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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사막 외전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原型 장미와 사막 외전 22

文集 220512

13 0 2022-5-12 09:11
[설탕]장미와 사막_외전







chapter. 1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키스는 지금까지 중 어느 것보다도 상냥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집요한 면이 있었다. 마치 이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처럼 대공은 니콜라에게 입을 맞춰 왔다.

  한동안 젖은 소리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으음....”

  니콜라는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전히 피곤했으며, 짙은 키스의 사이사이 숨을 쉬는 것만으로 벅찼다. 키스가 길어지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심지어 그것은 조금씩 더 거칠어져, 그가 어디까지 들어오려는지 자못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뜨거운 혀가 입안 깊숙한 곳까지 침범해 타액을 남김없이 훑어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하아....”

  더는 못 견디고 니콜라는 고개를 뒤로 빼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호흡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평소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디가 다르냐고 하면 딱 짚어 말하기는 어렵다. 대공은 언제나처럼 웃는 낯이었고, 사막에서와 달리 완벽하게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겉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화사했지만 자세히 보면 대공은 피곤해 보였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평소보다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사막을 며칠간 쉬지 않고 이동할 때조차 조금도 피곤해 보이지 않던 사람인데도 말이다.

  마치 며칠 밤을 샌 사람 같다. 전체적으로 묘하게 푸석해 보인다고나 할까.

  ‘푸석하다니.’

  로사 알렉세이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가 있다면 그것일 것이다.

  “니콜라.”

  어느 새 침대 위로 올라 와 젖은 입술을 핥는 대공은, 니콜라와는 달리 조금도 그만 둘 용의는 없어 보였다. 그가 숨을 고르는 동안 대공은 여유가 없어 보이는 눈으로 니콜라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제 입술을 초조하게 핥았다.

  “열어, 니콜라...응?”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그게 그의 인내심의 최대치였나보다.

  그 동안 로사의 표정이나 눈빛을 자세히 볼 여유가 없었던 니콜라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세에 압도당해 머뭇거리며 입을 벌렸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니콜라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단지 기분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마치 이 입맞춤으로 니콜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 느껴졌다. 니콜라는 머리가 어지럽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머릿속이 희게 비어갔다.

  

  

  품 안에서 축 늘어지는 몸을 받아 안으며 로사는 혀를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니콜라는 말이 잠들었다였지 실제로는 거의 혼수상태에 가까웠다. 열 손가락에 꼽고도 남을 만큼의 밤이 지나는 동안 쉽사리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고작 한 번의 입맞춤이 그의 성에 찰리가 없었다.

  “.......”

  한 발자국 뒤늦게 방안에 들어온 산드로가 발길을 멈추고 로사의 눈치를 보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방 안팎으로는 십수명에 달하는 시종과 호위병이 깔려 있었지만, 모두 대공의 눈치를 보느라 침대에서 멀찌감치 물러서 있었다.

  “저하?”

  산드로가 우물쭈물 대공을 불렀다.

  이쯤해서 대공의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낸다고 해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지난 열흘간 대공의 기분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니콜라를 기다리며 보낸 시간과 그 동안 대공이 두르고 있던 저기압을 고려하면, 니콜라가 정신을 차린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치 짧았으니까. 성에 안 찼겠지. 분명 성에 안 찼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환자이건 말건, 방금 전에 깨어나건 말았건 달달 흔들어서라도 그를 다시 깨우고 말리라던 주변의 예상을 깨고 대공은 니콜라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것도, 매우 고이.

  “의사를 불러.”

  “아, 예.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좀 전부터 와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언제 끼어들어야 할지 몰라 끼어들지 못 했던 태의원장이 황급히 그의 뒤에 와서 섰다.

  황실 태의원의 원장은 니콜라가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줄곧 그곳에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본래 황제의 병을 치료하는 게 업이지만, 얼마 전부터는 황제의 병환보다도 눈앞의 이 청년을 살려내는 게 더 중요해진 참이었다. (“어차피 죽을 노친네를 돌보는 일보단 훨씬 보람이 있을 거야. 너는 도합 세 명의 목숨을 살리게 될 테니.” 태의원장이 대공의 앞에 불려와 무릎을 꿇었을 때 들었던 말이다. 대공이 말한 세 명중 최소한 한 명은 태의 자신의 목숨을 뜻한다는 사실 정도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매우 잘 인지할 정도로는 대공을 잘 아는 자였다.) 태의가 그의 손에서 기절한 니콜라를 넘겨받아 맥을 재고 필요한 처치를 받는 동안 대공은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 시선이 하도 강렬했던 덕분에 태의원장은 불쌍하게도 진료 내내 손을 덜덜 떨었다. 행여나 실수라도 할까 봐서다. 말해 무엇하랴, 태의원에도 대공에 대한 소문은 퍼져 있었고 그 대부분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을.

  손을 내려놓고 태의가 말했다.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니콜라는 그냥 다시 잠든 것에 불과했다. 주변에 있던 몇 명의 수행기사가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태의의 옆으로 다가간 산드로가 물었다.

  “어째서 못 일어나시는 거요?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고비는 넘긴 거라고 하지 않았나?”

  “체력이 떨어져서 그렇지요. 제아무리 기사출신이라 해도 열흘이나 누워 있으면 근육이 빠지기 마련이고, 움직이지 않으니 근력이나 폐활량도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본인의 진료엔 문제가 없으나 대공이 기껏 깨어난 병자를 무리시켰기 때문이라는 말을 어떻게든 완곡하게 돌려 하는 말에 산드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두 사람 다 대공을 쳐다보지는 못 했지만.

  하기야, 고작 입맞춤 한 번에 숨이 모자라 허덕이는 것에는 그런 영향이 클 터였다.

  “첫 키스하는 처녀도 아니고.”

  로사는 투덜거렸다.

  그것은 충동적이었으나 일단 시작하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다. 입맞춤 한 번은 성에 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로사에게 지난 열흘간의 초조한 기다림에 상응할 만큼의 확신을 주기도 어려웠다. 앞으로도 그에게 이런 식의 키스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말이다. 다시 말해, 온전히 자신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확신.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되나?”

  “당분간은 후유증이 있을 겁니다.”

  로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후유증이라니?”

  “신체가 기능을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게 얼마만큼인데?”

  “장담하기 어렵습니다만...약기운이 다 빠질 때까지는 며칠일 수도 있고 몇 주일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본래 강녕하신 분이니 머지않아 건강을 되찾으실 거라고 봅니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대공의 기에 눌려 태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워낙에 치명적인 독이었는지라.”

  “.......”

  대공은 태의가 무심코 꺼낸 ‘독’이라는 단어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랬겠지.”

  잠시간의 침묵 후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산드로는 눈치 없는 늙은 의사를 반쯤은 동정하고 반쯤은 답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고, 이 사람아. 그 말을 꺼내면 어쩌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살리고자 노력하는 니콜라 데지아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이유는 사막에서 당한 습격 때문이었지만, 결국 일을 그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대공 자신이었다.

  대공이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 굳이 말을 꺼내 대공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잖아도 저 성질머리에 본인의 뼈아픈 실수 같은 걸 인정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대공은 하루에도 여러 번 황궁을 들락날락했다. 해가 지면 반드시 니콜라가 있는 곳에 들러 밤새 그를 지켜보고 나가곤 했다. 수도까지도 쉬지 않고 달려온 대공이었으니 그간 거의 잠도 자지 않은 셈이었다.

  드쉬어의 네 형제들이 이것저것 섞어서 만들어낸 약물은 조잡했으나 강력했다. 무엇보다도 이렇다 할 해독제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면, 그들이 사막 출신이자 아이를 가진 니콜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날붙이가 아닌 독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사형제가 독초를 조합하는 방식이 니콜라의 어미가 하는 방식과도 비슷해, 같은 핏줄인 니콜라가 거기에 내성이 있었던 것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니콜라가 목숨을 구한 이유는 반 이상이 그 스스로의 행운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반은, 굳이 말하자면, 대공이 대공이었던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사막 한복판에서 발자국조차 남지 않은 모래 위의 흔적을 따라 늦지 않게 니콜라를 구해 낸 것부터가 기적에 가까웠다.

  독이건 약이건 흔히 알려진 표준적인 제조법이 있기 마련이지만 보통은 기존의 방식에 특별한 기술을 추가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약물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약물은 만들어낸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니콜라에게 독을 먹인 자들이 스스로 독의 조제법과 그 해독방법을 밝히지 않았다면, 열흘은커녕 백 일이 지났어도 니콜라가 깨어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서 스스로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당연히 그 자들이 대공에게 해독법을 갖다 바치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대공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 자들은 말 그대로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괴로운 경험을 하고 난 뒤 하룻밤을 버티지 못 하고 해독법을 불었다.

  그리고 지금은 수도 외곽에 위치한 대공의 사유지에 있는 감옥에서 대공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성으로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그 자들에겐 재판이 없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 자들의 처분은 어떡할까요?”

  “누구 말이야?”

  “드쉬어 가의 네 형제들 말입니다. 지금 오르빌에 있는.”

  “그러고 보니, 그 자들이 있었지.”

  대공이 잊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그가 다시금 태의를 돌아보고 확인하듯 물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다 이거지.”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니콜라를 구해 오면서 대공은 그들에게 선언했다. 그들의 목숨과 그것을 끝내는 방식은 오로지 니콜라의 목숨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열흘 만에 니콜라가 깨어났으므로, 그들은 이제 죽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공이 니콜라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약속은 지키겠다.”

  “알겠습니다.”

  산드로는 의외로 관대한 처분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그리 가엾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만약에라도 니콜라가 죽었다면 그들은 살아서 죽음이 차라리 기꺼워질 정도로 괴로워질 예정이었으므로, 이 정도면 꽤나 관대한 처우이자 적합한 징벌이었다.

  그 동안 니콜라가 깨어나길 바라던 사람은 대공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산드로 또한 니콜라가 깨어났을 때 그야말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냐하면 니콜라를 저 지경에 처하게 만든 데에는 산드로 본인의 역할도 끼어있었으니까.

  애초에 산드로가 사막의 떠돌이들을 수소문해 드쉬어라는 성을 가진 일족을 찾아냈던 이유는 니콜라 데지아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미에 공작의 미망인이 그 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아냈기 때문이었을 뿐, 데지아라는 성이 사막식으로는 그렇게 읽힌다는 사실도 추후에야 알았다. ‘미리 알았으면 절대로 안 그랬지.’ 산드로는 억울해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자신마저도 인생 종칠 뻔 했는데, 그랬을 리가.

  거래에 응해 온 자들은 그들 집안 내에서도 말썽꾼들로, 이미 애저녁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자들이었다. 일족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사막에서도 손쓸 수 없을 만큼 말썽을 부리면 쫓겨나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그들은 드쉬어라는 이름을 가지고만 있을 뿐 니콜라와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대공과 함께 있는 니콜라를 굳이 사막의 경계선까지 쫒아와 납치해 간 이유는 대공의 일행이 사막을 벗어나게 되면 더는 쫓아올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큰 돈벌이였으므로 놓치기 아까웠던 것이다.

그자들이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대공이 찾고 있는 자가 대공과 함께 있는 시점에서 그 사실을 먼저 말했어야 했다. 당시 산드로는 니콜라의 정체를 전혀 눈치 채지 못 했기 때문에 다미에 공작의 아들을 죽이라는 대공의 명령을 그대로 전달했고, 그 자들은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계약을 이행하는데만 주력했다. 아마도 푼돈이나 더 뜯어낼 요량이었겠지.

  하지만 그 자들은 자신들이 손을 댄 사람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으며, 그 일로 받아야 할 댓가도 알지 못 했다. 혹여 돈을 받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는 했으나 그 후 돌아올 대공의 분노를 예상치 못했다.

  멍청한 자들이었다.

  고작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으나 산드로가 보기에 그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목을 치는 정도로 끝난다는 자체가 그들이 대공에게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비였다.

  무엇보다도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대공에게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일평생의 반을 그의 수행기사로 지낸 산드로로서도 정확히 짐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만큼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대공의 분노는 차갑고 격렬했다.

  산드로는 침대에 누운 니콜라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살아서 다행이지.’

  만약에라도 일이 잘못되었다면 그 뒤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산드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사는 시선을 내려 자신이 간신히 죽음으로부터 빼앗아 온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이 각도에서 니콜라의 얼굴을 들여다 본지도 꼭 열흘 째였다. 잠들어있는 남자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안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일어났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 남자는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더군다나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의 명령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일 뻔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로사는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살아오면서 거의 후회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남자였지만, 아마도 지금 느끼는 감정이 가장 그것과 비슷할 터였다.

  니콜라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그가 느낀 상실감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무언가를 실질적으로 잃어버린 적이 그가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령 잃더라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다시 빼앗아오면 되는 일이니 잃지 않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누군가가 완전히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대한 공포감은, 로사 알렉세이의 인생에는 없던 감정이었다.

  이전까지 그에게 중요하고도 가장 선명한 감정은 욕망이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가장 익숙한 방식은 빼앗는 것이었다. 그는 황제가 찬탈해간 제위나, 북부의 땅 대신 새벽의 빛이 가장 먼저 닿는 비옥한 평원, 만인지상의 이름으로 지어진 궁전이 가지고 싶었다.

  그리하여 갖고 싶은 것을 가져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애정 또한 그에게는 무의미했다.

  언젠가부터 로사는 자신이 니콜라에게 어떤 감정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기 훨씬 전부터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발견한 더러운 뒷골목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때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한밤중의 골목에서 마차를 타고 가는 그를 마주쳤을 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훨씬 뒤에, 분수가 반짝이는 정원을 가진 사막의 성에서 그가 자신에게 입맞춰왔던 순간일지도.

  욕심이 생겼다. 부정하지 않겠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어졌다. 그래서 니콜라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핑계 삼아 그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음에 기뻐했다. 억지를 써서 옆에 있게 만들었다. 거기에 굳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떤 것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법이다.

  잃어버리면 다시 되찾으면 된다. 빼앗겼다면 도로 빼앗아오면 된다. 그런 로사의 방식은 이번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죽음만큼은 빼앗아간 것을 돌려주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로사는 분노를 넘어서는 무력감을 느꼈다.

기도 같은 것은 할 줄 몰랐으며 오롯이 자기 자신만을 의지해 살아온 이 남자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에게 부탁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정도로 강렬하게 바랐다. 때문에 니콜라가 눈을 뜬 순간이 로사에게는 신이 손짓한 순간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 참 이상하군.’

  진료를 끝낸 후 그곳을 나오며, 태의원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봐요, 원사 영감.”

  태의원장의 뒤로, 뒤따라 나온 산드로가 그를 불러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분에 대해서는 당분간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약속하실 수 있죠?”

  태의가 이곳에 불려왔을 때부터, 니콜라의 신원이나, 그가 생사의 기로에서 지금 막 돌아왔다는 사실은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게끔 미리 단단히 약속해 두었다. 황후전에서도 침실을 나와서는 니콜라를 두고 ‘저 분’이라던가 ‘그 분’ 하며 애매한 호칭으로만 칭하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어디서 누구의 귀에 들어갈지 모르는 탓이다. 비록 외부인이 쉽게 들락거리지 못 하는 장소라고 해도 시종이나 경비의 귀조차 조심해야 하는 장소가 황궁이었다.

  무엇보다도 니콜라가 현재 임신 중이라는 사실은 반드시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끔 다짐을 받은 바 있었다.

  “특히, 그분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절대로 함구해 주십시오. 미리 알려지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아아, 그랬지요. 알겠습니다.”

  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내의 몸에 아이라니. 설령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 해도 바로 믿는 경우보다 반신반의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거다.

  대학에서 의술을 배워 황궁에 들어와 태의원 생활만 40년, 황제의 몸을 돌보는 원사가 된지는 올해로 12년차인 나이든 태의에게조차 그와 같은 남성임신은 듣도 보도 못한 경우였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진 못했으나 니콜라가 회임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하게 놀랐다.

  수도 출신의 의사인 그에게 남성 임신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더 적합한 의사를 사막에서 수소문해 데려오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다행히 황실 태의를 폼으로 12년이나 해 먹는 건 아니었으므로 다행히 대학과 황실의 서고를 죄다 뒤져 관련 자료를 찾아 니콜라에게 적합한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남성 임신이라 해도 여성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점이 도움이 되었다. 다행히 아이도 건강한 편이라 그 와중에도 별 일 없이 잘 자라주고 있다.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가 다행일지는 모를 일이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아이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대공임이 분명했다.

  니콜라의 얼굴도 눈에 익었다. 분명 황실 근위대에서 일하던 남자였다. 데지아 중위였던가. 황녀의 호위기사로 여러 번 내궁까지 왔었기에 알고 있었다. 게다가 태의의 기억이 맞다면, 데지아 중위는 황녀를 쫓아 추적대가 떠날 때 대공과 함께 떠났던 사람중에 한 명이었다.

  그는 이쯤에서 이게 말이 되는 일인지 판단하기를 포기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남자가 임신했다는 사실보다 저 근위대 기사가 대공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앞뒤 사정은 모르겠으나, 알고 저지른 일은 아닐 테고 반쯤은 사고겠지. 태의는 단정지었다. 그의 견해로는 수도에 살고 있으면서 제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대공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을 리가 없었다. 여자라면 대공비가 될 욕심에 또 모를까, 중위는 어느모로 보나 남자였고.

  아이를 탐탁치 않아할 쪽은 대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낳기 싫어 남자만 안고 다닌다는 인간이다. 황실 핏줄도 아닌 사내의 몸에서 제 아이를 보고 싶어 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태의는 분명,

  ‘죽이겠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고 보니 그건 아니었다. 죽이려고 했다면 애저녁에 죽게 내버려두고 남았지 태의원에서까지 사람을 불러 치료를 하게 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으로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니면 지우려나?’

  당장은 살려야 할 이유가 있어 살려 두지만 그 뒤에 죽인다거나, 혹은 청년은 살려두되 아이를 지운다거나. 아무튼 그런 짓을 하겠지, 분명해. 어쨌든 대공이 낳게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거기까지도 본인의 착각인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대공의 오른팔이라는 수행기사는 지금 두 손을 맞잡으며 태의에게 묻고 있었다.

  “괜찮은 게 맞겠죠?”

  “일단 경과는 괜찮습니다.”

  “두 분 다요?”

  “본인뿐만 아니라 태중의 아기씨도 당장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출산 시까지 각별히 주의는 해야 할 테지만 문제없을 걸로 보입니다.”

  산드로가 한숨을 탁 쉬었다.

  “...휴, 한숨 놓았네. 저 분이나 아이에게 문제 있으면 여러 사람 곤란해질 판이라...잘 좀 부탁합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요청해주시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비밀은 유지해 주십시오.”

  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좀 전에 방을 나오면서 보았던 광경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가 일어섰을 때, 침대 옆에는 대공 혼자 남아 있었다. 수행기사들과 시종들마저 물리고 침대가에 앉아 니콜라를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대공의 옆모습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분명 미려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이 남자의 머릿속을 낯가죽의 형태로 미루어 짐작해선 안 된다. 황궁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달라 보였다.

  가만히 니콜라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들어 있었다. 문득 얕은 한숨을 쉰 남자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상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니콜라.”

  태의는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무심코 멈춰 섰으나, 뒤에서 나오는 대공의 부하에게 떠밀려 문 밖으로 나가야 했다.

  순간이나마 엿본 대공의 표정은 인상적이었다. 대공이 웃는 얼굴은 그전에도 여러 번 보았지만 그것은 늘상 차가운 눈과 더불어 그저 짐승이 웃는다는 인상밖에 주지 않았다. 태의는 거기에 한 번도 감명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대공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괴로워 보였다. 그런데 태의에게는 그 쪽이 보기가 좋았다. 안도와 염려가 뒤섞인, 대공에게서 본 중 가장 인간다운 표정이었다.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단 말이지?

  얼굴 같은 거 믿을 게 못 되고, 특히나 그게 대공의 얼굴이라면 더더욱 그렇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나이든 의사는 희미하게 감탄했다. 짐승 새끼가 사람이 되었구만.

  어찌되었건 그 날은 니콜라 데지아가 열흘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날이었다.

  

  ++

  

  알렉세이 대공이 사막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그가 수도를 떠난 지 근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건강이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진 황제가 더 이상은 병상에서조차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된 시기와 고작 며칠 사이를 두고서였다. 계승자의 등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타이밍이다.

  대공의 귀환에 수도는 떠들썩해졌다. 과연 대공이 황제의 유언을 이행했는지,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혼란의 전조와 무성한 소문을 몸에 두른 채 대공은 황궁으로 향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황후전의 문을 열어 주인 없이 방치되어 있던 그곳에 자신의 신부를 눕힌 것이다.

  대공이 수도로 들어와 첫 번째로 향한 곳이 대공저가 아니라 황궁이었다는 사실이나, 황후전에 자신의 ‘신부’를 데려간 행위는 어느 모로 보나 상징적이었다. 그가 황제의 유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행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앞으로 저 궁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를 만천하에 명백히 알린 것과 다름이 없다. 때문에 그가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은 신부를 무려 황후전에 들어 앉혔어도 아무도 대공에게 반대하지 못했다.

문제는, 대공의 결혼 상대에 대해 아무도 아는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궁금하기야 누구나 궁금해 하고 있었으나 대공측에서 거기에 대해서 입을 다문 채 전혀 밝히지 않았다.

  그 후로 보름이 지났다. 황후전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아 걸린 채였고,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 당했다. 심지어 황후전의 출입 시종들조차도 대부분이 그들의 새 주인의 얼굴을 아직 보지 못 했다. 신부의 정체는 그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었다.

  

  

  대공의 결혼상대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는 니콜라 데지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닌 게 아니라 니콜라는 자신이 황궁의 어디쯤에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황궁 근무만 십년 가까이 했고, 미하엘 덕분에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황궁 내의 어지간한 곳은 모두 출입해 보았지만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처음 보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천장이었다.

  누운 상태에서 가장 처음 보이는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는 처음 이 곳에서 눈을 떴을 때 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지.’

  며칠 전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황궁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도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이 니콜라로서는 처음 보는 낯선 장소였던 탓이다. 수도에 돌아왔다는 사실조차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사막에 있다 하면 더 믿어질지 모를 정도다.

  문제는 아무도 그에게 여기가 어디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럴 기회도 없었다. 그는 잠들었다가 지금 막 깨어났을 뿐이었으니까. 꽤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수도에 와서 열흘째 되는 날 눈을 뜬 뒤로도, 니콜라는 한동안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또다시 일주일 가량이 지난 후였다.

  시선이 닿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밝았으나 조용했다. 널찍한 침대의 사방으로는 진줏빛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덕분에 천에 가려 외부가 바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딱히 주변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 창문을 열어 둔 자리가 있는지 산들바람이 느껴졌다. 바람에 밀려 살짝 열린 휘장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발치를 따끈하게 데우고 있었다.

  ‘아침인가?’

  며칠 전에 비하면 한결 몸 상태는 나아진 듯 했다. 그 사이에도 잠시 잠깐 일어나 식사도 하고 약도 먹었다. 비록 한 시간을 채 못 앉아 있고 도로 잠들어버리는 일이 다반사이긴 했지만 말이다. 기운은 좀 없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기에 니콜라는 우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어디 단단한 데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옴죽달싹도 할 수 없었다. 니콜라는 당황했다. 하도 누워만 있었던지라 근육이 모두 굳어 버린 건가?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아니면 설마 일어나는 법을 잊어버렸나? 평소 자신이 어떤 식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는가를 다시 되짚어보던 그는 문득 몸 위에 얹힌 팔 하나를 발견하고서 왜 자신이 움직일 수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니콜라의 시선이 팔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대공이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모르겠다. 대공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침대는 넓었으나 어째서인지 대공은 니콜라의 몸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이래서야 언제까지고 움직일 수 없다. 대공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니콜라가 몸을 비틀자 팔꿈치에 연결된 모양 좋은 이두근이 슬쩍 움직이더니 가슴께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무게감이 조금 아래쪽으로 옮겨갔다. 덕분에 팔이 자유로워졌으나 대공의 얼굴은 더 가까워진 결과를 가져왔다.

  ‘헉.’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마른 듯한 턱이 눈에 띄었다. 조금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고 있던 니콜라는 무심코 손을 들어 대공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잠든 모습에 홀려서 손을 대는 건 두 번째였다. 비록 첫 번째와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다르긴 했지만.

  “.......”

  그 순간 대공이 눈을 떴다.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접촉이었으니 놀라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한동안 니콜라를 들여다보았다. 눈동자가 새벽 햇빛을 받아 평소보다 더 새파랗고 투명해 보였다.

  놀란 건 니콜라 쪽이다. 손끝이 아주 살짝 턱에 닿았을 뿐이다. 거의 닿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이라 상대가 얼마나 예민한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하기야 대체 어떤 간 큰 자가 자고 있는 대공의 얼굴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그리고 니콜라는 그런 간 큰 짓을 본인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몇 초 뒤에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

  그는 서둘러 대공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대공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붙잡은 니콜라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가볍게 키스한 대공은 당황해서 얼어붙은 니콜라를 보며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꿈이군.”

  “...꿈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니라면 더 좋고.”

  로사는 입술 끝을 끌어올려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니콜라.”

  

  

  니콜라는 아직도 정신이 좀 없는 상태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어느새 사막을 떠나 여기에 와 있고, 시간은 훌쩍 지난 것 같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이상한 일이다.

  대공은 한동안 니콜라를 품에 안고 있었다. 니콜라는 점점 자세가 불편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꿈지럭대기 시작하자 대공은 니콜라를 더 세게 끌어당겼다.

  “아니, 조금만 가만히 있어. 내가 얼마나....”

  대공이 투덜거렸다.

  “저하.”

  “응?”

  “여기는 어딥니까?”

  대공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걸 지금 알려주면 재미없다는 듯이.

  물어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낼 수밖에 없다. 고개를 돌린 니콜라는 손을 뻗어 휘장을 걷어내려 했다. 창문이 열려 있다면 밖으로 보이는 풍경으로 위치를 짐작해볼 수 있고, 위치를 알면 여기가 어딘지도 대충 짐작이 갈 터였다.

  그러나 대공이 조금 더 빨랐다. 니콜라의 손을 잡고 다시금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대공이 말했다.

  “황궁이야.”

  “그건 알겠습니다만....”

  황궁 내의 어디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말하다 말고 니콜라는 대공의 손이 자신의 뺨에 닿아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새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지나치게 가깝다...라고 생각한 순간, 대공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니콜라.”

  “네?”

  뜨거운 것이 니콜라의 입술에 닿았다. 그와의 거리가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는 걸 니콜라는 입술이 맞닿고서야 깨달았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으나 피하지 못했다. “피하지 마.” 속삭이는 입술의 움직임이 입술 위에서 느껴졌다. 대공은 니콜라에게 입맞춰 왔다.

  삼켜지는 듯한 입맞춤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숨이....”

  “응?”

  “숨이 막힙니다, 저하.”

  고개를 돌리면 돌리는 대로 쫓아오는 입술을 피하며 니콜라는 하소연했다. 이대로는 기껏 깨어난 보람도 없이 다시 기절할 것만 같았다.

  간신히 놓여난 것은, 니콜라가 두 번째로 호흡곤란을 느끼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물가물해진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시야를 회복하자 바로 코앞에 보이는 대공의 얼굴은 조금 전 그대로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다소 한심한 기분으로 니콜라가 숨을 고르는 동안 로사는 고개를 숙여 다시금 그의 입가에 여러 번의 짧고 얕은 키스를 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여러 번 상대의 손에 의해 다시금 돌아오기를 여러 번, 간신히 벗어났을 때 니콜라는 입술만 애꿎게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든 니콜라는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대공이 니콜라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대공이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이쪽이 낫군.”

  “이쪽이라니요?”

  “살아 있는 쪽.”

대공이 눈가를 접으며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그는 줄곧 니콜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니콜라는 자신이 음식이라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보았다. 좀 전부터 묘하게 대공이 굶주린 짐승처럼 굴고 있는 탓이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니콜라는 그 앞에 놓여진 고깃덩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것도 짐승과의 사이에 가로막는 철창 따위는 없고, 오로지 짐승의 인내심에만 의존중인.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습니까?”

  애써 화제를 돌려 보았다. 아직 머릿속은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딘지는 알려주지 않아도 얼마나 지났는지 정도는 알려 주겠지.

  대공이 니콜라에게 되물었다.

  “어느 정도일 것 같아?”

  “글쎄요. 그 때 이미 남부 경계선에 가까웠으니까....”

  눈을 뜨고 보니 황궁인데 기억하고 있는 가장 마지막 장소는 사막이었으니, 그 기간이 제법 길었으리란 짐작은 하고 있다.

  그들이 사막의 경계선에 있었을 때, 수도까지는 며칠이 더 걸릴 예정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닷새쯤이고,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밤을 새워 달려온다 해도 꼬박 이틀 반은 걸리는 거리다. 그리고 최대한 하루쯤을 누워 있었다 치면....

  대충 계산해 본 니콜라가 물었다.

  “나흘 정도입니까?”

  “나흘?”

  대공이 피식 웃었다. 그의 반응에 니콜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급하게 오진 않았나? 하긴 남부 경계선과 수도까지의 거리를 사흘 안에 주파하는 게 말이 쉽지 보통 일은 아니다. 사흘 내내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말을 달려야 나오는 속도다. 그렇다면 평범하게 닷새쯤 걸렸다고 보고 계산하면....

  “일주일쯤 됐습니까?”

  대공은 니콜라를 바라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니콜라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중얼거렸다.

  “...일주일은 안 넘었을 텐데요. 거기서부터 수도까지 보통 닷새쯤 걸리니까....”

  “보름.”

  “...보름이요?”

  니콜라가 믿을 수 없어하며 되물었다. 보름이라면 한 달의 반이다. 설마 자신이 아무리 오래 정신을 잃었어도 보름이나 이러고 있었을 줄이야.

  스스로는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났다는 사실도, 수도에 돌아온 사실도 선명히 느껴지진 않았다. 체감으로는 하룻밤 정도가 지났던가 말았던가 하는 기분일 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좀 얼떨떨했다.

  “수도까지는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어. 우리가 수도에 도착한 건 보름 전의 일이야. 너는 열흘만에 눈을 떴지만, 그 뒤로도 회복되기까진 일주일 가까이 더 걸렸고.”

  “.......”

  “너는 보름 동안 깨어나지 않았어, 니콜라.”

  문득 낮아진 어조에 니콜라는 대공을 새삼스럽게 응시했다.

  보름간의 공백 때문인지 몰라도, 대공은 이따금씩 니콜라가 모르는 사람 같은 표정을 했다.

  ‘...걱정했나?’

  니콜라는 묘한 기분으로 로사를 바라보았다.

  ‘나를? 이 남자가?’

  본래 남을 걱정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다. 후회도 결코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고 해서 자신을 걱정해서였다고 생각하기에 니콜라의 자의식은 비대하지 않았다.

  ‘설마....’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살아난 건 요행이었다. 이대로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분명 사막에서 남자들에게 붙잡혀 독을 마시게 되었을 때 스스로도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으니, 아마 대공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돌아왔으니 반가워하는 것도 당연한가.’

  니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운이 좋았군요.”

  “...간신히 시간을 맞췄지.”

  잠깐 뜸을 들이던 대공이 대답했다. 시간을 맞췄다고? 대공이 사용하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니콜라는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아마도 대공 자신이 늦지 않게 수도에 도착했다는 의미겠지.

  황제가 죽기 전에 수도에 도착할 요량이었으니 말이다.

  한 발자국 뒤늦게 니콜라는 그들의 본래 목적에 생각이 닿았다.

  보름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탓에 상황판단이 조금 늦었지만, 그들이 수도에 도착하기 전을 되짚어보면 그야말로 시각을 다투고 있었다. 늙은 황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고 대공은 황제가 죽기 전에 수도에 도착할 작정으로 사막을 건넜다.

  그리고 보름이 지났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황궁이고, 대공도 느긋해 보였다.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대공은 무사히 수도에 입성해 계승권을 얻어낸 게 분명했다. 본인이 시간에 맞췄다는 말을 했으니만큼 최소한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대관식은 아직 하지 않았겠지?’

  니콜라는 생각했다.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해도 그간의 관례에 비추어보아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해보자면, 대관식 자체는 아마도 황제가 죽고 난 다음이 될 터였다. 설령 황제가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준비를 서두른다 해도 해가 바뀐 뒤에나 치러질 터였다. 황제의 대관식은 당대의 가장 크고 격식 있는 행사이므로 오래 걸리는 경우엔 준비에만도 일 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그 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산드로의 목소리였다.

  “저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대공이 밖을 향해 대답했다.

  “내가 나가지.”

  그러자 금세 바깥이 조용해졌다.

  사막에서는 산드로가 침실까지도 불쑥불쑥 들어오곤 했다. 물론 꼬박꼬박 허락을 받기야 했겠지만 니콜라의 입장에서는 그랬다는 얘기다. 대공이 산드로를 안으로 들이지 않는 건 평소답지 않았다.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왜 벌써? 아침이긴 해도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것 같은데.... 무심코 대공을 따라 일어서려던 니콜라는 대공에게 제지당했다.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조만간 바빠질 테니까 지금은 쉬어 둬.”

  “바빠진다고요?”

  “아마도, 여러 모로.”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떠올린 듯 대공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미소 자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까지 녹아내릴 듯이 달콤했으나 저 얼굴에 속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뇌리에 뭔가 불안한 예감이 스친 니콜라가 되물었다.

  “...여러 모로 뭐가 말입니까?”

  “대관식이 있을 테니까.”

  “대,” 니콜라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대관식이요?!”

  “그래, 대관식.”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몸도 성치 않은데 힘들게 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터무니없이 상냥한 대공의 말투보다도, 그 내용에 니콜라는 깜짝 놀랐다. 대관식을 한다고? 이렇게 빨리?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본래 대관식이란 준비에만도 몇 달이 걸리는 큰 행사다. 황제가 죽었을 때 다음 대의 계승자가 아직 정식 책봉되지 못했을 경우 약식으로 계승식을 하기는 하지만, 그 또한 제위를 빈 채로 놓아둘 수 없으니 하는 궁여지책에 가깝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니콜라는 문득 깨달은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그러면 대공이 곧 황제가 된다는 뜻이다.

  이렇든 저렇든 대관식은 대관식이고, 자칫했으면 자신이 깨어난 뒤 만나는 사람이 대공이 아니라 황제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현실로 와 닿지 않는 기분이다. 어안이 벙벙한 채 니콜라가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그럼, 저하께서는 곧....”

  “그래, 곧.”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기다려볼까 했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하자니 너무 늦을 것 같더군. 시간이 많지 않았거든.”

  해사한 미소를 여전히 입가에 건 채 대공이 덧붙였다.

  “네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아서 걱정이 많았어, 니콜라.”

  니콜라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대관식이 있을 예정이라면 바빠질 만도 하다. 하지만 왜 자신의 회복 문제가 거기에 같이 거론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가 늦어진다는 건지도. 남들이 일 년에 걸쳐서 준비하는 양을 고작 몇 주로 단축하느니만큼 그 준비가 한시를 다투는 건 알겠는데, 그의 회복이 늦어진다고 해서 차질이 생길 일은 또 아니지 않은가?

  “그렇군요....”

  “그래서 네가 시간을 잘 맞췄다고 말하는 거야. 하마터면 황실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대관식에 참석 못하는 황후가 나올 뻔 했으니.”

  “.......”

  지금 막, 뭔가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느라 모양 좋은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멍하니 보고만 있던 니콜라는 한 템포 늦게 되물었다.

  “...네?”

  대화를 따라가지 못 하는 니콜라를 향해 대공은 관대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이제 깨어났으니 정신이 없을 수도 있지. 걱정 마, 니콜라.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뭘 말입니까?”

  “대관식 말이야.”

  “아뇨, 제가 그걸 이해 못 한 게 아니라....”

  대관식이 무슨 뜻인지도 알고, 황후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알고 있다. 황제가 있고 결혼을 했다면 황후도 당연히 대관식을 하게 되겠지. 문제는 그걸 누가 하냐는 거다. 당연히 한 쪽은 대공이겠지만, 다른 한 쪽은? 니콜라는 여전히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말했다.

  “설마... 제가 합니까, 그걸?”

  “.......”

  이제와서냐는 얼굴로 대공이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니콜라?”

  뒤늦게 자신이 무언가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엄습했다.

  변명을 하자면, 니콜라가 수도에 와서 가장 처음 정신이 들었던 순간은 아주 잠시 동안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십 분 정도? 애초에 제대로 정신이 들지 않았던 상태였던 데다가 그 사이 잠들었다 깨고를 반복한 덕분에 니콜라의 기억은 상당 부분이 선명하지 못했다. 도중에 대공을 만났던 기억은 났다. 대공과 몇 마디를 나눴던 기억도 있었지만 이미 아주 희미해져 있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물었잖아. 대공비가 되고 싶은지 황후가 되고 싶은지.”

  대공의 말에 묻혀있던 기억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분명히 그 말을 듣긴 했다. 당시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 그럴 정신도 없었던 데다가 보통 그런 질문을 듣게 되면 누구나 반쯤은 농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말이 쉽지 남자 황후가 말이나 된단 말인가.

  그런 그를 대공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했다.

  “기억 안 나나, 니콜라?”

  “기억납니다만 그게 그런 뜻인지는....”

  “그 때 나는 네게 루비와 황금의 관을 씌워 주겠다고 약속했어.”

  기억하지 못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잊어버리지 않게끔 해 주겠다는 듯이, 대공은 힘주어 말했다. 한 음절 한 음절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덕분에 부정할 수도 없었다. 니콜라는 곤혹스런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어느 쪽이건 너는 황후가 될 거라고도 했지.”

  사실이었다. 대공은 그 말도 했다.

  맙소사,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건 간에 대공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니콜라를 황후로 삼겠다 말했던 것이다.

  대공은 니콜라의 손을 들어 올려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붉은 보석은 황후의 것이지.”

  “저하....”

  니콜라를 바라보며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그래서 니콜라는 대공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멀리서 봐도 그렇지만, 가까이서 보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화려한 얼굴이었다. 못 보는 사이 조금 마르지 않았나 여겼지만 오히려 그래서 이목구비가 더욱 선명해 보였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황국장미라는 그의 별칭에 그 이상으로 어울리는 사람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였을까, 니콜라는 눈앞의 광경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사이, 조만간 제국 황제이자 제국 제일의 미인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게 될 황국의 장미는 망설임 없이 그의 앞에서 선언했다.

  “니콜라, 너는 나와 결혼할 거야.”

  

  

  그것은 니콜라의 입장에서는 폭탄 같은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대공이 자리를 뜬 뒤에 혼자 남은 니콜라의 귀에 아직도 그 말을 하는 대공의 목소리가 선연히 울리고 있었다.

  ‘네게 루비와 황금의 관을 씌워 주겠어.’

  그는 대공에게서 청혼을 받았다. 그것을 미처 청혼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니콜라에게 더 이상은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정중하기까지 한 손등의 키스와 함께.

  손등의 키스 같은 건 살아오면서 평생 한 번도 받아본 적 없고, 받으리라 예상해본 적도 없었다. 니콜라는 그 순간 돌이 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다는 관용어구를 몸으로 체감했다. 손등에 아직 뜨거운 감각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런데 청혼을 받았다고 해서 기쁜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이건 좀 말이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으니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대공이다. 그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되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한 일이었겠지만 황후가 근위대 출신의 호위기사이리라곤 그 누가 이전에 예상했을까. 최소한 니콜라는 몰랐다.

  심지어 니콜라는 그 말에 대답도 안 했었다. 애초에 황후도 대공비도 원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고를 떠나, 바라지 않았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지. 차라리 농담이었다면 더 믿어졌을 것이다.

  “하....”

  니콜라가 깊이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휘장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퍼뜩 고개를 들자 침대를 둘러싼 얇은 소사천 너머로 사람의 모습이 어른어른 비치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방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황궁 시종이거나 경비병이거나 이곳의 관리인쯤 될 터였다. 딱히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니콜라는 그저 대공 외의 누군가와 드디어 만났다는 사실이 반가워 입을 열었다.

  “저기....”

  니콜라가 목소리를 내자, 저쪽에서 그를 돌아보는 기색이었다. 휘장 건너편에서 그림자가 정중히 허리를 굽히는 것이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네? 아, 네.”

  “세숫물을 올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후에 식사를 올릴 텐데, 뭔가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신지요?”

  “아닙니다, 딱히....”

니콜라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사이에 휘장 밖에서는 고개를 다시 숙여 보이고는 사라졌다. 여기가 어디이며 지금이 언제쯤인지를 물어볼 작정이었을 뿐인데 그럴 겨를도 없었다. 상대방이 몸을 돌려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 대접은 뭐지. 본래 근위대 중위일 뿐인 니콜라는 침대에 세숫물까지 대령 받는 생활을 해 오진 못했다. 묻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서 일하는 시종은 확실한데, 익숙하지 않은 대우에 어리둥절해질 따름이었다. 황궁의 시종들이라면 대부분이 귀족 출신으로 니콜라와는 신분상 크게 차이가 지지도 않을 터였다.

  혼자 남겨진 니콜라는 몸을 일으켰다.

  거의 먹은 것도 없고 줄곧 누워만 지내느라 기운은 없었지만 조금 움직인다고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거추장스런 휘장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와 바닥에 발을 디디던 그는 멈칫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니콜라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광경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황궁 내의 어딘가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엔 사방이 휘장으로 가려져서 눈에 보이는 건 천정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였기 때문이다. 천장이 높고 둥글어 황궁이겠거니 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로 납득하기는 어려워졌다.

  발이 닿은 바닥에는 새하얀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백금과 황동으로 테를 두르고 있는 테이블과 고풍스러운 형태의 자기들. 돋을새김한 창틀을 가진 세로로 긴 창문들.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잘 관리되어 있으며 그 대부분이 황실의 보물창고에서 꺼내온 듯 보이는 장식품들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호사스러운 방이었다.

  언뜻 보이는 것들만 이쯤 되는데, 한 눈에 예사롭지 않다는 걸 짐작하지 못한다면 십 년이나 황궁생활을 한 보람이 없다.

  그가 아는 한 이 정도로 사치스럽게 꾸며놓은 장소는 황궁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황제의 침전 정도나 될까 말까. 그나마도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거고, 이곳은 황제의 침전보다 더 장식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러면서도 난잡하지 않고 모든 것이 우아함의 극치였다.

  “......이게 다 뭐람.”

  조심스레 니콜라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섰다. 짙은 색의 양탄자는 밟으니 구름처럼 보드라워 또한 깜짝 놀랐다. 열려 있는 창가로 다가간 그는 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감탄과 낭패감이 뒤섞인 한숨을 쉬었다.

  이 또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정원이 있었다. 방이 위치한 건물을 중심으로 긴 주랑이 양측으로 뻗었고, 그 안에 둘러싸인 정원은 이국적인 화초와 새파랗게 물이 오른 넓은 잎사귀를 가진 나무들로 채워져 있었다. 일단 니콜라가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는 장소임은 확실했다. 내부에 이 정도 규모의 중정을 가지고 있는 곳은 니콜라도 알지 못했다.

  ‘황궁의 어딘가인 것 같긴 한데.’

  황궁에서 니콜라가 와본 적 없는 장소라면 몇 되지 않는다. 미하엘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니콜라도 대부분 가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이곳은 황녀조차 출입이 금지된 장소라는 뜻이다.

  그런 곳이 황궁에 몇 군데 있긴 했지만, 딱히 짚이는 데는 없었다. 외부가 보여야 대강의 위치라도 짐작을 할 텐데, 이래서야 아무런 단서도 되지 않았다.

  ‘감도 안 잡히는군.’

  일단은 밖으로 나가 볼 수밖에 없겠다.

  그 방에는 양쪽으로 두 개의 여닫이문이 있었다. 공작석으로 섬세하게 상감을 넣고 청동 손잡이에는 금을 입힌, 천장까지 뻗어있는 문이었다. 문짝 하나까지 이렇게 공들여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미하엘의 침전도 이렇지는 않았음을 떠올리며 니콜라는 문을 밀어 열었다. 무거운 문은 다행히 길이 잘 들어 조금만 힘주어 밀어도 쉽게 열렸다.

  ‘다행이다, 잠겨 있지 않아서.’

  문을 열었다고 해서 곧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응접실이 나왔는데, 마찬가지로 사람은 없었다. 니콜라는 이런 구조의 침실을 대충 알고 있었다. 복도에서 문을 열었을 때 침실로 곧장 들어가지 못 하도록 침실을 가장 안쪽에 배치하고 문 앞으로는 전실과 응접실을 연결해 방문객이 반드시 그곳을 통과하게끔 하는 형태다. 주로 귀부인들의 침실이 이런 구조였다.

  이 시점에서 니콜라의 머릿속에 어떤 가능성이 떠오른 것은 당연했다. 황녀조차 출입이 금지되어 있을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된 공간이 황궁에 그리 많지는 않았으니까.

  ‘설마.’

  그는 긴가 민가 하면서도 일단은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러고도 문을 몇 개 더 열고나서야 니콜라는 통로로 나왔다. 한쪽 벽이 완전히 트여서 정원을 둘러싼 형식으로 된 긴 주랑에도 마찬가지로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였다. 도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길래 사람이 이렇게 없는 거지? 점점 더 커지는 의구심을 억눌러가며 중정을 빠져나온 니콜라는, 주랑이 끝나는 위치에서 마침내 반대편에서 오던 시녀 한 명과 마주칠 수 있었다.

  니콜라도 놀라긴 했지만, 여자는 니콜라를 보고서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황실 시녀답게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우고 아주 고상한 태도로 니콜라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니콜라도 엉겁결에 마주 인사했다.

  “.......”

  “.......”

  먼저 인사한 쪽이 여자였으므로 니콜라는 그녀가 고개를 들길 기다렸다. 그러나 시녀는 허리를 굽힌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가 먼저 그만하기 전에는 그 상태로 조금도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니콜라가 고개를 들고 나서야, 여자도 숙인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손에 김이 오르는 도자기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조금 전 휘장 너머에서 세숫물을 준비해 오겠다고 말한 여자가 분명했다.

  아무리 나가려던 참이라 해도, 자신을 위해 세숫물을 준비해 온 사람을 두고 가던 길을 갈 만큼 니콜라는 매몰차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여자가 권하는 대로 뒤돌아섰다. 뿐만 아니라 자기 그릇이 무거워 보여 무심코 여자에게서 받아들려고 했는데, 그녀는 니콜라로 하여금 자기에는 손이 닿지도 못 하게 할 태세였다. 어찌나 품위 있게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척 하는지 차마 더는 손을 내밀지 못 했다.

  머쓱해진 니콜라는 순순히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가기 전, 니콜라는 조금 전 빠져나온 긴 주랑을 뒤돌아보았다. 니콜라의 짐작대로 이곳은 분명 황궁이었다. 다만 지금껏 문이 잠겨 있었기에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었을 뿐이다. 설마설마 했지만 이제는 슬슬 확신이 든다.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지금껏 주인이 없었던 장소.

  설마....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저기, 여기가 어딥니까...?”

  그래도 마지막으로 희망을 붙잡고 물었더니 여자는 이상한 눈으로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냐는 듯한 얼굴이다.

  “황후전입니다.”

  니콜라의 얼굴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핏기가 싹 가셨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

  

  “데지아 경이 깨어났다면서요?”

  산드로가 물었다. 읽고 있던 금년도 상반기 남부지역 조세편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아침에.”

  산드로가 뛸 듯이 기뻐하는 태의원장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 오늘 오전 일과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지금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는데, 이제야 말을 꺼내는 이유는 오늘 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잘됐군요.”

  산드로는 진심에서 우러난 축하를 전했다. 더 늦어지면 본인의 건강상태뿐만 아니라 태중의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뿐더러 국혼에도 차질이 있을 터였기에 여러 모로 시기가 좋았다.

  현재 황제는 내궁에 칩거 중으로, 병세는 대공이 수도에 들어온 이후로 더욱 깊어졌다. 태의원의 원장이 황제의 병구완을 제쳐놓고 니콜라에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황제는 이미 손쓸 시기를 지났다. 하루가 다르게 악화일로를 걷는 상태로 보아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지라 조만간 대공이 그 자리를 물려받을 것임이 명백해 보였다.

  덕분에 대공은 수도에 입성하자마자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황제가 돌보지 못하게 된 정무에 대공이 당연한 듯 손을 댔기 때문이다. 어차피 계승자가 되면 그가 돌보아야 할 국정이었고 그 외의 다른 대안도 없었으니 딱히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지만 대공은 통치자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수준을 넘어 훌륭한 남자였다. 기본적으로 그 역시 북부 공국의 왕으로서 여덟 살 때부터 제왕학을 배웠고 열두 살 때부터 섭정을 시작했다. 심지어 그 영토는 면적상으로는 수도에도 뒤지지 않는 크기였다. 어찌보면 태어나면서부터 영재교육을 받아 왔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하여 즉위식을 치르기도 전에 대공은 실질적으로 황궁의 실권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제국의 조세 방식을, 기존의 비효율적인 방식에 경악하면서 하나하나 뜯어고치는 중이었다.

  원래 뭐든지 기존의 방식을 바꾸면 첫 5년은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 뒤로는 좀 편해질 테니 미래를 위한 투자에 가까웠다. 어차피 황제가 직접 세금을 걷으러 다닐 것도 아니니 사양할 필요도 없었다.

  “아, 그렇지.”

  대공은 문득 생각났는지 고개를 들어 산드로에게 말했다.

  “궁내부에 사람을 보내 황후전에 예산을 편성하게 해.”

  “예산이요?”

  “황후가 될 사람인데 초라하게 지내게 둘 순 없잖아. 황후전이라 해도 말만 그럴싸하지 텅텅 비었더군.”

  수행기사로서 어지간하면 대공이 무슨 짓을 해도 그게 맞거니 생각해왔지만, 황후전을 두고 텅텅 비었다고 표현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대공에게 산드로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곳이 초라하진 않잖습니까.’

  오히려 황후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황궁에서 가장 호사스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백 오십 여년 전 제국의 16대 황제이자 애처가로 유명했던 드미트리 4세가 나이 차이나는 외국인 황후를 위해 지은 곳으로, 그 이후로는 대대로 황후에게만 사용이 허락된 곳이었다. 제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아도 황후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었기에 정부인이 죽고 난 후 제위에 올랐던 현 황제 대에서는 내내 문이 잠겨 있었다. 그곳이 어느 정도로 사치스러운가 하면 바닥은 북국의 대리석, 벽과 천장은 황금과 공작석이며 정원에는 기화요초를 깔아두고 주랑으로 둘렀다. 당시 황제가 황후를 위해 쓴 돈이 제국의 17년치 예산과 맞먹었다 한다. 솔직히 어지간한 규모의 사치라면 볼만큼 본 산드로조차도 황후전에 들어가 보고 입이 딱 벌어졌을 정도인데, 초라하다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요구하게끔 하고.”

  산드로가 할 말을 못 찾는 사이 대공이 덧붙였다.

  “아니지, 필요한 걸 말하라고 해도 안 할 거야. 알아서 적당히 갖다 줘. 싸구려 말고, 고급품으로.”

  다짜고짜 예산을 집행하라고 하지만 더 이상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집행할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이 예산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장이 가여워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년간의 경험으로 산드로는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식의 준비도 시작하도록. 궁내부장을 불러. 전례관들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식이요?”

  전례관들이라면 궁내부의 원로들로 황실의 의전을 맡은 직위다. 국혼이나 국상, 즉위식과 대관식, 매해 돌아오는 황실의 행사까지 그들의 손을 거치는 게 상례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식을 말하는지 산드로는 알 수 없었다. 대공의 즉위식이라면 이미 궁내부에서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대공이 말하는 식이라면 하나밖에 없겠지만....

  “대관식이요?”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황후의 대관식 말씀하시는 겁니까?”

  산드로가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겠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혼인을 공표하기도 전에 황후의 대관식 준비부터 하는 황제라니 들은 적도 없다. 심지어 그 본인의 즉위조차도 전에? 그런 게 가능한가?

  하지만 로사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시간을 많이 끌 순 없으니까.”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구체적인 식의 준비는 궁내부 소관이 되겠지만, 산드로는 일단 물어나 보았다.

  “황후는 열 두 개의 루비로 장식한 관을 쓰게 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황후의 머리에 씌울 것이니 할 수 있는 건 전부 하도록 해. 향후 백 년쯤은 남들 입에 오르내리게끔 가능한 화려하게,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이 좋겠어.”

  로사는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성대한 것으로.”

  산드로는 새빨간 루비가 열두 개나 박힌 관을 쓴 니콜라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뭐 그 사람이라면 그런 것도 그럭저럭 어울리겠지만, 그걸 받아서 과연 좋아할지는 의문이었다.

  

  

  해가 지자 대공은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황후전으로 가겠다.”

  인간 같지 않은 업무량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대공이 해가 지면 황후전으로 향한다는 건, 근래 황궁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저러면서 왜 정작 니콜라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황후전에 출입하는 인원을 제한하고 철저하게 함구시킨 덕분에 아직까지도 황궁에서는 대공이 황제의 혈육을 찾아 데리고 들어왔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것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황후의 대관식이 준비되는 마당이니 그에 대해서도 밝힐 때가 되었다. 대공의 뒤를 따라 일어서던 산드로가 물었다.

  “공표는 언제 하실 겁니까?”

  “공표?”

  “데지아 경에 대해서 말입니다.”

  니콜라의 해독제를 제공했다는 점을 제외하고, 드쉬어 가문의 남자들이 한 가지 더 도움이 된 점이 있었다면 그들 덕분에 니콜라의 신분이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니콜라 데지아가 그 동안 찾고 있던 다미에 공작의 아들이라는 말은, 그가 다름 아닌 황제의 마지막 혈육이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대공의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했다. 황제의 조건에는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다.

  심지어 그가 사막 출신이라는 점 또한 큰 장점이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구 황실의 외척들과도 관련 하나 없는 몸이니,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이 시점에서 대공이 데지아 경과 혼인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당사자도 이제 쾌유할 일만 남았으니 공표하기에는 최적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공의 대답은 의외롭게도 예상과 반대였다.

  “아니, 그렇게 되면 니콜라에 대해 외부에 알려질 거 아냐. 거기까진 아직 아니야.”

  산드로의 당연한 건의에 대공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산드로는 조금 의아해졌다.

  “공표하지 않으신다고요?”

  “해야 하나, 그걸?”

  “해야죠, 그럼....”

  산드로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당장은 아니라면, 언제쯤 데지아 경에 대해 외부에 알리실 예정이십니까? 데지아 경도 외부활동이 있으니 언제까지나 비밀로 하기도 곤란하잖습니까?”

  “아니, 니콜라는 당분간 저대로 감춰 둘 거야. 가능하면 대관식 직전까지.”

  산드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죠? 남자라서요?”

  “뭐, 그런 이유도 있겠지.”

  “이제 와서 상관없는 문제 아닙니까? 황녀가 사가의 남자와 이미 결혼해 아이를 가진 시점에서는, 데지아 경 이상으로 조건이 맞는 상대도 없을 테고요.”

  산드로는 도대체 대공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얼마 전엔 니콜라에게 ‘황후가 되겠냐, 대공비가 되겠냐’ 하며 억지 청혼을 하지 않았던가. 막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정신도 못 차리는 사람을 붙잡고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니콜라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대공은 틈만 나면 황후전으로 향했고, 정무로 바쁜 와중이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반드시 짬을 내어 잠은 그곳에서 잤다. 눈을 뜬 지금도 해가 지자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일어서는 것을 보면 최소한 현재 대공의 온 신경이 니콜라에게 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꽤나 진심인줄 알았는데....

  ‘아닌가?’

  산드로가 긴가민가하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하기야 사람이 그렇게 빨리 변할 리가 없나.’








chapter. 2

  

  

  소문이란 금이 간 그릇에 담긴 물과 마찬가지로, 틀어막더라도 조금씩 새어나가는 법이다.

  수도에는 차츰 소문이 돌았다.

  ‘증명할 길은 없으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실제 기사에서 사용된 문장이다. 대공의 결혼상대에 대해서는 신문에서 며칠에 걸쳐 번호를 붙여가며 추측성 특집 기사를 낼 정도였다. 그리고 대부분이 근거가 없었다.) 황후전의 새로운 사람은 사막 출신이었다. 미하엘 황녀가 아니라 대공이 사막에서 찾아낸 황실의 잊혀진 혈육이라나 뭐라나.

  하지만 반대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야말로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처음에는 대공이 데려 온 신부가 미하엘 황녀일 거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애초에 약혼까지 진행된 바 있고, 미하엘 황녀야말로 황제의 유일한 여식이라는 사실도 변함이 없었으므로. 사실 대공이 사막에서 돌아올 때 까지만 해도 그가 도망간 황녀를 찾아내 끌고 오리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왜냐면 수도의 사람들은 뭔가를 놓치고 돌아오는 대공을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대공이 도망간 미하엘 황녀를 찾아내 데려왔다면 굳이 꼭꼭 숨겨둘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전시했을 터였다. 그러자 또다시 항간에는 미하엘 황녀가 남자와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황후전에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게 황녀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황제에게 사생아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사생아가 이제 와서 나타났을 리도 없었다. 급기야 황후전엔 실제로는 아무도 없으며, 대공은 유언을 지켰다는 핑계로 제위를 빼앗기 위해 황제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마저도 돌았다.

  

  

  소문의 남자, 니콜라 데지아는 아직도 황후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외부의 소문도 잘 알지 못했다. 신문이라도 읽었으면 밖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았겠지만 황후전에는 신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니콜라는 대단히 답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소문은 진실이 삼 할에 거짓이 칠 할인데, 신문은 그 중 칠 할 쪽을 생산해내는 주범이었다. 생각해보면 무책임한 신문기사 때문에 큰 코 다친 게 얼마 전인데, 이제 와서 굳이 떠도는 소문들을 확인하고 싶어지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무슨 소리들을 떠들어대는지 모른다는 사실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황궁에 온 뒤로 니콜라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분명 예전에도 황궁에서 일했고 수도에 황궁 생활은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의 생활은 예전과는 거의 다른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달라졌다.

  살고 있는 곳은 같은 황궁인데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는 건, 단지 황후전의 호화스러움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식사하십시오.”

  잠깐 딴 생각을 하던 사이 니콜라의 눈앞에 음식이 차려졌다. 은쟁반에 은식기였다. 당연한 듯 정교한 세공이 들어간 접시만큼이나 내용물 또한 예쁘게 담겨 있어 처음엔 이런 걸 먹어도 괜찮은가 싶었지만, 이제 겨우 익숙해진 참이었다. 뭐 그래 봐야 니콜라가 먹을 수 있는 것이 현재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심심한 식단 위주였지만.

  “아, 고마워요.”

  첫날 세숫물을 대령해준 여자는 그 이후로도 줄곧 같은 시간에 황후전을 찾아와 외부와 이곳을 드나들며 니콜라의 생활을 돌보았다.

  아무래도 저 여자가 여기서 자신의 시중을 드는 역할 같은데, 따져 보면 훨씬 더 지위가 높을 것 같은 느낌은 아마도 착각이 아니겠지. 언제나처럼 식기를 내려놓고 얼른 사라지려는 여자의 손을 무심코 붙잡은 니콜라는 물었다.

  “저, 성함이?”

  “네?!”

  여자가 화들짝 놀랐다. 니콜라는 꽤 여자에게 익숙한 편이라, 이름을 묻는 것이나 손을 잡은 건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마르퀴스입니다.”

  “마르퀴스...?”

  “잘 모르실 겁니다. 북부 출신이라...여기서 니콜라 님을 모시게 하려고 오빠가 저를 불렀어요. 오빠는 대공 저하의 수행기사이십니다.”

  “그쪽 오빠가 누구죠?”

  “산드로 마르퀴스요.”

  여자의 대답에 니콜라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여자는 산드로의 여동생이었다. 그러고 보니 눈매 같은 곳이 좀 닮은 느낌이 들었다.

  “그분의 동생이셨군요.”

  “네, 그런데 손을 좀....”

  니콜라는 자신이 그녀의 손을 아직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놓았다.

  “아, 실례했습니다.”

  “네.”

  마르퀴스 양은 품위 있게 손을 치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말씀 놓으십시오. 저희 집안은 원래 선대 황제폐하의 가신 집안으로, 저희 아버지는 마르퀴스 후작이십니다.”

  “후, 후작이요?”

  니콜라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황궁은 여러 채의 궁전이 모여 있다. 그러다보니 각각의 궁에 거주하는 주인의 성품이나 지위에 따라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모시는 주인의 지위가 높을수록 시중드는 측근들의 계급도 높은 경향이 있다.

  그러나 후작따님이라니. (산드로가 후작가 아들이었다는 사실도 놀랍긴 마찬가지였지만.)

  니콜라로 말할 것 같으면 대부분의 생활이 근위대 병영이었고, 황녀이긴 하나 비 소생인 미하엘의 침전 또한 상당히 자유분방한 분위기였기에 그의 주변에는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실제로 황비전의 시녀장은 남작부인이었고, 황제궁의 시종장과 시종무관은 무려 백작과 후작이었다. 황후쯤 되면 시중을 드는 사람이 후작따님이라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니콜라로 말할 것 같으면 몰락귀족의 아들이라 신분이라고 할 것도 없고, 작위를 박탈당하기 전의 신분도 남작에 불과했다. 그것도 서자라서 물려받을 일이 요원한.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말도 못 붙여보았을 입장인 것이다.

  당황하는 니콜라를 보더니 마르퀴스 양이 비로소 생긋 웃었다.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

  당황하지 말란다고 당황하지 않을 수도 없고, 니콜라는 한동안 마르퀴스 양에게 말을 놓지 못했다.

  

  

  저녁에는 매일 태의가 찾아와 한 시간 가량 진료를 하고 돌아갔다.

  지난 보름간은 황후 전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던데 니콜라의 상태가 회복 일로에 들어섰기에 횟수는 하루에 한 번으로 줄어들었다. 다만 태의가 직접 올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처음 태의원의 수장인 나이든 원사가 진료가방을 직접 손에 들고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니콜라는 놀람을 넘어서서 급기야 기가 막혔다.

  첫 날은 태의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돌아가시라고 권했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 황제의 안위가 아니던가. 비록 황제의 용태가 지금은 반 시체에 가깝다 해도, 어쨌거나 황제를 돌보아야 할 태의가 그 일을 팽개치고 이곳에 온다는 사실 자체를 니콜라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의 쪽에서도 고집이 만만찮았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책임감을 가지고 니콜라의 회복을 돕게끔 대공으로부터 요구받았는지 가능한 완곡한 어조로 설명해야 했다. “그쪽을 살려놓지 못 하면 내 목이 날아갈 판국이었던 건 아시오?” 그 때 태의가 사뭇 억울한 어조로 말했다. “난 이제 발 못 뺀다니깐.”

  대공의 성질머리라면 서로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서로 양해하기로 하고, 태의는 매일 한 번 황후전에 와서 니콜라의 상태를 살필 자격을 얻었던 것이다.

  “약기운은 아직 조금 남아 있습니다만, 순조롭게 회복 중이십니다. 이대로라면 두어 달 후엔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오실 거라고 봅니다.”

  맥을 짚어본 태의가 말했다. 니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태의가 고작해야 체온을 재고 불편한 데가 없는지 묻고 약을 먹이기 위해 매일 자신의 침실을 찾아온다는 사실에 간신히 익숙해진 참이었다.

  “감사합니다.”

  “뭐 달리 안 좋으신 데는 없으시옵니까?”

  “네, 뭐 특별히는... 좀 졸리긴 하지만요.”

  하도 오랫동안 자고 있어서 그 반작용인지 모르나, 일단 깨어나니 회복속도는 빨라서 며칠이 지나자 몸은 거의 다 회복되었다. 다만 아직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진 않았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다면 쉽게 지치고 잠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훈련을 마치고도 남는 시간에는 연병장에서 개인훈련을 하거나 말을 타러 나가던 니콜라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변화였지만.

  “아, 그건 회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원래 그 때가 되면 잠이 쏟아지거든요. 태중의 아기님이 건강하신가 봅니다.”

  그 와중에 아이가 멀쩡하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고맙기도 했다. 분명 낳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안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간의 난리통을 생각해보면 무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특히나 그러잖아도 아이가 약해 쉽게 유산된다는 경고를 들었으니만큼, 그 일로 만약에라도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니콜라 본인 또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 터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것도, 다분히 아이 탓이 컸다.

  아니, 그보다는 아이 덕분이라고 말하는 쪽이 더 정확하다.

  “아이는 괜찮습니까?”

  “네, 아주 좋은 상태이십니다. 두 분 모두.”

  태의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니콜라가 묻긴 했으나 뒤의 말을 덧붙이는 태의의 시선은 니콜라의 어깨 조금 위를 향해 있었다. 왜냐하면 조금 전부터 대공이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라가 식사를 끝날 때쯤 황후전으로 찾아온 대공은, 태의가 와서 니콜라를 진찰하는 내내 그 곁에 딱 붙어 서 있었다. 덕분에 태의도 바짝 긴장했음이 분명했다. 대공에게뿐만 아니라 니콜라에게까지 사용하는 말투가 극존대라, 평소의 자연스러운 반말투에 익숙해졌던 니콜라마저도 다시 살짝 어색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저하께선 오늘은 무슨 일로?”

  니콜라가 묻자 대공이 웃었다.

  “내가 내 황후의 궁에 오는데 이유가 필요해?”

  따지자면 대공은 아직 황제가 아니고, 자신도 아직은 황후가 아니다. 어느 쪽이라도 해도 틀린 표현이지만 니콜라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조만간 그렇게 될 건 확실해 보였으므로.

  대공은 부쩍 황후전으로 자주 걸음했다. 그 전에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왔다더니, 니콜라가 깨어난 이후로는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오는 시간이 늘 들쭉날쭉해, 확실히 그가 바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느 때는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어느 때는 한밤중에나 겨우 찾아와 침대에 잠시 머리만 붙이고 가기도 했다. 그럴 때는 니콜라조차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리 늦어도 하루에 한 번은 찾아와서 니콜라를 보고 갔다.

  그 날은 외려 조금 늦은 축이었다.

  “아이가 좀 작지는 않나?”

  니콜라가 진료를 받는 내내 그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던 대공은 진료가 끝나고 불쑥 질문했다.

  “어째서 조금도 배가 부르지 않는 거지.”

  그는 고개를 기울여 니콜라의 배를 들여다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못마땅한 어조에, 진료를 끝내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던 태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몇 개월이시죠?”

  “이제 삼 개월쯤 되었을 겁니다.”

  니콜라가 대답했다.

  “그럼 적당한 겁니다. 원래 3개월 정도까지는 신체적 변화가 크게 없습니다. 그래서 산모 본인조차도 눈치 못 채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더군요.”

  태의의 말마따나 니콜라의 배는 거의 부르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아주 조금씩 불러오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냥 보면 그 안에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수준이었다.

  “잘 자라고만 있다면야 배가 부르든 말든 별 상관없지만.”

  대공이 니콜라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이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더니 근래에는 꽤 신경을 쓰는 기색이었다. 왜 아직도 티가 나지 않으냐고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는 게 처음도 아니었다.

  무엇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지는 언뜻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불러오는 쪽이 더 좋지 않나? 만삭이 되고 나면 거동이 힘들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별 의미 없는 말이지만 말이다.

  깨어난 이후 니콜라는 한 번도 황후전 밖으로 출입을 하지 못 했다. 한동안은 체력이 달려서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 했다면,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지금은 못 나가는 것에 가까웠다.

  밖에서 보기에도 그랬지만 안에 있는 입장에서도 황후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황후전 내에서도 니콜라가 있는 장소까지 드나드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대공과 태의, 그리고 마르퀴스 양 정도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 규모의 궁에 달랑 시녀 한 명밖에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느니만큼, 틀림없이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 와, 니콜라.”

  태의가 돌아간 후 둘만 남자, 대공은 침대에 걸터앉아 니콜라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니콜라는 순순히 가까이 다가갔다. 이것도 이제야 익숙해진 참이었다. 대공이 황후전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매번 침대를 같이 쓰는 것 말이다. 사실 그는 아직도 대공이 이렇게까지 가까운 곳에 있으면 긴장이 되었기 때문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뻣뻣하게 누워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저 이제 몸이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

  “네, 그래서 말인데 여기는 제 집도 아직 있으니 그 쪽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또 그 얘기야?”

  대공이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나가겠다고 말해본 적은 있다. 그럴 때 마다 대공에게 웃는 얼굴로, 번번히 거절당했다.

  “안 돼, 몇 번 말해야 알지? 내 아이를 가지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하지만 이대로 제가 황후전에서 지내는 것도 이상하잖습니까?”

  대공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이상한데.”

  ‘안 이상할 리가 없잖습니까.’

  니콜라도 황궁 돌아가는 사정은 좀 아는데, 아직 황후가 된 것도 아닌 사람이 황후전에 들어왔다면 분명 귀족회에서 반대가 없었을 리가 없다. 확실히 관습 따윈 개나 준 결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대공에게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을 수도 있지만,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다.

  니콜라의 옆에 누워서 대공은 니콜라의 옷소매 따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돌아 다닐 생각만 하는 건 아직 몸이 무겁지 않아서 그런가.”

  “.......”

  “네가 내 아이로 배가 불러진 모습을 보고 싶어.”

  대공이 불쑥 중얼거렸다.

  “그럼 누가 봐도 여기에 내 아이가 있다는 걸 알 테고, 너도 그럴 테니까.”

  니콜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말해주진 않았지만 니콜라는 자신의 존재가 비밀에 붙여져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유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대공의 결혼 상대가 남자라는 사실은 즉위 전까지는 숨기는 쪽이 좋았다. 자신이어도 그렇게 할 터였다.

  그 이후로 굳이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황궁에는 니콜라를 아는 사람이 많으니, 황궁 밖으로 나갔다가 괜히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낭패이기도 하고.

  시간을 보낸다는 측면에서는 잠이 쏟아지는 쪽이 차라리 나았다. 황후전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편안하긴 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알 수도 없고, 니콜라에게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눈을 돌리면 온 사방이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워진 궁전에서 지내는 일은 따뜻한 물속에 잠긴 듯이 안온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간 말 타는 법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

  

  황후전에 뜻밖의 손님이 온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산드로가 불쑥 황후전에 나타났다. 해가 지고 나서였다. 그도 대공 때문에 종종 황후전에 오기는 해도 니콜라가 있는 곳까지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은 다소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니콜라는 그가 찾아온 자체에는 놀라지 않았다. 마르퀴스 양이 그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지라 아마 여동생을 보러 왔겠거니 했던 것이다.

  친하다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이곳에서 지낸 이후로 예전처럼 자주는 보지 못 하던 인물이라 반가운 마음이 앞서 니콜라는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손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도착하셨는데 오래 머무르지 못하실 분이라 밤늦게 찾아뵈었습니다.”

  산드로가 깍듯하게 대답했다. 동생을 보러 온 게 아니었나? 당황한 니콜라가 되물었다.

“저한테 말입니까?”

  “네, 대공 저하께서 니콜라 님께 안내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황후전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찾아온 손님이라니 금시초문이다. 게다가 대공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면 대공과 자신이 동시에 아는 사람이라는 건데, 더더욱 짚이는 바가 없었다.

  “누구신데....”

  “지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산드로는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되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문 뒤로 비스듬히 얼굴을 내민 사람을 보고 니콜라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다름 아닌 미하엘이었다.

  “미하엘 님!”

  니콜라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눈을 동그랗게 뜬 건 미하엘도 마찬가지였다.

  “니콜라!”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는 니콜라에게 달려와 덥석 안겼다.

  “세상에! 나는 네가 거기서 죽은 줄 알았지 뭐야. 대공이 널 수도로 데려간 건 알았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소식이 없고...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반쯤 울먹거리며 미하엘이 자신의 마음고생을 털어놓는 동안, 니콜라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미하엘이 진정하길 기다렸다.

  “다행이다...살았구나....”

  한참이나 지나서 울음을 그친 미하엘은, 여전히 눈앞의 남자가 과연 그인지 확신하지 못 하는 것처럼 아래 위로 몇 번이나 그를 훑어보았다. 니콜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니콜라 본인조차도 그 때는 자신이 죽은 줄 알았는데, 그녀도 아마 비슷했을 터였다. 깨어난 뒤에도 미하엘이 염려되었지만 소식을 전해 줄 방도가 없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니콜라에게 사막에서의 일은 남자들에게 납치당한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대공이 니콜라를 데리고 사흘 밤낮을 달려 수도에 도착했다고 들었을 뿐이다.

  “나도 거기서 바로 온 거야. 대공이 내게 사막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지만 너무 걱정이 되어서....”

  니콜라를 데리고 대공의 일행이 먼저 떠난 후, 남은 근위대원들과 함께 미하엘 역시 황도로 향했다. 원한다면 근위대에서 그녀를 남편에게로 다시 데려다 준 뒤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보다 먼저 니콜라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다. 같은 거리를 왔지만 한참이나 늦어진 이유는 임신한 상태로 빠른 이동이 불가능한 탓이었다. 니콜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돌아가시지, 위험하게....”

  “수도에 왔는데 네 소식은 찾을 수도 없지, 대공이 시체를 안고 와서 황후전에 넣어두었다는 소문까지 있으니 내가 걱정하지 않고 배겨?”

  언뜻 봐도 임신한 상태가 확연한 몸으로 미하엘이 황궁에 들어오는 건 아무래도 위험했다. 오가다 미하엘 황녀를 알아볼 사람도 많았다. 황녀가 사가의 남자와 멋대로 결혼해 아이까지 가졌다는 사실을 알면 그야말로 난리가 날 일이다. 그런 점이 염려되어서 말을 했더니 미하엘이 발끈해서 대답했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몰래 들어온 거야. 밤이니까!”

  “몰래요? 그런데 여기까진 어떻게...산드로는 어떻게 만나셨고요?”

  그의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황후전은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어 설령 미하엘이 황녀인 신분을 밝힌다 해도 멋대로 들어오기란 불가능했다. 그녀가 여기 있다는 건 대공이 허락했다는 의미다.

  “대공을 먼저 찾아가셨습니까?”

  “응...이대로는 황궁에 입궁하기 어려워서...널 만나야겠다고 했더니 순순히 그러라더라.”

  “그랬습니까?”

  니콜라가 조금 놀라 물었다.

  “그랬다니까, 나 참, 무슨 생각인지.”

  대공에 대해서는 다시 떠올리기 싫다는 양 미하엘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본래 대공을 무서워했지만, 사막을 떠나기 직전엔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했다. 지금도 여전히 대공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니콜라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미하엘이 대공을 무서워하는 정도에 비하면 거의 신경을 안 쓴다고 할 수도 있지만, 대공도 미하엘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미하엘을 황후전에 보내서 니콜라를 만나게 해 줬다니. 그뿐만 아니라 직접 산드로에 데려다주게까지 했다니, 그답지 않았다.

  “황제폐하는 만나보셨습니까?”

  “뵙고 왔어. 날 알아보진 못하셨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뵌 걸로 충분해.”

  어깨를 으쓱한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황후전이었구나. 나도 여긴 처음이야. 흠, 이렇게 생긴 곳이었네.”

  “.......”

  “여기 오래 있진 않을 거야. 해 뜨기 전에 여길 나갈 생각이야. 정말 널 보러 온 거야, 니콜라. 무사한지 알고 싶어서.”왜 왔느냐고 질책했으면서 금세 돌아가야 한다니 아쉬운 기분이 들어 니콜라는 말끝을 흐렸다.

  “그렇군요.... 하긴 아리스테어 님도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응, 그에게 돌아가야지. 그런데 니콜라,”

  “네?”

  “네가 황후전에 있다는 건, 네가 대공의 결혼상대인 거지?”

  질문이 단도직입적이니, 대답도 심플할 수밖에 없었다.

  “네. 어쩌다보니.”

  “하....” 한숨을 내쉰 미하엘이 말을 이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네. 나도 소문은 들었어. 대공이 사막 출신 신부를 데려왔다고.”

  “그런 소문이 돕니까?”

  니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죄다 헛소리만 하는 줄 알았더니 꽤 사실에 가깝지 않은가. 미하엘이 체, 하고 혀를 찼다.

  “들을 만 한건 그 정도고 나머지는 다들 헛소리였지만 말이야. 그런데 대공이 왜 그걸 내버려두는지 모르겠어. 공표할 시기가 지나도 한참은 지난 것 같은데 전혀 그럴 기색이 없어. 그러니까 헛소문은 더 기승이고. 이쯤 되면 너에 대해 숨기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잖아?”

  “숨기고 있는 거 맞을 겁니다. 대공은 즉위식 직전까지 저에 대해 공표할 생각이 없을 걸요.”

  외부 사정에는 어두웠지만 니콜라도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말투도 담담했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미하엘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

  “드쉬어인지 뭔지, 그 새끼들이 너한테 한 짓은 천벌 받아 마땅하지만 어쨌든 네 아버지가 사실은 누구였는지 알게 되었으니 잘된 점도 있어. 나한테도 고마운 일이지. 대공과 억지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확실히 드쉬어 가의 남자들이 아니었다면 니콜라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을 테고, 그러면 처음 계획대로 미하엘까지도 수도에 끌려와야 했을 터였다.

  “분명 도움이 된 면이 있죠.”

  “그런데 너는?”

  “네?”

  “...니콜라, 너는 대공이 왜 너를 여기 뒀는지 알아?”

  니콜라는 아무 말 없이 미하엘을 쳐다보았다.

  “난 알아. 네가 황제의 유언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상대니까야. 다른 이유는 없을 걸.”

  게다가 아이까지 있으니 금상첨화인 거고. 미하엘의 말투는 단정적이었지만 반박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대답하지 않았던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굳이 입 밖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저도 압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대공은 네가 자기한테 필요하니까 붙잡은 거지 널 특별히 사랑하거나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

  답답해하며 언성을 높이는 미하엘을 잠깐 동안 슬픈 눈으로 바라본 니콜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압니다.”

  그렇다 한들 별 도리도 없고 말이다.

  “.......”

  하, 하고 미하엘이 한숨 비슷한 것을 쉬었다.

  “나 가야 돼.”

  그러고 보면 창밖은 어두워진지 한참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던 미하엘의 말이 생각났다. 고작해야 한 시간 남짓 되었을까 말까. 오랜만의 재회 치고는 너무 짧았다. 나갈 채비를 하는 미하엘의 뒤를 따라 니콜라도 일어섰다. 나가는 길을 배웅해 주기 위해서였다.

  “날이 어둡습니다. 조심하세요.”

  “괜찮아. 데려다 줄 사람이 있어.”

  문 앞에서 미하엘이 발을 멈추고 니콜라를 돌아보았다.

  “니콜라, 내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네?”

  “솔직히 지금 이건 네가 날 대신해서 발목이 잡혀 있는 꼴이잖아. 내가 도망친 자리에 널 밀어 넣어서.”

  그녀는 두 손을 내밀어 니콜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하고 같이 가자.”

  “...네?”

  “나 좋자고 널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 밖에 내가 고용한 길잡이와 경호원들이 있어. 사막까지 날 데려다 줄 거야. 한 사람쯤은 그 사이에 숨어서 갈 수 있어. 뭐하면 돈을 더 내면 되고, 티도 안 날 거야!”

  니콜라의 눈이 놀람에 차서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의 손으로 옮겨갔다. 눈빛이 흔들렸다. 미하엘이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기회는 지금 뿐이야, 니콜라!”

결국 미하엘의 목적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분명 그녀의 말엔 정곡을 찌르는 부분이 있었다. 현재로서 니콜라는 애초에 황궁에 온 적도 없는 걸로 되어 있었으므로 없어져도 그만이었다. 산드로는 들어오지 않았고, 마르퀴스 양도 어느 새 자리를 비워서 없었다. 말 그대로 방 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미하엘의 손은 그녀의 말처럼 마지막 기회라는 이름을 달고 니콜라의 앞에 놓였다. 어째서인지 황후전은 그 순간에 텅 비어 있었다.

  

  ++

  

  미하엘을 황후전에 데려다준 뒤, 산드로는 대공에게로 갔다. 평소 해가 떨어지면 황후전으로 가는 편이었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대공은 밤이 깊을 때까지도 집무실에 머물러 있었다. 황궁에는 공식적으로 대공의 거처가 따로 없었지만 그는 황제의 집무실을 제 것처럼 이용했고, 그건 곧 원래 그의 자리처럼 보였다.

  ‘기분이 안 좋으시군.’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것은 대공이 황후전에 가지 않고 있는 이유와 연관되어 있었다. 아마도 지금쯤 그곳에서는 니콜라 데지아가 미하엘 황녀와 상봉중일 터였다. 산드로 본인이 황녀를 거기까지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데려다주고 온 참이었다.

  물론 대공이 허락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지만.

  허락해준 이유는 역시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대공의 심사는 매우 꼬여 있었다.

  “니콜라는?”

  “반가워하시는 것 같던데요.”

  흥. 코웃음을 치는 대공의 목소리에는 짜증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계집애가 협박을 하더군. 니콜라를 만나게 해 주지 않으면 내일 귀족원에 출석해 제 뱃속의 아이가 내 것이라는 거짓말을 하겠다고, 맹랑하게 말이야. 어차피 소문도 그렇게 났으니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을 거라나.”

  대담한 여자로다. 사촌 오라비의 인생을 구하겠다고 자기 인생을 시궁창에 내던질 수도 있는 협박을 하다니. 산드로는 감탄했다.

  “비슷한 소문이 있긴 하죠. 외부에서 말들이 많긴 합니다.”

  “어떤?”

  “뭐, 여러 가지요. 개중에는 저하가 시체를 안고 들어왔다는 소문도 있고, 사실은 황위를 노린 저하의 거짓말이고 황후전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고.”

  후자는 몰라도 전자라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니콜라를 안고 들어왔을 때는 실제로 그의 생사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으니 그런 소문이 날 만도 했다.

  “심지어 지금 황후전에 있는 사람은 가짜고 사실은 저하께서 아직 미하엘 황녀를 찾고 있을 거라는 소문도 있고 말이죠.”

  대공은 코웃음을 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 계집애와 결혼하고 싶어 할 리가 있나.”

  물론 한 때 그러고자 했던 적은 있지만, 어차피 정략결혼이라면 누구완들 못 할까. 그 당시만 해도 대공은 결혼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이 없었기에 누구와 하든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의 결혼은, 그것을 이행함으로써 황위라는 대가를 얻는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타산적이었다. 대공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마음가짐이었다.

  일단 혼인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대공은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해가 될 만한 모든 장애물을 치워 버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는 아무도 자신의 결혼에 반대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설사 그게 혼인의 당사자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니콜라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른 선택을 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다시 말해 대관식의 준비는 니콜라가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니콜라가 황후전에 누워 있는 동안, 두문불출하는 그를 두고 괴상한 소문이 나는 걸 대공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소문이 날수록, 그리고 그것이 이상할수록 니콜라 본인이 주목받을 확률은 낮아지기 때문이다.

  니콜라 데지아는 황제의 핏줄임이 밝혀지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지금의 황족들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귀족사회에서도 딱히 이렇다 할 연결끈 없이 고립된 처지로 살아왔다. 확실히 그것은 로사에겐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황녀를 신부로 맞는 것보다 오히려 그에게는 유리한 면이 컸다.

  하지만 로사에게 유리하다는 건, 반대로 그 결혼 때문에 불리해지는 자들도 있다는 의미다. 그 정도에 따라서는 충분히 훼방을 놓을 법도 했다. 그런 면에서 현재 가장 위험한 사람이 있다면 니콜라였다.

  암살 시도 따위야 수십 번쯤 받아 오다 보니, 대공은 스스로에 대한 위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도 직접적으로는 건드릴 생각을 못 하는 대공이기에 가능했지, 니콜라는 다르다. 그러니 최소한 즉위 전까지는 니콜라에 대해 함구하는 쪽이 맞았다.

  입장이 바뀐다면 그 자신도 마찬가지로, 가장 약한 부분을 노릴 테니까.

  말 그대로의 감금은 아니었으나, 니콜라는 본인이 눈에 띄면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는지 황후전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그 안에서 의사와 시녀를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은 오로지 그 하나뿐인, 오로지 자신에게만 둘러싸인 생활을 하는 애인을 보고 있자니 니콜라가 황후전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그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로사를 먼저 찾아온 쪽은 황녀였다. 그는 사막에서 이미 황녀에게 원하는 곳으로 가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그랬으면 알아서 저 좋을 대로 꺼져 버릴 것이지, 기어이 니콜라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하긴 배포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어지간한 계집이었으면 국혼을 앞두고 남자와 손 붙잡고서 사막으로 가버리진 않았겠지.

  꼭 그래서는 아니었지만, 애초부터 마음에 안 드는 계집애였다.

  “니콜라를 만나게 해 주세요.”

  당당히 요구하는 태도부터 불쾌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니콜라와 각별한 사이임을 과시하는 태도는 참아주기 힘들 정도였다. 자신에게 그런 협박이 통하길 기대했다는 발상 또한 어이없기 짝이 없었고 말이다.

  물론 대공이 고작 그 따위 협박에 요구를 들어줄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니콜라도 절 만나고 싶을 테니까요.”

  고개를 쳐들고 대꾸하는 황녀를 보며 로사는 그녀의 되바라진 목덜미를 꺾어서 없애 버릴까 하는 충동을 느꼈지만, 간신히 참았다. 황녀의 목숨이 아깝다기보단 나중에라도 사실이 밝혀지면 니콜라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걱정을 해야 할 만큼 황녀가 니콜라에게 유의미한 존재라는 사실에 새삼 불쾌해졌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죽여서 없앤다는 선택지가 사라진 그는 이를 갈면서 산드로를 불러 황녀를 니콜라에게 안내해 주라고 말할 수 밖에. 물론 나가려는 황녀를 붙잡고 으르렁거리며 경고하긴 했다.

  “한 시간이야. 그 이상은 안 돼.”“한 시간은 너무 짧은데요.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황녀의 항의를 못 들은 척 하고, 로사는 미소 띤 얼굴로 짐짓 다정하게 충고했다.

  “좋든 싫든 한 시간 후엔 끌어낼 테니, 황녀 체면에 끌려나오고 싶지 않으면 곱게 자기 발로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정말 기가 막혀서!”미하엘은 항의했지만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 정도가 그가 참아줄 수 있는 한계치였는지라.

  그녀에게 주어진 딱 한 시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슬슬 일어나볼까.’

  로사는 황녀가 돌아갔을 법한 시간에 맞추어 일어섰다. 니콜라는 아쉬워하고 있을 것이다. 때맞춰 다정하게 대해주고 환심을 얻어 볼 요량이었다.

  딱 한 시간을 고작 양보해 준 주제에 그는 행위의 경제성을 따졌다. 무슨 뜻이냐면 억지로 베푼 호의에서도 일말의 대가를 얻어낼 작정이었다. 일부러 산드로에게도 자신이 황녀를 보내준 것이라는 사실을 어필하게 했으니 니콜라는 고마워 할 터였다. 인사 정도는 들을 수 있겠지. 그 정도 보상이라면 재수 없는 황녀를 참아 준 보람은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서랍을 열었다. 마호가니 서랍 안에는 그날 낮 궁내부 소속의 황실 전례관들이 대공에게 올리고 간 자개 상자가 들어 있었다. 낮에 이미 내용물을 확인했기에 다시금 열어보진 않았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있는 그는 상자 째 그것을 꺼내들었다.

  안에 든 것은 열 두 개의 루비다.

  대대로 황후에게 수여되는 붉은 보석 중에서도 황실의 창고와 대공의 사저를 통틀어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한 세트였다.

  황실의 공방에서는 황후의 관을 제작중이었다. 대관식의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분명 빠른 시일 내에 치러질 예정이니만큼 공방의 직인들은 서둘러야 했다. 이 루비는 그 위에 장식될 것이다. 황후의 황금 관에 붉은 보석을 넣는 관습은 오래된 전통이었지만, 마치 니콜라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에 붉은 루비는 잘 어울릴 터였다.

  웃기는 일이지만, 로사는 니콜라가 자신이 주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게 좋았다. 그것이 선의든 선물이든 혹은, 청혼이든.

  복도로 나온 그는 문 앞에 서 있던 여자를 발견하고 발을 멈추었다.

  “마르퀴스입니다.”

  황후전에서 일하고 있는 시녀였다. 믿을 만하고 입이 무거운, 대공 측의 사람으로 산드로가 북부에서 데리고 온 그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로사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산드로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아이다?”

  허리를 굽히는 산드로의 귀에 대고 아이다가 뭐라고 속삭였다. “뭐?” 잠시 후, 무슨 말을 했는지 산드로가 놀라 외쳤다.

  “무슨 일이지?”

  로사가 물었다. 산드로는 말하기 곤란한 얼굴로 로사를 보더니,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으음...황녀가 니콜라 님께 함께 떠나자고 권한 모양인데요.”

  “.......”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묻듯이 로사가 아이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아이다가 어깨를 움찔했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로사의 눈이, 바라보기만 해도 얼어붙을 듯 했기 때문이었다.

  

  

  사막에서 수도를 향해 오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대공의 계획은 다름이 아니라 임신한 상태의 미하엘을 황후로 책봉하고 그 사이 니콜라에게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이었다. 그 뒤 그녀의 아이와 니콜라의 아이를 바꿔치기하려 했다. 미하엘은 제 아이를 데리고 남편에게 돌아가는 조건으로 거기에 찬성했다.

  니콜라 데지아에게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다.

  ‘누가 기꺼웠겠어, 그런 게.’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긴 해도 대공에 비해서는 여러 모로 인간적 면모를 간직한 산드로는, 그런 방식으로라도 대공이 유혈사태 없이 제위에 오르는 게 중요했기에 당시엔 못 본 척 했지만, 꽤 가혹한 처사였다고는 생각했다.

  게다가 그 전엔 또 어땠나. 애인이랍시고 가진 반 협박에 가까운 관계는 그렇다 치고, 미하엘과의 관계를 오해한 대공은 니콜라에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 당시 현장에 한 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목격하진 못했으나, 대공에게 안겨 나오는 니콜라의 상태만 봐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 때 데지아 경은 거의 시체가 되었었지. 산드로는 대공이 진짜 니콜라를 죽인 줄 알았다.

  로사가 니콜라에게서 신뢰를 잃은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 때일 터였다.

  대공은 알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애정과 신뢰는 비슷한 감정 같아도 그 결이 다르다. 애정은 의외로 오래 가는 감정이다. 배신당하고 욕을 먹고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온갖 험한 일을 다 겪어도, 질척거릴지언정 끈질기게 마음 밑바닥에 남아 있곤 하는 게 사랑의 습성이다.

  하지만 신뢰는 다르다.

  한 번 깨지면 도로 붙이기가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바로 그놈의 신뢰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보통, 신뢰를 잃고 나서 가장 많이 후회라는 걸 하곤 한다.

  그러나 대공은 일말의 후회도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후회하는 방법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남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대공이 멋대로 애정을 밀어붙이는 동안 니콜라는 대공에 대한 애정은 남아 있었어도 그 사이에 깨어진 신뢰를 회복하지 못했고 그 결과가 결국 이런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고, 산드로는 생각했다.

  뭐, 못 본 척 했던 산드로 입장에서도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그 황녀와 데지아 경의 관계는 각별하기로 유명하니까요.”

  북부 출신인 그들마저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을 만큼 각별하다. 니콜라와 신뢰관계가 있다면 아마 그 황녀일 터였다. 그런 그녀가 니콜라를 데리러 왔다.

  산드로로서는, 니콜라가 그녀와 함께 가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저는 솔직히 저하께서 방법을 잘못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데지아 경 입장에서는 그간 갇힌 거나 다름없지 않았겠습니까? 애초에 남자잖아요. 황후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닐 테고.”

  로사 알렉세이가 니콜라 데지아를 곁에 두고 싶었다면 그가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청혼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공 역시 그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늦은 시점이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대공이 눈을 들어 산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산드로?”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으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살벌했다. 대공 앞에서 말조심을 해야 하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무심코 입을 열었던 산드로는 찔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괜한 말을 꺼냈나보다.

  이곳은 황궁이었다. 절대 피를 흘리면 안 되는 장소 중 하나다. 대공이 그야말로 짐승 소리를 듣고 있었던 몇 년 전조차도 황궁에서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짐승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들어도 정말로 머리끝까지 돌지는 않는 남자가 그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황후전으로 가는 길에는 순찰을 도는 경비병 하나 마주치지 않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살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아마도 다들 대공을 피해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황궁 경비대를 비난 할 일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로사만큼 위험한 종류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소한 수도에서는.

  황후전의 입구에 다다라서 산드로는 잠깐 고민했다.

  굳이 이곳을 가장 먼저 찾아오다니, 평소의 대공답지 않은 판단이었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니콜라는 없을 터였다.

  들어가 봤자 그 안에서 데지아 경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리라고 다시 한 번 말을 할까, 말까.

  쓸데없는 낙관적 예상을 했다가 대공이 미쳐 날뛰면 큰일이었다. 역시 폭발 전에 찬물을 붓는 쪽이 낫다는 판단에 그는 살신성인하는 심정으로 다시 말했다.

  

  

  “...이미 나가고 없을 겁니다. 아이다가 보았을 때 둘이 중정을 나가고 있었다던데, 지금쯤이면 벌써 성문을 빠져나가고 남을 시간이고요.”

  산드로의 말이 그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로사는 오랜만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누구든 걸리면 망설임 없이 죽여 버릴 수 있을 기분이었다. 배신감과 질투와, 불쾌감 따위가 뒤섞여 타오르는 머릿속에서 간신히 녹지 않은 차가운 정신이 그에게 물었다.

  ‘대체 왜?’

  근래 들어 니콜라는 그에게 가지고 있던 경계심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기색이었다. 깨어난 이후로 황후전에 모셔 놓고 매일 찾아간 덕분일 것이다.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가 주는 것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잘 되어가고 있는 줄 알았다.

  경계심을 얻을 만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그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은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보상할 수 있는 것을 보상하는 쪽이 그의 방식이었다. 때문에 그는 니콜라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보상을 하기로 했다.

  때문에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가두다시피 해 놓았으니, 도망가지 말라는 게 무리라고?

  전부 내 탓이다 이거지.

  하지만 니콜라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고, 로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었기에 낙관했다. 그가 키스하려고 할 때, 니콜라는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다. 하물며 황녀가 찾아왔을 때도 불쾌했지만 만나게 해 주었다. 그런데 날 배신하고 그 계집애의 손을 잡아?

  황후전의 시녀가 와서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루비를 주려고 했다. 황금 관에 씌울, 그의 검은 눈동자에 잘 어울릴 루비를. 그 홍염의 보석들은 여전히 상자에 담겨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걸 줄 상대가 없어질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사의 충격은 컸다.

  황후전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기나긴 주랑의 사이사이에 등불을 올린 정원도 대낮처럼 밝아, 그림자조차 숨을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주랑을 걸어갔다는 보고가 마지막이었다. 그 꼴을 떠올리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일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로사는 생각했다.

  이대로 두 사람이 곱게 떠나도록 둘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었다.

  붙잡아오면 된다. 붙잡아서 더 이상은 어디도 갈 수 없도록 묶어두면 되는 일이다. 이번에야말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어디 탑에라도 가둬두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면 이런 불쾌한 감정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니콜라는 그런 취급을 싫어하겠지만 할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사람을 속이고 도망을 가는 남자다. 더 이상은 속아줄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뒤는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억지로 붙잡아 놓으면 더 이상은 웃지 않을 것이다. 곁에 있으라고 말하고 아무리 상냥하게 대해 주어도 떠나고 싶다고 울던 니콜라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니콜라를 보는 것도 대단히 불쾌하고 신경에 거슬렸다. 그런 기분은 이미 지겹게 느꼈다.

  ‘하지만 어쩌겠어. 그렇게라도 옆에 둬야 하겠으니.‘

로사는 싸늘하게 웃었다.

  ‘나 역시 대단히 행복하진 않을 테니까 서로 조금씩은 양보하자구, 니콜라.’

  그는 정원을 건너 주랑을 지났다. 세 개의 문을 차례대로 열었다. 하나하나 문을 열 때마다 텅 빈 황후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때마다 그의 머릿속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격랑이 이는 심장을 안고 침실의 앞에 섰다. 언제나 니콜라가 있던 자리였다. 심장이 아플 만큼 뛰었다. 어차피 여기에는 없으니까 진정해, 진정하라고.

  그저 확인차 문을 열어보는 것 뿐, 거기에 니콜라가 없을 것은 뻔했다. 기대하지 말라고.

  그런데 뭘 기대하는 거야?

  이 지경에 와서도 무언가를 기대하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면서 로사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는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니콜라는 침대 위에 있었다. 잠옷 차림에, 누워 있다 문을 여는 기척에 벌떡 일어났는지 머리는 살짝 흐트러져 정수리 부근에 작은 까치집이 만들어진 채였다. 문을 여는 소리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하.”

  라고 말했다.

  로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갔다. 놀란 니콜라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

  그는 말없이 니콜라를 끌어안았다.

  

  ++

  

  대공의 옷자락에서는 새벽과 불길의 냄새가 났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횃불 속을 걸어 온 것이 분명했다. 그가 한밤중에 황후전에 불쑥 들어오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런 냄새를 묻혀 온 적은 없었다.

  니콜라는 흘긋 대공이 열어둔 채인 문을 보았다. 일직선상의 구조로 인해 열어둔 문 밖으로 멀찍이 보이는 주랑에는 사이사이마다 횃불이 걸려 대낮처럼 밝았다. 이 밤중에 황후전의 불을 전부 밝히고 그가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니콜라를 끌어안은 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대공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는 숨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거기에 숨길 수 없는 안도가 묻어 있다는 사실도 니콜라는 알아챘다.

  “...가지 않았군.”

  “어딜 말입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황녀는 돌아갔나?”

  “네.”

  “반가웠어?”

  니콜라는 살짝 웃었다. 그야 당연히 반가웠다. 반가워할 것을 알고 그도 니콜라에게 황녀를 보내주었을 터였다. 거기에서 대공의 호의를 느꼈었는데, 그는 아니었던 건가?

  “네.”

  “그런데 왜....”

  불쑥 입을 열었던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공은 망설이는 듯 고개를 들어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무언가를 망설이는 순간을 목도하는 특권은 아마도 제국 전체를 통틀어 니콜라에게만 주어진 것일 터였기에, 그는 그것을 만끽하기로 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로사는 속삭였다.

  “.......”

  조금은 놀란 얼굴로 니콜라가 대공을 응시했다. 분명 미하엘이 니콜라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공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니콜라는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미하엘을 궁전 밖까지 데려다주고서 돌아왔다. 밤을 틈타 수도를 벗어나야 하니 오래 머무를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니콜라에게 자신과 같이 가기를 권했지만 니콜라는 거절했다. 별로 망설이지도 않았다.

  “여기에 있기로 결정했어요.”

  “.......”

  로사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니콜라를 응시했다.

  “왜?”

  왜냐니, 그럼 당연히 도망치는 게 맞다는 건가? 기껏 사람이 결심을 했더니 왜 그랬느냐고 묻는 대공에게 니콜라는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그럼 저하는 왜 저를 여기 두신 겁니까?”

  대공이 대체 무엇 때문에 니콜라를 황후로 만들고자 하는지는, 사실 니콜라도 잘 몰랐다.

  아이 때문일 거라고 미하엘은 단정 지었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확실히 니콜라가 아이를 가진 이후 대공의 태도가 바뀌었고 니콜라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아이의 어미로써 곁에 있으라고 그에게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청혼을 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취급으로 보면 반쯤은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황후전에서 나가지도 못하게 했으니 말이다. 대공은 그걸 감춰 둔다고 표현했지만, 가둬 두는 것과 딱히 다르지도 않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니콜라가 남기로 결심한 것은, 결국 그가 대공을 좋아하는 탓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대공에게서도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그는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저는 도망가지 않았을 텐데요.”

  “너는 약해, 니콜라. 널 감춰 두어야 했어.”

  “그렇게 약하진 않습니다.”뜻밖의 평가에 니콜라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운 나쁘게 여기저기 구르고 다친 데다가 임신까지 한 몸이라 지금은 좀 그런 면이 있지만, 원래의 그는 건강 그 자체였다. 대공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심지어 이 와중에도 아이가 줄곧 무사한 것도 니콜라가 건강한 덕이라고 태의도 말한 바 있었다.

  “네가 다치는 게 싫었어.”

  “왜 그걸 신경 쓰십니까. 다쳐도 제가 다치는데.”

  “.......”

  “왜, 제가 다치는 게 싫으신 겁니까?”

  “나는,”

  니콜라의 질문에 로사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본래 아주 쉬웠을 터였다. 니콜라가 황제의 혈육이므로, 아이를 가져서, 그에게 제위를 가져다 줄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대공에게도 니콜라와의 결혼이 최선의 대안이라는 간편한 답안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껍데기였고 입 밖으로 뱉으면 공허해지는 낱말들일 뿐이었다. 실제 이유는 그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터무니없이 사소하고, 그러나 티 없이 진실한 단 하나의 이유.

  “너를, 사랑해서.”

  어느 순간부터였는지는 로사도 잘 모른다. 언젠가부터 니콜라를 볼 때 그가 모르는 방식으로 마음이 요동쳤던 것은. 그는 보통 이렇게까지 신경이 거슬리는 일을 참지 않았다. 그때 마다 차라리 죽여서 깔끔하게 끝낼까 몇 번이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번번이 어떤 이유에 의해 가로막혔고, 어느 순간이 오자 손에서 놓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느 순간인가 니콜라는 고개를 들어 대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습니까.”

  “.......”

  담담하고 맑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비로소 로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여기에 그가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눈 앞에, 아주 쉽게 가질 수 있었다. 손만 뻗으면, 말 한마디면 그의 것이 될 텐데 무얼 망설이는 거지?

  그리고 일단 깨닫자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침대의 아래 무릎을 꿇었다. 니콜라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비록 그곳이 황궁의 한복판이라 해도, 그는 어디에서든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그의 일생에 단 한사람에게만 행하는 일일 터였다.

  문이 열려 있었고 횃불은 환했으며 그가 끌고 온 근위대와 경비병들, 시녀와 귀족들이 그 밖에 서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공은 기꺼이 니콜라의 앞에서 자신의 몸을 낮추었다.

  “네게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

  “저하.”

  “나와 결혼해 줘, 니콜라.”

  이것으로 세 번째 그의 청혼을 받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에게는 마치 처음으로 듣는 말처럼 느껴졌다. 대공이 말한 짧은 문장은 앞서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황후의 보석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가 가져보지 못했던 지위에 대한 약속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사랑한다고 말했다. 니콜라에게는 그것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대답해 주지 않겠어? 네 대답이 듣고 싶어.”

  대공이 속삭였다. 니콜라는 고개를 들었다. 보석도 직위도 필요 없었던 니콜라는 과거의 약속에는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결심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공의 앞으로 다가갔을 때 대공은 다소 당혹스런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니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비로소 대공이 미소지었다.

  니콜라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마주쳤다. 그저 부딪히는 듯한 짧은 키스였지만, 그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첫 번째 접촉이 끝나는 순간 대공의 입술이 그의 것을 집어삼켰다.

  

  ++

  

  대공은 문을 닫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을 닫게끔 손짓했다. 열려 있던 황후전의 모든 문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일사불란하게 닫히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시종들과 병사들도 모두 각자의 자리로 물러났다. 그러나 환히 밝혀진 등불은 내리지 않았다. 가뜩이나 다른 건물들과는 떨어져 경내의 깊숙이 위치한 장소 덕분에, 멀리서 보았을 때 황후전은 어둠 속에 떠오른 금색과 붉은색의 신기루처럼 보일 터였다.

  당연히 침실에도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본래 결혼식의 밤에는 등불을 밝히니까.”밖에서 보면 훤히 들여다보이고도 남겠다는 생각에 니콜라가 불을 끄자고 했으나, 대공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거부했다.

  “그럼 대관식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황후에겐 대관식의 밤이겠지만, 내겐 오늘이야.”

  그간에도 니콜라의 회복은 대공의 참을성을 시험하듯 느렸다. 그런데 더 기다리라고?

  그럴 순 없지.

  니콜라의 손을 쥐고 대공은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 손바닥에 한 번, 그리고 손목과 팔꿈치 안쪽으로 입맞춰 가며 대공의 입술이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차츰 간지러움과 더불어 찌릿거리는 느낌이 엄습해왔다. 손등에서부터 시작한 입맞춤에 니콜라가 참지 못 하고 몸을 파드득 비튼 것은 그가 니콜라의 젖꼭지를 깨물었을 때였다.

  “아흑.”

  “아파?”

  “아, 아닙니다....”

  숨을 참느라 새빨개진 얼굴로 니콜라가 대답했다. 아프진 않은 것 같고, 오랜만이라 몸이 자극에 더 한층 쉽게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니콜라는 소위 말하는 성감대가 예민한 편이라 그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반응했다.

  “벌써 새빨개졌어.”

  “...얼굴 말입니까?”

  “여기도.”

  벌써부터 반쯤 일어서 있는 니콜라의 성기를 로사는 손으로 감쌌다. 앞부분은 이미 조금 젖어 있었다. 선액이 흐르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니콜라가 몸을 비틀었다.

  “아흐흣...!”

  “상자를 가져 올 것을.”

  이 시점에 루비를 바쳤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그는 아쉬움에 쯧 하고 혀를 찼다. 비록 니콜라는 그 루비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로사에게 그것은 약속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니콜라의 피부에 그 루비는 무척 잘 어울릴 터였다.

  니콜라의 허벅지를 잡고 활짝 벌리게 한 대공은 손가락으로 그의 밀부를 찾아 밀어 넣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장소가 열리는 느낌에 니콜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싫....”

  “싫어?”

  그렇지 않을 텐데. 로사는 니콜라의 얼굴을 보며 손가락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 정도는 쉽게 삼켰잖아. 니콜라도 잘 알 수 없었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대공이 만지는 부분마다 불이 나는 느낌이었다.

  내벽의 한 점을 꾸준히 문지르자 차츰 니콜라의 목소리는 윤기 띤 것으로 바뀌어 갔다. 안쪽을 더듬는 손가락이 내부의 어딘가에 닿았을 때, 니콜라는 번개가 치는 듯한 감각에 몸을 비틀었다.

  “...흑! 아, 흐윽...!”

  그의 얼굴을 보며 로사는 몇 번이고 같은 장소를 문질렀다. 정신이 없었다. 그곳을 집중적으로 괴롭히며 니콜라의 밀부를 길들인 로사는 충분히 풀어졌다 생각되었을 때 니콜라의 허리를 안아 들어 올렸다.

  “부...불 좀....”

  니콜라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이 부셔서라기 보단, 수치스러워서였다. 그의 것은 벌써 한계까지 발기해 있었고, 건드리기만 해도 터뜨릴 듯 했다. 귓가에 대공의 속삭임이 들렸다.

  “너만 그런 건 아니야, 니콜라.”

  눈을 떠 보니 대공의 성기도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붉게 일어나 있었다. 그런다고 딱히 위로가 되는 사실은 아닌지라 니콜라는 헤쓱해졌다.

  자신의 것에 향유를 바른 로사는 니콜라의 입구에 성기를 갖다 대고, 한 번에 꿰뚫었다.

  “으읏...!”

  오래간만이어서였는지, 뭐라고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지나칠 정도로 강한 이물감에 니콜라는 거의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미안.” 한계까지 자신의 것을 밀어 넣은 로사가 니콜라의 어깨에 대고 속삭였다. “참을 수가 없어서....”

  남자의 것을 가득 물고 있는 하반신은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허벅지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로사는 니콜라가 자신의 것에 익숙해지게끔 한동안 그 자세로 니콜라를 안고 있다가, 천천히 성기를 뽑아냈다. 미리 발라둔 향유의 덕분인지 움직임은 힘들지 않았다. 니콜라는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호흡이 뜨겁다.

  안이 휘저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니콜라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 대공의 손이 닿았다. 그는 니콜라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한 손을 그렇게 한 채, 어느 새 다른 손도 들어 올려 대공의 다른 쪽 어깨에 올리게 되었다.

  “안아.”

  “...네...?”

  “날 끌어안아, 니콜라.”

  대공의 요구에 니콜라는 그의 목을 안고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니콜라가 움직이는 바람에 몸 속에서 대공의 성기가 위치를 바꾸었다. 니콜라가 멈칫하자 대공이 그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더 세게.”

  마주 안은 듯한 자세가 되었을 때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대공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사랑해, 니콜라.”

  “.......”

  밑도 끝도 없는 고백에 니콜라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걸로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대공은 추삽질을 늦추고 성기를 천천히 밖으로 뽑았다. 통째로 밖으로 밀려나가는 듯한 감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흣...아....”

  “그것 뿐?”

  대공이 물었다. 니콜라의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분명해, 니콜라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도, 아, 저하를, 사랑합니다.”

  말하는 도중에 또 다시 깊게 들어온다. 마주 안은 채라 다리가 벌어져 삽입이 훨씬 깊어졌다. 대공이 추삽질을 해올 때 마다 니콜라의 성기가 대공의 배에 마찰했다. 허리가 뜨고 숨이 턱턱 막혔다.

  좀 더 안아.

  더 세게.

  대공이 꺼내놓는 날것의 감정에 그는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숨을 들이쉬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니콜라가 손을 놓칠 때 마다 그러자 대공은 다시 움직임을 멈추고 니콜라에게 그의 목을 안게 했다. 니콜라가 그를 안으면, 그도 니콜라를 안아 왔다. 닿아있고 싶다. 그가 닿아있는 만큼 힘껏 닿아오기를 바랐다.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정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끝나지 않을 듯한 감각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뒤흔들었다.









chapter. 3

  

  

  황제가 죽고, 새 황제의 즉위식의 날짜가 결정되었다. 황제의 국장이 치러지고 일주일 후로, 황후의 대관식 또한 즉위식과 동시에 치러질 예정이었다.

  황제의 죽음을 니콜라는 담담한 기분으로 보냈다. 따지고 보면 니콜라에겐 백부였던 셈이지만, 아버지가 따로 있었던 사실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던 데다가 제대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이니 그립다거나 대단히 애틋한 감정이 들지도 않았다.

  새 황제의 즉위식이라고 해도 한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황제 대행으로 섭정 중이던 대공이 새삼스레 황제로 즉위하는 것뿐이므로, 외부에서 보기에는 대공에서 황제로 호칭을 바꾸는 정도의 느낌밖에 와 닿지 않았다. 그보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 같은 날 대관식을 치를 다른 쪽이었다.

  “그럼 이제 드디어 황후 전하의 옥안을 뵐 수 있는 거야?”

  새로운 황후는 대공이 사막에서 데려 온 황제의 혈육이었다. 죽은 황제의 유언에 따라 대공과 결혼해 후계자를 낳는 조건으로 황후가 될 수 있었던 여자였다. 어찌 된 일인지 대관식 직전까지도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자세한 약력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쳐도, 이름과 나이 정도는 알려질 만도 한데 전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어찌어찌 사막 출신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다.

  황후 후보가 황후전에 들어 간지 몇 달째였음에도 정보량이 고작 그 정도라는 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실제로 대공이 황후전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설마 그 때는 얼굴을 보이겠지, 언제까지 그림자 황후로 살 수도 없잖아?”

  그림자 황후는 이름과 나이조차 불명인 새 황후를 부르는 별명이었다. 딱히 부를 이름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부르는 건데, 상대인 대공의 별명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황국장미’인 것에 비하면 시시한 것을 넘어 초라하기까지 한 별명이다.

  황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는 덕분에 소문만 무성했는데, 돌이켜보면 황후전에 사람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약 두 달, 그 사이 온갖 소문이 횡행했다. 개중 어떤 것들은 저절로 사라졌고, 남아있는 것은 대략 두 가지 방향이었다.

  “대단한 미인이라지! 대공이 아끼느라 보여주지 않는 거라 하던데.”

  -가 첫 번째였다면,

  “아니야, 엄청난 추녀라고 들었어. 황후가 저런 꼴이면 비웃음을 산다고 대공이 황후전에 처박아둔 거라고.”

  -가 두 번째였다.

  그리고 헨리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미인일 리가 없어. 아무리 대공이라도 남잔데 자기 신부가 미인이면 당연히 자랑을 하지 숨기겠냐? 남자들은 다 그렇잖아. 추녀인 게 분명해.”

  “그러게, 그것도 일리가 있네!”

  “음, 맞는 말이야.”

  성 아랫마을의 술집에서는 헨리를 포함해 몇 명의 남자들이 둘러앉아 황후의 정체에 대해 나름 격렬한 토론이 벌이는 와중이었다. 모여 앉은 인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헨리가 의기양양하게 술잔을 들어 맥주를 반쯤 마시고 내려놓으며 옆자리에 앉은 니콜라를 돌아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니콜라?”

  “아...음...글쎄.”

  심드렁한 대답이다. 헨리는 반응이 뭐가 이렇냐는 듯이 어이없어하며 니콜라를 보았다.

  “너는 사막에 다녀왔잖아. 황후 전하 되실 분 만난 거 아니야? 오래 된 일도 아닌데 기억 날 거 아냐.”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대공이 황후를 데리러 간 사막행에 길잡이로 동행했다가 얼마 전에야 수도로 돌아온 바 있었다. 그러니 분명 황후를 보았을 터였다. 니콜라는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잘 모르겠어.”

  “잘 모르는 거야,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둘 다라고 해야 하나....”

  “하긴, 대관식 때는 볼 수 있겠지.”

  니콜라는 고민스런 얼굴을 하더니 한참 있다가 또 말했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마. 둘 중에 어느 쪽이 미인이냐고 하면 백프로 대공이니까.”

  “뭐 그거야 그렇지. 솔직히 웬만한 여자들도 대공은 못 이길 거다. 남자 여자 통틀어서 내가 본 중에도 얼굴만으로 따지면 대공이 제일 미인이더라고.”

  백번 이해한다며 헨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너도 봤나본데? 어떻게 생겼냐니까?”

  헨리는 잊어버리지도 않고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이래저래 얼버무리며 여러 번 질문을 넘긴 니콜라가 기억하기로도 세 번째였다. 이런 집요함은 그의 직업적성 때문이기도 할 터였다. 니콜라가 뭐라도 말해주면 그걸로 기사라도 쓸 생각일 터였다. 황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고, 새로운 소식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걸로 그날 신문 1면 기사는 정해진 당상이었다.

  “뭐 하나만 얘기 해줘. 쓸만한 소스라면 기사는 내가 알아서 쓸게.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남자라던데.”

  니콜라가 불쑥 대답했다.

  “뭐?”

  “황후가 남자라는 얘기가 있다고. 나도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지만.”

  “에이, 무슨 말이야. 기억 안 난다고 아무 말이나 하면 못쓴다, 너?”

  ‘남자 황후가 웬말’이냐며 헨리는 껄껄 웃고 넘어갔다. 니콜라가 기삿거리도 안 되는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아무튼 네가 사막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와서 난 정말 기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위해 내가 건배할게. 건배!”

  잔을 추켜올리다 말고 니콜라를 보더니 물었다.

  “넌 왜 안 마셔?”

  “아, 난 당분간 금주야.”

  니콜라는 잔을 들어 보이며 우울하게 말했다. 잔에 든 것은 사과주스였다.

  

  

  술집은 새벽까지 문을 여는 술집이었지만 니콜라는 밤이 너무 깊기 전에 일어나야 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서느냐고 헨리가 매달렸지만, 말했다시피 당분간은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기에 술집에서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사과주스만 마시며 오래 앉아있기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벌써 취한 헨리를 달고 나와 니콜라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직 꽤 이른 시간이긴 해도 밤거리는 꽤나 어두웠고, 오랜만에 오는 골목길은 제법 낯설었다. 둘러보니 문을 연 가게는 대부분이 술을 파는 곳으로, 니콜라가 들어가긴 뭣했다. 컨디션은 상당히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임신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닌지라 그는 한창 몸조심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긴 좀 그런데....’

  사실 니콜라는 황후전에서 탈출해 나온 참이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대관식의 준비라는 것이.

  대관식 날짜가 정해진 후 황후전은 예전의 고즈넉함을 잃었다. 마르퀴스 양을 필두로 낯선 얼굴의 여관들이 온갖 사이즈의 장신구와 온갖 색깔의 가죽과 온갖 이름이 붙은 수많은 옷감을 가져와 니콜라의 몸에 걸쳐보기 시작했다. 황후전의 응접실은 어느덧 옷감으로 가득 차서 다시는 결코 예전 같은 곳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것이 네 시간을 이어졌다. “마마, 오른팔을 들어보십시오.” 라던가 “마마, 왼팔을 들어 보십시오.” 라던가 “마마, 가발을 씌워보겠습니다.” 하는 소리를 네 시간이나 듣고 있어야 했다는 말이다.

  가발에 와서는 솔직히 가발 따위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가발은 꽤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니콜라의 머리가 짧아서 틀어 올리는 스타일로 만들기엔 길이가 모자라고, 그러니 긴 머리 가발을 씌울 것인데 막상 가발을 씌우려고 보니 가지고 있는 곱슬머리가 아깝고, 그렇다면 부분 가발을 붙여 길이만 연장하자고 했다가, 그러지 말고 차라리 금발을 씌우자는 둥....

  이 모든 논의가 니콜라를 빼고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관들은 해가 지자 저녁식사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사라졌다. 결국 니콜라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가출까지는 아니고, 잠깐 바람이나 쐬고 들어가려 했던 것이 막상 나와 보니 들어가고 싶지 않아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대공이 청혼했을 때 좀 신중하게 생각해 볼 걸.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지만.

  

  

  십여 분쯤 걸었을까, 헨리는 끙끙대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좀 전의 술집에서 너무 급하게 마신다 싶더니 초저녁부터 인사불성으로 취해 버린 것이다. 니콜라도 알아보지 못 하고 헛소리를 주절거리다가 뻗어 버렸다. 담벼락에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지는 헨리를 쳐다보며 니콜라는 혀를 찼다.

  ‘이걸 어쩌나.’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건강한 놈이고 다행히 날씨도 춥지 않으니 하루쯤은 밖에서 자도 문제야 없을 테지만, 이곳은 술집이 많아 취객들을 노린 사건도 종종 일어나는 곳이었다. 혹시라도 인사불성인 놈을 버리고 갔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면 평생 양심의 가책거리였다. 그리고 니콜라는 헨리를 평생이나 양심에 담고 살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니콜라가 돌아가야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이라서다.

  탈출하긴 했어도 니콜라 역시 다시 돌아갈 생각이긴 했다. 애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알고는 있으니까.

  대공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도 자신이었고 말이다.

  대관식은 대공이 마침내 황제로 즉위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마도 당대에서는 가장 클 국가적 중요 행사다. 단순히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고, 황후를 책봉하는 것 만이라면 서류상으로도 가능한데도 굳이 식을 여는 목적은 제국의 부와 강건함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대관식에서 황제와 황후가 그 누구보다 화려해 보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하루에 그 많은 걸 다 정하려고 든 게 문제였다.

  일을 이렇게 만든 가장 주된 원흉은 대공이었다. 그가 대관식 날짜를 너무나 촉박하게 잡아 놓은 탓이다. 몇 주 전부터 준비해오긴 했지만 길게는 일 년을 준비하기도 하는 대관식을 몇 주 만에 준비하기란 여러 모로 무리였다. 그러니 일주일에 걸쳐서 해도 될 일을 사흘 안에 끝내야 하고, 사흘이 걸릴 일은 하루 만에 끝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혼준비라는 것이 예상 외로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단 사흘 만에 완전히 지친 니콜라는 즉위식은 몰라도 황후의 대관식은 좀 미루자고 궁내부에 요청해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 일 년쯤 말이다. 아이를 낳고 난 뒤에 대관식을 준비한다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적당할 터였다. 사실은 그냥 안 하거나, 주교의 앞에서 선서만 하는 형식으로도 괜찮았지만 일단 조금이라도 미룰 수 있기만 하면 만족할 참이었다. 조금 소박해진다면 더 좋을 테고 말이다.

  궁내부에서는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야 즉위식의 준비 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같은 기간 내에 황후의 대관식도 진행해야 하니 아마 뼛골이 빠질 지경이었을 것이다. 궁내부 원사는 니콜라의 제안에 구명줄을 잡은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대공이 일언지하에 딱 잘라 거절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아이를 낳기 전이어야 해. 내 아이가 혼외자식이 되게 둘 수는 없지.”

  그래서 니콜라는 울며 겨자먹기로 준비를 강행하게 되었다. 게다가 황후가 대관식에서 입어야 할 옷만 여덟 벌인데, 그의 경우 앞서 말한 이유로 체형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가봉을 해놓지도 못했다. 여덟 벌의 공식의상을 일주일 사이에 가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다 제 팔자인데 누굴 원망하겠나.

  

  

  ‘돌아갈까.’

  그는 기대고 앉아 있던 술집의 담벼락에서 꾸물꾸물 일어났다.

  “일어나, 헨리.”

  쓰러져 있는 헨리를 툭툭 치며 깨워 보았지만 미동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여관이라도 찾아서 던져 놓아야겠군.’

  그런 뒤 자신도 궁으로 돌아가면 시간이 적당할 터였다. 니콜라는 헨리를 부축해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고 일어섰다.

  바로 그 때였다.

  어느 샌가 다가온 새까만 그림자가 니콜라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헨리를 놓치는 바람에 헨리가 꾸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하던 니콜라도 상대방의 힘에 눌려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괴한은 벽에 떠밀려 옴죽달싹 못 하는 니콜라의 턱을 붙잡았다.

  “뭘 하려는...웁...!”

  부지불식간에 키스를 당하고야 말았다. 체격도 기술도 평균 이상인 그가 이렇게 쉽게 눌린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키스가 너무 야했다. 몸부림을 쳤지만 상대방의 돌처럼 단단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괴한은 좋을 대로 입을 맞춘 후에 니콜라를 놓아주었다.

  “아무한테나 입술 빼앗기고 다니지 마.”

  “헉...!”

  니콜라는 숨을 몰아쉬며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검은 코트에 가벼운 옷차림을 한 남자의 얼굴은 어디 가서 한 번 보면 잊지도 못할 만큼의 미남이었다. 대공이 빙글빙글 웃으며 니콜라의 앞에 서 있었다. 키스할 즈음부터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말은 바로 해야지, 뺏은 건 대공 쪽이었다. 여유 없이 사람을 몰아붙여 놓고는 무슨 소리인지. 농담이 아니라 고작 입맞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다니 과해도 너무 과하지 않은가? 톡톡히 대가를 치른 니콜라는 울컥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약혼자를 찾으러 왔지. 여관들이 울면서 찾아다니고 있더군. 네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야.”

  니콜라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흘깃 헨리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는지 넘어진 자세 그대로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물론 아무 것도 못 본 것 같았다.

  “도망간 피앙세를 이렇게 친히 찾으러 와서, 내가 화도 내지 않는데 뭐가 문제지?”

  피앙세....

  대공이 굳이 선택한 단어에 니콜라는 반박할 기운을 잃어버렸다. 헨리가 잠들어 있어서 다행이지, 깨 있었다면 내일 기사는 틀림없이 「대공저하의 숨겨진 피앙세는 누구?」 일거고, 운 좋아서 대공을 못 알아본다 해도 「근위대 중위의 피앙세는 남자!」 일테니 최소한 니콜라는 더할 나위 없이 곤란해진다는 게 불 보듯 뻔하다.

  “그건 그렇고 왜 이런 곳에 있었지?”

  “들어가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전에 헨리부터 어디 적당한 데 데려다 놓아야 하는데.... 잠깐 딴 생각을 하던 니콜라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대공을 눈치 챘다.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물었잖아, 니콜라.”

  니콜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되물었다.

  “여기가 어딘데요?”

  “.......”

  대답은 하지 않고, 대공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내가 알아야 하는 곳인가? 니콜라는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술집에서 나와서부터 길이 좀 익숙하지 않다고 느끼긴 했다. 오랜만에-라고 해도 약 4개월이 안 되겠지만-와서인지 근처의 가게들이 많이 바뀌어 있어서였다.

  길을 잘못 들어온 모양이었다. 근방의 가게들은 모두 낡은 여관들과 술집들이다. 니콜라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창가娼街의 뒷골목이었다.

  ‘아, 그래서 좀 화가 나 있었군.’

  니콜라는 대공의 말투가 묘하게 친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 근처 술집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아니,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닙니다.”

  “이건 누구지?”대공이 턱짓으로 헨리를 가리켰다. 그 때 헨리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어느 새 그들의 발치에 와서 누워 있었다. “우움....” 소리를 내며 대공의 신발에 볼을 부비는 헨리를 보며, 니콜라는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백했다.

  “...제 친구입니다.”

  

  

  저래도 어쨌거나 명색이 친구이니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서, 가장 가까운 여관에 눕혀 두기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니콜라가 설명하니 대공은 납득한 모양이었다.

  “난 네가 여기서 저 남자를 발견해 여관에 데리고 들어가려는 줄 알았는데.”

  “모르는 사람이면 그런 일 안 하죠. 친구니까 어쩔 수 없이....”

  생각해보니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해를 풀기가 훨씬 어려웠을 게 안 봐도 뻔했다.

  “무슨 말이야. 모르는 남자와 여관에 들어간 적도 있으면서.”

  “그런 일 안 한다니까요.”

  “그런 적 있을 텐데?”

  대공이 물었다. 단정적인 어조라 니콜라는 당혹스러웠다. 마치 본 적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로 니콜라는 이런 데서 모르는 남자와 여관에 들어간 적이 없었으므로!

  애초에 왜 남자와 여관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지가 의문이었다. 대공을 만나기 전의 니콜라는 오로지 여자밖에 모르는 평범한 연애관의 소유자였다. 남자와 뭘 해본 일 자체가 대공이 처음이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공을 만났을 때가, 니콜라가 처음으로 남자의 성기를 만져 본 날이기도 했다.

  “.......”

  문득, 불길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니까 대공의 성기를 처음 만졌던 날을 떠올린 것이다. 지금껏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그 일은 대공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였다. 그 때 니콜라는 인사불성인 대공을 데리고 여관에 들어갔다. 미약에 취해 있었고, 달리 방도가 없어서이긴 했지만.

  “일 년 전인가? 네가 여기서 남자를 하나 데리고 여관에 들어갔던 게 말이야. 일 년 반? 그쯤 되었지?”

  “네?”

  니콜라는 되물었다. 모르는 척이라기보단, 제발 모르는 척 해 주길 바라서였다. 하지만 대공은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 근처였지.”

  “........”

  “저쯤인가?”

  손을 뻗어 골목길 가운데 한 점을 가리켰다.

  아주 정확했다.

  니콜라조차도 긴가민가한 기억이었다. 대공이 그곳을 짚어 가리키고 나서야 정확한 위치가 기억이 났을 정도다. 반면에 대공은 자신이 쓰러져 있던 자리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분명 그 때 대공은 미약에 취해 기절 상태였고 여관에 들어갈 때까지 몸을 가누지도 못 한 채였다. 그리고 여관에 들어가서는 가장 먼저 눈을 가렸다. 결코 들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본인조차도 거의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니콜라는 급기야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어깨를 감싸고, “날씨가 추운가?”하고 중얼거린 대공은 니콜라를 내려다보고 생긋 웃었다. “봤다고 했잖아. 내가.”

  

  ++

  

  다음 날 니콜라가 눈을 뜬 장소는, 황궁이 아니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처음 보는 천장이었다. 황후전의 우아한 천장 장식에 익숙해져 있던 니콜라의 눈에도 만만찮게 호사스러운 것이, 황후전 못지않아 보였다. 어느 돈 많은 귀족의 저택 같았다.

  결론적으로 그곳은 돈 많은 귀족의 저택이 맞았다. 어제 밤이 늦어 대공은 니콜라에게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과 함께 대공저로 돌아가길 권했고, 니콜라는 대공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공저로 왔다.

  어제 기억을 비교적 금세 떠올린 니콜라는 좀 안심했다. 근래에는 잠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아무데서나 잠드는 버릇이 생겼는데 황후전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엉뚱한 데서 잠드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으니까.

  대공은 섭정기간 동안 황궁과 대공저를 오가면서 생활했지만, 니콜라는 돌아온 이후로 황후전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가 대공저에 오는 건 이걸로 딱 두 번째다.

  그 때의 방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업무공간에 침실이 있는 느낌이었다면 이쪽은 침실로만 만들어진 공간의 느낌으로 조금 더 작지만 밝았고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테피스트리가 바람을 받아 하늘하늘 나부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니콜라는 방 안에 자신 혼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의아해졌다.

  사실 어제 이곳에 왔을 때의 일이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대공의 말에 동의하고서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대공저로 향했다. 도중부터 마차 안에서 잠이 쏟아졌고 아마 그 쯤부터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전에, 뭔가 잊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떠올려보던 니콜라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 밖에서 고개를 들이민 사람은 다름 아니라 어제 만취해서 새우처럼 술이 등이 굽어있던 그의 주정뱅이 친구 헨리였다.

  “헨리!”

  “니콜라....”

  안으로 들어온 헨리의 얼굴은 주정뱅이답지 않게 꽤나 깔끔했다.

  그 때 헨리야말로 인사불성 상태였기 때문에 여관에 데려다주려고 하다 말고 대공저로 데리고 왔다. 굳이 방도 많은데 귀찮게 여관에 들르는 쪽이 더욱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대충 사정은 짐작하는지 헨리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니콜라에게 묻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것저것 묻고 다닌 모양인지, 여기가 대공저인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저쪽 방에 있었어. 일어나니까 고용인이 와서 씻을 물에다가 옷도 주고 먹을 것도 주던걸.”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것도 어제 옷이 아니었다. 헨리는 새 옷을 어루만지며 고마워하는 어조로 말하더니 니콜라에게 덧붙였다.

  “대공이 생각보다 사람이 괜찮은가봐.”

  니콜라는 피식 웃었다. 대공을 보고 사람이 괜찮다고 말한 건 아마 헨리가 처음일 터였다.

  “그런데 난 그렇다 치고 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응?”

  “난 술 먹고 쓰러진 걸 대공이 데리고 왔다더라고. 그래서 사실 아무것도 기억은 안 나. 대공 얼굴을 본 기억도 안 나고. 너랑 같이 술 마셨던 건 기억나는데.”

  헨리의 질문을 듣고 나니 니콜라는 문득 자신도 뭔가 매우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매우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어쩌면 목숨에 관련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 아주 아주 심각한 문제가....

  “너 대공한테 뭔 짓 했지?”

  니콜라 자신도 몰랐던 일인데, 아무래도 그는 뭔가 큰 충격을 받으면 그것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기질이 있는 모양이다. 혹은 뇌가 충격으로 반쯤 굳어 있다가 외부의 자극을 받은 지금에서야 전부 깨어난 것이든가.

  아무튼 그 순간 전부 기억이 났다.

  “......헉!”

  멈춰 있던 머리가 그때서야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모든 것이 재생되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공이 했던 말까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전부 말이다.

  니콜라는 벌떡 일어났다.

  구르다시피 침대에서 내려 온 니콜라를 보며 헨리가 당황해서 말했다.

  “어디 가?”

  “대공은? 어디에 있어?”

  “밖에 있는 거 같던데...? 왜 그래, 니콜라?”

  헨리가 너 정말 머리 괜찮냐 하는 얼굴로 니콜라를 쳐다보았다.

  물론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있을 수도 없었다.

  벌떡 일어난 니콜라는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당겼는데 열리지 않아서 반대로 밀어 보았는데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가 당황해서 헨리를 뒤돌아보았다.

  “이거 왜 안 열리지?”

  헨리가 턱을 긁적였다.

  “그 문 못 열어.”

  “뭐?”

  “왜냐면 너 지금 갇혀 있는 거거든. 나도 허락받고 들어온 거야.”

  “...왜?”

  니콜라가 되물었다. 헨리가 답답해 죽겠네, 하는 얼굴을 하며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물어 봤잖아. 너 대공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터벅터벅 침대로 돌아와 앉은 니콜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대공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일 년 전의 그 때 대공이 미친 듯이 찾던 남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무래도 난 이번에야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대공이 날 죽이면 넌 도망가라, 원망하지 않을게. 니콜라가 기운 없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헨리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 대공이 뭘 아는데?”

  “그러니까 내가 일 년 전에....”

  말하다 말고 니콜라는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애초에 타의에 의해 밝혀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던 일이다. 그래서 헨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대공은 일단은 이 일을 불문에 붙일 생각인 듯 했다. 그래, 확실히 알려져 봐야 대공의 명예만 더렵혀질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 쪽에서 먼저 말하지는 않는 게 좋다. 그러잖아도 화나있을 대공을 더 화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일 년 전에, 뭐?”

  “정확히는 일년 반 전인데...아니야, 아무것도.”

  대공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해가 안 되는 일 투성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대공은 니콜라가 그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러고도 한동안 그냥 내버려두었다. 대체 언제부터 알았을까?

  그리고 왜 내내 두고 보기만 했지?

  ‘설마 사막행 전은 아니었겠지....’

  최근이었다면, 그것도 희한했다. 자신도 어느새 잊어버린 일을 대공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알고 나서도 내내 별 말 하지 않은 것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왜 그때 그렇게 집요하게 그를 찾았는지도.

  아니 그보다, 찾아서 뭘 할 작정이었을까.

  “혹시 말이야, 헨리.”

  생각에 잠겨 있던 니콜라가 불쑥 헨리를 돌아보았다.

  “이건 나하고는 관련 없는 얘긴데, 실제로 있었던 일도 아니고, 그냥 예를 들어 말하는 거야.”

  “뭔데 사설이 길어?”

  “들어봐, 어느 날 네가 길에 인사불성으로 쓰러져 있는 어떤 귀한 집 아가씨를 봤다고 치자. 그냥 두면 죽을지도 몰라. 그럼 어떻게 할 거야?”

  헨리가 흠, 하며 팔짱을 끼고는 질문했다.

  “얼마나 귀한 집 아가씬데?”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아주, 아주 귀한 집 아가씨야. 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니콜라는 아주를 강조해서 두 번 이어 말했다. 제국 황제가 될 사람이니 그 정도도 부족했다.

  “그러면 네가 손대지 말고 그 집 사람을 부르는 게 훨씬 낫지.”

  고민할 것도 없다는 어조로 딱 잘라 헨리가 말해서, 니콜라는 당황했다. 물론 그 때 당시에 니콜라도 괜히 손대지 말고 대공 측 사람들을 부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자신이 황녀 쪽 사람이니만큼 대공 쪽과 접촉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컸다.

  대공을 들쳐 업고 대공저의 문을 두들길 수는 없는 게 당연했고, 자신이 대공저에 찾아가 알려주면 오히려 의심을 살 터였기 때문이다.

  괜한 흔적을 남기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신고만 하고 그냥 가자니 그 사이에 대공이 무사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부르지 않은 것이었지만, 역시 그냥 누굴 불렀어야 했나. 그 때 조금 귀찮아지더라도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던 것인가. 헨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못 할 사정이 있었던 거야?”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는 안 했어. 그리고 네가 그 아가씨를 도와서 목숨을 구하긴 했는데, 그 대신 아가씨한테 중대한....” 이 부분에서 니콜라는 단어를 고르기 위해 고민하느라 잠깐 말을 끊었다. “음..., 중대한 무례를 저지른 거야.”

  “어떤 무례인데?”

  니콜라는 또 말을 끊고 고민했다.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고, 비슷한 수준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내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알몸을 봤다면?”

  헨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한 듯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봤어?!”

  “아니 그 비슷한 거.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

  “결혼해야지.”

  당연하지 않으냐는 얼굴로 말한 헨리가 다시금 고개를 주억거리며 스스로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건 결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뭐?! 그러면 돼?”

  “보통은 그렇지.”

  니콜라는 깜짝 놀랐다. 결혼하면 해결되는 문제란 말인가? 그럼 이미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 였으니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러면 되는 건지 확신도 서지 않았고, 대공과 자신의 결혼은 이미 이것과는 다른 선상에서 끝난 이야기이니 만큼 대공이 그걸로 만족할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아니, 그럼 아가씨한테 그 수치를 주고 결혼을 안 한다고? 왜? 혹시 아가씨가 아니라 유부녀였어?”

  세상에 그런 파렴치한이 있을 수 있느냐는 얼굴로 헨리가 되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네가 유부남?”

  “아니, 그것도 아닌데... 암튼 거기까지 갈 건 아니야. 아무튼 사정상 안 된다 쳐. 그러면?”

  니콜라가 이야기를 끊었다. 유부녀냐 유부남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느 쪽도 유부녀는 될 수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헨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목숨은 구했지만 알몸을 보였다, 미혼인데 결혼으로 책임도 못 지겠다....”

  “.......”

  “그럼 그 집 아들이나 아버지가 너한테 결투신청을 할 거야.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널 죽이고 말겠지. 아가씨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으니까.”

  “...역시 그런 거야...? 복수...?”

  니콜라는 힘없이 되물었다. 헨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니콜라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아닌 게 아니라, 작년 그 일 이후로 대공이 자신을 찾기 위해 수도를 뒤집어 놓는 모습을 보면서 니콜라도 공포에 떨었다. 그가 잠적했던 이유도 다름이 아니라 분명 대공이 자신을 찾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죽여 놓으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대공이 그렇게 누군가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유라면, 그것 외에는 없었으니까.

  ‘설마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살해당하진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때 대공이 엄청나게 분노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대공이 분노하는 이유라면 알고 있다.

  오히려 짐작이 가는 게 너무 많아서 문제다. 일 년 전의 그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일 년씩이나 숨어 있었던 부분이라던가, 그 동안 시치미 떼고 있던 부분이라던가. 자신이라도 열 받을 일이다.

  다만 그 중 뭐가 대공의 뇌관을 건드렸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어떤 식으로 터질지도 모르겠다는 부분이 가장 두렵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니콜라와 헨리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일어들 났나?”

  문이 열리고 알렉세이 대공이 방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곳은 절대 추운 장소가 아니었다. 한 켠의 벽난로로 공기도 훈훈하게 데워져 있었다. 기온이 내려간 듯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니콜라의 등골이 서늘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공을 보자마자 용수철마냥 벌떡 일어난 헨리를 고갯짓만으로 밖으로 내보내고, 대공은 니콜라에게 다가왔다. 그 사이 헨리는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니콜라는 쓸쓸하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좀 전에 ‘생각 보다 사람이 괜찮다.’ 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루 이틀 저러는 게 아니니 이젠 놀랍지도 않지만.

  

  

  “저 친구는 토끼 같군.”

  대공이 말했다. 대공이 토끼를 실제로 본 적 있는지 의심하면서 니콜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성품은 좀 그런 면이 있죠.”

  가까이 다가온 대공이 침대의 기둥에 기대어 서서는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몸은?”

  “덕분에요.”

  아닌 게 아니라 마차에서부터 잠들었으니 틀림없이 대공의 도움을 받았을 터였다. 헨리도 그렇고 말이다. 니콜라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내 신부와 그 친구인데 내가 도와야지.”

  “어제 일은,”“기억해?”

  “저하께서는...?”

  니콜라가 말끝을 흐리며 대공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어제 술을 안 마신 게 조금 후회되었다. 마셨다면 술기운에 기억 안 난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 때문에라도 술은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겠지만.

  “나야 물론 한 순간 한 순간 빠짐없이 아주 잘 기억하고 있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안 그래?”

  대공이 성큼 침대로 올라왔다.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니콜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그에게 다가온 대공은 허리를 굽혀 마치 그를 안아들기라도 할 듯 한 손으로 니콜라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 니콜라의 손목을 잡았다.

  “저하,”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털썩 소리와 함께 니콜라의 뒤통수가 침대에 닿았다. 변변한 저항도 못 한 채 순식간에 대공의 아래에 깔린 니콜라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일어나려 했으나 대공이 그의 위에 올라타다시피 하고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손을 바깥으로 빼려 해도 손목을 하도 단단히 틀어 잡힌 채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공의 푸른 눈이 위에서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와 자신 사이의 거리는 고작해야 한 뼘이었다.

  “내가 영원히 못 찾을 줄 알았어?”

  니콜라와 눈을 맞춘 채, 대공이 입을 열었다.

  “지나가는 나그네 씨.”

  “.......”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니콜라가 이름을 말하기 싫어 아무렇게나 했던 말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니콜라의 눈이 낭패감과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대공은 즐거운 듯 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재미있었어? 내가 널 찾느라 수도를 다 뒤지며 온갖 삽질을 다 하고, 그걸 모르는 척 멀리서 구경하는 건?”

  “저하, 그건....”

  니콜라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대공이 그의 손을 단단히 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너는 내 목숨을 구했어.”

  “.......”

  “그리고 날 강간했지. 그건 강간이야, 그렇지?”

  다시 니콜라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대공이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다시 물었다.

  “그렇지?”

  니콜라는 깨달았다. 지금은 그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대공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니콜라의 행동이 분명 대공의 생명을 구한 것은 사실이나, 끔찍한 모욕이 될 수도 있었다. 니콜라는 그럴 가능성을 알면서도 그 일을 했다.

  그리고 복수당할 것이 두려워 대공의 눈을 가리고, 손을 묶어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그 시점에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네....”

  “그 때 이후로, 내가 널 얼마나 생각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니콜라. 매일같이 생각했어. 그래서 찾아냈을 때는 정말 기뻤지. 그래... 조금 예상외의 인물이었지만.”

  대공이 마치 고백이라도 하듯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지어 청혼할 때보다도 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문득 니콜라는 대공이 그를 추적하던 어느 시점에선가 그 일이 뚝 끊기듯 중단되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 때쯤 자신은 대공에게 정체를 들켜버렸던 거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니콜라가 외쳤다. 그리고 대공은 싱긋 웃었다.

  “맞아, 난 처음부터 알았어.”

  

  

  니콜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쯤 나에게 말할 작정이었어?”

  하고, 대공이 물어보면 니콜라는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평생 숨길 작정이었으니까. 실제로 사막행의 초기에 한동안 대공의 눈치를 살피다가 대공이 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본인도 함구하기로 했다. 솔직히 이런 일로 거짓말을 했다고 대공이 그를 몰아붙인다면 니콜라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 때는 들키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내가?”

  대공이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들어온 햇빛을 받아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고, 그러잖아도 해사한 얼굴은 더욱 말갛게 보였다. 마치 무고한 피해를 입은 고귀한 신분의 귀족 아가씨처럼.... 홀린 듯이 생각하다가 니콜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때 들켰으면 아마 저하께선 절 죽이고도 남았을 겁니다.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아니야.”

  “아니라고 하지 마시라니까요.”

  “널 죽이다니 그럴 리가.”

  대공은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죽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어. 진심이야, 니콜라.”

  “.......”

  “지금은 더더욱 그래. 네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어. 난 널 사랑하니까.”

  대공은 고삐가 풀린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렇게 나오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화낼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도 기억났다. 그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대공이 없는 인생을 상상할 수 없는 건 니콜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왜 이제 와서 말씀을 꺼내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났거든. 어제 황궁을 박차고 나간 널 찾으러 갔다가 그곳 골목에서 웬 남자놈을 들쳐 업고 있는 널 보고.”

  “그게 다인가요?”

“네게 부탁할 것도 있고.”

  “부탁이요?”

  니콜라는 고개를 들고 대공을 보았다. 대공이 남에게 뭔가를 부탁해야 할 일은 최소한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없었다.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대공이고, 이제 곧 황제가 될 남자인데, 부족한 것도 없었을뿐더러 대부분의 것은 명령으로 가능했다.

  “니콜라,”

  그는 손을 뻗어 니콜라의 뺨을 만졌다.

  “나와 결혼해 줬으면 하는데.”

  “네?”

  프로포즈를 대체 몇 번이나 받는지. 매번 말투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니콜라의 기억에 벌써 네 번째였다. 아니면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혼이 취소된 것인가? 그래서 다시 하는 건가? 니콜라가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이미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할 거야. 단지 나와의 결혼을 네가 진심으로 바라 주면 좋겠군.”

  “저도 진심으로 바랍니다만...?”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황후의 대관식을 네 출산 이후로 조정해 달라고 궁내부에 건의한 사람이 너라고 하더군.”

  “......”

  니콜라가 움찔한 얼굴을 했다. 비밀리에 건의한 데다가 발안자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해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어디서 새어나갔지?

  “어제처럼 도망치지 말라는 거야. 대관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는 짐짓 실망한 것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니콜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 결혼에 협조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와 준다면, 나도 그 일을 잊어 주지.”

  로사와 니콜라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꽤나 달랐다. 로사는 니콜라가 꽤나 소박한 성품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가 주교의 앞에서 선서만 하는 방식의 결혼을 원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단 하나의 증인만을 앞에 둔 맹세? 고작 그런 걸로 뭐가 증명이 된다는 건지. 로사의 견해로는, 맹세란 거창하고 증인이 많을수록 영속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로사는 니콜라가 가봉을 받다 말고 황궁을 뛰쳐나온 이후로, 줄곧 이 간극을 좁힐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뒷골목에서 니콜라를 발견한 순간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패를 떠올렸다.

  “어때, 니콜라?”

  니콜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할 거야. 그러고 싶어. 협조해 줘.”

  그 말에는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니콜라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니콜라 데지아가 로사 알렉세이에게 정식으로 코를 꿰이는 순간이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성대한 대관식이 되겠군. 향후 백 년쯤은 남들 입에 오르내릴 테니, 각오하도록 해.”

  열어놓은 창으로 햇빛은 차가운 공기를 타고 들어와 대공저의 샹들리에 위에서 수천 개의 파편으로 부서졌다. 산란하는 빛 속에서 니콜라의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더 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절대 싫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면이 장점이었다. 언젠가부터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막의 기사는 약속을 지키는 남자였다.

  로사는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그저 마주보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꽤나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

  

  돌이켜봤을 때, 그 대관식은 과연 성대했다.

  약속의 날에 황도에 깔린 붉은 주단의 길이는 모두 합치면 동서남북으로 뻗은 제국령의 동쪽 산맥과 서쪽 해안가까지를 연결하고도 남아, 다시 북부의 광산에서 남부의 사막까지를 이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시가지는 골목마다 꽃으로 장식되었으며 제국령의 모든 영토에서 횃불을 올려 밤까지도 대낮처럼 환하게 밝았다.

  그 날 처음으로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황후 니콜라 데지아 다미에는, 그가 보여준 독특한 두 가지 면모 덕분에 그를 본 대부분사람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첫 번째는 그가 쓰고 있던 황후의 관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황후에게 관을 장식한 열 두개의 붉은 보석은 잘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제국과 그 주변국의 역사를 통틀어서 그 어떤 황후가 써본 황금관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또한 그것은 오로지 단 한명을 위해 만들어져 영원히 그에게만 속할 물건이었다. 그러니 황후가 그 관이 무겁다는 이유로 이후에도 공식 행사 때에나 간신히 쓰고 나오게 되리란 사실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그 날의 칼부림이었다.

  대관식에는 대부분의 황족이 모두 참석했는데, 그 중에는 죽은 선황제의 세 아들도 당연히 와 있었다. 둘째 황자 이반은 유학 명목으로 외국에 가서 산 지 오래라 그다지 황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셋째 황자 사샤 또한 스무 살이 되면 입대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종신서원을 하고 신전에 들어간 첫째 황자 유리였다. 그는 열일곱 살에 태자로 책봉되어 선황제가 살아 있던 시절의 절반가량을 황태자로 살았는데 태자위를 포기하고 서원을 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줄곧 자신의 인생을 저주해왔던 그가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개인적인 복수와 탈환의 기회로 삼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비가 찬탈자였으니 자식 또한 찬탈자가 된다 한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알렉세이!!!”

  그는 대관식의 도중, 뭇사람들의 이목이 가장 집중되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사방으로 길게 깔린 주단의 위를 걸어 황후와 황제가 대신관의 앞에서 마주보았을 때였다.

  “나 또한 너를 죽여 찬탈자가 될 것이다!”

  황태자였던 유리가 즉위식의 황제, 그러니까 대공에게 달려들었다.

  본디 신성한 예식을 올리는 장소에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 것이 법도다. 그 날 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어떤 무기도 지참하지 않음으로써 경건함을 보여야 했다. 다시 말해 그곳에 수백 명의 사람이 있었고, 회장 밖으로 또한 수천 명의 사람이 운집해 있었어도 그곳의 누구도 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거기 있는 칼붙이는 오로지 단 하나였다.

  대관식의 증표로 황후와 황제가 동시에 하사받는,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의례용 검뿐.

  유리가 주단 위를 밟고 대공의 등 뒤로 달려들던 순간 때마침 그 보검은 대신관에게서 황후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유혈사태를 예감한 참석자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즉위식 중인 황제는 맨손이었고 또한 등 뒤에서 습격을 받았으며 유리가 일어난 위치는 하객석조차 아닌, 증인석에서였다. 황제에게서 고작 두 발자국 떨어진 자리였다. 제아무리 황제라 해도 피할 수 없을 거리였다.

  전 황태자의 검이 새 황제의 목을 향해 내리쳐졌을 때, 대신관의 손에서 검을 넘겨받은 황후가 그 자리에서 그것을 뽑아들었다.

  챙강---

  하고, 대관식에서 있어서는 안 될 소리가 났다.

  그래도 즉위식에서 황제의 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지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유리의 검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반사적으로 황제의 앞을 막아선 황후가 손에 든 검으로 그것을 날려버린 것이다.

  정적,

  그리고 황후는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든 검과 바닥에 떨어진 검을 번갈아 보았다. 본인도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 했기에 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니콜라가 로사를 향해 속삭였다. 그는 로사가 원하는 대로 이 화려한 대관식의 주인공 역할을 그저 무사히 치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사실 그는 할 만큼 했다. 그 상황에서 황제의 등을 노린 습격이 벌어지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습격이 벌어지지만 않았어도 완벽했을 텐데....”

  “아니,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아쉬워하는 니콜라에게, 로사가 미소 지어 보였다.

  당연히 별 문제는 없었다.

  다만 이 일로 인해 키가 크고 겹겹이 겹쳐 입는 혼례의상 덕분에 다소 성별이 모호했던 황후가 알고 봤더니 남자였다는 사실이 제국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을 뿐이다.

  “이리 와, 니콜라.”

  유리가 끌려 나가고, 장내가 정리된 후 로사는 니콜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칼부림을 당할 뻔 했던 사람답지 않은 담대한 태도였다. 니콜라는 이 남자가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잠깐 했지만, 그 생각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그대는 나를 또 구해주었군.”

  젊고 아름다운 새 황제는 홀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리고 수천의 군중 앞에서 자신의 황후에게 맹세의 키스를 했다.

  그것은 지금껏 보아 온 어떤 결혼식의 맹세의 키스보다도 길고, 보는 사람조차도 낯 뜨거워질 만큼 야한 키스였다. 황후가 숨을 쉬지 못해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는 대도 끝나지 않아서, 하객들이 괜찮을까 걱정했을 정도다.

  그리하여 제국 역사상 가장 성대했던 대관식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헨리가 일하는 신문사에서는 해당일 신문의 1면을 할애해 자세한 내용을 다루었는데 시간순으로 다루었는데, 황후에 대해서는 특별히 3면을 할애해 자세히 소개했다. 그리고 황후에 대한 표현치고는 이례적으로 “멋있다”고 평가했다.

  멋있었으니까.

  

  ++

  

  그 일로 인해 수도에서는 황후의 인기가 치솟았는데, 정작 황후전의 니콜라 데지아는 그런 사정을 잘 몰랐다. 그는 오히려 대관식 때의 일을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져서 별로 돌이켜보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이다. 약속을 했기 때문에 도중에 발을 빼지는 못 한 채, 로사가 바란 대로 그가 원하는 방식을 모두 맞춰주었더니 세상 다시없는 화려한 대관식이 완성되었다. 과연 장담한대로 향후 백 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겠구나. 니콜라는 일생에 대관식이 한 번이라는 점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생각했다.

  4개월 차였던 대관식 때까지는 별다른 티가 나지 않던 니콜라의 배는 대관식이 끝난 뒤부터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덕분에 외출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니콜라를 위해 로사는 황후전 안에 집무실을 차려놓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젊은 새 황제가 황후를 아껴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는 소문이 황궁에 퍼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니콜라의 배가 더욱 불러 만삭에 가까워지고 난 뒤에는, 로사가 그를 위해 사들이는 갖가지 진미와 온갖 귀하다는 약 덕분에 크게 임팩트가 떨어져서 기타 여러 가지 일례 중의 하나가 되었을 뿐이었다.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새벽 로사는 잠에서 깨었다.

  “저하,”

  니콜라의 목소리였다.

  그는 처음엔 의아하게 생각했다. 니콜라가 로사를 부르는 호칭이 폐하로 바뀐지도 꽤 되었고, 그것이 입에 익지 않아 한동안 저하와 폐하를 섞어 부르던 시기도 지났다. 그는 이따금씩 니콜라에게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도록 종용했는데, 처음에는 섹스할 때에나 닦달하면 못 참고 주저하며 간신히 입 밖에 내는 정도이긴 했으나 근래에는 이따금씩 단 둘이 있을 때 편하게 ‘로사’ 하고 부르기도 했다.

  어느 것이나 마음에 들었으나 어쨌든 니콜라가 주로 그를 부르는 호칭은 ‘폐하’였다.

  “왜 그러지, 니콜라?”

  그는 눈을 뜨고 옆자리를 보았다. 꿈은 아닌 모양인지, 조용한 숨결에 현실감이 느껴졌다. 니콜라는 까만 눈을 깜빡이면서 옆으로 누운 채 로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니콜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애정이 하염없이 그의 가슴속을 채워갔다.

  “배가....”

  니콜라가 조그맣게 말했다.

  로사는 벌떡 일어났다.

  

  ++

  

  여자아이였다.

  

  니콜라는 신기한 듯 아이와 바라보았다. 진통은 길었고 힘들었지만,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씻은 듯이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았어도 반쯤은 경감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지우려고 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가뜩이나 연약해 쉽게 사라질 수 있던 아이였다.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생명이 그저 존재함으로써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충족감을 가져다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안아보시겠습니까?”

  로사는 자신을 꼭 닮은 이목구비에 반짝이는 백금발을 가진 여자아이를 신기한 기분으로 안아 들었다. 갓난아기인데도 말도 안 되게 이목구비가 선명하다고, 크면 반드시 미인이 되겠다고 산파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으나, 로사는 그 아이의 눈동자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냥 보면 새까맣지만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색이 달라지는 눈동자는 그가 사랑하는 남자와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로사는 지금 놀랍게도 기뻤다. 자신이 아이를 안고 기뻐할 거라고는, 그 자신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로사 반쯤은 경이로운 기분으로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이건 네가, 나에게 준 거야.”

  그는 속삭였다.

  “또한 내가 너에게 주었고.”

  로사 니콜라가 앉은 침대의 가장자리에 몸을 기댄 채였다. 옷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겠지만 무릎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제국의 황제가 이렇게 쉽게 무릎을 꿇으면 안 되는데. 니콜라는 불편함 반 기꺼움 반으로 로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하겠지. 그러나 이것이 네가 준 기쁨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잊지 못 할 거야.”

  “.......”

  “그러니 나는 이곳에서, 이 아이를 지키고 너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해.”

  황제의 맹세는 완전하고도 영속적이다.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으며, 또한 언제나 모자람 없이 채워질.

  니콜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니콜라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사랑합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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