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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양은 개이득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10 0 2022-5-12 20:49








외전 1. 허니문



은은한 국화 향이 나는 차였다. 음료나 커피를 즐기지 않는 내가 물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마시는 이 차는 현도가 추천해 준 것이었다.

'현도는 역시 커피 마시려나?'

커피는 아침 공복에 좋지 않으니 마시지 않았으면 했지만, 현도가 커피 향을 맡으며 기분 좋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차마 막을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눈치 빠른 현도가 내가 걱정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언제부터인가 곁들인 음식과 함께 커피를 마신다는 점이었다.

현도가 마실 커피도 막 내리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지는 동시에 등 뒤에서 뻗어 온 두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바짝 다가와 나를 안은 녀석의 체온이나 풍기는 향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현도였다.

녀석은 내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말했다.

"화이 형, 잘 잤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현도는 잠이 덜 깬 아침에는 늘 경어를 썼다. 녀석이 말을 높일 때마다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 유독 더 귀엽게 보였다.

“너도 잘 잤어?"

"네…….”

현도는 목이 잠겨 있었다.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인 데다 조금 거친 느낌도 들어서 고개를 돌려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잡아 살폈다. 아침에는 무방비할 정도로 물렁해지고 멍해지는 녀석이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뭔가 이상했다.

“너 열나는 것 같은데."

말랑한 뺨을 떡 주무르듯 만지는데도 녀석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얌전해서 좋긴 하지만, 너무 얌전한 아이는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어른스러운 녀석일수록 아파도 티를 안 내고 조용하니까.

이마를 짚었지만, 아까 따뜻한 찻잔을 만져서 그런지 정말로 열이 있는 게 맞나 잘 모르겠다.

“몸 안 이상해?"

"음……. 조금?”

“어디가? 어디가 아파? 두통 있어?"

그러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애를 눕히고 약부터……!

'내가 허둥대면 어쩌자는 거야.'

현도와 관련된 일이면 나 스스로 통제가 잘되지 않았다. 우선 진정하기 위해 숨을 조금 내쉬었다. 그리고 현도의 팔목을 붙잡아 침실로 향했다.

"형?"

얌전히 잡혀 온 녀석을 침대에 앉혔다. 사실은 눕히려고 했는데,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 좀 재 보자.”

“아, 나 괜찮아. 어디 아픈 게 아니라…….”

“몸 이상하다며. 잔말 말고 가만히 있어."

현도를 앉혀 놓고 체온계를 찾으려고 일어나자, 이번엔 녀석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단번에 끌어당겨 품에 안는데, 순간 당황해서 몸이 굳고 말았다.

체온계를 찾으러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 놓으라고 하려던 찰나, 현도가 잡고 있던 내 팔을 어딘가로 옮겼다. 그리고 내 손에 무언가 잡혔다. 손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크고 단단한 무언가가.

차마 그것이 무엇인지 말을 못 꺼내고 있는데, 녀석이 나를 안은 채로 들뜬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미안…….”

현도는 내 팔목을 놓았다. 언제든 그의 중심부에서 손을 치울 수 있었지만, 괴로운 듯 열에 들뜬 녀석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손이 떨어지질 않았다.

'일 났네.'

잡고는 있는데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병아리콩 때부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애한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듯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하아…….”

현도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바지 안에서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는 부위 때문에 점점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오늘, 그것도 아침 댓바람부터일 줄은 몰랐다.

'밀어내야 하나.'

그러다 상처를 받으면 어쩌지.

안 그래도 마음이 약해서 내 말 한마디에도 의미를 붙이는 녀석이라 결심이 서질 않았다.

나라고 성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가장 미치겠는 건 오히려 나였다.

그렇다고 성이 잔뜩 난 녀석의 중심부를 달래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입맞춤으로 형제의 선은 넘었지만, 이건 내 입장에서 선을 넘는 정도가 아니라 범죄나 다름없었다.

'병아리콩이랑 무슨…….'

서둘러 손을 떼고 현도의 두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열병은 나도 앓기 직전인 것 같다. 열감이 확 올라온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이고 몸을 돌렸다.

"너 지금 열나는 것 같으니까 체, 체온계랑……. 얼음주머니도 가져올게."

내가 지금 뭐라 지껄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무거나 말을 뱉고서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현도가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금방 다녀올게. 마실 것도 가져올까?"

“…….”

“현도야?"

“…….”

녀석이 대답이 없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인가 싶어서 녀석의 손등을 살살 치며 달랬다.

"현도야, 형 좀 놔 봐.”

“…….”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오히려 힘을 주는 것을 보고 손가락을 잡아서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현도가 내 옷을 움켜쥐는 바람에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자 평소에 보던 어리광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때였다. 내내 잠잠하던 녀석이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도가 싫어?"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았다. 현도는 날 안은 채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울먹거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는데, 가슴이 시린 듯 욱신거렸다.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현도가 정말로 많이 아픈 모양이다. 약해지고 나서야 이전까지는 에둘러대던 불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녀석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나도 녀석을 놓을 수 없었기에 결국 침대에 같이 누웠다.

그제야 현도가 조금 안심한 듯 숨을 고르게 내쉬며 언뜻 웃는 듯한 표정도 지었다.

'옛날에는 좀 더 솔직했는데…….'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제 감정에 솔직해서 바로 표현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겉으론 낙관적인 척 웃고 다녀도 내가 언제든 사라질 것처럼 느껴지는지 아프고 나서야 그 심란함을 집착으로 드러냈다.

“내가 널 왜 싫어해.”

“그러면 무서워?”

전에도 같은 질문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마도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현도가 예전과 달라진 것처럼, 나 역시 그랬다. 우리는 어릴 적과는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변했다.

현도는 내게 너무도 과분했다. 나조차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어서 죄책감마저 느끼는 그런 존재였다. 소중히 다루고 어딘가 꼭꼭 숨겨 두지 않으면 누구라도 탐을 낼 것 같은 귀하디귀한 것이었다.

“조금…….”

그래서 두렵다.

더는 무심한 척, 태연한 척 녀석의 애정을 다 받아 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나야말로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침부터 이게 뭔 청승이야.'

녀석이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전에 아무 말이나 둘러대려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현도가 내 몸 위를 덮치듯 올라탔다.

“왜 두려워?"

녀석은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애써 둔하게 하려 노력했던 심장 박동이 다시 느껴졌다.

"형은 뭐가 두려웠어?"

현도가 손을 뻗어 내 뺨을 만졌다. 그 손길이 볼에서 턱으로, 그리고 입술을 향해 움직이며 내 피부를 문질렀다. 느리고 나긋하게 말하기 때문일까. 어쩐지 우리 주변에만 시간이 멈춰 버린 듯했다. 나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사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병아리콩…….”

소리 내고 나서야 말이 헛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현도는 듣고 말았다. 녀석은 처음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녹을 듯한 웃음을 지었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녀석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침에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청량한 바람이 현도 주변에만 불어오는 것 같다. 이제는 별것이 다 예쁘게 보인다.

“그 병아리가 큰 지가 언제인데.”

녀석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래도 오랜만에 들으니까 그것도 좋다. 병아리, 그거 형이 처음 붙여 준 애칭이었잖아."

병아리가 아니라 병아리콩이었고, 애칭이 아니라 별명 같은 것이었지만 정정해 주진 않았다.

"그런데, 나 사실 형이 그렇게 부르는 거 좋아하지 않았었어.”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안 그래도 경계심 있던 애에게 대뜸 병아리콩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래도 처음만 그랬지, 나중에는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기에 괜찮은 줄 알았더니 마냥 그런 것도 아니었나보다.

“싫다고 말하지.”

“그럼 더 부를 것 같았거든."

그때의 나라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냈다면, 이름 대신 부르고 다녔겠지.

“그런데 점점 좋아졌어. 누구도 날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었거든.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특별하게 느껴졌고.”

병아리콩에 그만한 위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부터라도 이름 대신 불러 줘?”

장난기를 담아 물으니, 녀석이 또 좋다며 웃는다. 속이 어쩐지 간지러웠다.

“그런데 왜 하필 병아리야? 내가 그렇게 작았어?"

“병아리콩.”

"응?"

"병아리가 아니라, 병아리콩. 동그랗고 노래서.”

"뭐가?"

“네 머리랑 눈.”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현도의 작은 머리가 생각났다. 공들여 빚은 것처럼 동그랗고 결이 좋아 만지고 싶었던 머리. 게다가 눈은 밝은 황금색이어서 병아리콩이라는 단어가 확 떠올랐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은 나보다 큰 녀석이라 이제는 정수리를 바라볼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또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녀석이 내 품 안에 안겨 들면 언제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동글동글한 것이 보기만 해도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단순히 체구가 작아서 그런 거면 병아리콩이 아니라 강아지라고 불렀겠지."

이렇게 열이 오르는 날에는 푹 삶은 병아리콩이 되는 현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행동이 습관이 되어버린 줄도 모르고.

“더 좋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는데, 현도가 숨을 쉴 때마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그 숨결에 흠칫 놀라 쓰다듬는 걸 멈추자, 마치 넓고 깊게 음미하는 듯한 숨소리가 들려와 괜히 긴장이 되었다. 동생으로만 생각하던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에게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의식하면 몸이 먼저 반응을 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2


“잠 깼으면, 일어나, 열 좀 재게.”

녀석에게 떨어지려는데, 현도가 놓아주질 않았다. 오히려 내 몸에 매미처럼 달라붙어서 꼼짝을 못 하게 했다.

"일어나라니까?”

그런 내 말에도 현도는 공연히 미소 지었다.

“더 자고 싶어서 그래?"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뺨을 기분 좋게 쓸었다. 평상시에도 애교가 많은 녀석이지만, 오늘따라 더했다.

귀엽다고 내버려 두었더니, 갈수록 느는 게 어리광이다.

"계속 이렇게 있을 거야?"

"조금만……. 형한테서 좋은 냄새 나."

일어나자마자 씻어서 비누 향이 남은 모양이다. 그렇게 말하며 더 품에 파고는 녀석이야말로 방금 씻고 나온 듯한 잔향이 맡아졌다. 입을 열 때마다 치약 냄새도 나고.

'잠깐, 치약?'

지금 녀석한테 나기에는 어색한 향이었다. 양치까지 한 거면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씻었다는 말이 되니까.

녀석이 갑자기 내 뺨을 잡더니 입을 맞췄다. 아침마다 늘 있는 입맞춤이라 대수롭지 않았다.

말캉한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치약 냄새와 섞인 단내가 입 속을 헤집을 때마다 머릿속 일부분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흐읍.”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코로 숨 쉬는 것을 잊어버린 내가 답답해 신음하자 입술이 조금 떨어졌다.

그제야 잠깐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지만, 다시 입맞춤이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조금 틀어 입술이 들러붙는 것을 피하며 말했다.

“잠깐, 잠깐만……!”

현도가 멈췄다.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달려들 것 같던 녀석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데, 숨 막히던 입맞춤 만큼이나 가슴이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더 기다려?"

녀석에게 풍기는 잔향은 독하다 느끼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벌린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녀석의 붉은 혀가 움직일 때마다 내 시선은 그것을 좇고 있었다.

녀석은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굶주린 늑대 앞의 양이 된 기분이었다.

“밤……. 밤까지 기다려."

내 말을 들은 현도는 내 몸 이곳저곳을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옷이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아랫배가 욱신거려서 신경 쓰였다.

“네.”

하지만 현도는 게걸스러운 짐승인 양 굴지 않고 말 잘 듣는 개처럼 천천히 내게서 떨어졌다.

“형, 먼저 나가 있을래요?"

현도는 잠이 덜 깬다든지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땐 늘 저런 식으로 존대를 썼다. 녀석이 어째서 나보고 먼저 나가라고 하는 것인지는 존재감이 넘치는 현도의 가랑이 사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고 녀석을 지나쳐 방을 나갔다.

“하아…….”

문을 닫기도 전에 짙은 신음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 * *


부엌으로 나온 현도는 열에 들뜬 것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가볍게 웃으며 장난을 치거나 포옹을 하면서도 아침과 같은 끈적이는 손길은 없었다.

덕분에 나도 괜한 긴장감 없이 현도를 받아 줄 수 있었다.

"형.”

이른 오후, 점심을 다 먹고 난 후 뒹굴고 있던 내게 현도가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크림이 올라간 디저트였다.

달 것 같아도 막상 입에 넣어 보면 맛이 담백함에 가까운 케이크다. 편식이 심한 나도 한 조각 정도는 어렵지않게 모두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케이크였다.

“이러다 굴러다니겠다."

기회만 있으면 내게 무언가를 먹이려 하는 현도 때문에 그런 소리부터 나왔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내 손은 간식 접시와 포크를 받았다.

“제발 그러면 좋겠네."

녀석이 한탄하듯 말했다. 어쩐지 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케이크를 포크에 찍어 한 입 먹어 보다가 맛있어서 현도에게도 먹여 주었다.

아무 말 없이 포크를 내밀어도 입부터 벌리는 녀석에게 케이크를 먹여 주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내가 어째서 현도의 한탄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를 말이다.

“하하.”

문득 떠오른 기억에 나도 모르게 웃자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따라 웃으며 물었다.

“갑자기 기분이 더 좋아졌어?”

“그냥, 옛날 생각나서."

“옛날?"

“내가 너 이등신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던 거."

“아. 기억나.”

“기억이 난다고?"

부모님이 신혼여행 다녀오기 전에 아파서 빠진 살을 찌우겠다고 열심히 먹였었다. 현도를 이등신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는 계획은 그때 나온 것이었다.

현도가 아기 새처럼 잘 받아먹긴 했지만, 이등신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유는 현도가 방금 나를 보고 한탄했던 것과 같았다. 아무리 먹여도 밑 빠진 독처럼 살이 찌질 않았으니까.

내가 그것을 말해 줬을 리는 없을 텐데도 현도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형이 나한테 이렇게 먹여 줬던 거."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해?"

“형도 다 기억하잖아.

"나야, 인상 깊었던 몇 가지만 드문드문 기억하는 거지."

“나도 그래. 형이랑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인상 깊었거든. 모두 처음이었으니까."

저 말이 어쩐지 절절한 고백처럼 들렸다. 이런 식으로 애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게 현도의 성격이라는걸 알면서도 낯간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형.”

묵묵히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는데, 현도가 나를 불렀다. 시선을 들어 보니, 녀석은 나를 보며 문득 자신의 한쪽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능청맞은 표정을 보자 금방 저곳에 뽀뽀해 달라는 말로 이해됐다.

숨 쉬듯 수작을 부리는 것을 알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농밀한 입맞춤도 했었는데, 뽀뽀를 조르는 손짓 정도는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아서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뽀뽀 정도야.'

고개를 현도의 얼굴 쪽으로 내밀어 녀석이 가리킨 곳에 입을 맞췄다.

쪽.

화들짝 놀란 현도는 내 입술이 닿은 볼을 손바닥으로 가리더니,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날 보았다.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놀라나 싶어서 괜히 머쓱해져 물러나며 말했다.

“해 달라며.”

"어? 아…….”

녀석이 갑자기 번지는 미소와 함께 손을 뻗었다. 설마 이대로 키스하려는 것인가 싶어 상체를 뒤로 젖히려는데, 그보다 먼저 뺨에 온기가 스몄다.

녀석의 손가락이 내 볼을 훑으며 떨어졌고 그 손끝에는 하얀 크림이 묻어 있었다.

“……!”

그제야 현도가 어째서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는지 알 수 있었다. 뽀뽀를 해 달라는 게 아니라, 내 볼에 크림이 묻었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었다.

현도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대로 일어났다. 일단 어디로든 숨어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녀석은 내가 일어나자마자 허리를 감싸고는 힘을 주어 끌어안아 버렸다. 나는 녀석의 가슴을 밀어내며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다.

“형, 화이 형. 나 또 뽀뽀해 줘."

"입 다물어…….”

“또 해 줘라, 형아.”

“…….”

볼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양쪽 뺨 위로 슬며시 번지는 홍조를 현도가 볼 수 없도록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입을 꾹 다물고서 속으로 젠장만 수십 번 되뇌었다. 현도 앞에서는 조금만 방심해도 머저리가 되어 버리는 것 같다.

“우리 형은 부끄러움이 많네. 내 앞에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것으로도 모자라 녀석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부끄럽다는 단어보다는 쪽팔린다는 표현이 내게는 더 와닿았다.

“뽀뽀 정말 안 해 줄 거야?”

“…….”

“그럼 현도가 하지, 뭐."

내 두 볼이 잡히더니, 낮게 수그리고 있던 턱이 올라갔다.

볼을 가리고 있던 팔 한쪽을 잡아 내린 녀석은 그대로 내게 입술을 갖다 댔다.

쪽오옥.

볼을 빨아들이는 듯한 뽀뽀에 놀라서 손을 들어 현도의 얼굴을 잡아떼어 냈다.

볼이 얼얼할 정도로 빨아서 질겁하며 문지르는데, 뭐가 좋은지 녀석이 크게 웃었다.

"웃기는.”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따라 웃고 말았다.

역시 현도는 몸집만 컸지, 아직은 애였다. 그것도 장난기가 상당히 많은 개구쟁이 어린애.


* * *


“형, 계속 거기에 있을 거야? 7시나 됐잖아."

“7시밖에 안 됐어!”

“해가 넘어간 게 언제인데.”

우리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문 너머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씻자마자 녀석이 달을 본 늑대처럼 돌변해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었기 때문에 피신해 온 것이었다.

'어린애는 개뿔. 저건 짐승이야.'

낮에는 그렇게 순했던 녀석이 반쯤 맛이 가 버린 눈으로 유혹하는데,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가 버릴 뻔했다.

“그럼 계속 거기 있을 거야?"

밤까지 기다리라고 한 건 나였지만, 이대로 문을 열기에는 육식 동물 아가리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져 주저되었다.

나라고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아서 안 지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과하다고.'

나를 원하는 욕망 어린 눈이 굶주린 이리처럼 보여서 두려울 정도였다. 녀석이 조금 진정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나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더는 문을 열어 달라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벌써 포기할 리는 없을 텐데, 조용해서 더 불길했다.

똑똑.

뜬금없는 노크 소리와 함께, 흥분이 많이 가라앉은 현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알았어. 아무것도 안 할게."

한숨 섞인 그 목소리에 실망이 가득 묻어나 있는 건 내 착각이 아닐 테다.

“그러니까 나 피하지 마, 형…….”

애원하는 그 목소리에 결국 문을 열고 말았다. 살짝만 열어 얼굴만 확인하려 했는데, 턱.

문을 잡고 있는 건 거대한 현도의 손이었다. 평소 보지도 않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문이 열리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이 무색하게 그대로 문은 활짝 열렸다.

눈앞에는 현도가 우뚝 서 있었다. 절절하게 애원했던 목소리와는 딴판인 얼굴이었는데, 이건 굶주린 짐승 정도가 아니었다.

아사 직전의 야차였다.

“현, 현도야? 형이다. 형이라고."

"응. 화이 형.”

녀석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그만큼 뒤로 물러났지만, 현도가 또 그만큼 더 다가왔기에 우리 사이는 멀어지지 않고 더욱 가까워졌다.

침대에 다리가 닿았고 균형을 잃은 내가 털썩, 그 위로 앉자 거대해진 현도가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3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것밖에 할 수 없던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손을 바라보며 이대로 잡아먹힐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바로 넘어트릴 것 같던 녀석의 손이 내 두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졌다. 그리고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내려다보던 시선은 현도가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오히려 나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형아."

내 무릎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갖은 애교를 다 피우는 녀석을 보자, 긴장으로 굳어졌던 몸이 서서히 풀어졌다.

현도가 조금은 진정하길 원해서 피한 것이지만, 녀석은 거부당한 기분에 상실감을 느꼈을 텐데도 낙담하는 대신 내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오히려 몰아붙여서 미안하다 사과하며 생기 없이 축 늘어지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졌다.

내가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분간 부모님 뵈러 가는 걸음이 무거워지겠네.'

풀이 죽다 못해 저를 밀어낼까 겁나 어찌할 바 모르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지고 와.”

“응?”

다른 때에는 눈치가 빨라 단번에 알아듣던 녀석이 또 곰처럼 둔하게 굴었다. 나는 녀석의 옷깃을 잡아다 당겨 코를 맞대며 다시 말했다.

"콘돔 가지고 오라고."

내 말을 들은 현도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이제야 알아먹은 것 같아서 옷깃을 놓아주니,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없으면 사 오기라도 할 테니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나갈 생각을 않고 내 다리 한쪽을 잡고서 올리더니 그대로 나를 넘어트렸다.

"읏.”

설마 콘돔 없이 할 생각인가 싶었는데, 현도가 손을 뻗어 침대 옆에 있던 협탁 서랍장을 열었다.

거기에서 뭔가를 가져와서는 내 배 위에 가득 쏟아 냈다. 모두 콘돔이었다. 개중 한 개를 집어 든 현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때 든 생각은 '속았다.' 였다.

녀석은 어느새 내 바지를 벗겨 버리고 훤히 드러난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읏.”

생소한 감촉에 몸이 떨렸고 손길이 닿는 곳마다 흠칫흠칫 놀랐다.

그런 내게 입을 맞추면서도 현도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치열을 훑기 시작했다. 물컹하고 질척이는 키스는 전처럼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몰아세우지 않았다.

덕분에 숨 쉬기는 편했지만, 그 움직임은 마치 사탕을 핥는 것처럼 천천히 음미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술에 머무르고 있던 입술이 턱 끝에서 목덜미 쪽으로 내려갔다.

“흐읏.”

허리가 들썩일 정도로 안절부절못하고 몸을 웅크리려는 나를 보던 녀석이 웃음을 흘렸다. 꽤 오래 웃으며 내 쇄골 부위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사이에 내 속옷마저 벗겨지면서 침대 밖 어디론가 던져졌다. 아래가 갑자기 허전해지자 황급히 두 손으로 중심부부터 가렸다.

귓가 근처에 있던 녀석의 웃음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렸다. 놀리는 것인가 싶어서 노려보는데, 나를 보고 해사하게 웃는 것을 보고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쓸데없이 예뻐 가지고.'

밖에서도 저렇게 헤프게 굴면 어쩌나 싶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화이 형, 너무 예쁘다. 안 예쁜 곳이 없어.”

내가 할 소리였지만, 일부러 말을 아꼈다. 그보다 웃옷만 입은 채로 하반신이 모두 벗겨져 버리니 변태가 된 기분이었다. 정작 녀석은 하나도 벗지 않아서 더 창피했다.

게다가…….

"너 왜 이렇게 능숙해?"

나는 경험이 없어서 모든 성행위에 서투른 반면, 현도는 숙련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억울한 기분까지 들려는데, 녀석은 싱긋 웃으며 들고 있던 콘돔 포장을 찢더니 자신의 두 손가락에 끼워 넣으며 대답했다.

“이미지 트레이닝?"

"뭐?"

나를 슬쩍 보고서 눈웃음친 녀석이 이번에는 다른 포장을 꺼내 찢더니, 끈적끈적한 젤을 내 허벅지 밑으로 흘려보냈다.

"읏. 차가워.”

무릎을 붙이고 웅크리자 현도는 그런 내 무릎을 잡아 천천히 짓누르며 열기 시작했다. 녀석의 콘돔 씌운 손가락이 허벅지를 타고 엉덩이 아래에 닿았다.

“자, 잠깐.”

화들짝 놀라 현도의 손목을 붙잡았다. 닿지 말아야 할 곳에 손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머리털이 곤두섰고 아랫배가 당기는 통증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다 손가락을 왜 넣으려고!"

“바로 들어가면 형이 다치니까."

"뭐, 뭐?"

"알고 있잖아. 뭐가 들어갈지."

알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대체 어떻게?'

그 흉기 같은 것이 어떻게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인가 싶다가, 갑자기 매우 자연스럽게 어떤 구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왜 아래야?"

“나한테 넣고 싶어? 그래도 되고."

말은 그렇게 한 주제에 아래를 더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바들바들 떨며 녀석의 어깨를 붙잡고서 말했다.

"너 진짜 경험 없는 거 맞아?"

"오늘 못 하면 아마 썩을 정도로."

“…….”

“어떻게 할까? 형이 할래?"

이럴 줄 알았으면 이쪽으로 공부 좀 해 둘 걸 그랬다. 현도를 다치지 않게 안을 자신이 없었기에 깔끔히 포기했다.

대신,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 아프게 해.”

“덜 아프게 해 볼게.”

안 한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 녀석의 손가락이 내 아래쪽을 건드렸다. 서서히 안으로 들어오는 이물감에 허리가 들썩였다.

"흐흣. 으읏.”

기분이 이상했다. 꽉 차 있는 느낌과 뻑뻑함이 절대 익숙해질 수 없다는 듯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괜찮아, 괜찮아, 형. 긴장하지 마.”

“그게 말처럼 안 된다고."

“천천히 할게. 겁먹지 마."

“이상해……. 기분만 나빠. 그냥 대충하면 안 돼?"

"무슨 큰일 날 소리야, 형. 충분히 풀어야지."

손가락이 다 들어온 줄 알았는데, 좀 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질겁했다. 뭔가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전보다 더 파르르 몸이 떨렸고 입을 열면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더 깊은가?”

게다가 아까부터 뭘 찾는 것처럼 안을 헤집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막 말하려는 그때였다.

푹, 안쪽에서 어딘가를 찌르는 손가락에, 이물감으로 불편하기만 했던 몸이 순식간에 뒤틀려 버렸다.

"허헉?"

나도 모르게 신음을 뱉으면서도 어째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내내 잠잠하기만하던 아래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인지 몰라 현도를 보는데, 녀석의 입술이 깊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여기 숨어 있었네.”

현도가 내 안에서 뭔가를 잘못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피가 아래쪽으로 쏠릴 리가 없었다.

“잠깐만 빼…… 허헉!"

손가락을 빼 보라고 말하려는데, 현도는 멈추지 않고 나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던 부근을 집요하게 건들기 시작했다.

신음을 내뱉는 내 입을 막아야 할지, 발딱 서 버린 것을 붙잡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미끄러지듯 들어온 손가락이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나 안을 넓혔다.

나는 놀라서 현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흐흣! 그, 그만 넣어……!"

손가락을 대체 몇 개나 넣으려는 것인지 무서워서 그만해 주길 바랐다. 다행히 내 말을 들은 현도가 손가락 하나를 빼면서 묵직했던 안쪽에 부담이 줄어들었다.

막 안심하려는 찰나, 손가락이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안을 긁거나 누르면서 자극하자 정수리가 감전된 것처럼 찌릿함이 밀려왔다. 발가락 끝부터 경직된 듯 떨던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이상해, 이상……!”

아래가 조여 오면서 금방이라도 쌀 것 같았다.

“그, 그만! 나올 것 같……!"

녀석을 밀어내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현도는 나를 놓아주지 않은 채로 안에서 손가락을 돌리더니, 짓눌렀다.

"아으읏!"

결국 몸 밖으로 뿜어내고 말았다.

들어온 손가락이 나가자, 몸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감각이 전신을 훑을 때까지 몸은 탄성을 지르듯 흠칫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조금 진정이 된 나는 밀려오는 수치스러움에 현도를 노려보려다가 깜짝 놀랐다. 붉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현도의 얼굴에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내가 사정해 버린 정액이었다. 게다가 정액이 눈까지 튀어서 한쪽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소매를 들어 닦아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만하라고 했잖아!"

정액이 눈에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나 때문에 시력이 나빠지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우선 가서 씻…….”

욕실로 데려가려는 나를 현도가 다시 눕혔다. 두 눈을 모두 뜬 녀석의 황금빛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시선을 맞추며 현도는 내 옷 앞섶을 열어젖혔다.

녀석의 손가락이 어깨 곡선을 따라 내려가더니, 내 가슴에서 멈췄다. 그 손이 유두를 잡고서 굴리자 안 그래도 민감해진 몸이 놀라 떨렸다.

“아, 흐흣.”

"올해 벚꽃은 다 본 것 같다 형."

“뭇, 슨……! 읏!"

뭔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녀석의 혀끝이 유두에 닿았다. 손으로 굴리던 것과 입에 머금고 굴리는 건 느낌 자체가 달랐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깊은 쾌락에 나도 모르게 몸을 뒤틀려고 했다. 그런 내 손을 잡아 깍지를 끼운 현도는 입술을 다른 쪽 가슴으로 옮겨 강하게 빨았다.

"하윽……!”

춥.

타액에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두를 머금고 있던 입이 떨어졌다.

“활짝 피었네.”

그제야 내 가슴을 보고 벚꽃 타령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치하다 생각하면서도 예민한 몸은 조금만 건드려도 자지러졌다.

미지근한 타액이 마르면서 유두 부근이 조금 서늘해졌다.

“헛소리 그만하고……."

“헛소리라니, 형이 지금 얼마나 예쁜데.”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갑자기 두 무릎을 잡아 벌렸다.

“봐, 여기도 분홍색이야."

내 아래에 다시 손을 대며 입구를 열라는 듯 두들겼다. 결국 참다못한 나는 현도의 팔을 붙잡고 일어났다.

“손장난 그만해! 그리고 왜 나만 벗고 있는데!"

“형이 벗겨 줘야지.”




○4


녀석은 내 팔을 잡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리는 서로의 입김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후각과 촉각이 극도로 민감해져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자극적이었다.

현도는 내 손목을 잡아 자신의 상의 안으로 넣었다. 손바닥을 두들기는 듯한 박동과 함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녀석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그의 옷을 잡아벗겼다.

마침내 현도의 맨살이 드러난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녀석의 몸은 공들여 조각한 예술작품처럼 보였지만, 그것에 감탄하기도 전에 자리 잡고 있는 흉터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 상처들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기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목구멍 안쪽으로 통증이 느껴졌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흉터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상처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 현도는 내 손을 잡아 상처를 더듬게 했다.

오돌토돌한 감촉에 심장이 묵직하게 쿵쾅거렸다. 손을 치워 내려 하자, 녀석이 말했다.

“보기 흉하지?"

그 물음을 듣자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흉터가 아무리 깊어도 나는 절대로 흉측하다 생각지 못할것이다. 내가 녀석의 흉터에 닿고 싶지 않았던 것은 혹여나 상처가 덧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도가 더는 그렇게 할 수 없게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녀석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이미 완전히 아문 상처는 말라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흉터는 지금보다 훨씬 옅어질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기보다는 안심하는 게 맞았다.

"예뻐. 예쁘다, 내 병아리콩."

활짝 웃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현도는 어느 한구석도 모난 부분이 없었다. 한참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음…….”

"응?"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녀석이 입을 막은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지만, 곧 알 수 있게 되었다.

녀석의 중심부가 볼록하게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라 허리를 만지고 있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 손목이 다시 잡히면서 현도의 중심부로 향했다.

녀석은 내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기더니, 신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벗겨 줘요, 형.”

녀석의 지시와 같은 부탁에 내 손이 천천히 현도의 바지로 향했다. 손끝이 떨려서 버클을 풀면서 헛손질을 반복했다. 무안을 속으로 삭이며 겨우 지퍼를 내렸다.

검은 속옷이 드러나자 나는 지퍼를 놓고서 말했다.

“이제 나머진 네가…….”

현도는 그런 내 손을 붙잡은 채 한 손으로 바지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와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이었다. 현도의 입이 내 목과 어깨로 옮겨 가면서 피부를 핥기 시작했다. 그 감촉이 간지러워서 흠칫 떠는 사이에 녀석이 말했다.

“충격받기 전에 미리 말할게, 형."

"뭐?"

“못 하겠으면 지금 말해. 한번 시작하면, 도망칠 수 없을 테니까.”

“무슨…….”

갑자기 경고하듯 말해서 반문하려던 찰나, 현도가 스스로 속옷을 조금 내렸다. 짓눌려 있던 녀석의 발기된 성기가 튀어나왔다.

크기와 굵기에 놀라 녀석이 어째서 도망가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큰 건 알고 있었지만…….'

아니, 이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크기인가? 정도를 지나쳐서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였다.

'이게 들어갈 수는 있어?'

빤히 녀석의 성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현도가 머쓱한 듯 말했다.

“형, 그렇게 계속 보기만 하면 나도 부끄러운데.”

“어, 미안."

“아니야, 그런데 어때? 받을 수 있겠어?"

그 물음에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저만한 것을 담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밀어 넣으면 들어는 가겠지만, 그 후가 문제다.

“……배 뚫리면 어떡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내 말을 들은 현도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뭐? 하하!”

생기가 너울거리는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환하게도 웃는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이었다.

현도는 내 뺨에 입을 맞추더니, 손등으로 그곳을 훑으며 말했다.

"조심해 볼게. 다른 건 괜찮아?"

“…….”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건 나도 알겠는데, 나와는 다르게 여유 있는 현도가 어쩐지 얄미워 보였다.

'자기는 넣는 쪽이라 이거지?'

지금이라도 내가 넣겠다고 오기를 부릴까 하다가 말았다. 하지만 형으로서 더 휘둘리지 말고 주도권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녀석의 성기를 붙잡았다.

"읏, 형?"

놀란 현도가 허리를 들썩거리는데, 녀석의 것이 생각보다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꽉 붙잡고 말았다.

"윽!"

현도가 괴로운 듯 신음을 토하고 나서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 수 있었다. 녀석이 풀썩, 내 어깨 위로 고개를 묻었다. 긴장된 나머지 힘 조절을 못 해서 꽤 아팠나 보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데,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작은 현도 터지겠다. 형아."

“뭐야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잇새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현도는 않듯이 내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대며 하반신을 내게 더 가까이 대려 했다.

“살살……. 부드럽게 만져 줘."

그 말대로 잡고 있던 것을 천천히 만졌다. 기둥을 위아래로 조심스럽게 매만지자 귓가에 뜨거운 습기와 같은 숨소리와 신음이 들렸다.

"하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는데, 현도가 반응을 보이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위는 몇 번 안 해 봤지만, 내가 해서 기분 좋았던 방법으로 조금 힘주어 귀두 끝까지 쓸어 주자 현도가 나를 끌어안았다.

"윽!"

배에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현도의 정액이 내 아랫배에 가득 묻어 흘렀다. 녀석의 중심부는 사정을 하고도 여전히 빳빳하게 힘을 주고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크기가 줄었다. 어쩐지 안심되었다.

'흉기 같은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사이즈였지만, 처음부터 충격적인 크기를 봐서 그런지 이만하면 해 볼 만할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내가 올라타는 게 낫겠지?'

현도를 눕히려고 녀석의 가슴에 손을 대고 밀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된 게…….'

녀석이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데 미동도 없었다.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녀석에게 누우라고 말하려는데,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던 현도가 머리를 들어 올렸다.

“하.”

호흡을 억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황금빛 눈동자를 들어 나를 보는데, 팔과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내 두 발목이 잡혔고, 현도가 그걸 단번에 뒤로 당기자 그대로 뒤로 눕혀지고 말았다.

폭신한 매트리스 위여서 충격이 전혀 없었음에도 눈앞이 어지러웠다. 내가 그 어지러움을 호소하기도 전에 두 무릎이 잡혀 활짝 벌려졌다.

“으앗!”

적나라하게 민감한 부분을 드러내고 말아서 놀라 소리를 지르는데도 현도는 내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짓눌렀다.

내 아래에 닿는 것이 아까와는 느낌이 달라서 고개를 들어 보았다. 분명 사정시켜서 사이즈를 조금 줄여 놨었는데, 처음 발기했을 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저건 진짜 불가능해!'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면 정말로 배를 뚫어 버릴 것만 같은 크기였다.

“자, 잠시만!”

들어오기 전에 사정을 한 번 더 시켜야겠다는 조급함에 막으려 했는데, 어느새 콘돔을 끼운 귀두 부근이 곧바로 내 아래에 닿았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겨우 눈으로 좇았을 정도였다.

“현도, 강현도!"

하얗게 질려,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녀석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불렸다. 놀라서 몸을 떠는데, 그제야 입구에 닿았던 귀두 끝이 들어오다 말고 멈췄다. 대신,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으득.

입술을 깨물었던 것인지 녀석의 입가에 피가 묻어 나오는 게 보였다. 방금까지 놀라 경직됐던 몸이 현도의 피를 보자 반사적으로 풀렸다.

손을 뻗어 다물린 입가를 만지자 그제야 현도가 입을 열었다. 녀석은 내 손을 마주 잡으며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음에도 손등과 팔에는 힘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더?"

물음이 짧았다. 그러나 '더 기다려?' 라는 질문이라는 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녀석의 인내심이 한계까지 달해 있었다.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는 현도를 바라보다 결국 눈을 감고 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이제 넣어.”

“…….”

두 손을 마주 잡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째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슬쩍 눈을 뜨는데, 현도가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것도 울먹거리는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 넣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두 손을 뻗었다. 현도가 고개를 조금 숙여 줘서 내 손이 그의 두 뺨에 닿을 수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미안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대체 뭐가?”

“싫다는데 억지로 하게 해서…….”

한 발 더 빼고 하자는 것이었는데, 내가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덩치는 곰만 한 녀석이 속은 토끼만했다.

'맞다. 겁이 많았지.’

나는 두 뺨을 잡고 있던 손으로 녀석의 가슴을 있는 힘껏 밀어 냈다. 아까는 꿈적도 하지 않던 놈이 이번엔 단숨에 눕혀지자 나는 일어나 녀석의 위에 올라탔다.

“형?"

“내가 할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

엉덩이를 조금 들어 녀석의 귀두 끝을 내 아래에 맞췄다.

"으읏.”

천천히 밀어 넣으려는데, 튕겨져 나오듯 엉덩이 골에서 미끄러져 버렸다. 한 번에 들어가지 못해서일까. 부담감이 더 커지면서 긴장으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만둘 생각은 없어서 다시 삽입을 시도하려는데, 현도가 내 허리를 붙잡았다.




○5


“넌 가만히 있으라니까."

"도와줄게.”

“됐어.”

거절하고 녀석의 성기를 잡아 내 입구에 맞췄다. 아까보다 더 정확한 부근에 닿았다. 방금처럼 튕겨 나오지 않도록 이번엔 제대로 밀어 넣었다.

'너무 커……!'

서서히 밀고 들어오는 이물감에 아랫배가 바짝 조이면서 허벅지에 힘이 풀리려 하고 있었다. 앞부분만 겨우 들어왔을 뿐인데도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안으로 넣으려면 엉덩이를 내려야 했지만, 나는 허리를 든 채로 움직이질 못했다. 허벅지가 경련했고 애써 넣었던 것이 엉덩이를 조금 들어 올리자 다시 안에서 튕기듯 빠져나가 버렸다.

"흐읏.”

안을 긁고 나가는 바람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쓰러질 뻔했지만, 다행히 현도가 허리를 잡아 주었고 나도 녀석의 가슴을 짚고 있어서 엎어지는 것은 면했다.

“…….”

나는 잠시 그 상태로 침묵했다. 도저히 저것을 다시 내 손으로 넣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형, 힘들면 나중에…….”

"도와줘.”

"네?"

내 허리를 잡고 있는 녀석의 손을 잡아다 엉덩이로 옮겼다. 결국 현도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적응이 되면 모를까, 지금 혼자서 하기는 무리였다.

“넣는 거 도와줘, 현도야."

“…….”

혼자서 할 수 있다고 객기를 부렸던 주제에 이제야 도와달라고 변덕을 부리고 있으니, 현도가 피곤하다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아서 도움을 청했던 것인데, 어째 녀석이 가만히 있었다.

“현도야?"

"형."

갑자기 현도가 나를 불렀다. 딱히 피곤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고 흥분한 것 같지도 않았다.

주변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걸 감지하면서도 너무도 평온한 현도의 얼굴 탓에 그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다.

녀석은 고요했다.

"매달려요.”

"어?"

“나한테 매달려요. 형."

갑자기 경어를 사용하더니, 대뜸 자신에게 매달리라고 한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녀석의 말대로 매달리듯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응, 잘했어요.”

별것도 아닌 것에 칭찬을 받아서 부끄러워지려는 찰나, 한쪽 엉덩이가 벌려지는 것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아.”

“못 참겠으면 물어요."

“무스…… 헉?!”

천천히 밀어 넣을 줄 알았는데, 단번에 파고들어 왔다. 숨을 뱉지도 못하고 몸을 떨고 있자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현도가 먼저 짙은 숨을 토해냈다.

“하아. 형.”

“허…… 헉!”

“화이 형."

꿰뚫듯 들어오던 성기가 뒤로 빠지는 것 같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빠르게 속에서 들썩이는 그것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현도가 그런 내 귓가를 혀로 핥았다.

"아……! 흣, 아!"

“물어요. 힘들면 참지 말고 물어."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나는 밀려오는 통증과 쾌락을 구분 못 하고 엉망이 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녀석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으흐윽!”

그러자 현도의 것이 아까보다 더 거칠게 안을 헤집어 놓으며 아랫배를 뚫어 버릴 것처럼 자극했다. 녀석의 손이 내 성기를 붙잡았다. 기둥을 위아래로 훑으며 함께 자극하는데, 말 그대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만하라는 말조차 못 하고 이를 세워 깨무는 것에 힘만 더 주는 게 고작이었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비리다기보다는 달았다.

벌려진 엉덩이 사이로 치고 들어오는 성기에 질척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살과 맞닿은 부분은 마찰하면서 끈적이는 액체로 범벅이 되었다. 거칠게 안을 헤집던 것이 끝까지 들어오면서 이상한 부근을 건드렸다.

"흐으읏!"

깨물고 있던 어깨를 놓을 정도로 내게서 낯선 신음 소리가 나왔다. 현도는 그곳을 집요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흐으, 아흣!”

짧고 얕은 호흡을 하며 관통하는 쾌락에 벗어나려 발버둥 치려는 순간, 푹. 찔러 오는 그것 때문에 내 안에서 뭔가가 뿜어져 나왔다.

"아……!"

사정보다는 배뇨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뒤늦게 그것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몸이 바르르 떨리면서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지저분한 것을 내보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다.

“으흑.”

“형?"

쾌락과 수치심이 섞이더니,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나도 왜 이러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화이 형, 형? 울어요?"

허리 짓을 멈춘 현도가 놀라 물었다. 그러나 나는 울음을 멈추는 대신, 녀석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움직이질 않았다.

배뇨를 한 것 같은 게 창피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그래?"

녀석이 안에 들어가 있던 성기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배 속에 가득 차 있던 것이 빠지면서 몸이 다시 한번 떨렸다.

"흑, 으응……!”

“미안, 미안해요. 형, 그렇게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프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우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파서 우는 게 아니야?"

현도는 그런 내 뜻을 바로 알아먹었다. 녀석은 내 허리를 감싸더니, 등을 토닥였다.

“그럼 왜 울어요?"

“……거 같아서."

"응?"

"오……줌 싼 것 같아서…….”

“……아. 어떡하지.”

현도의 말에 어깨가 절로 떨렸다. 냄새는 안 났지만, 역시 배뇨가 맞았나 보다. 닦으러 가자고 말하려는데, 현도가 벌떡 허리를 세워 일어나더니, 내 얼굴을 잡아 입을 맞췄다.

"흐읍!"

내 혀와 녀석의 혀가 휘감기며 서로의 숨이 섞였다. 거리낌 없이 입 안을 들쑤시는 혀를 받아 주면서 흘린 타액이 턱 끝으로 타고 내려갔다.

"으음, 하.”

춥.

입술이 떨어지면서 보인 현도의 입가에 촉촉한 타액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녀석의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서야 시선을 올렸다. 녀석은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고 있었다.

“형이 내보낸 거 오줌 같은 게 아니에요."

“……아니야?"

“봐, 깨끗하죠?"

현도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배뇨를 한 것치고는 시트의 색이 변하거나 한 흔적은 없었다.

'그럼 대체 뭐가 나온 거지?'

배뇨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정을 한 것도 아닌,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래도 제대로 느끼고 있었네요, 그럼 계속해도 되죠?"

“뭐? 끝난 거 아니었어?"

"네?"

“어?"

"네에?"

"응?"

우리는 서로 의문을 던지다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사정했잖아.”

“전 안 했는데요.”

“거짓말!"

현도는 웃으며 자신의 성기를 가리켰다.

“어?”

콘돔 안에 고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정도로 발기하고도 아직 사정하지 않은 것이다.

만져 줬을 땐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작 내 안에선 한 번도 쏟아 내지 않았다.

나는 온몸을 감싸는 쾌락의 통증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는데, 현도는 아무렇지 않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너……. 내 안 별로였어?"

묻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답하면 아마 지금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긴장감에 두들기는 심장이 아플정도였다.

현도는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나를 들어 올려 안고서 침대 밖으로 나왔다.

"어?!”

허공에 매달린 느낌에 놀라 현도를 끌어안는데, 녀석이 내게 속닥였다.

“미칠 정도로 좋아서 제 자지 터지는 줄 알았어요."

처음 듣는 상스러운 말에 놀라 고개를 뒤로 빼서 현도를 보았다. 녀석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 이질감이 가득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매달려요, 형."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닫기도 전에 녀석이 선 채로 내 안에 성기를 넣으려 했다.

“자, 잠깐만! 이건 싫어! 누워서……!"

이 자세로는 떨어질 것 같아서 침대에 누워서 하자는데도 녀석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기어코 안으로 들어오는 성기는 침대 위에서보다 훨씬 깊은 곳을 찔렀다.

"으윽! 너무 깊…… 읏!"

"윽, 씹.”

잘근거리는 욕이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현도를 바라보니, 녀석이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칫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욕망에 전 얼굴은 나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성적인 쾌락이 과한 탓에 고통에 전율하고 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녀석은 나를 든 채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윽! 흑!"

들썩일 때마다 밀고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이 주는 희열에 몸은 녀석이 주는 고통에 환호했다. 전신으로 퍼져나간 쾌감이 내 아래를 흥건하게 적셨고 내벽을 긁어내리는 자극에 압도당했다.

몸서리를 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고 절정에 달해 사정하고 말았다.

“으윽.”

현도 역시 나와 함께 쾌락의 끝에 다다르면서 내 안에서 여운을 즐겼다. 녀석이 꿈틀거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욕망을 모두 방출한 지금, 시간이 조금이라도 느리게 흘러 줬으면 했다. 만족감과 충실감에 화답하듯 천천히 안에서 빠져나가는 성기에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현도는 그런 나의 허리를 받치며 침대에 앉았다.

나는 현도를 끌어안고서 잠시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현도는 내 목덜미와 귀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 좋았어, 좋아요, 좋아해요. 형."

나도 좋다고 말하고 싶은데, 목이 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녀석을 꽉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현도가 나를 안은 채로 한 뒤로도 침대에서 몇 번 더 했던 것 같은데, 얼마나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어느 순간 눈앞이 돌더니, 아마 그대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나를 끌어안고서 잠든 현도가 보였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신생아 배냇짓처럼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고 예뻐서 멍하니 보고 있는데, 녀석의 어깨에 있는 상처가 보였다. 잇자국이 나 있는 그것은 딱지조차 앉지 않은 상처였다.





○6


'아.'

어깨를 물어뜯었던 것이 언뜻 생각났지만, 그렇다고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입술을 깨물며 서둘러 일어나려고 힘을 주는데, 복부에서 느껴지는 당기는 듯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으윽.”

아랫배의 진한 고통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종류였다.

“……형?"

내 목소리를 들은 현도가 잠에서 깨고 말았다. 어떻게든 힘을 줘서 일어나려 했지만, 전신이 욱신거려서 침대를 짚고 있는 팔이 덜덜 떨렸다.

'기분 나빠.'

다른 통증은 무시할 수 있었지만, 복부에 느껴지는 고통은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눈을 뜬 녀석이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아, 윽……!"

"배 아파?”

녀석이 내 허리를 안은 채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나는 애써 통증을 참아 가며 녀석의 어깨를 밀어 내고 말했다.

"알면 건드리지 마……."

안 그래도 욱신거리는 곳인데, 만져서 통증이 더 넓게 퍼지는 것 같았다. 현도를 밀려고 손에 힘을 주는데, 녀석이 갑자기 내 양쪽 다리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일어나려다 다시 눕혀진 내 무릎을 잡아서 활짝 벌렸다.

"읏?!”

말리기도 전에 녀석의 손이 내 엉덩이 밑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것을 보고 놀라 녀석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심장이 쿵쿵쿵, 뛰면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너 무슨……!”

또 하자고 하면 때릴 거다. 아무리 예쁘고 귀해도 정말 때릴 거다!

녀석의 손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움켜쥐고서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더 했다간 몸이 반으로 쪼개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현도는 손에 더 힘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뺀 것도 아니라서 녀석의 손은 아직도 내 엉덩이 밑에 있었다.

"너 이거 당장……!"

"미안, 미안해. 아무래도 안에서 터진 게 맞았나 봐.”

당장 손을 떼라고 말하려는데, 녀석이 풀죽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형."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다 퍼뜩, 어제 일이 떠올랐다. 몇 번째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정신없이 파고들던 녀석이 딱 한 번 우왕좌왕한 적이 있었다.


* * *


현도의 것이 찌걱거리며 내 안으로 들어와 아래를 쳐올렸다. 그 밑에서 힘겨워하는 나를 계속 몰아세우며 녀석은 내 성기를 움켜쥐었다.

사정할 수 없도록 귀두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은 채 아래를 치는데, 혼이 나가 속수무책으로 신음만 내뱉었다.

분출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내가 현도의 어깨를 깨물었고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내 허리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더욱 격렬하게 박았다.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아랫배에 닿은 녀석의 성기에 살갖이 불룩 솟아올랐다.

그대로 배가 뚫릴 것 같은 불안보다 녀석이 내 성기를 놓아주지 않아 사정할 수 없다는 괴로움이 더 컸다.

깨무는 것으로도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읏, 하으……! 아파, 놔, 놔 줘.〉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더 견디기 힘들어서 고개를 저었다.


〈싸고 싶어, 나 쌀……!〉


푹, 안으로 찔러 들어오던 것이 전보다 깊은 곳에 닿았다. 내장까지 닿은 듯한, 몸이 망가질 것 같은 섬뜩함과 나를 엉망으로 만드는 쾌락에 허리를 튕기며 자지러졌다.


〈허억!〉


나와 동시에 절정에 달한 현도는 내 성기를 놓았고 나는 원하던 사정을 할 수 있었다. 기진맥진해 있었음에도 녀석의 표정이 변한 것을 눈치챘다.


〈하아. 어? 잠깐만 이게 왜…….〉


현도는 무엇을 본 것인지 당황해하며 내 안에 있는 성기를 꺼내려 했다. 깊이 박힌 그것이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가자, 안 그래도 여운이 남아 있던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읏!〉

〈형, 그렇게 조이면……!〉


내 뒤가 안에 있는 현도의 것을 꽉 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힘을 풀지 않자 빠져나오지 못한 성기가 안에서 다시 부풀기 시작했다.

이번엔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녀석이 갑자기 부르르 떨자, 밑이 따뜻해졌다. 녀석은 나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녀석의 숨결이 닿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한동안 내 안에 있던 성기가 움찔거리며 서서히 물러나 귀두 끝이 입구에 걸리더니 툭, 하고 빠져나왔다.

아래가 과하게 젖어 질척였다. 예민한 몸이 힘껏 달아 움찔거렸다.


〈미안해 형, 바로 빼 줄게.〉


현도의 손가락이 아래로 들어갔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안에서 무언가를 긁어내려는 녀석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아마…….

……내가 올라탔다.

단단한 녀석의 복부를 짚고서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상태로 움직였었다. 그러다 현도도 이성을 잃고서 나를 끌어안은 채로 박아 넣었었다. 음낭이 뭉개질 정도로 마찰하며 내 안에 박던 녀석이 사정을 할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지나치게 밑이 젖는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벌려진 엉덩이 사이로 들어오는 성기가 배를 꿰뚫어도 좋으니, 아까의 쾌락을 한 번 더 느껴 보고 싶었다.

내가 재촉하듯 허리 짓을 하니 녀석도 더는 참지 못하고 끝까지 박아 넣었다.


〈으흑, 아……!〉


울음 섞인 신음을 내뱉자, 현도의 손이 내 눈가로 향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다 그 손목을 쥐어 볼록 솟아 있는 배 부근에 닿게 했다.


〈여기, 여기까지 닿았어.〉

〈……진짜 미치겠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도는 내 두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그대로 거세게 치고 들어왔다.

쾅, 박아 대며 안을 헤집을 때마다 빳빳하게 서 버린 내 성기가 울컥, 울컥 정액을 토했다.

정신이 뒤흔들리면서 더는 견디지 못한 내가 뒤늦게 도망가려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현도는 으르렁거리며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더 거칠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읏! 으흑, 흣.〉


통증은 이미 무뎌졌지만, 정도를 넘어선 쾌락에 눈물이 계속 나왔다. 안에서 터질 것만 같은 감각에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녀석은 그런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벽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나는 다시 한번 묽은 액을 사정하면서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좋아서.


〈흑, 흐, 흐흑.〉


현도가 그런 나를 달래듯 끌어안았지만, 내 안에서 한동안 머물며 움직이지 않았다.

목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의식이 멀어졌다. 뺨 언저리에서 녀석의 숨소리가 들렸다. 달짝지근한 향도 맡아졌다. 현도의 모든 것이 좋았기에 마음 놓고 그 품에 잠들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어제의 마지막이었다.


* * *


“아…….”

나는 잠시 자괴감 비슷한 것이 밀려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니까 이미 콘돔이 터졌었는데, 내가 자처해서 이 사달을 만들었다고?'

그 순간 불쑥, 뭔가를 깨달았다.

'그럼 내가 지금 아픈 게…….'

현도의 정액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내 안에 녀석의 것이 있다는 것이 변태 같게도 너무 좋았다.

방금 전만 해도 못 할 것 같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녀석은 그런 내 속마음도 모르고 안에 있는 것을 빼 주겠다며 내 밑으로 손가락을 조금 밀어 넣었다.

모양도 예쁘고 가늘어 보이는 현도의 손가락이었지만, 내 손보다 두 배는 컸다. 그래서 그런지 부어 있는 밑으로 손가락 하나만 조금 들어왔는데 안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읏, 응……!”

“많이 아파? 지금 다 빼 줄 테니까……!"

"안 빼도 돼."

"혼자 빼게? 하지만, 꽤 깊은 곳에 들어가 있을 거라 혼자서 하긴 힘들 거야.”

현도는 내가 많이 아파서 이러는 줄 알고 나를 달랬다. 그러고는 내 밑으로 손가락을 더 넣으려고 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손을 뻗어 꽉 끌어안았다.

“형?"

“그거 말고.”

손 말고 다른 것을 넣으라는 뜻이었고 현도는 바로 내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답지 않게 우물쭈물 답답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형 지금 아프…….”

엉덩이를 조금 움직여 녀석의 중심부와 가까이 닿게 했다.

“그래서 안 한다고?"

단단하게 달아오른 것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기세였다. 그래서 조금만 자극해도 바로 덮칠 줄 알았는데, 움찔거리기만 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부족한가?'

더 흥분시켜야 하나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이려는데 덥석, 녀석이 내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단번에 잡아당겨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려 무릎에 앉혔다. 녀석은 어떻게든 참으려는 듯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서 중얼거렸다.

“오늘은 안 돼…….”

나는 그런 녀석의 두 뺨을 잡아들어 눈을 마주했다.

“하아. 형은 왜 그렇게 겁이 없어…….”

현도는 고통스럽게 숨을 뱉었다. 묵직한 녀석의 중심부가 내 안으로 뚫고 들어올 기세였다. 겁이 없다는 소리를 들은 나와는 달리, 녀석은 어찌할 바 몰라 겁에 질린 안색이었다.

“내가 너한테 왜 겁먹어야 하는데.”

“제발, 다쳐 형…….”

"괜찮아.”

"안 돼, 진짜 안 돼.”

현도는 두 눈을 감고 말했다. 더는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감상했다. 반듯한 이마와 높고 모양이 예쁜 코, 적당한 두께에 촉촉해진 입술에도 눈이 갔다.

하지만 역시 현도의 얼굴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눈이었다. 눈을 마주쳐 줬으면 했지만, 녀석은 눈꺼풀을 감은 채 고집을 부렸다.

“눈 뜨고 형아 봐.”

“안 돼, 형. 많이 부어 있어서 진짜 큰일 나.”

"누가 뭐래? 그냥 나 보라고."

“…….”

“뭐야, 내 얼굴 보기 싫어?"

현도가 번쩍 눈을 떴다. 황금색 눈동자는 그 안에 햇빛이 가득 들어간 것처럼 일렁였다.

나는 그런 녀석의 눈가를 엄지로 어루만지며 웃음을 흘렸다. 나를 바라보던 현도의 눈동자가 한 차례 떨리더니, 이내 넋을 놓고 나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네가 참아.”

겁이 많은 아이를 달래 줄 수는 있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안달이 난 짐승이었기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대신, 본능에 충실할 수 있도록 재촉했고 결국 현도는 정신을 놓고 나를 탐했다. 그리고 나 역시 녀석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7


정사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은 허벅지 사이로 더는 정액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를 현도가 시트째 안아서 욕실로 데려가 씻겨 준 덕분이었다.

겉뿐만 아니라, 안까지 깨끗하게 해 줘서 보송보송해진 몸이 기분 좋았다. 따뜻한 물에 뭉친 근육이 조금 풀어져서 전신을 훑던 통증도 거의 사라졌다.

처음인 데다가 꽤 격렬하게 한 것치고는 몸 상태가 양호했다. 꼬박 며칠을 앓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 정도면 벽을 짚어야 하겠지만 걸을 수도 있겠다.

만족감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나와는 달리 현도 녀석은 어딘지 우중충해 보였다.

'왜 저래?'

나를 씻겨 줄 때부터 저 상태였는데, 연고를 발라 준다며 아래를 확인하더니 더 어두워져 있었다.

"미안, 미안해. 형. 이렇게까지 해서는 안 됐는데…….”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난 좋……."

좋았다고 말하려는데, 나보다 먼저 현도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

“밑이 이렇게 찢어졌는데, 뭐가 그럴 수 있어. 다 내 잘못이야. 그때 정신이 나가 가지고…….”

자책하는 녀석의 말을 듣고서야 내 밑이 찢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씻겨 줄 때 녀석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이 피라도 묻어 나와서 그랬던 것 같다.

격렬하게 한다 싶긴 했는데, 역시 조금 상처가 난 모양이다.

“병원 가자.”

"뭐?"

녀석이 나를 안고 벌떡 일어나 방에서 나가려 하기에 내가 질겁했다.

관계하다 찢어진 엉덩이 좀 봐 달라고 하라고? 미치지 않은 이상 절대 싫었다.

“싫어!"

내가 근육통을 무시하며 발버둥 치자 현도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지금 나보고 남한테 어딜 보이라는 거야!"

"아.”

"내려놔!”

현도는 나를 안은 채 다시 침대에 앉았다. 녀석도 제정신이 아니었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나를 꽉 끌어안았다. 현도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가슴에 푹, 고개를 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흘깃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이라 그래, 형이 처음이라서."

“……흑.”

"너도 처음이라며, 그럼 서로 요령이 없어서 생긴 상처잖아.”

“…….”

짜는 소리에 놀라 녀석의 얼굴을 잡아 들었다. 현도가 울고 있었다.

"미안해, 흑, 흐흑. 미안해 형…….”

눈물을 콸콸 쏟아 내고 있는 얼굴을 보는 바람에 웃음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터지려는 웃음을 삼키고 나는 울보 녀석의 두 뺨을 잡아다 입을 맞췄다.

눈물의 짠맛이 먼저 느껴졌고 이후로는 단맛밖에 나지 않았다.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녀석의 입안을 내가 먼저 헤집어 놓다가 떨어졌다.

반들거리는 녀석의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지?"

“…….”

말 잘 듣고 순한 내 동생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다.”

나는 그런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녀석의 어깨에 다시 시선이 꽂혔다. 내가 물어서 생긴 상처를 바라보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연고 다른 거 있어?"

아무리 급해도 내 밑에 발랐던 연고를 현도 어깨에 바를 수는 없었다.

“연고? 아.”

우느라 정신없던 현도가 내 물음에 갑자기 쥐고 있던 연고를 손에 짜더니, 그 손을 내 밑으로 뻗었다.

이미 충분히 발라서 미끈거리는데 또 바르려는 녀석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말고!”

"응? 많이 아파?"

아까까지 울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녀석이 계속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내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여 엉덩이 밑을 보려고 했다.

'미친!'

경악한 내가 녀석의 머리를 잡아 밀치며 소리쳤다.

"나 말고! 너 말이야, 너 어깨!"

"응?"

그제야 현도가 내 무릎을 놓고서 고개를 들더니,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반대쪽이었지만,

"멍청아, 여기.”

어떻게 된 게 제 몸 아픈 곳도 몰라?

내가 깨문 곳을 가리키고 나서야 현도는 제 어깨에 있는 상처를 보았다.

"아아.”

그 짧은 탄성과 어깨 들썩임이 끝이었다. 녀석이 다시 내 아래를 확인하려 고개를 틀려고 해서 나는 그런 녀석의 머리를 꾹꾹 밀어 내며 말했다.

"너나 바르라고!"

“형 먼저.”

“난 아까 발랐잖아.”

“그럼, 한 번만 더 확인해 볼게.”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들었다.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쥐어박으려고 했는데, 때릴 곳이 보이지 않았다.

'젠장.'

하는 수 없이 녀석의 두 볼을 잡아다 쭈욱, 늘렸다.

“흐여?(형?)”

동그랗게 뜬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게 퍽 귀여웠지만, 그렇게 늘린 볼을 놓고서 잽싸게 녀석의 손안에서 연고를 빼앗았다.

그리고 녀석을 밀어낸 뒤 품에서 빠져나왔다.

"윽.”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전신에 통증이 밀려왔다. 서 있는 게 고작인 내가 벽을 짚고 있자, 현도가 뒤에서 허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놔.”

"형.”

“놓으라니까?”

"알았어. 안 해. 안 할게!”

"해도 되니까, 일단 좀 놔 봐. 다른 연고 좀 찾아 오게.”

“무슨 연고?"

“너 어깨에 연고 발라야 할 거 아냐. 이건 좀 그러니까 다른 거 가져올게.”

“내가 가져올게.”

“됐어. 나도 혼자 움직일 수 있어.”

벽을 짚고 천천히 움직이면 걸을 만했다. 그리고 몸이라는 게 웅크리고 있기보다 계속 움직여 줘야 회복이 빨랐다.

그러나 현도는 내가 조금만 걸으려고 해도 부서질 것처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나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뭔 소리야, 너 상처 덧난다고."

“그래도 돼. 상관없어."

이건 대체 뭔 고집이지. 이번에는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내가 깨물어서 생긴 상처다. 방치했다가 덧다는 꼴을 봤다간 속이 어떻게 뒤집힐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강현도, 형, 화나게 할래?”

“……내가 가져올 거야.”

현도가 나를 끌어안은 채 퉁퉁 불어 있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녀석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고 나는 녀석의 그런 고집을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널 어떻게 이겨 먹겠냐.'

이번에도 백기를 든 나는 몸에 힘을 빼고 현도에게 말했다.

“빨리 가져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현도는 나를 놓아주며 침대에 앉혔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나가서 다른 연고를 가져와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은 현도를 보니, 마치 막대기를 물어 온 대형견처럼 보이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쥐여 준 연고가 상처에 바르는 것임을 확인하고 바로 현도의 어깨에 발라 주었다.

녀석은 아프지도 않은 것인지 그동안 미동조차 없었다.

피가 나올 정도로 어깨를 물어 버렸다. 어깨가 이 지경인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현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것이 너무 이상했다.

"괜찮아?"

"좋아.”

어깨가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 물었는데, 녀석이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 어깨 안 아프냐고."

“안 아파. 기분 좋아."

“……변태냐.”

“들켜 버렸네.”

현도는 해사하게 웃으며 만면에 그득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내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어깨뿐만 아니라, 목덜미에도 물린 자국이 보였다.

어깨만큼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잇자국이 적나라하게 난 채로 멍이 든 상태였다.

'아주 씹고 뜯고 맛봤네.'

머뭇거리다 손을 뻗었다. 멍 자국이라 연고를 바를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발랐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해서.

내가 목덜미에 손을 대자 어깨에 연고를 바를 땐 미동도 하지 않던 놈이 흠칫 놀랐다. 나는 이제야 녀석이 아파하는 것으로 알고 좀 더 살살 만졌다.

"미안…….”

물어뜯으라고 했던 건 현도였지만, 곧이들은 내 잘못이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다음에는 이러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못 했다. 그랬기에 무거운 한숨이 나오려 했고 그것을 막 뱉어 내려는데, 갑자기 현도가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등 뒤에 있던 이불을 끌어왔다.

"어?"

내가 그 행동에 당황하기도 전에 녀석은 나를 이불로 감싸더니, 번쩍 안아 들었다.

안긴 채로 박혔던 어제 일이 떠올랐다. 누워서 했던 것보다 훨씬 깊게 들어온 그것 때문에 반쯤 정신이 나갔던 기억이 선명했기에 반사적으로 현도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더 안 해, 아니, 못 해!"

"하하. 아무리 나라도 이불 너머론 못 넣어."

그제야 내가 이불에 돌돌 말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도는 민망해하는 내 뺨에 입을 맞추더니, 날 데리고 창가 쪽으로 향하고는 커튼을 쳤다.

순간, 눈이 부셨지만 현도가 손으로 가려 줘서 금방 적응해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다. 창밖 너머로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에 내린 눈이야.”

눈은 동백꽃 위를 덮고 있었다. 겨울 끝자락까지 만발한 동백은 여전히 붉고 탐스러운 꽃잎을 열어 둔 채였다.

창 너머로 보이는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절경을 함께 바라보던 녀석이 말했다.

“3월까지는 필 거야.”

동백은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심어져 있던 것이었다. 정원을 가꾸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도 만발한 동백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다른 꽃도 심어 볼까?"

내 물음에 녀석이 부드럽고 절절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에 응답하듯 눈길을 주고받으며 덧붙였다.

“나무도 좋고."

“벚꽃 같은?"

"응."

"예쁘겠다. 그럼 주변엔 장미나 해바라기도 심자. 코스모스도."

꽃과 나무를 심을 자리를 가리키는 녀석은 환한 눈망울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어린 미소를 보자, 벌써부터 각 계절의 바람을 타고 정원에 개화한 꽃밭의 향이 맡아지는 것 같았다.

봄이면 벚꽃이 필 것이고 여름에는 장미와 해바라기가 필 것이다.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피어나며 지는 꽃들이 아쉬워질 때쯤에는 다시 동백꽃이 만발할 지금의 풍경을 볼 수 있을 테다.

매 계절, 만개한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 현도가 그려졌다.

“그래, 그러면 좋겠다."

이제 꽃이 피고 지는 모든 계절에 네가 있을 거라는 사실이 숨이 막히도록 좋았다.



○8

2. 키스 타임.


무너지는 건물 잔해들이 곳곳에 쏟아졌고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무미건조하게 주변을 바라보던 키스는 이내 눈을 감았다.

'화이.’

처음 화이를 만났던 순간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그날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지독한 불행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데려다주었다.


* * *


「쉽게 길들 것이었으면 살려 두지도 않았지.」


모진 고문에도 울음 한 번,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은 키스를 내려다보며 피에로는 말했다. 그의 손에 들린 길이가 짧은 채찍에는 피와 살점이 묻어 있었다.

끝내 굴복하지 않은 키스를 우리에 다시 가둬 둔 피에로가 밖으로 나갔다. 3시간의 고문 끝에 온 휴식이었다.

짐승처럼 가둬진 키스는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는 숨을 내쉬기 전에 먼저 깊게 들이마셨다. 폐를 찢는 듯한 통증이 그를 감쌌다.

언제부터 감금되어 고문을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은 지옥에 있었다.

똑같은 일상에 염증이 나려던 어느 날, 그녀가 나타났다.


「저번에 이야기해 드렸죠? 현재 후원해 주고 있는 아이입니다.」


자신에게 깨끗한 옷을 입히고 한동안 고문이 없는 것이 이상하더라니, 피에로는 저택에 한 여인을 초대했다.

그는 키스를 앞에 세워 놓고 다정한 척 연기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누구라도 속아 넘어갈 표정이었다.


「가엾게도 교육 시기를 놓쳐 많이 뒤처진 상태죠. 낯가림이 많아 저조차 잘 따르지 않고요. 영특한 아이인데, 늘 그것이 마음 아픕니다.」


피에로의 큰 손이 키스의 머리에 닿았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키스를 쓰다듬었다. 키스는 할 수 있다면 그의 손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영특하다 말하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은 섬뜩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그대로 쥐고 있는 자신의 머리통을 터트릴 것처럼.

여인은 키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머리에서 손을 뗀 피에로의 손이 그의 두 어깨를 움켜쥐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키스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정면으로 마주한 여인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생소한 그 느낌에 경계심부터 들었다.

'이 여자도 개인가? 아니면…….'

피에로가 길들이려던 개들은 들어온 족족 죽어 나갔다. 공들인 보람이 없다며 아쉬워하던 그가 또 다른 교육자를 데려왔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구나.」


여인은 신기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평생 맡아 본 적 없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달콤한 향이 났다.

햇살을 머금은 듯한 백금발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고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 눈부셨다.


「난 금별해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에로가 붙여 준 이름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던 피에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똑바로 이야기하라는 뜻이었다.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겨우 참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던 그녀가 키스의 뺨을 감쌌다. 그녀의 손이 닿자 어깨에 가해졌던 통증이 옅어졌다.
그녀는 걱정스레 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아프니? 안색이…….」


키스는 그 행동에 구역질이 났다. 이제 와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고 그녀 역시 피에로와 다를 것 없어 보였다.

자신의 뺨에 닿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쳐 내며 피에로의 손에서도 벗어났다. 그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고 뒷걸음질을 치다 이내 뒤돌아 달아났다.

그러나 이 저택 어디에도 키스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날 저녁, 피에로가 키스를 찾았다. 어김없이 고문을 가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퍽,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해가 널 맡아 주기로 했다.」


피에로는 키스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한 힘으로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키스는 어떻게든 뿌리치려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멍청하게 군 것치고는 결과가 좋군.」


고통에 바들바들 떨고 있지만, 여전히 눈초리는 사나운 작은 짐승에게 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나 두 번 용납할 생각은 없으니, 허튼수작 말아야 할 거다.」


내던지듯 턱을 놓고서 피에로가 돌아섰다. 키스는 그대로 몸이 무너지려는 걸 벽을 짚고 버텼다. 욱신거리는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키스는 피에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가 고작 이 정도로 넘어간 걸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변했다.'

불변할 것 같던 피에로가 변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키스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최근, 고문실의 숨만 붙어 있던 개들을 모두 처분했고 그 뒤로 다른 개를 들이지 않는 이유가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 조금만 살펴도 피에로가 그녀를 철저히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그 의구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져만 갔다. 피에로는 그녀의 앞에서만큼은 평범한 인간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 아주 잘 길든 짐승처럼 굴었다.

피에로의 말대로 그녀는 자주 저택을 찾았다. 그때마다 피에로는 꾸며 낸 모습으로 그녀를 다정하게 맞았다.

그녀 역시 그런 피에로에게 익숙한 듯 호의를 모두 받아들였다. 둘 사이가 각별해질수록 키스는 속이 뒤틀리고 토악질을 하고 싶었다.

특히, 피에로가 신사적인 모습을 보일 때마다 쓰레기를 억지로 삼키는 기분이었다.

'죽여 버릴까.’

여인은 피에로가 처음으로 드러낸 약점 같은 것이었다. 제 손으로 당장 죽인다면 피에로의 일그러진 얼굴이 볼만하겠지만, 결국 그의 약점을 제 손으로 치워 버리는 꼴만 된다.

'안 돼.'

참아야 했다. 저 약점을 온전히 움켜쥘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기를 때까지는.


* * *


키스는 그녀를 당장 죽일 수 없었기에 별해가 방문할 때마다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다녔다.


「찾았다.」


정원에서 가장 외진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키스는 조금 놀랐다. 제 뒤에서 생각지 못한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렸던 탓이었다.

또다. 또다시 그녀가 자신을 찾아냈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활짝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별해가 보였다. 작정하고 숨으면 피에로조차 찾는데 반나절 넘게 걸렸는데, 그녀는 저택에 들어와 30분도 되지 않아 자신을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매일같이 숨어 있는 자신을 찾아냈다.


「여기 정말 좋다. 비밀 장소 같아.」


그녀는 풀썩, 키스의 옆에 앉았다. 잎사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위로 내리쬐어 그녀의 윤곽이 그대로 사그라질 것만 같았다.


「미안, 이번에도 내가 방해했니?」

「…….」


눈웃음 짓는 그녀를 보자 어쩐지 가슴이 간지러워 들고 있던 책을 더 꽉 끌어안았다. 심장이 계속 빠르게 뛰었고 어쩐지 두려워졌다.

키스는 그대로 일어나 책을 안고서 도망갔다. 집요한 그녀에게 당장이라도 붙잡힐 것 같았다. 달리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면서 키스는 이내 멈춰 섰다.

그러고는 뒤돌아보았지만, 별해는 자신을 쫓아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가슴이 욱신거렸다.


* * *


「역시 비밀 장소지?」


이번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별해가 나타났다. 이제는 불쑥 그녀가 말을 걸어도 놀라지 않았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네. 이럴 것 같아서 소풍 기분 내려고 가져왔어. 먹어 볼래?」


주섬주섬 가방을 뒤적이던 별해가 내민 것은 샌드위치였다. 키스는 아무렇지 않게 제 몫을 먹으며 내민 샌드위치를 잠시 바라보다 받았다.

처음으로 피하지 않은 키스를 본 별해는 더욱 활짝 웃으며 곁에 앉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종종 웃음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그녀가 준 샌드위치의 맛은 평범했다. 그렇기에 이곳에선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금별해.'」


별해가 입을 열었다. 한 입 베어 문 샌드위치를 들고만 있던 키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이름이 조금 어렵지? 그냥 '별'이라고 부르면 돼.」

「……별?」

「잘하네, 다들 그것도 발음하기 힘들어하던데.」


별해가 싱긋 웃었다. 칭찬을 듣고자 따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부끄러웠다. 여기선 누구도 저런 이유로 칭찬하진 않으니까.


「네가 불러 줘서 너무 좋다. 아무도 제대로 불러 주지 않아서 조금 속상했거든. 그러니까 네가 많이 불러 주면 좋겠어.」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던 키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치우고 샌드위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키스에게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해진 별해가 어깨를 으쓱 든 순간이었다.


「카키스토리코스.」


키스가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피에로가 붙여 준 이름이었지만, 자신의 이름은 이것뿐이었다.

나쁜 늑대라는 뜻으로, 작년까지 이름이 없다가 최근에야 길들지 않는 자신에게 붙인 것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이름을 모르는 그녀가 자신을 너라고 칭하는 것이 더 거슬렸다.

하지만 역시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싫었다.

‘괜히 알려 줬어.'

그렇게 후회하고 있을 때, 별해가 입을 열었다.


「키스」


샌드위치에 코를 박고 있던 키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햇살처럼 웃고 있는 그녀는 개구쟁이 소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스라고 불러도 될까?」


그 물음에 키스는 말문을 여는 것이 어려워졌다. 입을 열면 울컥하는 심정에 말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입을 꾹 닫았고 살짝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는 샌드위치에 입을 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뒤로 키스는 별해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먼저 찾아다닐 정도였다.

오늘도 별해를 먼저 찾으러 가던 키스는 멀리서 보이는 별해를 보고 다가가려다 멈췄다. 그녀의 앞에 피에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피에로는 별해에게 반지를 건넸다.

별해가 저것을 받지 않았으면 했다. 당장 막아야 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그사이에 별해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임신을 했다. 만삭인 그녀의 부른 배를 볼 때마다 계속해서 무언가 속에서 뒤틀리고 있었다.


「우리 셋이 사진 찍을까?」

「셋?」


별해가 배를 쓰다듬자, 그제야 안에 있는 아이까지 수를 센 것을 깨달았다. 키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가 원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한 달이 더 지나고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 품 안에 아기를 안고 있던 그녀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키스를 발견했다.

별해는 그런 키스에게 손짓했다. 그 손짓에 다가온 키스에게 안고 있던 아이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이름은 화이라고 지었어.」

「화이…….」


그녀만을 닮아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키스는 어쩐지 넋을 놓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알려 주지 않을래?」


별해는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 키스가 그 물음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

「화이한테 행복이 뭔지, 키스 네가 알려 줬으면 좋겠어.」


행복이라니, 누구보다 그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을 보고 화이에게 행복을 알려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키스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기적인 말을 하는 그녀가 이름을 알려 줬던 그날 이후 처음으로 거북했다.

키스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화이를 바라보았다. 인형처럼 생겨서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고 꼭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러다 통통한 볼살에 시선이 갔고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데, 화이가 갑자기 그 손가락을 움켜잡았다. 마치 자신을 선택해 준 듯.

키스는 흠칫 놀랐다. 손바닥 밑으로 전해지는 이상한 느낌에 당장이라도 손을 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별해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키스, 네가 가장 행복해져야 해. 내가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할게.」





○9


행복해지라는 별해의 말을 들은 키스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입을 다문다면 별해와 화이는 지금처럼 곁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들어진 평화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키스는 화이가 막 태어났을 때 보였던 피에로의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갓난아기를 서릿발처럼 차갑게 바라보던 그 시선은 결코 자신의 아이를 향한 아버지의 눈빛이 아니었다.

별해 앞에서는 철저히 숨겼지만, 키스는 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조만간 사고를 위장해 화이를 죽이리라는 것까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화이의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는 몸 전체로 아드레날린이 퍼져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희열감은 눈앞에 있는 화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도록 했다.

화이의 손에서 벗어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키스는 별해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고 온화하게 웃고 있던 별해에게 키스가 입을 열었다.


「행복해질 수 없어.」


그 말을 들은 별해의 머리가 당혹감에 움찔했다. 그녀는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지만, 이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아무것도 모르기에 물을 수 있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그럴 수 없으니까.」


별해의 밝았던 얼굴이 좀 더 굳었다.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한 키스가 또다시 벽을 세우고 있다는 것에 약간의 상실감마저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키스는 그녀를 거부하려 꺼낸 말이 아니었다. 별해와 화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한.」


그제야 별해는 키스가 한 말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걸 알려면 당신은 지금부터 날 제대로 봐. 모든 걸 마주하고서 거부하고,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별해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던 그가 장갑을 벗었다. 키스가 얼굴을 제외한 맨살을 타인의 앞에서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별해의 양쪽 눈썹이 크게 씰룩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깜빡였고 잠시 그 눈이 공허해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별해는 키스가 신체 접촉을 싫어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손을 뻗어 키스의 손을 붙잡았다.

키스의 손이 상처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흉터의 종류도 다양했다. 베여서 생긴 것과 화상으로 생긴 것, 살을 꿰맨 흉터까지.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길로 키스를 바라보았다.

키스가 자신이 웃옷을 잡아 조금 들어 올리자 드러난 배에도 비슷한 상처로 가득했다. 별해는 그 상처를 보고 숨을 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이 너덜너덜하다는 표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참혹한 모습에 별해는 숨을 쉬려 할 때마다 목구멍이 떨리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런 그녀 앞에서 키스는 하던 말을 덤덤하게 이었다.


「23명의 개들이 있었어. 난 개중 14번째였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14번째와 21번째가 전부야. 당신이 오고부터 피에로가 새로 개를 길들이지 않았거든.」


그 말을 들은 별해가 되물었다.


「언제부터?」

「기억 안 나.」

「……하.」


키스의 말에 결국 참지 못한 별해가 눈을 감고서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그녀는 고여 있던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런 그녀에게 키스가 말했다.


「피에로 모로네는 네가 아는 것처럼 선하지 않아.」


그녀가 자신의 말보다 피에로의 말을 믿는다면, 키스는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피에로를 향해 작은 의심이라도 가진다면, 그것만으로도 화이가 살아남을 수 있다.

지금은 그거면 됐다.

키스는 자신을 잡고 있는 별해의 손을 치워 내고 뒤로 물러났다. 그는 옷을 단정하게 정돈했고 벗어 뒀던 장갑도 다시 꼈다.


「나락에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지옥에 있지 마.」


그 말을 끝으로 키스는 등을 돌렸다.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려는데 별해가 자신을 와락, 뒤에서 끌어안았다.


「미안해. 이제야 알아서, 이제야 눈치채서 미안해.」


그녀가 미안해할 것은 하나도 없었음에도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 말했다. 살갖에 닿은 별해의 눈물이 키스의 마음을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 * *


그날 뒤, 별해는 피에로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피에로의 개인 서재에서 발견한 수십 개의 수첩과 자료에는 별해가 언제 어디서 어떤 장소를 이용하는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빼먹지 않고 찾았던 성당에는 붉은색으로 강조 표시까지.

그것으로 피에로가 처음부터 철저히 계산하고서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더 소름 끼쳤던 것은 그 기록이 무려 2년 전부터였다는 것과 그동안 한 번도 주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또한 키스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학대로 살해당한 뒤 유기되었다는 자료까지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끔찍한 괴물과 살을 섞고 있었다는 구토감에 서재를 뛰쳐나와 토를 했다.

그제야 그동안 피에로에게 느꼈던 섬뜩한 느낌이 이해가 되었다. 다정하고 신사적인 그였지만, 이따금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저지르곤 했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는 새가 예쁘다고 하면 그다음 날 새장에 가둔 새를 선물했던 그였다. 새를 풀어 달라고 했더니, 날개를 잘라서 지금 놓아주면 죽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새는 얼마 가지 않아 새장 속에서 죽어 버렸다.

그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고 새를 위해 장례까지 치렀다. 함께 슬퍼하던 그녀는 그 모습에서 진정성을 보았다.

추모 기간을 마친 새의 시체를 그가 쓰레기통에 버리기 전까지.


「우욱.」


별해는 다시 올라오는 구역질에 변기를 붙잡았다. 세면대에 손을 뻗어 붙들고 겨우 일어난 그녀가 입을 헹구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더는 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하던 남자였고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더는 아니었다.


* * *


늦은 밤, 잠들어 있던 키스는 작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곧바로 고개를 들어 베개 밑에 숨겨 놓았던 총을 쥐려는 순간, 별해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녀의 품에는 잠든 화이가 안겨 있었다. 별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쉿, 날 따라와.」

「……?」


수시로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을 피해 도착한 곳은 이제껏 고문을 당해 왔던 고문실 앞이었다.

잠시, 멈칫한 키스가 그녀를 붙잡았다.


「여긴 안 돼.」


누구든 한번 들어가면 죽거나 넝마가 되어 나오던 곳이었다. 키스는 그곳에 제 발로 들어가려는 별해를 말렸다.


「피에로가 찾아올 거야.」

「걱정 마. 그 사람은 지금 우릴 찾지 못해.」

「……?」

「꽤 강한 수면제를 먹였거든.」


그녀는 초조해하고 있는 키스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날 믿어.」


그녀는 키스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을 쳐 낼 수 있었지만, 키스는 결국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곳곳에 보이는 고문 기구 탓인지 학대를 가하기 전 피에로가 읊던 성경 구절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조금만 자극하면 정신을 놓을 듯한 아득함에 몸이 갉아 먹히는 듯했다.

그때였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키스를 별해가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에서는 달콤한 향이 풍겼다. 함께 안겨 있던 화이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잠에서 깨고도 순하게 눈만 굴리던 화이는 손을 들어 키스의 뺨을 찰싹, 때렸다.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해는 갑자기 고문실 한쪽에 있던 우리를 밀자고 했고 키스는 그녀를 도왔다. 그러자 그곳에서 비밀 통로가 발견되었다.

그녀와 함께 그곳을 빠져나오자, 키스는 처음으로 밟아 본 저택 밖 땅을 빤히 바라보다 하늘을 보았다.

창밖으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넋을 놓을 뻔하던 그를 별해가 불렀다.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녀는 조수석 쪽 문을 열었다. 눈치껏 키스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자신이 안고 있던 화이를 키스에게 안겼다.


「읏.」


그 무게감에 당황하기 전에 별해는 안전벨트를 당겨 채우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준비됐어?」

「어?」


별해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키스는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곤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순간,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린 차가 불시에 후진하면서 핸들을 꺾더니 격렬하게 숲을 헤치며 달렸다.

바짝 얼어 버린 키스와는 달리, 안겨 있는 화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꺄르륵 웃기까지 했다. 자신이 조금만 힘을 풀면 화이가 튕겨 나갈 것만 같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키스였지만, 이번만큼은 심장이 놀라서 제대로 뛰고 있었다.

보기와 달리 거친 별해의 운전으로 차체가 이리저리 흔들렸던 것도 도로가 나오고 나서야 안정되었다.


「어디 가는 거야?」


키스가 이제야 물었다. 흘깃 그런 키스를 바라보던 별해는 활짝 웃었다.


「어디든.」

「목적지를 말해.」

「우선은 로마에 갈 거야.」

「어디를 가든 피에로의 눈 밖으로 벗어날 수 없어.」


그녀 혼자라면 몰라도 짐짝과도 같은 아이 두 명을 데리고 도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망만 다닌다면 그러겠지.」

「……?」

「난 그 사람과 정면으로 승부할 거야. 죄를 지었으니,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맞서겠어. 하지만 키스, 그 전에 네 안전이 먼저야.」

「나 때문에 더 위험해질 수 있어.」

「가해자의 행동이 네 탓이 되진 않아. 그럴 일도 없어. 나는 더 이상 멍청하게 굴지 않을 테니까.」

「피에로는 마피아야. 그냥 간부가 아니라, 보스라고.」

「그래? 그건 몰랐네. 하지만 놈도 내가 변호사라는 건 몰랐을걸? 그것도 꽤 실력 있는.」


실력이 있다는 그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지금까지 모아 왔던 모든 증거 자료를 토대로 피에로를 압박했다. 그리고 단 사흘 만에 이혼장과 고발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패소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혼장은 받아들여졌지만, 아동 학대와 살인에 관한 것은 뚜렷한 증거가 되는 자료를 첨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10


대법원 판결은 접근 금지와 벌금형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태리 헌법은 형편없어!」


그녀가 탁자를 쾅! 하고 내리치자, 요람 안에 있던 화이가 움찔거렸다. 화이가 울먹거리려 해서 키스는 화이의 작은 가슴을 두들기며 달랬다.

기업을 상대로도 가지고 놀았던 피에로다. 그런 그가 이혼장부터 받아들인 것은 얼마든지 그녀를 다시 손안에 쥘 수 있다는 오만함의 표시였다.

그녀가 악착같이 굴며 법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기에 지금은 잠시 놓아준 것뿐이었다. 그것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키스는 흥분한 그녀에게 화이를 달래듯 조용히 말했다.


「예상 못 했던 것도 아니었잖아. 놈이 물러나 준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그게 제일 열받아, 쓰레기가 누가 누굴 봐줘?」


피에로에게 화를 내는 것이 보기 좋긴 했지만,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피에로를 언급하는 게 싫었다.


「화이가 들어.」

「아, 고마워.」


그제야 별해가 자신의 입을 막았다. 키스가 짚어 주지 않았다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을 내뱉을 뻔했기 때문이다.


「어른으로서 못 볼 꼴만 보이네.」

「내가 아는 어른 중에선 별이 제일 나아.」


그 말을 들은 별해는 키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놀란 키스가 질겁하고 떼어 내려는데, 그녀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키스, 역시 내 아들 할래?」

「싫어.」


키스가 단번에 거절했더니 그녀의 얼굴이 조금 울상이 되었다. 그녀가 섭섭함을 드러내자 키스는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래도 싫다는 의사를 번복하지 않았다.

키스의 고집에 별해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난 네가 날 엄마라고 불러 주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화이에게도 형이 생겨 좋을 테고.」

「싫어.」


키스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쳐 내며 또 한 번 단호하게 거절했다.

키스에게 있어 가족이라는 건 서로를 얽매는 관계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나 화이가 자신에게 얽매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없을 테니까.


* * *


5년이 지났다. 간혹 피에로가 신경을 거슬리게 굴긴 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동안 화이는 뛰거나 달리는 것도 가능해졌고 책도 곧잘 읽었다. 화이는 까다로운 아이였다.

특히 먹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젖을 뗀 후로는 우유나 이유식을 입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별해와 키스가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려 가며 화이를 먹였는지 모른다.

5년은 평화에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한 남자를 주워 왔다.


「이게 뭐야?」


눈 밑이 거뭇하고 의식을 잃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남자는 누가 봐도 송장 같았다. 기어이 그녀가 성질을 못 이기고 사고를 친 것인가 싶었다.

그녀는 자해한 흔적으로 보이는 팔목을 치료하며 말했다.


「……정신 병원 환자?」

「뭐?」

「정신 병원에서 탈출했다 했거든.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믿을 수는 없어도 살릴 수는 있지. 그나저나 노숙을 오래 했는지 냄새가 많이 나네.」


그녀가 남자의 옷을 벗기려 하자, 키스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씻기려면 벗겨야 하잖아.」


키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떼어 내고 남자의 앞에 서서 말했다.


「내가 할 테니까 넌 나가.」

「다 큰 성인을 너 혼자 어떻게 하려고?」

「내가 알아서 한다잖아!」


키스는 그녀를 방문 밖으로 밀어 냈다.


「그럼 욕조까지만이라도…….」


그녀가 마지못해 나가면서도 말하는데 키스는 쾅, 하는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늘어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말랐지만, 거구에다 섬세하게 생긴 동양인이었다.


「대체 얼마나 겁이 없는 거야.」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를 집에 들인 것도 모자라, 옷까지 벗기려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키스는 한숨부터 나왔다.

키스는 그의 멱살을 잡고 단번에 힘을 주어 앉게 했다. 힘이 없어 늘어지려는 그를 붙잡고서 뺨을 내리쳤다.

워낙 얼굴이 많이 상해 있어서 뺨 몇 대 치는 건 티도 나지 않았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던 남성이 눈을 떴다.


「깼으면 옷부터 벗고 욕실에 가서 씻…….」


남성이 와락, 키스를 끌어안았다. 소름이 정수리까지 올라온 키스가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현도……. 현도야."

남자는 영문 모를 단어를 입에 담았다.

'현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키스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자신을 끌어안으며 부르는 그 단어가 무척이나 간절하게 들렸다.

결국 다시 기절해 버린 남자를 키스는 질질 끌어다 욕실에 밀어 넣었다. 입고 있던 옷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대충 씻겨서 다시 방으로 데려와 침대에 눕히고 나자, 키스는 그 자리에서 탈진하고 말았다.


* * *


“으윽.”

한참 뒤에야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두통을 호소했다. 키스가 욕실까지 그를 질질 끌고 다니다 머리가 몇 번 부딪혀서 생긴 혹 때문이었다.

남자가 키스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키스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 아.”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다가 키스를 보고 뭔가를 깨달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영어였다.


「여기가 어디니? 내가 왜 이곳에 있지?」

「별이 널 주워 왔어.」

「별?」

「정신 차렸으면 이제…….」


여기서 나가라는 말을 하려 했는데, 별해가 들어왔다.


「정신이 좀 들어요?」


낯선 남자는 바로 침대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러다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시트로 몸을 가렸다.

"이, 이게 대체!”

“어? 한국분이셨네요?"

"네?"

몸을 가린 남자가 멍청한 얼굴로 별해를 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진 키스가 인상을 썼다.

그런 키스를 알아차린 별해가 말했다.


「이 사람, 한국 사람이라고 하네.」

「그게 뭐?」

「나도 한국인이거든.」


별해의 국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키스는 그녀가 이방인과 공통점을 가졌다는 점이 조금 불쾌했다.


「그래 봤자 남이야.」

「안타깝게도 한국인에게는 고질병이 있어.」


병이라는 말에 키스가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정이라는 불치병이지.」

「정?」


키스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설명 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난처해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기, 제 옷은 어디 있습니까?"

그 물음에 별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게요, 옷이 어디 있지?」


키스는 그런 별해를 보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버렸어.」

"버렸다고 하네요.”

"네?"

“급하니까 이거라도 입을래요?"

별해가 내민 것은 품이 넓고 길이가 긴 하얀 원피스였다. 그녀가 종종 집 안에서 입던 옷이었다.

원피스를 받은 남자의 얼굴은 전보다 창백해졌다. 남자가 어떻게 나오나 두고 보던 키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입기 싫다고 내던질 줄 알았던 원피스를 꾸역꾸역 입은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고 말아서 별해가 배를 붙잡고 웃었지만, 남자는 자신이 놀림을 받았음에도 얼굴을 붉히며 머쓱해하는 것 말고는 얌전했다.

'연기하는 건가?'

남자가 순한 척 내숭을 떠는 것일 수도 있었다. 키스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남자를 경계했다.

“나와요, 식사부터 하죠.”

별해가 밖으로 나가자 그 뒤를 키스도 따라 나갔다. 남자는 엉거주춤 나오면서 교육이 덜 된 침팬지처럼 모든 것을 낯설어했다.

그런 남자에게 화이가 갑자기 달려와 들러붙었다. 원피스만 보고 별해인 줄 안 것이다. 화들짝 놀란 키스가 화이를 데려가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남자가 화이를 들어 안았다.

화이는 낯선 남자에게 안겼음에도 낯을 가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키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입맛부터 시작해서 까다롭지 않은 것이 없는 화이는 낯선 사람에게 안기면 울음부터 터트렸었기 때문이다.

별해도 그것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웬일로 울지도 않네. 무겁죠? 이리 주세요."

남자가 그 말에 화이를 넘기려는데, 화이가 두 손으로 남자의 옷을 잡고 놓지 않았다. 안 부리던 고집에 별해가 난처해하자 남자는 괜찮다며 능숙하게 화이를 다시 안았다.

“저도 아이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이요?"

“이제 막 돌이 됐겠군요."

화이를 안은 채 그는 자신의 아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키스는 저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현도'를 말하며 짓던 것이었다.

그녀가 말한 정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남자와 별해의 관계에 미묘하지만 확실한 변화가 생겼다.

남자의 이름은 강륜이었다. 그는 살뜰히 화이를 보살필 뿐만 아니라, 그간 별해가 손보지 못한 집안 곳곳을 수리하거나 보수했다.

키스에게도 호감을 보였지만, 그는 냉랭한 키스에게 억지로 관계 개선을 위해 다가가려 하지 않고 기다렸다.

만약 그 상태로 몇 년을 함께 했다면, 키스가 그에게 마음을 열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곳을 떠나겠다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현도를 그곳에 계속 내버려 둘 수 없어요."

“양육권을 돌려받으려면 지저분하고 긴 싸움이 될 거예요. 거기다 승산이 거의 없다시피 하죠. 당신은 이미 정신 병원 입원 이력까지 갖고 있으니까요."

“끝까지. 끝까지 갈 겁니다."

“…….”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별해는 강륜을 바라보다 무언가 결심하듯 말했다.

"좋아요. 끝까지 가 보죠."

"네?"

그녀가 개구쟁이 아이처럼 웃었다.





○11


별해가 나서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던 강료의 양육권 문제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분쟁에서 유리할 만한 근거 자료들을 살펴보다 별해가 입을 열었다.

"반년 정도의 정신과 이력이 있네요?"

“수면제와 항불안제 정도만……."

“얼마나?”

“강제 입원 3일 전에 2주 치 처방받았습니다.”

“2주요? 보통 1달씩 처방해 주지 않나요?"

“증상이 개선돼서 약을 바꿨습니다."

그 말을 듣자, 별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좋네요. 일단 전문의 소견서부터 확보하도록 하죠. 하지만 이쪽에서 유리한 입장을 선점하려면, 우리도 그들의 약점이 필요해요. 아는 것 없나요?"

그 말을 들은 강륜은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침묵이 길어지는 것 같더니, 강륜이 마침내 뭔가를 떠올렸다.

“마약…….”

“지금 마약이라고 했어요?"

"네. 미성년자일 때, 강준이 환각 파티를 연 적이 있습니다. 다만, 당시에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아 어떠한 처벌도 없었습니다. 그 기록조차 없죠.”

확보할 수 있는 증거가 전무하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성인이 된 강준은 더욱 치밀해져서, 강륜은 그가 다시 마약에 손을 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별해의 반응은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강륜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럼 제법 꼬리가 길어졌겠네요."

“네?”

"가서 밟아 버리죠.”

별해는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준이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았으니, 자의로 마약을 끊었을 리 없었다. 그가 마약을 소지하고 있거나 마약 정밀 검사에서 양성 판정만 받는다면, 양육권 문제뿐 아니라 판 자체를 뒤집어 버릴 수 있었다.


* * *


「키스, 함께 가자.」


한국행이 결정되면서 그녀가 키스에게 같이 갈 것을 권했다. 이태리를 떠나 한국에서 삶을 새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키스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몇 번을 거절해야 알아들어?」

「키스 네가 적응할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할게.」


솔깃하고 달콤한 제안이었지만, 키스는 고개를 저었다.


「키스, 그러지 말고 긍정적으로 한 번만 생각해 줄래?」


키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독설이라도 퍼부을 듯한 안색이었지만, 여전히 입 밖으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던 키스는 날카로워진 억양으로 말했다.


「싫어. 가려면 너희끼리 가.」


연이은 단호한 거절을 듣고 이번에 반응을 보인 것은 곁에서 듣고 있던 강륜이었다. 그는 서툰 이태리어로 말했다.


「키스, 작고 귀여운 너를 이곳에 혼자 둘 수 없어.」

「뭐?」


키스가 황당해서 되묻자, 그가 자신의 서툰 이태리어를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강륜이 재차 또박또박 말했다.


「작고 귀여운 너를…….」

「뭔 헛소리야!」


키스가 질겁하자, 강륜은 두 눈을 끔뻑이며 순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헛소리라니, 나는 사실만 말했어. 그러니 너는 우리와 함께 가야 해.」


강륜은 기필코 키스를 한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결의에 찬 눈빛이었다. 그를 본 키스는 별해와 마주할 때보다 더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끔찍해서 못 들어 주겠네.」


키스가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그런 그를 부드러운 손길로 붙잡은 이가 있었다. 별해였다.

키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별해는 키스의 두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키스, 가족은 함께 가는 거야.」

「내가 왜 네 가족이야. 난 그딴 거 필요 없어.」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 그러니 내 곁에 있어 주지 않겠니?」


그 말까지 듣고, 키스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가슴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난생처음 느끼는 그 감정에 키스는 당황하고 말았다.

키스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자신이 두려웠다. 뭐든지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싫…….」


걸음을 뒤로 내디디려는 그때, 무언가가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움찔거리던 키스가 턱을 내려바라보니, 밑에서 화이가 잡아당기고 있었다.


「키쮸.」


부정확한 발음이었지만, 화이가 제 이름을 불렀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화이는 키스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만 있자, 화이가 발뒤꿈치까지 들어 무언가를 재촉했다. 키스는 알고 있었다. 화이의 이런 동작은 자신을 안아 달라는 뜻이었다.


「키쮸!」


말을 할 수 있는 나이는 한참이 지났음에도 화이는 늘 이렇게 행동이 말보다 앞섰다.

키스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화이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콧속으로 들어오는 아기 특유의 냄새에 부정적이기만 했던 모든 사고 회로가 멈췄다.

'좋은 냄새…….’

화이에겐 달고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모든 긴장을 놓게 했다.


「꺄하!」


화이가 안겨서 기분이 좋은 듯 키스의 품 안에서 꺄르륵 웃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한층 부드러운 얼굴이 된 키스에게 화이는 뺨을 맞대며 비비적거렸다. 놀라울 정도로 보들보들했다.

졸음이 밀려왔던 것인지 화이가 고개를 이리저리 옮기며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 화이의 등을 쓸어 주자 이내 아이는 키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아이였지만, 그 외에는 걱정이 될 정도로 순했기에 금방 재우는 게 가능했다. 순식간에 잠에 빠진 화이에게 귀를 기울이면 고롱고롱, 아주 귀여운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키스는 잠든 화이를 요람 위에 눕히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보살피는 것에 어느새 익숙해진 키스를 별해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뒤늦게 그녀의 눈길을 알아챈 키스가 풀어진 표정을 다시 굳혔다.

하지만 이미 그들 사이를 가로막던 벽이 또 하나 무너졌다. 별해와 함께 강륜마저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갈 거지?', '빨리 같이 갈 거라고 말해!' 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키스는 품 안에 잠든 화이와 두 눈을 빛내고 있는 무해한 어른들에게 백기를 들었다.


「엄마라고 안 해.」


그가 마지막 자존심을 챙기며 수락하자, 별해는 뛸 듯이 기뻐하며 키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소란에 화이가 깰까 봐 키스는 그녀를 피했다. 그런 그의 무방비한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낯선 느낌에 놀라기도 전에 키스의 바로 뒤에서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아빠는?」


그 말을 듣자마자, 키스는 순식간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바로 불쾌감을 드러내고 그의 손을 팍, 쳐 냈다.


「싫어!」

「엇」


매몰찬 거절에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강륜이었지만, 그에게 별해가 무언가를 속닥이자 그는 나사가 하나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 * *


이태리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딱 보름이 걸렸다.

평일이었지만, 공항은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별해가 화장실에 간 사이, 강륜이 화이를 안고서 키스의 옆에 앉았다.

강륜이 갑자기 자신의 휴대폰을 보여 줬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이제 막 태어난 듯한 아주 귀여운 신생아가 찍혀 있었다. 키스는 단번에 그 아이가 현도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 어쩌라고?」


다만, 강륜이 어째서 난데없이 현도의 사진을 보여 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강륜은 조금 들뜬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이름은 현도, 강현도. 내 아들이란다.」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아.」

「그래? 귀엽지?」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붙어 있는 것도 신기한데, 이목구비가 이만큼이나 선명한 신생아는 화이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확실히 귀엽긴 하지만, 화이만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강륜을 많이 닮은 듯해서 기분이 묘했다.

편했던 의자가 불편해지려 했다. 키스가 엉덩이를 조금 옆으로 옮기자, 슬그머니 강륜이 다시 옆으로 붙으며, 어깨로 건들기까지 했다.


「떨어……!」


화를 내려던 키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강륜의 품에 안긴 화이가 액정 속 현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액정을 단풍잎 같은 손가락으로 치며 화이가 말했다.

"혀또?"

"응, 맞아. 이 아가가 현도야. 화이 동생이지."

"돈생?"

“화이는 형이니까 현도는 화이 동생.”

“화이 돈생!”

키스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어로 열심히 설명하던 강륜이 액정 속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화이는 그런 액정 속 현도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연신 혀 짧은 소리로 동생이라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키스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어쩐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도에게 화이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키스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챈 강륜이 화이에게 물었다.

“화이는 키스한테 뭐라고?"

"화이 돈생!”

“하하. 또?"

"뚀?"

화이가 고개를 홱, 돌려 키스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키스에게 답을 알려 달라는 듯 두 눈을 빛내고 있는데, 한국어를 배울 의지가 없었던 키스는 그 둘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키스를 대신해 강륜이 대답해 줬다.

“화이는 키스한테 형아라고 하면 돼."

"횽아?"

“잘하네, 이제 키스한테 말해 줘야지."

화이가 고개를 들더니 키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키스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키스를 붙잡은 화이가 말했다.

“키스 횽아.”

키스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뿐이었다.


「뭐?」


키스가 이해하지 못하자 화이는 답답했는지 키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에게 액정 속 현도를 보여 주고는, 화면과 키스를 번갈아 가며 쳤다.

“혀또 돈생. 키스 횽아!"


「대체 뭐라는 거야…….」


키스가 알아듣지 못하고 있자, 그의 등 뒤에서 별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키스보고 형이라고 했어. 한국어로 '형'이나 '형아' 라고 하거든.」





○12


키스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애정을 받은 것이 처음이었다. 당혹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화이를 바라보았다.

“횽아?"

키스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화이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졌다. 보들보들한 그 손길에 그제야 키스의 입꼬리가 깊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화이가 그것을 보고 덩달아 웃으면서 그 둘을 지켜보는 별해와 강륜 또한 온기가 퍼지듯 미소 지었다.

키스는 가슴 한편에 성에가 낀 것처럼 시려 왔던 곳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는 이 기분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불행은 이르게 다가와 속삭인다. 네게는 행복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키스는 강륜의 등 뒤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무리를 알아차렸다. 개중 몇 명은 얼굴이 익숙한 자들이었다. 모두 피에로의 조직원이다.

별해와 강륜은 마피아가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가 좀 더 근접해 오지 않는 이상은 비행기에 탑승할 때까지도 모를 것이다.

별해와 강륜이 둔해서가 아니다. 저들이 미행과 납치에 숙련된 자들이었고, 키스는 유독 예민하게 기척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피에로가 이렇게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잠잠했지만, 꾸준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고 최근에는 피에로가 강륜의 앞에 나타나기도 했었으니까.

당시의 일은 키스도 말로만 들은 것이라 정확하게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피에로가 별해의 결에 강륜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거슬리고 초조해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공항에 오기 전, 한 가지 사인을 정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바로 알릴 수 있는 간단한 신호였다.


「페인트공이 왔네.」


키스가 입을 열었다. 페인트공은 살인 청부업자를 뜻하는 은어로 마피아들 사이에서 종종 사용되던 것이었다.

사인을 눈치챈 별해와 강륜은 잠깐 얼굴이 굳었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몇 시니?」


별해가 시간을 통해 그들의 위치를 물었다. 키스가 답했다.


「한 시, 세 시, 열한 시.」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화장실부터 다녀오자.」


작전은 간단했다. 유동 인구가 다양하고 많은 공항의 특성과 사람은 다른 인종의 얼굴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화이를 안은 별해가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륜과 키스가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그 둘은 칸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강륜은 수염을 붙였고 회색빛이 도는 가발을 눌러썼다. 그러고는 파란색 렌즈를 꼈으며 그 위에는 안경까지 걸쳤다. 누가 봐도 50대는 훌쩍 넘어 보이는 중년 신사의 모습이었다.

키스는 입고 있던 청 재킷을 버리고 옅은 갈색 코트에 검은 바지로 갈아입었다. 강륜은 그런 키스에게 비니를 씌우면서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곱슬머리가 감쪽같이 가려지면서 이목구비가 전보다 훨씬 잘 드러났다.


「누구 아들인지, 잘생겼네.」


강륜이 실없이 웃으며 말하자 키스는 인상을 쓰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내놔.」


마스크를 달라는 소리였다. 강륜은 들고 있던 마스크를 키스에게 건네는 대신, 직접 씌워 주었다.

키스는 자신을 챙겨 주려는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화장실 칸은 누군가의 손을 피하기엔 너무도 비좁았다.


「어디로 가는지 잊지 않았지?」


강륜은 화장실 칸에서 나오기 전, 다시 한번 물었다. 혹여나 키스가 방향을 잊었으면 어떻게든 다시 알려 주거나 함께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키스는 강륜의 물음에 흘깃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처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움직여야 할 루트를 별해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키스의 대답을 듣고도 강륜은 안심이 되지 않는지 칸 밖으로 나가길 망설였다. 더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조직원이 화장실 안까지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키스가 강륜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갈게.」


강륜이 그 말에 놀라 붙잡기 전에 키스는 화장실 칸에서 나오려다 멈췄다. 그의 예상대로 이미 화장실 안까지 조직원이 들어와 주변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낯이 익은 조직원이었다. 그는 키스의 얼굴을 알아볼 가능성이 있었다. 조금만 부자연스럽게 행동해도 바로 들킬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닫혀 있던 화장실 문 밖으로 우르르 아이들이 나온 것이다. 키스와 연령대가 비슷한 그들은 모두 동양인이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은 주변을 소란스럽게 하면서 조직원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았다.

키스는 그 틈에 화장실 칸에서 나와 아이들과 섞여 조직원의 옆을 지나쳤다. 그 조직원은 아이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질려하는 기색이었다.

덕분에 들키지 않고 나올 수 있던 키스를 무리에 있던 아이 중 한 명이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런 위화감 없이 섞인 그를 그 아이가 알아차린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아이는 키스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다른 건 비니를 쓴 키스와는 달리, 그 아이는 앞에 챙이 달린 모자를 썼다는 점이었다.

아이를 바라보던 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키스는 마스크를 내리고 아이가 쓴 챙이 있는 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키스의 시선에 아이는 더 넋을 놓고 있었다.


「너 모자 멋있다.


키스는 아무렇지 않게 일본어를 사용했다. 일본인 아이는 갑자기 들리는 일본어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는 자신의 모자와 그 아이의 모자를 번갈아 두들기며 말했다.


「나랑 바꿀래?」


아이는 그 말에 챙 달린 모자를 벗어서 내밀었다. 키스가 그 모자를 받자마자 비니를 벗고는 받은 모자를 썼고 대신, 그가 쓰고 있던 비니를 아이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고마워.」


키스가 웃자, 아이는 볼이 빨갛게 변하더니, 그가 씌워 준 비니를 만지작거렸다.

키스가 뒷걸음질로 물러나 다른 인파에 섞이자 순식간에 눈앞에서 키스를 놓쳐 버린 아이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런 아이에게 한 남성이 성큼 다가와 손을 붙잡고 끌었다.


「유키! 아빠를 잘 따라오라고 했잖아! 응? 네 모자는 어디에 두고 그걸 쓰고 있어?」


키스의 비니를 쓴 아이는 그렇게 보호자로 보이는 남성이 데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밖으로 중년의 신사가 나왔다. 강륜이었다. 그는 주변을 조금 훑어보더니, 키스의 비니를 쓴 아이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뒤이어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파악한 조직원이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이어폰에 손을 대고 주변을 서둘러 살폈지만, 찾으려던 대상 중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당했어! 강륜과 카키스토리코스가 보이지 않아! 그쪽은?」


이어폰 너머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조직원의 표정만 봐도 어떤 대화가 오가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젠장, 출구부터 막아!」


당했다는 얼굴로 사색이 된 조직원이 한국행 출국장 쪽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키스는 천천히 일본행 출국장 쪽으로 향했다.

일본행 출국장 쪽은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맨 앞줄에 남성 복장을 한 별해와 어린이용 연두색 치파오를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화이가 보였다.

그들의 변장은 손색이 없었지만, 키스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키스와 모자를 교환한 아이와 그 가족을 주시하는 중년 신사 복장을 한 강륜이 보였다. 그는 앞에 있는 아이가 같은 비니를 쓰고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음에도 석연치 않은 것인지 연신 기웃대며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티가 많이 났다. 보다 못한 키스가 강륜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머리 위로 쿵, 무언가 내려앉은 기분과 동시에 맥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공항 안의 공기가 일제히 뒤바뀌면서 냉기가 몸 전체에 퍼지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키스뿐만 아니라, 공항에 있던 모든 이들이 짓눌린 공기의 답답함을 느끼고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무리 지어 들어오는 이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피에로 모로네.

그의 등장만으로 수많은 인파가 길을 열며 구석으로 밀려났다. 피에로는 눈동자를 굴리며 누군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별해를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와 화이, 강륜까지 모두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피에로가 그들이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기 전에 키스는 움직였다.

곧바로 한국행 줄에 서면서 일부러 티 나게 서성이다 피에로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자, 키스는 그대로 줄에서 이탈해 달렸다.

최선을 다해 다람쥐처럼 이리저리 피하며 도망다녔지만, 결국 키스는 뒷덜미가 붙잡히고 말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자비하게 잡아챈 피에로는 키스를 잡자마자 한국행 비행기의 이륙을 막도록 지시했다.


「멍청이.」


그런 피에로를 키스는 비웃었다. 피에로는 그 말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별해와 화이, 그리고 강륜을 태운 일본행 비행기가 상공에 있었다.

키스는 떠나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오로지 하나만을 바랐다.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화이에게 바라는 단 하나뿐인 소망이었다.

'한 번만 더 날 선택해 줘.'


* * *


그날 뒤 별해와 강륜은 키스를 찾기 위해 수시로 이태리를 오갔다. 심지어 혼인을 하고 신혼 여행에 와서도 키스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뒤에서 지켜보던 키스는 끝내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이 움직인다면 피에로가 눈치를 챌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이와의 해후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직원 중 한 명인 앨버커가 한국으로 도주했고, 키스도 그를 쫓아 한국에 들어왔다. 그 순간부터 키스의 심장은 비정상적인 정도로 뛰고 있었다.

어쩌면 이 그리움이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보스, 앨버커의 위치입니다.」


그의 조직원이 등 뒤에서 앨버커의 동향을 보고했다.


* * *


「천만 달러나 받았으니, 예쁘게 성대만 잘라 줄게.」


앨버커의 손에는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들려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 소년이 화이라는 것을 키스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13


놈은 그대로 화이의 목을 갈라 버리려는 듯 칼을 댔다.

키스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 인기척을 들은 앨버커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키스는 그의 머리를 붙잡고서 단숨에 벽을 향해 박았다.

쿵.

한 번.

그런 키스를 말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로버트가 말했다.


「케빈 앨버커. 평점 최하점입니다.」


쿵.

두 번.

쿵.

총 세 번, 머리를 벽에 박고 나서야 앨버커를 놓아 주었다. 벽면에는 붉은 피와 살점이 묻었고 앨버커는 얼굴이 으스러진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제대로 서거나 앉을 수도 없이 바닥에 누워 바들바들 몸만 떨었다.

키스는 장갑을 갈아 끼운 뒤에 무릎을 굽혀 화이를 바라보았다.

'키가 조금 자랐나?'

어릴 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에 묘한 감동까지 일어나려 했다. 화이는 뚝뚝 눈물을 흘렸다. 많이 놀란 것 같아 그 눈물을 막 닦아 주려는데, 화이가 입을 열었다.

"개씨발, 깜빡이야.”

키스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움에 사무칠까 두려워 일부러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쉬워하는 사이, 화이가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해 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키스가 로버트에게 물었다.


「앨버커가 목구멍에 칼도 넣었나?」

「넣긴 했습니다. 칼이 아니라, 손가락이었지만.」


키스는 그대로 일어나 앨버커에게 다가가 놈이 쥐고 있던 칼과 품 안에 있던 총을 꺼내 가져왔다. 원래는 혀를 잘라 가려고 했는데, 화이가 충격을 받을까 봐 방법을 달리하기로 한 것이었다.


「골라.」


그는 화이에게 웃으며 총과 칼 중에 어떤 것으로 앨버커를 죽일지 고르라고 말했다. 무엇을 선택하는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화이가 고른 것은 키스의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이었다. 화이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를 고른 것이었다.

키스는 순간, 자신이 구원받은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는 감격을 못 이기고 그대로 화이를 끌어안았다.


「날 골라서 기분이 좋아?」


화이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해석한 키스는 한국어를 익히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화이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앨버커의 만행으로 목이 상한 화이는 쇳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것에 분노한 키스는 그대로 발을 들어 앨버커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 한 번의 발길질로 앨버커의 머리가 터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별해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아직 그녀와 만나는 것은 이르다. 피에로와 견주기에는 자신의 조직은 힘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화이를 놔 줘야 했지만, 품 안에 있는 그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보스.」


키스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안 로버트가 재촉했다.


「그냥 납치해 버릴까?」


그 말과 동시에 까무룩 정신을 잃은 화이를 품 안에 둔 키스를 향해 로버트가 재차 다그쳤다.


「보스, 이제 가셔야 합니다.」


키스는 화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겉옷을 탁자 위에 놓은 뒤 그곳에 화이를 눕혔다. 화이의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리면서 작은 손으로 꽉 쥐고 있는 자신의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그 손을 들어 입을 맞추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다시 만난다면, 그 손을 놓지 않겠다는 맹세를 뒤로하고 이내 밖으로 나갔다.


* * *


모든 기억들이 눈앞에 있는 불길처럼 선명하게 번져 갔다. 키스는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붉은 그것이 눈앞을 가득 채우니 마치 화이의 눈동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두려움조차 없었고 오히려 자신을 갉아 먹으려는 그것이 기꺼웠다.


「행복하기를.」


마지막으로 화이를 생각하며 키스는 눈을 감았다. 불이 붙은 잔해가 떨어지며 쿵쿵,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키스는 눈을 떴다. 뜨거운 눈물이 뚝뚝, 키스의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쾅.

폭발음과 동시에 막혔던 문이 열리면서 로버트를 포함한 자신의 조직원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보스!」


그들이 키스를 향해 소화기를 뿌리며 무너지는 잔해를 헤치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제노베제가 들어왔다.

그는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타오르던 불길 사이에서 피에로를 발견했다. 놈이 피에로의 뒷덜미를 잡아 올리자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것만 봐서는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피에로를 손에 쥔 제노베제는 키스에게 말했다.


「이건 내 거.」


입맛을 다시던 놈은 그렇게 피에로만 데리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조직원들의 도움으로 키스 역시 불이 더 번지기 전에 저택에서 나올 수 있었다. 키스가 나오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불길은 저택 전체를 뒤덮었다.

불꽃은 마치 이곳에 있던 모든 과거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 광활하게 타올랐다.




3. 우리 애들은 안 물어요.


“한국대?"

"응. 이번에 입학해."

준비가 미흡한 것치고는 안정권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원서는 대체 언제 넣은 거야? 나한테 그런 소리 없었잖아.”

현도가 당황한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만약 대학에 들어간다고 했으면 현도는 지금 경영하고 있는 회사도 때려치우고 나와 함께 대학을 가겠다고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말을 안 한 것이었는데, 녀석은 무슨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울먹거리고 있었다.

“수능 본다고 내가 말했잖아."

“대학에 간다는 말은 안 했잖아!"

“수능 본다는 게 대학 간다는 거지.”

“그럼 나……!”

현도가 개소리를 하려고 시동을 걸어서 그 말을 가로막고 내가 먼저 말했다.

“나 따라 대학 들어온다고 하면 너 진짜 혼난다.”

단호한 저지에 현도는 축축하게 젖은 눈가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약해지려고 해서 애써 외면했다.

내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자, 녀석이 갑자기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현도도 갈래.”

“안 돼.”

“갈래. 현도도 갈래."

“너 자꾸 그러면, 형아 군대 가는 수 있어."

지금은 면제됐지만, 자원하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 확, 해병대로 가 버릴까. 해병대 커리어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 찰나, 현도 녀석이 내 말을 듣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혀엉…….”

“넌 회사 운영이나 잘해. 망해서 깡통 차게 하면 현도 더 엿으로 바꿔 버릴 줄 알아."

내 허리를 끌어안은 현도는 더는 나를 막지 못하고 그저 낑낑대고만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달래듯 살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경영학과 나와서 네 회사 들어갈 건데, 형은 낙하산 소리 듣고 싶지 않다.”

현도 녀석이 이끄는 광명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곳으로, 그 기업이 망하면 한국 경제가 위태로울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강했다.

안 그래도 현도 녀석이 나이가 어려 다른 주주들이 만만하게 볼까 봐 걱정되는데, 나라도 녀석을 도우려면 경영 지식을 쌓아야 했고, 주주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에서 최고라 손꼽히는 한국대 수준의 학력이 꼭 필요했다.

조기 졸업을 생각하고 있으니, 그동안 현도가 잘 버텨 주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내 배에 얼굴을 묻고 있는 녀석의 두 뺨을 잡아 들어 올렸다.

"조금만 기다려. 졸업 빨리해서 도와줄게.”

잘생긴 얼굴을 엄지로 훑으며 사근사근 달래자 현도 녀석은 금세 풀어져 나를 다시 와락 끌어안았다.

“졸업만 하면, 이제 계속 나랑 있어."

“지금도 너랑 있잖아.”

"아니, 계속. 계속 내 옆에 있어야 해."

"또, 또, 고집 피운다."

“그리고 다른 거 말고 공부만 해."

“학생이 공부 말고 또 뭐 하는데?"

현도는 뭐라 말을 할 것처럼 굴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슬슬 아픈 것 같아서 좀 손을 풀어 달라 말하려는데, 녀석이 푹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진짜 공부만 해야 해. 다른 거 보지 말고.”

“아니, 그러니까 뭘.”

“…….”

녀석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 * *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 극성인 현도를 뒤로하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마침내 앉아 본 강의실 의자에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진짜 기분 묘하네.’

시한부만 아니었어도 진작 앉아 봤을 의자라 그런 것일까. 가슴이 계속 간질간질한 것이 조금 더 이 흥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 기분에 도취되는 것도 잠시, 나는 뭔가 이상한 시선을 느끼고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휙, 휙, 휙.

다들 저마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 날 보는 것 같았는데.'

쫓겼던 과거 탓일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꾸 느껴졌지만, 막상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아무도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계속 이런 식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으면 앞으로 대학 생활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시선이 느껴져도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랬고, 그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조차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구성은 간단했다. 학사 일정과 규정, 그리고 장학금 혜택과 전반적인 유학 지원까지 설명하는 게 전부였다.

“신입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필참 바랍니다!"

경영학과 선배로 보이는 남성이 칠판에 크게 뭔가를 적었다.


C BAR. PM 7:00 신입생 예외 없이 전원 참석.


'뭔 놈의 가게 이름이…….'

웃어야 할지 황당해해야 할지 모를 술집에 꼭 참석하라고 한 그는 무게감을 잡고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에누리 없습니다. 한 명이라도 불참하면, 불이익은 전체가 받습니다."

큰일 났다. 대학 첫날부터 찾아온 위기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내 당황의 이유 중 하나는 늦게 들어가면 적어도 3일은 삐져 있을 현도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취한다는 것이었다.

'일 났네.'




○14


입학 첫날부터 진행되는 신입생 소집에 당황한 것은 나뿐이었나 보다. 대부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했다.

내키지 않아 거부하고 싶었지만, 한 명이라도 불참하면 연대 책임을 묻는다는 게 문제였다. 집단은 집단을 이용한 차별 취급에 익숙했다.

참석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최대한 빨리, 그리고 조용히 졸업하려면 첫날부터 눈에 띄는 건 좋지 않았다.

'술은 안 마시면 그만이지만…….'

목구멍에 살구씨가 걸린 듯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건 역시 현도 때문이었다.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짧은 숨으로 내뱉었다.

'애를 어떻게 설득하지?'

학과 모임으로 늦는다고 하면, 분명 데리러 오겠다고 할 것이다.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젊고 수려한 외모의 대표가 말이다.

녀석은 주변을 잘 안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내 앞에서는 갈 수 있는 길이 직진밖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삼엄한 분위기의 회의장에서 주주들을 앞에 둔 현도는, 자신을 본 순간, 풀어진 표정을 하고 다짜고짜 끌어안았다. 그런 우리를 보고 경악하던 주주들의 표정이 수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 처음으로 낯부끄러움을 느꼈었다.

그날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현도 녀석이 절대 마중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건 앞으로의 평온한 대학 생활이 걸린 문제였다.

조바심을 숨기려 팔짱을 끼고서 어떻게 할지 좀 더 고민해 봤다.

거짓말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들키면 후폭풍이 더 귀찮았으니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몇 번은 더 이런 일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흠.'

좋은 핑계가 생각나지 않는다. 뭘 해도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현도 녀석이 서운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민이 길어지자 팔짱을 풀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괴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찰칵.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무리가 일제히 허둥지둥 움직였다. 뭔가를 숨기려는 듯 손을 내렸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휴대폰 카메라로 몰래 나를 찍은 것이다. 그 사실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오리엔테이션은 일찍이 끝났지만, 아무도 강의실에 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뭔가 더 남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다들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앉아 있을 이유가 없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내게 다수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들을 무시하고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던 학생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몰래 사진을 찍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그의 책상을 두 번 정도 두들기며 경고했다.

“지워.”

내 말에 놀랐는지 휴대폰을 꽉 쥐고 있던 여학생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현도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데,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강의실에서 나왔다.

대학생이나 되어서 몰래카메라라니. 대체 왜 찍는 것인지 그 속을 모르겠다.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문이 닫혔음에도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내가 있을 때는 조용하고 자리를 비우면 소란스러워지는 이 패턴, 뭔가 익숙하다.

'설마.'

몰래카메라도 모자라서 따돌림인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팀 과제가 시작되면 얘기가 달라지기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왜 저러는지는 이따가 과 모임에 가 보면 알겠지.'

오히려 단순히 신입생치고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날 어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학과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렸다. 현도였다.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현도야.”

- 화이 형, 데리러 갈게.

“너 회사는 어쩌고.”

- 곧 점심시간이잖아. 같이 먹자 형.


가만히 있어도 구경거리가 되는 녀석이 온다는 말에 질겁하고 말았다.


“아냐, 뭘 여기까지 와. 나 끝나서 바로 집으로 갈 거야."

- 나 학교 앞인데?

"뭐?"


벌써 교문 앞이라는 말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낯익은 외제 차 한 대가 보였다.


- 형 보인다. 지금 나갈…….


현도가 차 문을 열고 나오려고 하자 나는 그곳을 향해 달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나오지 마! 내가 가! 형이 가!"

- 어?


거친 뜀박질 끝에 겨우 현도를 막을 수 있었다. 누가 볼세라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형?"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현도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녀석을 막기를 천만다행이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포마드 컷에 슈트까지 갖춰 입고 있으니, 전광판에 걸려 있는 모델보다 화려한 모습이었다.

'동네방네 구경거리 될 뻔했네.'

겨우 한숨을 돌리는데, 갑자기 현도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매만졌다. 손가락으로 두들기듯 만지던 손이 목덜미까지 오더니, 내 옷깃을 잡아 단단히 여몄다.

“이렇게 입고 나왔어?"

"어?"

“속살이 다 비치잖아."

무지 티에 남방을 걸쳤는데, 무슨 속살이 보인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도는 내 남방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미치겠다. 진짜.”

녀석이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나도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야, 이거 안 비쳐. 잘 봐.”

“앞으론 모자도 써. 안경도 끼자."

“뭔 소리야 또.”

“마스크도 해.”

“아예 미라처럼 붕대로 감아 버리라고 하지?"

“그럴래?"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두 눈을 빛내며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고서 안전벨트를 채우며 말했다.

“뭘 또 그래야. 빨리 출발하기나 해."

현도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핸들을 꺾었다. 천천히 차가 움직였다.

“형, 먹고 싶은 거 있어?"

“식당은 별로야. 집으로 가.”

“현도 먹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현도와 달리, 나는 아직도 조금 민망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가기나 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와 뜨거워지려는 얼굴을 숨기려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채로 말했다. 그러자 현도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집에 도착했다. 과 모임에 나가야 한다는 말을 언제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현도가 내 턱을 잡고서 입을 맞췄다.

“자, 잠까…… 흡!"

집어삼키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상태에서 뭐가 급한 것인지 녀석의 무릎이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가운데를 짓누르며 자극하기 시작한다.

"흐흣!"

반사적으로 몸을 바르르 떨며 현도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튼 현도가 다시 한번 입술을 머금더니, 혀끝으로 내 잇몸을 건드리며 입 안으로 들어왔다.

뒤엉키는 혀와 넘기지 못한 타액이 턱 끝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질척이는 소리가 야릇하게 들릴 즈음, 현도의 손이 내 웃옷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감쌌다.

예민해진 몸은 손만 닿았을 뿐인데도 힘껏 달아올랐다.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입술이 떨어지자 내 고개가 자연스럽게 숙여졌다. 바르르 떨며 현도를 붙잡고 버티는데, 목덜미에 축축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그러자 정수리까지 찌릿해지면서 몸을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으읏.”

"형."

현도가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로 입을 열자, 그 숨결 때문에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화이 형, 현도 먹어야지."

더 못 견딜 것 같아서 목을 손으로 가리는데,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현도가 내 몸을 들어 올린 것이다. 그러더니 신발을 벗겼다.

설마 여기서 하자는 건가 싶었다. 방도 아니고 현관에서 하고 싶지는 않아서 발버둥을 쳤다. 하다못해 안으로 들어가서 하라고 말하려는데, 거실로 향한 현도가 나를 소파에 살포시 앉혔다.

내가 두 손을 모아 쥐고서 두 눈을 깜빡이고만 있으니, 현도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내 발밑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 주려고 예쁘게 포장했는데, 안 풀 거야?"

평소와 조금 다른 모습이라고는 생각했는데, 녀석이 작정하고 꾸미고 나왔다고 솔직히 말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런 현도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조각한 것 같기도 하다.

손가락을 눈가에 대자 눈을 감은 녀석이 고개를 움직여 내 손바닥에 비비적거렸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어느새 두 손으로 붙잡아 머리를 헝클어 놓고 있었다.

예쁘다. 이렇게 예쁜 것이 내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이 난다.

현도가 눈을 떴다. 나를 보는 황금빛의 눈이 일렁이는 것을 마주하고 있으니 녀석이 넥타이를 한 손으로 풀고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녀석의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자 감춰졌던 상반신이 드러났다. 얼굴만큼이나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 같은 근육질 몸이었다.

어느새 나는 누워 있었고 현도는 나를 덮친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로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않을 때 나를 재촉하는 시선에 손을 들어 현도의 가슴에서 복근까지 쓸어내렸다.

부드럽고 단단한 근육이 손끝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아랫배까지 왔을 땐, 마치 돌덩이를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힘껏 부풀어 오른 중심부가 바지 위로 도드라져 터질 것만 같았다. 흥분한 녀석의 크기를 알기에 내가 조금 주저하자, 현도가 그런 내 팔목을 잡아 바지 버클에 가져다 댔다.

“하아, 형…….”

그 욕망에 들뜬 숨소리를 듣자 더는 망설이지 않고 버클을 열었다. 그리고 속옷을 잡아 내리자 힘껏 발기한 성기가 툭, 튀어나왔다. 정말 언제 봐도 말도 안 되는 크기다. 이걸 어떻게 가라앉히나 고민하다 두 손으로 붙잡았다.

"으읏.”

굵은 신음 소리에 고개를 들자, 열에 들뜬 현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5


녀석의 눈동자가 촉촉했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붉은 혀가 탐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현도처럼 혀를 내밀다가 다시 녀석의 성기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갑자기 저것을 핥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무의식중에 혀를 내밀어 귀두 끝에 대 보았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녀석이 갑자기 질겁하며 내 머리를 붙잡아 막았다.

“형, 안 돼!”

먹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안 된다는 소리를 하는 녀석의 손을 쳐냈다. 그러고는 성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흣! 자, 잠깐, 형!"

현도의 몸이 크게 꿈틀거리면서 전보다 더 크고 짙은 신음을 내뱉었다. 입 안에 가득 찬 성기가 목구멍을 찌를 때마다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내뱉지 않았다.

“으윽!"

목구멍 안까지 집어삼킨다는 느낌으로 기둥을 머금자 성기가 입 안에서 움찔거리는 것 같더니 이내 사정했다.

놀란 현도가 내 얼굴을 잡아 입 안에서 성기를 빼내고, 두 손바닥을 내 입 앞으로 내밀었다.

“뱉어, 뱉어요. 형!"

당황에 흐트러진 모습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런 현도를 흘깃거리던 나는 입 안에 있던 것을 꿀꺽, 삼켰다.

그 행동에 놀란 현도가 나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저러나 싶어 기웃거리며 표정을 살피는데, 현도가 빨갛게 타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진짜 어쩌려고 저러지……. 제정신 아니야."

고개까지 저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당황하는 것치고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방금 사정한 성기를 다시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노골적이고 욕망 어린 시선을 보내며 내 몸을 더듬으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입을 열었다.

“오래는 못해, 이따가 나가야 하니까.”

“……어?"

“7시에 과 모임 있거든, 신입생은 필참이고.”

“어디서?"

"C BAR."

“무슨 과 모임을 그런 곳에서 해?"

“그럼 어디서 해?"

“학생이 무슨 술집이야!"

“대학생이거든?"

예상했던 대로 현도 녀석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 거기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겁도 없이 간다고 그래!”

“있긴 뭐가 있어. 그냥 과 모임이라니까?"

“그럼 나도 데려가.”

“신입생도 아닌데, 네가 왜 와."

“형, 나 미치는 거 진짜 보고 싶어?"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던 녀석의 빳빳하게 서 있는 성기를 불시에 움켜쥐었다. 당황해하는 녀석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고서 말했다.

“발딱 세워 놓고 미쳐 봤자, 내 아래에서겠지."

“읏.”

기둥을 잡고서 쓸자 현도의 허리가 경련하기 시작했다. 달아오른 성기는 금방이라도 사정을 할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귀두 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견디지 못한 현도가 쿠퍼액을 울컥 토해 냈다.

나는 녀석이 더 이상 사정하지 못하도록 꽉 쥐었다. 그러자 현도가 괴로운 듯 허리를 비틀며 나를 보았다.

“형, 화이 형…….”

"금방 다녀올 거야. 1시간 정도만 자리 지키다 올게.”

"혀엉…….”

나는 입고 있던 바지를 조금 내린 뒤 현도의 쿠퍼액을 윤활제 삼아 아래를 풀었다. 스스로 푸는 것은 처음이라 서툴렀지만, 곧 손가락 세 개까지 넣어 풀 수 있었다.

"읏……. 하.”

충분히 풀었다 생각한 나는 손가락을 빼고 현도의 성기를 잡아 아래에 닿게 했다. 하지만 넣지 않고 깔짝거리기만 하자 현도 녀석이 안달이 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현도가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얌전히 기다릴 수 있지?"

"…….”

“강현도 대답.”

“네…….”

입이 조금 나오긴 했지만, 걱정한 만큼 기분이 상하진 않은 모양이다. 순한 녀석을 더 달래 줄 겸, 나는 다리를 좀 더 벌려 녀석을 받아들이기 쉽게 몸을 열었다.

“그럼 이제 들어와.”

대답을 잘해서 보상해 주자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굵고 단단한 것이 밀고 들어오자 안쪽 살이 짓눌리면서 입구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충분히 늘렸다고 생각했는데, 손가락 세 개로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윽, 으흣.”

배에 가득 찬 이물감은 목구멍 끝까지 닿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대체 이건 언제 익숙해지는 거야.'

아무리 해도 낯선 느낌이었다. 현도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기둥이 내벽을 긁을 때마다 내장도 함께 빨려 나가는 것 같았다. 배를 붙잡고서 겨우 참고 있는데, 푹푹 찔러 오던 그것이 단번에 가장 깊은 곳까지 치고 올라왔다.

“흐흣!”

발끝에서 정수리 끝까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찌릿함이 퍼졌다. 쫙 펴지는 발가락에 힘을 주자 허벅지에는 경련마저 일어났다. 그럼에도 아래를 질펀하게 파고들어 안쪽까지 들쑤시는 성기에 몸은 절정을 향해 달아올랐다.

"으읏, 아, 흑.”

더 견디지 못한 내가 빠져나가려 몸을 뒤틀자, 현도가 내 두 손을 붙잡았다. 그 상태로 빠르게 아래를 쳐올리는 탓에 성기가 뱃가죽을 들어 올리며 안에서 요동을 쳤다.

"아으, 아! 그, 그만.”

질끈 눈을 감고 그만하라고 했지만, 현도는 멈추지 않았다. 더 했다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는데, 안을 들쑤시던 성기가 곧바로 뿌리까지 푹 찔러 왔다.

“허억!”

허리가 튕기면서 눈앞이 아찔해진다. 앞을 만지지도 않았는데 삽입만으로 사정하고 말았다. 힘을 주고 있던 몸이 그대로 전율하더니, 이내 맥이 풀렸다.

“하아……."

두 손을 잡힌 채로 늘어진 나는 체력이 거의 방전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힘들어…….'

관계 중에 먼저 나가떨어지는 건 늘 나였다. 운동이라도 시작해야 하나 싶었지만, 일단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었다.

쑥, 안에 있던 성기가 빠져나간 게 느껴졌다. 웬일로 녀석이 빨리 끝냈다. 과 모임을 간다는 말에 기특하게도 자제를 한 것일까?

이 정도면 조금 쉬면 금방 회복될 것이다.

점심밥은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저 잠이나 좀 자고 싶었다. 눈을 감고 막 잠에 빠지려는데, 내 몸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마침 잠들려는 차에 뭔가 싶어서 눈을 조금 뜨자, 현도가 콘돔을 입으로 뜯더니 성기에 끼우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놀란 내가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현도의 아랫배를 밀어 내며 말했다.

"너 왜, 왜 또?"

“7시라며, 그 전에는 끝내 줄게요."

“잠깐, 잠!”

말릴 세도 없이 다시 두 손을 붙든 현도가 내 안에 들어왔다. 그렇게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사정없이 헤집어 놓았다.


* * *


잠깐 정신을 잃고 잠에서 깨어났을 땐 6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몸이 보송보송한 것으로 보아 기절했을 때 현도가 내 몸을 씻겨 둔 모양이다.

하지만 끊어질 것만 같은 허리 때문에 그것이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이 자식 일부러…….”

과 모임에 못 나가게 하려고 평소보다 더 격렬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 싫지는 않았지만, 괘씸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현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 간 것인지 아니면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잘됐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후들거리는 다리로 벽을 짚고서 옷을 갈아입었다. 아래에 거의 감각이 없다시피 했지만, 악으로 깡으로 밖으로 나갔다.

해가 져서 날이 선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끊어질 것만 같은 허리를 붙잡고 택시를 타고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택시 기사님이 몇 번이고 내게 괜찮냐고 물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늦었지만, C BAR 앞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현도에게서 걸려 온 것이었다.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전화한 것으로 보아, 회사에 간 것이 아니라, 잠시 외출했던 것이었나 보다.

계속 무시할 수 없어서 전화를 받았다.


- 형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들리는 녀석의 큰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귀에서 조금 떼어 냈다.


"왜"

- 어디야, 형! 설마 밖이야?

“어. 과 모임 간다고 했잖아."

- 대체 그 몸으로 무슨 과 모임이야!

“그러게, 누구 때문에 이런 몸이네.”

- 거기 가만히 있어. 바로 갈게.

"와도 안 가. 1시간 후에나 나올 테니까, 정 오고 싶으면 앞에서 기다려."

- 형


전화를 끊고 진동으로 돌려놨다.

현도에게 걸려 오는 전화로 불이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BAR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이름이 불쾌하다고 생각하며 들어왔는데, 어째서인지 내부가 낯익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테이블 배치였는데, 예전에 강현모에게 접근하려 들어갔던 게이 바와 비슷했다.

그래서일까. 키스와 다시 만났던 기억이 잠깐 스쳤다. 당시엔 늑대 가면을 써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테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녀석이 이곳에 나타날 리 없었다. 쓸데없는 상념들을 지우며 안으로 더 들어갔다.

또다.

또다시 느껴지는 화살처럼 꽂히는 시선들.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특별한 적의가 보이지 않았음에도 위장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 나빴다. 그 시선들을 모두 외면한 채 눈동자만 굴려 최대한 조용한 곳을 찾았다.

있다.

구석진 곳에 있는 테이블이 보였다. 기본 세팅은 되어 있었지만, 유독 저쪽만 조명이 어두웠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앉지 않아 빈자리였다.

더 고민하지 않고 그곳으로 가 앉았다. 이제 여기서 적당히 눈도장만 찍고 돌아가면 될 것 같다.


* * *


“진짜? 진짜로 형이에요? 완전 동안이세요!"

“원래는 연예인 준비하다 경영학과 왔다는 거 진짜예요?"

"화이 오빠, 이름 진짜 예뻐요! 여자 친구 있어요?"

내가 앉기 전까지는 분명 외딴섬 같던 테이블에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들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다른 곳에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유독 내 앞에 사람들이 몰렸다. 적당히 상대해 주다 보면 알아서 흩어질 줄 알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어나기만 했다.




○16


“빨리 와, 얘야. 내가 오전에 말한 신입생. 봐, 대박이지?"

등 뒤에서 들리는 방정맞은 목소리가 어쩐지 불쾌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네, 장난 아니네…….”

낯선 얼굴 두 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한 놈은 얼굴을 붉히며 주춤했고 다른 한 놈은 넋을 놓더니, 헛소리를 했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에 숨이 막히고 짜증이 나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헛소리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지금 1차 추첨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맞다!”

그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선배들이 허둥지둥 무대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이번엔 내 옆에 앉은 동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후배 안면을 익히자고 모인 건데, 후배님들이 여기 다 모여 있으면 안 되지."

"아……. 죄송합니다!"

동기들은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이겠구나 싶었는데, 모두 돌아간 테이블에는 나와 어느새 내 앞에 앉은 선배. 단둘 뿐이었다.

그가 내 앞에서 술을 따른 잔을 내밀며 말했다.

“난 3학년 서윤수, 후배님은 이름이?"

선배라고 해 봤자 나와 동갑이거나 나이가 더 많을 내게 그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다.

“유화이입니다.”

“이름 예쁘네. 화이."

싱긋 웃으며 말하는데, 묘하게 기분 나빴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떨떠름한 표정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울리는 것 같은데.”

"네?"

“휴대폰. 아까부터 계속 진동하고 있었는데, 몰랐어?"

탁자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잡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수차례 전화가 왔던 기록이 있었다. 모두 현도한테서 걸려 온 것이었다.

어째서 전화를 한 것인지 의아해하다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주변이 워낙 시끄럽고 정신없어서 모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액정에 뜬 현도라는 이름만 보고도 기분이 좋아졌다.

“누구야?"

“동생이요.”

"동생한테 무슨 그런 표정을 지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저의를 알 수 없어 인상을 쓰자, 그는 서둘러 말했다.

“많이 귀여운 동생인가 봐?"

현도가 귀엽긴 하지.

“네.”

“여동생?"

“남동생이요.”

“대체 얼마나 귀엽기에 그렇게 푹 빠진 얼굴이 돼? 나도 남동생 하나 있지만, 난 걔를 볼 때마다 쥐어박고 싶던데.”

“애가 워낙 순하고 마음이 여려서요."

“많이 어린가 보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귀엽긴 하겠다."

동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그가 처음보다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대화할 마음은 없었다. 현도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먼저 일어나 봐야 될 것 같습니다. 동생 혼자 두고 나와서요.”

“귀여운 동생이 기다린다니, 어쩔 수 없지. 한 잔만 하고 가.”

“제가 술은 좀…….”

“잔을 한 번도 안 비운 거 알면 나중에 쟤들한테 더 시달려. 저렇게 마시고 싶지는 않지?"

그가 손가락으로 양푼 안에 맥주와 소주를 섞은 것을 사람들에게 먹이고 있는 선배들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질겁하며 외면했다.

전에 술을 한 잔만 마셨음에도 취해 버리긴 했지만, 그때 마신 술은 맥주보다 훨씬 도수가 높은 술이었다.

보통 생맥주 도수는 4.5도.

나도 성인 남자인데, 한 잔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소주도 아니고 맥주인데.

'한 잔 정도는 괜찮을지도.'

나는 잔을 받았다. 그러자 선배가 먼저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것을 보고만 있던 나는 순식간에 빈 잔을 보고서야 내 잔을 들고 홀짝였다.

쓰고 떫은 화약 약품 냄새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어, 어? 경태 온다. 마셔. 계속 마시는 척해."

더 마시기 싫어서 입에서 떼고 싶었는데, 그가 갑자기 잔 밑을 손으로 눌러 떼지 못하게 했다. 그사이 술이 가득 든 양푼을 안은 남자가 지나가더니 술잔을 놓은 후배에게 달려갔다.
결국 잔에 있던 술을 모두 마셔 버렸다.

“경태 저거, 아주 작정을 했네. 그래도 저기서 다 비울 건가 보네, 여긴 다시 안 오겠다. 이제 안심…… 화이 후배님?”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고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입을 막고 겨우 참았다. 그제야 내 몸은 맥주 한 잔조차도 해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어 버렸다.


* * *


'달이 왜 두 개지?'

예뻐서 그런 걸까? 그럼 현도도 두 개가 됐겠다.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헉! 갑자기 그렇게 뛰쳐나가면 어떡해, 후배님!"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뜨거운 얼굴을 식혀 주는 것 같았다. 빨리 양쪽에 현도를 끼고 싶다. 그 생각에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잠깐, 또 어디 가!”

뭔가가 내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데, 시야가 찌그러져서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모르겠다. 눈을 다시 깜빡이고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거 마시고 취한 것도 아니……닌가? 설마, 진짜야? 거짓말. 맥주 한 잔이었는데?"

“……?"

“후배님, 이거 몇 개로 보여?"

그가 내 앞에서 뭔가를 휘적거리고 있었다.

“진짜네. 정말 취했어. 후배님, 정말 귀엽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기 갈까?"

녀석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HT…… 다음으론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현도가 있는 곳이 아니라서 고개를 저었고 다시 내 갈 길을 가려는데, 녀석은 나를 놓지 않았다.

'왜 이렇게 짜증 나게 하지.'

사람이 아니라 왕파리가 아닐까. 때려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들어 면적이 가장 넓어 보이는 곳을 쳤다.

찰싹하는 소리가 들렸다.

"윽.”

왕파리가 나를 놓은 순간 일이 꼬이기 전에 그대로 내달리려 했다.

“이게 진짜……!”

나를 붙잡으려는 왕파리의 손이 내게 막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으윽!"

누군가가 왕파리의 손을 붙잡아 막았다.

“갑자기 무슨……!”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거대한 덩어리가 보였다.

'저게 뭐지?'

덩어리가 어떻게 했는지, 뭔가를 보자마자 질겁한 왕파리가 알아서 도망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언뜻 이목구비가 보였다. 굉장히 선명했는데, 마치 현도처럼 보였다.

“현도?"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덩어리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내게서 도망을 갈 것처럼 사라지려 해서 일단 붙잡았다. 거칠고 단단한 손을 꽉 잡자 더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현도야?"

재차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어서 손을 들어 얼굴을 붙잡았다. 자세히 보려고 눈에 힘을 줬다.

'모르겠다.'

어떻게 생긴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현도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어쩐지 데려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대로 손을 잡고 얼마나 끌고 갔을까. 눈앞에서 거대한 곰 같은 것이 달려오고 있었다.

어쩐지 지금과 똑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곰이 아니라 현도다.

"형!"

단숨에 달려와 나를 끌어안은 것은 내 예상대로 현도가 맞았다.

“전화도 안 받고! 혼자 여기서……!"

현도가 하던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나를 품에 가두듯 안고서 뒤로 물러났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현도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런 현도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뭔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내가 데리고 온 덩어리가 있었다.

예쁜 달이 두 개. 현도와 현도를 닮은 사람.

나는 냉큼 두 사람의 손을 동시에 붙잡았다.

"형!"

"응. 현도야. 형이야."

현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아니야, 형! 그거 현도 아니야!"

현도가 아니라는 소리에 현도 비슷한 것을 다시 바라보았다.

“현도 아니야?”

"키스입니다. 화이.”

그 물음에 녀석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축 처진 개처럼 보였다. 키스라는 말에 빤히 바라만 보고있자, 긴장했는지 잡고 있던 녀석의 손이 땀에 젖어 축축해지고 있었다.

불길에 휩싸이던 순간, 내게 행복해지라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행복해.”

“……!"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키스가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현도를 잡고 있는 손을 좀 더 꽉 쥐고서 웃자, 그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화이가 행복하다면 다행입니다.”

키스가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처럼 웃었다. 그는 내 손에서 벗어나려는 듯 힘을 주었다. 마치 자신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마치 자신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처럼.

현도와 다른 의미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강아지 키우고 싶었으니까…….'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이대로 키스의 손을 놓아 버리면 강아지를 유기한 기분마저 들 것 같다.

나는 현도와 키스가 서로의 손을 마주 잡을 수 있게 포갔다.

“지금 행복하다는 소리야."

질겁하던 두 녀석이 내 말을 듣더니, 멈칫했다. 나는 처음 짓는 듯한 함박웃음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우리 행복하게 살자."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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