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5657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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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12 20:54
<주인공 친구 ‘A’에 관한 고찰>
part 1. 무명배우 A
스물 아홉, 아홉수를 지나고 있지만 특별히 나쁠 것도 그리 좋을 것도 없는 내 직업은 남들이 듣기에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배우. 언뜻 화려하고 늘 주목받는 일상을 살아갈 것 같지만 그런 부류는 소수, 정해져 있었고 내 경우는 그 화려한 소수의 그늘에 가려진 쪽이었다. 무명배우, 강신형. 그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내가 맡는 역할은 늘 주인공의 친구, 처음 몇 씬 등장하다가 설명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다반수인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이름조차 없이 친구 A이나, 1로 표기되는 일도 다반사. 영화의 경우에는 찍어놓고 단 한 씬도 등장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강신형이라는 배우를 아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나 드라마의 어떤 역할로 나왔다고 해도 알아듣는 이는 전무했다. 그러나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안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욱 비정상적인 것이다. 나 조차 내가 맡은 역할 중에 딱히 인상적이라 느낀 것은 거의 없으니까.
얼굴 보통, 키도 작지는 않은 정도 약간 마른 체질의 몸을 개선해보고자 헬스를 다닌 적도 있었지만 몸 좋다고 캐스팅이 더 잘 될 일은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 몇 개월 만에 금방 그만두었다. 타고난 체질상 딱히 성과도 없었고. 차라리 눈에 띄게 개성적인 얼굴이었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만한 인상적인 조연이라도 맡았을 수 있었겠지만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인 얼굴이라 그조차 불가능했다. 애초에 처음시작부터가 불순했으니, 불평을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었다.
사실 나는 누군가와 같은 세계에 있고 싶다는 어리석고 감성적인 이유로 이 직업을 선택했다. 사실 그런 것 치고는 운이 좋았을 지는 모른다. 결국 나는 그 어리석은 바람대로 ‘그’와 같은 세계에 들어왔고, ‘그’ 덕분에 작은 역할이라도 꾸준히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주인공의 친구 역만 전전하다 보니 점점 맡는 역할은 초라하고 작아졌고 이제는 그마저도 띄엄띄엄이라 쉬는 동안에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었다. 이것이 서른을 목전에 둔 내 현실이었다.
문득 내 인생이 크리스마스 케이크 위에 장식된 눈사람 장식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눈에 띌 정도로 화려 하기라도 하면 푸념할 이유조차 없겠지. 그보다도 눈에 띄지 않는 나무장식 정도 일 것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리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가끔 어린아이들이 흥미로 그것을 입에 넣거나 맛을 보기도 하겠지만 원하던 달콤함을 얻지 못해 금방 뱉어낼 것이 뻔했다. 물론 보기 좋은 케이크가 눈길이 가긴,하겠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 나 케이크의 맛이었다.
나 또한 주인공의 삶을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학시절엔 친구의 단편영화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비록 시작이 불순했긴 했지만 자신이 썩 재능 없는 편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재능있고, 눈에 띄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기력으로 승부하기엔 내 연기는 평범한 수준이었고 그렇다고 얼굴이 잘생기거나 특이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될 수 있는 한 이 바닥에서 버티고 싶었다. 아직 여러 가지 미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가 장 큰 미련은 나를 이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세계로 들어오게만든 ‘그’ 에게 있었다.
*
“유은태, 신현아랑 결혼한다며?”
낯선 손님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인 적은 없었지만 익숙한 이름의 등장에 어쩔 수 없이 온몸이 움찔거렸다.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물론 일면식 없는 지나는 행인들 역시 그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유은태는 20대 남자 배우 중 독보적인 인기와 히트작을 지닌 배우였다. 그는 여자보다 더 깨끗한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에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역할에 따라서는 까칠한 실장님이나 거친 조폭으로 변신도 가능한 배우였다.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주로 트랜디한 드라마에 자주 출연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이름과 얼굴을 기억한다.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등에도 팬덤이 형성되어 있는 한류스타이기도 하다. 많이 버는 만큼 기부나 선행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었고 학창시절부터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에 엘리트집안 출신이기 까지 했다. 여러모로 완벽한 남자로, 많은 여자들의 이상형으로 꼽힐만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은태는 그들이 알기 이전부터 나에겐 동경과 애정의 대상이었다. 내 자신이 그의 1호 팬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애설 날 때는 아니라고 잡아 때더니. 갑자기 결혼발표라니.”
“그래도 엄청 잘 어울리잖아. 속 쓰리긴 하지만 신현아라면…. 인정해야지.”
씁쓸하고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여자 손님은 쉽게 유은태의 피앙새를 인정하는 눈치였다. 그들의 인정이 뭐가 중요 하겠냐만은 그 점에 있어선 나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로맨틱 코미디에 최적화된 남자 배우로 유은태를 떠올린다면, 단아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여배우라면 당연 신현아를 떠올리는 편이었다. 단순히 예쁘고 화려한 여배우야 많았지만 신현아 같은 배우는 심은하 이후에 처음이라고 화자되곤 했다. 영화에도 자주 출연하는 것을 보면 감독들 사이에서도 그 이미지와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울리긴 하지만, 아직 나이도 어리면서 벌써 결혼이래.”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29살이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니잖아.”
“잘 나가는 배우면, 한창때잖아.”
“유은태 정도면 결혼해도 잘 나갈 거야. 유부남이면 어때?”
맞는 말이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요즘은 결혼 여부가 배우에게 마이너스로 적용되는 일은 없었다. 외모나 이미지로 승부하는 아이돌도 아니거니와 이미 대체 불가능한 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유은태였다. 낯선 이의 칭찬에 괜히 어깨가 으쓱하다가도 어젯밤 연에 정보 프로에서 보았던 기자회견 모습을 떠올리면 어쩐지 마음 한편이 통째로 사라진 기분이 든다.
그 명백한 공허함을 인식하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친한 친구의 결혼 소식이었다. 비록 그 친한 친구의 얼굴을 본 지가 한 달이 넘었지만 워낙 바쁜 녀석이니 서운함을 느낄 리는 없었다. 결혼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전화로 알려줬었으니까.
‘신형아. 나 현아랑 결혼하기로 했어!’
아직도 그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어떤 시상식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떨림과 환희가 뒤섞인 고백이었다. 아마도 친하게 지내는 동료나 매니저에게 이야기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비록 학생이었던 때처럼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지만 우리에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유대감이 존재했다. 함께 있지 않아도 어떤 마음인지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만나지 않다가 만나도 자연스럽게 편안했다. 물론 내 경우엔 그를 편하게만 대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 했지만.
“……샷 추가.”
멍하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머릿속에 거칠고 지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바로 곁에서 둘림에도 겹겹이 쌓인 벽 너머에서 둘리는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졌기에,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 얼굴을 불손하게 노려보고 있음을 의식조차 못했다.
“이봐요!”
목소리의 남자가 카운터를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며 외쳤을 때에야 나는 부질없는 생각을 깨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큰 소리가 나자 카페의 손님들 모두가 카운터 쪽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예? 손님…….”
“에스프레소. 샷 더블.”
눈앞의 손님은 모자를 푹 눌러 쓴 것으로도 모자라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입가엔 제멋대로 자란 수염으로 거뭇거뭇했다. 거기다 낡아빠진 추리닝, 보이진 않지만 왠지 운동화가 아닌 슬리퍼를 신고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거칠게 잠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짙은 피로감까지.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
그제야 그가 주문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아차 싶은 마음에 즉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이럴땐 무조건 정중히 사과를 하는 것이 좋은 점객태도였다.
“죄송합니다.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쉽게 화를 가라앉히지 않을 인상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별말없이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떨리고 급한 마음으로-그도 그러 것이 남자의 인상이 상당히 험악하고 불편해 보였기 때문에-커피를 내려 건네자 그는 그것을 들고 휙, 급하게 사라져 버렸다. 피로에 찌든 모습으로 보아 상당히 바쁜 일을 하던 중에 커피를 사러 들른 모양이었다. 게다가 에스프레소. 더블샷이라니.
너무도 잘 나가는 바람에 길거리에 얼굴을 내놓고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또 그럴 시간도 없고-바쁜 드라마 주인공과 달리 그 주인공의 친구 역할을 전전하는 나는 배우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었다. 일거리가 꾸준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
몇 년 전 만해도 계절에 하나씩 드라마에 들어가고 종종 영화의 단역 제의도 들어왔지만 요즘엔 같은 기획사인 은태의 드라마에 겨우 구겨넣 듯 그의 친구역할 혹은 직장동료로 출연시키곤 했다. 그조차 이제는 팀이 길어져 남아 도는 시간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으니까.
집에 손을 벌리는 것도 한 두 번이어야지. 반대가 심해 여전히 아들을 소 닭 보듯 하는 아버지와 달리 그래도 어머니는 물심양면 나를 응원해 주었다. 어머니의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일일드라마 단역으로-역시나 주인공의 친구로-출연했을 때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비록 짧은 씬이라도 매일같이 드라마에 등장했으니 말이다.
은태 역시 내게 어려운 일 있으면 편하게 말을 하라고 해줬지만 내가 어떻게 그 녀석에게 돈을 빌릴 수 있을까. 그것이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손님하고 트러블 있었냐.”
사무실에서 거래처 사장과 한참 통화를 하고 나온 사장, 사장이자 어린시절부터 잘 알고 지낸 대한 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이미 상황이 종료되긴 했지만 워낙 큰 소리가 나서 통화를 하면서도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주문을 못 알아 들어서…… 잠깐.”
“피곤해? 너 어제 촬영이라도 있었어?”
“촬영 끝난 지 한 달도 더 됐어요. 그냥 잠을 좀 설쳤더니.”
촬영 때문에 방을 새서 피곤한 거라면 차라리 보람이라도 있겠지만, 나는 지난 방 불필요한 생각과 미련스런 마음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잠을 설쳤다는 말에서 오해를 한 모양인지 대한 형이 눈썹을 한껏 찌푸린 채로 물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언제 들어가는데?”
“아직, 정해진 거 없어요. 오디션 볼 건 몇 개 있는데….”
붙을 수 있겠느냐 묻는다면 희망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비중 있는 배역이 아니라고 해도 일단은 대중에 얼굴을 비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이들은 많았다. 배우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고, 나 같은 애매한 이미지의 배우들은 더욱이 차고 넘쳤다.
“왜 그렇게 일거리가 없어. 큰일이다.”
“그냥 배우 그만 두고 바리스타 쪽 공부나 해서 카페나 차릴까요?”
“뭐? 돈은 있냐?”
“형 카페에서 일하면서 돈 좀 모아보죠, 뭐.”
“야. 아서라. 아서. 넌 어디까지나 단기 알바야. 취직은 꿈도 꾸지마.”
“아, 형. 우리사이에 이러기에요.”
지금도 충분히 편의를 봐주고 있음을 알기에 형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다른 일을 찾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 생각이 자주 드는 것이 문제였다. 배우로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곁에서 지켜보기 힘든 일들이 많았다. 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했던 순진한 열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캐캐묵은 후회와 지리멸멸한 미련뿐이었다.
덜컹.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크게 둘려 나와 대한 형 모두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좀 전에 에스프레소를 시킨 시커먼 인상의 손님이었다. 위협적인 첫인상과 달리 다 마신 커피잔을 카운터에 돌려놓고 돌아갔다.
“뭐야. 저 사람. 노숙자냐?”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대한 형 또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내가 놀란 이유와 비슷하지 싶었다. 하지만 노숙자라기엔 지나치게 럭셔리하지 않은가. 비록 추리닝을 입었지만 이태리 장인이 만들진 않았겠지만 아니더라도 메이커 제품이었고, 얼굴의 반을 가린 선글라스 또한 명품이었다.
“딱히, 냄새가 나진 않던데요.”
“아, 아까 화낸 손님이……?”
“네.”
형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탓인지 인상만 봐도 견적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좀 전의 일은 확실히 내가 넋 놓고 있던 탓이었다. 코앞에서 주문을 하는데도 듣지 못하고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렇게 얼빠진 인간이니 무슨 일을 해도 잘 안되는 게 아닐까. 조바심 내고 걱정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 앞만 보고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생활에 틈이 생기면 이렇게 우울한 생각이 밀려온다. 요즘 그 증상이 더 심각해진 것 같다.
진동으로 바꿔놓은 줄 알았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벨소리는 유은태가 출연했던 드라마 비밀의 문의 주제가. 주인공 유은태가 불러서 화제가 되었던 곡이다. 뻔뻔스럽게도 그 노래를 부른 이가 지정해놓은 벨소리였다.
“어. 은태야.”
전화의 주인공은 내 친구이자 한류스타 유은태였다. 지금쯤 중국인지, 대만인지에서 팬 미팅 중이어야 할 녀석이 웬일로 국제전화까지 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뭐하고 있어? 지금 바빠?
“지금 알바 하는 중.”
-대한 형네 카페?
“응. 그렇지, 뭐. 바쁘다고 도와달라고 해서…….”
사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는 일이었지만 은태에게는 가게가 바빠서 도와준다, 취미로 하는 일이라고 둘러대고 있었다. 녀석에게 쓸데없는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는 좋은 것, 기쁜 것만을 공유하고 싶었다. 물론 내가 그런 것을 굳이 공유하고자 하지 않아도 그의 인생은 충분히 즐겁고 기쁜 일투성이겠지만 그래도 행여나 필요하다면 나눠줄 용의가 늘 존재했다.
-내가 보기엔 별로 안 바빠 보이는데. 손님도 거의 없고.
“뭐야. 너 보인다는 듯이 말한다. 설마…….”
-설마? 너를 지켜보고 있느냐고?
바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핸드폰 너머로 둘리는 소리로 알아냈다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은태의 말대로 정말 눈앞에서 보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 아닌가. 의문스런 생각과 동시에 왼쪽 빵 즈음에서 뜨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익숙한 실루엣이 창밖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옷에 달린 후드에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있었다.
“짠. 놀랐지?! 하하.”
순식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은태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재빨리 가게 안에 다른 손님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조금 전까지 유은태와 신현아의 결혼소식 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손님들은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야,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반응이 그게 뭐야. 넌 내가 반갑지도 않은가보다?”
반갑지 않을 리 없었다. 같은 회사 소속임에도 얼굴 본 지가 한달은 됨직하다. 직접 보지 않아도 자나 전화는 간혹 해왔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오롯이 이 얼굴을 내 두 눈이 차지하는 일은 아무래도 어려웠던 요즘이다. 얼굴을 가리던 후드-딱히 변장 효과는 없어보였지만-를 벗겨내니 예의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봐 왔음에도 볼 때마다 잘났다, 감탄하게 되는 얼굴이었다. 웃음 짓는 눈가에 가득한 다정한 장난기가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너 지금 스케줄 때문에 해외에 있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되어있지, 공식적으로는.”
“공식적으로는?”
남의 일인양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슬쩍 눈을 피하는 것이 아무래도 정상적인 절차를 걸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매니저도 아닌 내가 은태의 스케줄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착하게 생겨서는 가끔 돌발행동을 하는 터라 걱정스럽긴했다.
“하루 빨리 돌아왔어. 스케줄 남은거 하나 째고.”
“해외 스케줄인데 그런게 가능해?”
“아프다고 뻥쳤지. 뭐.”
“너 그러다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연예계라는 곳이 본인의 의도와 다른 소문이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다반사였다. 눈뜨고도 코베이는 바닥이라, 억울한 일은 비일비재로 일어났다. 요행히 유은태란 배우는 사람들에게 늘 좋은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었지만-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고-언제 어떤 일을 계기로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날고 기는 톱스타라고 해도 열애설, 결혼설은 인기에 영향이 있기 마련이었다.
“나도 숨 좀 쉬자. 기껏 열애기사도 냈는데 열애 상대 코빼기도 못 보고 있다고.”
내가 너무 잔소리가 심했나. 조금 전까지 싱글싱글 웃고 있던 은태의 얼굴에 서운함이 떠올랐다.
“뭐야, 누가 쉬지 말라고 했냐. 매니저 형이 연락안되면 나를 들들 볶아대니까 그렇지.”
“걱정 마. 잘 얘기 해놓고 왔어.”
섭섭함을 보이는 얼굴에 흔들린 나는 거기서 잔소리를 멈췄다. 그렇다고 그 섭섭함이 오래 갈 리는 없었다. 그 역시 내가 그를 생각해서 하는 말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싫은 소리를 한 것이 못내 신경이 쓰여 재빨리 커피를 내리고 녀석이 좋아하는 메뉴를 만들어 내밀었다. 유은태가 좋아하는 커피는 딱 한가지뿐이었다. 휘핑크림을 산처럼 쌓아올린 카라멜 마끼아또.
“땡큐. 너 내가 생크림 좋아하는 건 어찌 알구?”
“커피를 휘핑크림 맛으로 먹는 놈인 데, 왜 모르겠냐.”
“진짜 잘 먹을게. 매니저가 보면 기절하겠지만.”
타고나길 날씬한 체형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각 같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몸을 키운 것은 배우가 된 후였다-다이어트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24시간 매니저의 감시 하에 살고 있으니 좋아하는 커피 하나 맘대로 못 먹고 지낼 게 분명했다. 그런 점에선 부럽기만 한 인생은 아니었다. 그를 아끼는 사람인 내 입장에선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야속하기도 했다.
“현아씨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응. 너도 보고 싶고…….”
눈에 보이는 거짓말에-물론 보고 싶다는 마음이 누군가에 비해 미미하긴 해도 존재할 순 있는 문제였지만-기가막혀 코 웃음치며 녀석의 반반한 이마를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밀어냈다.
“거짓말 하지 마. 너 나한테까지 팬 관리 하냐.”
“팬 관리라니.”
“내가 너의 1호 팬이잖아.”
“무슨 팬이야. 친구끼리, 낯간지럽게.”
낯간지럽다고 해도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학교 강당의 조악한 무대에서 진지하게 읊던 대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유은태는 타고나기를 배우로 타고났다. 연기의 깊이 이전에 타고난 기질이 그러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완벽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천진한 기질이나 다정한 성격이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에 한명이었다.
“근데 기껏 내가 한국 들어왔더니, 현아가 지방 촬영가서 내일이나 온대.”
“좀 알아보고 오지 그랬냐? 칠칠맞긴.”
“그러게. 내가 좀 이래. 보고 싶어서 무작정 뛰쳐나왔는데, 막상 그런 건 생각 못했지 뭐야.”
좋아하는 걸 먹어서 기분이 한창 좋았는지, 은태는 비난의 말에도 쉽게 수긍했다. 확실히 연기 외의 부분에는 빈틈이 많은 녀석이었다. 어린나이에 연예계 생활을 시작해 매니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온 탓도 있었지만 본래 덤벙대는 면이 많았다. 신인 때는 몇 번 사기를 당할 뻔한 위기도 있었다.
“그래. 드라마 속에서는 완벽한 실장님이면서, 실제론 이렇게 칠칠 맞지! 크림 묻었잖아.”
나는 그의 턱 밑에 묻어있는 크림을 눈짓해 보였지만 은태는 엉뚱한 곳을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어디? 여기?”
“거기가 아니라…….”
답답한 마음에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편한 친구사이라면 얼굴에 묻어있는 것을 닦아주는 정도는 할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래선 안 된다는 제동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모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헤매다 재빨리 본래의 자리로 돌려놨다. 나는 카운터 위에 놓여있던 티슈를 거칠게 뽑아 던지듯 그에게 건넸다.
“네가 닦아! 내가 무수리도 아니고,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 해야되냐.”
“이제 현아가 해주겠지. 뭐.”
아무렇지 않게 건넨 별거 아닌 말에 무언가 소리 없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뭘까, 이 당치도 않은 기분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알 수 없는 허무함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혼자서 하겠다는 말은 절대로 안 하네.”
웃으며 농담을 건네면서도 머릿속은 조금 전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한 그의 말과 태 도. 그래, 그 둘은 그런 사인 것이다. 알면서도 간혹 이렇게 놀라고 방황하게 된다. 좋아하는 친구의 연인이니 인정해 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나 실은 너한테 부탁할게 좀 있어.”
“부탁?”
“응. 꼭, 들어줘야 해. 들어줄 거지?”
혼자서 운전조차 익숙하지 않은 녀석이, 게다가 백주 대낮에 직접 찾아왔을 때에는-보통은 내가 그의 집을 방문하거나 회사에서 만나곤 했다.-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진지하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부탁이 있다 말하니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뭔지 얘기부터 해라.”
“무조건 들어줘야해.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부탁하겠어.”
하지만 내 불안과 걱정은 아는지 모르는 지, 그는 내게서 어떻게든 승낙의 말을 듣고자하는 눈치였다.
“알았어. 들어 줄 테니까, 말 해.”
*
다음 날 나는 집안에 큰 우환이 있는 사람처럼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집을 나섰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탁을 받은 이상 이제 와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은태 녀석이 대답부터 들어야겠다고 했을 때 눈치 챘어야 하는데.
-프러포즈 이벤트를 준비해달라니. 야, 그런 건 네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결혼 하냐? 네가 하지?
나에게는 웬만해선 숨기는 일이 없이 솔직한 녀석이었으므로 망설이고 주저하는 것이 쉽지 않은 부탁임은 잘 알았다. 그러나 그의 부탁은 내 상상 밖의 것이었다. 현아를 위해 이벤트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고 힘이 드니 나에게 대신 준비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도 할 수 있으면 내가 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움직이면 너무 눈에 띄잖아. 게다가……. 나 내일부터 영화 들어 가. 시간내기가 너무 힘들어.
맞는 말이긴 했다. 이벤트 회사를 동원한다 해도 단번에 그의 얼굴을 알아 볼 텐데 괜히 여기저기 이상한 소문나 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녀석은 배우로서의 스케줄 외엔 모든 것을 매니저가 해결해주곤 했다. 매니저에게 부탁해도 되겠지 싶었지만, 이벤트를 준비하는 장소가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곳은 매니저에게도 숨기고 있는 은태와 현아의 비밀장소였다. 그 장소를 마련하는데 협력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내 명의로 빌린 그 오피스텔은 나를 위해 빌린 것이 아니라, 은태를 위한 공간이었다. 은태는 그곳을 만남의장소로 이용했다. 매니저에게도 알리지 않고 만든 완벽하게 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데이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 일을 대신 해줄 때에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이런 문제까지 관여하고 있는 내가 새삼 하나뿐인 친구의 이벤트를 도와주는 게 뭐 그리 짜증스러운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두 손에 잔뜩 들어있는 물건들을 내려다보니 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할 구실은 없었다. 스스로가 뭐든 들어주겠다고 한 시점이었으니까.
오피스텔에 들어온 지도 3시간쯤 지났을까. 들어올 때는 아직 밖이 밝았는지 어느새 캄캄한 밤이었다. 그동안 풍선을 몇 개째 불고, 또 불었을까. 입술이 붓고 쓰라릴 정도였다. 괜히 신경질이 나서 애써 불어놓은 풍선을 휙하니 던졌다가 터질까 싶어 재빨리 붙잡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대충 이정도면 되려나. 내가 만들어 놓은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방안을 훑어보았다. 드라마에서 스텝들이 만들던 것을 기억해내 얼추 비슷하게 재연했다. 문에서부터 침실까지 작은 초로 길을 만들어 놓고 침대 이를 장미 꽃잎과 색색의 풍선으로 장식했다. 이제 저 초에 불만 붙이면 끝이 날지도 모르겠다.
소파에 몸을 뉘였을 때, 전화벨 소리가 맹렬하게 울렸다. 익숙한 멜로디에 놀라 급하게 몸을 일으켜 전화기를 가져왔다.
-미안하다. 신형아. 아무래도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본래 계획은 내가 그를 대신해 이벤트 준비를 해놓고 약속시간에 맞춰 은태가 현아와 함께 돌아온다, 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안 된다니, 미안하다고만 하면 단가. 힘들게 꾸며놓은 것을 다시 치워야 한다는 것도 허무했지만 다시 이 짓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더욱 힘이 빠졌다.
“뭐? 그럼 기껏 해놓은 건 어쩌라고.”
-어쩌긴. 다음을 기약해야지. 촬영이 지연 되서 도저히 빠져 나갈 수가 없어서 그래.
“야. 내가 이거 만드느라 몇 시간을…….”
얼핏 수화기 너머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한창 촬영 중에 짬을 내서 몰래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화난 음성도 얼핏 들렸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현장 분위기가 좋지 않음은 와 닿았다.
-미안. 미안. 내가 나중에 크게 쏠게. 응?
“됐고. 괜찮으니까. 촬영이나 열심히 해라. 분위기 안 좋은 것 같은데. 빨리 끊어.”
대답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끊었다. 빨리 끊어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잠시 한숨은 쉬었어도 이렇게 투정 부리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은태의 부탁, 누구보다 은태의 사정을 잘 알고 이해 하는 내가 곤란해 하는 그를 향해 짜증을 내다니. 그러나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이해하면서도 올라오는 짜증과 허무함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치우자, 라고 생각하면서도 좀체 몸 안에 기운이 돌지 않는 것이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일단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좀 전에 누웠던 소파에 다시 몸을 뉘였다.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감은 눈 아래서 일렁이는 감정을 좀체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나는 나의 별 볼 일 없고, 미적지근한 인생에 달리 불만은 없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고 있었고 밥을 굶을 정도로 가난하진 않았으니까. 어떤 삶에도 크고 작은 불행은 동반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이것만은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없고, 좋은 친구의 모습으로 수년을 연기하며 지내왔다. 그도 모자라 현재는 좋아하는 사람의 프러포즈를 도와야 하는 신세라니. 그렇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친구 유은태. 그의 앞에서 나는 그를 친구라 부르며 늘 마음속으로 사랑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마음에 배우의 삶에 발을 들이기까지 할 정도로.
이름 없는 조연의 삶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극이다. 물론 그들은 그의 이야기가 비극이든 희극이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만.
*
유은태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입학식에서였다. 주위 풍문에 어두워 잘 몰랐지만 녀석은 중학교 때부터 일대에서 잘생긴 얼굴로 유명했다. **구 3대 얼짱이라던가. 뭐라던가. 나중에 사촌 누나로부터 들은 이야기였지만, 다른 중학교 출신인 나는 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순전히 다른 재능도 아닌 얼굴로 유명세를 떨치던 그에겐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덤벙대고 나사 빠진 성격과 달리 공부엔 소질이 있었다. 보통 얼굴로 눈에 띄는 아이들 중엔 불량한 무리에 속하거나 일찍이 이성에 눈을 떠 사고를 치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그는 그런 부류와는 일체 접촉이 없었다. 그는 선생님들로부터 사랑받는 모범생이었다. 전혀 놀고 싶지 않았음에도 원치 않은 사건에 휘말려 문제 학생으로 찍혀서 피곤한 학창시절을 보낸 나와 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은태를 처음 본 순간부터 운명을 예감했다. 운동장 단상 위에 반짝거리는 생명체가 있었다. 심장이 덜컥 멈추고 숨이 막혀왔다. 가슴을 갑갑하게 누르는 이상한 감각에 어딘가 아픈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입학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가 있는 그는 주변의 모든 얼굴과 풍경을 불러 처리해버리는 대단한 미모의 주인공이었다.
나도 모르게 더럽게 잘생겼네. 라고 중얼거렸을 정도였으니까. 나중에 생각해 보면 단순히 그의 화려한 외모에 놀란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첫눈에 그에게 반했다. 영화 같은 일이었지만 그에겐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주인공이었으니까. 그는 늘 그런 역할에 어울리는 이였다.
-쟤야. 쟤. 문학중 짱이라는 놈.
-짱은 아니고 그냥 짱하고 붙었다고 그러던데.
-그게, 그거 아냐. 그 새끼를 이겼으면 재가 짱 먹었겠지.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아니었지만, 억울한 면이 상당했다. 하지만 여기다 대고 해명을 해 봤자 괜히 더 이상한 소문 만 보태질 뿐이었다.
그나마 내 인생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중학교 때와 막 고등학교 입학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같은 반 여학생을 괴롭히는 치졸한 녀석을 만류하다보니 어느새 그 놈과 싸우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놈은 학교의 짱이라 불리는 상당히 폭력적인 녀석이었고, 싸움의 승패와 관계없이-이겼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나 역시 크게 다쳐서 병원신세를 져야 했으니까-유명해지고 말았다.
그 후론 싸움한다하는 녀석들이 수시로 시비를 걸어왔다. 그 때문에 나쁘지 않던 성적까지 떨어졌고 교사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학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고등학교에서만은 조용히,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살고 싶었는데, 첫날부터 이 모양이었다.
-안녕. 여기 앉아도 돼?
누구도 근처에 다가와 앉을 생각을 않는데, 간 크게 말건 인간은 다름 아님 단상위의 반짝이던 생명체, 유은태였다.
-……뭐, 뭐 그러든지.
아무래도 소문을 듣지 못했나. 그는 너무도 해맑은 얼굴과 명랑한 목소리로 내게 다가왔다. 입학식에서 보았던 진지하고 성실해 보이던 분위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너 소문 굉장하더라. 싸움 좀 하나봐.
하지만 뭘 모르고 순진하게 말을 걸어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히려 일부러 알고 말을 건 느낌이었다. 또냐. 미소를 띈 얼굴이었지만 그 내용은 시비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대번 인상이 구겨지고 마음이 불편하게 구겨졌다.
-그래서 붙어보잔 얘기냐?
-아니. 난 평화주의자. 싸움 전혀 못해. 친하게 지내면 편할 것 같아서 그러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싶었다. 인형 같은 외모의 모범생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어른들 보지 않는 곳에선 불량학생으로 변하는 이중적인 인간인가 싶어서 뜨악했는데 다행히 그런 쪽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로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웃으며 내민 손이 희고 고와서 함부로 잡아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시할까, 잡을까. 고민으로 움찔거리는 손을 은태는 직접 다가와 잡았다. 나는 그렇게 유은태라는 인간에게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거친 녀석들이 제법 많았던 중학교 때와 달리 비교적 모범적이고 면학적인 분위기의 고등학교에 와서는 내 소원대로 소문은 점점 사라졌다.
나는 그저 한 학급에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성적과 얼굴의 조용한 학생으로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평범하고 조용한 학생A는 자라서 주인공 친구 A로서 살게 된다. 고등학교 때와 특별히 달리진 것도 없었다.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 아니 사실 빛낼 필요도 없는 주인공을 동경하고 그 주변을 맴돌며.
*
-삑삑삑삑.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기계음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처음 눈을 뜨고 낯선 천장을 확인했을 때, 나는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던 중인지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잠에서 막 깨어나 멍한 머릿속이 깨어난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들어오세요. 청소 안한지 오래 되서 좀 지저분하지만.”
크지 않지만 발음과 발성이 명확한 청아한 목소리는 익히 잘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신현아. 유은태의 연인이자, 이 집을 사용하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은태가 계획했던 일이 취소되었다고 해서 당연히 신현아 또한 올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이 집을 꼭 둘만의 공간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은태도 가까운 곳에 스케줄이 있거나 조용히 쉬고 싶을 때 이곳을 이용한다고 했었다.
신현아 혼자였다면 껄끄러워도 나가서 아는 척을 했을 수도 있다. 친구의 연인이긴 해도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그녀는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그래서 집에 맘대로 들어온 것을 좋아할 리는 없었지만 나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낯선 사람의 기척이 함께 느껴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근데 웬 초를 바닥에…….”
“글쎄요. 나는 모르는 일인데. 누가 이래놨지, 밟을 뻔했네.”
잠들기 전 이벤트용으로 꾸며놓았던 장식들을 반쯤 치우다 말았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침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래선 상황을 더 악화시킬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신현아 혼자도 아니고 낯선 손님까지 끼어 있는 자리에 당당히 나설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신현아가 연인과의 비밀 장소에 다른 이를 데리고 왔다는 것에 당황하기도 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 집으로 부를지는 몰랐네요.”
“여긴 엄밀히 말하면 제 집은 아니에요.”
“그럼?”
“남의 집은 아니니까, 편하게 앉으세요.”
그들이 조금 전까지 내가 누워서 잠들어 있던 소파에 착석하는 모습을 열린 문틈으로 확인하고 혹 그 모습을 들킬까 싶어 문 뒤로 몸을 붙였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멀끔하고 큰 키의 남자와 함께였다.
그녀가 나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듯 나 역시 그녀를 인간적으로 좋아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연인을 배신할 배은망덕한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한 관계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 편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본론부터 이야기 하죠. 저 그 영화 꼭 하고 싶어요.”
“이미 제 쪽에서 거절한 걸로 아는데요.”
“알아요. 하지만 고집부리는 게 감독님한테 손해 보는 일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감독님. 드라마나 영화 감독인걸까? 하지만 감독을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에서, 그것도 매니저 대동하지도 않고 만나고 있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제작자 압력이 장난 아니긴 하지만, 뭐 내가 돈 벌려고 영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뭐 때문에 하세요?”
“뭣 때문이라니…….”
“지금은 감독님이 해외 영화제에서 상 좀 받고, 젊고 잘생긴 감독이라 좀 인기 끌고 있다 쳐도 흥행성공하지 못하면 그 관심 금방 식을 거예요. 결국 제작사 입장에서는 돈 많이 벌어다 주는 감독이 최고 아닌가요?”
“난 신현아씨 안 써도 충분히 돈 되는 영화 만들 자신 있습니다.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됩니다.”
어떤 감독이고, 어떤 작품이길래 저렇게 하겠다고 매달리는 걸까. 신현아는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을 정도는 아니어도 외모나 분위기가 좋고 연기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화려한 외모에 연기가 가려진 면이 없지 않아 보였다. 가끔 생각지 못한 비상업 영화에 출연하는 걸 보면 확실히 연기 욕심도 있어 보였다.
그때마다 반응은 별로였지만-아무래도 그녀는 트렌디하고 로맨틱한 드라마나 영화에 잘 어울렸다-본인은 인정을 못하고 계속해서 도전했다. 그런 면에선 탑스타 답지 열정 있어 보이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탑스타 다운 거만함은 확실히 가지고 있는 여자였기에 나는 그녀와 친해질 수 없었다. 그것도 모르는 은태는 신현아와 함께 있는 자리에 눈치도 없이 자꾸만 나를 불러냈지만.
“감독님이 원하는 게 어떤 거죠. 원하는 걸 드릴게요.”
“로비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난 돈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
신현아의 당돌한 제안에도 감독은 당황하지 않고, 칼같이 잘라냈다. 대체 어떤 감독인 걸까. 직업이 직업인지라 영화 자주 보고 좋아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 정도여서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잊고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일었던 것도 잠시.
“이런 건 어때요?”
보이지 않음에도 그 목소리에 담긴 은근한 유혹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설마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다시 문틈 사이의 공간으로 얼굴을 가져간 순간, 마주 앉아있던 남녀가 밀착해 있는 것을 보았다. 정확히는 신현아가 감독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자신의 하얗고 매끈한 손과 언제나 청아하게 빛나는 그림 같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쪽에서 남자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놀란 것일까, 오히려 반기는 표정인걸까. 거실의 공기는 꽤 오랫동안 무겁고 조용하게 정체되어있었다. 그 묵직한 덩어리를 가볍게 날린 것은 남자의 희미한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 소리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얼핏 보이는 현아의 표정에 흐릿한 균열이 간 것으로 보아 그녀의 미인계는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듣자하니, 동료 배우랑 곧 결혼한다던데.”
“그게 왜요?”
“늘 이런 식으로 배역을 땄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감독이 대신하는 듯 했다. 신현아는 이쪽에서 꽤 깨끗한 배우에 속했다. 가끔 스폰서를 가지고 있는 여배우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알고 지낸 여배우 중에도 대기업 사장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자랑처럼 떠들기도 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현아의 경우, 진실은 알 수 없어도 그런 쪽의 소문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외모와 재능이 출중하기도 했고 집안도 좋은 편인 신현아였기에 그런 부분엔 더욱 믿음이 갔다. 굳이 이용한다면 좋은 집안 빽을 이용해도 되었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는요.”
잠시 망설이는가 싶었지만, 그녀는 딱히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대꾸했다.
“나한테는 이런 게 안 통한다는 거 알았죠? 그러니 좀 떨어져 앉읍시다.”
“제가 감독님 스타일이 아닌가 봐요?”
“그래요. 난 댁같은 인공적인 얼굴이 취향이 아니라, 그 빵빵한 가슴도 부담스럽고…….”
신현아에게 인공적인 얼굴 운운을 하다니. 자연미인으로 누구보다 유명한 신현아인데. 게다가 가슴얘기까지. 제정신으로 하는 얘긴가. 아니면 쎄 보이려고 허세로 하는 말일까. 제 삼자인 내 입장에서는 기막힌 일이었지만 의외로 신현아의 취향엔 맞았던 모양이다.
“훗. 재밌는 분이시네.”
“농담이 아니라, 진짠데.”
두 남녀 간의 긴장은 그로서 일단락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좀 전에 본 장면으로 인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심각한 상황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은태에게 옮길 수도 없었지만, 모른 체 그 둘을 지켜보는 것도 힘든일이었다.
“됐으니까 마실 거라도 좀 내와요. 손님대접이 영 아니네.”
“그래요. 잠시만요.”
내가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문 뒤에서 숨죽이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은 본래의 차분한 상태로 돌아왔다.
“아, 맥주 밖에 없는데 괜찮으세요?”
“맥주라면 오히려 땡큐.”
어쨌든 그들은 금방 밖으로 나갈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대로 있어야 하나,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며 돌아서던 중 부주의하게 협탁 위의 스탠드를 건드렸다. 탁, 그리 크진 않지만, 지나치기 힘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혀있다면 모를까, 아직 약간 틈이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누군가 이 소리에 반응했는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서 물을 틀고 식기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신현아는 아니었다. 어디 숨을 곳이 없나, 침대뿐인 심플한 방안에는 장롱조차 없었다. 커튼 뒤? 아니면 침대 아래? 허둥대며 어정쩡하게 침대 옆에 몸을 웅크린 순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도둑?”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인지는 뻔했다. 나는 돌아설 생각도 못하고, 그렇다고 꼴사납게 웅크린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얼마간 숨을 죽이고 멈춰있었다.
급박한 상황. 무슨 변명이든 빨리 해야지, 안 그러면 신현아까지 눈치 채고 달려올 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상당히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이 펼쳐질 것이다.
“아, 아니요. 도둑 아닙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최대한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제스처를 취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커튼이 무겁게 드리워진 방안은 어두워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생각만큼 당황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를 향한 목소리 역시 낯선 사람을 향한 것 치곤 차분하고 논리적이었다.
“혹시 신현아씨 팬인가, 스토커?”
“아, 아뇨. 팬이라니, 그럴리가요.”
이 남자 이상으로 나는 그녀 같은 여자가 취향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여자란 성별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게 펙트였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현아의 팬, 심지어 스토커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집주인이라도 됩니까?”
“그, 그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무튼 도둑 아닙니다. 신현아씨랑도 잘 아는 사이고.”
“친구가 온 모양이니 알려줘야겠네.”
“자, 잠깐. 안 됩니다!”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남자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는 붙잡는 대로 끌려왔지만 표정엔 놀라움과 경계심이 희미하게 서려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했다. 낯선 사람을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마주치고도 소리지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스러웠다. 나는 어떻게든 그럴싸한 변명을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제, 제발. 부탁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진심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외치는 것은 그 뿐이었다. 제발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다는 것. 그 외의 어떤 말로 이 상황을 표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단순한 애원이 통할 리 없었다. 이젠 모두 끝이었다. 큰일은 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안 그래도 사이가 껄끄러운 신현아와 더욱 관계가 나빠지겠지.
“흠, 아는 얼굴이니까 봐줄게요.”
하지만 생각지 못한 말이 떨어졌다. 그 말을 듣고도 그가 자신을 눈감아 주기로 했다는 것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떨쳐내고 돌아섰다.
“감사합니다.”
그 유유자적한 뒷모습을 향해 뒤늦게 감사의 말을 전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멍했다. 강한 펀치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마비되고 머릿속이 성에 낀 유리창처럼 흐리흐리했다.
“신현아씨. 우리 밖에 나가서 얘기 할까요? 아무래도 맥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감독님 저 사람 많은 곳은 좀.”
“내가 조용한 가게를 알아요. 거기라면, 대통령이 와도 터치 안 할 겁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다행히 두 사람은 그대로 밖으로 퇴장했다. 모든 상황 종료. 한숨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몸 안의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털썩 주저앉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뒤늦게 어떤 의문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 보고 아는 얼굴이라고 했던 것 같다. 배우이긴 하지만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어느 작품에 누구의 친구역할로 나왔다고 한참을 설명해도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기 마련이었다.
감독이라는 걸 보니 배우들 얼굴을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딱히 감독들이 선호하는 배우도 아니었고. 하지만 내가 보러 다닌 수많은 오디션장 어디선가에서 마주친 것일 수도 있었다. 엄청나게 기억력이 좋은 편인 모양이다. 감독 중엔 꼼꼼하다 못해 병적일 정도로 섬세한 인간들이 많았다. 아마도 그런 부류이지 싶었다.
어쨌든 잘 넘어가서 다행이다.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졸지에 도둑취급을 받은 것이 억울했지만 그 남자 입장에서 신현아의 집에 단둘뿐이라 생각했는데 방 침대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했으니 도둑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집을 나설 수 있도록 현아를 데리고 나가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현아의 보고 싶지 않은 면을 발견한 것은 조금 찜찜했다. 원하는 배역을 따내고자 감독을 유혹하다니, 상대방이 장난으로 가볍게 넘겨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은태였다. 신현아가 청순가련한 이미지와 달리 뒤에서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는 내 알바 아니었다. 문제는 저 두 얼굴의 여자가 은태의 약혼녀라는 것이었다. 저런 여자와 은태가 결혼하도록 내버려 둬도 괜찮을 걸까. 하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어쩌겠는가.
고자질을 해? 은태가 신현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다름 아닌 내가 잘 안다. 나를 버리면 버렸지 신현아를 버릴 녀석은 아니었다. 섣불리 참견했다가 우정으로 위장한 관계마저 깨어지면, 그렇게 되면 나는 어쩌지. 솔직히 나는 그쪽이 더 두려웠다.
얼굴을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꽤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감독치고는 젊은 편, 얼굴만 보면 배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아는 감독은 아니었다. 이 바닥에 있다 보면 마주치는 일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아니 거의 희박할 것이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 확신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깨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어서오세요~손님!”
서비스업에 종사한지가 어언 10년, 배우 생활과 같이 한다. 다른 점은 몰라도 늘 친절하다는 이야기만은 늘 들어 왔다. 사실배우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니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왜 없었어요?”
하지만 배우로 나를 알아보는 사람보다 친숙한 카페의 종업원으로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 단골손님은 알기나 할까. 내가 자신이 본 어느 드라마에서 대사를 읊던 사람이라는 걸.
“일이 좀 있어서요.”
“그만 뒀는지 알고 놀랐잖아요.”
“하하. 당분간은 그만둘 일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당분간은 일이 없어서 카페에 매일 출근하기로 했다. 휴일 없이 일하는 대신, 오디션이나 스케줄이 생기면 빼주기로 한 것이 마음 좋은 사장님과의 유일한 계약조건이었다.
“어서 오세요.”
주문 들어 온 커피를 만들다가, 다가오는 느껴지는 기척에 기계적인 영업용 스마일을 지어 보이며 카운터로 다가오는 손님에게 인사했다.
“에스프레소. 샷 추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간결한 주문이다 싶었다. 얼굴을 보고 갸웃했지만, 옷차림을 보고 같은 사람임을 알았다. 같은 트레이닝복과 선글라스. 하지만 같은 것 그 뿐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말끔해 져서 못 알아 볼 뻔했다. 며칠 전의 그 덥수룩한 수염의 무뚝뚝한 손님이었다. 머리를 정리하고 수염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용모가 단정해 지니, 이제 보니 트레이닝복도 스타일리쉬 해 보였다.
“계산은 그쪽이 하는 거죠?”
금액을 이야기 하려고 입을 때려는 순간, 남자가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재미있자고 하는 농담인가, 농담할 것 같은 인상도 아닌데 대체 무슨 의미인지…….
“은인에게 커피 한잔 정도는 사줄 수 있잖아요. 안 그래?”
내가 여전히 얼굴에 물음표를 수백 개를 떠올린 채 멍하니 서 있자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내가 그에게 입은 은혜에 대해서 설명했다. 하지만 그 설명을 듣고 난 후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신현아 집에서 만났잖아요. 기억 안 납니까?”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뒤늦게 심장이 내 몸 가장 깊숙한 곳으로 쿵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
“맞다. 우리 건물 위층에 영화사 들어왔다더라!”
오랜만에 대한 형과 삼겹살집에서 조출한 회식 후 내 원룸으로 와 2차로 맥주를 마시던 중, 형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가볍게 ‘최현오’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제야 그 남자를 카페에서 재회한 이유를 조금은 납득했다. 나는 그 이름을 미친 듯 검색에 검색을 한 끝에 찾아냈다. 신현아와 관련된 감독이름을 찾다보니 검색에 걸렸다. 신현아가 최현오 감독의 차기작에 캐스팅 되었다는 기사가 여럿이었다. 아무래도 제작사에서 멋대로 낸 홍보용 기사인 모양이었다.
“그랬어요? 난 전혀 몰랐는데.”
“가끔 배우나 감독들 오던데. 못 봤어?”
일하다 보면 바빠서 손님들 얼굴을 일일이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배우를 본 기억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없는 시간에만 왔던 걸까.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 안 그래도 너한테 잘 보여서 배역이라도 따내보라고 일러주려고 했는데.”
“됐어요. 내가 은태 같은 조각 미남도 아니고.”
“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생각해서 해주는 얘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현실성 떨어지는 이야기엔 아무래도 동조해 주기 힘들었다. 길거리 캐스팅-가게 안이니 거리는 아니지만-이야 은태 같은 녀석이나 가능한 일이었지 내게는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은태에게는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나서야 전화가 왔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기보다 그만큼 영화 촬영이 고되기 때문아닐까 싶었다. 그런데도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최현아 앞에서 제대로 망신살 뻗칠 뻔했다.
대한 형이 부인의 호출을 받고 돌아간 후에도 나는 홀로 몇 캔의 맥주를 비워냈다. 홀로 마시는 맥주의 맛이 유난히 씁쓸한 것은 조금 전 걸려왔던 전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끊어. 나 바빠.”
전화를 받지 않을까 하다가 받았지만 오래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십 수년을 짝사랑해온 유은태라도 무슨 짓을 해도 이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끔찍이 하기 싫었던 일-좋아하는 상대의 프로포즈를 돕는 일-을 시킨 것도 모자라, 약속을 펑크 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까지 했다. 물론 후자는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덕분에 곤란한 상황과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왜 그래. 너 아직도 화난거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구!”
단순히 준비한 이벤트가 수포로 돌아가 하가 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지지리도 운 없고 볼품없는 자신에 대한 파일지도 모르겠다.
-미안, 미안. 내가 다음에 크게 쏠게. 아니면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없어?
아는지 모르는지 은태는 사과하기 바빴다. 솔직한 녀석답게 사과도 열심히 진심을 담아 한다. 그래서 멋대로 굴어도 쉽게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늘 끌려 다녔다. 몸도, 마음도, 시간도. 유은태의 한마디 말과 의미 없는 행동에 영향을 받았다. 인생 자체가 그로 인해 변한 거나 다름없었다.
“됐어. 나 절대 다음엔 안 해.”
-그래. 그건 그냥 내가 준비할게. 그러는 게 좋겠어.
“뭐? 시간도 별로 없다며.”
-생각해보니 너한테도 폐 끼치는 것 같고. 내 결혼인데, 프러포즈 정도는 내가 준비해야겠다 싶더라. 현아에게 미안한 짓인 것 같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가 이 결혼에 얼마나 진지한지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가슴을 차갑게 식히는 싸한 감정을 떠올렸다.
네가 그렇게 사랑하고 원하는 여자가 네가 없는 곳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아느냐고 폭로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내가 너한테 늘 미안하고, 고마워. 내 마음 알지?
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싶은데, 모른 척 하고 상처가 될 말을 쏟아내고 싶은데.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하게 된다면 그들의 결혼은 깨질지도 모른다. 아무리 단단한 애정이라도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타인의 사랑을 망쳐놓는데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는 넌 내 마음 아냐.”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을 떠올리는 나를, 꾸역꾸역 올라오는 더러운 욕망을 외면하는 나를 그는 절대 알지 못한다.
-알지. 나 같은 친구만나서 힘들고 고달픈 거. 하지만 나 남아있는 친구라곤 너 뿐이야.
“…….”
-네가 내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내가 어떻게 버렸겠어.
그는 나에게 기대고 있지만 나는 기댈 곳이 없었다. 아무도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명이라도 털어놓을 구석이 있었다면 숨이 좀 트였을까. 최근 들어 나는 내 자신이 한계에 달했다는 생각을 했다. 지지부진한 배우 일도, 지긋지긋한 짝사랑도. 모두 위험수위에 다다른 것 같다. 그렇다고 특별히 눈에 띄는 변화가 인 것은 아니다. 변화는 서서히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말은 잘해. 알았으니까,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말해.”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에도 나는 설렘과 떨림보다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갑갑증이 심할 때는 정말 숨을 쉬기 힘든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지금이 그랬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기 위해 이야기를 갈무리 했다.
-응. 그럴게. 아, 나 그만 끊을게. 감독님이 부른다.
“촬영장이야? 밤샘하는 거냐?”
-어, 밤새야 할 거 같아. 신형이 너는 잘 자.
“그래. 촬영 잘해.”
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연이다. 그는 내게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그는 내가 연기하고 있는 유은태의 절친한 친구 강신형 만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드라마 속의 처량하기 짝이 없는 역할이었다.
아무래도 맥주로는 해결되지 않는 갈급함에 냉장고로 다가가 소주를 꺼냈다. 소주잔이 보이지 않아 손에 닿는 머그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마신 후, 침대로 돌아와 눈을 꾹 감았다. 뜨겁고 어지러운 기운이 올라왔지만 더 은근하고 뜨겁게 타는 가슴 때문에,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
감독이라고 해도 이렇게 영화사에 붙어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쩌면 영화사에서 작업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최현오는 그 날 이후 꾸준하게 카페에 출근을 했다.
“커피 값은 그쪽이 내 줄거죠?”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 무전취식을 행했다. 오랜 알바생 짬밥이나 사장과의 인맥도 있으니 아는 사이에 커피 한잔 정도는 사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 빚이 있는 탓인지 몰라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마치 삥 뜯기는 기분이었다. 학생 때도 뜯기지 않던 것을 지금에야 뜯긴다는 게 우스웠지만.
“네. 그러세요.”
그때 그 상황에서 눈감아 준 것은 고마운 일이 맞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상대방이 그리 정감 가는 성격이 아닌 것이 문제였다. 현아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을 때도 만만치 않은 감독임은 알았지만 지켜볼수록 괴짜에 괴팍한 인간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그에 관한 기사엔 ‘괴물’ 감독, ‘괴물’ 신인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최현오는 신인이었지만 해외영화제에서 데뷔작으로 만든 저예산 영화가 상을 받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감독이 아니라 배우인가 싶을 정도로 반반한 외모의 소유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실물을 마주하니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단, 멀쩡한 상태일 때에 한해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산속에서 오랜 시간 수행하고 내려온 도인 같은 행색이었다. 말이 좋아 도인이지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배우는 은퇴 했습니까?”
갑자기 날아든 질문에 돌아간 줄 알았던 남자가 여전히 카운터 앞을 지키고 서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네? 저요?”
그럼 여기에 배우가 또 어디 있냐는 눈빛이었다. 확실히 놀라는 내 쪽이 이상한지 모르겠다. 배우로 불리는 것이 어색한 배우라니, 내가 생각해도 기막히지만 내 처지라면 그렇게 될 만도 하지 않는가.
“배우가 이런데서 일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은퇴한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혹시 부업?”
“뭐 비슷한 거예요. 하하.”
일단은 손님이고, 여러 가지 신세진 게 있으니 그의 무례한 태도를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그는 매사가 본인위주였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남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성격인 나로선 그 당당하고 무례한 성격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신현아 같은 여자가 그랬다. 물론 그의 당당함은 신현아의 것과는 좀 달랐다.
“회사에 물어보니 당분간 스케줄 없다던데, 나랑 일 하나 하지 않겠습니까?”
“네? 아뇨. 전 이미 하는 일이 있어서.”
“부업보다는 본업을 해야지. 아예 전업할 생각?”
전부터 생각했지만 있었지만 이 사람 반말과 존대가 기분 나쁘게 섞인 말투를 사용했다. 점점 반말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이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말은 고맙지만 회사 통해서 이야기 해주세요.”
“이건 좀 개인적인 부탁이라 좀. 내 졸업 작품을 만드는데, 출연해줬으면 해서요.”
“이미 유명하시던데, 학생이셨어요?”
“제가 남들보다 좀 늦게 들어갔습니다. 다니던 중에 데뷔하게 되고, 운 좋아서 상 같은 거 받았고. 어쨌든 이제까지 낸 등록금이 아까우니 졸업은 해야죠.”
영화로 유명한 예술대학 출신이라는 프로필을 얼핏 본 것 같은데, 아직 졸업 전인 모양이었다.
“단편이라 그렇게 긴 분량 아니니까 시간 많이 안 뺏을 거고. 적지만 출연료도 지불하겠습니다.”
일단 영화 출연이라니-비록 졸업 작품으로 만드는 단편이라고 해도-귀가 솔깃한 것은 사실이었다. 일을 쉰 것도 두 달이다 되가고 있지만 들어온 대본하나 없는 실정이었다.
“어떤 역할인데요?”
“할 겁니까?”
“일단 들어봐야 하든 말든 하죠.”
내가 급이 낮다고 우습게 보나. 아니면 자신 같은 유명 감독이 제안하는 일은 당연히 받아들 일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게다가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볼일 때문에 카운터를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뒤에서 기다리는 손님이 꽤 늘었다.
“저, 나중에 얘기하던가 하죠. 손님 기다리는데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갑자기 날아든 질문처럼, 다가온 손길도 갑작스러웠다. 또한 상당히 위악적이었다. 딱히 잘못한 일도 없건만, 잘못을 하고 도망치다가 붙잡힌 위협적인 기분이 들었다.
“할 거냐고요.”
단단한 손길만큼, 단호한 목소리가 나를 향해 물어왔다. 대답을 듣기 전까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 이쪽을 바라보는 손님들의 짜증스러운 눈길이 호기심으로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뼈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 듯한 악력에 아프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얼마 전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보지도 않고 수락해 곤란한 일을 겪었던 것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내게는 더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좀 놔요!”
내 입에서 알았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손을 감싸고 있던 남자의 뜨거운 피부가 떨어져 나갔다.
“일 언제 끝납니까?”
“10시요.”
“그럼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이건……. 내 번호.”
최현오가 건넨 것은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아주 심플한 명함이었다. 그것을 재빨리 주머니에 챙겨 넣고 밀린 주문을 받았다. 놀라서인지, 몇 번인가 주문을 못 알아듣고 다시 한 번 말해달라는 부탁을 해야 했다. 최현오에게 붙잡혔던 오랫동안 손이 꽤 오랫동안 저릿저릿했다.
*
손님이 한차례 왔다가 빠져나가고 한가한 시간이 왔을 때에야 나는 그에게 건네받은 명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뜻밖에 일거리가 생긴 것은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쁜 일은 아니겠지? 좋은 일에 선뜻 기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내 자신이 부정적인 탓이려나. 좋은 일로 엮인 사이도 아닌지라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한 달 만에 일다운 일이 들어왔는데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단편영화에 작은 배경일 테니 돈은 얼마 들어오지 않겠지만 연기를 한다는 자체로 의미 있었다.
연기를 쉬고 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느껴지는 것은 불안감이었다. 그것은 돈이나 생활과 관련된 불안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연기 자체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더 컸다. 내 자신의 한계를 통감한지는 오래였다. 그래서 연기를 하지 않는 인생에 대해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은 존재했다. 마치 은태에 대한 나의 마음처럼.
보답 받을 수 없는 짝사랑에 늘 괴롭고 갑갑하지만 그 고통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억지로 손에 쥔 것을 놓아 버리면 모든 것을 포기하면 편해 질 수 있을 텐데, 애써 편한 길을 포기하고 계속 이쪽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어느새 아픈 걸 즐기는 변태가 되어버린 걸까.
“뭐 그런 일이 있었어? 정말 잘 됐다!”
자랑보다는 고민되고 찜찜한 마음에 대한 형에게 낮에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냥 단편 영화래요. 졸업 작품이라고 하니 보수를 많이 달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래도 최현오 감독 요즘 뜨는 사람이잖아? 네 이력에 도움 될 거다.”
대한 형이 과하게 좋아하는 바람에 조금 민망했지만, 그보다 형이 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점이 더 신기했다. 그 정도 유명세가 있는 감독인지 몰랐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긴 했지만 큰상은 아니었고 신인감독에게 주는 신인상격이라고 알고 있는데. 물론 그 정도 만해도 대단하긴 하지만 말이다.
“형도 그 사람 잘 알아요?”
“잘 몰랐는데 마누라가 감독인데 배우처럼 잘생겼다고 하도 유난을 떨어서. 게다가 외국에서 상 받았다던 영화 괜찮더라고. 상 받고 뒤늦게 주목받아서 소규모 영화 치고 흥행도 한편이야 200만 들었다던가. 아직도 상영 중인데 한 번 찾아봐.”
대한 형과 나는 대화 덕분인지 몰라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편으로 다른 의문도 들었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혹은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출연제의를 한 걸까. 어떤 역할인지 제대로 듣지는 않았지만 작은 역이라고 해도 대충 뽑을 성격은 아닌듯했다. 신현아 같은 탑스타가 한번 출연케 해 달라 매달려도 코웃음 치던 양반이 아니던가.
큰 기대는 금물이지만 지레 겁을 먹는 쪽이 더 어리석은 짓 같다. 나는 마음속에 이는 쓸데없는 갈등을 억지로 내보냈다. 하지만 카페 영업시간이 끝날 무렵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불긴할 전화벨 소리에 놀라-진동으로 해 놓았는지 알았기에 더 놀랐다-확인해 보니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그리 반갑지 않은 상대였다. 은태의 매니저. 은태와 친하게 지내는데다 같은 회사인 관계로 그의 매니저와는 자연스럽게 알고 가깝게 지냈지만 대부분 은태의 매니저가 내게 연락을 해올 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몸이 아프다거나 해서 좀 돌봐달라거나 자잘한 심부름을 하는 정도는 양호했고, 심각하게는 은태가 스케줄을 펑크 내고 사라진다거나 갑자기 연락두절일 경우 등등.
-신형아. 은태가 연락 안했어?
“오늘요? 전혀. 무슨 일 생긴 거예요?”
예상은 했지만 매니저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어디서 뛰어온 건지, 그냥 앉아있어도 숨이 차는 것이 목소리가 잔뜩 상기 되어있었다.
-큰일 났다. 그 놈 대형사고 쳤어. 그러니까 녀석한테 연락 오면 꼭 나한테 알려줘.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고요. 알아야 찾아보든 말든 하죠.”
-같이 영화 찍던 배우랑 싸우고 잠수 탔어!
“네? 싸우다뇨. 설마 주먹질했다는 얘기는…….”
“그래. 그러니까 대형사고라는 거지!”
내가 유은태와 알고 지낸 이후로 이렇게 기막히고 놀라운 뉴스가 있었던가 싶다. 내가 아는 유은태는 역할 때문에 액션연기를 한 적이야 있겠지만, 실생활에서 주먹질을 한 적은 결코 없었다. 사내 녀석이라면 친구들끼리 반쯤 장난이라도 주먹질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장난이라도 그런 짓은 안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시비가 붙을 성격도 아니었다. 은태는 늘 다른 사람이 나쁜 의도로 시비를 걸어도 특유의 부드럽고 화사한 미소로 아무렇지 않게 넘기곤 했다. 연예인이란 직업을 가지고 오랫동안 살아온 녀석으로서는 그런 성격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큰 사고 없는 이미지 깨끗한 배우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은태였는데. 그런 은태가 싸움이라니. 주먹질이라니. 게다가 그대로 사라졌다는 점이 더욱 걱정스러웠다.
“지금 우리 사장이 그쪽 기획사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언론도 급하게 막 나왔는데 연락 안 되는 게 다른데서 또 사고치는 거 아닐까 걱정된다.”
매니저에게 연락을 하고 말고를 고민하기 전에, 내 연락이라고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잠수를 탔다는 걸 보니 핸드폰을 켜놨을 리도 만무하고, 갈만한 데가 어디 있더라. 쉽게 어떤 행동을 취할 수도 없어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나 했지만 떠오른 번호는 처음 보는 번호였다. 게다가 핸드폰 번호가 아니라 집 전화.
“여보세요?”
기대 없이 전화를 받았지만 묘한 침묵에 혹시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흐릿한 숨소리와 기척만으로도 상대방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어렴풋 알 수 있었다. 가령 어떤 큰 사고를 치고 난 후에 복잡하고 시끄러운 속을 잊기 위해 잔뜩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걸었다던가.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라면 잘못걸려온 전화라고 생각해서 그대로 끊었겠지만, 짚이는 게 있는지라 쉽게 끊을 수가 없었다.
“누구세요. 전화를 하셨으면 말씀을 하셔야죠.”
-……신형아.
한참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 끝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은태니? 대체 무슨 일 이야?”
-신형아. 나 좀 데리러 와.
그 목소리를 확인하자마자 한바탕 쏟아내고 싶었지만 잔뜩 흐트러진 힘없는 목소리에 꾹 참았다.
“알았어. 거기가 어딘데?”
*
사실 은태를 발견하면 냅다 달려가서 그 작달 마한 뒤통수를 시원하게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려와 술 취한 녀석의 축축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하지 않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고들 하지 않던가. 은태는 나를 보자마자 손을 번쩍 들어 흔들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지 엉성하고 틈이 많았다. 그 벌어진 틈새로 줄줄 새는 감정이 확연히 보였다. 그는 화가 나 있었고 한편으로 슬퍼했으며, 그 모든 감정들로 인해 버거워하고 있었다.
“갈 데가 그렇게 없었냐? 왜 하필 여기야.”
은태가 숨어있던-숨어있던 것인지, 그냥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곳은 그와 내가 대학시절 자주 찾던 민속주점이었다. 대학가의 흔한 주점이었지만, 오랜 시간 한곳에서 장사를 하다 보니 나름의 역사와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여기가 어때서. 여기 고추장 찌개가 끝내주잖아.”
“그 끝내주는 찌개는 손도 안 댔으면서 뭔 소리야.”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이야기나 들어보자 싶어 은태의 맞은 편에 자리잡고 앉았다. 앉으면서 주변을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야 길바닥에서 무슨 추태를 부려도 상관없는 인지도의 무명이었지만 은태의 경우엔 목격담만으로도 이상한 기사가 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평일이어서인지, 방학 중이기 때문인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긴 이런 허름한 주점에 배우 유은태가 와 있을 거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할까. 자리도 마침 조금 구석진 곳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이 새끼 안주 아깝게 술만 들이부었나보네. 그러다 속 버린다.”
“여기 오니까 옛날 생각 많이 나더라. 너도 그렇지?”
옛날이라고 해도 그리 오래전은 아니었다. 같은 학교에 들어갔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함께한 시간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가 1학년 때 출연한 드라마로 인해 이른바 벼락스타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아무리 대단한 배우라도 단역시절이라도 짧게 존재하겠지만 은태는 그렇지 않았다. 데뷔작부터 파격적인 주연이었다. 감독이나 제작사 입장에서는 상당한 모험이었지만 그 모험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 후로 학교에 거의 얼굴을 들이밀지 못했다.
“현실도피야? 그러게 왜 사람을 패냐.”
자꾸만 딴 소리를 해대는 녀석을 기다리자니 못 참겠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 매니저가 전화했어? 혹시 나 여기 있다고 한건 아니지?”
“걱정마. 안했어.”
“역시! 우리 신형이 의리 하난 끝내준다니까.”
아무리 은태의 매니저와 친한 편이고, 회사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결국에 나는 은태 편이었다. 어차피 은태 빽으로 붙어있는 회사에서 나한테 딱히 기대하는 바는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 얌전한 은태가 가끔 이런식으로 사고를 칠 때는 조금 유용할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유라도 알자. 싸움도 못하는 놈이 왜 겁 없이 주먹은 날려?”
“그놈이 맞을 만한 짓을 했거든. 아~주 나쁜 새끼야. 개 쓰레기 같은 놈.”
그 배우의 이름이 윤석원이었던가. 같은 드라마에 출연했던 적이 있어 얼굴과 이름을 기억한다. 친하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딱히 마주치는 씬이 많지 않아 자주 보진 못했지만 그때마다 인사를 씹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현아랑 무슨 일 있었어?”
“…….”
“그럼 그렇지. 현아랑 또 싸웠냐?”
혹시나 해서 찍어봤는데, 단번에 맞춘 것 같아 도리어 내가 당혹스러웠다. 은태는 대답을 하는 대신 연거푸 소주를 둘이 부었다. 진실게임을 하는 중도 아닌데, 입을 꾹 다물고 술잔만 비운다. 청순가련한 이미지의 신현아가 실상은 까다롭고 성깔 있는 편이기도 했지만 은태 역시 보기와 다르게 고집이 쎈 편이라 두 사람은 자주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에서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 모습조차 시기가 나고 빈정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괴로워하며 상담하는 것을 매번 들어줘야 하는 일도 곤욕스러웠다.
“그게 아니라……. 그 새끼가 먼저 현아 욕을 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였단 말야.”
“뭐라고 했는데?”
“감독을 그리 잘 꼬시더니, 배우랑 결혼해서 놀랐다고. 감독 킬러라나 뭐라나. 말이 사귀는 거지 몸 로비라던가.”
“사귀었던 건 맞잖아?”
원색적인 비난이긴 했지만 그런 오해를 받는 것에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그 장면을 목격하기까지 했다. 한창 나이의 여배우에게 스캔들 한두 개 있는 게 흠은 아니었지만 신현아는 유독 감독과 사귄다는 소문이 많았다. 아마 개중에 진짜 사귀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딱 한명이래. 딱 한명 사귀었는데 마치 작품 바꿀 때마다 사귀는 것처럼 얘기하잖아.”
“아니면 그만이지. 그걸 뭐 일일이 신경 써.”
약혼자가 모욕을 당하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지만, 모든 배우와 친하기도 힘든 법이고, 주목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세계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끄럽고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일일이 반응하며 싸우다간 싸우느라 제대로 된 작품은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감정보다는 일이 우선, 허술해 보여도 일에는 프로인 녀석이다.
분명 다른 이유가 존재하지 싶었다. 단순히 더러운 이야기를 지껄이는 동료를 때린 게 다라면, 한 방 날려서 시원한 표정을 지어야 할 게 아닌가. 그는 여전히 무언가에 괴롭게 짓눌려 있었다. 맘에 안 드는 놈을 한 방 먹여도, 술을 진탕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근심이 남아있었다. 아마도 은태가 나에게 전화를 한 진짜 이유가.
“현아가 우리 결혼 다시 생각해 보자고 그러더라.”
“뭐? 왜?”
미쳤냐는 말이 막 튀어나올 뻔한 것을 겨우 삼켰다. 미쳤다고 박에 생각되지 않았다. 기자들을 불러놓고 성대하게 발표해놓고,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예비신부인양 웃었으면서 이제 와서? 연기를 했던 걸까. 혹 다른 사람이 생겼다거나……
그때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현아와 함께 있던 남자, 최현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 때문에 잘 보이려던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는 대 놓고 유혹하는 현아를 단칼에 잘라내지 않았던가.
“아직, 결혼 보다는 일이 더 하고 싶대.”
“뭐? 그거야 결혼하고 나서도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그런 거라면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생각을 정리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비록 정식 프로포즈 전이라고는 해도, 결혼발표며 결혼까지의 스케줄이 모두 계획 중인 사이에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때리는 건 아니지 않는가.
“아무래도 미혼인 쪽이 일하는 데 편하겠지. 이해해.”
“이해한다면서 왜 이러는 건데?”
그 말도 안 되는 변덕이 이해가 가능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솔직히 머리로는 이해 할 수 있다고 해도.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실망하고 상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은태가 현아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그녀와의 결혼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현아가 은태를 좋아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야망 때문에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여자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싫은 사람이나 실은 일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적어도 결혼을 결심 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마음의 크기를 굳이 비교하고 재려하는 것이 우습긴 했지만 확실히 은태가 그녀를 더 많이 좋아한다. 그래서 은태는 늘 전전긍긍했다. 다른 일은 대충대충 낙천적인 성격으로 넘기는 녀석이 현아 앞에서만은 늘 성급하고 초조해 보였다. 작은 행동, 짧은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리고 동요했다. 나는 그 모습을 어쩔 수 없니 두 눈으로 보아야만 했다. 나에게 그것은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재해이자 사고였다. 피할 수도 없었고 외면 할 수도 없었다. 늘 괴로웠지만, 매번 그렇지 않은 척 해야 했다.
“나 이제 어쩌냐.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는 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가로채는 걸까.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내 마음조차 떳떳하게 내밀 수 없는 비겁하고 겁 많은 인간은 자신에게 강요되는 이 어이없는 감정노동을 그저 참아야만 하는 걸까. 언제까지나 눈부신 네 곁에서 친구로, 친구인 척 연기해야 하는 걸까.
소리 없이 무너지는 머릿속으로 흐릿한 멜로디가 끼어들었다. 처음 희끄무레 했던 멜로디는 점차 익숙한 벨소리로 변해갔다. 이런 심각한 순간에 누구야. 성가시고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본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최현오 감독’
이란 글자 때문이었다. 그 이름을 보고 나서야 낮에 있던 일과 약속이 떠올랐다. 약속을 해놓고 말없이 튀어나와 버렸으니 전화가 오는 것도 당연했다.
“매니저야?”
소수잔에 코를 박고 그대로 죽어 버릴 것 같던 은태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냐. 다른 전화.”
걱정 때문인지 괜히 손이 저려오고 식은땀이 맺혔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문자라도 남기고 나왔어야 하는데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은태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어딥니까?
다짜고짜 물어오는 묵직한 목소리에서 싸늘함이 느껴졌다. 성격이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던데, 약속을 잊은 상대에게 너그러울 리는 없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바람을 맞는다면 어떤 성격 좋은 사람이라도 화를 낼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변명은 됐고. 지금 어디에 있냐고.
“여기 J대 앞이에요. 그게 친구한테 갑자기 사고가…….”
‘뚝’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내 목을 향해 날아드는 칼끝 같이 느껴졌다. 큰일 났네. 설마 여기까지 오는 건 아니겠지? 장소를 묻긴 했지만 온다는 말은 없었다. 그 외에 다른 말이 없었다는 것이 조금 불안했지만,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불안한 예감은 한 시간도 안 돼서 현실이 되었다. 가게 상호를 묻는 문자가 왔을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눈 앞에 나타난 최현오를 보고 그 추진력-이 아니라 분노인걸까.-에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진짜 오셨네요.”
낮에도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밤에 만난 최현오는 그 새 다른 약속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말끔한 정장차림에 머리까지 훨씬 정돈된 상태였다. 확실히 옷이 날개는 날개였다.
“급한 일이라는 게 이런 거였습니까?”
최현오의 변신에 놀라는 한편 초조함에 눈치를 보는데, 그의 불만에 찬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유은태 입니까?”
“아, 네? 네. 은태야. 여기는 최현오 감독님…….”
이 상황을 은태에게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는 지를 고민하면서 어쩔 수 없니 소개를 하려 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은태는 아까 테이블에 엎어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최현오의 통화때문에 심란해서 한참동안 조용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꽐라인 것 같은데 냅둬요.”
“아, 네. 그래야겠네요.”
“이 친구 때문에 나랑 한 약속을 개무시 했다 이거군요.”
“개, 개무시라뇨. 급하게 나오느라 잠시 깜빡.”
“뭐 절친한 사이니까 이해는 합니다.
최현오는 개 무시한다고 방금 전에 살벌하게 투덜거려 놓고, 딱딱한 말투로 이해를 한다 했다. 냉정과 열정을 마구 오가는 바람에 갈피를 못 잡겠다. 그런데 은태랑 내가 친한 건 어떻게 알았을까.
“검색하니까 나오던데요. 유은태씨 인터뷰 기사.”
검색, 기사 라는 두 단어를 듣고서야 조금 천천히 납득했다. 내 이름을 검색하면 은태의 기사가 뜨는 구나. 검색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유명한 배우와 친하다고 말하는 편이 본인에게 도움이 될 텐데 은태는 늘 내 이름을 거론해 인터뷰하는 기자나 리포터를 당황케 했다. 오히려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어라. 저거 유은태 아냐?”
“누구 말하는 거야. 잘 안 보이는데?”
“저기 엎드려 있는 사람. 내가 아까 봤어.”
“에이, 닮은 사람인가보지. 유은태가 이런 데를 왜 와?”
손님이 뜸하긴 했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점이다 보니 시간이 늦어질수록 사람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만도 했다.
“우선 이 친구부터 치우고 얘기 합니다.”
은태를 짐작 취급하는 말투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 말엔 동의했다. 녀석은 이미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런 상태임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매니저가 대기 중 일 테니 은태의 집을 오갈 수는 없어, 그를 오피스텔로 데려갔다. 최현오가 차를 가져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신세를 졌다. 택시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엄청나게 눈치를 보였다. 오는 내내 말이 없던 것이 더 신경이 쓰였다.
“여기 유은태씨 집이었습니까?”
엎고 온 은태를 침실 침대에 버리듯-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 큰 녀석을 엎고 들쳐 엎고 올라오느라 너무 힘들었다-내려놓고 나왔을 때에야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최현오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처음이 아니었구나. 우리가 처음-사실 처음은 아니었지만-마주한 곳이었다.
“뭐, 그런 셈이죠.”
“오호. 신현아 스토커는 아니었다는 거네.”
또, 반말이네. 하지만 반말인 것을 지적할까 고민할라 치면, 그걸 눈치라도 챈 듯 재빨리 정중한 말투로 바꿔버린다.
“그런데 왜 숨었습니까?”
참 말투조차 얄미운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유은태랑 친한 거지 현아씨랑 친한 건 아니라서요. 거기 있다는 걸 알면 별로 안 좋아했을 겁니다.”
“그 뜻은 신현아랑은 사이가 안 좋단 말이군.”
정곡을 찔렸지만, 아니 그래서 기분이 더 나빴을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또 반말. 이번에야 말로 지적해야겠다 싶었지만.
“저기, 감독님.”
“방해꾼 치웠으니 우린 이제 갑시다.”
몇 마디 말만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열나게 하는 것도 참 재주인 것 같다. 꽤 무던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심하게 무던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니 정상적인 대화가 힘들었다.
아오, 열 받아. 소원인데 정말 딱 한 대만 때리고 싶다.
먼저 현관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하고 허공에 주먹을 날린 후에야 그를 따라 나왔다.
“땀 닦아요.”
감정을 한껏 담아 현관문을 쾅 닫고 나오는데 최현오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정확하게 각이 집힌 손수건은 향긋한 냄새까지 풍겨 왔다. 생긴 거랑 다르게-비록 지금 상태는 꽤 멀끔했지만 첫인상이 워낙 굉장하지 않았나-이런 걸 가지고 다니나. 그걸 얼결에 건네받은 후에야 뒤늦게 이마를 축축하게 적힌 땀방울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긴 했지만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까지의 거리를 건장한 남자를 업고 움직이는 게 쉽진 않았다.
“고맙습니다.”
좀 전까진 한 대 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지 못한 배려는 의외이기에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게 같이 부축하자니까, 왜 혼자 엎고 오느라 고생입니까?”
하지만 좋은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미련스럽다는 듯 혀를 차며 타박하는 남자를 보니 다시 슬그머니 주먹이 쥐어 졌다. 이게 웬 밀당 화법인가. 문제는 좋은 말 한마디에 가시 돋친 말 세 마디쯤이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제 친구니까 모르는 분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아서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라 이겁니까?”
“그럼 잘 알 리가……있어요?”
별 생각 없이 대꾸하다, 문득 그의 눈빛에 묘한 심통이 느껴져 뭔가 했다. 모르는 사이라는 말에 문제라도 있나. 물론 통성명 정도는 했지만 내가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은 인터넷 검색만 해도 다 나오는 수준이었다.
“뭐, 듣고 보니 그건 그렇군요.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 모르는 사이지. 생판 남이지. 네. 그렇죠.”
그런데 왜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란 말을 여러 번 강조 하는 걸까. 그것도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하지만 며칠 전에 신세진 것도 있었고 오늘 약속을 잊어 버린 일까지 여러 가지로 나는 이 남자에게 약자일 수 밖에 없었다. 반쯤 협박받아 함께 일하기로 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보아야 한다. 억지로라도 친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갈까요. 이 동네에 늦게까지 하는 술집이 별로 없어서…….”
오피스텔을 나와 어느새 컴컴하고 조용해진 거리로 나왔다. 이 동네는 조용하고 깔끔하긴 한데 대신 놀 거리는 없었다.
“잘 아는 동네입니까?”
“네. 저도 이 근처 살거든요. 집 가까워요.”
“그럼 거기로 갑시다.”
“집이라니. 우리 집이요?”
망설임 없이, 마치 잘 아는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답해 내가 얘기를 꺼내놓고도 놀랐다.
“아. 모르는 사이라 싫다는 건가.”
마침 꼬투리 잡았다 생각했는지 또 다시 얄밉게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히 사람 오는 걸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대한 형도 부인과 싸우면 종종 피신오긴 했고, 술 취하면 기분 좋아서 알게 된지 얼마 안 된 동료를 데려갈 데도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 지저분하고 좁아서요.”
하지만 까다롭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집으로 가자고 하기엔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일 얘기를 해야 하는데 적당한지도 모르겠고.
“딱히 깔끔 떠는 성격 아닙니다. 걱정 마십쇼.”
“그래도…….”
“갑시다. 술은 내가 살 테니까.”
덥썩 손을 잡아끌더니 앞장섰다. 우리 집인데 왜 자기가 앞서서 가는 건지, 그보다 왜 남의 손은 이렇게 덥석덥석 붙잡아 대는 건지 뒤늦게 그 손을 뿌리치고 혹 뭐라 투덜댈지 모른다는 생각에 후다닥 남자의 앞으로 나섰다.
“알았어요. 그럼 딴 말 하기 없기입니다.”
*
발에 차이는 쓰레기들을 급하게 소파 아래와 침대 밑으로 치우며 막 현관문 안으로 들어선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더럽다고 여러번 경고하긴 했지만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깨끗한 데 뭘 그리 치워요?”
“이, 이게 깨끗하다고요?”
타인의 부끄러움을 배려해 입바른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어쩐지 본인의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 청소는 관두기로 했다. 하긴 더럽고 좁다는 데 굳이 오겠다고 한 이가 자신이니 불평을 하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상당히 애주가신가 봅니다.”
다만 주방 한 구석에 쌓여있는 소주병과 맥주캔을 보고 한마디 하긴 했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을 자주 잊어서.”
“쏘맥 좋아하시나. 술 취향이 비슷하니 얘기는 잘 통하겠네요.”
칭찬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아니면 딴에는 칭찬을 한 것이지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장소나 분위기를 따지는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고집스런 커피 취향 때문인지 껄끄러웠던 만남들 때문인지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인 줄 알았다. 물론 여전히 편한 사람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본부터 볼래요?”
“아, 그래도 되나요.”
“그 편이 얘기하기 더 편할 것 같으니까요.”
간편한 차림이라 대본을 어디서 꺼내나 했는데 자그마한 usb를 꺼내 건넸다. 스마트한 시대에 너무 동떨어진 생각만 하고 있던게 아닌가 싶다. 침대 이불 속에 처박혀 있는 노트북을 급하게 찾아와 부팅을 했다.
“빨리 볼게요.”
“오래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이 친구가 있으니까.”
그는 발치에 놓인 술이 가득한 봉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목은 ‘세상 끝의 남자’ 였다. 제목만 봐도 그리 밝은 내용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만 내용은 더욱 어둡고 절망적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한없이 절망적인 상황에 다다른 사내가 자살을 결심하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상처를 주고 떠나보낸 첫사랑,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오래 전 이혼한 부인까지.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여성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들은 당연히 그를 딱히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내는 이 꿀꿀한 여행 끝에 작은 희망을 가지게 된다.
단편이라 분량이 길진 않았지만 상당히 임펙트 있는 내용이었다. 시나리오를 본 것만으로도 희미한 전율이 느껴졌다. 생각지 못한 섬세함이 대사 하나 지문하나하나에서 느껴졌다. 시나리오만으로도 상당히 좋았다.
“그런데 제가 맡을 역할이…….”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 내용 안에는 주인공 남자와 세명의 여자 외에 다른 남자 배우는 필요 없어 보였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아파트 경비원 정도일까.
“설마 첫사랑 역할이나 이혼한 부인을 시킬 거라고 생각해요?”
“네? 그럼…….”
“누구겠습니까. 주인공이지.”
어느 정도 예상한 답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했다. 단편영화라 분량이 얼마나 될까 싶어 가볍게 승낙했는데 뜻밖에 극 전체를 끌어가는 역할, 그것도 주인공이라니. 머릿속이 어찔해 졌고, 잘 넘어가던 숨이 기도에서 꼬이는 기분이었다.
“저, 저를 주인공으로 쓰시겠다고요?”
“네. 그게 뭐 잘못되었습니까.”
“저 주인공 맡아 본적이 거의 없어요.”
“그럼 이번 기회에 해보면 되겠네요.”
“아니,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어요?”
주인공 역할로 캐스팅한다는데 이렇게 따지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7,8년을 주인공은커녕 비중없는 조연만 전전한 나로서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래도 좀 지나친 반응이긴했다. 그만큼 놀라고 당황스러워서였지만 상대방이 그 유난스러움을 나쁘게 받아들여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최현오의 얼굴에 여과 없는 짜증스러움이 떠올랐다. 그 불편한 표정을 마주하고 아차 싶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제안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이 일을 했다거나 본적 있는 사람도 아니고 겨우 며칠 전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마주친 사람을,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영화 주연으로 발탁하다니. 내 연기를 제대로 본 것도 아니고, 내가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세 있는 배우도 아니었고.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메이저 영화도 아닌데 그리 부담가질 거 없습니다. 단편 영화제에 상영하자고 제의는 들어왔지만, 작은 영화제이고. 극장에 걸릴 기회도 별로 없을 테니까.”
“아니. 저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저를 뭘 보시고 중요한 역할을 맡기시겠다는 거예요?”
“나야말로 이해가 안가네. 뭘 보고 캐스팅 하겠습니까. 그쪽 연기 보고 캐스팅 한 거지. 내가 뭐 딴 맘이라도 있어서 이런다고 생각합니까?”
최현오 감독의 말은 구구절절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얼굴만 보고 캐스팅 할 정도로 잘난 얼굴도 아니었고, 엄청난 대표작도 없지만 분명 나 역시 여러 작품을 경험한 배우였다. 대부분의 사람의 기억 속에 없다고 해도 누군가 그 속에 나온 나를, 연기하는 나를 보기는 보았을 것이다. 우연히 그 연기를 기억하고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감독 한명쯤 있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제가 나온 작품을 보셨어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따로 오디션 본 것도 아닌데 내가 월 보고 같이 일하자고 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처음부터 내가 배우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라-배우이기 때문에?-수상한 사람은 아닐거라 생각해서 봐준다 하지 않았던가.
“물론 나도 이게 상업영화면 아무리 강신형씨가 엄청난 연기력의 소유자라도 주연으로 쓰기 힘들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 졸업작품이라고 설명했잖아요. 단편영화입니다. 고작 그런 영화의 주연 제의를 받았는데 왜 못한다고 뻣대는 겁니까?”
“……”
“강신형씨. 늘 그런 식입니까. 생각보다 부정적인 사람이네.”
아무래도 내 태도가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연거푸 맥주 캔을 비워나갔다. 맥주를 들이켰으니 조금쯤 시원한 표정을 지어야 할텐데 그는 더욱 무겁고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싫다는 건 아니죠?”
“네. 그런 건 아닌데…….”
“그럼 해요. 주인공 하면 큰일 날 것처럼 굴지 말고.”
나의 경우엔 그의 단호하고 짧은 말 몇마디에 여러 가지 충격을 받았다. 비난 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이렇게 루저 근성이 뼛속 깊이 스며들었는지 몰랐다. 아무리 일이 안된다고 해도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일을 해왔다니. 내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걸까. 작은 역할이라도, 돈이 별로 안 되도 연기 자체를 진심으로 즐기던 때도 분명 있었건만.
“내가 보기에 딱 맞다고 생각해서 맡기는 겁니다. 자신을 못 믿겠거든, 나를 믿어요.”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듯한 말싸움은 그로서 완벽하게 최현오 감독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왠지 싸울 필요도 없는 문제로 기운을 뺀 느낌이었다. 고맙다고, 잘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가볍고 겸손하게 넘길만한 일이었다. 왜 안된다고, 못하는 일이라고 못박고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을까.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영영 오지 않을 기회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결국 내가 정해놓은 갑갑한 틀 안에서 멋대로 내린 결론이었을 뿐이다.
“기분 상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자신이야 말로 딱딱하고 불투명스러운 표정으로 안주도 없이 술만 비우고 있으면서 내 기분을 묻는다. 내가 넋부자가 되어 말없이 앉아있었기 때문이려나.
“너무 맞는 말씀이라, 찔려서요.”
인간적으로 정이 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감독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는 꽤 직관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속의 갑갑하고 부정적인 면을 정확히 꽤 뚫어 볼 정도로.
“잔소리가 너무 심했나 했는데, 새겨들었다니 다행이네.”
그의 충고는 직설적이고 가차없긴 했다. 그것이 조금 신경쓰였던 걸까. 뒤늦게 걱정-인지 모르겠지만-섞인 투덜거림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한다.
허탈한 속으로 술을 넘겼다. 유난히 술이 쓰게 느껴졌지만 일부러 그 씁쓸한 감각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지금 느낀 감정을, 허무하고 씁쓸한 감정을 기억하고 싶었다. 내가 또 이런 한심한 짓을 하게 될 일을 대비해서 말이다.
“실례지만 감독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그런데, 좋은 충고는 충고로 받아들이겠지만 여전히 저 짧은 말은 신경이 쓰였다. 나보다 연상일 수도 있겠지만, 서로 나이를 튼 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거슬렸다.
“그쪽이랑 같습니다.”
“제가 나이를 알려드린 적이…….”
“유은태랑 동갑이잖아요?”
그 말에 단박에 납득한 것은 그만큼 유은태가 유명한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은태의 프로필이야, 검색만 하면 뚝딱 나올 정도였다.
“저 질문이 하나 더 있는데요.”
“얼마든지.”
“신현아, 준비하신다는 영화에 쓰실 거예요?”
물론 그때 분위기로 봐서는 신현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진 않지만, 혹 모를 일 아닌가. 갑자기 일 때문에 결혼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게, 정말 일 때문인지 의심스러웠다.
“궁금해요? 그럼 나도 질문하나 해도 됩니까.”
“네? 아, 뭐 하려면 하세요.”
질문 하나도 쉽게 들려주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심술궂은 성격이었다. 차라리 아직 언론에 흘리면 안 되는 정보라 말할 수 없다고 하던가.
“그쪽, 게이에요?”
풉. 막 입에 댔던 맥주캔을 서둘러 때어 냈지만 이미 일부분 마주앉은 사람에게 튄 후였다. 굴러다니던 수건을 주워 건넸지만 이미 손으로 슥슥 닦아 낸 후였다. 그 무심한 태도에 더욱 질문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실은 예전에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옛날 드라마를 봤는데, 게이 역할 하셨더라고요. 굉장히 잘 어울리길래, 혹시나 하고요.”
“아…..그거 혹시. 단막극.”
“네. K방송극 단만극이었을 겁니다. 제목이 장례식 전야, 였던가.”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자각한 지는 오래였지만 인터넷 커뮤니티를 얼쩡거리다 한 두 번 그 모임에 나가 본 게 전부였고, 그런 쪽의 가게나 남자를 제대로 만나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여자라면 두 번 사귀었던 경험이 있다. 물론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 보니 그 연애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와 잘 해볼 생각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남자가 마음 속에 늘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무얼 봐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는데, 드라마 속 역할 때문이었나.
그때 내가 맡은 역할은 역시나 주인공의 친구 역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를 좋아하던 게이, 그 친구가 죽은 후에야 친구의 부인에게 그 마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나 역시 그 역할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경험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역할이기 때문인가. 함께 했던 감독이나 동료 배우들도 연기 좋았다고 비행기를 태워주기도 했었다.
“그때 꽤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느낌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그때는 아직 영화 찍고 있던 때가 아니라 나중에 한번 기회가 있으면 일하고 싶다 생각하고 잊고 있었는데, 마침 딱 마주친 거죠.”
아직 신인이던 시절, 오래된 단막극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내겐 의미 있는 작품이었지만 연속극도 아닌 단막극을 보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고맙습니다.”
“됐어요. 좋은 걸 좋다고 말했을 뿐이니까.”
나조차 잊었던 나를 기억해준 것만으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나 불편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임은 변함이 없었다.
“참, 근데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는데.”
“네? 무슨…아…….”
게이냐는 질문을 그만큼 연기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걸로 들었는데, 단순히 역할 때문이 아니었다는건가.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넘어가도 됩니다.”
그냥 아니라고 기분 나쁜 농담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면 되었을 텐데, 나는 왜인지 그 짧은 거짓말을 쉽게 내밸지 못했다. 왠지 태연히 거짓을 말해도 마주한 남자가 그것을 정확히 꿰뚫어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거 마셔요.”
그는 식탁 위에 있던 큰 머그잔을 가져와 거기에 소주를 가득 들이붓고 내게 내밀었다. 가볍게 건넨 질문 하나로 시작해 졸지에 진실게임이 되어 버린 것이 기막히긴 했지만, 괜히 어줍잖은 변명을 하기 보다는 벌주를 마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단순히 재미로 그런 질문을 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감독님은요?”
“아직 결정 못했어요. 나 혼자 결정하기 힘든 사항이고.”
“그럼 안하는 건가보네요?”
“처음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열정 있는 배우더군요. 그때 보아서 알겠지만, 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단단하고요. 누구와는 달리요.”
두 사람이 그곳을 나간 후 어떤 대화를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신현아는 그에게 어느 정도 자신을 어필한 모양이었다. 불유쾌한 기억 때문에 찜찜하긴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하고 싶어서 자신의 자존심까지 내려놓을 정도인가 궁금해졌다. 방금 전에 읽은 단편 영화 시나리오에서도 상당히 좋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주 반병 분량을 한꺼번에 들이킨 여파인지 술기운이 훅 하고 올라왔다. 그러나 이런 날은 좀 취하는 편이 나았다. 생각지 못하게 길어진 하루의 피로가 몸과 마음을 갑갑하게 눌러왔기 때문이다. 술기운은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고, 평소에는 꼭 닫고 있던 입을 자연스럽게 열게 한다. 이미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했으니 더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 싶기도 했다.
“변명 같겠지만 저도 예전부터 이 모양은 아니었어요.”
여전히 내 자신이 그리 대단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모든 걸 제 풀에 포기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런 자존심만은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저도 좀 더 의욕 넘치던 때가 있긴 했어요. 나름 배우로서의 꿈도 있었고……. 그런데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내가 하던 이야기에 따박따박 반론을 재기하던 최현오는 이번만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사실 그의 대답을 기대하거나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혼잣말이나 다름없었다.
“외모가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 어차피 난 연예인이 되기 보다는 배우가 되고 싶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저보다 연기가 뛰어난 배우들도 많더라고요. 그래도 그런 사람들처럼, 아니 그 사람들 이상으로 잘하고 싶어서 방을 새워서 대본을 또 보고, 또…….”
최현오에게 따끔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잊었던 열정이 떠올랐다. 그래, 내게도 분명 꿈이 있고 열정이 있었다. 작을 역할이라도 방을 새워서 연구하고 연습하던 때가 있었다. 그 작은 역이라도 고맙고 소중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렇게 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했었는데 감독님 말대로 제가 잘못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 난 자신에게 들어온 역할을 기계적으로 답습하고 있었다. 어차피 중요하지 않은 역할인 데 뭐 어떠랴. 그렇게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낮추고, 그걸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만족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자위 아닌가. 그런 태도는 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 자체에 영향을 끼쳤던가 싶다. 어차피 안 되는 일이라 주춤거리고 포기한 채로 벗어나려는 의지조차 내던진 채로 누구도 아닌 내 인생을 외면했던 것 아닌가.
“다른 감독들은 모르겠지만 난 적당히 못난 얼굴이 좋던데.”
가만히 듣고 있던 최현오가 불쑥 엉뚱한 외모 지적을 한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 해도 못났다는 소리를 듣고 좋을 사람은 없었다.
“지금 제 얼굴이 못생겼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적당히, 라는 내 말 못 들었어요? 난 화려한 얼굴은 지양합니다. 그래서 신현아씨도 별로 쓰고 싶지 않았고.”
“별로 감독님 취향 물은 건 아니었는데요.”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는 알겠지만 여전히 마음 속엔 앙금이 남아있었다.
“자신감 가지라고 해주는 얘깁니다. 맞다. 그쪽 친구 유은태 같은 얼굴이 가장 별로. 여기 이 얼굴이 딱 내 취향.”
덜컹 의자 밀려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큰 그림자가 졌다. 주방 보조등만 틀어놓아 안 그래도 어두운데, 눈앞에 커다란 사람이 불쑥 시야를 막으니 더욱 컴컴한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무얼 하려는지 몰랐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거나 물 마시려고 냉장고로 가려는 건가, 무심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딱 좋다. 완벽해.”
두 손으로 덥썩 뺨을 감싸 안은 것을 느꼈지만 생각지 못한 공격에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뒤늦게 얼굴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두 뺨을 감싼 손아귀 힘이 상당히 셌다. 지난번 카페에서 남의 손 잡고 협박할 때도 느꼈지만 힘이 상당했다. 두터운 손에는 거부하기 힘든 열기가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지만 취한걸까. 아니면 본래 체온이 높은걸까.
“잘난 구석도 없고 그렇다고 썩 못나지도 않은 게, 도화지 같은 얼굴이잖아요. 조그만 다듬으면 꽤 좋은 재료로 써 먹을 수 있을 것 같달까.”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흐릿한 얼굴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이었다. 지나치게 깊이 찌르고 들어오는 건방 진 눈빛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자신감이나 오만함이라 생각했는데, 왜 인지 그것이 전부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다.
“놔요. 징그러우니까.”
겨우 단단한 손을 뿌리치고 의자 뒤로 바짝 물러났다. 그는 왠지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며 일부러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상처 받았습니다. 징그럽다니.”
“가, 갑자기 그러면 놀라잖아요. 그럼 좋을 리가 있겠어요?”
“나한테 잘 보이고 싶지 않아요?”
“누구처럼 육탄공격이라도 하란 말입니까.”
“그러시든지. 강신형씨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습니다.”
농담이란 것을 아는데 속이 울렁거리는 건 왜일까. 취해서, 아니면 한꺼번에 많은 정보와 이야기를 받아들인 머릿속에 버퍼링이 걸린 걸까.
“으, 머리 아파.”
결국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실제로 머리가 아프기도 했고.
“취했습니까?”
“예. 조금. 아 왜 벌써 취하는 거지. 저 잠시만……. 잠시만 쉴게요.”
“그래요. 그러는 게 좋겠네요.”
잠시 이 곤란한 손님을 내쫓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조금 누워있으면 멀쩡해질 것 같아 양해를 구하고 침대로 가 누웠다. 어차피 주방이나 침대나 엎어지면 코 닿을 데라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누워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아픔은 서서히 가라앉는 듯 했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 속에 애써 묵혀 두었던 걱정이나 질문은 선 명하게 떠오르는 듯 했다.
“나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였을까. 나는 여전히 주방에서 묵묵히 술병을 비우는 남자를 향해 불쑥 물었다. 내 질문에 마시던 맥주 캔을 가볍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잘 못하면 어때요. 내가 하자고 한 건데.”
“후후. 것도 그렇네요.”
그의 말대로 그의 선택이니 그를 믿고 따라가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속을 알 수 없어 아무래도 인간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재능과 능력은 믿을 수 있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 졌다. 쓸데없는 고민을 내려놓으니 마음은 가벼운데 이상하게 몸은 무거웠다.
“강신형씨. 잠든 겁니까?”
“…..아뇨. 안 자요.”
힘겹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지만, 가만 있는 몸이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곁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음에도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보다 술 약하시네.”
바로 곁으로 다가와 얼굴을 들여다보는 상대가 누군지는 알았지만 어떤 반응도 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귀찮았다. 귀찮고 무력한 마음에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알아서 집에 가겠지, 무겁게 찾아오는 잠의 무게 때문에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강신형.
그래서, 누군가 나를 친숙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도, 그냥 지나쳤다. 마치 여러 번, 예전에도 그렇게 친숙하게 불렀던 것 같다고. 그저 생각만 했을 뿐. 곧 그 생각도 완전히 흩어져 자취조차 찾기 힘들어 졌다.
part 2. 말 할 수 없는 비밀
햇볕이 여과 없이 왼쪽 뺨 위에 내려앉는 것을 얼마간 무시했다. 정신은 반쯤 깨어났지만 몸은 여전히 깨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억지로 일어날 이유는 없었다. 현재의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설 스케줄이 없었고, 카페 일은 오후에 나가보면 되었기 때문이다. 별이나 공기의 온도로 어렴풋 가늠해 보건데 해가 떠오른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 나지 않았다. 7시 나, 8시쯤 되었으려나.
좀 더 자도 괜찮다. 피곤하고 무거운 몸과 달리 쓸데없이 말똥말똥하게 깨어있는 머릿속을 향해 가만히 중얼거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어렴풋 들려오는 타인의 목소리,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의 대화소리로 인해 다시 잠들려던 정신이 번쩍 밝아졌다. 혼자 사는 집에 사람 목소리가 그것도 한사람도 아닌 그 이상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이보다 소름 돋는 상황이 또 있을까.
억지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그 소리가 TV에서 나오는 소리임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TV 앞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엄청 집중 중인 남자의 존재를 인식했다. 저 사람이 왜 우리 집에……. 아니, 어제 집으로 데려와 함께 술을 마셨으니 왜 아직도 안 갔냐고 물어야 할 듯 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직도 안가고. 라는 말을 덧붙였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발견하고도 태연히 리모컨 든 손을 들어 인사할 정도로 태연한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잊었다.
“일찍 일어났네요. 더 자도 되는데. 아, 내가 깨운건가.”
“뭘 보고 있는 거예요.”
“뭐긴요. 보면 모릅니까?”
확실히 무얼 보고 있는지는 두 눈에 보였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내가 데뷔 후부터 꾸준히 모아온 녹화 테이프였다. 데뷔 초창기의 어리숙한 내 얼굴이 화면 속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비디오 테이프 참 오랜만에 봐서 신기해서 틀어봤더니, 출연작 녹화 분이던데요. 하나 둘씩 보다 보니까 해가 떠 버렸더군요.”
“밤 샌 거 예요?”
“원래가 야행성이라. 밤새 술 마셔 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은 일찍 곯아 떨어져서 심심했거든요.”
안 그래도 민망한 상황인데, 굳이 더 부끄럽게 지적까지 해주니 고마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재생중인 화면을 두고 볼 수 없어 전원을 껐다.
“출연작을 다 모아 둔 겁니까?”
“뭐, 거의 다요. 어차피 요즘엔 DVD가 나오기도 해서, 녹화는 안 해도 되니까요.”
“이것 봐요. 강신형씨, 충분히 성실한 배우잖아요.”
“이런 건 그냥 기본이죠. 뭐.”
“그런 기본도 안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자부심 가져도 됩니다.”
사실 녹화 테이프며, DVD를 엄청난 양을 소장 중이었지만-나름 출연작은 많았다. 작은 역할 하는 사람들은 다작 이 가능하기 때문에-그것들을 안본 지 꽤 오래되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단역으로 나온 드라마를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보고, 또 보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안 그래도 뻘쭘한 기분이 드는데, 먼지 쌓인 테이프를 최현오가 열심히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부끄러워졌다.
“슬슬 졸린 것 같으니 가볼게요.”
“안 피곤하세요?”
“피곤하긴 한데, 왜요? 재워주게?”
“아, 아뇨. 안녕히 가세요.”
“이거 참. 농담인데 야박하기 짝이 없으시네.”
최현호는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내 쪽에선 가슴을 쓸어 내렸다. 어쩌다 보니 손님을 두고 잠들었다곤 하지만, 재워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진 않았다.
“저한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세요?”
어떻게 들으면 좀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는 대사였지만, 이 남자는 나와 만난 지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지나치게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작품 때문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기분이었다. 별로 재미도 없는 내 출연작을-개 중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작품도 있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꽤 있었다-방을 새서 보 다니, 솔직히 놀랐다.
“내 취향이라?”
짓궂은 눈빛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지만 나는 웃음이 나질 않았다. 이 남자는 내가 게이임을 의심하고 있었다. 어 제 질문의 연장 같은 게 아닌가-떠보는 얘긴 아닌지-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농담하지 마시고요.”
“농담 아닙니다. 어제 그랬잖아요. 얼굴이 내 취향이라고.”
싱거운 농담에 맥이 빠져서 관두기로 했다. 신원보장 되는 사람이니 사기꾼일리도 없고, 사실 내게 무언가를 빼앗아 갈 게 있는가 싶었다.
타인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내가 삐뚤어 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 남자가 진중하지 못한 탓 일까. 그러나 그가 자신의 영화에 대하는 태도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보고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 여전히 망설 임이 남아있는 자신을 향해 격려하듯 다독거려 보았다.
누군가 때문에 잠이 천리만리로 달아나 버린 나는 아직 약간의 피로감이 몸 안에 남아있음에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종로로 향했다. 집을 나서기 전 검색해 보니 종로에 있는 독립영화 전문 영화관에서 아직 최현오의 첫 장편 영화이자 영화제 수상작이 아직 상영중이라는 정보를 보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보았기 때문인지 영화가 어떤지 더욱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다. 최현오가 나, 정확히는 나라는 배우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고무 시켰다. 왠지 나만 상대방에 대한 정보에 무지 한 것이, 불리하단 느낌을 받았다. 예로부터 싸움에 앞서서는 적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하지 않던가. 물론 그는 싸움의 적이라기보다는, 함께 하나의 일을 해야 할 동료이자 지휘관이었지만 왠지 적이란 기분을 지울 수 없음이 사실이었다.
나를 향한 칭찬이나 작은 상냥함이 존재함을 알고 있음에도 간혹 보이는 그의 공격적인 태도들이 그런 기분을 더욱 공고히 만들어주는 듯 했다. 원래 성격이 그렇다면 할 수 없었지만, 유난히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 이 들었다.
영화제 수상 후, 재개봉 한지도 시간이 꽤 흘러서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처럼 일부러 찾아와 보는 사람들도 많아 보였다. 그래도 보는 사람이 나뿐 일거라 생각했던 것에 비해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게다가 평일 오전, 대부분 직장에 나갈 시간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젊은 학생들로 보였다. 영화 시작 전부터 상영관 앞에 배치된 팜플렛을 유심히 보는 이들이 많았다.
‘심연 속에서’
확실히 밝은 영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목부터 우울함이 풍겨왔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우물 속에 빠져 있는 한 남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우물 벽은 미끄럽고, 줄 하나 보이지 않는데다가 아무리 부르고 또 불러도 사람은커녕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 누군가의 원한을 샀던 것인지 아주 오래 전부터 최근까지의 삶을 되짚어 본다.
그는 사채업자로, 양아치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온 남자다.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서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고, 그는 어둠 속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미쳐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소재가 특이하고 흥미로운데다 연출이나 대사가 세련되어서, 저 예산이라는 핸디캡을 충분히 뛰어 넘는 영화였다. 최대한 돈을 둘이지 않고 영화를 찍기 위해서 만들어낸 플롯일지도 모르겠지만,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내 면의 갈등과 감정들이 상당히 잘 표현되어 있었다. 거기다 이어지는 충격적인 반전과 결말까지.
영화관을 나서는 내 얼굴은 열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떡 벌인 채라 상당히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놀라움과 감동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 하나같이 떠오르는 생각도 같을 것이다. 내가 왜 이 영화를 이제야 보게 되었나.
예전에만 해도 영화란 영화는 닥치는 대로 보고 다녔었다. 독립영화나 마이너 한 해외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이 영화관 역시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예전엔 한 달에 두 세 번은 오고 갔던 곳이었는데 말이다. 최현오는 여전히 적 인지 내 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커다란 자극이 되는 사람임은 분명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완전히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보러 와야지. 본래 마음에 드는 영화는 여러 번 보는 터라, 유난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영화는 한 번 보아서는 의미를 다 알기 힘들어 보였다. 이건 꼭 여러 번 봐야 할 영화였다.
최현오의 영화를 본 후에 가장 크게 와 닿은 명제는 사람의 인성과 재능의 연관관계였다. 그 말고도 여러 감독들을 만나봤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거장도 있었고, 팬이어서 작은 역할이라도 꼭 출연하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기대와 다른 태도와 인간성을 마주하고 크게 실망했던 적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훌륭한 영화를 만 들어 냈고,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또 다시 감동하고 말았다.
꼭 좋은 인간성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물론 그 남자가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스캔들을 일으켰다거나, 범죄자인 것은 아니지만 정이 가고 친근한 사람은 아니었다. 까칠하고 속을 알 수 없는데다가 지나치게 뻔뻔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애초에 만남부터 잘못된 사이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는 일부러 내 불편함을 풀어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이야 그러든 말든 자신의 페이스대로 행동했다. 왜 인지 내 쪽에서 쩔쩔 매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영화관을 나와 카페로 출근하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좀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집에 들르긴 애매한 시간이기도 했다. 일찍 나가 가게 정리 해 놓고 대본이나 정독해야겠다. 그럴 생각으로 최현오에게 받은 파일을 프린트 해 가지고 나왔다. 잔뜩 술을 마시고 곯아 떨어졌는데도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물을 머금은 듯 싱싱한 느낌이었다. 좋은 자극을 받고 나왔기 때문일까.
그러나 문득 개운한 머릿속에 끼어드는 흐릿한 생각이 있었다. 은태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뒤늦게 걱정이 되어 핸드폰을 꺼내 포털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다. 혹 간밤에 있던 사고-은태가 저지른-에 대한 기사가 터 졌을까. 싶은 노파심 때문이었다. 사장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깨끗했다. 대신 아이돌 출신 배우의 음주운전 기사에 연예란 대부분을 도배하고 있었다.
상대방도 이름 없는 배우가 아닌데, 어떻게 막은 건지 모르겠다. 그쪽 기획사에 돈을 먹였나. 하긴 안 그래도 결혼 발표로 인해 주가가 떨어진 유은태가 폭력 사건에 휘말린다면 그 손해는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 손해 금액을 생각하면 입 막기 위한 뇌물이야 아깝지 않았겠지.
이럴 때 보면 배우가 소모품처럼 느껴졌다. 비단 유은태 같은 한류스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기 상품-배우-은 인기 있는 대로의 고충이 있겠지만 팔리지 않은 상품인 나 역시 힘든 점이 있었다. 하지만 간혹 진지하고 성실한 감독을 만나면 자신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배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충분히 성실한 배우잖아요. 자부심을 가져요.
최현오는 그런 감독임이 분명 했다. 이 사람과 일을 하고 싶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열망이 더욱 간절해 졌다. 이제는 그쪽에서 나를 자르겠다고 한다면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나를 원하고 있으니, 나 역시 진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일도 없음을 확인하고 안심했지만 그래도 은태의 상태가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싶어 전화를 해봤지만 은태의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하긴 그 지경으로 마셨으니-매니저에게 들어보니 며칠 밤샘 촬영을 한 후라고 들었다-제 정신 일리가 없었다. 늦은 오후시간에나 겨우 깨어날 게 뻔했다.
잠시 은태의 오피스텔에 들러볼까 고민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숙취로 죽을 리도 없었고, 아픈 것도 아닌데 옆에서 챙겨줄 필요는 없었다. 속이 미친 듯이 쓰려야 자신이 벌인 사고가 어떤 것인지 조금쯤 깨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일어나면 매니저한테 연락해봐. 일은 잘 해결 된 것 같으니까.’
은태에게 간단한 문자를 보내는 선에서 내 할 일을 끝냈다. 이정도면 나도 ‘친구’로서 할 만큼은 했다. 그보다는 내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본래의 계획대로 카페에 일찍 출근해 시나리오나 분석해 봐야겠다. 이렇게 비중 있는 데다가 내 맘에 드는 배역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나를 믿는 감독의, 최현오의 믿음에 보상할 수 있도록 아니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잘 해내고 싶었다.
*
“어때요? 괜찮아요?”
한 때 작가가 꿈이었던 국문과 출신 대한 형에게는 옛날부터 작품에 대한 조언을 간혹 구했었다. 최근에야 딱히 읽어 봐달라기 민망한 트렌디한 아침드라마 같은 것이 대부분이라 뜸했지만, 이번만큼은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사실 반쯤 자랑하고픈 맘도 있었다.
“이야, 기막히네. 단편인 게 아까울 정도다. 게다가 네가 드디어 주인공을 하는구나.”
“뭐, 메이저 영화도 아닌데……
“그래도 최현오 감독 더 뜨면, 너도 덩달아 주목 받을 지도 모르잖아. 잘 해봐.”
사실 그런 큰 기대까지는 없었다. 그 남자의 기대대로 자신이 잘 할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스럽고 걱정이 되어 연 기나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무슨. 이 역할 너랑 잘 어울려. 왠지 이미지가 딱인 것 같…아. 미안. 이거 칭찬이 아닌가.”
“아니에요. 그렇다니 다행이죠, 뭐.”
아무래도 결혼도 실패하고 사업 실패에 빚까지 진 엄청난 불행아와 잘 어울린다는 칭찬은 좀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한 형이 말하는 어울림은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말하는 것일 테니 기분 나쁘지 않았다.
사실 이 시나리오 속 주인공의 상황이 나와 동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계속되는 불행의 수렁 속에 빠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절벽 위에 서 있는 불안을 느끼며, 더 나아가도 나아질 것이 없을 거란 막막함을 안고 살고 있었다.
바쁜 오후 시간이 지나고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감에도 늘 보이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아침에 내 집에서 나갔으니 아직도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늘은 영화사에 출근을 안했을 지도 모른다. 감독이 영화사 소속도 아니니, 특별히 일이 없으면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얼굴 도장 찍으며 공짜 커피를 얻어먹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어차피 같이 일을 해야 할 사이니 미운 정이라도 들어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대한 형에게 영화사가 바로 위라는 이야기를 해주기 전에는 몰랐는데, 의식하기 시작하니 낯익은 얼굴들이 종종 보였다. 물론 같은 배우라고 해도 다 아는 사이는 아니었고, 초면에 어디까지나 TV나 영화에서 본 얼굴들이 대부 분이었다. 배우뿐만이 아니라 기자나 스태프로 보이는-이 일을 오래하다 보니 분위기로 대충 파악이 된다-사람들 도 종종 보였다.
이러다 아는 얼굴 마주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카페 일을 하는 게 딱히 부끄럽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도 아니었지만, 껄끄러운 상대와의 우연한 만남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 말이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늘씬한 몸매의 미인은 데뷔 2년차의 신인 배우 지윤영이었다. 부모가 중견 배우라 쉽게 이름을 알린 편이었지만 물려받은 유전자가 좋아서인지 확실히 예쁘고 눈에 띄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애교 있는 성격과 이미지까지. 그래서 그녀는 주로 주인공의 동생 역할이나 애교 있는 막내딸 역할을 주로 맡아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엔 앨범도 냈다던가. 물론 노래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는 일 때문에……?”
사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고, 같은 기획사라 오며가며 얼굴을 익힌 정도였다. 그래도 요즘 나온 신인 중에는 가장 튀는 아이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아, 네.”
처음엔 내 얼굴을 못 알아 본 건가 싶었다. 그러나 분명 내 눈을 보고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는데, 왜 갑자기 안면몰수인가. 그러나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에 고민이 스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아는 체를 할까, 말까 그 짧은 시간에 재빨리 계산을 한 모양이었다. 기획사 안에서도 은태와 함께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태도가 상당히 달랐던 아이였다.
그 이유야 빤히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이 한둘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할 정도로 철판 일 줄은 몰랐다. 뭐, 인사를 꼭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회사 밖이라고 안면몰수 하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혀서 말 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어라, 강신형. 일한다던 카페가 여기였구나.”
안 그래도 쓸쓸한 상황인데, 이런 순간 더 반갑지 않은 상대가 등장할 건 뭐람. 이쪽은 그냥 인사하지 않고 씹어도 괘념치 않을, 아니 오히려 그랬으면 싶은 상대였다.
“어머. 현아 언니 오랜만이에요!”
게다가 잠시 심각한 안면인식 장애라도 걸렸는가 싶었던-물론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지윤영이 신현아를 발견하자마자 콧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달려가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누구야, 난 그쪽 같은 동생 둔 적 없는데.”
“언니, 농담 하는 거예요? 저에요. 윤영이.”
“내가 아는 윤영이가 한둘이어야지. 김윤영? 최윤영?”
자신을 본체만체 하는 현아를 향해 꿋꿋하게 아는 체를 해대던 지윤영의 얼굴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현아 의 성격을 본인도 들은 풍문이 있다면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친한 척을 하고 싶을까. 친한 척한다고 받아 줄 성격이 아니었다.
TV속에서 다소곳하게 웃고 있는 신현아의 모습은 실상 본인의 성격과는 정반대였다. 도도하고 차가운 성격에 아무에게나 곁을 내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딱 친해지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근데 넌 나는 잘 기억하면서 너네 기획사 선배는 기억이 안나나 보다. 참 싸가지 없는 기억력이네.”
“네? 그게 무슨…….”
“너 강신형 몰라? 너네 기획사 선배잖아. 게다가 학교도 같은걸로 알고 있는데.”
하지 말라고 만류하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긴 말렸다고 내 말을 들었을 지도 의문스러웠다. 사실 날 위해서 한 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맘에 안 드는 후배를 혼쭐내고 싶은 기분에 저러는 걸 것이다.
“어, 어라. 신형 오빠였네. 안녕하세요. 제가 눈이 좀 안 좋아서요.”
“써클이나 빼고 얘기 하시지?”
“이, 이거 도수 없는 건데. 그런 거 아니에요. 죄송해요.”
옆구리 찔러 절 받기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찔러서 사과 받기라니. 차라리 버릇없는 후배 때문에 민망하고 씁쓸하던 상황이 좀 더 나았다.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언니라고 하지 마. 나 아무하고나 언니 동생 안 해.”
“네. 그, 그럴게요. 전 일이 좀 있어서…….”
여러 가지 의미로 쪽이 팔린 지윤영은 그대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제야 그녀가 주문만 해놓고 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까지 마친 터였는데, 이건 어쩌면 좋을까.
“왜 안 어울리게 남의 일에 끼어들어?”
작은 해프닝을 완전히 크게 벌여놓은 신현아를 향해 물었다. 얼굴을 붉힌 채 카페를 빠져나가는 맹랑한 후배의 모습을 보니 조금 고소하긴 했지만은, 딱히 고맙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누가 너 때문에 그런 줄 알아? 저 기집애가 은태한테 얼마나 꼬리를 쳤는데, 은태한테만 그랬는줄 알아. 아주 여 기저기 뿌리고 다녀. 그럴 시간에 연기 연습이나 하지.”
“흐음. 질투 나서 성질 낸 거였구나.”
대답대신 입술을 삐죽거리는 걸 보니, 단단히 벼루고 있던 모양이었다. 역시 나 때문에 나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저 못된 기집애 쫓아냈으니 커피 한잔 줘.”
“요즘은 공짜로 커피 마시려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누구? 은태?”
이런 모습을 보면 딱히 은태에게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난번 본 불민스러운 장면은 아무래도 걸렸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왜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얘기한 걸까. 단순히 일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걸까.
“뭐 먹을 건데?”
“제로 칼로리 캬라멜 마끼아또, 같은 거 없나.”
“있을 리가.”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 줘. 내 팔자에 무슨 마끼아또야.”
마침 누군가가 놓고 간 공짜 커피가 있어서 그것을 갈무리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이 카페 위에 영화사 있잖아. 영화사 사람들하고 약속 있어서. 네가 내 일에 웬일로 관심이야?”
영화사라면, 아무래도 최현오가 일하는 영화사를 말하는 거겠지. 준비한다는 신작 때문인 걸까. 확정된 것이 없어 서 알려줄 것이 없다고 하더니, 관계자가 아닌 나한테는 알려주기 싫었던 건가.
“요즘은 스케줄 별로 없는가 봅니다. 일찍오셨네.”
오래 궁금해 할 필요 없이, 머릿속에 떠올린 인물은 곧바로 나타났다. 만나기로 한 영화사 사람들에는 최현오 감독 또한 포함되어 있던 모양이다. 그는 신현아를 향해 아는 체를 하면서 내 쪽을 향해 슬쩍 눈빛을 보냈지만, 그 눈을 일부러 외면했다.
“아, 감독님 오셨어요? 이사님도 같이 들어오시네.”
“이야, 우리 현아씨. 결혼할 때가 되어서 그런가, 날로 예뻐지네.”
“이사님도 참, 자꾸 비행기 태우시면 어지러워요.”
좀 전에 지윤영을 향해 독설을 내뱉을 때의 얼굴을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모습을 보면 참으로 천생 연기자였다. 그들은 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곧 주문을 하기 위해 최현오가 카운터로 다가왔다.
“아메리카노 두 잔만 줘요.”
주문도 다른데다가 평소와 달리 카드를 내밀었다. 사실 궁금한 것은 다른 거였지만,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있기라도 하나.
“오늘은 웬일로 돈을 내요?”
“영화사 법인카드래요. 좀 더 비싼 거 먹을 걸 그랬나.”
그러면 그렇지. 계산을 마치고 커피를 내리면서도 뒷통수가 따가웠다. 최현오에게 자리로 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카운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뭔가 더 할 말 없느냐는 듯한 무언의 시위로 느껴졌다. 커피가 든 쟁반을 내밀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말을 속 시원히 털어놨다.
“비밀이라고 하더니 같이 하기로 한 모양이네요.”
“뭐,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어요. 신현아씨 캐스팅 안하면 감독이 갈린 판이라.”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거의 확정적인 모양이었다. 그때는 절대 안 된다고 버티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하지만 서로를 위해서는 좋은 타협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현아 연기는 잘하고, 열심히 해요. 잘 생각하신 것 같네요.”
“사이가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친해서 아웅다웅 하는 거였나?”
“아웅다웅 이라뇨. 그 표현 참 맘에 안 드네요.”
우리가 대화하는 걸 보고 있었나. 갑자기 나타난 듯 자연스럽게 연기하더니. 감독 중에도 배우를 겸업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던데, 이 남자도 그래도 될법 해 보였다.
“참. 주말에 시간 되요?”
커피를 내 주었는데도 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봄직한 고루한 작업멘트를 던져왔다.
“주말이요?”
“시간 비워놔요. 나랑 갈 데 있으니까.”
“어딜 가요. 내가 왜 그쪽하고…….”
“촬영 할 곳 사전답사 갈 거예요. 주연배우도 한번 가봐야지.”
영화 관련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배우인 내가 사전 답사하는 데까지 굳이 따라갈 필요가 있나 싶었다. 다른 스태프이나 친한 사람하고 가면 될 것 아닌가.
“네? 제가 그런데 까지 가야 해요?”
“그럼요. 내 졸업 작품인데 좀 신경써주면 안됩니까? 입금 안됐다고 이러시나.”
“촬영이라면 모를까, 여기 일도 해야 하고.”
“괜찮아. 신형아. 주말에 마누라 쉬는 날이잖아.”
창고 정리를 한다고 들어가 있던 대한 형이 어느새 나와서 참견을 하고 나섰다. 사실 카페 일 때문이라는 것은 핑계였는데, 그 핑계를 나서서 없애주니 곤란한 일이었다.
“형.”
“가게 일은 괜찮으니까, 대신 우리 강배우 잘 좀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아, 사장님이 화통하시네. 감사합니다.”
원망과 눈치를 담아 형을 바라보았지만 형은 오히려 최현오의 편을 들고 나섰다. 아무튼 이 형은 사람은 참 좋은데 눈치가 없어서 문제였다.
“그럼 토요일에 내가 그쪽 집으로 갈게요.”
다른 변명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최현오는 내가 빼도 박도 못하게 그대로 사라졌다. 영화 때문이라는데 협조해서 나쁠 것은 없었지만, 금쪽같은 주말을 저 남자와 함께 보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갑갑해 졌기 때문이었다.
*
-너 유은태 좋아하냐?
고 2 때 있었던 일이었다. 체육시간, 축구를 하다가 무릎이 좀 까진 것을 핑계대고 교실에 들어와 있던 때였다. 날은 더웠고, 가만 있어도 짜증이 나는데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왔더니 지쳐 있던 터였다.
누구였더라. 같은 반인 건 확실하지만, 그리 친하지도 않고 어울린 적도 없는 녀석이었다. 얼굴도 희미하고 어울려 논적도 없는 녀석이었다. 얼굴도 희미하고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기억하고 있는 것을 늘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키가 무척 컸다는 정도였다. 늘 맨 뒷자리에 앉아 잠을 자거나 책-교과서는 아니지 싶었다-만 읽을 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거나 어울리는 것을 본적이 없는, 그런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였다. 그런 인간이 내게 말을 건 것도 모자라 황당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미쳤냐? 뭔 개소리야.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당황스러움이 담긴 험한 말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특별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 물론 짧은 시간이 이토록 서로를 친밀하고 가깝게 생각하는 친구 사이가 된 것이 된 것이 신기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약점 같은 거라도 잡혔나. 너 걔 부탁이라면 뭐든 오케이잖아. 아니 명령이었나.
네가 뭘 아느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다른 녀석들의 눈에도 비슷하게 보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은태는 친구들에게 두루 인기가 좋았고, 모두가 그에겐 약했다. 하지만 개중 내가 유난해 보였던 것은 내게 그가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만해도 나는 학교 친구들의 기피대상이었고 선생들의 눈총을 받는 문제아였다. 그런 내가 은태와 어울리는 것을 보고 내가 그를 괴롭히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적극적이고 넉살 좋은 은태에게 내가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끌려가는 식이었다.
은태는 짝이라는 이유로 나를 온갖 곳에 다 데리고 다녔고, 한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이 들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친해지니 은태는 더욱 스스럼없이 행동했다. 모범적인 겉모습과 달리 뺀질거리며 노는 것을 좋아하던 은태는 툭하면 청소를 빼먹거나 자율학습을 땡땡이 쳤다. 나는 반쯤 강제로, 혹은 걱정되는 마음으로 녀석의 청소를 대신하거나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곤 했다. 내 물건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주었고, 곤란한 부탁을 받아도 웃으며 밀어붙이는 녀석을 거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에게 고백한 여학생을 대신 만나 거절하는 일까지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은태의 부탁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싫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스스럼없이 아무거나 부탁하는 것이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져 좋았다. 내가 그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란 것이 기뻤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하든,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수군거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평판이 좋고 인기 있는 은태와 어울린 덕분에 다른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저 그의 곁에 있었던 것뿐인데, 나를 피하고 오해하던 사람들이 편견을 없애고 다가왔다. 그에겐 그때부터 이미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그 매력을 동경하며 부럽게 생각했다. 질투를 느낄 여지조차 없었다.
2학년이 되어서도 은태와 같은 반에 배정되었고, 학교에서는 우리 둘 사이는 공공연한 단짝으로 알려졌다. 그 정도로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난 또 늘 껌딱지처럼 붙어 다녀서, 사귀기라도 하나 했네.
처음 한 말이야 조금 어이없는 농담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뭔가 싶었다. 이쯤 되니 명백한 시비로 들렸다.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그 말엔 쉽게 참고 있기 힘들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 순간 욱하는 성미를 참지 못 하고 사고 친 후, 다시는 주먹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농담이야. 한 대 치겠다.
그러나 눈빛이나 표정까지 어떻게 할 순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딱히 반성하는 기미가 없는 녀석이 기막혔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도발에 더 반응해봤자 내 기분만 상할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가만있는 사람한테 시비야. 너야말로 은태한테 왜 이렇게 관심 많아? 좋아하냐?
어쩌면 녀석은 사는 게 너무 무료하고 심심한 나머지 내게 시비를 걸었을 지도 모른다. 얌전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세상과 주변에 온갖 불만과 증오를 품고 있는지도. 간혹 10대 중엔 그런 삐뚫어진 아이들이 있었다. 사춘기를 무난하게 졸업하지 못하고 질질 끌며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문제아들. 중학교때 나와 싸웠던 녀석도 딱 그런 놈이었다.
하지만 그는 좀 달랐다. 내가 녀석의 뻔히 보이는 시비를 빈정거리며 넘겼으나 얼마간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유은태한테는 별로 관심 없어. 나는…….
그때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체육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야. 주번. 물 떨어졌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이 우르르 열린 문으로 쏟아졌다. 그 중에는 당연 은태도 섞여 있었다.
-네가 빠져서 우리 완전 깨졌다. 다 이기고 있었는데……!
-그랬냐.
나에겐 체육시간에 하는 축구 시합의 승패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은태는 땀에 절은 체육복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며 분하다는 듯 말했다. 그 투정에 대충 대꾸하며 좀 전까지 마주하고 있던 얼굴을 찾았지만 녀석은 없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뭐라고 하려고 했던 걸까.
그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며칠 후 그 녀석이 전학을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아마 그때, 그 말이 도화선이 된 것 같다. 나는 내 자신이 여자에게 성적인 호감이 미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친구들과 모여서 야동을 보거나 헐벗은 여자의 사진을 봐도 어떤 자극도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멋진 남자나 남자들의 몸에 더욱 관심이 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남자를 좋아한다는 자각은 못했다. 아직 누군가를 진지하고 열렬하게 원한 적이 없기에.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너 유은태 좋아하냐?
내가 은태를 좋아하나. 물론 친구로서는 더 없이 좋은 녀석이라 생각하고 좋아하고 있었지만 정말 ‘그런 의미’로 좋아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깨끗이 잊어버려야 했는데 나는 몇날 며칠이고 그 말을 붙들고 있었다. 사실 답은 이미 예전부터 나와 있었다. 알면서도 굳이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내게 판도라 상자 같은 것이었다. 열어서 확인하는 쪽이 더 괴롭고 불행 할 것이다. 알기에 열지 않았는데 어이없게도 그 금기의 상자를 열어젖힌 것은 아무 관계도 없는 제 3자였다.
*
카페 영업이 끝나는 시간은 대략 10시쯤이다. 가게 정리를 하고 집으로 향하면 대략 10시 반. 돌아가는 길에 14시간 영업하는 마트에 들러 늦은 저녁거리를 장본다. 가장 바쁜 것이 저녁 타임이라 제대로 식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불규칙한 식사는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익숙해 졌다. 그래도 시간이 되면 내가 해먹고자 하는 편이었다. 커피 만드는 일도 좋아하지만 음식 만드는 일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오늘도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데 왠지 평소와 조금 다른 기분이 들었다. 묘한 기척 소리가 일단 불이 다 켜 있는 것은 물론 내 것이 아닌 신발까지.
“너 비번 안 바꿨더라?”
잠시 도둑인가 싶어 긴장했지만-도둑이라면 가지런하게 신발 벗어놓고 들어와 TV를 보고 있을 리는 없었다-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안심했다. 하지만 안도감은 이내 희미한 짜증스러움으로 바뀌었다.
“너 또, 말도 없이…….”
어쩌다 비번을 알려주긴 했지만 은태는 그 후로 종종 이렇게 남의 집에 불쑥 처 들어왔다. 오는 건 좋지만 문자 정도는 해달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아, 미안. 근처 왔다가 네가 보고 싶어서.
“말은 바로 해라. 현아 보러 왔다가 펑크 난 거겠지.”
하필 우리 집 근처가 그들의 아지트인 게 문제였다. 현아와 싸우거나 혹은 약속이 취소되면 쪼르르 우리 집으로 와버리니 말이다.
“그런 거 아냐. 정말 너 보러 왔어. 나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장 봐 온 것을 아는지 어쩐 건지, 당연한 듯 먹을 걸 요구한다. 하긴 애초에 버릇을 잘못 들인 내 잘못이다. 그럼에도 얼굴을 봐서 안심되고 기쁜 마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워낙 엉망이었기에, 멀쩡한 모습이 반가웠다. 정말 멀쩡하긴 한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역시 네가 끓여주는 김치찌개가 제일 맛있어. 어떻게 우리 엄마보다 음식을 더 잘 하냐?”
“대충 차린 거야. 뭔 아부가 이렇게 심하냐?”
혼자 먹었다면 이것보다 대충 차렸겠지만,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녀석을 홀대할 수 없어 생각보다 반찬 가짓수가 많아졌다. 신경 안 썼다고 하기엔 확실히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너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일없어?”
“사고 친 덕분에 휴가야. 이번 주는 오프. 머리 좀 식히고 있으래.”
“근신하라는 거겠지. 놀라고 줬겠냐?”
“어때, 덕분에 놀아서 난 좋기만 한데.”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철없다고 해야 할지. 사실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복잡한 이야기 해봤자 내가 걱정할 거라 생각해서 그러는 걸 것이다.
“현아랑은……. 어떻게 되었어?”
물어주길 바란다고 생각했다. 얼핏보기에 솔직한 듯 보이는 녀석이었지만 진짜 고민이 있으면 오히려 말을 돌리고 딴 짓을 한다. 지난번이야 사고치고 술 먹은 후라 술술 불었지만 오늘은 왠지 쉽게 이야기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내일 놀러가자. 모처럼 시간 난건데, 집에만 있자니 아깝잖아. 응?”
아니나 다를까 현아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니 곧 바로 다른 이야기로 입을 막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뚱맞게 놀러 가자니. 게다가 내일은 최현오와 촬영지 답사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원치 않게 생긴 약속이었지만 가볍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내일은 안 돼. 약속있어.”
“왜? 누구랑?”
“알아서 뭐하게. 너 모르는 사람이야.”
“뭐야. 이거, 수상한대.”
“수상하긴 뭐가 수상하다고 그래.”
정말 수상한 사람은 은태였다. 지난번 현아와 마주친 것이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평소와 같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은태에 대해 언급했다. 결혼을 미룬다는 것이 헤어진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은태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여자냐. 너 나 몰래 연애해?”
“연애는 무슨. 여자 아니야.”
“그럼 그냥 취소해. 나랑 놀자.”
잠시 작은 갈등이 일었지만, 역시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은태는 지금 현아와의 문제도, 일에서도 도피하고 있었다. 만류는 못해도 도움을 줄 순 없었다. 게다가 그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내 일도 중요했다.
“안 돼. 일 이야.”
“일? 나보다 일이 중요하다 이거지.”
“난 너랑 달리 일 골라서 하는 처지가 아니란 말이다.”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자격지심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에 일일이 서운할 사이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내가 기분 나빠한다고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백프로 마음이 없는 말이라 할 순 없었지만 하도 졸라대는 통에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알았어. 일인데 방해할 수는 없지. 그냥 모처럼 시간 나서 너랑 좋은 데 가서 머리 식히고 싶었어.”
다행히도 이정도 선에서 물러났다.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게 조금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내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 드라마? 영화?”
잡지와 책이 쌓여있는 식탁 한구석에 대본이 얼핏 나와있었다. 나는 그것을 슬쩍 다른 잡지로 가렸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 해 줄게.”
단편 영화이기는 했지만 실로 수년 만에-학생 때를 제외하곤 거의 처음이지 싶었다-맡게 된 주연이었다. 내게는 좋은 일이었고 기쁜 일이었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 대한 형에겐 낯부끄럽게 자랑질 까지 했었다. 그런데 왜 은태에게만은 솔직히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
하필이면 장소는 남도에 위치한 처음 들어보는 섬이었다. 주인공의 첫사랑이 섬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설정이었지만 하필 섬이라고 그렇게 먼 섬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남해는 대학 때 친구들과 국토대장정으로 땅 끝 마을을 가 본 후로 처음이었다. 걸어갈 때도 엄청나게 멀었지만, 차로 가도 반나절은 달려야 했다. 1박 하자는 이야기는 없었지만-어차피 촬영도 아니고 답사로 가는 것이었으니-하루에 다녀오기 상당히 빡센 길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만나자던 사람은 정오가 넘어서야 느릿느릿 나타났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어차피 최현오가 우리 집으로 나를 데리러 온다고 하긴 했지만 약속 시간 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타난 것은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각한 것도 심상찮은데 차에서 내리는 얼굴이 푸석하고 왜인지 조금 부은 것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 어제 영화사 사람들하고 회식이…….”
“윽. 술 냄새. 대체 언제 까지 마셨길래.”
“아, 아직도 술 냄새나나. 일찍 들어와서 잤는데.”
처음엔 몰랐지만, 가까이 다가올수록 냄새가 진하게 풍겨서 놀랐다. 이거 음주운전이 아닌가 미심쩍었지만 다행히 음주운전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일찍이 몇 신데요?”
“다섯시? 여섯시? 그래도 아직 해 뜨기 전이었는데…….”
10시간 정도 지난건가. 그 정도면 술이 깰만도 한데-물론 정신적으로는 깨어 보였지만-냄새가 나는데다가 얼굴에 덕지덕지 술기운이 남아있는 분위기. 밤새 술독에라도 빠졌다 나온 모양이었다. 어제 그냥 은태 따라 가버릴 걸 그랬나보다. 적잖이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운전해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요. 깼어요. 진짜라니까.”
운전석에 타려는 남자를 완력으로 조수석에 밀어 넣고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얼마 전에 타던 고물차를 처분해 운전은 좀 오랜만이었지만-게다가 이런 초 장거리는 실로 오랜만이었다-최현오가 술일 깰 때까지라도 내가 맡을 수 밖에 없었다.
고속도로로 들어서 가장 처음 나온 휴게소에 들렀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최현호는 출발 한지 오분 만에 떡실신 된지 오래였다. 네비에 목적지를 찍자마자 코를 골며 잠들었던 것이다. 이래놓고 술이 깼다고 뻔뻔하게 이야기 하다니.
“감독님. 일어나요.”
차를 세운 후에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아 억지로 흔들어 깨웠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지 멀미도 안하나, 아니면 그 정도로 피곤한 걸까.
“으음. 벌써 도착했나.”
“무슨 소리에요. 한참 남았어요.”
그는 눈을 뜨고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자신이 어디인지 쉽게 파악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눈을 찌푸리고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야 휴게소에 들른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여기는 왜요?”
“그 전에 술 좀 깨셔야 할거 아니에요?”
내 배도 채우고 싶었지만 동행의 해장도 시킬 겸 우동을 시켜 먹었다. 처음엔 입맛 없다고 주저했지만, 이내 고춧가루를 팍팍 뿌리더니 삼분 만에 우동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 앞에 숙취 해소 음료를 내밀었다.
“아, 고마워요. 생각보다 세심하시네.”
“저 원래 남 뒤치다꺼리가 전문이거든요.”
“누구? 유은태?”
지난번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지은 죄가 있다 보니-그의 입에서 바로 유은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실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실생활이 아닌 곳에서도 그랬어요. 전 주인공 친구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싫었습니까?”
나는 그가 무엇을 묻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 실제의 생활에 대해서 묻는 것인지, 맡았던 역할에 대해 묻는 건지. 어쩌면 둘 다에 대해서 묻는 걸까. 사실 그 두 가지를 굳이 분리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내 대답은 둘 다 같았으니까.
“마냥 좋아할 순 없겠지만, 이상하게 싫지도 않았어요. 결국 그게 나니까.”
처음엔 그 작은 역할, 눈에 띄지 않는 자리가 마냥 감사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두 옛일이었고, 결국엔 모든 것이 많이 변해 버렸다. 그때의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영원히 머무는 것이 없을 뿐이다. 사람의 마음도, 주변의 모든 것도 결국엔 시간을 따라 흐르기 마련이었다.
휴게소에 잠깐 들른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똑같은 고속도로를 한참동안 생각없이 바라보면서 운전하다보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는 듯 했다. 처음엔 전날 숙취로 인해 정신 못차리는 최현호가 기막혔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았던 것 같다. 덕분에 평소라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깐족댔을 양반이 한참이나 조용했으니 말이다.
차를 타고 5시간을 달리고도, 이번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그리 큰 배도 아니라서 차도 두고 타야만 했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한 것은 은태였지만 어쩌다 보니 내가 이 먼 곳에 여행을 와 있었다. 일 때문에 시작된 여정이니 완벽하게 여행이라 말하긴 어려웠지만, 사람의 모습이 멀어지고, 바다가 있는 풍경에 서 있으니 여행기분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좋네요. 여기.”
누군가를 칭찬해주고픈 맘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배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보이는 것은 바다뿐이었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에 뜨거운 햇살에 지친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바다의 짠 내가 폐로 가득 들어오니 없던 여유가 생기고 입가가 풀어졌다.
“그렇죠? 쓸쓸하고 고즈넉한 게 딱 좋은 곳이라니까요.”
딱히 그래서 좋다고 한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최현오 또한 이 섬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언제 돌아가죠?”
“글쎄요. 오늘은 천천히 섬이나 둘러보고, 저녁이나 먹죠. 어차피 시간 많은데요.”
“시간이 많다뇨. 설마……. 여기서 자고 가자는 말이에요?”
장소가 지나치게 멀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었다. 그러나 최현오는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래야죠. 저게 오늘 마지막 배입니다. 여기 하루에 배가 두 번 밖에 안와요.”
“그걸 지금 말씀해주시면 어떻게요?”
“뭐 문제 될 거라도 있습니까? 남자끼린데?”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남자를 보며 내 반응이 지나치게 호들갑스러웠나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반쯤 강제로 끌려 온 것도 억울한데 제대로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던 것이 괘씸하긴 했다.
“문제는 아니지만 자고 갈 거라고 생각했으면, 뭐라도 가져 왔을텐데.”
“여기도 슈퍼는 있을걸요? 아니면 아무데서나 못자는 체질?”
그와 짧게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여유 있던 기분은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이상하게 멀고 오래 걸린다 싶어서 과연 하루로 될까 생각은 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 남자와 이 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될 줄은 몰랐다.
“배고프니까 일단 저녁이나 먹어요. 여기 매운탕 죽이는 집이 있는데. 아직 있으려나 모르겠네.”
아무리 억울하고 기막혀도 섬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으니 빨리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하룻밤, 잠자는 것뿐이었다. 별일이야 있으려나 싶었다.
식사를 하러 가기 전, 간단하게 근처를 둘러보았다. 바닷가엔 낡은 고깃배와 그물 같은 것이 널려 있었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약간의 비린내와 쓸쓸함이 느껴졌다. 섬이 작긴 했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그의 말대로 작은 슈퍼-민박을 겸하는-도 있어서 그곳에서 필요한 것을 사고 방을 구했다.
그가 말한 식당에 와 보니, 우리 말고도 낚시꾼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한 팀 있었다. 일찍부터 술판을 벌여 시끄러운 낚시꾼 일행을 피해 우리는 바깥,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았다. 아직 해가 떠 있긴 했지만 수평선 끄트머리부터 희미하게 주황빛이 밀려오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펜트하우스 부럽지 않은 전망이었다.
“이 가게 어때요? 바다도 한눈에 보이고, 괜찮죠?”
내 마음을 읽은 듯-가끔 그는 독심술이라도 익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맘을 정확히 읽었다-최현호가 물어왔다.
“여기서 촬영하시게요?”
“예전에 왔을 때, 여기서 회에 소주를 마시는데 기막힌 풍경이 들어와서 사장님한테 대충 허락은 받아놨어요. 뭘 찍을지 정해놓은 건 아니었지만.”
왜 이 먼 곳까지 사람을 끌고 와 고생시키는가 싶었지만, 이곳에 다다라서야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명장 면이 탄생할 법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좋네요. 정말, 세상 끝 같은 게…….”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망망대해뿐 인 곳에 멍하니 앉아있자니, 자신의 존재가 한낱 먼지 같이 느껴진다. 여기서 더 나아가도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막막함. 물론 가고 또 가다보면 어딘가 이국의 땅에 다다를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사실이 쉽게 와닿지 않았다.
“벌써부터 배역에 몰입중입니까?”
“네?”
“방금 전, 되게 쓸쓸해 보였거든요.”
일부러 떠올린 것은 아니었겠지만 며칠 동안 그가 준 시나리오를 수십 번 읽었으니 나도 모르게 몰입했을 지도 모르겠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가게 주인이 찬과 술을 내왔다. 술을 시킨적은 없는데 대체 누구인가 싶었는데, 자연스럽게 소주 병을 까고 술을 콸콸 따르는 사람을 보니 알겠다.
“잠깐, 술 드시게요?”
“어차피 내일이나 나가는데 뭐 어때요.”
“아니 어제 그렇게 드셔놓고는 또 마셔요?”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 술을 마셔야죠.”
술을 못할 것 같지 생기진 않았지만 이정도면 알콜 중독 아닌가. 하긴, 얌전하고 청순하게 생겨서는 어떤 남자들보다 주량이 쎈 여자도 알고 있는데-그게 신현아라면 믿기겠는가-건장한 남자에겐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단지, 내일 또 내가 운전해야 하는 게 아닌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을 뿐이었다.
“술 마시는 쪽이 이야기가 잘 통하잖습니까. 마셔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잔을 놓고 잔을 가득 채웠다. 무슨 얘길 듣고 싶어서 이러는 지 몰라도 호락호락 넘어갈 마음은 없었다.
“전 딱히 할 얘기 없는데요.”
“왜요. 작품 얘기라던가. 우리 영화 찍으려고 온 거잖아요. 잊었어요?”
“영화 얘기라면 뭐.”
그의 말대로 어차피 내일 아침까진 이 섬에서 나가지도 못하는데 뭐 어떤가 싶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씁쓸하지만 부드러운 소주가 막 목구멍을 타고 몸 안에 스며든 순간, 그가 술보다 더 톡 쏘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불편해요?”
정작 그가 건넨 말은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왠지 지난번 술자리의 연장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술 마시고 일찍 항복하고 누워버리는 바람에 끝이 났던 자리 말이다.
“아니, 질문 바꾸지. 내가 싫은 건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향한 호감에 익숙한 나머지 타인의 비호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혹은 굳이 타인이 정한 감정을 자신의 편의대로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 남자는 후자에 속할까. 물론 같이 일하는 사이에 묵은 감정이 남아있는 것이 찜찜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상식선에선 그에게 예의바르고 성의있게 대했다. 여기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그다지 좋지 않은 거지,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감정 자체엔 굉장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를 위해 그런 에너지 소모가 과연 필요한가 싶었다.
“좋고 싫고 할 게 어디 있어요? 잘 알지도 못하는데.”
“알지 못한다. 단지 그 이유가 전부입니까?”
“솔직히 좋은 만남은 아니었잖아요. 그래도 감독으로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 좋은 감독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칭찬을 들어도 별로 기쁘지 않네.”
어쨌든 감독으로서는 인정한다고, 내 나름대로의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쉽게 만족 못 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기가 한 일이 있는데-게다가 그 웃기고 민망한 상황들-뭐가 그리 자신 있어서 자신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말투만 좀 고치셔도 더 좋을 지도요.”
“내 말투가 어때서?”
“말을 막 놓으신다 거나. 괜히 사람 속을 긁으신다 거나.”
“그럼 그쪽도 말 놓으면 되잖아?”
“전 아무하고나 말 안 놓습니다.”
그쪽에서 먼저 물었으니 나 역시 술 마신 핑계 삼아 평소의 불만을 가감 없이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는 원하는 답을 여전히 듣지 못했는지 표정이 점점 찌푸려졌다.
“그래. 아무하고나 안 놓는단 말이지.”
“…….”
“알게 되면 좋아할 수도 있다는 거네. 그렇지?”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뭘 알려줄까요. 그럼 나한테 궁금한 거라도?”
영화에 관련해서야 물어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좀 전의 반응으로 보건데 딱히 그런 질문을 받고 싶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영화라면 몰라도 솔직히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건 없었다. 내 사생활도 정리가 안 되서 복잡한 상태였다.
“생각나면 물을게요. 지금은 딱히 없어요.”
“나는 그쪽한테 궁금한 거 엄청 많은데.”
“네. 그래 보이시네요.”
감독이라는 직업 때문일까. 종종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타인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나 감독이나 작가라면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주제의 영화를 만들어도 결국 궁극은 ‘사람’에 관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부러 술자리에 참석하고 사람들을 사귀는 사람들도 종종 보았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 술자리를 갖다가 정작 본업을 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질문에 대답 안했잖아요.”
“무슨 질문…….”
물어보려다 희미하게 스치는 불쾌한 기억에 멈칫했다. 나한테 게이가 아니냐고 물었었지. 하도 기가 막혀서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 질문을 하고도 자신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른다니, 참 뻔뻔하다 싶었다.
“내가 드라마에서 게이 역할 한 번 했다고,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전부가 아니야. 내가 그것 말고 아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라구.”
연기는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물론 내가 게이인 것은 맞긴 하지만 단순히 역할하나만 보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다른 근거가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 남자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우연히 본 드라마에서의 모습과 카페를 오가며 마주친 단편적인 기억이 전부였다.
“대체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당신, 유은태를 좋아하잖아?”
그의 입에서 정확히 흘러나온 이름에 순간 심장을 붙잡힌 듯 가슴이 찌릿했다. 어디서 들어 본 말 같다, 라고 생각했다. 황당하지만 10년도 전에도 나는 그 말을 나를 잘 모르는 녀석에게 들었다. 그러나 당황스럽기는 그때보다 더했다.
“그만 좀 하시죠. 이미 저한테 많이 실례하신 것 같은데.”
“역시 아니라고는 안하네. 지난번에도 그랬지. 내가 당신 게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도 그러더니.”
이 남자는 대체 무얼 본걸까. 분명 그는 나와 은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 마음을 눈치 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구도 내 마음을 모른다. 은태 본인은 물론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것이었다. 당연 우리를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보통의 남자들 관계를 그런 식으로 오해하기란 힘들었다. 적어도 우리나라 정서상으로는 그러했다.
“벌써 취하셨나봐요. 말씀이 좀 과하시네요.”
“아닌데. 겨우 이만큼 마셨는데 취했으려나고.”
“씨발. 그럼, 내가 취했나.”
상황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욕설이나 뱉는 것은 어린애 같은 짓이라 생각하고, 아무 때나 욕을 하는 그런 부류도 아니었지만 오죽하면 욕이 다 나왔을까.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짧은 욕설에 그는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그 눈 안에 웃음을 떠올렸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닷바람 좀 쐐야겠네요. 감독님도 머리 좀 식히고 있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아니 뛰었다. 해변을 향해 걸었지만, 장소는 중요치 않았다. 어떻게든 이 남자와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참 멀어졌다고 생각한 후에야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하늘과 바다는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저 먼 바다 끝 지평선엔 어둠이 섞여 들고 있었다. 육지는 어느 쯤 일까. 지금 심정으로는 헤엄을 쳐서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 정도로 기분이 끔찍했다.
“도망치지 말고 얘기 해봐.”
애써 열 받은 마음을 식히려고 피했는데, 문제의 인물은 나를 결코 혼자 두려고 하지 않았다. 언제 따라왔는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렸더라도 코 앞에서 넘실대는 파도 소리에 묻혔을 지도 모르겠다.
“얘기하면 속 시원할지도 모르잖아. 혼자서 끌어안고 있으면 답답하잖아. 조금만 솔직해 지면 훨씬 편해질걸?”
화가 나는 한편, 이 남자가 대체 내게 왜 이러는 지 알 수 없어 그 점이 더 불쾌했다. 내가 혹 잠결에 은태에 대해서 잠꼬대라도 한걸까. 아니, 나한테 그런 이상한 잠버릇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이런 황당한-그러나 내게는 황당하지 않은-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묻는 걸까.
“정말. 그만 하라고요!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인데?”
“관심 있어서 그런다고 말했잖아. 댁이 내 취향이라고.”
“당신 진짜……. 장난 그만 쳐요.”
“장난? 난 한 번도 장난 인적 없는데.”
이런 이야기를 단순히 재미로 장난으로 이야기 하는 인간이래도 문제였지만, 장난이 아니라면 아닌 대로 문제였다. 화를 내고 욕을 해도 물러나지 않는 상대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썰미 좋으신 건 인정할게요. 근데 눈치 챘다고 그렇게 막 말해도 됩니까. 네?”
나는 결국 자포자기 한 심정이 되어 버렸다. 내가 게이인 것도, 유은태를 좋아하는 것도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무례하게 얼굴에 대고 묻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나 조차 함부로 꺼내 보이지 못하는 내 진심이 아무렇게나 까발려진 것 같아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당신, 더 가까이 오지 마. 한 대 칠거 같으니까.”
“그래. 그렇게 해.”
“…….”
“차라리 그게 더 솔직해서 좋겠네.”
“야, 이 미친…….”
말이 안 되는 상대에겐 매가 약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끊은 싸움질을 서른이 다 된 나이에, 그것도 같이 일해야 하는 감독에게 하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날라 간 주먹은 의외로 순발력 있는 상대로 인해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그는 잽싸게 내 주먹을 피했고, 나는 있는 대로 힘을 실은 주먹을 따라 그대로 끌려갔다. 애석하게도 그곳은 모래사장이 아니었다.
풍덩, 크고 묵직한 소리가 날 정도로 제래도 물속에 빠졌다. 얕은 곳이긴 했지만 제대로 넘어져 한동안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억지로 일으키기 전까진 말이다.
“괜찮습니까? 조심해요. 여기 생각보다 파도가 쎄다고요.”
물에 빠졌다 나와 눈앞이 흐리흐리하고 머릿속까지 얼마간 뿌옇게 흩어져 있었다.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열기가 빠져나가긴 했지만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일단 나를 부축하고 있는 남자가 최현오라는 것이 가장 불만스러운 일이었다.
“오바 하지마요. 그냥 좀 빠졌을 뿐인데…….”
“좀이요? 완전 젖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그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물에 빠진 바람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업었다. 자존심이 상해도 부축 정도는 받을 수 밖에. 하지만 나를 향해 어이없는 듯 웃음 짓는 남자를 보니 가라앉았던 화가 순간 다시 솟아 났다. 나는 그대로 손 끝에 힘이 돌아오길 기다려 그를 파도속으로 밀어 넣었다.
“풉. 꼴 좋네요.”
나는 나와 똑같이 물에 빠진 남자를 향해 일부러 비웃음을 날렸다. 물에 빠져 흠뻑 젖은 채로 몸을 일으키는 최현호를 보니 그제야 조금 기분이 풀리는 듯 했다. 유치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이 완전히 젖어 비틀대면서도, 나를 원망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제서야 그의 얼굴에 조금 미안함이 스쳤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그런데, 난 정말 알고 싶어서 물어본겁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걸 알고 싶어하냐고요.”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은 여전했다. 남이 굳이 숨기고 보이지 않으려는 진심을 아프게 찌르는 이유는, 아무래도 좋은 쪽으로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당신이 정말 게이이고, 유은태를 좋아하는 거라면 나에게도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에요?”
철썩, 철썩. 물이 들어간 귓속에 희미한 이명과 파도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그 불투명한 소리에 섞여 들어온 목소리가 나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이제껏 했던 이야기 중에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최현호가 젖어서 무겁고 멍한 몸을 끌어당겼다. 나는 그가 내가 했던 것처럼 나를 물 속에 밀어넣을 줄 알았다. 왜인지 모르게 그런 느낌을 받아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내 몸은 생각했던 것과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밀려 넘어진 것이 아니라 그대로 그의 몸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내 입술 또한 그의 얼굴 위로, 정확히는 그의 입술 위로 콰당 넘어지듯 부딪쳤다.
물에 젖어 차가운 입술이 느껴지는 순간, 머릿속이 물에 잠긴 듯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온통 갑갑했다. 차라리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쪽이 나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입술을 벌리고 무언가 뜨겁고 미끄러운 것이 들어오려 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뭐, 뭐하는 짓이에요!”
정신이 드는 대로 나는 그를 세게 밀쳤다. 그 반동에 나 조차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다 바닷물에 다시 빠졌다.
“뭐하는 짓이냐고? 이래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는 나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화가 난 듯 쏘아 붙일 뿐이었다.
“강신형. 너하고 잘해보고 싶단 뜻이잖아.”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얼마간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입술이 여전히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입안에선 소금기가 잔뜩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 외에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감각과 생각이 일순간 깨끗하게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
바닷물에 젖은 몸을 이끌고 우리는 맡아두었던 민박집으로 향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이 젖었고 이대로 횟집으로 돌아갈 순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이어진 수순이었다. 이미 주변엔 땅거미가 내려 시원하게 느껴지던 바닷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오는 길이 내내 무겁고 어지러웠다. 갑작스럽고 황당한 고백을 들었지만 여전히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이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눈앞에 앞장서 가는 남자는 담배를 태울 뿐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 중일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걸까, 그냥 부끄럽고 뻘줌해서 그러는 걸까.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어떤 설명이 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최현오는 젖은 옷을 벗어놓고 씻고 나온 후 민박집 냉장고에서 꺼내온 소주를 몇 잔 털어 넣더니 그대로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워버렸다.
나는 뒤늦게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고 나와 민박집 주인에게 얻어온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길은 없었지만-자는 것처럼 누워있었으니-괜히 눈치가 보여 쭈뼛거렸다. 다른데 정신이 팔려 꽃무늬가 화려한 헐렁한 바지를 입고도 자신이 뭘 입었는지 잠시 자각도 못했다. 뒤늦게 방 한구석에 걸려있는 낡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놀라 혀를 찼을 뿐이다.
이건 아무래도 봐도 남자 옷은 아닌 것 같다. 주인아주머니가 무심하게 내미는 옷가지를 생각 없이 들고 왔는데, 설마 자기 것을 내줬을 줄이야. 하지만 화려한 차림새의 나와 달리 이미 먼저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은 최현오의 것은 비교적 평범했다. 그러나 이 경악스러운 옷차림을 봐주는 이는 없었다. 한마디 감탄이라도 들려올 줄 알았건만 그는 여전히 방 한구석에 몸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저……. 감독님.”
불도 끄지 않고 누워버린 상대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솔직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끝내자니 찜찜했다.
어떻게 들어도, 좋아한다는 의미로 들렸지만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는 것을 받아 본 것이 상당히 오랜 옛날의 일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그에게 들은 모든 것들이 나의 오해였으면 했다. 차라리 그냥 뻔뻔하고 남의 상처를 일부러 들쑤시는 것을 즐기는 마조히스트인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잠들기라도 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설마, 정말로 잠든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희미하게 움직이는 그의 어깨가, 규칙적인 숨소리가 그가 깨어있지 않는 상태임을 알려주는 듯 했다.
“감독님. 주무세요?”
“…….”
“감독님?”
진짜 자나. 아까부터 말없이 누워있어서 자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정말 그렇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당황스러웠다. 참, 어이가 없네. 질러놓고 잠들어 버리면 나는 어쩌라고…….
“정말 주무시는 건…….”
그럼에도 미련이 남아, 누워있는 남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려던 찰나.
“뭡니까.”
눈을 꾹 감고 있던 사람이 돌연 내 손을 덥썩 붙잡았다. 어정쩡하게 손을 붙잡힌 자세로 앉아있자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 불편하고 난처한 것은 이 상황 자체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 주무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려고 했죠. 자려는 사람 깨웠으면 용건이 뭔지 말 해봐요.”
눈을 뜬 그는 손을 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킬 생각도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긴 뭐겠어요. 아까 했던 말 때문이죠.”
“그게 뭐요?”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건지 좀 헷갈려서요. 제가 혹시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아닌데…….”
나오려던 말이 쏙 들어간 것은 나를 바라보는 최현오의 표정이 상당히 싸늘했기 때문이다. 내가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주저하는 사이 그는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말로 못 알아들으니 다른 걸로 알게 해줄까?”
“뭐, 뭘요.”
“내가 그쪽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른 방법으로 알려 줄 수도 있어. 예를 들면…….”
무기력하게 누어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재빨리 내 몸을 넘어뜨리고 그 위로 올라왔다. 당하고도 자신이 당한 상황을 바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마치 아까 키스 당했던 때와 비슷했다.
“이런 식으로요.”
“잠깐, 감독…….”
그나마 이미 한 번 당한 일이 있어서인지, 그 다음에 그가 뭘 하려는지 예상이 갔다.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적어도 때리려고 달려든 것은 아닐 것이다.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내게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느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단단히 결심한 듯 자신을 밀치려는 손을 억지로 붙잡고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하더니…….
“풉…….”
“…….”
“옷이 그게 뭡니까. 웃겨서 뭘 못하겠네.”
“뭐, 뭘 하려고 했는데요?”
굳이 묻지 않아도 어떤 전개로 이어졌을지는 알고 있었지만 민망하고 당황스러워 어떤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안 그래도 창피하고 식은땀이 흐르는데 내 몸 위에 올라와 있는 남자는 여전히 키득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그래, 나 역시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고 기막혀서 웃음이 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나는 웃느라 정신없는 남자를 그대로 밀치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는 밀려난 그대로 누워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하하. 꽃무늬……. 완전 잘 어울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꼴인 지 잊었습니까?”
참다못한 내가 따지듯 물으니 그제야 웃음소리를 겨우 삼키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창피하긴 했지만 민박집 아주머니가 코디 해준 의상 덕분에, 그는 좀 전처럼 공격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말은 바로 합시다. 강신형씨가 혼자 넘어진 거였잖아요. 오히려 내가 피해자면 피해자지.”
“그래서 억울하다 이거에요?”
“억울하긴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좋아하는 데 참아야지.”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쐐기를 박듯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내비쳤다. 더는 어떻게 피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었다.
“하루 종일 운전을 해서 그런지 피곤하네요.”
결국 피곤하다는 핑계로 대충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이 상태로 잠이 올 리는 없었지만 더 이상 멀쩡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희미한 한숨 소리가 들리고 불이 꺼졌다. 쉽게 잠은 오지 않았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의외로 속 시원해 져서 잘 자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섬을 빠져나가는 배를 탔고 그대로 서울로 올라왔다. 헤어질 때 건넨 말은 지극히 공과 사가 구분된 말이었다.
“다음 주부터 촬영 들어갑니다. 회사에도 연락해 뒀을 겁니다.”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나 역시 그 때 일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본인도 계획했던 고백은 아닌 모양이니 민망하고 후회스러울 지도 몰랐다. 그러니 내 쪽에서 얘기를 꺼내면 더 창피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
“다들, 수고 하셨습니다!”
단편 영화는 촬영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2주 정도. 그것도 내내 찍은 게 아니라 중간에 며칠은 최현오의 스케줄 문제로-배우보다 더 바쁜 감독이었다-촬영을 쉬었었다. 대부분을 서울과 경기도에서 찍었고, 딱 한번 지난번 들렀던 섬에 다녀온 것 외엔 힘든 스케줄도 없었다.
짧은 시간을 바쁘게 보내다 보니 2주가 순식간에 지났고, 어느새 마지막 촬영 일. 고생했던 스텝끼리 모여-라고 해도 상업 영화도 아닌지라 몇 명 안 되었다-회식을 하기로 했다. 영화 스텝들은 대부분 최현오의 인맥으로 모은 동료나 학교 선후배 들이었다. 그 자리엔 당연히 최현오도 나왔다.
촬영 기간 내내 나는 일부러 그 문제에 대해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최현오 역시 비슷한 태도였으므로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촬영으로 인해 거의 매일 같이 얼굴을 봐야 했지만, 늘 다른 스텝들도 함께였다.
어떤 면에선 잘 된 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없던 일로 넘길 순 없었다. 적어도 그때 우리는 둘 다 그리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멀쩡한 상태에서 온몸이 젖은 채로 누군가에게 빼앗기듯 당한 키스는 쉽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키스 후에 이어진 고백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어떤 점에 먼저 놀라야 하는 걸까. 최현오가 게이인 점? 아니면 만난 지 얼마 안 된 내게 반해있었다는 점. 그런 나머지 초등학생처럼 유치한 방법으로 자신의 관심을 표현했었다는 점. 놀라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신형 오빠. 신인이에요?”
스텝 중 가장 어리고 성격이 활발하던 최현오의 여자 후배가 내게 물었다. 알게 된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2주 동안 매일같이 얼굴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밀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 아뇨. 꽤 오래전에 데뷔했어요.”
“그래요? 무슨 작품 했는데요?”
“달에서 온 그대. 라고. 아세요?”
그나마 최근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골라 이야기 했다. 그래야 설명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에서 온 그대요?! 그걸 왜 몰라요. 근데 거기서 무슨 역할을…….”
“유은태 친구 역할이었어요. 중간부터는 거의 안 나와서…….”
“아, 나 기억난다. 만날 사고치고 다니던 꼴통 친구!”
옆에 있던 조명 담당이 아는 체를 하며 끼어들었다. 정답을 맞췄다는 듯 의기양양해 하는 조명담당에게는 상당히 미안했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 아뇨. 그 친구 말고, 다른 친구.”
“그 친구 말고도 또 다른 역할이 있었나.”
“에이, 뭐 어때요. 앞으로 더 비중 있는 역할 맡으면 되지. 우리 최 감독님 눈에 든 배우시니까 앞으로 더 잘 되실 거예요.”
여자 후배는 팔꿈치로 조명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찌르며 눈치를줬다. 조명은 억울한 표정으로 나와 후배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나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아이, 오빠. 그냥 말 놓으시라니까요.”
솔직히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어디서 배우라는 이야기를 꺼낼 때 마다 맞는 상황이었다-민망하긴 했지만 이젠 익숙해 져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순수한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야. 너 어따 꼬리치고 있어. 내 배우야.”
좋은 분위기에 눈치 없이 끼어 드는 사람이 있었다. 최현오였다. 사실 나에게 말을 걸었다기 보다는 후배에게 말을 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봐. 최 감독. 떴다고 선배님한테 너무 버릇없는 거 아니야?”
“저, 그쪽이 후배가 아니에요?”
“제가 후뱁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제가 학교를 좀 많이 늦게 들어가서.”
분명 그렇게 들었다. 그래서 졸업작품이란 말을 듣고 조금 놀랐었다. 그 나이, 게다가 해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아가며 화려하게 데뷔했는데 아직 학교 졸업전이라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사실 제가 어디서 선배라고 하기 창피하긴 해요. 학교만 일직 들어갔지 현오 오빠에 비해서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해놓은 것도 없고…….”
“아직 어리시잖아요. 기회가 더 많을 겁니다.”
“하하. 고마워요. 우리 감독님께선 재능 없는 것 같다고 독설을 하시던데.”
“내가 언제 그랬냐. 열심히 하라고 충고 해준 거라고.”
종종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는 내게 곧바로 말을 걸진 않았다. 아무래도 신경을 쓰고는 있는 걸까, 아니면 내 쪽에서 쭈뼛거리니까 배려해 주고 있는 걸까. 물론 영화 찍는 동안 대화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감독과 배우 사이였다.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촬영장 안이었고 내용도 영화에 관련된 것 뿐이었다.
“아는 사람이 끼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아요?”
분명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어 무슨 일인가 했더니 용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요? 저는 상관없어요.”
“실은 신형씨가 보고 싶대요.”
“네? 저를 왜…….”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설명대신 술잔을 비웠다. 결국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 다 있는 회식 자리에서 뭔가를 얘기 하리라 생각지 못했지만, 이런 식이라니 나한테 고백했던 것이며 키스했던 것들 모두 잊은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윤성희라고 해요.”
얘기를 들은 지 십여분쯤 후였나, 식당에 나타난 것은 안경을 낀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처음 그녀가 얼굴이 왠지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름을 듣고 진심으로 놀랐다. 물론 그 놀람은 반가움에 가까운 의미였다.
“어. 윤성희 작가님이세요?”
“네. 근데 우리 작품 한 적은 없지 않았어요.”
“그냥, 제가 팬이에요. 늘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드라마 작가 중에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많지는 않겠지만 윤성희 작가는 그 유명한 작가들 가운데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극본은 재미있고 훌륭한 것들이 많았다.
“어머. 그것 참 잘됐네.”
그녀가 내 칭찬에 기분 좋게 웃으며 한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통성명을 하고 술을 주고 받은 후, 그녀가 본격적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듣고나서야 그녀가 나를 보고 싶어했다는 말을 이해했다.
“실은 현오 작업실 놀러갔다가, 촬영한 걸 좀 봤거든요. 제가 지금 케이블에서 드라마 준비 중인데 잘 어울리실 만한 배역이 있어서요.”
“저 말이에요?”
“그럼 강신형씨 겠지, 누구겠어요.”
그때까지 가만히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현오가 툭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나도, 나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좋아하던 작가가 내게 직접 캐스팅 제의를 해오니 감격스럽고 놀라워 꿈인지 생시인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케이블 드라마라서 내용 제약도 없고 스텝이나 배우들도 다 신선한 사람들로 가려고 해요. 아시죠? 요즘 케이블 쪽이 오히려 작품성 있고 괜찮아요. 배우나 스텝이나 서로 윈윈할 수 있는 환경이거든요.”
그녀의 말대로 요즘은 모든 콘텐츠가 공중파 중심이던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케이블 드라마가 신선한 소재와 식상하지 않은 내용으로 매니아와 젊은 층의 공감대를 얻으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거 제 명함, 나중에 따로 만나서 자세히 얘기 해봐요. 우리.”
갑자기 일어난 행운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지만 가슴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나치게 붕 뜬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간이라 인적이 줄어서인지 더욱 썰렁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밤공기가 미지근했는데, 이제 여름도 다 끝나가는 것인지 제법 공기가 선선했다.
혼자뿐이라 생각했는데, 저만치에서 얼핏 비치는 담뱃불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했는데 최현오였다. 그는 거기 서서 나를 발견하긴 했지만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다. 다만 한마디 말을 건넸다.
“내 덕분입니다. 알죠?”
“네. 고맙습니다.”
“뭐, 인사 받자고 한 말은 아닙니다.”
덕분이라고 말해놓고, 인사받자고 한 말은 아니라니. 그러나 아무리 그가 잘난 척을 해도 내 쪽에선 백번 고맙고 감동적인 일이긴 했다. 몇 달을 일 없이 쉬고 있던 내게 생각지 못한 일복이 트였으니 말이다.
“혹시 저를 써달라고 부탁하신 건…….”
“내가 좋아한다고 했다고 그렇게 우스워 보입니까?”
“네? 아, 그런 뜻은 아니라…….”
갑자기 변한 공기에 멈칫했다. 그는 들고 있던 담배를 거칠게 던져 끄고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 그런 얼 빠진 놈 아닙니다. 일하고 연애감정 섞는 일 절대 없습니다. 같이 일했으면서 그걸 모르겠습니까?”
모를 리가 없었다. 실은 촬영하면서, 엄청나게 혼이 난 적이 한번인가 있었다. 욕을 하며 칠 듯이 달려들어 한 대 맞는 줄 알았다. 사실 내 쪽에선 잘 해냈다고 생각한 씬이었기에 그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이 이해도 안 갔고, 어린 스텝들도 보는데 질펀한 욕을 먹고 있자니 민망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며칠 전에는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던 남자가 아니었나.
“네. 그런 분 아니죠. 그냥, 얼떨떨해서요.”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한 듯 보이자 그는 그제야 화난 얼굴을 풀고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밀린 행운이 찾아오나 보죠. 아니, 행운이 아니라 이때까지 착오가 있어서 받지 못한 운이 오는 걸 겁니다.”
그의 말대로 된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불안을 제쳐 두고 마음껏 기뻐해도 좋을 것 같다.
“두고 봐요. 내 영화에 출연했으니,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유명해 질 겁니다.”
자기 자랑인 건지, 나에 대한 칭찬인건지 솔직히 조금 헷갈리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 자신감이 부럽네요.”
“부럽기만 해요? 혹시 멋있거나, 하진 않고?”
“네. 멋있으세요.”
“의외로 쉽게 인정하시네.”
“전에 말했잖아요. 감독으로서는 좋아하고 있다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내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전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내가 게이이고, 유은태를 좋아하는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이 남자의 고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순 없는 일이었다. 가망 없는 짝사랑이긴해도 나는 은태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고, 최현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짝사랑은 멋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은 없었지만 딱히 좋게 들리는 말은 아니었다. 이 남자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또 건드리네. 하지만 전과 달리 그저 불쾌함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가 나에 대한 호감이 있어, 나나 내 감정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사랑을 멋으로 하세요?”
“멋은 없더라도 스스로가 행복해야죠. 적어도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그런 사랑은 아니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
“이제 슬슬 끝내고 싶지 않습니까?”
이 남자는 나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걸까. 불쾌하고 당황스럽다가도 신기하지만 낯설었다. 나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감정을, 냉정하게 알려주니 말이다. 그의 말대로 나는 이 감정이 나나 은태 모두에게 도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괴롭히다 못해 아무것도 모르는 은태에게 괜한 원망과 미련을 쌓고만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늘 끝내고 싶었죠. 아시겠지만, 그 친구 곧 결혼할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을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는 참 추하고 미련스러워요. 떳떳하게 고백하고 차일 자신도 없었네요. 난.”
고백 후의 일이 두려워 나는 내 마음을 전할 용기조차 없었다. 거짓이긴 해도 지금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다는 욕심때문이었다.
“내가 짝사랑을 끝낼 방법 알고 있는데.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그런 생각 안 해봤을 것 같아요? 나도 모르는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사실 강신형씨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 않으려고 했겠죠.”
나는 은태를 향한 내 미련스런 감정을 끊어내려고 수없이 노력했다. 그냥 그가 원하는 대로 좋은 친구로 머무는 쪽이 내게도 고통스럽지 않은 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때론 채찍질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마음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안 된다고 가능성 없다고 부정할수록 마음은 더욱 간절하고 단단하게 굳어 버렸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겁니다.”
그의 말을 듣고 맥이 탁 풀렸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한 답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단지, 말로는 쉬워도 성공 확률이 아주 아주 낮은 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미 유은태에 대한 감정으로 빼곡한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받아.
“맞는 말이네요.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가요?”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나조차 어떻게 못하는 문제를 도와주겠다니.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내 이 감정이 누군가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문제라면 의지하고 싶었다. 그것이 비겁하고 유치한 방법이라도 좋았다. 그것은 어느정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는 어느새 내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씁쓸한 담배 향이 어렴풋 풍기는 손이 내 귓가를 스쳐 뺨을 감쌌다. 키스를 하는 줄 알고 잠시 움찔했지만 그는 그저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은태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 줄게.”
그것은 고백이 아닌, 선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너무도 당연하게 이야기 하는 남자를 나는 비웃을 수 없었다. 그의 눈이 너무도 진지하고 단단하게, 내 눈빛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심하게 잠을 설쳤다. 안 그래도 처음 맡는 주연 작품에 촬영 기간 2주간 초긴장상태로 보냈는데 긴장이 풀릴 틈도 없이 두 번째 공격, 아니 고백을 맞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저돌적으로, 공격인가 싶을 정도로 당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좋아한다는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이라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왜일까. 솔직히 그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그를 보면서 순수하게 감동하기도 했다.
꼬이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감정을 고백함에 있어선 삐뚤어진 구석 없이 직선으로 다가왔다. 의외였기 때문에, 더 각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대답 기다립니다.’
안 그래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는 침대 맡에 메시지 수신음이 묵직하게 울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남자를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이전에 유은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걸까. 그를 좋아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버릇처럼 되어버려서 나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나를 상상 할 수가 없었다.
‘대답 언제 해 줄 겁니까?’
‘좋아요, 싫어요. 둘 중 하나면 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립니까?’
‘대답 없으면 내 맘대로 하란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하지만 잠깐 들었던 묘한 두근거림은 다음날 바로 사라져 버렸다. 기다리겠다던 사람이 계속해서 대답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참 오래도 기다려 준다. 계속된 질문은 수시로 날이 바뀌어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왜 남의 문자 씹어요?”
급기야 며칠 후에는 카페에 나타나 대답을 보채기까지 했다. 사실 얼핏 문자 온 걸 보긴 했는데 어차피 무슨 내용인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답장을 할 필요가 있는가 싶었다.
“일하는 중이거든요. 보시다시피.”
사실 바로 다음날 문자로 협박처럼 대답을 윽박지르기에 곧바로 찾아올 줄 알았다. 생각했던 것에 비해서는 늦게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마도 바빠서 못 왔던 게 아닌가 싶었다. 지난 번 회식 때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귀동냥해서 들어보니 영화사 지원 아래 차기작 준비로 상당히 바쁘다는 얘길 들었다.
“늘 먹던 거 줘요.”
“이제 돈 좀 내고 사 먹지 그래요?”
대한 형이 이런 것으로 눈치를 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주 오는 사람이 커피 한잔 팔아줄 생각도 안하는 것이 괘씸해서-내 가게가 아니라 아무래도 더 그랬다-이제 커피 협찬은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 날 일을 누구에게 말 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왜요. 내가 좋아한다니까, 이제 막 해도 될 것 같습니까?”
“그래요. 내가 좋다고 하시니까 이제 막 하려고요 나도.”
어차피 좋아한다고 해서 굉장히 매너 있게 대해주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다. 오히려 좋아한다는 감정을 무기로 뻔뻔하게 굴고 있지 않던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또 다시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가는 카페 한가운데서 입술을 들이밀 것 같아서 참았다.
“요즘 바쁘신가봐요.”
생각보다 늦게 쳐들어온 것도 그렇고, 차림새를 보니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한동안 말끔한 상태를 유지하던 최현오였는데 오늘 보니 다시 본래의 편안하고 허술한 상태로 바뀌어 있었다. 턱 밑의 수염이 거뭇하고 집안에 나온 듯 옷차림이 편했다. 이런 식으로 처음 만났던 날과 같은 부랑자 스타일이 완성되는 걸까. 평소엔 멀쩡하다 못해 배우같이 보이는 얼굴이 왜 그 모양이 되나 했더니. 그 과정을 직접 보고 있자니 이해가 갔다.
“걱정해주는 겁니까?”
“바쁘고 힘들다고 얼굴에 써 있어서요.”
“요 며칠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 시나리오 수정중이에요. 각색하는 작가랑 매일 싸우는 중이라 죽겠네요.”
“그래서 촬영은 언제 들어가세요?”
“영화 말고 다른 질문은 없어요?”
“네? 아……. 별로…….”
“전혀 없다, 이거죠. 이거 짝사랑 동지면서 너무 하시네.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한 사람한테 기껏 물어볼게 일 얘기뿐이라니.”
사실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쪽이 너무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대해주니 나 역시 그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안하무인이라고 생각했었던 그의 뻔뻔함은 의외로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참, 윤작가랑 얘기한건 어떻게 되었어요?”
“안 그래도 이따 만나서 얘기하기로 했어요.”
“아, 그럼 안 되겠네. 데이트 신청 하려고 했는데.”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오늘은 좀 쉬기로 했어요. 자체 휴가…….”
마침 약속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카페에서 손님처럼 마주하고 있어서 괜찮았지만, 단둘뿐인 만남은 부담스러웠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더 불편했다.
“참, 우리 영화 단편영화제 출품한다고 말했었나요?”
“아, 네 그랬죠.”
“이왕 찍은 건데 졸업 작품으로 끝내면 아쉽잖아요. 한사람이라도 더 보는 편이 좋지.”
“저야 상관없죠. 감독님 작품이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확실히 졸업 작품만으로 남기기엔 아까운 작품이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는 쪽이 좋았다. 내 연기가 부족해 혹 망쳤을지 모른다는 걱정도 들지만, 엄연히 이 남자가 만든 영화였다. 허투루 넘어간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나 보다는 그를 믿기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되었다.
“그럼, 갑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생각나면 언제나 콜해요. 기다리고 있으니까.”
윤작가와 만난다고 해서 괜히 자기도 끼면 안 되냐고 억지를 부릴 줄 알았는데 ‘일’ 이란 얘기에 미련 없이 물러났다. 이런 면으로 보면 괜찮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일과 인연을 만들어 준 것도 그였다.
정식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다른 일에 치여 잊고 있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었지만, 잘 안되더라도 꼭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 하지만 그가 내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다른 말일 것이다.
*
윤성희 작가를 만나러 오랜만에 방송국에 왔다. 몇 달을 방송국 근처에 올 일이 없었다. N 케이블 방송국은 몇 년전에 학교 선배의 작품에 단역 출연하면서 몇 번 왔다 갔다 했었다. 그때만 해도 문 연지 얼마 안 된 신생 방송국이라 배우나 스텝 일손이 많이 딸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관심이나 화제성이 요즘 같지 않아서 출연했던 드라마가 10회 만에 조기종영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탑스타들도 앞 다투어 출연을 하려 나설 정도로 탄탄한 방송국으로 성장했다. 작품의 독창성과 작품성 덕분이었다. 종종 공중파를 넘어서는 시청률이 나오기까지 했다.
“아, 미안해요. 잠깐 처리 할 일이 좀 있어서.”
“괜찮습니다. 별로 오래 안 기다렸어요.”
방송국 로비의 카페에서 잠시 윤작가를 기다렸다. 20분 정도 솔직히 이 정도는 기다리는 축에도 끼지 않았다. 배우에게 가장 큰일은 기다림 이란 말도 있었다.
주연배우라면 대기 시간이 짧아서 쉴 틈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조연을 주로 맡았던 내 경우엔 촬영장에 나가면 대부분의 시간이 기다림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아예 카메라 앞에 서지도 못하고 돌아갈 때도 있었다.
“참. 피디님도 곧 내려오실 거예요. 이종환 피디라고 알아요?”
“아……. 이 피디님이요. 전에 같이 드라마 한적 있어요. 오래 전이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요? 잘 됐네.”
하지만 기억하지 못 할 거라고 확신 했다. 워낙 오래전, 그것도 1,2회 출연한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기 시놉이랑 1,2 회 대본이에요.”
“제가 맡게 될 역할이…….”
“거기 형광펜으로 밑줄 쳐놨어요. 정재희.”
윤작가의 신작 제목은 ‘어른의 연애’ 였다. 30대 여 주인공의 일과 사랑이 주가 되는 트렌디한 로맨스 드라마였다. 내가 맡게 될지도 모를 ‘정재희’ 는 여주인공 ‘윤수아’의 20년 지기 친구이자 하우스 메이트였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연기해야 할 듯싶었다. 메인 남자 주인공은 따로 있었지만 그 다음으로 비중 있는 역이었다.
“어때요?”
“재미있네요. 그런데 역이 너무 멋있는 것 같은데. 제가 어울릴지 모르겠어요.”
“하하. 그래요? 근데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역이에요. 여기서 정말 화려해야 할 건 남주거든요. 남주는 엄청 잘생긴 바람둥이거든요. 게다가 재벌 2세. 이 남주하고 뚜렷하게 대비 돼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런 역을 자주하는 배우들은 솔직히 좀 지겹더라고요. 좀 신선한 얼굴이 필요했어요.”
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떠오르는 얼굴들이 몇 있었다. 자상하고 스위트한 서브 남주를 전문으로 하는 남자 배우들.
“솔직히 신형씨가 유명하지 않아서 더 좋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영화 찍은걸 좀 봤더니 우울하고 깊이 있는 역할을 잘 소화하시더라고요. 정재희는 겉으로는 밝지만 상처가 많은 사람이란 설정이에요. 가볍게 연기해선 또 안 돼서, 완전 신인에게 맡기기는 또 불안하더라고요.”
내가 왜 이 역할에 캐스팅 되었는지를 납득이 잘 되도록 이유를 잘 설명해 주니 더는 자신 없다는 말을 하기도 민망했다. 그렇다고 해도 상당히 큰 행운이었다. 굳이 찾는다면 내가 아니더라도 연기 되고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피디도 그런 면에서 신형씨 캐스팅 하는데 찬성했어요. 남녀 주연은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사람들이니까 서브 남주는 신선한 얼굴 하나 껴 있는 게 오히려 좋을 거라고도 해요.”
“네. 이해했습니다.”
“그럼 우리 같이 하는 걸로 알게요?”
“네. 당연히 해야죠.”
여전히 배우로서 내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확신은 없었다. 어설프지 않은 연기라고는 생각해도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그렇고 그런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그리워하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배우라고. 하지만 아직 나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얼굴을, 신선한 얼굴이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내게 할 수 있는 역이 눈앞에 주어졌다. 더 주저 할 필요가 있을까. 열심히 하겠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면 되는 거였다.
“강신형씨 오랜만이에요. 한 5년 만인가?”
솔직히 나는 피디가 나를 절대 기억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같이 한 작품은 딱 한번, 그것도 그의 말대로 5년 전이었고, 출연 편수도 적었는데 그런 단역 배우를 아직까지 기억하리라고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네. 이피디님은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그래. 여전히 장가 못가셨고.”
“아니, 윤작가 남의 아픈 구석을 이렇게 찌르기야?”
“이 친구 성실하고 감각 있어. 작은 역이긴 해도 중요한 씬이었거든. 주연 배우가 몰입 못해서 수십 번 찍어야 했는데도 짜증도 안내고, 매번 열심히 하더라. 나 솔직히 감동 했어.”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다니까.”
“참 최현오 감독하고 작업했다면서요. 기대하고 있을 게요.”
최현오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어딜 가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자리가 그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여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처음 만나는 거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낯가리는 내가 쉴 새 없이 말을 할 정도로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좋은 작가와 피디, 거론되는 다른 배우들도 연기파이거나 신인이어도 이미지가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좋은 팀과 같이 일하게 되다니, 좋은 기회를 얻은 것 같아 마냥 설레고 즐거웠다.
한참 좋은 분이기를 깬 것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며 저녁을 먹으러 자리를 옮기려던 참이었다.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진동으로 해놓을 것 그랬다고 후회하며 잠시 통화를 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한동안 잠잠했던 녀석이 연락을 해왔다. 은태였다.
“신형아. 큰일 났어. 지금 당장 와줘.”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찾았다. 살아있다고 생존신고라도 하려고 연락이 왔나 싶었었는데 이 긴장감이라니.
“뭐? 무슨 일인데 그래?”
“설명할 시간 없어. 급해”
장소 외엔 아무런 설명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기운이 그리 큰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안 그래도 지난번 크게 사고 친 적이 있어서 안심할 순 없었다. 그때 사건은 잘 해결된 게 아니었나. 촬영이 며칠 중단되었지만 곧 다시 촬영한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 또 생겼을까.
“저 죄송한데, 급한 일이 생겨서 저녁은 못할 것 같아요.”
“응?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많이 급한 일이에요?”
“맞아. 이렇게 뭉쳤는데 아쉽구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뭘 먹을까를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다음에 제가 쏠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일 있다는데 뭘.”
“맞아. 그냥 서운해서 한 말이야. 나중에 보자고요.”
사실 이 중에 제일 한가한 사람이 나일 텐데-두 사람은 유명세 있는 스타 작가, 피디라 배우나 기자들이 서로 만나자고 하는 이들이었다-하필 이 순간 이렇게 바쁜 척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에 몇 번이고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 난 다음에야 방송국을 나섰다. 큰일은 아니어야 할텐데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
“빨리 왔네? 근처에 있었어?”
걱정하고 가슴 졸인 것에 비해 눈앞에서 확인한 은태의 상태는 상당히 양호해 보였다. 건강상태는 물론 표정 역시 긴장되고 위태로운 것-조금 전의 통화에서 느꼈던-과는 멀었다. 그는 오히려 입가에 희미한 웃음까지 떠올리고 있었다.
“네가 빨리 와 달라고 했잖아. 그것보다 대체 무슨 일이야?”
“집 좀 보려고 하는데 혼자 보려니까 잘 모르겠어서.”
“잠깐, 집이라니?”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지만 뭔가 내가 모르는 숨겨진 사정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들은 후로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우리 신혼집 말이야. 현아한테 보여주기 전에 너한테 검사받으려고 그랬지.”
“너 나한테 급한 일이라고 했잖아?”
그제야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은태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연기를 밥 먹듯 하는 녀석이 나를 불러내려고 자신의 특기를 이용한 것이다. 녀석의 연기력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급한 거 맞아. 나 시간 얼마 없어. 금방 들어가 봐야해.”
“나 일 때문에 중요한 미팅 중이었다고.”
“요즘 일 없어서 카페 일 하는거 아니었어?”
“카페 일이라고 쉽게 빠져도 되는 거야? 차라리 솔직히 얘기하고 부탁을 하면 되잖아.”
은태가 다소 자기중심적이고 멋대로 구는 것을 하루 이틀 겪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어이없는 장난을 치는 것도 심심찮게 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는 바쁜 사람이라 시간을 내기 힘들었고, 그러다 상대적으로 한가한 내가 시간을 맞추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평소엔 당연히 그런 그를 이해했다. 하지만 하필, 내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이런 장난이라니.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그 위태로운 목소리에 가슴 졸이며 여기까지 달려 왔다는 것이다. 걱정이 되어 가슴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했었다. 하지만 녀석은 지금 너무도 멀쩡하게 웃고 있었다.
“얼마나 걱정 했는줄 알아?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고.”
“아무 일 없었잖아. 그럼 됐지.”
“…….”
“빨리 들어가자. 나 시간 없어.”
어이없고 화가 난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눈앞의 건물로 들어갔다.
은태가 골랐다는 신혼집은 고급 아파트 단지의 펜트하우스였다. 너무 화려하고 넓어서 내게는 그저 별천지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지금 은태가 사는 집 역시 이곳 못지 않게 화려하고 넓었으므로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사실 거기에 뭐가 있든 놀라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은태의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도저히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때? 괜찮아.”
“어. 괜찮네.”
“여기서 현아한테 다시 프로포즈 하려고. 현아가 좋아할까?”
“뭐, 내가 걔 취향을 어찌 알겠어.”
자연스럽게 대답은 무성의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올라오는 화를 꾹 누른 채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최선이었다.
“뭐야. 너 너무 성의 없다?”
하지만 이런 내 맘을 알 리 없는 은태는 평소와 다르게 삐딱하고 싸늘한 내 태도를 이상하게 여겼다. 어쩌면 보통 때의 나라면 이정도 일로 화를 낸 적은 없을 것이다.
“너는 내 일에 성의 보인 적 있었냐.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관심도 없잖아.”
“그거야 네가 말을 잘 안하잖아.”
“아까 말했잖아. 중요한 미팅이었다고. 근데 네가 급한 일이라고 연기하는 바람에 도중에 뛰쳐나왔다고.”
아마도 그는 평소처럼 농담과 웃음으로 무마시키려 했을 것이고, 그것이 당연히 통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화가 나고 어이없어도 그의 유쾌한 기운에 휩쓸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금방 체념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부탁이든 할 수 있고, 격식이나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는 편하고 쉬운 친구.
그런데 오늘은 내 정해진 역할이 지겹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 오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내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일을 망친 건지는 몰랐어.”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기획사에 부탁해서 다른 역할 소개해줄게. 내가 그동안 너한테 신경을 좀 못썼네.”
별로 어렵지도 않다는 듯 배역을 주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물론 그가 대놓고 나를 밀어주진 않았어도 은근슬쩍 같은 작품에 소개를 해준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역할을 주겠다고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마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질린 물건을 던져주는 듯한 태도로. 가벼운 충격이 전신을 훑고 지났지만 내가 지나친 해석을 하는 거라 생각하려고 했다. 어쨌든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일테니까, 좋게 생각하자.
“됐어. 내가 언제 그런 거 해달라고 했냐?”
“그럼? 일이 없어서 짜증난 거 아니었어?”
진심으로 내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그의 표정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다시 한번 큰 충격이 밀려 왔지만 좀 전보다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나의 감정은 결국 그 정도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더 설명해 봐야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친구로서의 우리 관계도 사실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지극히 일방적으로 쏠려 있는 관계, 그러나 거기엔 나의 안일한 애정이 큰 기여를 했으므로 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내가 원했고 내가 만든 결과였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까지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냥, 지쳤을 뿐이다.
“내가 피곤해서 좀 예민했나 보다. 요즘 일이 좀 많았거든. 물론 너만큼 바쁜건 아니었지만.”
“…….”
“이만 가볼게. 다음에 보자.”
도망치듯 화려한 아파트를 빠져 나오면서, 이대로 자신이 사라졌으면 했다. 일이 잘 풀리고 바닥치던 자존감이 조금 회복 되어감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은 끝내 누군가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 일임을 잘 알면서도, 이 마음은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고 계속 될 것 같았다.
‘짝사랑 그만하고 싶지 않아요?’
나도 그만하고 싶었다. 그냥 그가 원하는 좋은 친구로 남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자리마저 잃을까,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에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여 가며 살아온 것은 다름 아닌 내가 원한 일이었다. 내가 아직 이 감정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 안에는 모순된 내가 여럿이 존재했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대신 맡길 수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 차라리 그럴 수 있다면.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그 순간 한 남자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을 들키고,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았지만 그렇게라도 내보일 수 있어서 조금이지만 숨통이 트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전히 그의 감정은 당황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를, 딱히 잘생기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나를 알아봐주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남자.
‘윤작가 하고 얘기 잘 됐어요?’
자기 생각하는 걸 알기라도 한걸까. 마침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혹시 또 자기 고백에 대답하라고 닦달하는 게 아닌가 싶어 확인해 보니, 의외로 일 얘기였다. 그가 소개해줬다고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본인 말대로 자신의 의지 밖의 일일텐데 왜 이렇게 신경써주는 걸까. 어쨌든 그가 다리 놔준 일이긴 했지만 그정도로 충분히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걱정이 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인 듯 했다. 그는 진심으로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게 웬일이야.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전화를 했더니 밝은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반기는 말투가 상당히 불량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은 전달되었다.
“지금 어디세요?”
-지금요? 제 작업실에 있는데요.
“커피 필요하지 않으세요?”
-필요하기는 하지만……. 필요하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배달이라도 해주나?
*
솔직히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분명 그에게 전화를 할때만 해도 그냥 일 잘되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던 거였는데-정신을 차려보니 가게에 들러 커피까지 챙겨서는 그의 작업실 앞에 서 있었다. 영화사에서 빌려줬다는 그의 작업실은 카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서와요.”
내가 대체 여기 뭐하려고 온 걸까, 라는 생각이 여전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일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죠?”
“일 안하고 있었어요. 그쪽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발로 찾아왔으니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아마 어느정도 기대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생각보다 훨씬 들떠 보였다. 낮에 보았을 때는 분명 제대로 면도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얼굴도 말끔해 졌고 옷차림도 깨끗했다.
“나온다고 꽃단장한 거예요?”
“네. 면도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알아봐주니 황송하네요.”
이런 얘기를 했다고 수줍어할 사람도 아니었지만 너무 당당하게 인정하니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누가 칭찬을 했다고, 착각도 참 잘한다.
“칭찬이 아니라, 여기 크림 묻어있어요.”
내가 오겠다고 해서 급하게 면도를 하고 씻은 모양이었다. 그의 턱 언저리에 쉐이빙 크림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닦아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만 눈이 딱 마주쳤다.
“뭡니까. 하려던 거 마저 해요.”
“그냥 거울 보고 직접 하세요. 여기 늘 드시던거.”
“얼마예요?”
“됐어요. 내가 다방 아가씨도 아니고.”
“돈 내고 사먹으라더니?”
“덕분에 일 잘되었으니까,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하기로 했나보네. 잘 됐네요. 말이 없길래 일이 잘못 되었나 걱정했는데.”
내가 걱정까지 될 정도로 불안했던 건가 싶었지만, 그에게 전화할 때 기분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떠올리면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엄청 꿀꿀하고 우울한 목소리로 통화를 했을 것이다.
“감독님은 내가 그렇게 좋아요?”
“뭡니까. 갑자기 안 어울리는 대사를…….”
“저에 대해 잘 모르시잖아요. 그런데도 좋다고 하시니까 신기해서요.”
“사람을 잘 안다고 좋아지는 겁니까?”
“음. 그건 아니죠.”
“더 알게 된다고 싫어질 일도 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게 쉽게 자신하지 말아요. 나 생각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멍청하고 자신이 없는 거죠.”
내가 유은태가 하는 대로 끌려가고, 그의 말을 다 들어주고 그를 위해 많은 것을 헌신하는 이유는 내가 멍청할 정도로 착해서가 아니다. 결국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내 욕심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에게 빚을 지우기 위해서, 내가 자신 때문에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해 지는지 알아주기를 바라서.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를 돌아봐 주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희망을 붙잡은 채로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내 음침한 욕망을 멋대로 투영시켰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의 눈빛이 내 눈동자 위를 부드럽게 감싸듯 다가와 겹쳐졌다. 몸이 달지 않는대도 그의 일부와 나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묘한 일체감에 심장이 조용히, 하지만 묵직하게 뛰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부드러운 힘이 나를 생각지 못한 곳으로 밀쳐댔다. 망설임을 붙잡을 틈 따위는 없었다.
“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어요?”
그는 나의 우발적인 질문에 놀라 잠시 헤매는 듯 했지만, 이내 그 말뜻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부드럽게 휘어 있던 눈매가 의심과 갈등으로 경직되었다.
“당신을 좋아하게 해줄 수 있냐고요.”
“그거 내 고백에 대한 답입니까?”
나는 즉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재촉이나 압박 없이 스스로 꺼낸 말임에도 아직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정리하는데 타인의 감정을 이용해도 되는 걸까. 결국 두 사람 모두 상처 받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끝나버리면 그때 더 괴로워지지 않을까.
“정말 그게 될까요. 내가 유은태 아닌 다른 사람을…….”
“그냥 알았다고 하면 됩니다.”
“…….”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내 망설임을 읽은 듯, 그가 내게 말했다. 그 말이 마치 주문처럼 내 안으로 들어와 웅성대는 의심과 질문들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두근대는 심장과 시끄럽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알았어요. 당신 말대로 해줘요.”
마음 속 셔터가 그대로 내려갔다. 더는 도망칠 수 없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해줘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니, 그가 내게 다가왔던가. 어쩌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누가 먼저라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의 손이 내 눈 위로 다가왔다. 눈꺼풀 위에 다가온 손바닥의 열기가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눈을 감으면 그 뒤의 일은 그의 손에 맡기면 된다.
*
입술을 파고드는 격렬한 기운에 절로 몸이 휘청거렸다.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뜨거운 혀가 목구멍을 틀어막을 듯 움직였다. 마음은 기꺼이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몸이 어쩔 수 없이 그의 단단한 팔을 밀어내려고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담하게 허리를 잡아당겨,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밀착시켰다. 그 바람에 하반신 위로 미묘한 부위가 달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곳으로 허벅지를 밀어 넣어 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왜요? 겁 나요?”
도발하는 듯한 행동과 질문에 폐를 질린 듯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어쩌면 계속해서 입술을 덮치는 누군가의 입술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눈앞에 바짝 다가선 얼굴을 향해 입을 열었지만 그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네.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조금씩 밀리다 보니 결국 닿은 것은 벽이었다. 등 뒤에 닿은 벽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넘어져 뇌진탕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벽에 몰린 몸이 더욱 위험한 상황에 몰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움켜쥐더니, 이윽고 바지 사이로 손을 집어 넣었다. 다른 손은 입고 있던 셔츠를 단추가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위로 밀어 올렸다. 맨 살 위로 그의 손끝이 닿았다. 그는 피부를 긁듯이 거칠게 쓰다듬더니 가슴 위의 돌기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그렇다고 입을 쉬는 법도 없었다. 여전히 내 입술은 그의 입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공략하는 그의 손길에 온몸이 굳었고, 닫힌 목구멍 안으로 헉, 하는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렸다.
“처음이에요?”
치열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멈추고, 바쁘게 움직이던 그의 손길도 동시에 정체 되었다. 무엇을 묻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여자 친구와 키스나 포옹 정도는 했었지만, 길지 않았던 만남이었고 그다지 진지한 관계도 아니었기에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간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남자와 더 진한 관계가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느날 게이들이 모인다는 클럽에 술을 잔뜩 마시고 찾아간 적은 있었지만, 그냥 멍 좀 때리다가 나왔을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마음이 딴곳에 가 있으니 몸이 엉뚱한 사람에게 허락되었을 리는 없었다. 물론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 그건 왜요?”
“처음이구나. 괜찮아요. 뭐, 부끄러운 일이라고.”
“아직 대답 안했거든요.”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상황을 어렴풋 눈치 챈듯했다. 능숙한 그의 키스와 애무에 허둥대며 뻣뻣하게 몸을 굳히는 내 태도 때문에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명색이 연기자이긴 했지만 내 경우엔 깊은 애정신을 연기한 적도 드물었다. 아니, 단 한번도 없었다. 있어 봐야 볼 뽀뽀나 끌어안는 정도였을 뿐.
“네. 네. 알았다니까.”
그는 내가 부정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놀리듯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기분 나빠 눈을 흘기자 괜찮다는 듯 등을 감싼 손으로 토닥토닥 애를 달래듯 쓸어내렸다. 그러나 장난스런 분위기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최현오는 그대로 내 몸을 끌어당겨 작업실 한 편의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때 쯤 내 옷가지는 반쯤 벗겨져 있었다. 바지는 무릎 아래로 내려와 있었고, 셔츠는 겨드랑이 언저리까지 올라와 잔뜩 구겨진 상태. 그 모습을 슬쩍 내려다보고 있자니 새삼 얼굴이 달아올랐다. 완전히 벗겨진 것보다 창피한 꼴이었다.
그러나 얼굴 화끈거리는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침대 위로 쓰러져 허둥대는 동안 내 몸 위로 자신의 무게를 실어왔고, 자신의 상의를 벗어던졌다. 그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의 손이 내 속옷 위로 다가와 어렴풋 튀어나온 것을 서슴없이 만져왔다.
“뭐, 뭐하는 거예요?”
실수가 아님은 뻔히 알았지만, 무얼 하려는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항의의 말이 튀어나오고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와 긴장으로 움츠러든 것을 완전히 감싸 쥐었다.
“뭐 하다뇨. 같이 즐기려는 거지.”
“……괜찮으니까, 그냥 해요.”
“나한테 맡기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몸 위에 올라온 그의 무게 탓에 어디로도 갈 수도 없었고 시선을 피할 곳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내 모든 감각을 한곳으로 집중하게 만들었다. 대담한 손길과 차갑고도 뜨거운 목소리로.
“그럼 입 다물고 얌전히 다리나 벌려.”
생각지 못한 협박 같은 말에 밀려 입술을 그대로 깨물었다. 하지만 차갑고 거친 말과 달리 그의 목소리나 눈빛은
뜨겁고 축축했다. 그는 그 눈빛처럼 뜨겁고 축축한 손으로 내 속옷을 끌어내리고, 그 속에서 어느새 뻣뻣하게 굳어있던 성기를 꺼내 손안에 쥐고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단순하고 기계적인 동작이었지만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속도를 높여 갔다.
모델하우스처럼 생활감 없이 놓여있던 공간에 열기가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공기가 텁텁하게 무거워졌다. 일부러 그런 것들을 생각하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꼴사나운 짓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나를 의식하는 듯 부러 손을 거칠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읏…….”
어쩔 수 없이 깨문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극 받아 부피를 늘려가는 성기가 내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내 의지와 다르게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뻗어나간 손은 그의 손에 낚아 채여 머리맡에 그대로 묶여 버렸다. 다른 쪽 손은 애꿎은 침대 시트를 뜯고 있었다. 뭐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파도에 휩쓸려 난파 될 것만 같았다.
“그, 그만……아……!”
할 것 같으니 그만하라는 말은 제대로 흘러나오지 못하고 숨 가쁘게 끊어져 나왔다. 오히려 그 말이 그의 동작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그의 손이 반쯤 흘러내린 속옷 속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 속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절정에 다다른 욕망이 폭죽 터지듯 화려하게 폭발했다.
“…….”
“…….”
그 순간 최현오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눈빛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쾌감에 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그는 그림이나 되는 것처럼 오랜 시간 감상했다. 크게 벌려진 눈과 함께 벌려진 입에선 소리 없는 비명이 오랫동안 흘러 나왔다. 숨도 쉬지 못하고 지른 비명 끝에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자, 그의 손안에 갇혀 있던 끈적한 정액이 내려간 속옷과 허벅지 위로 흘러내렸다.
“지금 표정 아주 좋아.”
그는 마치 촬영 중의 감독인 것처럼 깨끗한 손을 들어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뜻밖의 칭찬에 나는 더욱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몰랐다. 자위를 하거나 몽정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는 달랐다. 그보다 날것의 쾌감이 절정의 순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나른한 쾌감이 남아있는 몸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끈적하게 젖은 옷가지와 몸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몸을 더욱 붙여왔다. 그리고 힘 빠진 다리를-안 그래도 꼴사납게 벌어져 있는-더욱 크게 벌리고 그 안으로 자신의 하반신을 빈틈없이 맞물려 왔다. 벗은 사타구니 사이로 그의 성기가 여과 없이 느껴졌다. 이미 전라나 마찬가지인 나와 달리 그의 하반신은 탄탄한 청바지에 감싸여 있었다. 그럼에도 그 질긴 천을 뚫고 나올 듯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느껴져요?”
물을 것도 없이 그의 욕망은 벌려진 내 다리 사이를 공격적으로 찌르고 있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결국 섹스의 궁극적인 끝은 삽입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현실로 닥치니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몸과 마음은 생각을 깊이 할 여유를 일었다. 사정의 여운이 아직 짙고 무겁게 남아 있었다. 어쩌면 이것을 노리고 나 먼저 사정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려운 마음을 떨치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고개를 돌리고 바라본 시선이 그의 손이 침대 옆 협탁 안을 뒤져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바세린 병을 꺼냈다. 건조한 편이라 겨울이면 자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걸 왜…….”
“받아들이기 쉽게, 도와주려고 그러지. 설마, 아픈 걸 즐기는 건 아닐 거 아니야?”
그제야 그것의 용도를 정확히 알았다. 잠시 충격에 휘청거리는 사이 그는 그것의 뚜껑을 바르게 열고 손가락에 묻혀 어딘가로 가져가려 했다.
“가만 있으라니까.”
내 몸이 빠져나가려는 듯 요동치는 것을 눈치 챈 그가 무릎으로 허벅지를 아프도록 눌러왔다. 아픔에 멈칫하는 사이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의 구멍으로 쑥 들어왔다. 차갑고 미끌거리는 것이 흥분으로 뜨겁게 물든 곳으로 들어오는 기분은 뭐라 말하기 힘든 것이었다. 목구멍으로 손가락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말문이 막히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무리……라구요. 그만해요.”
“아직 엄살 피우긴 일러. 겨우 손가락이라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곳을 들락거리고 있는 목적은 다른 것을 넣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안을 늘리는 데만 집중하지도 않았다. 그의 손끝이 내벽 어딘가를 미묘하게 긁어 내린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몸이 튕겨오를 듯 움찔거렸다.
“여기가 기분 좋아?”
“……으, 아, 하지 말아요.”
“맞네.”
그는 그 근처를 손끝으로 지그시 누르며 오랫동안 자극했다. 자극 받은 곳이 빗장을 열고 크기를 늘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좀 전만 해도 손가락 하나가 비집고 들어오기 버겁게 빡빡하던 곳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변했다. 그것은 그의 손가락이 어떤 곳을 누르고 긁어댈수록 더 했다. 그때마다 사정하는 순간 느꼈던 길고 아득한 쾌감은 아니었지만, 짜릿하고 짧은 쾌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마냥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낯선 감각에 거북하고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으, 으…. 앗! 이상하니까 그만….”
“좋은 거겠지. 이상한 게 아니라.”
그가 내 말을 들어 줄 리 없었다.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듯 달콤하게 바라보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키스가 시작되고 옷이 벗겨지면서 그는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 거친 포식자처럼 변해 버렸다. 욕망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제대로 경험이 없는 나를 조금은 기다려 주면 안 되나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로션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끈적한 액체로 흠뻑 젖은 곳을 빠져나가자 틈을 주지도 않고 자신의 흥분한 성기 끝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으로 열심히 안을 늘리고 자극한 탓인가 처음엔 그 뭉툭한 머리끝이 입구 안으로 수월하게 들어오는 듯 했다. 하지만 얼핏 고개를 내려 확인한 후에야 그의 성기가 겨우 귀두 끝만을 걸치 듯 삽입했을 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음을 느꼈다.
각도 때문인지 심리적인 작용인지 그의 성기는 생각보다 크고 두꺼웠다. 모두 다 들어오면 몸이 부서지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그의 말대로 손가락 정도는 우스운 수준이었다. 두려움은 곧바로 몸으로 퍼져나갔다. 부드럽게 열린 안이 긴장으로 좁혀드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으니까, 긴장 풀어.”
“읏. 전혀 안 괜찮거든요.”
“그쪽만 아픈 게 아니라. 나도, 윽. 아프다고요.”
조금 전까지 고압적이던 사람이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렇다고 그에게서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입구에 끝을 걸친 성기도 여전히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그대로였다.
“다치지 않게 할게요. 나도 당신도 기분 좋게…….”
“그게 가능해요?”
아무리 봐도 무모한 짓이란 생각만이 들었다. 몸을 학대시킬 뿐이지 즐겁고 기분 좋은 일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는 그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두 손은 어깨와 귓불, 머리카락 사이를 유연하게 오갔다. 뜨겁고 치열한 공기 속에 유일하게 그 입맞춤만이 보드랍고 온화하게 다가왔다. 덕분인지 긴장이 조금 풀렸다.
“아까 좋았잖아요. 벌써 잊었나.”
어정쩡하게 연결된 것이 힘겨운 모양인지 눈썹을 찡그린 채 웃고 있었다. 내가 겁먹고 멈칫하는 바람에,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한 채 괴로워하는 것이 안타깝기는 했다.
“알았어요. 대신, 조금 천천히…….”
입을 맞추고 몸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 덕분에 확실히 긴장이 조금 풀렸고, 덕분인지 뻣뻣하게 문을 닫으려던 곳에 쉽게 힘을 밸 수 있었다.
“으, 악!”
하지만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긴장을 풀어 놓더니 벌린 곳을 무자비 하게 뚫고 들어왔다. 빠르고 강렬하게 박혀 들어온 단단한 성기에 허리가 휘고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 바람에 침대 헤드에 머리를 쾅 부딪쳤다. 아픔이 빠르고 강하게 온몸을 관통했다.
“천천히! 하라고 했잖아요.”
“괜찮아. 멀쩡하네.”
그는 손을 뻗어 연결된 곳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의 손이 완벽하게 맞물린 곳을 어루만지는 노골적인 감각에 소름이 끼쳤다. 몸안의 모든 내장기관으로 찬 서리가 들어왔다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더 소름끼치고 떨리는 일은 그 다음부터였다. 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맞물려 있던 성기가 가만 있지 못하고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으, 아앗, 읏…!”
그의 뜨겁고 흥분한 성기가 좁디좁은 곳을 무자비하게 오가는 동안 입에선 숨어갈 듯한 신음소리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두 다리가 몸에서 분리되고 몸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기분에 아찔한 두려움을 느꼈다. 겪어본 적 없는 낯선 아픔이 그 끔찍한 기분을 부채질 했다. 그보다 더 아픈 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이런 여러 가지 감정이 뒤범벅이 된 통증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고통과 충격에 헐떡이는 몸을 더욱 벌리고 거칠게 자신의 성기를 박아댔다. 더 깊이, 깊이. 더 들어올 곳도 없는 구멍 안을 몇 번이고 뚫었다.
“으. 으윽, 아…!”
그를 받아들이는 곳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반대로 다른 곳의 감각은 멋대로 살아서 몸 안을 흘러 다녔다. 그의 움직임은 조금 느려졌지만 오히려 더욱 집요하게 안을 찌르고 문질러 댔다. 몸을 가득 채운 뜨거운 둔통 속에 알 수 없는 쾌감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그것은 더욱 형체를 갖추고 몸으로 느껴졌다.
더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고 더운 숨만이 힘겹게 흘러나올 때까지 그는 멈추고 앉고 움직였다. 그 사이 미묘하게 자세를 바꾸고 안 그래도 벌어진 내 다리를 더욱 크게 벌렸지만, 그조차 제대로 느낄 틈도 없었다.
“아, 아…으읏…!”
잠시 느긋해 졌던 움직임이 다시 속도를 붙여온다 싶더니, 그는 무겁게 깊숙이 자신의 성기를 묻으며 절정을 맞았다. 내 안에 들어온 그의 성기가 희미하게 떨리며 울컥울컥 토해내는 것이 너무도 생생히 느껴져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피하거나 눈을 감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마치 내 몸의 한부분인 것처럼 내 안에 연결된 채였다. 완벽히 연결되어있음에도 만족하지 못한 듯 두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아프도록 세게 끌어당겼다.
몸 안이 그의 것으로 가득 찬 데 이상하게 뻥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정도로 거칠게 몰아 붙여진 탓이었다. 오히려 허탈한 기분을 느껴야 할 것은 그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아해. 강신형.”
흥분으로 만족감이 스치는 눈이 나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문득 나른하고 뜨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빈 것처럼 느껴졌던 내 몸을 채워주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넓은 등을 어루만졌다. 나를 원하고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아직 같은 고백을 들려 줄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모든 것을 받아 들였다. 그와 하나로 연결되어 흥분으로 헐떡이던 순간 나는 그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틈은 없었다. 그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고 사정을 하며 쾌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대신이나 상상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놀랐고 기뻤다. 하지만 미지근하게 눈가로 차오르는 눈물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순간 어딘가를 향해 기도했다. 언젠가 나 역시 그와 같은 얼굴로 기쁘게 고백할 수 있었으면, 꼭 그랬으면. 그 순간 내가 그런 바람을 간절하게 속삭인 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part 3. 어른의 연애
아침에 눈을 뜨니, 수천 밤을 새고 또 지난 후 완전히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하루에 십년 쯤 겪어야 할 불행과 노동을 몰아 쓰고 죽은 듯 잠들었다 깨면 자신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간혹 있지 않은가.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 것 같다.
“잘 잤어요?”
아무래도 적응되지 않는 이질적인 통증과 한참 싸우는 와중에-물론 남이 보기에는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꾸물거리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상쾌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온몸이 해체 당한 듯한 기분에 상태가 최악인 나와 달리 최현오는 막 샤워를 마치고 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과 목소리였다.
“잘 잔 것처럼 보입니까?”
“잘 자던데. 아닌가?”
말을 말자. 그쪽이야 원하는 짓을 맘대로 했으니 상쾌한 기분이겠지만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한꺼번에 당한-그렇게 표현하기엔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나는 여러모로 처참한 상태였다.
“많이 불편해요? 도와줄까?”
“됐어요.”
“일어나야 씻을 거 아니에요. 도와줄게요.”
사실 나는 다가오는 손길을 뿌리칠 기운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그의 팔에 이끌려 욕실까지 갔다. 하지만 욕실에 들어와서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남자에게 어쩔 수 없이 불평 한마디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씻는 건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정말요?”
“네. 나가주세요.”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에 부끄러워 할 필요 없는데….”
많은 감정을 담아서 말없이 노려보니 그제야 문을 닫고 물러났다. 문을 닫고 완전히 혼자가 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최현오가 나간 후에야 정신적으로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전날 밤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의지에 따라 일어난 일들이기는 했지만 막상 아침이 되어 맑은 정신으로 맞는 일들이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일단 무겁고 삐걱거리는 몸을 뜨거운 물로 씻어내면 좀 낫지 않을까. 욕조에 뜨거운 물이 차오르는 동안 어젯밤 있던 일들을 천천히 재생시켰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행동, 부끄러움 모르고 다가오는 뜨거운 눈빛. 무엇보다도 상상도 못했던 곳으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일-어렴풋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내 자신이 당하는 쪽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충격으로 인해 아픔은 그 다음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뒤집어지거나 잘못되는 일은 없었다. 가능했다. 유은태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를 했다. 육체적인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몸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였으니 어쩌면 마음도 그에 따라 움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영원히 따라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내 자신이 그 정도로 구제불능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몸 이곳저곳을 괴롭히던 근육통은 뜨거운 물에 녹아 거의 사라졌다. 물론 특정부위가 좀 불편했지만 아침에 막 눈을 떴을 때보다는 훨씬 양호한 상태였다.
“순서가 좀 바뀌긴 했지만 우리 데이트 할까요?”
욕실을 나오자마자 날아든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데이트’ 라는 말이 나를 향한 단어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아직 시간이 이르지 않나요?”
다른 것을 지적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어제의 일을 계기로 우리는 사귀는 사이, 그 어디쯤인 관계가 되었다. 정확히 사귀는 관계라 말하기 뭐한 것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아직 완전히 적응이 되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이 시간에 가면 딱 좋은 곳을 알고 있거든요.”
최현오가 하는 대로 따라가기로 했으니 군말 않고 따라나섰다. 게다가 나보다는 그쪽이 연애에 익숙해 보였으니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없는 나는 그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창밖을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느라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몰랐는데, 도착하고 보니 종로였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 끝에 보이는 것은 영화관이었다. 내가 최현오의 영화를 보았던 그곳이었다. 얼핏 상영작 리스트를 보니 아직도 그의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감독님 영화 보여주려고 데려왔어요?”
“아니. 부끄럽게 저걸 왜 보겠습니까.”
“부끄럽다고 하시니 낯서네요. 뭐 어때서요.”
“보면 볼수록 단점만 눈에 들어와요. 게다가 애인이랑 보기에 무드 없는 내용이고.”
늘 자신만만한 것 같더니 해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은 자신의 첫 영화에 의외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동시에 애인이라는 말을 은근슬쩍 강요하고 있었다.
“우리……. 사귀는 건가요?”
“그럼 사귀지도 않을 거면서 잤습니까?”
“아, 아뇨. 확인 차 물었어요.”
“혹시 후회되거나 무르고 싶은 건…….”
“아니라니까요.”
“다행이네. 절대 물러 줄 생각 전혀 없거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이 이상한 연애는 순서가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순서가 바뀌면 어떤가 싶었다. 순서와 방법에 상관없이 그와 내가 원하는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면 좋은 일이었다. 여전히 그의 괴짜 같은 면과 멋대로인 면은 불만스러운 점이었지만 나를 생각하고 걱정해주는 마음은 때때로 감동적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각별한 감정의 대상이 되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종종 호감을 보이며 다가온 사람들은 있었지만 내가 그들에게 무심하게 대하자 대부분 알아서 떠나갔다. 당연한 일이었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다르다. 그는 내 고집스럽고 차가운 벽을 억지로 깨부수고 들어오려 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아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좋아해도 되지 않을까. 이 사람과 함께라면 외롭고 아픈 일보다는 즐겁고 설레는 일이 더 많지 않을까. 아직 그를 좋아하지 않지만,좋아하고 싶었다. 그 때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어서요. 취향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최현오가 고른 영화는 이름조차 낯선 스웨덴 감독의 영화였다. 영미권 영화도 자막이 나오긴 마찬가지였지만 낯선 언어와 서정적인 화면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사전정보 없이 무작정 끌려와서 혹 취향에 안 맞아서 지루해 잠드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지루한지 모르고 빠져들어 영화를 봤다.
누군가의 손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내 손을 꽉 잡기 전까지는 그랬다. 의식하지 않고 태연한 척 하려 했지만 깍지 낀 손이 저릿하고 불편했다. 눈치를 봐서 슬쩍 빼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손가락은 단단하게 얽혀 있어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뒷골목의 허름한 순댓국집으로 들어왔다. 새소리 같은 낯선 언어가 흐르던 아름다운 영화를 관람한 후에 찾기엔 뭔가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맛은 있었다.
“여기 어때요? 내 10년 단골집입니다.”
“괜찮네요. 저도 순댓국 맛있는 집 알고 있는데.”
“그래요? 그럼 다음엔 거기로 갑시다.”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무난한 데이트였다. 물론 그 무난한 데이트조차 내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이 아닌데도 처음처럼 무얼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방향을 잃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종이배 같은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를 붙잡는 그의 손길이 처음엔 어색하긴 했지만 나중엔 조금 편안해 졌음을 느꼈다.
*
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카페는 오늘로 마지막 출근이었다. 당장 내일은 드라마 포스터 촬영이 있었다. 포스터나 홈페이지에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은 처음이기도 했고, 영상과 사진은 좀 다른 느낌이라 아무래도 긴장이 되었다.
사실 한동안 카페 일을 봐줄 수 있을 것 같아 아르바이트도 구하지 않았었는데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사람 좋은 사장님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좋아하기만 했다.
“포스터 촬영을 한다고?”
“네. 처음 하는 거라 어색할 것 같아요.”
“잘 하겠지. 뭐. 근데 너 미용실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옷도 좀 사서 입고……. 돈 없으면 형이 좀 빌려줄까?”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보다 더 내 일처럼 기뻐해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쑥스러운 기분에 주변을 둘러보는데 익숙한 얼굴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내 애인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이쿠 감독님 오셨네. 소식 들으셨어요? 신형이 내일 포스터 촬영 한데요.”
“형. 뭘 그렇게 동네방네 방송을 해요?”
“들으면 안 될 애기도 아니잖아요. 우리 사이에.”
순간 괜히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어 숨을 죽이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눈빛에 손이 달린 것처럼 내 얼굴이며 몸을 훑었다. 그렇다고 ‘우리 사이’를 이야기 할 리는 없었지만-괴짜 같은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런 것까지 할 정도로 경우 없진 않았다-괜히 목이 따끔거리고 속이 탔다.
“여긴 어찐 일이에요?”
“애인 보러 왔지요.”
손님 때문에 카운터로 돌아간 대한 형의 눈치를 살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데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이 남자가 지나치게 조심성이 없어서일 것이다.
“밖에서는 조심 좀 해주세요.”
“하긴 이제 유명 배우시지. 알았어요. 조심하지.”
“아직 촬영 시작도 안했는데 뭐예요. 놀립니까?”
“좋아서 그래요. 애인한테 좋은 일이 생겨서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최현오의 말투나 태도가 조금 건방져서 그렇지-이건 아무래도 타고난 걸까-자신의 말대로 그의 표정은 싱글벙글. 누가 보면 자기 영화가 대박이나 난 줄 알겠다. 괜히 삐딱하게 대꾸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고마워요.”
“뭘요. 우리 애인의 일이 곧 내 일이니까.”
하지만 이 능글맞은 태도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가끔이라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조금쯤 귀엽게 봐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내일 포스터 촬영이라고 하니까, 오늘 데이트는 거기로 가면 되겠네요.”
“어딜요? 안 바쁘세요?”
“시나리오 수정은 작가랑 주먹다짐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합의 봤습니다.”
“……영화 만드시는 거 맞아요?”
무슨 영화를 대단하게 준비하길래 시나리오 작가랑 주먹다짐까지 한 건지. 농담으로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 남자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괜히 걱정 되었다.
“아무튼 갑시다. 이상한 데 가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저 아직 일이…….”
“사장님 강배우 모시고 어디 갈 데가 있는데요.”
“곧 저녁 알바 오니까 걱정 말고 가봐!”
마지막 날이라 제대로 마무리 하고 싶었는데, 내 애인께서 멋대로 사장과 상의한 후로 스케줄을 정해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나섰다.
최현오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청담동의 헤어샵이었다. 헤어샵 간판을 보자마자 무슨 생각인지 빤히 보였다. 아마도 대한 형과 같은 걱정 때문일 것이다.
“설마, 미용실에서 데이트 하자는 겁니까.”
“맞아요. 중요한 일이잖아요. 이미지 변신 해볼 생각 없어요?”
“제가 어차피 얼굴로 미는 배우도 아니고, 됐어요.”
“그래도 역할에 충실해야죠. 이왕 연기 변신하는 김에 이미지도 변신하면 역할에 이입하기 좋을 겁니다.”
다른 감독도 아니고 최현오가 하는 이야기이기에 마음이 동했던 것 같다. 비록 꽃미남 같은 얼굴은 아니어도 로맨틱한 드라마의 서브 남주인데 너무 꾸미지 않는 것도 좋게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완벽한 연인이 있는 여주가 흔들릴 만큼 매력적인 남자가 되어야 하는데, 차창에 비치는 내 모습은 과연 어떤가 싶었다. 대충 말려서 삐죽 튀어나 온 머리카락 하며,오래 입어 헤진 청바지에 폴로 티셔츠. 무난하긴 하지만 역할에 충실한 헤어와 패션은 아니었다.
“잘 아는 헤어 디자이너가 하는 곳이에요. 그쪽 기획사 헤어샵도 나쁘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실력 보장하는 사람이니까 믿어도 됩니다.”
“어떻게 헤어 디자이너까지 아세요?”
“옛날 애인입니다. 참고로 남자.”
“네? 아……. 그러시군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크게 충격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공공연히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이야기 해 왔다. 옛 애인이 남자라는 것, 그 남자를 내게 소개시켜준다는 것 모두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혹시 질투 나서 싫다면 다른 데로…….”
“별로, 상관없는데요.”
“너무하네. 질투하는 척이라도 하면 안 됩니까?”
질투까진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기는 했다. 게다가 옛 연인과 친구처럼 잘 지내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게 헤어진다고 해도 남아있는 감정이 있지 않을까. 연애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 뭐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난 전혀 모른다 대답해야 할 것이다. 연락은커녕 소식조차 모른다. 그게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 반대는 더욱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최 감독 오랜만!”
최현오의 옛 연인이라는 사람은 눈에 띄는 화려하고 밝은 미남이있다. 헤어 스타일리스트답게 조금 화려한 머리 색깔에 심플하고 몸에 핏 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언제부터 최 감독이야. 어색하니까 관둬.”
“감독님이라 감독님이라고 부르는데 뭐 어때? 그런데 같이 오신 분은 누구?”
최현오를 반갑게 맞아주던 그는 뒤늦게 그의 결에 뻘쭘하게 서 있는 내 존재를 확인한 듯 슬쩍 물었다.
“내 애인.”
“애인? 연애할 시간 없을 정도로 바쁘다며.”
“내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다고 그래.”
“어라. 오리발 내미는 것 보게,전에 만났을 때는 분명 그랬는데.”
“몰라. 기억 안나. 오늘은 나 말고,이 친구 머리 할거야.”
옛 연인이라는 이인성과 대화하는 최현오를 보고 있자니 나와 있을 때와 다른 편안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연인의 감정이라기보다는 확실히 친하고 편한 친구 같은 분위기였다. 정말 사귀었던 사이가 맞는가 싶을 정도.
“안녕하세요. 이인성이라고 해요.”
“네. 처음뵙겠습니다.”
손을 내밀면서 웃는 얼굴이 소년처럼 해맑은 느낌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남자에게 인기 있음은 물론 여자 손님들에게도 꽤 인기 있을 법 했다.
“현오 애인이라니까 특별히 신경써드릴게요.”
“완전 신경 써야 돼. 내일 사진 촬영 있대. 배우거든.”
“어,그래요? 실례지만 성함이…….”
늘 이런 시간만 되면 어디론가 숨고 싶어졌다. 내 이름이나 경력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민망해 하는 표정을 마주하기 곤욕스러웠기 때문이다.
“강신형이라고 합니다. 그리 유명하지 않아서 잘 모르실거예요.”
“어. 이름 들으니까 왠지 어디 나왔는지 알 것 같은데……. 어디더라. 으음. 달에서 온 그대?!”
“네. 거기 나왔어요.”
“기억난다. 기억 나.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나으시네요.”
그나마 최근작이 꽤 잘된 편이라-비록 내 역할은 아주 작고 등장씬도 적었지만-기억을 해주니 다행스러웠다. 최현오에게 나중에 들어보니 엄청난 드라마 매니아라고 했다. 안보는 드라마가 없을 정도라고. 반면 본인의 영화는 어둡고 우울해서 아주 싫어한단다.
“중요한 배역 받았으니까,상큼하게 바꿔줘.”
“설마 자기 영화? 난 자기 영화 재미없어서 별로 던데.”
“걱정 마. 윤작가 드라마에 나온대.”
이인성이 영화 재미없다고 대놓고 욕하는데도 그는 기분 나쁜 티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늘 있는 일인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우와, 나 윤작가님 짱팬인데, 완전 멋지게 바꿔드려야겠네.”
“잘 해. 망치면 가만 안 둔다.”
“내가 한두 번 장사해봐. 방해되니까 좀 앉아있어!”
“안 되는데 감시해야 하는데.”
사람 찌르는데 일가견 있는 최현오였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게 받아쳤다. 물론 친해서 그런 것 같고, 나나 다른 손님들에겐 상냥할 게 분명했다.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껴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지만, 나 역시 옆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불편해 이인성의 편을 들었다.
“선생님 말대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제야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도 그의 두 눈만은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기가 없다고 욕을 할리도 없는데, 왜인지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걸 신경 썼다면 애초에 옛 애인이 일하는 헤어샵에 데려오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혹시 어떤 배역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그게……. 30대 여자가 주인공인 로맨스물인데요.”
처음엔 상관없는 사람에게 드라마 내용과 배역을 설명하는 것이 조금 쑥스러웠지만 상대가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좋아. 딱 떠오른다. 떠올라!”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미간을 찌푸리고 말없이 거울 속을 노려보던 이인성이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몰라도, 손뼉을 치며 혼자 좋아했다. 감정표현에 솔직하다 못해 좀 산만하다 싶기도 했지만 일단 가위를 들고 머리를 만지기 시작하니 진지하고 프로다운 눈빛이 돌아왔다.
“저……. 선생님.”
“하하. 선생님은 무슨. 이름 부르셔도 됩니다.”
조용해진 틈을 타 아까부터 계속해서 떠올랐던 의문을 풀고자 했다. 둘이 진짜 사귀었던 사이였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편하게 지내고 있는지. 슬쩍 물어보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거울 뒤편이 얼핏 최현오의 얼굴이 비쳤지만 그는 다행히 누군가와 통화중이 었다.
“최 감독님하고 사귀셨다는데.”
“네에? 와, 저 미친 새끼.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개뻥을……!”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가위를 든 손을 위험하게 허공에 흔들며 흥분해 소리쳤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허탈했지만, 나보다 이인성 쪽이 더 기분나빠하는 것 같아 표시도 낼 수 없었다. 정말 싫어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 졌다.
조용히 물으려고 했던 건데 이래서야 최현오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처음엔 긴가민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둘이 친하고 잘 아는 사이로 보여서 믿을 뻔했는데, 역시 거짓말이었나. 연기는 내가 아니라 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아, 아니었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저 새끼가 죄송해야 할 일인데. 참, 저 게이인건 맞아요.”
“네? 아…….”
“실은 제 구 남친이 최현오 친구였어요. 그 거지 같은 놈하곤 이젠 얼굴도 안보지만 현오하고는 아직도 친구처럼 지내요. 아,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세요.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요. 절대 제 타입 아니거든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가 싶었지만 아마 내가 최현오의 연인이라고 생각해 편하게 해주는 이야기인 듯 했다. 좀 복잡하고 겉모습만 봐선 투박하고 막 대하는 걸로 보여도, 꽤 신뢰가 있는 관계임은 분명했다.
“참 조심성도 없어. 자기야 감독이라 크게 상관없을지도 몰라도 배우신데……. 애인이라고 막 자랑하고 다니고.”
“괜찮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이라 생각해서 이야기 했을 것이다. 툭하면 거짓말에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놀리는 사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선을 넘지 않는 선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사려 깊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여기에 데려온 것 자체가 그러 했다.
“이런 적 없는데. 아무래도 신형씨 되게 좋아하나봐요.”
별 거 아닌 인사치레 같은 말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이 관계가 정상적이었다면 뭔가 할 말이 있겠지만 서로가 좋아서 이뤄진 관계는 아니니 왠지 죄책감이 느껴진다. 어차피 상대방은 깊은 의미를 두고 한 말도 아닐 텐데 말이다.
머리를 자르는 것 정도 하겠거니 싶었지만 염색에 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중간에 깜빡 졸기까지 했다. 기다리는 사람은 더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최현오는 통화 때문에 종종 자리를 비웠고, 돌아와서도 분주하게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말로는 한가하다 했지만 여러 가지로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다 됐습니다!”
3시간 쯤 지난 후에야 완성된 헤어스타일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마무리를 하고 손을 떼어내니 완전히 다른 인상의 남자가 거울 속에서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요? 얼굴이 하얀 편이셔서 애쉬브라운으로 염색해봤어요. 머릿결이 얇고 축 쳐지는 스타일이라 볼륨 펌 해서 살짝 띄워놓으니까 훨씬 어려보이죠?”
대체 뭘 어떻게 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확실히 전보다 훨씬 나아진 것은 분명했다. 간혹 염색이나 펌을 하긴 했지만 그때마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런 스타일이 어울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역시 만지는 사람 나름인 걸까. 그렇다고 해도 본판이 바뀌었을 리는 없는데 포토샵을 한 것처럼 얼굴전체가 뽀샤시 해진 느낌이었다.
“……노, 놀랍네요.”
“그러게. 완전 놀랍네.”
거기에는 최현오 역시 동의하는 듯,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내 변화된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사실 남자도 머릿발이 상당하니까. 내가 했지만 참 뿌듯하네. 역할에 정말 딱인 것 같지 않아?”
“어떡하죠. 나 다시 반하겠는데.”
“그만 비행기 태우시죠.”
“진짜라니까? 이러다 남자 주인공 교체되는 거 아닌가 몰라.”
“거기 커플님들아 사람 많은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보다 못한 이인성이 한마디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낯간지러운 칭찬은 계속 되었다. 나중엔 놀리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쑥스럽긴 해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자 다음 코스로 갑시다.”
최현오의 도움으로-정확히 말하면 헤어스타일리스트의 솜씨이긴 했지만-놀라운 머릿발로 인해 외모가 업그레이드 된 것은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용실에서 3시간 넘게 앉아있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참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란 이야기가 반갑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네? 또 어디를…….”
“머리 바꿨으니 다음엔 옷걸이에 걸맞은 걸 걸쳐야죠.”
대답을 할 틈도 없이 그는 나를 조수석에 밀어 넣고 출발해 버렸다. 나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 같아 어이없다 생각하면서도 이 남자가 나에게 나쁜 일을 할 리 없다는 믿음이 있기에 이내 포기하고 안전벨트를 맸다.
*
“여기 좀 비싼 곳 아니에요?”
최현오의 차가 선 곳은 헤어샵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즉, 여전히 우리는 강남에 있었고 그것도 명품샵과 수입 편집샵이 즐비한 거리 한가운데 있었다.
“비싸면 어때요. 협찬 받으면 되지?”
“누가 저 같은 무명배우한테 협찬을…….”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배우들도 협찬받기가 힘들다고 들었다. 나로서는 협찬은 꿈도 꾼 적 없었다. 헤어 메이크업은 물론 의상까지 내가 준비해야 했다. 그나마 여러 씬 등장하지 않긴 했지만 그조차 사비로 해결하자니 돈이나 시간적으로 힘든 점이 많았다.
“어머. 이게 누구야. 최감독!”
“안녕하세요. 선생님.”
게다가 그가 들어간 곳은 건물 하나가 한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디자이너의 의상실이었다. 그는 그곳을 어색하지 않게 들어가더니, 가게 직원과 짤막하게 인사를 했고 곧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의상실의 주인이 등장했다.
“자기가 여긴 뭔!일이야, 그렇게 놀러오라고 해도 안 오더니.”
“선생님 도움이 좀 필요해서 왔습니다.”
“뭔데, 말만해.”
게다가 둘 사이는 상당히 친밀했다. 이인성처럼 친구 관계는 아니어도 오며가며 한두 번 본 사이는 아닌걸로 보였다.
“의상 협찬 좀 해주셨으면 해서요.”
“자기 입게? 어디 시상식이라도 가.”
“아뇨. 제가 아니라……. 여기 제 영화에 출연한 배우. 인사해요. 디자이너 차지연 선생님.”
최현오가 멀뚱히 서 있는 내 손을 끌어당겨 디자이너 앞에 밀어 넣어,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신형이라고 합니다.”
“아, 네. 신인이신가 봐요?”
당연히 디자이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최현오의 몇 마디 말로 흔쾌히 의상을 골라가라고 허락해 주었다. 이인성이야 친구여서 잘해줬다 쳐도 패션 디자이너하고는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
신기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옷을 제대로 고를 수도 없었다. 어차피 디자이너와 최현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멋대로 골라 입히는 대로 빌려 왔을 뿐. 내가 보기에는,다 비슷한 심플한 디자인이라 어떤 게 더 좋은지 잘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예전에 알바를 잠시 했어요.”
의상실을 나온 후에야-대놓고 앞에서 물을 순 없었으니까-내 의문은 겨우 풀렸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도 퍼뜩 감이 오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알바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알바를요?”
“그게 좀……. 말하기 싫은데, 창피해서.”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요. 애기 해줘요.”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일도 아닐 텐데 왜 어울리지 않게 뒤로 빼나 했더니,들어보니 별건 아니었다. 다만 생각보다 화려한 과거에 조금 놀랐을 뿐.
“모델. 믿기지 않는다고 웃지 말고요. 내가 20대 초반엔 상태가 좀 괜찮았거든.”
“뭐 그렇게 안 믿기는 것도 아닌데요. 키도 크시고 얼굴도…….”
잘생겼다, 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길래 말을 잇기 싫어졌다. 내가 그의 눈치를 보면서 망설이자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뭡니까. 왜 칭찬을 하다 마는 거죠?”
“왠지 하기 싫어졌어요.”
솔직히 최현오가 객관적으로 키 크고 잘생기고 매력적인 것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칭찬하기 힘든 것은 자신이 자신의 장점을 매우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내세우는데 주저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의 자신감은 익숙해지질 않는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이런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 했어요. 돈만 벌 수 있는 거면 뭐든.”
“집이 어려운 편이었어요?”
“아뇨. 오히려 넘칠 정도로 잘 살았어요.”
“그런데 왜?”
“아버지가 엄한 분이셨거든요. 영화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당장 집에서 나가라기에 그길로 나왔어요. 집 나온 게 고3 때라,어떻게 고등학교는 졸업했는데, 대학은 날아갔죠. 뭐. 아버지하곤 거의 의절 당한 거나 마찬가집니다.”
하긴 대부분의 부모가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자 하는 자식을 환영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 역시 내가 연극영화과를 지망한다 했을 때 좋아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약한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설득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그처럼 집에서 쫓아낸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사람처럼 성공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나로선 불가능 할 것 같다. 게다가 그에겐 고생으로 찌든 피로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멋있네요.”
“멋은요. 그냥 칙칙한 얘기지.”
아까는 칭찬 않는다 뭐라고 하더니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엔 쑥스러운지 눈을 피했다. 타인의 눈엔 대견하고 멋있게 보이는 일화였지만 아무래도 본인에겐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뇨. 저도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포기할까 했었어요. 그나마 어머니가 도와주셔서 연기과로 대학을 갈 수 있었죠. 그런데 감독님은 집안 지원은 전혀 받지도 못하시고 뭐든 혼자 해내셨잖아요.”
늦게 학교에 들어간 것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속 얘기를 좀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내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을 때도, 내게 자신을 좋아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을 때도 뜻밖에 튀어나온 진지한 감정에 놀라곤 했다.
지금도 생각지도 못했던 진지한 이야기를 듣게 되니 새로운 기분이었다. 가끔은 그의 진중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그의 진심을 의심하게 될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쉽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근데 강신형씨는 언제부터 배우 할 생각을 했어요?”
“언제더라. 흠……. 고등학교 때인가.”
갑자기 질문이 내게로 향했다. 하지만 술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자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좀 전에 그가 쑥스러운 듯 반응한 것도 이해가 갔다.
“저도 제가 배우를 꿈꾸고 이렇게 배우생활을 하게 될 줄 몰랐어요. 처음엔 그냥 친구 따라 연극반 구경이나 간 거였는데.”
처음엔 은태가 멋대로 끌고 가 억지로 구경한 것이었다. 그 후로 종종 얼굴을 비쳤고, 나는 내가 속한 재미없는 써클 대신 그들의 연극연습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 축제날 연극부원 한 명이 아파서 결석을 하게 되고, 그를 대신해 무대에 올라갔다. 흥분되고 떨리는 첫 경험 이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연극부원이 되었다.
“혹시 그 친구가 유은태 입니까?”
“네. 맞아요.”
“유은태는 정말 안 끼는 데가 없네.”
자기가 물어놓고 씁쓸해 하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그의 입장에선 은태가 좋게만 보일 리는 없었다. 내게도 은태는 넘어야 할 산이듯, 그에게도 유은태는 이겨야 하는 경쟁자일 것이다. 그 마음은 내것과 종류도 다르고 더 클 것이다.
“사실 좀 예상은 했습니다. 확인 차 물었던 거지. 그런데도 왠지 짜증이 나네.”
“미안해요.”
“왜 사과합니까. 이상한 사람이네.”
나도 내가 사과하는 게 웃기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의 실망스러운 기분이 이해가 갔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이내 무거운 기분을 털어내고 웃었다.
“이상한데 자꾸 끌려. 참……. 이상해.”
그는 운전대에 비스듬히 얼굴을 기댄 채 나를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칭찬인지,불평인지 모를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이 남자가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래서일 것이다.
“이상한 사람한테 이상하단 소릴 들으니까 정말 이상해질 것 같네요.”
“그럼, 진짜 이상해 져볼까?”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는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의 얼굴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이 닿는 느낌이 아찔해 눈을 감았다가 의외로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에 안심해 감은 눈에 힘을 풀었다. 그러나 부드럽고 장난스럽게 시작된 입 맞춤은 점점 격렬하고 치열한 것으로 변해 등이 휘고 목을 가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유리창에 쾅,머리를 부딪쳤지만 그는 사과 대신 손을 뻗어 내 머리통을 감쌌고 더욱 진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게다가 그는 키스에서 만족하지 못했는지 운전석에서 몸이 반쯤 넘어와 기껏 입혀 놓은 비싼 옷을 벗겨 내고 그 안의 피부를 만지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의 손길이 무방비한 옆구리와 배 언저리를 쓸어내렸을 때, 그 손이 차가우면서도 뜨거워서-말도 안 되는 두 가지 감각이 동시에 느껴졌다-절로 숨이 멈추었다.
시동을 켜지 않아 미지근한 차안 공기가 뜨겁게 변했다. 단순히 키스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당장 불붙은 사람을 진정 시킬 방법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바지 춤 아래로 들어오자,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를 밀쳐냈다.
“여,여기서는 안 돼요.”
밀쳐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밀려나지도 않았다, 그는 도망친 내 어깨를 끌어당기며 흐트러진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그럼 어디로 갈까요?”
“아무데나……. 어쨌든, 안이면 좋겠어요.”
대답을 하며 그를 재차 밀쳐냈지만 공간이 좁아서 더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밀어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손을 잡아채 끌어내렸다. 그래도 내 말을 아예 무시하진 않았다. 딱히 바람직한 반응도 아니었지만.
“여기도 차안인데?”
“장난해요?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어쩌려고…….”
그나마 건물 뒤의 후미진 주차장이라 사람의 발길은 뜸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인적이 없을 거라 자신할 수도 없었다. 사실 사람이 절대 올 리 없다고 해도 이런 곳에서 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떨어져 운전대를 잡았다.
“알았어요. 어디든 들어가면 된다 이거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전벨트를 다급하게 찾아 맨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는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엄청난 과속이었지만 만류할 상태는 아닌 걸로 보였다. 행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오늘 밤 편안하게 잠들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
본격적인 일정이 잡히자 회사에서 매니저를 붙여 줬다. 물론 전에도 형식상의 매니저가 있기는 했지만 회사에서 이야기 나누고 전화나 하는 정도였지, 직접 내 스케줄에 동반하지는 않았다.
“한경준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낯이 익은 얼굴이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지윤영의 매니저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회사에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된 편이라 마주치면 눈인사만 하는 정도였다.
“윤영씨 매니저 아니세요?”
“아, 맞아요. 이번에 신형씨 일도 맡게 되었어요.”
“윤영씨 매니저면 바쁘지 않아요?”
물론 회사에서 한 매니저가 여러 명을 관리하는 경우야 많았다. 나 역시 형식상의 매니저가 존재는 했으니까. 하지만 지윤영처럼 한창 주가가 오른 배우의 매니저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내 스케줄까지 소화가 가능할까.
“실은 윤영이가 사고를 쳐서 당분간 자숙하기로 했어요.”
“네? 무슨 일로…….”
“기사 못 보셨어요? 걔가 얼마 전에 음주운전을 해서…….”
음주운전이란 단어로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확실히 성실한 느낌은 아니었고, 건방진 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정도로 큰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나를 무시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불쌍한 맘은 들지 않았지만-사실 본인이 죄를 지었으니 대가를 치루는 것도 당연했다-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순간의 실수로 기회를 날려 보낸 후배가 안타깝기는 했다. 후회하고 되돌리고 싶어도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도 없을 텐데.
“포스터랑 홈페이지 세팅 된 거 보셨어요?”
“아, 벌써 나왔어요?”
“아직 공개 전인데 파일 보내주셨어요. 완전 잘 나오셨더라.”
경준 매니저가 노트북을 가져와 홈페이지 화면과 포스터 시안 몇 개를 보여주었다. 매니저의 말대로 사진은 훌륭했다. 촬영할 때 사진작가에게 엄청나게 지적을 받아가며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한 보람이 있었다.
다른 두 연기자에 비하면 어색함이 남아있긴 하지만 사진작가의 솜씨로 어떻게든 커버된 모양이었다. 솔직히 너무 잘 나와서 내 얼굴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포토샵을 너무 심하게 한 게 아닐까, 실제 드라마에 나온 얼굴과 너무 달라 욕을 먹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이미지가 많이 변하셨어요.”
“그래요? 별로 변한 거 없는데.”
“머리도 그렇고, 좀 세련되게 변하셨네요.”
확실히 변한 스타일이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윤작가도 머리 어디서 했냐고 물으면서 훨씬 좋아졌다고 칭찬해 주었다.
“참, 윤영이 코디 하던 애가 형 코디도 할 것 같아요.”
“미진씨 말이구나.”
“우와, 다른 배우 코디까지 어떻게 기억하시네요.”
“그냥 회사 지나다니다 자주 봐서 그렇지. 뭐.”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를 거쳐 간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한 회사에 오래 있다 보니 그런 거지 딱히 기억력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참.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래요. 편하게 해요.”
“그럼 형도 말 편하게 하세요.”
“알았어. 앞으로 잘해보자.”
새 매니저 경준과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텅텅 비어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던 내 스케줄 표가 빈 곳이 드물 정도로 꽉 차 있는 게 조금 감격스러웠다.
“내일 대본 리딩 하시죠? 아침에 모시러 갈게요.”
“촬영도 아닌데 뭘. 쉬어.”
“쉬다뇨. 내일 취재진도 온다는데.”
“그 사람들이 왜 거기까지 와?”
“요즘은 홍보하려고 대본 리딩도 공개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신경 좀 쓰고 오세요. 무심한 듯 시크하게, 아시죠?”
지윤영의 매니저일 때도 느꼈지만 참 싹싹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이었다. 그 까다로운 아가씨 비유를 맞출 정도이니 알만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그간 고생 많았을 테니 함께 일하는 동안 잘해줘야겠다.
회사에서 나오라고 해서 나오긴 했지만 매니저 소개 받은 거 외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일찍 집에 돌아가 대본이나 봐야겠다. 대본리딩하는데 취재진이 몰려오건 말건 내게 중요한 것은 ‘정재희’라는 인물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강신형!”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간밤에 봤던 시나리오 속 대사를 몇 개 곱씹고 있는데 등 뒤에서 발성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너 회사까지 왔으면서 나 안보고 가는 거야?”
지난번 껄끄럽게 해어져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는데, 정작 은태 본인은 전혀 껄끄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밝고 시원한 웃음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회사에 있는 줄 몰랐어. 스케줄 있는 줄 알았지.”
“너 드라마 들어간다며. 그것도 주연으로?”
“주연은 아니야. 서브.”
“그 정도면 주연이나 다름없지. 뭐.”
갑작스러운 내 신분상승에 대해서는 회사 사람들도 말이 많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은태의 귀에 들어갈 만도 했다. 스폰서라도 물은 게 아니냐고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으니-회사에서도 모르는 스폰서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라 웃고 말았지만-말이다.
“너 요즘 나한테 너무 소홀한 거 아니야?”
“좀 소홀하면 어때. 그동안은 잘 했잖아.”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은태의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연락 좀 뜸했다고 소홀하다는 불평이 흘러나와 까칠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 마음은 언제나 그에게 충실했다. 더 이상 그러지 않기로 결심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감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런 사람을 향해 소홀하다, 변했다 이야기 하다니. 물론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겠지만 당하는 사람에겐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지난번 일 때문에 꽁해 있어?”
“아니거든. 내가 겨우 그깟 일로…….”
“아니면 뭐야. 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아니면 나한테 이럴 이유가 없는데 말이야.”
순간 은태가 뭔가를 알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가 싶어, 바짝 긴장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평소에도 이런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녀석이었다. 결혼하자던가, 사랑해 같은 말을 친구들에게도 종종 말했었다.
“아니지? 난 또…….”
내가 은태의 질문에 기막힌 듯 코웃음 쳤더니 그는 이내 멋대로 결론을 내고 안심하며 웃었다. 그는 왜 안도하는 걸까. 내게 있어 여전히 자신이 1순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나는 그 착각을 깨주고 싶었다. 괜한 심술이었지만, 왠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뭐가?”
“맞다. 나,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그래서 너한테 전처럼 신경 써주지 못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너한테는 현아도 있고, 괜찮지?”
은태는 생각보다 놀랐는지 얼빠진 표정으로 정지화면처럼 머물러 있었다.
“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보자.”
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순간 넋이 빠져 있던 은태가 정신을 차리고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사실 은태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늘 깊은 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고 그럼에도 구김 없고 해맑아서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지 못한다. 모르는 척 하지만 자신의 그런 점을 무기로 삼았고, 그럼에도 제 할 일은 잘 해냈다.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그의 말대로 변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변하고 싶었다. 지금보다 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
집으로 돌아와 며칠 새 하도 봐서 너덜해진 대본을 붙잡았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사가 눈앞에 둥둥 떠다닐 뿐 안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은태를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못된 척 심술을 부렸지만 그럼에도 나는 동요하고 있었다. 그를 향한 짝사랑을 끝내고자 마음먹긴 했지만, 칼로 자르듯 감정을 잘라낼 수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은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는 내 의식 속에 끼어든 것은 다른 남자였다. 최현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쉽게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려 놓았다를 반복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그런 사이’ 니까 전화정도야 어떤가 싶다가도 막상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싶어 막막한 기분이 든다. 이런 기분에 괜히 통화다가가 이상한 얘기를 흘리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을 때,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폰 화면을 확인하고는 재차 놀랐다.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했던 상대가 도리어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여보세요.”
내 소란스러운 마음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마음과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은 후에 전화를 받았다.
-별로 놀란 목소리가 아니네. 뭐해요?
하지만 너무 태연하게 가다듬은 게 문제였나, 그는 도리어 그 점을 지적했다. 그래도 다른 것을 들키지 않았으니 다행이었지만.
“뭐하긴요. 대본 보는 중이었어요.”
-역시 우리 강배우 성실하다니까.
“최감독님 그 배우, 배우 소리 좀 그만해요. 그렇게 강조하지 않으셔도 잘 알거든요.”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자기야? 허니? 우리 애기?
“끊을 게요. 별로 중요한 용건은 아니신 것 같으니까.”
-끊다뇨. 안 됩니다. 그럼 당장 쳐들어 갈 거라고요.
전화도 맘대로 못하게 협박을 한다. 이런 사람이 현재 내 애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성실한 연인이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하루에 한 번씩 안부전화를 했고, 데이트 코스도 늘 열심히 준비했다. 무엇보다 내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해주며 함께 고민하고자 나서는 점은 감동적인 정도였다.
-대본연습 도와줄까요?
“감독님이요?”
-네. 덕의 애인께서 도와주겠다고요.
“됐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한 번 해봐요. 내가 로맨스 전문은 아니지만, 감독이니까 도움은 되겠죠.
됐다고 여러 번 거절했지만 자꾸만 졸라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저만치 던져두었던 대본을 들고 와 앉았다. 펼쳐놓았던 부분의 대사를 잠시 바라보며 감정을 잡았다. 최현오는 연습이라고 대충 봐주는 사람이 아님을 직접 경험해서 알기 때문이었다.
“너는 내가 늘 변하지 않고 있어서 좋다고 했지. 그런데 난 니가 너무 변한 게 없어서 가끔 얄미워.”
그 대사는 정재희가 술에 취해 쓰러진 윤수아를 두고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었다. 잘 나가던 직장에서 좌천되고 남친과 대판 싸운 후 친구인 재희와 술을 마시며 고민을 털어놓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고 격려한 정재희는 막상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씁쓸한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
“사실 난 변하고 싶은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에 불쑥 끼어든 물기에 놀랐다. 눈앞을 뿌옇게 물들이고 목소리를 탁하게 만드는 그것은 핸드폰을 통해서 그에게도 달은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지적이 바로 날아들었다.
-방금 건 감정과잉입니다. 너무 넘치네.
“그렇죠?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게다가 방금 건 ‘정재희’가 아니라 ‘강신형’ 이잖아요.”
정확한 지적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흘러나오던 눈물조차 얼어붙은 듯 뚝 멈추었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곳을 향해 체념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직도 강신형 마음 속에는 유은태가 많이 있네요.
-뭐,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내 자리가 아예 없을 거라고는 생각 안합니다.
최현오는 조금 씁쓸한 목소리였지만 그다지 실망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 담담한 목소리에 내 마음의 혼란도 서서히 정리되는 듯 했다.
-내일 대본 리딩한다면서요? 너무 늦게까지 연습하지 말고 적당히 하고 일찍 자요. 내가 지적한 것만 고치면 완벽할 겁니다. 다큐 찍는 거 아니잖아요. 강신형은 접어두고 정재희가 되라고요.
“알았어요. 명심할게요.”
-참. 잊지 말아야 할 거 또 있습니다.
그가 한 템포 숨을 고르고 한 말은 사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좋아합니다. 잘 자요.
*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된 후에야 나는 조연 아닌 주연의 고충을 몸소 실감했다. 그래도 서브니까, 부담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격려했었는데 서브인 내 씬도 만만치 않게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여주인공인 수아와 같은 집에 살고 있다 보니 대사가 없더라도 같은 장면에 등장하는 씬이 많았다.
물론 최현오의 영화에서도 주인공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단편이었고 대사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드라마 주연의 대사량은 상상이상이었다. 게다가 16부작,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잠깐, 컷. 컷. 신형씨 방금 전에 대사 하나 씹었어.”
조연 일 때는 낸 적 없는 NG까지 수 십번 냈다. 그나마 현장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좋게 웃고 넘어갔지만 여러모로 면목이 없었다. 무명인 나를 캐스팅한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모험일 텐데, 기대만큼 잘하고 싶었다. 마음과 달리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휴. 다행이다. 재희가 NG 안냈으면 내가 낼 뻔했는데.”
상대역인 윤수아를 맡은 주민영은 털털한 성격이라 NG를 낸 나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아마도 내가 민망할까봐 배려해주고 있는 듯 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 안하셔도….”
“진짜예요. 윤작은 다 좋은데 대사가 너무 길고 어려워.”
주민영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에도 나보다 3살이나 연상이었다. 트랜드한 드라마와 작품성 있는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중인 중견 여배우로, 신현아 같은 대중적 인기는 아니었지만 매니아층의 지지를 받는 배우였다. 연기도 잘해서 감독들도 좋아하는 모양이었고 패셔니스타로도 유명해 특히 여성 팬이 많았다.
“주민영. 너는 주인공이면서 제일 NG많은 거는 아냐?”
“주인공이니까 제일 많죠. 대사가 많으니까, 안 그래요?”
그나마 조금 안심되는 것은 상대역이 잦은 NG에도 짜증내지 않고 몇 번씩 반복되는 씬에도 집중을 잘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감독의 말대로 나 못지 않게 NG를 많이 냈다. 그녀의 말대로 주인공이고 씬이 많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녀의 연기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종종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하겠다고 할 때도 있었다.
“초반이라 그렇죠, 뭐.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예요.”
“네.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뭘. 나도 마찬가지라서 하는 말인데.”
“다시 한번 갑시다. 레디!”
“나 이집에서 나갈거야.”
“맨날 그 소리냐. 너 내가 쓰레기 분리수거 안한 거 때문에 삐쳤어? 아님 빨래 아무렇게나 던져놔서.”
“그런 거 아니야. 나 진심이야.”
“뭐?”
“네 애인이 싫다잖아. 나 때문에 네 연애사업 방해할 수는 없지.”
“재희야.”
“나간다고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하루이틀 알던 사이도 아니고…….”
“컷. 좋았어. 좀 쉬었다가 다음 씬 들어갑시다.”
긴장으로 인해 실수가 있었지만, 날이 바뀌고 씬이 쌓이면서 긴장을 없애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다행히 대사를 잊는 실수 외에는 연기적인 지적은 크게 없었다. 간혹 하는 실수는 조연에서 주인공으로 성장하는 성장통이겠거니 생각하게 되었다.
최현오의 강신형이 아니라 정재희가 되라는 한마디는 역할에 몰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실 나는 시놉시스를 보았을 때부터 친구를 짝사랑하는 내 상황을 떠올렸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으면서도 상대를 속이고 친구로 머물러 있던 나와, 친구 이상의 관계가 아니라고 오랜시간을 지내왔음에도 갑자기 연애감정을 느끼게 된 정재희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단지 처한 상황이 비슷하다고 지나치게 내 모습을 투영할 뻔했다. 그랬다간 우울하고 처량 맞은 연기가 나왔을 것이다. 정재희는 부드럽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너무 가벼워서도 안 되지만 무거워서도 안 되는 역할이었다.
하마터면 좋은 역을 망칠 뻔했던 것을 누군가가 구해주었다. 참 여러모로 최현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것 같다.
*
첫방을 앞두고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이런 행사에 참가하는 게 처음이라 걱정이 많았지만 나보다 베테랑인 매니저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다.
“어차피 잘 안 알려진 형보다는 주민영이나 윤지호한테나 스포트라이트가 갈 거예요. 지난번 대본 리딩 때도 그랬잖아요?”
매니저의 말대로 기자들은 나보다는 다른 주연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고 질문도 거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연예인이었다면 그런 점을 슬퍼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차라리 그 점이 안심이 되었다. 연기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이런 쪽으로는 영 재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은태는 예능이나 토크쇼에 나와서도 분위기를 잘 맞추고 얘기를 잘 하던데, 그런걸 보면 천상 타고난 스타다 싶었다.
어쨌든 매니저의 한마디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지난번에도 기사가 나갔다고는 들었지만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었고, 나에 대한 것은 배역과 이름 소개 정도였다.
드라마 현장의 카메라에는 익숙했지만 기자들 후레쉬 세례는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얼굴에 바른 비비가 두텁게 느껴지고, 스타일리스트가 꽉 조여 놓은 자켓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또한 내가 해내야 하는 역할이었으므로, 이 시간을 어떻게든 버틸 수밖에 없었다.
감독과 작가가 나서 간단한 작품 소개를 하고, 두 주연배우의 인사 후에 내 차례가 왔다.
“정재희 역할을 맡게 된 강신형입니다.”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모두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기자들 질문이야 다른 배우들에게 집중될 것이 뻔했고, 그러리라 생각해서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놓고 있던 게 문제일까. 어떤 기자가 내 이름을 호명했을 때도 나는 미처 알아듣질 못했다.
“신형씨, 뭐해?”
옆에 서 있던 주민영이 내 팔을 툭툭 쳤을 때에야 나를 향한 모두의 시선과 수많은 렌즈를 의식했다.
“아, 네. 질문하세요.”
“최현오 감독의 단편영화에 출연하셨고, 차기작에도 출연 예정이시라는데 어떤 인연으로 같이 하게 되신 겁니까?”
“영화가 단편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계시던데 전혀 다른 분위기의 드라마를 하게 돼서 어렵지는 않습니까?”
질문은 하나로 끝나지 않았고 게다가 여러 군데서 들어왔다. 생각지 못했던 질문들로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지만 우물쭈물했다간 더 주목을 받을 것 같아 대충 둘러댔다.
“운 좋게도 좋은 기회가 많아서 연속해서 멋진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네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배역이지만 그래서 더 즐겁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엔 없던 기지도 발휘되는가 보다. 내게 이런 순발력이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럭저럭 해냈지만 기분은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찔했다. 나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를-게다가 나도 모르는 최현오의 신작 출연이라니-타인에게 듣게 되면서 많이 당황스러웠다.
“우와. 신형씨 최현오 감독이랑 작업했었어?”
“네. 단편 영화에…….”
“보고 싶다. 나 그 감독님 좋아하거든.”
예. 저도 그 감독님 영화는 참 좋아합니다. 좋아하는데, 참 당혹스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영화가 완성작이 되어서 나온 지도 몰랐고, 영화제가 시작된 지도 몰랐다. 나도 촬영하느라 정신없었고 그 사람도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빠서 얼굴을 못 봤지만, 그래도 전화는 매일 했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통화하면서 했던 이야기라고는 시답지 않은 날씨 얘기나 다른 남자 배우랑 바람피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투정뿐이있다.
“오늘따라 되게 예쁘네. 어디 갔다 왔습니까?”
제작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최현오의 작업실로 향했다. 집에 있는지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빨리 얼굴을 마주하고 기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어준 그의 표정은 반가움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었다.
“사람 놀래는 재주가 정말 좋으시네요.”
“무슨 소립니까?”
“영화 나왔으면 저한테 얘기 정도는 해주셨어야죠. 그리고 그 영화제 시작했다는 것도 몰랐잖아요.”
“전에 영화제 나간다는 말은 했잖아요?”
“언제라고는 안하셨잖아요. 상영 중인 것도 몰라서 기자들 앞에서 얼마나 당황했는데요.”
“맞다. 나 지금 인터넷 기사 보고 있었는데, 실물이 훨씬 나은 것 같네요.”
“말 돌리지 마시고요. 왜 얘기 안했어요?”
“맞다. 그래서 한번 가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시간 돼요?”
“내일요?”
“네. 뭔 상을 준다고 꼭 오라고 하던데. 어차피 영화도 봐야 하니까 갑시다.”
싸움을 걸고자 단단히 마음먹고 달려왔는데 상대방이 내가 던지는 말을 모두 여유 있게 받아치니 점점 전의가 사그라졌다. 그래도 명색이 주연배우인데 완성작 나왔다는 얘기조차 안 해준 건 너무하지 않은가 싶지만 일단 영화를 보여준다는 말에 불은 꺼졌다. 거기다 그는 납득할 수밖에 없는 방패를 들이밀었다.
“모처럼 중요한 배역 맡아서 집중하고 있는데 방해될까봐. 그랬죠.”
“전혀 방해 안 됩니다. 제가 그렇게 집중력이 없는 줄 알아요?”
“그래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긴장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초반에 엄청 버벅거렸던 것은 사실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괜한 걱정이 아니라 어디서 훔쳐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확했다.
“처음에는 그냥 작은 영화제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는 유명한가봐요. 아는 기자가 영화를 봤는지 신형씨 애기를 좀 물어서 간단히 얘기 해줬는데 기사를 냈더라고요. 저도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는 내가 화를 내려고 했던 원인들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한 후, 여유 있게 웃어보였다. 그 여유 있음이 열 받긴 하지만 여기서 더 화를 내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알았어요. 가볼게요.”
“그냥 가게요?”
그때까지 나는 현관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는데 맨발로 나온 그가 붙잡았다.
“내일, 보자면서요. 그리고 밤 촬영 있어서 가봐야 해요.”
“아, 그래요?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네.”
손을 놓는 그의 표정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 괜히 내가 미안한 기분이었다. 전화로 물어봐도 될 것을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심란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얼굴 봐서 좋네요.”
하지만 그는 아쉬움을 애써 긍정적으로 떨치려고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저만치 멀어진 그의 손을 잡았다. 잡아서 어쩌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행동임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워 어색하게 악수하듯 흔들고 놓았다.
“내일은 괜찮아요. 촬영 없거든요.”
도망치듯 돌아서 문을 쾅, 닫았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단숨에 엘리베이터까지 뛰었다. 나도 모르게 내 손을 움직인 힘은 뭐였을까. 왜 그 순간 손을 잡고 싶다고 느꼈을까.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리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
-그냥…. 살아야겠다.
저녁 노을이 지는 바닷가의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초췌한 얼굴의 사내가 허무한 눈빛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혼자였고 완전한 빈손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더는 나아갈 곳이 없다고 깨달은 순간 그는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그는 웃지도 그렇다고 울지도 않고 있었다. 담담하게 그저 눈앞의 모든 것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마지막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더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지만 숨 쉬고 있는 자신이 다행스러웠다. 너무도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안도감이 스친 것은 잠시였다. 곧 남아있는 시간을 살아가야 할 근심에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렸을 뿐.
그 순간 화면은 캄캄해 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영화는 훌륭했고 내 연기도 그 영화에 제법 잘 어울렸다. 모든 것을 잘 끝냈다는 안도감에 한숨이 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나는 한숨을 쉬었지만 이상하게 눈가에서 뜨거운 것이 흘렀다. 왈칵 흘러나온 눈물과 동시에 가슴속에 일렁이는 뜨겁고 넘치는 감정에 놀랐다. 흐릿한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우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소용있을까 싶었다. 감은 눈 위로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옆에 앉아 있던 최현오가 내 어깨를 토닥거리듯 두드렸다.
“울 정도로 감동적입니까?”
놀리듯 물었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나정도로 울고 있진 않았다. 감동적인 표정으로 울먹거리거나 조금 눈가를 훔치는 정도였을 뿐이다.
“자기 연기에 감동받아서 울다니 좀 창피하지 않아요?”
“영화 내용이 좋아서 그러는 거거든요.”
내가 연기했음을 알면서도 나인지도 모르고 빠져 들었다. 내가 외우고 했던 대사임에도 처음 보는 것 같았고, 촬영한 장소들임에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아마도 감독인 이 사람의 능력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내고 서둘러 눈가를 훔치고 진정하려 애썼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단정하게 접힌 손수건을 내밀어 도움이 되었다.
“감독님. 배우분. 잠시 퇴장했다가 무대 세팅되면 다시 들어오세요.”
영화제 스탭으로 보이는 앳된 청년이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도 나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화 끝에는 관객과의 대화가 준비되어있다고 했다. 이런 꼴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예정 되어 있는 행사를 취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되도록 빨리 마음을 진정시켜야 하는데, 좀체 진정이 되지 않아 괴로웠다.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하고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에야 가슴이 좀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덕분에 무대인사를 하러 다시 상영관에 들어갔을 때는 정상적인 얼굴로 돌아왔다. 왜 그렇게 울컥했던 것인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강신형입니다.”
주연으로, 게다가 영화제 같은 큰 행사에 인사를 하게 된 것은 처음이라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다행히 나에 대한 질문보다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최현오 감독에 대한 질문이 훨씬 많았다.
그의 작품은 특별상을 수상했다. 상 받을 일이 많아서인지 그닥 감동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사진을 요구하는 기자들 때문에 덩달아 그 옆에서 뺨에 경련이 일 정도로 웃어야 했다. 어쨌든 결과물이 만족스럽게 나왔으니 됐다 싶었다.
“이제 축하하러 가야죠?”
귀찮고 소란스러운 일정이 겨우 마무리 되고 행사장을 나왔을 때는 우리 둘 다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였지만 내게도 중요한 날이었다.
“그래요. 제가 살게요.”
“아니죠. 내가 사야지. 덕분에 영화가 잘 나왔는데.”
“감독님 능력이죠. 제가 뭘.”
“우리 둘 다 잘 해서라고 칩시다. 됐죠?”
늘 그렇듯 소주에 어울릴 법한 장소로 데려갈 줄 알았더니 생각지 못하게 세련된 바로 데려가 조금 놀랐다.
“이런 곳도 좋아하세요?”
‘블루스카이’ 라는 밝은 이름과 달리 가게 입구에서부터 온통 컴컴한 곳을 올라가면서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엔 그 의심이 의외다, 라는 감정으로 바뀌었다. 생각보다 넓은 홀은 전체적으로 조도가 낮은 편이었고, 고급스러운 가구와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째즈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왜요. 가끔은 괜찮잖아요. 게다가 모처럼 축하하는 자리니까.”
“좋아요. 전 괜찮아요.”
“실은 아는 가게예요.”
“인맥이 상당하시네요.”
“말했잖아요. 안한 알바가 없다고. 알바 했던 곳이에요.”
“아, 여기서 일했던 거예요?”
키 크고 말끔한 모델 같은-실제로 경험도 있다고 했었지-외모의 남자에게 어울리는 장소였다. 실제로 가게 직원들이 상당한 미남자들이었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은 가게 안에 여자의 모습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식한 순간이었다. 서로 친밀한 눈빛을 주고받는 남자들, 심지어 가게 구석에서 입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혹시 여기…….”
“맞아요. 눈치가 아예 없진 않네.”
“제가 평소에 눈치가 없다는 뜻이에요?”
“빠른 편은 아니잖아요.”
이번에도 반박하기 힘든 말이 돌아와 괜히 따졌다고 후회했다. 게다가 딱히 틀린 말도, 그렇다고 나를 향해 비난 하는 말도 아니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이런 곳에 안 와봤을 것 같아서 와 봤어요. 싫어요?”
“아뇨. 저도 궁금하기는 했어요.”
“여기가 이야기하기 조용하고 편해요.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최현오는 가게 사장으로 보이는 젠틀한 분위기의 남자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다. 조금 나이가 있었지만, 왠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어 보이는 얼굴과 분위기였다.
“사장님이신가 봐요?”
“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로 신세진 분이라.”
이런 가게를 운영하는 거면 아무래도 본인도 게이인 걸까. 딱히 여성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설명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멋모르고 까불던 시절에 많이 도와주셨어요. 어른으로서 여러 가지 알려주시기도 했고…….”
“아, 네. 그렇군요.”
“질투 안합니까.”
“왠지 놀리시는 것 같아서 속아드리기 싫네요.”
“안 속네.”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 아니거든요.”
지난번에도 속았는데 설마 또 속을까. 하지만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렇게 바라니 질투하는 척이라도 해줄걸 그랬나 약간 미안한 마음이 잠시 들었다.
나 역시 소탈한 장소와 술을 선호하긴 했지만 가끔 이런 곳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있다.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 이었다.
“우리 나이도 같은데 그만 말 놓는 게 어때요?”
“아, 네. 그랬었죠.”
“게다가 사귀는 사이인데 너무 내외하는 것 같고.”
같은 나이임은 진작 알았지만 말 놓을 생각을 못했던 것은, 처음에는 그의 성격이나 하는 행동이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감독과 배우로 일을 하다 보니 감히 말 놓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배우 생활이 짧지 않음에도 나는 아직 감독들이 어렵고 같이 있으며 긴장되는 편이었다. 그의 경우엔 촬영 중엔 평소의 여유나 능글맞음이 싹 사라지고 귀신같은 얼굴로 성을 내는 편이라 더욱 그랬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알았어. 그렇게 하자. 이렇게 말하라고.”
“네……. 아니, 응.”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이정도로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는데 좀 더 편하게 바꿀 필요는 있었다. 아직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차차 적응되겠지. 이미 종종 반말을 하던 누군가는 전혀 어색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호칭도 좀 바꿔주면 좋겠는데.”
“감독님을 감독님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같이 일할 때는 몰라도 이런 데서까지 그래야겠어? 이름 불러.”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건너편에 있던 손이 내 손을 잡아왔다. 잠깐 움찔했지만 이런 짓이 어색하지 않은 곳임을 깨닫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하지만 태연하게 지나기에 그의 손길은 지나치게 야했다.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바닥 안까지 세세하게 쓸어내리고 간질이듯 긁어내리는 것이 마치 침대 위에서 애무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오씨라고 부를게. 그럼.”
“이름 불러. 그냥 친구 부르듯이 부르면 되잖아. 그렇다고 친구처럼 생각하라는 말은 아니고…….”
“알았어.”
“다시 불러봐. 신형아.”
자연스럽다 못해 스스럼없는 누군가와 달리 왠지 부끄러워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노골적인 눈빛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현오야.”
“…….”
“됐지?”
“거기다 좋아해, 까지 붙여주면 참 좋을 텐데.”
그는 여전히 의자 뒤에 몸을 느슨하게 붙인 그대로, 커다란 손만이 내 손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온 기분이었다. 땀구멍 하나하나, 속눈썹 한올까지 세어지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봐. 그래도 내가 전보다는 좀 좋아졌지?”
늘 느끼는 그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결정적인 것을 가지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기막힐 정도의 자신감, 하지만 저 자신있는 모습에 이끌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불편하고 낯설었던 그의 모습을 조금씩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 맞아.”
솔직히 인정했다. 본래 첫인상이 최악인 탓도 있었지만 알아 갈수록 매력 있는 사람임을 느꼈다. 게다가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내보이며 내게 여러 호의와 배려를 베풀었다. 나는 그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그걸 어떻게 말로 해.”
“나하고 유은태 퍼센트로 따지면 어느 정도일까?”
나는 최현오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이름에 흠칫했다. 그는 내가 은태를 오랫동안 짝사랑 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나의 착각인 것 같다. 그는 유은태를 좋아하는 나를 좋아하고 받아들였을 뿐, 그렇다고 그 존재를 가볍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신경을 쓰는 편이 정상이다. 그것을 여태까지 그저 표시 내지 않았을 뿐.
“난 수학 쪽은 꽝이야. 그리고 숫자로 어떻게 말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예를 들어서 해보라는 거야. 나도 내가 어느 정도 잘하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힘을 낼 거 아냐?”
그의 말대로 아무래도 나는 눈치가 없긴 한 모양이었다. 참으로 한심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최현오는 늘, 언제나 유은태를 머릿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은태의 존재를 잊고 있던 순간까지도 그는 그를 의식 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표시 내지 않으려 했을 뿐.
“10%? 아니……15%쯤?”
“…….”
“왜? 실망했어?”
그의 기분을 생각해서 거짓말을 했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런 짓은 오히려 더 실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마음을 숫자로 표현하라는 주문자체가 어려웠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주한 얼굴이 말 없이 표정 없이 앉아있는 것이 여간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니. 생각보다 후해서 놀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10년 세월을 하루아침에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거든. 그런데 며칠사이에 15프로라면 할 만하지 않겠어?”
나를 생각해서 태연한 척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표정 없던 얼굴에 천천히 웃음이 번지는 것이 눈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겨우 그 정도로, 그것으로 기뻐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내게도 이 작은 숫자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종종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누군가의 존재를 아예 잊게 될 때가 많았다. 은태에게 오래 연락이 없으면 보고 싶고 걱정이 되었고, 그래서 보낸 문자에 답이 없으면 하루 종일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붕 뜬 채로 안정되질 않았다. 그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어떤 이가 있는지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인정하지 못해 늘 괴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잊히는 때가 많았다.
“안 되겠다. 일어나야겠어.”
“왜?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현오를 놀라서 바라보았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고 그의 기분도 좋아보였는데 갑자기 돌아가려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대로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순간 키스를 하려는 것인 줄 알고 아연해 졌지만 그의 입술이 향한 곳은 내 귓가였다.
“같이 있으니까 참을 수가 없어져. 당장 네 옷을 벗기고 몸 구석구석 먹어버리고 싶어.”
차라리 키스를 하는 편이 덜 부끄러웠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의 음성이 닿은 귓불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당분간은 참을래. 퍼센트가 더 오를 때까지…….”
“…….”
“기대하고 있을게.”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첫방송 날짜가 다가오니 긴장이 되었다. 어차피 케이블 드라마니까 시청률이 공중파만은 못할 거라고 피디와 스태프들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열심히 준비한 만큼 기대가 아예 없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첫 방송이 언제야?”
최현오가 그렇게 물었을 때부터 무슨 의도인지는 알았지만 같이 보자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 것은 차라리 혼자인 편이 덜 긴장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싫어?”
“싫은 건 아닌데, 그냥 혼자 보고 싶어서.”
“왜? 첫회부터 키스씬이라도 나와?”
“그런 씬 없으니까 걱정 마.”
“그럼 왜? 역사적인 주연 데뷔작인데 같이 봐야지.”
주연 아니라 서브라고 누차 강조해도 그게 그거 아니냐고 늘 주연임을 강조했다. 서브라고 배역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었고-사실 다른 남자주인공 못지않게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솔직히 굳이 그렇게 나누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그럼 우리 집으로 올래?”
“오케이. 좋은 거 가지고 갈게.”
“그냥 와도 되는데, 집에 술도 많고.”
“술 말고 다른 선물 있어.”
“뭔데?”
“보면 알아.”
집으로 부른 게 잘한 일인가 싶었지만, 어차피 할 거 다 한 사이에 새삼 신경 쓰고 꺼릴게 있는가 싶었다. 오히려 상대방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괜히 기대했다가 아무 일도 없어서 허무할 수도 있었다.
지난번에 아무런 준비 없이 손님을 맞았기에 이번엔 청소도 하고 메뉴에도 신경을 썼다. 사전 제작한 분량이 많이 쌓여서 최근엔 며칠에 한번은 쉬는 날도 있었다. 첫방송하는 날에 마침 쉬어서 다행이었다. 첫방송만은 본방으로 보고 싶었다.
어차피 저녁시간은 아닌 늦은 시간인지라, 식사보다는 안주가 될 만한 탕과 곁들일 가벼운 반찬을 준비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 순전히 내 멋대로 정한 메뉴였다. 그러고 보니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술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음식으로 치긴 힘들었으니까-도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었지만 우리는 함께 지낸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래도 좋아하는 음식 정도는 물었다가 만들어줘야겠다. 겨우 그 정도로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오늘 이렇게 내가 출연한 드라마를 편안하게 시청하게 된 것도 최현오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영향 끼친 바가 없다고 했지만 그의 영화에 출연한 일을 계기로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변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자신 없는 모습으로 내가 꿈꾸던 길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냄비를 가스불에 올려놓고 경준이가 뽑아다준 기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아직 시작 전인 드라마 티저에 대한 반응부터, 단편 영화제에서 상영된 단편에 대한 리뷰 기사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내실 있는 내용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전문가의 평가까지. 모두 칭찬뿐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냉정한 말을 듣는 편이 차라리 현실감 있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로 경사가 많은 지금, 조금 더 욕심을 내 한 가지 더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번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끝났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나를 믿고 응원해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첫방본방 사수 알지? 다들 어디야?
드라마 배우들끼리 만든 단체 카톡방에 민영누나가-이제는 누나동생 할 정도로 친해졌다-분위기 메이커답게 첫 방송 카운트다운을 알렸다.
-당연하지. 난 지금 친구가 하는 호프에 와 있어. 단체로 보려고.
남자 주인공 지호가 민영 누나에 이어서 현재의 상태를 보고했다. 그밖에 다른 배우들도 모두 첫방송을 보기 위해 대기중이었다.
-신형이는 뭐해? 조용하다?
-나? 나는 집이야.
-혼자? 혼자 쓸쓸하게 뭐하는 거래.
-혼자 아니야. 친구 오기로……^^
친구라는 단어에서 망설였지만 괜히 애인이라고 했다간 안 그래도 수다스러운 카톡방이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참았다. 아직 손님 맞을 준비가 채 끝나지도 않았고 드라마 시작 전부터 스캔들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 연애 소식을 누가 관심 있게 봐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딩동.
가스불에 올려놓은 냄비를 살피러 주방에 막 들어왔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좀 이르다 싶긴 했지만 이르다고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오후쯤, 연락이 왔을 때는 일이 있어서 드라마 시작 시간에야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 같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어서와.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나는 초인종 누른 방문객이 당연히 최현오일 줄 알았다. 그래서 확인할 생각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것은 최현오가 아닌 유은태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다니. 나 기다렸어?”
“너 뭐야. 말도 없이…….”
“내가 언제는 말 하고 찾아왔어?”
은태의 말대로, 그는 툭하면 말도 없이 찾아왔고 심지어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내 집에 무단으로 쳐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하필 무작정 쳐들어온 날이 오늘이란 말인가.
“왜 그런 표정이야. 나 안 반가워?”
“반갑긴 한데, 갑자기 뭐야.”
“너 오늘 드라마 첫 방이잖아. 축하해주려고 왔어. 짠. 케이크도 사왔다고.”
“너 뭐야. 왜 안하던 짓을 해?”
내가 반기지 않든 말든, 그는 이미 집안으로 들어와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고 소파에 누워버렸다. 드라마 첫방송을 축하하기 위해 왔다는 핑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내가 신경 안 쓴다고 삐쳤었잖아. 이제부터는 잘하려고.”
“내가 언제 삐쳤다고 그래?”
“삐쳤잖아. 그래서 나한테 먼저 연락도 안하고 연락해도 뚱하게 반응하고……. 안 그래?”
그런 게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 봤자, 은태는 이미 내가 자신에게 토라져서 소원해 졌다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런 깜짝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하지만 선물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선물이 아니라 폭탄이 아닌가 싶었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맛있는 냄새 나네.”
“꽃게탕.”
“꽃게탕? 우와, 맛있겠다. 너 내가 오는 줄 어떻게 알고.”
꽃게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은태가 주방으로 달려가 냄비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집어넣으려 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 가까스로 녀석의 숟가락을 빼앗는데 성공했다.
“너 때문에 만든 거 아니야.”
“그럼? 누구 오기로 했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 일을 어떻게 정리 해야하나를 고민했다. 역시 은태를 돌려보내는 쪽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쉽게 돌아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설마 사귄다는 사람이야? 잘 됐네. 이 기회에 인사나 시켜줘.”
“그런 거 아니야. 호들갑 떨지 마.”
“야, 부끄러워할 거 없어. 그리고 네 애인이면 당연히 나한테 인사시켜줘야지. 안 그래?”
웬만해서는 모처럼 만난 친구를 쫓아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어떻게든 최현오가 오기 전에 그를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매정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나, 은태, 현오.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딩동
은태를 상대하는 사이에 정말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 늦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에 비해선 빨리 왔다.
좀 더 천천히. 이왕이면 늦게 도착했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자꾸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은태가 나가보라고 눈짓해 보였다.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게 좋을까. 머리가 무겁고 발걸음은 더욱 무거웠다.
“안녕. 나 늦지 않게 온 거지?”
문을 열자 어느 때보다 기분 좋아 보이는 현오가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다.
“어, 일찍 왔네.”
“늦을까봐 엄청 과속해서 왔어. 나 과속으로 찍혔을지도 몰라.”
“지난번에도 찍혔잖아? 조심 좀 하지.”
“괜찮아. 오늘 같은 날은 벌금 좀 내도…….”
교통 위반딱지 얘기로 시간을 끌어봤자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날 수밖에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따라 나온 은태를 현오가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안녕하세요.”
“유은태?”
“네. 유은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은태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거리를 걸어 다니면 백이면 백 자신의 이름을 외치니 당연하게 생각했겠지만 현오가 그를 알아본 것은 의미가 전혀 달랐다. 현오의 시선은 당연히 나를 향해 돌아왔다.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을 향해 나는 솔직한 내 심정을 전했다.
“미안. 나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야.”
“아, 죄송해요. 제가 첫방송 축하하고 싶어서 말도 안하고 찾아왔어요. 좀 끼어도 되죠?”
보통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웃으면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유은태가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예의바르게 양해를 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안되겠는데요.”
“네? 하하. 그러지 말고 좀 봐주세요. 저랑 신형이랑 아주 각별한 사이거든요.”
하지만 그것이 현오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현오가 정색하며 자신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은태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는지 웃으며 계속해서 그를 자극하는 말만을 던지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강신형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은태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현오가 바로 내게 성질을 내며 따져 물어왔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나도 원치 않던 일이기에 억울함을 지울 수 없었다.
“본인이 말했잖아. 멋대로 쳐들어 온 거라고.”
“선약이 있다고 말하며 되잖아.”
“말했어. 그런데도 안가겠다고 하잖아.”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내 억울함보다도 그의 서운함이 더 신경이 쓰였기에 화를 내는 그를 향해 열심히 변명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심지어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나가는 그를 따라 신발도 신지 않고 급하게 뛰쳐나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그가 뒤를 돌아보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돌아보지 않고 가버릴 정도로 화가 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지 마. 같이 있어 준다고 했잖아.”
다가가 손을 잡으니 시선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지만 살며시 마주 잡았다. 그것으로 좀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말로 듣지 않으면 안심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안 가. 열 좀 식히려 나온 거야.”
“정말?”
“그냥 담배나 한 대 피고 오려고…….”
비록 내가 원한 일은 아니었지만 좋은 일로 찾아온 사람을 기분 상하게 해서 덩달아 마음이 쳐졌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냉랭함이 맴도는 것은 더욱 울적했다. 어떻게 해야 그 눈빛이 다시 따뜻해 질까, 고민하던 끝에 부끄러운 짓을 하기로 했다. 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다가온 그에게 입을 맞췄다.
“담배 대신이야?”
그는 자신의 입술에 달았다 떨어진 입술을 손을 뻗어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 이미 차가운 기운은 녹아 있었다.
“이걸로 된다면…….”
“그럼 한 번 더 해줘.”
내 딴에 엄청난 용기를 내서 한 일이라 한 번으로 만족해 주면 안되나 싶었지만, 스스로 나선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입을 맞추려고 다가가니 잡혀 있던 손이 다가와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가볍게 시작된 입맞춤이 오랜 키스로 변한 후에야 그는 완전히 기분을 풀고 웃어주었다.
겨우 기분을 풀어 데리고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을 리는 없었다. 내가 오자마자 은태는 귓속말로 투덜거렸다. 은태가 내게 바짝 붙자마자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잔뜩 기대했는데. 아니었잖아.”
“뭐가.”
“여자친구인줄 알았는데, 실망이라고.”
은태를 슬쩍 밀쳐내고 통성명이나 제대로 시켜야겠다는 생각에-그렇지 않으면 은태가 실수를 할 것 같아서-현오를 소개했다.
“인사해. 최현오 감독이야.”
“아, 최현오 감독이면, 우리 현아랑 작업하기로 한 그분?”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어요. 반가워요.”
현오가 차가운 것은 당연했지만 은태의 태도 역시 어딘지 냉랭했다. 비록 그가 웃으며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넸다곤 하나 내 눈에는 그것이 지극히 형식적이며 억지라는 것이 느껴졌다.
오붓하게 술 마실 분위기는 아니라 커피라도 내오겠다고 주방에 들어왔는데, 은태가 쫓아와 이유를 말해주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런 곳에서 만나네.”
“원수라니?”
“저 인간 때문에 결혼까지 미루게 되었잖아.”
현아가 결혼을 미루자는 말을 해서 은태를 속 썩인 것은 알았지만 그 이유가 영화 때문인지는 몰랐다. 결국 현오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결혼까지 미루려고 했을 줄이야. 내년 봄쯤 결혼식을 올리려 했으니, 확실히 촬영 일정이 겹치긴 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심각한 일은 아니라 안심하는 한편, 겨우 그런 이유로 현오에게 차가웠던가 싶어 당사자도 아닌데 짜증이 밀려왔다.
“그게 왜 최감독 때문이야? 누가 결혼까지 미루고 영화 출연하라고 했나.”
은태는 내가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는지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당혹스러움을 서둘러 숨기고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농담, 농담.”
“왜 이렇게 안와? 드라마 시작할 시간이야.”
“응. 지금 가고 있어.”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과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일단 마음을 풀어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은태가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너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았어. 내가 뭐 애야?”
사실 걱정되는 것은 은태보다도 현오였지만,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이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집에는 머신이 없어서 간단하게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가져왔다. 빨리 안 오냐고 불평할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커피를 받아드는 현오의 손길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우리 둘만 속닥거려서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우와. 시작한다!”
안 그래도 작은 소파에-판매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2.5인용이라고 되어있었다-남자 셋이 끼어 앉아있자니 비좁기 그지없는데, 양쪽에서 느껴지는 만만치 않은 기운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남자 복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복이 없다고 해야 할지. 어차피 한 명은 영양가 없는 은태였으니 그리 넘치는 것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민영누나 여전히 동안이네. 전보다 더 어려진 것 같아.”
은태가 주민영을 보고 놀라워하며 말했다. 두 사람이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도 있던가, 퍼뜩 생각나는 게 없어 의아했다.
“너 민영누나랑 같이 일했었어?”
“있지. 두 번이나 같은 작품 출연했는데…….”
“왜 나는 기억이 안 나지.”
“잘 기억해봐. 나 데뷔작 다음, 다음에 찍었던 특집극 말이야.”
“아하. 그거 기억날 것 같기도…….”
은태의 설명에 겨우겨우 기억을 되살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드라마 시작했는데, 조용히 좀 합시다.”
“앗.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이 나와서 신나서 그랬어요.”
은태는 아무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감독이라고 해도 특별히 어려워하고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그 덕분에 현오가 시비를 걸어도 다툼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확실히 전보다 대사처리가 좋아졌네.”
하지만 조용히 하자고 말한 현오 역시 가만있지는 않았다. 이야기 하면서 꼭 어깨를 감싸 안을 필요는 없는데-아니 지나치게 과한 행동이었다-괜히 내 어깨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이야기 한다. 나는 그 손을 억지로 치우고 옆에 앉아있는 은태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런가. 나 저때 긴장해서 실수 많이 했는데.”
“긴장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하지만 손을 치워봤자 그의 손은 다시금 어깨 위로 올라왔고, 눈치를 봐서 다시 그 손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두 남자 모두 조용히 화면 속에 빠져 들었다. 나 역시 다른 것은 잊고 드라마에 집중하기로 했다. 복잡한 인간관계 정리도 중요했지만 당장은 드라마와 연기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드라마 중반쯤부터 은태의 전화기가 계속해서 울리더니 드라마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은태는 여기 앉아서 드라마 볼 정도로 한가한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매니저 목소리가 격양 되어 있었다.
“너 또 땡땡이야?”
“그런 거 아니야. 잠깐 시간 나서 왔더니 스케줄 변경 되었다고 그러네.”
“그럼 어서 가봐.”
“나도 꽃게탕 먹고 싶은데…….”
“나중에 해주면 되잖아.”
꽃게탕에 미련이 남아 보이는 녀석을 빨리 보내려고 한 말인데 현오의 시선이 뒤통수에 찌릿하게 박혔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 봬요.”
은태의 인사에 현오는 고개만 까닥이며 성의 없이 인사했다. 사실 다음 따위 없었으면 하는 표정이라 괜히 까칠한 말이나 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너 나 때문에 괜히 무리해서 온 거야?”
“그래. 그런데도 넌 나를 소 닭 보듯 하고…….”
“꼭 안 와도 되잖아. 전화로 하던가.”
약속도 없이 쳐들어와 곤란한 상황을 만든 불청객이긴 했지만 친구사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단지, 하필 선약이 있던 상대가 현오인 것이 신경 쓰여 나도 모르게 냉랭하게 대했다. 상황이 꼬이긴 했지만 은태 역시 나를 축하해 주려고 온 것이다.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직접 얼굴 보고 축하해 주고 싶기도 했고.”
아마 지난번 내가 했던 말이 신경이 쓰였겠지. 워낙 멋대로에 남 신경 쓰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그렇다고 친구에게 야박한 녀석은 아니다. 알면서도 나는 너무 내 입장에서만 그를 몰아세웠던 것 같다.
“알아. 고맙다.”
고맙다는 말을 건네니 나를 향한 시선에 서려 있던 희미한 원망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다행히 은태의 마음은 쉽게 풀렸다.
“참 내가 사온 케이크는 너만 먹어. 알았지?”
문을 닫고 나가기 전 은태가 내게 귓속말로 당부했다. 누구와 달리 크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역시 현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방해꾼이 사라졌네.”
은태가 가는 것을 배웅하고 채 돌아서기도 전에 등 뒤로 다가온 이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두 팔이 허리를 안았고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무게를 실어왔다.
“그러게.”
혹시 하는 얘기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얘기에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괜히 찔리는 것은 뭘까. 괜히 그의 눈치를 보고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쨌든 지금 이 사람과 내가 각별한 관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서운한 게 아니고…….”
“아니. 가서 속 시원하기만 한데?”
여전히 은태는 내게 좋아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런 눈치 없는 깜짝 방문은 달갑지 않았다. 그나마 드라마 끝남과 동시에 나가서 다행이지 한 명을 달래놓으니 한 명이 토라지고, 이런 굴레의 반복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거짓말이라도 좋네.”
등뒤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쓸쓸한 울림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돌려 나를 안은 사람을 마주보았다.
“거짓말 아니야. 이상하게 요즘은 당신이 더 편해.”
그 쓸쓸한 목소리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아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조금 기운없던 그의 눈가에 본래의 여유있는 웃음이 돌아왔다.
“그래? 하지만 너무 편하게 생각하면 곤란한데.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는 거잖아?”
“아니야. 떨릴 때도 있어.”
“언제?”
사실 굉장히 많았다. 그는 좀체 행동을 예측하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은태 역시 멋대로에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 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어쩌면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예상이 가는 걸 수도 있었지만 그와는 느낌이 달랐다.
현오는 늘 생각지도 못한 과감한 행동으로 놀랜다. 나를 싫어하는가 싶더니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당히 자신을 더 좋아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적당히 봐주는 법도 없었다. 욕심이 많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만족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어떤 말을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최현오는 그가 만드는 영화보다 더 앞을 예측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혹시 이럴 때?”
현오가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나를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코와 입술 사이의 애매한 곳을 살짝 부딪쳤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한 것인 듯, 그는 내 얼굴에 자신의 입술과 턱을 장난스럽게 부비다가 마침내 입술위에 안착했다.
“어쨌든 지금은 유은태가 아니라, 내가 더 필요하다는 거지?”
능숙하게 파고든 입술이 빈틈없이 포개져 움직이다가 떨어졌지만, 거의 입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 정도로 그의 입술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래.”
“아직 유은태를 더 좋아하고 있더라도, 말이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대답이 꼭 필요 없는 듯 다시 내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꼭 붙어있는 몸과 좀체 떨어질 줄 모르는 입술로 완벽히 겹쳐져 있던 몸을 조금씩 움직여 그는 그대로 소파 위에 내 몸과 자신의 몸을 동시에 쓰러뜨렸다. 그의 무게가 기분 좋게 가슴 위로 떨어졌다. 맞닿은 가슴 위로 기분 좋은 떨림이 스쳤다. 처음엔 그의 적극적인 스킨십이 민망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슴 떨림조차 기꺼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관계에 욕망과 감정은 어느 정도로 섞여 있을까. 그가 나를 만지고 그런 그를 서툴게 받아들이는 내게, 분명 욕망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은 그를 온전히 사랑한다 말하기 힘들었다. 분명한 것은 이제는 그런 고민을 떠나 순수하게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 옷을 벗기며 얼굴과 목덜미에 마구잡이로 키스를 했고, 나는 조금 망설이다 그의 셔츠 단추 위로 더듬더듬 손을 가져갔다. 스치는 손끝에 어렴풋 그의 욕망이 느껴져 잠시 놀랐지만, 이미 그것이 내 안에 몇 번 들어왔다 나간 것임을 기억해 내고 안심했다. 그는 옷을 벗고 드러난 맨살 위로 입술을 옮겨 초조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탁.
미지근하게 멀어지던 귓가에 희미하지만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보면 밖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나는 내 가슴 위를 쓸어내리는 그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그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뒤를 힐끔 쳐다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못 들었는데…….”
“현관 쪽에서.”
하지만 나는 그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나를 향해 뜨거운 욕망을 보내는 그의 눈빛뿐이었다.
“가만 있어. 별 거 아니니까.”
“그렇지만……읏!”
현오가 내 가슴 위에 슬쩍 이를 세웠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뻣뻣하게 튀어나온 곳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묘한 아픔에 허리를 뒤틀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숨소리가 절로 거칠어 졌고 눈을 뜨고 있어도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집요하게 그곳을 공략하면서 바지 안쪽으로 한쪽 손을 밀어 넣었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는 뻔했다. 내 손 역시 본능적으로 그의 하반신을 향해 움직였다. 온몸을 간질이는 흥분이 서서히 차올라 더는 다른 것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은 온전히 내 몸과 그의 몸이 함께 느끼고 원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을 뿐이다.
*
첫 방송 시청률은 3%였다. 케이블 시청률 치고는 굉장히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첫 방송이라 흥미로 본 사람도 있겠지 싶어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회가 지날수록 시청률은 상승해 6회가 방영중인 지금은 5%까지 올랐다. 시청률이 오르고 있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시청률에만 신경 쓸 순 없었다. 16부작인 드라마 촬영은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괜히 흥분하지 않고 촬영에 집중하려고 했다. 일부러 인터넷 반응도 보지 않고 촬영에만 집중했다. 시청률이 나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까지 듣지 않을 순 없었다.
오늘도 촬영장에서 밤을 새야 하는 신세였지만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기뻐서인지 피곤한 것도 모르겠다.
“형 메일 좀 확인해요. 팬레터 장난 아니게 많이 왔던데요.”
내 차례가 아직이라 대기하며 음악을 듣고 있는데, 졸린 얼굴로 다가온 경준이 말했다. 어딜 갔다 왔나 했더니 커피와 음료수를 사가지고 왔다. 직접 내린 뜨거운 커피가 간절했지만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봉투에 들어있는 편의점 커피로 합의보기로 한다.
“메일? 무슨 메일?”
“기획사에서 만들어준 형 메일 말이에요.”
그 설명을 듣고도 한참을 생각한 끝에야 기억해 냈다. 분명 이 기획사에 들어왔을 때 공식메일이라며 알려준 메일 주소가 있긴 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쓰는 메일도 아니었고, 누군가 메일을 보내 올 리도 없었으니 신경을 끄고 살았다. 사실 비번조차 가물가물했는데 매니저인 경준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팬레터는 무슨 스팸이겠지.”
“스팸이 아니라니까요. 지금 인터넷에 형 관련 기사 꽤 많이 떴어요. 리플도 다 좋은 얘기뿐이고……. 인터넷에 팬 카페도 만들어 졌다니까요.”
“특이한 취향인 사람들도 있네.”
“그거야 형이 잘 하니까 그렇죠. 확실히 이번 역할이 참 좋다니까요. 솔직히 남자주인공 말고 형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요.”
“반응이 나쁘지 않다니까 다행이긴 하네.”
경준은 내가 잘되니까 마냥 좋은지, 애써 담담하려는 내게 들뜬 소식만을 매일같이 전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오랜 무명생활동안의 경험 덕분인지 조금 설레긴 해도 크게 흥분되진 않았다. 잠깐 반짝하는 사람들의 관심에 자신을 망치는 배우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윤영 같은 여자였고, 사실 지윤영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이 봤다.
“이거 끝나고 잡지 인터뷰 있어요.”
“무슨 잡지?”
“패션지예요. 사진도 한두 장 찍어야 할 거라고.”
“뭔데, 사진까지?”
“화보는 아니고 작게 실리는 거래요.”
사진도 곤욕스러웠고-포스터 촬영할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사실 나보다도 사진작가가 더 힘들어 보였지만 말이다-낯선 사람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그나마 텔레비전 인터뷰가 아니라 다행인가.
“요즘 인터뷰 요청도 은근 들어오고 있어요. 아마 드라마 끝나면 더 많아 질 거예요.”
“난 인터뷰는 진짜 꽝인데.”
“확실히 그러신 것 같긴 하더라. 최대한 괜찮은 매체 것만 골라서 잡을 게요.”
“그래주면 고맙지.”
경험이 없기도 했지만 워낙 말주변이 없다보니 이런 인터뷰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그나마도 여럿이 함께하는 자리가 많아 그럭저럭 묻어가면 되었지만 단독 인터뷰자리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형, 조심해요. 괜히 기자들한테 밉보이면 안 좋아요.”
아마도 경험에서 나온 충고일 것이다. 지윤영은 기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오만하게 굴었던 모양이라 사건이 터졌을 때 더욱 악의적인 기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책잡힐 빌미는 제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연기를 하는 이유는 연예인이 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기쁘기는 했다. 결국 그 관심이 없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몇 년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심영미라고 합니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사실 걱정보다도 겁을 먹고 있었다-인터뷰 하러 온 기자는 인상 좋은 여자였다. 살짝 통통한 옆집 이웃 같은 인상의 편안한 기자 분 덕분에 어렵지 않게 말문이 열렸다.
“강신형씨 실제로 보니 더 멋있으시다. 화면발이 별로란 말은 아니구요.”
“감사합니다. 제가 아니라 역이 멋있는 거죠.”
“에이, 너무 겸손하시다. 요즘 시청자들 반응 얼마나 좋은데요. 어디서 갑자기 이런 신인배우가 나왔냐며. 그런데 신인이 아니라 데뷔 7년 차라면서요?”
“군대 가기 전에 잠깐 단역출연 한 거까지 치면 8년이라고 해야 할지도요.”
인터뷰어가 능숙하고 편한 사람이라 몇몇 곤란한 질문을 제외하고-애인은 없냐, 상대역 주민영씨 같은 스타일은 어떠냐 등등 대부분 이성에 관한 것이었다-는 어려운 질문도 없었다. 내가 아연해진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였다.
“참, 최현오 감독님 신작에 출연하신다면서요? 작품운이 참 좋으신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아닌가요. 신현아씨 상대역이라고 감독님께 직접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따져 묻지 못했지만, 어디서 잘못된 이야기를 들었거나 와전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오에게 직접 들었다고 하니,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지금 어디야?”
인터뷰를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현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 내내 그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끝나자마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전화할까 했는데 잘 됐네. 너도 이리 올래?”
“어딘데?”
“영화사 사람들하고 미팅하고 뒤풀이 왔어.”
“거기 내가 껴도 되는 거야?”
“당연히 괜찮지. 마침, 너한테 할 말도 있어.”
왜 인지 그 할 말이 뭔가 알 것 같았다. 영화사 사람들과의 모임에 부르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즐거워 보이는 싱글거리는 목소리도 그랬다. 왜 이 남자는 늘 일을 벌여놓고 통보만 해 주는 걸까. 한두 번은 어이없어서 그냥 넘어가 주었지만 매번 이런 식인 것은 싫었다. 왜 나도 모르는 내 차기작 소식을 다른 사람-그것도 초면인 기자-에게 들어야 하는 걸까.
*
현오가 영화사 사람들과 회식한다는 곳은, 마침 인터뷰 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시간이 늦은 것도 아닌 데 일찌감치 모여 있었는지 벌써 얼큰하게들 취해있었다.
“강신형씨 잘 봤어요! 최감독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가게에 얼굴을 들이밀자마자, 지난번 카페에서 현오와 같이 왔던 영화사 이사란 사람이 아는 척을 해왔다. 그날 이후 카페에서도 몇 번 마주쳤는데 아무래도 그때의 그 카페 직원이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해봅시다. 기대가 커요!”
앞으로 잘해보자니, 내가 최현오의 신작에 출연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된 것 같다. 그 얘기에 현오를 향해 슬쩍 눈을 흘겨줬지만 술에 취해서인지 일단 모르쇠인지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너무 낯선 사람들이 많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인원수는 적었다. 잘 되었다 생각했던 것도 잠시 별로 도움 되지 않는 아는 얼굴도 보였다.
“강신형 오랜만이다. 잘 나가더니 얼굴 보기 힘드네.”
영화사 사람들과의 모임이니 현오 영화에 캐스팅된 현아가 앉아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있다고 귀띔해주었다면 끝나기를 기다리던가, 아예 다른 날 보자고 했을 것이다.
“언제는 우리가 자주 봤다고 그래.”
“드라마 잘 보고 있어. 나 처음엔 너 아닌 줄 알았잖아. 어디 수술이라도 한 거야?”
칭찬인지 빈정거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현아 역시 술을 꽤 마셨는지 평소보다 업 된 상태였다. 나를 향해-물론 거짓이겠지만-저렇게 헤픈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내가 너 인줄 아냐.”
“내가 무슨 수술을 했다고 그래. 나 모태미녀 신현아야.”
“하긴 요즘엔 시술은 수술로도 안친다면서.”
“그래. 남자들도 많이 해. 연예인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관리잖아. 너도 이제 좀 신경 써.”
그녀를 보고 그리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그리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현오가 흐뭇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아니, 흐뭇해 보였던 것은 착각이었다.
“우리 배우들 사이가 이렇게 좋네. 감독인 나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인가 봐.”
질투하나. 분위기 살벌한 거 보이지도 않은지, 그는 자신은 빼놓고 대화하는 나를 향해 빈정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아와 나 사이를 질투하다니.
“앞으로 더 사이좋게 지내야죠. 앞으로 몇 개월은 계속 봐야 할 사이인데, 안 그래?”
분위기를 보니 이미 현아조차도 내가 같은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감독님. 저한테 설명할 게 있지 않으세요? 잠시 얘기 좀 하죠.”
신현아랑 둘만 얘기하는 걸 질투하니, 오붓하게 이야기할 시간을 마련해줘야겠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질투하던 사람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걸음질 치려 들었다.
“갑자기 무섭게 왜이래?”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 왜 나는 모르는 얘기들을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거냐고.”
“알았어. 나가서 설명해 줄게.”
사정모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분위기를 깰 수 없었으니 밖으로 나왔다. 그 생각엔 현오 역시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음악소리와 사람들 대화로 시끄러운 곳을 나오니 길거리가 조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는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가게 옆 골목으로 들어왔다.
“내 영화 출연하게 된 게 싫어?”
“내가 언제 출연한다고 했냐구. 어떤 역인지 어떤 내용인지 들어본 적도 없는데.”
“나야. 내 영화인데 확인할 필요가 있어?”
“내 의견은 무시한다 이거야.”
“실은 처음엔 다른 배우 캐스팅하려고 했어. 네가 했으면 했지만 네가 드라마 찍기 전이라 영화사에 말도 꺼낼 수도 없었거든.”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정말 ‘나’로 괜찮은가 싶었다. 드라마가 뜨고 조금 유명세를 얻었지만, 상대역이 신현아라면 내 쪽이 한참 떨어졌다.
“다행히 드라마 덕분에 인지도 올라서 얘기라도 꺼내 볼 수 있게 되었어. 그래도 처음엔 반대가 심해서, 일부러 인터뷰 할 기회만 있으면 네 얘길 했어. 소문이라도 내서 기정사실화 시키려고.”
“왜 그렇게까지 해서…….”
“왜긴 왜야. 내 영화에 네가 필요하니까 그렇지.”
이런저런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나를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행동이 사실은 나를 위해서였다는 게 기가 막혔고, 아무리 위한다고 해도 자기 멋대로 그랬다는 게 아무래도 답답하고 짜증이났다. 눈물이 날만큼 감격스럽기도 했다. 사적인 감정을 떠나, 순수하게 나를 필요로 하다고 말해주는 감독으로서의 그의 모습에 감동했다.
“사실 어제 영화사에서 겨우 허락 됐어. 확실해지면 말하려고 아껴두고 있었던 거라고.”
“그래도 얘기 했어야 해. 네가 잘못한 거라고.”
아마도 잘 안 돼서 내가 실망하게 될까봐 알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정은 다 설명했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알았어.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긴 해?”
“그럼, 엄청 미안하지.”
정말 미안해서 하는 말인지, 나를 달래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미안한 표정이라기엔 너무 밝았다-그래도 내 기분을 신경 써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단은 거기까지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화내지 마. 설마 안한다고 할 거야?”
“어떻게 그래. 최현오 감독님 작품인데.”
“아마 시나리오 보면 꼭 하고 싶다고 할거야.”
자신감이 아니라 사실일 것이다. 이제껏 내가 제대로 본 그의 작품은 두 개뿐이지만, 그 정도로도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연출하는 두 번째 장편영화가 누구보다 궁금했고, 그 영화에 출연하게 될 내 모습도 궁금했다.
“근데 신현아는 뭐라고 안 해?”
영화사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신현아가 순순히 같이 하겠다고 한 게 의문스러웠다. 자신 역시 억지로 캐스팅 밀고 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현오가 납득이 가는 이유를 설명했으려나.
“감독이 정한 캐스팅인데 뭘 뭐라고 해?”
“좀 전에 봐서 알겠지만 우리 사이 그다지 좋지 않아.”
“어차피 일이야. 그 여자도 프로인데 그런 감정 개입시키겠어? 설마, 신경 쓰여?”
“뭐? 누가 신경을 쓴다고 그래? 연기 한 두해 했나. 내가 아마추어도 아니고 프로인데….”
신경이 아예 안 쓰인다면 사실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배우 일 하면서 사람 봐가며 한 적도 없었고-이때까지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연기와 인간성이 별개라 성격은 별로여도 연기 호흡은 잘 맞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현아는 연기를 꽤 한다. 그것이 그녀와 다른 얼굴 젊은 여배우들과의 차이점이었다.
“은태 때문에 사이가 안 좋은 건가.”
찔리긴 했지만 그대로 인정하자니 마뜩찮은 기분이 들어서 일단은 부정했다. 은태의 연인이라서 나쁘다고 하기엔 그의 전 여자친구들과의 사이를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전까지 사귄 여자들은 그리 오래 사귀지도 않았고 자주 볼 일도 없긴 했지만 말이다.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아무튼 유은태는 늘 따라다니는구나.”
가벼운 한숨을 쉬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시 한번 그가 은태를 의식하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내가 이 여자, 아니 신현아씨랑 연인연기를 해야 한다고요?”
안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곧 들어가는 영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것을 듣고 나니 영화사에서 반대가 심할 만도 하다 싶었다. 비록 첫사랑에서 원수로 변해 여주인공에게 복수 당하는 역이라고는 해도 전반부에는 농도 높은 애정씬도 있단다. 단순히 원만한 관계가 아닌 정도라면 상관없었지만 하필이면 은태의 약혼녀인 현아라니.
“뭐야. 그 반응은? 나라서 니가 진짜 좋아서 한다고 한줄 아냐.”
“연기는 연기잖아. 프로끼리 왜 이래?”
현오가 좀 전에 내가 했던 이야기를 제 입으로 말하며, 상기시켜 주었다. 물론 연기엔 최선을 다해 집중해야겠지만, 이제껏 내가 맡은 배역 중에 가장 어려운 역이 될 것 같았다.
“맞아요. 전 프로라서 아주 열렬히 사랑해 볼 거거든요.”
신현아는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자신만만 이었다. 사실 나보다는 그녀쪽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어, 왔어? 여기야.”
대화를 나누던 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다. 또, 누가 왔는가 모두가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은태였다.
“니가 은태 불렀어?”
“응. 마침 근처라고 해서. 괜찮죠, 감독님?”
“뭐, 안 괜찮을 이유가…….”
나하고 있을 때는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더니 다른 사람 의식해서인지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괜히 내가 신경이 쓰여서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요즘 자주 뵙네요. 감독님.”
현아의 손에 이끌려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온 은태가 우리가 있는 테이블에 와 앉았다. 별로 좋은 조합은 아니었다. 신현아에 유은태 그리고 최현오라니.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지 않은 조합이었다.
“겨우 두 번 봤는데, 자주인가요?”
“그 정도면 자주 보는 거죠. 그런데, 전에도 생각했지만 얼굴이 좀 낯익어요.”
“기사사진 본 거 아냐?”
옆에서 듣고 있던 현아가 끼어들었다. 그는 얼굴이 제법 알려져 있는 감독이었다. 신인이기는 했지만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비범한 외모 때문에 꽤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태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맞아. 그렇겠지.”
“아니, 나 사실 이름만 알고 있었거든. 얼굴은 지난번에 처음 본거였어.”
딱 잘라 아니라고 말했다. 기분 탓인지 나를 바라보는 은태의 눈빛이 조금 차갑다고 느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겐 아는 체를 했지만 나에겐 인사를 하지 않았다. 딱히 인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 생각해서라면 상관없겠지만, 눈이 마주쳐도 의식적으로 피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본 것 같다니, 구닥다리 작업멘트 같네요.”
“하하. 내가 감독님 작업해서 뭐하게요. 여기 이렇게 예쁜 애인도 있는데.”
“술은 내가 마셨는데 왜 이래, 취한 사람처럼.”
“나 정신 멀쩡해. 현아 네가 예쁜 거야 대한민국 사람들 다 아는 사실인데. 안 그래요?”
그나마 전보다 나은 것은 그녀가 끼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비록 내 아군은 아니지만 분위기 나빠지지 않게 적당히 제동을 걸어주고는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게 되어 속이 좀 쓰리긴 했지만 그거야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또 시작이다 싶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술이 올라서 그런지 기분이 묘하게 울렁거렸다. 비단 눈앞에서 자신의 연인에겐 다정하면서 내게 눈길도 주지 않는 누군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만난 후론 딱히 연락도 없긴 했지만 나는 물론 녀석도 바빴을 테니 그러려니 했다.
나는 그때 그에게 서운했던 감정을 털었다. 그 역시 내게 미안한 마음을 풀고 돌아갔다고 생각했는데. 혹 무슨 일이 있었나. 그냥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맘에 걸렸다. 다른 사람도 많은 자리라 왜 그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어디가?”
화장실에 가서 세수나 하려 했지, 가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현오가 불안한 눈빛으로 손을 잡아왔다.
“화장실가. 설마 따라올 거야?”
“아니. 빨리 와.”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복도에 나와 통화중인 현아와 마주쳤다.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데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우리 지난 날은 잊고 앞으론 잘 지내보자.”
게다가 민망하게 악수까지 청했다. 청소년 드라마 한 장면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멋대로 다가와 손을 잡기까지 했다. 놀라서 손을 빼냈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영화 때문에 이럴 거 없어. 일은 일이니까.”
“영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 사실 네가 그렇게 싫은 건 아니야.”
“…….”
“거짓말 하지 말라는 표정이네. 오히려 니가 나한테 까칠하니까, 그래서 나도 똑같이 대했던 거야. 오해하지 마.”
처음 만났던 게 2년 전쯤이었나. 이미 유명한 여배우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입견은 있었지만 그래도 은태의 여자 친구이기 때문에 잘 보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본 내 첫인상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긴장이 되어 마음과 달리 표정은 딱딱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그녀를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사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좋아. 그런데 그전에 너한테 물어볼게 있는데.”
“뭐? 말해봐.”
이왕 서로 지난 일을 털고 넘어가는 거 확인하고 싶은 점이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민감한 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뺨 맞더라도 확인은 하고 싶었다.
“최 감독하고 많이 친해보여서…….”
“그런가. 별로, 내 쪽이 짝사랑이야.”
“짝사랑?”
“확실히 최감독 작품이 욕심 나긴하지. 연기력 끌어 올려줄만한 능력도 있고……. 너를 보니까 더 그래 보여. 감독님이 연출하셨다는 단편영화 봤거든. 그전까지는 네가 그렇게 연기 잘하는지 몰랐거든.”
“….”
“내가 칭찬했다고 너무 감동 먹지는 말고.”
“난 그런 의미로 물은 게 아니야. 둘이 다른 일은 없었어?”
“무슨 일?”
“……네가 잘 알잖아.”
차마 직접 보았다고 말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식으로 설명할 길은 없었다. 그녀가 알아서 눈치 채 주길 바랄 뿐, 다행히 그녀는 떠오르는 게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탄식했다.
“혹시 그걸 감독이 말했니? 되게 입 싸네.”
“어쩌다 알게 된 거야. 네 사생활에 관여하려고 하는 건 아니야. 단지 은태도 있는데 너 늘 그러고 다니는 건…….”
“풉……. 크큭. 하하하.”
갑작스럽게 터진 웃음이 잠시 흐르던 긴장을 날려 버렸다. 그 웃음소리는 누구도 아니고, 여성스러움이 몸에서 발끝까지 흐르는 저 여배우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호탕하게-솔직히 좀 깰 정도였다-웃는 모습은 처음 보기도 하거니와 그 전에 나눈 이야기가 전혀 웃기는 종류가 아니라 더욱 당황스러웠다.
“내가 감독하고 연애한 적은 있어도 내 몸 판적은 없어.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이야?”
그녀는 한참동안 웃을 대로 웃은 후에, 정색하듯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내고 나를 노려보았다. 꺼릴 것 없다는 뻔뻔한 얼굴에 여전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본 것이 있으니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은태 여자친구만 아니면 상관도 없어.”
“무슨 얘길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니야. 최감독이 나를 하도 싫다 해서 열 받았었어. 나중엔 오기로라도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생각했지. 그렇다고 정말 꼬셔서 어떻게 해보려고 한건 아냐. 그냥 좀 놀리려고 그랬던 거지.”
“그걸 내가 어떻게 믿으라고.”
“하도 비싸게 구는 게 열 받아서, 나한테 손 대면 성추행이라고 협박하려고 그랬던 거야. 그래봤자 손끝 하나 안 건드렸지만…….”
아무 일 없던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단지 그녀가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행동했던 것인지, 정말 자신의 몸을 무기로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한 일인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믿든 말든 네 자유야. 은태한테 고자질하려면 하던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녀는 내가 믿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스스로만 떳떳하다면 누가 뭐래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내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다. 다행히 뺨따귀를 날리진 않았다.
“미안. 내가 널 오해했었네.”
“미안한 줄 알아서 다행이네. 다음에 또 그딴 헛소리 하면 가만 안둔다. 너.”
괜한 걸 물었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오해 한 가지는 풀렸다. 협박같은 말을 들으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한결 가볍고, 눈앞의 여자가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졌다.
“둘이 여기서 뭐해?”
모처럼 좋은 화해 분위기를 조성중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은태였다. 안에서 사람들과 있을 때만 해도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나오니 쌩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잠깐 전화 받으러. 안쪽이 너무 시끄러웠어.”
“네 옷하고 가방 가지고 왔어. 집에 가자.”
“벌써 가자고?”
“나 너 데리러 온거야. 딱히 술 마시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흠, 난 더 마시고 싶은데~”
“너 내일 스케줄 있잖아. 차에 먼저 가있어.”
현아도 그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깨달았는지 더 조르거나 불평하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의문스런 시선을 보냈다. 얘 왜 이래? 라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 시선을 향해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잘들어가.”
“늦었는데 넌 안가? 너는 언제까지 있으려고?”
간다고 해서 잘 가라고 인사한 것뿐인데 은태는 대번 미간을 찌푸리고 공격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나? 나야 뭐 내가 알아서…….”
“저 사람하고 같이 들어가는 가보네. 아니면 같이 지내나. 벌써 둘이 동거까지 하는 사이야?”
“누구 얘기 하는 거야.”
“최현오 감독. 너 그 남자랑 사귀잖아.”
그 순간 머릿속에 무거운 돌덩어리가 연속해서 추락하는 듯 했다. 게다가 그 돌덩어리의 무게는 점점 무겁고 강렬 했다.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충격에 머릿속이 어질어질 했다. 무슨 소릴 들은 건지, 듣고도 부정하고 싶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야 할까,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단 부정부터 해야 할까. 애초에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말이 안 되었다. 혹시 현오가 직접 말을 했을까, 아니 그는 그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겉으론 까칠한 듯 굴어도 사실 누구보다 나를 배려해주는 이였다.
“저 사람 너 되게 좋아하는 거 같긴 하더라. 좋아해서 그렇게 많이 밀어주나봐.”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본 적 없는 삐뚤어진 웃음을 지으며 대놓고 빈정거렸을 때였다.
“아니면 정말 좋아서 만나는 거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 마치 화면 속에 나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다. 그가 맡았던 역할 중에는 다정한 남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래, 이렇게 불량한 표정으로 여주인공에게 모욕을 주는 드라마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려도 결국 눈앞에 펼쳐진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당연히……. 당연히 좋은 감정이 있어서 만나는 거지. 그럼 뭐겠어?”
어설프게 부정해봤자 믿어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내어 따져 묻는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점이 싫은 것인지, 그것을 숨겼기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설마 정말 다른 목적으로 사귄다고 생각을 하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냥 잘 나가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해. 난 널 이해해. 널 이용하는 그 남자가 더 나쁜 거라고 생각해.”
이해한다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은태를 보고 있자니 뜨겁게 술렁이던 가슴이 오히려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떨림은 여전했지만 놀라고 기막혀서 흔들리던 것과는 달랐다. 나는 그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 그 오해의 내용이 충격적일 뿐이었다.
“너야말로 왜 그런 소릴 해? 내가 그럼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을 다른 목적으로 만난다 이거야?”
“그래. 솔직히 갑자기 영화에 출연하고 작가까지 소개해줬다 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거라니. 정말 실망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니. 적어도 친구로서의 우리는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말은 안 해도 늘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을 알았다.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면 기꺼이 도와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알아도 그러지 않은 것은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태는 나를 겨우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성공에 눈이 멀어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그런 형편없는 쓰레기라고.
“나 그 사람 좋아해서 만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람 모함 하지 마!”
솔직히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서 그 마음을 포기하려고 그에게 기댄 것은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과 행동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늘 고마워했고, 없던 감정과 마음이 조금씩 쌓여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은태의 말도 안 되는 오해는, 겨우 만들어 가던 내 감정마저 더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은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화를 내려고 한 것은 본인인데 내가 화를 내고 있으니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느낀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데? 말이 안 되잖아. 넌 나를 좋아하는데…….”
“……뭐?”
“나도 알아. 너 나를 좋아하잖아. 그런데 그 남자를 좋아할 리가 없지. 안 그래?”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말이 나를 완전히 흔들었다. 대체 왜일까. 왜 은태가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왜 몰라야 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간단하게 말하는 걸까.
part 4. 100%
가을 바람이 제법 선선해 반팔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드라마 속 배경은 여름이었다. 솔직히 밤 촬영을 할 때는 춥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여름 끝 무렵에 촬영을 시작한 드라마는 완연한 가을이 다가온 10월,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다음 주면 드디어 마지막 방송이었다.
“에……에, 에취!”
“감기야? 괜찮아?”
그렇게 물으며 걱정스럽게 다가온 것은 민영 누나였다. 한 손엔 뜨거운 김이 오르는 커피가 있었다. 따뜻한 커피를 건네받으니 그 작은 온기라도 반가울 지경이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바람이 춥네요.”
하지만 춥다고 엄살 부리기엔 민영 누나가 입고 있는 민소매 원피스의 위엄이 장난이 아니라-그런 옷을 입고도 목소리조차 떨리지 않는 게 존경스러울 정도였다-감히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아이고, 촬영도 이번 주면 끝이네.”
“그러네요. 처음엔 언제 끝나나 싶을 정도였는데.”
“자기는 주연이 처음이라 힘들긴 했겠다. 끝나서 속 시원해? 아니면 서운해?”
“둘 다요. 그런데 서운할 틈도 없을 것 같아요. 바로 다음 작품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뒤늦게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차기작은 좀 더 천천히 신중하게 고르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몇 달을 쉬고, 몇 달에 한번 들어오는 일조차 변변치 않았던 과거를 생각하면 배부른 생각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현오의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행운에 수상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친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조차 내가 부정한 방법으로 그 기회들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너 나를 좋아하잖아?’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냐 물어야 했을까. 나를 태풍처럼 휩쓸고 간 말을 던져놓은 이는 그대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더라도 그것이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모를 리는 없었다. 단순히 친구 사이의 애정을 말함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언제,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알고 있음에도 내색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몰라야 했다. 그는 주변의 감정이나 고민 같은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행복한 주인공이었다. 그냥 그렇게 있는 편이 나았다. 나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그런데 연기를 하고 있던 것이 나만이 아니었다니.
“맞다. 나 촬영할 때 놀러가도 돼? 최현오 감독님 꼭 한번 보고 싶었거든.”
“그러세요. 놀러오세요.”
“와 진짜? 고마워. 내가 맛있는 거 잔뜩 싸들고 놀러갈게!”
“별 것도 아닌데요.”
주민영은 이미 인기 많은 배우임에도 소탈하고 겸손했다. 내 쪽이 그녀보다 인지도가 훨씬 낮음에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현아와는 여러 가지로 다른 스타일의 여배우였다. 그렇다고 현아가 싸가지 없고 오만하다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그때 대화를 나눈 후로 그녀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생각해보면 어쨌든 그녀는 일에 있어선 지각을 하거나 욕먹을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외의 것들로 인해 생긴 오해로 종종 욕을 먹고 있었지만 근거 없는 소문도 상당했다.
요즘 들어 나 역시 그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든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었나 반성하게 되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종종 망각할 때가 있었다. 그것은 현아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한 은태에 대해서도 그랬다.
“우리 촬영 끝나도 연락도 자주 하고, 떴다고 사람 변하기 있기 없기?”
“뜨긴 뭘 떴다고. 누나가 훨씬 인기 많잖아요.”
“걱정마라. 우리 신형이는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니까. 안 그럴 거야. 그렇지?”
어느새 다가온 피디가 주민영의 농담을 기분 좋게 받아 넘겼다. 당연히 그래서도 안 되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더욱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인기로 인해 하루아침에 환경이 바뀐 누군가에게 들어보니 그게 마음대로 안 될 때도 있는 모양이었다.
인기가 많고 찾는 곳이 많아지면 연락을 자주 하고 싶고 자주 만나고 싶어도 시간을 내기 힘들어 진다. 한두 번은 바쁘다는 말에 괜찮다 대답해주지만 그런 일이 자주 생기면 일부러 그런게 아닌가 의심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실망하고 돌아서는 얄팍한 관계엔 미련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 씁쓸해 지기도 할 것이다. 은태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은태는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근데 신형이 많이 힘든가봐. 처음보다 살이 많이 빠졌어.”
“네? 아, 그런가요?”
“응. 아니면 다음 작품 들어가려고 미리 다이어트 중이야?”
주민영에게도 어디 아픈데 없냐는 이야길 들었는데 피디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매니저 경준도 밥 좀 챙겨먹으라고 잔소리 하면서 걱정을 해 주긴 했다.
“형, 보약이라도 좀 지어 먹고 그래요. 팬들이 막판이라 엄청 빡세게 돌리나 보다고 얼굴 까칠하다잖아요.”
솔직히 몸무게 재본 지가 오래되어서-딱히 변화가 일어나는 몸무게도 아니었다, 아무리 과식을 해도 비슷한 수준에서 머물렀다-살이 빠진 것은 모르겠지만 주변사람들이 이렇게 걱정할 정도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래?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불면증이라도 있으세요?”
확실히 잠도 못자고 먹지 못하기도 했다. 촬영이 막바지라 일정이 빡빡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사전제작하고 시작한 드라마라 다른 드라마 일정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휴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김없이 떠오르는 누군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
확실히 사람들의 걱정대로 내 몸과 마음은 여러 가지로 지쳐 있었다. 모처럼 머리를 식히려고 매니저를 물리고 택시를 탔다. 민영 누나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어서 오랜만에 대한 형의 카페에 들르기로 했다. 그런 것을 의식할 사람도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일로 만나는 사람이 아닌 관계없는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폐가 될까봐 전화도 안하는 모양이고, 가끔 안부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형이 내려주는 커피를 먹고 싶기도 했다. 그 밑에서 오래 배워 어느 정도 능숙해 지긴 했지만 형만큼은 아니었다.
-뭐? 가게 앞이라고. 아이고, 왜 하필이면 오늘이냐.
한동안 좋은 일만 생겨서 내가 기본적으로 운 없는 스타일임을 깜빡하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 않으면 꼭 비가 온다거나, 흰옷을 입으면 음식을 흘린다거나 하는 사소한 불운 같은 것들이 내게 늘 따라다녔다.
마음먹고 찾아왔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다소 허무하긴 했지만, ‘내부수리 중’ 이라는 문구가 있어서 설마 못 온 사이에 가게가 망했는가 싶었는데, 그나마 그런 것은 아니라 천만 다행이었다.
“그러게요. 그런데 왜 갑자기 수리중이에요?”
-장사가 괜찮아서 확장 좀 하려고, 운 좋게 마침 옆 가게가 비었더라고.
“그래요? 잘 됐네요.”
-너 일부러 시간 내서 들렀을 텐데, 서운해서 어쩌냐?
“안 묻고 온 제 잘못이죠. 다음에 봐요.”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약속도 정하지 않고 온 내 잘못이었다. 대한 형이 미안해 하니 괜히 내가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집에 일찍 들어가서 쉴걸 그랬나. 잊었던 피로가 갑자기 몰려들어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쉰다고 풀리는 피로는 아니었다. 요즘은 집에서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이 찐득한 피로는 아무래도 마음의 피로인 것 같다. 그 원인은 잘 알고 있지만 막상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찾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겁고 걱정스러운 한숨부터 흘렀다.
“한창 잘 나가는 배우가 웬 한숨이야?”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느껴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달리 위협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워낙 넋을 놓고 있던 지라 깜짝 놀랐던 것이다.
“깜짝이야. 여긴 어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내 작업실 근처인 거 잊었어?”
“그래도 타이밍이 너무 기막혀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들켰네. 사실 나 너 미행 중이었거든.”
평소라면 반가웠을 사람이지만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 때문인지, 웃으며 반기는 것이 어려웠다. 아무래도 그와 함께 있으면 감정을 숨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거기 내부수리 중이야. 다음 주에 문 열거래.”
“응. 전화해서 확인했어.”
“모르고 왔나봐? 사장님하고 친한 거 아니었어?”
현오도 아는 사실을 내가 몰랐다니-물론 그는 근처에 작업실이 있어서 자주 들락거렸겠지만-내가 연락만 자주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요즘엔 연락을 안했더니.”
“뭐야, 너 떴다고 이러기냐? 친한 형님 아니었어?”
“그러게. 너무 나 아쉬울 때만 찾았었네.”
“농담인데, 왜 그리 진지해?”
농담이란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작은 농담에도 마음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솔직히 현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내가 고민하는 이유를 안다면 그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지금껏 그는 내가 은태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주었지만, 그 끝이 어디일지 알 수 없었다.
“너 표정이 영 별로다. 어디 아파?”
“아니, 좀 졸려서 그런가봐.”
생각을 할수록 머릿속은 복잡하게 엉켰고 이내 하얗게 물들어 갔다. 게다가 몸 속의 힘이 갑자기 쑥 빠져 나가는 것 같다.
“나 이만 가볼게.”
“어이, 여기까지 와서 가버리는 거야?”
“어차피 드라마 끝나면 자주 볼 텐데 뭐. 일하러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거야. 매니저 기다려서 가 봐야해.”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사실 오늘 촬영분 모두 끝냈고 모레까진 특별한 스케줄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손길을 뿌리친 것은 지금의 나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럼 내가 데려다 줄게.”
“괜찮아. 택시 타고 가면…….”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는지-아쉽기도 했을 것이고-차로 데려다 준다는 것을 거절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돌아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멋대로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머릿속도 함께 꼬이는 듯 했다.
“왜 그래. 너. 어지러워?”
그가 다가와 부축했다. 그 손에 기댄 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좀체 기운이 돌아오지 않았다.
“신형아!”
눈을 감으면 기운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지만, 나는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이런 게 졸도한다는 감각이구나. 연기는 해봤지만 실생활에서 접해본 적 없는 것을 이제야 경험하며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
“형 괜찮아요? 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눈을 떠보니 매니저 경준이 세상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울먹거리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당연히 알지. 기억상실도 아닌데….”
“연락받고 얼마나 놀랬는데요.”
“나도 놀랐어. 과로에 영양실조라니, 지금이 80년대야?”
옆에 있던 현오가 기막혀서 중얼거리는 말에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얼굴이며 몸에 아무런 감각도 없었는데 이제는 살만하긴 한가보다.
의사가 와서 괜찮다고 이야기 한 후에도 경준은 한동안 우울한 얼굴이다가 회사에 연락을 해야겠다며 나갔다.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이 축 쳐진 것이, 괜히 몸 관리 못해서 매니저한테 죄책감만 지어준 것 같아 미안했다.
“미안해. 많이 놀랐어?”
“사과할 필요는 없고, 잘 챙겨 먹어. 쉴 때는 좀 쉬고.”
나도 내 자신의 몸 상태가 이정도로 바닥친줄 몰랐다. 가을에 여름 옷 입고 밤새 촬영을 해서 감기가 오는가 싶었을 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렇게 쓰러지는 꼴을 보이다니. 며칠 잠 못 자고 식사를 거르긴 했지만 젊을 때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든 탓인가, 아니면 마음의 고민은 몸에도 전염이 되는 걸까.
“충분히 쉬고 있어. 걱정 마.”
“그런데 왜 이래. 혹시 회사에서 다이어트 시켜?”
“아니야. 운동해서 몸 좀 키워보라고는 하는데 다이어트 까지는…….”
솔직히 현오가 황당해 하는 것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이해가 갔다. 딱히 무리 할 일도 없는데, 이렇게 되다니 내가 생각해도 기막히긴 했다.
“아까 물어보니. 네 매니저가 오늘은 더 스케줄 없다더라.”
아무래도 현오는 내가 눈앞에서 쓰러진 것 외에 황당하고 이해가지 않는 점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엔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싶었는데, 쓰러지기 전 나눴던 대화가 퍼뜩 떠올랐다. 카페 앞에서 마주쳐놓고 일이 있어서 가 봐야겠다고 도망쳤던 것이.
“아……. 그래. 내, 내가 뭔가 착각했었나봐.”
“너 왜 나랑 눈을 안 마주쳐?”
“내가 뭘…….”
“너 카페 앞에서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고, 뭔데 그래?”
의식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니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것 같긴 했다. 집요하게 따라오는 눈빛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하며 사정하듯 말했다.
“나 환자야, 좀 봐주라.”
좀 치사하긴 하지만 환자임을 내세우니 그제야 물러나는 듯, 차갑게 굳히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알았어. 상태가 나아지면 심문할게.”
“내가 무슨 범죄자야?”
“뭔가 저지른 사람처럼 수상해서 그렇지. 너 어제 내 전화도 안 받았잖아.”
“촬영 중 이었어.”
“그럼 그제는?”
그를 만나고 뒷걸음치며 도망친 것은 심란한 마음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이기도 했지만 그 이유도 있었다. 이상하게 그의 전화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요 며칠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코 그가 싫어졌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명확한 이유를 말하라면 솔직히 어떤 핑계를 대어야 할지 자신 없었다.
“나 집에 가고 싶어.”
“좀만 기다려. 이거 다 맞고 가야 한대.”
결국 나는 또 내가 아픈 것을 방패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현오는 환자니까 봐준다는 그 말대로 더 이상 추궁하진 않았지만 시선을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니저를 돌려보내고 현오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사를 맞고 와서인지 한결 상태가 나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속을 무겁게 하는 기억은 남아있었지만, 어차피 혼자 끙끙거린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를 보고 직접 물어야겠지만 아직은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나 돌아갈까.”
“어? 아니, 가려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막 침대에 누웠는데-그냥 앉아 있으려고 했지만 현오가 누워있으라고 강요했다-현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은 것 같아서 그러지.”
“싫다니, 그런 거 아니야. 오랜만에 보니까 좋은데.”
그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는데 막상 익숙한 손의 온기와 목소리가 결을 맴도니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익숙하다, 라는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전화도 피하고, 만나니 도망치려고 했으면서, 뭔 소리야?”
“도망치려던 건 아니야. 그냥 좀…….”
“뭐야, 뭐가 문젠데……. 말해봐.”
그의 입장에서는 나의 변덕이 이해가 안 될 만도 했다.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주긴 했지만, 정작 말 할 수 없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었다.
“일도 잘 되고 있고, 나랑 영화 찍으면 더 잘 나갈 일만 남았는데. 뭐가 문제야?”
“…….”
“혹시 유은태 때문이야?”
말을 하지 않아도 그는 제법 정확히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생각해보니 너 지난번에 유은태 만난 이후로 이상해.”
역시 엄청 예리하다니까. 사람 마음을 읽는 것은 타고난 능력일까, 단순히 집중력 차이인 걸까. 겪을 때마다 놀랍고 의아했는데 이정도가 되다보니 이젠 무서울 지경이었다.
“은태가 좀 이상해.”
“걘 원래 이상한 것 같던데, 뭘. 예전부터 좀 별로였어. 늘 실실거리면서 웃고 다니는 게 나사 빠진 인간 같았지.”
현오의 은태에 대한 악평에 씁쓸하게 웃었다. 어느 정도 맞긴 했지만 단순한 사고를 친 거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았다. 그가 답답해 하니 모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일러주긴 해야겠다 싶었다. 확실히 그가 알아야 할 내용도 있었으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뭔가, 본 것 같아.”
“뭐, 너희 집에서 우리 키스 하는 거 봤다고 해?”
“그걸 어떻게 알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돌아온 답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혹시 우리가 얘기하는 걸 듣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 날, 은태가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나와 달리 그는 분명히 그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거 유은태가 보면 안 되는 거였어? 그게 그렇게 충격 받아서 쓰러질 정도의 일이야?”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우리 관계를 들켜서, 혹시 네가 남자 좋아하는 걸 알고 싫어하거나 도망칠까봐. 그렇게 겁이 나?”
“아니라니까, 나도 말 좀 하자.”
“그럼 뭔데? 네 태도는 딱 그거잖아.”
확실히 여기서 말을 끊으면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현오와 나의 관계를 틀린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내가 정말 놀라고 충격 받은 것은 다른 말 때문이었다.
“내가 조금은 좋아졌다며, 그럼 내 기분도 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냐?”
“현오야…….”
“참겠다고, 기다리겠다고 한건 나지만 그래도 좀 적당히 해!”
그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힘을 주어 걸으며 그대로 현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묵직한 문소리와 함께 그의 마음도 닫혀 버린 듯 했다. 쫓아가야 하는가 싶다가 쫓아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포기했다.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그에게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아예 가버린 것이 아니었다. 30분쯤 후 쭈뼛거리는 얼굴로 돌아온 것이다.
“그냥 갔는 줄 알았어.”
“환자를 내버려두고 어딜가. 죽 사왔어.”
그렇게 말하며 식탁 위에 주섬주섬 사온 것을 펼쳐 놓았다. 손길이 거친 것으로 보아 여전히 불만은 남아있는 듯 했지만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먹자. 먹고 약 먹어야지.”
좀체 다가가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나를 향해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짓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여전히 입안이 까칠하고 뭘 넘길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를 생각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겠다 싶었다.
현오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숟가락으로 죽을 떠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먹고 뜨거움에 몸을 움칠거리니 그 다음부터 후후 불어서 식힌 후에 먹여 주었다.
“그냥, 내가 먹을게. 이젠 괜찮아.”
이런 상황이라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싶었지만 먹여주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어디가 다쳐서 거동을 하기 힘든 상태도 아니었으니까.
“나 아직 열 받아 있으니까 건드리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해.”
“알았어.”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차가운 기세 탓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숟가락으로 퍼주는 것을 순순히 받아 먹었다.
“저, 나 정말 그런 거 아냐. 다른 것 때문이야.”
죽도 잘 먹었고, 더 이상 화를 내진 않았지만 여전히 냉랭한 얼굴이 신경이 쓰여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변명할 필요 없어. 내가 너무 내 감정만 생각하고 한 말이니까. 솔직히 네가 충격 받을 만도 하지. 오랫동안 숨기려고 애썼을 텐데, 그걸 들켰으니까.”
“이해해줘서 고마워. 사실 많이 놀랐긴 했거든.”
의외로 그는 화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오히려 내 마음을 이해한다고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그때 유은태가 본 거 알았지만 이럴 것 같아서 말 안했어. 나는 솔직히 유은태한테 우리가 이런 사이라고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
“……왜?”
“그냥 좀 놀래주기라도 하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모르는 얼굴로 생글거리는 게 기분 나쁘잖아. 사람 마음도 모르고.”
알았으면서도 귀띔해주지 않은 것이 잠시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배려해서 한 행동이란 생각에 어리석은 원망을 지웠다. 게다가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종종 떠올린 생각과 비슷한 것이었다.
“고마워.”
“뭐가?”
“나도 종종 비슷한 생각 했거든. 물론 그게 그 애 잘못은 아니지만…….”
하지만 사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좋아했던 것도, 그럼에도 친구인 척 그의 곁에서 연극을 하고 있던 것도.
“정말 모르는 거라고 생각해?”
“네 마음을 한 번도 눈치 챈 적 없다고 생각 하냐고. 그렇게 오랫동안 옆에서 좋아했으면 말을 안 해도 알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확실히 그건 아니었다. 단지 눈치 빠른 그가 내놓은 가설 중 하나 일 뿐. 하지만 나는 일단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몰라.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게다가 너하고 달리 걔는 엄청 둔해. 관심 있는 거 외엔 문외한라고.”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알던 은태가, 은태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은태에게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듯 했다.
은태는 절대 알지 못한다고, 설령 대놓고 말을 해도 모를 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눈앞에서 확인한 것이다.
“너 그거 알아? 너 연기는 잘해도 거짓말은 못해.”
“……내가, 그래?”
“엄청 표시나. 지금 나한테 뭐 숨기고 있는 것도 다 보인다고.”
나는 이제 부정할 마음도 없었다. 차라리 솔직히 이야기 하고 양해를 구하는 편이 났겠다 싶었다.
“거짓말 한건 아냐. 다 말할 수 없을 뿐이지. 지금은 말 못하지만……. 정리가 되면 얘기 해줄게.”
말 할 수 없는 이유를 솔직히 이야기 하자, 그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어쩌지 못하고 남아 있는 썰렁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분명 내가 끌어안으려고 했던 것인데 오히려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알았어. 기다릴게. 근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가 진심을 담아 전해오는 체온 때문인지 창백하게 질려 있던 몸이 다시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이제 너를 놔줄게.”
재희는 좋아하는 여자의 손을 스스로 놓았다. 자신에게 오겠다고 찾아온 그녀였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로 모른 척 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을 첫 번째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두 번째나 세 번째쯤은 되니까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보다는 나와 있는 편이 행복할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재희는 결국 사랑하는 친구를 놓아주기로 결심한다.
“재희야.”
“네가 정말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도록 놔줄게.”
“너 그게 진심이야? 정말 그러고 싶어?”
오히려 그런 재희의 단호함 앞에 당황하는 것은 수아였다. 수아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수아는 재희가 자신의 손을 놓지 않기를 바랐다.
“대신 네가 돌아왔을 때 네가 아는 나는 없을 거야.”
수아는 자신을 밀어내는 재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 손을 놓으면 완전히 달라져 있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보는 재희는 잃게 된다.
“난 완전히 달라져 있을 거야. 더 이상 네가 첫 번째도 아니고, 너만 바라보고 있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재희는 수아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하고 있다. 사실은 망설이고 떠나고 싶어하는 그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대신 그녀의 등을 밀어준다. 그리고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접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꼭 돌아와줘.”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지, 그 마음을 깨끗이 지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지 알 순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로 행복했으면 해서.
“컷.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씬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조금 전까지 사랑했던 여자를 눈물 맺힌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에서 먼저 빠져나온 주민영이 좀 전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얼굴을 닦아 내며 웃기 전까지.
“우리 재희 진짜 수고했어.”
“네. 누나도 고생했어요.”
머릿속에서, 그리고 실제로 몇 번을 연습했던 대사였지만 막상 상대배우가 있는 상태에선 다른 느낌이었다. 큐 싸인이 들어올때마다 몇 번이고 사랑했던 여자를 보내는 장면, 그것이 내 마지막 촬영분이었다.
몇 달을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것이 쑹덩 빠져 나가는 듯 했다. 잘 해냈다는 생각에 후련하기도 했지만 사실 첫 주연작에 애정을 가지고 열중했던 역이라 상실감이 더 컸다. 다른 배우들은 이런 기분을 매번 느끼는 걸까. 울렁거리는 마음이 좀체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다시 눈물 날 것 같다. 얘.”
여러 번 경험했다고 능숙해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 촬영분이 많이 남은 주민영도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누나는 아직 몇 씬 더 남아 있잖아요?”
“그래도 우리 재희랑은 끝이잖아. 재희 보고 싶어서 어째.”
촬영하는 동안 종종 극중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곤 했는데, 이젠 이렇게 불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녀의 말대로 내가 연기했던 ‘정재희’가 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비록 이뤄지지 못한 외사랑이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린 강한 사람.
“실은 저도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나에겐 다른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차 새로운 인물에 몰입하는 기쁨을 느끼면 이 서운함은 쉽게 잊혀 질 것 같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런 날 한 잔 해야 하는데.”
여러 스텝과 인사한 끝에 마지막으로 피디와 인사를 나눴다. 윤작가와 함께 나를 인정해주고 믿어줬던 그에게 여러 가지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종방연 때 보면 되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에이, 내가 더 고맙지. 잘 따라와 줬잖아.”
아쉽긴 해도 다른 곳에서, 또 좋은 인연으로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괜히 더 오래 있다간 청승맞게 눈물이나 흘릴 것 같아서-여자가 그러면 예뻐 보이겠지만 다 큰 사내놈이 그러면 징그럽지 않을까-애써 서운한 마음을 털고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비오네.”
“저녁때부터 왔는데 아직도 내리네요.”
안 그래도 마음이 썰렁하고 쓸쓸한데 밖으로 나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비가 내리면 시원한 게 아니라 서늘한 기운이 들었다. 이러다 눈으로 변하는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났다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빠른 시간에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촬영 축하? 아니 위로해줘야 하는 건가.’
타이밍 좋게 현오에게 메시지가 왔다. 촬영하는 거야 대충 알고 있겠지만 시간은 말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센스있게 맞췄는지 모르겠다. 답장을 하려다 차라리 전화를 할까싶어 통화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잠잠하던 핸드폰이 울렸다. 몇 년째 바꾸지 않던 벨소리는 최근 내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주제가로 바꿨다.
“안 받으세요?”
참 좋은 노래였지만 그 노래를 감상하려고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 때문에 전화를 받기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 전화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여보세요.”
의외로 떨리거나 마음이 불안하진 않았다. 사실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일단은 얼마 안 남은 드라마 촬영에 집중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괜히 거기에 매달려 있다간 잘 해온 드라마 마지막을 망칠 것 같았다. 그렇게 쓰러진 후에 오히려 마음은 좀 진정되었다.
-지금 뭐해? 회사에 물어봤더니 오늘 촬영마지막이라던데.
“응. 지금 막 끝났어.”
- 잠깐 볼래? 술이나 한잔 하자.
드디어,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은태와 편하게 대화할 만한 장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디서 만나나 고민을 했는데, 지난번 학교 근처 주점으로 오란다. 확실히 그곳은 둘이 조용히 이야기 나누기 좋을 법했다.
“어서와. 촬영하느라 수고했어.”
늘 기다리는 것은 내 몫이었는데 오늘은 은태가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테이블 위를 보니 이미 몇 잔 걸친 모양이었다. 여러 가지로 적응되지 않는 상황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너는 오늘 스케줄 없어?”
“광고 촬영 한건 있었는데 막 끝나고 오는 길이야.”
“그렇구나. 근데 왜 벌써 시작했어. 같이 마셔야지.”
혼자 술을 따르려는 것을 빼앗아 따라주면서 말했다. 은태는 그런 나를 힐끔 보며 웃을 뿐, 그냥 하는 대로 지켜볼 뿐이었다. 화를 내거나 까칠한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걸리는 표정이었다. 비 내리는 날씨처럼 왠지 모르게 쳐져 있었다.
“이모. 여기 술잔 하나만 주세요.”
이미 시켜 놓은 게 있어서 주문을 할 필요가 없어 보여 술잔만 하나 받았다. 술잔이 테이블 위에 놓이기 무섭게 은태가 술을 따랐다. 술을 따르는 그의 눈빛이 이미 무언가 넘치도록 차올라 있음이 보였다.
“나한테 물어볼 거 있지 않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의 말대로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은 내 쪽이 맞긴 했다. 하지만 그것을 은태가 또 되묻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든가. 왜 알았는데 말을 안 했냐든가.”
“내가 궁금해 할 거라는 거 알면서 왜 그동안 아무 말도 안했어?”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내내 고민했다. 그러나 그 고민하고 신중히 고른 말들은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의 마음을 더욱 알 수 없었다. 만나서 이야기 하면 뭔가 확실해질 거라고 바랐었는데 오히려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솔직히 나 요즘 컨디션별로야. 그때 촬영장에서 싸운 것 때문에 중도 하차하게 되었고…….”
“몰랐어. 계속 바쁜 줄 알았으니까.”
“해외 팬미팅이나 광고 같은 거 찍고 있었어. 내가 원하는 건 연기를 하는 건데,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나 부르고…….”
뜻밖에도 그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그때 했던 말에 대한 설명이 아닌 자신의 근황이었다. 조금 놀라운 소식도 있었지만 가끔 듣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은태는 연기가 아닌 다른 것을 요구하는 환경에 늘 불만이었으니까. 영화 하차한 이야기는 좀 안되었다 싶긴 했지만 본인이 저지른 일이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은태는 평소처럼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지만 그의 말들은 귀로 들어오는 즉시 바로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듯 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랬던 모양이다. 어떤 감정도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이었다.
“일도 잘 안 풀리는데 현아는 계속해서 결혼을 미뤄야겠다고 하지. 갑자기 모든 일이 꼬여 버렸어.”
“그래. 힘들었겠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나조차 좀 놀랐다. 테이블 바닥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은태도 힐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잠시 흔들리는 듯 보였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너는 좋아 보이더라. 일도 계속 잘 되고 그 사람하고도 잘 지내는 것 같더라.”
예전이라면 나는 그의 이야기에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하며 함께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왜 인지 완전히 낯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는 충분히 잘 하고 있잖아. 또 좋은 시나리오도 들어올 테고, 뭐가 문제야?”
“나한테 제일 문제는 너야.”
“뭐?”
“너 요즘 너무 변했어. 늘 네가 먼저 나한테 연락하고, 말 안 해도 챙겨주고 그랬는데.”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걸까. 내가 변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은태를 보고 나는 아연하게 질려 있었다.
“나 네가 변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 솔직히 힘들었어. 대체 왜, 뭣 때문에 변했는지 몰라서 괴로웠지.”
내가 아는 많은 것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렇게 다른 생각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네가 연락해주길 기다렸어. 근데 너 연락이 없더라.”
“왜 꼭 내가 연락을 해야 하는데……?”
당연한 듯 내게 왜 연락을 안했냐고 원망하는 말에 기가 막혔다. 나는 그가 던져놓고 가버린 말 때문에 선고받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난 며칠을 힘겹게 버텨왔다. 그의 진심을 알 수 없어 괴로웠고, 그 괴로움에 잠도 들지 못 하고 제대로 식사도 못해 쓰러지는 못난 꼴까지 보였다.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그를 영원히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어나지도 않은 상실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시험하듯 문제를 던져 놓고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길 기다린 모양이다.
“너 너무 변했어. 내가 아는 신형이 같지가 않아. 너 이제 나를 안 좋아하는 거야? 나는 너한테 이제 중요한 사람이 아닌 거야?”
그는 왜 나의 변화가 힘들다고 말하는 걸까. 내 주변에는 나의 변화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좋은 모습으로 변했다고, 축하한다고 기꺼이 함께 기뻐하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가장 가깝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그런 내가 싫다고 한다. 나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 사람 좋아하지 마.”
“좋아하지 말라니, 누구를……?”
현오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내 머릿속은 과부화로 인해 생각을 하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네가 나를 원한다면……. 그래. 섹스도 할 수 있어. 그런 게 필요했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니?”
“……야. 유은태!”
하지만 과부하 걸린 머릿속을 뜨겁게 만들만큼 그는 나를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기만하고 있었다.
내 마음을 들키면 어떻게 되려나, 종종 상상한 적은 있었다. 늘 바랐던 것은 ‘사실은 나도 널 좋아한다.’며 나를 안아주는 그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그는 늘 여자를 좋아했고, 나를 그런 감정으로 본 적이 없었다. 최악은 나를 향해 경멸을 담은 시선을 보내며 욕을 하는 은태였다. 은태는 간혹 꿈속에 나타나 나를 향해 더럽고 징그럽다고 욕하며 떠나곤 했다. 혹 조금 놀라긴 하지만 본래의 성격대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더라도 여전히 나를 친구로 생각해 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마주하는 그의 대답은 생각지도 못한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제대로 고백조차 못하고 이런 식으로 실연을 당해야 한다니.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현아랑 헤어지는 건 못해. 그렇지만 너에게도 충분히 신경 쓸게. 그러면 되는 거지?”
“닥쳐. 이 미친새끼야. 너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이따위 소릴 할 수가 있어?”
“그걸로 안 되는 거야. 현아랑도 헤어지길 바래?”
“내가 원한 건 네 마음이었지, 그런 게 아니라고. 그리고 네 마음을 억지로 구걸할 생각도 없었어. 너를 좋아하고, 너도 나를 좋아하기를 오랫동안 바랐지만 그래도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으니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모습을 보고도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어. 어차피 그건 내가 관여 할 수 없는 문제니까. 너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서 어떻게 내 맘을 이렇게 몰라?”
그에게 내 감정이란 건 어린애가 때를 쓰는 것보다 못한 걸까.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었다. 필요한 걸 쥐어주고 해소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어쨌든 난 네가 변하는 게 싫어. 그 사람하고 있으면서 더 변할 거고…….”
불같이 화를 내며 쏟아내는 이야기에 은태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넌 내가 잘나가는 게 그렇게 싫어? 영원히 다른 사람 인생의 조연으로 살면서, 누군가의 특별한 사람 같은 건 바라지도 말라 이거야?”
가장 기가 막히는 것은 그가 내가 배우로 인정받게 되고, 전과 다른 대우를 받게 된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설마 정말로 잘된 것이 배 아프거나 질투가 나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유은태였다.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유명한 배우이며 스타였다.
이미 나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은태가 왜 내 작은 성공을 순수하게 기뻐하지 않는 걸까. 왜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내가 변했다고 말하는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함께 꿈을 키우고 같은 대학에 진학하며 함께였던 사람이 내 꿈을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 취급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그를 보고 꿈을 키운 나에게.
“너 일부러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내가 널 좋아하는 게 너무 너무 끔찍해서,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 이러니?”
“신형아.”
“그렇다면 잘 했네. 나 지금 후회하는 중이야. 나 왜 너를 좋아했을까, 왜 너를 그토록 오랫동안 혼자서 사랑했을까.”
내 마음이 결코 보답 받을 수 없는 거라고 해도, 그를 사랑하고 생각한 시간과 모든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후회하는 일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입으로 후회를 말하고 있었다.
“마음 정리하게 해줘서 고맙다.”
나는 미련도 슬픔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위해 어떤 감정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은태가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났지만 나는 나를 따라오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돌아섰다.
“따라 오지 마. 다시는 연락하지도 말고…….”
우리 둘의 추억의 장소에 최악의 기억을 남기고 돌아가는 길, 여전히 빗줄기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빗속으로 뛰어 들었다. 차가운 비가 뜨겁게 일렁거리는 가슴을 잠재워주기를 바라면서.
*
어떤 정신으로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익숙한 오피스텔 건물 앞에 다다랐을 때에야 내가 현오의 집 앞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걷고 또 걷다 지쳐 택시를 탔다. 행선지를 묻는 택시 기사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이곳을 이야기 했던 모양이다.
“뭐야. 왜 이렇게 비를 잔뜩…….”
문을 열어준 현오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 쫄딱 젖은 꼴을 바라보았다. 잔뜩 젖은 채로 택시를 탔을 때도 택시기사가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던 것 같다. 좀 다른 것은 그는 이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내 차가운 손을 잡아끌었다는 것이다.
“일단 들어와. 감기 걸리겠네.”
그 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무방비한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잔뜩 젖은 내가 그를 끌어안았다 가는 멀쩡한 그의 옷까지 축축하게 젖을 게 뻔했지만 그런 것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 나에겐 손안에 들어오는 누군가의 온기가 간절했다. 아무나가 아니라, 바로 이 남자의 온기. 나를 바라보는 진지하고 따뜻한 눈빛과 솔직한 감정.
“나 좀 안아줘.”
“지금 안아주고 있잖아.”
그는 놀라지도 않고 두 팔을 뻗어 내 몸을 마주 안아왔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보다 더 깊고, 뜨거운 것이었다. 숨 막힐 정도로 깊고 뜨거워서 다른 생각은 절대 끼어들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섹스하자.”
“뭐야. 갑자기 쳐들어 와서는 다짜고짜 유혹하는 거야?”
“…….”
“혹시 또 어디 아픈 거야?”
그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해 걱정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나는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힘에 겨웠다. 조금쯤 이상해져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도 그는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하자. 하고 싶단 말이야.”
나는 그의 의아한 시선을 외면하고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내 몸을 무작정 기대려 했다. 그제야 그는 내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고민하는 듯한 손길이 내 어깨를 맴돌다가 돌아왔다.
“알았어. 근데 할 때 하더라도, 몸 좀 녹이자. 너 장난 아니게 떨고 있잖아.”
“…….”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나와.”
“필요 없어.”
“왜 화풀이로 섹스하려는 건데?”
그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그럼에도 단호할 때는 단호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두 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자신에게서 떼어 놓았다. 나는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아니, 너 지금 엄청 화나 있어. 그리고 슬퍼 보여.”
현오의 손이 다가와 두 뺨을 부드럽게 감싸 도망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손을 떨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봤자 딱히 도망칠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는 그를 보고 싶어서 이곳까지 왔다.
“이건 비야, 운거야?”
“둘다……. 인가.”
“누구야? 누가 우리 신형이를 울렸어?”
“유은태.”
늘 그 이름을 말할 때 망설였는데 오늘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왔다.
“유은태 만났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어쩌면 나는 그 말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고자질이라기엔 우습지만, 속에 들어있는 말을 그에게 털어 놓고 싶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새끼가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 너를 좋아하지 말래. 계속 자기를 좋아 해달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나도 그랬어. 근데 이유가 더 가관이야. 내가 변하는 게 싫다고 그러네. 그냥 예전처럼 지냈으면 좋겠대. 심지어 내가 배우로 잘나가는 것도 싫대. 그것 때문에 내가 변한 것 같다면서, 하하…….”
전후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오는 은태가 나에게 했던 말을 다 듣지 못했다. 우리가 사귀는 것을 들켰다고는 말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조차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는 이야기에 혹 오해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말 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하…. 흑….”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공허한 웃음은 흉하게 일그러져 울음으로 바뀌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굳이 참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조금 안심되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왜곡되거나 굴절된 시선 없이, 아프고 슬프고 힘이 들어서 우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현오의 품에 기대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속이 시원해 졌다 싶을 정도로 한참이었다. 내 눈물이 머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나를 깨우듯 흔들었다.
“다 울었으면, 씻고 나와.”
억울한 마음을 그에게 토해내고, 마음껏 울어버린 후에야 뒤늦게 젖은 몸에 한기가 들었다. 울어서 잠긴 목을 열기 두려워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귀가 열렸다. 뿌옇게 가려져 있던 머릿속도 선명하게 돌아와 있었다. 현오는 기다렸다는 듯 내 앞에 인스턴트 커피를 끓여 내어주었다. 흔한 믹스 커피인데 유난히 달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달고 따뜻한 기분과 반대로 가슴 속엔 한없이 쓰라린 상처가 움푹 패였다. 가슴을 할퀴고 간 아픔은 이제 지났지만 쉽게 잊히지가 않았다.
“난 왜 그런 새끼를 좋아한 걸까.”
혼잣말인지, 현오에게 하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이야기를 기다리는 현오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쨌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까끌한 입을 열어 입에 올린 첫말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얘기 하지 마.”
“왜, 너도 은태 싫어하잖아?”
“당연히 그 새끼는 싫지. 근데, 나는 은태를 좋아한 너를 싫어하지 말라는 말이야.”
이것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일까. 현오는 은태가 싫어도 은태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존중해 주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당연한 듯 때를 쓴다.
그래도 나는 유은태가 나를 좋아하고 믿는다 생각했었다. 내가 원하는 감정은 아니지만, 친구로서. 그러나 그가 친구를 대하는 이 태도는 뭘까.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알고 있어서 우습게 보이는 걸까. 아니, 아무리 은태가 나쁘다 해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어쩌면 지금 일이 꼬이고 힘이 드니까 잠시 생각을 잘못한건지도 모른다.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꼴도 보기 싫다 돌아선 후에도 나는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좋을 텐데.”
“왜?”
“그렇다면 난 분명, 널 더 좋아했을 거야.”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은태에 대한 마음이 차갑게 식어 버리는 것을 두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를 향해 자라기 시작한 감정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현오의 표정이 미묘했다. 솔직히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현오가 좀 더 기뻐할 줄 알았다.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거짓말 하지 마.”
“아니, 진짜야.”
“우기기는. 기분 나쁜 말은 아니긴 한데, 지금 와서는 소용없는 얘기잖아. 어차피 네 마음 속 지분은 유은태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거잖아.”
“아니.”
내 마음은 제대로 된 고백조차 하지 못하고 실연했다. 아프고 힘들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이로서 그에 대한 내 감정을 보내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있던 자리를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으로 온전히 100% 채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느꼈다.
“이제 51퍼센트쯤은 너야.”
“정말?”
“응. 방금 전에 넘어왔어.”
다시 한 번 확인하고도 그는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허한 웃음을 지었다. 방황하던 눈빛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왠지 미안하네. 넌 지금 기분이 최악일 텐데, 나 혼자 기뻐서.”
“괜찮아. 그렇게 최악은 아냐.”
“그래?”
“응. 덕분에 괜찮아 졌어.”
은태를 만나고 비 내리는 길을 방황하는 동안 마음과 기분이 더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이 추락했다. 그렇게 끝에 끝, 바닥을 쳤지만, 덕분에 새로 시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 겨우 떠올랐다. 여기, 이 남자가 있는 곳이었다.
“안아줄게. 이리와.”
그가 손을 흔드는 것과 동시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까와 같이 무모하고 위태로운 감정은 아니었다. 훨씬 안정되고 편안한 기분이었다.
“기분 좋아서 당장 어떻게 하고 싶긴 하지만 오늘은 그냥 이러고 있자. 넌 지쳤어. 쉬어야 해.”
나를 끌어안은 그의 손길은 격렬하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내게는 그 정도 온도가 맞았다. 지치고 상처 받은 마음을 쉬는 데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고마워.”
몇 번을 해도 모자를 말을 건넸다. 그는 대답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내 등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을 따라 눈을 감으니 거짓말처럼 깊은 잠이 쏟아졌다. 그의 말대로 내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
역사적인 첫 주연 드라마의 마지막 방송 시청률은 7.5%였다. 공중파로 치면 초대박이 난 셈이었다. 덕분에 종방 연은 잔치 분위기였고, 포상 휴가 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곧 촬영에 들어갈 차기작의 시나리오를 보는데 집중했다.
감독이 내 애인이라 불편한 점도 있긴 했지만, 사실 편한 점이 더 많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전화해서 물어도 미안한 감이 없었으니까.
-한꺼번에 물어봐. 대체 몇 번째 전화하는 거야?
웬만해선 내 부탁이나 질문에 너그러운 사람이-그것이 일에 관한 것이라면 더 그랬다-이번만은 참지 못하고 불평을 했다. 그의 뾰루퉁한 목소리에 내가 조금 심했다 싶은 마음이 들긴 했다.
“아, 미안. 그냥 볼 때마다 생각나서 그랬어.”
-차라리 이리오지 그래?
“싫어. 집중이 안 된단 말이야.”
-어허. 그래서 촬영장에서는 어쩌려고.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뭐가 다른데, 난 잘 모르겠는데?
각자의 일에만 충실한다면 집중이 안 될 리가 없었다. 문제는 단둘이 있으면 일로 만나도 엉뚱한 곳으로 새게 된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약해서 금방 유혹에 넘어가는 나도 문제였지만 일에 집중하려는 나를 대놓고 방해하는 현오가 더 문제였다.
“나 지금 회사 들어가는 길이야. 이따 봐서 연락할게.”
-온다는 뜻이지?
“그래. 이따 들를게. 대신 딴 짓하면 안 된다.”
-그건 장담할 수 없는데?
어쨌든 일과 연애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점은 여러 가지로 매력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 촬영 때문에 자주 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사적인 만남은 아니어도 얼굴을 계속 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함께하는 작업은 즐거웠지만, 사실 그의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배우 강신형에겐 즐겁고 황송한 일이었다.
드라마 끝나고 당분간 스케줄도 없는데 기획사 사장이 호출을 해 회사에 왔다. 이 기획사에 벌써 7년째 소속되어 있었지만 사장과 따로 만나는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요즘 사장이 내 칭찬을 한다는 경준의 말을 들어보니, 나쁜 얘기가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히 긴장이 되었다.
회사 로비에 얼굴이 익숙한 회사 연습생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기획사에선 나이 어린 가수 연습생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인 듯 했다. 아직 앳된 얼굴에 어색하게 화장을 한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 얘기에 빠져 있었다.
“그거 들었어? 좀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말이야.”
“맞아.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좀 그런 느낌 있었지.”
“보면 여자를 사귀는 것 같지도 않긴 하고…….”
내 쪽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쌩하니 지나갈 수도 없어 다가가 일부러 아는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 것뿐인데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몇 미터쯤 물러났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 동시에. 그 과장된 놀람에, 만화 같은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 재생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왜 이렇게 놀라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저는 일이 있어서 가볼게요.”
“나도 같이가. 저, 저도 가볼게요!”
내가 뭔가 잘못을 했나. 말을 걸자마자 피하듯 도망치는 게 수상쩍었다. 마치 해선 안 되는 이야기를 하다가 들킨 것 같지 않은가.
“왜들 저러는 거지?”
마침 뒤따라 들어오던 경준에게 내 기막힌 기분을 전했다. 경준은 저만치 멀어진 여자애들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뭐 바쁜가 보죠. 요즘 애들이 좀 건방져서 그래요. 이해하세요.”
“나를 피하는 것 같은데.”
“피, 피하긴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중얼거린 말에 경준이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지나치게 펄쩍 뛴다 싶긴했지만 그의 말대로 그럴 이유가 없었다. 지나가며 인사나 하는 사이지 딱히 길게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다.
“하긴, 쟤네가 나를 피할 이유가 뭐 있다고…….”
“그쵸. 빨리 올라가세요. 사장님 기다리세요.”
경준은 딱히 늦은 것도 아닌데 재촉했다. 경준도 사장이 어려울 테니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했다.
“신형씨. 재계약 우리하고 할 거지?”
사장실에 들어가 앉자마자 날아온 질문에 왜 보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쫓아내지 않는 것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던지라-처음 들어올 때부터 은태의 부록처럼 딸려온 나였다-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처음이었다.
“네? 아, 재계약 할 때가 다 되었나요. 아직 좀 남은 것 같은데.”
“내년 초야. 계약금 많이 올려줄 테니까, 꼭 우리랑 하자. 확답 받고 싶어서 부른 거야.”
어차피 나 같은 배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텐데, 확실히 내가 뜨긴 떴나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연히 마주치면 이름을 헷갈려해 신용이니 진영이니 불렀던 사장이 내 이름을 정확히 불러준 것도 그렇고, 재계약을 하자고 사정하는 것도 그랬다.
“그 동안 거둬주신 은혜가 있는데 제가 어떻게 다른 곳으로 가겠어요. 걱정 마세요.”
솔직히 크게 혜택 받은 것은 없었지만 기획사 힘으로 이런저런 작은 역이라도 들어가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고맙게 생각했다. 비록 은태의 입김이 적용된 일인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얼마 전까지의 내겐 감사한 일이었다.
“역시 신형씨는 사람이 이렇게 좋아. 그러니까 좋은 기회가 알아서 찾아와 준거지.”
“아닙니다. 회사에서 그동안 도와주신 덕분이죠.”
“고마워. 앞으로도 잘 해보자, 우리!”
갑자기 변한 사장의 태도가 얼떨떨하기는 했지만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며 정중하게 부탁하는데 내 쪽에서도 겸손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신형씨 좀 이상한 소문 있더라. 조심해.”
이야기는 잘 되어 나오려는데 사장이 불러 세워, 조심스럽게 당부했다.
“이상한 소문이요?”
“알아서 처신해. 갑자기 잘나가서 그러는 것 같으니까.”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알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래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을 보아 더 붙잡고 캐묻기 그랬다. 나에 대해 도는 소문? 종종 회사 사람들이 무슨 스폰서 생긴거 아니냐고, 나도 모르는 스폰서에 대해서 수군거리긴 했지만 그조차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로는 잠잠해 졌다. 오히려 예전부터 내가 잘될 줄 알았다며 말도 안 되는 아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터넷이라도 검색해 볼까. 드라마 방영하는 동안에는 사람들 반응이 궁금해 종종 찾아보긴 했지만 요즘엔 찾아보질 않았다. 원래 컴퓨터와 친한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아무래도 나와 달라-사실 나도 그리 옛날 사람은 아니지만-늘 스마트 폰을 놓지 못하고 사는 듯 했다. 매니저 경준만 해도 다른 건 다 좋은데 핸드폰 게임이나 인터넷 검색을 하느라 불러도 대답이 없거나 집중을 못할때가 종종 있었다.
“경준아. 뭐봐?”
사장실에서 나오니 아니나 다를까, 경준은 한참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등 뒤에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음에도 쉽게 반응이 없었다. 대체 무슨 재미있는 것을 보기에 정신이 빠졌나 궁금해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에야 크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데 그리 숨겨. 야한 거야?”
“그런 거 아, 아니라니까요! 보지 마세요!”
심지어 핸드폰을 놓치기까지 했다. 같은 남자끼리 그런 거 본다고 욕할 리도 없고-비록 야한 여자를 봐도 별 느낌이 없는 나지만-무슨 흉한 걸 보고 있었길래 이런 반응일까. 핸드폰을 주워서 건네려다 화면에 떠오른 인터넷 기사 제목에 멈칫했다.
‘요즘 인기 급상승중인 중고 신인 K군의 비밀’ 이란 기사 제목이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조연을 전전하며 주목받지 못하다가 최근에 뜬 배우 K가 실은 게이였다는 것이다. 기사의 댓글에는 심심치 않게 내 이름이 등장했다.
“이거 내 얘기야?”
“그, 그냥 헛소문이에요. 어떤 기자가 방송에서 이상한 얘길 한 모양인데, 그게 형하고 좀 상황이 맞아 떨어지다 보니…….”
“그 방송 이름이 뭔데?”
심장 뛰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쿵쿵 울려댔지만, 흘러나온 목소리는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가슴 속에 불길한 떨림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함부로 보일 정도로 나는 부주의하지 않았다.
“그냥 보지 마세요. 헛소리예요.”
“아까 그 애들도 그 얘기 때문에 나한테 그랬구나. 그치?”
“아, 그냥 안 보시는 게 나을 텐데.”
-이거 아주 따끈한 정보인데요. 제가 직접 지인한테 들은 얘깁니다. 요즘 갑자기 뜨는 중고 신인 K군이라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름 없이 조연만 전전하다가 갑자기 드라마 하나로 반짝 기대주로 급부상했죠. 그런데 그 친구 사실 게이라네요. 동료 배우 스토커 짓까지 했다던데……. 아주 오랫동안 짝사랑해서 10년 가까이 쫓아다니기까지 했대요.
-어머. 어머. 나 그 배우 누군지 알 것 같아.
-나도요. 나 그 드라마 팬인데! 그 사람이죠…그….
-아이고, 그만들 하세요. 그러다 실명 나오겠다.
-그런 줄 몰랐는데, 되게 깨끗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잖아요.
-그거야 배역이 그런 거지, 그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회사 노트북으로 문제의 방송을 찾아보았다. 방송을 보는 내내 옆에서 안절부절 하던 경준이 내가 노트북을 덮고 일어나자 그제야 애써 웃으며 말을 걸었다.
“형. 형 얘기 아닐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인터넷에선 나 일거라고 얘기들 하고 있잖아.”
“악플러들은 그냥 무시하세요. 저 놈들 저러는 거 한두 번인가요. 곧 저러다 말거예요.”
경준은 무거운 분위기를 지우려고 애써 밝은 척을 했다. 아예 근거 없는 소문이라면 경준의 말대로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낯선 기자가 말하는 그 소문은 뒤틀리고 이상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들어맞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고, 동료인 배우를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평생 제대로 꺼내 본 적도 없는 그 비밀을 왜 낯선 사람이 흥밋거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왜 이렇게 늦었어?”
서둘러 온다고 온 것인데, 중간에 허비한 시간 때문인지 현오의 작업실에 도착하니 주변이 캄캄해져 있었다.
“아 미안. 얘기가 좀 길어져서…….”
얘기는 짧았지만 그 후에 들은 이야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경준에게는 약속이 있다고 들여보낸 후에도 회사 휴게실에 우두커니 앉아 혼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얘기가 흘러나온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장이 갑자기 왜 호출 했어? 무슨 얘기 했는데?”
“…….”
“어이, 강신형.”
“응? 아……. 계약 문제 때문에 불렀대. 재계약 하자고.”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좀체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욕을 먹는 것이 억울하고 상처가 되어서는 아니었다. 대체 누가 그런 말을 전한건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아, 아무것도 아냐. 저녁 먹을까. 밥 먹었어?”
“그 전에 아주 슬픈 소식이 있어. 방해꾼이 찾아오겠대.”
“누구?”
“신현아. 이쪽도 엄청난 우등생이라서 말이지. 대본 연습한다니 자기도 끼어 달라 그러네.”
“현아? 잘됐네. 안 그래도 같이 대본 맞춰보고 싶었었는데…….”
“잘 돼? 모처럼 오붓하게 데이트 하려고 했더니.”
아무래도 혼자 연습하는 것보다는 상대가 있는 쪽이 좋았다. 대화를 치는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받아칠지 상상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아와는 잘 내자보자고 화해아닌 화해를 했지만, 따로 연락할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기는 뭐한 관계였다.
“저 왔어요. 저녁 거리도 사왔어요!”
“누구는 빈손으로 왔는데, 센스있으시네.”
처음엔 방해꾼이니 어쩌니 투덜거리더니 현아가 오니 오바하면서 반가워했다. 아마 나 보라고 하는 유치한 질투유발 작전이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의 장난에도 힘없이 웃는 게 다였다.
“신형이 벌써 와 있었네. 안녕?”
“어…. 안녕.”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도 적응이 안 된다. 그래도 그녀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주어서 서먹서먹한 관계가 많이 나아졌다.
“근데 너 괜찮아?”
“뭐가?”
“인터넷에 이상한 소문 돌더라고. 당장 다 고소해버려. 그런 새끼들은 초장에 잡아야해.”
무슨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막았을 텐데, 이미 막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현아에게서 받은 짐을 주방에 내려놓고 돌아온 현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상한 소문?”
“아, 아무것도 아냐.”
“아니긴. 고소 어쩌고 하던데?”
“왜? 감독님한테는 비밀로 해야 하는 거야?”
말을 하면 걱정을 할 게 뻔해서 절대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결국 이렇게 알려졌으니 이실직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현아를 향해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긴, 어차피 인터넷에 파다한 소문이니 알고 있으려니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고소해. 미친 놈이네.”
현아가 맥주를 사온다며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해 피해준 모양이다-현오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다.
“내 얘긴지도 확실히 모르고, 게이라는 건 맞는 말이잖아. 은태를 오래 짝사랑한 것도 맞고.”
“그래도 이건 아니다. 스토커라니 너무 악의적이잖아.”
“내버려 두면 잠잠해 지겠지.”
“그동안은 그럼 그냥 참고만 있겠다는 거야?”
게이라고 욕을 먹는 것도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혔다는 얘기는 억울하고 화가 나기는 했다. 하지만 해명을 하고 말 것도 없었다. 어설픈 변명을 해봤자 거짓말을 하는 게 되어버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알고 싶은 건 누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소문을 만들었냐는 것뿐이었다.
“아, 혹시 영화에 폐가 되려나. 그러면 어쩌지?”
“하나도 안 민폐야. 괜히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난 네가 걱정 돼서 그러는 거라고.”
나에 대한 평가는 상관없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 특히 현오에게 폐가 되고 싶진 않았다. 정작 본인은 그런 걱정을 하는 나를 타일렀다. 그리고 진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거 용인해주는 분위기가 아냐. 다른 직업도 아니고 배우인데……. 혹시 장난삼아 물어도 모른다고, 아니라고 해.”
“응. 그래야지.”
“넌 연기는 되는데 거짓말이 안 돼서 걱정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솔직히 불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알았어. 그렇다고 믿어야지. 뭐.”
심란하던 마음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진정이 되었다. 이제까지 나는 고민이나 걱정이 있어도 혼자 해결하려 했다. 하물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소식과 좋은 감정만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걱정을 나누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내 걱정을 나눠 가진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이 더 컸다.
“저 왔어요. 무슨 얘기를 하기에 그렇게 심각해요?”
술 사러 나갔던 현아가 돌아와 썰렁한 분위기를 보고 물었다. 이 분위기를 만든 원흉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대책 회의 중이었어요.”
“아, 그 루머 때문이에요?”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한 것과 다르게, 인기 연예인인 현아는 반응부터가 달랐다. 그녀에게는 늘 엄청난 인기와 함께 루머와 안티가 따라다녔다. 연예계 데뷔가 빨랐던 그녀는 모델 데뷔까지 합치면 이쪽 생활만 15년쯤 될 것이다. 별의별 일을 다 겪다보니 웬만한 일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듯 했다.
“내가 아는 기자한테 물어봐 줄까. 나 친한 언니인데 이런 쪽 소문에 빠삭한 사람 있어.”
“괜찮아, 너까지 안 나서도.”
“왜 우리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기로 했잖아. 그런 의미에서 내가 좀 도와줄게.”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이 친구 신경 쓰지 않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연습한다고 듣고 왔는데, 어느새 술자리로 변해 버렸다. 현아가 나를 위로해야 한다고 술을 잔뜩 사왔기 때문이었다.
“은태가 통 연락이 안 되네. 너 뭐 들은 거 없어?”
“연락이 안 된다니, 언제부터……?”
“일주일 전부터. 매니저한테 물어보니 당분간 스케줄도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럴까.”
현아의 질문에 어느 정도 짚이는 것이 있긴 했지만, 솔직히 말 해줄 수는 없었다. 솔직히 정말 나 때문인 건지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단지 지나치게 화를 낸 게 아닌가 걱정스럽긴 했다. 화가 나서 마음껏 질러놓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다시 보지 말자는 말은 좀 심했나 싶긴 했다. 하지만 그때의 은태를 생각하면 다시 화가 나고 마음이 무너지던 그때의 기분이 상기되었다.
“뭐 듣게 되면 얘기 좀 해줘.”
“응. 근데 넌 별로 걱정 안 돼?”
“내버려 둬. 내버려 두는 게 좋을 때도 있잖아.”
“엄청 쿨 하시네.”
가만 듣고 있던 현오가 가볍게 맞장구 쳤다. 그의 시선이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를 향해 괜찮다는 듯 웃었다.
“서로 바쁘다 보니 이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서 못 사귀어요. 저에 비해 강신형은 너무 어리광을 받아주죠. 그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나 봐요.”
현아의 가벼운 불평에 평소라면 또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그를 위한다고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용인해 주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둘이 싸웠어?”
현아가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이 질문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싸웠다고 하기엔 은태가 내 속을 긁고 난 일방적으로 화를 낸 것뿐이니 제대로 싸웠다고 하기도 뭐했다.
“무슨 얘기라도 해?”
“아니, 그냥 전에 술자리에서도 좀 썰렁한 것 같고, 그 후로 연락도 안한다니까.”
술자리가 길어지는 것 같아 간단한 안주거리를 만들겠다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사실 은태의 이야기가 나와 다시
맘이 심란해진 탓이기도 했다.
“걱정 돼?”
주방에 따라온 현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별로, 상관없어. 그런 녀석…….”
“내가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면 안 그래도 돼.”
“아니, 진심이야. 그다지 걱정되지는 않아. 아무리 이상한 짓을 해도 결국 제자리는 일지 않는 녀석이니까.”
그냥 궁금하긴 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은태 역시 이 소문을 들었을까?
“많이 좋아졌네. 전에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고민하더니.”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맞거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 속 타게.”
“그때는 미안했어.”
냉장고를 뒤지는 척 몸을 돌리고 대답했다.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그때의 나는 엉망이었다. 현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을 겨우 추스를 수 있었다. 오랫동안 품어온 감정에 배신당한 기분은 생각보다 끔직했다. 그때의 나는 그의 마음을 살필 정도로 여유도 없었다.
“괜찮아. 다 과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이렇게 넌 내 앞에 있고…….”
등 뒤에 뭔가 다가온다 싶더니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뒤에서 끌어 안겼다. 현아도 있는데, 비록 보이지 않는 곳이긴 해도 문도 없이 뚫려 있는 곳에서 이래도 되나 싶었다.
“하지 마. 보면 어쩌려고.”
“왜, 스릴 있잖아?”
부끄럽고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나를 안는 그의 단단한 팔이 싫지 않아 모른 척 그의 손길을 내버려 두었다.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이제껏 몇 번을 그에게 기대고 위로 받았는지 모르겠다. 만난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처음엔 그렇게 불편하고 싫은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힘이 들고 고민이 많을 때 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당연한 듯 이 사람이었다.
*
제작 발표회 겸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아직 본격적인 촬영도 들어가기 전에 왜 이런 귀찮은 행사를 해야 하나 싶었지만, 영화의 경우엔 드라마보다 홍보가 중요하다는 설명을 듣고야 불평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하긴, 영화 하나 만드는데 들어가는 돈과 노력이 엄청나니 이왕 찍는 영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떠들썩하게 소문나는 게 좋았다. 사실 실망한 구석은 없는 영화가 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단편 영화를 찍긴 했지만 본격적인 상업영화에 이렇게 비중있는 역으로 출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드라마의 성공으로 내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래도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영화는 현오에게도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사실 나는 그의 작품에 출연한 것만으로도 좋았기 때문에 다른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현오에겐 상을 받은 후 만드는 첫 영화이기에 말은 안 해도 많이 부담스러울 것이라 느꼈다.
“강신형 오늘 좀 멋지다?”
드레스를 한껏 차려입은 현아가 나를 발견하고 아는 체를 해왔다. 받은 게 있어 나도 한마디 해주려는데 안하던 칭찬을 하려니 괜히 소름이 돋는 듯 했다.
“고맙다. 너, 너도……. 예쁘네.”
“풉. 야, 맘에도 없는 말 하지 마. 거짓말이라고 다 써 있다.”
갑자기 살갑게 굴어서 적응이 안 된다. 차라리 막 대하는 편이 편하다니. 그래도 함께 영화를 하게 되며 자주 만나 전보다는 확실히 편안해 졌다. 현아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덕분이었다. 자주 보고 이야기 나눠보니 생각보다 편한 친구였다. 내가 그녀에 대해 많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몸소 느끼는 중이었다.
“할 말 있는데 잠깐 나갈래?”
“어딜? 곧 시작할 것 같은데…….”
“어차피 저렇게 시간 끌다가 한참 있어야 시작할거야. 잠깐은 괜찮잖아.”
현아의 손에 이끌려 제작 발표회가 열리는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사람들 눈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긴 드레스를 입고도 이곳저곳을 능숙하게 누비더니 용케 사람 없는 비상구를 찾아냈다.
“지난번 알아본다는 거, 알아봤어.”
왜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여기까지 불러냈나 했더니, 그때 그 소문 때문인 듯 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찜찜하잖아. 아직도 그 소문 한창 시끄럽더라.”
“고맙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데?”
현아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 준 게 고맙기도 하고 얼떨떨했다. 내가 괜히 수고를 끼쳤다 싶었지만 알아낸 게 있다니 궁금하기는 했다.
“사실 들은 얘기가 있긴 한데, 별로 영양가 없어.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어서.”
솔직히 소문의 근원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 큰 기대는 없었지만,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알아냈다는 그녀의 표정이 복잡하기만 했다.
“왜 그래?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
“듣고도 좀 믿기지 않지만, 그 언니가 거짓말 하는 것 같지 않고, 그 방송 나왔다는 기자 놈이 거짓말 하는 것 같아. 글쎄, 은태가 얘기 한 거라고 그랬대.”
은태의 이름에 머리 위에 찬물이 쏟아 진 듯 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가 이내 뜨거워졌다. 물론 현아는 그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너도 황당하지? 나도 어이가 없어서 진짜,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구.”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멍청하게 서 있으니 그녀는 단순히 놀라서 말을 못하는 거라 오해했다. 그 오해가 차라리 고마웠다. 지금 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언니한테 절대 그럴 리 없으니까, 주변에도 루머라고 소문 좀 내달라고 했어. 애초에 출처부터가 말이 안 되는 소문이잖아.”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매니저에게 연락이 와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도 머릿속엔 그녀에게 들었던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둘이 어디 갔다 온 거야?”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눈을 흘기며 물었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술을 열어도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좀 전의 충격이 아직 남아있었다. 다행히 현아가 끼어들어 대신 대꾸했다.
“어머, 감독님 질투하세요?”
“응. 둘이 원래 원수 같은 사이 아니었어? 역할에 너무 몰입한 거 아냐.”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별로 안 좋아.”
“이상하신 분이시네. 전에 대놓고 꼬실 땐 넘어올 생각도 안하시더니.”
현아는 현오가 자신 때문에 질투한다고 오해하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굳이 고쳐주고 싶지 않았다. 나 때문에 질투하는 거라고 어떻게 말을 할까.
사실 눈앞의 장난스러운 다툼은 딱히 걱정스럽지 않았다. 정말 걱정되는 일은 따로 있었다. 확인이 필요하긴 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한 일이라고 납득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현오와 본인 말고는 알지 못한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왜 나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걸까.
행사가 시작되었음에도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를 잠깐씩 잊곤 했다. 평소라면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 긴장해서 내내 예민한 상태였겠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어 차라리 긴장은 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감독 최현오입니다.”
배우 못지않게 주목받는 감독이라서인지, 현오를 향한 플래시 세례가 어마어마했다. 그는 나와 함께 있을 때 부드럽게 싱글거리는 얼굴대신 딱딱하고 오만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저, 강신형 배우에게 질문 있습니다!”
“여기요. 여기도요!”
“최현오 감독과 다시 작업하게 돼서 어떠십니까?”
“상대역 신현아씨와의 호흡은…….”
드라마 제작 발표회 때와는 다르게 내게도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겨우 몇 달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렇게 달라진 것이 많은데 어떻게 예전의 나로 있을 수 있을까.
“좋은 스텝과 배우분들과 일하게 되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때라면 서툴러도 열심히 대답했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사실 지금의 내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혹시 그 소문 들어보셨습니까?”
시끄러운 행사장을 조용히 울리는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어찐지 좋지 않은 인상의 기자가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기자의 묘한 시선-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경멸하는 것 같기도 한-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무언지 예상이 갔다.
“강신형씨가 게이라는 소문이 있으시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자의 질문과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뚝 끊긴 듯 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잠깐 동안 다들 입을 다물고 카메라 셔터조차 누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소문만 듣고 욕하는 걸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그 소문에 대해 듣는 기분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저거 미친놈 아냐. 어떻게 저런 소릴 대놓고…….”
“…….”
“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지 말라고 해. 저 사람이 그때 그 기자 인가봐.”
옆에 있던 현아가 들리지 않게 귓가에 소곤거리는 말을 들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각과 달리 입술은 굳었고 몸은 덜덜 떨려왔다.
“말해보십시오. 전혀 해명을 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온몸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기자가 어느새 은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거기 서서 나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던지는 것이, 유은태처럼 보였다.
“저, 저는…….”
대답을 재촉하는 시선에 더욱 목소리가 떨렸다. 눈앞은 흐릿흐릿하게 멀어지고 손끝엔 온기가 돌지 않았다. 그때 다가온 누군가의 손이 내 손끝을 가볍게 쥐었다. 익숙한 체온과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보니 현오가 내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요. 거기에 대해 제가 할 말이 좀 있는데 해도 될까요?”
나도 그랬지만 질문을 던진 기자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제3자로 인해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현오는 기자가 대답을 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기자님은 혹시 제가 게이라는 소문은 못 들어 보셨나봐요?”
“네?”
“아무래도 소문이 잘못된 것 같아서요. 실은 제가 게이입니다.”
망설임 없이, 너무도 당당한 고백에 조금 전 스쳤던 침묵이 잠깐 지났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놀라움과 충격에 한 숨을 내뱉으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신형씨가 괜히 저랑 어울리다 보니 억울한 소문에 휩싸이신 것 같네요. 물론 저는 제 성향에 대해서 거리낄 것은 없습니다만, 엄한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면 안 되겠죠?”
잠깐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나는 그 웃는 얼굴을 향해 소리 없이 외쳤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왜 네가 내 앞을 막고 그런 소릴 하고 있느냐고.
“저와 강신형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입니다. 워낙 친하다 보니 같이 어울리는 일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까 괜한 소문까지 생겼나봅니다. 앞으로 강신형과 관련해서 이런 루머가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멍하니 나를 든든히 막고 있는 그의 넓은 어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
현오는 사람들의 경악스러운 시선을 남겨두고 그대로 퇴장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놀라서 얼빠진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 비슷한 표정이었기에 나를 이상하게 보진 않았다. 아니, 이제 거기 있는 모든 기자들의 관심은 내게서 멀어졌다.
“감독님. 잠깐만요!”
“갑자기 영화 제작발표회에서 이런 발표를 하신 까닭은…….”
“원래부터 커밍아웃할 계획이 있으셨습니까? 감독님!”
기자들이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현오를 뒤늦게 쫓아가며 흥분해 외치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 인파에 묻혀 현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
정신을 차리자마자 현오를 찾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간 것 같지 않은데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이곳 저곳을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차가 있겠다 싶어 주차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거기서 현오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차 곁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그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한 대 칠 듯 달려들었다. 물론 때릴 생각은 없었지만, 사람 마음을 애태우는 그의 행동에 울컥한 것은 사실이었다.
“무슨 짓이냐니, 그냥 커밍아웃한 것뿐이야.”
“그걸 왜 카메라 앞에서, 나 때문에 하느냐고!”
화를 낼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기막히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전히 놀람이 가시질 않았다. 은태가 내가 게이라는 소문을 내고 다닌 것보다도,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이 게이라고 외친 것이 더 놀라웠다.
“왜 그게 너 때문이야? 내가 게이인건 사실인데.”
“내가 거기서 대답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으니까, 구해준거잖아.”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엉뚱한 짓을 벌이는 그였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었으면 이런 황당한 짓은 안했을 것이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그래서 나선 건 맞아. 근데, 난 이 기회에 귀찮게 들러붙는 여배우들도 쫓아낼 겸 솔직해 지고 싶었어.”
그러나 본인은 오히려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했다. 금방 후회할 사람이면 애초에 나서지도 않았겠지만, 나는 그가 자신과 상관없는 소문을 해명하려고 스스로 진흙탕을 뒤집어 쓴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 게다가 정말, 그 이유가 은태 때문이라면……. 나는 내 자신이 더욱 원망스러울 것만 같다.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마. 네가 나한테 말했잖아. 그런 질문 받아도 절대 아니라고 말하라고 했잖아. 근데 너는 왜 그래?”
“아, 내가 그랬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
“그래. 솔직히 너를 위해서 그랬어. 하지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나는 연예인도 아니야. 그렇게 크게 손해볼일은…….”
더는 할말이 없어서 차라리 그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안긴 그는 평소와 달리 당황하며 나를 밀어내려 했다.
“너 왜 이래. 누가 보면 어쩌려고…….”
“보든 말든 상관없어.”
“야, 여기 사람 꽤 지나다녀. 사진이라도 찍히면…….”
“뭐 어때.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사실인데, 알려져도 상관없어.”
지금 좀 전에 들었던 질문을 받았다면 나는 솔직히 이야기 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게이라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인데 왜 비난 받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관없긴, 난 상관이 많아. 내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인데 괜히 시끄러워지면……. 근데 방금 너 뭐라고 한 거야?”
“뭐가?”
“알려져도 상관없다고 한 거. 다시 말해봐. 응?”
현오가 자신을 끌어안은 나를 부드럽게 때어내며 내 표정을 살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눈물 대신 웃어 보였다.
“좋아한다고. 너를…….”
그가 황당한 커밍아웃을 하며 나를 향해 웃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고 자신 있게, 하지만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좋아해. 최현오.”
“…….”
“못 알아들었어? 좋아해. 사랑해. 사랑한다구.”
마음을 전하는 일은 어렵지만, 해내고 나면 이렇게 뿌듯한 거구나. 제대로 된 고백을 해본 것이 처음이라 떨리고 어색했지만 고작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마주한 얼굴에 뜻밖의 기쁨이 번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굉장히 멋진 일이었다.
“너 며칠 전만 해도 완전 넘어온 건 아니랬잖아?”
“숫자 같은 거 아무렴 어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가 좋아. 100프로 너만 좋아하고, 너만 사랑해.”
말을 끝내자마자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덮치듯 키스해 왔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놀라지도 피하지도 않고 그의 키스에 응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뒤늦게 찾아온 쑥스러운 마음에 작은 불평을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만해. 누가 보면…….”
“봐도 상관없다면서?”
현오는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하지만 딱히 불만스럽거나 억울한 표정은 아니었다. 핀잔주는 말투와 달리 그의 표정은 정반대. 본 적 없는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여기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잖아?”
의미를 깨달은 듯, 그의 웃음이 한층 진해졌다. 손을 끌어당기는 그의 손은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알았어.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
우리는 문이 열리자마자 키스를 하며, 서로의 몸을 안으로 밀어 넣고 옷을 벗기는 데 전념했다. 빨리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내 자신을 던지듯 그에게 몸을 맡겼던 처음을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감정이었다.
침대로 가기 전에 이미 몸에 걸친 옷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던지듯 몸을 쓰러뜨리며 그의 몸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입을 맞추고 서로의 살을 어루만지는 동안 엉키고 뒤집히며 위가 되었다가 아래가 되기를 반복했다. 몸을 겹치고 뒤척거리면서도 입술을 쉬진 않았다.
“어지러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불평에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가볍게 웃었다.
“이정도로 벌써 어지러우면 곤란해.”
그의 말대로였다.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지치지 않기 위해 숨을 고르며 지나치게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몸을 맞대고 차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마음껏 입술과 얼굴에 키스를 퍼붓던 입술을 아래로 옮겼다. 마치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듯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그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과 목덜미, 귓불 따위를 사랑스러운 기분으로 어루만졌다. 그는 보지 않고도 손을 뻗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이미 열렬히 입을 마주하며 혀를 섞고, 온몸에 키스를 하면서도 될 수 있으면 많은 부분을, 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자, 잠깐…. 거기는….”
내 몸을 타고 내려가던 그가 너무 아래로 내려간다 싶더니 사타구니 사이로 거침없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방비하게 반쯤 발기한 성기위로 뜨겁고 축축한 것이 덮쳐왔다.
당황스러워 허리를 뒤틀었지만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입안에 들어간 성기로 느껴지는 압박과 자극에 온몸이 짜릿하게 전류가 흐르는 듯 했다. 짧고 강렬하게 몸을 통과하는 쾌감이 온몸을 꿰뚫었다.
“으, 으읏……!”
참지 못하고 흘러나온 신음이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 벗은 몸으로 느껴지던 차가운 공기는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이 타는 듯 뜨거웠고 특히 그의 입안에 감싸인 욕망이 가장 뜨겁게 일어나 있었다. 안 그래도 터질 것처럼 커진 성기를 그의 혀와 이가 긁어대며 자극하는 바람에 금방이라도 절정에 다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겨우 버티고 있지만 그리 오래 참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아, 그만, 하읏. 할 것 같…….”
다급한 마음에 몸을 뒤틀며 그의 머리를 밀쳐 내려했지만 가까스로 달은 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결국 그의 입안에 한계에 달한 욕망을 남김없이 쏟아냈다. 길고 진한 쾌감이 등허리를 울리고 지나간 후,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남의 입안에 정액을 쏟아낸 것에 묘한 죄책감과 창피함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뜬 것은 갑자기 다리를 확 벌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손닿는 곳에 있던 티슈를 뽑아 대충 입에 남아있는 것을 닦아내고 그대로 내 다리를 벌리고 자신의 사타구니를 바싹 붙여왔다. 붉어진 성기의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 모습에 멈칫하더니 자신의 손가락을 내 입안에 집어넣었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이 빠져 나오자마자 곧 바로 다리 사이의 구멍으로 집어넣었다. 이미 뜨겁게 충혈된 곳으로 차갑고 미끌 거리는 손가락이 들어오니, 의식 하지 않아도 그것을 바싹 조이려 들었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을 더 안으로 깊숙이 집어 넣고 뻣뻣해진 안을 풀어 내기 위해 세세하게 돌아다녔다. 그는 능숙하게 내가 기분 좋을 만한 곳을 누르고 문지르며 내 몸과 그곳에 힘이 빠지길 기다렸다.
“앗……하읏!”
입 밖으로 정체불명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번의 사정으로 늘어져 있던 몸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듯 했다. 점점 그의 손길에 몸이 녹진녹진하게 녹아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다리를 활짝 벌리고 조르듯 허리를 들썩거렸다.
“안 되겠다. 더는 못 참겠어.”
한계에 달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평소보다 한층 허스키해진 목소리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안 참아도 돼. 어서…….”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어 내게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잔뜩 성나 있던 그의 욕망이 곧바로 내 몸을 뚫고 들어왔다.
“흣……. 아앗!”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내 다리 사이에 완전히 자신의 성기를 박았다. 몇 번을 경험해도 그의 성기가 그 작은 구멍을 밀고 들어오는 엄청난 충격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을 가득 채운 그의 욕망에 가슴 속에 뭔가 빠듯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만족스러움에 배가 부른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몸을 채운 그것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오는 이미 성기를 완전히 깊은 곳까지 삼입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듯, 한쪽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고 더 깊이 박아댔다. 쿵쿵, 몸속에 커다란 못을 박는 듯 큰 소리가 울리는 듯 했다. 점점 그의 움직임이 복잡해 졌다. 점막을 찌르고 부비며 끊임없이 자극했다. 그의 성기가 의지를 가지고 살아있는 것처럼 내벽을 찌르며 날뛰는 감각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사정을 할 때와는 다른 묘한 쾌감이 간헐적으로 온몸의 신경을 돌아다녔다. 발 끝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손끝이 붙잡을 것을 찾아 다급하게 매달렸다. 이성을 잃은 손이 그의 어깨와 목덜미를 할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피스톤운동을 계속했다.
“으, 아아, 읏, 아아……!”
밭은 숨을 내뱉는 입술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어도 집요하고 안을 찔러 올리는 그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으응, 읏, 아아!”
“신형아…….”
현오가 내 이름을 애틋하게 불러왔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할 수도 없었다. 그와 연결된 몸이, 그가 허리를 흔들 때마다 함께 흔들렸다. 흔들리는 시야로 그의 얼굴을 힘겹게 찾아 손을 뻗는 것이 전부였다.
현오의 손이 내 손을 아프도록 세게 붙잡는가 싶더니, 그는 그대로 자신의 성기를 세게 박아 넣었다. 울컥하며 무언가 터져 나오는 느낌에 온몸이 전율했다. 눈앞이 번쩍거리며 하얗게 번졌다. 내벽에 완벽히 맞물린 성기 끝에서 움찔거리며 무언가를 토하는 느낌이 들었다. 연결된 그의 몸이 자잘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랑해.”
마찬가지로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향해 토해낸 말에 나도 똑같은 말을 힘겹게 뱉어냈다.
“나도, 사랑해.”
몸과 마음이 온전히 통한 상태에서 서로의 몸을 완벽히 겹치는 섹스는 상상 이상으로 짜릿하고 기분 좋은 것이었다. 몇 번인가 사정을 한 후에야 겨우 그의 성기가 완전히 빠져 나갔다. 지치긴 했지만 머릿속은 명료했다. 마치 차가운 겨울 밤 같은 느낌이었다.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누워있다가 문득 떠오르는게 있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어 내 몸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또 하자는 건가, 싶어 잠시 긴장했지만 그 역시 지쳐있긴 마찬가지인 듯 내 어깨 위로 밭은 숨을 토해냈다.
“근데 아까 왜 거짓말 했어?”
갑자기 왜 그게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그때는 다른 일이 워낙 충격적이라 세세한 내용을 따질 생각은 못했다. 그가 나와 단지 친해서 자주 어울릴 뿐이라면서 했던 말. 친구라는 말은 그렇다 치고-우린 사실 한순간도 친구인 적이 없었다.-우린 만난 지 고작 몇 달 밖에 안 되었는데 그는 우리가 고등학교 때 알던 친구라고 이야기 했었다.
“무슨 거짓말?”
“나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라고.”
그냥 친구일 뿐이라고 이야기해도 되었을 텐데, 그는 굳이 우리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거짓말까지 하며 나를 변호했었다.
“거짓말 아닌데.”
“뭐?”
“말 그대로라고,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사이잖아. 우리.”
“…….”
“이렇게 말해도 기억을 못하네.”
그는 나를 탓하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기막힌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니, 신경질적으로 몸을 휙 일으켰다.
“정말 기가 막힌 건 나야. 강신형. 난 너를 고2때부터 알았어. 너는 얼굴만 반반한 어떤 놈한테 푹 빠져서 나 따위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고2때라고……?”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친구중 제대로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도 없었고,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거의 은태의 친구들이었을 뿐. 그조차 은태가 배우가 되어 바빠지니 나 역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렇다. 내 얄팍한 인간관계에 남아있는 고등학교 때 친구는 은태뿐이었다. 하지만 고2때, 라는 말에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떤 흐릿한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 유은태 좋아하냐?’
싸가지 없다 싶을 정도로 저돌적인 질문을 던지던 녀석,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나보다 먼저 눈치 챘던 사람이 있었다.
“너……. 너 설마, 네가?”
기억을 떠올리고도 너, 라는 말 밖에 안 나올 정도로 내 기억은 희미했다. 하지만 최현오라는 얼굴은 흐릿해도, 그와 나눈 대화만은 인상적으로 남아있었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야.”
“왜 말을 안했어?”
“어차피 이름도 기억 못하는데 말해서 뭐해.”
은태가 얼굴이 낯익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냥 하는 말 일거라고, 감독이라 어딘가에서 스치듯 만났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같은 반이었기 때문에 기억했던 모양이다.
이제야 그와 처음 만난 후-처음이라 생각했지만 처음이 아니었던-그가 취한 태도와 묘한 말들이 납득이 갔다. 처음 만났는데도 어색항도 예의도 없이 당돌하게 대하던 최현오. 그는 마치 나를 잘 안다는 듯 내 감정을 속속들이 들추며 나를 당황하게 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걸까, 말이 안 되는 기막힌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그에게 특별한 신통력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의 행동이 황당하고 불쾌하기만 했다. 설마 그가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안해. 못 알아봐서.”
생각해 보면 그는 나에게 몇 번인가 암시를 줬다. 기억력이 나쁘다거나 눈치가 없다는 말을 수시로 하기도 했고, 은태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괜찮아. 어차피 그때는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그래도 나한테 관심은 있었잖아?”
“…….”
“아닌가. 아, 아니면 말고.”
“맞아. 그때부터였어.”
괜히 김칫국 마시는 소리를 했나 싶어 민망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왠지 억울한 표정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때 너를 잠깐 좋아했었어. 그렇다고 너처럼 10년 넘게 계속 좋아했었다는 얘기는 아니야.”
잠깐 이란 말을 묘하게 강조하는 것 같아 웃었지만, 현오가 매서운 눈빛을 보내 즉시 입속으로 꾹 삼켰다. 하지만 참아보려고 해도 자꾸 웃음이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왜 그렇게 웃어?”
결국 한마디 듣고 말았지만, 날선 말에도 기분이 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흐뭇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숨겨져 있던 선물을 발견하고 놀라움에 상자를 열어보는 기분이었다.
“좋아서 그러지.”
“내가 널 몰래 좋아했다니까 좋냐?”
“응. 좋은데?”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입으로 고백한 옛날이야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듯 했다. 좀체 보기 힘든 모습에 눈앞의 남자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예쁘게 웃어서 봐줬다.”
현오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주하던 눈에 힘을 풀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이미 수없이 나눈 입맞춤이었지만 이상하게 풋풋한 맛이 나는 듯 했다. 마치 18살,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
유명 감독의 커밍아웃에 관한 기사가 얼마간 올라왔지만, 그의 말대로 연예인 아닌 감독이기 때문일까. 몇몇 포비아나 개념 없는 네티즌은 원색적인 욕을 남기고 비난하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었다. 어차피 개인의 성적 취향에 상관할 바가 아니다. 좋은 작품을 기대한다. 잘생긴 남자는 다 게이 아니면 유부남이라더니, 등등.
그러나 그랬던 것도 잠깐, 그에 대한 뉴스는 인터넷에서 금세 사라졌다. 그보다 더 핫한 이슈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좀더 주목받는다 해도 어디까지나 그는 감독이지 연예인은 아니었다. 스텝이나 주변사람들은 그가 게이인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던 눈치였는지, 촬영장에서 별다른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내가 그때 당황해서 실수만 안했어도 쓸데없는 사고를 치진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게이냐는 소문에 대해 물은 거라면 그렇게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문을 낸 사람이 은태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는 상당히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현아는 당연히 거짓말일거라고 생각해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쉽게 납득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은태뿐이었다. 내가 게이인 것이며, 누군가를 오래 좋아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은 은태가 유일했다. 아니 한 사람 더 있었지만 현오는 절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이에게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10년을 알고 지낸 친구보다 현오를 더 믿게 되었다. 믿음이 무너지는 것은 이렇게 씁쓸한 일이었다.
“은태야. 나야.”
모든 것이 정리된 듯 했지만 내게는 아직 과제 같은 사람이 남아있었다. 많은 생각과 고민을 지난 후 은태에게 전화를 걸 용기를 얻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기분이나, 그가 만들어낸 소문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편했지만, 불편하긴 했지만 끔찍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좋아했던 마음을 영영 불쏘시개로 던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마음은 과거의 시간에, 그를 좋아했던 나에게 남아있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더니…….
한참 침묵하던 은태가 힘겹게 꺼낸 말은 헤어지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이 퍽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화가 나서 한 말이지. 설마, 진짜겠어?”
늘 말이 많고 활달하던 녀석이었는데 제대로 된 인사도 대꾸도 없이 침묵만을 붙잡고 있었다. 잠깐 들린 목소리가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쉰 듯한 거친 목소리와 불안한 호흡, 현아의 말대로 그는 요즘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영화가 엎어졌어도 빨리 차기작을 골라야 할 텐데, 모든 걸 거부하고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에서도 꽤나 골치를 썩고 있다했지만 본인이 싫다하니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경준에게 들어보니, 은태의 매니저가 그를 정신병원이라도 데려가야겠다고 한숨 쉬는 걸 들었단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아주 많아. 만나자.”
-안 돼. 나 바빠.
“너 스케줄 없잖아. 일하기 싫다고 잠수 탔다며? 회사에서 얘기 다 들었어.”
-다른 일 있어. 안 돼.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나인데, 정작 만나자 하니 거절하려 드는 것은 은태였다. 협박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너무도 비협조적인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카드를 내밀기로 했다.
“나 네가 한 짓 다 알고 있어.”
-…….
“안 나오면 너희 집으로 간다.”
잠시 당황한 듯, 고민하는 듯 망설이던 은태가 긴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알았어. 나갈게.
은태의 상태를 고려해 내가 그의 집 근처로 가겠다고 했다. 집으로 찾아가도 되지만, 차라리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 낯선 곳에서 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은태의 집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작은 골목에 위치해 한낮에는 사람들이 많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은태가 괜찮다고 말해, 그의 집 근처에 오면 종종 들렀던 곳이다. 아마 은태와 현아도 이곳에서 가끔 데이트를 했을지 모르겠다.
“얼굴이 왜 그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 은태가 카페에 들어왔다. 모자에 선글라스를 썼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초췌함에 깜작 놀랐다. 늘 말끔하던 얼굴이 까칠하다 못해 앙상한 것이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는 좋아 보이네.”
“응. 덕분에.”
“지금 비꼬는 거니?”
기운 없는 목소리가 딱히 감정도 없이 물어왔다. 확실히 좋은 의미로 해석하기 힘들겠지만 정말 비꼬려는 게 아니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이야. 네 덕분에 정말 내게 중요한 게 뭔지, 중요한 사람이 누군지 깨달았거든.”
비 내린 땅이 단단해 지듯, 믿었던 사람이 선물한 뜻밖의 위기에 나는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물론 이왕이면 편안하고 무탈한 편이 좋았지만 그랬다면 좀 더 돌고 돌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랬냐고 안 물어?”
얼마간 우리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초조해 보이는 은태였다.
“네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 해도 돼. 이유가 꼭 중요한건 아니니까.”
“차라리 화를 내거나 때려.”
“싫은데 그러면 너만 속 편해질 거 아냐?”
빈정거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에 원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마음 고생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낸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의 잘못이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용서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용서 할 수 있도록,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온 것이다.
“미안해.”
무겁고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 한마디에 그의 고뇌와 후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어. 그래도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너를 잃어버린다는 생각에 무작정 화가 나고 견딜 수가 없었어. 네가 돌아선 건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담담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작정이었다. 내 말은 좀 더 아끼고 생각한 후에 전하기로, 그러나 그 부분에서 나는 견딜 수 없어 참견하고 말았다.
“넌 한참 잘못 알고 있어. 난 너한테 한 번도 돌아선 적 없어.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했지만, 그래서 남아있던 마음이 다 달아날 정도였지만……. 그래도 친구로 네 옆에 남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
“넌 어떻게 나를 이렇게 모르니?”
선글라스에 가려진 표정인데, 이상하게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무너질 듯 말 듯한 눈으로 나를 위태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진실을 눈앞에 두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내가 너한테 쓸데없는 존재는 아니었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정도로 서운했다는 걸 보니.”
“무슨 소리야. 네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 현아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라.”
어쩌면 예전의 나라면 기뻐했을 말인지 모르겠다.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늘 내가 좋다고, 내 존재가 유일하다고 늘 말해주었다. 비록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더라도, 내가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그의 말이 나를 그의 곁에서 견디게 했었다.
“변명 같겠지만,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너는 내가 누구보다 믿고, 언제나 찾을 수 있는 내 친구로만 있었잖아. 늘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나 말고는 결코 다른 특별한 사람은 절대 만들지 않았지. 네가 왜 그런지 알면서도 난 내가 편하고 좋으니까,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너도, 너를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해질 권리가 당연히 있는 건데…….”
은태는 고해성사 같은 말을 힘겹게 마치고 지친 듯 선글라스를 벗고 두 손을 가져가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우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울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손을 뻗을까 하다가, 멈칫했다. 아직 내 마음이 그 정도로 회복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너 내가 너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은태가 자신의 기분을 어느 정도 갈무리하기를 기다려 물었다. 이제와 꼭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왕 털어놓고 이야기 하는 거 마음속에 작은 돌부리라도 걸리지 않고 해결하고 싶었다.
“언젠가 술 마시고 얘기 한적 있어. 넌 엄청 취해서 전혀 기억 못할 거야.”
“내가……. 언제?”
황당하긴 했지만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오래라 같이 술을 마신 일은 수 없이 많았다. 그는 힘든 일만 있으면 나를 찾아와 술을 마시자고 했었다. 대부분은 녀석이 먼저 쓰러졌지만, 가끔 나도 머리끝까지 차오르게 취할 때도 있었다. 필름이 끊긴 일이 절대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 엄청 고민 했었다. 근데 네가 곤란할까봐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거지.”
“전혀, 기억 안나.”
“그럴 거야. 그래서 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 했어. 모른 척 넘기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뭔가 더 물어볼게 많았지만 왠지 그걸로 만족했다. 어차피 이제는 지난 시간의 감정이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미련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사랑했던 감정에 미련이 없는 것이 맞겠지만. 그렇다고 그와의 인연을 끊어낼 생각은 없었다. 그런 감정만이 아니라도 은태는 내게 의미 있는 친구였다. 비록 좀 어리석고 이기적인 녀석이긴 하지만 그에게도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분명 존재했다.
어떻게 인사를 하고 일어나야 할까 고민을 하는데, 카페 주인이 틀어놓은 텔레비전에 내가 출연한 드라마의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여주인공과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기도 했고, 열심히 외고 또 외었기에 곧 나올 대사가 떠올랐다.
“이제 그만 너를 놔줄게.”
은태는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텔레비전 속의 나를 발견했다. 거기서 여주인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아니 내가 아닌 내가 연기한 정재희를 보고 있었다.
“대신 네가 돌아왔을 때 네가 아는 나는 없을 거야. 난 완전히 달라져 있을 거야. 더 이상 네가 첫 번째도 아니고, 너만 바라보고 있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아직 난 내 마음속에 그에게 남은 마음을 어떤 식으로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움보다는 안타까움 이, 안타까움보다는 애틋함이 더 컸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와 지낸 시간을 의미 없게 만들 수 없었다.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 보게 되면 그를 편안 친구로 대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꼭 돌아와줘.”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남기고 가게를 나왔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았다.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서 더는 아무런 충격도 동요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내 감정과 그 감정을 품은 오랜 시간을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마음이 이상하게 쓸쓸하고 축축했다. 날씨까지 우울한 회색빛에 뺨을 스치는 바람도 차갑기만 했다. 회색 하늘을 명하니 바라보다 흰 먼지 같은 것이 천천히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하니 그대로 손안에서 녹아 버렸다. 눈이었다.
눈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지며 광대뼈가 올라갔다. 어린애도 아닌데 눈 하나에 기분이 이렇게 바뀌다니. 하지만 아무리 어른이 돼도 첫눈이 내리는 날은 이상하게 맘이 설렜다. 첫눈이 내리면 늘 생각나는 사람이 같았는데, 올해는 전혀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여보세요. 지금 뭐해? 창밖 좀 한번 봐봐.”
나는 현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의미 있는 첫눈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맞기 위해서였다.
에필로그. 1년 후, 인터뷰
“우와, 밖에 눈 정말 많이 내린다. 그쵸?”
오랜만에 만나는 기자는 통통한 몸매에 두꺼운 옷까지 입어서 왠지 귀여운 인상이었다. 인터뷰를 여전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래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이었기에 연락이 왔을 때 흔쾌하게 응하기로 했다.
“네. 올해는 눈이 참 많이 내리네요.”
“눈 오면 좋은 소식도 같이 오잖아요. 축하드려요! 황룡영화제에서 신인상 수상하셨잖아요!”
“하하. 네. 감사합니다.”
요즘 어딜 가나 비슷한 인사를 듣고 있어 민망했지만 축하해주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져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오고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황송하게도 얼마 전 상을 받게 되었다. 수상 소감에서도 말했지만 이 모든 영광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준 ‘최현오’ 감독님 덕분이었다.
“우리 처음 본 게 거의 1년 전이죠? 요즘 영화 찍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잘 되가나요?”
“네. 촬영 한창이라 좀 정신없어요.”
“그때보다 훨씬 표정도 목소리도 좋아지셨어요. 한층 여유가 있고 편안해 보이신 달까.”
“그래요? 아무래도 인터뷰를 많이 하다보니까.”
“아뇨. 단순히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혹시 애인 생기신거 아니에요?”
“요즘 그런 얘기 자주 듣긴 한데.”
“아니에요?”
대답 대신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있어도 없다 이야기 하는 게 좋다고 매니저가 당부하기도 했지만 나 또한 밝힐 생각은 없었다. 실제하는 내 애인은 조금 서운해 하겠지만.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드디어 세상에 이름을 알리셨어요. 연속으로 좋은 작품에 출연하시고 연기력을 인정받으신데다가, 이렇게 신인상까지 받으셨잖아요.”
“신인상을 받으려니 쑥스럽더라고요.”
“주연상을 받아도 아깝지 않은 연기였는데, 왜요?”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좋긴 한데 부끄럽다는 거였어요. 데뷔한 지 오래 되었으니까요.”
“1년 새에 역할도, 인생도 조연에서 주연으로 업그레이드되신 셈이네요?”
“네. 하지만 저는 예전 무명 생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연생활을 오래하면서 느낀 게 많습니다. 저는 늘 조연이라고 해도 주연 못지않은 인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연기 했어요. 물론 누구도 주인공 아닌 주인공 주변 사람의 이야기는 긍금하지 않았겠지만 저는 늘 궁금하고 마음이 쓰였거든요.”
모든 것이 그저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지만 누군가의 삶을 연기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제 인생이 조연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결국 누구나 자신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좌절하고 비관적인 생각을 하긴 했지만,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미련스러울 정도로 꾸준한 인생을 살아왔다. 누군가에 대한 마음은 결국 이루지 못하고 끝이 났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고 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좌절해봤기에 또 그런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문득 들기도 하지만 지금은 두려움을 갖기 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이야, 나 감동했다. 누구나 본인 인생의 주인공?”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가 돌아가는 것을 보자마자, 엿듣고 있던 이가 불쑥 다가와 참견을 했다. 아마 아까부터 입이 근지러운 것을 한참 참고 있던 모양이었다.
“놀리지 마. 나도 똑같이 갚아준다.”
“내가 뭘?”
“네 인터뷰 기사야 말로 완전 오그라든다고.”
“오그라 들어? 어떤 부분이?”
본래 오늘은 현오와 모처럼 데이트하기로 한 날이었다. 인터뷰 할 때 말했던 촬영으로 바빠서 거의 2주만의 만남이었다. 모처럼 느긋하게 데이트를 하는가 했는데 경준이 깜빡하고 인터뷰 스케줄을 말해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함께 왔던 것이다. 그냥 다른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할 걸.
“암튼 오래 기다렸어. 생각보다 인터뷰가 길어져 버렸네.”
“아니. 덕분에 다음 작품 아이디어를 얻었어.”
“다음 작품? 어떤 건데?”
“늘 조연만 전전하지만 연기를 끝장나게 잘하는 명품 조연 배우 이야기야.”
너무 급조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출처가 어딘지도 뻔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아냐. 진짠데?”
처음엔 또 사람을 놀리는가 싶어서 기분이 나빴지만, 현오가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노트 위에 적혀 있는 문장들을 보니 장난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정말 할 생각인가?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내 영화가 아닌 그의 영화였다.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뭐, 영화 얘기는 나중에 하고. 배도 고프니까 나가자.”
현오는 한참 앉아있어 몸이 찌뿌둥한지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모처럼의 데이트에 처음인 것처럼 설렜다. 아무래도 밖에 내리는 눈도 한몫 하는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데이트가 반가운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집에서 작업하는 동안에는 춥다고 패딩만 대충 걸치고 다니던 사람이 몸에 붙는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에 머리까지 뒤로 넘겼다. 만났을 때, 어디 결혼식장이라도 다녀왔는 줄 알았다.
“눈도 오는데, 어디로 갈까?”
어디를 갈까 좀체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이럴 때 늘 센스를 발휘해 목적지를 정하는 사람은 그였다. 그의 손을 잡으면 어딜가도 좋은 곳에 다다를 게 분명했다.
작년 여름 언저리에 그가 내게 영화에 출연해 달라 이야기하며 말했을 때도 그랬다. 내 자신을 믿지 못하고 망설이는 답답한 나를 향해 그는 말했다. 자신을 따라오면 된다고, 자신을 믿으라고. 그리고 그를 따라 온 곳이 바로 지금, 이곳이었다.
“너랑 있으면, 어디든 좋아.”
그에게서 망설임 없이 단호한 답이 흘러나왔다. 좀 어이없고 닭살스럽긴 했지만, 이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사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란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제는 무엇을 해도, 어디를 가도 두렵지 않았다. 내가 길에서 어긋나 방황을 해도 무조건 내 곁에서 나를 붙잡아줄 그가 있으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