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乔迁新居】全站开放中
注册 / 登录
支持我们
浏览分区作品
原创 二创
登录
注册
Wid.2579474
Second Daddy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10 0 2022-5-12 20:47




Second Daddy  _  00







『  8월 달력을 떼며 이제 정말 가을이구나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9월도 닷새밖에는 남질 않았네요.
  그래도 일주일전까지는 여름이 다 물러가지 않아 제법 무덥더니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 당신 걱정이 됩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를 앓아 잔기침을 하곤 했잖아요.

  당신 소식은 전해 들어 알고 있어요.
  어디 불편한 곳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건가요? 많이 예민했던 사람이라 걱정이 되네요.

  아, 갑작스러운 내 편지를 받고 많이 놀라셨을 줄로 압니다.
  나 또한 이 글을 적기까지 몇 번이나 펜을 잡았다 놓았는지 몰라요.
  주저하고 또 주저하다가 몇 자 적어봅니다.

  당신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거든요.

  없던 잠이 쏟아지고, 몸도 자꾸 까라지고, 비위가 급격히 나빠져서 병원엘 갔었습니다.
  그것도 벌써 5개월 전의 이야기네요.
  진찰을 한 후 의사와 면담을 하는데 의사가 묻더군요.
  보호자도 함께 오셨느냐고.

  내게 아기가, 생겼답니다.
  당신의 아기에요.

  처음 그 이야길 듣고 너무 놀랐고, 당황스러웠고, 두렵고, 그리고…… 기뻤습니다.
  5개월 전 그날, 그렇게 우연히 다시 만났던 것이 마지막일거라 여겼었는데,
  이 아기가 당신과 나의 인연을 죽 이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열 달을 기다렸다가 낳아 내가 잘 키우려고 합니다.

  어느덧 20주가 넘었습니다.
  이제 아기의 발길질과 딸꾹질하는 떨림도 고스란히 느껴지네요.

  편지를 적고 있는 지금도 과연 당신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이 잘 하는 일인가 싶지만,
  당신이 함께 기뻐해줄 수 없어도, 기뻐해 주지 않아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용기를 내봅니다.

  연락처는 적어도 소용없을 것 같아 적지 않습니다.
  또 편지 하겠습니다.  』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또 오늘과 같은 나날에 익숙해져가던 무렵, 첫 번째 편지를 전해 받았다. 보내는 이의 정보라곤 또박또박 적힌 이름 석 자만이 전부이던 그 편지가 날아온 것은 4년을 선고받은 수감생활 중 고작 5개월이 지났던 어느 날이었다.

편지를 보내온 이의 이름에서부터 의아함을 느끼게 하던 편지의 내용은 놀람의 정도를 넘어선 경악과 당혹감, 서늘함, 그리고 끝도 없는 까마득함을 느끼게 했다.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이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교도소에 들어가 썩고 있는 놈을 아비로 둔 생명을 열 달 동안 배불러 낳아 혼자서라도 잘 키우겠다고 말하는 여자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무시해버렸다. 크게 고민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편지는 보란 듯이 계속 날아왔다. 언제나처럼 겉봉투에는 보내는 이의 이름 석 자만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고, 편지지에는 순전히 아기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들만 늘어놓은. 그러한 와중에도 꼬박꼬박 안부를 묻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로인해 어느 날부터인가 편지가 뚝 끊겼을 때에는 그 소식이 몹시 궁금하고 애가 타도록.

그러나 끝내, 출산을 3주 앞두었다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아침상을 물린 직후의 아침. 고요하던 복도를 나긋이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무진이 천천히 두 눈을 떠올렸다. 그러자 곧 제 나름대로의 공간에서 운동을 하거나 설거지, 걸레질에 여념이 없던 31번방 죄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진에게로 향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진은 부동의 자세로 맞은편의 흰 벽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계속해서 긴 복도를 울리며 가까워지던 발걸음소리가 이내 31번방 앞에서 멎는다. 열쇠꾸러미에서 열쇠가 찰랑거리는 소리도 잇따라 들려왔다. 이윽고 밖에서부터 굳게 잠겨 있던 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교도관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31번방을 쭉 한 번 훑어본 후에 무진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3471번, 나와라.”

매사에 팍팍하기로 악명이 높은 송 교도관의 지시에 무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31번방 사내들과 교도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를 따라 움직였다. 무진은 마른 탓에 뼈 굴곡이 완연한 발을 검정고무신 안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으며 휘적휘적 31번방을 나왔다. 무진이 송 교도관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와 섰을 즈음, 열려 있던 31번방의 문이 무심히 닫혔다. 뒤를 돌아 인사를 건넬 시간도 없이 말이다.

두 교도관과 무진은 복도 중간, 중간에 장벽처럼 자리한 몇 개의 철문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출소소속을 밟을 제 2청사를 향해서다. 차갑고 음습한 느낌이 드는 교도관 내부와는 달리 단정하고 깔끔한 제 2청사 앞에는 사무직 교도관 한 명이 종이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무진에게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건네며 지극히 기계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갈아입고 나오세요.”

종이가방을 건네받은 무진은 송 교도관과 함께 탈의실로 들어갔다. 송 교도관은 탈의실 문 바로 옆에 팔짱을 끼고 섰다. 무진은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벌려 그 안에서 제 평상복을 꺼냈다. 매끄러운 소재의 정장바지와 단추가 거의 다 뜯겨나가다 만 실크소재의 셔츠가 무진의 손에 잡혀 나온다. 무진은 지난 3년간 제 이름이나 다름없었던-수용자번호가 박혀 있는 황록색 죄수복을 훌렁 벗었다.

별 감흥 없이 무진을 바라보고 있던 송 교도관은 이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폭력혐의로 수감된 수용자들의 대다수가 그렇듯이 무진의 등에도-정확하게는 오른쪽 견갑골 위에 조폭임을 증명하듯 주먹크기 만한 문신이 있었는데,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 눈에 알아보기가 난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어도 문신의 소재로 흔한 용도, 호랑이도, 뱀도, 잉어도, 장미도 아니었다.  

송 교도관이 무진의 문신 속 그림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있는 사이, 무진은 옷을 모두 갈아입고선 송 교도관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송 교도관은 구태여 그에게 그의 등에 있는 문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어투로 명령하듯 말했을 뿐이다.

“따라와.”

다시 탈의실 밖으로 나가자 조금 전 무진에게 옷을 건넸던 교도관이 앞장서서 제 2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무진은 교도관 두 명과 함께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출소에 대한 기대감이나 기쁨 같은 것은 무진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삼시세끼 같은 반찬에 밥을 먹는 것과도 같은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곧 무진은 청사 내의 작은 사무실로 안내됐다. 그곳에서 무진을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사무직 교도관이 예의상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지품은 다 건네 받으셨습니까?”
“……연장만 빼고요.”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죠?”

몸에 늘 지니고 있던 칼은 받지 못했다는 무진의 대답을 무시하며 교도관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절차상의 하나일 뿐이다. 무진은 맞은편의 교도관을 고요히 바라보다가 의자 등받이에 제 등을 완전히 기대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770509.”
“이름은요?”
“한무진입니다.”

수감되어 있던 죄수 3471번에서 인간 한무진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무진의 얼굴에는 되찾은 자유를 향한 약간의 흥분감도 찾아볼 수 없다.

교도관은 그 밖에도 주소지 및 각종 신상정보를 확인한 후 무진의 신분증과 함께 영치금 몇 푼을 돌려주었다. 무진은 그것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청사를 빠져나왔다. 청사의 출입구에서부터 교도소 정문까지 걸어가는 동안 또다시 몇몇의 철문을 더 통과해야 했다. 도대체 총 몇 개의 크고 작은 문이 무진 본인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놓았는가는, 세어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다.      

기익.

녹슨 교도소의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어 젖혀졌다. 서서히 열리는 문틈으로는 더 이상 드높은 담장이나 감시탑이 아닌 탁 트인 바깥세상이 보였다. 무진은 천천히 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전히 감격스럽다거나 하는 기분은 딱히 들지 않는다. 그저 빳빳한 죄수복과는 달리 부드럽게 살갗에 휘감기는 실크셔츠의 감촉이 약간은 더 좋았을 뿐.

“무진 형님!”
“형님!”

무진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교도소 담장 앞에 정차되어 있는 세단 쪽이었다. 각각 운전석과 보조석에 앉아 있던 수하 두 명이 얼른 차 밖으로 내려서더니 무진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싹싹한 것에는 비견할 자가 없는 창수는 한달음에 무진에게 달려와선 무진의 입가에 담배 한 대를 슬며시 가져다댔다.

무진이 담배를 입술 사이에 베어 물자, 창수는 서둘러 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무진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볼이 쪽 빨려 들어갈 정도로 깊숙이 담배를 빨아들였다가 매캐한 담배 연기를 쭉 뱉어낸 무진은 피다 만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발로 비벼 껐다. 여전히 빌어먹을 맛이다, 담배는. 그래서 누군가는 이 담배가 세상사와 같은 맛이라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진은 차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으며, 아직 차 밖에 서 있는 두 명의 수하-창수와 정한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출발해.”
“네, 형님.”

무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창수와 정한이 서둘러 제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운전석에 앉은 정한은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바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곧 세 사람을 태운 세단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교도소의 담장 옆으로 서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무진은 혀끝에 남은 미약한 니코틴 냄새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뒷좌석의 창밖으로 의미 없는 시선을 던졌다. 딱히 구경거리가 있었던 건 아니다.

“……?”

그러던 중 무진의 시선을 잠시 잡아두는 것이 있었다. 교도소 담장 밖에 정차되어 있는 SUV차량 한 대. 운전자로 추정되는 남자는 차 밖으로 나와 있었다. 단순히 지나가는 무진의 차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그 남자와 무진의 시선이 딱 맞부딪쳤다.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한참을 벗어나고도 남자의 새카맣고 뚜렷한 눈동자가 잔상처럼 남은 듯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착각은 아닐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던 무진은 그러려니 생각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별 의심 없이 보조석 쪽의 사이드미러를 힐긋 봤을 때 백미러에 뒤에서 유유히 따라오고 있는 SUV차량이 비춰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무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SUV차량은 무진의 세단이 큰 대로로 접어들어 얼마간을 달리다가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한 뒤 그 다음 삼거리에서 2시 방향으로 틀어 곧 나타난 일방통행 골목길로 접어드는 순간까지도 묵묵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래서야 단순히 가는 길이 같아서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형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무진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운전석의 정한이 백미러를 힐끔거리며 무진에게 물었다. 무진은 보조석 쪽 사이드미러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 보조석에 앉아 있던 창수를 향해 제 손을 내밀었다. 창수는 무진의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이해하지 못했다.

“네?”
“네 거, 연장 좀 줘봐.”
“네?”

무진은 그대로 손을 뻗어 창수의 옷깃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겼다. 그리곤 그의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사이드미러에서 비껴나가지 않는 SUV차량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무진은 정한에게 고요하게 지시했다.

“세워.”

정한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도로 한 가운데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서 달리던 무진의 차가 멈추자 뒤따라오던 SUV차량도 서서히 속력을 멈추며 정차했다. 무진은 자신의 차가 완전히 멈추어 서기도 전에 뒷좌석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곤 밖으로 내려섰다. 손에는 창수의 잭나이프를 비껴 든 채다.

SUV차량을 향해 일정한 보폭으로 떼어지던 무진의 발걸음에 점차 속력이 붙더니 이내 걸음은 뜀박질이 되었다. SUV차량의 보닛을 한 팔로 잡아 가볍게 뛰어넘은 무진은 운전석의 창문을 제 주먹으로 힘껏 내려쳤다. 그러자 정면을 보고 있던 운전자-조금 전 교도소에서 스치듯 봤던 남자가 안전벨트를 풀더니 운전석의 문을 연다.

무진은 살짝 틈을 벌리며 천천히 열리던 운전석의 문을 잡아 격하게 열어젖혔다. 그리곤 갑작스런 무진의 행동에 대응할 방법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남자의 멱살을 잡아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잠자코 제 손에 끌려나오던 남자의 어깨를 손으로 잡아 그를 차체 쪽으로 확 몰아붙인 무진은 들고 있던 잭나이프를 남자의 목전에 드리웠다. 자신이 미행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킨 것으로도 부족해서 날카로운 칼이 금방이라도 제 살을 뚫고 들어올 것처럼 살갗에 바짝 닿아 있는데도 남자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다. 제 키나 몸집이 무진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쉽게 무진을 당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무진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남자의 얼굴을 고요히 노려봤다. 말끔한 이목구비와 단정한 차림새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한 번 또렷이 마주치고 나면 그 잔상이 오래가는 새카맣고 예리한 눈동자가 단연 돋보였다.

만약 이 남자를 과거의 언젠가 스치듯 보기라도 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는 무진 자신과 안면이 없는 사람이리라. 그 눈동자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 수상하지 않은가. 안면도 없는-그래서 인연도 없을 낯선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무진의 뒤를 쫓아온 목적이 말이다. 무진은 누가 봐도 조폭임에 분명한 자신이 그 목숨을 위협하고 있음에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 남자에게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뭐냐, 니 새낀?”
“놓아주시죠. 아이가 보고 있습니다.”

남자는 단정한 어투를 사용하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지도 남자의 새카만 두 눈동자에서 조금도 비껴나지 않던 무진의 시선은 곧장 SUV 안쪽으로 향했다. 과연. 남자의 말대로 보조석에는 이제 갓 3, 4살 즈음이 되었을 법한 사내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무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진은 한동안 사내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행동에 딱히 이유는 없었다.

빠앙-

별안간 뒤쪽에서 들려오는 차 경적소리에 무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무진은 자신이 넋 놓고 사내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무진은 고개를 돌려 SUV의 뒤쪽을 바라봤다. 어느새 SUV차량 뒤쪽으로는 몇 대의 차들이 줄지어 서서 날카로운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은색 세단의 운전자는 아예 운전석 창문까지 내리곤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이 새끼야! 얼른 차 안 빼? 여기에 니 새끼들이 전세 냈냐!”

무진은 서슴없이 욕을 내뱉는 은색 세단의 운전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서 무진의 동태를 지켜보던 창수가 서둘러 뛰어왔다. 무언가를 막으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형님!”

창수의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채 그의 입술에서 떨어져 나오기도 전에 무진은 은색 세단 앞으로 걸어가서 그 사이드미러를 발로 빡 걷어찼다. 사이드미러가 맥없이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에는 아예 부숴버릴 작정으로 콱콱 짓밟기도 했다. 짜증 가득한 얼굴로 욕설을 퍼붓던 은색 세단의 운전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을 일어난 것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무진을 바라봤을 뿐이다.

사이드미러를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린 무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떨어뜨려 자신을 황당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던 운전자의 얼굴에 날카로운 잭나이프의 날을 꾹 가져다대며 말했다.

“나를 대낮에, 그것도 길 한복판에서 만난 걸 감사하게 여겨. 형씨.”

곧 잭나이프의 날로 인해 운전자의 살갗이 살짝 베이면서 몽글몽글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운전자는 그 따끔하고 날카로운 감촉에 완전히 굳어 있다가 생존본능을 쥐어짜서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찰싹찰싹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운전자의 볼을 때리듯 두드린 무진은 다시 되돌아와서 창수에게 잭나이프를 홱 던져주었다. 그리곤 어느새 보조석에 앉아 있던 아이를 품에 안아든 SUV의 주인 남자를 슬쩍 한 번 노려봐준 후 그 곁을 지나쳐 자신의 세단 쪽으로 걸어갔다. 출소한 직후에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한무진씨.”

앞서 멈춰 있던 제 세단으로 걸어가던 무진이 멈추어 선 것은 등 뒤쪽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기 때문이다. 중저음의 목소리.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가 자신을 불러 세운 것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진이 구태여 뒤를 돌아봤던 것은, SUV의 주인 남자가 전혀 의외의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웃어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황이야 어쨌든, 아들과의 첫 대면인데 말입니다.”

무진보다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은 창수였다. 창수는 무진과 SUV의 주인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를 정신없이 번갈아봤다. 무진은 깊은 주름이 질 정도로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를 노려봤다. 무진이 지금 실없는 농담 따위에 웃어줄 기분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봤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는지, 확인시켜주듯 말했다.

“당신 아들입니다.”

잘도 그런 농담을, 웃지도 않으면서 지껄였다는 거다.













Second Daddy _ 01







“우유 한 잔, 따뜻하게 데워주시고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합니다. 그리고…….”
“진토닉.”

무진의 대답에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무진을 바라봤다. 한낮의 카페에서 대뜸 술을 주문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 앞에 서서 주문을 받고 있던 카페 직원도 좀 당황스러웠는지-그래서 혹 자신이 메뉴를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를 확인하듯 무진에게 물었다.

“진토닉이요, 손님?”
“그래, 진토닉. 여기 메뉴판에 버젓이 적혀 있는데. 안 돼?”
“아…… 아니요. 아닙니다. 됩니다.”

카페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무진과 남자가 보고 있던 메뉴판을 접어 제 옆구리에 꼈다.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주문서를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메뉴를 확인했다.

“주문하신 것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우유 한 잔 따뜻하게 부탁하셨고, 아메리카노 한 잔에 진토닉 한 잔. 맞으십니까?”

무진은 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가보라는 듯 손도 허공에서 휙휙 내저어보였다. 직원은 내쫓기듯 테이블에서 돌아서서 프런트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도중에 힐긋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수상하게 여겨지지 않겠는가.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면서도 말이 짧고, 표정이라고 밝을 리가 없는 무진이 셔츠에 혈흔을 가득 묻힌 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힐긋거리는 시선에는 익숙해져서 이젠 신경도 쓰지 않는다. 무진은 소파에 제 등을 깊숙이 기대고 앉으며 맞은편에 앉은 남자와 사내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시 봐도 눈매가 깊은 남자는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고 입고 있는 옷도 주름 하나지지 않은 말끔한 차림새였다. 꽉 조여 맨 넥타이가 무진에게만은 참 갑갑해 보였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단정하다’고 할 것이다.

사내아이의 눈동자는 새카맸다. 아이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낯선 사람-무진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코는 동그랗고 작았으며 입술은 병아리의 부리처럼 윗입술이 약간 뾰족했다. 그 나이의 아이답게 복숭아 빛이 감도는 두 볼은 터질 듯이 포동포동하게 부풀어 올라서 작은 코를 짓누를 듯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여러모로 귀여운 상이다. 그 얼굴 어디가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말대로라면…….”
“석재희라고 합니다.”
“그래, 그러니까 그쪽 말대로라면 거기 그 새끼가 아무래도 내 새끼라는 건데.”

무진의 ‘그쪽’이라는 호칭이 거슬렸는지 남자가 분명히 제 이름을 밝혔지만 무진은 ‘그쪽’이라는 호칭을 고집했다. 매끈한 이마를 손가락으로 슬슬 긁으며 생각을 정리하던 무진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마저 말했다.   

“내가 사람을 좀 못 믿어. 왜 못 믿느냐하면…… 태생이 그래.”
“좀 뜬금없는 말이군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졸라 뜬금없어, 지금 상황이. 어디서 굴러먹다가 나타난 건지 알 수가 없는 그쪽도, 그쪽이 내 새끼랍시고 데리고 온 거기 그 놈도.”
“아주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뭔 말이냐?”

재희는 한결같이 차분한 태도로 무진의 이야기를 듣고 대답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은 그의 말투에 무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눈살도 눈에 보일 정도로 분명하게 꿈틀거렸다. 그 때 카페 직원이 돌아와서 조금 전 주문했던 커피와 우유, 진토닉을 차례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재희의 눈동자를 노려보듯 응시하던 무진은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힘주어 내려치며 소리 지르듯 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묻잖아!”

무진의 다소 거친 행동에 서빙을 끝내고 돌아가던 카페 직원이 놀란 눈을 하고 돌아봤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카페에 있던-몇 되지 않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진과 재희에게로 향했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차분한 태도로 무진을 고요히 바라보던 재희는 많이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진을 빤히 보는 사내아이에게 따뜻한 우유가 담긴 머그컵을 꼭 쥐어주었다. 아이가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을 찔끔거리며 우유를 살짝 식힌 후에 한 모금 삼킨 후에야, 재희는 금방이라도 제 멱살을 쥐어 잡을 것 같은 무진을 다시 보며 말했다.

“편지를 말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줄곧 보냈던 편지 말입니다.”
“……편지? 그래, 편지. 왔었지, 아마도. 내 새끼를 뱄다고 하는 얘기를 줄줄 늘어놓는 그런 편지가 오긴 했었지. 그런데 그게 뭐? 그걸 넌 어떻게 알고 있는데? 누구냐, 너.”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하던 무진이 다시 똑바로 재희의 두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질문이라고 했지만 말꼬리가 올라가지 않는, 평조의 어투였다. 재희는 그리 어려운 대답이 아니라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물론 대답하기가 쉬웠다고 해서 이해하기도 쉬운 대답은 분명 아니었다.

“이름이라면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니, 그거 말고.”
“이 아이, 아버집니다.”
“내 새끼라며.”
“네.”
“그런데 네가 그 새끼 아버지라고?”
“네.”
“하하하하…… 좆까라, 정말.”

무진이 이를 드러내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테이블 위로 제 팔을 길게 뻗어 재희의 멱살을 콱 움켜잡으며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재희를 고요히 노려보는 그의 얼굴은 어느새 장난을 치는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재희는 제 가지런한 셔츠를 막무가내로 움켜잡은 무진의 손을 제 손으로 콱 움켜잡아 떼어냈다. 무진의 손이 단박에 떨어져 나갈 정도로 제법 억센 힘이었다. 떼어낸 무진의 손을 콱 쥐듯이 잡은 채로 재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밀히 말하면 당신의 핏줄이지만, 내 아입니다. 아이에 대한 모든 권리는 제게 있습니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당신이 아일 반길 거라는 기대는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는 이 말을 전하러 온 겁니다.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권한을 주장하지 말아주십시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리고 쭉.”

무진은 팔을 확 휘둘러 재희에게 잡혔던 제 손을 빼냈다. 재희의 손에 잡힌 자리가 숨길 새 없이 붉게 변했다. 재희는 제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이 아이가 작은 손으로 감싸 잡고 있던 머그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아이에게 외투를 입혔다. 그리곤 아이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서선 자신의 모든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무진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재희의 목을 두 팔로 꼭 껴안은 아이가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재희의 어깨 너머로 무진을 빤히 봤다.

무진은 빈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 당한 기분이다. 갑자기 나타나 길을 막더니 제 할 말만 모두 다 쏟아놓고 일어서는 거다.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질 않은가.

“야, 기다려!”

무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재희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자 재희의 걸음이 잠시 우뚝 멈춰진다. 재희는 살짝 고개만 옆으로 돌려 무진을 바라봤다. 새카맣고 깊은 그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무진을 담아낸다. 아이의 시선은 한결같이 무진에게 닿아 있었다. 무진은 잠시 숨을 한 번 돌린 후에 머릿속을 마비시킬 것 같은 모든 혼란과 궁금증을 죄다 짓누르고 지극히 평범한 질문만을 가까스로 던졌다.  

“그 여자…… 그러니까 걔 엄마는.”
“죽었습니다. 3년 전에.”

재희는 지극히 단조로운 어조로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재희의 어깨 너머로 무진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의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들어 올려 인사를 하듯 공중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물론 무진은 그러한 아이의 행동에 동참해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손을 흔드는 아이의 모습이 출입구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이다.

재희와 사내아이가 먼저 카페를 빠져나가자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정한과 창수가 무진에게 다가왔다. 연방 카페 출입구와 무진을 번갈아보는 창수와는 달리 무진만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던 정한이 낮은 목소리로 보고하듯 말했다.

“형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무진과 재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호출이 왔었다. 그러니 빨리 돌아가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한의 보고를 제대로 들었는지 어쨌는지 무진은 미동도 없이, 하염없이 출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가지로 정의될 수 없는 감정들이 그의 얼굴 속에서 마구 뒤섞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 왔습니다.”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한의 목소리에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무진의 시선이 정한의 뒤통수로 날아와 박힌다. 무진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차가 커다란 빌딩 앞에 정차해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보조석에 앉아 있던 창수가 얼른 내려서서 뒷좌석의 문을 열어준다. 무진은 제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재킷을 손에 잡아 쥐고 차 밖으로 내려섰다.

무진은 로비로 이어지는 층계를 오르기 전에 고개를 들어 다시금 높은, 검은색 빌딩을 올려다봤다. 여전한 위압감이 든다. 괜히 숨이 막히고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 도살장에 끌려온 소, 돼지라도 된 것 같다, 이곳에만 오면.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는 법 없이.

“형님?”

차를 주차시키러 간 정한을 대신해 무진의 뒤를 따르려던 창수가 우뚝 멈춰 서서 빌딩만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는 무진을 불렀다. 그제야 슬쩍 고개를 돌려 창수를 보던 무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층계를 올라갔다. 손에만 들고 있던 검은색 재킷도 한 번 탁 털어서 잔주름을 없앤 후 몸에 대충 걸친다.

무진과 창수가 로비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에 일렬로 죽 서 있던-모두 한결같이 검은 정장을 몸에 맞춰 입은 사내들이 일제히 무진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천장이 높은 로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사내들의 인사에 무진은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즐겁거나 재밌어서 터지는 웃음이 아닌, 그냥 헛웃음 말이다. 한 것이라곤 지난 3년 남짓, 모든 걸 다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가 썩은 것 밖에 없는데 황송스럽게도 이제 ‘이사’라지 않은가. 그러니 웃음이 날 수 밖에.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인사를 마친 사내들 중 하나가 무진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진과 마찬가지로 가장 더러운 일들을 손수 해결보고 다녔던 ‘행동대장’급의 남자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고상하게도 그 직책을 ‘실장’이라고 하던가. 수완에 있어서는 늘 무진보다 앞섰던 그가 무진, 자신에게 허리를 극진히 숙여 인사를 하고, 존대를 하게 되다니. 비정상적이다. 주민등록증에 줄 하나 가는 것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 자체가.

사내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보인 후 앞서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창수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무진을 보며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무진의 직책이 ‘실장’에서 ‘이사’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장본인보다 자기가 더 흥분하기라도 한 것처럼. 늘 그렇게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타입이다, 그는.

무진과 창수는 사내의 안내를 받으며 빌딩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또 다른 사내가 두 사람을 맞는다. 무진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미리 받고 그곳에 서서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습관인 것처럼 손으로 안경을 가볍게 치켜 올리던 사내는 무진을 회장실로 안내했다. 그 뒤를 졸졸 따라오던 창수에게는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라는 듯, 비어 있는 소파 쪽을 말없이 손으로만 가리켜 보였다.

무진은 회장실 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재킷의 단추를 끼웠다. 살짝 구겨져 있던 셔츠의 깃도 단정하게 정리한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가식적인 미소만은 짓지 않는다. 그런 인위적인 미소일지언정, 짓는 법을 잊어 버렸다.

똑. 똑. 일정한 간격을 두어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고, 무신경하고, 묵직한 목소리다. 무진은 한숨을 가볍게 내쉰 후에 손잡이를 비틀었다.

“안녕하셨습니까, 회장님.”

회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시야를 바닥으로 처박으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가장된 몸짓으로 마음에도 없는 존경과 신뢰의 표시를 하는 거다. 오늘도 회장에게선 그만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말이 한참 후에야 나왔다.

“그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별 일 없으셨습니까?”
“보는 대로다. 네놈은 좋아 보이는군.”

풍채가 좋은 중년의 남자는 시선을 무진이 아닌 제 손에 들린 골프채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예리한 눈빛으로 골프채를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 중년남자의 책상 위 명판에는 ‘회장 한인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무진과 성이 같다. 물론 두 사람의 이름을 아는 누구라도 두 사람이 부자간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우연히 성이 같은 것뿐이라고 생각할 만큼 두 사람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결코 부자지간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수고 많았다, 4년 동안. 그때 일은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아닙니다.”
“어쨌든 그 일로 네놈이 내 후계자가 되는 일에 그 누구도 딴소리를 하지 못하게 됐으니 여러모로 좋은 게 아니냐?”

무진은 대꾸하지 않고 문가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대화를 나눌 때에는 최소한 이 정도의 거리를 두는 것이 편하다. 한 회장도 굳이 가까이에 있는 소파에 와서 앉으라는 권유는 하지 않았지만. 한 회장은 골프채를 손에 든 채로 책상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골프채를 허공에 휘둘러 스윙연습을 하며 지나가는 투로-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나오자마자 피곤하겠지만, 네가 좀 맡아야 할 일이 있다.”

무진이 출소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떨어지는 지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시선. 제 아들보다 더 사랑스럽다는 듯이 골프채를 쓰다듬는 손길. 그런 사람에게 대뜸 아무래도 아버지한테 손자가 생긴 모양이에요, 라고 말해봤자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리란 걸 안다. 픽 하고 웃어넘기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무진은 모든 말을 삼켰다. 그리곤 빈주먹을 쥐며, 짧게 대답했다.

“네.”














“누구 마음대로 입찰 업체를 바꿔?”

콰직.

공사장의 안내 표지판이 누군가의 성난 발길질에 저만치 날아갔다. 그 탓에 샛노란 먼지가 피어오른 공사장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 몇몇과 공사장 인부 몇몇이 대치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조금 전 상대방을 자극하듯 안내표지판을 걷어찼던 사내가 제 바짓단에 묻은 누런 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그리곤 현장간부로 보이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더니 덜컥 그의 멱살을 잡고는 있는 힘껏 그 볼을 후려쳤다.  

쩍 하는 무지막지한 마찰음이 또렷하게 울려 퍼지자 잠자코 상황을 보고 있던 현장의 인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각목이며 삽 등을 들고 달려들었다. 정장 바지에 두 손을 찔러 넣고서 한껏 여유를 부리던 사내들도 일제히 달려들어 인부들과 얽혔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먼지들이 일어나면서 금세 시야가 혼탁해졌다. 거기에 온갖 마찰음에 비명이 뒤섞여, 한 여름 땡볕 아래 공사장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무진은 그 공사장 입구에 세워진 세단 안에서 가만히 앉아 그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누군가는 머리가 터져 피가 흐르고, 누군가는 팔이 부러져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덜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대며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도 무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는 시간을 죽이며 따분한 삼류 드라마를 보듯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평생’이라는 게 30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1년 혹은 당장 내일이 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삶이지만, 어쨌든 그 시간이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 남은 시간을 모두 통틀어서 한 시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브레이크가 박살난 채 광란의 질주를 하는 고철 덩어리.

언제부턴가 인생은 그렇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디가 끝인 줄도 모른 채, 어떻게 끝내야하는 줄도 모른 채. 상부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안면도 없는 누군가의 오장육부를 들쑤시고,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것 없는 싸움판에 목숨을 내걸고, 나랏법은 옆집 똥개가 짖는 소리로나 알아듣는 듯 무시한 채 무작정 때리고, 부수고, 망가뜨리고, 없애버리는 것에 익숙한 생활.

이물이 난다. 매번, 매시간, 구역이 치솟고 시디신 침이 고일 정도로.

“형님, 저 새끼들 밀리는데요?”

의미 없는 시선을 현장 쪽으로 던져둔 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무진의 귓가에 창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수는 연신 백미러를 힐긋거리며, 우람한 체격의 인부에게 속수무책으로 얻어터지고 있는 검은 정장의 사내들과 그 모습을 관망하듯 지켜보기만 하는 뒷좌석의 무진을 번갈아봤다. 무진은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확 쓸어 넘겼다. 한숨인지, 혹은 그냥 숨인지 분간할 수 없는 숨도 나지막이 뱉어 놓는다.

곧이어 뒷좌석의 문을 벌컥 연 무진은 피범벅이 된 사내들을 바닥으로 거침없이 내팽겨 치고 있는 우람한 체격의 인부에게 달려갔다. 그리곤 거침없이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반사적으로 돌아오는 그의 얼굴에 단박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날아든 주먹에 인부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렸다. 무진은 쭉 뻗은 제 다리로 그런 인부의 복부를 힘껏 걷어차 그를 바닥 위로 쓰러뜨렸다.

어김없이 누런 먼지가 일어나 눈이며 코로 사정없이 들어왔다. 무진은 그 먼지분자들을 뚫고 쓰러져 신음하던 인부의 복부를 타고 올라 이미 코피가 터진 사내의 입을 향해 연방 주먹을 내리꽂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로 같은 곳에 주먹을 내리꽂았을 때에는 사내의 입술이 흐물흐물 짓이겨지더니 이내 붉은 선혈과 함께 부러진 이빨 몇 개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빠악.

고통에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연신 피가 뒤섞인 기침을 토해대던 사내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래에 깔려 신음하고 있던 사내의 동료임에 분명한 인부 하나가 각목으로 무진의 왼쪽 어깨를 내려쳤기 때문이다. 무진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싸 쥐며 각목을 잡아 쥔 사내를 돌아봤다. 무진이 고요히 자신을 노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사내는 각목을 더욱 꽉 잡아 쥐면서도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 개에새끼가 우리 형님한테!”

어느 참에 달려왔는지, 대뜸 특기인 돌려차기로 사내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창수 탓에 얼마 뒷걸음질 치지도 못하고 맥없이 고꾸라졌지만. 무진은 허겁지겁 자신에게 달려와 각목에 맞은 어깨를 살피는 창수를 저만치 밀어내곤, 창수의 일격에 쓰러져 있던 사내의 멱살을 잡아 그를 일으켰다. 그리곤 거침없이 주먹을 휘갈겼다. 기어코 사내의 코에서 뿌직 하고 무언가가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났다.

코가 부러져 숨을 쉬기가 용이하지 않은지, 사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나 무진은 이내 숨을 내쉬기 위해 벌어져 있던 사내의 입을 제 손으로 꾹 눌러 막고는 사내의 톡 튀어나온 광대뼈에 쉴 새 없이 제 주먹을 휘갈겼다. 각목에 맞은 어깨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사내의 얼굴을 산산조각으로 부술 것처럼 달려드는 주먹도 화끈거리고 욱신거려 죽을 맛이다. 그럼에도 무진은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무진의 시선은 숨이 막혀 헐떡거리며 온몸을 비틀어대는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실은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송장을 치우게 될 게 분명했다. 창수는 얻어터질 각오로 냅다 무진에게 달려들어 그의 등을 뒤에서부터 꽉 끌어안아 곤죽이 된 사내로부터 떼어 놓았다.  

“형님, 그만하세요. 그러다 그 새끼 뒈져요!”

그러나 무진은 창수를 거칠게 밀쳐내며 다시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얼굴을 차갑게 굳힌 무진에게서는 으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무진에게 떠밀려 나가떨어진 창수는 다시 무진에게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콱 붙들었다. 정말이지, ‘적당’의 수준이 없는 사람이다, 무진은.      

그래서 위태로워 보인다.

마치 그대로 완전히 망가져버리길, 그래서 다시는 사용할 수 없도록 완전히 부수어져버리길 바라는 사람 같아서.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 같아서.     
      
“좆같아, 정말.”
   
무진은 제 어깨를 콱 붙잡고 있는 창수에게서 벗어나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입에 고인 쓴 침을 바닥에 탁 내뱉고는 언제 그런 소란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고요해진 현장에서 걸어 나갔다. 창수는 현장에 남아 있는 사내들에게 현장정리를 맡기곤 서둘러 무진의 뒤를 따라왔다. 무진은 제 세단 뒷좌석에 들어가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앉으며, 얼른 운전석으로 따라 들어와 앉는 창수에게 말했다.

“사무실에 가기 전에 들를 데가 있어.”  














drrrr…… drrrr……

컴퓨터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던 새카맣고 예리한 눈동자가 적막을 깬 원인을 찾기 위해 소리 없이 움직인다. 곧 책상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소음을 만들던 휴대폰을 집어든 사내는 일에 열중하느라 흘러내린 줄도 모르고 있던 제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쓸어 넘기며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지극히 평범한 첫 마디를 내뱉는 음성은 중저음이다.

“네, 석재희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뱉는 목소리에는 의도하지 않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를 전혀 모르는 누구라도 그 목소리를 듣는다면 까닭 모를 신뢰감을 느낄 만큼, 진중하고 떨림 없는 톤이었다는 거다.

재희는 제 손목을 들어 올려 시계를 한 번 들여다본 후, 다시 시선을 컴퓨터 모니터에 고정했다.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을 처리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통화 상대방의 이야기에만 온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는 모니터를 빠르게 훑던 것도, 참고자료를 급하게 넘기던 것도 모두 멈춘 채 통화 상대방의 목소리에만 집중해야 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통화 상대방의 숨소리가 다소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재동이 아버님?”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저 재동이 어린이집 선생님인데요.”

자신을 어린이집 선생이라고 밝힌 여자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귀 기울여 잘 듣자니 여자의 목소리는 재동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때마다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하던 선생의 목소리와 흡사한 것도 같았다. 단박에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재동의 일로 통화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당장 재동의 보호자인 재희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고서는 안 될, 그런 곤란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리라.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재희는 불안감에 책상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어린이집 선생을 재촉하듯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누가 재동이를 찾아왔는데 좀 이상해서요. 재동이 이름도 잘 모르는 것 같고. 여러모로요. 바쁘신 줄 알지만 잠시 어린이집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 아버님? ”  

어린이집 선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재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재희는 제 의자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걸쳐 입으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잔뜩 긴장해 있는 상대방을 더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20분 내로 가겠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휴대폰 폴더를 닫는다. 그리곤 책상 서랍을 열어 차키를 챙긴 후 빠르게 집무실을 문을 열었다. 때마침 그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려던 동료에게는 잠시 나갔다오겠다는 말을 대신해 손을 슬쩍 한 번 들어보였다. 곧 등 뒤에서 급한 일이라고 소리치는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부터 올라오는 것도 기다리지 못해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재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부아아아아앙.

지하주차장으로 뛰어 들어오는 재희의 모습이 CCTV를 스쳐지나간 직후 그의 SUV가 튕겨나가듯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Second Daddy _ 02



  



벌써 30분 째다.

현란한 무늬의 실크셔츠를 입은 창수가 어린이집 문 앞에 버티고 있었던 시간이 벌써 그렇게나 지났다는 거다. 창수의 앞을 제 몸으로 가로막고 서서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어린이집 선생의 손에는 커다란 국자 하나가 야무지게 들려 있었다. 여차하면 그것으로라도, 그러니까 그 같잖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창수를 막아야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두 눈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필시 창수가 살찐 어린 양들을 노리는 굶주린 늑대 정도로 보였으리라.

어린이집 선생과 한참 들어가니 마느니 실랑이를 벌이던 창수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짧은 탄식을 하며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창수의 다소 거친 감정 표출에 국자를 들고 있던 선생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그녀는 더욱 꽉 국자 손잡이를 잡으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했다. 두려움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는 모양인지 두 눈까지 질끈 감은 채였다.

“자꾸 이러시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 주세요.”
“아, 그 아가씨 정말 깐깐하게 구시네? 애 좀 보자니까? 잠깐만 본다고요, 잠깐만.”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니, 왜 안 되는데?”
“아이 이름도 잘 모르시는 분께 어떻게 아일 보여드립니까!”
“이름이야 모를 수도 있지. 대신 얼굴을 알잖아, 얼굴을!”
“입에 담기도 껄끄러운 대부분의 범죄들은 면식범에 의해 일어난다는 걸 모르시나요? 게다가 지금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아이를 안다고 우기시는 거잖아요!”
“뭐야, 그 말은? 보자보자 하니까 이 아가씨가, 내가 뭐 납치범이라도 된다는 거야?”
“아닌가요, 그럼? 그리고 언제 절 보셨다고 아까부터 그 아가씨, 이 아가씨 타령이에요!”
“아가씨라고 부르면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좋지 뭘 그래요? 기껏 좋게 불러줬더니 그 아줌마 성격 참 이상하네? 아니, 막말로 내가 뭐 톱스타 얼굴 좀 보여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것도 아니고, 애새끼 얼굴 좀 한 번 보고 가겠다는데 그렇게 쩨쩨하게 굴건 또 뭐야? 내가 보면 고 놈 얼굴이 닳는 답디까?”
“아무튼 안 되니 돌아가세요, 좀!”

창수의 언성이 갈수록 높아졌다. 어린이집 선생의 목소리에도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은 조금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으르렁거려댔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동안 무진은 쭉 놀이터 앞에 서 있었다. 어린이집의 한쪽 벽면은 놀이터가 훤히 내다보이도록 통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통유리 건너편으로 돌아앉은 재동의 뒷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없는지, 재동은 혼자서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블록을 맞추고 있었다.

뒤통수가 참 동그랗다. 숱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에서는 매끄러운 윤기가 흐른다. 아빠다리를 하고 앉은 뒷모습을 보니 체구는 꽤나 작다. 아니, 작은가?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 그 또래아이들의 체구는 어떠한지, 그것에 비하면 재동의 체구는 정상인지 혹은 더 크거나 작은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딱히 관심을 두었던 적도 없고.

한참을 꼬물거리며 블록을 맞추던 재동이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린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곧 멀찍이 떨어져 있던 붉은색 블록을 발견한 녀석이 통통한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섰다. 무진은 재동이 아장아장 걸어가 바닥의 붉은색 블록을 작은 손으로 집어 드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통유리 앞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그리곤 재동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즈음 손을 뻗어 통유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똑똑.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재동이 동그란 고개를 이리저리 부산히 돌린다. 녀석은 한참만에야 통유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무진을 봤다. 무진과 재동의 시선이 소리 없이 부딪친다. 그리고 재동은, 무진이 특별히 녀석을 부르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손에 붉은색 블록을 든 채로 냅다 통유리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곤 제 이마가 통유리에 꾹 눌리도록 바짝 붙이고 서서 밖을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그 밖에 서 있는 무진의 얼굴을 말이다.

여전히 동그랗고 새카만 눈동자다. 어린아이답게 맑고 또랑또랑한 눈빛을 담고 있었지만, 또한 어린아이답지 않게 겁이 없고 담담한 눈빛을 지닌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재동은 첫 만남에서도 그랬듯이 무진을 빤히 올려다봤다. 고요하지만 숨이 막히는 시선이다. 이런 것의, 이 작은 생명체 속에 정말 자신의 피가 흐른다는 걸까?

“무진 형님, 저 아줌마가 한사코 안 된다는데요?”

창수가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무진에게 다가와 말했다. 머리모양이 그런 꼬락서니가 된 것은 제 성질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애꿎은 머리만 계속해서 벅벅 긁어댔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하죠, 형님. 제가 저 아줌마 콱 붙잡고 있을 테니까 그 사이에 형님이 냅다 뚫고 들어가셔서 애새끼를 데리고 나오시는…… 어? 어라? 그 애새끼, 여기 있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생각한 방법을 손짓까지 동원해 떠들어대던 창수는 뒤늦게야 통유리 안쪽에 이마며 볼을 바짝 붙이고 있는 재동을 발견했다. 창수는 냉큼 통유리 앞으로 다가가서 재동과 눈높이를 맞추며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곤 큰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려는데, 조금 전 그와 아옹다옹하던 그 선생이 와서는 대뜸 재동을 품에 안더니 커튼을 확 쳐서 통유리를 가려 버린다.

“아니, 뭐 저딴 아줌마가……!”
“야.”
“네, 형님.”

무진의 부름에 창수가 닫힌 커튼에 대고 한 마디를 더 하려다가말고 냉큼 무진에게로 다가왔다. 무진은 막연한 시선으로 닫혀버린 커튼을 바라보며 창수에게 물었다.

“저 새끼, 어떤 것 같아?”
“네? 뭐가 말입니까?”
“나랑 닮았느냐고, 저 새끼가.”
“누구요?”
“네가 봐도 내 새끼인 것 같으냐? 저거.”
“아…….”

창수는 그제야 무진이 말하는 ‘저 새끼’ 혹은 ‘저거’라는 게 조금 전까지 통유리 앞에 붙어 있던 재동임을 알아차렸다. 물론 질문의 뜻을 알았다고 해도 닮았다고 해야 할지,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무진의 표정이 너무 애매해 얼른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 그냥 가십니까, 형님?”

무진은 창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이어 들려온 창수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서 있던 창수는 얼른 무진의 뒤를 따라 뛰어가서 그보다 먼저 주차시켜 놓았던 차 앞에 도착했다.

브아아아아앙. 끼긱. 끽.

무진이 잠자코 창수가 열어주는 뒷좌석 문 안으로 들어가 앉으려던 참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보던 SUV차량이 좁은 골목을 헤집듯 달려와 다소 거칠게 멈춰선 것은. 시동도 제대로 끄지 않은 채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내려선 이는 검은 정장을 말끔히 차려 입은 재희였다. 어린이집으로 곧장 달려 들어가려던 재희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시선에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봤다. 곧 재희와 무진의 시선이 소리 없이 부딪친다. 재희의 미간이 확 찌푸려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
“…….”

두 사람이 아무런 말없이, 그러나 표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적대감을 가득 품고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닫혀 있던 어린이집의 문이 안쪽에서부터 확 열어젖혀졌다. 문이 열리자마자 바깥으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재동이었다. 재동은 짧고 통통한 팔을 허공으로 쭉 뻗으면서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뛰어왔다. 그리고 이내는 익숙하게 상체를 숙여 두 팔을 뻗는 재희의 품으로 쏙 들어가 안긴다. 재희에게 안기자마자 재동은 두 팔로 재희의 목을 꼭 껴안았다.

“재동이 아버님 오셨어요?”

재동의 뒤를 따라 나온 어린이집의 선생이 재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창수를 상대로 언성을 높이던 때와는 달리 솜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사용해서다. 그녀는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버젓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창수와 무진을 힐긋 보다가 다시 재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재희는 그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말했다.

“재동이, 오늘은 일찍 데려가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어린이집 선생은 들고 있던 재동의 가방과 외투를 얼른 재희의 손에 쥐어주었다. 재희는 다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제 SUV로 척척 걸어갔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재동은 제게 손을 흔들어주는 선생을 향해 작은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재희는 재동을 보조석 위 어린이전용시트에 앉히곤 안전벨트를 콱 조여 주었다. 손을 흔들어주던 선생이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 후에도 재동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인사를 건네듯이.

탁.

보조석 문이 닫히는 소리에 죽 재동에게 닿아 있던 무진의 시선이 재희에게로 옮겨졌으나 재희는 무진에게는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은 그는 안전벨트를 매고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함께 타고 있는 재동을 염려해선지 재희의 SUV는 달려들어올 때와는 달리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무진과 마찬가지로 점점 멀어져가는 재희의 SUV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창수가 무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따라가.”
“네?”

오늘따라 평소 같지 않은 행동을 해대는 무진에게 의문을 품을 새도 없다. 창수는 먼저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아버리는 무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멀리 보이던 재희의 SUV가 골목을 돌아 사라져 버리자 얼른 운전석으로 뛰어 들어갔다.

창수는 좁은 골목에서 서슴없이 엑셀을 밟고 핸들을 틀어가며,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재희의 SUV를 뒤쫓았다. 골목을 돌고 돌아 큰 길로 나오자마자 눈동자를 부산히 굴리던 창수의 시야에 멀리 신호에 걸려 정차해 있는 재희의 SUV가 들어왔다. 창수는 다시 엑셀을 콱 밟으며 무모하게도 가장 끝 차선에서 가장 안쪽차선으로 대각선을 그리듯 끼어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튀어나온 창수의 차를 보고 놀란 뒤차들이 사정없이 경적이 울리고 난리였지만 올곧게 SUV의 꼬리만 바라보고 있는 창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창수는 재희의 SUV 바로 뒤에 붙어 재동이 타고 있어 속력을 내지 못하는 SUV를 쫄쫄 따라갔다. 이래서다. 일과 관련해서 미행이 필요할 때에 결코 창수에게 운전을 맡기지 않는 것은. 그의 미행은 너무 티가 난다.

뒤에서 버젓이 무진의 차가 따라오고 있음을 알고 있을 텐데도 재희는 다른 길로 새지 않고 곧장 한 아파트 단지 안으로 차를 몰아 들어갔다. 이번에도 창수는 재희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몇 개의 동을 유유히 지나던 재희의 차가 텅 비어 있는 지상주차장에 매끄럽게 주차를 했다. 차의 시동을 끄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재희의 모습을 고요히 지켜보던 무진이 뒷좌석 문을 벌컥 열고 내렸다.

“어? 형님!”

주차할 자리를 찾고 있던 창수가 무진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 그를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버렸다. 그의 걸음이 향한 곳은 이제 막 SUV에서 내려서 아파트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재희와 재동 쪽이었다.

재희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던 재동이 제 앞까지 넘어오는 무진의 그림자에 놀라 빠끔 뒤를 돌아봤다. 어린아이가 무진의 존재를 알아챘을 정도라면 당연히 재희도 무진이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모르는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 재동이 뒤를 돌아보라는 듯이 작은 손으로 재희의 바짓단을 잡아당기기도 했지만 재희는 그런 재동을 품에 안아 척척 빠른 걸음을 놓았을 뿐이다.

재희가 마침 1층에 내려와 있던 엘리베이터를 타자 무진도 슬쩍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재희가 층수를 누를 때까지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가만히 서 있는 것이다. 소리 없이 눈동자를 굴려 옆에 선 무진을 바라보던 재희가 한참 만에 층수를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위층을 향해 죽 올라갔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재동만이 동그란 눈동자 가득, 자신을 보고 있는 무진을 담아냈을 뿐이다.

엘리베이터가 익숙한 기계음을 내며 멈추어 서자 재희가 무진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둔 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 한쪽 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무진도 그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왼쪽으로 바로 보이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재희가 잠시 손을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 뒤에 서서 재동을 빤히 보고 있던 무진의 시선이 차츰 위쪽으로 올라와 재희의 시선과 부딪친다. 재희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마침내 입을 열어 따지듯 물었다.   

“뭐하는 겁니까?”
“뭐가?”
“왜 뒤를 밟고 있는 거냐고 묻는 겁니다.”
“그런 적 없어.”
“저는 한무진씨를 제 집으로 초대한 적이 없는데, 미행이 아니라면 뭡니까? 돌아가시죠.”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 밖에 또 문제 있어? 내 몸뚱이에 붙어 있는 다리로 내가 걸어서 왔는데. 샌님들이 운운하기 좋아하는 신체의 자유인가 신체의 지랄인가 하는 게 이런 거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대체 어린이집은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재희의 질문에 무진이 힐금 아래쪽을 내려다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것은 재동이 야무지게 메고 있던 노란 가방이었다. 어린이집 이름이 버젓이 찍혀 있는. 그와 담판을 짓기 위해 처음 카페에서 만나던 날도 재동이 그 가방을 메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방에 찍혀 있는 이름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어린이집을 죄다 들쑤시고 다닌 걸까? 아니면 좀 더 체계적인 조사방법이 있다거나. 하여간 조폭들의 정보망도 알아줘야 한다. 아니, 그 무모함을 알아줘야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재희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다는 듯이 돌아서서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잠금장치가 무리 없이 열린 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대뜸 무진이 등 뒤에서 재희를 불렀다. 아니, 정확하게는 재희를 불렀다기보다 그곳에 있는 누구에게고 통용될 수 있는 호칭을 쓴 것이지만.

“야.”
“뭡니까?”
“들어가지마.”
“…….”

제 수하에게 명령하듯 말하는 무진의 어투에 재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무진은 재희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팔짱까지 끼고 선 채로 다시 한 번 명령하듯 말했다.

“그냥 잠깐만 있어. 거기.”
“싫습니다. 그래야할 이유가 없어요. 그럼.”

단칼에 싫다고 거절하며 재희는 열린 현관문 앞에 재동을 내려놓곤 들어가라며 녀석의 작은 등을 살짝 떠밀었다. 그러자 무진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그런 재희의 옷깃을 확 그러쥔다. 자신이 멋대로 내린 명령을 재희가 듣지 않았기 때문인지, 미간에는 전에 없던 주름이 확 잡혀 있었다. 다혈질인 모양이다. 금세 얼굴도 붉어지는 걸 보면. 재희는 제 옷을 힘껏 잡아당기는 무진의 두 눈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군요.”
“……?”

무슨 까닭에선지 재희의 그 말에 그의 옷깃을 콱 쥐고 있던 무진의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 재희는 한껏 구겨진 제 셔츠의 주름을 탁탁 두드려 펴고는 그때까지도 열린 현관문 틈새로 고개를 빠끔 내밀곤 무진을 올려다보던 재동을 다시 안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곧 열려 있던 현관문도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닫힌 현관문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서 있던 무진은 별 수 없이 돌아서서 아직 그 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버튼을 누른 후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선다.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기억이 날들 말 듯 했기 때문이다. 재희가 조금 전 무진에게 했던 그 말을 어디에선가 한번쯤 들어본 것 같아서.

“저 말, 어디서 들었더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명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무진은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아니 애초에 왜 같은 이름의 어린이집을 다 뒤져서 재동을 찾아냈는지도.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뒤를 따라오면서 내내 무슨 생각을 했는데 결론을 지은 것도 없고, 자신이 지금껏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명확히 모르겠다. 혼란. 자신의 핏줄일지도 모르는 아이의 존재는 고민 없이, 의미 없이 살던 무진에게 좀 어려운 고민을 던져주었다. 적어도 모르는 척 하고 살라고 모르는 척 하고 살 수가 없게끔.

이제야 겨우 주차를 끝내고 운전석에서 나오던 창수는 금세 돌아온 무진 때문에 다시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아야 했다. 곧 두 사람이 탄 세단에 다시 시동이 걸리더니 세단은 매끄럽게 아파트 단지를 돌아 나갔다.

무진의 세단이 아파트 단지를 완전히 빠져나가 시야에서조차 사라졌음에도, 재희는 거실 창에 기대어 서서 계속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조금 전 가득했던 냉기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 Strike!

집어삼키고야 말겠다는 듯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포수의 미트 안에 공이 빨려 들어갈 때마다 나던 둔탁한 소리가 좋았다. 공이 빠르고 무거울수록 그 소리는 마운드에까지도 들릴 듯 커졌다. 손 안에 꽉 차는 공으로 몇 번이고 바람을 갈랐다. 어깨를 이용해 팔을 크게 휘두르면 눈에 보이지 않던 청아한 공기가 살갗을 스치는 느낌이, 땀이 완전히 식혀지는 그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배트를 붕붕 휘두르며 무엇이라도 쳐내겠다는 듯이 으스대던 놈이 공에 손도 대보지 못하다가 돌아서는 꼬락서니도 우스웠고, 연방 헛스윙만 해대는 놈들을 지켜볼 때에는 희열이 다 느껴졌다.

마운드에 서면 늘 승자가 된 기분이었다. 패배감 따위는 느낄 새가 없었다. 승패에는 관계없이 늘 그랬다. 팀의 경기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마운드에 서는 그때 비로소 경기가 시작되고,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순간 모든 경기가 끝나는 거라 생각했다. 그 주어진 시간 안에 마음껏 던지면 그만이다. 그러다가 맞으면 그건 별 수 없는 일. 승리를 위해서 던진 것이 아니다. 던지는 것 자체가 좋아서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다.

야구가 좋았다. 가능하다면 평생 그것만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불행의 순간은 순식간에, 예고 없이, 걷잡을 새도 없이 닥쳐든다.
그때도 그랬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을 훤히 비추는 헤드라이트를 발견한 그 순간에. 그렇지만 너무 놀란 두 다리는 땅에 붙어서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빠른 속도로 어둠을 가르며 달려들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인한 극심한 눈부심에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가까스로 두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는 것뿐이었다.

끼이이이익.

바퀴가 노면을 따라 거칠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그렇게 계속해서 미끄러질 뿐 멈추어 서지는 못했다. 오토바이가 너무도 가까이에 다가와 있어 헤드라이트에 의한 눈부심이 순간적으로 사라진 순간,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와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쳤다. 그리고 곧이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끼기기기긱.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공을 던지기 위해 팔을 휘두를 때면 살갗에 고스란히 느껴지던 그런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옆으로 넘어진 오토바이도 넘어져 몇 번을 구른 후에야 멈추어 섰다.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중으로 치솟았던 몸은 다시 땅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까만 바닥이 맹렬하게 시야로 몰려들었다. 그곳에 몸이 쑤셔 박히는 순간 온몸의 뼈가 산산 조각나고 관절이 비틀릴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다시는 공을 던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 눈이 질끈 감겼다.





“……하악!”

무진은 두 눈을 확 뜨며 잠에서 깼다. 시야가 갑자기 개방되면서 익숙한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몰려들었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가득 한 걸 보니 아직도 새벽인 것 같았다. 급격한 서늘함이 몰려들면서 식은땀이 흘러 살갗이 끈적끈적한 느낌이 든다. 벌벌 손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꿀꺽 하고 울대가 크게 너울거리도록 마른침을 삼킨 무진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까지 묵직하게 욱신거린다.

차가운 냉수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던 무진은 그러나 이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왼쪽 어깨가 바늘을 쑤셔 박듯이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신경을 긁어내듯이 날카로운 통증과 화끈거림에 무진은 손으로 어깨를 감싸 잡으며 이를 콱 물었다. 그렇게 해도 여지없이 신음소리가 새어나갔다.

“악…… 큭…….”

온몸을 아찔한 통증이 훑고 지나간다. 송곳으로 머리의 어딘가를 콱 눌러 쑤시는 것 같은 불쾌한 통증에 낮게 욕설을 내뱉던 무진은 벽에 의지해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리곤 닫혀 있던 침실방의 문을 열기 위해 팔을 뻗었다. 무진의 손이 방문 손잡이에 걸리는 순간, 그의 몸이 앞쪽으로 쏠리면서 다시 다리가 꺾여 넘어졌다. 그때 손으로 무게가 쏠리면서 손잡이가 비틀려 방문이 틈을 내며 열렸다.

쿵.

열린 방문 사이로 무진이 넘어지는 소리에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던 창수가 두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창수는 언제나처럼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무진을 발견하고는 소파에서 허겁지겁-굴러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이 내려와 무진을 붙들었다.

“형님! 정신 차리세요! 형님!”
“시끄러…… 빨리 부르기나 해, 그 인간.”
“……아, 알겠습니다.”

창수는 서둘러 제 휴대폰을 꺼내들고 정신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진은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돌려서 천장을 보고 누웠다. 크게 숨을 들썩일 때마다 가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것이 눈에 보였다. 눈은 뜨고 있는데 보이는 것은 없다. 머리도 깨어 있으나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머지않아 창수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유 선생의 발걸음소리가 층계를 울렸다.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도 잇따라 들린다. 발을 동동 구르던 창수가 얼른 현관문을 열어준다. 차가운 바깥바람을 가득 묻힌 유 선생이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익숙한 손길로 무진의 안색부터 살핀 후에 제 의료가방을 꺼냈다. 창수는 유 선생이 따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왔다. 거즈에 얼음을 싼 유 선생은 무진이 감싸 쥐고 있던 왼쪽 어깨에 얼음거즈를 대어 식혀주며 창수에게 물었다.

“잠잠한 것 같더니 또 왜이래? 언제 또 건드렸어?”
“어제,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일을 보시다가 각목에…….”

창수의 말을 잠자코 듣던 유 선생이 그 시선을 누워 있던 무진에게로 옮겼다. 제법 통증이 심한지 무진은 이를 악 문채로 미간을 확 찌푸리고 있었다. 상처는 모두 나았다. 일상생활이 무리가 없을 정도로 재활도 성공적이었다. 물론 그 일상생활이라는 게 때리고 부수는 조폭으로서의 일상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고, 여전히 통증에 신음한다.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삶은 더더욱 깊고 어두운 곳으로 가라앉고 있기 때문에. 애초에 무진 스스로에게 그러한 삶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다.

유 선생이 잠시 처음 병원에서 무진을 만나던 날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무진의 얼굴은 평온함을 되찾았다. 무엇을 비추고 있는지 알 수 없던 눈동자도 한결 차분해졌다. 유 선생은 통증이 좀 완화되었는지 몸을 일으켜, 거추장스레 자신을 붙들고 있던 창수와 유 선생의 손을 떨쳐내는 무진을 보며 잔소리하듯 말했다.

“이봐, 사람 죽일 때 쓰라고 애써 고쳐준 게 아니라고.”
“시끄러워. 닥쳐, 좀.”

새벽 댓바람부터 호출에 응해 눈썹 휘날리며 달려온 것이 무색하도록 쌀쌀맞은 대꾸만이 어김없이 돌아왔지만. 무진은 제 옷을 대충 추슬러 입고는 창수가 누워 자고 있던 소파에 몸을 앉혔다. 창수가 얼른 그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무진의 어깨 위에 다시 얼음거즈를 대어준다. 고개를 뒤로 완전히 젖혀 흰 천장을 바라보던 무진은 웅얼거리듯 유 선생을 불렀다.

“아저씨.”
“왜.”
“갑자기 하늘에서 애새끼가 하나 뚝 떨어졌어.”

무진의 말에 유 선생이 시선을 옮겨 창수를 봤다. 그러나 창수는 애매하게 웃기만 할 뿐이다. 유 선생은 다시 고개를 돌려 무진을 봤다. 무진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 선생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 무진은 다시 입을 열어 제 할 말을 마저 했다.

“틀림없이 내 새끼라는데…… 나보고 아버지 노릇할 필요 없대. 하지 말라 그러더라고. 조폭이라서 그런가? 나란 놈,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고 골치 아픈 거 싫어해서 생각 없이, 개념 없이 굴러먹고 있으니까 나한테 안 떠맡기고 알아서 키워주겠다면 고맙다고 넙죽 절이라도 해야 하는 것도 같은데.”
“그런데?”
“씨발, 낚인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유 선생은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는 무진을 고요히 바라보며 물었다. 무진의 말대로라면, 4년간 복역생활을 한 뒤에 밖으로 나오자마자 예상에도 없던 아들을 만났을 테니 지난 이틀간은 그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이 진짜 아들이건 아니건 그런 것은 상관없이. 무진은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무시하는 게, 잘 안 돼. 병신같이.”









second daddy _ 03







탁.

면도기를 세면대 위에 올려놓으며 살짝 턱을 치켜들고 거울을 본다. 그렇게 면도가 말끔하게 잘 되었는지를 눈으로 확인한 뒤, 손가락으로도 쓸어서 만져본다. 면도를 끝낸 후에는 스킨을 손바닥에 덜어내어 얼굴에 끼얹듯 발랐다. 면도를 한 부위를 중심으로 따끔따끔한 통각이 느껴졌지만 인상을 찌푸릴 정돈 아니었다. 머리를 자연스럽게 말끔하게 정돈한 뒤 다시 한 번 거울로 체크를 하고 욕실에서 나와 침실로 들어간다.

문손잡이에 걸려 있던 셔츠를 한 번 펄럭여 잔주름을 펴고는 몸에 걸쳤다. 바싹 건조하여 다림질된 까닭에 피부 위로 유유히 미끄러지는 셔츠의 감촉이 좋다. 깃이 구겨지지 않도록 셔츠를 잘 정돈한 후에 미리 골라두었던 넥타이를 둘러맸다. 넥타이의 매듭을 짓는 것은 이제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손에 익었다. 탁 하는 소리를 내며 토스트기계에서 잘 구워진 식빵 두 개가 튀어 오른다. 스프도 고소한 냄새를 내며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재희는 매듭을 지은 넥타이를 손끝으로 슬쩍 만져 정돈한 다음 부엌으로 나갔다.   

따끈따끈한 식빵을 각각의 그릇 위에 올리고, 허니버터와 블루베리잼, 사과잼, 땅콩크림 등을 줄지어 늘어놓는다. 알맞은 온도로 끓은 스프도 볼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둔 뒤 냉장고를 열어 달걀 두 개와 수제소시지를 꺼냈다. 프라이팬을 가열한 뒤 달걀을 깨서 넣고 프라이를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무언가 꼬물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 깨어났는지 재동이 제 몸집만한 베개의 끄트머리를 잡아 쥐고서 부엌으로 나와 있었다.   

“일어났어?”

아침인사를 대신한 재희의 물음에 재동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볼을 긁었다. 까치집과 다름없이 삐죽이는 머리모양이나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얼굴을 보아하니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씻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재희는 프라이팬의 불을 끄고는 재동을 안아 욕실로 데리고 갔다. 재동을 세면대 앞 디딤대에 내려준 재희는 녀석의 목에 수건을 둘러준 후 특별히 재시공한 재동 전용의 미니 세면대에 물을 틀어줬다. 그러자 작은 두 손을 모아 물을 받고는 동그란 제 얼굴에 끼얹기 시작했다. 서툰 몸짓이었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배우는 법이다.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볼을 문지르던 재동이 허공을 향해 두 손을 쭉 뻗는다. 비누를 달라는 거다. 재희가 비누를 짚어 녀석의 손앞에 놓아주자 비누보다 작은 손을 꼬물거려 거품을 내더니 얼굴에 열심히 문지른다. 비누거품으로 하얗게 된 얼굴을 말끔히 닦아내는 것까지는 아직 무리여서 지켜보던 재희가 대신 비눗물을 닦아주었다.

세수를 마친 뒤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보송보송하게 닦아주곤 베이비로션을 적당량 덜어 주었다. 재동은 세수를 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슥슥 문질러 로션을 펴 발랐다. 이번에도 고르게 발라지지 않고 뭉치는 곳이 있어 재희의 손길이 닿아야 했지만, 녀석은 제 또래들답지 않게 제법 자율적이다. 로션까지 다 바른 재동이 부엌으로 달려 나갔다. 녀석이 세수 한 번을 할 때마다 사방으로 튀는 물들을 수건으로 문질러 닦은 재희도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자. 다 먹어야 한다?”

다시 프라이팬을 가열해 마저 달걀프라이를 완성하고, 소시지도 먹음직스럽게 구워낸 재희가 재동의 접시에 그것들을 덜어주며 말했다. 혼자서 식탁 의자 위로 기어오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을 안아서 제대로 앉혀주자 재동이 포크를 집어 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맞은편에 앉은 재희가 식빵을 한 입 크기로 잘라 잼을 발라 녀석의 입안에 넣어주자 입을 크게 벌려 그것을 넙죽 받아먹은 재동의 두 볼이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다. 갓 구워진 빵의 고소함과 블루베리쨈의 새콤달콤한 맛에 재동의 씰룩거리는 두 볼이 금세 복숭아 빛으로 물들었다.   

유리컵 가득 따라준 우유를 꿀꺽꿀꺽 잘도 마신다. 재희는 냅킨으로 재동의 입가에 동그랗게 자국이 남은 우유를 닦아주었다. 그리곤 먼저 아침식사를 끝낸 재동을 의자 아래로 내려놓아줬다. 재동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뒤뚱거리며 거실로 달려가 거실 소파에 기듯이 올라갔다. 그리곤 얼마 전부터 사용방법을 터득한 리모컨을 야무지게 붙들어 잡곤 전원을 켜서 어린이방송을 시청한다. 그동안 재희는 재동의 수발 아닌 수발을 드느라 차갑게 식어버린 음식들을 먹었다. 갓 내린 커피의 그윽한 향은 느낄 새가 없다. 적당히 식으면 물을 마시듯 삼켜야 한다. 아직 손길이 필요한 어린아이와 함께 하는 아침시간이란 그렇게 여유가 없고 정신도 없다.

어린이 프로그램을 모두 본 재동이 욕실로 들어가면 그 뒤를 따라가 양치하는 것을 도왔다. 양치까지 마친 뒤에는 미리 골라두었던 옷을 입히고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빗겨준다.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하루계획표를 통해 준비물이나 유의사항이 없는지 서너 번 체크한 후에 현관으로 나가면 시간이 딱 맞는다. 그 일과 중 어느 하나라도 틀어지기 시작하면 결코 지각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엄마한테 인사해.”

재희가 집을 나서기 전에 현관 앞 장식장에서 액자 하나를 꺼내 재동에게 건네며 말했다. 두 손으로 액자를 받아든 재동은 액자 속 여자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병아리 부리 같을 입술을 뾰조롬 내어 뽀뽀를 했다. 인사를 끝낸 재동이 액자를 다시 내민다. 재희는 그것을 받아 원래의 자리에 놓아두며 아주 잠시 액자 속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의 젊은 여자는 재동의 동그란 눈매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재희는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여자의 그 동그란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앞에 잘 보고…….”

앞서 나가는 재동에게 앞을 잘 보고 걸으라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현관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재희는 이내 멈칫하고 말았다. 현관문 밖에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무진이 팔짱을 낀 채로 열린 현관문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전에 무엇 때문에 그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인가.

“뭐 씹은 표정이네.”
“그쪽이 썩 반갑지는 않습니다만.”
“너, 나에 대해서 뭐라도 알아?”
“무슨 말입니까?”
“잡쓰레기를 보는 것 같거든, 날 볼 때마다 네 놈 표정이. 나에 대해서 뭐라도 알고 그러는 거냐? 아니면 내가 그냥 깨부수고 짓밟는 게 일상인 조폭이라니까 다 같은 똥이겠거니 생각해서 그러는 거냐?”
“잡쓰레기로 본 적, 없습니다.”
“그럼 네 놈 눈깔은 원래 그렇게 만인한테 더러운 건가?”
“시비 걸 정도로 한가한 거라면 다른 상대를 알아보시죠. 전 바쁩니다.”

표정의 변화라곤 일절 없이 무진에게 대꾸한 재희는 열려 있던 현관문을 닫아 잠그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재동은 재희와 무진을 번갈아보며 재희의 바지를 손 안에 꽉 잡아 쥐었다. 두 사람 사이에 고인 공기가 차갑게 얼어간다는 것을 어린아이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곧 1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재희는 재동을 품에 안고선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재희의 등 뒤에 대고 무진이 질문을 던지듯 말했다.

“전에 나한테, 그 놈 아버지 행세하면서 알짱거리지 말라고 했었지?”

무진이 뒤를 돌아봤을 때 재희는 고요히 무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희의 바지를 꼭 쥐고 있는 재동의 눈동자에도 무진의 모습이 꽉 들어찬다. 한참동안 서로 대화가 오고가지 않았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위잉 하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무진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제 구둣발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닫히려던 센서가 작동해 엘리베이터 문이 양쪽으로 확 벌어진다. 무진은 두 손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붙잡고선 재희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정말 그런 걸 원한 거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
“애 같은 거 한 번도 원했던 적 없어. 나 혼자 살기에도 충분히 복잡하고 짜증나거든. 지금도 그래. 그런데 그게 뭐 어쨌는데? 내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미 태어났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안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네놈이 기대한 것처럼 피붙이도 부정하는 막돼먹은 놈은 아니라서 신경 끄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거다. 그 놈이 정말 내 피붙이면. 나란 놈, 누구 말처럼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내가 알짱거리는 게 영 거슬리면 그 놈이 내 자식이 아니란 증거를 보여 봐. 나도 내 새끼 아닌 것한테 신경 쓸 만큼 한가한 놈은 아니니까.”

무진의 제멋대로인 발언에 재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진은 그런 재희를 보며 씩 하고 지극히 인위적으로 웃어보이고는 엘리베이터에 동승했다. 재동은 한결같은 시선으로 무진을 바라봤다. 어찌나 고개를 빳빳이 들고 바라보는지, 가느다란 목에 붙은 녀석의 동그란 고개가 기어코 꺾일 것 같다.

“석재동이랬나? 이름은 또 왜 이렇게 촌스러워?”

무진이 재동의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멋쩍어 꺼낸 말처럼 그다지 무게 없는 중얼거림이었다. 그제야 무진을 보기 위해 힘겨울 정도로 쳐들렸던 재동의 고개가 제자리를 찾아 내려온다. 무진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재동의 뺨을 향해 제 손을 뻗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라곤 딱히 없는 건지 재동은 무진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재희가 재동을 제 옆으로 바짝 끌어 당겨 무진의 손이 닿지 않도록 했을 뿐이다. 재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무진을 향해 특유의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쪽이 할 불평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네놈은 새끼 낳은 암캐처럼 앙앙거리는 게 취미인가 보지?”

무진이 고집스레 팔을 뻗어 재희에게 바짝 붙어 있던 재동의 머리를 기어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힐긋 눈동자를 굴려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는 재희를 노려보듯 응시하던 무진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음에 또 보자는 그의 말이 옅은 바람결처럼 흩어졌다.

멀어져가는 무진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재동이 고개를 들어 재희를 봤다. 마치 저 사람이 누구인데 자꾸 찾아오는 거냐는 질문을 하듯. 재희는 그저 녀석의 동그란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어주며,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무진의 뒷모습을 고요히 바라봤을 뿐이다.












서른셋.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를 먹는 동안 딱 한 번 진심을 다해 사랑한 사람이었다. 무진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기분이 어떠한지를 금세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그 이름을 한 번 불러주면 정말 기분이 좋은 것처럼 웃으면서 한 번 더 불러달라고 서슴없이 속삭이던 사람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웃으면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던, 그런 사람이었다.

열여덟에 처음 만났고, 스물에 제대로된 연애를 했고, 스물셋에 떠나보냈다가, 스물아홉에 다시 한 번을 만났다. 바람처럼 한 번 지나고 나면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스침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고, 무엇에도 분노하지 않으면서 나무토막과도 같은 삶을 살던 그 때, 딱 한 번 오아시스처럼 찾아왔던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때, 그 만남으로 재동이 생겼다고 했다.

편지의 글귀를 통해서만 녀석을 만났을 때에는 그 존재자체가 실감이 나질 않아서 큰 감흥도 없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까지 유발한 건 아니었다는 거다. 그러다가 편지가 끊겼고, 몇 달간은 그 소식이 궁금했지만 남은 시간은 그 궁금증마저 잊게 했다.

하지만 실상 재동을 보니, 자신을 또렷이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무심히 돌아서기가 쉽지 않다. 자꾸 욕심이 생긴다. 조금만 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는 그런 욕심. 욕심이라 말하기엔 소박하지만 또 다른 무엇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한. 나날이 커진다. 재동을 생각할수록, 자꾸 녀석을 만날수록 신경이 쓰이고, 눈앞에 두고 보지 않으면 궁금함에 금세 초조해진다. 그런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없던 인내심이 더 급격히 바닥을 드러낸다.

스스로가 낯설 만큼 갑작스럽다. 도통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다.














“형님, 오셨습니까?”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무실에 도착한 무진을 맞으며 정한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건넸다. 무진은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곧장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는 것은 오늘따라 집무실에 고여 있는 공기가 유난히 긴장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빌딩 앞 경비가 지극히 삼엄한 것도 그렇고, 로비에도 필요 없이 많은 사내들이 지키고 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오늘따라 분위기 진짜 이상하지 않습니까, 형님?”

주차를 마친 뒤 뒤늦게 집무실로 들어온 창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가 느낄 정도라면 확실히 무슨 일이 있다. 조직에 무슨 일이 있는데도 한 회장이 따로 무진을 호출하지 않은 것은 좀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야?”
“저도 전달받은 바가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지난밤에 조직원 중 하나가 습격을 받았다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배후가 누구인지 조사하고 있는데 지금으로써는 흑룡회 놈들의 보복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어? 그 놈들이라면 5년 전의…….”

정한은 창수를 보며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것 같은 무진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겨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형님께서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5년 전의 일이라면 무진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그 일에 관여되어 교도소에서 4년이나 복역을 한 것이니 말이다. 쓸데없는 이권싸움이었다. 기업의 형태를 가장해 점점 세력의 규모를 늘려가던 두 조직이 하나의 지역에서 부딪쳤다. 조폭은 사업가가 아니다. 적당히 이윤을 조정해서 타결을 보고 악수를 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거다. 싸우고 싸우다가 끝내 살아남는 쪽이 모든 것을 차지하면 그 뿐이다.

한 회장의 지시로 그 일은 전적으로 무진이 담당했었다. 살면서 가장 많은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고, 물을 마시듯 칼을 맞고, 아무런 생각 없이 부유하듯 하루하루를 보냈던 시기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전쟁이나 싸움보다 가치 없는 혈전. 그 중심에 무진이 있었다. 경찰이 출동하고 손목에 쇠고랑을 차던 순간에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치고 박고 달려도 결국 끝은 다 이 모양이라고, 교도소로 들어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흑룡회. 그쪽도 제법 살만해진 모양이다. 잠자코 찌그러져 있지 않고 마치 무진의 출소를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는 걸 보면. 한 번 피를 보면 끊임없이 피를 흘려야 한다. 보복과 보복으로 점철되는 어그러진 삶. 그 끝은 없다.

“별다른 연락은?”
“없었습니다.”
“그럼 됐어.”

어차피 무진이 필요하다면 부르지 말라고 해도 부를 한 회장이다. 아직까지 호출이 없다는 것은 딱히 무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일 게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무진은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곤 제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창수와 정한은 영문도 모르고 그 뒤를 따랐다. 창수는 정한이 몸조심을 하라고 특별히 주의를 준데다 무진이 집무실로 오기 전 새벽같이 일어나 재희의 아파트에 들렀다 온 사실을 떠올리곤 앞서 걸어가는 무진에게 물었다.

“오늘은 그냥 들어가십니까?”

무진은 창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갈 곳이 생겼는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지하주차장의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무진은 서로의 얼굴만 연방 바라보는 창수와 정한, 그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근방에서 제일 큰 장난감 가게. 찾아봐.”  














무진은 규모가 큰 장난감 가게 앞에 정차된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운전석의 정한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어 있는 조수석은 창수의 자리였다. 그의 자리만이 덩그러니 비어 있는 것은 그가 무진을 대신해 장난감 가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무진은 뒷좌석에 몸을 한껏 기대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 지난밤은 악몽 때문에 잠을 설쳤다.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한 뒤 동도 트기 전에 집을 나섰다. 재동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재동과 재희의 외출시간이 언제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나서서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시간 남짓이 지났을 때 비로소 재희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두 시간이나 기다린 보람이 없게도 재희는 바로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표정을 굳혔지만. 딱히 반길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군요.

그 말, 그 어투, 그 음성.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면서도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다. 이런 걸 두고 처음 보는 대상을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현상, 이른바 기시감이라고 하는 것인가? 글쎄, 그것에 대한 확신도 들지 않는다.

무진이 눈을 감은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창수가 장난감 가게에서 나왔다. 양팔 가득 커다란 상자 몇 개씩 쌓아 들고서다. 그 모두가 현란한 포장을 자랑하는 어린이용 완구들이다. 금방이라도 상자를 떨어뜨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모습에 정한이 밖으로 나가 옮기는 것을 도왔다. 정한은 트렁크를 열어 크고 작은 상자들을 집어넣었다. 그 동안 창수는 작은 상자 두어 개를 품에 안고서 보조석으로 들어와 앉았다.
      
“형님, 다녀왔습니다. 요새 장난감은 정말 끝내주던데요?”

창수가 장난감 가게 안에서 본 참신한 장난감들에 대해 흥분해서 떠드는 동안 무진의 시선은 줄곧 그의 옆구리에 끼어져 있는 곰 인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슬쩍 손을 뻗어 곰 인형의 다리를 붙들어 잡은 무진은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창수를 타박하듯 말했다.

“뭐냐, 이건? 사내새끼한테 줄 거라고 했잖아. 귓구멍을 처먹었냐?”
“아니, 그 가게 주인이 사내아이라고 무조건 로봇만 가지고 놀지는 않는다고…….”

무진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곰 인형을 바라봤다. 물론 포동포동한 볼과 동그란 눈망울을 지닌 재동의 얼굴만 생각하면 녀석이 곰 인형을 끌어안고 다닌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보통 사내아이들에게 곰 인형을 선물하고 그러던가? 사내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로봇, 비행기, 자동차 따위만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자신이 아이들의 정서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건지, 아니면 창수가 장난감 가게의 장삿속에 속아 넘어간 건지.

“어디로 갈까요?”

트렁크에 상자들을 모두 다 싣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은 정한이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곰 인형을 이리저리 뒤집어보고 있던 무진의 시선이 창수에게로 닿는다. 곧 그의 입에서 지극히 당연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왜 또 오신 거예요!”

어린이집 교사가 두 팔을 벌려 무진과 창수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야외활동 시간인지 아이들은 모두 놀이터에 나와서 흙장난을 하거나 놀이기구를 타며 놀고 있었다. 돌아앉아 있는 재동도 보인다. 무진은 손가락으로 동그란 재동의 머리통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석재동. 이제 이름도 아니까 상관없지?”
“앗, 이봐요!”

어린이집 선생이 말릴 새도 없이 무진은 그녀의 팔을 슥 밀고 안으로 척척 들어갔다. 어울리지도 않게 작은 곰 인형 하나를 옆구리에 낀 채다. 올망졸망 모여 앉은 아이들 사이로 걸어가는 무진의 막무가내 행동에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던 선생이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창수가 얼른 그 앞을 가로 막았다. 어린이집 선생은 차 안에서 고요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정한의 얼굴과 제 앞을 가로 막은 창수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불안정한 음정으로 협박하듯 말했다.

“자꾸 이러시면 정말 경찰 부를 거예요?”
“그 아줌마 의심도 많으시네. 얼굴을 한 번 봐요, 얼굴을. 완전 붕어빵이잖아. 저거 말고 우리 형님이랑 저 석재동이가 부자라는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어? 안 그래요?”
“그런 건 모르겠으니까 나가 주세요!”
“와. 이 아줌마, 인정머리가 없네? 애들 가르치는 사람이 그러면 못써요.”
“뭐라고요?”

무진은 또다시 어린이집 선생과 말싸움을 해대는 창수의 목소리를 뒤로 하곤 재동에게로 걸어갔다. 쪼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흙장난을 하던 재동은 무진의 그림자가 제 앞으로 기어 넘어오자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바짝 다가와 있는 무진의 다리에 시야가 가리자 재동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무진은 녀석의 고개가 아플 정도로 꺾이기 전에 제 무릎을 굽히고 녀석의 등 뒤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렇게 또 한 번, 무진과 재동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친다.

“석재동.”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동그란 눈동자가 더 극명한 빛을 내는 것 같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무진은 손을 뻗어 아침에 재희의 방해로 닿지 못했던 재동의 볼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보드라운 감촉이 들면서 포동포동한 재동의 볼이 폭 눌려 들어간다. 오묘한 느낌이다. 재동은 제 볼을 조물조물 만지면서도 표정은 한결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무진을 빤히 바라봤다. 의심이라곤 전혀 없는 눈빛이다.

이윽고 재동의 동그란 눈동자는 데굴데굴 굴러 무진의 옆구리에 끼어져 있는 곰 인형에게로 향했다. 재동의 시선을 따라 제 시선을 옮기던 무진은 재동이 곰 인형을 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곤 그것을 옆구리에서 뺐다. 그러자 재동의 시선이 어김없이 곰 인형을 좇아 움직인다. 무진은 녀석의 시선이 박혀 떨어지질 않는 곰 인형을 슥 내밀었다. 그러자 다시 무진의 두 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던 재동이 이내 통통한 두 팔을 뻗어 곰 인형을 답싹 안는다.

“너는 사내새끼가…….”

마론 인형을 선물 받은 계집아이처럼 마냥 좋은지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곰 인형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재동의 모습에 무진이 핀잔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무진이 그러거나 말거나 제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을 쭉 내밀어 곰 인형의 코에 뽀뽀를 하기도 하고, 통통한 볼을 부드러운 털에 슬슬 비벼대던 재동이 별안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제 반바지 주머니에 작은 손을 꾹꾹 쑤셔 넣는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을 꼬물거리던 재동은 무언가를 집어 꺼냈다. 녀석이 무진에게 꺼내어 내민 것은, 아껴먹으려고 주머니 속에 오래 넣어두고 있었는지 뜨뜨미지근한 온기를 지닌 자두맛 사탕이었다.











Second Daddy _ 04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도로 위 가로등불빛이 하나, 둘 점등되기 시작했다. 하루일과를 마친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골목에는 길고양이 몇 마리만이 담벼락을 타고 느릿느릿 움직일 뿐이다. 멀리 떨어진 큰길에서 차들이 질주하는 소음과 인근 주택가에서 흘러든 TV프로그램의 말소리만 제외한다면 새벽처럼 고요한 골목이었다.

그 골목을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유유히 비추며 들어오는 차량이 있었다. 재희의 SUV다. 재희는 때 아닌 불빛에 놀라 후다닥 달음질하기 바쁜 길고양이들을 바퀴로 깔아버리지 않도록 천천히 골목에 진입하면서도 연방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저녁 8시까지는 재동을 데리러 가겠다고 했는데 벌써 약속한 시간을 30분이나 넘기고 말았다.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평소보다 차가 막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퇴근시간이 따로 없는 재희라는 것을 어린이집에서도 잘 알고 있고, 그가 늦더라도 재동을 알뜰살뜰 잘 보살펴주기는 하겠지만 괜히 초조해진다. 이윽고 재희의 SUV는 어린이집 앞에 도착했다. 지금 시간까지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재동과 오늘도 재동을 돌보아주고 있을 선생뿐인지, 불이 켜진 곳은 교사전용 사무실뿐이다. 재희는 어린이집의 이동수단인 노란 버스 옆에 제 SUV를 주차시키곤 서둘러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에 고개까지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하는 재희에게 어린이집 선생은 한사코 괜찮다며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선생은 앞장서서 사무실 안으로 재희를 안내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쪽에 자리한 3인용 소파에 누워 잠든 재동의 모습이 보였다. 재동은 제 몸을 다 덮기에 충분한 무릎담요를 덮은 채 잠들었는데, 낯선 곰 인형 하나가 녀석의 두 팔에 야무지게 안겨 있었다. 곰 인형의 귀에는 태그가 고스란히 붙어 있다.

“저건…….”
“저것뿐만이 아니에요.”
“네?”

어린이집 선생은 낯선 곰 인형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재희에게 소리 없이 웃어보이고는 한쪽으로 잘 치워둔 장난감 박스들을 질질 끌고 왔다. 플라스틱 총, 칼에서부터 로봇, 자동차까지 웬만한 장난감들은 다 모아둔 것 같다.

“저번에 왔던 사람들 있잖아요? 왜, 약간 위험한 분위기 풍기시는 분들이요. 그 사람들, 오늘도 잠깐 왔다갔어요.”

이것들이 다 뭐냐는 눈길로 장난감 상자를 훑어보는 재희에게 어린이집 선생이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말을 골라가며 말했다. 그 간결하기 그지없는 설명에 재희는 단박에 무진을 떠올렸다. 그가 재동에게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다며, 앞으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선전포고하듯 던졌던 말도 떠올랐다.

4년간 그 존재자체도 미심쩍었을 아들이다. 그 아들을 최근에 직접 만났고 이후로는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강한 끌림에 아들의 존재가 자꾸 눈에 어른거리고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핏줄이라는 게 다 그런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마음에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할지는 알 수 없어도 생각나는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걸까, 무진은.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 재동이와 어떤 관계인지 여쭤 봐도 되나요?”

어린이집 선생은 조심스레 물으며 재희의 표정을 살폈다. 재희는 딱히 숨길 일도 아니라는 듯이 특유의 단정한 어투로 어려움 없이 대답했다.

“직접 보셨으니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었지만, 직접 보았다는 것은 무진과 재동 두 사람을 모두 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창수가 말했듯이 누가 봐도 두 사람은 같은 피가 흐른다고 생각될 정도로 닮아 있다. 콕 집어 눈이니 코니, 입이니, 귀니 말하지 않아도 몹시 닮아 있다. 물론 비슷한 생김을 지녔다고 해서 무진과 재동이 풍기는 분위기까지 같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어떻게 그것마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제 네 살인 천진난만한 아이와 세상의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어른인데.

아니, 그렇다면 재희는? 무진이 재동의 친부라고 한다면 재동의 어머니가 죽은 후 그를 홀로 키우고 있는 재희는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보통 자신의 핏줄이 아닌 걸 알면서도 아이를 그렇게까지 보듬고 돌볼 수 있는 건가? 어린이집 선생은 재동의 집안사정에 대해서 녀석이 한 살 때 친모가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진이 재동의 친부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된 지금 이 순간은 꽤나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재희가 신경 쓰지 않도록 놀란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어쩌면 무진이 사온 장난감들을 모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재희는 묵묵히 장난감 상자들을 제 차로 옮겼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소파에 잠들어 있던 재동을 품에 안아들곤 입구까지 나와 자신을 마중하는 선생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재희는 재동을 보조석에 앉혔다. 편하게 눕힌다고 뒷좌석에 홀로 눕혔다가는 그 아래로 굴러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전용시트에 앉혀 안전벨트를 여며주자 재동이 입술을 뻐끔거리며 제 볼을 손가락으로 슥 긁으며 뒤척이더니 이내 다시 고요히 잠든다.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은 재희는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려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재동의 품에 안겨 있는 곰 인형을 바라봤다.

어울리지 않는다. 무진이 그런 것을 사들고 왔다는 것 자체가. 분명히 그 곰 인형만은 직접 고른 것이 아닐 것이다. 그 정도의 섬세함을 가진 남자라면 재동을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아이에게 좀 더 살갑게 대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핸들에 닿아 있던 재희의 오른손이 슬쩍 떨어진다. 재희는 손을 뻗어 곰 인형을 쓰다듬듯 가만가만 매만졌다.














솨아아아아.

샤워기에서부터 세찬 물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무진은 그 앞에 멍하니 서서 살갗을 때리듯 쏟아지는 물줄기는 그저 맞고 있었다. 무진의 얼굴을 흠뻑 적신 후 목을 타고 흐른 물줄기는 그의 지난 이력들을 증명하듯 어깨와 가슴, 복부에 남아 있는 크고 작은 흉터들을 겉돌다 허벅지로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이 튀어 상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있는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거울에는 밋밋한 백지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무진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춰졌다. 좋고 싫은 것도, 기쁘고 슬픈 것도 전혀 모르는, 얼간이 같은 얼굴이다. 입술의 끝부분을 끌고 올라가는-웃을 때마다 필요한 근육을 사용하지 않은지는 꽤나 오래됐다.

무서워하겠지, 아마. 이런 몰골이라면 틀림없이 좋아하지는 않을 거다, 아이들은.  

가볍게 고개를 흔든다. 그로 인해 그의 진갈색 머리카락을 흠뻑 적시고 있던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싹 잘 건조되어 있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내듯 닦아내며 욕실을 나섰다. 욕실 문을 벌컥 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한이 얼른 샤워타월로 무진의 몸을 닦듯이 감싸줬다. 무진은 어깨에 작은 수건에 고개를 파묻다시피 해서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거실로 걸어갔다.
  
“형님, 사과 좀 드십시오.”

사과를 껍질도 까지 않은 채로 베어 먹고 있던 창수가 무진에게 사과를 권한다는 게 자신이 먹고 있던 것을 내밀며 말했다. 무진은 지레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창수에게 대꾸했다.

“과일이라면 큰집 생활할 때 지겨울 정도로 먹었다. 물릴 정도로 집어넣었잖아, 네 놈들이.”
“네?”
“일주일에 한 번이어도 족할 걸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나 엿 먹으라고 그런 거냐?”

무진이 불만스레 덧붙였다. 그러자 창수와 정한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정한의 시선을 받은 창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다시 창수의 시선을 받은 정한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두 사람의 묵언적인, 그러나 어딘가 이상한 행동에 무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창수가 얼른 그런 행동들을 보이는 이유를 설명했다.

“형님 면회 갔을 때 뭐 필요하신 것 없으시냐고 여쭈니까 형님께서 사식은 따로 필요 없다고, 처리하기도 곤란하니까 그딴 건 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저희는 계속 영치금만 넣었는데요.”

창수는 확인을 구하기 위해 정한을 봤다. 무진의 시선도 자신에게로 향하자 정한이 창수의 말에 틀림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무진은 미간 사이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들어간다. 하루가 멀다 하고 꼬박꼬박 사식이 들어왔었다. 사식이라고 해봤자 교도소 매점에서 파는 항목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그다지 신선한 과일은 아니었지만.

4년 내내 하루도 거른 일이 없어서 무진과 한 방을 쓰던 이들은 식사 후에 늘 과일을 먹었다. 무진의 출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는 아쉬운 마음을 대신해 무진이 없으면 이제 과일은 먹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니냐며 장난으로 말하던 이도 있었다. 그래서 무진은 당연히 창수와 정한이 무진을 생각해 넣지 말라는 사식을 고집스레 넣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한사코 아니라면, 대체 누구인가? 4년간 그렇게까지 신경을 쓴 사람은.

“……뭐야, 정말.”

잠시 한 회장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무진은 피식 바람을 빼듯 웃었다. 한 회장은 그런 정성을 보일 사람이 아니다, 결코. 그 외에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하나, 하나 되짚어보다가 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옷장을 열어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던 무진은 샤워를 하기 전, 자신이 벗어서 침대 위에 던져놓았던 옷이 온 데 간 데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창수나 정한이 치웠거니 생각하고 말았겠지만 무진은 곧장 침실에서 나와 세탁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세탁기를 열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확인한 후에 세탁물을 모아놓는 바구니를 마구 파헤쳤다. 무진의 낌새가 이상했는지 정한이 세탁물 바구니를 뒤집어 탈탈 터는 무진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 바지, 어쨌어?”
“형님 샤워하실 때 세탁소 아저씨가 다녀가셔서 맡겼는데요?”

창수가 사과를 먹으며 다가와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무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세탁실에서 뛰어나와 창수의 멱살을 확 움켜잡았다. 창수는 무진이 갑자기 흥분하여 달려드는 이유를 알지 못해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무진은 창수의 셔츠가 꾸깃꾸깃해지도록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다가 확 밀치듯 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야.”
“네?”
“언제 가지고 갔냐고!”
“한 5분 전에…….”

창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무진은 창수를 밀쳐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세탁소 주인남자가 세탁물 수거를 위해 온 것이라면 아직 아파트 단지 내에 있을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이 무진은 층계를 반쯤은 건너뛰듯이 내려갔다. 무진이 숨을 몰아쉬며 어둠이 깔린 아파트 지상주차장으로 나갔을 때, 수거한 세탁물들을 싣고 있는 세탁소 주인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남자를 향해 달려 나간 무진은 트렁크를 닫으려던 그를 옆으로 확 밀쳐냈다. 영문을 모르고 무작정 그의 거친 손길에 밀쳐진 주인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무진을 바라봤다. 무진은 남자가 수거한 옷가지들 사이에서 자신의 바지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남자가 수거한 옷가지들이 바닥으로 휙휙 내던져졌다.

“뭐하는 거요?”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바닥을 구르는 옷가지들을 주우며 남자가 짜증스레 소리쳤다. 그러나 무진은 그마저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막무가내로 옷가지를 헤집다가 그 속에서 제 바지를 끌어냈다. 그리곤 서둘러 바지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무언가가 톡 하고 걸릴 때에는 비로소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의 바지주머니에서 끌려나온 것은 다름 아닌 자두맛 사탕이었다. 낮에 재동에게 받은 것이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어 세탁물을 들쑤시나 싶었는데 고작 집어낸 것이 사탕이라는 것에 세탁소 주인남자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참 어이가 없어서.”

남자는 자두맛 사탕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무진을 쏘아보다가 트렁크를 닫고는 아파트 단지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무진은 손안에 얹어진 자두맛 사탕을 하염없이 지켜보며 서 있다가 그것을 든 손을 곽 주먹 쥐어 잡고는 다시 터벅터벅 아파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무진의 등 뒤쪽에서 차 한 대가 맹렬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브아아아아앙.

무진은 무심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헤드라이트에 눈이 부셔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다. 주차를 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라기에는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게다가 운전자의 실루엣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차량에 전체적으로 짙은 선팅이 되어 있다는 점도 의심스럽다. 무진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차가 무진을 날려버릴 것처럼 무진의 정면을 향해 달려왔다.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의 마모소음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박아버릴 심산인 거다.

“젠장!”

쾅.

올곧게 달려 들어오던 차는 인도를 타고 올라가 환풍구에 부딪쳤다. 무진은 몸을 옆쪽으로 던지듯 굴려 간발의 차로 차와의 충돌을 피했다. 충돌의 여파로 잠시 잠잠하던 차 안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차의 보조석과 뒷좌석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안에 타고 있던 사내 셋이 일제히 내려섰다. 한결같이 검은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흑룡회다. 계속 아파트 어딘가에서 무진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확하게는 무진이 혼자되는 순간을 말이다. 5년 전, 그 의미 없던 조폭들 간의 싸움에서 무진에 의해 반사 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사망한 보스의 보복을 한다는 게 명분이겠지만 실상은 한 회장이 후계자로 지목한 무진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조직이 아직 굳건하다는 것을 알리려 하는 것일 게다. 물론 그마저도 의미 없고 가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뚜벅뚜벅 무진과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사내들을 빤히 바라보며 무진도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상대는 셋, 운전자까지 치면 넷이다. 자신이 슈퍼맨도 아닐 진데 무작정 달려들었다가는 반드시 피를 보고 말 것이다. 구태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제 한 몸 희생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내들은 서서히 무진에게 다가서면서 흩어져 무진을 에워쌌다. 무진이 주먹에 꽉 힘을 주어 잡자, 배트를 들고 있던 사내가 그것을 높이 치켜들며 무진에게 달려들었다.

배트가 바람을 가르며 떨어질 때에는 붕 하는 소리가 났다. 무진은 옆으로 비껴나서 슬쩍 사내의 공격을 피하자마자 배트를 들고 있던 사내의 손목을 발로 걷어찼다. 균형을 잃은 사내는 비틀거리며 손에서 배트를 놓쳤다. 무진은 얼른 손을 뻗어 사내가 놓친 배트를 두 손으로 들었다. 나머지 두 명의 사내들도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각각 손에는 날이 예리한 칼을 말아 쥐고서다. 어둠속에서도 새파랗게 날이 선 칼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사내들이 양쪽에서 칼날을 공중으로 휙휙 휘두르며 다가왔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휘두르면 당해내기가 쉽지 않다. 배트로 공간을 내어 사내들을 밀어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팔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치고 들어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빠른 시간 안에 해결을 보는 수밖에. 무진은 칼을 비틀어 잡은 채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내를 향해 들고 있던 묵직한 배트를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달려들던 사내는 날아든 배트에 맞아 욱신거리는 정강이를 두 손으로 감싸 잡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무진이 빈손이 된 것을 놓치지 않고 또 다른 사내가 달려들었다. 깊숙이 찌르며 들어오는 그의 손을 팔과 옆구리 사이로 콱 맞물려 잡고는 허리를 비틀어 달려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해 딸려오던 사내의 몸을 확 걷어찼다. 그러자 무진의 옆구리에 끼어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던 사내의 손목에서 기어코 무언가가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났다.

무진은 온몸을 부르르 떠는 사내를 내던지듯 바닥에 떠밀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잔챙이들이었기 망정이지 그 수가 더 많았다거나 솜씨가 좋은 놈이 왔다면 틀림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통증에 신음하며 도통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내들을 고요히 내려다보던 무진이 바닥에 침을 뱉고는 돌아서려는데 덜컥 등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그를 붙들었다.

“뭐야!”

얼마나 콱 붙잡고 있는지 떨쳐내려 해도 쉽게 떨쳐지지가 않는다. 무진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제 팔을 밀어 넣고 턱 쪽으로 끌어당겨 무진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붙들어 놓은 것은 조금 전 배트를 쥐고 흔들던 사내였다. 사내가 벗어나기 위해 날뛰어대는 무진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봉쇄하는 사이, 운전석에서 또 한 사내가 내려섰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작은 잭나이프 하나를 꺼내서 공중으로 휙 던졌다가 받고 다시 휙 던졌다가 받길 반복하면서 무진에게로 다가왔다.

잠시나마 그를 잊었다. 그‘도’ 있다는 걸 잊은 거다. 하지만 아차 싶은 순간에는 늘 늦는다. 사내가 점점 더 무진과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더니 덜컥 무진의 어깨를 제 손으로 잡았다. 그리곤 날이 예리한 잭나이프를 거침없이 무진의 복부에 쑤셔 박았다. 날카로운 것이 살갗을 꾸역꾸역 파헤치며 밀려들어왔다. 내장을 들쑤시는 끔찍한 통증에 무진의 편편하던 이마에 불끈 핏줄이 솟는다. 비명은 터질 새도 없었다.

사내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통증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눈을 치떠 자신을 보는 무진을 향해 소리 없이 씩 웃었다. 그리곤 아직 손을 떼지 않았던 칼 손잡이를 더욱 꽉 잡아 쥐었다. 칼을 비틀어 돌릴 작정인 거다.   

“씨발…….”

사내의 뜻을 파악한 무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때였다. 세탁소 주인남자를 찾으러 뛰어 나간 무진이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정한과 창수가 밖으로 나와 본 것은. 그들은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둘이 통증에 신음하며 나뒹굴고 있는 모습과 나머지 두 사내에게 붙들려 있는 무진의 모습만 보고도 상황판단을 끝내고는 냅다 달려오며 소리쳤다.

“형님!”
“저 개에새끼들이 감히 우리 형님을! 다 죽었어어어!”

거의 공중으로 몸을 날리다시피 한 창수가 칼을 움켜잡고 있던 사내의 면상을 후려 찼다. 그러자 사내의 목이 홱 꺾이듯 돌아간다. 정한 또한 무진을 잡고 있던 사내의 멱살을 잡아 그의 코를 뭉개버릴 것처럼 강하게 후려갈겼다. 얼굴 전체가 시큰거리는 통증에 사내가 코를 감싸 쥐며 나가떨어진다. 정한은 비틀거리며 주저앉는 무진의 팔을 잡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다급하게 말했다.

“형님, 어서 피하십시오!”

정한이 무진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기도 전에 이리저리 나가떨어져 있던 사내들이 몸을 추슬러 정한에게 달려들었다. 정한은 무진을 저만치 떠밀어내고는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내들과 한데 뒤섞였다. 창수 또한 사내들과 뒤엉켜 싸우느라 미처 무진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잭나이프를 고스란히 복부에 꽂은 채로 넘어져 있던 무진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늦은 밤이긴 했지만 밖의 소란을 아파트 주민들이라고 모를 리 없다. 다만 나섰다가 괜한 개죽음을 당하기 싫어 모르는 척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집값이 떨어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을 테니 그들 중 누군가 사람이 죽어나가기 전에는 경찰을 부르든 할 것이다. 보통은 그 전에 싸움이 어떻게든 끝나 양쪽 모두 모습을 감춰버릴 가능성이 더 크지만.

무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통풍구를 들이박고 있는 차 안으로 기듯이 들어갔다. 운전석의 문도 열려 있는데다 차키도 고스란히 꽂혀 있다. 운전석에 앉아 숨을 고르던 무진은 팔을 뻗어 운전석 문을 닫았다. 복부에 박힌 칼의 손잡이가 핸들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하지만 뽑는 것보단 그대로 놔두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하아…… 하아…….”

연거푸 묵직한 숨이 터졌다. 가슴까지 들썩이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어도 숨쉬기가 녹록치 않다. 기어를 바꿔 죽 후진을 한 무진은 핸들을 비틀고 엑셀을 밟으며 빠르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뒤처리는 창수와 정한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선 무진 자신이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 일에 대한 보복은 경찰의 몫이 아닌 것이다.

무진은 가로등이 죽 늘어선 큰 길로 나갔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길에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헤드라이트가 나가고, 범퍼가 덜렁거리는데다 칼을 맞아 정신이 몽롱한 운전자가 차선을 무시하며 차를 모는데도 사고가 나지 않았던 것은. 머리가 묵직하게 짓눌리는 느낌이 든다. 시야도 점차 혼탁해졌다. 꾹 힘을 쥐어짜며 핸들을 붙잡은 무진의 손에는 여전히 자두맛 사탕이 들려 있었다.

















집에 와서도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서류를 들여다보던 재희는 잠시 부엌으로 나와 목을 축였다. 그리곤 다시 제 서재로 들어가기 전에 재동의 방으로 걸음을 한다. 슬쩍 문을 열어보니 재동이 곰 인형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채 잠들어 있다. 이불은 어느새 또로록 말려 내려와 녀석의 발목 즈음에나 걸려 있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가 고스란히 이불 밖으로 드러나 있어서 그대로 내버려두면 아침에는 복통을 호소할 것이다.

재희는 재동의 방으로 들어가 배가 나오도록 올라간 녀석의 잠옷을 내려주고는 이불도 끌어다가 녀석의 가슴께까지 잘 덮어주었다. 머리카락을 차분히 쓸어 넘겨주자 녀석의 얼굴이 확 풀어진다. 손가락으로 동그란 코를 건드렸을 때에는 간지러운지 코를 찡그리면서 입도 서너 번 뻐끔거린다. 재동의 동그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재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서 문을 닫곤 재동의 방을 나왔다.

시간은 벌써 새벽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주말동안 재동과 함께 보내려면 잠들기 전에 일을 모두 끝내놓는 것이 좋을 거다.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 제 손으로 뒷목을 주물러가며 잠을 쫓아낸 재희는 다시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현관문에 무언가가 묵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쿵.

재희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만약 지금이 한낮이었다면 앞집에 사는 초등학생이 공을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려 그것이 현관문에 부딪치면서 난 소음이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조금 전 시계는 분명 새벽 1시를 가리켜 보이고 있었다. 혹 쉴 곳을 찾던 길고양이가 층계를 따라 이곳까지 올라온 것인가? 어떠한 것도 확신은 없었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없었다. 확인하지 않고는 계속 신경이 쓰일 테니 말이다.

자동잠금장치의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위잉 하는 기계음을 내며 잠금장치가 매끄럽게 돌아간다.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비틀어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조금씩 바깥의 찬 공기가 스며 들었다. 그제야 센서가 재희의 움직임을 인식했는지 현관에도, 현관문 밖에도 동시에 오렌지색의 빛이 들어온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조금 틈을 벌리며 열린 문은 중간 즈음에 뭔가에 걸려 더 이상은 열리지 않았다. 확실히 이상하다. 그러한 생각이 들자마자 재희는 힘을 주어 현관문을 떠밀었다. 그러자 현관문의 틈이 조금은 힘겹게, 서서히 벌어진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현관문이 확 열어젖혀지면서 무언가 검은 형상을 띈 것이 열린 현관문 쪽으로 홱 쓰러졌다.

툭.  

쓰러져 있는 뒷모습으로 보건데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쓰러져 있는 그에게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재희는 침착하게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옆쪽으로 돌렸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사람은 분명 무진이었다.









Second Daddy _ 05







“한무진씨!”

재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층계를 울리며 퍼져나갔다. 무의식적인 외침이었다. 재희는 쓰러져 있는 무진에게 다가가 그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무진에게서 콜록 하고 묵직한 기침이 터진다. 잭나이프가 고스란히 꽂혀 있는 복부에서는 붉은 선혈이 꿈질거리며 흘러내려 바닥으로 고여 들고 있었다. 무진을 붙들고 있던 재희의 손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것인가. 물론 그가 조폭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이제 출소한지 고작 나흘 남짓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노려지다니. 무진의 삶은 어쩌면, 재희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각박하고 거칠지도 모른다. 출소를 하는 날에도 얼굴에서 긍정적인 감정이 내비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일까.

“어쩌다 이렇게…….”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중얼거리던 재희는 손을 뻗어 무진의 맥부터 짚어보았다. 그리곤 무진을 완전히 눕혀서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곤 심장박동을 들어본다. 미미하게나마 심장이 뛰고 있음을 확인한 재희는 나지막이 숨을 뱉어낸 후, 무진의 등과 다리를 양팔로 떠받쳐 그를 안아들었다. 그 탓에 복부가 당겨서 고통스러운지 무진의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재희는 무진을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 제 침대 위에 눕혔다. 무진의 복부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재희의 셔츠는 물론 침대시트까지도 점점 적시고 있었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칼에 찔린 후 그 칼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출혈은 많은 편이 아닐 텐데도 제법 상처가 깊은지 상처부위에서 꿈질꿈질 계속해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너무도 갑작스런 무진의 방문에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질 않는다. 재희는 힘겨운 숨을 토해내며 신음하는 무진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제 서재로 가서 휴대폰을 덜컥 집어 들었다. 그리곤 다이얼 중 1을 두 번, 9를 한 번 누른다. 그러나 그는 신호음이 채 한 번을 떨어지기도 전에 휴대폰 폴더를 닫았다. 만약 119에 신고를 해서 그를 인근 병원으로 옮긴다면 치료야 수월해지겠지만 단순부상이 아닌 칼에 의한 자상이니 경찰에게 연락이 가게 될 것이다. 조폭들이 치명상을 입고도 병원행을 꺼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무진의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무진 또한 조폭이니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무진이 병원으로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러한 상처를 입고서 재희 본인의 집을 찾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휴대폰을 손 안에 꼭 쥐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재희는 다시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그리곤 단축다이얼을 꾹 눌렀다. 이윽고 신호음이 길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끊길 듯 말 듯 이어지는 신호음에 애가 타기 시작했다. 재희는 무진이 누워 있는 자신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시계를 바라봤다. 어느새 새벽 1시가 훌쩍 넘었다. 초침이 한 번, 또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몸 속 어딘가에서 쿵, 쿵 하는 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상대방 쪽에서 전화를 받은 것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들려와 다시 한 번 통화시도를 했을 때에서였다. 예상대로 잠결에 전화를 받은 것인지 목소리가 갈라진다. 재희는 특유의 침착한 어조로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밝혔다.

“여보세요? 선생님. 접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아직 잠기운을 채 떨쳐내지 못했는지 통화 상대방은 단박에 재희의 음성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누구냐고 다시 묻는 상대방에게 재희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더욱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을 바꾸어 설명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 3부 석재희 검삽니다. 급히 좀 와주셨으면 합니다.”













꿈.
꿈이다.
꿈을 꾸고 있다.

손안에 꽉 잡히는 동그란 공의 감촉도, 선선하게 불어드는 바람결도, 멀리서 글러브 낀 손을 휙휙 흔드는 이의 모습과 얼른 던지라고 다그치는 음성까지도 모두 다 현실인 것처럼 선명했지만, 분명히 꿈이다. 지금의 무진 자신은 공을 던질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누구의 말처럼 한 번 흘러간 과거의 시간을 다시 돌이킬 수 없고, 현재의 자신이 공을 던질 수 없으며, 미래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면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그저 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꿈이라고 하더라도 허망한 마음을 갖는 것은 사치다. 근래에 자주 꾸던 악몽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처지라는 거다. 손 안에 꽉 차는 공을 바라보다가 공중으로 휙, 휙 던졌다. 직선을 그리며 곧게 올라가던 공은 다시 손바닥 안으로 휘감겨 들어온다. 이 감촉만은 변함이 없다. 꿈결 속에서도.

야구를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그 전까지는 주로 친구 두세 명과 캐치볼을 하거나 홀로 벽을 보고서서 공을 던져 벽에 맞고 튕겨 나온 공을 다시 잡으며 노는 게 고작이었다. 딱히 야구경기 자체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그저 야구라는 것이 던지고 싶은 만큼 힘껏 공을 던질 수 있는 것이라 하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을 뿐.

중학교 2학년임에도 야구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특별히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고, 그런 것도 낙하산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낙하산을 태워줄 만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야구부에 변변찮은 투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취미삼아 만들어 놓은 야구부의 유일한 투수가 3학년이 되면서 명색의 야구부라는 곳에 한 학기 가량이나 투수 자리가 비어 있었다는 거다.

- 너, 공부도 딱히 잘하지 않으니까 우리 야구부에 들어올래? 와서 투수나 해라.

아마도 그런 뉘앙스였다. 처음 무진에게 투수를 하라고 권하던 같은 반 급우의 말은. 투수‘나’하라고. 무진이 틈만 나면 야구공을 주물거리며 노는 걸 지켜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와 아무런 무게감도 없이 툭 던진 말이었다. 그래서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딱히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고, 방과 후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존재자체도 희미할 정도로 정원이 고작 10명이던 야구부는 어중이떠중이의 집합이었다. 위로 붕 뜨는 공조차 잡지 못하는 외야수더러 수비를 보라고 하느니 나무토막을 세워놓는 게 더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땅볼도 엉덩이나 허벅지에 맞고 아프다며 징징거리는 내야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자가 무진의 공을 쳐냈을 때나 볼 수 있는 드문 광경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땅볼이든, 뜬공이든 쳐낼 타자가 없다는 것에 있었다.  

그런 약점들 모두를 차치하고서라도 문제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진이 야구부에 가진 가장 큰 불만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했다고 허세를 부리던 포수가 무진이 공을 힘껏 던지면 번번이 놓치거나 겁을 집어 먹곤 몸을 사렸다는 점이다. 어째서 그런 놈들이 야구를 하겠다고 모여든 것인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상황이 그러하니 정식으로 야구를 하는 것이 친구들과 캐치볼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학교 대운동장 옆에 따로 마련한 야구부 전용 훈련장을 없애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야구부지만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부원수가 쉰에 달할 정도로 많았고,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그 야구부를 거쳐 갔다고 한다. 그렇게나 대단했던 야구부가 언제부터 시들시들해졌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지만.

여느 날과 같은 날이었다. 부원들은 탈의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개를 쳐들고 야구중계를 하는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분해진 무진만이 밖으로 나와 야구부에 입부하기 전에도 그랬듯, 벽을 보고서서 공을 던지고 받았다가 다시 던지길 반복했다. 문득 잡기 힘든 공을 던져보고 싶었다. 공이 날아오면 얼굴을 감추는 것부터 하는 바보포수라서 못 잡는 공이 아닌, 누구라도 잡을 수 없는-혹은 쳐낼 수 없는 빠르고 강한 공을 던져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딛는 다리에 힘을 콱 주고서 허리를 완전히 비틀었다가 튕기면서 팔을 크게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바람의 저항이 강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진의 손에서 빨려나가 벽에 강하게 부딪친 공은 빠르고 크게 휘면서 튕겨 나왔다. 무진이 그것을 잡기 위해 글러브를 낀 오른쪽 팔을 힘껏 쳐들며 자리를 박차고 뛰어 올랐지만 그 조차도 너끈히 넘겨버리는 높이였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탁.

묵직한 마찰음이 들렸다. 그래서 뒤를 돌아봤다. 그때, 틀림없이 줍기 힘든 곳으로 굴러가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공은 한 남자의 손에 콱 잡혀 있었다. 남자는 이십대 중반, 혹은 후반 즈음이 되어보였는데, 그는 공을 건네 달라는 듯이 글러브를 쩍 벌리는 무진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뿐 공을 넘겨주지 않았다.

당시 무진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야구중계가 끝난 뒤 밖으로 느릿느릿 걸어 나오던 부원들이 그를 보며 호들갑을 떨어댔고, 그 이름을 들었을 때에서야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고, 교장까지도 달려 나와 그를 반기는 모습을 보곤 제법 대단한 사람이겠거니 싶었을 뿐이다.  

- 어깨에 힘만 준다고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는 게 아냐, 애송이. 힘을 빼라고.

마음껏 던질 뿐인데 누군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떠드는 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 우연한 만남이 무진 본인에게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문선배이자 유명 프로야구 선수였던 그의 추천으로 매년 고교야구에서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고등학교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교외대회엔 출전조차 한 적이 없어서 캐스팅은 고사하고, 입학을 생각지도 않았던 학교였다.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야구에 빠져들어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그러나 아버지인 한 회장은 무진이 야구명문이긴 해도 엄연히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감독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한 회장을 찾아가 무진이 공 던지는 것을 좋아하고, 마땅한 실력도 갖추었으며, 타고난 유연성이 있어 잘만 훈련시키면 훌륭한 선수가 될 거라고 설득했지만 한 회장은 단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야구부를 계속 하기 위한 훈련비는 물론이거니와 학비조차도 챙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무진은 늘 장학생이 되지 않으면 안 됐다. 오로지 공을 계속 던지기 위해서였다. 그 손으로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을 때리고,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공을 던지기 위해서.

- 그저 내 말만으로 무진이 너를 장학생으로 추천하는 것도 이제 한계인 것 같다. 아직 넌 1학년이라 교외 대회에 출전해서 성적을 내본 적도 없고. 너도 알다시피 너보다 가정환경이 좋지 않은 녀석들이 2, 3학년 중에도 많아. 지금으로썬 무진이 네 아버님이 마음을 바꾸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아버지는 여전하시냐?
- 네. 그 사람은 아마 평생 용납 안 할 겁니다.
- 흐음. 그러면 이렇게 하자.
- ……?
- 2학년 투수 중 한 놈이 지난번에 다친 팔꿈치가 아직 다 낫질 않았다고 해서 마침 그 자릴 대신할 녀석이 필요했다. 넌 아직 1학년이고, 출전경험도 없는데다 키도 작지만 방법이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구나. 다음 주부터 시작될 도지사배 대회에서 네가 그 녀석 자릴 대신하는 게다. 물론 경기는 3학년 위주로 풀어나갈 테고 네가 한 번이라도 등판될 기회가 있을지 어떨지 장담할 순 없지만. 만약 기회가 온다면 그 때엔 모두에게 확실히 보여야 하지 않겠냐?

만약 기회가 온다면 모두에게 확실히 보여야 한다, 무진이 여전히 장학생이어야 하는 이유를. 그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든다면 그 땐 정말 방법이 없으리라. 결국은 아버지, 한 회장의 뜻에 굴복당한 채 손에서 공을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일을, 평생을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조폭의 아들이라고 똑같이 악질적인 조폭이 되는 것,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진은 의지를 다지며 말했다. 감독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올지 안 올지 확신할 수도 없는 그 기회가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다는 것을 무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백 개씩 공을 던졌다. 모두가 훈련을 마치고 지쳐 돌아갈 때에도 홀로 남아서 훈련을 계속했다. 주말이라고 쉬는 법 없이, 새벽같이 집을 나와서 하루 종일 개인훈련을 하다가 버스가 끊기고 나서야 뛰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지나가지 않을 것 같던 일주일을 보냈다.

욱신거리는 몸을 어르고 다를 새도 없이, 파스 한 장 붙이는 법도 없이 몰아치듯 보내다보니 피로가 누적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모처럼 밤 훈련도 빼고 잠든 경기 전날 밤에는 너무 깊이 잠이 들어서, 결국 경기가 있는 당일엔 늦잠을 자고 말았다.

- 으악, 늦었잖아!

이부자리를 정리할 정신은 당연히 없었거니와 시합이 있음에도 아침도 거르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가면 기다리는 시간동안 초조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몸도 풀어줄 겸 자전거를 타고서였다. 부지런히 폐달을 밟아 비탈진 언덕길을 매끄럽게 돌아 내려갔다. 살갗에 스치는 바람도 적절히 선선했고, 늦잠을 잤긴 했지만 푹 잔 덕택에 기력도 회복되어 여러모로 컨디션이 좋았다. 그 상태 그대로라면 공은 백 번도, 이 백 번도 던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은 무진의 자전거가 비탈을 막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주택가 골목과 연결되어 있어 종종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은 늦잠을 잔 탓에 출근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이후였고, 따라서 길에는 차는 물론 인적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강아지 한 마리가 도로로 튕겨 나온 작은 고무공을 쫓아 덜컥 달려든 거다.

- 꺄악! 덕구야!

강아지의 주인임에 분명할 어린 여자아이가 두 귀를 손으로 꾹 막으며 소리를 꽥 질렀다. 굴러간 공을 입에 문 강아지는 피할 새도 없이 달려드는 무진의 자전거를 보곤 놀라서 우뚝 멈추어 섰을 뿐이었다. 무진의 자전거에는 비탈길을 달려 내려왔기 때문에 가속도가 붙어 있었다. 브레이크를 잡고, 발로 바닥을 쓸 듯이 내려왔음에도 그 속도가 줄지 않았다. 그대로는 어린 강아지가 무진의 자전거에 치여 저만치 날아가거나, 무진이 강아지를 피하려다가 자전거와 함께 꼴사납게 구를 게 분명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당연히 그랬다. 무진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경기를 앞두고 있었고, 그 기회를 잡으려면 어찌됐든 무사히 경기장에 도착하고 봐야 했다. 물론 강아지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자전거와 충돌하는 충격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을 테고 지켜보던 주인 아이가 큰 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남을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고 희생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 젠장.

무진은 질끈 두 눈을 감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모든 일에서 무책임해져 버리려고 했지만 순간적으로 작은 몸을 둥글게 말고 짧은 꼬리를 바들바들 떠는 강아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젠장. 젠장. 젠장.

무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잡고 있던 자전거 손잡이를 왼쪽으로 강하게 틀었다. 갑작스레 방향이 전환되자 자전거가 버티질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그와 동시에 무진의 몸도 공중으로 불안정하게 퉁, 퉁 튀겨댔다. 자전거의 어딘가가 땅에 쓸리듯 괴이한 소리도 났다. 끝이다.

기기기긱. 콰앙.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딱딱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따끔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몰려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폐가 눌려 마른기침이 연거푸 터졌다. 눈을 떴을 때 무진의 자전거는 저만치 나가떨어져 있었다. 자전거의 바퀴만이 이제껏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연방 팽글팽글 돌아갔다. 무진은 배를 바닥에 댄 채로 엎어져 있었는데, 왼쪽 팔꿈치와 두 무릎에서 제법 따끔따끔한 통증이 올라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곧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강아지를 품에 안은 여자아이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 오빠, 아파?
- 학생, 괜찮니?

한참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무진의 상태를 걱정하며,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을 던졌다. 어떤 남자는 팔이나 다리가 괜찮은지 한 번 크게 돌려보라고도 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삔 것은 아닌지 팔은 무리 없이 돌아갔다. 몸을 지탱해줄 발목도 무사한 것 같았다. 무진은 계속 괜찮은 거냐며, 아프다면 구급차를 불러주겠다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나가떨어져 있던 자전거를 다시 타곤 빠르게 폐달을 밟았다.

다행스럽게도 늦지 않게 경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 무진의 몰골을 보고 다들 놀란 눈치였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을 시간도, 설명할 여유도 없었다. 고작 고교대항전이었고, 전국대회도 아닌 도대회에 불과했지만 경기장에는 제법 관중들이 있었다. 그러나 고교대회에서 늘 우승후보로 거론되는 야구부였던 만큼 긴장하거나 하는 이도 딱히 없었고 경기는 수월하게 풀렸다. 5회 말이 끝난 시점까지 단 한 점도 내주질 않고 3점을 따왔으니 말이다.

감독은 6회 초 공격이 시작될 때부터 3학년 주전 에이스를 빼고 무진을 마운드에 올려 보냈다. 보기 드문 왼손투수인데다가 고작 1학년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구장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마운드로 쏠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잘 던져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무진이 그 자리를 계속 지킨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의구심도 품지 않도록. 포수의 사인이 떨어졌고 무진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포수의 미트를 향해서 힘껏 공을 던졌다. 자세는 완벽했다. 그러나 공은 포수의 미트에 맞아 뒤로 빠지고 말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또 한 번. 몇 번을 던져도 마찬가지였다.

까진 팔꿈치의 통증이 미묘하게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자세는 평소와 다름이 없는데도 손끝의 흔들림으로 제구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고교야구 특성상 프로야구와는 달리 타율이 높지 않았고, 순전히 그 덕에 2점을 빼앗기는 것으로 6회 초를 마무리했지만 이대로 경기를 이끌어간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승리는 고사하고 마운드조차도 지킬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모처럼 투수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깟 통증 때문에 마운드를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무진은 6회 말 공격이 이어지는 사이에 잠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팔꿈치가 참을 수 없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선수전용 화장실을 사용하다가 상처가 났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꼼짝없이 마운드에서 끌려 내려올 될 것이다. 그래서 관중들이 몰려 앉아 있는 곳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인적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운 물을 틀어놓고 화끈거리는 팔꿈치를 식혔다. 머릿속 어딘가가 왕왕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물이 너무나도 차가워 통증조차도 무디게 만들었다. 그러나 물을 잠그면 어김없이 화끈거리는 통증이 몰려들었다. 공격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그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숨을 한 번 길게 내뱉은 후 수도꼭지를 잠갔다. 상처에 물이 닿아 더욱 따끔따끔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제대로 닦지 않아 흐릿한 거울을 통해 제 얼굴을 바라보던 무진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잠시 벗어두었던 모자를 눌러썼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갑작스레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 그 손을 해서도 마운드에서 내려가지 않겠다는 거냐?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반응하여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모자를 깊게 눌러쓴 탓에 시야가 좁아져서 문가에 서 있는 누군가의 길게 뻗어있는 다리만 보였을 뿐이었다. 서둘러 모자를 벗고서 상대방의 얼굴을 노려봤다. 선배라고 하기엔 들어본 적이 없는 음성을 지녔던 그는 얼굴 또한 낯설었고 유니폼도 입고 있지 않았다.

- 너 때문에 팀 전체가 질 수도 있는데 고집을 부리려는 거냐고 묻는 거다.

자신의 얼굴을 쏘아보며 오도카니 서 있던 무진에게 그가 다시금 입을 열어 말했다. 화가 났다. 무진에 대해서는 일절 아는 것이 없는 그가, 무진의 사정에 대해서는 당연히 모를 그가, 오늘 아침에 무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관심도 없을 그가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게 참을 수 없이 짜증이 났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멱살을 왈칵 잡아 쥐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아무것도 모르면서 멋대로 지껄이지 마!

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무진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악력이 대단했다. 버티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찬물에 흠뻑 젖어 있던 무진의 팔꿈치를 제 손으로 콱 움켜잡았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무진에게선 화장실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비명이 터졌다.

- 아악!

무진이 짜증스레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그를 확 떨쳐내자 그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그가 누구이고, 어떻게 무진의 부상을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을 적나라하게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등을 돌려 화장실을 빠져나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군.

어?

뒤늦게야 무진이 이를 갈며 쫓아 나갔을 땐 그는 이미 등을 보이며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즈음 6회 말 공격이 끝나서 그를 따라가 볼 엄두를 내보지도 못했다. 그 다음부터는 악에 받쳐서 공을 던졌다. 순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못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경기를 끝냈다. 단 1점이 앞선 투아웃 상태에서 상대편 주자가 3루를 밟고 있을 때, 4번 타자에게서 보란 듯이 삼진을 잡아.   

경기를 끝내고 관중석을 둘러봤지만 그를 발견하진 못했다. 그가 경기장을 빠져나갔기 때문인지, 아니면 몇몇의 관중들에게 섞여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발견한다면 잘 봤느냐고 한 번은 떵떵거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끝내 무진은 그날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10년도 훨씬 더 넘은 근래에 재희에게서 그가 했던 말과 같은 말을 듣고 문득 그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이를 갈면서 그 얼굴을 똑똑히 봐두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저 무진에게 등을 보이며 점점 더 멀리 걸어가는 그 뒷모습만이 반복되어 눈에 보일 뿐이다. 꿈속인데 잡아서 그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꿈속이라서 몸이 제 것 같지가 않아 도무지 그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넌, 누구지?
넌…… 대체 누구야?













툭.

무언가가 얼굴로 떨어졌다. 무겁지는 않았다. 그저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던 와중에 갑자기 뭔가에 덮쳐지니 좀 놀랐을 뿐이다. 무진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위아래의 속눈썹끼리 서로 들러붙기라도 했는지 쉽사리 눈을 뜰 수가 없다.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리던 무진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서서히 선명해져오는 시야 속에 황갈색의 무언가가 꽉 들어찼다. 감촉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코와 입을 막아 좀 갑갑하기도 했다.

무진은 바위를 달아놓은 것처럼 묵직한 팔을 들어 제 얼굴 위로 떨어져 있는 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좀 거리를 떼어놓고 보니 그것의 정체가 확실히 보인다. 곰 인형이다. 그것도 무진의 눈에 익기까지 한. 재동에게 직접 사준 것이니 틀림은 없을 거다. 그런데 이게 왜 얼굴 위로 떨어져 있었던 걸까. 밤늦게 아파트 근처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었는데. 그런 생각을 순차적으로 하던 무진은 제 시야에서 곰 인형을 홱 치우며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푸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벽지와 깔끔한 침구들이 보인다. 볕이 잘 드는 창문이 바로 옆에 있어서 지금이 낮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물론 그 모두가 결코 익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쪽저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무진은 침대 바로 옆에서 무언가가 꼬물거리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두 주먹까지도 꽉 쥐고 경계하는 자세도 취했다. 그 빠르고 날렵한 동작에 침대 옆에 붙어 있던 재동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여진다. 재동을 발견한 무진도 놀람과 당황스러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
“…….”

무진과 재동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재동이 대뜸 등을 돌려서 타다닥 하는 소리를 내며 달려 나가는 바람에 무진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떤 얼굴을 했기에 아이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냅다 도망을 간 걸까. 아니, 그 전에 자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와 있는 걸까. 무진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그러한 생각을 하다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잡았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 꾼 꿈이며,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들, 갖가지 생각들이 번잡하게 섞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제 좀 정신이 듭니까?”

무진이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문가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자 재희가 보였다. 재희의 바지를 작은 두 손으로 콱 움켜잡고 있는 재동의 모습도. 무진 본인의 얼굴이 무서워서 도망가 버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재동은 어쩌면 재희를 데리러 갔던 모양이다. 잠들어 있는 무진의 곁에서 한참을 꼬물거리다가 무진이 깨어나는 것을 보고는 그 사실을 재희에게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Second Daddy _ 06







“어떻게 된 겁니까? 그저께는.”
“그저께?”

무진은 추궁하듯 묻는 재희의 말을 고스란히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단 말인가? 하긴. 꽤나 긴 꿈을 꾸긴 했었다. 꿈이라기보다는 과거의 한 조각 기억이라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에서야 창수가 무진의 허락도 없이 그의 바지를 세탁소 남자에게 맡긴 것을 알았다. 물론 그런 일을 처리하는데 창수는 일일이 무진의 허락을 구하진 않았고, 무진 또한 평소에는 그러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땐 사정이 달랐다. 재동에게서 받은 사탕이 바지주머니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좋지 않은 인연으로 엮어 적대시하고 있던 놈들이 아무래도 보복을 하려는 것 같다는 정한의 충고가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혼자 있지 않는 게 좋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은 이미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세탁물 수거차량을 붙잡아 사탕을 찾고 돌아가려던 길에 괴한들이 들이닥쳐서 칼을 맞았고, 그들의 차를 몰아 정신없이 달렸다.

딱히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이성적인 생각과 판단을 할 여유가 없었기에 무슨 생각이 있어 재희의 아파트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거다. 그저 갈 곳이 없었다. 몸을 피할 곳이, 잠시나마 숨어 있을 곳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30년을 살면서도 자신의 집과 사무실 밖에는 달리 아는 곳조차 없었다. 며칠 전 창수와 함께 뒤를 밟아 알아냈던 재희의 집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판단능력이 제로가 된 것이 아니고서야 그 몰골을 하고서 재희의 집을 찾을 결단을 내렸단 말인가. 이래서야 무진이 재동에게 접근하지 말아야 할 구실만 더 늘어나버린 게 아니냔 말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 앞에 피범벅이 되서 나타난 조폭 아비라니. 무진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림이 영 아니다. 아니, 그림이 되고 말고를 따지기 전에 도리가 아닌 것 같다.

혼자만의 긴 생각에 잠겼던 무진은 고개를 숙여 제 복부를 바라봤다. 판단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릴 만큼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하던 상처 부위에서 통증이랄 게 딱히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좀 당기고 따끔따끔하면서 화끈거리는 느낌은 있지만 지금껏 느껴본 통증들에 비하면 그런 것은 통증이라 말하기도 뭣하다. 곧 무진의 시야에 매끈하게 잘 붙어 있는 거즈가 보였다. 거즈에 살짝 피가 스민 흔적은 있지만 출혈도 거의 멈춘 것 같았다. 아마도 상처 부위를 말끔히 꿰매고 소독까지 한 것이리라. 게다가 무진은 피로 얼룩졌을 티셔츠 대신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용케 장기들은 피해갔다고 하더군요.”

무진이 제 상처부위만 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자 재희가 누군가에게 들은 말을 전하듯 말했다. 그제야 무진은 고개를 들어 재희를 바라봤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섞이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두 눈에는 아주 약간의 의구심만 내비치고 있을 뿐이다. 재희는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었다가 한참만에야 깨어난 조폭이 가장 먼저 할 고민에 대해 미루어 짐작하고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믿을 만한 의사선생님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무진을 치료한 의사가 경찰에 연락을 한다거나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제 집 앞에 배에 칼이 꽂힌 채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정신이 없었을 텐데도 그 와중에 그가 조폭이라는 것과 그래서 병원으로 수송될 경우에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미리 짐작하고 빠르게 대처했다는 것이 실로 놀랍다. 재희가 조금만 덜 단정하고 덜 말끔한 인상을 가졌다면 혹시 조직의 일을 하고 있는 자가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렇지 않은가? 일반인이라면 그 상황에서 당연히 119에 연락을 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재희에게 큰 신세를 졌다. 그간 그의 침대도 독차지 한 것 같고, 옷까지 빌려 입고, 어쩌면 시중까지 들게 했으리라. 보통은 이럴 때 빈말로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것이다. 그러나 재희를 빤히 바라보던 무진의 입에서는 그 간지러운 인사말 대신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말이 내뱉어졌을 뿐이다.

“어째서냐?”
“그런 식으로 앞뒤 잘라버리고 물으면, 적당한 대답을 하기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너, 의외로 착해빠진 거냐? 아니면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은 거냐?”
“현관문 앞에 쓰러져 있던 한무진씨를 내 집에 거둬들이고 치료까지 해가며 보살핀 이유를 묻는 거라면 둘 다 아닙니다.”
“그럼 뭔데? 날 살려낸 걸로 돈을 뜯어낼 만큼 너 별로 가난해보이지도 않고…… 그대로 내버려뒀다면 혹시 알아? 다시는 내가 네 놈 앞에 알짱대면서 성가시게 굴지 못하게 될지도.”
“불쾌합니다.”
“뭐?”
“자기 집 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간다면 말입니다.”
“뭐야, 그런…….”

그의 말대로 누가 좋아하겠는가. 자신의 집 현관문 앞에 숨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사람이 쓰러져 있으면. 그러나 그 정도로 무진과 얽히기 싫었다면 그는 차라리 경찰을 부르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딱히 무진의 걱정을 할 만큼 무진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동이 상처받을 것을 걱정할 만큼 재동과 무진의 사이가 아직 각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히 무진이 자신의 집 앞에서 죽으면 불쾌해질 것이기 때문에 치료하고 간호까지 해주었다는 재희의 말에 납득할 수가 없다.

“숨겨달라고…… 도와달라고 날 찾아온 게 아니었습니까?”
“벼, 별로 그런 거 아냐.”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 것뿐이고.”

재희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어 말했다.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어투였다. 무진은 구태여 그에게 갈 곳이 딱히 없었고, 생각 없이 향하다보니 이곳으로 온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제 몸 하나 숨길 데가 없다는 건 어떠한 경우에서도 당당히 할 만한 말이 아니질 않은가.

“의미 없는 문답은 이쯤하고 이제 식사나 하죠. 곧 출근을 해야 하니까.”

무진이 쉽게 흥분하는데 반해 재희는 늘 차분한 것 같다. 무진이 내키지 않는 행동을 보였을 때에도 고작 미간만 찌푸리는 게 고작이고. 단 한 번도 격앙된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차분하다해서 방심할 수 없게도 그는 좀처럼 당해내기가 힘들다. 도대체 뭘 해먹고 사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진은 필히 재희가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리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억지를 쓰는데도 당해낼 수 없을 리가 없다.

“야, 너…….”

무진은 마저 식사준비를 하려는지 등을 돌리며 침실을 빠져나가려던 재희를 불러 세웠다. 그러자 재희가 잠시 걸음을 멈추곤 슬쩍 고개를 돌려 무진을 바라본다. 무진은 그에게 뭔가를 물으려다가 입만 뻐끔거렸다. 뭔가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좀 유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무진의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던 재희는 무진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진은 금방이라도 침실을 빠져나갈 것 같은 재희를 향해 다소 다급하게 입을 뗐다.

“사탕…….”
“사탕?”
“못 봤냐?”
“주머니, 뒤져보시죠.”

재희가 그 시선을 무진이 입고 있던 잠옷의 주머니 즈음에 힐긋 던지며 말했다. 무진은 재희가 침실을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잠옷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 그의 손끝에 무언가 딱딱한 게 걸리면서 사탕 포장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다행이다. 중간에 빠져버리지 않아서.

무진의 옷을 갈아입히다가 무진이 손에 콱 움켜쥐고서 한사코 놓지 않으려는 사탕을 발견하고는 보잘 것 없는 그 사탕 하나가 무진에겐 제법 중요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을 것이고, 나중에라도 무진이 그걸 다시 찾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재희가 잠자코 그것을 갈아입힌 잠옷 주머니 안에 잘 넣어두었던 걸 보면.   

“석재동. 손님 모시고와, 밥 먹게.”

잠시 후 부엌에서 재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때까지도 문가에 물러서서 엉덩이를 슬며시 흔들어가며 무진을 관찰하고 있던 재동이 쪼작 걸음을 떼듯 다가왔다. 무진은 느릿느릿하게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재동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무진이 앉아 있는 침대까지 걸어온 재동은 제 작은 두 손을 서로 맞대고 꼼지락거리며 무진을 올려다봤다. 재희가 시킨 바가 있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해야겠으나 그 방법을 몰라 나름 고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참동안 비선형을 그리듯 부풀어 오른 배를 양옆으로 흔들며 무진을 올려다보던 재동이 슬쩍 제 손을 무진에게 들어보였다. 그 손을 잡으라는 듯이. 그러나 단박에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한 무진이 빤히 내밀어진 녀석의 자그마한 손을 바라보기만 할뿐 꼼짝도 하지 않자 이번엔 까치발을 들곤 무진의 얼굴에 좀 더 가까이 제 손을 뻗는다. 무진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슬며시 제 손을 뻗어 재동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말캉말캉한 촉감이 손 안에 쏙 들어온다. 그제야 재동은 만족했다는 듯이 해쭉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녀석의 동그란 볼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무진은 재동의 미약한 힘에 이끌려 침대에서 나왔다. 재동은 아직 키가 작았기 때문에 녀석의 손을 잡기 위해선 상체를 조금 구부려야 했다. 그 탓에 상처 부위가 자극되면서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아니, 당장 죽을 지경이어도 참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잡고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재동의 작은 손을 놓아야 할 테니까 말이다.

부엌에는 2인용 식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마주보고 앉는 의자 옆쪽으로 하나의 의자가 더 놓여 있다. 아마도 그곳은 그녀의, 무진이 딱 한 번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그녀의 자리이리라. 상을 차리던 재희가 식탁의 의자 하나를 뒤로 빼내곤 무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그를 이끌어 빼낸 의자 앞으로 데려간 뒤 그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밀어 넣어 주었다. 온몸에 힘이 없는데다가 쉽게 몸을 구부리고 펴는 것조차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잠자코 있긴 했지만 무진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수줍거나 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쪽팔려서다. 재희의 행동은 마치 고급레스토랑에서 한껏 차려입은 여성을 에스코트할 때나 쓸 법한 것이질 않은가.

재희는 의자에 올라가려고 버둥거리는 재동을 안아 제자리에 앉혀주었다.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자마자 재동은 포크와 숟가락을 양손에 하나씩 잡아 쥐었다. 재희는 재동의 앞에는 양송이가 듬뿍 들어간 야채스프를, 그리고 무진의 앞에는 계란죽 한 사발을 각각 내려놓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으며 무진에게 말했다.

“위가 비어 있을 테니 당장은 죽부터 먹는 게 좋을 겁니다.”
“이왕 착한 척 할 생각인 거면 좀 씹을 수 있는 건더기로 줘. 이딴 건 먹어봤자 위한테 시비 거는 것밖엔 안 되잖아.”
“난 의사선생님 말씀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아무거나 집어먹곤 이번엔 배가 아프다고 하면 곤란한 건 내 쪽이니까요.”

재희가 묵묵히 머그컵을 들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한 가운데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재동은 고소하게 잘 구워진 식빵 위에 사과잼을 듬뿍 떠올렸다. 그리곤 작은 손으로 쥐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은 큰 숟가락을 들어 뭉친 잼을 대충 치덕치덕 펴 바르다간 견딜 수 없이 침이 고이는지 꿀꺽 침을 한 번 삼킨 후에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을 벌려 한 가득 빵을 베어 물었다. 녀석의 통통한 볼이 더욱 큼직하게 부풀어 오른다.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커피를 들이키는 재희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던 무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재동에게 향했다. 재동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열심히 입을 옴짝거려 빵을 집어 삼켰다. 목이 메어보였는지, 재희가 재동의 옆에 놓여 있던 우유를 재동에게 내민다. 재동은 뾰조롬 입술만 내밀어 재희가 내민 우유를 받아 마셨다. 아기 새 같지 않은가. 작은 부리를 뻐끔거리며 부모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잠자코 받아먹는.

오물오물. 호록호록. 쩝쩝.

재동이 볼을 씰룩거려가며 빵과 알맞게 익은 달걀프라이, 우유 등을 열심히 먹는 소리가 무진의 귀를 자극했다. 며칠간 영양제만 맞고 버틴 것인지 홀쭉해져버린 뱃속이 서서히 엉키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무진의 앞에 덩그러니 있는 것은 달걀죽이 들어 있는 사발 하나뿐이다. 무진은 하는 수 없이 사발 왼쪽에 놓여 있던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가 왼손잡이라는 것을 아는 창수나 정한이 차려준 밥상을 받는 게 습관이 되다보니, 사발 왼쪽에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 자체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무진이 묵묵히 숟가락을 들어 달걀죽을 뒤적이자, 재동을 챙겨주고 있던 재희의 시선이 소리 없이 무진에게로 향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진은 건더기라곤 거의 보이지 않는 달걀죽을 퍼 올려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뜨끈뜨끈하고, 고소하고, 뭘 넣었는지 달걀 특유의 비린내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진은 입속에 부드럽게 감기는 죽을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돌려 집 내부를 쭉 둘러봤다. 물건이 없어 깨끗할 수밖에 없는 무진의 집과는 대조적으로 재희의 집은 아이와 함께 사는 집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다. 누군가, 집안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라도 부리는 것일 게다. 무진은 그렇게 확신했다. 냉정하고 무심하기 그지없는 재희가 눈엣가시 같은 무진, 자신을 위해 아침부터 죽을 끓이는 모습은 상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무진이 달걀죽을 거의 다 비워갈 즈음, 재동이 포크를 야무지게 잡아들곤 비엔나소시지를 쿡 찍었다. 그러나 비엔나소시지가 기름에 겉돌면서 여지없이 그릇 밖으로 굴러 떨어진다. 재희에게서 그릇 밖으로 떨어진 음식은 주워 먹는 게 아니라고 배운 탓인지, 재동은 아쉬운 듯 떨어진 비엔나소시지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것을 힐금 곁눈질로 보던 무진이 손을 뻗어 덥석 떨어진 비엔나소시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재동의 시선이 여지없이 무진에게로 향한다. 무진은 주워든 비엔나소시지를 덥석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본 재동의 두 눈은 동그랗게 뜨여져 한 시도 깜빡이지 않았지만.

“음식 남기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나중에 죽으면 한꺼번에 다 섞어 먹게 되는 거다.”

무진이 자신을 빤히 보던 재동을 향해 입술을 찍 찢어 웃으면서 짓궂게 말했다.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지옥이라는 곳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진이 재희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았는지 재동이 고개를 홱 돌려서 재희를 빤히 봤다. 재희는 그런 재동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며, 재동의 그릇 위로 제 그릇의 소시지를 덜어주었다. 재동은 입은 크게 벌려 소시지를 입에 쓸어 넣고는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그리곤 대뜸 뒤로 돌더니 다리부터 하나, 하나 바닥에 디뎌 의자에서 내려왔다. 무엇을 하나 싶어서 쭉 지켜보자 의자에서 내려오자마자 소파로 달려가 텔레비전부터 켠다. 어린이방송을 보기 위해서다.  

고개를 완전히 돌리고 재동을 돌아보는 무진과 마찬가지로 재희도 한동안은 잠자코 재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뜸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어느새 죽 한 사발을 다 비운 무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덜컥 무진의 팔을 제 손으로 받치듯 잡으며 그를 끌어당겼다. 재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무진은 습관적으로 버티며 팔을 빼내려고 했다.  

“왜? 뭐? 야, 왜 이러는데?”

그러나 무진이 버티건 말건 재희는 힘으로 무진을 잡아끌곤 제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무진을 침대에 던지듯 앉혀놓고는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낸다. 하얀 박스였다. 재희는 그것을 들고 다시 무진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점점 더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자 무진의 두 눈에 자동으로 경계심이 어린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누가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오면 손 안에 힘이 들어가고, 한 시도 그 상대방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심장은 두 귀에 울릴 정도로 크게 뛰고.

재희가 무진의 상의에 손을 대자마자 무진이 홱 재희의 손을 떨쳐냈다. 누군가의 손이 이유 없이 몸에 닿는 게 싫다. 아니, 이유가 있더라도 싫다. 그것이 끊임없이, 수도 없이 닥쳐드는 위험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재희는 다시금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덜컥 무진의 상의를 붙들어 잡았다. 이내 고요하지만 날카롭게, 경고하듯 자신을 노려보는 무진의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쳤지만 조금도 주춤하는 기색이 없다. 여전히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는 지나친 차분함만이 고여 있을 뿐이다.

한동안 말없이 무진의 두 눈을 내려다보던 재희가 무진의 상의를 위로 휙 걷어 올렸다. 그리곤 무진의 몸에 잘 붙어있던 거즈를 떼어냈다. 꿰매긴 했지만 아직 아물지 않아 살짝 벌어진 상처에서 핏기가 비쳤다. 재희는 하얀 상자를 열어 핀셋과 솜을 꺼내들고는 솜에 소독약을 묻혀 무진의 상처 부위에 천천히 발라나갔다. 상처부위에서 올라오는 따끔따끔한 통증에 무진의 미간에 금세 주름이 잡힌다. 소독이 끝난 상처 위에 새로운 거즈를 잘 붙여준 재희가 의료상자를 정리하며 말했다.

“소독은 아침, 저녁으로 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만…… 그런 섬세함을 한무진씨한테 바라는 건 무리일 것 같군요. 어차피 저녁 소독도 내가 하게 될 테니 그냥 알아두라고 말하는 겁니다. 출근해봐야 알겠지만 그리 늦진 않을 겁니다. 재동이 점심은 12시쯤 먹이는 게 좋습니다. 두 시 넘어서 졸려하면 낮잠 좀 재우세요. 저녁은 제가 와서 먹일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뭐? 그 말은 나더러 계속 여기 있으라는 거냐?”
“딱히 갈 곳도 없지 않습니까?”
“멋대로 단정 짓지 마. 여기에 계속 눌러앉아서 신세질 생각은 없어.”
“신세라고 생각하는 만큼 일을 돕는다면 별로 신세를 지는 게 아닐 텐데요.”
“대체 뭐야, 너. 언제는 알짱거리지 말라면서?”
“갑작스런 어린이집 보수 공사 때문에 그동안 재동일 달리 맡겨둘 곳이 없는 것뿐입니다.”

재희는 넥타이를 의료상자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고는 넥타이를 익숙하게 둘러매며 말했다. 여전히 그의 말 어디에서도 무진을 염려한다거나 생각하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지만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딱히 뭐라고 할 순 없지만, 속고 있는 것 같아서 찝찝한 기분. 그러나 그 원인을 파악할 수가 없을 만큼 재희는 틈을 보이질 않는다. 정말 모르겠는 건, 무진더러 재동의 아버지 노릇을 할 생각일랑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던 재희가 무진이 재동의 곁에 있는 것을 은근슬쩍 눈감아주고 있다는 점이다.

구김이라곤 없는 재킷을 걸쳐 입은 재희가 거실로 나가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던 재동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곤 녀석에게 당분간 어린이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해주었다. 재동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기뻐하는 기색 또한 없었지만. 재희는 작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자신을 배웅하는 재동을 돌아보다가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무진은 재희가 나가느라 열렸던 현관문이 천천히 닫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을 뿐이다. 현관문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돌아가 잠기자 현관문 앞에서 살랑살랑 손을 흔들던 재동이 고개를 돌려 무진을 빤히 바라봤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발산하는 이 작은 생명체와 한 공간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것이다.

재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실외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휴대폰 메뉴 중 전화번호부를 선택해 전화번호를 하나 찾아낸다. 통화버튼을 누르는 그의 휴대폰 액정에는 ‘어린이집’이라는 네 글자가 나타났다. 잠시 후 아이들을 태우러 올 준비를 하고 있었을 어린이집 선생이 전화를 받았다. 재희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제 SUV의 운전석 문을 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의 집 베란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선생님. 며칠간 재동이가 어린이집에 못 나갈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무진은 덩그러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식탁 위에는 아침식사를 하고 난 후의 그릇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치워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끼진 않는다. 제동은 무진이 누워 있는 침대 아래에서 곰 인형을 옆구리에 야무지게 낀 채로 고무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공을 탕탕 튕겨가며 혼자 열심히 놀다가도 한 번씩 고개를 돌려 무진을 돌아본다. 그리곤 시선이 마주쳐도 무진이 별다른 행동도 보이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면 다시 고개를 돌려 열심히 공놀이를 하는 거다.

무진은 그런 재동의 뒤통수를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동그란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인데도 딱히 따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참동안 공을 튕기며 놀던 재동이 그것도 시시해졌는지 저만치 굴러가버리는 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또 홱 고개를 돌려 무진을 보는 것이다.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참 맑다. 어렸을 때엔 누구라도 다 그런 건가? 다 그런데, 세상풍파에 시달리다보니 저절로 혼탁해지는 건가? 상상할 수 없다. 무진 자신이 어렸을 때에 재동과 같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한참동안 무진을 빤히 보던 재동이 몸을 일으키더니 방에서 투다닥 뛰어나갔다. 어디로 가는가 싶어서 슬쩍 목을 빼고 바라보니 냅다 달려간 곳이 부엌의 냉장고 앞이었다. 벽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1시가 넘었다. 그새 출출해졌던 모양이다. 재동은 냉장고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가까스로 냉장고 손잡이가 녀석의 손에 잡혔지만 그 묵직한 문을 녀석의 미약한 힘으로 열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진은 묵직하게 까라지는 몸을 일으켜서 녀석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끙끙거리며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던 재동의 뒷덜미를 잡아 녀석을 옆으로 끌어낸 무진이 가뿐하게 냉장고 문을 연다. 말끔히 정돈되어 있는 냉장고에 요구르트라든가, 치즈, 소시지 등의 간식거리가 많은 것은 다 재동 때문일 거다. 냉장고를 슥 둘러보던 무진이 제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재동을 내려다봤다. 재동은 손가락을 쭉 뻗어서 무언가를 가리켜보였다. 재동의 손가락이 뻗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무진의 시선이 선반에 닿는다. 선반에는 생수 몇 병과 초코우유 서너 개가 들어 있었다.

“뭐. 이거?”

초코우유를 집어 들고 묻자 재동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은 초코우유 하나를 꺼내 재동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러자 재동이 또다시 투다닥 뛰어서 침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봤자 그 섬세하지 못한 손으론 우유팩을 열지도 못할 거면서. 정말 어린아이는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간다. 무진은 냉장고 문을 나직이 닫고 재동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왔다. 무진의 짐작대로 재동은 뜯기지 않는 우유팩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었다. 재동의 손에서 초코우유를 낚아채 듯 집어든 무진이 녀석의 침이 묻은 우유팩을 쪽 열어서 다시 녀석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우유를 받아들곤 꿀꺽꿀꺽 맛있게 먹던 재동이 문득 고개를 숙여 제 다리에 걸쳐져 있던 곰 인형을 내려다본다.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던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이 얼마나 끝없고 그 성품은 또 얼마나 순진무구한지를. 재동은 곰 인형을 아기처럼 떠받쳐 안더니 대뜸 초코우유를 곰 인형의 주둥이에 들이부었다. 곰 인형도 초코우유를 먹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뭐하는 거야, 인마!”

곰 인형의 털이 초코우유에 흠뻑 물드는 걸 지켜보던 무진이 경악해 소리치며 곰 인형을 낚아챘다. 그러나 참담하게도 이미 곰 인형은 초코우유에 흠뻑 젖어버린 후다. 무진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 놀란 것인지, 아니면 곰 인형을 갑자기 빼앗겨 놀란 것인지 재동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진을 바라봤다. 뭔가 평소보다는 눈동자에 좀 더 습기가 고인 것 같다.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무진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으며 흠뻑 젖은 곰 인형을 바라보자 재동이 자리에서 일어서선 두 팔을 쭉 뻗었다. 무진의 손에 잡혀 있던 곰 인형을 돌려달라는 듯이.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곰 인형에 제 손이 닿지 않자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한다. 어쩐지 평소보다 초롱초롱하던 눈가에는 금세 물기가 고였다. 금방이라도 통통한 볼을 타고 투둑, 툭 떨어질 기세다. 대체 무진 본인이 뭘 어쨌다고 녀석이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어도.  

“이게 가지고 싶으면 달라고 똑바로 얘기해.”

무진이 재동을 타이르듯 말했지만 재동은 한결같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손을 뻗을 뿐이다. 끙끙 앓는 소리를 하다가 제법 애가 타는지 발도 동동 구른다. 무진은 두 손으로 제 바짓가랑이를 잡고 마구 끌어당기는 재동의 작은 손을 잡아 떼어내며, 좀 더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똑바로 얘기하라잖아, 사내새끼가 눈물만 찔끔거리지 말고.”
“으응…… 응…… 흐으응…….”

그러나 몸을 빌빌 꼬며 발만 동동 구르던 재동은 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무진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곤 통통한 손등으로 슥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는 것이다. 꼬물거리며 눈물을 훔쳐내면서도 곰 인형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지는 못하는 재동의 모습을 지켜보던 무진은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설마. 그럴 리가. 아닐 거다.

무진은 곰 인형을 바닥에 처박듯 내던지고는 재동을 가뿐히 들어 안았다. 다소 거칠게 녀석을 침대 위에 앉힌 무진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재동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자꾸만 몸을 동그랗게 말려고 드는 녀석의 작은 어깨도 두 손으로 콱 잡아 쥔 채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갑자기 뒷골이 당기면서 시야가 아득해진다. 무진은 제 예감이 빗나간 것이길 바라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입을 뗐다. 진정이 되질 않아서 새된 목소리가 튀어 나가고 말았다.

“말해! 말하라고! 뭐가 필요한지, 뭐가 갖고 싶은지, 쳐울지 말고 말하란 말이야!”

무진의 다그침에 재동은 결국 맑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고 말았다. 그런데도 우는 소리가 크질 않다. 아니, 크지 않은 게 아니라 흐느끼는 소리만 들릴 뿐 그 울음소리조차도 제대로 들리질 않는다. 무진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우는 재동의 동그란 얼굴을 제 두 손으로 잡았다. 눈물로 가득 찬 재동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무진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참담한 표정이 내걸렸다.  

“네 녀석, 어째서 한마디도 안…… 설마…… 못하는 거냐?”





   




Second Daddy _ 07







재희는 1분에도 몇 번씩 제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시간을 확인한 후 한참이 지난 것 같아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지만 전보다 고작 1, 2분여가 흘렀을 뿐이다. 오늘따라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간다. 평소에는 배당된 수십 건의 사건을 처리하느라 늘 부족한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오늘이라고 다를 게 없다. 여전히 시간은 부족하다. 오늘 안으로 훑어봐야할 사건의 기록들이 책상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는 거다. 다만 재희 혼자만이 평소와 달리 일을 제대로 손에 잡지 못하고 초조하게 연방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을 뿐.  

“검사님, 오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느새 다가왔는지 책상 앞에 서 있던 김 계장이 재희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재희의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이 그의 눈에도 자꾸 거슬렸던 모양이다. 재희는 다소 애매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이건 오늘 배당된 사건인데요.”
“한 건 입니까?”
“네.”

재희는 김 계장이 내미는 기록을 받아들었다. 두께가 웬만한 사전을 능가한다. 그만큼 사건과 관련된 이해관계가 많다는 것이리라. 평소라면 뒤로 미뤄두는 법 없이 당장에 그 내용을 살펴보았겠지만 오늘은 그저 그 기록을 잔뜩 쌓여 있는 다른 사건파일들 위로 얹어놓을 뿐이다. 지금 그의 손에 붙들려 있는 사건기록은 그가 아침에 출근을 한 이후부터 쭉 들여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그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재희는 아무 일도 없노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아무 일이 없는 것은 아닐 거라는 걸 말이다. 게다가 늘 일밖에 모르던 그가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초조해하는, 그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니 당연히 눈에 띄어서 자꾸 시선이 간다. 그래도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더 캐물을 수는 없겠지만. 김 계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자코 제자리 돌아갔다.

재희는 또다시 습관처럼 제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그러나 시침은 여전히도 같은 자리에서 머물고 있을 뿐이다. 재동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어린아이를 홀로 집 안에 두고 온 기분이 든다. 딱히 무진이 못 미더워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진이 재동을 잘 돌보고 있을 거라 완전히 믿는다면 초조해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재희는 고개를 내저어서 잡념을 떨쳐내곤 다시 손에 들린 사건기록에 집중했다. 그 하나의 기록만 하더라도 수백 페이지에 달해 부지런히 읽는다고 하더라도 오늘 안에 다 읽을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을 해보려고 용을 써도 깨알 같은 글씨들이 공중에 두둥실 떠다니는 것만 같다.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고, 눈으로 글자를 보는데도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는다. 미간까지 찌푸리며 기록을 들여다보지만 헛수고다.

똑똑.

재희는 불현듯 들려온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가를 바라봤다. 닫혀 있던 문이 바깥에서부터 슬쩍 틈을 내며 열리더니 그 틈새로 선배검사인 유 검사가 슬쩍 얼굴을 드민다. 재희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런 기척에 문가를 바라보던 김 계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유 검사에게 인사를 했다. 유 검사는 김 사무관을 향해 슬쩍 손만 한 번 들어 보이곤 유유히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뭘 그렇게 인상 쓰고 보냐? 그러다간 금세 늙는다고, 석검.”
“선배…… 어쩐 일입니까?”
“어쩐 일이긴. 담배 피우러 가는 김에 들렀지. 같이 가자고.”
“정말 어쩐 일이에요?”
“뭐가?”
“내가 담배 안 피우는 걸 알면서 굳이 같이 담배 피러 가자고 하니까 묻는 겁니다.”
“아아, 꼴사납잖아? 다 늙어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 피우면.”
“아직 선배는 마흔도 안 됐습니다만?”
“숫자상으로는 그렇지. 내 신체 및 정신건강상으로는 당장 제삿밥을 얻어먹어도 시원치가 않을 수준이지만. 조잘거리지 말고 얼른 일어나, 석검. 선배가 말을 하면 엉덩이를 들썩거리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냐.”
“할 일이 산더민데요.”
“그래? 그럼 담배는 여기에서 피울까? 석검이 오매불망기다리던 그 사람얘기나 좀 주절거리면서?”

유 검사는 장난을 치듯 말했다. 감이 좋기로 유명한 김 계장이 유 검사의 말하는 뉘앙스가 뭔가 묘하다는 것을 단박에 캐치하고는 고개를 들어 재희를 바라봤다. 대놓고 무엇을 물어올 기세는 아니었지만 재희에게로 닿는 그의 눈빛은 제법 날카로웠다. 죽어라 진실을 숨기고자 드는 피의자들에게서 진실을 파헤치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유 검사가 재희를 향해 던지는 묘한 시선과 장난스런 말투가 그의 귀에 거슬리지 않았을 리 없는 것이다.

힐긋 김 계장을 바라보던 재희가 마침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 검사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으며 먼저 재희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 그 뒤를 따르던 재희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김 사무관을 슬쩍 돌아보며 평소와 다름없는 어투로 말했다.

“잠깐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 계장 역시 평조로 대답하고는 다시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다. 재희는 나직이 검사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유 검사는 이미 복도 끝에 마련된 휴식공간으로 앞서 걸아가고 있었다. 말이 휴식공간이니, 쉼터니 하는 것이지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담배피울 곳을 잃은 흡연자들이 겨우 숨을 트고 있을 수 있는 서너 평 남짓의 작은 흡연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만성적으로 고여 있던 니코틴 향이 묵직하게 숨통을 조인다.

먼저 들어가서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던 유 검사가 곁에 와서 서는 재희를 향해 슬쩍 담배를 권해본다. 재희는 거절의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내젓고는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독한 니코틴 냄새에 미간사이에는 가느다란 주름마저 잡혔다. 유 검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재희에게 내밀었던 담배를 다시 제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다거나 부장검사에게 잔소리를 들은 까닭인지, 유 검사는 한숨을 내쉬듯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재희를 향해 다소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뭐를 말입니까?”
“한무진 말이야. 재동이 녀석 친부라던 사람. 얼마 전에 출소한 거 내가 뻔히 다 아는데 모르쇠로 나올 생각은 말고, 불어.”
“……아버지 노릇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뭐야, 그랬단 말이야? 정혜씨가 죽기 전에 부탁했다며? 그 사람 출소하면 궁금해 할 테니까 재동이 데려가서 인사라도 시켜달라고. 굳이 인사시키라는 게 무슨 뜻이겠어? 친부라는 사람이 재동일 키우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게 해주라고 그런 거 아니야? 너도 그럴 목적으로 그 사람 출소하길 기다린 거고.”
“맞습니다.”
“맞는데 아비 노릇 하지 말라 그랬다고? 혹시 그 작자가 재동이, 지 새끼 아닐 거라고 그러든? 키울 수 없다고 딱 발뺌해?”
“아니요. 오히려 욱해서 자기마음대로 나타날 거라고 하던데요.”
“그런데 뭐가 문제야? 무슨 속셈이냐, 대체?”
“자극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극을 하지 않으면 친아들을 앞에 두고도 뭘 해야 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를 사람이니까.”
“그건 어째 예전처럼 한무진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뉘앙스다?”
“예전부터 그랬습니다. 하지 말라고,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자극을 하면 할수록 분해하면서 더 오기를 부리는 사람이죠. 자기감정에 전혀 솔직하지 못한 타입입니다.”
“어? 진짜냐?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정혜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좋아하던 사람이니까요. 늘 만나면 마냥 행복해 죽겠다는 듯이 그 사람 얘길 주절거리는데 모를 턱이 있습니까? 작은 버릇하나까지도 다 압니다.”
“아아, 정혜씨랑 석검이랑은 소꿉친구였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면 석검이랑 한무진은 그다지 유쾌한 관계도 아니군.”

유 검사가 피우고 담배꽁초를 재떨이 위로 휙 던지며 말했다. 재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유 검사와 재희는 대학 선후배사이로 처음 만났다. 성격은 묘하게 엇나갔지만 용케도 가깝게 지냈다. 사법고시를 패스한 이후에도, 연수원 생활을 마친 뒤 검사로써 일을 시작할 때에도 사석에서 자연스런 만남을 가졌었고, 작년부터 재희가 인사이동으로 유 검사과 같은 지검에서 일하게 되면서 더 가까워져 서로의 가정사에 대해서 웬만큼은 알고 있다. 재희가 재동의 친모인 정혜와 초등학교 때부터 대문을 마주하고 살던 소꿉친구라는 것과 정혜가 죽은 후에 재희가 떠맡은 재동은 사실 재희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는 거다. 그 세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담배 하나를 더 꺼내서 입에 물던 유 검사가 조금 전 사용한 뒤 어디에 넣어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것 치고 날마다 과일을 넣어준 건 좀 이상한데 말이야.”

교묘하게 파고든다. 얼굴에는 가느다란 웃음까지 띄면서. 그러니까 고집이 센 피의자들도 입을 꾹 다물곤 모르쇠로 응하다가 그의 신문을 받은 후에는 늘 고개를 떨구고 진실을 자백하는 것일 테지만. 물론 유 검사를 제법 오래 알고 지내왔으므로 이 상황을 무던하게 넘길 방법쯤은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당황할 필요 없이, 유 검사와 마찬가지로 슬며시 웃으면서 평소처럼 말하면 그만이다. 그런 듯 아닌 듯.

“뭘 생각하시든, 그건 자유니까요.”
















위잉.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풀려 돌아갔다. 밖에서 비밀번호를 눌러 잠금장치를 풀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재희였다. 이른 저녁임에도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은 집은 사물의 윤곽만 구분할 수 있도록 어둡고 고요했다. 재희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거실과 부엌 쪽의 인기척을 살폈다. 그러나 집에서든, 어린이집에서든 재희가 돌아오면 늘 현관까지 도도도 달려 나와 꾸벅 배꼽인사를 하던 재동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재동처럼 그 몸이 작지 않은 까닭에 그 어디에고 있다면 분명히 보였을 무진도 보이지 않긴 마찬가지다.

“…….”

재희는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쳐 두고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식탁 위에는 아침식사를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다못해 무진은 음식물이 묻은 그릇을 싱크대 안으로 넣어주는 최소한의 수고마저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럴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지만. 오히려 식탁 위 그릇들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고, 설거지까지 되어 있다면 그것이 더욱 무진답지 않다.

재희는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며 서둘러 식탁 위의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겼다. 음식냄새가 미약하게나마 고여 있었기 때문에 환기를 위해 부엌의 창도 활짝 열었다. 싱크대의 물을 틀어 민첩하고 말끔하게 그릇들을 닦아낸다. 이런 사소한 집안일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손에 익었다.

다 닦은 그릇들을 식기세척기 안에 차곡차곡 넣어서 세척기를 작동시킨 재희는 두 손을 흐르는 물에 깨끗이 닦고는 마른 수건으로 그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곤 부엌 바로 옆에 있는 재동의 방 쪽으로 걸어가서 닫혀 있던 방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그러나 재동의 방 안에서도 재동과 무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재희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제 침실로 향했다.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가 붙어 있는 벽을 손바닥으로 더듬던 재희의 시야가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무진의 윤곽이 들어온다. 연이어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재동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없어진 줄 알았습니다.”
“…….”
“식탁 위가 아침에 식사한 그대로던데, 점심도 거른 겁니까?”
“어떻게 된 거냐?”  

대꾸가 없기에 재동을 재우다가 무진도 잠들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무진은 점심은 먹은 거냐는 재희의 물음에 전혀 상관없는 질문으로 대꾸했다. 재희는 제 손이 살짝 얹어져 있던 스위치를 눌러 방 안에 불을 켰다.

탁.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점등되어 금세 방 전체가 환해진다. 재희의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재동의 얼굴이 뭔가 꾀죄죄하다. 마치 펑펑 운 후에 얼굴을 제대로 닦지 않아 고스란히 눈물이 말라붙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녀석의 품에 꼭 안겨 있는 갈색 곰 인형도 뭔가에 잔뜩 더럽혀져 있었는데, 재희는 그것이 방바닥에 반쯤은 쏟아져 있는 초코우유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진은 침대에 살짝 걸터앉아 두 볼을 씰룩이며 잠들어 있는 재동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한결같이 그러고 있었던 것처럼, 불이 켜지고 재희가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그 자세 그대로 꼼짝을 않는다.

“어떻게 된 거냐고.”

재희에게는 얼굴의 옆쪽만을 내보인 채로 무진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진이 무엇에 대해 묻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붙박인 것처럼 재동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짐작하지 못할 것도 없다. 무진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재희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위태로운 감정이 그의 얼굴에 가득 넘실댄다. 무진은 여전히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새끼…… 말을 못해?”
“…….”
“아니지? 나이가 몇인데 말을 못해? 그런 거 아니잖아? 내 얼굴이, 표정이 무서워서 말을 안 하는 거지? 처음 봐서 낯서니까 경계하는 거지? 아니야? 그런 거잖아! 아니면 좀 느린가? 좀 느릴 수도 있는 건가? 대체 뭐야. 대답해. 대답하라고, 새끼야!”

무진이 점차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에라도 재희의 멱살을 틀어잡고는 짤짤 흔들어댈 기세다. 재희는 그런 무진을 특유의 고요한 시선으로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시적일 겁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아빠’라는 말부터 내뱉긴 했지만 분명히 말은 했었습니다.”
“했었다니. 말투가 이상하잖아! 짜증나게 우물거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재동이 가장 먼저 배운 단어는 ‘엄마’가 아닌 ‘아빠’다. 녀석이 옹알이를 하기도 전에 엄마가 죽어서 그 단어를 내뱉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다른 아이들과 다소 그 시작이 다르긴 했지만 처음부터 말을 하지 못했던 건 분명히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재희는 손으로 넥타이를 슥 잡아당겨 풀면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노려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무진에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사고였습니다.”
“사고를 당…….”
“아닙니다, 사고를 당한 건.”

무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재희가 그의 말을 뚝 자르며 말했다. 재동이 사고를 당한다거나 하는 것은 언급되는 것조차 싫은지 미간마저 약간 찌푸린 채다. 무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재희를 바라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주 잠시나마 닫혀 있던 재희의 입술을 바라보며 그것이 다시 열려 속 시원하게 자신의 의문을 풀어주길 기다렸다는 거다. 그것을 아는지 재희는 그리 오래 뜸들이지 않고 말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앞집에 젊은 부부가 살았습니다. 그 부부 사이에 재동이보다 세 살 많은 남자아이가 있어서 두 녀석이 오며가며 잘 놀았고, 내가 일 때문에 늦게 퇴근하면 그 부부가 어린이집에서 재동일 직접 데려와서 잘 때까지 보살펴 주곤 했습니다. 다시없을 좋은 이웃이었죠. 그런데…….”
“그런데?”
“그날도 재동인 그 집 아이와 놀고 있었을 겁니다. 놀이터에서만 노는 거라고 백번 교육시켜도 아이들이란 다 그렇게 모든 걸 금세 잊는지, 두 녀석은 지상 주차장에서 공을 가지고 놀았다더군요. 물론 곁에 아이엄마가 있기는 했지만 마침 지나가던 윗집 여자가 말을 걸어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왜 한 시도 시선을 떼선 안 되는지, 압니까? 아이들은 어른보다도 집중력이 뛰어나고, 지극히 맹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섯 살 난 아이도 별반 다를 게 없었겠죠. 튕기는 공을 쫓으면서 놀다가 갑자기 공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니까 아이가 그걸 잡겠다고 무작정 뛰어갔을 겁니다. 그 아이보다 걸음이 느린 재동이는 한참 뒤쳐져서 그 뒤를 따라갔을 거고.”

재희의 말을 잠자코 듣던 무진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줄곧 지켜보던 엄마의 시선이 아주 잠시 떨어져 나간 사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고무공, 그리고 그 고무공을 맹목적으로 뛰는 아이, 차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지상주차장.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니, 그보다는 뒷골이 콱 조여지는 기분일까.

공을 잡겠다고 먼저 뛰어가는 어린아이의 뒤를 따라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뛰어가는 재동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공을 쫓는 것이 아니라 공을 쫓는 아이를 가까스로 따라가고 있는 재동의 뒷모습이 말이다. 아이엄마가 당장에 달려올 수 없는 곳에서 때마침 만난 이웃여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도, 주차장이라는 것을 잊었는지 빠르게 달려 들어오던 차가 순식간에 어린아이를 덮치는 모습도, 뒤늦게야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경악하며 뛰어오는 아이엄마의 모습도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모든 끔직한 상황을 코앞에서, 두 눈으로 지켜보며 오도카니 서 있는 재동의 자그마한 뒷모습까지도. 아아, 신음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다.

“병원에선 실어증일 거라고 하더군요. 어린아이가 실어증에 걸린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그게 6개월 전입니다. 그 후에 이곳으로 이사를 했고 재동이도 그 일을 잊은 것처럼 점점 나아져서 예전의 밝은 성격을 되찾는 것 같긴 하지만 한 가지, 말은 여전히 하지 않습니다.”

재희의 말을 모두 들은 무진은 곧바로 시선을 재동에게로 옮겼다. 병아리 부리 같은 작은 입술을 꼬물거리며 단잠을 자던 재동이 볼을 씰룩거린다. 말라붙은 눈물 자욱이 간지러운 모양인지, 작고 통통한 손을 들어 괜히 슥 긁어보기도 한다. 재동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선척적인 이유도 아니고, 불치인 것도 아니라지만 ‘다행이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참 쫑알거리며 이 말, 저 말을 배워야 할 아이가 우는 소리조차도 마음대로 낼 수 없다니. 무진의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자신의 핏줄이라는 아이가 비상하지 못할지언정 평범하지도 못하다는 사실에 가슴으로부터의 통증을 느낀 건인가. 후자라면 재동이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으나 전자라면 전혀 소용이 없다. 무진이 그 사고를 저지른 사람도 아니고, 설사 그가 교도소에 있지 않고 재동의 아버지로써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재희가 그랬듯이 녀석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을 테니까. 처음부터 어떠한 상황에 있지 않던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결코 그 상황을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이상한 부분에서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낄 필욘 없습니다.”

재희가 옷장을 열어 풀어낸 넥타이를 제자리에 걸어두며 말했다. 와이셔츠의 단추 두어 개도 자연스레 풀어낸다. 그러나 재희가 뭐라고 떠들어도 들리지 않는지 무진의 시선은 한결같이 입맛을 다시며 자고 있는 재동에게 닿아 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희는 다시 부엌으로 걸어 나가면서 아침식사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무진에게 말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날의 일은 정말 우연이었다고 생각한다. 평소처럼 일정한 시간에 집을 나섰다거나, 힘껏 달리면 탈 수도 있었을 버스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그런 우연. 그렇다고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은 없던 하루였다. 딱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그날은 개교기념일이었고 모처럼의 쉬는 날이었지만 담임이 고문으로 있는 학교 야구부의 시합이 있어서 쉬지도 못하고 경기장으로 향해야 했다는 것 정도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우유 한 잔으로 아침밥을 대신하곤, 담임이 누누이 강조한 대로 교복을 차려 입은 후에 다녀오겠다는 인사말을 건성으로 던지면서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자마자 바로 보이는 정혜의 방 커튼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유일한 하루였다. 늘 늦잠을 자서 지각을 밥 먹듯 하는 그녀였기에, 대부분은 커튼이 닫혀 있는 창문만 봤기 때문이다. 그제야 재희는 정말 늦었다는 걸 실감했다.   

정류장에는 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재희의 곁에서 걷고 있던 사람들이 그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지만 재희는 뛰지 않았다. 10분을 늦으나 1시간을 늦으나 어차피 지각은 지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딱히 야구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지각으로 인한 처벌까지도 가중 없이 똑같다면 구태여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평소에는 지각을 하는 일이 없는 거의 없는 그였기에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일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버스정류장 앞에 서서 한참동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출근시간과 통학시간이 지난 직후라서인지 거리엔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기 때문에 재희는 가까운 곳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놀고 있던 여자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강아지의 입에 물릴 만한 작은 고무공을 들고 가볍게 굴리면 강아지가 얼른 달려가서 그것을 물어왔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마저도 살짝 지루함을 느낀 재희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던 순간이었다.

- 꺄악! 덕구야!

난데없이 여자아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얼른 고개를 다시 여자아이쪽으로 돌렸지만 그 곁을 맴돌던 강아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재희의 시야에서 완전히 비껴나갔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뿐이다. 비탈길과 연결되는 큰길로 데구르르 굴러가는 고무공이 보였다.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공이 굴러가는 쪽을 바라봤다. 여자아이의 비명을 들은 사람들도 일제히 그쪽을 바라봤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비탈길 쪽을 바라보니, 공을 잡으러 달려간 강아지를 향해 자전거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대로 있다간 강아지가 자전거 바퀴에 치여 나가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자전거도 멀쩡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적어도 자기애와 이기를 지닌 인간이라면 자신이 최소한의 손해를 입는 쪽을 택할 것이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라면 그대로 내달렸을 거란 거다. 최소한 자전거와 함께 처참하게 나뒹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있던 이는 돌연 손잡이를 왼쪽으로 강하게 틀었다. 그로 인해 진행하던 방향이 전환되자 자전거가 버티질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위태로웠다. 재희의 눈이 깜빡이는 찰나, 도로 가장자리에 있던 가로수에 앞바퀴를 들이받으면서 자전거가 공중으로 붕 솟아올랐다. 그와 함께 자전거에서 떨어져나간 이는 등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 목숨이 위태로웠던 강아지는 무사히 고무공을 입에 물고 여자아이에게 되돌아왔다.

바닥에 쓰러져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는 자전거의 주인을 향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재희도 얼결에 그쪽으로 걸음을 놓았다. 자전거의 주인은 까까머리를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재희와 비슷한 또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좀 더 앳되어 보였지만. 그는 하늘을 보고 누워서 낮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 오빠, 아파?
- 학생, 괜찮니?

한참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자전거 주인의 상태를 걱정하며, 강아지를 품에 안은 여자아이와 사람들이 한꺼번에 물었다. 그는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팔과 다리를 돌려보며 몸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를 체크했다. 몸 상태가 생각보다 멀쩡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 그는,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다시 자전거를 세워서 타고는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가 그렇게 급한가 싶었다. 단순히 지각을 모면하기 위해서라기엔 그다지 성실해 보이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처절할 정도로 다급해보여서, 여기저기까진 상처의 쓰라림 따위는 느낄 수도 없을 만큼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쫓고 있는 것 같아서 점점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우연과 우연이 점철되는 상황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날, 또 한 번의 우연이 찾아왔다. 뒤늦게 찾아간 학교소속 야구부의 첫 시합에서, 대항 학교의 투수로 나와 마운드에 서 있는 그를 봤다. 어딘가가 불편한지 얼굴을 미묘하게 찌푸린 채로 공을 던지고, 던지고, 던지고.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던지던 그를. 그러나 경기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구가 되지 않아서 그는 점점 더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그의 투구가 불안한 것은 아침의 사고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껏해야 고교야구다. 전국대회도 아니고 고작 도지사배 대회. 그런 곳에서 1위를 한다고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끝까지 마운드를 지키고 싶어서 남몰래 일반인 전용 화장실로 숨어들어 상처를 식히고 뒷모습은 자못 어리석어보이기까지 했다. 틀림없이 끌려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마운드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집념, 혹은 고집 때문이었을까. 이번에는 우승까지도 바라본다던 재희의 학교 야구부는 첫 경기에서부터 쓰디쓴 패배를 맛봐야 했다. 담임이 고문이라는 이유로 모처럼의 개교기념일까지 반납하고 재희의 반 전체가 경기관람을 간 것이 무색하게도.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다. 소꿉친구인 정혜에게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저녁식사 준비를 모두 마친 재희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여놓고서 다시 제 침실로 들어왔다. 잠들어 있는 재동과 여전히 그 재동을 빤히 보고 있을 무진에게 식사준비가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재희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셔츠를 끌어내리며 침대 쪽을 향해 말했다.

“이제 일어나시죠. 저녁식사 준비가…….”

그러나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닫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재동을 빤히 보고 있던 무진이 재동의 곁에서 옆으로 누운 채 풋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픔도 잊은 채 자는 건지, 재동도 여전히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녀석의 고롱고롱 평온한 숨소리가 침실 가득 넘실댄다.

재희는 침대 가까이로 걸어갔다. 그리곤 침대의 등받이를 한 손으로 잡으며 슬쩍 상체를 숙여 자신 쪽으로는 뒤통수만 보여 주고 있던 무진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무진의 미간사이에 여전히 옅은 주름이 잡혀 있다. 한 조각 잠을 자면서도 평온하게 자지 못하는 것 같다.

“…….”

재희는 슬쩍 제 긴 손가락을 뻗어 무진의 주름진 미간 사이를 문질렀다. 그러자 예민한 무진이 조금 뒤척거리며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을 고요히 바라보던 재희는 공중에 머물러 있던 손가락을 다시 뻗어 무진의 볼을 간질이듯 만져보았다. 무진이 또다시 몸을 뒤척이며 목을 한껏 웅크린다.

그 모습을 이제까지는 내비친 적 없던 감정을 가득 담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던 재희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것은 어디선가 적나라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무진의 뒤척임에 깬 것인지 재동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희는 그런 재동의 시선에도 크게 놀라지 않고, 그저 무진의 볼을 간질이던 손가락을 가만히 제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쉿.”     

눈동자만 느릿느릿하게 굴리던 재동은 제 옆에서 잠들어 있는 무진을 빤히 보더니 알았다는 듯이 동그란 고개를 가만가만 끄덕였다.











Second Daddy _ 08







잠든 자세가 불편했는지 무진이 별안간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그리곤 푹신한 베개에 고개를 파묻듯이 비벼댄다. 어깨까지 크게 한 번 들썩이며 평온한 숨을 내뱉던 무진은 그러나 곧 순간적으로 두 눈을 확 떠올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깨끗이 뜨여진 두 눈이 천천히 옆으로 구르면서 주변을 살핀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온 방을 뒤덮었다. 들리는 것이라곤 벽 어딘가에 붙어 있을 시계의 시침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뿐이다.

무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꽤나 오래 잠을 자고 있었는지 머리가 조금 묵직한 느낌이 든다. 딱히 잠에 빠져든 기억이 없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잠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저녁을 차리겠다고 말하던 재희의 모습은 생각이 나지만 그가 차린 저녁밥을 먹은 기억은 없다. 그러니 그 사이에 잠든 것이리라.

무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다. 푹신한 침대도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본다. 그곳에 누워 있던 재동은 온데간데없었다. 본래 이 침실의, 침대의 주인일 재희의 모습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슬슬 손가락으로 제 복부를 긁던 무진이 침대에서 벗어나 닫혀 있던 방문을 열었다. 지난 아침에 죽 한 사발을 먹은 게 다라서 배가 고프기도 하고, 목도 말랐기 때문이다. 침실을 나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냉장고에서 주스나 우유 같은 것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냉장고 문을 연 무진은 곧장 냉장고 불빛에 환해진 식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 아래 무엇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펭귄 그림이 그려진 상보 하나가 식탁 위를 덮고 있다.

냉장고 문을 다시 닫은 무진은 손을 뻗어 상보를 걷어냈다. 그러자 각종 야채를 섞어 만든 볶음밥과 작은 그릇에 덜어낸 반찬들이 옹기종기 차려져 있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무진은 손을 들어 제 귓등을 슬슬 긁었다. 다만 볶음밥이 남아서 그렇게 상보를 덮어놓은 것이라고 하기엔 억지스러울 정도로 말끔히 차려진 한상이다. 그렇다면 무진이 중간에 깨어 먹을 것을 찾을 걸 미리 알고 재희가 그렇게 해둔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해석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수상하다.

“……독만 안 들었으면 된 거지, 뭐.”

무진은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리고는 덥석 숟가락과 야채볶음밥 접시를 손에 들었다. 그리곤 식어서 굳어 있는 그것을 스스럼없이 퍼서 입속에 밀어 넣었다. 마구 밥을 쑤셔 넣은 탓에 금세 한쪽 볼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식탁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서, 다른 반찬들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오로지 볶음밥에 입으로 밀어넣던 무진이 슬쩍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거실 쪽이다.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에 그 윤곽만 살짝 보일 뿐이지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거실의 소파 위에 누워서 불편한 쪽잠을 자고 있는 것이 재희라는 것 정도는 말이다. 3인용 소파가 턱없이 모자란 장신의 키를 지닌 것이 재동일 리는 없지 않은가. 무진은 볶음밥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재희가 누워 있는 소파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보나마나 미간을 찌푸린 채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잠들어 있을 재희의 얼굴 쪽을 빤히 내려다봤다.

이상한 놈이다.

재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것뿐이다. 무진 본인은 그다지 감이 예리하거나 분석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눈에 보인다, 재희의 미심쩍은 행동들은. 이전에 재희에게 말한 적 있듯이 무진이 재동의 앞에 나타나질 않길 바랐다면 재동을 무진에게 보이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로.

만약 상황이 바뀌었다면. 그래서 어떤 이유에서든 무진이 재희의 친아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라면 무진은 결코 재희처럼 그에게 아이를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자식을 보고서도 상관없다는 듯이 외면할 수 있는 인종은 지구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를 꼭꼭 숨겨두었는데도 재희가 난데없이 찾아와 자기 아들이라며 찾아가겠다고 했다면 다시는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없도록 흠씬 패서 쓰레기 더미 위에 내던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무진이라면 재희를 시멘트에 묻어 바다 깊이 던져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쉽지 않았을 거다. 얼마만큼 정혜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고작 그 이유로 전남자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키운다는 것 자체가.

그것으로도 부족해 재희는 무진의 접근을 은근히 눈감아주고 있질 않은가. 칼을 맞고 찾아왔을 때에도 경찰에 신고부터 하지 않고 조용히 치료를 해주고, 어린이집의 보수공사 때문에 재동일 맡아 볼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라고 하긴 했어도 갈 곳이 없는 거라면 당분간 이곳에 있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단순히 재희와 무진 본인의 성격차이라고 하기엔 억지스러운 부분도 많고 말이다.

“대체 누구냐, 너?”  

무진은 잠들어 있는 재희의 얼굴을 멀뚱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예민한 까닭인지 재희는 그 작은 공기의 일렁임에도 몸을 뒤척였다. 미간사이에는 여지없이 주름이 생겼을 것이다. 무진은 차갑게 식은 볶음밥을 입속으로 탈탈 털듯이 밀어 넣으며, 지극히 비좁아 보이는 소파에서 잠든 재희를 꽤나 오래 관망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

맞춰놓은 알람이 울기도 전에 재희가 두 눈을 떠올렸다.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다보니 이제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이다. 간밤에는 좁은 소파에서 몸을 한껏 움츠리고 잔 탓인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는데도 머리가 썩 개운하질 않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재희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곧 그는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말고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침실 쪽을 바라봤다. 무진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분명히 문을 닫아놨었다.

재희는 애매하게 열려 있던 침실의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의 예상대로 침대 위는 깨끗이 비어 있다. 침실에서 돌아 나온 재희는 곧장 부엌으로 갔다. 식탁 위의 상보가 아무렇게나 걷어져 있고, 그 안에 차려두었던 볶음밥은 밥알 몇 개만을 남겨둔 채 자취를 감췄다. 무진이 새벽에 일어나서 먹은 것이리라. 비운 그릇이 싱크대 안에 들어가 있는 법 없이 고스란히 식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욕실 안에도 무진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 걸 보면 무진이 있을 만한 곳은 딱 한군데뿐이다. 만약 그곳에도 없는 것이라면 재희에게 가겠다는 인사말도 없이 돌아가 버린 것일 테고 말이다. 재희는 활짝 열어젖혔던 욕실 문을 닫고는 곧장 재동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닫혀 있는 방문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옆으로 돌렸다. 어째서인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달칵.

마침내 방문을 연 재희는 열린 문 틈새로 고개를 밀어 넣어 재동의 방을 살폈다. 재동에게 잘 덮어주었던 이불은 녀석이 걷어찼는지 무릎까지 똘똘 말려 내려와 있다. 잠옷까지 위쪽으로 말려 올라가 새하얀 배가 동그랗게 드러났다. 어떤 꿈을 꾸는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통통한 두 볼을 열심히 꾸물거리는 것이 문가에서도 훤히 보였다.

그리고 무진은 그렇게 잘도 자고 있는 재동의 침대 매트리스를 베게 삼아서 고개를 기대고 앉아서 잠들어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잠들어 있는 재동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신이 왜 자꾸 재동이에게 시선을 빼앗기는지도 모르고, 그저 본능이 끌리는 대로 재동의 곁으로 다가가 그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재동이 눈을 뜬데도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할 거면서 말이다. 참 서툰 사람이질 않은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모에게 살가운 애정을 받아본 자만이 자식에게도 살가운 애정을 줄 수 있는 법이니까.

재희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곤 욕실로 들어가서 평소처럼 샤워도 하고, 머리도 감고, 면도도 했다. 면도를 끝낸 후에는 차가운 스킨을 얼굴 전체에 펴 바르고 로션과 에센스도 발랐다. 세탁소에서 미리 찾아왔던-빳빳하게 잘 다려진 와이셔츠를 매끄럽게 몸 위에 걸치고 그에 어울리는 넥타이를 찾아 맨다. 머리카락의 물기를 말리면서 헤어스타일을 정리하면 특유의 말끔한 인상이 완성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루일과다.

준비를 끝마치면 곧장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바쁜 아침시간을 쪼개고 쪼개야 하지만 재동에게 단 하루도 아침식사를 거르게 한 적이 없다. 토스트기에 식빵을 밀어 넣고 각종 잼들을 냉장고에서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을 즈음이면 재동이 커다란 베개를 손에 쥐고 나타난다. 얼마나 화려한 꿈을 꾸었는지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삐친 채로. 통통한 손으로 두 눈을 쓸면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재희의 뒷모습을 빤히 보고 있는 재동에게, 오늘도 재희가 평소와 같은 아침인사를 건넨다.

“일어났어?”

재동은 동그란 머리통을 열심히 끄덕였다. 보통 때라면 그런 재동을 데리고 욕실로 가서 세수를 시키고 머리도 감기겠지만 오늘만큼은 오믈렛을 만드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다. 재동과 마찬가지로 한쪽 머리가 삐죽 치솟은 무진이 꾸물꾸물 재동의 방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희는 커다란 볼에 계란 여섯 개를 깨서 넣고 각종 야채들을 썰어 한데 섞으며, 베개를 손에 쥐고 서 있는 재동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던 무진에게 말했다.

“좀 씻겨주시겠습니까?”  
“뭐?”
“아직 혼자서는 못 씻거든요. 저는 아침식사를 준비해야합니다.”

재희의 난데없는 요구에 무진이 괴상한 표정을 짓다가 제 앞에 서 있던 재동의 정수리 즈음을 내려다본다. 재희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재동도 고개를 빠끔 들어 무진을 봤다. 녀석의 동그란 눈동자 어디에서도 거부감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은 딱히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금 주저하는 기색이 엿보일 뿐이다. 아마도 재희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저를 씻겨준 적이 없어서 그럴 게다.

“아니면 오믈렛을 만드시겠습니까?”
“못해, 그런 거.”

재촉하듯 던진 재희의 물음에 무진이 인상까지 팍 쓰면서 대꾸했다. 재희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이고는 돌아서서 오믈렛을 만들기 시작했다. 계란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한껏 자극한다. 무진은 벅벅 제 머리를 긁다가 여전히 자신을 뚫을 것처럼 보고 있는 재동을 마주봤다. 당연히 아이도 씻길 줄 모른다. 씻겨본 적이 없으니까. 자칫 비눗물이라도 눈에 들어가 또 재동을 울려버리게 되면 어쩌란 말인가.

무진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재동이 베개를 질질 끌면서 욕실로 걸어갔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베개로 욕실 바닥을 쓸어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무진은 얼른 녀석에게서 베개를 빼앗아 저만치 던져버리곤 녀석을 따라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에는 재동의 작은 키를 특별히 배려한 작은 세면대가 있었다. 아마도 어린 재동을 위해 욕실을 따로 개조한 것이리라. 재동을 위하는 재희의 마음 씀씀이가 묻어난다. 그 때문에 괜한 열등감 같은 것이 밀려드는지라 무진은 쳇 하고 짧게 혀를 찼다.

“이게 뭐야? 목에 끼는 건가?”

무진이 노란 샴푸캡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익히 본 적이 없는 물건이라서 그 용도를 모르겠는 거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재동이 통통한 두 팔을 들어 제 머리를 연거푸 쓸어내린다. 시선만은 무진에게 딱 고정한 채다. 샴푸캡을 머리에 걸쳐지도록 쓰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지 입술까지 꾹 닫은 채로 열심히 손을 움직인다. 무진은 긴가 민가 하면서도 슬쩍 재동의 머리에 샴푸캡을 씌웠다. 고무재질로 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잘 들어가지 않던 샴푸캡이 갑자기 쑥 들어가면서 그 사이로 재동의 동그란 머리통이 드러난다.

재동은 알아서 제 고개를 세면대 쪽으로 숙였다. 작은 두 손으로 세면대를 꼭 붙들고서 무진이 샴푸를 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진은 샤워기를 끌어다가 물을 틀었다. 좀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온수를 트니 이번엔 좀 뜨거운 것 같다. 한참동안 샤워기의 물을 제 손등에 뿌려보던 무진의 팔을 타고 물이 흘러 금세 그가 입은 잠옷이 흠뻑 젖었다. 무진은 그에 개의치 않고 물 온도를 맞춰 미지근한 상태로 천천히 재동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다행스럽게도 온도가 적당한지 재동은 온몸을 부르르 떨지도 않고, 뜨겁다며 고개를 움츠리지도 않았다.

샴푸를 할 때에는 식은땀이 다 났다. 제 몸에 비해서는 한없이 커보이던 재동의 머리가 두 손안에 쏙 들어올 것처럼 작은데다 그 살갗이 한없이 여렸기 때문이다. 힘주어 문지르면 바삭 으스러져버릴 것 같다. 간질이듯 조심조심해서 샴푸를 끝낸 무진은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재동의 머리카락에 남은 거품들을 씻어냈다. 무사히 샴푸를 끝내고 머리에 수건을 둘러줬을 때에는 안도감에 나지막한 한숨마저도 터졌다.

재동은 세면대 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역시나 작은 손과 짧은 팔은 세수를 하기엔 너무 벅차다. 물이 사방으로 튀어 금세 세면대 주변이 엉망이 된다. 무진은 수건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로 재동의 목덜미를 가볍게 받치듯 잡고는 녀석의 얼굴에 물을 끼얹어 세수를 시켜주었다. 손끝에 닿는 재동의 살갗이 보들보들했다. 통통한 볼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폭폭 눌려 들어갔다가 금세 다시 부풀어 오른다.

그저 씻겨주고 있을 뿐인데, 어쩔 수 없이 살과 살이 맞닿고 있는 것뿐인데 묘한 기분이 든다.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하고 참을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오르는 기분. 무진은 어깨에 걸쳐 두었던 깨끗한 수건으로 재동의 얼굴에서 물기를 닦아주었다. 두 눈을 꼭 감고서 잠자코 있던 재동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제 얼굴의 물기를 닦기 위해 가까이 다가와 있던 무진을 보며 소리 없이 방긋 웃었다. 어제 제 녀석을 울린 사람이라는 것은 그새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침식사준비, 다 됐습니다.”

무진이 재동의 환한 웃음에 말을 잃고 있었을 즈음, 부엌에서 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진은 재동의 작은 등을 두드리듯 가볍게 밀었다. 그러자 재동이 얼른 부엌 쪽으로 달려간다. 무진은 재동에게 닿았던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돌아서서 마저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을 얼굴 가득 끼얹자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무진이 얼굴과 머리카락의 물기를 대충 닦고는 부엌으로 가자, 오믈렛을 각자의 그릇에 덜고 있던 재희의 시선이 소리 없이 무진에게 향한다. 무진은 그런 재희에게 뭘 보냐는 식의 시선을 한 번 휙 내던지고는 비어 있는 의자를 꺼내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세수를 해서 그런지 무진의 얼굴 전체에 혈기가 돌면서 입술까지도 평소보다 붉어져 있다. 젖은 머리카락과 젖은 눈썹에선 어쩐지 시선을 떼기가 힘들다.

“야, 배고파.”   

재희는 오믈렛이 들어 있는 프라이팬을 들곤 한참동안 무진을 빤히 보다가, 무진이 배를 벅벅 긁으며 짜증스레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곧 재희는 먹음직스러운 오믈렛을 무진의 그릇 위에 놓아 주었다. 무진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양을 이룬 오믈렛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다가 크게 떼어내 한 입에 밀어 넣었다. 포근포근한 계란과 그 속에 들어간 각종 야채의 맛이 말끔한 조화를 이룬다. 못 하는 게 없는 것 같다, 석재희라는 이 남자는. 맛있는 오믈렛을 먹으면서도 무진의 미간에는 어쩐지 계속해서 주름만 늘어났다.

한 손에는 숟가락, 또 한 손에는 포크를 든 재동은 이미 전투적으로 오믈렛을 먹고 있었다. 반쯤은 입으로, 반쯤은 식탁 위로 흘리긴 했지만. 식탁 위를 너저분하게 만드는 것은 무진도 마찬가지다. 재희는 눈동자를 굴려 전투적으로 먹는 모습만큼은 완전히 빼닮은 무진과 재동을 번갈아보다가 얼른 커피를 마셨다. 그러지 않으면 실없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침식사를 모두 마친 뒤 설거지를 할 즈음, 무진은 재동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어린이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금방이라도 텔레비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재동과는 달리 한없이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설거지를 끝내고, 각 방의 침구들도 모두 정리한 재희는 재동에게 어린이집 유니폼을 입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무진이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그 어린이집 보수공사, 의외로 참 빨리 끝나네?”
“…….”

제법 예리하게 파고드는 무진의 중얼거림에 재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재동과 무진이 계속 함께 지내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좋겠지만, 연일 어린이집을 빠지면 어린이집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두 사람만 집에 두고 가면 어제도 그랬듯이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다. 순전히 그 때문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는 것이다. 아침드라마를 심드렁하게 보고 있던 무진이 시선은 여전히 텔레비전 화면에 고정한 채로 재희를 불렀다.

“야.”
“뭡니까?”
“혹시 너, 나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냐? 난 세문출신인데.”
“아닙니다.”
“그래?”
“네.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왜지? 난 어째 네놈 고딩일 때 모습을 알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무진에게 재희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건 정혜였고, 재희는 같은 학군에 있는 남고를 다녔었다. 그래서 그날, 그 야구경기에서 상대편 투수로 나왔던 무진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거다. 달리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날 우연히 그를 본 것이 제법 강력하게 기억에 남았던 것이고 말이다.  

“라면이나 레토르트 식품은 찬장에 있습니다. 어린애가 아니니까 라면 정도는 혼자 끓여먹을 수 있을 겁니다. 난 오후 6시 즈음에 퇴근합니다. 어린이집에서 재동일 데리고 오면 늦어도 7시를 넘지는 않을 겁니다.”

재희는 무진에게 더 머물러도 좋다는 말을 그렇게 에둘러서 표현하고는 재동을 데리고 현관문을 나섰다. 혹시라도 나갈 생각이라면 문단속을 꼭 하고 가라는 성가신 말은 하지 않는다. 재희는 재동에게 신발을 꼭 맞게 신겨주고는, 현관 옆 수납장에서 작은 액자 하나를 꺼내 재동의 두 손에 들려주었다. 그러자 재동이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을 쭉 내어서 액자 위에 쪽 하고 뽀뽀를 한다.

집을 나서기 전에 힐긋 고개를 돌려 집에 남은 무진을 돌아보던 재동은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가볍게 손을 뒤흔들었다. 무진이 제 손을 들어 그 인사에 화답하기도 전에 열렸던 현관문이 닫히고,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닫힌 현관문 쪽을 빤히 보고 있던 무진은 다시금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진짜 수상한데.”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언제 봐도 통속적인 내용만이 가득한 아침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무진의 시선은 한결같이 텔레비전 화면에 머물러 있었으나, 사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어떤 대사를 내뱉고 있는지는 전혀 인식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소파에 비스듬히 누이고 있던 몸을 일으킨 무진은 곧장 재희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옷장을 열어 입을 만한 옷이 있나 마구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에 흐트러진 옷가지들이 서랍 밖으로 삐져나오고, 옷걸이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무진에겐 그런 것들을 원상 복구시킬 섬세함 따위가 없다. 적당히 티셔츠와 허리부분이 후크가 아닌 고무줄로 되어 있는 트레이닝복 바지를 꺼내든 무진은 입고 있던 옷들을 휙휙 벗어던지곤 찾아낸 옷들을 대충 걸쳐 입었다.

그대로 다시 현관으로 걸어 나온 무진은 신발장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갖가지 구두들이 반질반질하게 광이 날 정도로 잘 닦여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커 보인다. 괜히 확인한답시고 발을 밀어 넣었다가 정말 헐렁헐렁할 정도로 크면 기분이 꽤나 상할 것이다. 무진은 신발의 구석구석까지 살펴보며 신을 만한 것을 찾았다. 재희의 집에 왔을 때에는 맨발상태였기 때문에 재희의 신발을 빌려 신지 않으면 외출할 수가 없다.

“……인간 같지 않은 새끼.”

무진은 신발장 구석에서 오랫동안 신지 않아 먼지가 수북이 쌓인 조리 하나를 꺼냈다. 수많은 구두의 향연 속에서 겨우 하나 건진 조리는 여름에만 잠깐 신고 마는 것이리라. 그리고 아마도 그 조리를 마지막으로 신었던 여름은 최소한 3, 4년은 되었을 것이다. 조리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낸 무진은 두 발을 신발에 끼워 넣었다. 예상대로 뒤가 조금 남긴 하지만 어차피 슬리퍼니 상관없다.

조리를 찍찍 끌고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던 무진이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조금 전 재희가 재동에게 들려주었던 액자를 떠올리며 수납장을 기웃거린다. 곧 그의 시야에 작은 액자 하나가 들어왔다. 일정하게 잘 닦아주는지 액자에는 작은 먼지하나도 앉지 않았다. 무진의 예상대로 액자 속 사진 속에는 정혜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진이 알고 있는 정혜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니 아마도 무진과 헤어진 이후에, 재동을 가졌을 즈음이나 그 후에 찍은 사진이리라. 사진 속 그녀는 한 여자가 아닌 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액자 속 정혜의 사진을 쓱 한 번 매만져보던 무진이 액자를 다시 수납장 위에 얹어놓았다. 그리곤 자동자금장치를 풀고 현관문을 나섰다. 무진에 의해서 슬쩍 열렸던 현관문이 천천히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집은 인적을 잃고 또다시 고요해졌다.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온 무진은 두 눈을 살짝 찌푸렸다. 오랜만에 직접 햇볕을 쬐자니 두 눈이 시큰거릴 정도로 아려왔기 때문이다. 출근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지상주차장에는 그다지 차가 많지 않았다. 무진이 타고 왔던 차도 주민의 신고로 견인을 해갔는지 어쨌는지 보이지 않는다. 창수나 정한에게 전화 한 통 해서 데리러 오라고 한다면 단 5분만에라도 달려올 그들이지만, 휴대폰도 없고 그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외우는 수고는 한 적이 없어서 방법이 없다. 슬쩍 주차장을 둘러보던 무진은 조리를 찍찍 끌며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혀, 형님! 괜찮으십니까?”
“그간 어디 계셨던 겁니까?”

무진이 제 집의 벨을 누르자 인터폰으로 무진의 모습을 확인한 정한과 창수가 한달음에 현관으로 달려와 문을 열어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었다. 무진은 입술을 찍 찢어서 웃어보이곤 그들을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재희의 집에서부터 자신의 아파트까지 꽤나 먼 거리를 죽 걸어왔더니 갈증도 나고, 온몸이 까라진다. 무진은 곧장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 하나를 꺼내서 뚜껑을 열곤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식도를 타고 차가운 물이 흘러들어가면서 몸의 열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 같다.

그 자리에서 생수 하나를 다 비운 무진은 생수통을 싱크대 쪽으로 홱 집어던졌다. 빈 생수통이 농구공처럼 이리저리 튕기다가 잠자코 싱크대 안으로 들어간다. 무진은 입고 있던 셔츠를 훌러덩 벗어서 바닥으로 집어던지곤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복부의 상처를 치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도록 샤워를 피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온몸이 끈적끈적한 거 같아 영 찝찝하다. 딱히 갈 데도 없으면서 그간 연락도 하지 않았던 무진을 많이 걱정했었는지 정한과 창수는 어디에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무진의 뒤를 쫓아왔다.

“뭐야?”

무진이 욕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제 뒤를 따라 욕실 문 앞까지 온 두 사람을 노려보듯 하며 물었다. 그러자 창수가 대뜸 손을 뻗어 무진의 복부에 붙어 있는 거즈를 가리키며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어? 치료하셨네요, 형님?”
“그럼, 설마 여직 칼을 배에 꽂고 다니겠냐?”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걱정했단 말입니다! 잠도 못 자고.”

창수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정한은 바지마저도 훌러덩 벗어 던지곤 욕실 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가는 무진의 등에 대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혹시 모르니 유 선생님을 부르겠습니다. 일단 치료를 했어도 덧날지도 모르니까요.”

무진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별다른 거절의 의사를 밝히지 않고 문을 닫았다. 곧 욕실 안쪽에서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로 보아 무진은 냉수를 콸콸 틀고서 샤워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정한은 제 휴대폰을 꺼내들고 유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 동안 창수는 무진의 침실로 가서 무진이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챙겨가지고 왔다. 두 사람 모두 무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일단은 무진이 무사히, 그것도 제 두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다 된 거다.
무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즈음에 맞춰 유 선생이 도착했다. 조금 전 샤워로 무진의 복부에 붙어 있던 거즈가 물기를 머금어 흠뻑 젖어 있었다. 무진은 소파에 가서 누우라는 유 선생의 지시에 따라 잠자코 소파 위에 누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런 모습을 유 선생이나 두 수하에게 보인다고 해서 털끝만큼의 수치스러움도 느끼진 않는다. 다 같은 남자인데 수치스러울 건 또 뭐란 말인가.

유 선생은 무진의 복부에 붙어 있는 거즈를 천천히 떼어내고 상처를 들여다봤다. 꼼꼼하게 꿰매진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묻어나지 않는다. 유 선생은 핀셋으로 소독약을 묻힌 솜을 집어 무진의 상처에 차분히 약을 발랐다. 능숙한 손짓으로 거즈를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그것을 무진의 상처 위에 덮는 유 선생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정한과 창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유 선생의 차분한 손짓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무진은, 정한과 창수마저도 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을 만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툭 던졌다.

“그런데 선생. 이 상처 보고도 별로 안 놀라네? 잔소리도 안 하고.”









Second Daddy _ 09







SUV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아파트 지상주차장에 깔린 푸르스름한 어둠을 둘로 갈랐다. 저마다 약속 하나쯤은 있을 만한 금요일 저녁이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지상주차장의 빈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널찍한 지상주차장을 빙빙 돌며 빈자리를 찾던 재희는 조금 구석진 곳까지 가서야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매끄러운 솜씨로 주차를 끝내자 시동이 꺼지면서 눈부시던 헤드라이트 불빛도 꺼진다. 재희는 문을 열고 내려서자마자 곧장 보조석으로 가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재동을 제 품에 안았다. 재동은 반쯤 잠들어 있으면서도 그 모든 상황에 익숙해진 듯 짧은 제 두 팔을 뻗어 자연스레 재희의 목을 끌어안는다.

재희는 차의 문을 모두 걸어 잠근 후 아파트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돌연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제 집의 베란다 즈음을 올려다본다. 집에 불이 켜져 있지 않은 까닭에 창문이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말없이 캄캄한 베란다의 창문을 바라보던 재희는 한참만에야 다시 걸음을 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집의 현관문 앞에 섰을 때까지도 그는 그저 무진이 불을 켜는 것조차 잊은 채로 지난번처럼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달칵.

현관문을 열자 현관의 센서가 작동하여 불이 켜진다. 집안은 역시나 어두컴컴하다. 재희는 품에 안고 있던 재동을 소파에 눕혀놓고는 거실의 불부터 켰다. 불이 들어와 주변이 밝아지면서 휑하기 그지없는 집안 내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재희 본인이 아침나절에 깔끔하게 정돈하고 간 부엌의 상태도 그대로인 것은 물론, 어디에서도 사람 특유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닫혀 있는 욕실 문이나 침실, 재동의 방 등을 굳이 둘러보지 않더라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진은 지금 이곳에 없다.

가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쪽지 한 장 남기는 법 없이 사라졌다. 없는 쪽지를 대신해서 잔뜩 헝클어져 있을 신발장이나 침실의 옷장이 그가 이제 돌아갔다는 증거가 되기야 하겠지만. 재희는 무진이 침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져놓고 간 옷가지를 챙겨 세탁물 바구니에 모두 집어넣었다. 원래부터가 재동과 재희, 단 둘뿐이었는데 아주 잠시 무진이 머물렀다 간 탓인지 집이 너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재희는 천천히 집을 죽 둘러보다가 현관 옆 수납장에 얹어져 있는 액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액자는 아침과는 다르게 아주 조금 비뚤게 놓여 있었다. 그 액자를 집어 들었다. 집을 나서기 직전에 이 액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을 무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사진을 보면서. 그 감정의 기복이랄 것도 크지 않은 얼굴로, 고작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얼굴로 애절한 표정이라도 지었을까? 아니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참담함을 느끼며 입술이라도 꽉 깨물었을까. 액자 속 정혜의 사진을 고요히 들여다보던 재희의 미간에 불현듯 주름이 잡혔다. 입술도 평소보다 더 힘주어 다물어졌다.















유 선생은 오전진료를 마치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정형외과 위주의 작은 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병원의 규모가 작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은 늘 있고, 인력은 항상 부족하다. 휴식을 취한다고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손에는 늘 환자들의 상태를 기록한 차트를 들고 있어야 할 만큼. 젊은 인력들이 아주 잠시 머물렀다가 더 큰 병원을 찾아서, 더 많은 급여를 찾아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 선생은 병원의 일 외에 무진의 주치의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 그를 돌보기 시작한 이후부터 언제 올지 모를 호출에 대비해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마다 모든 일은 미리미리 처리해두는 습관도 생겼다.

무진과 인연이 닿은 것은 야구선수였던 그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을 무렵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7, 8년쯤이나 되었다. 오토바이에 의한 뺑소니 사고였는데,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목숨에 지장이 있을 만큼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니었다는 거다. 그 사고로 왼쪽 어깨와 팔이 골절되어 야구선수로써의 생명에는 다분히 지장이 있었지만 말이다.

어린나이에 프로에 입단해서 오랜 기간 2군에서 고된 훈련만 하다가, 그 노력을 인정받아 1군으로 올라가면서 점차 빛을 보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을 말하면 누구인지 알 정도로 유명했던 것은 아니지만 무진의 진중한 투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입을 모아 미래가 보인다고 칭찬을 하던 선수였다. 당시 무진이 속한 구단의 투수코치와 사적인 친분이 있던 유 선생은 늘 술자리에서 무진에 대한 칭찬을 듣곤 했었다. 한 구를 던지더라도 절실함이 담겨 있고, 한 구를 던지더라도 정말 힘껏 공들여 던지곤 한다며, 그의 이야기를 할 때면 투수코치는 신이 나서 떠들었었다.

그랬던 무진이었기에 사고를 당한 직후의 충격은 감당하기가 벅찼을 것이다. 사고를 당했다는 것, 그래서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을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조차 감내하기 버거웠을 그가 언론의 제물이 될 것을 염려하여, 구단에서는 비밀리에 그를 유 선생의 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의 인력을 많이 붙이면 어디에서 어떻게 소문이 새어나갈지 알 수 없어서 유 선생이 그의 치료와 재활을 거의 전담했다.

무진이 갑작스런 사고로 모습을 감춘 뒤, 처음에는 당찬 신인의 부재에 대해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과 언론들은 서서히 무진의 존재를 잊어갔다. 당시의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지 못한 상태였다. 그 존재를, 이름 세 글자를 확고히 새기지도 못했다. 그런 그를 대신할 선수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매년 청출어람을 방불케 하는 혈기왕성한 신인들이 프로야구에 입문했다. 잠시 주춤하는 순간, 썰물이 밀려들어 모든 것을 다 쓸어가는 것처럼. 그곳에 공을 던질 수 없는 신인, 한무진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유 선생은 분명히 기억한다. 무진이 수차례에 걸쳐 수술을 하는 동안에도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가 딱 한 번 병원으로 찾아왔을 때 한 말을. 그는 재활을 위해 버둥거리는 무진의 모습을 관망하듯 지켜보다가, 유 선생이 보호자상담을 요구하자 그럴 시간이 없다며 단칼에 거절하고 돌아서면서 말했다.

- 반병신만 안 되게 해 달라고. 고상한 야구라면 모르겠지만 천박한 주먹질에는 제대로 쓸 수 있는 게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

그것은 결코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로써 할 말이 아니었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유 선생은 그간 무진이 사무치게 느꼈을 좌절감의 깊이를 감히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가 한 구를 던지면서도 절실할 수밖에 없었고, 한 구를 던지더라도 힘껏 공들여 던졌던 이유, 그것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뜻과 달리 야구를 고집하면서도 내내 불안했을 것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라도 공을 던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똑똑.

팔이 골절된 다른 환자의 차트를 들여다보다가 그만 무진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유 선생은 들고 있던 차트를 책상 위로 올려두며, 조금 전 노크소리가 들려왔던 집무실 문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들어와요.”

곧 바깥에서부터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유 선생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유 선생이 아는 한 모든 정장을 가장 맵시 있게 소화하는 사람, 재희였다. 재희는 꾸벅 고개를 숙여서 유 선생에게 인사를 했다. 재희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랐는지 유 선생은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재희를 보다가 이내 편안한 미소를 띄워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손으로 문 앞의 소파를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 앉으라는 말을 대신해서다. 그리곤 자신도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장소의 특수성으로 인해 넘쳐나는 음료수 하나를 꺼내 재희에게 건넨 유 선생이 차분한 어투로 물었다.

“무슨 일로 왔나? 석 검사.”
“선생님께 지난번에 본의 아니게 신세를 졌습니다.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아, 그 정도야 신세라고 할 수 있나. 난 어차피 그 고삐 풀린 망아지의 주치의인 걸.”
“그래도 밤중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니래도. 그보다는 다른 일로 곤란하게 됐네.”
“다른 일이라면?”
“그 망아지 놈이 의심을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어제 상처 좀 봐달라는 연락이 와서 급히 갔더니 그러더라고. 어째서 그 상처에 대해서 뻔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냐고. 내가 자네 집에서 제 상처를 꿰매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좀 대충 꿰매줄 걸 그랬지?”

유 선생이 농담을 하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희는 손끝으로 음료수 캔을 만지작거렸을 뿐이었다. 딱히 무진과 숨바꼭질을 하려던 건 아니다. 다만 서서히 말할 기회를 만들려고 했을 뿐. 무언가 홀로 곰곰이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재희의 얼굴을 힐긋 곁눈으로 바라보며 유 선생이 다시 입을 열어 제법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에야 이젠 그만한 상처에는 면역이 돼서 놀랄 것도 없다고 웃어넘기긴 했지만 말일세. 다음번에도 같은 질문을 해오면 핑계를 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본인이 정 궁금해 하면 말해줘도 괜찮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굳이 자네가 먼저 알리지 않은 걸 내가 말하기에는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네.”
“제가 본인한테 직접 말하겠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야 편하겠지만…….”

유 선생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한 종합병원의 의사였고, 지인과의 인연으로 한 때 프로야구에 입문했던 무진을 치료하다가 그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몇 년 전 형사부 소속 검사인 재희가 의학적인 검증을 위해 찾아오면서 빙산의 일각쯤에 해당하는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재희가 오래전부터 무진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지금은 그가 무진의 친아들을 키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재희가 무진의 모든 것을 파헤치려 한다는 것까지도. 그러나 재희의 직업이 검사이고, 무진은 조폭의 중간 보스 격인 사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태평하게 두 사람을 지켜볼 수가 없다.

“처음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였던 사람은 아닐세.”
“압니다.”
“안 다니 다행이지만, 걱정이 안 되는 건 또 아니니 한마디하겠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처를 주려거든 이쯤에서 아예 손을 떼. 어떠한 이유에서든, 무엇을 위해서든, 설사 상대가 죄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의한 상처를 줘서는 안 되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그런 건. 특히 그게 한 번 깊은 상처를 입어서 어딘가가 단단히 망가져버린 사람이라면, 더더욱.”

유 선생의 경고와도 같은 조언에 재희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술은 어떠한 의지를 담기라도 한 듯 굳게 다물려 있었다. 유 선생이 재희에게 아직 점심식사 전이라면 같이 식사나 하러 가자고 막 권하려던 참이었다.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밖에서 다시금 노크소리가 들린 것은.

똑똑.

“또 누가 왔지? 들어와요!”

따로 선약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 문 밖에 서 있는 이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한 유 선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곧 바깥에서부터 집무실의 문이 열어젖혀지며, 문 밖에서 노크를 했을 장본인이 특유의 가벼운 목소리로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리며 들어왔다. 다름 아닌 유 검사였다.

“작은 아버지, 저 왔…… 어라? 석검?”
“왔냐?”
“선배, 오셨습니까?”

유 검사는 재희가 점심시간까지 쪼개어가며 자신의 숙부이자 간간이 의료자문도 해주는 유 선생의 집무실에 와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의외였는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뭐. 자문 구하러 온 거야? 뭔가 그런 분위기는 또 아닌데?”
“인사를 드리러 온 것뿐입니다. 이제껏 여러모로 신세를 지기만 했으니까요.”
“정말? 그뿐이야?”
“그뿐입니다만.”
“작은 아버지, 석검 말이 맞는 겁니까?”
“사람을 의심부터하고 보는 걸 보니 검사가 딱 네 일이긴 한 모양이구나.”

유 선생이 농담을 하듯 가벼운 어투로 말하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제 직감은 아니라고 말하는지, 유 검사는 의심이라도 하듯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재희를 바라봤다. 재희에게 유 선생을 소개시켜준 것이 바로 유 검사였다. 형사부의 배당사건들은 의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유 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재희가 유 선생의 도움을 크게 받은 부분은 분명, 따로 있다.

프로구단에 입단해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던 무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후 그가 소속된 구단에서는 무진이 연습 중 부상으로 2군의 훈련에 참여하고 있으며 점진적인 치료중이라고 둘러대기만 했었다. 기자들조차 그가 어디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지 열심히 찾으려고 들지도 않았다. 유망한 신인임에는 분명했지만 스타급의 선수는 아니었던 무진은 쉽게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히 증발해버렸다. 흔적도 없이.

그런 무진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게 바로 유 선생이었다. 우연한 기회였다. 아니, 재희 자신은 결코 그것이 우연한 기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검사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살해사건을 배당받았었다. 전문의의 자문이 절실했던 그때, 대학선배인 유 검사가 자신의 숙부이자 종합병원 원장인 유 선생을 소개해주었다. 그 일로 자주 유 선생의 집무실에 드나들다가 보게 되었다. 유 선생이 보관하고 있는, 무진이 사라진 이후의 날짜를 포함한 무진의 싸인볼과 환자복을 입은 무진과 투수코치, 유 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을.

꽤나 오래전부터 무진의 주치의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왔는지, 재희의 끈질긴 설득과 부탁에도 유 선생은 한사코 모른다고 고개를 내저었었다. 그러나 무진의 아이가 곧 태어날 것이며, 아이엄마가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한다는 재희의 말에 유 선생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민을 하다가, 주저도 하다가 비로소 무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왜 그토록 좋아하던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지, 그 후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에 있는지.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그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수소문을 해보려고 해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엄두도 나질 않던 무진이 갑자기 가까이에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물론 그 뒤로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손은 무진에게 닿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유 선생의 말대로 무진이 알고자 한다면 그가 먼저 알게 되기 전에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5분 정도는 여유가 있지만 그대로 더 자리를 지키고 있다간 선배인 유 검사에게 까닭 없이 시달릴 것이 분명하므로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이다. 유 선생은 가보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어보였다. 재희는 유 선생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미련 없이 그의 집무실을 돌아 나왔다. 등 뒤로 유 검사의 의문 가득한 시선이 꽂혀들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해 버렸다.
















“부르셨습니까.”

검은색 정장을 말끔히 차려 입은 무진이 한 회장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 회장은 무진의 예상에서 조금도 빗겨가는 바 없이 집무실의 1인용 소파에 기대앉아 골프채를 닦고 있었다. 무진은 한 회장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저 문가에 우뚝 서서 한 회장이 입을 열길 잠자코 기다렸다. 아침부터 한 회장의 호출을 받고 달려오는 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무진은 그에겐 별 볼 일이 없지만. 볼 일이 있는 것은 늘 한 회장이며 볼 일이 있을 때에만 무진을 찾는다, 그는.

“얘기는 들었다. 며칠 전에 습격을 받았다고.”
“네.”
“애들 시켜서 알아보니, 예상대로 흑룡회 놈들 짓이라더군. 보스가 직접 움직인 건 아니고 행동대장격의 놈들이 지들 선에서 일을 친 것 같은데. 어느 선에서 벌어진 일이건 그건 이쪽이 알 바 아니지.”
“…….”
“깔끔하지가 못하단 말이야. 4년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지다니. 이 바닥에서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순순한 의도로 받아들이긴 힘들지, 이건. 뭔가 든든한 뒷배라도 생긴 건진 모르겠지만 우릴 집어삼키겠다고 도발하는 게 아니고서야.”

한 회장은 깨끗하게 닦아 반짝반짝 빛나는 골프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거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은 무진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기 때문이다. 한 회장의 말은 그에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시선은 바닥의 어딘가에 하염없이 박혀 있다. 머릿속으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무진은 묵묵히 한 회장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한 회장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비단 그가 제 아버지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자식사이라고 무진을 특별하게 여기는 한 회장이 아니니까. 지시가 떨어질 때마다 잠시라도 주저하거나 겁을 내면서 살 궁리를 하려 들지도 않는다. 무슨 말을 들어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무엇을 봐도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 도무지 인간스럽지가 못하다는 거다. 쯧 하는 소리를 내어 낮게 혀를 차던 한 회장이 무진을 슬쩍 떠보듯 물었다.

“네 수하들 말이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냐?”
“뭐가 말입니까?”
“멍청하긴. 그간에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 거다.”
“여관에 있었습니다.”
“여관?”

무진은 속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굳이 한 회장에게 재희와 재동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딱히 하고 싶지도 않다.

한 회장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로소 고개를 들어 무진을 바라봤다. 무진이 부상을 당했다고 당장 병원으로 뛰어가지 않은 것만 하더라도 다행일 테지만, 여관에 숨어 있었다니 좀 의외다. 아니, 애초에 여관에서 피를 흘리면서 위태롭게 숨어들어온 사람에게 방을 내어준다는 것 자체가 의아하지 않은가. 부끄러워 말을 안 해 그렇지 혹시 모르는 일이다. 무엇에도 관심 없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무진이 어딘가에 몰래 그를 돌봐줄 정부라도 하나 뒀을지도.

뭐, 어찌됐든 상관없다. 무진은 멀쩡히 살아 돌아왔고, 괜히 경찰에 알려져 소란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무진이 칼을 맞은 덕택에 요새 들어 자꾸 눈에 거슬리는 무리들을 쳐낼 명분을 얻었으니 말이다. 조폭은 명분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별다른 이유 없이 가볍게 행동하는 것은 양아치나 하는 짓이다. 명분이 없어 주저하던 중에 모처럼 기회를 얻었다. 4년 전 갑작스런 공권력의 개입으로 제대로 짓밟지 못하고 살려두었던 흑룡회의 싹을 완전히 짓밟을 기회. 잘만 된다면 이쪽 바닥은 순전히 한 회장의 차지가 될 것이다.

“지금은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다. 언제 시작할지 모르니 네 녀석도 매사에 단단히 준비해두는 게 좋을 거다.”  

한 회장이 흥분감에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무진은 그런 한 회장을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만 하고는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이것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 회장을 볼 때마다 무진은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어째서 저 사내가 자신의 아버지인 것인지. 어째서 저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사내가.

단 한번이라도 한 회장은 무진에게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다. 만약 무진이 그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의 친아들이었다면 분명히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이니까, 법률상 서류 한 장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게 전부인 관계니까 그나마 체념이라도 할 수 있는 거다. 남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자신을 아들이 아닌 그저 밥 먹여 키우는 똥개 정도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스스럼없이 버리고 다시 주울 수도 있는 거라고.

한 회장의 집으로 왔던 것은 무진의 나이 여섯 살 때였다. 그 전에는 무진 또래의 아이들이 가득한 시설에서 지냈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부모는 부재했다. 한 번이라도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정을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그런 무진의 앞에 한 회장이 나타났다. 우리에 갇혀 있는 짐승을 대충 손으로 찍어 고르듯, 그는 한껏 뛰놀고 있는 놀이터의 아이들을 훑어보다가 손을 들어 무진을 가리켰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하필 무진이 서 있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무진으로 하여금 제 뒤를 이어 지금의 회사를 물려주겠노라고, 한 회장은 늘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러나 1g의 진심도 담겨 있지 않은 빈말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저 그는 방패막이가 필요했을 뿐이다. 자신을 향하는 온갖 위협과 오욕을, 그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대신 뒤집어 써줄 그런 방패가. 그래서일 거다. 무진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잠자코 복종하지 않고 대뜸 야구를 하겠다면서 고집을 부렸을 때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은.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이 무슨 명령을 내리든 꼬리를 흔드는 개였을 뿐, 달리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불가능한 꿈을 좇는 인격체가 아니었다.

야구는 무진에게 있어서 유일한 탈출구였지만 결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마지막이 올지 막연했기 때문에 한 번의 공을 던지더라도 절실함을 담아 던졌다. 자신이 던진 공을 타자들이 쳐낼 때면 딛고 있는 세상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위태로웠다. 언제부턴가 야구는 무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아닌 무진의 생명줄과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그것을 그만두는 순간 인간 한무진의 삶도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운이 좋아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구단에도 들어갔지만 거기까지였다. 운이라는 것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지, 2군에서 1군으로 올라가 처음으로 치룬 경기에서 첫 승리를 따낸 그 날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운’을 언급할 만한 일은 무진에게 생기지 않았다.

앞으로의 경기를 준비하며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차도 거의 없던 도로의 끝에서 갑자기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확 들어왔다.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서서 무진이 나타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갑작스런 점등에 무진의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있었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무시할 수 없는 속력으로 무진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고,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오토바이 앞에서 피로로 지친 무진 무진은 속수무책이었다.

오토바이와의 충격으로 몸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면서 몸이 데굴데굴 바닥 위를 굴렀다. 온몸의 뼈가 가루가 되는 것 같은 통증에 신음하면서도 오른손으로 몸을 더듬어 왼쪽 어깨와 왼쪽 팔이 무사한지부터 살폈다. 그러나 오토바이에 정확히 가격당한 왼쪽 어깨와 팔은 차라리 제 몸에 붙어 있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끝났다.

의식이 점차 흐릿해지는 상황에서도 그 생각이 들었다. 두 세 번의 수술을 하는 동안 무진은 쭉 의식이 없었다. 의식을 차렸을 때에는 거의 온몸에 붕대가 휘감겨 미라나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재활을 열심히 한다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에는 큰 지장이 없을 거라는 말, 그러나 다시 마운드에 서는 것은 어쩌면 힘이 들지도 모르겠다는 말은 무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 떼를 쓰는 놈에겐 매가 약이지.

멍하니 넋을 놓고 침상에 앉아 있던 무진을 보며 한 회장이 불쑥 꺼낸 말이었다. 무진은 매섭게 눈을 치떠 한 회장을 바라봤다. 한 회장이 꺼낸 말의 뉘앙스가 어쩐지 무진이 그리 될 줄 알고 있었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 하나쯤은 소리 없이 죽일 수 있을 한 회장이었다. 야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들놈의 한쪽 어깨나 팔쯤 가볍게 망가뜨리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한 회장은 발뺌할 의사가 전혀 없는지 비죽 미소를 지으면서 한마디를 더 보탰다.

- 거역하라고 들지 마라. 내가 가차 없는 인간이라는 건 네 녀석이 더 잘 알잖아?

그렇다고 조폭이 된 거냐고. 그렇다고 그대로 숙이고 들어가 한 회장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얼간이가 된 거냐고. 한 회장의 치밀함과 비열함을 몸소 겪어보지 않은 누군가는 쉽게 비난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무진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회장이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잃을, 보잘 것 없는 그더라도 그것 하나만은 꼭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예쁘더구나. 정혜라던 그 아이.

한 회장은 자신을 거역하지 말라는 당부를 대신해서, 자신의 허락 없이 죽을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말을 대신해서 그 한마디 말을 툭 내뱉고는 무진의 병실을 빠져나갔다. 한 회장에 대한 분노로 꽉 쥐어졌던 주먹에서 힘이 탁 풀렸다. 헛웃음까지 났다. 벗어날 수 없다. 거역할 수 없다.

진심을 다해 하고 싶은 것조차 할 수 없는 삶이란 어차피 무진에겐 필요 없는 것이었다.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다. 살기 위해, 혹은 죽기 위해 아등바등 거릴 필요도 없다. 어차피 그 선택은 무진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 속에 갇힌 햄스터 따위처럼, 적당히 골라진 삶이란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허튼 욕심을 버리는 법도 배웠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그때, 떠나보냈던 정혜를 4년 전 우연히 다시 만났던 그날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녀의 손을 가볍게 놓을 수 있었을 정도로. 정혜는 야구를 할 수 없게 된 무진이라 할지라도 그 곁에 남고자 했지만, 또 한편으론 무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차갑게 식어서 헤어지는 게 아닌 이별은 상상하던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아직 마음속에 남은 미련에 더 아팠다.

그러나 차츰 그것에도 익숙해졌다. 이제는 정혜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이고, 그녀는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고 깨끗이 단념하고 나서는 괴상할 정도로 말짱해졌다. 모든 걸 포기하면 차라리 마음만은 편하다는 것도 그렇게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껏 아무것에도 욕심내지 않고, 삶에 미련을 두지도 않고, 두려움도 없이 아무렇게 뒹굴어가며 살았다.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 생각했다. 아직 죽음이 다가오지 않는다면. 재동이 대뜸 무진 자신의 앞에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는 거다.

교도소에서 정혜의 편지를 받았을 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이의 존재가, 눈앞에서 꼬물거리고 체온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니 무진의 마음속에서도 극명하게 살아 숨 쉰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욕망이 솟구쳐서,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 늘 자문하면서도 몸은 항상 재동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단순하게 사랑하던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것, 혹은 자신의 피가 흐르는 핏줄이라는 것을 떠나서 재동은 그 존재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무진을 몇 번씩 들었다 놓는 그 작지만 강렬하게 빛나는 존재를 탄생시킨 하늘이 아직은 무진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시험하려 드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무시하고 싶지 않다. 욕심이 난다.

문득 살고 싶어졌다. 살고 싶다. 그저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으로.  

수년 전 정혜가 다칠까봐 두려워 그녀를 놓았던 때와는 달리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말랑말랑하고 작지만 따뜻한 손을 놓고 싶지가 않다. 아직은 무진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녀석에게 어떠한 존재가 되어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녀석이 쑥쑥 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고 해도.









Second Daddy _ 10







“형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린이집 앞에 차를 세워둔 지도 어느새 30분 남짓이 지났다. 정한은 백미러를 연방 힐긋거리며, 창밖 너머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무진에게 물었다. 한 회장의 호출로 그의 집무실에 불려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들른 어린이집이다. 그러나 어린이집으로 가라고 지시했던 무진은 그 앞에 도착한 이후로 지금까지 뒷좌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딱히 볼 일이 있어 온 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린이집의 아이들은 지금 실내에서 놀고 있는지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하얀색으로 도색된 울타리도 굳게 닫혀 있다. 보조석에 앉아서 고개를 쭉 내빼고 어린이집을 살피던 창수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 무진을 보며 물었다.

“제가 가서 그 녀석을 불러올까요, 형님?”
“됐어. 그만 돌아가.
“오늘은 안 보고 가시는 겁니까?”
“돌아가라고, 네 놈들.”
“뭐라고 하셨습니까, 형님?”
“돌아가 있으라고. 네 놈들 험상궂은 얼굴 보면 싫어할 거야, 아마.”
“네?”

무진이 자신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듯이 말하곤 바로 뒷좌석 문을 열고 내렸다. 창수와 정한은 어린이집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무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이다.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게. 그런데도 무진은 누군가가 정한과 창수의 험상궂은 얼굴을 싫어할 거라며, 무진은 상관 말고 두 사람은 그만 돌아가 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정한과 창수가 한사코 자리를 지키고 서서 무진의 동태를 살피자, 어린이집의 울타리 앞으로 척척 걸어가던 무진이 홱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리곤 시선이 딱 마주치자마자 미간을 확 일그러뜨리며 얼른 가보라는 듯이 성난 손짓을 한다.

창수와 정한은 일단 물러나 있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 무진을 거슬렀다가 괜히 큰일을 만들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무진만 남겨두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단 무진의 시야 밖으로 차를 몰아 사라졌다. 두 사람이 탄 차가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무진은 그제야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돌려 어린이집 쪽을 힐긋거렸다. 그때였다.

달칵.

닫혀 있던 어린이집 문이 안에서부터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어린이집의 여선생이었다. 처음 무진을 만났을 때 괴한들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겠다며 국자 하나를 야무지게 두 손에 쥐고 있던 바로 그. 아이들의 실외활동을 지도할 참이었는지, 문손잡이를 잡고 서서 구령을 붙여 가며 걸어 나오는 아이들을 지켜보던 선생이 낯선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곧 그녀의 시선과 울타리 밖에 서 있던 무진의 시선이 공중에서 딱 마주친다. 어린이집 선생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거리며 놀랐다. 곧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얼른 얼굴에서 놀란 표정을 숨기느라 바쁘다.

“아…… 음…… 재, 재동아. 아버지 오셨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선생은 다른 아이들이 모두 놀이터로 달려 들어간 이후에야 느릿하게 걸어 나오던 재동과 눈높이를 맞춰 쪼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서슴없이 무진을 ‘아빠’라고 지칭하는 그녀의 음성에 무진은 갑자기 가슴 속 어딘가가 뜨끔해지는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까지는 납치범 보듯 무진을 보던 그녀가 어떻게 재동과 무진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일까? 혹 재희가 따로 말해둔 것일까?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구태여 왜? 어째서 그는 무진과 재동의 관계를 어린이집 선생에게까지 말해야 했는가? 무진이 재동의 어린이집에 드나드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무진이 그러한 혼란으로 머릿속 의문을 채 잠재우지 못하고 있는 사이, 어린이집 선생의 곁에 서서 고개를 이리 빼고 저리 빼던 재동이 다시 선생을 빤히 본다. 어디에도 아빠가, 재희가 없는데 어째서 아빠가 온 것이라고 말하느냐는 눈초리로 말이다. 아무래도 재희가 재동에게는 아직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어린이집 선생은 재동의 작은 동을 토닥이듯 두드리며 말했다.

“재동이도 가서 놀고 있으렴.”

재동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는 놀이터를 향해 쫄랑쫄랑 달려가다가, 하얀 울타리 너머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한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무진을 빤히 봤다. 단 몇 시간 전에 본 사람도 금세 잊을 만한 나이다. 그러나 재동은 고작 사나흘 정도 같이 지냈다는 이유로 무진을 기억하는지 소리 없이 해쭉 웃으면서 작은 손을 무진에게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리곤 다시 몸을 돌려 놀이터로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무진에게 선생이 가까이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금방 보고 갈 테니까…….”
“천천히 보고 가셔도 돼요. 그럼.”

어린이집 선생은 울타리 문을 슬쩍 열어주고는 이제 그만 가보겠다는 듯이 다시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무진은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로 차분히 걸어가는 선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가? 그렇게 대단한 사실인가? 무진이 재동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경계심이 가득하던 낯선 누군가의 두 눈에 친절함이 가득 깃들게 할 정도로.

무진은 거리낌 없이 열어젖혀진 울타리를 슥 밀어 열곤 안으로 들어갔다. 놀이터 바깥에 벤치 두 개가 놓여 있다. 한쪽엔 어린이집 선생이 앉아서 그 주변을 에워싼 여자아이들 몇몇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진은 비어 있는 벤치에 슬쩍 걸터앉았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모래장난을 하거나 소꿉놀이를 하고,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천천히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훑어보던 무진은 곧 어렵지 않게 재동의 뒤통수를 찾아냈다. 재동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지 두 손을 열심히 꼬물거린다.

“……?”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에 있는데도 덜컹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 부모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또래들과는 뚝 떨어져서 혼자서 놀고 있는 뒷모습을 발견한 부모라면. 어째서인지 재동은 놀이터의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혼자 놀고 있었다.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도,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도 재동이 보이지 않는 듯 저들끼리 희희낙락이다. 재동이 제 앞에 앉혀 놓은 곰 인형이 탐나는지 여자아이 둘이서 그 앞을 알짱거리며 저들끼리 속닥거리기도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진의 두 손이 꽉 주먹 쥐어 졌다.

재희의 말대로라면 이곳으로 이사를 온 지도 6개월이며, 재동이 이 어린이집에 다닌 지도 그와 비슷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같이 노는 친구 하나 없다는 건, 그간 쭉 혼자서 놀았다는 것일까? 재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아니, 알고 있다면 계속해서 이 어린이집에 재동을 보낼 리가 없다. 아침마다 재동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저녁 때 데리고 오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그가, 이런 속사정까지야 알 턱이 없다. 말 못하는 재동이 떼를 부렸을 리도 만무하고.

“이봐, 너희들.”

여자아이들의 머리를 매만져주며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이집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동에게로 걸어갔다. 선생이 다가오자 여자아이들이 까르륵거리며 도망간다. 선생은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재동을 품에 안 듯 일으켜 세워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곤 저마다 엄마니 아빠니 해가며 모래를 조물거리고 있던 아이들에게 제법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친구랑은 다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했니, 안 했니?”
“했어요.”
“혼자 놀고 있는 친구한텐 뭐라고 말하자고 했었지?”
“같이 놀자, 친구야.”

아이들이 배운 대로 열심히 입을 놀려 대답했다. 단순히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일 뿐, 재동을 향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어투였다. 어린이집 선생도 늘 같은 이유로 아이들을 훈계하는 것에 지쳤는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재동과는 같이 놀지 않는 거냐고 아이들에게 되물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번갈아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툭, 툭 그 이유를 내뱉었다.

“걔는 말도 못 한단 말이에요.”
“맞아. 뭐라고 해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이상해요!”
“바보 같아!”

아이들이 악의는 없이, 그러나 자신들이 느낀 바를 여과도 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생의 손에 이끌려 녀석들 앞에 서 있던 재동이 주춤거리며 선생의 등 뒤로 조금씩 몸을 숨겼다.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하면 못 쓴다며, 어린이집 선생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이들을 혼내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고집스레 입술만 비죽 내밀 뿐이다. 풀이 죽어 재동의 동그란 고개가 바닥을 향해 푹 숙여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진이 화를 참지 못하고 벌떡 벤치에서 일어나 척척 놀이터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야, 이 좆같은 새끼들아! 지금 뭐라고 나불거렸어!”

무진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아이들을 향해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자, 아이들을 따끔하게 혼내던 어린이집 선생이 화들짝 놀라선 무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무진이 어린아이들이라고 상관하지 않고 집어던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무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꽉 쥔 주먹은 눈에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콱 베어 문 입술에서는 곧 피라도 터질 기세다. 갑작스런 무진의 난입에 아이들도 저들끼리 딱 붙어선 작은 몸을 한껏 웅크렸다. 고 작은 몸에도 생존본능이란 살아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진정하세요, 아버님!”
“씨발,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이 좆만한 것들이 지금 싸가지 없게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있잖아! 이리 와! 이리 못 와?!”

무진이 아이들을 향해 손을 뻗자 어린이집 선생이 온몸으로 달려들어 그를 뜯어말렸다.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아이들과 한데 뒤엉켜 옥신각신하고 있는 어른들 사이에서 멀뚱히 서 있던 재동의 눈썹이 축 쳐져 내려갔다. 곧이어 코끝이 조금씩 붉어진다싶더니 곧 녀석의 동그란 눈동자 가득 눈물이 차오른다. 재동은 망울망울 차오른 눈물을 뚝, 뚝 떨어뜨렸다. 여전히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린 채로 통통한 두 볼에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울음소리를 들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들리지 않아서 더 서럽게 느껴지는 울음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진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그제야 어린이집 선생도 무진을 떠밀던 것을 멈추곤 돌아서서 펑펑 우는 재동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재동은 어린이집 선생의 어깨에 제 고개를 파묻은 채로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 아아, 또 울리고 말았다. 울리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때도, 지금도.

단순히 무진이 화를 내며 달려드는 게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단지 선생이 자신 때문에 친구들을 혼내는 게 부끄러워서 우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자신을 피하고, 함께 놀아주지 않는 것 때문도 아니다. 그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아이는 그것이 버거워서 울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을 상처가 아파서 울고 있었다. 제 아버지의 품에서도 아니고, 자신의 유일한 방패가 되어주고 있는 선생의 품에서. 가슴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하아…… 하아…….”

재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린이집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벤치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무진의 모습이었다. 재동은 그 건너편 벤치에 어린이집 선생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계속 운 탓인지 두 눈이 퉁퉁 부어 있다. 일을 하던 도중에 어린이집 선생의 급한 연락을 받고 모든 걸 내던진 채로 곧장 달려오는 길이다. 그 탓에 어린이집 앞 골목에 어중간하게 정차시켜놓은 차 시동도 끄지 못했다.

“아버님, 오셨어요?”
“네, 선생님.”

재희와 어린이집 선생이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무진이 알아서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어린이집 선생은 오늘은 그만 집에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하곤 나머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어린이집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재희는 재동이 앉아 있던 벤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여전히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 눈물을 깨끗이 닦아주자 재동이 두 팔을 뻗어 재희의 목을 끌어안는다.

재희는 그대로 재동을 품에 안아 무진이 혼자 앉아 있던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땅의 어딘가에 막연히 시선을 내리꽂고 있던 무진이 재희의 구두를 보고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재희를 바라본다. 재희가 아무런 말없이 그저 고요히 자신을 바라보자 슬쩍 눈동자를 굴려 그 시선을 피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중얼거리기도 했다.

“가려고 했어. 그냥 얼굴만 좀 보고 가려고 했는데…… 애새끼가 울잖아. 애새끼 울려놓고 그냥 갈 수도 없고.”
“어제는 왜 말도 없이 간 겁니까?”
“그렇게 됐어. 슬슬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먼저 찾으러 올 테니까.”
“찾으러 와요? 누가 말입니까?”
“있어, 그런 사람.”

무진은 한 회장에 대한 언급을 피하며 대충 대답했다. 재희에게 시시콜콜 한 회장과의 문제에 대해 말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재희는 또다시 입을 굳게 닫고는 무진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발길을 돌려 제 SUV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무진이 벌떡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서도 한참을 주저하다가 겨우 말했다.

“저녁, 먹고 가. 사줄 테니까. 신세도 졌고.”

무진의 뜬금없는 제안에 재희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서서 무진을 돌아본다. 그리곤 힐긋 제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특유의 사무적인 어투로 대꾸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입니다만.”
“그래도 먹어.”

재희가 이래저래 말대꾸하는 것에 짜증이 났는지 무진이 확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명령하듯 말하곤 척척 앞서서 걸어갔다. 어린이집 울타리 너머로 걸어 나간 무진은 차에 타도 좋다는 재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차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그 거침없는 행동력에 말을 잃고 있던 재희는 제 품에 안겨 있는 재동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재동은 볼까지 다 홀쭉해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작은 몸을 들썩이면서 울었을 테니 뭔가를 좀 먹이는 게 좋겠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재희는 별 수 없이 제 SUV쪽으로 걸어와서 뒷좌석 문을 열곤 무진의 옆 좌석에 재동을 앉혔다. 늘 보조석의 어린이 전용 시트가 녀석의 자리였지만, 그건 다만 재동을 돌봐줄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진이 함께 있는데 굳이 재동을 위험천만한 보조석에 태울 이유야 없는 것이다. 재동은 그새 때가 타서 꼬질꼬질해진 곰 인형을 작은 손으로 조물거리면서 이따금씩 슬쩍 고개를 들어 무진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화가 났는지 어쨌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사내자식이 눈치나 보고 그러지 마.”

무진이 멀뚱히 앞을 보며 말했다.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는지 재동이 얼른 무진에게 닿았던 시선을 제 곰 인형에게로 옮긴다. 무진은 옆에 앉은 재동에게 안전벨트를 채우려다가 그것이 여의치 앉자 녀석을 가뿐히 안아들어 제 무릎에 앉혔다. 녀석의 동그란 배를 품어 안곤 안전벨트를 채우듯 제 두 손을 깍지 껴서 붙잡았다. 그 모습을 백미러로 확인한 재희가 미처 시동도 끄지 못했던 차를 몰아 골목을 빠져나갔다.

메뉴의 선택은 순전히 재희의 몫이었다. 아직 재동이 무엇을 잘 먹고, 무엇을 못 먹는지 알지 못하는 무진은 입을 다문 채로 제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놀고 있는 재동의 정수리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재희의 SUV는 그의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골전문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요즘 아이 같지 않게 재동이 패밀리 레스토랑의 기름진 음식보다는 지극히 토속적인 음식들을 더 잘 먹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이라 한적한 음식점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동은 언제 그렇게 펑펑 울었느냐는 듯이 말짱해진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음식점 한 곳에 마련된 놀이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곳에서 노는 어린아이라곤 한 명도 없었지만, 혼자 노는 것에는 익숙한지 스스럼이 없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무진이 눈동자만 굴려 맞은편에 앉은 재희를 보며,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어린이집, 옮겨야 하지 않냐?”
“무슨 이유로 말입니까?”
“아무 말도 못 들었어? 거기 선생한테…….”
“아니요, 아무것도요.”

예상은 했지만 정말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재희는. 재동이 어린이집에서 혼자 겉돌고 있다는 것도, 그것이 재동의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단지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말을 조잘조잘 잘 하는 평범한 아이들도 제 의사표현이 충분하지 못해 서로 다투고 토라질 나이가 아닌가. 그런데 재동은 아예 말을 하지 못하니 의사소통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 갑갑함을 이해한다고 녀석들의 행동이 괘씸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재희가 어린이집 선생에게서 전해들은 바는 재동과 아이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있어서 훈계를 하던 도중에 지켜보던 무진이 끼어들었다는 것 정도였다. 세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 소란으로 인해서 재동보다도 무진이 더 상처를 받은 것 같다.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평소보다 기가 죽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곧 주문한 전골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놀이방에서 신나게 놀던 재동도 재희가 부르는 소리에 얼른 테이블로 돌아왔다.

보글보글 끓는 국물을 바라보고 있던 재동이 꿀꺽 침을 삼킨다. 재희는 국물이 하얗게 끓어오르자 불을 줄이고는 무진의 그릇에 먼저 전골을 덜어주었다. 그걸 건네받은 무진은 일말의 미련 없이 그것을 재동의 앞에 놓아주었지만. 재동은 커다란 숟가락을 야무지게 손에 들고는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전골 국물을 후후 불어 식혔다. 재희가 전골 속의 쇠고기를 집어 녀석의 입가에 대주자 재동이 입을 쩍 벌려서 날름 그것을 받아먹는다. 입 속의 고기를 다 삼키고 나서는 다시 입을 쩍 벌려서 뭔가를 넣어주길 기다리기도 했다. 영락없이 아기새다. 먹이를 물어다주길 기다리는 아기새.  

재동이 열심히 입술을 옴짝거리며 음식을 받아먹는 걸 지켜보느라 전골 국물이 다 식도록 멍하니 있던 무진에게, 재희가 식은 국물에 밥을 말아 재동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내일, 정혜에게 가려고 합니다.”
“그래?”
“오랜만에 재동이도 인사시킬 겸.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가지 못했으니까요.”
“흐음…… 그런데 그 얘길 왜 나한테 해?”

무진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따지듯 말했다. 시선은 한결같이 입맛을 쩝쩝 다셔가며 맛있게 전골국물과 밥을 먹는 재동에게 꽂혀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시선은 곧바로 재희에게 가서 꽂혔다. 그러지 않고서는 베길 수 없도록, 재희가 무진의 귀가 확 뜨이는 그런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같이, 가겠습니까?”















재동은 여전히 꼬질꼬질한 곰 인형을 품에 꼭 안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뒷좌석에 장착한 어린이시트가 녀석의 작은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잘 고정시켜 주고 있음에도 무진의 시선은 연방 녀석 쪽을 향했다. 재동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더 신경이 쓰인다. 의식하면서 피하려고 해도 시선은 녀석에게 붙박여서 떨어지질 않는 거다. 교도소에서 정혜의 편지를 처음 받던 날에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사로잡혀 버리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창밖으로는 수많은 나무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높은 빌딩과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아파트만 가득하던 도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오랜만에 정혜를 보러 가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재희의 제안에 아주 잠시 망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끝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한 번은 봐야 했다. 비록 정혜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무진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꼭 한 번은.

정혜가 있다는 곳은 생각처럼 그리 멀지는 않았다. 재희의 집에서 출발하면 차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수목장림이었다. 어디에선가 새로운 장례문화라며, 화장한 유골을 수목의 밑이나 주위에 묻어 장사를 지내는 것을 수목장이라 한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던 재동도 재희의 차가 주차장에 주차를 할 즈음 슬며시 눈을 떴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제 엄마에게 가까이 왔다는 걸 알았는지 얼른 손등으로 두 눈을 비볐다.

“이쪽입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재희가 앞장서며 말했다.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서 그런지, 삼림욕장처럼 상쾌한 공기가 폐 속까지 밀려들었다. 재동은 무진의 옆에서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었다. 어른들의 발걸음에 맞춰 걷기가 버거워 보였는데도 안아달라거나 하지 않는다. 무진이 우뚝 걸음을 멈추자 그 곁에서 열심히 걷던 재동도 잠시 걸음을 멈추곤 무진을 빤히 올려다본다. 무진은 재동의 손에 잡혀 바닥을 휩쓸고 다니는 곰 인형을 제 손으로 잡아들며 녀석에게 말했다.

“대신 들어줄 테니까.”  

재동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은 곰 인형을 반대편 손으로 바꾸어 들곤 재동에게 슬쩍 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재동이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무진의 손을 가만히 올려다보니 이내 거리낌 없이 제 작은 손을 무진의 손에 꾹 밀어 넣는다. 손 안에 헐겁게 들어오는 작은 손이 뜨거운 온기를 품고 있다. 앞서서 걸어가던 재희는 어느새 어느 자작나무 앞에 서서 손을 뻗어 자작나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재희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자작나무 앞에 다다르자 재동도 얼른 무진의 손을 놓고 달려가 두 팔로 자작나무를 꼭 끌어안는다. 재희가 아직 어린 녀석에게 정혜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녀석도 그것이 제 엄마의 분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제 통통한 볼이 꾹 눌릴 정도로 바짝 붙어 서서 떨어지려고 들질 않는 걸 보면. 무진은 제 손에 들린 곰 인형을 들어서 바라보다가 터덜터덜 재희와 재동 부자에게로 걸어갔다.

“이거냐?”
“네.”
“……어떻게 된 거야?”

그러고 보니 제대로 묻지도 않았다. 3년 전에 죽었다는 정혜가, 재동이 아직 핏덩이였던 그 시기에 죽어버렸다던 정혜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무의식중에 재동을 낳다가 죽었다거나 갑작스런 사고로 죽어버렸으리라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혜에게 딱히 지병이랄 게 없었고, 정혜보다야 무진이 더 자주 감기에 걸렸을 만큼 건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혜의 유골 위에 우뚝 선 자작나무를 보고나니, 그녀가 정말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재희는 애매하게 던져진 무진의 질문이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를 알아차린 듯, 나무를 꼭 껴안고 있는 재동을 보며 말했다.

“암이었습니다. 임신 5개월째에 접어들었을 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내내 많이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보다 뱃속에 있는 생명이 그 영향을 받을까봐 하루에도 몇 번씩 의사에게 아기는 괜찮은 거냐고 묻곤 했을 정도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치료를 받지 않고 버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출산예정일을 3주쯤 앞두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이 잘 되어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그 뒤론 쭉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암세포의 전이가 생각보다 너무 빨랐어요.”

재희는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입을 닫았다.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무진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새하얗게 질렸기 때문이다. 제법 충격이었다. 꿈에도 그녀가 그렇게 서서히 고통을 느끼며 죽어갔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신 5개월에 접어들었다며 보내온 편지에서도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단지 태어날 아기에 대한 설렘만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재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찬찬히 머릿속에 정리해보던 무진은 왜 출산예정일을 3주 정도 앞두고 편지가 끊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내지 않은 게 아니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리라. 출산 후 곧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했을 테니까. 많이 두려웠을 것이다. 삶의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닐지 모르지만, 갓 아기를 출산한 어머니만큼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도 없을 테니 코앞까지 들이닥친 죽음의 그림자가 정말 두려웠을 거다.

얼마나 살고 싶었겠는가. 큰 욕심 없이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무진의 얼굴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무진은 재동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재희에게 머릿속에 갓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너…… 그걸 알면서도 저 녀석 아빠가 될 결심을 한 거냐?”
“뭘 말입니까?”
“정혜가 암환자라는 거, 그래서 얼마 못 살 거라는 거 다 알면서도 흔쾌히 아이 아빠가 될 결심을 한 거냐고.”
“네.”
“저 녀석이 네 새끼가 아닌데도?”
“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속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자신의 핏줄도 아닌 아기를, 아무리 아기의 엄마를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곧 죽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아기를 떠맡을 수 있었다는 것일까. 무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얼굴을 찌푸렸다. 재희는 재동에게 두었던 시선을 무진에게 옮겨서, 단 한순간도 그 시선을 무진에게서 떼지 않으며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정혜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임신 5개월째에 접어든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한무진씨, 당신의 아기를 가진 것을 너무나도 기뻐했지만 그만큼 자신이 가진 병 때문에 많이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낳아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설사 낳는다고 하더라도 건강한 몸이 아니니 아기의 곁을 평생 지켜줄 수는 없을 거라며 매일 밤 두려움에 울었습니다.”
“…….”
“그래서 낳아달라고. 내가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재동이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무진은 고개를 들어 재희를 바라봤다. 재희의 시선은 올곧게 무진의 두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간의 허세도 담겨 있지 않은 진중한 눈빛이다. 재희는 어쩌면 무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이 정혜를 사랑했던 것일까? 그래서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혜가 다른 남자의 아이만 남겨두고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떠맡았을 정도로? 무진의 얼굴에 비치는 끝없는 의문을 씻어주는 한마디는 그다지 뜸들이지 않고 튀어나왔다. 속 시원하게 갈증을 씻어준다기보다 오히려 더 큰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긴 했지만.  


“내가 아버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아긴 한무진씨, 당신의 아이니까.”










Second Daddy _ 11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제가 알아들을 수 없도록 난해한 것이라 따분했는지 재동은 풀밭에서 허공을 향해 사뿐사뿐 뛰어오르는 풀벌레를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풀벌레를 잡기 위해 두 손바닥을 모으고서 녀석이 바닥에 착지하길 기다렸다가 그것이 뛰어오르기 전에 바닥을 덮쳤지만 번번이 풀벌레는 재동의 작은 손을 피해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재동은 지쳐서 나가떨어지기보다 심기일전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쉬고 있는 풀벌레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너무 집중을 한 탓인지 어느새 입술은 병아리 부리처럼 뾰족하게 모아져 있다. 두 볼은 금세 상기되어 발갛다. 죽은 엄마를 만나러 온 아이답지 않게 활기찬 모습이었다.

재동이 풀벌레와 아옹다옹하는 사이, 자작나무 앞에 서 있던 무진과 재희 사이에는 한동안 묘한 적막감이 흘렀다. 재희는 여전히 무진의 두 눈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고, 무진도 어쩔 수 없이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잔뜩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재희가 이상한 말을 내뱉은 이후부터다. 재동이 무진의 아이라서 재희 본인이 녀석의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는 둥의. 무진은 곧 애매하게 웃으면서 가벼운 어투로 대꾸했다.  

“뭐야, 뉘앙스가 좀 웃기잖아. 똑바로 말하라고, 기분 나쁘게…….”

재희가 따라 웃지 않는 바람에 곧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말았지만. 무진은 괜히 제 애꿎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그 묘한 분위기 속에선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재동도 한 번 바라본다. 딱히 녀석이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한 시도 떨어져 나가지 않는 재희의 시선에서 잠시나마 자유롭고 싶었을 뿐. 그러나 무진이 어떤 행동을 보이든 재희는 무진에게서 한 시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어째서 부정하지 않는 건가. 어째서 말실수라고 말하지 않는 걸까. 그가 만드는 이 길디긴 침묵은 상황을 더 괴상하게 끌어가고 있질 않은가. 무진은 재희를 힐긋거리며 아랫입술을 윗니로 지분거렸다. 그가 무진이 들은 말에 한 치의 오류도 없다는 듯이 침묵을 지키니까 괜히 조바심이 난다. 어디로든 가버리고 싶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재희는 자신이 그대로 더 고집스레 무진을 바라보았다간 틀림없이 무진이 이 자리를 피해 도망가 버릴 거라고 판단했는지 슬쩍 시선을 자작나무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정혜랑은 초등학생일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두 집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둔 채 마주보고 있었고, 어머님들께서 본래 친분이 있으셔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잘 아시겠지만 정혜가 완전히 여성스러운 타입은 아니라서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서로 별 스스럼없이 지냈습니다. 동성친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얼마나 격이 없는 사이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정혜는 부끄러움이란 일체 없는 여자였다. 털털하기론 여느 남자보다 부족함이 없었는데, 어느 날은 갑자기 창문을 열고 슈퍼에 가는 재희를 불러 세우면서 생리대를 좀 사다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여자형제라곤 없이 외동인 재희가 물건을 잘못 집어올 것을 염려해 날개가 붙은 중형으로, 브랜드명까지 일일이 불러주면서. 10년을 같이 산 부부라면 가까스로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던 일이었다.

그래서다. 단 한순간도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지 않았던 것은. 그렇게 격의 없이 지냈기 때문에. 정혜가 난생 처음으로 조금 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을 때에는 반쯤은 신기해하면서, 나머지 반쯤은 정말로, 앙금 없이 기뻐해줄 수 있을 만큼 돈독했던 사이였다. 그녀와 결혼을 하거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거나 하는 것은 꿈조차 꿔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연애상대로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관계.

정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사람은 바로 무진이었다. 남녀공학을 다니던 정혜가 2학년이 되면서 처음으로 그와 같은 반이 되었다고 했다. 그즈음의 무진은 수업시간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지만, 고교야구에서 우승을 놓친 적이 거의 없던 야구부의 주전 자리를 일찍이 꿰차고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눈에 띄는 사람은 늘 사랑받는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반짝반짝 빛이 나니 누구에게고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혜에게서 한무진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정혜가 다니는 학교에는 아는 사람이라곤 정혜를 제외하면 단 한명 밖에 없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한 기회로 스치듯 만났던 무진뿐인데, 두 사람이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놀랐다는 거다.

무진을 처음 만난 날, 보란 듯이 제 팀의 승리를 지켜내는 무진의 모습을 보고 한동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침나절에 처참하게 구르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에, 뼈에는 이상이 없는 듯 했지만 까진 상처가 쓰라리고 신경이 쓰여서 제구가 쉽지 않다는 걸 분명히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많이 놀랐던 거다.

무리를 해가면서도 마운드에서 내려가기가 싫어서 관람객 전용 화장실로 몰래 빠져나와 찬물로 상처의 열기를 식히던 그 모습이 너무 어리석게 느껴져서, 자기학대 같아서 뒤를 쫓아가 쓴말을 했지만 그게 오히려 무진에겐 자극이 됐었던 모양이다. 하지 말라고 자극을 할수록 오히려 더 불타올라서 기어이 하고자 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날 무진은 재희에게 분명히 보여줬었다.

무진의 선전으로 학교 야구부의 패배가 확실시 되자 하나, 둘 자리를 떠나는 같은 반 녀석들에게 휩쓸려 자리를 뜨면서도 재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라는 것처럼 어깨를 쭉 펴고 마운드에 서 있는 무진의 모습을, 그 고집 세고 단순해서 오로지 하나 밖에 모르는 열일곱 투수의 모습을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 바라보았다는 거다.

그 뒤로 그의 경기는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속한 야구부가 우승을 했다는 소식은 전해들을 수 있었다. 우리 학교 야구부가 진 것은 순전히 더 막강해진 우승팀과 처음부터 겨누었기 때문이라는 담임의 변명 덕택이었다. 무진의 학교 야구부가 우승했다는 사실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고작 1학년짜리 투수마저 그렇게 죽어라고 달려드는데, 다른 선수들은 오죽하겠으며 그렇게 오기와 투기로 똘똘 뭉친 야구부는 누구라도 당해낼 수 없을 테니까.

학교 행사가 있어 수업이 일찍 끝나거나 1년에 한 번 뿐인 개교기념일이거나, 주말 등의 쉬는 날이면 바람을 쐴 겸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정혜의 학교를 찾곤 했다. 쉬는 날이라고 연습을 소홀히 하지 않는 그 학교 야구부의 훈련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아니, 이제라도 솔직히 말하건데 재희가 관심을 두고 지켜봤던 것은 야구부 전체라기보다 선배 투수들에 비해 몸집이 작고 뼈가 가는 1학년 투수였다. 늘 우승후보로 거론되는 야구명문답게 연습장은 늘 북적북적했는데 그 속에서 무진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장 바쁘게,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을 찾으면 그가 바로 무진이었으니 말이다.

야구가 그렇게까지 좋은 건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야구가 정말 좋아서 지칠 줄 모르는 것 치고는 좀 더 강렬한 절실함 같은 게 엿보이긴 했지만. 무진과 별다른 친분이 없는 재희로써는 그 절실함의 정체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씩 웃으면 둘도 없을 개구쟁이처럼 느껴졌지만 야구를 할 때만큼은 한없이 진지해졌다. 그는 연습 중 범할 수 있는 작은 실수만으로도 실전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아쉬워했다. 그 한 가지를 향한 올곧은 집념, 고집, 진지함과 성실함, 절실함. 그 모든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희가 무진에게서 점차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빛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니폼과 얼굴은 흙먼지에 잔뜩 엉망이 되었어도,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라고.

정혜와 본격적인 교제를 하고 난 뒤로 재희는 심심치 않게 무진을 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올 즈음 정혜를 데려다주러 왔다가 헤어지는 게 아쉬운지 골목 어귀에서 정혜의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까까머리를 못해도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볼 수 있었다는 거다. 정혜는 방학만 되면 그가 전지훈련을 가야 해서 그를 거의 볼 수 없다며 한숨을 쉬었지만 재희는 방학 중에도 몇 번 그를 볼 수 있었다. 갓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할 텐데도 동이 트지 않은 새벽에 정혜의 집 앞에서 기웃거리는 까까머리, 한참동안 닫혀 있는 창문만 올려다보다가 터덜터덜 돌아가는 까까머리, 돌아서서 가는 동안에도 몇 번씩 걸음을 멈추고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던 까까머리. 그게 무진이었다. 그리고 재희는 그 까까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그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정혜는 재희를 만날 때마다 신이 나서 무진의 이야기를 떠들어 댔으므로,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정말 싫을 때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부끄러울 때에는 귓등부터 발갛게 달아오르며, 뒷덜미를 슬슬 만지거나 코를 찡긋거리는 작은 습관이 있다는 것 정도는 자연스레 알게 됐다. 정혜의 목소리에는 늘 애정이 충만했으므로, 재희에게도 애정이 가득 담긴 표현들로 들려왔다. 어쩌다가 한 번씩 무진을 볼 때마다 마음이 요란해진 원인에는 그 탓도 없다 하진 않겠다.

혼란스러웠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무진은 마운드에 섰을 때처럼, 정혜의 옆에 서 있을 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사실 당시에는 그 혼란스러움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고 그 감정이 정혜가 무진에게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단순하게 무의식중에 가장 친한 소꿉친구를 빼앗겼다는 분한 마음이 괴상하게 표출 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프로야구에 입단한 후 훌륭한 경기를 보여주던 무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기 전까지. 무진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린 후에야 알았다. 그가 멀리 가지 않고 늘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제 감정을 간신히 억눌러 참을 수 있었던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과거를 회상하듯, 혹은 생각을 정리하듯 막연히 어딘가를 바라보던 재희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무진이 가장 궁금해 할 것들에 대해서 여과 없이, 숨김도 없이.  

“프로구단에 소속된 신인 투수, 한무진씨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정혜의 행방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이따금씩 전화는 왔기 때문에 아주머니도, 아니 장모님도 별도의 실종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이쪽에서 연락할 방법은 없었으니까 실종된 거나 마찬가지였죠.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정혜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어머니에게서 들었습니다. 정혜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무진씨가 왜 사라졌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그래서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꽤나 해쓱해져 있었습니다. 마른 몸에 비해서 배는 조금 부풀어 있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사실대로 말해주더군요. 한무진씨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과 암 진단을 받았다는 것 모두. 아이를 낳는 게 두렵다기에, 아주 조금은 주저하게 된다고 말하기에 낳아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키워줄 테니까 걱정 말고 낳으라고.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뭐라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틀림없이 똑바로 말하고 있다는 거야. 재동이가 한무진씨, 당신 아들이라서 내가 아이 아버지가 되겠다고 했어.”

무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재희가 하는 말 자체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그보다는 늘 밥맛없을 정도로 깍듯이 존대를 하던 그가 갑자기 말을 덜컥 놓는 바람에 배로 놀랐다. 그러나 재희는 자신의 말에 한 치의 틀림도 없다는 듯이 똑바로 무진을 바라봤다.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까 뭐라는 건가. 정혜의 아이라서가 아니라, 무진의 아이라서 기꺼이 그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했다는 건가? 대체 그게 무슨 의미인가, 대체 그게. 차근차근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순식간에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다. 재동의 존재조차 희미하던 무진을 찾아와 재동을 보여 놓고 굳이 아버지 노릇할 생각을 하지 말라며 자극한 것도, 무진이 재동의 곁을 은근히 맴도는데도 못 본 척 내버려둔 것도,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무진이 재희의 집을 찾아갔을 때 무진이 머무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스리슬쩍 배려해준 것도 모두 같은 이유에서라는 건가?

무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홱 쓸어 넘겼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야기는 한 가지 결론으로 모아지는데, 도저히 그 유일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떻게 남자가, 남자를. 무진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짐작했는지 재희가 한숨을 돌린 후 다시금 존대를 하며 말했다. 마치 무진을 다독이기라도 하는 듯 차분한 어조였다.

“정혜가 한무진씨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한무진씨에게 꼭 알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저 한무진씨의 핏줄이 이 세상에 태어날 거라는 사실만을 알리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정혜도, 나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일 때문에 유 선생님과 접촉하게 되면서 한무진씨의 이야길 듣게 된 겁니다. 당신이 그때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그 말을 듣고야 무진은 유 선생과 재희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재희가 유 선생을 통해 무진의 이야기를 들었을 무렵 무진은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교도소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든 거다. 무진의 아기를 가졌으며 이제 5개월이 조금 넘었다는 정혜의 편지가.

“나는 쭉 한무진씨가 출소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만해.”
“아니, 줄곧 기다렸어요. 그동안은 묵묵히 참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은 정혜였으니까,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정혜니까 그나마 참아줄 수 있었습니다.”
“닥쳐!”

무진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서 먼 곳에 떨어져 앉아 있던 재동에게까지 들렸는지 재동이 동그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을 쳐다본다. 무진은 어느새 두 손으로 재희의 멱살을 콱 움켜잡고 있었다. 기만당한 것 같다. 꼼짝없이 재희의 손바닥 안에서 열심히 놀아난 것 같다는 거다. 그렇다고 딱히 그가 무진 자신을 속이려 들었다거나 배신을 한 건 아니지만. 어정쩡한 기분이 든다. 무슨 놈의 고백이 두근두근한 것도 아니고 사람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몰아친단 말인가. 이건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아닌 아찔한 쇼크다.

“왜 그딴 말을 지금껏 안 하다가 이제 지껄이는 거야, 너.”
“이제 이 마음을 억누를 이유가 없잖습니까. 게다가 한무진씨가 이 마음을 계속 모를 생각이라면, 10년도 훨씬 더 된 그때처럼 앞으로도 관계의 변화가 없을 테니까요. 그건 내게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미친 새끼! 이 개호로 자…….”

무진이 치가 떨린다는 듯이 격한 반응을 보이며 손에 잡은 멱살을 짤짤 흔들자 재희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졌다. 재희는 제 멱살을 비틀어 쥔 무진의 손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제 두 손으로 무진의 얼굴을 콱 움켜잡았다. 순식간이었다. 얼굴을 감싸 잡은 재희의 손힘이 너무 억센데다가 워낙 순간적으로 바짝 끌어당겨지는 바람에 무진은 버티어 서질 못하고 재희에게 끌려갔다. 뒤늦게 고개를 비틀며 저항해봤지만 저항다운 저항을 하기도 전에 재희의 입술이 무진의 입술을 꾹 짓눌렀다.

잠시 정신적 공황에 빠져 멍하니 서 있던 무진은 재희의 혀가 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침입을 시도하자마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작정한 것처럼 두 주먹을 꽉 진 무진은 연방 재희의 옆구리며, 등에 그 악에 받친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퍽,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침없는 주먹세례였지만, 무진의 얼굴을 콱 잡은 채로 그의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재희는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 떨어져나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무진은 제 혀에 바짝 힘을 주어 점점 입술을 비집으며 거세게 밀려드는 재희의 혀를 밖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재희의 혀를 더 자극하는 바람에 두 개의 혀가 삽시간에 뒤엉켰다. 밝은 대낮에,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어린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침없이 입술을 부대끼고 있는 두 남자라니. 상상만으로도 욕지기가 치미는 것 같다.

무진은 제 입천장을 긁듯이 핥고 있는 재희의 혀를 콱 깨물었다. 재희의 혀가 워낙 입속에 꽉 들어차는지라 힘주어 깨물었어도 큰 타격을 입힐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따끔한 통증에 재희가 주춤하는 사이 무진은 힘껏 어깨를 비틀었다. 그리곤 아주 잠시 재희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 틈을 타서, 제 볼을 콱 붙잡고 있던 재희의 두 손을 확 떨쳐냈다.

뻐억.     

재희에게서 벗어나자마자 무진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주어 쥔 주먹으로 재희의 얼굴을 가격했다. 얼마나 이를 악물고 때렸는지 재희는 그 주먹을 피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곤 제대로 맞아 비틀거렸다. 그에게서 낮은 신음소리가 터진다. 무진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씩씩 하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무진은 다시 재희의 멱살을 콱 움켜잡았다. 지금은 그를 곤죽으로 만들어도 속이 시원할 것 같지가 않다. 무진의 성난 주먹이 조금의 반성기미도 보이지 않는 재희의 면상을 다시금 강타하려는 찰라 무진의 바지가 무언가 미약한 힘에 의해 쭉, 쭉 당겨진다.

재동이었다. 재동은 무진이 재희를 때리는 걸 보곤 한달음에 달려왔는지 작은 어깨를 들썩여가며 가쁜 숨을 토하는 와중에도 그러지 말라며 동그란 얼굴을 홱홱 가로저었다. 뾰족한 입술을 움찔거리는 모양새가 조금만 더 방치했다간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어버릴 것만 같다. 재동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까 완전히 증발될 것 같았던 이성이 가까스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여전히 뭔가 당했다는 기분은 사라지지 않지만. 무진은 재희를 툭 밀치듯 놓아주곤 바닥에 퉤 하고 쓴 침을 뱉었다.

“너,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마. 다시 알짱거리면 죽여 버릴 거야.”

















쾅.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무진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문이 금방 부수어 진다고 해도 이상할 없을 정도로 거세게 닫혔다. 창수는 이내 욕실 안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욕실 문을 바라봤다. 오늘은 달리 할 일이 있으니 창수에게 쭉 쉬고 있으라던 무진이 다짜고짜 호출을 해오는 바람에 낮잠을 자다 깨어 달려간 곳은 울창한 수목장림이었다. 그곳에는 재희와 재동도 함께 있었는데, 무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탄 뒤 곧장 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백미러를 통해 언제나처럼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는 재동을 볼 수 있었다. 녀석은 무진이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리자 금세 풀이 죽어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무진의 시선이 지나가는 풍경에 고정되어 있는데다 그가 이따금씩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는 바람에 물을 수 없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수목장림에는 무슨 일로 왔으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창수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욕실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가 무진이 갈아입을 옷을 챙기기 위해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무진은 차디찬 물을 틀어놓고 옷도 벗지 않은 채 그 아래 서 있었다. 당장에 머리를 식히지 않으면 머리가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가운 물이 머리카락을 흠뻑 적시고 내려와 피부를 아릴 정도로 세게 때린다. 옷도 흐르는 물에 완전히 젖어서 몸에 밀착됐다. 거울에는 온수로 샤워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김이 서렸다. 시린 김이다. 무진은 슬쩍 손바닥으로 거울에 서린 김을 닦아내고, 그곳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재희는 줄곧 ‘그런 눈’으로 무진을 보고 있었다는 건가? 무진은 그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는 그날 야구장에서의 첫 만남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무진을 기억하고 생각해왔다는 건가? 그 지긋지긋하게 긴 시간동안? 백번 양보해서 재희의 말이 모두 사실이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감정이 이성간에 느끼는 그것과 같은 것이라면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정혜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처럼 겉으로 드러내지도 못했을 감정이다. 아니, 설사 정혜가 죽었더라도 무진이 재동을 끝내 모르는 척 외면했다면 보상받지 못했을 감정이다. 그런데도 재희는 단지 재동이 무진의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녀석의 아버지가 되어주기로 작정했다는 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다면 수감기간 내내 사식으로 과일을 넣은 것도 모두 재희가 한 짓일까? 정한이나 창수가 넣지 않았고, 한 회장이라고 넣을 리 없었을 것이다. 사식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편지가 오기 시작했을 즈음부터였다. 만약 유 선생이 무진의 건강을 생각해 과일을 넣어준 것이라면, 무진이 수감생활을 시작한 직후부터 사식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제외를 하고 나면 남는 것은 역시 재희 뿐이다.

무진은 찬물에 흠뻑 젖은 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었다. 워낙 입술을 잘근거려서인지 거울에 비쳐 보이는 입술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붉은 것 같다. 제 입술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자니 조금 전 재회와 입술을 부대꼈던 게 번뜩 떠올랐다. 무진은 손등으로 제 입술을 거칠게 닦아내면서, 치솟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한껏 격앙되어 소리를 질렀다.

“젠자아아아앙!!!!!!”
“형님, 괜찮으십니까!”

무진이 갈아입을 옷을 문 앞에 가져다 놓으려던 창수가 깜짝 놀라선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창수는 옷도 채 벗지 않은 채 찬물에 흠뻑 젖어 있는 무진의 모습에 한 번 놀라고, 그가 고막을 찢어 놓을 듯이 소리를 지르며 제 입술을 거칠게 닦아내는 모습에 또 한 번을 놀라고, 살짝 튀기만 해도 지레 놀라 몸을 움찔거릴 정도로 차갑게, 끊임없이 쏟아지는 냉수의 온도에 다시 놀랐다.

창수는 얼른 샤워기의 물을 잠그곤 그대로 내버려두면 기어코 피를 볼 것 같은 무진을 제 온몸으로 붙잡아 말렸다. 그를 말리느라 그의 몸을 콱 끌어안자 등골을 서늘케 하는 냉기가 품에 확 쏟아져 들어온다. 창수를 떨쳐내기 위해 버둥거리던 무진은 이내 거칠게 숨을 뱉어내며 잠잠해졌다. 온몸에서부터 차가운 물방울을 뚝, 뚝 떨어뜨리는 무진의 어깨가 크게 들썩인다.

“너, 사식 넣은 적 없다고 그랬지?”
“네?”
“확실해, 그거?”
“네. 전에 말씀드렸듯이 형님께서 넣지 말라고…….”

한참만에야 진정이 된 무진이 뜬금없이 사식이야길 꺼내는 바람에 창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무진은 됐다는 듯이 창수를 확 떨쳐내서 밀어내고는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내린 물들이 금세 바닥을 엉망으로 만든다. 창수는 얼른 샤워타월을 무진의 젖은 어깨 위에 둘러주고는 바닥에 떨어진 물줄기들을 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무진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막연히 허공을 바라봤다. 거칠게 문질러댄 입술이 툭 건드리기만 해도 피가 나올 정도로 붉어져 화끈거린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재희와 관련된 잡념들만 떠올랐다. 그만큼 재희가 꺼낸 이야기는 무진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인 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정혜가 언제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핏줄도 아닌 재동을 키울 작정을 했다는 게 순전히 다 무진 때문이라니. 도대체 무진 자신이 그에게 뭐라고. 설사 생명의 은인이라고 치더라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건?

모두 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전히도 믿기지는 않지만 재희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친다면 대체 몇 년이라는 건가. 최소 10여년, 최대는 13년도 훌쩍 넘었을 거다. 그렇게 지독했으면 보통은 눈에 띄지 않나? 누군가에 대한 감정 때문에 그 사람의 아이까지 맡아 키울 작정을 했을 정도라면, 그 정도로 지긋지긋한 감정이라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눈에 보일 만큼. 보일 만큼?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

똑똑히 보았어도 무진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을 뿐. 만약 재희가 했던 행동들을 그가 아닌 다른 어떤 여자가 했다면, 무진도 그 감정을 알아챌 수 있었을 거란 거다. 다만 재희가 남자였기 때문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거다.

때때로 야구부의 전용 연습장으로 찾아와 시시하기 그지없는 훈련장면을 지켜보던 남학생이 하나있었다. 비가 올 때에는 우산을 하나 들고서, 시험기간이 가까워졌을 때에는 책 하나를 옆에 끼고서.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아서 기억이 난다. 이따금씩 훈련 중에 고개를 돌려보면 여지없이 눈이 마주치곤 했었다. 무진이 처음으로 나간 도지사배 고교야구에서 첫 승을 거둔 이후부터였다. 그 시합을 할 때 마운드에서 내려가지 않으려고 몰래 상처를 식히고 있던 무진에게 찾아와 죽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다가와선 그 팔론 무리니 그만두라고 했던 건방진 녀석과 야구부 훈련을 고요하게 지켜보던 남학생의 체격조건이 비슷하다는 것을, 그땐 미처 관심을 갖지 않아서 몰랐다.

그러고 보니 몇 번 더 있었다. 그 고요한 시선을 느낀 것은. 정혜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 정혜를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갈 때나 전지훈련을 마친 뒤에 괜히 한 번 정혜의 집으로 가서 그 앞을 기웃거렸을 때에.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있나 없나를 살피던 그때, 열 번에 서너 번은 그 눈과 마주치곤 했었다. 차분하게 사람을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과. 오랜 기억이라 그 얼굴이나 표정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진의 기억 속에 있는 남자의 모습들이 크게 다르질 않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어쩐지, 낚인 기분이 들더니. 제대로 낚여버린 기분이 들어 영 찜찜하더니. 감은 조금도 빗나가질 않았다. 재희가 순전히 재동이 무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녀석을 떠맡은 거라면, 고작 그런 수단으로 재동을 생각한 거라면 더 이상 재희에게 재동을 맡길 수가 없다. 그러나 맡기지 않는다면? 무진 본인이 재동을 데려다 키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보일 꼴 못 보일 꼴 다 보여 가면서, 무진을 제거하려는 놈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이 위험한 곳에서? 한 회장에게 재동을 보여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무진이었다. 그러나 그것 모두 무진이 재동의 양육권을 건네받았을 때에나 해야 할 앞선 고민들이다. 법은 결코 무진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거다. 낳는다고 다 아버지인 게 아니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도저도 할 수 없다. 재희는 이러한 무진의 처지까지도 다 파악하고 일을 벌인 것인가? 만약 무진이 재동을 모르는 척 무시해버렸다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재동을 맡아 키울 생각이었던 건가? 단지 녀석이 소꿉친구인 정혜의 아들이자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무진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쪽이든 도무지 정상이 아니다.

“……미쳤어.”








Second Daddy _ 12







재희는 재동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애니메이션 DVD를 보고 있었다. 떠먹는 요구르트를 손에 쥐고서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던 재동의 입이 슬쩍 벌어진다. 두 눈은 동그랗게 뜨인 채로 텔레비전에 붙박여 있어, 금방이라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재희는 그 곁에 앉아서 시선마저도 바닥 어딘가로 떨어뜨리곤 줄곧 무진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렇게 갑자기 밀어붙일 생각은 아니었다. 서두를 필요 없이 서서히 그가 알게 하려고, 처음에는 그럴 작정이었다는 거다. 10여년이나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사람이다. 고작 1년 혹은 3년 즈음 더 기다리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무진을 보니까, 정말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알짱거리는 그를 보니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재희 본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이상하다고 대놓고 의심을 하면서도, 그쪽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은 무심함에 자신도 모르게 조바심이 났는지도 모른다.

물론 예상은 했었다. 솔직히 모든 걸 다 털어놓았을 때 무진의 반응을. 재동 덕택에 달랑 한 대로 끝났지만, 아마 재동이가 말리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피를 봤을 거다. 누구라도 놀랄 일인데, 무진이라고 놀라지 않았겠는가? 대뜸 그런 고백을 들으면. 게다가 상대는 남자다. 결코 기분 좋게 받아들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재희도 알고 있다는 거다. 하지만 기분 좋게 받아들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감출 수는 없었다. 다가왔다가 금세 사라지고 다시 제멋대로 다가왔다가 금세 사라져버리는 무진을 관망하듯 두 손 놓고 바라보기 힘들었다. 슬슬 한계였다.

툭.

무진의 일그러지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리던 재희가 제 몸에 가볍게 부딪쳐오는 무언가를 느끼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졸음이 쏟아지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재동이 보인다. 보라고 틀어준 DVD도 어느새 끝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재희는 DVD를 끄곤 제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재동을 품에 안아 녀석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푹신한 침대 위에 재동을 눕혀 놓고 베개를 잘 괴어준다. 이불도 끌어다가 배 위로 잘 덮어주었다. 재동은 입을 동그랗게 벌려 하품을 하고는 그 여운으로 두 볼을 씰룩거렸다. 재희가 손을 뻗어 그 볼을 간질이듯 만져주자 재동이 작은 두 손으로 재희의 손을 꼭 붙잡아 놓는다. 잠기운이 여실히 고인 두 눈동자로 재희를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재희는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입술만 연방 뻐끔뻐끔 거리는 재동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녀석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몹시 궁금한 것이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그 앙증맞은 입술을 열심히 움직이며 하루에도 조잘조잘 수많은 단어들을 쏟아냈었다. 완전한 문장을 이루지는 않았지만 녀석은 제가 아는 모든 단어들을 다 내뱉느라 바빴다.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사용하는 단어 중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이 ‘엄마’라면 녀석은 ‘아빠’였다는 것만 빼곤 특이점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보다 더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했다면 했지 뒤처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재동이 제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면 더 가슴이 아프다.

재희는 어렵지 않게 재동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재동이 말을 하지 못해도 척척 녀석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무진이 나타난 이후부터, 그가 제 시야 안에 들어올 때면 재동은 얼른 고개를 돌려 재희를 보며 지금과 같은 눈빛을 했었다. 새카만 눈동자 가득 무진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을 담아서 재희를 봤다는 거다.

“그 사람은…….”

재희는 재동의 머리카락을 뒤로 차분히 쓸어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재희의 입술에서 무진을 지칭하는 것 같은 단어가 튀어나오자 재동이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로 재희의 입술에 온 시선을 고정한다. 둘러대기로는 재동의 삼촌이나 재희 혹은 정혜의 친구 정도가 좋을 것이다. 그러면 녀석도 제 앞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무진의 존재에 대해 더는 궁금해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재희는 그 어떤 거짓도 보태지 않고 말했다.

“그 사람도 아빠. 재동이 아빠.”
“……?”

예상대로 재동은 두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재희를 본다. 확실히 4살짜리 어린아이가 단박에 이해할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아빠라면 제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 무진도 아빠라니. 아빠도 하나, 엄마도 하나인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을 재동의 얼굴에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내비친다. 재희는 다시 입을 열어 녀석이 별다른 의문 없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쉽게 말을 바꾸어 재설명했다. 이번에도 거짓이 조금도 보태지지 않았다곤 할 수 없겠지만.

“엄마가 계속 재동이 곁에 있어줄 수 없어서 대신 아빠를 한 명 더 보내준 거야. 그러니까 재동인 다른 친구들처럼 엄마가 없는 대신 아빠가 둘인 거고. 알았어?”

재동은 멍하니 재희를 보면서 동그란 두 눈을 느릿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이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재희의 설명을 돌이켜보듯 천장을 보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린다. 그렇게 제 나름대로, 이왕이면 엄마 한 명, 아빠 한 명이 곁에 있는 게 좋지만 엄마가 없는 대신 아빠가 둘이라면 그것도 상관없겠다는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다시금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해대던 재동이 몸을 꿈틀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늘 해결되지 않고 제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의문이 애매하긴 하지만 풀리긴 풀렸으니 이제 그만 잠을 자려는 모양이었다. 재희는 다시금 재동의 머리카락을 쓸어서 넘겨주고, 이부자리를 정리해줬다. 재동은 곧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며칠 새에 새카맣게 떼가 탄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서다. 위생을 위해서 빨자고 해도 한사코 고집스레 고개를 내젓는다. 재희는 얼마고 더 그렇게 잠든 재동의 곁을 지키고 앉았다가 손을 뻗어 곰 인형을 한 차례 쓰다듬어 보았다.

















무진은 차는 재동의 어린이집 앞 도로에 잠시 정차해 있었다. 무진은 뒷좌석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창문 너머로 어린이집을 바라봤다. 더운 날씨 탓에 모두 안에 들어가 있는 건지 하얀색 울타리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바라보던 무진이 지루한 기색을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창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나 애틋한 것인가 싶어서다. 그저 보이지도 않는 그곳 어딘가에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의미 있게 바라볼 만한 것인가 싶었다는 거다.

“형님, 오늘도 어디 다른데 가 있을까요?”

백미러를 힐긋거리며 뒷좌석의 무진을 살피던 창수가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근래 들어 재동의 어린이집에 찾아올 때마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창수 등에게 돌아가 있으라는 지시를 내리던 무진이었기에 그렇게 물은 것이다. 그러나 무진은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것까진 없어.”
“그럼 가서 그 녀석 불러올까요?”
“됐어.”
“예? 오늘은 그냥 가시는 겁니까?”

창수가 진정으로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떻게 멈춰볼 생각도 할 새 없이 재동에게 끌려가는 무진의 모습에 핏줄이란 게 다 이런 건가 싶었다. 짬이 날 때마다 무작정 재동의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무진이 한 번이라도 재동을 만나지 않고 돌아간 적은 없다. 확실히 며칠 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종종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가 갑자기 주변의 물건을 신경질적으로 확 내던지는 돌발행동을 보이는 것도 그날 이후부터다.

그냥 돌아가라는 거냐는 창수의 질문에 무진은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창수가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차의 시동을 걸 때까지도. 창수는 백미러를 한 번 보고, 사이드미러도 체크해서 행인이 없는지를 살핀 후 핸들을 서서히 틀어 골목 중앙으로 차를 몰아나갔다. 그때 즈음이었다. 닫혀 있던 어린이집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수영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것은. 형형색색의 수영복이 눈가에 어른거리는 바람에 창수는 브레이크를 질끈 밟곤 그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날이 너무 더워서 물놀이를 시키려는 참인지, 어린이집 선생들이 나와서 물놀이 준비를 했다. 커다란 공기주입식 욕조도 서너 개 준비하고, 방수용 천도 놀이터 앞 보도블록 위에 깔아둔다. 놀이터 인근의 커다란 나무들이 그 위로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아이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바짝 밀착된 수영복 탓에 하나같이 동그란 올챙이배가 강조 되서 그 움직임들이 더 깜찍해 보인다.  

“물놀이라도 하나 본…….”

벌컥.

창수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도중에 무진이 뒷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워낙 자기 내키는 대로 하는 성격의 무진임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창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다시 후진기어를 넣고 차를 조금 전 정차해 있던 자리로 빼냈다. 차의 시동을 끄고 내렸을 때 무진은 어린이집의 하얀 울타리 앞에 서 있었다. 호스를 끌어와 공기주입식 욕조에 물을 가득 담은 후 방수용 천도 흠뻑 적시고 있던 어린이집의 여 선생이 무진을 발견하곤 얼른 울타리 앞으로 달려오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 오셨어요?”
“지난번엔…….”   
“지난번엔 그런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선 아이들에게 늘 주의를 준다고 하는데도 금세 잊는지 종종 그러네요. 아이들은 잘 타일렀습니다. 다신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난동을 부린 사람은 무진인데 오히려 어린이집 선생이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를 한다. 하다못해 몹쓸 말들을 지껄이던 녀석들의 부모도 아닌데 말이다. 무진은 거듭 사과를 해대는 여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눈동자를 구석으로 내몰았다.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보고서는 도저히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굴색이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두 볼이 얼얼할 정도로 화끈거렸다.

“아니…… 어린놈들이 하는 말로 어른스럽지 못하게 혼자 열 받아선, 그딴 식으로 제멋대로 굴어서 나야말로…….”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내뱉지 못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상대에게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숙이고 들어가 사과의 뉘앙스로 말하는 것도 처음이라는 것도, 그래서 그다지도 서툴다는 것도 간파해냈을 것이다. 어린이집 선생은 고개를 살짝 숙여서 소리 없이 터지는 미소를 감추고는 고개를 돌려 재동을 불러들였다.

“재동아, 아버지 오셨어.”

선생의 부름에 파란색 수영복 바지와 노란색 수영모를 쓴 재동이 울타리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왔다. 여지없이 볼록하게 솟은 올챙이배에는 무진의 배꼽처럼 완전한 원을 그리는 작은 배꼽이 자리하고 있다. 재동이 무진 자신을 꼭 빼닮았는지 어쨌는지는 여전히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빼도 박도 할 수 없게 닮아버린 배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다. 재동이 제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

선생의 뒤쪽으로 걸어오던 재동은 울타리 너머의 무진을 빤히 바라봤다. 예전처럼 제가 아는 ‘아버지’가 아니라며 다가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무진의 예상을 깨고 재동은 다다다 울타리 앞까지 달려 나왔다. 그리곤 발끝으로 서서, 고개까지 바짝 들고 무진을 올려다본다. 어째서인지 동그란 두 눈은 평소보다도 더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지난번에 그러고 가서, 그러니까 녀석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희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이곤 화를 내며 가버려서 분명히 두려워하고, 무서워 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다가오니 오히려 뭔가 더 찜찜하다.

“아줌마. 오랜만에 보네?”

주차를 마치고 어슬렁거리며 무진의 곁으로 다가오던 창수가 울타리 너머에 서 있는 어린이집 선생을 향해 제 손을 슬쩍 들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입술을 길게 쭉 찢어서 웃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물론 어린이집 선생은 그를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그의 인사에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진은 부적절한 호칭을 사용해서 어린이집 선생을 불러놓곤 왜 사람이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데 무시하느냐며 시비를 거는 창수의 뒤통수를 빡 소리가 내도록 힘껏 때렸다.

“으악! 아, 아파요. 형님!”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와.”
“아이스크림이요?”
“그래, 아이스크림. 슈퍼에 있는 거 싹 쓸어와.”
“그만큼이나 많이요?”

창수가 시키는 대로 얼른 가지 않고 버티고 서서 자꾸 되묻자 무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창수를 노려봤다. 한마디만 더 했다간 어김없이 엉덩이라도 걷어차일 것이다. 창수는 얼른 주차시켜 두었던 차로 돌아갔다. 웬만하면 걸어가도 무방하겠지만 슈퍼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모조리 긁어오라고 하니, 두 팔로 운반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창수가 차를 몰아 골몰을 빠져나가자 무진의 시선이 다시 울타리 너머 재동에게로 향한다.

“들어오세요.”

어린이집 선생이 울타리를 열어주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이들을 지도하러 가보겠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곤 벌써부터 참방거리며 놀고 있는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무진이 열린 울타리를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여전히 무진을 빤히 보고 있던 재동이 소리 없이 해쭉 웃는다. 그리곤 무진이 터벅터벅 놀이터 앞 벤치 쪽으로 걸어가자 다다다 달려와서 무진의 옆에 서며 제 통통한 팔을 위로 쭉 뻗는다. 손을 잡아 달라는 듯이 작은 손가락도 공중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도 무진이 무뚝뚝하게 앞만 보며 걸어가자 그의 바지를 꾹 잡아 당겨서 그의 시선을 끌어온 후, 다시 조금 전처럼 팔을 들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무진은 멍하니 그 작은 손을 바라보다가 슬쩍 상체를 숙여서 녀석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녀석은 만족한 것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무진의 옆에서 쫄랑쫄랑 걸어갔다. 무진은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잘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재동의 작은 등을 가볍게 밀며 말했다.

“가서 놀아.”   

재동은 어쩐지 무진의 앞에서 떠나기가 싫은지 몸을 비비꼬고 서 있다가, 녀석을 부르는 선생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걸음을 떼면서도 연방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무진이 훌쩍 사라지기도 한다는 걸 학습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계속해서 확인해두려는 것처럼.

물놀이를 할 때에도 재동은 혼자였다. 아니, 어린이집 선생들이 신경을 써서 녀석과 놀아주고 있었고 선생에게 들러붙어 있으려던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놀게 해주기도 했지만 문득 바라보면 또 혼자서 발장난을 하며 참방거리고 있었다는 거다. 아이들은 저마다 뒤엉켜서 까르륵 웃어댔지만 재동은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굳이 다가와 녀석을 괴롭히는 아이는 없었지만, 또한 굳이 다가와 말 없는 녀석과 놀고 싶어 하는 아이도 없었다.

“형님. 말씀하신대로 아이스크림, 싹 다 긁어왔습니다.”

무진이 혼자 노는 재동의 모습을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고 있을 때 심부름을 보냈던 창수가 돌아왔다. 양팔에 들린 네 개의 봉지가 터질 듯 위태로울 만큼 아이스크림이 한 가득이다. 크리스마스에 찾아오는 산타할아범처럼, 두 손 가득 짐 꾸러미를 들고 등장한 창수에게 아이들의 시선이 확 고정된다. 창수는 무진 앞에 아이스크림 꾸러미들을 내려놓곤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먹어.”
“네?”
“꼴리게 맛있는 것처럼, 처먹으라고.”

창수에게, 정확하게는 내려놓아진 아이스크림 꾸러미 쪽을 넋 놓고 바라보는 아이들을 고요히 지켜보던 무진이 뜬금없는 지시를 내렸다. 창수는 단박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무진의 지시에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다가, 더운 김에 잘 됐다고 좋게 생각하며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껍질을 벗겨냈다. 맛있게 먹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 특히 누군가를 골려주듯 맛있게 먹는 것 하나는.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이 창수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진다. 뜨거운 입김 때문에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을 호록호록 소리까지 내가며 빨아들이자 입까지 헤벌어졌다. 금방이라도 침을 흘릴 기세다. 창수가 자신도 모르게 손등을 타고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혀로 슥 핥아 올렸을 때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린이집 선생들을 올려다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꿀꺽 침을 삼키는 녀석들도 태반이었다. 아이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린 짐승에 대해서는 잘 안다. 그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욕구에 충실하다.

무진은 벌떡 일어서서 벤치 옆에 놓여 있던 아이스크림 꾸러미를 손에 들었다. 그리곤 그 꾸러미를 따라 움직이는 아이들의 시선을 주시하면서 재동에게 걸어갔다. 무진의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스크림 꾸러미는 곧 재동 주변에 하나하나 놓아졌다. 재동은 제 주변을 에워싼 아이스크림 꾸러미를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무진을 빤히 봤다. 무진은 팔짱을 낀 채로 그런 재동을 내려다보며, 그 누구라도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석재동이 너, 다 먹어.”
“아, 아버님. 그걸 다 먹으면 배탈이 날지도 모르는데요.”

그 많은 걸 재동에게 다 먹으라고 말하는 무진의 무모함에 깜짝 놀란 어린이집 선생이 두 손을 공중에서 휙휙 휘저으며 염려의 말을 전했다. 무진은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지극히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에는 입에도 담지 않는 ‘친구’라는 단어까지 들먹여가며.

“그래요? 그렇다면 별 수 없지. 석재동, 너 혼자 다 못 먹겠으면 먹고 싶어 하는 친구라든가, 좋아하는 친구한테 좀 나눠주든가.”

무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고는 다시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멀뚱히 제게 주어진 아이스크림들을 둘러보던 재동은 가장 먼저 아이스크림을 꺼내서 어린이집 선생들에게 죽 나눠주었다. 선생들은 얼결에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며 재동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넘칠 만큼 충분히 남은 아이스크림은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손가락을 빨고 있던 어린이집 친구들에게 하나, 하나 쥐어주었다. 고작 아이스크림 하나였다. 녀석들이 재동을 향해 웃으면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의 대가는. 재동이 다른 아이들 틈에서 홀로 튀지 않고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은 고작 그 아이스크림 하나가 필요했다. 감정을 교류하는 것에는 그렇게 사소한 계기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진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아이들이 자연스레 재동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조잘조잘 떠들게 되는 것까지는. 그저 단 한순간이라도 녀석들로 하여금 부러움에 몸서리치게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이고, 그 효과가 고작 아이스크림 하나를 해치우는데 필요한 10분 남짓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아이들이 재동과 친구가 되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셈에 밝은 어른들과는 달라서, 아이스크림이 제 입속으로 녹아 사라진 후에도 재동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새 재동에게 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반응이랍시고 돌아오는 게 그저 해맑은 웃음뿐이라도 해도 계속해서 재동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재동은 전에 없이 바빠 보였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아이들의 말을 모두 경청하느라 녀석의 고개가 이리저리 쉼 없이 움직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무진은 입술 양끝에서 저릿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으아아악!”
“어머,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는 지르고 그러세요?”

무진과 마찬가지로 재동과 아이들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창수가 대뜸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와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여 선생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창수는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핀잔을 주는 여 선생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무진을 뚫어져라보면서,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우리 형님 웃는 거 처음 봅니다.”

어찌나 감격을 했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목소리 때문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여 선생을 슬쩍 고개를 돌려 무진을 바라봤다. 먼 벤치에 앉아서 한 시도 재동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무진의 얼굴에, 창수의 말대로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본인조차도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참만에야 친구들 틈에서 빠져나온 재동이 얼른 무진에게 달려갔다. 그리곤 무진의 옆에 앉으려는지 제 허리높이와 비슷한 벤치 앞에서 한참을 버둥거린다. 무진은 별 수 없이 재동을 안아서 벤치에 앉혀주었다. 재동은 또다시 소리 없이 해쭉 웃고는 자세를 바로 하려는지 조금 꼬물거리더니, 제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스크림을 대뜸 무진에게 내밀었다. 아무리 봐도 제가 이리저리 핥고, 빨고 했던 흔적이 여실한 아이스크림을 말이다.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무진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녀석에게 물었다.

“왜?”

재동은 한사코 자신이 먹던 아이스크림을 무진에게 내밀었다. 여차하면 무진의 입술에 마구 문질러버릴 기세다. 굳이 아이스크림을 사람 입가에서 아른거리게 하는 것은, 백이면 백 먹으라는 의미일 거다. 크게 마음을 써서 제 것을 한 입 먹게 해주겠다는, 그런 의미 말이다.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팔을 쭉 뻗고 있는 재동을 그대로 둘 수도 없어서 무진은 천천히 제 고개를 숙여서 거의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그러자 재동이 남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먹으며, 기분 좋은 듯 제 다리를 허공으로 퉁, 퉁 차댄다.

며칠사이에 녀석이 부쩍 더 살가워졌다. 비단 무진이 오늘 녀석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줬기 때문만이 아닐 거다. 마치 녀석의 마음속에 무진의 존재를 확고히 새기기라도 한 것처럼. 뭐라고 설명한 걸까? 이 녀석에게, 재희는.


















“오늘은 좀 늦었구나?”

늘 일이 바빠 저녁 늦게야 재동을 데리러 온다는 재희를 대신해서 재동의 곁을 지키고 있다가 한 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녀석이 완전히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어린이집을 출발한다는 게 일반적인 퇴근 시간대에 맞물려 늦고 말았다. 언제라도 호출만 하면 10분 이내에 달려오던 무진이 오늘은 1시간도 훌쩍 넘겨서 도착하자, 골프채를 닦던 한 회장이 힐긋 무진을 올려다보며 다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두 번씩 아량을 베풀 순 없으니 다음엔 늦지 마라.”
“네.”

한 회장의 자상함을 가장한 경고의 말에 무진은 묵묵히 대답을 했다. 무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척, 오로지 골프채에만 관심을 두는 척 하더라도 그는 이미 보았을 것이다. 자신을 찾아올 때면 늘 흠잡을 데 없는 말끔한 차림새였던 무진의 옷깃이 오늘따라 좀 헐렁하게 풀어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미처 집에 들렀다 올 겨를이 없었던 것이리라. 어딜 다녀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회장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탁상 위에 올라져 있던 파일 하나를 무진 쪽으로 휙 던졌다. 곧 던져진 파일이 무진의 발치에 떨어지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자잘한 사진들이 바깥으로 삐져나온다. 무진은 그것을 곧바로 줍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 회장은 담배를 입에 물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난번 흑룡회 놈들의 인사에 화답해 줄 때가 된 것 같다. 놈들의 핵이나 마찬가지인 차기보스가 내일, 계약 때문에 직접 움직인다고 하더군. 원래 그런 놈들이야 대가리를 따고 나면 나머지는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오합지졸이니까……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 테지.”

지난번 무진과 조직원 중 하나를 습격한 것은 흑룡회 보스나 그 주변인의 뜻이 아니었다. 그저 행동대장격의 놈들이 4년 전 일에 앙심을 품고 멋대로 일을 친 것뿐이다. 그 이야길 무진에게 들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한 회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의 보복을 명분으로 흑룡회의 실질적 보스나 다름없는 차기보스를 제거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지난번 습격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할 사람을.

“실수 없이 해야 한다. 장소와 시간은 파일 안에 있을 테니 확인해라.”
  
한 회장은 그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그만 나가보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무진은 제 발치에 여전히 떨어져 있는 파일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그의 두 주먹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진다.

싫다. 이런 일 따위. 대체 누구의 이익인가? 억지스럽게 명분을 만들어 사람의 피를 아무렇지 않게 손에 묻히는 일 따위, 역겹다. 그렇게 더럽혀진 손으로 재동의 작고 포근한 손을 다시 잡으라는 건가? 누군가의 목숨을 취한 손으로 재동의 포동포동한 볼을 만지고, 가식적이게도 녀석의 머리까지 쓰다듬으라는 건가? 할 수 없다, 그런 건. 더 이상 하기 싫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했다. 많을 때에는 수천 번도 더. 자유롭고 싶다. 마음이 가는대로, 무엇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살고 싶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하기 싫은 일을 등 떠밀려 하지 않고, 누군가의 협박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게, 그렇게 살고 싶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억지로 가능하게 만들어서라도.

사람을 해치고 제거하라는 한 회장의 지시가 있을 때마다 늘 빈주먹을 쥐었다. 진정으로 죽이고 싶은 사람은 늘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할 수 없다. 설사 한 회장의 피라고 하더라도 손에 묻히게 된다면, 결코 다시는 재동에게 갈 수 없을 것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진은 나가보라는 한 회장의 손짓에도 조금도 꿈쩍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명령을 받으면 늘 좋다 싫다 말없이 조용히 집무실을 나가곤 했던 무진이 대뜸 할 말이 있다고 하는 게 대단히 의외였는지 한 회장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무진을 바라본다.

인생에서 가장 큰 절망감을 맛본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던 그 순간, 인간 한무진은 죽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이후로의 삶은 무엇도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고, 삶의 의미도 없이 영위하는, 그저 ‘숨이 붙어 있는 것’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끝내는 붙어 있던 숨마저 끊어지리라고. 그런 무진 앞에 재동이 나타났다.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던 살에 미련이 생겼던 것은 그때부터다. 다시 살고 싶었다. 이왕이면 녀석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모습으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되리란 걸 안다. 그러나 몇 번을 생각해도 무진이 지금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그것뿐이다. 애원. 한 회장의 마지막 남은 인정에의 호소. 무진은 한 회장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연이어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납작 엎드린다. 자존심 같은 것은 진즉 던져버렸다. 무진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 입술을 떼어 말했다.

“이제 그만 두고 싶습니다.”








Second Daddy _ 13







한 회장과 무진 사이에 깨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적막감이 맴돌았다. 한 회장은 골프채를 닦던 손길마저 우뚝 멈춘 채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무진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무진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닐 거다. 그 뜻을 왜곡해서 잘못 받아들인 것도 아닐 거다. 그렇게나 몸을 낮추고 들어오는 무진의 태도로 보건데 말이다. 그러나 한 회장 본인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무진은 지금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피식 하고 한 회장에게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어이가 없어서 터트린 웃음이었다.   

“그만두고 싶다?”
“……네.”
“무엇을 말이냐?”

한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무진에게로 걸어오며 물었다. 엎드려 있는 무진의 등 위로 한 회장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는 들고 있던 골프채를 이용해 무진의 턱을 슬쩍 들어올렸다. 무진은 제법 의지를 강하게 다진 듯,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표정으로 한 회장을 올려다봤다.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적나라한 적의가 끓어 넘친다.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언제라도 한 회장의 목을 따 버릴 것처럼 강한 적의를 드러내면서도 이제껏 한 번도 한 회장의 지시에 고개를 내젓지 않았던 그였다. 한 회장의 경고를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그 몸으로 확인하게 해준 이후부터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감추고 얌전히 굴었다는 거다. 그 약발이 이제는 좀 떨어진 걸까? 아니면, 여전히도 한 회장의 지시를 거역했을 때의 후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두려움조차 억누를 수 있을 만큼 그만둬야겠다는 의지가 강한 걸까. 한 회장은 잠자코 무진에게 핑계를 댈 기회를 주기로 했다.

“말해라. 이제 와서 무엇을, 왜 그만두겠다는 건지.”
“회장님의 아들로 사는 걸 그만두고 싶습니다. 이유 없이 남의 피를 손에 묻히는 것도, 그래야만 배부르게 살 수 있는 조폭인 것도 다 싫습니다. 회장님의 후계자가 되는 것도, 죽을 때까지 써도 남을 만한 재물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무진은 그럴싸한 핑계도 대지 않고 모든 게 다 싫다고 말할 뿐이다. 남들은 서로 갖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걸고 싸우는 마당에, 잠자코 숨을 죽이면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모두 제 것이 될 것을 스스로 걷어차려는 거다. 한 회장은 확고한 의지를 내비치는 무진을 보며 씩 웃다간 그대로 무진의 턱을 끌어당겨 그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비릿한 음성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 나왔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지. 건방지게 잘도 조잘거리는 구나.”

한 회장은 말을 다 끝내자마자 들고 있던 골프채로 무진의 가슴께를 격하게 후려쳤다. 휘두른 골프채에 정통으로 맞은 가슴 어딘가에서 빡 하고 무언가가 기어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크윽……!”

갑작스런 타격에 무진은 가슴이 부수어질 것처럼 격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빗겨서 맞은 것인지, 아니면 한 회장이 일부러 그렇게 가격을 한 것인지 가슴이 답답해져 오면서 숨도 제대로 내쉴 수가 없었다. 한 회장은 한 손으로는 가슴을, 또 한 손으로는 제 목을 쥐어뜯으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무진을 차갑게 내려 보며 대뜸 와이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어 소매를 팔등까지 걷어붙였다. 셔츠의 여밈 단추도 두어 개쯤 풀어낸 후엔 차고 있던 가죽 벨트를 빼서 손에 들었다.

“너는 그냥 내가 짖으라면 짖고, 뛰라면 뛰고, 처먹으라면 처먹으면 되는 거다. 자식이란 게 다 그런 거잖아? 짖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도 제멋대로 컹컹거리는 놈은, 혼쭐이 나야지.”

철썩.

한 회장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무진의 다리를 제 발로 꾹 밟아서 멀리 도망갈 수 없게 잡아둔 다음, 손에 두 번 정도 돌려서 말아 쥔 가죽 벨트로 그의 몸을 힘껏 내려쳤다. 골프채로 가슴을 가격당한 통증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허공을 가르며 달려든 벨트가 살갗을 찢어버릴 것처럼 몸에 짝, 짝 붙었다.

철썩. 철썩.

우습게도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통증이었다. 한 회장의 자식으로 입양된 이후부터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만 하면 여지없이 가죽 벨트나 무자비한 발길질이 날아들었으니까. 어째서인지 통증에는 익숙해도 좀처럼 그 통증이 무뎌지지는 않는 것 같지만 말이다. 벨트의 끝자락이 스친 무진의 볼이 금세 짙은 자국을 만들어내며 붉게 달아오른다. 그러나 무진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최소한의 방어만 할뿐, 그 고통스러운 상황 자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참을 수 있다면 그냥 맞는 게 낫다. 그러면 적어도 그 불똥이 다른 누군가에게 튀지는 않을 테니까.  

“살 만해진 모양이구나, 네 놈이.”

한 회장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어깨를 크게 들썩일 정도로 깊은 호흡이었다. 무진이 아직 고등학생일 적에 야구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단 이유로 제 속이 풀릴 때까지 폭력을 가하던 것과 비교해보면 그도 어쩔 수 없이 늙어간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단시간 만에 한 회장은 들고 있던 벨트를 바닥으로 확 내던졌다. 그렇다고 잠자코 당한 무진이 결코 멀쩡했다는 건 아니다. 무진은 가슴에서의 묵직한 통증에 몸을 조금도 꿈쩍할 수가 없었다. 사정없이 휘갈겨진 벨트엔 머리며, 얼굴, 손등까지 죄다 붉게 부어올라서 화끈거린다.

한 회장은 꼼짝도 하지 못하는 무진을 고요히 내려다보며 제 마른 입술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제대로 정돈한다. 긴장해 있던 목을 풀 듯 가볍게 고개를 한 바퀴 돌리며 책상 앞으로 걸어간 그는 인터폰 버튼을 눌러 집무실 밖의 수하에게 지시했다.

“밖에 대기 중인 놈들 있지? 그 놈들 다 들어오라고 해.”

그의 지시가 있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한 회장의 들어오라는 대꾸에 안으로 들어온 것은 정한과 창수였다. 정한과 창수는 문가에 쓰러져 있는 무진의 모습을 발견하곤 크게 놀라 한 회장에게 인사를 하는 것마저 잠시 잊었다. 곧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 시선만은 한결같이 쓰러져 있는 무진에게 머물렀다. 한 회장은 걷어 올린 소매를 다시 내리면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데리고 나가.”
“네, 회장님.”
“그리고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김정한입니다.”
“그래, 김정한. 너는 잠시 남아라.”

한 회장의 지시에 정한과 창수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본다. 정한은 창수에게 무진을 데리고 나가라는 듯 고갯짓을 해보였다. 창수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식은 있되 제 의지로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던 무진을 부축해서 회장실 밖으로 나갔다. 곧 탁 하는 소리를 내며 회장실의 문이 다시 닫힌다. 한 회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깃을 정리하고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골프채도 다시 집어 들었다. 골프채에 흠집이라도 생기지는 않았는지, 그것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여유를 부리는 한 회장에게 결국 정한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무슨 일로…….”
“알아봐.”
“예?”
“아무래도 요즘 저 놈이 따로 한 눈 파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아봐. 사소한 것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과 관련된 건 모두 다 알아 와야 한다. 시간은 넉넉히 열흘주지.”

그러니까 열흘 내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각오를 해두라는 것 같았다. 늘 이런 식이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가장 곤란한 사람을 골라 지시를 내리곤 이도저도 할 수 없게끔 궁지로 몰아넣는다. 한 회장이라고 무진의 최측근이나 다름없는 정한이 무진이 요즘 들어 무엇에 그리 바쁜지 추호도 모를 거라 생각했겠는가. 만약 정한이 무진을 생각해서 진실을 감추려들면 정한 자신이 다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정한이 상부의 지시를 그대로 따른다면 필히 무진이,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끝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망가지리라.

그러나 그러한 지시는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할 권리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정한은 그저 평평하던 미간을 고통스레 일그러뜨리며, 특유의 우직한 목소리로 충성스런 대답을 내어놓았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쾅. 쾅. 쾅.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현관문이 크게 요동쳤다.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이제야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오던 재희가 침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멈춰 서서 현관문 쪽을 바라봤다. 문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현관문 밖에 서 있을 누군가는 제멋대로 현관문 손잡이를 붙잡곤 벌컥벌컥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현관문 바로 옆에 버젓이 벨이 있는데도 말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대체 누구인가? 이 시간에 저렇게까지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재희는 인터폰 화면을 켜서 현관문 밖을 내다보았다. 현관문 밖의 센서가 작동해서 복도에는 불이 훤히 들어와 있었지만, 현관문 밖에 서 있는 누군가가 한 시도 가만히 있질 않아서 그 얼굴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그가 입고 있는 게 정장이라는 것과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그의 모습이 제법 다급해보인다는 것 정도.

언뜻 눈에 들어오는 체격이나 옷차림만으로도 그가 결코 무진일리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슬쩍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는 거다. 어린이집 선생에게서 오늘 무진이 어린이집에 들렀다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재동을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 그는 재희의 앞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다시 한 번 눈에 띄면 그땐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지 않았던가. 그러나 무진마저도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난폭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현관문부터 두드리고 보는 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대로 문 밖의 사람을 내버려두면 이웃에 피해가 될 것인지라 재희는 별 수 없이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안전 고리만은 제대로 걸어둔 채다. 현관문이 조금 틈을 내며 열리자 현관문 밖에 서 있던 이가 벌컥 제 쪽으로 문을 잡아당겼다. 안전 고리 탓에 현관문은 어느 정도까지만 열리다가 멈췄다. 그러나 문틈으로 그 밖에 서 있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한 재희는 얼른 마지막 남은 안전고리마저 풀어낼 수밖에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현관문 손잡이를 부여잡고 있는 이는 무진의 곁에 늘 붙어 다니는 그의 수하, 창수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입니까?”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여는 겁니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 그게. 형님, 형님이…….”
“한무진씨요? 한무진씨가 뭐 어쨌다는 겁니까!”

창수가 숨을 돌리며 무진을 지칭하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재희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갑자기 덜컥 멱살까지 잡아 쥐며 무진이 어쨌다는 거냐고 따져 묻는 재희의 돌발적인 행동에 창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재희를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지금 눈앞의 재희는 종종 스치면서 볼 때마다 재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말끔하던 그 남자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재희가 드물게 흥분한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창수는 상황파악을 위해 필요한 설명들은 모두 다 잘라내고 자신이 찾아온 목적만을 밝히기에 바빴다.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전에 한사코 여길 들렀다 가야 한다고 하셔서.”
“어디 있습니까?”
“예? 그야 밖에…… 앗, 잠깐만요!”

무진이 어디 있느냐는 재희의 물음에 무심코 바깥쪽을 손으로 가리키던 창수는 곧 재희에게 다소 거칠게 떠밀렸다.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던 창수를 떠밀고 튕겨지듯 밖으로 뛰어나간 재희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이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갓 샤워를 해서 머리의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열린 현관문 앞에 홀로 남겨져서 멍하니 서 있던 창수는 곧 재희의 뒤를 따르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조금 전 재희와 창수가 벌인 소란으로 잠에서 깼는지, 잠옷 차림의 재동이 커다란 베개를 한 손으로 잡아 질질 끌며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들어왔던 불이 나가 컴컴해진 층계와 졸린 눈을 비비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동을 번갈아보며 고민하던 창수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작 네 살 난 어린아이를 텅 빈 집에, 그것도 이렇게나 늦은 시간에 혼자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창수는 별 수 없이 재희의 집 안으로 들어가 열려 있던 현관문을 조용히 닫았다.

한달음에 아파트 밖으로 달려 나온 재희는 사방을 둘러보며 무진의 차를 찾았다. 곧 그의 눈에 헤드라이트 불빛도 여전히 켜져 있고, 시동도 꺼지지 않은 상태로 운전석 문만 완전히 열려 있는 차 한 대가 들어온다. 층계를 뛰어내려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재희가 곧장 무진의 차 앞으로 달려갔다.

무진은 보조석에 앉아서 닫혀 있는 창문에 제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경련하듯 떨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재희는 곧장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바닥의 어딘가에 힘없이 고정되어 있던 무진의 눈동자가 천천히 구르며 재희를 담아낸다. 재희의 모습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을 즈음엔 여지없이 미간이 찌푸려지고 말았지만. 재희는 손을 뻗어 무진의 볼을 손등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간지러워서인지, 아니면 부어오른 볼이 따끔거려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지 재희가 제게 닿는 게 싫은 것인지 무진이 슬쩍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돌린다. 고작 그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인 것 같았다.

“얼마나 다친 겁니까? 이번엔 또 어디에서 그랬어요? 많이 아픕니까? 어디가요?”
“꺼져.”

걱정이 돼서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재희에게 돌아온 무진의 대꾸는 그게 전부였다. 고운 말이 튀어나오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재희는 입술을 굳게 닫고 무진을 바라보다가 열려 있던 운전석 문을 닫았다. 그리곤 안전벨트도 제대로 매지 않은 무진에게 안전벨트도 잘 채워줬다. 당장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려는 생각에서다. 무진은 서슴없이 핸들을 잡아 쥐는 재희를 고요히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듯 길게 숨을 한 번 내뱉으며 힘겹게 말했다.

“어디로든 꺼지라고, 그 작자 눈에 안 띄게.”

조금 전보다 좀 더 구체적인 무진의 말에 재희가 잠시 출발을 미루며 무진을 바라봤다. 대뜸 꺼지라고 하기에 재희의 면상은 보기도 싫으니 꺼지라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무시한 거다. 하지만 잠자코 들어보니 뉘앙스가 좀 이상하다. 꺼지되 ‘그 작자 눈에 띄지 않게 꺼지라’니. 그는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 것인가? 대체 무슨 말을 전하려고 이런 상태로 여기까지 온 것인가.

무진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바가 없다. 그래서 그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그의 얼굴에 자꾸 짙은 절망감을 드리우게 하는 정체가 무엇인지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하지만 두렵다고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최소한 무진, 그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재희는 무진에게서 시선을 거둬 먼 앞쪽을 내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더 이상 재동일 못 보게 되도 상관없습니까?”
“…….”
“대답하세요. 상관없다고 한다면 한무진씨 말대로 꺼져줄 테니까.”
“협박하지 마, 개자식아.”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대답하세요, 어서.”
“……안 되니까 너더러 꺼지라는 거잖아. 내가 먼저 안 보는 건 이제 못 하겠으니까 네 놈이 그 새끼 데리고 꺼지라는 거잖아. 나 같은 놈이 더 욕심내기 전에 눈에 안 띄게 하라는 거잖아!”
“그렇다면 됐습니다.”
“뭐? 뭐라는 거야, 대체. 그런 태평한 소리 지껄이지 마! 너, 내가 어떤 마음으로…….”

무진은 얼굴 전체가 시큰거리는 것도 잊고,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울려 욱신거리는 것조차 잊은 채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뭐가 됐다는 건가, 대체. 한 회장은 조만간 재희와 재동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8년 전 그때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헤아릴 줄도 모르면서 왜 제멋대로 떠드는 거냐고 재희를 몰아세우던 무진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재희의 크고 따뜻한 손이 무진의 꽉 쥐여진 주먹을 감싸듯 잡아왔기 때문이다. 흠칫 놀라 빼내려 했지만 재희의 손은 쉽사리 무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기에 있어요. 우린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겁니다. 한무진씨가 두려워하는 그 자가 당신도, 재동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겁니다, 내가. 그러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요.”

재희는 점차 무진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그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와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뿐인데도 오늘따라 그 목소리가 자장가처럼이나 편안하게 들렸다. 착각일 가능성이 높지만. 재희는 여전히 무진의 손을 제 손으로 잡아둔 채로 차를 출발시켰다. 무진이 이렇게까지 흥분하고 격앙된 것은 그의 몸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당장에라도 무진을 의사에게 보여야한다. 재희가 모는 차는 곧 아파트의 지상주차장을 크게 돌아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 그거, 마지막이 되길 바랍니다.

야구공 하나를 툭 던져서 무진의 발치에 떨어뜨리며, 그렇게 말했었다. 만루상황에서 홈런을 허용해서 풀이 죽어 있던 날이었다. 모든 경기를 다 잘하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그것이 부담이 돼서 제구가 잘 되지 않던 날이었다. 전적으로 그날 팀의 패배는 무진의 제구력 저하가 원인이었으므로 프로선수에게는 굴욕일 수밖에 없는 경기 후 훈련을 받았다. 양측 구단 선수들은 물론이거니와 관람객들마저 모두 빠져나간 넓은 구장에서 투수코치와 단둘이 남아 일대일 훈련을 했다는 거다.

아니, 모두가 돌아간 것은 아니었나 보다. 투수코치가 던진 곳을 캐치하지 못하고 뒤로 흘리는 바람에 그것을 줍기 위해 외야 관람석 앞으로 달려갔을 때 그곳에 딱 한 사람이 남아 있긴 했으니까 말이다. 그날 무진이 맞아버린 홈런볼을 용케도 잡았는지, 그는 들고 있던 야구공을 무진의 발치 앞에 떨어지도록 가볍게 툭 던졌다. 잔디 위를 데굴데굴 구르던 공은 무진의 발끝에 톡 한 번 부딪친 후 움직임을 멈췄다.

그게, 그 공이 마지막이 되길 바란다는 것. 그 말의 의미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공이 투수로서 무진이 허용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홈런볼이 되길 바란다는 것이었으리라. 팬으로써 던지는 애정 어린 충고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 남자가 자신을 깔아보듯 내려다보며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괜히 발끈했었던 기억이 난다. 몸을 생각해서 연습은 그만하자는 투수 코치의 말도 무시한 채로, 그날은 무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공이 완벽히 들어갈 때까지 공을 던지고 또 던졌으니까.

다시는 홈런을 맞지 않길 바란다. 그런 뉘앙스로 말을 했던 걸 보면 그 남자는 아마도 무진이 속해 있던 구단의 팬 중 하나임에 분명했다. 그 뒤로는 딱히 마주친 적이 없긴 하지만, 그가 충고랍시고 툭 던진 말도 분명히 기억하는데 어째서인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남자의 얼굴만은 새까만 암흑으로 연상이 된다. 사람을 고요히 내려다보던 시선만큼은 분명히 뇌리에 남았는데도, 그 눈빛이 어떤 얼굴 속에 들어가 있었는지는 도통 모르겠는 거다.  

혹시 그라면 아직 무진을 기억하고 있을까? 다 이긴 경기에서 만루 홈런을 맞아버리는 바람에 굴욕적이게도 홀로 경기가 있던 구장에 남아서 훈련을 받던 한 어린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마운드에서 사라지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막연하게, 밑도 끝도 없이 그런 확신이 생겼다.

     



무언가가 곁에서 꼬물거리는 느낌에 무진이 천천히 두 눈을 떠올렸다. 서서히 밝은 빛이 시야를 파고 들어오면서 주변의 풍경도 가득가득 밀려들어온다. 익숙한 천장이다. 아이를 키우는 주제에 겁도 없이 흰색에 가까운 아이보리색 벽지로 도배한, 재희의 침실 천장 말이다. 무진은 여전히 제 곁에서 꼬물거림을 멈추지 않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소리 없이 눈동자만 옆쪽으로 굴렸다. 서서히 시야를 밀고 들어와 결국에는 완전히 꽉 채워버리는 재희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고 말았지만.

재희는 침대 옆에 앉아서 엎드린 채로 옅은 잠에 빠져 있었다. 머리를 감고서 제대로 말리지 않은 탓인지 늘 차분하던 그의 흑발이 오늘따라 좀 푸석푸석해 보인다. 옷도 갈아입을 겨를이 없었는지,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무진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던 날 밤에 입고 있던 바로 그 옷이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12시간 이상은 지났을 거다. 일단 밤이 낮으로 뒤바뀌었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릿속이 깨끗하니까 말이다.   

무진은 아직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은 꼬물거림의 정체를 쫓아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곧 무진의 다리 위에 어정쩡하게 올라와 있던 재동과 무진의 시선이 공중에서 딱 마주친다. 조금 전 재희 때문에 놀란 무진이 어깨를 크게 흠칫한 탓인지, 재동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무진의 안색 혹은 표정 등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제가 뭘 잘못 건드린 게 아닌가 싶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의 작은 손은 무진의 왼쪽 팔을 감싸고 있는 깁스 위에서 꼬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깁스한 것을 처음 보는지 녀석은 두 눈 가득 호기심을 품고는 로봇 팔처럼 딱딱한 깁스를 제 손가락으로 슬쩍 눌러보고 있던 것임에 분명했다.  

“왜 또 여기에 있는 거냐, 내가.”

무진히 형편없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눈을 뜨면 반드시 병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무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재동은 하지 않아도 될 행동-잠들어 있는 재희의 머리를 제 손으로 구태여 이리저리 흔들어 그의 잠을 방해했다. 곧 예민하기 그지없는 재희가 스스럼없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자신이 잠든 것을 미처 몰랐는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무진이 눈을 떠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몸은, 괜찮습니까?”
“칼 맞은 것도 아닌데 안 괜찮을 건 또 뭐……크악!”

무진은 자신을 걱정하듯 말하는 재희에게 퉁명스레 대꾸하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침대위로 쓰러지듯 눕고 말았다. 가슴에서 날카로운 것으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깁스를 한 것은 왼팔이고 가슴에는 압박붕대가 칭칭 감겨 있을 뿐인데, 가슴 안쪽에서 시큰거리는 통증이 계속해서 올라온다. 재희는 제 팔을 무진의 등 밑으로 밀어 넣어 그를 천천히 일으켜 앉혀주며 그의 상태에 대해서 들은 바를 충실히 전했다.

“늑골이 골절됐습니다. 유 선생님 말씀이, 깁스를 할 수 없는 부위라 안정을 취하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일단은 뼈가 붙고 봐야 하니까, 얌전히 좀 있어주시죠.”

골프채로 가격을 당한 부위이니 늑골 몇 대가 나가는 것쯤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뼈가 붙을 때까지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안정을 취하는 곳이 하필 재희의 집이라는 것이 좀 크나큰 문제일 뿐. 베개를 세워 무진의 등에 잘 괴어준 재희는 곧장 침실 밖으로 나갔다.

재동은 여전히 무진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무진을 빤히 올려다봤다. 예전에 녀석의 그 눈빛에는 낯선 사람을 향한 어린아이 특유의 호기심과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한 탐구정신이 반짝였다면, 며칠 전 어린이집에 들렀던 이후부터는 그 모든 게 사라지고 딱 한 가지 감정만 담겨 있는 것 같다. 관심 아니면 애정. 착각이 아니라면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다. 재희에게서 따로 무슨 이야길 들었기에 그렇게 눈빛부터 바꾸고 달려들어 곁에서 살랑거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어도. 어린이집 선생도 부쩍 무진더러 ‘재동이 아버님’이라고 하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진이 제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걸 녀석도 알게 된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갔던 재희가 들어왔다. 두 손으로는 손잡이가 있는 트레이를 들고서다. 재희는 무진이 앉아 있는 침대 앞으로 와서 트레이를 무진의 허벅지 즈음에 얹어놓았다. 트레이에는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전복죽과 맑은 콩나물국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비록 며칠 전, 재희와 회상하기도 싫은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작 그 이유로 그가 차려낸 밥상을 물릴 것 까지는 없지 않은가. 무진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시키며 습관처럼 왼손으로 숟가락을 집어드려다가 멈칫했다. 왼팔에 깁스가 되어 있다는 걸 깜빡했다. 무진이 깁스한 왼손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숟가락을 내려다보고 있자, 재희가 그 숟가락을 대신 들어 죽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말했다.

“침대에 흘리지 않고 먹는다면 혼자 먹게 해드리겠습니다.”
“이까짓 숟가락질쯤이야, 눈 감고도 한다.”

무진은 큰소리를 치며 재희에게서 다시 숟가락을 낚아챘다. 그리곤 배가 고픈 김에 숟가락 가득 죽을 퍼 올려서 제 입가로 가져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오른손이 벌벌 떨리면서 별안간 죽이 뚝, 뚝 하고 이불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야구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왼손으로 하는 게 익숙해서 오른손을 사용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사용하긴 했다. 이를테면 주먹을 휘두른다거나 하는 경우에. 나름 섬세함을 요하는 숟가락질에는 사용한 적이 없어서인지 제 몸에 붙어 있는 오른손이건만 제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재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무진에게서 다시 숟가락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곤 이리저리 뒤적여 한 김 식혀낸 죽을 숟가락에 적당히 떠서 무진의 입가로 슬며시 가져다댔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누군가 떠먹여주는 걸 받아먹는다는 게 영 내키지 않는지 무진은 얼굴을 묘하게 찌푸리며 한사코 입을 벌리지 않았지만. 재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침착한 어조로, 그러나 조금 전 이불을 더럽히는 실수를 한 무진이 뜨끔해할 말을 꺼냈다.

“더 이상 침대시트가 더러워지면 곤란합니다.”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가슴이 뻐근하고 콕콕 쑤셔 와서 죽을 맛이다. 최소 반나절 이상은 누워 있었기 때문에 속이 텅 비어서 조금만 더 버티다간 꼴사납게 꼬르륵 소리가 절로 날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희가 떠먹여주는 걸 잠자코 받아먹고 있을쏘냐. 그렇게 내적일 갈등을 하면서도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전복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무진의 시선이 제 앞에 앉아 있는 재동에게로 옮겨진다. 재동은 제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먹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먹으면 된다고 무진에게 시범이라도 보이려는 것처럼 말이다.

딴에는 무진이 받아먹는 법을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녀석이 아플 때면 지금처럼, 재희가 녀석의 침대 맡에 앉아서 죽을 떠먹여주곤 했을 테니까. 무진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딱히 고개를 숙이거나 하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앉아서 입을 슬쩍 벌리고 있다가 재희가 죽을 떠서 넣어주면 우물우물 씹어 넘기기만 했을 뿐이다. 이따금씩 아랫입술에 묻어버린 죽이나 국을 혀로 나직이 핥으면서.

“야, 어디다 집어넣는 거냐! 다 묻었잖아.”

점점 혈색을 찾아가는 무진의 입술을, 마냥 싫고 귀찮은 척 하면서도 주면 주는 대로 열심히 받아먹는 그를 너무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숟가락이 무진의 볼에 닿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넋을 놓고 있었던 걸 보면. 재희는 얼른 탁상 위의 티슈를 몇 장 뽑아서 무진의 볼에 묻은 죽을 깨끗이 닦아준다. 누군가 무엇을 대신 해주는 것, 그러니까 지금처럼 밥을 먹여주는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샤워를 한 후에는 타월로 대신 몸을 닦아준다거나 하는 등의 수발에는 익숙해졌는지 무진은 묵묵히 재희의 손길을 받았다.

무진은 한 손으로는 제 턱을 슬며시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티슈를 든 채로 제 볼을 깨끗이 닦아내는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만 보면 그 성격이 조금은 까칠할 것 같기도 하고, 지독할 정도로 꼼꼼할 것 같지만 여자들이라면 껌뻑 죽을 것 같다, 재희는. 완전한 조각 미남형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호남형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라면 적당하겠다. 이런 얼굴을 과거에도 보았다면 기억이 안날 리가 없는데도 지금껏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정말 그 시기에는 야구밖에 몰랐던 모양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야구와 여자 밖에.

무진이 한참동안 잠자코 죽을 먹고 있는 동안, 그 모습을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던 재동이 별안간 침대 아래로 내려가더니 다다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무엇을 하려나 싶어서 잠시 식사를 멈추고 침실 밖을 힐금거리는데, 곧 녀석이 손에 무언가를 들곤 이번에는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녀석은 제 원숭이 컵에 생수를 넘치기 직전의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담아가지고 와서, 컵을 든 두 팔을 쭉 뻗어 무진에게 내밀었다. 아픈 무진을 위해 재희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것처럼.

“짜식.”

재희의 시선은 곧 다시 무진의 얼굴에 붙박이고 말았다. 재동이 대견스러운 듯,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팔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무진의 예의 그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술로 시원스런 곡선을 만들면서 새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어 조금은 장난스럽게도 보이는 웃음을. 처음 보았을 때도 재희의 시선을 옭아매고 한참이나 놓아주지 않았던 그 웃음을 말이다.

무진에게 이런 웃음을 짓는 방법조차 잊고 살게 한 그를, 용서할 수 없다.










Second Daddy _ 14   







“검사님, 지금 오십니까?”

김 계장은 언제나처럼 정시에 검사실 문을 확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재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재동의 어린이집에서 사정을 봐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를 홀로 돌보면서 그처럼 한결같이 정시에 출근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성실함과 철두철미함이 없었다면 서른다섯을 넘기기도 전에 벌써 4년차에 접어드는 검사가 될 수도 없었을 테지만.

김 계장은 근래 재희가 배당을 받은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챙겨들고 재희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재희는 평소처럼 정장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말끔하게 걸어두지 않고 대충 책상 어딘가에 휙 던져놓고 있었다. 뭔가 갑갑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넥타이도 느슨하게 푸는 모습엔 초조함마저 느껴졌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그런 재희의 모습을 곰곰이 눈여겨보며 김 계장이 들고 있던 기록들을 건네자, 재희는 그것을 받아 책상 위에 올려놓기만 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보다, 지금 당장 좀 알아봐주셔야 할 게 좀 있습니다.”  
“뭘 말씀입니까?”
“한인호란 자에 대해서 사소한 것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봐주십시오.”
“한인호요?”
“네. 신상명세에서부터 성장배경, 소유재산, 가족관계, 지금껏 벌여온 사업의 내용, 최근 들어 만나고 다니는 자는 없는지, 그 자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없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말입니다.”
“검사님께서 직접 수사하시려는 겁니까?”
“네. 그 자와 연관된 사건들이 많을 텐데 이제껏 그저 묻히고 감춰지기만 한 것 같습니다. 워낙 교묘하게 수사망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 자는 한 번도 죗값을 치룬 적이 없어요. 이번에야 말로 잡아들일 겁니다. 내 두 손으로 직접.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반드시.”
“하지만 검사님.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건…….”
“먼지가 나올 때까지 털어볼 작정입니다. 표적수사라고 비난하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재희의 단정적인 어투에 뭔가를 더 말하려던 김 계장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껏 재희가 배정받지도 않은 사건을 직접 수사하러 나선 적은 없었다. 한 달 안에 처리해야 할 사건들이 7, 80건씩, 많으면 100건 남짓도 들어오니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니 연륜이 있는 김 계장이라도 당황하지 않겠는가. 딱히 범죄사실을 인지해서 수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의심이 가는 사람을 무조건 들쑤시겠다니. 쉽게 입 놀리기 좋아하는 언론이나 정계에서는 이 같은 경우를 두고 ‘표적수사’라고 한다.

“대체 한인호라는 자가 누구기에…….”
“김 계장님도 조금만 조사해보시면 아실 겁니다. 왜 그 자를 잡아야만 하는지.”

얼굴 표정을 싹 굳히고 말하는 재희를 뚫을 것처럼 바라보던 김 계장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재희는 조금 격앙되어 있는 상태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감정적여보이기도 했다. 김 계장이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희를 힐긋거렸던 것은 그 탓이다. 재희도 김 계장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쓰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무진과 그의 아버지인 한 회장의 사이가 결코 좋지 않다는 사실은 유 선생에게 들어 알고 있다. 한 회장이 무진에겐 아버지라기보다 그를 이용할 방법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 때문에 무진이 4년 남짓 복역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당시에는 이미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무진을 위해 재희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검사직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배당받았던 갖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을 수사해나가면서도 짬짬이 한 회장에 대해 조사해보긴 했으나, 전면적으로 수사를 하는 것과는 달라 한계가 있었다. 짬이 나지 않아서 늘 겉핥기만 하고 있었던 참이다. 서서히 한 회장을 무너뜨릴 준비를 한 후에, 무진이 다치지 않도록 차근차근 빼내올 작정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럴 수 없다. 무진이, 두려워하고 있질 않은가. 그가 더 이상의 상처를 받는 것만큼은 지켜볼 수 없다. 비열하게 숨어 그를 상처 입히는 자는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다.  

똑똑.

재희가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잠재우려 애쓰느라 미처 노크소리를 인식하지 못하자 김 계장이 도저히 평소의 그 같지가 않은 재희를 다시 빤히 바라보다가 들어오라는 말을 대신했다.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김 계장의 예상대로 유 검사였다. 김 계장은 유 검사와 슬쩍 눈인사를 나눴다.

유 검사는 재희의 책상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와선 어쩐지 표정이 이상한 재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한참만에야 재희가 자신과 시선을 맞추자 제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을 재희 앞에 툭 던져 주었다.

“……뭡니까?”
“나흘 전에 배당받은 사건.”

재희는 유 검사 건넨 기록을 감흥 없이 열어보는 시늉만 했다. 기록의 내용을 대충 훑어 보건데 전과가 없는 아마추어들에 의한 청부살인사건이었다. 인터넷도박에 빠져 큰 빚을 지곤 사채업자에게 시달리고 있던 피의자A가 그 빚을 청산해주겠다는 살인교사자의 꼬임에 넘어가 인면식도 없는 피해자를 또 다른 피의자B와 함께 납치?살해한, 사람 목숨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 근래에는 희귀하다 할 수도 없는 그런 사건. 재희는 유 검사가 굳이 이 사건기록을 가지고 와 자신에게 보여주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겁니까?”
“재수사 좀 하려고 들춰보니까 신기하게도 의외의 사람이 걸러져서.”
“네?”
“잠깐 나가서 얘기할래? 담배 좀 피우게.”

유 검사가 묘한 미소를 만면에 띄워내며 말했다. 말의 뉘앙스 또한 얘기는 나가서 하자고 권유하는 것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점이 있다. 뭔가 있는 것이다. 재희는 유 검사를 빤히 보다가 별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담배 좀 피워야겠다던 유 검사는 휴게실로 가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담배를 운운했던 것은 김 계장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댄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묵묵히 유 검사의 뒤를 따르던 재희는 유 검사가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되는 철문을 열고 나가자 한숨을 쉬듯 물었다.

“어디까지 갈 겁니까?”
“타.”

유 검사는 차키를 꺼내 지하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제 차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는다. 유 검사의 그런 돌발적인 행동의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원래 이해가 가기 보다는 안 가는 행동을 더 자주하는 별종이었기에 재희는 져주는 셈 치고 보조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러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유 검사가 수첩 하나를 재희에게 넘겨준다. 수첩에는 유 검사 특유의 악필로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단박에 분간할 수 있는 글자는 거의 없다.

“……뭡니까, 이게?”
“아까 보여줬던 사건의 피의자들, 어젯밤에 신문했거든. 둘 다 전과는 없어. 두 사람은 중, 고등학교 때 같이 유도부 생활을 했던 동창이고 지금은 무직인데, 사채 빚이 좀 많았다나봐. 사채업자한테 한참 시달리고 있던 참에 그 사건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박응식이 찾아와서 그 빚을 다 청산해줄 테니까 사람 하나만 죽여 달라고 했다고. 살인과정은 단순해. 피의자A 명의로 대포차를 빌려서 지하주차장에서 피해자를 기다렸다가 들이받곤 다쳤으니까 같이 병원가자면서 차에 태워 인적이 뜸한 곳으로 끌고 갔나 봐. 그 장소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피의자B랑 피해자를 살인하고, 유기했지. 멍청하게 CCTV화면에 찍히는 바람에 금세 경찰한테 덜미가 잡혔지만.”
“사건정황이 명백하고, 살인교사자까지 잡혔다면 뭐가 문젭니까?”
“그게 좀 이상하거든. 살인교사를 하려면 살인을 교사한 박응식이랑 피해자 사이에 원한관계라든가, 복잡한 치정에 같이 얽혀 있다든가, 뭐 죽여야만 할 사정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이 두 사람, 인면식이 없어. 친인척도 아니고, 이웃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동창인 것도 아니고, 하물며 사업상 자주 만난 사이도 아니야. 박응식한테 왜 살인을 교사한 거냐고 물어보니까, 술 마시다가 다른 테이블에 있던 피해자랑 한 번 시비가 붙었는데 그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나? 싸우다가 순간적으로 울컥 치밀었으면 그 자리에서 우발적 범행을 저지르는 게 더 일리 있지, 꾹 참고 있다가 큰 돈 들여 살인을 청부하는 게 일리 있겠냐?”
“확실히 수상하긴 하네요.”
“응. 아무래도 그 살인사건, 배후를 좀 더 파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그래서, 선배는 뭘 의심하시는 건데요?”
“그 살인 교사한 박응식이란 사람, 폭력조직에 몸담은 적이 있어.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 기승을 부려대는 폭력조직들 죄다 검거하려고 검경합동수사본부 조성됐고, 검거작전이 대대적으로 실행되는 바람에 박응식도 그때 붙잡혀서 7년 정도 징역을 살았어. 그때 소속된 조직이름이 ‘독사파’라고 했던가, 뭐 대충 그런 이름이었는데. 조직 간부들이 거의 다 끌려들어가서 조직이 와해되면서 남아 있던 놈들이 새롭게 조직을 결성했다나 봐. ‘백도회’라고. 석검, 너 알지?”  

유 검사의 직접적인 질문에 재희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유 검사를 빤히 바라봤다. ‘백도회’라는 폭력조직을 알고는 있다. 아니, 모를 리가 없다. 조직들이 기업의 형태를 갖기 시작하면서 외적으로는 ‘백도건설’이라는 기업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실상은 무진이 몸담고 있는 폭력조직의 이름이다. 재희의 굳어지는 표정만으로도 그의 대답은 알겠다는 듯이 유 검사는 제 이야기를 마저 해나갔다.

“박응식이 거기 보스랑은 막역한 사이였던가 봐. 형님, 동생 하는 사이였다고 그러더라고. 죽은 피해자는 골프장이나 테마파크 건립사업을 하는 시공사에서 근무하는데, 이번에 그 시공사에서 하고 있는 대형 골프클럽 조성사업의 총 책임자로 임명됐었고. ‘백도회’에서 ‘백도건설’이라는 사명 걸고 건설 사업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뭔가 연관은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영 뒤가 구린 게 말이야, 좀 더 캐보면 빙산 전체가 보일 것 같지 않냐?”
“나한테 할 말이 뭡니까?”
“관할 경찰들 말이 그 ‘백도회’라는 조직, 근래 몇 년 동안 좀 잠잠하다 싶었는데 단순히 숨고르기였던 것 같다고 하더라고. 최근 그 조직의 중간 보스급 간부가 수감생활을 하다가 출소했다네? 뭐, 피해자가 죽은 건 그 간부라는 자가 출소하기 이전이었긴 하지만 뭐라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거기 조직 보스랑은 부자지간이니까. 구미가 당기는 사건이긴 한데 막상 달려들려니 시간도 없고, 좀 복잡할 것 같아서 그래. 도와줄 거지?”

유 검사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얼굴 표정만은 익살스레 바꾸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다. 재희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사식을 넣어주던 수감자에 대해서. 그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떤 이유로 수감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그가 바로 재동의 친부이며, 재희는 제법 오래전부터 그의 출소를 기다려 왔다는 것도, 그리고 그가 얼마 전 출소를 했다던 ‘백도회’의 중간 보스급 간부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그것 모두를 알면서도 재희에게 도와 달라고 하는 까닭이 재희라면 그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 거라 추측해서인지, 혹은 단순히 재희를 배려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차라리 잘 됐다. 아니, 오히려 수고를 덜었다. 유 검사의 말대로 원한에 의한 단순 청부살인사건이라고 하기엔 수상한 점이 많고,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 미심쩍지 않은가. 어차피 한 회장을 조사하다보면 저절로 걸려나올 사건이었겠지만 미리 알게 됐으니 시간을 줄인 셈이다. 어디에고 있지만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너무도 막연해서 잡힐 것 같지 않던 한 회장이 가시거리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재희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 검사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선배가 날 도와줘야겠는데요.”

재희는 자신이 좀 더 알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곤 서둘러 유 검사의 차에서 내려서서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뭐가 그렇게나 급한 건지 한 번 뒤돌아보는 법도 없다. 그라면 아마도 검사실에 도착하는 즉시 수사에 착수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시한폭탄이라도 품에 안고 있는 사람처럼, 안달이 나선.

대체 누구인가? 한무진이라는 자는. 재희와는 어떤 관계인가. 단순히 재희의 아들인 재동의 친부? 아니면 다른 무엇? 무엇이기에 그는 매사에 냉철하고 틈도 보이지 않는 재희를 저토록 안달이 나게 하는가. 유 검사에겐 검사 특유의 호기심이라기보다 지극히 사적인 호기심이 충만해졌다.


















“재동아! 삼촌 왔다!”

현관문 밖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익숙한 음성에 침대에 누워서 색종이를 조물거리고 있던 재동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녀석은 고개를 돌려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무진을 빤히 바라봤다. 현관문 밖의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러가며 아는 척을 하는데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는 모양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몸집이 큰 무진에게 그 답을 구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무진은 소리 없이 눈동자만 굴려 그런 재동을 마주봤다. 다시금 현관문 밖에서 쩌렁쩌렁한 음성이 울려 퍼지는 바람에 그 시선은 금세 침실 바깥쪽으로 홱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만.

“형님! 저 왔어요!”

목소리로 보나, 성량으로 보나, 현관문까지 쾅쾅 두드려대는 그 무식함으로 보나 현관문 밖에 서 있을 사람은 창수임에 분명했다. 재희의 집에 맡겨놓은 무진을 보러 온 것이리라. 성가시게. 무진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다시 고개를 돌려 재동을 바라봤다. 무진은 며칠째 침대에 몸이 묶여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니 굳게 잠긴 문을 열 수 있는 건 재동뿐이다. 녀석의 키는 또래들보다도 작아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잠금장치에 닿지 않겠지만.

“문, 열어줄 수 있겠냐?”

혹시나 싶어 그렇게 묻자 재동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조심조심 침대 아래로 내려가선 다다다 밖으로 뛰어나간다. 부엌으로 달려 나간 녀석은 제 키와 엇비슷한 높이의 식탁 의자를 두 손으로 잡고는 그것을 질질 끌면서 무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녀석이 어떻게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려는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한참동안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작은 생명체가 꼬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머지않아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특유의 기계음을 내며 돌아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벌컥.

잠금장치가 풀리자마자 바깥에서부터 확 문을 젖혀서 여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재동의 포동포동한 볼을 흡입할 것처럼 쪽, 쪽 큰소리를 내며 뽀뽀를 해대는 소리까지도. 아니나 다를까 창수는 재동을 품에 안고서 녀석의 볼에 제 입술을 완전히 밀착시킨 모습으로 나타났다. 무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베고 있던 베개를 창수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던지지 않았다면 창수는 얼마고 더 그렇게 재동의 보드랍고 포동포동한 볼에 뽀뽀를 해댔을 것이다. 무진이 날린 베개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은 후에야 창수는 재동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재동은 창수에게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무진에게로 다다다 뛰어와 제 자리인양 무진이 누워 있는 침대로 기어올라 왔다.

“형님, 좀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눈뜨고 말하는 식물인간이다.”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입니다, 정말.”
“왜 왔냐?”
“어떻게 하고 계시나 궁금해서 왔죠. 걱정도 되고. 재동인 오늘 어린이집에 안 갔어요?”
“그 자식이 두고 갔어. 지 없는 동안은 이 녀석이라도 필요할 거라고.”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밥 먹을 때도 그렇고, 화장실 갈 때도 재동이만으로는 좀 무리이지 않아요?”

창수가 침대 주변에 놓여 있는 다 식은 죽과 재동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사용했을 것 같은 유아변기를 둘러보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무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팔의 허용범위까지 놓여 있는 물건들을 짚는 것 정도다. 차차 나아지기야 하겠지만, 지금당장은 가슴을 꼿꼿하게 펴고 일어설 생각은 못하겠다. 아니 정 궁하면 이 악물고 통증을 감내하며 움직일 수 있긴 하다. 지금이야 특별한 애로사항이 없다지만 불편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을 하던 창수는 묘안이라고 생각했는지 두 눈을 반짝이며 무진에게 물었다.

“제가 계속 올까요? 형님 똥오줌도 치워드리고.”
“병신자식아, 내가 뭐 치매환자냐? 중풍 걸린 노인이야?”
“아니, 전 형님 불편하실까봐 그러죠.”

창수가 손을 뻗어 재동의 볼을 간질이듯 만지며 말했다. 재동은 고개를 들어 그런 창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창수가 입술을 길게 쭉 찢어서 웃자 저도 방긋거리며 잘도 따라 웃는다. 녀석에게 무섭게 생긴 아저씨랑은 말도 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걸, 재희는 가르치지 않은 걸까. 무진은 재동이 귀여워 견딜 수 없는지 또다시 재동을 품에 안으려고 팔을 뻗는 창수를 눈살까지 찌푸려서 노려보며 보이지 않는 한 사람에 대해 물었다.

“정한이 놈은? 왜 안 보여?”
“형님 그렇게 되시고 나서 저도 정한 형님 못 봤는데요? 뭘 하러 다니시는지, 사무실에도 코빼기 하나 안 내비치세요. 애인이라도 생겼나?”
“니 새끼, 못 들었어?”
“예? 뭘요?”
“그날 한 회장이 정한이 놈만 잠깐 남으라고 했었잖아. 뭔가 말했을 거 아냐, 놈한테.”

무진의 말에 창수는 곰곰이 한 회장의 방에서 무진을 데리고 나왔던 날을 생각했다. 무진의 기억대로 한 회장이 정한을 따로 남겨두기는 했었다. 정한이 나오길 기다릴 여유가 없어 창수는 그대로 무진을 차에 태워 병원으로 가려다가 대뜸 재희의 아파트로 가라는 무진의 지시에 따랐다. 그때부터다. 정한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창수는 제 기억을 모두 되짚어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무진은 재동을 두 손으로 잡아 훌쩍 안아서는 제 무릎에 앉혀놓곤 동화책 하나를 꺼내서 큰 목소리로 읽기 시작하는 창수를 힐긋 보다가 다시 그 시선을 아무것도 없는 천장에 꽂았다. 한 회장은 그날 밤, 정한에게 별도로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왜 그 뒤로 정한은 보이지 않는 것인가. 예전 같았으면 창수와 마찬가지로 무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왔을 텐데.

뭔가 찜찜하다.















재희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밤 10시가 훌쩍 넘은 무렵이었다. 저녁을 먹는 것도 잊은 채로 오후 내내 김 계장과 함께 한 회장의 이력을 확인하고 건설업에 뛰어들기까지의 과정에서 불법행위는 없었는지를 찾는 것에 매달렸다. 정해진 시한이 있는 것도 딱히 아니었지만 되도록 빨리 사건을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래서 무진이 가능한 빨리 한 회장의 손아귀에서, 그 지긋지긋한 과거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인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낯선 구두 한 켤레와 그곳까지 나와 있는 식탁 의자 하나였다. 고개를 돌려 거실의 소파를 바라보자 낯선 구두의 주인일 창수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무진이 걱정돼서 찾아온 것이리라. 그리고 재동은 그의 배 위에 제 배를 대고 엎드린 괴이한 자세로 용케 단꿈에 젖어 있었다. 함께 비디오테이프를 보다가 잠든 건지, 테이프가 완전히 끝까지 돌아가 텔레비전에는 검은 화면만 둥둥 떠 있을 뿐이다. 두 사람 모두 워낙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재희는 발소리를 죽여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무진은 침대에 얌전히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자세가 영 불편한지 오만상을 찌푸린 채다. 재희는 재킷을 벗어 테이블 위에 슬쩍 얹어 두고는 무진이 누워 있는 침대 앞으로 걸어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른 숨소리가 내뱉어지며 어깨가 크게 들썩일 때마다 무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희는 천천히 제 손을 뻗어 위쪽으로 슬쩍 치켜 올라간 무진의 눈썹을 쓸어보았다. 까끌까끌한 눈썹의 느낌이 손가락 가득 묻어난다. 그것이 못내 간지러웠는지 무진의 눈썹이 아주 조금 꿈틀거렸다.

재희는 손가락을 천천히 미끄러뜨려 쭉 뻗어 있는 무진의 콧날을 몇 차례에 걸쳐 쓸어내렸다. 이내 무진이 코를 찡긋거린다. 깨어있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예민한 탓에 무의식중에도 그렇게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유야 무엇이든 괜히 더 짓궂은 이를 하고 싶게 만드는 반응이다. 무진의 턱을 따라 손가락을 슥 밀어올린 재희는 무진의 귓불을 슬며시 조물거리다가 그의 귓바퀴를 따라 간지러울 정도로 슬며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귓바퀴를 타고 점점 더 안쪽의 연한 살갗으로 파고들던 재희의 손가락이 귓구멍 속으로 밀려들자 무진이 어깨마저도 바짝 웅크린다. 재희의 손가락이 닿아 있던 그의 귀는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꿈틀거리는 무진의 모습을 지켜보던 재희의 입가에는 어느새 소리 없는 미소가 걸렸다. 그는 무진의 귓불을 간질이듯 매만지며 천천히 제 고개를 숙였다. 고른 숨을 뱉어내기 위해 살짝 벌어져 있던 무진의 입술이 점점 가까워져, 이내는 맞닿으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무진이 두 눈을 말끔히 떠올려서 제 시야를 꽉 채우고 있는 재희를 바라본 것은.  

“……뭐하는 거냐.”

무진이 반사적으로 재희의 어깨를 확 떠밀며 물었다. 그 탓에 금방이라도 닿을 듯 했던 무진과 재희의 입술이 거리를 확 벌리며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재희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전혀 별개의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죽은 다 먹었습니까?”
“왜 딴말이야?”
“하루 종일 얌전히 누워 있었겠죠? 불편하고 심심하다고해서 성치도 않은 몸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하면 좋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넥타이를 죽 잡아당겨 풀며 말했다. 그의 움직임을 조용히 눈으로 좇던 무진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아주 조금 뒤척였다. 완전히 돌아누운 것도 아닌데 가슴이 뻐근하고 욱신거리는데다 기름칠이 제대로 되지 않은 쇳덩이처럼 온몸의 움직임이 둔하게만 느껴진다. 제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은 거다.

- 만약에 형님이 쌩깠으면 재동이 아빠는 혼자 이 녀석을 키우려고 했던 걸까요?

저녁에 재동과 함께 배달음식을 시켜 먹던 창수가 문득 꺼낸 말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그가 오랜 숙고 끝에 꺼낸 말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므로 무진 역시도 깊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창수의 그 가벼운 질문이 오히려 의문이 되어 스스로는 결론짓고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혼자서 천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 거다. 끝내 결론은 내지 못하고.

마침 재희가 왔으니 그에게 직접 물으면 될 것이다. 평소처럼 와이셔츠 소매의 단추들을 느슨히 풀어내며 욕실로 들어가려던 재희의 등 뒤에 대고 무진이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리며 물었다.

“어쩌려고 그랬냐?”
“뭐가, 말입니까?”

재희가 셔츠 단추를 풀다 말고 뒤돌아보며 되묻는다. 무진은 잠시 뜸을 들이며 재희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곤 이번에도 단 1g의 거짓도 없는 것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는지 지켜볼 작정으로 물었다.

“만약 내가 재동이 녀석 모른 척 무시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느냐고. 재동일 키운 게 나 때문이라며. 그런데 내가 그 녀석 무시했으면 니 새끼, 완전 새 되는 거잖아.”
“그래도 내 아들로 키웠을 겁니다. 처음부터 원했던 건 그거니까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재희가 대답했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민망해하는 기색도 없다. 그렇게까지 당당하니 믿기는 믿어야겠는데, 도통 믿을 수 있는 것이라야지 믿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재희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무진을 말없이 마주보다가 슬쩍 그 시선을 다른 어딘가로 돌리며 말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헤어지게 됐는지는 정혜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정혜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앞선 두려움에 정혜를 떠나보낸 한무진씨의 결단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욕심으로, 집착으로 곁에 묶어 두면서 그 사람이 다치는 것도 지켜보는 것보다 그러기 전에 먼저 보내버리거나 도망치는 것, 그게 한무진씨의 방식이란 것도 잘 알았습니다.”
“……뭐라는 거야, 갑자기.”
“하지만 내 방식은 다릅니다.”

재희의 단정적인 어조에 무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재희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무진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갑자기 정혜와의 지난 일을 들먹이는 이유는 모르겠다. 아니 분명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할 거라는 건 느낌으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재희는 무진에게 똑똑히 듣고 기억하라고 당부라도 하듯 깔끔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무진씨가 내게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그 순간부터, 내게서 멋대로 도망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입니다.”










Second Daddy _ 15







무진은 암흑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무엇도 들리지 않는다.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홱 하고 거칠게 휘저어봤지만 잡히는 것도 없다. 그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암흑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불안함에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가 목을 타고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두 다리로 딛고 있는 땅조차도 어둡게만 보여서, 언제 어느 때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몸이 묶여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막막함에 식은땀이 흘렀다.

부르르르르릉.

어둠이 주는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디에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어 단박에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만 결코 달갑게 들리지 않는 소리가 말이다. 오른쪽에서다. 아니, 왼쪽인가? 등 뒤에서부터 뒤통수를 찌를 듯이 날카롭게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앞에서 달려들어 무진의 몸을 집어삼킬 것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방향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피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곧 정면에서 눈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을 쏘며 오토바이가 달려들었다. 아니, 그것은 오토바이의 형상을 갖춘 것은 아니었고 그저 두 눈을 아리게 하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이고 특유의 엔진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을 뿐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그것이 오토바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깰 수가 없다. 그래서 매일 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끔찍한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야 만다. 덜컹이는 심장이 기어이 살갗을 뚫고 나올 것 같다. 식도를 타고 솟구쳐 기어이 토해질 것만 같다.

끼이이이이익.

오토바이의 바퀴가 성나게 노면을 긁으며 미끄러졌다. 이대로 서 있다간 또다시, 꿈결에서 겪는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생생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두 팔을 들어 눈이 부셔 제대로 뜨고 있지도 못한 눈을 가리는 것뿐이다.

콰앙.

언제나처럼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초고층 빌딩에서 맨땅으로 쑤셔 박혔을 때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지끈거림이 온몸을 휘감는다. 몸은 공중을 향해 솟아올랐다가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공허했던 머릿속으로 피가 콸콸 들어차는 것 같았다. 시야가 흔들렸다. 다시금 고요해진 어둠 속에선 누군가의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고개를 가까스로 그쪽으로 돌렸다. 곧 점점 흐릿해지는 무진의 시야에 한회장이 들어찬다. 한 회장은 무진을 한없이 깔아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떼를 쓰는 놈에겐 매가 약이지.

당할 수 없다. 이 남자에겐. 스스로가 상처받는 것쯤은 이제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이 남자라면 무진이 끝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라도 산산이 부숴버릴 거다. 모두 짓밟아버릴 거다. 마음속 어딘가에 소중한 것들을 담고 있는 한 결코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철저히 무감각해지는 것,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사는 것, 그것뿐이다. 이 지긋지긋한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그렇게 인간으로 살지 않는 방법뿐.

- 우린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겁니다. 한무진씨가 두려워하는 그 자가 당신도, 재동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겁니다, 내가. 그러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요.

그때 불현 듯 재희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곧 그것이 꿈결에 생생한 음성이 되어 울려 퍼졌다. 꽤나 당황했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그런 말을 지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딱히 정혜처럼 무진의 심정을 이해하고 물러서리란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모르겠다. 그게 전에도 말했듯 제 방식이라는 건지, 혹은 남자의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건지.

- 여기에 있어요.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됐었던가? 그 말뜻을 제멋대로 받아들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막연히 불안해할 것 없이, 설사 그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다치지 않게 할 테니 걱정할 것 없이 그렇게 곁에 있으라고 위로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제 처지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재동의 곁에 쭉 있어도 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던 무진의 왼쪽 손 위에 작은 손 두 개가 사뿐히 얹어졌다. 꿈결이라서인지 보드라운 살갗의 느낌을 느낄 수가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재동이 쪼그리고 앉아 무진의 피 묻은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은 채로 언제나처럼 해쭉 웃고 있었다. 이 아이와 살고 싶다. 그저 자신의 처지라든가, 어두운 과거라든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이 아이의 아빠로, 단순히 그런 존재로만 살고 싶다.  

무진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여 재동의 손을 맞잡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던 한 회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재동을 확 낚아채간 것은. 한 회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무진의 왼손을 제 구둣발로 꽉 밟았다. 재동은 그의 손에 대롱대롱 붙들려서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울고 있었다. 한 회장은 그런 재동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무진을 향해 말했다.

- 거역하라고 들지 마라. 내가 가차 없는 인간이라는 건 네 녀석이 더 잘 알잖아?





“……하악!”

무진은 두 눈을 확 떠올렸다. 반사적으로 온몸도 크게 들썩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늑골에서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벌어진 입술에서는 연방 뜨거운 숨이 터졌다. 심장이 덜컹거릴 때마다 짐승의 그것 같은 숨소리가 마구 흩어졌다. 끔찍한 기분이다. 얼굴 옆면을 타고 흐른 땀이 턱 끝으로 모아졌지만 무진은 차마 그것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젠장…….”

무진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제 팔로 꽉 조여 안았다. 그러나 몸의 떨림은 쉽사리 멈춰지질 않는다. 머릿속은 점점 더 뒤엉켜서 그대로 뇌압이 올라가 팡 터져버릴 것만 같다. 거친 호흡도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땀에 젖은 온몸 구석구석이 다 쑤신다. 이 모두가 무진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두려움의 존재가 악몽 속에서 실체화되었기 때문이다. 한 회장이 재동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무진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 무진이 악몽에서 깨어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내지른 비명을 들었는지, 재희가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무진에게 물었다. 무진에게선 아무런 대꾸가 없자 그는 벽을 손바닥으로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곧 어두컴컴하던 침실에 불이 들어오면서 천장을 보며 누워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무진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크게 뜨여진 두 눈은 쉬이 감기지도 못한다.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벌벌 떨면서도 막상 손끝도 꿈쩍하지 못하는 무진의 모습에 재희가 한달음에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침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던 무진의 몸을 살짝 일으킨 후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볍게 감싸 잡아 자신을 보도록 돌렸다.

그러나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던 무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재희의 손길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어 돌리다가 이내 그것이 여의치 않자 제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두 팔로 재희의 어깨를 거칠게 떠밀었다. 그럼에도 재희가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의 손목을 강하게 붙들어 잡자 조금이라도 수그러들 기색 없이 온몸을 비틀며 그를 밀쳐내기만 했다. 이제 통증을 감내한다는 조건 하에 사소한 움직임은 가능할 정도라곤 하지만 골절된 늑골 쪽이 심하게 욱신거릴 텐데 그것마저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극도로 신경이 민감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인지 다른 누군가의 온기가 닿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진정하세요, 한무진씨.”  
“놔! 씨발, 건드리지 말라고!”

재희는 무진이 제 턱이며 어깨를 거침없이 밀어내는데도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팔을 크게 벌려 무진의 몸을 콱 끌어안았다. 재희의 팔에 갇혀 몸이 결박이라도 된 것처럼 바짝 조여지자 무진이 두 다리마저도 버둥거리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 숨결은 진정될 기미 없이 점차 거칠어지기만 한다. 재희는 무진이 목에 빳빳이 힘을 주며 버티는데도 온전히 제 팔 힘을 이용해서 그의 고개를 제 한쪽 어깨에 묻게 했다. 그리곤 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싸듯 꾹 눌러 잡았다. 그러고도 한참동안 꿈틀거리던 무진은 서서히 반항이랄 것을 멈췄다. 재희의 목덜미에 훅훅 불어들던 그의 숨결도 점점 가느다랗게 변해 편안해진다.

무진은 말없이 재희의 품에 안겨 있었다. 결코 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체구도 아니었지만, 자신보다 큰 어깨를 가진 누군가에게 안긴다는 게 그렇게 사람을 평온하게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껏 누구도 재희처럼 무진을 다독이며 끌어안아줄 이가 없었으니까. 평균적인 여성의 체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정혜로서는 지금처럼 무진을 품에 안아준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재희도 무진을 제 품에 품어 안고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곤 무진의 점차 고요해져가는 숨소리뿐이었다. 무진은 크게 한 번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처럼 긴 숨을 뱉어내고는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파. 이렇게 확 조이면 아프다고, 병신아.”
“악몽을 꾼 겁니까?”

무진은 슬쩍 재희의 몸을 밀어냈다. 재희를 밀어내는 무진의 손에는 그다지 힘이 실려 있지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재희도 순순히 밀려나줬다. 재희는 땀으로 범벅이 된 무진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재희를 보던 무진은 이내 저만치 시선을 던져놓으며 악몽을 꾼 이후엔 습관처럼 욱신거리는 왼쪽 어깨를 슬쩍 돌려볼 뿐이다. 재희더러 아프다고 했던 것은 이제 거의 다 나아가는 왼쪽 손목 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진이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쳤었다는 것은 유 선생에게 들어 알고 있다. 그것이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던 결정적 계기였던 것도. 인생에서 맛봤을 가장 큰 절망의 순간, 그는 하루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악몽으로 반복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재희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밖으로 나갔다. 말없이 돌아앉아 욱신거리는 왼쪽 어깨를 주물거리고 있던 무진의 시선이 슬쩍 재희가 빠져나간 문 쪽으로 향한다. 물론 그 시선은 머지않아 다시 돌아온 재희 때문에 얼른 다른 곳으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재희는 아이스 찜질팩을 가지고 돌아왔다. 펜대나 굴리게 생긴 재희가 그런 것을 준비해두고 살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지긋지긋한 통증을 완화시키는데 그것처럼 좋을 게 없다. 무진이 재희가 제 옷깃을 끌어내리는데도 잠자코 있었던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어깨 위에 차가운 찜질팩이 슬며시 닿자 녹슨 못으로 콕콕 찌르는 것 같던 통증들도 차갑게 얼어붙어버리는 것 같다. 무진은 다시금 한숨을 돌리곤 힐긋 재희를 바라봤다. 묻지도 않고 무진이 통증을 느끼는 곳을 잘 알고 있다. 틀림없이 유 선생이 알려준 것이겠지만, 대체 어디까질까? 이 남자가 무진 본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의 감정을 게임으로 치부할 생각은 없지만, 만약 그가 무진이 이유 없는 친절함 혹은 푸근함에 약하다는 것마저 알고 있다면 이 게임은 백이면 백, 그의 승리다. 한 번도, 심지어 독감에 걸려 앓아누웠을 때조차 누군가의 간호를 받아본 적이 없다. 매순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느라 저절로 독해지고 고집이 세졌다. 그런 무진에게 무언가를 받길 원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걸 주었기 때문에, 정혜가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재희 또한 정혜와 같다면, 그녀처럼 단지 자신이 무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침없이 파고들며 아낌없이 모든 걸 내주려한다면 끝가지 견뎌낼 수 있으리란 보장은 할 수가 없다.

“좀 진정이 됐습니까?”
“이제 잘 거니까 나가.”

무진은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며 침대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 이불을 확 끌어당겨 덮었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겠습니다.”
“가서 잠이나 자, 성가시게 굴지 말고.”
“또 악몽을 꾸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네놈이 그렇게 지키고 있으면 잠이 오겠냐? 아예 악어 주둥이 벌리고 들어가서 드러누우라고 해라.”

무진의 투덜거림에 재희의 입가에 소리 없이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평소처럼 중얼거리는 걸 보니 이제 정말로 안정을 되찾은 모양이다. 게다가 제대로 자각도 하고 있는 모양이고. 그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이야기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듯, 아니면 그 뜻을 전혀 모르겠다는 듯 무시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차라리 그렇게 재희가 위험한 상태라는 걸 본능으로 알고 움츠리려 드는 쪽이. 재희는 재동에게 하듯 무진의 이부자리를 정리해주곤 잠시 침실을 빠져나갔다.

무진은 늑골로부터의 통증에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하며 등을 돌리고 누워서도 바로 눈을 감지 않고 온 신경을 등 뒤쪽으로 집중했다. 재희가 소파로 돌아가서 눕지 않고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후 재희가 다시 침실로 들어왔을 때 무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재희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재동을 품에 안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나 싶어 지켜보자 재희가 품에 안긴 재동을 무진이 누워 있던 침대에 똑바로 눕혀준다. 재동은 어린 짐승 특유의 본능으로 온기를 찾아 무진의 품으로 데굴데굴 굴러들어왔다.

“뭐, 뭐야.”

무진이 당황해 묻는데도 대답 없이 재희는 다시 문가로 가서 스위치를 눌러 불을 껐다. 그리곤 그대로 나가지 않고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 의자에 몸을 앉히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신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무진에게 말했다.

“주무시죠, 이제. 우리 둘 다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을 테니까.”

재동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품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재희이긴 하지만 누군가 편안히 잠들 때까지 지켜봐준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던 모양이다. 슬쩍 고개를 베개에 가져다댔을 뿐인데도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던 잠기운이 쏟아져 내린 것은. 재동이 제 동그란 고개를 무진의 가슴에 비비적거릴 때마다 베이비로션 냄새가 올라와 좀 더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던, 정말 너무도 오랜만에 찾아오는 평화로운 밤이었다.















“뭐야, 이게.”

무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신을 깨워서 등에 베게까지 받쳐주며 앉히더니 대뜸 마른 수건을 어린아이 목에 손수건 감듯 감아주는 재희에게 투덜거리며 물었다. 무진이 뭐라고 떠들거나 말거나 묵묵히 욕실로 들어가 플라스틱 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나온 재희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테이블을 침대까지 쭉 끌어당겼다. 그리곤 그새 조금 흘러내려온 무진의 수건을 잡아 다시 잘 여며주며 뒤늦은 대답을 했다.

“세수를 시켜주려는 것뿐입니다.”
“설마…….”
“네, 그 설마입니다. 물수건만으론 찝찝할 것 아닙니까.”
“애새끼 다루듯 하려는 거면 그러지마. 거북하니까. 그리고 세수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그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한 손으로 말입니까?”

재희가 깁스를 하지 않은 무진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이라며 손을 척 들어 보이려던 무진은 그러나 곧 가슴통증에 끙 하며 앓는 소리를 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꾹 물었지만 그럼에도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가 슬며시 새어나가 버렸다. 재희는 한숨을 푹 한 번 내쉬곤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무진의 등을 끌어당겨 그가 고개를 앞쪽으로 숙이도록 유도했다. 그리곤 제 큰 손으로 물을 한 가득 퍼 올려 무진의 얼굴에 끼얹었다. 물의 온도는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였다.

무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물이나 비누거품이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래서야 재동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싶으면서도, 조금 낯간지럽고 거북하다 느끼면서도, 몸이 편하니까 가만히 얼굴을 대주고 있었다는 거다. 재희는 무진의 얼굴을 말끔하게 세수시키곤 그의 목에 둘러주었던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샅샅이 닦아주기까지 했다.

세수가 끝난 후에는 재희가 잠시 부엌으로 나가서 스팀타월을 들고 왔다. 그리곤 아예 테이블 의자를 끌어다 놓고 침대 옆에 앉아서 무진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런 식의 접촉에 익숙해질리 없는 무진이 확 손을 빼내는 데도 묵묵히 다시 그 손을 제 손으로 꼭 잡고는 가지고 온 스팀타월로 무진의 팔을 세세히 닦아나갔다. 손가락 하나하나, 손가락 사이사이, 손바닥의 손금을 따라서까지. 스팀타월의 온기가 고스란히 살갗으로 파고들어 기분이 좋았다. 한참동안 무진의 손을 잡아 손가락을 닦던 재희가 여기저기에 나 있는 흉터들과 굳은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흉터에, 궂은살 천지군요.”
“그야 조폭이니까.”
“이건 야구선수이기 때문입니다만.”

재희는 손가락 첫째 마디에 생긴 굳은살을 가볍게 눌러 보이며 말했다. 야구공을 손에 잡지 않은지도 오래돼서 감각마저 무뎌졌지만 그가 하루에도 수백 개의 공을 던지며 연습을 하던 열혈 투수라는 증거가 그렇게나마 남아 있었던 거다. 재희는 제 손을 가볍게 오무렸다 펴면서 멍하니 들여다보던 무진의 목에 스팀타월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무진이 움찔 하며 목을 움츠린다. 그럼에도 재희는 묵묵하게 무진의 잠겨 있지 않은 옷깃을 헤쳐서 목, 붕대가 감기지 않은 가슴 언저리, 복부까지도 스팀타월로 정성스레 닦아줬다. 무진의 시선은 재희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고요히 움직였다.

“그럼 이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샤워를 한 것에는 비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개운하게 무진의 몸을 닦아주던 재희가 타월과 대야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곤 곧장 뒷정리를 하기 위해 욕실로 걸어 들어간다. 무진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래서 살랑살랑 걷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이 드는 재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저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거면서도 그것마저도 기분이 좋을 걸까? 그는.


















재희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것도 잊은 채 ‘백도회’가 관련된 5년 전 사건 기록을 들춰보고 있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무진이 4년간 복역을 했었기 때문에 굳이 사건 기록을 보지 않아도 정황은 줄줄 욀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수사하고 있는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기 위해서 다시금 기록을 들추고 있는 것이다.

5년 전, 어느 기업에서 유명관광지에 테마파크 시설을 건립할 때에 소음이 일었다. 두 폭력조직이 입찰을 통한 이권다툼을 하느라 서로 얽혀 조직간 싸움으로 번진 사건이었다. ‘흑룡회’라는 폭력조직 산하의 하청업체가 입찰을 받았으나 뒤늦게 무진이 소속되어 있는 ‘백도회’에서 끼어들어 중간에서 입찰을 낚아채면서 문제가 불거졌었다. 공식적인 물리적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으나 비공식적 장소에서의 물리적 충돌이 없었다곤 할 수 없다. 그러한 이권다툼 과정에서 ‘백도회’ 측의 중간 보스급 간부가 ‘흑룡회’의 보스를 중태에 빠뜨리기에 이르렀고 오랜 의식불명상태에 있던 ‘흑룡회’의 보스는 끝내 사망했다. 조직적 싸움의 과정에서 상대편 보스를 죽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조직적 폭력행사 혐의로 가중처벌을 받아 두 조직 모두를 스스로 초토화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피의자도 피해자 쪽도 모두 그 사건은 조직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한 일이라 주장했다. 제 3의 목격자들에 의해 죽은 ‘흑룡파’의 보스가 먼저 흉기를 휘둘렀다는 것과 피의자의 흉기는 사실 피해자가 먼저 휘두른 것을 피의자가 주워 다시 휘두른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살인사건치고 형벌은 다소 가볍게 내려졌다.

당시의 담당검사도 그 사건을 조직간 이권다툼의 성격으로 보기보다 조직간 세력싸움의 변형된 형태로 보았던 것 같다. 실제로 그 사건 이후 테마파크나 골프장 등의 휴양시설 건설에서는 ‘흑룡회’를 짓밟은 ‘백도회’가 독보적으로 이득을 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한 회장이 무진을 포함한 수하들의 희생을 통해 얻은 대가다.

재희는 과거의 사건 기록을 내려놓고는 이번엔 무진이 속해 있는 폭력조직 ‘백도회’ 혹은 ‘백도건설’의 조직도와 내력에 관한 기록을 들여다봤다. 기록을 통해 ‘백도회’가 수십 년 전에는 ‘독사파’라는 이름으로 폭력조직을 결성하여 일대의 단란주점들을 통해 수입을 얻곤 했었다는 점과 유 검사가 배당받은 청부살인사건의 살인 교사자 박응식이 ‘독사파’의 핵심멤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한 회장은 사채업을 하면서 ‘독사파’에게서 인력적인 도움을 받는 대신 자금줄을 대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년 전, ‘독사파’의 핵심인물들이 모두 잡혀 들어가면서 남아 있던 조직원들은 모두 한 회장이 보살핀다는 명목 하에 흡수해 지금의 조직을 만든 것이리라.   

재희는 유 검사에게서 넘겨받았던 기록을 펼쳐 다시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 회장과 과거부터 인연이 있었던 박응식의 교사 아래 살해된 피해자는 한 시행사의 골프클럽 조성사업의 총책임자였다. 직접적으로 살인에 가담한 피의자 A와 B는 빚 청산을 위해 박응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고, 박응식은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밀 때나 유 검사의 신문을 받을 때에도 단지 피해자가 술김에 자신에게 모욕을 줘 참을 수 없었기에 사람을 시켜 그를 살해했다고 했다. 수상한 점이 영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백 번 양보해서 박응식의 진술이 전부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그와 오랜 인연이 있는 한 회장은 이번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조사결과, 건설계획이 잡혀 있다는 골프클럽의 도급사가 한 회장의 ‘백도건설’이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중간에 한 번 도급사가 변경되었다가 이후에 다시 ‘백도건설’쪽으로 공사가 넘어갔다. 다시 말하자면 이변이 없는 한 ‘백도건설’에서 공사를 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던 것이 공사시작 직전에 갑자기 입찰업체가 뒤바뀌었고, 그로 인해 소란이 일면서 공사가 계속 지연되었을 즈음 그 공사의 총책임자인 피해자가 살해됐다. 그 일이 있고부터 공사 담당자 몇몇이 재배치되면서 입찰부터 다시 공사가 재개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결정된 도급사가 ‘백도건설’이었다는 거다. 시기상 너무 교묘하게 끼워 맞춰지지 않는가. 시행사 직원의 죽음과 ‘백도건설’의 공사 재입찰이.

고대 로마시기엔 범인을 추적하는데 두 가지 개념을 썼다고 한다. 하나는 오늘날의 범죄수사에도 중요하게 작용되는 ‘알리바이’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쿠이보노’다. ‘알리바이’는 ‘어딘가 다른 곳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교사살인의 살인을 교사한 자의 ‘알리바이’의 유무 여부는 큰 쓸모가 없다. 남는 것은 쿠이보노다. ‘쿠이보노’는 해석하자면 ‘누구의 이익인가’라는 뜻인데, 다시 말해 그 범행을 통해서 누가 이익을 얻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사망으로 이익을 얻게 된 것은 박응식이 아닌 한 회장이다.

하지만 의심이 간다고 무작정 들이닥쳐 한 회장을 잡아들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능구렁이 같은 그가 이번 일이라고 달리 대응책을 마련해두지 않았을 리도 없지 않은가. 자칫하면 5년 전과 마찬가지로 무진이, 혹은 그와 비슷한 다른 누군가가 애꿎게 죄를 뒤집어쓸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재희의 예상대로 ‘백도회’가 골프클럽 조성사업 책임자의 살인사건 배후에 있다면 그 죄를 뒤집어쓸 경우 이번만은 단순히 3, 4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한 회장을 구석으로 내몰아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증거를 내민 다음 완전히 붙잡아야 한다.

“검사님.”

재희가 다시금 의지를 다지며 새로운 기록들을 뒤적이고 있을 때 검사실 문을 열고 김 계장과 문 계장이 들어왔다. 출근하자마자 재희가 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던 것들을 조사하고 돌아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재희는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밥은 먹었느냐는 인사도 생략한 채로 다급하게 물었다.

“알아보셨습니까?”
“네. 말씀하신대로 얼마 전 살해당한 피해자를 대신해 테마파크 조성사업 책임자로 재배치된 자를 조사해 봤는데요, 그 자의 계좌에서 수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제 3세계 아이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는데, 입찰업체가 다시 ‘백도건설’ 쪽으로 바뀌기 직전에 수 억 원의 자선자금이 익명으로 기부됐다고 합니다.”
“익명으로요?”
“네.”

김 계장은 자신이 알아본 자선사업의 모금내역을 문서화하여 재희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쭉 눈으로 훑던 재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익명의 기부는 ‘백도회’에 의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들이 로비자금을 자선자금으로 둔갑시켰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아니, 오히려 그 이후에 입찰업체가 다시 변경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재희는 이번에는 시선을 문 계장에게로 옮겼다. 그가 알아본 것들에 대해서도 마저 보고하라는 듯이 말이다. 문 계장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자신이 알아본 바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죽은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물어보니 고인이 자살하기 전에 가족들에게 친정이든, 해외든 잠시 가 있으라는 말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 시기 즈음해서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고요. 만성적으로 앓고 있던 우울증이 유독 심해져서 정신과 상담도 주기적으로 받았던 것 같습니다.”

딱 한 회장의 행동답지 않은가.
비단 무진에게 그러는 것뿐이 아니다. 사람의 약점을 꿰뚫는 순간 그것으로 상대방의 숨통을 조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마는 비열함에 주먹이 꽉 쥐어진다. 재희는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려 애쓰며 부가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가 죽기 전에 접촉했던 사람들에 대해선 알아봤습니까?”
“입찰업체 측의 대표들과 종종 사석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공사 입찰업체 선정전에는 으레 그렇듯이 공사장 터에 조폭들이 어슬렁거리기도 했다는데 당시엔 그리 큰 말썽은 없었답니다. 딱 한 번, ‘백도회’ 쪽에서 새로 입찰을 받아 공사를 진행하려던 업체 측 인부들과 패싸움을 벌인 걸 빼면요. 공사 진행하는데 시끄러울 필요 없다면서 다들 조용히 넘어간 모양입니다. 그 일은 아마도 ‘백도회’ 쪽에서 일종의 으름장을 놓아본 거겠죠.”
“중간에 한 번 바뀌었었다는 도급사는 피해자와 어떤 관계랍니까?”
“아, 중간에 도급사 바뀌었을 때 피해자가 힘 좀 쓴 모양이던데요. 그 도급사는 피해자의 고향친구가 공동운영하는 중소규모 건설업체라고 합니다.”

문 계장의 대답을 들은 재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 계장과 문 계장의 이야기를 종합해 본 후 재희의 머릿속에 떠오른 시나리오는 이렇다. 골프클럽 조성사업의 입찰에 참여했던 한 회장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던 입찰을, 총 책임자의 고향친구가 운영하는 건설업체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입찰을 넘겨주면 큰돈을 주겠다고 얼러도 보고, 당장 입찰업체를 바꾸지 않으면 가족들까지 무사하지 못하리라고 협박도 했겠지만 총책임자인 피해자가 요지부동의 태도를 보이자 과거부터 인연이 있던 박응식을 통해 그를 제거한 거다. 고인이 부쩍 우울증이 심해져 정신과 상담의 빈도가 잦아진 것은 순전히 그에게 받은 협박 탓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곤 새로 골프클럽 조성사업의 총책임자가 된 자에겐 협박과 함께 그 자가 명목상으로 운영 중인 자선업체에 자선자금의 명분으로 거액을 기부했을 거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익명으로.

물론 그가 직접 움직였을 리는 없다. 언제나처럼 푹신한 소파에 앉아 무진과 같은 충견들에게 손가락만 까딱여 보였을 뿐. 수사기관에서 그 배후로 자신을 지목할 것이 분명한데 스스로 움직여 목격자를 만들거나 증거를 남기는 짓은 하지 않으려 드렀을 테니까. 설사 이번 사건이 문제가 된다고 해도 언제나 그래왔듯 검찰 측에선 증거가 없어 자신에게 손조차 댈 수 없도록 말이다. 심증은 있어도 결정적인 물증이 없는 한 어느 판사도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순 없다. 정황은 알았으니 증거를 잡으면 된다. 어떻게든 숨겼겠지만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한다. 그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만한 치명적인 증거를.   












Second Daddy _ 16







위잉.

잠겨 있던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돌아갔다. 이내 현관문의 손잡이도 돌아가면서 문이 열린다. 현관 센서가 작동하면서 불이 들어와 한밤중에 귀가하는 이의 얼굴을 비춘다. 재희였다. 며칠째 계속해서 야근을 하고 있다. 순전히 한 회장의 덜미를 잡기 위해서다. 따로 배당된 사건들도 함께 수사해야 하니 저절로 귀가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재희는 불이 다 꺼져 있어 어두컴컴한 집안을 쭉 둘러봤다. 재희의 기척에도 누구 하나 나와 보질 않는 걸 보면 지금쯤 무진과 재동은 잠들어 있는 것임에 분명했다. 근래에 수시로 드나들며 무진의 수발을 들고 있는 창수의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재희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장 소파로 가서 고단한 몸을 뉘였다. 점심, 저녁을 챙겨먹을 시간도 없이 사건이 몰아친다. 그럼에도 막상 손에 잡히는 건 없다. 그 허무함이 체력을 더욱 고갈시킨다.

“조금만…….”

재희는 작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피로 때문에 약간 잠긴 그의 음성은 잠기운에 완전히 젖어 있었다. 아주 조금만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씻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2, 3시간 후에는 다시 또 일어나 아침준비를 해야겠지만. 단 10분의 단꿈이라도 지금으로썬 감지덕지일 것 같다.

그렇게 재희가 재킷도 벗지 않고 불편한 자세로 얼핏 잠이든지 10여분 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침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것은. 불안정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온몸이 크게 덜컹거리며 흔들린다거나, 그때마다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를 흘리는 것으로 보아 어둠속에서 기척을 내는 이는 무진임에 분명했다.

자던 도중에 목이 너무 말라서 물을 마시려던 참이었다. 되도록 안정을 취하면서 움직임을 줄여야 뼈가 빨리 붙겠지만, 달리 수발을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왕 노릇이나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곤히 잠든 재동을 깨워 물을 가져오라고 시킬 수도 없고 말이다. 단꿈에 젖어 있는 재동에게, 그 짓만큼은 할 수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골절부위가 몹시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칼을 몇 번씩이나 맞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경험이 있는 무진에겐 그 정도 통증은 참을 만한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무진에겐 말이다.

“응?”

벽에 의지해 부엌으로 걸어 나오던 무진은 특유의 예리한 감각 탓에 소파 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게 재희가 아닌 다른 누구라는 의심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부엌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거실 쪽으로 걸어온 무진은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거실에 불이 환하게 들어오면서 옷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불편하게 몸을 구기고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재희의 모습이 보인다. 무진이 잠들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았던 그다. 그러니 한 두 시간 전에야 돌아왔을 것이다.

무진은 재희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무진의 그림자가 제 얼굴을 뒤덮고 있는데도 재희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만큼 피곤함에 깊은 잠에 빠져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니 재희가 잠든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대부분 재희는 무진이 잠드는 것을 지켜본 이후에야 잠을 잤고, 그가 일어나기도 전에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새벽에야 들어왔을 재희에게선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고기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러니 회식자리에 불려갔다가 늦은 것은 아니라는 거다. 더불어 여자의 향수냄새조차 나질 않는 것으로 보아 여자를 만나고 온 것도 아니다. 그는 이제야 퇴근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야. 재동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비단 오늘 하루뿐만이 아니라 그는, 재동을 떠맡게 된 이후부터 이런 생활을 했을지 모른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자신의 삶은 거의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어떤 면에선 고맙다. 생판 남인 아이를 제 아들로 삼아 키워줬으니 왜 고맙지 않겠는가. 거기에 어떠한 흑심이 있었다고 한들 상관없이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미안하다. 무진이야 재동의 존재를 몰랐던 데다가 알았을 땐 이미 교도소에 있었으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멋대로 스킨십을 해올 때는 괘씸하고, 그 오랜 기간 동안 쭉 무진만을 지켜봤다는 얘길 할 때는 무섭기도 했고, 이유 없는 친절을 베풀 때면 좀 거북하기도 하지만.   

재희는 무진으로 하여금 참 오묘한 기분을 들게 하는 남자다. 잠든 재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무진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자신의 손이 재희의 얼굴을 향해 뻗어지고 있다는 것조차 무진은 인식하지 못했다. 틀림없이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거짓말처럼 그랬다.

무진의 손가락은 재희의 짙은 눈썹을 슬쩍 매만지다가 이내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뒤쪽으로 쓸어 넘겼다. 그 손길이 못내 기분이 좋은 건지 재희의 미간 사이에 잡혀 있던 주름이 펴지면서 재희의 얼굴 전체가 온화하게 뒤바뀐다. 그 탓에 무진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퍼뜩 깨달을 수 있었다.

“으악! 젠장. 미, 미쳤어. 돌았어.”

뒤늦게야 제 손을 짤짤 흔들어도 보고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도 해봤지만 손에 남은 감촉은 제법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무진은 자신이 물을 마시러 나왔다는 것조차 망각한 채로 도망치듯 서둘러 침실로 되돌아갔다.


















솨아아아아아.

잠깐 눈을 붙였던 재희의 눈꺼풀이 깊은 밤중에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에 가뿐히 떠올려진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며 여전히도 제 청각세포를 자극하고 있는 물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재희는 별안간 벌떡 제 상체를 일으켰다.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잠에 들었던 모양인지 그는 여전히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비단 지금 하루뿐만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무진이 잠든 침대 옆이든, 재동의 좁은 방바닥이든, 거실의 작은 소파에서든 불편하게 잠을 자다가 놀라 깨어난 것은.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던 무진이 또다시 부상을 입은 채로 찾아온 날부터다. 그때부터 이것저것 돌봐주고 챙겨줘야 할 대상이 재동에서, 재동과 무진으로 늘어나버린 거다. 동시에 한 회장에 대한 수사로 직장에서도 할 일이 더 많아져버렸고. 물론 불만은 없다. 잠을 더 쪼개서 자야해서 몸이 평소보다 더 고단하다는 점만 감내하면 한동안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각오했던 무진을 쭉 곁에 두고 볼 수 있게 된 거니까 말이다. 스스로는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적어도 1년간은 재희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나 고집이 센 남자이질 않은가. 한 회장을 처리한다면 어쩌면 그는 지금처럼 은근히 재희 본인의 곁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무진이 다친 일을 잘됐다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유 선생의 병원으로 무진을 데려갔을 때 유 선생은 혀를 끌끌 내차며 또 아버지에게 맞은 거냐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진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또’라는 것은 이전에도 그러한 상처를 수차례에 걸쳐 입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런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한 것이 바로 아버지라는 것일 게다. 예전부터 일삼던 폭력으로도 부족해서 이미 성인이 된 아들에게 늑골이 부러지고 팔에 금이 갈 정도의 폭력을 가하다니.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혜와 무진이 헤어진 이유의 중심에도 무진의 아버지, 즉 한 회장이 서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결코 헤어질 것 같지 않았던 두 사람이 이별을 맞아야만 했던 까닭을 물었을 때, 정혜는 두루뭉술하게나마 그가 자신이 다칠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고 말했었다. 처절한 과정을 거치며 야구에서 손을 놓게 되었듯이 정혜도 그렇게 잃기 전에 스스로 먼저 놓은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며칠 전 무진이 재희더러 ‘그 작자가 알기 전에 재동을 데리고 어디로든 가버리라’고 한 것은 아마도 한 회장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라는 의미일 거다. 그렇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쿵.

며칠간 지검에 나가면 맡은 일 때문에, 퇴근 후에는 무진과 재동을 돌보는 일로 바빴던 탓에 난잡하게 뒤섞였던 생각을 정리하느라 미처 잊고 있었다. 자신이 깨어난 것은 아닌 밤중에 들려온 물소리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그의 의식을 깨우기라도 하듯 곧 들려온 묵직한 마찰음에 재희는 더 지체할 것 없이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제야 침대 위에 누워 있어야 할 무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재희는 넓은 보폭으로 뚜벅뚜벅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슬쩍 열려 있는 욕실 문틈으로 은은한 오렌지색의 불빛이 새어나온다. 샤워기에서 연거푸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음성도 들려왔다. 틀림없이 무진의 것이었다. 조금 전 재희가 들었던 쿵 하는 소리는 그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그는 신음소리를 한껏 짓이기며 연방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재희는 스스럼없이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곤 갑작스런 인기척에 홱 뒤를 돌아보는 무진을 한없이 내려다보며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뭐하는 겁니까, 이 시간에.”  
“몸이 근질근질…….”

자신의 의견은 묵살당한 채로 며칠간 재희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혼자 움직이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온몸이 근질거린다는 이유로 이 새벽에 샤워를 하겠다며 움직이다가 기어이 넘어져버린 모양이다. 맨몸으로 철퍽 욕실 바닥에 넘어져 있는 꼬락서니가. 비누는 저만치 굴러가 있고, 그가 들고 있었을 배스타월도 거품이 잔뜩 일어선 욕조에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었다.  

재희가 욕실의 광경을 천천히 눈으로 훑으며 조금 전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는 동안 몸이 근질근질해 샤워를 하려던 것뿐이었다는 대답을 하려던 무진이 도중에 입을 닫았다. 그리곤 대뜸 들고 있던 샤워기를 비틀어 올려 문가에 서서 자신을 빤히 보고 있던 재희의 옷에 마구 끼얹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나가, 새끼야! 멀뚱히 서서 뭘 보고 섰냐!”

삽시간에 재희의 옷이 젖어 들어갔다. 그럼에도 재희가 얼른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문가에 버티고 서 있자 무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뜨려진다. 당황한 거다. 불현 듯 의식하게 된 것이리라. 무심코 재희의 침입을 내버려두었다가 그가 했던 고백과 키스가 갑자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뒤늦게야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의식하고 있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며 자극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는 걸까.

재희는 흠뻑 젖은 제 옷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무덤덤하게 무진을 봤다. 그리곤 이내 거침없이 욕실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나가라고 했더니 오히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아예 욕실 문까지 닫아버리는 재희의 행동에 무진이 미끄러운 바닥 위에서 온몸을 버둥거리며 짜증스레 소리쳤다.

“나가! 나가라고! 왜 쳐들어오는 거야! 나가란 말이다, 이 변태자식아!”

재희는 욕실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샤워기의 물을 잠갔다. 흉기가 따로 없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비누를 집어 본래 자리에 집어넣곤 욕조 위에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던 배스타월도 손에 들었다. 재희는 배스타월을 서로 부대껴서 하얀 거품이 더 잘 피어오르도록 만들며 자신에게서 조금도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않는 무진에게 말했다.

“온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혼자서는 날이 새도 끝날 것 같지 않고, 자꾸 이렇게 요란스럽게 굴면 한참 자고 있는 재동이도 깨버릴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뭐 어쩌겠다고!”
“씻겨 드리겠습니다.”
“됐어! 꺼져! 재수 없게 가까이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친히 씻겨 주겠다는 재희의 말에 무진이 경련하듯 몸을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부끄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날, 그러니까 정혜를 함께 보러 갔다 온 날 이후로 그와의 접촉이 부담스러워졌을 뿐.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재희가 무진 본인을 그저 동정하는 거도 아니고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데, 이성간에 느끼는 그러한 감정으로 보고 있다는데 말이다. 만약 무진 본인이 그런 특별한 감정으로 보고 있는 상대와 욕실 안에 단둘이 남는다면 아마도 결코 참지 못할 거다. 남자의 본능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다 그런 게 아닌가.

“괜히 겁에 질려서 버둥대다보면 오히려 화를 입는 법입니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지도 않는데 구태여 먼저 공격하는 짐승은 드무니까요.”
“젠장, 뭐라는 거야!”
“그러니까, 날뛰지 말란 겁니다. 흥분되니까.”
“미친놈아!”

재희가 흥분된다는 말을 대단히도 차분하게 중얼거리자마자 무진의 입에서 망설임 없이 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지금 당장 재희에게 퍼붓고 싶은 말이 그것 하나일리는 없겠지만 가까스로 참아 넘기는 것이리라. 무진 자신이 그렇게 자꾸 날뛰면 오히려 흥분된다고 하니까.

재희는 무진에게 다가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넘어져 있던 그를 일으켜 세웠다. 무진이 한사코 재희의 손길을 매섭게 쳐내는 바람에 거의 반강제로 그를 일으켜서 욕조에 걸터앉힌 것이나 다름없다. 무진은 재희에게 몇 번이고 당부하듯 으름장을 놨다. 물론 허세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100% 진심에서 우러나온 경고였다.  

“세우면 죽일 거야. 예고 없이 바로 죽여 버릴 거라고.”

무진이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다는 듯이 재희는 거품이 잔뜩 일어난 배스타월로 무진의 어깨부터 묵묵히 닦아나갔다. 깊게 패인 쇄골이 어깨까지 시원스레 쭉 연결되어 올라온다. 곧은 등골이 옅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등에는 적당히 마른 근육이 붙어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의 등에 주먹 정도의 크기로 새겨진 문신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그것이 무언인지 한참은 골똘히 봐야겠지만, 그렇게 보고도 어쩌면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재희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문신의 정체는 바로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무진이 몸을 담고 있었던 구단마크와 그의 등번호다.

“언제 새긴 겁니까?”
“뭐가?”
“여기 등에, 구단마크 말입니다. 한무진씨 등번호하고.”
“그런 것까지 알아보는 거냐?”
“내가 모르는 건 거의 없습니다. 한무진씨에 관한 한.”
“니 새낀 스토커주제에 왜 그렇게 떳떳한 거냐? 정말.”

무진이 재희를 핀잔하듯 중얼거렸다. 그게 다였다. 그저 싫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새겨 넣은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봐도 모를 것을 단박에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럼에도 과거의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것이 민망한지 무진은 괜히 콧등을 슥 긁기도 하고 두 발을 미끄러운 바닥에 이리저리 문질러대기도 했다.

재희는 제 몸을 닦듯 정성스레 무진의 몸에 비누칠을 해나갔다. 간지러운 구석구석을 잘도 파고든다. 비누칠까지야 다른 누구에게 맡겨본 적이 없지만 샤워 후에 무진의 몸에 남은 물기를 닦아주는 일은 늘 창수나 정한의 몫이다. 지금도 그것과 같이 생각하기로 했다. 괜한 생각을 해서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재희의 손이 무진의 허리 쪽으로 파고들어와 그의 허벅지를 문질러 닦는 동안엔 저절로 두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으니까. 王자 근육까지는 없지만 탄탄한 복부 위로 배스타월이 간지럽게 지나갈 때마다 어딘가가 바짝 조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터질 것 같은 조여짐의 정체는 재희의 손이 스스럼없이 무진의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왔을 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재희를 인식하려 하지 않아도 얼마쯤은 저절로 인식하게 된 까닭인지 창수나 정한의 손길이 닿을 때와는 달리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다. 게다가 근래에 제대로 빼주지 않았기 때문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제길.”

재희는 돌연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두 무릎을 꼭 붙이곤 상체마저도 슬쩍 숙이는 무진을 빤히 바라봤다. 뭔가 잔뜩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재희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몸을 웅크리면 제대로 씻겨줄 수가 없는데도 그 자세로 꿈쩍도 하지 않으려고 드는 거다. 연방 윗니로 아랫입술만 잘근거리기나 하고.

재희는 들고 있던 배스타월을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곤 손을 뻗어 무진의 턱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저절로 무진의 웅크렸던 상체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무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깁스 때문에 유일하게 옴짝거릴 수 있는 팔로 재희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러나 재희는 제 가슴을 무진의 벗은 등에 바짝 밀착시키며 상체를 슬쩍 숙였다. 그로 인해 그의 볼이 저절로 무진의 이마 즈음에 닿는다. 재희는 두 손으로 무진의 무릎을 잡았다. 그러자 무진이 두 다리에 더 바짝 힘을 주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재희의 가슴을 떠밀던 손으론 이제 재희의 턱을 마구잡이로 떠밀고 있다.

“하지……!”

무진의 말은 채 완성되어 튀어나기도 전에 멎었다. 재희가 무진의 무릎을 잡고 있던 두 손에 힘을 주어 그의 무릎을 서서히 벌렸기 때문이다. 곧 하얀 거품을 가득 머금고 있는 무진의 페니스가 완연히 드러난다. 아직 일어섰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고작 타인의 손길이 좀 스쳤다는 이유로 몸살을 앓으며 꿈틀거리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재희가 검지로 무진의 페니스를 두 갈래로 갈라진 선단부분까지 쓱 한 번 쓸어 올리자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살갗에는 금세 소름이 일어났다. 잘근거리던 입술 사이에서는 기어이 끙 하고 앓는 소리가 튀어나갔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됐…… 크윽!”

그저 손바닥으로 페니스 전체를 완전히 감싸 잡았을 뿐인데 무진이 상체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잔뜩 짓이겨진 신음소리를 냈다. 재희는 아직 충분히 서지 않아 말랑말랑한 무진의 페니스를 손 안에 가볍게 쥐고 만지작거리면서 유난히 후끈 달아오른 무진의 귓불을 살짝 베어 물었다. 그러자 또 한 번 무진의 몸이 크게 들썩인다. 욕조를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그의 손가락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재희는 손에 힘을 완전히 풀어서 무진의 음낭에서부터 귀두 끝까지를 간질이듯 천천히 쓸어 올리다가 잔뜩 후끈거리는 요도 부위를 손가락으로 둥글리듯 슬며시 매만졌다. 무진의 페니스가 서서히 단단해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다시 제 손바닥으로 무진의 페니스를 완전히 감싸 잡고서 위아래로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귓불을 잘근거리던 입술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부끄러울 때면 여지없이 두 귀를 붉힌다던 무진의 두 귀가 새빨갛게 타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희는 제 혀를 내어 무진의 귓바퀴를 따라 움직였다. 예민한 곳이 축축이 젖어 들어가자 무진의 페니스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삽시간에 부풀어 올랐다.

“……윽.”

무진의 몸이 점점 더 무너져 내리며 자연스레 재희에게 기대어온다. 재희는 무진의 꿈틀거리는 복부를 다독이듯 쓸어 올리며 숨을 내쉴 때마다 크게 들썩이는 그의 어깨에도 나직이 입을 맞췄다. 그의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페니스를 더욱 세게, 그리고 빠르게 쓸어 올렸다가 쓸어내리길 반복하자 가슴까지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두 발은 애꿎은 욕조 바닥을 걷어찰 뿐이다. 마른 침을 꼴깍꼴깍 삼킬 때에는 울대뼈가 크게 너울거렸다. 재희는 숨길 새 없이 드러나는 그 모든 반응을 고요히 제 두 눈에 담으며 손아귀에 바짝 힘을 주어 거침없이 무진의 페니스를 쓸어내렸다.  

무진의 엉덩이가 저절로 들썩거린다. 감당하기 벅찬 아찔함에 몸이 저절로 버둥거리며 재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 무진의 손이 재희의 팔뚝을 성나게 할퀴었지만 재희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던 재희가 팔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을 무렵, 그의 손 안에서 잔뜩 몸살을 앓던 무진의 페니스가 기어이 폭발했다. 동시에 무진이 꾹 눌러 참았던 신음소리를 여지없이 흘려내며 허리를 완전히 비틀며 전율했다.   

“아아…… 윽! 크으윽.”   

재희는 무진의 살덩이를 쥐어뜯을 것처럼 빠르게 세게 문질러대던 손에 힘을 살짝 풀어내며 그의 페니스를 마사지하듯 차분히 쓸어 올렸다. 사정의 여운에 부들부들 떨리던 무진의 페니스가 이내 잠잠해지며 남아 있던 정액을 마저 내뱉었다. 재희에게 완전히 기대어 어깨까지 크게 들썩이며 호흡을 고르는 무진의 복부가 너울거렸다. 재희는 어린아이를 다독이듯 그의 너울거리는 복부를 제 손바닥으로 찬찬히 쓰다듬어주며, 배꼽 아래까지 자라난 털도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매만졌다.

아찔한 쾌감에 모든 것을 잊고 몸을 내맡겼던 무진은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자 벌떡 재희에게 기댔던 제 상체를 바로 일으켰다. 그리곤 당장 샤워기에 물을 틀어 제 사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재희의 손바닥을 찬물로 깨끗이 씻어 내렸다. 제 손으로 문질렀을 때 재희의 손바닥에서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박박 닦아낸다. 재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미소를 터트렸을 뿐이었다. 워낙 잘근거리며 물고 늘어진 탓에 피라도 베어 나올 것처럼 붉어진 무진의 두 귀가 유난히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무진은 무언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며칠사이에 확실히 눈에 익은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 벌써 일주일 남짓이 되어간다. 재희의 집에 머물기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까지 뭉개고 앉아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재희에게 신세를 질 생각은 없었다. 정혜를 함께 보러 갔던 날 있었던 그 껄끄러운 일 때문에 가능만 하다면 평생 그를 다시 보기 싫었으니까.   

그저 한 회장은 여전히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처절하게 깨닫고 나서 그가 재동의 존재를 알게 되기 전에 피하라는 말을 전하러 찾아왔던 길이었다. 이번만큼은 스스로 발길을 끊는 것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재희에게 재동을 데리고 어디로든 가버리라고, 그렇게 등을 떠밀 생각이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무진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은 이제 두려울 것도 없지만 그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상처 입는 것만은 여전히 두려웠다.

하지만 재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재동과 자신은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무진도 여기에 있으라고 말했다. 허세가 아니었다. 허세가 아닌 진심이어서 오히려 그 말이 미련 맞게 느껴졌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지 모르듯 한 회장을 잘 모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자, 옷 입자.”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무진의 귓가에 재희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진은 그의 잠을 깨웠던, 부산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곧 재동에게 어린이집의 노란색 유니폼을 입히고 있는 재희의 모습이 무진의 시야에 들어온다. 녀석의 옷을 입히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시간이 쫓기고 있는 탓인지 재희의 손길은 수준급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힐금거리며 연방 벽시계를 올려다보는 폼이. 그러면서도 소홀함은 없다.

“야.”

무진은 여전히 누운 채로 재희를 불렀다. 그러자 재희와 재동이 동시에 무진을 바라본다.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재희도, 무진도 민망해하는 기색이 없다. 그저 그 일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걸 함께 지켜보기라도 한 듯 자연스레 넘겨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덕택에 시원스레 빼내고 개운해진 기분으로 푹 잘 수 있었다. 좀 이른 시간에 일어난 탓에 여전히도 좀 졸리긴 하지만.

재희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 잠그지 못한 상태였고, 넥타이도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었다.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재동의 머리카락엔 물기가 여전했다. 아무래도 객식구가 하나 생기는 바람에 그들의 생활리듬이 깨어져 버린 모양이다. 그렇게 허둥지둥 정신이 없는 걸 보면. 재희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없는 여유를 부려가며 아침인사와 다름없는 말을 무진에게 건넸다.

“벌써 일어났습니까?”
“원래 그렇게 빨리 데려다주고 그러는 거냐?"
“뭐가 말이죠?”
“어린이집 말이야. 원래 이렇게 새벽같이 준비해서 보내야하는 거냐고.”

무진이 아직은 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물었다. 지난 며칠간 재희의 집에 머물면서 느낀 한 가지가 있는데, 그건 바로 재희와 재동의 아침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과하게 일찍 시작한다는 것이다. 직접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무진이 알기로 아이들은 보통 아침 9시를 전후해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엘 간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났다는 이유로 그 시간이 조금 당겨졌을 수는 있겠으나, 재동이 집을 나서는 시간은 7시 혹은 그 이전이다. 너무 이른 것이다.

무진이 의문을 갖고 묻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는지, 재희는 다시 재동의 옷깃을 정리해주고 녀석의 머리에 남은 물기를 바짝 건조된 수건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내 출근시간에 맞춰 보내야 해서 그렇습니다. 아직 혼자서 어린이집 차를 기다렸다가 타고 가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린이집 차가 데리러 올 때까지 딱히 맡겨둘 곳도 없으니까요. 특별히 어린이집에 양해를 구해서 일찍 데려다놓고, 퇴근하는 즉시 가서 데리고 오는 겁니다.”

아아, 그런가.

무진은 재희의 무덤덤한 말속에서 꽤나 많은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재동이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 중 가장 먼저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다른 녀석들이 도착할 때까지 남는 2시간 남짓을 홀로 놀며 보낼 것이란 것. 그리고 재희의 퇴근시간이 결코 빠르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건데 녀석은 다른 아이들이 모두 부모들의 손을 잡고 돌아가는 걸 빤히 지켜보다가 기다림에 지쳐 잠이 들었을 즈음 재희의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올 거라는 것. 어쩌면 그렇게 다른 아이들과 다른 생활패턴 때문에 더 혼자 노는 게 편해졌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딱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 일찍 출근을 하고 저녁 늦게야 돌아오는 재희는 재동 때문에라도 동료들과의 회식자리나 사석에 나가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의 하루는 일과 재동에게만 매여 있는 것이다. 또한 어린이집 차가 올 때까지 재동일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재희의 집안사정까지야 잘은 알 수 없지만 감히 짐작하건데, 그의 집에서는 재희가 재동을 맡아 기르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닐 재희를 그저 손 놓고 지켜볼 이유는 없다. 가족 모두가 죽은 게 아니라면.

“너, 부모님은?”
“뜬금없이 무슨 말입니까?”
“다 살아 계시냐고. 형제라든가…….”
“네. 두 분 다 건강하십니다. 형제는 없고. 그런데 그런 건 왜 묻는 겁니까?”      
“흐음.”

무진은 검지로 이마를 긁적였다. 예상대로다. 정말 미련 맞은 남자이질 않은가. 재동을 제 아이로 키우기 위해 가족의 외면을 받으면서,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마저도 감수하다니 말이다. 정혜에 대한 마음이 그 정도라는 건가. 아니면 무진 자신에 대한……. 무진은 이내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처럼 잡았다.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생각이 흐르고 말았다. 되도록 언급도, 생각도 하기 싫은 방향으로 말이다. 무진은 또다시 손목시계를 힐금 들여다보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재희에게 물었다.

“그 노란 차, 그거 날마다 오긴 하냐?”
“노란 차?”
“애들 싣고 갔다가 싣고 오는 그거 말이야.”
“이 아파트 단지에서 다니는 아이들이 꽤 있으니까 오기야 하겠지만.”
“그럼 놓고 가.”
“네?”
“저 녀석, 여기 놓고 가라고. 내가 차 태워서 보낼 테니까.”

무진의 갑작스런 제안에 재희가 입을 다물곤 무진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자신이 지금 무언가를 잘못 들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젖은 머리카락을 제 손가락으로 꼬물꼬물 만지고 있던 재동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진의 얼굴과 재희의 얼굴을 번갈아봤다. 지금 무진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다른 아이들처럼 노란 색 어린이버스를 타고 어린이집에 가는 일을 하게 해준다고 말하지 않는가.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건 또 뭔데.”
“벌써부터 몸을 움직이면 좋지 않을 게 아닙니까.”
“엄살떨면서 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단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는 게 좀도 안 쑤시고 좋아.”
“그건 한무진씨 생각이죠.”
“조금씩은 움직일 수 있다니까? 아픈 것도 좀 참을 만하고.”
“진심입니까?”
“응.”
“그러면 어린이집에 연락을 해놓겠습니다. 그리고 저녁엔 내가 데리고 올 테니까…….”
“아니, 그것도 됐어. 그 늦은 시간까지 그 녀석, 거기에 묶어놓을 필요 뭐 있어? 일찌감치 데려다 놓는 게 좋잖아. 나도 안 심심하고 너도…….”

무진은 뭔가를 더 말하려다 쩝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닫았다. 그리곤 괜히 제 뒷머리를 벅벅 신경질적으로 긁는다. 그가 꺼내지 않고 부러 삼킨 말은 그렇게만 한다면 재희도 재동을 데려오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아 편할 게 아니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재희는 제 곁에 서 있는 재동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그러자 재희를 빤히 올려다보던 재동이 열심히 제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다는 거다. 왜 아니겠는가. 부모의 손을 잡고 하나, 둘 돌아가 버리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게 녀석이라고 결코 좋았을 리 없는데.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마세요.”
“부탁이랄 거 있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아버지 소리 듣기 민망해서 그러는 것뿐이니까…… 근데 네가 말한 거지? 어린이집 선생한테. 그 여자, 알고 있던데.”
“사실을, 필요한 만큼 말한 것뿐입니다.”

무진이 재동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언젠가부터 어린이집 선생은 무진을 볼 때마다 꼬박꼬박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혹은 재동더러 ‘아버지가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즈음 무진을 대하는 태도에도 확실한 변화가 생겼고 말이다.

재희는 재동의 준비를 돕느라 제대로 잠그지도 못했던 셔츠 단추를 마저 잠그고 넥타이도 능숙하게 조여 맸다. 정돈이 잘 되지 않았던 머리카락을 뒤로 슥 쓸어 넘긴 후 매만지고 재킷까지 가볍게 걸치고 나니 특유의 말끔한 인상이 완성된다. 아니, 그 모습은 말끔하다기보다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조금은 차갑고 냉철하게 보일 정도였다. 다시 한 번 거울을 통해 제 모습을 확인한 재희는 무진이 앉아 있던 침대로 다가와서 인사말을 전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너.”
“네?”
“혹시라도 니 새끼, 밤에 그런 짓 좀 했다고 기세등등해하면 가만 안 둘 거니까…….”

무진이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던 재희를 굳이 붙들어 잡고 꺼낸 말은 나름 경고성의 멘트였지만 결코 두렵게 닿아오지 않았다. 말투와 뉘앙스도 뭔가 단단히 분해하면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지 못하는 건 어찌됐든 그의 손길에 절정을 맛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사실이다. 좋았으니까. 그의 손에서 가버린 것은 재희도 알고 무진 본인이야 더더욱 잘 아는 분명한 사실이니까.

“점심시간엔 집으로 전화할 테니까 받으세요. 재동이에게 받으라고 할 순 없으니까.”

재희는 무진의 경고에는 일언반구 대꾸없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제법 근사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남자다. 무진은 조금 성가신 표정을 지으며 이제껏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을 전화기를 바라봤다. 자신이 정 못 미더워서 굳이 재동의 안전을 확인하겠다는데 별 수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 대충 고개는 끄덕여줬다. 재희가 궁금해 하는 것은 무진 자신의 안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동은 현관으로 걸어 나가는 재희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 현관문 앞에서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재희는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후에, 뒤늦게야 어슬렁거리며 침실을 빠져나온 무진의 모습도 두 눈에 한 번 담고선 집을 나섰다.

“이리 와.”

재희가 나간 후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스스로 잠기는 걸 눈으로 확인한 무진이 아직 그 앞에 멀뚱히 서 있던 재동을 불렀다. 그러자 재동이 한달음에 무진에게 달려온다. 소리 없이 입을 활짝 벌려 웃고 있는 얼굴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담겨 있다. 유난히 물기가 가득한 두 눈에도. 무진은 욕실로 들어가 헤어드라이기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서 콘센트를 찾다가 소파 옆의 콘센트를 발견하곤 그리로 가서 전원을 연결했다. 무진이 따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재동은 알아서 그의 뒤를 따라왔다. 오리새끼 같다. 졸졸졸 꽁무니만 보고 따라다니는 꼴이.

무진이 소파를 탁탁 두드려보이자 재동이 기듯이 소파 위로 올라가 앉았다. 무진은 드라이기를 켜서 물기가 채 마르지 않아 이리저리 삐죽이는 재동의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무진을 닮아 머리카락이 가늘다. 정혜를 닮아 연한 갈색을 띠는 머리카락이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듯 하며 서늘한 바람으로 머리카락을 말려주자 기분이 좋은지 녀석이 고개를 이리저리 가볍게 흔든다. 아기였을 적에 얼마나 신경을 써서 뉘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동그란 뒤통수다.  

재동의 머리를 말끔하게 다 말려준 무진은 드라이기의 전기코드를 정리하며 다시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재동이 또 엉금엉금 소파에서 내려와선 얼른 무진의 뒤를 따라온다. 드라이기를 본래의 자리에 집어넣은 무진은 힐금 고개를 돌려 제 뒤에 바짝 서 있는 재동을 돌아봤다. 이미 밥도 먹은 것 같고, 옷도 입혀 놨고, 피부에서는 베이비로션 냄새가 나는데다 머리도 다 말렸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는데 벽시계를 보니 시간은 겨우 7시 30분이다.

무진은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긁적이며 다시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재동이 열심히 그 뒤를 따른다. 슬슬 자신도 밥을 먹어야 할 테고 사람답게 몰골도 추슬러야 할 테지만 어쩐지 다 귀찮다. 충분히 자다가 지쳐서 깬 것이 아닌지라 피로감에 아직 몸이 무겁고 하품도 절로 났다. 무진은 짧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겨우겨우 침대 위로 올라와 앉는 재동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녀석을 팔로 안듯이 해서 제 몸과 함께 침대 위로 뉘여 버리며 조금은 무책임한 말투로 말했다.  
  
“음…… 그럼…… 조금만 더 자자.”









Second Daddy _ 17







“어머, 안녕하세요.”

지금 막 뛰어나왔는지 재동을 옆구리에 끼다시피 안고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무진을 향해 어린이집 선생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유난히 목소리 톤이 높은 것은 무진이 반가워서라기보다 그가 재동을 어린이집 차량에 태워 보내기 위해 나와 있다는 것을 대단히 의외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물론 아침에 재희에게서 따로 연락은 받았었다. 오늘은 재동이 어린이집 전용 차량을 이용해서 가게 될 것 같으니 시간에 맞춰 집 앞으로 데리러 와 달라는 것이었다. 늘 바쁜 재희가 그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재동을 태워 보낼 리는 없을 테니 다른 사람이 그걸 대신하리란 생각은 했지만 그게 바로 무진일 거라곤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세 사람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알 필요도 없겠지만 무진과 재희의 관계라면 보통 얼굴을 마주치기도 꺼려질 게 아닌가. 법적인 아버지와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사이좋게 아이를 돌보는 건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도 무진이 재희의 아파트 앞에서, 그것도 잠에서 덜 깬 얼굴을 하고 나와 있으니 아리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재희와 무진 두 사람이 나란히 한 아파트에서 현관문을 마주하고 사는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어린이집 선생이 자연스레 밀려드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무렵, 무진이 재동을 땅에 내려주곤 녀석의 손을 잡고 다가와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는 도저히 사람다운 얼굴을 하고 있질 않아서, 한사코 아이를 보여줄 수 없다는데도 수하로 보이는 사내-창수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며 위험한 냄새를 폴폴 풍기더니 이제는 인사까지 할 줄 아니 장족의 발전이다.

어린이집 선생은 팔이 불편해 보이는 무진을 대신해서 재동을 어린이집 차량에 탑승시켰다. 재동은 버스의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잠시 멈춰 서서 무진을 향해 작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댔다. 무진이 무심코 깁스한 손을 올리려다가 다시 반대편 손을 슬쩍 들어보이자 해쭉 웃으며 씩씩하게 차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이집 선생도 무진에게 다음에 뵙겠다는 인사를 하고는 버스에 올랐다.

재동은 창문 바로 옆 자리에 앉아서 예전의 언젠가 그랬듯 제 이마를 유리에 완전히 밀착시키고는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며 무진을 바라봤다. 그때는 몰랐다. 불과 석 달이 다 지나기도 전에 무진의 삶이 녀석에게 이다지도 엮이게 될 줄은. 무진의 시선과 재동이 시선이 얇은 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맞추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린이집 버스가 서서히 속력을 높이며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버린다.

무진은 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어린이집 버스가 달려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렇게 한가로운 풍경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으리라곤, 일생에 그런 날이 단 한번이라도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 꿈조차 꿔보지 않았던 삶이 현실이 되어 있다. 다소 불안정하고 위태롭더라도.

무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나와서 눈이 아릴 정도로 부셔야 할 시간인데 구름이 온통 해를 가리고 있다. 그림자조차도 불분명한 모습으로 바닥에 이지러졌다.

어쩐지 비가 올 것 같다.  

무진은 습관처럼 제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재희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모든 행동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1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현관문 앞에 서서 재희가 일러주고 간 비밀번호를 어색하게나마 하나, 하나 누르고, 잠금장치를 풀리자 손잡이를 비틀어 현관문을 열곤 안으로 들어간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대충 벗어놓고 거실 안으로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재희도, 재동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무진이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기껏해야 시시껄렁한 아침방송을 뒤적이는 것밖엔.

무진은 잠시 이마를 긁적이다가 재희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털썩 침대 위에 앉았다. 재동을 데려다주기 전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인 덕에 잠은 더 이상 올 것 같지가 않다. 슥 고개를 돌리며 할 만한 것을 찾던 무진은 또다시 제 이마를 긁적였다. 잠시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없는 방에서 주인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그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에 대해서 아주 잠시 고민했다는 거다. 실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닫혀 있던 옷장의 문을 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그냥 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잘 뒤져보면 거창하게 앨범까지는 없더라도 사진 한 두 장 쯤은 나올 테니, 재희가 고등학생일 적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거다. 그러면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나지 않는 기억 속 인물의 모습이 분명하게 형상화될 테니까 말이다. 무진은 머지않아 옷장 속 깊숙이에 들어 있는 종이상자 하나를 찾아냈다. 대략 가로, 세로가 30cm남짓 되는 상자를 보자마자 무진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진다.

상자를 꺼내 그 뚜껑을 열어보니 무진의 예상대로 크고 작은 앨범과 몇 가지 소지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들어 있다. 그 안에 통장이라든가 장신구 등 돈이 될 법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 재희 몰래 그의 물건을 뒤적이는 무진으로 하여금 마음의 무게를 크게 덜어주었다. 무진은 가장 먼저 보이는 앨범을 꺼내들었다. 앨범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는데 최소한 15년 이상은 되었을 거라 생각될 만큼 낡아 있었다.

“어디보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앨범을 넘기던 무진의 두 눈에 어린아이의 모습이 들어온다. 어려서부터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또렷한 얼굴 생김새가 딱 봐도 재희였다. 생일케이크로 보이는 커다란 케이크를 앞에 두고도, 동갑내기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볼에다가 뽀뽀를 하고 있어도, 손에 친척 어른들에게서 받았을 만 원짜리 지폐를 콱 쥐고도 아이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그래서 피식 하고 무진 본인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무진은 앨범을 좀 더 뒷장으로 넘겼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것 같은 재희의 사진을 필두로 눈에 익은 여자아이가 서서히 재희의 옆자리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때에는 재희보다도 몸집이 컸는지, 정혜임에 분명할 여자아이는 재희의 누나뻘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함께 사진을 찍는 횟수가 줄어들고, 정혜가 독차지 했던 재희의 옆자리는 시커먼 사내놈들이 대신 차지하기 시작했지만 어른의 모습이 엿보이기 시작했을 고등학생 시절까지도 정혜는 재희의 곁에 있었다.  재희의 말대로 격의 없이 지냈던 탓이리라.

천천히 사진 하나하나를 눈으로 훑어 내려다가보니 마치 재희의 성장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진의 시선은 이윽고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가서 찍은 것 같은 재희의 사진에 머물렀다. 다 똑같은 교복, 비슷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한 남학생들이 사진 속에 한 가득이었지만 그중에서 재희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부정할 생각도 못할 만큼 명백하게, 재희의 외모는 그때나 지금이나 좀 많이 눈에 띄니까 말이다. 순전히 여자들의 관점에서.

재희의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보자마자 무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남학생이 전부 그였다는 걸 말이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자세, 무언가를 물끄러미 보거나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 전부가 닮아 있다. 아니 판박이다. 이로써 아주 오래전부터 무진을 지켜봐왔다는 그의 말이 99% 진실 쪽으로 기울어졌다. 뭔가 인정해버리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무진은 보고 있던 앨범을 탁 닫고서 상자에 넣으려다가 아직 건드리지 않았던 상자 속의 작은 앨범을 마저 꺼냈다. 시기에 맞추어 말끔하게 사진들을 정리해 두었으면서도 구태여 작은 앨범 하나가 더 있으니 저절로 없던 호기심도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냥 한두 장 들춰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무진은 그 작은 앨범을 끝까지 다 넘겨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진에게조차 없는 무진의 사진이-정확하게는 무진과 정혜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작은 앨범 한 가득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정혜에게 받은 것일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정혜에게 무진과 찍은 사진을 굳이 달라고 할 때에는 그만한 명분이 필요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두 가지 방법이 훨씬 더 가능성 있어 보인다. 예를 들면, 정혜가 재희의 집에 놀러갔다가 그 앨범을 통째로 놓고 갔으나 재희가 끝내 찾지 못했다며 돌려주지 않았거나, 재희가 정혜의 집에 가서 슬쩍 그 사진들을 빼왔다거나. 어느 쪽이든 혀가 내둘러진다.

“……하여간. 스토커 새끼.”

무진은 핀잔을 하듯 중얼거리면서도 그 앨범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지 않고 잠자코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상자의 뚜껑을 닫아 그것을 원래의 자리로 고스란히 되돌려 놓았다. 방바닥에 앉아서 한참동안 앨범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몸이 괜히 쿡쿡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무진은 거실로 걸어 나오다가 거실의 창밖으로 빗줄기가 내리긋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잠시 내리고 그칠 비는 아니었다.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해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일기예보를 꼬박꼬박 챙겨보고서 아침마다 우산을 가져가라고 말해주는 친절한 부모를 기대할 수는 없었던지라 늘 비가 오면 당연한 듯 맞고 다녔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행여 자식이 비라도 맞을 새라 우산을 챙겨들고 교문 앞을 서성이던 학부모들의 사이로 혼자서 걸어 나왔었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거니와 운동화까지 흠뻑 젖은 채였다. 부러워했던 적은 없다. 그러나 혼자서 비를 맞는 건 분명, 서러운 일이었다. 소중한 누군가에게는 결코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무진은 점점 더 굵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우산을 챙겨 들고서 재동을 마중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곽지역에 위치한 흑룡회 소유의 창고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추모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5년 전, 무진이 소속된 조직인 ‘백도회’와의 마찰로 큰 부상을 당해 몸져누웠던 흑룡회의 보스가 반년을 넘게 고생하다가 끝내 사망한지 딱 4주기가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건이 조직 간의 폭력행사로 알려지는 걸 양쪽 조직 모두 원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사건이 상당부분 축소되어 개인 간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폭력으로 정리되었다. 그 일로 백도회에서는 행동대장급이었던 무진만이 폭행치사죄로 4년간의 수감생활을 했으나 흑룡회는 실로 많은 것을 잃었다. 우두머리를 잃고, 사업상의 주도권을 빼앗긴 조직은 가까스로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줄지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아침부터 피워놓은 향냄새가 진동을 했다. 죽은 보스의 영정을 앞에 서서 인사를 마치고 나온 사내들은 서너 명씩 모여서 담배를 피웠다.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분위기가 숙연해 그랬다기보다는 최근 자금난까지 겪고 있는 조직의 운영이 위태로워 서로 말을 아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흑룡회 조직원들이 한숨이 섞인 담배연기를 하늘로 피워 올리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사내들이 흑룡회의 창고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은. 그 수가 수십에 이른다. 그 손에 저마다 각목을 비껴들고 있는 것으로 보니 결코 죽은 흑룡회 보스의 추모식에 점잖게 참석하려는 게 아님에 분명하다. 이건 단지 흑룡회 조직원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리고 그들 모두가 마음 속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있을 때를 겨냥한 습격일 뿐이다.

“……씨발!”

담배를 피던 흑룡회 조직원 중 하나가 거칠게 담배꽁초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즈음해서 창고로 빠르게 달려 들어오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인지한 다른 조직원들도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면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공격에 대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사내들의 얼굴 하나하나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을 이끌고 나타난 이의 얼굴은 흑룡회에도 제법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 무리가 어느 조직 소속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리를 데리고 나타난 사내는 ‘백도회’의 행동대장급 사내다. 얼마 전, 출소를 한 무진을 흑룡회 조직원 중 몇몇이 제거하려 했다는 것을 빌미로 보복을 자행하려는 것일 거다. 선대 보스의 추모식이 거행되는 창고까지 친히 찾아와서.

아무리 조폭이라지만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다.

곧 상황은 얘길 전해 듣고 창고에서 달려 나온 흑룡회 조직원들과 행동대장급 사내를 필두로 들이닥친 백도회의 무리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서서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사내들은 적절한 때를 기다리듯 서로를 고요히 노려보기만 했다. 이따금씩 손에 든 연장이나 각목을 고쳐들기도 하면서.

선대 보스 사망 이후에 보스 자리는 공석으로 남겨뒀지만 차기보스로 거론되고 있는 사내 하나가 흑룡회 조직원들 사이를 가르며 가장 앞으로 나왔다. 그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한 회장의 처사에 대해서 크게 분노했는지 빠득빠득 하는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이마에는 굵은 핏대가 불끈 일어서 있다. 그는 제 재킷 안쪽에서 크기가 작지도, 크지도 않은 나이프를 꺼내어서 비껴들며, 제 곁에 서 있던 조직원들을 향해 지시하듯 소리쳤다.

“다 조져버려!”

사내의 지시에 흑룡회의 조직원들이 기합을 불어넣으며 백도회 조직원들 향해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두 진영의 사내들이 뒤엉키면서 여기저기서 둔탁한 마찰음이 울려 퍼지고 이따금씩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도 터졌다.

제게 달려드는 백도회 조직원들의 손목이나 발목, 목을 날렵하게 베어나가던 흑룡회 차기보스의 얼굴에 붉은 선혈이 확, 확 튀어 오른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싸움에선 이길 수 없다. 수적으로도 밀려서가 아니다. 설사 지금 당시에는 그들을 말끔하게 제거하더라도 한 회장은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또다시 지금처럼 조직원들을 보내올 것이다. 흑룡회가 깨끗이 사라지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싸움인 것이다. 지극히 소모적이기만 한.

조폭이 의리를 들먹이면서, 서로의 살을 깎아먹으려 패싸움을 벌이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근래에는 각 조직들이 서로 연합을 하면서 설사 같은 사업영역에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기준을 부여해 수익을 나누고, 특정 조직의 조직원 중 하나가 사법기관의 추격을 받을 때에는 서로 숨겨주기도 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 그래서 예전처럼 사법기관에서도 함부로 조폭조직을 검거하려 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한 회장은 자꾸만 상대조직을 제압하려 든다. 집어삼키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홀로 독식할 수 있도록.

그 지독한 욕심이 독이 될 것이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를 통째로 집어삼킬, 그런 독.

















무진은 일찌감치 아이들을 데리러 온 젊은 여자들 사이에 껴서 울타리 너머를 힐긋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재희의 집을 다 뒤져서 찾아낸 우산을 펼쳐 들고서다. 비가 내려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어린이집 앞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그룹을 이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개가 아이들의 이야기나 집안일, 혹은 어린이집 행사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외모가 낯설기도 하거니와 결코 호의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무진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물론 무진 본인은 그런 것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곧 어린이집 현관 쪽에서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서로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대화를 멈추고는 어린이집 현관 쪽을 힐긋거리며 쳐다본다. 안에서부터 문이 열리고 어린이집 선생님이 먼저 나와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부모들과 인사를 나눴다. 제 신발을 찾아서 신은 아이들도 하나, 둘 밖으로 나와 제 엄마를 찾아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무진은 걸음을 떼어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열려 있던 어린이집 현관문 안쪽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석재동. 집에 가자.”

무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어린이집 주변으로 퍼져나가자, 아이에게 우비를 씌우고 있던 학부모들이 일제히 무진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진은 그저 열려 있는 현관문 쪽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텅 비어 있던 현관문 밖으로 재동이 빠끔 고개를 내밀곤 밖을 쳐다본다. 제 이름이 들리긴 했는데 정말 제가 들은 대로 지금 집에 가자는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녀석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문가에 서서 밖을 내다봤다는 것이다.

우산을 들고 문 밖에 서 있는 무진을 보곤 재동의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녀석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서 제 가방과 곰 인형을 양 손에 잡아 질질 끌곤 다시 밖으로 나왔다. 신발마저 대충 구겨 신고 나오려던 것을 어린이집 선생이 발뒤축까지 꼭 맞게 신겨주었다. 재동은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무진에게로 뛰어왔다. 무진이 팔에 깁스 한 것을 보곤 어린이집 선생이 다가와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에 재동에게 우비를 입혀주고, 녀석이 질질 끌고 있는 가방도 어깨에 제대로 매주었다. 무진은 고맙다는 뜻으로 꾸벅 하고 고개를 한 번 숙여보였다. 그런 식으로라도 고마움을 표현하는 게 영 어색하긴 했지만.

“비 안 맞게 꼭 붙어. 알았어?”

무진이 제 곁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재동에게 말했다. 그러자 재동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무진의 곁에 딱 붙어선 그의 바지를 제 작은 손안에 꽉 말아 쥔다. 반대편 팔에는 그 언젠가 무진이 사준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서다. 제법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동안. 이른 시간에 데리러 온 부모님의 손을 잡곤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말이다. 재동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던 제 친구들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서 인사를 하고는 무진을 바라보며 해쭉 웃었다.

무진은 재동의 걸음에 맞추어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무진의 평소 걸음대로 걷자면 재동의 짧은 두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비 때문에 발에 물이 채여 걷는 것조차 버거운 녀석에게 종종걸음으로 걷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생각보다 어렵다. 어린아이의 보폭에 맞추어 걷는다는 것은. 그저 멈추어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아니고, 아이의 걸음을 지켜보면서 비슷하게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빨리 걷는 것보다 누군가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걷는 게 더 힘들다는 걸, 무진은 재동과 나란히 걷는 내내 깨달았다.

“왜?”

한참 빗물을 걷어차며 열심히 걷던 재동이 우뚝 멈추어서는 바람에 자동으로 걸음을 멈춘 무진이 재동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재동의 시선이 물끄러미 무진을 향해 올라왔다가 다시 어딘가로 홱 돌아간다. 녀석의 시선을 쫓아가보니 맛있는 냄새를 풍겨내는 분식집이 하나 보인다. 비가 와서인지 어묵국물의 냄새라든가, 새빨갛게 끓고 있는 떡볶이, 하얀 김을 피워내는 순대와 만두가 그렇게 먹음직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재동은 어느새 입을 헤 벌리고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내버려두면 기어코 침이라도 뚝, 뚝 흘릴 기세다. 그렇다고 점심을 먹지 않은 것도 아니겠지만, 그렇게까지 먹고 싶어 하는데 모르는 척 할 수도 없다. 마침 무진 자신도 아직 점심식사 전이고 말이다. 무진은 재동을 데리고 분식점으로 들어갔다. 평일의 늦은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내부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무진은 적당히 자리를 잡아서 재동을 먼저 의자에 앉혀주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뭐 먹을…….”

무엇을 먹을 거냐고 재동에게 물으려던 무진은 자신을 빤히 보기만 하는 재동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녀석에게 묻는다고 대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벌써 한글을 깨쳤을 리도 없으니 손가락으로 메뉴를 가리키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진은 떡볶이, 순대, 김밥, 만두, 어묵 달랑 5가지만 적혀 있는 메뉴판을 뚫어져라 보다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오는 주인 여자에게 말했다.

“저거 다 1인분씩 줘요.”

주인 여자는 무진과 재동을 번갈아보며 그걸 두 사람이 다 먹겠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제재는 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많이 팔아주겠다는데 싫다는 장사치가 어디 있겠는가. 주문한 것들은 바로바로 테이블 위에 놓아졌다. 재동은 가장 먼저 꼬치어묵으로 제 손을 쭉 뻗었다. 무진은 녀석의 손이 닿을락 말락 하는 꼬치어묵을 하나 집어서 녀석에게 건넸다. 냉큼 꼬치어묵을 한 입 베어 문 재동은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씹기도 전에 도로 뱉어버렸다. 혀까지 베 내미는 걸 보니 너무 뜨거웠던 모양이다. 무진은 별 수 없이 다시 녀석에게서 꼬치어묵을 받아들어 제 입김으로 후후 불어서 한 김 식힌 다음 다시 녀석에게 건넸다. 재동은 적당히 먹기 좋게 식은 어묵을 두 입 정도 물어서 입속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간 딱딱한 꼬치가 드러나 먹을 수 없게 되자 다시 그것을 무진에게 내밀었다.

결국 무진은 거의 먹지도 못했다. 녀석이 꼬치어묵에 질릴 때까지 그것을 식혀주고, 꼬치가 나올 즈음이면 다시 어묵만 위쪽으로 밀어 올려서 건네주고, 떡볶이의 매운 양념은 어묵 국물에 살짝만 씻어서 입속에 넣어주고, 순대의 질긴 창자부분을 떼어 속의 당면만 소금을 찍어서 녀석의 숟가락 위에 올려주느라 정작 제 입속으로 뭔가를 넣을 여지가 없었다는 거다. 무진은 거의 다 식고 불어버린 것들을 대충 입속에 밀어 넣곤 분식집을 나왔다. 남은 음식을 싹싹 긁어먹는 취미도 없었거니와 그저 재동이 먹는 것만 봤을 뿐인데 허기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가 불러서인지 재동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빗물을 참방거리며 걷어차는 두 다리에도 더 힘이 들어갔다. 그 탓에 무진의 바지는 여지없이 젖어버리고 있었지만. 마음만 같아선 길 위의 모든 것에 시선을 주며 느린 걸음을 걷는 재동을 품에 안거나 업어서 후다닥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한쪽 팔엔 깁스를 하고 또 한 팔엔 우산을 들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다. 결국 무진은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1시간을 훌쩍 넘겨서 도착했다. 그럼에도 재동은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재동의 비에 젖은 옷을 벗기곤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세수를 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을 옆구리에 끼고 머리도 박박 감겨주고, 목욕까지 말끔하게 싹 시켜주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만큼 훨훨 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몸이. 물론 몸이 성하다고 한데도 어린아이를 목욕시켜본 적이 없어서 녀석을 씻길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나중에 한 번, 재희가 녀석을 씻기는 걸 지켜보며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럼없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다음을 기약했다는 거다.

재동이 제 짧은 팔로는 제대로 닦아내지 못한 비누거품을 대신 씻어내 주고 수건으로 녀석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감싸듯 해서 물기도 닦아내줬다. 금세 보송보송해진 재동은 기분이 좋은 듯이 방긋 웃었다.

무진은 냉장고를 열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재동이 좋아라하는 초코우유를 향해 손을 뻗던 무진은 그러나 결국 흰 우유를 꺼내 재동에게 건넸다. 재동은 무진이 밍밍하기만 한 흰 우유를 손에 쥐어주자 잔뜩 실망한 눈초리를 했다. 무진이 다시 흰 우유를 가져가 입구까지 뜯어서 내밀었을 때에는 별 수 없이 흰 우유를 쪽쪽 들이켰지만 말이다. 무진은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하듯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으로 솔솔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배도 부르고, 씻기까지 한 탓인지 재동의 두 눈에 금세 잠기운이 몰려든다. 무진은 재동의 등을 가볍게 밀며 녀석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침대에 녀석을 눕혔다. 그리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는 재동에 동그란 배에 손을 얹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것처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재동이 두 눈을 스르륵 감더니 잠에 빠져든다. 고롱고롱 숨을 내쉬며 잠든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대적 평화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Second Daddy _ 18







저녁에는 창수가 찾아왔다. 양손에는 치킨 두 마리를 사들고서다. 오늘도 여지없이 자신을 재동의 ‘삼촌’이라 지칭하는 것을 잊지 않으며, 창수는 재동을 목마 태워 가지곤 휘휘 돌면서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던 무진에게 말했다.

“형님, 모르고 계시죠?”
“뜬금없이, 뭘?”
“오늘 덕수 형님께서 애들 한가득 데리고 흑룡회 놈들을 손보러 가셨다는 거요.”

조덕수. 5년 전까지만 해도 무진은 그처럼 행동대장으로 지내면서 조직의 이익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었다. 물론 원해서 한 일은 아니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이의를 제기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개처럼 달려가는 것뿐.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하자마자 한 회장을 만나러 갔을 때, 무진을 맞이하며 깍듯이 예의를 차려 인사했던 그 사내가 바로 덕수였다. 그가 흑룡회 조직원들을 처리하러 간 것은 무진을 대신해서리라. 한 회장이 상황이 여의치 않자 무진에게 시키려던 것을 그에게 떠넘긴 것임에 분명했다.

“오늘 놈들이 선대보스 추모식인가 뭔가 한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장소까지 어떻게 알아내셨는지는 모르겠는데 회장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모양이에요. 이번 일 처리만 잘 되면 그 대가는 기대해도 좋다는 말을 하셨다는 얘기도 있고. 허를 찌르고 들어간 덕택에 완전히 깨부숴놓고 온 모양이던데요.”

창수가 자신은 그 일에 크게 관여되어 있지 않은 모양인지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단순히 전달하듯이 이야기했다. 그리곤 제 다리 위에 앉아 있는 재동의 입속에 살코기를 떼어 넣어주고는 녀석이 오물오물 씹는 걸 지켜보다가 다리를 위, 아래로 덜덜 떨어 장난을 쳐댄다.

재동은 소리 없이 해쭉 웃다가도 창수가 다시 고기를 떼어주면 잠자코 그것을 덥석 받아먹었다. 무진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는지 창수에게 물었다.

“정한이 놈은?”
“예?”
“그 놈도 거기 같이 갔어?”
“아뇨. 안 그랬던 것 같은데요. 순전히 덕수 형님이 데리고 있는 애들만 갔다나 봐요.”
“그 새끼, 찾아와.”
“누구요? 정한 형님이요?”
“그래. 지금 당장.”
“지금 당장이요? 아, 형님 정말 너무하세요. 저 아직 치킨 한 입도 못 먹었는데. 재동이랑도 더 놀아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닥치고 엉덩이 빨리 안 떼?”

무진이 창수의 등을 제 발로 꾹꾹 차듯이 떠밀며 말했다. 창수는 싫은 표정으로 엉덩이를 뭉개고 앉아 있다가 들고 있던 치킨을 입속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고는 별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진도 조폭인지라 수틀리면 여지없이 주먹을 날려 오는데 버티고 있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창수는 휘적휘적 현관으로 걸어가 구두를 신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 소처럼 느릿느릿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전에 무진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재동에게 손을 슬슬 흔들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창수에 의해 열렸던 현관문이 다시 닫히고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돌아가 잠긴다.

무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요 며칠 이상할 정도로 정한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니 그는 스스로 무진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리라. 정확히 한 회장이 무진을 폭행한 뒤 그를 데리러 들어온 정한만을 따로 남긴 이후부터다.

그때 무슨 이야기가 오갔든지 그것은 분명히 서로의 안부 따위나 묻는 시시껄렁한 대화는 아니었을 거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한 회장은.

무진이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옷깃이 빳빳하게 잡아당겨졌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무진은 옷이 잡아당겨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금세 그의 시야에 재동이 들어찬다. 입을 동그랗고 크게 벌린 상태로 무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재동이 말이다.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는 치킨을, 창수가 했듯이 손수 찢어 제 입에 넣어달라는 것처럼. 정말 아기 새다. 사랑스러운 아기 새.

한 회장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재동에게마저 그 손을 뻗치려한다면 그땐 무진 본인도 두 손에 다시금 피를 묻히게 될지언정 결코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우당탕탕탕.

재희는 갑작스런 소란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지난밤에도 무진과 재동이 잠든 이후에야 돌아왔다. 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잠든 무진과 재동을 조금 지켜본다는 게 중간에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동이 터올 즈음까지는 깨어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어느새 날은 밝아서 햇빛이 침실 창으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재희는 가장 먼저 침대 위를 살폈다. 무진은 간 데 없고 재동만이 고릉고릉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다. 얼마나 머리를 굴리면서 잤는지 녀석의 머리카락은 까치집이나 다름없고 옷도 동그란 배를 완연히 내밀고선 돌돌 말려 올라가 있다. 재희는 재동의 옷을 잡아서 내려주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후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의 잠을 깨운 소란스러움의 원인을 찾아서다.

침실을 나서자마자 재희는 그 소란스러움의 원인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부엌에서 어슬렁거리던 무진이 무언가 잘 안 풀린다는 것처럼 제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의 주변은 엎어진 도마라든가, 썰리다 만 채소들, 깨져서 나뒹구는 계란과 접시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뭐하는 겁니까?”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반갑지 않은 음성-재희의 음성에 무진이 힐긋 뒤를 돌아본다. 이내 홱 고개를 다시 돌려버리는 모습이 뭔가 창피한 장면을 들켜버리기라도 한 것 같다.

재희는 소리 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부엌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아마도 조금 전 소란은 도마가 뒤집어지면서 난 소리일 것이다.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각종 음식재료들과 토스터기에서 풍겨나는 빵 타는 냄새로 짐작건대 무진은 아마도 아침식사 준비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고맙다는 말은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성격이니 행동으로 보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재희는 묵묵히 허리를 숙여 무진의 발 근처에 떨어져 있던 도마와 썰다 만 당근 등을 집어서 식탁 위로 올려두었다. 썰어놓은 당근의 크기가 성인의 엄지 두 마디 정도는 될 것처럼 크고 투박하다.

계란을 깨는 것도 녹록치 않았는지 작은 볼에는 깨진 계란이 자잘한 껍질들과 함께 뒤섞여 있다. 곧 토스터기에서 새카맣게 탄 빵 두 장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냉장고는 열어보지 않아도 잔뜩 헤집어져 있을 것이다.

“쉽지가 않네. 되게 간단해보였는데.”
“아침식사를 준비하려던 겁니까?”
“조건 없이 뭘 받아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안 내켜서 그런 것뿐이야, 공짜로 밥 얻어먹는 거.”

무진이 슬쩍 제 귓등을 긁으며 말했다. 평소보다 한참은 더 작아진 목소리다. 귓가도 살짝 달아올라 있는 것이 그런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영 어색하고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의 작은 습관, 표정, 눈빛, 미동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정혜가 늘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를 해주었고, 재희 역시도 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귀담아 들었으니 말이다. 줄곧 그를 관찰하듯 지켜봐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너, 안 늦었냐?”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재희에게 무진이 슬쩍 시선을 벽시계로 던지며 물었다. 재희도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무진의 우려대로 이제 슬슬 나갈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아무래도 무진이 서툰 솜씨로나마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했던 것은 공짜 밥을 얻어먹기가 껄끄러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이건 순전히 재희가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진의 곁을 지키면서 거의 밤을 꼴딱 지새우느라 그만 늦잠을 자버린 거다.

“깨우지 그랬습니까?”
“됐어.”
“네?”
“재동인 내가 시간에 맞춰서 보낼 거니까, 넌 빨리 준비나 해.”

무진은 재동을 깨우려는지 침실로 향하던 재희를 향해 말했다. 재희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다가 무진을 빤히 바라봤다. 이건 무진, 그 나름대로의 배려다. 늘 잠이 부족할 재동은 좀 더 잘 수 있게 해주고, 아침식사 준비하랴 재동을 준비시키랴 아침마다 전쟁을 치루는 것이나 다름없을 재희에게도 약간의 여유를 주려는 그런 배려 말이다.

“그럼 그것들이라도 썰어드리죠. 또 손을 다칠지도 모르니까.”

재희가 무진이 엉성하게 잡고 있던 부엌칼을 대신 잡아들며 말했다. 그리곤 무진이 한 시간여 동안 엉망으로 썰어놓은 채소들을 빠르고 정갈하게 썰어나간다. 무진은 그만 제 입이 헤벌어지는 것도 모르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웬만한 베테랑 주부도 울고 갈 만큼 매끄러운 칼솜씨가 아닌가.

재희는 무진이 계란 속에 빠뜨려 놓은 계란의 껍데기도 모두 걸러내고 토스터기의 탄 빵 대신 새로운 빵을 넣어 타이머까지 작동시킨 후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까지 해주었으니 오늘의 아침 준비도 재희 본인이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무진은 일정하게 썰린 채소들을 계란에 넣어 한데 뒤섞었다. 그 손길마저도 얼마나 거칠기 짝이 없는지 계란물이 이곳저곳으로 튀어버린다.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 프라이팬에 계란물을 쏟아 넣었을 때에는 기름을 채 두르지 않은 상태라 계란이 쩍쩍 프라이팬에 들러붙어버렸다. 처참하게 찢겨 오믈렛이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스크램블 에그라고 하기도 뭣한 상태가 된 계란요리를 바라보며 무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계란요리를 그릇에 쏟아 담고, 적당히 잘 구워진 빵들도 한쪽에 정리해서 올렸다. 냉장고 문을 열어 주스와 우유도 꺼내 언젠가 재희가 차려냈던 아침의 식탁과 비슷하게 차려본다. 최대한 기억을 살려서 배치해 놓았는데 어딘가 영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도통 어쩔 수가 없다.
  
오늘 아침, 무진이 눈을 떴을 때 재희는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팔에 턱을 괸 채로 풋잠에 빠져 있었다. 계속 그렇게 불편하게 앉아서 무진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매사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동할 것 같은 그가 평소라면 일어나서 준비마저 마쳤을 시간까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다. 이제껏 누군가를 위해서 아침을 준비해본 적이 없긴 하지만.

“모양도 좀 구리고 맛도 장담할 수 없지만 군소리 말고 처먹어.”

무진은 어느새 준비를 마치고 다시 식탁 쪽으로 다가오는 재희에게 미리 경고하듯 말했다. 그리곤 싱크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묵묵히 의자에 앉아 포크를 집어 드는 재희를 바라봤다.

재희는 언제나처럼 주름 하나 없이 잘 다려진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단추도 조금의 미어짐 없이 제자리를 온전히 지키고 있고,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비뚤어지는 법 없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만져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면도도 깔끔하게 해서 턱 주변이 반질반질할 게 분명하다.

재희는 무진이 만들어낸-엉성하기 짝이 없는 계란 요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도 빤히 쳐다보자 무진이 민망해하는 기색을 보인다. 괜히 이마를 긁적였다가 쓸데없는 곳을 바라보기도 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게 보였다는 거다.

곧 재희는 계란요리를 포크로 가득 집어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간은 하나도 되질 않았고 여전히 계란 껍데기가 약간씩 씹힌다. 부드러워야 할 계란은 퍽퍽하기 이를 데가 없고 약간의 탄내도 난다. 너무 익혀서 아삭아삭하게 씹혀야 할 채소들은 흐물흐물해져 계란을 씹을 때의 느낌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재희는 미간에 주름 하나 잡지 않고 묵묵히 무진이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계란요리를 해치웠다. 그것도 억지로 먹는다기보다 오히려 보는 사람도 ‘그렇게 맛있나?’하는 생각이 들도록 먹음직스럽게.

그것이, 자신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 결코 맛있을 리 없다는 확신을 하는 무진으로서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혀를 가진 게 아니고서야 그런 게 맛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재희는 묵묵히 식사를 마친 후 포크를 얌전히 내려놓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무진에게 잘 먹었다며 인사까지 했다.

무진은 양치를 하기 위해 다시 욕실로 들어가는 재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재희의 그릇에 남은 계란 한 점을 집어 제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넣고서 몇 번을 씹다가 씹을수록 고소하기는커녕 비릿한 냄새까지 올라오는 그것을 도로 뱉어버리고 말았지만.

“웩.”

무진은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으며 물소리가 나는 욕실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독하다. 독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이런 걸 그렇게 맛있다는 듯이 먹어치우다니 말이다. 재희가 깨끗이 비워낸 빈 그릇들을 싱크대로 가져가는 동안에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를테면 무진 본인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리 쪽으론 영 소질이 없던 정혜가 무진의 생일이랍시고 끓여준 밍밍한 미역국을 작은 냄비 하나 가득 맛있어 죽겠다는 듯이 먹어치웠던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혀에서 느끼는 맛은 결코 훌륭하다 할 수 없었지만 그때 먹은 그 미역국은 무진이 살면서 맛본 최고의 요리였다.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재희의 감정에 공감을 느껴서는. 무진이야 그 마음에 대한 보답을 받았으니 짝사랑의 처절함까지는 공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재희의 마음씀씀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 것만 같다.

이런 식의 공감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재희에 대한 무진의 경계심을 약하게 만들 뿐이다. 굳건히 세워진 벽을 격한 파도처럼 밀어붙여 산산이 부수는 게 아니라 잔잔한 물결처럼 몇 번이고 부딪쳐서 서서히 금이 가게 만들고 이내는 허물어뜨릴 것 같아 두렵다. 신경 쓰이는 존재가 하나 더 늘어난다는 것, 그 일이 벌어지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재희는 출근을 하자마자 이제껏 수사한 내용들을 쭉 펼쳐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한 회장의 여죄에 대해서는 구속 후에 묻더라도 당장 그를 구속하려면, 유 검사가 배당받은 살인사건을 그가 교사했다는 직접적 증거를 포착해야 한다.

그가 분명히 살인교사를 했다면 최소한 박응식과는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어쩌면 한번쯤은 직접 살인을 한 피의자A, B와도 접촉을 했을 수 있다. 중간에 누군가가 개입하면 전하려는 뜻이 왜곡되는 경우가 생긴다. 오히려 이러한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 외엔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한 회장이라면 피의자A, B에게 직접적인 연락을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그들의 연락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무엇인가? 피의자들의 통화기록은 이미 조회를 했었다. 달리 특이점은 없었다. 물론 그런 곳에서부터 덜미를 잡힐 한 회장은 아니니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렇지만 혹시 모른다. 재희는 책상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수사기록을 정리하고 있던 김 계장을 불렀다.

“계장님!”
“예, 검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피의자들 휴대폰 통화기록 조회했을 때 박응식하고 통화한 내역은 포착이 됐었던가요?”

재희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할 새도 없이 김 계장은 말없이 제 기억을 되짚었다. 박응식이 살인을 교사했다는 건 피의자는 물론 박응식 본인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러니 직접적으로 살인에 가담한 피의자 A, B와 박응식 간에는 반드시 정보전달이나 진행상황을 전달키 위한 연락이 오고 갔을 것이고, 만약 그 연락수단으로 자신들 명의의 휴대전화를 사용했다면 그들의 통화내역이 분명히 남아 있어야 한다.

“아니요. 두 사람 모두 박응식과의 통화내역은 없는데요.”
“그럼 그들 사이에 또 다른 연락수단이 있었다는 거군요. 예를 들면 자신명의가 아닌 휴대폰이라던가.”

반드시 연락은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휴대폰 통화기록 조회 결과 서로간의 연락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다시 말해, 제 2의 연락수단이 있었을 거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포폰이라든가.

이런 사건에서는 오히려 박응식과 피의자 A, B 세 사람 모두 대포폰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을 확률이 더 크다.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재희의 한 마디 만으로도 그의 의중을 알아챈 김 계장이 서둘러 검사실을 나서며 말했다.

“지금 당장 유 검사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피의자들에게 대포폰을 만든 사실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계장이 검사실을 빠져나간 뒤에도 재희는 다시 책상 의자에 앉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흥분이 돼서다. 그들이 대포차를 빌려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그들의 연락책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다. 수많은 범행에 대포폰이 기본공식인 것처럼 사용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도 당연해서 오히려 의심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는 거다.

만약 재희의 짐작대로 세 사람이 정말로 대포폰을 통해 연락을 했다면, 그리고 이미 그 대포폰을 처리했다고 한다면 경찰력을 총동원해서라도 버려진 대포폰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피의자 A, B가 피해자를 살해 및 유기한 장소까지 통하는 모든 길을 다 뒤져서라도.

전문 청부업자가 아니니 그들은 범죄에 사용된 모든 도구들을 되도록 자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설사 그 도구가 발견되더라도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러나 오히려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되는 범죄도구들은 범죄의 단적인 증거들이 되곤 한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강하게, 그러리라 믿는다.
















“왜?”

무진이 재동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열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재동이 난데없이 무진의 손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재동은 무언가 빠뜨린 것이라도 있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무진을 빤히 바라봤다.

재희를 먼저 보내놓고 8시 즈음 재동을 깨워 준비를 시킨 뒤 지금 막 어린이집 차량이 올 것을 대비해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재동이 한사코 걸음을 멈추며 무진의 손을 연방 잡아끌었던 것이다. 녀석은 곧 제 손을 쭉 뻗어서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녀석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따라 옮겨지던 무진의 시선이 정혜의 사진이 담겨 있는 액자에 닿는다.

그제야 무진은 알았다는 듯이 액자를 집어 재동에게 건넸다. 재동은 두 손으로 액자를 붙들어 잡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제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을 쭉 내밀어 액자에 뽀뽀를 했다. 무진은 재동이 다시 건네는 액자를 받아 들어선 사진 속 정혜를 들여다보며 제 손가락으로 정혜의 얼굴을 한 차례 쓰다듬은 후 액자를 제자리에 올려두었다. 시계를 보니 금방이라도 어린이집 차량이 들이닥칠 것 같다. 무진은 재동을 옆구리에 끼듯이 들어서 안고는 당장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서둘러 밖으로 나가니 어린이집 차량이 코너를 돌아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진은 재동과 함께 층계를 내려와 어린이집 차량이 늘 정차하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형님.”

중간에 무진을 기다리고 있었음에 분명한 창수와 정한이 덜컥 무진을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지난 며칠간 그랬듯이 재동을 기분 좋게 어린이집 차량에 태워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이집 차량이 서서히 멈춰서는 것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무진이 난데없이 나타난 정한과 창수에게 일종의 인사말을 던졌다.

“왔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무언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창수는 손을 뻗어 이젠 자신을 반가워하는 기색까지 내보이는 재동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해쭉 웃는 재동에게 환한 미소로 답해주지 못하고 그저 쓰게 웃는 창수의 태도가 어쩐지 영 거슬린다.

무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빤히 보고 선 정한을 응시했다. 여러 가지 의문이 담긴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이제껏 왜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간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에 대해서. 정한에게 직접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회장님께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참만에야 정한에게서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갑자기 무진이 정한의 멱살을 확 낚아챘다. 재동이 곁에서 보고 있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은 결코 듣고 싶지 않은 상대방이 거론됐기 때문이다. 한 회장. 그가 무진을 통하지 않고 그의 직속 수하인 정한에게 따로 시킬 일이 뭐가 있겠는가? 정한과 창수가 좋지 않은 표정을 지을 만한 지시란 게 대체 무엇이겠느냔 말이다.

정한이 보이지 않는 요 며칠 그의 행적에 대해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는 순간에는 역시 침착할 수가 없다. 무진은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이를 악물고 다시 명령하듯 말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어떤 지시를 받았고 그 지시를 받고 뭘 하고 다녔는지.”
“형님께서 요즘 달리 신경 쓰는 일이 있는 것 같다면서 제게 그게 뭔지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회장님의 지시도 지시였지만, 석재희씨는 형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반면에 우리 쪽에선 석재희씨에 관해 일절 아는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라 좀 알아보고 다녔습니다. 말씀드리지 않고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형님.”

정한이 무진에게 미안해할 것까진 없다. 그도 조폭인 이상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측근인 무진의 지시든, 혹은 한 회장의 지시든.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조폭은 조직에 필요가 없고, 필요가 없으면 제거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무진은 여전히 정한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한 회장한테 벌써 보고한 거냐?”
“아직 찾아뵙지 않았습니다.”
“한 회장에게 가지 않고 나한테 먼저 왔다고?”
“네.”
“네놈,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압니다.”

한 회장이 지시엔 묵언으로나마 ‘무진이 모르게’라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상황판단능력이 좋고, 조폭임에도 제법 셈이 빠른 정한이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러니 그가 한 회장의 지시를 무시하고 무진에게 먼저 달려온 것은 한 회장의 지시를 어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한순간의 결단으로 하루아침에 조직의 제거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정한이 이렇게 다급히 무진을 찾아온 것은 무진의 처지가 위험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혹은 한 회장의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진에게 급히 알려야 할 것이 생겼다거나. 어느 쪽이든 결코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형님, 알고 계셨습니까?”
“뭘?”

정한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무진이 좀 더 미간을 찌푸리며 곧바로 되물었다. 정한은 무진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잠시 창수와 묘한 시선을 주거니 받거니 하기도 하다가 한참만에야 어렵게 입을 떼서 말했다.

“그 사람, 형사부 검사랍니다.”








Second Daddy _ 19







무진은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주변은 온통 어두컴컴해졌으나 집 안 어디에도 불을 켜지 않은 채다. 배고픔도 잊어 점심식사도, 저녁식사도 챙겨먹지 않았다.

그가 잔뜩 헤집어 놓은 재희의 침실과 서재에는 서랍 깊숙이에 들어있던 졸업앨범과 졸업장, 각종 법 관련 서적들이 엉망으로 잡혀 나와 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 그 정도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지 불을 켜고 본다면 그 어지럽혀진 정도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벽시계의 시침만이 야속할 정도로 찰칵거리며 적막감을 일그러뜨리고 있을 뿐이다.  

검사였다니.

상상도 못했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알아봤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얼마나 얼이 빠져 있었으면 그런 것조차 의심하지 못했던가. 아침 일찍 출근을 하고, 퇴근 시간도 불규칙해 어쩔 때는 새벽에야 조용히 들어와 소파에서 불편한 잠을 자는 걸 알면서도 왜 그의 직업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었던가.

대답이야 이미 알고 있다.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의심해 볼 겨를도 없을 정도로, 제 속이 시끄러워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만으로도, 재희의 감정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그를 막연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갈 곳 없던 무진에게 잠시라도 편히 쉴 곳을 마련해준 그를, 자신의 자리를 무진에게 조금 양보함으로써 무진으로 하여금 재동의 아빠로 살 수 있게 해준 그를, 한 회장에 대한 두려움과 지긋지긋한 과거의 악몽에 떨던 무진을 아플 정도로 힘껏 끌어안아주던 그를, 정혜만큼 혹은 그녀보다 더 오래, 더 깊은 감정으로 무진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그를 어느새 믿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슴속이 싸하게 아프다. 바글바글 끓는 뜨거운 물을 가슴에 확 끼얹어버린 것 같은 묵직한 통증에 숨을 쉬어도 갑갑하기만 할 뿐이다. 야구를 그만 둔 이후,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던 그때부터 누군가를 믿고 의지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웬만한 상처에는 무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무진일지라도 지금과 같은 가슴 서늘한 배신감은 익숙하지가 않다.

재희가 먼저 말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진이 궁금해 하기 이전에, 먼저 알아보려 하기 이전에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미리 말해줄 수 있었을 거다. 굳이 지금 재희의 직업이 무엇이고, 무진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서로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한쪽이 조폭이고, 나머지 한쪽이 검사라면.   

위잉.
찰칵.

무진이 홀로 우두커니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 잠겨 있던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밖에서부터 풀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현관문이 벌컥 열어젖혀지는 소리도. 현관 밖의 불빛이 스며들어왔고,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무진은 현관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무진의 예상대로 재희였다. 제법 늦은 시간인지라 집 안이 온통 컴컴한 것은 무진과 재동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재희는 발걸음소리를 한껏 눌러 죽인 채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곤 익숙한 손길로 거실 벽을 더듬어 거실 등의 스위치를 찾는다. 지극한 고요함 속에 재희의 손에 의해 스위치가 눌려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거실에 훤히 불이 들어오면서 재희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소파에 앉아 있는 무진을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불은 다 꺼두고…….”

그러나 말을 다 끝맺지 못했던 것은 심상치 않게 흐트러져 있는 집 안 때문이었다. 서랍이며 장식장 안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던 물건들이 모조리 들쑤셔져 바닥 여기저기로 굴러다닌다.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물건 중에는 재희의 학위증을 비롯하여 그가 법조계 사람임을 증명할 만한 것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무진이 알게 된 것이리라. 재희는 슬쩍 어두컴컴한 재동의 방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여전히도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재동인 자는 겁니까?”
“보냈어.”
“보내다니, 어디로 말입니까?”
“그런 건 알 거 없잖아, 내 아들인데.”

시비조로 말하는 무진의 음성에 재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무진을 돌아봤다. 무진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재희를 노려봤다. 처음 그를 봤을 때처럼, 그의 두 눈동자 가득 경계심이 서려 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버린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진다. 무진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재희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확신을 구하듯 비릿한 음성으로 재희에게 물었다.

“너, 검사냐?”
“네.”

이미 무진이 알고 있는데, 알아버렸는데 구태여 아니라고 할 이유는 없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재희의 대답에 무진에게선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웃음이 터졌다. 잠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려는 듯 허공을 노려봤다가 다시 재희를 빤히 보는 그의 두 눈이 한없이 날카롭다. 무진은 금방이라도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 듯이 위태로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하나만 더 묻자. 니 새끼가 검사랍시고 하는 짓거리에 우리 조직을 들쑤시는 것도 포함돼 있냐?”

날카롭게 파고드는 무진의 질문에 재희는 오히려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대답을 한다면 오히려 오해가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을 말하는 건 무진을 기만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입을 꾹 다물고서 침묵을 지킬 수도 없다. 무진은 눈에 보일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꽉 다물린 입에서는 이빨이 뿌드득 갈리는 소리가 날 정도다. 무진은 재희의 멱살을 한 손으로 콱 움켜잡으며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
“아니라고 지껄여 보라고, 한 번!”

퍽.

악에 받친 무진의 목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의 주먹이 날아들어 재희의 왼쪽 볼을 후려쳤다. 그 충격으로 재희의 몸이 오른쪽으로 확 기울자 다시 그의 멱살을 끌어당겨 이번엔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깊숙이, 그리고 날렵하고 파고들어오는 무진의 주먹에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쓰러진 재희에게선 연거푸 마른기침이 터졌다.

무진은 그 큰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토해내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재희를 발로 떠밀 듯 걷어차 바닥에 완전히 눕히곤 그의 목을 제 발로 콱 짓밟았다.

“……윽.”

재희는 고통스레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무진의 발을 떨쳐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대항할 의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그는 애초에 주먹조차 쥐고 있질 않다. 지금 당장 무진이 그를 때려죽인다고 하더라도 그는 끝내 주먹을 쥐고 달려들지 않을 거다. 막연히 그런 확신이 들었던 것은 무진을 가까스로 올려다보는 재희의 두 눈이 여전히 차분했기 때문이다. 재희는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힘주어 자신의 목을 짓밟고 있는 무진을 고요히 응시하며 다소 힘겹게 물었다.

“왜…… 화를 내는 겁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네놈이 날 엿 먹였잖아!”
“내가 뭘 어쨌는데요?”
“이용하려고 했잖아. 니 새끼가 날 오랫동안 지켜봐왔네, 나 때문에 내 애새끼의 아버지가 되고 싶었네,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여서 사람을 풀어지게 해 놓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겁니까?”
“뭐야?”
“내가 한무진씨를 쭉 지켜봐왔다고. 몰랐겠지만, 기분 나쁠 지도 모르겠지만 쭉 혼자 사랑했었다고 말했던 게 단지 당신을 꼬드겨 조직의 기밀을 빼내려고 했던 거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나빴습니까? 어째서죠? 한무진씨는 내가 그쪽을 ‘그런 눈’으로 보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뭐…….”

재희가 하는 말이 워낙 고약하게 들려서 뭐라도 대꾸를 하고 싶었음에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인정하는 꼴이 되리란 걸 알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진이 재희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가 그것 말고는 딱히 없기 때문에.

재희가 검사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무진의 조직에 대한 수사를 하고 있다는 말도 없이 멋대로 들이밀 듯 다가와서는 무진의 편인 것처럼 편하게 대해주고 의지하게 만들더니 그것 모두가 무진을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던 거다. 무진 본인을 낚기 위해 재동을 미끼로 삼은 것까지 포함해서.

아니, 하지만 재희가 무진 본인을 ‘그런 눈’으로 보았던 것이 거짓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홀가분해야 하는 게 아닌가? 당황스러워서 도통 받아들이기 힘들던 그 감정이 거짓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실망스러움에 기분이 더럽고 배신감이 치미는지 모르겠다. 남자 따위가 품었던 감정이 거짓이었다고 해서 그게 뭐 어떻다고.

“도망가 버릴 것 같아서 말 안했습니다.”
“좆도…….”
“내가 검사라는 거 알았으면 몸부터 사리려고 들었을 게 뻔하니까. 지금처럼 의심부터 했을 테니까. 천천히 밝히려던 것뿐입니다. 내가 검사라는 걸 알게 되더라도 한무진씨가 내 옆에서, 재동이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 즈음에.”
“헷갈리게 하지 마, 개자식아!”

재희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무진의 발목을 덜컥 잡아챘다. 그러자 무진이 얼굴에 인상까지 쓰며 재희에게 잡힌 발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의 완력이 워낙 강해 버티는 것조차 힘들었다. 무진이 주춤하는 사이 재희는 그의 발목을 확 잡아당겼다. 그로 인해 무진은 재희의 복부 위에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았다. 재희는 무진의 손목을 제 손으로 콱 붙들어 잡으며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미간에는 좀 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고작 내가 폭력조직 하나 잡아들이겠다고 이미 죽은 소꿉친구의 자식을 아들로 삼고, 남자를 상대로 그런 미친 짓을 했겠습니까? 당신의 그 ‘백도회’라는 폭력조직이 뭐 그렇게 대단한데요? 그딴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라서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한다는 겁니까? 한무진씨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길, 믿는 겁니까?”

재희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거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퍼지던 그의 목소리도 차츰 희미해졌다. 재희에게 붙들린 제 손목을 비틀어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무진은 정말 그런 걸 믿느냐고 호소하듯 묻는 재희의 말에 일순 온몸의 힘을 풀었다.

어떻게 믿겠는가.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재희가 무진에게 접근한 목적이 달랑 무진의 조직을 접수하는 것뿐이었다고 한다면 10년도 훨씬 더 전에 야구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일도, 그 뒤로 종종 야구부 연습을 구경하러 왔던 일도, 정혜의 집을 찾아갈 때면 종종 마주치곤 했던 그의 시선도, 복역생활 중 꼬박꼬박 과일을 챙겨 넣어주던 정성과 재동을 기꺼이 제 아들로 삼은 진심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억지다.

“제기랄, 안 믿겨! 그래서 돌겠다고!”

무진이 짜증스레 소리쳤다. 얼굴은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믿기지, 않는다. 재희의 감정이 한순간이라도 거짓이었다고는, 그가 무진을 속여 제 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혼란스러움의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큰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이 들이닥쳐도 믿을 수가 없다.

언제 그를 봤다고 이렇게까지 믿고 의지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이 지경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믿고, 수긍하고, 그 감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 사실을 깨닫자 혼란스러워지고 만 거다.

무진의 얼굴 표정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던 재희는 붙들어 잡았던 무진의 두 손목을 놓아주곤 대신 그 손으로 무진의 볼을 감싸 잡아 그의 고개를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 돌발적인 행동에 무진에게선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제대로 된 단어를 구사하기도 전에 무진과 재희의 입술이 꾹 맞부딪쳤다.

“잠……ㄲ.”

무진은 제 손으로 바닥을 떠밀어보기도 하고, 재희의 어깨를 성나게 쥐어뜯으며 그와 떨어지려 아등바등 거렸지만 재희는 두 눈을 감고 미간마저 살짝 찌푸리며 막무가내로 무진의 입술을 탐했다.
무진의 아랫입술을 간질이듯 제 타액으로 흠뻑 적신 재희의 혀가 무진의 콱 다물린 치열을 샅샅이 훑어나간다. 재희는 무진의 볼을 감싸고 있던 두 손으로 무진의 볼을 가볍게 문지르듯 아래쪽으로 잡아당겨 그의 턱을 슬쩍 벌렸다. 그 탓에 무진은 턱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감당해야 했으니 거의 무력이나 다름없었다.

무진의 턱이 살짝 벌어지자 재희가 애달프게 무진의 입술 주변만 배회하던 제 혀를 무진의 입술 사이로 집어넣었다. 어느새 무릎은 무진의 다리 사이로 꾹 밀어 넣은 채다. 재희의 탄탄한 허벅지가 가랑이 사이로 쿡 와 닿자 무진의 허리가 저절로 들썩인다.

재희는 혀끝으로 무진의 혀끝을 휘휘 돌리듯 간질이며 핥다가 제 혀를 깊숙이 밀어 넣어 무진의 혀를 바깥쪽으로 끌어당기듯 핥으면서 슬쩍 상체를 일으켰다. 그로 인해 오히려 재희의 복부에 올라 앉아 있던 무진의 몸이 뒤쪽으로 슬쩍 넘어간다.

“잠…… 뭐하자는……!”

무진이 두 손으로 재희의 턱을 밀어 올리며 서서히 제 몸을 깔아 누르는 재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다리를 들어 재희의 어깨를 퍽퍽 거세게 내차기도 했다. 어찌나 힘껏 걷어차는지, 재희의 어깨가 뒤쪽으로 확 꺾이듯이 밀렸다. 재희의 미간사이에 주름이 한층 더 깊어지는 것으로 보건데 통증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희는 묵묵히 자신의 턱을 밀어내는 무진이 팔을 잡아 바닥에 꾹 내리누르며 무진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위쪽으로 말아 올렸다. 서늘한 감촉으로 재희의 손가락이 맨살에 닿자 무진이 허리를 비틀며 재희의 얼굴을 우악스레 밀어냈다.

재희는 제 얼굴을 떠미는 무진의 손마저 붙들어 다시 바닥 위로 짓누르며 완전히 그의 몸을 타고 올랐다. 무진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도록 그의 턱을 꾹 눌러 잡고서 한껏 들썩이는 어깨마저도 힘주어 붙들었다.

무진은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힘껏 주먹질을 해댔지만 그 주먹은 재희에게 닿지 않았다. 아무리 흠씬 두드려 패도 제 턱을 힘껏 내리누르고 있는 재희의 손을 떨쳐낼 수가 없다. 무진의 다리는 애꿎은 허공에다 계속 헛발질을 해댈 뿐이다.

그렇게 한 차례 투덕거리며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 났더니 두 사람의 온몸이 땀으로 끈적끈적하게 젖었다. 누구의 것이라 구분할 수도 없을 거친 숨결이 연거푸 터져 나온다. 있는 힘껏 반항을 하던 무진도 완전히 힘이 빠졌는지 축 늘어져선 제 턱을 붙들고 있는 재희의 손을 맥없이 밀어볼 뿐이다. 재희는 무진의 성난 손길에 제대로 긁혀 시큰거리는 볼 언저리를 손등으로 대수롭지 않게 슥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정말 싫은 거면 헷갈린다느니, 돌겠다느니, 그딴 소리 하지 마.”

언젠가 한 번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던 적이 있다. 정혜의 친구라고 했으니 동갑임에 분명하면서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면서 성인군자처럼 굴던 재희가 대뜸 화가 난 것처럼 얼굴 표정을 굳히며 말을 놓는 바람에 당황한 무진으로 하여금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만든 그런 상황이, 이전에도 한 번. 무진은 멍하니 재희를 올려다봤다. 재희의 아래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 꽤나 분하고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순전히 굴욕감 때문이다. 불쾌해서가 아니란 거다.

“네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난 버티기 힘들 정도로 흔들리니까. 그러니까 마음에 없으면 은연중에라도 흔들지 마.”

재희가 다시금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얼굴에는 어느새 잔뜩 고통스러운 표정이 담겨 있다. 생각해보면 재희는 무진을 만난 이후로 무식할 정도로 제 마음을 밀어붙였다. 그의 말대로 그가 무진을 지켜봐온 것이 고등학교 시절부터라면 10년도 훌쩍 넘은 기간을 무진의 주변만 빙빙 돌며 꾹 눌러 참았으니 이제와 펑 터지는 것도 이해 못할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무진에겐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감정이었다.

어쩌면 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동감한 순간부터 감정의 향방이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무진이 그에게 밑도 끝도 없이 의지를 하고 믿음을 갖기 시작한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간 감정이다. 정말 교묘하게도 스며들었다. 이제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게끔. 무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씨발, 진짜 짜증나는 새끼.”

무진은 힘이 거의 빠져나간 두 손을 들어 재희의 멱살을 콱 움켜잡았다. 그리곤 단번에 그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완전히 포갰다. 얼마나 힘껏 잡아당겼는지 두 사람의 입술이 부딪쳤을 때에는 턱이 서로 부딪치면서 퍽 하는 다소 묵직한 마찰음이 났다.

무진은 버석버석한 느낌이 드는 재희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성질대로 짓씹다가 제 혀를 재희의 입술 새로 밀어 넣어 뜨겁게 달아오른 재희의 입속 점막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재희는 거침없이 달려드는 무진의 혀를 제 혀로 슬며시 말아 올리며 손으로 무진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뒤로 넘겼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두 눈을 폭 감고 있던 무진의 속눈썹이 살짝 떨린다. 이렇게나 다정한 손길이 어떻게 거짓이었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두 개의 입술 사이로 타액이 길게 이어진다. 재희는 슬며시 눈을 떠서 무진의 입가에 묻은 타액을 손가락으로 닦아주곤 그의 몸을 껴안듯 일으켜 세워서 근처의 소파에 앉혀 주었다. 도저히 침대까지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소파에 기대어 앉자마자 무진은 서둘러 바지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간 어느새 바짝 부풀어 오른 제 분신이 기어이 옷을 뜯고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극에는 지극히 솔직히 반응한다.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당연히 그런 게 아닌가. 재희는 능동적으로 바지를 홱 벗어던지는 무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 손으로 제 넥타이를 잡고서 죽 잡아당겨 풀어냈다. 늘 차분하기만 하던 새카만 두 눈에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감이 이글거린다.

와이셔츠의 단추도 서너 개 풀어낸 재희는 고개를 숙여 다시금 무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는 굵직한 쇄골은 넓은 어깨까지 곧게 뻗어 있다. 강력계 검사들은 상황에 따라서 직접 현장에 나가 수사를 지휘하기도 한다더니 몸은 제법 탄탄한 근육질이다.

무진은 제 목덜미에 연거푸 입맞춤을 하던 재희의 머리카락을 다소 거칠게 쥐어 잡는가 싶더니 대뜸 그의 얼굴을 제 복부 아래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그 갑작스러운 행동의 이유를 묻듯 자신을 쳐다보는 재희에게 간단하게 명령하듯 말했다.

“빨아.”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일목요연한 무진의 지시에 재희가 물끄러미 무진의 브리프를 바라봤다. 몸에 완전히 밀착되는 브리프는 곧추서 있는 무진의 페니스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슬쩍 눈을 떠서 무진의 두 눈을 바라보던 재희는 이내 두 손으로 소파를 붙든 채로 고개만 숙여 브리프 위로 무진의 페니스를 죽 쓸어 올리듯 핥았다. 그러자 무진의 다리가 조금 꿈틀거린다. 혀끝에 닿는 살갗의 온도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제법 뜨거웠다.

이를 세워 브리프 표면으로 적나라하게 비치는 귀두 쪽을 잘근거리자 무진의 허리가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거렸다. 재희는 혀를 내어 귀두 쪽을 동글게 말아 돌리며 눈을 치켜떠 무진의 반응을 살폈다. 지금 자신에게 봉사를 하고 있는 상대가 여자라고 생각하기 위해선지 구태여 두 눈을 감고 있던 무진은 미간까지 찌푸리며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했다. 두 볼은 조금 전보다 더 상기되어 있다. 본능적으로 쾌락을 좇아 들썩이는 허리 때문에 무진의 판판한 복부가 연방 재희의 콧날에 닿았다.

이런 성행위를 ‘펠라치오’라고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행동에 옮겨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니, 애초에 누군가와 성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이제껏 무진 이외에 연애감정을 가진 상대가 없었던 데다가 단순한 성욕에 휘둘려 하룻밤 상대를 찾을 만큼 가벼운 성품도 아니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진이 그 사실을 안다면 펄쩍 뛸 지도 모르겠지만. 첫 경험의 상대가 무진이다. 그 사실만으로 재희는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와 견디기가 힘들었다.  
  
재희의 타액으로 젖은 브리프가 좀 더 살갗에 밀착되면서 단단하게 일어선 무진의 페니스가 완전히 적나라하게 비췄다. 재희는 손으로 무진의 페니스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리곤 이내 슬며시 브리프를 잡아내려 그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던 무진의 페니스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재희의 손길이 닿자마자 무진의 페니스가 부들부들 떨린다. 두 갈래로 갈라진 선단은 이미 끈끈한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재희는 브리프 깊숙이 손을 넣어 무진의 음낭을 손 안에 움켜쥐곤 어르듯이 조물조물 매만졌다. 그러자 무진이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어 거친 숨을 내뱉는다. 숨을 한 번 내뱉을 때마다 온갖 흉터가 낭자한 그의 복부가 크게 너울거렸다. 재희는 그 솔직한 반응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손에 착착 감겨드는 무진의 달뜬 살덩이를 다독이듯 매만졌다. 재희가 그렇게 한동안 힘겹게 떨리는 무진이 페니스를 관망하듯 바라보며 이따금씩 손만 뻗어 간질이듯 만지작거리자 애가 탔는지 무진이 감고 있던 두 눈을 슬며시 떠서 재희를 바라봤다. 그 순간 재희가 입을 벌려 무진의 페니스를 가득 품어 문다.

“……윽!”   

뜨거운 입속 점막이 완전히 살갗을 품어 감싸는 느낌에 무진의 허리가 낭창하게 뒤틀렸다. 배가 아플 정도로 페니스가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단지 서서히 고개를 움직여 무진의 페니스를 끝까지 삼켰다가 입술로 조이듯 천천히 뱉길 반복하는 재희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본 것뿐인데, 눈을 감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머리카락 끝이 쭈뼛 서는 기분도 든다.

무진은 소파의 가죽을 쥐어뜯을 듯이 하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재희가 입을 충분히 벌리지 않은 탓에-일부러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예민한 살갗이 그의 이에 쓸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아, 씨발…… 아윽! 으으으윽!”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연거푸 낮은 욕설을 내뱉던 무진이 덜컥 재희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순간 그의 입속에서 요동치던 무진의 페니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 재희가 제때에 입을 떼지 못하는 바람에 뜨거운 분출물이 고스란히 재희의 입속으로 튀어들었다. 그럼에도 재희는 묵묵히 후희에 벌벌 떨리는 무진의 페니스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무진은 소파에 목을 완전히 뒤쪽으로 꺾어 천장을 바라보며 전율을 느꼈다. 복부가 쉼 없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온몸에 식은땀이 고이고 금세 소름이 돋았다.

재희는 사정을 한 여운에 가까스로 숨만 몰아쉬며 소파와 한 몸이 된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는 무진을 고요히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대뜸 무진의 두 발목을 잡아서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소파에서 무진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그의 둔부가 완전히 재희의 위쪽 허벅지에 닿는다.

한순간에 몸이 구겨지듯 자세가 불편해지자 미간을 찌푸리던 무진은 제 허벅지에 제대로 닿고 있는 재희의 분신을 느끼곤 잠시 주춤거렸다. 적당히 서로 빼는 것으로 끝내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재희를 상대로, 그건 좀 안일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야, 잠깐만…… 야, 잠깐! 꺼내지 마! 꺼내지 마, 미친놈아!”

불길한 예감에 무진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지만 재희는 바지버클을 내려 보란 듯이 제 분신을 밖으로 꺼냈다. 상대인 무진이 몸매가 죽여주는 미녀도 아닌데, 하물며 제가 팔팔한 십대인 것도 아니면서 그의 페니스는 제 복부에 완전히 밀착될 정도로 바짝 일어서 있다. 그걸 입에 넣으면 목구멍너머로 넘어갈 게 분명했다.

일어설 대로 일어선 살덩이가 지끈거리는지 재희는 이따금씩 눈살을 찌푸리며 슬슬 제 달뜬 살덩이를 무진의 허벅지 안쪽에 대고 문질렀다. 뜨끈뜨끈한 남의 살갗이 닿자 무진의 허리가 또다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본능에 사로잡혀서.

교도소까지 다녀온 마당에 남자끼리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 깔리는 쪽이 자신일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뿐. 그렇다고 재희를 깔아놓고 박을 생각이라도 해본 것은 아니지만.

재희는 무진의 허리를 받치듯 잡고선 제 페니스로 무진의 엉덩이 골 사이에 슥 문질러댔다. 그저 살갗끼리 조금 스치면서 비벼지는 것뿐인데도 재희는 손가락 끝이며 발가락 끝까지 저릿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전혀 자극을 받아본 적 없던, 깊숙한 곳이 후끈후끈한 살덩이에 이리저리 쓸리자 무진이 어깨까지 움찔 떨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잠깐, 기다려! 기다리라고, 씨발아! 아아아악!”

무진이 헐벗은 다리까지 버둥거리며 재희를 말리려 해봤지만 어김없이 재희의 살덩이가 무진의 애널을 헤집으며 들어왔다. 여자건 남자건 삽입 전에는 좀 풀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건지, 아니면 너무 흥분해서 잊어버린 건지 전희 없이 밀고 들어오는 무자비한 삽입에 무진의 목에 굵은 핏대가 바짝 일어섰다.

지극히 뻑뻑한 무진의 애널에 페니스가 반쯤 밀려들어가다 말고 멈추었는데도 재희에게선 헉 하고 거친 숨결이 토해졌다. 재희는 상체를 숙여 두 눈까지 질끈 감고서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는 무진의 입술 언저리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리곤 소파 등받이를 손으로 잡고 그것을 지지대삼아 제 허리를 강하게 짓눌렀다. 그로 인해 무진의 애널 주름이 완전히 확 펴지면서 재희의 페니스가 끝까지 밀려들어가 무진의 내부를 꽉 채운다. 너무도 단단한 조임에 참아볼 새도 없이 신음소리가 마치 탄성처럼 터져 나왔다. 점잖기만 하던 얼굴도 확 일그러져 버렸다.

“큭윽…… 하아…….”
“개새……끼이……윽.”

재희의 아래에서 완전히 찌그러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무진은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를 흘리며 나지막이 재희를 향한 욕설을 내뱉었을 뿐이다. 모르는 게 무섭다는 말이 있던가? 만약 있다면 딱 그 짝이다. 아무래도 실전경험이 전무함에 분명한 재희는 섹스가 단순히 박고 흔들고 뱉어내면 끝나는 것인 줄 아나보다. 하다못해 포르노나 야동조차 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것이리라.
무진이 아랫부분의 시큰한 통증에 숨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두 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잠시 완전한 삽입의 전율을 느끼고 있던 재희가 무진의 허리를 붙들어 안으며 그의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무진은 몸의 반쯤은 재희에게 안기고, 나머지 반쯤은 소파 등받이에 걸쳐진 애매한 상태가 됐다. 받쳐줄 것이라곤 재희의 탄탄한 허벅지뿐이라서 오히려 그의 페니스가 더욱 깊숙한 곳까지 밀려들어왔다. 억지 부리지 않고, 배꼽 언저리까지는 밀려든 것만 같다.  

“악! 아윽!”

재희는 상체를 숙여 무진의 발갛게 달아오른 귀를 잘근거리며 서서히 제 허리를 튕겨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뿌리 끝까지 천천히 죽 빼냈다가 다시 완전한 삽입을 반복해댄다. 그럴 때마다 뱃속 어딘가의 깊숙한 곳이 자극되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율이 무진을 엄습했다. 말로만 듣던 전립선을 건드린 건지 어쩐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흥분이 됐다. 재희의 페니스가 드나들 때마다 애널이 찢어질 것처럼 화끈거리는 통증만 빼자면 말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조바심이 났는지 재희가 좀 더 무진을 소파 쪽으로 밀어붙이며 허리의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그로 인해 재희의 허벅지와 무진의 볼기가 강하게 부딪히면서 찰싹찰싹 하는 소리가 연거푸 울려 퍼졌다.

조금씩 적응해가던 리듬을 산산이 깨부수며 제멋대로 들쭉날쭉 드나드는 재희의 페니스 때문에 맥없이 흔들리는 것밖엔 도리가 없던 무진은 손 안에 콱 말아 쥐고 있던 재희의 셔츠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뜯었다. 그 때문에 재희의 셔츠에서 단추들이 뜯겨져 튕겨 나오고, 이내는 셔츠마저 북, 북 하는 소리를 내며 처참하게 찢겨졌다.

찰박찰박.

무진이 점점 더 찌그러져 갈수록, 재희의 허리가 더욱 빠르고 깊숙이 움직일수록 살갗끼리 마주치는 소리가 매우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재희의 페니스 굵기 이상으로는 벌어지지 않는 무진의 애널이 쫀득하게 재희의 살갗에 달라붙는다. 재희의 살덩이를 집어삼키려는 듯이 콱 물곤 놓아주지 않는 거다.

“하아…… 큭…….”
“젠장…… 악, 아윽!”

재희가 정신없이 박아대는 통에 제 몸이 점점 더 미끄러지자 무진은 두 팔로 아예 재희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됐다. 소파를 짚은 채로 연방 쉬지 않고 허리를 움직이던 재희는 무진의 등을 제 팔로 껴안아 그를 완전히 품에 안았다. 그리곤 팽창할 대로 팽창한 제 페니스를 무진의 애널 깊숙이 집어넣고는 부르르 떨리는 무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무진은 통증과 함께 몰려드는 쾌락에 애꿎은 재희의 등이며 어깨를 제 손으로 쥐어뜯었다.

“윽! 으응…… 으으윽…!”
“크으으윽!”

이윽고 재희의 페니스가 뜨거운 정액을 왈칵 쏟아내며 폭발했다. 페니스가 닿았던 곳보다 더 깊숙한 곳이 뜨거운 것으로 축축이 젖어들자 무진의 몸이 부르르 내떨린다. 얼마나 정신없이 밀어붙였는지 절정을 맛본 순간에는 아찔한 느낌마저 들었다. 재희는 한참을 더 그렇게 무진을 껴안고 있다간 마지막 남은 정액 한 방울까지도 모두 흘려냈다. 머지않아 그것은 도로 재희의 페니스를 따라 흘러나왔다.

재희는 가까스로 숨만 뱉어내며 제게 완전히 붙어 안겨 있는 무진의 가슴에, 팔에 고요히 입을 맞췄다. 크고 작은 흉터들이 온몸을 뒤덮고 있는 그였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정성스럽게.

재희는 그대로 무진을 데리고 침대로 가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침대 위에 그를 눕혔다. 그 순간까지도 고집스레 제 페니스를 무진의 애널에 밀어 넣은 채였다. 한 번 사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애널이 헐겁지 않을 만큼 재희의 페니스는 적당한 상태의 부풀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한 번으로는 참아왔던 것을 다 해소하지 못했다는 듯해 고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재희는 어쩐지 그새 기가 한풀 꺾여서 숨만 쌕쌕 몰아쉬고 있는 무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숨을 내뱉느라 달싹이는 입술에 쪽쪽 소리를 내가며 가벼운 키스를 퍼붓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무진은 그만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행복해서 웃는다거나, 어이없어서 터지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 웃겨서 터지는 그런 웃음 말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이 서른을 넘겼으면서 첫 경험을 하는 남학생처럼 서툴기 그지없는, 그저 휘몰아치는 게 전부인 격정적인 섹스를 했는데.

재희는 두 팔로 무진을 제 품에 꽉 끌어안았다. 무진은 묵묵히 그 품에 안겨서 천장을 바라봤다. 어쩌자고 이렇게 휩쓸리고 있는 걸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런 덧없는 의문을 던지던 무진은 곧 다시금 자신의 애널을 꽉 채우며 부풀어 오르는 재희의 뜨거운 살덩이를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Second Daddy _ 20







재희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곁에서 잠들어 있는 무진을 내려다봤다. 무진은 새벽의 푸르스름한 기운 속에서도 훤히 보일 만큼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난밤에는 꽤나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하고, 통증어린 비명을 차마 참지 못하고 쥐어짜듯이 내지르기도 했었다. 그 바람에 결국에는 목이 쉬어 습관처럼 욕설을 내뱉을 때마다 쇳소리 같은 것이 났었다.

뭔가 뒤죽박죽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려서, 정말 순수하게 본능에만 의지했다. 몇 번을 해버렸는지는 일일이 세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아쉽게나마 무진의 몸에서 빠져나왔을 즈음 무진의 상태로 보건데 분명히 정상범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무진도 남자를 받아들인 경험이라곤 전혀 없을 테니 조심해서 배려했어야 했다는 걸 안다. 머리로는 알았다는 거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무지 그럴 재간이 없었다. 처음으로 성에 눈을 뜬 사춘기 소년처럼 흥분에 젖어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왜 연수원 시절에 신혼생활을 시작한 동기들이 날마다 반쯤은 꿈에 빠져 있는 것처럼 몽롱한 상태에 있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지난 몇 시간은 재희 본인도 정말 몸이 붕 뜬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까. 끔찍한 흥분감과 아플 정도로 짜릿한 쾌감에 지배당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있는 힘껏 반항하던 무진이 몇 번의 사정을 한 후엔 몸의 긴장감을 완전히 풀고서 종국에는 재희의 허리에 다리까지 휘감으며 매달려오는 턱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재희는 손을 뻗어 무진의 미간 사이를 가만가만 매만졌다. 그러자 무진의 미간이 슬쩍 펴지는가 싶었던 이내 다시금 잔주름을 만들어버린다. 무진은 재희의 손길이 성가신지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작게 움츠렸다. 잠을 자면서도 그 사소한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고 반응할 만큼 그는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것 같다. 마음을 푹 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거다. 앞으론 그가 단잠을 잘 수 있게 하리라. 단꿈만 꾸어도 부족할, 그런 편안 잠을 자게 해주리라.

무진의 이마를 가만가만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의지를 다지던 재희는 상체를 숙여 무진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진은 또다시 예민하게 몸을 뒤척이며 좀 더 재희 쪽으로 파고들었다. 순전히 따뜻한 것을 찾아 움직이는 본능에 의해서다.

평생 손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품 안에 안겨 있다. 마음이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에 체념하고, 순전히 정혜와 무진을 위해 도중에 접어버렸던 감정이 지금은 그에게까지 닿아 있다.

꿈은, 아닐 것이다.  

“……뭐야.”

성가실 정도로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재희의 손길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는지 무진이 오만상을 구기며 눈을 떴다. 시비를 걸듯이 뭐냐고 따져 묻는 목소리는 처참하게 갈라진다. 재희는 무진이 자신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는데도 한결같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귓등을 매만지면서 태연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잤습니까?”
“잘 잘겠다? 응? 니 새끼라면 퍽도 잘 잤겠다고?”
“그렇게 말해도 편안하게 자던데요.”
“웃기지마. 하나도 안 편했어. 빌어먹을. 틀림없이 찢어졌을 거야. 니 새끼 때문에 아주 매일같이 피똥을 줄줄 쌀 거라고. 이런 대중없는 새끼. 내 옆구리에 혹시 구멍은 안 났냐?”

무진이 단정적으로 말하며 욱신거리는 제 옆구리를 슬며시 매만졌다. 정확하게는 골절을 입은 부위를 말이다. 그가 입은 부상이 아직 완전히 다 나은 것이 아닐 텐데 그만 성욕을 짓누르지 못하고 그를 몰아붙여 버렸다. 중간, 중간에 아프다고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자신을 마구 떠밀던 무진이었는데도 말이다.

재희는 천천히 제 상체를 숙여 무진의 반듯한 이마 위에 소리 없이 입을 맞췄다. 무진이 꿈틀거리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을 때에는 그 손마저도 제 손으로 꼭 붙들어두며 그의 콧등이며 볼 언저리에도 입을 맞춘다. 어디서 뭘 보고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섹스 후 일어난 아침에는 그런 게 정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런 걸 생각하기도 전에 제 눈에 안경이라고, 무진이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여 마음이 끌리는대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진은 한시도 잠자코 안겨 있는 법 없이 재희를 확 떠밀며 그를 핀잔하듯 말했다.

“여자가 아니라고. 이딴 짓 좀 하지 마.”   

말한 그대로다. 똑같은 사내놈에게 밤중에 내내 깔린 것도 서러운데,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의 품속에 갇히다시피 해서 공주라도 된 것처럼 잠자코 모닝키스를 받는 것 따위 하나도 기쁘지 않다. 왜인지 자신만 내리 깔렸다는 게 억울하기도 하고, 이제와서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한다.

무진은 제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자신에게서 도무지 시선을 떼질 않는 재희를 힐금 바라봤다. 괘씸하게도 그의 얼굴은 모든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 것처럼 개운해 보인다. 그 덕택에 무진은 몸이 천근만근 까라지는데 말이다. 무진은 제 손으로 얼굴을 확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한 침대에서 재희와 마주보자니 지난밤의 일들이 고스란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쪽팔려, 진짜.”

평소에는 지독히도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던 주제에 지난밤에는 몇 년을 굶은 짐승처럼 마구잡이로 달려들었었다. 지난밤의 섹스는 서로를 배려한 어른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첫 경험을 하는, 치기어린 남학생들의 그것처럼 성급하고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융통성이라곤 없는지, 혹은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까지 쌓였던 건지 몸을 섞는 내내 주먹다짐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는 거다. 그렇다고 통증과 폭력만이 난무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나 서툰 상대를 대상으로 지난밤에는 여자와의 관계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전율과 쾌감을 느꼈었다. 남자를 상대하며 느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얼굴이 화끈거린다. 남자 아래에 깔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러운데, 어느 참엔가 그 아래서 암캐처럼 앙앙거리다가 종국에는 두 다리로 그의 허리까지 휘감기까지 했다는 것이. 잊을 수 있으려면 좋으련만 오히려 뚜렷하게 떠오른다.

자신의 얼굴에서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절정을 맛보던 재희의 얼굴도 생생하고, 그의 아래에 깔려서 처음 느껴보는 미묘한 자극에 한껏 짓이겨진 신음소리를 토해내던 무진 본인의 모습도 지나치게 생생하다. 재희는 수치스러움과 멋쩍음에 괜히 제 이마를 손등으로 몇 차례씩 닦아내는 무진을 고요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어 물었다.

“이제 말해주시죠. 재동인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래도 한 회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서 일단 안전한 곳에 보내놨어.”
“유 선생님께 보낸 겁니까?”
“다 꿰고 있네, 완전히. 창수랑 정한이 놈도 같이 보냈으니까 당분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래 뵈도 의리 빼면 시체인 놈들이라 지들이 죽었으면 죽었지, 누가 재동이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걸 보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무진이 확신이 차서 대답했다. 정한과 창수를 깊이 신뢰해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 번도 그들을 의심해본 적은 없다. 근래 들어 정한이 보이지 않아 걱정을 하긴 했지만 그의 배신을 생각했던 적은 없다는 거다. 무진의 믿음대로 정한은 스스로 무진을 찾아왔다. 정한은 창수에게서 무진이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길 듣기 전에 스스로 무진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한 회장이 무진 몰래 조사하라고 했던 것을 무진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놨던 것이리라.

그러고도 그는 한 회장과 약속한 열흘을 넘기고서야 찾아온 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 회장이 그 사실을 안다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진 않을 거라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 회장이 그에게 주었던 열흘간 혼자 고민하고 가슴앓이 했을 정한의 미련함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대로 정한을 한 회장이 보낸 놈들에게 당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어 창수, 재동과 함께 유 선생에게 보냈다. 유 선생이라면 당분간 그들이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잘 돌봐줄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내 옆에 있는 게 가장 위험해.”

혼자 생각을 정리하던 무진이 돌연 조금은 시무룩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동도, 그를 따르는 창수나 정한도, 그리고 어쩌면 재희까지도. 한 회장이 무진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질 거란 거다.

무진은 침대의 이불을 확 걷어버리곤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곤 완전한 나체 상태면서도 거리낌 없이 터덜터덜 침대를 돌아 밖으로 나갔다. 재희의 시선이 한 순간도 제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단순하게 재희도, 자신도 남자고 같은 몸을 지녔으니 나체 정도 보이는 것이나 별 상관있겠냐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재희는 침대에서 나와 무진의 뒤를 따라갔다. 유난히 고여 있는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져서 제 몸을 내려다보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 참에 재희 본인도 나체가 되어버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재희는 무진이 들어간 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욕실 문을 벌컥 열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욕조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가려던 무진이 제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들어오는 재희를 보곤 움찔 놀라 어깨를 떨더니 이내 미간을 확 찌푸린다.

“야, 누가 들어오래.”
“땀을 많이 흘려서 조금이라도 빨리 씻고 싶습니다.”

무진은 뻔뻔하게 말하는 재희를 조용히 노려보다가, 잠시 다른 곳을 쳐다봤다가, 이내 제 귓등을 긁적이더니 어렵게 들어간 욕조에서 다시 나왔다. 그리곤 재희의 곁을 유유히 스쳐서 지나가며 말했다.

“그럼 내가 좀 기다렸다 하지, 뭐.”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나도 더 이상 할 체력 같은 건 없으니까.”

재희는 욕실 밖으로 나가려던 무진의 내버려두지 않고 그의 팔을 잡아당겨 그를 샤워부스 안쪽 벽으로 바짝 밀어붙이며 말했다. 그리곤 샤워기의 물을 틀어 삽시간의 그의 몸을 물에 젖게 만들었다. 그의 나이도 무진과 마찬가지로 서른을 넘겼고, 지난밤에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해댔으니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발정하지 않으리란 건 확실해 보였다. 무진이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잠자코 돌아서서 물을 맞은 것은 그런 확신을 했기 때문이다. 몸이 홀딱 젖은 김에 아예 씻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재희는 샤워볼에 비누거품을 가득 피워내서 그것으로 무진의 등을 슥슥 문질렀다. 재희가 등 뒤에서 뭘 하거나 말 거나 무진은 제 손으로 얼굴을 박박 문지르며 다소 거친 세수를 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얌전하게 무진의 어깨와 등, 허리, 팔에 비누칠을 해나가던 재희가 슬쩍 무진의 옆구리 사이로 제 손을 미끄러뜨려 복부에 비누칠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아예 무진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 탓에 무진의 엉덩이와 등이 툭 하고 재희에게 닿는다.
  
“야! 뭐야, 갑자기.”
“등에 물이 닿아 따끔따끔합니다. 한무진씨가 암고양이처럼 할퀴어댄 탓에.”  

재희가 무진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말하는 바람에 무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귀에 들려온 것은 분명히 재희의 목소리였는데, 이번만큼은 평소처럼 존대를 하고 있는데도 낯설게 느껴졌다. 재희는 좀 더 팔에 바짝 힘을 줘서 무진을 끌어당겼다. 그 탓에 무진은 골절을 입은 부위가 살짝 당겨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재희는 혀를 내어 무진의 귓등을 핥으면서 계속해서 얘기했다.
  
“정말 좋았습니다. 단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상상이상이었습니다. 그런 기분일 거라곤 이제껏 상상도 못했으니까.”
“젠장, 그딴 말 아무렇지 않게 마구 지껄이지 말…… 잠깐. 그러니까, 뭐야. 너, 처음이냐? 그런 기분일지 몰랐다니, 설마 여자하고도 해본 적 없어?”

무진이 재희의 품을 비집고 나와 의외라는 듯이 놀란 얼굴을 하곤 물었다. 여전히도 그의 얼굴엔 얼굴도, 몸도 멀쩡한 남자가 지금껏 동정딱지도 떼지 못했을 리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어려 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려가며 단정적으로 내뱉어지는 재희의 대꾸는 무진의 그런 확신을 산산이 부숴버렸지만 말이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난잡하게 몸을 섞을 마음 따위 없습니다, 나는.”

성실한 남자니까,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일 만큼 단정한 남자니까 그런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의 거리는 이억 광년만큼 멀리 떨어져 있던 게 아닌가?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니까 어젯밤에야 재희가 동정을 뗀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납득은 간다. 그가 왜 지난밤 그렇게까지 조급해하고, 안달이 나서 쩔쩔매고, 사람의 사정은 봐줄 여력도 없이 밀어붙였는가를. 왜 그렇게 사춘기 소년처럼 어설프기 그지없는 섹스를 했는지도.

어이가 없다. 웃음이 나올 것 같다. 만약 무진이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그랬단 말인가. 평생 동정도 못 뗀 쭉정이가 되어 늙어 죽으려고 한 건가. 물론 중간에라도 무진 말고 달리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겼다면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석재희. 이 남자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는 어찌 보면 참 미련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하다. 무진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해서.

딱히 마음에 직격하는 고백을 들은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뭣도 모르는 사춘기 소년의 고백 같은 얘길 들어서인지, 마음이 그만 동해버린 모양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화르륵 불타올라 금세 반응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무진은 돌연 복부 아래쪽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내 그는 원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레 말했다.  

“씨발아, 섰어.”















무진의 미간이 움찔하며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두 눈꺼풀이 슬며시 말려 올라간다. 서서히 또렷해지는 그의 시야에 익숙해진 천장이 가득 밀려들어온다. 느릿느릿하게나마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훑어보던 무진은 이내 제 손으로 얼굴을 쓱 쓸어내렸다. 얼굴이 까칠까칠한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개운하기는커녕 오히려 몸이 더 묵직하게 까라지는 것만 같다.

“…….”  

무진은 몸을 일으키려다말고 잠시 멈칫했다. 그의 허리에 재희의 팔이 묵직하게 휘감겨 있어 마음껏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도 더 이상 할 체력 같은 건 없다고 주절거린 주제에 욕실에서 한 번 빼고 나오자마자 침대에서 연거푸 몇 번을 더 해댄 재희 탓이다. 천장이 노란 것 같다. 무진은 눈꺼풀을 스르륵 감으며, 자신의 체력이 이 정도 밖에 안 됐던가 하는 생각에 자조적으로 웃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순전히 상대방 탓인지도 모른다. 상대인 재희가 여자보다 체력이 좋은 남자인데다, 이제야 동정딱지를 떼고 처음으로 그 맛을 알고 흥분한데다, 어쩌면 평균 이상으로 좀 정력이 좋은지도 모르겠고. 동정은 웬만하면 건드려선 안 된다. 잘못 버릇을 들였다간 내내 고생할 테니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은 별 수 없는지 몰라도.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재희가 자신이 검사라는 사실에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냐고 묻기 전에는 무진 스스로도 그 이유를 깨닫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어느새 재희를 신뢰하게 됐다고 해서 무진도 이제 그와 완전히 같은 감정이 되었다곤 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재희가 무진의 가장 약한 부분을 완벽하게 파고들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차갑게 식은 쇠 같던 무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재동과 함께 살고 싶다고, 녀석의 아빠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그 곁에는 늘 재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고 되물을 필요도 없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다고 정말 한 번이라도, 재희와 이렇게까지 엮이리란 생각을 해본 건 또 아니지만. 무진 본인과 재희 사이에 구태여 상상하지도 않았던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지만, 무진이 꿈꿨던 일상에는 사실 그리 큰 변화가 없다. 여전히 재희가, 재동이, 그리고 무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한을 통해 한 회장이 무엇을 알아보려고 했는지를 알게 된 이상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다.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기에 더 달콤할 것이라 생각하는 그런 꿈. 잠시 유 선생의 신세를 지는 것으론 재동의 안전을 완벽히 보장받을 수 없다.

무진은 슬며시 제 허리에 둘러져 있는 재희의 팔을 들어 천천히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재희는 아주 조금 뒤척이긴 했지만 바로 눈을 뜨거나 하지는 않았다. 슬그머니 침대 아래로 내려온 무진은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던 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휴대폰 폴더를 열어 창수의 번호를 검색했다. 그리고 곧 창수의 번호가 액정화면에 뜨자 통화버튼을 누른다. 통화 연결음이 한 번, 그리고 두 번째 길게 늘어지던 순간 마치 무진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렸다는 듯이 창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연락 없어서 걱정했잖습니까. 저희들만 여기로 보내놓으시고 혼자 남아계시니까 잠도 못 자겠고. 서, 설마 재동이 아빠를 송장으로 만들어버리거나 한 건 아니시죠? 네?”
“혼자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재동이는?”
“재동이야 잘 자고 있습니다. 누굴 기다리는지 현관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12시 넘어서 잠들었어요. 다행히 밥은 잘 먹었고요.”
“……미행하는 놈은 없었고?”
“네. 정한형님하고 샅샅이 살펴봤는데 아직 그런 움직임은 없습니다.”
“알았어. 내 연락 있을 때까지 거기서 꼼짝도 하지 마.”

창수가 뭐라고 더 하는 것 같았으나 어차피 이런저런 우려의 말일 것이 분명했으므로 무진은 폴더를 닫아 통화를 끝내버렸다. 한 회장이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근래에 테마파크 조성사업이나 흑룡회 처리 문제에 온통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두 문제 모두 고요하게 마무리되어가고 있으니, 언제까지고 무진의 일탈을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재희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태평하게 한 회장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릴 순 없다. 정한이 소임을 다하지 않고 사라졌으니 한 회장은 사람을 시켜 정한을, 아니 어쩌면 무진을 찾으려 할 것이다. 정한이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 그 자체가 한 회장에게는 보고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반증해보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한 회장이 본격적으로 무진의 뒤를 캐기 시작하면 근시일내에 그는 재희와 재동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가 움직이기 전에 무진 본인이 먼저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재동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진은 며칠 전에 창수를 시켜 가지고 오게 했던 제 옷들을 꺼내 걸쳐 입었다. 바지를 입고 버클을 채운 뒤 구겨진 셔츠의 깃을 대충 정리하던 무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는 재희를 바라봤다. 그가 깨어난다면 반드시 무진을 붙잡아두려 할 것이다. 자신을 믿고 잠시만 더 기다리라고 몇 번이나 무진을 설득하려 들 게 분명하다. 물론 무진은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한 회장은 더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진은 한 회장이 기어이 재동에게까지 손을 뻗는 걸 지켜볼 수가 없다.

무진은 한참동안 고요히 재희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나섰다.















drrrr…… drrrr……

익숙하게 귓가에 울려 퍼지는 진동에 재희가 확 두 눈을 떠올렸다. 어느새 해가 떴는지 창밖이 훤하다. 재희는 잠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손을 뻗어 옆자리부터 더듬어보았다. 이윽고 텅 빈 옆자리의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 가득 느껴졌을 때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옆자리에서 곤히 자고 있어야 할 무진이 보이지 않았다.

“……?”

슬쩍 고개를 치켜들어 침실과 열린 문틈으로 살짝 보이는 부엌까지 내다봤지만 무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재희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곤 미간을 찌푸리며 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옷과 뒤섞인 무진의 옷은 여전히 방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다. 그러나 욕실에서도 물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른 곳에서도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재희는 당장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 문부터 벌컥 열어젖혔다. 욕실은 비어 있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거실로 나갔다. 거실의 소파 위에도 무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재동의 방과 서재 등도 빠짐없이 들어가 봤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무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신발장을 보니 무진의 구두가 사라지고 없다. 아무래도 그는 재희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슬쩍 빠져나가버린 모양이다.

재희의 주먹이 초조함에 꽉 쥐어졌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재동에게 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진이 재동을 보러 간 것이라면 재희에게 말 한마디 없이, 도망치듯이 가야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무진이 찾아갔으리라고 짐작이 가는 곳은 딱 한군데다. 한 회장. 물론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경우이긴 하지만. 재희의 짐작대로 무진이 덜컥 혼자서 한 회장을 찾아간 것이라면, 그렇다면.  
  
타닷.

재희는 곧장 침실로 되돌아갔다. 무진을 뒤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진이 위험하다. 단지 그의 몸이 상하는 것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수사에 큰 진전이 없는 지금 재희가 한 회장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안다. 자칫 잘못하면 모든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무진의 행보를 그저 손 놓고 지켜볼 수만도 없다.  

drrrr…… drrrr……

옷장에서 옷을 꺼내 서둘러 걸쳐 입던 재희의 시선이 잠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를 잠에서 깨게 만들었던 익숙한 진동이 다시금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바지에서부터다.

재희는 바닥으로 팔을 뻗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던 제 바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 속에서 바르르 떨리고 있던 휴대폰을 끄집어내서 곧장 귓가에 가져다댔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여보세요? 계장님? 네, 접니다.”

재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통화상대방은 잠자는 중에 깨운 게 아니냐며, 그랬다면 미안하다는 사과를 먼저 했다. 그 후의 통화는 통화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재희에게 이야기를 하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대답을 하며 상대방의 얘기를 듣던 재희의 표정이 돌연 눈에 띌 만큼 환해진다. 재희는 통화가 끝나갈 즈음 조금은 다급하게 말했다.

“그걸 찾았다니 다행입니다. 예상대로군요. 덕택에 바로 몰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더 미룰 까닭이 없습니다. 김 계장님께서는 관할 경찰서에 연락을 해주세요. 무장필수입니다. 네, 현장엔 저도 가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끝낸다. 재희는 조금 전의 통화로 뜨끈하게 달아오른 휴대폰을 손 안에 꽉 쥐었다. 드디어 그 긴 꼬리를 잡았다. 한 회장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일이, 그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성큼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그저 기뻐하고 있을 새가 없다. 지금 당장은 무진을 붙잡아야 한다. 그가 허튼 짓을 하지 않도록. 재희는 더 지체할 것도 없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누가 왔다고?”

집무실의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한 회장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서에게 되물었다. 비서는 다시 한 번 한 이사가, 그러니까 무진이 한 회장을 만나려고 회장실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전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한 회장의 입술이 긴 곡선을 그린다.

그가 지금처럼 쪼르르 달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버틸지, 그것이 관건이었을 뿐. 어떻게 오지 않고 버티겠는가? 한 회장의 말을 어기면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가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뻔히 잘 아는 무진일 텐데 말이다.

궁금했던 참이었다. 무진의 수하인 정한에게 열흘의 기한을 주었는데 그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질 않았기 때문에. 대충 무진에게 갔으리란 짐작은 했다.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정한이 괘씸하긴 하지만 어차피 한 회장에겐 상관없었다. 그가 한 회장의 지시대로 무진이 요즘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에 대해 조사한 후 모든 걸 다 털어놓건, 아니면 무진에게 달려가 한 회장이 그 사실을 알아보라고 했으니 조심하라고 하건. 어차피 무진은 지금처럼 한 회장 자신에게 달려오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중요한 건 한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무진의 소중한 것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무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맹목적인 복종을 할 수 있도록.

“들어오라고 해라.”

한 회장의 지시에 비서가 꾸벅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해보이곤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곧 회장실 앞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한 회장은 팔짱을 끼고서 문 쪽을 바라봤다.

잠시 후 회장실 문을 열고 무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무진은 제법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한 회장에게 맞아 생긴 상처들을 대충이라도 치료한 모양이었다. 속까지도 멀쩡할 리는 결코 없겠지만. 한 회장은 무진이 연락도 없이 덜컥 찾아온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증스럽게 물었다.

“어쩐 일이냐? 난 널 부른 일이 없는데.”
“오늘은 제가 회장님께 볼 일이 있어 왔습니다.”
“네가 먼저 볼 일이 있다고 찾아오다니, 별 일이구나.”

한 회장은 무진을 향해 씩 웃으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러나 무진은 한달음에 달려와 불붙일 생각을 하지 않고 주먹을 꽉 내려쥐며 빙 둘러 말할 것도 없이 직접적으로 말했다.

“정한이 놈한테 내 뒤를 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아비가 자식이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궁금한 건 당연한 게 아니냐? 네 녀석이 직접 말할 리가 없으니 친히 알아보려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 놈, 별로 쓸모가 없더구나. 모처럼 열흘이나 시간을 줬는데도 그 간단한 일 하나 처리를 못 하고.”

한 회장이 혀를 내차며 말했다. 그는 스스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무진을 바라봤다. 고작 그런 걸 확인하려고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자신을 찾아온 진짜 이유나 한 번 말해보라는 거다. 그가 할 말이라곤 지금 한 회장의 머릿속에 있는 말을 고스란히 내뱉는 것뿐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러나 곧 무진에게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왜 그랬습니까?”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내게, 하고 싶은 것만 하며 떵떵거리고 살게 해줄 테니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렸던 나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잊은 겁니까?”
“아아, 그랬지.”

한 회장은 한참 후에야 무진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를 어린이보호시설에서 처음 데리고 왔을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가볍게 웃어버린다. 마치 왜 게임기를 사주지 않는 거냐고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의 투정을 듣듯, 가볍게. 그리곤 오히려 그렇게 따지듯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며 반박했다.

“내가 그중에 지키지 않은 약속이 있나?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껏 밥 한 끼 굶긴 일이 없고 떵떵거리면서 아랫사람이나 부리며 살게 해줬잖아. 고작 긴 인생의 4년 남짓, 교도소에서 썩게 했다고 이러는 거냐? 그렇다면 작은 희생을 통해 큰 것을 얻는 방법을 배웠다 생각하면 그만이지. 애초에 네놈이 내게 그런 불만을 토로할 자격이나 되는 거냐? 애비 어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떨거지 주제에. 그런 너를 기꺼이 내 아들로 삼아준 걸 감사히 여겨라. 말도 안 되는 아들의 권리, 아버지의 의무 같은 건 너 따위가 주장할 게 아니지.”
“그런 걸 가족이라곤 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모르는 게냐? 내가 원한 건 내 주위에서 성가시게 알짱거리는 아들놈이 아니다. 단란한 가족을 만들려고 널 거기서 꺼내온 게 아니야. 그저 내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복종하는 개가 필요했을 뿐이다.”

한 회장은 무진을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정말 단 한순간도 무진을 제 아들이라 여겨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떠안겨준다고 해도 싫다고 거절했겠지만 조직을 물려줄 후계자니 어쩌니 했던 것도 그저 달콤한 속삭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무진은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이다. 개처럼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섬기다가 죽어버리거나 쓸모가 없어지면 내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우면 그만일. 한 회장은 입을 꾹 다물고 서 있는 무진에게 못을 박듯 말했다.

“너는 단지, 내 개다.”

슬프거나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원래 알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라고 해도 사람이라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한 회장에 대해선 일찌감치 체념하고 있었기에 그저 분노만이 치밀 뿐이었다. 무진의 주먹이 꽉 쥐어진다. 무진은 이를 악물고서 한 회장을 노려보다가 간신히 입을 떼서 한 회장에게 물었다.

“한 번쯤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그런 생각이라?”
“내가 당신의 뒤를 핥는 개나 다름없었는지는 몰라도. 그 개가 뒤돌아서서 당신을 물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넌 날 물 수가 없다.”
“그 생각, 오늘부로 다시 해보시죠.”

한 회장이 무진의 말하는 뉘앙스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순간 무진이 갑자기 땅을 박차며 한 회장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한 회장이 제 옆에 놓인 골프채를 쥐어 들기도 전에 소파 테이블을 밟고 뛰어올라 그의 면상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퍽.

엄청난 마찰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한 회장의 몸이 충격에 비틀리면서 그가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진은 갑작스런 공격에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진 한 회장의 멱살을 잡아 그를 소파 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그리곤 그의 터질 것 같은 복부를 다시 한 번 힘껏 걷어찼다. 이까지 악 물고 걷어찬 탓에 한 회장의 거구가 그 충격으로 크게 들썩였다. 무진은 한 회장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웠다. 한 회장은 두 눈을 부라리며 분개했다.

“너, 이놈……”

빠악.

그러나 제대로 말을 내뱉기도 전에 무진의 성난 주먹이 날아들어 한 회장의 면상을 후려갈겨버렸다. 한 회장은 그만 제 이로 혀를 깨물었는지 입가를 감싸 잡은 채 한참을 끙끙거렸다. 한 때에는 잘 나가는 조폭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나이가 들고 살이 찐 기름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정혜가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살아있는 한, 한 회장이라면 끝내 그녀를 찾아낼 테니까. 자신 때문에 애꿎은 그녀가 상처 입는 게 싫었다. 그래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한 회장에게 보란 듯이 야구를 빼앗겼듯이 더 이상 소중한 무언가가 망가지는 걸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소중한 누군가의 존재가 이 세계에 자신을 단단히 묶어두는 족쇄라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소중한 존재들을 만들어버린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과 다르다. 무진, 자신이 아니더라도 재동을 지켜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라면 끝내 재동을 지켜낼 거라고 그를 믿을 수 있으니까. 다시는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는데 그 상대가 한 회장이라면 상관없을 것 같다. 손을 한 번 더럽히는 것으로 이 지긋지긋한 남자와의 관계가 정리된다면.

“처음부터 이러는 거였는데. 당신도 죽고 나도 죽고. 그러면 간단한 거였어.”

퍼억. 퍽.

무진이 한 회장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 당겨 올렸다가 그의 목을 거칠게 걷어차며 말했다. 숨통이 콱 막혀오는지 한 회장이 목을 붙들곤 한참을 데굴데굴 굴렀다. 한 번 결심을 하면 그만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건 미련이 남았었기 때문일 거다. 이대로 죽어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더 버티고 살다보면 조금은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아주 가느다란 기대를 끝내 놓질 못해서. 하지만 그것도 이제 됐다.

무진은 제 품에서 퍼렇게 날이 선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수없이 얼굴을 걷어차이고 머리를 얻어맞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한 회장은 시퍼렇게 날이 선 무진의 나이프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 밖에 누구 없는 거냐! 이봐! 밖에 누구라도…….”

한 회장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무진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 회장이 먼저 회장실을 나서기 전까진 먼저 사옥을 떠나는 법이 없는 비서와 수십 명에 달하는 수하들 중 누구도 달려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소란이라면 당연히 밖에서도 알아챘을 텐데 말이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눈앞의 무진을 처리하고 난 뒤에 알아보면 될 것이다. 한 회장은 제 재킷 안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내 금방이라도 그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며 달려들 것 같은 무진에게 겨누었다. 사용한지는 꽤나 오래 되었지만 제법 쓸 만한 총이다. 한 회장은 코와 입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쓱 닦으며 씩 웃었다. 승리를 예감한 미소였다.

그러나 무진이 총구를 보고도 주춤하는 법 없이 뚜벅뚜벅 거리를 좁히며 걸어오자 한 회장은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잠시의 망설임도 엿보이지 않았다.

탕.
탕탕.

쩌렁쩌렁한 총성이 회장실 가득 울려 퍼졌다. 시간을 정지시켜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광활하게 퍼져나가는 총성이었다.

“……크악!”

그러나 총상을 입고 나뒹구는 건 무진이 아닌 한 회장 본인이었다. 어느새 벌컥 열려 있던 집무실 문엔 지금 막 층계를 뛰어올라온 재희가 숨을 내뱉느라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서 있었다. 손에는 뿌연 연기를 피워내는 리볼버를 잡아들고서다. 한 회장이 들고 있던 리볼버에서 발사된 총알들은 집무실 문짝과 소파 테이블의 다리 하나를 박살내었을 뿐이었다. 재희의 총에 맞으면서 자세가 흐트러진 탓이다.

재희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서 있을 뿐 뒤를 돌아보지 않는 무진에게 뚜벅뚜벅 가까이 걸어가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를 가볍게 빼앗았다. 그리곤 그것을 제 외투 안쪽에다 집어넣는다. 그제야 무진의 시선이 소리 없이 재희에게 고정됐다.

재희는 잠시 무진을 마주보았다가 눈동자를 굴려 그가 어딘가 한군데라도 다치지 않았는지를 살폈다. 그리곤 무진이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걸 몇 번에 걸쳐 확인한 후에 그의 팔을 잡아 제 뒤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더 이상은 나서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담아 무진의 두 눈을 한 번 쳐다보기도 했다.

“너, 넌…….”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던 한 회장이 얼굴을 완전히 굳힌 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재희를 가까스로 올려다보며 입을 뗐다. 그러나 재희는 한 회장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도록 구둣발로 그의 입을 짓이기듯 밟았다.

“우웁……!”

한 회장이 고통스레 몸을 뒤틀어댔다. 그러면서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지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던 제 총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쭉 뻗는다. 재희는 그 모습을 고요히 지켜보다가 아예 한 회장의 멱살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이미 피가 터진 그의 면상을 몇 번이고 휘갈겼다.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서 휘갈기고, 또 넘어져서 바닥을 기면 그 복부를 거칠게 차올렸다. 특정 표정도 없이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 재희의 얼굴은 지독히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성이 반쯤은 날아간 듯 보이기도 했다.

“검사님! 지금 방금 총성이…….”

열려 있던 회장실 문 밖에서 낯선 이들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한참이 더 지난 후였다. 재희의 지휘 하에 검거에 나선 형사들이었다. 조금 전 울려 퍼진 총성을 듣고 서둘러 재희의 뒤를 쫓아온 것이리라.

재희가 멀쩡하다는 걸, 아니 멀쩡하다 못해서 검거대상인 한 회장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모습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형사들은 서둘러 달려와 땅바닥에 맥없이 고꾸라져 있던 한 회장을 일으켰다. 그리곤 그의 팔에 여지없이 수갑을 채운다. 재희는 한 회장의 머리카락을 휙 잡아당겨 그의 얼굴을 쳐들게 하고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들어두라는 듯이 말했다. 물론 특유의 말끔한 존대를 꼬박꼬박 사용해서다.

“서울중앙지검 형사 3부 석재희 검삽니다. 한인호씨를 살인교사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앞으로 당신이 하는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Second Daddy _ 21







“선배.”

등 뒤에서부터 울려 퍼진 목소리에 급히 검사실로 들어가려던 유 검사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섰다. 뒤를 돌아보니 재희가 서 있었다. 한 회장을 검거할 때에 직접 경찰들을 지휘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지 재희의 옷차림은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늘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리도 제대로 고정되지 않고 엉망이다. 현장까지 얼마나 허겁지겁 달려갔으면.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다. 유 검사는 잡고 있던 검사실 문손잡이를 놓고 재희 앞으로 걸어왔다.

“아까 슬쩍 보니까 한인호, 면상이 장난 아니던데. 네가 그런 거야?”
“네.”
“하여간. 이 대중없는 놈. 사적인 감정이 개입된 건 아니겠지?”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럴 땐 아니라고 해야지, 인마.”

유 검사가 순순히 사적인 감정이 개입됐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하는 재희를 툭 치며 핀잔하듯 말했다. 오로지 정도만을 걸어온 그가 피의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직접 무력을 사용했다는 얘길 전해 듣고 꽤나 놀랐었다. 게다가 피의자는 반항하던 와중에 재희에 의해 총상까지 당했다. 물론 그다지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유 검사는 확실히 해두려는 생각으로 다시 재희에게 물었다.

“실탄은 어쩌다가? 그것도 석검, 네가 먼저 쐈어?”
“아니요.”
“……됐어, 그럼. 부장님한테 깨질 건 좀 각오해야겠지만.”
“박 계장님께 맡겨놓은 파일 있습니다. 한 번 봐주세요.”
“알았어. 볼게. 나 이제 들어가 봐야 돼.”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하지 마. 난 순전히 법에 따라 판단하는 청렴한 검사니까.”

유 검사의 장난기 섞인, 그러나 제법 진지한 어투에 재희가 피식 웃는다. 유 검사는 이만 들어가 보겠다는 듯이 손이 흔들어보이곤 제 검사실로 들어갔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박 계장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다. 유 검사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 인사에 화답하고는 서둘러 제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곤 제 검사실에 먼저 와서 앉아 있는 한 회장을 향해 싱긋 웃어보이고는 그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재희에게 맡기면 일을 수월하게 처리해 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피의자를 잡아다 앉혀 놓을지는 몰랐다. 물론 일단 사건을 배당받으면 뒤로 미루는 법 없이 재깍재깍 처리하는 그지만, 그가 야근까지 해가며 완전히 몰두해서 속전속결한 사건은 아마도 이번 사건이 처음이지 않나 싶다.

한 회장의 얼굴에 난 상처들과 다리의 총상은 모두 재희가 만든 것이란 얘길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에게서 넌지시 전해 들었다. 물론 총성이 총 세 발 울렸고, 그 중 두 발은 한 회장이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총에서 발사된 것인지라 일종의 자기방어로 처리되긴 하겠지만. 폭력행사를 싫어하는 그가 피의자에게 직접 물리적인 폭력까지 행사했다는 점이 제법 의아하다. 그답지 않게 감정적인 처사가 아닌가.

“안녕하세요? 한인호씨. 전 이번 청부살인사건 수사담당인 검사, 유익현입니다.”
“…….”
“변호사 선임이 어쩌고, 묵비권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현장에서 우리 석검이 대신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생략하고 바로 묻겠습니다. 괜찮죠?”
“…….”
“왜 그랬어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꾸도 하지 않는 한 회장에게 지극히 절차적인 이야기를 해대던 유 검사가 돌연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한 회장이 퉁퉁 부운 얼굴을 들어 유 검사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미소가 남아 있는 얼굴을 유지하는 유 검사는 매우 가벼워 보였지만 한 회장의 독기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빤히 보며 ‘네?’하고 제쳐 묻는 것으로 보아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닐 것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한 회장은 뻣뻣하게 나가기보다 피식 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웃으며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했다.  

“대체 검사양반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도통…….”
“박응식 씨와는 오랜 인연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실 테고. 나머지 두 피의자들하고는 정말 모르는 사입니까?”
“모릅니다.”
“연락을 한 적은 없으신가요?”
“모르는 사람과 연락할 일이 뭐 있습니까?”
“피의자들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번 청부살인사건과는 전혀 무관하시다?”
“그렇소.”
“그런데 구속영장은 왜 나왔을까요? 그거 웬만해선 쉽게 안 나오는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명백한 증거가 있어섭니다. 그거 보여드리면 더 이상 발뺌하실 수가 없으실 거예요, 아마.”
“나를 떠보려는 거요?”

그런 어마어마한 오해를 받는다는 게 기분 나쁘다는 듯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따져 묻는 한 회장에게 유 검사는 어깨를 슬쩍 들어 보였다. 처음부터 자신이 그랬노라고 인정하고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유 검사는 재희와 그의 검사실에서 일하는 김 계장이 함께 찾아낸 증거자료를 꺼내 한 회장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피해자를 납치살해 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A씨가 애인 명의로 구입한 대포폰의 통화내역입니다. 16통 중에 15통은 모두 살인교사혐의를 받고 있는 박응식씨와 통화했습니다. 물론 박응식씨도 대포폰을 이용했고요. 유의해서 봐야하는 건 여기 마지막의 16번째 통화내역입니다.  010-0909-6060. 이거 한인호씨 휴대폰 번호 맞죠?”
“……그래. 내 휴대폰이지.”
“그럼, 인정하시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검사양반이 말한 그 휴대폰 번호가 내 휴대폰 번호인 것은 맞지만 그 휴대폰은 몇 달 전쯤에 그만 잃어 버려서 가지고 있질 않아.”  

유 검사는 결정적인 증거를 보고도 크게 놀란 기색 없이 발뺌을 하는 한 회장을 말없이 바라봤다. 유 검사가 생각지도 못한 증거를 내보이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당황한 기색마저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유 검사는 다시 싱긋 웃으며 또다른 증거자료를 내보였다.

“그럼 이건 어떠신가요? 피의자A의 살인을 도운 공범, 피의자B의 휴대폰 통화내역입니다. 물론 대포폰이고요. 총 9통의 통화내역이 있고 그중 1통은 한인호씨 자택번호로 걸려 있습니다. 정확히 피해자가 살해되기 전날이죠. 서로 알지도 못하고 얼굴조차 본 적 없으며 통화는 해봤을 리 만무한 피의자들의 통화내역에 왜 한인호씨의 연락처가 두 번씩이나 걸러지는 걸까요? 혹시 집전화도 잃어버리셨습니까?”  
“…….”

유 검사는 기록 너머로 힐긋 한 회장의 눈빛을 살폈다. 동요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중간에 낀 박응식이 모든 것을 떠안고 가기로 했기 때문에 죽 마음을 놓고 있었는지 움직일 수 없는 증거 앞에서 천하의 그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언제나처럼 느긋이 의자에 앉아서 거만하게 손가락만 까딱여 살인을 교사하고도 그가 잘 해낼 거라고 완전히 믿지 못해 확인전화를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으리라. 너무 철저하게 하려다보면 오히려 오점이 남는다. 지금이 상황이 그렇듯이.

“검사님.”
“무슨 일이죠, 박 계장님?”
“이거 석 검사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고마워요.”

한 회장을 상대로 신문을 하던 유 검사는 조심스레 다가와 한 뭉텅이의 서류를 건네는 박 계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조금 전에 복도에서 재희가 말한 그 자료인 모양이었다.  유 검사는 슬쩍 서류의 첫 페이지를 넘겨서 그곳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글귀를 쭉 훑어 내렸다. 그리곤 이내 제 이마를 볼펜 뒷부분으로 톡톡 치면서 한 회장을 향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물론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고 해서 정말 대수롭지 않은 말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공갈협박죄도 추가되겠는데요? 그 밖에도 이번 청부살인사건 외에 총 7건의 사건에서 폭력, 살인교사, 금품수수 등의 혐의로 기소될 확률이 큽니다. 피해자가 직접 녹취한 통화내용을 포함해서 증거들도 모두 확보됐습니다.”

유 검사는 재희가 검사로 임관한 4년 전부터 쭉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사건들을 보곤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이 많은 사건들을 지난 며칠사이에 정리한 것은 아닐 거다. 꽤나 오래, 관심을 두고 지켜보면서 꼼꼼하고 세세하게 파헤치기 시작했을 거란 거다.

증거인멸의 우려가 많은 피의자의 눈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그의 목을 사납게 물어뜯을 준비를 한 거다. 결정적인 물증이나 증언이 최근에야 확보된 사건들도 여럿이다. 대체 얼마나 공을 들여온 건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재희는.

“내가, 내가 이렇게 혼자서 당하고 있을 줄 알아?!”

흥분하지 않으려고,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던 한 회장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얼굴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목에는 핏대가 뻣뻣하게 서 있다. 그의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검사실의 계장들이 달려와 그를 반강제적으로 다시 의자에 앉혔다. 유 검사는 계장들을 떨쳐내기 위해 온몸을 비틀어대며 씩씩거리는 한 회장을 고요히 바라보며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듯이 말했다.

“혼자 당할 수밖에 없겠어요. 한무진씨는 5년 전에 ‘흑룡회’ 보스 폭행치사 혐의로 부여된 형량 다 채웠잖습니까. 지금에 와서 그게 단순 폭행치사가 아니라 계획된 범죄에다가 조직폭력의 행사였다고 우겨도 돌이킬 수 없단 건 잘 아시죠? 이게 그 유명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고. 뭐, 그 이후엔 딱히 혐의를 부여할 건이 없어요.”
  
한 회장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그를 꼭 붙잡고 있던 계장들이 멍하니 유 검사를 지켜봤던 것은 그가 한 회장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이 얘기하면서도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수사망을 피해가며 자신이 지은 죄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이득을 취해왔던 악 중의 악이 처절하게 바닥으로 내팽겨 쳐지고 있다. 더 이상 그가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손가락 하나 비집어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좁을 뿐이다.

“젠자아앙! 젠자아아아아아앙!”

한순간에, 정말 단 한순간에 자신의 처지가 180도 뒤바뀌어버렸다는 생각을 했는지 한 회장이 온몸을 꿈틀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이번만큼은 그도 자신이 예전부터 그랬듯 유유히 이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란 걸 직감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차가운 철창 안에 갇혀서 조금씩 힘을 잃고 늙다가 죽어갈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지나가기라도 한 듯이. 후회보다는 여전히도 강한 미련이 물씬 풍기는, 그런 비명을 한 회장은 끝도 없이 질러댔다.  














재동은 통통한 손으로 무진의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매만지고 있었다. 무진의 중지를 슬쩍 집어 올려 검지에 척 얹어보기도 하고, 세 개의 손가락을 딱 맞붙였다가 다시 그 사이에 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이를 벌리기도 하면서 손장난을 친다. 그러다가 무진이 슬쩍 녀석을 내려다보면 빤히 고개를 들어 무진을 바라보다간 해쭉 웃는다.

그저 좋은 듯 했다. 같이 공을 차며 노는 것도 아니고, 같이 맛있는 걸 먹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장난감을 사러 손잡고 나서는 상황도 아닌데 그렇게 그저 옆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무진은 병원 침상에 앉아 유 선생의 진찰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골절을 입은 지 2주가 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조금 격하게 몸을 움직인 탓에 다시금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병원에는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낸 재희와 재동이 동행했다. 그전까지는 정한과 창수가 했던 일이다.

한 회장이 구속되면서 와해될 위기에 놓인 조직을 재정비하느라 창수와 정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거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는데, 창수에게서 간간히 안부전화가 걸려오고 정한은 아침마다 찾아와 꼬박꼬박 인사를 한 뒤에 돌아가곤 하니 연락이 아주 끊겼다고는 할 수 없다.

“흠.”

다시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신중하게 들여다보던 유 선생이 낮게 탄식하며 이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상을 당하고도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어느 정도 붙기 시작해야 할 무진의 늑골이 여전히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 선생이 한참동안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기만 하고 이렇다하게 소견을 말하지 않자 초조했는지 재희가 먼저 입을 열어 무진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좀 어떻습니까, 선생님.”
“그동안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대체?”
“거의 침대에서만 지내고, 가끔씩만 몸을 움직였습니다. 혹시 이상이라도 있습니까?”
“이제 다 붙을 때도 됐는데 뼈가 붙다 말았어. 조금 틀어진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뭔가 격한 운동이라도 한 거야?”
“…….”
“…….”

유 선생의 별 뜻 없는 질문에 무진과 재희의 시선이 공중에서 딱 부딪친다. 곧 무진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재희를 노려봤다. 너 때문이라는 강한 분노의 감정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무진이 여태껏 격한 운동을 했다면 딱 두 번 뿐이다. 첫 번째는 한 회장의 사무실로 쳐들어가서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흠씬 두드려 팼을 때. 그때 한 회장이 입은 상처는 모두 구속과정에서 흉기를 들고 반항하는 피의자를 제압하기 위해 재희가 어쩔 수 없이 행사한 자기방어로 처리됐다. 부장검사에게 불려가 심하게 깨지긴 했지만. 두 번째는 그 직전에 했던-여유와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던 재희와의 서툰 섹스다. 무진이 격하게 몸을 움직인 것은 아니었지만, 행위 내내 재희의 품속에서 거의 찌그러지다시피 했으니 몸에 무리가 갈 만도 하다.

무진은 뼈가 채 붙지 않은 원인이 후자에 있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재희는 태연스럽게도, 혹은 뻔뻔하게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과 떨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투는 자못 단정적이기까지 했다.

“한 회장을 구속할 때 주먹을 좀 휘둘러서 그럴 겁니다.”
“하아, 역시 그랬단 말인가? 처음부터 불안하긴 했네. 잠자코 있길 죽기보다 못하는 사람이 늑골을 다쳐서 올 때부터 이게 한, 두 달 가지고 붙어먹을 뼈가 아니란 걸 직감했지.”

유 선생이 붕대를 감아주며 잔소리를 하듯 말했다. 그는 무진이 덜컥 각 티슈를 집어 들어 재희에게 홱 집어던지는 까닭을 짐작하지 못했다. 재희는 대수롭지 않게 무진이 던진 티슈를 받아들어 그것을 잠자코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 무시무시한 태연함과 뻔뻔스러움에 무진은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1년 내내 뼈가 안 붙어서 고생하고 싶으면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하라고.”

붕대를 말끔하게 감아준 유 선생이 무진의 등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리며 말했다. 언제나 늘 잔소리다. 그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진은 싫은 표정을 지으며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긁곤 했지만 정말 그런 참견이 싫었다면 아예 유 선생의 입을 막거나 제 귀를 막아버렸을 것이다.

한 회장은 결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오히려 유 선생에게서 많이 봤다. 유 선생을 보면서 왜 한 회장은 그처럼, 아니 그보다 더 얕은 관심이라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생각하곤 했었다. 이제는 다 부질없는 일이지만.

“내가 부축하겠습니다.”
“됐어.”

무진은 자신에게 기대라는 듯이 침상에서 일어서는 바짝 다가오는 재희를 슬쩍 떠밀곤 진찰실을 나섰다. 재동에게만은 제 손을 잡는 것을 허락하면서다. 걸음을 뗄 때마다 늑골이 욱신거려 견딜 수가 없을 텐데도 그는 재동의 곁에선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녀석과 보폭을 맞춰 걸어갔다. 재희와 마찬가지로 그 위태로운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유 선생은, 한 시도 무진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지 않는 재희에게 말했다.
  
“고맙네.”   
“뭐가 말씀입니까?”
“저 녀석에게 없던 여유를 만들어줘서. 이제야 저 녀석도 사람 같아 보여.”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나야 의사로써 할 일을 했을 뿐이네.”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를 붙잡을 수도, 구해낼 수도 없었을 겁니다.”

유 선생은 깍듯하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재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리고 불안하니 어서 무진을 따라 나가보라는 듯이 그의 등을 살짝 떠밀기도 했다. 재희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해보이곤 조용히 진찰실을 빠져나갔다. 곧 살짝 열려 있던 진찰실 문이 바깥에서부터 나직이 닫힌다.

닫힌 문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유 선생은 허공으로 팔을 뻗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흰 가운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는 창문 앞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곧 병원 밖으로 나서는 무진과 재희, 재동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재희는 무진의 허리를 제 팔로 떠받치듯 단단히 붙잡아 그를 부축했다. 주변에 보는 사람도 많은데 다 큰 남자 둘이 그런 식으로 엉켜 있는 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무진이 버럭버럭 짜증을 내는 소리가 유 선생의 진찰실까지도 들리는 듯 했다. 재동은 고집스럽기 그지없는 두 사람을 멀뚱히 바라보면서 잡고 있던 무진의 손을 앞, 뒤로 가볍게 흔들며 걸어갔다.

엄마는 없었다. 작은 아이 하나와 아빠, 그리고 또 아빠가 있을 뿐인 묘한 구성이다. 그럼에도 걸어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은 여지없이 단란한 가족을 연상케 만들었다. 지켜보고 있는 이도 저절로 웃음이 날 만큼.















세 사람은 오랜만에 수목장림을 찾았다. 풀이 우거져 바닥이 폭신폭신한 수목장림에 들어서자 재동은 양손에 하나씩 붙잡고 있던 무진과 재희의 손을 놓고는 먼저 저만치 달려 나갔다. 발을 내딛으면 폭, 폭 눌려 들어가는 흙의 감촉이 좋은지 방긋방긋 웃는 녀석의 모습이 멀리서도 보인다. 재희와 무진은 그런 재동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 한 회장이 사라진 후 남겨진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조직 분위기는 어떤 겁니까? 혹시나 보복의 위험이 있다면…….”
“너 쌍팔년도 조폭 영화 많이 봤구나? 조폭이라고 다 의리감 끓어 넘치고, 보스를 신 떠받들 듯이 하면서 맹목적인 복종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요즘은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고. 한 회장 그렇게 된 거, 대부분의 놈들은 쌍수 들고 반길 거다, 아마.”

무진이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사람들이 조폭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조직성에 있다. 조직원 중 누군가 한 사람이 다치면 다른 조직원들이 대신 보복을 해주기 때문에. 조폭과 특정 사건에 휘말리고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건 당사자인 조폭이 교도소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의 조직원들이 바깥에 남아 있는 이상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도 조직원들 간의 의리가 남달랐을 때에나 가능한 얘기다.

이제껏 무진의 조직에서 있어왔던 보복은 조직원들 스스로가 동했다기보다 한 회장의 일방적인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 회장이 보복을 명분으로 어떠한 이익을 얻으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폭력을 부추기던 한 회장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의 보복을 자처할 이는 없을 거란 거다. 한 회장이 조직원 중 그 누구도 믿지 못했던 것처럼 조직원 중 그 누구도 그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따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조직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뗄 작정이라는 무진의 의사는 정한을 통해 조직에 전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다시 돌아오리란 미련을 두지 않음으로써 조직에서 더 이상 무진 본인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도록 한 것이다.

차기 보스에 의한 보복도 없을 것이다. 한 회장은 법의 심판대에서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처벌을 받을 테고, 죽기 전에 형량을 마치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조직은 늙고 쇠약해진 노인을 받아주는 자선단체가 아니다. 완전히 힘을 잃은 한 회장의 심복을 자처하는 이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게 한 회장이 만든 조직이다. 그가 자초한 일이라는 거다.
  
이제야 비로소 원치 않았던 일에서 손을 떼게 된 것이다. 과거와 지금이 다른 점은 단지 한 회장이 건재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뿐인데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 재동이 크는 걸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 비현실적인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순전히 재희 덕택이라는 것을 무진도 알고 있다. 무진의 더 나아질 것도, 더 나빠질 것도 없던 삶은 재희가 재동의 손을 붙잡고 나타나면서부터 뒤바뀌기 시작했으니까.  

“뭐야, 이런 거. 좀 이상해.”

정혜가 묻혀 있는 자작나무 앞에서 무진이 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곳으로 처음 정혜를 만나러 왔을 때와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라곤 없다. 당시에도 무진은 재희, 재동과 함께 이곳을 찾았었다.

다만 그땐 몰랐던 재희의 감정을 알게 됐고, 당시엔 당혹스럽고 거부감이 들기만 하던 그의 감정에 서서히 무진의 마음도 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좀 달라졌을 뿐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결국 달라진 것은 무진의 마음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정혜 앞에 재희와 나란히 서자니 괜히 낯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정혜는, 알고 있었을까? 사람을 잠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단박에 파악하곤 하던 그녀라면. 재희의 마음도 조금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라서 믿었던 걸 거다. 오랜 기간 친구로 지내왔던 그의 성품과 책임감을 잘 알아서, 그리고 그라면 꼭 재동에게 무진을 찾아줄 거라고 믿어서.

정혜가 지독한 병마와 싸우면서도 재동을 끝내 낳아 키우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재희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나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라면 지극히 위태로운 무진도, 자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무진의 상처도 모두 감싸안아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대체 왜 이딴 걸 보낸 거야.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너는.”

무진이 자작나무를 올려다보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다소 진심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다분히 장난스러운 어투였다. 시선은 단 한순간도 재희에게 닿지 않았지만 그의 말속에서 ‘이딴 거’라는 게 재희를 지칭하는 것임은 듣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거였다.

“불평해도 다신 안 놔줄 거니까요.”

재희는 구시렁거리는 무진의 손을 제 손으로 가볍게 끌어당겨 잡으며 말했다. 그런 것에 익숙할 리 없는 무진이 화들짝 놀라 손을 빼내려는 걸 되려 깍지까지 껴서 꼭 잡아 내린다. 팔을 위, 아래로 휙휙 휘둘러 재희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려던 무진은 그러나 이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의 귓등은 그 언젠가 그랬듯 발갛게 달아올랐다.

재동은 여전히 여기저기서 폴짝, 폴짝 뛰어오르는 풀벌레를 정신없이 눈으로 좇고 있었다. 풀벌레를 잡기 위해 손을 뻗으면 여지없이 풀벌레는 재동의 느린 손을 피해 저만치 달아나버리곤 했다.

한참동안 허탕만 치던 재동은 근처의 풀 위로 폴짝 뛰어와 앉은 풀벌레를 발견하고는 제 두 손바닥을 마주대고서 살금살금 풀벌레에게로 다가갔다. 풀벌레는 목을 이리저리 꺾기도 하고 두 다리를 비비기도 하면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재동은 침까지 꼴깍 삼켜가며 서서히 풀벌레와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그리고 이내 놈이 긴 뒷다리를 이용해 폴짝 뛰어오르자 허공에 대고 두 손을 순간적으로 탁 닫았다. 두 눈까지 질끈 감고서다.

“……?”

잠시 후 재동은 감고 있던 두 눈을 슬며시 떠올렸다. 마주 잡은 손바닥 안에서 무언가가 탁, 탁 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 사방을 홱홱 둘러봤지만 조금 전 보았던 풀벌레는 온 데 간 데 없다. 재동은 제 손을 바짝 끌어당겨 마주 댄 손바닥을 살짝 떼었다. 그리곤 그 틈으로 손바닥 안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 녹색 풀벌레 한 마리가 들어가 앉아 있었다. 몇 번을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풀벌레를 잡았다. 크게 놀라서 어안이 벙벙하던 재동의 얼굴이 금세 활짝 펴지면서 녀석의 통통한 두 볼도 복숭아 빛으로 확 물든다.

“아, 아…….”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재동이 멀리 떨어져 있던 무진과 재희를 향해 제 짧은 팔을 홱 들어 보이며 입을 뗀 것은. 불분명한 발성이었고, 발음조차도 어눌했지만 분명 녀석은 목소리를 쥐어짜며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을 쉴 새 없이 오물오물 거리고 있었다.

자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신기하게 생긴 풀벌레를 잡았다는 걸 두 사람에게 실컷 자랑하고 싶어서. 두 볼이 아릴 정도로 열심히 입을 옴짝거리던 재동은 다른 소리를 내보았다.

“파…… 빠…….”

여전히 목소리는 너무도 작아 무진과 재희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재동은 다시 제 두 손을 눈에 바짝 가져다 대고 안을 들여다봤다. 풀벌레는 여전히 녀석의 작은 손 안에 있었다.

재동은 폴짝폴짝 뛰듯이 재희와 무진에게 달려갔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위태롭게 뛰는 와중에도 열심히 입을 오물거렸다. 녀석의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가빠지기 시작한 숨결과 함께 불분명한 발음을 구사하는 음성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재희와 무진을 향해 돌진하듯 투다다다 달려오던 재동은 결국 무진의 다리에 제 얼굴을 팍 파묻다시피 부딪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던 무진은 제 다리에 얼굴을 묻고 허우적거리는 재동의 어깨를 잡고서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안 다쳤어? 왜 이렇게 허우적거려.”
“아…… 파아! 아파……빠, 아빠!”

두 볼이 발갛게 상기돼서는 동그란 두 눈을 반짝이며, 제 두 팔을 모아잡고는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 해쭉 웃는 재동의 모습에 무진은 할 말을 잃었다. 재희도 멍하니 재동의 모습을 지켜봤다. 재동이 조금 전에 말을 했었다. 서럽게 울 때에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아이가 완전히 들떠 ‘아빠’라고 신이 나서 외쳤다. 두 사람의 귀가 모두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무진은 덜컥 재동의 볼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 탓에 제 볼이 마구 찌그러지고 있는데도 재동은 모아 잡았던 두 손을 살짝 펴서 그 안에 앉아 있던 풀벌레를 무진과 재희에게 보여주며 또다시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요거. 요거. 재동이가 잡았어. 아빠, 요거…….”

재동의 손에 앉아 있던 풀벌레가 폴짝 날아올라 도망을 쳤다. 무진이 갑자기 덜컥 재동을 제 품에 끌어안는 바람에 하마터면 두 사람 사이에서 짜부라져버릴 뻔했기 때문이다. 숨이 막혔는지 재동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입술만 뻐끔뻐끔 거린다. 그러나 무진은 녀석의 동그란 머리통마저 손바닥으로 감싸듯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다시 말해봐.”
“아빠?”
“다시.”
“아빠.”
“또.”
“아빠아아아아!”

계속해서 다시 말해보라는 무진의 요구에 재동이 올챙이배에 힘이 빡 들어갈 정도로 바짝 힘을 줘서 무진을 불렀다. 녀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수목장림을 가득 울려 퍼진다. 무진은 옆구리의 상처가 쿡쿡 쑤시고 있다는 것조차도 무시하며 재동을 번쩍 안아들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재동도 제 몸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자 마냥 기분이 좋은지 까르륵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재희는 지치지도 않는지 재동에게 계속 자신을 불러보라고 시키는 무진과 누가 그의 아들 아니랄까봐 쉬지 않고 ‘아빠’를 부르짖는 재동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기적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다.

세 사람의 앞에 우뚝 서 있던 자작나무 가지가 가느다란 바람에 하늘하늘 기분 좋게 흔들렸다.








Second Daddy _ 完







아직 새벽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방 안에 여실한데 재희가 두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시야 안으로 몰려든다. 탁상 위 시계를 집어다가 시간을 확인한다. 평소보다는 2시간 남짓이나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만 일어나야 한다. 출근 전에 준비해둬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재희는 침대 매트리스가 흔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조심해서 제 몸을 일으켰다. 그 약간의 뒤척임에도 금세 미간을 찌푸리는 무진이 곁에서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재희가 슬쩍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자 이불이 엎드려 자고 있는 무진의 허벅지 정도까지 흘러내린다. 무진은 완연한 맨몸이었다.

재희는 침대 밖으로 나서려다 말고 잠들어 있는 무진을 내려다봤다. 평소에 무진은 재동과 같은 방을 쓴다. 재동을 침대에 눕혀놓고 녀석이 잠들 때까지 기다린다는 게 같이 잠들어버리기 일쑤라는 거다. 지난밤처럼 무진이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에 재동이 잠들어버린 다거나 할 때에만 별 수 없이 재희의 침대를 빌린다. 한 번 눈을 뜬 이후에는 늘 굶주려 있는 것처럼 격정적으로 달려드는 짐승의 침대를 빌린다는 게 순전히 잠만 잔다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무진의 몸 여기저기에 성나게 물어뜯긴 자국이 여실히 남아 있는 것으로만 보더라도.

찬 기운에 어깨를 움츠리는 무진의 모습에 재희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다가 덮어준다. 그리곤 그대로 나서질 못하고 고개를 숙여 무진의 목덜미에 가만히 입을 맞춘다. 무진의 뜨끈뜨끈한 온기가 입술에 그대로 옮겨지는 것 같았다. 재희는 손가락으로 무진의 귓불, 귓바퀴 등지를 간질이듯 가만가만 매만지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욕실로 들어가 말끔히 씻은 후 로션을 발랐다. 그리곤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어둠이 깔려 있는 부엌에 불을 켜곤 물을 틀어 두 손에서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이 닦아냈다. 그리곤 냉장고 문을 열어 필요한 재료들을 모두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둔다. 단무지, 우엉, 햄, 당근, 계란, 유부, 식빵 등이 식탁을 한가득 채웠다. 가장 먼저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그리고 준비했던 재료들을 차례로 씻어 껍질을 까고, 도마 위에서 일정한 두께로 썰어냈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갓 볶아져 나온 야채들은 먹음직스럽게도 좀 더 선명한 빛을 냈다.

재희가 갓 지은 밥을 기름과 소금으로 간하고, 준비해둔 재료들을 모두 정리해 식탁 위에 세팅을 마쳤을 무렵 침실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들어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무진이 몸을 구부리며 바닥에 떨어진 제 옷을 줍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엌의 소란스러움에 일찌감치 깨어버린 모양이다. 무진은 바지를 추켜 입고, 티셔츠를 목과 팔에 끼어 입으면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벌써 일어났습니까?”   

재희의 물음에 무진은 고개만 천천히 끄덕여 보이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대답을 한답시고 입을 열면 보나마나 잔뜩 녹슨 목소리가 튀어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곧 무진이 들어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잠을 쫓아내려는 모양이었다. 마음 놓고 편하게 잘 수는 없었을 거다. 오늘은 무진이 재동의 아빠로써 처음 맞는, 재동의 소풍날이었기 때문이다. 바쁜 재희를 대신해 어린이집 소풍에는 무진이 따라가기로 했다. 사실 재동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것이나, 준비물을 챙기는 것, 행사에 대한 이야길 듣고 오는 것 등 어린이집에 관한 모든 일은 이제 완전히 무진의 담당이 되어버렸긴 하지만.

재희가 김밥을 말고 있을 때 무진이 젖은 머리에 수건 하나를 대충 얹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터덜터덜 식탁 앞으로 걸어와서 재희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샤워를 했는지 그의 몸에서 달큼한 비누냄새가 났다. 혈액순환이 잘 돼서인지, 밤새 재희가 물어뜯었던 살갗들이 한층 더 불그스레해진 것 같다. 무진은 재희가 키스마크를 남발해놓은 쇄골 주변이 간지러운 듯 벅벅 긁으면서 매끄럽게 말려 있는 김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먹어보세요.”  

재희는 재동이 먹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얇게 썬 김밥을 그릇에 담아 무진에게 내밀었다. 무진은 예쁘게 잘 썰려 있는 김밥을 놔두고도 가장 끝부분을 집어 입속에 밀어 넣었다. 금세 무진의 한쪽 볼이 톡 튀어나온다. 재희는 김밥 하나를 더 말면서 오물오물 움직이는 무진의 입과 볼을 바라봤다. 무진이 또 하나의 투박한 김밥 끄트머리를 집어 들었을 때에는 달큼한 비누냄새가 확 풍겨오며 후각을 자극했다. 무진은 들고 있던 김밥을 마저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맛있네.”

툭 내뱉듯이 한 말임에도 재희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무진은 이리저리 식탁을 살피다가 간장 등에 절여진 유부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덥석 그것을 손으로 집으려다가 비닐장갑을 끼고 있는 재희의 손을 보고는 저도 비닐장갑을 꺼내 손에 낀다. 익숙하지 않은 비닐장갑을 끼려니까 한참이나 낑낑 거려야 했다. 도중에 비닐장갑 서너 장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힘겹게 비닐장갑을 낀 무진이 김밥을 모두 다 싸고 뒷정리를 하던 재희에게 물었다.

“밥을 이거 안에다가 쑤셔 넣으면 돼지?”
“방법은 그렇습니다만…….”
“간단하네, 뭐.”

무진은 그렇게 말하곤 유부를 벌렸다. 그러나 간장에 조려져 부드러워진 유부는 무진의 무지막지함에 쪽 찢어지고 말았다. 무진은 찢어진 유부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다시 하나를 더 집어서 천천히 사이를 벌렸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버리고 만다. 몇 번을 더 시도하던 무진은 결국 괴상한 모양의 유부초밥만 연달아 만들어 놓곤 손을 뗐다. 어딘가에 구멍이 나거나 미어터질 것처럼 밥을 쑤셔 넣은 유부초밥은 냉큼 제 입속으로 집어  넣는다. 소풍가는 날이면 도시락은 아이들의 자존심이 되지 않던가.

자신이 만든 괴상한 유부초밥을 먹던 무진은 조금 전부터 재희가 샌드위치를 만들다말고 자신을 빤히 보는 걸 알아챘다. 무진이 슬쩍 눈동자를 굴려 재희를 쳐다봐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무진은 제 손으로 집고 있던 유부 초밥을 들어 재희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자 재희가 알아서 입을 벌려 유부초밥을 입에 머금는다. 얼결에 재희의 혀끝에 손가락이 닿자 무진이 홱 제 손을 빼냈다. 아주 살짝 그의 귓등이 붉게 물든다.  

삽시간에 도시락이 완성됐다. 무려 4단에 걸친 찬합에 과일이며 김밥, 샌드위치, 유부초밥이 제자리를 찾아 차곡차곡 들어가 있다. 그걸 준비하느라 아침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재희가 시계를 보고는 서둘러 앞치마를 풀며 무진에게 당부했다.

“도시락은 다 준비했으니까 음료수만 챙겨 가면 될 겁니다. 혹시 몰라서 소화제도 함께 넣었으니까 재동이가 체한다거나, 속이 안 좋으면 꼭 먹으세요.”
“응.”

무진은 침실에서 외투와 가방을 챙겨들고 곧바로 현관으로 걸어 나가는 재희의 뒤를 잠자코 따라갔다. 문이야 직접 잠그지 않아도 알아서 잠기겠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구두를 신고, 외투의 깃도 제대로 정리한 재희가 나서려다 말고 무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리고 잊지 않았죠?”
“뭘…… 아, 밥 먹는 거? 안 잊었어. 그 정도로 꼴통은 아니라고.”
“안 잊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응. 너도 갔다 와.”

재희는 현관 앞까지 따라 나와서 잘 다녀오라는, 조금은 통속적이지만 그답지는 않은 인사를 건네는 무진을 빤히 쳐다봤다. 괜찮을까? 잠시 생각을 해본다. 재동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무진도 오늘 아침은 보기 드물게 차분하니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을 한 재희는 팔을 뻗어 무진의 허리에 휘감고는 그를 확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미처 버틸 생각을 하지 못한 무진의 몸이 확 딸려오며 재희의 몸에 툭 부딪친다. 그리고 이내 무진의 입술에 재희의 입술이 꾹 짓눌리듯 부딪쳤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뿐.

“아빠…… 재동이 쉬…….”

어느 참에 깬 것인지 재동이 제 방문을 열고 나와 있었다. 이제는 녀석도 방문을 쉬이 열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재희와 무진은 잠시 얼어붙은 것처럼 그대로 붙어 있다가, 재동이 제 통통한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즈음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무진은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뭐해?”

천진난만하게 터져 나온 재동의 질문에 또 한 번 심장이 덜컹 거린다. 무진은 투다다다 재동에게 달려가 녀석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곤 아직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재희에게 얼른 나가보라는 듯이 손을 휙휙 내저어 보이며 재동에게도 말했다.

“아빠 일하러 간대. 빨리 손 흔들어줘.”
“아빠, 빠빠.”

재동이 제 손을 쫙 펼쳐서 재희를 향해 팔랑팔랑 흔든다. 머리는 잔뜩 뻗쳐서, 아직 잠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무진은 그대로 재동을 들쳐 안고 욕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재희가 대뜸 구두를 벗고 들어와 무진의 어깨 너머로 제 고개를 드밀며 재동의 볼에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지 않았다면. 재희는 재동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조금 있다 보자.”
“응.”

재희는 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다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재희가 나가고 현관문이 닫히고 밖에서 들리던 그의 인기척이 사라졌을 때까지도 무진은 재동을 품에 안고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조금 있다 보자고 말하던 재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무진의 귓가에서 속삭여졌었기 때문이다. 재동에게 건네는 말인 듯, 무진 자신에게 건네는 말인 듯. 간지러운 느낌이다. 귓가가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다.

“아빠아, 재동이이 꼬추…… 꼬추 터질 거 같아.”

무진은 재동이 제 통통한 두 다리를 빌빌 꼬며 앓는 소리를 할 때에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재동은 울상이 되어 무진에게 매달렸다. 쉬가 마려워 제 작은 꼬추가 터져버릴 것 같다며. 무진은 단 서너 걸음 만에 욕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슬쩍 닫히다 만 욕실 안쪽에서 쪼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밥 냄새가 살짝 고인 부엌에는 재희가 준비한 도시락이 식탁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재동이 아버님도 오셨네요?”

놀이공원으로의 소풍을 앞두고 아이들이 모두 왔는지를 체크하던 어린이집 선생이 재동과 함께 손을 잡고 서 있던 무진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무진 또한 선생을 향해 막 인사를 하려는데 그의 뒤쪽에서 알짱거리고 있던 창수가 제 고개를 앞으로 확 드밀며 어린이집 선생에게 아는 척을 했다.

“나도 왔어요, 아줌마. 오랜만에 보네?”
“자, 그러면 인원점검 끝났으니까 이동하겠습니다.”

물론 어린이집 선생은 창수에게서 홱 등을 돌려서 다시 가장 앞으로 걸어가 버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매몰찬 대접을 받고도 창수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다가 무진을 향해 찍 웃어보였다. 무진은 그런 창수의 면상이 보기 싫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네 놈이 왜 여기 와 있는 거냐?”
“저도 백도회 일에서 손 뗐습니다, 형님.”
“그런데?”
“이제 딱히 할 일도 없겠다, 우리 재동이랑 놀아주려고 왔죠.”

창수가 재동의 볼을 쪽 빨아 삼킬 것처럼 제 주둥이를 내밀며 말했다. 무진은 그런 창수의 얼굴을 홱 밀어내며 재동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 버스에 올랐다.
  
특별히 오늘 어린이집 버스는 두 대다. 맞벌이를 하지 않는 대다수의 엄마들이 아이들의 소풍에 함께 했기 때문이다. 무진도 바쁜 재희를 대신해 재동의 소풍에 함께 하기로 했다. 창수까지 덤으로 끌고 올 생각은 결코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모두 엄마가 따라왔는데 재동은 그런 것은 부럽지 않은지 무진을 보며 방긋거렸다. 친구들처럼 옆에 누군가가 있으면, 그게 엄마든 아빠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무진이 없었던 때에는 어땠을까? 재희는 어린이집 소풍에 동행할 만큼 한가하질 못하니 소풍날이면 재동은 따로 어린이집에 남아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거나, 소풍을 지도하는 선생님과 함께 다니며 엄마와 함께 하는 다른 아이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이렇게 무진이 제 곁에 있다는 것을 무척이나 기뻐하는 것이리라. 무진은 괜히 측은한 마음에 재동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 요거.”

재동은 무진의 손길이 좋은지 두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무진의 손이 슬며시 떨어져나가자 부산히 제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곤 제 작은 손을 무진에게 쫙 펼쳐 보이며 뭔가를 내민다. 말끝마다 ‘아빠’, ‘아빠’ 타령이다. 아마도 자신이 그렇게 불러주면 무진이 참지 못하고 기쁜 표정을 지으니 그걸 알고 그러는 모양이다. 제 스스로 그렇게 불러대고 싶은 것도 있겠지만. 무진은 녀석이 내미는 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리고 이내는 가슴 어딘가가 싸해지는 느낌에 슬쩍 몸을 떨었다.
  
“아빠 요거 좋아하지?”  

재동이 무진에게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자두맛 사탕이었다.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꽤나 오래 전에 녀석에게서 그것을 받은 적이 있다. 어쩐지 홀라당 먹어버리기가 아까워서 늘 품에 지니고 있다가 생각이 날 때면 바스락거리며 꺼내서 보곤 했었다.

습격을 받아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았던 사탕이었다. 재동은 그때 무진이 자두맛 사탕에 집착하는 까닭이 단순히 그것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린아이니까, 딱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무진은 얼떨떨하게 자두맛 사탕을 건네받았다. 그러자 재동이 반대편 주머니를 뒤져 또 하나의 자두맛 사탕을 꺼내더니 그것마저 무진의 손에 쑤시듯 넣어주고는 입을 쩍 벌린다. 그것을 까서 제 입속에 넣어달라는 듯이 말이다.

무진은 사탕의 껍질을 까서 녀석의 입속에 툭 밀어 넣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이 입을 쪽 오므려 사탕을 빨아먹기 시작한다. 녀석의 통통한 볼은 사탕 때문에 더 한껏 부풀었다. 무진은 그 통통한 볼을 제 손가락으로 간질이듯 만져보다가 재동이 재촉하듯 자신을 빤히 보자 손에 들고 있던 자두맛 사탕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제야 재동은 만족한 듯 배시시 웃었다.

“재동아 삼촌은? 삼촌도 고거 잘 먹어. 삼촌도 줘야지.”

무진과 재동이 똑같이 한쪽 볼을 부풀리며 사탕을 먹자 창수가 두 사람 사이로 제 고개를 불쑥 내밀며 입까지 쩍 벌렸다. 그러나 재동은 더 이상 가지고 있는 사탕이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창수가 재동에게 더 이상 가지고 있는 사탕이 없다면 지금 먹고 있는 거라고 달라며 장난을 쳤을 땐 가차 없는 무진의 응징이 가해졌다. 재동이 정말 아쉽게나마 제 입에 물려 있던 사탕을 뱉어 창수에게 건넬 기세였기 때문이다. 창수는 무진에게 제대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서는 놀이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끙끙거렸다.

“자, 도착했습니다. 모두 조심해서 내려요.”

차가 놀이공원의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끝내자마자 어린이집 선생이 아이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하곤 먼저 차 밖으로 내려섰다. 아이들은 저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렸다. 무진도 재동의 손을 잡고선 그 뒤를 따랐다.

요즘 들어 놀이공원으로 소풍을 오는 일이 많아졌다지만 아직 어른의 허리만큼도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탈만한 놀이기구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놀이공원 한쪽에 마련된 작은 동물원 구경부터 했다.

창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랑우탄이 보이면 오랑우탄 흉내를 내고, 사자나 호랑이가 보이면 그들의 포효소리를 따라하면서 재동을 포함한 어린이집 아이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열렬한 반응을 보이자 무진과 창수를 낯설어하던 어머니들의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점심을 먹을 즈음엔 자신들의 돗자리 한쪽을 비워주며 앉으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무진은 재희가 아침 일찍부터 싸준 도시락을 꺼내놓았다. 무려 4단 찬합이다. 1층부터 3층까지는 소풍의 단골메뉴인 김밥, 유부초밥, 샌드위치가 차곡차곡 들어가 있다. 마지막 4층은 여전히 싱싱함을 자랑하는 과일들이다. 이른 새벽부터 이걸 준비한다고 꽤나 부산을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늘 시간에 쫓기는 주제에 말이다.

창수는 다른 집의 도시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니 오히려 더 화려한 도시락을 보곤 괴상한 환호성을 내지르며 음식들을 제 입으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아기 새의 먹이를 챙기는 어미 새처럼 꼬박꼬박 재동의 입에 음식을 집어넣어주면서 말이다.

무진은 배가 불렀다. 그저 재동이 열심히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만 봐도. 그런 말은 어느 부모들이나 다 쉽게 하는, 그저 꾸며낸 말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렇다. 더부룩함과는 거리가 멀다. 뱃속 깊은 곳이 따뜻하게 충만해져 오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전에는 미처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이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놀이기구가 밀집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늘 그렇듯이 아이들이 가장 먼저 타게 된 놀이기구는 안전하고 누구라도 즐길 수 있는 회전목마였다. 어느 엄마들은 아이와 함께 회전목마를 타려고 했지만 또 어느 엄마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밖에 남았다.

재동은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회전목마를 타러 아장아장 걸어가다가 우뚝 발길을 멈추고 서서 회전목마 바깥의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무진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빠! 재동이 저거 타고 올게.”
“응. 조심하고.”
“형님,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유치한 새끼, 저런 게 타고 싶냐?”

무진의 핀잔에도 창수는 꿋꿋이 재동과 함께 회전목마를 타러 갔다. 오르골에서나 흘러나올 법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서 회전목마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자 무진의 곁에 서 있던 엄마들이 서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대느라 바빴다. 그 모두가 아이와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무진은 사진을 찍지 않는 대신 한 순간도 재동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도 된다. 두 눈에만 새겨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빠아!”

재동은 무진이 서 있는 쪽으로 제가 탄 말이 돌아가자 짧은 팔을 힘껏 들곤 열심히 흔들었다. 무진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다른 아이들이 재동처럼 행동하면 엄마들은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보기 위해서다. 사진을 찍던 엄마도, 무진처럼 잠자코 쉬면서 아이를 지켜보던 엄마도 아이의 손짓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무진은 여전히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재동을 향해 제 팔을 쭉 들어 있는 힘껏 흔들어줬다. 멀리에 있는 누군가가 보더라도 확연히 보일 만큼 큰 동작이었다. 그러자 재동의 얼굴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녀석에게 필요한 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와 엄마가 있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 그것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녀석을 쭉 지켜보면서 녀석이 뭔가 행동을 보이면 그것에 작은 반응이라도 해주고, 녀석이 입을 조잘거리면 그 말을 귀담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 사실 모든 아이들이 제 부모에게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이지 않겠는가. 그 단순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생각보다 더 힘들 뿐이지.

아이들이 탈 수 있는 수준에서의 놀이기구를 서너 가지 더 탄 다음, 어린이집 선생들은 돌아갈 사람들은 모두 어린이집 차량을 위해 함께 돌아가고 놀이공원에 남아서 좀 더 시간을 보낼 사람들은 그렇게 하라는 말을 전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달래서 어린이집 차량에 탑승했다. 무진도 재동의 손을 잡곤 미련 없이 놀이공원을 등지고 걸어갔다. 그러나 창수는 자꾸만 미련이 남는지 타보지도 못한 놀이기구를 돌아보며 무진을 조르듯 말했다.

“형님, 더 놀다가요. 네?”
“안 돼, 약속 있어.”

그러나 무진은 제 휴대폰을 꺼내 시간까지 확인해가며 냉정하게 창수의 애원을 거절했을 뿐이었다.



















“석검, 지금 가냐?”

유 검사가 검사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다가 김 계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재희의 모습을 보곤 그대로 문가에 멈추어 서며 물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김 계장과 살짝 눈인사를 나누곤 도로 밖으로 나갔다.

곧 재희가 그의 뒤를 따라 검사실 밖으로 나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유 검사의 뒤를 따라 나왔다기보다 단순히 퇴근을 위한 과정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재희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유 검사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오늘은 따로 저녁 약속이 있는지 연방 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바쁜 것 같으니까 바로 말할게.”
“뭔데요?”
“그 사람, 죽었어.”

유 검사에게서 전혀 의외의 말이 튀어나오자 재희의 시선이 한동안 손목시계에 고정되어 있다가 천천히 움직여 유 검사에게 닿는다. 그의 두 눈에는 약간의 놀람과 의아함, 당혹스러움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유 검사가 죽었다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정확히 지칭하지 않았는데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그렇게 에둘러서 표현해도 의미가 통하게 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없지 않은가.

한 회장이다. 유 검사가 담당했던 청부살인사건의 피의자로 기소된 데다가 총 7건에 달하는 여죄가 밝혀지면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제 막 교도소 생활을 시작한.

자살일리는 없었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혹은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해 목숨을 끊을 정도의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엄청난 사건들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어쩌다가 그랬답니까?”
“운동시간 이용해서 밖에 나와 있을 때 수감자 중 하나가 갑자기 달려들었다나 봐. 흉기로 단박에 경동맥을 찔렀다는데 자세한 내막은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래도 밖으로 얘기가 새어나가면 또 언론들이 난리칠 테니까 쉬쉬하는 것 같아.”
“그 수감자는 누구죠?”
“이름까지는 모르겠는데 ‘흑룡회’라는 조직에 있었던 사람 같아. 어차피 무기수니까 사람 하나 더 죽여서 죄가 무거워져봤자 상관없다고 여긴 건지, 뭔지. 너도 알지? 한인호의 ‘백도회’랑 그 무기수가 소속되어 있던 ‘흑룡회’랑 꽤나 상극이었다면서. 5년 전부터라고 하던가? 한인호 구속되기 직전에도 ‘흑룡회’하고 사사로운 마찰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더라고.”

유 검사의 말을 듣고서야 대충 짐작이 갔다. 한 회장이 어느 날 갑자기 죽임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 그가 그렇게나 명분으로 붙이기 좋아했다던 ‘보복’을 그 스스로가 당하게 된 거다. 그렇게 보면 폭력조직인 ‘흑룡회’는 한 회장의 ‘백도회’와는 달리 여전히 조직 간의 의리를 중요시 여겼던 모양이다. 아무리 무기수여서 죄가 더 무거워지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제 조직을 짓뭉갠 것에 대한 보복을 행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한 회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이익을 위해 ‘흑룡회’와의 접촉도 불사하며 욕심을 부리다가 화를 입은 거다. 결국 그의 지나친 욕심이 독이 되어 그를 죽였다.

“아, 내가 좀 오래 붙잡았나보다. 그럼 가봐, 석검. 내일 보자고.”

유 검사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재희의 등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야근을 해야 하는지 터덜터덜 제 검사실 쪽으로 걸어갔다. 이내 검사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유 검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재희도 지하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양심만은 온전히 붙든 한 법조인으로썬 한 회장의 죽음이 달갑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그를 평생 평온함에 살게 해주고 싶은 한 남자로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누구도 감히 그를 불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 못하리란 생각에. 그로 인해 다시는 그가 곁에 있고 싶은 사람들에게서 등 돌리며 도망치지 않게 될 거란 확신에.















“젠장, 늦었잖아!”

차에서 서둘러 내리는 재희를 향해 무진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미간을 확 일그러뜨린 채다. 오늘은 재동의 어린이집에서 소풍을 가는 날이었고, 무진이 그곳엔 자신이 따라갔다 오겠다고 하기에 그걸 빌미로 무진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약속을 했던 참이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이 1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검사에게도 출퇴근 시간이란 게 있기야 하지만 칼퇴근을 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서 조금 넉넉하게 약속시간을 잡았는데도 이 모양이다. 길이 막힌 탓도 있었다. 덕택에 무진은 재동과 함께 약속장소에서 꽤나 오래 기다렸을 거다.

재희는 무진이 들고 있던 빈 찬합을 얼른 받아들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곤 소풍까지 다녀오느라 피곤할 텐데도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던 재동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녀석의 의사를 물었다.

“재동인 뭐 먹고 싶어?”
“꼬기!”
“한무진씨는요?”
“고기 먹고 싶다잖아. 그거 먹어.”
“아빠 다 됐네요.”

재동이 먹고 싶은 걸 먹자는 무진이 대답에 재희가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무진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재희의 시선을 피했다. 누군가 웃으며 말을 하면 왠지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아 싫었지만 재희의 의도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다, 어쩐지 느낌이 싫지도 않았다.

무진은 약속시간을 훌쩍 넘겨서 나타난 재희가 괘씸했는지, 혹은 자신에게서 한 시도 떨어져나가지 않는 재희의 적나라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내서 각오해두라는 듯이 말했다.

“네 지갑, 오늘 완전히 거덜내줄 테다.”
“원하는 밥니다.”
“계산서가 나오고도 그렇게 여유 부리는지 한 번 보자고.”
“아빠, 꼬기!”
“그래. 고기 먹으러 가자.”

재희가 재동에게 손을 내밀자 재동이 익숙하게 재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나머지 한 손을 무진에게 내밀어 그의 손을 잡는다. 무진은 재동의 머리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걸었다. 녀석이 돌부리에라도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을지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재희는 그런 무진의 옆모습을 보며 걷는다.

어느새 석양이 져서 하늘이 온통 오렌지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사랑스레 지켜보는 무진의 얼굴 옆면도 그 빛에 물든다. 이거다, 바로. 진정으로 원했던 건. 늘 꿈꿔왔던 건.
  
서서히 저물어가는 석양에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뜨려졌다.










+) 안녕하세요, 순결한 보이시즌입니다:D
먼저, A동의 능력자이신 '아로네'님께서 그려주신 삽화 주소를 붙입니다. 정말 훈훈한 세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으니 꼭 감상하시길 바랍니다:D
http://pds15.egloos.com/pds/200909/11/91/f0059191

소설 제목 옆에 또다시 '完'자를 써붙이고 나니까 후련합니다. 그리고 쪼끔 아쉽기도 해요. 사실 내용상 21편에서 끝이 났어도 무방하지만, 행복의 오오라가 풍기는 21편에서 한 회장의 끝이 어찌 되었는지를 넣을 부분이 도저히 없기에 한 편을 더 만들었습니다. 그대로 사건만 처리해놓고 끝내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여러분이 원하시는 건 앗흥앗흥하거나 입이 쩍쩍 붙을 정도로 달짝지근한 것이니까......하지만 능력이 없는 저는 이 정도에서 끝을 내볼까 합니다;ㅁ;

한 회장은 벌집을 쑤신 꼴로, 흑룡회를 짓뭉겠다가 화를 자초했습니다. 무진뿐만이 아니라 제 수하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벌레 죽이듯 했던 놈이니 완전히 사라지는 게 세상을 구하는 겁니다. 무진이는 첫부분에 비해 많이 유들유들해졌군요. 행동이나 말투나 표정이나'ㅂ'......자, 여러분.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제껏 무진이가 재희를 뭐라고 불렀는지만이라도 생각해 봅시다. (니 새끼, 네 놈, 개XX, 씨X놈 등등 다채로운 어휘구사력을 선보였었죠.) 그런데 이젠 그냥 '너'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어마어마한 발전입니다*-______-* 뭐, 이름이라도 불러주는 날엔 매일 밤 홍콩으로 날아가겠군요.

재희는 원하던 바를 다 얻었으니 이제 늘 입을 귀에 걸고 다닐 것 같고, 무진이는 저렇게 차차 아들 바보가 되어갈 것 같습니다'ㅂ' 주인공인 두 아빠들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던 재동아, 이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렴;ㅁ;  

이제껏 이 긴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_ _)*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더 좋은 글로 찾아뵐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이만 물러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 생기시고, 나날이 평온하시길 바랍니다.


收藏
文澜德Wland2.4.0 beta

Powered by kumame

hellowland.lofter.com

我们需要你的支持!
帮助中心
服务条款
公告栏
创作辅助工具
浏览器推荐
Keep Writing,Keep Thin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