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2259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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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级 大众 无倾向
文集 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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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12 20:16
@라무 요게금지 나만아는표시있음 @라무
목 차
16. 커튼콜(2)
17. 왝더독
18. 백야
외전. Home Sweet Home
16. 커튼콜 (2)
하지의 선택이야 뻔했다. 하지는 턱을 당기고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 모습에 여환이 하지의 눈을 더 깊게 주시했다. 저렇게 보면 정말로 속을 읽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하지도 덩달아 여환의 눈을 응시했다.
그렇게 몇 초 더 눈을 맞추다가 먼저 시선을 내린 것은 온여환이었다. 박하지의 입을 막고 있던 그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꽉 막혔던 입이 그제야 트였다. 하지는 저도 모르게 온여환의 손바닥 안쪽에 후욱,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온여환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순순히 떨어져 나가는가 싶던 여환의 손가락이 다시 돌아와 하지의 입가를 쓸었다. 파드득 놀란 하지가 고개를 뒤로 뺐다. 그래 봤자 등 뒤의 벽에 막혀 그의 손을 피할 수도 없었다.
“가만히 있겠다고 했잖아.”
가만히 있겠다는 게 그가 박하지를 제 마음대로 주물럭거려도 가만히 있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지는 그의 말 한마디에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여환의 손을 쳐 내지 못했다. 여환이 하지의 입가에 묻은 무언가를 닦아 내고 있었다. 하지가 언뜻 눈을 내려 그의 손을 확인했다. 박하지에게 깨물렸던 온여환의 손날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박하지가 아니라 온여환에게서 나는 피였다. 그런 주제에 온여환은 제 손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하지의 하관에 묻은 피만 꼼꼼하게 닦아 냈다.
한참이나 턱을 쓸던 손이 뺨 위에서 멈칫했다. 바짝 일어난 솜털이 스칠 만큼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온여환의 손이 마침내 아래로 떨어졌다. 둘의 거리는 여전히 너무 가까웠고, 긴 다리 두 쌍이 허벅지부터 얽혀 있었다. 서로의 다리 사이로 들어간 무릎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가 고민하는 사이 골목 바깥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났다. 연정을 찾아온 국정원의 차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흘러간 시간을 가늠해 봤을 때 그들일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이미 진작에 떠났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순전히 박하지의 느낌일 뿐이긴 했지만.
“비…….”
“한 시간만 줘.”
비키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하지가 입을 다물었다. 밑으로 떨어진 온여환의 손이 박하지의 손가락을 살살 건드렸다. 손톱끼리 톡톡 부딪치기만 하기를 여러 번, 여환은 마침내 박하지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 안쪽까지 파고드는 손가락과 체온이 간곡하게 박하지를 붙들고 있었다.
“다 설명할게.”
“…….”
“내가 그동안 너한테 못 했던 말들, 안 했던 말들 다. 왜 그랬는지도 설명할게. 그러니까 한 시간…… 아니, 30분만 줘.”
“…….”
“부탁이야.”
하지야. 여환의 고개가 하지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그 바람에 여환의 귓불이 하지의 귓바퀴를 스쳤다. 닿는 체온에 뺨이 익어 갔다. 부슬부슬 흩날리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고, 둘 사이에서 아지랑이 같은 김이 피어올랐다.
“……20분.”
하지의 대답에 여환이 그의 손등을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그 안에 다 설명해.”
온여환에게 허락된 시간은 짧았다. 그를 찾아 헤맸던 시간에 비하자면 너무 부족하고 턱없었지만, 그럼에도 온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지의 손을 잡은 그대로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다. 일부러 큰길을 피해 동네를 빠져나갔다. 박하지만큼이나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걷던 여환은 어느 주택가 안쪽에 세워진 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눈에 하지는 별말 없이 그가 문을 열어 준 차에 몸을 실었다. 허리를 숙인 여환이 하지의 가슴팍 위로 안전벨트를 가로질렀다.
“이동 시간은 제외야.”
하지가 눈을 올렸다. 정면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온여환이 다시 한번 눈을 맞춘 채 말했다.
“도착하면, 그때부터 20분.”
하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수석 헤드레스트에 툭, 하고 뒷머리를 기댔다. 눈앞의 얼굴은 눈꺼풀로 덮어 버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조수석 문이 닫히고 그가 운전석에 타는 소리가 더욱 생생히 들렸다.
차에 시동이 걸렸다. 두 사람을 실은 차가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박하지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온여환도 어디로 가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그건 목적지가 어디든 서로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눈을 떴을 때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라거나, 사막 위라고 해도 말이다.
우습게도 박하지는 그런 걸 조금 바랐던 것도 같다. 눈을 떴을 때 우리의 차가 은하 어딘가를 횡단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 * *
온여환의 차가 멈춰 선 곳은 바다 한가운데도, 사막 위도, 은하와 은하 사이도 아니었다.
“들어가.”
그가 현관문을 붙잡은 채 안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현관 위에 켜진 센서 등을 올려다보던 하지가 머뭇거리며 발을 뗐다. 넓은 현관엔 신발 하나 나와 있지 않았다. 유리로 된 중문을 밀어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으나 선뜻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애꿎은 손톱만 손바닥 안쪽에 꾹꾹 박아 넣고 있는데, 뒤에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온여환의 턱선이 보였다. 하지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튀어나온 손이 중문을 밀었다.
“괜찮으니까 들어가.”
얼굴을 살짝 내린 여환의 숨이 볼 캡에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하지는 등 뒤에 붙은 몸을 떨쳐 내려는 듯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가 꽤 넓었다. 온통 하얀 벽과 하얀 천장에 바닥마저 색이 엷은 미색의 대리석이라 훨씬 더 넓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거실 안쪽의 통창을 멀거니 바라보는데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블라인드가 내려왔다. 하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여환이 거실과 이어진 부엌의 아일랜드 식탁에 리모컨을 내려놓는 게 보였다.
센서 등이 꺼지고 블라인드마저 닫히기 시작하자 집 안의 적막이 더욱 또렷해지는 듯했다. 온여환은 블라인드가 창가를 완전히 덮은 걸 확인한 후에야 거실 등 스위치 하나를 올렸다. 그나마도 아트월 벽면을 비추는 간접 등이라 실내는 여전히 어두컴컴했으나, 박하지도 온여환도 조명 밝기 따위를 토론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의 눈이 거실 벽에 붙은 디지털시계를 힐긋거렸다.
“설명해.”
이곳에 들어온 지 벌써 1분이 지났다. 박하지는 온여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몸을 돌려세웠다.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마주 선 두 사람은 꼭 장식물 같았다. 회색 소파와 벽걸이 텔레비전 사이에 세워진 작가 미상의 조각품들. 하나는 정말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박하지는 우리가 경매장에 올라간다면 누가 더 높은 값에 팔릴지를 생각해 봤다. 쓸데없는 상상이었다. 가짜와 가짜의 싸움은 원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이토록 만날 때마다 치열하게 불꽃이 튀어야 할까. 묵묵히 제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는 온여환과 시선을 맞추던 하지가 눈가를 찌푸렸다.
“시간 더 써 줄 마음 없으니까 빨리 얘기하라고.”
“널 찾는 데에 50일을 썼어.”
온여환의 첫마디에 하지는 기가 차서 웃어 버렸다. 필리핀에서부터 축적된 피곤함이 이제야 몰려왔다. 몇 시간의 비행과 서울의 봄비가 박하지의 어깨를 내리눌렀고, 쌓인 피로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동안 잊고 있던 분노가 넘실넘실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억울해? 고작 나 같은 거 하나 찾느라 반 백일을 쓴 게 아까워?”
박하지를 바라보는 온여환의 눈동자에도 이채가 돌았다.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다가오는 그의 걸음에서 차가운 얼음 결정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려 딱딱한 대리석에 발바닥을 붙이고 서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온여환이 팔뚝을 확 낚아챌 때도 상체만 조금 흔들렸을 뿐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아까워. 쓰지 않아도 될 시간을 썼으니까.”
“그럼 차라리 찾지 말지 그랬어.”
박하지가 팔뚝에 감긴 손을 떨어뜨리기 위해 팔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온여환은 이번엔 양손을 써서 하지의 팔을 붙들었다. 박하지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팔을 들썩이고 온여환은 그 팔을 붙들며 꽉 내리누르는 과정이 골목길에서 펼쳤던 육탄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다. 이미 한번 힘을 쏟아 낸 박하지는 피로함까지 인식해 버린 몸뚱이로 온여환의 완력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거실 중앙에서 점점 밀려난 하지의 종아리에 소파 다리가 닿았다. 이제 더는 피할 곳이 없어진 그가 발을 올려 온여환의 정강이를 걷어차려던 순간이었다. 여환이 하지의 어깨를 쥐고 확 밀었다. 다리 한쪽을 들고 있던 하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소파 위로 풀썩 무너져 내렸다. 온여환의 정강이를 겨냥했던 발끝이 어딘가를 걷어찬 것 같긴 한데 헛발질이었다. 하지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다시 일어나려고 했으나 위에서 찍어 누르는 온여환의 힘에 그대로 주저앉혀졌다.
“그 50일 동안 내내 생각했어!”
머리 위에서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가 우레 같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올리려는데, 그보다 온여환이 자세를 낮추는 것이 더 빨랐다. 대리석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은 그의 눈높이가 낮아졌다.
“네가 왜 날 믿지 못했을까, 왜 떠났을까! 믿어 달라는 말 대신 무릎 꿇고 빌었으면 좀 나았을까, 아니 차라리 돈을 쥐여 줄 걸 그랬나!”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쥔 손아귀 힘에 팔이 저렸다. 관절까지 욱신거리는 건 박하지인데, 어째서인지 온여환은 저가 더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고.”
하지의 모자챙 아래로 들어오는 온여환의 얼굴을 보며 아까 골목길에서 마주했던 그 얼굴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초조하고 조급한 얼굴. 박하지를 놓칠까 봐 애가 타는 얼굴.
“……그래서. 그 생각의 결론이 뭔데.”
그러나 하지는 이번만큼은 저 얼굴에 그냥 넘어가 줄 수 없었다. 온여환은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하겠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박하지도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그를 따라 이 집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까운 시간이 침묵으로 흘렀다. 여환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는 그를 재촉하는 대신 그 침묵의 시간을 셌다. 약속한 20분이 다 되면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갈 것이다.
“난 너한테 미안하다고 못 해.”
온여환이 입을 연 건 남은 시간이 절반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미안하다는 사과가 내 진심을 담지 못하니까.”
“…….”
“넌 항상 진심을 바랐잖아.”
이걸 솔직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차라리 늘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을 하지 그러냐고 화를 낼까. 저따위 말을 하는 온여환의 눈이 전에 없이 진중하고 깊어서, 박하지는 더욱 허탈했다. 그가 손을 들어 제 왼쪽 어깨에 올라온 온여환의 손목을 확 밀치며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지 않은 게 네 진심이라는 거지?”
헛웃음과 함께 반대쪽 어깨에 붙어 있는 손도 마저 밀어 냈다.
“한 시간, 아니, 20분 동안 하려고 했던 설명치곤 참 간단하네. 잘 들었어.”
아직 시간은 남았지만, 더 들을 이유가 없었다. 박하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를 뻗으려는데 이번엔 골반이 붙잡혔다. 온여환은 앉은 자리에서 박하지의 양쪽 골반을 꽉 붙든 채 얼굴만 들어 그를 봤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게 너무 많다는 거 알아. 그래서 네가 날 못 믿었다는 것도 알아, 아는데.”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한테 똑같이 했을 거야.”
아주 가끔 박하지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조금 달라졌을까. 나는 다르게 살았을까. 생각할 때마다 결론은 하나였다. 우리는 지금의 삶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국정원 소속인 걸 숨겼을 거고, 그날 너를 혼자 인천항으로 보냈을 거야.”
과거에 선택받지 못했던 미래는 다시 그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같은 이유로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바뀌어도 그 속에 던져진 게 나 자신이며 또다시 미래를 선택하는 것 역시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너한테 어떤 사실들을 숨기는 게 알게 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면, 네 주변을 감시하는 게 너한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난 또 그렇게 했을 거야.”
온여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안다. 그 역시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순간 그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할 거라는 걸. 그러니까 우리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알아서 화가 나는 거였다.
“네가 이런 나를 이해 못 해도 어쩔 수 없어.”
“어쩔 수가 없다고?”
우리가 이렇게 망가져 버렸는데, 시작도 못 하고 어그러졌는데, 그걸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온여환은 여전히 온여환이라는 게 화가 났다. 박하지가 온여환이라는 사람을 바꾸지 못했고, 그 역시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게 참을 수 없었다. 박하지는 온여환이 자신의 신념마저 다 내버린 채 바뀌어 주기를 원했으니까. 그가 온여환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택해 주기를, 사실은 그 누구보다 바랐으니까.
“날 네 손바닥 안에 올려놓으려고 했으면서, 어쩔 수 없단 말로 퉁 치자는 거야?”
“널 손바닥에 올려놓으려고 한 게 아니야. 이게 내가 널 지키는 방식이었어. 네가 위험해질까 봐…….”
“그게 아니라 네 합리화겠지!”
옆으로 크게 물러난 하지가 제 골반을 붙든 여환의 팔을 확 쳐 냈다. 밑으로 떨어진 손이 바닥을 짚었다. 그는 구원의 손길을 놓친 신자처럼 허망한 얼굴이었다. 하지는 그 부덕한 신자에게 저주 같은 고함을 쏟아 냈다.
“날 지키는 방식이었다고? 네가 그렇게 감추고 숨기면서 지키려고 했던 것들이 결국 이따위로 드러났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그래도 넌 이게 날 지키는 방법이었어?!”
“난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행복하길 바랐던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살면, 그게 행복이야?!”
소리를 내지르는 하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남들은 지옥에 사는데 나 혼자 이게 천국이라고 믿으면서 하하 호호 지내면, 그렇게 바보가 되면 행복한 거냐고! 넌 그렇게 사는 내가 정말 행복했을 것 같아?! 대체 그게 어떻게 날 지키는 거야, 어떻게!”
악을 쓰던 하지의 허리가 앞으로 확 굽어졌다. 숨이 찼다. 명치 아래가 꽉 눌려 아팠다. 몇 년을 묵혀 뒀던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온몸의 피를 토해 내는 것처럼 체력이 떨어졌다. 하지는 한참 더 숨을 골랐다. 띵하게 울리던 머리가 잠잠해지고 호흡도 고르게 뱉어질 때까지.
“……내가 위험해질까 봐 그랬다고?”
온여환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하지가 픽 웃었다. 허리를 다시 세웠다. 온여환은 여전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거지 같은 드라마 주인공처럼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아? 나는…….”
박하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박하지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면 행복할 거라 믿었던, 그렇게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던 온여환에게 진실을 말해 주는 것이 그 자신에게도 너무나 고된 일이었다.
“나는 항상 알고 싶었어.”
“…….”
“나를 버렸다던 어머니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도, 내가 나가 볼 수 없는 담장 너머의 세상도.”
비록 그들은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박하지는 항상 알고 싶었다.
“그리고 너도.”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항상 궁금했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박하지가 온여환에게 바랐던 것은 딱 그거 하나였다. 그가 알고 싶었다. 장난스러운 농담 따위로 자신을 밀어내지 말고, 거친 섹스로 다정을 숨기지 말고, 그냥 그가 사는 세상에 들여보내 주기만을 바랐었다.
“네가 인천항에 날 데리러 오겠다고 했던 그 날.”
박하지는 오래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온여환에게는 정말로 깊은 흉터를 남긴 그날의 이야기.
“네가 우리 아버지한테 총 맞고 나한테 못 왔던 거, 그것도 내가 모르고 살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 말 안 한 거야?”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 온여환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말이 흘러나오진 않았지만 박하지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묻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널 다 잊어버리고 살다가, 지금처럼 다른 사람 입을 통해서 우연히 그 말을 듣게 되면, 그럼 널 용서해 줄 것 같았어? 나한테 그런 말도 못 한 너한테 감동이라도 받을 줄 알았냐고.”
박하지는 짧은 순간, 곰발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당시 자신의 기분을 떠올렸다.
“난 네 덕분에 더 비참해졌을 뿐이야.”
온여환이 맞았다던 총이, 그의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지구를 몇 바퀴 돌아 자신의 머리통에 박히는 기분을 느꼈었다.
“나는…….”
잘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박하지의 숨이 다시 울컥 차올랐다. 목이 눌리며 코끝이 매워졌다. 하지는 좁아진 성대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쥐어 짜냈다.
“그때 너를 기다렸던 나는, 아버지한테 네가 프락치라는 소리를 듣고도…… 그래도 네가 그 항구에 나타나길 바랐어. 알아?”
박양일의 날카로운 외침과 총성이 울리며 전화가 끊긴 후에도 박하지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였다.
“네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널 다시 보는 게 내가 지옥으로 떨어져 똥통을 구르는 일이라고 해도……. 네가 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내 옆에 있기를.”
“…….”
“언젠가, 네가 다시 나를…….”
나를 찾아오길 바랐었다고. 그래서 다시 만난 너를 끝까지 밀어내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고. 그 말이 선악과처럼 목구멍에 걸렸다. 하지의 시선이 창문을 가린 블라인드를 향했다가, 천장을 봤다가, 그리고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굿하게 내려간 온여환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넌 나한테 끝까지 솔직하지 않았어.”
그게 온여환이 박하지에게 준 배신이었다.
“나만 솔직하지 못했던 거야?”
여환을 지나쳐 현관으로 향하던 하지가 뒤에서 날아드는 말에 중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너 나 좋아하냐.”
“…….”
“내가 그렇게 물었던 건, 그날 나도 너한테 솔직한 말을 듣고 싶어서였어.”
하지가 중문 손잡이에 손끝만 올려 둔 채로 다시 몸을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온여환이 박하지의 뒤에 서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온여환을 보며 하지는 그가 한 말을 기억 속에서 더듬어 찾았다. 너 나 좋아하냐. 그 말을 언제 들었더라. 찾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온여환에게 그런 말을 들어 본 건 딱 한 번이었다.
5년 전, 아니, 이제 6년이 되었나.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마지막 섹스를 했던 그날, 온여환이 갈급증이 난 사람처럼 다급하게 굴었던 그 날,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박하지를 향해 그가 던진 말이었다.
너 나 좋아하냐. 그 말에 박하지가 뭐라고 답했더라. 아마 그렇다는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되물었었다. 넌 나랑 왜 자는데. 하지는 그때 온여환의 입에서 나온 대답만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외로워서.
“솔직한 말을 듣고 싶었다고? 그래서 이제 내 탓을 하자는 거야?”
우리가 이 꼴이 난 게 결국 솔직하지 못했던 내 탓도 있다? 하지의 눈이 시뻘게졌다.
“네가 나한테 그 대답을 못 들어서, 그래서 억울했어? 아니! 넌 매 순간 나한테 그 말을 들었어! 내가 너한테 했던 행동들, 말들, 그 안에 모든 말이 있었다고! 몰랐다고 하지 마, 넌 분명 다 느끼고도 모르는 척한 거니까! 그래도 내가 솔직하지 못했다고? 그래, 내가 솔직하지 못했다면 넌 비겁했던 거야!”
박하지가 중문을 확 밀었다. 머리 위에서 센서 등이 켜졌다. 신발을 구겨 신고 단숨에 현관까지 향하려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하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팔을 흔들었다.
“놔!”
“맞아, 난 비겁해! 그래서 마지막까지 비겁할 수밖에 없어!”
“놓으라고!”
“사랑해!”
현관 손잡이를 향해 뻗어 나가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널 이용하면서 속일 때도, 혼자로 만들었을 때도, 제대로 지켜 주지도 못했던 순간에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널 사랑하면 안 되는 순간에도 널 사랑했다고! 그런데 내 사랑이 어떻게 안 비겁할 수가 있어?!”
온여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현관에 색색거리는 거친 숨이 채워졌다. 고개를 푹 숙인 여환이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박하지는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하지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박하지는 제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희미한 떨림을 느꼈다. 그건 박하지가 떠는 게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가, 언제나 꼿꼿한 남자가, 박하지의 얇은 손목 하나 쥔 채 어쩔 줄을 모른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너한테 사랑을 말해도, 말하지도 않아도……. 나는 비겁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어. 내가 가진 사랑이 비겁하니까.”
여환이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엷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그래서 너한테 이 말을 하면서 널 붙잡으려는 순간조차 나는…….”
“…….”
“지금도 나는, 이렇게 비겁하게 널 사랑해.”
“…….”
“사랑해.”
사랑이라는 말을 이렇게 비겁하게 뱉을 수 있는 남자가 또 있을까. 온여환은 정말 비겁한 새끼였다. 박하지는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사랑을 한다면, 적어도 이런 사랑은 아니길 바랐다. 상처 입고, 상처 주는 것도 모자라 배신하고 비겁하게 숨는, 그런 사랑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비겁하게 사랑을 칼날처럼 들이대며 자신을 붙잡는 비겁한 새끼는, 정말이지 죽어도 사랑하고 싶지 않다.
“……난 비겁한 사랑 같은 거 안 해.”
박하지가 온여환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의 손이 예상외로 쉽게 떨궈졌다. 온여환의 입술 새로 탄식 같은 한숨이 흘렀다. 하지는 축 처지는 어깨와 스러질 듯 떨어지는 고개 따위에 시선을 두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애초 온여환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끝났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나가야 한다. 박하지는 거지 같은 드라마의 주인공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가 현관문 손잡이를 돌려 밀었을 때였다.
“미안해.”
발 하나가 문간을 넘어갔다. 이제 나머지 발도 떼어 놓기만 하면 됐다. 그의 집에서 나와 등 뒤에서 문이 닫히면 그대로 제 갈 길을 찾아 떠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미안해.”
그런데 제 뒤에 선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하지를 옭아맸다. 그동안 자신이 해 온 일을 두고도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하겠다던 남자가 사랑을 말한 후에 미안을 말한다. 자신이 고백한 비겁한 사랑에 용서를 구하고 죄책감을 가진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개새끼.”
온여환은 정말, 끝까지 비겁한 새끼였다. 문간을 넘어갔던 박하지의 발끝이 되감기를 하듯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는 손잡이를 밀고 있던 손을 그대로 놓아 버렸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고개를 드는 여환의 목에 팔을 둘렀다. 주춤, 뒤로 물러나려던 온여환의 팔이 하지의 등허리를 꽉 안았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하지는 그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문댔다. 윗입술이 밀려 올라가 인중에 닿았다. 하지의 볼 캡이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달려드는 박하지를 온여환은 밀어 내지도 않았다. 그의 등이 현관 벽 어딘가에 부딪혔다. 끝까지 내몰린 온여환의 입술을 열며 혀를 집어넣는 하지의 뺨이 뜨거웠다. 눈가와 볼을 닦아 주는 손길이 없었다면 하지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키스 때문에 차오른 줄 알았던 숨이 사실은 울음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는 온여환의 혀를 씹어 먹을 듯 감아올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흐윽…….”
겨우 떨어진 입술 사이로 젖은 숨이 터졌다. 금세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살짝 머금었다가 놓은 온여환이 그의 코끝에 입을 맞추며 중얼댔다. 미안해. 그 말이 듣기가 싫었다. 비겁한 사랑을 하는 게 미안한 일이라면, 그럼 비겁한 사랑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박하지는 그의 사랑이 비겁해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딱 한 가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널, 사랑할 거야.”
비겁한 사랑을 하지 않기 위해, 네 사랑이 아니라 내 사랑을 위해서, 박하지는 온여환을 다시 사랑하기로 했다. 내가 널 원한다고 하면 그가 보내는 사랑이 어떠한 형태든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못할 테니까. 비겁하고 치졸하고 일그러진 사랑이라 해도, 그 사랑을 박하지가 원하는 거니까.
“내가 너를…….”
사랑해. 마지막 말은 박하지의 혀끝에서 온여환의 혀끝으로, 소리 없이 전해졌다. 붉은 혀가 뜨거운 입 안에서 엉켰다. 더 깊을 수도 없이 깊게 서로에게 끌려갔다. 박하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린 개거지 같은 드라마를 쓰고 있다. 결말이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흘러가는 이야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어딘가엔 이런 이야기도 있어야지. 이따위로 질척하고, 형편없고, 모든 주인공이 망가져 추락하는, 사랑하다 죽어 버릴 놈들처럼 사랑하는, 그런 거지 같은 드라마도 누군가에겐 삶이겠지.
피할 수 없이 밀려드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주인공의 자세는 그토록 초연하기까지 했다.
* * *
“내일이면 일신 주가가 뚝 떨어질 겁니다.”
송태갑이 낮은 테이블 위에 신문 한 부를 내려놓았다. 신문 1면엔 몇 시간 전 기자회견을 열었던 마루 미술관 이지원 관장이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실려 있었다. 그 위에 걸린 헤드라인이 강렬했다.
‘대통령 비자금’ 일신이 주고, 민정 수석이 관리했다
추정액만 500억 원 폭로
“내일 자 한조 일보 신문입니다.”
송태갑의 말에 염정석이 그가 내려놓은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기사 내용의 대부분은 이지원 관장이 기자회견에서 말한 것들을 받아쓰기한 것이었다. 새로운 정보라 해 봐야 이지원 관장의 기자회견에 대해 일신 그룹 측에선 아직 “추후 공식 입장을 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 정도였다.
후속 기사들은 뒷면에서 이어졌다. 대통령의 차명 재산과 비자금 조성에 일신 그룹의 마루 미술관이 어떤 방식으로 관여했으며 양심선언을 한 이지원 관장은 어떤 인물인지, 해당 비자금 조성에 일신 그룹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유연 부회장도 관여되어 있는지, 그리고 일신 그룹이 대통령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현 정부에서 혜택을 받아 온 것이 아니냐며 새로운 의혹을 제시하는 기사도 있었다.
건성으로 기사 내용을 훑던 염정석이 신문을 반으로 접었다. 툭, 하고 테이블 위로 던져진 신문 뒷면엔 일신전자에서 새롭게 출시한 태블릿 PC 광고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걸 내려다보던 염정석이 한쪽 눈썹을 불쑥 올렸다.
“여태 일신 광고비로 먹고살던 놈들까지 기사를 내는 걸 보니 이번 건이 크긴 큰가 보군.”
“언론도 머리를 쓰는 거죠. 지금 일신 편들었다간 광고 빠져서 망하는 게 아니라 몰매 맞고 망할 수도 있다는 걸 알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아마 이유연도 언론에서 더 떠들기 전에 공식 입장문을 내놓으려고 할 겁니다.”
“정말 이유연이 직접 나서겠어?”
“안 나서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자기 동생이 직접 양심선언을 하고 나섰는데.”
씩 웃은 송태갑이 위스키가 담긴 온더록스 잔을 들었다. 염정석 역시 잔을 들어 그의 잔과 부딪쳤다. 일찍 터뜨린 축배를 맛보는 두 사람의 입가에 걸린 승리의 미소가 은은했다. 일신 그룹 막내딸이자 마루 미술관 관장 이지원의 양심선언은 송태갑이나 염정석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였으나, 그 변수 덕분에 상황이 그들에게 더욱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게. 설마 이지원이 나설 줄 누가 알았겠어.”
“일신이 원래도 그런 말이 많지 않았습니까. 기업 경영은 잘하는데, 가족 경영을 못 한다고.”
재벌 기업 중 가족사가 무난한 곳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개중에서도 일신 그룹은 가족 관계도가 복잡하기로 소문난 기업이었다. 현재는 병환으로 경영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는 회장 이기문은 슬하에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이 세 명이 태어난 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본처인 최선화가 낳은 아이는 맏딸 이서은뿐이고, 맏아들인 이유연은 4살이 되던 해에 이기문 회장이 혼인 전 만났던 여성이 보내온 아이였으며, 막내딸인 이지원은 혼인 후 밖에서 낳아 데려온 아이였다. 삼 남매의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첫째 이유연과 둘째 이서은은 어린 시절부터 심한 경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기업 경영에 뛰어든 후부터는 본처인 최선화까지 이서은의 편에 서서 경영권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이 싸움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는 것이 바로 막내딸인 이지원이었다.
이지원은 이기문 회장이 특히 예뻐하던 막내딸로 유명했다. 실제로 외모도 수려했거니와 느지막이 본 막내딸이니 품에 끼고 애지중지 키운 것도 당연했다. 아마 막내딸인 이지원만큼은 복잡하고 사나운 기업 경영의 세계에서 떨어뜨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게 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20살 때 프랑스로 미술 유학을 보내 준 것 역시 그래서였다. 문제는, 너무 품에 끼고 산 탓에 경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다.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지원은 그때부터 미술관 일을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마루 미술관의 관장은 이유연 부회장의 처 김희선이었다. 김희선은 일신문화재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자리를 이지원이 메운 것이었는데, 이지원은 미술을 즐길 줄이나 알지, 그걸로 미술관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마루 미술관 운영은 여전히 김희선의 손안에서 굴러갔다. 말이 김희선이지, 실상은 이유연이 마루 미술관을 쥐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마디로 이지원은 소위 말하는 바지 사장 혹은 얼굴마담일 뿐이었고, 실세는 이유연이었다는 거다.
이지원은 자신의 배다른 오빠와 그 처가 미술관 운영에 관여하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도 운영 면에서 부족한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런 일을 잘 알고 있는 오빠의 도움을 받으면 저야 좋은 것 아니겠냐며 속 편한 소리나 해 댔다. 그러니 이유연이 자신의 미술관을 이용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도 전혀 몰랐지.
“집안이 화목해야 일이 잘된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구만.”
“이유연 부회장도 예상 못 했겠죠. 설마 아무것도 모르는 막냇동생이 그런 사고를 칠 줄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사고도 칠 수 있었던 거겠지만. 덧붙인 송태갑의 말에 염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예상했겠는가. 재벌가의 자제가 직접 얼굴을 드러내고 나와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에게 뇌물성 정치자금을 대 줬다고 기자회견을 열 줄이야.
이번 일을 계기로 정·재계 인사들의 비자금 형성에 악용되지 않는 건강한 미술 문화를 바로 잡고 싶다는 이지원의 순진해 빠진 예술가 마인드는 일신과 현 대통령에게는 치명타가 되었고, 국민들에겐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송태갑과 염정석에겐 그들조차 몰랐던 히든카드가 되었다.
이제 국민들은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뜨겁게 들고 일어날 것이고, 염정석은 그 물살의 끝에 서 있기만 하면 됐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아직 왕좌에 앉아 있는 백근호의 마지막 이빨을 확실하게 뽑아 버리는 것이었다.
“조만간 이유연한테서 신호가 올 겁니다. 이유연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이 상황에 대통령한테 기댈 수 없다는 건 알 테니까요.”
백근호를 찾아가는 것은 이유연의 입장에선 침몰하는 배에 함께 몸을 싣는 짓이었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릴 줄 아는 사업가 이유연이라면 지금이 바로 배를 옮겨 타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옮겨 타야 할 배가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한 염정석이라는 것도. 그래야만 다음 정권에서 재판까지 가게 되더라도 집행유예와 벌금형 정도로 끝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이유연한테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면 국민들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정말 내가 그 손을 잡아 주는 게 나을 것 같나?”
“당분간은 강경한 모습을 보이시는 게 좋긴 하죠. 하지만 어차피 일신은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고, 어디에든 붙을 겁니다. 다른 쪽에 붙이는 것보다야 의원님 뒤에 가지고 계시는 게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연락이 오면 뭘 제안하는지나 들어 보시죠.”
아마 선거 자금을 지원하고 정권이 바뀐 후 이번 일의 처리 과정을 부드럽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해 올 것이다. 당장 염정석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송태갑의 말마따나 어차피 일신은 무너지지 않을 테고, 그들이 대 줄 수 있는 선거 자금은 어느 누구의 주머니로든 흘러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다른 주머니를 채워 주느니 차라리 나라를 위해 자금을 쓸 준비가 된 사람의 주머니를 채우는 게 나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잔을 들던 염정석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마닐라 건은 어떻게 됐나? 대통령이랑 연결 고리가 있는 게 확실해?”
“아직 알아보는 중입니다.”
사건의 발단이 된 마닐라 사기극과 선장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선장이 왜 갑자기 사업을 접고 사라졌으며, 그 사업 수익금이 왜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로 들어갔는지도 정확한 연유를 파악하지 못했다.
“아직도 파악이 안 됐단 말이야? 백근호 그 인간이 예전에도 선장 이용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던 인간이라는 거 몰라?”
사건이 터진 게 언젠데 국내 최대 정보원이라는 곳에서 왜 아직도 상황 파악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있느냐며 열을 내는 염정석은 마치 벌써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만 같은 태도였다. 그런 염정석을 바라보던 송태갑의 입매가 일자로 굳어졌다. 지금 대통령 자리를 넘볼 수 있게 해 준 게 대체 누군데. 그런 마음이 부글 끓어올랐지만, 아직은 참아야 했다. 그가 원장 자리에 오를 때까지는.
“……흠, 걱정 마십시오. 대통령이 선장을 이용해서 빠져나가기 전에 우리가 선장을 이용해서 대통령을 끌어내리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선장이 무슨 이유로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에 돈을 입금했든, 일단 지금은 그 사실을 충분히 이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송태갑의 말에도 염정석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대통령이 당하고만 있겠어? 오히려 자기는 선장을 잡으려고 국정원에 지시를 내렸었다고 말하면?”
“절대 못 그럽니다. 그 말을 했다간 필리핀 정부 사업으로 사기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버젓이 알고서도 필리핀 정부에 알리지 않았다고 시인하는 꼴이 되는 거니까요. 설사 대통령이 정말 자기 하나 살겠다고 그런 선택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국정원 내에 마닐라 작전에 대한 자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라진 박하지는 찾아서 처리하면 그만이고요.”
송태갑이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한쪽 다리를 꼬아 올리는 그의 자세가 퍽 거만했다.
“저희가 만지는 대로 모양을 낼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때, 염정석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염정석이 잔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의 보좌관에게서 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야?”
전화를 받은 염정석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송태갑이 그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시선을 돌리는 염정석과 눈이 마주쳤다.
“일신 그룹에서?”
염정석의 말에 송태갑의 눈꺼풀이 살짝 들렸다. 연락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빨리? 나쁜 신호는 아니었다. 그쪽에서 상황의 심각성을 빠르게 인지하고 애가 타는 중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염정석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때였다. 송태갑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염정석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정석은 그제야 다시 입을 뗐다.
“……그래. 만나겠다고 해.”
이제 이 나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것이다. 염정석과 송태갑의 눈동자에 서로 다른 욕망이 다글다글 끓어올랐다.
* * *
바닥에 떨어진 볼 캡이 온여환의 발에 밟혀 찌그러졌다가, 박하지의 발끝에 치여 거실까지 날아갔다. 등판으로 중문을 밀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온여환의 어깨 위엔 박하지의 양팔이 꽉 감겨 있었다. 박하지는 신발도 채 벗지 못해 한 짝만 겨우 벗었고, 와중에 걸음도 맞지 않아 자꾸만 둘의 무릎이 부딪쳤다. 위태롭게 뒤로 걷던 온여환이 발밑을 확인하려 고개라도 내릴라치면 박하지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입술을 밀어붙였다.
마음이 조급했다. 처음 나눈 키스도 아니건만 꼭 첫 키스를 하던 순간처럼 심장이 간질거렸다. 박하지의 한 짝 남은 운동화가 온여환의 발등을 올라타듯 밟았다. 순간 타이밍이 어긋나며 여환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두 사람의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렸다.
“잠…….”
몸을 떨어뜨리려던 온여환은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는지 아예 박하지의 등허리를 꽉 안아 버렸다. 그러곤 맞붙은 입술을 떼어 내 하지의 얼굴을 제 어깨에 완전히 폭 파묻었다.
“윽.”
박하지의 무게까지 안고 그대로 넘어진 온여환이 낮게 신음했다. 등이 부딪친 건 온여환이지만 그 충격이 맞붙은 가슴을 통해 박하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명치 위가 찌르르 울렸지만, 몸을 떨어뜨리고 싶진 않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늑골 안쪽을 쳐 댔다. 엇박자로 튀는 심장 박동을 가만히 교환했다. 여환의 어깨에 젖은 입술을 문대며 숨을 고르는 하지의 뒷머리에 큰 손이 내려앉았다. 다듬을 때를 놓쳐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꽤 긴 머리카락이 곧은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가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마사지하듯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 손이 비를 맞아 축축한 등을 도닥였다.
“너 젖었네.”
그 말에 다른 의도가 없음을 알면서도 괜히 온여환의 손이 닿은 등줄기가 찌릿거렸다. 따끔한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한숨 같은 날숨을 뱉은 하지가 고개만 살짝 올려 밑에 깔린 여환을 봤다.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운 여환이 앞으로 흘러내린 하지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가 걷히자 드러난 하지의 눈가가 새빨갰다. 조금 전까지 울고불고 악을 썼던 티가 남아 있었다.
여환이 하지의 눈꼬리에서 미처 마르지 못한 물기를 톡톡 두들기듯 닦아 주었다. 박하지는 그제야 아, 내가 울었구나, 자각했다. 온여환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에 쪽팔림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기보단 눈가를 만져 주는 그 손길이 마냥 좋아서, 이 손길과 체온을 참 많이도 그리워했다는 생각만 들어서, 그게 조금 신기했다.
“감기 걸리겠다. 씻을래?”
“…….”
“일어나. 씻고 옷부터 갈아입자.”
박하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여환이 먼저 몸을 세웠다. 그의 위에 엎어져 있던 박하지도 자연히 몸을 일으켜야 했다. 겨드랑이 사이로 불쑥 들어온 팔이 하지를 그대로 안아 바로 세웠다. 여환은 하지를 현관 옆에 붙어 있는 욕실에 집어넣었다. 욕조가 딸린 욕실에 덩그러니 선 박하지를 대신하여 욕조에 물을 받고, 찬장에서 수건을 꺼내고, 벽에 붙은 후크에 배스 가운까지 걸어 준 온여환이 다시 몸을 돌려 그를 봤다.
“편하게 씻고 나와. 옷은 밖에 둘 테니까 나와서 갈아입고.”
여환은 그 말만 남긴 채 밖으로 나갔다.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박하지는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음 놓고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온여환과 함께 욕실에 들어왔던 순간부터 간헐적으로 숨을 참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박하지도 몰랐던 것을 온여환은 알았으려나. 그래서 편하게 씻고 나오라는 말 같은 걸 했나.
박하지는 이곳이 온여환의 집이라는 게, 자신이 지금 그와 같은 천장 아래 있다는 게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사랑을 말했고, 처음 키스를 해 보는 청춘들처럼 이를 부딪치다가, 지금은 마치 초야를 앞둔 연인처럼 바깥에 온여환을 두고 욕실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다 거짓말 같았다.
박하지가 제 앞에 붙은 세면대 거울을 바라봤다. 푹 눌린 머리에 퉁퉁 부은 눈언저리, 눈물이 말라붙어 건조해진 뺨과 붉은 홍조, 후줄근하게 늘어난 반팔 티셔츠에 대강 걸친 흰 셔츠까지, 아주 완벽하게 꼴 보기 싫었다. 이 꼴이라서 온여환이 씻으라고 들여보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몰골을 확인하자 박하지도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주섬주섬 옷을 벗은 하지가 욕조에 몸을 담갔다. 마닐라에서부터 짊어지고 왔던 근심과 두려움이, 턱밑까지 치받아 숨통을 조이던 진실과 조급함이,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형체 없는 원망과 눈물이, 물살에 풀어져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박하지가 봄비와 눈물에 축축이 젖은 몸을 개운하게 씻고 문을 열었을 때, 온여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발밑엔 그가 준비해 둔 새 옷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하지는 그 옷으로 갈아입는 대신 몸에 걸친 가운 끈을 조여 묶기만 했다.
“……온여환.”
밖으로 나온 하지가 조용한 집 안을 어색하게 돌아다니며 그를 찾았다. 설마 어디 나간 건 아니겠지. 씻으면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아마 밖으로 나가진 않았을 것 같았다. 박하지는 꽉 닫힌 문들을 돌아봤다. 화장실 문을 제외하고 눈에 보이는 문은 총 세 개였다. 남의 집 방문을 함부로 여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지금은 예의를 따지는 것보다 온여환의 행방이 더 궁금했다. 하지는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와 함께 눈에 보이는 방문을 밀었다.
첫 번째 방은 침실이었다. 거실과 마찬가지로 온통 하얬다. 붙박이장도, 침대 매트리스도, 이불까지도. 그 외 다른 가구는 없었다. 침대 아래 깔린 짙은 회색의 카펫이 아니었으면 사람이 자는 방처럼 보이지도 않았을 것 같다. 박하지는 자신만큼 짐 없이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혜령이 박하지의 방을 볼 때마다 혀를 차던 게 이래서였나.
그때,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온여환이 씻고 있는 모양이었다. 온여환의 행방도 찾았겠다, 이제 얌전히 그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으나 왜인지 거실 소파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온여환이 나올 것 같지 않았고, 박하지는 모처럼 시간이 많았다.
침실 문을 닫고 나온 하지는 결국 다른 방문을 열었다. 바로 맞은편 방이었다. 침실처럼 온통 하얗게 정리가 되어 있는 방을 예상하고 문을 민 하지는 벽면을 채우고 있는 사진과 글씨들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한쪽 벽엔 아마도 온여환이 붙여 놓았을 자료들이 빼곡했고, 그 맞은편 벽엔 커다란 책상이 세워져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를 본 하지는 이곳이 바로 온여환이 예전에 자신과 영상 통화를 할 때 있었던 곳임을 알았다.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긴 하지는 책상을 지나쳐 어지러운 벽 앞에 섰다. 멀리서 볼 때부터 바로 알아봤다. 이건 온여환이 선장과 그 주변 관계를 정리해 놓은 거대한 파일첩이었다. 파일첩 가운데엔 박하지의 사진도 붙어 있었다. 박하지의 머리가 지금보다 짧을 때였다. 흥신소에 다니던 시절인 것 같은데, 이걸 대체 언제 찍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가 자신의 사진에 손을 뻗으려던 때였다.
“여기서 뭐 해?”
박하지와 색만 다른 검은색 가운을 입고 나타난 온여환이 한쪽 어깨를 문틀에 기댄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언제 나왔지. 꼭 남의 집을 뒤지다가 현장 검거를 당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뒤지고 있던 게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가 머쓱함을 감추지 못하며 손을 내리자 픽 웃은 여환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곤 벽에 붙어 있던 사진을 떼어 내 하지의 손에 쥐여 줬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야.”
성질머리 더러워 보이잖아. 그렇게 말한 온여환이 사진 속에서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하지의 얼굴을 가리켰다가 그 손으로 눈앞에 있는 하지의 볼을 콕 찔렀다. 별안간 볼이 찔린 하지가 촉감이 남은 뺨을 스윽 문질렀다.
“……맞네.”
“뭐가?”
“스토킹 전문.”
온여환은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고 그냥 웃었다. 자신의 사진을 내려다보던 하지가 다시 고개를 올렸다. 벽면을 가득 채운 이름들과 관계망이 거미줄 같았다. 그 속엔 박양일의 이름도 있었고, 구도완과 마자위, 최근에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대통령과 일신 그룹 사람들의 이름들도 섞여 있었다.
박하지는 적힌 이름 중 절반 이상을 몰랐다. 이 수많은 이름의 관계를 온여환은 하나하나 엮어 가며 이 벽을 채웠을 것이다. 이 관계도에서 유일하게 이름 없이 물음표만 달고 있는 인물, 선장을 찾기 위해서.
“이제 다 상관없어.”
여환이 말했다. 박하지의 눈이 그를 돌아봤다. 여환은 벽면에 고정되어 있던 하지의 시선에서 어떤 생각들을 읽었는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이딴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난 너만 무사하면 돼.”
“……정말?”
“응.”
“내가 상관있다고 해도?”
박하지는 알고 있다. 10년 동안 선장을 쫓았던 온여환이 정말로 한순간에 이 모든 걸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박하지가 다 버리고 떠나자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온여환이 진심으로 원하는 길은 아닐 거라는 걸 안다. 무엇보다 박하지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지나간 진실은 아무런 힘도 없다고 외면하기엔 박하지의 삶이 너무 많이 휘둘렸다. 더는 나 자신도 모르는 진실에 묶여 영문도 모른 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말했잖아. 나는 항상 내 어머니랑 아버지가, 그리고 날 둘러싼 세상이 궁금했다고.”
“…….”
“알고 싶어. 알아야겠어.”
한국으로 온 건 그래서였다. 박하지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온여환보다 더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선장한테 전화가 왔었어.”
하지가 여환을 똑바로 보며 섰다. 여환의 눈썹이 미간을 좁히며 모이는 게 보였다. 이제 다 상관없다고 했던 그도 역시나 선장의 존재에 여전히 반응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선장이 너한테 전화를 했다고? 직접?”
“응. 잘은 모르겠지만, 선장은 아예 사라지려고 하는 것 같았어.”
선장은 분명 선장이라는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거라고 말했었다. 그 얘기를 왜 박하지에게 해 주는지 알 수 없었고, 이게 혹시 미끼는 아닐지 의심도 들었지만, 그게 미끼든 아니든 하지는 선장이 이대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둘 수가 없었다.
“그 전에 찾아야 돼.”
“……그게 진짜 네가 원하는 거야?”
온여환의 손이 박하지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가운 아래 골격이 그대로 느껴지는 어깨를 붙잡은 채 신중히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눈이었다. 지금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고, 어쩌면 듣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들어야 할 수도 있다고. 박하지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어. 내가 원하는 거야.”
그래서 더 알아야만 했다. 선장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박하지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이야기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했다. 이 극은 이대로 끝나선 안 됐다. 이제 선장과 우리를 위한 마지막 커튼콜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17. 왝더독 -
“네 말은, 선장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거지?”
온여환이 미지근하게 식은 맥주 한 캔을 더 따며 말했다. 책상에 기대앉은 그가 서재 의자에 앉아 있는 박하지를 향해 줄까, 물어보듯 눈짓을 했다. 하지는 손끝으로 빈 캔만 달그락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아서였다.
박하지와 온여환은 그동안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온여환이 화성파에 잠입했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최근 송태갑의 서재에서 박양일의 원본 편지가 발견된 것, 그리고 그 편지가 숨겨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까지.
두 사람은 그런 얘기들을 자정이 넘도록 나누었지만, 아직 해야 할 얘기가 훨씬 많이 남아 있었다. 멀쩡한 정신으로 하기 힘든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박하지는 그래서 더 취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같다. 결국 새로운 캔을 따는 것은 온여환 혼자였다. 박하지는 그의 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거랑 마 전무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어. 그리고 네가 도 실장이었고, 국정원 요원이라는 것도. 어쩌면 선장은 네가 화성파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단숨에 맥주 반 캔을 비운 온여환이 젖은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그때도 내 정체를 알았다면 비코어 그룹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테니까. 아마 그때 이후에 내 정체를 알았을 거고, 어떻게 나오나 지켜본 거겠지.”
“왜?”
하지의 반문은 온여환이 아니라 선장을 향한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
선장은 분명 국정원이 자신의 뒤를 쫓는다는 걸 알았고, 박하지의 뒤에 그때처럼 국정원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모든 걸 지켜보기만 했을까. 선장이라면 충분히 국정원의 추적을 피해 움직일 수 있었고,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박하지를 처리하고자 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장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움직임을 다 감지하고도 그냥 넘어갔다. 오히려 일을 더 크게 키웠다. 사업의 규모를 키우고, 외부 사람을 끌어들였다. 마치 곧 폭탄이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 적군을 유인하는 것처럼.
“예전에 네가 크루즈에서 했던 말 기억해?”
넓은 책상 위에 보이지 않는 생각들을 어지러이 널어놓고 허우적거리던 박하지가 눈을 올렸다.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온여환은 남은 맥주를 마시려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괘씸죄.”
박하지는 그제야 온여환과 같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구도완을 다시 만났던 크루즈에서 박하지가 했던 말이었다. 선장을 오랫동안 뒤쫓았던 온여환과 그가 넘겨준 자료로 선장을 파악했던 박하지의 공통된 의견 중 하나는, 선장이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는 걸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어. 비코어 그룹이 무너지고 선장이 그렇게 잠잠하게 사라질 리가 없었는데 말이야.”
선장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당한 것을 되돌려 갚아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선장이 어떤 식으로 국정원을 엿 먹이고 싶었던 건지 알 것도 같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선장이 아무리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제 살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을 이렇게 벌인 데엔 단순한 앙갚음이 아니라 분명 그 사람이 얻어 가는 것도 있었을 텐데.
“하아…….”
양손으로 얼굴을 덮은 하지가 피곤한 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머리가 꽉 막혀 생각이 나아가지 않았다. 생각이 조금만 깊어질라치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어 길을 막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네가 보기엔 진짜로 선장이…… 그 사람이 나랑 관련 있는 사람 같아?”
친모라느니, 어머니라느니, 그런 단어를 입으로 뱉기는 아직 어려웠다. 여전히 인정이 안 됐다. 박양일이 자신의 친부가 아니라는 것도, 30여 년 전 죽은 이름 모를 누군가가 자신의 친부라는 것도, 그리고 자신을 낳자마자 사라졌다는 어머니가 선장일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도, 박하지는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나한테 정말로 다른 증거를 남겼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박하지가 기억하지 못할 뿐, 다른 증거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증거가 아니라 아직 찾지 못한 또 다른 증거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박양일의 편지가 다 거짓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장에게 쫓기던 그가 절박한 마음에 다 꾸며 낸 거짓말이라면? 사실 선장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증거 따위 하나도 없었다면? 우리가 그 편지 쪼가리 하나에 다 놀아난 것뿐이라면?
그런 말을 두서없이 중얼거리면서도 박하지는 자신이 희박한 가능성에 매달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박하지가 박양일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왜 친아들도 아닌 박하지를 20여 년 동안 거두어 키웠는지, 그걸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맞아. 그럴 수도 있어.”
그러나 온여환은 박하지의 그 신빙성 없는 주절거림을 듣고도 그럴 수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탁, 하고 책상 위에 맥주 캔을 내려놓은 그가 하지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을 붙잡아 내리며 말했다.
“내가 틀린 걸 수도 있어. 네가 가지고 있다는 게 뭘지, 다른 건 없는지 더 찾아볼게.”
책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은 여환이 하지가 앉은 의자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푹 숙여진 하지의 고개 아래로 그의 얼굴이 파고들었다.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시선이 부딪쳤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생각해.”
여환의 손이 하지의 뺨을 쓸었다. 하지는 이끌려 가듯 그 손바닥 안에 입술을 묻고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켜고 뱉을 때마다 그의 손안에서 둘의 체취가 섞였다. 여환이 손을 내려 하지의 턱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내린 박하지는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의 향기와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입술이 닿은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하지의 입술을 머금은 여환은 아까 그에게 달려들던 박하지처럼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천천히 사탕을 녹여 먹는 아이처럼 혀를 내어 윤곽을 덧그리고, 입술 안쪽까지 간지럽게 핥기만 하다가 천천히 치열 안까지 혀를 집어넣었다. 혀끝을 세워 느리게 움직이다가 이윽고 면적을 넓혀 혀를 비볐다. 입 안이 꽉 찼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충족감을 조금도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하지가 손을 뻗어 여환의 얼굴을 꽉 감쌌다. 입술이 더 빈틈없이 맞물리도록 고개를 비틀었다.
입 안에 고인 침이 여환의 혀를 타고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온여환은 그의 타액을 하나도 흘리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혀로 입 안을 긁고, 부지런히 울대를 움직여 받아 마셨다. 박하지가 어디에서 난 사람인지, 그의 피에 누구의 유전자가 섞여 있는지 모르지만, 온여환에겐 그런 것 따윈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했다.
박하지의 존재를 남김없이 핥아 마시려는 그의 모습에 하지는 못내 코가 매워졌다. 그가 코끝을 찡긋거리며 숨을 헐떡이자 여환의 혀가 뒤로 물러났다. 입술을 떨어뜨리려는 듯한 행동에 하지가 다시 여환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멈추지 마. 떨어지지 마.
그 말이 소리로 나왔는지, 그저 입 안에서만 맴돌았는진 잘 모르겠다. 박하지가 제 나름의 말을 마쳤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허벅지와 둔부 밑으로 온여환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하지의 몸을 확 들어 올렸다. 하지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안았다. 몸이 뜨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는 곧장 책상 위에 앉혀졌다.
뒤로 넘어갈 듯 기우는 등허리를 한 손으로 받친 여환이 맞붙은 입술 사이로 다시금 혀를 밀어 넣었다. 하지는 그 혀를 온전히 삼키며 가운이 흘러내려 드러난 맨다리로 여환의 허리와 허벅지를 감쌌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 혹은 가지고 있지 않든, 박하지를 그 존재 자체로만 해석할 그에게 모든 것을 풀어놓고 싶었다. 완전히 녹아내리고 싶은 밤이었다.
* * *
검은색 세단 두 대가 파주 출판 단지를 지났다. 아울렛과 쇼핑몰, 출판사와 공장들이 모여 있는 이 도시는 낮 동안에는 꽤 많은 방문객이 오가며 북적이지만, 출판사 직원들을 태운 셔틀이 마지막 운행을 끝내고 아울렛마저 폐점하고 나면 흡사 유령도시처럼 조용해졌다. 송태갑과 염정석을 각각 태운 차가 한적한 자유로에 들어선 것이 그즈음이었다. 일정한 속도로 사이좋게 달리는 두 차의 앞뒤로 다른 차는 보이지 않았다. 좌측에 임진강을 두고 뻥 뚫린 자유로는 두 사람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건지 짐작도 할 수 없게 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송태갑과 염정석은 별장에서 이유연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염정석의 보좌관 측으로 요청이 왔던 만남의 날이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별장에 나타난 것은 이유연이 아니라 아랫입술에 큰 흉터가 있는 남자였다. 퍽 위협적으로 생긴 남자는 자신을 회장님의 수행원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보안 때문에 약속 장소를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번거롭긴 했지만, 보안이라면 송태갑과 염정석에게도 중요한 문제였기에 두 사람은 큰 의심 없이 준비된 차에 각각 올라탔다.
송태갑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목적지도 듣지 못한 채 한 시간을 달렸을 때였다. 차의 속도가 높아질수록 주변에 보이는 건물이 낮아졌고, 건물보다 평야가 훨씬 더 많이 보였다. 공장 단지가 모인 지역까지 지나치자 도로에는 전신주와 전봇대마저 드문드문했다.
“대체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참다못한 송태갑이 운전사에게 말을 붙였을 때였다. 전방을 주시하던 운전사의 눈이 백미러를 향했다.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 핸들을 쥔 운전사가 빠르게 손목을 꺾었다. 송태갑의 어깨가 기우뚱 기울었다. 거의 유턴을 하다시피 방향을 바꾼 차는 사유지 푯말이 세워져 있던 비포장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손잡이를 잡으며 자세를 바로 세운 송태갑이 다시 앞을 보려는데, 이번엔 차가 그대로 급정거를 했다. 머리가 조수석 헤드레스트를 들이받았다. 억, 하고 터지는 비명을 애써 숨기지도 않은 송태갑이 교통사고 보험 사기단처럼 뒷덜미를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소리치는 그의 얼굴이 시뻘겠다. 운전사는 이번에도 백미러를 통해 그의 얼굴을 한 번 힐긋거리고 말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운전사가 차에 올라탄 이후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거칠어진 송태갑의 음성과 달리 차분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송태갑은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일단은 주위를 살폈다.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차 앞쪽으론 철제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고, 불빛이라곤 그와 염정석이 타고 있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조명이 다였다.
대체 여기가 어디길래 도착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다시 물으려는데, 밖에서 철컹하고 쇳덩이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떤 송태갑이 조수석 등받이를 꽉 잡았다. 어깨를 낮추며 소리가 난 쪽으로 눈을 돌렸다. 차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은색의 두꺼운 울타리가 개방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울타리가 완전히 열리자 분명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말했던 운전사가 다시 핸들에 손을 올렸다. 차가 전조등을 끄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듯한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왜인지 송태갑은 아까처럼 다그쳐 물을 수가 없었다. 송태갑은 적어도 상황 판단력 하나는 빠른 사람이었다. 주변에 건물 하나 없고, 핸들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신도 아닌 상황에서 운전자를 자극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차가 멈춰 선 것은 그대로 몇백 미터를 더 들어간 후였다. 눈앞에 처음으로 건물의 불빛이 보였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외형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흡사 거대한 공장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축물이었다. 물론 공장이라기엔 은은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1층 창문의 형태가 너무 세련되어 보이긴 했다.
이번엔 정말 도착한 것인지 운전사가 시동을 완전히 껐다.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송태갑이 파드득 고개를 돌렸다. 별장에 그들을 데리러 왔던 수행원이 문을 잡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내리시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얘기하는 게 퍽 깍듯한 자세였지만, 왜인지 기분이 나빴다. 그의 기분이 찜찜한 이유가 여기까지 이동하는 과정이 다소 거칠었던 탓만은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송태갑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들의 뒤로 차 한 대가 더 들어왔다. 염정석이 타고 있던 차였다. 남자는 송태갑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손수 차 문을 열고 염정석을 맞이했다.
“일신은 손님 대접을 이따위로 하나!”
염정석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호통을 쳤다. 늘 보좌진들에게 대접을 받으며 다녔을 그가 한 시간 동안 모르는 길을 달리며 얼마나 부글부글 끓어 댔을지 안 봐도 훤했다. 보통은 염정석이 저렇게 화를 내면 단번에 고개를 조아리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었으나, 그의 앞에 있는 남자는 차 문을 탁 닫으며 고개를 돌리는 게 다였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먼저 돌아서는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염정석이 노여운 숨을 톺아냈다. 송태갑은 재빨리 그런 염정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의원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송 차장! 이 일에 일신이 꼭 필요한 건가?!”
염정석의 외침에 그들의 앞에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남자가 살짝 고개를 트는 게 느껴졌다. 송태갑은 목소리를 낮추며 그를 달랬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의원님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일신이 될 겁니다.”
“아마 꼭 그래야 할 거야!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시원찮은 소리나 듣게 되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콧김을 뿜으며 읊조린 염정석이 송태갑의 어깨를 스치며 걸음을 뗐다. 처음부터 일신과 손잡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그는 이번 일로 단단히 마음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일신 같은 기업을 뒤에 두는 것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훨씬 유리했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 센 염정석이 과연 일신의 제안에 마음을 돌릴지 알 수 없어졌다.
송태갑은 염정석의 뒤를 따르며 소리 없이 입술을 물었다. 다 차려진 밥상인데 노친네의 고집에 엎어질까 걱정스러웠다. 일신이 왜 이렇게 고자세로 나오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도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 보려는 건가. 송태갑은 염정석과 일신의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 떨어져 봤을 때는 공장인가 싶었던 건물은 가까이에서 보니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진 거대한 디자인 하우스 같은 외형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다양한 모형의 장난감 블록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듯한 모양새였는데, 그 모습이 퍽 조화로웠다. 아무것도 없이 잘 깎인 부지에 오롯이 서 있는 독특한 건축물이라니. 송태갑은 꼭 외계인이 세워 놓은 건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런 곳에 대체 왜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 세워져 있는지 잘 이해가 안 됐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회장님이 계실 겁니다.”
앞서 걷던 남자가 입구로 보이는 유리문을 당기며 길을 터 주었다. 염정석은 그런 남자를 향해 끝까지 눈을 흘기다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실내는 마치 미술품이 다 빠진 갤러리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갤러리의 용도로 세워진 건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염정석의 뒤를 따라가던 송태갑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등 뒤의 남자가 다시 문을 밀어 닫기 직전이었다.
“근데, 자네.”
송태갑의 말에 눈을 내리깔고 있던 남자가 시선을 올렸다. 재벌가의 수행인이라기엔 지나치게 맹렬한 눈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태갑이 그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방금 회장님이라고 했나?”
이유연 부회장이 아니라? 덧붙여 묻는 그의 말에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유리문을 밀어 닫을 뿐이었다. 소리 없이 닫히는 유리문이 마치 동이 틀 때까지 열리지 않는 깊은 동굴의 바위 문처럼 느껴졌다. 송태갑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제 뒷덜미를 간질이던 선득한 찝찝함의 실체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일신 그룹의 누구를 만나러 온 거지? 그리고 그들을 데리러 온 차가 왜 두 대였을까? 염정석은 별장에 송태갑이 함께 있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의원님.”
송태갑이 염정석을 불러 세우려는 때였다. 휑한 실내에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염정석과 송태갑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텅 빈 실내를 울리는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송태갑이 걸음의 주인을 찾으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건물 한쪽에 마치 거대한 조형물처럼 비정형화된 모양의 나선형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발소리는 그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찍으며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난간을 붙잡는 하얀 손이 보였다. 계단이 지상과 가까워질수록 걸어 내려오는 사람의 머리꼭지가 점점 더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송태갑보다 먼저 소리를 낸 것은 염정석이었다.
“아니, 당신…….”
말을 제대로 끝맺지는 못했다. 그사이 염정석과 송태갑을 이곳까지 불러들인 호스트는 계단을 완전히 내려와 그들 앞에 섰다. 두 사람은 모두 잠시 말을 잊은 듯했다. 그런 둘을 번갈아 보던 이의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 나긋한 인사에 실내를 채운 공기가 위화감으로 물들었다.
“이지원이라고 합니다.”
신일 그룹의 막내딸이자 마루 미술관의 이지원 관장이 이 자리에 나올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 * *
온여환의 집에서 보내는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환이 사람을 시켜 박하지의 예전 집에서 단출하게나마 옷과 짐을 챙겨다 준 덕에 잠자는 장소만 달라진 기분이었다. 외출을 못 한다는 게 조금 갑갑하긴 했지만, 어차피 생각을 정리하고 머리에 입력해야 할 정보가 많았으니 그 역시 나쁘지 않았다.
처음엔 그의 집에 몸을 숨긴다는 것이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누구라도 마주치게 되면 온여환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온여환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널 숨기고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못 할걸.’
온여환의 말에 따르면 박하지가 사라진 50일 동안 눈이 뒤집혀 그를 찾으러 다녔던 그를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생각은 못 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온여환은 그 기조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바깥에서 박하지를 찾는 데에 보냈다. 물론 흉내만 내는 것이고, 그는 다른 일을 알아보러 다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 때문에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는 박하지는 이제 온여환의 집이 제집처럼 꽤 편하기까지 했다.
부엌에서 커피 한 잔을 내린 박하지가 온여환의 서재로 향했다. 책상에 컵을 내려놓고 그 옆에 엉덩이를 기대앉은 그는 팔짱을 낀 채 자료와 관계망이 더욱 풍성해진 벽면을 바라봤다. 박하지는 어젯밤 온여환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뭐 보고 있어?’
박하지가 서재에 들어섰을 때, 온여환은 책상 앞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은 영어, 반은 한자인 종이 서류를 스캔한 이미지였다.
‘필리핀 정부랑 검찰에서 발표한 비밀 계좌 거래 내역이야.’
얼마 전 필리핀 정부는 마자위가 소속된 홍콩 남부 조직과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로 의심을 받고 있는 비밀 계좌의 과거 거래 내역을 공개했다. 현 대통령이 해당 비밀 계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를 조사 중인 검찰에서도 홍콩 남부 조직과의 거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자세한 정황은 파악 중이라고 발표한 바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린 여환은 그가 품은 의문에 대해 털어놓았다.
‘대통령이 마루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구입한 걸로 비자금을 생성한 건 맞아. 그리고 이번에 밝혀진 비밀 계좌로 비자금을 관리한 것도 맞고.’
‘근데 뭐가 이상한데?’
‘남부 조직과의 거래가 너무 일회성에 그쳐 있어.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다기보단 비자금을 돌리는 과정에서 일회적으로 세탁기를 사용한 수준이야.’
박하지는 마자위가 구도완 몰래 서류로 장난질을 치면서 중국 본토에 뚫려 있는 자신들의 세탁기 성능이 얼마나 빵빵한지, 우리가 왜 홍콩 최대 조직인지 자랑스레 떠들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실제로 홍콩 남부 조직은 마약 사업을 주력으로 하며 몸집을 부풀린 조직인 만큼 사업 수익금의 세탁 과정이 꽤 치밀하게 짜여진 조직이었다. 대통령이 비자금을 세탁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세탁기를 스쳐 간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거래가 있긴 있었다는 거잖아.’
‘이번에 비밀 계좌로 입금된 금액만 20억 달러야. 수익금으로 2조가 넘는 돈이 움직이는 사기극을 도모했는데, 그 담합의 증거가 과거에 겨우 천만 달러 세탁기 돌렸던 이력이라고? 좀 이상하지 않아?’
온여환은 비밀 계좌의 실소유주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마자위와 도모하여 선장의 사업 수익금을 빼돌렸다는 증거가 너무 부실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누가 일부러 몰아가고 있다는 거야?’
‘정황상 의심은 들어.’
‘누가 몰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선장?’
‘선장이든 누구든 대통령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긴 했다. 차기 대선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만 하는 송태갑과 염정석. 그들은 대통령이 무너져야 자신들이 원하는 차기 정권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선장은 왜? 절대로 단순한 복수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선장이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를 폭로하고 그를 무너뜨리는 게 목표였다면, 그 목표를 이룬 후 선장이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이득은 무엇일까?
생각에 잠긴 하지가 책상 위로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서재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컵을 들었다. 입술에 닿는 커피가 다 식어 미지근했다. 다시 컵을 내려놓는데, 그때 현관문에서 도어 록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온여환인가? 하지가 책상에 놓인 탁상시계를 바라봤다. 밤 열 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온여환이 올 때가 다 됐다는 것을 확인한 하지가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서재 밖으로 나가려는 때였다.
“와, 집 좋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건 웬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는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손을 그대로 멈춘 채 굳어 버렸다. 오만 가지 생각으로 순식간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온여환의 집에 누군가 침입한 건가. 손님인가. 이 시간에? 박하지가 집에 있는 걸 아는 온여환이 집에 손님을 들일 리가 없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쥐고 있던 문고리에 진동이 느껴졌다. 놀란 하지가 황급히 손을 떼며 뒷걸음질 침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또 여기 있었어?”
문 뒤에서 나타난 건 다행히도 익숙한 온여환의 얼굴이었다.
“방금…….”
삽시간에 핏기가 가신 얼굴의 박하지가 입술을 뻐끔댔다. 방금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런 말을 하려고 했었다. 온여환의 뒤에서 쏙 얼굴을 내민 여자가 “하이!” 하고 경쾌하게 인사를 건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오랜만이야, 박하지 씨.”
하지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다만 이름을 기억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가 입술을 오므린 채 유, 우, 이따위 발음을 더듬거리고 있으려니 씩 웃은 그녀가 알아서 제 이름을 불었다.
“유성혜요, 유성혜. 우리 마닐라에서 봤잖아.”
“아…….”
“난 박하지 씨 주민등록번호까지 다 외울 판인데 그쪽은 겨우 내 이름 석 자를 몰라주네. 우리 관계가 너무 불공평하다, 그쵸?”
“사찰한 게 뭐 자랑이야?”
무심하게 툭 쏘아붙인 온여환이 문 앞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하지에게 다가섰다. 그의 등 뒤에서 유성혜가 사찰이라니, 지가 다 시켰으면서!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온여환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하지의 앞에 서서 그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밥은 먹고 여기 들어와 있는 거야?”
“아……. 어, 아까 점심…….”
“점심?”
온여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지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저도 모르게 그의 질문에 술술 답하던 박하지가 여환의 뒤에 서 있는 유성혜에게 시선을 던졌다. 유성혜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는 게 보였다.
“야. 나 거실 나가 있을 테니까 둘이 할 거 하고 나와. 눈꼴 시려서 못 봐 주겠네, 진짜.”
유성혜는 아예 손을 뻗어 문까지 쾅 닫았다. 온여환은 닫힌 문을 한번 힐긋거리고 말았을 뿐이었다.
“뭐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지가 제 턱을 쥐고 있는 온여환을 손을 떨어뜨리며 물었다. 금세 내려가는가 싶던 손이 이번엔 하지의 허리에 감겼다. 하지가 팔꿈치를 세우며 그의 가슴팍을 밀었지만, 맞붙는 하체까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사스러운 자세보다 더 따지고 싶은 게 있었다.
“뭐냐고. 저 사람이 왜…….”
“믿어도 되는 애야. 국정원 서버 뚫고 박양일 편지 찾게 도와준 거 다 쟤 작품이고.”
혼자 해 온 일이 아닐 거라는 예상은 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박하지는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문장에 조금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네가 언제부터 누굴 믿었는데?”
나는 그렇게 못 믿어서 미행에 사찰에 별짓을 다 했으면서. 그 말을 들은 온여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하지의 허리를 안은 채 그를 내려다보는 여환의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내려갔다.
“도련님.”
그 놀리는 듯한 호칭도 오랜만이었다.
“너 지금 질투해?”
“말 같지 않은…….”
해명을 뱉기도 전에 입술이 덮쳐졌다. 미처 맺지 못한 말이 웅얼웅얼 여환의 입 안에 먹혔다. 미친놈아, 밖에 사람 있잖아. 그 말 역시 소리가 되진 못했다. 그를 떨어뜨리려 이리저리 고개를 비틀며 몸을 움직이는데, 하지의 얇은 티셔츠 안으로 불쑥 손이 들어왔다. 놀란 하지가 있는 힘을 다해 여환의 어깨를 밀쳤다.
“풉!”
하지의 힘에 가볍게 밀려난 여환이 닫힌 문에 등을 기댔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 진짜. 분하게 중얼거린 하지가 여환을 옆으로 확 밀치며 문을 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소파에 앉아 있던 유성혜가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뺐다. 방에서 나오는 하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조금 의뭉스럽다 싶더니, 하지의 뒤를 따라 나오는 온여환을 바라볼 때는 아주 게슴츠레해졌다.
“할 거 하고 나오랬더니 진짜 하고 나왔나 봐.”
유성혜의 말에 안 그래도 붉어져 있던 박하지의 얼굴이 이제 아주 터질 듯했다. 온여환은 그런 하지의 손목을 뒤에서 잡아채더니 그대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박하지와 유성혜의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박하지는 그런 여환의 뒤에 숨어 조용히 젖은 입술을 훔쳤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네가 찾은 것부터 보여 줘.”
“예예, 지만 잘났지, 아주.”
빈정대듯 중얼거린 유성혜가 가방 안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녀의 손가락이 타다닥,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내가 박하지 씨의 생물학적 친부의 정보를 좀 찾아봤어요.”
화면에서 슬쩍 시선을 뗀 유성혜의 눈이 박하지와 온여환을 번갈아 봤다.
“이것도 얘가 시킨 거니까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진 말고요.”
안 좋게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박하지는 유성혜의 말을 듣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생물학적 친부라는 단어도 낯설거니와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박양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박하지의 머릿속에서 박양일은 여전히 그의 아버지였지만, 진짜 아버지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박하지는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네 친부에 대해 먼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내가 부탁한 거야.”
바짝 굳어 있는 하지의 무릎 위로 온여환의 손이 슬며시 올라왔다. 박하지는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그와 눈을 맞췄다. 온여환의 손끝이 그의 무릎을 살짝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겠어? 꼭 그렇게 묻는 것만 같은 행동이었다. 박하지는 그 작은 몸짓에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유성혜의 노트북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아예 하지에게 노트북을 통째로 돌려 주며 말했다. 화면엔 눈썹이 짙고 얼굴이 뾰족한 남자의 증명사진이 확대되어 있었다.
“일단 이 사람이 박하지 씨의 친부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뭐, 유력한 사람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들어요.”
박하지는 유성혜의 말을 들으면서도 시선은 오로지 화면 속 사진에 박혀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앳됐다. 아무리 봐도 박하지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지는 않았고, 끽해 봐야 스무 살 남짓밖에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 친부라는 사람의 사진을 이런 식으로, 그것도 이렇게나 어린 얼굴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박하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유성혜가 난감한 얼굴로 온여환을 봤다. 어떡해, 계속해? 입 모양으로만 묻는 그녀의 모습에 여환이 하지의 옆얼굴을 힐긋거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흠, 사진 속 남자 이름은 김현필, 70년생이고요. 어릴 때 보육원에서 자라서 확인된 친인척은 없고, 고등학교 중퇴 후 같은 보육원 출신 친구랑 동거, 고정된 직업은 없었던 것 같아요. 박하지 씨랑 유전자 정보가 일치하는 신원 미상 변사자……. 어, 편의상 A라고 합시다. 그 A가 발견됐던 달에 실종 신고가 접수됐는데, 당시 나이 만 21세 성인 남성이라 실종 신고 대신 가출 신고로 접수됐어요. 그 뒤 기록이 없는 걸 봐선 아마 못 찾은 것 같고요.”
유성혜는 박하지의 굳은 표정을 눈으로 살피면서도 말을 잇는 걸 멈추진 않았다. 거침없이 얘기하는 게 차라리 하지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하지는 마치 영화 속 대사를 듣는 것처럼 무감하게 유성혜의 말을 곱씹었다. 김현필, 70년생, 21살. 고작 20살이 갓 넘은 나이에 실종되었다는 남자의 얼굴을 하지는 다시 한번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에게서 혹시 자신의 얼굴이 보일까 싶어서였다. 닮은 구석은 쉽게 찾을 수 없었지만, 가족도 없고 고정된 직업도 없이 살았다는 그의 인생이 지금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다.
“근데 좀 이상한 기록이 하나 남아 있더라고요.”
“무슨 기록?”
“김현필 가출 신고를 접수한 사람이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던 한병수라는 남자거든? 근데 이 이름을 왠지 어디서 본 것 같다 싶더라고. 그래서 A의 기록을 다시 살피다 보니까……. 여기 봐 봐.”
노트북 화면에 새로운 이미지를 띄운 유성혜가 모니터 어딘가를 손으로 짚었다. 하지는 고개를 빼며 그녀의 손이 닿은 곳을 자세히 확인했다. 유성혜의 손끝 바로 위에 한병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현필의 기록이 아니라 A의 기록에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설마 단순한 동명이인은 아닐 것이다. 하지가 이 이름이 왜 여기에서 나오냐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올리자 유성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게 무슨 기록이냐면, A가 처음 발견됐을 당시 한병수가 이 변사자를 김현필로 지목했다는 기록이거든.”
그러니까 한병수가 신원 미상 변사자의 신원을 확인하러 경찰서에 방문했던 기록이라는 거였다.
“인상착의며 뭐며 다 김현필이 분명하다고 했었는데, 다음 날 갑자기 자기가 착각한 것 같다고 말을 바꿨어.”
“신원 미상 변사자 기록 중에 그런 경우는 흔하잖아.”
온여환이 말을 얹자 유성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하지. 흔하긴 한데, 이 한병수는 A의 사체 사진까지 확인하고 갔었단 말이야. 뭐, 사체 발견 당시 이미 부패가 꽤 진행된 상태였다는 거 감안하면 얼굴을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었을 수도 있긴 해. 그럼 사진을 본 그때 잘 모르겠다고 했어야지. 경찰서 나서기 직전까지도 김현필이 맞는 것 같다고 했던 사람이 다음 날 갑자기 말을 바꾼 건 좀 수상하지.”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한병수는 김현필이 가출 당일 입고 나갔던 옷, 신발, 심지어는 속옷 색깔에 대한 증언까지 번복했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김현필의 옷과는 조금 다르다는 거였다. 석연찮은 번복이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유전자 검사니 뭐니 하는 것이 흔하지 않을 때였으니 경찰도 김현필의 생활품을 수거해 유전자 검사를 시도해 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출 신고가 접수된 사람도 성인 남성이었고 강변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 사체 역시 성인 남성이었다.
그 당시 그런 식으로 집을 나가거나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사체 대신 해결해야 할 사건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김현필의 가출과 이름 모를 사체가 경찰의 뇌리에서 금방 잊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거 하나 더.”
“또 뭐.”
“한병수가 말을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의 계좌로 1억이 꽂혔다는 거지.”
유성혜는 이 말을 가장 먼저 했어야 했다. 앞의 불확실한 추측들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는 증거였다.
“한병수 이 사람 신상이랑 현재 거주지 뽑아 둔 거 있지?”
온여환은 곧장 유성혜에게 그의 주소지를 물었다. 당연히 확인해 뒀다며 고개를 끄덕인 유성혜가 그의 메일로 파일을 보내 주려던 때였다.
“같이 가.”
박하지의 말에 온여환과 유성혜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이 사람 만나러 갈 때 나도 같이 가자고.”
“……오늘 안 갈 거야.”
“그럼 내일 같이 가.”
온여환의 표정이 굳었다. 박하지의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사라진 체온에 하지가 허전해진 제 무릎을 한번 봤다가 온여환의 얼굴을 봤다. 그는 하지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넌 안 돼.”
“왜?”
“몰라서 물어? 너 지금 여기서 못 나가. 일 끝나기 전까진 위험하다고.”
“너랑 같이 움직이면 되잖아. 어차피 내가 네 옆에 붙어 있을 거 아무도 모를 거라며.”
“그렇다고 얼굴 드러내고 돌아다녀도 괜찮다고는 안 했어.”
“이거 내 일이야. 네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넌 그렇게 생각했어? 네 일은 네 일이고, 내 일은 내 일이라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
기어이 박하지의 언성이 높아졌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가 온여환을 똑바로 보며 섰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금방이라도 화를 쏟아 낼 듯했다. 그 눈빛을 가만히 받아 내는 온여환의 방어력도 만만치 않았다. 느닷없이 그들 사이에 낀 유성혜만 난처해졌다. 웬만하면 유성혜도 둘의 화가 사그라들 때까지 쥐 죽은 듯 닥치고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내려다본 유성혜가 안 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기요, 싸움 중에 미안한데요. 내가 여기 오래 머물 수가 없는 몸이라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거든요. 계속 싸우실 거면 저 나간 후에 이어서들 해 주실래요.”
몸을 일으킨 유성혜가 들고 온 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온여환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유성혜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으로 향하기 전 박하지에게 잠깐만, 하고 나직이 양해를 구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야, 너 여기서 오래 못 버텨. 알지?”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유성혜가 자신을 뒤따라 나온 온여환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거실에 있는 박하지를 의식한 듯 온여환이 중문을 닫으며 짧게 답했다. 알아.
온여환도 모르지 않았다. 박하지를 이곳에 계속 숨겨 두고만 있을 순 없다는 걸. 지금은 박하지가 어디에 있더라도 위험했다. 그가 신경 쓸 것이 뻔해서 자신의 집이라면 안전할 거라고 말은 했지만, 이곳 역시 언제까지고 안전한 장소일 수는 없었다.
대통령의 비자금 이슈가 터지며 원장이든 송태갑이든 모든 관심이 그쪽에 몰려 있어 상대적으로 박하지의 추적에 전력을 쏟고 있지 않을 뿐, 박하지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찾아낼 인간들이었다. 어쩌면 가장 치졸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을 쓸지도 몰랐다.
박하지의 귀국을 도운 사람이 평화흥신소 채성균 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직후 며칠 동안 흥신소를 털고 있는 것만 봐도 알조였다. 강혜령이 운영하는 연정엔 닷새째 요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사흘 전부터는 아예 오픈조차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은 모두 박하지도 모르는 내용들이었다. 온여환이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아마 앞으로도 그가 박하지에게 알릴 일은 없을 것이다.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녀석이라는 걸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병수 신상은 메일로 보내 줄게. 너도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여.”
말을 마친 유성혜가 현관문을 밀었다. 여환은 그녀가 집을 나서자마자 현관문 위에 달린 잠금장치를 한 번 더 돌리고 걸쇠까지 건 후에야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둘만 남은 공간에 내려앉은 정적이 사뭇 아슬아슬했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는 순간 뾰족하게 돋아나 공격을 해 올 것처럼.
“하지야.”
그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온여환이었다. 박하지의 앞에 서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여환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힘이 빠져 있었다.
“너랑 이런 걸로 싸우고 싶지 않아.”
“나도 싸우자고 한 말 아니야. 아니, 이게 싸울 일이나 돼?”
박하지도 온여환처럼 차분히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잘되진 않았다. 싸우자는 게 아니라면서도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자꾸 엇나갔다. 억울했다. 화도 났다. 온여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서러웠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자신이 배제된다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 박하지는 그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난 당사자잖아. 아까 그 사람이 정말 내 아버지…….”
말을 잇던 하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유성혜의 노트북으로 잠깐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 머리에 콱 박혔다. 박하지보다도 어리고, 박하지와 같은 나이는 영영 살아 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어쩌면 제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남자. 박하지는 그런 사람을 하필 제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 버린 순간에 찾았다.
목숨 줄이 코앞까지 닳아 있어 친아버지를 찾았다는 기쁨도,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슬픔도 누릴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박하지는 수십 년을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던 것보다 이런 순간까지 제 살길만 궁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후, 하고 짧게 숨을 뱉은 하지가 다시 여환과 눈을 마주쳤다.
“그 사람이 정말 내 아버지라면, 그럼 누구보다 내가 먼저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온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을 듯한 완강함이 보였다. 그러나 이번엔 박하지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온여환이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든 갈 방법을 생각해 보려던 참이었다.
“혹시 아직도 날 못 믿어서 그래?”
그래, 혹은 안 돼, 이 두 대답 중 하나가 튀어나올 거라고만 생각했던 박하지는 온여환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말이 나와 당황했다. 뭐? 되물으니 온여환이 차분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날 못 믿어서, 그래서 네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거냐고.”
박하지의 눈가가 와작 구겨졌다. 처음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해가 안 돼서 반응을 못 했다면, 지금은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이건 누가 들어도 온여환이 박하지의 말을 꼬아서 듣는 거였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하지의 자세가 비딱해졌다.
“대체 왜 자꾸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 내가 널 못 믿었으면 이 집에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날 믿어?”
“…….”
믿어. 그 한마디면 됐다. 온여환의 말도 안 되는 꼬투리도, 이상한 흐름으로 뻗어 나가는 감정싸움도 그 한마디로 모두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박하지는 온여환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기만 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것은 분한 숨소리뿐이었다.
박하지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 말 한마디가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목구멍에 코르크를 꽂은 것처럼 말이 안 나오는지. 지금 박하지의 곁에 남은 사람이라곤 온여환뿐이었고,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역시 그 하나뿐이었는데, 어째서 그 말은 나오지 않는지.
박하지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리던 온여환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가에 설핏 걸렸다가 사라지는 자조를 본 하지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가 자신의 반응에 상처 입었다는 것이 느껴졌고, 그 상처가 꼭 박하지의 손끝에 생겨 피가 새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하지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마른세수를 하듯 큰 손으로 얼굴을 훔치는 온여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니다. 그냥 나 혼자 찔려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해.”
“…….”
“원래 죄가 많은 사람이 제 발 저리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든 온여환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지쳐 보이기도 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더 괴로워진 박하지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는데, 이번엔 온여환이 그 입을 막았다.
“이건 내일 다시 얘기하자.”
“…….”
“나 좀 씻고 나올게.”
돌아서기 전 박하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가 떨어지는 손길이 아쉬웠다. 하지는 욕실로 향하는 온여환의 뒷모습이 문 뒤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와의 접촉에 심장 박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버릇처럼 눈으로 그의 모습을 좇는 것도, 그가 자신의 말에 마음이 상했을까 봐 걱정하는 것도, 모두 박하지가 온여환을 사랑한다는 증거인데 왜 그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는 이렇게 어려운지.
사랑과 믿음은 같이 갈 수 없는 감정인 걸까. 아니, 애초에 믿음이라는 것은 감정에 묶이지 않는 마음인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과 상관없이 여전히 온 마음으로 서로를 믿진 못하는 걸까.
온여환이 들어간 욕실에선 꽤 오랫동안 물소리가 났다. 거실 한가운데 못이 박힌 듯 꼿꼿이 선 박하지 역시 꽤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
* * *
달빛이 쏟아지는 천창 아래, 넓다 못해 휑하기까지 한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은 마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즐겼던 식탁을 닮은 듯했다. 그 기다랗고 넓은 식탁은 채운 것은 달랑 세 사람이 다였다. 그중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을 움직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지만 말이다.
“음식들이 입맛에 안 맞으세요?”
이지원은 진한 레드 와인 소스가 끼얹어진 안심 스테이크를 반쯤 썰어 먹은 후에야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말이 무색하게도 음식은 훌륭했다. 송태갑이 먹은 거라곤 빵 한 입과 스테이크 한 조각이 다였으나 그것만 먹어도 충분히 훌륭한 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음식을 따뜻하게 준비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으나, 사실 진짜로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이지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송태갑과 염정석은 내내 그 얘기를 누가 먼저 꺼낼지 서로 눈빛만 교환하고 있었다.
“혹시 먼 길 오시게 해서 기분 상하신 거라면 죄송해요. 여기만큼 조용히 이야기 나누기 좋은 곳이 또 없어서요.”
이지원의 시선이 정확히 염정석을 향했다. 사르르 휘어지는 눈매가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
“제 딴에는 신경을 쓴다고 쓴 건데 두 분을 불쾌하게 했나 봐요.”
차에서 내렸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이따위로 대우한 사람을 만나면 멱살이라도 잡아챌 듯한 기세였던 염정석은 정작 이지원을 앞에 두곤 낮은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불쾌했다기보단 당황스러워서, 하고 말끝을 흐리는 게 딱 청문회에서 답변을 피하려는 국회의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한심한 모습에 송태갑은 속으로만 혀를 찼다. 사실 염정석을 비웃으면서도 송태갑 역시 그의 마음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오빠나 언니에 비해 경영 능력도, 사교성도 한참 떨어져 재벌가 사교 모임에도 잘 모이지 않는다던 일신 그룹 미모의 막내딸 이지원의 실제 모습은 송태갑이 알고 있던 것과 살짝 달랐다.
물론, 부드러운 말투나 고전 미인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는 그가 알고 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자회견이 끝남과 동시에 일신 그룹과 대통령 비자금 계좌 관련 검색 키워드를 뚫고 ‘이지원 사진’이라는 키워드를 올렸던 것이 충분히 설명되는 미모였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진으로 느껴지던 우아하고 이지적인 분위기 외에 묘하게 설명하기 힘든 아우라 같은 것이 있었다. 기자회견장에서의 모습보다 더 세련되게 세팅된 헤어나 붉게 칠한 립스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면, 혹시 저희 오빠가 나오기를 기대하셨나요?”
이지원이 송태갑과 염정석의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콕 집어 꺼냈다. 사근사근하게 웃고 있어서 더욱 사람 입을 닫게 하는 미소였다. 바로 저런 점이 송태갑이 그녀에게서 느끼는 묘한 위압감이었다. 염정석은 이미 그 분위기에 질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얘기를 꺼내야 하는 건 송태갑뿐인 듯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송태갑이 접시 옆에 놓여 있던 냅킨으로 괜히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뭘 먹은 게 없어 어차피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냅킨을 내려놓은 그가 자신을 향하는 이지원의 눈을 바라봤다. 새카만 동공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었다.
“이지원 관장님이 계실 줄은 전혀 몰랐던 게 사실입니다. 저희는 이유연 부회장님, 아니면 이기문 회장님을 예상했기 때문에…….”
“저희 아버지요?”
송태갑의 말을 자른 이지원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죄송해요. 그러면서 손으로 입가를 가려 보긴 했으나, 그런다고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잔뜩 휜 눈매까지 가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던 이지원은 그렇게 몇 초가 더 흐른 후에야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흠, 하고 작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똑바로 드는 그녀의 입가엔 여전히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죄송해요. 좀 웃겨서요.”
“대체 뭐가…….”
“침대에 누워서 오늘내일하시는 분이 어떻게 이런 델 나온다고 상상하셨는지.”
“……예?”
송태갑이 느리게 눈을 끔뻑거렸다. 건강이 안 좋은 아버지의 얘기를 하며 저토록 부드럽게 웃는 이지원의 모습이 오디오가 맞지 않는 영상을 보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두 분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싶기도 하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스테이크 접시를 슬쩍 밀어 낸 이지원이 테이블 위에 양손을 올리고 깍지를 꼈다. 마디가 얇고 긴 검지가 하얀 손등 위를 톡, 톡, 두드렸다. 으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말을 고르는 그녀의 표정은 혼자만 알고 있던 이야기를 처음 꺼내 놓으려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보였다.
“자, 그럼 일단 상황 정리부터 해 드릴게요.”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푼 이지원이 탁, 하고 식탁을 내리쳤다.
“마닐라에서 선장의 사업이 엎어졌어요. 그리고 그 수익금이 백근호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로…….”
“잠시, 잠깐만요.”
송태갑이 다급하게 이지원의 말을 막았다. 이지원은 말을 잇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입술을 벌린 채 비스듬히 고개만 기울인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그 눈길이 송태갑을 향할 때는 등줄기로 스산한 한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뭐죠?”
“과, 관장님이 선장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그거 아는 게 뭐 새삼스러운 일인가요? 청와대도 알고 여기 계신 두 분도 아는 사실인데?”
“그렇지만…….”
“말 끊지 마세요. 저 말 끊는 거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이지원의 미간 사이가 미묘하게 좁아졌다. 만남 이후 처음으로 달라진 그녀의 인상에 송태갑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지원은 그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표정을 풀었다. 마치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한 미소를 장착한 그녀가 짝, 하고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그럼 다시 시작할게요.”
해맑게 말하는 얼굴이 어쩐지 처음 봤을 때의 우아한 얼굴과는 너무나 달라 보였다.
“선장의 사업 수익금이 백근호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로 전달됐어요. 비자금 계좌를 관리해 주던 재벌가의 자제가 직접 양심선언도 했고, 현재 필리핀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홍콩 남부 조직원과 비자금 계좌의 연결 고리도 발견됐으니 아마 백근호의 정치 인생, 아니, 그분의 인생 자체가 회생 불가가 되겠죠?”
그렇게 말한 이지원이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빵 접시를 끌어 오더니 그 안에 남아 있던 크루아상 하나를 휙, 날렸다. 염정석의 시선이 빵을 따라 공중을 날았으나 송태갑은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이지원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백근호한테 비자금을 갖다 바쳤던 불쌍한 우리 오빠. 혼외자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겠다고 평생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 멍청하게 백근호랑 같이 쓸려 가게 될 거고요.”
이지원이 두 번째 크루아상도 식탁 밑으로 떨어뜨리더니, 마지막 남은 크루아상을 손에 집었다. 마찬가지로 공중을 향해 날아갈 줄 알았던 빵은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송태갑에게로 날아왔다. 갑자기 얼굴 앞으로 날아드는 빵을 빠르게 잡아 내자 이지원이 와, 하고 박수를 쳤다.
“송 차장님 순발력 좋으시네요.”
그 말이 정말 순수한 칭찬처럼 들려서 섬뜩했고, 이어진 말은 그 말투와 어울리지 않아 더욱 섬뜩하게 느껴졌다.
“참고로 그건 멍청한 정부 밑에서 열심히 휘둘리던 우리 국정원장의 모가지였어요.”
“예?”
“그럼 이 빈자리들은 누가 채워야 할까요?”
어느새 다 비워진 접시를 가리키며 눈을 빛낸 이지원이 옆으로 치워 놨던 자신의 스테이크 접시를 끌고 왔다. 그러곤 내려놓았던 포크를 들어 가니쉬로 곁들여져 있던 구운 방울토마토 하나를 콕 찍었다. 힘을 너무 많이 줬는지 접시 위로 포크가 미끄러지며 거북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지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빈 접시 위에 방울토마토를 톡 떨어뜨렸다.
“대통령 염정석, 국정원장 송태갑, 그리고 일신 그룹의 새로운 수장 이지원.”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거론하는 수에 맞춰 방울토마토를 옮겼다. 레드 와인 소스가 뚝뚝 떨어진 빈 접시엔 마침내 방울토마토 세 개가 나란히 놓였다.
“이렇게 셋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거죠. 낡은 것들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다 갖다 버리고요.”
“…….”
“하, 제가 이 판을 짜느라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두 분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기자들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눈가를 찡긋거리는 이지원의 모습에 송태갑은 얼마 전 그녀가 열었던 기자회견을 다시 떠올렸다. 포털에 돌아다니는 기자회견 사진 중엔 그녀가 자수가 박힌 손수건으로 붉어진 눈가를 훔치는 사진도 있었다. 손수건에 새겨진 자수는 명품 브랜드에서 찾을 수 없는 디자인이라서 그녀가 직접 새긴 자수라느니, 유명 디자이너가 손수 새겨 준 자수라느니 쓸데없이 갑론을박을 펼치는 댓글을 본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개중엔 이지원의 눈물에서 진실성이 엿보인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었다.
송태갑은 문득 그 댓글을 썼던 이들이 제 앞에 앉은 이지원을 보면서는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 송태갑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을 이지원 관장이 다 계획했다는 겁니까? 일부러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다행히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염정석이 오랜만에 말을 꺼내 주었다. 이지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확실히 마무리하려면 아무래도 제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덕분에 좀 피곤하게 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모든 책임은 우리 이유연 부회장이 다 안고 갈 테니까요. 지금 저에 대한 여론도 나쁘지 않고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겁니까? 일신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인데 왜…….”
“당연히 타격이 있겠죠. 하지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아시잖아요. 이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꽤 괜찮은 거 아니에요? 저는 두 분이 저와 함께 그 일을 같이해 주실 분들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건데.”
“우리가 싫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마지막 말은 드디어 할 말을 찾아낸 송태갑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차피 일신은 쥐고 있으면 좋은 카드, 없으면 조금 아쉬운 카드 정도라는 거 아실 텐데요.”
그는 이지원에게서 이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결국 대통령을 만드는 판이고, 나라를 굴리는 판이었다. 그런 판을 얘기하며 한낱 기업가의 딸일 뿐인 사람이 중심에 서게 할 수는 없었다.
“조금 아쉽기만 한 카드가 아닐 텐데요.”
그러나 이지원은 송태갑의 말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 염정석 의원님은 현직 국정원 소속 요원과 공모하여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사건을 조작하신 거나 다름없고.”
“조, 조작이라니!”
발끈한 염정석의 반발을 가뿐히 무시한 이지원이 이번엔 송태갑을 보며 말을 이었다.
“송태갑 차장님은 과거에 대통령 비자금 계좌를 덮어 주기 위해 고의로 다른 사건을 터뜨려 그 보상으로 차장 자리에 오르신 분이잖아요. 제가 이걸 다 아는데, 정말로 없으면 아쉽기만 하시겠어요?”
이지원이 그 사실을 어떻게 다 아는 걸까. 선장의 얘기를 꺼낼 때부터 그녀가 가진 정보력이 깊다는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국정원 내부 사정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송태갑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뗐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오늘 이지원 관장의 이면을 알게 된 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제 이면이요?”
송태갑의 말에 이지원이 푸흡, 소리 내어 웃었다.
“뭘 얼마나 아셨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게 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면 사용해 보세요. 근데 전 두 분이 어떻게 나오든 별로 무섭지가 않은데, 두 분도 제가 어떻게 나오든 별 타격 없으신 거 맞죠?”
이지원은 송태갑이나 염정석이 자신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이지원은 기업가지만 송태갑과 염정석은 공직자와 정치인이었다. 국민들이 원하는 도덕적 잣대가 훨씬 높았고, 그 잣대를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때 그 타격도 훨씬 더 크게 입는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이지원에게 싸움을 걸 수조차 없는 위치라는 거였다. 뭔가 잘못됐다. 권력 위에 또 다른 권력이 군림하는 기분이었다.
“뭘 원해서 이러는 겁니까?”
송태갑의 의문에 이지원이 피곤하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을 말씀드려요. 그냥 의원님은 대통령이 되시고, 차장님은 원장이 되시면 돼요. 제가 잘 서포트 해 드리겠다니까요.”
서포트를 해 주겠다는 말이 꼭 내가 당신들의 서포트를 받겠다는 말처럼 들리는 게 송태갑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이지원은 확실히 송태갑과 염정석에게 원하는 것이 있고,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아, 그 전에 이거 하난 확실히 하고 가죠. 선장은 그만 쫓는 걸로.”
벌써부터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이지원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송태갑은 그녀가 하는 요구의 내용이라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선장은 왜…….”
이지원이 원하는 것이 일신 그룹의 회장 자리인지, 돈인지, 권력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제가 그 사람을 좀 알거든요. 이 일에 그 사람 공도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 이대로 조용히 사라질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그건 안 됩니다.”
송태갑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지원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려고 했다. 송태갑은 그 찰나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선장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있습니다.”
“……난 또 뭐라고. 당연히 더 있겠죠. 그게 무슨 문제라고요. 어차피 아무도 못 밝히는데.”
“아뇨. 선장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별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던 이지원의 동작이 뚝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송태갑을 향했다. 뭘 안다고요? 묻는 목소리엔 큰 고저가 없었다. 송태갑은 짧은 순간, 이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으나,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지원은 송태갑과 염정석이 불리해질 수 있는 사실들을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이 순간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겨 봐야 송태갑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박양일……. 그러니까, 예전 비코어 그룹의 회장이었던 사람이 편지를 남겼어요. 선장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이지원의 손에 들려 있던 포크가 접시 위에 놓였다. 딱, 날카로운 소리가 높은 천장까지 치솟았다. 반면에 뒤이어 나온 이지원의 음성은 고요하게 식탁 위만 맴돌았다.
“그 편지, 혹시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묻고 있지만 부탁은 아니었다. 송태갑은 이 대화 역시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 * *
박하지는 온여환이 침대를 빠져나가던 순간에도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다. 그는 침실 문이 꼭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옆으로 돌아누워 있던 몸을 바로 눕혔다. 눈을 뜨자 침실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제 막 동이 튼 이른 새벽 시간이었으나 꼼꼼하게 쳐진 암막 커튼은 동살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는 어둠 속에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문밖에서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온여환이 나갔다. 박하지는 이불 속에서 한숨을 뱉은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닫힌 현관문을 잠시 바라보고 서 있던 그가 욕실로 향했다. 온여환의 칫솔 옆에 나란히 세워진 칫솔을 빼서 양치를 하고 세수를 했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 풍경이었다. 박하지 몰래 집을 나선 온여환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가 결국 자신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을 것이며 혼자 집을 나설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어젯밤 온여환에게 그런 질문을 들었고, 결국 그가 원하던 대답을 해 주지 못한 박하지도 끝까지 그를 따라나설 수 없으리라는 것을. 박하지가 그를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결국 그를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런 방법을 택하려는 건가.
욕실에서 나온 박하지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자신의 보스턴백을 내려다봤다. 그 안엔 얼마 전 온여환이 박하지의 서울 집에서 가지고 왔던 옷 몇 벌이 들어 있었다. 외출복이라고 입고 다녔던 옷들이었다. 지금 보면 온여환이 집에서 입고 돌아다니는 옷들보다 더 후줄근했지만, 그래도 박하지에겐 꽤 익숙한 것들이었다. 하지는 열려 있는 가방 틈으로 그 옷들을 내려다보며 손으로 뒷덜미를 주물럭거렸다. 나갈까, 말까. 짧은 고민의 몸짓이었다.
저번처럼 도망을 치려는 건 아니었다. 이제 더 도망갈 곳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박하지는 단지 제 인생의 오랜 의문점을 스스로 해소하고 싶을 뿐이었다. 온여환의 손에만 내맡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박하지의 손이 기어코 가방 안에 든 옷을 뒤적였다. 오래 입지 않고 처박아 두기만 해서 모양을 잃고 구겨진 옷들 사이로 유난히 반질반질한 옷감이 만져졌다. 이런 옷이 있었나. 하지가 제 손에 걸려든 옷을 쑥 빼냈다. 꺼내 놓고 보니 무슨 옷인지 단번에 알 것 같았다. 마닐라로 떠나기 전, 박양일의 제삿날에 온여환이 보내 주었던 검은색 정장이었다. 국화 꽃다발과 함께였다.
박양일의 소식이 처음 전해졌던 그때 박하지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것에 용서라도 구하려는 것처럼. 어쩌면 박하지가 죽은 제 친아버지를 찾아 나서려고 마음을 먹은 날 입기에 딱 적합한 옷일지도 몰랐다. 그는 결국 온여환이 사 준 슈트를 선택했다.
“……딱 맞네.”
여환에게 받은 이후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었는데, 걱정할 것도 없이 딱 맞았다. 거울 앞에서 똑 떨어지는 어깨선과 소매 따위를 들여다보던 하지가 그 위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볼 캡을 눌러썼다. 그가 마닐라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 썼던 모자였다. 반쯤 가려진 제 얼굴을 가만 보던 하지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 준비가 끝났다.
드레스룸에서 나온 그는 온여환의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 그가 쓰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패스워드를 입력하라는 화면이 떴다. 박하지는 당황하지 않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일전에 온여환이 알려 준 것이었다. 물론 그도 박하지가 이런 식으로 사용할 것을 알고 알려 준 것은 아니겠지만.
시작 화면이 뜨자 하지는 인터넷 창을 열고 그의 메일 주소를 입력했다. 유성혜가 그의 메일로 한병수의 신상 파일을 보내 주겠다고 했었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패스워드 창에 노트북 비밀번호와 같은 것을 입력해 봤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엔터를 눌렀다.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다는 문구와 함께 로그인이 되지 않았다. 역시 노트북 비밀번호와 메일 비밀번호를 똑같이 해 놓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그의 메일을 열어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괜히 여러 번 시도했다가 그에게 알림 메일이라도 가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만일 유성혜가 어제 온여환에게 한병수의 신상 파일을 메일로 첨부해서 보냈다면, 그리고 온여환이 그 파일을 저장해서 확인했다면, 그 저장 파일은 어디에 있을까?
퍼뜩 눈을 빛낸 박하지가 다운로드 된 파일들이 자동 저장되는 폴더를 열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던 때보다 더 강한 확신이 있었는데, 불행히도 폴더는 텅 비어 있었다. 혹시 다른 폴더에 저장했을까? 박하지는 드라이브 내에 숨겨진 폴더를 죄다 열어 봤다. 그러나 유성혜에게 온 파일은 찾을 수 없었다. 몇몇 폴더는 아예 보안이 걸려 있어 열어 볼 수도 없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려던 찰나, 박하지의 눈이 다시 노트북의 첫 시작 화면을 바라봤다. 삭제된 파일이 옮겨지는 휴지통 폴더가 보였다. 하지가 마우스를 움직여 휴지통 아이콘을 클릭했다. 열린 폴더에 파일 몇 개가 남아 있었다. 가장 최근에 삭제된 건지 맨 위에 올라와 있는 파일의 이름은 알파벳 대문자 세 개로만 이뤄져 있었는데, 박하지는 그 이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HBS…….”
한병수의 이니셜이었다. 하지가 그 파일 위에 마우스 커서를 옮겼다. 손가락 한 번만 움직이면 한병수의 주소지를 알 수 있고, 온여환 몰래 그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박하지는 이제 와서 클릭 한 번을 못 해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니, 이제 와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그는 계속 혼자서 갈등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온여환을 믿지 못해서 이러는 건가.
어제부터 내내 생각했지만 박하지는 쉬이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믿는다는 게 대체 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이대로 폴더를 닫고 노트북을 끄면, 그러면 온여환을 온전히 믿는 게 되는 걸까. 온여환이 저를 대신하여 모든 걸 알아 올 때까지 얌전히 집 안에 틀어박혀 손이나 빨고 있는 것, 그런 게 박하지가 온여환을 믿는다는 증거가 되는 걸까? 그런 건 그냥 책임을 전가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박하지에게 믿음이란 서로를 향한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었는데, 과연 온여환과 그의 사이에도 그런 것이 움틀 수 있는 걸까. 그거야말로 정말 확신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아. 듣는 사람도 없건만 올라오는 한숨을 속으로만 삼킨 박하지가 마우스에서 막 손을 떼려던 때였다. 그의 눈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한병수의 파일보다 좀 더 아래에 있는 이미지 파일이었는데, 작게 축소된 미리보기 화면 속에 찍힌 사람의 인영이 묘하게 익숙했다.
하지의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이미지 파일을 클릭하는 동작에서 아까와 같은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파일이 열리자 화면 가득 사진이 떠올랐다. 박하지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인영이 확대되어 나타났다.
“……누나?”
그 인영은 문 닫힌 연정 앞에 서 있는 혜령이었다. 하늘이 어두웠고, 주변 상가엔 다 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연정 간판엔 왜인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리고 가게 밖으로 나와 있는 혜령은 왜인지 몹시 수척해 보였다. 영업시간엔 항상 깔끔하게 화장을 끝내고 손님을 맞이하는 그녀였는데, 메이크업도 안 한 얼굴이었다. 불길한 위화감이었다.
하지는 마우스 스크롤 위에 얹어 두고 있던 중지를 천천히 움직였다. 스크롤이 돌아가며 다음 이미지 파일로 넘어갔다. 혜령이 담배를 태우는 모습,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모습, 불 꺼진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뒤로는 가게 외관 사진만 이어졌다. 온여환이 왜 강혜령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진 모르겠으나 특별할 건 없어 보였다.
괜한 기우였나. 그런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움직이던 박하지는 문득 사진 속에서 두 명의 남자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는 다시 스크롤을 올려 처음 보았던 사진으로 되돌아갔다. 혜령의 모습 위주가 아닌 사진 전체를 다시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가게 문 앞에 서 있는 혜령을 바로 옆 상가 뒤에서 고개만 내민 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초점이 혜령에게 맞춰져 있어 처음엔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남자의 모습을 알고 보니 단번에 보였다.
그들은 혜령의 모습이 찍힌 사진에 배경처럼 머무르며 그녀를 관찰하는 것은 물론, 혜령이 사라진 뒤에도 가게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푸석하던 혜령의 안색, 휴일 없는 연정에 불 꺼진 간판, 그리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정체불명의 남자들까지. 혹시 혜령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지는 책상 앞에 숙이고 있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겨우 사진 몇 장일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박하지는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을 일과 자신의 일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혜령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그건 필시 박하지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한국에 다시 왔을 때 연정 앞에서 들었던 혜령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당신들 대체 왜 이러냐고요!
혜령은 그렇게 소리쳤었다. 그때 만난 온여환은 박하지가 사라진 후 국정원에서 흥신소와 연정을 비정기적으로 감시하고 있다고 했었다. 혜령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거고, 5분이면 갈 거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건 박하지가 한국에 들어온 게 알려지기 전의 이야기였다. 채 사장의 주변 조사를 통해 마닐라에 있던 박하지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 국정원이 과연 지금도 이전처럼 혜령이나 흥신소에 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박하지를 찾고 있을까?
“아…….”
박하지의 손이 탁, 하고 노트북을 내리덮었다. 책상을 짚는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안일했다. 멍청하고 이기적이었다. 내가 편하게 있으니 모두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만 여겼다. 너무 현실감이 없었던 거다. 저 바깥은 여전히 맹수가 득시글거리고 있는데.
박하지는 서재를 박차고 나왔다. 이건 온여환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알고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였다. 박하지는 그렇게 생겨 먹은 사람이었다. 도어 록 잠금을 해제한 손이 단번에 문손잡이를 밀었다.
며칠 만에 맡는 바깥 공기를 반가워할 새도 없이 하지는 복도를 내달렸다.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가마득했다.
* * *
박하지는 연정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앞에 택시를 세웠다. 차라리 택시에서 내리지 않고 이동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으나, 불법 주차 차량이 많아 차 한 대 지나가는 것도 아슬아슬한 골목에서 카 액션이라도 찍게 되는 날엔 박하지만 손해였다. 하지는 요금을 내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장 뒤편의 샛길로 숨어들었다.
박하지가 어릴 때 이 동네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골목길이 많아서였다. 어른들은 가로등 없는 골목길이 위험하다고 해가 지면 꼭 큰길로 다니라고 당부를 했었지만, 아이들에게 어둡고 으슥한 골목은 숨바꼭질을 하고 놀기 딱 좋은 길일 뿐이었다.
그리고 박하지는 그런 숨바꼭질 같은 놀이를 하면 언제나 높은 확률로 술래를 맡는 아이였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기면 이겼다고 술래가 됐고, 지면 졌다고 술래가 됐다. 동네에 사는 아이들 중 가장 어리고 작았던 박하지는 혜령이 없으면 늘 그런 식으로 은은한 따돌림을 당했었다. 그런데도 박하지는 뭐가 좋다고 신이 나서 형, 누나들을 쫓아다녔다.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되면 꼭 해가 다 질 때까지 골목을 누비다가 혜령의 손에 붙들려 돌아오곤 했었다. 박하지가 몇십 년이 지나도 동네 지리를 빠삭하게 외고 있는 건 그때의 경험 때문이었다.
이 동네는 서울 강남처럼 논밭에 건물이 세워지는 획기적인 수준의 개발이 이뤄지지 않는 동네였다. 물론 세월이 흐르며 건물과 담장이 허물어져 길이 넓어진 곳도 있었고, 아예 길이 사라진 곳도 있었지만, 커다란 줄기는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박하지는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연정까지 갈 수 있는 길을 꿰뚫고 있었다.
하지는 페인트칠이 벗겨진 담벼락 앞에서 훌쩍 점프를 했다. 손을 뻗어 담을 짚고 발끝에 반동을 주며 상체를 세워 올렸다. 순식간에 제 키만 한 담장을 뛰어넘었다. 이쪽 길로 가면 연정의 입구가 아니라 뒷방으로 이어지는 뒷문이 나타났다. 그 문으로 드나드는 일이 없어 언젠가부터 자물쇠를 걸어 둔 문이었고, 거기라고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적어도 버젓이 입구로 향하는 것보단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혜령을 만나진 못하더라도 주변에 몸을 숨기고 무슨 일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는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벽을 끼고 방향을 틀려는 순간이었다. 탁, 하고 작은 돌멩이가 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지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듯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천천히 주변을 살피던 하지가 문득 시선을 내려 제 신발 밑을 바라봤다. 깨진 아스팔트에서 뜯겨 나온 작은 자갈돌 같은 것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지는 확인하듯 그 위로 신발 밑창을 툭툭, 부딪쳐 봤다. 그의 발에 차인 모래알들이 울퉁불퉁한 땅 위에서 탁탁,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하아. 그 모습을 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하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올렸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눈앞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코 밑으로 악취가 풍겼다. 생선 비린내 같기도 했고 부패한 음식물 쓰레기 냄새 같기도 했다. 하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려고 했으나, 그 순간 발등 위가 묵직해졌다. 돌덩이에 눌린 것처럼 꽉 밟혀 발을 빼지 못하는 사이 상체가 퍽 밀렸다.
“윽!”
등이 땅에 부딪힘과 동시에 재빨리 몸을 돌렸다. 뭔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달아나야 한다. 잡히면 안 된다. 그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차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바로 그때 딱딱한 쇳덩이가 뒤통수를 내려찍을 것처럼 겨눴다. 뒤이어 철컥, 하고 들려온 소리는 분명 장전 소리였다.
“안녕, 박 대리.”
하지는 그 음성을 듣자마자 흡, 하고 숨을 참았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박하지의 머리통에 총을 겨눈 그가 등 뒤로 바짝 붙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 위로 올라온 얼굴이 하지의 귓바퀴 위로 숨결을 뿜어냈다.
“너 그동안 재미있는 짓 많이 벌였더라? 도 실장은 도 실장이 아니고, 너는 국정원이랑 손잡고 짝짜꿍하고. 씨발, 영화 찍냐?”
하지는 천천히 눈동자만 굴려 제 얼굴 옆에 붙어 있는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희번덕대며 까뒤집힌 눈이 매섭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구……. 구도, 완…….”
“그래, 아직 잘 기억하고 있었네.”
그가 말을 이을 때마다 귓바퀴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 소름이 돋았다. 오랫동안 바깥을 헤맨 도망자의 악취가 후각을 마비시킬 것만 같았다. 어깨를 비틀어 제 뺨에 맞붙은 그의 얼굴을 떨쳐 내고 싶었으나 머리채가 잡혀 버린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럼 이것도 기억해?”
그의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났다.
“내가 너랑 이복구 어떻게든 세트로 잘 묶어서 포장해 주겠다고 했던 거.”
하지는 청각을 통해 들어온 자극이 머릿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치환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박하지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장면이 지나갔다. 그의 급소를 잡아 뜯고 달아날까, 정강이를 걷어차 버릴까, 아니면 팔꿈치로 명치를 찍어 버릴까. 생각은 수없이 했는데 결국 그는 아무것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해도 구도완이 제 머리통에 대고 총을 갈기는 것보다 빠를 순 없을 것 같아서였다.
“너 나타나길 기다리느라 포장 끈 다 떨어질 뻔했어, 알아?”
구도완이 그의 뒤통수에 대고 있던 총구를 더 앞으로 들이밀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박하지는 구도완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낚시터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선장에게 버림받고 모든 것을 뒤집어쓰게 생긴 구도완이 이번엔 정말로 박하지를 놓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여, 여기서 그 총 쏘면……. 너도 끝이야.”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낸 하지의 말에 구도완이 꺽꺽, 숨을 들이켜며 웃었다.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거야? 박하지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그르릉거리는 구도완이 곧 그의 귀부터 씹어 먹어 버릴 것만 같았다.
“씨발, 존나게 고맙다? 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
“내가, 내가 너 살길 찾아 줄게.”
“뭐?”
박하지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정말로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자 생존을 향한 본능만 또렷해졌다. 살아야 했다. 지금 죽기엔 너무 억울했다. 이렇게 죽을 거였으면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필리핀 땅에서 죽었을 것이다.
이제 정말 코앞인데, 박하지가 대체 어떤 세상을 못 보고 살았는지 그 두꺼운 꺼풀을 벗겨 내기 직전인데, 왜 하필 지금인가. 새장을 벗어나 날아 보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그 새장 바깥이 어떤 곳인지 알고만 싶다는데, 그런데 왜 지금이냐고. 하지는 처음으로 제 생 앞에 절박해졌다.
“너, 너도 억울한 거 있는 거 아니야? 선장이 너 버렸잖아.”
“…….”
“내가 선장 찾을 수 있어. 선장 정체 밝히고 너도…….”
“야, 이 씨발 새끼야, 너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뭐, 누가 누구 살길을 찾아 줘?”
구도완이 박하지의 머리통에 총구를 후벼 넣을 듯 비벼 댔다. 쇳덩이에 사정없이 짓눌린 두피가 찢겨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으윽, 괴로운 신음을 뱉었다.
해가 위치를 바꾸며 좁은 골목 안에서 가슴과 등을 꽉 붙인 채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비추었다. 누가 보면 퍽 다정한 애정 행각이라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까지 빌어먹게도 따스했다.
“박하지야. 똑똑히 들어. 네가 내 살길을 찾아 줄 입장이 아니야.”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죽음이 두렵기보단 서럽고 억울해서. 아직 이 동네 가게들이 다 문을 열지도 않은 평화로운 아침 시간, 큰길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림자와 햇살이 반반씩 섞인 골목 안에서 머리통이 뚫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게 분해서. 평생을 존재가 감춰진 채 없는 사람처럼 살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록 존재감이 없어야 하는 걸까. 이왕 죽을 거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 전시함으로써 내 생을 증명할 순 없는 걸까.
“내가 네 살길 끊어 놓으려고 온 거지.”
박하지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죽은 네 아버지한테 했던 것처럼.”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의 가짜 아버지, 박양일. 그의 죽음이 선명해졌다. 그는 정말로 믿었던 선장에게, 그 선장이 새로운 손발로 불러들인 제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밝혀진 거였다.
“형님께 안부나 전해 드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박하지는 선장의 배가 되고 싶었다던 박양일의 허무한 침몰을 뒤따르고 싶지 않았고, 그와 같은 삶을 살다 간 아들로 남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구도완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단단한 스프링이 당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구도완의 반대쪽 손에서 살짝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박하지는 그 순간 고개를 확 숙이곤 재빨리 상체를 앞으로 말았다. 그러곤 팔꿈치로 구도완의 명치를 가격하며 몸을 돌리는데, 그 순간 뒷덜미가 붙잡혔다. 아래로 찍어 누르는 듯한 힘에 입이 헤벌어지며 커억 침이 튀었다. 구도완은 박하지가 허리를 들지 못하도록 뒷목을 그대로 찍어 누르더니 발을 뻗어 뒤꿈치로 무릎 오금 안쪽을 퍽 쳤다.
“윽!”
하지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마치 구도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듯한 자세가 되었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구도완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하관을 활짝 벌리며 징그럽게 웃었다. 뒤통수에 겨눠졌던 총구는 이제 정확히 박하지의 앞이마 위에 닿았다.
“작작 까불어. 이번엔 너 구하러 올 왕자님 안 계시니까.”
피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는 제 눈앞에서 구도완의 검지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보았다. 시야를 부옇게 흐리던 것이 눈물이었는지 섬광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탕!
총성은 단 한 발만 울렸다.
* * *
온여환이 한병수를 만난 것은 강남의 한 건물 꼭대기 펜트하우스에서였다.
30여 년 전, 고깃집에서 숯불을 갈고 음료 공장에서 일을 하던 남자가 강남에만 건물이 다섯 채나 있는 부동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그의 통장에 꽂힌 1억이라는 돈의 도움이 컸다. 물론 그 돈으로 아파트를 사고 차익을 남겨 되팔고, 수익금으로 또 아파트와 땅을 사고 되팔기를 반복하며 재산을 부풀린 것은 한병수의 능력 아닌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결국 기반이 된 것은 그 돈이었다.
한병수의 주위 사람들 중 절반은 그가 주택복권에 당첨됐다고 믿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가 사기를 쳤다고 믿었다. 한병수 본인은 자신을 보육원에 맡겼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남겨 준 유산이라고 했다던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돈이 많은 부모가 왜 보육원에 자식을 버렸겠냐는 것이었다. 소문은 무성했지만 아무도 한병수에게 대놓고 손가락질을 하진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보육원 출신의 고깃집 알바생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이름을 바꾸고 살던 동네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였다고 한다. 한재호라는 이름을 새로이 가지게 된 그는 서울 땅에서 한창 가격이 치솟고 있던 강남 신사동에 10층짜리 빌딩을 샀다. 그리고 그 빌딩 한 층에 세를 들어온 피부과 의사와 결혼을 한 것이 바로 다음 해였다. 슬하에는 1남 1녀를 두고 있고, 무용을 전공하는 딸은 영국에서 유학 중이며 올해 수험생이 된 아들은 의대 입시를 준비 중이었다. 가정은 화목하고, 살림은 유복했으며, 남부러울 것 없이 풍족한 삶이었다.
그 삶이 한병수, 아니 한재호의 발목을 잡은 거다. 그가 예전처럼 잃을 것이 없던 청년이었다면 그는 절대로 온여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을 테니까.
“진짜로 우리 와이프한테 아무 얘기도 안 할 거죠? 나 보육원 출신인 거 우리 가족들은 진짜 모르게 하는 겁니다, 예?”
얼음이 가득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켠 한재호는 온여환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후에야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도 같이 살기만 했지, 현필이 걔에 대해서 잘 몰라요.”
한재호가 김현필을 처음 만난 곳은 보육원이었다. 5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던 한재호와 달린 김현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보육원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고 했다. 공부도 잘했고, 얼굴 생긴 것도 썩 나쁘지 않았는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했다고. 단순히 사회성이 없는 게 아니라 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가 한 달에 같은 옷을 몇 번 입었는지 알려 주거나 몇 주 전에 흘리듯이 한 대화를 그대로 기억해서 복기한다거나, 심지어는 그날 하루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갔는지도 기억했다. 딴에는 친근감의 표시라고 하는 행동들이었는데 듣는 상대방은 대부분 기분 나빠하거나 소름 끼쳐 하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늘 혼자 다녔다. 그런 김현필 옆에 한재호가 유일한 친구로 남게 된 것은 한재호 역시 보육원 내에서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퇴소할 나이가 될 때까지 보육원에 남는 아이들은 친구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둘은 결국 함께 보육원을 나와 인천에 단칸방을 얻어 같이 살았다. 학교는 계속 다닐 여유가 없어 둘 다 그만두었다. 한재호는 특별한 재주랄 게 없어 고깃집이나 식당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김현필은 꽤 똘똘하고 일머리가 있는 편이라 이런저런 일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가장 오랫동안 했던 일이 바로 사라지기 직전까지 다녔던 용역 회사 일이라고 했다.
“용역 회사?”
“예. 말이 회사지, 그냥 깡패들 사무소 있잖아요. 기업 일 봐주는 곳.”
“거기 이름이 뭡니까?”
“일……. 일 뭐더라.”
“일광?”
여환의 말에 한재호가 어, 맞아요,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거기를 어떻게 알아요? 아는 곳이에요? 묻는 한재호에게 온여환은 슬슬 고개만 흔들었지만, 그 이름은 분명 그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혹시나 해서 던져 본 게 정말로 맞아떨어질 줄은 온여환도 몰랐다.
일광은 박양일이 젊은 시절 다녔던 용역 회사의 이름이었다. 말이 회사지, 인천의 일광파라고 통하던 깡패 집단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용역 깡패들 하는 일이 다 그렇듯 철거민이나 노조와의 충돌이 대부분이었는데, 회사 연혁이 오래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런 일보단 일신 그룹 같은 기업의 뒤처리를 도맡아 하곤 했다. 후에 화성파가 생기며 흡수되었으니 어찌 보면 화성파의 전신이라고 볼 수도 있는 조직이었다.
“그래서, 그 일광에서 김현필 씨가 무슨 일을 했는데요. 깡패 짓을 했을 것 같진 않은데.”
“아유, 걔가 무슨 깡패예요. 걔 벌레 새끼 한 마리 못 죽여요. 그냥 거기서 장부 정리 같은 거, 숫자 놀음 이런 걸 좀 봐줬나 봐요. 원래 깡패들이 머리가 안 돌아가잖아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주판 역할이었다는 거다. 깡패들 일이 다 그렇듯 중간에서 일을 봐주고 떼어먹는 수수료로 배를 불려야 했는데, 그걸 한 푼이라도 더 떼어먹거나 혹은 덜 떼어 먹히려고 김현필처럼 멋모르는 애를 데려다가 장부 관리를 시킨 거였다.
김현필은 사장이 이번 달 수익금 이만큼 만들어야 한다, 라고 말하면 들어온 수익금에서 어떻게든 숫자를 굴려 수익금을 채워 냈다. 미묘하게 장부를 조작하는 거였다. 신기한 것은 그게 또 안 걸린다는 사실이었다. 일광의 사장은 그런 김현필에게 월급을 올려 주고 더 많은 일을 맡겼다. 당연히 김현필이 들여다봐야 하는 장부와 업무적 정보도 많아졌다. 한재호는 김현필이 그즈음부터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랬는지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사람이 좀 더 음침해졌다고 해야 하나. 헛소리도 좀 하고……. 그땐 그런 게 흔하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조현병? 뭐 그런 거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현병? 뜻밖의 말에 온여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가 확신은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유, 나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고, 그냥 애가 갈수록 이상해졌다는 거죠.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가끔 들어오는 날에도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았거든요. 혼자서 두꺼운 공책에 스크랩 같은 거나 엄청 하고…….”
“스크랩이요?”
“그 왜 엑스 파일이라고 알아요? 한때 연예계 엑스 파일 같은 거 엄청 돌았잖아요. 걔가 만들던 게 딱 그런 거였어요. 연예인 얘기는 거의 없고 순 깡패들 얘기에 무슨 기업들 얘기뿐이긴 했는데, 제법 그럴듯한 얘기들이 적혀 있어서 가끔 몰래 읽고 그랬어요. 근데 그거 보고 있으면 얘가 진짜 미친 거 아닌가 싶긴 하더라고요.”
“왜요? 문장에 맥락이 없거나 읽기가 힘들던가요?”
조현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기승전결에 맞춰 조리 있는 글을 쓸 수가 없어진다는 거였다. 한재호의 말대로 김현필이 정말 조현병 같은 걸 겪고 있었다면 그의 스크랩북은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도 어려울 만큼 맥락 없는 글투성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재호는 고개를 저으며 전혀요, 라고 답했다.
“날짜별로, 회사별로 정리도 엄청 깔끔하게 되어 있었어요. 중간중간에 지 일기 같은 걸 써 놨는데, 그 내용이 좀 이상했거든요. 자기가 무슨 재벌 딸이랑 사랑에 빠졌다느니, 그 여자 배 속에 지 애가 있다느니, 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소설처럼 써 놨더라니까요.”
“……예?”
“이 새끼 진짜 돌아 버린 거 아닌가 싶어서 앉혀 두고 얘기를 해 봐야 하나 했는데, 얼굴을 볼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때부터 저도 공장에서 일을 시작해 가지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느라 집에 거의 못 들어갔고요.”
“혹시 그 공책 가지고 있어요?”
“미쳤어요? 당연히 버렸지. 죽은 사람 물건을 왜…….”
한재호가 별안간 입을 닫았다. 온여환은 그 미세한 표정 변화와 그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한재호는 김현필을 가출 신고로 접수했다. 실종 접수가 안 돼서 가출로 접수를 한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김현필이 죽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한재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온여환의 눈빛이 따가운 듯 자꾸 시선을 다른 곳에 뒀지만, 이어지는 온여환의 질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한재호 씨가 확인했던 신원 미상 변사자, 김현필 씨 맞죠?”
“…….”
“한재호 씨.”
“아이씨, 아니라고요! 그거 진짜 현필이 아니었다니까요!”
“그럼 왜 사진 보고 김현필 씨라고 했다가 말을 바꿨습니까?”
“옷이요, 옷! 옷이 똑같아서 현필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서 바꿨다고요!”
“그때 그 시신은 부패가 많이 진행돼서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을 거고, 옷이 똑같았다면 더욱 번복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왜죠?”
“하아, 진짜…….”
“왜 그러셨어요?”
한재호가 한 손으로 넓은 이마를 문지르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이제 와서 잘못 걸렸다 싶었지만, 그는 지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내가 보기엔 그게 진짜 현필이가 아닌 것 같았다니까요…….”
“그러니까 왜요.”
“…….”
“저 세 번은 안 묻습니다. 왜 그러셨어요?”
한재호는 결국 그날 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김현필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가출 신고를 접수하기 이틀 전이었다. 공장에서 3주 동안 숙식을 하다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집 근처 골목에서 누군가 두들겨 맞고 있는 걸 봤다고 했다. 처음엔 재수 없게 같이 걸리기 전에 돌아가자고 생각했는데, 말소리를 들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김현필의 목소리였다.
한재호는 용기를 내서 김현필의 이름을 불렀다. 현필이냐? 그 순간 김현필로 추측되던 인물이 갑자기 골목 밖으로 달아났다. 그를 폭행하던 남자 역시 그 뒤를 따라갔다. 한재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을 뒤따라가거나 신고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했다. 김현필이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몇 시간 후 집으로 돌아온 김현필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어디 운동장에서 굴렀다가 온 건지, 아니면 정말 얻어맞은 건지 붉은색 카라티와 아이보리색 면바지가 흙먼지로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 놀란 한재호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김현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한재호가 그의 방문을 열었을 때 김현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 정도는 좀 기다려 보다가 그래도 집에 안 와서 경찰서로 가서 신고를 했어요. 그러고 한 2주 있었나? 경찰서에서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시신이 들어왔는데 확인하러 오라는 거예요. 놀라서 가 봤죠. 근데 그 얼굴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얼굴은 알아보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옷 입은 걸 보는데 현필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맞는 것 같다고 했죠. 솔직히 그 사진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하여간 그러고 나오는데, 웬 남자가 얘기 좀 하자는 거예요.”
한재호가 말을 바꾼 건 그 남자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 시신이 김현필의 시신으로 위장된 거라고 말했다고 했다.
“뭐라고요? 위장?”
설마 진짜로 그 말을 믿었나 싶어서 되묻는 온여환의 반응에 한재호는 결백을 주장하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누가 봐도 조폭같이 생긴 남자가 와서 그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안 믿습니까!”
남자는 김현필이 일광파 일을 도맡아서 해 주며 알면 안 되는 정보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됐고, 그 정보들로 큰 기업들을 협박하고 다녔다고 했다. 가뜩이나 김현필의 공책을 들여다봤었던 한재호는 그의 말에 쉽게 설득당했다.
남자는 기업들을 협박하고 다니던 김현필이 신변이 위험해지자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려고 시신을 구해 똑같은 옷을 입혀 놓은 거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김현필을 반드시 잡아야 하는 사람인데, 만일 김현필이 이대로 사망 처리가 되면 영영 잡을 수 없게 될 테니 저 시신이 김현필이 아니라는 말만 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 한마디의 사례가 1억이었다.
“그래요, 솔직히 돈도 탐났죠. 탐이 나긴 했는데, 그 남자 말 들으니까 현필이 그 새끼도 잘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업무 중에 알았던 걸로 다른 사람 협박하고 다니는 거, 그게 잘한 짓입니까?”
“그래서 1억을 받기로 하고 말을 번복하셨다는 거죠? 그 남자 말에도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 그냥 덜컥 믿기로 하고?”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그 남자 얼굴은 기억나요?”
온여환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얼굴은 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병수에게 사진 하나를 띄워 보여 줬다. 그건 박양일의 사진이었다.
“이 남자 맞아요?”
“스읍, 잘 모르겠는데…….”
“……그럼 이 사진은요?”
온여환은 손가락을 옆으로 움직여 다른 사진을 띄웠다. 물론 같은 박양일의 사진이었다. 다만, 30년 전에 찍은.
“어어, 맞는 것 같은데?”
한재호가 온여환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들고 갔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멀리서 봤다가 손가락으로 확대해서 얼굴만 다시 확인해 보기도 하던 그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맞네요. 확실해요.
“……알겠습니다.”
한재호의 손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휙 빼앗은 온여환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재호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저, 검사님. 저한테 뭐 문제없는 거 맞죠? 확실하죠?”
온여환은 한재호에게 자신의 신분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경찰이라고도, 검사라고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재호는 온여환을 제멋대로 검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30년 전의 한재호가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던 박양일에게 설득당해 말을 번복한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아, 그런데.”
펜트하우스 입구 바깥의 엘리베이터로 향한 온여환이 하강 버튼을 꾹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 공책이요.”
“공책이요?”
“김현필 씨가 했다는 스크랩북.”
“아아, 예예.”
“그거 어떻게 버리셨어요?”
“어떻게 버렸냐고요?”
한재호는 온여환의 질문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딴 걸 왜 물어보나 싶었던 건지 몇 초 동안 눈만 깜빡였다.
“버릴 때 어디에, 어떻게 버리셨냐고요.”
“그야 뭐……. 그냥 박스에 담아서 집 바깥에다 내놨죠.”
“……그냥 집 바깥에요?”
“예. 종이니까 뭐…….”
폐지 줍던 할머니가 가져갔겠죠. 한재호의 무책임한 말이 이어지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온여환은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문 바깥에서 손을 모으고 서 있는 한재호가 온여환을 퍽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제발 자신에게 다른 불똥이 튀지만 않게 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온여환은 그 눈빛을 무시한 채 지하 3층 층계 버튼을 누르고 닫힘 버튼까지 꾹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멀미가 날 듯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온여환의 사고도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황상 김현필은 박하지의 친부가 확실했다. 그가 박양일이 속해 있던 일광 사무소의 직원이었다는 것, 그리고 김현필의 시신을 은폐하려고 했던 사람이 박양일이라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렇다면 김현필은 대체 선장과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 사람인가? 온여환은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탄 후에도 한참이나 시동을 걸지 못했다.
“스크랩북…….”
사실 한재호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온여환은 계속해서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스크랩북을 만든다는 것이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결국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행위였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다는 김현필은 주변의 정보를 굉장히 잘 기억했다고 했다. 그걸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몰라 친구들과 멀어졌지만, 그가 정보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온여환은 그런 사람을 한 명 더 알고 있었다. 물론 한재호에게 들었던 김현필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이긴 했다. 수집한 정보를 시기적절하게 잘 활용했고, 그것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람을 주무르는 능력이 탁월했던 사람, 바로 선장이었다.
“……만약에 최초의 선장이 김현필이었다면?”
어디까지나 가정이었지만, 유추는 해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현필은 박양일이 한재호에게 했던 말대로 정말 일광파에서 얻었던 정보들로 기업들을 협박하고 다녔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바로 최초의 선장질이었을지도 모른다. 화성파 이전에 일광파가 있었듯이 지금의 선장 이전에 김현필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김현필은 사랑을 했다.
“재벌 딸…….”
김현필이 엑스 파일에 휘갈겨 놨다던 일기의 내용이 정말 믿을 수 있는 내용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수집된 정보로만 따지면 그는 어느 재벌집의 자제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을 했다. 지금까지의 얘기가 모두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그 배 속의 아이는 박하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김현필이 사랑했다던 재벌집의 자제가 바로 지금의 선장이 되는 것이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온여환이 별안간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빠앙. 시끄러운 경적이 고요한 지하 주차장을 깨웠다.
“뭔가 이상한데.”
해결이 안 되는 구석들이 있었다.
첫 번째, 지금까지 박하지의 친모로 알려졌던 조선족 백영란은 대체 누구인가. 백영란은 박양일이 박하지를 자신의 자식으로 키우기 위해 섭외한 사람일 뿐인 건가.
그렇다면 두 번째, 박양일은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박하지를 자신의 아들로 키워야 했나. 학교도 보내지 않고 바깥출입을 제한하면서 평생 존재를 숨기다시피 한 이유가 뭔가. 만일 박하지가 정말 선장의 아들이라면, 먼 미래에 선장의 약점을 잡기 위한 존재로 남겨 둔 건가. 이게 가능하려면 선장은 박하지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선장이 정말로 박하지의 친모라면 자식의 존재를 모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열 달 동안 아이를 품었고 낳았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박하지의 친부 김현필은 대체 왜 죽었냐는 것이다. 그리고 박양일이 그런 김현필의 사망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1억이나 되는 돈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박양일의 돈은 아닐 것이다. 당시 그에겐 그만한 돈이 없었으니까. 박양일이 누구의 지시로 움직였든, 그 뒷배가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리란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확실한 게 고작 그거 하나였다.
“미치겠네, 진짜.”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온여환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이번엔 운전석 헤드레스트에 뒷머리를 박았다. 김현필에 대한 것을 알게 되면 조금이나마 엉킨 타래가 풀릴 줄 알았다. 집에 돌아가 박하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 상태로는 뭐 하나 제대로 얘기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침에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도망치듯 나왔던 것이 다 무색해졌다. 돌아가서 뭐라고 말을 하나. 혼자 가서 미안했다는 말부터 해야 하나.
애꿎은 머리털만 헤집던 온여환은 운전석에 앉은 후 한참이 지나서야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일단은 돌아가야겠다. 평소라면 다른 일을 더 보다가 집으로 갔겠지만, 오늘은 집부터 들러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차를 빼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온여환이 발신인을 확인했다. 유성혜였다. 아마 오늘 한재호를 만나러 가는 것을 알고 뭔가 알아낸 게 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한 것일 터였다. 온여환은 기어 위에 올렸던 손을 떼고 화면에 뜬 통화 아이콘을 밀었다.
“어, 나…….”
- 온여환!
온여환이 제대로 입을 떼기도 전에 유성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녀의 음성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온여환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왜 그래?”
- 어떡해……. 야, 구도완이…….
“구도완? 구도완이 뭘 어쨌는데?”
온여환은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온 것에 당황하지도 않고 다급히 물었다. 유성혜가 이렇게까지 당황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건 처음이었다.
- 구도완이 연정 근처에서…….
“연정? 강혜령이 운영하는 연정 말하는 거야?”
- 응, 그 뒷골목에서…….
온여환은 차가운 드라이아이스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강혜령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박하지가 그걸 알았나. 아니면…….
- 사망한 채 발견됐어.
“……뭐?”
- 구도완이 연정 근처에서 사망했다고. 총상이야. 하, 근데…… 근데 거기에서 박하지 핸드폰이…….
가리봉동 시장 근처에서 박하지의 모습이 CCTV에 찍혔다고 했다.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이었고, 그 뒤로는 카메라가 없는 골목길로 이동한 탓에 모습이 찍히지 않았단다. 지금 박하지가 탄 택시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역추적 중이고, 온여환의 집 주소가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라고 전하는 유성혜의 목소리는 거의 울먹임에 가까웠다.
- 박하지 지금 구도완 살해 유력 용의자야. 그리고 넌 그 용의자 지금까지 몰래 숨겨 줬던 사람 되는 거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너 이거 걸리면 끝난다고. 너 지금 어디야? 일단 좀 피해 있어. 회사 들어오지 마, 알았지?
“……리가 없어.”
- 뭐? 온여환, 야, 정신 차려! 회사 들어오지 말라고!
박하지가 구도완을 살해했다고? 그 녀석한테 총이 어디 있어서? 아니, 총을 쥐어 본 적도 없을 녀석이었다. 그런 애가 무슨 수로 구도완을 죽여? 구도완이 그곳에 있을 걸 대체 어떻게 알고? 뭔가 잘못됐다.
“그럴 리가 없다고.”
- 그럴 리가 있건 없건 일단 좀 피해 있으라고! 내가 알아볼 테니까!
온여환은 통화가 끊기지 않은 핸드폰을 그대로 조수석에 던져 버렸다. 기어를 바꾸고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조수석 밑으로 떨어진 핸드폰에서 유성혜의 외침이 들려왔다.
- 야, 온여환! 듣고 있어? 미친 새끼야, 여기 오면 안 된다고!
온여환은 그 모든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정말로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머릿속에선 박하지와 구도완의 죽음, 그리고 총상이라는 단어가 어지러이 휘돌아다녔다.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온 여환은 갑자기 마주한 햇빛에 빈혈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지독하게 눈부신 낮이었다.
* * *
탕!
박하지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총성을 듣고 번쩍 눈을 떴다. 시야가 온통 새하얬다. 눈이 멀어 버린 줄 알았다. 눈꺼풀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앞이 바뀌진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눈이 멀어 버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하지가 눈을 뜬 곳은 천장도, 벽도, 심지어 바닥까지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창문이 하나도 없었고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그 어떤 도구도 없었다. 그래서 박하지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띵했다. 누운 자리에서 몇 번 더 심호흡을 하며 완전히 정신을 차린 박하지는 본능적으로 손과 발부터 확인했다. 혹시 묶여 있진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손발 모두 자유로운 상태였다. 다만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말라붙은 피에서 비린 쇠 냄새가 올라왔다.
하지는 구역질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오른쪽 관자놀이 근처가 욱신거렸다. 손바닥으로 그 위를 살짝 누르자 통증이 더욱 배가되었다. 이건 현기증이 아니라 물리적인 충격에 의한 어지러움과 통증이었다. 박하지는 의식을 잃기 전의 짧은 찰나를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탕!
총성이 울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얼굴 위로 뜨거운 피가 흘렀다. 박하지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제 뺨에 튄 피를 닦아 냈다. 손을 움직이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자각이 든 것은 눈가를 닦아 내고 눈꺼풀까지 들어 올렸을 때였다. 앞이마가 뚫려 얼굴이 반이 날아간 구도완이 바닥으로 스러지는 것이 보였다. 박하지는 그제야 자신의 머리통을 더듬었다. 이마에도, 손등에도, 피가 흥건한데 아무런 외상이 없었다. 이건 구도완의 피였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총성이 울렸는데.
박하지는 바닥에 쓰러진 구도완이 손에 쥐고 있는 총을 바라봤다. 조금 전의 총성은 저 총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구도완의 머리통을 뚫어 놓은 것 역시 저 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다른 사람이……?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박하지가 빠르게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단단한 무언가로 그의 관자놀이를 퍽 내리쳤다. 이번에야말로 눈앞이 새하얘졌다. 박하지는 낙뢰를 맞고 넘어가는 나무처럼 옆으로 쓰러지는 와중에 본능처럼 기척이 느껴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좁은 골목길, 담벼락의 그림자 아래 우뚝 서 있는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찰나처럼 짧게 지나가는 장면 속에서 남자의 아랫입술에 남아 있던 커다란 흉터가 눈에 보였고, 그게 박하지의 의식 속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 남자…….”
이름 모를 그 남자가 박하지를 구했다. 아니, 구했다고 해야 할까? 박하지에게 총구를 겨누던 구도완을 죽이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맞지만, 동시에 박하지를 때리고 정신을 잃게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옮겨 온 것이다.
박하지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공간이 너무 넓어 한눈에 담는 것조차 힘들었다. 200평은 거뜬히 넘을 듯한 장소에 이토록 아무것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니. 바닥은 반질반질한 대리석이었고 벽과 천장엔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는데, 환기구나 공조 시스템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간이 워낙 넓어 갑갑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휑해서 춥고 서늘한 기운이 강했다.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왜인지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박하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괴함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곳엔 모퉁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벽과 벽이 맞닿아 생긴 모퉁이가 없고, 마치 커다란 원통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온통 둥글었다는 거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똑같이 생긴 벽이라서 도통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박하지는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질렀다. 대체 여기는 어딜까.
그가 주춤주춤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그의 왼편에 있던 새하얀 벽이 갑자기 웅, 진동하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벽이 아니라 벽인 줄 알았던 문이 돌아가는 거였다. 사람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거대한 크기의 문에 하지는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쳤다. 그는 문이 반쯤 돌아간 후에야 그 뒤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키가 큰 남자였다. 그의 아랫입술에 난 흉터가 보였다. 구도완을 죽이고 박하지를 쓰러뜨렸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러나 그 남자 하나가 아니었다. 박하지는 남자의 옆에 서 있는 왜소한 체구의 여성을 바라봤다. 박하지에게도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일어났어요? 다친 데는 좀 괜찮나?”
“그쪽은…….”
“날 알아보겠어요?”
새하얀 공간보다 더욱 새하얀 투피스 팬츠 정장을 입고 나타난 사람은 지난 며칠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뒤집어 놓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모를 수가…… 없죠.”
마루 미술관의 이지원 관장. 그녀의 얼굴은 박하지도 신문과 뉴스를 통해서 보았다. 온여환의 서재 벽에 그녀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비록 저 귀퉁이에 붙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를 왜 이런 곳으로…….”
지금 이 순간 박하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왜 자신이 이런 곳에서 저 사람을 맞닥뜨리게 되었냐는 것이었다. 이지원이 왜 구도완을 죽였지? 아니, 애초에 박하지가 그곳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구도완이야 박하지를 쫓아 그가 찾아올 만한 연정 주변을 어슬렁거렸던 거라고 치자. 그런데 이지원은 왜, 어떻게?
“음, 아닌데. 아무래도 날 제대로 못 알아보는 것 같은데.”
생각이 많아 보이는 박하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이지원이 불퉁하게 말했다. 그녀는 180도 돌아가 다시 단단히 고정된 벽 앞에서 몇 걸음 떨어져 섰다. 이지원이 벽에서 떨어지자 함께 들어왔던 남자가 다시 벽 어딘가를 툭, 쳤다. 그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벽 너머로 사라졌다. 넓은 공간엔 이지원과 박하지, 단둘만 남았다.
“실망이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하지 씨는 날 알아볼 줄 알았는데.”
하지의 어깨가 움찔 솟았다. 이지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 것이 생소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왜 저렇게 친숙하게 부르는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박하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로서는 해석이 필요한 문장처럼 들렸다.
혹시 우리가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었나? 혼란스러워하는 박하지에게 살짝 눈을 흘긴 이지원이 그의 옆을 지나쳤다. 박하지는 그런 이지원의 걸음을 따라 몸의 방향을 돌렸다. 반 바퀴쯤 돈 것 같은데 여전히 하얀 벽과 하얀 천장이라서 몸이 얼마나 돌아간 건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지원은 박하지와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더니 팬츠 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틱 막대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흡사 레이저 포인터처럼 생긴 것을 꾹 누르자 대리석인 줄로만 알았던 바닥 일부가 직사각형 모양으로 솟아올랐다. 하얀 벽이 문이 되어 돌아갔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바닥은 어느새 책상이 되었다. 그 뒤로 낮은 의자도 함께 솟았다. 이지원은 바로 그곳에 앉아 박하지를 바라봤다.
싱긋 웃는 그녀의 얼굴은 왜인지 박하지가 매체를 통해 접하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아니, 완전히 달랐다. 지금의 이지원에게선 자신이 운영하던 미술관이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 형성에 이용됐을 줄은 몰랐다며 눈물짓던 모습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놀이를 기다리는 개구진 아이 같기도 했고, 자신만의 왕국을 세운 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토록 상반된 이미지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박하지도 알 수 없지만, 그가 이지원에게서 받은 인상이 딱 그랬다. 그리고 그 느낌이 완전히 낯설지만은 않다는 게 가장 의아한 점이었다.
“……제가 이지원 관장님을 알아야 합니까?”
박하지는 그녀에게서 분명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시감의 종류가 내장을 주무르는 것처럼 불쾌하고 기분이 나빴다. 이지원은 그런 박하지를 향해 이곳에 들어온 이후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흰 얼굴에 붉게 그어진 미소가 징그럽도록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내가 항상 이곳에서 전화를 했으니까.”
“…….”
“우리 박 대리한테.”
우 리 박 대 리 한 테.
그 모든 음절이 박하지의 고막을 뚫고 지나갔다. 구도완의 머리통을 뚫었던 총알이 박하지의 관자놀이를 다시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박하지는 이제야 이지원에게서 느껴지던 익숙하고도 낯선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이 같은 오만함, 상냥한 말투 뒤에 숨은 서늘함, 그리고 말 사이사이 은은하게 밴 기분 나쁜 비웃음. 그 모든 것은 선장의 것이었다.
“이번엔 진짜 정식으로 인사를 해 볼까?”
이지원이 대리석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그리고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박 대리.”
“…….”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고 들었는데, 전혀 모르나 봐. 잘 들어.”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내뱉는 숨소리 하나하나가 너무나 선명했다. 박하지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빤히 바라봤다. 잘 들으라던 이지원은 정작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하지는 그 입술이 만들어 내는 말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로, 선장이야.
* * *
온여환이 국정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에 대한 체포 명령이 떨어진 후였다. 박하지의 택시가 온여환의 집에서 출발했다는 기록이 확인됐고, 그가 탔던 택시의 차량 블랙박스 영상까지 확보된 상태였다. 유성혜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두 손을 모아 가며 기도를 올렸다. 그 미친놈이 제발 회사로 찾아오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그러나 유성혜는 역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믿음이 없는 자의 기도는 무참히 씹고 마는 것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들의 아량이었다.
“박하지가 마지막으로 찍힌 장소가, 어디라고요?”
쾅,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상황실에 쳐들어온 온여환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뒤로 곤봉을 쳐든 요원들이 달려드는 게 보였다.
“온여환!”
“그만!”
유성혜가 소리를 지른 것과 상황실에 함께 있던 권규호가 온여환의 뒤를 치려던 요원들을 막은 것은 모두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상황실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고, 온여환의 뒤를 따라왔던 요원들도 석고상처럼 굳어 숨만 헐떡였다. 온여환의 머리통이 깨진 만큼 그들의 상태도 퍽 좋아 보이진 않았다. 정작 이 난리 통을 만든 당사자인 온여환은 제 앞과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상황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정면에 세워진 대형 모니터 앞에 섰다.
“온여환.”
“13번 띄워 봐.”
그는 자신을 부르는 권규호의 말을 그대로 무시한 채 16분할로 나누어진 스크린만 바라봤다. 그곳엔 박하지의 행적을 추적하던 CCTV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13번 카메라 띄워 보라고.”
“야, 온여환!”
“왜요, 나 체포하려고요?”
걸리적거리는 재킷을 벗어 바닥에 내던진 온여환이 권규호를 돌아봤다. 손바닥으로 피가 흐르는 이마를 닦아 내는 온여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냉철했고, 동시에 살짝만 건드려도 달려들 맹수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권규호는 생전 처음 보는 온여환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상황실 밖에서 대기 중인 인력을 바라봤다. 온여환이 갑자기 난동을 부릴 경우 그들이 저 남자 하나를 제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그런 걸 가늠해 보는 권규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온여환은 다시 대형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하세요.”
“…….”
“박하지만 찾고요.”
쉽게 등을 노출한 그는 무방비한 상태였다. 하지만 왜인지 권규호는 그를 향한 체포 지시를 내릴 수가 없었다.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는 걸 알 테고, 국정원에 오면 잡힐 거라는 사실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녀석이었다. 도망칠 생각이었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녀석인데도 그러지 않았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박하지를 찾는 것. 온여환에겐 그게 정말 중요한 일처럼 보였다. 권규호는 몇 년을 봐 온 온여환의 속을 여전히 모르겠고, 이 사달이 난 판국엔 정말로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박하지만 찾겠다는 온여환의 말이 거짓처럼 들리진 않았다.
“유성혜, 13번 카메라 띄워 보라고.”
온여환이 데스크 앞에 앉은 유성혜를 향해 말했다. 권규호와 온여환을 번갈아 보며 분위기를 살피던 유성혜는 뒤늦게 어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모니터에 명령어를 입력하고 엔터를 쳤다. 13번 카메라 화면이 확대되었다.
“누가 체포 명령이 떨어진 수배자를 상황실에 들이랬나!”
호랑이 같은 포효와 함께 길을 막고 선 직원들을 밀치며 등장한 것은 송태갑이었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권규호는 온여환의 승모근이 빳빳하게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출입문 쪽으로 돌아가는 옆얼굴이 이번에야말로 정말 맹수처럼 보였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가 아니라, 침입자를 물어뜯으려는 맹수.
“권 국장, 자네가 온여환을 상황실에 들였어?!”
“차장님, 그게 아니…….”
송태갑은 상황실을 가로질러 권규호에게 다가갔고, 권규호는 그런 송태갑에게 온여환을 조금이라도 감쌀 수 있을 만한 변명을 준비하며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온여환의 몸이 완전히 돌아섰다. 그의 길쭉한 팔이 공중을 가르더니 그대로 송태갑을 향해 날아갔다.
“온여환!”
그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한 유성혜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높은 고함에 권규호와 송태갑의 눈이 그제야 온여환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온여환은 송태갑의 멱살을 틀어쥐었고, 권규호는 그 손을 막을 시도도 해 보지 못했다. 송태갑이 상황실 벽으로 밀려나며 등과 뒤통수를 세게 부딪쳤다. 퍽, 하는 충격음이 꽤 크게 울렸다. 그러나 송태갑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다. 온여환이 그의 숨통을 막듯 멱살을 쥐고 있는 탓이었다.
“내가 오는 동안 생각을 해 봤어.”
“온여환,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권규호가 온여환의 팔 한쪽에 매달리며 송태갑에게서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돌덩이처럼 근육이 솟은 팔은 꼭 기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권규호의 힘에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는 듯 온여환은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살짝 돌려 여유롭게 권규호를 바라보기까지 했다.
“국장님도 한 번 들어 봐요. 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될 테니까.”
“뭐? 너 지금 무슨 헛소리야! 이 손부터 좀 놓고 말해!”
“구도완이 연정에서 기다린 건 분명 박하지일 텐데, 그런 구도완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깔끔하게 죽여 버리고 박하지를 빼돌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박하지는 구도완이……!”
“박하지한테서 얻어 내고 싶은 정보가 있거나 감추고 싶은 정보가 있는 사람이겠구나, 생각했죠.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런 목적을 가진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송태갑을 바라본 온여환이 의도적으로 그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숨이 꼴딱 넘어갈 듯한 얼굴로 침을 흘리던 송태갑은 갑자기 숨통이 트이자 쿨럭거리며 기침을 쏟아 냈다.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권규호를 향해 온여환을 체포하라는 눈짓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권규호도 이제 더는 온여환의 행동을 봐줄 수가 없었다. 그가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박하지가 가지고 있다는 선장의 증거를 찾고 싶었어?”
온여환의 말에 송태갑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바로 그때 권규호의 지시를 받고 안으로 들어온 직원들이 온여환의 어깨와 팔을 붙잡았다. 힘주어 떼어 내려는 순간 잠깐, 하고 그 동작을 막은 건 이번에도 권규호였다. 온여환은 제 팔에 매달린 이들에 의해 송태갑에게서 살짝 몸을 떨어뜨렸지만, 그 멱살만은 절대 놓지 않았다.
“아니면 당신이 원장 자리에 앉기 위해 선장의 존재가 필요해질 때까지 숨겨 둘 생각이었나?”
송태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당황스러운 기색을 온여환도,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던 권규호도 알아차렸다. 온여환이 하는 모든 이야기가 생소한 권규호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조차 벅찬데, 송태갑이 보이는 반응은 권규호의 반응과는 확실히 달랐다.
“무, 무슨 소리, 큽, 하는 거야.”
애써 눈을 부릅뜨며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려는 송태갑의 모습을 예상했던 온여환은 그를 더 다그칠 생각 따윈 없었다.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 안 통한다면 절대로 외면하지 못할 증거를 내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온여환은 아직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이들의 손을 털어 내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핸드폰 안에서 잠자고 있던 녹음 파일을 켰다. 그러곤 화면을 끄지 않은 핸드폰을 통째로 권규호에게 넘겨주었다. 엉겁결에 온여환의 핸드폰을 넘겨받은 권규호가 뭘 어쩌라는 건지 알지 못해 그를 바라보는데, 상황실 전체에 익숙한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 ……의원님. 어차피 지금 대통령은 이빨 빠진 호랑이입니다.
그건 온여환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송태갑의 목소리였다.
- 기껏해야 여론 조작 정도밖에 못 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는 다음 대권까지 안정적인 지지율을 유지할 수도 없을 거고요.
- 선장이 있지 않나.
- 말씀드렸잖습니까. 선장은 저 없이 절대로 못 잡습니다.
“그, 그거 당장 꺼!”
송태갑이 권규호가 가진 핸드폰을 빼앗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권규호는 본능적으로 그 손을 피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고, 온여환은 송태갑의 멱살을 붙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가 뻗은 팔을 내리눌렀다. 그러는 사이 권규호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건드렸는지 재생되던 녹음 파일이 뚝 끊어졌지만, 상황실에 있는 모두가 들었다. 그게 송태갑의 목소리라는 것을.
“당신이랑 염정석 의원이 산장에서 만났을 때 내가 직접 녹음한 거야.”
온여환이 송태갑의 얼굴 위로 뜨거운 입김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태갑과 염정석. 나란히 튀어나온 그 이름에 권규호는 물론이고 그들을 둘러싼 다른 직원들까지 술렁였다. 염정석 의원이라고? 방금 그 목소리가? 차장님이 왜 염정석 의원이랑? 근데 아까 VIP 얘기도 나오지 않았어?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송태갑이라고 안 들릴 리가 없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아, 아니야! 저거 다 조작이야! 지금 누구 말을 믿는 거야!”
“조작? 저 음성이 전국으로 퍼지게 돼도, 그때도 조작이란 소리가 나올까?”
“무, 뭐?”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지금이라도 당장 모든 포털에 풀 수 있어.”
송태갑의 경악한 얼굴로 온여환을 바라봤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는 얄팍한 기대를 품고 있는 듯도 했으나, 온여환은 정말로 수가 없다 싶으면 이 자리에서 모든 녹음본을 풀어 버릴 각오도 하고 있었다. 송태갑과 염정석만 잡고 끝낼 수 없어서 여태 가지고 있었던 녹음본이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통령이고 선장이고 다 관심 없었다. 온여환은 박하지를 찾아야 했다.
“대, 대체 원 하는 게 뭐야, 너.”
“박하지 어디 있어.”
“몰라! 나도 모른다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 박하지가 뭔가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한데!”
“아니야, 나만 아는 게 아니라고!”
다급하게 외치던 송태갑의 낯빛이 허예졌다. 자신의 말실수를 직감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온여환은 확신이 들었다. 송태갑이 박하지가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한 그 사람, 그가 바로 박하지를 데리고 간 사람이다.
“그럼 누가 또 아는데.”
누구일까. 염정석? 일신의 이유연? 그것도 아니면 대통령?
“씨발, 누구냐고!”
“이, 이지원.”
온여환은 송태갑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도 순간 그게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이름이었기 때문에.
“뭐?”
“일, 일신 그룹, 이지원, 이라고.”
“온여환, 이게 다 무슨 말이야, 지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권규호였다. 그는 자신이 듣고 있는 대화가 대체 무엇에 대한 얘기인지, 방금 들었던 녹음본은 뭔지, 차장님과 일신 그룹 이지원은 대체 무슨 관계인지,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박하지가 사라진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은 온여환도 마찬가지였다.
온여환은 국정원에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구도완에게서 박하지를 구하고 그를 데리고 갔다면 그 인물은 당연히 송태갑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백 프로는 아니었지만 아주 높은 확률이라고 생각했고, 설사 그 확률이 빗나간다고 해도 온여환이 예상 가능한 범주의 인물일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지원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모든 추측이 백지가 됐다. 그리고 완전히 새하얘진 그의 머릿속에 오늘 오전 한재호에게 들었던 말들이 하나씩 날아와 쌓이기 시작했다.
일광 사무소에 다니던 김현필. 그의 스크랩북. 그 안에 적혀 있던 기업 정보. 망상처럼 휘갈긴 일기. 그의 아이를 가졌다던 여성. 재벌가의 딸. 일신 그룹의 뒤처리를 도맡아 했던 일광 사무소. 한재호에게 1억을 건넨 박양일. 그리고 박양일의 아들이 되어 자란 박하지.
마침내 마지막 문장까지 쌓아 올렸을 때, 온여환은 송태갑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까치발을 든 채 겨우 버티고 있던 송태갑이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차, 차장님. 주변에서 그를 부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온여환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권규호가 그런 온여환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대체 이게 다 무슨 말이냐고, 온여환!”
여환은 그 말에 대답할 정신도 없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에 대형 스크린 가득 띄워진 박하지의 인영이 보였다. 온여환이 상황실에 들어오자마자 확인하려고 했던 13번 카메라 화면이었다. 그곳엔 막 택시에서 내리는 박하지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 모습을 망연히 보던 온여환의 눈에 돌연 이채가 돌았다.
“유성혜.”
“어어?”
벌어지는 상황에 마찬가지로 넋이 빠져 있던 유성혜가 온여환을 올려다봤다.
“저 화면 더 확대해 봐.”
“뭐?”
“저 CCTV 화면 더 확대해 보라고.”
유성혜는 지금껏 다른 얘기들을 쏟아 내던 온여환이 왜 갑자기 CCTV 화면에 관심을 두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가 확대해 보라고 하는 장면은 박하지가 동네를 떠나가는 모습이 찍힌 게 아니라, 도착하는 모습이 찍힌 장면이었다. 박하지의 이후 행적을 추적하는 데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단서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온여환은 빨리! 하고 언성을 높이며 재촉했다. 유성혜는 영문도 모른 채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녀가 명령어를 입력하자 화면에 확대된 박하지의 모습이 떴다. 온여환은 그의 모습을, 정확히는 그가 입고 있는 옷을 빤히 들여다봤다.
“저 옷…….”
온여환은 그 옷이 어떤 옷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온여환이 그에게 선물했던 슈트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온여환이 박하지의 몸 치수에 꼭 맞춰 주문 제작했던 비스포크 슈트였으니까. 그리고 온여환은 저 슈트를 주문할 때까지만 해도 박하지가 어디로 튈지 확신할 수 없었던 자신이 옷 안쪽에 위치 추적기를 붙여 놓았다는 사실까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핸드폰.”
중얼거린 온여환이 자신의 핸드폰을 찾는 듯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권규호의 손에 아직 그의 핸드폰이 들려 있는 게 보였다. 눈 깜짝할 새 그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은 온여환이 출입문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제가 박하지 위치 공유할 테니까 그쪽으로 곧장 지원 팀 보내세요!”
* * *
“근데 좀 시시하네.”
하얀 대리석 책상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중얼대는 이지원은 진심으로 실망스러워 보였다.
“난 박 대리가 정말 내 정체를 밝힐 특별한 증거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누군지도 몰랐다니.”
박양일이 거짓말을 한 걸까, 송태갑이 거짓말을 한 걸까.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이지원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박하지는 그 순간 그녀가 송태갑에게 박양일의 마지막 편지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들었을 거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그녀는 박하지가 선장의 정체를 밝힐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그를 붙잡아 온 것일 테다.
편지를 실물로 읽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송태갑에게 그 내용을 전해 듣기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지원은 박하지를 둘러싼 출생의 비밀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는 거다.
“박 대리한텐 미안하게 됐어. 그래도 내 얼굴까지 안 봤으면 살려는 뒀을 텐데 말이야.”
만일 그 비밀을 알았다면, 이지원은 박하지를 살려 둘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기까지 데리고 올 이유도 없이 구도완과 함께 죽여 버렸을지도 몰랐다. 박하지를 죽이는 것이 곧 선장에 대한 증거를 없애는 방법이었으니까.
생각을 이어 갈수록 박하지는 왜인지 점점 더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성이 또렷해지고, 불필요한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언젠가 선장을 직접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묻고 싶었던 수많은 질문들도 부옇게 증발해 갔다.
당신은 왜 정체를 숨긴 채 살았는지, 어째서 거기에 박양일을 이용했는지, 정말로 내가 당신의 아들인지, 그런데 당신은 왜 날 알아보지 못하는지. 그런 것을 다 미뤄 두고, 지금 이 순간 박하지가 그녀에게 궁금한 것은 딱 하나였다.
“저를…….”
“응?”
박하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흡음이 전혀 안 되고 소리가 되울리기만 하는 공간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박하지는 흠, 하고 목구멍을 콱 조여 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절 죽일 겁니까?”
“…….”
“아버지와 구도완처럼?”
박하지는 예전에도 선장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때 질문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은 박하지 자신이 아니라 구 대표, 즉 구도완이었다.
구 대표도 죽습니까?
그렇게 물었던 박하지에게 선장은 웃으면서 내가 왜 구도완을 죽이겠느냐 반문했었지만, 우습게도 구도완은 정말로 선장의 손에 죽었다. 안 죽일 거라면서요. 그렇게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선장이 구도완을 죽일 마음이 없다는 대답 따위 믿은 적도 없었다. 구도완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그가 거슬린다 싶으면 죽일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선장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박하지는 결국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것도 알았다. 내 아버지를 당신이 죽였습니까. 구도완을 죽일 겁니까. 그 질문들의 끝에 마지막 질문은 결국 나도 그렇게 죽일 겁니까, 가 될 것을.
“음, 죽일 마음까지는 없었는데.”
거짓말이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지?”
이지원이 대리석 책상 아래에서 묵직한 리볼버 권총을 꺼낸 것은 그때였다. 오늘 하루 박하지가 총을 마주한 것만 벌써 두 번째다. 그의 생에서 이토록 자주 총을 목격하게 될 날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지원의 손에 들린 총을 보는 순간 박하지의 머릿속은 더욱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살아야 한다. 이건 아까 그 골목에서 구도완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던 그 순간에 차오른 절박함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의지였다. 적어도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저를 죽이면 후회할 겁니다.”
“왜?”
이지원은 태연하게 물으며 권총의 약실을 옆으로 휙 뺐다. 총 여섯 발의 탄을 채울 수 있는 약실은 빈 곳 없이 꽉 차 있었다. 빙글빙글 몇 바퀴 돌아가던 약실이 이지원의 손목 스냅 한 번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철컥, 하고 발사 준비를 마친 권총이 금방이라도 박하지를 향해 총알을 뱉어 낼 것만 같았다. 박하지는 마른침을 삼키며 빠르게 말했다. 지금은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제가 죽으면 제가 가지고 있다는 그 증거가 뭔지 영영 못 찾게 될 테니까요.”
“그러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박 대리만 죽으면 완벽해지잖아.”
이지원은 마치 어린 조카와 장단을 맞추며 놀아 주는 이모처럼 느긋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박하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한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손바닥 안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아니죠. 그 증거까지 찾아서 없애야 완벽해지는 거죠.”
“…….”
“제가 가지고 올게요. 어디 있는지 아니까.”
흐음, 낮게 침음을 뱉은 이지원이 무거워 보이는 리볼버를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 하나로 들어 올렸다. 흔들흔들, 그녀가 생각을 이어 가는 동안 흔들리는 리볼버가 꼭 시계추 같았다.
“어디 있는지도 알고 뭔지도 알면, 박 대리는 왜 여태 내 정체를 안 까발리고 닥치고 있었을까?”
“봐도 몰랐으니까.”
“…….”
“아버지는 나한테 남기기만 했지, 아무 설명도 안 해 줬어요. 그걸 누구한테 보여 줘야 할지도 몰랐고.”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서인지 말이 술술 나왔다. 박양일은 박하지에게 증거를 남기기만 했을 뿐, 그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설사 그걸 찾아온다고 해도, 박 대리가 죽을 운명이라는 건 바뀌지 않을 텐데 수고스럽게 그런 짓을 하려는 이유는?”
“솔직하게 말해요?”
“해 봐.”
“도망칠 기회를 한 번 달라는 거예요.”
박하지는 이번엔 정공법을 택했다. 어차피 그럴듯하게 꾸며 낼 말도 없었고, 꾸며 낸 말에 속아 줄 선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도망칠 기회를 달라는 건 박하지의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도리어 신선하다 싶었는지 이지원이 처음으로 박하지와의 대화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처럼 눈썹을 들썩였다.
“어차피 당신은 내가 여기서 나가는 즉시 사람을 붙일 거잖아요. 수상하다 싶으면 곧장 죽여 버릴 거고.”
“…….”
“나한테는 목숨이 걸린 기회 한 번이지만, 당신한테는 밑져야 본전인 게임을 제안하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그리고 확률적으로 박하지가 이곳에서 나가 정말로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박하지를 빤히 보며 동그란 총구로 하얀 턱을 살살 긁어 대는 이지원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이지원이 고민하는 지점이 바로 그 점이었을 것이다. 하나 마나 박하지가 질 게임이라는 걸 아니까.
박하지는 자신의 저의를 꿰뚫어 보려는 듯 빤한 시선을 던지는 이지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찔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도망칠 기회를 달라는 것도, 목숨을 내놓은 게임을 제안한 것도, 그에겐 속임수 같은 게 아니었다. 박하지는 정말로 여기서 나갈 기회 한 번, 그걸 얻고 싶을 뿐이었다.
“좋아.”
이지원의 대답이 떨어졌다. 박하지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그녀의 입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이지원이 한 번 더 입을 움직였다. 좋다고.
“……좋다고요?”
듣고도 믿기지 않아 재차 묻자 이지원이 싱긋 미소를 그렸다.
“그래. 나는 박 대리가 재미있는 일을 해 줄 때가 꽤 즐겁거든.”
이지원이 제 턱밑에 대고 있던 총구를 들어 박하지를 겨눴다. 박하지의 어깨가 움찔 치솟았다. 그러나 이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총구를 휘휘 흔들며 말했다.
“가 봐.”
“…….”
“가 보라니까? 내 마음이 바뀌면 재미없어질 텐데.”
“…….”
“10초 줄게.”
이지원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 얼굴에 무표정이 드리우기 전에 달아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일종의 본능이었다. 박하지는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곧장 몸을 돌렸다.
“10.”
등 뒤에서 카운트가 시작됐다. 박하지는 아까 이지원이 들어왔고 남자가 사라졌던 벽 어딘가를 더듬거렸다. 문틈이 미세하게 갈라진 것은 보였는데, 어딜 눌러야 문이 작동하는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아까 그 남자가 이 근처 어딘가를 눌렀던 것 같은데. 박하지가 정신없이 벽을 두드리는 사이 등 뒤의 카운트는 벌써 7초를 넘어가고 있었다.
“6. 5.”
그리고 4초로 넘어가기 직전, 하지는 다시 한번 손의 위치를 옮겨 벽을 때렸다. 그 순간 발바닥을 간질이는 진동과 함께 벽이 돌아갔다. 하지는 밀려나는 벽에서 슬쩍 물러섰다.
“3.”
문이 열리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박하지는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틈이 생긴 벽 뒤로 어깨를 욱여넣었다.
“2.”
마침내 몸이 완전히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눈앞에 높은 계단이 보였다. 박하지는 이 계단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뛰어 올라갔다. 그렇게 반쯤 올랐을 때였다.
탕!
리볼버가 그의 등 뒤에서 격발했다. 이지원이 카운트를 다 셌을 타이밍이었다. 어쩌면 그게 이지원이 박하지를 다시 쫓겠다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는 계단을 오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계단까지 오른 후 닫힌 문을 퍽 밀었다. 지상이었다. 박하지는 밖으로 나온 후에야 조금 전 자신이 있던 그곳이 지하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바깥은 여전히 해가 환한 대낮이라는 것도 알았다.
어떤 거대한 건물이었는데 내부를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지하 공간과 마찬가지로 온통 하얗고 텅 빈 곳이라는 것 정도만 알 것 같았다. 박하지는 입구로 짐작되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밖으로 나오자 입구 바로 앞에 시동이 걸린 채 공회전 중인 차 한 대가 보였다. 혹시 사람이 타고 있나 싶어 박하지는 전속력으로 달려가면서도 눈으로 내부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하지는 망설임 없이 차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려 있었기에 운전석에 앉자마자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았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일단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쭉 달렸다. 비포장 산길임에도 속도가 빠르게 올라갔다. 주먹만 한 돌을 밟고 지날 때마다 차가 크게 흔들렸지만 브레이크를 밟을 순 없었다. 바로 뒤에 차 한 대가 쫓아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는 백미러로 바짝 쫓아오는 차를 살피며 액셀에 올린 발끝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침내 차가 산길을 빠져나왔을 때는 속도 게이지가 100km를 넘었다. 하지는 그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자유로를 탔다.
버릇처럼 백미러로 뒤차를 살피는데 왜인지 따라오는 차의 속도가 느려진 듯했다. 박하지의 차가 그만큼 빨리 달린 탓일까. 거리가 점점 벌어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거울로는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아졌다. 이상했다. 이렇게 쉽게 놓칠 리가 없는데.
그때, 박하지의 머리 위에서 별안간 변조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박 대리, 잘 가고 있어?
아직은 박하지에게 선장의 목소리로 더 익숙한 변조 음성이었다. 박하지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소리가 들리는 선바이저 안쪽을 더듬거렸다. 허벅지 위로 핸드폰이 툭 떨어졌다. 스피커폰으로 통화가 연결된 핸드폰이었다. 이게 왜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거지? 생각할 틈도 없이 선장의 말이 이어졌다.
-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한데, 그 차는 브레이크가 고장 났어.
침착한 설명에 박하지는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눌러 봤다. 아무런 제동도 걸리지 않았다. 씨발. 욕을 씹은 하지가 액셀에서 발을 떼려는 때였다.
- 그리고 속도가 100 이하로 내려가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거야. 속도가 100을 넘어가면서 지금 폭탄 스위치가 눌렸거든.
“뭐?”
박하지의 발이 다시 액셀 위로 올라갔다. 눈은 빠르게 속도 계기판을 확인했다. 눈금이 110 위를 아슬아슬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 속도가 100 밑으로 줄면 폭탄은 자동으로 터질 거야.
“씨발, 당신 처음부터 이러려고……!”
어쩐지 너무 쉽다 했다. 선장이 박하지의 제안에 쉽게 넘어가 줬던 이유가 있었다. 이지원은 애초부터 박하지를 이렇게 죽이려고 했었던 거다. 그녀는 구도완을 죽이고 박하지를 잡아들였을 때부터 구도완을 살해하고 달아난 전 화성파 보스의 아들이 도주 중 사망하는 완벽한 계획을 실현할 생각이었을 거다. 박하지의 앞에서 내보인 리볼버는 당연히 다 쇼였고, 거기에 스스로 걸려든 것은 박하지 자신이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분명 낮게 변조된 음성인데 조금 전 들었던 이지원의 진짜 목소리와 겹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수라 백작과 통화하는 기분이었다.
- 내가 그랬잖아. 박 대리는 정말 재미있는 일을 해 준다니까. 혹시 박 대리가 증거를 가지고 오겠다는 말을 내가 정말 믿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설마 그렇게까지 순진할까. 빈정대는 말을 들으며 박하지는 도로와 계기판을 번갈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표지판을 통해 이곳이 파주라는 걸 알았고, 그나마 교통량이 많은 지역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계속 이렇진 않을 터였다. 파주는 DMZ와 근접해 있어 위로는 올라갈 수 없었고, 결국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데, 그러면 금방 교통량이 많아지는 수도권 지역으로 이어졌다. 이 속도로는 끽해야 한 시간도 달릴 수 없을 터였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애초에 박하지도 큰 기대를 갖고 행동한 건 아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조금 허무했다. 살아야 한다. 그 목표는 끝내 이룰 수 없게 될 듯했다. 그러나 박하지에겐 다른 목표가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을 수도 있다.
박하지는 적어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존재가 감춰진 채 죽진 않을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너무 순진하네. 왜 내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 박 대리, 배짱 그만 부려.
선장은 이제 슬슬 박하지와의 통화가 피곤해지는 듯했다.
“잘 들어. 내가 이제부터 진짜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 거거든.”
하지는 제 다리 사이에 떨어진 핸드폰 화면에서 녹음 버튼을 찾아 눌렀다. 자신의 앞을 하나둘 막아서기 시작하는 차량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자식 있어?”
- ……박 대리. 지금 나랑 소개팅하고 싶어?
“아, 지금은 없을 테니까 있었냐고 물어봐야 하나?”
- …….
“김현필.”
그 이름을 꺼낸 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였고, 박하지에게도 그 이름 석 자 외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박하지는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말을 던질 상황이 아니었다. 티끌의 가능성이라도 선장의 정곡을 찔러야 했다. 그 사람이 두려움을 느낄 만한 상황을 안겨 주어야 했다.
선장은 박하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짧게 침묵했다. 실제로 몇 초도 지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박하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시속 100km 이상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주변 풍경이 빠르게 변했으며, 그의 앞을 가로막는 차량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시간이 없었다.
- 박하지.
선장이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 너 뭘 가지고 있어.
돌아오는 반응에 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장의 대답이 박하지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마지막 의문을 완벽히 해소시켰기 때문이었다. 박하지는 김현필과 선장 이지원의 아들이 분명하다. 그 사실을 확인받음과 동시에 박하지의 눈앞이 부예졌다. 당황스러운 눈물이었다. 그 눈물의 이유는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었다. 그건 차라리 후련함에 가까웠다.
“내가 가진 건 이 몸뚱이 하나야.”
- 뭐?
“내가 김현필 씨의 아들이거든.”
하지는 오른손을 들어 후드득 눈물방울이 떨어진 뺨을 빠르게 훔쳤다. 창문을 내려 들이치는 바람에 젖은 얼굴을 말렸다.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럼 선장 당신이랑 나는 무슨 사이일까?”
- …….
“당신은 알지?”
- 너…….
“알잖아. 내가 당신 핏줄이라는 거.”
박하지의 손에 아까 보았던 리볼버가 쥐어져 있다면, 지금 그의 총구는 필시 선장의 머리를 겨누고 있을 것이다. 이제 해머를 코킹하고, 방아쇠를 당길 차례였다.
“기대하세요. 가장 시끄럽고 요란하게 죽어서 당신이 선장이라는 걸 밝히고, 평생 당신을 곤란하게 할 몸뚱이로 남아 줄 테니까.”
처음부터 박하지의 목표는 그거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모두가 보는 앞에 죽음을 전시함으로써 내 생을 증명하는 것. 그리고 그 증명으로 당신의 세상을 침몰시키는 것.
박하지는 제 할 말만 마친 후 통화 종료를 눌렀다. 그러곤 곧장 112를 눌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해 본 거였지만, 당연하게도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보통은 개통 중지 상태의 핸드폰으로도 긴급 전화가 가능했지만, 이 핸드폰은 아무래도 발신 기능을 전혀 사용할 수 없도록 손을 써 둔 듯했다. 선장이 박하지가 타고 갈 자동차에 외부와 연결되는 핸드폰을 둘 리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씨발, 낮게 욕을 뱉은 하지가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눌러 아예 꺼 버렸다. 이 깡통 핸드폰으론 다른 곳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고, 선장과의 통화 녹음본을 전송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박하지는 우습게도 온여환과 마지막 통화를 할 수 없다는 것, 그게 가장 서글펐다.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장의 정체를 밝혀 달라느니, 박하지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게 해 달라느니, 그딴 유언 같은 유언을 전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선장의 정체야 여태껏 그래 왔듯 온여환이 알아서 밝힐 테고, 정체가 밝혀지면 박하지와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엇보다 박하지의 죽음은 온여환의 탓이 아니었으니 그가 하지의 억울함을 밝힐 이유도 없었다.
박하지는 그냥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온여환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혹시 박하지가 이번에도 스스로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박하지는 누구에게 끌려가지도 않고 오롯이 혼자서 연정으로 향했고, 하필 그곳에서 우연히 구도완을 만났으며, 그 뒤부터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박하지가 스스로 집을 나가 구도완을 죽이고 도주하려고 했다는 전개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박하지는 온여환이 자신을 믿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박하지를 홀로 인천항 컨테이너 터미널에 보내 놓고 박양일의 총을 맞아 쓰러졌던 온여환의 마음이 바로 이랬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고, 자신이 믿을 수 없게 행동했지만, 그럼에도 믿어 주길 바라는 마음, 그 이기심. 이런 게 바로 우리가 한 사랑이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참 성질이 더럽고 고약한 사랑을 했다. 그래서 서로에게 그토록 모질고 매섭게 굴었나 보다.
박하지는 픽 웃어 버렸다. 동시에 눈꼬리를 타고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젖은 얼굴을 말리자고 열어 놓은 창문에서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왔다. 눈물이 자꾸만 났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었다. 하지는 눈물과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벅벅 닦아 내며 생각했다. 자신이 이 차와 함께 터지더라도 선장과의 통화 녹음본이 남은 핸드폰을 지킬 방법이 뭐가 있을지.
핸드폰이 망가지는 것이야 막을 수 없겠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데이터만 무사하면 됐다. 그럼 유심 칩만 빼서 삼켜 버리면 되지 않을까. 박하지가 발견되었을 때 설사 그의 몸뚱이가 산산이 분해되어 있을지라도 그의 배 속에서 유심 칩이 발견되지 않을까. 아니려나, 폭탄이 터지면 그의 위장까지 다 녹아 버리려나. 애초에 유심 칩이 꽂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문제이긴 했다. 박하지가 손에 든 핸드폰을 뒤집어 보려던 찰나였다. 그의 차선 앞으로 빨간 스포츠카가 불쑥 끼어들었다.
“헉……!”
하지의 반사 신경이 자동으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역시나 속도는 줄지 않았다. 그가 탄 차의 앞머리가 스포츠카의 범퍼를 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하지는 재빠르게 비어 있는 옆 차선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끔찍한 충돌은 피했지만 차가 출렁이며 순간 속도계의 눈금이 넘실거렸다. 하지는 액셀을 밟은 발바닥에 신경을 집중하며 속도를 유지했다.
스포츠카는 그런 하지를 약 올리듯 눈앞에서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갔다. 시뻘건 뒤꽁무니를 향해 속으로만 욕을 퍼부은 하지가 불안하게 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단은 운전에 집중해야 했다. 하지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핸들을 꽉 잡았다.
빠앙!
바로 옆 차선에서 귀가 터질 것 같은 클랙슨이 울린 게 그때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린 박하지가 멍멍한 정신을 다잡는데,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박하지! 하지는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박하지! 이쪽이라고!”
빵, 빵, 짧게 울리는 클랙슨 사이로 분명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박하지가 열린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오른쪽 차선에 창문을 활짝 열고 클랙슨을 울려 대는 온여환의 모습이 보였다. 비로소 눈이 마주치자 그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야!”
그건 분명 온여환이었다.
“속도 줄이고 차 세워!”
그의 외침에 박하지는 그제야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는 반사적으로 액셀을 콱 밟으며 핸들을 고쳐 잡았다. 속도 계기판의 눈금이 100을 아슬아슬하게 웃돌다가 110 위로 치솟았다. 창문 밖의 온여환의 잠시 뒤처졌다가 다시 그와 나란히 속도를 맞췄다.
“박하지, 차 세우라고!”
박하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여기서 속도를 줄였다간 너무 큰 사고로 이어질 것이다. 바로 옆에 차를 붙이고 있는 온여환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박하지!”
“안 된다고! 못 세운다고!”
박하지와 속도를 맞춘 채 달리던 온여환이 그 말을 듣고 표정을 굳혔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던 그가 갑자기 앉은 자리에서 벨트를 풀었다. 그러곤 핸들을 왼쪽으로 휙 꺾어 박하지의 차 오른편에 차체를 바짝 붙였다. 온여환의 차가 차선을 완전히 침범했다. 차가 조금만 흔들려도 그대로 충돌할 듯한 거리였다.
“너 뭐 하는 거야!”
당황한 박하지가 소리를 질렀으나 온여환은 아무 대답 없이 차량의 간격을 유지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500미터 앞, 차선이 좁아지는 구간을 앞두고 문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창문이 열린 박하지의 차 조수석 문을 턱 붙잡았다. 박하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쳤어?!”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온여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예 운전석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박하지의 차 안쪽으로 불쑥 고개를 집어넣었다. 차선이 좁아지는 구간은 이제 불과 200미터 앞이었고, 두 차량은 여전히 10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박하지는 차량의 속도를 신경 쓰랴, 전방을 확인하랴, 그리고 자신의 차로 넘어오는 온여환을 보랴,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 온여환, 앞, 앞에!”
온여환은 자신의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기 직전 박하지의 차 안쪽으로 완전히 몸을 옮겼다. 그러곤 가드레일에 충돌해 튕겨 나오는 자신의 차량을 피하기 위해 박하지가 쥐고 있는 핸들을 왼쪽으로 확 꺾었다. 차가 크게 휘청거렸지만, 다행히 충돌은 없었고, 속도도 100을 유지하고 있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것처럼 숨을 헐떡이던 박하지가 버럭 악을 썼다.
“죽으려고 환장했어?!”
“다쳤어?”
온여환이 한 손으로 피가 묻은 박하지의 턱을 휙 잡아채며 물었다. 이마며 뺨이며 꼼꼼하게도 살폈다. 박하지는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그 손을 털어 내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진짜 미쳤냐고! 여길 왜 타!”
“속도는 왜 못 줄여? 브레이크는?”
그러나 이번에도 박하지의 고함을 무시한 온여환은 핸들을 쥔 그의 손등을 감싸더니 차를 세울 수 없는 이유부터 물었다. 그 차분하고 침착한 얼굴에 박하지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그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사람이 없고 차가 없는 곳에서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속도를 줄이려고 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가드레일이라도 들이받고 나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 차에 온여환이 올라탔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고,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은 맞지만,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다.
네가 타면 어떡해. 이걸 왜 네가 타냐고.
불분명하게 웅얼대는 박하지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도로가 울렁거렸다. 온여환은 그런 하지를 진정시키려는 듯 한 손으론 여전히 그의 손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론 발간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자꾸 눈물길이 만들어졌다.
“박하지.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만 얘기해.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해.”
“…….”
“하지야.”
나직하게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하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땀처럼 흘러내렸다. 어쩌면 정말 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차에 폭탄이 실려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멀쩡했었는데, 온여환이 차에 몸을 싣던 순간부터는 식은땀이 너무 많이 났다.
따가운 눈가를 벅벅 문지른 하지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 계기판을 다시 확인하며 입을 뗐다.
“속도가 100km 이하로 떨어지면 터진다 그랬어.”
온여환이 얕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도 차를 세울 수 없는 상황 정도만 생각했지, 설마 폭탄까지는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온여환은 당황을 드러내지 않았다.
“괜찮아.”
“…….”
“아무 일 없어. 괜찮을 거야.”
하나도 괜찮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괜찮다는 그의 말이 의미 없는 위로나 빈말처럼 들리진 않았다. 박하지의 얼굴을 바라보는 온여환의 눈은 우리가 정말 괜찮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확신을 말하는 그 눈빛에 박하지는 조금 전까지 끝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던 제 삶이 조금씩 연장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말 한마디일 뿐이었고, 고요한 눈빛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박하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조금 더 살고 싶다는 의지가 움트는 것만 같았다.
“일단 확인부터 할게.”
온여환은 조수석을 뒤로 밀어 공간을 확보하더니 차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운전 중인 박하지의 다리와 핸들 사이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확인하겠다는 게 폭탄의 유무를 확인하겠다는 뜻이었던 모양이다. 박하지는 액셀에서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신경 쓰며 그가 안쪽을 잘 살필 수 있도록 허벅지를 바짝 내렸다. 한참 안쪽을 들여다보던 온여환이 짧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들었다.
“액셀 안쪽으로 다른 선이 연결되어 있어. 아마 폭탄이 맞을 거야.”
“어떻, 어떻게 해, 그럼?”
“폭발물 해체는 내 전문이 아니고, 달리는 차에서 괜히 잘못 건드리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말끝을 흐리며 잠시 고민하던 온여환이 갑자기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당황한 하지는 뭘 하는 거냐고 묻지도 못했다. 빠르게 셔츠를 벗은 온여환은 양쪽 소매를 한 손에 하나씩 길쭉하게 잡더니 셔츠의 몸통 부분을 휘휘 돌려 긴 밧줄처럼 꼬았다.
“박하지. 여기서 우측으로 빠져서 5km만 가면 대교 하나 나와. 그쪽으로 차 몰아.”
그렇게 말하곤 다시 좌석 밑에 쪼그려 앉은 온여환이 양팔을 박하지의 다리 사이로 불쑥 집어넣었다.
“뭐, 뭐 해?”
“액셀에서 발 떼지 마.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 계속 적당히 누르고 있어.”
그는 하지의 발끝과 액셀, 그리고 그 옆의 작동하지 않는 브레이크 페달을 몇 번 누르며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미리 벗어 뒀던 셔츠로 액셀과 브레이크 사이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브레이크 페달은 작동하지 않으니 기둥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셔츠를 묶어 액셀을 누르는 힘을 고정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고정이 잘될까. 제대로 된 끈도 아니었고 셔츠를 벗어 급히 만든 것이었다.
무엇보다 액셀이 고정된다고 해도 10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는 차에서 그냥 뛰어내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거야. 박하지는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일단은 온여환이 시킨 대로 5km 앞의 대교로 차를 몰았다.
“됐어.”
마침내 매듭을 짓고 일어난 온여환이 다시 조수석에 앉았다. 그의 목덜미엔 어느새 땀이 맺혀 있었다. 박하지는 그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손등으로 땀방울을 닦아 주자 온여환이 씨익,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중 처음 보는 온여환의 미소였다. 이런 상황, 이런 장소가 아니었다면 박하지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퍼붓게 만들었을 미소였다.
“도련님.”
“…….”
“나 믿어?”
온여환이 말했던 대교가 멀지 않은 곳에 보였다. 여환은 핸들을 쥔 박하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며 물었다. 자신을 믿냐고. 박하지는 그 손과 온여환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윽고 그의 눈만 빤히 들여다봤다. 갈색 눈동자가 박하지의 얼굴을 담은 채 반짝거렸다.
“하지야. 나 믿냐고.”
온여환의 손 아래에 잡혀 있던 손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박하지가 핸들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빼 버린 탓이었다. 여환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 떨어지려는데, 하지의 손이 다시 올라와 그의 손등을 감쌌다. 이젠 온여환이 핸들을 잡고, 그 손을 하지가 감싼 모양새였다.
온여환이 가만히 웃었다. 그의 입술이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아마 그도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박하지는 그의 호박색 눈동자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온여환이 붙잡은 핸들이 어디로 꺾이는지, 차의 머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차의 속도가 어디까지 치솟았는지, 그런 건 하나도 확인하지 않았다.
온여환이 나를 믿느냐고 물었다. 박하지는 그 세 번째 물음 앞에서야 입술을 떨어뜨렸다.
“믿어.”
더할 나위 없는 대답이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탄 차가 대교의 기둥을 뚫고 날아갔다. 빨랐던 속도만큼이나 강물에 차가 처박혀 가라앉는 속도도 빨랐다. 검은 세단은 순식간에 트렁크 뒤에 박힌 심벌만 겨우 보이는 상태가 됐다. 그리고 정확히 3초 후였다.
펑!
대교 위로 높은 분수가 치솟았다. 그 순간 대교를 지나던 사람들은 눈부시게 파란 하늘 위에 쌍무지개가 뜬 것을 보았다.
* * *
국정원 지원 팀 차량이 파주 출판 단지를 지났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가 왜 파주로 가고 있는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건 선두 차량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권규호도 마찬가지였다.
“야, 좀 더 빨리 갈 수 없어?”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아래턱을 쓸던 권규호가 운전자를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운전자는 지금도 최대한 빨리 가고 있는 거라는 말과 함께 액셀을 밟은 발끝에 힘을 줬다. 다른 차들을 피하며 핸들을 꺾는 손이 분주했다.
현장에서 손을 뗀 지 오래인 권규호가 이렇게 직접 움직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권규호는 국정원에서 출발하기 직전 온여환에게 받았던 전화 내용을 떠올렸다.
- 지금 박하지의 위치가 한 곳에 계속 고정되어 있어요.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지금 당장 운용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그쪽으로 보내세요. 거기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이 바로 선장일 테니까.
그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은 온여환은 곧이어 파주에 위치한 어느 장소의 주소지를 문자로 보내 왔다. 권규호가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답답해하는 그에게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준 것은 뜻밖에도 온여환이 아니라 유성혜였다. 유성혜는 그간 온여환에게 들었던 일들, 그리고 그와 함께 벌여 왔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권규호는 얼마 전 국정원 데이터 시스템에 침입하려고 했던 것이 온여환과 유성혜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알고 기함했지만, 뒤이어 들려온 얘기들에 비하면 그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권규호는 유성혜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송태갑이 염정석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수를 쓰고 있었다는 것도, 그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선장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를 정보를 고의적으로 감추고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정보의 실체라는 게 바로 박하지의 피에 흐르는 선장의 유전자라는 것도.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말뿐이었다. 그럼에도 권규호는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온여환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권규호는 온여환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선장을 쫓았던 사람이었다. 10년도 넘는 기간이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시간이 없어서 선장을 놓칠 것만 같은 불안감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선장은 언제나 멀리 있는 사람이었고, 시간을 따져 가며 추적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여환과 유성혜의 허무맹랑한 말을 듣는 순간에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처음으로 선장의 실체가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말들이 다 사실입니까?’
유성혜의 말을 다 들은 권규호는 송태갑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딘가 넋이 빠져 버린 듯한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박하지가 선장의 아들이라고? 그런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정보를 가졌던 자조차 밝히지 못한 진실들이 남아 있는 듯했다.
권규호는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온여환을 국정원의 뜻에 불응한 변절자로 처단할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을 믿고 자신의 상사인 송태갑 차장의 지시도 없이 독단적인 행동을 할 것인지.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온여환의 말이 진실일지 아닐지 판단하기 위해선 그를 따라가 보면 될 일이었다. 선장을 쫓느라 10년도 넘게 썼던 시간에 고작 몇 시간을 더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권규호는 송태갑의 지시 없이 지원 팀을 호출했다. 그동안 권규호가 자신의 방식과 다른 송태갑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랐던 이유는, 그래도 그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정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하는 그의 신념에 동의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그가 꿈꾸는 정의가 자신의 정의와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정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 이상 권규호가 송태갑의 지시에 맞춰 움직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온여환의 거짓말이라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권규호 자신의 후회가 가장 크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게 권규호가 직접 지원 팀을 꾸려 움직인 이유였다.
“국장님, 앞에 사유지 표시가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냥 들어갈까요?”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던 요원이 몇 미터 앞에 나타난 사유지 푯말을 보며 말했다. 내비게이션 화면엔 해당 푯말이 가리키는 길로 화살표가 나 있었다. 권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뚫어.”
그의 대답을 들은 요원이 빠르게 차선을 바꿔 내비게이션 안내대로 방향을 틀려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야 하는 길에서 검은색 세단이 확 튀어나왔다. 어어, 하고 소리를 지른 요원이 이를 악물며 빠르게 핸들을 꺾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음에도 몸이 크게 요동칠 만큼의 충격이었다. 그런데도 세단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보란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좁은 비포장 길을 저런 속도로 빠져나온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권규호의 직감이 저 차를 쫓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야, 밟아.”
“예?”
“밟으라고, 새끼야! 저 차 잡아!”
권규호가 소리쳤다. 핸들을 잡은 요원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다시 액셀을 밟았다. 자동차 엔진이 오토바이 같은 소리를 내며 치고 나갔다. 무전을 든 권규호는 지원 차량 모두에게 상황을 알리고 세단을 포위할 것을 지시했다. 평일 낮의 자유로 위에서 난데없는 추격전이 펼쳐졌다. 파주 아울렛에 쇼핑이나 하러 나왔을 일반 차량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빨리 달리는 세단의 뒤꽁무니가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차가 너무 많습니다, 국장님!”
운전대를 쥔 요원의 얼굴의 관자놀이에 땀이 맺혔다. 뻥 뚫린 길이라면 따라잡기 힘든 거리가 아니었지만, 중간중간 끼어드는 차량들 때문에 무작정 속도를 높이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사이 세단은 조금 더 멀어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놓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때였다. 글러브 박스 위에 부착된 무전기가 불빛을 내며 작동했다.
- 국장님, 저희가 앞을 막겠습니다!
3호 차량에서 온 무전이었다. 권규호가 그 무전에 답을 하기도 전에 반대편 차선에서 차 한 대가 중앙 분리대를 뚫고 들이닥치는 것이 보였다. 3호 차량이었다. 바로 그 앞을 지나가려던 세단이 미처 길을 뚫지 못하고 핸들을 꺾었다. 차 앞머리가 크게 회전했다. 타이어 타는 소리가 도로를 울렸다. 뒤에서 달리던 차량들이 급히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꺾었지만 퍽, 퍽, 연쇄 추돌을 일으키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보닛이 크게 일그러진 세단이 그대로 차량들 사이에 갇혔다.
앞에서 일어난 사고로 주행을 멈춘 차들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은 권규호의 차도 마찬가지였다. 꽉 막힌 도로를 보던 권규호가 곧장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사고 현장을 구경하겠다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달려 나간 권규호가 마침내 보닛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세단 앞에 멈춰 섰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먼저 차에서 내린 3호 차량 요원들이 이미 세단을 둘러싸고 있었다. 세단의 운전자는 사고 충격으로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었고, 뒷좌석 탑승객은 의식이 없어 보였다. 요원의 몸에 가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혹시 저 사람이 선장일까. 권규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던 미지의 인물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낼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다가선 권규호가 차량 앞을 가로막은 요원을 밀어 내려던 때였다. 그보다 먼저 몸을 돌려 권규호를 바라보는 요원의 표정이 어째 귀신을 본 듯 아연했다.
“국장님, 차에…….”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뭐야, 하고 인상을 찡그린 권규호가 그의 어깨를 툭 밀어 차량 앞으로 다가섰다. 깨진 창문 틈으로 화이트 톤의 슈트가 보였다. 생각보다 가녀리고 작은 체구에 권규호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차 안을 확인했다.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권규호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지원 관장?”
이마가 찢어져 흘러내린 피가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으나 그 얼굴이 이지원이라는 것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의식 없던 그녀의 눈꺼풀이 조금 움직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권규호는 조금 전 온여환과 송태갑의 대화에서 이지원의 이름이 등장했던 순간을 기억해 냈다. 분명 그 이름을 듣기는 했었는데 자세한 얘기는 더 전해 듣지 못했었다. 유성혜 역시 이지원에 관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었다. 온여환은 박하지를 데려간 사람이 누구든 바로 그 사람이 선장이라고 했었고, 그가 박하지의 위치라고 일러 준 장소에서 도주하던 차량엔 이지원이 타고 있다.
그렇다면 선장이 이지원이라는 말인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말이 안 되려면 이지원이 여기에서 등장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권규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지원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지원은 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나. 뒤쫓아 오는 차량을 피해 어디로 가고 있었나. 이 일에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기에 송태갑의 입에서 이지원의 이름이 나왔었나.
“국장님!”
답을 내리지 못할 의문만 떠올리던 권규호의 뒤에서 달려온 요원 하나가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유성혜 팀장인데, 좀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원 팀에 합류하지 않고 국정원 본부에 남은 유성혜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다는 뜻이었다. 권규호가 빠르게 전화를 넘겨받았다.
“어, 나야. 무슨 일…….”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성혜의 말에 권규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사망이 확실해?”
확인하듯 물은 권규호가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지켜보던 요원이 그의 곁에 주춤 다가서며 물었다.
“국장님, 어떻게 할까요?”
권규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깨진 창문 안쪽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는 이지원의 입가에 빠르게 걸렸다가 사라지는 미소를 목격했다. 그건 마치 승리를 확신한 자의 미소와도 같았다.
18. 백야 -
경기도 파주시 자유로에서 10중 추돌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원인은 반대쪽 차선에서 달려오던 차량의 중앙 분리대 침범이었다. 해당 차량을 피하려던 검은색 세단은 뒤이어 달려오던 차량과 1차 충돌 후 차체가 크게 돌며 또 다른 차량들과 연이어 충돌했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후행 차량들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연쇄 충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해당 사고로 검은색 세단 운전자와 탑승객 1명이 뇌진탕 증세를 보이며 의식을 잃었고, 그 외에도 10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구급차는 의식을 잃은 부상자부터 싣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뒤이어 사설 레커차와 보험사, 경찰차들도 속속 도착했다.
현장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그들이 모두 떠나고 그날 저녁 뉴스에 사고 소식이 전해질 무렵이었다. 속보 타이틀과 함께 뉴스의 머리기사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보도가 끝난 직후엔 모든 포털과 SNS가 뉴스 내용과 화면 캡쳐 이미지로 도배되었다.
흔하다면 흔할 교통사고 뉴스가 대한민국을 뒤덮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가장 먼저 병원으로 실려 갔던 부상자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지원 씨, 계속 그렇게 입 다물고 있을 겁니까?”
탁, 테이블을 내리치는 장동준의 손에 힘이 실렸다. 취조실과 분리된 참관실에서 모니터로 상황을 지켜보던 권규호가 시선을 올렸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지원의 얼굴에선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찾을 수 없었다. 깔끔하고 수수한 블랙 원피스 차림의 이지원은 여느 때와 같이 고고하고 창백했다. 대한민국을 휩쓸어 버린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기까지 했다.
“오늘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모니터 자리에 앉아 있던 유성혜가 고개를 올려 권규호를 봤다. 그동안 이 자리에서 이지원의 취조 과정을 지겹도록 참관해 왔던 유성혜였다. 저런 식이라면 오늘도 시간 낭비만 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어쩔까요? 이대로 계속 두고 봐요?”
“잠깐 기다려 봐.”
권규호가 참관실 내부의 디지털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올 때가 됐는데.
“누가요?”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덩달아 시계를 보던 유성혜가 물었다. 권규호의 대답을 대신하듯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이 바로 그때였다. 참관실이 아니라 취조실 안쪽 문에서 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것이었다. 유리창을 등지고 있던 장동준이 참관실 쪽을 돌아봤다. 그래 봤자 취조실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참관실에선 그의 당황스러운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덩달아 권규호를 올려다보는 유성혜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권규호가 입을 여는 것보다 취조실 문이 열리는 것이 더 빨랐다.
“어?”
열린 문 뒤에서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유성혜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온여환이었다.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
“야, 너…….”
온여환의 등장에 놀란 건 취조실에 들어앉아 있던 장동준도 마찬가지였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온여환을 보며 장동준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오랜만이에요, 장 과장님.”
온여환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 음성에 반응하듯 내내 도도하게 테이블만 내려다보던 이지원의 시선이 처음으로 정면을 향했다. 그러곤 천천히 제 옆에 선 남자를 돌아봤다. 선명히 느껴질 만큼 또렷한 시선이었다. 정작 그 시선의 대상이 된 온여환은 이지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만 나가 보시죠. 오늘은 제가 맡을 테니까.”
“뭐?”
“설마 국장님이 부르신 거예요?”
온여환의 말에 놀라서 되묻는 장동준의 목소리와 유성혜의 말이 겹쳤다.
“맞아.”
쉽게 튀어나오는 대답에 권규호를 올려다보는 유성혜의 눈이 커졌다.
“온여환 지금 징계 중이잖아요.”
“그것도 맞고.”
“근데 왜…….”
어쩌려고 그러시냐는 말을 하려던 유성혜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취조 시 조사관을 온여환으로 배정해 달라고 했던 건 이지원의 요청이었다. 물론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온여환은 정직 상태였고, 국정원에서 취조 대상자의 요구를 일일이 들어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방법이 없잖아.”
물론 이지원의 입을 열게 할 가장 쉬운 방법이 온여환을 부르는 것임을 유성혜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직 처분을 받은 사람을 이렇게 절차 없이 불러내도 되는 걸까. 괜히 더 문제가 커지진 않으려나. 최근 국정원 전체가 휘청일 만큼 큰 사건을 여러 번 겪은 유성혜는 얼굴 위로 드러나는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 염려와 걱정을 알아차린 권규호가 안심하라는 듯 유성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괜찮을 거야. 우리가 언제 원칙 지키면서 일했냐.”
자랑이 아닌 말을 자랑처럼 뱉은 권규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참관실 문이 열렸다. 조금 전까지 취조실 의자에 앉아 있었던 장동준이었다. 자신이 이지원의 취조를 맡겠다는 온여환에게 웬일로 순순히 자리를 내주고 온 것이었다.
원래라면 이지원이 있든 말든 취조실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도 남았을 텐데, 그간 사건이 너무 많이 터졌던 탓일까. 왜인지 온여환을 대하는 장동준의 태도가 전처럼 마냥 공격적이진 않았다. 어쩌면 이번 일로 징계를 받은 온여환에게 어떤 측은함이라도 가지게 된 걸지도. 이유가 뭐든 간에 장동준답지 않은 태도이긴 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다소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는 유성혜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안으로 들어선 그가 권규호의 뒤에 섰다.
“뭐, 큰일이야 있겠냐. 일단 지켜보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유리창 너머로 향했다. 좁은 취조실엔 온여환과 이지원, 딱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지켜만 보는데도 숨을 쉬는 게 조심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들을 둘러싼 긴장감이 마치 벽을 뚫고 넘어오는 듯했다.
“오랜만이야, 도 실장.”
무겁게 이어지는 침묵 속에 먼저 돌을 던진 건 이지원이었다. 취조실에 앉으면 그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은 채 인형처럼 앉아 있기만 하는 이지원이 먼저 말을 붙인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온여환은 이지원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관심 없는 사람처럼 그간의 사건 자료만 휙휙 들춰 넘겼다.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입니다. 저는 오늘 이지원 씨 처음 만난 거니까. 그리고 잊으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자면 여기 취조실입니다.”
“그래서?”
“말 놓지 마시죠. 도 실장이라고 부르지도 마시고.”
이지원이 픽 웃었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태도에도 온여환의 눈은 꿋꿋이 서류에 박혀 있었다. 그 안엔 그동안 수집된 증거와 정황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박하지가 납치되었던 그 날, 이지원의 파주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해당 장소는 20여 년 전 일신 그룹 사회복지재단에서 사회 공헌 사업의 일환으로 정신병동을 설립하려던 곳이었다. 물론 그건 대외적인 이유일 뿐이었고, 사실상 바로 전해에 터졌던 일신 그룹의 장애인 채용자 차별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보여 주기식으로 세우려던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그조차 인근 주민들의 반발로 전면 무효화 되었고, 건물이 세워진 장소는 사유지로 지정되어 외부인의 접근이 막혔었다.
이지원은 바로 그곳을 자신의 은신처로 삼았다. 겉으로는 마치 텅 빈 갤러리나 거대한 연회장처럼 보이는 곳이었지만, 지하에는 다수의 통신 회로와 복잡한 보안 시스템을 갖춘 공간이 숨어 있었다. 그곳의 통신선을 확보한 국정원은 대부분 암호화 처리되거나 삭제된 데이터 속에서 선장의 행적과 연결되는 잔류 데이터를 찾아냈다. 국정원이 선장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의미한 자료를 찾아낸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이지원과 선장이 동일 인물임을 밝히는 결정적 증거가 된 것은 아니었다.
“박 대리는 잘 있나?”
다음 장을 들추려던 온여환의 손이 뚝 멈췄다. 그의 손끝에 잡힌 얇은 종이에 구깃하게 주름이 졌다. 온여환은 취조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이지원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봤다.
“몸은 좀 괜찮나? 다친 데는 없다고 듣긴 했는데.”
이지원의 정말로 박하지의 안부가 걱정되는 사람처럼 눈썹을 살짝 모았다. 음성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나긋했으나, 온여환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박하지의 이름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지원 씨.”
읊조리듯 입안에서 발음을 굴려 뱉는 온여환의 목소리가 낮게 지글거렸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는데 괜히 쓸데없는 소리로 자극하려고 하지 말고, 당신이 해야 할 말이나 해. 굳이 날 콕 집어서 불러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온여환은 현재 징계를 받고 정직 상태인 자신을 불러낸 게 권규호의 의지가 아니라 이지원의 요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상부와 공유되지 않은 단독 행동으로 조직을 혼란에 빠뜨린 것에 대한 책임의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 내려진 징계였고, 심지어 온여환 본인조차 그 징계를 불만 없이 받아들였는데, 정작 국정원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지원의 한마디에 그가 이곳까지 불려 나오게 된 것이었다. 새삼 이지원이라는 사람의, 선장의 영향력에 치가 떨렸다. 이지원은 목숨 줄이 틀어 잡힌 와중에도 키를 쥐고 선장 행세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날 만나려고 한 이유가 뭐냐고.”
그러나 온여환은 이 또한 그녀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온여환이 그렇게 만들 것이기도 했고. 온여환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지원을 노려봤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던 이지원이 천천히 상체를 젖혔다. 의자 등받이에 여유롭게 허리를 기댄 이지원이 한쪽 다리를 꼬아 올렸다. 입꼬리에도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뭘 그렇게 열을 내. 나는 그냥 그 아이가 잘 지내나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설마 폭탄이 실린 차를 타고도 살아남을 줄은 몰랐거든.”
“…….”
“죽으라는 사람은 안 죽고 애먼 사람만 죽었지 뭐야. 쓸모없게.”
이지원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녀의 얼굴에선 일말의 안타까움이나 죄책감, 하다못해 동정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온여환은 이지원이 쓸모없다고 치부한 죽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곧장 알아들었다. 송태갑이었다.
그날 온여환이 파주로 떠나고, 국정원에 남은 권규호가 유성혜에게 자초지종을 듣던 그때 송태갑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유성혜가 하는 얘기 중 송태갑이 아는 내용도 있었겠지만 아마 모르는 내용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박양일의 원본 편지에 숨어 있는 선장의 정체에 대한 진짜 힌트, 박하지라는 존재의 뒤에 감춰진 진실, 그리고 선장을 이용한다고 믿었던 자신이 도리어 선장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송태갑은 자신이 덫에 걸렸음을 알았다. 그 속에서 피할 구멍은 없었다. 온여환이 가진 녹취록만으로 이미 치명상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유성혜는 이복구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온여환의 부탁으로 국정원 소속 블랙 요원인 이복구의 데이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해당 데이터에 권한 외 코드로 접속된 기록을 발견했으며, 해당 코드 보유자가 이복구의 데이터를 외부로 유출한 정황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확인 결과 데이터 수신인은 구도완이었다. 발신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추측할 수 있었다. 선장이라는 존재를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이용하고, 그 과정에서 국정원 요원들의 목숨을 휴지 조각처럼 여겼던 사람, 송태갑이었다.
권규호는 유성혜에게 이 모든 사실을 원장에게 즉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권규호가 지원 팀을 이끌고 국정원을 나선 후 유성혜에게 긴급 보고를 받은 원장은 송태갑을 즉각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송태갑이 국정원 내부 심문실에 갇히기까지는 불과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원장은 송태갑을 제외한 차장들을 소집하여 긴급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회의의 안건은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고 처벌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수습하고 면피하느냐였다.
전 대통령부터 현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국정원의 은밀한 정치 개입과 여론 조작, 고의적인 사건의 축소 및 확대는 비단 송태갑의 손에서만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꼬리 자르기를 고민하고 있었다. 어쩌면 송태갑은 그것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살아 있으면 가장 고통스럽게 잘려 나간 꼬리가 되리라는 걸 말이다.
송태갑의 부고가 전해진 것은 원장실에서 열린 긴급회의가 끝날 무렵이었다. 그는 심문실 창틀에 넥타이로 목을 맸다. 요원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사고 현장에 있던 권규호에게 걸려 온 전화가 바로 그의 부고를 알리는 전화였다. 의식을 잃기 직전의 상태였던 이지원은 아마 그것이 박하지의 얘기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병원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을 체포하러 온 국정원 요원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던 이지원이 제 혐의가 납치 및 살인미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고 했었으니까. 살인이 아니라 살인미수가 확실하냐고.
권규호는 이지원에게 박하지가 탄 차가 대교 밑으로 추락 후 폭발하였으며, 탑승자 두 명은 폭발 발생 전 차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특별한 부상 없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탑승자 중 한 명인 박하지의 핸드폰에서 이지원과의 마지막 통화 음성을 확보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음성 속엔 이지원이 선장이라는 증언과 박하지가 그 아들이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권규호는 음성 확인 후 해당 내용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현재 이지원의 파주 은신처를 조사 중이며, 박하지와 이지원의 친자 관계 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가 진행 중임을 알렸다. 검사 결과가 나온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결과는 99.9998%로 두 사람 간 생물학적 친자 관계가 성립되었다.
결국 박하지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되었고, 살아 있음으로써 선장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일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 정도로 말이다.
“생각해 보면 박 대리도 참 명줄 한번 질겨. 그때나 지금이나 말이야.”
온여환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지원이 박하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란 게 정말 그것밖에 없을까.
“내가 도 실장, 아니, 온여환 자네를 부른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
온여환은 제 눈앞에 앉아 있는 인간미가 말살된 사람의 심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애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평생 나를 곤란하게 할 몸뚱이로 남아 주겠다고.”
“…….”
“그래서 나도 좀 갚아 줄까 해.”
이지원이 등받이에 기댔던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테이블에 가슴을 바짝 붙인 이지원이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그 애한테 평생 잊을 수 없어서 곤란한 기억 하나쯤은 남겨 주고 싶거든.”
이지원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온여환은 닿기 싫은 사람을 피하듯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런 온여환을 놀리듯 씩 웃은 이지원이 테이블 위에 취조용으로 항상 두는 녹음기를 가져갔다. 손바닥만 한 녹음기에서 녹음 버튼을 꾹 누른 이지원이 마치 그게 마이크라도 되는 양 입술 밑에 붙여 들었다.
“잘 들어. 지금부터가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녹음기 위에 들어온 빨간 버튼이 선명했다.
이지원은 어릴 때부터 조금 특별한 아이였다. 아니. 조금 많이 특별한 아이였다. 아이답지 않게 성숙했고, 아이답지 않게 얌전했으며, 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사람들은 이지원이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된 이유로 그녀의 친모가 상간녀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꼽았다. 어린 나이지만 제 처지를 너무나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측은하게 여겼고, 누군가는 영악하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모두 외부의 평가일 뿐이었다.
이지원은 그저 재미가 없었다.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사는 게 재미가 없었다. 친구들은 유치한 장난을 하면서도 웃기지도 않은 일에 까르르 웃었고, 뻑 하면 시끄럽게 빽빽거렸다. 이지원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의 폭이었다. 그녀가 유난히 성숙하고 얌전하며 생각이 깊은 아이처럼 보였던 이유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모든 것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 일이 없었다면 이지원은 평생을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 일은 이지원이 7살이 되던 해에 벌어졌다. 이지원의 친모가 그녀를 찾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이지원은 태어날 때부터 친모와 함께 살지 못했다. 당연했다. 이지원의 친모는 이기문 회장의 상간녀였으니까.
그녀는 이지원을 자신이 키우겠다고 했지만, 이기문 회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기문 회장이 이지원에게 특별한 부정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그는 혹여라도 맏아들인 이유연처럼 밖에서 큰 아이가 뒤늦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타날 것을 염려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신이 거두어 본처인 최선화의 밑에서 자라게 하는 게 여러 소문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이기문 회장은 갓 태어난 이지원을 자신의 집으로 들이고, 이지원의 친모에겐 적절한 금액의 보상을 했다. 그러나 이지원의 친모는 이지원을 자신이 양육하겠다는 뜻을 거두지 않았고, 주기적으로 이지원을 만나러 왔다.
사람들은 그녀가 이지원을 이용하여 더 많은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나, 이지원의 생각은 달랐다. 이지원은 언젠가 자신을 이 집에서 데리고 나가 함께 살 거라고 말하는 제 어머니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왜 그렇게까지 비장한 얼굴로 자신과 함께 살자고 말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늘 알겠다고 대답하곤 했었다. 싫다고 답하면 왜인지 재미없는 이야기를 더 오래 들어야 할 것만 같아서 그랬다.
그러나 그날의 이지원은 모든 것이 귀찮았다. 그날은 유치원에서 자신의 귀에 대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귓속말을 해 대는 아이를 밀쳤다가 혼이 났고, 유치원 선생에겐 친구가 귓속말을 한다고 해서 밀치는 건 나쁜 짓이라는 어이없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 아이는 이지원의 친구도 아니었고, 이지원은 귓속말 같은 유치한 짓거리를 싫어했지만, 그딴 건 아이를 밀친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지원은 당장 이 귀찮은 인간들을 다 없애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재미없고 귀찮은 인간들투성이였다.
그런데 하필 바로 그날 그녀의 친모가 찾아왔다. 집안사람들 몰래 유치원 버스에서 내린 이지원을 데리고 근처 피자집에서 싸구려 피자를 사 먹이면서 또 똑같은 소리를 했다. 엄마랑 같이 살자. 엄마가 꼭 너를 데리고 나올게. 그런 말들을 이지원의 바로 옆에 앉아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지원은 짜증이 치밀었다. 유치원에서 제게 귓속말을 했던 아이처럼 엄마를 밀쳐 버리고 싶었지만, 귓속말을 한다고 사람을 밀쳐선 안 된다는 유치원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엄마를 밀진 않았지만, 화가 풀리진 않았다. 엄마는 그런 이지원의 마음도 모르고 다음에 또 보자며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지원은 손만 흔들고 웃지는 않았다.
엄마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손을 내린 이지원은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됐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동네를 한참 내려가 인근 공원의 공중화장실에 몸을 숨겼다. 역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고, 쭈그려 앉은 다리가 저렸지만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이지원은 그곳에서 거의 하루를 꼬박 숨어 있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온 이지원은 태연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이지원이 집으로 들어오자 하얗게 질린 얼굴의 어른들이 더러워진 옷과 역한 냄새를 풍기는 그녀의 몰골을 확인하며 물었다. 대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무슨 일이냐고. 어른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이지원은 하루를 굶어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갔었다고. 왜 그런 말을 했느냐 묻는다면, 그저 귀찮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이지원은 제 어머니가 귀찮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찾아와 자신을 귀찮게 할 것도 성가셨다. 그런데 사람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손으로 밀치는 건 나쁜 짓이라고 하니까 다른 방법을 생각한 것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이지원의 말을 들은 어른들은 크게 분노했고, 그녀의 친모는 납치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 갔다. 그 과정에서 이지원의 증언이 다시 필요했는데, 이지원은 이번에도 같은 말을 했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갔었다고. 제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얘기해야 할 때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지원은 제 어머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모정이었을 수도 있고, 체념이었을 수도 있다. 이지원의 어머니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날 이런 말을 했다.
‘너도 결국 그 집안 핏줄이구나. 그렇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아이가 됐구나.’
그 뒤로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녀가 이지원을 다시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이지원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이렇게 하면 어른들에게 혼나지 않고도 귀찮은 일을 해결할 수 있구나. 이지원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건 이지원 인생에서 가장 선명하게 느껴 본 흥분이자 즐거움이었다.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이지원은 그런 것에 재미를 느꼈다. 이지원이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다. 이지원의 나이는 고작 7살이었다.
그녀는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이간질을 하거나 비밀을 폭로했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만의 유희를 즐기며 그렇게 19살이 되었다. 박양일과 김현필을 만난 것이 바로 그즈음이었다. 먼저 알게 된 것은 박양일이었다. 그는 가끔 이기문을 찾아오는 사설 용역 업체의 깡패였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이지원이 교복을 입고 집 안을 돌아다닐 때마다 알게 모르게 그녀를 힐긋거리곤 했었다. 이지원은 거지 같은 깡패 새끼 주제에 웃기는 짓을 한다 싶으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티 내지 않았다. 나중에 저 새끼를 데리고도 재미있는 일을 한번 꾸며 봐야겠다. 그런 생각만 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재미있는 일이라는 게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어느 날 박양일이 데리고 온 김현필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김현필은 높은 담벼락 아래 세워진 차 앞에서 이기문을 만나러 들어간 박양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노트와 펜이 들려 있었다. 마치 그림이라도 그리는 것처럼 집을 샅샅이 살피고 관찰하며 손을 움직이기에 이지원은 그가 가난한 화가라도 되나 싶었지만, 그가 노트에 그리고 있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글자였다.
조용히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일신 그룹 이기문 회장의 자택이 어떤 구조인지, 입구가 어디고 차고는 어디인지, 담벼락의 높이가 얼마나 되고 창문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까지 상세하게 적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 하는 거야?’
묻는 이지원의 말에 김현필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의 손에서 노트가 떨어져 나갔다. 그걸 먼저 주운 사람은 이지원이었다. 김현필이 재빠르게 노트를 낚아채려고 했지만, 새카만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지원과 눈이 마주치자 마네킹처럼 굳어 버렸다.
이지원은 그런 김현필에게 생긋 웃어 준 후 다시 노트를 확인했다. 노트엔 온갖 기업의 비리와 약점, 더러운 사생활, 알려지면 쪽팔릴 사소한 치부까지 세세히 적혀 있었다. 개중엔 이지원도 알고 있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어서 노트에 적힌 정보에 더욱 신뢰감이 상승했다.
‘대단하다.’
감탄이 튀어나온 것은 진심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더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벌일 수 있었다.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훨씬 손쉬워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해 봐야 친구들이나 집안 어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말이다.
‘이 노트 나한테 팔래?’
이지원이 물었다. 그때까지 이지원의 새하얀 얼굴을 홀린 듯이 보며 얼굴을 붉히던 김현필은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듯 단번에 거절하며 노트를 뺏어 갔다. 그는 이건 돈 따위로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했다. 돈이 아니면 뭐로 살 수 있느냐 물었더니, 뭐로도 살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 세상에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물건이란 없었으니까.
두 사람은 그날 그렇게 헤어졌지만, 이지원은 내내 김현필을 생각했다. 정확히는 김현필이 작성하고 있던 그 노트와 노트의 내용이었다. 더 재미있는 일을 벌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지원은 결국 이기문을 찾아온 박양일을 남몰래 불러냈다. 그러곤 김현필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다.
이유를 묻던 박양일은 연락처를 알려 줄 수는 없고, 김현필이 있는 곳에 데려가 줄 수는 있다고 했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비록 박양일이 이지원을 제 차 옆자리에 한 번이라도 태워 보고 싶어서 수를 쓴다는 것이 훤히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박양일은 이지원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겁쟁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일광 용역. 이지원은 그곳에서 김현필을 다시 만났다. 김현필은 이지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가 입고 있었던 교복까지도. 물론 교복의 디자인이나 색깔을 기억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현필은 교복 치마의 주름, 그녀가 신었던 양말의 종류와 색깔, 구두 모양 같은 것까지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흔한 일이 아니었다.
‘멋지다.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해?’
묻는 이지원의 말에 김현필은 쑥스러운 얼굴로 그냥 관찰할 뿐이라고 답했다. 지켜보는 모든 것이 그 사람을 알아내는 정보가 된다고. 이지원은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쓸모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 줄 노트만 빼앗으려던 계획을 전면 수정한 건 그래서였다. 노트를 가지는 건 결국 제한된 정보를 가지는 것이지만, 김현필을 곁에 두면 그가 관찰하고 기억하는 모든 것이 새로운 정보가 될 테니까.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김현필을 만났다. 김현필은 답답하고 속 터지는 구석이 있었지만, 의외로 이지원과 말이 잘 통하기도 했다. 그는 일상을 따분해하는 이지원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고, 그녀를 위해 끊임없이 재미있는 정보들을 알려 주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는지, 그 정보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도.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마치 사귀는 사이라도 된 것처럼 살을 부비며 접촉하는 일도 있었다. 김현필은 이지원을 좋아했고, 이지원은 그런 김현필이 흥미로웠다. 김현필이라는 인간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다기보단 그가 가진 능력에 대한 흥미였지만, 그 흥미를 기반으로 관계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다 두 사람이 틀어지기 시작한 건 해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맘때의 이지원은 김현필에 대한 흥미도 조금씩 떨어져 갔고, 성인이 된 만큼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때였다. 그러나 이제 또래 친구들을 골려 주는 것 정도로는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김현필의 노트 속에 새로운 자극제가 두껍게 쌓여 있는데 고작 그런 걸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는 건 당연했다.
이지원이 김현필의 노트에서 본 어느 중소기업의 산업 폐기물 무단 유출 정황을 신문사에 제보한 것은 그래서였다. 해당 기업에 특별히 악감정이 있었다거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지원이 제보한 내용은 빠르게 기사화되었고, 전국적인 논란으로 번져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 내용을 극구 부인하던 해당 기업의 사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지원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언젠가 제 어머니를 납치범으로 몰아 경찰에 붙잡히게 했을 때 느꼈던 흥분감보다 더 자극적인 재미였다. 단순히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세상의 흐름이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신이 된 것처럼 황홀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지원에 의해 벌어진 일이란 걸 안 김현필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화를 냈다. 자신이 노트에 모은 정보는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더 가치 있는 일에 쓰여야 한다고 했다. 사실과 진실이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단순한 재미로 공개했다가 사람을 죽게 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이지원은 그의 말이 따분했다. 김현필이 말하는 가치 있는 일이란 저렇게 흥미로운 정보들을 가지고도 일광 용역에서 장부 금액이나 맞추는 일이었으니까. 태생은 어쩌지 못한다고, 멍청한 새끼들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멍청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저 좋은 머리를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저 노트는 그의 손에서 썩어 가고만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이지원은 자신의 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랫배가 무거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생리일을 떠올렸다. 6개월 전이었다.
그동안 생리를 안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 없었던 이유는 원래도 생리 불순이 매우 심하여 주기적으로 산부인과 검진을 다녔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산부인과 진료 역시 6개월 전이었다. 처음엔 설마, 라고 생각했다. 아랫배가 단단해지긴 했지만, 이는 오랫동안 생리를 하지 못할 때 아랫배가 부어오르던 증상과 흡사했고, 그 외 특별한 증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지원은 집 안에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쓰러졌다. 집안에서 일을 하던 사람에 의해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결론적으로 그날 이지원이 병원에 간 것은 모두에게 비밀에 부쳐졌다. 쓰러진 이지원을 발견하고 그녀와 함께 병원을 향했던 직원도 그날부터 찾아볼 수 없었다. 이기문 회장이 손을 쓴 탓이었다.
이지원은 그날 병원에서 임신 7개월이 다 되어 간다는 진단을 받았다. 갑자기 쓰러진 이유도 임신성 빈혈 때문이었다. 생각지 못한 변수의 등장에 이지원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이지원 본인조차 임신 증상을 거의 느끼지 못했던 데다가, 가족들도 이지원의 임신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임신 막달이 될 때까지 배도 거의 나오지 않는 산모들도 종종 있다는 말을 위로라고 했다.
이기문과 그의 본처 최선화는 이지원을 당장 집으로 데리고 왔다. 소문이라도 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그들은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극소수만 남기고 모두 잘랐다.
이지원은 그날부터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아이를 지워 버리면 일이 간단했겠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현재 이지원의 상태라면 유도 분만을 통해 아이를 자궁 밖으로 나오게 하거나 자궁 절개술을 해야만 하는데, 이지원에게 전치태반 1) 증상이 발견되어 지금 유도 분만을 할 경우 과다출혈로 산모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했다. 자궁 절개술은 최선화가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했다. 이지원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배꼽 아래에 수술 자국이 남은 것이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하면 집안 망신이라는 이유였다.
결국, 이기문은 이지원의 몸 상태가 유도 분만이 가능해질 때까지 집 안에 가두고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그는 여자아이가 쉽게 몸을 굴려 바깥에서 아이를 배고 들어온 것을 마치 가문의 수치처럼 얘기했는데, 이지원은 그런 제 아버지가 우습기만 했다. 바깥에서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전적이 두 번이나 있는 인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밖에선 막내딸을 예뻐하는 아버지인 척 구는 것도 가증스러웠다. 이지원이 어떻게 하면 이 집안을 다 뒤집어엎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바로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마음 같아선 밖에서 아이를 낳아 집안을 콩가루로 만들고 싶기도 했지만, 그건 이지원에게도 리스크가 생기는 문제였다. 이지원은 이번만큼은 멍청한 어른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기문은 이지원의 아이 친부부터 찾았다. 친부를 찾아야 제대로 입막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에게 친부의 존재를 알려 온 것은 뜻밖에도 박양일이었다. 박양일은 이지원이 작년부터 김현필이라는 녀석과 가깝게 지내 왔다는 것을 이기문에게 고스란히 일러바쳤다. 김현필의 존재에 질투를 느끼던 박양일의 속내가 뻔히 보이는 태도였다. 그러나 이지원은 그런 박양일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김현필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으니까.
이지원이 박양일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딱 하나였다.
‘김현필 노트, 그것 좀 찾아 줘.’
이지원은 집을 나서는 박양일을 붙잡고 김현필의 노트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박양일은 그게 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거냐고 물었다. 이지원은 노트를 가지고 오면 얘기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 뒤로 한동안 박양일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임신 36주가 지나며 유도 분만이 가능해진 이지원이 집 안에서 아이를 낳기로 한 그날이었다.
이기문과 최선화는 이지원을 병원으로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산부인과 의사를 아예 집으로 불러들여 아이를 받게 했다. 아침부터 시작되었던 진통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아이가 나온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탯줄이 잘린 아이가 숨을 터뜨리며 끔찍하게 울어 댔다. 의사는 다급히 아이의 입을 막았다. 이 집 안에선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아이를 넘겼다. 그 남자가 바로 박양일이었다.
박양일의 임무는 태어난 아이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완벽히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를 포대기에 싸고 집 밖으로 나갔다. 집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이지원은 밑이 다 빠져 버린 듯한 통증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자정이 다 된 시각이었다. 방 밖에서 이기문과 박양일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지원은 움직이기 힘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방문을 살짝 열었다. 이기문에게 김현필의 사체도, 아이 사체도 모두 완벽히 처리했다고 보고하던 박양일이 문득 시선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그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이지원은 보고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 박양일을 테라스와 이어지는 뒤뜰에서 따로 만났다. 이지원의 앞에 선 박양일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미안합니다, 였다. 이지원은 그 말의 의미를 되묻지 못하고 다시 물어야만 했다.
‘뭐라고?’
‘미안하다고요.’
‘혹시 노트 못 찾았어?’
이지원의 물음에 박양일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마치 자신이 들은 말을 해석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이지원은 대답이 없는 박양일이 답답했다. 그녀가 다시 재촉했다.
‘내가 부탁한 노트 못 찾았냐고.’
박양일은 그제야 자신의 품 안에서 장부처럼 두꺼운 노트를 꺼냈다. 이지원이 찾던 김현필의 노트였다. 이지원이 못 보는 사이 더 많은 정보가 쌓여 있었다. 이 재미있는 물건이 드디어 그녀의 손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흥분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노트를 품에 안고 웃는 이지원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박양일이 물었다. 그 노트를 어디에 쓰려는 거냐고. 이지원은 보고 있던 노트를 탁 닫으면서 말했다.
‘전에 이 노트가 뭐가 중요한 거냐고 물어봤었지? 이 노트는 내가 세상을 바꾸는 시작점이 될 거야.’
두고 봐.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렇게 호언한 이지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림 유학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목적이었으나, 사실 유배나 다름없는 유학이었다. 그러나 이지원은 자신의 유학에 큰 불만을 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반겼다. 한국을 떠나 어른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준비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제 발아래 두고 싶었다. 사람 하나의 인생을 제 손으로 망가뜨리는 것도 그렇게나 재미있었는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주무르는 대로 주물리고, 벗기는 대로 벗겨지는 그런 세상. 이지원이 꿈꾸는 자신의 세상이었다.
그녀는 파리에서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다. 김현필이 남긴 정보들을 데이터화 했고 그에게 배운 방법으로 더 많은 정보들을 수집하고 저장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10년이 지나서였다.
이지원과 박양일이 다시 만난 것도 그때였다. 이지원은 그에게 자신과 함께 세상을 바꿔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박양일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선장과 화성파의 시작이었다.
그 위대한 시작점에서 이지원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모든 역사 속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야만 했던 가장 힘없는 존재. 그녀의 아이였다. 이지원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제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지, 또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설마 그 아이가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박양일이 그 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해 1년을 숨겨서 키우다가 아이 출생 1년 만에야 다른 여자의 이름을 빌려 출생 신고를 하고, 심지어 그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 키우고 있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그 아이가 바로 박하지였을 줄은 정말이지, 조금도.
세상을 주무르려고 했던 이지원은 정작 자신의 세상, 그 등잔 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게 그녀의 세상이 무너진 이유였다.
“그때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지원의 후회는 뒤늦었다. 그때도 지금도 이지원의 발목을 붙잡은 사람은 결국 박하지였다.
“……할 말은 그게 다입니까?”
내내 말없이 듣기만 하던 온여환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이 모래를 삼킨 것처럼 텁텁했다. 그는 이지원이 들고 있는 녹음기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 그러자 이지원이 의자를 짧게 끌며 뒤로 물러났다.
“아직. 그 애한테 전할 말이 남아 있거든.”
“…….”
“그때도, 지금도, 그 애는 그저 실수일 뿐이었어.”
“…….”
“아무도 그 애의 존재를 반기지 않고, 찾지도 않았을 만큼 의미 없는 실수 같은 거였다고.”
아무것도 아닌, 없었으면 좋았을, 제대로 확인했으면 절대로 지금까지 존재하지 못했을, 그런 가볍고 하찮은 실수.
“그 애한테 꼭 전해 줘요.”
이지원이 입꼬리를 싱긋 올리며 웃었다. 온여환은 그 미소에서 박하지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끔찍했다. 그가 이지원의 손에 들린 녹음기를 거칠게 빼앗았다. 녹음 버튼을 다시 눌러 녹음을 중단시킨 그는 이제 더 이상 이지원과 한자리에 있기가 힘든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무시하자. 가 버리자. 그는 속으로 되뇌며 테이블을 지나쳤으나, 문고리를 잡는 순간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온여환이 다시 이지원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그녀의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거 하나만 확실히 알려 줄게요. 실수라는 건 그 일이 당신 인생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나 쓸 수 있는 말이에요.”
“…….”
“실수치고 박하지는 당신한테 좀 대단한 존재이지 않나요? 당신 인생을 온통 뒤흔들어 놨는데.”
이지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지원은 아직도 선장 놀이를 끝내지 못했다. 그녀는 온여환을 흥분시킬 말들을 하고, 취조를 망가뜨리고, 그렇게 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조종했다는 희열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이지원이 원하는 거였고, 온여환은 그것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박하지를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여태껏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완벽하다고 믿어 왔던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두려운가 보지?”
가뿐하게 몸을 바로 세운 온여환이 뻣뻣해진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나. 그게 사실인데.”
“…….”
“박하지가 의미 없는 실수일 뿐이라고? 아니. 그냥 당신의 완벽한 실패야.”
온여환은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취조실을 나서는 그의 걸음이 빨랐다. 그는 취조실 문을 쾅 닫은 후에야 긴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온여환이 손에 들린 녹음기를 내려다봤다. 이지원과 김현필, 그리고 박양일과 박하지의 이야기는 아직 세상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져서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 이유는 파급력이 너무 큰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가십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문제의 본질을 흐릴 가능성이 너무 컸다. 결국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것은 이지원이 ‘선장’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범죄 집단에 협력하여 오랜 기간 불건전한 자금을 취득하였다는 것,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지금 온여환의 손안에 바로 그 모든 이야기의 내막이 담긴 녹음 파일이 들려 있는 거였다. 겨우 이 작은 기계 안에 말이다.
“온여환.”
그때, 참관실 문이 열리며 권규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만난 권규호는 일이 바쁜지 전보다 살이 조금 내린 모습이었다. 온여환은 제 손에 들린 녹음기를 그에게 내밀었다.
“수고했다.”
“됐어요. 저 할 일 다 했으니까 이제 가도 되죠?”
“벌써 가게?”
온여환이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듯해서 그의 마음이 급해졌다. 여환은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상승 버튼 위를 손가락으로 다다다 두드리며 내려온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1층으로 올라가는 시간이 빠를까, 아니면 그냥 지금 비상계단을 이용해 올라가는 시간이 더 빠를까를 가늠했다.
“얀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세요. 저 다음 달까지 징곈데.”
“말하는 싸가지 하곤……. 네 징계 아마 다음 달까지 안 갈 거야. 그 전에 징계위원회 한 번 더 열리면 내가…….”
“아, 싫습니다. 저 다음 달까지 꽉 채워서 징계받을 거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뭐?”
“아예 한두 달 정도 정직 내려 달라고 하세요. 이참에 좀 쉬게.”
“야, 넌 징계가 무슨 휴가인 줄 아냐?”
권규호의 잔소리가 길어질 타이밍이었다. 다행히 때맞춰 도착해 준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었다. 빠르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온여환이 닫힘 버튼을 누르기 전에 말했다.
“저 다음 주까지 한국에 없어요. 연락하지 마세요.”
온여환은 황당해하는 권규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온여환의 발걸음이 바빴다. 당연했다.
세 시간 후 그는 이 나라를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예정이었다.
* * *
- 최 기자님. 저희가 지금 8월 여름 대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잖아요. 다른 때의 대선 같았으면 이 정도 시기엔 지지율이 도드라지는 후보가 눈에 띄기 마련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여름 대선에선 각 후보들의 지지율이 여전히 엎치락뒤치락하며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아요.
- 예. 아무래도 이번 선거가 전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임기를 끝마치고 치르는 대선이 아니잖습니까. 탄핵 후 두 달 만에 치르는 대선이기 때문에 다른 대선 때와는 비교하기가 좀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뭐가 있을까요?
- 특징이라면 아무래도 다양한 후보들이 고루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겠죠. 저번 정권에서 국민들이 실망한 부분이 많았고, 제1야당이라는 곳의 유력한 대선 후보자가 국가 기관 소속의 공직자, 그리고 재벌가 자제와 부적절한 야합을 이루려고 했다는 점 등이 국민들의 다양한 정치적 의사 표현을 이끌어 낸 게 아닐까 싶습니다.
- 그렇군요. 그런데 와중에 또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전 정권의 집권당이었던 민경당의 신흥태 후보가 꽤 높은 지지율을 모으며 선전하고 있다는 건데요. 대통령의 비자금 스캔들 리스크로 당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것에 비해 꽤 고무적인 성과 아닌가요?
- 예, 아직 선거가 두 달이나 남은 시점이기 때문에 아직 성과라고까지 말씀드리기엔 좀 그렇지만…….
“나라가 완전 미쳐 돌아가는구만.”
인천 대교에 들어선 택시 기사가 시사 채널에 맞춰져 있던 라디오 주파수를 확 돌려 버렸다. 짧은 기계음 뒤로 칼 같은 네 박자의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사는 이제야 좀 속이 편해졌다는 듯 핸들을 두드렸다. 기사의 시선이 힐긋, 백미러를 향했다.
“차가 좀 막히네요. 비행기 시간 괜찮으시죠?”
“예, 괜찮아요. 여유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기사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박하지는 기사의 음 이탈을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물 위로 보석 같은 윤슬이 떠다녔다. 몇 달 전의 사고나 라디오에서 떠드는 이야기들은 머릿속에 남지도 않을 만큼 평화롭고 눈부신 날이었다. 박하지는 이 평화로운 풍경을 뒤로하고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죽을 각오를 하고 공항으로 향할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세 시간 후, 그는 이 나라를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예정이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 * *
“근데 왜 아이슬란드야?”
탑승 수속 카운터의 긴 줄을 기다리던 박하지가 고개를 돌려 온여환을 봤다. 박하지의 캐리어까지 두 개를 나란히 끌던 그가 갑자기 두 캐리어를 겹치더니 그 위에 박하지를 앉히려고 들었다. 박하지가 질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왜 이래, 창피하게. 그 말에 온여환은 뭐가 창피해, 다리 아파서 앉아 있겠다는데. 그렇게 답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꼭 누가 자기들을 눈꼴시게 쳐다보고 있나 감시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온여환은 확실히 자신을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하지는 최근 들어서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엔 그의 비정상적인 집착과 의심인 줄 알았는데, 그냥 성격이 저 모양이었던 거다.
하지는 이번에도 자신이 말을 들어줄 때까지 두 개 겹친 캐리어를 끌고 다닐 온여환을 알기에 하는 수 없이 그 위에 엉덩이를 올리고 앉았다. 온여환은 캐리어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다리 사이에 꽉 끼어 고정했다. 하지는 앉은 자리에서 다시 온여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아이슬란드냐고.”
“아, 낮이 길이서.”
“응?”
“지금 가면 백야 볼 수 있다더라.”
박하지는 온여환의 한참이나 이해하지 못했고, 온여환은 픽 웃으며 기어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곧 네 생일이잖아.”
박하지는 그제야 그 말뜻의 의미를 알았다. 아, 낮이 긴 하지라서. 아이슬란드의 하지는 대한민국의 하지보다 훨씬 더 낮이 길어서 하루 내내 해가 지지 않는 백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생일 이렇게 챙겨 본 적 없는데.”
예전엔 어머니를 도망가게 했던 자신의 존재가 싫었고, 그래서 생일을 챙기는 것도, 제 이름도 다 싫기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에게 생일을 축하받고, 그 생일을 기념하여 함께 여행까지 떠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라 박하지는 이 모든 것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고, 특히 이 일상을 함께하는 사람이 온여환이라는 것은 더욱 믿기지 않았다.
“아직 챙겨 준 것도 아냐. 가서 더 챙겨 줄 거야.”
온여환이 아래로 떨어진 박하지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리며 장난스레 눈썹을 찡긋거렸다. 뭐야, 징그럽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박하지는 제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끝까지 감추진 못했다.
“어, 움직인다. 가자.”
내내 움직일 줄 모르던 탑승 수속 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하지는 캐리어에서 사뿐히 내려와 걸음을 옮겼다. 앞사람의 뒤를 따라가던 그는 문득 고개를 내려 제 손에 들린 여권을 바라봤다. 아이슬란드행 티켓이 끼워진 여권을 펼치자 제 사진이 보였다. 그 옆엔 박하지의 이름, 생일, 국적 등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언제나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박하지의 손안에 남은 것은 결국 그토록 지긋지긋하던 그의 인생뿐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지금은 그 지겨운 삶이 버겁지가 않았다. 새로운 삶도, 새로운 이름도, 그의 자유도, 박하지는 언제나 바깥에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야.”
박하지의 뒤를 따라오던 온여환의 멈춰 선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가 보고 있던 여권을 함께 들여다보며 물었다. 뭐 문제 있어? 박하지는 자신을 향하는 그 눈빛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무 문제없어.
그의 삶이, 자유가, 모두 다 박하지 자신의 손안에 있었다.
외전. Home Sweet Home -
“그러니까 이 남자가 변호사가 아니라 이거죠?”
의뢰인 김소희가 보고 있던 종이를 다방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자의 사진이 박혀 있는 신상명세서 위로 명품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힌 선글라스가 던져졌다. 아마 이 다방에 있는 집기를 다 갖다 팔아도 저 선글라스 하나를 못 살 텐데, 그 귀한 걸 함부로 벗어 던진 김소희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의 종이를 두들겼다. 마치 제대로 확인을 구하려는 듯 다급한 동작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하지가 시선을 올려 제 의뢰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예, 확실히 변호사는 아닙니다. 로스쿨을 나온 적도 없고요.”
박하지가 의뢰인 김소희에게 건네줬던 서류는 그녀의 예비 남편이자 사기 전과 3범 손정훈의 신상명세서였다. 그가 찾은 자료에 의하면 손정훈은 김소희가 아는 것처럼 대형 로펌 소속의 변호사가 아니었고, 당연히 판사 아버지를 두고 있지도 않았으며, 강남 아파트는커녕 월세방 하나도 없어 고시원을 전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김소희가 결혼하려고 했던 남자는 쥐뿔 가진 게 없는 사기꾼이었다 이거다.
“말도 안 돼…….”
김소희가 종이를 구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박하지는 종이처럼 구겨진 의뢰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일을 하며 자주 보게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배신당한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슬퍼하며, 누군가는 허탈해한다. 이렇듯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면서도 결국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딱 하나였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김소희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두 달 앞두고 상견례에서 만났던 예비 시아버지라는 사람이 법원이 아니라 어느 식당 주차장에서 발레파킹을 하고 있는 걸 목격했을 때부터 김소희의 안에서 의심이 싹텄을 테다. 그러다 흥신소까지 찾아왔을 때는 그 의심이 거의 확신의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확인한 후의 충격이 얕진 않을 것이다.
김소희의 흐느낌이 커지자 아까부터 그들이 앉은 테이블을 힐끔거리던 노인 둘이 이제는 대놓고 그들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뭐 구경났나. 박하지가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자 그들을 향하던 시선이 바퀴벌레처럼 사사삭 흩어졌다.
헛기침을 하며 식은 쌍화차를 들이켜던 노인들이 괜히 다방 사장에게 역정을 냈다. 거, 테레비 소리 좀 켜 보쇼! 하나도 안 들리네, 아주. 노인네의 요구에 카운터에서 껌을 씹던 사장이 리모컨을 들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뜬 음량 표시가 세 칸 올라갔다. 김소희의 울음소리 위로 뉴스 아나운서의 멘트가 겹쳤다.
-바로 오늘 오후였죠. 검찰과 특별 검사 팀이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필리핀 마닐라 광산 개발 사기극의 핵심 인물인 이지원에게 징역 30년을 구형했다는 소식입니다. 이는 사실상 유기징역의 최고 상한선에 해당하는 징역인데요. 자세한 내용은 현장 연결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파란색 마이크를 든 기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때까지도 김소희는 울음을 그칠 기미가 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시선을 뗀 박하지가 테이블 위 냅킨 몇 장을 뽑아 들었다.
“원래 사람은 사람한테 더한 짓도 할 수 있어요.”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김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쏘아보는 눈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김소희의 입장에선 뭣도 모르는 박하지가 어쭙잖은 위로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쭙잖은 위로가 아니라 박하지 본인의 경험담이었다. 그가 바로 더한 짓을 당해 본 당사자라서 해 줄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하지는 그런 개인사를 떠드는 대신 그녀의 손에 기어코 냅킨을 쥐여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 너무 믿지 마세요.”
박하지가 무릎을 밀며 몸을 일으켰다. 김소희의 젖은 눈이 그를 따라 올라왔다.
“그 사람 믿은 게 내 잘못이에요?”
울먹이며 따지고 드는 김소희의 목소리가 텔레비전 소리를 뚫었다. 재킷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던 박하지는 시간을 확인하던 무심한 눈 그대로 김소희를 봤다. 화풀이 상대가 필요해 감정적으로 나오는 의뢰인에게 똑같이 감정적으로 굴어 봤자 좋은 꼴 못 본다는 사실 또한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이었다.
“잘못이라고 한 적 없어요.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는 뜻이지.”
박하지가 뒷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평화흥신소 박하지 과장
현장 포착, 미행, 잠입 전문
테이블 위에 올라온 명함을 확인한 김소희가 뭐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박하지는 제 이름이 보이도록 내밀었던 명함을 휙 뒤집었다. 뒷면엔 은행 이름과 계좌 번호가 적혀 있었다.
“잔금은 여기로 입금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까딱인 박하지가 몸을 돌렸다.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을 남자에게도 그만 가자고 얘기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카운터에 앉아 있던 다방 사장이 어머, 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다. 하지의 눈이 자연스레 그쪽을 향했다. 곰 발바닥 같은 손으로 사장의 손에 들린 리모컨을 빼앗은 남자가 전원 버튼을 눌러 텔레비전을 껐다. 뉴스를 시청하던 노인네들이 뭐여, 성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가 리모컨을 든 남자를 보곤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덩치만으로도 위화감을 줄 수 있는 사내였으니 당연했다. 어쩌면 아까 박하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노인들이 군말 없이 찌그러졌던 것 역시 저 남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쯧, 하고 작게 혀를 찬 박하지가 남자를 불렀다.
“공성철 대리.”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곰발이라는 깡패 시절 별명 대신 공성철이라는 본명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아진 남자였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곰발로 살던 시절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만 가죠.”
박하지가 고개를 까딱이며 입구를 가리켰다. 다방 사장에게 리모컨을 돌려준 공성철이 별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후에야 다방 출입문을 밀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요.”
폭이 좁은 계단을 내려가던 박하지가 타박하듯 던진 말에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조용한 게 이상해서 힐긋 고개를 돌리자 공성철은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좀 전에…….”
그 뉴스, 하고 말을 꺼내려던 박하지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말해 봤자 뭐 하겠나 싶었다. 딴에는 제 생각 한다고 한 짓일 텐데. 됐다는 듯 고개를 저은 박하지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저 차 좀 빼 오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공성철이 오래된 상가 건물을 돌아 뒤쪽 주차장으로 향하며 말했다.
“같이 가요.”
“주차장 멀어요. 저기 골목 앞에 나가 계십쇼.”
자신을 따라나서려는 박하지에게 됐다고 손을 휘젓는 공성철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하여간 덩치는 커 가지고 의외로 날렵하단 말이야. 박하지는 하는 수 없이 그가 사라진 방향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가 들어오기 힘든 종로 뒷골목의 풍경은 몇 블록 떨어진 인사동이나 익선동의 한옥 거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상가라고 믿기지 않는 빨간 벽돌 건물과 과연 영업을 하긴 하는 건가 의심이 드는 가게의 낡은 간판들은 불 꺼진 가로등 때문에 사뭇 음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요즘 유행한다는 레트로니 빈티지니 하는 것들도 이렇게 구질구질한 진짜 레트로는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범죄 누아르 영화의 배경이라면 또 모를까.
하필 이런 곳을 약속 장소로 정한 사람은 조금 전 박하지가 만나고 나온 의뢰인 김소희였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동네 노인들이나 다니는 오래된 다방을 찾아 선택한 듯한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선택이었다. 방문객이 많지 않은 동네는 그만큼 타 지역 사람들이 오면 더욱 눈에 띄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박하지의 맞은편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걸어오고 있는 저 여자처럼.
“박하지 씨?”
아무리 봐도 이런 다방 골목에서 볼 차림은 아닌 듯하여 빤히 쳐다봤을 뿐인데 여자의 입에서 별안간 박하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다. 박하지가 자리에 멈춰 선 순간 그의 머리 위에 있던 가로등이 탁 켜졌다. 주황색 불빛 아래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얇은 은테 안경을 쓴 여자는 단정하게 머리를 묶어 올리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아래엔 흰 블라우스와 일자로 떨어지는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검은색 하이힐은 보도블록이 울퉁불퉁 올라온 길을 걷기엔 썩 적합해 보이는 신발이 아니었다. 눈을 올린 박하지가 반사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누구십니까.”
“일신 그룹에서 나왔습니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던 그의 동작이 멈칫 끊겼다. 어디요? 되묻는 박하지에게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박하지가 물러선 만큼 다시 다가온 여자가 손가락 사이에 명함 한 장을 끼워 내밀었다. 일신 그룹 전략기획실장 안성미. 명함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박하지가 눈을 들어 올렸다.
“그쪽이 안성미 기획실장님?”
“예.”
“저번엔 비서더니 이번엔 기획실장님이 행차하셨네요?”
“…….”
“그 사람 징역 구형받았다고 이러시는 건 아닐 테고, 좀 급하긴 하신가 봐요.”
안성미가 미동 하나 없이 눈꺼풀만 깜빡였다. 일신 그룹에 소속된 인간들은 전에도 몇 번 만나 본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박하지가 느끼는 건 늘 비슷했다. 인간들이 하나같이 인간미가 없다는 거였다.
“저번에 비서는 해외 도피 얘기하던데.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한국에 살 거라 그랬고.”
박하지가 안성미의 손에서 명함을 낚아채며 말했다.
“혹시 이번에도 비슷한 얘기할 거면…….”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사시려면 현금이 넉넉한 편이 좋겠죠.”
“…….”
“액수를 말씀하시면 맞춰 드리겠습니다.”
“……내가 얼마를 말할 줄 알고 먼저 액수를 부르래요?”
“얼마를 부르시든 최대한 맞춰 드릴 거니까요.”
사기꾼 같은 멘트였지만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일신 그룹이 얼마나 애가 타는 상황인지는 박하지도 잘 알고 있었다. 두 달 전 현직 대통령에게 뇌물을 공여한 죄로 재판을 받은 이유연 부회장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되고 장녀인 이서은이 이유연 부회장의 자리를 이어받은 후 끝없이 추락하는가 싶던 일신 그룹의 주가는 최근 들어 조금씩 회복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기업 이미지는 여전히 나빴고 온라인상의 불매 운동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지만, 한편에선 일신 그룹의 모든 계열사를 망하게 할 순 없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일신가 자제들의 만행은 단순한 경영진 리스크인데 기업 전체에 대한 불매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일신 그룹에겐 그게 기회의 목소리였다. 그들이 이미 벌어진 경영진 리스크는 리스크대로 관리하면서 기업 운영을 소홀히 하지 않던 이유였다. 일신 그룹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끊임없이 신제품을 개발하고 해외 기업과 계약을 맺었고, 이유연과 이지원을 향한 검찰 수사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했다. 그래야만 기업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
중간 과정으로만 보자면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국민을 떠나 소비자이기도 한 사람들은 일신 그룹이 만들어 내는 초경량 노트북과 핸드폰, 인공지능 기능을 탑재한 새로운 가전 라인 제품들에 관심을 보였다.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한 일신 그룹의 주가는 오늘 오후 이지원의 징역 구형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게 소위 말하는 주식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투자자들은 이미 일신 그룹의 경영진 리스크와 기업을 별개로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신 그룹의 입장에선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모든 일이 잠잠해질 것 같았다면 전략기획실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박하지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신 그룹에는 절대로 알려져선 안 될 마지막 리스크가 남아 있었다. 오래전 그들이 이지원의 출산을 숨겼고, 박양일을 이용해 그때 태어난 아이를 죽이려고 했으며, 그 아이가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 말이다.
“돈 받고 평생 입 닫고 살라 이거죠?”
박하지가 엄지 끝으로 빳빳한 명함 모서리를 툭툭 튕기며 물었다.
“근데 내가 돈보다 진실을 밝히길 더 원한다고 하면 어떻게 돼요?”
“…….”
“지금 여기서 나 잡아가나?”
뻣뻣하게 굳어 있던 안성미의 얼굴 근육이 처음으로 미세한 찡그림을 보였다. 무섭진 않았다. 어차피 박하지도 그들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한 말이었다.
박하지는 이제 일신 그룹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박하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일신 그룹부터 용의선상에 오를 터였다. 세상에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박하지가 이지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많았으니까. 일신 그룹이 박하지에게 손을 대려거든 아마 그들부터 처리해야 할 것이었다. 그중엔 당연히 온여환도 포함되어 있었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안성미가 안경을 추어올렸다. 살짝 보였던 얼굴의 요동은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생각 바뀌시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안성미는 그 어떤 설득도 없이 골목을 돌아 나갔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느리게 멀어졌다. 조바심을 내야 하는 쪽은 본인들이면서 끝까지 여유를 지키는 척 굴었다. 마치 연락하지 않으면 박하지의 손해라는 듯이. 아마 그들은 끝까지 오만할 것이고, 저 고오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박하지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정말로 다 필요 없고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선다면,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를 드러낸다면, 그들은 무너질까. 나는 그들에게 최후의 리스크가 될까.
생각에 잠긴 채 골목을 빠져나온 박하지의 앞에 익숙한 차가 멈춰 섰다. 고개를 든 하지가 손에 들려 있던 명함을 빠르게 뒷주머니에 집어넣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의자 안쪽으로 다리를 집어넣으려던 그의 움직임이 별안간 멎은 건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뒤였다.
“도련님, 타세요.”
핸들에 양손을 겹쳐 올린 온여환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한 박하지의 입가에도 어쩔 수 없이 옅은 미소가 걸렸다.
“뭐야.”
“뭐긴 뭐야. 우리 도련님 직접 모시러 온 기사지.”
“공 대리는?”
“택시 태워서 귀가시켰습니다. 그만 물어보시고 얼른 타세요.”
온여환이 눈으로 백미러를 확인하며 말했다. 길이 좁아 뒤에서 차가 들어오면 차를 빼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길을 막고 있을 수는 없으니 박하지는 일단 차에 올라탔다. 온여환은 하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안전벨트를 쭈욱 뺐다. 하지는 자신의 벨트를 직접 채워 주는 그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 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도련님에 관해서 모르는 게 어디 있어.”
딸깍, 벨트를 채우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든 온여환이 박하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꾹 찍었다. 짧게 붙었다가 떨어진 입맞춤에 하지는 미처 반응을 보일 새도 없었다. 그사이 자세를 바로 한 온여환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 모든 행동들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순간 박하지는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따지고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릴 뻔했다. 또 그냥 넘어갈 뻔했네.
“어떻게 알고 왔냐니까.”
“난 모르는 게 없다니까.”
“공 대리한테 물어봤지?”
“안 물어봤는데.”
“진짜로? 나 걸고?”
큰길로 나가기 위해 점멸등을 켜고 좌우를 살피던 온여환이 별안간 인상을 구기며 그를 돌아봤다.
“뭐 이런 거에 너를 걸어. 이게 뭐 중요한 대화라고.”
“중요해.”
박하지에겐 온여환이 여전히 공성철을 통해서 자신의 일과를 전해 듣는다는 사실이 그리 유쾌할 수 없었다. 박하지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인이 타인에게 제 일과를 묻고 다닌다는 걸 알면 그 누구라도 싫을 것이다.
온여환도 그걸 아는지 그 말 잘하는 인간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핸들만 꺾었다. 그러나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넘어가려는 온여환의 기세에도 박하지는 봐주지 않고 계속 추궁했다. 물어봤어, 안 물어봤어. 반복해서 묻는 박하지의 말에 곤란한 듯 눈썹을 들썩이던 온여환이 별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안 물어봤어.”
“근데 왜 대답이 느려?”
“물어본 건 아닌데.”
“아닌데?”
“공 대리가 나한테 먼저 알려 줬어. 너랑 외근 나왔다고.”
그럼 그렇지. 핀잔하듯 중얼대는 박하지의 말을 들은 온여환이 그의 허벅지 위로 손을 뻗었다. 왜 그래, 하면서 손을 잡으려 드는 것에 박하지가 그 손을 툭 쳐 냈다. 온여환의 손끝이 움찔 떨리며 떨어졌다. 순간 너무 세게 쳤나 싶기도 했지만, 일단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러려고 공 대리 흥신소에 취직시킨 거지?”
“말은 바로 해, 도련님. 공 대리 취직시킨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내가 그랬다고?”
“그래. 공 대리 흥신소에 소개한 건 너잖아. 채용 결정한 건 너희 사장이고.”
“내가 공 대리를 흥신소에 소개한 이유가 뭔데?”
“뭔데?”
온여환이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어울리지 않는 유순한 표정에 박하지는 기가 찼다.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지.
흥신소에 다시 출근하겠다는 박하지에게 절대 안 된다며 극구 반대하던 온여환이 타협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곰발과 함께 다니라는 거였다. 이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더 대화를 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박하지가 하는 수 없이 곰발을, 그러니까 공성철을 평화흥신소의 새로운 직원으로 추천해야만 했던 이유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채 사장이 싫다고 하면 저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었다. 내심 채 사장이 직원 채용을 거절해 주길 바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하지의 기대와 달리 채 사장은 공성철을 보자마자 합격을 통보했다. 안 그래도 우리 흥신소에 저렇게 건장한 직원이 필요하다고 생각 중이었다나 뭐라나. 박하지는 사장님이 대체 언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물었고, 채 사장은 너한테 말 안 하고 혼자 생각했던 거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박하지는 그의 채용 결정에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채 사장도 온여환도 절대 아니라며 잡아떼기만 하니 더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온여환이 박하지 곁에 공성철을 붙여 두려는 게 일종의 경호 목적이라는 걸 아니까 적당한 선에서 물러난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이렇게 덮어씌운다고? 누가 보면 정말 박하지가 좋아서 공성철을 흥신소에 소개한 줄 알겠네. 물론 지금은 박하지도 공성철과 함께 일하는 것이 싫지 않았고, 늘 혼자 하던 일을 분담해서 할 수 있으니 확실히 더 편해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온여환이 공성철을 통해 박하지의 일과를 전해 듣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박하지는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며 차선을 바꾸는 온여환의 옆모습에 낮게 한숨을 쉬었다. 운전하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나. 박하지는 됐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계천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화났어?”
“아니.”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박하지의 대답이 빨랐다. 정말로 화가 난 게 아니라서 곧장 대답한 것뿐인데, 오히려 그게 더 화가 나 보였을까. 온여환이 다시 한번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는 박하지의 손을 그러쥐었다. 이번엔 하지도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너 감시하려는 게 아니라.”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창밖을 보던 시선을 거둔 박하지가 운전석을 바라봤다. 온여환의 눈은 이미 박하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냥 나는 궁금해서 그래. 네가 나 없을 때 어디에서 뭘 하고 누굴 만나는지.”
“…….”
“가둬 두려는 거 아냐. 너 하고 싶은 거 못 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온여환이 신중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머뭇거리는 그의 혀끝에서 어떤 말이 맴돌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결국 박양일처럼 너를 가둬 두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일 테다. 박하지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껴 본 적 없었지만, 혹여라도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 구속처럼 느껴질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알아. 네가 못 하게 한다고 내가 안 할 사람도 아니고.”
평소 대화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박하지의 말투에 온여환이 안도하듯 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예전엔 저 남자의 속을 하나도 알 수가 없어서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막막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저 속이 투명한 어항처럼 너무 훤히 들여다보여서 곤란할 때가 있었다.
박하지가 빨간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빨개지고, 파란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파래지는 남자는 오로지 그에게만 반응했다. 저렇게나 쉬운데 왜 예전엔 몰랐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제는 화 한 번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박하지가 화를 내면 화를 내는 대로 그를 끌어안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까지 너무 잘 보이니까.
온여환이 잡고 있는 손을 슬쩍 돌린 박하지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꼈다. 기다렸다는 듯 얽히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앞으로 나 어디서 뭐 하는지 궁금할 때마다 그냥 나한테 직접 연락해.”
“너 바쁘다고 연락 안 되면?”
“그럼 공 대리도 바쁘겠지.”
“걘 바빠도 내 연락 못 씹어.”
“진짜 못됐다.”
진심으로 한 말에 온여환이 어쩌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무슨 애랑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는 어이가 없어 웃어 버렸다.
“어쨌든 공 대리도 근무 중인데 일하는 사람한테 일일이 내 얘기 전해 듣는 거 나도 민망해. 그러니까 공 대리 그만 괴롭히고 나한테 물어봐.”
“너한테 물어보면 다 말해 줄 거야?”
“어.”
“그럼 하지야.”
온여환의 음성이 사뭇 낮아졌다고 느낄 때였다. 빨간불에 멈춰 있던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여환은 앞차의 출발에 맞춰 액셀 페달을 밟으며 입을 뗐다.
“아까 들고 있던 그건 뭐였어?”
“…….”
“무슨 명함 같던데.”
못 봤을 줄 알았는데 다 봤구나. 하지는 여환과 맞잡지 않은 오른손으로 바지 옆선을 갉작거렸다. 온여환은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손끝으로 하지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하지는 이내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명함을 꺼냈다. 차에서 내리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숨길 생각도 없었고. 이젠 서로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것이 더 익숙한 일이 되었다.
“일신 그룹에서.”
박하지가 말을 꺼내자마자 여환이 차선을 바꿨다. 그는 길 한쪽에 차를 멈춰 세운 후에야 박하지의 손에 들린 명함을 제대로 확인했다.
“전략기획실장? 이 사람이 찾아왔었어?”
“응. 조금 전에.”
“공 대리랑 같이 있었어?”
“아니, 나 혼자 있었어.”
“지켜보다가 혼자 있을 때 접근한 걸 거야.”
“그래도 위험한 짓 벌이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건 모르는 거지. 이번엔 뭐라고 하는데?”
한껏 경계심이 치솟은 온여환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명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박하지는 하얗게 변한 그의 손톱 위를 달래듯 살살 문질렀다. 그의 손에서 금방이라도 찢길 듯한 명함도 슬며시 빼냈다. 주머니에 명함을 다시 챙겨 넣는 박하지를 바라보는 온여환의 표정이 복잡다단했다. 여러 감정이 버무려진 얼굴 위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박하지를 향한 걱정이었다.
박하지는 그 일이 마무리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우리가 걱정하고 신경 써야 할 짐들이 겹겹이 쌓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 위태로운 짐들 위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사는 우리가 신기하기도 했다. 이토록 편안해도 되는 걸까. 내가 행복을 꿈꿔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언제나 자신만을 향하는 온여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고 나면 거짓말처럼 모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박하지는 조금 전까지 부산스럽게 들썩이던 머릿속이 자신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는 온여환의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차분히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별 얘기 안 했어. 그 사람들 하는 말 맨날 똑같은 거 알잖아.”
“…….”
“해외로 나갈 생각 없다고 했더니 이번엔 돈 주겠다더라. 거기는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니까. 얼마를 부르든 다 맞춰 줄 수 있다는데, 이렇게 된 거 한 백억쯤 불러 볼까.”
그렇게 야금야금 뜯어내면 속이 좀 후련해질까. 풀지 못한 마음의 짐들도 내다 버릴 수 있게 되려나. 모르겠다. 거대한 새장 같은 저택을 벗어났더니 이번엔 온 세상이 통째로 박하지를 꽁꽁 묶어 감추려고 하는데, 이렇게 커다란 새장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건지 하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고 싶어?”
온여환이 다시 창밖으로 돌아가려는 하지의 턱 끝을 살짝 그러쥐었다. 하지는 저항 없이 고개를 돌려 여환을 봤다.
“그 사람들 말고,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지그시 맞춰 오는 시선에 박하지는 어리광을 조금 부려 보고 싶기도 했다. 온여환이 자꾸 도련님, 도련님 하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정말 도련님 같은 짓을 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얼굴을 감싼 커다란 손바닥에 뺨을 비빈 하지가 웅얼댔다. 모르겠어. 하지의 말이 여환의 손안에서 뜨거운 숨과 함께 맴돌았다.
“그냥 무시하고 살고 싶다가도, 이렇게 가끔 나타나서 사람 속 뒤집을 때 보면 내 몸에 기름 끼얹어서 뛰쳐나가고 싶기도 하고.”
엄지로 박하지의 아랫입술을 살살 쓸던 온여환의 손길이 멈췄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진짜로 그러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래도 하지 마.”
하지가 고개를 들어 여환을 봤다. 걱정과 화, 속상함과 애정이 모두 깃들어 있는 시선이 단호했다. 박하지는 저 눈이 좋았다. 우리 함께 불구덩이에 뛰어들자고 했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 순순히 그러자고 따라올 남자의 눈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박하지는 저 눈이 끝내 살길을 찾고 기어이 자신을 살려 내고 말 것이라는 걸 알았다. 자신에게 쉽게 져 주지 않아서 분할 때도 있었고, 떨어지라고 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고 따라붙던 시선이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저 눈이 없는 세상이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는 손끝으로 그의 뜨거운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알았어. 안 할게.”
온여환의 관자놀이를 지난 박하지의 손이 그의 뒷머리를 안았다. 목 뒤로 팔을 두르자 얼굴이 가까워졌다. 하지는 온여환이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가 숨을 뱉으며 입을 벌렸다. 다시 공기를 들이켜자 온여환의 혀가 함께 들어왔다. 하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겹친 입술이 더욱 깊게 맞물렸다.
면적을 넓히며 비벼지는 혀의 표피가 너무 생생했다. 뜨거운 열기가 몸통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번져 오르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박하지는 온여환의 셔츠 깃을 붙잡으며 간신히 얼굴을 떨어뜨렸다. 형형한 눈빛의 남자가 다시 얼굴을 붙이려고 가까이 다가왔지만, 박하지는 그들이 차를 세운 곳이 아무나 지나다닐 수 있는 길바닥이라는 걸 상기하며 필사적으로 몸을 떨어뜨렸다.
“집으로 가자.”
“…….”
“집에 가서 해, 응?”
하지의 손가락이 온여환의 젖은 입술을 닦았다. 그 손끝을 아프지 않게 살짝 물었다가 놓은 온여환이 운전석에 바로 앉았다.
“그래. 집으로 가자.”
핸들을 다시 쥐는 온여환의 손등에 핏줄이 오른 게 보였다. 그가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했다. 박하지는 조급해진 마음을 숨기려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차체를 휩쓸고 나갔다. 왜인지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창틀에 팔을 올린 하지는 자꾸만 혀를 내어 온여환과 겹쳤던 입술을 핥았다. 그 입술 위로 온여환의 시선이 여러 번 닿았다가 떨어졌던 것 역시 선명히 느꼈다.
* * *
욕실 문을 열자마자 손목이 붙들렸다. 멱살을 쥐듯 가운을 확 잡아당기는 힘에 무방비로 끌려 나온 박하지는 읍, 하고 꽤 정석적인 소리와 함께 입술이 물렸다. 집에서 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현관을 넘자마자 씻고 나오겠다며 냉큼 욕실부터 들어가 버렸던 박하지에게 소소한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온여환은 키스 한 번으로 혼을 다 빼놓으려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를 몰아붙였다.
맞물린 입술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침실까지 향하는 길이 험난했다. 누구 하나 제대로 뵈는 것이 없는 상태라 어깨며 등이며 여기저기 부딪치고 난리가 났다. 마침내 방에 들어섰을 때는 벌써부터 입술이 얼얼했다. 입안을 집요하게 달구는 온여환의 체온에 박하지는 혀가 마비된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온여환에게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아 그의 목을 꽉 안았다. 여환은 하지의 등허리를 받치며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급하게 달려들어 박하지의 혀를 탐하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쉽게 입술을 떨어뜨렸다. 침대에 누워 양팔로 간신히 온여환의 목을 안은 박하지가 크게 숨을 헐떡였다. 오는 동안 매듭이 다 풀려 버린 가운은 힘없이 늘어져 매끈한 가슴팍이 반복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온여환은 막 씻고 나와 꼿꼿하게 선 유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시선을 의식한 박하지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언제나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호박색 눈동자에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박하지는 아직도 저 눈이 어려웠다. 특히나 지금처럼 침대 위에서 저 눈을 마주할 때는 마치 처음 관계를 맺었던 그때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온여환에게 티 내지 않으려고 보이지 않게 노력 중이긴 하지만.
“나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
억지로 목을 가다듬은 하지가 모르는 척 물었다.
“어. 누가 욕실로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혼자 해결해야 되나 고민하면서.”
“그럼 혼자 하지 그랬어.”
일부러 무릎을 살짝 세운 박하지가 허벅지로 온여환의 가랑이 사이를 문질렀다. 바지 안쪽에서 발기한 물건이 사타구니 안쪽까지 닿을 듯했다. 새삼스레 그 크기에 놀란 하지가 주춤, 다리를 떨어뜨리려고 하자 씩 웃은 온여환이 하얀 허벅지 위에 하체를 밀착시켰다. 부드럽게 골반을 들썩이며 쓸어 올리자 성기의 모양이 선명히 느껴졌다.
“누구 좋으라고 혼자 해.”
너한테 흠뻑 싸 줄 건데. 지나치게 좋은 목소리로 음담패설을 속삭인 온여환이 선이 가는 박하지의 턱과 하얀 목, 반듯한 쇄골 위에 차례대로 입술을 내렸다. 단단하게 젖꼭지를 세운 가슴이 바르르 떨렸다. 옆구리를 타고 올라온 여환의 손이 마침내 동그랗게 두드러진 유두를 꼬집듯 쥐자 하지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간지러, 응…….”
“좋은 게 아니라?”
“하아, 으…….”
대답은 못 했지만 사실 좋은 게 훨씬 컸다. 하는 일이 거친 만큼 결코 부드럽지 않은 손끝을 가진 남자인데도 그의 손가락이 지나다니는 자리마다 기분 좋은 감각이 태어났다. 온여환을 제외한 타인의 손길이 닿아 본 적 없는 여린 살결이 그의 손이 닿자 주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자꾸만 닿기를 원했다.
하지가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허리를 들었다. 그의 손끝을 쫓아 가슴을 내밀자 하지의 쇄골 위에서 입술을 어물거리던 온여환이 큭, 하고 웃었다. 평소라면 왜 웃냐며 한 소리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지가 여환의 뒷머리를 꽉 쥐었다. 여환은 그 손길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내려 반대쪽 유두를 물었다. 온여환의 혀가 예민한 살갗을 쓸었다. 단단해진 젖꼭지를 혀끝으로 공글리며 애무하더니 이를 세워 살짝 씹어 보기도 했다.
“아!”
아프진 않았지만, 살결에 이가 닿는 것은 언제나 서늘한 자극이었다. 박하지가 원망하듯 눈가를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봤다. 번쩍 고개를 든 온여환이 다시 하지의 입술을 물었다. 숨을 쉬느라 벌어졌던 입술 밖으로 살짝 나와 있던 붉은 혀를 그대로 감아 빨아 당겼다. 그러곤 양손으로 잡아 빙글 돌린 젖꼭지도 슬쩍 위로 잡아당겼다. 하지의 허리가 더 높게 들렸다.
으븝, 으, 하고 맞물린 입술 사이로 말이 되다 만 음성들이 흩어졌다. 아마 그만하라거나, 아프다거나, 뽑힐 것 같다거나, 그런 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온여환은 겨우 이 정도의 자극으로 사람의 젖꼭지가 뜯겨 나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고, 괴로워하면서도 온여환의 목을 꽉 껴안는 박하지가 마냥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숨이 찬지 하지의 헐떡임이 커졌다. 잠시 입술을 떨어뜨린 여환이 빠르게 옷가지를 벗었다. 박하지도 팔꿈치까지 흘러 내려간 가운을 완전히 벗어 자신의 엉덩이 아래에 깔았다. 앞으로 흠뻑 젖을 침대를 걱정하여 앙큼한 대비를 하는 박하지의 모습에 가볍게 웃은 온여환이 그의 허벅지 사이에 자리했다. 손으로 무릎 뒤 오금을 지그시 누르자 하지의 둔부가 살짝 들렸다. 딱딱하게 선 성기가 그의 배꼽 아래에 툭 떨어졌다. 귀두 끝에서 흘러나온 프리컴이 벌써 배꼽 안쪽의 우물로 고여 드는 게 보였다. 하지는 침을 꼴깍 삼키며 제 무릎 사이로 얼굴을 집어넣는 남자를 바라봤다.
“나 버리고 들어가서 깨끗이 씻었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버렸던 것에 꽤 상심이 컸나. 온여환의 뒤끝이 오늘따라 유난히 오래간다 싶었다. 유치하게 구는 게 어쩌면 그냥 골려 주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그가 손으로 꽉 누른 하지의 허벅지 뒤쪽을 혀로 날름 핥으며 물었다.
“확인해 봐도 돼?”
온여환의 혀가 점점 더 둔부에 가까워졌다. 박하지는 그제야 그가 뭘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지 알 것 같았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해?”
“아니, 하지. 그치, 박하지?”
온여환이 하지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이름 가지고 저딴 장난치는 거 박하지가 딱 싫어하는 짓거리인데, 그 상대가 온여환이 되자 생각보다 그리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목소리가 이젠 거의 박하지의 엉덩이 아래에서 들려오는 듯한 이 상황에 그런 것이 싫고 좋고를 따질 수도 없었다.
차에서부터 몸이 달아 힘들었던 건 박하지도 마찬가지였다. 욕실에서 씻는 동안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고, 뒤를 씻어 내는 동안에도 아래가 근지러워 몇 번이나 손가락을 집어넣고 싶은 걸 꾹 참았다는 말은 온여환에게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앞니로 아랫입술을 깨문 하지가 고개만 살짝 들어 자신의 아래까지 내려간 온여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곤 양손을 내려 스스로 두툼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그 모습을 코앞에서 바라보는 온여환의 입술 새로 뜨거운 숨결이 샜다. 그 뜨거운 공기가 여린 살을 베고 지나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하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오른손을 더 깊게 가져갔다. 손가락으로 아랫구멍을 만지작거리다가 손끝만 살짝 집어넣었다.
“읏…….”
빡빡한 주름이 손톱 끝을 겨우 집어삼켰다. 이보다 더 깊이 넣기는 힘들었다. 하지는 고리처럼 걸린 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구멍을 벌렸다. 그런다고 벌어질 구멍도 아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온여환이 하, 하고 거칠게 숨을 터뜨렸다.
“도련님, 뭐 해?”
“확인, 한다며. 빨리, 읏!”
박하지가 더 재촉하기도 전에 물컹하고 진득한 감촉이 아래를 점령했다. 온여환이 혀를 내어 손끝만 겨우 들어간 박하지의 구멍 주변에 들러붙었다. 마치 사탕을 핥는 것만 같았다. 솜사탕처럼 입에 닿자마자 녹는 것 말고 오랫동안 핥고 굴려야만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사탕을 먹고 있는 것처럼 몇 번씩 혀를 내며 빨아 댔다.
질척한 소리가 방을 채웠다. 그때마다 점점 더 축축하게 젖어 가는 구멍 덕분에 박하지의 손가락도 조금씩 깊어져 갔다. 온여환의 혀가 손가락과 뒤에 동시에 닿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손을 뺄 수도 없었다. 온여환이 아예 그의 손목을 잡고 제대로 삽입을 시키고 있는 탓이었다.
“아아, 흣, 손, 놔줘…….”
“왜.”
온여환이 여전히 혀를 그의 구멍에 붙인 채 말했다. 혼자 풀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 그 말이 반은 밖으로 나오고, 반은 구멍 안으로 뭉개져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읏, 좀, 그만……!”
뒤늦게 수치심이 든 박하지가 온여환에게 붙잡힌 다리를 들썩였다. 여환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하지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는 자유가 된 손을 빠르게 구멍 안쪽에서 빼냈다. 그 순간 미처 다물어지지 않은 틈 사이로 이번엔 여환의 혀끝이 밀고 들어왔다. 그는 마치 손을 놔주겠다고 한 게 이 모든 행위를 관두겠다고 한 뜻은 아니었다는 듯이 박하지의 엉덩이를 더 활짝 벌려 올리며 본격적으로 뒤를 핥아 댔다.
“하으윽……. 아!”
손가락이나 성기가 들어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겨우 입구 근처에 머물러 있을 뿐인데도 깊숙한 곳까지 침투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있었다. 박하지가 몸을 뒤틀어 봤으나 엉덩이가 단단히 붙잡혀 있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배꼽에 고였던 프리컴은 벌써 흘러넘쳐 하지의 명치를 적시고 있었다.
“아, 그만, 그만하고, 흣, 들어와.”
차라리 빨리 그가 제 안을 헤집어 놓았으면 싶었다. 박하지가 발끝을 세워 온여환의 등줄기를 살짝 긁었다. 소름이 돋는지 그의 어깨가 바르작 떨리는 게 느껴졌다. 온여환이 그제야 박하지의 아래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하지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눈을 피하며 쑥스러움을 타는 하지의 모습이 귀여운지 짧게 감상에 빠져 있던 온여환이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그도 더는 여유를 부릴 정신이 없어 빠르게 콘돔을 가지러 가려는데, 퍼뜩 상체를 올린 박하지가 그의 팔을 확 붙잡았다.
“어디 가, 그냥 넣으라니까.”
“뻑뻑할 텐데.”
“알아, 괜찮아.”
“…….”
“……그게 좋으니까, 빨리.”
박하지가 여환의 팔을 붙잡은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홀린 듯 침대 위로 돌아온 온여환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걸렸다.
“뻑뻑한 게 좋아?”
굳이 확인하겠다고 다시 묻는 온여환의 말투가 짓궂었다. 꼭 놀리는 듯한 투가 애 같았지만 박하지는 오늘따라 애처럼 구는 그에게 굳이 거짓을 고하진 않기로 했다.
“응, 좋아, 하아…….”
그럴 때가 있었다. 질척한 젤 없이, 미끈거리는 콘돔도 없이 오로지 맨살끼리만 부대끼고 싶은 날.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섹스를 한 날은 뒤가 훨씬 더 화끈거렸지만 그만큼 연결되어 있는 서로의 존재감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움직임이 몸 안에 새겨지는 것처럼.
한쪽 손으로 박하지의 다리를 벌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그의 뒤통수를 감싼 여환이 자연스럽게 그 위로 몸을 붙였다. 다시 맞물린 입술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혀가 농도 짙게 치열을 훑었다. 하지의 다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허리에 완전히 감은 여환이 입을 맞춘 채로 눈을 떴다. 뜨거운 시선이 하지의 열 오른 얼굴을 관찰했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 시선을 받아 내던 하지가 여환의 목을 세게 안았다. 여환은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천천히 하체를 맞붙였다. 꼿꼿한 성기가 엉덩이 사이를 쿡쿡 찔렀다. 그의 성기 끝에서도 미끌거리는 액이 나온 게 느껴졌다.
“우리 도련님, 이렇게 야한 짓 좋아해서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 아아!”
박하지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을 새도 없이 여환의 것이 하지의 둔부 사이를 가르며 들어왔다. 처음부터 단번에 깊숙하게 찌르는 내침에 하지의 손이 급하게 여환의 가슴팍을 밀어 냈으나, 여환은 손쉽게 그 손을 잡아채 버렸다.
“아, 잠, 까안, 으흣!”
“하아, 마르기 전에 넣어야 해. 좀만 참아.”
여환은 부족한 액을 자신의 프리컴으로 메우려는 듯 성기가 다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앞뒤로 부지런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게 박하지에게 짜릿한 자극이 되었다. 끝까지 채워지지 않는 감각이 간지럽기도 했다. 내벽이 조금 부드러워지며 움직이기가 편해지자 여환이 더 깊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으, 흐……!”
온여환의 성기에 달라붙는 내벽이 평소보다 더 빡빡했다. 받는 하지도 힘들지만 넣는 온여환 역시 버겁긴 마찬가지인지 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여환이 하지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며 달래듯 말했다.
“도련님, 빨리 해 달라며. 힘 좀 빼.”
“하아, 으……. 뺀 거, 야, 응.”
“더 빼야지. 그래야 내가 더 들어가지.”
여환의 손이 하지의 젖은 배꼽 위를 문질렀다. 꼭 여기까지 넣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짓에 거부감이 드는 게 아니라 덜컥 기대부터 되는 걸 보니 박하지는 온여환의 말대로 정말 야한 짓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차라리 편했다.
박하지는 거리낄 것 없이 골반을 열고 양다리로 여환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여환을 받아들였다. 그에 맞춰 허리를 움직이던 여환이 어느 순간 단번에 뿌리까지 퍽, 쳐올렸다.
“아, 아!”
온여환의 손이 닿았던 배꼽 아래가 뚫릴 것만 같았다. 박하지가 잠시 숨 고를 틈을 주던 온여환이 그의 발목을 붙잡아 제 어깨 위로 걸치듯 들어 올렸다. 그러자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채워져 있는 줄 알았던 온여환의 성기가 박하지의 안을 더 크게 차지했다. 박하지를 잠식한 그의 존재가 버거우리만큼 무한하게 느껴졌다.
온여환이 내벽을 푹푹 찔러 올리기 시작했다. 박하지의 신음이 더욱 높아졌다.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기 힘든 제 목소리였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박하지의 입에선 불이 붙은 폭죽처럼 자꾸만 높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으, 흣!”
온여환은 박하지의 목소리가 특히 자지러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지금까지는 탐색에 불과했다는 듯 그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빨라졌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박하지의 안에서 성기의 절반이 쑤욱 빠졌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박하지는 자신의 안을 채우는 뜨거운 감각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릴 뿐이었다.
“하아, 도련님은 왜.”
하지의 배꼽 주위를 지분거리던 여환의 손이 그의 아랫배 위에 내려앉았다. 마른 배를 살짝 눌러 보듯 쓰다듬는 손마저 뜨거웠다.
“흐응, 읏, 아……!”
“너는 왜, 이렇게 속만 뜨거워서 사람을 미치게 해, 어?”
온여환이 박하지의 목덜미에 이를 박으며 중얼댔다. 정작 미치겠는 건 박하지인데 속도 모르고 그의 살을 빨아 당기며 아랫도리를 들썩였다.
매번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박하지는 온여환과 몸을 섞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몸으로 시작해서 마음까지 이어진 사이였으니 서로 육체의 상성이 잘 맞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항상 좋을 수가 있지.
박하지의 눈앞에서 터진 불꽃이 꽃이 되고, 별이 되고, 다시 어둠이 됐다가 또 빛이 됐다. 정신을 잃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릴 수도 없었다. 하지는 거의 온몸을 여환에게 내맡긴 채 그의 몸짓에 따라 움직였다. 팔을 들어 여환의 목을 감싸 껴안는 것도, 한쪽 다리로 그의 허리를 죄며 보채는 것도, 그의 귓바퀴를 깨물며 신음을 내지르는 것도. 그 모두가 온여환이 만들어 내는 감각에 맞춰 생각할 겨를도 없이 행해지는 행동들이었다.
“도련님, 하아.”
“아……. 으, 읏!”
“아직도 뻑뻑한 게 좋아?”
입술 사이로 뭉개져 흘러나오는 여환의 목소리가 낮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바짝 붙어 서로를 탐하지 않고 있었다면 제대로 듣기 힘들었을 만큼 낮고 불분명한 발음이었으나 박하지는 대충 말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답은 말 대신 행동으로 전했다.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었다가 정신없이 흔드는 것이었다. 그 반응에 여환이 허리를 빠르게 놀리며 웃었다. 그가 웃자 박하지의 아랫배도 우웅, 진동하는 듯했다.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머리가 돌 것 같았다. 온여환이 박하지의 귓바퀴 바로 아래 깊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좋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흐으, 응……!”
“난 이제 도련님 안에 한 번 싸야겠거든.”
여환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르릉. 울리는 호흡을 들으며 하지는 아마 여환보다 더 먼저 사정했던 것 같다. 가슴이 축축했다. 온여환이 허리를 들썩일 때 박하지의 허리가 부르르 떨리며 뒤틀렸고, 팔딱 튀어 오르는 그 허리를 여환이 거세게 내리찍으며 더 크게 자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안에서 사정하는 여환을 느끼며 박하지는 사정감보다 더 큰 쾌감과 해방을 맛보았다. 온여환에 의해 온몸이 속박당했는데도 무중력의 우주 어딘가로 떠오른 것처럼 몽롱했다.
“하…….”
무너져 내리듯 스러진 여환의 무게감에 숨이 막히지만 하지는 도리어 그의 어깨를 더 세게 감아 안았다. 두 사람의 평평한 가슴이 조금의 드팀새도 주지 않고 맞붙었다. 그 가슴 위로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이의 심박동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건 꼭 몸 안에서 굴러가는 시계 소리 같았다. 그들의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이 차려진 박하지가 꾸물꾸물 팔을 움직여 여환의 등을 쓸어내리려던 때였다. 여환이 맞닿아 있던 상체를 다시 벌떡 일으켜 세웠다.
“우리 이번엔 좀 부드럽게 갈까?”
박하지의 안에 들어차 있던 여환의 것이 다시 불끈거리며 부피를 키웠다. 하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턱을 떨어뜨렸다.
“바로 하겠다고?”
“힘들어?”
“당연……!”
“참아 봐. 나도 도련님 씻고 나올 때까지 참았잖아.”
씨발, 또 그 소리다. 억울해진 박하지가 언제까지 뒤끝을 부릴 거냐 소리치려는 순간 온여환이 어느새 다시 딱딱해진 성기로 박하지의 아랫배를 찔렀다. 조금 전의 정사로 인해 아직 여운이 다 빠져나가지 않은 하지는 그 뭉근한 움직임에도 허벅지 사이가 달달 떨릴 지경이었다. 밀어 내고 싶은데 익숙하게 여환을 받아들이는 내벽은 이미 준비를 마친 것처럼 느껴졌다.
상성이 너무 잘 맞아도 문제인 걸까. 박하지는 진심으로 괴로운 듯 눈썹 사이를 찌푸리면서도 다리로는 온여환의 등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자신도 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박하지를 예상했다는 듯 여환은 그의 허리를 훌쩍 안아 올렸다. 그리곤 자신의 허벅지 위에 하지를 앉힌 후 하체를 쳐 대기 시작했다. 철벅철벅, 온여환의 정액이 흘러내려 젖은 아래에서 질척한 마찰음이 울렸다. 부드럽게 가자더니 하나도 부드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싫다고 관두자 할 마음은 없었지만.
* * *
박하지가 눈을 뜬 건 오전 10시가 넘어서였다. 평소보다 여유로운 기상이었으나 지난밤의 정사 때문인지 몸의 피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면에 침대는 간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깨끗했다. 어지러운 건 온여환이 온통 물고 뜯어 놓은 박하지의 몸뚱이뿐이었다.
끙끙거리며 완전히 몸을 일으킨 박하지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대강 주워 입고 방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풍겨 오는 고소한 버터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하지는 그 냄새에 이끌리듯 느릿느릿 부엌으로 향했다.
가볍게 바닥을 딛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던 온여환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하듯 까딱이며 싱긋 웃는 모습이 여유로운 아침 풍경과 잘 어울렸다.
“일어났어?”
거실과 부엌 사이에 우뚝 선 하지는 대답 대신 까치집이 얹힌 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개만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지금 깨우러 가려고 했는데. 와서 앉아.”
가스레인지 불을 완전히 끄고 돌아선 온여환은 양손에 프라이팬과 뒤집개를 들고 식탁에 놓인 접시에 오믈렛을 옮겨 담으며 말했다.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온여환은 제법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마닐라에서도 그가 만든 음식을 얻어먹었을 때도 꽤 맛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한두 가지만 특별히 잘하는 거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특별히 못 하는 요리가 없는 거였다.
온여환의 말로는 혼자 오래 살다 보니 자연히 터득하게 된 거라는데, 마찬가지로 혼자 살아 본 경험이 있는 박하지는 별로 공감할 수 없는 얘기였다. 연정에서 지낼 때 혜령이 박하지에게 과일 깎기 정도만 맡겼던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우유 줄까?”
토스터에서 따끈따끈한 식빵을 꺼낸 온여환이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커피.”
“빈속에 무슨 커피야. 우유 마셔.”
“뭐야, 그럼 왜 물어봤어.”
“너 잠 덜 깬 목소리 귀여워서.”
“별…….”
어이없어하는 박하지의 반응에 온여환은 웃으며 우유를 꺼냈다. 그는 딱 한 잔 남은 우유를 박하지의 컵에 가득 따라 가지고 왔다.
“주스 없어?”
“왜? 주스 마시고 싶어?”
“아니, 나 말고.”
“난 됐어.”
식탁 위에 구운 식빵과 컵을 내려놓은 온여환이 비로소 하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우유 대신 식탁 구석에 놓여 있던 생수통을 들었다. 이 또한 박하지가 온여환과 같이 지내며 알게 된 소소한 사실 중 하나인데, 그는 우유를 잘 안 마셨다. 우유를 마시면 항상 탈이 난다고 했었다. 그래서 빵 같은 걸 먹을 때도 우유 대신 커피를 택했고, 커피가 없으면 차라리 물을 마셨다. 그나마 커피가 있어도 그게 라떼 종류면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 외에는 특별히 가리는 음식이 없었지만, 양식보다는 한식을 더 선호하는 듯했다. 기름진 것보단 담백한 걸 더 좋아했고, 짠 건 참아도 단 건 잘 못 참았다. 그래서 디저트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또 빵은 좋아했다. 식빵이나 호밀빵처럼 부재료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빵을 살짝 구워 버터를 발라 먹는 게 온여환이 가장 좋아하는 아침 식사 메뉴였다. 또 뭐가 있더라.
“그 집은 언제 정리할 거야?”
박하지가 한 면에 잼을 바른 식빵을 주욱 찢으며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던 때였다. 불쑥 다가온 온여환의 손이 그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툭, 털어 주었다. 박하지는 들고 있던 식빵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제 입술을 닦으며 물었다.
“무슨 집?”
“네 옥탑방 말이야.”
“아.”
“정리 안 할 거야?”
“해야지.”
“그러니까 언제.”
박하지는 음, 하고 고민하는 척 우유를 들이켰다. 이럴 때는 입에 뭘 물고 있어야 대답을 피하기가 쉬웠다.
집 얘기가 나올 때면 박하지는 항상 이런 식으로 확답을 피했다.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다시 들어왔을 때부터 온여환의 집에서 지냈었고, 사실상 그냥 같이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온여환이 그 옥탑방을 정리하자는 말만 하면 입을 다물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서, 다음 입주자를 구하기가 번거로워서, 별로 있지도 않은 짐을 챙겨 오는 게 귀찮아서, 이유도 참 다양했다.
처음엔 온여환도 그 이유를 순수하게 믿으려고 했지만, 이쯤 되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하지가 온여환과 함께 사는 게 싫은 건 아닐까. 지금은 같이 지내고 있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장소를 없애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안다. 박하지가 정말 그와 사는 게 싫었다면 진작에 집을 나갔을 것이고, 떠날 곳이 필요하다면 온여환이 주소를 다 알고 있는 옥탑방을 택할 리도 없었다. 그러나 온여환은 자신의 추측이 다 비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박하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벌써 1년을 가까이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는 대체 뭐가 불안해서 아직도 온전히 온여환의 옆에 머무르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혹시 말이야.”
여환이 식탁 위에 양쪽 팔꿈치를 올리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남은 우유를 한 번에 다 마신 박하지가 컵을 내려놓으며 그를 봤다.
“집이 너무 좁아?”
“큽!”
뜬금없는 온여환의 말에 박하지는 우유가 잘못 넘어간 듯 기침을 토해 냈다. 여환은 얼굴이 벌게져 콜록거리는 그에게 자신이 마시던 생수병을 내밀었다.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퍽퍽 두드리던 박하지는 기침이 조금 가라앉은 후에야 온여환이 준 물을 들이켰다. 달아올랐던 얼굴색이 금세 평소대로 돌아왔다. 온여환은 진정된 박하지를 보며 한술 더 뜨는 소리를 했다.
“더 큰 데로 이사 갈까?”
“뭔 소리야, 진짜. 이 집보다 더 큰 집으로 가서 뭐 하게? 집에서 공 찰 거야? 나 큰 집 싫어.”
“그럼 더 좁은 데로 갈까?”
“그게 뭔 뜬금없는…….”
“아니면 말을 해 봐. 왜 사람 불안하게 세컨드 하우스 만들어 놓고 없애지도 않는 건지.”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나 했더니 하고 싶었던 얘기가 결국 저거였던 모양이다. 하지가 공연히 빈 페트병을 구깃거렸다.
“……그게 무슨 세컨드 하우스야.”
“너한텐 아닐지 모르지만 나한텐 그렇게 느껴져.”
말하는 온여환의 목소리에 사뭇 힘이 빠져 있었다.
“네가 이 집이 싫어서 그러는 건지, 내가 싫어서 그러는 건지 헷갈리기도 하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
순간 하지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집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얼버무리는 자신의 말을 온여환이 곧이곧대로 믿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저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온여환이 싫다니.
“내가 너 싫었으면 여기 들어와 있겠어? 난 그냥…….”
온여환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명확하게 얘기를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그가 저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박하지는 그에게 무어라 설명할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오래 묵은 불안이 그의 심장 아래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모양이 흐릿해 제대로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박하지의 장기 내벽에 찰싹 달라붙어 그 형체마저 잃고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박하지는 자신의 몸 곳곳에 스며든 불안의 정체도 알 수가 없었고, 그걸 문장으로 간결하게 정리해 낼 능력도 없었다.
“그냥…….”
박하지가 흐릿하게 맴돌기만 하는 말을 잇지 못하며 입술을 축이던 그때, 온여환의 핸드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온여환이 박하지를 힐긋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자리를 피하는 걸 보니 아마 일 관련 전화인 듯했다. 그는 국정원에서 전화가 올 때면 항상 박하지에게서 조금 떨어져 전화를 받곤 했다. 워낙 보안이 생명인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온여환은 통화를 누르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예, 차장님, 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을 미루어 보아 아마 권규호 차장에게 걸려 온 전화인 모양이었다.
송태갑이 해임되며 공석이 된 차장 자리를 메운 것은 당시 국장이었던 권규호였다. 국정원 내부 사정이라 박하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얼핏 듣기로는 여러 번 차장 자리를 고사했었다고 한다. 해당 사태에 자신의 책임이 없지 않다며 사직서까지 제출했었다고 했는데, 그런 그를 설득한 것이 바로 온여환이었다.
책임을 지고 싶으면 안에서 다 해결하고 나가세요.
온여환의 그 말에 권규호는 차마 사직서를 내던지지 못했다. 설득이라기엔 짧고 불친절한 말이었지만, 그는 온여환이 하려는 말의 의도를 다 알아들었던 것 같다.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들이 줄줄이 잘려 나간 위태로운 조직 안에선 그 어느 때보다 상황을 명확히 판단하고 정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국정원이 왜 이토록 망가졌고 비난을 받는지 권규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권규호가 국정원에 남은 이유였다. 그리고 그는 같은 이유로 온여환의 사직서를 반려하고 그를 팀장으로 임명했다. 온여환은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번엔 권규호가 그를 설득했다. 너도 끝까지 해결하고 나가, 인마. 그게 권규호가 온여환에게 한 설득의 다였다. 온여환은 고작 그 한마디에 국정원을 떠나지 못했다.
그가 투철한 충성심을 가진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누구는 온여환이 자리 욕심이 있어서 그 더러운 꼴을 보고도 버티고 있는 거라고 했고, 또 누구는 조직을 쇄신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가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지만, 박하지가 보기엔 그런 말들은 온여환을 하나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알량한 애국심도 없었고, 거창한 야망도 없었다. 한때는 군인이었던 온여환은 그 시절의 군인 정신 같은 것도 다 갖다 버린 지 오래인 남자였다.
온여환이 국정원에 남기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박하지 때문이었다. 비코어 그룹을 무너뜨린 후에도 국정원에 머물렀던 이유가 박하지의 안위를 걱정해서였던 것처럼, 그는 처음부터 오로지 박하지의 안전에만 관심이 있었다. 박하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온여환이 자신 때문에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일들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도.
이지원이 구속된 후 홍콩 내에서 수배령이 떨어진 남부 조직의 보스가 암암리에 세력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론 해외 조직이 결집하는 데에 대한민국의 국정원이 끼어들 일은 없었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해당 조직이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한국인이 주범인 국제 사기극에 연루되어 있었던 만큼 움직임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당 임무를 자처해서 맡은 사람이 바로 국정원 해외 파트의 새로운 팀장 온여환이었다.
박하지는 온여환에게 왜 그 일을 맡았느냐 묻지 않고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박하지에게 조금이라도 위험이 될 수 있는 요인들을 빠짐없이 파악하려고 할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모조리 없애고 말 사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든 간에 말이다. 생각만 해도 고달프고 버거운 길을 오로지 박하지 하나 보고 선택한 사람에게, 박하지는 뭘 해 줄 수 있을까.
복잡한 상념이 맺혀 느려진 손끝이 남은 식빵 조각을 의미 없이 죽죽 찢을 때였다.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고개를 번쩍 든 하지가 온여환이 들어간 드레스 룸과 현관을 번갈아 봤다. 그사이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렸다. 평화로운 주말 아침부터 온여환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누구든 간에 분명한 목적을 가진 방문객이라는 것만은 분명할 듯했다. 접시 위에 식빵을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턴 하지가 몸을 일으켜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팀장님, 저 이복구입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현관문 손잡이를 붙잡은 하지가 주춤했으나, 동작이 멈춘 것보다 문이 밀린 것이 먼저였다. 빼꼼 벌어진 문틈으로 이복구의 얼굴 반쪽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안면에도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어…….”
“…….”
솔직히 말하면 못 알아볼 뻔했다. 다시 만난 이복구는 양아치처럼 샛노랗게 색을 뺐던 머리카락을 짙은 갈색으로 덮었고, 두피에 가깝게 바짝 깎았던 헤어스타일도 많이 길어 단정해져 있었다. 밖에서 봤다면 영락없이 건실한 청년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쳤을 인상이었다. 그게 박하지의 기억 속에 남은 인상과 많이 달랐고, 그래서 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던 같다. 문턱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서먹한 공기를 먼저 밀어낸 것은 이복구였다.
“아, 그……. 안녕하세요. 팀장님께 볼 일이 있어서…….”
하지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마저 열어 주었다. 어차피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이도 아니겠다, 문전박대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아주 반갑게 맞아 줄 사이도 아니긴 했지만.
“여기서 뵐 줄은 몰랐어요. 팀장님 혼자 사시는 줄 알았는데…….”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선 이복구는 변명인지 해명인지 모를 말들을 두서없이 주절거렸다. 종합해보면 급한 일이 생겨서 권규호 차장의 지시를 받고 온여환을 데리러 왔다는 거였다. 하지는 집까지 찾아올 만큼 급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거기까지 물어보진 못했다.
“……잘 지내셨어요?”
할 말이 떨어졌는지 잠시 눈을 굴리던 이복구가 평범한 안부를 물었다. 저런 질문을 받고 있으려니 두 사람 모두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겼던 사람들이라는 게 실감 났다. 그런 일을 겪고도 이런 안부를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지내고 있다는 건 분명 잘 지내는 축에 속하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질문에 대답을 대신한 하지는 이복구의 안부는 따로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다기보단 그의 소식이라면 박하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송태갑의 사망 후 한국으로 돌아온 이복구는 국정원으로 들어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송태갑에게 따로 지시를 받고 박하지에게 접근한 것도 맞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들을 송태갑에게 전한 것도 맞지만 선장과 관련된 일이나 송태갑이 벌이고 있던 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단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취조 기간이 꽤 길어 고생을 좀 했다는 것 같던데, 다행히도 국정원은 이복구의 말에 거짓이 없다고 판단했고, 그는 3개월 만에 다시 국정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온여환에게 전해 들은 얘기였다.
‘걔가 너 한번 만나 보고 싶다던데, 만나 볼래?’
그렇게 묻던 여환에겐 그저 고개만 저었었다. 만나지 못할 사이는 아니지만, 특별히 시간을 내서 만날 만큼 좋은 사이도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언젠가 만날 일이 생기면 다시 만나지겠지. 그러고 말았던 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언젠가가 오늘이 될 줄은 박하지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이번에도 이복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박하지는 이복구가 말하는 ‘그때’도, 그가 자신에게 ‘감사’를 전하는 이유도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멀거니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더니 이복구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날 저 구해 주셨던 거요.”
“……아.”
“그때 형님, 아니, 그…… 박하지 씨 아니었으면 저 거기서 죽었을 거라는 거 팀장님께 들었…….”
“너 예뻐서 한 일 아니야.”
시선을 내린 채 말을 잇던 이복구가 처음으로 입을 뗀 박하지의 반응에 다소 놀란 듯 눈을 올렸다. 박하지는 덤덤하게 그 눈을 마주했다.
“내가 특별히 좋은 사람이라 그랬던 것도 아니고, 그냥 또 내 앞에서 사람이 다치거나 죽으면 도저히 발 뻗고는 못 잘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포대 자루에 담겨 던져진 이복구를 따라 물속으로 뛰어든 것이 특별한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박하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는 단지 제 삶이 누군가의 버려진 목숨과 피로 더 무거워지지 않길 바랐을 뿐이고, 그러니 그 상대가 이복구가 아니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나 편히 살자고 한 일이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그런 거에 감사하지 마. 나도 너한테 고마운 거 하나도 없어.”
“…….”
“미운 것도 없고.”
두 사람이 나눠야 할 얘기라면 결국 이게 다였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책임과 이유를 따져 묻기엔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짓이 되어 버렸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웃어넘기기엔 남은 기억이 아직 선명했다. 그러니 둘에게 남은 감정 역시 딱 이 정도로만 털어 내는 게 맞았다. 관계에 응어리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그 관계가 좋아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관계도 있는 법이다.
그런 하지의 생각이 전해진 것인지 이복구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거실이었지만 그게 썩 불편하고 껄끄럽지만은 않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벌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박하지와 이복구의 눈이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미안, 일이 생겨서…….”
통화를 마치고 드레스룸에서 나오던 온여환이 박하지의 앞에 서 있는 이복구를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사이 박하지는 드레스 룸에 들어갈 때와 달라진 온여환의 차림을 훑어보았다. 검은색 긴팔 티셔츠에 가죽 재킷을 걸쳐 입고 나온 그의 손엔 어딘가 오래 출장을 갈 때 가지고 다니는 박하지의 보스턴백이 들려 있었다. 박하지는 문득 급한 일로 온여환을 찾아왔다는 이복구의 방문 목적이 다시금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제대로 묻지는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한 온여환이 금방이라도 이복구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다가온 탓이었다.
“야, 너 내가 올라오지 말고 밑에서 대기하란 말 못 들었어?”
“예? 아뇨, 전 차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만…….”
“못 들었어도, 새끼야. 생각이 있으면 밖에서 대기해야 할 거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 맘대로 들어와?”
“맘대로 들어온 게 아니라 내가 문 열어 준 거야. 급한 일이라길래.”
박하지가 이복구와 온여환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덕분에 이복구를 다그치는 온여환의 말이 멈추긴 했지만, 그의 뒤에 선 이복구를 바라보는 여환의 시선엔 여전히 못마땅함이 그득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이 남은 듯한 얼굴이었으나 하는 수 없이 쯧, 하고 혀를 차는 것으로 속엣말을 갈무리한 여환이 턱짓으로 현관문을 가리켰다.
“밖에서 기다려. 나도 금방 나갈 테니까.”
“어딜 나가는데?”
이복구에게 퇴장을 지시하는 온여환에게 박하지는 이번에야말로 묻고 싶은 것을 제대로 물을 수 있었다. 그에게 질문을 받은 온여환은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그를 봤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듯하자 이복구는 눈치껏 몸을 돌려 현관을 나섰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에 박하지가 다시 한번 입을 뗐다.
“갑자기 어딜 가냐고.”
“……홍콩.”
“뭐?”
홍콩을 무슨 역삼동쯤으로 얘기하는 온여환의 대답에 박하지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밥 먹다 말고 홍콩을 간다고?”
온여환이 일 때문에 갑자기 불려 나가는 경우야 흔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 전까지 식탁에 앉아 아침 먹던 사람이 별안간 홍콩을 가겠다니. 뭔지는 몰라도 분명 작은 일은 아니리라는 직감이 섰다.
“무슨 일인데?”
불안한 얼굴로 다가오는 박하지의 모습에 온여환이 별일 아니라는 듯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나 원래 다음 주에 홍콩 들어가기로 했었던 거 알잖아. 그게 조금 당겨졌어.”
“그러니까 그게 왜 갑자기 당겨지냐고.”
온여환이 조만간 홍콩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던 건 박하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박하지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가 홍콩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아니라 왜 이렇게나 갑자기 떠나냐는 것이었다.
“그쪽 상황이 좀 변했나 봐. 나도 아직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별일 아닐 거야.”
“자세히 못 들었다면서 별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박하지의 말끝이 살짝 떨렸다. 일하러 나가야 하는 사람의 앞에서 부산을 떨고 싶진 않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온여환이 하는 일이라는 게 늘 위험과 맞닿아 있다는 걸 알아서 더 그랬다. 특히 지금처럼 미리 예정되어 있던 일정에 변동이 생겼을 때는 높은 확률로 안 좋은 일이 터졌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우리 도련님 얼굴 봐, 곧 울겠다.”
박하지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정말 별일이 아닌 건지 온여환은 장난스레 웃으며 그의 뺨을 주물럭거렸다. 박하지가 그 손을 치워 내려 고개를 털자 아예 어깨를 당겨 품에 안아 버렸다.
“울지 마. 어제 침대에서 울던 거 생각나서 또 꼴리잖아.”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별일이 아니니까 이런 말이 나오지.”
온여환이 들썩이는 박하지의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바닥을 통해 번지는 체온이 바짝 조여든 하지의 심장까지 닿았다. 그의 심장 아래 흐릿하게 붙어 있던 불안이 꿈틀거렸다. 하지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아까는 그렇게 설명하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던 불안의 실체가 지금에 와서야 조금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박하지가 그 불안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가 여환의 품 안에서 도리질을 쳤다. 그의 어깨에 대고 코끝을 비비며 온여환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고개를 숙인 여환이 하지의 귓바퀴를 살짝 물었다가 놓으며 속삭였다.
“일주일이면 돼. 그 안에 돌아올게.”
“…….”
“집 얘기는 돌아와서 다시 하자.”
여환이 하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덩달아 하지도 여환의 허리에 팔을 두르려는데, 현관에서 다시 초인종이 울었다. 인터폰 화면 위에 이복구의 초조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여환은 서두르는 대신 박하지의 뺨에 입술을 꾹 찍었다가 떨어뜨렸다. 하지는 떨어지는 그의 입술을 따라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매일 연락해. 하루도 빠지지 말고.”
그를 올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가 여느 때처럼 온여환으로 꽉 차 있었다. 여환은 그 눈가에도 짧게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폰 섹스 같은 거 해 볼까, 하고 장난스러운 말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박하지가 실없는 소리 그만하라는 듯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래도 그 실없는 소리 덕분에 계속 굳어 있던 하지의 표정이 그나마 조금 풀렸다. 여환은 그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본 후에야 안심한 듯 현관으로 향했다.
“진짜 별일 아닌 거 맞지?”
현관까지 그의 뒤를 따라온 박하지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듯이 물었다. 탁탁, 바닥에 신발 코를 부딪치던 여환이 하지를 돌아봤다.
“어. 아냐.”
웃는 얼굴로 답한 여환이 현관문을 밀었다. 박하지는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근심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온여환은 끝까지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것은 현관문이 완전히 닫힌 후였다.
“팀장…….”
문 앞에서 대기하던 이복구가 밖으로 나온 그를 보고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온여환이 입술 위에 검지를 갖다 붙이며 그의 말을 막았다. 빠르게 복도를 벗어난 온여환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후에야 이복구를 돌아봤다.
“왜 네가 왔어?”
“예? 전 그냥 권 차장님이 시키신 대로…….”
혼자 마닐라로 가겠다는 온여환에게 권규호가 바득바득 우겨서 데려다 붙인 파트너가 겨우 이복구인 모양이었다. 붙일 거면 좀 제대로 된 인간을 붙여 주든가. 하필 붙여도 꼭 저런 걸. 온여환은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공항.”
“바로요? 차장님도 안 뵙고요?”
“너 시간 많아? 한가롭게 서울 바닥이나 누비고 갈 여유가 있나 보지?”
반질반질한 문을 거울삼아 이복구를 바라보는 온여환의 눈빛이 어쩐지 서늘했다. 조금 전 박하지를 마주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이복구가 허리를 바짝 세웠다. 그래, 이복구가 아는 온여환은 대개 저런 얼굴이었다. 이름 앞에 붙이고 있는 성과 다르게 온정보단 냉정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남자.
온여환은 아닙니다, 하고 기가 죽어 대답하는 이복구를 매섭게 바라보는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 마자위 위치는?”
“아직 마닐라를 못 빠져나간 것 같다고 합니다.”
마닐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마자위가 탈옥했다. 박하지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아침부터 온여환이 권규호 차장의 전화를 받아야 했던 것도, 이복구가 친히 그를 모시러 온 것도 다 그 이유였다. 엘리베이터 계기판에 나타나는 숫자의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온여환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럼 일단 마닐라로 가야겠네.”
온여환은 마자위를 찾으러 갈 것이다. 홍콩이 아닌 마닐라로.
* * *
새파란 도화지를 닮은 하늘 위에 무지개가 그려졌다. 박하지는 높이 떠오른 무지개의 고리에 손가락을 걸 듯 손을 뻗었으나 너무 멀어 닿진 않았다. 아무리 뛰고 날아올라도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발밑의 땅이 끈끈한 점액질처럼 달라붙어 그의 발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무거운 몸뚱이는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만 맴돌더니 이윽고 땅속으로 삼켜지기 시작했다. 마치 물이 빠지는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팔을 허우적거리던 박하지는 머리통만 간신히 내민 채 소리쳤다.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그저 입술만 뻐끔거리는데 입 안으로 진흙이 밀려 들어왔다. 목구멍이 꽉 틀어 막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얼굴이 완전히 잠기기 직전,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같은 걸 낳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는 잘 기억도 안 나는 남자, 한때 그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이의 목소리였다.
너 같은 걸 낳아선 안 됐는데.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그의 생물학적 어머니이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불러 본 적 없는 여자의 것이었다.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음성에 잊고 살았던 무력감이 되살아났다. 진흙 속에서 퍼덕이던 하지의 팔이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이마 위로 은색 리볼버의 총구가 겨눠졌다.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희미하기만 했다.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웃는 모양만 선명하게 보였다.
10, 9, 8…….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하지는 본능적으로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옳았다. 그사이 이마에 겨눠진 총구가 그의 머리를 지그시 찍어 눌렀다. 입술, 코, 눈이 완전히 잠기고 마침내 숨이 턱 막히는 어둠이 들이닥쳤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카운트다운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6, 5, 4…….
하지는 난파된 배처럼 몸에 힘을 빼고 무력하게 침몰해 갔다. 더 깊은 심연으로, 바닥으로, 그렇게 완전한 소멸의 길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 몸이 쑤욱 끌려가는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졌다. 장기까지 꾸역꾸역 채워져 들어오던 흙모래가 잘게 갈리고 또 갈려 마침내 먼지처럼 흩어지고, 그의 몸을 끌어당기는 것 같던 진흙이 맑은 물로 변하여 그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3, 2…….
하지의 눈이 온기가 느껴지는 자신의 손목을 봤다. 커다란 손이 밧줄처럼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박하지를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믿어 마지않는 손.
1.
마침내 카운트다운이 끝났을 때였다. 박하지는 그 커다란 손에 붙들려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완전히 밖으로 나온 후에야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허억……!”
눈이 번쩍 뜨였다. 새파란 하늘과 무지개 대신 새하얀 천장과 문밖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생활 소음이 현실로 돌아온 그를 반겼다.
“…….”
꿈이었다. 어쩌면 꿈속에서도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언제나처럼 가라앉는 자신을 끝까지 붙잡고 끌어 올려 주는 손이 있으리란 것도. 그러나 그걸 다 알면서도 이런 꿈을 꾼 날은 심장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늑골 아래가 저리곤 했다. 아직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런 꿈에 시달리다가 깬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뻗어 머리맡에 둔 핸드폰부터 찾아 쥐었다. 잠금 화면을 풀자 잠들기 전 온여환과 주고받았던 대화창이 나타났다. 오늘은 뭘 했는지, 누굴 만났고 저녁으론 뭘 먹었는지,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다가 박하지가 먼저 잠드는 바람에 맥락 없이 끊겨 버린 대화창 하단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온여환의 마지막 메시지만 홀로 남아 있었다.
[잠들었어? 내 꿈 꿔^^]
마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메시지에 하지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맺혔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꿈의 여운이 다시금 되살아나 목덜미 아래를 갉작거리는 탓이었다.
이런 꿈을 처음 꾼 것도 아닌데 오늘은 유난히 떨치기가 힘들었다. 온여환이 옆에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요 며칠 부쩍 박하지를 괴롭히는 원인 모를 불안감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박하지의 불안감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도 온여환이 홍콩으로 떠난 후부터이긴 하지만, 꼭 그의 부재만이 이유였던 것은 아니다. 제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는 박하지도 이미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은 하지가 착잡한 얼굴로 침대 옆의 협탁을 돌아봤다. 손을 뻗어 첫 번째 서랍을 열자 그 안에 얌전히 놓여 있는 명함 한 장이 보였다. 일전에 박하지를 찾아왔던 여자가 주고 간 명함이었다. 저 종이 쪼가리 하나가 바로 박하지의 꿈자리를 망친 주범이었다.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박하지가 그들의 핏줄을 나누어 가졌다는 이유로 잊을 만하면 그를 찾아와 감시하는 이들과 아마 평생 박하지의 몸뚱이 어딘가에 새겨져 살아갈 이지원이라는 인간의 존재. 그들은 언제나 박하지에게 불안과 초조, 조바심과 위태로움이 될 것이다. 그건 아무리 평화로운 일상을 흉내 내더라도 박하지의 삶이 절대로 평화로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명함에 새겨진 글자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박하지가 다시 핸드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온여환의 마지막 메시지 내용을 보는 시선이 조금 더 애틋해지는가 싶었으나 그것도 잠시, 하지는 이내 대화창을 끄고 키패드 화면을 띄웠다. 그의 손끝이 명함에 적힌 숫자와 똑같은 숫자를 눌렀다. 이제 버튼 하나만 누르면 통화가 연결될 것이다.
하지의 엄지가 차마 액정에 닿지 못하고 잠깐 멈췄다. 그들을 만나서 뭔가 특별히 해결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울며불며 소리칠 생각도 없었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얽혀 버린 이 지긋지긋한 관계들을 결코 끊어 낼 수 없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박하지가 죽어 버리지 않는 이상은 그랬다. 어쩌면 그래서 더 그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박하지는 얼마 전 자신에게 묻던 온여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그 사람들 말고,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었다.
박하지는 그때도 지금도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정확히 말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는 짧은 망설임 끝에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오래가지 않아 신호음이 뚝 끊기고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안성미입니다.”
“박하지입니다.”
짧게 숨을 들이켠 하지가 혀끝으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밀어 냈다.
“좀 만났으면 합니다.”
* * *
온여환과 연락이 끊긴 것도 바로 그날부터였다. 오늘까지 사흘째였고, 그가 떠난 지는 8일째 되는 날이었다. 일주일 안에 돌아오겠다던 약속 역시 이미 지켜지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보내면서도 박하지는 빈곤한 상상력으로 불길한 생각을 잇지 않으려고 노력해 봤다. 일이 길어지는 거겠지. 바빠서 연락할 틈이 없는 거겠지. 배터리가 다 된 거겠지. 어쩌면 핸드폰이 고장 났을 수도 있지. 아니면 아예 잃어버렸거나 그것도 아니면 통화가 안 되는 지역에 있는 걸 수도 있지. 뭐가 됐든 나쁜 일이 벌어진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런 노력도 그와 소식이 끊긴 지 사흘째가 되는 오늘 아침엔 더 끌어모을 수가 없었다. 사흘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했던 박하지는 해가 뜬 것을 확인하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 상단에 오전 7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 떠올랐다. 박하지는 이른 시간을 무시한 채 연락처 저장 목록을 뒤졌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참 이어졌다. 전화가 소리샘으로 이어지기 직전 신호음이 뚝 끊겼다. 박하지는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것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유 팀장님. 저 박하지예요.”
- ……박하지 씨?
박하지가 전화를 건 사람은 유성혜였다. 이쪽마저 연락이 안 되면 어쩌나 했는데 전화가 연결돼서 다행이었다. 잠에서 덜 깨 목소리가 잠긴 유성혜는 아침부터 예상치 못한 인물의 전화를 받아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꿈결을 헤매는 건지, 다짜고짜 온여환과 연락이 되느냐 묻는 박하지의 말에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횡설수설했다. 정신이 없는 유성혜를 진정시키는 건 도리어 박하지였다. 그는 며칠 내내 걱정으로 밤을 새운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온여환이 전화를 받고 홍콩으로 떠난 게 열흘 전이에요. 알고 계셨어요?”
- ……홍콩이요?
“예. 일주일째까진 연락이 됐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고요.”
- 아…… 그, 박하지 씨, 조금 더 기다려 보면 어때요? 아마 현지에도 사정이 있을 거라…….
“웬만한 사정으로 저한테 연락 안 할 사람 아니에요. 연락 안 되는 거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니까.”
- …….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이면 꼭 했을 거라고요.”
온여환은 해외에 나가더라도 박하지와 연락하는 걸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혹 사정상 며칠씩 연락이 힘들 때가 생기더라도 꼭 미리 말했었고, 언제 다시 연락하겠다는 약속도 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항상 지켜졌었다. 이번처럼 말도 없이 연락을 끊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거다.
“그 사람한테 무슨 일 있는 건지 좀 알아봐 주세요.”
애써 눌러 왔던 나쁜 생각들이 정수리를 텅텅 두드려 댔다. 혹시 다쳤으면 어떡하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니겠지. 그가 나쁜 상황에 처한 거라면. 위험한 이들과 같이 있다면.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그럼 어떡하지. 박하지는 핸드폰을 꼭 쥔 채 딸꾹질을 하는 사람처럼 간헐적으로 거친 숨만 뱉었다.
그 소리를 가만 듣고 있던 유성혜는 전화가 끊긴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때쯤이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 저 이거 진짜 얘기하면 안 되는 건데…….
무언가 불길한 소리를 내뱉을 것 같은 전조였다.
- 온 팀장 지금 마닐라에 있어요.
“……마닐라요?”
왜 홍콩이 아니라 마닐라일까. 생각하는 순간 답이 튀어나왔다.
- 마자위가 탈옥했어요.
박하지는 머릿속에서 그 이름을 제대로 인식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이라 그랬다. 홍콩 남부 조직의 마자위. AG코퍼레이션의 마 전무. 선장과 박하지에게 물을 먹고 혼자 붙잡혔던 딸 전무. 거기까지 연상해 낸 박하지가 겨우 아, 하고 목소리를 냈을 때 유성혜가 다시 말을 이었다.
- 다행히 다시 붙잡았는데, 그 과정에서 온 팀장이 조금 다쳤…….
“뭐라고요?”
핸드폰을 쥔 박하지의 손끝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그쳐 묻는 목소리도 조금 떨렸던 것 같다.
“다쳤다고요? 어딜요? 얼마나요?”
- 현지에서 수술받았고 아직 중환자실에 있다는데…….
그 뒤로 이어진 말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온여환의 부상 정도와 상태에 대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박하지에겐 그가 다쳐서 수술을 받았으며 아직 의식이 없어 중환자실에 있다는 정보만 거름망 위에 남은 돌멩이처럼 굴러다녔다. 눈앞에 캄캄했다.
“그 병, 병원이 어디예요? 마닐라 어디로 가면 돼요?”
- 박하지 씨, 일단 진정하고.
“어디냐고요!”
온여환이 무슨 일로 마닐라에 갔는지, 국정원이 또 거기에서 무슨 일들을 벌이고 있었는지, 박하지는 그딴 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작전 기밀 사항 같은 걸 말해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쳐서 수술을 받은 온여환이 입원해 있다는 병원의 주소 하나면 됐다.
“안 알려 주시면 저 혼자 마닐라 병원 다 뒤져 보고 다닐 거예요.”
- 하, 진짜 둘 다 고집 장난 아니다.
“알려 주세요.”
이쯤되면 유성혜도 자신이 박하지를 어르고 달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쉰 유성혜가 잠깐만요, 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메시지가 들어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핸드폰 화면에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병원의 주소와 함께 간 이복구의 연락처가 떠올랐다. 눈으로 주소를 외운 하지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씻고 옷을 갈아입을 정신도 없어 대충 겉옷만 걸친 하지가 급히 집을 나섰다. 그의 손엔 핸드폰과 지갑, 그리고 여권 하나만 들려 있을 뿐이었다.
* * *
“좀 괜찮으세요?”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일반 병실로 옮겨진 온여환을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은 이복구였다.
“팀장님 저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던 거 아시죠?”
한국을 떠나올 때부터 온여환이 자신과 함께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는 걸 잘 아는 이복구는 이제 막 의식을 차린 사람을 앞에 두고 제 공로를 인정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큰일 안 나서 서운하냐.”
온여환의 목소리가 성대를 다친 사람처럼 거칠었다. 입을 뗄 때마다 입술에서 쇠 맛이 났다. 말을 하면서 입술이 찢어진 건지, 아니면 이미 찢어져 있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의식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병원에 오기 직전의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 진짜 뭐 그런 말씀을 하세요. 팀장님이 저 한 번 살려 주셨던 것처럼, 저도 팀장님 한 번 살려 드린 거라구요.”
“까지 마, 새끼야.”
사람이 병실에 누워 있으면 기세가 좀 꺾이고 그래야 하는데, 이복구는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온여환의 기세를 여전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물이나 좀 가지고 와.”
“아직 물 마시지 말래요.”
“왜?”
“왜라뇨. 팀장님 지금 칼 맞고 수술해서 3일 만에 깨어난 사람이잖아요. 물 마시는 게 되겠어요?”
“칼…….”
이복구의 말을 들은 후에야 가물가물하던 온여환의 기억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온여환이 마닐라에 온 것은 교도소에서 탈옥한 마자위를 잡기 위해서였다. 필리핀 교도소는 우리나라의 교도소와는 시스템이 달라 수용자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많았고, 마자위가 수감 되었던 곳이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였다.
교도소 내에서 싸움이 벌어진 틈을 타 밖으로 빠져나온 마자위는 홍콩에 남은 조직원의 도움으로 마닐라에 들어오는 컨테이너 운항선에 숨어들려고 했으나, 운항선을 컨택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샜다. 온여환과 이복구는 마닐라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마자위가 타기로 예정된 선박 근처에서 현지 경찰들의 도움을 받아 잠복 중이었다. 항구가 넓은 만큼 구도완이 나타나면 사방에서 동시에 그를 가운데로 모는 것이 작전이었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타이밍이 어긋났던 건지, 마자위가 중간에서 항구를 빠져 나가 버리며 일이 틀어졌다. 가장 선두에서 그를 쫓아간 사람은 온여환이었다. 그는 마자위를 해산물이 늘어선 시장으로 몰았다. 언젠가 박하지와 함께 와 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길이 좁고 사람이 많아 이동이 힘든 데다가, 시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로가 단 네 군데뿐이라 퇴로만 잘 막으면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장을 빠져나가려던 마자위는 가는 곳마다 서 있는 경찰차를 보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제 뒤를 바짝 쫓아온 온여환을 보며 광둥어 욕을 구사하다가 시장 점포와 식당이 함께 들어선 4층짜리 건물 위로 올랐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위로 오르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온여환은 미미하게 웃으며 마자위가 사라진 건물의 계단을 뛰어올랐다.
단숨에 옥상에 도달했다. 마자위는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난간 앞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옆 건물로 뛰기엔 간격이 너무 멀었고, 그냥 밑으로 뛰어내리기엔 생각보다 높이가 꽤 있었다.
‘그만 뛰어, 새끼야. 여기서 뛰어 봤자 네 다리만 분질러져.’
‘뭐야, 하, 한국인이야?’
‘그래, 너 잡으려고 내가 바다까지 건너왔잖아. 그러니까 적당히 하고 좀 있자. 사람들 금방 올라올 거니까.’
그렇게 말한 온여환이 귀에 꽂은 리시버를 꾹 누르며 건물 위치를 알렸다. 이복구가 경찰 병력과 함께 곧장 진입하겠다는 답을 해 왔을 때였다.
‘씨발, 개 같은 한국인 새끼들!’
별안간 마자위가 품에서 꺼낸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 밑의 시장 바닥에서 주워 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길쭉한 회칼이 눈앞으로 달려드는 것에 온여환은 손을 뻗어 칼날부터 잡았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등 뒤에 찬 홀스터에서 총을 뽑아 들려고 했다. 그러나 온여환의 총을 발견한 마자위도 그의 홀스터로 손을 뻗는 바람에 그 손부터 막아 내야 했다.
‘윽!’
마자위는 왼쪽 손목이 푹 꺾인 상태로도 달려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살겠다고 달려드는 게 아니라 죽겠다고 달려드는 폼이었다. 뒤엉킨 몸이 빙글빙글 돌았다. 온여환의 손바닥을 파고든 칼날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렀다. 팔꿈치를 타고 뚝뚝 떨어진 피가 바닥을 어지럽혔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자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게 적당히 하고 가자고 했잖아, 새끼야.’
‘씨, 씨발…….’
시뻘건 눈을 부릅뜨며 욕지거리를 뱉어 낸 마자위는 이복구가 옥상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악을 쓰며 난간으로 달려들었다. 무게를 실어 미는 힘에 온여환은 그대로 난간 밖으로 밀려 났다.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놓친 건 그때였다.
‘팀장님!’
이복구의 목소리가 멍멍하게 귀를 울리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부욱, 하고 시장 점포의 천막이 찢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생선 가판 위에 떨어졌다. 떨어진 건 등으로 떨어졌는데 왜인지 옆구리가 저릿했다. 온여환은 팔을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한 후 천천히 제 옆구리를 더듬었다. 회칼의 손잡이가 만져졌다. 손을 떼어 눈앞으로 들어 올리자 시뻘건 피가 묻어 나왔다.
좆 됐다. 오늘 박하지랑 연락 못 했는데.
그게 온여환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었다.
“잠깐.”
돌연 생각을 멈춘 온여환이 창백해진 얼굴로 병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야, 내가 3일 만에 깨어났다고?”
“예? 예, 엊그제 수술했으니까…….”
“내 가방은?”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니까 봇짐 내놓으라고 한다는 게 딱 이 경우였다. 이복구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가방이요?”
“그래, 내 가방! 핸드폰, 이 새끼야!”
버럭 소리를 지른 온여환이 직접 찾겠다며 몸을 일으켰다가 윽, 하고 수술 부위를 감쌌다. 놀란 이복구가 괜찮냐며 다가오려는 것을 막은 온여환이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온여환이 저렇게 조급해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칼 든 사람을 앞에 두고도 잘만 나불거리는 양반이 무슨 일이지. 잘은 모르겠으나 그 가방에 꽤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긴 한가 보다 싶었다. 주머니 속의 차 키를 더듬거린 이복구가 잠깐만 여기 계시라며 몸을 돌렸다.
“아마 차에 있을……. 어?”
병실을 나서려던 이복구의 앞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도 들렸다.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복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수술 부위를 감싼 채 통증을 참아 내던 온여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자리에선 이복구의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아니, 저기…….”
이복구가 온여환과 미지의 방문자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왜 그러냐니까.”
온여환이 찢어지는 듯한 옆구리를 쥐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병실에 들이닥쳤다. 온여환은 동작을 멈춘 채 벽을 돌아 나오는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박하지였다.
“……?”
순간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꾹 감았다가 떴지만 이복구를 지나쳐 자신의 앞에 다가와 선 사람은 아무리 봐도 박하지가 맞았다. 집에서 자주 입는 맨투맨 티셔츠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 검은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박하지의 모습은 마치 조금 전까지 집에 있다가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 집이 2,000km 넘게 떨어진 곳이어서 문제였지.
“도련님, 너…….”
“어디…….”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열렸지만 둘 중 누구도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온여환은 박하지 때문에 말을 멈춘 거였고, 박하지는 아래턱이 바르르 떨려 문장을 구사할 수가 없었다. 하지는 아랫입술을 꾹 물며 온여환을 살폈다. 핼쑥한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는 환자복을 입은 온여환의 옆구리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왼쪽 심장 아래에 남은 커다란 흉터로도 모자라 오른쪽 옆구리에도 그만한 흉터를 남길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는 목구멍을 콱 틀어막는 울음을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다쳤어.”
“……너 여기 어떻게 왔어? 혼자 왔어?”
“어쩌다 다친 건데. 마자위 때문이야?”
“그건 또 누구한테 들었…….”
“내가 묻잖아, 어디 다쳤냐고!”
박하지의 고함이 병실 복도까지 울렸다. 열린 문 앞을 지나가던 의료인들과 환자들이 병실 안을 기웃거렸다. 아, 이렇게 주목을 끌면 안 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박하지가 온여환을 앞에 두고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어쩔 줄을 모르고 뒷머리를 긁적이던 이복구가 조심스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 저기, 그, 아까 아침에 문자가 와서 제가 말씀드리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저도…….”
주절거리는 이복구를 바라보는 온여환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몸만 성했으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틀어쥐었을 것만 같은 눈빛에 바짝 쪼그라든 이복구가 박하지를 향해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근데 팀장님이 심하게 다치신 건 아니고요. 아, 물론 수술을 하긴 하셨는데.”
“이복구, 입 다물어.”
온여환이 이복구의 입단속을 시켰지만 뱉어지는 말을 막진 못했다.
“다행히 칼이 빗겨 가서 심각하진 않…….”
“칼?”
박하지가 눈을 크게 떴다.
“너 지금 이거, 칼 맞은 거야?”
온여환의 바로 앞까지 성큼 다가온 박하지가 무심코 손을 뻗었다. 환자복 단추가 벌어져 드러난 붕대 바로 위까지 올라온 손이 차마 닿진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박하지의 손끝이 유난히 붉었다. 이 더운 나라에서 꼭 눈송이를 만지다가 들어온 사람처럼 추워 보였다.
그 손을 잡아끌고 싶어 손가락을 달싹거리던 온여환이 박하지의 뒤쪽으로 시선을 넘겼다. 난처한 듯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이복구를 향해 눈짓을 했다. 다행히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이복구가 잽싸게 자리를 비켰다. 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온여환은 그제야 박하지를 향해 제대로 손을 뻗을 수 있었는데, 이번엔 박하지가 그 손을 피해 한걸음 물러났다. 그의 눈가가 울긋불긋했다.
“도련님. 나 괜찮아. 크게 다친 거 아냐.”
“옆구리에 칼을 맞고도 괜찮아? 넌 내가 칼 맞고 왔어도 크게 다친 거 아니라고, 그딴 소리 할래?”
박하지의 목소리가 얇게 갈라지며 치솟았다.
“너 목숨이 열 개쯤 돼? 네 심장은 뭐 강철이라서 총 맞고도 살고, 칼 맞고도 산대?”
“살았잖아.”
“못 살았으면?!”
“…….”
“네 목숨 다해서 죽었으면 어쩔 뻔 했는데!”
소리치는 하지의 말끝에 기어이 울음이 섞여 나왔다. 굵은 속눈썹 끝에 그렁하게 맺힌 눈물이 뺨을 적시지도 못하고 병실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누운 자리에서 바라만 봐야 하는 온여환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언제까지 나 때문에 다칠 거야?”
“너 때문 아니야.”
“네가 마자위 잡겠다고 마닐라까지 온 게 나 때문이 아니면 누구 때문인데?”
온여환은 오래전 총알이 발치를 스치는 전쟁터에 나가서도 죽음이 두렵지 않았었다. 화성파에 잠입했을 때도 임무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 죽음 자체가 두려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군인 시절엔 죽음보다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머리가 세뇌되었을 때라서 그랬고, 전역 후엔 질병 같은 무기력증에 시달리느라 삶과 죽음 따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느껴질 때라서 그랬었다.
그랬던 온여환은 칼을 맞고도 살아난 지금에 와서야 죽음이라는 단어에 서린 공포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었을까 봐 덜덜 떨며 상공을 날았을 박하지의 눈물을 보면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게 두려워졌다. 만일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남겨진 박하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겠지. 저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없었겠지.
뭐가 그렇게 서럽다고 숨까지 헐떡거리며 우는 박하지의 눈물이 바닥이 아니라 그의 심장 근처에 고여 들어 철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여환은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마음 같아선 당장 박하지의 어깨를 끌어안고 젖은 눈가를 닦아 주고 싶었지만,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링거 줄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진통제는 통증을 앗아 가는 대신 정신까지 몽롱하게 했다.
“내가 갈 수가 없어서 그래. 네가 좀 와 줘.”
손바닥을 내보인 여환이 가만히 박하지를 기다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떨어뜨리던 하지의 걸음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가 비로소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을 때, 여환이 하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환의 몸 위로 쓰러질 뻔한 하지가 손으로 침대를 짚어 버티려고 했지만, 반대쪽 손까지 동원한 여환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미안해. 연락 못 해서.”
여환의 수술 부위에 무리가 갈까 봐 벗어나려 바르작대던 하지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다. 옆구리에 칼을 맞아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남자가 걱정했지? 물으며 도리어 자신을 걱정하는 게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그런데 그게 또 싫지는 않고. 하지는 여환의 어깨 위에 눈가를 비비며 자꾸만 새어 나오는 눈물을 틀어막았다. 그래 봤자 온여환의 환자복만 적시는 꼴이었지만.
“근데 내가 다친 건 진짜로 너 때문 아냐. 내가 마닐라에 온 것도 너 때문 아니고.”
“…….”
“그냥 내가 시작한 일 내가 끝내고 싶은 거야.”
“……안 끝났잖아.”
박하지의 목소리를 삭아 들어갈 듯 작고 불분명했지만, 여환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못 끝낸 일들이 아직도 너무 많잖아. 그럼 우린 계속 불안할 거고……. 나는 또 네가 이렇게 다쳐서 올까 봐…….”
그게 나 때문일까 봐, 내가 바로 널 삼켜 버리는 존재일까 봐. 그게 두렵다는 말이 하지의 목구멍 안쪽에 달라붙어 나올 듯 말 듯 했다. 그건 박하지의 심장 아래에, 그의 장기 내벽에 스며들어 있는 불안의 실체와도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고 싶은 일들이 사실은 하나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게 박하지를 불안하게 했다. 박하지가 가진 출생의 비밀은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힐 거고, 그 비밀이 약점이 되어 버린 자들은 박하지가 죽을 때까지 그를 감시하며 따라다닐 것이다.
비밀을 밝히는 과정에서 벌어져야만 했던 수많은 사건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것이고, 그와 관련된 이들도 끊임없이 박하지를 찾을 것이며, 온여환은 그런 박하지의 주변을 경계하느라 이번처럼 제 몸을 살피지 않고 뛰어들 것이다. 박하지가 불구덩이에 뛰어들자고 해도 기어이 살길을 찾아내고 말 이 남자는 박하지가 그 자체로 불구덩이 같은 존재라는 걸 몰랐다. 그가 하지의 손을 잡고 있는 동안엔 어쩔 수 없이 그 불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박하지.”
온여환의 차분한 음성이 하지의 머릿속에서 산불처럼 번져 가는 생각을 막았다.
“나도 불안해.”
언제나 거칠 것이 없는 사람처럼 구는 온여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품 안의 박하지를 잃지 않겠다는 듯 그의 허리와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옆구리가 눌리며 눈가가 일그러졌다. 단순히 신체적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네가 다칠까 봐 불안하고, 내가 널 지키지 못했던 시간들이 다시 널 해치러 올까 봐 무서워.”
온여환이 제 신분을 속이고 박하지의 곁에 머물렀던 4년이라는 시간이 박하지에겐 고스란히 상처가 되었듯이, 박하지를 지키기 위해 벌였던 일들이 결국 모든 일의 도화선이 되었듯이, 온여환은 자신이 박하지를 다치지 않게 지킬 수 있다는 것에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벌인 일들이 도리어 그를 다치게 하진 않을까, 라는 불안감이 꿈속을 뒤덮는 날도 많았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난 날에는 잠든 박하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그를 끌어안고 눈을 감곤 했다. 그럴 때면 박하지는 언제나 잠결에도 온여환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등허리를 껴안고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꿈을 꾸는 사람처럼 편안한 숨을 뱉었다. 온여환은 그 숨소리에 위안을 얻곤 했다.
“그러니까 네가 내 옆에 있어 줘.”
어쩌면 우리는 함께 있음으로써 평생 떨치지 못할 불안과 두려움을 밟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이 그런 거라면 온여환은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계속 같이 있자.”
서로의 불안이자 위로가 되자. 두려움이자 숨이 되자. 어둠과 빛이 되자. 그래서 우리가 그 자체로 온전한 세상이 되자. 그 어떤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세계가 되자.
“난 그거면 돼.”
“…….”
“너는?”
박하지가 팔을 들어 온여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고르게 번지는 숨과 함께 조그만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도. 나도 그거면 돼.
가슴이 맞닿았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세상이 두 사람의 심장 사이에서 자라났다.
* * *
박하지가 병실 사물함에서 익숙한 보스턴백을 꺼내 들었다. 원래는 박하지의 것이었지만 이젠 온여환이 더 자주 들고 다니곤 하는 가방엔 온여환의 옷과 박하지의 옷이 함께 엉켜 있었다. 한국을 떠나며 옷은커녕 속옷 한 장 챙길 여유가 없었던 박하지의 옷은 대부분 온여환이 입원한 병원 근처의 쇼핑몰에서 급하게 산 옷들이었다.
올 땐 가벼웠는데 돌아갈 땐 무겁게 돌아가겠네. 실없이 중얼거린 박하지가 가방 지퍼를 잠그고 돌아섰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는 온여환과 눈이 마주쳤다. 박하지는 퇴원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데 뚱한 얼굴의 온여환은 환자복도 벗지 않은 채였다.
“옷 안 입고 뭐 해?”
“며칠 더 있다가 가자니까.”
또 저 소리다. 박하지는 어제부터 이어지는 이 언쟁이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온여환의 갑작스러운 입원에 덩달아 마닐라에 머무르게 된 박하지가 있는 연차 없는 연차 모두 끌어다가 받아 낸 휴가가 딱 3주였다. 그나마도 채 사장에게 3주 동안 박하지의 일까지 다 해치우겠다고 말해 준 공 대리 덕분에 겨우 얻은 장기 휴가였다.
혹여라도 온여환의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다면 그 이상 마닐라에 머물러야 할 수도 있어서 내심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스럽게도 온여환의 회복은 눈에 띄게 빨랐다. 수술 부위는 염증 없이 아물고 있었고, 3주면 퇴원 후 비행기를 타도 무리가 없을 거라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드디어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마닐라에서 완전히 회복한 후 떠나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다친 몸으로 타지에 오래 머무르는 것보단 한국에서 지내는 것이 심적으로도 훨씬 편할 거라는 생각에 결정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온여환이 마닐라에서 며칠만 더 묵고 가자고 저렇게 고집을 피워 대고 있었다. 온여환의 앞으로 다가선 박하지가 그의 환자복 단추를 하나씩 톡, 톡, 풀어내며 말했다.
“그 몸으로 마닐라에 남아서 뭐 하려고.”
“퇴원해도 된다잖아. 다 나았어.”
“퇴원해도 된다는 게 다 나았단 소리는 아니야.”
환자복을 들추자 온여환의 오른쪽 옆구리에 손바닥만 한 거즈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또 버릇처럼 혀가 차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흉터가 걱정했던 것만큼 크게 남진 않을 것 같다는 점이었지만, 그렇다고 속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빚어 놓은 듯 잘 깎인 몸뚱이에 왼쪽 오른쪽 사이좋게 흉터가 생긴 것이 보기 좋을 리가 없었다. 무의식중에 거즈 위를 더듬듯 만지던 박하지는 온여환이 내쉬는 한숨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떨어뜨리려고 했으나, 그 전에 먼저 온여환에게 손등이 감싸졌다.
“그럼 다 안 나았으니까 여기서 쉬다가 한국 들어가면 되겠다.”
“나 흥신소도 나가 봐야 해. 벌써 2주 넘게 못 나갔잖아.”
“휴가받았다며.”
“놀다 오라고 준 휴가 아니거든?”
“그럼 나 아직 병원이라고 해.”
“아, 진짜 왜 이래?”
보름 넘게 병원에만 갇혀 지냈던 게 너무 지겨웠나. 마닐라 호텔에서 며칠만 더 머무르다가 돌아가자는 온여환의 고집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박하지도 온여환의 말을 따라 마닐라에서 휴양을 보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마음 편히 휴가를 즐길 상황이 아니었다.
퇴원을 해도 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어찌 됐건 온여환은 외과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환자였고, 아직은 수술 부위를 잘 살피며 케어해야 하는 시기였다. 박하지는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서 온여환을 편히 쉬게 해 주고 싶은 생각뿐인데, 온여환은 철없는 아이처럼 휴가를 즐기려고 했다.
“놀고 싶으면 다치질 말았어야지.”
달래겠다고 뱉은 말이 좀 무정하게 들렸으려나. 박하지의 손등을 그러쥐고 있던 온여환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래도 붙잡은 손을 아예 놓지는 않아서 박하지의 손도 함께 내려갔다. 굳은 여환의 표정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 박하지가 제 발언을 수습하겠다고 입을 떨어뜨렸을 때였다.
“내 말은…….”
“그래서 그러는 거야. 이 꼴로 나타난 거 미안해서.”
“…….”
“나 때문에 너까지 계속 병원에서 고생했잖아. 잠도 편하게 못 자고.”
박하지의 뺨을 쓸어내리는 온여환의 음성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졌다. 정작 다쳐서 아픈 사람은 본인이면서 박하지의 고생을 먼저 생각하느라 눈도 제대로 못 맞추는 남자에게 더 모진 말을 하기는 힘들었다. 하지가 제 얼굴 위에 머물러 있는 손을 겹쳐 잡곤 밑으로 내려 깍지를 꼈다.
“그게 왜 고생이야. 내가 다쳤으면 너도 똑같이 했을 텐데.”
“넌 내가 다칠 일 없게 하지.”
“참나.”
말이나 못 하면. 박하지는 온여환의 대답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전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박하지를 살리겠다고 멈추지 않는 차에 뛰어들기까지 했던 남자라면 정말로 평생 다치지 않게 해 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 그는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다. 아마도 박하지 역시 마찬가지겠지. 자신이 다친 것보다 온여환이 다친 것을 더 아파하게 될 것이고, 온여환이 어딘가에서 또 저 대신 다치고 있진 않을까 불안하고 두렵겠지.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삶을 살았던 박하지는 이제 자신이 아닌 타인의 아픔까지 짊어지고 살아야겠지만, 그 무게가 싫지 않았다. 어쨌든 그 무게를 책임지는 것이 저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서로의 아픔과 불안을, 두려움과 시련을, 눈물과 좌절을 짊어진 우리는 아마 평생 함께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조급해하고 안달 낼 이유가 없었다.
“마닐라는 몸 다 나으면 다음에 다시 오자.”
온여환의 환자복을 마저 벗긴 박하지가 침대 위에 올려 두었던 얇은 셔츠를 그의 팔에 꿰어 주며 말했다. 끝까지 져 주지 않는 박하지의 대답에 온여환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노골적인 한숨을 가볍게 무시하며 꿋꿋하게 셔츠 단추를 다 채운 박하지가 이번엔 온여환의 앞에 손을 내밀어 보였다.
온여환이 시선을 올리자 마치 안 잡고 뭐 하느냐고 말하듯 눈썹을 까딱였다.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박하지의 고집을 꺾기가 힘들 것 같았다. 온여환은 하는 수 없이 그의 손을 맞잡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퇴원 절차를 밟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바깥엔 박하지가 미리 불러 둔 택시가 서 있었다. 마닐라에서 체포된 마자위 때문에 아직 현지에 머물고 있던 이복구가 온여환의 퇴원 소식에 직접 모시러 오겠다며 연락을 해 오긴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한 건 박하지였다. 이복구도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또 모를까, 별것도 아닌 일로 괜히 일하는 사람을 불러낼 이유는 없었다. 이복구와 함께 있는 것보단 온여환과 단둘이 있는 것이 훨씬 더 편하기도 했고.
아직 무리해서 힘을 쓰면 안 되는 온여환을 대신해 택시 트렁크에 짐을 실은 박하지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온여환을 먼저 태우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기사에게 목적지를 전했다.
“Airport, please.”
기사는 짧은 고갯짓과 함께 곧장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그래도 몇 달 살아 봤다고 눈에 익은 마닐라 거리를 보고 있으려니 문득 이 나라를 처음 찾았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박하지는 자신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는 할지, 한국으로 돌아갈 때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예측이 안 되는 우주 한가운데 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때는 마닐라의 풍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박하지가 예측할 수 없는 모든 사건과 그가 그릴 수 있는 모든 사랑이 한 사람에게 집약되어 있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마닐라 풍경에 그림처럼 스며들어 있는 남자, 온여환에게.
하지는 창밖의 거리에 시선을 둔 온여환의 뒷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병실을 나올 때부터 내내 조용한 그가 신경 쓰였다. 혹시 아직 마음이 상해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온여환의 몸이 박하지 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이윽고 하지의 어깨 위로 그의 머리가 툭 내려앉았다. 동시에 흐음, 하고 내뱉는 숨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와서 박하지도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을 태운 택시가 해안도로에 들어선 건 몇 분이 더 흐른 후였다. 길 밖으로 펼쳐진 바닷가를 보던 박하지가 별안간 차를 세워 달라 요청했다. 박하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창밖을 감상하던 온여환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박하지가 차를 세워 달라고 한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박하지는 그런 온여환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몇 장을 뽑아 들었다.
“Could you wait for me here, please?”
잠깐 기다려 달라는 것치곤 꽤 많은 금액인 것을 확인한 기사가 돈을 건네받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Thank you.” 하고 감사 인사를 잊지 않은 하지가 문을 열고 내리려다가 제 옆에서 미동 없이 앉아 있는 온여환을 돌아봤다.
“뭐 해? 안 내려?”
“공항 가는 거 아니었어?”
“맞아. 여기서 잠깐 얘기 좀 하다가 가자고.”
박하지는 그 말만 남긴 채 훌쩍 몸을 일으켰다. 먼저 밖으로 나간 하지가 차도를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온여환도 이내 차 밖으로 나와 그의 뒤를 따랐다. 박하지는 어느새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오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힐긋 내려다본 얼굴에선 아무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얘긴데. 난 도련님이 진지한 얘기 하려고 할 때마다 무섭더라.”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가볍게 말한 온여환이 오랜 시간 바람과 빗방울에 풍화되어 반질반질해진 바위에 박하지와 나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혹시 집 얘기 때문에 그래?”
온여환은 두 사람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 주제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박하지의 집 문제로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있었는데, 어쩌면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뭐, 그것도 그건데…….”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으로 말끝을 흐린 박하지가 이내 온여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것보다 다른 얘기가 먼저야.”
“그러니까 무슨 얘기.”
“나 그 사람 만났어.”
“누구?”
“그 사람.”
대상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두루뭉술한 지칭에 고개를 기울이며 천천히 눈만 깜박이던 온여환이 불시에 표정을 굳혔다. 설마. 소리 없이 뻐끔거리는 입술이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박하지는 그 입 모양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맞아. 이지원.”
“뭐?”
온여환의 목소리가 바닷바람 사이로 높게 치솟아 부서졌다.
“네가 왜? 아니, 어떻게…….”
“안성미 실장이라는 사람한테 연락해서 그 사람 좀 만나게 해 달라고 했거든. 그 사람 접견은 아무나 못 한다며.”
“잠깐만.”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킨 온여환이 순간 찌릿거리는 오른쪽 옆구리를 감싸며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놀란 박하지가 그의 앞에 서서 상태를 살피려 손을 뻗는데, 온여환이 그 손을 휙 낚아챘다. 손아귀에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붙잡힌 손목이 금세 아릿해졌으나 하지는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잡혀 준 채 온여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지금 혼자서 일신 그룹 전략기획실장이라던 그 사람을 만났다는 거야?”
“나 혼자라도 만나야 했으니까 만난 거야.”
“나한테 얘기하고 같이 만났어도 됐잖아. 위험하게 왜 또 너 혼자……!”
“넌 나한테 얘기하고 마닐라 왔어?”
책망하는 듯한 말에 온여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죄책감과 미안함이 떠오르는 얼굴을 보던 박하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자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온여환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하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너랑 싸우자고 이러는 거 아냐.”
파도 소리에 밀려날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온여환은 박하지의 말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도 나한테 말 못 하고 해야 할 일이 있었듯이 나한테도 그랬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어.”
“……네가 해야 할 일이 뭐였는데.”
“피하지 않는 거.”
박하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그에게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보이는 듯했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은 없으니까, 일단 그것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박하지는 피하지 않기 위해서 이지원을 만나야만 했고, 그래서 일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일신그룹의 전략기획실장 안성미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박하지가 금전 따위를 요구할 줄 알았던 안성미는 이지원을 만나게 해 달라는 박하지의 요청에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결국엔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접견은 교도관도 없는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접견실로 들어서던 이지원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박하지임을 확인하자마자 조금 놀란 것도 잠시, 곧이어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잘 지내나 봐? 얼굴 좋아 보이네.’
그렇게 말하는 이지원은 박하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모습보다는 초췌해 보였다.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은 푸석하게 구불거렸고, 화장기가 없는 민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했으며, 살이 내려 전보다 훨씬 더 도드라진 광대뼈는 사람의 인상을 안쓰럽게 만들었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지원이 초라해 보이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모든 걸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으면서도 이지원의 고개는 꼿꼿했고, 그 눈에 서린 광기만은 형형했다.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건 오히려 박하지였던 것 같다. 그는 수면 아래에서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이는 백조처럼 겉으로는 평온하게, 그러나 테이블 밑으로는 땀이 차오르는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확인시켜 주려고요.’
‘뭘?’
‘당신이 졌다는 걸.’
내내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이지원의 입매가 처음으로 비틀렸다. 박하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뭘까 생각해 봤어요. 어쨌든 내 몸 안에 당신 유전자가 있는데, 당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당신 핏줄을 이어받은 나겠구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봤더니 딱 하나 생각이 나더라고요. 당신은 당신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거. 아버지도 그래서 죽인 거잖아요.’
박하지가 말한 아버지란 그의 친부인 김현필과 그런 김현필을 죽이고 박하지를 대신 키웠던 박양일, 둘 모두를 칭하는 말이었다. 이지원을 사랑했고, 그래서 이지원을 더 끔찍한 괴물로 만들어 버린 두 남자이기도 했다.
‘나를 죽이려고 한 것도 그래서였겠죠. 아버지와 다르게 나는 실패했지만.’
박하지는 그 두 남자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평생 이지원을 만나지 않고 그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잊고 산다면 조금 더 평화로운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그건 언제라도 이지원이 다시 나타나기만 한다면 박하지의 삶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거대한 주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박하지는 제 인생을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이젠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기억해요? 당신을 영원히 괴롭힐 몸뚱이로 남을 거라고 했던 말.’
‘…….’
‘그때는 내 죽음이 당신을 괴롭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벌였던 수많은 범죄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당신은 벌을 받고, 그러면 그게 당신에게 가장 괴로운 일이 될 줄 알았죠. 근데 그딴 건 다 착각이었어요. 당신은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고, 그딴 걸로 수치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니까.’
‘…….’
‘당신은, 당신이 죽이지 못해 살아 있는 나를 보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잖아요. 지금도 날 죽이지 못한 게 너무 분할 거고. 그래서 당신한테 내 존재를 매 순간 각인시키려고요. 나는 계속 살아서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괴롭히는 존재가 될 겁니다. 그 말 해 주려고 왔어요.’
말을 잇는 내내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성대에 힘을 주고 있던 박하지는 마지막 문장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한시라도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몸을 돌린 박하지가 접견실 출입문 쪽으로 발을 뻗을 때였다.
‘네가 대단한 존재인 줄 아나 본데.’
박하지가 앉았던 자리에 시선을 붙박고 있던 이지원이 입을 열었다. 박하지의 고개가 이지원에게 돌아가자 이지원의 시선 역시 그를 향했다.
‘그때 온여환한테 말했는데 못 들었나? 넌 내 실수만 없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애라는 거.’
박하지는 그 말을 처음 들었고, 온여환이 자신에게 전하지 않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온여환은 절대로 박하지가 그런 말을 듣게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네 존재 자체가 실수고 오류라고. 넌 아무것도 될 수 없고,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어.’
그따위로 태어난 애니까. 덧붙이는 이지원의 말끝에 칼날이 박혀 있는 듯했다. 박하지의 마음에 칼집을 내겠다고 작정한 이지원의 말에 박하지는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지원이 던진 모든 말들이 그를 비껴갔다. 그 순간 박하지는 이지원이야말로 자신에게 아무것도 될 수 없고,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맞아요. 난 실수로 태어난 애예요. 그런데 그 실수 때문에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됐는데요?’
‘…….’
‘……종종 올게요.’
당신이 날 볼 때마다 괴로울 수 있게.
말을 마친 박하지가 접견실 문을 열었다. 머리끝까지 차올라 넘실거리던 불안감이 열린 문 바깥으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시원하다는 느낌과 누군가의 체온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교도소를 빠져나오는 내내 박하지는 그리운 체온을 떠올렸다.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었다.
“그게 너였어.”
그날의 일을 먼바다 위에 한 장면씩 띄워 떠내려 보내는 사람처럼 묵묵하게 말을 잇던 박하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박하지가 말을 시작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잠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온여환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의 눈 안에 바다와 하늘과 박하지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박하지가 평생을 그리워했고, 선망했고, 이제는 매 순간 사랑할 모든 세상이 온여환에게 있었다.
“그래서 네가 돌아오면 이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박하지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라와 있는 여환의 손을 슬쩍 잡아끌었다. 미약한 힘이었을 뿐인데도 온여환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곧장 깍지를 꼈다. 바람이 드나들던 손바닥 밑으로 익숙하고 온전한 체온이 덮였다. 박하지의 세상 안으로 온여환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섞였다. 이것이 온여환이 세상인지 박하지의 세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젠 그런 구분조차 필요치 않았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어려운 길만 택할 거고, 평탄한 삶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살 텐데.”
“…….”
“그래도,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박하지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온여환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박하지는 검지 끝으로 그 손등 위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우리 같이 살까.”
너의 집과 나의 집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 우리가 함께 사는 우리의 집에서. 서로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자신의 자리인 채로. 나를 좇는 불안을 너도 느낄 것이고, 풀지 못한 과제처럼 산적해 있는 나의 과거는 너의 것이 될 테며, 내가 가진 결핍 또한 너와 함께 채워 가야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내가 좋다면…….
“그래.”
온여환의 대답에서 바다 냄새가 났다. 넓고, 아득하고, 푸르렀다.
“그러자.”
아무런 미사여구도 없이 오로지 하나의 의미만을 가득 담은 말이 귓가를 채웠다.
“우리 같이 살자.”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대답과 함께 온여환의 팔이 박하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쳤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로 태어난 사람들처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나의 삶이 너의 삶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가 된 삶을 내리비추는 태양빛이 눈부셨다. 타오르는 낮이었다.
@라무 요게금지 나만아는표시있음 @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