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691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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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级 少年 常规
原型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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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1 14:00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화
1화 광명
셰인.
그는 자신의 심장에 성스러운 기운이 담긴 검이 꽂힌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아아. 이제야…….”
7대 죄악 중, 질투에 속하는 타락의 힘.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속박해 오던 그 힘이 비로소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심장에 박힌 성검에 의해.
이내 그간 아무리 많은 생명을 죽여도 찾아오지 않던 광명이 그의 눈에 새겨졌다.
“형…… 님?”
반쯤 부서진 가면 너머로, 자신의 동생이자 인류의 희망, 용사 클라인의 얼굴이 보였다.
용사가 악당을 무찌른 순간이건만.
녀석의 표정은 어찌 저리 당혹에 차 있을까.
셰인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깨달았다.
“클라인…… 너는, 여전히 빛나는구나.”
“형님……? 형님이 어째서…….”
스윽-
셰인의 덜덜 떨리는 손이 클라인의 볼을 쓸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힘에 부친 듯 점점 아래로 처졌다.
타락의 힘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만큼, 생명력 또한 스러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년…… 만이구나.’
한때의 욕심이 불러온 참사.
그 이후로, 셰인은 단 한시도 평안하지 못했다.
질투라는 이름의 타락에 빠져,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조직’과 함께 수많은 왕국을 불구덩이에 처넣었으니까.
지금에 이르러, 한 줌 남은 인류는 한 사람을 주축으로 모여 저항군을 결성했다.
그 사람은 셰인이 질투한 대상이자 증오해 마지않던 동생, 클라인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맑은 정신으로 10년만에 보게 된 동생에게 조금의 증오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자유라곤 조금도 쥐어지지 않던 타락의 안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동생의 검에 담긴 신성한 힘 때문일까.
본래 증오만 가득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죄책감만이 남았다.
셰인은 뭐라 입을 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죄인이다.
씻을 수 없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
그의 명령으로 무너진 수많은 왕국과, 그 안에서 죽어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삶의 터전은 물론이요 그들의 가족, 친우, 연인마저 빼앗아 버린 최악의 악당.
그게 바로 자신, 클레이튼 R 셰인이었다.
최후의 최후.
셰인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자신의 동생, 클라인을 올려다봤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제 형의 정체를 이제야 알아본 동생.
녀석이 이렇게 슬퍼할 줄 알았다면, 가면을 보다 더 튼튼하게 만들어 둘 것을.
아니. 애초에 스스로의 의지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을 몸,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셰인은 형이 된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그런 동생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비록 세상 모든 사람들의 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악당이지만.
그럼에도.
“미안해하지 말거라. 죄인은 네가 아닌 나였으니.”
인류의 희망인 용사이자 동생에게, 형으로서 그 어깨에 올려진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셰인은 두 눈을 감았다.
마치 동생에게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말라는 듯.
평온한 얼굴로.
* * *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었다.
그런 햇살의 온기를 담은 이불은 서늘함과 포근함을 함께 선사했고, 머리를 감싸고 있는 베개 또한 따스한 아침을 맞이하기에 최고로 푹신했다.
“또 그 꿈이구나.”
잠에서 깬 셰인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그 포근함에서 벗어나기 싫다 앙탈을 부렸으나, 셰인은 상관치 않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울창한 나무로 가득한 저택의 뒷동산이 보였다.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모두, 그가 평소 보아 왔던 풍경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죽음으로 가득한 고성의 정상에서 지내 왔던 나날들.
어디를 보더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죽음의 땅.
그러나 지금은 어디를 보더라도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세상이지 않나.
셰인은 잠시 시선을 돌려 방 한쪽 구석에 배치된 거울 앞에 섰다.
검은 머리카락과 로즈베리 빛깔의 눈동자.
여기까지는 예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거친 피부와 깡마르기만 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깨끗한 어린 피부와 훤칠하기만 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젠 인정해야겠군.”
클레이튼 R 셰인.
조직 ‘무명’의 7대 죄악을 담당하던 간부 중 ‘질투’를 대표하던 그는, 15년 전 과거로 회귀했다.
* * *
마리아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찻잔에 차를 우리고 있었다.
걱정의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자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인 셰인 때문이었다.
“하아…….”
매일 아침마다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에게 차를 가져다주는 것.
모든 귀족가의 고용인들이 하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마리아는 하루 일정 중 그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런 마리아를 보며 그녀의 동료 하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리아. 요즘 왜 그렇게 죽을 표정이야?”
“어? 아…… 별거 아냐.”
“아항. 셰인 도련님 때문에?”
동료 하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자, 마리아는 가뜩이나 안 좋은 기분이 더더욱 우울해지는 것만 같았다.
알면서 물어보긴 왜 물어봐?
클레이튼 R 셰인.
연합국에서 그 유명한 대상단이자 백작가 가문의 장남인 셰인 도련님.
고작 하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도련님은 그야말로 신과 같이 부러울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그의 성격은 저택 내에서도 유명했다.
마리아는 올해로 5년 차 하녀로서 제법 짬을 먹은 상태였지만, 언제나 기분이 저기압인 셰인과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차라리 욕하고 때리기라도 하면 도망이라도 갈 텐데.’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저주하는 듯한 표정에, 한낱 미물을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무심한 눈동자.
거기에 혹여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그 무심한 눈동자에 진득한 혐오감이 섞이는 걸 보노라면 소름이 끼쳤다..
마리아로서는 그 눈동자와 마주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다.
특히나 지난 이틀.
이젠 하다하다 셰인에게서 살기마저 느낀 마리아는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리아의 동료 하녀 또한 그런 마리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료 하녀의 표정에서 동정이라는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고생 때문에 마리아는 집사장에게 무한한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로 인한 질투로 저렇게 비꼬듯 말해 오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동료 하녀가 모시는 사람은 이 가문의 둘째 도련님인 클라인이었다.
동 세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천재라 알려진 천재 중의 천재.
지금에 들어서 10년 이상 검을 잡고 전장에서 살아온 가문의 기사들마저도 클라인 도련님을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모시는 사람의 위세에 따라 가문 내에서의 지위가 달라지는 게 고용인의 법도가 아니던가.
그런데, 동료 하녀로선 마리아가 자신의 주인보다 못한 주인을 모시면서도 집사장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아니꼽게 보인 것이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화를 꾹 참은 마리아는 동료 하녀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 셰인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셰인이 가볍게 말했다.
“들어와라.”
“예, 도련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어제도 봤던 하녀, 마리아였다.
항상 들어올 때마다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 있는 소녀.
셰인은 그런 소녀가 조금은 낯설면서도 익숙하다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게, 셰인이 회귀한 지 오늘로서 3일 차다.
처음 이틀 동안에는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변을 의심했다.
혹여 조직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그 때문에, 그제와 어제도 저 하녀에게 매우 냉담한 표정으로 나가라 명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회귀했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체감하게 된 이상, 행동거지를 다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차향이 좋군.”
“예?”
“차향이 좋다고 말했다.”
“……?”
물론, 그런 셰인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마리아는 도대체 왜 이 사람이 안 하던 칭찬을 하고 그러나 의심이 부풀어 올랐다.
“지난 이틀 동안에는 미안했다.”
“……!”
“좋지 못한 꿈을 꿨거든.”
“아, 아닙니다. 도련님.”
목소리에 딱히 진정성이 느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의무처럼 느껴지는 사과.
그러나 본래 나쁜 짓만 일삼던 사람이 어쩌다 한 번 착한 일을 하면 돋보이듯.
마리아는 정말 천지가 격변한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찻잔은 1시간 뒤에 다시 찾아가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방 밖으로 나온 마리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방금 자신을 바라보던 셰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웬일이래…….”
그 눈동자는 여전히 무기질적으로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조금은 감성적으로 느껴졌다.
* * *
세인은 오래간만에 감상에 잠겼다.
타락은 결코 이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조직에서 자신에게 심은 타락의 힘은 분명 강력했다.
하지만 마력이 인간의 마력기관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하듯, 타락 또한 성장을 위한 매개체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회귀 전의 셰인은, 그 누구보다 타락에 걸맞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질투.
다름 아닌 제 동생, 클라인을 향한 질투였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자신의 동생보다 못하다는 현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보내오는 비교의 시선.
물론, 셰인이 처음부터 동생을 질투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어릴 적의 셰인 또한, 명석한 두뇌로 사람들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 왔으니까.
그러나 그의 동생 클라인은 셰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그에 더해 검술에 대한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인가.
마력의 사랑을 받는 천부적인 재능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가히 클라인은 기원 후 다신 찾아볼 수 없는 천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렇기에 훗날 조직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인류의 희망으로서 용사가 될 수 있던 것이다.
그러한 재능을 가졌던 동생이기에.
셰인은 한때 질투에 미쳐 있었다.
그리고 타락이 성장하기에 그러한 셰인의 질투는 너무도 달콤한 영양제와도 같았을 터.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음일까.
아니면 전생에서 죽기 전, 동생이 자신의 심장에 찔러 넣은 성스러운 검의 기운 때문일까.
지금의 셰인으로선, 이 질투라는 감정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셰인은 옅게나마 자신의 마음에 남아 있는 질투를 마저 지우고 싶었다.
이미 질투는 질리도록 해 봤다.
그것도 질투의 화신이 되어.
수많은 인류를 학살하는 것으로.
그렇기에 셰인은 자신 안의 감정을 세밀하게 살펴봤다.
그리고, 회귀 전의 마지막.
타락의 힘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던 자신의 동생을 떠올렸다.
그 얼굴에는 진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
그 당시, 유일하게 남은 혈족을 스스로의 검으로 찔러 죽였다는 죄책감.
그리고, 어깨 위에 잔뜩 짊어져 있는 사명감까지.
‘나는 동생을 질투하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아니오, 였다.
그러자 마음 깊숙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마지막 질투의 감정마저 모래알처럼 사그라졌고.
생애 처음으로 셰인의 머리는 더없이 맑아져, 마치 광명을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쯤,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클라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셰인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지었던 미소를 입에 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화
2화 단초 (1)
클레이튼 L 클라인.
17살이라는 나이에 훤칠한 키.
반짝이는 금발에 푸른 벽안의 눈동자에는 옅은 망설임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유인즉, 자신의 형님 셰인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방학 이후, 형님은 방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1학기가 끝나기 전, 동급생에게 처절할 정도의 패배를 했다는 소식 때문일 것이다.
그 뒤로 한 달이 다 되어 갈 동안 재차 셰인을 찾아갔으나, 돌아오는 것은 적의에 찬 냉담뿐.
둘의 아버지 클레이튼 J 로웰도 그런 형님을 내버려 두라는 말만 하고 신경을 끈 상태였다.
아버지는 둘이 어린 시절부터 자식에 대한 큰 관심이 없었다.
클라인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여러 사건사고 속에서 로웰은 자식을 포함한 인간 자체에 감정을 쏟으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클라인에게는 가주의 후처인 어머니가 있었지만, 자신의 형님인 셰인에겐 본처였던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기에.
형님은 크게 삐뚤어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마저도 그런 형님을 경계하는 상태였으니.
형님은 이 저택에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위치였다.
그랬기 때문일까, 형님은 언제나 자신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나까지 형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형님에게 남을 이가 없어.’
그렇기에 클라인은 포기하지 않고 형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후, 좋아.”
오랜만에 다시 셰인의 방 앞에 선 클라인은 얕은 심호흡과 함께 입을 열었다.
“형님, 클라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평소처럼 평범한 목소리로 묻자, 의외로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라.”
그 목소리에 클라인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는 똑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미묘하게 달랐던 것이다.
그런 의아함 반, 걱정 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찻잔을 들고 창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셰인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께서 부르셔서 찾아왔습니다.”
“굳이 고용인을 쓰지 않고.”
“예…….”
왜 괜히 찾아왔냐며 핀잔을 주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예?”
하고 싶은 말?
평소에는 자신과 단 한 마디도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형님이 무슨 일인가.
살짝 긴장감이 들 때.
셰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미안하다.”
“……?”
“그동안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너를 매몰차게 대했구나.”
“……!”
낯부끄러울 정도로 직관적인 말에, 클라인은 머리에 번개라도 맞은 듯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형님……?”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 셰인의 입가에서, 클라인은 처음으로 제 형의 아주 옅지만 확실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 * *
낯부끄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사과.
그 행동에 대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가짐을 확인하고자 하는 행동이었을 뿐.
“지금부터라도 바뀌면 되겠지.”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시점은 조직에서 자신에게 접근하기 5년 전의 세상.
최악까지 치달은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이제 와서 동생에게 사과를 했다 한들, 셰인의 상황이 많이 나아지지도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이 방 밖에는 그런 셰인을 백안시하는 이들이 많을 테지.
회귀 전의 셰인은 바로 그러한 인간들에 의해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비교 대상이 됐던 클라인과 그런 그를 보조해주며 셰인을 경계해온 계모, 레이첼.
그리고 무엇이든 필요성만 따지고 보는 셰인의 아버지…….
‘로웰.’
철저한 실력주의자.
그게 바로 로웰이었고, 그런 로웰의 근처에는 인성이 어찌 됐든 실력만 출중한 인물들만 남았으니.
그런 셰인과 클라인이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백작가의 장남임에도 차남에게 밀린다는 것은 셰인이 다니던 아카데미에서도 좋은 놀림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딜 가든 셰인은 남들에게 비교만 당하는 삶을 살아왔고,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조직은 그런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던 끝에 타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자신을 죽음이자 타락의 해방으로 이끌어 낸 동생의 얼굴을 봤을 때.
셰인은 처음으로 주변의 시선에서 벗어나 진실된 태도로 동생과 마주할 수 있었다.
수많은 인간들을 죽인 악의 간부가 자신의 형이었음에도, 형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이 가득했던 얼굴.
세상에는 그런 인간도 있던 것이다.
그게 가족이라는 것이고.
그 소중한 감정이, 지금의 셰인을 만들 수 있던 것이다.
“죽음 끝에서 깨달은 감정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감정.”
비록 타락의 힘으로 인해 행한 행위였지만 셰인은 너무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관여했다.
이제 와서 그게 없어진 일이라 한들, 셰인은 회귀 전 클라인의 어깨에 걸린 짐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무거울지도 모를 짐이 어깨에 놓인 듯한 느낌을 들었다.
“바꿔야지.”
평생 다시없을 기회일지도 모를, 지금의 상황을.
* * *
“바뀐 것 같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아카데미로 떠나는 당일 날.
로웰은 웬일인지 가족끼리 식사를 하자는 명목으로 셰인과 클라인을 식사 자리에 불러 냈다.
본래 가족들에게 큰 관심을 쏟지 않는 로웰로선 드문 일이었다.
“전에는 시체만도 못한 너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특히 동생을 보는 눈에서도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구나.”
“…….”
그 말에 셰인이 입을 다물자 좌불안석에 빠진 것은 클라인이었다.
언제부터 가족에게 신경을 썼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아들의 눈빛이 그러했으면서 여태 말 한 번 하지 않았던 것인가.
혹여 형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셰인은 별다른 감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꿈을 꿨습니다.”
“꿈?”
“예.”
“무슨 꿈이었느냐?”
“클라인이 내지른 검에 심장에 꿰뚫리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푸흡!”
난데없는 꿈 이야기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히 클라인이었다.
내가?
형님한테?
형님, 도대체 저를 어떻게 보시고…….
“허.”
어처구니가 없던 것은 가주인 로웰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드물게 표정에 변화를 보였다.
“기묘한 꿈이로군.”
“물론 꿈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이라도 잘해 주고자 합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좋아서 나쁠 것은 없지.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로웰은 다시금 식사를 이어 갔고, 그 뒤로 더 이상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레이첼은 잠시 자리를 비웠나 보군.’
현 가모이자 셰인의 배다른 어머니, 레이첼이 만약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슨 소리를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셰인이 했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고용인들의 입으로 전해질 내용이라 달라질 건 없을 테지만.
그렇게 식사가 끝나 갈 무렵, 로웰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 잘 다녀오거라.”
“예, 아버지.”
“알겠습니다.”
무뚝뚝한 그 안부 인사에 셰인과 클라인이 답했고, 먼저 로웰이 식당을 나갔다.
전생에는 어땠더라.
‘생각났군.’
전생에 셰인은 이날 로웰과 대판 싸웠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아카데미를 자퇴하겠다는 자신의 선언 때문이었다.
당시 이 무렵의 자신은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고용인들에게 비교당하고, 아카데미에서 비교당하고.
여기저기 그를 비교하는 시선뿐.
때문에 그들에게서 벗어나 여행을 가고자 로웰에게 청했었고.
당연히 돌아오는 것은 거절이었다.
‘당시에는 가주가 피도 눈물도 없다 생각했지.’
물론 사회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귀족에게 있어서 아카데미 졸업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것 때문만이었을까.’
결국 이때 아버지의 협박에 못 이겨 아카데미에 갔으나, 결국 끝내 적응하지 못한 셰인은 도망을 갔었다.
그렇게 자유를 찾아 여행을 떠났을 때.
자신에게 돌아왔던 것이 무엇이었지?
‘귀족의 의무를 포기한 귀족가의 망나니.’
딱히 셰인이 망나니처럼 누군가를 죽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간의 사람들에게, 셰인은 귀족으로서 의무를 저버린 귀족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현재 셰인이 살아가고 있는 연합국에서 아카데미란 그런 의미를 품고 있던 것이다.
‘가주는 그런 미래를 예측했을 터.’
그러니 자신의 자퇴를 협박까지 섞어 가며 말리려 했을지도 모른다.
셰인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여전히 로웰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생각에 전환점을 둔다면 서로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을까.
그렇게 언제고 로웰과 진지한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형님.”
“음, 왜 그러느냐.”
식사를 마친 클라인이 말을 걸어왔다.
클라인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형님께 검을 겨누지 않을 겁니다.”
“…….”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만약 전생의 네가 내 정체를 알았더라면 검을 내게 겨눴을까.
셰인은 전생의 마지막에 동생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죄책감에 버무려진 그 얼굴에는 깊은 후회가 담겨 있었다.
* * *
그날 오후.
셰인은 자신의 직속 하녀인 마리아에게 필요한 물품들이 담긴 가방을 받고는 클라인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바로 오늘, 셰인과 클라인은 한 달 간의 휴식기를 끝마치고 아카데미로 돌아간다.
물론, 셰인에게는 보다 오랜만의 아카데미였다.
‘아카데미라…….’
전생의 셰인이 망가진 이유는 다양했지만, 무엇보다 그 시작은 역시 아카데미였다.
학생들의 얕보는 시선, 비교의 시선도 시선이었지만.
처음으로 셰인이 엇나가기 시작한 무렵은 아카데미로 가던 길에서의 사건이었으니까.
‘내가 가장 큰 열등감을 느꼈던 사건의 단초. 이번에는 그리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거다.’
그 당시를 떠올리며, 셰인은 클라인과 함께 기사단이 호위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화
3화 단초 (2)
클레이튼 가문의 영지에서부터 아카데미까지 거리는 꽤 있는 편이었다.
때문에 평범하게 생각하면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아카데미에 가는 게 맞겠지만, 이 세계에서 텔레포트가 허용되지 않는 장소가 몇 군데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제국의 황궁이 그러했고, 제국을 포함한 다섯 국가가 연합하여 만든 연합국이 그러했다.
셰인과 클라인이 가는 아카데미는 그 연합국의 정중앙에 위치했기에, 텔레포트는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아카데미를 향해 가는 마차 안.
클레이튼 가문의 기사단에게 호위를 받으며 가는 동안 셰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5년 뒤. 녀석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셰인을 타락으로 이끌었던 조직, ‘무명’이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셰인이 타락하든, 타락하지 않든.
그들의 계획에는 변화가 없을 터.
그러려면 먼저 그때 다가올 풍파를 대비해 힘을 키워야만 했다.
동시에 셰인은 자신의 동생 클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던 용사.
끝없이 펼쳐진 역경을 뚫고, 제1군단장의 자리에 서 있던 자신마저 쓰러뜨린 클라인이니.
어쩌면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녀석은 지난 삶처럼 스스로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들을 쓰러뜨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클라인은 얼마나 많은 절망을 겪었던가.
조직은 클라인을 죽이거나 타락시키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고, 클라인은 그 모든 것을 이겨 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아픔을 겪었다.
전설 속 영웅이 그렇듯, 녀석은 많은 것을 잃어 가며 영웅의 길을 걷는다.
셰인은 이번 생에서까지 녀석이 그런 일을 겪길 바라지 않았다.
‘그러려면 일단 내가 강해져야겠지.’
지금도 조직을 막을 다양한 방법이 떠올랐으나, 당장 셰인의 능력으로는 모두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해질 방법은 많다.’
굳이 타락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조직에 있었을 무렵 가지고 있던 정보들을 떠올리면 강해질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그중에서도 셰인이 떠올린 방법은.
‘룬 문자.’
현 인류가 알지 못하는, 고대의 종족 중 그마저도 선택받은 존재들만이 썼다고 알려진 마법 문자.
룬 문자를 다루던 대표적인 존재로는 드래곤이 있었다.
마법의 종주라 부릴 만큼 마법의 창조자가 쓰는 룬 문자라면, 마력의 절대량은 상관이 없어질 터.
듣기로 룬 문자를 터득한다면 마력의 총량과 상관없이 모든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지만…….
적어도 셰인은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분석력으로도 룬 문자를 이해하기란 요원한 일이었으니.
‘대신 응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셰인은 룬 문자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을 어느 한 인물을 잠시 떠올리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그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서서히 저물어 가는 태양을 보며, 어느새 셰인과 클라인을 태운 마차는 산의 외곽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 * *
마을을 지키는 자경단원 알렉스는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계 초소 바깥을 바라봤다.
언제나 똑같은 풍경에, 변하지 않는 공기의 냄새.
항상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교대 인원들.
그러나 오늘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언제나 조용하기만 한 마을에, 그 유명한 클레이튼 백작가의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마을에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주 조용히, 여관에서 짐을 풀고 하룻밤을 머문 뒤 새벽 일찍 마을을 떠나니까.
마을의 촌장도 아닌 젊은 자경단원이 클레이튼 가문의 직계는커녕 그들을 모시는 기사조차도 얼굴을 멀리서나 보는 게 끝일 테니.
“여, 알렉스. 교대하러 왔다. 이 부러운 놈아.”
“왔냐.”
교대 타임의 동료 자경단원이 도착하니 알렉스가 씩 웃으며 맞이했다.
“아까 하보크 상단도 왔더만? 아주 진창 마시겠어.”
“진창 마시긴 뭘 마셔. 그래 봐야 내일 또 경계 근무 있어서 쓰러질 때까지 마시지도 못하는데.”
동료의 부러움이 섞인 말에 이렇듯 대답했지만, 알렉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동료도 아는 것이다.
술은 많이 못 마시겠지만, 술보다 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래도 그 사람들 말에 너무 귀 기울이지 마라. 밖에 나가면 개고생이잖냐.”
“뭐 밖에 아는 게 있어야 나가든 말든 하지.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
그러면서 알렉스는 동료와 교대를 마치고, 곧장 마을의 유일한 술집으로 향했다.
본래 여관의 창고로 사용됐던 이 건물은 몇 년 전부터 클레이튼 가문의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면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마을이 제법 커져서 만들었다지만, 알렉스의 아버지는 그저 촌장이 클레이튼 사람들이 머무는 자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여관과 술집을 따로 구분지어 뒀을 뿐이라 말했다.
그리고 알렉스도 그 이유가 더 맞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게 낡은 술집입구에 들어서니, 벌써부터 떠들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자, 마셔라, 마셔!”
“대장! 이걸로 그 일은 잊어버리자고!”
“오냐, 우리가 언제 내일을 생각하고 살았냐?! 마시자!”
거친 외모의 남자 열댓 명이 얼마 없는 술집의 좌석을 죄다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도 때마침 술집에 들어온 알렉스를 발견하곤 씩 웃으며 맥주잔을 추켜올렸다.
“어이어이, 이거 시골 촌놈 알렉스 아냐?!”
“으하하, 얼굴이 아주 보기 좋게 탔구만!”
“이제야 좀 남자답게 생겼어, 크하하하핫!”
하보크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단.
하보크 상단은 클레이튼 가문이 운영하는 클레이튼 상회에 소속된 상단이었다.
그들은 매년 이맘쯤에 클레이튼 가문이 이 마을에 찾아오는 것을 알고 똑같은 날에 비슷한 시간에 맞춰 찾아온다.
그리고 방금 알렉스를 반긴 이들은 그런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단이었다.
“웨이튼 단주님. 잘 지내셨습니까?”
“으하하하하! 단주님이란다! 아이고, 닭살 보여?! 내 팔 좀 봐!”
“야, 이 새끼들아. 요즘 세상에 저렇게 예의 바른 청년이 어디 있다고 놀리냐, 이 못 배워먹은 새끼들아! 니들도 단장님이라 불러!”
“일 없수다, 대장님! 낄낄낄!”
마치 오래 지낸 형제들처럼 그들은 서로 웃으며 농담을 주워 담았고, 알렉스는 그런 그들 사이에 어색하게 앉았다.
“그래, 오늘도 왔구나. 잘 지냈냐?”
용병단의 대장, 웨이튼의 말에 알렉스가 굳은 미소를 보였다.
“이 마을에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평소처럼 지냈습니다.”
“흐흐, 그래. 원래 그러고 사는 거지.”
“그런데 오늘도 그 일 때문에 찾아오신 겁니까?”
“뭐, 그렇겠지. 원래 이쪽 양반들 생각이 다 클레이튼 사람들 눈칫밥 먹는 데 최적화됐으니까.”
“그래 봐야 뭐 달라지는 게 있기는 합니까?”
“그거야 모르지. 원래 인생이란 게 도박 같은 거 아니겠냐. 어느 쪽 도련님이 더 우세한가. 그 확률이 얼마나 한쪽에 치중되어 있는가. 그런 걸 따지는 거지. 그리고 거기에 올인 베팅을 때리는 거고.”
웨이튼의 말처럼 하보크 상단이 원하는 것은 클레이튼 가문의 두 형제에 대한 정보였다.
정확히는 셰인과 클라인, 그 둘 중 누가 가주의 자리에 가까운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럼 누가 더 우세한 겁니까? 보통 장남이 이어받지 않습니까?”
“농사나 술집 주인, 여관 주인처럼 배우면 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저 귀족 나으리들이 하는 일에는 재능이라는 게 필요하지. 단순하잖아. 장남보다 차남의 재능이 더 뛰어나면 차남이 받는 거다. 그리고 저 귀족 나으리의 가문은 방금 내가 말한 케이스고. 그런 거다.”
“…….”
그러고 보니.
언제 한 번 촌장님이 마을 어르신들과 하던 이야기에서, 장남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올해 아카데미 휴식기가 시작하던 때, 장남이 아카데미에서 처참히 패배하고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던가?
“그래도 배부른 소리지. 저 대단한 가문의 장남이 가주 후보에서 물러난다 해도 설마 땡전 한 푼 없이 쫓겨날까?”
분명 나 같은 놈이 평생을 일해도 만지기 힘든 돈을 받고 쫓겨날 거라며 웨이튼이 피식 웃었다.
“푸…… 아무튼, 나도 그런 신세나 돼 봤으면 좋겠군. 하다못해 그러면 저번처럼 뒈질 뻔한 일도 없을 거 아냐.”
언제나 지루한 마을에서 이런 바깥세상 이야기는 아주 재미난 이야깃거리였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해 주시던 허무맹랑한 용사의 이야기보다, 이런 쪽이 알렉스는 훨씬 더 재미있었다.
언젠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꿈인 알렉스에게 그 바깥세상에 대한 정보란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새끼, 표정 보니 딱 우리 말론이 생각나는구먼.”
“아,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웨이튼의 말에 알렉스는 용병단원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그리 물었다.
말론.
알렉스처럼 다른 시골 마을 주민이던 그는 웨이튼에게 잘 보여 용병단원이 된 케이스였다.
알렉스는 지난번 용병단의 방문 때 그를 보며 굉장히 부러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말론도 그런 알렉스의 시선을 즐기듯, 한껏 콧대가 높아진 모습이기도 했고.
그랬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왜겠냐.”
“……?”
“쯧. 우리가 묻어 줬다. 용병단에 흔히 있는 일이지 뭐.”
“에이, 저 촌놈 때문에 우리 대장님 기분 또 다운 되셨다!”
“대장, 어디 우리가 내일을 생각하고 살았답디까? 말론 그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우리도 잘 알고! 대장도 맨날 우리한테 말해 주는 사실 아닙니까!”
“맞아, 맞아!”
알렉스는 용병단원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용병들에게 죽음이란 늘 언제나 곁에 두고 사는 역병 같은 존재였으니까.
“후, 그래. 뭐, 그렇게 됐다. 새꺄, 그러니까 너도 괜히 용병 같은 거 하겠다고 깝치지 말고 니네 마을이나 잘 지켜. 여기서는 네가 고블린만 때려잡아도 영웅 소리 들을 테니까. 알겠냐?”
“그러고 보니…… 예전에 뵀던 다른 분들이 안 보이는데…….”
“어랍쑈, 대장. 이 새끼 이거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모양인뎁쇼. 이러니까 씨발 아무리 용병들이 뒤져나가도 새로운 놈들이 충당되는 거라니까! 어휴, 병신새끼. 하여튼 목숨 아까운 줄을 몰라요.”
“근데 우리도 그 병신새끼 아니냐?”
“맞는 말이다, 처맞는 말!”
용병들은 우울해지려는 분위기를 살려 보려는지, 더더욱 호들갑을 떨며 수다를 떨었고, 끝내 알렉스는 그들에게 있던 일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별거 아냐. 그냥 던전 웨이브가 터졌는데 하필 재수없게 우리가 그 근처에 있던 것뿐이지. 그나마 근처 도시의 기사단이 훈련을 위해 주변에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지. 안 그럼 우리도 다 뒈졌어.”
“……고생하셨겠습니다.”
“고생은 씨발, 좆빠지게 했지. 돈도 못 받고 말이야. 쯧, 그런 게 바로 개죽음이라고, 개죽음!”
그러면서 웨이튼이 술이 가득 담긴 잔을 쭉 들이켜 마셨다.
“아주 좆같았지. 숲 외곽에 난 길을 통해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렸어. 너 그거 아냐? 몬스터 피어라고, 트롤쯤 되는 놈들은 대부분 몬스터 피어라는 걸 내뱉거든. 그걸 들으면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몸이 굳어 버리기 일쑤지.”
크아아아아-!!
“그래, 마치 저렇게 세상이 떠나가라…… 잠깐.”
이야기를 하던 웨이튼이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술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쿠오오오오오오오--!
다시 한번 멀리서 들려오는 괴성.
“이런 씨발.”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현실에서 들려오자 웨이튼의 표정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 * *
쿠오오오오오오오--!
멀리서 들려오는 포효 소리.
누군가에게는 공포의, 또 누군가에게는 낯선 존재감의 소리였겠으나.
또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하면서도 혐오스러운 소리였다.
“시작됐군.”
그리 중얼거리며 일어난 셰인은 포효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정 기간 방치된 던전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현상, 던전 웨이브.
곧 있으면 녀석들은 마을을 향해 진군할 것이다.
셰인은 잠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때, 자신은 억지로 기사단의 지휘권을 뺏어 전장에 나섰다.
결과만 말하자면, 셰인은 결국 마을을 지키지 못했고, 마을 주민들의 원성을 샀으며, 그의 무능함은 이곳 용병단에 의해 소문이 나면서 셰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만심만 가득한 무능한 귀족으로 낙인이 찍혔었다.
당시에는 클라인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억지로 지휘권을 가졌으나, 그렇다고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죽은 가족의 시신을 품에 안고 원망에 찬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과.
억지로 지휘권을 잡고서도 실패한 자신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짓는 기사단원들의 눈빛뿐.
때문에 그날 이후, 셰인은 더 이상 남을 위해 살기 않기로 다짐했고.
더더욱 이기적인 성격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딱히 이제 와서 사람들의 선망과 존경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셰인은 스스로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 했고, 셰인의 지휘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사고도 아니었으니 전적으로 그의 잘못만이라 할 수는 없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나서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은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훗날 ‘무명’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명성은 필수였으니.
이미 해질녘이 된 마을이 부산스러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셰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섰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화
4화 단초 (3)
쿠오오오오오--!
그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먼저 반응한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인이었다.
고작 17살의 나이에, 클라인은 저 멀리 떨어진 산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 것이다.
동시에 방 한편에 세워진 검을 집고 곧장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런 클라인 보다 조금은 느리지만 기사단에서는 가장 빠르게 반응해 나온 사람은 그들을 여기까지 호위해서 온 기사단장, 레이어드였다.
“도련님!”
“예.”
둘은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던전 웨이브.
물론 클라인은 그걸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실전에서 몬스터와 싸워 본 경험도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럼에도 클라인은 뛰어난 본능적 감각에 맡겨,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먼저 마을 주민부터 대피시켜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다들 들었나!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곧바로 마을 동쪽으로 모여라!”
“알겠습니다!!”
뒤늦게 나온 기사단원들이 부산스럽게 바깥으로 뛰쳐나갔고, 그 뒤를 이어 셰인이 걸어 나왔다.
“클라인.”
“형님.”
“던전 웨이브구나.”
“……맞습니다.”
설마하니 형님도 그걸 바로 알아차릴 줄은 몰랐는지 클라인의 눈동자에 잠깐 놀라움이 서렸다.
결코 형님을 얕봤기에 보인 태도는 아니었다.
그저 형님이 놀라울만큼 침착했기에.
“어찌하겠느냐?”
셰인의 물음에 클라인은 잠시 주춤했다.
본래 그가 알고 있던 형님이라면 여기서는 자신에게 묻기보다 먼저 명령권을 쥐려 했을 테니까.
형님은 존중하지만,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몬스터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형님을 존중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그런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린 클라인은 셰인의 물읍에 답하고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마을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때문에 저는 레이어드 기사단장과 함께 먼저 녀석들을 타격할 생각입니다.”
“그래라. 지휘권은 너에게 맡기마.”
레이어드도 그런 차분한 셰인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역시 셰인이 저렇듯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지휘권까지 클라인에게 맡겼다.
물론 진짜 지휘권은 기사단장인 레이어드에게 있겠지만, 클라인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굳이 자신이 지휘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 기사단원 5명은 남기고 가거라. 나는 여기서 마을을 지키겠다.”
“……알겠습니다.”
이건 명령에 가까운 요구였지만, 클라인은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어쨌든 마을을 지켜야 할 비상 전력은 있어야 함이 옳았고, 마을의 자경단원으로는 저 멀리서 들려온 몬스터 피어를 이겨 낼 이는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형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몸 성히 다녀오거라.”
그런 셰인의 말에 클라인과 레이어드 기사단장 둘 모두 어깨를 흠칫거렸으나,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은 변한 셰인의 행동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이번 소동을 마무리해야 했으니까.
* * *
몬스터 피어가 들리자마자 웨이튼 용병단은 곧장 자신의 화주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이미 전투태세를 갖춘 클레이튼 가문의 기사단이 분주하게 밖을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사단원들은 마력이 실린 목소리를 내며 시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
“젠장. 쪽팔리게…….”
그때, 때마침 숙소에서 나온 단주와 눈이 마주친 웨이튼은 그런 단주의 명령을 기다렸다.
“끄응, 웨이튼 대장. 어떻게 하면 좋겠나?”
“단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번 웨이브보다 따로 있지 않습니까?”
“크흠! 그렇지.”
단주는 이런 웨이튼의 눈치가 퍽 마음에 들었다.
웨이튼의 실력은 평범한 용병대의 평균보다 아주 살짝 높은 정도였으나, 단주의 기분을 알아서 맞춰 주는 행동력만큼은 상위급에 해당됐기 때문이다.
때맞춰 웨이튼이 한 기사를 붙잡고 상황을 물었다.
“기사님! 혹시 외부로 몬스터 토벌에 나서시는 겁니까?”
기사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의 차림새를 보고는 표정을 풀었다.
“그래, 맞다. 기사단장님과 함께 나갈 예정이다.”
“지금의 병력만으로는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혹시 이쪽 병력을 피해 마을로 오는 몬스터는 없을지…….”
“그건 걱정 마라. 우리 쪽도 5명이 남기로 했으니.”
기사의 말에 웨이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가만 보자, 분명 차남의 실력이 어지간한 기사단장들보다 실력이 좋다고 했었지. 그럼 분명 차남 쪽이 토벌대에 포함되겠군?’
계산을 마친 웨이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 그럼 혹시 저희가 전선에 나가는 걸 도와도 되겠습니까?”
“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물론 병력은 조금이라도 더 있는 게 이득이긴 하지만, 굳이 용병단의 힘까지 빌릴 필요성이 있나 싶은 기사였다.
그만큼 기사가 믿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런 기사의 기색을 읽은 웨이튼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여 녀석들이 전선을 넓게 가진다면 마을에 피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이래봬도 전장 밥만 10년이 넘게 먹은 몸입니다. 던전 웨이브도 몇 차례 겪어 보았지요. 결코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럼, 5분 뒤에 동쪽 경계 초소로 오도록. 늦으면 기다리지 않고 갈 것이고, 만일 이쪽 지휘관님이 허가하지 않는다면 물러나야 한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기사는 다시금 바쁜 발걸음을 옮겼고, 웨이튼은 뒤에 서 있는 단주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분명 외부로 나가는 쪽이 차남일 겁니다. 제가 그쪽에 최대한 시야에 들어오게 할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후후후, 웨이튼. 역시 자넨 나와 계속 함께 가야겠네.”
“별말씀을.”
그렇게 웨이튼이 이제 막 술기운에서 벗어난 동료들을 부르려 할 때.
“웨, 웨이튼 님.”
“응? 알렉스. 무슨 일이냐. 너도 들었잖냐. 어서 사람들 대피시키지 않고 뭐 하고 있어?”
“혹시. 된다면 저도 함께 나갈 수 있겠습니까?”
“뭐?”
그러자 언제나 호탕한 웃음을 짓던 웨이튼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지금은 실제 상황이다.
고작 시골이 시시하다는 이유로 마을을 떠나고자 하는 애송이 놈이 건방지게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 웨이튼의 표정을 알아본 알렉스가 급하게 변명을 내던졌다.
“저도 압니다! 제 부탁이 무례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제가 나고 자라곤 고향입니다. 고향의 위기에서조차 도망치는 머저리가 어떻게 바깥세상에서 살아남겠습니까?”
“개소리 하지 말고 넌 주민들이나 대피시켜. 그게 네 고향을 위한 일이다. 알겠냐?”
“이미 사람들은 대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코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웨이튼 단장님!”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차라리 여기서 주먹으로 코뼈를 뭉개 버리면 알아서 돌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먹고 주먹을 올리려 했으나.
“절대로 도와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바깥세상을…….”
“……쯧.”
웨이튼은 알렉스의 두 눈을 응시했다.
두려움이 가득한 눈동자다.
전장에서 숱하게 봐 왔던, 전장의 병아리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눈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것은, 과거 첫 전장에 나섰던 웨이튼조차 갖지 못했던 눈동자였다.
“뒈지거든 날 원망하지 마라.”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웨이튼이 등을 돌렸을 때, 때마침 숙소에 나온 어느 한 남자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척 보자마자 20살이 채 되지 않는 미소년이 숙소 밖을 나오고 있었다.
흑발을 길게 묵어 늘어뜨린 소년.
누가 보더라도 귀족과 같은 복장을 입고, 로즈베리 색상의 눈동자로 웨이튼에게 잠깐 시선을 보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저게 그 말로만 듣던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인가?’
듣기로는 제 동생의 재능을 질투하고 능력은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귀족이라 들었다.
‘가능하면 얽히고 싶지 않은데.’
모든 귀족들이 그러진 않겠으나, 능력도 없으면서 권위만 내세우는 귀족에게 괜히 걸렸다간 제 명에 못 살고 죽기 마련이다.
실제로 주변 용병단 단주 중 한 명도 그런 식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정리당한 걸 들어 보지 않았던가.
‘그래도 선두에 나가진 않는다니 다행히 얽힐 일은 없겠군.’
* * *
‘어디서 봤었지.’
셰인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기사단과 웨이튼, 그리고 알렉스의 뒷모습을 보며 짧은 생각에 잠겼다.
셰인은 알렉스의 이름도,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으나, 묘하게 얼굴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전에 자신이 이 마을에 왔기 때문에?
아니다.
전생에도 마을 주민들의 얼굴과 촌장도 봤었지만, 셰인은 그들을 전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다 못해 촌장도 아닌 고작 마을의 자경단원 하나를 기억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보다 미래에 만났을지도 모르겠군.’
지금이 아닌. 먼 미래에서.
아마 좋은 관계로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생의 셰인과 좋은 관계인 인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그쯤 되어서 셰인은 알렉스에 대한 관심을 껐다.
그런 셰인을 향해 기사단원 중 한 명인 로드윌이 다가왔다.
“도련님. 마을에 방책이라도 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예?”
“그리고 용병들은 마을 주민의 호위로 물려라. 여기 있어 봐야 도움이 되진 않을 터이니.”
용병대는 끝내 기사단을 따라가지 못했다.
기사단을 따라간 인물은 전령 역할을 수행할 웨이튼과, 주변 지리를 잘 아는 마을 주민인 알렉스뿐.
그 외 용병대는 마을에 남아 주민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원 로드윌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으나,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진 않았다.
자존심 강한 셰인의 말에 토를 달아 봐야 좋을 것도 없었고, 실제로 마을이 위기에 처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로드윌의 표정에 그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파악한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보기에, 아까 그 피어의 주인은 누구일 것 같나?”
뜬금없는 질문에 로드윌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트롤의 피어였습니다.”
“맞다. 그것도 살기가 진득한 피어였지.”
“예.”
셰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착각이 있다. 트롤이 그저 무식한 재생력과 근력만 있을 뿐이라 생각하지.”
“……그 외에 다른 게 있습니까?”
로드윌의 입장에서, 트롤과 마주친 적도 없던 셰인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어찌 보면 우습게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로드윌은 그런 셰인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트롤은 영리한 몬스터다. 또 기습과 같은 함정을 팔 줄도 아는 녀석들이지.”
“함정…… 말입니까?”
로드윌이 알고 있는 트롤은, 무식한 재생력과 바위마저도 일격에 부숴 버리는 근력으로 적을 몰아치는 몬스터였다.
그런 녀석이, 함정 따위를 판단 말인가?
“토끼를 잡는데 늑대가 사력을 다하겠나?”
“…….”
하기사. 트롤에게 있어서 기사라면 모를까, 일반인들은 그저 먹기 좋은 사냥감에 불과할 터.
“자연에 있는 트롤들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적을 파악하고,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 그 힘을 발휘하지. 혹은, 자신이 이길 수 없다 판단하면 기습 같은 나름의 작전이라는 것도 펼친다.”
몇 번이고 트롤과 싸워 봤으나, 트롤에게 그런 면모가 있었음은 처음 알았기에, 로드윌은 조용히 그런 셰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니 트롤은 함부로 몬스터 피어를 내뱉지 않는다. 굳이 있다면, 사냥감을 상대할 때 정도. 그것도 아까처럼 살기가 진득한 피어가 아닌, 적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한 용도다.”
“그럼 아까 트롤의 피어는 무엇입니까?”
“트롤이 살기 섞인 피어를 내지르는 경우는 두 가지 뿐. 하나는 많은 수의 적을 앞에 뒀을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
“자신의 주인을 위해 파수꾼의 자리에서 벗어나 사냥꾼이 되었을 때다.”
주인?
무리 지어 다니지 않기로 유명한 그 트롤에게 주인이라니?
로드윌은 그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셰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저 산등성이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한 마력의 불꽃과, 고함 소리.
전투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화
5화 단초 (4)
“전방에 몬스터들이 보입니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산으로 올라온 지 어느덧 30분 정도 흘렀을 무렵, 기사단은 전방에 보이는 몬스터들과 격돌했다.
“……대단하군.”
전령의 역할로서 전투에서 배제된 웨이튼과 알렉스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절로 나오는 감탄사를 숨기지 못 했다.
특히, 알렉스의 경우에는 그 충격이 더더욱 컸다.
평생 시골에서만 살아왔고, 몬스터라 해 봐야 이따금 뒷산에 자리 잡는 소규모 고블린 무리 정도가 전부였다.
그보다 무서운 것은 이따금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늑대나 곰과 같은 짐승 정도일까.
그 무시무시한 짐승들보다도 기사들은 빠르고 용맹하게 자신들의 검을 휘둘렀다.
던전 웨이브에 포함된 몬스터는 적게는 고블린부터 각종 무기를 들고 있는 코볼트, 거기에 트롤 열댓 마리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몬스터의 수는 총 150여 마리.
이 정도면 소형 웨이브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거기에 대적하는 기사단의 수는 총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기사단원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불리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첫 충돌에서 기사단은 각각 들고 있는 방패와 창을 이용해 접근하는 고블린이나 코블트 따위를 정리했고, 측면에서 파고드는 워 울프 같은 마물들은 검을 든 기사들이 일격에 베어 버렸다.
기사단도 기사단이었지만, 특히 최선두에 서 있는 소년이 눈에 띄었다.
나이는 분명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의 소년은, 제 머리색과 비슷한 화사한 금빛의 검강을 휘두르며 수려한 동작으로 몬스터들을 베어 나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본 알렉스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멋지다…….”
“감탄하는 건 좋다만, 정신줄까지 놓지는 말아라.”
“헙, 예!”
웨이튼의 경고에 알렉스도 멍했던 눈에 힘을 부릅 주고는 주변을 살펴봤다.
아직까지 트롤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아직 전장의 상황은 순조로웠다.
한편, 그런 트롤을 보고 있던 사람은 알렉스뿐만이 아니었다.
클라인은 워 울프를 베어 넘기는 과정에도 트롤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이쪽의 전력을 가늠하듯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트롤들.
녀석들이 나서기 시작하면 기사들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 한들, 트롤의 괴력이 담긴 주먹은 그런 갑옷을 뚫고 안에 있는 사람을 묵사발 내기에 충분했기에.
본능적으로 분석하고 상황을 직시하는 눈.
이는 클라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 중 하나였다.
클라인은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상황을 인지하는 게 가능했다.
레이어드는 그런 클라인의 눈빛을 보며 내심 소름이 돋았다.
이제 겨우 17살에 불과한 소년이, 마치 20년도 더 전장에서 살아간 노장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까.
그걸 느끼는 것은 비단 레이어드뿐은 아니었다.
기사단원들도 레이어드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의 아들이 뛰어날수록, 그들의 사기는 점차 올라갔다.
그렇게 전장의 열기가 더해지고 있을 때.
드디어 트롤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오오오오-!!
가장 선두에 있던 트롤의 피어를 시작으로, 남은 트롤들도 일제히 피어를 쏘아 보냈다.
“커헉!”
알렉스는 그 피어에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웨이튼이 그런 알렉스를 부축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게 마력을 다루는 몬스터와 인간의 전투다.”
“예, 예!”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피어에 그나마 알렉스가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선두에서 싸우고 있는 기사들의 마력 덕분이었다.
몬스터와 마물들을 상대로 내뿜는 기사들의 마력이 방패처럼 허공에 맺혔다.
‘그래도 꼬맹이 주제에 여전히 눈빛이 죽지는 않았군.’
웨이튼은 그런 알렉스를 잠시 쳐다보다 다시금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트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클라인은 전장의 좌측에서 전방으로 몸을 옮겼다.
‘여기서 전투가 지체돼서 좋을 게 없어.’
기사단은 분명 트롤을 모두 막기에 충분한 전력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다른 몬스터들이 마을로 향해 갈지 몰랐다.
물론 마을에도 형님과 다섯 명의 기사단원, 용병대와 자경단이 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변수를 줄이고 싶은 게 클라인의 목표였다.
“흐읍-!”
클라인의 코어에서 마력이 끓어올랐다.
전신을 휘감은 마력은, 이내 서른 명의 기사들이 내뿜던 마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마력의 용오름을 피워 올렸다.
동시에 클라인이 검을 가로로 휘두른 순간.
용오름은 실제로 용이 되었다.
그러나 용은 그저 찰나의 형상만을 유지한 채 바람처럼 날아갔고.
전장의 선두로 향하던 트롤들과 그런 트롤 곁에 있던 몬스터들을 단숨에 폭발시켜 버렸다.
전투라고 불릴 수 없을 정도의 일방적인 폭력.
그 말도 안 되는 힘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던 몬스터들도 겁을 집어 삼켰다.
적을 멸살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몬스터의 군대도, 저 존재 앞에서는 그저 불 앞의 부나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몰아붙여라!”
그때, 레이어드의 외침과 함께 기사단이 마력을 끌어올려 단숨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전투에 조금도 패배를 생각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그릇의 천재가 있었고.
바로 그 천재가 자신들이 모시는 도련님이었기에.
이윽고 마지막 트롤이 베어졌을 때.
클라인은 방금 막 자신이 직접 베어 낸 트롤을 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마지막 트롤의 시체에서부터, 아주 옅은.
검푸른 마력이 물의 형태를 취하며 허공으로 사그라졌다.
“설마……?”
뒤늦게 클라인이 고개를 치켜들어 외쳤다.
“전령! 어서 빨리 마을로 돌아가 전원 마을 밖으로 대피하라 전하세요!”
“예? 아! 알겠습니다!”
뒤늦게 웨이튼이 의아함을 담으면서도 알렉스를 붙잡고는 전장에서 벗어났고, 클라인은 아직 의아함에서 벗어나지 않은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마을로 돌아갑니다!”
* * *
한편, 셰인은 숲 너머에서 용오름이 치솟는 것을 보고는 전투의 끝이 왔음을 깨달았다.
‘금방 끝났군.’
일반 용병들만 투입했더라면, 혹은 클라인이 없었더라면 이번 전투는 며칠이고 이어졌을 터.
여태까지의 그림은 전생과 비슷했다.
그 당시에도 클라인은 셰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다가 트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여기까진 그때와 마찬가지고.”
마을의 경계선. 숲의 어둠 속에서.
셰인은 불길한 마력을 품는 존재를 느꼈다.
지난 삶, 셰인은 이때 당시 멀리서나마 녀석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시체를 물고 늘어진, 어둠이 가진 순수한 힘.
어둠의 정령 중 하나인 썩은 나무 정령을.
당시에는 몰랐으나, 썩은 나무 정령은 이 밤 속에 자신의 어둠으로 존재감을 숨기고 이곳까지 찾아왔다.
‘이러니 전생의 내가 몰랐을 수밖에.’
만약 그때 지금처럼 예비 병력을 마을에 남겨 뒀더라면 적어도 마을 주민들이 대피할 시간은 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생의 셰인은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나갔고, 빈 집이 된 마을은 썩은 나무 정령에게 맛 좋은 식사 자리가 되고 말았다.
“전투 준비.”
“예? 헙!”
셰인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로드윌을 포함한 다섯 명의 기사단원들이 뒤늦게 어둠의 정체를 깨닫고 전투 준비를 외쳤다.
쿠웅-!
썩은 나무 정령이 가진 특유의 검푸른 오오라에 휘감긴 오우거의 등장.
그것도, 머리가 둘이나 달린 트윈 헤드 오우거였다.
덩치에 맞지 않게 은밀히 움직이던 트윈 헤드 오우거는 사냥감들이 눈치를 챈 걸 깨닫고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을 감싸고 있던 어둠을 주변으로 폭사했다.
오오오오오오--!!
“흡!!”
단순한 어둠의 폭사만으로도, 다섯 명의 기사단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리에 버텨야만 했다.
트윈 헤드 오우거.
4품의 엑스퍼트라면 사력을 다해 상대해야 하고, 보다 안전하게 상대하려면 못해도 3품의 마스터는 되어야 상대할 수 있는 괴물.
가뜩이나 그런 존재가, 어둠의 정령마저 품고서 그 힘을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위험하다…….’
기사단원들은 썩은 나무 정령의 존재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저 오우거가 위험하다는 경종은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우리끼리 놈을 죽이기엔…… 역부족이다.’
5인의 기사단원들의 실력은 6~5품의 엑스퍼트.
죽음을 각오한다면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가려면 적어도 여기서 둘 셋은 죽음 혹은 치명적인 부상을 각오해야만 했다.
그들은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았으나, 방금 놈의 등장과 함께 터진 포효 소리가 본대에도 들렸을 터.
그렇다면 여기서 마을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이미 주민들도 모두 대피한 상황이니.
놈이 마을 안쪽까지 들어가는 것을 막을 뿐이라면, 이쪽도 충분히 버틸만하다는 계산이 섰을 때.
셰인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설픈 생각으로 놈을 상대할 생각은 버려야 할 거다.”
기사들의 시선이 아주 잠깐 셰인에게 향했다.
놀랍게도, 기사들조차 다리에 온 힘을 쥐고 버텨야 했을 어둠의 힘에, 셰인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채로 트윈 헤드 오우거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까짓 게.’
한편, 셰인은 오우거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썩은 나무 정령에게서 적의를 읽었다.
숲의 부정적인 기운이 모여 만들어진 어둠 속성의 정령.
썩은 나무 정령은 자신의 마력을 터뜨렸으나, 셰인으로선 놈의 위협은 봄바람의 산들바람 정도로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셰인은 10년이 넘도록 7대 죄악이자 타락 중 하나인 ‘질투’에 지배되지 않았던가.
‘내게 그따위 음험한 마력이 통할 것 같으냐.’
그런 셰인에게 고작 저따위 정령의 기세는 조금도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질투’라는 이름의 타락은 모든 세상의 생명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또 증오하는 존재.
‘언데드’의 근원인 힘이었으니까.
지난 삶, ‘무명’의 제1군단장이었던 셰인은 모든 언데드들의 왕이자 죽음 그 자체였고.
고작 숲 하나가 가진 ‘죽음’의 기운으로는 셰인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기사단은 들어라. 단 일격. 그 안에 놈을 정리할 테니, 사력을 다해 빈틈을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보통 때라면 기사들은 저런 셰인의 말에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셰인에 대한 일말의 믿음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썩은 나무 정령의 위협을 받고 적의를 불태우는 셰인의 목소리에는 감히 기사들이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기운이 담겨져 있었다.
클라인과 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복종의 명령.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적의 앞에서 셰인의 명령은 오히려 기사들에게 알 수 없는 믿음을 선사했다.
기사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무구에 마력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5품 엑스퍼트, 로드윌은 검과 방패에 마력을 부여해, 오우거의 빈틈을 찾아봤다.
셰인은 그런 로드윌과 기사들에게 조언을 던졌다.
“놈의 실체는 어둠의 정령이다. 평범한 오우거를 생각하고 덤볐다간 순식간에 어둠에 잡아먹힐 테니, 항상 어둠이 존재하는 공간을 조심해라.”
“……예!”
셰인의 조언을 들은 기사들이 단숨에 달려들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적의 공격을 흘리며 상대의 저력을 파악할 터였으나, 지금은 그러한 여유조차 있지 않았다.
수많은 전장을 겪은 전사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놈이 제대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자신들은 단 1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단순히 오우거였다면 모를까, 정령의 힘까지 더해진 저 괴물은 당장 그들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한편, 셰인은 자신의 심장에 맺혀진 두 개의 서클을 맹렬히 돌리고 있었다.
고작 2서클에 불과한 셰인이었지만, 셰인의 마법은 특별했다.
아니, 애초에 그에게 서클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마력의 총량에 불과했다.
그는 어둠의 왕이자 수억의 언데드 대군을 이끌던 군단장이었다.
이제 와서 마법의 수식 따위, 그에게는 애들 장난처럼 비틀 수 있었다.
‘단숨에 죽여야 한다.’
정령은 기본적으로 매개체가 있어야만 힘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저 어둠의 정령이 쓰고 있는 매개체는 이미 죽은 트윈 헤드 오우거였고.
결국 저 오우거를 파괴해야만 저 정령을 제압할 수 있었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서클에, 셰인은 자신만의 변화를 추가했다.
룬어에서 파생된 곁가지 기술 중 하나.
‘증폭.’
셰인이 만든 마법 술식 속 마력 간의 거리가 늘어나며 마법의 범위가 늘어났다.
절대적인 총량은 그대로였으나, 그 크기만큼은 결코 2서클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이대로는 2서클 마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거기에, 셰인은 한 가지 기술을 더 추가했다.
‘중복.’
마법에 마법을 중복시키는 기술.
언뜻 보아서는 단순히 마법 하나를 더할 뿐인 기술로 보일 수 있었으나, 마법의 중복은 기본적으로 사장된 기술이었다.
마법에 정해진 술식에는 그 용량이 정해져 있고, 거기에 억지로 중복을 해 봐야 이미 가득 찬 컵에 물을 채워넣는 것에 불과하기에.
그러나 셰인은 증폭으로 마력 간의 간격을 넓혔고, 그 자리에 그대로 똑같은 수식을 그려 넣었다.
‘속성은 ‘금(金)’. 형식은 절삭.’
펼쳐진 셰인의 손 위로 마력으로 이루어진 푸른 원반이 만들어졌다.
원반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고, 이내 곧 마력의 반발력으로 인해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원반의 크기는 넓어지면서, 또 동시에 절삭력이 높아져 갔다.
이윽고 원반이 피처럼 붉은빛을 띄웠을 때, 셰인의 입이 열렸다.
“지금!”
그 찰나의 외침을 기사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 잠깐의 사이에 기사들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으나, 셰인의 명령에 몸을 아끼지 않고 최후까지 남은 마력을 쥐어짜 동시에 오우거의 발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트윈 헤드 오우거, 썩은 나무 정령은 그런 기사들의 공격조차 무시하고 셰인의 손에 들린 원반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사방에서 들어오는 기사들의 합공을 경시할 수 없었기에, 녀석은 최후의 발악으로 어둠의 힘을 모아 방어막을 펼쳤다.
‘흡수’의 성질을 지닌 어둠의 방벽이 셰인이 날린 붉은 원반을 막아서는 순간.
“감히!”
절대자의 영혼을 지닌 셰인의 마력이 담긴 외침은 곧 피어의 형태가 되어 썩은 나무 정령의 영혼을 사정없이 흔들었고.
영혼의 흔들림은 곧 녀석의 마력에 커다란 균형을 만들었다.
그 균형을 뚫은 붉은 원반은 매우 정확하게 트윈 헤드 오우거의 상징인 두 개의 머리를 반듯하게 지나갔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원반은 그대로 숲을 향해 날아가 지나치는 모든 것을 베어 버렸다.
그렇게, 두 개의 머리가 떨어진 오우거는 중력의 힘으로 바닥에 쓰러졌고.
기사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클라인의 능력을 의심한 적 없는 기사들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셰인에게서 클라인에겐 느낄 수 없는,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화
6화 단초 (5)
웨이튼과 알렉스는 전력을 다해 마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마력을 다루는 웨이튼이 알렉스보다 훨씬 빠르게 앞서 갔겠지만, 이 주변의 지리는 알렉스의 손바닥 안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동네의 산이란 산은 죄다 들쑤시고 다니지 않았던가.
30명의 기사단과 함께 할 때와는 다르게, 인간들은 보통 다니지 않는, 흔히들 말하는 동물들의 길을 통해 마을로 향해 갔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래, 나도 알겠다!”
둘은 도대체 클라인이 무엇을 보고 마을이 위험에 처했다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그 트롤들조차 단 일격에 도륙을 내버린 사람이 하는 말이 결코 허언일 리가 없었다.
그러한 생각에 둘이 마을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검은 기운을 일렁이는 거대한 오우거가 있던 것이다.
그것도 머리가 두 개나 달린 트윈 헤드 오우거!
이는 웨이튼조차도 단 한 번 본 게 전부였던 엄청난 몬스터였다.
그런 괴물이, 불길한 어둠에 휩싸여 있는 모습은 혹여나 꿈에 나올까 두려울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다섯 명의 기사들은 트윈 헤드 오우거를 일제히 공격하고 있었으나, 그 묵직하면서도 빠른 공격 한 번 한 번에 기사들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기로 한 듯, 두 걸음 물러서면 세 걸음을, 세 걸음 물러서면 네 걸음을 나아가 오우거를 압박했다.
그럴수록 오우거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어둠의 힘이 기사들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이따금 그림자가 있는 방향에서 가시가 튀어나오기까지 하니…….
단언컨대 웨이튼은 저 전투에서 단 5초도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기사들의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외쳤다.
“지금!”
그러자 방금까지도 격렬하게 오우거를 몰아치던 다섯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며 오우거의 발을 붙잡았다.
그제야 웨이튼과 알렉스의 시선이 방금 외쳤던 소년을 향해 갔다.
검은 머리의 소년은 한쪽 손에 불길한 핏빛의 원반을 만들어 내더니, 있는 힘껏 오우거를 향해 날렸다.
오우거 또한 그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는지 어둠의 방어막을 펼쳤으나.
“감히!”
다시 한번 소년의 외침에 방어막이 크게 흔들렸다.
흔들린 것은 오우거뿐만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아예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져 버렸고, 웨이튼도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목소리.
단언컨대 웨이튼은 과거 트윈 헤드 오우거의 몬스터 피어도 이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독이 되었음일까.
셰인의 목소리에 웨이튼의 영혼이 흔들렸고.
동시에 오우거의 머리들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웨이튼과 알렉스는 순간이나마 녀석의 그림자가 이쪽을 향해 뻗쳐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 *
로드윌을 포함한 다섯 명의 기사단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볼 때, 셰인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생에서 겪었던 것이지만,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정령들은 항상 끈질겼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로 삼고 있던 오우거의 머리 두 개를 모두 떨어뜨렸으니 썩은 나무 정령에게도 존재의 격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은 갔겠지만.
도주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해가 진 밤이었으니, 어둠의 정령인 썩은 나무 정령이라면 어디로든 그림자에 숨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지금 셰인만큼 어둠의 마력에 민감한 사람이 없기에 쉽게 간파할 수 있을 터지만.
괜히 사람들이 돌아왔다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그보다 골치 아픈 일은 없다.
처치도 곤란해지고, 그림자에 숨은 것과 다르게 인간의 몸에 숨어 버리면 아예 그 안에서 동면을 해 버리기에 직접 몸을 만지지 않는 이상 간파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셰인의 눈에 마을 동쪽 입구에 주저앉아 있는 청년과 중년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알렉스와 웨이튼이었다.
“음.”
클라인이 먼저 보낸 전령인가?
셰인이 그렇게 생각할 때쯤.
알렉스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고, 웨이튼도 그런 알렉스와 함께 다가왔다.
“그, 괜찮으십니까?”
“이쪽 일은 마무리되었다. 그쪽은?”
이미 저쪽도 정리가 됐으리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일단 물었다.
그러자 생각대로 저쪽 또한 알렉스와 웨이튼에 떠날 쯤엔 대장격이던 모든 트롤이 죽었고, 나머지는 고블린과 코볼트 등의 잡다한 몬스터가 전부라고 했다.
코볼트는 조금 위험할지 몰라도 고블린 정도면 몇 마리가 도망치더라도 마을의 자경단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터.
“그, 기사단의 사람 중 젊으신 분이 제게 마을로 찾아가 대피하라고 했습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러면서 셰인은 한쪽에 쓰러진 오우거를 바라봤다.
한편, 알렉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숲에서 보았던 클라인의 무위도 무위였지만, 심장을 울리던 셰인의 외침은 알렉스로 하여금 경외심을 품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이 사람과 한 마디라도 더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를 굴릴 때쯤.
갑자기 셰인이 웨이튼을 향해 손을 뻗었고.
이변은 그때 발생했다.
“컥! 웨, 웨이튼 님……!”
셰인의 손짓과 거의 동시에 여태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웨이튼이 알렉스의 목을 쥐어잡고는 뒤로 물러선 게 아닌가.
“동면을 취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나 보군.”
셰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고, 알렉스는 목으로부터 전해지는 압박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가까스로 시선을 웨이튼에게 돌렸을 때.
웨이튼은 어느새 검은 안개에 휩싸여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어떻게?!’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는 의식 속에서, 알렉스는 이쪽을 향해 여전히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셰인을 바라봤다.
“인, 간. 나를, 놓아 줘라. 그럼, 이 인간. 산다.”
평소 호탕했던 웨이튼의 목소리라 믿기지 않을 만큼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따위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이 인간. 죽는다.”
“너를 놓아주면 더 많은 인간들이 희생되겠지.”
“그러면. 협상은.”
“늦었다.”
“……?”
거절이 아닌, 늦었다 라니.
썩은 나무 정령이 의아함을 드러내기도 전에, 녀석의 발밑으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인간……!”
순식간에 위로 솟구친 흙에 의해 정령이 속박됐다.
땅은 마치 강철이라도 된 듯, 정령이 아무리 힘을 쥐려 해 봐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떻게?!”
웨이튼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정령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직 성인도 채 되지 않은 소년이 무영창으로 마법을 펼친단 말인가?
물론 정령이 살았던 기원 전 시기를 떠올리면 그러한 존재들이 없던 것도 아니었으나.
자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마법을 발동시켰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마력은 곧 정령을 구성하고 있는 힘이건만!
다른 건 몰라도, 자신조차 모르게 마법을 펼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너 따위가 이해하겠나.”
셰인 또한 그런 그 얼굴에 떠오른 경악의 의미를 알고는 하찮다는 듯 웃었다.
“자, 잠깐, 인간! 이 인간, 을 죽일 생각인가!”
“못할 건 뭐지?”
그러면서, 셰인은 한쪽 손을 올려 마력으로 수식을 그려냈다.
그러자 쭉 편 그의 손 위로, 금속 검신이 생성됐다.
“……!”
셰인은 새롭게 삶을 시작한 뒤로, 인간을 죽일 생각은 그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렁하게 넘길 생각 또한 없었다.
어디까지나 무자비한 학살에 가까운 짓을 하지 않겠다는 거지, 적을 살려 두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네놈이 그 몸뚱이에 남아 있어 봤자, 그 남자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오히려 죽기를 바랄 테지.”
신체의 권한은 빼앗기고, 내면에 잠든 채 육체를 유린당하는 기분이 어떠한지는 이 세상에 셰인보다 더 잘 아는 인물은 없었다.
어느새 셰인의 손 위로 만들어진 금속 검신은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잘 가라.”
“자, 잠깐만요!”
그렇게 셰인이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날로 변한 손으로 놈의 목을 치려는 순간.
알렉스가 달려들어 그런 셰인의 팔을 붙잡았다.
평민이 감히 귀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그것만으로도 몰매를 맞는 것이 당연했으나, 셰인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으로 그런 알렉스를 노려봤다.
“방금 듣지 않았나? 이대로 둬 봐야 이 남자는 죽는다.”
“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알렉스가 간절한 표정으로 그런 셰인의 팔을 붙들고 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셰인의 머리에 하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살아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등 뒤로 세 자루나 되는 검을 매고서 금발의 미남자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있었다.
피투성이 남자는 애절한 표정으로 그런 미남자를 바라봤고.
[……미안합니다.]
금발의 남자는 곧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윽고, 홀로 남은 피투성이 남자는 등 뒤를 돌아 셰인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셰인의 눈을 대신하는 언데드 대군을 바라보며 외쳤다.
[개죽음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어 보이는 남자는, 그렇게 자신의 등에 달린 검을 들고 날뛰던 끝에 15기의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너였군.”
“예, 예?”
“…….”
당시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는 새하얗게 샜고, 여기저기 흉터투성이인 모습이라 지금처럼 평범한 시골 청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지만.
분명했다.
전생에 클라인과 함께 황녀가 갇힌 도시에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결사단원 중 한 명이었다.
그 과정에서 클라인과 황녀를 제외한 모두가 셰인의 언데드 군단에 목숨을 잃었고, 알렉스는 그중 마지막까지 클라인을 지키다 삶을 마감한 결사단원이었다.
만일 그때 알렉스가 클라인을 절벽 밑으로 피신시키지 않았더라면 목숨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아래 있던 기연도 만나지 못했을 터다.
‘그래서 얼굴이 익숙했던 것인가.’
셰인은 잠시 그런 알렉스를 바라보다, 이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러나 미래의 클라인의 곁에 설 정도의 실력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선택받은 이중 한 명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셰인은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하고, 여전히 묶인 채 움직이지 못하는 썩은 나무 정령과 눈을 마주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뭐라?”
그런 썩은 나무 정령이 제대로 대답도 하기 전.
셰인은 정령이 들어가 있는 웨이튼의 몸 안으로 마력을 흘려 넣었다.
“들어와라. 네놈이 살 길은 이것 하나뿐이니.”
“……인간. 건방지군.”
동시에, 웨이튼의 몸 안에 스며들었던 검은 안개가 서서히 셰인을 향해 옮겨 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화
7화 단초 (6)
어둠 계열 중 하나인 썩은 나무 정령은 셰인의 행동을 비웃었다.
방금 셰인이 한 행동은, 자신의 심상 세계로 어둠의 정령을 끌어오는 행위였다.
어찌보면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싸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큰 착각이었다.
어둠의 정령은 기본적으로 생명체의 마이너스 감정, 즉 음기를 먹고 성장한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가장 감정적인 생명체.
제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아니. 설사 고대의 그 대단한 종족들조차도 어둠의 정령을 자신의 심상세계에 들이는 미친 짓따윈 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제법 영혼이 강한 인간이긴 했으나.
아무리 발악한다 한들 생명체에게는 반드시 음기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음기가 존재하는 이상 어둠의 정령은 그 어떤 상대가 온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숲을 지키는 정령으로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아 왔던가.
정령은 인간의 어둠이 어디서부터 진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죽음이다.
이제부터 셰인은, 그간 썩은 나무 정령이 보아 왔던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며 인격이 마모될 것이다.
밖에서는 찰나의 시간 동안 수십 번의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살아났을 때 또다시 다가올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테지.
그렇게 음기는 더더욱 생겨날 것이고, 그게 정령을 더욱 성장시키는 힘이 될 터.
그러나, 썩은 나무 정령의 예상은 셰인의 내면에 들어온 직후부터 비틀어졌다.
-뭐, 냐. 이건…….
죽음.
썩은 나무 정령은 그 누구보다 죽음에 있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셰인의 내면에 들어온 직후.
썩은 나무 정령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지평선 저 너머까지 쭉 이어진, 셀 수도 없을 숫자의 시체밭이었다.
-이게, 도대체…….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오로지 죽음뿐.
그 참상은 수백 년을 숲에서 살아온 어둠의 정령마저도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그쯤 되자,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이건.
자신이 알던 죽음이 아니다.
-뭐냐. 무엇이냔 말이다-!
어둠의 정령은 결코 스스로 느낄 수 없는, 느낄 리 없는 감정을 깨닫고 현실을 부정했다.
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고작 저따위 시체들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저 시체들을 만든 원인.
자신과 비슷한 어둠이지만, 더없이 깊고 심오한 어둠의 티끌을 마주했기에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수많은 시체 위에 올라, 왕좌에 앉아 있는 셰인의 모습이 보였다.
-뭐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셰인의 가슴은,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 검에 의해 꿰뚫려 있었다.
셰인은 마치 단잠을 자듯 미소 짓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본능적인 깨달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체들은, 저 인간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저건 도대체 무엇인가.
저것은 죽음인가?
아니, 아니다.
한없이 죽음에 가까우나, 그와 다른 무언가였다.
그때, 감겼던 셰인의 눈이 뜨였다.
-도, 도대체…… 어떻게 필멸자 주제에. 이런 세계를…….
어둠의 정령이 두려움에 떨며 하는 질문에는 그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싸늘한 침묵.
방금까지 정말 그 포근한 얼굴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두 눈을 뜬 셰인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고.
그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가 검게 물들기 시작할 때.
무언가가 썩은 나무 정령을 향해 다가왔다.
그것은, 죽음과는 한없이 가까우나.
그와 다른 무언가.
‘소멸’이었다.
* * *
마을에 도착한 클라인과 기사단은 마을 입구에 쓰러져 있는 트윈 헤드 오우거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 거대한 몬스터가, 어떻게 아무런 존재감도 뿜지 않고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사건에 대한 경위는 아직까지 피를 흘리며 응급처치를 막 시작하고 있던 다섯 명의 기사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쭉 저 상태십니다.”
“……서둘러 마법사를 불러야겠군. 도련님, 어찌하시겠습니까?”
침대에 곤히 누워 잠든 셰인을 바라보며 묻는 레이어드의 말에 클라인이 침울한 기색으로 답했다.
“형님이 깨어나면 함께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런 클라인의 말에 레이어드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그 첫째 도련님이 고작 용병 따위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며칠 동안, 셰인은 평소와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눈빛은 똑같았지만, 언제나 클라인을 향해 보내던 적의적인 시선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이번 일도 그러했다.
하지만 레이어드는 그런 셰인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클레이튼 백작가의 자제분이시다. 고작 평민을 위해 저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지.’
물론, 셰인의 속을 알 수가 없던 레이어드는 설마하니 셰인이 자신의 내면에 날뛰는 정령을 상대하기 귀찮아 웨이튼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까지는 떠올릴 수 없다.
“로드윌. 미안하네만 자네가 다른 친구와 함께 다녀와야겠군. 마탑에 정확히 상황을 설명하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나마 마을에 남아 있던 다섯 명의 기사단원 중 가장 실력이 좋았던 로드윌이기에, 그는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로드윌도 그런 레이어드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쓰러지신 첫째 도련님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됐던 것이니.
어찌 기사의 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장 정령에 의해 쓰러지신 도련님을 구하려면 마탑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로드윌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갈 필요 없다.”
“……도련님!”
침대에 누워 있던 셰인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단장님. 지금 뭐 하고 계신 겁니까!”
“무슨 짓입니까!”
어느새 레이어드가 한쪽 손을 검 손잡이에 올려 둔 것을 보곤 주변의 기사들이 대경하는 목소리를 냈다.
클라인 또한 그런 레이어드를 노려봤다.
“정말 셰인 도련님이 맞으신지 먼저 확인해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먼저 뒤로…….”
“그거라면 확인해 보면 될 일이지. 호들갑 떨 필요 없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셰인의 말에 레이어드는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그런 셰인이 내민 손목을 붙잡았다.
“…….”
그런 레이어드의 마력이 셰인의 신체 내부를 쑥 훑고 지나갔고, 어둠의 정령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도련님이시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됐다. 마을은?”
“복귀한 기사단에게 주변 정찰을 시켰고, 그들이 돌아온다면 마을 주민들도 다시 불러들일 예정입니다.”
“알았다.”
그렇게 뒷정리를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간 뒤, 레이어드와 로드윌, 그리고 다른 기사들이 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셰인과 클라인 단 둘이 남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어째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신 겁니까, 형님.”
“걱정해 주는 거냐.”
로즈베리 눈동자가 바다처럼 푸른 클라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클라인의 모습에 셰인이 피식 웃었다.
“별로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
“너라도 같은 일을 했겠지.”
“저는…….”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그보다 클라인.”
“예?”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며 종자가 필요하지 않더냐?”
“……?”
갑작스러운 셰인의 말에, 클라인은 두 눈을 깜빡일 따름이었다.
* * *
다음 날, 이른 새벽.
기사단은 짐을 챙기고 마차와 함께 다시금 마을을 떠날 채비를 갖췄다.
촌장은 아직 마을 주변에 몬스터가 있지 않을까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기사들이 주변을 모두 훑고 지났으며, 별다른 몬스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셰인은 부상당한 기사들을 위해 마을의 마차를 요구했다.
촌장은 무척이나 속이 쓰린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마차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을을 지키다 부상당한 기사들을 위한 것이었고, 상대는 그 대단한 클레이튼 가문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듯 보였으나, 결국 저 또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이 마을을 떠나기 전, 웨이튼의 고용주인 하보크 상단주가 그 값을 대신 치렀다.
그는 마을을 위해 전력을 다한 클레이튼 가문을 향해 칭송을 내뱉기 바빴다.
한편, 클라인은 창밖으로 부상당한 기사들을 태운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있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셰인에게 물었다.
“왜 저 사람을 제게 붙여 주신 겁니까?”
마을을 떠나기 전.
셰인은 알렉스를 찾아가 클라인의 종자가 되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사실 물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통보에 가까웠다.
무례하다고 느낄 만큼 일방적인 말이었으나, 알렉스는 그런 셰인의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행에 합류했다.
“재능이 있는 녀석이다. 곁에 두고 잘 키워라.”
“그렇…… 습니까?”
의아함이 담긴 클라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셰인이 알렉스를 데리고 온 이유는, 굳이 전생의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지금과 그때의 알렉스는 달라졌다.
마을에 있는 가족과 친우, 동료들이 죽는 일도 겪지 않았고, 전생처럼 세계에 위기가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가 전생에 어떤 기연을 겪어 강해졌는지 알 수 없었으나.
셰인의 눈은 인간의 영혼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알렉스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물론 클라인과 비교하면 그 빛이 많이 줄어들겠지만.
‘어둠의 정령에게 붙들렸을 때도 녀석은 멀쩡했지.’
비록 흔들렸을지언정, 무릎 꿇지는 않았다.
셰인은 그것만으로도 알렉스에게 합격 점수를 내줬다.
영혼이 맑은 이들은 언제나 시련을 이겨 내고 강해지기 마련이니까.
전생에 수없이 많은 영웅들을 봐 왔던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티 없이 맑았던가.
셰인은 자신의 감이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잘만 키운다면, 전생과 달리 제대로 키워 준다면. 보다 더 찬란한 빛을 내뿜을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영혼이 빛나는 클라인의 곁에 붙여 뒀다.
맑은 영혼은 보다 더 맑은 영혼에 이끌리고 성장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마차는 쉴 새 없이 바퀴를 굴려 움직였고, 어느새 저 멀리서 도시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쭉 들고서야 보이는 거대한 성벽과, 그런 성벽 위에 서 있는 수많은 병사들.
그 모습을 본 클라인이 문득 떠올린 듯 셰인에게 물었다.
최근 셰인은 클라인의 물음에 금세 답해 왔다.
비록 단답형이긴 하지만, 예전처럼 불쾌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진 않았기에.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질문했다.
“형님은 이번에 무슨 학과에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클라인의 물음에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치 이미 생각해 둔 일이라는 듯한 즉답이었다.
“지휘학과다.”
“예……?”
“학과 시험은 같이 치르겠구나, 클라인.”
전생과는 또 다른 선택.
영문을 모르는 클라인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런 제 형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올해는 여러모로 지휘학과의 황금기이지.”
머리가 반쯤 허전한 아카데미의 총장, 하우젠 G 크로노스는 커다란 소파에 앉아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중년의 남성, 리바이 벤자민은 미소를 지르며 자신의 스승을 바라봤다.
“황금기 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아주 좋은 황금기에 이곳에 온 걸세.”
총장, 크로노스의 말처럼 현재 아카데미는 역대 최고의 황금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생들의 수준이 뛰어났다.
“제국을 지키는 저지먼트 기사단장의 딸부터 시작해 다양한 인재들이 우리 아카데미에 있다네. 그 중에서도 클레이튼 가문의 차남이 또 대단하지.”
“아, 그 이름은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교수들이 자신의 밑천을 모두 드러내게 하는 녀석이라 했지요.”
“맞네. 특히 검술과 마력의 컨트롤은 여느 교수들보다도 뛰어나다고 하더군.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이 아니라 백을 깨우친다고들 하니, 세기의 천재라고 교수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해.”
“그 생도가 지휘학과에 온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러니 자네도 밑천이 털리지 않도록 잔득 주의해야 할 거야!”
크로노스의 말에 벤자민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는 어디까지나 생도들의 마음가짐을 교육할 뿐입니다. 그 정도 생도라면 제가 딱히 건드릴 게 없을 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자네까지 그러면 어쩌나? 그래도 자네는 제국 기사단장 출신이지 않나.”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친 모지리일 뿐입니다.”
“쯧쯧…… 그때 내 말했잖나? 자네는 제국의 기사단 따위보다 모험가가 되는 게 천성일 거라고.”
“하하, 그때 그 충고를 들을 걸 그랬습니다.”
오랜만에 스승을 만났기 때문일까?
벤자민은 크로노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나저나 슬슬 생도들이 찾아올 시간이군.”
“그렇군요.”
“그래도 자네가 보는 눈 하나는 있지 않나. 특히 자네가 있던 칼바람 기사단은 재능이 상당한 이들로 모여 있다고 들었는데.”
“황궁에 발을 들이는 이들의 재능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이미 가공된 원석을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
“이 사람이 겸손은.”
“그래도, 이따금 발굴되지 않은 원석을 보는 것도 재미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게. 때로는 나중에서 발견되는 원석도 있을 따름이니.”
“예.”
그 말을 끝으로 벤자민은 스승에게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원석이라…….”
제국의 권력 다툼에 지쳐 은퇴한 벤자민에게는 자그마한 소망이 있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그 역겨운 권력 다툼의 중앙에 있을 어느 한 사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있다면, 그런 인재를 설득시켜 붙여 주고 싶다는 정도의 소망.
자신처럼 나약하게 도중에 떨어져 나가는 도망자가 아니라, 든든하게 그 사람을 곁에서 보좌해 줄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화
8화 학과 시험 (1)
“음냐.”
메이어 디라일라는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에 사 온 머핀을 한입에 처리하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네가 그런 것도 먹냐?”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디라일라는 인상을 팍 썼다.
“머미까. 사라 바 머느데.”
“쯧, 다 먹고 말해라. 품격 없이.”
목소리의 주인은 아르민 N 폴론.
제국 출신의 남작가 자제였다.
디라일라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선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건들거리는 태도도 태도지만, 무엇보다…….
“내 밑으로 들어오면 그런 건 배터지게 먹게 해 준다니까?”
평소에는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로 행동하면서, 또 실력은 실력대로 본답시고 자신을 영입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 왔기 때문이다.
꿀꺽.
“뭡니까. 사람 밥 먹는데. 관심 없다니까요.”
부유한 상인 가문의 자제인 폴론은 돈으로 사람을 사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는데, 이는 디라일라가 혐오해 마지않는 일이었다.
“비싸게 굴긴. 어차피 갈 곳도 없으면서.”
그리고 이렇게 거절하면 꼭 저따위 말을 내뱉는데, 마음 같아서는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귀족과 평민 간의 신분 차이도 있지만, 저 갈 곳이 없다는 말에 부정할 수 없는 게 디라일라의 처지였기 때문이다.
하프 이종족.
디라일라의 평생을 쫓아다니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당장 머핀을 씹던 이빨부터가 인간들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짐승의 그것처럼 뾰족하고 딱딱한 이빨.
지하에 사는 고대 이종족, 지하인의 피가 절반 섞여 있는 디라일라의 특징이었다.
이 특징 때문에 디라일라는 어디를 가든 눈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 제법 아카데미에서 성적 좀 내고 있지 않나…… ‘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이었지만, 사실 그녀의 자기평가는 상당히 과소평가되어 있었다.
적어도 실기와 필기를 합치면 아카데미 내에서도 그녀보다 윗줄에 있는 이들은 열 손가락을 넘지 못했으니까.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라. 내가 지휘학과에 들어가서 너를 받아 주면 그나마 부족한 수행 평가 점수도 받을 수 있을 거 아냐.”
니 새끼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세요.
“그러니까 괜히 헛짓거리 하지 말고 나한테 붙어. 솔직히 나처럼 너 같은 걸 편견 없이 봐 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어?”
지랄은 1절만 해도 충분한데 왜 이 새끼는 2절, 3절까지 가려는 걸까.
이마의 실핏줄이 터질 것 같은 감각에 디라일라가 마음속으로 평온을 되새기는 사이, 한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어, 저 사람인가?”
“누구?”
“저기 저 금발벽안의 미남. 소문의 클라인 아니야?”
“아? 진짜? 어떻게 알아?”
“어릴 때 연회에서 본 적이 있거든.”
“대박.”
디라일라와 폴론의 근처에 있던 신입생도들이 정문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클라인.
그 말도 안 되는 재능은 이미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외부에서도 그 압도적인 재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생도였다.
주변에서 그런 클라인을 동경과 선망어린 시선으로 보는 생도들이 디라일라의 눈에 제법 들어왔다.
참…… 자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딜 가든 저렇게 선망 어린 시선을 받겠지.
조금은 부럽다….
만약 자신에게도 저런 명성이 있었더라면 폴론 같은 멍청이가 달라붙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때, 폴론이 그런 신입생들에게 다가갔다.
“너희들, 클라인은 처음 봐?”
“어, 네.”
“처음이에요.”
“하하, 내가 저 녀석하고 좀 면식이 있어.”
그런 폴론의 말에, 디라일라는 폴론이 말을 건넨 신입생도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다들 한 미모 하는 얼굴들이다.
그나저나 너, 진짜 클라인 알긴 하냐?
면식이라는 게 대련 수업에서 개처발린 기억을 면식이라 하는 건 아니겠지?
“전투학과에서도 검술에 있어서는 이미 교수님들을 뛰어넘었다고.”
“와, 소문대로네요?”
“그치. 대단하지? 나도 몇 번이나 검술을 섞은 적이 있는데, 단 4합도 견디기 힘들었어. 교수님들도 쟤 상대로는 10합을 못 버티시지.”
그치. 3합 정도는 버텼지.
그것도 같은 귀족으로서 존경한다며 3합만 봐주면 안 되겠냐고 빌었잖아, 이 빌어먹을 놈아!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신입생도들은 더욱 눈을 빛내며 폴론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아카데미에 나올 이유가 없지 않아요?”
“듣기로는 이미 유명 모험단이나 왕실에서 눈여겨보고 있다고 하더라. 쟤랑 3합 이상 겨룰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법 이름 있는 모험단에서 연락이 온대. 나한테도 왔거든.”
“와! 선배도 정말 대단한 분이셨네요!”
“후후, 뭘 그런 걸로.”
그러던 중, 신입생도의 시선이 그런 클라인의 곁을 걷고 있는 셰인에게 향했다.
“근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군가요? 분위기가 되게…… 고풍스럽네요.”
“누구? 아. 머저리 셰인이잖아.”
“네? 셰인이요?”
세기의 천재라 알려진 클라인의 곁에 서 있는 셰인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사람이었고, 폴론은 또 한 번 아는 척을 하며 입을 나불거렸다.
“그래. 지 동생의 재능을 질투하는 머저리 셰인. 머리는 제법 똑똑한데, 마력 친화력이 부족해서 5년이 되도록 아직도 2서클에 불과하지. 그러면서 지 동생은 질투해서 이것저것 해 보려는데, 죄다 실패해.”
“아…… 그랬군요.”
“쟤는 무시하고 다녀. 어차피 성격도 더러워서 누구랑 붙어 다닐 인간도 아니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디라일라는 그런 폴론의 말에 잠시 과거를 회상해 봤다.
저놈. 클라인에게 진 뒤에 바로 셰인한테 대련을 신청했었지, 아마?
디라일라의 기억이 분명하다면 2서클 마법사와 10분 이상 대련을 했던 게 바로 폴론이었다.
‘그때 뭐라 했었지? 자기도 마법을 배운다고 마법만 쓰겠다고 했던가?’
폴론의 검술은 제법 뛰어났지만, 마법도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간신히 2서클 마법을 펼치는 정도일까?
당시에 셰인에게 한참 고전하다가, 결국 거리를 좁히고 격투술로 셰인을 제압했던 폴론이었다.
한편, 디라일라는 그런 셰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클라인이 유명인사인만큼, 그의 형인 셰인 또한 항상 화두에 오르내렸다.
당장도 클라인을 주제로 이야기하던 생도들이 옆에 서 있는 셰인에게 멸시의 시선을 보냈다.
디라일라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이야 뭘 하고 살든 말든 자기 일이나 잘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쟤도 참 인생 피곤하겠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셰인을 보던 중, 디라일라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 녀석, 원래 저런 분위기였나……?’
남들보다 감각이 뛰어난 디라일라는 마지막으로 셰인을 봤던 기억을 떠올려 봤다.
딱히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같은 수업을 들으며 옆에서 봐 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땐 뭐라 해야 하나.
좀 우중충하고 세상의 모든 걸 짜증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면…….
지금은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시선을 돌리려 할 때.
문득 디라일라는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잔뜩 위축된 표정으로 서 있는 폴론이 고개를 바닥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
비단 폴론뿐만이 아니라, 그런 폴론의 TMI를 듣고 있던 여생도들도 시선을 슬며시 돌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쭉 훑어보는 셰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우, 무슨 사람 눈빛이…….”
아까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무표정이었지만.
디라일라는 본능적으로 고개가 숙여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뭐라 해야 할까.
꼭, 맹수가 지그시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다만 침묵은 아주 잠깐뿐이었기에 교내는 다시금 떠들썩한 소리로 가득해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셰인은 쓴웃음을 머금은 클라인과 함께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쯧쯧…….”
셰인에게 별 관심이 없던 생도들은 각자 제 갈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면 셰인의 험담을 입에 담고 있던 이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무안하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중에는 폴론도 껴 있었다.
* * *
클라인은 지금의 상황이 불편했다.
아카데미에 오자마자 클라인과 셰인이 받은 상반되는 시선들.
최근 며칠 동안 셰인은 어쩐 일인지 자신에게도, 가문의 사람들에게도 살갑게 굴진 않을지언정 날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시선을 받다 보면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그렇게 불안한 눈빛으로 셰인을 바라볼 때.
셰인이 지그시 입을 열었다.
“클라인.”
“……예, 형님.”
“그런 표정 지을 거 없다. 아니, 짓지 마라.”
“예?”
“나는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때로는 네 그런 시선이 사람의 마음을 더욱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아 두거라. 나는 불쌍하지 않으니까.”
“……! 저, 저는 그럴 마음이…….”
설마하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제야 클라인은 그동안 형님이 자신에게 보였던 태도를 떠올렸다.
혹시, 내 이런 태도가 오히려 형님을 더 불편하게 만들어왔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셰인은 그런 클라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찰나에 지나가서, 집중한 채로 보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미소였다.
“난 이제 괜찮다.”
“……죄송합니다, 형님.”
“됐다. 저들의 시선 또한 결국 시샘에 불과하니. 너를 이길 수 없기에 너와 비교되는 사람을 찾는 거고, 그게 나일 뿐이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지. 나는 스스로의 비굴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남을 질투하는 머저리들에게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질투 그 자체였던 셰인이다.
고작 저따위 질투에 상처를 받는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웃기지 않겠는가.
“…….”
그러면서, 셰인은 방금까지 클라인에게 지어 줬던 미소하고는 전혀 다른, 조금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그런 셰인과 클라인의 대화를 들었음일까.
혹은 무저갱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셰인의 눈빛 때문일까.
생도들은 일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 뭐야. 듣던 거랑 완전히 다른데?’
‘사람 눈이 무슨…….’
‘서, 선배? 정말 머저리가 맞아요?’
‘어우…….’
그렇게 눈빛만으로 생도들의 시선을 돌리게 만든 셰인은 보란 듯이 클라인을 봤고, 클라인도 쓴웃음을 머금었다.
비록 그가 바라는 만큼 셰인에게 사교성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상처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클라인은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험장에 도착한 뒤.
시험장에는 그들 외에도 다수의 생도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셰인과 클라인의 또래였다.
모두 셰인과 클라인처럼 아카데미 5년차 생도들이다.
“다 온 것 같군. 환영한다. 나는 올해서부터 지휘학과의 수석교수가 된 리바이 벤자민이라 한다.”
그의 자기소개에 이곳에 모인 생도들은 벤자민의 얼굴을 본 적도 없으면서 그를 알아봤다.
제국의 기사단 중 하나인 칼바람 기사단의 단장!
비록 타국의 남작 출신이었지만,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제국의 기사단장이 된 전대미문의 인재였기에,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들어 봤을 인물이었다.
그 정도는 돼야 아카데미에 들어오자마자 수석 교수가 될 수 있는 걸까.
생도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그런 벤자민을 바라봤다.
한편, 셰인은 나름 속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벤자민은 전생에도 셰인이 봤던 인물이었다.
치열한 전장에서, 스스로의 불꽃을 마지막까지 불태며 떠나간 노장.
비록 10년 뒤의 일이었지만, 당시 그를 상대했던 셰인의 군단은 고작 단 한 사람으로 인해 5일이나 진군을 늦춰야만 했다.
잠시 그때를 회상하던 셰인은, 새삼 다른 감정으로 벤자민을 바라봤다.
그 전까지의 벤자민은 재능이 썩 뛰어난, 남들보다 영혼이 조금 더 강한 사람에 불과했으나.
당시 전장에서 보여 줬던 벤자민의 영혼은 셰인조차도 타락으로 물들일 수 없을 만큼 강건했다.
‘미래의 인재로군.’
이번 삶을 살아가면서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눈에 띄는 것은 나름대로 셰인에게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다.
한쪽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클라인의 곁에 서 있는 알렉스도 그중 한 명이었으니까.
전생에는 허무하게 사그라진 그 영웅의 영혼들을, 셰인은 결코 그리 보내지 않을 예정이었다.
셰인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벤자민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제부터 너희는 학과 시험을 봐야 한다. 만약, 학과 시험에 통과하게 되면 앞으로 나와 함께 1년 동안 지휘학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화
9화 학과 시험 (2)
벤자민은 생도들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펴봤다.
대부분은 눈을 빛내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셰인처럼 별다른 감정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지휘학은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생도들만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니 시험의 기준은 아주 엄격할 것이다.”
이어지는 벤자민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제부터 생도들은 골렘술사가 만든 전투인형들을 고르고, 환영 마법으로 이루어진 인공 던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인공 던전을 얼마나 이상적인 형태로 클리어 하느냐를 두고 채점을 할 것이며, 이 결과는 모든 생도들에게 개방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알고는 있었는데…….”
“역시 점수가 전부 까발려지는 건 좀 그렇군.”
지휘학과에 지원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귀족 출신의 생도들이다.
그러다 보니 자존심 또한 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는 꼭 필요한 절차였다.
비단 이번 시험뿐만은 아니다.
앞으로 지휘학과에서 모든 점수는 타학과 생도들에게 공개된다.
이유는 아카데미의 존재 이유하고도 제법 연관이 있었는데, 연합국에 존재하는 아카데미는 다른 일반적인 아카데미들과 다르게 사관학교에 가까웠다.
생도들의 주적은 다름 아닌 던전의 몬스터들.
이 세계는 아직 미지가 많은 세계다.
인간들이 차지하고 있는 구역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던전의 집합체, ‘요람’에 의해 봉인되어 있다.
인류는 점점 불어나고,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니.
그로 인해 긴 시간 동안 대륙이 전쟁의 화마로 뒤덮였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찾아온 평화의 시간. 인간들은 더 이상 무의미한 피를 흘리기보단 ‘요람’을 토벌하고 땅을 넓히기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렇게 여러 국가가 모여 만들어진 게 바로 연합국이었으며, 그런 연합국의 아카데미는 당연히 던전의 클리어가 주목적이 됐다.
그런 만큼 지휘관은 모든 전력을 통괄하는 자리로서 철저한 실력자만이 생도들을 영입해 직접 팀을 꾸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그러니, 지휘학과의 생도는 다른 생도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어필해야 하고, 뛰어난 팀원을 받아들이려면 스스로 실력이 뛰어남을 보여야 했다.
철저한 실력주의 학과.
그게 바로 지휘학과였다.
셰인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 또한 그런 실력주의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여태까지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알려진 자신의 이미지를 단번에 바꾸기엔, 이런 지휘학과의 시스템이 더없이 잘 어울렸으니까.
“던전의 종류는 하나다. 여기에 던전에 대한 설명서가 있으니, 가져가도록.”
벤자민의 말에 5년차 생도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벤자민의 앞에 놓인 설명서를 가지고 갔다.
“형님 것도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래라.”
굳이 거절할 것도 아닌 일이라, 셰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클라인이 가져온 설명서를 읽었다.
전생의 셰인은 지휘학과에 지원하지도 않았고, 따로 그 시험에 대해 알아볼 정도로 주변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닌지라 시험에 관해서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흐음.”
“설명도 나름 친절하군요.”
“그렇구나.”
설명서의 내용은 심플했다.
생도별로 포인트가 총 1천 포인트까지 지급되며, 그 포인트를 이용해 여러 타입의 골렘을 차출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던전의 종류는 땅에 굴을 파고 사는 커스 고블린 던전이었다.
그저 고블린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던전은 여타 다른 평범한 던전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포인트로 골렘을 대여하고 싸운다라.”
“전투에서는 오로지 골렘만 써야 하는 것 같습니다. 본인의 힘으로 몬스터를 제압하면 탈락이라 하는군요.”
“그렇구나. 너는 어떤 골렘을 가지고 갈 생각이냐.”
“고블린들이 다니는 땅굴이니, 날렵한 타입을 위주로 할 생각입니다.”
괜찮은 선택이었다.
고블린이 사는 지형은 주로 천장이 낮고, 통로도 비좁은 게 일방적이었으니.
“형님은 어떤 타입을 고르실 생각입니까?”
“음.”
설명서를 보던 도중 떠오른 방법이 있긴 했다.
그렇게 무심코 입을 열려던 그때.
문득, 오늘 클라인이 보였던 태도를 떠올렸다.
생도들의 시선에 걱정부터 하는 클라인의 모습.
어쩌면 자신의 딱딱한 이미지가 클라인에겐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럴 땐, 조금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 줘도 되겠지.’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이런 말을 하면,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비밀이다.”
“예?”
“비밀.”
그러면서, 셰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퍽 장난기 있는 모습에, 클라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바, 방금 그거.
장난이라고 치신 건가?
어떻게 받아야 하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셰인에게 이런 장난을 받아 본 적 없던 클라인은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셰인은 그 모습이 웃겨 더더욱 미소를 지었다.
* * *
인공 던전에 들어가면 본인의 무력은 쓸 수 없기에, 생도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골렘을 선택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벤자민은 앞서 다른 교수들에게 인적 사항을 체크한 생도들의 얼굴을 찾아다녔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클레이튼 L 클라인.
역대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알려진 천재 중의 천재.
그 외에도 다양한 생도들이 찾을 수 있었다.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총장이 말했던 그 사람의 딸인가.’
같은 제국의 기사단 출신으로서, 모를 수가 없는 린트베르크라는 이름.
실제로 제국 내에서도 린트베르크라는 이름은 모르는 이들은 없을 정도로 드높았다.
그런 사람의 딸이라고 하니 자연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앞서 교수들에게 인적 사항을 들은 생도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에 우중충한 얼굴을 한 베른슈타인 후작가 가문의 차남, 베른슈타인 오스튼.
신체적 능력은 절망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으나, 머리는 쓰는 데 있어서는 도가 튼 소년이었다.
앞서 교수들도 놀라게 만든 논문을 만들었다고 했던가.
제국의 남서쪽을 지키는 볼드윈 가문의 장남과 현 마탑주의 손녀도 이어서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중 가장 기억에 남을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저건…… 뭐 하는 짓이지?”
검은 머리를 뒤로 묶어 늘어뜨린 로즈베리색 눈동자를 지닌 소년.
클레이튼 R 셰인.
어느새 생도들이 각자의 골렘들을 고르고 자리로 돌아갔을 무렵.
가장 뒤늦게 고른 셰인은, 비단 벤자민 뿐만이 아니라 여타 다른 생도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었다.
* * *
베른슈타인 오스튼은 멍하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주변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평소 생각이 많아 멍한 표정을 짓는 일이 많은 그였다.
“하하, 저거 진짜냐?”
“완전 미친놈이네.”
“또 어떻게든 자기 동생보다 시선 좀 끌어 보겠다고 저러는 것 좀 봐라.”
“저러니 머저리 소리를 듣지.”
앞서 골렘의 선택을 끝마친 생도들은 전방을 주시하며 누군가를 한참 비웃고 있었다.
오스튼도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으로 시선을 돌린 곳엔 클레이튼 R 셰인이 있었다.
그 유명한 클라인의 형이었다.
“조금…… 특이하네.”
평균적으로 생도들이 고른 골렘의 수는 적에는 10기, 많게는 20기 사이를 맴돌았다.
당장 방금까지만 해도 가장 적은 수의 골렘을 소유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오스튼,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총 11기의 골렘을 선택했다.
그러나 당장 셰인이 고른 골렘의 수는 고작 3기뿐.
그러니 응당 생도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땅굴이라고 인원을 최소화하려고 한 건가?”
“그래 놓고 덩치 큰 엘리트 대검 전사는 왜 뽑은 거지?”
“진짜 멍청하네.”
들려오는 소리에 오스튼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향했다.
분명 이름이…….
‘폴론이었나.’
제국 출신의 남작가 자제.
오스튼이 폴론에게 시선이 끌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오스튼 또한 엘리트 대검 전사를 선택했기에, 자연스레 잠시 시선이 끌렸을 뿐.
그러자 폴론은 그런 오스튼의 시선이 못마땅했는지 표정을 잔뜩 구겼다.
“뭘 봐?”
“아, 아무것도.”
“쯧.”
그렇게 혀를 한 번 차고는 다시금 자신의 동료들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시금 시선을 셰인에게 향한 오스튼은 잠시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마력을 쓸 수 없는 마력불능자인 오스튼이었지만, 그는 머리를 쓰는 것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당장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수천 가지의 던전들이 들어 있었고, 그 던전의 클리어 방법과 자신이 직접 고안해 낸 공략법 또한 존재했다.
자신이라면 저 정도 병력만으로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을까?
클리어 자체는 가능할지 몰라도, 제한시간 안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마력을 쓰지 못한다는 자신의 조건 내에서 일어나는 일.
만약 마력을 쓸 수 있다면?
오스튼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본래 있던 자신의 계획을 구성하고, 그 위에 가정을 더한다. 그리고 그 끝에 이어지는 정답은?
‘……과연, 머저리가 되는 건 누구일까.’
오스튼은 머릿속으로 정해 뒀던 자신만의 경계대상에, 셰인이라는 두 글자 이름을 추가했다.
위험도는, 가장 위에 적혀 있었다.
* * *
던전 내부로 발을 들이자마자 셰인이 내린 평가는.
“꽤 잘 구현해 놨군.”
정도였다.
축축한 바닥의 감촉, 땅굴 내부에 진동하는 지독한 냄새, 어두운 땅굴에서도 시야를 밝혀 주는 발광이끼까지.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고서야 결코 구현할 수 없을 법한 환경에 셰인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땅 밑으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저 깊은 지하에 드래곤이 울기라도 하듯.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기에 셰인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상황을 응시했다.
우르르르르르-
아니나 다를까.
땅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점차 심해짐에 따라 땅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셰인은 뒤에 서 있는 골렘들에게 명령했다.
“내가 손을 올리면 호흡을 참도록.”
“…….”
“…….”
딱히 목소리로 화답하진 않았으나, 골렘들의 심장 위치에 심어진 푸른 마력석이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명령을 수행 중이라는 의미다.
이윽고 땅의 진동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지금.”
벽면의 구명에서부터 녹색 연기가 터져 나왔다.
셰인도 함께 숨을 참고 눈을 가늘게 떴다.
동시에 발광이끼에서 보다 밝은 녹색 빛이 흘러나오며 점차 연기가 사그라졌다.
땅굴 전체를 감싸고 있던 지독한 냄새의 원인.
바로 땅속에 매립되어 있는 대량의 독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발광이끼들은 바로 이러한 독기를 주 영양분으로 살아갔고, 사람들은 흔히들 이곳을 세이브 존이라고 불렀다.
“이제부터 시작이로군.”
하루에 4번씩. 일정한 주기에 따라 터지는 이 독기는 커스 고블린들의 천연 요새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 이제 막 독기가 사라진 지금이 앞으로 나아갈 타이밍이었다.
더구나 이곳이 언제까지고 안전하다 볼 수는 없었다.
삼 일에 한 번씩 발광이끼가 포자를 터뜨리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때는 독기를 흡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당연하게도 전멸.
시험은 탈락이다.
“지금쯤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겠어.”
고작 삼 일 안에 클리어 해야 하는 던전.
이런 던전을 주로 스피드런이라 불렀고, 시험에도 안성맞춤인 형태였다.
다급함만큼 사람의 본질을 알아보기 쉬울 때가 없을 테니 말이다.
‘작년까지의 시험은 이 정도 난이도가 아니었을 텐데.’
이번 시험을 기획한 인물은 아주 지독한 인물일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셰인은 한가롭게 주변을 훑어보다 골렘들에게 딱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주변을 경계하도록.”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녹색 빛을 띄우는 발광이끼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셰인은 발광이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0화
10화 학과 시험 (3)
“아오, 답답해.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조교수 알프렌은 자신의 앞에 떠 있는 마법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화면에는 다양한 각도로 인공 던전에 들어가 있는 생도를 촬영 중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클레이튼 R 셰인.
소문의 클라인의 형이었다.
어느덧 조교수의 일을 시작한지도 5년 차.
다양한 생도들을 지켜본 조교수였지만, 단언컨대 저런 생도는 처음 봤다.
“벌써 3시간째 저러고 있네. 무슨 정신병이라도 있나?”
본래라면 지금 이 시기는 굉장히 바쁠 시기다.
교수들과 조교수들은 60명 가량의 생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기록하며 점수를 매기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면 속 셰인은 벌써 3시간이나 같은 자리에서 멀거니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걸 지켜보는 알프렌도 답답하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장 기록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셰인이 무얼 하든 그 자리에서 꼭 보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아…… 쟤들은 바쁘네.”
알프렌은 힐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바라봤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표정과 다르게, 동료 조교수는 진득한 자세로 자신과 비슷한 마법 화면을 바라보며 상황을 기록하는 중이었다.
동료 조교수가 담당한 생도는 베른슈타인 오스튼.
아카데미 내에서 머리로는 당할 자가 없다 할 정도로 뛰어난 생도였으나,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마력불능자라는 치명적인 단점 또한 함께 있는 생도였다.
선천적으로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체.
그 때문에 소문으로는 가문에서도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자식이라 한다.
그의 아카데미 행은, 사실상 가문에서 배푼 마지막 자비였던 셈.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똑똑하다면 가문에서도 쓸 만하지 않겠냐고.
그러나 귀족 사회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으니.
대부분의 귀족 가문은 자식 중 한 명이 가문의 대를 이으면, 남은 형제자매들은 모두 가문을 떠나 야인의 삶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언제 자신의 등에 비수를 꽂아 자리를 차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리가 비상한 자를 옆에 둔다?
하물며 남작가, 자작가도 아닌 국왕의 사촌쯤 되는 핏줄을 이은 후작가가?
언어도단.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오스튼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소문난 공부벌레였다.
하루라도 도서관에 들르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으니, 하루의 시작을 도서관에서 시작하고 폐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가 몇 권의 책을 매일같이 대여해 간다.
그러니 항상 눈가에 다크서클이 사라질 날이 없는 것이다.
그런 오스튼의 성실함은 조교수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였다.
“이런 게 부러울 때가 다 있네…….”
뭐라도 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한 탓에, 알프렌은 괜히 입맛을 다졌다.
또 다른 생도를 관찰하는 동료 조교수도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의 주변에는 제법 뛰어난 생도들을 관찰 중인 조교수들이 있었기에.
이 지루한 시간을 조금씩 한눈을 팔며 다른 생도들의 활동을 지켜보던 알프렌은 새롭게 눈에 들어온 인물을 흘겨봤다.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라…….”
제국에서 여러 의미로 이름 높은 저지먼트 기사단장의 자녀.
지금은 세상을 떠난 린트베르크 K 로버트의 딸인 아네이스 또한 아카데미의 유명인사 중 한 명이었다.
만약 클라인이 없었다면 아카데미 최고 우등생은 분명 아네이스였을 것이다.
그녀는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도 순위 밖으로 이름이 내려간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언제나 클라인의 뒤에 이름을 올렸고, 필기 성적에 있어서는 대부분 오스튼에게 밀릴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성적은 뛰어났다.
당장만 보더라도 아네이스는 뛰어난 전술로 커스 고블린을 돌파하며 최선두로 나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그 클라인과 오스튼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만큼 동료 조교수는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입하고 있었다.
“저건 별로 안 부럽네…….”
앞으로 던전의 클리어가 나오려면 적어도 이틀은 더 두고 봐야 하는 상황.
그런 마당에 계속 저런 페이스가 유지된다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상황이 좋은 건 아니지.”
알프렌은 여전히 화면 속에서 땅만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셰인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난 후의 일이었다.
* * *
“지, 지금쯤 최선두는 아, 아네이스가 달리고 있으려나…….”
11기의 골렘들이 질서정연하게 커스 고블린을 정리 한 직후, 오스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스튼은 이번 지휘학과 시험에서 수석을 노리고 있었기에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급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거기까지는 그의 계산 내에 들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네이스는 평소에 말수도 적고 고분고분한 편이지만,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때문에 남들은 커스 고블린이 파둔 함정을 경계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시간에, 저돌적인 돌진으로 그러한 함정을 무력화시키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저 무식하기 때문에?
그럴 리가.
아네이스는 클라인과 오스튼 때문에 평가절하된 부분이 있을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봤을 땐 어지간한 중견 모험단의 단장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마력 컨트롤 또한 어마어마하고, 직감도 날카로운 탓에 어지간한 함정이 아니고서야 아네이스가 그런 함정에 시간을 잡아먹힐 일은 없다.
그 외에도 오스튼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생도들의 평소 실력을 토대로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그런 오스튼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면, 소름이 돋다 못해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시뮬레이션의 결과는, 당장 조교수들이 모여 있는 상황실의 내용과 크게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생도들의 패턴, 성향, 그들이 고른 골렘의 종류와 숫자.
그 모든 것이 오스튼에게는 굳이 볼 거 없는 미래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예측하기 힘든 인물이 있다면, 다름 아닌 셰인의 존재였다.
“그, 그 사람은…… 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느 정도 예측은 되었다.
그러나 당장 그가 어떤 성과를 보였을지는 그런 오스튼조차 쉽사리 장담할 수 없었다.
“마,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그게 맞다면.”
그리고 그게 지금쯤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면.
셰인의 클리어 속도는, 이후 자신조차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를지도 모른다.
오스튼은 그렇게 판단했고, 놀랍게도 그런 그의 예측은 몇 시간 후에 저절로 증명되었다.
* * *
몇 시간 뒤.
한편, 모두가 오스튼처럼 태평하거나 아네이스처럼 빠르게 던전을 주파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생도들은 처음 겪어 보는 던전에 당황하거나, 자신들이 책이나 남들의 입담으로 전해 들은 것으로 배운 것과는 다르게 현장에서 부딪치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난감함을 표할 때가 많았다.
“이런 씨발…….”
대표적으로 폴론이 그러했다.
처음에 기세등등하게 커스 고블린을 처리할 때까지는 좋았다.
난폭하긴 하지만 그래 봐야 고블린이었고, 골렘들의 실력도 생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폴론은 골렘의 성능과 뛰어난 자신의 지휘 실력이라면 못해도 이틀 안에는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었다.
폴론은 골렘이라는 생각에 체력 배분을 생각지 못했고, 골렘술사가 설정해 둔 ‘체력’이 한계치에 다다를수록 실수가 늘어나며 부상당하는 골렘들도 늘어났다.
그 차이를 인지하는 게 너무 늦었고,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던전의 깊숙한 곳에 들어온 이후였다.
그때부터는 휴식을 취하고 싶어도 제대로 취할 수가 없었다.
땅굴 내에 온통 피 냄새가 진동을 하자 커스 고블린들이 벌떼처럼 몰려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흔적을 지우는 등의 역할을 하는 아처 골렘들은 커스 고블린이 흥분한 타이밍을 모르고 따로 정찰에 보냈다가 정리당한 상황.
벌써 커스 고블린이 주변을 모두 포위한 모양인지, 후방으로 보낸 골렘들조차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남은 전력은 15기.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무렵 21기의 골렘을 가지고 왔던 걸 생각하면 벌써 6기나 잃어버렸다.
그것도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말이다.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고 멀쩡한 골렘은 고작 8기뿐이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사실, 폴론 정도의 실력이면 분명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아직까지 던전에 직접 들어간 적도 없고, 지휘를 해 본 적도 없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인재에 속한다.
그저 잃기만 한 게 아니라, 폴론 또한 나름 생도들 중에서 빠르게 던전을 주파한 쪽에 속하니 말이다.
그러나 폴론이 이렇게 초조해하고 있는 이유는 작년의 시험과 다르게 이번 시험의 난이도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쯧……. 지금쯤이면 다른 놈들도 고생하고 있겠지.”
폴론이 짜증을 내면서도 머릿속으로 이후의 일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허공에 알림이 울렸다.
[띠링- 안내드립니다.]
“깜짝이야! 뭐, 뭐야?”
마치 머리에 직접 울리는 듯한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에 폴론이 몸을 크게 움찔거리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잠깐. 분명 아까 설명서에 안내음이 들리긴 한다고 했는데…….”
폴론이 알기로, 이러한 안내음은 벌써 들려올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무슨 시험에 사고라도 일어난 건가?
그런 생각이 찰나에 지나갔으나.
[현재 시각 오후 오후 11시 55분.]
[첫 번째 던전 클리어가 이루어졌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상입니다.]
“미친?!”
이어지는 안내음은 이변 따위는 없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그러한 사실을 알렸고.
그와 동시에 아직까지 탈락하지 않은 50여명의 생도들은 일제히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유일하게 표정에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았던 사람이라고는.
“하아, 역시.”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예지에 가까운 예측을 했던 베른슈타인 오스튼과.
“……빠르네.”
여전히 지휘에 집중하며 작은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린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그리고.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해당 안내음을 듣고 있던 셰인뿐.
평균적으로 던전 진행률이 3분의 1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1화
11화 학과 시험 (4)
인공 던전을 지켜보고 있던 상황실에 비상이 걸렸다.
“미친! 지금 몇 시야?”
“시험 시작하고 15시간 47분!”
“고작 16시간 만에 던전 하나를 클리어 했다고? 진짜?”
“빨리 교수님들께 알려!”
알프렌은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겨 교수 휴게실로 향했다.
평소라면 던전 클리어가 진행되더라도 교수를 깨우러 가는 일은 없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교, 교수님!”
“음. 알프렌. 무슨 일인가?”
한때 기사단장이었던만큼, 다급한 알프렌의 발걸음 소리에 이미 잠에서 깨 있던 벤자민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행시간 15시간 47분. 던전을 클리어 한 생도가 나왔습니다.”
“……15시간 47분이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표정에 변화가 없던 벤자민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최단 기록이로군.”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복장을 갖췄다.
“알프렌. 역대 지휘학과 시험에서 가장 짧은 클리어 타임이 몇 시간이었지?”
“이, 26시간 21분이었습니다.”
“거의 10시간을 단축시켰구먼.”
물론 역대 시험 모두 던전의 타입과 몬스터의 동료가 제각각이었으나, 기본적으로 던전은 짧으면 이틀, 길게 잡으면 일주일 정도는 소요된다고 봐야 한다.
그런 마당에 고작 16시간?
벤자민은 수많은 던전을 경험했고 또 들어왔다.
던전에 들어가는 이들의 실력에 따라 클리어 속도가 천차만별일 테지만, 그 벤자민조차도 셰인과 똑같은 조건으로 던전에 들어간다면 그 안에 끝낼 자신은 없었다.
“기록일지는 가지고 왔나?”
“예, 예. 여기 있습니다.”
맨 처음, 셰인이 던전에 들어갔을 때 있던 일에 대한 설명이 주르륵 나열됐다.
이는 여태껏 셰인의 행동을 하나하나 상세히 기록하던 알프렌이 고생한 흔적이었다.
“그러니까, 함정으로 가득한 땅굴에 또 함정을 파서 커스 고블린을 처리했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셰인이 데리고 간 세 개체의 골렘.
다만 셰인이 고른 골렘은 하나하나 모두 값비싼 골렘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움직이는 암살자, 다른 하나는 흙마법에 능통한 마법사, 마지막 하나는 거대한 대검을 든 엘리트 전사였다.
암살자와 엘리트 대검 전사의 경우에는 각각 150포인트가 들어갔고, 마법사는 200포인트나 날아갔다.
그렇게 남들은 10~20개체의 골렘을 데리고 갈 때, 셰인은 500포인트를 남겨 두고 단 세 개체의 골렘만 들고 간 것이다.
이를 보고 여타 다른 생도들은 비싼 골렘만 가지고 가면 던전이 클리어되는 줄 아느냐며 비웃었지만, 실은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
흙마법사와 암살자를 이용해 커스 고블린들이 설치한 함정을 교묘하게 바꾸어 도리어 커스 고블린이 함정에 걸리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평소처럼 안전한 줄 알고 지나가던 커스 고블린이 함정에 빠져 즉사했고, 셰인은 그 뒤로 한 마리는 중상만 입힌 채, 다른 함정으로 고블린들을 유인해 왔다.
“운영에 있어서 능력이 말도 안 될 정도로군…….”
셰인의 깔끔한 행동에 벤자민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이게 정말 던전에 처음 들어간 생도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적을 깔끔하게 죽이기보다, 활용성을 먼저 찾는다.
잔인함은 악독한 취향이지만, 셰인의 행동은 냉철한 잔혹함이었다.
“저 땅굴은 하루에 4번씩 일정한 주기에 따라 독기가 땅굴을 가득 메우지. 녀석은 그 시간도 정확히 계산했군.”
“마, 맞습니다. 거기다 놀랍게도…….”
“그래. 고블린이 주로 쓰는 마취제를 분연구에 쑤셔 넣었어.”
그 결과, 분연구에서 독기가 터져 나오자, 그와 함께 마취제도 동굴을 가득 메웠다.
그러는 사이 셰인은 고블린들의 마취제와 함께 있던 해독제를 천에 적셔 마스크처럼 쓰고 다니며 던전을 활보했다.
“그런데 벤자민 교수님. 저건 괜찮은 겁니까?”
조교의 말에 벤자민은 피식 웃었다.
조교가 말한 것은, 셰인과 골렘들 전체에 씌워져 있는 발광이끼였다.
“지휘관이 직접 만들긴 했지만, 전투에 사용된 게 아니지 않나. 녀석은 규정대로 고블린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취제가 퍼짐과 동시에 셰인은 멀뚱히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리 마취제를 분연구에 쏟아 넣었다 하더라도 커스 고블린은 기본적으로 신체에 마취제의 항체가 만들어진 몸이다.
일정 기간 몸이 굳긴 할 테지만, 그게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셰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닥과 벽에 난 발광이끼를 몸에 두르고 독기가 아직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 움직인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 보기엔 도박에 가까웠다.
“발광이끼는 땅 밑으로 자기들끼리 연결된 줄기가 있지. 발광이끼가 독기를 빨아들여 생명력이 강할 거라 착각들 하는데, 아니잖나.”
“예. 조금만 줄기를 상하게 만들어도 줄기와 연결된 발광이끼들이 단체로 죽어 버리죠. 미세한 마력으로 연결된 녀석들이라, 마력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혹은 그와 관련된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낭패였을 겁니다.”
“그렇지. 녀석은 그걸 알고도 발광이끼를 자신의 몸에 두른 것이고.”
“그럼 처음에 몇 시간 동안 땅을 보고만 있던 것도…….”
“그래. 발광이끼의 줄기들끼리 연결된 마력 패턴을 확인하고 있던 것이지.”
“저는, 그게 가능하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누군가는 생각해 봤을 법한 일이지. 그걸 직접 행동으로 옮길지는 본인의 판단 여부겠지만. 녀석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던 거고, 그걸 실현시킨 것뿐인 것이지.”
제국의 기사단장직에 있던 벤자민은 수많은 인재들을 봐 왔고, 그들이 만들어 낸 놀라운 일들을 여럿 봐 왔기에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천재가 있는 법일세.”
그렇게, 셰인은 스스로 만든 마취제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고블린을 손쉽게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주술사 고블린을 마주하는 것까지 확인한 벤자민은 밖으로 나가 셰인을 맞이할 준비를 갖췄다.
* * *
“대단하더군. 채 하루도 지나지 않고서 던전을 클리어 할 줄이야.”
“감사합니다.”
셰인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벤자민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그거 아나? 스피드런의 최고 기록은 26시간이었네.”
“제가 10시간을 단축시켰군요.”
“또 커스 고블린 던전의 클리어 방법에 대해 획기적인 발견을 하기도 했지.”
“그렇습니까.”
“26시간이라는 그 최고 기록을 누가 세웠는지 아나?”
당연히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기억할 셰인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대충 누구일지는 감이 잡혔다.
“이런 부분에서는 또 정보가 부족하군. 부끄럽지만 나일세.”
“역시 그러셨군요.”
“별로 놀라진 않는군?”
“벤자민 수석교수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안목과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지휘력. 이미 제국뿐 아니라 연합국에서도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벤자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군. 엘리트 대검 전사는, 마지막에 그 전투를 예상하고 데려갔던 건가?”
벤자민의 물음에 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전투.
던전의 끝에 도달했을 때 셰인이 마주한 것은 슬슬 마비 효과에서 거의 다 벗어난 주술사였다.
그러나 주술사 옆에 있던 다른 커스 고블린들은 아직 덜 깬 탓에 녀석을 제압하기까지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압’이라는 결과였다.
셰인은 거기서 당장 커스 고블린 주술사를 죽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잠시 두 눈을 감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렇게 주변을 주시하던 셰인은, 엘리트 대검 전사에게 명령해 한쪽 벽을 부수라 명했다.
잠시 후, 흙먼지가 일어나며 무너진 벽 너머로는 보랏빛 마력석이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보통 푸른빛을 머금은 여타 다른 마력석과는 다른 형태의 돌.
“책에서만 봤습니다만, 꽤 잘 구현해 놨더군요.”
그것은, 몬스터들에게 더 없기 귀중한 마력의 근원이라는 돌이었다.
몬스터가 섭취 시, 한 단계 더 높은 상위종이 될 수 있는 방법.
셰인은 그 돌을 고블린 주술사의 입에 억지로 집어넣고, 경과를 지켜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블린 주술사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며, 매스 홉 고블린 주술사라는 상위 개체가 되었을 때.
셰인은 놈이 눈을 뜨기도 전에 엘리트 대검 전사를 시켜 놈의 목을 따 버렸다.
보통이라면 매스 홉 고블린의 시체가 남았을 자리에 금빛 코인 하나가 남겨졌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그때 주운 코인을 품에서 꺼내 들어 묻자, 벤자민이 웃으며 말했다.
“입장권일세.”
“입장권 말입니까?”
“아카데미 내에 저장되어 있는 아티팩트들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 있나?”
“그런 게 있다는 소문은 들어 봤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 소문으로만 알려진 이야기였다.
셰인 또한 그와 관련된 내용으로 자세히 아는 것은 없었다.
“‘저장고’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라 생각하면 된다네.”
“…….”
“그리고 그곳에서 자네가 원하는 물품 한 가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지. 물론, 대가도 있다네.”
“대가 말입니까?”
“만약 자네가 계속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다면, 언젠가 한 번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해 줘야 할 걸세.”
“……알겠습니다.”
애초에 아카데미 강의가 대가인지도 잘 모르겠다.
연합국 아카데미에서 일일 강의를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의 이름값을 높이는 행위이기에, 손해 볼 게 없다 생각한 셰인은 품에 금색 코인을 잘 넣어 뒀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별거 없네. 배정된 숙소에서 쉬도록. 물론, 일주일 뒤에 있을 필기시험도 준비해야겠지만.”
이어지는 대답에 셰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겼고, 벤자민은 그런 셰인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마법학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셰인은 머리를 쓰는 데 재능이 있었다고 하니 필기시험도 어렵지 않게 합격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벤자민은 셰인의 무미건조한 눈빛을 떠올렸다.
언뜻 세상사 전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던 눈빛.
아무런 감정도 보여 주지 않던 그 눈을, 벤자민은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전장에서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던 눈.
심지어 셰인의 눈은 그보다 더 속을 알 수 없을 정도고 깊어서, 계속 보고 있자면 자신마저 감정이 지워질 것 같은 그런 위험한 눈빛이었다.
고작 저 나이에 어쩌다 저런 눈을 가지게 됐는지.
“특이하군.”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감에 불과했기에.
벤자민은 등을 돌려 자신의 남은 업무에 충실하기로 했다.
* * *
나른한 오후였다.
클라인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방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셰인은 줄곧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 있었다.
지난 삶, 언제나 타락에 의해 신체의 주도권을 빼앗긴 이후, 언제나 가슴속에 응어리진 감정과 타락의 힘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회귀를 한 후로 타락의 힘이 느껴지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종의 트라우마라 해야 할까.
이렇게 시간이 날 때면 언제나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며 증세가 없는지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던 도중, 셰인은 자신의 심상세계 내부에 무언가 검은 응어리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건……?’
보다 가까이 다가가 응어리의 정체를 확인하던 도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런 셰인의 집중을 깨뜨렸다.
“형님. 안에 계십니까?”
“……그래. 잘 끝냈느냐.”
“예. 무사히 끝냈습니다.”
전생에도 나름 지휘에 일가견이 있던 클라인이었기에.
셰인은 거기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후 셰인은 밖에서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냐는 클라인의 용기 어린(?) 제안을 받아들이고 함께 복도를 걷던 도중.
“거기 신사분들.”
“…….”
“예? 저희 말입니까?”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한 소녀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네. 두 분이서 걸으시니 마치 유명 화가의 화폭 같군요.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불러 세웠답니다.”
유명 화가의 화폭이라.
셰인은 저 말이 자신들보다, 눈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기서 만나는군.’
클라인보다도 반짝이는, 마치 가을의 보리밭을 연상케 하는 백금발 머리카락. 그런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청량한 숲과 같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소녀의 아름다움을 더더욱 부각시켰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작은 얼굴에 모두 담겨 있으니, 그 아담함에 남자라면 절로 보호 본능이 자극될 것 같은 외모였다.
그러나 소녀의 목소리에서는 알 수 없는 권력자의 기운이 담겨 있었으니.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셰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외관과는 다르게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강철의 벽으로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지휘학과 실기 시험장으로 가고 싶어서요.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곳이라면 2관 건물 뒤로 가시면 됩니다.”
“어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소녀가 자리를 떠나고, 셰인은 그녀의 자취가 사라질 때까지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확실히…… 정말 아름다운 분이셨지요?”
“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셰인이 가볍게 수긍했다.
“……?”
그러다 뒤늦게 클라인의 표정을 확인한 셰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모르게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클라인이었다.
분명 무슨 쓸데없는 오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셰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알까.
방금 지나간 그 여자가, 제국의 두 송이 꽃 중 첫 번째인 제1황녀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라는 사실을.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2화
12화 학과 시험 (5)
벤자민은 제법 흐뭇한 기분이 들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음을 깨달았다.
어느덧 시험이 치러지고 3일이 지난 시점.
방금 막 마지막 생도가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다.
그사이 던전을 클리어 하지 못한 생도도 많았지만, 클리어한 생도 또한 그 수가 결코 적지는 않았다.
그뿐이던가.
무엇보다 벤자민을 흐뭇하게 만들면서도 세월의 야속함을 느끼게 만드는 이유는, 상단에 있는 3명의 생도들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클레이튼 R 셰인.
당장 아카데미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경이로운 속도를 보이며 던전을 클리어한 생도였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울진대, 올해 20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벤자민의 던전 클리어 기록을 깨뜨린 생도가 둘이나 더 나왔다.
먼저 베른슈타인 오스튼.
마력불능자라는 이유로 가문에서 배척받던 생도는, 셰인보다 4시간 늦게 던전을 클리어했다.
놀랍게도 그의 던전 클리어 방식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셰인과 닮은 점이 많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발광이끼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뿐일까.
오스튼 또한 고블린을 죽여 얻은 마취제를 분연구에 넣어 고블린들을 단체로 마취시키고 수월하게 토벌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셰인과는 다르게 발광이끼를 통해 시간 단축을 하지 못해 셰인보다 4시간이 더 걸렸다.
심지어 지휘를 하는 것만 보았을 때, 그 누구보다 노련하고 예측에 가까운 지휘 실력을 선보이며 던전을 클리어했다.
남은 한 명은 그런 오스튼보다 3시간 늦게 클리어했다.
과거 벤자민보다 몇 시간 차이 나지 않았지만, 그런 벤자민보다도 빠른 속도로 던전을 클리어한 것이다.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그녀는 셰인이나 오스튼처럼 던전의 지형지물을 활용하지는 않았으나.
탁월한 지휘력으로 던전을 돌파했다.
특히 무엇보다 탁월했던 것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골렘의 수준을 빠르게 분석하고, 그를 토대로 지휘함에 있어 한 치의 오차가 없도록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단순히 지휘에 있어서 카리스마는 모든 생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셰인은 싸울 일 자체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오스튼은 어마어마한 예측으로 미리 작전을 구상해 뒀다면.
아네이스의 경우에는 실시간으로 전장을 파악하고 그때그때 맞춰 명령을 내리는 타입이었다.
전체적으로 전장을 보는 눈은 과거 20년 전의 벤자민보다 우월하다는 증거였다.
“스승님의 말씀이 맞았군.”
이 정도의 인재풀이면 지금의 지휘학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황금기가 맞았다.
당장 지휘학과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과에서도 역대급으로 뛰어난 생도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세월의 흐름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런 시기에 그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어찌 보면 교수로서 최고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륙의 평화를 가지고 올 인재들이지.”
“어머, 그런 인재라면 저도 귀가 솔깃해지네요, 벤자민 기사단장님.”
“……언제 오신 겁니까.”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백금발의 소녀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린 벤자민이 낮은 한숨과 함께 그리 물었다.
딱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굳이 지금의 감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기품 있는 발걸음은 그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에이, 그래도 기왕 온 건데. 그런 질문보다는 차부터 내주지 않겠어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얼굴은, 어느 누가 보더라도 얼굴을 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제 막 청순하게 핀 꽃처럼 사람의 마음을 어딘지 모르게 치유하는 미소였으나.
벤자민의 마음은 메마른 고원처럼 딱딱하기만 했다.
“황녀님께서 직접 아카데미에 행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칫, 정말 쌀쌀맞으신 건 황궁에서나 여기서나 마찬가지네요. 자유의 몸이 되셨다길래 조금은 사람이 유해졌나 했는데.”
당연하지만, 황녀에게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도 벤자민쯤 되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도 지금 둘의 상황에서 벤자민은 황녀에게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당신의 머릿속에는 제 동생만 가득한가 보죠?”
“황실 기사단으로서 저는 두 분 모두에게 아무런 정치적 도움을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동생에게 인재라도 보내 주려고 아카데미에 오신 거 아니에요? 절 너무 얕보고 계시네요.”
“…….”
제국의 두 송이 꽃.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는, 청순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 대화의 본질을 꿰뚫었다.
분명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건만.
벤자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아, 세상이 참 야속하기도 하지. 동생에게는 당신과 같은 인재가 가득한데, 왜 저에게는 승냥이 같은 것들 밖에 없을까요?”
“잘 모르겠군요.”
“흥, 아무튼 제게 도움이 되기 싫다는 말씀이시네요.”
흥이 식었다는 듯, 그녀는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리고는 고개를 픽 돌렸다.
저런 모습 하나하나가 남자의 심리를, 더 나아가 사람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는 것을 벤자민은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사람을 홀리기만 해서?
아니다.
사람으로부터 본능적으로 호의적인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그 사이에 만들어진 틈을 노리는 것이다.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고, 사람의 심리를 읽는데 있어서 그녀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은 여태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좀 알려 줘요. 오늘 길에 재미있는 두 사람을 봤거든요.”
“저도 아카데미에 온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에이, 진짜. 그래도 좀 들어 봐요. 보아하니 단장님의 제자 같던데.”
“…….”
더 이상 단장이 아니라고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벤자민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클레이튼 가문의 형제를 봤어요. 소문으로 듣던 것처럼 둘 다 모두 훤칠하던걸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특히…… 검은 머리의, 그러니까 형인 셰인이라는 남자 말이에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그 말에 벤자민도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이 황녀님의 눈에, 과연 그 무기질적인 표정의 소년이 어떻게 비춰졌을까.
벤자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소문으로 판단할 생도는 아니라는 것 정도입니다.”
“헤. 단장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재능에 있어서는 괜찮다는 거네요.”
황실 소속의 기사단장이었을 무렵부터 벤자민의 인재를 보는 눈은 정확하기로 소문이 났었다.
그런 그의 말이니만큼, 황녀도 두 눈을 빛내며 복도에서 봤던 남자를 떠올렸다.
자신의 외모에 자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청순한 외모를 어떤 식으로 휘둘러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그녀다.
여태껏 그녀의 외모에 연정을 품지는 않을지언정 호감조차 느끼지 않는 남자는 없었다.
적어도 첫 인상에는.
하다못해 일말의 변화라도 있어야 했건만.
그 남자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벽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 눈은, 올리시아로 하여금 심장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심유했다.
그저 냉혹하다거나 냉철하다, 따위의 말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지만, 물건처럼 여기지도 않는다.
이따금 사람을 물건처럼 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물건을 품평할 때 감정이 동반되듯 미세한 변화가 찾아온다.
올리시아는 그런 것조차 놓치지 않고 파악하는 눈을 가졌으나.
그 남자는 도대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그런 호기심이 들었던 것이다.
“음, 아무튼 알겠어요. 일단 단장님이 무슨 목적으로 아카데미에 왔는지 알았으니 그걸로 됐어요. 동생 쪽은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벤자민은 그 말에 작은 안심을 느꼈고, 올리시아는 그런 감정조차도 놓치지 않았다.
언제나 청순한 외모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홀리는 올리시아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제 동생이 부러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카데미에도 관심을 좀 쏟아 봐야겠네.’
한편, 벤자민으로 인해 온 아카데미였지만 황녀는 벌써부터 벤자민보다는 이 아카데미 자체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아직 정치계에 발을 들이기 너무 어린 병아리들이라 벌써부터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까처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만약 복마전과 같은 황실의 정치에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를 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벌써부터 흥미가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움직여야지요. 탐욕스러운 오라버니는 뭐든 다 먹어치우려 할 테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올리시아는 자신의 흥미를 애써 밑으로 가라앉혔다.
* * *
일주일은 금세 흘러가, 어느덧 필기시험일이 찾아왔다.
“그, 형님. 괜찮으십니까?”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더냐. 저들의 눈치 볼 거 없다. 어차피 알아볼 사람들은 금방 알아보니까.”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조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 나가던 셰인의 신기록이 아카데미 전체로 확산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생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몇몇 교수들은 그런 소문을 헛소문 취급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진짜 제 실력으로 한 게 맞을까?”
“그걸 믿냐? 그 셰인이야. 열등감에 쩔어 있는 놈이 어떻게 지휘학과 시험에서 최고 기록을 세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아카데미 교수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게 가능할까…….”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러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셰인은 거기에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필기시험까지 끝나고 점수가 공개되면 더 이상 저런 말도 못 꺼낼 거다.”
필기시험의 경우에는, 한 명의 교수가 내는 것이 아닌 수십 명의 전문가들이 문제를 가지고 시험 당일에 찾아온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당일 날, 선택된 몇 개의 문제들만이 선정되는 형태의 시험.
아무리 돈으로 사람을 매수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도 정말 몇 명만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어디에도 알리지 않고 내는 문제를 돈으로 매수해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심지어 학과장이라 하더라도 그 문제의 출처를 모두 알지는 못하기에, 컨닝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불가능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적어도 나는 머리를 쓰는 일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참견이었군요.”
“뭘 또 사과까지.”
그렇게, 셰인과 클라인은 함께 시험장으로 들어섰고, 그곳에는 어느새 50명으로 줄어든 생도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 왔나? 왔으면 자리에 앉도록.”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 조금은 수척해진 벤자민이 시험장에 들어오자 시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 시험은 일주일 동안 치러진다.”
필기시험이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부여됐다.
이것만으로도 도대체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문제가 출제되었다는 걸까.
작년과 다르게 실기 시험부터가 불지옥 난이도였기에 그 난이도에서 살아남은 생도들은 조금씩 긴장을 머금었다.
어찌 보면 실기가 가장 중요한 시험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지휘학과 시험은 실기보단 필기에서 더 많은 수의 생도들이 탈락한다.
그 이유는…….
“이 시험지에는 총 다섯 문제가 적혀 있다. 그동안 너희는 도서관과 지정된 시험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를 인지하고 행동에 임하도록. 괜히 쓸데없는 관심이 의심을 살 수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라.”
고작 다섯 개의 문제가 일주일이라는 시간 필요할 정도였고, 그 문제의 해답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작은 규모의 논문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험지가 배부되었고, 시험이 시작됐다.
배정받은 시험실 책상 앞에 앉아 그런 시험지의 내용을 천천히 훑어본 셰인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건…….’
문제의 난이도가, 셰인에게 다른 방식으로 고민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3화
13화 학과 시험 (6)
소문으로 듣던 대로, 지휘학과의 문제는 난이도가 상당했다.
‘던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예시로 들고 생도들의 판단력을 확인하는 건가.’
다만 어려운 점은, 문제에서 제시한 상황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셰인은 왜 학과 측에서 도서관의 출입을 허용했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이런 문제는 당장 생도 중에서도 제대로 된 답안을 내는 생도가 없을 터.
그러니 도서관의 출입을 허용하고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을 내준 것이다.
특히 가장 마지막 문제는 던전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방법으로 클리어할지 제시하라는 문제였기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허투루 썼다간 모든 문제를 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 한다…….”
다만 셰인에게는 이 문제들이 별 어려울 게 없었다.
다섯 문제에 나오는 모든 던전의 특성과 클리어 방법이 셰인의 머릿속에 떠올랐으니까.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당장 셰인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현재 인류에 알려진 던전의 지식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그걸 알아보기 위한 비교 검증이 필요했다.
자칫 잘못해서 아직 인류가 파악하지 못한 지식을 적어 넣었다간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건 셰인이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어디까지 당장 셰인이 원하는 것은 클라인의 곁에 서 있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명성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 이상의 시선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셰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해당 문제들에 대해 알아보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테니.
물론, 그렇다고 너무 적당히 할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논란은 생기되, 귀찮을 일로 이어지지는 않을 정도로.
그 선을 지켜야 했다.
거기에, 도서관에 가서 만날 사람도 있었고.
그렇게 자리를 옮겨 도서관으로 향하자, 이미 몇몇 지휘학과 지원 생도들이 도착한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셰인의 등장과 함께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 왔다.
본래 있던 학과에서도 엘리트 소리를 질리도록 들린 녀석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할 속도로 던전을 클리어 한 셰인이 의심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셰인은 그러한 시선들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기록 서적을 펼쳤다.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새하얀 백지.
셰인은 거기에 자신이 원하는 서적과 관련된 키워드를 적어 냈다.
그러자 백지였던 서적에 관련 서적들의 이름이 스스로 적히기 시작했고, 셰인은 그중 하나를 체크했다.
그러고 다음 장을 넘겨 보니, 셰인이 체크한 서적의 시작 문구가 보였다.
아카데미 내에 등록된 대부분의 서적은 이 기록서적으로도 찾을 수 있는 편리한 시스템.
셰인은 그렇게 조용히 자신의 할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읽었을까.
이미 대부분의 생도들은 돌아가고, 단 몇 명만 남아 있는 새벽 늦은 시간.
오늘은 이 정도면 됐다 싶어 기록서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아, 알고 있었군요.”
셰인의 뒷자석에 앉아 있던 오스튼이 말을 더듬으며 마찬가지로 기록서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일정 주기마다 시선을 보내는데 그럼 그걸 모를까. 무슨 일이지.”
“자, 잠깐 대화 좀 나눌 수 있, 있을까요.”
도서관에 찾아온 두 번째 이유.
오스튼의 접근을 기다렸던 셰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하지.”
* * *
전생에 타락한 뒤의 셰인이 오스튼과 만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그리고 둘에게는 그 한 번의 만남이, 수십 수백 번을 만나는 것보다 더욱 값진 만남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조직과 인간들의 전쟁이 한참이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는 조직이 인간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있을 때였다.
클라인으로 인해 황녀가 조직에 의해 포위된 도시에서 탈출하고 그 결과 인간들이 다시 결집되기 시작할 무렵.
조직의 제1군단장인 셰인을 향해 인간들이 접촉해 왔다.
내용인즉, 회담을 한 번 갖자는 제안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러한 제안을 허락한 적 없던 셰인은 처음으로 받아들였고, 홀로 인간들의 진영으로 향했다.
그 이유는 최근 황녀가 인간들에게 구출된 이후부터 조직의 진군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전부터 그러한 전황은 있었다.
아무리 조직에서 그에 대한 문제점을 찾으려 했으나,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받아들인 것이다.
고작해야 밟혀 죽을 때 꿈틀거리다 생을 마감하는 인간들이, 조직의 진군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이유가 궁금했으니까.
그렇게 회담에 도착해서 처음 본 이가 오스튼이었다.
오스튼의 뒤로 황녀와 클라인이 보였다.
현명했다.
수만의 군대보다 클라인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셰인은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오스튼이라고 합니다.”
“무명이다.”
무명(無名).
당시 셰인의 이름이 아닌 조직의 이름.
이름이 없다는 의미의 이름이라니.
아이러니 했지만,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회담은 딱히 평화라든가, 항복 따위의 선언이 오가진 않았다.
서로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한 발버둥.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1시간의 회동이 끝났을 때.
셰인은 오스튼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
이름에 담긴 역사.
그가 걸어온 행적.
셰인이 가진 어둠은 인간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 감응력은 모든 군단장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그러니 적어도 회귀한 뒤의 셰인은 단언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말더듬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자신뿐일 것이라고.
심지어 오스튼 본인보다도 말이다.
* * *
“던전을 클리어한 방법을 어떻게 떠올렸는지가 궁금하다?”
셰인의 그러한 물음에 오스튼이 어수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드, 듣고 싶습니다.”
오스튼의 말에 셰인은 굳이 숨기지 않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배웠지.”
“배, 배웠다 하심은?”
“머리를 쓰는 데 있어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배웠다.”
“누, 누구보다 뛰어난 사, 사람…… 말입니까? 그, 그게 누구인지 무,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스튼의 두뇌는 전생에 그랬듯 셰인이 조직을 찌르기 위해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스튼의 오감은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그만큼 경계심도 많다.
다만.
전생처럼 타락의 힘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만큼 오스튼의 감정에 대한 온전한 파악은 불가능했으나, 어느 정도는 구분이 가능했다.
일정한 경계심과, 참기 힘든 호기심.
당장은 모종의 이유로 저런 멍청한 모습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을 만큼.
여기서 너무 갑작스러운 정보의 공유는 녀석에게 혼란만 가져다줄 뿐이었다.
천천히.
하지만 녀석이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지 않도록.
셰인은 그에 가장 어울리는 답변을 내놨다.
“그런 걸 주고받을 만큼 우리가 서로를 잘 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아, 그, 죄,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다. 대신, 놀이를 하나 제안하지.”
“노, 놀이 말입니까?”
“그래. 이번 필기시험에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나. 단순하고 유치하지만 심플한 방법이지.”
“승자에게 보, 보상이 있는 겁니까?”
“말했잖나. 이건 놀이라고. 내기가 아니다.”
셰인의 말에 오스튼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빛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좋습니다.”
* * *
방으로 돌아온 오스튼은 평소 멍해 보이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차가운 냉소를 띄웠다.
“놀이라…….”
클레이튼 R 셰인.
지난번 실기시험 이후, 오스튼은 그에 관한 정보를 수소문해 알아봤다.
대부분의 정보들은 주로 오스튼도 평소 알고 있던 내용에 불과했다.
동생을 시기하고, 그로 인해 많은 무리수를 두기도 했던 사람이라거나.
평소의 오만한 성격으로 주변인들에게 차갑게 대한다거나 등.
그러나 그런 정보들 중 비교적 최근에 나온 정보가 있었는데, 외곽에 위치한 마을 주변에서 던전 웨이브가 바로 그것이었다.
클라인을 위주로 한 기사단들이 던전 웨이브를 토벌하고 마을을 구했다는 내용.
대부분 클라인의 위용이 다시 한번 아카데미에 퍼지는 내용이었지만, 오스튼은 그보다 셰인의 활약이 더욱 놀라웠다.
썩은 나무 정령의 출현, 어둠의 정령에게 잠식당한 트윈 헤드 오우거를 단 일격에 보내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생도들은 헛소문이라 치부했지만, 오스튼이 봤을 때 단순히 헛소문으로 취급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사회는 능력주의 사회다.
트윈 헤드 오우거라면 숙련된 기사들도 각오를 하고 덤벼야 했고, 베테랑 용병들도 출혈을 감수하고 사냥해야 하는 몬스터.
거기에 어둠의 정령까지 깃든 놈을 단 일격에?
연합국 아카데미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있고, 찾아보면 분명 비슷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 또한 있을 것이다.
당장 오스튼의 머릿속에도 열댓 명의 생도가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분명 작년까지만해도 셰인의 실력은 트윈 헤드 오우거는커녕 고블린 부락조차 혼자 정리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
‘사람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나?’
그뿐이던가.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동생 클라인과 말 한마디 나누는 걸 본 적이 없던 셰인이다.
그러나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 클라인과 함께 다니는 경우도 많았고, 아주 드물긴 해도 클라인을 향해 미소를 보일 때도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저 사람이 바뀌었다 할 수준으로 치부할 정도가 아닌 것이다.
거기에 뛰어난 오성을 지닌 오스튼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그에게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흥미의 영역이었고, 오스튼은 그저 흥미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충분한 경계심 또한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셰인과의 대화는 그런 경계심의 벽마저 금이 가게 할 정도로 흥미를 돋웠다.
‘놀이라고?’
셰인의 뜬금없는 제안.
오스튼은 셰인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계심을 셰인 또한 알아본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친해지자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자는 형식으로 이번 필기시험에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지 따위의 말을 꺼낸 것이다.
언뜻 보면 이상할지도 몰랐다.
친구라면 그냥 서로 대화 몇 마디 주고받고 친해지면 되는 거 아닌가?
아카데미에서도 교실에서 금방금방 친구들을 사귀고 파벌을 만드는 이들이 있지 않았나.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까지 해 가며 서로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오스튼에게는 충분히 필요한 일이었다.
남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친해지기엔, 오스튼의 오성은 너무 뛰어났다.
후작가의 자제로서 그는 수많은 인간군상을 만나 왔고, 오스튼의 뛰어난 오성은 그런 이들의 인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돈 한 푼에도 덜덜 떠는 사람.
가진 돈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
그런 사람 옆에서 아부를 떠는 사람.
쥐꼬리만 한 권력으로 세상을 위시하려는 사람.
수많은 권력을 가지고도 더 욕심내는 사람.
오스튼의 눈으로 봤을 때 인간들의 세상은 ‘욕심’이라는 것 하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욕심은 곧 질투를 유발하고, 질투는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하나같이 위험한 것들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 감정들로 인해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물론 인간성 따위가 없더라도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은 언제나 넘쳐 난다.
그러나 오스튼이 봤을 때, 최소한의 인간성은 반드시 필요했다.
인간성이 없어지면,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남는 것은 파멸뿐.
마력이라는 힘이 없는 오스튼은 그런 인간들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을 부리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바보 연기였다.
굳이 평범함을 연기하지 않고 바보 연기를 하는 이유 또한, 타인의 관찰을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본래 사람이란 족속은 자기보다 못한 이들에게 감정의 벽을 허물고 본래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쉬우니까.
당연히 평범함을 연기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무시받고 귀찮은 일들이 생겨났지만, 반대로 오스튼은 그런 사람들을 파악하는 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까지는 말이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셰인을 만나기 전까진.
오스튼은 5년의 아카데미 생활 동안 셰인을 여러 번 봐 왔고, 그에 대한 파악도 끝난 상황이었나.
그러나 아카데미의 휴식기가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됐을 무렵부터 달라진 셰인은, 오스튼이 조금도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서 돌아왔다.
아예 처음부터 파악하기 힘든 사람은 봤어도 이렇게 변하는 경우는 없었기에.
오스튼은 책상 앞에 앉아 시험 문제를 내려다봤다.
“이런 놀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죠.”
오스튼은 팬을 들어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각 그처럼 책상 앞에 앉은 셰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렵군.”
처음에는 현 시대 인류의 수준에 얼추 맞을 정도로만 문제를 풀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 도서관에 갔던 게 아니던가.
그러나 오스튼과 만나게 됐고, 놀이라는 것을 제안하고서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본래라면 이런 제안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오스튼에 대해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시대의 오스튼은 아직 어수룩한 경계심이 남아 있었다.
어수룩한 경계심.
차라리 명백한 경계심이라면 거래라도 가능했지만, 미래의 오스튼과 달리 당장의 오스튼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필기시험 점수 따위나 논하는 놀이를 제안했던 것이고.
그러자 오스튼은 흥미를 보였다.
분명 그 오스튼의 흥미라면, 적당히는 끝나지 않겠지.
쓸데없는 관심은 귀찮고 때로는 위험마저 초래할 테지만.
그 정도 귀찮음과 위험 따위, 미래의 오스튼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떠올리면 감수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4화
14화 학과 시험 (7)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일주일 후.
필기시험이 끝나고, 생도들의 시험지를 확인하던 벤자민은 당혹스러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올해의 지휘학과 시험은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편이었다.
스피드런 형식의 커스 고블린 던전도 그랬고, 필기시험 또한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난해한 던전을 위주로 골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생도들이 그러한 필기시험에 어려움을 표했고, 개중에는 모든 문제를 풀지조차 못한 생도들도 더러 보일 정도였다.
특히나 벤자민은 이번 시험에서 오스튼이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유는, 이 필기시험이 단순히 던전의 클리어 방법만을 유도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던전의 특성 이해.
커스 고블린 던전은 그나마 던전 중에서도 제법 쉬운 쪽에 속했다.
이유는 그나마 던전의 생리가 물리 법칙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인류가 발견한 던전 중에는 그러한 물리 법칙조차 무시하는 던전들이 등장한다.
사막의 땡볕 아래 얼음 폭풍이 부는가 하면.
사나운 북극 지방에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이 펼쳐지기도 한다.
심할 때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으로 인해 시간 축이 무너져 고대의 어느 시대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이는 단순히 뛰어난 지휘력만으로는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문제다.
던전에는 다양한 기현상들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뛰어난 지휘관이라면 이러한 기현상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해결법을 찾아야 하니까.
다만 이러한 기현상들을 이해하려면 마력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마력을 다룰 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오스튼은 그런 마력을 다루는 게 불가능했다.
거기에 셰인 또한 마찬가지.
비록 셰인은 2서클에 해당되는 마법사였지만, 그럼에도 마력친화력과 감응력이 모두 부족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둘 모두 이번 시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벤자민은 판단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그런 벤자민의 예측을 과감하게 부정했다.
“어렵군, 어려워. 이런 시각에서의 이론은 처음 보는데.”
“그렇다고 이걸 맞다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아니, 그런 결론을 내기에도 억지입니다. 당장 이론적으로 봤을 때, 메자이아 대수림의 마력 패턴을 생각하면 아예 가능성이 없지도 않잖습니까?”
“저도 비슷한 의견입니다. 오스튼 생도의 논리대로라면 ‘놓지 않는 늪’의 현상도 이해가 됩니다.”
“단순히 입자의 밀집도로 생각할 게 아니라, 입자의 성질에 변화를 주는 마력을 예측한다라. 예, 저도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중력 에너지와 입자 밀집도가 아닌 마력으로 인한 입자의 성질 변화라면 그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대한 이론이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당장 벤자민의 앞에 있는 이들은, 이번 필기시험을 제출하기 위해 모인 다양한 전문가들이었다.
던전을 연구하는 마탑의 마법사, 학자, 현직 베테랑 모험단의 단장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여 오스튼이 제출한 시험 문제의 답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저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분야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위세 높은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아직 채 성인도 되지 못한 소년이 낸 문제의 답에 대해 저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해 토론을 하고 있다니.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오스튼의 시험지에 나온 ‘놓지 않는 늪’의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기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던전은 너무 많았고, 그 던전들에도 평범한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이 샐 수 없을 만큼 있었을 뿐.
반면, 셰인의 시험지에 대해서는 그러한 전문가들조차 입을 다물었다.
“이건…….”
“어렵군요.”
“무슨 시험지를 마탑 논문급으로 내놓았는지.”
“정말 이걸 일주일 만에 풀어 낸 게 맞습니까?”
셰인의 시험지는 빽빽한 글자와 함께 여벌의 문서가 5장이 추가로 등장했다.
“그래서 다른 문제들은 평범하게 풀어 낸 것에 반면, 이 문제만큼은 이 정도의 정성을 들였군요.”
“그러니 이건……. 당장 우리로서도 이 이론이 맞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탑의 수석 마법사가 결국 백기를 들었고, 이론적인 부분에서만큼은 가장 뛰어난 마법사의 사실상 항복선언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벤자민 수석교수님. 아무래 이 문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젠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도 않은 벤자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다른 문제들만 하더라도 전부 정상적으로 풀어냈으니, 합격에는 문제가 없겠군요. 성적순위의 발표만 조금 늦게 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신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내놓겠습니다.”
그러면서, 벤자민은 셰인이 낸 시험지를 조심스럽게 마탑 출신의 마법사에게 건넸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대우기(大雨期) 공략법]
현재 인류가 요람 탐사의 앞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5대 요람 중 하나인 메자이아 대수림.
하루만에 강의 위치가 바뀔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준의 비가 쏟아져 토벌대가 항상 애먹게 만드는 요람의 비밀이, 아카데미 필기 시험지에 풀려 버렸다.
* * *
사흘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합격자 명단이 나왔다.
그러자 생도들 사이에서 의아함이 생겨났다.
“왜 성적표 공개가 미뤄진 거지?”
이러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여러 소문을 불어왔고, 그에 대한 해답은 금방 밝혀졌다.
“생도 중 한 명의 답안 때문이라고?”
그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추측성 소문도 소문이거니와, 설마하니 셰인이 그러한 결과물을 내놨다는 것이 생도들 사이에서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디라일라가 교내 게시판 앞에 섰다.
그의 옆에서는 평소처럼 음침한 얼굴의 오스튼이 함께 있었다.
“오올~ 오스튼. 진짜 합격했네?”
“으, 응. 어려운 건 아, 아니었으니까.”
“크크…… 어렵지 않기는. 올해 지휘학과 시험 완전 불지옥이었다던데. 합격자가 고작 20명 정도밖에 없잖아.”
“…….”
오스튼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었고, 디라일라는 그런 오스튼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디라일라와 오스튼의 관계는 그리 신기할 게 없었다.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척받는 디라일라와, 당장 가문에서 버림받은 오스튼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제법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야. 네가 붙었으니까 나 좀 네가 하는 지휘에 껴 줘.”
“어, 내가? 너, 너 정도 실력이면 다,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보고 있지 아, 않을까?”
“참말로 그렇겠다, 야.”
오스튼의 말에 디라일라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애당초 이종족인 자신을 데려다 써 줄 만한 지휘학과 생도가 있기나 할까?
그나마 떠오르는 것은 폴론이었지만, 그 인간의 패거리에 들어가서 좋은 꼴은 못 볼게 뻔했다.
‘아니면, 내가 내 처지에 너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건가?’
까득.
그런 생각에 디라일라는 습관적으로 이빨을 갈았다.
이놈의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도저히 적응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단장님이 계실 적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쩝, 미안. 방금 한 말은 무시해 줘.”
디라일라는 그리 말하며 등을 올렸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오스튼의 지휘 아래로 들어간다 한들 이종족인 자신이 있다면 오스튼도 다른 생도들을 영입하기 힘들어질 게 아닌가.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기에, 디라일라가 포기하려 할 때.
“글쎄. 세상에는 내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 많더라고. 아마 한 명은 그런 너를 알아보고 있지 않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오스튼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그런 디라일라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 방금 뭐라고?”
“으, 응? 아, 아무것도 아, 아냐.”
돌아서서 본 오스튼은 평소처럼 음침한 얼굴에, 말을 더벅이며 멍청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 방금 말을 안 더듬은 거 같았는데.
하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생도들의 북적거림으로 인해 잘 들리지 않았기에, 디라일라는 별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 저기 클라인이다!”
“옆에 셰인도 있네.”
“그러게. 그러고 보니 그 머저리 셰인도 지휘학과에 합격했네?”
“소문으로는 클라인보다 점수는 좋다던데.”
그때 바로 옆에서 다른 생도들의 대화가 들려와, 디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클라인.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아카데미에서, 그런 시기질투조차 허무도록 만드는 천재 중의 천재.
듣자 하니 이번 지휘학과의 실기시험에서는 그럭저럭 평범한 점수로 던전을 클리어했다고 들었다.
‘저런 인간 밑으로 들어가면 편할 텐데…….’
그러기엔, 클라인은 이미 아카데미에서 흔히 요즘 애들이 하는 말로 인싸 중의 인싸였다.
자신은 아싸 중의 초 아싸였고.
클라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슨 협박을 들을지 예상이 된 디라일라는 벌써부터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셰인은 최근 아카데미에서 기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지휘학과의 실기시험에서 저 오스튼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는 것이 디라일라에게는 놀라운 부분이었고.
생도들 사이에서는 전 저지먼트 단장의 딸인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는 부분에서 상당히 고평가되고 있는 듯했다.
듣기로는 여전히 남들과 어울리지 않는 성격은 그대로라고 하는데…….
‘그래, 차라리 저 인간한테 지휘를 받으면 편할지도 모르겠네.’
적어도 같은 인간이나 이종족이나 차별 없이 무시하는 성격은 똑같을 테니까.
‘에휴, 어쩌다 내 신세가 이래 됐는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디라일라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방금 했던 생각 때문일까, 셰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향했고, 발걸음도 이쪽으로 향했다.
그런 셰인의 뒤로 클라인이 따라왔다.
평소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는 일이 드문 셰인이, 웬일인지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머문 게 신기해서였다.
디라일라는 그 시선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도 여기저기서 눈칫밥 먹은 경험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셰인의 시선에서 느낀 것은, 아주 미약한 동정…… 인가?
뭐지. 나를 알고 있나?
싶은 생각을 할 때.
“시험은 잘 준비했나?”
그런 셰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디라일라가 아닌 뒤에 서 있던 오스튼이었다.
어느새 셰인의 시선은 디라일라에게 떨어져 오스튼에게 향해 있었다.
“네, 네. 셰, 셰인 님도 시험은 잘 치, 치셨습니까?”
“그런 편이지. 기대해도 좋다.”
“재, 재미있어지겠군요.”
오스튼은 그리 말했고, 셰인은 슬쩍 시선을 디라일라에게 옮겼다.
다시금 시선이 옮겨졌을 때는 아까와 같은 동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평소처럼 무감정한 표정이었다.
“메, 메이어 디라일라입니다. 우, 우리와 같은 5년차 새, 생도이죠.”
“그런가.”
갑자기 옆에서 뜬금없이 자기소개를 한 오스튼의 행동에 디라일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 가만히 서 있기도 뭐 했던 디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아…… 마법학과 디라일라야. 그, 수업에서도 몇 번 얼굴은 본 거 같은데. 맞지?”
“기억이 나는군.”
“어…… 그래. 그렇다고.”
“…….”
디라일라는 왠지 이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셰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한편 셰인의 동생인 클라인은 무언가 감동받은 듯한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형님…… 드디어 친구가 생기셨군요.”
라는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무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셰인은 말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클라인도 오스튼과 디라일라에게 매력적인 웃음을 보이며 형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셰인을 따라갔다.
“야, 야. 오스튼. 왜 갑자기 저 인간한테 날 소개한 거냐?”
“으, 응? 아…… 그, 그냥? 디라일라 너 나,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 아, 알고 지내는 일이 어, 없으니까.”
“와, 씨. 이렇게 뼈를 때리네.”
“그, 그래도 알고 지내서 소, 손해 볼 건 없을 거야.”
“아~ 그러세요?”
디라일라는 잠시 당황했지만, 별 상관없는 헤프닝이라 생각하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 이 별 의미 없는 해프닝보단, 오늘 하루 일정을 걱정해야 함이 올바를 테니까.
“난 과외 수업이나 하러 가야겠다…….”
* * *
셰인은 오랜만에 복도를 걸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다지 연상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조직에 있었을 당시 봤던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니 자연스레 떠오를 수밖에 없는 기억이었다.
[야, 나보고 널 지원하라는데?]
[그런가.]
[그런가? 그런가아? 제길, 내가 니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우리 쪽 애들 방패막이로 세운 뒤에 그 더러운 시체로 일으켜 세울 작전이라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나는 상부에 그런 지시를 바란 적이 없다.]
[지랄하지 마! 왜 우리 우월한 지하인들이 너처럼 시체나 가지고 노는 음침한 새끼 밑에서 굴러야 하는데? 됐고, 네가 위에다 말해라. 내가 말해도 알아 처먹질 않으니까.]
[원한다면 그리 해 주지. 어차피 결과가 달라질 거 같진 않지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모든 조직원들은 죽으면 내 군단에 소속된다. 네가 어딜 가든, 너희 지하인들이 전선에서 죽는다면 내 휘하로 온다는 말이다.]
[이 새끼가!]
참, 여러모로 트러블이 많았던 사이였다.
애당초 7대 죄악에 속하는 군단장들 모두 서로 사이가 좋은 일은 드물었지만.
특히나 셰인과 3군단장과는 사이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질투를 담당하고 있는 셰인과, 교만을 담당하고 있는 디라일라가 어떻게 한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상극 중에서도 상극.
인류의 배신자 디라일라는, 전생의 셰인과 더 없는 물과 기름에 속한 인물이었고.
[야. 시체박이야.]
[날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 말도록.]
[그럼 날 인류의 배신자라느니 그딴 명칭부터 좀 치우지?]
[난 그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다만.]
[그럼 네가 밑에 것들한테 명령하든가. 니 명령이면 애새끼들이 깜빡 뒤지드만.]
[뭐 하러 그런 귀찮은 일을 하나.]
[망할놈.]
서로에 대한 혐오가 확실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의 의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이기도 했다.
[인류의 배신자는 무슨 헛소리 하고 앉았네. 애초에 같은 인간 취급을 해 준 적도 없었으면서…….]
언젠가 디라일라는, 마셔봐야 취하지도 않을 술을 머금으며 셰인의 고성 꼭대기에서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니 당시의 디라일라과 지금의 디라일라를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상념에 잠시 잠겼던 셰인은 어느새 도착한 거대한 문 앞에 섰다.
“이곳입니까?”
“맞네, 아카데미의 아티팩트 저장고일세.”
아티팩트 저장고.
그리 대단한 물건이 잠든 곳은 아니었기에 이렇게 급하게 올 이유는 없었으나.
디라일라를 보며 동시에 떠오른 이 시기에 있었던 어느 한 사건이 떠올라, 이곳에 찾아오기로 했다.
‘조금 더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생각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군.’
생도 5년차 초기.
당시 디라일라는 소리 소문 없이 아카데미에서 사라졌었던, 그때는 금방 사그라들었던 작은 사건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5화
15화 괴물 사냥(1)
아카데미의 아티팩트 저장고는 굉장히 넓었다.
겉으로 보던 것과는 다르게 공간확장 마법이 펼쳐져, 아카데미 내부의 도서관만큼이나 넓은 공간.
그곳에는 하나하나 귀중해 보이는 아티팩트들이 투명한 유리 보관함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쭉 훑어보던 셰인은 벤자민을 향해 말했다.
“아무거나 골라도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하게. 물론 하나만 골라야 하니 제법 고민을 해 봐야겠지만 말일세.”
“예.”
이곳에 찾아올 생도들을 위해 친절하게도 아티팩트 전시장 아래에는 해당 아티팩트의 사용처까지 적혀 있었다.
물론, 여기에 있는 아티팩트들은 그리 대단한 성능의 물건들은 아니다.
평범한 생도들이 사용하기에 과분한 정도는 맞으나, 그렇다고 제국이나 왕국의 저장고의 수준보다는 한참이나 뒤떨어졌다.
딱 생도들에게 생색내기 좋은 수준.
애초에 그 이상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셰인은 실망하는 기색 하나 없이 천천히 훑어봤다.
‘굳이 아티팩트만 고를 필요는 없겠군.’
다양한 무기와 방어구, 혹은 부적이나 착용하는 액세서리 등이 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셰인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설마 그걸 고를 생각인가?”
그런 걸 고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벤자민의 표정이 애매해졌지만.
셰인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답했다.
“예.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며칠 전에 봤던 보랏빛 돌멩이.
마력의 근원이라 불리는 돌이었다.
몬스터에게는 천고의 비약이라고 불리는 돌.
그러나 반드시 몬스터에게만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정령에게도 이 마력의 근원은 말할 필요가 없는 영약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마력의 근원을 보는 셰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벌레들을 처리할 때 쓸 만하겠군.’
적어도 이 아티팩트 저장소에 있는 대부분의 아티팩트보다 확실한 성능을 보여 줄 터였다.
* * *
디라일라는 눈앞에 보이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문을 볼 때마다 살짝 기가 죽었다.
‘좀 거시기하네.’
연합국의 중심에 있는 도시의 집인만큼, 내부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 또한 제법 명망 높은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다만, 이 집은 별장으로 사용되고 있던 터라 그리 넓은 집은 아니었다.
3층 높이의 건물.
디라일라는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는 이제 겨우 10살이나 됐을 법한 소년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디라일라를 반겼다.
“선생님!”
“아, 안녕하세요.”
소년은 지난달부터 디라일라가 과외를 봐주고 있는 어느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아주 옥이야 금이야 키워진 것인지 겉보기에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소년이 마중을 나오는 게 디라일라에게는 퍽 어색했다.
평소에 자신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한가득인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자신을 보는 눈에는 흥미가 가득하다.
때문에 수업을 진행하려 해도 영 수다스러운 성격 때문에 진행이 더뎌질 때도 있었다.
“오, 왔구먼. 디라일라 양. 어서 오게.”
그런 소년의 뒤로 한 남성이 나타났다.
“넵. 안녕하셨나요, 가주님.”
“무얼. 그리 딱딱하게 굴 것 없네. 하하, 오늘도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네.”
“아, 알겠습니다.”
귀족의 자제가 아닌 가문을 책임지는 가주의 자리.
아무래도 인간들의 권위적인 성격을 많이 봐 온 디라일라의 입장에서는 영 부담스러웠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번 달 연구비를 얻으려면 어쨌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생활비나 등록금 같은 것은 전부 아카데미 측의 지원을 받아 해결하고 있지만, 아무런 연줄도 없는 디라일라에게, 그것도 이종족이라는 꼬리표를 붙은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귀한 차를 얻었네. 이따 한 번 맛이라도 보겠나?”
“네? 아휴, 괜찮습니다.”
“하하, 사양은 사양하도록 하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주가 자리를 비웠고, 그 뒤로 평탄하게 수업이 진행됐다.
“선생님, 선생님. 있잖아요~ 지난주에 제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고장 나서요…… 아버지한테 막 혼나고 그랬어요.”
“아하하, 그랬군요…….”
물론, 도중 아이의 수다가 이어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곧 새 장난감이 생길 거라고 기대하라고 하셨어요! 헤헤.”
천진난만한 아이의 미소.
본래라면 모성애라도 일으킬 만큼 귀여운 그 미소에서, 갑자기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디라일라는 방금 떠올린 기묘한 감상을 빠르게 털어 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이빨을 남들에게 보이기 어려웠다.
* * *
아카데미의 늦은 밤.
셰인은 조용히 언덕 나무 위에 앉아 그 아래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봤다.
연합국의 중심인 아르젠티아 수도는 언제나 밝다.
다섯 국가의 중진들이 모여 만든 국가이고 그런 국가의 수도이니만큼 발전의 속도가 여타 다른 도시들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빠르다.
야심한 밤하늘.
어느 누군가에게는 이 밤이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셰인은 잘 알고 있다.
이 도시의 지하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벌레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그 벌레들은 연합국의 밑바닥부터 갉아먹으며, 다섯 국가의 연합에도 자신들의 더러운 이빨을 들이밀 것이다.
훗날, 그게 자신들에게 어떤 독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는 채로.
‘어차피 훗날 모두 죽을 벌레들.’
그렇다면 미리 정리해 주는 게 맞지 않겠나.
셰인은 당장 이 평화로운 시기에 찌들어 아카데미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양지에서의 신분을 만들기 위한 행위일 뿐.
음지에서는 또 다른 신분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밤의 어둠보다 훨씬 어두운 기운이 셰인의 생각에 호응하듯 그런 그를 에워쌌다.
곧, 일말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이 언덕 아래.
어느 한 저택을 향해 내려갔다.
* * *
중년의 귀족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차를 한 입 머금었다.
고급스러운 차라는 명성에 걸맞게, 혀를 감미롭게 감싸 오는 향이 중년의 귀족에게 퍽 마음에 들었다.
“아쉽구나. 많이 마시지 못한다는 게.”
“……건강에 해롭습니다.”
중년의 귀족 바로 앞에 선 기사가 충직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항상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은 맛이 좋길 마련일세. 나는 참을성이 없어서, 간간이 이렇게 맛이라도 봐야 하는 편이지.”
“…….”
기사는 귀족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당장 중년의 귀족이 마시고 있는 차는, 마화초라는 식물의 잎사귀를 재료로 쓰는 차였다.
이름에 걸맞게 마력에 양의 기운을 주입하는 식물이지만, 그 독기가 강해 음용자의 마력이 꼬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향이 좋은 터라 귀족들에게 이따금 기호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장난감은 어찌 됐나?”
“예, 제압해서 지하실로 옮겼습니다.”
“그렇구먼. 정말 운이 좋았지. 안 그런가? 그리도 튼튼한 이종족이라니. 쉽게 찾아보기 힘든데 말이야.”
“그래도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카데미의 생도에다가, 그녀의 뒤에는…….”
기사가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지만, 중년의 귀족은 그가 무얼 걱정하는지 이미 파악했다.
“무얼.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애초에 아카데미는 어디까지나 그녀를 보조해 주는 것뿐이지, 보호의 명분까지는 있지 않으니까. 더욱이 아카데미의 바깥에서는 말이지. 오히려 사라지면 더 좋아하지 않겠나? 귀찮은 돈벌레가 없어졌다며 웃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일세.”
“그렇습니까.”
“그래. 어차피 그 장난감의 뒷배도 이쪽 세계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으니.”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하하, 자네는 언제나 진지한 게 문제일세. 그래도 다행이지. 저번에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아들 녀석이 심심하길래 좀 가지고 놀라고 했더니 그새 망가질 줄 누가 알았겠나?”
“제대로 도련님을 보필하지 못한 제 죄입니다.”
“이런, 그게 어디 자네 잘못인가? 심지어 자네에게 맡겨 둔 일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튼튼한 장난감이니, 저번처럼 아들 녀석에게 망가지진 않겠지.”
그러면서 귀족은 자연스럽게 주제를 옮겼다.
“그보다, 오시기로 했던 손님은 어떻게 됐나?”
“예.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고 하십니다.”
“역시 바쁘신 분들이란 말이지. 그래도 소중한 고객이니, 우리가 기다려야 하지 않겠나?”
“…….”
“일단 상품만 보여 드리고, 교육은 따로 시켜야 할 걸세. 자네가 좀 바쁘겠어.”
“가주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언제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하하, 알겠네. 역시 자네만큼 믿음직한 기사가 얼마나 있겠나. 슬슬 손님 맞을 준비를 해 두지.”
“예, 알겠습니다.”
* * *
셰인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타락?
조직의 무력?
둘 다 아니다.
셰인은 이제 타락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고, 조직의 무력 또한 군단장의 지휘에 앉아 본 경험이 있으니 대비가 가능하다.
그러나 단 하나.
셰인조차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인류의 타락이다.
전생에 인류가 조직에 의해 무너진 것은, 조직에서 보인 말도 안 되는 무력도 큰 존재감을 차지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제국을 포함한 다섯 국가가 무너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5년이 안됐다.
그중에 첫 번째 조직의 침공으로 무너진 왕국은 일주일조차 걸리지 않아 왕의 목이 성벽에 걸렸더랬지.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왕국이 무너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반년.
남은 제국과 하나의 국가만이 4년하고도 반년을 채워 조직에게 맞서 대항했으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 나갔고, 모든 국가가 멸망에 이르렀다.
훗날 남은 인류를 그러모아 당시의 1황녀가 새로운 국가를 선포하기 전까지, 인류에게는 일말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본래라면 조직의 무력으로도 모든 국가를 무너뜨리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연합국의 존재가 바로 조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터.
그러나 조직은 그 사실을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가며 연합국에 암세포를 퍼뜨렸다.
그 끝에 조직이 등장할 무렵, 연합국의 존재 의의는 무색해졌고.
이는 인류의 멸망을 보다 빠르게 다가오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이 암세포들만큼은 당장의 셰인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 암세포가 이 시점에서 너무 많이 퍼져 버린 까닭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그것들을 하나하나 박멸해야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놈들을 하나하나 색적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당장 놈들을 모두 불살라 버릴 능력조차 셰인에겐 없었으니까.
하지만, 놈들의 사이사이에 연결된 신경 세포 정도는 한 번이라면 정리해 볼 만한 가능성이 있었다.
고풍스러운 풍경의 저택을 바라보며 그리 생각했다.
‘계속 날 감싸고 있어라.’
[예, 주인님.]
셰인의 주변으로 그 어떠한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으나, 그 영혼에게만 들리는 자그마한 소리가 존재했다.
어둠의 정령.
아카데미에 오기 전, 셰인에 의해 소멸된 썩은 나무 정령의 남은 찌꺼기.
너무도 하잘것없는 존재감이라 셰인조차도 자신의 내부에 남아 있는 그것을 발견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며칠 전, 실기시험을 끝마치고 자신의 방에서 심상세계를 살피고 있을 때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저 찌꺼기에 불과했기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성장조차 노릴 수 없는 하찮은 존재였으나.
셰인이 가지고 온 마력의 근원을 먹이며 다시금 어둠의 정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셰인에 의해 한 번 소멸된 탓에 과거의 기억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못했고, 이미 종 자체가 썩은 나무 정령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그저 어둠 덩어리.
셰인은 녀석에게 이름조차 붙여 주지 않았다.
거창하게 정령이 불리고 있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녀석은 통로였다.
셰인의 내면에 깃든 어둠을 물리적으로 현현하도록 만드는 통로.
그 어둠을 통해 몸을 숨기고 저택 내부로 들어온 셰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겨운 냄새로군.”
저택 내부의 창고.
귀족이 머무는 저택치고는 경호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쉽게 들어왔으나, 셰인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더러운 취미를 가진 귀족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노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니던가.
당장에도 셰인의 코에 냄새 따위는 그저 창고의 먼지와 나무상자의 냄새뿐이었지만.
보다 깊은 지하 밑으로 음습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느껴졌다.
종류는 아주 다양했다.
죽음, 절망, 저주, 증오, 포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희열.
누군가의 희열이었다.
이러한 감정들만 보더라도 셰인은 지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암세포다운 취미로군.”
현재의 인류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바로 이종족이다.
대부분의 이종족들은 과거 아카샤에 의해 봉인되었고, 지금은 던전에서만 볼 수 있는 이들.
그러나 아카샤의 대봉인이 끝나기 전의 인류는 이종족들 사이에서 벌레 이하의 삶을 살아갔다.
그랬기에, 이제는 힘을 갖추기 시작한 인류는 그런 이종족들을 혐오했다.
회귀 전, 디라일라가 괜히 조직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종종 대봉인의 봉인에서 풀려나온 이종족이 보였고, 과거에는 그들을 노예로서 부려 먹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제국의 입장이 달라져 이종족들의 독립된 나라를 인정하고, ‘이종족 노예제도’를 폐지했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본래 하지 말라는 짓을 하면 거기에 더한 쾌감을 느끼는 족속들이 아니던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극히 일부 그러한 쾌감만을 쫓아가는 삶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들이 만들어 낼 풍경이야 뻔했다.
다시 한번 어둠에 감싸인 셰인은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늘 낮에 봤던 구릿빛 피부의 소녀가 쇠사슬에 걸린 채 체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씨발, 진짜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본다, 정말.”
걸쭉한 욕 한마디.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는 셰인이 과거에 알던 그 자존심 가득한 목소리도, 현재의 활기찬 목소리도 아닌.
무언가를 포기하기 직전인 것처럼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셰인은 이런 형태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던 것 같았다.
[인류의 배신자는 무슨 헛소리 하고 앉았네. 애초에 같은 인간 취급을 해 준 적도 없었으면서…….]
오크조차도 한 잔에 별나라로 보내 줄 독한 술을 병째로 입에 들이부으며 자신의 삶을 한탄했던 어느 날 고성의 밤. 한 여인의 목소리와 지독하게도 닯아 있었다.
“디라일라.”
아무런 무늬도 없는 동그란 가면 너머로, 셰인은 전생의 자신이, 그리고 자신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어느 한 소녀의 이름을 아무런 감정 없이 불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6화
16화 괴물 사냥 (2)
“디라일라.”
“……뭐야, 이 가면남은.”
셰인의 부름에 디라일라가 답했다.
두 눈에 힘을 부릅뜬 채 애써 자신을 노려보는 디라일라의 모습에 셰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전생에 셰인이 디라일라를 봤을 땐 이보다 더한 눈빛을 경험했던 기억이 있으니 저런 눈빛은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또 이해가 가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런 곳에 가둬져 있으니, 그녀의 성격상 없는 용기라도 쥐어짜며 저렇게 상대방을 위협하는 게 최선일 터.
“그리 볼 것 없다. 널 해치러 온 건 아니니.”
“뭐? 이딴 곳에 사람을 가둬 놓고 하는 말이 그거냐? 장난해 지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치 털을 한가득 세운 고양이처럼 디라일라가 으르렁거렸지만 셰인은 개의치 않았다.
“널 가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위쪽에 있는 놈들이다.”
“위쪽이라면…… 살리에르 백작을 말하는 거냐?”
범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디라일라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살리에르 백작은 이 별장의 주인이자, 오늘까지 웃는 낯으로 디라일라를 맞이해 준 사람이었다.
“맞다. 그 괴물이 너를 이곳에 가둔 것이지.”
“…….”
거기까지 듣던 디라일라의 눈빛이 조금은 바뀌었다.
괴물.
자신을 이곳에 가둔 백작을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괴물이라 부르고 있었으니.
어쩌면 아까 자신을 해하기 위해 온 게 아니라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럼, 그놈이 왜 나를 이곳에 가둔 건데?”
“간단하다. 연합국의 지하도시에선 네 몸이 어마어마한 상품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지.”
“지하도시…….”
디라일라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연합국의 어딘가, 거대한 지하도시가 존재하고,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고 알려진 블랙마켓이 존재한다는 것.
당연히 없는 걸 만드는 곳이다 보니,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도 흉악하기 이를 데가 없는 수준이다.
과거 생체 실험의 선두주자였던 흑마법사들의 주된 거래처였다고 할 정도이니.
그 외에도 도박 투기장을 운영한다는 등, 좋지 못한 소문이 가득한 장소였다.
“살리에르는 그 지하세계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나름의 거물이라 보면 된다. 주로 이종족 노예를 수집하는 수집가들의 입맛에 맞도록 교육시키고 파는 역할을 하고 있지.”
“…….”
“가끔은 자기 입맛에 맞는 이종족을 데려와 손수 채찍을 든다더군. 자기 아들이 갖고 놀기 딱 좋은 장난감으로 만들려고.”
“……그만.”
“차라리 교육되어 끌려간 녀석들의 처지가 나을 수도 있겠군. 어찌 됐든 수집가들의 입맛에만 맞는다면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의 순수한 악의에 노출되면 어떻게 될지는…….”
“그만-!”
디라일라의 절규 섞인 비명이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눈에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둘을 합한 것보다 더 큰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도 그럴 것이, 디라일라는 이 지하실의 피해자들이 겪은 감정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오늘까지 디라일라의 학생이었던 백작의 아들이 장난처럼 휘두른 채찍에 비슷한 또래의 이종족 소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또 누군가는 울음을 그치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눈알이 뽑혔다. 실은 손님의 취향을 위해 행한 일일 뿐이었다.
디라일라처럼 욕설을 퍼붓던 어느 엘프는 혓바닥이 잘렸다.
이 역시 말 못하는 노예가 필요하다는 손님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고문이 이루어졌으나, 피해자들이 남긴 감정만큼은 통일되었다.
고통과 절망.
그들의 피와 눈물, 고통 어린 땀을 머금은 벽과 바닥은 디라일라에게 그들의 감정을 끊임없이 속삭였다.
마치, 너라도 이런 우리들의 기억을 알아 달라는 듯.
그들의 감정은 디라일라가 절망하면 절망할수록 더 강해져만 갔다.
“외면과 도망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그 무엇도 없다.”
“……뭐?”
“앞으로 네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바란다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돼.”
“…….”
“지금 겪고 있는 그 감정들을 잘 기억해 둬라. 그래야만 너 자신을 지킬 수 있을 테니.”
“도대체…… 인간들은 왜 이러는 건데? 왜 이렇게 잔인한 건데?!”
디라일라는 더 이상 눈을 부릅뜨며 셰인을 위협하지 못했다.
대신 눈물로 얼룩진 표정이 되어 셰일을 바라볼 뿐.
그리고, 셰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두려워하니까.”
“……뭐?”
“인간에게 이종족은 두려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피식자의 본능이 남아 있으니.”
기원전.
고대 신 아카샤의 대봉인에 의해 이종족이 던전에 봉인되기 이전의 시대.
인류는 전 종족 중 최하위 피식자의 자리에 있었다.
당시의 인간은 지금처럼 마력을 쓰지도 못했고, 엘프처럼 숲을 다루지도, 드워프처럼 뛰어난 무구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뿐이던가.
수인족보다 신체 능력은 월등히 떨어졌고, 무엇 하나 다른 종족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피식자였고, 아카샤의 대봉인 이후에도 인간들은 포식자에 대한 두려움을 뼛속 깊은 곳까지 새기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이들이 고통받는 순간을 보며 느끼는 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모든 인간이 그러지는 않겠으나.
인류가 기본적으로 이종족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본능에 새겨진 그 인식을 바꾸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할까.
아니, 애초에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한 종족에 새겨진 본능을 바꾼다는 것.
그런 일이 결코 쉬울 리 없다.
셰인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황제는 인류가 가진 이종족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알고 있었다. 황제는 전 인류의 정점.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가 이종족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종족의 노예화를 폐지했지. 이종족에 대한 겁박은 자신들의 공포에 의해 기인한 것이었으니.”
“…….”
“하지만 제국은 지금도 연합국의 지하도시를 방치하고 있다. 이미 그곳에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이해득실은 풀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럼, 백작은? 살리에르 백작은!”
셰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디라일라가 숙였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눈물범벅인 그 눈동자에는, 어느새 독한 원한의 편린이 보였다.
자신을 이렇게 가두고 끔찍한 고문을 행했을 살리에르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보다는 당장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는 땅의 기억들이 그녀의 원한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그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가할 순 있겠지만, 실상 큰 피해는 주지 못할 거다.”
“뭐야, 그럼 나한테는…… 희망이 없다는 거잖아…….”
디라일라는 허탈함에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도망친다 한들, 살리에르 백작은 살아 있는 증인인 디라일라를 살려 둘 리가 없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는 아카데미에 기댄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살리에르 백작이 지난 부과 권력, 그리고 그와 얽힌 고위층들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결국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확실히. 기본적인 승산은 무에 가깝다 봐야겠지. 애초에 그 괴물이 만나고 있는 자는, 네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인물일 테니까.”
“뭐?”
“그래서 내가 이곳에 온 거다. 애초에 정리할 수 없는 실타래는 쓸모가 없으니.”
“그게 무슨…….”
“태워 버리면 그만이지.”
셰인의 말을 디라일라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지하실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쥐새끼가 숨어들었군.”
지하실에 들어온 인물은, 살리에르 백작의 충직한 기사, 워나드였다.
* * *
“이거……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언뜻 보면 여유로운 듯한 얼굴을 한 살리에르 백작이었으나, 그의 내심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방금 전.
그의 오랜 지기이자 믿음직한 기사인 워나드가 들렀다 나갔다.
지금처럼 중요한 손님을 맞이할 때 들어오는 일이 없던 워나드였지만, 이번만큼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침입자의 등장.
여태껏 지하 세계의 한 축을 주름잡던 살리에르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행해 온 일들은 대놓고 알려져선 안 되는 극비리의 일이었다.
그러니만큼 언제나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지도 몇 년이 지났건만.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이 별장에 침입자가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별장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실력자가.
“허허. 아닙니다. 오히려 여태까지 조용했던 게 다행인 일이지요.”
한편, 살리에르의 맞은편에는 그런 살리에르에게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짓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오늘 살리에르가 애타게 기다리던 손님 중 한 명이었다.
“방금 나간 기사는 4품의 엑스퍼트, 그것도 마스터에 다다른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닙니까? 실력도 좋고 노련하니, 금방 해결되겠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미소로 넘겼지만, 살리에르는 그럴수록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자가 어떤 사람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였지만, 정말 그를 좋은 사람으로 봐서는 안 된다.
잔혹하기로 따진다면 그는 애초에 살리에르조차 비빌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실상 살리에르 백작이 지하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것도, 그곳에 기반을 잡고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던 이유도 전부 눈앞에 있는 이 중년의 남자 때문이 아니던가.
수십 년 전에 겪었던 흑마법사들과의 전쟁 당시보다 지금 이 순간이 살리에르에겐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가 무서운 것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남자조차도 뒤에 배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정체를 떠올려 보면 자연스레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라는 그 이름 높은 백사자의 갈기.
‘저지먼트’ 기사단의 일원, 어먼스 J 다이라니까.
* * *
침입자, 셰인을 바라보는 워나드의 눈빛은 결코 곱지 못했다.
응당 그 눈빛은 침입자에게 보내야 할 당연한 시선이었지만,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워나드의 속 또한 그의 주군 살리에르만큼 새카맣게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오늘 같은 날에…….’
현재 위층에서 자신의 주군과 마주하고 있는 인물이 누구던가.
그 위명 높은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지 않은가.
황실의 제일 날카로운 검이자, 제국의 안녕을 위해 인정(人情)을 도려낸 말살자들.
그런 황실의 검이니 만큼 이는 현재 살리에르 백작이 하고 있는 일이 저 드높은 황실과 매우 연관이 깊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칫 여기서 그들의 눈밖에 나는 일이 벌어졌다간…….
저 감정 없는 검이 어디로 향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눈앞의 적을 처리하고 이 사건을 그저 작은 일로 치부해야만 했다.
“너의 배후가 누구인지 말하고 싶어서 빌게 만들어 주지.”
문답무용.
대답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워나드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세는 과연 심상치 않았다.
엑스퍼트, 그것도 4품 끝자락에 다다른 마력이 셰인의 피부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다.
‘그때 상대했던 트윈 헤드 오우거보다는 강하겠군.’
아카데미의 휴식기가 끝나고 돌아오던 당시 작은 마을에서 마주했던 트윈 헤드 오우거.
비록 썩은 나무 정령에 의해 움직이던 시체였지만, 워나드는 간소한 차이로 그런 트윈 헤드 오우거보다 우월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당시에는 가문의 기사들이 앞에서 시간을 끌어 둔 덕에 마법을 준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무엇도 자신을 지켜 줄 수 없는 상황.
거기다 이렇게 좁은 지하실은 마법사보다 기사가 월등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진 예상했던 대로군.”
물론, 셰인 또한 준비한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미숙한 척 흔적을 남기며 워나드를 이곳으로 유인한 게 바로 셰인이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담담한 셰인의 반응에 워나드가 미간을 좁히는 사이.
셰인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네 유용함을 보여 봐라.”
그 말은 앞에 있는 워나드도, 뒤에 묶여 있는 디라일라에게도 한 게 아닌.
여태껏, 이 지하실에 녹아 있는 고통과 절망을 닥치는 대로 씹어먹던 어느 한 존재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7화
17화 괴물 사냥 (3)
뭇 사람들이 듣기에 당연한 소리지만, 기사와 마법사의 일대일 전투는 대부분 기사가 유리하다.
특히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기사라면 상대가 뭘 하기도 전에 목을 베어 버릴 정도.
“헛.”
그러나 워나드의 검은 통념과는 다르게 셰인을 꿰뚫지 못했다.
“정령…… 이로군.”
낮은 침음을 뱉으며 워나드가 검을 갈무리했다.
정령이 어떤 존재던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워나드조차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문 존재들이지 않나.
‘정령술사를 상대한 적은 거의 없는데.’
게다가 어둠의 정령이 인간과 계약을?
워나드의 내면에서 방심이라는 단어가 지워졌다.
“정령이라. 거기다 에너지를 흡수하는 능력인가? 처음 보는 경우군. 그런데 과연 이 일격도 흡수할 수 있을까?”
워나드는 과연 노련한 기사였다.
고작 그 한 번의 충돌로 셰인이 가진 정령의 힘을 파악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에 대한 대비책까지 떠올렸다.
그의 말처럼, 어둠이라는 속성 자체가 가진 능력은 ‘흡수’.
방금 워나드의 검을 막았던 것 또한 어둠의 정령이 워나드의 검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흡수한 것이었다.
그걸 깨달은 워나드는 이 전투를 길게 끌고 가는 것보다, 단기간에 온 힘을 담아 단기결전을 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훌륭한 판단이군.’
셰인의 감상에 맞추듯, 워나드의 자세가 바뀌었다.
왼쪽 팔을 뒤로 빼고, 오른손으로만 검을 쥔 워나드의 찌르기 동작은 펜싱의 에페(Epee).
“하앗!”
워나드의 기합과 함께 그의 손에서 섬광이 쏘아져 나갔다.
금방이라도 셰인의 심장에 검이 닿으려는 찰나.
‘……무슨?’
워나드는 어느새 단검으로 스스로의 손을 베고 있는 셰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워나드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물러가고, 발광석에 의해 지하실이 다시 밝아질 때쯤.
“……뭐였지?”
먼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한 워나드는 자신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깨닫곤 의아해했다.
도대체 방금 전 있었던 일은 뭐란 말인가.
‘놈은?’
그렇게 워나드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귓가에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워, 워나드으…….”
“……?!”
그곳에는 귀족 차림의 한 소년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워나드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뒤로는, 단검을 든 채 소년의 목을 겨 두고 있는 셰인이 워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 도련님?!”
아니, 잠깐.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충성을 간직해 온 기사인 워나드는 순간적으로 주군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에 이성을 잃을 뻔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가히 초인적인 인내심이었다.
상대는 정체모를 힘을 사용하는 자다.
거기에 어둠의 정령과 계약한 것을 보면, 정신 계열의 공격을 해 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것이 환영으로 만들어진 도련님이라면?
감히 이따위 짓을 저지른 놈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리라.
워나드의 마력이 지하실을 메우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마력을 분석했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은 워나드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어, 어떻게?”
워나드의 기감에 걸린 도련님에게서, 그가 평소 느껴 왔던 마력과 동일한 사람의 마력이 느껴졌다.
여태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던 워나드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워나드으으…… 나, 무서워…… 여, 여기 너무 차가워…….”
“네노오오옴!!”
포효와 같은 워나드의 목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메우자, 그제야 셰인이 입을 열었다.
“참 재미있군.”
“뭐라?”
셰인의 말에 워나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고작 이목구비의 형태가 다르단 이유만으로 이종족들을 벌레 이하 취급하며 물건처럼 부숴 버린 네게도 아끼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으득-
셰인의 말에 워나드가 이빨을 부서져라 갈았다.
감히 그딴 더러운 쓰레기들과 도련님을 비교하란 말인가?
이따위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도련님이 놈의 손에 있는 동안에는 이쪽이 철저한 ‘을’이었으니.
챙그랑-
워나드의 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짓씹듯 내뱉는 항복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셰인의 대답은 무감정하기 그지없었다.
“없다.”
“뭣……?”
워나드의 반응이 채 끝나기도 전에, 셰인은 손에 들린 단검으로 소년의 목을 그어 버렸다.
“크이익--!”
피와 함께 목에서 터져 나오는 공기 새는 소리가 기형적으로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소년은 피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워나드를 바라보던 끝에 두 눈이 뒤집혀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으, 으아.”
그 모습을 본 워나드는 다리가 풀린 듯 휘청거리며 자신의 도련님이었던 것을 향해 걸어갔다.
“아아, 아아아아!”
천진한 웃음으로 언젠가 자신처럼 기사가 되고 싶다며 웃던 도련님의 얼굴이 워나드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흐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을 시작으로 도련님과 관련된 기억들이 머리를 헤집고 들어오며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워나드를 덮쳐 왔다.
고통, 절망, 비탄.
온갖 감정들이 그런 워나드의 내부를 채우기 시작하자 이는 겉잡을 수 없이 거대한 칼날이 되어 그를 헤집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들어 도련님의 원수를 죽음보다 더 한 고통에 처하게 하고 싶었으나.
워나드의 육신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이 붉은빛으로 물들며 점차 어둠이 그를 잠식해 갔고.
그 끝에 보이는 것은 어둠이었다.
* * *
“뭐, 뭐야…….”
워나드가 들어온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디라일라는 현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어둠으로 가득 채워졌던 지하실에 다시금 빛이 들어올 무렵.
디라일라는 아찔함을 느꼈다.
어둠이 사라진 자리에서 셰인은 옆구리가 거의 뜯겨져 나가다시피 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
그러나 그런 디라일라의 걱정은 기우라는 듯 셰인은 멀쩡히 서 있었고.
오히려 그런 셰인보다는 그와 마주하고 있던 워나드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쟤, 쟤는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디라일라의 말대로 워나드는 혼자 서 있다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얼굴에 선명한 긴장이 떠오르고, 이후에는 미친 사람처럼 처절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흐허허허헝!”
“흐아, 흐아아아!”
“아아아아악!”
그 모습을 본 디라일라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씨발, 무섭게 왜 저래…….”
“잡아먹힌 거다.”
어느새 지혈을 마친 셰인이 답했다.
“잡아 먹혀……? 당신이 부리던 그 정령한테?”
“아니.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에 먹히고 있는 거다.”
“뭔 소리야, 얘는 도대체.”
셰인은 거기서 더 설명을 이어 가지 않았다.
겉보기엔 여유 있어 보였으나, 셰인은 스스로의 부상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위험했군.’
확실히 워나드는 위험한 적이었다.
제아무리 셰인이 전생에 조직의 제1군단장이었다 한들, 당장의 몸으로는 저만한 기사를 마주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거기에 워나드가 구사한 섬광과 같은 찌르기는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놈이 가진 능력은 속성변화능력이었다.
워나드의 검은 마치 용수철처럼 그 찰나의 찰나밖에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바닥과 벽, 천장을 튕기며 셰인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왔다.
만약 두 눈에 마력을 중첩시켜 집중하지 않았더라면 고작 옆구리가 뜯겨 나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뿐인가.
[Krrr…… 죄송합니다, 주인님…….]
데미지를 입은 것은 셰인뿐만이 아니었다.
소환된 정령도 꽤나 지친 듯해 보였다.
이 지하실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했던 존재감은 온데간데없어졌을 정도.
어둠의 정령은 셰인의 내면에 있는 어둠을 현실로 형상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니.
그 어둠을 극히 일부 외부로 끌어낸 것만으로도 어둠의 정령은 모든 힘을 소진한 듯 보였다.
“상식적으로는 이 이상 전투를 이어 가기엔 무모한 일이겠지만…….”
셰인은 시선을 지하실의 출입구로 향했다.
그곳에서부터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고전하며 상대했던 워나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
상대방 쪽에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디라일라조차도 그 흉흉한 기세를 읽을 수 있을 수준이었다.
“뭐야. 지금 뭐가 오고 있는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디라일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 셰인은 부상을 입었고, 자신 또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지금 다가오고 있는 존재에게 도주는 불가능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과연 디라일라가 알까.
지금 다가오는 이 존재로 인해, 오히려 셰인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는 것을.
* * *
전생의 셰인은 이따금씩 자신의 성으로 찾아오는 디라일라가 반갑지 않았다.
“왜 자꾸 여기에 찾아오는 거냐.”
“그야, 여기에는 술이 넘쳐나잖아?”
멸망한 제국의 황성.
우습게도 이곳에는 디라일라의 말처럼 최고급 술들이 넘치도록 많았다.
수많은 귀족들이 머무는 곳이고, 그런 곳이니만큼 와인 저장고에서 실시간으로 술이 제조되던 장소였으니 말이다.
디라일라는 이따금 이곳에 찾아와 이렇듯 고래처럼 술을 빨아들이며 주사를 부리기 일쑤였다.
당시의 타락한 셰인은 그런 디라일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취할 수도 없는 육체를 망가뜨려 취하려는 모습은, 쓸데없는 자해로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푸하! 근데, 그것도 있지만 그냥 여기 오면 뭐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무슨 말이냐.”
딱히 그녀의 술주정 따위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은 단 1도 없었지만, 괜히 그녀가 취해 이 고성에서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이후 그녀가 돌아가면 술 창고를 죄다 부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셰인은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저 엿 같은 사자상 말이야.”
“사자?”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제국의 상징인 백사자의 동상이 여기저기 부서진 몰골로 흉물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걸 보면 내가 인간들한테 처음 납치당했던 기억이 떠오르거든. 그때 저 고양이 새끼들 중 한 놈을 봤었지.”
“…….”
“참, 그땐 그 새끼가 지옥에 올라온 괴물 새끼처럼 보였는데…… 꿀꺽, 꿀꺽.”
“…….”
“퍄! 근데 웃기지 않냐고. 그렇게 괴물 같은 놈들이, 실은 이 손에 그리 쉽게 찢겨져 나가는 반푼이들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리 말하며 디라일라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 표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의 셰인은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들이 쓰는 힘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병신 새끼들…… 그마저도 그 힘이 온전치 않다는 것도 모르는 그따위 반푼이들한테 두려움을 느꼈다라…… 여길 오면 그때가 떠올라.”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일 텐데 왜 여기까지 와서 그걸 상기시키려 하는 거지?”
셰인의 물음에 디라일라가 푸흐흐- 공기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그 거지 같은 것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증거잖냐.”
“…….”
그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디라일라는 고개를 푹 숙였고, 셰인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게, 전생의 셰인이 마지막으로 본 디라일라의 모습이었다.
* * *
“아무래도 직접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헛. 다이라 님께서 직접?”
황실에서 온 손님, 다이라의 목소리에 살리에르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예.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가는 길이 마음 편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끄응…… 이거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살리에르의 충성스러운 기사, 워나드가 지하실에 내려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다이라는 그럼에도 직접 움직이고자 했다.
그러자 살리에르의 속만 바짝 타올랐다.
가능하면 이 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가능한 한 빠르게 일이 끝나길 바랐건만.
그래도 워나드가 직접 일을 해결한다면, 그걸 다이라가 직접 본다면 그나마 떨어진 신뢰를 조금이나마 되찾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살리에르는 앞장서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그러시지요.”
반면, 다이라는 겉으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것과 다르게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쯧, 제국에 인재가 없군.’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는 살리에르를 보며 다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살리에르에 대한 인상은 좋은 편에 속했지만, 아직도 지금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그랬다.
워나드가 지하실로 내려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전투가 일어났으면 이미 진작에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이 됐음에도 지하실에서 느껴지는 기색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저택의 주인도 알지 못하는 이가 가장 비밀스러운 지하실에 찾아왔음에도 이렇게나 조용하다?
이 노쇠한 황실의 기사는 그게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직까지 워나드의 마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죽지는 않았으나, 상황이 그리 평탄하게 흘러가진 않고 있다는 반증일 터.
‘뭐, 반대로 생각하면 침입자 놈들을 잡아 심문할 기회가 될 수 있겠다만.’
적어도 자신의 눈이 없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그럼 침입자를 놓치는 일은 없을 테니.
‘쯧. 아무튼 일이 끝나면 저자에 대해서 단장님께 말씀드려야겠군.’
그래도 이번 일은 상부에 보고할 생각이었다.
당장 살리에르를 내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꼬리를 자를 준비를 하게 될 터.
그러나 다이라의 그 생각은 곧 쓸데없는 고민이 되고 말았다.
지하실의 문이 열린 순간 날아든 검은, 다이라의 ‘인식 범위’ 안에 있었음에도 막아 낼 수 없던 것이었으니까.
“어어……!”
퓨슉-!
그리고 다이라는 들을 수 있었다.
그 찰나의 찰나의 순간.
날카롭게 날아온 누군가의 검이 살리에르의 미간을 꿰뚫으며 나는 파육음을.
지하도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황실의 기사들이 십수 년간 갖은 노력을 하며 만들어 온 거물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순간이었다.
“……!”
그리고 살리에르의 미간에 검이 꽂히기도 전에 발검한 다이라는 볼 수 있었다.
새까맣게 물든 눈동자에 증오를 가득 채운 워나드가, 어느새 풀린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 피와 뇌수를 줄줄 흘리고 있는 살리에르를 바라보는 모습을.
“주…… 군……?”
짝- 짝- 짝-
그리고 그런 지하실 안쪽.
불길한 어둠으로 몸을 감싼 가면의 남자가 천천히 박수를 치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비극적인 연극이로군. 과연, 옛말 중에 틀린 게 없단 말이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보면 희극이라 했던가?”
느긋하게 치던 박수를 멈춘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리 멀지 않음에도 이는 충분한 희극이지 않나. 그렇지? 제국의 고양이.”
그 말에 다이라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백염과 같은 오러를 폭사하며 지하실 내부를 가득 채웠을 뿐.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8화
18화 괴물 사냥 (4)
“후우.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구먼.”
찬란한 백염의 오러를 뿜어내고 있는 다이라의 말이 지하실 안에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 말도 안 되는 무게감에 짓눌린 걸까.
털썩-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디라일라가 혼절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셰인은 그런 디라일라를 탓하지 않았다. 그만큼 다이라가 뿜어내는 기세는 어마어마했으니.
아직 내적으로 채 성장이 다 되지 않은 디라일라가 감당하기엔 힘든 적임이 분명했다.
“감히 고양이라는 말을 내뱉다니, 실력이 제법 있는 모양이야. 그리고 우리의 정체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고.”
“되다 만 쓰레기 냄새를 풀풀 풍겨 대는 놈들이 그리 흔하지는 않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지.”
“허허허, 되다 만 쓰레기라…… 자네, 도발을 제법 잘하는군. 내 앞에서 그딴 말을 내뱉는 이들이 언제 마지막으로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아.”
“늙은 고양이 앞에서 무얼 겁먹겠나.”
“그럼 어디 이 늙은이의 검을 받아 보게. 부디 살아남기를 바라지. 자네에게 들어야 할 말이 많을 것 같거든.”
이만큼 열이 뻗치게 만드는 상대가 얼마만이던가.
비단 셰인의 도발에서만 화가 나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지하도시를 길들이기 위해 키워 왔던 살리에르가 허망하게 죽었다는 것.
그로 인해 지하도시가 얼마큼의 격동을 겪을 것인가.
제국이 지하도시를 방치하고 있던 것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중 큼지막한 지분 하나가 무참히 박살이 나 버렸다.
그 사실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다이라는 시작부터 전력으로 백사자의 오러를 끌어올렸다.
이내 그의 온몸에서 분출되던 백염의 오러가 손에 쥔 검으로 옮겨가더니, 어느 순간 한곳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끔찍할 정도로 정제된 에너지.
아마 저 일검에는 이 저택조차도 단번에 날려 버릴 힘이 담겨 있으리라.
하지만.
셰인은 그런 가공할 힘 앞에서도 태연했다.
오히려 백염의 빛이 비추는 가면 너머의 눈빛엔 탐욕이 가득했다.
“타다 남은 찌꺼기 같은 오러지만, 그래도 거기에 담긴 파괴력만큼은…… 그래. 가지고 싶군.”
“……?!”
셰인이 말을 내뱉은 순간.
다이라는 한평생 느껴 본 적 없던 거대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는 그저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있을 때의 긴장감이 아니었다.
아예 검을 휘두르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경고는 그의 삶을 통틀어 처음이었으니까.
적의 빈틈이 보이지 않아서?
아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는 3품의 마스터에 이른, 그야말로 초인(超人).
상대의 움직임에 섞여 있는 허와 실 정도는 간단히 구분하고도 남는 실력자다.
그럼에도 그의 본능은 말 그대로 검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정확히는 눈앞에 있는 존재에게 자신이 가진 백사자의 오러를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라는 자신의 본능보다 자신이 겪어 왔던 수많은 경험을 믿었다.
‘무슨 사술을 부리는지는 모르겠다만…… 허튼 수작일 뿐이다.’
그래, 이건 사술일 뿐이다.
황실의 기사로 살아오며 무수한 적들을 처리해 온 그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술을 부리던 이들을 봐 왔고, 매번 본능의 경고를 느껴 왔었다.
그러나 그런 위기를 극복하고 적들을 분쇄할 수 있던 것은 이 백사자의 오러와 자신의 검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니.
이윽고 다이라의 검에 모든 에너지가 응축되었을 때.
“……?!”
태산의 일부마저 가를 수 있을 그 막대한 힘은 마치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꽃가루처럼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다이라의 얼굴에 충격이 떠오르고, 셰인은 가면 너머로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 * *
회귀 후, 셰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스스로의 내면을 관조해 왔다.
그러는 이유는 타락을 경계함과 동시에, 전생에 조직이 써 왔던 타락의 힘을 자신이 써먹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내면을 관조한 셰인은 제법 그럴듯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타락에 대한 원리를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타락의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사람이 가진 감정 자체에 ‘자의식’을 부여하는 것.
‘나 같은 경우는 몸에 질투의 화신을 만들어 낸 격이었지.’
그렇게 감정이 부여된 자의식은 감정 자체에 물리력을 부여해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감정의 힘.
셰인이 ‘오리진’으로 명명한 이 능력은 통념적으로 알려져 있는, 마력을 다루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능력이었다.
게다가 마력이 아닌 감정을 힘의 원천으로 이용하는 것인 만큼, 해당 감정이 존재하는 한 제약도 한계도 없는 힘이었다.
‘그래서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타락의 힘에 대한 원리를 파악한 셰인은 다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셰인이 타락의 과정을 건너뛰고 감정의 힘을 활용하기 위해선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감정에 물리력을 담아 외부로 분출할 통로의 부재, 다른 하나는 오리진으로 쓰일 감정 그 자체의 안전성 문제였다.
그리고 셰인은 장고 끝에 두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통로의 경우에는 타인의 감정을 먹고 그것으로 힘을 키우는 특성을 지닌 어둠의 정령이 훌륭한 대체재 역할을 했다.
셰인에 의해 소멸된 썩은 나무 정령의 흔적.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가지고 온 ‘마력의 근원’.
두 재료를 통해 만들어진 정령은 오로지 셰인에 의해, 셰인을 위해 탄생한 정령이었기에, 셰인의 감정을 외부로 분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 오리진에 담길 감정은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질투의 힘.
다른 군단장들이 지닌 감정과는 다르게, 셰인이 가진 ‘질투’는 독보적인 위력을 지녔으나 반대로 안정성이 불안정했다.
육체의 주인인 셰인의 의식마저 질투하여, 죽기 직전까지 본래의 의식을 배제시켰을 정도가 아니던가.
‘무턱대고 질투를 썼다간 잘못하면 정령이 삼켜지는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클라인을 향한 질투를 모두 없애 버린 지금의 셰인으로선 굳이 그 감정을 되살리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다른 감정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데…….’
셰인의 내면에 여러 감정이 떠오르다 가라앉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수많은 상념과 고민 끝에, 한 가지의 감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질투에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당장 셰인의 부족한 힘을 채워 줄 격렬한 감정.
바로 ‘탐욕’이었다.
* * *
“무, 무슨…….”
“음, 과연.”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다이라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가 검을 휘두르려는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변했기 때문이다.
저건, 무엇인가.
“이빨……?”
지금 있는 이곳이 지하실이란 건 똑같다.
하나, 지하실이 지하실이 아니게 되었다.
평범한 벽돌로 쌓아 올려진 벽은 날카롭게 돋아난 이빨과 꿈틀대는 혀로 들어차 있었고, 바닥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이 늪처럼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 혐오스럽고 괴이한 광경에 얼이 빠지기도 잠시.
다이라의 귓가에 셰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족스럽진 않다만, 그래도 지금으로썬 이 이상은 과욕이겠지.”
셰인이 보란 듯이 한쪽 손을 들었다.
“어, 어떻게!”
그렇게 들어 올린 셰인의 손 위로는, 다이라가 평생을 갈고닦아 왔던 순백색의 오러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다이라가 봐 왔던 그 어떤 오러보다 찬란한 빛을 띄우며!
“말도 안 돼…….”
그런 오러를 잠시 바라보던 셰인은 주먹을 쥐어 힘을 갈무리하고는 다시금 다이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세상에 배신당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이라.
그런 그에게, 셰인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되다 만 쓰레기라지만, 그나마 써먹을 구석은 있었군.”
“뭐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황망해하기도 잠시, 어둠으로 가득했던 바닥에서 거대한 입이 아가리를 벌려 왔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다이라가 오러를 끌어올리려 했으나.
“아, 아니! 왜 오러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백사자의 오러.
항상 자신의 의지를 따라 움직여 왔던 오러가 이제 와서 배신하다니?
절망에 빠질 틈도 없이, 거대한 입이 순식간에 다이라의 몸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렸다.
* * *
“으헉?!”
언제 정신을 잃었던 걸까.
발작을 일으키듯 눈을 뜬 디라일라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한 천장의 무늬 하며 미묘하게 부드러운 침대.
이곳은 영락없는 자신의 기숙사 방이었다.
“꿈…… 이었나?”
“그럴 리가 있나.”
“히에엑!!”
들려오는 목소리에 디라일라는 다시 한번 발작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주변을 훑어봤다.
이내 한 인영이 창가 너머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너, 너는!”
“정신이 좀 들었나?”
“꿈이, 아니었구나.”
일렁이는 어둠 속에 서 있는 가면의 남자, 셰인을 마주한 디라일라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런 일을 겪고도 꿈일 거라 생각할 정도로 어수룩한 건가. 아니면 그 일이 꿈이길 바라는 건가. 어느 쪽이든 현실을 도피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지.”
“큭…….”
다짜고짜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말에 디라일라가 신음을 내뱉었다.
맞는 말이다.
디라일라는 그 일이 꿈이길 바랐다.
적어도 인간들의 그런 어두운 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는 본능적인 방어 기제였다.
“자, 잠깐.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탈출한 거지? 분명 거기에…….”
“잡종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었지.”
“마, 맞아! 그거, 저지먼트 기사단 맞지? 황실 소속 기사단!”
“맞다.”
“어떻게 도망친 거…… 예요?? 그 말도 안 되는 괴물한테서…….”
“도망칠 필요까지야.”
“예?”
“그런 잡종 하나 정리하지 못할 거였으면 애초에 널 구하러 가지도 않았을 거다.”
“……도대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뭐란 말인가?
디라일라는 혼란스워졌다.
저지먼트 기사단.
이는 제국에서 신성시 되다시피 하는 이름이다.
대전쟁 당시에 수많은 위기에서 제국을 지켜 냈으며, 황제의 오른팔로 칭송받는 기사단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의 힘은 일반적인 기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단적인 부분이 바로 오러.
그들의 오러는 하나같이 마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지녔다고 평가받았다.
같은 3품의 마스터라도 일반 3품의 기사와 저지먼트 소속의 기사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아득한 힘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존재를 죽였다고?
“믿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
이 이상 물어봐야 별 소용이 없겠다 싶어, 디라일라는 주제를 옮겼다.
“그럼 그 저택의 사람들은 어떻게 됐죠?”
“이제 이 세상에는 없다.”
“아…….”
그러자 디라일라가 무언가 걸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그 꼬맹이도, 죽었겠죠?”
“……재미있군. 그놈이 무슨 짓을 행해 왔는지 알고 있음에도 걱정을 하는 건가?”
“걱정하고는 거리가 조금 있지만…… 말이죠.”
어린아이였다. 물론 디라일라 또한 그 저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수업했던 그 아이가 어떤 짓을 했는지도.
때문에 디라일라가 살리에르 백작의 아들에게 동정심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린아이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익히 알던 아이였다는 것.
그것에서부터 오는 근본적인 씁쓸함이었으니.
실상 셰인이 저택에 들어가 가장 먼저 죽인 존재가 바로 살리에르 백작의 아들이었다.
녀석을 죽여 영혼을 회수하는 것으로 셰인은 워나드의 정신을 무너뜨렸던 것이니까.
“……여러모로 같군. 그때와.”
“예?”
“아무것도 아니다.”
회귀 전의 디라일라는 숱한 배신을 당하고도 다른 존재를 믿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비단 인간이 아니더라도, 다른 종족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셰인은 그런 나약한 모습의 디라일라가 마냥 싫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의 디라일라는 인간의 적이 아닌, 인간의 편에서 싸워야 했으니.
“저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왜 저를,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구해 주신 겁니까?”
“너한텐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가치……?”
“언젠간 알게 될 거다. 너는 아직 네가 가진 재능이 뭔지 모르니.”
“…….”
재능.
디라일라는 과연 자신에게 있다는 재능이 무엇일지 궁금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눈앞의 존재가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본인의 재능이라면 본인 스스로가 깨달아야 할 테니까.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다. 그때까지는 처신을 잘하고 있도록.”
“다시요? 아니 그런데.”
“뭐지?”
“한심한 말이겠지만…… 제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그 물음에 셰인은 디라일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당장은 괜찮은 듯 보였지만, 그녀는 방금 막 납치를 당했다.
그것도 지하실에 남아 있는 그 끔찍한 감정들을 공유한 채로.
아직까지 인간에 대한 증오에 다다르진 않았으나, 불신은 뼛속까지 새겼을 것이다.
디라일라는 여전히 혼자였고, 의지할 곳이 없는 나약한 소녀에 불과했으니.
“남을 믿지 못하겠으면, 찾아야지.”
“예?”
“네가 스스로 판단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
셰인의 말에, 디라일라의 두 눈이 커졌다.
어찌 보면 식상할지도 모르는 말이겠으나, 이는 디라일라의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와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디라일라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너희 모두 알고 있겠지만, 4개월 뒤 계급심사가 있다.”
지휘학과 수석교수인 벤자민의 말에 생도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계급심사. 제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계급인 품계(品階)를 두고 하는 심사다.
20살 이후, 혹은 아카데미 5년차에 들어서부터 신청할 수 있는 이 심사는 당연하겠지만 모든 생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험이었다.
품계가 곧 사회의 계급이었으니.
“외부의 계급심사와 다르게 아카데미에서의 계급심사는 학과점수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본인의 적성에 맞는 시험도 따로 봐야겠지만 말이다.”
특히 지휘학과에서의 점수는 계급심사에서 고득점으로 취급되기에, 정작 시험의 필기 부문에서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평가 점수가 아득히 높아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다.
괜히 아카데미에서 가장 엘리트들만 모이는 학과가 아닌 셈이었다.
“그러니 던전 능력 평가 점수를 위해 앞으로 함께할 동료를 구하는 건 당연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지휘학과에 들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던전에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그 말인즉 본인의 탐험대를 꾸려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에 마음이 함껏 부푼 생도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대답했고, 셰인은 그 가운데서 홀로 계산을 시작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9화
19화 메자이아 대수림 (1)
클라인은 굉장히 흐뭇한 눈빛으로 제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팀에 넣어 달라는 건가?”
“엉. 안 될까?”
그도 그럴 것이, 아카데미에서 흔히 요즘 애들의 말로 ‘아싸’ 중의 아싸로 취급되는 자신의 형에게 팀원이 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한편, 셰인은 셰인 나름대로 당황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디라일라였으니까.
“……왜지?”
지금은 셰인이 디라일라를 구한 지 이틀째 되는 날.
비록 필요로 인해 디라일라를 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벌써부터 디라일라와 접촉하는 건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경계심이 많은 디라일라의 성격상 천천히 관계를 쌓아 나갈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디라일라가 셰인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셰인조차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최근에 좀 거시기한 일을 당했잖아.”
한창때의 소녀가 거시기라는 말을 한다는 게 심히 유감스러운 부분이었으나,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셰인이 아니라 옆에 있던 클라인이었다.
“아…… 그랬지요. 살리에르 백작. 그자가 그런 짓을 일삼는 사람일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지먼트 기사단의 일원마저 한 분 희생됐다 했죠?”
“어, 어. 그치. 응.”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그러했다.
디라일라가 구출된 새벽이 지난 다음 날 아침.
세간에는 대대적으로 특종 기사가 터졌다.
바로 살리에르 백작이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지하도시의 한 축을 주름잡던 일원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의 냄새를 맡은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차에 전투가 발생.
그 자리에서 살리에르 백작과 그런 백작의 수호기사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저지먼트 기사단원은 그 과정에서 독에 중독되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에는 아카데미 소속의 이종족 생도가 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까지 기사에 면밀히 드러났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 빨리 알려진 거지?’
물론 디라일라는 하루아침에 사방에서 이어지는 관심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기사의 내용대로였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살리에르 백작에게 납치되어 감금됐었고, 그 여파로 기절한 상태였다고.
저지먼트의 기사단원이 희생된 일이다.
당연히 황실 직속의 수사관이 등장했고, 디라일라는 잔뜩 기가 죽은 채로 그런 그들의 수사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는 디라일라의 기억을 읽는 마법을 펼쳐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왔으나, 이는 아카데미 총장에 의해 무산되었다.
타인의 정신에 얽히는 마법은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물론, 그 모든 것을 꾸민 이는 셰인이었다.
연합국의 유명 신문사에 어느 정도 날조한 내용을 풀어낸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정보를 알리면 황실측에서도 디라일라를 해코지하지 못할 테니까.
거기에 아카데미에서도 이번 일을 상당한 스캔들로 보고 있었다.
감히 연합국 아카데미에서 보호하고 있는 이종족 생도가 납치를 당했다니!
아카데미에서 황실 직속 수사관으로부터 디라일라를 보호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아, 아무튼 그때 그 일로 좀…… 아무한테나 기대기가 어렵더라고.”
“이해합니다. 분명 힘드시겠지요. 하지만 인류에는 그런 말종과 같은 인간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디라일라 양.”
그러면서 클라인은 안타깝다는 눈동자로 그런 디라일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이에 사방에서 느껴지는 눈총!
“헉.”
그 순간 디라일라는 아카데미 여생도들에게 위험도가 격상됐다.
“그런데 그게 나를 찾아온 것과 무슨 상관이지?”
“그게, 들어 보니까 넌 사람들한테 영 무관심한 거 같고…… 그게 이종족이든 사람이든 똑같을 거 같아서. 그리고 너 실력도 대단하다고 들었고.”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셰인에 대한 이미지는 제법 나아진 상태였다.
물론 여전히 동생을 질투했던 적이 있는지라 사람들의 눈빛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지만.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인 연합국 아카데미에서, 엘리트만 모인다는 지휘학과 1등을 차지한 사실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받게 된 것이다.
“사람 앞에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말은 그렇게 했으나, 셰인에게 있어서 이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일단 디라일라는 훗날 셰인에게 있어 중요한 일을 해 줘야 할 인물이었으니 가까이 있을수록 좋았다.
“오케이, 그럼 앞으로 너랑 같이 던전 가는 거지?”
잠시 고민하는 척 연기를 하며 끝내 디라일라를 받아들이자, 그녀가 눈에 띄게 밝은 표정을 지었다.
디라일라는 디라일라대로 셰인의 뒷배는 믿음직스러웠으니 말이다.
연합국에서 셰인과 클라인의 가문, 클레이튼 가문은 모든 상인들이 한 다리씩 거쳐 가는 거대 귀족가이지 않나.
이미 앞서 살리에르 백작에게 한 차례 데이기도 했고, 저지먼트 기사단원인 다이라의 충격적인 정체도 봤던 터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색안경을 끼고 봤다간 어느 누구 하나 믿을 수 있겠냐.’
물론 여전히 인간에 대한 불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걸 내색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저지먼트 기사단원의 희생이라니. 아마 그래서 요 며칠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겠지요, 형님?”
“음. 아마도.”
클라인의 물음에 셰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습을 보이지 않다니? 누구 얘기하는 거야?”
셰인의 팀에 들어가게 된 게 확정되면서 디라일라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네이스 양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아.”
아네이스.
저지먼트 기사단의 전대 단장의 딸.
그녀는 며칠 전,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도 장례식장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일 터.
셰인은 그 얘기를 듣고 있는 중에도 얼굴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우리가 굳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음, 냉정하게 말하면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하.”
그 말에 클라인은 씁쓸하게 웃었고, 디라일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네이스는 디라일라도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 대화도 주고받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디라일라에게 아네이스는 나름 괜찮은 사람에 속했다.
적어도 자신을 색안경 끼고 보는 일은 없었으니까.
만약 지난 사태가 없었더라면, 디라일라는 한 번쯤 그녀의 팀에 들어가 보기 위해 찔러 봤을 터.
그러나 디라일라는 이후 그녀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애초에 그리 친하지도 않았지, 참.’
그래, 깊이 생각할 거 없다.
디라일라는 그리 단정 짓고 비 내리는 창가를 바라봤다.
* * *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아네이스의 몸을 차갑게 만들었음에도, 아네이스는 자신의 발 아래 있는 무덤을 바라봤다.
이로써 두 번째 이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이스는 이 감정이 도저히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인은 독살…….”
백사자의 오러라면 어지간한 독은 대부분 막을 수 있을 터였으나, 정체 모를 독에 당한 다이라의 시신은 마치 온몸의 수분을 전부 빼앗긴 듯 비쩍 마른 미라 같은 상태였다.
아네이스는 다이라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어려서부터 아네이스는 저지먼트 기사단원들과 관계가 깊었다.
아버지의 곁에서 검을 배울 때면 기사단원들은 거기에 껴서 그녀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모두 피가 이어진 이들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그녀에게 삼촌이요, 오빠였고, 가족이었다.
그랬던 이 중 다이라는 마치 나이 많은 큰아빠 같은 사람이었다.
허허로운 말투 하며, 그가 휘두르는 검에서는 언제나 그 특유의 말투처럼 여유가 묻어나오곤 했었다.
그런 그가, 정의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정의롭게, 죽었다고.”
아네이스는 장례식 도중에 줄곧 들어왔던 그 말을 떠올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정의를 위해 죽은 다이라에 대한 믿음을 보였으나, 아네이스는 줄곧 가지고 있던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정말 정의를 위해서였나요?”
차마 다른 이들에게는 물을 수 없던 그 물음을, 이제는 땅 아래 묻힌 다이라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 * *
“마력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답해 볼 사람이 있습니까?”
지휘학과 교수 자하드의 물음에 생도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답했다.
“마력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입니다.”
“그리고요?”
“마력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일차원적으로는 물, 불, 바람, 흙이 됩니다.”
“또?”
“어…… 그리고 그러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환경은 던전의 불가해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자하드의 말에 일어선 생도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방금 생도의 말처럼 마력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원소입니다. 때문에 우리 지휘자들은 모두 마력에 정통해야 하지요.”
전쟁이 목표인 지휘자와, 던전을 탐험하는 지휘자는 결이 다르다.
둘 모두 적을 상대해야 함은 맞으나, 던전은 거기에 환경적 요소가 추가된다.
“자, 방금 말한 생도의 대답을 인용해서…… 그 불가해한 환경을 지닌 지역을 꼽자면 어디가 있겠습니까?”
“메자이아 대수림입니다!”
생도 중 한 명이 그리 답하자, 대부분의 생도들이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예. 메자이아 대수림.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요람 중 하나죠.”
그러면서 자하드는 칠판에 마법도구를 활용하여 몇 가지 영상을 재생시켰다.
“보다시피, 메자이아 대수림은 어마어마한 우기로 인해 토벌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죠.”
현 인류는 마력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능을 손에 쥐었다.
때문에 고작 ‘비’라는 환경 하나만으로 던전의 공략이 완전히 막히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던전 토벌에 애를 먹는 이유는, 그 비가 평범한 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강산성의 비가 내리거나, 혹은 맞는 것만으로도 신체를 무겁게 만드는 비, 영하의 온도를 지닌 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모두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다.
영하로 내려가면 우박이 내려야지, 왜 비가 되어 내린단 말인가?
그러나 이 불가해한 일들은 모두 마력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지휘자들은 그러한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도 재빠른 대처를 할 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때, 생도 한 명이 손을 들어 물었다.
“그럼 그러한 환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를 데리고 다니면 되지 않습니까?”
“좋은 질문이군요. 확실히 인간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홀로 할 수는 없는 존재지요. 하지만 지휘자의 판단 일분일초에 따라 전장의 상황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직접 상황을 인지하고, 파악하고, 결론을 낼 수 있어야 하죠.”
탐험가의 지휘자는 단순히 지휘 하나만 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제부터라도 던전에 대한 기본적인 마력과 구조 이해가 필요로 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있는 생도들 대부분이 마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력이 있는 이들이다.
그런 실력마저 없었으면 이 지휘학과에는 발도 들이지 못했을 테니까.
자하드는 한쪽에 조용히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어느 한 생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예를 들면 이번 시험에서 오스튼 생도와 셰인 생도처럼, 던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면 팀을 꾸릴 때보다 높은 수준의 팀원을 끌어들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모험단에서 스카우트, 또는 협업 제의가 올 수도 있죠.”
그러면서 자하드는 셰인을 향해 시선을 보내왔다.
……이윽고 수업이 끝나고.
‘마력과 던전의 고찰’의 교수, 자하드가 셰인을 따로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 교수님.”
“아, 셰인 생도. 어서 오세요. 일단 축하한다는 말부터 해야겠군요.”
“축하 말입니까?”
“예. 일단 이것부터 한 번 읽어 보시죠.”
자하드의 개인 연구실에 도착한 셰인은 그가 건네는 서류를 보고 읽었다.
“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협업 제의.
아까 수업 시간에 들었던 것처럼, 이따금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생도들은 외부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협업 제의를 받기도 한다.
최근 셰인이 시험에서 낸 짧은 논문은 메자이아 대수림 지역의 대우기에 관한 내용이었고, 아무래도 모험단 중 하나가 이런 셰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왔군요.”
“아무래도 상대측에서 그만큼 조급하다는 거겠죠. 어떻게, 한번 만나 보겠습니까?”
자하드의 물음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자이아 대수림.
5대 요람 중 하나에 포함되는 그곳에는 셰인도 빠른 시일 내에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0화
20화 메자이아 대수림 (2)
“단장,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지휘학과에 들어간 생도를 데리고 가겠다는 건…….”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자신의 단원의 말에 타오르듯 붉은 단발의 여인, 라비아타는 손에 들린 종이를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 메자이아에는 가 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 글을 쓴 거라고. 너, 가보지도 않은 던전에 이 정도 수준의 논문을 쓸 수 있겠어?”
“그거야 물론 아닙니다만…….”
“나도 이런 생각은 못해 봤어. 세상에, 드래곤 하트라니!”
“하지만 어디까지나 책상물림이 생각한 공상 이론 아닙니까. 이걸 믿고 그대로 데리고 가자는 건!”
“물론 그렇지. 그런데 그걸 확인하려고 가는 거 아냐. 어차피 우리도 가야 하는 길이고.”
“끄응…….”
라비아타의 말에 모험단원, 제임스는 눈가를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비아타의 말처럼 이 논문은 그저 공상이라고 낮잡아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특정 불가능한 패턴의 대우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발상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상은 인지 외에서 일어나기에, 괴현상이라 판단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꼬맹이가 그래서 낸 결론이 드래곤 하트란 말이지…….”
드래곤 하트.
차갑게 식은 모험가의 심장마저 뜨겁게 달굴 단어.
고대 모든 종족의 정점에 섰다는 위대한 존재의 심장은 마력의 원천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정순한 마력이 가득하다고 한다.
얻는다면 어디 불로불사로 끝날까.
인간들의 기준으로 신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될 터.
셰인의 논문에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대우기가 일어나는 이유를 드래곤 하트에 있다고 판단했다.
정확히는 그곳에 드래곤의 사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은 것이다.
“여기에 적혀 있다시피 아예 공상라고만은 할 수 없어. 고대 문헌에 따르면, 드래곤이 죽은 곳 부근에는 드래곤 하트에 깃든 마력이 자연으로 돌아갈 때 다양한 괴현상들이 일어난다고 하니까. 당시에는 마력 패턴을 짤 기술이 없어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만약 이 논문에 적힌 것처럼 드래곤…… 그것도 장로급 드래곤의 사체가 봉인됐다면 그 괴현상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논리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고.”
그랬다.
셰인이 한 것은 이미 세간에 퍼져 있는 메자이아 대수림에 대한 논문에 힘을 실어 줄 가상의 증거를 제시한 것이다.
“거기에 여기 보면 그 이유까지 적혀 있잖아.”
[만약, 드래곤이 죽기 직전에 아카샤의 대봉인이 이루어졌다면 메자이아 대수림에 끝없이 펼쳐진 마력의 파장에 대한 정의가 가능해진다.
대봉인으로 인해 만들어진 던전은 ‘멈춰진 세계’이기 때문에, 마력 또한 가둬진 채로 세계의 의지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당시의 현상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비록 세계의 의지에 의해 마력이 봉인되었다고 하지만, 마력이란 본래 세상을 이루는 요소. 세계의 의지에 완벽히 저항하진 못 했으나, 자신들로 인해 망가진 자연을 되돌리고자 끊임없이 자신들의 원소를 바꾸는 것이다.]
논문에 나타난 이 가설은, 여러 학파에 속한 학자들이 과거 자신들이 냈던 메자이아 대수림의 논문을 끄집어내 교차 검증하는 등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물론 아직 던전에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지금은 시작 단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학자들만큼 불타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모험가들이었다.
그들은 학자들만큼 뛰어난 지식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말하길,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죽은 드래곤의 사체가 잠들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는 단숨에 모험가뿐만 아니라 귀족들조차도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이었다.
“그러니 남들이 선점하기 전에 우리가 데려가야지. 그만큼 선견지명이 있다는 거 아냐.”
“후……. 그럼 하다못해 시험은 치러 봐야겠습니다. 그 5대 요람 아닙니까. 그곳에 데려가는 만큼 최소한 자기 몸을 지킬 수준은 되어야겠죠.”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언제 내 멋대로 한 적 있나.”
“그게 바로 지금입니다만?”
그렇게 둘이 한참 수다를 떨고 있을 무렵, 방문을 열리며 다른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지휘학과 교수 자하드라고 합니다.”
“여, 자하드! 오랜만이야?”
젋은 축에 속하는 자하드 교수는 라비아타의 인사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예. 오랜만입니다.”
“참나. 딱딱한 건 여전하네. 그래도 같은 동기인데 말이야.”
“라비아타의 공주님 아니십니까. 예의를 지켜야지요.”
그 말에 반응한 사람은 다름 아닌 셰인이었다.
‘그 이동국가 라비아타라.’
지금은 사라진 헤르메스 모험단과 동격을 이루고 있는 라비아타 모험단.
소수정예의 모험단으로 ‘이동국가’라는 이명을 받을 만큼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지닌 존재들.
실제로 그들은 아직 7대 요람이 자리하고 있을 적, 첫 번째 요람과 두 번째 요람의 토벌 작전에 큰 기여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라비아타가 드래곤 하트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은 전생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하니 처음부터 이동국가가 직접 나설 줄은 셰인조차 생각지 못했다.
“하여튼 그게 딱딱하다는 거야. 그래, 저 무표정한 녀석이 소란의 주인공인가?”
“맞습니다. 셰인 생도. 인사하세요. 이쪽은 이동국가 라비아타 모험단의 주인인 라비아타 클로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클레이튼 R 셰인입니다.”
셰인이 앞서 얌전히 인사하자 라비아타가 흥미를 보였다.
“이야. 소문으로 듣던 거랑은 다르네. 게다가 클레이튼이면 꽤 유명한 가문인데…… 예의도 바르고.”
자신을 만나기에 앞서 먼저 조사를 했다는 걸까.
셰인은 굳이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고 답했다.
“메자이아 대수림 탐사의 협업과 관련돼서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라비아타도 씩 웃었다.
라비아타는 다른 국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신분이랄 것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이동국가 라비아타의 주인을 감히 누가 얕보겠냐마는, 귀족의 신분도 아닌 자가 귀족을 뒷조사를 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는 셰인을 기꺼이 본 것이다.
그만큼 이쪽 세계의 기본은 알고 있다는 의미였기에.
“음, 본론부터 꺼내는 것도 내 성격하고 맞고. 좋아, 우선 네가 말한 용건으로 찾아온 거야. 당연하지만 이 논문 때문이지.”
“당연히 메자이아 대수림까지 동행하겠군요.”
“잘만 계약이 된다면 요람 안에서 활약할 기회도 생기겠지.”
라비아타는 스스로가 갑의 위치에 있음을 잘 아는 듯한 태도였다.
실제로 셰인이 제아무리 연합국의 거대 상단의 집안이라고는 해도, 라비아타쯤 되는 모험단을 압박했다간 전 국민에게 배척당하게 된다.
연합국에게 있어 모험가란 반쯤 신성시되는 존재들이었으니.
셰인도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대로 얌전히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어떤 조건인지 봐도 되겠습니까?”
“성격 한 번 마음에 드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모험단이 아직 내 독단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어서. 제임스!”
라비아타의 부름에 여태 옆에 서 있던 청년이 앞장섰다.
“안녕하십니까. 라비아타 모험단의 회계를 담당하고 있는 아르디아 제임스라고 합니다.”
그의 인사에 셰인도 똑같이 인사를 하자, 제임스가 설명을 이었다.
“알다시피 메자이아는 그 험난한 자연재해에 걸맞도록 위험한 몬스터들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무력을 시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습니까.”
“예. 앞서 알아본 바, 셰인 생도의 실전 평가는 작년까지 그리 좋은 평은 받지 못하고 있더군요.”
맞는 말이다.
회귀 전, 이 시기의 셰인은 클라인에게 압도되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잔뜩 위축된 상태였고, 마법사에게 그런 심리 상태는 극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어떤 대련을 하든 쉽게 당황하고 감정의 컨트롤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평가 점수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을 터.
“물론 어느 정도 평균은 됩니다만…… 솔직히 이 정도로 메자이아 대수림에 진입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 판단됩니다.”
제임스의 표정에는 별다른 악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 눈에서는 스스로의 주제를 알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스스로의 주제를 알아야, 본인이 나설 때와 그러지 않을 때를 분간할 테니까.
실제로 제임스는 여전히 셰인과의 협업은 시기상조라고 보는 입장이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싹이 명예에 취해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이 먼저 협업을 하자고 요청해 놓고 이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예의와 거리가 멀었지만.
“자자,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고──.”
“테스트가 제게 필요하다면 치르겠습니다.”
“응?”
반대로 셰인과의 협업을 원하던 라비아타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할 때, 셰인이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먼저, 계약 조건부터 듣도록 하죠.”
그러면서 셰인은 담담한 눈빛으로 제임스를 바라봤다.
“……이건 제 실수로군요. 인정하고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셰인의 눈빛에 제임스가 먼저 한 발 물러섰다.
그 이름 높은 라비아타 모험단의 회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셰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만한 명성을 지닌 모험단이었기 때문이다.
모험가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 앞에서는 언제든 예의를 잃을 수 있었지만, 계약 하나만큼은 반드시 절차를 따라야만 했다.
당장 제임스는 셰인에게 계약내용도 보여 주지 않고 다짜고짜 테스트부터 봐야 한다 주장했으니.
이는 명백히 모험가로서의 기본 질서를 지키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제임스는 스스로의 행동에 일말의 변명도 없이 깔끔한 사과를 내놨고, 셰인도 조용히 받아들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라비아타와 제임스의 내면에 셰인에 대한 점수가 조금 올라갔다.
적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는 아니겠구나.
“흠…….”
건네받은 계약서를 바라보며 셰인은 찬찬히 읽어 나갔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테스트는 어떤 식으로 진행됩니까?”
“던전의 진행은 앞서 아카데미의 시험으로 충분히 봤으니, 순수한 무력을 볼 예정입니다. 간단한 대련입니다. 저하고의 대련을 통해, 제 몸에 손이 닿는 것을 셰인 생도의 승리 조건으로 정하겠습니다.”
거기에, 자신은 마력을 쓰지 않겠다는 제임스의 덧붙임까지.
비록 그는 라비아타의 회계를 담당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등급 모험단의 어지간한 베테랑보다도 강한 무력을 쥐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라비아타 모험단의 재산을 지킬 수 없을 테니까.
“…….”
그러나 셰인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제임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조건에 불만이 있으십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해야…….”
다시 한번 셰인이 말을 끊었다.
“추가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찾아간 게 아닌, 라비아타 측에서 저를 찾아왔으니 한마디 말해 볼 위치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건 셰인이 아니라 저쪽이라는 말이다.
제임스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진 몰라도,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라비아타의 체면이 있었다.
“……좋습니다. 무엇입니까?”
“대련에서 승리 시, 계약에 변경 사항과 추가 사항을 넣고 싶습니다. 대신 대련 상대를 바꾸겠습니다. 제 대련 상대는.”
그러면서 셰인의 시선은 제임스에서 뒤쪽 소파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던 라비아타가 있었다.
“엥. 나?”
물론, 그 웃음이 황당함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셰인 생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아무리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조건이 있어도…….”
“조건이 그것뿐은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셰인의 말에 자하드가 침음을 내뱉었다.
실제로, 이번 대련은 솔직히 말해 대련이라는 이름조차 붙이기 힘들 정도로 셰인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만들어졌다.
제한 시간은 총 10분.
10분 안에 셰인이 라비아타의 신체에 물리적 접촉을 하지 못하면 테스트는 탈락이고 동행은 무산된다.
물론 라비아타의 무력이 무력인 만큼 그녀는 대련이 시작되고 5분 동안 일정 구역에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페널티를 가지고 있으나.
아무리 마력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라비아타쯤 되는 인물에겐 그까짓 마력이 없다 하더라도 셰인 정도의 무력을 짓밟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터.
말이 10분이지 5분 후 라비아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셰인이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수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거기에 상대할 방법도 미리 생각해 뒀습니다. 그리고, 테스트에 실패한다 해도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
물론 그 유명한 라비아타 모험단과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은 아쉬울 테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다.
셰인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비단 라비아타 모험단만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니 제가 더 이상 참견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자하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셰인은 이내 아카데미 내에 마련된 대련장에 도착한 라비아타와 마주섰다.
“자, 준비는 됐겠지?”
“예.”
“그럼 바로 시작하자고.”
간단한 준비 동작조차 없이 라비아타는 대련장 한가운데 서서 셰인을 바라봤고, 셰인은 기다릴 것도 없이 양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라비아타가 셰인의 손에 마력이 집중됐다는 것을 인식한 것과 동시에.
파앙-!
주먹만 한 마력탄이 라비아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1화
21화 메자이아 대수림 (3)
마법사의 캐스팅 속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쟁이 오가고 있다.
그야 던전은 항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고, 그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빠른 캐스팅이 전제되어야만 마법사들도 안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마법사는 메모라이즈 마법으로 미리 준비하고.
또 어떤 마법사는 스크롤을 마련해 두고 위험에 대응하기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즉발 캐스팅이다.
아무런 전조 없이 검사가 검기를 뽑아내듯 곧바로 마법을 쏘아낼 수 있는 능력.
많은 탐험 마법사들은 그러한 경지를 꿈꾸지만, 실상 그 경지에 다다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일까, 라비아타는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뿐.
그녀의 주변에서도 즉발 캐스팅을 하는 마법사가 없던 것도 아니거니와, 더불어 이런 걸로 놀라기엔 그녀는 너무 많은 상황을 겪어 왔다.
파앙-!
간단히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셰인의 마력탄이 조각나 사방에 퍼졌다.
물론 셰인 또한 라비아타가 고작 이 정도로 당황하진 않으리라 예상했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호.”
즉발 캐스팅을 할 수 있는 마법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렇듯 1초에 수차례 가능한 마법사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잠깐 사이에 바람처럼 날아오는 6개의 마력탄이 다양한 곡선을 그리며 동시에 날아왔다.
“흡.”
그 파괴력 하나하나가 묵직한 돌덩이를 날린 것과 같아, 잘못 맞으면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질 만한 것들이었지만.
라비아타는 한 차례 숨을 들이마시고는 순식간에 모든 마력탄을 주먹으로 때려 부숴 버렸다.
“후. 알아본 거랑 진짜 많이 다르네?”
“…….”
라비아타는 나름 진심을 담아 칭찬을 했지만, 셰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으로 다중 캐스팅을 이루어 낼 뿐.
다시 한번.
“오? 또 있어?”
이번에는 셰인도 가만히 서서 마법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라비아타를 중심으로 외곽을 돌면서 마력탄을 소환하는 좌표를 지정.
이번에는 앞뒤로 마력탄이 날아들며 사방을 포위하듯 날아왔다.
라비아타의 눈에 경탄의 빛이 어렸다.
단순히 마력탄을 많이 소환하는 게 아니었다.
어느 마력탄은 느리게, 어느 마력탄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제각각의 속도 차를 그리며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외곽을 도는 셰인의 움직임은 상대의 주의를 이끌면서 거리를 벌리는 역할까지.
철저한 심리전을 구상해 두고 이뤄지는 대련은 평범한 아카데미 생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노련했다.
마치 사람을 상대하는데 있어 많은 경험을 가진 것처럼.
그 점이 다시 한번 라비아타에게 옅은 재미를 선사했다.
이런 타입의 인재는 미래가 기대되기 때문에.
“하압!”
또 한 번 짧은 기합과 함께, 라비아타의 주먹이 뻗어 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력탄을 동시에 터뜨렸다.
그렇게 마탄 세례가 끝났음에도, 셰인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후우…….”
아직 뭔가 더 보여 줄 게 있는 걸까 싶어 라비아타가 숨을 고르는 셰인을 보기 무섭게, 다시 한번 마력탄이 방출되었다.
하지만 이미 수차례 봐 왔던 공격이었던 만큼 슬슬 지겨워지려던 찰나.
방출된 마력탄은 이번엔 라비아타를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
한 번에 사방으로 퍼져 나간 마력탄이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는가 싶더니, 마력탄들이 벽이나 천장에 부딪치며 그 경로가 뒤죽박죽 얽히기 시작한 것이다.
기이하게도, 마력탄은 부딪힐 때마다 터지기는커녕 속도를 더해 갔다.
이내 상황을 지켜보던 자하드조차도 눈으로 쫓기 힘들어질 속도가 되어 대련장 내부를 질주했고.
그러던 어느 순간.
벽과 천장, 바닥에 튕겨지던 마력탄은 일제히 라비아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이, 이야…….”
노련함에 더불어 소름 돋을 정도로 정교한 마력 제어 능력.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이 공격에 분명 허를 찔렸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에서 수많은 적들과 얽히며 몬스터의 움직임을 읽는 데 도가 텄던 라비아타의 동체 시력을 속이는 것은 무리가 있었는지.
라비아타는 재미있다는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전방위로 덮쳐오는 마력탄을 거의 동시에 주먹으로 쳐 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내뻗은 주먹에 터진 마력탄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흩어졌다.
과연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의 움직임.
하나 라비아타는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태연히 셰인을 바라봤다.
“진짜, 대단해, 진심으로 감탄했어. 이 정도면 난 합격이라고 보는데? 솔직히 처음 공격들은 파괴력이 낮아서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았는데, 마지막 건 좋았어.”
제법 주먹이 얼얼했다고, 라며 라비아타가 박수를 쳤으나.
셰인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라비아타를 바라봤다.
그렇게 다시 한번 셰인의 손에 마력이 모이는 것을 느낀 라비아타는 이쯤해서 그만 끝낼까 마음을 먹었다.
그때.
“그래도 발버둥 친 보람은 있군요.”
“응?”
“시야는 확실히 돌릴 수 있었습니다.”
“……?!”
아주 은밀하게.
허공에 수놓인 거미줄처럼.
그간 라비아타에 의해 터져 나가 바닥에 흩어져 있던 마력탄의 흔적들이 가느다란 선을 만들며 이어지는 것을 본 직후, 셰인이 주먹이 앞으로 나아갔다.
* * *
룬어를 기반으로 다루는 마법의 대표적인 장점은 바로 범용성에 있었다.
수많은 수식으로 마력이 통하는 길을 만드는 일반적인 마법과 다르게, 룬어는 그 자체만으로 마력을 담고 있기에 숙련만 된다면 굳이 시동어가 없더라도 바로 쓸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마법과 다르게 알고 있는 룬어만 많다면 다양한 조합 또한 가능했으니.
조금만 집중한다면, 지금의 여기에 펼쳐진 현상처럼 만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멀리서 둘의 공방을 지켜보며 감탄하기 바빴던 자하드 교수는 방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질 못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지만, 마력현상을 연구하는 자하드조차도 단번에 알아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눈으로 관측된 것은 단순히 셰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천천히 주먹을 내지른 것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라비아타의 앞에 있었으니까.
마치 셰인이 서 있던 공간 자체가 이동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라비아타는 등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하…… 하하…….”
순간 현기증을 느끼기도 잠시.
어느새 셰인의 주먹이 자신의 배에 닿아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블링크?’
최소 6서클의 마법사가 쓸 수 있다는 그 마법?
아니.
아니다.
라비아타는 여태껏 수많은 마법사를 봐 왔고, 실제로 그녀의 모험단에도 블링크를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있지만 다르다.
단순히 블링크뿐이라면 지금 자신의 현기증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방금 막 일어난 사태를 천천히 되감아 보았다.
여태까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마력탄의 조각들이 마력으로 만들어진 실에 연결되는가 싶더니 공간이 팽창했다가 단숨에 쪼그라들었다.
“……?”
수많은 던전을 다니며 다양한 괴현상들을 직접 목격해 온 라비아타조차 대응할 수 없을 정도의 이상 현상.
물론 마력을 쓸 수 있다는 전제하였다면 그 전조를 놓쳤을 리 없었으나, 어찌 됐든 지금 중요한 것은.
“수고하셨습니다.”
테스트에서 셰인이 통과했다는 것이었다.
* * *
“흐음…….”
방금 막 계약을 마치고 돌아온 셰인은 정신적 피로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전까지 라비아타에게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거냐며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마법사에게 비전을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제임스가 나서서 그녀를 극구 말렸지만 말이다.
자하드 교수 또한 마력을 탐구하는 이로서 내심 궁금한 듯 보였으나 마찬가지로 라비아타를 말리면서 후해진 조건으로 계약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더구나 방금의 대련은 육체적으로도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옆구리에 난 상처는 여전히 정령으로 틀어막은 채 회복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뛰어다니며 마력탄을 쏟아붓고 다니면서도 다중 캐스팅을 했던 것도 몸에 무리를 줬다.
셰인은 마력탄을 처음 쏘아낸 순간부터 다른 한쪽으로는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리는 삼중 룬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셰인이 펼친 룬 마법에 들어간 룬어는 ‘팽창’과 ‘굴절’, 그리고 ‘수축’.
공간을 찰나의 찰나에 팽창시켰다가 복구하는 것으로 공간 자체에 유연성을 추가시키고, 거기에 굴절로 부드러움을 넣었으며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수축시켜 셰인과 라비아타의 거리를 줄여 버렸다.
말하자면, 공간 자체를 뒤틀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라비아타가 현기증을 일으켰던 이유였고.
그때까지 셰인이 마력탄을 날렸던 것은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한 밑 작업임과 동시에 라비아타가 캐스팅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든 눈속임이었다.
그렇게 방금 전 대련에 대한 간단한 복기를 마치고 있을 때, 클라인이 다가와 어정쩡한 얼굴로 셰인을 맞이했다.
“아, 형님! 이야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적당히 잘 끝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예. 아버지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 셰인은 클라인과 함께 통신 수정구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잠시 후, 연결됐던 수정구로부터 아버지, 로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 시간은 좀 되느냐.
“예.”
-이제 너의 나이가 몇이지?
갑자기?
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까.
아버지가 아들의 나이도 제대로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 셰인은 그 의도를 금방 파악했다.
……이건 지난 생에 없던 일인데.
“열여덟입니다.”
-그렇군. 슬슬 너도 가문의 사람으로 그에 마땅한 책임을 질 나이가 됐구나.
“혹시.”
-그래. 너와 관련해서 약혼 제의가 들어왔다.
“예?!”
그 말에 반응한 사람은 셰인이 아니라 클라인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2화
22화 무아지경
“클레이튼 백작이라. 과연 우리 말에 순순히 따르겠나?”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의 물음에 부하로 보이는 이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클레이튼 백작이라면 살리에르 백작의 공백을 메꾸면서도 보다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판단입니다.”
“내가 알기론 클레이튼 백작은 돈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상인이던데?”
“물론 그렇습니다만, 최근에 보인 행보를 보면 금전적 이득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움직임을 시도하고 있는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남자, 올리버 G 대니얼은 부하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연합국의 시장에서 클레이튼 가문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결코 낮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군 또한 클레이튼 가문과 선이 연결되길 바라고 있을 정도였으니.
“좋다. 한데, 정치적 움직임이라는 건 무엇이냐. 그 치는 어느 조직에도 후원을 하고 있지 않을 텐데?”
클레이튼 백작은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돈자루를 푸는 가문이 아니었다.
간혹 뿌린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건 공공의 이익이나 거래의 성사를 위해서지, 정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아직 후원처럼 대놓고 행동은 하고 있지 않으나, 최근 들어 귀족들의 연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흠…… 그 클레이튼이 그렇단 말이지.”
연회가 단순히 먹고 노는 장소가 아닌 만큼,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는 귀족계의 분위기를 염탐하고 있는 것이라 봐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아네이스의 나이가 올해로 몇 이었지?”
“열일곱입니다.”
“소문에 들리는 그 클레이튼 가문의 천재 또한 같은 나이라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로웰 가주의 성격은 굉장히 신중한 편입니다. 그 정도의 이름을 날리는 아들의 혼사 문제는 꽤나 신중하게 나서지 않을지요.”
“그렇다고 우리 저지먼트 기사단의 딸이란 이름이 결코 작지는 않을 터.”
아니, 오히려 이름값만 따진다면 클레이튼 가문은 저지먼트 기사단에 미치지 못한다.
일개 상단 가문과, 대전쟁 때부터 황실을 보좌해 온 기사단의 이름값이 어찌 같을까.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귀족들의 순혈주의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쯧. 그놈의 순혈주의자들.”
그러나 현재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고 있을 아네이스는 전 단장, 린트베르크 K 로버트의 친딸이 아니었으니.
서로의 이름값은 부족하지 않으나, 이쪽에서 명분이 부족한 것은 맞았다.
“로버트여. 그대의 충심은 결국 죽어서까지 나를 귀찮게 하는군. 가는 길에 자식이라도 하나쯤 남기고 가지 그랬나.”
지금도 그 큰 등이 떠오른 대니얼은 잠시 주먹에 힘을 쥐었다 풀었다.
“그럼 머저리라 불리는 첫째도 괜찮을 테지. 들어 보니 최근 철이 든 것 같다고 하던데.”
“예.”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와 약속을 잡게. 내 직접 나설 테니.”
“알겠습니다.”
부하가 방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은 대니얼은 한쪽 테이블에 위치한 사진을 바라봤다.
자신과 저지먼트 기사단원들, 그리고 전 단장 로버트와 아직 한참 어린 아네이스가 찍힌 단체 사진이었다.
사진 속 자신은 웃고 있었으나, 대니얼은 잘고 있었다.
저 웃음 속에 얼마나 더러운 감정이 가득했던가.
그 더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단장직에 올라왔음에도, 여전히 대니얼의 가슴속에는 질투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 자리에 서 있으니…….
“네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군.”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았다.
* * *
“야, 약혼 말입니까? 형님의?”
“그래.”
수정구로 통신이 끝난 뒤, 클라인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형님이…… 약혼을?
물론 그들도 귀족인 만큼 약혼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것은 맞았지만, 여태까지 둘의 아버지인 로웰이 약혼과 관련된 말은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형님이 약혼이라니…….
최근 셰인이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줬다지만, 한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게 잘 상상이 가지 않는 클라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면 형님도 지금보다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클라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반면, 셰인은 전생과 달라진 상황 속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네이스라…….’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그 유명한 저지먼트 기사단의 딸.
심지어 학과시험에서도 3등을 차지한 우등생이다.
안 그래도 아네이스에게는 한 번 접촉할 기회를 엿보고 있긴 했다.
그녀 또한 전생에 셰인이 기억할 정도로 우수한 인간이었으니.
그런데 그런 그녀와 약혼으로 이어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살리에르, 그 벌레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속셈인가.’
셰인의 정체를 알고 접촉해 온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셰인은 그 자리에 단 하나의 증거도 남겨 두지 않았으니.
다만 저지먼트가 섬기는 주인에게 살리에르 백작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결코 작지 않았던 만큼, 하루 빨리 그의 빈자리를 채울 궁리를 하고 있었을 터.
셰인은 오히려 이 일이 기껍게 다가왔다.
‘오히려 써먹을 수 있겠군.’
아직은 이야기가 오가는 정도니 셰인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보다 클라인.”
“예?”
“아직 팀은 안 구했지?”
여기서 팀이란, 지휘학과 생도라면 반드시 해야 할 팀 구성이었다.
지휘학과 생도들은 각자 자신의 팀원을 구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으로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예. 아직은 이론적으로 더 배워야 할 것 같아서 모집은 미뤄 두고 있습니다.”
“그래? 마침 잘됐구나.”
“……?”
“내 논문으로 인해 라비아타 모험단 쪽에서 협업 논의가 들어왔다.”
“라, 라비아타 말입니까?”
오늘 따라 놀랄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라비아타의 위명은 클라인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헤르메스 모험단과 더불어 모든 모험가들이 꿈꾸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던가!
“학과 시험에 제출한 내 논문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 같구나. 함께 메자이아 대수림에 가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세상에! 축하드립니다, 형님!”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클라인.
하나 그것도 잠시, 제 형이 제출한 논문의 내용을 떠올리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메자이아 대수림이면…… 명색이 5대 요람 중 하나 아닙니까.”
“그렇지. 많이 위험할 거다.”
“끄응…….”
만약 메자이아 대수림의 원정을 무사히 다녀온다면 셰인의 명성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를 것이지만.
반대로 얻는 명성만큼이나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을 터.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클라인. 함께 가지 않겠느냐?”
“제가, 말입니까?”
“그래.”
클라인의 능력은 그 메자이아 대수림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은 몬스터보다 환경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클라인이 곁에 있다면 위험할 일도 없을뿐더러…… 클라인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거기에 5대 요람에 들어가는 만큼, 클라인이 직접 구성한 팀이 아니라 하더라도 학과 점수를 얻을 수 있을 테고.
한편 클라인은 내심 큰 감동을 받고 있었다.
형님이 자신을 믿고 이런 제안을 해 준 것일 테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짐을 하며, 클라인은 셰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다만 그런 클라인의 생각과 다르게 아카데미에 퍼진 소문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야, 클라인. 너 라비아타랑 협업하기로 했다며? 진짜 대단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알 로스의 말에 클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맙긴 한데, 내가 하는 거 아냐. 우리 형님이 하신거야.”
“어? 그래? 그거 진짜였구나?”
“응?”
설마하니 당사자가 소문을 모르고 있냐며 알 로스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임마, 아카데미에 지금 너 형님 관련해서 소문 싹 퍼졌어.”
“……? 뭐라고?”
“네가 라비아타하고 협업하는 거에 너희 형님이 숟가락만 쓱 얹었다고 하던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본래 라비아타 정도 되는 수준의 명성을 지닌 존재가 움직이다 보면 소문이야 금세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다.
거기에 라비아타도 관련해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분명 클레이튼 R 셰인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건만.
왜 소문이 그런 식으로?
“쯧…… 너희 형님, 보기에 많이 바뀌긴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보였나 봐.”
“…….”
친구의 설명에 클라인은 입을 다물었다.
이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형님을 지켜드릴 수만 있다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일어나다니.
“안 되겠다. 어서 빨리 내가 협업에서 빠진다고 공표해야…….”
“머리도 좋은 애가 오늘따라 왜 이래? 네가 빠진다고 해서 저런 소문이 없어지겠어? 오히려 너희 형님이 성과를 혼자 독식하려 한다고 욕만 더 먹을걸?”
평민 출신인 알 로스는 하늘에서 떨어진 기회를 뻥 차 버리려는 클라인의 행동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극구 말렸으나, 클라인의 가슴은 무겁기만 했다.
확실히, 이제 와서 빠진다고 하면 정말 로스의 말처럼 될지도 몰랐다.
“하아……. 이걸 어쩌지.”
그렇게 고민이 이어지고.
수업이 끝나고 셰인을 만날 때까지, 클라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클라인, 표정이 왜 그러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형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소문?”
주변 소문에 관심이 없던 것은 셰인도 마찬가지였던지라, 클라인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셰인에게 소문에 대해 말했다.
어지간하면 셰인의 열등감을 부추기고 싶지 않았으나, 적어도 자신이 형님의 기회를 빼앗는 것보다는 차라리 형님께 미움을 조금 받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뭘 그런 걸 또 신경 쓰고 있느냐.”
“예? 하지만 이건 엄연히 형님 혼자서 하신 일이잖습니까.”
“클라인.”
“……예.”
“내가 예전에 말했었지. 소문에 휘둘리는 머저리들을 상대로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을 지키고 있다. 너는 어떠하냐.”
“…….”
클라인은 올해 아카데미에 막 들어왔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때로는 너의 그런 시선이 사람의 마음을 더욱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아 두거라. 나는 불쌍하지 않으니까.]
무심코 또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형님이 걱정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는 엄연히 형님이 이겨 내야 할 일.
클라인은 스스로의 태도를 반성했다.
‘맞다. 형님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시는데 내가 먼저 설레발 치는 것도 웃긴 일이야.’
실제로 클라인은 형님이 과거처럼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이내 스스로의 내면에 숨겨진 진실을 깨달았다.
‘그랬구나. 겁을 먹은 건 오히려 나였어.’
생전 처음으로 형님이 자신에게 잘해 주고 있다.
말투도 이상하게 고풍스러워진 걸 제외하면 주변인들에게 가시 돋친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직 한 명 뿐이지만, 형님에게 직접 팀원이 되겠다는 사람까지 생겼다.
모든 것이, 과거의 형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기에.
혹여 형님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진 않을까, 또다시 마음의 상처가 번지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클라인은 마치 스스로의 내면이 맑게 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클라인의 내면에 있던 망설임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클라인이 서 있는 상태로 눈을 감으며 몸을 옅게 떨었다.
‘무슨?!’
한편, 그걸 지켜보고 있던 셰인은 속으로 작은 경악을 터뜨렸다.
무아지경(無我之境).
이따금 하나의 일에 극도로 몰입하여 다른 것은 모두 잊고 그 하나에만 정신을 집중한 상태.
그저 많이 집중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무아지경은 스스로의 내면에 어지러이 퍼진 탁한 기운을 소멸시켜, 존재의 격이 올라가는 현상이었으니.
대부분의 경우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드물게 이런 경험을 하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커다란 성장을 맞이하게 됐다.
한데 클라인은…….
‘고작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무아지경에 이르다니?’
셰인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이내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래야 내 동생이지.’
그리고, 셰인은 용사의 형으로서 더 어울리는 미래를 떠올렸다.
‘육체적 성장은 충분한 것 같군. 그럼 이제…….’
전투에 익숙한 정신적 성장의 밑거름을 다질 차례였다.
‘던전을 가야겠군.’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3화
23화 준비(1)
“약혼, 이요?”
아네이스의 물음에 현 저지먼트 기사단의 단장, 올리버 G 대니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네이스, 너도 알겠지만 다이라의 희생으로 인해 내부에서 말이 많더구나.”
“…….”
“때문에 폐하께서 우려가 크시다. 지하도시의 벌레들이 힘을 비축하는 것이 장차 인류에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말이지.”
그게 약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어른의 사정을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아네이스는 일단 잠자코 들었다.
“그에 우리는 직접 지하도시에 간섭하기 위한 첩자를 심어 두기로 했다.”
“그래서요?”
“그게 바로 클레이튼 가문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대상회를 이끌고 있으니만큼, 지하도시에 적잖은 영향력을 펼칠 수 있으리라 보고 있지.”
“네…….”
“하지만 아무리 클레이튼 가문이라지만,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다. 때문에 필요한 게 바로 약혼이지.”
“아.”
그제야 어른의 사정을 이해한 아네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것도, 정의를 위해서 인가요?”
“그래. 또한, 대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
“……알겠어요.”
아네이스는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관심이 없었으나.
정의를 위해서. 대의를 위해서.
그녀가 납득하기 위해서는 위의 두 조건이면 충분했다.
정의와 대의는, 언제나 희생의 또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저지먼트 기사단 또한 위대한 정의와 대의를 위해 스스로의 피를 흘리고 희생하지 않던가.
‘그래도, 아쉬워.’
자신의 작은 아버지, 대니얼의 선택이 아쉽다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이 약하다는 것.
절대불변의 막강한 힘이 있었더라면 굳이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결국 아네이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약혼이 확정된 날 바로 셰인을 찾아갔다.
* * *
“그런 이유로, 임시나마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가 우리 팀에 합류하게 됐다.”
“으에엑!”
갑작스러운 아네이스의 등장에, 팀원들 모두 놀랐으나 역시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디라일라였다.
아네이스.
그녀가 적을 두고 있는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얼마 전 디라일라의 납치와 관련된 인물이었기에,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그 인물이 디라일라 앞에서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아, 아니 좀 이상한데? 왜 이 팀에 지휘학과 생도가 이렇게 많아?”
디라일라의 당황도 당황이지만 그녀의 말 또한 타당했다.
본래 지휘학과 생도들은 타 전투학과의 생도들과 팀을 꾸리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팀장으로서 점수를 가장 많이 받는 지휘학과 특성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네이스의 선택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딱히. 왜 이상해?”
“어, 그야 넌 지휘학과잖아!”
“별로. 지휘학과라도 이 팀에 들어올 이유는 충분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다름 아닌 5대 요람 중 하나인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당연히 따라올 점수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요, 다름 아닌 라비아타 모험단과 협업을 했다는 것은 그 어떤 모험가에게도 대단한 명성이 될 테니.
굳이 학과를 따질 것도 없이, 이번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셰인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생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셰인이 모두 무시로 일관하자 그 뒤로 귀찮아지던 것은 클라인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약혼자가 있는 팀을 한번 보러 온 것뿐. 그리 오래 있진 않을 거야.”
“어, 그래? 아, 아니. 잠깐 약혼?”
디라일라가 뭐라 의문을 더 표하기도 전에 셰인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무튼 아네이스도 이번 협업까지는 임시로 함께할 예정이다. 이제부터 들어갈 던전에 대해 설명할 테니 잘 듣도록.”
“끄으응…… 오케이.”
어쨌든 임시라는 소리에 디라일라가 자리에 앉았다.
굳이 자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었으나, 가능하다면 아네이스와 최소한으로 엮이길 바라는 게 디라일라의 입장이었다.
“최대한 메자이아 대수림과 비슷한 환경의 던전으로 골랐다. 여기서 너희들은 각자의 제약을 건 상태로 토벌에 임하게 될 거다.”
“제약 말입니까?”
클라인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메자이아 대수림은 마력을 사용하는 데 많은 제약이 있는 장소다.”
셰인의 말에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메자이아 대수림은 몬스터보다는 환경이 위험한 장소다.
여러 던전 관련 수업에서도 들었지만, 메자이아 대수림은 기우 문제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요람이 전체적으로 마력 불안정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곳에서 마력을 다시금 쌓기 위해서는 위험도 위험이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마력적응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괜찮겠으나, 적어도 지금 우리가 논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 셰인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마력 불안정 현상은 룬어와 관련이 높은 존재로 인해 생겨난 현상이었으니.
남들보다는 제약이 덜한 편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열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던전에 각자 제약을 걸 거다.”
“어떤 제약입니까?”
“먼저 클라인. 너는 신체강화에 필요한 마나를 제외하고는 일체 마력을 쓰면 안 된다.”
“으음…….”
신체강화는 마력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기초적인 전투법이다.
막대한 마력을 무기삼아 싸우는 클라인에게는 큰 제약이나 다름없었다.
“디라일라는 이걸 받아라.”
“어, 이건 뭐야. 흙?”
셰인이 건넨 주머니를 열어 보니, 한 줌의 흙만이 담겨 있었다.
“이걸로 뭐 하라고?”
“넌 그 흙만을 무기로 사용해라.”
“엑?”
지하인인 디라일라는 굳이 따지자면 대지 속성의 마법사다.
때문에 그녀에게는 고작 저 정도의 흙만 있더라도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겠으나.
그건 디라일라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도 대량의 흙을 이용해 질량으로 승부를 보기 때문이다.
“너무 정교하게 다루면 머리 아픈데…….”
“참아라.”
“끄응…….”
일단 팀에 들어오면 어지간해서 팀장의 말을 듣는 게 맞다.
실제로 이렇듯 모험단의 리더는 동료의 실력향상에도 많이 관여를 하는 편이기에.
이어서 아네이스가 셰인을 바라봤다.
“나는?”
“음.”
아네이스의 말에 셰인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애초에 아네이스는 셰인이 생각하고 있던 전력이 아니었기에.
물론 그녀도 미래에는 중요한 인물이 될 테지만, 아직까진 접촉할 예정이 없던 인물이기도 했다.
아네이스는 이후 자연스럽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클라인만큼 많은 역경을 겪긴 하지만, 그거야 셰인이 알 바 아니었다.
클라인이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챙겨 줄 필요가 없었고, 디라일라처럼 아예 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경우도 아니었으니.
“너도 클라인과 비슷하게 신체강화만으로 마력을 쓰도록. 그리고 하나 더.”
“응.”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러라.”
“……? 알았어.”
셰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아네이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셰인은 본격적으로 훈련에 필요한 던전에 대해 설명했다.
“던전의 타입은 숲과 동굴, 그리고 땅굴이 포함된 다중 던전이다. 크기는 중형이지.”
“생각보다 크군요.”
“난이도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주요 몬스터는 랫맨과 트롤, 워 보어와 매스 고블린, 레더 코볼트 정도다.”
다중 던전은 셰인이 말한 것처럼 여러 몬스터가 아울러 지내는 던전을 뜻했다.
이런 던전의 클리어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보통은 두세 팀의 모험단이 들어가 각자의 영역을 맡고 클리어하는 것이 주된 방법이다.
그 외에는 지금의 셰인처럼 독식 형태로 던전을 클리어하는데, 이럴 경우 던전에 머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길어지며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던전을 클리어한 보상도 독식하게 되겠지만.
“시작은 땅굴이다. 그다음으로 동굴이고, 그 앞에 숲이 우거져 있다고 하는군.”
앞서 탐사 전문 마법사가 자신의 소환수를 다루는 패밀리어 마법으로 알아낸 정보였다.
그 외에도 던전의 특징, 몬스터의 습성 등을 한 번씩 훑어 준 셰인이 다시금 말했다.
“비록 제약을 걸긴 했으나, 위험하다는 판단이 서면 즉시 제약은 신경 쓰지 말고 토벌에 임하도록, 이상. 질문 있나?”
그 물음에 손을 든 사람은 디라일라였다.
“근데 넌 제약 같은 거 없어?”
“난 항상 제약을 걸고 싸운다.”
오리진의 힘을 주로 다루는 셰인은 지금의 신분으로 그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니 이게 제약이 아니면 뭐가 제약일까.
하나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디라일라가 얼굴에 연신 물음표를 띄웠으나 셰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던전의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 * *
죽은 몬스터가 다시 살아나고, 파괴된 지형이 복구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
던전은 중추가 파괴되지 않는 한 끝끝내 재생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마법사가 던전의 기현상에 대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매달렸지만, 여태껏 뚜렷하게 밝혀진 건 없었다.
이는 신으로 추앙받는 아카샤가 행한 봉인으로 만들어진 환경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셰인 일행은 연합국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푸른 파수꾼의 숲]이라는 던전에 도착했다.
“역시 눅눅하네.”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디라일라가 평한 환경이었다.
셰인의 앞서 했던 말처럼, 던전의 도입부는 눅눅한 땅굴에서부터 시작됐다.
동시에 셰인은 품에서 꺼낸 동그란 마공학품에 자신의 룬어를 더했다.
“우와. 이게 그 듣기만 했던 마도촬영기인가 그건가? 대박. 혼자 떠다니네.”
마력을 주입시키면 내부에 저장된 마력 회로에 따라 영상을 기록하는 마도촬영기.
던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 혹은 전투를 복기하고 실력을 키우는 데 쓰이는 유용한 물건이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바로 가격.
어지간한 모험단이라 해도 구매를 망설일 가격이기도 하거니와, 내구성까지 보장된 상등품은 과장을 더해 한 개 모험단을 꾸릴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던전을 잡은 것과 그에 필요한 비용부담은 모두 셰인과 클라인의 가문, 클레이튼 가에서 지불했다.
로웰의 성격상 이렇게 퍼주지 않았으나, 다름 아닌 라비아타하고의 협업, 그리고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향한다는 말에 로웰치곤 드물게 둘을 크게 칭찬하며 이러한 지원을 보내 왔다.
“보다시피 이걸 통해 앞으로의 전투를 기록하고, 틈이 날 때마다 전투를 복기할 예정이다. 그러니 적당히 할 생각은 버리도록.”
“알겠습니다, 형님.”
“으아, 이거 잘못하면 흑역사가 영원히 기록되는 거 아냐?”
“…….”
‘부유’와 ‘추적’의 룬어를 적은 마도촬영기가 둥둥 떠다니며 일행의 뒤를 따라왔고, 이어서 첫 전투가 시작됐다.
전투의 첫 신호탄이 된 몬스터는 랫맨.
성인 크기에 이족 보행을 하는 쥐 형태의 몬스터다.
교활하기로는 고블린에게 견주고, 경계심은 코볼트 저리 가라 할 정도이기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고블린 정도의 지능을 가졌으며 코볼트처럼 경계심을 풀기 시작하면 그저 성인 남성보다 조금 더 힘이 센 수준에 불과한 어중간한 몬스터라는 뜻과 같았다.
통로를 통해 나타난 랫맨의 수는 총 다섯 마리.
이쪽의 수는 고작 넷.
수적 우위에 있기 때문일까?
랫맨은 찌찍 웃으며 거리를 좁혀 왔다.
본래의 랫맨이라면 잘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기본적으로 코볼트만큼 경계심이 많은 놈들이니.
‘하지만 여기선 던전의 특성이 발휘되지.’
던전 내의 몬스터는 어지간해서 인간들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법이 없다.
굳이 그러한 상황이 있다면 불리할 때 다른 동료를 부르거나 함정으로 유인할 때뿐.
수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몬스터의 행동을, 자신들을 봉인시킨 아카샤를 향한 증오, 즉 인간이라는 종족 전체를 향한 증오심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더불어 녀석들의 지식 수준은 던전이 봉인된 그때 그대로 멈춰져 있으니.
당시의 인간들은 마력이라는 이 세상의 기본적인 힘조차 쓸 줄 모르는 하등 종족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카샤에 의해 봉인되어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은 랫맨들에게, 눈앞의 인간들은 힘없는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물론, 랫맨도 상대를 보는 눈은 있기에 마냥 눈앞에 있는 적의 수가 자신들보다 하나라도 더 많거나 장비가 월등히 뛰어나다면 망설임 없이 도망쳤겠지만.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클라인. 네가 먼저 실력을 보여 봐라.”
“알겠습니다, 형님.”
이에, 클라인 또한 전투에 임하는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어 앞으로 향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4화
24화 준비 (2)
클라인의 검술은 본능을 기반으로 한 변칙적인 검이다.
과거, 처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클라인은 어떻게 검을 잡아야 밸런스가 깨지지 않는지, 검의 경로를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신이 내린 축복.
그 말에 가장 어울리는 천재 중의 천재.
그런 클라인에게 검술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마력 감응력이었다.
클라인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마력을 다루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고,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클라인의 파괴적인 마력에 대항할 자는 그리 많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클라인의 검술은 어느 순간부터 성장을 멈추고, 압도적인 마력을 보조하는 식으로 격하되기 시작했다.
셰인은 바로 그 점을 콕 집었다.
분명 클라인의 마력은 대단하나, 그게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는 법.
훗날 클라인이 성검을 얻기 전까지, 셰인은 클라인의 검술을 보다 성장시킬 생각이었다.
-끼익!
선두에 선 덩치 큰 랫맨이 먼저 달려들었다.
놈들은 성인만 한 덩치도 위협적이지만, 강철과도 같은 내구성을 지닌 손톱 또한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놈이 먼저 손톱을 휘두르며 클라인에게 공격을 가했다.
클라인은 그런 랫맨의 공격을 뒤로 물러나 피하고 일격에 랫맨의 심장을 꿰뚫었다.
-찌직?!
무리 중에서 제법 덩치가 큰 녀석이 한 번에 죽은 것을 보고 남은 네 마리의 랫맨이 움찔거렸으나, 이내 동시에 공격해 왔다.
두 마리는 사족 보행으로 몸을 낮추고, 벽과 천장을 타며 달려들었고, 다른 한 마리는 아까처럼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에 클라인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최소한의 마력으로 강화된 다리에 힘을 싣고 단숨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최소한의 마력으로 강화할 수 있는 것으로는 랫맨의 동체 시력을 속이기 힘들었다.
-끼이익!
잠깐 당황한 두 랫맨이 위아래로 손톱을 휘둘러 오는 것을, 클라인은 벽을 타는 것으로 회피하고 그대로 정면에 있는 랫맨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우와. 화려하네.”
디라일라의 말처럼 클라인은 화려한 동작으로 랫맨을 넘어뜨림과 동시에 검으로 놈의 심장을 꿰뚫고 그대로 뒤돌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자신들의 공격이 빗나가자마자 남은 두 마리가 서로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쳤으나, 그들의 뒤에는 셰인과 일행이 있는 상황.
이에 두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클라인은 어렵지 않게 한 마리의 목을 베며 공격을 회피했으나.
-찌지직!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랫맨이 울었고, 클라인의 검에서 살아남은 랫맨도 함께 울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를 선택했다.
이미 다섯 마리의 동료 중 셋이 당한 상황.
랫맨은 여기서 모두 죽기보다 다른 동료들을 더 불러 온다는 선택지를 택한 것이다.
-찌직?! 케헥!
그러나 그걸 지켜보고 있을 셰인이 아니었다.
어느새 소환된 마탄이 두 랫맨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했고, 놈들은 눈을 까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클라인.”
“예, 형님.”
“형편없구나.”
“……!”
클라인의 가슴에 그 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 *
반나절 정도 이어진 토벌 이후, 일행들은 그럭저럭 쓸 수 있는 안전지대를 발견한 뒤에야 전진 캠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냄새가 최대한 나지 않는 전투식량으로 식사를 마친 후에야 셰인의 입이 열렸다.
“우선, 클라인. 너부터 시작해야겠다.”
“……예.”
셰인의 말에 일행들은 그가 꺼내는 마도촬영기를 바라봤다.
셰인이 마도구에 마력을 부여하자, 마도구 위로 입체영상이 떠올라, 오는 길에 치렀던 클라인의 전투를 투영했다.
“여기서 클라인의 문제를 파악한 사람이 있나?”
“어…… 잘 모르겠는데. 잘한 거 아냐? 전부 일격에 깔끔하게 죽였는걸. 도중에 몇 마리 놓치기는 했지만.”
디라일라의 평가였다.
그녀의 말처럼, 클라인은 일검에 적을 죽이며 조금의 빈틈도 없이 적을 상대했다.
때문에 아까 셰인이 클라인에게 형편없다 말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편, 클라인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이어서 아네이스가 입을 열었다.
“상냥하네.”
“엥?”
“검이 상냥해.”
아네이스의 말에 디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냥해?
적을 일격에 죽이는 검의 어디가 상냥하다는 말인가.
“마치, 몬스터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반드시 일격에 죽이려고 고집하고 있어. 그게 아니었다면 저렇게 놓치는 랫맨도 없었을 거야.”
추가적인 아네이스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디라일라 또한 그 말을 알아들었다.
“엑. 그래서 상냥하다는 거야? 뭔 비유가…….”
좀 고통스럽더라도 더 오래 살고 싶은 디라일라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클라인. 너는 머리가 나쁜 게 아니니 굳이 더 설명하진 않으마. 하지만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팀에 얼마나 위험을 끼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이는 클라인의 착한 심성에서부터 나오는 나쁜 버릇이다.
“비단 팀에 위해를 끼치는 것뿐만이 아니다. 너의 검에는 망설임이 있어. 그 망설임이 있는 한 너는 육체적 혹은 마력이 성장하더라도 검술에 있어서는 더 이상 진보할 가능성이 없다.”
“…….”
“나는 내 동생이 그런 반푼이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아.”
물론, 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전생의 클라인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지지는 않았으나, 반대로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았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그러한 망설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눈앞에서 겪었기 때문이다.
셰인은 굳이 그 지경이 되어서야 클라인이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아네이스. 너도 클라인만큼 문제가 심각하다.”
“……내가?”
마도촬영기에서 나오는 영상이 이번에는 아네이스의 전투를 보여 줬다.
아네이스의 전투는 말하자면, 예술에 가까웠다.
아네이스의 검은 상대를 일격에 죽이기보단, 틈을 만드는 데 특화됐다.
적에게 빈틈이 나오면 굳이 죽이기보다는 부상을 입혀 전투에서 배제시키고, 다음 행동으로 빠르게 이어질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다.
덕분에 클라인과는 다르게 놓치는 랫맨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클라인의 눈에는 그녀가 가진 문제가 여실히 보였다.
“클라인의 검이 상대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면, 너의 검에는 생각이 많다.”
“…….”
셰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강 알아차린 아네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셰인의 말을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평가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확실히, 그 덕분에 네 검술은 ‘예지’에 가깝다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게 과하다는 말이다.”
“동감하지 못하겠어.”
그저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에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셰인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일단 이 전투 장면부터 보도록 하지.”
셰인이 보여 준 영상은 처음 클라인의 전투에서처럼 다수의 랫맨을 상대하는 아네이스의 모습이었다.
랫맨은 맨손으로 싸우지만, 그 손톱으로 흙벽을 파고 달리며 다방면에서 공격을 가해 온다.
아네이스는 그런 랫맨들의 전투방식을 금세 습득하고, 다양한 패턴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상대했다.
검을 크게 휘둘러 벽과 천장에서 오는 랫맨들을 경로를 파괴한다.
경계심이 많은 랫맨은 단순히 자신들의 이동경로에 검이 훑고 지나갔다는 것만으로 움직임이 느려졌고, 동시에 앞으로 뛰쳐나간 아네이스가 정면의 랫맨 두 마리의 다리와 얼굴을 베고는, 동시에 뒤로 몸을 돌렸다.
마력이 실리지 않은 평범한 철검이라 방금의 공방에서 죽은 랫맨은 없었으나, 아네이스는 차질없이 움직이며 랫맨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이 도주에 방해가 되는 상처들이었다.
다리를 베거나, 발목을 베거나, 얼굴을 베어 앞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클라인의 전투와 다르게 혈향이 땅굴 내부에 진동했고, 영상 속 디라일라는 속이 안 좋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끝내 아네이스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간 랫맨은 없었다.
“음, 내가 봐도 깔끔하기만 한데?”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이건…… 제가 펼치기엔 힘든 검술이로군요.”
본능에 맡기듯 검을 휘두르는 클라인과 다르게 아네이스는 정교한 검술을 선보였으니, 디라일라나 클라인이나 또 다른 천재를 보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네이스, 너의 검은 정교하다. 지금 본 것처럼 약한 상대가 너를 이길 확률은 0에 수렴할 거다. 하지만 너와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겨루게 된다면 네가 질 확률이 높아지지. 왜 그런지 아나?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
“아직 그런 경험이 없기에 이런 검술을 펼쳤을 거다. 보다 강한 적이 나타나면 그저 보다 강했기 때문이라는 핑계가 있었을 것이고, 약한 적에게는 기술을 고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아.”
셰인의 말처럼.
아네이스는 여태까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적을 상대한 경험이 없었다.
저지먼트 기사단의 일원들은 그야 다들 강한 게 당연했고, 반대로 아카데미에서는 아네이스와 견줄 정도의 상대는 없었다.
몇 번은 클라인과 대련을 한 적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클라인의 마력은 아네이스도 어쩔 방법이 없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네이스는 여태까지 자신과 동등한 상대와 싸워 본 적이 없었고, 보다 자신의 명확한 한계를 깨닫는데 어려움이 있던 것.
그 말을 들은 아네이스는 뭔가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이 던전에 괜찮은 상대가 있더군. 녀석과 겨뤄 보고, 클라인과 대련을 펼쳐 봐라. 마력을 쓰지 않은 상태로. 그럼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알았어.”
아네이스는 순순히 셰인의 말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팀에 들어온 이상 리더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맞았고, 아네이스가 듣기에도 셰인의 판단이 아예 틀렸다고 생각되지도 않았기에.
“그럼, 디라일라.”
“윽.”
한편, 디라일라는 무언가 찔리는 게 있다는 듯 셰인의 시선을 피했다.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의 영상을 보며 이래저래 참견하긴 했지만, 실상 여기서 가장 무력이 뒤처졌던 것은 바로 디라일라였다.
실제로 그녀는 지금도 옷 여기저기 구른 흔적으로 인해 흙투성이가 된 상태였고.
“굳이 영상을 보기보다 스스로가 잘 알겠지만, 그래도 일단 봐 보도록 하지.”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그래도 봐라. 직접 보는 것과 아닌 것은 다르니까.”
“끄응…….”
이어서 마도촬영기에서 디라일라의 모습이 비춰졌다.
-이런 씨발!
“크흠!”
시작부터 디라일라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랫맨의 공격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전투에선 감정이 격해지기 마련이니 욕을 한다는 것 자체로 뭐라 하진 않아. 하지만 적에게 눈을 떼고 저렇게 구르는 건, 그것도 다대일 전투에서 저러는 건 자살행위다.”
클라인과 아네이스하고는 다르게 디라일라에게는 전술적으로 해 줄 조언이 많았다.
어쨌든 셰인 또한 마법사였고, 기본적으로 디라일라도 셰인처럼 시동어 없이 마법과 비슷한 이적을 행사하는 사람이었기에.
“한 줌의 흙을 사용해 랫맨의 내부로 침투시키고 안에서 헤집는 것은 좋은 공격 방식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다대일 전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전투법이다.”
셰인의 말처럼 영상 속 디라일라가 조종하는 한 줌의 흙이 랫맨의 입과 코에 들어가 내부를 헤집고 나오는 장면이 있었으나, 그 때문에 디라일라가 이어지는 다른 랫맨의 공격을 대응하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게 된 것이다.
“전사도, 마법사도 둘 다 멀티태스킹이 중요하지. 전사는 전투 중에도 외부의 위험요소가 없는지 미리 파악해야 하고, 마법사 또한 비슷하게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위험이 없는지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전사는 가능하고 마법사가 불가능한 이유를 아나?”
“어, 모르겠는데.”
“전사와 다르게 마법사는 제5감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5감각?”
“미각, 촉각, 후각, 청각.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합쳐져 만들어진 기감이다.”
누구나 한 번쯤 ‘타인의 시선을 느낀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시선에는 그 어떠한 물리적 법칙이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떻게 타인의 시선을 눈치챌 수 있을까?
바로 인간이 타고난 다섯 번째 감각, 기감 때문이다.
“전사는 최전방에서 타인의 기감에 가장 많이 노출된다. 때문에 살기에 민감하지.”
하지만.
“후방에서 마법을 쏘는 마법사는 그 기감이 무딘 편이다. 그 차이가 전장에서 생과 사를 가르지.”
그러면서, 셰인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디라일라를 바라봤다.
“그러니, 몸소 살기를 느껴 보고 그 편린을 기억해라.”
“아……?”
그 직후 디라일라는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움직임이 멈췄다.
손과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은 묵직한 돌덩이라도 올려 둔 듯 자유롭지 못 했다.
숨 한 번도 들이쉬지 못하는 갑작스러운 상황.
그리고 그 현상이 어디로부터 발생됐는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바로, 셰인에게서부터 폭사되어 나오는 살기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살기라는 거다. 지금 느끼는 그 감각을 잘 새기도록.”
“흐극.”
‘잘 새기라고? 이런 미친!’
이건 뭐라 해야 할까.
새기고 싶지 않더라도 알아서 세포 단위로 새겨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과도한 공포에 몸이 경직되고, 그로 인해 도망치라는 뇌의 명령을 다리가 거부한다.
절대적인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의 감각.
그렇게 30여 초 더 지속되고 나서야 셰인은 살기를 거뒀고, 디라일라는 그대로 주저앉아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았다.
“시, 씨발…….”
“디, 디라일라 양?”
그 사이, 아네이스와 검과 관련해 대화를 주고받던 클라인이 당황하며 다가왔다.
아네이스 또한 무슨 일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디라일라를 바라봤다.
고작 30초.
그사이 디라일라의 구릿빛 피부가 창백해지고, 어마어마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우으, 씨발! 지릴 뻔했잖아!”
“지, 지리다니 그게 무슨…….”
그 말에 클라인이 얼굴을 붉혔으나 디라일라에게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방금 네가 느낀 것 보다는 미약하지만, 전방의 전사들은 그러한 기감을 느낀다. 그러니 다가오는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고.”
“으…….”
그러자 디라일라는 클라인과 아네이스를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
쟤들은 이런 걸 경험하면서 산다고?
물론, 방금은 셰인이 디라일라에게 살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새기기 위해 과하게 선보인 것이지만, 최전선의 전사들은 적과의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며 천천히 그 살기에 익숙해지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런 살기를 사람이 뿜을 수 있다는 것도 경악할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 보는 앞에서 지릴 뻔했다는 게 더 빡쳤던 디라일라가 외쳤다.
“이씨.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야! 그럼 너는? 말로만 보여 주지 말고 실천으로 해 봐!”
그 말에 클라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셰인을 바라봤고, 아네이스는 대놓고 디라일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의 말은 따르긴 따르겠자만, 그래도 뭐 하나 보여 줘야 보다 믿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분명 형님을 존경하는 클라인이었지만, 적어도 팀장이 됐다면 다른 팀원들에게 그 부분을 납득시켜야 하는 것은 분명했기에.
클라인 또한 셰인을 바라봤다.
“리더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지!”
그런 디라일라의 말에, 셰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소화나 시킬 겸 보여 주도록 하지. 따라와라.”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5화
25화 준비 (3)
준비를 마친 셰인은 일행들과 함께 임시 캠프에서 나와 앞으로 나아갔다.
앞서 수십 차례나 토벌된 던전이었기에 길을 찾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셋 모두 어려운 제약을 걸고 싸웠으니, 나도 거기에 맞게 제약을 추가하도록 하지.”
그러면서 셰인이 스스로에게 내건 조건은, 1서클 마법만 사용하겠다는 제안이었다.
물론 거기에 룬어도 쓰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저 평범한 1서클 마법.
그 정도면 랫맨 소굴의 정리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 * *
셰인의 뒤를 따라 움직인 경로는 거대한 돔 형태의 땅굴이었다.
천장에는 대형 야광석이 박혀 내부를 간신히 알아볼 정도는 됐을 정도였고, 그 아래로 랫맨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앞서 땅굴 내부를 순찰 중이던 랫맨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일행이 공동에 들어서자마자 십수 마리의 랫맨들이 각자의 울음소리를 내며 일행을 향해 흉흉한 기운을 뿜어냈다.
“아, 이게 살기인가?”
아까 셰인의 진득하고도 농후한 살기를 맛본 디라일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헷갈렸기 때문이다.
셰인과는 다르게, 십수 마리의 랫맨이 뿜어 대는 살기는 비유를 하자면 칼로 찔린 것과 뭉툭한 젓가락으로 콕콕 찔린 수준의 차이였던 것이다.
“형님, 한 번에 상대하기엔 적의 숫자가…….”
1서클의 마법이라고 해서 살상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도 적이 무방비할 때나 통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그 말에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보기나 해라. 먼저 디라일라.”
“응?”
“한 줌의 흙이 얼마나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보여 주마.”
셰인이 시동어도 없이 1서클 마법, 바람 칼날을 일으켰다.
다른 마법과 다르게 비교적 쉬운 1서클이었기에 가능했다.
“바람 칼날? 그런데 그게 바람 칼날이 맞나?”
셰인으로부터 느껴지는 마력 패턴을 보고 금방 알아차린 디라일라였으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라일라가 알기에 바람 칼날은 꽤 훌륭한 절삭력을 가지고는 있으나, 유지력이 부족해 희미한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마력이 담기지 않은 검에도 손쉽게 유지력을 잃는 경우가 많다.
“근데 왜 저렇게…… 두껍지?”
디라일라의 말처럼, 셰인이 소환한 바람 칼날은 그녀가 알던 마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일반적인 바람 칼날은 길어야 50cm 정도인데, 셰인이 소환한 바람 칼날은 말 그대로 검처럼 생겼으니.
“무릇 마법사란 상식에 갇혀서는 안 된다. 디라일라. 왜 너는 너의 흙에 마법을 곁들이려 하지 않지?”
“어?”
디라일라는 지하인이다.
선천적으로 흙을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들의 시점에서 그것은 마법과 유사성이 짙어 그녀는 인간들의 사회에서 마법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라일라에게 흙을 다루는 것은 이적에 가까운 힘이지, 마법이 아니다.
때문에 정작 디라일라는 마법에 대한 지식은 있으나, 그걸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번거로운 일보다, 단숨에 땅을 뒤흔들고 거대한 성벽을 만들 만큼 디라일라의 능력은 뛰어났으니.
셰인은 그 점을 집어 말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흔히들 정해진 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 순간부터 막힌 길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선지자라 말하지. 하나 틀렀다.”
그러면서, 셰인은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랫맨을 향해 바람 칼날을 날렸다.
“마법사에게 정해진 길따위는 없다. 어느 길에 서 있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하지.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마법은 어디까지나 ‘걷는 법’에 불과할 뿐, 길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달려드는 랫맨의 손톱이 바람 칼날을 파훼하기 위해 휘둘려졌으나, 바람 칼날은 유려한 움직임으로 랫맨의 공격을 피해 놈의 옆구리를 크게 베고 지나갔다.
정말 바람 칼날의 절삭력이 맞는 걸까 싶은 위력이었다.
그럼에도 바람 칼날은 조금도 그 형태를 잃지 않고 다음 사냥감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바람 칼날 또한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하나의 ‘걷는 법’에 불과하지.”
바람은 결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러나 바람 칼날은 그런 바람의 결을 통제해 파괴력이 줄어들었다.
그러는 편이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초보 마법사들이 속성을 다루는데 어려움을 덜 겪을 것이고.
하지만 셰인은 그 뻔한 길을 걷지 않았다.
바람을 통제하기보다 인도했고, 그로 인해 바람의 결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셰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람에 자신의 의지를 불어넣었다.
마법에 의지를 불어넣는 것.
마치 검사가 자신의 검에 의지를 불어넣어 검이 홀로 떠다니듯.
셰인 또한 자신의 의지를 바람 칼날에 불어넣은 것이다.
고위 마법사가 이것을 봤더라면 경악에 빠졌을 것이다.
마법사는 마력을 다루는 자이지, 의지를 다루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검사처럼 신체 내부의 우주를 다루는 것이 아닌, 신체 외부의 우주를 다루는 마법사이기에.
그럼에도 셰인은 손쉽게 마력과 의지를 접목시켰다.
단순히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뻗게 할지 선택한 결과였다.
그 광경에 디라일라가 뒤늦게 셰인의 마법에 대해 이론적으로 어설프게나마 이해를 마쳤고, 경악한 표정으로 그런 셰인을 바라봤다.
“마법사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개척자이자 선지자다. 정해진 마력 패턴 따위를 읊고 끝내는 걸로 마법사를 칭할 것이었다면, 모든 도서관의 사서들은 대마법사가 됐겠지.”
“미친…….”
그 말에, 디라일라는 경악 속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재정립했다.
셰인의 말처럼.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힘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아카데미에서의 마법은 그저 점수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당연했다.
인간들의 마법은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지 않으면 지금 자신이 흙을 다루는 수준보다 한참이나 뒤떨어졌고.
설사 시간을 들여 대마법사가 된다 하더라도, 그 시간이면 디라일라 또한 자신의 능력을 보다 개화했을 테니.
한편, 경악에 빠진 것은 디라일라뿐만이 아니었다.
클라인과 아네이스.
둘 또한 셰인의 바람 칼날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도,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
어느새 소환된 또 하나의 바람 칼날.
두 개가 된 바람 칼날이 유유히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보이는 검로는 마치 클라인과 아네이스.
그 둘이 이 던전에 들어와서 펼쳤던 검술과 흡사했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유려하고 아름다운 선을 보이며, 그 안에서 랫맨들의 급소를 향해 날아들었으니.
둘의 경악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몸을 쓰는데 있어, 나는 클라인 너와 같은 자질은 타고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력을 다루는데 있어서까지 밀리는 것은 아니지.”
마력을 이론적 바탕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셰인 본인이 가진 능력.
적어도 이론의 영역에 있어서는, 결코 클라인이 가진 본능의 영역에 밀리지 않는다.
이는 지난 삶에서 타락으로 인해 내면에 갇히며 긴 시간 동안 셰인이 갈고닦아 온 그의 노력의 결실이었으니.
“잘 보거라. 이게 전장에 있어서 가져야 할 전사의 검이다.”
그러니, 클라인과 아네이스가 펼치는 검술을 이론의 영역에서 파악하고, 분석하고 펼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보다 진보하는 것은 셰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거대한 땅굴 돔 전체에 랫맨의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으…….”
피 냄새에 현기증을 느낀 디라일라가 코를 틀어쥐었고, 클라인은 복잡한 심정에 눈살을 찌푸렸으며, 아네이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해.”
아네이스는 어떻게든 방금 셰인이 마법으로 펼친 검로를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그만큼 셰인의 바람 칼날은 아네이스에게 있어 이상적인 검술의 표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셰인이 이를 막았다.
“아네이스. 방금 내가 한 말을 기억하나?”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라고?”
“맞다. 내가 보여 준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분석한 길일 뿐. 너는 너의 검을 갈고닦아야 한다. 참고하되 매몰되지는 마라. 그 순간 너는 스스로의 길에 가로막혔을 때, 그걸 헤쳐 나가는 방법을 잊어버릴 테니. 선지자는 마법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알았어.”
“그리고 클라인.”
“예.”
“내 전투를 보고 느낀 점이 있더냐?”
“…….”
셰인의 물음에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많은 랫맨의 시체를 바라봤다.
셰인은 결코 랫맨을 편하게 죽이지 않았다.
어떨 때는 랫맨의 급소를 피하고 거동이 불편하도록 만들어 동료 랫맨들을 흥분하게 만들고.
또 어떨 때는 일격에 죽이며 죽음의 공포를 새겨 넣었다.
마치 몬스터의 본능에 각인시키듯.
셰인은 랫맨의 행동 하나하나에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도록 조절한 것이다.
소름이 끼치도록 몬스터에 대한 습성을 파악한 태도.
거기에 더불어 셰인은 랫맨이 어중간한 공포를 느낄 때 몇 놈을 풀어 주고 다른 동료 랫맨을 부르도록 내버려 뒀다.
그 결과.
처음에는 십수 마리에 불과했던 랫맨의 숫자는 지금 보는 것처럼 수십 마리로 불어나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셰인의 바람 칼날은 분명 클라인의 검술과 비슷했으나, 그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패도적인 검술.
마치 세상을 오시하는 듯한 자세는, 세상을 감싸는 듯하던 클라인의 검술와는 크게 달랐으니.
이는 검을 휘두르는 자가 추구하는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셰인은 그러한 결과를 클라인에게 요구했다.
디라일라나 아네이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 길을 개척하라는 게 아닌, 길을 제시하는 태도.
클라인은 그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형님은 분명 평소 까칠한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이런 패도적인 성격을 지니진 않았다.
언제 이런 변화를 겪은 것일까.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런 검을 보여 주시는 걸까.’
동시에 클라인의 몸이 떨렸다.
이는 옅은 두려움, 거부감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클라인은 한편의 마음속에 생기는 작은 변화에 혼란함을 느꼈다.
그런 셰인의 길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깨달은 것이다.
이는 클라인의 천재적인 검술에 대한 이해도 때문이었다.
전투에 있어서 동정이란 전혀 쓸모가 없는 것.
전투는 그야말로 광기 그 자체였고.
검에는 결코 동정 따위의 부드러운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그 완성형을 바로 눈앞에 뒀으니.
이런 훌륭한 교과서를 클라인의 재능은 결코 흘려 보내지 않았다.
‘여태까지 내가 휘두른 검은, 무엇을 위한 검이었지?’
분명 이 이후 오랜 고민이 클라인을 뒤따라 다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전처럼 클라인의 검에 적을 동정하는 감정이 들어갈 일은 없을 터.
비록 셰인만큼 패도적인 검술은 되지 못할지언정.
스스로에게 망설임을 제시하는 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5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6화
26화 준비(4)
진득한 진청색 피를 온몸에서 흘리는 트롤의 괴성이 숲에 울려 퍼졌다.
아네이스는 지친 몸을 이끌고 그런 트롤과 마지막 대치를 이어 갔다.
트롤의 가죽은 수십 번에 걸쳐 베이고 찔려 넝마처럼 변한 지 오래.
그마저도 타고난 회복 능력으로 몇 번에 걸쳐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그리고 또 많이 회복했기 때문일까.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친 트롤은 더 이상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고, 이내 무릎을 꿇었다.
한편 아네이스의 상태는 결코 좋다고 볼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 구른 흔적은 당연했고,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트롤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최후에 생명을 불태우듯 휘두른 놈의 몽둥이를 미처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내상까지 입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네이스는 얼굴에 미소가 자리해 있었다.
생사결.
비록 몬스터였으나, 신체강화를 제외한 어떠한 마력도 쓰지 않고 순수 인간의 힘으로 상대하는 트롤은 그야말로 하나의 벽처럼 느껴졌으니.
그 벽을 기어코 부수어 버린 아네이스에겐 이 고통 또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두르라던 셰인의 말처럼, 아네이스는 이번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것도 저런 괴물을 상대로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말이다.
특히 마지막을 장식했던 트롤의 그 공격은 아네이스에게 작은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죽기 직전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는 트롤의 공격은 아네이스의 ‘예지’를 살짝 비틀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겨우 실마리를 잡은 수준이었으나, 이 감각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되뇌다 보면 분명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터.
“……고마워.”
만약 셰인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경험을 언제쯤 맛볼 수 있었을까?
아네이스는 이번의 작은 깨달음을 셰인 덕분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네가 직접 성취한 일이다. 나보다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도록.”
“……부끄러워하는 거야?”
“헛소리.”
“훗.”
그런 아네이스의 미소에 셰인이 고개를 돌려 남은 팀원들을 바라봤다.
클라인은 같은 검사로서 아네이스의 깨달음에 순수한 축하 인사를 건넸고, 디라일라는 여기저기 구른 탓에 피를 흘리면서도 웃는 아네이스를 보며 기가 죽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디라일라도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방금 저 트롤이 이 던전에서 마지막 상대였기 때문이다.
“으아, 드디어 끝났다.”
일행은 그대로 앉아서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앞서 디라일라와 클라인 또한 고블린이나 코볼트를 상대했고, 그중에는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을 자랑하는 ‘워 보어’라는 이름의 멧돼지 무리 또한 토벌하느라 지친 탓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쉬었을까.
일행들이 쉬는 사이 셰인은 쓰러진 트롤에게 다가가 녀석의 목에 걸린 나뭇잎 목걸이를 끊어 들었다.
‘예정대로 이것까지 얻었군.’
이번 던전에 들어온 이유.
팀원들의 전력을 가다듬는 것도 있었지만, 셰인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이 트롤이 목에 걸고 있는 나뭇잎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평범해 보이고, 실제로도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나뭇잎.
그러나 셰인은 이 나뭇잎의 진정한 활용처를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숲 자체가, 그리고 이 트롤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나뭇잎이었다.
‘세계수의 나뭇잎. 이걸 먹는 건 두 번째로군.’
유일하게 엘프와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을 얻은 셰인은 일행들의 시선을 피해 나뭇잎을 씹어 삼켰다.
* * *
“아으! 죽는 줄 알았네, 진짜.”
던전을 마치고 아카데미에 돌아온 일행들은 먼저 해산하기로 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이래저래 팀의 첫 던전 토벌을 무사히 마친 만큼 축하하는 자리라도 가지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그럴만한 체력이 남은 사람은 없었다.
마력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한 채로 진행한 던전 토벌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셰인은 거기에 할 일이 더 있었다.
따로 모험가 협회와 아카데미에 복귀 서류를 제출하고, 또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을 현금화하면서도 분배 또한 해야 했기 때문이다.
“형님. 제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바쁘시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셰인은 라비아타와의 협업과 관련해 아직 정리해야 할 서류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여러 모로 바쁜 나날이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괜찮다. 나는 그리 지치지 않았다. 그보다는 돌아가서 이번 토벌에서의 전투를 복기해 보도록 해라.”
“으음…… 그래도.”
“괜찮대도. 어서 가 봐라.”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클라인까지 떠나고 홀로 남아 이어지는 업무를 모두 마친 셰인은, 근처 골목길로 들어가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확실히, 조금 바쁜 하루가 되긴 하겠군.”
진짜 사냥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 * *
“뭐, 뭐냐. 도대체 뭐냔 말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이 씨발 새끼야……!”
셰인은 언젠가 나이가 들어 노쇠한 슬라임을 본 적이 있었다.
멀쩡한 슬라임과 다르게 코어가 불안정했던 슬라임은 점액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흐물거리기만 했었다.
“워,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마, 말만 해라! 어? 내 돈이고 뭐고 전부 넘기겠다. 그러니, 그러니 뭐라 말 좀 해 보란 말이다……!”
눈앞에 있는 이 살덩어리의 이름 모를 귀족을 보니 그때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그 늙은 슬라임과 다르게 눈앞의 살덩어리는 말이 많다는 것 정도일까.
“제발, 제발…… 목숨만은…….”
눈앞의 귀족은 극도의 공포에 다리 사이를 축축하게 적시며 필사적으로 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존재는 무언가 다르다.
새하얀 가면과 대비되는 검은 안개로 몸을 감싼 이 존재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별장에 침입한 직후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호위 기사들을 죽여 버렸다.
평범하게 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몇몇은 싸우지도 않았음에도 그대로 미쳐 버리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고, 또 어떤 기사는 벽과 바닥에 생성된 정체 모를 이빨에 의해 씹어 삼켜졌다.
그럼에도 이 가면의 존재는 어떠한 말 한 마디 내뱉고 있지 않으니, 그 침묵으로부터 오는 공포가 귀족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히, 히힉! 그, 그럼 저건 어떠냐! 엘프, 엘프다! 아주 어렵게 구한 이종족이란 말이다. 어지간한 귀족 놈들도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라고!”
귀족의 말에 셰인이 시선을 돌려 한쪽에 손과 발이 속박된 한 여인을 바라봤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과 대비되게 그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는데.
그중에서도 소지와 약지가 잘린 왼손은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았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품이 가득했다.
‘엘프에게 포션이라도 먹인 모양이군.’
그러나 포션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약품이기에, 다른 종족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 독극물에 해당되니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 셰인이 엘프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귀족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저걸 주마! 그러니 이대로 떠나 다오. 그러면 절대 너를 쫓으라는 명령 따윈 하지 않겠다. 평생 조용히 살 것이야!”
“…….”
그러나 셰인이 여전히 말없이 엘프를 쳐다보자, 두려움에 의해 정신이 나가 버린 귀족은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이, 씨발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 하지 않았느냐!!”
거의 비명이나 다름없는 괴성을 내지른 귀족이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는 그대로 셰인을 향해 돌진했으나.
그걸 두고 볼 어둠의 정령이 아니었다.
셰인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귀족의 손을 포박하고 그대로 그 육중한 몸뚱이를 들어 올렸다.
[Krrr…… 주인님.]
정령이 정중하게 물어 왔고, 셰인은 공중에 매달린 채로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는 귀족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쩌면, 잠깐의 평화에 취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 다시금 시선을 엘프에게 돌렸다.
“아니면, 너무 여유를 부렸다거나.”
본래라면 이대로 녀석을 붙잡아 심문이라도 할 생각이었으나,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살리에르를 상대할 때도 그랬다.
생각해 보면 회귀 전의 셰인은 지금보다 더 악독하고 처절하게 상대를 짓밟았다.
그게 인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던 고귀한 영혼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타락이 없어진 이후, 셰인은 적을 너무 유하게 상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저 붙잡고 심문이라니.
이 얼마나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영혼이 망가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그러면서, 셰인은 살덩어리 귀족을 위아래로 훑었다.
“먹어라.”
[예, 주인님.]
“영혼 한 조각 남기지 말고.”
그 말에 어둠으로 일렁이는 아가리를 벌리던 정령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제 힘이…….]
“내 힘을 보태 주지.”
[아아……!]
여태까지 그저 물질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던 오리진의 양이 달라졌다.
마치 빗물로 고인 물줄기가 세찬 강줄기가 되듯.
셰인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오리진의 질과 양이 모두 한껏 늘어났다.
[너무, 너무 맛있습니다. 황홀합니다, 주인님……!]
“됐으니 이거나 먹어치워라.”
[예!]
“끄윽, 끼이이익!”
가진 바 형상이 훨씬 뚜렷해진 어둠의 정령이 점차 다가오며 이빨을 번들거리자 귀족이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이내 축 펴지며 팔다리가 늘어졌다.
과도한 공포로 인해 기절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둠의 정령이 입을 멀려 귀족을 집어삼켰고, 그제야 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셰인은 두 눈을 감고 어둠의 정령과 동화했다.
녀석에게 먹힌 귀족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방금, 셰인이 정령에게 명령한 것은 단순히 귀족을 먹어치우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영혼의 섭취.
다만 영혼은 어둠의 정령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셰인은 이를 위해 자신의 오리진을 녀석에게 전달했다.
이와 같은 일은, 이미 전생에 너무 많이 해 왔기에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다만 셰인은 여태까지 그 방법을 무의식중에 쓰지 않고 있었다.
그때의 자신은 타락으로 인해 그 행동에 이런 짓거리에 거리낌이 없었다.
단순히 물리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은 필요 이상의 잔인함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것들을 상대하는 데 대수가 어디 있겠나.’
당장 셰인이 상대하는 게 전생처럼 무고하며 고귀한 영혼을 가진 적도 아니고.
그저 인류를 좀먹는 거머리나 진드기 같은 놈들이 아니던가.
“평화에 취해 있던 거지.”
그렇게 셰인은 이름 모를 귀족이 남긴 영혼의 조각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정보를 모았다.
귀족의 이름은 리암 알친.
하이엘 왕국 출신의 자작.
6년 전에 연합국으로 들어옴.
타종족의 고통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성적 취향.
“별 쓸데는 없었군.”
그러면서, 셰인은 품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시간이 걸리겠어.”
여기저기 손때가 많이 탄 책은, 이전에 죽은 살리에르 백작이 생전에 만들어 둔 거래 장부였다.
거래 장부는 매우 세밀하게 적혀 있었는데, 거래 상대의 이름과 날짜, 품목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디서 몇 시에 누구를 통해 거래를 이뤘는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과연 살리에르와 거래를 했던 놈들은 자신들의 목줄을 잡고 있는 이 장부의 존재를 알까?
아마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장부에는 셰인이 가장 원했던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혹여 리암 알친의 기억 속에 그와 관련된 정보가 있을지 몰라 영혼을 살펴본 것이었지만, 쓸데없는 추잡한 기억만이 읽힐 따름이었다.
“놈의 영혼을 더 살펴보도록. 이종족 노예와 관련된 정보라면 모조리 기억해 둬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만족스러운 포식을 했기 때문일까, 어둠의 정령의 대답에는 어느 때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럼 이제…… 진짜 볼일을 보도록 할까.”
[이미 능멸당한 몸, 더 이상 어찌할 생각하지 말고 죽여라!]
이딴 소리나 내뱉는 정신 나간 엘프였으나, 어쨌든 셰인의 메자이아 대수림 공략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7화
27화 준비(5)
엘프(Elf).
아카샤의 대봉인이 있기 전, 숲의 주인이었던 종족.
세계수를 자신들의 신으로 모시며 살아가던 그들은 아름다운 외모에 숲을 사랑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알려져 있으나.
실상 몽상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엘프들은 결코 온순한 종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숲을 사랑하는 요정이자 숲지기였으며, 또 숲의 패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들.
그들은 자신들의 숲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스스럼없이 목숨을 던질 만큼 호전적으로 변하는 종족이기도 했다.
때문에 대수림의 공략을 위해선 엘프들의 적개심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한 준비도 마친 상황이다.
[진정해라. 너를 해하려 온 게 아니니.]
[……?!]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셰인의 목소리에 엘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연하지만 엘프들은 인간들의 말을 할 줄 모른다.
그들이 아카샤에 의해 던전이나 요람에 봉인되기 전에 인간은 고작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벌레 같은 종족이었으니.
당연히 인간의 언어를 알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셰인에게 죽은 살리에르 백작에 의해 리암 가문에 팔려온 엘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인간이 언제 이렇게 번성했단 말인가?
세상은 왜 이렇게 변한 거지?
어떻게 마력도 쓰지 못하던 벌레 같은 종족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몸이 떨리는 치욕 속에서 엘프는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하고 싶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매번 자신에게 치욕과 능멸을 선사하던 저주받을 인간이 낄낄 웃으며 뭐라 말했으나 엘프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귀한 노예가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귀족들의 아티팩트 때문이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치욕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이 흰 가면을 쓴 남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엘프어를 하는.
[너, 너는 무엇이냐. 분명 동족의 향은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의 커넥트 로드를 쓸 수 있는 거지?]
커넥트 로드는 엘프들의 대화 수단이다.
인간들과 다르게 엘프들은 자신들만의 특수한 저주파 마력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것이 바로 엘프의 언어.
그러나 이 저주파 마력은 비슷하게 따라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별한 마력의 줄기.
바로 세계수의 나뭇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셰인이 트롤에게서 때어 낸 나뭇잎 목걸이. 그게 바로 엘프들이 신성시하는 세계수의 나뭇잎이었다.
[너는 누구냐!]
그렇기에 엘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말은, 오만했다.
[봉인을 깰 자다.]
[뭐, 뭐라?]
[세상에 자유를 내릴 자이고 너희들의 친우가 될 자.]
[……!]
마치 세상을 오시하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 눈동자에 엘프, 엘라 루 오르카가 떨리는 심정을 가라앉히고 간신히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너희 동족의 자유.]
[무슨…….]
[해방을 원하지 않나?]
[……원한다.]
저 말에 아니라는 거짓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던전과 요람에 갇힌 그녀의 동족들은 영원히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어떤 영문인지 오르카는 제한적이나마 봉인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그 이유를 찾아보기도 전에 인간들에게 붙잡혀 치욕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엘프는 다급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 자유를 위해서 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일단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자유를 위한 갈망. 그걸 내게 바쳐라. 그거 하나면 된다.]
[너에게 종족 전체가 속박되라는 것이냐!]
[아니. 그 갈망을 채울 힘을 나를 위해 쓰라는 말이다. 내가 곧 너희의 자유가 될 것이니.]
[믿을 수 없다.]
공포는 공포였고, 신념은 신념이었다. 엘프들의 신념은 굳건하다.
때로는 그들의 가냘픈 외모 때문에 그들이 강자에게 굴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엘프들은 고대에 그 지옥 같은 곳에서도 자신들의 숲을 지켜 낸 용맹한 전사들.
절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동족을 팔아먹는 일은 하지 않는다.
설사 눈앞에서 친족이 살해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기에 셰인 또한 눈앞에 엘프를 고작 말 몇 마디로 협력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경험하게 해 주는 수밖에.
[알고 있을 테지. 봉인된 너희들이 시간이 멈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봉인에서 빠져나온 너 또한 다르지 않다. 알고 있지 않나?]
[…….]
오르카는 셰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
존재의 시간 자체를 빼앗긴 오르카는 성장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정체된 존재.
이는 성장이라는 생명의 축복이 가로막힌 것이다.
[새로운 탄생으로 인해 봉인에서 벗어나지 않은 너희에게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나,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셰인은 일렁이는 어둠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며 양손에 자신의 오리진과 마력을 모았다.
룬어는 단 한 글자.
모방.
회귀 전, 타락에 물든 셰인이 제1군단장으로서 군림할 수 있던 이유.
질리도록 써 왔던 단 하나의 마력 패턴을 짜내어 엘프에게 건넸다.
[이, 이건…….]
오르카는 생전 처음 보는 그 마력 패턴을 거부하려 했으나, 신체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스스로 기어 다니고, 일어서서 걷는 것처럼 본능에 새겨진 것과 같았다.
[흡?!]
자신에게 흡수된 마력 패턴으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마력 패턴은 셰인의 눈빛에 스며든 것과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
그게 내면으로 들어오자, 오르카는 무언가 해방된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내, 내게 무슨 짓을…….]
[해방감. 아주 짧지만, 너를 옥죄고 있는 봉인을 해 주했다.]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영기에 민감한 엘프인 오르카는 스스로의 영혼에서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이는 마치, 아카샤의 대봉인이 있기 전의 감각이었다.
[설마, 설마…… 드래곤! 너는 드래곤인가?]
아카샤의 대봉인마저 무시할 수 있는 마력.
그것은, 모든 종족의 정점에 선 존재이자, 세상을 수호하는 데미갓(Demigod). 반신의 영역에 들어선 드래곤들 밖에 없었다.
[아니. 지금은 단순히 따라 한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나는 단지 미래를 제시했을 뿐이다. 지금도 단편적으로 따라 한 것에 불과하지. 시간이 지나면 너는 다시 봉인될 것이다.]
[…….]
셰인의 말처럼, 봉인에서부터 자유를 되찾은 영혼이 아주 천천히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영혼에 쇠사슬을 거는 듯한 감각.
오르카는 두 눈을 감았다.
[너를 따르겠다. 단, 선택은 종족의 몫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결국, 자유를 갈망하는 너희는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셰인은 가면 너머로 미세한 웃음을 보였다.
이로써 메자이아 대수림을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끝마쳤다.
리암 알친의 별장에서 일어난 사건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대서특필로 연합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 * *
“으와. 기사 내용 한번 살벌하네.”
아침 신문을 펼치고 식당에 앉은 디라일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해당 기사를 읽었다.
[단독! 또다시 피살된 연합국 귀족. 살해 동기는 이종족 노예?]
[지난 날 4월 27일에 연합국 남부 외곽에 위치한 리암 알친 자작이 그의 별장에서 피살된 채 발견됐다.
이번 사건의 맡은 수사 기관에서는 지난 밤 일어난 처참한 살해 현장을 얼마 전에 피살된 살리에르 백작의 사건과 동일 인물이라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
하여, 이러한 두 피해자의 피살 방법이나 상황 등을 유추했을 때, 본 기자 또한 수사 기관과 비슷한 생각이다.]
바로 어제 일어난 귀족 살인 사건.
요 한 달도 안 되는 시기에 벌써 두 명이나 되는 귀족이 살해당한 일은,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특히나 디라일라에게는 더더욱 그러했으니.
심지어 이번에 죽은 리암 알친 또한 이종족 노예를 몰래 데리고 있다가 죽었다고 알려지지 않았나.
그 증거로 리암 알친의 시체 위로 그가 남긴 거래 장부가 있었다.
“뭐, 뭘 그렇게 시, 심각하게 봐?”
한편, 식당에 앉아 그런 디라일라에게 다가온 사람은 지휘학과 학과시험에서 2등을 차지한 베른슈타인 오스튼이었다.
“어? 아. 이것 좀 봐 봐. 또 귀족 한 명이 살해당했어.”
“휴, 흉흉하네.”
“그치? 앞으로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겠다.”
“여, 여긴 연합국의 주, 중앙이야. 이런 크, 큰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저, 적어.”
“아, 맞다. 그랬지.”
“그, 그나저나 요즘 바쁜 것 가, 같던데.”
오스튼의 물음에 디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보름 동안 아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말도 마. 무슨 이상한 제약을 걸고 던전을 클리어 하라는데, 아주 죽을 맛이라니까?”
“제약?”
기왕 이렇게 된 거 잘됐다며 디라일라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이거 보이냐? 이 누님이 요만한 흙으로 던전을 돌파했다? 머리가 아주 쪼개지는 줄 알았다고. 그 덕분에 기술적으로 많이 늘긴 했지만.”
“으, 음…….”
오스튼은 그런 디라일라가 내미는 한 줌의 흙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품에서 작은 외안경을 꺼내 흙을 보다 자세히 훑었다.
외안경은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오스튼도 마력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도구였다.
“이, 이거, 마력이 스며든 거 아, 아니야?”
“엉? 아니, 그야 뭐. 내가 쓰는 흙이잖아.”
“아, 아니, 마력으로 코팅이 됐다는 게 아니라, 말 그, 그대로 흙에 마력이 스며든 것 가, 같다고.”
“으응?”
그제야 디라일라도 자신이 꺼낸 흙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자 정말로 오스튼의 말처럼 흙에서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어,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 하하. 꼭 나, 나처럼 말을 더듬네.”
“아니, 근데 이거 뭐야, 정말?”
“최, 최근에 이 흙을 조, 조종하는 데 힘이 덜 들어가지 아, 않았어?”
“조금 익숙해졌다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무기물에 마력이 스며드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실제로 마력을 한가득 품은 마석도 던전에서 곧잘 발견이 되고, 실제로 마석 광산도 있을 정도이니.
때로는 오래된 물건에 마력이 스며들어 그 자체로 아티팩트가 되는 경우 또한 있다.
그러나 디라일라가 놀란 이유는, 이 흙을 쓰기 시작한지가 고작 보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 짧은 시간 동안 마력을 담아서 쓴다고 무기물에 마력이 스며든다면, 세상에는 아티팩트가 여기저기 넘쳐날 것이다.
자연스럽게 무기물에 마력이 담기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셰, 셰인은 너한테 이, 이걸 보여 주고 싶어 했던 거 같은데.”
디라일라는 처음에 셰인의 제약을 받았을 때, 단순히 마력의 컨트롤을 늘리는 방법인 줄 알았다.
실제로 그녀의 생각처럼 이 정도로 흙을 컨트롤해 본 기억이 없기에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그녀의 마력 컨트롤은 나날이 진보하고 있었으니까.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터.
지하인도 아니면서 지하인인 자신보다 더 특성을 잘 알 리가 있나.
아무튼 이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한 호재였으니.
“너, 너라면 이걸 좀 더 다, 다양하게 쓸 수 있지 아, 않을까?”
“으음…….”
오스튼의 말에 디라일라도 생각에 잠겼다.
마력이 스며든 흙.
그렇다면 이건…….
“내가 먹어도 되겠는데?”
“어?”
“나, 마력이 스며든 광물이면 뭐든 먹을 수 있으니까.”
언제나 숨기고 싶었던 뾰족한 이를 내보이며 디라일라가 말하자, 오스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이 마력은 네가 직접 만든 마력인데, 마, 마력이 늘어날까?”
“단순히 늘어나는 효과만 보자면 쓸모없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 마력에 대한 이해력 자체는 높아질 거야.”
사람이 본인의 장기를 직접 볼 수 없듯이, 마력도 비슷했다.
스스로의 마력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디라일라는 단순히 자신의 마력이 스며든 흙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에 대한 이해력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는 분명 평범한 인간들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와…… 대박.”
그렇게 지금의 훈련이 얼마나 유용한지 깨달은 디라일라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당장 비싼 마석을 먹지 않더라도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은 셈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네이스의 합류로 이 팀에 머물러도 되는 게 맞나 싶었던 디라일라였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 딱 붙어 있어야겠다.”
“자, 잘 생각했어.”
* * *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비단 디라일라뿐만이 아니었다.
셰인은 이후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향하기 전까지 컨디션을 조절하라며 대기하라 했으나, 클라인과 아네이스가 의욕을 내비쳤다.
셰인이 지휘했던 던전에서의 깨달음을 잊고 싶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디라일라도 던전을 클리어 하며 돈도 벌어들일 겸, 흙에 마력을 품기 위해 그들과 함께 던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던전에서는 항상 클라인과 아네이스의 논의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아네이스 양의 검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주 조금의 변화면 되죠.”
“그래. 그런데 네가 쓰는 검술은 변칙적이지만 그게 너무 본능에 치중되어 있어. 본능에 따라 상대의 급소만 노리니까, 오히려 그 변칙성이 죽는 느낌.”
“아, 그래서 어제 그 대련에서…….”
“응. 그런데 네가 썼던 그 검술에 변칙점은 어떤 의식의 변화로…….”
그러는 사이에 라비아타 모험단과 약속한 시간이 찾아와, 일행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약속 장소인 하이엘 왕국의 어느 고급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행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비단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요정의 외모.
가만히 있음에도 희미한 빛무리가 흘러나오는 듯한 이종족, 엘프 오르카였다.
[언제나 인간들의 시선은 역겹군.]
[참아라.]
[……알겠다. 동족을 위해 그리하지.]
오르카는 약지와 소지가 없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얼굴을 가렸다.
“야, 야. 너 저 엘프는 어떻게 데리고 온 거야?”
디라일라의 질문에 클라인과 아네이스 또한 비슷한 의문을 담은 표정을 보였다.
“알 거 없다.”
“뭐?”
“깊게 알려 하지 마라.”
“……우씨.”
“노예 같은 건 아니다. 그녀에게는 도움을 받을 게 있어서 말이지.”
“뭐? 무슨 도움?”
“그건 차차 알게 될 테니 기다리도록.”
“끄응…….”
그러다 이내 표정을 핀 디라일라는 조심스럽게 엘프를 향해 다가갔다.
어쨌거나 같은 이종족이 아니던가.
괜히 없던 친근감도 생기려 해서 어색하게 친근한 미소를 그리며 다가갔다.
“어, 안녕하세요?”
“…….”
당연하지만, 인간의 말을 하지 않는 오르카는 디라일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셰인을 바라봤다.
[굳이 이런 것들을 상대해야 하나?]
[말도 통하지 않으니 무시해라.]
[그러지.]
“저기 안녕하세요? 저기요? 응? 저기요? 나 누구랑 얘기하니?”
그렇게 디라일라의 이종족 친구 사귀기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8화
28화 짧은 신경전
라비아타라는 이름은 특별하다.
단순히 유서 깊은 모험단, 강한 모험단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 이름이 특별한 이유는, 그들이 기원 후 처음으로 인간 사회에서 마력을 사용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초대 라비아타 모험단장은 던전에서 인간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냈고, 그 지식을 아낌없이 세상에 풀어 인류 전체에게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선물했다.
그뿐이던가?
역대 라비아타 모험단장들은 하나같이 역사적인 발견을 해 왔고, 그때마다 인류는 크게 진보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라비아타라는 이름은 현 인류에게 있어서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그래서 셰인을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아닌 척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하하! 이거 진짜 대단하네. 고작 보름 만에 이만큼 준비했다고? 제임스. 우리가 그때 했던 계약이 민망하지 않아?”
“정말 할 말이 없군요.”
라비아타는 크게 웃으며 셰인의 준비성에 감탄했고, 깐깐해 보이는 제임스조차도 그런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와……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같은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셰인과 라비아타가 나누는 대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디라일라는 어이가 없었다.
대략 2시간 전.
라비아타와 제임스가 약속 시간에 맞춰 등장하고 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곧바로 메자이아 대수림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실상은 셰인의 독무대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
“보름 만에 그 깐깐한 마탑의 장로한테 인정받은 건 당연하고 그 양반한테 마도구까지 뜯어 왔다니. 정말 듣고도 믿기지가 않네.”
“보통 깐깐한 이들이 아니긴 하지요.”
지난 보름 동안, 셰인은 일행들과 던전 토벌을 마친 뒤, 독자적으로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 준비를 이어 갔다.
그 과정에서 마탑의 인물들과 접촉하고 탐사에 필요한 마도구를 양도받았고, 다른 엘프도 아닌 메자이아 대수림 출신의 엘프까지 어디선가 데리고 왔다.
특히 엘프의 등장에 라비아타가 크게 놀랐는데, 그 이유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대수림에는 저 귀쟁이들이 그렇게나 아끼는 세계수가 있잖아. 그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저 귀쟁이들하고 싸우기까지 하면 보통 피곤한 게 아니거든.”
사실상 메자이아 대수림의 기괴한 기상 현상과 맞물려 숲의 패왕인 엘프들과 전투를 치르라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그런 와중에 대화의 창구가 되어 줄 엘프까지 데리고 왔으니, 라비아타의 입장에서는 자다가 떡이 떨어진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거 참, 그쪽에선 이렇게까지 준비해 줬는데 나는 안 좋은 소식이나 들고 왔네. 라비아타라는 이름에 면목이 없어.”
“안 좋은 소식이라면…….”
“뭐, 이번 우리의 탐사에 거머리들이 좀 들러붙었어. 그 녀석들한테는 우리 모험단의 이름값에 네가 퍼뜨린 드래곤 하트가 참을 수 없이 향기로운 꿀단지 같았겠지.”
그러면서 라비아타의 설명이 이어졌다.
내용인즉슨, 제국과 메자이아 대수림과 접경 지역인 하이엘 왕국에서부터 동반 파견을 보내 왔다는 것이다.
“거기다 모험가 협회에서 최근에 이름 좀 날리고 있는 모험단도 같이 좀 부탁한다고 붙여 왔더라고. 아주 사방에 도둑놈들밖에 없다니까.”
“모양새가 그리 좋지는 않군요.”
“맞아. 자기들 이름값은 지키고 싶으면서, 또 정보는 얻고,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도 적으니 기회다 싶었겠지.”
“저기, 그래도 모두 명성이 적지 않은 곳인데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나요?”
도중에 디라일라가 손을 들어 묻자, 라비아타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떨까 싶지만, 결국 어른의 사정이라는 거지. 다른 거라면 모를까, 여태껏 발견된 적 없던 드래곤 하트에 대한 거니까. 이쪽을 견제할 겸, 기회가 되면 자기들이 꿀꺽할 심산인 거야. 가뜩이나 위험한 요람에서 우린 같은 인간들끼리 신경전을 펼쳐야 한다는 거고.”
“그리고 정말 눈앞에 목표물이 나타났을 땐, 신경전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셰인의 첨언에 디라일라가 ‘아…….’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에 이번에는 클라인이 조심스럽게 질문해 왔다.
“그럼 왜 굳이 그들과 함께 가는 겁니까?”
“요람 내부에서는 문제가 일어나면 해결이라도 할 수 있지, 외부에서 적으로 돌아서면 시작부터 일이 꼬이는 수가 있거든.”
“예……?”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그 녀석들의 제안을 거절하면 뒤에서 무슨 수작질을 할지 모른다는 거야. 특히 하이엘 왕국의 경우에는 메자이아 대수림 접경 국가이다 보니 우리가 요람으로 향하는 길을 아예 막아 버릴 수도 있지.”
“하지만 요람의 토벌은 인류의 숙원인데,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 말에 제임스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물론 그렇게 대놓고 가로막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명분은 그들에게 있죠. 혹여 요람에서 뭘 잘못 건드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하고, 그와 비슷한 논리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형성하면 여론도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거기다 그 부분을 주관하는 게 연합국의 모험가 협회인데, 이번에는 그치들도 여기에 한 발 걸쳤잖아.”
“예. 그러니 이에 대해 안정성을 확인하겠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시간을 쓰는 것 정도는 그들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라비아타의 이름값이 대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국제 여론마저 어찌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정면에서 맞붙는 거라면 모를까 그런 식의 여론전은 라비아타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니.
“……어렵군요.”
“왜 그렇게 복잡하게들 산데…….”
“정의롭지 않아, 그런 짓은.”
클라인과 디라일라, 아네이스가 차례대로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고, 라비아타는 그런 셋을 보며 쓰게 웃었다.
본래라면 이 정도까지의 견제가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여론전으로 몰고 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요람에 들어갈 때마다 이런 식의 방해가 들어온다면 국민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들고 일어설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가뜩이나 그 이름값과 전력만으로도 이동국가라는 이명에 걸맞은 라비아타 모험단이, 전설로만 알려졌던 드래곤 하트까지 손에 넣으면 어찌 될까?
국가급 권력을 가진 조직이 그만한 보물을 차지하는 것도 크게 문제가 될 사항인데, 그게 고작 하나의 조직에 들어간다?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됐든 그런 이유로 내일 탐사가 시작될 때 인원이 좀 늘어나 있을 거야. 그 부분은 이해 좀 부탁할게.”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대신 이 부분은 내가 잊지 않을 테니 기대하라고. 그럼 다들 잘 쉬고, 내일 다시 보자.”
“예. 들어가십시오.”
긴 이야기가 끝나고서야 라비아타와 제임스가 식당을 떠났고, 그들의 인기척이 없어졌을 때 디라일라가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던전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하네…….”
그 말에 클라인과 아네이스도 반박할 수 없었다.
“정작 내일이 되면 오늘이 그리워질 거다. 그러니 컨디션 조절은 알아서 하도록.”
일행들은 셰인의 그 말이 사실임을, 금방 실감할 수 있었다.
* * *
“하,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정말 이런 어린 생도들을 데리고 가는 게 맞는 선택입니까? 요람 탐사는 애들 탐험 놀이가 아닙니다.”
자신을 애덤이라 소개한 하이엘 왕국 출신의 기사단장이 눈썹을 찌푸리며 셰인과 그 일행들을 바라봤다.
어딘가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인 그는 각자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그 말을 내뱉었다.
그에 호응하듯, 옆에 있던 황실 호위 기사, 도미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확실히 좀 나이가 어리긴 하구려. 요람의 이름이 그리 가볍진 않을진대. 램퍼트 모험단장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기는 것으로 하죠.”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좋다며 중얼거리듯 답하는 모험가 협회의 이름으로 나온 램퍼트 모험단장, 일렉사까지.
그들의 태도에 라비아타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라고 진심으로 셰인 일행을 배척하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 탐사가 시작된 이유는 바로 셰인의 논문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각자의 이해득실을 위해 모인 자리.
그들은 이번 탐사에서 최대한 통제권을 붙잡고 싶어서 저런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다.
어찌 됐든 셰인과 그 일행들은 아직 아카데미 생도들이었으니까.
그때, 파견 나온 이들에게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은 셰인이 라비아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라비아타 님. 계약서의 내용, 기억하십니까?”
“어?”
갑자기 계약서?
무슨 말인가 싶어 계약서의 내용을 떠올려 보던 도중, 제임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계약서의 내용상, 셰인 님의 협력 대상은 어디까지나 라비아타 모험단에 한정됩니다.”
“그럼 제가 저들에게 배려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죠.”
“이 시간부로 저는 저들을 독자적인 세력으로 판단할 겁니다. 저들의 생존 여부는 제 알 바 아닙니다.”
파견 세력의 태도에 셰인은 저들을 없는 이들로 취급하기로 결정했다.
“하,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요람 탐사가 그리 만만하게 보이던가?”
곁에서 그 말을 들은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장, 애덤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셰인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누군가 그런 셰인의 앞을 막아섰다.
“이봐. 우리 단장님께서 말씀하지 않나. 어려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파견단에 포함된 기사 중 한 명이 거대한 덩치를 들이밀며 그리 말하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경직됐다.
“후우.”
“한숨?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웰스. 그만해라. 저쪽의 입장이 저러니 우리도 그에 맞게 취급하지.”
“하, 단장은 사람이 너무 착해서 문제요.”
애덤이 말리는 척 말했으나, 결국 이 또한 기선 제압을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
“이런 애송이들은 인생의 매운맛을 모르지. 그 잘난 가문의 이름 하나 믿고 왕국의 기사단장에게 이따위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면 말이야.”
그러면서 웰스라 불린 기사가 셰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순간.
라비아타가 그 손을 막았다.
“야.”
“엇.”
“적당히 하지?”
“…….”
그 한마디에, 웰스는 눈살을 한 번 찌푸리고는 라비아타의 손을 뿌리치고는 말했다.
“뭐, 알겠소. 그 유명한 라비아타의 말이니 이쯤 하지.”
그렇게 웰스가 기사단으로 돌아가자, 라비아타는 셰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야, 아무리 그래도 죽이려 한 건 좀 아니지.”
방금,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라비아타만은 셰인의 왼손 아래로 모이는 은밀한 마력을 눈치챘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지난번 라비아타가 봤던 마탄과는 전혀 다른 살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세를 졌습니다. 제가 타인과의 접촉은 극도로 혐오하는지라.”
신세를 졌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방금은 정말 저 웰스라는 기사를 불구로 만들 생각이었다.
회귀 후 많이 유해지긴 했으나, 셰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혐오한다.
인류를 지키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가올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였고, 또 그 과정에서 망가져가는 클라인을 지켜 주고 싶기 때문이지 결코 그들이 예뻐서가 아니다.
방금처럼 성격대로 행동했다면 일이 귀찮아졌을 터.
“어우, 두 번 손대면 목숨까지 잃겠네.”
그렇게 라비아타가 농담을 내뱉으며 멀어졌고, 이어서 일행들이 다가왔다.
“야 이, 진짜 저것들 싸가지가 없네? 잘 참았다, 잘 참았어.”
뒤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던 디라일라가 대신 화를 냈고, 아네이스와 클라인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클라인은 파견단으로 돌아가 동료들과 대화하고 있는 웰스를 보는 눈초리가 좋지 못했다.
‘저 녀석이 사람한테도 저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나.’
그 모습이 퍽 재미있던 셰인은 방금 느꼈던 혐오감이 씻기는 듯했다.
“됐다. 어차피 저 웃는 표정들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그 말이 실현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대수림 초입에서는 불행 중 다행으로 속성이 뒤섞인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빨리 달려라, 빨리!”
그럼에도 애덤은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의 휘하 기사단원들에게 소리쳤다.
콰과과과과과──!!
다만,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져 내렸을 뿐.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사방에서 강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물줄기가 터져 나오며 일행들을 압박해 왔다.
한편, 이 사태를 일찍이 눈치챈 셰인의 일행과 라비아타 모험단은 저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 상황.
그런 그들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던 황실의 호위 기사, 도미닉과 램퍼트 모험단 또한 그 뒤를 바짝 쫓아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뒤처진 것은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뿐.
물론 그들이 뒤늦게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아무 말 없이 달리기 시작한 셰인을 따라간 나머지 일행들보다 1분 정도 늦었을 뿐이다.
나름 신속하게 움직였다 해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나무뿌리 사이로 터져 나오는 물줄기에 발이 꼬일 뻔했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로 만들어진 동굴.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인지 거대한 나무뿌리가 시작되는 나무의 밑으로 커다란 입구가 뚫려 있었다.
앞서 달리던 셰인과 일행, 그리고 라비아타 모험단은 이미 나무의 밑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저 안으로만 대피한다면 숨 돌릴 틈은 있을지도 모른다.
“크아악! 사, 살려우흡?!”
그때, 무리에서 가장 뒤떨어져 오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나무뿌리 사이에서 터져 나온 물줄기에 맞아 쓰러졌다.
“웰스!”
하필이면 아까 셰인을 위협했던 기사였다.
이에 그걸 두고 볼 수 없던 애덤이 달려가 그를 끌고 오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웰스는 넘어짐과 동시에 물줄기와 함께 저 아래로 빨려내려갔다.
하도 물줄기의 힘이 강했기에, 웰스가 재빠르게 검을 땅에 꽂아 넣었음에도 순식간에 쓸려 버린 것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9화
29화 진입
동료를 잃은 절망감을 애써 뒤로하고, 애덤과 그의 수하들은 가까스로 나무 내부로 통하는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전력질주를 했기 때문일까, 그들은 하나같이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웰스 이외에는 낙오된 기사단원은 없다는 것.
그러는 한편, 일행들은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 모여 지도를 펼치고는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작태에 분노가 차오른 애덤이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라비아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미리 이렇다 말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았소? 이쪽은 방금 단원 한 명을 잃었단 말이오!”
“……하아. 저기, 지금 놀러 왔어?”
“뭐라?”
“여긴 요람 안이야. 댁들은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 아니고.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방금은……!”
“쯧, 이래서 기사들은 안 받으려고 했던 건데.”
물론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방금 같은 경우 경고 정도는 던져 줄 수 있었다.
그랬다면 그 웰스가 그리 허무하게 쓸려 내려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비아타도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었다.
“나라고 해서 사태를 알고 달려간 게 아니야. 자문역으로 온 이 친구가 달리기 시작해서 나도 달린 거지. 여기가 평범한 던전일 줄 알아?”
“큭…….”
“여긴 요람이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라고. 게다가 나는 분명 달리라고 소리쳤어. 그뿐이야? 분명 입장 전에 무장은 최대한 가볍게 하라고 했었지? 근데 그걸 무시한 사람이 누구였어?”
그런 라비아타의 말에 애덤이 입술을 씹었다.
확실히 요람에 진입하기 전에 앞서 라비아타는 일행들에게 무장을 최대한 가볍게 하라는 경고를 남겼다.
그러나 애덤은 그 의견을 적당히 흘려들었다.
마력을 수련한 기사들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더라도 깃털처럼 가볍게 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이 축축하고 푹 파이는 땅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기에 자체적으로 하이엘 왕국이 탐사를 진행했을 때에는 이렇게 초입부터 폭우가 내린 적은 거의 없었기에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또한 패인 중 하나였다.
“자자, 애덤 단장. 진정 좀 해 보시구랴. 물론 일이 이렇게 된 것에 애도를 표하는 바일세. 하지만 아직 대수림의 초입 아닌가? 그러니 쓸려 나간 그 기사도 무사할 가능성이 있네. 어쩌면 요람 밖으로 튕겨져 나갔을 수도 있지. 다행히 크게 무거운 장비들은 모두 벗어 두지 않았나?”
라비아타와 애덤 사이에 험악한 기류가 흐르자 그 사이를 막아선 것은 황실에서 나온 도미닉이었다.
“거기에 라비아타 단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우리가 너무 들떠 있던 게지. 5대 요람이라는 이름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어.”
도미닉과 애덤은 기사단 출신이다.
그들은 주로 같은 인간이나 몬스터에게 강하지, 이런 환경적 요소에 빠른 적응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도미닉은 애덤과 다르게 노련한 기사였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태도를 변경하는 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아까 보니 셰인, 자네가 먼저 달리기 시작하더구먼. 분명 자네는 이 대수림의 예측 불허한 날씨를 예측할 수 있는 거겠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본론을 꺼내들었다.
“아까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것은 사과하겠네. 그러니 우리도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나?”
그가 고개를 숙이자, 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셰인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한 것으로 제게 무언가를 요구하시는군요.”
“……크흠, 너무 티가 났나?”
도미닉이 면목 없다는 듯 웃었다.
“확실히, 자네는 아카데미 생도이지만 또 모험가이기도 하지.”
모험가는 대가를 받는 자들이다.
그들 또한 라비아타를 따라오는 조건으로 이후 라비아타 모험단에 이익을 가져다줄 거래를 마친 상황.
그러나 요람으로 입장하기 전, 셰인은 앞서 자신과는 계약한 바가 없다며 따로 행동하겠다고 했다.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것에 뭘 아끼겠나. 그래, 무엇을 원하고 계신가? 미리 말해 두지만, 황실의 권한을 사용하는 데엔 한계가 있네.”
그 말에 셰인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조건을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정도의 조건으로 하겠습니다.”
“흐음…… 알겠네. 그 정도라면 내가 어찌할 방법은 있을 것 같구먼.”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제공하는 정보는 어디까지나 라비아타 모험단과 황실의 호위 기사단뿐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 내용은 도미닉 경. 당신이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행할 수 있도록 서류로 남겨 두길 권하는 바입니다.”
“음, 철저하구먼. 그것도 수용하겠네.”
둘의 대화에 결국 다급해진 것은 램퍼트 모험단과 하이엘 왕국 기사단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번 탐사에서 떨어져 나갈 게 분명했다.
그나마 이번의 경우에는 그 폭우에 속성력이 부여되지 않아 그저 달리기만 했으면 됐지, 이후 산성이 섞인 비나 닿는 것만으로도 신체가 얼어붙는 재앙과 같은 기상과 마주하게 되면 복귀조차도 못할 수 있었다.
“자, 잠깐만요. 램퍼트 모험단도 거래를 요청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보여 드렸던 무례에 대한 사과도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나선 것은 램퍼트 모험단장인 일렉사였다.
“그쪽에서는 무엇을 내걸겠습니까?”
일렉사가 잠시 주변의 시선을 확인하고는, 이내 조용히 말했다.
“거래 내용이 유출되고 싶지 않아요. 비밀 유지 서약을 해 주신다면 바로 거래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어서 셰인과 일렉사는 둘이서 한쪽 구석에 가서 대화를 나눴고, 이내 일렉사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그러자 가장 곤란해진 것은 하이엘의 애덤이었다.
출발 전부터 셰인의 신경을 가장 건드린 것도 그였고, 그로 인해 단원을 잃은 상황에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애덤도 남은 부하들을 생각해서라도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까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원하는 거래 내용을 말한다면 재량껏 맞춰 보겠소.”
이번 탐사대의 서열 정리가 끝난 순간이었다.
* * *
“하하, 생각보다 야무지지 않냐?”
한쪽에서 파견을 나온 이들에게 이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셰인을 바라보던 라비아타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수완이 좋군요. 그저 짐덩어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저런 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다니.”
“……아무튼 이 돈 귀신은 봐도 꼭 지 같은 것만 봐.”
“아가씨께서 직접 모험단의 회계를 담당하시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갈 겁니다. 개처럼 돈을 버는 건 저인데 쓰는 인간들은 물불 안 가리고 쓰니 이런 말이 안 나오게 생겼습니까?”
“아아, 그만그만. 귀에서 피 터질 거 같으니까 그만.”
“예, 더 말해 봐야 들어야 할 사람들은 한 명밖에 없으니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그 말에 라비아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금 말했다.
“그러는 너도 저치들한테 엄청 뜯어냈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이쪽은 아가씨의 이름값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클레이튼 가문이 작은 가문은 아니라지만, 저 나이에 저들을 상대로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저렇게 몰아붙이는 것도 재능입니다.”
첫 만남과는 달리 제임스의 평가가 상당히 후해지자 라비아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진짜 돈 귀신이라니까.”
“이제 다 누구 탓입니까?”
“그만!”
* * *
일행들이 멈춰 서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품에서 꺼낸 기상 관측구를 살펴보던 셰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습니다.”
이 마도구는 요람에 오기 전, 셰인과 마탑의 장로가 머리를 맞대며 만든, 대수림 공략을 위한 장비였다.
“앞으로 15분. 다음 체크 포인트까지 이동합니다.”
그리고 대수림 공략을 위한 계획에는 마도구뿐만 아니라 한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 있었다.
대우기로 인해 매번 지형이 바뀌는 대수림이지만, 단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바로 셰인과 그 일행들이 머물렀던 거대한 나무들이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 거대한 나무들은 어마어마한 빗물에도 쓸려 나가지 않고,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켰는데, 대수림에서의 이동은 대부분 이런 나무를 찾아가는 형식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램퍼트 모험단장 일렉사는 자신의 단원들을 다독이며 선두에 선 일행들을 쫓아 뛰어갔다.
그러면서 일렉사는 아까의 선택을 떠올리며 재차 잘한 선택이라 스스로를 칭찬했다.
대수림에 입장한 지 어느덧 반나절.
만약 셰인이 챙겨 온 기상 관측구가 없었더라면 일렉사 일행은 여기까지 도달하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늘 위로 심상치 않은 마력의 변화가 느껴지는 것을 눈치챌 때는 늦는다.
그럴 때마다 하늘을 쳐다볼 때면 이미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나름 베테랑 모험단으로서 자부심이 있던 일렉사는 단원들의 목숨을 위해 기꺼이 그러한 자존심을 꺾어 버렸다.
‘그래도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어요.’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자신 있는 일렉사였다.
평생을 몬스터를 상대하며 살아온 그녀와 그녀의 단원들은 이곳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위기는 갑자기 찾아왔다.
“남은 시간 3분! 빠르게 돌파합니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에 마주친 몬스터 무리.
한 마리, 한 마리가 어린아이 수준의 크기를 가진 대형 벌레였다.
그레이트 우드 패러사이트.
움푹 꺼지는 땅으로 인해 이동에 제약이 있는 일행을 비웃기라도 하듯, 녀석은 땅 위를 제 안방처럼 빠르게 휘젓고 다녔다.
게다가 녀석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성액은 나무의 뿌리마저 녹일 정도로 지독했다.
하지만 일행의 대처는 침착했다.
“방진(方陣)! 저(沮)!”
일렉사를 위시한 단원들이 앞장서 방패를 앞세우자, 방패에 덧씌운 마력이 반응하며 마치 자그마한 성벽을 만들 듯 전방을 막아섰다.
“과연, 북방의 민족이라 이 말인가!”
해마다 몬스터 웨이브가 규격 외로 터져 나오는 제국의 북방.
그곳의 출신답게 일렉사와 그녀의 단원들은 방어를 하는데 있어서 특출난 능력을 보였다.
그에 도미닉이 크게 칭찬하며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고는 검에 마력을 모으며 외쳤다.
“전원, 황실의 저력을 보여라!”
“““예!”””
“웰스의 울분을 풀어야 할 시간이 왔다! 기사단, 발검!”
애벌레들이 한차례 산성액을 내뱉고 다음을 준비하는 사이, 황실의 기사단과 하이델 왕국 기사단이 애벌레들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단단한 외피를 자랑하는 몬스터였으나, 기사들의 오러 앞에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도륙이 나는 애벌레들.
그러나 살아남은 녀석들은 금세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날카로운 이빨은 단순히 나무를 파먹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애벌레들은 땅 밑으로 들어가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땅을 헤집고 다니며 기습적으로 튀어나와 일행들의 발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다행히 기감에 민감한 기사단원들이었기에 그런 공격에 당하지는 않았으나.
“1분! 디라일라!”
“오우케이!”
시간이 이 전투를 길게 허락하지 않았다.
셰인의 외침에 디라일라가 화답하며 마력이 담긴 발 구르기를 시전했다.
그러자 디라일라를 중심으로 마력의 파장이 울려 퍼지더니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일대가 흔들렸다.
그리고.
-끼이익!
이내 땅 안에서 애벌레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내부에서는 제 집처럼 드나들던 땅이 순식간에 몸을 찔러 오는 창으로 변해 애벌레들의 숨통을 끊어 내고 있었다.
“헤헹, 감히 내 앞에서 땅으로 들어가?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지.”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어서 달려라!”
“에이, 진짜! 잘했으면 칭찬이라도 해 줘!”
그렇게 셰인의 일행이 먼저 달려가고, 아직 남은 몬스터들을 황급히 처리한 나머지 인원들도 나무 내부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으, 와…….”
“여. 왔구나? 다행히 낙오자는 없네? 햐~ 그 사이에 또 쏟아지는 거 봐라. 안 그래도 찝찝했는데 좀 씻고 와야 하나?”
앞서 도착한 라비아타가 환히 웃으며 들어온 일행들을 맞이했다.
시커멓게 그을린 채로 연기를 모락모락 내고 있는 수 백 마리의 애벌레들과 함께.
그 광경에 일렉사는 아까 자신이 했던 다짐이 민망해졌다.
* * *
대수림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속성이 뒤섞인 비가 내리지는 않았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런 기후와 마주치는 중심부와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였다.
비가 내리고 그사이 최소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빠지고서야 허락된 이동 시간.
그마저도 대부분이 10분에서 2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다 보니 탐사대의 전진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디라일라는 허락된 휴식 시간 동안 자신의 마력을 점검하고는 이내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으. 이거 보통 힘든 게 아니네.”
다른 이들과 달리 디라일라는 체력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빠른 템포로 달릴 수 있던 이유는 이 땅에 넘쳐 나는 마력 덕분이었다.
디라일라는 그나마 남들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땅의 마력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흡수할 수 있는 디라일라와 다르게, 마력 불안정 현상으로 인해 다른 일행들은 마력을 수급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피로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바닥에 누워 있는 디라일라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쪽에서는 이미 짧게 눈을 붙이고 있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최대한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한쪽에서 기름 먹은 천으로 무구를 다듬고 있는 아네이스와 클라인에게 시선을 맞췄다.
“역시 전사라 그런가? 생각보다 여유가 보이네.”
“하하, 아무래도 전투는 그리 많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네가 체력이 낮은 거야. 운동 좀 해.”
지난 보름 동안 말을 놓게 된 클라인이 웃으며 답했고, 아네이스는 체력이 부족해 보이는 디라일라에게 일침을 가했다.
“우 씨, 나 정도면 양반이야! 나보다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예 틀린 말은 아니네. 마법학과 생도들은 대부분 앉아 있으니까.”
“그런 기준 이하의 사람들을 평균으로 생각하지 마.”
“에이, 진짜.”
토라진 디라일라가 나무에 뚫린 구멍 너머를 바라봤다.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마냥 쏟아져 내리는 빗물.
디라일라는 나름 비가 내리는 날에 운치를 즐겼기에 비가 싫지만은 않았으나, 이곳에 온 이후로 싫어질 것 같았다.
“하, 그래도 생각했던 것만큼 치열하지는 않네.”
처음에는 파견을 나온 이들과의 마찰 때문에 이번 탐사가 굉장히 숨 막히는 여정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에 반해, 그들은 첫날 셰인에게 꼬리를 만 이후로 이렇다 할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실에서 나온 도미닉과 램퍼트 모험단의 일렉사는 셰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며 조언을 받기까지 했다.
부디 탐사가 이대로만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 셰인이 다가왔다.
“보는 눈을 길러야겠군.”
“엉? 뭐야. 너도 쟤처럼 잔소리하게?”
“잔소리라기보단 충고다. 좀 더 세상을 넓게 보라는.”
“무슨 소리야?”
“네가 보는 것만큼 여기에 얽힌 인간들이 순수하지 않다는 말이다. 쉬는 것으로 뭐라 하진 않겠지만, 저들에게 긴장의 끈은 놓지 마라.”
“……?”
뭔진 모르겠으나 셰인의 말에 디라일라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이처럼 던전 내부를 탐사하다가 일어나는 범죄가 적지 않다고 했다.
더군다나 디라일라는 인간들에게 한 번 납치까지 되어 봤던 몸이 아니던가.
그녀는 엉거주춤 누웠던 자세를 바로하고 일행들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흠흠. 조심해야지, 음.”
‘그래도 황실과 왕국, 거기에 라비아타까지 포함된 이번 탐사에 설마 허튼짓할 사람이 있을까?’
디라일라는 그리 생각하며 괜히 찜찜해진 생각을 접고는 애써 눈을 감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0화
30화 거짓말
본론부터 말하자면, 셰인은 이 탐사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힘을 합쳐 대수림을 탐사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담합일 뿐.
각자의 목적은 다른데 목표가 같다면, 이 사이에서 불화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타락을 향해서,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서, 누군가는 답답한 자신들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기나 긴 기다림의 끝, 해방을 위해서.
그리고 셰인은, 그 사이에서 이해득실을 모두 챙겨 갈 예정이었다.
그에 따라서 셰인으로선 완벽하게 자신의 편을 구분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중에 적과 중립, 그리고 아군은 확실하게 정해 뒀으나, 애매한 자가 한 명 있었다.
“역시, 애매해. 생각 없이 검을 휘두른다니.”
그리 중얼거리는 아네이스를 바라보며 셰인은 생각에 잠겼다.
최근, 아네이스는 요람으로 출발하기 전, 준비 단계에서 던전을 토벌하며 얻은 작은 깨달음에 진도가 막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곧잘 보였다.
백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고민에 빠진 푸른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셰인의 경우 항상 무표정으로 자신의 페이스를 지킨다면, 아네이스의 경우에는 반대로 너무 많은 생각에 잠겨 있어 오히려 파악이 어렵다고 해야 할까.
‘철혈의 정의, 아네이스.’
셰인의 전생에, 아네이스는 조직을 위협할 정도로 위협적인 몇 안 되는 존재 중 한 명이었다.
다만 아네이스의 경우에는 반대로 인류의 몰락을 가속시키는 존재이기도 했는데, 셰인은 그 이유를 하나로 꼽았다.
오로지 흑과 백으로만 바라보는 시선.
아네이스의 정의에는 중간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의에 있어서 중간은 있으나 아군과 적군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전생의 아네이스는 범죄자가 자신의 친구든, 가족이든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심판에만 몰두한 여인이었다.
죄인의 처벌 행위로 인해, 인류의 사회에 큰 악재가 닥치는 것 또한 그녀가 알 바 아니다.
오로지 정의를 실천하는 것.
때문에 셰인이 조직에 막 가담하고 군단장이 되기까지, 그녀는 수많은 악인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처형했다.
때로는 필요악이라는 이유로 죄를 저지르는 자를.
때로는 인류를 위협하는 조직의 존재들을.
그렇기에 그녀는 철혈의 정의라는 이명을 얻었고, 누구든 그녀의 앞에서 죄를 범하기를 두려워했다.
해서, 셰인에게 아네이스는 애매한 존재였다.
당장의 셰인은 인류를 위해 ‘필요악’을 자처할 생각이었기에.
만일 지금의 아네이스가 회귀 전에 셰인이 봤던 그 철혈의 정의와 동일했다면 고민할 것 없이 아네이스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아네이스는 아직 그 정도까지 몰리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면 과거와 다르게 그녀를 컨트롤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셰인은 천천히 그런 아네이스를 탐색하며, 다가올 기회를 기다렸다.
* * *
어느덧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가 시작된 지 한 달째 되던 무렵.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 의해 나무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어코 비에 속성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방대한 숲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해 새하얀 도화지가 되어 갔다.
이때부터는 초입과 다르게 단순히 비가 그친다고 이동할 수는 없었는데, 이에 대한 대비책 또한 셰인이 준비해 두고 있었다.
[부탁하지.]
[알겠다.]
메자이아 대수림 출신의 엘프, 오르카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오르카는 대수림에 온 직후부터 쌓아온 엘프의 마력 일부를 탐사대가 쉬고 있던 나무의 내부로 흘려보냈고, 이내 미약한 흔들림과 함께 나무 밑으로 하나의 통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세상에…….”
놀랍게도 나무 밑으로 열린 공간은 빗물 하나 새지 않고 조명까지 밝혀진 제대로 된 통로였다.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하이엘 왕국의 기사, 애덤의 질문에 답한 것은 제임스였다.
“아마도 엘프들이 만든 공간 같습니다. 저도 고서에서나 읽어 봤지, 실제로 있을 줄은 몰랐군요.”
고대 종족인 엘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얼마 없으나, 세계 최고의 모험단 라비아타에 소속된 제임스는 엘프에 대해 비교적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에게 닥칠 대재앙…… 그러니까 아카샤의 대봉인이 아닌, 메자이아 대수림의 이러한 기상현상을 예견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때문에 대봉인이 실행되기 전, 그들은 세상에서 황급히 모습을 감추고 이처럼 자신들만의 환경을 만들었다, 라는 고서를 읽은 적 있습니다.”
“끄응……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좋았을 것을.”
애덤의 말에 일행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나와 준 게 어디인가 싶지만, 어느덧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도 한 달이 지난 시간.
그동안에 인명 피해가 아예 없던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저도 이곳 출신의 엘프를 찾아보려 했습니다만, 역시 쉽지가 않더군요.”
제임스의 말처럼, 애초에 아카샤의 대봉인에서 벗어나와 현재를 살아가는 이종족은 그리 흔치 않았다.
그마저도 봉인의 여파로 인해 자신들이 살아갔던 던전이 아니라면 마력을 운용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오르카 또한 대수림에 들어오고 나서야 엘프의 마력을 쓸 수 있었으니.
디라일라가 특이하다면 특이한 케이스일 것이다.
“본래는 이곳 엘프들과의 소통을 위해 데리고 왔습니다만, 이런 능력까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셰인은 굳이 관심을 사고 싶지 않아 그리 말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어쨌든 그로 인해 탐사의 속도에 가속도가 붙으려던 찰나.
“이런, 여기라고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은가 봐.”
라비아타의 말에 전방에서 다수의 몬스터들이 출현했다.
대부분 땅에 굴을 파고 살아가는 벌레 종류의 몬스터들로, 이전에 봤던 그레이트 우드 패러사이트도 보였다.
“확실히 적은 숫자가 아니군…….”
도미닉도 침음성을 흘릴 만큼 벌레 군단의 수는 ‘수백’이라는 수를 쓸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바닥부터 벽, 천장 할 것 없이 들러붙은 녀석들은 이내 탐사대를 발견하고는 이빨을 내밀었다.
“이런 괴물들이 넘쳐 나는 공간이라니. 도대체 기원전 대수림이 어떤 곳이었을지 쉬이 상상이 가질 않는군.”
그렇게, 일행들은 지친 몸에 마력을 부여하며 이어질 전투에 대비했다.
* * *
“젠장!”
가까스로 끝난 전투. 모두가 각자의 정비를 마치고 쉬고 있을 때, 한쪽에서 애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번 전투에서 또다시 휘하 기사단원 한 명을 잃었는데, 이로써 애덤과 함께 온 단원 15명 중 4명이 사망했다.
전투에 있어서 사상자가 나오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필 다른 탐사대원들 중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자까지는 나오지 않았던 것.
그러나 다른 이들이라고 마음이 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황실의 호위 기사단, 도미닉의 휘하 기사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으니.
그중에는 왼쪽 팔꿈치 아래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도 있을 정도로 부상의 정도가 심각한 이도 있었다.
그로 인해 탐사대는 이참에 이곳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주변의 지리부터 파악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여태까지는 대수림의 특성상 베이스캠프를 깔 방법도 없었거니와 탐색의 진행이 더딘 탓에 그럴 수 없었으나.
이제는 비를 막아 줄 방법이 생긴 만큼 더 이상 탐사를 반드시 급하게 진행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한 차례 베이스캠프를 준비하고 난 뒤.
도미닉은 탐사대 인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대로 움직이기엔 탐사의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남은 물자들로 버티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네만……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도미닉의 제안은 인력을 나눠서 이 나무 밑 통로를 수색하자는 것이었다.
위험도는 아무래도 높아지겠으나, 전투보다는 수색을 목표로 물자를 얻자는 것.
“그러면 너무 지체되지 않겠소?”
그의 제안에 애덤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으나, 도미닉은 수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상자도 너무 많지 않은가. 이 상태로 탐사를 진행해 봐야 피해만 불어날 것 같으이.”
“끄응…….”
확실히.
탐사대는 제법 지친 상태였다.
대수림의 기후 때문에 몬스터가 그리 많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반대로 탐사대처럼 악독한 기후에 살아남고자 몬스터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일정 시간 안에 몬스터를 뚫고 억지로 들어가야 하니, 마음이 급해서 부상자나 사망자가 나오는 경우도 상당했다.
“나도 일단은 찬성. 이 통로가 나무로 만들어져서 아무래도 내 마법은 마음대로 쓰기가 힘들거든.”
그에, 여태까지 몬스터를 처리하는 데 가장 큰 활약을 해 왔던 라비아타가 찬성표를 던졌고, 뒤이어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먼. 우선 피해가 가장 큰 하이엘 왕국 측에서 베이스캠프를 지켜 주시게. 우리는 주변을 탐사하도록 하지. 물론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정보를 얻기 위함이니 각자 다른 소속에 자신의 소속을 섞는 걸세.”
“뭐야, 할아범. 여태까지 사람 좋은 척하더니 역시 믿기 힘들다 이거야?”
“허허, 뭘 하든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오히려 나중에 말이 나올까 봐 노파심이 드는구먼.”
노회한 기사답게 그는 융통성 있는 제안을 해 왔고, 짧은 조율 끝에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정확하게 하기 위해 돌아가면서 팀을 바꾸는 게 좋겠네.”
이내 이어지는 수색 작전.
라비아타와 인원들이 각각 수색을 하며 며칠이 지난 결과,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오르카가 또다시 메자이아 대수림의 비밀 하나를 밝혀낸 것이었다.
평범하게 나무의 뿌리로 만들어진 벽이 열리더니 내부에서 다양한 식용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여태까지 군용 식품만 먹던 탐사대의 일원들에겐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어지는 수차례의 수색.
그날은 아네이스가 황실의 기사단과 수색을 이어 갈 차례였다.
“허허, 황실의 자랑이 오셨군그래. 그러고 보니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구먼. 대니얼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나?”
“……우리 단장님하고 아는 사이세요?”
시작된 수색 작전.
지난 며칠 동안 왔다갔다 했던 만큼 익숙해진 길을 따라 걸으며 아네이스는 도미닉의 말에 답했다.
“물론, 알고말고. 그 친구나 나나 황실에 몸을 담은 지가 몇 년인데. 그거 알고 있나? 그때 대니얼이 황실에 소속되기 전에 내 밑에서 몇 개월 수련을 한 적이 있었네. 자네의 전 단장, 로버트와 함께 말이야. 둘은 사이가 참 좋았어. 죽마고우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이였지.”
“…….”
하나.
“로버트의 일은 참으로 안타깝지. 당시에 대니얼이 얼마나 슬픔에 잠겼을지 나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네.”
둘, 셋.
“그렇게 친했던 녀석들이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로버트의 유지를 자네가 잇고 있으니 나 또한 안심되는구먼. 지금의 저지먼트 단장인 대니얼도 그 사실을 기꺼워하고 있을 걸세. 허허.”
그리고 넷, 다섯.
“특히 저지먼트 기사단과 우리 황실의 호위 기사단은 함께 많은 작전을 펼쳤네. 저지먼트 기사단은 정의를 위해, 우리 황실 기사단은 적들의 악의가 폐하께 미치지 않게. 그리고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았구먼.”
또다시. 여섯, 일곱.
“해서,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 제국을 위해, 황실을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말일세.”
마지막으로 여덞.
아네이스는 투명한 바다처럼 푸른 눈으로 도미닉을 바라봤다.
그 짧은 시간.
도미닉이 내뱉은 여덟 번의 거짓 속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 되느냐고? 흐음, 일단 처음에는 바짝 숙이면 된다, 아네이스. 그리고 강해지거라. 네가 그 거짓말을 타도할 수 있는 힘과 확신이 생겼을 때까지.]
언젠가 자신의 양아버지에게 들었던 그 말처럼.
“네, 제가 도움이 된다면요.”
아네이스는 강철 같은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 * *
‘좋지 않군.’
아네이스의 그림자에 어둠의 정령을 숨겨 뒀던 셰인은 자신에게 전해 오는 아네이스와 도미닉의 대화를 지켜보며 그리 생각했다.
아네이스의 정의는 위험하다.
그녀는 분명 악한 마음이 아닌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검을 휘두르지만, 그 정의를 감당하기에 인류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언젠가 그녀는 폭주에 가까운 상태에 다다를 것이다.
지금도 하나하나, 조금씩 단서를 수집해 가며 자신의 검을 벼르고 있으니.
타인의 거짓을 알아차리는 그녀의 능력은, 차츰 자신이 제거해야 할 대상을 정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녀석이 가진 원인을 파악해야 하는데.’
전생에도 셰인은 그저 아네이스가 폭주하듯 죄인들을 썰어 대는 것만 봐 왔지, 그녀가 어째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몇 가지 유추해 볼 점이 점은 있었다.
전생에 그녀가 첫 정의를 심판한 대상에 대한 사실이었다.
‘저지먼트 기사단.’
황실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자신들이 키운 아네이스에 의해 완벽하게 분쇄된다는 점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1화
31화 검은 꽃
실상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저지먼트 기사단을 위시한 황실의 기사단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수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으니.
회귀 전 아네이스가 그들에게 철혈의 정의를 내린 것은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아네이스는 정의를 실현한 뒤의 후폭풍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로 인한 뒷감당은 남은 이들이 해야만 했다.
그런 그녀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보다 정리된 혼란을 준비하고 싶은 셰인은 아네이스가 가진 정의의 원인을 알아볼 이유가 있었다.
‘실수했군. 아네이스와 이렇게 빨리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
가능하다면 디라일라를 구하며 죽였던 저지먼트 기사단원의 영혼을 파헤쳐 봤어야 했다.
‘하지만 대신할 것은 있나.’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나은 단서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셰인은 수색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아네이스와 도미닉의 일행들을 바라봤다.
* * *
수색이 진행된 지도 어느덧 보름.
충분한 휴식을 마친 일행은 다시금 탐사를 위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터널에 길잡이도 있으니 탐사가 쉬워졌군. 목표 지점까지 얼마나 걸리지?]
[인간들의 기준으로 열흘 정도다. 그리고 인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뭐지?]
[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동족은 너희 인간들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땐 어떻게 할 예정이지?]
[굳이 이 인원들이 모두 들어갈 필요는 없지. 거기다, 당장 너의 동족들도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을 테니.]
순간, 오르카의 걸음이 멈췄다.
잠시 셰인을 응시하던 그녀는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고, 재차 물었다.
[새로운 적? 동족들에게 적이 있다는 말인가?]
[그래. 그들은 나와 비슷하지만, 보다 강경하게 너희 동족들을 노리고 있지.]
[그들과 아는 사이인가?]
[놈들은 날 모른다. 하지만 나는 놈들을 알고 있지.]
메자이아 대수림의 드래곤 하트.
그 물건을, 조직이라고 해서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메자이아 대수림을, 그리고 거기에 살고 있는 엘프들을 꾸준히 압박하고 있을 터.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오르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지 않나? 너희 인간들이 던전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아카샤, 인간들의 신이라는 존재에 의해 시간이 붙잡혀 있다. 이곳에 있는 우리 동족들은 죽더라도 죽지 못하고, 살더라도 살지 못한다.]
마치, 저주와 같이.
라며 오르카가 말했고 셰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다.]
[예외?]
[내가 너에게 잠시나마 아카샤의 봉인을 해주했던 것을 기억하나.]
[……설마. 그들에게도?]
[그들에게 봉인을 풀 정도의 능력은 없다. 다만, 다른 방법으로 대봉인의 눈을 잠시 피할 방법은 있지.]
아카샤의 대봉인은 언뜻 보면 완벽한 듯싶지만, 아예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오르카도 시간이라는 것 자체는 여전히 봉인되어 있으나, 육체적 자유는 되찾지 않았나.
디라일라 또한 마찬가지.
오히려 디라일라는 아카샤의 대봉인으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되찾은 이종족 중 한 명이었다.
대봉인에는 이렇듯 구멍이 존재하고, 그중 몇 개는 인간들의 신 아카샤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그러나 조직은 그 구멍을 다른 방법으로 활용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봉인되어 왔음에도 너희에게 정신적 타격이 없는 이유를 아나?]
[아마도, 시간의 되새김 때문이겠지.]
던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초기화가 된다.
죽었던 몬스터는 되살아나고, 파괴된 주변 지형이 원상 복구된다.
당연히 그로 인해 생겼을 정신적 피로도 초기화되기 마련.
그러나 이 던전은 어떠한가.
[부폐한 사체가 많은 것 같지 않나?]
[……!]
그제야. 오르카는 이곳까지 오면서 지나쳐 온 몬스터들의 부패된 사체들을 떠올렸다.
물론, 던전에 부패된 몬스터의 사체가 없을 이유는 없다.
만일 그들이 봉인되기 전에 죽었던 것이라면 이해가 되니까.
하지만 많아도 너무 많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사체를 파먹는 애벌레들의 수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이 던전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제대로 흐르고 있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비틀어졌다고 봐야 할 터.]
[무슨 말인가.]
[누군가에 의해 시간선이 갈라졌다는 말이다. 여전히 이곳은 봉인되었지만, 시간 하나만큼은 이어지고 있지. 그리고 이 비틀어진 시간선은 너희 동족들에게 제법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고 있을 거다.]
[…….]
오르카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 *
탐사를 진행한 지 얼마나 됐을까.
해를 볼 수 없는 지하의 특성상 시간 감각이 점차 흐려지고 있을 때부터, 탐사대는 이변을 감지했다.
“뭔가 이상하군.”
방금 막 전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애덤이 탐사대의 지휘관들을 모아 그리 말했다.
“음, 확실히. 저 벌레들의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네.”
“그렇소. 다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왠지…….”
“유인되고 있는 것 같아요.”
라비아타가 애덤의 말을 받아치고, 애덤이 추가적으로 이상함을 표할 때 일렉사도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구먼. 이상하게 길이 막힌 곳이 많았지.”
마지막으로 도미닉의 말처럼, 일행은 어디론가 유인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흐으음. 이 늙은이의 경험에 따르면, 이럴 때는 신중하게 가는 게 맞는 것 같네만.”
“또다시 일정이 지체되고 싶지는 않으나, 도미닉 경의 말에는 찬성이오. 거기에 최근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시선 또한 느껴지고 있던데.”
“으음, 그런가?”
도미닉의 말에 애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감이라며 일축했다.
한편, 셰인은 애덤의 말에 속으로 살짝 놀랐다.
‘괜히 왕실의 기사단장이 아니란 말인가?’
이번 탐사대 중에서 애덤 측의 인원들은 전투력이 가장 떨어지는 편이라고 평가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애덤의 기감이 예민했던 것이다.
그 라비아타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놈들의 시선을 애덤이 느끼고 있었다니.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놈들이 움직였나?’
어찌 보면 오히려 여기까지 왔는데도 지나치게 조용한 것이라 해도 좋았다.
조직의 성격상 자신들의 일에 방해될 이들은 일찌감치 치워 두는 치밀함을 보였을 테니까.
‘굳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도 알겠군.’
물론, 조직이 이번 탐사대를 쉽게 봐서 내버려 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많은 탐사대를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
때가 되면 녀석들은 그간 준비해 둔 것들을 서둘러 풀기 시작할 게 분명했다.
‘역시, 그게 나오기 시작하겠지.’
애덤이 느꼈다는 기척.
그것 하나만으로도 놈들이 준비한 카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셰인은 눈치챘다.
이제부터는 진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셰인이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토벌대에 그 사실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
당분간은 아카데미 일행들에게 떨어지지 말라는 말 정도만 남겨 둔 상황에서.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습이다!!”
평소처럼 지하 터널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가장 먼저 라비아타와 셰인이 발걸음을 멈췄고, 그다음으로 애덤이 주춤한 순간, 주변의 발광석이 일제히 터지며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그 직전에 애덤이 소리쳤으나,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던 발광석이라는 광원이 사라지고 동시에 들어오는 공격에 당황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크아악!”
“끄아아아!”
다급하게 일렉사의 모험단이 방패를 들어 방어에 들어갔으나, 공격해 오는 이들은 능숙하게 뒤에 있던 기사단을 노리고 들어왔다.
“이게 뭔 날벼락이야?!”
전방에 있던 라비아타의 손에서 불길이 치솟자, 금세 주변이 밝혀졌다.
공격해 오던 적들은 기분 나쁘게 꾸물거리는 정체 모를 그림자들.
탁한 보랏빛 기운으로 이루어진 녀석들은 어둠 속에서 탐험단의 목을 쥐어 오고 있었다.
이어지는 격렬한 전투.
클라인은 지난날까지 얻은 깨달음으로 보다 정형화된 용오름을 피워 내며 검을 휘둘렀고, 아네이스도 그 옆에서 백색으로 빛나는 오러를 흩날리며 적을 베었다.
디라일라는 흙으로 빗어진 창과 방패를 만들어 침착하게 전장을 컨트롤해 나갔으나, 전장의 혼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젠장, 이놈들 뭐야! 오러! 오러를 피워라!”
“으으…… 소용없습니다! 베어도 계속 움직입니다!”
“이, 무슨?!”
오러에 몸이 베였음에도 움직이는 적들이라니!
오러는 단순히 절삭력을 높이기 위해 발현하는 기술이 아니다.
수련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오러에 베이게 되면 내부의 마력이 진탕이 되기에, 살상력의 차원이 달라진다.
하나 놈들은 그런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고 달려드니, 기사들이 혼란에 빠지는 건 당연했다.
생각보다 피해가 커질 것 같자, 셰인은 직접 해결 방법을 말할까도 싶었으나, 이내 먼저 클라인이 소리쳤다.
“단순히 베는 것으로는 효과가 적습니다! 선이 아닌 면으로 공격해야합니다! 타격으로 공격하십시오!”
그에 기사들 몇 명이 곧바로 오러의 형태를 바꿨다.
대수림에 있는 동안 클라인도 상당한 활약을 해 왔기에 몇몇 기사들은 클라인을 내심 인정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그들은 황실이나 왕실에서 나온 이들이니만큼, 금방 전투의 흐름을 읽고 방식을 바꿨다.
오러를 형성하던 마력의 형태가 묵직하게 바뀌기 시작하자, 이내 클라인의 말처럼 효과가 나왔다.
“적은 타격에 약하다! 그 점을 명심하고 전투에 임하도록!”
가장 먼저 실천했던 애덤의 외침에 기사들도 응답했다.
그렇게 적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전장의 열기가 사그라졌다.
“후우…….”
쓰러진 적들의 모습을 보며, 일행들은 앞서 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부터 살펴봤다.
“이게, 무슨…….”
적들의 공격을 허용한 이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다.
시체 위에는 검은 꽃이 피어났고, 시체는 마치 모든 마력을 뽑아먹힌 것처럼 창백했다.
그걸 본 라비아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꼭…….”
동시에 라비아타의 시선이 오르카에게 향했고, 오르카는 쓰러진 적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게, 당신이 말한 적들의 수작인가?]
[그래.]
적들을 감싸던 보랏빛 기운이 사라진 그곳에는, 핏줄이 파랗게 올라온 엘프들이 쓰러져 있었다.
[다크엘프다.]
* * *
탐사가 잠시 미뤄지고, 일행들은 다시 한번 회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메자이아 대수림에 이런 형태의 몬스터가 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소. 하이엘 왕국에서 수십 년 동안 자체적인 탐사를 통해 알아본 사실이오.”
애덤의 말에 도미닉이 물었다.
“으음…… 하지만 그 탐사대가 중심부까지 온 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고?”
그에 애덤이 아직 창백한 표정이 가시지 않은 오르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확인된 외형만 봐서는 엘프와 매우 흡사합니다. 다만, 엘프는 저런 모습이 아니지요.”
“음, 그렇지.”
비록 아카샤의 대봉인에서 자유로운 엘프는 그리 많지 않으나, 적어도 그들이 아는 엘프에게 방금과 같은 특성은 없었다.
“라비아타 단주, 그대는 뭘 좀 아는 게 있소?”
그에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애덤이 물었고, 라비아타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엘프라는 종족이 숲의 주인이라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지?”
“물론이오.”
“그런데 사실 엘프라는 종족이 단순히 숲에서 강하기 때문에 숲에 사는 게 아냐. 애초에, 그들의 특성은 숲과 크게 관련도 없고.”
“흐음?”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엘프란, 숲에서 살아가는 종족이었기에.
“사막에서 사는 엘프도 있고, 극지방에서 사는 엘프도 있어. 애초에 엘프는 그저 주변 환경에 따라 적응이 달라지는 종족이란 말이지. 엘프들은 단지 숲이 지닌 마력의 정순함 때문에 그곳에 있는 거야.”
“그렇다면 저 엘프들은 무언가에 오염됐다고 보면 되는 겐가?”
대충 이해한 도미닉의 물음에 라비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요람에 무언가 변칙적인 일이 생겼나 봐. 숲 전체가 저런 마력에 휩싸이진 않았으니까, 일부만 저런 상태라는 거겠지.”
“흐음…… 어쨌든, 저들의 기습은 위협적이오. 놈들의 마력에 상처를 입는 순간 아까 희생당한 이들처럼 된다는 말이니.”
앞서 전투에서 죽은 인원들은 급소를 당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
상처 부위로부터 보랏빛 꽃을 피워 낸 채로.
“그런데 자네는 아까부터 거기서 뭘 하고 있나?”
한참 회의 중일 때, 도미닉이 셰인을 향해 물었다.
셰인은 이번 전투에서 사망한 시신으로부터 꽃을 채취했는데, 품에서 모노클을 꺼내 착용하고는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적을 상대하려면 그에 앞서 적에 대해 알아야겠죠. 그들이 남긴 꽃에 단서가 있지 않을까 싶어 보고 있었습니다.”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구먼. 혹시 무언가 찾은 게 있나?”
도미닉의 물음에 일행들의 시선이 셰인에게 모였다.
직접 오지도 않고 메자이아 대수림의 기상 현상에 대한 가설마저 새운 셰인이었다.
그가 직접 본다면 무언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셰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2화
32화 분열
“본론부터 말하자면 라비아타 단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엘프들은 숲의 마력이 아닌 다른 마력에 의해 이러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당장 상황에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닌 것 같소만…… 혹시 다른 것은 없소?”
애덤의 물음에 셰인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사막과 극지방에 사는 엘프들과 다르게, 이들은 오염된 상태입니다.”
“오염이라면?”
“엘프들은 자신들의 마력을 주변 환경에 맞게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이 엘프들은 강제적으로 마력을 변화시켰습니다. 인위적이라는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흑마법사가 시체를 조종하는 것과 비유할 수 있겠군요.”
“……흑마법!”
그에 일행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갔다.
지금은 제국과 연합국에 의해 소탕됐다지만, 당시에 흑마법사들이 대륙에 얼마만큼의 피해를 줬는지, 이들 중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물론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겠습니다만. 결과는 비슷합니다. 이들은 언데드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베는 공격에 별 소용이 없던 것이죠.”
“끄응…….”
확실히 셰인의 말대로라면 아까의 전투가 설명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약점도 확실하다는 건데.
“그럼 화염 속성에 약하겠구랴. 언데드라하면 불이 가장 효과적이니.”
그러나 도미닉의 나지막한 말에도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격기가 가장 효과적일 겁니다. 아니면 빛 속성이나. 말이 언데드나 다름없다지만, 정작 언데드는 아니니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다크엘프들은 조직의 미완성작이다.
당장 이들에게 이성은 없으나 조금만 더 다듬어진다면 완벽하게 이성을 가진 본격적인 살인 기계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셰인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전생의 셰인은 완성된 다크엘프들을 봤었으니까.
그들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이 탐사대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게 분명했다.
“……셰인. 방금 그대는 인위적이라 말했소.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이게 인간의 소행이라 봐도 무방한 것이오?”
애덤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단순히 몬스터라면 일의 심각성은 내려간다. 이 또한 탐사대가 원하던 정보 중 하나였으니.
그러나 인위적이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 고대에 존재하던 마법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건 마법이라 부르기도 힘들지요. 연금술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요람에, 우리를 제외한 또 다른 존재들이 있다는 게로구먼. 우리는 그들에게 유인당하고 있던 것이고.”
탐사대는 어디까지나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이라는 요람을 알아보기 위해 온 것이지, 내부에 알 수 없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숲에서 엘프를 오염시킬 정도의 존재들이라니?
그들의 권한에서 이미 벗어난 일이다.
“나는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 당장 얻은 정보만 하더라도 이미 충분하다고 보고 있고.”
먼저 애덤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비록 그들이 목표했던 드래곤 하트에 대한 실마리는 얻지 못했으나, 어찌 됐든 셰인이 새운 가설이 대수림에서 먹힌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니까.
그뿐이던가?
오르카의 존재로 인해 보다 수월하게 대수림을 탐사할 수 있는 방안까지 찾아냈다.
이는 여태까지 꽉 막혀 있던 대수림의 해결 방안을 찾아낸 일인 만큼, 결코 적은 수확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렇긴 하네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고 돌아가기도 힘들지 않겠나?”
반대로 도미닉은 좀 더 탐사를 해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대수림에 있네. 그것도 엘프를 이 지경으로 만들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놈들이 말이야. 하다 못해 놈들의 정체나 일의 진행도는 알아 봐야 하지 않겠나?”
언뜻 들어 보면 도미닉의 말에도 일 리가 있었다.
일행들이 침묵하자, 도미닉이 말을 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누가 봐도 수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네. 이게 대륙에 어떤 불화를 가지고 올지 몰라. 하물며 대수림과 가장 가까운 것은 하이엘 왕국이 아니던가.”
“끄응…….”
그 말에 애덤도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침음성을 삼켰다.
“……하지만 이 일을 외부에 알릴 자들은 필요하다고 판단되오. 자칫 여기서 우리가 나가지 못하는 상황마저 배제할 수는 없진 않소?”
“이해하네. 하지만 이 대수림의 변덕적인 날씨를 뚫고 어찌 외부까지 이 사실을 알릴 수 있겠나? 이 늙은이는 여기서 병력을 나누는 일은 오히려 앞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보는구먼.”
“그 말에는 오류가 있소, 도미닉 경. 애초에 변수는 이미 생겨났소. 그 변수가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되는 일이오. 아니라면, 최소한 외부에 이 사실을 알려야 우리의 다음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틀린 말은 아니구려. 하지만 결국 이번 탐사대에서 선택권은 라비아타 단장에게 있네. 단장,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끝내 결정권은 라비아타에게 미뤄졌고, 이내 그녀도 애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일단 외부에 이 사실을 알릴 인원부터 추려 보자고.”
한 번 이야기가 나오자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이내 곧 황실 호위 기사단과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에서 인원을 차출하기로 했다.
애덤은 따로 차출된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불렀다.
“제국 측 놈들의 낌새가 이상하다 느껴지면 먼저 치거나 도주하도록. 반드시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폐하께 알려야 한다. 알겠나?”
“예.”
* * *
“후방에서 습격!”
차출 인원들을 내보내고 다시금 탐색이 이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원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갑자기 천장을 뚫고 등장한 애벌레들과의 격렬한 전투 중, 후방에서 다크엘프들의 기습이 시작됐다.
이처럼 다크엘프들은 정면에서 달려들기보다 탐사대의 빈틈을 공략해 왔다.
때문에 외부로 소식을 알릴 전령들이 차출된 이후부터 탐사대의 움직임은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거센 공격이 시작됐다.
“젠장할 몬스터 놈들이!”
“죽어라!”
이어지는 전투의 치열함. 그에 라비아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놈들의 첫 습격을 제외하면 여태껏 기습만을 해 가며 탐사대의 발목을 잡는 수준이었던 놈들이, 오늘은 사생결단을 낼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놈들의 숫자가 탐사대에게 큰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 꿍꿍이가 무엇일까.
순간, 라비아타의 동공이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마력? 아니, 저건…….’
다크엘프들의 발 아래로 음습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움직여 땅으로 퍼져 나갔다.
그 직후, 방금까지 천천히 움직이던 다크엘프의 마력은 라비아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쏜살같이 주변 나무의 뿌리들로 스며들었다.
“아! 모두 여기로 모여!”
오염됐다고는 하나, 엘프의 마력이다. 순식간에 나무로 흡수된 녀석들의 마력이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른다.
라비아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모이기도 전에.
오염된 마력에 닿았던 나무들이 순식간에 일행들을 덮쳐들었다.
* * *
숲에서 엘프들을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숲 전체가 엘프의 신체 일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성장조차 눈으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느린 나무들이, 마치 지능적인 동물처럼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공격해 온다.
누군가는 단순히 숲을 태우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이 세상에는 다양한 나무가 있는 법.
거센 불길로도 타지 않는 나무가 있는 반면, 태웠다간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는 나무까지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다크엘프에 의해 오염된 나무의 뿌리는 그저 덩치를 급격하게 불리며 길을 막아선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고 잠잠해졌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한참 격렬한 전투 중에 있던 터라 일행들이 나뉘어졌다는 것.
“아, 젠장. 저 녀석들, 여태까지 저런 걸 숨기고 있었어?”
사실 라비아타도 이런 일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엘프가 등장했다는 것으로도 일단 이곳이 특성상 일행들은 언제든지 목에 칼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만큼 숲에서 엘프들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다크엘프들은 여태껏 나무를 조종하는 모습은 전혀 보인 적이 없었기에, 그에 따라 탐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수를 쓰다니!
‘그래도 다행이라면 녀석들의 한계가 이 정도라는 건가?’
라비아타는 바닥에 쓰러진 다크엘프들을 바라봤다.
녀석들은 고작 나무로 길을 막은 것만으로도 힘을 다했는지, 창백해진 상태로 쓰러져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탐사대 일행이 다크엘프의 사망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탐사는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모습에 라비아타가 그리 말했다.
비록 고작 길을 막은 수준에 불과하지만, 어찌 됐든 명백하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다크엘프가 나무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나무 터널에서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야 할 것 같소. 하지만 그전에,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군.”
현대 탐사대에 남은 인원은 대략 26명.
그러나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은 고작 14명.
나머지 일행들은 다크엘프의 소행으로 갈라진 상황이다.
“하, 일단 사람들 찾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고.”
“라비아타, 당신의 마법으로 저 나무들을 태울 수는 없소?”
“어려운 일은 아냐. 그런데 이 나무들, 저 다크엘프의 마력에 오염됐잖아. 저런 걸 내 불로 지졌다간 어떤 중독 현상이 일어날지 몰라.”
“아…… 그렇다면 오염되지 않은 곳으로 간다면 어떨 것 같소?”
“그것도 힘들어. 난 몬스터에 대해서는 척척박사지만, 나무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 그런데 과연 그 엘프들이 이 통로를 그저 보기 좋으라고 나무의 뿌리로 만들어 놨을까? 내가 봤을 때는 아냐.”
모르긴 몰라도 엘프들의 대비가 있을 것이고, 실제로 이곳까지 오면서 열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터지는 나무들도 없잖아 있었다.
그 때문에 라비아타는 자신의 주무기는 화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이던가.
“괜히 잘못 태웠다가 통로가 무너지면 그땐 우리가 조난당하는 거라고.”
“……어렵게 됐군.”
그 외에도 다수의 방안으로 떨어지게 된 탐사대와 다시 만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클라인이 제안을 하기도 했고, 디라일라에게 거는 기대감도 나타났다.
“제 마력으로도 안 되겠습니까?”
셰인과 떨어지게 된 클라인이 직접 나서서 말했다.
‘형님…….’
던전에 들어온 뒤부터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곧잘 보였던 셰인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와 떨어졌다는 사실이 클라인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하물며 요람에 오기 전, 반드시 형님을 지키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불이 안 된다면 앞도적인 마력량으로 나무를 파헤치는 방법을 제시해 봤으나.
비슷하게 통로가 무너지면 곤란한 것은 매한가지였고, 디라일라가 무너지는 통로에서 흙무더기를 책임진다는 방안도 나왔지만…….
“으음,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사실 디라일라는 최근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디라일라의 부름에 땅이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해야 할까?
지하인인 디라일라는 땅에 얽힌 미세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땅은 정말 다양한 생명체와 자신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땅과 가장 친한 생명체가 있다 하면, 그건 바로 나무였다.
“다크엘프들이 죽은 이후부터, 나무들이 분노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곳의 흙이 제 뜻대로 잘 안 움직여요.”
평소라면 이런 제약은 별 소용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나무와 밀접한 엘프들의 지역이었고, 엘프의 마력에 감화된 나무들은 다른 지역의 나무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이 땅과 밀접한 관련이 생긴 것이고.
“어쩔 수 없네. 직접 움직이면서 찾아보는 수밖에.”
가능하다면 크게 움직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본래 조난을 당하면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곳은 던전이라는 것이고, 각 일행들의 식량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니 행동을 빠르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바로 움직여 보자고.”
라비아타의 결단에 일행들도 각자 고개를 끄덕였고, 클라인은 입술을 깨물며 검을 든 손에 힘을 쥐었다.
‘반드시 찾아가겠습니다, 형님.’
* * *
한편.
일행들과 떨어지게 된 셰인은 황실의 호위 기사, 도미닉과 그가 이끄는 기사단원 몇 명, 그리고 램퍼트 모험단원 몇 명이 모인 공간에 있었다.
그나마 여기서 서열이 가장 높은 도미닉이 눈살을 찌푸리며 길을 가로막은 나무의 뿌리를 바라봤다.
일반적인 나무뿌리와 다르게 하나하나가 성인 남성보다도 두꺼운 크기를 자랑하는 뿌리들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이에 몇몇 기사들이 오러를 일으켜 나무를 베어 봤으나, 겨우 흠집만 날 정도로 견고했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함정에 당한 것 같구먼. 나는 이대로 길을 따라가 봐야 한다고 생각하네만. 자네들은 어떤가?”
도미닉의 물음은 셰인과 램퍼트 모험단원들에게 향했다.
셰인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램퍼트 모험단원들도 자신들의 단주와 떨어진 게 불안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으니 저쪽도 찾아서 움직이는 방향으로 잡고 있을 걸세. 여태까지로 봐 왔을 때, 몇몇 지점에 합류 지점이 있었으니 일단 그걸 찾아 움직이는 게 맞는 것 같구먼.”
“알겠습니다. 램퍼트는 도미닉 경을 따라가겠습니다.”
“저도 별다른 이견은 없습니다.”
그나마 년차가 높은 램퍼트 단원이 그리 말했고, 셰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맙네. 그럼 간단하게 정비를 마치고 출발해야겠구먼.”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 좋은 미소를 잃지 않은 도미닉과, 언뜻 보기에는 주변의 경계를 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기사단원들.
그러나 셰인은 분명히 봤다.
셰인은 다크엘프들이 등장한 순간 이쪽으로 다가오던 황실 측 사람들의 움직임.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셰인은 앞서 걷는 도미닉을 보며 비소를 지었다.
‘이거, 기회가 넝쿨째로 굴러 들어온 격이군.’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3화
33화 여기서 왜 나와?
황실의 호위 기사, 하르페는 이번 불침번이 시작되기 전, 자신의 상관인 도미닉의 부름을 떠올렸다.
“이보게, 하르페. 슬슬 때가 된 것 같구먼.”
“때라면…….”
“셰인. 저 아이는 뛰어난 인재이지. 하지만 아직 인류에게 준비되지 않은 인재일세. 안타깝지만 여기서 정리해야겠어.”
하르페는 도미닉의 표정을 깊게 바라보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정으로 안타깝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재 황실에서 준비하고 있는 대국적인 일은, 저만한 인재를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업적이었기에.
인재욕이 강했던 도미닉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야간에 기회가 있을 걸세. 그들이 자네에게 도움을 줄 테니, 자네도 당분간 몸을 숨기고 있게나.”
그리고 이어지는 불침번의 시간.
도미닉의 말처럼, 기회는 얼마 가지 않아 금방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다크엘프들.
그에 맞춰 하르페도 검을 뽑아 들어 그들의 장단에 맞추기 시작했다.
“내가 적들을 막아 보겠네! 자네가 먼저 가서 이 사실을 기사단에 알려야 해!”
“알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셰인은 크게 당황한 기색 없이 하르페의 말을 따라 뒤로 달려 나갔다.
그에 하르페는 계획했던 대로 다크엘프 둘을 놓쳤고, 놈들은 실수 없이 달려가던 셰인의 등에 검을 꽂아 넣었다.
“큭……!”
짧은 단말마와 함께 셰인이 쓰러지기도 잠시.
“……끝났군.”
다크엘프들의 단검에 찔려 바닥에 쓰러진 셰인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게다가 셰인의 허리에는, 보랏빛 꽃이 피어나기까지.
죽음.
타깃의 확실한 죽음을 확인한 하르페는 그런 셰인의 주변에 서 있는 다크엘프들을 바라봤다.
“너희들의 역할은 끝났다.”
그러면서 하르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남은 다크엘프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한 순간에 세 명의 다크엘프가 머리를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머지는 놈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나도 이제 몸을 숨겨야겠군.”
방금까지 자신을 위해 셰인을 살해한 다크엘프의 시체를 바라보는 하르페의 눈에는 깊은 혐오의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이종족은 인류의 적.
비록 황실의 대국을 위한 일이었기에 임시나마 손을 잡았지만, 그조차도 하르페에게는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한편, 하르페는 쓰러진 채 미동도 보이지 않는 셰인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쯧,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이 또한 인류를 위해서다. 그 희생을 내가 기억하마.”
이런 시기가 아니었더라면 황실에서 중히 기용했을 인재였겠으나.
하필 메자이아 대수림의 드래곤 하트를 거론하다니.
그러한 안타까움에 하르페가 뒤돌아 걷던 직후.
“나도 기억하마. 네가 가진 역겨운 위선과 그 기억을.”
“……!!!”
들려서는 안됐을 셰인의 목소리와 함께, 하르페는 경악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들러붙는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 * *
외부에 알려진 굳건한 황실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상 현 황실의 내부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현 황제의 예기치 못한 건강 악화.
아직까지는 그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그 뒤로 평생 일어나지 못한다.
그 와중에 다음 옥좌의 주인에 가장 가까운 이는 작금의 황태자,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
황태자인 새뮤얼은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자신의 수족을 늘리고 있었다.
그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본래의 황제와는 다르게 황태자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추켜세우고, 만약 따르지 않는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숙청했다.
나날이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현 황제는 그런 황태자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훗날, 역사대로 시간이 흘러 황제가 된 새뮤얼은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에 취한 황제, 전쟁에 미친 전쟁광이 되어 인류의 미래에 거대한 재앙을 가지고 온다.
하지만 그 재앙은 여러 악재들과 조직의 오랜 준비로 인해 만들어진 예정된 재앙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수많은 기사들은 황태자 새뮤얼의 대국적인 ‘합일’에 경도되어 있었고.
그리고 이번 탐사대에서 파견을 나온 황실 호위 기사단 또한 그런 새뮤얼의 손가락 중 하나였다.
‘황태자님께서 드래곤 하트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지만 않으셨어도…… 영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구먼.’
황실의 사람답게, 도미닉은 귀족이면서 동시에 천재인 셰인의 처리가 영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훗날 있을 ‘합일’을 떠올리면, 이는 충분히 필요한 일.
만약 이번 작전이 잘 먹혀 들어간다면, 이후에 필요한 합일에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그를 위한 희생이 아니던가.
‘언젠가 하르페에게 술이라도 사 줘야겠구먼. 이런 궂은일을 시켰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본인이 역겨운 위선자임을 알지만, 도미닉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후우. 광명은 언제 찾을는지.”
아무튼, 지금쯤이면 명령을 받은 하르페가 셰인과 다크엘프들을 처리하고 지금쯤 모습을 숨겼을 터.
기다리던 아침이 찾아오고, 새벽 동안 불침번을 서야 했던 셰인과 하르페가 사라지자 잠시 혼란이 일어났으나, 이내 곧 멀지 않은 장소에서 다크엘프들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암울한 침묵이 흘러갔다.
“……안타까운 일이로고. 하지만 여기서 그 둘을 찾으러 갔다간, 본대와 떨어질 위험이 있을 것 같구먼. 일단 이동부터 해야겠네.”
그런 도미닉의 말에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태까지는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실에 도미닉은 속으로 작은 위안을 얻으며 걸었으나, 그가 알 수 없는 곳에서 그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 * *
서로 등을 맞대며 전투를 지속하던 디라일라와 아네이스는 클라인의 무용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럽다.’
‘천재라는 게 저런 걸 보고 말하는 건가?’
마력을 풀풀 풍기며 최전선에서 몬스터를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는 클라인의 모습이란.
분명 요람에 입장했을 때 당시만해도 성장속도 자체는 클라인이나 아네이스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셰인과 떨어지자마자 클라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단순히 마력으로 찍어 누르는 게 아니라, 그 마력 한 가닥 한 가닥이 적의 생명을 위협하며 움직인다.
검에서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예전에 셰인이 가르쳤듯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최적의 경로를 따라 급소만을 노린다.
그리하면 남은 인원들이 알아서 급소를 타격당한 몬스터를 정리할 테니까.
그러한 살벌한 전투에 여태껏 무관심했던 탐사대원들의 시선이 클라인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소문으로 역대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허.”
몇몇은 순수하게 대단하다는 시선을, 또 몇몇은 재능이라는 잔인한 현실의 벽 앞에서 짧은 절망을 내비쳤다.
클라인의 본격적인 활약 덕분일까, 그동안 부진했던 탐사대의 발걸음이 빨라졌으나.
이런 탐사대에게 또다시 위험이 찾아왔다.
“다크엘프다!!”
탐사대가 찢어진지도 어느덧 5일차에 접어들 무렵.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던 다크엘프들이 다시금 전장에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전과 극명히 달라진 점이 있었다.
확연히 다른 기세.
본능에 몸을 맡기듯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이쪽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투.
직전에 느낀 낌새가 다르지 않았음일까, 적들은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누군가에게는 경상을, 누군가에게는 확실한 죽음을 선사했다.
“아오, 이 성가신 것들!”
그에 라비아타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마력을 개방, 순식간에 적들이 있던 공간에 화염에 퍼부어지며 시야를 가렸다.
한편, 한쪽에서 그들의 전투를 관망하고 있던 오르카는 어느새 자신에게 접근한 다크엘프를 마주했다.
[서른두 번째 가지의 나뭇잎, 오르카.]
[……!]
[그분의 뜻을 따라 이곳에 왔다. 이 말을 전하라 하더군.]
[그분?]
[시간이 없다. 이제부터 전달하겠다. 내용은──]
[잠깐, 그게 도대체……!]
내용을 들은 오르카가 다크엘프에게 무언가 묻기도 전에 그는 다시금 연무 속으로 사라졌고, 이내 연무가 가셨을 때 더 이상 다크엘프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오르카가 혼란에 빠져 있기도 잠시.
“아직 전투가 가능한 사람들은 아직 경계 풀지 마! 경상인 사람들은 부상자들부터 먼저 옮겨!”
“아아아, 제이콥!”
“젠장!”
이번 전투에서 또다시 나온 희생자들 앞에서, 탐사대는 복수의 불길을 태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같은 엘프라는 이유만으로 오르카를 혐오 어린 시선을 바라보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로, 탐사대의 정신은 점차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 * *
잠에 빠져 있던 디라일라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음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하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요람 내부였기 때문일까.
이제는 이 정도에도 금방 눈을 뜰 정도로 지금의 상황에 익숙해진 디라일라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어?”
그러자, 그곳에는 오르카가 무릎을 굽힌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오르카 씨?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아니, 말 못했지 참.”
메자이아 대수림의 엘프, 오르카.
이번 탐사 기간 동안 몇 번이고 디라일라가 말을 걸어 보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눈길 한 번 준 적 없던 그녀가 오르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데 무슨 일로…… 라고 하기엔 말을 못하는데. 아, 답답해.”
언어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은 디라일라가 오르카에게 뭐라 말을 전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던 그때, 오르카가 주변에 돌멩이를 주워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맞네. 그림은 그릴 수 있었지, 참.”
그러면서 디라일라는 그녀가 그리는 그림을 세심하게 바라봤다.
“이건 나고, 이건 오르카 씨고. 음, 그러니까 나랑 같이 어디를 가고 싶다는 건가? 아! 화장실?”
그런 디라일라의 말에 오르카는 잠시 인상을 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요즘 분위기가 영…… 그렇지?”
최근, 다크엘프의 등장으로 인해 오르카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진 와중에 그녀 홀로 움직였다간 탐사대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특히, 도미닉과 떨어지게 된 황실의 호위 기사들은 오늘 있던 다크엘프하고의 전투에서 동료까지 잃었으니.
당장 오르카를 보는 시선이 매우 흉흉했다.
저들에게 다크엘프든 엘프든,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 테니.
괜스레 황실 호위 기사단원들이 머무는 쪽에서 시선을 돌린 디라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바로 가요.”
여태까지 마치 인형처럼 표정에 변화가 적었던 오르카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했던 게 마음에 들었는지, 디라일라는 훌쩍 일어나 불침번들에게 말한 뒤 오르카와 함께 외부로 나왔다.
“흠흠. 그래도 여태까지 꾸준히 말을 건 보람이 있구나. 후후.”
그동안 이 엘프와 친해지기 위해 얼마나 말을 걸었던가.
처절한 무시로 일관됐지만, 디라일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거 인간들 사이에서 살기도 팍팍한 마당에, 같은 이종족끼리 말이라도 트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다 손가락이 몇 개 없는 걸 보면 분명 힘든 시간을 보냈을 터.
디라일라는 오르카가 자신에게 차가운 이유가 타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 근데 우리 좀 깊게 온 거 아닌가요? 저기요, 어디까지 가세요? 아이 참. 여기에 우리 말고 누가 있다고…… 이렇게 멀리 올 필요 없어요.”
너무 일행들과 멀리 떨어진 게 아닌가 싶었던 디라일라가 그리 말해 봤지만, 오르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기요? 저기요! 여기서 더 멀어지면 위험해질 거 같은데!”
그렇게 디라일라가 뒤에서 부르기를 한참.
오르카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드디어 멈췄네! 아니 무슨 볼일 한 번 보겠다고 이렇게 멀리…… 까…… 지…… 어?”
그때쯤, 디라일라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앞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등장한 존재는, 디라일라도 익히 알고 있던 존재였다.
“다, 당신은…….”
문제는 그가 홀로 등장한 게 아니라, 등 뒤로 십여 명의 다크엘프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검은 기운에 휩싸인, 새하얀 민무늬 가면의 사내.
셰인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4화
34화 타오르는 미소
며칠 전.
전생에 다크엘프를 지휘한 적이 있던 셰인은 다크엘프의 마력이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하르페가 놓친 척 달려드는 다크엘프의 공격은 셰인으로선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황실 호위 기사단원 중 한 명인 하르페를 처리한 뒤, 셰인은 남는 시간 동안 상처를 치료하며 하르페의 기억을 정리했다.
그가 살아온 대부분의 쓸모없는 기억들은 지워 버리고, 황실과 연관된 기억들만 가다듬으며 정보를 수집하기도 잠시.
“별건 없군.”
대부분 셰인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제외하면,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황실과 얽힌 이해득실 정도만 파악할 수 있었다.
실상 이것도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던 부분이기는 했다.
그 기억의 내용은 현 황태자,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이 드래곤 하트를 노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조직과 연계하여 드래곤 하트의 일부분 혹은 그에 준하는 것을 얻고, 이번 탐사를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들의 목적이었다.
굳이 새로울 것도 없는 정보라 셰인은 대충 머리 한편에 이 정보를 남겨 두고, 이내 약속된 시간에 맞춰 찾아온 다크엘프들을 바라봤다.
녀석들은 명령받은 기억과 다르게 셰인이 멀쩡히 살아 있자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다크엘프들의 전투는 맥없이 끝나 버렸다.
어느새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셰인의 오리진을 품은 어둠이 다크엘프들을 향해 옥죄어 왔기 때문이다.
“이대로 살육 기계로 만들기엔 아깝지.”
가뜩이나 그리 많지도 않은 엘프들이다.
하지만 그 적은 숫자만으로도 전생에 수많은 인류의 중진들을 암살하는 데 도가 튼 놈들이었고.
살려 둔다면 분명 쓸 일이 많을 녀석들이다.
셰인은 오리진의 일부를 엘프들에게 주입했다.
‘하기야. 그 정신 나간 녀석의 발명품이니.’
가뜩이나 이지를 상실해 표정 변화가 없던 다크엘프들이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리고는 입으로부터 탁한 무언가를 내뱉기 시작했다.
다크엘프의 몸에 스며들었던 오염된 마력과 찌꺼기였다.
[정신이 좀 드나?]
[여, 여긴…….]
어느새 셰인의 오리진으로부터 풀려난 다크엘프가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올려다본 셰인은, 새하얀 민무늬 가면을 쓰고 있었다.
* * *
셰인이 조직에 몸을 담고 있던 시간은 고작 10년에 불과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생각하면 이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일 뿐이지만.
셰인은 그 10년이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에 있는 시간을 잘 이용하는 게 좋을 거야.”
타락한 자아에 밀려 스스로의 내면에 갇힌 셰인은 검은 머리카락에 마치 용암을 품은 듯한 주홍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셰인의 진정한 자아를 알아차리고, 때때로 마주칠 때면 저런 식으로 시간을 잘 이용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했다.
내면에 있을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녀의 말처럼 셰인은 스스로의 내면에 갇힌 상황에서도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타락한 자아는 끝까지 자신을 물고 늘어지며 놓아주지 않았고, 스스로 지쳐 내면 속에서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내면의 셰인을 괴롭혔다.
내면의 세계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음에도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 같다가도, 1초가 10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기이한 개념의 공간.
남들에게는 고작 10년에 불과했을 시간이었을 테지만, 셰인에게 10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개념으로 그곳에서 버텨 왔던 것이다.
때문에 내면에서 봐 온 외부의 지식들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뜯어보며 이윽고 습득에 이르러 결국에는 더 진화하는 과정까지 다다랐으니.
결국 그 소녀의 말처럼.
셰인은 그 시간을 결코 헛되게 쓰지 않은 셈이었다.
* * *
잠시 과거를 떠올렸던 셰인은 이지를 되찾은 다크엘프들을 바라보며 그때 그 소녀를 떠올렸다.
‘너의 말처럼 됐군.’
단지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였기에 여러 정보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당장 지금으로서도 그 소녀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셰인은 어쩐지 자신의 회귀가 그녀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평소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감정에 기댄 판단이라 그 생각이 오래 이어지진 않았지만.
‘당장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아무튼.
그때 그 소녀가 말했던 것처럼, 회귀 전.
타락한 자아가 받아들이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던 셰인은 눈앞의 다크엘프들에게 이성을 되찾게 하는 일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요람에 오기 전부터 다크엘프와 조우할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뒀으니.
[우리가, 어째서 이런 몸이 된 것인가.]
[……설명해 다오. 너의 정체는 무엇이지? ]
아직 오염의 여파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 다크엘프들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셰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어느 엘프에게 했던 것처럼.
[너희의 자유를 되찾아줄 자다.]
셰인은 천천히, 그러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 * *
셰인이 다크엘프에게 이성을 되찾아 준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선, 엘프는 기본적으로 육체에 마력을 받아들이는 성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엘프라고 해서 아무런 마력이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고,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걸 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셰인은 바로 그 마력 패턴을 분석하고, 따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물론 셰인이 그러한 마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당장으로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다크엘프들에게 심어진 마력을 비틀어, 기존에 그가 알고 있던 마력 패턴으로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희가 살기 위해서는 종족을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맞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다크엘프들이 품고 있는 마력에는 당장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당장 다크엘프들이 미완성품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다크엘프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마력을 충분히 보충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들은 이지를 상실했고, 조금만 싸워도 금방 마력이 바닥나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다크엘프들에게 남은 특유의 마력을 베이스로 두고, 셰인의 모조한 마력이 대신 소모되도록 유도하여 그러한 사태를 막고 있지만.
이도 언제까지고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다크엘프들에게 동족의 설득을 종용한 것이다.
물론 그들 또한 엘프이고 이지를 되찾은 만큼 동족을 배신하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셰인을 적으로 두기에는 이미 그들은 너무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적들은 엘프들을 잡아다 다크엘프로 만들고 있었고, 그 수가 적은 엘프들에게 이런 식으로 전력이 빼앗기는 것은 큰 위협이었으니.
물론 순전히 셰인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셰인 또한 그들의 처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만큼, 단 하나의 조건만을 말하고 있었다.
[붉은 정령사초를 섭취하지. 그리고 너희 엘프의 수장을 만나러 가겠다.]
붉은 정령사초.
정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그 독초는, 인간이 섭취할 시 그 섭취량에 따라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근원의 맹세도 하겠다.]
[……!]
고대의 종족들에만 알려져 있는 맹세.
이름이 거창한 만큼, 맹세를 어겼을 시의 페널티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는데, 이는 단순히 마력을 동결시키는 붉은 정령사초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도록 하지요.]
[좋아. 그럼 먼저 너희의 오염된 동료들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아봐야겠군.]
[예.]
이후, 셰인은 자신의 마력이 허락하는 수준까지 다크엘프들을 받아들였고, 그 수는 총 14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14명의 다크엘프와 함께 등장한 셰인을 향해, 디라일라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신…… 당신이 이번 일의 배후였어요?”
물론, 그녀가 충분히 해 봄직한 오해를 하면서.
그야 디라일라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셰인은 누가 봐도 흑막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동안 탐사대를 괴롭혀 온 다크엘프에게 둘러싸여져 있지 않은가.
하지만 셰인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비슷하지만 다르지. 나는 이들에게 강요와 협박이 아닌 선택과 자유를 선사했으니.”
“무슨 선문답 같은 얘길…….”
“네가 보기에 이들이 지금껏 만나 왔던 녀석들과 똑같아 보이나?”
“어…….”
그제야 디라일라는 셰인의 뒤에 서 있는 다크엘프들을 바라봤다.
놀랍게도 여태까지 만나 왔던 다크엘프들과 다르게, 그들의 눈에는 흐릿한 기운이 담겨 있지 않았다.
당장 지금도 호기심이 담긴 표정으로 자신과 오르카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자의 저주로부터 벗어난 이종족이 있다니. 거기에 땅의 종족이라. 오랜만에 보는군.]
[우리의 형제 또한 있다. 어째서 저 둘이 함께 다니는 거지?]
[정말, 저자의 말처럼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 걸까?]
[……선택은 동족들이 해 줄 테지.]
이러한 다크엘프들의 다양한 표정, 그리고 오르카의 평온한 얼굴에 디라일라는 일단 무조건적인 적의는 풀기로 했다.
“그럼, 우리가 상대했던 다크엘프하고는 다르다는 거, 맞죠?”
“그래.”
순전히 저 말을 믿어 줄 수는 없었으나, 일단 대화는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지만, 오르카가 괜히 자신을 이 자리에 끌고 온 게 아닌 것 같았으니.
“그럼 무슨 일로──.”
그런 이유로 디라일라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야, 그게 진짜였으면 좋겠네.”
“……?!”
“정말 그 다크엘프들이랑 상관없는 거, 맞지?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타오르듯 붉은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의 여인, 라비아타가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양손에 피어오른 불꽃처럼, 타오르는 미소를 지으며.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5화
35화 이변
라비아타의 등장에 디라일라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디라일라야 어쩌다 다리 하나 걸친 탐사대원일 뿐이지만, 직접 탐험대를 이끌고 있는 라비아타는 다크엘프들에게 당해 왔던 울분이 있었을 테니까.
실제로 그 표정이 더없이 사나웠는데, 그에 가면의 사내, 셰인은 별 부담 없이 라비아타를 맞이했다.
“주인공이 등장하셨군.”
“뭐, 내가 오는 걸 알기라도 했나 봐?”
“다르지. 네가 이곳에 오는 걸 알고 있던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초대한 거다.”
“초대라…… 이상하네? 난 초대장을 받은 적이 없는데.”
“가장 귀찮은 녀석들부터 죽이지 않았나. 그게 바로 초대장이지.”
“하!”
셰인의 말에 라비아타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역시, 황실 놈들만 죽이던 이유가 있었구만?”
“응?”
그 말을 들은 디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 전투 때, 다크엘프에 의해 죽은 이들은 모두 황실의 호위 기사단원들뿐이었다.
“그래서 너도 일부러 연막을 터뜨린 게 아닌가.”
“뭐, 맞긴 해. 저 녀석들의 시선이 뻔히 저 엘프에게 향했더라고. 뭔진 몰라도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겠다 싶어서 지켜보려고 했지.”
그 말처럼. 라비아타는 지난 전투 때 화가 난 모습으로 큰 폭발 마법을 선보였으나, 실상 파괴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퍼진 연기 때문에 시야가 가릴 정도였으니.
“그래서, 초대한 이유가 뭘까? 참고로 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작자는 태생부터 못 믿는 병이 있어요. 말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무얼 그리 날을 세우나. 그건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해도 될 일이지.”
“흥.”
그러면서, 셰인은 뒤에 서 있던 다크엘프들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워 줬으면 하는군.]
[괜찮겠습니까? 저자에게 느껴지는 마력이 심상치 않습니다.]
다크엘프 중 한 명이 셰인에게 그리 물었다.
‘하긴. 마력에 민감하기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엘프들이니.’
라비아타가 가지고 있는 마력의 분위기를 파악한 다크엘프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다크엘프라고 해서 셰인을 진심으로 생각해 한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원흉을 제거해 줄 희망이 아닌가.
[저자 역시 너희 종족에게 자유를 만들어 줄 존재다. 필요한 일이지.]
[……알겠습니다.]
그러자 다크엘프들이 자리를 비켰고, 디라일라 또한 그들을 따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이야. 딴 건 몰라도 용감한 건 칭찬해 줄게. 설마 나랑 단둘이 남겠다니. 이거 찐하게 데이트 한번 해 줘야겠는데?”
“필요 없습니다, 라비아타.”
여태까지 어둠에 파묻혀 잔득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와 다르게, 라비아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 이건 나도 좀 놀랐는데.”
새하얀 민무늬 가면을 벗은 셰인을 바라보며, 라비아타가 그리 말했다.
* * *
라비아타는 제어할 수 없는 존재다.
일찍이 셰인은 라비아타를 그렇게 인식했다.
힘으로만 따지자면 전생의 클라인에게 밀리지도 않았고, 단순한 화력만 보자면 오히려 클라인보다 앞설 정도다.
그뿐이던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현 인류와 비교하면 호수와 바다만큼의 차이를 보였고, 지략 또한 결코 밀리지 않았으니.
라비아타라는 이름은 그만한 이름값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조직에서도 가장 위협적으로 보고 있던 적이었고.
만약 조직의 수작에 걸리지만 않았더라면, 전생에 셰인을 죽인 자는 클라인이 아니라 라비아타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셰인은 그러한 이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분명 라비아타는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으나, 반대로 말하면 필요에 의해 손을 잡을 수 있는 동맹의 자격은 충분했으니까.
“어, 저기. 혹시 정체가 뭐야?”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이며 메자이아 대수림의 비밀을 풀어낸 클레이튼 R 셰인. 그게 접니다.”
“뒤에 수식어가 몇 개 더 필요하지 않아? 귀족 살해자라던가? 그런 거.”
지략이 뛰어나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라비아타는 셰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셰인이 해 왔던 몇 가지 일을 곧바로 유추해 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 엘프만 보면 뻔하잖아? 솔직히 의심이 없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좀 허무맹랑해서 말이야.”
엘프. 오르카를 가리켜 말한 라비아타의 말에 셰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저 디라일라라는 이종족 꼬맹이도 너 옆에 있고.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예. 맞습니다. 귀족 살해자라는 이명이 붙어도 할 말이 없군요.”
“하…… 그래. 일단 일이 좀 복잡한데. 설명 좀 해 줄 수 있을까?”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대수림에서 저열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무명. 그런 이름이었지, 아마?”
전생에 셰인이 몸을 담고 있던 조직의 이름, 무명.
그 이름이 라비아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 맞습니다. 그리고 황실의 어리석은 놈들은 그들과 손을 잡고 있지요.”
“그 늙은이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무슨 용기로?”
이런 라비아타의 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메자이아 대수림은 셰인의 논문으로 인해 넓은 대륙에 다시 한번 수면 위로 올라온 상태였고.
거기에 살아 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인 라비아타까지 직접 그 확인에 나섰다.
이미 온갖 이들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상황.
거기서 황실이 무슨 짓을 했다간, 인류를 위한 연합국부터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황실은 아마 거기에 큰 신경을 쏟지 않고 있을 겁니다.”
“쯧. 그 망나니 새끼 때문이군.”
라비아타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일도 그 미친놈이 꾸민 일이라는 거겠고.”
“……예. 그런데 라비아타.”
“응?”
“괜히 서로 탐색전을 펼치는 건 그만하도록 하지요. 그 정도 사실이야 이미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당신도 황실과 연결이 있을진대.”
“와…… 이거 좀 오랜만인데.”
그러면서, 라비아타의 두 주먹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내가 좀 자존심이 세거든. 이런 식으로 누군가 내 머리 위에 서 있는 게 지독히도 싫단 말이지.”
그런 라비아타의 행동은 셰인도 이미 예측한 바였다.
“우연이로군요.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만.”
그러자 동시에 셰인의 품에 있던 어둠의 정령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 대치 상황을 깨뜨린 건 라비아타였다.
두 주먹의 불길을 꺼뜨린 라비아타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 유명세가 싫은 건 아닌데, 귀찮은 게 많단 말이지.”
굳이 한 번 위협해 봤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라비아타였지만.
셰인은 방금 라비아타가 왜 저런 위협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내 위에 누군가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고 싶었겠지.’
외부에 알려진 셰인의 나이는 이제 겨우 18살.
그런 마당에 당장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셰인이 누군가의 밑에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라비아타였으나.
방금 셰인의 행동으로 라비아타는 끝내 판단을 마쳤다.
“진짜 특이하네. 정말 혼자 움직이는 거 같은데. 내가 황실과 연결된 건 어떻게 알았어?”
“황태자의 황실 호위 기사단, 2황녀의 램퍼트 모험단, 그리고 1황녀의 낮새가 될 사람은 얼마 없지 않습니까.”
“낮새라. 하하, 틀린 말은 아니네.”
서로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탐사대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황태자와 1황녀, 2황녀까지 가담한 이번 탐사대는 어찌 보면 황실의 복마전이 여기로 옮겨져 왔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난장판인 상황이었다.
셰인 또한 그 사실을 진작에 파악했었다.
이후 정세에, 황실은 빠질 수 없는 세력이었으니.
“뭐, 됐어. 어차피 나도 의뢰를 받은 것뿐이니까. 의뢰 보상으로 얻을 것도 충분히 얻었고.”
별거 아니라는 듯 라비아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도 라비아타의 입장에서는 그저 의뢰 하나를 받은 것에 불과했다.
물론, 이 사실을 알려지면 1황녀에게는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갈 것이다.
다름 아닌 그 라비아타 모험단이 의뢰를 받는 일은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황태자의 눈치를 잔뜩 보고 있을 1황녀로서는 혹여나 그러한 이유로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싫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무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무려 나를 초대했는데 별 볼일 없는 말을 꺼내진 않겠지?”
그 말에 셰인은 옅게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셰인이 이렇게까지 라비아타에게 정체를 드러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가진 세계 최고의 모험가라는 명성에 자부심이 있었고, 또 받으면 받은 만큼 대가를 확실히 치르는 인물이었으니.
“온전한 드래곤 하트를, 이번 탐사가 끝나기 전에 넘겨드리겠습니다.”
“온전한이라……. 그게 무슨 말일까?”
라비아타의 사나운 미소가 흥미진진하게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셰인은 이번 탐사에 대한 목표 중 절반을 이뤘다고 확신했다.
* * *
“뭐야? 다크엘프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허리가 굽은 추레한 노인의 목소리가 음습한 나무 동굴에 울려 퍼졌다.
겉보기에는 너무도 추레해, 그저 성격 나빠 보이는 노인처럼 보였으나.
그런 그의 앞에 서 있는 부하는 온몸이 떨리는 공포를 가까스로 참아 내며 입을 열었다.
“예, 고든 님. 현장에 나가는 다크엘프들이 계속해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게야! 분명 귀중한 실험체라고 하지 않았어!”
“분명 적들과 조우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 복귀하는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고작 시킨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그렇게 무능해서는 키메라의 재료로도 쓰기 힘들겠군. 쯧!”
갑작스럽게 메자이아 대수림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면서 동시에 그 유명한 라비아타의 탐사대가 이곳에 들어섰다.
그에 따라 조직에서는 고든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보내려 했으나, 고든은 그를 만류했다.
괜히 너무 큰 지원을 받았다간 엘프 여왕의 눈에 띌 가능성도 있었으니.
자신의 실험에 방해될 게 분명했다.
때문에 조직에서는 거기에 맞춰 여태까지 여러 수법과 황실 호위 기사단까지 뒤에서 몰래 조종하며 시간을 끄는 데는 성공했으나, 거기서 문제가 터져 버렸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머리는 떼어 내고 나머진 실험의 재료로 썼을 테지만…… 운이 좋구나. 지금은 너처럼 쓸모없는 것의 손이라도 필요할 때이니.”
그 말에 부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다크엘프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누가 감히 내 작품에다가 허튼 짓을…… 흥. 어쩔 수 없군. 일단 남겨 둔 것들이라도 제대로 챙겨라. 도대체 조직에서는 뭘 하고 있길래 정보 관리조차 똑바로 하지 못하고 있는지 원.”
다시 한번 혀를 찬 노인, 고든은 추가로 말했다.
“그리고 내 귀중한 실험체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파악해 놓거라. 만약 이번에도 시킨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래, 제법 쓸 만하게 만들어 주마.”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고든의 말에 결국 한차례 몸을 떤 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가치를 증명해야 할 게야. 내 밑에 있을 가치가 없다면 재료로 써야 할 테니까. 끌끌끌.”
그리 말하며, 고든은 부하들이 가지고 온 탐사대원들의 시체를 보며 추레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훌륭한 재료가 있어서 저놈이 얼마나 쓸모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언제 화가 났냐는 듯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노인은 이번 일을 별 볼일 없는 이변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한편, 고든처럼 예상에 없던 이변에 당황한 사람은 또 있었다.
“젠장!”
탐사대와 떨어진 황실 호위기사단은 거듭되는 전투 아닌 전투에 짙은 피로감을 내보이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마치 그림자처럼 검의 경로에서 벗어나 어둠에 몸을 숨겼고, 바로 옆에서 휘둘려지는 단검에 팔이 베이고 말았다.
“크아악!”
온몸의 마력이 팔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기사는 곧바로 단검에 베인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 냈다.
기사로서 한쪽 팔이 사라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나, 저들의 검에 베이면 어찌 되는지 여태껏 잘 봐 오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떨어진 팔의 상처 부위로부터 보랏빛 꽃이 피다가 이내 시들며 가루로 화했다.
“이 빌어먹을 귀쟁이 놈들아! 도대체 뭘 하자는 게냔 말이다!”
또다시 부상자가 속출하는 전투.
그에 도미닉이 울분 섞인 고함을 소리쳐 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느새 몸을 숨긴 다크엘프로 인해 도미닉의 기사단은 그 자리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마력으로 강화된 기감으로도 적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황실의 기사단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짧은 기습으로 치고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짓거리도 어느덧 나흘째.
잠을 잘 때도 편안히 잘 수가 없었고, 언제 목이 노려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그 용맹한 황실 기사단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는 명백히 전투라기보단, 사냥을 당하는 행위에 가까웠으니.
“빌어먹을 이종족 놈들!”
또다시 간발의 차이로 다크엘프를 놓친 도미닉이 분노에 차서 그리 고함을 내질러 봤으나, 어둠 속에서 모습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는 다크엘프들은 차가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6화
36화 끝나 가는 탐사 (1)
“어떻게 그런 일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겐가?”
고든에게 명령을 받은 조직원은 들려오는 도미닉의 말에 한껏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로 다크엘프가 공격해 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랬지. 그것도 수십 번이나. 이쪽의 피해가 얼마나 큰 지 알기나 하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줄 아나? 하루라도 빨리 지금 사태를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게야. 내 단원들의 인내심도 그리 길지는 않으니.”
이는 괜한 위협이 아니었다.
당장 도미닉의 기사단원들만 해도, 조직원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살기가 번들거렸으니.
‘젠장…….’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된지 모르겠다.
어째서 다크엘프들이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거지?
물론 연금술과 관련된 지식이 없는 조직원은 결국 고든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미친 노친네. 그렇게 자신하더니, 이따위 문제를 일으켜?’
그렇게 속으로 고든을 씹어 대며, 조직원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다크엘프들에게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까?”
“없었네. 그저 치고 빠지기만 반복하더군. 기존 탐사대에게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치고는 피해가 큰 것 같습니다만.”
“지금 우릴 의심하는 겐가?”
“아닙니다.”
“자네 상부에게 똑바로 전달하게. 이번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우리 황실의 믿음을 일부 잃어버렸다는 것을.”
“……예.”
고작 황실의 개에게 이따위 취급을 받는 게 짜증 났지만, 조직원은 다시 한번 참았다.
조직의 계획에 황실과의 끈은 결국 자신의 감정 따위보다 수십만 배는 더 중요할 테니까.
“그럼, 저는 바로 보고 드리러 가 보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자면, 죄송합니다.”
“썩 꺼지게. 자네 얼굴을 조금만 더 봐도 무심코 검을 뽑을 것 같으이.”
“…….”
그렇게 조직원이 떠나고, 도미닉은 그런 조직원의 뒷모습을 살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노부가 그리도 만만해 보이나 보구먼. 아니, 우리 황실의 위상이 줄어든 것일지도 모르겠어.’
일이 이 지경까지 온 이상, 도미닉은 더 이상 조직을 믿을 수 없었다.
누가 아는가?
드래곤 하트를 독점하겠다는 이유로 이쪽의 전력을 미리 떨어뜨리려는 행위일지.
아니, 도미닉은 오히려 그쪽이 진실이라 무게를 두었다.
애초에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 또한 비슷했으니.
[만일, 그들이 틈을 보인다면 드래곤 하트는 우리 쪽에서 가져올 수 있도록 해 보죠.]
[걱정할 건 없습니다. 만약 그만한 사안에 빈틈을 보인다면 그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우위를 차지하면 될 뿐이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도 놈들을 이용하면 되는 겁니다.]
[저들이 십수 년에 가깝도록 메자이아 대수림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전 인류를 책임질 우리 제국의 이름은 그리 가볍지 않다는 것을.]
도미닉은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고, 그 말에 따라 행동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다크엘프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자신들을 공격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다크엘프의 변화가 정말 자신들의 생각처럼 일부러 한 짓이 아니라면, 도미닉이 넘긴 블러핑 정보 또한 조직에게 날카로운 검이 되어 돌아갈 테니까.
“결국, 승자는 우리 황실이 될 것이다.”
한편, 도미닉이 그러한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자리에서 벗어난 조직원의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저놈들, 딴생각을 하고 있군.’
다크엘프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말을 피하는 도미닉의 행동은 조직원에게 그러한 확신을 주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살벌한 조직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간이다.
그만큼 눈치고 있었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 능숙했으니.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자신의 전임자들처럼 고든의 실험체가 됐을 터.
조직원은 도미닉이 보였던 태도를 떠올리며 이 사실을 빠르게 고든에게 알려야겠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나 그런 다급한 마음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발 아래로 어둠이 일렁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흠…….”
머릿속을 메우는 조직원의 다양한 기억들.
그중에서 필요한 것들만 뽑아내고 정리한 셰인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기억을 갈무리했다.
사실, 이렇듯 타인의 기억을 뽑아내는 일은 결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기억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정의하는 것인지라, 자칫 잘못하면 기억에 잡아먹혀 스스로가 누구였는지 혼란에 빠져 광인이 되기 쉬웠으니.
그저 단순하게 필요한 기억만 받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전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부모에게 버려졌든, 무언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든, 복수가 되었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사연이 있고, 그러한 사연들은 모이고 모여 기억을 강탈한 존재를 압박한다.
그러나 셰인에게는 이러한 압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야, 누구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관찰했어야 했던 셰인이었으니.
회귀 전, 타락한 자신의 의식 아래로 밀려 내면에 갇혔던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과 같은 일은 너무도 쉬울 따름이었다.
지금, 기억을 정리하면서 보다 중요한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단도진입적으로 말하자면, 예. 그렇죠.]
눈앞에 있는 엘프들의 여왕 앞에서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셰인도 분명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게 분명했다.
[솔직히 놀랍기는 하네요. 고작 몇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그래요. 놀라워요.]
그러면서 엘프들의 여왕이 고개를 들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미모를 보는 순간부터 몸이 경직되었을 것이다.
마치 자연의 사랑과 축복을 그대로 받은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미모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화이트골드의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는 마치 한겨울 눈이 쌓인 산처럼 보였다.
눈동자에는 에메랄드 빛 호수가 잠들어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마치 긴 시간의 기다림 끝에 맺힌 새빨간 사과와 같은 색이었다.
하지만, 셰인에게는 그저 앞으로 자신과 협력해야 할 대상.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미모에 혹하기에는, 이미 셰인의 인격적인 부분이 너무도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다르게, 과연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네요.]
[인간이라…….]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인간은 탐욕 그 자체였으니.
탐욕이라는 게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인류는 강해지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고, 그래서 엘프의 수명보다도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탐욕은 진보의 밑거름이고, 이게 곧 종족의 성장을 가져다 오니까.
하지만 때때로 인간은 그러한 탐욕에 잡아먹히기도 하는 존재다.
[하면,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음, 글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역시 고민이 되긴 하네요.]
그러면서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는 잎을 동동 띄운 물을 마시며 호수가 담긴 눈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보이는 모습만큼 여유롭진 않아 보이는데.]
[이해해 주세요. 우리 엘프들이 이런 걸요. 인간들과 다르게, 우리는 긴 세월을 살아가잖아요?]
[수명이 길다고 반드시 엘프들처럼 느긋한 건 아니지. 그리고 모든 엘프가 그런 것 또한 아니고.]
[어머, 정면에서 반박당하니 할 말이 없긴 하네요. 음, 사실 곤란한 건 맞아요. 우리 아이들은 수면기에 들어서, 적들에게 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도대체 그들은 세계수의 봉인을 어떻게 깨고 들어올 수 있던 걸까요?]
그 질문에 셰인은 가볍게 설명했다.
[세계수의 정체를 알지 않나. 적 또한 그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지.]
[아하……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그 ‘다크엘프’라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던 것이로군요.]
전생에 엘프들이 조직에 의해 그리도 무력하게 흡수당할 수밖에 없던 이유.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이어져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엘프들의 수면기 때문이었다.
수천 년에 한 번, 엘프들은 수면기에 접어든다.
그 이유는 현재 메자이아 대수림의 관계와 비슷한데, 수천 년에 한 번씩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이렇듯 마력 불안정 현상이 일어난다.
그때마다 엘프들은 스스로를 수면기에 접어들도록 만들고, 세계수의 봉인 속에서 지금과 같은 시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고작 5~10년 사이로 안정기에 접어들었어야 할 대수림은 아카샤의 대봉인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는 것이고.
조직은 세계수의 봉인을 풀고, 세계수가 아니라면 수면기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엘프들을 데리고 실험에 강행한 것이다.
그동안에는 수면기에 들지 않는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 홀로 조직을 상대하고 있었다.
다만 조직도 멍청하지는 않아서, 이 숲의 여왕인 프리실라와 정면에서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수면기에 든 엘프를 납치해 고든을 통해 다크엘프로 만들었다.
[그래서 아주 답답하답니다. 이 숲에서 제 눈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믿음이 깨져 버렸거든요.]
셰인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을 지켜 주는 세계수의 마력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들 중 하나가 바로 조직이었으니.
[그런 마당에, 그들보다 더 정교하게 제 동족을 활용하는 당신이 나타났네요. 그러니 어떻게 함부로 믿을 수 있겠어요?]
당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크엘프의 모습만 보더라도, 프리실라의 의견은 타당하고도 넘쳤다.
그녀는 현재 수면기에 들어간 수천의 엘프를 책임지고 있는 여왕이었으니까.
[확실히, 거래라는 것은 서로 믿을 수 있는 신용이 필요하지.]
[네, 맞아요.]
[필요하다면 근원의 맹세도 하겠다.]
[어머, 정말요?]
그러자 프리실라의 표정에 옅게 놀라움이 스쳤다.
지금 당장 이곳, 엘프들의 요람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근원의 맹세를 했지만, 고작 적의를 가지지 않겠다는 정도의 맹세는 쉬운 편이었으니.
[하지만 그게 만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죠? 계약의 내용과 과정까지 제게 설명해 주셔야 해요.]
[어려울 건 없지.]
사실, 근원의 맹세는 지금 셰인이 한 것처럼 가볍게 해서는 안 될 행위다.
스스로의 근원을 걸었다는 것만큼, 만약 맹세를 어길 시에는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소리였으니.
고대에서도 그리 자주 사용되는 거래 방법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스스로를 판돈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던가.
가능하다면 셰인도 이러한 행위는 하고 싶지 않았으나, 인간인 이상 그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이보다 효과적인 게 없었다.
고대의 종족들을 던전에 봉인시킨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던 아카샤였기에.
[그 정도라면 믿을 수 있겠네요. 좋아요.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그만큼 엘프들에게는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본 역사에서, 끝내 조직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 했던 엘프들이 얼마만큼의 악명을 떨쳤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런 위험쯤이야 감수할 만했다.
더구나 메자이아 대수림에 깃든 드래곤 하트는 그녀의 협력이 없다면 얻을 수 없었으니.
[아참. 그러고 보니, 제 형제자매들을 저런 모습으로 만든 장본인은 꼭 제 앞에 데려다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만큼은 제 손으로 직접 찢어 버리고 싶거든요.]
화사한 미소와는 다르게 살벌한 프리실라의 말에도, 셰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 * *
조직의 계략에 의해 탐사대가 흩어진지도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나눠진 탐사대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게 합류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다크엘프들이 나타나지 않는군요.”
그간 탐사대를 괴롭히던 다크엘프들의 등장 빈도가 현저히 줄어든 것.
클라인의 그 말에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식사를 마쳤다.
“으아, 그래도 지치는 건 똑같네.”
디라일라의 말처럼, 일행들은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탐사가 시작된 지 2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그간의 피로는 단순히 쉰다고 풀리는 게 아니었으니.
“거기다, 다행이네. 셰인이 멀쩡하다니.”
“응…… 그치.”
디라일라의 말에 클라인도 얼마 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라비아타가 혹시 몰라 셰인에게 걸어 뒀던 생명 추적 마법이 느껴졌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그동안에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마력 불안정 현상 때문에 제대로 관측되지 않았는데, 셰인의 마력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는 소식에 클라인은 한숨 놓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직 셰인이 합류하지 못했다는 것도 있었지만, 라비아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때문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알리지 마.”
그 한마디는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고 있었고, 클라인은 그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해 빠지지 않았다.
‘탐사대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설마하니 같은 탐사대에 배신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클라인이었기에,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클라인이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셰인은 황실 기사단과 함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살아남은 몇몇 황실 기사단이 있었고, 클라인은 굳게 입을 다물며 아네이스를 바라봤다.
아네이스 또한 저지먼트 기사단으로서 황실과 연관이 있지 않나.
‘……내가 너무 민감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만약 셰인이 관여된 게 아니었다면 클라인도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다음 날 저녁.
거대한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공동 아래에서 갈라졌던 탐사대는 다시 한번 합류할 수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7화
37화 끝나 가는 탐사 (2)
다크엘프들의 기습이 사라지게 되니 탐사대의 진행 속도는 날이 갈수록 거침이 없어졌다.
물론 메자이아 대수림의 명성에 걸맞게 몬스터들의 등장 빈도도 많아졌으나.
급격하게 성장한 클라인과 아네이스의 활약과 다시금 흙을 다룰 수 있게 된 디라일라의 가세는 탐사대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과 같았다.
그렇게 셋이 중심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며칠.
탐사대는 드디어 다른 통로들과 연결된 공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뜻밖에 그곳에 먼저 도착한 이들은 다름 아닌 램퍼트 모험단이었다.
“아, 오셨군요.”
하지만 램퍼트 모험단도 보통 고생을 한 게 아닌지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으나, 적어도 사상자는 없는 듯 보였다.
“이야, 다행이다. 먼저들 와 있었네?”
“예. 도중에 몬스터들의 부화장을 마주치는 바람에 전투가 좀 격했습니다만…… 그 외에 큰 위협은 없더군요.”
“그래? 이쪽은 다크엘프들이 좀 나오긴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 나오더라고. 그래도 여기 이 양반이 활약을 좀 했어.”
“……그래 봐야 부족했소.”
애덤이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애덤이 가진 민감한 기감은 다크엘프들의 습격을 대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으나, 실상 실력이 가장 뒤떨어지던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은 이제 애덤을 포함해도 4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
큰 피해를 입은 애덤의 표정은 자신의 활약에 비해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들 용감하게 싸웠어. 이 라비아타가 그들을 기억해 주지.”
“……말이라도 고맙소.”
어찌 됐든 살아 있는 전설로 알려진 라비아타 모험단의 단장이 하는 말이다.
오만하게 들릴지 몰라도, 라비아타 또한 애덤의 목숨을 여럿 구했기에 그도 일단 감사를 표했다.
“뭐, 마음 같아서는 바로 움직이고 싶긴 하지만…… 아직 한 팀이 남았으니까 좀 기다려 보자고. 2~3일 정도 기다려 보고 안 온다 싶으면 그때 출발하는 걸로. 어때?”
“네, 그렇게 하죠.”
“알겠소.”
이런 라비아타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캠프를 준비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 탐색을 끝내고 충분히 안전을 확인한 뒤 취침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드디어 마지막 탐사대가 합류했다.
황실에서 나온 호위 기사단의 단장인 도미닉과 그의 단원들이었다.
그러나 탐사대는 그런 그들을 보고 어서 오라며 환대할 수는 없었다.
“피해가…… 컸던 모양이오.”
황실 호위기사단의 인원은 어느새 절반밖에 남지 않았고, 또 남은 이들의 눈빛에 지독한 살기가 가득한 것을 보아하니 보통 고생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허허, 노부의 실수요.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우리 쪽을 노릴 줄은 몰랐던 게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도미닉은 순순히 자신들이 부족했다며 인정했다.
그러나 속은 전혀 달랐으니.
‘기필코 이 일은 잊지 않을 것이야.’
도미닉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조직원이 다녀간 이후 한동안이라도 습격이 없을 줄 알았던 게 패착이다.
속도를 높여 한시라도 빨리 합류하려 했으나, 바로 어제 다크엘프들의 대대적인 기습이 있었다.
그것도 함정까지 파 놓은 매복!
마지막으로 자신을 보며 떠났던 조직원이 만약 눈앞에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무슨 이유를 대든지 고통스러운 최후를 선사해 주겠다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도,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내가 될 것이다.’
비록 이번 일로 인해 황실 기사단이 큰 피해를 봤으나, 따지고 보면 다른 이들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그나마 항상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램퍼트 모험단이 그 수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지만, 공격에 나서는 기사단들의 수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니.
이대로 천천히 탐사를 이어 가면서 램퍼트 모험단의 수를 줄이고 나아간다면 후에 충분히 자신이 상황을 주도해 나갈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렇게 노회한 기사는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자신의 계획을 정리했으나.
또다시 그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형님!”
“클라인.”
다음 날.
셰인이 탐사대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셰인의 등장에 가장 먼저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인이었다.
“형님!”
최근의 활약으로 탐사대의 관심을 크게 받고 있던 클라인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쪽으로 몰렸다.
탐사를 시작하고서도 한동안 몸단장이 깔끔했던 셰인의 복장은 여기저기 해져 있었고, 살짝 야윈 모습은 이만저만 고생한 게 아닌 듯했다.
그에 클라인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지금 바로 포션을…….”
“클라인. 난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가벼운 탈수 증상에 불과하니.”
탈수 증상이라기보다는 다크엘프들을 유지하는 마력으로 인한 마력 부족 현상이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오오, 셰인, 자네가 무사해서 참으로 다행일세.”
그때.
셰인의 등장에 기겁하면서도, 복마전 같은 황실에서 수십 년을 버텨 온 도미닉은 표정 변화 한 번 없이 셰인을 맞이했다.
물론 셰인 또한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말에 답했다.
“저와 함께 있던 기사는 안타깝게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다크엘프들의 공세가 워낙 대단했던 터라.”
“……아닐세, 아니야. 하르페도 자신의 희생을 결코 헛됐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도미닉의 표정에 잠시나마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기껏 계획을 짜 둔 상황에서 혹여나 하르페가 셰인을 건드렸다는 정황이라도 드러났다간,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수가 있었으니.
도미닉은 평소보다 인자한 표정으로 셰인을 반겼고, 이내 곧 탐사대는 출발 전, 다시 한번 작전 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 와중, 셰인의 한마디에 탐사대원들의 표정에 경악이 떠올랐다.
“뭣, 그게 정말이오?”
“예. 다크엘프를 피해 있던 도중, 엘프들의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진의 존재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셰인의 말은, 이 방대한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에 있어서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인 소식이었다.
일반적으로 던전 내부에서는 아카샤의 대봉인으로 인해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만, 대봉인 이전에 설치된 마법은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램퍼트 모험단장, 일렉사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마법은 인간이 아닌 엘프가 만든 마법이에요. 비록 제가 마법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사용해도 안전에 문제가 없는 게 맞는지 걱정은 드네요.”
“으음, 타당한 이유일세. 나도 마찬가지로 그런 걱정이 드는구먼. 혹시 안전한 방법을 알아냈는가?”
거기에 마침 잘 됐다는 듯 거드는 도미닉의 말에 셰인이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불안한가.’
겉으로는 여유로운 듯 보이는 도미닉이겠지만, 그로서는 탐사대의 힘을 줄이기 위해 보다 질질 끌어야 할 이유가 있을 터.
그런 마당에 이런 방법이 제기됐으니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그럴수록 셰인은 더더욱 여유로워졌다.
적이 조급해진다는 것은, 실수를 유발할 확률이 늘어난다는 의미였으니.
“예,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우선 이를 알려면 메자이아 대수림에 사는 엘프들의 특징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엘프의 마법이니만큼, 엘프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고대에 엘프들이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주변의 마력에 동화되는 특징을 극도로 활용해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을 완벽히 자신들의 통제권 아래 놓았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부상을 입더라도 숲의 생명력으로 빠르게 회복하며, 동시에 나무를 조종할 수 있고 그들이 다루는 마법 또한 나무와 연관이 깊었다.
그 중에서도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는 뿌리 속에 흐르는 마력을 다루는 데는 따라올 자가 없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나무들의 마력을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나무와 나무 사이로 이동하는 정기를 통해 자신들의 의식을 먼저 옮기고, 그것을 좌표로 활용해 순간적으로 나무끼리 얽혀 있는 마력을 확장시켜 이동하는 텔레포트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설명을 모두 듣게 된 라비아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음, 일단 텔레포트가 구동하는 방식은 이해했어. 그런데 그걸 어떻게 사용할 건데? 그건 엘프들만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잖아.”
그 말처럼.
메자이아 대수림이 엘프들에게 있어서 무적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바로 엘프들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숲의 마력에 엘프만큼 동화되는 이들은 몇 없었고, 그걸 또 엘프들의 입맛에 맞춰 발달시킨 이들도 없었으니.
만일 지금처럼 엘프들이 수면기에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탐사대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입구에도 들어가지 못했을 게 뻔했다.
그러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다. 비록 나무는 아니더라도, 자연에 속한 마력에 그만큼 동화율을 자랑하는 존재가.”
그러자, 라비아타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고, 다른 이들도 그에 따라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엥?”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디라일라가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8화
38화 끝나 가는 탐사 (3)
“에엑! 저기,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그런 중요한 건…….”
탐사대의 시선을 끌게 된 디라일라가 기겁을 하며 거절하려 했으나, 셰인이 그 말을 끊었다.
“너에게 모두 맡길 생각은 없다. 네가 그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어, 그럼 다행인데. 마지막 말은 꼭 필요한 말이었니?”
“다만, 디라일라. 너의 역할이 중요한 건 달라지지 않았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곳의 대지는 의지력이 강한 이곳의 식물과 연결되어 있다.”
“어, 그렇지.”
“이제부터 나는 엘프들이 만든 마법진을 손볼 예정이다. 그 주체를 나무에서 흙으로 옮길 생각이지. 너는 거기에 맞게 이곳의 대지와 동화율을 높여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끄응. 아냐, 한번 해 볼게.”
당황스러운 요구였으나, 이내 디라일라는 마음을 고쳐먹고 셰인의 말에 따랐다.
그녀 또한 생도 신분이기 이전에 한 명의 모험가였고, 팀장의 말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셰인은 엘프들의 마법진을 개조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고, 바닥에 앉아 이곳의 대지와 교감하던 디라일라를 향해 라비아타가 다가왔다.
앞서 셰인의 부탁을 받은 라비아타는 디라일라의 옆에 마찬가지로 앉아 속성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불을 다루는 마법사로서 이름 높은 라비아타답게, 그녀는 속성에 대해 순도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 것처럼, 자연도 성향이 서로 다르기 마련이지. 불이라고 다 같은 불이 아니고, 대지라고 다 같은 대지가 아니란 말이야.”
“아…….”
“아마 밖에선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을 거야. 네가 가진 속성 친화력은 그 어떤 종족보다도 뛰어났을 테니까.”
“네, 네. 맞아요.”
라비아타의 말처럼, 이곳의 대지는 바깥과는 달랐다.
오랜 기간 나무와 함께 해온 메자이아 대수림의 대지는 디라일라에게 호의적이기는 했으나, 외부처럼 맹목적인 믿음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지. 엘프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곳의 자연과 친화력을 쌓아 왔고, 그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거든.”
이어서 라비아타는 설명했다.
“그런데, 너는 네가 가진 재능 때문에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
“착각이요?”
“그래. 너희 지하인들이 가진 건 속성 친화력만은 아니야.”
“……?”
“고대에 지하인들은 대지의 주인이었어. 그 엘프들마저도 자존심을 뒤로하고 지하인과 친분을 유지할 정도로, 땅에 있어서만큼은 지하인들이 으뜸이었단 말이지. 이게 왜 그런지 알아?”
“음…… 잘 모르겠는데요.”
“엘프는 다방면으로 친화력이 뛰어나. 자신들의 마력패턴을 자연과 맞추면서 그로 인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머무는 자연과 하나가 되지. 이런 숲을 제외하고도 엘프들은 사막과 설원 지대에서도 잘 사는 이유가 바로 이거란 말이지. 그런 그들이 왜 지하인과 친분을 유지해야만 했을까? 이유는 단순해. 바로 지배력 때문이야.”
“지배력이요?”
“그래, 지배력. 지하인이 특별한 이유가 뭔지 알아? 속성 지배력이라는 힘은, 어느 한 종족을 대표하는 힘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인간들도 속성 친화력은 알아도, 지배력에 대해서는 모르지. 적어도 인간들 중에 지배력을 소유한 사람은 여태까지 한 명밖에 없었어.”
얼마 전, 어둠이라는 속성을 지배하고 있던 셰인을 떠올리며 라비아타가 이어서 말했다.
“어느 한 종족이라면, 설마?”
“맞아. 드래곤. 유일하게 속성에 있어서 절대적 지배력을 지닌 종족들. 지하인의 지배력은 비록 드래곤에게는 밀리지만, 그렇다고 드래곤이 지하인보다 대지를 더 잘 다뤘던 건 아니야. 친화력과 지배력. 이 두 개 모두를 갖춘 존재는 너희 지하인이 유일하거든.”
“으음. 그런데 잘 믿기지가 않네요. 그 드래곤보다 지하인이 더 대단했다니…….”
디라일라에게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다.
단지 그만큼 드래곤이라는 이름에는 무게감이 있었으니.
그러나 라비아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드래곤은 속성 지배력이 대단한 만큼, 친화력은 없었다고. 그 차이가 만들어 낸 결과야.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의 개념이지. 그런 의미에서 엘프들은 나무가 자라는 땅만큼은 지하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던 거야. 만약, 지하인들이 자신들의 지배력일 행사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들이 말라 죽었을 테니까.”
“아…….”
그런 라비아타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디라일라에게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방법을, 찾은 거 같아요.”
그렇게 혼자 고민하고 실행에 옮겨 본 디라일라가 맑은 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라비아타는 작게 감탄했다.
종족 자체의 특성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모르고 살았던 자기 종족의 특성을 말만 들었다고 파악하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으니.
‘꼭, 이 녀석만 그런 건 아니지.’
디라일라를 제외하더라도 클라인과 아네이스의 재능 또한 결코 만만찮았다.
라비아타로서는 이런 인재들을 곁에 둔 셰인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 * *
한편, 아네이스는 머릿속에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네이스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흐르는 기세를 읽을 줄 알았고, 그렇기에 도미닉과 황실 기사단이 다시금 탐사대에 합류 한 순간부터 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변화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럴수록 아네이스의 귀는 점차 민감해져 갔다.
사람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고, 다양한 정보를 머릿속에 풀어내며 점차 스스로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자 지난번에 도미닉이 해 왔던 제안을 떠올렸다.
정의.
저지먼트 기사단과, 도미닉의 황실 기사단이 아네이스에게 항상 말하는 단어.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아네이스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그게 무엇일지 여전히 아네이스는 알 수 없었으나.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질문하고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아직 정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네이스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저런 질문을 하는 것부터가, 의심의 싹을 틔우기엔 충분하다는 사실을.
* * *
“클라인.”
“형님?”
셰인의 부름에 클라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쪽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많이 성장한 것 같구나.”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나, 클라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다.
전투를 치를수록, 클라인은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힘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힘은 넘쳐 난다.
그 어떤 적도 클라인의 검 앞에 대적할 수 없었고, 실제로도 갑충형 몬스터들은 클라인의 검 앞에서 자신들의 방어력을 자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클라인은 스스로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기교였다.
넘쳐 나는 마력과 그걸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다른 의미다.
여태까지는 그러한 불편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외부에서는 언제나 넓은 지형에서 싸울 수 있었고, 고작해야 만나 본 고블린들은 전력으로 싸울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그나마 트롤을 상대로 어느 정도 힘을 보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전력을 다 해 본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좁은 지형에서 산성액을 내뱉으며 돌진하는 곤충형 몬스터들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고, 땅 내부를 헤집고 등장하는 몬스터의 날렵함은 그 어떤 몬스터들에게서도 겪어 본 적 없는 까다로움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도 클라인이 가진 힘은 일당백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그럴수록 스스로의 실력이 불편하다고 느껴졌다.
보다 잘할 수 있음에도 그럴 수 없다.
여태까지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한차례 셰인과 강제로 떨어지게 되면서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다 보니 그러한 결과에 다다른 것이다.
“드디어 벽에 다다랐구나.”
셰인의 그 짧은 말에서 클라인은 곧바로 그 안에 내재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벽…….”
여태까지 특별히 벽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 없던 클라인은 아직 그걸 스스로 깨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클라인. 마력이라는 게 무엇일 거 같으냐.”
“마력, 말입니까?”
그 질문은 누가 들어도 난해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클라인은 그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주저하는 듯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전까지는 마치 저를 지켜주는 단단한 성벽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성벽은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서, 다가오는 상대에게 절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적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단단한 성벽.
그러나 벽은 움직이지 않는다.
클라인은 그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 이런 클라인의 심정을 본다면 미친놈이 아니냐며 욕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클라인의 마력 컨트롤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진정한 재능이라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본인은 생각이 달랐다.
“언제나 제 뜻대로 움직여 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닌 거 같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들은 셰인은 미세한 웃음을 지었다.
“스스로가 성벽이라 말해 놓고, 성벽이 움직이길 바라는구나, 클라인.”
“아…… 하하.”
그 말에 클라인도 스스로의 비유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웃었다.
“클라인. 너의 문제는 다른 누구에게 말해도 제대로 된 조언을 듣기 힘들 거다.”
“왜…… 그렇습니까?”
“그야, 세상에 너 같은 천재는 또 없을 테니까.”
“음…….”
대놓고 자신을 세워 주는 말에 클라인이 부끄럽다는 듯 콧등을 긁었으나, 셰인은 이 말에 한 치도 과장을 섞지 않았다.
그만큼 클라인이 가진 재능은 천재들 사이에서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홀로 고고히 태어난 새는 자신을 챙겨 줄 동료나 가족이 없다면 하늘 높이 날아가는 기술을 배우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클라인이라는 이 새는, 나는 법을 배우기도 이전에 자신의 날개가 얼마나 큰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니 날려고 해도 날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력을 측정해 본 게 언제지?”
“한 8년은 된 것 같습니다.”
9살.
그때부터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클라인의 재능은 이미 꽃을 피우고 있었다.
당시 특별 주문했던 마력 측정기가 한계치에 다다르게 측정될 정도였으니, 클라인의 마력 순도는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이라면?
클라인은 스스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 모르는 독수리나 다름없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거라. 조만한 기회가 있을 테니.”
“기회라면…….”
“그때가 찾아오면, 걱정하지 말고 네가 가진 모든 마력을 풀어 봐라. 그럼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게 될 테니.”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형님.”
“아니다. 조언이랄 것도 없으니.”
어차피 때가 되면 찾아온다는 것을 미리 말해 준 것뿐이기에, 셰인은 다시금 시선을 돌려 마력 패턴을 개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로써 준비는 서서히 끝을 맺고 있었다.
이 길었던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를 완벽하게 끝마칠 준비를.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39화
39화 끝나 가는 탐사 (4)
드디어 셰인의 작업이 끝나고, 디라일라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특히 디라일라는 라비아타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녀는 이번 기회에 스스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후우, 이거 긴장되네.”
셰인이 그린 마력 패턴 안에 자리 잡은 디라일라는 굳은 표정으로 이곳의 대지와 교감을 시작했다.
주변에는 이어질 전투를 대비하여 탐사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런 셰인과 디라일라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도미닉이었다.
‘좋지 않군.’
틈이 생기면 드래곤 하트를 차지해야 하는 황실의 입장에서, 지금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이 탐사는 셰인과 라비아타라는 두 인물로 인해 가능했던 건데, 이번에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황실에서는 언제 또 드래곤 하트를 얻게 될지 미지수인 상황이었으니.
거기에 도미닉은 셰인 또한 불안한 요소라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아직까지 셰인이 황실을 향해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아서 어느 정도 안심은 하고 있으나, 어쨌든 자신이 암살을 명령한 하르페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만약 셰인이 지금 보이는 모습이 연기고, 탐사 종료 후 밖으로 나갔을 때 당시의 일을 공론화한다면…….
도미닉의 입장에서 셰인은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하필이면 저지먼트 기사단의 소속인 아네이스와 약혼 관계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셰인의 처분을 두고 황실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
그럴 가능성은 낮겠으나, 혹여나 셰인이 밖으로 나가서 하르페의 암살 계획을 공론화한다면 황실이 꼬리 자르기에 들어가는 수가 있었다.
이후의 위기, 그리고 황실에서의 입지를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셰인을 정리해야만 했다.
‘어렵구먼…….’
하지만 도미닉의 생각처럼 이전과 다르게 셰인을 처리할 타이밍이 그리 쉽게 생기지는 않았다.
이전과 다르게 마력 패턴을 개조하는 시도를 하는 탓에 불침번에서도 제외됐고, 항상 사람들이 모인 중앙에서만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도미닉은 초초한 마음이 들었으나, 아직 그에게는 활용할 카드가 여럿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도미닉의 시선을, 셰인 또한 모르고 있지 않았다.
* * *
마무리 확인 작업까지 마친 이후, 탐사대는 한곳에 모여 자리를 잡았다.
중심부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평화적으로 넘어가진 않을 테니.
이윽고 탐사대가 모인 마력 패턴 아래로 옅은 푸른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빛은 점차 강해져 탐사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 빛이 정점에 달했을 때, 중앙에 있던 디라일라는 자신의 마력을 셰인이 그린 마법진에 주입하기 시작했고, 이내 푸른빛은 짙은 다갈색으로 변하며 강렬한 마력의 파동을 만들어 냈다.
그러다 빛이 점차 사그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어느 누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 * *
“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디라일라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발동이 된 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탐사대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이게 무슨…….”
당혹스러움을 느낀 것은 디라일라 뿐만이 아니었다.
하이엘 기사단의 애덤도 탐사대의 인원들이 모두 보이지 않자, 이게 어찌 된 일이냐는 듯 라비아타를 바라봤다.
셰인의 마법진에 그 다음으로 관여한 사람이 라비아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비아타는 이 상황을 알기라도 했던 것인지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당황하지 마.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안 느껴져?”
“……!”
그녀의 말에 애덤의 기감이 경고음이라도 내뱉듯 사방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하이엘 기사단, 전원 전투 준비!”
한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단답게, 그들은 능숙하게 검을 뽑아 들며 전투에 대비했고, 이내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안광을 내뿜으며 다가오는 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저건……!”
적들의 정체에, 애덤의 얼굴에는 잠깐의 경악과 함께 극도의 분노가 점철됐다.
“감히!!”
애덤의 고함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살기가 터져 나갔고, 라비아타도 두 주먹에 불꽃을 피우며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전투를 준비했다.
한편.
그런 적들을 맞이하고 있는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진이 발동되고 눈을 뜬 클라인과 아네이스, 그리고 도미닉과 램퍼트 모험단 또한 다가오는 적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노오옴!! 너희는 뭐 하는 놈들이더냐!”
애덤과 비슷하게 분노가 담긴 검을 휘두르던 도미닉은 상대를 보며 이러한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눈앞에 있는 이 기괴한 생명체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크륵, 크어.”
익숙한 얼굴들.
그러나 그 아래로부터 이어지는 몸의 형체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개체는 애벌레의 몸체에 8개의 다리를 기괴하게 움직이며 바닥을 돌아다녔고, 어떤 개체는 사마귀의 그것과 같이 생긴 날카로운 팔과 벌레의 날개를 가진 녀석도 보였다.
그러나 탐사대에게 충격을 가져다 준 이유는, 바로 그들의 얼굴이 여태까지 잃은 동료들의 얼굴이라는 것.
누가 보더라도 인간과 벌레를 대상으로 키메라 실험을 한 흔적에, 도미닉도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비록 조직과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긍지 높은 황실 기사단원들의 시체를 써먹어서는 안 됐다.
‘역시 믿을 수 없는 종자들이다!!’
셰인이 마법진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 도미닉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그 사이 또다시 찾아온 새로운 조직원에게 마법진 작업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 조직원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싶었으나, 그때도 결국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의를 위해서.
운이 좋았던 것일까, 조직은 성공적으로 셰인의 작업에 핵심이 되는 목적지를 살짝 비트는 데 성공했고, 다시 한번 탐사대가 갈라지도록 만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조직의 실수로 인해 다크엘프들에게 죽은 기사들의 시체가 키메라가 되어 나타나는 일은 도미닉으로서도 상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으드득…….”
나이가 든 뒤로 이렇게까지 화가 났던 적이 얼마 만이던가.
그런 도미닉의 기세를 눈치챈 누군가가 외쳤다.
“도미닉 경! 지금처럼 무리하게 전투에 임해서는 안 돼요!”
“자네는 지금 저걸 참으라는 겐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램퍼트 모험단장 일렉사가 그리 외치자 도미닉은 이빨을 으득 씹었으나,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장답게 그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냉정하게 상황판단을 했다.
‘그래. 여기서 이 늙은이의 실수로 자네들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되돌려서는 안 될 일인 게야.’
끝내 도미닉이 검을 회수하며 램퍼트 모험단이 세운 방패 뒤로 돌아가 한 차례 숨을 돌렸다.
“후우. 미안하네. 늙은이가 주책없이 날뛰었구먼.”
“……아니에요. 그보다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시나요?”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세. 일렉사 양. 저쪽에 얼굴이 같은 개체들이 보이는가?”
“예.”
도미닉의 말처럼, 저 키메라들 사이에서는 얼굴이 서로 같은 개체들이 곧잘 보였다.
얼굴 외에도 목 아래로 이어진 벌레 특유의 육체도 마찬가지로 같은 형태를 띄고 있었는데, 도미닉은 거기서부터 몇 가지 단서를 추려냈다.
“예전에 흑마법사들을 상대하며 본 적이 있네. 저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무래도 놈들에게 모체가 따로 있는 것 같구먼.”
“……놈들이 증식한다는 말씀입니까?”
일렉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장 기괴한 외형은 둘째치더라도 놈들의 공격 하나하나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높은 확률로 그럴 걸세. 다른 거라면 모를까, 얼굴의 형태까지 똑같은 개체들을 설명하려면 그것 외에 떠오르는 게 없으이.”
“그럼, 여기서 계속 놈들을 상대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로군요.”
“아무래도 그렇게 봐야 할 것 같구먼. 아마 우리와 떨어지게 된 다른 이들도 이와 비슷한 상태일 테니…….”
“저들 중에 가장 최근에 죽은 자는 채 보름이 되지 않은 키메라도 있습니다.”
“잘 봤네. 아마 이런 식으로 증식시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르겠어.”
“도대체 어떤 집단이길래 이 정도의 무력을…….”
“…….”
일렉사의 말이 비수처럼 도미닉의 가슴에 박혔다.
확실히.
어쩌면 황실은 적들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저런 키메라들이 얼마나 생명을 유지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런 짧은 시간 내에 저 정도 전력을 만든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었으니.
거기에 황실의 기사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저런 키메라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것은, 얼마만큼 황실이 우습게 보이고 있는지 잘 보여 주는 방증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에요. 클라인이 이쪽에 있으니, 적어도 전력이 부족하진 않을 것 같아요.”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게지.”
일렉사의 말처럼 전방에서 마력을 풀어헤치며 전투에 임하는 클라인은 전혀 지치는 기색 없이 묵묵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클라인의 표정은 어두웠는데, 그 이유는 탐사대가 갈라지기 전에 셰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클라인. 아마 나와 또다시 떨어지게 될 일이 있을 거다. 그때는 당황하지 말고, 닥쳐 오는 위협에 대비해라. 내 몸 하나 건사할 자신은 있으니까. 알겠느냐.’
마치 이번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셰인의 그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표정이 굳어 있던 것은 클라인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묵묵히 클라인을 보조하며 검을 휘두르는 아네이스의 표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는데, 그녀는 당장 눈앞의 적보다 아까 도미닉이 내뱉은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뭐 하는 놈들이냐!’
이런 상황에서도.
도미닉이 내뱉은 그 거짓말.
아네이스의 감은 도미닉이 적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저리 내뱉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도미닉에게 달려가 그 거짓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아네이스는 꾹 참았다.
아직 거짓을 밝히기에, 아네이스가 가진 정의에는 힘이 없었으니.
그러한 생각에, 또다시 아네이스는 습관처럼 떠오르는 의문을 머리 한 구석에 박아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러한 의문 덩어리를.
* * *
빛이 저물자마자 셰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푸른 오러에 휩싸인 검이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는 듯, 셰인의 코앞에서 터진 중첩 마력탄이 검을 튕겨 냈다.
“큭?!”
설마 이 기습에 대응할지 몰랐던 것일까.
황실 기사단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고, 뒤이어 날아오는 중첩 마력탄을 빠르게 베어 낸 뒤, 셰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
기사단원의 말에 셰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텔레포트 마력패턴이 발동하기 전까지 보이던 다른 탐사대원들은 어디로 가고, 황실 기사단만이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느냐니…….”
그러면서, 셰인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비웃듯이 말했다.
“굳이 대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은 아니로군.”
말 그대로, 셰인은 저들에게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의문은 해소될 테니.
비록, 저들이 납득할지는 다른 문제겠지만.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0화
40화 끝나 가는 탐사 (5)
고든이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런 무능한 놈 같으니라고!”
다크엘프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마친 조장급 조직원이 10일 가까이 지나도록 상부에 보고가 없자, 조직의 상부에서는 이상함을 느끼고 고든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제야 조직원마저 실종됐음을 깨달은 고든은 이젠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가뜩이나 자신의 연구를 방해하는 탐사대 때문에 민감한 마당에, 일을 맡긴 조직원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으니.
물론 어딘가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기에, 결국 그는 하던 연구를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고든의 분노는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졌다.
워낙에 변덕이 심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번 상황이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이놈들로 실험해 보면 괜찮겠군.”
실종된 조직원이 가지고 온 탐사대원들의 시체를 보며, 고든은 예전부터 해 왔던 키메라 연구의 성과를 보기로 했다.
워낙 눈에 띄는 키메라였기에 조직에서도 아직 쓸 때가 아니라 판단하고 묵혀 뒀으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놈들도 곧 온다고 했으니. 시간 끌기 정도는 되겠군. 흐흐흐.”
그렇게, 광기의 연금술사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쓰러진 시체들에게 다가갔다.
“부디 너희는 실망시키지 말아 다오, 나의 아이들아.”
그렇게 작업에 몰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된 조장급 조직원을 대신해 평조직원이 가지고 온 탐사대의 현황을 듣게 된 고든은 더더욱 얼굴에 미소를 피웠다.
“엘프들의 마법진을 파악한 인간이 있다고? 고놈 참 신기한 놈이로군!”
비록 자신을 귀찮게 한 탐사대였으나, 연금술사답게 흥미로움을 참지 못하는 고든은 그 자그마한 소식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 귀찮은 벌레들 사이에서 제법 쓸 만한 녀석이 있었어. 흐흐.”
고든은 자신의 흥미를 끈 상대의 이름을 조직원에게 물었고, 이내 조직원에게 듣게 된 이름을 고든은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셰인, 셰인이라…… 잘하면 내 조수로 써먹어도 되겠어. 반항하면 귀찮으니 이것저것 고쳐 봐야겠지만 말이야.”
이 나이에 들어서도 새로운 일거리는 질리지가 않았다.
그렇게, 고든은 자신에게 찾아올 탐사대를 기다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 * *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면, 있게 만들어 줘야겠군.”
황실의 기사단원 중 한 명, 에버닉의 말과 동시에 기사단 전원이 무기에서 오러를 피워 냈다.
과연 한 명 한 명이 4품의 엑스퍼트들이었고, 개중에는 3품 마스터에 다다르는 벽에 근접한 이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여태까지 다크엘프들의 습격에 살아남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듯, 그들이 피워 내는 살기는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그들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지그시 그들을 바라봤다.
방금 전, 셰인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피했던 덕분일까.
황실의 기사답게 상당한 내공이 쌓인 그들은 본능적으로 주변의 마력부터 탐지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셰인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신중하군.”
“원래 준비된 마법사만큼 무서운 법은 없으니.”
비록 이만한 거리에서 마법사를 죽이지 못한다면 기사로서 그만한 수치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들은 신중했다.
이윽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기사 중 한 명이 말했다.
“순순히 투항한다면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지.”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희 호위기사단들은 개소리를 그럴듯하게 내뱉는 습관이 있군. 얼마 전에 내 손에 죽은 머저리도 그랬지. 세상에 편안한 죽음 따위는 없다.”
“쯧. 역시 하르페는 너에게 죽었나.”
예상했던대로 셰인은 호위기사단의 저의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자 가장 앞서 있는 에버닉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이제 고작 18살의 소년이 가진 표정 관리와 그 심계는 놀라울 정도였으니.
만약 자신들의 단장인 도미닉이 조금이라도 경계를 풀었다면, 황실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가자.”
기사단 전원이 한순간에 달려들었다.
확실히 엑스퍼트 4품의 수준이라 해야 할까.
다 함께 수많은 고비를 견디며 합을 맞춰 온 그들은 셰인이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날카롭게 들어왔다.
“틴더(Tinder).”
그러나 동시에 셰인도 1서클 마법, 3중첩 틴더를 시전하며 주변에 불길을 터뜨렸다.
주문과 함께 6개의 불꽃이 터져 나오자 기사단의 발걸음이 멈췄다.
“……?! 대비하라!”
고작 1서클 마법, 틴더.
화력만 봐서는 고작해야 살짝 화상을 입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3중첩이나 되니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1서클일 뿐인 틴더.
오러로 몸을 감싸는 기사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준은 아니었다.
실제로 가장 앞에 선 에버닉의 명령에 기사들이 오러로 몸을 감싸자 불길은 덧없이 사라졌다.
“일반적인 1서클 마법의 화력이 아니군…… 확실히 무언가 한 수가 있긴 했던 건가.”
평소 봐 왔던 마력탄과는 다른 마법에, 기사들이 잠시 움찔했지만 그것도 정말 잠깐에 불과했다.
이 정도로는 자신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파악하고는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셰인이 원하던 것이었다.
“아까 했던 말 중에, 맞는 말이 있었지.”
“뭐?”
“준비된 마법사는 무섭다고 했던가. 딱 맞는 말이다. 지금의 너희들을 보면.”
“……? 아!”
그제야 틴더에 의해 밝혀진 주변을 확인한 에버닉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콰과과과곽-!!
이어서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벽과 바닥으로부터 틴더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폭발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갔다.
폭발로 인한 반발력이 오러를 두른 기사들의 몸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그러게 주변 환경을 잘 확인하셨어야지.”
그런 기사들의 발밑으로는, 화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터지는 시스투트리 나무의 뿌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물론, 단순히 저 정도 폭발력으로 4품 엑스퍼트 수준의 실력자들을 쓰러뜨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셰인이 준비한 것은 단순히 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커헉!”
기사들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은 송곳들.
그 모두가 하나같이 기사들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어, 어떻게…….”
똑같이 심장이 꿰뚫린 에버닉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셰인을 바라봤다.
“그리 놀랄 것도 없지. 스스로의 마력에 의해 죽은 것뿐이니.”
“그게, 무슨 말…….”
“알 거 없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세상에 편안한 죽음 따위는 없다고.”
“이렇…….”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에버닉은 원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흐음. 확실히, 쓸 만하군.”
그런 에버닉의 죽음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셰인은 방금 전 전투를 상기해 봤다.
사실 셰인이 가진 절대적인 무력만 따지자면, 저들에게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친다.
그러나 이렇게 저들을 쉽게 이길 수 있던 이유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마법사인 셰인이 치밀하게 준비해 뒀기 때문이다.
‘그때 그 일 덕분에 일이 잘 풀리는군.’
지난번, 디라일라를 구출하며 살리에르 백작의 별장에서 저지먼트 기사단원인 다이라와 싸웠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저지먼트 기사단은 마력과 오리진이 섞인 자신들만의 오러를 사용한다.
오러의 속성은 흡수.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을 띈 저지먼트 기사단은 마법사들에겐 저승사자요, 같은 기사들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는데, 다이라에게서 뽑아낸 흡수라는 속성은 현재 셰인의 오리진, 탐욕과 굉장한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거기에 어둠의 정령이 가진 어둠 속성까지 가미되어 이번 전투가 쉽게 이어졌는데, 셰인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어둠 속성과 함께 자신의 오리진을 황실 호위 기사단 전원의 그림자에 숨겨 뒀다.
다만 그때까지는 기사단이 자신들의 그림자에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마력을 담지 않은 탓에 물리력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대신 한 가지 명령을 내려 둔 상태였다.
기사단원들이 평소 흘리는 마력을 흡수하고 그 성질을 터득하라는 것.
덕분에 기사단원들의 마력에 반발력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었고, 틴더를 통해 시스투트리의 뿌리에 화속성이 담긴 마력을 주입시켰다.
그 결과 나무뿌리의 폭발이 기사단원들의 그림자에 숨겨진 자신의 오리진에 마력을 부여해 물리력을 담아 낸 것이다.
실로 완벽한 그 기습은 과연 기사단원들은 심장에 꿰뚫리는 그 순간까지 자신들이 무엇에 당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먼저 처리하셨군요, 셰인 님.]
그때, 뒤에서 다크엘프 오베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 엘프들의 여왕, 프리실라와 만난 이후로 다크엘프들은 셰인의 지휘권을 인정하며 그의 밑으로 들어오길 자처했다.
마력에 민감한 엘프들인만큼, 다크엘프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동족들에게 좋은 영향이 가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상처는 없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저희가 제때 도착하지 못한 탓에.]
[아니, 됐다. 어차피 너희 도움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아직 너희가 나설 차례도 아니니까.]
[…….]
오베른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오베른을 보며 셰인은 조용히 물었다.
[내 밑으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나?]
[아직 그 정도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습니다.]
[손에 피를 묻혀야 할 일이 많을 거다.]
[그건 이미 제 누이…… 여왕님과 끝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셰인 님. 당신이 우리 동족을 위해 준다면.]
오베른은 프리실라와 같은 핏줄을 타고 난 엘프였다.
오베른은 자신들이 아카샤의 대봉인에 의해 이곳에 봉인되어 있는 동안,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파악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합리적인 고민을 했다.
그 결과, 대수림에 봉인되어 있는 동족들을 위해 셰인을 따라 인간들의 세계에서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이유로 복종을 선택했다.
오베른은 여왕의 핏줄인만큼 이미 다크엘프들에게 굳건한 신뢰를 받고 있었고, 이는 곧 통솔력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들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셰인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현 상황은 어떻지?]
[아직까지 인간들…… 그러니까 탐사대의 전력이 밀리는 그림은 아닙니다. 다만 숲의 외곽에서부터 정확히 이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던 존재가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존재감을 숨기지도 않고 온다라. 확실히 끝장을 보겠다는 의미로군.]
[느껴지는 마력을 봤을 때…… 만약 그 존재가 합류하게 된다면, 탐사대에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놈의 마력을 내게 전달할 수 있겠나?]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록 다크엘프가 된 탓에 더 이상 정순한 엘프의 마력을 쓰진 못하겠으나.
그래도 이곳에서 살아온 지 고대를 기점으로 해도 백 년이 넘어가는 오베른이다.
나무와 나무끼리 연결된 엘프들의 연락망은 여전히 사용할 수 있었고, 이내 곧 오베른은 외부에서부터 다가오고 있다는 침입자의 마력 일부를 나무로부터 받아 올 수 있었다.
‘호오.’
그리고 그 마력은, 셰인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1화
41화 끝나 가는 탐사 (6)
이번 탐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드래곤 하트의 실존 가능성과 셰인이 세운 이론으로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안전을 확보하고 중심부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 확인이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드래곤 하트의 획득이며, 목적 자체는 황실과 조직하고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드래곤 하트란 과연 무엇일까.
실상 드래곤 하트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이들은 얼마 없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드래곤 하트는 기원후, 인류의 역사상 드러난 적 없는 보물이다.
그저 취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러한 보물이라고만 알 뿐.
그렇기에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 위치한 드래곤 하트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이들은 세상에 몇 없었다.
그중 한 명인 라비아타는, 자신의 앞에서 ‘쏟아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달려드는 키메라 군단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진짜 심장 한번 되찾기 힘드네. 뒤로 빠져!”
디라일라가 흙으로 급조한 방벽 뒤에서 전투를 치르던 하이엘 기사단 전원이 라비아타의 목소리를 듣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동시에 라비아타의 손끝에서 다량의 붉은 구체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플레임 오브 헤이즈(Flame orb haze).
수십 개의 화염구가 전방으로 나아갔다.
하나하나가 농후하게 압축된 화기를 가지고 있던 구체들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키며 키메라 군단의 몸을 액체처럼 터뜨렸다.
그런 키메라들의 체액조차도 곧바로 증발해 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화력.
그러자 과할 정도로 공동 내부에 붉은 안개가 차들었다.
라비아타는 미세한 마력의 조정으로 안개를 건너편 통로까지 가득 메운 뒤, 다시 한번 마법을 영창했다.
헤이즈 밤(Haze bomb).
동시에 다시 한번 터지는 붉은 안개는, 키메라가 들어오는 통로마저도 지옥의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허어…….”
한 순간에 정리되어 버린 현장을 바라보는 애덤은 할 말을 잃었다.
과연 마법사다운 화력이라 해야 할까.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몇 분이고 해야 할 캐스팅도 없이 즉발로 날아간 마법치고는 화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라비아타라는 명성답군.’
여태까지는 일행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라비아타 홀로 앞서 나가서 따로 전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직접 그 현장을 바라보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그저 재해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후, 타는 냄새가 별로 향긋하진 않네. 화염 내성 마법 걸어 줄 테니까, 다시 앞으로 나아가 보자고.”
“……알겠소.”
“네…….”
똑같이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로서 디라일라 또한 느끼는 게 있었는지 살짝 질린 기색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길 얼마.
탐사대원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하군.”
죽은 동료들로 만든 키메라들의 시체는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눈앞에 죽어 있는 키메라들의 상태는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에 쥐어짜여진 듯 죽었어. 뭐지?”
어느 정도 나아갔을 때부터 등장하는 키메라의 시체들.
그 모습에 탐사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무에 얽힌 채 죽어 있는 키메라들이, 애덤의 말처럼 말라 비틀어져 죽은 것이다.
“뭐,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거 같네.”
라비아타의 말에 애덤이 물었다.
“예측 가는 게 있소?”
“응. 여기서 이런 짓을 할 존재는 몇 없거든. 흐음, 이거 전투가 생각보다 쉽게 끝나겠는데.”
“……?”
“뭐, 가다 보면 알 거야. 근데 다들 표정 관리는 잘 하라고. 보면 깜짝 놀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좀 설명해 주시오.”
애덤이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해 봤으나 라비아타는 빙긋 웃어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길을 따라 걷던 도중, 그들은 라비아타가 했던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에, 엘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디라일라와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색찬란한 빛과 함께, 이 지하 공동에 자그마한 숲이 형성됐다.
싱그러운 풀들은 마치 이 상황이 기쁘기라도 한 듯 산들거리며 춤을 췄다.
거목으로 자라난 버드나무의 잎들은 자신의 아래 앉은 여인을 가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주변에서 흔들거린다.
반짝이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이, 이 공간을 채우는 햇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호수가 담긴 것만 같은 눈동자가 탐사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동화에서나 볼 법한 몽환적인 풍경.
그러나 탐사대는 마냥 그런 여인의 모습에 넋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는데.
그런 그녀의 주변으로 수많은 키메라들이 말라비틀어진 채 식물에 얽혀 죽은 모습에서부터 오는 괴리감은 그들에게 충분한 위기 의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가히 아름다운 여인이 하프를 연주하며 그런 탐사대를 반기듯 입을 열었다.
“아아. 음. 아, 안녕, 맞나? 안녕하세요?”
수백 년 만에 입이라는 기관을 통해 대화를 시도한 여인.
엘프들의 여왕, 프리실라는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탐사대와 마주했다.
* * *
“……끔찍하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도미닉은 이빨이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었다.
나름 기사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라 자부할 수 있던 그였다.
과거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에서도 얼마나 끔찍한 광경을 봐 왔던가.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이러한 풍경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
“…….”
그리고 다른 인원들도 도미닉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클라인의 활약을 주축으로 전투를 이어 간 일행들은 여전히 몰려오는 키메라 군단을 상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길 얼마, 도착한 장소는 눈살을 절로 찌푸릴 풍경이었다.
“끼륵.”
“카르르르.”
여태까지 상대해 온 키메라들은 모두 하나같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두고 도미닉은 모체가 따로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안타깝게도 그런 그의 판단은 맞아들었다.
죽은 탐사대원들의 시체.
그러나 당연하게도 멀쩡하게 시체만 남아 있지는 않았다.
시체의 아래로 팽창했다 수축하기를 반복하는 알 주머니.
마치 인간의 피부 조직을 강제로 불려 만들어진 듯한 그 알 주머니에서는 여태껏 그들이 상대해 왔던 키메라들이 잉태되고 있었다.
그 수가 총 열에 다다르니, 고약한 악취와 함께 끔찍한 그 풍경은 일행들을 경악에 빠뜨리게 하기 충분했다.
도대체 이런 짓을 저지른 존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클라인은 생에 처음으로 격한 분노를 느꼈다.
“아아…….”
도미닉 또한 키메라들의 모체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여태껏 생각은 해 왔으나.
역시 황실과 끈이 연결된 조직은 상종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지금은 비록 죽은 시체들로 이루어진 풍경이나, 언제 저 풍경이 제국으로 뻗을지 모른다.
그나마 단원을 잃지 않았던 일렉사가 정신을 붙잡고 말했다.
“도미닉 경. 제가 경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알겠네. 나이가 들어 마음만 여려지는 것 같으이. 미안하네, 자네들. 다 내가 부족했기 때문일세. 이제 그만 편히 쉬게나.”
다행히 도미닉도 그간의 경험 덕분에 패닉에 빠지지는 않았다.
클라인 또한 단순히 감정에 휘말려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었고, 아네이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데 익숙했다.
다만 도미닉의 남은 기사단원들은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모습을 보며 도미닉이 괴로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소리쳤다.
“정신 차리거라, 이 못난 것들아! 동료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저 어린 핏덩이들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이게 무슨 추태인 게야!”
그 말에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난 기사단원들은 살기가 풀풀 풍기는 기세를 드러냈다.
“미안하네. 그럼 바로 정리에 들어가야겠구먼.”
지금도 꾸역꾸역 키메라를 낳고 있는 모체들을 바라보며 일행 전원이 달려들려던 순간.
“힛, 미안, 미안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 형제라고. 멋대로 죽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위에서 들려오는 가벼우면서도 가느다란 목소리에, 일제히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 순간 클라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강렬한 살기에 반응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히히힉. 실패, 실패했다. 역시, 네가 제일 강하구나?”
“웬놈이냐!”
한 순간에 클라인에게 달려들었다가 기습에 실패한 존재는 공중제비를 돌며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저건…….”
나타난 적의 모습을 보자, 일행들은 인지부조화에 걸린 듯 몸을 굳혔다.
거친 갑각에 감싸인 다리는 개구리의 그것과 비슷했고. 상체는 근육질로 뒤덮인 고릴라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며, 얼굴은 8개의 눈을 가진 거미를 연상케 했다.
하나같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채 만들어진 듯한 존재.
“키메라로군.”
“히히…… 정답, 정답이야.”
검은색 털이 수북한 놈의 머리에 달린 거미다리가 끼릭거리며 기분 나쁜 움직임을 취했다.
“끔찍하게도 생겼군…….”
“힉, 왜 다들 내 얼굴만 보면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아빠, 아빠는 나보고 항상 예쁘다고 해 주시는데! 히히힉!”
그리 말하는 녀석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서, 그런 표정을 짓는 녀석들은 전부, 전부 이렇게 만들어 줬어.”
“……?!”
우직하게 생긴 고릴라의 손에 들린 것은, 악력에 의해 뭉개진 사람의 얼굴.
뒤늦게 그 얼굴을 알아챈 일렉사가 절규하듯 외쳤다.
“카르로트!”
그제야 일행들 중 몇몇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힘에 의해 강제로 목이 뽑혀 나간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이 짧은 사이, 탐사대원 하나를 죽이고서 클라인에게 기습을 가했단 말인가.
방금까지 단순히 키메라라는 정도의 인식을 가졌던 일행들 내면에 적의 위험도가 격상했다.
적어도, 여기서 저자와 대등하게 다룰 정도의 실력자는 없었다.
“전원, 방진!”
동료를 눈앞에서 잃었으나, 일렉사는 철저하게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침착한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도 그녀의 단원들 또한 동요하던 마음을 거둬내고 방패를 들어 전열을 가다듬었다.
일단 적은 단 한 명.
그러나 일반적인 몬스터라 생각해서는 안 됐다.
“히, 재밌겠다. 놀이, 놀이하자! 나랑 놀자아아!!”
그에 키메라의 공격이 시작됐다.
놈이 자세를 낮춘다고 인식하기 무섭게, 놈의 다리가 쭉 뻗어 나가며 방패를 치켜든 일렉사의 모험단에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그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도약을 통해 놈이 휘두른 주먹이 방패를 후려쳤다.
평소처럼 굳건하게 방패를 들고 있던 그들은 묵직하다못해 터지듯 들어오는 그 공격에 뒤로 밀려났다.
여태까지 그 어떤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후방을 안전하게 지켜 왔던 그들이 밀려난 것이다.
“무슨 힘이……!”
“히히히! 친구들은 조금, 조금 튼튼하네에에!!”
방패를 디딤판으로 쓰며 발차기를 날린 키메라가 거리를 벌리기도 잠시, 아네이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니, 뭐가?”
아네이스의 중얼거림에 반응한 클라인의 질문해 왔다.
“뒤에 있던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근데 왜 우리는 저 사람이 쓰러진 것조차 느끼지 못했지?”
“음?”
그러자 클라인도 의아함을 느꼈다.
적은 분명 은밀하면서도 강하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시체가 쓰러지면서 났을 기척조차 일행들이 느끼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저 방패를 봐.”
“아!”
일렉사 모험단원들이 들고 있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방패는, 평소보다 그 빛이 선명하지 않았다.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야. 뭔가 다른 게 있어.”
“확실히…….”
아네이스의 말을 듣고보니 클라인도 상황을 판단하고 주변에 마력을 흘려 봤다.
그러자 평소라면 물 흐르듯 흘러야 할 마력이, 무언가에 방해라도 받는 듯 흐트러졌다.
“어쩌면, 반마력 장비가 있을지도 몰라.”
그런 아네이스의 평에, 클라인의 얼굴도 굳어졌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2화
42화 끝나 가는 탐사 (7)
라비아타의 부관, 아르디아 제임스는 자신의 감을 믿는 사람이었다.
한때 대륙에서 가장 유명했던 암살단체의 수장이었던 그는 신중하긴 했으나, 위기 상황이 오면 스스로의 감을 믿고 움직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감은 제임스에게 많은 위기로부터 구원을 가져왔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조직에 의한 다크엘프들의 습격으로 탐사대가 찢어진 이후, 제임스는 탐사대에 다시 복귀하기보단 독단적으로 움직이기를 선택했다.
단체가 아닌 혼자라면 충분히 살아남을 자신도 있었거니와, 탐사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시선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비아타 또한 이런 제임스의 판단을 믿고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계획대로 홀로 돌아다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위험.’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위기감에 제임스는 그림자 속에 자신을 숨겼다.
음차원의 마력.
한때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암살 단체의 수장답게, 최소한의 신체기능만을 남겨 둔 채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에잉, 쯧쯧. 역시 급조해서 만든 것치고는 영 힘을 못 쓰는구나.”
꼬장꼬장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위험한 요람에 평범한 노인이 있을 리는 만무할 터.
제임스는 습관적으로 이곳에 있을 법한 인물들을 추려 봤다.
이곳까지 오면서 키메라들의 모습도 확인한 제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있을 법한 인물 중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고든. 그 자인가.’
한때 흑마법사 집단의 수장이었던 고든.
과거 연합국과 전면전을 펼쳤던 흑마법사 집단은 현재 괴멸된 상태였고, 연합국의 수장인 제국에서는 흑마법사를 이끌었던 고든이 사망했음을 공식으로 발표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제임스가 이끄는 정보 단체가 주시하고 있는 조직에서 활동 중인 것을 확인했었다.
‘좋지 않은데.’
다른 것은 몰라도 고든의 능력만큼은 진짜였다.
고작 탐사대 하나가 상대하기엔 벅찬 존재였으나, 이내 제임스는 생각을 달리 했다.
제임스가 알고 있는 고든이라면 자신이 이곳까지 온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만큼 고든은 다방면으로 뛰어난 존재였고, 음차원의 존재를 모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거기다 그가 다루는 언데드도 없는 것을 봐서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특성상 언데드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엘프들의 눈을 피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 곧바로 라비아타에게 가기보다는, 탐사대보다 먼저 메자이아 대수림에 찾아온 또 다른 모함단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라비아타도 안심하고 전력을 다할 수 있을 테니.
그리 판단한 제임스가 몸을 빼려던 찰나.
“끌끌. 게 누구냐. 쥐새끼처럼 숨어서 보지 말고 나오거라.”
‘……!’
고든의 시선이 어둠이 일렁이는 방향으로 향했다.
* * *
제임스가 고든의 주거지에 도착하기 한참 전.
[그게 정녕 가능한 겁니까……?]
오베른의 물음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셰인은 이번 탐사대의 주적인 고든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생에도 그랬지만, 고든의 정체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무렵, 사람들은 그저 그가 미친 연금술사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 잔혹하리만치 천재적인 면모 또한 부각됐지만, 이미 한 번 연합국에 의해 패배했던 패배자에 불과했으니.
그러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었다면, 그의 재능은 고작 천재적이다, 라는 표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재능은, 조직과 만나게 되면서 진정한 악마의 꽃을 탄생시켰다.
예를 하나 들면 고든이 만든 키메라 군단은 단순히 흑마법사가 만든 키메라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현재 이종족들이 봉인된 지금, 오로지 인간에게만 허락되어 있는 ‘종의 성장’이 가능한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이를 간단하게 봐서는 안 된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고든이 만드는 키메라는 늘어날 것이고,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다양한 몬스터의 장점만을 추려 만든 생체 병기나 마찬가지다.
그런 존재들이 성장마저 가능하다면, 이 얼마나 불합리하단 말인가.
[그중에서도 넘버링이 붙은 녀석들은 까다롭지.]
넘버링.
고든이 특히나 애정하며 자신의 친자식이라 부르기까지 하는 키메라 생명체들.
아직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으나, 미래에는 그러한 키메라 생명체들이 하나하나 군단을 다루는 수준까지 성장하면서 인류에게 공포로 다가온다.
[그러한 개체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녀석은 알파지.]
[알파, 말입니까.]
[그래. 놈은 조직의 입장에서 보면 실패작이다. 군단으로 활용하기엔 불가능한 놈이니.]
[한데 왜 가장 까다로운 겁니까?]
[반대로 말하면, 단일 개체로도 조직에서 쓰일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니까.]
고든의 첫 키메라인 알파는, 고든이 한참 제국을 향한 적의가 가득했을 당시에 만든 키메라였다.
당시 제국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연합국의 토벌대에 의해 자신이 이끌던 흑마법사 단체가 전멸했을 때.
고든은 자신이 당한 수법 그대로 제국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다만 군단을 원했던 조직의 의도와는 달랐기에 단 한 마리에 만족했어야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파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놈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반마력 파장을 일으키는 키메라니. 생명의 근원인 마력을 거부하는 상대가 어찌 까다롭지 않을까.]
[반마력…… 그런데, 왜 그런 존재를 탐사대에만 맡겨 두시는 겁니까?]
앞으로 나아가던 길.
현재 셰인이 가고 있는 방향은 탐사대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오베른의 그런 의문에, 셰인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마력을 주축으로 성장한 인류에게 마력을 흩트리는 반마력 생명체는 위협적이나.
아직 알파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곳에는 그런 알파의 최대 천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 * *
“히히히, 우리 같이 놀자아아!!”
알파의 괴성과 함께 다시 한번 램퍼트 모험단원들의 방패가 크게 흔들렸다.
그들의 오러가 언제 끊길지 모르듯 위태롭게 휘엉청거리자, 더 이상 방어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클라인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저 속도를 눈으로 따라잡긴 힘들어.’
키메라, 알파는 클라인의 동체 시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순간가속의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응? 네가 놀아주게?! 좋아!”
아까 기습에 실패했던 클라인이 앞으로 나오자, 너무도 쉽게 알파의 시선이 끌렸다.
그런 알파가 다시 한번 제자리 멈춰 도약 자세를 취하자, 클라인은 그대로 뽑아 든 검의 경로를 정했다.
하지만.
씨익.
직전에 보인 알파의 웃음에 황급히 검을 휘수하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앙-!
본래는 알파가 도약하는 순간에 맞춰 그 경로에 검을 휘두를 작정이었다.
한번 도약을 시도하면 도중에 경로를 바꾸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보인 알파의 웃음에 클라인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틀어졌음을 느끼고는 자세를 바꿨고, 다행히 그 감은 틀리지 않았다.
본래라면 정면에서 들어왔어야 할 공격이 측면에서 날아왔다.
살기를 느끼고 대비하고 있던 덕에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지만, 그 묵직한 무게감에 클라인이 들고 있던 검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흐읍!”
그 순간 검을 비틀어 알파의 주먹을 흘리고, 마력으로 강화된 발차기를 녀석의 복부에 쑤셔 넣었다.
“키헤헥!”
“……!”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그런 느낌이 들기 무섭게, 알파가 뒤로 몸을 피했다.
“아으, 아파, 아파! 히히…… 근데 재미있다. 어떻게 알았지?”
그런 알파의 물음을 뒤로하고, 클라인은 녀석의 뒤에서 움찔거리는 무언가를 바라봤다.
그것은 성인 몸통의 크기만 한 사이즈의 꼬리였다.
분명 처음에는 본 적 없던 꼬리가, 클라인과 눈이 마주치고 도약한 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몸뚱이인지.
클라인은 한 차례 넘긴 고비를 뒤로하고 외쳤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공격이 놈에게 먹혀듭니다!”
방금 막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탐사대에 알린 후에도 클라인은 최전선에 서서 일렉사 모험단에 가해지는 부담을 조금씩 덜어 줬다.
“히히, 조금 답답하지만, 이런, 이런 방법도 재미있어. 응. 히히히.”
하지만 탐사대가 무작정 유리해지지도 않았다.
반마력 파장으로 인해 알파의 공격의 대부분을 가담하고 있던 일렉사 모험단원들이 빠르게 지치기 시작했고, 처음과 다르게 방패에 유지되던 오러 또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바람 앞에 놓여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꽃처럼.
이미 그 사실을 진작에 파악한 알파는 굳이 클라인이나 황실 기사단원들을 노리기보단 앞장서서 방패를 들고 있는 이들을 노렸다.
그나마 그중에서 가장 위협적인 이는 아네이스였는데, 그녀의 오러는 반마력 파장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아네이스는 뒤에서 모체가 낳는 키메라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상황.
그러던 중.
“끄윽……!”
아까부터 알파의 집요한 공격을 담당하고 있던 모험단원 중 한 명이 부들거리는 팔을 늘어뜨렸다.
정신력과 관계없이 이미 팔 근육이 괴사하기 시작하며 더 이상 뇌의 명령을 듣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히히, 친구, 친구 아파 보인다. 그런데 더 못 놀겠네. 히히.”
마치 일방적으로 개미를 학살하는 이유 없는 악의를 지닌 아이의 표정처럼.
순수한 악의로 무장한 알파의 주먹이 또 한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젠장, 타일렉!”
“씨발!”
방패를 늘어뜨린 동료를 대신해 자리를 메우던 단원 한 명이 빈틈을 보였고, 짐승과 같은 본능을 가진 알파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패 사이로 자신의 꼬리를 우겨넣어 단원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것만으로도 단원의 얼굴은 뭉개진 채로 바닥에 쓰러졌고, 더 이상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썅!”
결국 일렉사의 입에서도 욕이 터져 나왔다.
특히 그는 도미닉과 황실 기사단을 노려봤는데, 아까부터 그들은 소극적으로 움직이며 틈만을 보고 있었다.
‘이딴 게 황실의 기사단원이라니!’
북부의 성벽을 지키고 있는 고향의 기사들보다도 못한 그 모습에 일렉사가 분노를 터뜨릴 때쯤.
죽은 동료를 기릴 틈도 없이 알파가 다시금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공격이 통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방패 밖으로 나온 클라인이 일렁이는 오러에 휩싸인 채 알파의 주먹을 막은 것이다.
그러나 검에 부담되는 충격으로 인해 검이 부러진 순간, 알파는 자세를 잃지 않기 위해 꼬리를 놀려 클라인의 심장을 노렸다.
“키힛?!”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화끈한 통증이 꼬리로부터 느껴지자, 알파가 뒤로 크게 물러섰다.
어느새 잘려 나간 꼬리.
탄탄한 근육으로 외피를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알파의 신체는 오러로 감싸인 검을 막을 수 없었다.
한편, 클라인은 뒤로 크게 물러선 알파를 쫓지 않았다.
“잠시 빌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카르로트도 스스로 도움이 된 걸 좋아했을 거예요.”
클라인의 손에 들린 검은 알파의 첫 기습에 당한 모험단원의 검이었다.
그에 클라인은 잘린 상태에서도 버둥대는 알파의 꼬리를 다시 한번 가르고, 일렉사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앞서겠습니다. 외람되지만 단장님께서는 녀석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형식으로 방진을 짜 주십시오.”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제가 잘 못 물었네요. 알겠어요. 당신을 믿어 보도록 하죠.”
어느새 용오름이 피어오르는 클라인의 모습을 보며 알렉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말씀하신 기회는 이런 거였나.’
반마력의 원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클라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주변에 퍼진 마력이 마치 그물에 걸린 물처럼 흐트러지는 것을 보고, 클라인은 자신의 폭발적인 마력을 피워냈다.
여전히 이 폭력적인 마력량을 한 번에 통제하기엔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미적거리다간, 방금처럼 또다시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아파, 아파아아악!!”
8개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굉음을 내뱉는 알파의 모습을 보면, 무슨 이변이 일어날지 모른다.
실제로 아까보다 반마력 파장이 더욱 거세게 일었으나.
고작 그물 따위로는 몰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이겨 낼 수 없는 법이니.
잔잔한 호수가에 잠들어 있던 용이 승천하듯, 클라인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압도적인 마력량은 그러한 반마력의 그물조차 거둬내기 충분했다.
이윽고 탐사대는 거둬져 가는 반마력 파장에 편안함을 느꼈다.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안정했던 오러는 다시금 단단한 방패의 형상을 만들어 냈고, 그제야 반격의 시간이 찾아왔다.
* * *
클라인의 활약이 시작되자 전투의 흐름이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오러를 되찾은 일렉사의 모험단은 이전과 다르게 알파를 포위하는 형식으로 방진을 만들어 놈이 쉽사리 도약을 하기 힘들도록 공간의 제약을 만들었다.
그때마다 클라인은 놈이 도약하기 전에 앞서 달려들었고, 반대로 답답해진 알파가 억지로 공격에 들어가면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클라인의 반격이 들어왔다.
어느새 놈의 속도에 클라인이 익숙해진 것이다.
“왜, 왜?! 왜 너희는 안 죽어어?!!”
그 사이 알파의 신체에 여기저기 상처가 쌓였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격통도 알파의 불안정한 정신을 갉아먹었지만, 그보다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자신에게 순순히 죽지 않는 적들의 존재는 알파의 내면 깊이 뿌리 잡은 악의가 그의 정신을 더욱 크게 흔들었다.
“후우…….”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는데, 확실히 알파는 무언가를 죽이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불리한 지금의 상황에서도 탐사대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공격은 하나같이 위협적이었다.
조금의 실수만으로 죽음에 내몰리게 만들 정도였기에.
하지만 그러한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기회를 만들어 낸 덕분일까.
“주거어어어엇!!”
모험단원의 방패에 내쳐진 알파가 괴성을 내뱉으며 크게 도약하며 램퍼트 모험단원에게 달려들자, 단원은 크게 뒤로 물러서면서도 자신의 오러를 분출시켜 놈이 허공에 뜨도록 만들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클라인과 아네이스가 동시에 달려들어 알파의 어깻죽지와 옆구리를 크게 베어 냈다.
“캬아아악!”
끝내 알파가 바닥에 쓰러지고, 그제야 일행들은 긴장 섞인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단일개체 하나가 이만한 인원들을 상대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게 드디어 끝났다고 판단됐을 무렵.
클라인이 알파의 마무리를 위해 다가가기 직전.
뒤에서부터 짧은 섬광이 터져 나왔다.
“아?”
“……?!”
방금까지 용오름을 피워 내던 클라인의 오러가 사라지고, 동시에 아직 방패를 내리지 않은 램퍼트 모험단의 오러 또한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신체 균형이 어그러진 일행들이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곳에는 멀쩡하게 서 있는 도미닉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구먼.”
그런 도미닉의 손 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섬광을 뿌려 대는 육각면체 오브가 놓여 있었다.
그런 오브에서 퍼지는 섬광은, 방금까지 알파가 만들어 낸 반마력 파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일대의 마력을 동결시켰다.
“자네들은 여기서 이만 사라져 줘야겠네. 황실의 미래를 위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느새 검을 뽑아 든 도미닉은 자신의 기사단원들과 함께 일행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런 도미닉의 그림자 밑으로 일렁이는 어둠을 본 사람은, 클라인이 유일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3화
43화 끝나 가는 탐사 (8)
“그 꼬맹이, 도대체 이걸 어떻게 안 거지?”
“어머, 저도 방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라비아타의 혼잣말에 반응한 사람은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였다.
프리실라가 키메라의 모체들을 정리하고 짧은 소개를 마친 이후, 그녀와 탐사대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 끝에 마주한 흑빛 바위를 바라봤다.
다만 그저 검기만 한 바위는 아니었는데,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이 신중하게 그것을 향해 다가가려 하자 라비아타가 그를 제지했다.
“만만히 보고 갔다간 순식간에 침식된다?”
“침식? 라비아타. 그대는 이것의 정체를 아는 것이오?”
“엉. 이게 저렇게 생겼지만…… 그래도 드래곤 하트라고.”
“……?!”
그 말에 기사단 전원이 행동을 멈췄다.
눈앞에 있는 저게 이곳까지 온 이유, 드래곤 하트란 말인가?
“그런 것치고는 그저 평범한 돌처럼 생겼소만.”
“뭐, 보고 믿어야겠다면야.”
라비아타가 손끝에 피워 낸 불덩이 하나를 바위 근처에 보내자, 가만히 있던 바위로부터 음습한 기운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불덩이를 집어삼켰다.
“이, 이게 무슨…….”
그 모습에 애덤을 포함한 그의 기사단원들이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이런 게 드래곤 하트란 말이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에 애덤이 기겁을 하며 묻자, 라비아타가 피식 웃었다.
“뭘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였던 것’ 이라고 표현해야겠지?”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시오.”
“말하자면, 오염된 거야. 무언가에 의해.”
“그게 지금의 상황과 관련이 있소?”
“응. 방금 보니까 이걸 이렇게 만든 녀석들이 저 키메라 무리를 만들었을 확률이 높거든.”
“그뿐만이 아니랍니다. 제 형제자매들도 저 오염된 드래곤 하트에 의해 다크엘프로 타락하고 말았죠.”
본래 드래곤 하트는 엘프들이 신성시하는 세계수의 중심부에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엘프들이 수면기에 들어가고, 여왕인 프리실라 또한 그 힘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사이에 조직은 드래곤 하트를 탈취, 이런 식으로 자신들만이 아는 장소에 옮겨 뒀다.
프리실라도 숲의 기운을 받아 드래곤 하트의 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조직에서는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도무지 찾을 방법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자신을 찾아온 가면의 남성, 셰인에 의해 이 위치를 전달받았다.
다만 홀로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 조언하고 탐사대와 함께 찾아오라는 말도 들었는데, 직접 찾아오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엘프들이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오염되어 있군요.”
“음, 그러네.”
셰인은 이러한 상황까지 예측하고 라비아타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꼬맹이…… 정체가 뭐지?’
조직에 대해서는 라비아타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 정도로 놈들과 관련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셰인은 마치 이 상황을 전부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했기에, 라비아타의 의구심이 점점 더 깊어져만 갈 때.
옆에 있던 애덤의 물음이 그런 라비아타의 상념을 일깨웠다.
“그게 무슨 의미요?”
“……다른 드래곤의 마력이 섞여 있어. 이 드래곤 하트는 드래곤이 죽으면서 모든 마력이 자연으로 돌아간 상태인데, 여기에 누군가 장난질을 친 거야.”
“그럼 배후에 드래곤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오!”
애덤의 말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라비아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헌에 의하면 드래곤들은 더 이상 이 세계에 관여할 수 없게 됐어. 아마 고대에 남겨진 드래곤의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이 짓거리를 한 거 같은데.”
라비아타의 단호한 어조에도 애덤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드래곤의 힘이 담긴 아티팩트라니…….”
“아무튼 애송아. 네가 나설 차례다.”
“애송, 아니 디라일라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그렇게 불러요.”
“내 맘이야. 어쨌든 이건 너한테 달린 문제야.”
“끄응, 어째 나한테 일이 몰리는 거 같은데…… 정말 제가 해도 되겠어요? 가뜩이나 탐사대도 이렇게 나눠졌는데.”
디라일라의 물음에 라비아타가 평소처럼 털털한 웃음을 보였다.
“어차피 네가 아니면 이걸 건드릴 수 있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텔레포트 같은 경우에는 원래 계획된 거기도 했어.”
“네?”
“뭐, 그런 게 있다 이 말이야. 아무튼 안심하고 일단 한번 파악해 봐. 보니까 지금 저 드래곤 하트가 이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그것부터 풀어야 우리가 힘을 쓸 수 있을 거야.”
“눼에…….”
뭔가 찜찜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기에, 디라일라는 먼저 이 주변의 대지부터 차근차근 공명을 시도해 봤다.
“아…….”
주변의 대지는 드래곤 하트에 심어진 마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속성 지배력.
포악하다 못해 오만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지배력은 대지를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다.
그런 지배력 때문일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디라일라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전이라면 다르게, 스스로가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나를 따라와. 어서!’
지하인으로서 대지속성에 대한 지배력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눈앞의 마력을 이기지 못한다.
당장 주인조차 없는 마력이었음에도 지배력의 수준은 디라일라를 아득히 상회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디라일라에게는 저 마력이 품지 못한 또 다른 게 있었으니. 바로 속성 친화력이다.
디라일라는 저 마력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배제시키고 주변 대지로부터 영향권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자신과 친숙하면서도 디라일라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력에 조금씩 끌려왔다.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단호한 기세로 대지의 신뢰를 조금씩 이쪽으로 끌고 오자, 점차 반응이 돌아왔다.
‘좋아, 된다. 이대로 천천히…….’
주변 대지와의 공명에 정신을 쏟고 있는 디라일라를 보며 라비아타도 내심 다시 한번 감탄했다.
확실히 지하인이기 때문일까.
주변의 대지가 조금씩 정화되는 게 눈으로 확인될 정도였으니, 그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 빠르네요. 우리 엘프들이었다면 얼마나 걸릴지 기약할 수 없었을 텐데.”
그는 프리실라도 마찬가지였는데, 드래곤 하트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프리실라는 감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엘프들이 길게는 수년에서 십수년을 매달려야 겨우 해낼 수 있는 일을, 지금 이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고 있으니.
그렇게 작업이 순탄하게 진행되나 싶은 순간.
“아, 이런.”
드래곤 하트로부터 꿈틀거리는 검붉은 촉수를 보며, 라비아타가 탄식을 내뱉었다.
“역시 조치를 취해 뒀나.”
“저, 저게 무엇이오?”
점점 크기를 반투명한 촉수의 형태에 애덤이 당황하며 묻자, 라비아타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고대 어느 멍청한 추종자 놈들의 찌꺼기야.”
“고대? 추종자의 찌거기라니?”
“예로부터 타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도가 튼 놈들이 있었어. 그놈들을 추종하던 것들이 만든 거지.”
남의 것을 훔치는 데 미친 것들이니, 드래곤 하트의 존재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저 지하인 꼬맹이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어머, 불청객들이 오고 있네요.”
대수림의 나무들을 통해 키메라 군단까지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오는 프리실라가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말해 줬다.
“끄응. 저 촉수는 내가 직접 해결할게. 나머지 좀 부탁해.”
“……한번 해 보겠소.”
디라일라는 여전히 드래곤 하트의 정화 작업 중이라 힘을 보탤 수 없는 상황이었고, 라비아타도 저걸 상대로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온갖 정신을 쏟아야 할 때였다.
“젠장. 이건 쓰고 싶지 않았는데. 당분간 얼마나 쓰러져 있을런지.”
라비아타는 자신의 턱 아래를 쓸어내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 지하인 소녀가 없어진다면 저 드래곤 하트를 언제 다시 정화할 수 있을지 기약을 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가 있는 이상 몰려오는 키메라 군단을 상대하는 데 크게 고역은 없을 테지만…….
“하아. 일이 힘들게 됐네요. 이곳의 나무들은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니…….”
그녀 또한 이곳의 오염된 마력으로 인해 전력을 다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자신의 팔찌에 걸린 마법을 풀어 기다란 장궁으로 형태를 바꿨다.
“직접 활을 든 게 얼마 만지 모르겠지만, 부디 제 솜씨가 녹슬지 않길 바라야겠죠?”
“……그랬으면 좋겠소.”
한 눈에 봐도 눈이 돌아갈 정도의 엘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음을 지었지만, 차마 애덤은 저 웃음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허락해 주지 않았으니.
키에에엑-!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키메라의 울음소리가 마치 이 탐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 같아, 애덤은 기나 긴 탐사로 인해 지친 몸을 이끌고 전선에 나섰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 전우들이여. 검을 들고 우리 왕실의 저력을 보이자!”
* * *
“아네이스. 이제 자네가 움직여야 할 때이구먼.”
“……제가요.”
도미닉의 말에 아네이스는 그가 왜 자신에게 저런 말을 했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도미닉의 손에 들린 육각면체 오브에서 나오는 일정한 파장은 퍼지는 범위만큼 마력을 동결시켰다.
그러나 마력이 동결된 것은 황실 측 또한 마찬가지였고, 지금부터는 순수 육체적인 능력만 가지고 전투를 이어 가야 한다.
비록 램퍼트 모험단이 알파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긴 했으나, 이 육각면체의 오브는 그리 오랜 시간 지속되지 않기에.
도미닉은 순수 마력이 아닌 오리진이라는 힘을 쓰는 저지먼트 기사단, 즉 아네이스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비록 마력까지 온전히 쓸 수 있을 때에 비하면 부족하겠으나, 마력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을 상대로는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테니.
“아네이스. 이는 황실의 뜻인 합일(合一)을 위함일세.”
“……그게 뭔데요.”
“……온전히 하나된 인류. 지금처럼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말함일세. 그곳에는 서로를 미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 오롯이 인간만을 위한 세상이지.”
그게 바로 인류를 위한 정의라며.
도미닉은 아네이스를 설득했다.
정의.
참 어려운 말이다.
아네이스는 뒤를 돌아봤다.
앞서 있던 전투로 인해 지친 기색이 여력한 램퍼트 모험단과, 아직 여력이 남은 듯 보이는 클라인.
그에 반해, 이번 전투에서 몇몇 위협적인 키메라만을 상대한 덕에 멀쩡한 황실의 기사단.
하지만 이런 유불리의 상황은 아네이스에게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쪽이든.
지금의 상황에서는 자신이 어디에 서든 유리함을 가지고 올 수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도미닉의 말이 떠올랐다.
정의를 위해.
물론, 아네이스도 이제는 잘 안다.
이곳에 있는 클라인은 죽을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램퍼트 모험단이야 무언가 자신들이 원하는 게 있기에 황실과 이해득실이 얽혔다고 하지만, 적어도 클라인은 전혀 연관이 없었으니까.
그는 그저 자신의 형을 따라 탐사에 나선 일개 생도일 뿐.
저들이 말하는 미래라면, 여기서 클라인이 억울하게 죽어야 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러니 저것은 가식이며 위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아네이스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여기서 아네이스가 클라인의 편에 선다 한들, 여러 사람이 있는 지금 아네이스의 선택이 황실의 귀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도 없었으니.
아네이스는 그렇게나 정의를 부르짖는 황실의 거짓을 파악할 때까지. 그리고 스스로의 힘이 갖춰질 때까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찾아온 선택의 순간.
아네이스는 하나의 결론에 미치고 말았다.
‘나도, 그렇구나.’
가식. 위선.
저지먼트 기사단을 포함해 정의를 외치는 이들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진실된 모습.
만약 여기서 다시 한번 황실의 편에 선다면.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아네이스는 스스로의 검에 오러를 피워 냈다.
티 없이 맑은 순백의 오러는, 끝내 그 검끝을 황실 기사단에게 향했다.
“……결국, 그런 선택을 하는구먼. 안타까운 일이야. 조금만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더라면, 이곳의 모든 인재들을 우리 황실이 품을 수 있었을 것을. 제국의 눈이 어두웠던 것을 탓해야 함이지…….”
그러면서, 도미닉과 황실 기사단은 뒤로 물러섰다.
“……?”
“하나 굳이 우리의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겨야겠구먼.”
“……!”
“히힉…… 인간, 인간은 역시 재밌어. 나도 껴도 돼?”
어느새 뒤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보다 빠르게, 아네이스의 검이 뒤로 휘둘려졌다.
카앙-!
“히히히! 좋아, 나도 낄게. 응─?!”
그 짧은 사이. 클라인과 아네이스에게 베인 상처가 상당히 아문 알파가 아네이스의 검에 튕겨져 멀리 도약했다.
“빨리 처리하시게, 괴물. 황실의 은총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으니.”
“아쉽지만, 히히! 알겠어!”
아무래도 좋았다.
좀 더 놀고 싶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강한 인간들을 나뭇가지 꺾듯 죽이는 것 또한 하나의 재미였으니.
알파는 굳이 아네이스와 시간을 끌기보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램퍼트 모험단으로 시선을 향했다.
“큭……. 황실이 더러운 건 여전하군요.”
“욕이라면 얼마든지 받아 주겠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야.”
일렉사가 살기 어린 눈으로 도미닉을 바라봤으나, 도미닉은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다시 놀자아아아!!”
그렇게 알파가 램퍼트 모험단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
퍼억-!
그런 알파의 측면에서 무언가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놈의 옆구리가 움푹 파이도록 걷어찼다.
그로 인해 아까 아네이스에게 베인 상처가 다시금 찢어지면서, 알파는 고통어린 괴성을 내지르며 벽에 처박혔다.
“무슨?!”
갑자기 나타난 황금빛 오러.
그 존재를 확인한 도미닉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희미하나, 그 빛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클라인은 자신의 오러와 같은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로 날아간 알파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금이었구나.’
순간, 클라인은 떠올렸다.
[그때가 찾아오면, 걱정하지 말고 네가 가진 모든 마력을 풀어 보아라. 그럼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게 될 테니.]
며칠 전, 셰인이 했던 그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형님은 알고 있었어.’
탐사대의 배신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지금의 상황을 자신에게 맡긴 것이다.
형님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예측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마력을 쥐어짜며, 그 압도적인 양으로 반마력 파장을 가까스로 이겨 낸 클라인은 언제나 샘물과 같이 넘쳐흐르던 마력이 빠르게 고갈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빠르게 끝내야 해.’
지금은 평소의 전력도 내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아직 상처를 다 회복하지 못한 알파라면 아까처럼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터.
아네이스가 황실 기사단을 상대하는 사이 클라인은 알파를 완전히 죽여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변은 클라인에게만 일어나지 않았다.
-파직.
클라인의 마력량을 버티지 못한 육각면체 오브에 금이 간 순간.
“……?!”
도미닉은 자신의 발아래 무언가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그런 그의 그림자가 제 주인인 도미닉을 집어 삼켰다.
“단장님!”
그에 기겁한 황실 기사단이 도미닉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이를 아네이스가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이윽고 도미닉을 완전히 집어삼킨 그림자는 마치 무언가를 음미하듯 꾸물거리더니, 이내 도미닉의 몸에서 빠져나와 사람의 형체를 띄웠다.
[맛있군. 역겨운 인간의 위선이란 이리도 달콤하구나.]
그림자.
어둠의 정령은, 마력이 동결된 도미닉을 손쉽게 제압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으로 홀연히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4화
44화 끝나 가는 탐사 (9)
고든의 시선을 느낀 제임스가 바짝 긴장할 때, 그런 그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든.”
“……!”
여태 자신의 뒤로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제임스는 잠깐 섬뜩함을 느꼈으나, 이내 숙련된 암살자답게 기척을 내지 않고 상황을 관망했다.
“끌끌끌. 처음 봤으면 대뜸 상대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자기 이름부터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
고든의 말에 셰인은 답하기보단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쯧쯧.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라는 게 없어. 그래…… 이름이 셰인이라 했던가?”
그러면서 고든은 주변을 쭉 훑어봤다.
“그런데 혼자 온 것이냐?”
“굳이 다른 사람이 더 필요한가?”
“끌끌. 자신감 하나는 대단하구나. 아무래도 내가 꽤 얕보인 모양이야. 하긴, 꽤 시간이 흐르긴 했지. 아무래도 좋아. 안 그래도 너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게 있던 참이었다.”
방금 막 알파로부터 전해져 오던 신호가 끊겼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첫 자식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이야.
그러나 그 슬픔을 달래 줄만큼, 눈앞에 있는 존재는 고든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 귀쟁이 놈들의 마력 패턴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도 궁금하고…… 보아하니 분석력이 인간의 수준은 아닌 것 같구나. 아해야, 일단 예의상 한 번 물어보마. 내 성격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지극히 드문 일이니 잘 듣거라. 내 제자가 되어 볼 생각이 있느냐?”
스스로 말한 것처럼, 고든은 본래 남에게 허락을 받는 성격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셰인이 가진 남다른 분석력이 그만큼 그의 흥미를 끌어낸 것이다.
“이래저래 흥미가 생기더구나. 고대 마법인 룬어를 쓰는 것도 그렇고, 그걸 직접 개량한 것도 제법 봐줄 만했다. 내 제자가 되기엔 충분하지. 어떠냐?”
“거절하지.”
“쯧, 그럼 그렇지. 역시 머리만 보관해야겠구나. 걱정 말거라. 곧 있으면 내 제자가 되도록 만들어 줄 터이니.”
그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이렇듯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연금술사지만, 그는 한때 전 대륙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흑마법의 정점에 서 있던 이였으니까.
“내 비록 소싯적처럼 고풍스럽게 싸우진 못하겠으나, 그래도 재미있는 연구는 많이 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게 있지.”
고든은 자신이 앉아 있던 책상 서랍에서 그로테스크한 가면을 꺼냈다.
“이게 무엇일 것 같나?”
“……여전히 취미가 고약하군.”
“호오. 이것도 벌써 알아봤느냐?”
“네크로노미 마스크(Necronomi mask).”
고든이 개발한 최악의 발명품이자, 이곳에 오면서 가장 경계하던 물건이다.
한 인간의 피부를 살아 있는 채로 뜯어내 그 피해자의 피로 숙성시키고, 원혼이 담긴 가면.
“흐하하. 맞다. 내 나름의 역작이라 할 수 있지.”
그만큼 어느 정도 상정 내에 들어 있는 물건이었다.
다만 아직 조직과 결탁한 지 오래되지 않아 그 수준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니 저 물건은 고든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완성된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마스크의 개수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다는 것일까.
‘이전에 봤을 땐 저 가면이 수십 개나 있었지.’
때문에 전생에서의 고든은 무려 한 개 군단을 그 혼자 감당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무위를 자랑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지. 내가 만들었지만 말이야.”
그만큼 저 가면의 위력은 얕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든이 마스크를 얼굴에 쓰자, 순식간에 그로부터 퍼져 나오는 기세가 흉악해지기 시작했다.
“부디 너무 빨리 쓰러지진 말거라. 나도 이걸 실전에 쓰는 건 처음이니 말이다. 힘 조절이 안 돼서 무심코 죽여 버릴 수도 있거든. 끌끌!”
그리 말하는 고든의 손에는 어느덧 썩은 피처럼 탁한 붉은빛 검이 쥐어져 있었다.
‘확실히 이때에는 이미 완성이 됐군.’
재료로 쓰인 인간의 신체 능력을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권능.
네크로노미 마스크의 효과였다.
놈에게서 풍기는 기세를 보아하니 필시 저 마스크에 재료로 들어간 인간은 3품의 마스터 수준에 다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고든이 달려들었다.
황실의 호위 기사단, 도미닉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의 몸놀림.
아니, 파괴력 면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났다.
그러나, 셰인은 그런 고든의 횡베기를 가벼운 움직임으로 피했다.
동시에 중첩된 마탄을 그의 얼굴을 향해 날려 보냈다.
고든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고 손에 오러를 감싸 날아오는 마탄을 파훼했다.
“호오…… 생각보다 빠르구나.”
옅게 감탄사를 내뱉은 고든은 셰인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가면 너머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 중에 이만한 반응속도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았으니.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놀라기에는 너무 일렀다.
고든의 기술은 확실히 인간들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종에 한 해서일 뿐이었으니.
“혈마법이로군. 흡혈귀에게 피라도 빨렸나?”
“……아는 게 참 많은 아해로구나.”
고대 종족, 흡혈귀.
기원전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이 종족은 혈마법의 시초가 되는 종족이었으며, 그들이 가진 피에 대한 권능은 수많은 종족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든이 쓰는 혈마법은 과거 흡혈귀를 추종하던 일단의 무리들이 따라 만든 열화판에 불과했다.
“그래, 내가 오만했구나. 사실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게 나뿐만은 아닐 테지. 그래서 놀랍긴 하다만…… 그걸 안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이 달라지진 않는다.”
확실히, 아는 것뿐이라면 현 상황의 타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도 셰인은 흡혈귀라는 고대 종족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모르고 있었으니.
“오만하다라, 그래. 네놈은 오만에 어울리지 않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만나 본 적 없던 흡혈귀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고든에게 약점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 * *
전생에 인류는 허망하게 멸망의 길을 걸었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직에서 요직에 앉아 있는 고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몇 차례 고든을 죽이기 위한 원정대를 보낸 전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패뿐.
어떨 때는 일당백으로 싸우는 검귀가 되었다가도, 또 어떨 때는 하늘에서 비처럼 불덩이를 쏟아내는 대마법사가 되기도 했다.
밤에는 어둠 속에 숨어들어 원정대의 간부를 암살했으며 이른 새벽에는 천 리 밖에서도 활을 쏘아 표적을 제거하는 레인저가 되었다.
홀로 수십의 거장이 되어 원정대를 가지고 노는 고든의 악명은 당시 인류가 가진 실낱같은 희망을 무참히 짓밟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어느 한 천재는, 고든의 다양한 면모보다 그가 가진 힘의 원천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지고 보면 한 명의 인간이 그 모든 재능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천재는 고든이 가진 힘의 원리를 중점으로 파악했고, 그 결과 단 한번.
원정대는 고든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 위업은 모두가 말더듬이라 무시하던 한 청년에 의해서였으니.
그 이름은 베른슈타인 오스튼.
당시 오스튼은 스스로가 가진 예지에 가까운 분석력으로 고든에 의해 수차례 원정대가 학살을 당할 때에도 놈에 대해 모든 것을 분석했고, 그 결과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고든은 고대 흡혈귀의 샘플을 우연찮게 얻어 그 인자를 자신의 신체에 합성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진정한 흡혈귀로 거듭나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가 가진 지식은 어디까지나 흑마법에 기반되어 있었고, 그 흑마법마저도 혈마법의 열화판조차 베끼지 못해 만들어진 결과물이었으니.
찾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약점은 분명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오스튼은 그걸 놓칠 리 없는 인물이었고.
끝내 원정대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려 고든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셰인은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당시에 오스튼은 대다수의 마법사들을 통해 자신이 세운 이론을 입증했다는 것이고, 지금의 셰인은 그때처럼 자신을 도와줄 다른 마법사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개의치 않았다.
“기회는 단 한 번. 고귀한 용의 자손에게 닿았던 일점(一點).”
“흠?”
“목표는 치명(致命).”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아무튼 이제 슬슬 대화가 지루해지기 시작했으니,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아쉬워하지는 말아라. 어차피 내 제자가 된다면 싫어도 많은 대화를 나눠야 될 테니. 끌끌.”
다시금 고든이 자세를 잡고 움직였다.
검붉은 오러로 이루어진 검이 현란하게 허공에 검로를 그렸다.
그 궤적을 따라 날아드는 검강은 마치 다방면에서 날아오는 기사들의 검을 일제히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더구나 그 마력량조차 우습게 볼 게 아닌 탓에 어지간한 마법으론 방어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셰인은 손끝에서 마력탄을 발사시켜 검강을 향해 날려 보냈다.
“어리석은! 그깟 마탄으로 막아 보려는 거냐!”
하지만.
타앙-!
본래라면 저 정도 마탄 따위 가볍게 상쇄하며 셰인의 팔다리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어야 할 검강이, 놀랍게도 마탄에 의해 상쇄되었다.
고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네놈…… 그 마력을 어떻게 구사한 게냐……!”
그야 방금 셰인이 보인 마력은, 고든이 그토록 혐오하던 황실에서나 볼 수 있던 마력이었으니.
과거 자신의 흑마법사 집단을 붕괴시킨──
“황실의 고양이들이 쓰는 것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구나.”
“아니, 틀렸다. 나이가 드니 보는 눈도 퇴화한 모양이로군.”
“뭐라?”
“그딴 되다만 기술을 굳이 따라 할 필요가 있을까. 보다 더 진보된 기술을 만들면 되는 것을.”
“……만든다? 고작 스물도 채 되지 못한 네 녀석이?”
“혈마법의 열화판에 불과한 네 기술이라면 솔직히 황실의 기술을 쓸 필요도 없다.”
“……흐흐. 그런 말투도 오랜만이구나. 내 기술이 열화판에 불과하다? 웃기는 소리!”
열화판.
그건 고든의 역린이었다.
실제로도 그는 고대 흡혈귀의 샘플을 가지고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기에.
그로부터 느끼는 열등감은 분명 존재했다.
물론 고든의 기술은 뛰어나다. 하지만 셰인이 가진 분석력은 그런 고든의 기술마저 이해하고, 보다 진보하기에 이르렀으니.
타인의 피와 혼으로 숙성시킨 가면?
그저 쓰기만 해도 재물의 생전 능력을 그대로 쓰는 기술?
셰인은 그게 바로 고든의 한계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저 열화판에 다다르는 것.
그저 복사에 이르는 것.
그것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고작 2서클 마법사에 불과한 셰인이 3품의 마스터에 다다른 고든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셰인은 그저 따라 하기보다, 더 진보된 방향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셰인은 알고 있었다. 고대 흡혈귀들의 능력과 우열을 가를 수 없는 성능을 보이던 또 하나의 능력을.
인간의 7대 욕망 중 하나, 탐욕.
디라일라를 감금했던 귀족의 별장에서 탐닉한 저지먼트 기사단원, 다이라의 힘을 파악해 마력에 오리진을 담는 능력으로 고든의 오러를 흡수시켜 파훼하고.
황실 기사단원들로부터 강탈한 수많은 기억, 경험이 그런 고든의 움직임을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록 셰인은 고든처럼 육체적인 능력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하나, 애초에 그들의 육체적인 능력은 셰인에게 하등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고작해야 열화판, 복사판을 가지고 오는 저런 가짜 따위에게 질 이유가 없던 것이다.
“끌끌, 끄흐흐흐, 이 내가 열화판? 가짜에 불과하다고? 마음이 바뀌었다. 내 너를 중히 여겨 제자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이 변덕 심한 노인네의 화를 너무 건드렸어.”
그에 고든은 들고 있던 검으로 또다시 검강을 날려 대고는, 그사이 품에서 또 다른 가면을 꺼내 썼다.
셰인이 아까처럼 마탄으로 대응하는 사이에 이번에는 핏빛으로 물든 냉기가 폭풍을 일으켰다.
그에 셰인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화속성 마법사, 라비아타의 기술을 떠올렸다.
그러나 화속성을 지니지 못한 셰인은 화속성과 가장 근접한 ‘분해’의 룬어를 추가한 마법으로 대응했다.
핏빛으로 이루어진 냉기 폭풍은 적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마력 안개에 의해 산화되듯 분해되어 사그라졌다.
다시 한번 고든의 가면이 바뀌었다.
“이노오오옴!!”
이번에는 혈마력으로 만들어진 활에서 번개처럼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날아드는 십여 발의 화살 세례가 셰인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든다.
이건 다른 누군가의 기억을 빌릴 필요도 없이, 중첩 마탄을 날려 화살의 방향을 비틀었다.
그사이 고든의 손에는 거대한 배틀액스가 들린 채 태산을 무너뜨릴 기세로 묵직한 한 방을 노리고 들어온다.
어려울 것도 없이 중첩 헤이스트 마법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 피했다.
대신 그 자리를 파고든 배틀액스가 바닥을 내려치자, 거대한 구덩이가 파이며 흙과 나무의 파편들이 셰인을 향해 날아왔다.
중첩된 마력 실드로 방어하고 흙먼지가 가득한 공간에 수십 발의 마탄을 날려 보낸다.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혈마력으로 이루어진 방패와 검을 든 고든이 달려들었다.
그것은 녀석의 오판이었다.
차라리 튼튼한 재질로 만들어진 진짜 방패라면 모를까, 흡수의 성질을 띈 셰인의 마력은 오히려 강철보다 꿰뚫기 쉬웠다.
제아무리 3품의 마스터가 가진 오러라 해도, 마력으로 만들어 낸 세 자루의 마력검이 일제히 한 점으로 달려들자 고든의 방패가 마치 거미줄처럼 실금이 쩌적 그어진다.
다시 한번 중첩 헤이스트로 거리를 벌리자, 그제야 고든의 움직임이 멈췄다.
“흐흐…… 그래, 인정하마. 고작 이 정도로는 네 녀석을 잡아 죽이기엔 힘들겠어.”
가지고 있던 모든 가면을 썼음에도 셰인에게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으니.
그에 고든에게 남은 것은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한데, 그건 네 녀석 또한 마찬가지지.”
그러면서 고든은 스스로의 가면을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이게 있는 이상 나는 너를 죽이진 못하더라도, 시간을 끄는 정도는 가능하다는 말이다. 심장이 꽤 뻐근하지 않으냐?”
고든은 핵심을 짚었다.
확실히, 2서클로 인해 부족한 마력은 고든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으로 충당하고 있었지만, 그 내구성까지는 따라가지 못한다.
실제로 끊임없이 마력을 분출하고 흡수하는 과정을 겪으며, 셰인의 마력 코어는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끈다? 아니지. 시간을 끈 건 네가 아니다.”
“……?”
“내가 끌었지.”
어느새 바닥에 널브러진 셰인의 마력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미약한 빛을 뿜으며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룬어.
[팽창], [굴절], [수축].
공간이 뒤틀려짐과 동시에.
“지금.”
여태껏 그림자 내부에 숨어 있던 한 명의 암살자가 뛰쳐나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5화
45화 끝나 가는 탐사 (10)
전생에 오스튼이 고든을 패퇴시킨 방법은 생각보다 심플했다.
상대가 대응하기 힘든 수를 쓴다면, 애초에 그 수를 쓰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를 한다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누구든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수를 쓰기 힘들었던 이유는 혈마법에 대한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스튼은 그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수차례 원정대와 고든의 전투를 파악한 뒤 거의 해체하다시피 고든의 혈마법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흡혈귀의 권능이 아닌, 그 열화판인 혈마법의 약점은, 무엇이든 진실되게 자신의 것으로 가질 수 없다는 가짜라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 가짜를 본체에서 분리시키면 되는 일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오스튼은 바로 실행에 옮겼고, 단 한 번의 시행착오 없이 고든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한다.
“……!”
주변에 흩뿌려진 셰인의 마력에 의해 공간이 팽창된다.
동시에 그 공간은 무엇도 존재하지 못하는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고, 그 자리에는 마력조차 외부로 튕겨져 나간다.
주인이 없는 마력은, 세상의 의지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인이 없는 마력이란 무엇을 뜻함일까.
공기 중에 포함된 마력을 제외한다면, 이미 죽어 사라진 자의 마력을 혈마력으로 변질시켜 억지로 붙잡고 있는, 세상의 의지를 배반한 어느 한 노인네에게 해당된다.
팽창과 동시에 고든이 소지 중이던 모든 가면이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고든은 셰인에게 들어올 공격에 대비했으나, 셰인은 고든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 행동에 고든의 사고가 1차적으로 멈췄을 때, 고든의 등 뒤로 불빛이 터져 나왔다.
아무런 물리력도 없는 간단한 1서클 마법, 라이트(Light).
그로 인해 고든의 그림자가 셰인이 있는 방향으로 길게 늘어지다 이윽고 벽의 그림자와 맞닿았다.
그림자에 숨어 있던 누군가는, 그 찰나를 놓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뒤늦게 음차원의 마력을 감지한 고든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그런 고든을 스쳐 지나갔다.
“크륵……!”
단검은 부드럽게 고든의 목을 베고 지나갔고, 순식간에 피분수가 일었다.
단 1초도 되지 않는 순간.
승부는 그 짧은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후우…… 아직 실력이 녹슬진 않았군요.”
쓰고 있던 안경을 바로잡으며 뒤를 돌아본 제임스는 반쯤 잘려 덜렁거리는 목을 부여잡은 고든을 바라봤다.
철저한 암살자답게, 그는 다시 한번 고든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덜렁거리는 목이 공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치며 뭉개지고, 그제야 제임스는 안심하고 셰인을 바라봤다.
“……셰인?”
그저 아카데미 생도에 불과한 그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음이 놀라웠던 제임스가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셰인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제임스가 황급이 다가가려던 그 순간.
“주인님께 손대지 말아라, 인간.”
쓰러진 셰인의 배후에서 등장한 어둠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어둠의 정령? 주인이라고?”
통상적으로 계약이 불가능하다 알려진 어둠의 정령이 계약한 것도 모자라 인간을 ‘주인’이라 부르는 상황에 제임스가 잠시 당황하며 물러섰다.
단순 계약이 아닌 주종 관계가 확립됐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krrrr…… 그때와 같은가.”
제임스의 반응에 관심이 없던 어둠의 정령은 쓰러져 있는 셰인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애도했다.
아마, 차라리 죽음을 바라고 싶어질 것이다.
기본적으로 어둠의 정령으로서 인간과 같은 감정이 없음에도, 정령은 그런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 지금쯤 상대는 과거 자신보다 더한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고 있을 터이니.
그 당시의 기억은 없으나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파악하고 있던 정령은, 지금의 자신이 아닌 썩은 나무 정령이 느꼈던 공포가 지금도 본능에 새겨져 있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 * *
“크윽?!”
달려드는 키메라의 공격을 흘려보내고 반격을 가한 애덤은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비록 다른 곳보다 통로가 넓으나, 여전히 비좁게 느껴지는 이 나무 밑 통로에 몰려오는 키메라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너무도 뜨거운 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오!’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의 원인이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바로 라비아타였다.
라비아타는 드래곤 하트에서부터 촉수가 등장하기 무섭게 저렇듯 열기를 일으켰는데, 당장 저쪽으로 시선을 돌려 봐야 보이는 것은 실명할 듯 타오르는 불길뿐이었다.
한편 안에 있는 디라일라가 걱정됐으나, 그런 애덤의 걱정과 다르게 디라일라는 라비아타의 보호를 받는 덕에 그을린 흔적은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다만 디라일라를 자신의 영향권에서 지키는 것이 한계인 라비아타는 그다지 여유롭지 않았다.
‘젠장, 쉽지가 않네.’
차라리 수만이라는 숫자의 군대를 상대로 평원에서 싸우는 게 쉬웠지, 이런 제한된 공간에서 자신의 열기로부터 다른 이들을 지키기에는 당장 라비아타가 가진 마력이 너무도 파괴적이다.
그걸 가까스로 컨트롤하며, 눈앞에 있는 촉수를 상대하는 일은 라비아타에게도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당장 스스로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지금.
마력의 컨트롤은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저 촉수는 타인의 마력에 대한 주도권을 강탈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어지간한 속성 지배력이 있지 않는 이상 저 촉수에 대항할 수단은 그리 많지 않았고, 당장 라비아타는 어떠한 이유로 자신이 가진 속성 지배력을 외부로 돌린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저 촉수에 대항하려면 이러한 폭주의 상태에 돌입할 수밖에 없던 것이고.
‘그 멍청한 녀석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메자이아 대수림에 들어온 직후부터 자신이 가진 속성 지배력을 일부 부여받은 단원을 떠올리며 라비아타가 이를 악물고 있던 그때.
“어?”
방금까지 라비아타의 마력을 잡아먹기 위해 발악하던 촉수의 기세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뜻밖의 변화에 호응이라도 한 것일까.
“으아아아아악!!”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오는 괴성에 시선이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작은 불꽃이 튀더니, 이내 그 기세를 급격히 불려 가며 사람의 형태를 띄워나갔다.
“이 몸, 등자아아앙!!”
마치 차원을 불태우는 듯한 불길. 그 속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오며 라비아타를 보고는 씩 웃었다.
“미안, 단장. 좀 지각했다. 하하핫!”
“저 썩을 놈이…….”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 먼저 들어와 있던 라비아타의 단원.
이그니스의 등장이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거야!”
“헷. 지금은 상황이 급하잖아. 나중에 설명할게. 근데 나도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거든.”
그러면서 이그니스는 기세가 줄어든 촉수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근데 하나는 확실하지. 저 망할 촉수 놈부터 어떻게 해야겠다는 거.”
그러면서 이그니스는 자신의 가슴으로부터 하나의 불꽃을 피워 내 그것을 라비아타에게 건넸다.
“다시 가져가라고, 단장.”
“빌어먹을 놈.”
불꽃이 라비아타에게 돌아가자, 이그니스는 다시금 자신의 자취를 감췄다.
불의 정령, 이그니스.
여태까지 메자이아 대수림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들어왔던 라비아타의 정령이 돌아오면서, 그동안 건네줬던 속성 지배력 또한 제자리를 찾았다.
라비아타는 폭주하던 자신의 마력이 다시금 자신의 주도하에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후우, 좋아. 일단 이 망할 것부터 끝내 버리자고!”
여태까지는 그저 폭주하듯 휘두르던 마력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화력이 집중적으로 촉수를 향해들었다.
이윽고 기세가 줄어들기 시작한 촉수는 그에 대항하지 못한 채 끝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한참 집중에 들어섰던 디라일라에게도 희소식이 들려왔다.
“어? 갑자기 애들이 온순해졌어요!”
“그렇단 말이지……! 거기 기사단! 다들 엎드려!”
“……!”
라비아타의 말에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몸을 피했다.
그러자 라비아타는 여태까지 드래곤 하트에 집중되고 있던 자신의 마력을 몰려오는 키메라 군단을 향해 날려 보냈다.
어마어마한 화력이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며 통로에 있던 모든 키메라를 집어삼켰다.
놀랍게도 여태까지 라비아타의 화력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고 있던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은 어느새 열기가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휘감겨 오는 온기가 지친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제 좀 끝내자, 이 지겨운 것들아!”
그 열기 속에서도 동료를 방패 삼아 살아남은 키메라들이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달려들었으나.
그 기세는 이전과 다르게 확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대수림의 탐사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 * *
한 순간의 방심으로 일어난 사태에, 고든은 놀라면서도 화가 나긴 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지금은 이렇게 물러설 수밖에 없겠군. 쯧, 아쉽게 됐어.’
본래라면 조직에서 더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만도 했으나, 고든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래 봐야 인간에 불과하다고 얕잡은 것도 문제였으나, 자신의 역작인 다크엘프의 완성이 얼마 멀지 않았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다크엘프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꽁꽁 숨겨 둔 드래곤 하트에 탐사대가 도달했으며, 정작 자신은 이렇게 그 어린 애송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비록 실수하긴 했으나, 완전한 패배는 아니다.’
그래도 이번 일로 인해 얻은 데이터의 양이 결코 적지 않았다.
아쉬운 게 있다면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거야 다음을 노리면 된다.
비록 자신의 육체는 죽었으나, 그는 본래 영혼을 다루는데 능숙한 흑마법사이자 혈마법사다.
죽은 몸뚱이는 버리고 본래 자신의 육신으로 영혼은 알아서 돌아갈 터.
‘대관절 그 애송이가 가진 지식이 얼마인지 모르겠군.’
다만 셰인의 존재가 고든을 걸리게 만들었다.
이곳에 온 이후부터, 셰인의 주도하에 고든이 준비해 둔 모든 수가 사라지기 시작했으니.
조직에서 철저히 숨겨 왔던 드래곤 하트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도.
천연 요새 역할을 하던 메자이아 대수림의 기상 현상을 파악한 것도.
엘프들이 아닌 이상 알 수가 없는 지하 터널의 존재 여부도.
엘프들만이 쓸 수 있는 텔레포트를 활용한 것도.
전부, 전부 그 애송이의 발상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이쯤 되니 심증적으로 다크엘프가 사라진 것도 셰인이 한 짓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뭐가 됐든, 나중에 놈들에게 알아보라 시키면 될 일이지.’
어쨌든 지금은 다시 본래의 육체로 돌아가 이번에 얻은 데이터를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쓰고 있던 육체가 죽은 직후부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깜깜한 시야만 이어지고 있을 뿐.
과거 연합군과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자신의 비기다.
지금이라면 공간을 통과한 채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가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인데, 여전히 시야가 어두웠다.
‘이게 무슨 일이냐.’
무언가 이상했다.
그 낌세를 느낀 직후, 고든의 시야가 밝아졌다.
그곳은, 핏빛으로 불길한 색에 물든 하늘과 그 아래로 지평선 너머까지 시체들이 늘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 가운데.
왕좌에 앉은 채, 성스러운 검에 찔려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6화
46화 수확의 시기 (1)
고든은 셰인의 내면에서 발악하고 울부짖으며 발버둥 쳤으나, 그 추레한 노인이 맞이하게 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심상 속 세상.
이는 제아무리 영혼을 다루는데 통달한 존재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스스로가 영혼을 다루는 흑마법사이자 혈마법사였기에 그 결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본래 영혼이란 빛나면 빛날수록 옅은 빛들을 끌어모아 다 함께 강해지지만.
반대로 어두운 영혼은 타인의 영혼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고든 또한 자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영혼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양분으로 삼았던가.
그러나 셰인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저 무저갱보다도 더욱 깊고 어두운 영혼은, 고든조차도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 깊은 내면을 바라본 고든은 그제야 셰인이 품고 있는 어둠의 정체를 알아봤다.
최근 자신이 연구 중이던 본질의 타락.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의 힘을 극한으로 이끌고 그것을 부정의 힘으로 오염시키려던 그의 연구 결과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 안 돼. 안 돼!!’
그게 고든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도대체 놈이 누구길래 자신이 개발하고 연구한 그 결과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그 순간에도 고든은 학자이자 연금술사였고, 마밥사였다. 끝내 그 진실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고든에게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이윽고.
소멸.
고든은 여태껏 자신이 농락해 온 여타 실험체들의 영혼보다 더 끔찍한 최후를 예감했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의지가 고든의 영혼을 잘게 분해시켰다.
아무리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봐도 보이지 않았다.
‘크에에에엑──!’
끝내 고든은 자신의 모습처럼 추레한 발악 끝내 완전한 소멸을 맞이했다.
이전 어둠의 정령처럼 실수란 없었다.
영혼의 찌꺼기조차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소멸된 것을 확인한 셰인은 두 눈을 감고 감상에 잠겼다.
이 노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악인의 죽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고든은 조직이 인간 세계에 완벽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가장 뛰어난 조력자였고, 그의 죽음은 곧 전생에 완전무결했던 조직의 계획에 크디큰 말뚝을 박아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로부터 오는 쾌감을 만끽하며, 셰인은 떠올렸다.
처음 시작은 오스튼과의 놀이가 원인이었다.
그전까지는 아직 조직에게 대항하기 위해 힘을 기를 시기라 판단하고 큰 움직임을 보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훗날 조직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였던 오스튼와 연을 유지하는 것을 생각해 그를 만족시킬 만한 결과가 무엇일지 생각이 미쳤다.
이 시기에 큰 사건들 대부분은 조직과 연관이 있었고, 셰인 또한 조직에서 보내 왔던 시간이 있던 만큼 대부분의 큼지막한 사건들은 조직과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부터 계획이 시작됐다.
사실 계획이라기보단 몽상에 가까웠다.
그 모든 것이 확률 싸움에 불과했으니.
드래곤 하트로 라비아타의 시선을 끌었다.
그 물건에 대해 세상 누구보다 염원하고 있을 존재가 바로 라비아타였기에 높은 확률로 자신에게 접근해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셰인 또한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원하는 물건이 있었기에, 그녀가 온다면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뿐이던가.
메자이아 대수림을 떠올리니 이 시기에 있을 인류 최악의 연금술사, 고든까지 생각이 뻗쳤다.
셰인의 기억에 의하면, 이 시기의 고든의 연구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의 자신이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어찌 됐든 그 모든 일은 확률에 불과했으나, 결국 그 확률을 전부 뚫고 이렇듯 원하던 결과를 손에 쥘 수 있었다.
“후우.”
“krrr…… 주인님.”
눈을 뜬 셰인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어둠의 정령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특한 정령을 다루고 있군요, 셰인.”
“예.”
무언의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제임스의 눈빛이었으나, 그에 응해 줄 필요성이 없었기에 셰인은 어둠의 정령을 바라봤다.
“녀석의 시체는?”
“껍데기만 버려두고 왔습니다, 주인님.”
“그런가.”
황실의 호위기사단, 도미닉의 행방까지 확인한 셰인은 그제야 제임스를 바라보고 말했다.
“일단 탐사대로 돌아가도록 하죠.”
“……좋습니다.”
제임스의 의문이야 어찌 됐든. 이제 일의 마무리를 확인하러 갈 차례였다.
* * *
“인간 여러분들을 이곳까지 초대한 건 엘프 역사상 제가 처음이에요.”
프리실라의 말에 일행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셰인과 라비아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에 남녀노소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그래도 도와준 사람들한테 그 엿 같은 목소리 좀 안 내면 안 될까?”
그에 라비아타가 한 소리를 하자 프리실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세요.”
“너희 귀쟁이들이 목소리에 이상한 짓을 하는 걸 한두 번 봤어야지.”
“아쉽지만 걸렸으니 어쩔 수 없네요.”
그러면서 프리실라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마력을 제외시켰다.
엘프들은 자신들의 외모가 전 종족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활용할 줄 알았다.
목소리에 마력을 부여해 상대방의 적의를 줄이는 것.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나, 모르고 있으면 당하기 쉬웠다.
“흠흠, 아무튼, 메자이아 대수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간 여러분.”
그러면서 프리실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도록 할게요.”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인 그녀는 고귀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잠시 후, 다시금 고개를 든 그녀는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에 들어갔다.
“인간들의 신, 아카샤에 의해 우리가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 봉인된 뒤로 여러분들이 상대했던 어떤 단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답니다. 그들은 세계수의 시선을 피하고 자신들의 터전을 잡은 뒤, 수면에 취한 우리 엘프들을 납치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저렇듯 생체 실험까지 자행했죠.”
저 뒤에는 보랏빛 피부의 엘프들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비록 저렇게 변해 버린 탓에 우리 엘프와는 많이 달라져 버렸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한 가족인 사실은 사라지지 않죠. 여러분들이 저 아이들도 구해 준 거랍니다.”
그뿐이던가. 오염된 드래곤 하트를 정화해 주기까지 한 덕분에 조직의 뿌리까지 뽑아 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로, 엘프들의 여왕, 프리실라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눈앞의 인간들을 인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
그에 일행들 전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는 인류에게 있어서, 세 번째 요람을 클리어 했다는 신호였기에.
이로 인한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이는 그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기본적으로 인류가 요람을 정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해당 요람에 속한 주인 종족의 우두머리를 수차례 토벌하는 것.
그게 몇 번이 될지는 모른다. 첫 번째 요람에서는 4번으로 끝났고, 두 번째 요람에서는 7번으로 늘었다.
많은 마법사들이 그러한 부분에 대해 연구해 봤으나, 여태껏 그 비밀을 풀어낸 자들은 없었다.
반면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바로 주인 종족의 우두머리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이 방법이 성공했던 적은 없었다.
단지 아카샤가 직접 그리 말했다는 게 풍문으로 들려왔기에 그러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을 뿐.
하지만 현 인류는 그 방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요람과 던전을 포함해 모든 이종족과 몬스터들은 인간에게 극도의 적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요.”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셰인의 귀를 간지럽혔으나, 무표정으로 듣고 있던 셰인은 그저 고개를 묵묵히 끄덕일 따름이었다.
탐사대가 한동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한 뒤, 셰인은 프리실라와 따로 대담할 시간을 가졌다.
“그대들의 신, 아카샤는 이곳 요람이라 불리는 곳에 다양한 종족들을 봉인했죠.”
아카샤의 대봉인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시간의 정체.
아카샤의 대봉인이 진행된 장소는 시간의 반복성을 띄게 된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늙지 않는다.
죽어도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난다.
모든 성장이 멈춘다.
던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저주였고 봉인이었다.
늙지 않고 죽지 않으나 그럼에도 미칠 수가 없고. 시간이 반복되니 육체적, 정신적 성장도 멈춘다.
성장이 멈추기에 배움을 행할 수 없다.
아이를 가지고 종족의 부흥 또한 불러오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수백 년의 정체된 시간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지금도 봉인된 수많은 종족들은 자신들이 봉인된 이후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프리실라에게 조직은 공포나 마찬가지였다.
이 반복되는 봉인 속에서 그들이 납치하고 생체 실험을 가한 다크엘프들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등장은 우리 엘프들에게 희망이나 마찬가지였죠.”
프리실라는 탐사가 시작된 그 순간부터 인간들의 등장을 눈치채고 있었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전역은 그녀의 눈 아래 있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럼에도 쉽사리 탐사대를 내쫓을 수 없던 이유는 조직의 존재 때문이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들이 또 얼마만큼의 동족들을 납치해 갈지 몰랐기에.
“그래서 더욱 감사하답니다.”
그리 웃으며 프리실라가 말했지만, 이번에는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라고 공짜로 일해 준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내가 내밀 도움의 손길 역시 마찬가지고. 또 인간으로 인한 위협이 이번으로 끝은 아닐 것 터.”
“아마, 그렇겠죠.”
셰인에게 대수림 바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듣게 된 프리실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배타적인 성향을 띄우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이는 기원전에도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오히려 기원전의 환경이 엘프들을 더더욱 배타적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강인한 종족들이 많았으니.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멸족이 당연시되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전히 배타적이긴 하겠지만…….
“좋아요. 어디 한번 이야기 해 보도록 할까요. 우리 엘프들의 고향,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에 대해서.”
프리실라의 그 말 한마디에, 셰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천문학적인 금액의 돈벌이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7화
47화 수확의 시기 (2)
요람의 개방은 전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 만큼 역사적인 일이다.
아마 모든 국가는 어떻게 해서든 요람에서 나오는 천연 자원들에 대한 지분을 확보하고 싶을 터.
그러나 역사적으로 개방되어 왔던 요람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주인이 확실히 존재하는 요람이다.
그 주인은 당연히 엘프들.
주인이 존재하는 이상 제아무리 제국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발을 들일 수는 없다.
물론 엘프들이 인간들의 접근을 완전히 막으려 한다면 인간 측에서 엘프들에게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명분이 없지 않느냐 할 수 있겠지만, 인간으로서는 거대한 이해득실 앞에서 명분은 그리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셰인은 인간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들의 탐욕이 이기심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그로 인해 인간들간의 분열을 야기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이득 앞에서 인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의 등에 칼을 꽂을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반대로 이득 앞에서는 철천지원수끼리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었으니까.
그 중간에서 컨트롤을 잘 해내야만 했다.
그와 관련해서 셰인은 며칠 동안 프리실라와 향후 계획과 관련된 논의를 해야만 했다.
“후, 좋아요. 대부분의 문제는 다 정리했네요?”
“그렇군.”
“참, 저답지 않게 너무 많은 일을 했어요. 어서 아이들이 깨어나야 저도 편안해질 텐데요.”
그런 프리실라의 엄살에도 셰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말을 이었다.
“때가 되면 그 물건을 받으러 오지.”
“준비해 두고 있을게요. 그래도 앞으로 진행될 일에 차질이 없다는 가정하에 드리는 것이니, 그 부분은 알아주셔야 해요?”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은 비단 셰인에게만 이득으로 이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엘프들 또한 요람을 개방하면서 일어났어야 할 수많은 진통들을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됐으며.
인간들의 시선이 이곳에 쏠리기 시작하면 조직에서도 섣불리 이전처럼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로 인해 프리실라는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보물 하나를 셰인에게 약속했다.
이후 세상에 드러날 일이 없는, 이제는 단 하나뿐인 보물.
드래곤의 역린.
과거 모든 종족의 정점에 있던 존재가 가진 정기가 모여 있는 물건이자, 훗날 셰인에게 있어서 조직에 대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다.
“드래곤 하트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마음 놓고 있을 때는 아니지. 할 일이 있지 않나.”
셰인이 한 말에 프리실라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일 두 가지.
바로 마력 불안정 현상과 수면기에 들어간 엘프들을 깨우는 일이었다.
“음~ 그렇죠. 애초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셰인, 당신이 말했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니까요. 하지만 이건 저라고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랍니다. 세계수에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에요.”
“바로 가도록 하지.”
“음…… 원래 다른 종족을 세계수의 아래까지 데리고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러면서 프리실라가 셰인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네가 가진 힘이 얼마만큼 늘어나는지 알고 있다. 따로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이런. 그것까지 알고 계신가요? 정말 모르는 게 없네요.”
“알고 있는 것만 알 뿐이다.”
이윽고 둘은 세계수의 중심부로 향했다.
다만 평범하게 걸어서 가는 것은 아니었고, 여왕의 방에 설치된 마법진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렇게 도착한 세계수 앞.
사람들의 상상만큼이나 거대한 나무가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 있는 모습은 과연 장엄하면서도 엄숙한 기분이 들도록 만들었다.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이 거대한 나무는 외부가 어떤 환경이든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올곧게 서 있었다.
거기에 세계수의 내부는 말 그대로 요람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수많은 엘프들이 세계수의 내부에 맺힌 열매 안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인간들이 쉬이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으나, 그보다 더한 것이 존재했다.
세계수의 아래, 무언가가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원 포 올(One for all.). 그린 드래곤이로군.”
“……네, 맞답니다.”
거대한 세계수의 뿌리가 내린, 두 눈을 감은 채 긴 잠에 빠진 듯 보이는 그린 드래곤.
그린 드래곤의 이름은 고대 언어로 ‘전체를 위한 하나’라는 의미로, 이름처럼 그들은 스스로가 세계수라는 거대한 초목이 되어 숲을 형성한다.
그리고 인간들은 물론이고 엘프에게도 아득한 시간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번.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시기가 있다.
수천 년 동안 숲을 일군 그린 드래곤은 때에 맞춰 수면기를 끝내고 산란을 한 뒤,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마력을 방출하여 자식에게 전승하고 숨을 거둔다.
그때가 바로 엘프들이 수면기에 들어설 때다.
다음 세대의 드래곤과 마력을 공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죽은 드래곤은 다시 자신이 일평생 일군 자연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세대의 그린 드래곤이 깨어나면 엘프들의 수면기도 동시에 끝맺음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아카샤의 대봉인으로 인해 ‘성장’을 허락받지 못한 해츨링이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마력이 다시금 자연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요.”
그린 드래곤은 엘프들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엘프들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때문에 가장 큰 문제는 해츨링과 깊은 교감을 진행 중인 엘프들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교감 중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해츨링이 깨어나지 않는 이상 엘프들 또한 이변을 깨닫지 못하고 언제까지고 잠에 빠져 있을 테니.
프리실라의 걱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왕인 프리실라는 수면기에 들 수 없기에 그들의 정신체에 간섭할 권한 또한 없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군.”
“정말요?”
“다만 네가 가진 정기가 필요하다.”
“어머!”
그러자 프리실라의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어지며 몸을 배배 꼬았다.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신가요?”
“……이상한 말로 알아듣지 말지.”
“헤, 장난이었답니다.”
그러고는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프리실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물어 왔다.
“정기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저들의 마인드 로드에 간섭할 예정이다.”
“음, 상당히 위험한 행위네요.”
마인드 로드란 현재 그린 드래곤의 해츨링과 엘프들의 정신체가 모여 있는 가상의 공간을 뜻한다.
셰인은 그곳에 자신의 정신을 불어넣어 엘프들을 깨울 예정이었으나,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해츨링이라고는 하나, 위대한 존재인 드래곤과 평균 수명이 수백 년에 다다르는 엘프들이 가진 수천의 정신체로 이루어진 사상의 흐름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오랜 시간 준비하지 않는다면 프리실라조차도 위험할 정도였다.
그러나 셰인은 달랐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타락에 의해 스스로의 내면에 갇혔을 때.
그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공간은 1분이 10년 같았고 때로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듯한 세상이었으니.
그런 장소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셰인은 스스로의 기억을 수천, 수만, 수억 번을 되감으며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저 공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다만 스스로를 지키는 것까지는 가능할지라도, 수많은 사상이 한데 얽힌 그곳에 멋대로 침입했다간 곧바로 적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엘프 여왕, 프리실라의 정기가 필요했다.
“음, 그렇다면 좋아요. 제 정기를 나눠 드리도록 할게요.”
설명을 다 들은 프리실라가 양손을 셰인의 어깨 위에 올리고는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풀 내음이라 해야 할까.
애초에 세계수의 중심부에 있으니만큼 그 어느 때보다 청량한 풀 내음이 가득했으나, 프리실라에게서 나는 향기는 또 달랐다.
서로의 코가 닿고, 끝내 입술이 닿기 직전.
프리실라의 입술로부터 조금씩 옅은 풀빛의 정기가 셰인의 입을 통해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프리실라가 천천히 얼굴을 도로 빼내자, 셰인은 자신의 내면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자연의 기운을 느꼈다.
‘상성이 별로 좋지는 않군.’
신체 자체는 이 기운을 받아들이며 엄청난 생명력에 환호하고 있었으나, 반대로 셰인의 오리진은 이러한 기운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을 보였다.
‘혐오하고 있어.’
어둠 또한 자연의 일부였으나 엄연히 기운이 다른 법.
셰인이 가진 어둠은 생명력과 상성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차암. 표정에 변화 한 번 없으시네요. 무뚝뚝한 사람.”
“그게 놈들을 상대할 때 가장 올바른 태도일 테지.”
“그것도 그렇겠네요.”
아무튼 이로써 준비가 끝났다. 셰인은 엘프들의 정신체가 모여 있을 그린 드래곤의 품속 알을 향해 다가갔다.
* * *
“우와…….”
“……다시 보기 힘든 광경이겠네.”
“응.”
며칠 뒤.
프리실라의 허락을 받은 탐사대는 세계수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세계수 주변으로는 이 변덕스러운 기후의 원인인 마력 불안정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멸망하는 세상 속에서 오로지 자신들만 남은 것 같은 몽환적인 기분이 탐사대의 가슴에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변화는 금방 시작됐다.
항상 먹구름이 껴 있던 메자이아 대수림에 조금씩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풀 내음이 가득한 마력이 대수림에 퍼진 모든 나무로부터 흘러나와, 혼란으로 가득했던 주변의 마력들을 어르고 달래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혼란으로 가득한 마력이 진정하며 조금씩 나무로 흡수되는 모습은 마치 숲속에서 거대한 실크 커튼이 휘날리는 풍경을 자아냈다.
“아…….”
“아름답다.”
커튼을 따라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개어 갔고, 따스한 햇살이 숲 전체에 생명력을 되찾아주고 있었다.
[아─♫ 아아─♪]
아래서부터 수많은 목소리들이 하모니를 이루며 탐사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긴 잠에서 깨어난 수천 명의 엘프들이 혼란에 빠진 대수림의 마력을 달래기 위한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하나 엘프들의 하모니는 마력만을 달래지 않았다.
“흑…….”
“……그, 멍청한 녀석.”
“왜 먼저 간 거냐……. 워렌.”
“너희와 이 풍경을 보고 싶다.”
이곳까지 오며 잃은 동료들을 위한 레퀴엠.
이제는 이곳에 없는 자신의 친우를 떠올리며, 탐사대원들은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에 마치 바람이 다가와 그런 눈물을 대신 훔쳐 주듯 스쳐 지나갔다.
분명 이 슬픔은 오래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 되면 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고, 죽은 동료들보다는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것이다.
냉정하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무기를 들고 전선에 나서는 인간들에게 죽음은 너무도 가까웠고, 슬픔은 사람과 죽음을 연결하는 족쇄와 같았으니.
슬픔을 떨치는 것 또한 생존의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죽은 순간이나 그들의 빈자리를 기억하기보다, 죽은 이들과 함께 보내온 추억을 더욱 회상하는 것으로 나쁜 기억들을 떨쳐 낸다.
그러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이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회상하는 동료들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노라 영원히 기억될 테니.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8화
48화 수확의 시기 (3)
그간 요람의 바깥세상에서는 라비아타의 탐사대로 인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많은 기자들이 앞에 대거 대기하며 마공학 형체 기억기…… 카메라를 들고 탐사대가 언제 나오나 매일같이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어어! 저기!”
“어! 뭐, 뭐야?!”
요람 밖에서도 저 멀리 보이는 먹구름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치 천상의 커튼처럼 하늘을 가득 매운 신비로운 빛줄기가 반짝이자 그간 지루함에 카드놀이를 하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마구 셔터를 눌러 댔다.
“와…… 이거, 들어 본 적 있어! 고대에는 극지방에 저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본 거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오라라?”
“아! 오로라!”
“맞아, 그거!”
“근데 메자이아 대수림에 저런 현상이 관측된 적이 있던가?”
“그럴 리가 있나? 저긴 매번 비만 주구장창 내리던 곳인데.”
하나같이 안면식이 있는 기자들은 입으로는 수다를 떨면서 손으로는 바쁘게 마법 양피지에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인쇄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글쎄. 아무래도 탐사대가 무슨 일을 한 것 같은데…….”
그렇게 기자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어어억?!!”
때마침 과거 마탑 소속이었던 기자 중 한 명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보…… 봉인! 봉인이 해제됐다!!”
“뭐? 뭐가 해제돼?”
“요람! 요, 요람이 개방됐어!”
그 말에, 순간 모든 기자들이 등줄기를 타고 들어오는 기이한 느낌을 느끼곤 몸을 굳혔다.
이는 기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촉.
특종에 대한, 그것도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던 거대한 특종의 감이 울리고 있던 것이다.
“개방? 우, 우리가 아는 그 개방 맞지? 요람이 클리어됐다고?!”
“그렇다니까!! 입구에서 느껴지는 요람 특유의 마력막이 사라졌어!”
“야! 이 씨!!”
기자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마차로 돌아가 각자의 수정구를 찾고는 상대편에 있는 누군가에게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아, 글쎄!! 지금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됐다고, 개방!”
“그래, 그거!”
“100년 만에 처음으로 개방된 요람이야!!”
그리고 이 거대한 특종은, 당분간 기자들에게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할 천고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 * *
해일처럼 몰려오는 인파를 본 적이 있는가.
요람이 개방되고 일주일 후.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대수림의 입구로 나온 탐사대는 예상치 못한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다.
“나왔다!”
“라비아타도 있어!”
“어, 근데 수가 많이 적은데?”
“일단 달려가!”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있던 기자들이 단숨에 탐사대 앞까지 달려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음성 저장 마법이 걸려 있는 수정구슬 상자를 들이대며 외쳤다.
“요람의 봉인이 해제됐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요브람 마탑 학회에서 나왔습니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중심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커튼 모양의 빛과 함께 먹구름이 사라졌습니다! 요람의 봉인 해제와 관련이 있는 게 맞습니까?!”
‘으와.’
그 모습을 본 디라일라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나름 인간 세계로 나온 이후부터 연합국의 수도에서 살아왔던 디라일라는 나름 사람을 많이 봐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다르지 않은가.
탐사대에게 달려들던 곤충형 몬스터들도 저렇게 달려들진 않았다.
한편 라비아타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에 대한 인터뷰는 나중에 할게. 일단 지금은 협회에 먼저 알려야 할 사실이 있거든. 오늘 저녁 중으로 공지 나갈 테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으라고. 빨라도 내일 중으로 시간 잡을 거야.”
하지만 고작 그 정도 말에 물러설 기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라비아타의 명성이고 나발이고 간에 일단 당장 일어난 일부터 취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그러시지 마시고 가볍게 한 말씀만!”
“메자이아 대수림에는 엘프들이 살았다는 고대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 보신 겁니까?!”
하지만 이내 그런 기자들은 이후에 나온 각 왕국의 파견원들에 의해 밀려나고 말았다.
라비아타의 의중을 확인한 이상, 일단 저 기자들을 떼어 내고 안에 있던 일을 들어야 했으니.
그렇게 탐사대는 전부 인근 도시의 성에 도착했다.
성주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고, 본래 성주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다양한 국가의 중진들이 앞다투어 이번 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윽고 다음 날 아침.
라비아타의 말처럼 따로 기자 회견이 열렸고, 그 날 이후로 세간은 발칵 뒤집혀졌다.
[특종! 인류의 미래가 더욱 밝아졌다! 메자이아 대수림 개방!]
[메자이아 대수림에 숨겨진 비밀들과 엘프들!]
[라비아타의 탐사대는 어떤 방법으로 탐사가 아닌 클리어에 성공했는가?]
[알 수 없는 집단에 의해 몰살당한 황실의 호위 기사단. 그 내막에는 무엇이 숨어 있나!]
[50인의 영웅들이 그려 낸 한 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
당연하지만 100년 만에 이루어진 요람의 개방은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소재였다.
그뿐이던가.
여태까지 토벌 형식으로 진행되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번 요람은 주인 종족의 인정으로부터 이루어진 일이 아니던가.
마탑 또한 이번 사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고, 자신들이 소속된 왕국의 왕을 매일 같이 찾아가며 제발 대수림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몸이 달아오른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모험가들도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되면서 생기게 될 신규 던전들에 관심이 많은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요람이 개방된다고 해서 모든 구역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남은 던전들은 여전히 봉인되어 있는 상태고, 그러한 던전들은 아무리 토벌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새로운 천연 자원이 매립되어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데, 모험가들의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시끄러운 외부와는 다르게 셰인 일행은 따로 마련된 거대 저택에서 동료들과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외부 활동은 이번 탐사대를 이끌었던 라비아타와 제임스가 대부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은 떠날 채비를 갖춘 뒤 따로 셰인을 찾아갔다.
애덤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떠나기 전에 그대에게 사과를 하고 싶소.”
“…….”
“탐사 초기에 자네를 무시했던 언행에 대해 모두 사과하겠소. 미안하오.”
“죄, 죄송합니다.”
애덤의 사과에 맞춰 남은 기사단원들도 고개를 숙였다.
그 와중에 재미있는 인사가 한 명 끼어 있었는데, 그는 탐사 초기에 대수림의 폭우에 떠밀려 내려갔던 기사단원, 웰스였다.
그는 도미닉이 말했던 것처럼 운 좋게 물살에 떠밀려 요람의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었고, 홀로 따라가기란 불가능이라 판단하고 요람 밖으로 나오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그 몇 달 사이에 많은 수의 기사단원이 죽고, 황실의 호위 기사단은 아예 전멸했다는 소식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아무튼.
애덤은 첫 만남과는 대조되게 셰인을 존중하고 있었기에, 셰인 또한 그를 위해 준비해 둔 편지 한 장을 그에게 넘겼다.
“이건?”
“사과를 받겠다는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기분이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홀로 있을 때 읽어 보십시오.”
“아……. 알겠소.”
“반드시, 혼자 있을 때 읽으셔야 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강조하는 셰인에게서 무언가 느낀 게 있는 걸까.
원래부터 감이 좋았던 애덤은 그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
아무튼 하이엘 왕국에서 마련해 준 대저택에서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이 나가자, 그 뒤를 이은 것은 램퍼트 모험단의 일렉사였다.
“나중에 다시 한번 보겠네요, 셰인.”
“예.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애덤과 그의 기사단원들이 왕국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서 벗어났다면, 램퍼트 모험단의 경우에는 필요 이상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실상 그들은 이번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 다시 모습을 드러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위에 있는 누군가가 그것을 반기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애덤과 일렉사마저 떠나게 되니, 대저택이 굉장히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주 조용해진 것도 아니었는데, 클라인의 경우에는 요람에서 알파와 도미닉과의 전투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느라 매일같이 밖에서 검술을 단련했고, 디라일라 또한 그런 클라인의 옆에서 대지와의 교감을 이루며 나름 성장을 하고 있었다.
한편, 그런 둘과 다르게 아네이스는 무언가 깊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셰인에게 찾아왔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하도록.”
“황실의 기사단을 죽인 사람. 너야?”
“…….”
아네이스의 질문에 셰인은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하늘처럼 연보랏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언뜻 무심하게 보였으나, 셰인은 그 안에 숨겨진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불신.
아주 뿌리 깊은 불신이 아네이스의 내면을 점차 잠식하고 있던 것이다.
그 눈동자는 마치 전생에 봤던 철혈의 정의를 보는 것 같았다.
셰인은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맞다. 내가 죽였지.”
“…….”
거짓 없이 돌아오는 그 대답에 아네이스는 잠시의 침묵 후에, 다시금 셰인에게 물었다.
“왜?”
“그들은 현 인류에 있어서 해악이니까.”
“알고 있는 게 있어?”
“어느 정도는.”
셰인의 대답에 아네이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
“합일, 이라는 게 뭔데?”
“현 황태자가 꿈꾸고 있는 망상이지.”
“망상?”
“녀석은 전쟁 없는 인류를 위해 전쟁을 바란다.”
“……그건 모순이야.”
“그래, 모순이지.”
이어서 셰인이 설명했다.
“전 국가를 통합한 하나된 국가. 녀석은 연합국이라는 시스템 체재를 무너뜨리고 오롯이 제국의 통치하에 이루어지는 세상을 바라고 있지. 그러기 위한 전쟁을 바라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로는.”
“표면적인 이유.”
“알고 보면 단순한 전쟁광일 뿐이다. 지독한 기회주의자이며, 자신이 가질 권력에 대한 욕심만이 그득한 놈이지.”
그러나 그뿐만이라면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문제는 따로 있다.
“다만 놈에게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세력도 충분하다는 것이고, 그 가능성이 한없이 높다는 데 있다.”
“……그게 그들이 말하는 정의야?”
“정의라면 정의겠지.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숨기고 싶기에 만들어 낸 가면이, 언젠가부터 스스로의 얼굴이라 생각하게 된 케이스니까.”
“…….”
아네이스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황실의 모순 가득한 거짓말들.
그러나 놀랍게도 눈앞에 있는 소년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진실이라고 아네이스의 귀가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깊이 고민하고 있는 아네이스의 모습에, 셰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아네이스. 혼자 고민하고 혼자 판단하는 행동은 분명 유능하나, 모든 일을 그리 진행하지는 마라.”
“…….”
“적어도 너의 약혼자가 된 사람으로 이 정도 충고는 하고 싶군.”
어딜 봐도 약혼자들끼리 나눠야 할 대화는 아닌 듯싶었지만, 셰인도 그렇고 아네이스도 그런 걸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아네이스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할 때는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한다.”
문득 시작되는 셰인의 말에 아네이스가 다시금 경청했다.
“첫 번째는 준비를 하는 것. 적은 너를 모르지만 네가 적을 알고 있을 때 필요한 방법이지.”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시류를 기다리는 것. 어쭙잖은 기회를 찾기보다, 확실하게 찾아올 기회를 기다리는 거다. 그 방법으로는 그 시류가 찾아올 시기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지.”
“…….”
“마지막 세 번째는, 그 두 가지 모두를 손에 쥐는 일이다.”
“어려워.”
아네이스가 내뱉은 그 짧은 말에 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가 곧 힘이라고 배워 온 아네이스에게는 어렵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모순으로 가득한 황실에서, 아네이스는 홀로 그 모순을 깨닫고 고민하며 살아왔으니.
그렇기에 셰인은 말했다.
“어려울 게 없지. 너는 그중 두 개를 해결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그래. 준비는 내가 할 것이고, 시류 또한 내가 만들 것이다. 그러니 내 약혼자인 너는 이미 그 둘 모두 얻은 것이나 다름없지.”
“오만해.”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내 오만에는 방심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 말하는 셰인의 로즈베리색 눈동자는 한 점의 흔들림 없이 아네이스를 바라봤다.
“조만간 그 기회가 있을 때 보여 주도록 하지. 내가 해 온 준비와 그 시류가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그 말에 결국 아네이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녀의 민감한 귀는 셰인이 한 점 거짓 없이 말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49화
49화 수확의 시기 (4)
탐사대가 밖으로 나온지 이주일이 지나갈 무렵.
라비아타의 대외적인 일정도 대략적으로 끝맺음을 하고 셰인과 그 일행들도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말해 두겠지만, 황실과 관련된 일은 침묵해야 한다.”
“어, 오케이.”
“알겠습니다, 형님.”
“응.”
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직전. 셰인은 일행들에게 그렇게 상기시키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다수의 기자들과 함께 수많은 생도들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 소식에 가장 뜨겁게 달궈진 곳이 바로 연합국의 아카데미였기 때문이다.
디라일라는 앞서 몇 번이고 이런 인파를 봤지만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아서 어색하게 웃었고, 클라인은 평소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으며, 아네이스와 셰인은 표정에 별 변화 없이 그러한 인파들을 맞이했다.
사방에서 기자들이 인터뷰를 한 번이라도 따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이내 그들은 아카데미 측에서 나온 가드들과 교수들로 인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아카데미의 총장인 하우젠 G 크로노스까지 등장했다.
“할 말이 많지만, 이 말부터 해 주고 싶구나. 정말 고생 많았고,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크로노스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셰인 일행을 맞이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이 좀 더 쉴 수 있게 편의를 봐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서, 총장의 입장에서 일단 대수림의 탐사가 어떠했는지 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아니, 하다못해 그러했다는 세간의 인식이 필요했다.
“힘들겠지만 너희들의 시간을 좀 빼앗아야 할 것 같다.”
“괜찮습니다.”
가장 앞에 있던 셰인이 대표해서 그리 말하자, 크로노스도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는 그들을 총장의 개인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사실 모험가 협회와 국회 측에 이미 탐사 진행 관련 서류는 받았단다. 다만 이번 일로 몇 가지 충고를 해 주고 싶어 이리 불렀지.”
“어떤 말씀이든 받겠습니다.”
“허허, 별건 아니야. 그저 노파심에 하는 소리지. 자네들이 이루어 낸 업적은 나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업적이야. 하지만, 그로 인해 너무 젊은 나이에 얻게 된 명성이 오히려 자네들에게 독이 될까 걱정이 됐네.”
크로노스의 말에 셰인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그저 듣기만 하기보다, 무엇이 문제가 될지 셰인이 먼저 입에 올리는 것이 옳았다.
“예. 저희의 이름값을 노리고 다가오는 이들도 많으리라 예상됩니다.”
“오,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군. 맞아. 분명 많은 곳에서 자네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올 테지.”
그 정도야 셰인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물론 아직 지금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한 디라일라와 다른 일행들은 아니겠지만.
당장 사람들이 보내 오는 환호에도 어버버 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걸 걱정할 틈이나 있었겠나.
“내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을 봐 왔지. 그중에는 남들이 평생을 일궈도 얻지 못할 명성을 단번에 얻는 이들도 적지 않았어. 원래 이런 바닥이 아니던가. 그치?”
“예, 맞습니다.”
그 말처럼 던전에서 의도치 않게 숨겨진 비밀을 찾았다던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현상을 풀어냈다는 등.
다양한 이유로 급격히 명성이 늘어나는 이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등장했다.
“나는 그런 이들이 어떻게 등장하고 또 어떻게 몰락하는지 봐 왔어. 자네들도 그런 일을 겪지 않길 바래서 이리 따로 불렀네. 하물며 요람의 개방을 이루어 낸 영웅들이 아닌가. 이는 100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하지만 그게 자만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네.”
크로노스 총장은 진심을 담아 그리 말했다.
셰인 또한 크로노스는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비단 그가 이런 참교육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셰인의 전생에서 크로노스는 조직이 세상에 태동할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연합국에서 일어난 조직의 테러 사태.
당시에 크로노스는 아카데미 생도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렀고, 그 일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크로노스는 셰인이 존중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문제가 생길시 상담을 위해 찾아와도 괜찮겠습니까.”
“음. 물론이지. 사양하지 말게. 나 또한 100년 만에 등장한 영웅의 스승이 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으니 말이야. 허허허.”
크로노스는 그리 말하며 그들을 배웅해 주었고, 남은 일행들도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아네이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복잡한 상태였다.
방금 크로노스가 말했듯, 자신은 이용할 가치가 생겼고 이는 곧 황실의 체스 말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디라일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 번 쉽사리 사람을 믿었다가 어떤 꼴을 당했던가.
예전에는 마냥 이름값이 높아지면 남들이 함부로 건들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지금 그 상황이 들이닥치자 현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난 아무런 백도 힘도 없는 명성만 높은 이종족이잖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냥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자 디라일라는 셰인과 클라인에게 더더욱 붙어살아야겠다고 판단했다.
‘클레이튼 가문의 이름값이 어땠더라…….’
한편, 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셰인은 클라인과 따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클라인. 한동안은 따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음…… 아쉽지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클라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머리가 나쁘지 않은 클라인이니만큼, 방금 전 총장과의 대화에서 깨달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너는 모험가 협회 측 위주로 자리를 다지고 있어라. 이게 거기에 도움이 될 거다.”
“이게 무엇입니까?”
두꺼운 서류 뭉치.
그 내용은 아직 모험가 협회 측에서 토벌하지 못한 미토벌 던전 리스트였다.
물론 단지 리스트만 건넨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전생에 셰인이 조직에 가담했을 무렵 클리어한 던전들이었기에, 던전을 진행함에 있어 필요한 정보들도 함께 담겨 있었다.
적혀 있는 주의사항만 유의한다면 클라인의 실력으로도 무리 없이 클리어가 가능할 터.
“음, 알겠습니다. 그러면 형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릴 예정이다. 어차피 가주님도 이미 몸이 달아오르셨을 거다.”
“아…… 아무래도 그렇겠군요.”
“어차피 이번 학기 성적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실기에서 얻어야 할 점수는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로 말할 필요도 없을 수준이고, 남은 것은 필기 정도인데 그거야 시험 날짜에 맞춰 오기만 하면 된다.
5년차 생도는 굳이 아카데미에 출석을 하지 않더라도 슬슬 외부 활동을 할 시기이기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터치를 하지 않았다.
단 하나. 곧 있을 계급심사를 제외한다면, 더 이상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끌지 않아도 됐다.
‘이제부터는 명성 관리를 해 나가야겠군.’
아직 엘프의 여왕 프리실라에게 드래곤의 역린을 받아 오지 못했고, 적어도 메자이아 대수림의 엘프들이 안정된 시기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때까지는 굳이 던전이나 다른 요람에 찾아갈 필요가 없기에, 셰인은 이제 외부적인 명성 관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디라일라. 너는 당분간 클라인을 따라다니면서 성장에 힘쓰도록 해라.”
“어? 응. 알겠어.”
마침 클레이튼 가문과 떨어질 이유가 없던 디라일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 각자의 기숙사로 헤어지기 전에 셰인은 따로 아네이스를 불러 단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에 클라인이 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갔으나…… 이제는 슬슬 익숙해지려는 마당이다.
“무슨 일이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불렀다.”
“걱정.”
“그래. 너도 알겠지만 당장 황태자는 움직이지 못해. 도미닉의 황실 호위 기사단은 황태자가 대외적으로 쓸 수 있는 제법 큰 손이었으니까. 그중 하나가 잘려 나간 탓에 그걸 처리하느라 바쁠 거다.”
“아…….”
“그뿐만 아니라 황태자가 아닌 황실의 입장에서 이번 기사단의 몰살이 가볍게 볼일은 아니지. 국제 정치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도 어느 정도는 살아남았고, 램퍼트 모험단은 유실이 그리 크지 않았다. 오로지 황실의 기사단만 몰살된 사태다 보니, 황실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라 여길 거다.”
“응.”
“그러니 황태자보다는 아직 황권을 잡고 있는 황제 쪽에서 움직일 거다. 그러면 황태자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테니, 네가 걱정하는 일은 당분간 벌어지지 않겠지.”
“그렇…… 구나. 다행이다.”
표정 변화가 드문 아네이스가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황태자와 얽힌 저지먼트 기사단의 내부 사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아네이스의 입장에서, 그들의 입맛대로 부려지는 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셰인 또한 괜한 압박으로 아네이스가 폭주하기 전에 미리 이렇게 안심을 시켜 둔 것이다.
이번에 도미닉의 기억을 이어받으면서, 셰인은 그간 아네이스와 황실에 얽혀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세부적인 단계까지 가려면 조금 더 정보가 필요할 테지만, 컨트롤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정보는 다 얻은 셈이다.
이윽고 아네이스가 돌아간 후, 홀로 남은 셰인은 평소처럼 스스로의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셰인이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보였던 활약은 결코 적지 않았으나, 여전히 무력적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비록 황실의 호위 기사단을 전원 죽이는 데 성공했고, 최악의 연금술사, 고든 또한 소멸시키기는 했으나, 이게 무력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호위 기사단이야 오리진의 힘을 모르고 있었기에 당한 것이고, 그에 더해 전원이 방심하고 있던 탓도 있었다.
거기에 고든은 애초부터 완성된 존재가 아니었고, 고든이 본래 육신으로 돌아가 흑마법까지 써 가며 네크로노미 마스크를 썼다면 결코 셰인이 이길 수 없는 상대였을 테니.
철저하게 상황이 허락한 상태에서의 전투만을 유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부족한 마력량을 커버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금처럼 룬 마법으로만 부족한 부분을 메꾸다가는 지난번 고든과의 전투에서처럼 약점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으니, 오리진에 대해서도 더 깊게 생각해야 했다.
‘이건 드래곤의 역린을 얻으면 해결될 문제로군.’
그래도 드래곤의 역린만 떠올리면 마냥 차갑기만 하던 셰인의 가슴이 든든해졌다.
전생에 조직에서 드래곤의 역린으로 어떤 일을 일으켰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고든이 조직의 대장장이었다면, 드래곤의 역린은 조직의 군대나 마찬가지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조직은 큰 무기 두 개를 단 한 번에 잃은 셈.
이후 조직에서 어떤 행동 변화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
아마 이제부터는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 때처럼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조직에게 큰 비수를 날리는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셰인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계가 드러날 정보였지.’
애초에 귀중한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미래가 바뀌어 쓰지 못할 거란 생각에 전전긍긍하다가 얻을 것도 못 얻는 멍청이가 될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의 심상 세계의 확인을 마친 셰인은 생각의 정리 또한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려먼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클라인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곧장 던전 탐사에 나설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현재 그들이 얻은 명성은 어디까지나 부풀려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의 이름값이 사라지기 전에, 이 명성을 진짜 자신의 명성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한 첫 걸음으로, 셰인은 오랜만에 자신의 아버지,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 로웰과 대화를 해 보기로 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0화
50화 수확의 시기 (5)
최근 로웰은 굉장히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저지먼트 기사단의 단장인 올리버 G 대니얼이 조심스럽게 제안해 온 지하도시에 관련된 내용을 검토하는 것부터가 일단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지만,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어디까지나 검토하는 수준이라 위험도를 체크하는 경우였기에, 외부 정보망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기다렸다 판단을 하면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작업만 3개월이 넘게 걸릴 정도로 로웰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다름도 아니고 연합국의 그림자를 차지하고 있는 지하도시와 관련된 일이 아니던가.
자칫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클레이튼 상단의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신용이 중요한 상단에 그러한 결함은 치명적이었으니.
그러나 이제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 때문이었다.
이 일로 인해 로웰은 지난 3개월 동안 고생했던 지하도시 안건조차도 뒤로 확 미뤄 버렸다.
다음 황권을 차지할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는 저지먼트 기사단의 부탁이었긴 했으나, 메자이아 대수림 건은 정말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개방만 됐다면 이 정도로 바쁘진 않았을 것이다.
현재 메자이아 대수림의 주인은 엘프이며, 라비아타가 이끈 탐사로 인해 그들의 인정을 받았고, 현 인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놨다는 소식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렇다면 그저 먼저 가서 침부터 발라 둔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을 터.
로웰은 다방면으로 엘프들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동시에, 이후 연합국에서 주도할 메자이아 대수림의 외교 사절단에 포함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로웰은 이렇게 바쁜 시간들이 너무나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일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일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개운해지기 때문이다.
‘……덕분인가. 요즘 잠도 잘 오는군.’
늦은 밤.
마력등에 의해 밝혀진 서재에서 한참 쌓여 있는 서류를 일일이 확인하고 있던 로웰은 잠시 눈을 쉬게 할 겸 눈두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수정구에서 옅은 빛과 함께 진동이 울렸다.
“음.”
이 늦은 시간에 자신에게 연락하는 이가 누구일까.
수정구에 비춰지는 색을 보아하니 정보팀에서 보내 오는 수신은 아니었다.
그렇게 수정구에 마력을 흘려보내자, 안에서 셰인의 얼굴이 비춰졌다.
“음…… 셰인. 오랜만이구나.”
[예, 가주님.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과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래. 안 그래도 연락을 한 번 하려고 했다.”
이는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최근에는 바빠도 너무 바쁘기도 했거니와, 당장 셰인 또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해서 아직 연락을 취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보다, 급한 일이더냐.”
[아닙니다.]
“그럼 직접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기사단을 보내 주마.”
[……예. 알겠습니다.]
부자간의 짧은 대화가 끝이 나고, 다시 색을 잃은 수정구를 바라보며 로웰은 두 눈을 감았다.
누구를 닮은 셰인을 봤기 때문일까.
로웰은 최근 바쁜 통에 잊고 지냈던 과거를 떠올렸다.
‘엘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린 전 부인이 떠오른 것이다.
전 부인 엘리나의 죽음은 로웰로 하여금 많은 것을 바꾸게 했다.
본래도 그의 차가웠던 그의 성향은 더욱 극단적으로 바뀌었으며.
전 부인을 떠올리는 게 너무 힘들어 이토록 일에 매달리지 않았던가.
셰인을 보는 것조차도 엘리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터라, 로웰은 자식들에게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차가운 심장을 가졌던 터라 사람들은 로웰이 감정이 메말랐다고 평하지만, 반대로 차가운 심장을 가졌기에 첫 배우자를 향한 사랑은 그 누구보다 뜨겁게 불타올랐었다.
그리고 그 뒤로 찾아오는 냉기는 그 누구도 쉽사리 달래지 못한 것이었고.
로웰은 또다시 찾아오려는 두통을 피하고자 다시금 서류로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음 한편, 이후 찾아올 셰인이 가지고 올 일거리를 기대하며.
* * *
며칠 되지 않아, 셰인은 기사단과 함께 가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작 몇 달에 불과한 시간이었으나, 그사이 가문에서 셰인의 위상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최근 로웰이 그렇게 붙잡고 있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대에 직접 껴 있던 인물이고, 그뿐만 아니라 라비아타가 직접 계약하도록 만든 논문을 만든 장본인이었으니.
오는 내내 가문의 기사단원들도 행색 하나하나에 조심성이 묻어났다.
“어, 어서 오세요, 도련님!”
그런 셰인의 담당 메이드인 마리아는 누가 보더라도 긴장한 표정으로 그런 셰인을 반겼다.
셰인은 마리아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가주님은?”
“아, 지금 서재에 계세요. 준비가 되면 바로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그럼 바로 가지.”
“아…… 알겠습니다!”
마리아가 앞장서서 걷는 사이, 가문의 사람들은 셰인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게 사람의 위치라고 해야 할까.
몇 달 전, 가문에서 떠나기 전에서 셰인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고용인들도 적지 않았으나, 외부에서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지고 돌아오니 사람의 품격부터가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로웰은 클라인도 아닌 셰인을 가장 먼저 불렀고, 단 둘이 대담까지 나눌 예정이니.
단번에 가문 내에서 셰인과 클라인의 서열이 뒤바뀐 순간이었다.
물론 클라인은 그런 걸 신경 쓸 위인이 아니었으나.
“……왔구나, 셰인. 고생이 많았다.”
가문에서 단 한 사람. 거기에 크게 신경을 쓸 사람이 있었다.
다니엘 L 레이첼.
셰인의 배다른 어머니이자 클라인의 친모인 현 가모가 바로 그러했다.
클라인의 명성이 올라간 것은 레이첼로서도 환영할 일이었으나, 하필이면 거기에 셰인까지 끼어 있는 게 문제였다.
아니, 오히려 이번에 단기간 성장한 사람만 보자면 세인이 더 우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라비아타의 탐사가 시작된 이유가 바로 셰인의 논문 때문이었으니.
이미 다양한 마탑 측에서 클레이튼 가문에 셰인과의 만남을 주도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모험가로서의 명성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실질적인 명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기에.
레이첼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셰인은 레이첼에 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아예 무관심으로 둘 일도 아니다.
어쨌든 마음 여린 클라인의 생모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셰인은 레이첼의 인사에 마찬가지로 예의를 차렸다.
“예, 레이첼 님. 클라인은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만, 이 편지를 전해 달라 했습니다.”
셰인은 클라인에게 받아 준 편지를 레이첼에게 건네며, 마지막까지 고개를 한 차례 숙이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첼은 잠시 셰인이 건넨 편지지를 보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찌 될런지.”
레이첼의 입장에서 셰인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처음 레이첼이 클레이튼 가문에 왔을 때의 분위기는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웰은 막 부인을 잃은 시점이라 레이첼의 앞에서도 곧잘 슬픈 표정을 지었을 당시였기에.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한편, 그 모든 부담은 레이첼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전 부인인 엘리나를 따르던 기사들도 많았더랬다.
때문에 그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할 레이첼은 자연스럽게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고, 로웰은 여전히 레이첼을 챙기기보단 가문을 돌보는 데 힘을 썼으니.
이 집안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클라인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해 오던 셰인이 이렇게 유명해져 버렸으니…….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니.’
아직 셰인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아카데미로 떠나던 날, 호위에 나섰던 기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전처럼 클라인과 날을 세우는 일은 없다고 했으니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레이첼은 방으로 돌아가 클라인이 보낸 편지를 보며, 조금씩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 아이가…….’
클라인이 보내 온 편지에는, 온통 형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것도 이전과 다르게 부정적이지 않고 전부 긍정적이기만 한 내용에, 레이첼은 더욱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 *
“흐음…… 놀랍구나.”
로웰의 서재에 도착한 이후, 셰인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있었던 일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데만 어느덧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렇다면, 황태자와의 거래는 위험하다는 것이군.”
“아마 버리는 말로 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로웰은 어느덧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고는 무심히 손을 뗐다.
셰인에게서 듣게 된 전모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도미닉…… 그 늙은이가 셰인을 노렸다라.’
그간 가족들에게 정을 떼고 살아왔던 로웰이다.
그럼에도 셰인이 암살을 당할 뻔했다는 소식이 로웰의 무의식중에 분노를 일깨우게 만들었다.
일에 있어서도 철저히 사무적으로 살아왔던 로웰이기에 이러한 감정의 변화는 낯선 것이었다.
그 때문일까. 로웰은 이 어색한 감정을 지우고자 보다 사무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래도 황태자와의 끈은 계속 잡아 두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흐음.”
“시간에 쫓기는 건 저들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저들에게는 정보가 없고, 우리에겐 있으니 그걸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셰인의 말 또한 틀린 게 없었다.
어찌 됐든 괜한 피바람을 막기 위해 라비아타와도 상의해서 도미닉과의 일은 일단 수면 밑에 묻어 두기로 결정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증거가 없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증인이 많기는 하나, 단순히 증인만으로 황실을 압박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물론 라비아타의 이름값을 생각한다면 충분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그 여자는 이쪽에 관심이 없겠지.’
도와달라면 라비아타가 그걸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셰인은 굳이 라비아타와 생긴 인연을 그런 식으로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황태자를 당장 어찌할 단계는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무리하게 황태자를 친다고 해도 이쪽에서 볼 만한 이득은 없었으니.
괜한 진흙탕 싸움만 될 뿐이었다.
“시간은 이쪽에 있습니다. 황태자의 측근이 사라져 혼란에 빠진 지금, 그들이 감히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이쪽의 덩치를 키워야 합니다.”
“나도 거기에는 동의하는 바다. 그렇기에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 문제에 있어 신중을 기하고 있지.”
“그 부분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무엇이냐.”
“현재 가주님의 권한 하에 얼마만큼 드실 수 있으십니까.”
“흠?”
셰인의 그 단호한 물음에 로웰이 잠시 의문을 품었다.
마치, 말하는 만큼 떠먹여 주겠다는 듯한 말로 들렸으니까.
“우리 가문의 모든 것을 총동원한다면, 얼마만큼 먹을 수 있습니까. 대수림에 넘쳐흐르는 금맥 말입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1화
51화 수확의 시기 (6)
인류는 하나의 요람이 개방될 때마다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왔다.
이번 메자이아 대수림만 해도 얻을 게 상당했는데, 첫 번째로 가장 중점을 둬야 할 것은 바로 마석 광산이었다.
현 인류의 모든 부분에 들어간다 해도 좋을 정도의 기초 재료인 마석은 던전에서 몬스터를 토벌해도 얻을 수 있지만, 이는 마석 생산량의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뿐 나머지 80퍼센트는 마석 광산에서 채굴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물량이 부족한 탓에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마석의 효율성을 높이는 연구에 매달려 있는 상황이고.
이런 마당에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되면서, 상단을 포함해 수많은 국가기관에서는 과연 메자이아 대수림에 매장된 마석이 얼마나 되는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보면 우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의 땅은 아니었으니까.
주인인 엘프가 떡하니 있는데, 침은 남이 먼저 흘리고 있으니.
하지만 적어도 셰인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가뜩이나 수도 적은 엘프들은 굳이 그 많은 마석 광산을 놀려 두고 있을 이유가 없었고, 그에 대한 권한 중 일부도 프리실라에게 받아 온 참이었다.
“얼마만큼 먹을 수 있는가…….”
“정확히 탈이 나지 않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로웰은 셰인이 어째서 저런 오만한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게 헛된 말은 아니라 판단했다.
비록 작년까지만 해도 부족하다는 평을 많이 받아 온 셰인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클라인과 비교된 평판 문제였지 셰인 스스로가 남들보다 뒤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니.
오히려 머리를 쓰는 데 있어서는 로웰을 닮아 뛰어난 구석이 있었다.
로웰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얼마 전까지 있던 문제들로 인해 혼잡했던 문제들은 모두 한쪽 구석으로 몰아 두고, 당장 셰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정보들을 토대로 계산에 들어갔다.
‘이 녀석이 도대체 어떻게 그런 부분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웰이 방금까지 셰인에게 들은 것은, 메자이아 대수림에 매립되어 있는 마석의 총량과 질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는 단순히 탐사대에 속해 있다고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그 넓은 메자이아 대수림에 마석 광산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는 필시 엘프들과 긴밀한 이야기가 오간 게 분명했다.
“1등급 마석 광산 2개 정도는 무리 없이 차지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무리하면 3개까진 가능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듯하군요. 그보다는 명분과 실리를 챙기면서 2등급 광산을 챙기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마석 광산의 주인이 엘프였고 그들의 여왕인 프리실라에게 대부분의 권한은 받을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셰인이 전부 차지하려 한다면 당연히 배탈이 나기 마련이다.
크게는 황실이나 귀족 사회의 견제가 시작될 수 있고, 연합국 차원에서 견제가 들어오는 수가 있다.
이럴 때는 적당히 나눠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말 잘 듣는 상단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리라.
“하지만 그것도 많은 감이 있다. 이건 어찌할 테냐.”
그렇다 하더라도 1등급 마석 광산 2개는 상당히 큰 먹이었다.
당장 소화를 하기 위해서는 클레이튼 가문에서도 인력을 총동원해야 할 정도였으니.
거기에 1등급 마석 광산은 황실마저도 고작 8개 정도를 가지고 있을 뿐인데, 그 와중에 일개 백작 가문이 2개나 차지하는 것은 역시 명분에서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아예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다른 이들과 다르게 셰인은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가 시작되도록 만든 논문의 저자였다.
당연히 그 부분에 있어서 명분은 결코 부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족한 명분은 굳이 셰인이 노력해서 채울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명분은 엘프 측에서 채워 줄 것입니다.”
“흐음. 확실하더냐?”
“예.”
“그렇단 말이지…….”
“그 외에도 메자이아 대수림에 만들 지부도 따로 생각해둬야합니다.”
“음.”
하이엘 왕국과 이어진 메자이아 대수림은 지리적으로 봤을 때도 매우 훌륭한 위치였다.
대수림의 북으로 이어진 거대한 산맥을 넘어가면 이후부터는 또 다른 요람과 이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지고 동쪽은 암석 지대가 펼쳐진다.
그 암석 지대를 더 나아가면 또 다른 요람이 등장하니, 그야말로 모험가들에겐 최고의 요충지가 탄생하는 셈이다.
그러니 상업적으로 발달할 가능성도 무긍무진했으니, 이에 대한 추진 또한 지금부터 준비해야 했다.
그 말에 로웰은 다시금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는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번 대수림 건을 제대로 마무리만 한다면, 적어도 제국과 연합국 내에서 클레이튼 상단은 절대적 지위를 얻을 수 있을 터.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남들에게 귀족가의 망나니라 불려오던 셰인이 물고 왔다는 게 여전히 얼떨떨하긴 했으나.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네가 말한 대로 일을 추진하도록 하마.”
“예.”
“그래, 그리고…….”
“……?”
“음.”
이걸 뭐라 말해야 할까.
여태껏 가족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던 로웰이었으나, 아무래도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셰인과 클라인이 물고 온 기회를 제외하더라도, 두 자식이 그 위험한 요람에서 생존해 왔다는 것이 로웰에게 적지 않은 안도감을 가지고 온 것이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리 큰 감흥이 생기지 않았는데, 이렇듯 멀쩡히 살아 돌아온 모습을 보니 마음이 움직였다.
‘……우습구나.’
하나 이제 와서 여태껏 버려두다시피 키워 온 셰인을 걱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 또한 위선처럼 보이지 않겠나.
로웰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이 가진 감정은 이제 와서 내비칠 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비라는 무게감은 이 한마디를 끝내 내뱉게 만들고야 말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예.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래. 들어가서 쉬거라.”
셰인도, 로웰도.
여전히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영원히 이 간격이 좁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른다면.
보다 얼굴을 보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이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가 좁혀질 날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적어도 둘 중 한 명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으리라.
* * *
최근 마법사들의 도시, 메지셔널 위습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마법사들의 흥미를 끌 만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엘프들의 마법!
자신들이 전공하는 마법이 아닌 이상에야 별 관심이 없는 마법사들이었으나.
이종족의 마법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해당 이종족의 마법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그게 자신들의 마법에 어떤 영향이 오게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때문에 평소 연구 중 폭발 사고가 아닌 이상에야 소란스러운 일이 없는 도시에는 틈만 나면 마법사들끼리 모여 엘프들의 마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던 와중에 도시 측에서 오랜만에 학회를 열기로 결심하고 모든 마탑의 탑주들에게 초대장을 보내 왔다.
“드디어!”
“이얏호!!”
본래라면 이런 학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메지셔널 위습에 모여들었다.
평소 같은 초대장이라면 별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테지만, 초대장에 초청 인물 중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소 발걸음이 무겁던 마법사들이 한달음에 학회 건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오, 매브릭. 오랜만에 보는군.”
“멀린. 자네도 오랜만이구먼. 거의 10년만이던가?”
“언제 그리 시간이 흘렀는지 원.”
“그러게나 말이야.”
기대감에 부푼 마음 때문일까.
오랜만에 만난 마법사들은 서로의 신변잡기를 해 가며 학회 건물 내부를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그 대화도 얼마 지나지 않다 다른 주제로 넘어갔는데.
“그나저나 발견된 엘프의 마법이 어떨 것 같나?”
“글세? 일단 두고 봐야겠지. 당장 국회에서 내놓은 답은 없으니.”
“그나마 오늘 초청 건으로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크게 기대하긴 힘들겠지.”
“크흠.”
두 마법사는 그리 말하면서도 귀를 붉힐 정도로 잔뜩 흥분하고 있었다.
실상 두 마법사들의 대화처럼, 그리 크게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일단 엘프들의 마법이니 만큼 그에 대해 파악하려면 엘프에게 직접 배우든가, 긴 시간 끝에 해부하다시피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전자의 경우에는 엘프가 자신들의 마법을 그 정도로 상세하게 알려 줄 리가 없기에 논외였고, 후자의 경우에도 상당 수준의 마법사가 가야 그나마 파악할 수 있지 않겠나.
그나마 마법사라면 연합국 아카데미 출신의 생도 두 명이 들어갔다는데…….
그래 봐야 생도 출신 아닌가.
심지어 둘 다 마탑에 가입되어 있지도 않은 터라 큰 기대는 어려운 게 당연했다.
“그러니 우리가 더더욱 나서서 의회에 발의를 해 봐야지.”
“암. 그렇고말고. 듣자 하니 엘프들이 쓰는 텔레포트 마법이 그렇게 은밀하다던데.”
“아마도 엘프 특유의 마력 적응력 때문에 그런 것 같아. 그래도 전체적인 구조만 파악할 수 있다면 탐사용으로도 쓰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로군.”
두 마법사처럼 기대는 크지만 그래도 너무 앞서 나가지는 말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딱 한 명.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다들 뭘 모르는구먼. 그 녀석은 불세출의 천재야!’
제법 중후한 나이에 콧수염을 기른 그는 카비르 마탑의 장로, 케이든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번 학회에 초청된 인물과 만나 보고 또 함께 연구까지 진행해 본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자신의 후원자에게 온 의뢰였기에 적잖이 귀찮아했지만 그 태도가 얼마나 이어졌던가!
당시 그 인물과 만난 이후로 자신의 제자들이 죄다 오징어처럼 보이기 시작한 케이든은 언제고 그자와 다시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대어를 낚고 왔으니, 이번에는 자신을 얼마나 놀래킬지 벌써부터 기대가 돼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러다 이윽고 실내가 어두워지면서 진행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음성 확장 마도구를 통해 진행자의 목소리가 회장을 가득 채웠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행을 맡게 된 마일즈라고 합니다. 거두절미하고 오늘 이렇게 모이게 된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메자이아 대수림의 엘프 마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번 초청 건에 있어 초대된 분은 마탑 소속이 아니니, 이번 주제와 관련된 질문만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짧은 진행자의 말이 이어지고, 이내 회장의 중앙 계단에서부터 한 사람이 등장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로즈베리색 눈동자.
짧은 지팡이를 들고 등장한 사람은, 이곳 학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에 지나치게 어린 소년이었다.
이윽고 단상에 올라선 소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학회 측에서 준비한 음성 확장 마도구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는, 생긴 것처럼 앳되어 가늘었으나 이 자리의 누구도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알 수 없도록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목소리가 다시금 회장에 울려 퍼졌다.
[이번 엘프 마법과 관련되어 학회에 초청된 클레이튼 R 셰인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훌륭한 선배 마법사님들 앞에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2화
52화 수확의 시기 (7)
명성을 제대로 다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명성을 키우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 셰인이 선택한 방법은 고지식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선망받는 이들의 인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법사들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또 배움에 대한 절박함을 가졌으니 이름을 알리기에는 이만한 이들이 없었다.
하지만 셰인이 아직 생도 신분인 것에 더해, 마탑 출신이 아니라는 점은 큰 약점에 속했다.
그러니 지금 가지고 있는 이들의 호기심이 꺼지기 전에 먼저 채워 줘야만 했다.
[거두절미하고 첫 시작은 질문부터 받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인 발표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발표자는 자신이 가지고 온 정보를 푸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관여하고 있는 학문이 아닌 이상에야 빠르게 관심이 식는 이들이었고, 셰인은 가능한 이곳의 모든 마법사들의 관심을 끌어올릴 방법을 이미 떠올렸다.
아무리 관심 없는 학문이라도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주제를 보여 주면 될 일이니.
그에 이곳에 모인 마법사들이 거의 동시에 손을 들어 올렸고, 진행자 중 한 명이 고른 마법사의 질문이 시작됐다.
“마르디 마탑의 세르게이라 하오. 이번에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과 동시에 탐사의 결과로 어떠한 마법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소?”
[엘프들의 마법에 관한 본질과 기본적인 응용 정도는 파악해 왔습니다.]
“음……!”
기다렸다는 듯 답한 셰인의 말에 마법사들의 얼굴에도 과연 흥미가 생겼다.
고작 생도 출신이긴 하지만, 탐사 전 논문으로 한 차례 다양한 마탑을 뜨겁게 달군 전적이 있으며, 그 요람에서도 살아남은 마법사가 하는 말이었으니.
충분히 기대해 볼만한 사안이었다.
“호르콰이 마탑의 멜피스입니다. 그렇다면 그 본질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예. 일단 준비해 둔 것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셰인은 단상에 마련된 칠판에 어떠한 공식을 적었다.
학회에 참석한 마법사들은 학회 측에서 나눠 준 두 손바닥만한 원판을 바라봤고, 거기에는 셰인이 칠판에 적은 공식이 그대로 따라 적혔다.
[이게 엘프들이 마법을 다루는 데 필요한 공식입니다. 기본적으로 엘프들이 가진 마법의 본질은 친화성입니다. 그들은 수백,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의 마력 적응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대수림과 동화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아주 적은 마력만으로도 메자이아 대수림이라는 그 방대한 영역에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예.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엘프들의 시야에 벗어날 방법이란 없습니다. 그곳의 모든 식물들이 그들의 눈이고 또 귀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 말에 회장이 대번에 시끄러워졌다.
이게 말이야 쉽지,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과정과 긴 시간이 필요했을지 짐작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법사들은 다시 한번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인류가 마력을 다루기 시작한 지 고작 몇백 년밖에 되지 않은 터라, 고대 종족들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이것은 셰인이 인간들에게 하는 경고와 마찬가지였다.
혹여라도 엘프들에게 전쟁을 시도하거나, 납치 따위의 짓을 시도했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 번쯤 생각해 보라는 그런 의미였다.
괜히 엘프들이 기원전에 고작 수천의 숫자로 제국보다도 넓은 메자이아 대수림을 지배할 수 있던 것이 아니다.
거기에 셰인이 내보인 마법 공식은, 철저하게 마력 적응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인간들로서는 똑같이 따라 한다 한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 말인즉슨, 인간들의 수준으로는 엘프들의 마법에 간섭할 여지가 없다는 의미였으니.
“하르멘 마탑의 가르파 세르지오일세. 그렇다면 엘프들의 마법을 통해 우리 인간들이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이라 볼 수 있겠나?”
그때, 자신을 세르지오라 소개한 마법사의 질문은 다소 시험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었다.
당장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도 엘프들의 마법을 활용할 방법이 곧장 떠오르지 않은 마당에 고작 생도 신분인 셰인이 그걸 떠올릴 가능성은 적었으니.
[당장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다고 확언하기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여태까지 그래 왔듯, 모방을 시작으로 새로운 길을 창조해 내지 않았습니까. 마치,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면서, 셰인이 허공에 손을 대고 짧게 주문을 외우자, 그의 손 위로 마력이 가닥가닥 나오며 하나의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허어……!”
그에 질문을 해 온 마법사를 포함해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려지는 푸르른 풍경은 그 무엇보다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드넓은 초원과 그 위를 뛰어노는 산양들.
초원의 뒤로 태산이 펼쳐지며, 하늘 높이 떠오른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태양은 강렬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학회에 모인 마법사들은 이게 단순히 마력으로 자아낸 풍경화가 아님을 깨달았다.
햇살 아래로 느껴지는 따스함은 심신을 안정시켜 줬으며, 뿐만 아니라 나이 든 신체가 활력을 되찾고 있었으니.
마법사들은 대경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하나같이 셰인을 바라봤다.
[이는 메자이아 대수림의 주인인 엘프의 여왕에게 받은 정기입니다. 그를 토대로 만든 것이죠. 재료로 엘프들의 정기가 필요하다는 가정이 필요합니다만, 이를 이용해 응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엘프 여왕의 정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둘째 치고, 한 생명체의 정기로 이러한 마법을 쓰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현 마법사들의 개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물론 현 인류가 가진 마법적 지식만을 토대로 본다면 그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시점일 뿐이었다.
[엘프들은 이렇듯 자신들의 적응력을 통해 숲의 정기를 다룰 수 있습니다. 아니, 이 말에는 어폐가 있군요. 엘프들의 정기가 곧 숲의 정기이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 질문이오. 그렇다면 역시 우리 인간들이 이를 활용하기란 요원한 일이지 않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정기를 활용한 마법이라 했을 때 여러분들이 떠올린 한 학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에 몇몇 마법사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자연의 정기와 다르게 생명체의 정기, 즉 생명력을 사용하는 학파가 분명 존재했지 않았던가.
수십 년 전에 연합국에서 직접 토벌하며, 그 전쟁의 참혹함을 겪어 봤던 마법사들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랬지. 놈들이 그랬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후!”
[예. 바로 흑마법이죠. 비록 그 방식과 사상이 잘못된 학파이긴 합니다만, 엘프들이 정기를 다룰 수 있듯, 인간이 정기를 다룰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으음……!”
몇몇 마법사들은 침음을 내뱉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여전히 많은 마법사들에게 흑마법이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였으나, 그럼에도 이를 반대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야, 그를 대비해 셰인이 지금 보이고 있는 마법이 있었으니.
눈앞에 떡하니 그 결과가 있는데 어떻게 그걸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마법사들은 고지식하지만, 결코 눈앞에 펼쳐진 결과를 피하는 인간들이 아니었다.
한편 셰인의 논문을 근거로 함께 연구한 전적이 있던 카비르 마탑의 장로, 케이튼은 셰인이 펼친 마법을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질문하십시오.]
“음. 자네의 이론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지네. 그렇다면 앞서 모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걸 설명해 드리려면 앞서 말씀드린 정기의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겠군요. 방금 제가 흑마법과 비교를 했습니다만, 실상 흑마법에서의 정기와 지금 제가 보여 드린 정기는 성향부터가 다릅니다.]
“음. 확실히, 흑마법사가 다루는 마법은 다소 패도적이고 거칠기가 이를 데 없지.”
[그 이유는 흑마법에서 다루는 정기는 생자의 죽음으로부터 뽑아내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에게서 나오는 정기는 본연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띄우는데, 이를 마력으로 억압하고 죽은 자의 기운으로 다루기 때문에 생기가 오염되기에 일어난 일이지요. 즉, 세상의 의지를 배반한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맞네. 우리 마법사들은 세상의 의지를 배반하는 게 아닌, 새로운 질서를 쫓는 이들이니.”
[예. 반면, 방금 제가 다룬 정기는 생명체의 생명력과는 다르게 이미 자연 그 자체에 존재합니다. 때문에 흑마법사처럼 죽은 자의 기운이라는 매개체가 없기에, 엘프들처럼 스스로가 자연과 동화되지 않는다면 다루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자 케이튼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는데, 그렇다면 아무리 엘프 여왕이 나눠 준 정기가 있다 하더라도 방금 셰인이 보여 준 마법은 불가능하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떠올리고 보니 더더욱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해서, 저는 엘프들의 마력 적응력을 모방해 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만, 그 공식을 적자면 이렇습니다.]
다시 한번 뒤에 비치된 칠판으로 다가가 새로운 공식을 적어 넣었다.
아까하고는 다르게 마력 적응력을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라 이번에는 대부분의 마법사들도 바로바로 공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엘프들이 만든 마법과 다르게 적응력 위주가 아닌 마력 패턴을 위주로 사용했습니다.]
엘프의 적응력은 인간들의 적응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인간들 중에서도 뛰어난 적응력을 지닌 이들조차 엘프들 사이에서는 저능아라고 불릴 정도로 부족했으니.
그렇기에 셰인은 시선을 바꿔, 마력 적응력이 아닌 패턴 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가. 이런 방법이 있었군.”
“확실히, 서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마력 패턴을 외부에서부터 만든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근데 이걸 어디에 써먹을 수 있지?”
“예끼, 이 사람아! 아까 그 마법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나나? 이 회장 전체를 밝히고도 그만한 치유력을 보인 마법이지 않나. 그걸 한 점에 집중시킨다면 어지간한 트롤의 피로 만든 회복 포션보다 효과가 좋아!”
“이 늙은이 성격 좀 보소. 끄응, 아무튼 그렇구먼.”
확실히 아예 길이 없을 때와는 다르게 셰인이 한 가지 길을 보여 주자 거기서부터 곁가지가 늘어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는 비록 아무런 준비도 없이 쓸 수 있는 마법은 아닙니다만, 자연의 정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한 방법이지요. 그렇다면 자연의 정기를 어떻게 자력으로 얻느냐. 실상 이 방법까지는 제가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엘프들의 도움이 있다면 이 또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있으리라 판단됩니다.]
거기까지 듣게 된 마법사들은 셰인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웠다.
그 이상 질문이 있을까도 싶었지만, 앞서 듣게 된 내용과 여태 셰인이 보여 준 공식을 해부해 보기에도 바쁜 시간이었다.
이로써 마법사들의 흥미는 충분히 이끈 셈이었다.
아직 인간들이 자력으로 자연의 정기를 뽑아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고민을 사서 하느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집중해서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셰인의 마법에서 보였던 회복력이었다.
단순히 기력을 보충해 주는 수준이었으나 어느 마법사가 했던 말처럼, 이 넓은 회장을 가득 채우는 수준임에도 그 정도라는 것은 가히 획기적이었으니.
셰인이 명성을 바라고 있는 만큼, 마법사들 또한 명성이 고픈 이들이었다.
왜?
명성이 있어야 곧 돈이 되니까.
트롤의 피로 만들어진 포션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얼마만큼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던가.
비록 완벽한 치료법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많은 모험가들이 부상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낼 수 있었다.
덕분에 당시 포션을 만들어 낸 마법사는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명성과 금화를 손에 쥐지 않았던가?
만약 여기서 셰인이 풀어낸 정보를 토대로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면, 자신들에게도 그러한 기회가 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결국 명성과 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고, 이는 학파의 종류를 무관하게 관심이 쏠릴 만한 아이디어였다.
적어도 정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익숙한 학파는 없었으니 말이다.
즉,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돈방석에 앉는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 * *
당연하지만 학회가 단 한 사람 때문에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열린 학회이니만큼, 자신들의 연구에 전진이 있던 마법사들도 연구를 발표하기 위해 차례대로 단상 위에 올라갔다 사라졌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귀에는 거의 박히지 않았는데, 심지어 발표자조차도 빨리 발표를 마치고 다른 일에 몰두하고 싶어 하는 인상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앞서 셰인이 발표한 자료 때문이었다.
학회가 끝나고 마련되는 연회가 시작되기 전.
셰인은 밖에 준비된 마차에 앉아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카비르 마탑의 장로, 케이튼이었다.
그는 굉장히 흥분된 표정으로 셰인에게 한참 동안 메자이아 대수림에 있던 일에 대해 물었고, 셰인은 성심성의껏 그 질문에 대답했다.
물론 숨길 것은 대충 숨기고 말을 이었는데, 이를 모두 다 듣게 된 케이튼의 얼굴에는 어느덧 진중함이 묻어났다.
“고든…… 그자가 살아 있었단 말인가.”
그 이유는 몇십 년 전에 일어난 토벌에 의해 사라진 흑마법사들의 우두머리, 고든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어찌 됐든 라비아타와 이야기를 끝낸 것처럼 셰인은 고든의 죽음을 라비아타의 공으로 돌렸다.
아직 그만한 흑마법사를 이겼다는 명성까지는 셰인에게 필요가 없었으니.
하여튼 라비아타가 고든의 죽음을 확언했기에, 케이튼의 얼굴에도 그나마 안심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이번 발표는 여러모로 말이 많을 것 같구먼. 자네도 참…… 속이 엉큼한 데가 있어.”
그러면서 케이튼이 웃음을 지었다.
“언뜻 보면 자네가 만든 공식을 너무 쉽게 공개한 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
“예. 맞습니다.”
그런 케이튼의 물음에도 셰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야 당연한 말이지 않나.
기껏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얻어 온 엘프들의 마법을 외부로 알리는데, 겨우 명성 하나만 챙기기엔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러니 챙길 수 있는 것은 더 챙겨야 하는 것이, 상인 가문의 사람으로서 당연한 덕목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3화
53화 인류의 그림자
독자적으로 개발한 공식을 풀어 버린다는 행위는 일반적인 마법사들의 관점에서 큰 손해라고 볼 수 있었다.
마법사란 무릇 자신이 만들어 낸 마법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그 비밀을 잘 간수해 뒀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허나 셰인은 그런 일반적인 마법사로 살아갈 생각이 없기도 했고.
애초에 이 정도 공식은 마탑의 장로급 마법사들이 엘프들과 접촉하게 되면 금방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려질 거, 차라리 정보를 풀어 마법사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크게 봤을 때 명성에 더 큰 도움이 됐다.
“허허, 우리 마탑에도 홍복이 찾아오겠어.”
케이튼이 껄껄 웃었다.
‘부럽다! 앞으로 이 소년의 명성은 오래토록 이어지겠구나.’
마법사는 물론 금욕도 대단하지만, 그만큼 명예욕도 중요시하는 이들이다.
비록 셰인이 이번에 알린 공식은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기초적인 만큼 근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이후 정기와 관련된 마법이 발전할 때마다 셰인이 만든 공식이 그 밑바탕으로 깔린다는 의미이니, 이는 셰인의 명성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널리 이어질 것이다.
그것도 고작 1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말이다.
‘난 저때 뭐 하고 살았더라?’
물론 이제 한 마탑의 장로가 된 만큼 케이튼도 결코 젊은 시절 방탕하게 보내 온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셰인과 비교하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케이튼이 자아성찰에 들어간 사이, 셰인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케이튼 님. 저번에 말씀드린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 말인가. 안 그래도 자네가 무사히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착수에 나섰네. 아마 진행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은 없을 것 같군. 엘프 측의 허가만 있다면 대수림에서 정기를 추출할 마법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걸세.”
일전, 셰인은 케이튼과 함께 연구를 진행했을 당시 몇 가지 사업을 제안했었다.
대표적인 사업은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정기를 추출하여 판매하는 것.
이후 정기를 이용한 회복 마법 스크롤을 만들 예정인 셰인은 분명 이게 먹힐 만한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기가 담길 마법 플라스크를 개발할 마법사들의 영입이었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선 이런저런 사업을 진행해 본 장로 마법사인 케이튼이 이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하지만 보다 수월하게 하려면 자네의 도움도 필요할 걸세.”
“이번 기회에 연회에 참석하면 되겠습니까?”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군. 하하, 맞네.”
케이튼의 인맥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칠 테지만,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된다면 그곳에 파견 나갈 마법사들을 설득할 인물도 필요했다.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며 돕겠습니다.”
“음, 그래 주게나. 그런데 이후 따로 일정이 있는가?”
“예. 곧 계급 심사가 있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군.”
연합국에서 주도하는 계급 심사.
이 때문에 아카데미에서도 5년차에 들어선 생도들이 지금도 바쁘게 준비하고 있을 터.
1년에 단 2번밖에 없는 이벤트이니만큼 케이튼도 이해했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연회에 참석할 생각인가?”
“굳이 일을 미룰 필요는 없겠지요.”
“알겠네. 그럼 나도 짧게 준비를 마치고 움직이도록 하지. 같이 가세나.”
“예, 알겠습니다.”
* * *
전생에 셰인은 연회와 썩 인연이 없는 편이었다. 아니, 오히려 악연만 가득했었다.
때문에 연회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일로 치부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전생과 다르게, 이번 생의 연회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셰인이지 않은가.
어느새 연회가 지속된 지도 5일차.
마지막 날이니만큼 앞서 다른 날보다는 참여한 마법사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며칠 동안 케이튼의 소개로 마법사들과 연을 맺던 셰인은 시간이 남아 홀로 테라스에서 포도주를 마셨다.
‘이제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챙겼나.’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되기까지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냈다.
이제 엘프들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본격적으로 인간과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면 굳이 셰인이 나서지 않더라도 추가적인 이득이 절로 굴러 들어올 터.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이번 연회에서 만나길 기대했던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중간중간 이렇듯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도 기다리던 인물이 나타나지 않자, 머릿속에 계획을 다시 한번 정리하려 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신사분?”
별안간 기다렸던 목소리가, 셰인의 뒤에서 들려왔다.
* * *
겉으로 보기에 현 제국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 중이다.
실제로도 대외적으로 제국에 반하는 세력은 없었고, 계속되는 경기의 호황으로 국민들 또한 안락함을 느끼고 있었으니.
그러나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 현 1황녀는 지금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8년 전. 다음 황제로 내정되었던 올리시아의 첫째 오빠인 황태자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비어 버린 황태자의 자리에 누가 앉을지에 대한 치열한 정치 공방이 오가고 있는 상황.
게다가 황제는 섣불리 후계를 지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님이 유유부단하신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라버니가 너무 노골적인 게 문제야.’
황제는 반신반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사람의 본성을 읽는 데 탁월한 재능을 타고 난 올리시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둘째 오라버니,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은 교활한 뱀과 같은 사람이다.
그것도 극독을 품고서 수풀에 몸을 가리고 숨어 있는 뱀.
그러나 황제조차도 반신반의하고 있을 만큼, 평소 새뮤얼은 제 아버지를 닮은 인자한 웃음으로 주변에 녹아들어 있었다.
때문에 새뮤얼은 귀족들 사이에서 이미 황태자라 불리고 있으나…….
올리시아는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적으로 여의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자신의 쌍둥이 동생인 아나스타샤 또한 섣불리 새뮤얼에게 이빨을 들이댔다가 지금은 북방으로 내몰리지 않았던가.
혹독한 날씨가 사시사철 이어지는 그곳에서, 매해 몰려오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고 있으니 외부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터였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지.’
그렇기에 올리시아는 몸을 잔뜩 낮추고, 이후 자신의 힘이 될 인재를 모으러 다니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황실에 들어온 귀족들이 그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관점이 바뀌었다.
황실의 권력도 권력이지만, 실상 국제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이들은 연합국에 소속된 귀족들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올해부터는 그런 귀족의 자제들이 모이는 연합국 아카데미에 시선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여러 인재들이 눈에 띄었고, 그중에서 한 소년이 깊게 각인되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어깨 바로 아래까지 내려왔고, 짙은 로즈베리색 눈동자에서는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와인 잔 안으로 그의 눈동자 색과 같은 포도주를 흔들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바로 이 소년.
클레이튼 R 셰인.
무려 100년 만에 개방된 요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젊은 천재였다.
“안녕하세요, 신사분?”
올리시아의 말에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수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장인의 손길에 의해 탄생한 이 와인보다도 존귀한 자를 뵙습니다.”
단순한 움직임과는 다르게 그 태도에서는 품위와 절도가 느껴졌다.
“어머. 저를 알아보시나요?”
예상외인 것은, 다른 이들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올리시아가 가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셰인은 자신을 바로 알아봤다는 것이다.
“제국의 꽃이라 불리시지 않습니까. 세상에 단 둘밖에 없는 분을 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이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그때 아카데미의 복도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죠?”
“예.”
올리시아는 셰인의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기복 없는 표정이라 감정을 읽기 힘들긴 했으나, 그렇다고 피하는 모습은 아니었으니.
그런 올리시아는 셰인을 보면 볼수록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어떤 사람이든 잠깐이라도 마주해 보면 어렵지 않게 그 사람의 성향을 읽을 수 있었지만.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셰인에게서는 조금의 내면도 엿볼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잠시 침묵에 빠져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셰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제가 제국의 꽃이라 과분하게 불리고 있지만, 꼭 꽃이 벌을 기다리고만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래서 찾아왔답니다.”
“과감하시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원하는 답변은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 셰인의 말에 올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오라버니가 먼저 선점한 건가?’
나름 새뮤얼의 눈을 피해 인재를 영입하려 했던 시도는 무산되는 듯했다.
어쩐지 이만한 인재가 있음에도 새뮤얼이 직접 수를 쓰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아쉽게도 저는 저지먼트 기사단의 아네이스와 약혼을 한 사람입니다. 또한, 제가 찾는 사람도 따로 있지요.”
“그렇…… 군요.”
이건 몰랐던 소식이다.
저지먼트 기사단이라면 최근 오라버니의 행보를 지지하고 있는 황실의 기사단이지 않나.
백사자의 오러를 휘두른 그들은 본래라면 정치적인 성향을 띄워서는 안됐으나, 7년 전. 그들의 단장이었던 린트베르크 K 로버트의 사망 이후부터 그와 정반대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로버트 단장의 딸과 약혼을 했다라.
셰인을 놓친 것은 아쉬운 일이었으나, 생각보다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정보를, 이 사람이 괜히 줬을까?
올리시아의 본능이 그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 해 주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예. 저는 대외적으로 가문에 얽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동생은 아닙니다.”
“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력을 챙기십시오.”
“……좋은 말씀이네요.”
물론, 클라인 또한 그녀가 생각하던 인재 중 한 명이긴 했다.
오히려 셰인이 제대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는 클라인을 위주로 보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림자 밑을 잘 보셔야 합니다.”
“그림자…… 밑이요?”
“예. 생각보다 바닥에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귀물들이 떨어져 있기 마련이니까요.”
“음…….”
언뜻 듣기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철저한 정치 싸움으로 가득한 황실에서 새뮤얼의 눈을 피해 남몰래 자신의 세력을 챙기고 있는 올리시아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림자, 바닥.
때마침 이 연합국에는 인류의 그림자라 할 수 있는 도시가 있지 않던가.
바닥 아래, 지하도시라는 존재가.
그리고 그 저지먼트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최근 지하도시의 한 축을 담당하던 살리에르 백작의 저택에서 숨을 거뒀다.
대외적으로도, 황실에서도 그 사건은 저지먼트 기사단이 또다시 제국의 어둠을 바로잡았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올리시아 또한 무언가 석연찮은 기색을 느끼긴 했으나, 큰 틀에서 벗어나진 않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듣고 보니 아무래도 무언가 미심쩍음을 느꼈다.
‘살리에르 백작은 한때 이름 있는 상단을 운영했었는데. 클레이튼 가문 또한 거대한 상단을 운영 중이야.’
그런데 그 클레이튼 가문의 자제와 저지먼트 기사단의 영애가 엮인다라.
이걸 과연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적어도 올리시아는 그렇지 판단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 귀중한 정보였다.
저지먼트 기사단이 지하도시와 얽힌 정황이 포착된다?
황실의 이름에도 악영향을 끼칠 터였으나, 그만큼 큰 약점을 잡는 것이라 봐도 좋았다.
저지먼트 기사단은 오라버니의 수족 중 가장 큰 손일 테니.
‘그런데 왜 이걸 나한테?’
올리시아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 귀한 정보였으나, 그걸 말하는 이가 바로 그 당사자인 셰인이었으니.
어떤 목적으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준 걸까?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섣불리 믿기에는 힘들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
자신을 옮아매겠다는 이유로 새뮤얼이 함정을 파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저지먼트 기사단을 내건다?’
그 교활한 새뮤얼이 할 도박은 아니었다.
적어도 새뮤얼 또한 아직 올리시아가 가진 황실에서의 발언권을 우습게 볼 정도는 아니라 판단하고 있을 테니.
오랜만에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셰인이 입을 열었다.
“이런 일에 대해 도움이 되는 친구를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천 리 밖의 세상을 내다보는 녀석이지요.”
“……네?”
“베른슈타인 후작 가문의 차남을 만나 보시지요. 그리고 반드시 그를 영입하셔야 합니다. 결코 쉬운 녀석이 아니니 너무 마음 놓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는 보다 서로의 진실된 모습으로 마주하길 바라겠습니다.”
가뜩이나 복잡한 마당에 무슨 소리냐 묻기도 전에 셰인이 자리에서 떠났고, 홀로 남은 올리시아는 단아한 머리를 헝클었다.
“하아. 어렵네, 어려워.”
기껏 와서 인재를 낚아 보려던 올리시아는 뜬금없이 떠맡은 숙제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셰인이 남기고 간 와인잔을 들어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는 자세를 바로 하고 하늘 위에 떠 있는 달빛을 바라봤다.
‘클로이 오라버니…… 왜 그리 일찍 떠나셨나요. 올리시아는 너무 어렵네요. 이것저것. 모든 게.’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가면 같은 미소가 아닌 진짜 자애로운 미소로 자신을 바라봐주던 첫째 오라버니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4화
54화 불손한 의도
보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드디어 엘프들이 메자이아 대수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라비아타를 통해 한 차례 외부로 연락이 갔던 터라, 대수림의 앞은 소문의 엘프를 보려는 인파로 북적북적했다.
거기에 각종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이미 며칠째 자리를 잡아 두고 텐트를 친 상태였고, 그 사이에는 마법사들도 여럿 있었다.
“엘프들이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고대 문헌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고, 실제로 귀족 나으리들 소문들을 들어 보면 보통이 아니라더라고.”
그저 구경을 위해 몰려든 하이엘 왕국의 국민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흥분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허허, 그렇게 말이야. 엘프들의 마법이라니.”
“듣기로는 정령술에도 조예가 깊다는데, 꼭 좀 들어 봤으면 좋겠구먼.”
나이 든 마법사들은 주책이라 불릴 만큼 흥분된 상태로.
“이야, 이거 몇 달 간은 메자이아 대수림과 관련된 기사만으로 살아도 되겠어.”
“왜 안 그러겠어. 이제 라비아타라는 이름만 올려도 팔려 나갈 텐데.”
기자들은 이후 벌어들일 수익을 기대하며 메자이아 대수림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른 새벽이 지나가고 서서히 해가 그 모습을 보일 때, 숲의 경계선으로 연녹빛이 흘러나왔다.
“어어!”
“와아!”
인파들의 환호와 함께, 대수림을 가리던 수풀이 저절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사슴과 다람쥐, 다양한 새들이 등장하며 그 가운데 엘프 여왕 프리실라와 그 곁을 따르는 장로 엘프들이 등장했다.
“와…….”
“어우, 저건…….”
“저, 저게 진짜 존재할 수 있는 외모라고……?”
과연 여신이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소문의 엘프를 구경하기 위해 몰린 인파들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기자들조차도 사진 찍는 것조차 까먹은 채 멍하니 엘프들의 자태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법사들도 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들은 금세 프리실라의 주변으로 무형의 마력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흥미로운데.”
“그러게 말이야. 저것도 엘프들의 마법과 관련된 건가?”
“고서에 나오는 서큐버스들의 매혹과는 좀 다른 거 같은데…….”
“신기하구먼.”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인 만큼 프리실라의 외모에 감탄하기도 잠시, 금세 마법적 학구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인간 여러분. 저는 엘프들의 여왕, 프리실라라고 한답니다.”
마치 아기 새가 우는 듯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기자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기 바빴다.
다만 이전처럼 막무가내로 달려가 인터뷰를 진행하지는 못했다.
프리실라가 은연중에 내뿜는 감히 범접하기도 힘들 정도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으나, 무엇보다 기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연합국에서 보내온 사절단.
제아무리 기자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들만큼은 예외였다.
알 권리를 외치는 목이 쥐도 새도 모르게 떨어질 줄 누가 안단 말인가.
기자들은 목숨을 아낄 줄 아는 이들이었다.
“크, 크흠. 환영합니다. 숲의 종족들이여. 이 늙은이는 이번 사절단의 대표를 맡은 일라이자 J 카터라고 합니다.”
“네, 만나서 반가워요. 일라이자라고 부르면 될까요?”
“편하실 대로 불러 주시면 되겠습니다.”
카터는 노련한 정치 귀족답게 프리실라의 외모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고로 들었던 것처럼 미혹과 비슷한 마법을 쓴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보아하니 쉬울 것 같지는 않군.’
고대에서나 잘나가던 이들인 줄 알았더니…….
예상외로 프리실라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인간 귀족들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단순히 여왕으로서의 품격이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예법까지 온몸에서 습관처럼 보일 정도이니.
이는 이미 인간 사회의 예의를 파악했다는 것이다.
한 종족을 이끄는 여왕이 저 정도로 준비를 해 왔으니 어찌 긴장을 하지 않을까.
이 정도 눈치도 없었더라면 카터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일도 없었다.
하지만 카터는 너무 인간적인 발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는 무려 고대에서부터 살아남은 종족이었고.
그들이 가진 무력의 과시는 인간의 상식을 깨 버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어머. 그게 카메라, 라는 마도구인가요? 정말 신기하네요.”
“헙.”
카터와 가볍게 인사를 마친 프리실라는 그리 멀리 있지 않던 기자의 카메라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러고 보니 기자 여러분은 그 카메라라는 것을 이용해 대중들에게 정보를 알린다고 했던가요? 괜찮다면 기자님에 한해서 딱 하나. 질문을 허용할게요.”
“그건…….”
프리실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카터가 곤란함을 보이기도 전에, 기자는 잽싸게 입을 열었다.
“에, 엘프들은 인간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바란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물론이죠. 저희는 인간 여러분이 기원전이라 부르는 고대 때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만 힘을 발휘했답니다.”
그런 프리실라가 안심하라는 듯 카메라를 바라보며 그리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기자가 넋을 잃고 카메라를 작동시키려는 순간.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 엘프들은 엘프에게 우호적인 분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만…… 그 반대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예? 그게 무슨…….”
그때, 프리실라가 가볍게 허공에 손을 내젓자 뒤로 우거진 나무의 뿌리가 땅을 박차고 올라왔다.
“흐억!”
“저, 저게 뭐야!”
그리고 그런 나무의 뿌리에는, 열댓 명의 복면을 쓴 이들이 꽁꽁 묶여 있었다.
이미 생을 마감한 듯 보이는 그들은 축 늘어진 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처럼 친절하고 인내심이 깊은 분들만 계시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안타깝게도 저들은 우리 엘프가 그저 팔아먹을 상품처럼 보였던 것 같아요.”
그때, 아직까지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던 것일까.
뿌리에 속박된 이들 중 한 명이 꿈틀거렸다.
“사, 살려…… 살려 주어…….”
가늘지만 생존을 향한 갈망을 내비쳤으나.
복면의 사내에게 돌아온 것은 거친 나무의 뿌리 한 가닥이었다.
단숨에 목에 휘감긴 뿌리가 사내의 목을 비틀고는, 이내 다시금 땅 밑으로 모습을 감췄다.
한 번에 십수 명의 시신들이 사라졌다.
“본래라면 산 채로 우리 아이들의 거름이 되도록 했겠지만……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걸…… 아. 생매장이라고 하던가요? 윤리에 벗어난 일이라고 들어서. 친히 생은 마감시켜 줬답니다.”
무섭다.
기자는 분명 아까와 똑같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프리실라의 얼굴을 보면서도 이전과 다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고 땀이 흘러내렸다.
“인간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우리 엘프들은 여러분과 적대할 생각이 없답니다. 우리는 그저 과거처럼, 우리의 영역에 허락 없이,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오시지만 않는다면…… 여러분을 환영하겠습니다.”
그런 프리실라의 모습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아름다운 외모가 가지고 있는 역사는, 과연 고대에 걸맞은 잔혹함이 깃들어 있음을.
“그럼, 재차 말씀드릴게요. 어서 오세요, 인간의 사절단 여러분.”
그러면서, 프리실라는 무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험가와 기사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호위 받듯 멍하니 서 있는 카터를 향해 짙은 미소를 지었다.
* * *
엘프들의 등장으로 연합국이 다시 한번 크게 진동했다.
많은 사람들은 벌써부터 인간과 엘프 사이에 전쟁의 조짐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다행히 프리실라가 일으킨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실상 이는 연합국의 실수나 체면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연합국 또한 엘프들의 등장으로 그들을 납치하려는 일단의 무리가 분명 등장하리라 예상했다.
하여 긴 경계선을 만들어 침입자가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뒀으나, 일단의 무리들은 그마저도 예상했는지 사방으로 긴 땅굴을 파고 메자이아 대수림에 침입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엘프의 납치를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기에 벌인 일이었으리라.
앞서 연합국에서도 대대적으로 자신들이 감시하고 있으니 무단으로 메자이아 대수림에 침입하지 말라 경고를 했음에도 생긴 일이니.
그 외에도 여러 정치적인 문제로 일이 마무리되었고, 의외로 살벌했던 첫 만남과는 다르게 사절단은 자신들의 일을 잘 마무리하고 성공적으로 엘프들과의 동맹을 맺게 됐다.
물론 이후로도 조율할 일이 많을 테니 회담은 끊임없이 이어질 터였으나…….
셰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알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지금과 같이 이미지를 굳히라 했던 것은 셰인이 프리실라에게 직접 해 줬던 조언이었으니.
절벽에 핀 꽃.
셰인이 원하는 인간들 사이에서의 엘프들의 이미지였다.
한편, 셰인은 보름 만에 돌아온 아카데미를 별 어려움 없이 활보하고 있었다.
유명세와 달리 셰인에게 직접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메자이아 대수림과 관련해서 궁금한 것은 클라인과 디라일라, 아네이스에게 한참 동안 물어보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굳이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셰인에게 다가가 물을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시선이 꽂히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는데, 이는 교무실에 들리기까지 쭉 이어졌다.
“아, 어서 오게, 셰인.”
그런 셰인을 반긴 인물은 리바이 벤자민. 학과시험에서 시험관을 담당했던 지휘학과 수석교수였다.
“이것 참.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만, 안 그래도 자네 또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 같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오히려 감사는 이쪽이 해야지. 인류의 긴 숙원 중 하나를 풀어 주지 않았나. 교수로서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또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자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네.”
“교수님 또한 훌륭한 모험가를 많이 배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그래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아서야 쓰겠나. 하하! 항상 무표정한 자네가 아부도 할 줄 아는군. 아무튼 말이 길었네. 여기, 자네가 찾던 것일세.”
“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벤자민이 내민 것은 계급 심사와 관련된 서류였다.
이미 계급 심사는 진행 중이었고, 셰인은 다른 곳에서의 일정을 처리하느라 유독 늦게 찾아온 케이스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기가 늦어 괜찮은 파견 의뢰는 대부분 빠져나갔네. 자네가 보고 있는 게 전부이지.”
아카데미에서 개별적으로 보는 시험과 다르게, 계급 심사는 연합국에서 배정되는 파견 의뢰를 수주해야만 했다.
이는 셰인이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 한들 벗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셰인은 이번 파견의뢰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야, 셰인이 그리고 있는 인류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그곳에 있었으니.
“남은 건 세 군데 정도로군요.”
“맞네. 대부분 남들이 기피하는 파견 의뢰지.”
그러면서 벤자민은 어딘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굳이 추천한다면…… 북방의──.”
“여기가 좋겠습니다.”
“음?”
벤자민이 무어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셰인은 벤자민에게 받은 파견 의뢰 서류 중 하나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 뒀다.
[북방 강철의 숲, 아룬비다의 비두론 성벽 전초기지 파견 의뢰서]
현 시점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그녀와 만나려면 지금이 최고의 적기라 할 수 있었다.
훗날 북방의 난이라 불렸던 제국 최대 규모의 반란을 주도한 제국의 두 송이 꽃 중 하나.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를 만나기에는.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5화
55화 두 번째 놀이
“흐음.”
셰인은 오랜만에 아카데미 도서관을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고 서적 하나를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셰인이 선택한 서적은 ‘제국의 역사’.
앞으로 가게 될 북부에 관한 정보를 훑어보기 위함이었다.
제국의 건국 이래, 제국이 크게 흔들리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전쟁과 흑마법 토벌전처럼 전 대륙이 떠들썩해지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제국 자체가 흔들린 사건들도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제국의 북부, 아룬비다 지역에서의 일이었다.
‘오크 군단의 침략.’
감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오크 군단이 제국의 수도를 향해 남하한 사건이었는데, 이때 당시 제국은 북부 영토 전체의 75퍼센트를 오크들에게 내줬던 전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만 해도 오크를 우습게 생각했던 제국의 황제와 정치 귀족들은 부랴부랴 군대를 일으켜 오크들을 물리쳤다.
그 전쟁에 소모된 시간만 하더라도 1년.
제국의 땅에서 오크의 흔적을 완전히 뿌리 뽑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3년이 훌쩍 넘었다.
복구에는 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제국은 북방의 아룬비다 지역에 비두론이라는 이름의 성을 세웠다.
일종의 전초기지였는데,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냄과 동시에, 오크들의 본거지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몇 차례 제국의 군대가 나서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시도 때도 없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독하고 드넓은 산맥에 군대를 일으키는 것부터가 무리한 감행이었다.
거기에 틈만 나면 달려드는 오크들의 군세에 인간들은 속수무책.
그에 더불어 산맥에서의 오크들은 남하했을 당시보다 더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보급조차도 쉽지 않아 결국 몇 차례나 이어진 토벌은 무산으로 돌아갔고, 지금의 상황이 50년가량 이어진 것이다.
때문에 지금도 이따금씩 50년 전 오크들이 일으킨 공포를 떠올리는 인간들이었으나.
‘인간은 망각의 생물이지.’
지난 50년 동안 이상 없이 평화가 이어지자, 인간들은 당시의 위험을 망각했다.
기억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오크의 군단이 다시 한번 남하하게 된다.
그뿐이던가?
그 타이밍에 하필 북부를 책임지던 2황녀,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서 제국은 한 차례 홍역을 치르게 된다.
‘반역의 황녀라.’
사실 북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셰인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그 사건은 조직이 관여되어 있지도 않았고, 조직은 제국의 북부에 관심이 아예 없었으니.
‘굳이 관심을 둘 이유가 없는 곳이라 했지.’
북부는 조직에게 있어서도 애매한 지역이었다.
단순히 혹독한 환경이라 굳이 건질 게 없다는 이유가 아니다.
조직은 몬스터가 위치한 곳, 이종족이 위치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조직 아래 머물도록 만들었으니, 원래대로라면 오크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조직은 의도적으로 북부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으니, 애초에 오크라는 종족 자체가 이미 주인이 있는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산왕.’
북부의 산맥을 통째로 쥐고 있는 어느 한 존재가 조직의 발걸음을 막아선 것이다.
다만 전생의 셰인은 굳이 조직이 건드리지 않는 지역에 대해 알아보지 않아서, 대략적인 정보만 파악해 뒀었다.
그저 고대시대 이전, 신화시대서부터 이어진 ‘산왕’이라는 존재가 어떠한 연유로 오크라는 종족을 통솔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때문에 아직 파견을 가기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 있으니, 그전에 정보를 좀 더 수집하고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뒤로 조금 더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셰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여, 여기 계셨군요.”
말더듬이 천재, 베른슈타인 오스튼이 어느새 셰인의 뒤에 서 있었다.
* * *
지휘학과에 들어오고 지휘자로서 팀원을 구한 오스튼은 최근 공략 대상이 된 던전과 관련된 서적을 읽고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온 정보였지만, 멍하니 있기 보단 책을 읽으며 계획을 정리하는 게 오스튼의 습관 중 하나였다.
그렇게 그날도 평소처럼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늦은 밤. 오스튼은 언제나 도서관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가는 생도였다.
그래서 별명도 도서관 말더듬이라 불리지 않던가.
평소라면 지금쯤 읽던 책을 정리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을 시간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카데미의 귀빈실.
평소라면 이 주변조차 올 일이 없는 오스튼은 드물게 놀라고 있었다.
“음,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보리밭을 떠올리게 만드는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숲 속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연못 같은 에메랄드 눈동자.
그저 앉아서 찻잔을 들고 있을 뿐임에도 고고하게 보였으며,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풍기는 분위기에서는 자연스러운 고귀함이 느껴졌다.
‘……제국의 두 송이 꽃.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
공석에서는 얼굴조차 보기 힘든 1황녀가 왜 자신을 찾아온 걸까.
아니, 이유는 이미 파악했다.
애초에 저 황녀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오스튼은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두터운 가면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사람에 대해 파악하는 게 일상인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 여자도 진즉에 파악했을 터.
하지만 찾아온 이유를 알아낸 것과는 다르게, 어떤 연유로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옅은 경계심과 함께 오스튼이 입을 열었다.
“화, 황송합니다. 황녀님. 그, 그런데 그 사, 사람이라 하면. 누구인지 무, 물어도 되겠습니까?”
“음……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이에요. 따로 만날 일이 있었는데, 당신의 이름을 들었거든요.”
“아.”
그제야 오스튼은 뭔가 막혀 있던 것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바쁠 사람이야. 나를 소개한 이유는……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건데.’
일단 황녀와 얽힌 일이다 보니 정치적인 색을 띠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셰인이 황녀와 얽힐 일이 무엇일까.
아직 대외적으로 셰인이 아네이스와 약혼을 맺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터라, 해당 정보를 모르는 오스튼은 생각의 경로를 달리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대수림 탐사에서 황실의 호위 기사단이 전멸했다고 했던가?’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오스튼이 알기에 최근 황실의 많은 기사단이 은연중에 현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호위 기사단 또한 그럴 확률이 높았다.
만약 셰인과 호위 기사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스튼이 셰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으나, 호위 기사단은 전멸했음에도 셰인과 함께 간 팀원들은 모두 무사하지 않았던가.
좋은 사이였더라면 호위 기사단이 전멸하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황태자와 대립하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나를 통해 1황녀를 지지하라는 말인가?’
뭐가 됐든 오스튼에게 있어서 나쁠 일은 아니었다.
셰인이 그린 그림이 무엇이든, 오스튼은 눈앞의 황녀가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보고 그림자 밑을 잘 보라고 일러 주더군요. 바닥에는 사람들이 놓친 귀물이 떨어져 있다던가요? 그와 관련해서 당신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조언했어요.”
어찌보면 웃기는 일이다.
셰인도 그렇고 오스튼도 그렇고.
둘 다 생도의 신분이지 않은가.
황실의 정치가 그리 만만한 것도 아닌데, 고작 생도의 말만 듣고 행동하다니.
어찌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 일을 행한 사람이 1황녀, 올리시아라면 달랐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자신 있던 그녀의 눈엔 눈앞에 있는 오스튼이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 생각이 들었으니.
“당신 보고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는 사람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도움을 좀 받을까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 그렇군요. 제가 어,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편, 오스튼은 올리시아의 말을 듣자마자 셰인이 말하는 의미를 간파했다.
‘지하도시에 황태자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는 거구나.’
그게 황녀와 관련이 있다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일 게 분명했다.
‘지하도시와 최근 일어난 스캔들은…… 살리에르 백작. 그래, 그자가 있었어. 도하도시에서 이종족 노예로 장사를 하고 있다 했었고. 거기에 셰인, 그 사람이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떠나기 전에 엘프 하나를 데리고 갔었다 했지. 손가락이 몇 개 없는 엘프를…… 바로 그 전에도 귀족 하나가 살해당했고.’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오스튼은 도대체 셰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귀족 살해자라니?
셰인이 직접 죽였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으나, 어찌 됐건 연관이 있다고 확신했다.
이건 위험해도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지 않나.
‘재미있는데.’
하지만 반대로 오스튼은 심장이 멋대로 날뛰는 것을 느꼈다.
“지, 지하도시의 노예 시장. 그, 그쪽을 파다 보면 무언가 나, 나올 것 같습니다.”
“지하도시의…… 노예 시장이요? 아…….”
거기까지 들은 올리시아는 무언가 깨달은 것이라도 있는지 두 눈을 반짝였다.
‘이 멍청이!’
그제야 살리에르 백작이 노예를 다뤘다는 것을 떠올린 올리시아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오스튼이 도달한 결과까지 이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눈앞에 있는 오스튼에게 적지 않은 감탄을 했다.
고작 몇 마디를 나눴다고 저런 조언을 하다니?
이건 정말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보석이지 않은가.
올리시아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번들거리는 욕망을 자제하기 위함이었다.
그와 동시에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셰인은 이미 너무도 유명해졌지만, 오스튼은 아니지 않은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인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분명 오스튼의 존재는 언젠가 올리시아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이다.
오스튼 또한 재미있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조언으로 이 황녀님은 곧바로 무언가 바로 깨달은 눈치이지 않은가.
오스튼은 적당히 멍청하거나 적당히 똑똑한 사람이 조종하기엔 편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나 자신이 한 조언을 곧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처음 겪어 보는 유형이었다.
당장 학점을 위해 꾸린 팀원들 또한 오스튼이 한나절을 설명해야 알아듣지 않던가.
그렇게 한 사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두 사람의 인연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그 미래는 오직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을 터였다.
* * *
“이젠 굳이 말더듬이 연기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 서로 알 만한 사이가 아닌가?”
셰인의 말에 오스튼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그런 거치고는 우리가 그리 많이 만난 사이는 아, 아니지 않습니까?”
“너에게 만난 횟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텐데.”
“…….”
애초에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오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셰인의 모습을 본 오스튼의 눈가에 웃음이 어렸다.
“이거, 그래도 쑥스러운 건 어쩔 수 없군요.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건 처음인지라.”
“그렇겠지. 넌 조심성이 많은 인간이니.”
“흐음…… 제 착각이 아니라면, 어째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착각은 아니다. 너라는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 자부할 수 있지. 그 유명한 1황녀보다도 말이야.”
“하하. 여러모로 재미있습니다. 여태 말 몇 마디 주고받고도 당신이라는 사람은 영 파악하기가 힘들어요. 마치…… 안개. 예. 검은 안개가 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비슷하게 맞췄군.”
“예?”
“오스튼. 너는 진정 너에게 마력이 없다고 생각하나?”
“…….”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오스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생적으로 마력 불능자로 태어난 오스튼은 단 한 톨의 마력도 느낄 수도, 쌓을 수도 없었다.
“예. 이미 찾을 수 있는 고서란 고서는 다 찾아봤습니다. 저는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런가. 하지만 또 모를 일이지. 가끔 인간은 자신이 파악하지 못했을 뿐인 것을 지식의 전부라 생각하기도 하니까.”
“…….”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쪽으로도 정보를 주지. 그보다 황녀와의 만남은 어땠나?”
“흥미로웠습니다. 제 생에 당신 다음으로 재미있는 사람이었죠.”
거짓이 아니었다. 황녀와의 만남은 앞으로도 기대가 됐을 정도였으니.
본래라면 정치에 관련해서는 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갈 생각이었던 오스튼이, 스스로의 생각마저 바꿀 정도로 재미있었다.
“근데 제게 그분을 소개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 놀이를 위함이지.”
“두 번째 놀이라…….”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처음 시작이 학과시험 당시 누구의 논문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느냐였다.
결과적으로 셰인의 논문이 더욱 화제가 되어 승자는 셰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번 놀이는 저번보다 훨씬 자극이 심할 거다. 제국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일이니까.”
“……놀이치고는 많이 위험해 보이는군요.”
“그만큼 너에게 흥미로운 일이 될 거다. 이 제국에는 네가 알지 못한 무리가 있거든. 놈들이 제국을 뒤에서 주무르고 있어.”
“……그렇습니까?”
“황태자는 놈들이 부리는 마리오네트에 불과하지. 그러니 그에 미리 대응해야 한다.”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음모라 말할지도 모른다.
기원 후 가장 거대한 나라를 뒤에서 조종하는 무리가 있다니?
하지만 오스튼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음모는 그저 망상에 불과하지만, 이 사람은 아니다.’
벌써 살리에르 백작과 연관되기도 했고, 실제로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황실의 기사단과도 엮인 적이 있는 셰인이지 않은가.
적어도 비상한 오스튼의 머리로는 이게 단순한 망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가끔 연락하지. 그때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다.”
“알겠습니다. 기대하도록 하죠.”
거기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았기에, 오스튼은 망설임 없이 셰인이 내미는 손을 마주 잡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6화
56화 산왕
일차로 왔던 사절단이 돌아간 뒤, 장로들과 회의를 마친 프리실라는 짐짓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 이런 일은 또 오랜만이네요.”
정치. 엘프와는 영 연관이 없는 단어였다.
엘프들은 고대시대부터 상대가 누구든 자신들의 숲에 다른 종족이 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해 왔다.
간혹 허락해 주는 존재가 있다면 채굴을 위해 찾아오는 드워프나 지반의 마력을 취식하기 위해 찾아오는 지하인 정도뿐.
그랬기에 이런 정치적인 일을 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네요. 그 거름으로 삼아도 모자랄 존재들이 등장했으니.’
프리실라는 한쪽 탁상 위에 올려진 고든의 머리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고든. 수면기에 든 엘프들을 납치해 다크엘프로 만들었던 빌어먹을 혈마법사.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머리가 반쯤 박살이 난 상태다.
셰인이 말하길 스스로를 ‘무명’이라 칭하던 그들의 존재는 엘프들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이 메자이아 대수림 내에서 엘프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방어 수단인데, 그걸 무력화시키지 않았던가.
이 와중에 탐욕에 젖은 인간들과 전쟁을 하는 것은, 수천의 엘프를 다스리는 여왕으로서 맞지 않는 판단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몇몇 장로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번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면, 그에 걸맞게 변화를 추구해야 하지 않던가.
“하지만 지루한 건 어쩔 수 없는…… 아.”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던 프리실라는 숲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두 귀를 쫑긋 새웠다.
“안 그래도 지루했던 참인데. 잘됐네요.”
프리실라는 자신의 정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면을 쓴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셰인 님. 어쩐 일로 오셨나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나 확인할 겸,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
“물어볼 거요? 당신이 모르는 것도 있었네요?”
셰인의 말에 프리실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수림의 개방과 관련해서 가장 큰 도움을 준 존재가 바로 셰인이지 않은가.
이후 일어날 일을 마치 예지라도 하듯 풀어 놓은 덕에 인간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아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아무튼, 북방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음. 뜬금없네요. 북방이라…….”
프리실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감았다.
고대에는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종족들의 왕국이 지어졌고, 또 하루가 지나면 무너지기를 반복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살벌했던 시기였으니만큼, 잠시 기억을 더듬을 필요성이 있었다.
“환경을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가 궁금하신 걸까요?”
“북방의 푸른 피부의 오크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산왕의 존재.”
“으음……. 푸른 피부의 오크, 라는 건 저도 처음 들어 봐요.”
프리실라의 말에 셰인은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제국이 북부로 발을 뻗었을 때만 해도 당시에는 푸른 피부의 오크는 볼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모습을 드러낸 만큼, 고대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생각해봄직 했다.
“하지만 오크라는 종족 자체에 관련된 기억은 좀 있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 오크들은 그리 대단한 종족은 아니었어요. 하루가 다르게 싸웠고, 매우 전투적이었죠. 하지만 그런 성격과는 다르게 아무래도 힘에서는 많이 밀렸어요.”
인간들과 비교해서 오크들은 신체적으로 월등하나, 그렇다고 고대에 잘나가던 종족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마력을 다룰 줄 모르며, 신체 능력으로만 따진다면 수인족에게 밀렸으니.
다만 압도적인 번식력과 호전적인 성격으로 인해 굳이 먼저 건드리는 짓을 하는 종족들은 없었다.
“그런데 다른 종족들이 오크를 귀찮게 봤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오크라는 종족을 두려워해서 피한 건 아니거든요.”
그게 오크들에게 오만함을 불러 왔다.
“그 당시 새롭게 부임한 족장은 제법 야심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자신들의 수를 이용한다면, 다른 종족들을 상대로 싸울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거죠.”
아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실제로 전생에 제국은 그 어마어마한 오크들의 뿌리를 뽑느라 한동안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인해전술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단순히 숫자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들은 첫 상대부터 잘못 건드렸어요. 하필이면 흡혈귀를 건드리고 말았죠.”
이곳,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상대한 고든이 썼었던 혈마법의 모체.
흡혈귀는 그야말로 두려움 그 자체인 종족이었다.
조용히 자신들만의 고성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식사의 시간이 찾아오면 세상 밖으로 나간다.
그 주기가 찾아오는 시기만큼은 대부분의 종족이 숨을 죽였는데, 이는 엘프들조차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본래라면 흡혈귀를 건드렸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물론 흡혈귀들에 의해 부락 몇 개가 날아가긴 하겠죠? 그러나 오크들은 기어코 선을 넘고 말았답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오크들은 흡혈귀의 고성에 기습적으로 난입해, 어린 흡혈귀들의 생명을 앗아 갔다.
가뜩이나 종족의 수가 턱없이 모자란 흡혈귀, 그중에서도 로열이라 불리는 진혈의 흡혈귀의 핏줄을 건드린 것이다.
이후 터져 나온 흡혈귀들의 분노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일 터.
“단 하루. 오크들의 본거지인 우르부라크가 괴멸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어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오크들은 단 하룻밤만에 몰살. 수백의 오크들만이 도망쳐 간신히 멸종을 피할 수 있었답니다.”
태생이 게으르고 움직이지 않는 흡혈귀들이었으나, 한 번 움직이면 전 대륙의 종족들이 숨을 죽인다.
프리실라가 말하기를, 그 당시 하루라도 전투가 일어나지 않으면 기적이라 불리던 고대의 대륙에서는 놀랍게도 며칠이나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혹여나 흡혈귀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문으로 듣기에 당시 족장의 아들이었던 오크가 추악한 발악 끝에 도주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는 자신을 따르는 몇몇 오크들만을 데리고 북상했다고 했죠.”
“그런 일이 있었군. 그럼에도 고서가 남지 않았다니. 신기한 일이야.”
“아마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당시의 인간들 또한 마력을 다루지 못했던 것은 똑같았고, 혹여나 자신들의 행동으로 흡혈귀들의 시선이 끌릴지 몰라 두려워했을 거예요. 음, 당신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때의 인간들은 그저 다른 종족들의 귀찮음으로 살아남을 수 있던 거니까요.”
“있던 사실을 수치로 여길 생각은 없다. 그리고 애초에, 모든 종족의 승리자는 결국 인간이었으니.”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긴 하네요.”
여기까지 듣고 난 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오크들에 대한 기원.
흡혈귀들에게 전멸당한 오크들이 그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분명 산왕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음…… 그런데 흥미롭기는 하네요. 그 푸른 피부의 오크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셰인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프리실라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랐으나, 그 결이 달랐다.
“애초에, 그곳에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인데 말이죠. 역시 인간들의 신인 아카샤가 무슨 짓을 벌인 걸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푸른 오크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그 산맥은, 산왕이 살고 있는 곳이거든요.”
“그건 알고 있다.”
“어머,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산왕이 거주하는 그곳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요. 애초에 당시 흡혈귀들이 오크 족장의 아들을 내버려 둔 이유도 산왕이 거주하던 북부로 갔기 때문이거든요.”
알아서 죽을 길을 가는데 굳이 쫓아가서 죽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산왕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이지?”
“으음.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답니다. 산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저 남들이 지어 준 것일 뿐이고, 그곳에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존재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 거대한 산맥의 주인을 보고 산왕이라 부른 것뿐이죠.”
“그런가.”
아쉽지만 그 오랜 시간을 살아온 프리실라조차 모른다면, 더 이상 따로 알아낼 방법은 없을 듯했다.
‘어쩔 수 없나. 부족한 정보는 직접 가서 챙겨야겠군.’
여기서 놈들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직접 가서 얻으면 될 일이다.
그쯤 생각을 정리한 셰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프리실라가 그런 셰인을 멈춰 세웠다.
“아, 그러고 보니 가지고 계신 정기를 상당히 소모하셨던데.”
“내버려 둬도 알아서 사라지는 기운이니까.”
“그렇긴 해도, 우리는 그러니까…… 음. 인간들의 언어로 동업자, 라고 하는 사이잖아요? 혹시 모르니 다시 채워 드릴게요. 이제 와서 셰인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엘프들도 곤란해요.”
프리실라의 입장에서 셰인은 한편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지만, 또 유일하게 무명이라는 조직에 대해 현 시점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프리실라의 말에 셰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셰인이 가진 오리진과는 영 조합이 맞지 않았고, 어둠의 정령 또한 극도로 불편해하기에 지금도 자신의 그림자에 숨겨 둔 상태였지만……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오지 않겠나.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프리실라의 정기는 쓸 방도가 많았다.
“좋아요. 앞서 드린 정기가 조금 혼탁해졌으니…… 회수하고 다시 새로운 정기로 채워 드릴게요.”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알겠다.”
이전처럼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프리실라가 셰인의 내부에 깃든 자신의 정기를 회수하고, 새로이 정기를 불어넣었다.
그때처럼 숲 내음이 셰인의 코끝을 스쳐 지나가고, 프리실라는 평소처럼 웃음을 지었다.
“다 됐어요.”
“음.”
이전처럼 풍족하게 채워진 생명력에 육체가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만한 정기라면, 치명상을 입더라도 한 번은 회복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가 봐야겠군.”
“참, 성격도 급하시네요. 아직 제 말은 다 안 끝났다고요?”
“할 말이 더 있나?”
“이전에 셰인 님이 말했던 그 사람이 왔어요. 아마 지금쯤이면 눈을 떴을 거 같은데…….”
“……그런가. 지금 바로 보러 가지.”
결국 일이 일어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셰인이 움직일 준비를 하자, 프리실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쩐지 제가 일방적으로 부려 먹어지는 기분이네요.”
“어차피 거래로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그 거래에 제가 북방에 관한 정보를 말해 줘야 한다는 내용은 없었잖아요?”
맞는 말이기는 했다.
거기에 이렇듯 써먹을 수 있는 정기도 받지 않았던가.
“여왕으로서의 체면도 있답니다. 나중에 제 부탁도 하나쯤 들어 주세요.”
“알겠다. 그렇게 하지.”
어차피 조직을 상대하려면 엘프들의 조력도 필요하기에. 셰인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가 볼까요? 그, 하이엘 왕국의 기사분께요. 이름이…… 애덤이라 했었죠? 꽤 중한 상처를 입고 왔더라고요.”
“살아만 있으면 된다. 그가 가진 특유의 감각은 여러모로 유용할 테니.”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7화
57화 애덤의 우울
“자네들 이전에 나온 단원들은 없었네.”
애덤은 그 대화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 섬짓한 기분은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평생을 섬겨 온 왕실이 자신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릴 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대수림 탐사 도중, 조직의 등장으로 인해 당시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라는 이유로 기사단원들을 전령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애덤은 프리실라에게 모두가 대수림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듣곤 그들이 무사히 복귀했는지 확인하려 했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이 이것이었다.
자신의 명령 없이 함부로 사라질 부하들이 아니기에, 애덤은 결국 홀로 그들이 사라진 경위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런 애덤의 행동은 그가 감히 예상도 못한 결과로 돌아왔다.
“커, 헉…….”
몇 날 며칠이고 단원들의 정보를 찾고 다녔음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애덤이 지하에서 정보를 다루는 정보 길드에 찾아가 관련된 정보를 의뢰했던 날 밤.
애덤은 자신의 심장에 정확히 파고든 단검을 바라봤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판단하기도 전에 단검은 애덤의 심장을 두어 번 더 찌르고 난 뒤에 완전히 뽑혀 나갔고, 힘없이 쓰러진 애덤은 자신의 침실에 침입한 존재를 겨우 볼 수 있었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비춰진 자는 애덤이 정보를 의뢰했던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쯧. 이러니 내가 기사 따위를 하지 않는 거야. 힘만 쓸 줄 알고 제가 모시는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애덤이 원통함에 무어라 입을 열기 직전.
화아악──!
“뭣?!”
애덤의 가슴에서부터 연녹의 빛이 터져 나오며, 동시에 애덤의 신형이 사라지고 그의 침실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의 암살자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 * *
“……그렇게, 된 것이오.”
애덤의 설명을 모두 듣게 된 셰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직은 이미 왕국에도 손길을 뻗었던 거군.”
“……조직? 그때 그 키메라를 조종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오?”
“맞다. 그들은 이미 많은 국가에 마수를 뻗치고 있지. 그래도 아직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한 모양이야. 해 봐야 국왕 정도인가.”
“그게 무슨 소리요! 폐하께서 그런 사특한 이들과 손을 잡았다니!”
“믿고 싶지 않다는 심정은 알아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아라.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
차마 애덤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당장은 심증에 불과하나.
정보 조직이 의뢰자를 암살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분명 왕성에서도 내성에 위치한 기사단장의 침소까지 침입했다는 것은 내통자가 있다는 말이었으니.
“그대는, 이 사실을 그때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이오?”
애덤은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떠나던 날, 셰인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그렇게 물었다.
“제국도 그럴진대, 너희 왕국이라 해서 다를 건 없겠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가진 탐욕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이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영혼도 팔 수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래도 말조심하시오. 아직 폐하께서 그들과 손을 잡았다는 증거는 없으니.”
셰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접 이해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휴식을 취해 둬라. 아무리 프리실라의 정기로 부상의 악화를 막아 뒀다고는 하지만, 심장이 몇 번이나 쑤셔진 걸 바로 고칠 정도는 아니니.”
“알겠소. 그래도 그 마법 스크롤은…… 고맙소. 이 일은 잊지 않도록 하지.”
이전에 셰인이 애덤에게 줬던 편지는, 이런 일을 예상하고 넘겨 뒀던 엘프들만의 이동 수단이었다.
부상을 입은 엘프를 세계수의 수액으로 만들어진 연못에 곧바로 이동시켜 주는 비상 마법.
애덤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지.”
“…….”
분명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할 것이다.
대관절 셰인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저렇듯 엘프 여왕과 단둘이 움직일 만큼 친분을 쌓았는지 등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당장은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기로 한 애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현실은 냉담하기만 했다.
* * *
“왕실에서, 그렇게 공표를 했단 말이오……?”
“그래.”
애덤이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돌아온 지 이틀 후.
하이엘 왕국에서는 애덤의 사망 소식을 공론화했다.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안타깝게도 사망했다는 것.
그 말을 들은 애덤은 참담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애덤은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메자이아 대수림을 개방하는 데 함께 있던 영웅으로 알려지지 않았던가.
그런 애덤이 침소에서 대량의 핏자국을 남기고 사라졌음에도 왕국에서는 그런 애덤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사망했다 알렸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나.
이틀이나 지나고서야 애덤은 겨우 현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제안 하나를 하지.”
“제안……?”
“나는 조직과 적대하고 있다. 황실조차 일부가 조직에 가담하고 있는 지금, 조력자가 필요해.”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소.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오?”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천천히 알려 주도록 하지.”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애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당장 이곳에서 얼마나 지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설사 엘프들이 받아 준다고 해서 평생 이곳에 숨어 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해 보시오. 당신이 말하는 제안을.”
“현명하군. 본론부터 말하자면, 정보 조직이 필요하다. 연합국에 자리 잡은 지하도시에 대해 파악할 필요가 있어.”
“지하도시?”
“그래. 그곳에 얽매인 인간들은 결국 조직에 의해 약점이 잡힐 수밖에 없거든. 은밀한 사생활이 없는 귀족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손을 댄 귀족은 없지 않나.”
“……부정할 수 없군.”
“해서 지하도시에 한 축을 담당할 이들이 필요하다. 나는 내 조력자들을 지하도시에 내려보내고, 밑에서부터 주도권을 잡아 갈 생각이다.”
“……내가 그곳에 간다고 도움이 되겠소?”
이번 일을 겪어서인지 애덤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듯 보였으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군.”
확실히, 애덤의 전투 실력은 특별히 뛰어나다고는 하기 힘들다.
물론 한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장이었으니 그 실력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나, 기사들이 꿈에도 그리는 자신만의 시그니처가 없다는 게 애덤의 현실이었다.
살리에르 백작가에서 봤던 워나드는 애덤보다 품계는 떨어졌으나,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가지고 있던 위협적인 기사였다.
하지만 애덤이 시그니처가 없음에도 왕국의 기사단장이 될 수 있던 것은, 애덤 특유의 ‘감’ 덕분이었다.
고작 감 하나만으로 왕실의 기사단장이 되다니.
그럼 그 왕국이 이상한 게 아니냐 할 수 있겠으나.
물론 그것 하나만 가지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고, 행동에 나설 줄 알아야 하니까.
“네가 타고난 그 감이 그저 우연의 일치라 생각하나?”
“……?”
“인간에게 있어서 감이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생각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편견이다.”
“그게 무슨 소리요?”
“고대에는 너보다 뛰어난 감을 가지고 생존하던 종족도 있었지.”
“그게 지금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어쩌면 너에게 그들의 피가 일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러자 애덤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 내, 내가 하프라 말하는 것이오?”
“하프까지는 아니겠지. 애초에 내가 알고 있는 그 종족들은 자신들의 감을 전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자들이었으니. 해 봐야 아주 오래전에 이뤄진 일이었을 터. 지금에 들어서야 어쩌다 네가 그 능력을 깨닫게 된 것일 뿐.”
“…….”
그에 애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생각해 보면 애덤은 스스로의 감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러지는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에도 지금과 같은 능력은 없었으니.
셰인은 그와 관련된 계기가 있으리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8살 즈음의 일이었소.”
그러다 생각을 이어 가던 끝에 애덤은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과거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간 적이 있었소. 그런데 하필 산에서 막 내려온 늑대 무리와 마주치고 말았지. 그때 한 녀석에게 팔을 크게 물린 적이 있었소.”
덕분에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려 죽을 뻔했으나, 그 뒤부터 묘하게 몸에 기운이 났으며 잔병치레도 없어지고 무엇보다 특유의 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애덤은 말했다.
“늑대라…….”
그렇다면 견족 수인일 확률이 높았다.
전생에 셰인이 봐 왔던 수인족들 중에서도 특유의 감이 뛰어났던 녀석들이니.
“네가 가진 감을 성장시킬 방법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정말이오?”
“그래. 높은 확률로 견인 수인족과 연관이 깊은 듯싶으니. 수단을 찾게 되면 알려 주지.”
“그건 고맙소. 하지만 그게 지금의 상황을 역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진 않을 듯한데.”
“그것도 생각해 둔 게 있다. 그러려면 네가 내게 협력을 해야겠지.”
“방법을 물어도 되겠소?”
그 정도는 미리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앞으로 애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고.
“네가 알고 있던 왕실의 분위기는 어떠했지?”
“왕실의 분위기?”
“그래. 최근 혹은 그보다 이전에 분위기가 한 번 반전된 적이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아니. 율리무스 국왕은 자신의 후계자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소. 국왕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럴 준비를 하고 있었지. 하지만 1년 전쯤에 어느 순간부터 국왕의 건강이 좋아지기 시작했소. 덕분에 계승 작업 또한 뒤로 미뤄졌고.”
“그렇겠지. 그럼 이쯤에서 뭔가 짚이는 게 없나?”
“국왕의 건강이 조직과 연관이 있다는 말이오?”
“많은 인간들이 불멸의 삶을 바라지 않나. 조직은 불멸은 불가능할지라도, 그 정도 착각은 할 수 있게 만들 능력은 있지.”
“그랬군. 그래서…….”
하이엘 왕국의 국왕이 조직과 손을 잡았다면, 당시 메자이아 대수림에 있던 일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조직은 막고자 했을 것이고.
당연히 율리무스 국왕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역시 내 단원들은…….”
“황실 기사단원들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젠장!”
참담한 기분이었다.
평생토록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장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애덤이었기에.
국왕의 타락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한데, 국왕의 권력이 강해지면 그에 불만을 가질만 한 세력들이 여럿 있지. 그중 가장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누구일까?”
“……설마.”
애덤은 정치가 난무하는 왕국에서도 기사단장을 했던 사람이다.
셰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금세 파악한 그가 얼굴을 구겼다.
“슬슬 나이를 먹기 시작하는 자식들은 불안하겠지. 그것도 자신들의 손아귀에 거의 다 들어왔던 권력이 도로 빠져나갔으니 오죽할까.”
“반란을, 부추기자는 거요?”
“성공하면 혁명이지. 그에 따른 명분도 충분하지 않나. 너는 앞으로 지하도시에서 자리를 잡을 거다. 시작 과정은 우리 가문 쪽에서 도와주도록 하지.”
“……당신의 가문도 무언가 복잡한 일에 얽힌 모양이군. 알겠소. 내게 선택지는 없을 테니.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해야만 할 일이지.”
“알겠다. 이와 관련된 일이 끝나면 다시 양지로 나간다 해도 관여치 않겠다.”
“그것 참 고마운 배려로군.”
이로써 다크엘프들을 이끌 인재가 마련되었다.
이제는 정말 북부로 향할 시간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8화
58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1)
북부의 아룬비다는 매년 인력 부족에 시달리지만, 그럼에도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많이 받지 못하는 지역이다.
아카데미에서도 파견 의뢰 중에서 가장 인기가 없기로 소문이 난 장소인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 교통이 불편하다.
워낙 기후가 좋지 않은 지역이다 보니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아룬비다 지역은 전술적인 특성상 거대한 산맥의 중턱에 위치해 있어 이동하는 데도 상당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흐음…….”
“괜찮으십니까?”
앞에서 들려오는 길잡이의 목소리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을 만하다.”
“인내심이 대단하시군요.”
길잡이의 물음에 셰인은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고 대답했다.
험준한 산맥으로 인해 이곳은 기사들에게도 한 번에 오르기에는 강당한 강행군을 요구하는 곳이다.
기사들보다 체력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셰인으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차라리 고든을 상대했을 때가 편했군.’
그나마 프리실라에게 받은 정기가 아니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마법사님께서 이곳까지 파견을 오신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인데, 어쩌다 한 번씩 오시는 분들은 가는 데만 일주일 이상이 걸립니다. 셰인 님께서는 그분들에 비하면 대단하신 거죠.”
“굳이 칭찬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남은 거리는 얼마나 되지?”
“이제 반나절 정도만 가면 됩니다. 다만 기지 근처에는 몬스터가 서식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예?”
길잡이는 어느새 자신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마력탄을 발견했다.
“벌써부터 신고식이 시작된 모양이야.”
동시에 수십 개의 마력탄이 허공에서 서로 튕겨지며 주변 바위 사이로 날아가자.
깨개개갱-!!
이곳저곳에서 아이스 워 울프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산맥의 위에서, 오연하게 서 있는 셰인은 길잡이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몬스터들의 피 냄새가 더 퍼지기 전에 움직이지.”
“아, 알겠습니다!”
* * *
“음. 도착했다고?”
“예, 황녀님.”
한 여성의 담백한 목소리에 부하로 보이는 이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대답했다.
언제나 영하로 내려가 있는 날씨로 인해 얼어붙은 창가로 산란한 빛이 여성을 밝혔다.
옅은 실버블루 톤의 머리카락은 잔뜩 해진 머리끈에 묶여 어깨 아래로 내려왔고, 한 겨울의 얼어붙은 호숫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은빛 눈동자는 감정이 메마른 듯 보였다.
“여기서는 황녀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저도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제게는 영원히 황녀님이십니다.”
“고집 하고는.”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제국의 두 송이 꽃 중 하나로 불리며, 1황녀의 쌍둥이 자매인 그녀는 현재 아룬비다 영주이며, 동시에 전초기지인 비두론 성의 성주이기도 했다.
그녀의 담백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만큼 그녀가 쓰고 있는 집무실은 삭막하기만 했다.
갑옷이 걸려 있는 갑옷 거치대와 책상, 그리고 쌓여 있는 다양한 서류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 메자이아 대수림을 개방한 영웅이라.”
“과연 일렉사가 알려온 정보대로의 사람일지 궁금하군요.”
“듣자 하니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가 시작된 이유도 그 소년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예. 그가 학과시험을 통해 발표한 논문으로 시작된 사건이었지요.”
아나스타샤는 거의 보름 전, 일렉사가 보내 온 보고서를 떠올렸다.
일렉사는 이곳 아룬비다의 출신으로, 스스로가 외부의 소식을 알리는 정보원이 되겠다며 지원자들을 차출하고 나간 여인이었다.
밖으로 나간 지 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상당한 명성을 쌓은 그녀 덕분에,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곳에 있음에도 외부의 소식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 짓는 성격에, 감정 변화가 극도로 적다. 반면에 소문과 달리 동생인 클레이튼 L 클라인을 상당히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전투력 또한 마법사치고 근거리에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으며, 마력탄을 위주로 기상천외한 방법을 구사하며 전투를 치른다. 학술적 능력이 뛰어난 것을 넘어 비범하게 느껴지며, 라비아타 모험단주에게도 인정받는 모습을 곧잘 보였다.’ 이렇단 말이지. 그런데 그런 인재가 여기까지 직접 왔다는 말이고.”
“그렇습니다. 일렉사도 처음에는 얕보고 있다가 한 번 크게 데였었죠.”
“맞아. 그랬었지. 갑자기 아룬비다 영지의 모든 몬스터 부산물에 대한 독점권을 요구해 왔다고 했던가?”
메자이아 대수림의 초입 단계에서 셰인을 무시하던 행보를 보였던 일렉사는 이후 그의 능력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저러한 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당시 그 보고서를 받고 얼마나 황당했던가.
물론 아룬비다에서 나오는 특산물이라고는 넘쳐 나는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해체해서 얻게 되는 마석과 부산물 정도가 전부였다.
이걸 외부로 넘기는 것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벌어들일 테지만, 특유의 험한 지형 탓에 그마저도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마차도 다닐 수 없는 가파른 산맥을 타고 올라오는 마당에 무슨 무역을 하겠다는 건지.
1년에 2번씩 오는 지원품을 받는 것도 적지 않은 예산을 제국에서 감당하고 있으니, 상인들 입장에서 아룬비다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셰인은 저러한 요구를 해 왔고, 일렉사는 이를 받아들였다.
실상 오히려 거래가 된다면 아룬비다의 이득이었다.
가뜩이나 잔뜩 쌓여만 있는 악성 재고들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허락을 하긴 했는데, 여기까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어.”
“영특한 소년이라 들었습니다. 분명 머릿속에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 뜻이 있겠지요.”
“그러길 바라야지.”
“황녀님. 황족으로서의 처신을 지키시지요.”
갑자기 이어지는 충신의 조언에 아나스타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런 말도 안 했다.”
“아무리 우리 아룬비다에 오는 파견원이 없다지만, 첫날부터 황녀님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은 황족의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도 궁금한데.”
“참으시지요.”
“…….”
“황녀님.”
“쯧. 알겠다. 미미르, 그대가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지.”
“혹여 몰래 나가시면 아니 됩니다.”
“내가 그리 신용이 없나?”
“그렇습니다.”
“……황족의 체면을 지켜 다오.”
“제게 믿음을 주신다면 얼마든지 그러하겠습니다, 황녀님.”
얼굴에 겨울 한파에도 꿋꿋할 것 같은 철판을 깐 채로 내로남불을 시전하는 충신, 미미르의 말에 결국 황녀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직접 얼굴을 보긴 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결국 미미르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아 서류를 읽던 아나스타샤는 방금의 상황을 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저런 녀석이 충신이라고…… 음…….”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방금 미미르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이걸로 592번째 거짓말을 쳤군. 다시 생각해 보니 충신이 맞는 것 같아.”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일렉사가 보내 온 보고서를 찾아 다시금 읽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아룬비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의 영주님이시자 정당한 황실의 일원이신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2황녀님의 보좌관인 카시아스 H 미미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아룬비다 영지로 파견을 오게 된 클레이튼 R 셰인입니다.”
미미르는 생각보다 고풍스러운 셰인의 태도에 속으로 살짝 놀라움을 느꼈다.
18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메자이아 대수림을 개방한 영웅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정도 뻗대는 느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태도엔 오만함이나 방만함은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 메자이아 대수림을 개방한 영웅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제국의 미래가 밝음을 새삼 느끼는군요. 황녀님께서는 몰려 있는 집무로 인해 나오시지 못하셨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합니다. 제국의 북부를 책임지고 계신 분이지 않습니까.”
“예. 일단 오는 길에 노고가 많으셨을 테니, 피로를 좀 푸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피로는 이후에 풀기로 하고, 파견과 관련하여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성을 한 바퀴 돌면서 그에 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미미르는 셰인의 옆에 서서 걷기 시작했고, 셰인도 그런 미미르를 따라 걸어갔다.
“먼저 이곳 아룬비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외부적으로 알려진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국의 북부를 책임지고 있음에도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단도진입적으로 말해서, 이곳 아룬비다는 모든 것이 부족한 영지입니다.”
미미르는 영지의 장점보다 단점을 부각시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애초에 장점이 없는 것도 그러했지만, 그 과정에서 셰인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본래 아룬비다는 과거 황실에서도 꽤 큰 신경을 쓰고 있던 영지였습니다. 언제 푸른 오크들의 남하가 이루어질지 모르니 말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첫 푸른 오크들의 남하가 이루어진지도 어느덧 50년째.
그동안 전초 기지로 세워진 비두론 성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오크들의 침공을 막아 왔다.
하지만 50년 전과 같이 폭풍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거기에 이 혹독한 환경은 지원 인력마저 끌고 오는 게 순탄치 않았다.
몇 년이고 바깥세상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이런 영지에 누가 자원을 해서 오겠는가.
그에 반해 꾸준한 오크들의 침입 시도와 함께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 사상자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으니.
영지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에 제국은 한 가지 묘수를 떠올리니.
전투에 능한 사형수나 중한 범죄자, 그리고 정치에서 밀려난 황족 혹은 귀족을 파견하는 것으로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외부에서 좋지 않은 이유로 끌려온 이들의 사기가 좋을 리 없었고, 지금은 이렇듯 제국에서도 방치한 영지가 되어 버렸다.
‘때문에 아나스타샤의 또 다른 이명은 ‘꺾인 꽃’이지.’
셰인의 생각처럼 그녀가 제국에 있을 당시에는 기사도를 내세우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아나스타샤다.
그러나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이곳, 아룬비다에 좌천되어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가 단 1년도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나, 아나스타샤는 그저 겉으로만 기사도를 내세운 여인이 아니었다.
고작 14살이라는 나이에 좌천되어 온 아나스타샤는 지난 7년 동안 이곳에서 굳건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그뿐이던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던 지휘권자의 권한을 되살리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여 영지를 본격적으로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외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굳이 환경적인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제국에서 버려진 이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던가.
제국에서는 이제 꺾인 꽃이라 불리는 아나스타샤가 이곳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여기까지 미미르의 설명을 모두 듣게 된 셰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부정적인 이야기만 했음에도 셰인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자, 미미르는 긴가민가해졌다.
‘의도를 알 수가 없군.’
그저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을 채우러 온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고행의 길을 걷는 기사처럼 단련을 위해 찾아온 것일까.
여태까지 이곳으로의 파견을 신청한 이들은 대부분이 그러했고, 간혹 아나스타샤의 관심을 얻어 황실과 끈을 만들어 보겠다며 찾아오는 이들 또한 있었다.
물론 전부 더 이상 황실과 연을 유지하지 않기에 헛된 걸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대충 파견 기간만 채우고 떠나 버렸지만.
과연 이 소년은 그들 중 어디에 포함되어 있을까.
아니면, 아직까지 미미르가 만나 보지 못한 쪽에 속해 있을까.
‘당장은 지켜봐야겠군.’
한참 전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이 소년이 무슨 연유로 찾아왔을지.
미미르는 보다 시간을 두고 보는 쪽을 선택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59화
59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2)
지난 이틀 동안 셰인은 비두론 성에 머물며 미미르에게 아룬비다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인근에 출몰하는 몬스터나 푸른 오크들의 주 출몰 지역과 그들의 특성 등.
그중에는 아룬비다 주민들의 성향에 관한 정보도 들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곳의 주민들은 좋지 않은 이유로 끌려온 이들이 아니던가.
그 때문인지 아룬비다는 듣도 보도 못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득실거리는 마경으로 불리고 있었다.
때문에 미미르는 조금은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셰인에게 이와 관련된 조언을 해 주었다.
아카데미에서 파견을 온 셰인은 지휘학과인 탓에 현재 남아 있는 수색대 중 팀장 자리가 하나 비어 있는 곳에 셰인이 배치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지휘관으로 온 귀족 나으리라고? 아주 지랄 났구나, 지랄 났어.”
“이런 어린 새끼 말을 들으라고? 아무리 우리 범죄자라지만 뒤지라는 거랑 뭐가 다르냐!”
“씨발, 이 애새끼야. 만약 우리 앞에서 조금이라도 얼타는 순간 그 곱디고운 얼굴이 불어터진 오크 새끼들마냥 될 줄 알아라! 알겠냐?”
그리고 그런 미미르의 걱정처럼, 수색대원들은 결코 쉽게 셰인을 인정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하나같이 험악하게 생긴 수색대원들은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막말을 내뱉었다.
애초에 저들은 스스로가 더 이상의 밑바닥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아룬비다에 올 정도라면 중한 범죄를 일으켰기에 평생 이곳에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떠오르는군.”
“뭐, 새꺄?”
“이 새끼가 어르신이 말하고 있는데 처웃고 있네. 아주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야.”
“어디 건드릴 수 있으면 건드려 봐! 이곳 생활을 아주 지옥으로 만들어 주마.”
거기에 끼리끼리 모인다 하지 않았던가.
이런 이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있기에, 이들에게 한 번 찍힌다면 아룬비다에 소문이 쫙 퍼져 어딜 가든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셰인은 그런 그들의 온갖 모욕적인 언사에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스스로가 밑바닥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그 아래에 또 다른 바닥이 있는 걸 모르더군.”
“얘 지금 뭐라는 거니?”
“허, 참나. 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어디 새로 온 애새끼가 얼마나 버티는지 좀 보자고.”
그러나 미미르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셰인은 이미 전생에 밑바닥 중 밑바닥, 끝없이 추락하는 나락의 구렁텅이에 거하던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는 저런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인간 언저리까지는 끌어올려야겠군.”
* * *
평소처럼 오전 업무를 위해 서류를 확인하고 있던 미미르는 영지업무와 관련된 서류를 가지고 오는 비서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예, 미미르 님. 여기, 지난 주 수색대의 활동 내역과 현재 남은 보급품 관련 서류입니다.”
“그래요. 그나저나, 그는 잘 적응하고 있나요?”
“아…… 그 사람이요.”
미미르의 질문에 비서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미미르가 언급한 사람은 다름 아닌 셰인이었다.
어느새 셰인이 아룬비다에 도착한 지도 며칠이 지난 시점.
며칠 동안 아룬비다에 대해 들었던 셰인은 현재 팀장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는 수색대 팀 중 하나에 들어갔다.
‘별일 없으면 좋겠지만…….’
아마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미미르가 이곳 사람들에게 앞서 경고를 해 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어차피 그들의 성격상 진심으로 셰인을 받아 줄 리가 없다.
미미르가 알고도 막지 못하는 방식으로 셰인을 배척시킬 테니.
하도 이전 파견인원들에 대한 평판이 주민들 사이에서 좋지 않다 보니 이런 일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주민들 입장에서 파견 인원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라는 동질감도 없는데다가, 파견 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곳 주민들을 바닥에 흩뿌려진 취객의 오물처럼 바라보지 않던가.
거기에 몇 번이고 이 험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이곳의 주민들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갑질을 부리는 행동까지 겪고 나니 아나스타샤의 이름값이고 나발이고 간에 파견 나온 이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대하는 전통이 만들어진 상황.
어차피 다른 목적으로 온 것들이니, 적당히 기를 눌러 주고서 시간만 때우다 보내려는 것.
일반적인 파견 인력은 그러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파견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거나, 어디 한 자리에 처박혀 말 그대로 시간만 채우고 떠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군요.’
덕분에 황실 측 정치 귀족의 아들 중 한 명이 정신병까지 얻어 돌아갔을 때, 얼마나 많은 질타를 받았던가.
그 외에도 다양한 소문들이 퍼지면서 가뜩이나 인력도 부족한 마당에 파견 지원조차 오지 않으려 한다.
당연히 미미르도 이와 관련해서 여러 번 고민을 해 봤지만 이런 류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편, 미미르의 비서는 무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수색대 인원들이 그분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흐음……?”
의아한 일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지 않은가.
그 말은 어지간한 외압에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특이하군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남쪽 경계 지역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부터는 수색대 인원들도 비교적 온순해졌다고…….”
“그렇습니까? 남쪽이라면…… 아,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요. 확실히 그는 영리한 구석이 있어요. 그럼 한 시름 놔도 되겠군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비서의 말에 미미르는 옅은 웃음을 보이며 한 가지 걱정거리가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데, 황녀님께서는 요 며칠 안 보이시는군요.”
“예. 어디서 또 뭘 하고 있는 건지…….”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는데, 그때마다 무언가 바쁘다는 투로 대화를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 그런 모습이 한두 번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요. 음.”
그런데 그럴 때마다 두통이 이는 일이 생기지 않았었나?
싶었으나.
이미 쌓인 업무가 많았기에, 미미르는 결국 관심을 거두고 자기 할 일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 * *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 본능적으로 하는 일이 무엇일까?
바로 서열 정리다.
무의식중에 리더를 가리기 시작하고 또 그를 추대하는 식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런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리더를 의지하는 성향이 강하다.
물론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을 테지만.
“그래서, 날 찾아오셨다?”
“그래.”
리더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럴 가능성 또한 무척이나 적었다.
“참나, 어이가 없군. 고작해야 이제 막 성인식을 치렀을 애송이한테 당하다니 말이야.”
이곳, 아룬비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거구의 남자, 펠리스는 여기저기 멍이 든 상태로 서 있는 수색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어찌 됐든 상관없는 일이지. 나야 거래만 확실하면 되는 일이니. 그러니 일단 거래 내용은 들어 봐야겠는데.”
거래.
셰인은 펠리스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굳이 그런 방법을 쓸 이유는 없었다.
겪어 본 결과, 그랬다간 더 귀찮은 반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돈은 필요 없는 것 같군.”
“오, 척하면 척이군. 그래, 맞다. 여기서 돈은 길바닥에 쓰러진 몬스터의 부산물보다도 쓸모가 없지.”
펠리스의 말처럼 세상과 고립된 아룬비다에 금품은 필요가 없었다.
사용할 방법도 없었고, 성에서 나오는 보급 이외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이라고는 없었으니.
“우대권을 주지.”
“하, 우대권? 그건 또 뭔 헛소리냐.”
“올해가 지나기 전에 내 가문에서 이곳에 교역을 틀 예정이다. 그럼 방금 네가 필요 없다 말했던 금화의 가치가 수직 상승하겠지.”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우리가 이런 곳에 있으니까 대가리에 든 게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아?”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지. 정작 그때가 돼서 땅을 치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펠리스는 셰인의 말을 듣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눈앞에 있는 애송이의 말에 신용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뭘까. 저 목소리에 들어 있는 확신은.
그래서 일단 조금 더 들어 보기로 했다.
“방법은?”
“두 달.”
“뭐?”
“두 달 안에 이 영지에 많은 변화가 찾아올 거다.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참…… 아주 당돌한 애새낀데.”
다짜고짜 자기 밑에 있는 대원들을 줘 패고 와서는 하는 말이 거래라 해 놓고, 정작 그 내용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뭐, 좋다. 기다려 보도록 하지.”
그러나 생각 외로 펠리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전에도 한 번, 이와 비슷한 제안을 받고 지금의 자리에 앉았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도 이런 식으로 말했지…….’
덕분에 지금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펠리스는 몇 년 전, 자신에게 찾아와 당돌하게 자신을 지지하라는 제안을 해 왔던 황녀, 아나스타샤를 떠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그냥 해 주지는 못해. 이쪽이 받은 것도 없는데 베풀기만 해 주면 밑에 것들이 지들 멋대로 생각하기 바쁘거든. 안 그래?”
“그렇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다른 놈들한테 널 건드리지 말라고 말해 주는 것뿐이다. 저놈들에게 인정을 받는 건 네가 할 일이지.”
“좋아, 그렇게 하지.”
저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앞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방해만 들어오지 않아도, 이후 일이 복잡해질 일은 없을 테니.
“그럼 가봐. 다음에 볼 때는 그럴듯한 게 있어야 할 거야.”
그렇게 펠리스의 추객령을 받은 셰인은 고민할 것도 없이 빠져나왔고, 뒤이어 엉거주춤 자신을 따라오는 수색대원들을 바라봤다.
“저쪽과 거래는 끝났군. 이제 우리끼리의 대화만 남았어.”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대장이 우릴 네놈한테 팔아먹었다고?!”
당연히 반발은 뒤따라왔으나, 셰인은 그런 그들의 불평에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답했다.
“꼬우면 범죄를 일으키지 말으셨어야지.”
“이런 씨발…….”
“저 벙어리 새끼는 왜 아무런 말도 없어!”
“야, 이 신참 새끼야. 넌 지금 분하지도 않냐?!”
그때, 수색대 삼인방은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서 있는 누군가를 향해 그리 외쳤다.
온몸을 갑주로 뒤덮은 그는 얼마 전에 새로 배정받은 인원이라 했는데, 모종의 이유로 입을 열지 못한다는 모양이었다.
다만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스스로를 샤샤라 소개할 뿐이었다.
“…….”
또 유일하게 셰인이 도착했을 때도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썅. 벙어리 새끼.”
결국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샤샤의 모습에 삼총사는 입을 꾹 다물고는 셰인을 바라봤다.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맹세를 담아 쏘아보고 있는 모습이, 셰인에게는 우습게만 보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0화
60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3)
수색대 삼총사 중, 멀대 같은 키를 가지고 있는 케빈은 셋 중 그래도 아룬비다에서의 짬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때문에 죄수들 사이에서 대장인 펠리스가 자신들을 버린 것을 믿을 수 없어 직접 찾아갔다.
“왜 너희들을 버렸냐고?”
펠리스는 그런 케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우리가 밖에서 범죄자라 낙인이 찍혔다고 해도 그렇지, 저런 애송이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는 게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케빈은 자신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물론 아룬비다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범죄자거나 황실에 찍혀 몰려온 귀족들이다.
당장 펠리스 또한 그렇지 않던가.
하지만 펠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흠,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근데 말이야.”
“예?”
“그 애송이, 우리가 여태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막 온 건 아니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 이번 보급품이다. 읽어 봐.”
그러면서 펠리스는 케빈에게 편지 하나를 넘겨줬다.
“이건…… 어어?”
케빈은 외부에 가족이나 지인이 없는 탓에 편지를 주고받을 일이 없으나, 펠리스는 자신의 가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은 일이었으나, 이마저도 귀중한 기회였다.
이곳에서는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케빈은 얼마 만에 읽어 보는 건지 모를 편지지를 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떨렸다.
“요, 요람이 개방됐다고? 엘프? 이게 무슨…….”
“뭐…… 우리가 나갈 수도 없는 마당에 요람이 개방되고 나발이고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하지만 아무리 외부에서의 소식이라지만 요람의 개방이다.
인류의 거대한 숙원 중 하나가 풀린 것이다.
세상과 단절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게 역사적으로 얼마나 거대한 사건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기에 제국에서는 이번 일에 대한 대대적인 민심 잡기를 위해 성대한 축제를 열었고, 그 과정에서 아룬비다 또한 덕을 볼 수 있지 않았던가.
물론 평소보다 보급품이 더 많이 들어온 수준에 불과했지만,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그 이유까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늘어난 보급품의 이유가 이랬다니.
“메자이아 대수림…… 이라는 요람을 개방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더군. 그 애송이가.”
“세상에…….”
“너희도 봤지? 이번에 늘어난 보급품. 그게 다 저 애송이가 논문 하나 잘 내서 시작된 일이다, 이 말이야. 알겠나?”
“…….”
그러면서 펠리스는 케빈에게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언뜻 보면 이곳은 폭력을 과시하는 힘이 전부일 것 같지만, 의외로 정치라는 게 중요했다.
예전 같았으면 저런 의문 따윈 폭력으로 제압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시기가 아니지 않나.
아나스타샤가 만들어 온 또 다른 그들만의 질서였다.
“나도 너희들한테 그 애송이를 전적으로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근데 방해는 하지 마. 우리 신조가 뭐지?”
“……당한 만큼 갚는다.”
“그래. 어쨌든 이번에 후하게 들어온 보급품은 저 애송이가 몇 개월이나 그 정글 속에서 개고생하면서 만들어 낸 거잖나.”
“끄응…….”
“내 말이 어려운 건 아닐 텐데. 그치? 선입견만 가지지 말라, 이 말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외부에서 오는 새끼들한테 어떤 시선으로 취급받았는지 잘 알잖아.”
“……알겠습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인 케빈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셰인의 명성이 어떻든 간에 아룬비다를 처음 찾아온 애송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일단은 두고 보겠다는 스탠스를 취한 것이다.
그래도 셰인의 묵직한 마력탄에 얻어맞은 것에 대한 앙금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어디 한번 실력 좀 보자고.’
여태까지 고작 일신의 능력만 믿고 아룬비다에 도전했던 파견원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십수 년을 아룬비다에서 살아온 이들보다 강한 이들도 적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아룬비다는 혹독한 환경과 더불어 언제 몬스터가 나올지 모를 정도로 몬스터가 많은 지역이다.
자신들의 전 팀장 또한 적지 않은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휴식 중 튀어나온 몬스터에 의해 부상을 입고 얼마 가지 않아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어설픈 지휘력으로 팀 전원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경우도 숱하게 봐 왔기에 케빈은 두 눈 크게 뜨고 셰인을 감시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첫 수색 작전이 펼쳐졌다.
* * *
외부에서 아룬비다의 주민들을 향한 시선은 고우려야 고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죄자들이 아닌가.
그나마 지휘관에 속해 있는 이들의 경우에는 중앙 정치에서 좌천되어 들어온 귀족이라고는 하나, 대부분이 범죄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본래라면 셰인 또한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조직의 밑바닥을 봐 왔기에, 인간 사회에서 쫓겨난 이들이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셰인이 이들에게 무작정 폭력을 선사하기보다 대화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일 처리의 효율에 좋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생에 그들이 보인 2황녀, 아나스타샤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반란이라는 것은 혼자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이곳 아룬비다 주민들의 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전생에 이들은 아나스타샤의 반란에 참여해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기에 대화를 시도해 볼 마음이 생긴 것이다.
적어도 마지막까지 그들은 황녀의 곁에서 의리를 지키다 생을 마감했으니.
그리고 실제로 다른 파견인력들은 시도조차하지 않은 펠리스와의 거래는 효과적이었다.
적어도 아룬비다에 퍼져 있는 파견 인력에 대한 노골적인 적의가 셰인에게 향하지는 않았으니.
물론 그렇다고 시선에 호의를 기대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셰인이 하는 일에 대한 반항이 없는 것만으로도 셰인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두 달 후에는 그러한 시선조차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두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흐음…….”
수색대의 하루 일과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뭐, 준비는 끝났슈.”
아룬비다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울 때쯤 수색대 삼총사 중 케빈이 다가와 입을 열자, 셰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출발하지.”
“얘들아, 가잔다!”
“알겠슴다.”
“얼마 만에 수색이냐.”
“…….”
삼총사와 샤샤가 출발하고, 셰인은 얼마 전에 지급받은 지도를 펼쳐 수색을 시작했다.
수색 작업은 매일 정해진 지역을 통과하며 돌아다니고, 그 과정을 서류화시켜 상부에 보내면 되는 일이다.
다만 아룬비다의 특성상 언제 날씨가 나빠질지 모르고, 또 동시에 예기치 못한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특히 아룬비다는 그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생명력이 질긴 몬스터들이 대부분이다.
피부가 꽁꽁 언 얼음마냥 딱딱한 아이스 트롤이나, 두꺼운 지방층과 근육으로 신체를 보호하는 아울베어, 눈 밑을 파고 다니는 아이스 웜 등.
하나같이 쉽게 상대할 몬스터가 아니었다.
“정지.”
“정지람다.”
“예이.”
“…….”
그렇게 수색을 이어 가던 중, 수색대는 아울베어의 서식지에 돌입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혹한의 바람이 아울베어가 서식하는 숲에서부터 불어왔다.
잎은 찾아보기 힘든 앙상한 나무가 줄줄이 서 있는 숲의 입구.
얼어붙은 바위며 나무 할 것 없이 나 있는 아울베어의 손톱자국은 위협적이었다.
바위는 말할 것도 없고, 겨울둥이 나무의 경우 강철처럼 단단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탓에 강철의 숲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장소.
평소에는 셰인의 태도에 듣는 둥 마는 둥 의욕을 찾아보기 힘든 삼총사였으나, 아울베어의 서식지에 도착하자 눈빛부터 달라졌다.
“……아울베어라.”
아울베어는 위험하기가 아주 대단한 몬스터다.
크기는 일반적인 오우거보다는 조금 작으나, 근육질적인 외관과 다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매우 은밀한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엇 하는 사이에 아울베어의 강력한 손톱에 의해 자신의 신체가 3등분 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재빠르기까지 해서, 차라리 오우거를 상대하는 게 편하다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수색대의 임무 중에는 이러한 몬스터들이 얼추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생태계가 지난번과 얼마만큼의 변화가 있는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포함됐다.
그렇게 한동안 아울베어의 서식지 앞을 살펴보던 셰인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이동하도록 하지.”
“예이.”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서식지의 중반까지 걸어가던 셰인이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하군.”
셰인의 혼잣말에 삼총사 중 덩치를 담당하고 있는 맥고완이 물었다.
“음? 무슨 말임까?”
“아울베어의 움직임이 없다.”
“아, 그거 말임까. 원래 아울베어는 쉽사리 기습하거나 하지는 않슴다.”
맥고완이 익숙하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본래 아울베어는 특유의 덩치도 있고 한 번 상대하기 시작하면 난폭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놈들은 야행성이다.
“밤이 아니라면 기습도 쉽사리 하지 않슴다.”
하지만 그만큼 조심성도 많은 녀석들이다.
어떤 상대가 됐든 간에 이 아룬비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리한 위치에 서야만 안전한 사냥이 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인 또한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조용하다 생각이 들지 않나?”
“어? 그러고 보니 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슴다.”
그제야 다른 일행들도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울베어가 야행성이고 또 조심성도 많은 녀석이라 낮에는 어지간해서 기습을 하지 않는 놈들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자신들의 서식지에 들어온 침입자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놈들은 아니었다.
최소한 특유의 올빼미 소리, 아룬비다의 주민들이 밤의 울음소리라 부르는 녀석들의 위협 행위가 이어지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전임 팀장의 공백 이후 오랜만에 아울베어의 서식지에 찾아온 삼인방은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거, 아무래도 서식지를 옮긴 것 같은데……?”
그나마 이러한 경험을 여러 번 해 봤던 케빈이 그리 의견을 내놨고, 셰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에 의해 밀려났다는 소리가 되겠지.”
“쯧,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됐슈. 당장 가서 보고부터 해 봐야겠는데.”
“아니. 좀 더 둘러보고 가도록 하지.”
“앞에 뭐가 있는 줄도 모르고 간다는 말이유?”
“그게 수색대의 임무 아닌가?”
“……이보슈.”
“말해라.”
“댁은 잘 모르나 본데, 여긴 그렇게 물러터진 생각으로 돌아다니다간 죽기 딱 좋은 곳이요. 아룬비다 수색대 철칙 3번째. 무언가 쎄하다 싶으면 보고부터 해라. 이게 기본 철칙이란 말이올시다.”
이곳에서는 괜한 영웅 심리로 움직였다간 뼈도 추리지 못한다.
어차피 이곳 아룬비다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사태가 곧잘 일어나길 마련이다.
그걸 굳이 파헤치겠다고 들어가 봐야 목숨을 보전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래 봐야 결국 이어지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어차피 몬스터들의 영역 싸움이요. 그 끝은 몬스터 웨이브고.”
실상 이런 이상 현상이 일어날 때면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었다.
원리는 그들도 알지 못한다.
아룬비다의 몬스터들은 그저 호기심으로 판단할 놈들이 아니었으니.
“그러니 괜히 여기서 뒈지기보다, 미리 가서 알린 후에 몬스터 웨이브에 대비하는 게 훨씬 낫다, 이 말이오. 알겠슈?”
“글쎄…… 나는 의견이 좀 다른데.”
“하, 그래. 곱게 말해서 알아들을 리가 없지. 어디 들어나 봅시다.”
팔짱을 끼고 고깝다는 듯 바라보는 케빈의 태도에도 셰인은 나무라지 않았다.
저들에게는 저들의 입장이라는 게 있을 것이고, 그들의 경험상 그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몬스터들의 영역 다툼이라, 많이 일어나는 일이지. 하지만 그에 따른 전조 현상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긴 하지.”
아룬비다는 던전이 아닌 자연 상태 그대로 몬스터가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지역이다.
그렇다 보니 영역 다툼이 굉장히 활발한 편인데, 셰인은 이에 관해 다양한 조사를 하고 찾아왔다.
“일차적으로 몬스터들 간의 영역 다툼의 시작은 외부에서 박힌 돌을 빼낼 때 일어나지. 그렇다면 그에 따른 대대적인 몬스터들의 이동이 감지된다.”
“그렇지.”
거기까지는 케빈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고, 셰인은 품에서 두꺼운 서류를 꺼내보였다.
“봐라. 이게 지난 한 달 동안 아룬비다에서 일어난 몬스터들의 이동 경로다.”
“……? 그건 또 어디서 난 거요?”
“수색대의 팀장이 됐는데 그저 놀고만 있었을까. 파견된 입장인 만큼 파견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 않나?”
“허.”
여태 저런 기본적인 일조차 하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케빈은 여태껏 파견 인력 중 저런 태도를 보인 인물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그 요람을 개방한 영웅 중 한 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분명 나이에 걸맞지 않는 모습이 있었을 터.
케빈은 그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특히 아울베어의 서식지를 밀어 버릴 정도의 힘을 지닌 몬스터는 아이스 트롤 정도다. 놈들의 재생력과 방어력은 아울베어조차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지. 하지만 최근 한 달 동안 아이스 트롤의 이동 경로는 여기서 멀찍이 벗어나 있다.”
“…….”
“거기에 아이스 트롤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다. 때문에 한 몬스터 무리의 서식지를 강탈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지. 다른 수색대의 보고에 따르면 바로 지난주까지 아울베어는 이곳에서 평소처럼 활동했다는 내용이 있군.”
“…….”
“또 이는 아울베어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대신 번식기에는 다르지. 지금은 아울베어가 번식기가 시작될 무렵이고, 이때의 아울베어는 최소 가족 단위로 몰려다닌다. 즉, 지금은 아이스 트롤도 쉽사리 접근하는 시기가 아니야.”
케빈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셰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전부 케빈이 자신의 선임들에게 배워 왔던 것 그대로였으니.
“그, 그럼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뭐요? 번식기가 시작될 무렵이라 사나워질 시기의 아울베어가 이렇게 급하게 사라지다니. 결국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소리 아니요?”
“누가 해결하자고 했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자그마한 단서라도 있는지 확인하자고 했지. 언제까지 저 성벽 하나만 믿고 이렇게 안일하게 움직일 생각이냐.”
“……!”
그 말에 케빈을 포함한 삼총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하,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 저 성벽에 뚫린 적은…….”
“똑같군.”
“……? 뭐가 똑같다는 거요?”
“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내고 있는 제국의 정치 귀족들과 똑같이 안일하다고 말했다.”
“……!”
“그리고 그들의 안일함이 너희에게 어떻게 돌아왔지?”
셰인의 말에 케빈은 결국 뒤통수를 해머로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내가 저 혐오스러운 정치 귀족놈들과 똑같다고?
당장이라도 저 건방진 주둥아리를 뜯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케빈은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셰인의 무표정한 저 얼굴, 저 눈빛에서는, 마치 자신들을 시험하려는 듯한 의도가 읽혀졌기에.
케빈이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저 눈빛은 자신들이 파견 인력에게 보내왔던 표정이 아니던가.
심지어 이곳에 오면서까지 셰인에게 보였던 표정이기도 했으니.
결국 삼총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지.”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1화
61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4)
나무와 바위 할 것 없이 길게 늘어진 핏자국과 혈향이 난무하는 가운데, 셰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케빈을 포함한 삼총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딱 보아하니 여러 마리의 아울베어가 전투를 일으킨 흔적이었다.
피를 제외하고도 아울베어의 깃털과 손톱 자국이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이 풍경으로 짐작하건대 보통의 혈투가 일어난 게 아닌 듯했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정작 아울베어의 시체는 단 한 구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크로군.”
“어어. 맞네, 맞어. 여기들 보라고. 발자국이 오크 놈들 거야.”
“그런데 오크 놈들이 어떻게 아울베어를 잡은 거지?”
“그러게…… 그놈들한테 아울베어는 천적일 텐데.”
고대에도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던 오크는 여전히 마력을 쓰지 못한다.
때문에 놈들이 두꺼운 지방과 근육으로 온몸을 보호하는 아울베어를 사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
물론 어마어마한 숫자의 오크들이 달려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당장 찍힌 발자국만 보자 하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조짐이 있었나.’
전생에 들었던 어느 한 기억을 떠올린 셰인은 이번 수색 작전을 여기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이대로 돌아간다.”
“아, 알겠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원…….”
어째 분위기가 싸하다 느낀 케빈이 냉큼 고개를 끄덕인 그때.
파앙─!
“으헉?!”
갑자기 소환되어 숲을 향해 날아간 셰인의 마력탄으로 인해 케빈이 주춤거렸다.
“뭐, 뭐 하는 거요?!”
“전투 준비.”
“어엇, 이봐 케빈! 저기!”
삼총사 중 가장 작은 체구를 가진 해커스의 외침에 일행들의 시선이 마력탄이 날아간 지점으로 향했다.
“우오오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올빼미의 머리를 가진 곰, 아울베어였다.
본래 낮에는 기습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이었으나, 동족의 피 냄새에 흥분한 상태였다.
“그나마 한 마리라 다행이군!”
케빈은 자신의 주무기인 장창에 마력을 두른 채 아울베어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얼마 전, 셰인의 마력탄에 형편없이 날아가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습으로 인해 반응을 못했을 뿐이다.
케빈 또한 이곳에 오기 전에는 나름 이름을 알리던 평민 출신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오러가 담긴 창이 아울베어의 눈을 향해 찌르고 들어갔다.
그 사이에도 사방에서 날아오는 마력탄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아울베어였으나, 녀석 또한 전투에 능하기는 마찬가지.
자신의 피부를 뚫지 못하는 마력탄보다는 케빈의 창이 더 위협적이라 판단하고 마력탄을 무시한 채 케빈의 창을 막았다.
뒤이어 도끼를 든 맥고완이 합세하고, 남은 해커츠는 짧은 숏소드 두 자루를 든 채 주변을 경계하면서 아울베어의 신경을 거슬리도록 만들었다.
과연 셋은 셰인에게 시험하듯 시선을 보냈던 만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있어, 노련함만 보자 하면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원들보다도 높다고 판단될 정도였다.
거기에 서로 간의 단합력도 좋아서 금세 아울베어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하핫, 보이냐, 신입? 이게 바로 선배의 위엄이다, 이거야!”
케빈도 여태 셰인에게 압도되기만 하던 감정을 풀기라도 하듯, 샤샤를 향해 그리 외쳤다.
“…….”
그런데 그때쯤, 또 한 마리의 아울베어가 퍼진 혈향에 반응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발견됐다.
스르릉─!
“어, 이런. 야, 임마 신입! 멋대로 나서지 마!”
그에 샤샤가 검을 뽑아들었다.
멀리서 케빈이 이를 만류했으나, 샤샤는 개의치 않고 다른 한 마리의 아울베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음에도 그의 움직임은 마치 깃털 같았는데, 등 뒤에서 뽑아 든 대검이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이에 아울베어가 양팔로 이를 막아 냈으나, 그 두꺼운 지방과 근육을 뚫고 뼈에 금이 가는 충격이 이어졌다.
“쿠어어어─?!”
예상치 못한 격통이 양팔에서부터 올라오자 아울베어가 뒤로 크게 물러섰다.
단언컨대 아이스 트롤이 최대 힘으로 후려치는 몽둥이도 저런 파괴력을 내지는 못하리라.
“뭐, 뭔…….”
“허어…….”
그에 자신이 아까 선보였던 찌르기와 비교되는 케빈과 힘으로는 어디서 밀려 본 적 없던 맥고완이 입을 헤─ 벌렸다.
평소 샤샤에게 벙어리라 놀려 대던 해커츠의 표정도 좋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외부에서 온 파견 인력과는 다르게 이곳에 소속된 주민들 사이에서는 힘과 실력이 최고 아니던가.
그런 측면에서 샤샤의 전투 능력은 셋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긴장 풀지 마라. 더 온다.”
셰인의 말에 뒤늦게 해커츠가 반응했다.
“3시 방향에서 둘 더 온다!”
아울베어의 수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다만 처음 등장했던 아울베어는 맥고완의 도끼에 끝내 머리가 쪼개졌고, 샤샤가 상대하던 녀석 또한 샤샤의 검에 의해 양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몰려오는 아울베어들과 전투를 이어 갈 필요는 없었다.
“후퇴한다!”
“알겠슈!”
셰인의 명령에 삼총사와 샤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냉큼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뒤에 남은 해커츠가 뒤따라오는 아울베어를 견제하려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울베어가 일정 간격 이상 거리를 좁힐 때마다 중첩된 셰인의 마력탄이 아울베어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눈이 큰 아울베어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얼굴인 점을 노린 것이다.
얼마나 추격전이 이어졌을까.
해가 질 무렵, 아울베어의 서식지인 강철의 숲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아울베어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이상한데. 여기 밖으로 놈들이 안 쫓아오다니.”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케빈이 한 혼잣말에 셰인이 답했다.
“지난 날 오크들에게 받은 습격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군.”
“아…….”
생각이 또 그렇게 이어질 수 있겠구나 싶었던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고, 셰인은 일행들을 이끌며 비두론 성으로 향했다.
* * *
“뭐, 그럼 우리 먼저 들어가 보겠슈.”
“그래.”
그래도 한 번 같이 싸워 봤기 때문일까, 케빈을 포함한 삼총사가 셰인에게 보내오는 눈빛은 이전보다 경계가 많이 헐거워져 있었다.
안면까지 전부 뒤덮은 투구를 쓴 샤샤는 가만히 셰인을 응시하다가 이내 자리를 비웠고, 홀로 남은 셰인은 보고를 위해 미미르에게 찾아갔다.
“음…….”
한참 업무에 시달리고 있던 미미르는 셰인을 보고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시지요. 듣자 하니 오늘 첫 수색 작전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어떠셨습니까?”
“나름 순조로웠습니다. 과연 북부의 전사들답게 전투에 능하더군요.”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그래도 그들이 쉽게 따르지 않았을 텐데,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미미르에게 자신이 겪은 일과 관련해 입을 열었다.
“아울베어의 서식지에 오크들이 출현했습니다.”
“아울베어의 서식지라면 강철의 숲인데…… 그곳에 오크가요? 이상하군요. 오크들은 보다 북쪽으로 올라가야 나오는데 말이죠.”
“다른 수색대의 기록을 찾아 봐도 오크들이 대규모로 이동했다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아울베어의 서식지에서 발견된 오크의 발자국 수로 봤을 때, 놈들은 대여섯 마리로 뭉쳐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으음…….”
뿐만 아니라, 아울베어를 사냥하고 떠난 것 같다는 추가적인 발언에 미미르가 양 눈썹을 좁혔다.
“고작 오크 다섯이서 아울베어를 사냥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로군요.”
“무언가 이변이 있다고 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다른 수색대에 오크들을 주의하라 명령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첫 수색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과를 가지고 오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이 정도 조언만 하더라도 미미르는 알아서 잘 해결하리라.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부탁이요? 무슨 일인지요.”
“성벽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권한을 받고 싶습니다.”
“으음…… 홀로 나가겠다는 말씀입니까?”
“예.”
실상 안 될 말이다.
이곳 아룬비다는 현재 군사 지역이나 마찬가지라,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으니.
이는 아룬비다의 주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셰인 님에게만 특혜를 준다는 선례를 남길 수는 없으니까요. 혹시 혼자 다니시려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입니다. 아룬비다는 아카샤의 대봉인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지역이지 않습니까.”
“음…… 그렇죠.”
“그와 관련해 정보를 수집해 볼 생각입니다.”
“흐음.”
셰인의 부탁에 미미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 본 적도 없는 메자이아 대수림 관련 논문으로 인해 마법사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 소년이지 않나.
혹여 이 아룬비다에서 비슷한 업적을 세운다면, 황실에서도 아룬비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부족한 지원을 더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대신, 2인 1조로 다닌다면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지요, 셰인 님.”
필요한 허락은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누구를 데리고 나가느냐인데.
당연하지만 삼총사는 대번에 얼굴을 구기며 거절 의사를 보내 왔다.
“미쳤수? 정해진 수색 지역이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데.”
“어, 미안함다. 제 목숨은 귀함다.”
“나도 굳이…….”
해 봐야 이득도 없는 고생을 뭐 하러 하겠는가.
해서 따로 담배 같은 기호품이라도 가져다 줘야 하나 생각할 때쯤.
“…….”
“샤샤?”
수색대에 신입으로 들어온 샤샤가 그런 셰인의 어깨를 치며 종이 한 장을 건네 왔다.
-메자이아 대수림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줘. 직접 듣고 싶군.
“메자이아 대수림에 관해서? 어려울 건 없지.”
강철의 숲에서 보였던 샤샤의 무위는 과연 대단했으니, 함께 데리고 갈 만했다.
그리 생각한 셰인은 다음 날부터 샤샤와 함께 수색이 끝난 후, 따로 밖으로 나와 아룬비다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2화
62화 강철의 숲, 강철의 여인 (5)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시간.
셰인은 낮에 수색대 업무를 끝내고 샤샤와 따로 나와 조사를 이어 갔다.
그간 수색대가 작성한 보고서를 미미르에게 받은 셰인은 지난번 아울베어의 서식지에서 있던 것처럼 기존에 볼 수 없던 현상이 일어난 지점을 토대로 돌아다녔다.
-뭘 확인하려는 거지?
그런 작업이 일주일가량 이어졌을 무렵.
샤샤가 셰인에게 쪽지로 그런 질문을 해 왔다.
“오크들의 이변을 확인하고 있다.”
이미 시간이 흐른 탓에 흔적이 없어진 곳도 많았다.
그럼에도 셰인은 관련된 지역이라면 빠짐없이 다니며 주변을 훑고는 그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주변 지리를 확인하고, 잠시 주변에서 마력과 교감하던 셰인이 그만 자리를 뜨려고 하자 다시 한번 샤샤가 쪽지를 내밀어 왔다.
-이럴 거면 차라리 더 깊숙한 곳까지 가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래 봐야 상대의 경계심만 부추길 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
“이렇게 알아서 찾아오도록 만들어야지. 호기심이 생기도록.”
“……!”
그때, 샤샤는 그동안 셰인이 몇 번이나 보여 왔던 마력탄이 떠오른 것을 보자마자 등 뒤에 매인 검에 손을 올렸다.
“퀴이익─!”
하지만 역시 한 발 앞서 셰인의 마력탄이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무언가를 향해 날아갔다.
“……오크?”
나무 뒤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푸른 오크 한 마리였다.
그게 얼마나 놀라웠는지 벙어리였던 샤샤가 입을 열 정도였다!
“……!”
그제야 자신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에 샤샤가 슬그머니 셰인의 눈치를 봤으나, 셰인은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오크를 바라볼 뿐이었다.
“기절했나. 흐음.”
무려 중첩된 마력탄이었기에 오크는 얼굴이 함몰되듯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
하지만 셰인은 마력탄을 풀지 않고 오히려 그 수를 더 늘렸다.
그 모습에 샤샤가 의아함을 표하기 전에 먼저 검을 뽑아 들었다.
눈앞의 소년을 그리 오랜 시간 봐 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수색대에서 보내온 시간은 나름 농후했다.
이 아룬비다는 그만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곳이니.
그런 셰인의 감이라면 일단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게 올바른 일이리라.
“크르륵!”
그러자 쓰러진 오크가 발작을 일으키더니, 방금까지 기절해 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펄떡 일어나 피로 물든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크와비타! 워나후!”
인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자신들만의 언어를 내뱉으며, 광기에 젖은 듯 놈의 몸으로부터 불그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과연 방금까지 기척 없이 뒤좇아 오던 존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샤샤가 입을 열었다.
“마력……? 오크가 어떻게?”
어지간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런 감상은 일단 뒤로 물려 두시죠.”
“……!”
셰인의 존댓말에 샤샤가 다시 한번 놀랄 겨를도 없이, 마력탄이 오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오크는 이전과 다르게 기민한 움직임으로 셰인의 마력탄을 피하고 오히려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혹한의 날씨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땅에 발자국이 새겨질 정도로 우악스러운 돌진력이었다.
“워나후!!”
동시에 허리춤에 차인 두 자루의 손도끼를 쥐어 든 오크가 달려들었으나 중간에 경계하던 샤샤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지체 없이 앞으로 나아간 긴 대검이 오크의 쌍도끼를 막아 내고, 오히려 힘으로 압도해 검을 위로 쳐올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오크의 양팔이 하늘 높이 떠오르고, 그사이에 샤샤는 저 대검이 낼 수 있는 속도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날렵하게 오크의 양팔을 잘라 냈다.
“쿠오오오오─!”
자신의 양팔에서 느껴지는 섬찟하면서도 화끈한 감각에 오크가 괴성을 내질렀으나, 뒤이어 날아온 셰인의 마력탄이 그런 오크의 머리를 후려쳤다.
“크웍, 크와비타! 워, 워나후!!”
그럼에도 오크의 투지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대로 자신의 피로 물들어 번들거리는 입을 샤샤에게 들이밀었다.
이에 샤샤가 뒤로 물러섰고, 또다시 마력탄이 날아와 오크의 머리를 강타했다.
중첩 마력탄을 몇 번이나 허락했던 터라, 오크는 끝내 얼굴이 함몰된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끝났군요.”
오크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불그스름한 기운이 사라지고서야, 셰인은 마력탄의 소환을 멈췄다.
“……마력을 쓰는 오크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자 샤샤가 셰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걸 예상했던 건가?”
“요 며칠 소수의 오크로는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마력을 쓰는지는 둘째 치고, 무언가 특별한 수단을 얻었으리라는 생각은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투구를 벗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재미있어, 너.”
“영광입니다, 2황녀님.”
샤샤…… 아니,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제국의 두 송이 꽃 중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그녀는 강철이 떠오르는 굳건한 기세로 그런 셰인을 바라봤다.
차디 찬 아룬비다의 바람이 그런 그녀의 실버블루 빛깔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 * *
“미쳤습니까, 황녀님?”
“미안.”
“미치셨습니까?”
“미안.”
“미쳐 버린 겁니까?”
“미안하다니까!”
다음 날 아침.
미미르는 서류 작업을 하던 와중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아나스타샤를 질타했다.
당연히 자신이 잘못한 일을 인지하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몇 번이고 사과를 해 봤으나, 날아오는 말이 고울 리가 없었다.
세상에.
어떤 황녀가 이 험난한 아룬비다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닌단 말인가!
물론 이와 같은 일이 몇 번 일어난 적이 있긴 했다.
그때는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비두론 성벽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내부에서였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외부를 돌아다니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당장 언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지 모르는 시기 아닙니까. 진정 이 미미르가 피 말라 죽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나가진 않았을 거야.”
“역시 미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미쳐 버린 마당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만.”
“후우.”
결국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친 거지. 오크가 마력을 썼다. 이게 미친 게 아니고 뭐가 미친 거겠어.”
“그럼 둘 다 미친 것으로 하지요.”
“…….”
질타는 거기까지 하고, 미미르의 표정은 확실히 좋지 않았다.
당장 이렇게 구박이라도 해야 황당함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혹시 그 개체만 특별한 것 아닙니까?”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정신 차려.”
적어도 최근에 서식지를 습격당한 몬스터들과 관련된 보고서를 보건대, 한두 마리가 일으킨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자 미미르는 기가 차다는 듯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미친 황녀님에게 그런 소리를 듣다니. 제가 미쳐버리겠군요.”
“진짜 미칠 것 같으니까 그놈의 미친 소리 좀 그만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다른 몬스터들의 서식지에서 일어난 이변 현상은 마력을 쓰는 오크들의 소행이로군요. 흐음…….”
그제야 현실을 직면한 미미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놈들이 무언가 준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봐야겠죠.”
“그래야겠지.”
미미르의 말처럼 오크들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이 점은 이전까지 받아 온 보고와는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미미르가 보다 심각해진 표정을 짓는 이유는, 이전의 보고에서는 오크들이 마력을 쓰지 못한다 생각했던 것이고, 지금은 아니지 않나.
오크가 마력을 쓰기 시작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몇 가지 위험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당장 최악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몬스터 웨이브지.”
“한 차례로 안 끝나는 게 문제겠군요.”
이전까지 몬스터 웨이브는 그저 자연 현상처럼 일어났다.
사시사철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아룬비다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계절이라는 게 존재한다.
얼마나 덜 춥고 더 추운지에 대한 차이일 뿐이지만, 의외로 이로 인해 다양한 몬스터들의 영역 다툼이 일어난다.
그래서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몬스터 웨이브는 예측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마저도 1년에 1, 2번을 넘지 않기에 막을 만했으나…….
“오크들이 머리를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미르의 말에 아나스타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 웨이브의 시기를 녀석들이 컨트롤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당장 오크들의 수준이 어떠했는지 당장 아나스타샤가 직접 겪어 보지 않았던가.
거기에 지금 오크들은 적은 수로 이쪽이 모르게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을 만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흐음…….”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쪽이 적들의 속셈을 알았다고 해서 이렇다 할 대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아룬비다가 그 강력한 몬스터 웨이브를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굳건한 성벽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수색대 또한 성벽이 없는 외부에서 갑작스러운 기습이 일어나면 사상자가 속출하지 않던가.
물론 전쟁을 하자면 못할 것도 없으나, 그렇게 되면 피해가 말도 안 되게 커진다.
그러니 일이 그렇게 커지기 전에 황실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테지만, 애초에 이곳 아룬비다는 제국에서 버림 받은 이들이 모이는 곳.
뭐가 예쁘다고 바로 지원이 오겠는가.
증거도 없이 대뜸 찾아가서 오크들이 마력을 깨우치기 시작했고 그들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 생각인 것 같다고 말해 봐야 진짜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게 뻔했다.
“증거를 모아야겠지, 아무래도.”
“예. 그게 가장 확실합니다.”
“흐음…….”
둘의 고민은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3화
63화 변화, 그리고 대응 (1)
늦은 밤. 아나스타샤와 미미르가 한참 회의에 들어가고 있을 무렵.
“흐아암.”
비두론 성 내부,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감옥을 지키고 있는 경계병은 멍한 표정으로 흔들거리는 촛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새는 영 조용허네잉…….”
올해로 마흔에 들어선 경비병은 오랜 시간 이곳, 비두론의 지하실에 위치한 감옥을 경비해 왔다.
그런만큼 이곳에 대한 역사도 상당히 빠삭했는데, 최근에 들어온 신입은 그런 선임 경비병의 혼잣말에 반응해 물었다.
“예전에는 안 이랬어요?”
“엉? 아. 그치. 지금이야 황녀님이 오신 뒤니까 이렇게 텅 비어 있긴 한데…… 흐흐, 어디 입 좀 털어 볼까잉?”
“어, 넵. 궁금합니다.”
안 그래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아룬비다이지 않은가.
신입은 몹시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선임을 바라봤고, 선임은 피식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공짜로?”
“에이, 설마요. 여기 쩐 있습니다.”
“흐흐, 그래. 억울하거들랑 말아라잉? 나중에 너도 너 후임한테 똑같이 말해 주면 되니까.”
“물론이죠, 헤헤.”
신입이 내미는 담배 한 개비를 받은 선임이 입술을 적시며 시동을 걸었다.
“아따, 언제였더라? 그래, 일단 황녀님이 오시기 전과 후의 차이를 말해 줘야겠지?”
아나스타샤.
제국의 두 송이 꽃이라 불리는 그녀가 아룬비다의 영주로서 오게 된지도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전까지 아룬비다는 말 그대로 무법지대라 해도 좋았다.
툭하면 살인이 일어났으며, 힘이 곧 진리고 자리였다.
다양한 파벌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서로에게 신경전을 펼쳐 댔다.
“그중에서도 이곳 지하실은 진실의 방이라고도 불렸었제잉.”
“진실의 방이요?”
“엉. 와서 묶이고 좀 몇 대 맞다 보면 없던 죄도 술술 불었거든. 아주 하루하루가 피 마르는 나날이었지.”
“와. 그럼 황녀님이 오신 이후부터 달라진 겁니까?”
“어? 어. 맞지, 맞어. 그때가 아주 죽여줬지.”
현재 아룬비다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2황녀에게 우호적이지만, 그 당시에 살아남은 주민들은 알고 있었다.
2황녀는 결코 리더십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갔으야.”
“예? 죽어요? 여기서요?”
“그지. 지금이야 너처럼 해 봐야 탈세 정도 한 놈들이나 여기서 살아남지. 예전에는 살인범이나 강간범도 툭하면 들어왔으야.”
“아…… 다른 선임분들에게 들은 것 같습니다.”
“그제. 그런데 그런 것들이 황녀님이 황녀로 보였겠어? 죽일 대상이거나 강간할 대상이었제.”
선임은 당시의 분위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땐 제국에서 황녀님을 버렸다는 말이 절로 나왔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기제. 근디야, 이게 웬걸. 본토에서 보내 온 게 꽃이라 불리는 황녀가 아니라 칼 든 망나니였네?”
“예에?”
지금으로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 신입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자라고 무시하고 덤벼든 놈들은…… 흐, 아야, 여기 지하실이 왜 그렇게 깨끗한지 아냐?”
“어, 글쎄요?”
“7년 전에는 이곳이 사시사철 아주 피 냄새가 옴팡진 곳이었다 이 말이야. 신선한 피부터 갈색으로 죽은 피까지 아주 다양했다니께.”
“허, 허어…….”
설마하니 그런 시기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신입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대된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옴마, 너도 보니까 딱 여기 알맞게 생긴 인재구마잉. 벌써 기대되지?”
“아래 있는 건 사람이 아니잖아요.”
“흐흐, 그지. 그 육시럴 놈들 때문에…….”
선임은 괜히 말하다가 말았다.
이곳에 오래 있었던 만큼 알고 지내던 주민들도 많았고, 그중에는 오크들에게 당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이들도 적잖이 있었기 때문이다.
“쯧. 마음 같아서는…… 응?”
“예?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니여. 방금 뭔가 본 것 같았는데 잘못 봤나 봐.”
“에이, 저 그런 거 안 통합니다.”
“어허이, 이놈이? 됐다, 그래. 잘못 본 거지.”
선임은 어째서인지 방금 촛불 아래 그림자가 이상하게 움직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저 야간 근무가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고 뒤이어 후배와의 수다를 이어 갔다.
* * *
지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셰인은 철창 아래, 특수한 마법 가공 처리가 된 쇠사슬로 꽁꽁 묶인 푸른 피부의 오크를 내려다봤다.
얼굴이 함몰된 상태로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는 녀석은 입에 재갈까지 물려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셰인을 바라보는 놈의 눈빛엔 아직 투지가 남아 있었다.
“눈빛은 볼만하군.”
셰인은 나름 녀석을 인정했다.
이런 투사(鬪士)는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싫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악역의 자리에 서야만 할 때가 존재하는 법이다.
“어쩌면 나도 놈들과 다르지 않을지 모르지. 아니, 근본적으로 본다면 한없이 닮아 있을지도 몰라.”
언젠가 제국을 위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달래던 어느 한 늙은 기사가 떠오른 셰인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털어 냈다.
“하지만 내 악의에 선의가 희생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나를 증오해도 좋다. 투사여.”
적어도 너는 명분이 존재하지 않나.
인류의 적으로서.
나는 그 적의 목을 베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망나니가 되어 주리라.
그런 스스로의 다짐 속에서 오리진을 일으킨 셰인은,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집어삼켜지는 오크를 바라보며 두 눈을 감았다.
깊디깊은 셰인의 정신 속에서 오크의 영혼이 잘근잘근 분해되어 갔다.
그리고 한 오크의 삶이, 통째로 셰인에게 옮겨져 들어왔다.
언젠가 있을 복수의 나날.
두 번의 패배로 이어진 종족의 암울한 미래.
그러나 이제는 없을 실패를 다짐하며 일으키는 거룩한 전쟁의 준비.
그리고.
-아파.
-힘들어.
-난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해?
-누가 좀 구해 줘.
오크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느 한 소녀의 처절한 좌절.
“이건…….”
한 영혼에 다른 영혼이 뒤섞여 있다.
아주 작은 파편, 티끌에 불과했으나 이는 결코 흔치 않는 상황.
셰인의 뇌리로 지난날 프리실라와 이야기를 나눴던 때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혹시?’
생각지 못한 가설이 떠오른다. 셰인의 머리가 급격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방금, 일반적인 정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중요한 단서를 잡았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볼일이 끝나 돌아가려던 그때, 셰인은 문득 비쩍 말리 비틀어진 오크의 시체를 바라봤다.
무언가 걸려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인한 전사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아 두려던 것뿐.
그러나 그 우연이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 냈다.
“저건…….”
오크의 목에 걸려 있는 자그마한 토템.
아룬비다의 산맥을 표현한 것인지, 산이 조각되어 있는 토템에 셰인의 시선이 끌렸다.
별다른 마력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나무 조각에 불과했으나.
셰인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셰인의 눈은 특별하다.
대상의 영혼을 볼 수 있는 만큼, 사물에도 그 영혼에 담긴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일종의 물건에 담긴 염(念)의 색깔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크가 가지고 있는 가죽 갑옷이라던가 다른 물건에서는 오크가 사용하던 것처럼 강렬한 붉은색이 눈에 띄었는데, 단 하나.
저 토템만큼은 달랐다.
색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는 특별한 일이었다.
어떤 물건이든 만든 자에 의한 염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거기에 토템이라는 물건은 무언가를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적과 같은 역할이니만큼 염이 강하게 배어 있을 수밖에 없는 물건인데.
왜 저것에서는 아무런 것도 느낄 수 없을까.
마치 색으로 가득 찬 세상에 홀로 무채색을 띠고 있는 듯했다.
“…….”
셰인은 어둠의 정령을 시켜 오크의 목에 걸려 있던 토템을 끊어 손에 쥐었다.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군.”
이제 진짜 목적은 다 끝냈기에, 그제야 셰인은 다시금 어둠 속에 파고들어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이 되자 미미르에게 지하실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보고가 들어갔다.
“흐음…….”
차가운 감옥 아래.
얼굴이 함몰된 푸른 피부의 오크가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풀썩 쓰러져 있는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오크어를 모르기에 어떻게 할지 두고 볼 생각이었습니다만…… 자결인가요?”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새벽 동안 후임과 수다를 떨었던 경비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분명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간 흔적이 없었는데, 교대자와 교대하기 전 확인차 들어가 보니 오크가 저런 상태로 죽어 있는 게 아닌가.
선임 경비병은 지금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아마 우리가 모르는 자결 방법이라도 있던 모양입니다.”
아쉽긴 했지만 타살의 흔적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마력을 쓸 수 없던 오크가 마력을 썼으니만큼, 그에 대한 부작용일지도 모를 일이리라.
미미르는 그리 판단하고 일을 그 자리에서 마무리했고, 지난 밤 아나스타샤와 주고받았던 대화를 떠올렸다.
‘특수 수색대를 더 빨리 준비해야겠군요.’
오크들이 무슨 일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미미르는 아나스타샤와 그들이 무엇을 준비 중인이 알아보기 위해, 아룬비다의 깊은 협곡으로 들어갈 특수 수색대를 만들 예정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셰인이었다.
“무력으로만 본다면 다른 사람도 많아. 하지만 셰인이 가지고 있는 기감은 나보다도 뛰어나더군.”
한때 기사의 황녀라 불리던 아나스타샤가 하는 말이다.
무력으로만 봤을 때는 이곳 아룬비다에서 가장 뛰어난 그녀가 직접 판단한 내용이었으니, 이는 믿을 만한 정보였다.
언제 몬스터들의 기습이 일어날지 모르는 아룬비다에서 셰인이 가진 기감은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력인데, 이게 또 복잡했다.
‘황녀님이 가시는 게 가장 확실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의 지휘관이 직접 가는 것은 위험도가 너무 높았다.
거기에 제국 측에 보낼 서류를 준비하려면 미미르가 직접 나서서 제국으로 향해야 하는데, 미미르를 제외하면 서류 작업을 할 사람이 아나스타샤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그 사람밖에 없군요.’
미미르는 머릿속에 떠올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4화
64화 변화, 그리고 대응 (2)
“후욱, 후욱…….”
아룬비다 주민들의 우두머리, 펠리스는 등에 덤벨을 짊어지고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문 앞에서 멈춘 발소리의 주인 또한 문도 두드리지 않고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듯했다.
이윽고 만족할 만큼의 운동량을 채우고서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덤벨을 바닥에 내려놓은 펠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 직접 행차하시는 일은 드문데. 이 덤벨보다 무거운 주제를 들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온몸에서 땀을 흘리던 펠리스가 문을 열자, 미미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 덤벨 정도의 무게로 끝났으면 저도 좋겠군요.”
“후우…… 그럼 그렇지. 일단 들어오쇼. 땀 냄새가 좀 나긴 할 건데, 피 냄새도 잔뜩 맡아 본 양반이니 괜찮겠지.”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방에 들어온 미미르는 잠시 펠리스의 방을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자기 개발에 열심이시군요.”
“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면 사람이 미치는 법이지. 그래, 내 성격은 잘 알 테니 본론부터 들어가는 게 어떨까 싶소만.”
“저야 좋습니다. 예, 본론부터 말하자면…… 오크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흐음.”
펠리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한쪽 손에 들린 아령을 까딱거렸다.
그러면서도 미미르가 하는 설명에는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싶었으나, 듣다 보니 점차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아령이 들린 손도 움직임을 멈췄다.
펠리스도 그저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닌지라, 현재 몬스터들의 서식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 수 없는 기현상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마력을 쓰는 오크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니?
그러나 이는 놀랍게도 황녀가 직접 확인한 일이라고 했다.
“특수 수색대를 편성하고 싶다라. 좋소. 어찌 됐든 나도 이곳의 주민이니 마다하지는 않도록 하지. 다만, 편성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히 듣고 싶은데.”
“팀장은 펠리스 당신에게 맡길 예정입니다. 다만, 작전지휘자도 따로 붙을 예정이지요.”
“그 외부에서 온 애송이요?”
“그렇습니다.”
“나보고 이곳에 도착한 지 보름도 채 안 된, 그것도 아직 성인식조차 치르지 못한 애송이에게 지휘권을 양도해야 한단 말이오?”
펠리스의 억양이 무거워졌다.
어찌보면 황녀의 보좌관인 미미르에게 저런 태도가 올바른가 싶겠으나, 펠리스는 결코 미미르가 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미미르 또한 펠리스에게 필요 이상의 존중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아나스타샤가 그런 걸 받아야 하는 성격이었다면 그녀의 이름값을 위해서라도 고압적으로 나왔을 테지만, 아나스타샤 본인 스스로가 그런 것을 싫어하기에 미미르와 펠리스는 이러한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펠리스는 아룬비다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인재이기도 했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작전 지휘 자문인 정도 되겠지요. 판단은 펠리스, 당신이 하면 됩니다.”
“흐음…….”
펠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애송이가 곧 이 아룬비다에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 말했던가.
두 달 안에 결과가 나올 것이라 했는데, 아직까지는 들려오는 소식이 없었다.
물론 마력을 쓰는 오크를 발견한 게 변화라면 아주 큰 변화겠지만.
녀석이 말했던 뉘양스는 이런 게 아니지 않나.
“지휘권만 내게 확실히 준다면 맡아 보도록 하겠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제국에 관련 정보를 올려야 해서 당분간 영지에는 없을 예정이거든요.”
“황녀 홀로 둬도 되겠소?”
“이번엔 각서까지 받았으니 괜찮겠지요.”
“그쪽은 황녀님을 너무 믿는 게 문제요. 쯧. 뭐, 그래도 허튼 짓을 할 분은 아니니, 그쪽이 말하는 대로 하리다.”
“예.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는 길에 선물이나 좀 가지고 와 주쇼.”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렇게 둘의 대화가 끝나고.
미미르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셰인이 머무는 거처로 향했다.
가볍게 노크를 하자, 안에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십시오.”
“예. 들어가겠습니다.”
방문을 열자마자 미미르는 놀라움에 눈이 살짝 커졌다.
“이게…… 뭐죠?”
“올해부터 작년까지의 수색대 보고서와 제가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마법입니다.”
본래라면 삭막하기 그지없을 셰인의 숙소는 마치 거대한 종이 뭉치로 이루어진 상자처럼 느껴졌다.
온 벽에는 셰인이 말한 것처럼 다양한 수색 보고서들이 붙어 있었고, 나무로 만들어진 칠판에는 아룬비다의 지도가 크게 펼쳐져 다양한 표식들이 위에 적혀 있었다.
거기에 방 중앙에서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원형 구슬 위로는 복잡한 마법 공식이 투영되어 있기까지.
잠시 그걸 지켜보던 미미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미르 또한 과거 뛰어난 마법사로 이름을 알렸던 만큼, 마법 공식을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본 건데. 어디였지?’
유쾌한 기억이 아닌 불쾌감이 동반되는 것을 봐서는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닌 듯했다.
“여, 열심이군요.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조짐은 확실히 보입니다.”
“흐음……?”
그 말에 미미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 또한 수색대의 보고서를 매일같이 받아 읽지 않던가.
오크들의 움직임이 수상하기에 몬스터 웨이브를 의심하고 있긴 했으나, 저렇게 확정짓지는 못했다.
“무슨 단서라도 잡은 게 있습니까?”
만약 잡혔다면 이는 아주 희소식이었다.
이를 근거로 황실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황실 자체에서 도움을 받기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로써 국제 사회에 알릴 기회가 생기고, 모험가들의 관심을 끌지도 모른다.
“예. 안 그래도 이에 관해 찾아뵐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자신이 표식을 남겨 둔 아룬비다의 지도로 향했다.
“보시면 오크들이 습격한 대부분의 몬스터 서식지는 번식기에 들어설 무렵입니다.”
“예. 그건 들어서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게 몬스터 웨이브와 큰 연관점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죠.”
저 현상을 봤을 때 미미르가 바로 떠올린 것은 몬스터의 조련이었다.
그러나 몬스터와 짐승은 다르다.
갓 태어난 몬스터라 해도 조련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마저도 매우 온순한 몬스터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크들이 습격한 몬스터들은 온순하기는커녕 사납기 이를 데 없는 녀석들이지 않은가.
애초에 몬스터를 조련해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다는 것부터가 기본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이곳 아룬비다에서는 상식적으로 힘든 일이다.
“예. 그래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해 봤습니다만, 이들의 행동과 연관이 있을 만한 방법으로는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품에서 꺼낸 마도 촬영기를 보였다.
마도 촬영기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허공에 투사되자, 얼마 전, 아나스타샤와 함께 상대했던 오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크의 마력 말입니까?”
“맞습니다. 이들의 마력 패턴을 공식화해서 만들어 본 게 바로 이것입니다.”
“예? 고작 마력 패턴만 봤다고 공식화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드물게 깜짝 놀란 미미르가 셰인을 바라봤다.
그건 마치 오르골의 내부도 보지 않은 채, 소리만 듣고 내부 설계도를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 복잡하진 않은 관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투박하기 그지없었죠.”
그러나 셰인의 분석력은 상식선에서 이해가 가능한 부류가 아니었다.
물론 셰인도 고등 마법처럼 복잡한 수식이라던가, 고위 기사의 마력 패턴까지 알아보지는 못한다.
정확히는 너무 오래 걸린다 해야 할까.
그러나 오크의 기억을 습득하기도 했던 덕에 이걸 공식화하는 데는 그리 어려움이 따르지는 않았다.
경악한 미미르를 뒤로하고 셰인은 굳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런데 우리 생각보다 일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공식, 어딘가 익숙하지 않습니까?”
“예. 안 그래도 보자마자 무언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만,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군요.”
“혈마법입니다.”
“……?!”
혈마법. 과거 당시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에 참석했던 미미르는 어째서 자신이 저 공식을 보자마자 불쾌감부터 떠올렸는지 곧장 알 수 있었다.
“오, 오크들이 혈마법을 쓴단 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당신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미미르의 표정이 보다 심각해졌다.
흑마법과 혈마법은 전 대륙을 통틀어서 가장 금기시 되는 마법들이었고, 그런 만큼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죽하면 마탑의 탑주들조차도 그 두 마법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지 못하는 실정 아닌가.
그러나 아직 완벽하게 소화한 것은 아니나, 고든의 영혼을 해체했던 셰인은 그 두 마법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메자이아 대수림을 탐사했던 당시, 키메라를 다루던 전 흑마법사 수장, 고든의 연구실에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허어…….”
그러고 보니 보고서에 고든이 나타났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물론 세간에는 고든이 엘프 여왕, 프리실라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의 연구실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던 미미르였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이들은 모종의 혈마법을 통해 마력을 깨우친 듯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혹, 오크들이 키메라를 쓸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어째서죠?”
“일단 흑마법은 기원후에서야 인간들에 의해 개발됐고, 현대의 혈마법의 경우 또한 그 고든이라는 작자가 기존의 혈마법을 흑마법과 접합시켜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아…….”
확실히. 셰인의 말처럼 고든은 그만한 전적을 가지고 있던 마법사였다.
미미르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흑마법과 혈마법은 기원 후 많은 개조를 거쳤다는 말이다.
“그들의 마력 패턴을 공식화한 결과를 보면 이는 원조 혈마법에 가깝습니다.”
“음…… 그렇다면 확실히 키메라까지 다가가기엔 무리가 있겠군요.”
혈마법에 대한 원리까지는 모르나, 마법으로 인한 결과 정도는 마법사들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기에 미미르도 금세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맞습니다. 원조 혈마법은 주로 육체 강화에 특화되어 있죠.”
“그렇다면 어째서 그게 몬스터 웨이브를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겁니까?”
“……말씀드렸다시피, 혈마법의 원조는 육체 강화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 이론은 몬스터의 마력 인자를 혈관에 때려 박는 일입니다.”
“그럼 설마…….”
“예. 크게 봤을 때는 몬스터를 통솔하게 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다른 곳이라면 이 이론이 먹힐지도 모른다.
무리를 이루는 몬스터야 외부에 차고 넘치니.
그러나 아룬비다에 있는 대부분의 몬스터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러지 않는 몬스터도 제법 있으나, 오크들이 찾아간 몬스터는 대개 단일개체로 돌아다니는 몬스터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몬스터의 마력 인자를 통해 동족인 것처럼 흉내를 내더라도 통솔 자체는 불가능하다.
동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다면 이빨을 들이댈 몬스터들이지 않나.
그러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몬스터들이 사나워지는 시기가 있지 않습니까.”
“……일월식(一月蝕).”
“예. 두 개의 달이 하나로 뭉치는 시기에는 유독 몬스터들이 사나워지고, 뭉쳐 다니기 시작하죠.”
끝내 미미르는 침묵에 빠졌다.
아직까지는 망상에 불과한 이론일 뿐이지만, 눈앞의 소년이 어떤 존재던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던 메자이아 대수림의 마력불안정현상을 고작 아카데미의 학과 시험에서 밝혀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들을 정도로 미미르는 우둔하지 않았다.
거기에 이론적으로, 심리적으로도 틀린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직은 보다 연구해 봐야 할 일이지만, 제 생각에는 오크들의 계획은 이럴 듯합니다. 혈마법으로 몬스터의 마력 인자를 흡수하고, 모종의 방법으로 일월식을 흉내 내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다.”
“그 웨이브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상이 되겠군요…… 한데, 도대체 오크들이 어떻게 혈마법을 쓸 수 있는 겁니까?”
그에 대해서는 셰인도 아직 추측에 불과하나, 떠올린 것은 하나 있었다.
오크의 영혼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들려왔던 한 소녀의 처절한 울음소리.
그리고 오크들에게 얽힌 역사.
아마 오크들은…….
‘어린 흡혈귀들을 다 죽인 게 아니었나.’
프리실라가 말해 주었던 북부 오크들의 기원.
그 과정에서 오크들이 어린 흡혈귀들을 습격하지 않았던가.
높은 확률로 그 흡혈귀 중 하나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오크들에게 붙잡힌 채 착취당하고 있을 터.
그러나 셰인은 그 사실을 굳이 미미르에게 말하지 않았다.
“고대에도 오크들은 마력을 다루지는 못했으나, 마력을 사물에 담는 주술은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오크 샤먼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니, 아마 그와 연관이 있을 거라 추정됩니다.”
“후…… 복잡하군요. 이를 본국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그나마 북부의 최전방에서 변화의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 내는 미미르였기에 셰인의 말을 듣고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 아룬비다를 쓰레기장쯤으로 여기고 있는 황실에서는 높은 확률로 셰인이 한 말을 믿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개소리하지 말라며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게 고민하는 미미르의 모습에, 셰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미르 님. 한 가지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미미르는 무표정으로 저런 말을 내뱉는 셰인을 바라봤다.
분명 아무런 표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마치 누군가를 향한 살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5화
65화 오크의 혈마법 (1)
특수 수색대는 빠른 시간 내에 편성되었다.
편성대 인원은 펠리스를 필두로 셰인과 수색대 삼총사인 케빈, 맥고완, 해커츠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여! 특수 수색대라니! 특수 수색대라니!!”
당연히 케빈은 길길이 날뛰었다.
특수 수색대?
이름만 봐도 뒈지기 딱 좋은 이름이지 않나.
거기에 2황녀, 아나스타샤의 직속으로 만들어진 조직이기에 빠져나갈 수도 없었을뿐더러, 펠리스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마당에 항의조차 쉽지 않았다.
삼총사는 머리를 맞대고는 자신들끼리 황녀에게 혹여 잘못한 일이 있지 않나 곰곰이 머리를 굴려 봤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자자, 발광은 거기까지 하고. 우리 작전에 브리핑 들어간다.”
펠리스의 그 한마디에 삼총사는 결국 입을 다물고 그쪽이로 시선을 옮겼다.
이 아룬비다에서 밉보이면 안 되는 대상이 딱 셋이 존재한다면, 황녀와 그녀의 보좌관 미미르, 그리고 바로 눈앞에 있는 펠리스다.
“미리 말해 두는데,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결코 외부에 흘려서는 안 된다. 알겠냐?”
“……진짜 벌써부터 목이 조여 오는구먼.”
“그러게 말임다.”
“염병 쌌다, 진짜.”
삼총사는 말은 그리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리 작전의 핵심은 북상이다.”
“북상이라면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첫 번째 목표는 오크의 근거지 탐색이다.”
“이런 미친.”
펠리스의 말에 해커스가 대뜸 욕설을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크의 근거지는 이곳 비두론 성이 세워지고 50년이 지나도록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저 날고 긴다는 황실에서도 50년 전에 실패했던 일을 고작 5명이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에 맥고완이 이어서 물었다.
“……질문 있슴다. 갑자기 왜 오크의 근거지를 찾는 검까?”
“네 말처럼 갑작스럽지만, 지랄 맞게도 오크가 마력을 쓰기 시작했댄다.”
“예?!”
삼총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크가 마력이라니?
금시초문의 사태에 삼총사가 말을 잇지 못하자 펠리스는 셰인에게 턱짓했다.
이제부터는 셰인이 설명할 차례였다.
“오크가 마력을 쓰는 것과 동시에 몬스터 웨이브를 부추기고 있다.”
이어지는 긴 설명에도 삼총사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셰인의 말을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도 황당한 정보가 한 번에 풀렸기에 도무지 뇌가 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크가 마력? 그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혈마법이라고? 오크들이 그걸 써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 지금 나보고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이러한 의문이 뒤따라오는 것도 당연했으나.
결국 이들은 머리로는 이해를 못했음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삼총사는 아룬비다의 주민임과 동시에 또 군인이기도 했다.
결국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나.
“유언장이나 남겨야겠슴다.”
“염병, 읽어 줄 인간이 있기나 하고?”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입으로는 저리 욕을 내뱉었으나, 셰인은 속으로 저 셋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누가 봐도 목숨이 걸린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2황녀의 카리스마인가.’
괜히 전생에 아룬비다의 주민들이 황녀의 반란에 동참했던 게 아니었다.
“작전의 시작은 내일 새벽부터다.”
“아직, 남은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작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고, 최소한 이건 알고 싶어서. 오크의 근거지를 찾을 만한 단서는 있습니까?”
“있다.”
그에 답한 것은 펠리스가 아니라 셰인이었다.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추적 마법으로 오크의 흔적을 쫓을 예정이지.”
“어…… 마법? 아…….”
케빈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알겠다는 듯 수긍했다.
마법은 개뿔도 모르는데 관련된 마법이 있다잖나.
‘어쩐지 몬스터들이 기습할 때면 귀신 같이 알아차린다 했더니.’
추적 마법인지 뭔지를 쓴 모양이다.
“아무튼, 단서는 충분하니 아예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앞으로 이 아룬비다의 처우가 달라질 수도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펠리스가 물어 왔다.
이는 펠리스도 미미르에게 따로 듣지 못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오크가 마력을 쓰기 시작한 사태인데 이걸 제국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까?”
셰인의 말에 펠리스는 어딘가 헛웃음을 들이켰다.
그럼 그렇지, 역시 저 나이에 이르는 생각은 저 정도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허, 물론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 한 5년 전쯤이었다면 말이야.”
펠리스의 말에 삼총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셋 중에 외부, 그것도 제국의 정황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리스는 지속적으로 외부로부터 제국의 정황을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지금 제국에서 북부를 신경 쓸 겨를은 없을 텐데.”
“당장 제국이 북부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지. 그럼 그걸 해결하면 될 일이고.”
“그게 이번 작전이랑 연관이 있다고? 글쎄. 내가 보기에 제국은 이 빌어먹을 성이 무너진다 해도 눈길 하나 안 보낼 것 같은데?”
조금 과장된 것 같지만, 실상 저 말은 사실이었다.
현재 황실의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는 황태자에게 2황녀, 아나스타샤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테니.
그러나 펠리스의 물음에도 셰인은 따로 답하지 않고 웃음만 지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일이지.”
애초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슬슬 아룬비다에 온 목적이 실행되고 있었다.
* * *
예정과 다르게 미미르는 곧바로 황실로 향하지 않았다.
셰인이 한 달이라는 시간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빠르게 떠나고 싶었다.
황실에서는 자신들이 배척하는 아나스타샤의 존재로 인해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연합국의 관심마저 무시하지는 못한다.
국가 여론이 좋지 못하면 하다못해 황실로부터 금전적 지원이라도 받지 않겠는가.
시간이 금이라는 말처럼, 조금이라도 빠르게 찾아가 여론전을 펼치고 이와 관련된 내용을 외부로 퍼뜨릴수록 찾아오는 이득은 비례해서 커질 것이다.
그럼에도 미미르가 기다린 이유는, 그만큼 셰인의 제안에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동시에 미미르는 셰인이 해 왔던 제안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리도록 두 눈을 감았다.
평소 감정 변화가 흔치 않는 미미르는 얼마 만에 자신의 심장이 이렇듯 쿵쾅거리는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냥 찾아온 게 아니었군요.’
처음에는 셰인도 다른 마법사들처럼 아룬비다의 조사를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이 혹독한 환경에 많은 이들이 포기하긴 했으나, 그런 인물들이 없진 않았으니.
셰인이 잘 해내고 있을 때도 그 생각은 변치 않았다.
물론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게 조금 기대할 만한 구석은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으로서의 기대치였다.
안 그래도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논문 하나만으로 그만한 관심을 받았던 셰인이었으니 아룬비다라고 못할 게 있겠냐는, 딱 그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제 셰인이 해 온 제안은 그런 미미르의 판단을 통째로 뒤집어엎을 수준의 폭탄 발언이었다.
- 기회가 있을 겁니다.
- 기회? 무슨 기회를 말하는 겁니까?
- 황녀님께서 다시 황실에 발을 들일 기회 말입니다.
- ……?!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여태까지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다.
주로 가문에 이름값이 없는 기사들이 혹여나 2황녀를 통해 황실과 연이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황실은 아나스타샤를 완벽하게 배척하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머지않아 시간만 축내다 파견 기간을 끝내고 돌아갔다.
혹시 셰인도 그런 인물이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해 봤으나 결과적으로는 아니었다.
애초에 셰인의 가문에서 현 황실의 분위기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고, 셰인은 다른 이들처럼 그저 몸뚱이만 와서 떡만 받아먹고 갈 위인이 아니었다.
직접 자신이 아나스타샤의 위치를 변동시킬 작정으로 찾아온 것이다.
-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이는 결코 헛된 망상이 아닙니다.
그 말이 결국 미미르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어느덧 아나스타샤를 모신 지도 15년이 다 되어 간다.
말괄량이 꼬마 아가씨에서 성숙한 한 명의 여인이 되기까지.
그녀를 곁에서 모셔 온 미미르에게 셰인의 말은 너무도 달콤했다.
다만 평소 이성적인 미미르라면 저런 말에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 아룬비다의 세월이 황실에 대한 기대감을 흔적조차 없이 앗아 가 버렸으니.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디 한번 믿어 보도록 할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지금 당장으로서는 망상에 불과한 제안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테지.
하지만.
- 이번 일이 잘 돌아간다면, 황태자를 칠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을 즐기고 있을 그 미치광이의 목에 예리한 단검이 꽂힐 예정이지요.
그 말을 내뱉은 셰인의 눈동자에 담긴 살기.
수십 명을 죽인 사형수도 보내져 오는 이곳 아룬비다를 다스리는 데 일조하고 있는 미미르다.
그런 미미르조차도, 그만큼 농후한 살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의지와 계획, 그리고 야망까지 존재하는 그 소년의 말을 들어봄직 하지 않은가.
미미르는 창가를 통해 이른 새벽부터 저 아룬비다를 향해 나아가는 셰인과 일행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이 성벽 너머로 사라졌을 때, 이후 도움이 될 만한 서류를 하나라도 더 모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6화
66화 오크의 혈마법 (2)
단잠에서 외눈을 뜬 사이클롭스는 자신을 잠에서 깨운 원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손가락 하나만 한 크기의 푸른 피부를 지닌 존재가 일곱.
이게 웬일인가.
사이클롭스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고는 양팔로 땅을 짚었다.
육중한 몸뚱이가 일어나자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가끔 있는 일이다.
저 푸른 피부의 애송이들은 가진 힘은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투지가 지나치다.
때문에 곧잘 자신들의 힘을 시험코자 이렇듯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
나름 긴 세월을 살아온 사이클롭스는 몇 번이고 저런 애송이들을 상대했고, 그때마다 그는 제법 괜찮은 식사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사이클롭스는 자신이 누워 있는 바위 아래를 두어 번 두들기고는 오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위로 막아 둔 이 땅굴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새끼가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 저 멋모르고 찾아온 불청객들을 빠르게 물리쳐야만 했다.
“의식을 거행한다!”
가장 선두에 선 푸른 피부의 오크가 그리 외치자, 뒤에 서 있던 여섯 마리의 오크들이 각자의 무기를 땅에 내려찍었다.
평소라면 십인대장인 선두의 오크만 나섰겠지만, 눈앞의 사이클롭스는 그 정도로 단순한 상대가 아니다.
얼마 전에 사냥한 아이스 트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기에, 오크들은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고 육중한 몸을 일으킨 사이클롭스를 포위해 나갔다.
가장 먼저 움직인 이는 가장 앞서 있는 십인대장이었다.
“쿠오오오오오-!! 명예를 위하여!”
“““위하여!!”””
투박한 강철 검이 사이클롭스의 발목을 노리고 들어온다.
처음에는 자신의 육체를 믿고 무시하려 했던 사이클롭스였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느새 오크 십인대장의 검에서 피어오른 불길한 핏빛 마력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마력이었고 오크들이 언제부터 저런 걸 쓰기 시작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긴 세월 아룬비다에 군림해 온 사이클롭스는 직감적으로 저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포식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클롭스가 저들을 상대로 오만할지언정 긴장을 푸는 일은 없었다.
발 구르기 한 번에 오크들이 만든 포위진이 단번에 무너졌다.
단단한 땅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여파에 의해 오크들이 단숨에 튕겨져 나갔으나, 능숙하게 낙법을 펼친 십인대장 오크가 곧바로 달려들었다.
사이클롭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몸이었으나, 그럼에도 인간들 기준으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오크의 움직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렵했다.
그러나 거대한 눈동자를 지닌 사이클롭스는 그런 십인대장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사이클롭스의 거대한 발이 십인대장의 몸을 노리고 날아왔다.
누가 봐도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격이었으나, 그럼에도 십인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 버티면 된다.
십인대장은 그런 사이클롭스의 발차기를 강철 검으로 맞섰다.
하지만 이는 십인대장의 오만이었을까.
사이클롭스의 발차기는 마치 투석기에 실려 날아오는 돌덩이와 같았다.
십인대장은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 형편없이 바위에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오크들이 달려들었다.
사이클롭스가 다시 한번 발구르기를 시전하고, 그 위력에 오크들은 또다시 땅을 굴렀으나 이번에도 곧장 일어나 재차 달려들었다.
이에 사이클롭스의 상체가 낮게 주저앉았다.
마치 폭포에 단련된 바위처럼 묵직한 사이클롭스의 주먹이 달려드는 오크들을 향해 날아갔다.
양 사이드에서 달려들던 오크들은 좌우로 펼쳐져 그 공격을 피했고, 중앙에 서 있던 두 오크만이 공중으로 도약했으나 사이클롭스도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주먹의 방향을 바꿨다.
“……?!”
십인대장처럼 자신들의 무기로 그의 공격을 막아 보려 했으나, 사이클롭스의 주먹이 모인 마력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주먹질 한 번에 두 오크가 허공에서 고깃덩이가 되어 저 멀리 날아갔다.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그럼에도 남은 네 마리의 오크는 당황한 기색 없이 사이클롭스에게 달려들었다.
“크워어어어─!”
사이클롭스의 발목에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한 오크들은 광분한 사이클롭스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감히 하찮은 오크들에게 상처를 입은 사이클롭스가 핏발 선 눈으로 오크들을 노려보며 목에 마력을 집중했다.
“크오오오오오오오─!!”
일대의 대지가 상처 입은 사이클롭스의 살기어린 피어에 반응해 낮은 진동을 토해 냈다.
그러나 살아남은 오크들은 그런 사이클롭스의 피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이클롭스가 눈가를 꿈틀거렸다.
이 아룬비다에서 사이클롭스의 피어를 정면에서 받고도 멀쩡히 서 있는 생명체는 얼마 없었다.
그 정도로 강렬한 살기라면 적어도 동요한 기색을 보여야 했는데.
그럼에도 오크들에게 그러한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명예를 위하여!!”
그때, 저 멀리 날아갔던 십인대장 오크가 비틀거리며 함성을 외쳤다.
어떻게?
사이클롭스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방금 주먹에 즉사를 면치 못한 두 오크처럼 저 십인대장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어야 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단 말인가.
하나 십인대장은 그런 사이클롭스의 의문에 답할 생각이 없는지 조각이 나 손잡이만 겨우 달린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허리춤에서 두 장검을 뽑아 들었다.
“““명예를 위하여!!”””
다시 한번 사방에서 오크들이 달려들었다.
그에 사이클롭스가 또다시 발구르기를 시전했으나.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오크들은 강력한 사이클롭스의 마력에 대항했고, 아까처럼 형편없이 나뒹구는 일 없이 곧장 사이클롭스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악─!
“크와아악!!”
다르다.
고작 그 짧은 시간에 오크들의 기세가 바뀌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사이클롭스는 혼란에 빠졌다.
다시 한번 자신의 발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오크들의 공격이 아까와 다르게 굉장히 매섭다.
처음 십인대장 오크의 마력을 보고 느꼈던 불길한 직감이 맞은 것이다.
그제야 사이클롭스는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챘다.
방금.
오크들에게 다시 한번 발목이 깊게 베이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관절 부위에 자상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마력이 단숨에 빠져나가는 감각에 일순 현기증이 느껴진 것이다.
“죽음 끝에 영광 있으리!!”
그런 사이클롭스의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오크 십인대장이 두 검을 높이 치켜든 채 도약해 왔다.
사이클롭스도 거기에 반응해 다시 한번 주먹을 들었다.
저 네 마리의 오크가 펼치는 합공도 위협적이지만, 특히 저 십인대장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가히 사이클롭스조차도 위기 의식을 느끼도록 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주먹과 투박한 두 검이 마주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까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방금 막 네 마리의 오크들에게 베인 발목으로 인해 하체에 체중이 집중되지 않은 탓에 주먹에 힘이 덜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오크 하나 날리지 못할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눈앞에 오크는 날아가기는커녕 자신의 주먹에 두 검을 꽂아 넣는단 말인가.
황급히 다른 손으로 십인대장을 날려 보내려 했으나, 사방에서 달려드는 네 마리의 오크가 그것을 방해했다.
전투가 곧, 사냥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놈들의 사투를 바라보는 다섯 쌍의 눈동자는 끝까지 그런 놈들의 사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며칠 전.
비두론 성을 떠난 특수 수색대는 셰인을 따라 며칠 동안 오크의 흔적을 뒤쫓은 결과, 사이클롭스의 서식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부터는 일반적인 수색대도 상부의 허가 없이는 결코 들어오지 않는 위험 지역이었다.
사이클롭스는 이곳 아룬비다에서도 천적이 없기로 유명하면서도, 한 번 목표로 한 사냥감을 끝까지 쫓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만 비두론 성 근처에 출몰해도 초비상에 들어갈 정도로 위협적인 몬스터이니만큼, 괜한 관심을 끌지 않는 게 최상이었다.
그런 사이클롭스가, 단 7마리의 오크들에게 사냥당하고 있었다.
“미, 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
셰인의 은폐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
일행들은 숨을 죽이고 그런 오크의 사냥을 지켜봤다.
숨소리도 조심히 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케빈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사이클롭스는 3품의 마스터도 상대하기 벅찬 존재니까.
적어도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완성한 기사가 아니라면 사이클롭스를 1:1로 상대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비두론 성에 사이클롭스가 등장하면 수십 명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상대해야 하는 게 바로 저 거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7마리의 오크가 사냥을 이어 가고 있으니.
물론 그 과정에서 2마리가 피떡이 된 채로 죽어 버렸지만, 단 7마리가 사냥한 것치고 적은 수의 피해였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펠리스도 경악 섞인 눈으로 오크들을 바라봤다.
사이클롭스는 그 뒤로도 오크 한 마리를 더 죽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끝내 집중적으로 공략당한 발목으로 인해 무릎을 꿇었고, 뒤이어 오크들의 대장처럼 보이는 쌍검의 오크에게 외눈이 찢어발겨지며 전투의 종지부가 찍혔다.
한데, 거기서부터 기이한 행위가 이어졌다.
끝내 목이 베여진 사이클롭스의 피를, 가장 앞서서 싸웠던 오크 한 마리가 들이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지들끼리 하는 의식 같은 건가?”
인간들 사이에서도 간혹 몬스터의 피를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를 지켜보니 단순히 의식만 치르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사이클롭스의 피를 마시는 대장격 오크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4마리의 오크가 그런 대장격 오크를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는 굳은 의지가 담긴 자신들만의 언어로 외쳤다.
“명예를 위하여!”
“형제여! 우르부라크에서 보자!”
“우리의 고향에서 영혼의 자유를 되찾으리라!”
앞서 오크의 기억을 차지한 셰인은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사이클롭스의 피를 들이켠 대장격 오크가 외마디 괴성을 내지르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쌍검으로 동료 오크를 향해 내지른 것이다.
그에 일행들은 깜짝 놀랐으나, 오크들은 마치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차분하게 그런 대장 오크를 상대로 물러서 각자의 무기를 쥐어 잡았다.
대장 오크의 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흉흉한 붉은빛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스스로가 사이클롭스라도 된 것마냥 어마어마한 괴력을 내뿜으며 무기를 휘두르자, 남은 네 마리의 오크들이 가까스로 그 공격을 막아 냈다.
결국 근력을 버텨 내지 못한 쌍검이 동시에 부러지고, 대장 오크는 그마저도 필요 없다는 듯 내던진 뒤에 맨 손으로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네 마리의 오크들은 눈앞의 오크가 자신들의 대장이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합공을 펼쳐 갔고, 이내 네 마리 중 유독 덩치가 큰 오크가 대장 오크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명예로운 죽음을!”
“종족에게 영광을!”
“형제에게 안식을!”
“우르부라크를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허무하리만치 죽어 버린 대장 오크.
네 마리의 오크들은 장례를 치르듯 쓰러진 대장 오크 앞에 서서 각자 다짐을 외쳤고. 최후에 대장 오크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은 오크가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고는 경건한 자세로 죽은 오크의 심장으로부터 피를 뽑아내 마시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오!!”
그러자 피를 마신 오크의 몸으로 붉은 기운이 터져 나오더니, 다시금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앞서 죽은 대장 오크와는 다른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씨발…….”
그에 케빈이 중얼거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저건 마치, 마치…….
“광신도 같군.”
펠리스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일행들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셰인을 제외하고.
그런 셰인의 눈동자는 한없이 깊게 가라앉은 채, 오크들의 의식을 지켜봤다.
이윽고 놈들은 죽은 오크들의 시신과 사이클롭스를 수습하고, 외곽에서 경계하던 오크들까지 돌아왔을 때 사이클롭스가 지키던 바위로 향했다.
방금 대장 오크의 피를 마신 오크가 저 무거운 바위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안에서는 성인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사이클롭스가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다.
물론 성체 사이클롭스가 당한 마당에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크들은 사이클롭스를 제압한 뒤, 죽은 오크들을 자루에 담듯 새끼 사이클롭스도 담아서 질질 끌고 갔다.
이윽고 오크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가 되고서야, 셰인은 은폐 마법을 풀었다.
“이, 이봐. 방금 그거 무슨 일이야?”
그러자 가장 먼저 케빈이 셰인에게 물어 왔다.
고작해야 18살의 소년이 그걸 알 수나 있나 싶겠으나, 그만큼 답답해진 것이다.
저 소년은 그 메자이아 대수림의 비밀도 풀어 낸 인물이었으니,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셰인은 그런 케빈의 질문에 답해 주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왜, 고든의 혈마법이 가진 특징이 보이는 거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죽인 조직의 고위 간부, 고든.
아직 그자의 영혼을 흡수 중인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셰인이 알아볼 정도로 오크들의 의식에서는 진하게 고든이 창조한 혈마법의 기운이 풍겼다.
일전에 아나스타샤와 마주했던 오크는 단순히 혈마력을 일으키는 수준이었고, 그 오크의 파편화된 기억 속에서도 이와 관련된 정보는 없었다.
아무튼 당장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생에는 없던 조직의 개입이 의심된다는 것.
셰인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겸, 설명을 요구하는 케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방금의 그 전투력이 평균적이진 않을 거다. 일시적인 현상일 테지.”
“그게 무슨 소리요?”
“사이클롭스와의 첫 전투 당시에, 분명 오크들은 사이클롭스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오크들이 밀려나지 않게 됐지. 그 기점이 어디서부터인지 기억하나?”
“……사이클롭스가 처음으로 오크의 공격을 허용했을 때지.”
“그래. 그때부터 놈들의 기세가 달라졌지. 이는 혈마력이 가진 여러 특징 중 하나다.”
“혈마력?”
그게 뭐냐는 듯 일행들이 시선이 섞였으나, 셰인은 조용히 이어서 설명했다.
“혈마력은 다양한 방법으로 쓰이지. 대표적으로 흑마법이 그중 하나고.”
“놈들이 흑마법을 쓴다는 거냐?”
“얼추 비슷하다.”
“……듣자 하니 메자이아 대수림에서도 흑마법사가 출현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것과 연관이 있나?”
날카로운 질문을 해 온 이는 펠리스였다.
“어쩌면.”
그에 셰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놈들이 행했던 의식에서 유사한 부분이 보이는군.”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 시점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7화
67화 오크의 혈마법 (3)
셰인의 말을 들은 펠리스가 악귀처럼 표정을 구겼다.
흑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애초에 상종을 해서는 안 되는 이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미친놈들의 의식 같은 게 아니었나?”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더군. 다른 오크들은 일시적으로 강화된 것에 불과했지만, 마지막에 동족의 피를 마신 놈은 달랐다.”
이전의 오크들이 다룬 혈마력은 다른 존재의 마력이 외부로 분출되려는 성질을 이용한 방식이었다.
때문에 그 마력이 모두 분출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겠지만.
동족의 피를 마셨던 오크는 분출되려던 마력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동족의 피를 마신 그 녀석은 사이클롭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겠지.”
“미, 미친.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한데? 아니 씨발, 누구는 수십 년 동안 단련해서 마력을 늘리는데, 고작 사냥 한 번 성공했다고 그렇게 강해진다고?”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한정 강해지는 건 아니다. 일단 다른 존재로부터 얻은 마력이기 때문에 스스로 마력의 총량을 늘리지는 못해. 거기에 같은 몬스터를 상대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개체라 하더라도 인간들마다 마력의 성질이 다르듯, 몬스터들 또한 그러할 테니. 오크 한 개체 당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거다.”
“어, 그, 그래?”
그건 생각보다 큰 페널티였다. 한 번 성장하고 나면 더 이상의 진화는 없다는 말이니.
“그리고 아까 봤던 것처럼, 처음 사이클롭스의 피를 마셨던 녀석의 희생도 감안해야지. 사이클롭스의 마력을 정화하기 위해 스스로의 생명력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동족에게 흡수되도록 만들었으니까.”
“그럼 다른 놈들도 같은 방식으로 강해질 때마다…… 끄응, 엄청 비효율적이구먼.”
“문제는 오크라는 놈들이 수를 불리는 데 이골이 난 놈들이라는 거고.”
“아, 맞다. 그것도 그렇지.”
극히 드물게 쌍둥이를 낳는 인간과 다르게, 오크는 한 번 출산할 때마다 5~6마리씩 새끼를 낳는다. 많을 때는 10마리를 동시에 출산하는 걸 생각하면 미친 번식력을 지닌 것이다.
그렇기에 저런 비인간적이고도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강해질 수 있는 것일 터.
“머리가 아파 오는군…… 저런 놈들이 때로 몰려온다라.”
그간 인류가 압도적인 숫자의 오크를 상대로 밀리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냐 없냐의 유무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오크가 저런 식으로 마력을 사용한다면, 제아무리 제국이라 하더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니, 펠리스만 하더라도 오크들의 공세에 의해 비두론 성벽이 무너지는 광경을 떠올렸는지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다른 삼총사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너희가 생각하는 미래를 만들지 않으려고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음…….”
“그, 그렇슴다.”
“마, 맞는 말이지.”
그러다 펠리스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오크들의 본거지를 안다고 해서 해결할 방안이 있나? 물론 놈들을 공격하는 데 수월해지긴 하겠지만, 이곳은 전쟁을 일으키기에 그리 좋은 지역이 아냐.”
괜히 황실이 이곳을 버려 놨겠는가.
몇 차례의 군대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제 와서 오크들의 근거지를 밝힌다고 해서 이전에 실패했던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국에서는 완벽하게 아룬비다를 포기하고, 산맥 바로 아래까지 전선을 물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면서 펠리스는 보다 안 좋은 가설을 떠올렸다.
‘그마저도 시간을 지체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하면 밀려오는 오크들에 의해 비두론 성은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사이에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생겨날 것이다.
그러면 제국에서는 끝까지 막아 보려 했다는 명분과 함께 처치 곤란한 아룬비다의 난민들에 대한 문제 또한 해결하게 되지 않겠나.
현 제국의 실태를 보아하니 이마저도 실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다. 그걸 위한 수색 작전인 거고.”
“단순히 오크의 본거지를 찾는 게 아니었어?”
케빈의 물음에 셰인은 일전에 미미르와 나눴던 이번 특수 수색대의 목표를 간결하게 설명했다.
“일차적인 목표는 오크의 본거지를 찾아내는 거고, 두 번째는 마력을 쓰는 오크를 생포, 마지막 세 번째는 오크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는 방식을 알아내는 거다.”
“쯧. 미미르 그 양반. 이렇게 무거운 부탁을 했으니 그 값은 나중에 철저히 받아야겠어. 어째 하나도 쉬운 일이 없군 그래.”
펠리스는 중얼거리듯 그리 말했으나, 그런 그의 말과 다르게 입가에는 흉흉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어찌 됐든 저런 것들을 상대로 전투를 펼쳐야 한다는 거군. 마음에 들어.”
오랜만에 투쟁심이 들끓는 느낌이었다.
삼총사는 그런 펠리스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으나, 셰인은 그의 투지를 보며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곧 질리도록 싸워야 할 거다.”
* * *
셰인의 말은 머지않아 사실로 다가왔다.
오크들과 사이클롭스의 혈투가 끝난 지 며칠이 더 지난 시점.
일행들은 오크의 뒤를 쫓은 결과, 그들이 인간들처럼 전초 기지를 만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크들의 기지는 아직 미완성인 상태였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을 초소는 만들어졌으나, 내부는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럼 정리를 해 보지.”
“내부에 오크들의 숫자는 약 80여 마리. 그중 40마리는 노예처럼 보이며, 다른 오크들에 비해 확연히 체구가 작아.”
“거기에 자잘한 노동은 놈들이 모두 도맡고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놈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 가칭 백부장이라 부르는 놈이 거주 중인 건물이 보이지.”
“우리의 목표는 그 백부장 오크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셰인의 설명에 펠리스가 물었다.
“계획은? 무작정 쳐들어가자는 말은 아닐 테고.”
특수 수색대를 책임지고 있는 펠리스답게 타당한 물음을 해 왔다.
“우리의 숫자가 적으면, 환경을 이용하면 될 일이지.”
“……?”
전생에 조직의 말단이었을 무렵.
조직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던전을 공략하고 다녔던 셰인이다.
지금보다 더 악독한 조건 속에서 얼마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신을 입증해 왔던가.
적은 숫자로 많은 수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셰인은 삼총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달리기는 잘 하나?”
“……?”
처음 특수 수색대로 뽑혔을 때 느껴졌던 불안감이 다시금 엄습해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총사는 결코 추위 때문만은 아닐 오한을 느끼며 셰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 *
장작이 타오르며 훈훈한 공기가 맴도는 넓은 방.
율랙타르는 자신의 내면에서 날뛰려는 야성을 억누르는 데 온 신경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런 그의 뒤로 늙은 오크 주술사가 다가와 율랙타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흐으…….”
“클클클. 워소드의 아들 율랙타르. 버티기 힘겨워 보이는구나.”
“의식은, 다 되어 가나?”
“그래. 준비는 끝났다. 이젠 네 녀석이 이겨 내는 일만이 남았지.”
율랙타르가 붉은빛이 감도는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자, 늙은 오크 주술사가 내미는 정체불명의 고깃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먹어라. 그리고 이겨 내라. 그리하면 너는 진정한 우리 오크의 용사가 될 것이다.”
“…….”
한 눈에 봐도 구역질이 나게 생긴 고깃덩어리다.
듣기로는 무엇의 심장을 재료로 만들었다던데.
하나 그딴 건 율랙타르가 알 바 아니었다.
으적─
율랙타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술사가 내미는 고기를 씹어 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절하듯 바닥에 쓰러졌다.
“크흐흐. 머지않았구나. 우리 종족이 자유를 되찾을 그 날이…….”
주술사는 쓰러진 율랙타르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그런 율랙타르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우리의 신은 끝내 우리를 버릴 것이고, 미래는 스스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지.”
그러면서 주술사는 자신의 목에 걸린 토탬을 손에 쥐었다.
“우르부라크를 위하여.”
신이 여태껏 자신들을 조종해 왔듯이.
우리 또한 마지막까지 신을 이용하리라.
그렇게, 주술사는 식음도 전폐한 채 율랙타르가 눈을 뜨기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이틀이라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율랙타르가 두 눈을 떴다.
“이겨 낸 모양이구나. 워소드의 아들이여.”
“……별거 없었군.”
“클클클. 그런 것치고는 땀을 제법 많이 흘린 것 같다만…… 아무래도 좋다. 준비를 갖춰라. 밖으로 나가 마지막 의식을 치러야겠다. 우리 100명의 형제들 또한 기다리고 있다.”
“다 왔나?”
“그래.”
십인대장을 넘어 백부장이 되는 일은 오크들에게 있어 영광스러운 날이다.
때문에 백인대에 소속된 모든 오크들이 모이고, 백부장이 되는 의식을 치르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한바탕 시끄럽겠군.”
“그렇겠…… 으음?”
그때, 주술사는 허옇게 뜬 눈으로 고개를 돌려 바깥 방향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소리지?”
“왜 그러지?”
“바깥이 시끄럽군. 아무래도 형제들이 불청객까지 끌고 온 모양이야.”
“좋군. 안 그래도 누워 있느라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는데.”
뿌우우우우우──!
아니나 다를까 율랙타르가 자리에서 일어서기 무섭게 적이 출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고, 둘은 동시에 밖으로 나갔다.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사이클롭스도 보인다!”
“강인한 전사, 율랙타르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를 이끌어 줄 전사! 율랙타르의 의식이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저들을 막아 내리라!”
그에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오크들 너머로, 저 멀리서 대량의 몬스터들이 달려오는 광경이 펼쳐졌다.
“몸풀기에 딱 좋은 시험대로군.”
의식도 의식이지만, 역시 율랙타르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 성미에 맞았다.
평소 자신이 쓰던 투박한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율랙타르는 이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야성을 터뜨리며 포효했다.
“쿠오오오오오─!”
“율랙타르!”
“워소드의 아들이 일어났다!”
“그에게서 강인한 영혼이 느껴진다.”
“의식을 이겨 낸 새로운 용사가 탄생했다!”
“율랙타르! 율랙타르!”
그에 혼비백산으로 움직이던 오크들이 율랙타르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율랙타르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써 내려갈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자는 누구인가! 나, 워소드의 아들 율랙타르의 곁에 설 형제여! 앞서 나아가 스스로를 증명해라!”
“우오오오오─!”
그에 오크들이 각자의 무기를 힘껏 쥐고 함성을 내지르며 몰려오는 몬스터를 향해 달려갔다.
율랙타르는 이 전투가 이제부터 자신이 써 내려갈 역사의 첫걸음이 되리라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 먼 저리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두 쌍의 눈동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주접들이 대단하군.”
한 오크에게는 역사가 될 전투가, 누군가에게는 저런 박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8화
68화 전초 기지 (1)
율랙타르는 몰려오는 몬스터 무리를 바라보며 자신의 내부에 몰아치는 투지를 다스렸다.
의식이 진행되기 전보다는 사이클롭스의 마력이 내뿜는 야성을 조절하기가 수월해졌으나, 여전히 넋 놓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무기를 들고 달려 나갈 것만 같았다.
이윽고 자신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100명의 오크들이 몬스터 무리와 부딪혔다.
처음부터 나서는 것도 효과가 좋을 테지만, 율랙타르는 나름 오크들 중에서도 현명한 오크였다.
무작정 전투만 잘해서는 안 된다.
보다 극적인 효과를 봐야만 했다.
새로운 백부장으로서 가치를 보이려면, 전장에 어려움이 있을 때 비로소 나서야만 하는 것이다.
율랙타르는 이러한 감각으로 지금도 한참 노동을 하고 있는 노예 오크의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던 율랙타르는 한쪽에서 아이스 트롤들이 날뛰는 장소를 주목했다.
아직 몬스터의 마력을 섭취하지 못한 오크는 다른 존재로부터 마력을 빼앗아 일시적으로 신체를 강화한다.
때문에 뛰어난 재생력의 마력을 지닌 아이스 트롤은 유독 오크들에게 힘을 쓰지 못하는 편이었다.
재생력을 믿고 깡으로 달려드는 전투 방식을 선호하는 아이스 트롤의 입장에서 마력을 빼앗는 오크는 치명적으로 다가왔으니.
한편, 아울베어가 몰려든 장소는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마력에 의지하기보단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싸우는 놈들이다 보니, 마력을 빼앗는다고 아이스 트롤만큼 크게 우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조금은 밀려나도 괜찮다.
어차피 이곳은 몬스터의 침입을 대비해 협곡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거점에 지어진 기지였으니. 보다 타이밍을 재다가 들어가도 괜찮으리라.
그에 슬슬 활약할 때가 찾아온 것 같다 판단한 율랙타르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율랙타르의 기감에 위협적인 마력이 감지됐다.
“후욱……!”
자신의 감에 따라 위를 바라보기 무섭게.
쿠르르릉─!!
그들의 전초 기지를 보호해 주고 있던 협곡으로부터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신의 분노가 담긴 망치가 협곡을 내려친 듯한 소리.
얼마나 대단했는지 한 번 전투에 집중하면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못하는 오크들마저 그 소리에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돌아와라! 모든 병력은 돌아오도록!”
그에 불길함을 느낀 율랙타르가 서둘러 오크들을 불러일으키려 했으나.
쿠르르르르르릉──!
다시 한번 터진 협곡의 울음소리에 오크들은 그 명령을 채 듣지 못했고, 율랙타르가 느꼈던 불길함은 곧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본래라면 든든한 방벽이 되어 그들의 전초기지를 안전하게 지켜 줬어야 할 협곡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율랙타르의 눈앞에, 훗날 종족을 위해 싸워 줘야 할 자신의 백인대 중 절반이 바위에 파묻히는 광경이 펼쳐졌다.
* * *
협곡에 의해 보호받는 오크들의 전초기지를 들어갈 수 있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무작정 은폐 마법 등을 활용해 들어간다 하더라도, 저기서 무사히 정보를 빼오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조직의 개입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물리적인 정보를 아무렇게나 내버려 뒀을 리가 없으니.
거기에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도 힘든 위치이니만큼 그런 도박수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
해서, 셰인은 차라리 적들의 시선을 한 곳에 몰리도록 만들기로 했다.
최근 아룬비다의 몬스터들은 지속적인 오크들의 습격으로 인해 오크의 냄새에 민감한 상태다.
한가득 벼르고 있을 터이기에, 셰인은 일전에 사이클롭스 서식지에서 채취한 오크의 피가 담긴 주머니를 삼총사에게 넘겼다.
“니미. 이걸 가지고 뛰라고?”
몬스터를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약재까지 넣은 데다, 냄새를 증폭시키는 마법까지 추가된 피주머니를 받자, 삼총사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그냥 뒤지라는 말이랑 뭐가 다른 검까?”
맥고완이 그 질문에, 셰인은 미리 준비해 둔 알약 3개를 그들에게 넘겼다.
“엘프의 정기를 활용한 약이다. 평소보다 생명력이 넘쳐 날 테니, 알아서 사용해라.”
“병 주고 약 주고 아주 지랄 났네.”
그러나 결국 셋은 셰인의 작전을 받아들였고, 이내 작전대로 움직였다.
다만 이 작전은 단순히 몬스터를 끌고 온다고 성립되는 게 아니었다.
성의 주민들이 밖으로 나가 빈집털이를 하려면,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성문을 굳게 닫아야 하지 않겠나.
셰인은 이를 실행하기 위해 며칠 동안 ‘파동’과 ‘증폭’ 룬 마법을 활용한 마법진을 협곡 이곳저곳에 설치하고 다녔다.
마력으로 이어진 이 마법진들의 역할은, 중심이 되는 단 하나의 마법진으로부터 전해지는 충격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중심이 되는 마법진에 충격을 가하는 것뿐.
그건 멀리 갈 필요 없이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협곡이 무너져 내리기 바로 직전.
“이거, 진짜 해도 되는 건가?”
펠리스는 밝게 빛나는 마법진 위에 서서 불안하다는 듯 셰인을 바라봤다.
“안심해라. 필요한 준비는 다 해 놨다. 몇 번이나 설명하지 않았나.”
“끄응…… 그렇긴 하다만.”
그럼에도 영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듯, 펠리스의 표정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옛날에 비슷한 상황에서 마법사 새끼가 마법진을 잘못 그렸던 적이 있었지. 그때 뒤질 뻔한 뒤로 마법사라는 작자들은 영 믿음이 안 간단 말이다.”
그에 셰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부하들도 너를 믿고서 목숨 걸고 몬스터들을 유인하러 갔다. 계속 이러면 곤란한데.”
“아─! 알겠어, 알겠다고!”
그렇게 발악하듯 소리친 펠리스는 결국 손에 들린 워 해머를 꽉 움켜쥐고는 셰인이 따로 표시해 둔 마법진을 노려봤다.
“후우…….”
정신을 집중해 마력을 응집시키자, 워 해머가 옅은 떨림을 보였다.
마력과 무기가 공명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로 선명한 마력이 코팅되어 갔다.
단순한 파괴만으로는 안 되기에 마력으로 만든 코팅을 뾰족하게 세운 펠리스는 양팔을 높이 치켜올렸다.
그리고 내려치는 순간─.
콰아아아앙─!
마치 광산 개발용 마력 폭탄 수십 개가 모여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며, 그들이 서 있던 동굴이 큰 소리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됐나?!”
“아직. 한 번 더!”
“젠장!”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흙무더기가 머리 위로 떨어졌으나, 앞서 셰인이 방호 마법을 펼쳐 둔 탓에 압사당할 일은 없었다.
그를 믿고 펠리스는 온 힘을 다해 다시 한번 워 해머를 내려쳤다.
워 해머가 마법진에 다시 한번 닿는 순간, 펠리스는 감각적으로 손에 느낌이 왔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몬스터의 골통을 박살 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그런 느낌은 펠리스를 배신하지 않았다.
단번에 무너지는 동굴 안쪽에서, 앞서 그려 둔 마법진으로부터 빛이 터져 나왔다.
셰인과 펠리스는 빛무리에 휩싸여 이내 동굴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윽고 협곡의 아래.
앞서 몬스터를 몰아 온 삼총사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협곡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친, 이게 마법사인가?”
“아님다. 펠리스 님의 힘임다.”
“아니, 병신아. 펠리스 님의 힘 하나만으로 협곡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었겠냐?”
“이 멍청이들아.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오크 놈들이 샌드위치가 되고 있는데! 으하하! 다 뒤져라!”
셋이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무너져 내리는 협곡에 의해 일어난 결과는 보고 있는 입장에서도 경악으로 돌아올 정도로 대단했다.
비교적 가파른 전초 기지의 입구에서 특히 피해가 가장 컸는데, 그 근처에서 몬스터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던 100여 마리의 오크 중 절반이 저 자연재해에 의해 한 줌의 고깃덩어리로 변해 가는 장면은 어딜 가도 다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하늘이 무너졌다!”
“신께서 우리를 버리셨는가?!”
“우리의 형제들이 협곡의 신께 노여움을 샀다!”
당연히 남은 오크들도 혼비백산에 빠져 소리를 질렀다.
삼총사는 저 오크들이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상황을 저주하고 있는 말을 하고 있을 게 뻔했으니.
화아아악-!
그때, 머지않아 셰인이 미리 그려 둔 마법진 위로 빛무리가 생성되더니, 그 안에서 셰인과 펠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다!”
“대단한 활약이었슴다, 펠리스 님!”
“으하하, 다 뒈져 버려라! 이 오크 새끼들아!”
케빈과 맥고완은 모습을 드러낸 둘을 보며 환한 안색으로 둘을 반겼고, 해커츠는 생체 망원경으로 저 멀리서 벌어지는 오크들의 소란을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으악, 씨발! 어지러워!”
예전부터 마법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은 펠리스는 텔레포트 마법으로 인해 생긴 여파에 속을 뒤집는 느낌에 헛구역질을 하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한편, 셰인은 자신의 발 아래로 펼쳐진 마법진이 이론대로 잘 작동되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속성력이 강한 이곳 아룬비다의 마력 특성상 텔레포트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게 세간의 평가였으나, 이를 극복한 셰인이 기어코 텔레포트 마법을 펼친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유용하게 쓰일 예정이었다.
그러던 셰인은 한참 오크의 전초 기지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는 해커츠에게 다가갔다.
“상황은?”
“그걸 말이라고 해?! 저놈들 아주 샌드위치가 됐다고! 으하하, 목숨 걸고 달린 보람이 있구만!”
끝내 작전에서 가장 위협적인 다수의 오크들을 전초기지 밖으로 몰아내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 일행들은 천천히 셰인의 부유 마법을 활용해 전초 기지 내부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휘유. 장난 아니네. 마법사라는 건. 어? 아악!”
해커츠가 그런 평을 남기며 앞으로 걸어갈 때, 펠리스가 그런 해커츠를 거칠게 뒤로 내동댕이쳤다.
산사태로 일어난 흙먼지와 눈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백부장 오크, 율랙타르가 그 안에서 기습을 가해 온 것이다.
찰나의 순간, 한 오크의 검이 해커츠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크와비타! 워츠바크 두 다라!”
“워이, 씨발! 뭐야?”
불길한 붉은 마력을 휘감은 백부장 오크의 등장에 삼총사가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 있던 이 오크가 벌인 사이클롭스와의 전투를 떠올리면, 자존심 상하지만 자신들이 상대할 적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에 펠리스가 워 해머를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뭐라는진 모르겠지만, 상황은 심플하군.”
“죽이지는 마라, 펠리스.”
“무얼. 사이클롭스의 공격에도 안 뒤지던 놈이니 그리 간단하게 죽지는 않겠지.”
셰인의 말에 그리 대답한 펠리스가 자세를 잡자, 율랙타르도 그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작된 전투.
그사이, 셰인은 주변을 훑어봤다.
바깥의 오크들은 아직 기지로 돌아올 정신은 없을 거다.
갑작스러운 산사태에 더해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을 테니.
그렇다면 남은 변수는 이곳에서 노동을 담당하고 있던 오크들뿐이었다.
“케빈, 맥고완, 해커츠. 너희는 저 오크들을 상대해라. 보아하니 마력을 쓰지 못하는 것 같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뭐, 그 정도야 어려울 거 없지. 알겠수다.”
“비실거리는 게 상대하긴 쉬울 것 같슴다.”
“야, 입 닥쳐. 꼭 그렇게 말하면 뭔가 일이 터진단 말이야. 가뜩이나 아까 죽어라 달려서 다리도 아파 죽겠구만.”
그렇게 삼총사가 슬슬 모이기 시작하는 오크 노예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클클클.”
지난 며칠 동안 백부장이 머물고 있던 거처에서 한 늙은 오크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걸어 나왔다.
낡은 거적때기를 입고서, 나무로 된 지팡이를 손에 쥔 오크는 재미있다는 듯 셰인 일행들을 바라봤다.
“오크 샤먼.”
셰인은 그런 오크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눈을 빛냈다.
펠리스와 대치 중이던 오크의 마력이 며칠 전과는 다르게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그사이 눈앞의 오크 샤먼과 같은 건물에 있었으니, 오크들의 의식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 녀석은 생포할 필요도 없이 영혼을 흡수해 기억을 읽어야만 했다.
‘어쩌면 전생에는 없던 조직의 개입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해서 삼총사를 부르려 할 때, 오크 샤먼이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으나 가만히 지켜봐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셰인은 지체 없이 마력탄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놈도 방비를 해 두고 있던 것인지, 붉은 보호막이 생성되어 셰인의 공격을 차단했다.
이윽고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어라 중얼거리며 지팡이로 땅을 내려찍은 놈의 주변으로,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며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뭐, 뭐야!”
“어어?”
“저, 저 새끼들 왜 저러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삼총사가 고개를 들어 시야를 다시 확보했을 때.
“크오오오!”
“크칵, 그아아아악!!”
아까까지 무기력함에 시달린 듯한 표정으로 다가오던 노예 오크들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니, 이내 일제히 포효하기 시작했다.
“에라이, 씨발. 그럼 그렇지! 일이 쉽게 흘러갈 리가 없지!”
“이 뚱땡이 새끼야! 내가 썅, 입 다물라고 했지? 아오!”
“미, 미안함다! 미안함다!”
해커츠의 막말에 맥고완이 사과하는 사이에도 삼총사는 무기를 들고 심상치 않은 오크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깡말라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노예 오크들은, 그 짧은 사이 핏줄이 파랗게 올라와 어느새 붉게 변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이지를 상실한 듯한 모습이었으나, 명백히 이쪽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69화
69화 전초 기지 (2)
“흐읍!”
“합!”
“으랴앗!”
오크들의 기세가 달라지긴 했어도, 그간 아룬비다에서 살아남은 삼총사는 차분히 대응에 나섰다.
셋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적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상대가 정체불명의 능력을 쓰는 만큼 셋은 경각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견제를 해 나갔다.
그리고 그 대처는 정답이었다.
붉은 마력을 뿜어내는 오크들은 기존 오크보다 다른 점이라고는 근력이 더 강해진 수준이었기에, 상대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에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 일격으로 죽이기보다는 부상자를 늘리는 쪽으로 선택한 그들이었으나, 오크들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야, 저 새끼들 트롤처럼 달려든다!”
“알겠슴다!”
“오케이!”
그중에서도 가장 짬이 많은 케빈은 노예 오크들의 변화를 민감하게 캐치하고는 다른 둘에게 알렸다.
오러에 감긴 무기에 당했음에도 오크들은 내상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렇게 되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일격에 적을 죽이는 방향으로 옮겨야만 했다.
셋 모두 망설임 없이 전투 스타일을 바꾸자, 오크들도 하나둘씩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크흐흐.”
그럼에도 오크 샤먼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뭔가 준비하고 있는 게 있는 모양이군.’
셰인은 오크 샤먼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유심히 지켜보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삼총사가 활약하는 전투에 마력탄을 날려 보내 적절한 서포팅을 이어 갔다.
오크 샤먼을 먼저 노리고 싶었으나, 놈은 핏빛 마력으로 만들어진 보호막 안에 있었기에 단순한 마력탄으로는 뚫는 데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한편, 펠리스도 힘겨운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분위기상 백부장으로 파악되는 오크는 과연 셰인이 말했던 것처럼 사이클롭스에 준하는 파괴력으로 펠리스를 압박해 왔다.
이전에 봤던 사이클롭스처럼 발을 굴러 자세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거나, 폭발적인 도약력으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이런 공격을 맞고도 버텼다라.’
그에 펠리스는 삼총사가 그러했듯, 먼저 적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중하게 적의 공격을 피하고 견제 용도의 공격만 간간이 날리며 시간을 끌었다.
다만 놈의 공격 하나하나가 굉장히 위협적이라는 것과, 혈마력이라는 생소한 마력을 쓰는 상대인 탓에 그만큼 움직임을 크게 해야만 했다.
“크오오오오─!”
그에 백부장 오크, 율랙타르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쥐새끼처럼 피해 다니는 펠리스에게 포효를 터뜨렸다.
혈마력이 담긴 포효는 어찌보면 사이클롭스가 내뿜던 몬스터 피어보다도 위협적으로 다가왔으나, 펠리스는 별달리 흔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한 번에 끝내야겠군. 역시 그게 맞겠어.”
여태까지 자잘한 움직임만 보이던 펠리스가 자세를 고치고 워 해머를 움켜쥐었다.
저쪽이 한 방이라면, 이쪽도 한 방으로 깔끔하게 승부를 봐야 하지 않겠나.
율랙타르는 활활 타오르듯 투지 어린 눈으로, 펠리스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단 한 방을 위한 준비를 이어 갔다.
* * *
“흐읍!”
양옆에서 들어오는 곡괭이와 송곳을 피한 케빈은 귀신 같이 그 사이에 보이는 틈을 보고 창을 내질렀다.
그에 어김없이 오크의 심장을 꿰뚫는 손맛이 느껴졌고.
케빈이 다음 동작을 위해 창을 뽑아내려 할 때, 심장이 꿰뚫렸음에도 아직 죽지 않은 오크가 케빈의 창을 붙잡았다.
“쯧.”
죽기 직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창을 으스러져라 붙잡은 오크 탓에, 상황판단을 끝낸 케빈은 창을 포기하고 허리춤에서 숏 소드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동료의 희생을 본 오크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 번에 세 마리가 케빈을 향해 달려든 순간.
그걸 지켜보고 있던 셰인이 마력탄 두 발을 날려 두 마리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그사이 남은 한 마리의 목을 벤 케빈이 다시금 달려가 창을 회수했다.
“휘유! 마법사 양반이 전장을 좀 볼 줄 아는군!”
여태까지 셰인과 함께 한 전투에서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케빈도 점차 셰인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전투가 이어지는 사이, 오크 샤먼의 추가적인 개입 없이 어느덧 노예 오크들의 수도 상당수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덧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정리되고 있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오크 샤먼은 얼굴에서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때.
“크아아아아아─!”
펠리스와 율랙타르의 전투도 어느덧 끝맺음을 보이고 있었다.
사이클롭스의 마력을 지닌 율랙타르의 공격이 하나하나 치명적이긴 했으나, 펠리스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게 적을 상대했다.
저만한 속도를 가진 적을 상대하는 게 처음이 아닌 펠리스로서는 오히려 사이클롭스보다 율랙타르를 상대하는 게 더 간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이클롭스의 마력을 가졌다고는 해도 신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내구성마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니.
서로 한 방을 노리고 싸운다면, 아직 사이클롭스의 힘에 채 적응하지 못한 율랙타르보다는 노련한 펠리스가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끝내 율랙타르의 야성이 폭발해 동작 하나하나가 커지던 그 순간, 펠리스는 몇 번의 빈틈을 흘려보낸 끝에 완벽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다.
율랙타르가 양손에 쥔 검을 앞으로 쏘아지듯 내지르는 그때.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몸을 한 바퀴 돌린 펠리스.
오러로 코팅되어 끝이 날카롭게 선 워 해머가 그대로 율랙타르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콰직!
최대한 마력을 끌어 모아 방어를 해 봤으나, 펠리스의 워해머는 그런 율랙타르의 노력이 무색하게 망설임 없이 관자놀이를 파고 들어왔다.
메긴기요르드(Megingjörð).
수십 년 동안 목숨을 걸고 연구한 펠리스의 시그니처.
비록 셰인의 힘을 빌렸으나 협곡마저 무너뜨렸던 일격.
그렇게, 긴 탐색전을 마친 전투가 끝을 고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머리 절반이 함몰되어, 율랙타르는 그대로 바닥에 몇 번이고 처박히며 결국 쓰러졌다.
혈마력의 효과 때문일까.
머리가 반이나 함몰 되고서도 율랙타르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인 듯, 율랙타르는 한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크 샤먼에게 시선을 던졌다.
“크르으으……!”
지금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는 저자라면 무언가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을 담고 바라봤을 때.
비로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오크 샤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했다, 율랙타르. 너의 이름은 우리 종족의 영웅으로서 기억될 것이다. 너의 그 힘은, 더 뛰어난 인재에게 향할 것이야. 크흐흐흐흐.”
그러나 들려온 말은 율랙타르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순간, 심장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열기를 느낀 율랙타르가 오크 샤먼의 이름을 부르짖으려던 그때.
오크 샤먼이 지팡이로 땅을 내려찍자, 피로 얼룩진 전초 기지가 불길하게 떨려 오며, 죽은 노예 오크들의 시체로부터 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대지에 스며들었다.
살아남은 노예 오크들은 두려움에 떨며 괴성을 내질렀고, 그에 심상찮음을 느낀 일행들이 이 일의 원흉이 되는 오크 샤먼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다시 한번 오크 샤먼이 지팡이를 내려찍자, 마치 혈관이 둘러싸듯 붉은 마력이 펼쳐지며 전초 기지를 집어삼켰다.
하늘이 붉은 마력에 뒤덮이기 직전.
“현혹되지 말고, 마력은 쓰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일행들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이렇다 할 반응도 채 하기 전에 핏빛 마력에 집어삼켜진 케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젠장. 이번엔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한 거지.”
세상천지가 붉다. 어찌 된 일인지 방금 전만 해도 자신의 바로 옆에서 싸우고 있던 맥고완과 해커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염병할 흑마법사. 이 새끼들은 사술 없이 뭘 하는 꼬라지가 없어.”
그러면서 케빈은 기억을 더듬어 셰인이 말했던 여러 정보들을 떠올려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흑마법은 아니라 했던가.
타인의 혈액에 녹아 있는 마력을 통해 다루는 혈마법이라고 했었다.
거기에 이 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에 셰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현혹되지 말고 마력은 쓰지 말라고 했지?’
그렇다면 일단 마력을 쓰지 않는 게 좋을 듯싶었다.
긴장된다고 무턱대고 힘을 빼는 짓도 미련한 일이었으니.
그러자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이 흐르기도 잠시.
케빈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지긋지긋한 오크 새끼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푸른 피부의 오크. 그러나 생각대로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공에서 피를 흘리며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혈마법과 관련이 있는 걸까.
케빈이 자신의 애장인 창을 들고 경계를 하고 있으려니,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 오크가 달려들었다.
“커헉?!”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달려드는 속도가 비이상적이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케빈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오크의 주먹이 정확히 케빈의 명치를 쑤시고 들어왔다.
상상 이상의 파괴력에 몇 차례나 바닥에 내뒹군 케빈은 서둘러 정신을 차려 앞을 바라보기도 잠시. 어느새 자신의 앞에 도달한 오크의 무릎팍이 짓쳐들어왔다.
“쿱!”
얼굴에 적중된 그 일격에 뇌가 흔들리듯 시야가 뒤엉켰다.
‘뭐야!’
여태껏 상대해 본 적들과 차원이 다른 속도다.
그럼에도 케빈은 섣불리 마력을 쓰지 않았다.
이상 현상.
굳이 아룬비다가 아니더라도 몇 차례 던전을 탐험해 본 이들이라면, 이상 현상에 대한 기본적인 내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던전이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평소 다혈질처럼 보이는 케빈이지만, 전투에 들어가면 그 누구보다 냉정해지는 그다.
‘저 새끼, 움직임이 뭔가 이상한데.’
오크의 무릎에 날아간 케빈은 격통에 뜨이지 않으려는 눈을 억지로 떠서 오크의 움직임을 다시 한번 지켜봤다.
또다시 이쪽을 향해 도약하는 오크의 움직임에서 이상함을 느낀 케빈은 첫 타격에 멀리 날아간 창 대신 다시 한번 허리춤에서 숏소드를 쥐어 잡고는 달려드는 오크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여지없이 그 찌르기는 빗나갔고, 다시 한번 명치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커흐, 이런 씨팍!”
또 한 번 몇 번이고 바닥을 굴렀으나, 덕분에 몇 가지 정보를 터득할 수 있었다.
‘저 새끼. 움직임에 전조가 없잖아.’
나름 뛰어난 전사인 케빈은 적의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저 오크는 그런 게 조금도 없었다.
마치 실이 끊긴 인형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느낌.
거기에.
‘이렇게 처맞고 있는데도 움직여지는 건 기적이지!’
느껴지는 격통에 비해 몸은 생각보다 자유롭게 움직여진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케빈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환영이라든가 뭐, 그런 건가. 염병할.”
마법사가 아님에도 거기까지 추측한 것은 훌륭한 일이었으나, 케빈은 더욱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 애송이. 여기까지 내다본 건가?’
마지막에 외쳤던 셰인의 한마디가 그런 케빈에게 더욱 큰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상황이 나아질 일은 없었다.
마력도 쓰지 못하는 상황에 케빈이 할 수 있는 대처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저 유일하게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셰인이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썅…….”
이젠 하다하다 증식까지 시작한 오크를 바라보며, 케빈은 각오를 다졌다.
* * *
“크흐흐…… 산제물이 알아서 걸어 들어왔구나.”
오크 샤먼은 각자의 위치에서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도끼를 내려찍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 채, 각자의 환영에 시달리며 공포에 빠진 저 표정들이란. 몇 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뿐이던가? 놀랍게도 이곳에 있는 인간들 하나하나가 오랜 시간 정순하게 마력을 쌓아 온 실력자들이지 않나.
특히 허공에 워 해머를 든 채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는 펠리스는 오크 샤먼에게 있어 최고의 재료가 될 예정이었다.
저들의 시체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 오크 샤먼은 천천히 시선을 셰인에게 향했다.
다른 일행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두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소년.
인간 마법사 또한 흔치 않은 재료다.
저 어린 인간은 죽이지 않고 살려 둔 채로, 가진 지식을 모두 토해 내야 하리라.
그런데 혹시 벌써 기절한 건가 싶은 순간.
“흥미롭군.”
“……?!”
갑자기 눈을 뜬 셰인은 정확히 오크 샤먼을 응시하고 있었다.
“토템이라. 혈마법에 주술을 접목하니 이런 식으로도 쓰이는군.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을 했다.”
“어떻게……?!”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샤먼은 셰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자신이 펼친 주술에 전혀 영향을 입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 사이에도 셰인은 혼자 중얼거리듯 재차 입을 열었다.
“본디 이만한 수준의 마법을 준비하려면 지속적으로 많은 재료가 들기 마련이지. 하지만 주술은 다르군. 준비하는 과정은 복잡하지만, 한 번 준비되면 공격을 가하는 입장에서 이보다 더 날카로운 비수는 없었겠어.”
“환영의 재료로는 주술에 걸린 대상의 마력을 이용하는 건가? 그래. 대상의 마력으로부터 기억을 읽고 실체화를 시키는군.”
“맥고완과 해커츠는 당했나. 펠리스도 마력을 사용했군. 케빈이 버티고 있는 건 좀 의왼데. 뭐, 괜찮겠지.”
앞서 주술이 발동되기 전.
셰인은 끊임없이 오크 샤먼의 주변을 관찰하며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샤먼의 행동은 달리 말하자면 이미 할 수 있는 행동은 전부 다 끝마쳤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으니.
그 결과 오크들이 죽을 때마다 미세한 혈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했고, 그것을 역추적.
전생의 기억과 고든의 기억이 가지고 있는 혈마법의 특징과 대조하며 셰인은 주술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대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직접 주술이 발동된 지금.
셰인은 일행들이 보고 있는 환영이 어떠한지 직접 볼 수 있었다.
오크를 제외하더라도 다양한 몬스터와, 인간들에게 쫓기고 있는 일행들.
그럴수록 그들이 마력을 쓰는 강도가 점차 강해졌고, 혈마력이 거기에 반응해 조금씩 환영에 물리력이 추가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환영에 불과했던 격통이 점차 실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전에 죽인 이들까지 끌고 오니. 정신이 버틸 리가 없지.”
그에 셰인은 다시금 오크 샤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걸로 나를 죽이려면…….”
그러면서 셰인은 서서히 마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를 확인한 오크 샤먼은 당혹감에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인간 마법사.
결국 마력을 쓰고야 말았구나.
하지만, 그런 샤먼의 미소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대륙은 멸망시키고 왔어야지.”
셰인의 주변으로부터 검은 마력이 피어오르기 무섭게.
오크 샤먼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시체.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전초기지를 가득 채우고도 한참을 너머 가파른 협곡의 벽면에서도, 협곡의 위에서도 시체들이 떨어져 내린다.
수없이 많은 인간의 시체에, 오크 샤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인간. 도대체 이게 무슨…….”
“너의 주술은 감당할 수 있나? 이 죽음들을.”
그에 비해 선명하다 못해 섬뜩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방에서 넘쳐 나는 시체들 사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0화
70화 전초 기지 (3)
하늘에서 시체로 이루어진 비가 쏟아져 내린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하나같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인간들의 시체다.
혈마력을 다루고 죽음에 익숙하다 자부한 오크 샤먼조차도 겪어 본 적 없는 그 수많은 죽음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어떻게 고작 한 명의 인간이 이만한 수의 죽음을 겪는단 말이냐!”
주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크 샤먼은 눈앞에 펼쳐진 이 죽음의 비가 결코 허상 따위가 아님을 진작에 간파했다.
흔들리는 것은 오크의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한계란 존재하는 법.
당연히 샤먼이 준비해 온 주술 또한 한계가 존재했다.
과도하게 많은 죽음으로 인해, 이를 환영으로서 재정립하는 샤먼의 주술 또한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샤먼이 황급히 주술에 손을 쓰기 시작했으나, 전초기지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술은 샤먼의 명령에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나지 않았다.
주술의 명령권이 강탈당한 것이다.
“어, 어떻게!”
“남의 것을 빼앗아 썼으면, 본인의 것이 빼앗기는 것도 각오를 했어야지.”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샤먼은 셰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한 거냐!”
이게 혈마력의 큰 약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술자에 의해 만들어진 마법이나 주술에 대한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것.
일반적으로 다뤄지는 마력은 명확한 소유권이 존재한다.
그러나 혈마력은 타인의 것을 빼앗아 쓰는 만큼, 자신이 쓸 수 있도록 개조하는 과정에서 마력의 소유권을 상실한다.
그렇게 되면 혈마력에 대해 더 깊은 이해도와, 거기에 쓰이는 마법 혹은 주술을 자세히 아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강탈을 당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과거 고든 또한 그러한 점을 경계하여 혈마력의 본 소유자를 생체로 가공한 마스크를 만듦으로써 대처를 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크 샤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상황에, 셰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어디 한번 감당해 보도록.”
차갑게 쓰러진 시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수백, 수천, 수만의 시체가 동시에 팔과 다리를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장면은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는 상황에도 오크 샤먼은 자신의 주술이 타인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듯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단 말이다! 어찌 한낱 인간이 위대한 선조들의 주술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시체에겐 말이 통하지 않는 법.
서서히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시체들, 이젠 수십만에 다다르는 시체들의 퀭한 눈동자가 오크 샤먼을 향해 갔다.
그 수많은 죽음을 마주한 오크 샤먼이 침을 질질 흘리며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꿈이로구나. 크허허허.”
끝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오크 샤먼은 미련하도록 자신에게서 벗어난 주술의 주도권을 빼앗으려 시도했다.
그러자 반대로 주술이 술자인 오크 샤먼을 공격을 해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셰인이 주술의 통제 권한을 샤먼에게 돌려보내자, 그간 셰인이 감당하고 있던 통제력이 해일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수많은 죽음의 환영을 감당하지 못한 주술이 오크 샤먼의 뇌를 까맣게 태우기 시작했다.
“크허허, 크헤헤헥!”
통제되지 않는 주술의 힘 앞에서 오크 샤먼은 칠공에서 피를 쏟아 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시체들 또한 정신이 무너져 가는 속도는 더더욱 부추겼다.
그런 오크의 발밑으로, 검은 이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대로 죽으면 이쪽이 곤란하지.”
어느새 셰인의 오리진에 반응한 정령이 오크 샤먼의 발밑에서 그 심연과 같은 아가리를 열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 샤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술자가 사라진 주술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혈마력으로 이루어진 돔 형태의 구가 사라지고, 어느덧 해가 지고 있는 아룬비다의 하늘이 비춰졌다.
“크헉, 이 씨벌놈의 오크 쉑…… 으잉?”
그때, 허공에서 줄곧 숏 소드를 휘두르다 넘어지기를 반복하던 케빈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어, 애송, 아니지. 뭐라 해야 돼? 아무튼 마법사 양반. 끝난 거요?”
“그래.”
그러자 케빈은 단번에 풀린 긴장으로 인해 다리가 풀려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푸, 푸하…… 씨부레 아주 뒤질 뻔했네. 아니 근데 이 양반들은 왜 쓰러져 있는 거야? 서, 설마 뒤진 건 아니겠지?”
케빈과 다르게 무심코 마력을 쓴 맥고완과 해커츠는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펠리스도 몸 이곳저곳에서 출혈을 일으킨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다행히 셰인이 주술을 금세 해제한 덕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테지만, 정신적 데미지는 상당한지 곧장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하도록 하지. 일단 일행들을 챙겨라. 나는 저 건물을 좀 수색하고 오지.”
“어어, 알겠슈. 염병…… 그 뭐냐. 고맙수다. 덕분에 목숨은 건졌네.”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거 생긴 것과 다르게 부끄럼이 많은 모양이구먼. 크흠.”
케빈은 무안한 듯 그리 말하며 쓰러진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그 또한 주술의 여파로 인해 정신적 데미지가 상당한 탓에 몸이 잘 안 움직였지만, 아룬비다의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극한의 상황에 노출되는 경우가 제법 잦은 편이었다.
제일 상황이 심각해 보이는 펠리스에게 다가가는 케빈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셰인은 그대로 백부장 오크와 오크 샤먼이 거주했던 건물로 향했다.
건물 내부는 이상한 약초향과 혈향이 동시에 퍼지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셰인은 그 두 향이 보다 강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오크 샤먼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다.
마치 흑마법사의 연구실을 보는 것처럼 불쾌한 실험의 흔적들이 즐비해 있었으나.
셰인은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을 돌리지 않고, 동물의 가죽이 쌓인 장소로 향했다.
종이를 만들 줄 모르는 오크들이 대신해서 쓰는 말린 가죽 위에 동물이나 몬스터의 피로 오크어가 적힌 두루마리였다.
그것들을 빠르게 살펴보던 셰인은 이내 원하는 두루마리를 챙기고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끄응. 이거 할 말이 없군.”
밖으로 나와 보자 펠리스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모습이었고, 케빈은 쌍코피를 흘리며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염병. 챙겨 주려는 사람한테 대뜸 주먹이나 날리고 말이야.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러게 누가 마력을 쓰라고 했나? 젠장.”
“거 미안하다니까.”
보아하니 샤먼의 주술로 인해 한가득 살기를 품고 있던 펠리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본능적으로 바로 앞에 있던 케빈에게 주먹이라도 날린 모양이다.
“두 번 미안하면 사람 죽이겠습니다, 그려. 손으로 막아서 망정이었지, 아니었음 내 골통이 부서졌을 거 아닙니까.”
“크흠…….”
할 말이 없는지 펠리스는 덩치가 큰 맥고완을 둘러메고는 셰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황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필요한 건 챙겼나?”
“그래.”
“그럼 바로 움직여 보자고. 바깥에 있는 놈들도 슬슬 기어 들어오려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서 펠리스는 한쪽에서 그 짧은 사이에 말라비틀어진 백부장 오크의 시체를 바라봤다.
“쯧. 살아 있는 오크는 밖에 있는 놈들 중에서 하나 골라 가져가야겠군. 미안하게 됐다.”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죽인 것도 아니고.”
“뭐, 그렇지?”
그렇게 떠날 채비를 갖춘 셋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맥고완과 해커츠를 둘러멘 상태로 미리 준비해 둔 밧줄을 이용해 가파른 협곡을 올라갔다.
* * *
“후우, 뒤지겠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고 작은 캠프를 차리니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정신을 잃었던 맥고완과 해커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냥감을 찾을 겸 나갔던 펠리스는 그 사이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오크 한 마리를 기절시켜 데려왔다.
“아오, 마음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네.”
“맞슴다.”
맥고완과 해커츠가 기절한 오크를 향해 이를 갈며 그리 말했으나, 그 말을 들은 케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둘에게 쏘아내듯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이고 싶은 건 너희들이다, 이 말종 새끼들아. 마력을 쓰지 말라 했는데 왜 써 가지고 뒤질 뻔하냐고.”
“아니, 그럼 오크 놈들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려들어서 날 쥐어 패는데 그걸 가만히 맞고 있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맞슴다.”
“지랄. 말이라도 못하면.”
“크흠.”
한편, 자신도 당한 게 있기에 펠리스도 한차례 헛기침을 내며 일행들의 시선을 모았다.
“아무튼, 셰인. 살아 있는 오크의 표본은 구했고, 놈들의 근거지 탐색은 어떻게 됐지?”
“관련된 정보는 입수했다. 이제 복귀만 하면 돼.”
“그럼 이건 이제 터뜨려도 되겠군.”
그러면서 펠리스는 씨익 웃으며 손에 들린 푸른 신호탄을 들고 흔들거렸다.
길었던 특수 수색 작전이 끝맺음을 알릴 신호탄이었다.
* * *
늦은 시간.
눈과 함께 달빛이 내려오는 발코니에 선 아나스타샤는 북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 그녀의 뒤로, 미미르가 나타나 그녀에게 뜨거운 홍차를 가져다 건넸다.
“미미르.”
“오늘도 나와 계십니까. 며칠째입니까. 날씨가 찹니다.”
“걱정 마라. 그 정도로 나약하진 않으니까.”
“이렇게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안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해지겠지.”
셰인과 펠리스, 그리고 케빈을 포함한 삼총사가 오크의 근거지를 찾기 위한 여성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아나스타샤는 보름 전부터 발코니에 나와 늦은 시간까지 그들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긴장되십니까.”
“글쎄. 긴장이라는 걸 언제 해 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래서 잘 모르겠어.”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곳으로 좌천되다시피 온지도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14년 동안 당연하다시피 여겨 온 황실의 풍요로운 삶이 끝났을 때에도.
일방적인 적의만 보내 오는 아룬비다의 첫날밤에도.
해일처럼 몰려오는 몬스터 웨이브 속에서조차 긴장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아나스타샤였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긴장을 하고 있을까?
아나스타샤는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파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긴장이라는 것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익숙하지 않기에 모르고 있는 것일 뿐.
“황실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런 미미르의 기습적인 질문에도 심장은 오히려 차갑게만 느껴졌다.
황실.
저 어두운 밤하늘 속에서도 빛나는 별과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긴장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미미르. 나는 그렇게 먼 미래까지 볼 줄 몰라.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사람이거든.”
이곳 아룬비다의 날씨처럼 냉철한 마음으로 여기에 서 있는 이유는, 저 먼 황실의 일 보다 최근 이곳 아룬비다에서 벌어지는 기현상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오크들이 마력을 쓰기 시작하고,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려 한다.
당장은 전조 현상에 불과했으나, 그게 현실로 다가온다면 과연 자신은 이곳 아룬비다를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위기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아나스타샤를 이곳에 서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미르는 탄식했다.
눈앞의 여인이 아장아장 걷던 시절부터 모셔 왔다.
그럼에도 그녀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것이지 않나.
셰인이라는 소년의 제안을 들었을 때, 이곳 아룬비다보다 황실을 바라보는 자신과 다르게 아나스타샤는 당장 스스로가 이끄는 이곳 아룬비다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면모를 봐 왔기 때문에 아나스타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것이 아닌가.
미미르는 혹한의 날씨에 금방 식으려 하는 찻잔에 마법을 걸어 다시금 데우고는 여전히 북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는 황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름 황실에서 보내 왔던 시간이 길었다 보니, 사람을 보는 눈이 제법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따금 제가 가늠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런 이들은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게 올려다볼 정도로.
“……그래?”
“예. 그런데 또 그런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니 웃기게도 그것과 관련된 감이 늘어난다 이 말입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남들보다 특출난 무언가가 있는 사람들. 이곳 아룬비다에서도 여럿 겪었지요. 이곳의 특성상 높은 곳까지 가지는 못했지만요.”
그러면서 미미르는 황태자를 거론하며 살벌한 살기를 감추지 않았던 그 소년을 떠올렸다.
“그런데 셰인에게서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음? 반대로 그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다고 할 줄 알았는데.”
“하하. 오히려 지금 단계의 저조차도, 그리고 제가 황실에서 봐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무엇 하나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그가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네.”
“황녀님을 보좌하는 이 미미르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믿은 그 소년 또한 믿어 보십시오.”
미미르의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보고 있던 하늘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하하, 그래. 확실히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둔 모양이야.”
“……이거, 타이밍이 제법 괜찮았군요. 하하.”
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느새 저 먼 북쪽으로부터 푸른빛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으나, 둘의 눈에는 저 푸른빛이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앞서 셰인과 그 일행들에게 작전이 완료되면 터트리라 넘겨줬던 신호탄이 별천지인 아룬비다의 하늘에서도 유독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1화
71화 왜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나 (1)
“크하, 뒤질 뻔했다!”
“따뜻한 물에 씻고 싶슴다…….”
“거기에 맥주 한 잔 걸치면 인생 끝이지. 흐흐…….”
녹초가 된 삼총사가 비투론 성벽을 넘어서자, 경계를 서거나 여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룬비다의 주민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보내 왔다.
삼총사야 밖에 자주 드나들지만, 펠리스가 직접 나서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 펠리스는 어깨에 무언가 커다란 자루를 들고 있었다.
“이봐, 케빈. 뭐 하다가 온 거야? 펠리스 님은 또 언제 나가셨고.”
그에 경계를 서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물어 오자, 케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이 걱정 없이 사는 것들아!”
“뭐래. 아주 지랄을 해요, 지랄을. 어디 몬스터라도 잡고 온 건가? 크기를 보면 얼추 오크 같은데. 펠리스 씨. 뭡니까?”
펠리스 역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좀 더 있다가 말해 주지. 그보다 황녀님은?”
“뭐 그렇게 숨길 게 있다고…… 음, 평소처럼 위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새벽에 미미르 님이 밖으로 나가긴 했는데.”
“그래? 그럼 잘 전달된 거군. 알았다. 계속 수고해라.”
“아 진짜 계속 숨길 겁니까? 예?!”
그러한 질문을 뒤로한 채, 삼총사는 먼저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갔고, 셰인과 펠리스만이 성 내부로 들어갔다.
1층에 들어가자, 평소처럼 갑옷을 입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둘을 반겼다.
“고생했다, 제군들. 그게 오크인가?”
“예. 놈은 지하에 내려놓을까요?”
펠리스의 물음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셰인. 그대는 나와 따로 얘기 좀 하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남은 펠리스마저 성의 지하로 향하고, 셰인은 아나스타샤를 따라 그녀의 집무실로 향했다.
“미미르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잘도 그런 이야기를 당사자 없는 곳에서 말하더군.”
“황녀님께서 거절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이 험한 아룬비다의 주민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 계신 분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명령을 따르는 이들만 남았으니.”
섬뜩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또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제법 힘든 청소였지.”
“그럼 또 청소해야 할 시기가 찾아오겠군요.”
“……어린 나이에 제법 말에 살기가 담겨 있군.”
미미르가 말이 맞았다.
눈앞의 이 소년이 품고 있는 살기는, 아나스타샤가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살기였다.
살기라는 것은 다양하다.
전장에서 적을 죽이기 위해 병사들이 내뿜는 가공되지 않은 거친 살기와.
1:1 상황 속 서로를 향해 남긴 비수를 위해 흐르는 정제된 살기.
혹은 정치 속에 담긴 음험한 살기 등.
그 모든 것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발현된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소년의 살기는,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감정이 없는 살기라고 해야 할까.
셰인이 의도적으로 내보이고 있는 살기는 마치…… 무기물을 죽이려는 듯한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생명체를 죽인다는 의식 없이, 그저 테이블 위에 쌓인 먼지를 치우는 듯한…… 그런 살기였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렇게 되었을까. 아니면 태생부터가 저런 살기를 가지고 살아온 걸까.
그런데 어째서 저 기운이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아나스타샤는 자신과 불과 4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이 소년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걸 굳이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듣자 하니 내 오라버니에게 비수를 날리려는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오라버니가 말이지…….”
아나스타샤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오라버니를 떠올렸다.
기묘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통 알 수 없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자신의 쌍둥이 누이와 비슷하지만, 결이 다르다.
1황녀인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는 그저 본능적으로 사람에게 호감을 이끄는 이다.
반면 오라버니인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은 올리시아와 비슷하게 미소라는 가면으로 표정을 가리고 있지만, 정작 올리시아처럼 자연스러운 미소가 아니다.
후천적으로 배워서 만들어 낸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의 소년과 자신의 오라버니가 겹쳐 보였다.
살기.
그래, 살기다.
어릴 적, 새뮤얼은 이따금 벌레를 잡아 죽일 때와 같은 표정으로 타인을 향해 그러한 시선을 보냈던 것이 기억났다.
다만 눈앞의 소년과 차이점이 있다면, 어쨌든 벌레 또한 생명체라는 것이고.
눈앞의 소년이 가진 무기질적인 살기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물으셨었지요.”
“그랬지.”
“그때 황실의 호위기사단장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죠. 그들의 목적을.”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을 흡수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지만.
관련된 정보는 아나스타샤 또한 이미 외부에 정보원으로서 파견된 램퍼트 모험단의 일렉사의 보고로 들었던 적이 있었다.
“인류만을 위한 유일한 나라. 하나로 통합된 인류의 나라. 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좋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재 정치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준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길어 봐야 3년에서 5년. 곧 계획이 진행될 겁니다.”
물론 셰인의 개입으로 인해 전생과 달리 조직과 불화가 생기긴 했으나, 새뮤얼의 계획은 고작 그 정도로는 막을 수 없다.
“흐음…… 내가 그 말을 왜 믿어야 하지?”
이쯤에서 아나스타샤는 한 번 셰인을 떠보기 위해 그런 질문을 했으나.
“여전히 제국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이곳 아룬비다보다도 더.”
“……!”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 * *
아나스타샤와의 만남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셰인은 평소처럼 방 주변으로 방음 마법과 알림 마법을 펼치고 자리에 와 앉았다.
타인의 영혼을 해체하는 과정에는 아무래도 비교적 주변을 향한 경계가 무뎌지기 때문이다.
아직 오크 샤먼의 영혼을 해체하지 않은 상황.
셰인은 복귀하는 동안 미뤄왔던 일을 하기 위해 준비를 마치고는 낡은 테이블 위에 물건들을 늘어뜨렸다.
오크 샤먼의 영혼을 살펴보기 전에 앞서, 일전에 지하 감옥에서 죽인 오크의 토템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흔히들 인간이나 이종족이 쓰는 물건에는 옅게나마 염(念)이 존재한다. 특히 토템처럼 신성시되는 물건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염이 전혀 보이지 않는 물건이라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셰인은 한참 동안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토템을 살펴봤다.
먼저 마력을 부여해 별다른 반응이 없는지 검토하고, 오리진도 마찬가지로 사용해 봤으나 역시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한참을 비슷한 방법으로 알아봤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어떨까.
물건에서 찾아볼 수 없다면 이걸 사용했던 이들에게서 찾아봐야겠다.
아직 어둠의 정령에게 붙잡혀 절규하고 있는 오크 샤먼의 영혼으로 시선을 돌렸다.
셰인의 의지를 읽은 어둠의 정령이 여태껏 여러 번 해 왔던 그 일을 능숙하게 시작했다.
“이건 좀 멀쩡하군.”
앞서 지하 감옥에서 봤던 오크와 다르게, 오크 샤먼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차이가 있는 걸까.
여태까지와 다르게 셰인은 오크 샤먼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훑어봤다.
그런 와중에, 대략 50년 전.
늙은 오크 샤먼이 아직 한참 어린 오크였던 시절.
샤먼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신전으로 향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크의 손재주를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정교하고 또 거대한 신전 앞.
그그그극─
신전에 걸맞은 거대한 석문이 천천히 열리자, 셰인은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뭐라 해야 할까.
세상에 동떨어진 존재를 범접했을 때의 느낌.
그와 동시에.
[흥미롭구나.]
‘……!!’
석문 너머로부터 정체모를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셰인은 직감했다.
이는 기억 속 샤먼에게 걸려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몰려들어와 셰인을 옥죄었다.
마치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 못해 무너지고,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자신의 방인지, 아니면 낯선 오크들의 신전인지.
이는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셰인의 영혼이 뒤흔들렸기에 일어난 일이다.
수천의 엘프와 해츨링의 마인드 로드에 간섭했을 때도 이 정도의 존재감을 느끼지는 못 했다.
마치 타락으로 인해 만들어진 질투의 인격이 세인을 의식의 수면 깊은 곳에 가뒀을 때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농후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머리로 경종이 시끄럽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셰인의 내면에서 방금 막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정령이 울부짖었다.
항거 할 수 없는 절대자로부터, 제 주인을 지키고자 사냥개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울부짖음에는 깊은 공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운명의 폭포를 거스르고 헤엄쳐 온 아해야. 너로 인해 세상의 운명이 뒤바뀌었구나.]
이어지는 질문에 셰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두려워서?
아니.
대관절 저 존재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온몸이 눈앞에 있는 거대한 존재에 의해 부들부들 떨려왔으나, 그의 머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철저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셰인은 왜 자신이 이 상황에 기시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무명에 있었을 적, 무명의 정상에 있던 존재와 마주했을 때가 바로 이러했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존재감은 오히려 그 당시 겪었을 때보다 더욱 농후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빠르게 자신의 상황과 과거에 있던 일들을 정리해 가며 지금 상황에 대해 유추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절대자. 드래곤. 대수림. 프리실라. 북부의 오크. 그리고.
‘산…… 왕?’
아룬비다에 오기 전, 프리실라에게 북부에 관해 물었을 때 들었던 산왕의 존재.
때마침 자신은 오크의 영혼을 해부하고 있지 않았나.
고대 시절, 산왕이 존재한 북부에 들어간 마지막 종족 또한 오크였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그러자 의지와 상관없이 잔뜩 굳어 버린 몸에 의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상대방으로부터 호기심이 느껴졌다.
그 간단한 감정의 편린마저도 셰인의 정신이 뒤틀리는 듯했다.
[호오. 그래, 맞다. 언젠가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었지.]
‘어떻…… 게 내게 간…… 섭한 거지……?’
[재미있구나. 나를 보고도 그런 질문을 하다니. 그래, 그 토템은 오크들이 나를 섬기기 위해 만든 것이지. 거기에 너의 존재가 운명을 바꾸었다. 이 우주의 신인 아카샤가 이를 허락했구나.]
‘아카샤……?’
다시 한번 셰인의 영혼이 크게 흔들렸다.
가져서는 안 되는 물건을 가진 것처럼, 무거운 무게감이 짓누르는 듯했다.
[아쉽지만 이 이상 말해 줄 수는 없겠구나. 그래…… 우리는 다시 한번 만날 운명이다. 너를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어. 그때가 된다면 우린 더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테지. 진정 영웅의 길을 걷고 있는 아해야. 그날이 하루빨리 오길 고대하고 있으마.]
“……!”
순식간에 거대한 존재감이 흐릿해진다.
그에 셰인이 무언가 더 묻기도 전에 산왕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어느새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셰인은 신음 한 번 흘리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진 토템을 바라봤다.
“……역시, 쉽지가 않군.”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뜻하지 않는 타이밍에 등장했다.
이게 앞으로의 계획에 무슨 차질이 생길까.
셰인으로서도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 * *
미미르가 황실에 도착한 지도 어느덧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앞서 미리 연락을 취하고 중요한 일이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흘이나 걸린 것이다.
물론 황제는 이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룬비다의 이변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긴 여전하군요.”
그리고 정작 그 만남이 성사됐을 때도, 미미르는 생각했던 것처럼 온갖 모욕만 당해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오크가 마력을 쓴다고?]
[설사 그 말이 맞다 하더라도 그 미개한 오크들이 어떻게 몬스터를 끌어모아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다는 말이오?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믿어 주던가 하지.]
[제대로 된 증거도 없는 마당에 우리 보고 병력을 일으키라는 말씀입니까?]
[혈마력이라 했소? 고든은 이미 죽었고, 흑마법 전쟁 당시에 그들의 뿌리는 뽑혔소. 그런데 하물며 인간도 아닌 마력도 쓰지 못하는 미개한 오크들이 쓴다니. 농담도 정도껏 하셔야지.]
탁- 타닥- 타다닥- 탁-
황실의 정치 귀족부터 북부의 영주들까지. 하나같이 목청을 높이며 그리 말해 왔다.
특히 북부의 영주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걸린 일이라 더더욱 눈빛이 곱지 않았다.
아룬비다의 혹독한 날씨 특성상, 군대를 일으키려면 보통 많은 물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탁- 타닥- 타다닥- 탁-
미미르는 오히려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어찌 저리 생각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게 움직이는지.
회의 당시 일정한 간격으로 손가락을 책상에 튕기던 미미르는 그리 생각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무조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증거 하나 없이, 그저 말만 번지르르하게 내뱉으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하다못해 일을 보다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조사대를 파견하겠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설마하니 황제를 눈앞에 두고도 헛소리를 내뱉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는 듯 우롱에 가까운 태도를 일관했다.
진정 제국을 걱정한다면, 50년 전 오크들의 남하 사태를 떠올린다면 저런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태도를 보고 미미르는 속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그야.
탁- 타닥- 타다닥- 탁-
“정겨운 소리네요. 그렇죠?”
그래야만 자신들의 작전대로 이야기가 흘러갈 테니.
미미르는 그리 생각하며, 늦은 밤에 자신의 객실로 찾아온 여인을 반겼다.
“어른스러운 여동생이 아직 귀여울 때 천둥소리가 무섭다며 제 방문을 두드릴 때마다 냈던 소리였죠.”
가을 보리밭을 연상케 하는 백금발의 머리카락.
숲을 떠올리게 만드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테이블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며 그리 말했다.
“그래서, 할 말이라도 있나요, 미미르 경?”
1황녀.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가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2화
72화 왜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나 (2)
처음의 시작은 소문이었다.
제국의 저 먼 북쪽.
고대 흡혈귀의 흔적이 발견됐다더라.
하는 그런 도시 전설과 같은 소문이 말이다.
고대 종족에 관해 언급되는 소문은 워낙 이 바닥에 자주 퍼지는 탓에 처음에는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소문의 출처가 메자이아 대수림의 탐사에 포문을 열었던 셰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급격한 관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모험가들의 성지인 연합국.
특히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관심이 지대했다.
이미 셰인의 이름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명했고, 벌써부터 엘프들이 주로 쓰던 정기를 활용한 마법이 상당 수준까지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소문의 출처가 정확한지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을 무렵.
또 다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그쯤이었다.
북부 아룬비다의 영주인 2황녀, 아나스타샤가 직접 확인한 일이며, 이로 인해 제국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연합국 입장에서 제국이 그 요청을 거절하든 말든 일절 상관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의 상황과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 뭐? 오크들의 남하?”
“몬스터 웨이브?”
“그런데 조사조차 안 들어갔다고? 완전 미친놈들 아니야?!”
50년 전.
당시 북부의 대부분을 오크들에게 함락당한 사건으로 인해 전 대륙의 경제가 박살이 나지 않았던가.
그때 당시에도 연합국은 대륙의 중심이었으며, 그 연합국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고 있는 제국이었는데, 그런 제국이 오크들로 인해 북부가 함락당했으니 제국의 금화 가치가 수직 하락하는 것은 당연했고.
시장 경제의 중심이 되었던 제국 금화의 가치 하락은 연합국의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때문에 그 소문에 의해 각 나라에서 파견된 타국의 귀족들이 제국 소속 귀족들에게 달려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연합국의 제국 소속 귀족들은 그와 관련된 정보를 쥐뿔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관련된 정보를 자연스럽게 얻었을 테지만, 제국 자체에서는 미미르가 찾아온 건에 대해서 그리 심각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단순히 2황녀가 황실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수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을 해 줘야 대비를 할 것 아니오!”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오!”
그러니 저렇게 타국의 귀족들이 큰 소리를 쳐도 할 말이 없던 것이다.
제국 소속의 의원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뭘 아는 게 있어야 말해 줄 텐데, 관련된 정보라고는 도시에 퍼진 소문 정도가 전부였으니.
이대로 상황이 흘러갔다간 다른 귀족들에게 무능하다는 인식만 남을 판이었다.
그러던 와중, 제국 측 의원들에게 셰인이 소속된 가문인 클레이튼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의회 소속 귀족들에게는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인 상황.
서신을 확인한 이들은 밝은 얼굴이 되어 곧장 의회로 달려 나갔다.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온다고 하오!”
“그게 정말이오? 증거라면?”
“혈마력을 쓰는 오크를 생포했고, 추가로 전투 기록이 담긴 영상을 가지고 온다 하더이다.”
“소문이 진짜였다니!”
“그럼 발표는……?”
“카비르 마탑 소속인 케이튼 장로의 이름으로 학회를 따로 연다고 했소. 장소는 당연히 메지셔널 위습이고.”
“으음……!”
그러자 의회의 분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
만약 헛소문이었더라면 그저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다름 아닌 클레이튼 가문이 직접 서신을 보내 온 내용이었으니.
소문은 사실이라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정치적인 선택지가 대폭 늘어난다.
그 말인즉슨, 귀족들의 입장에서 굉장히 위험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때문에 아직 의회에서 발언권이 얼마 없거나 가문의 힘이 약한 이들은 기회로, 이미 잃을 게 많은 이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제국의 중앙 정치 귀족 놈들은 왜 북부의 요청을 거절한 거지……?”
이만한 사태를 그저 증거 불충분으로 넘긴 제국을 향한 불신이 싹튼 순간이었다.
* * *
“자네는 언제나 날 놀라게 만드는군. 허허.”
케이튼은 몇 달 만에 보는 셰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뛰어난 인재를 환영하는 그의 입장에서 셰인은 찾아올 때마다 놀라운 발견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혈마법이라…… 최근 들어 위험한 마법이 자주 발견되는군.”
마법사로서 흑마법과 혈마법이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케이튼은 자연스럽게 걱정의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슬슬 그 마법들을 수면 위로 올려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째서지?”
남들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었으나, 케이튼은 차분히 셰인에게 되물었다.
눈앞의 소년이 가지고 있는 시야가 유별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에 대한 무지(無知)는 대처하지 못하게 만드는 재앙의 근원입니다. 인류가 처음 마력을 깨우치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들이라 하여 마력을 남발하던 시기가 있지 않았습니까?”
“으음. 확실히 그렇지. 기원 후 극초기에는 그러한 경우도 상당했다고 들었네.”
“흑마법과 혈마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대처할 수 있는 기관을 따로 만들어야겠지요.”
“흐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야. 다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걸세. 36년 전에 있었던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으니.”
“걱정 마십시오.”
셰인이 그리 말했으나, 그래도 케이튼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셰인이 방금 했던 발언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머지않아, 학회가 시작됐다.
1년에 한 번 열려도 많은 마당에 올해만 들어 두 번이나 열렸음에도, 많은 마법사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전에 셰인이 발표한 엘프들의 정기를 활용한 마법의 연구가 한참 유행 중이지 않은가.
이미 어느 정도 자신만의 이론을 세운 마법사들은 여러 귀족이나 상인의 눈에 띄어 상당한 금액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기에, 다양한 마법사들이 모여 단상 위에 선 셰인을 바라봤다.
뿐만 아니라, 드물게 마법 학회에 뜻밖의 인물들도 대거 찾아왔다.
요 며칠 소문에 시달리던 연합국의 정치 귀족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클레이튼 R 셰인입니다. 몇 달 만에 선배님들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또한, 이 자리를 찾아 주신 의원님들께도 감사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셰인은 이전과는 다르게, 먼저 자신이 가지고 온 결과물을 선보였다.
이 자리에 마법사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 클레이튼 R 셰인 마법사님께서 직접 촬영해 온 증거 영상을 시청하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이어지고 학회가 점차 어두워지더니, 이내 셰인이 준비한 수정구가 허공에 오크들과 사이클롭스의 전투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전투는 광기, 그 자체였다.
자신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철저히 적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은 과연 용맹함일까, 무모함일까.
이는 결과가 말해 주었다.
여러 오크가 죽었음에도 그들은 조금의 주저 없이 사이클롭스에게 기어코 상처를 내는 데 성공했고, 점차 전투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크 십인대장이 사이클롭스의 거대한 외눈에 검을 꽂아 넣는 것을 결정타로, 놈의 거구가 쓰러지자 학회에 모인 의원과 마법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오크가 마력을 썼다.
그것도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괴이한 방법으로, 저 거대한 사이클롭스가 쓰러진 것이다.
마력에 있어서 저항력이 있는 사이클롭스는 어지간한 마법사들에겐 상처조차 입힐 수 없는 존재이지 않나.
이에 마법사들이 깊은 침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이어지는 오크들의 의식.
죽은 사이클롭스의 피를 마신 오크가 폭주를 하더니, 여태 곁에서 함께 싸워 온 오크들은 그런 오크를 죽이고, 또다시 그 오크의 피를 마신다.
과연 혈마법다운 괴이한 의식이었다.
이윽고 영상이 끝나자, 질의 시간이 찾아왔다.
역시나 질문의 시작은 가장 마지막에 있던 의식에 관해서였다.
“놈들이 마지막에 행했던 그 의식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오?”
[차후 저희가 알아본 바, 오크들은 죽인 몬스터의 피를 섭취하는 것으로 피에 담긴 마력을 자신들의 신체에 담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몬스터의 야성 따위와 같은 것이 함께 깃들기에 그 야성을 담을 제물을 정하는 것이지요.]
“한 번 걸러 내서 쓴다는 것이군. 동족의 목숨을 걸고…….”
[맞습니다.]
그 이후로도 셰인은 아룬비다에서 얻어 낸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냈다.
오크들이 쓰는 혈마법의 방식과 그 결과, 그리고 치명적인 약점.
마지막으로 오크 샤먼이 펼쳤던 주술에 대해 말할 때는 여러 마법사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주술은 마법과 비슷한 면이 있기에, 오크 샤먼이 펼친 주술의 성능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파악했기 때문이다.
“환영에 물리력을 담는다라…… 거기에 대상이 마력을 쓰기만 하더라도 발동된다니. 조건도 너무 쉽지 않나?”
“아무리 마법이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라고는 하지만, 주술은 특히나 치명적이군.”
“이런 마법이 군대에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복잡해지지. 오히려 강하면 강할수록 당하게 되니.”
특히 무려 3품의 마스터 실력에 다다른 펠리스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마법사들에게도 공포로 다가왔다.
작금에 들어서 인간들에게 마력은 없어선 안 되는 것이기에.
마법사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할 쯤, 셰인은 또다시 준비해 둔 물건을 단상 위에 올렸다.
[이것은 오크들의 전초 기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오크어로 적혀 있는 가죽이 번역된 채로 공개되자, 글을 읽은 이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가죽에 피로 적인 내용인즉슨.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 아룬비다를 함락하겠다고 적혀 있는 게 사실이오?”
“진정 오크들과 전쟁이 벌어지는가!”
가장 먼저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은 의원들이 그리 외쳤고, 마법사들 또한 안에 적인 내용을 마법적인 시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토템을 활용한 주술로 몬스터를 조종한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인에 가깝겠어.”
“아무리 방어를 한다 하더라도 토템의 효과 반경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할 텐데.”
“토템을 옮기기만 해도 효과가 발휘되니,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지 않소?”
“끄응…… 난해하군.”
새로운 마법에 흥미를 가지고 찾아온 마법사들도 어느새 일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법사들 또한 연구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50년 전에 일어난 사태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의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현재 아룬비다는 어떤 대책을 마련 중이지?”
[안타깝게도 현재 아룬비다의 인력만으로는 오크들의 계획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보다시피 오크들은 그 방대한 숫자로 이미 아룬비다보다 더 넓은 포위망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총 184군데가 이와 같은 백인대로 구성되어 전초 기지를 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게 오크의 무서운 점이었다.
많은 숫자를 통한 인해전술.
뿐만 아니라 놈들은 토템과 고든의 혈마법을 통해 전생의 셰인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전술적인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다.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그와 관련해서 황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지요. 해서 저는 이 증거들을 가지고 이곳 연합국에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 이는 결국 제국에서 일어나는 일일세. 그 문제의 해결을 연합국에 끌어들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제국의 화폐가 연합국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는 하나, 고작 화폐를 인질로 삼아 이 위기를 넘기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결국 제국에서 먼저 나서줘야 연합국도 거기에 발 맞춰 움직인다는 것인데.
“제국은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에요.”
그때.
누군가 학회의 문을 열며 그리 말하자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가을 보리밭을 떠올리게 만드는 금발의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3화
73화 장난스러운 표정
1황녀, 제페르 디 아르샤 올리시아의 등장에 몇몇 눈치 빠른 귀족들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바로 간파해 냈다.
‘결국 황실의 정치 싸움이었나?’
현재 아룬비다는 2황녀인 아나스타샤가 맡고 있고, 그런 황녀의 요청이 거부됐다.
여기까지는 추론에 불과했지만, 1황녀까지 몸소 나선 것을 보면, 분명 황태자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리라.
올리시아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바라보며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아쉽게도 황실에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이번 건을 미뤄 두기로 했어요. 이미 메자이아 대수림으로 인해 중요성에서 밀린다 판단한 것 같더라고요.”
“…….”
마치 너희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 올리시아였지만,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한 몇몇 사람들은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하면, 황녀님께서는 우리 연합국이 아룬비다로 파견을 가길 바라시는 겁니까?”
황실의 현실을 눈치챈 인물 중 연합국의 의장인 헤일로 마일드의 질문에 올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 도움을 주신다면 우리 황실도 잊지 않겠지요.”
“글쎄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떨지.”
그런 의장의 부정적인 태도에 동감한다는 듯 다른 의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제국의 화폐 가치가 높다고는 하지만 지금부터 밑 작업을 들어간다면 어느 정도 출혈을 각오하더라도 막을 방법은 있었으니.
굳이 위험한 도박에 참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연합국이 제국의 권력에 비교적 자유롭다고는 하나, 추후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이의 코털을 건드릴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저 또한 가만히 도움만 받을 생각은 아니랍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조금만 모인다면, 저도 제 이름을 걸고 황실에 제대로 된 군대를 요청하겠습니다.”
“음…….”
이렇게 된다면 명분에서도 그림이 산다.
만일 방어전에 있어서 큰 출혈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건 제국의 이름값에 먹칠을 하는 것이지 연합국 입장에서 손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그대로 황실에 빚을 지운다면 남는 장사로 봐도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회의 인물들은 표정이 펴질 줄을 몰랐다.
기왕 제국의 원정에 참여한다면 이기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50년 전과 다른 그림이 그려질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올리시아의 의견에 동참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 혹독한 아룬비다에서 오크들과 제대로 된 전쟁을 준비할 수 있을까?
50년 전 제국이 어떻게 아룬비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떠올리면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 기술적 진보가 있었으니 완전히 같은 그림이 그려지진 않겠으나…….
반대로 말하면 오크들 또한 마력의 사용이라는 발전을 이루어 냈다.
의회의 귀족들과 마법사들이 이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유는, 이 또한 제국의 치욕으로서 역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눈치 빠른 올리시아는 저들의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차렸다.
“괜찮아요. 다들 걱정하시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 인류는 과거의 실패로부터 진보하는 존재랍니다.”
그러면서, 올리시아가 셰인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럼, 이어서 두 번째 발표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번 발표는 앞서 시연에 도움을 주신 카비르 마탑의 아르키아 J 케이튼 장로님께 감사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자 마법사들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앞서 학회를 열 때, 셰인이 한 가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가.
몇몇 마법사들은 설마하는 눈치로 셰인을 바라봤다.
셰인은 그런 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마법이 인챈트된 스크롤을 펼쳐 들었다.
마력에 반응한 스크롤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회장을 매우자, 이내 둥근 포털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테, 텔레포트?!”
마법사들의 도시, 매지셔널 위습은 텔레포트 차단 마법진이 설치된 도시다.
다만 몇몇 이들은 앞서 셰인이 언급한 케이튼의 손에 들린 스크롤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정적으로 매지셔널 위습에 걸린 텔레포트 차단 마법진을 무효화하는 스크롤이었기 때문이다.
[정기를 활용한 신개념 이동 수단, ‘라이프 텔레포트’입니다.]
그런 포털의 내부에서,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갑옷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옅은 실버블루 톤의 머리카락이 해어진 머리끈으로 묶인 채 목 아래까지 늘어졌고, 눈밭을 연상케 만드는 메마른 은빛 눈동자가 회장을 쭉 훑었다.
“오랜만이야, 올리시아.”
“어머. 이런 식으로 마주할 줄은 몰랐네요. 정말 많이 컸어요. 이 언니보다도 더.”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제국의 두 번째 꽃, 2황녀가 포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가혹한 기후만큼이나 인간의 앞길을 막는 것은 험악한 지형이다.
특히 그 두 가지가 엮여 있다면, 이는 인간이 살기에 힘든 지역이라 부른다.
작금에 들어서 인간이란 교류를 통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룬비다는 제국에서도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매년 위협적인 몬스터 웨이브를 막느라 보급품을 보내 줘야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담고 있는 아룬비다의 마력 때문에 텔레포트도 못하는 상황.
한마디로 계륵과 같은 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이동 수단만 어떻게 해결이 된다면 아룬비다도 충분히 값어치 있는 땅이 될 수 있었다.
메자이아 대수림처럼 마석이 잠들어 있지는 않으나, 그 외에 다양한 광산이 깃든 땅이었으니.
그뿐이던가.
매년 일어나는 몬스터 웨이브로부터 얻게 되는 부산물은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의 사체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일반적인 던전과 다르게, 이곳 아룬비다는 던전에 포함되지 않은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는 장소이지 않던가.
방법만 생긴다면 충분히 금싸라기로서의 가치가 있는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문제가 바로 눈앞에서 해결된 모습에 많은 이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특히 귀족들은 1황녀와 2황녀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과, 이후 명분이 그 둘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음을 눈치챘다.
반면 마법사들은 정말 셰인이 정기를 활용한 텔레포트 마법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으아아악!”
“젠장, 늦었다!”
“내, 내 연구비가, 시간이……!”
개중에는 셰인과 동일한 연구를 진행 중이던 마법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무려 황녀가 직접 그 성능을 확인한 저 마법 이상으로 뛰어난 결과를 낼 리가 없지 않나.
[보시다시피 해당 지역인 아룬비다를 중심으로 정기를 마력 코드로 재배치하는 것으로 안정성을 확보한 텔레포트가 가능해졌습니다.]
“자, 잠깐. 그게 가능한 거요? 정기를 해석해서 마력 코드로 만들었다고?”
지금 셰인이 하는 말은 마치 다른 종족의 언어를 그대로 인간의 언어로 바꿨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시간을 충분히 들인다면 그것도 가능한 일일 테지만, 고작 혼자의 힘으로, 그것도 몇 개월 만에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마법사들은 믿겨지지가 않았다.
거기에 마력이라는 것은 언어처럼 인간이 창조해 낸 것조차 아니지 않은가.
아직 베일에 싸인 게 많은 것이 마력이다.
그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마법사들을 향한 셰인의 다음 말은 그들이 뒷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많은 어려움과 시행 착오가 있었으나 그 덕에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건 무슨 아카데미 수석 입학을 교과서만 보고 해냈다는 것도 아니고.
‘이게 재능이라는 건가…….’
‘늙으면 죽어야지. 암, 저런 어린 것들에게 추월당하다니! 죽어 마땅하지!’
‘저 코드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이 떨어질 텐데……!’
실상 아룬비다처럼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버려진 지형이 얼마나 많던가.
저 텔레포트 마법진이 상용화만 된다면, 그로 인한 인센티브를 받는 것만으로도 돈방석에 앉을 수 있으리라.
많은 마법사들이 질투 혹은 선망 어린 시선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도저히 저런 나이에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아닌지라 의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앞서 라비아타도 인정한 마법사이지 않은가.
재능이라는 것이 잔인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법사들이기에, 결국 현실의 씁쓸함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셰인에 의해 열린 학회는 마무리가 지어졌고, 무려 7년 만에 상봉한 두 황녀는 따로 방을 잡아 서로를 마주했다.
“할 이야기가 많겠지요?”
“응. 그런데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네.”
백부장이 습격을 받았던 것 때문일까, 최근 오크들의 동향이 심상찮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가능한 한 이곳에서의 일정을 빠르게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아나스타샤다.
“아쉽네요. 그래도 7년 만의 만남인데.”
“어쩌겠어.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걸.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그때 해후를 풀어도 되겠지.”
“그래요…… 아무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올리시아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봤다.
이 배다른 쌍둥이 동생은 어릴 적부터 탁월한 신체 능력으로 전선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황실의 품위보다는 병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드래스보다는 갑옷을, 아름다운 코사지보다는 뜨거운 심장으로 이 제국을 지키고자 했다.
그런 아나스타샤가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아룬비다라는 척박한 땅에 버려진 것이다.
어찌 보면 경쟁자를 하나 제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올리시아는 그 사실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결국, 아나스타샤는 하나의 본보기였을 뿐이었으니까. 자신의 오라버니인 새뮤얼이 자신에게 대항하는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그래서일까.
아나스타샤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올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선 게 의외인가요?”
“응. 언제나 오라버니의 눈치만 살폈으니까. 내가 떠나던 그 순간까지도.”
아나스타샤는 딱히 올리시아를 탓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을 뿐.
그렇기에 올리시아는 전혀 기분 상한 내색 없이 미소를 지으며 홍차가 담긴 잔을 들며 말했다.
“달리기 위해 자세를 낮추듯, 저도 비슷한 상황이었거든요.”
7년 전 그날 이후. 올리시아는 가급적 몸을 사리며,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본래라면 벌써부터 움직일 생각은 없었으나,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게 없다고 판단한 새뮤얼이 방심을 했고, 로즈베리 눈동자의 소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밥상이 차려진 상태이니만큼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 좋아.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그 사람에게 따로 들은 건 없었나요?”
“나머지는 언니가 알아서 해결할 거라고 하던데? 난 와서 듣고 결정만 하라고 했어.”
“참…… 기껏 사람을 불러 놓고 해결은 전부 이쪽에게 맡겨 두는 건가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올리시아의 표정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재밌었던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
하나부터 열까지 셰인이 모두 손을 쓰려고 했다면 올리시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감이 들었을 터.
그러나 셰인은 판만 깔아 두고 나머지는 올리시아에게 맡겨 놨다.
마치 탐스러운 요리 재료들을 눈앞에 내놓고 마음껏 요리해 보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재료들을 망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일을 키워 보도록 하죠.”
그러면서 올리시아는 빙긋 웃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언제였을까.
아주 어릴 적, 자신을 괴롭히던 새뮤얼에게 복수를 하기 직전의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위치는 너무 많이 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4화
74화 버린 자와 선택하는 자
테라스로부터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한 금발의 청년이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그 모습엔 범상치 않은 자태가 흘러나오니, 누가 보더라도 그가 고귀한 혈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청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비교적 어두운 방으로 이어졌다.
“그렇군요. 저의 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라…….”
“예. 현재 매지셔널 위습에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흐음…….”
청년,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은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마치 누군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움직임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1황녀와 2황녀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미리 계획된 일임은 맞는 것 같습니다.”
“누구일지 궁금하군요. 제 몸 지키기 바빴던 첫째 누이와 추락한 둘째 누이를 움직이게 만든 이가…….”
“매지셔널 위습에서 학회를 연 인물은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이라고 합니다.”
“아아. 그 상인 가문의 장남입니까. 이번에도 일을 화려하게 시작했군요.”
혹시 그 소년이 이번 일의 배후일까 싶었지만, 새뮤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18살에 불과한 소년이 두 황녀를 직접 움직였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의 가문인 클레이튼의 가주가 아니고서야.
그러나 반대로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저지먼트 기사단에서 그 가문과 접촉했다고 들었는데. 별다른 성과는 없었답니까?”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으로 인해 바쁘다는 답변만 돌아오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상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연합국의 지하도시에 똬리를 틀게 만들 예정이었다.
황실에서 밀어 주고 클레이튼 가문의 크기를 생각하면 일전에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살리에르 백작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올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그런 클레이튼의 가주에게 메자이아 대수림이라는 더 큰 떡이 놓여져 있는 마당에, 위험성이 다분한 지하도시는 그리 매력적인 요리가 아닐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대니얼 단장이 실망하고 있겠군요.”
“…….”
까악─ 까악─
그때.
테라스 난간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새뮤얼은 익숙하다는 듯 그런 까마귀의 발치에 놓인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참…… 요즘은 그자들과 위치가 바뀐 것 같단 말이죠.”
종이를 펼쳐 읽은 새뮤얼은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새뮤얼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는 그런 새뮤얼의 미소가 섬뜩하다고 느껴졌다.
여태껏 자신의 말을 듣지 않던 수하들에게 짓던 미소와 같다고 해야 할까.
그들이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섬득함은 괜한 게 아니었다.
“군대를 움직여야겠습니다. 이대로 제국을 생각하는 황족이 누이들밖에 없다는 인식이 생기면 곤란하죠. 이 제국의 안위를 그 누구보다 걱정하는 것은 저이니 말입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면, 차출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슬슬 대니얼 단장이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려 북부를 호령하는 오크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나머지는 알아서 말 잘 듣는 이들로 고르도록 하십시오.”
저지먼트 기사단.
황실의 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학회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셰인은 오랜만에 맡는 숲 내음에 눈을 떴다.
과거 비 내리는 소리가 가득했던 메자이아 대수림은 어느새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이곳에 얽힌 이윤과, 아직 떨어질 게 남은 과자부스러기를 받아먹기 위한 행렬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다만 수명이 긴 엘프들은 조용한 것을 원했고, 그에 따라 프리실라가 한 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제한해 두었기에 이전보다는 많지 않았지만.
프리실라의 정기가 담긴 세계수의 잎으로 메자이아 대수림에 도착한 셰인은 평소처럼 프리실라를 찾아갔다.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피부가 더 하얘지신 것 같아요.”
프리실라가 미소를 띠며 그리 말하자, 셰인은 적당히 받아 주며 본론을 꺼냈다.
“드래곤의 역린을 받으러 왔다.”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처음 둘의 계약은 메자이아 대수림의 안정이었다.
아직 진행 중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메자이아 대수림에 나오는 이득이 한가득 얽힌 상태다.
그러니 더 이상 전쟁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게 된 지금.
엘프들은 셰인과 프리실라의 계약처럼 이제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봐도 좋았다.
“좋아요.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여전히 당신의 가문에서 많은 부분을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프리실라는 자신의 가슴에 양손을 올렸다.
“음…….”
옅은 신음과 함께 프리실라의 손에 마력과 정기가 모이기 시작하자, 연녹색 빛줄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심장으로부터 하나의 보석이 형체를 갖추며 그녀의 손 위에 놓여졌다.
얉은 모습을 한 보석은, 그 어떠한 보석보다도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에메랄드하고는 비교조차 안 될 찬란함 앞에, 셰인은 지난 생을 통틀어 두 번째로 보는 드래곤의 역린을 바라보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결국 이걸 다시 한번 갖게 되는군.’
전생에 드래곤의 역린은 지금처럼 고귀한 자태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조직에 의해 한껏 오염되고, 고든의 온갖 실험이 끝난 뒤에야 자신의 손에 들어왔던 것이지 않나.
보석으로부터 느껴지는 힘 자체는 전생보다 적었으나, 근본적인 질은 훨씬 잘 갖춰진 상태다.
애초에 역린이 가진 힘보다는 근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더 중요했던 셰인이기에 오히려 좋았다.
“다만 이걸 드리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이걸 가지고 뭘 하고 싶으신 가죠?”
“전쟁.”
“…….”
“전쟁을 막을 전쟁.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아이러니하지 않나.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이라니.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건가요?”
“때론 두려움이 전쟁을 억제하기도 하는 법이지. 걱정 마라, 프리실라. 너의 종족에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될 일은 일절 없을 테니. 넌 지금처럼 인간들에게 있어 우호적인 종족이면 된다. 인간들의 호의를 받고, 또 그들의 존중을 받으면 돼. 잘 자라나는 나무처럼, 햇빛에만 있으면 된다.”
그 밑에 있는 그림자는 내가 책임질 일이니.
그렇게 뒷말을 덧붙인 셰인을 바라보는 프리실라의 눈빛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걷는 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의 표정과 같다고 해야 할까.
“……거래할 뿐인 우리의 관계에 제가 더 말을 더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셰인.”
“왜 그러지?”
“안식을 찾을 자리는 찾아보세요. 당신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하다 한들, 결국 당신 또한 한 명의 인간이니까.”
“그건 걱정할 거 없다. 이미 있으니.”
녀석도 지금쯤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까.
셰인은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고, 프리실라는 가만히 그런 셰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을 위한 안식을 찾아야죠. 아직은 어리석은 사람.’
그렇게, 프리실라는 평소처럼 셰인에게 자신의 정기를 교체해 주며 둘의 만남은 조용히 마무리 지어졌다.
* * *
“이, 이게 뭐여?”
“허미…….”
“이, 이게 전부 물자라고? 여기 아룬비다에?”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만…….”
“이렇게 미치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썩을 새끼야!”
아룬비다의 이른 아침.
비두론 성에 모인 주민들은 영지의 앞에 차곡차곡 쌓이는 물자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제나 마차 하나 분은 될까 싶을 정도로 적은 물자만 보다가, 성의 입구에 방해가 된다 싶을 정도로 한가득 쌓이는 걸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아니, 정확히는 본 적도 없는 수준이었다.
최근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됨에 있어서 물자가 조금 풍족하게 들어온 감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조금이라는 말을 써야 할 정도에 불과했으니.
“흠흠. 안녕하십니까! 저는 클레이튼 상회에서 온 하보크 상단의 하보크 메링턴입니다. 혹시 처분이 힘든 몬스터의 부산물이 있으십니까?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푸짐한 인상을 가진 한 상인의 용기 어린 외침에 주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격? 저 양반이 뭘 모르고 하는 말 아냐? 여기에 금화가 무슨 쓸모가 있다고?”
“야 이, 멍청아. 저거 안 보이냐?”
“포탈?”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포탈.
그에 아룬비다 주민들도 의아하다는 듯 포탈을 바라봤다.
“저게 왜?”
“아오, 이 돌대가리. 야, 우리가 왜 매번 물자가 엿 같이 부족했는데? 왔다갔다 뒤지게 힘들어서 그런 거 아냐! 근데 저기에 포탈이 생겼다는 건 이동이 편해졌다는 거고!”
“아!”
그러나 그저 좋다고 보고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오히려 걱정 어린 시선으로 쌓이는 물자를 바라보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뭔가 일이 터지려는 것 같은데.”
“미미르 경이 황실에 가서 받아 온 건가? 그냥 주진 않을 텐데…….”
“저 포탈이 열려서 개방된 거 아냐?”
“아니지, 아니야. 그럼 저렇게 상단이 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물자가 저만치 쌓이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하기사…… 그런데 무슨 문제가 터지려면 상인들도 안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전쟁을 안 겪어 봐서 하는 말이지. 전쟁터야말로 일획천금의 기회라고. 돈에 눈이 멀어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말이야.”
“아아…….”
“그럼 진짜 무슨 일이 터지려는 건가?”
“저번에 펠리스 님이 나갔다 온 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아룬비다의 주민들 사이에서 그런 의문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그날 저녁.
아나스타샤가 모든 주민들을 한데 모았다.
저녁이 되어 더욱 추워진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제군들. 우리는 현재 바람 앞에 선 촛불이다.”
그 말에 주민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시작부터 저런 말로 분위기를 잡는 걸까?
그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최근 나는 한 가지 제보를 받았다. 오크들이 마력을 쓰기 시작했다더군. 그리고 확인 결과, 그 보고가 사실이라 판명됐다.”
“……! 마, 마력 말입니까?”
“아니, 그 무식쟁이 오크 놈들이 어떻게 마력을 씁니까?”
“글쎄. 너 같은 놈들도 쓰는데 그놈들이라고 못 쓸까?”
“이 미친놈이?”
쿵!
한참 소란이 가중되려 할 때, 아나스타샤가 대검의 끝으로 땅을 내려치며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하여, 비밀리에 편성한 특수 수색대가 오크들의 전초기지를 습격, 그 결과 오크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쿵!!
“전쟁. 오크들은 50년 전과 같이, 제국의 북부를 정복하고자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
쿠웅!
“그들은 고대 흡혈귀의 마법을 이용해 마력을 깨우치고, 자신들만의 주술을 만들어 작위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
“……!”
쿵! 쿵!
“제군들. 이번 겨울은 특히 더 혹독한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쿵!! 쿵!!
“하나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단 한 번도 적들에게 우리의 성벽을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가?”
쿠웅! 쿠웅!
“또한! 이번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지 않은 겨울이 될 터. 나의 용사들이여. 들어라. 외부에서 우리는 버려진 자들이라 비웃을 테지만, 그건 착각이다. 저들에게 그런 선택권 따위는 애초에 주어진 적도 없었다.”
쿠웅!! 쿠웅!!
“착각하지 마라, 제군들!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저 제국을 저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 손으로 직접 지킬 것인가. 그 선택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쿠웅!! 쿠웅!! 쿠웅!!
“제군들. 어찌하겠나. 우리를 버렸다 비웃는 저들을 우리도 똑같이 버리겠는가? 아니면 우매한 자들에게 현실을 보여 주며 그들의 착각을 바로잡겠나!”
어느새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아나스타샤의 타이밍에 맞춰 자신들도 지면에 발을 구르고 있었다.
얼마 만일까.
이 혹독한 날씨에도 이렇듯 심장이 뜨거워진 것이.
7년 전.
아나스타샤가 아룬비다에 첫 발을 들였을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두 눈을 빛냈다.
자신들과 다르게 이곳 아룬비다에서도 눈빛에서 단 한 번의 절망을 띄운 적 없던 강인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들 모두 그녀를 따르기로 한 것이고.
바로 지금.
그들은 또다시 자신들이 시험대 앞에 섰음을 깨달았다.
“물론이지요, 황녀님!”
“저 바깥 놈들에게 알려 줍시다! 우리가 누구인지!”
“버리긴 누가 버렸답니까!”
“맞습니다! 선택지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오오오옷!”
그리고, 그들은 결코 아나스타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들의 위기는 곧 제국의 위기요, 이번 전쟁을 잘 마무리한다면 제국 놈들도 더 이상 자신들을 경시하지 못하리라.
그 믿음직스러운 영광의 길에는 바로 2황녀,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가 앞장 설 것이니.
비로소 전쟁의 준비가 끝났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5화
75화 폭풍전야
“피의 기억이…… 읽히지가 않아…….”
엘더 샤먼의 느릿한 말이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무너진 전초 기지 내부.
앞서 셰인을 포함한 특수 수색대가 다녀간 이곳은 이미 전초 기지로서의 역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때문에 이러한 보고를 들은 엘더 샤먼은 죽은 오크 샤먼의 피에 얽힌 기억을 읽어 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음~ 글쎄? 사실 우리도 그 늙은이가 만든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
그에 대답한 사람은 이제 10살이나 됐나 싶은 소녀였으나, 그녀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더 큰 엘더 샤먼의 앞에서도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누가 알았겠어? 고든, 그 음흉한 늙은이가 그렇게 갑자기 죽어 버렸을 줄은.”
소녀의 말처럼,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조직의 핵심 간부로 있던 고든이 죽었다는 사실은 조직에게 꽤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그간 고든이 홀로 담당하고 있던 다양한 연구들도 일순간에 모두 멈춰 버렸고, 앞으로 큰일을 해 줘야 할 드래곤 하트도 끝내 온전한 형태로 라비아타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때문에 이렇게 북부까지 찾아와 흡혈귀의 마력을 사용하는 오크에게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그때, 소녀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하하! 이거, 인간들에게 한 방 먹은 모양이군.”
“인…… 간?”
“그래. 옅지만 놈들의 냄새가 느껴져.”
2미터가 넘는 엘더 샤먼의 덩치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
꽉 끼는 정장을 차려입고는 구릿빛 피부의 스킨헤드를 쓸어 만졌다.
오크들의 시체를 보면 이미 시간이 꽤 지난 상태였으나, 스킨헤드의 남자는 그럼에도 확신에 차서 그리 말하고 있었다.
“냄새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데?”
소녀의 물음에 스킨헤드 남자가 기존의 백부장이 썼던 건물을 가리켰다.
“저쪽인데? 저 건물로 들어갔어.”
“역시 개코라니까!”
“그 주둥이 뜯어 버리기 전에 닥쳐라. 난 곰이라고.”
이윽고, 엘더 샤먼은 기존의 이곳에서 죽은 오크 샤먼의 방에서 사라진 물건들을 확인했다.
“인간들이…… 우리……의 계획을, 눈치챈 것…… 같군.”
“일이 복잡하게 됐는데? 여기 있는 가죽들도 몇 개 챙겨 갔다는 건 너희들의 언어를 해석할 줄 안다는 거 아냐.”
“게다가 몬스터들이 싸운 걸 보면 그쪽으로 의심을 지우게 만들고 시선을 돌리려던 거 같은데?”
남자와 소녀의 말에 엘더 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대족장에게, 찾아가 봐야겠군…….”
인간들이 계획을 눈치챘다.
그들은 숫자도 적고 수명도 짧지만 그만큼 자신들의 위기에 민감한 종족이다. 이미 이쪽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그들은 왔던 것만큼이나 신속하게 자신들의 본거지로 향했다.
곧 있을, 인간들과의 전쟁을 위해.
* * *
비록 올리시아가 전쟁을 한다고는 했으나, 전쟁이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뚝딱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대륙은 이제 막 한여름이 시작하는 와중에 북부의 원정을 위해 병사들이 입어야 할 보온 장비를 마련하고, 얼마만큼의 군사를 보낼 것인지, 그리고 그 군사를 누가 책임질 것인지 등 여러 모로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나마 연합국은 상황이 달랐다.
모험가들은 평소에도 험지를 돌아다니는 이들이기에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게 빠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도 이윤 없이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기에 제국에서 적절한 보상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먼저 움직일 생각 따윈 없을 터.
“한 달이라더군.”
아나스타샤의 그 말에 셰인과 미미르는 조용히 경청했다.
“먼저 보내 주는 물자들로 최대한 한 달 동안 버티라는 것이 황실의 뜻이야.”
“……더 빠르게는 안 되는 겁니까?”
“폐하의 건강이 많이 악화되셨어. 그보다 더 빠른 원정은 아무래도 힘들 거야.”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셰인이 준비한 포탈이라 해야 할까.
다급하다면 언제든지 황실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었고, 1황녀인 올리시아는 보름 안에 선발대를 보내겠다 말했었다.
“그래도 마냥 절망적인 상황만 있는 건 아니지. 보상안을 우선적으로 마련한다면 모험가들도 선발대가 올 쯤에 찾아올 테니까.”
“그럼 중요한 건 앞으로 보름이겠군요. 오크들이 과연 그 전에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지…….”
미미르의 희망 어린 말이 나오기 무색하게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크들도 움직일 겁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오크들의 뒤에는 조직이 있으니, 놈들도 우리 쪽에서 눈치챘다는 것을 이미 확인 했을 겁니다.”
“조직이라…….”
전생과는 다르게 ‘무명’의 개입 이후, 오크들의 움직임은 확연히 빨라지고 있었다.
본래라면 몇 년 후에나 본격적으로 움직였을 오크들이 벌써부터 전초 기지를 지으며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나.
어쩌면 전생과 다르게 이미 상당 부분 전쟁의 준비가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먼저 움직였다는 것을 알았으니, 오크들도 이쪽이 대응하기 전에 속도전을 걸어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어도 며칠 안에 오크들의 수작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셰인은 섣불리 밖으로 나가기보단, 성 내부에서 방어에 전념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남겼다.
보좌관인 미미르도 셰인의 의견에 찬성하니,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 *
“이야, 진짜 때깔 좋다!”
“그러게…… 언제 망가질지 몰라서 불안하기만 했던 무기들이었는데.”
그간 모아둔 몬스터의 부산물을 팔아 번 돈을 통해 물자를 구입하고 영지민들을 무장시키는 한편, 삼총사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성벽 앞 도랑을 손보며 돌아다녔다.
영지 내에 셰인을 제외한 단 하나뿐인 마법사, 미미르도 더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거…… 놀랍군요.”
미미르는 셰인이 넘기고 간 보고서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마법사로서의 학구열이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셰인의 보고서에는 마법으로 보수하거나 개선이 가능한 성내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마법사인 미미르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해당 문제들을 해결할 마법을 공식으로 적어 두기까지 했다.
그동안 셰인이 아룬비다에서 지내는 동안 꾸준히 준비해 온 보고서였기에, 그만큼 완성도가 훌륭했다.
“확실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봅니다.”
같은 마법사로서, 셰인은 뭐랄까. 독특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이미 정해진 길을 걷는 반면, 셰인은 끊임없이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면이 보였다.
그렇다고 이미 만들어진 길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 길을 활용해 새로운 대로를 개척해 내니, 선배 마법사로서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셰인은 진보적인 마법사였다.
“공식대로 따라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군요…….”
언젠가 시간이 난다면 셰인과 마법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싶을 정도였지만, 당장은 해야 할 일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한편, 셰인과 펠리스는 성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젠장. 누구는 도랑이나 파고 있는데.”
“그러게 말임다. 힘듬다.”
“야이 근육 돼지 새꺄! 삽질 100번에 허리 한 번 펴라고 했지!”
“너무함다, 해커스.”
그런 셰인과 펠리스를 바라보며 성벽 앞 도랑을 파고 있는 삼총사가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펠리스가 귀를 휘적거리며 셰인에게 물었다.
“마법진 설치하러 가는 거냐?”
“그래.”
지금의 사회에서 마법사가 중요한 이유다.
공성전이 벌어졌을 때, 마법사는 단순히 멀리서 마법만 팡팡 쏘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지도를 펼친 셰인은 미리 체크해 둔 지점에 찾아가 다양한 마법진을 설치하고 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을까.
첫 시작은 남들이 한참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황녀님. 정찰대의 보고입니다.”
“음…….”
며칠 동안 황실과 연합국의 중진들의 원거리 회의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서류 작업을 하느라 바빴던 아나스타샤는 두 눈을 감은 채 미미르의 보고를 들었다.
“반나절 거리서부터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감지됐다고 합니다.”
“규모는?”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라는 보고로군요.”
“그렇단 말이지…….”
매년 일어나는 몬스터 웨이브는 얼추 천 마리 내외에서 일어난다.
때문에 몬스터의 숫자를 눈대중으로 맞추는 데 이골이 난 정찰병들조차도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다는 보고를 해 온 것이다.
이제 정말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아룬비다 영지민들에게 혹독한 겨울이 시작됐다.
* * *
유려한 선을 그리며 검이 휘둘리자, 마지막까지 보고를 지키고 있던 진흙 골렘이 무너져 내렸다.
“으아앗! 이제 좀 끝내자, 망할 것들아!”
디라일라의 발 구르기 한 번에 대지가 요동치며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헤비 그렘린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발치에서 무수히 솟아난 대지의 창이 사정없이 헤비 그렘린들의 다리를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중상을 입은 헤비 그렘린들을 향해 전격 마법이 쏘아져 나갔다.
단련된 쇠로 무장된 그렘린들이었으나, 오히려 전격 마법에 의해 내부에서 통으로 그을려졌다.
한편, 한참 입구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던 전투학과의 생도들도 전투의 마무리를 지었다.
“으아! 드디어 끝났다!”
“그러게…… 다들 고생 많았어. 어디 다친 곳은 없지?”
클라인의 물음에 방금까지 입구에서 침입해 오려던 그렘린을 막고 있던 알 로스가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지! 내가 누구냐, 알 로스 님 아니냐! 하하.”
해맑게 웃는 그의 뒤로 큰 챙 모자가 눈에 띄는 마법사 소녀가 다가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뒤에서 그렘린 몇 마리 상대한 게 전부면서 뭘 그렇게 대단하다는 듯 말하는 거야?”
“아니, 아르티아. 네가 마법 쓰는 시간은 뭐 거저 벌어지냐? 다 나랑 알렉스가 뒤져라 노력해서 만들어 낸 시간 아냐!”
“천박하긴. 뒤져라가 뭐니, 뒤져라가?”
“아오. 야, 알렉스. 너도 한마디 해 봐!”
“어…… 아, 아냐.”
“에라이.”
“흥, 쟤처럼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몰라.”
“뭐래. 지도 디라일라보다 밀리면서.”
“……! 너 지금 말 다 했어?”
“다 했다, 뭐!”
여느 때처럼 말싸움을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클라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몇 번이고 말려 봤으나, 성격상으로 안 맞는 건지.
알 로스와 마법 연합의 총관의 딸, 아르칸 T 아르티아는 저렇듯 항상 말싸움을 해 댔다.
그러면서 클라인은 둘 사이에 껴서 이도저도 못하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평범한 인상의 소년.
형님과 함께 아카데미로 돌아오던 중, 던전 웨이브로 인해 위기에 처한 마을에서 인연을 맺어 자신의 하인이 된 이였다.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막 돌아왔던 시기, 뒤뜰에서 홀로 목검을 휘두르는 알렉스의 검을 본 클라인은 알렉스에게 검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원채 열정이 뛰어나고 무기를 다루는 데 익숙한 알렉스를 클라인이 기껍게 본 것이다.
그 뒤로는 여러 던전을 함께 데리고 다니자 알렉스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마력을 깨우치는 게 늦은 탓에 마력 운용은 아직 미숙했으나, 알렉스는 다양한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
“아무튼 다들 고생했어. 이제 그만 위로 올라가자.”
지난 한 달 동안 클리어에 전념한 고대 드워프의 전초 기지.
기대했던 드워프하고의 만남은 없었으나, 대신 땅 밑에 지어진 전초 기지를 차지한 헤비 그렘린들과 조우한 그들은 오늘에서야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드워프들의 보고에는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에이. 드워프제 무구 좀 들어보나 싶었는데.”
알 로스가 아쉽다는 듯 그리 입맛을 다셨다.
한 달 동안 어두운 땅 아래서 고생한 것에 비해 큰 이득은 없던 것이다.
“그래도 마석은 많네.”
“그러게…… 어?”
그때, 디라일라는 한쪽 구석에 정사각형 모양의 광물을 발견하고는 입술을 축였다.
“저기, 나 마석은 포기할 테니까 저거 하나만 주면 안 돼?”
“음?”
“어머, 이건…….”
그때, 아르티아가 광물의 가치를 알아봤는지 자세히 들여다봤다.
“으음…… 마법적으로 연구할 가치는 있겠지만, 나한테는 그리 필요가 없겠네. 좋아. 나도 입찰은 포기할게.”
“저게 뭔데 그래?”
알 로스의 물음에 아르티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형상 기억 광물. 고대 드워프들이 성벽을 지을 때 쓰는 물건이야. 지금에 들어서는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광물인데…… 아직 연구가 덜 됐거든. 입찰 경매에 올리면 제법 값은 받을 수 있겠지.”
“뭐, 내가 써먹을 수도 없겠네. 그럼 나도 포기.”
“나도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음, 그럼 이건 디라일라한테 넘기기로 할게.”
“오예! 고마워, 다들!”
그렇게 원정을 끝낸 일행들이 한 달 만에 밖으로 나왔을 때.
알 로스가 신문팔이 소년이 들고 있는 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야. 클라인. 저거 네 형 아냐?”
“응?”
거기에는 대문짝만하게 셰인의 사진과 함께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메자이아 대수림의 비밀을 밝힌 천재 마법사, 클레이튼 R 셰인. 이번에는 북부에 얽힌 오크들의 혈마법을 발견하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6화
76화 난공불락 (1)
흔히들 전쟁 전은 폭풍전야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룬비다의 주민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아서, 평소처럼 날카로운 살기를 숨기고 성벽 너머를 바라봤다.
그러다 시작된 전쟁은 방금 전의 고요함이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혼란과 광기로 가득 차게 된다.
성벽 너머.
몬스터 군단이 자신들의 흉성을 해소하기 위해 성벽을 향해 다가온다.
오크 샤먼이 펼친 주술의 효과일까?
몬스터들의 눈이 밤하늘 아래서 붉은빛으로 물들어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일반인들이 보면 오금이 저릴 게 분명한 광경.
하나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때를 기다렸다.
그때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아래를 비추자, 몬스터 군단의 최전선에 서 있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시작부터 아이스 스톤 크랩이 일렬로 다가왔다.
평소 바위를 먹으며 지내는 그들의 외피는 튼튼하기가 강철과도 같았기에, 어지간한 파괴력이 아니고서야 뚫기가 힘들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는 성을 포위하기 위해 비교적 작은 소형 몬스터들이 주를 이뤘다.
중간중간에는 아울베어나 아이스 트롤과 같은 중형급 몬스터들이 성문을 부수기 위해 다가왔다.
그리고 가장 끝에는 사이클롭스와 오우거와 같은 대형 몬스터들이 있었다.
놈들의 손엔 큼지막한 바위가 하나씩 들려 있었는데, 놈들의 근력을 생각하면 저 정도 크기의 바위는 성벽을 지키는 대포의 사정거리와 맞먹을 정도로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몬스터들이 한 대 모여 오크 샤먼의 주술에 의해 더더욱 강화되니 그저 다가오는 것으로도 느껴지는 압박감이 대단했다.
이윽고 몬스터 군단이 대포의 사정거리까지 다가온 순간.
포문의 조준을 마친 포병들의 귀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쏴라!”
콰콰콰콰콰콰쾅─!!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와 같이 포문으로부터 거대한 대포알이 터져 나왔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포음에 아이스 스톤 크랩이 몸을 잔뜩 웅크려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그와 동시에, 대포의 포문 바로 앞.
포탄 앞에 마법진이 전개됐다.
[가속], [중첩], [관통].
지난 며칠 동안 미미르가 밤까지 새어 가며 포문에 새겨 둔 마법진 위로 셰인의 룬어가 빠짐없이 적혔다.
날아가는 포탄이 마법진을 통과해 중첩된 가속이 붙고, 동시에 기존의 사거리를 벗어나 멀리까지 날아갔다.
그 결과 대형 몬스터가 있는 곳까지 피해가 확산되고, 바위를 던질 준비를 하던 대형 몬스터들은 대포에 의해 몸이 꿰뚫렸다.
동시에 몬스터의 몸을 뚫고 나온 포탄이 땅에 처박힘과 동시에 터지자, 그로 인한 철파편이 주변에 있던 몬스터의 몸을 또다시 관통했다.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몬스터 군단의 후열이 박살이 났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준비된 마법사는 무섭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런 마법사가 무섭기 위해서는, 그만한 재력도 필요한 법이다.
‘황실의 금화가 좋긴 좋군.’
그 짧은 시간 안에 공수해 온 대량의 마석.
그걸 조금만 활용한다면 지금처럼 초장에 몬스터 군단의 힘을 확 빼고 시작할 수 있었다.
뒤이어 날아오는 포탄에 또다시 피륙이 허공을 날아다니자, 혈향을 맡은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자신들의 야성을 숨기지 못하는 몬스터의 특성상, 놈들은 빼지도 못할 운명인 것이다.
이게 몬스터들의 한계였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렇기에 강한 점도 분명 있었다.
목숨 따위 돌보지 않는 소모전이 이루어진다면 이쪽의 피해가 훨씬 클 테니.
“개문(開門)!”
포탄과 화살의 비를 맞고 넝마가 된 몬스터 군단을 확인한 아나스타샤가 그리 외치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며 제국에서 수급해 온 장비를 갖춘 영주민들이 모두 달려 나갔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아룬비다에서 살아온 이들은 각자의 무기를 쥐고 달려오는 몬스터를 맞이했다.
순식간에 전투로 인한 광기가 전장을 가득 채웠다.
검사의 검에 아이스 트롤의 목이 단번에 떨어져 나가고.
팔 한쪽이 날아간 채 살아남은 오우거의 주먹질에 방패를 든 전사가 방패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간다.
사이클롭스의 발 구르기에 수십이나 되는 인간들이 넘어지며 전선이 무너지는가 하면.
수십 명이 사이클롭스에게 달려들어 기어코 그 목숨을 빼앗는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이어지고, 밤이 지나 새벽이 되고 동이 틀 무렵.
몬스터의 피로 이루어진 강이 흐른다 해도 좋을 정도로 몬스터의 시체들이 아룬비다의 차가운 바닥을 덥히고 있었다.
한 차례 끝난 몬스터 웨이브.
수만의 몬스터가 끝내 목숨을 잃었으나, 반대로 인간들의 피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상자의 수는 총합 200가량.
그 중에 목숨을 잃은 이의 숫자는 채 10명이 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아나스타샤와 미미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생각보다 피해가 많은데.”
고작 수천으로 수만의 몬스터 군단을 막았음에도 이러한 평가가 나온 이유는 역시 이번 웨이브가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수색대가 확인한 몬스터의 총 수는 십만이 넘어가는 상황.
이번 웨이브에 소모된 몬스터의 수는 얼추 1만 7천여 마리로 확인되니, 적어도 이러한 웨이브가 최소 6번 이상 더 진행된다는 말이다.
그뿐이던가?
인간들의 힘이 빠지길 기다리고 있는 오크들의 존재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만 이처럼 몬스터 웨이브가 몰아서 오게 된다면 성을 지켜야 하는 작금의 상황에 성을 보수할 방법이 마땅찮아진다.
때문에 인명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성문을 열었으나.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이후 성문을 열 수 있는 횟수는 최대가 3번입니다.”
미미르의 평가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웨이브의 예측 시간은?”
“이틀 후, 새벽으로 판단 중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앞으로 올리시아의 선발대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총 열흘.
과연 그 안에 성벽을 무사히 지킬 수 있을까?
이쪽의 피해가 너무 커진다면 이후 도착할 지원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힘들어진다.
아무리 똥개도 제 집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 한들, 숫자의 차이를 메우기엔 힘든 일이니.
반대로 성벽이 무너진다면 지원군이 온다 해도 오크들과의 전쟁이 제대로 될 가능성이 없다.
아무리 봐도 상황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그때, 셰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급 품목을 바꿔야겠습니다.”
* * *
겉으로는 나른해 보이는 오후.
해질녘의 석양을 바라보며 올리시아는 얼음이 동동 띄어진 티를 마시며 잠시나마 생긴 여유를 즐겼다.
이처럼 단순히 티타임을 가지는 것처럼 보임에도 고귀함이 느껴졌으나, 이는 물 위 백조와 같을 뿐이다.
실제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새뮤얼의 가신들과 앞으로 다가올 전쟁을 대비해 힘겨루기를 하고, 물밑 정치싸움으로 치열한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올리시아에게 있어서 이번 일은 첫 반기이자,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만일 이번에도 황실에서 새뮤얼의 입지에 밀리게 된다면, 도리어 올리시아의 힘이 쭉 빠져나가게 될 테니.
그리된다면 재기 불능이다.
그럼에도 이렇듯 한숨 돌릴 수 있는 이유는, 눈앞에 있는 소년 때문이었다.
“화, 황녀님. 말씀하신 다, 담당 보급의 무, 문제는 해결했습니다.”
베른슈타인 가문의 차남, 베른슈타인 오스튼.
일전의 만남 이후 올리시아는 몇 번씩 오스튼과 만남을 가졌고, 그 결과 지금처럼 바로 곁에 두고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몇 가신들은 타국 출신의 귀족인 그가 황실에, 그것도 황녀의 직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도 않아서 보여 준 오스튼의 유능함에 그들도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올리시아에게 저런 인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오스튼이 건넨 서류를 받은 올리시아는 잠시 읽더니, 입을 열었다.
“수고 많았어요. 덕분에 저도 이렇게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네요.”
“아, 아닙니다.”
“그래도 여전히 속도가 느리네요…… 과연 제 여동생이 그 험난한 시간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셰인이 만든 포탈 덕분에 아룬비다와의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실정이다.
때문에 현재 아룬비다가 얼마나 태풍 앞에 놓인 촛불과 같은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십만 대군의 몬스터 웨이브라니.
거기에 아룬비다의 몬스터가 가진 평균 전투력이 어디 낮다고 할 수 있던가.
그러한 몬스터들이 십만이나 움직이는 와중에 무려 그들을 상대로 보름을 버텨야 하는 일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난공불락으로 지어진 비두론 성이지만 과연 자신들이 도착했을 때 멀정한 외관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러한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튼은 황녀보다 훨씬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괘, 괜찮을 거, 겁니다.”
“음. 이유는요?”
“그곳에는 그 남자가 있으니 말입니다.”
“어라, 방금은 말을 더듬지 않으시네요?”
“하, 하하. 여, 연습 중이긴 하, 합니다.”
“흐음…….”
황녀는 이미 오스튼이 말더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스튼이 저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 이유는 그게 저 자만의 처신법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라면 셰인이요? 물론 그 사람도 대단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개 한 명의 사람이 십만 대군의 몬스터 웨이브를 어찌할 방법이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그의 재능은 다, 단순히 그 정도가 아, 아닙니다. 그가 사람을 쓰, 쓰는 눈은 정확하기가 저, 저나 황녀님 이상입니다.”
“어머…… 그렇단 말이죠.”
이젠 제법 오스튼을 봐 온 황녀는 그가 누군가를 인정하는 모습에 나름 놀란 눈치였다.
평소 오스튼은 저렇듯 자신감 없는 모습을 일관하면서도, 결코 타인을 인정하는 언행 따위는 일절 없지 않았나.
그런만큼 오스튼의 눈동자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그럼 제가 너무 무리하며 움직이지 않아도 되겠네요?”
“마, 만약 제가 그, 그라면…… 화, 황녀님께서 와, 완벽한 준비가 끄, 끝났을 때를 기다릴 것 가,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죠…….”
본래라면 시일을 앞당겨 선발대를 보내려 했으나, 오스튼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보다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게 맞을 듯싶었다.
그렇게, 올리시아는 오스튼과 늦은 밤까지 새뮤얼의 움직임에 다양한 대응을 논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으으아! 추, 추워!”
두꺼운 털옷을 곰처럼 껴 입은 디라일라가 생전 처음 겪어 보는 혹독한 날씨에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 디라일라의 뒤로 클라인과 알렉스, 알 로스와 아르티아가 순서대로 포탈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이어지는 그들의 표정 또한, 디라일라와 큰 차이가 없었다.
“어서 와라. 생각보다 늦었군.”
일행들을 맞이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셰인이었다.
평소 언제나 깔끔한 모습을 유지해 온 셰인이 약간은 초췌해진 모습으로 그들을 반겼다.
그런 셰인의 뒤로는, 여전히 전투가 진행 중인지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반파된 비두론 성벽이 보여지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7화
77화 난공불락 (2)
셰인의 기사를 본 클라인은 금방 아버지인 로웰에게 연락을 취했다.
[음, 안 그래도 너에게 셰인이 남긴 메시지가 있었다. 진행 중인 탐사가 끝나면 찾아와 달라더구나. 그 이종족 소녀와 함께.]
거의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던전 탐사에 매달렸던 클라인은 셰인의 부름에 곧바로 응했다.
오크들과의 전쟁이라니!
드워프 전초기지 던전에 찾아가기 전까지 이런 소식은 듣지 못했기에, 클라인은 가장 먼저 디라일라에게 의사를 물었다.
“엥. 아룬비다라고? 오크들? 오크들이 마력을 써?”
그 한 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디라일라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셰인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았다.
최근 셰인 덕분에 클라인과 함께 붙어 다니며 여러 던전을 탐사한 덕에 디라일라도 모험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굳게 얻지 않았던가.
그에 대한 고마움도 있고, 현재 1황녀와 2황녀가 공동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정치적 견해도 포함된 선택이었다.
이후로 클라인은 예의상 남은 세 사람에게도 의중을 물었는데, 그중 알렉스가 가장 먼저 나섰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 꼭 껴 주십시오!”
최근 클라인에게 매일 같이 검술을 배우고 있던 알렉스는 이상할 정도로 셰인에게 우호적이었다.
거기에 클라인의 친우인 알 로스는 순전히 전쟁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참여했고, 아르티아는 최근 마법사로서 이름을 알리는 셰인에게 제법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정기를 활용한 마법이라면 우리 할아버지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렇게 클라인의 팀원 모두 아룬비다행 포탈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정작 와 보니 비두론 성의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반쯤 무너져 있는 성벽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몬스터와의 혈전.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일행들의 기가 살짝 죽어 있는 상황에, 셰인이 앞장서 그들을 안내했다.
“늦지 않게 와 줘서 다행이구나, 클라인. 오래간만이다. 몸은 잘 챙기고 있지?”
“아, 네, 형님.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서 그렇다. 마법도 많이 썼고. 아무튼,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좀 쉬면서 설명을 듣겠느냐?”
“……예. 형님.”
포탈을 탄 덕에 거리로 인한 피로감은 없었으나, 정작 셰인 본인이 피곤해 보였기에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너희의 파견은 모험가 협회 소속으로 처리될 거다. 그와 관련된 협상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공표가 될 테지.”
“그렇습니까…….”
“당장 어느 정도까지 정해졌는지는 말해 주기 힘들지만, 보상안이 상당하니 그 부분은 걱정할 거 없다.”
클라인의 관심사는 딱히 돈 같은 게 아니었으나, 팀원들을 이끄는 팀장으로서 팀원들의 이윤에는 민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셰인 또한 이러한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해 줬던 것이다.
그때, 아르티아가 손을 들며 물었다.
“모험가 협회에 들어가는 수수료를 제외하고 다른 보상안은 받지 않을 테니, 당신이 제게 직접 보상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아르칸 총관님의 손녀인가. 어떤 보상을 말하는 것이오?”
“정기를 마력 패턴으로 공식화시켰다고 들었어요. 그 메커니즘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소.”
그녀의 제안을 세인은 받아들였다.
아르티아는 전격계 마법을 쓰는 마법사였기에, 대규모 전쟁에서 특히 힘을 발휘하는 마법사이기도 했다.
거기에 마법 연합 총관의 손녀이기까지 했으니 그 실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셰인의 전생에서 클라인과 함께 활약했던 영웅 중 한 명이기도 했고.
“저, 저는 셰인 님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알렉스?”
그 말을 들은 알렉스가 용기를 내어 손을 들며 말하자 셰인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골의 순박한 청년이었던 알렉스는 그간 단련을 꾸준히 해 왔는지, 어느덧 제법 전사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본래라면 알렉스가 저런 의견을 낼 만한 영향력이 없을 테지만 셰인은 알렉스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너는 다재다능한 게 주무기이니 몇몇 마법을 배우는 것도 좋겠지.”
전생에서의 알렉스는 다양한 무구를 활용한 변화무쌍한 전투를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거기에 마법까지 추가된다면 필히 전생보다 더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을 터.
마력을 깨우치기에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인이 곁에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마력을 다루는데도 능숙한 듯하니 가르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반면 디라일라와 알 로스는 딱히 셰인에게 바라는 게 없었기에 조용히 황실에서 마련하는 보상안을 받기로 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지금 상황을 설명하마. 일단 당장은 그리 불리한 편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성벽이 반파된 모습에 불리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디라일라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 여기서도 내가 활약해야 한다고?”
“그래. 현재 성벽의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니, 너의 힘이 중요하지. 물론 활약하는 만큼 그만한 보상이 돌아갈 거다.”
“으…… 그렇다면야.”
예전에는 많은 관심을 받으며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던 디라일라였으나, 메자이아 대수림 이후 끊이지 않던 관심에 자신이 생각했던 그림과 다르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클라인과 아르티아 덕분에 그러한 접촉이 많이 사라지긴 했으나…….
“아나스타샤 황녀님께서도 너의 이름을 기억하겠지.”
“으음? 그, 그렇단 말이지?”
황실의 관심은 좀 다르지 않나.
일전에 들어 본 바에 따르면 황태자는 나쁜 놈이고, 거기에 대항하고 있는 게 1황녀와 2황녀라고 했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연을 이어 두는 게 좋으리라.
언젠가 자신의 가족들, 헤르메스 모험단을 찾기 위해서라면 인간들의 고위층과 커넥션을 만들어 둬야 하니까.
“어렵지 않은 일이지! 거기다 내가 최근에 좋은 걸 먹었걸랑.”
“좋은 거?”
“흐흐, 들어는 봤나 몰라. 형상 기억 광물! 고대 드워프들이 만든 광물을 이 몸이 직접 섭취했다 이 말이지. 맡겨만 줘!”
“호오…….”
저건 셰인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형상 기억 광물의 효과는 셰인도 전생에 익히 겪어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네가 다른 곳에 투자할 시간이 훨씬 늘어나겠군.”
“으응?”
그러자 어느새 셰인의 눈빛이 노예를 바라보는 그것처럼 변하자, 디라일라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 단체에서는 너무 잘하는 티를 내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삶의 지혜를, 디라일라는 너무 늦게 알아채고 말았다.
* * *
“하나의 속성을 깨우친 마법사는 백 명의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익숙해진 마법사는 천 명의 사람의 능률을 따라가며, 대가(大家)를 이룬 마법사는 만 명의 사람들이 우러러보도록 만들지요.”
미미르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성의 테라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고작 하루.
7만이라는 숫자의 몬스터의 공세를 막느라 넝마가 된 성벽이 디라일라의 활약으로 인해 복구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이었다.
지난날.
셰인은 보급품의 품목을 바꿔 포탄과 마석, 그리고 클레이튼 가문으로부터 엘프의 정기가 담긴 플라스크를 구입하는 데 집중했다.
포탄과 마석은 전진해 오는 몬스터의 수를 최대한 줄이는 데 쓰였고, 엘프의 정기가 담긴 플라스크는 전투 중 부상을 입은 이들을 치료하는 데 주로 쓰였다.
거기에 전투의 양상 또한 바꾸었는데, 성벽을 지키기보다는 최대한 성벽을 활용하여 부상자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덕분에 성벽이 하루하루 무너져 내렸지만, 셰인이 디라일라를 데리고 오는 것으로 단번에 걱정이 날아갔다.
과연 지하인이라 해야 할까.
대지를 다루는 데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디라일라는 비명을 지르며 성벽의 재건을 도맡아 했다.
“으아악─!”
물론 디라일라의 마력량에도 한계란 존재하기에, 그녀는 소가 여물을 먹듯 마석을 섭취해 가며 성벽을 보수해야만 했다.
평소에 그렇게 못 먹어서 안달이 났던 마석을 바로 오늘이 되어서야 한없이 먹게 되었으나, 먹는 족족 빠져나가는 마력에 그것을 감당하는 그녀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훌륭한 인재로군.”
인재욕이 그다지 많지 않던 아나스타샤마저 탐욕 어린 시선으로 디라일라를 바라볼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아니겠는가.
“너는 저런 인재를 잘도 알고 지내는구나.”
아나스타샤의 말에 셰인이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연합국의 아카데미 아닙니까. 찾아보려면 저런 인재는 충분히 발견할 법합니다.”
“내 누이가 괜히 인재에 대한 욕심을 보이는 게 아니었어.”
아룬비다의 특성상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아나스타샤였기에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셰인의 포탈로 인해 아룬비다가 배척받을 시기는 지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방어하는 데 있어 어려움은 많이 줄어들겠어.”
앞으로 1황녀, 올리시아의 선발대가 오기까지 총 5일 정도 남은 상황.
성벽이 보수된 지금,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무난한 방어를 이룰 수 있을 듯싶었다.
“흠…….글쎄요. 어떨런지.”
셰인의 그 한마디에 미미르도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 놈들도 보고 있을 겁니다. 하루 만에 성벽이 재건되는 저 기적을.”
“음?”
그에 아나스타샤가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바라보며 다음의 말을 기다렸다.
“아마, 곧 총공세가 시작될 겁니다.”
과거, 50년 전의 오크들은 인간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 파악했을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군대가 그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 얼마 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는 얼추 알고 있을 터.
그러니 놈들의 입장에서는 그전에 비두론 성의 성벽을 허물어야 했으나, 예상과 다르게 하루 만에 복구되는 현실을 마주했으니 놈들 또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과연.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로군. 그 어느 때보다 격한 공격이겠어.”
“예. 그래도 그만큼 시간이 걸릴 테니…… 준비는 해 둬야겠습니다.”
“둘에게 맡기도록 하지.”
“예. 그리고 황녀님.”
아나스타샤의 집무실에서 나가기 전, 셰인은 그녀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음. 그래.”
* * *
셰인과 미미르의 걱정처럼, 그 뒤로 3일간은 평소와 다르게 평온한 시간이 흘러갔다.
첫날의 웨이브 이후로 오크들은 대포의 위력을 다시금 깨닫고 몬스터들을 한 번에 많이 보내기보다는 짧게 오래 보내는 방향으로 나갔다.
철저하게 소모전으로 가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성벽이 보수된 지금, 더 이상 그 수를 쓸 수 없게 됐으니 이번에는 작정하고 모든 몬스터를 보낼 예정인 것이다.
그렇게 올리시아로부터 이틀 후 선발대가 도착한다는 서신을 받은 날.
이른 새벽부터 몬스터 군단의 최종 공격이 시작됐다.
“으, 으와…….”
어둠 속에서 빗나는 무수한 숫자의 붉은 눈동자에 디라일라가 질렸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무려 8만에 다다르는 숫자의 몬스터 군단.
기존에 예상했던 걸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대형 몬스터의 수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으나, 대신 중형과 소형 몬스터가 주를 이루었다.
과연 이번 최후의 몬스터 웨이브를 얼마만큼의 출혈로 막느냐에 따라 향후가 달라질 것이다.
뿌우─!
마지막 몬스터 웨이브를 알리는 뿔피리의 소리가 널리 퍼져 나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8화
78화 난공불락 (3)
비두론 성벽에서는 최후의 공격이라는 듯 포탄이 쉴 새 없이 쏘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만의 몬스터 대군은 그 포화 속에서도 지체 없이 비두론 성으로 전진해 나갔다.
철저히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 알기에 할 수 있는 몬스터 대군의 야행(夜行).
고작 수십 문의 대포로는 해일처럼 몰려오는 몬스터의 수가 줄어드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게 달아오른 대포의 입구가 식을 줄을 모르고 불꽃을 쏘아 댔다.
적이 모래사장의 모래처럼 많다면 어딜 쏴도 맞는다는 얘기였으니.
이윽고 포화 속의 행군을 마친 몬스터들이 성벽의 코앞까지 다가와 성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틴더(Tinder).”
셰인이 바닥을 향해 1서클 마법, 틴더를 발현하자 땅 내부로부터 셰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룬 마법이 발동했다.
[5중첩], [5증폭], [압축], [팽창].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대폭발이 일어나 하늘을 밝혔다.
일전에 라비아타의 원소 마법을 보고 응용한 방법이었다.
사방에 몬스터의 피륙이 터져 나가고, 대지가 우르르 울렸다.
그야말로 대재앙.
폭발의 여파에서 한참을 벗어난 몬스터들조차 흔들리는 땅에 의해 넘어질 정도였다.
한편, 난리가 난 몬스터 대군과는 다르게 비두론 성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여전히 대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궁병들도 화살이 허락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시위를 당겼다.
셰인이 팽창의 방향을 전방으로 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셰인이 신중에 신중을 기해 만든 5중첩 룬 마법의 향연.
중첩이라는 게 단순히 마법을 여러 번 새긴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룬 마법을 새기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공간을 벗어나면 개별로 취급되기에 중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허락된 공간에 최대한 다른 글자와 겹치지 않도록 써 내려가며, 또 동시에 그로 인해 내려가는 안정성까지 챙기려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거기에 중첩이 될수록 필요한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덕분에 마석은 또 얼마나 소비했던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몬스터 대군의 숫자는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폭발로 인해 생긴 구덩이로 몬스터들이 몸을 내던진다.
계속해서 꾸역꾸역, 끊임없이 밀려오는 몬스터들은 서로가 서로를 짓밟으며 성벽을 올라타기 시작했다.
“끊는 기름을 뿌려라!”
성벽에서 대기 중이던 인원들이 펄펄 끓는 기름을 성벽 아래로 때려 부었고, 열에 약한 아룬비다의 몬스터들은 속수무책으로 성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몇몇 몬스터들의 날카로운 손톱은 사정없이 단단한 성벽을 파고들어 위로 향한다.
넓은 성벽을 지키기 위한 기름도 이미 동이 난 상태.
마치 도화지에 개미가 올라가듯 성벽 위로 몬스터들이 올라가려는 그 순간.
“으아악! 이 개씨발놈들아악─!!”
그때, 성벽 위. 어느 마법진 위에 서 있는 금발에 구릿빛 피부의 소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과격한 욕설을 내뱉었다.
지난 며칠 동안 심장통에 두통까지 시달려 가며 성벽을 보수하던 디라일라였다.
그녀의 눈에는 마치 수명을 갈아 넣은 일생의 명작이 벌레들에게 갉아먹혀지는 기분이었으리라.
그런 디라일라가 마력을 휘두르자, 그간 디라일라의 마력을 한가득 머금고 있던 성벽이 일제히 흔들거렸다.
이윽고.
성벽이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세워졌다.
그 한 번에, 성벽에 들러붙어 있던 몬스터들은 온몸이 꿰뚫린 채 또다시 땅으로 추락했다.
“끄에엑!”
그러자 마석까지 섭취해 가며 준비한 마법이 발동되어 그 반동으로 두 눈을 까뒤집은 디라일라가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주민 중 한 명이 그런 디라일라를 후송하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외쳤다.
“개문(開門)하라!!”
디라일라를 마지막으로 마법에 무지한 몬스터 대군의 숫자는 그야말로 대폭 줄어들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셰인과 디라일라라는 세기의 어린 천재 마법사들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만한 대규모 마법진을 설치할 수 있도록 보급된 마석도 한몫했다.
이마저도 1황녀, 올리시아가 끊임없이 황태자 새뮤얼 측에 도발하고 요구하며 가져온 결과였다.
아마 여태껏 쓴 마석만 하더라도 한 도시를 5년간은 운용할 마석량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거의 몬스터 군단의 숫자 또한 눈에 띄게 확 줄어든 상황.
거기에 가장 위협적인 대형 몬스터들은 대부분 대포의 포화를 견디다 못해 넝마가 된 상황이었으니, 아군의 병력이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워도 될 상황이 만들어졌다.
또다시 뿔피리의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육중한 성문이 열렸다.
“우와아아아아!!”
“죽여 버려!!”
“이 지긋지긋한 개새끼들아!”
디라일라의 마법으로 인해 몬스터 대군이 주춤한 사이, 아룬비다의 주민들이 총력전이라는 의지를 다지며 달려들었다.
인간과 몬스터의 충돌.
요 보름이 되어 가는 사이 수십, 수백 차례나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던 전사들이 각자의 무구를 들고 몬스터의 급소를 노리고 들어갔다.
혼자서 백을 상대하는 게 가능한 이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을 찍으며 몬스터를 쓸어 버렸고, 홀로 상대하기 힘든 중형 몬스터에게는 서너 명이 붙었다.
포화로 인해 넝마가 되었어도 강인한 대형 몬스터에게는 수십이 달려든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혈향이 퍼지고, 무엇이 몬스터며 무엇이 아군의 시체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의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아무리 단련된 전사들이라 하더라도 몰려오는 몬스터 대군의 앞에서는 급소를 내어 줄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은 스스로의 몸에 꿰뚫리는 도중에도 결코 무구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몬스터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뛰어난 육체로 전장의 상황을 단 번에 파악하고 있는 아나스타샤는, 한 명 한 명의 전사자가 나올 때마다 그들과 보내왔던 추억을 떠올렸다.
매년 아룬비다에는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전사자는 반드시 나오며, 그들의 충성어린 죽음은 아나스타샤의 가슴에 지금까지도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그리고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상자에 그녀는 눈을 감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했다.
악 깨문 입술에서는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눈물 대신 핏물이 흘러나와 턱 아래로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끝내 그녀는 자신의 등에 매인 대검을 뽑아 들었다.
“잊지 않을 것이다.”
“…….”
“반드시 잊지 않을 것이야. 내 영혼에 맹세코.”
“…….”
“너희 무명이라는 조직이 내게 한 짓을, 결코 잊지 않겠다. 그러니 너희도 목숨을 걸어라. 아니.”
“…….”
“그 오만한 영혼을 걸어라.”
“그하하하하하─!!”
혹한의 날씨보다도 차가운 그녀의 분노를 맞이한 짐승의 남자, 카르후는 자신의 전신에 베여지듯 들어오는 그 살기에 대소를 터뜨렸다.
자신보다 머리가 두 개는 작은 여인이 내뿜는 기세가 실로 만만찮지 않은가.
역시 찾아오기를 잘했다.
“아암! 이 정도는 되야 이 카르후의 상대가 되지! 그하하핫!!”
* * *
셰인은 조직의 성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앞서 자신과 라비아타에 의해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너무도 큰 피해를 입은 무명이, 과연 이번에도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을까?
앞서 자신들의 실수로 인해 북부까지 찾아와 놓고?
절대 아니었다.
본래부터 무명이라는 조직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하되, 한 차례 방해가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는 결코 방심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니 이번 몬스터 웨이브라는 혼란을 틈타, 가장 효과적인 시기에 그들의 개입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효과적인 시기란 언제일까.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한 경계가 느슨해지고, 지휘자가 스스로의 주변보다 전방을 주시하는 시기.
또한, 그 지휘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무명이라는 이름답게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최적의 방법.
바로 총공세의 때였다.
그 사실을 셰인에게 앞서 들은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살기만큼이나 투지를 터뜨리는 카르후를 노려봤다.
그간 아룬비다를 지키며 제국에서 보내 오는 극악무도한 실력의 살인마나, 샐 수 없이 상대한 사이클롭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투지가 그런 아나스타샤를 거침없이 후려쳤다.
그럼에도 아나스타샤는 일말의 흔들림 없이 양손으로 쥔 대검을 놈에게로 향했다.
“하─ 아주 잘됐군, 잘됐어. 이 카르후가 고작 암살 따위의 일이나 한다기에 그리 실망이 클 수가 없었는데. 이리도 강인한 전사가 내 앞에 서다니. 아주 좋군.”
수인족 중 웅족의 핏줄을 타고난 카르후는 자신의 야성을 숨기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서로 간에 잡담은 필요 없겠지. 전심전력으로 날 상대해야 할 거다. 기껏 훌륭한 적을─.”
콰아앙─!
카르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런 그의 뒤에서 펠리스의 묵직한 망치가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하는 성질을 지닌 펠리스의 시그니처가 벌써부터 발현됐다.
“거, 덩치도 큰 놈이 말도 많군.”
손을 타고 올라오는 묵직한 타격감이 방금 전 공격이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렸으나, 펠리스는 카르후가 날아간 방향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몇 채의 건물을 뚫고 날아간 그곳에서부터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크하하하하하─!”
먼지구덩이 사이에서 카르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펠리스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공격에도 불구하고 카르후는 머리에서 피를 조금 흘릴 뿐, 치명적인 데미지는 없는 듯했다.
“퉤.”
한 바탕 크게 웃은 카르후가 피와 이빨 섞인 침을 내뱉고는 자세를 잡았다.
“간다아!!”
카르후는 곰 같이 우직한 자세를 취하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곰과 같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앞서 이어질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펠리스가 놈의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워 해머를 휘둘렀으나, 카르후는 마치 갈대와 같은 유연한 움직임으로 펠리스의 공격을 피하고 왼 주먹을 위로 쳐올렸다.
그에 다가올 충격을 대비한 펠리스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저 주먹은 위험하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워 해머보다도 치명적이다!
‘젠장.’
이미 휘두른 자세에서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급히 발을 놀리며 놈에게 발차기를 날려 봤으나 무게 중심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발차기였다.
카르후는 그 단단한 맷집을 믿고 그대로 주먹을 휘두르려던 찰나,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곧장 주먹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섰다.
도저히 인간의 신체로는 불가능할 정도의 유연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카르후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카르후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대검이 내리꽂혔다.
“후우. 신세를 졌습니다, 황녀님.”
“가뜩이나 너무 많은 죽음이 이어졌다. 명령이니, 결코 죽지 말도록.”
“황은이 망극하군요. 흐흐.”
“아바마마는 살아 계시니 그런 말은 쓰지 말도록 하지.”
방금까지도 목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는 카르후는, 둘의 대화에도 씩 웃으며 투지를 불태웠다.
그는 이러한 감각에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투사의 기질을 타고났다.
하나 그런 놈의 투지에도, 아나스타샤와 펠리스의 살기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재미있어 보이네~? 나도 껴도 될까~?”
그때, 별안간 허공에서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은 흰머리를, 반은 검은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려 묶은 소녀의 물음에, 카르후가 씩 웃으며 말했다.
“뒤에서 보조만 해라. 난 이 즐거움을 되도록 오래 느끼고 싶으니.”
“저런…… 아쉽네~ 알겠어!”
전쟁 중의 이 혼란을 즐기듯, 소녀는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허공에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누웠다.
“싸워라~ 싸워라~ 아무나 싸워서 이겨라~”
“그거 참 힘이 나는 응원이구만! 그하하하하!”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9화
79화 난공불락 (4)
절반 이상을 정리했다지만 여전히 몬스터 대군의 숫자는 많았다.
3만이라는 숫자는 고작 몇천이 감당하기에는 힘들었으나.
힘든 전시의 상황 속, 한 소년으로부터 치솟는 금빛 용오름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용기백배하게 만들었다.
한 번의 휘두름에 열이 넘는 적이 쓰러진다.
그의 발자취가 지나간 장소에는 오로지 황금빛 용에 의해 급소를 허락한 몬스터들이 줄지어 쓰러졌다.
아이스 트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한 전사의 머리가 박살 나기 직전, 금빛 용이 아이스 트롤의 머리를 통째로 가르고 지나갔다.
그 주변으로 나풀거리는 황금빛 마력으로 만들어진 실오라기는 주변의 모든 적을 말살시켰다.
압도적인 무력.
그 모든 것이 이제 겨우 17살이 된 한 소년에 의해 일어나고 있었다.
클레이튼 L 클라인.
그런 그의 곁에서 알 로스는 클라인에 의해 중상을 입었음에도 꾸역꾸역 살아남아 움직이는 몬스터를 처리했고, 그간 클라인의 검술을 꾸준히 학습하던 알렉스는 클라인이 다니는 경로에 방해가 되는 소형 몬스터들을 상대로 변화무쌍한 전투를 벌였다.
그때, 밤하늘에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번쩍이는 빛과 함께 낙뢰가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과연 저것이 하나의 번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풍경인 것일까.
지금도 연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낙뢰가 지나간 자리에는, 검게 타오른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단 한 번의 마법이 수천의 몬스터를 전투불가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꺄아악!”
그리고 여지없이 구슬픈 비명이 성벽 위에서 울렸다.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디라일라처럼 마석을 매개체로 자신의 한계 이상의 마법을 끌어올린 아르티아였다.
방금 일으킨 천뢰라는 마법은 그녀보다 한 단계 위인 7서클 마법사나 쓸 수 있는 마법이었으니.
그마저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 캐스팅해야 하는 마법을 발현시킨 것이다.
당연히 당장 아르티아가 발현하기에는 무리였으나, 쓰러진 디라일라를 보며 괜한 승부욕이 불타올라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으으…… 그, 그래도 내가 더 버텼다…….”
차마 디라일라처럼 꼴사납게 혼절할 수는 없던 아르티아였으나, 끝내 그 말을 내뱉고는 똑같이 혼절해서 쓰러졌다.
고작 한 번의 마법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단 번의 마법이 일으킨 바람은 결코 작지 않았다.
후방에서 휘몰아친 낙뢰의 후폭풍으로 인해 감전에서 벗어나지 못한 몬스터들이 앞으로 전진을 못하자, 전방에서 몬스터를 끊임없이 상대하던 사람들에게 한숨 돌릴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게, 동이 트기 시작하며 모습을 보인 태양은 전쟁의 여신은 인간들에게 미소를 짓는 듯했다.
* * *
회귀 전.
셰인의 전생에 조직에는 셰인을 포함한 총 7명의 군단장이 존재했다.
셰인은 그중에서 ‘질투’를 담당하는 군단장이었으며, 생자를 향한 원혼의 질투를 매개로 압도적인 숫자의 언데드 군단을 다뤘다.
때문에 셰인의 군단은 백전불태요, 불멸의 군단이었으나.
무의 끝에 다다른 자를 상대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적합한 경향이 강했다.
반면, 그런 존재들을 상대하기 위한 부대는 여럿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강인한 군단이 있다면 바로 ‘분노’를 담당하는 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노라는 이름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하핫!’하고 호탕한 웃음과 함께 전투를 즐기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분노’를 담당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단 한 번.
그가 진심으로 분노했을 당시, 그는 스스로가 ‘분노’의 군단장이 될 수 있음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분노는 전대 ‘분노’를 담당했던 군단장에게 향했다.
자신의 승부를 방해하고 적을 가로챈 그 행위에 분노를 터뜨린 그는 단번에 자신의 상사였던 군단장에게 덤벼들어 당당히 그를 죽이고 자신을 입증했다.
그자가 바로 웅족의 사내. 카르후였다.
* * *
울컥─!
길고 길었던 전투의 공방 끝에 펠리스가 입에서 각혈이 한 움큼이나 흘러나왔다.
바로 직전.
카르후가 휘두른 주먹을 피했음에도 그 여파만으로도 내상을 크게 입은 것이다.
“미, 미친…….”
만일 이번에도 아나스타샤가 대검을 휘둘러 카르후의 공격을 흘리지 않았더라면 정통으로 맞았을 것이다.
흘린 공격을 받아 낸 것뿐임에도 이 정도다.
정타를 허락했다면 필시 죽음에 이르거나 그 근처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터.
그러나 상황이 악화일로를 그리고 있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펠리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억지를 부리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은 짐짝에 불과하다.
“크으…… 미안합니다, 황녀님. 제 역할은 여기까지 같습니다.”
펠리스의 한마디에 아나스타샤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자인 펠리스가 전장에서 물러서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하하핫! 주제를 알고 빠지는 것도 전사로서의 덕목이지!”
그런 카르후는 이제 아나스타샤를 직시할 때,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암~ 이제 슬슬 지루해지려는데.”
“걱정 마라, 광대야. 이제야 겨우 재미있어질 때이니.”
그렇지 않냐는 듯 카르후가 아나스타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겨우 몸 풀기가 끝났는데 말이야. 그쪽도 그렇지? 그하핫.”
“……후우.”
그런 카르후의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신의 손에 쥐인 대검에 집중했다.
쉽지 않은 상대다.
전투에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발이요 둘째로 중요한 것은 눈이라 하였다.
그만큼 상대방의 움직임을 통해 공방이 성립되는 게 전사들의 전투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는 말도 안 되는 유연함으로 공격에 허와 실을 섞고, 뿐만 아니라 그 한 방 한 방이 상대를 반드시 죽일 위력을 담고 있다.
거기서부터 오는 압박감은 보통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소녀의 농간인지, 카르후의 움직임에 환영까지 뒤섞이며 전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만약 다양한 종류의 살기와 투지를 경험해 온 둘이 아니었더라면, 눈앞의 존재에게 진즉에 사망했을 터.
결국, 아나스타샤는 전력이 아니라면 상대할 수 없는 적임을 인정했다.
“우선 사과하도록 하지.”
“음?”
“영혼을 걸라 말했음에도 미리 나서지 않았어.”
그런 아나스타샤가 성인 남자가 두 손으로 들어도 무거울 법한 대검을 한 손으로 집고, 다른 손으로는 펠리스가 놓고 간 워 해머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런 아나스타샤의 양쪽 눈으로 푸른 귀화가 일렁거렸다.
“이제부턴, 진정 영혼을 걸어야 할 거야. 난 이미 걸었으니.”
순간, 푸른 귀화가 순식간에 아나스타샤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대검과 워 해머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기의 조합으로 인해 말도 안 되는 자세가 펼쳐졌으나, 카르후는 자신의 뛰어난 직감이 외치는 경종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감을 느껴 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카르후의 호쾌한 웃음이 비두론 전체에 떠들썩하게 울렸다.
“그하, 그하하…… 그하하하하하핫!! 좋다, 좋아! 그럼 이쪽도 전력을 다해 주마!”
2미터가 넘어가던 그의 덩치가 단숨에 3미터로 늘어났다.
거기에 눈이 붉은빛으로 빛나니, 마치 바깥에 있는 몬스터들의 그것과 흡사했다.
심신이 단련된 기사들조차도 기에서 밀릴 정도로 놈이 내뿜는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였다.
“그럼, 나는 이쪽과 어울리도록 하지.”
검은 머리카락에 로즈베리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카르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직후.
카르후의 발밑으로 룬 마법이 발동됐다.
[팽창].
단번에 공간이 팽창하며 카르후에게 깃들어 있던 소녀의 마법이 흩어져 버렸다.
카르후 스스로가 쓴 게 아니라, 흑백의 소녀가 발현한 마법이었기에 마력이 다시 제 주인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혼란을 즐기는 어릿광대야. 어디 한번 내게도 혼란을 심어 보거라.”
그러자 흑백의 소녀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랑~? 넌 누군데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걸까~?”
“어디 한번 맞춰 보거라. 네가 퍽 좋아하는 놀이가 아니더냐.”
“와아? 이거 진짜 궁금한데~? 그럼 진짜 놀아볼까?!”
퐁-!
방금까지 비교적 평범한 차림이었던 소녀가 연기에 휩싸이더니, 어느새 마술사의 그것과 같은 복장으로 바뀌었다.
커다란 중절모의 챙을 잡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쑈를~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셰인과 소녀의 주변으로 검은 벽이 생성되며 둘을 가두었고, 그 순간까지도 셰인은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 * *
변화무쌍.
셰인의 회귀 전에는 그 타이틀이 주로 알렉스를 가리키는 전투법이었으나, 세상에는 그러한 방식의 전투를 즐기는 이가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천부적으로 뛰어난 무재(武才)를 타고났으며, 무기를 다루는 법에 있어서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서부터 조개만 한 작은 손으로 다양한 무기를 익혀 갔다.
이윽고 제법 나이가 들어 이젠 소녀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한 그녀는 자신의 몸보다 배는 더 큰 대검을 휘두르며 기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소녀가 바로 제국의 두 번째 꽃,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였다.
부웅-! 콰앙-!
주먹에 허와 실이 섞인다.
그 속도 또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매우 잽싸며 또한 유연하기가 그지없다.
그러나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서 그 모든 기예는 하나의 재롱에 불과했다.
세상에 그 누가 웅족의 카르후에게 힘으로 밀리지 않을까.
카르후의 근력은 사이클롭스조차도 능가할 정도의 힘이 담겨 있건만.
아나스타샤의 무기에 담긴 귀화처럼 푸르게 타오르는 불길은 그런 카르후조차도 뒤로 물러서도록 만들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힘을 내는 거지?!’
조직에 가담한 만큼 카르후는 눈앞의 여인이 휘두르는 힘이 무엇인지 진즉에 파악했다.
오리진.
아주 극소수의 인간들 사이에서 발현된다는 그 힘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카르후는 의문을 떠올렸다.
보통의 인간은 저만큼 선명하게 오리진을 사용하지 못한다.
해 봐야 황실의 저지먼트 기사단처럼 마력과 오리진을 섞어서 쓰는 정도.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그런 것 따위 하나 신경 쓰지 않고 대검과 워 해머를 휘둘렀다.
거기에 변칙적이기가 가히 카르후 못지않았다.
대검을 둔기처럼 사용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에 검으로 둔갑하지를 않나.
워 해머를 휘두르는 척하며 투척하고,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하면 뒤이어 대검이 둔기마냥 날라든다.
그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아나스타샤는 저만한 대형 무기들을 마치 나뭇가지 휘두르듯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나 카르후는 수많은 전투과 전쟁, 혈투를 즐겨 온 존재다.
그 역시 유연한 몸놀림으로 아나스타샤의 모든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체력을 아끼고, 최후의 한 방을 준비했다.
저 가공할 파괴력은 카르후조차도 인정하겠으나.
저것은 명백한 오버 파워였다.
그러니 기다리고 기다린다면 빈틈이 나오지 않겠는가.
때문에 카르후는 이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공격을 쑤셔 넣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렇게 몇 차례의 공방이 오갔을까?
아나스타샤의 대검이 땅에 처박히고, 워 해머가 아래서 위로 올라간 바로 그 순간.
“흐읍!”
카르후의 오른손에 온 힘이 집중됐다.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음속과 같은 속도로 아나스타샤의 명치를 향해 파고 들어갔다.
이건, 먹혔다.
바위도 두부처럼 부수는 주먹이 내는 파괴력은 설령 사이클롭스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전신의 터져 나가는 공격이다.
그러나.
“커흡?!”
마치 모기가 때리기라도 한 듯, 아나스타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뒤로 물러서며 워 해머를 내려쳤다.
‘이게 무슨?!’
제아무리 카르후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들어간 공격 이후에는 방심이 잇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워 해머에 내려쳐져 온몸이 부서질 듯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카르후의 머릿속에는 온통 의문만이 남았다.
도대체 어떻게?
전심전력을 다하면 작은 동산마저 지형이 뒤바뀔 정도의 충격력을, 저런 여인이 버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멀쩡해 보였고, 그대로 몇 번이나 워 해머를 내려쳤다.
한 대 한 대가 마치 거대한 성벽이 내려찍는 듯한 충격이 잇따랐다.
그렇게 몇 번이고 내려치는 사이, 어느새 바닥에 피로 이루어진 살덩이 같던 카르후가 사라졌다.
어느새 검은 벽이 사라지며, 흑백의 소녀가 카르후를 자신의 곁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으아! 괴물, 괴물!”
그러나 그녀는 쓰러진 카르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셰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어떤가, 광대여. 인생 처음으로 겪어 보는 혼란은?”
“……으으, 몰라 이 괴물아! 너랑 안 놀아!!”
“저런. 벌써부터 그런 말을 하면 섭섭한데.”
“메롱이다, 이 괴물 멍청아! 흥! 가자, 곰탱아!”
“그, 그하……. 내가, 내가 저다 마이지……?”
온몸의 뼈가 바스라지고 이빨은 전부 부러져 버렸음에도 카르후는 여전히 투지가 사라지지 않은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투지가 맞았다.
“그래, 네가 졌어! 이 바보 똥깨!”
“나 고미라고 며 버으 마해.”
“그래, 이 미련 곰탱아! 그리고 이 괴물! 이번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러면서, 둘은 나타났을 때처럼 신출귀몰하게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마치 그대로 접히듯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흐음…….”
셰인은 그렇게 사라진 둘을 전혀 아쉬워하는 내색 없이 보내 줬다.
카르후라면 모를까, 그 흑백의 소녀는 지금의 셰인으로서도 소멸시키기에는 불가능한 존재였으니.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자.
7군단의 군단장이 아님에도 제8의 악이라 불리며 조직조차도 통솔이 불가능한, 말 그대로의 ‘혼란’은, 소멸하고 싶다고 소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은 없었다.
이미 방금의 만남으로, 셰인은 조직에게 하나의 독극물을 투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제는 시간이 가져올 결과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서 셰인은 어느새 푸른 귀화를 꺼뜨린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어 가고 계시는군요, 황녀님.”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0화
80화 합류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하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조직에 의해 타락한 적이 있던 셰인은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치를 따르지 않고 힘을 탐하다 사그라진 이들을 수없이 봐 오지 않았던가.
때문에 일반적으로 세계가 허락한 선 아래서만 힘을 탐하거나, 이치에 맞도록 조정하는 법이다.
그러지 않으면 어떤 이유로든 어울리지 않는 힘에 의해 무너지니.
그리고 지금 바로 눈앞에, 그런 사람이 서 있었다.
“이상한 일이야. 나조차도 이 힘에 대한 원리를 잘 모르는데, 너는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니까.”
아나스타샤의 그 말에 셰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 힘을 오리진이라 부릅니다.”
“오리진?”
“인간이 가진 감정에 물리력을 담는 능력이지요.”
“……그건.”
셰인은 손 위로 새하얀 오러를 일렁거렸다.
황실에서 허락한 힘.
저지먼트 기사단이 쓰는 백사자의 오러이지 않은가.
“저지먼트 기사단이 쓰는 오러도 거기서 기인한 힘입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쓰고 있는 거지?”
셰인이 오리진이라 명한 능력은 황실에서도 아주 비밀리에 쓰이고 있는 힘이다.
그마저도 연구가 매우 뎌딘 탓에 황실의 검이라 명한 저지먼트 기사단에게만 전수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셰인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기보단, 자신의 할 말을 이어서했다.
“일반적으로는 이렇듯 마력을 섞어 물리력을 담습니다. 황녀님처럼, 오리진 그 자체를 활용하여 물리력을 생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만들었다. 언뜻 들어서는 대단한 일처럼 보일 테고, 또 대단한 게 맞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따릅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아나스타샤의 영혼을 바라봤다.
“정제되지 않은 그 힘은, 죽음을 불러옵니다.”
그녀의 영혼에 전체적으로 퍼진 실금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롭게 보이기만 했다.
* * *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영혼을 복구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 적어도 셰인의 지식에 의하면 그러했다.
인간의 영혼과 피를 매개체로 삼아 혈마법을 쓰던 고든조차도 그와 관련된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힘은 더 이상 쓰시면 안 됩니다.”
“꼭 미미르처럼 잔소리를 하는군.”
다음 날 아침.
다시 한번 아나스타샤에게 찾아가 그리 말한 셰인에게 그녀는 조금 질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몇 번이고 반복하며 하는 소리이지 않나.
“지금은 전시 중이야. 지휘관이 스스로의 몸을 아끼겠다고 전쟁에서 물러나는 순간 패배는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지.”
“더 멀리 보십시오.”
아나스타샤가 오리진을 사용하며 단 한 번 막은 카르후의 공격은 그만큼 대단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으나, 그동안 내부에서 분열이 시작되던 아나스타샤의 영혼에 외부까지 실금이 퍼지도록 만들었으니.
괜히 카르후가 자신의 공격이 먹힌 순간 방심을 한 것이 아닌 셈이다.
“앞으로도 제국에는 황녀님의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 백성들을 생각하시지요.”
“…….”
저렇게 말하니 아나스타샤로서도 할 말이 빈곤해졌다.
“알았다니까.”
“꼭입니다.”
“그래.”
그동안 아나스타샤와 1황녀인 올리시아를 이용해 제국의 안정을 되찾을 구상을 하고 있던 셰인에게 이번 일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아무튼, 내일이면 드디어 선발대가 도착하겠군.”
말을 돌리듯 아나스타샤가 하는 말에 셰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아룬비다는 제국의 군대가 오기 전에 전력을 보존한 상태로 몬스터 대군을 막아 냈다.
물론 인명 피해가 상당히 컸으나, 그 정도는 수용 범위 내였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쓰러져 자고 있는 디라일라와 아르티아의 활약이 큰 덕분이었다.
“황녀님.”
그때, 전장의 뒷수습을 하고 있던 미미르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며 들어왔다.
그만큼 미미르의 표정에는 급박함이 느껴졌는데, 이후 그의 보고를 들어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크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보고였다.
* * *
“과연 인간들은 강하군.”
푸른 오크의 대족장.
파가부탄의 그 한마디가 공간을 무겁게 만들었다.
지난 보름의 시간 동안 오크들이 보낸 몬스터 웨이브의 수는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해서 만든 결과였다.
그러나 그만한 수의 몬스터 웨이브로도 인간들의 성, 비두론의 성벽을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고, 곧 있으면 인간들의 수는 오히려 늘어날 터.
“거기에 암살도 실패했지.”
“…….”
그 말에, 이곳에서 유일하게 오크가 아닌 존재들이 고개를 떨궜다.
조직, 무명에서 파견을 온 파견원들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카르후가 누구던가.
차후 군단장으로 거론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겨우 21살의 여인을 이기지 못하고 반 시체가 된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조직의 정보력에 의하면 2황녀, 아나스타샤에게 그만한 무위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었기에 이는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그에 엘더 샤먼, 카르가토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계획에는…… 차질이 없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계획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저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반파됐던 성벽이 고작 하루 만에 모조리 복구됐다.
그뿐이던가.
몬스터 웨이브의 총공세에서는 성벽을 타고 올라가던 수많은 몬스터들이 거대한 가시로 변형된 성벽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죽음을 맞이했던가.
대족장이 그 점을 찝어 말하자 카르가토는 여전히 문제가 없음을 알렸다.
대족장, 파가부탄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엘더 샤먼이 직접 하는 말이다.
그에 파가부탄은 카르가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명의 파견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래의 물건은 이번 대업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의는 없겠지.”
“……물론이오.”
고든이 남겨 둔 혈마법을 오크들에 전수해 주긴 했으나, 카르후가 큰 소리를 탕탕 낸 것에 비해 암살에는 실패했으니 무명의 파견원들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고든의 혈마법은 진짜였으니.
그가 창시한 마법을 주술로서 발현시키기 위한 준비는 끝마쳤다.
지금쯤 자신들의 승리라며 웃음을 피우고 있을 인간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그 15만의 몬스터 대군조차도, 그들의 계획 중인 혈마법을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했음을.
이제는 그 과정을 끝마치고 실행에 옮길 단계가 되었다.
* * *
오크의 가장 큰 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압도적인 숫자다.
다산이 기본인 그들은 많은 숫자로 적을 밀어붙인다. 불과 10년이면 성인식을 치를 정도로 성장 속도 또한 빠르기에, 그들의 인해전술은 고대에서조차도 먹혔던 전술이었고, 이는 지금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50만.
늦은 밤.
성벽 너머로 보이는 오크들의 그 숫자는 미미르의 사역마가 알려온 것이다.
무려 50만이라는 숫자의 오크들이 전부 혈마력을 쓴다.
부상을 입힌 적으로부터 마력을 뽑아내는 놈들은 지치지 않는 전사다.
그런 숫자를 고작 몇천이라는 인원으로 막아야 한다는 사실에, 아나스타샤를 향한 충심으로 무장한 아룬비다의 주민들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해전술의 큰 장점 중 하나인 ‘압도’가, 인간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은 것이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다.
인간이란 공포 앞에서 무너지기 쉬워지나, 반대로 말하면.
“어디 한번 죽어 보자!”
“이 씹새끼들아! 한 놈당 100마리씩 잡으면 우리가 이긴다!”
“염병, 내가 아룬비다에서 죽인 몬스터 숫자만 하더라도 1천이 가뿐히 넘어가는데, 그것도 못할까!”
공포를 이겨 냈을 때. 혹은 공포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 몰릴 곳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강해진다.
콰과과과광─!!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대포의 폭음이 재차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이전과 다르게 셰인의 마법진이 포함되지 않은 대포알이다.
귀한 화약이 마치 물 쓰듯 빠져나가고, 수많은 오크들이 그 포화 속에서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사그라진다.
그럼에도 너무 많은 숫자가 이를 무산시키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했다.
혈마력을 쓰는 오크들을 상대로는 마법조차 쓰기 쉽지가 않았다.
한 번 마법을 펼칠 때면 많은 수의 오크들을 죽일 수 있겠으나, 그 여파에서 살아남은 오크들은 더욱 강인해져서 찾아올 테니.
일격필살.
놈들을 죽이는데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대포가 비명을 지르며 그 내구성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불꽃을 뿜어냈다.
“끝이 없네, 시벌.”
어느 한 주민의 말이 비수처럼 파고든다.
끝내 대포가 더 이상 불을 내뿜지 못하게 될 때가 됐음에도 놈들의 숫자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듯 보였다.
이윽고 주민들이 활의 시위를 당겼다.
죽이지는 못하겠으나, 이렇게라도 놈들에게 부상을 입혀 둬야만 했다.
수천의 화살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또다시 활시위가 당겨지고, 튕긴다.
어찌나 많은 화살이 날아갔는지, 쉴 새 없이 퍼부어지던 10만 발의 화살은 끝내 모두 동이 났음에도 오크들의 숫자는 여전했다.
“흐음……!”
그에 미미르가 신음을 흘리며 준비된 마석과 함께 성벽 아래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카가가가각─!
그러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부터 공수해 온 특제 나무 씨앗들이, 미미르와 마석, 그리고 엘프들의 정기가 담긴 플라스크에 반응해 급속도로 성장하며 가시덤불이 되어 성벽을 감쌌다.
이로써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어서 오크 대군이 단단한 가시덤불에 막힌 성벽을 무구로 내려치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오크대군은 끊임없이 성문을 두들기며, 준비해 둔 사다리를 성에 내건다.
아니면 밧줄에 묶인 갈고리를 던져 타고 온다.
성벽의 주민들이 서둘러 이를 막아 보려 하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
하물며 지금은 백 손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던가.
오크들은 가시덤불이 자신들을 옮아매어 와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성벽을 두드리며, 또 그와 비견되도록 많은 수의 오크들이 끝내 성벽을 넘기 시작했다.
“죽여!”
“으아아!!”
아직 마력을 흡수하지 못한 오크는 그리 강하지 않다.
그에 성벽을 지키는 주민들도 신체를 마력으로 강화한 채 검을 휘두르며 창을 내찌르고 방패로 밀어 성벽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크의 인해전술은 인간들의 방어를 한낱 발악에 불과하도록 만든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엘더 샤먼은 화룡점정(畫龍點睛)으로, 비소를 지었다.
“시작…… 하라.”
전장의 후방.
엘더 샤먼 카르가토를 중심으로 백여 마리의 오크 샤먼들이 각자의 주술을 읊었다.
“샤 두아 비 코두아…….”
“샤 두아 보 하바나…….”
“샤 두아 투 보고아…….”
어둡던 밤하늘이 붉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푸른 달빛이 분노한 듯 붉게 변하고, 대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15만이라는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몬스터의 피를 한가득 머금은 대지가, 주술에 이끌려 자신들이 머금던 피를 일제히 내뱉기 시작했다.
더불어 인간들의 반격에 의해 죽어 나간 오크들의 피도 일부 섞이며, 흡사 피 안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크오아아아아아─!!”
푸른 오크들이 일제히 공명하듯 울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몰라, 씨발! 그냥 죽여!”
성벽 위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인간들은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참아 내며 울부짖는 오크들의 목과 심장을 꿰뚫었으나.
“커헉?!”
오크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심장이 꿰뚫리고, 목이 베여져도 움직인다.
15만이라는 몬스터들의 피를 흡수한 놈들은 죽음조차 미뤄 둔 채 달려든다.
흡사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가 된 듯, 놈들의 무기에 인간들이 파죽지세로 밀려 나갔다.
이윽고 성벽이 무력하게 뚫린 그 순간.
“마력을 사용해라! 적의 머리를 부수어라!”
기어코 아나스타샤의 명령이 내려오자 인간들도 그간 참아 왔던 마력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비록 불사처럼 보이나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목이 떨어져 나가면 필사(必死)였으니.
결국 성벽을 포기한 인간들이 뒤로 물러서 해일처럼 몰려오는 오크 군단을 노려보던 그 순간.
“나를 고용한 값은 아주 비쌀 거야.”
한 여인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밤하늘에 태양이 떠올랐다.
아니,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붉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인이 오연하게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쾅.”
아득한 세월 동안 열기라고는 품어 본 적 없던 대지가, 만들어진 태양에 부르르 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태양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이동요새 라비아타의 등장.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크 군단의 최후방에 수십, 수백 개의 포탈이 생성됐다.
“전군! 제국의 땅을 밟은 대가가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 주도록!”
과거 황실의 기사단장이었던 한 사내, 리바이 벤자민의 명령에, 1만 5천이라는 숫자의 군대가 검을 뽑아 들며 응했다.
선발대가 아룬비다의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1화
81화 격전
어둠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 산왕은 시간의 흐름을 바라봤다.
고대를 넘어 신화시대서부터 살아온 산왕은 세상이 창조되는 그 순간에도 살아 숨 쉬고 있던 존재다.
고로 이 세상이 탄생하고 시간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간이 만들어 내는 강을 들여다볼 자격이 있었다.
인간들에게는 긴 시간이나 산왕에게 있어서는 잠깐의 단잠에 불과한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지금의 시간선 외에 길이 이어진 그 흐름을 지켜봤다.
마치 깊은 심해를 담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선이다. 분명 자신이 존재했던 시간선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가 않는다.
그에 산왕이 의아함을 느낄 때쯤, 현재의 시간선 속 작은 빛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작디작은 불빛.
그 불빛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금이 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찬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산왕에게 있어서도 극히 찰나의 시간.
그는 그 빛을 본 직후에 그 짧은 시간 동안 탐욕이라는 감정을 느꼈으나, 이내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랬군.”
작은 불빛이 잠시나마 심해처럼 가려진 또 다른 시간선을 비추자, 그제야 산왕은 그 가려진 시간선 속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재미있는 유희가 되겠어.”
바뀐 시간선을 이해한 산왕은 그렇게 꿈속을 헤매듯,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이 보낸 초대장에 상대가 응하길 기다리며.
* * *
셰인이 이곳 아룬비다에 오도록 추천한 인물이자, 학과시험 당시 담당관을 맡았던 지휘학과 수석교수, 리바이 벤자민은 한때 제국에서 알아주는 황실의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타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무위로 자신을 입증했고, 스스로의 시그니처를 깨달은 기사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올리시아가 그토록 탐내던 인재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참전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은퇴 기사를 다시금 전쟁에 참여시키는 행위는 제국법상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고, 벤자민이 참전한다는 것은 결국 제국 스스로가 이번 상황을 위기 상황이라 판단했다고 자명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벤자민은 이번 전쟁에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새길 수 없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스스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왔다.
황실의 정치에 마음이 부러진 지금에서도 아나스타샤를 생각하는 그의 충심 때문이었다.
“전군! 진격하라!”
그런 벤자민의 명령에, 올리시아를 따르는 황실의 기사단이 말에 올라탄 채 랜스를 들고 돌격했다.
황실의 기사단이 품은 마력이 랜스에 담기고, 전투마가 투레질과 함께 질주를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최후방에서 주술을 외고 있는 오크 주술사들이었다.
“크와비타! 파 다르게르 워나후!”
그에 후방에서 나타난 인간들을 향해 주술사를 지키던 오크들이 달려들었다.
혹시 모를 위기 상황에서 주술사들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주술을 걸어 둔 오크들은 일전 펠리스가 상대했던 백부장급 오크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끈질긴 생명력을 무장한 놈들이라 하더라도, 단 한 번의 공격에 상반신 전체가 날아가면 불사라 할 것도 없이 죽기 마련.
벤자민은 번개처럼 흐르는 마력을 쌍검에 두른 채 태풍처럼 오크들 사이를 휘저었다.
뇌영(雷影).
번개와 같은 속도에 그림자가 쫓아가지 못하고 잔상만이 남겨진다.
그리고 그 잔상이 남고 간 자리에는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오크들이 쓰러져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사이클롭스의 마력을 휘감은 오크들이었으나, 그럼에도 그 빛과 같은 속도에 반응하지 못한 채 목이 잘려 나갔다.
“막아라, 막아!!”
“뒤를 부탁한다, 형제여!”
“우르부라크에서 보자!”
결국 기사단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몇몇 오크들이 직접 기사단에게 뛰어들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혈폭.
몬스터의 야성을 담은 피를 터뜨리는 자살 기술.
백부장쯤 되는 능력을 지닌 오크들이나 쓸 수 있는 그 자폭에 대다수의 기사들이 휘말렸고, 전광석화로 움직이던 벤자민조차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자살한 오크의 핏물이 땅을 타고 주술사들을 지키는 방어막에 흡수되었다.
이젠 내부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아진 농도.
부상자를 뒤로하고 다시금 정비한 기사단이 달려들어 남은 오크들을 정리한다.
기사단 또한 결코 적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나, 그 덕에 주술사를 지키던 최후의 오크마저 끝내 차가운 아룬비다의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덧 주술로 강화한 방어막은 성벽처럼 튼튼하게 주술사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벤자민이 번개처럼 검을 휘둘러봤으나 이내 공격은 덧없이 튕겨져 나왔다.
“으음……!”
튕겨져 나올 때의 반발력이 상당하다.
방금, 전력을 다해 휘두른 탓에 벤자민은 자신의 찢어진 손바닥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그때,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하는군, 벤자민.”
“……대니얼 님.”
“그래, 나다.”
사자의 갈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내.
명불허전 황실의 검. 저지먼트 기사단의 단장, 올리버 G 대니얼.
그가 백염의 오러를 휘감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좀 도와줄까?”
“그래주면 고맙겠군요.”
“으하하, 그리하지!”
그는 호탕하게 웃음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촤악-!
그러자 방금까지 벤자민의 검에도 일절 흔들림 없던 방어막이 단숨에 갈라졌다.
마력을 흡수하는 오러.
백사자의 오러 앞에서는 혈마력도 부질없이 사그라질 뿐이었다.
“쿠, 쿠와비타! 에루버 바크!”
그에 오크 샤먼들이 화들짝 놀랐으나, 이미 벤자민의 검은 움직이고 있었다.
일순간에 백 마리의 오크 샤먼 중 열이 목을 베였고, 뒤이어 저지먼트 기사단이 움직였다.
“전원! 황실의 정의를 보여라!”
기사단장 대니얼의 명에 기사단원들이 백염의 오러를 두른 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절반이 되는 샤먼이 정리되자, 엘더 샤먼, 카르가토가 두 눈을 부릅뜨며 토템이 달린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미리 준비해 둔 주술이 발동되며, 피의 막이 기사들을 감쌌다.
* * *
하늘에서 태양이 떨어진다.
이런 광경을 목도한 이가 어디 있을까.
이 비현실적인 광경은 몬스터의 야성에 잡아먹힌 오크들의 발걸음조차도 멈춰 세웠다.
태양이 떨어지고 있는 바로 아래로는 아직 닿지도 않은 오크들의 피부가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불사의 몸을 지니게 되었다지만 고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몬스터의 야성으로도 견딜 수 없는 최악의 격통에 오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윽고.
결코 만나서는 안 될 태양과 대지가 맞부딪치자 말 그대로 공간이 소멸됐다.
오크들은 한 줌의 핏물도 남가지 못한 채 산화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행운이었다.
죽음은 곧 고통의 해방을 뜻했으니.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그 폭발 범위에 걸쳐져 있던 오크들은 사정이 달랐다.
신체의 절반이 녹아내렸다.
그럼에도 주술에 의해 끈질긴 생명력은 그들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섰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오크들이 죽거나 전투 불능의 부상을 입었다.
그에 라비아타는 자신이 직접 만든 하나의 지옥도를 보며 기침을 내뱉었다.
“크으, 젠장. 아직 무리인가.”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얻었던 드래곤 하트를 이식하는 과정이 진행 중이건만, 너무 무리하게 움직이고 말았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또 몇 달 동안 요양해야 할 터.
“그러게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런 라비아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제임스가 한마디 내뱉자, 라비아타가 빽 소리 질렀다.
“이 새끼야, 네가 맨날 돈돈 이러니까 내가 여기까지 온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 하트가 채 이식되기도 전에 달려 나올 줄 누가 알았습니까?”
“끄응…….”
사실 제임스도 속으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라비아타는 인간들의 세상에 간섭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여태껏 황실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화로 탑을 쌓아도 될 수준의 보상이 제시됐음에도 라비아타는 눈 하나 꿈쩍했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직접 인간들의 사건에 간섭한 것이다.
“뭐, 어쩌겠어. 받은 도움이 있는데.”
평생의 숙원이었던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지 않았던가.
그에 큰 도움을 주었던 셰인의 부탁이 있던지라, 라비아타는 특별히 이번에 한해서 이렇듯 모습을 내비친 것이다.
“그럼 들어가자고. 나머진 알아서 하겠지.”
그 많던 오크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본 라비아타는 욱신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포탈로 향했고, 제임스도 그런 라비아타의 뒤를 따라 포탈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세상에…….”
태양이 떨어진 이후.
그 광경은 성벽 너머에서 한참 전투 중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도 빠짐없이 전해졌다.
혹독한 이곳에서 난로 앞에서도 느낄 수 없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밤하늘이 밝게 빛나며 말도 안 되는 굉음이 들려왔다.
마치 하늘이 분노하여 태양을 내린 듯한 광경.
그럼에도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전투를 멈출 수 없었다.
앞서 셰인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듣기도 하였고, 몬스터의 야성에 집어삼켜진 오크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성벽과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위치에 태양이 떨어졌기에, 여전히 성벽을 넘어오는 몬스터의 수는 적지 않았다.
“흐읍!”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빛을 내는 이는 다름 아닌 클라인이었다.
황금빛 오러를 내뿜는 그의 주변으로 오크들의 시체가 쌓여 갔다.
평소에는 적의 핏방울도 몸에 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클라인이었지만, 전쟁에서는 그럴 겨를조차 남지 않았다.
자신이 활약할수록 죽는 사람들이 적어진다.
그 사실에 클라인은 더욱더 마력을 뿜어내며 적들을 일사불란하게 베어 나갔다.
그런 클라인의 곁에서 부상으로 인해 빠져 있던 펠리스도 워 해머를 휘두르며 오크의 머리통을 부숴 나갔다.
살아남은 이들은 클라인과 펠리스가 있는 방향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필사의 사투를 벌였다.
그러던 와중에 하늘 위로 따사로운 빛이 흘러내렸다.
라비아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태양이 아닌, 생명을 보듬는 엘프들의 정기가 모이고 모여 부상자들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잘한 상처들은 눈에 띄는 속도로 회복되어 갔으니, 인간들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이것들아, 네놈들만 무적인 줄 아냐?!”
“죽여 버려 그냥!”
이어지는 전투 속.
끝내 아나스타샤 또한 대검을 뽑아 들어 전장에 나섰다.
일격필살.
한 번의 휘두름에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오크들이 쓰러진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혼란스러운 전장의 상황 속에서 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난 존재들아.]
다시금 제 색을 되찾은 밤하늘의 위로, 진정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너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그 안에서, 민무늬 가면을 쓴 검은 망토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무(無)로 돌아가라.]
허공에 떠오른 남자가 손을 움켜쥐자.
전장에 심연과 같은 어둠과 함께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2화
82화 강철의 여인
아래서 위로 손을 움켜쥐는 단순한 손짓.
그러나 이어지는 결과는 결코 단순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비두론 성을 주변으로 설치되어 있던 마법진이 발동되며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쌌다.
검은 기운을 담은 마력은 온갖 것들이 혼합되어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하니, 탐욕의 오리진이 전장을 가득 채운 오크 샤먼의 주술을 향해 마수를 뻗어 나갔다.
본래라면 그 술자인 엘더 샤먼이 꽉 붙잡고 있어야 했을 터이나, 벤자민과 저지먼트 기사단의 등장으로 인해 엘더 샤먼은 더 이상 주술의 주도권을 잡을 겨를이 없었다.
“아, 안 돼!”
빼앗기기 시작한 주도권을 엘더 샤먼이 뒤늦게 되찾아오려 했으나, 셰인의 탐욕은 한 번 물고 늘어진 먹잇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엘더 샤먼은 그나마 남은 주도권으로, 이 일의 원흉으로 보이는 저 민무늬 가면의 남자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에 일제히 성을 향하던 오크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민무늬 가면의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순탄치 않았다.
이미 40퍼센트 이상 빼앗긴 주도권으로 인해 주술로 야성을 다스리던 오크들이 동족을 향해 이성을 잃고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krrrrr……!]
거기에, 그 혼란 속에서 가면의 남자의 앞을 막아서는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둠을 형상화시킨 듯한 존재는 무수히 흘러 들어오는 셰인의 오리진을 탐하며 짐승처럼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수만의 오크들이 달려드는 것을 홀로 막기에는 역부족.
땅 아래로 내려온 셰인은 하위 마법, 윈드 커터를 소환해 냈다.
그러나 일반적인 윈드 커터와는 다르게 그 크기가 어지간한 롱 소드에 비견될 만큼 컸고, 그 수가 무려 백 자루에 달했다.
셰인은 이제 70퍼센트까지 빼내 온 주술의 주도권 쟁탈 작업도 멈추고 온 신경을 백 자루의 검에게 돌렸다.
압도적인 집중력이 백 자루의 검에 새겨지자, 하나하나가 일류 검사의 일격에 맞먹는 위력을 갖췄다.
전생에 수없이 탐해 온 인재들의 검.
압도적인 언데드 군단 앞에서도 찬란한 영혼의 빛을 머금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검을 휘두르던 결사단의 검술이 지금 이 순간, 오크들을 향해 펼쳐졌다.
훗날 어느 천재가 창조한 합격진(合擊陣).
백화야행(百花夜行).
백 개의 꽃잎이 흩날리듯 펼쳐지는 검진이었으나, 셰인이 독자적으로 개량한 제2형, 백귀야행(百鬼夜行)이 펼쳐졌다.
어둠과 어둠을 타고 흐르는 백 자루의 검이 셰인이 허락한 공간을 넘는 순간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오크들은 엘더 샤먼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수백, 수천의 오크들.
그럼에도 셰인이 펼친 마법의 검무는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셰인의 신체로부터 쉴 새 없이 마력이 빠져나갔다가 흡수된다.
이전이라면 이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 버렸을 심장이, 이제는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성능은 확실하군.’
드래곤의 역린(逆鱗).
이 세계가 창조되면서 탄생한 그들은 모든 종족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였으며, 또 동시에 마력의 주인이었으니.
그 권능에 따라 드래곤의 역린은 이만한 마력이 들어왔다 빠지는 것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었다.
“흐읍─!”
하나, 그 또한 무적은 아니었으니.
셰인이 심장에 머금을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아직 2서클에 불과한 심장이 내뱉는 마력은 아무리 빠르게 흡수와 분출을 반복한다 한들 그 절대적인 양 자체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한 덩치의 오크가 거대한 글레이브를 휘두르자 합격진이 바스라졌다.
마치 들어오라는 듯 훤히 열려 있는 그 구멍 속으로, 한 마리의 오크가 발을 내디뎠다.
“너는 누구냐.”
오크 대족장. 파가부탄이 이쪽을 향해 글레이브를 겨누자, 셰인도 입을 열었다.
[운명을 거스른 자. 그리고, 너희들의 신이 기다리고 있는 자다.]
“알 수 없는 말이로군. 우리들의 신께서는 우리의 미래를 더 이상 관여치 않으신다.”
조직, 무명이 접촉해 온 순간부터 산왕은 더 이상 오크들에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에 오크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행하라는 의미로 이해했고,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신탁 따위는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산왕이란 오크들에게 애증의 존재였다.
그가 있기에 이 혹독한 아룬비다에서도 살아남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고, 더더욱 나아가 어린 흡혈귀의 피로 마력을 깨우칠 수 있었으나, 그들은 신와 펼쳤던 내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오크라는 종족은 신의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에 셰인은 펼쳐 뒀던 합격진을 거두고 파가부탄을 바라봤다.
셰인이 보기에 이미 오크들은 그들의 신인 산왕이 만들어 둔 거대한 체스판의 체스말이 된 상태다.
그저 무명의 간섭으로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라 믿고 있을 뿐.
“쓸데없는 말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피차 마찬가지로군.]
태어난 순간부터 신의 은총을 한 몸에 받은 파가부탄의 힘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샤먼의 주술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으스러져라 움켜쥔 글레이브를 움직였다.
그에 맞춰 대족장을 따라 오크들이 달려들려는 그 순간.
셰인의 몸에서부터 절대자의 마력이 터져 나왔다.
산왕의 은총을 받은 파가부탄마저 주춤할 수밖에 없는 절대자의 존재감.
모든 종족의 정상에 존재했던 드래곤의 피어는 달려들던 모든 오크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몬스터의 야성에 잡아먹힌 오크들은 그 힘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크르…….”
오크 군단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에 비로소 혼자가 됐음을 느낀 파가부탄이 이를 갈며 다시금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날아드는 검에 막히고 말았다.
휘두르는 이 없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바람의 검.
그런 검이, 백 자루가 되어 파가부탄을 향해 달려든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개수작을!”
파가부탄은 날아드는 검을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터뜨려 냈다.
산왕의 힘이 담긴 글레이브의 힘이었다.
하지만 셰인은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쉴 새 없이 회전하는 셰인의 서클.
수십 자루의 검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시금 같은 숫자의 검을 생성하여 파가부탄의 발걸음을 막은 것이다.
“이따위 바람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하나 그러는 사이에도 파가부탄은 분명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셰인 또한 백 자루의 검을 조종함과 동시에 새롭게 소환하는 작업에 발걸음을 쉬이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검의 공세는 점차 거칠어져 간다.
합격진이 펼쳐질 때처럼, 생성되는 즉시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가속했다.
그러자 파가부탄의 걸음속도가 점차 느려진다.
[다가오는 게 마치 굼벵이 같구나.]
오만한 셰인의 말이 파가부탄의 행동에 불을 지핀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파가부탄이 크게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그러자 글레이브에 담긴 마력이 터져 나오며 일순, 백 자루의 검이 일제히 한 줌의 바람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퍼억-!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가부탄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하나 파가부탄이 땅을 박찬 순간 이미 재생성된 검이 그런 파가부탄의 허벅지와 어깻죽지를 크게 베고 지나갔다.
“닿았다, 빌어먹을 놈아.”
그럼에도 파가부탄은 큰 입을 씰룩이며 바로 앞까지 당도한 셰인을 향해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글레이브는 그대로 셰인의 허리부터 머리까지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파가부탄이 기다리던 파육음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
글레이브가 쓸고 지나간 셰인은 마치 잔영처럼 사라지고, 이내.
“krrrr…….”
어둠의 정령이 그 자리를 대신해 그런 파가부탄을 비웃으며 사라졌다.
파가부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어둠의 정령은 역소환되어 셰인의 그림자로 돌아왔으나.
이미 싸움은 끝났다.
“커허헉─!”
백 자루의 검이 파가부탄을 향해 일제히 날아와 꽂혔다.
탐욕은 파가부탄을 보호하는 산왕의 힘조차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전신에 검이 꽂힌 파가부탄이 두 손을 늘어뜨리고.
아슬아슬했던 이 전투의 종지부를 짓기 위해 셰인은 그대로 백 자루의 검을 녹여 파가부탄을 에워쌌다.
그러자 동시에 수많은 이빨이 그런 파가부탄을 먹어치웠다.
[초대장을 보냈으니, 그에 응해야겠지.]
분해되어 가는 파가부탄의 영혼.
그리고, 그의 영혼 깊숙이 파고 들어간 산왕의 편린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울리기 시작하며, 셰인의 정신세계로 침범해 나갔다.
* * *
피로 물든 머리끈이 묶인 옅은 실버블루 톤의 머리카락의 여인.
그런 여인의 앞으로 지평선을 가득 매운 오크 군단이 다가왔다.
피 칠갑이 된 채, 반쯤 부서진 대검의 옆으로 피에 물든 워 해머가 쥐어져 있다.
셰인은 마치 세계를 관조하는 신이 된 듯한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푸른 불꽃이 그런 그녀를 집어삼키듯 타오른다.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제국의 2황녀.
그녀의 뒤로는 오크들만큼은 아니나, 무장된 인간의 군대가 그런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제국을 배반한 배신자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반역자.
이곳 아룬비다의 주민들로부터 봉기를 일으켜 대부분의 북부 영주들을 학살한 여인.
그로 인해 제국은 황급히 군대를 일으켜 세우고 북부까지 찾아와 반역자를 향해 검을 세웠다.
그리고, 그런 반역자의 주변으로부터 수백의 시체들이 줄을 지었다.
끝까지 자신들의 황제, 아나스타샤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다.
셰인은 그들 중 태반이 눈에 익었다.
이곳 아룬비다에 오면서 보게 된 삼총사와 펠리스 또한 그 시체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이로써 제국은 지켰다.”
이윽고, 황녀는 마지막 그 순간.
자신의 검을 제국이 아닌 오크들에게 향했고.
부동의 마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은 가히, 강철의 여인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숫자의 오크들을 향해 달려드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었으나, 잔뜩 금이 간 그 영혼이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산화되는 그 순간까지 하나라도 더 많은 적을 베고 뭉갰다.
그리고 그 끝에.
오크들은 경의를 담아.
인간들은 두려움을 담아.
강철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봤다.
[참으로 영웅에 걸맞은 최후이지 않느냐.]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산왕은 신으로서 그런 아나스타샤에게 모든 경의를 담아 그리 말했다.
이는, 달라진 시간선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3화
83화 영혼을 바쳐라
하나의 장면에 불과했으나, 셰인은 그 속에서 무수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전생의 아나스타샤가 일으킨 반란은, 순전히 제국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무명의 간섭이 없던 전생에는 오크들이 끊임없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 비두론의 성벽을 두드렸다.
한 달에 한 번 간격으로 진행되는 웨이브 속.
아나스타샤는 몇 번이고 제국에게 이번 일의 심각성에 대해 알렸으나, 이번 생과 마찬가지로 제국에서는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
무려 2년의 세월 동안 몬스터 웨이브의 공세를 막은 비두론 성은 더 이상 성의 역할을 이어 가지 못 했고.
수천에서 고작 수백만이 살아남은 아룬비다의 주민들을 향해, 아나스타샤는 천명했다.
“이 아룬비다의 황제가 되겠다.”
그리하여 아나스타샤는 비두론 성을 포기하고, 그간 병력을 빼내기 싫어 엉거주춤하던 북부의 귀족들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더 이상 가릴 게 없어진 그들은 신속했고, 무능한 북부의 영주들은 이를 막아 내지 못했다.
끝내 영주의 목이 성벽에 걸리고 살아남은 주민들이 이를 제국에 알리자, 그제야 반란임을 인지한 제국이 부랴부랴 군대를 일으켜 오크가 남하하고 있는 북부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료들을 잃은 아나스타샤는, 마지막까지 황녀로서 제국을 지키기 위해 오크 군단을 향해 달려들었고.
제국은 ‘우연찮게’ 아나스타샤를 제압하기 위해 올라온 군대를 동원하여 남하하는 오크들을 막을 시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어떠하더냐, 아해야.]
산왕의 그 물음에 셰인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이제 와선 어찌 돼도 좋은 이야기로군.”
아나스타샤의 희생은 아름다웠다.
셰인이 봐 왔던 그 어떠한 영혼보다도, 심지어 미래의 클라인조차도 빛을 바랄 정도로 밝게 타오르다 사그라졌으니.
그러나 이는 이미 전생의 이야기였고, 전생에선 그런 아나스타샤의 희생이 무의미하게 제국은 무너져 내린다.
[정말 무의미했을 것 같으냐?]
다시 한번 이어진 질문.
그 물음에 셰인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했다.
“계기가 되었군.”
그런 아나스타샤의 죽음. 그리고 무능한 제국의 추악한 행태.
이를 본 1황녀, 올리시아가 과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까.
아나스타샤의 최후를 듣게 된 올리시아는 더 철저한 준비를 하게 되었고, 그 무너지는 문명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 후 클라인과 합류하여 멸망해 가는 인류에 한 줄기 빛이 되어 등장했으니.
그렇기에 클라인이 셰인에게 맞닿을 수 있었고, 지금의 새로운 시간선이 만들어질 수 있던 것이다.
“무의미하지 않았어.”
[맞다. 모든 일에는 계기가 존재하는 법이고, 그 끝에는 이렇듯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법이지.]
산왕이 이어 말했다.
[나는 그녀와 내기를 했단다. 나의 아이들로부터 제국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내기였지.]
끝내 산왕은 아나스타샤와의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는 제 영혼을 바쳐 제국을 지켜 냈고, 산왕은 더 이상 오크들에게 관여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북부의 난은 마무리가 지어진 것이다.
[아해야. 나는 오롯이 존재하는 자다. 다른 시간대의 나라고 해도 다르지 않지.]
“그래서 놈들이 개입하기 시작했나.”
[그렇단다.]
산왕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전생과 다르게, 이번 생에 산왕은 더 이상 오크들에게 개입하지 않았다.
이는 전생부터 이어져온 산왕과 아나스타샤의 약속이었기에.
때문에 무명은 이를 간파하고 오크들에게 개입할 수 있던 것이다.
산왕은 더 이상 오크들에게 간섭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나는 이야기를 사랑한단다. 또 이야기에 걸맞은 영웅 또한 사랑하지. 운명을 거스르는 아해야. 너는 그 이야기에 걸맞은 주인공이로구나.]
“잘못 본 것 같군. 나는 빛나지 않는다.”
자신이 다루는 오리진처럼 한없이 어두운 존재라면 또 모를까.
[아니, 너는 분명 영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단다. 영웅에게 색 따위는 상관없지. 어떠하냐. 너 또한 나와의 내기를 하지 않겠느냐?]
“내기.”
[그래. 내기란다.]
산왕의 물음에 셰인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전생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산왕의 존재.
그 존재가 지금, 자신에게 개입을 시도한다.
여기서 거절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산왕은, 이 세계에서 배제된 존재니까.
때문에 셰인이 거절한다 하더라도 산왕은 이 세계에 개입할 수단이 없기에 물러설 수밖에 없다.
다만 본신의 존재감이 이토록 거대하고, 또 아카샤의 대봉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오크와 엮였기에 이렇듯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뿐.
“받아들이지.”
여태껏 산왕과 내기를 했던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왔다.
오크들은 그토록 바라던 마력을.
아나스타샤는 오크로부터 제국의 평화를 가지고 왔다.
이번에는 셰인의 차례였고, 셰인 또한 원하는 바가 있었다.
[좋다, 좋구나!]
산왕의 우렁찬 웃음소리와 함께 정신의 세계는 무너져 내리고, 끝내 눈을 뜬 셰인은 거의 그와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후웅─!
압도적인 파괴력이 담긴 글레이브가 방금까지 셰인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간다.
“과연 좋구나!”
백 자루의 검에 꼬챙이가 됐던 오크의 대족장, 파가부탄이 웃음을 터뜨리며 글레이브를 휘두른 것이다.
“신으로 추앙받던 것치고는 기습이 날카롭군.”
“아무렴, 내게 있어서 영웅이란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는 자일지니! 내 스스로는 하나의 관객에 불과하다!”
웃음을 터뜨리는 파가부탄, 아니. 산왕은 자신이 강림한 파가부탄의 육신을 눈 깜짝할 사이에 복구하며 다시금 달려들었다.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온 어느 한 신의 존재감이 전장을 가득 채웠다.
가히 패도적이라 말할 수 있는 그 존재감은 전장의 모든 이들을 멈춰 세웠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드래곤의 역린을 흡수한 셰인뿐.
앞서 파가부탄의 영혼을 분해하며 산왕의 힘마저 소화해 낸 탐욕의 오리진이 사방에 흩뿌려지는 산왕의 힘을 또다시 집어삼켰다.
만일 드래곤의 역린을 섭취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잡아먹혔을 그 패도적인 기운이 백 자루의 검에 담기기 시작했다.
“후하하하핫!!”
웅장한 웃음소리.
백 자루의 검이 허공을 어지러이 수놓는다.
그에 산왕이 글레이브를 움직여 휘두르자, 단 한 번에 백 자루의 검이 사그라졌다.
자신의 힘이니만큼, 그 누구보다 파쇄가 손쉬울 수밖에.
하나 사그라지는 검들 중 몇몇.
산왕이 보기에도 결코 적지 않은 마력이 담긴 검 몇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타오르는 붉은 마력.
만일 산왕이 개입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보고 싶었던 여인, 라비아타의 마력이었다.
아직 대지에 남은 그녀의 마력을 여태껏 한데 모아 왔던 셰인이 일제히 터뜨렸다.
태양이 떨어졌을 때보다 그 힘은 비견할 수 없이 줄어들었으나.
[팽창], [압축], [폭발], [5중첩].
한 순간 팽창하며 터지는 힘을 압축하고, 폭발의 룬 마법으로 폭발력을 다섯 번 중첩시킨 그 힘은, 범위는 협소해졌을지언정 라비아타가 떨어뜨린 태양보다 더 강렬하게 터져 나갔다.
셰인이 가진 드래곤의 역린과 같은 드래곤 하트를 섭취한 라비아타의 마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대단한 아해로고!”
그럼에도 산왕은 그 폭발 속에서 약간의 그을림만 보일 뿐, 다시금 글레이브를 휘둘러 화기를 날려 버렸다.
그 여파만으로도 셰인은 몇 장이나 되는 마력 실드를 만들어 방어해야만 했다.
신과 비교하면 한없이 나약한 오크라는 종족의 몸에 들어간 탓에 그 한계가 명확했으나, 그럼에도 한 종족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이 발휘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내가 그린 오크라는 종족의 한계란다.”
산왕이 설명을 하는 도중에도 글레이브가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인다.
이는 정점에 도달한 소드 마스터가 검을 휘두르듯,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때마다 퍼지는 여파만으로 땅이 베이고 바위가 무너지며 주변의 지형이 뒤바뀌니.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만났던 고든보다도 훨씬 강대한 모습에, 셰인이 결국 두 눈을 감았다.
“영혼을 바쳐라. 그런 거군.”
신을 향한 도전.
이를 아무런 출혈 없이 승리하려는 행위 자체가 신을 향한 모독이며, 또한 오만일 것이다.
셰인은 자신의 오만함을 인정하고, 이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황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야.”
셰인의 다짐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산왕은 휘두르던 글레이브를 멈추고 그런 셰인을 응시했다.
셰인이 양팔을 내리자 허공을 어지러이 수놓던 백 자루의 검이 모조리 사라졌다.
그러면서 셰인은 아나스타샤가 선보인 기술을 떠올렸다.
셰인이나 저지먼트 기사단처럼 다른 힘을 빌리지 않은, 한 개인의 굳건한 다짐만으로 만들어 낸 오리진.
그 대가로 쓰일 때마다 영혼이 깎여 나가는 그 힘을 떠올리며, 분석한다.
이윽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눈을 뜬 셰인의 눈동자는 온통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심연보다 두려운 어둠으로 메워져 나갔다.
* * *
“저, 저게 뭐지?”
엘더 샤먼의 함정에 빠져 환영 속을 거닐던 벤자민은 어느새 거두어 진 환영에서 벗어나 하늘을 가득 뒤덮은 어둠을 바라봤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빨려 들어갈 듯한 감각.
벤자민은 여태껏 살아오며 이런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도대체.”
마찬가지로, 제국의 검으로서 수없이 많은 적을 단죄해 온 저지먼트 기사단장, 대니얼마저도 이는 맹세코 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 * *
마법의 여파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디라일라와 아르티아는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거대한 힘의 움직임을 감지한 본능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은 눈을 뜨자마자 이상하리만치 어두운 병실을 바라보다 이내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수한 밤하늘의 별조차 집어삼킨 어둠.
그리고 달이 있던 그 자리에, 붉은 피를 흘리는 눈동자가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꿈이구나.”
“꿈이네.”
아주 안 좋은 악몽을 꾸는 것이 분명하리라.
둘은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아니, 빠져드는 척했다.
* * *
오크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자, 클라인 또한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빛을 잡아먹는 어둠과, 달 대신 자리한 붉은 눈동자.
그리고, 지면을 가득 채운 정체 모를 뾰족한 가시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이빨이었다.
무수히 돋아난 뾰족한 이빨은 자신에게 걸린 오크들을 산채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마력에 민감한 클라인은 이 항거할 수 없는 힘의 주인이 누구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 클라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의 존재를 찾아다녔다.
* * *
꾸물거리는 어둠이 셰인을 휘감기 시작한다.
그에 산왕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런 셰인‘이었던 것’을 바라봤다.
두려움이 아니다.
희열.
자신이 여태껏 마주해 온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한계에 도달한 자를 마주한, 진정한 영웅의 면모.
그러나 저것을 과연 영웅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인가.
핏물을 흘리는 눈동자와 이빨이 뒤섞인 덩어리가 셰인을 집어삼키고, 이내 그것은 점차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흐하하하! 과연, 과연이로구나! 이는 영웅의 재목(材木)이로다!”
2미터, 5미터, 10미터.
이윽고. 산왕이 고개를 바짝 들어야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가 그런 산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늘 대신 날카로운 이빨이.
영롱한 눈동자 대신 붉은 피를 흘리는 어둠이.
길게 늘어난 그 존재는, 승천하지 못한 용이었다.
무엇이든 씹어 삼키는 단단한 이빨로 무장된 용은, 침인지 피인지 진득한 무언가를 흘리는 아가리를 벌렸고, 이내 포효를 터뜨리며 산왕을 향해 질주해 나갔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4화
84화 제국의 영웅들
“오크들의 군대는 와해됐다.”
“…….”
“오크 대족장의 죽음은 확인되었고, 남은 살아남은 패잔병들만이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지.”
“…….”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아나스타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룬비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전쟁의 승리가 결코 달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지 멀쩡히 살아남은 이들보다 사상자가 훨씬 더 많았고, 그중에서는 목숨을 잃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전쟁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기 마련.
거기에, 전쟁의 마지막.
붉은빛과 함께 하늘 높이 승천한 검붉은 용은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남기고 떠나갔다.
“고개를 들어라, 용사들이여. 너희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몇몇이 고개를 들어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오크들이 성벽을 넘어왔을 때,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던 사람.
명부상실 이곳 아룬비다의 맹주이자, 자신들이 따르는 강철의 여인.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얼굴에 자부심을 띄웠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앞으로도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을 테지. 만일 그럴 때가 찾아온다면 지금처럼 고개를 들어라. 그리고 현실을 봐라. 우리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고, 제국을 지킨 영웅이다.”
항상 부동의 자세로 이곳 아룬비다를 지키고, 언제나 흔들림 없던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디 찬 아룬비다의 바람마저도 그녀의 눈물을 식히지 못했다.
미미르는 그런 황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정치와 거리가 멀고 머리를 쓰는데 귀찮아하는 아나스타샤였지만, 이곳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모두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리라.
‘먼 길을 돌아왔군요.’
이곳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범죄자다.
강도와 살인, 그리고 엇나간 길을 걸어가던 이들이 대부분.
제국의 사람들은 이들을 더러운 범법자라 침을 뱉고, 이곳에서 흘리는 피는 마땅히 치러야 할 응징이라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들은 틀림없는 범죄자다.
그렇기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자 그 누구보다도 이곳 아룬비다를 수호하려 애쓴다.
그런 그들의 노력마저 조롱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
아나스타샤는 저들이 그 누구보다 이번 전쟁의 주인공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 아룬비다에 오게 되면서 얼마나 많은 악인들을 봐 왔던가.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온 이들은 이곳에 와서도 적응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아나스타샤는 그 누구보다 앞서서 검을 휘둘렀고 정의의 철퇴를 내렸다.
그렇게, 그녀는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수많은 피를 흘려 이곳 아룬비다의 맹주가 될 수 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남은 이들은, 하나같이 사연이 있는 이들 밖에 없다.
경쟁자에게 아내를 잃어 복수심에 불타오른 사람.
누군가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수가 된 사람.
불치병에 걸린 아들의 부탁에 그 생을 직접 마감시켜 준 사람 등.
누군들 사연이 없겠나 싶겠지만, 이곳 아룬비다에는 특히나 바깥에서의 삶에 지칠 대로 지쳐 온 이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곳에 스스로 찾아와 자신들의 삶을 마감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저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 아룬비다를 이번 전쟁에서 지킬 수 있었을 것이며, 앞으로도 누가 지킬 것인가.
아나스타샤는 눈앞에 있는 이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는 사실에 황녀는 눈물을 흘렸고, 이곳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충성을 맹세한 여인의 눈물을 두 눈으로 응시했다.
더 이상 그들의 눈빛에 슬픔과 두려움은 남아 있지 않았다.
“더 나아가자.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을 우리의 손으로 끝맺음을 지으리라!”
“““우와아아아아!!”””
* * *
“새뮤얼 님.”
그 부름에 황태자는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한 발 늦었다고 합니다.”
“쯧. 이번에도 절 실망시키는군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후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야겠죠. 너무 욕심이 많았으니.”
최근 황태자와 그의 지지자들은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차적으로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으로 생겨난 교역 루트의 확보에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차적으로 살리에르 백작의 죽음 이후 연합국 지하도시의 동태를 살피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 아룬비다의 사건으로 인해 군대를 차출하는 등.
이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해결하려 하니 당장 황태자의 입장에서는 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역시 인력이 부족하군요.”
특히 살리에르 백작이 거느리고 있던 지하도시의 인력이 전부 소실된 것은 너무 큰 손실이었다.
이는 무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준비해 왔던 일이었기에.
이종족 노예를 소지한 귀족의 살인 사건이 두 번이나 일언 탓에 관련된 귀족들 또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상황이지 않던가.
“조직도 별 도움은 안 되고 있고…….”
아니, 오히려 방해되는 감이 컸다.
무명은 새뮤얼에게 허락도 맡지 않고 제국의 북부를 탐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와 관련된 소식을 조직원으로부터 듣게 된 것도 바로 얼마 전이었다.
놈들은 이번 기회에 1황녀와 2황녀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라며 말해 왔고, 훗날 필요한 순간을 위해 오크의 병력을 빌려 준다는 말로 새뮤얼을 꼬드겼다.
그 때문에 못 이기는 척 군대를 일으킬 준비를 늦췄다.
아룬비다가 무너지고, 북부의 영지가 제법 큰 손실을 받았을 때 영웅처럼 등장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리되면 1황녀와 2황녀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대로 다음 왕좌를 향한 길이 더욱 견고해졌을 터이나…….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오히려 그 선택은 다른 쌍둥이 황녀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고 말았다.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이후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눈에 선했다.
언제나 눈치 싸움에 급급하기만 하던 몇몇 정치 귀족들은 이참에 두 황녀에게 붙어 유리한 자리를 점하고자 할 테지.
그나마 아나스타샤의 경우에는 거리도 멀거니와 애초에 그녀 스스로가 정치에 별다른 뜻이 없기에 안심할 수 있었으나, 다른 한 명은 달랐다.
“귀찮게 하는구나, 동생아.”
1황녀, 올리시아.
여태까지는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왔으나, 최근에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 은밀함 속에서 칼을 갈고 있다 들었다.
특히 이번 아룬비다에 선발대를 보내는 과정에서 올리시아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몇몇 올리시아를 따르던 가신들이 이번 아룬비다의 원정에 대해서 목소리를 얼마나 높였던지, 이전에 몬스터 웨이브와 오크 군단의 남하를 부정했던 새뮤얼의 가신들은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도 수그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곁에서 그 혼잣말을 듣고 있던 가신은 그 서늘한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이전까지의 여유는 사라지고, 차가운 분노만이 남겨진 모습.
“오랜만이야, 이런 기분은…… 아주 오랜만이라고.”
찰나의 순간 짐승처럼 두 눈을 빛냈던 새뮤얼은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가면 같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이런…… 미안합니다. 잠시 감정이 격해졌군요.”
“아, 아닙니다. 황태자님.”
“아무튼 아룬비다에 관련된 일은 포기하도록 하죠. 대신 뒷말이 없도록 전쟁의 뒤처리는 깔끔하게 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예.”
“이번 일로 흔들리는 가지들이 있다면, 바로 쳐내도록 하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새뮤얼는 자신 밑에 있으면서도 다른 형제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가신 따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게 가신이 떠나가고, 홀로 남은 새뮤얼은 다시금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의 활자가 읽히는 대신, 어느 한 사람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왜 그리 어리석게 떠나가셨습니까, 형님…… 형님이 계셨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전 황태자.
제페르 디 셰르다 클로이.
만약 그가 지금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새뮤얼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의 가면을 씌운 채,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새뮤얼이 아룬비다와 관련된 일을 깔끔하게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저지먼트 기사단의 활약이 예상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적의 중요 간부를 죽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더라면 보다 정치적 거름으로 써먹을 수 있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저지먼트 기사단은 오크들에게 대족장 다음으로 중요한 엘더 샤먼을 놓치고 말았다.
전장에 나타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용만 아니었더라면 분명 잡았을 터이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당시에 굳었던 몸이 움직였을지는 모를 일이니.
제국은 뒤늦게 부랴부랴 군대를 일으켜 예상 시간보다 빠르게 아룬비다로 향했으나, 그들이 할 일이라고는 패잔병이 되어 돌아다니는 오크나 몬스터 따위를 정리하는 것뿐.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간 군대는 보다 깊은 북부로 향할 준비에 들어섰다.
여기까지가, 여태 기절해 있던 셰인이 듣게 된 정보였다.
“그렇군요.”
“그래. 그렇지.”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침대에 누워 있는 셰인을 바라보며 능글맞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썼지?”
“…….”
“썼네, 썼어. 그치?”
“…….”
“왜 이러실까. 나한테는 그렇게 쓰지 말라고 해 놓고. 안 그런가?”
“……예. 썼습니다.”
전쟁이 끝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작전 중 셰인과 보내온 시간이 많았기 때문일까.
아나스타샤는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셰인을 대했다.
반면, 셰인은 그런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저 얼굴이 보기 싫었다.
정령을 통하지 않고 물리력을 일으키는 오리진.
셰인은 전쟁 당시, 산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본인의 오리진에 물리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셰인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아나스타샤가 쓰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다가 상상 이상의 파괴력에 본인 스스로가 통제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셰인 스스로에게 굉장히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스스로가 가진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머저리 같은 짓은, 전생에 이미 충분히 겪어 봤기에.
셰인의 약점을 잡은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을 집요하게 노려 댔다.
평상시 미미르에게 당하는 것을 풀기하도 하는 것처럼.
“비밀리에 기절한 너를 끌고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오리진을 본격적으로 터뜨리기 시작한 셰인은 산왕과의 전투 후, 그대로 의식을 잃고 전장 한가운데 쓰러졌다.
앞서 자신과 비슷한 기운, 오리진을 느꼈던 아나스타샤가 가장 먼저 정체불명의 용이 나타난 장소로 향했고, 그 결과 셰인을 데리고 올 수 있던 것이다.
“이것저것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은데. 그런 건 천천히 듣도록 하지. 설마 황녀 앞에서 뭘 숨기지는 않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아나스타샤가 제국의 정치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셰인 또한 그녀에게 어느 정도 자신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모든 것을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그러는 한편, 셰인은 아나스타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에 홀로 남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셰인이 마법을 사용하던 도중, 갑작스레 등장한 용으로 인해 마력이 꼬여 그 여파로 부상을 입은 상태라 일러 뒀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선 셰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나스타샤는 카르후의 공격을 한 차례 막은 것만으로도 영혼에 금이 갈 정도였다.
물론 그전에도 꾸준히 써 왔을 테니 영혼이 상해 있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리 쉽게 금이 가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방어가 아닌 공격.
그것도 산왕을 향해 그만한 힘을 폭주시켰던 셰인은 어떠한가.
거울을 들여다본 결과, 놀랍게도 셰인의 영혼은 조금도 상처를 입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이런 말이었나.’
셰인은 폭주 후, 어렴풋이 기억나는 산왕과의 대화를 떠올려 봤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5화
85화 정령의 변화
비늘 대신 이빨이.
총명기 있는 눈동자에서는 피눈물이.
넘치는 정기가 흘러나와야 할 입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이 흘러나오는 용.
이는 셰인이 전생에 직시한, 승천하지 못한 용의 후손인 라비아타를 본떠 만든 형상이었다.
전생의 라비아타는 조직의 함정에 빠져 타락한 드래곤 하트를 섭취하게 되면서 타락에 오염되었고, 조직조차 어쩌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무력적인 면에서, 당시 라비아타는 셰인이 봤던 그 어떠한 존재보다도 강력했다.
당시의 그녀는 메자이아 대수림을 모두 불태우고서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죽음을 맞이했었다.
셰인은 무의식중에 순수한 파괴의 화신이었던 당시의 라비아타를 떠올렸고, 지금에 이르러서 그 모습이 탐욕의 오리진에 의해 재현되고 있었다.
타락한 용이 아가리를 열고 달려든다.
산왕은 그런 용의 아가리를 글레이브로 크게 베어 냈으나, 글레이브는 순식간에 이빨로 이루어진 비늘에 의해 삼켜졌다.
그대로 용에게 씹어 삼켜진 파가부탄의 육신은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지기 시작했다.
‘글렀군.’
산왕의 본체라면 힘이 흡수되기도 전에 용을 찢어발겼겠지만, 이 육신은 그만한 힘이 없었다.
그렇게 분해되어 이제는 산왕의 티끌만이 남은 영혼은, 붉은 하늘을 마주했다.
그곳에는 왕좌에 앉은 채, 세상을 오시하듯 내려다보는 셰인이 앉아 있었다.
“그대가 이겼다. 이로써 나와의 내기에서 이긴 존재는 네가 세 번째로구나.”
“하나는 알겠는데, 다른 하나는?”
“오래전 고향을 잃고 내게 찾아온 어린 오크였지. 그는 작은 몸으로 스스로의 부족을 이끌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사이클롭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단다.”
마력조차도 쓰지 못하는 오크가, 수십 마리가 목숨을 걸고 달라붙어야만 죽일 수 있던 사이클롭스를 홀로 잡은 것은 산왕에게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었다.
그렇기에 오크를 수호하는 신이 되어, 아카샤의 대봉인에서도 그들이 봉인되지 않도록 지킨 것이다.
“재미있군.”
“아무튼, 운명의 강을 거슬러 온 아해야. 너는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그 물음에 셰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미 정해 둔 것은 있었으나, 막상 앞에 닥치게 되니 다른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오게 된 이유.
만일 그것을 자신의 분석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다다른다면.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는 의미이지 않나.
그러나 셰인은 생각을 달리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신화에서부터 살아온 저 산왕조차도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해의 영역.
셰인은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할 머저리가 아니었다.
“손상된 영혼을 복구하는 힘. 그걸 가지고 싶다.”
“……현명한 질문이구나. 그래, 영혼의 손상은 존재 그 자체를 멈추게 만들지. 아주 위험한 일이야.”
산왕의 영혼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빛무리에 불과한 저 모습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으나, 영혼 그 자체가 기뻐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내게 적지 않은 유희를 안겨 준 여인이다. 비록 다른 시간선에서의 일이었지만,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런 셰인의 의중을 읽은 것인지 산왕은 가볍게 덧붙여 말했다.
“손상된 영혼을 복구하는 방법에는 총 세 가지가 있단다. 첫 번째로는 시간.”
“시간?”
“그래.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 시간이 흐르면 손상된 영혼은 자연스럽게 복구가 되지. 하지만 이는 살아 있는 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단다.”
“그럼 소용이 없겠군.”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두 번째로는 영혼의 각성. 흔히 너희 인간들이 ‘환골탈태’라 부르는 경지에 다다르거나, 영혼 자체가 성장하여 격을 탈피하는 경우지.”
“……마찬가지로 쉬운 일은 아니고.”
“영혼이라는 것 자체가 상처를 입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복구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란다.”
“마지막 방법은?”
“너희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마력의 근원. 그걸 섭취하게 된다면 손상된 영혼을 복구할 수 있단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방법을 강제적으로 일으키는 방식이지.”
“……부작용이 있겠군.”
마력의 근원.
몬스터가 섭취할 경우, 존재를 탈피해 더 상위의 개체에 다다르게 되는 돌.
셰인이 앞서 어둠의 정령에게 먹인 희귀한 광석이다.
다만 이는 인간이 섭취할 수 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인간은 마력의 근원을 섭취하면 체내 마력이 폭주하며 사망에 이르니.
수많은 마법사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모두 실패.
실험에 참여한 인간은 모두 사망에 이르렀기에, 끝내 연합국에서는 이와 관련된 연구를 불법으로 지정하고 아예 막아 버렸다.
“너희 종족은 아카샤라는 신을 배출한 종족이지 않으냐. 이미 그 이상 근원이 성장할 방법은 없는 것이지. 이는 이치에서 벗어난 일이기에, 세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영혼이 곧 근원이지 않나. 성장이 불가능한데 어떻게 탈피가 가능하다는 거지?”
“영혼과 근원은 다른 이치란다. 근원은 종족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값을 의미하는 것이고, 영혼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지.”
“…….”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으나, 감은 잡혔다.
혹시나 싶어 마력의 근원을 안전하게 섭취할 방법에 대해 물었으나.
“나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탄생하지 않은 지식은 모른단다. 작은 아해야. 너는 그 길을 스스로 걸어야만 해.”
“…….”
“다만, 이래서는 나와의 내기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보상으로는 적절치 않은 감이 있구나.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이걸 받거라.”
산왕은 정사각형의 큐브를 넘겨 보냈다.
“이게 뭐지?”
“어느 위대한 대마법사의 서고란다. 이제는 신이 되어 버린 한 사내가, 아직 인간이었을 적 간직해 둔 서고이지.”
“아카식 레코드……!”
인간의 신. 아카샤가 승천한 서고의 이름.
그저 떠도는 전승에 의하면 우주의 진리가 저장된 공간이라 했던가.
그러나 산왕은 그런 셰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달라. 아쉽게도 그 서고는 그런 대단한 것이 아니란다. 말 그대로 서고일 뿐이지. 굳이 말하자면…… 그래. 아카식 레코드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단다. 하나의 티끌 정도조차 되지 않지.”
“……그런가.”
“실망한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아니, 전혀. 오히려 다행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셰인은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하려 하지 않는다.
전생에 이미 한 번 겪어 봤던 일이었으니.
그렇다고 이 물건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 또한 아니다.
무려 신이 인간이었을 적 남기고 간 서고. 그게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니 어찌 대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안에 있을 지식이 얼마나 방대할지는 셰인조차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걸로 만족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때, 여기까지가 대화의 끝이라는 것을 고하듯, 산왕의 말이 이어졌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이번 잠은 즐겁겠구나.”
“잠?”
“세계에서 방출된 내가 이렇게까지 개입하지 않았더냐.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차례란다.”
“그런가.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겠군.”
“그렇지.”
이 신화시대의 흔적으로 남겨진 존재가 꾸는 꿈은 어떠할까.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꿈이 이어질까.
필멸자인 셰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 선물이란다. 더 이상 내게는 필요치 않는 것이지.”
“……?”
사그라드는 산왕의 편린으로부터, 푸르스름한 작은 빛이 셰인에게 흘러 들어와 흡수되었다.
“선물은 본래 내용물을 모를 때가 두근거리는 법. 그것의 사용 방법은 네가 스스로 깨닫길 바라마. 그럼 잘 있거라.”
“…….”
그렇게 산왕의 편린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분명 드래곤의 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긴 수면기에 들어갈 터.
뜻밖의 존재가 개입된 이 사건은 이렇게 아무도 몰래 끝이 났다.
* * *
그리고 현재.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영혼이 예상과 다르게 멀쩡한 것을 확인한 셰인은 어둠의 정령을 불러냈다.
산왕이 말했던, 셰인이 이미 걷고 있는 길이라 했던가.
회귀 후, 셰인이 마력의 근원과 관련됐던 적은 어둠의 정령뿐이었기에 확인차 어둠의 정령을 불러냈건만.
“음…….”
“주, 주인님…….”
어찌 된 일인지.
정령에게 뜻밖의 변화가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셰인을 닮은 로즈베리 색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차 있다.
이전, 거의 짐승에 가까웠던 외형은 어디로 가고 한 소녀가 오들오들 떨며 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셰인의 드넓은 상식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사태에, 어둠의 정령이 자그마한 입을 열었다.
“그게…….”
때는 셰인이 산왕과의 대화가 끝나고, 전투의 여파로 인해 정신을 잃었을 당시로 돌아간다.
어둠의 정령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셰인의 상태에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감정의 영역에서 많은 것을 공유했는데, 본래 존재의 어두운 감정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보니 이는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던 중, 셰인이 산왕과의 전투에서 오리진을 자신에게 거치지 않고 곧바로 쓴 탓에 셰인의 영혼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이는 어둠의 정령에게 소멸의 위기였다.
도무지 어찌해야 될지 모르던 그때, 어둠의 정령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마력의 근원을 떠올렸다.
정령의 티끌이었던 자신이 지금의 존재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물건.
셰인의 곁에서 영혼에 대한 이해력을 갖췄던 어둠의 정령은, 아직 자신이 채 소화하지 못한 마력의 근원을 황급히 집어삼켰다.
그리고 셰인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는 자신을 매개로, 오리진이 자신을 거쳐 넘어갈 때처럼 마력의 근원에 담긴 힘을 셰인에게 건넨 것이다.
명백한 도박에 가까운 행위였으나, 그만큼 당시 셰인의 영혼은 위태로웠다.
다만 그 과정에서 셰인의 영혼에게 생긴 균열이 너무도 거대한 탓에 남아 있는 마력의 근원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했고, 한 번 복구되기 시작한 셰인의 영혼은 탐욕스럽게 어둠의 정령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의도치 않게 셰인과 영혼이 극히 일부 뒤섞이게 된 존재가 다시금 탄생하게 된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감히 주인님께 허락도 받지 않고 이런 일을 저지른 제게 벌을 주십시오…….”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짐승 같은 울음소리도 내지 않고 아담해진 체구로 소녀와 같은 모습을 한 채 저리 말하는 이 장면은 누가 본다면 파렴치한이라 욕할 테지만.
셰인의 생각은 거기까지 뻗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소녀의 모습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보며, 남모를 고민에 빠져든 것이다.
‘왜 그 여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저 소녀의 모습은, 셰인에게 너무도 익숙한 어느 한 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유일한 셰인의 말동무.
때문에 이번 생에 몇 번이고 찾아보려 시도했던 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어둠의 정령을 보며 셰인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6화
86화 과거
회귀 전.
“안녕? 반가워. 거기 있는 게 꽤 답답해 보이네?”
검은 공간에서 셰인은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두 눈을 떴다.
그럼에도 여전히 끔찍한 어둠만이 보일 뿐.
“너는…… 누구지?”
“음, 글쎄. 과연 그게 중요한 걸까?”
중요하고말고.
셰인이 있는 이곳은, 하나의 물리적 공간이 아닌 정신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지 않은가.
자의식이 생긴 질투가, 육체의 소유권을 지닌 셰인조차도 질투하여 주인인 셰인을 내면에 가둬 버리지 않았나.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한 결과였다.
아무튼 소녀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누구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소녀는,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고는 했다.
그 간격이 며칠인지, 아니면 몇 시간인지, 혹은 몇 년인지조차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정신적 공간.
이따금 말을 걸어오는 소녀의 존재는 셰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때로는 혹시 자신이 미쳐 버려서 상상 속 인물을 만들어 낸 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차라리 완전히 미쳐 버린다면 이 저주받을 공간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셰인은 스스로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차라리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고자 방향을 돌렸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당연하지만 신체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는 것이었다.
조직에 가담하고 수많은 마법적 지식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자신이 들었던, 이해하지 못했던 마법들도 다시금 뜯어 보고 해부하며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이 제법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일까?
의식의 최심부에 갇혀 지내기만 하던 셰인은 어느새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질투가 보고 듣는 광경을 공유할 수 있는 경지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노력으로 가능한 것도 딱 거기까지.
그 이상의 결과는 가져올 수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소녀와 마주하게 됐을 때, 셰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라. 역시 대단하네. 벌써 거기까지 도달한 거야?”
이따금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던 소녀가 질투의 자의식을 통해 셰인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토록 궁금했던 소녀의 정체는, 유령에 가까웠다.
영혼이라 해야 할까.
그녀는 타인의 몸에 빙의된 채, 영혼의 상태로 셰인에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 대상은 매번 달라졌다.
때로는 고든이 될 때도 있었고.
때로는 디라일라의 몸으로.
때로는 카르후의 몸에 빙의한 채로 셰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그 역시 몇 번이고 물어봤으나, 그때마다 소녀는 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셰인은 그녀를 볼때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정확히는 이 세계의 존재 같지가 않다는 말이었다.
“언젠가 다가올 때를 위해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거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도록 해. 알았지?”
또한 틈이 날 때마다 저런 말을 내뱉곤 했는데, 실제로 회귀 후 셰인은 그 덕을 크게 봤다.
물론 소녀의 그 말 때문에 준비했던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의식의 세계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지식을 탐구하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때로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고는 했다.
“확실히 저쪽과는 다른 재미가 있단 말이야.”
“이쪽의 서고지기의 성향 때문이겠지?”
“무슨 말이냐고? 신경 쓰지 마. 그냥 넌 너대로 하고 있는 일을 하면 돼. 아하하.”
* * *
아무튼.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현재로 돌아와.
셰인의 질문을 받은 어둠의 정령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단지, 주인님의 영혼과 엮이는 과정에서 이 모습과 매우 흡사한 존재를 봤습니다.”
“…….”
그저 무의식의 일종일까.
어쩌면 오리진을 일으킨 여파로 인해 손상이 심각했던 영혼은 무의식중에 셰인이 가장 위태로웠을 당시 조금이나마 의지할 수 있던 말동무를 떠올렸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어둠의 정령은 대부분 그 소녀와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으나, 용암을 담은 듯한 주홍빛 눈동자가 아닌 셰인과 같은 로즈베리 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떨지 마라. 단지 생각할 게 있었을 뿐이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도록 해.”
“가, 감사합니다!”
어둠의 정령이 멋대로 일을 벌인 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의 영혼이 어떤 꼴이 됐을지 몰랐으니.
다만 칭찬 또한 하지 않았다.
혹여나 다음에 쓸데없이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럼, 이름을 지어 줘야겠군.”
“……! 저, 정말입니까?!”
그에 어둠의 정령이 크게 기뻐했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히 한 대상을 부를 때 쓰는 게 아니다.
존재에 대한 가치성을 확보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존재가 가진 역사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어둠의 정령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더더욱 셰인의 인정을 바라 왔던 것이다.
“이름은…….”
그러나 어둠의 정령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그 기쁨이 확 죽고 말았다.
“검둥이가 좋겠군.”
아무리 자신의 주인이 경외의 대상이라지만, 저건 아닌 것 같았다.
* * *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황태자 새뮤얼의 지원 아래 일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지지부진하던 연합국과의 협상도 빠르게 진행이 되며, 한참 여름을 지내고 있던 모험가들은 혹독한 아룬비다의 날씨에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춥다, 춥다 하더니만 진짜 장난 아니군.”
“어우. 이거 진짜 보통 격전이 아니었겠는데?”
“무슨 시체가 이렇게도 많은지.”
거기에 이곳저곳에 숨져 쓰러진 몬스터와 오크의 시체들은 이곳이 얼마나 격전지였는지 새삼 깨닫게 만들었다.
무려 50만 대군의 오크 군단과 15만의 몬스터 웨이브이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 무구를 다루는 업종에서는 행복의 비명을 지르리라.
아룬비다의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상대하기가 까다롭지만, 그만큼 다양한 재료로도 쓰일 테니.
그렇게 오크의 근거지로 향할 준비가 차곡차곡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몇몇 중진들끼리 모이는 회의가 진행됐다.
가장 먼저 아룬비다의 영주인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
다음으로는 제국에서 파견된 저지먼트 단장, 올리버 G 대니얼.
마지막은 연합국에서 파견 온 하얀나무 모험단의 단장, 말셀러스였다.
말셀러스가 단장으로 있는 하얀나무 모험단은 비록 라비아타나 지금은 사라진 헤르메스 모험단과 비교하면 급수가 떨어지나, 활동량만 보자면 단연코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모험단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 말셀러스의 걸걸한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그는 그 목소리만큼이나 큰 덩치의 소유자였는데,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그 턱수염으로 인해 제법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나, 그와 다르게 두 눈동자는 마치 소처럼 순둥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사나이 말셀러스. 황녀님과 이곳의 주민들의 활약에 감동받았습니다. 제국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겁니까, 대니얼 경?!”
태도만 보면 이건 뭐 압박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말셀러스는 진심으로 이곳 아룬비다에서 일어난 전쟁의 결과에 감동하며 물은 것이었다.
반면 자신이 따르는 황태자의 입지가 좁아지긴 했으나, 황실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대니얼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하는 척했다.
“동감이오. 설마하니 이토록 훌륭하실 줄이야. 제국의 귀감 아니겠소.”
“와하하! 대니얼 경이 그리 말하니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황녀님!”
“칭찬은 고맙군. 하지만 이 또한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던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니, 서둘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이고.”
“암, 암! 그렇지요! 제가 너무 떠들기만 했군요. 바로 회의에 들어가시지요!”
회의의 주제는 아나스타샤가 말한 것처럼,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준비였다.
오크의 군대는 해체됐으나 아직 놈들의 근거지가 멀쩡히 남아 있는 상황.
또다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려면, 놈들의 근거지를 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앞서 아룬비다를 무탈하게 지킨 덕분에 이번 회의에서 발언권이 강한 아나스타샤의 주도하에, 회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황태자 또한 이번 일의 경우 관망의 제스처를 취했기에 대니얼도 황녀의 의견에 별다른 토를 달지는 않았다.
군대의 편성은 생각보다 심플했다.
각개격파.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펠리스를 필두로.
연합국의 모험단은 말셀러스를 필두로.
황실의 군대는 저지먼트 기사단을 필두로 오크의 군단을 각개격파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리 효과적이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대니얼의 말처럼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다.
각개격파라 하더라도 이미 적의 군대가 와해된 마당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그러나 곁에서 아나스타샤를 보좌하는 미미르가 그 말을 받았다.
“아룬비다의 특성상 굳이 분란을 만들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음…….”
대놓고 이쪽을 적대하는 말이었다.
황태자의 사람으로 구성된 황실의 군대는 아룬비다와 섞일 수가 없는 조합이었으니.
가뜩이나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곱지 않은 아룬비다의 주민들이다.
굳이 분란을 만들어 저쪽이 물어뜯기 좋은 먹이를 줄 필요가 없는 일이지 않나.
대니얼도 그저 한 번 찔러 본 것뿐이었기에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대 편성을 마치고 작전 회의가 진행되며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다만, 이후 진행되는 전쟁의 구도는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상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오크들의 엘더 샤먼, 카르가토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오크는 인간들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일반적인 패배가 아니라, 처참히 대패하고 말았다.
대족장인 파가부탄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고, 50만 대군은 대부분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오크들의 번식력이 좋다고 한들 50만 대군은 쉽게 만들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아룬비다의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어린 오크들의 수도 결코 적지 않았고, 마력을 깨우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걸러지기 때문이다.
그뿐이던가?
조직, 무명의 개입으로 인해 산왕을 저버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반발이 일어났던가?
파가부탄의 리더십과 카르가토의 판단으로 그러한 오크들은 숙청하거나 혈마력을 거둬들여 노예로 부렸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불만이 쌓였으나, 이후 인간들의 비옥한 땅을 차지한다는 원대한 목표,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크들의 고향인 우르부라크로 돌아가자는 명목이 존재하지 않았나.
그런 와중에 이런 대패를 하고 말았으니.
그만한 군세를 다시 회복하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애초에 현 상황까지 이끌어 낸 카르가토를 남은 오크들이 신용할지도 미지수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르가토는 아예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내부의 분열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단합되는 법.
현재 인간들은 자신들의 근거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그것을 기반으로 다시금 권력을 붙잡으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또 다른 대족장을 내세우면 될 터.
그렇게 카르가토가 오크들의 근거지에 도착했을 무렵.
그런 카르가토를 반긴 것은 다름 아닌 가면을 쓴 한 명의 사내와, 그런 그의 뒤를 지키고 서 있는 수많은 오크 무리였다.
“늦었군. 종족의 수치여.”
“너는……!”
전쟁의 많은 패배 요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을 부린 사내는, 아룬비다의 날씨보다도 서늘한 눈동자로 그런 카르가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7화
87화 반란
며칠 전.
셰인은 손에 들린 두 개의 물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둘 다 산왕에게서 받은 것인데, 하나는 직육면체의 아카식 레코드.
다른 하나는 푸른빛을 띄우는 구였다.
그중에서도 셰인은 푸른빛을 띠는 구를 먼저 살펴보고 있었는데, 거기서는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성스러운 검을 쥔 채, 가면을 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클라인.
며칠의 전투 끝에 셰인은 그런 클라인의 검에 가슴을 꿰뚫렸고, 그로 인해 질투의 자아가 소멸해 버렸다.
그리고 이 푸른빛의 구에서는 당시 셰인이 느꼈던 신성함이 담겨져 있었다.
다만 눈앞의 푸른 구체는 전생에 클라인이 휘두르던 성검보다 파괴적인 성향이 더 짙었는데, 이건 아마 클라인의 성검에 담겨 있던 기운과 주인이 다른 탓에 일어난 일인 듯싶었다.
“그런가. 이게 바로 신성이라는 것이군.”
그 힘에 대해서는 셰인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위압감이 좀 있어 보이는 수준에 불과했으니.
전생의 경우, 클라인은 당시 성검으로 오리진을 무력화시키는 용도로 썼다.
그 덕분에 질투의 인격이 사라진 것이니.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 산왕의 신격은 용도가 많이 다른 듯 보였다.
셰인은 한쪽에 치워 뒀던 오크의 토템을 꺼내 들었다.
“보다 지배 쪽에 치우쳐져 있다라.”
그 즉시, 셰인은 이 신성의 사용법이 무엇이고, 산왕이 왜 자신에게 이것을 넘겨준 것인지 의도를 파악했다.
“제법 괜찮은 선물이야.”
셰인은 그런 산왕의 신성을 망설임 없이 입으로 가져가 삼켰다.
* * *
늙은 오크 바투칸은 조용히 두 눈을 감은 채 평소와 같이 산왕의 신전을 지키고 있었다.
“세월이…… 변했군.”
세월이 흐르면 시대도 바뀐다지만, 오크들에게는 그러한 격언이 그다지 통하지 않았었다.
이 혹독한 북부에서는 별달리 변화라 할 만한 게 없었으니.
그러나 요 몇 개월 간, 오크들은 너무 많은 격변의 시대를 지나오고 있었다.
자신들을 무명이라며 다가온 이들의 등장이 그 시작이었다.
현 대족장인 파가부탄과 엘더 샤먼 카르가토는 무명과 손을 잡고 오크 종족을 거두어 준 신을 배반했다.
인간들과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향을 되찾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족 포식을 강행했고, 이를 거부한 동족은 모두 노예로 만들어 버렸으니.
주로 성인식을 막 치른 오크들은 그런 이를 따라 과거를 잊고 더 이상 신전을 찾아오지 않게 됐다.
그나마 바투칸은 신전을 지키는 신전지기인 터라 그 격변에서 살아남아 노예 신세로 전락하는 꼴은 면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동족을 포식하고 강해지는 것에 과연 의미가 있는가.
바투칸은 그 의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감았던 눈을 떠, 한쪽에 묶여 있는 한 소녀를 바라봤다.
마치 저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중 하나를 닮은 찬란한 은발을 가진 소녀는, 의식이 없는지 쇠사슬에 묶인 채 무력하게 앉아 있었다.
“애초부터 우리 오크에게 영광이란 있었는가.”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 있는 흡혈귀 소녀.
그녀의 피는 오크들에게 특별한 힘을 가져다주었고, 이 혹독한 북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원래부터 오크라는 종족은 다른 종족에게 기생하여 살아남아 왔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에 자신이 뭐라 말을 덧붙이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가.
비록 자신들의 고향, 우르부라크를 멸망시킨 종족이었으나…….
애초에 원인을 따지고 본다면 저 어린 것들의 목숨을 먼저 취한 오크들의 오만이 그 이유였으리라.
반면에 인간들은 어떠했던가.
바투칸은 50년 전 인간들과의 전쟁 당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오크 중 하나였다.
이미 50년이나 흘러 버린 세월이지만, 바투칸의 머릿속에서 그때의 장면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50년 전에 마주했던 인간들은, 마치 오크라는 종족이 꿈꿔 왔던 미래 같았다.
다른 종족의 것을 탐하지 않고,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종족.
비록 그 육체는 나약할지언정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심을 통해 성장해 나가고, 서로 단결하여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이들.
그 모든 것이, 바투칸에게는 눈부시면서 동시에 절망을 선사했다.
이미 오크들의 내전은 일어났고, 패배했다.
어쩌다 이리 되었단 말인가.
북부의 초대 대족장, 아르가투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사이클롭스를 죽였다.
당시의 그 기적은 자신들의 신마저 놀래킬 정도이지 않은가.
그 영광 앞에 오크들은 미래를 봤다.
하나, 지금은 더 이상 그러한 미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또다시 패배할 테지.”
영광 없는 오크들에게 진화란 없다.
다른 존재의 것을 탐하는 것만으로는 고향을 되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선견지명이 있는 오크로군.”
“……!”
그때. 그런 바투칸의 뒤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본 그 자리에는 어둠에 휩싸인 채 민무늬 가면을 쓰고 있는 존재가 서 있었다.
“……누구시오. 이곳은 무명에서 온 그대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한 장소가 아니오.”
그에, 바투칸은 조직에서 찾아온 인물이라 생각하고 축객령을 내렸다.
실제로 파가부탄과 카르가토 또한 조직과 협력은 했으나, 이곳 신전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놨으니.
신전이 더럽혀지는 것을 걱정하기 보단, 오크에게 마력의 원천인 흡혈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가면의 존재는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쇠사슬에 걸려 있는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나가라 하지 않았소!”
“아름다운 존재로군.”
바투칸은 당장 저자를 내쫓으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그에게서 풍겨 오는 기세는 바투칸으로 하여금 항거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면의 존재, 셰인은 말을 이었다.
“늙은 오크여. 과거의 영광을 아는 오크여. 그대는 이 존재가 아름다운 이유를 알고 있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소.”
“이 흡혈귀라는 종족은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하여금 흡혈을 하여 살아가는 종족이지. 다른 종족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음이야.”
“…….”
“그럼에도 이들이 그토록 강할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강함.
오크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힘.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바투칸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모르겠소. 이 비루한 오크가 그런 것을 알기나 할까.”
“이들의 존재가 곧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말이요?”
“다른 존재로부터 승리하고 이긴다. 이는 세상에 가장 간단한 법칙 중 하나가 아닌가. 흡혈귀라는 이 종족은 그 누구보다 세상이 정한 법칙에 잇따르는 존재지.”
인간도 마찬가지다.
밭을 기르고, 동물을 키우며, 때가 되면 잡아먹는다.
한데 이게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아니.
생태계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저들이 특히 강한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그에 대한 이유 따위는 없다. 그저 세계가 설계한 대로 태어났다는 게 전부지.”
“……그렇다면 모두 부질없는 짓 아니오?”
“아니지. 그렇다면 그들의 것을 배우고, 그게 안 된다면 비슷해지려고 해야겠지.”
“그게 지금의 지경에 이른 것이지 않소.”
“달라. 너희는 너희의 의지가 아니지 않나.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이 힘을 다루려 했나? 이 힘에 대해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자신들의 한계를 맛보았나? 아니지. 너희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어. 그저 아기 새마냥 어미가 식사거리를 잡아 오도록 기다리며 머리를 내밀고 있을 뿐이었지.”
“……!”
흔히들 하는 착각이 있다면, 오크가 단순히 무식하기만 할 뿐인 종족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단히 착각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마력을 다루지도 못하면서, 마력을 사물에 담을 줄 아는 종족이다.
비록 몇몇 선택받은 샤먼만이 가능한 일이었으나, 어찌 됐든 종족 그 자체가 해낸 일이라는 말이다.
“이제 그만 둥지를 떠나 날개를 펼쳐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둥지를 떠나다니.”
“너희 군단은 패배했다.”
“…….”
“그리 놀라지 않는군.”
“예상은 했소. 50년 전에 마주했던 인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
“그래, 맞다. 인간은 그리 쉽게 당하지만은 않지. 너희 50만 대군은 끝내 인간의 성벽을 제대로 넘어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며, 15만의 몬스터 대군 또한 차가운 이곳의 대지와 하나가 되었지.”
“……그러는 그대는 누구요.”
“너희들이 따르는 신의 대변자.”
“뭐라?”
그러자 바투칸의 두 눈이 사나워졌다.
종족의 치부를 말하는 것도 괜찮았다.
모두 맞는 말이었으니.
신전에 찾아온 것도 참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신전에서, 자신들의 신을 모욕하는 말 따위는 도저히 들어 줄 수 없었다.
“너희의 신은 더 이상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라는 대변자를 보냈지.”
“헛소리!”
“이걸 보고도 그리 생각하나.”
동시에, 셰인은 거인에게 받았던 신성을 내보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그 빛은, 바투칸으로 하여금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
“그, 그걸 어떻게……?”
너무도 익숙한 저 빛은 자신들의 신, 산왕이 신탁을 내릴 때 내뿜던 빛이지 않던가.
뿐만 아니라 종족이 신을 경배하기 위해 만든 토템에 신성을 깃들도록 만들 때, 신전지기인 바투칸이 항상 봐 오던 빛이었다.
지배자로서 느껴지는 힘.
이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 신격이, 다시금 바투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된 연유로 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겠소?”
“산왕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와 내기를 했고, 내가 승리했지. 산왕은 더 이상 이 세계에 관여할 수 없게 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셨는가…….”
바투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의 대변자.
그 말은 허언이 아닐 테니.
“무엇을 바라시오.”
“나는 신처럼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대등한 존재는 될 수 있지.”
“대등……?”
“너희의 고향, 우르부라크를 되찾을 수 있는 힘을 내주지. 대신, 너희는 내게 협력해라. 너희가 신에게 버림받게 만들고, 또 너희의 믿음을 저버리게 만든 이들에게 칼을 들어라.”
“무명에서 온 자가 아니었군…….”
바투칸은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감았다 이내 다시금 셰인을 직시하며 말했다.
“우리 종족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가서 전해라. 너희 종족을 이끌던 신의 대변자가 찾아왔노라고.”
“……그리하겠소.”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기지를 지키고 있던 오크를 포함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예 오크들은 셰인이 전해 온 처참한 종족의 패배에 분노했다.
노예가 된 오크들 또한 자신들의 처지가 그저 종족의 미래를 위한 희생이라 생각했으니.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에, 이처럼 가장 밑자리에서 참고 견뎌 왔던 것이다.
그러나 패배했다.
대족장은 그 죄를 묻기도 전에 죽음에 이르렀고, 그런 대족장의 앞잡이였던 엘더 샤먼, 카르가토는 자신의 몸뚱이만 영위한 채 이곳을 향해 찾아오고 있단다.
대부분의 오크들은 이게 자신들의 신이 실망했기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했다.
거기에 앞장 선 오크는, 그래도 한때 오크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고 있던 신전지기, 바투칸이었다.
“신전지기! 너는 저 정체도 알 수 없는 자를 종족의 일에 끌어들이는가!”
“대족장님의 호의로 살아남은 그 명줄을 앞당기는구나!”
당연히, 노예와 반대파 오크들을 감시하기 위해 남겨진 오크들은 곧장 무기를 쥐어들며 위협해 왔으나.
“당장 일족이 어떤 길로 나아가는지도 모르는 버러지들이 말이 많구나.”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오크들이 당장 흥분을 하고 나섰다.
“감히!”
“죽어라!!”
상대가 어떻게 오크어를 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감히 반란을 부추기려는 저자를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되었기에, 그들은 곧장 무기를 쥐고 셰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셰인의 그림자가 일순간 늘어나더니, 어둠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 그들의 공세를 막아 냈다.
“인간!”
“아니, 다른 무언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전신에 검은 갑옷을 차 려입은 채, 양손은 셰인의 오리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이빨이 이를 막아 냈다.
마음 같아서는 감히 주인님께 무기를 들이댄 놈들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싶었으나, 참았다.
이 또한 셰인의 명령이었으니.
“오크들이여. 너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50만 대군은 모두 고향 땅조차 밟지 못한 채 사그라졌다. 인간들의 성벽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으며, 그 너머로 인간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대족장 파가부탄은 죽음으로서 50만 동족의 죄를 갚지 못했고, 엘더 샤먼 카르가토 또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비굴하게 살아남았다. 그럼, 이제 너희가 선택할 시간이다. 어찌할 테냐.”
셰인은 그런 노예 오크들을 바라봤고, 그들의 두 눈에는 의지가 깃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대족장이 인간들에게 패배했다는 것이…… 정말이오?”
그중 한쪽 팔이 잘린 오크가 그리 물어 오자, 셰인은 품에서 하나의 토템을 꺼내보였다.
“그건…….”
“대족장의 증표!”
“정말 패배했단 말인가!”
그러자, 대족장 측에 서 있던 오크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떠올랐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8화
88화 흡혈귀
그렇게, 카르가토는 두 눈 멀쩡히 뜬 채로 자신의 부족이 통째로 강탈당하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발악을 해 보려 했으나, 준비된 상태가 아닌 샤먼은 무력하다.
카르가토는 기약 없는 복수를 다짐하며 차가운 벌판 아래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그림자 밑으로 한 소녀가 숨어든지도 모른 채.
셰인은 그런 카르가토를 일부러 살려서 보냈다.
황녀에게 공을 최대한 몰아주려면 아직 죽여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대변자여. 어찌할 생각이오?”
“인간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할 거다.”
“음?”
“내가 이미 수를 써 뒀다. 그보다, 우선 흡혈귀를 만나 봐야겠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는…….”
“괜찮다. 생각해 둔 것은 이미 있으니.”
흡혈귀는 위험한 종족이다.
단 몇 명으로 하룻밤 사이에 과거 오크들의 고향, 우르부라크를 초토화시키지 않았던가.
당장 한 마리만 날뛰더라도 셰인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셰인에게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갑의 입장에 서 보겠군.”
그러면서, 셰인은 신전으로 향했다.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
한 점의 빛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이곳에 한 소녀가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밤하늘의 달처럼 찬란한 은발과, 아룬비다의 눈밭보다도 창백한 피부.
거기에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의 눈에서는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크들은 자신들이 마력을 깨우치기 위해 이 소녀에게 흡혈을 당하고, 그 피를 채혈해 왔다.
그리고 그 피를 마시는 것으로 마력을 터득해 온 것이다.
그러나 흡혈귀에게 있어서 혈액이란 생명력 그 자체인 탓에, 소녀는 매번 채혈을 당할 때마다 생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 시간을, 무려 수백 년 동안 겪어 왔으니.
소녀는 더 이상 고통에 몸부림 칠 기운조차 모두 소진하여, 눈동자에는 무기력함만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그러한 고민도 샐 수 없을 만큼 해 봤으나, 기억에도 없던 어린 나이에 납치를 당한 어린 흡혈귀는 그 해답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
셰인은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동질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갇힌 소녀의 정신세계.
그녀가 직접 만든 정신세계는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흑색의 공간에 불과했다.
그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무엇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전생의 셰인조차도 이러지는 않았다.
셰인에게는 있던 말동무조차 없이, 이 어린 소녀는 지금처럼 새카만 공간에 혼자 갇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견뎌 온 것이다.
그 시간 속 느껴지는 고통을, 감히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눈앞의 소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셰인. 그 스스로 밖에 없었다.
하지만 셰인은 지금 이 눈앞의 소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다.
그걸 다시금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며, 셰인은 입을 열었다.
“나가고 싶나.”
“누구……?”
인간의 언어는커녕 언어라는 것 자체를 알 리가 없는 소녀였으나, 정신세계에서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이 고통만 가득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으냐.”
“아…….”
진득한 피가 담긴 듯한 눈동자가 놀라움에 커진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또 다른 존재.
이 검은 공간과 고통뿐이 전부였던 소녀에게 이러한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기에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셰인은 그런 소녀의 말을 천천히 기다렸다.
지금 저 소녀가 느끼는 감정을 전부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비슷한 상황을 겪어 봤기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바깥이라는 게, 존재하나요?”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도 확립되지 못한 소녀의 질문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훨씬 다채로운 세상이 존재하지.”
“이곳처럼 아프지는 않나요?”
“글쎄.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일 거다. 하지만, 여기서처럼 아무 이유 없는 고통은 찾아오지 않지.”
“아…….”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서 자그마한 물기가 어리더니 이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고통에 겨울 때만 나오던 게 아니었던 건가.
새로운 깨달음을 느낄 시간도 없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고 싶어요. 여기서……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그래.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내가 도와주마.”
“가시는 거예요……?”
문득 불안하다는 듯 소녀의 두 눈이 떨렸다.
두려울 테지. 생전 처음 보는 존재에게도 이렇듯 의존하고 싶어 할 만큼.
“내가 여기 있을수록 네가 밖으로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괜찮으냐.”
“…….”
“자주 찾아오마. 이제 이곳에서 고통을 겪는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하거라.”
“아아…….”
정말 그 고통이 이젠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까.
셰인은 소녀에게 잘 있으라는 말을 남긴 채, 그 공간에서 사라졌고.
소녀는 언젠가 셰인이 다시 찾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 * *
“잘 다녀왔소?”
눈을 뜬 셰인을 반긴 존재는 바투칸이었다.
신전지기인 그는 셰인이 흡혈귀 소녀의 정신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 주변을 지키기 위해 서 있었다.
“그래.”
“신기하군. 여태까지 정신이 깨어 있었다니.”
바투칸은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흡혈귀 소녀를 바라봤다.
사실, 둘은 서로가 앙숙이라 해도 좋을 사이였다.
바투칸은 자신들의 선조가 모조리 흡혈귀에게 몰살당해 고향을 잃은 처지가 되었고.
소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까지 납치를 당한 것이었으니.
여태까지 소녀의 존재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바투칸이었으나, 이어지는 셰인의 설명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인격이 형성되고, 동시에 우리가 피를 뽑아 쓸 때마다 고통을 느꼈다는 건가.”
바투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월이지 않은가.
무려 수백 년 동안 생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저 갇혀 지냈다는 사실이 바투칸으로 하여금 씁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오크의 오만함이 잘못이었을까, 흡혈귀의 잔혹함이 문제였을까.
바투칸은 그 둘에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았다.
단지, 바투칸은 이제라도 소녀가 자유롭길 바랐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저 소녀의 고통이 곧 오크라는 종족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으니만큼, 바투칸은 감히 거기에 의견을 달 수 없었다.
“바투칸. 너는 우선 종족을 다스려라. 나는 방법을 찾도록 하지.”
“방법이라면?”
“이 흡혈귀가 없더라도 너희가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방법. 그걸 알아오겠다.”
“……! 그런 게 가능한 일이오?”
“인간도 할 수 있던 일이다. 이미 선례가 있던 일이니만큼, 너희라고 못할 것은 없지.”
“으음……!”
다만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무수한 노력이 필요할 터.
그럼에도 셰인이 이리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신이 남기고 간 아카식 레코드 덕분이었다.
“자주 찾아오도록 하지. 내부 관리는 철저히 하도록.”
“알겠소. 그리하도록 하지.”
“특히, 기술을 깨우치도록 해라. 전투보다는 기술의 발전이 너희 종족의 미래를 감당할 테니.”
“기술이라…….”
오크라고 무식하게 둔기만 들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쇠를 다를 줄 알았고, 몬스터의 부산물로 다양한 장비를 만들 줄 알았으니.
“필요한 일에 대한 분류를 확고히 하도록.”
앞으로 오크들은 셰인을 위해 해 줘야 할 일이 많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오크들의 고향을 되찾아 줘야겠으나, 셰인은 오크들의 고향 우르부라크에 관한 대략적인 지식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조직과 맞서 싸우다보면 우르부라크 또한 다시 오크들의 품에 돌아올 터.
“가끔 찾아오도록 하지.”
“알겠소. 그런데, 엘더 샤먼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놈들이 자리를 잡았다고 했나?”
“그렇소. 그리고 그 수가 상당하지.”
비록 50만 대군이 패배로 인해 많이 죽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가 살아남았다.
엘더 샤먼 카르가토는 용케 흩어진 오크들을 규합시키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낸 상황.
바투칸은 혹여 카르가토가 이곳을 향해 진격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여기로 와서 전쟁을 해 봐야 녀석에게 유리할 게 없다. 놈도 이미 너희가 마음을 돌린 것을 알고 있으니.”
언젠가 놈에게도 여유라는 게 생긴다면 피의 복수를 감행하려 할 터이나…….
글쎄. 놈에게 과연 그런 여유가 생길 날이 찾아올까.
“당장은 놈도 다가올 인간의 군대에 대응하려 할 테지.”
카르가토는 더 이상 인간의 영토를 침략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50년 전처럼, 인간의 군대를 상대로 꾸준히 소모전을 펼치며 알아서 나가떨어지기를 노리고 있을 터.
더군다나 아직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무명의 입장에서 이렇듯 와해된 오크는 더 이상 쓸모가 없을 터.
유일하게 놈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을 만한 게 흡혈귀였으니, 그 부분만 주의한다면 될 일이다.
‘그래 봐야 산왕의 기운 때문에 놈들이 손을 댈 방법도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 셰인은 다시금 비두론 성으로 돌아왔다.
* * *
“어디를 그리 쏘다니고 다니나.”
자신의 방에 설치되어 있던 포탈을 활용해 돌아온 셰인을 반긴 것은 다름 아닌 아나스타샤였다.
“오크들의 근거지에 다녀왔습니다.”
“그런가. 일은 잘된 모양이군.”
“예. 그렇습니다.”
아직 자신의 정체를 완벽히 밝히지 않은 올리시아와 다르게, 아나스타샤에게는 셰인도 상당한 정보를 푼 상태였다.
그녀의 성격상 그러한 정보들을 통해 정치적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충분한 결단력까지 갖추고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이런 사람은 괜히 정보를 숨기기보다, 풀어줌으로써 믿음을 사는 게 더 이로웠다.
“전쟁의 기간은 어느 정도로 보고 있지?”
“지금으로서는 최대 2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아룬비다를 포함해,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북부의 땅은 굉장히 넓다.
거기에 엘더 샤먼인 카르가토는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오크였으니.
이미 자신의 본거지를 제외하더라도 더 많은 부락을 만들어 둘 예정일 터.
놈은 분명 철저한 게릴라전으로 전쟁의 양상을 이어 갈 것이다.
반면 셰인의 포탈 덕분에 황실의 군대는 보급에 큰 문제가 없어졌으나, 여전히 아룬비다의 혹독한 날씨는 해결방안이 없기에, 전쟁은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무겁군.”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2년 동안 황태자를 견재할 수단이 무궁무진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앞서 이미 두 황녀에게 여론전으로 밀린 새뮤얼은 이번 전쟁에서 발을 뺄 수단이 차단됐다.
그런 만큼 전쟁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최대한 공을 쌓아 밀렸던 여론에 대항하려 할 터.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마냥 밝지는 않았는데, 그 과정에서 고통받을 병사들의 걱정 때문이었다.
분명 많은 사상자가 생길 테지.
그러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내버려 두면 그 희생이 같은 인간에게 몰려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새뮤얼의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지금 흘리는 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희생이 생겨날 것이다.
오히려 지금 하는 행위는 미래에 일어날 유혈 사태를 줄이기 위한 일이었으니, 아나스타샤도 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더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노력해야겠군.”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아나스타샤가 직접 타 온 홍차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9화
89화 2년 후 (1)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흐른다지만.
보내는 사람마다 시간의 가치는 달라지며, 또 누군가에게는 남들에게 잠깐의 시간에 격변의 시기를 보내기도 한다.
“세 분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뭘,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죠.”
“맞슴다.”
“아주 그냥 뿌리가 뽑혀졌더만요. 하하핫!”
갑작스레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아룬비다의 삼총사, 케빈과 맥고완, 해커츠는 정찰을 끝마치고 돌아와 미미르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2년 전, 특수 수색대 임무를 무사히 마친 그들은 체계적으로 직위가 개편된 아룬비다에서 공을 인정받아 상급 간부의 위치에 올랐다.
“오크들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그 빌어먹을 놈이 뒤진…… 아니 죽은 이후로는 완전히 와해됐습디다. 오히려 인간만 보면 도망치더라 이 말입니다.”
케빈의 보고에 미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군요. 이젠 슬슬 종전을 선포해도 될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대족장 파가부탄의 죽음 이후 남은 오크들을 대동했던 엘더 샤먼, 카르가토의 세력은 추악한 발악 끝에 아나스타샤의 지휘하에 토벌이 완료됐다.
2년 동안 끈질기게 근거지를 바꿔 가며 철저하게 게릴라전으로 이어 갔던 놈이었으나, 끝내 꼬리가 밟힌 것이다.
그 후로는 오크들도 무력화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황실의 군대 역시 물러갔고.
“그치들이 없으니 아주 살맛납니다, 그려.”
“아무래도 이쪽의 주민들과 어울리기에는 힘든 이들이었죠.”
황실의 군대는 초기에 아룬비다에 머물다가 진군이 시작된 시점에서 따로 거점을 만들어 그곳에서 지냈다.
다만 군사 작전을 펼치다 보면 마주치는 경우가 제법 많았는데, 그때마다 아룬비다의 주민들과 다양한 문젯거리를 만들어 왔다.
“그래도 다른 분들과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뭐, 황실에 소속된 놈들처럼 우릴 무시하는 인간들은 없으니…… 우리도 마냥 싸움닭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리고 그 뭐냐, 황녀님께서 많이 도와주고 계신다는데 우리가 막돼먹게 움직여서야 쓰겠습니까.”
“황녀님께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껍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지난 2년 동안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아룬비다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했다.
약 50년 전에 일어났던 오크의 남하 이후 일어난 군단의 침범.
이를 막기 위해 2년 전 아룬비다가 얼마만큼의 희생을 했고, 또 성공적으로 막아 냈던가.
비록 지금도 당시에 모습을 나타냈던 불길한 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15만이라는 몬스터 웨이브와 50만 대군의 오크 군단을 막아 낸 결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맥고완. 팔은 좀 괜찮습니까?”
“예. 이젠 많이 익숙해져서 이 팔로도 홍차를 타 마시고 있슴다.”
“그거 잘된 일이로군요.”
“임마, 넌 앞으로 평생 황녀님께 충성을 맹세해야 돼! 그 팔 하나 붙이는데 얼마나 돈이 들어갔는지 아냐?”
“당연한 소리 하는 거 아님다, 해커츠.”
육중한 체구의 맥고완은 지난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었다.
그러나 다행히 특수 수색대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보상으로 마탑에서 공수해 온 마공학 인공 관절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튼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삼총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최근 완공된 목욕탕을 향해 달려갔고, 미미르는 그런 그들을 배웅하며 테라스로 나갔다.
지난 2년 사이, 아룬비다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룬비다의 남쪽 성문에 거대하게 설치되어 있는 텔레포트 포탈.
지금도 여러 사람들이 이용 중인 저 포탈을 중심으로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아직 아룬비다에는 제법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남아 있다.
몬스터의 시체가 사라지고 마석이나 낮은 확률로 부산물을 얻을 수 있는 던전과 다르게, 아룬비다는 던전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던가. 덕분에 녀석들의 부산물은 비싼 값에 거래되곤 한다.
클레이튼 상회에 소속된 상단이 이를 사들였고, 지속적으로 추가 매입을 하고 있는 상황.
자연스럽게 숙박 시설의 필요성으로 이어졌다.
거기에 이전에는 별 활용 가치가 없던 금화의 가치가 수직 상승하고, 여타 평범한 도시처럼 아룬비다에서도 화폐를 이용한 거래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아룬비다에는 마석 광산은 없을지언정 질 좋은 철광산이나 희귀 금속이 잠들어 있는 광산이 많았다.
1황녀인 올리시아는 북부의 맹주인 아나스타샤와 협약을 맺어 그러한 광산을 개발하기에 착수했고, 그 덕분에 인부들도 대거 고용되고 있는 시점이지 않나.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골드로 아룬비다의 시설들을 한 차례 뒤집어엎으며 이른바 산업 혁명이 일어난 것과 같은 효과를 보게 됐다.
이제 종전 선언만 이루어진다면 일반인들도 관광을 위해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
오크들이 억지로 이루어 낸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몬스터들의 개체수가 급감한 지금, 아나스타샤는 아룬비다의 주민들과 올리시아의 지원군을 통해 인간들의 영역을 더욱 넓히는 단계에 들어섰다.
과연 2년 전이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변화였을까?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 계기는 단 한 사람의 등장에서부터 시작됐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는지요.”
2년 전.
그 누구보다 아룬비다를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그는 어느덧 늠름한 청년이 되었다.
* * *
“드디어 끝!”
디라일라의 외침과 함께 모험가 협회에서 방금 막 나온 클라인과 그의 동료들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던전도 꽤 성공적이었네.”
“꽤? 이럴 때는 완벽했다라고 표현해야지.”
알 로스의 말에 답한 사람은 마법연합 총관의 손녀 아르티아였다.
그녀의 말처럼 방금 그들은 또 하나의 던전을 완벽하게 클리어하고 관련된 보고서를 모험가 협회에 제출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이로써 그들이 미개발 던전을 클리어한 횟수는 총합 20회가량.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닌데, 더 놀라운 건 모든 던전이 정보조차 확보되지 않은 미탐사 던전이란 것이다.
가히 말도 안 되는 성과였다.
때문에 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활동했으나, 덕분에 실력도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겪어 보지 못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월등해졌고, 무엇보다 확고한 명성을 얻어 이곳저곳에서 협업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고마워. 덕분에 이번에도 신세를 졌네.”
그중 하나인 아네이스가 인사를 건네 왔다.
전대 저지먼트 기사단장인 로버트의 딸이자, 셰인의 약혼녀였던 그녀도 최근 적지 않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애초에 저지먼트 기사단이라는 이름값도 있었으나, 그와 별개로 그녀 스스로가 만들어 낸 팀원과 상당한 양의 던전을 클리어 했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클라인과 함께 협업을 이어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녀 스스로 탐사를 진행하는 일이 더욱 많았다.
“아, 응. 너도 고생 많았어. 음…… 그런데 요즘은 어때?”
“뭐가?”
“그…… 형님이랑 파혼된 거.”
“딱히.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아.”
셰인과 아네이스의 약혼은 결국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현 저지먼트 단장인 올리버 G 대니얼이 급격히 성장하는 클레이튼 가문을 더 이상 컨트롤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셰인도 그렇고 아네이스도 그렇고, 둘 모두 약혼 관계라는 게 무색할 정도의 사이였기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던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둘은 서로의 관계를 각자의 목표를 위해 이용해먹은 감이 없잖아 있을 정도였으니.
오히려 그 사이에 낀 클라인만 어정쩡해진 그 관계가 아쉬웠을 따름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겪는다면 셰인에게 큰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어떤데?”
“형님?”
“응.”
“여전히 아룬비다에 머물고 있어.”
이제는 거의 종전에 가까워진 상황이었으나 셰인은 아룬비다에서의 일에 제법 많이 관여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제 겨우 안정기에 들어선 메자이아 대수림의 건으로 인해 바쁜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 로웰을 대신해 아룬비다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클라인의 답변에 아네이스는 무언가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무렵.
“아, 그리고 이거. 형님이 너에게 전해 달라고 했어.”
“편지?”
“응.”
클라인에게 건넨 편지를 받은 아네이스는 그걸 품에 갈무리하고 언뜻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잊지 않았구나.”
“아…….”
그러자 클라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 아네이스는 여전히 셰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클라인의 착각에 불과했다.
아네이스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셰인과 했던 어느 한 약속 때문이지, 약혼에 관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클라인은 표정 변화가 극히 드문 아네이스가 저렇듯 미소를 지을 때마다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다, 정말.’
셰인이 바뀐 지도 어느덧 3년에 다다르고 있는 상황.
클라인도 더 이상 셰인이 이전처럼 돌아가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보다 부드러워질 수 있지 않은가.
‘그래.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한편 클라인이 모험가 협회에서 큰 명성을 거머쥔 반면, 셰인 또한 마법사들 사이에서 확고히 이름을 새겨 두고 있었다.
지금도 셰인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그때마다 비슷한 학파의 마법사들이 곡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1년 전쯤에는 아르티아도 비슷한 일을 겪었기에 한동안 클라인이 대신 시달려야만 했다.
“클라인 님. 그럼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클라인에게 말을 걸어온 이는 알렉스였다.
그 또한 이제는 어엿한 전사의 모습을 갖췄는데, 등 뒤로 다양한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검과 한 손 도끼, 단창과 활 등.
클라인에게 검술을 배우고, 이따금 협업을 위해 함께 다니는 모험단으로부터 기술을 흡수한 알렉스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모험가였다.
이미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백병지왕(百兵之王)이라는 대단한 칭호까지 얻지 않았던가.
정작 알렉스 스스로는 그 칭호가 과분하다며 꺼리는 듯했으나, 그만큼 무기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서 많은 모험가들에게 인정을 받은 상황이었다.
“아, 당분간은 휴식기를 가지려고. 2년 동안 열심히 해 왔으니까, 몇 개월 정도는 정비를 해야지.”
원래라면 진작에 가져야 할 시간이었으나, 일행들 모두 의욕이 넘쳐 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단순히 던전을 클리어 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명성이 늘어날 것도 없었기에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려나…….”
이따금 편지를 주고받긴 하나, 셰인도 바쁜 시간을 보내는 듯했고.
클라인 또한 셰인이 전해 준 던전의 정보를 토대로 탐색을 진행하느라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도 편지 좀 보내 봐야겠다.’
그래도 이제는 얼굴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클라인은 많은 인파들로 가득한 도시를 걸어갔다.
* * *
두 눈을 뜬 셰인은 자신이 잠들어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평소처럼 세안을 마친 후 옷을 차려입었다.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자신에게 도착한 클라인의 편지를 뜯어 읽었다. 아네이스가 자신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는 이상한 오해와 함께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셰인의 방.
침대로부터 꾸물거리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음. 편지인가? 혹시 다른 사랑하는 님에게서 온 건 아니겠지.”
이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나스타샤였다.
태어난 모습 그대로의 나신의 몸으로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민 그녀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비슷합니다.”
“호오? 이 나를 두고 다른 여자의 이름을 찾나?”
“여자는 아닙니다. 제 동생 클라인에게서 온 편지이죠.”
“그것참 다행이군. 아니었다면 오늘 밤에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는데.”
“…….”
본론만 말하자면 편지 속 클라인의 걱정은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눈앞의 아나스타샤가 있는 이상, 클라인이 생각하듯 셰인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게 됐으니.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아나스타샤와 이런 관계가 시작됐던 게.
셰인은 괜히 떠오르려는 어젯밤의 기억을 애써 무시하며, 이 관계의 시작을 떠올렸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0화
90화 2년 후 (2)
셰인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해 온 일은 결코 적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틈틈이 논문을 발표하며 마법사로서의 명성을 넓히는가 하면, 가문의 사업 중 일부를 맡으며 아룬비다에 급격한 상업적 성장을 안겨 줬다.
거기에 산왕으로부터 받게 된 아카샤의 아카식 레코드의 활용법을 연구하면서, 그동안 정체되어 왔던 마법사로서의 실력도 늘려 어느새 4서클의 마법사가 되었다.
또한 산왕의 대변인으로서 오크들이 흡혈귀의 마력이 아니더라도 마력을 깨우칠 수 있도록 연구를 진행했다.
앞으로 오크들이 해 줘야 할 일이 결코 적지 않은 터라 이것은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산왕의 봉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흡혈귀에게 금제를 가할 방법을 찾아내는 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비록 오크들에 의해 강제로 채혈을 당하며 정상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한 흡혈귀였으나, 그녀는 엄연히 ‘진혈’이라 불리는 순혈 중 순혈의 피를 이은 흡혈귀지 않나.
혹여라도 그녀가 폭주를 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아나스타샤의 영혼을 복구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앞으로 1황녀인 올리시아와 함께 아나스타샤가 해 줘야 할 일이 많았기에 이 역시 신경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산왕으로부터 얻은 마력의 근원을 통한 영혼의 복구법. 그걸 실현시켜야만 했다.
하나같이 쉬운 일이 없었으나, 셰인은 잠도 최소한으로 줄인 채 매일같이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셰인에게 아나스타샤가 그리 말해 왔다.
“뭐가 말입니까?”
“그대가 해야 할 일 중 대부분은 외부하고 소통을 해야 하지 않나.”
“음.”
그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마법적 논문의 경우에는 클레이튼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는 카비르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과 협업 중이라 대부분 낮에 시간을 소모한다.
뿐만 아니라, 셰인은 의외로 마법사로서 갖춰야 할 서클에 대한 심층적인 개념이 부족했다.
이는 전생에도 그렇고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로 마법은 쓰되, 추구하는 방향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여 그 부분은 마탑의 장로인 케이튼의 자문을 제법 받아야만 했다.
그뿐이던가?
군사 회의를 할 때면 미미르와 함께 아나스타샤를 보조하러 가곤 하지 않던가.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낮에 다른 이들과 소통에서 소모되는 시간이 있던 만큼 아나스타샤의 증상을 봐야 했던 셰인은 낮에 시간이 주로 부족했던 것이다.
“어차피 나도 군사 회의에 시간이 잡아먹히는 일이 많으니, 차라리 저녁에 그대의 방으로 찾아가도록 하지.”
“황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일.
다 큰 남녀가 한 밤에 같은 방에 있다니.
그것도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아나스타샤와?
물론 소문을 퍼뜨릴 인력 자체가 없었기에 이상한 추문이 퍼지는 결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 결과 아나스타샤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물리적 접촉도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맨살을 드러낸 아나스타샤의 등에 손을 올리는 등.
남들이 보면 필시 오해할 만한 행위가 잦았으나, 둘 다 딴 마음을 품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 사고가 터지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아카식 레코드의 도움으로 마력의 근원을 어느 정도 해석하는 데 성공한 시점.
슬슬 근원석으로부터 아주 일부분의 힘을 뽑아 아나스타샤의 영혼에 접목시키는 과정에 자그마한 결함이 생기고 말았다.
셰인의 영혼은 이미 한 번 마력의 근원에 우연찮게 영향을 받은 상태였고, 아나스타샤 또한 방금 막 마력의 근원에게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그 거리를 충분히 벌려 두지 않고 섣불리 접근하던 중, 둘의 영혼이 극히 짧은 시간 동안 결합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셰인은 아나스타샤의 기억을, 아나스타샤는 셰인의 기억을 일부분 서로 엿보게 되고 말았다.
‘그나마 중요한 기억은 아니라서 괜찮나.’
다행히 아나스타샤가 셰인의 영혼과 결합하는 와중에 본 기억은, 산왕과 대화하는 장면 중 일부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다른 시간선에서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끝내 보고 말았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아나스타샤는 그 과정에서 끝내 깊은 슬픔에 매몰되고 말았다.
다른 시간선에서의 일이었으나, 결국 같은 영혼이 겪은 사건이다.
셰인이 가지고 있던 그 기억과 마주한 순간 아나스타샤는 당시의 자신과 깊게 몰입되어 극심한 공허함과 무력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위험했다.
아나스타샤의 영혼은 이미 상당히 금이 간 상태였는데, 전생에 소멸되어 버린 자신의 영혼과 일순간 공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대로 그녀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던 셰인은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아나스타샤가 그런 셰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전생에 노처녀로 죽었군.”
“……예?”
그런데 하필 저 얘기를 꺼내는 순간이 아나스타샤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 서로 맨살이 닿고 있을 때였다.
거기에 비록 셰인은 다른 영혼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읽는 일이 잦았으나, 그래도 영혼이 결합된 적은 처음이었기에 그녀의 기억을 읽게 되면서 적잖은 여파가 있는 상태였다.
만약 그때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그날 밤 사고를 치는 일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하필 서로의 몸이 맞닿은 상태였고.
하필 셰인이 읽게 된 아나스타샤의 기억은 처음 아룬비다로 온 상태로 그녀가 가장 외로울 당시였으며.
하필 그날따라 밤하늘을 비추는 두 달이 너무도 아름다웠을 뿐이었다.
“뭘 그리 생각하고 있어? 전날 밤이 그리도 좋았나?”
“…….”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 셰인은 아나스타샤의 저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긍정을 하려 하니 셰인에게 익숙하지 못한 이 감정은 너무도…… 뭣한 것이었고.
부정을 하자니 아나스타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았다.
“훗. 됐다. 그럼 점도 귀엽군.”
살다 살다 귀엽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본 셰인이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던 그때, 아나스타샤가 이어서 말했다.
“아무튼, 오크들의 마지막 근거지까지 뿌리를 뽑았군. 이제는 종전이야.”
“……그렇군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걸린 전쟁이 드디어 끝맺음을 맞이한다.
이는 분명 좋은 소식이었다.
“올리시아의 군대는 아직 남아서 광산의 개발 쪽으로 인원을 돌리겠다더군.”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아마 당분간 군대를 일으킬 일은 없을 테니.”
“흠. 말만 들어 보면 언젠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나스타샤의 말에 셰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도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지하도시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전 하이엘 왕국의 기사단장, 애덤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 * *
-최근 이종족 노예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수정구로부터 애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주로 사들이는 쪽은?”
-완벽하게 파악은 못했습니다만, 주로 4층의 경매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는 저희가 주목 중이던 인물도 포함됐습니다.
“그때 그 정보상이로군.”
-……예. 맞습니다.
지하도시의 경매장이라면 익명이 철저하게 보장되어 있는 장소였으나, 애덤이 줄곧 시선을 떼고 있지 않던 존재가 있었으니.
왕국에서 애덤을 암살하려 했던 정보상의 리더였다.
“아직 섣불리 판단하기는 힘들겠지만, 당장으로서는 놈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을 해야겠군.”
-……조직입니까?
“아마도.”
-좀 더 자세히 파 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찾아가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애덤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다.
최근 클레이튼 가문의 위명이 얼마나 높던가.
근 2년 동안 가장 핫한 메자이아 대수림과 아룬비다의 상권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클레이튼 가문이다.
또 동시에 클라인은 모험가들 사이에서, 셰인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상당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셰인이 직접 지하도시와 관련됐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면 그 이름값에 상당한 영향이 생길 터.
“걱정 마라. 신분은 철저히 숨길 테니.”
하지만 셰인에게 이름값은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다.
쓰일 때 쓰고 아닐 때는 말아야 하는 것에 굳이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그리 말하신다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걸릴 생각도 없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셰인은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지하도시로 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런가. 당분간은 이별이겠군.”
“예. 하지만 저는 여기에 있어야 할 것 같군요.”
“알겠다. 그런 걸로 해 주지.”
슬슬 황태자 측에서도 셰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을 터.
그들의 눈이 이곳 아룬비다에도 숨어 있을 테니, 적당한 알리바이는 필요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 데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셰인은 자신의 방에 설치한 포탈을 통해 은밀히 아룬비다에서 빠져나왔다.
* * *
지하도시는 총 5층으로 구분이 지어진다.
그중 지하 1층은 적당히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들이 판매되는 지하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2층은 보다 법적 제재가 강한 물건들이 즐비하고, 3층부터는 투기장이나 도박장, 적당한 크기의 정보상들이 있다.
주로 3층까지는 적당히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들어온다면, 4층부터는 본격적으로 지하도시의 어둠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지하 경매장이 존재한다.
지하 경매장에서는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진행되는 경매인 만큼, 극히 희귀한 물건들이 들어온다.
그중에는 이종족 노예는 물론이고 같은 인간마저 노예로 팔리고 있으며, 마약과 불법 도핑제 등도 적지 않다.
그 외에는 살인 청부업이나 고급 정보상 등 수많은 불법이 난무하는 장소이며, 5층부터는 지하도시의 최상위 간부들만 출입이 허가되는 구역이다.
“갈 길이 멀군…….”
그런 지하도시에서 현재 3층에 자리를 잡은 애덤은 그리 중얼거렸다.
어느새 이 지하도시에 들어온 지도 2년이 넘은 시점.
애덤은 최대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나름 3층에서 제법 존재감 있는 정보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애덤이 원하던 구역은 4층이었다.
주로 고급 정보가 오가는 장소이며, 어느 곳에 가더라도 남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는 거물들이 등장하는 장소.
하이엘 왕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사(祕事)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현재 거주 중인 3층으로는 부족했다.
그러나 4층부터는 지하 세계에서 로열이라 불리는 이들만이 자리를 허가받을 수 있었고, 실상 4층부터 5층에 자리를 잡은 이들과 인맥이 없는 이상 3층이 한계였다.
“끈을 만들지 않으면 힘들 것 같은데…….”
그렇게 답답함을 느끼고 있으려던 찰나.
“없으면 만들어야지. 그뿐이지 않나.”
“……오셨습니까.”
그런 애덤의 등 뒤로 민무늬 가면을 쓴 존재, 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1화
91화 거래 장부 (1)
“끈을 만든다는 말씀입니까?”
지하도시에 급격히 늘어나는 이종족 노예를 위주로 한 거래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보다 깊은 지하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아래층과의 끈이 필요한 애덤의 질문에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끈을 만들 필요가 있나. 자리가 나면 그때 차지해도 될 일이지.”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실제로 선례가 있지 않나?”
“음…….”
셰인의 말을 이해한 애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선례가 있다면, 본래 이곳 지하도시를 주름잡던 패밀리 중 하나인 흑마법사 집단의 경우, 5층을 지배하던 파이브 패밀리 중 하나였다.
그들은 주로 암시장을 다스렸는데, 38년 전에 일어난 제국의 흑마법사 토벌 작전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때문에 암시장을 다스리던 패밀리의 자리가 공석이 되자, 그 자리는 긴 싸움 끝에 남은 패밀리 중 하나가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파이브 패밀리에서 포 패밀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굉장히 배타적입니다.”
애덤의 말처럼 단순히 하나의 패밀리가 사라진다고 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하나의 패밀리를 정리하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지. 살리에르 백작의 죽음 이후, 노예상을 주로 다스리던 쪽에서 신흥 강자가 나오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만…….”
과거 이종족 노예를 주로 다스리던 살리에르 백작.
디라일라를 납치했다가 셰인에게 죽음을 맞이한 그는 비록 5층의 패밀리에는 속해 있지 못했으나 나름 4층에서는 거물로 통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패밀리를 정리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놈들은 외부에서의 공격에 굉장한 단합력을 보입니다.”
“굳이 외부를 움직일 필요는 없지. 자기들끼리 싸우도록 만들어도 될 일이니까.”
“……내분을 노리고 계시는 겁니까?”
그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지하도시는 개인의 이익이 뭉치고 뭉쳐서 만들어진 공간이었으니.
하지만 그들 또한 한 번의 내분이 지하도시의 권력 구도를 어떻게 바꿀지 잘 아는 탓에 그 부분에서도 철저한 선을 지키고 있는 마당이다.
애덤이 그 부분을 짚고 들어왔다.
“애덤. 세상에는 돈으로 안 되는 일 따위는 없다.”
“예?”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돈으로 해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돈이 부족했을 뿐인 거지.”
“……?”
도대체 얼마만큼의 돈을 투자할 생각인 걸까.
아무리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지만 이 지하도시의 권력 구도를 단순히 돈 하나만으로 해결한다고?
애덤은 셰인의 말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외부에서 보는 지하도시의 선입견과 다르게, 지하도시는 폭력 하나만으로 돌아가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상당 부분의 폭력은 절제되며, 나름대로의 선을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다.
때문에 지하도시의 사람들은 폭력을 휘둘렀을 때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이득과, 참았을 때 훗날 돌아올 이득을 계산할 줄 아는 머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이들을 단순히 많은 돈으로 휘두르는 게 가능할까?
“말하지 않았나. 돈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고. 그저 가지기만 하더라도 수많은 이들의 머리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얼마나 탐이 나겠어.”
“그런 물건이 있습니까……?”
“물론. 특히 4개의 패밀리가 환장할 만한 물건이지.”
도대체 그 물건이 뭐길래 저러는 걸까.
애덤은 셰인이 품에서 꺼내는 하나의 낡은 책을 바라봤다.
“은밀하게 소문을 퍼뜨려라. 망자가 남기고 간 혼돈이 나타났다고.”
* * *
디라일라를 납치했다가 셰인에게 살해당한 살리에르 백작은 포 패밀리에 들어갈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향력이 적었느냐 하면 결코 아니었다.
그는 4층에서도 최상위권에 위치한 사람이었으며, 스스로 가지고 있던 정보 조직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5층의 포 패밀리의 바로 밑 단계였다고 봐도 좋았다.
제국의 고위층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위치에 올라간 것은 그만큼 살리에르 백작의 수완이 좋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놈이 죽은 지도 벌써 2년째로군…….”
5층의 포 패밀리 중 하나.
통칭 ‘금광’.
투기장과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는 패밀리의 이름으로, 금광의 주인인 엘도라트는 한때 포 패밀리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한 귀족의 이름을 떠올렸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데 급급했던 탓에 호위조차 제대로 두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지만, 실제로 그만한 조심성 때문에 놈이 죽던 그 순간까지도 포 패밀리는 살리에르 백작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놈의 죽음으로 인해 한때 지하도시는 남겨진 이권을 두고 거친 경쟁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냥 조용히 죽고 사라질 놈인 줄 알았더니.”
이 지하도시를 30년 넘도록 거닐고 있는 엘도라트는 이 도시에서 한껏 명성을 날리다 사라지는 존재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
그럼에도 살리에르 백작만큼 급부상하는 존재들은 몇 없었다.
“놈의 거래 장부가 드러났다…… 라.”
한때 이종족 노예를 다루는 데 있어 전권을 쥐고 있다해도 무방했던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그러한 소문이 지하도시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엇.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떻지?”
“인위적으로 퍼지고 있는 소문으로 보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자신을 따르고 있는 수하에게 그리 묻자, 수하는 준비된 말을 이어서 내뱉었다.
“그 소문의 근원지를 파악하려 찾아본 결과, 정보상들 위주로 퍼지고 있는 듯합니다.”
“정보상이라. 쥐새끼인가?”
엘도라트의 금광과 마찬가지로 포 패밀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궁쥐’.
주로 정보상과 청부업을 담당하고 있는 패밀리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시궁쥐 또한 소문의 출처를 알아보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누가 이런 재미있는 장난을 치고 있을지 궁금하군.”
이종족 노예는 제국을 시작으로 대부분의 국가가 불법으로 지정된 사항이다.
그럼에도 이종족 노예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 때문이다.
마력을 가지지 못했던 인간에게 이종족이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런 이종족을 향하는 폭력은 때로 마약과 같은 유흥을 선사했으니.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은 아니나, 가학심이 강한 이들에게서 그런 성향이 곧잘 보이고는 했다.
현 황제는 그런 인간의 가학심이 곧 기원전 인류의 두려움을 강조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이를 제국법으로 엄격히 금지시켰다.
그런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라니.
“걸릴 수밖에 없는 소문을 만들어 냈군. 거기다 실력도 좋아. 안 그런가?”
소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만큼 은밀하게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보통의 실력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하도시에서는 황제도 부럽지 않을 권력을 누리는 게 바로 포 패밀리지 않나.
비록 시궁쥐만큼은 아니더라도 지하도시 내의 정보망은 충분한 금광에서도 아직 소문의 출처를 확인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보아하니 시궁쥐 또한 비슷한 처지 같지 않나.
“모두 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널 탓하는 게 아니다. 엘리엇. 그만큼 상대가 쉽지 않다는 거지.”
그러면서 엘도라트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출처는 알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놈들의 목적만큼은 얼추 예상이 되야 하는데.”
“높은 확률로 내분이 그 목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목적일 확률은?”
“돈이 목적일 가능성도 제할 수는 없습니다. 행동 패턴으로 미루어 봤을 때, 오히려 그쪽의 가능성이 더 높겠지요. 하지만…….”
“돈이 목적이라면 그걸 팔려고 하지는 않겠지. 거기다 이렇게까지 소문을 내는 걸 보면 상대도 이 지하도시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이야.”
“……맞습니다.”
당장 포 패밀리 중 하나인 금광과 시궁쥐가 이토록 관심을 갖을 만한 물건이 바로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두 패밀리도 마찬가지일 터.
거기에 적힌 이름값만 해도 얼마일 것이며, 그것을 활용한 돈벌이 수단이 얼마나 넘쳐 나겠는가.
당장 팔아치우는 것으로도 큰돈을 만질 수는 있겠으나, 그걸 활용해 더 큰돈을 벌거나 높은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놈들에게 그걸 활용할 만큼의 배포나 능력이 없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엘도라트도 그렇고 그의 수하인 엘리엇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봤다.
“그저 좀도둑은 아니었을 거야. 무려 그 저지먼트 중 하나를 죽인 놈이니.”
살리에르 백작 본인은 무력이 별 볼일 없었으나 그를 지키고 있던 기사는 무려 시그니처를 깨우친 자였고.
그 기사와 함께 살해당한 저지먼트 기사단의 실력을 생각해 보면 상대는 살리에르 백작의 정체를 알고 찾아갔다는 말이 된다.
“재미있어. 아주 일이 재미있어지겠어. 안 그런가, 엘리엇?”
“주인님의 기대만큼이나 지하도시에 상당한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맞아. 분명 대단히도 큰 게 찾아올 거야.”
이렇듯, 지하도시에 퍼진 소문으로 인해 포 패밀리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그게 정말입니까?”
“……아직은 소문에 불과하나, 들리는 바에 따르면 지하도시의 포 패밀리들 또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겠군요.”
새뮤얼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간 살리에르 백작의 죽음으로 인해 얼마만큼의 손해를 봤던가.
새뮤얼이 아주 세심하게 준비해 둔 사람이니만큼 그 피해도 상당했다.
“살리에르 백작…… 죽을 거면 조용히 죽었어야죠. 쯧.”
새뮤얼은 살리에르 백작의 자식마저 죽었다는 사실이 새삼 아쉽게 다가왔다.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애비가 감당하지 못한 죄를 물었을 터인데.
그러면 뭐 하겠나. 이미 죽어 없는 이들인 것을.
“소문이 만약 진실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에서 확보해야만 합니다.”
비록 살리에르 백작과 새뮤얼의 관계를 증명할 만한 것들은 모두 소실되었다고는 하나, 거래 장부에 남아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새뮤얼의 밑에 있는 수하들이었다.
그런 수하들에게 큰 약점이 잡히는 것은 새뮤얼 또한 손발이 묶이는 일과 마찬가지.
게다가 지금은 아룬비다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쌍둥이 황녀에게도 상당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마당이 아닌가.
비록 빠르게 대응한 덕에 두 황녀에게 밀리고 있진 않았지만, 더 이상의 실책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메자이아 대수림 건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정리됐죠?”
“이제는 안정권에 들어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쪽 인력도 전부 지하도시로 투입하세요. 명심해야 합니다. 살리에르 백작의 장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차지해야 해요.”
“……뼈에 새기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만약 일이 번거로워질 것 같으면…….”
“…….”
“들개를 푸세요.”
“……알겠습니다.”
새뮤얼의 말에 그의 수하가 잠시 몸을 흠칫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2화
92화 거래 장부 (2)
시간이 흐를수록 소문은 점차 지하도시에 넓게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가 지하도시에 풀렸다는 정도의 지라시에 불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에는 다양한 살점이 붙기 시작했다.
살리에르 백작의 숨겨진 아들이 거래 장부를 통해 돌아온다더라.
누군가 숨겨진 거래 장부를 통해 거물들을 협박하고 있다더라.
등등. 다양한 지라시가 덧붙여졌으나, 그중 가장 사람들의 지지를 사고 있는 것은 곧 4층의 지하 경매장에 거래 장부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연막작전이군.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야.”
“연막이라면……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더 높겠군요.”
셰인의 말에 애덤은 금방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왕실의 정치 놀음을 지켜봤던 기사단장 출신이라 그런지 이해가 빨랐다.
“장부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고 싶은 존재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뭐, 당연한 말이겠지만요.”
“가장 의심해 볼 수 있는 건 제국인가.”
“살리에르 백작의 출신 때문입니까?”
“맞다. 애초에 살리에르 백작은 현 황태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니만큼 신경이 쓰일 테지.”
“……괜찮으시겠습니까? 황실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일이 필요 이상으로 커질 수도 있습니다.”
애덤의 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황실이 이곳 지하도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위기에 몰렸다고 생각되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비록 쌍둥이 황녀에게 빌미를 주는 꼴이 되겠지만, 적어도 장부를 타인에게 빼앗기는 것보다야 나은 선택지였으니까.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장부가 누구에게 넘어가든 상관할 일은 아니니. 오히려 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하지만 반대로 너무 큰 관심을 끈다면 물건을 넘기는 과정에서도 분명 잡음이 심할 겁니다. 경매장에 물건을 올리는 과정에서부터 작업이 들어올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과연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하도시의 생태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애덤은 예리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다.
확실히, 경매장의 시스템상 판매자의 신원을 확실히 숨기거나 경매품의 도난을 방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지만.
경매품을 경매장에 넘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고까지 경매장 측이 책임을 지지는 않을 터.
물론, 어지간한 무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경매를 담당하고 있는 패밀리가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지만, 상대가 같은 패밀리거나 황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지.”
하지만 셰인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고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자 애덤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눈앞의 청년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왔는지 여실히 봐 오지 않았던가.
나중에야 듣게 된 일이지만 메자이아 대수림 때부터 아룬비다의 오크 남하 사건까지.
저 청년이 가지고 있는 혜안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진심을 다해 따르기로 한 것이고.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 이상 관여하는 것은 수하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황실에서 따로 연락이 왔습니다. 1황녀 측입니다.”
“안 그래도 언제 연락이 올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심스럽게도 접근했군.”
2년 전, 1황녀 올리시아에게 새뮤얼이 지하도시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 주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애덤이 지하도시에서 자리를 잡아 가며 올리시아와 조심스러운 커넥션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연락을 주셨네요. 오랜만이죠? 얼굴을 보는 건 1년만인 것 같네요.
“오래만입니다, 황녀님.”
-네. 잘 지내고 계시죠? 1년 전이랑 다르게 훨씬 남자다워지셨네요.
“감사합니다. 황녀님께서도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어머, 감사해요. 그래도 제 동생과 지내다 보니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네요?
“…….”
설마 올리시아에게도 말한 건가.
-그런 표정 지으실 거 없어요. 제 동생이 원래 어릴 때부터 소유욕이 제법 있었답니다? 제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어요.
“……그렇습니까. 몰랐던 사실이군요.”
-평소에는 욕심이 없다가도 한 번 자기 거라 정한 건 죽어도 내놓는 법이 없었답니다. 참참,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말이죠. 최근 지하도시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러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저 또한 황녀님께서 연락을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셰인의 말에 올리시아가 묘한 미소를 띄웠다.
현재 아룬비다의 토벌 이후, 아나스타샤와 더불어 올리시아의 주가는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실상 아룬비다의 맹주인 아나스타샤보다도 더 그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봐도 좋았다.
정치에 영 관심이 없어 최소한으로 활동하는 아나스타샤와 다르게, 올리시아는 지난 2년 동안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선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는, 지금도 셰인에게 시험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황녀가 직접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소문에 관해 듣게 된 건 보다 전이에요. 다만, 오라버니 쪽에서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탓에 저로서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어찌 보면 너무 새뮤얼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싶겠지만, 셰인은 올리시아가 현명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살리에르의 거래 장부는 현 시점에서 새뮤얼에게 있어 가장 민감한 약점이었으니.
그럴 때 섣불리 나서는 것보다는 추후를 위해 정보만 얻어 두는 것이 올리시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이었으리라.
“황실 측에 이렇다 할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런 셰인의 물음에 올리시아가 비로소 제대로 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번에는 자신이 한 발 앞섰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들개’가 움직일 것 같아요.
“들개라…….”
-어머, 혹시 알고 계셨나요?
“들개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들이 움직이는 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올리시아의 정보력이 앞섰다.
들개는 새뮤얼이 살리에르 백작만큼이나 세밀하게 관리 중인 사냥개들이다.
저지먼트 기사단이 명분을 앞세워 움직인다면, 그들은 음지에서 활동한다.
정치적 방해물을 정리하거나,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새뮤얼이 철저히 숨겨 둔 병력.
‘본래라면 1년 뒤에나 움직일 녀석들이 벌써부터 활동을 시작했군. 그만큼 황태자도 급해졌다는 말이겠지.’
그리 생각한 셰인이 이어서 말했다.
“만족스럽군요. 알겠습니다.”
-충분한 거래라 생각해도 될까요?
“예. 나중에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확실히 제법 괜찮은 정보를 얻은 만큼, 셰인은 가면을 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아참, 그리고 한 가지 허락을 맡고 싶은 일이 있어요.
“허락, 말입니까?”
일어서던 자세 그대로 멈춘 셰인이 되물었다. 제국의 황녀가 허락을 맡아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던 셰인은 이내 두 눈을 감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셰인의 허락을 맡을 만한 사안이었다.
“예. 상세한 계획 내용과 함께 보내 주십시오.”
올리시아와의 대화를 끝으로, 셰인은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할 채비를 갖췄다.
뜨거운 감자에 불과한 소문에, 불을 지필 시간이 찾아왔다.
* * *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하도시에 퍼지고 있던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와 관련된 소문은 이제 더욱 덩치를 불려 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이쯤에서 별다른 소식이 없는 한 서서히 줄어들어야 했으나, 그런 기색 없이 소문은 점차 덩치를 키워만 갔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거래 장부가 경매장에 올라오리라는 소문보다는 이를 활용해 누군가 이득을 보려 한다는 음모성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에 애덤이 셰인에게 의문을 표했으나, 오히려 셰인은 주제와 다른 소문을 더 키우라고 명령했다.
“준비해야 할 게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도록 부채질만 하도 충분해.”
“음…… 알겠습니다.”
때문에 황실에서는 이전과 다르게 오히려 소문을 가라앉히고 싶어 했으나, 애덤의 활약으로 더욱 음모성 추측이 가득해지는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지하도시와는 달리, 지상에서는 거래 장부와 관련된 소문은 아는 사람이나 알 법한 내용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어느 날 일어난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평소처럼 조용한 아침.
디라일라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기를 맞이해 커피와 부드러운 빵과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아카데미 졸업 후. 지난 2년 동안 바쁘게 움직인 만큼, 디라일라도 상당한 돈을 모아서 이제는 혼자 그럭저럭 지낼 만한 원룸을 구할 수 있었다.
“아, 청소를 한번 싹 해야겠네.”
하지만 바쁜 나날을 보내 온 탓에 기껏 전세로 뽑은 집에 먼지가 제법 쌓여 있었다.
해서 차분한 아침 식사만 끝내고 오랜만에 집안 청소를 해 볼까 싶던 그때.
“푸흡?!”
그러한 마음으로 신문을 펼친 디라일라는 신문의 절반 이상을 채운 대문짝만 한 사진을 보고 마시던 커피를 뿜고 말았다.
“뭐뭐, 뭐야?!”
어째서 지금 상황에 데자뷔를 느끼는 걸까.
[특종! 2년 전에 등장했던 귀족 살해자. 또다시 출몰했나?]
[하루 사이에 죽은 두 명의 귀족들! 귀족 살해자의 목표는 이종족 노예의 자유?]
[속보! 현 의장 헤일로 마일드. 아직까지 사건을 조사 중. 섣부른 판단은 너무 이르다.]
“아니, 그동안 조용한가 했더니…….”
그간 잊고 지내던 가면의 사내를 떠올린 디라일라는 갑자기 활동하기 시작한 그의 모습을 보며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안락하기만 하던 이 원룸이 갑자기 감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쾅쾅쾅!
“힉.”
“안녕하세요! 디라일라 양! 매일속보에서 찾아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우리도시에서 온 기자입니다! 잠깐 인터뷰 가능하시겠습니까?!”
벌써부터 특종의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몰려왔다.
이제는 제법 인간 사회가 돌아가는 꼴을 파악한 디라일라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지금의 상황이 일단락되기를 기다렸다.
‘으아아! 이런 관심은 사양이라고!’
난데없는 기자들의 외침 속.
디라일라는 양쪽 귀를 막고 없는 척 두 눈을 꾹 감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이미 과거에 제국의 심문까지 받았던 몸이지 않나. 이제 와서 알 것도 없는데 왜 갑자기 찾아온단 말인가.
거기에 귀족 살해는 중죄 중의 중죄로 통하는 만큼 괜히 연류되었다가는 좋은 꼴을 못 본다.
‘집에 남아 있던 식량이 얼마나 있더라…….’
해서 자진 감금 생활을 각오하고 있을 무렵.
거짓말같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멈췄다.
“어?”
“제법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군.”
“어어어억?! 헙!”
“걱정 마라. 외부에 우리 목소리가 나갈 일은 없으니.”
의자에서 그대로 뒤집어 자빠진 디라일라가 황급히 두 손을 입에 가져다대는 것을 보며.
가면의 사내, 셰인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3화
93화 거래 장부 (3)
불길한 기운을 담고 있는 검은빛의 검들이 허공에 떠다니며 주변의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다.
이미 화려한 저택은 붉은 핏빛으로 가득했고, 그 참혹한 현장을 만들어 낸 것은 저 불길한 기운을 지닌 열 자루의 검이었다.
하나하나가 절정에 다다른 기사의 검술을 구사하는 저 악마의 검 앞에서 남은 기사들은 힘겨운 전투를 이어 나갔으나, 끝내 이겨 내지 못한 채 하나둘씩 쓰러져 나갔다.
그리고 그런 학살의 현장에서, 민무늬 가면을 쓴 존재가 무심한 발걸음을 옮겼다.
“너, 너는 도대체 뭐냐. 무엇을 원하길래 이, 이런 짓을……!”
“…….”
“도, 돈이냐? 아니면 이종족? 가져갈 테면 다 가져가라. 그러니 제발 목숨만큼은……!”
가면의 존재, 셰인은 마치 한 번 본 연극을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런 귀족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 무심함에 귀족은 순간 살아남은 줄 알았으나, 이내 가슴으로부터 화끈한 통증이 느껴져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에는 여태 자신의 사병과 기사들을 학살하던 검이 꽂혀 있었다.
“크, 크륵…….”
아무런 말도, 설명도 없이 그저 갈 길만을 걷는 저 존재가 마냥 두렵기만 하면서도, 이제 그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잠시.
“주인님. 먹어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희미해지는 의식 속, 뒤에서 들려오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 귀족은 더없이 불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
“으헥!”
셰인이 만든 어둠의 공간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던 디라일라는 지하실에 도착하고서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으으…… 다신 겪고 싶지 않아.”
원체 대지로부터 기억을 읽는 재주가 뛰어난 디라일라는 셰인의 그림자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에 지속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느낌을 겪었다.
이는 셰인이 숨긴다 해도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그런데 여긴 어디예요?”
“어느 귀족의 저택이다. 2년 전까지 활발하게 이종족 노예를 사들이고 있던 놈이지.”
“아, 아니 그런 곳에 저는 왜…….”
“네가 왜 도와야 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하지 않았나?”
“아니이…… 그게 이런 곳에 데려와 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에…….”
생명의 은인이니 이치에 맞다면 응당 가면의 존재에게 협력할 의지가 있던 디라일라였지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아야만 했다.
해서 자신의 집에 찾아온 가면의 존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며 물었고, 그 결과가 지금에 다다른 것이다.
“너라면 읽을 수 있겠지. 이 공간에 깃든 기억을.”
“으…….”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2년 전, 살리에르 백작에게 납치를 당했을 당시 그곳 지하실에서 겪었던 기억들은 디라일라에게 크나큰 충격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이로서, 현실을 바로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이제 제법 힘도 좀 있고. 끗발도 있으니까 도움이 좀 되지 않으려나.’
나름 2년 동안 다양한 모험을 해 오며 명성을 알려오지 않았던가.
만약 이러한 형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면 무언가 효과가 있지 않을까.
‘아니, 안 되겠구나.’
생각해 보니 이제 좀 끗발이 있다 한들, 제국의 황제조차 법으로 금지시킨 일을 버젓이 하고 있는 자들이지 않나.
디라일라는 그런 자그마한 희망을 일찍이 지워 버렸다.
“흐으윽…….”
대신 눈앞의 존재에게 자신의 도움으로 이런 놈들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울 의사가 있던 디라일라는, 천천히 이곳 저택에 얽힌 다양한 기억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중에서 가장 음습하고, 암울하며, 두려운 기억들.
모두 그 결말이 좋지 못했다.
디라일라는 구토감을 간신히 참으며─
“구웨엑!”
끝내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게워 냈다.
대지에 얽힌 기억들은 하나같이 절망과 공포, 혼란, 짙은 슬픔, 세상에 대한 증오 따위로 가득했다.
마치 정신이 오염되는 듯한 기분,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는 그 감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셰인이 그런 디라일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단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 낸 광경은 어떠했나.”
“어떻긴 씨발…… 좆같은 새끼, 잘 뒤졌다 싶죠. 썅…….”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긴 채 죽어 있는 귀족의 시체를 바라보는 디라일라의 표정이 절로 사나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대륙 곳곳에 생겨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어……? 그, 그건 힘들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나름 이제 세상을 겪어 봤다 말할 수 있는 디라일라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렇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디라일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
디라일라는 이런 기억이 한없이 펼쳐지는 세상을 떠올리자마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그런 세상에서 한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그런 이야기는 갑자기 왜 하는 건데요……?”
“현재 그걸 실현시키려는 놈들이 있다. 지금 하는 일은 그걸 색출하는 작업이고.”
“음…… 그런데 이렇게 막 죽여도 될까요? 벌써 3명 짼데…….”
디라일라의 걱정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죽은 귀족들도 켕기는 게 있기에 연합국 측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긴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연합국에서 자발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실제로 이미 그런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는 상황이다.
“걱정 마라.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니.”
“다른 계획도 있어요?”
“애초에 지금 하는 건 검증이었다. 이젠 거래 상대에게 찾아갈 차례지.”
“거래 상대라면…….’
“지하도시의 개장수. 놈에게 갈 예정이다.”
“개장수……?”
디라일라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셰인은 그런 그녀에게 이어서 말했다.
“네가 할 건 거기까지 길을 안내하는 것 정도다.”
“어…… 저는 그 개장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요.”
“가 보면 알게 될 거다.”
“음…… 알겠습니다.”
뭐가 됐든 나쁜 놈들 혼내 주겠다는데 빠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어둠 속에 녹아들어 다시금 모습을 감췄다.
* * *
통칭 개장수.
5층의 포 패밀리 중 암시장과 경매장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여기저기 퍼져 있는 신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3명째로군.”
어두운 방 안. 희미한 마력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이 골동품으로 가득한 방 내부를 비추었다.
“음~ 그러게 말이야. 누군진 몰라도 아주 섹시하게 일을 벌이고 있네?”
그런 개장수의 말에 호응한 인물은 마약과 도핑, 그리고 윤락가를 운영하는 포 패밀리의 일원 ‘미스 슈’였다.
“목적이 뭐길래 저러는 것 같아?”
미스 슈의 물음에 개장수가 피식 웃었다.
“뭘 알면서 물어. 분명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겠지.”
현재 외부에서 귀족 살해자라 불리는 존재는 연합국 사회에서도 커다란 이슈로 자리 잡고 있었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귀족 살해자와 피해자인 귀족을 욕했는데, 법으로 금지된 이종족 노예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조사 결과 인간 노예도 적잖이 있었던 터라 더더욱 여론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는 상황.
그러나 둘에겐 그런 상황 따윈 알 바 아니었다.
둘은 이게 귀족 살해자가 자신들에게 보내는 시그널이라는 것을 진즉에 눈치챘다.
“장부가 진짜라는 걸 보여 주고 있군.”
굳이 검증까지 갈 필요 없이, 자신이 직접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가 진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곧 접촉해 오려나?”
“글쎄. 조심성이 많은 놈이니 어떻게 접근해 올지 모르겠군.”
“어머, 조심성 많은 사람들 다 죽었나 봐? 밖에서 저렇게 귀족을 살해하고 다니는 인간인데.”
“지하도시에서 여론을 조작하는 능력만 봐도 알 법하잖아. 놈은 철저해.”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그러면서 미스 슈는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 다리를 꼬았다.
“그럼 이후를 기대할게~ 그래도 우린 쌍둥이 남매잖아? 같이 해먹자고.”
“약쟁이들이나 잘 관리해라. 다른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우리가 알아챘으니 그것들도 눈치를 챘을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그럼 난 간다? 얘들아, 가자~”
그 말을 끝으로 미스 슈는 자신의 의자를 받치고 있던 노예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개장수는 그런 미스 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남매라고 해서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 특히, 나 몰래 다른 일을 꾸미고 있으면 더더욱. 안 그런가? 귀족 살해자.”
“…….”
골동품이 한가득 쌓여 있는 공간에서 민무늬 가면을 쓴 존재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던 것인지 의자에 앉아 그런 개장수를 바라봤다.
“제법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군. 취미가 아주 고상해.”
지하 5층.
개장수의 저택에 도착한 셰인이 그리 말하자, 개장수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금화가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버려 둔 물건들이지. 보는 눈이 없다면 사서 손해를 보는 법이야.”
“그럼 그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이지?”
“글쎄…….”
개장수는 가면의 존재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봤다.
수십 년 전.
어렸던 자신과 쌍둥이 동생이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봐 왔던 수많은 인간 군상들 중에서 이만한 작자는 보기 쉽지 않았다.
“적어도 네가 깔고 앉은 골동품들보다야 위험해 보이긴 하는군. 함부로 먹었다간 배탈이 나겠어.”
“그런가.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군.”
“이봐,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고. 이 지하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어디 무식한 힘 하나만으로 될까. 먹을 거 아닐 거 구분할 줄 알아야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이지.”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보이지?”
가면의 존재, 셰인은 제법 손때가 탄 두꺼운 서류 더미를 보였다.
“흐흐, 그거 아주 독이 그득그득 들어 있는 물건처럼 보이는군.”
“…….”
“하지만, 독극물도 쓰기 나름이겠지…… 동생에게 들어 보니 독도 약재로 쓰인다더군.”
“쓰기 나름이라는 거지.”
“거래 방법은?”
“낙찰이 되면 방범용 인챈트를 풀어 주도록 하지. 날짜는 다음 주 경매부터.”
“좋아, 좋아. 이야기가 아주 빠르게 진행되는군. 이런 건 좋아하는 편이지. 알았다.”
“미리 말해 두건대…… 괜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방금 말했잖나. 독도 약재로 쓰인다고. 무식하게 혼자 처먹을 생각은 없어.”
개장수가 어깨를 으쓱이고, 셰인은 한쪽에 거래 장부를 두고 사라졌다.
“갔군…… 흐음.”
셰인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개장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래 장부를 확인했다.
자신의 손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굉장히 시끄러울 것이라 생각했던 물건이, 상상 이상으로 쉽게 들어왔다.
이곳 5층은 제국에서도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할 정도로 방비를 자랑하고 있지 않나.
모든 패밀리가 그렇겠지만, 경매를 담당하는 개장수는 특히 방비에 힘을 줬다.
단순히 경비를 세운다거나 함정을 설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대에 존재했던 드워프의 설계도를 일부 차용한 복도도 있었다.
개장수가 방비해 둔 이 복도는 적어도 그가 만든 이후 무단으로 통과한 인물은 없었는데.
셰인이 최초로 그곳을 통과한 것이다.
“위험하군. 위험해…….”
상대가 자신에게 적의가 없어서 망정이었지, 만약 그게 아니었더라면…….
설마하니 대지를 다스리는 지하인이, 그것도 앞서 드워프의 전초 기지 던전을 클리어한 존재가 셰인의 곁에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한 개장수는 그리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만에 흘려 본 건지 모를 식은땀을 뒤로한 채, 그는 거래 장부를 따로 보관하며 이어질 경매의 보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한편, 애덤이 만들어 둔 근거지에 돌아온 셰인은 디라일라를 클레이튼 가문으로 보냈다.
한참 귀족 살해자의 존재로 인해 어수선한 상황에 괜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보다, 차라리 가문에서 보호하는 게 맞다 판단했고, 디라일라 또한 수긍했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그래. 개장수에게 물건은 맡겨 놨다.”
“후우…… 가장 큰일은 해결됐군요.”
애덤이 한 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애덤도 이번 일에 적잖은 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 지하도시에서 포 패밀리의 정보망에 걸리지 않고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지.”
“……드디어.”
“그래. 하이엘 왕국의 2왕자에게 연락을 취해라.”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4화
94화 지하 경매장 (1)
하이엘 왕국은 최근 호황의 나날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본래부터 연합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였던만큼 교역이 활발했고, 최근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하지 않았던가.
메자이아 대수림과 국경이 맞닿은 하이엘 왕국의 변방은 덕분에 최고의 격변을 지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무사태평한 나날을 걱정하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하이엘 왕국의 세 왕자였다.
“아버님이 날이 갈수록 건강해지는군.”
그들 중 맏형인 올리버 드 헬리손이 그리 말하자 셋째인 아르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도 최근에는 휘어잡으신 모양이야. 전혀 빈틈이 없어.”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건지…….”
왕권이 강화되고 있는 소리는 그야 왕자들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어찌 됐든 선대가 귀족들을 휘어잡은 상태에서 왕좌를 물려준다면 그 덕을 보는 이들은 다름 아닌 왕자들이었으니.
그러나 문제는 왕자들의 나이가 30대를 바라보고 있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시기였고, 실제로도 2년 전에는 왕자들끼리 왕위 쟁탈전을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건강해지는 것을 넘어 젋어지기까지 했으니.
그 시점에서 국왕은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멈추고 다시금 왕권을 잡았다.
그런지도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흐른 상태이니.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왕자들은 조바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메이슨. 넌 어때?”
첫째 왕자가 묻자, 둘째 왕자인 메이슨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뒤늦게 반응하며 입을 열었다.
“음, 글쎄. 형들이랑 별다를 건 없지. 나도 간신히 내 사람을 붙잡고 있는 중이니까.”
현 국왕이 왕위 쟁탈전을 철회하기 전까지는 세 사람 모두 다양한 귀족들을 포섭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국왕의 힘이 강해지자 몇몇 귀족들은 다시금 그의 밑으로 들어갔고, 남아 있는 왕자들의 불만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쯧. 답답하군.”
차라리 국왕이 무언가 문제라도 일으킨다면 이를 문제 삼을 수 있겠으나, 현재 하이엘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의 시기를 걷고 있었다.
때문에 왕자들은 그저 이렇듯 모여 한탄을 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둘째 왕자 메이슨이 먼저 일어났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봐야 아버지 심기만 거스를 거야. 난 먼저 일어날게.”
“후. 너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일단은 해산하자.”
“알았어.”
메이슨의 말처럼 당장 아버지의 눈에 찍히고 싶은 사람은 없었기에, 첫째 왕자의 말대로 세 사람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 방으로 돌아온 메이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덤 기사단장님. 정말 살아 계셨군요.”
“이젠 기사단장이 아닙니다, 왕자님.”
2년 전과 다르게, 눈이 훨씬 깊어진 왕실의 충실한 기사가, 왕자의 방에 앉아 있었다.
* * *
메자이아 대수림 사건 이후로 조직과 관련된 미래의 지식은 꽤 많은 부분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득을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었다.
인류 멸망 당시에는 많은 인간 군상을 볼 수 있었다.
끝없이 몰려오는 조직의 군단 앞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본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으니.
그중에서 셰인이 눈여겨본 사람 중 하나는 하이엘 왕국의 2왕자, 올리버 드 메이슨이었다.
딱히 메이슨 왕자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은 아니다.
다만 잦은 테러와 제국과의 전쟁, 그리하여 황폐화된 왕국을 마지막까지 지킨 단 하나뿐인 왕자였을 뿐.
그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과 함께 조직의 군대에 맞서 용맹히 싸우다 전사했고, 셰인은 그 기억을 토대로 2왕자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시간대에서 알아본 2왕자도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에 따라 2왕자에게 접근한 애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에 대해 조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상하다고 느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메이슨은 2년 전,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복귀한 애덤의 사망 소식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애덤이 막 왕실에 기사로 임명됐을 당시, 메이슨의 호위 기사로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막 복귀했을 당시에도 메이슨과 잦은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그렇게 급사하기에는 너무 건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병사를 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하여 메이슨은 독자적으로 애덤 사망에 관해 수사를 해 봤으나.
어느 날.
자신이 정보를 알아 오라 시켰던 수하가 방문 앞 나무 상자에 머리만 남겨져서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이 일의 위험성을 깨달은 메이슨은 그에 관한 수사를 포기했었다.
하나 며칠 전, 과거 긴급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었던 애덤의 수신호가 적인 편지가 메이슨 왕자의 방에 도착해 있었다.
“왕자님의 걱정대로 저는 암살 시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죽을 뻔했지요.”
그러면서 애덤은 자신의 가슴팍을 열며 당시 정보 단체 수장의 단검에 찔렸던 흔적을 보였다.
몇 번이고 찔린 것에 더해 독까지 묻어 있던 터라, 엘프들의 세계수에서 치료를 받았음에도 흉터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왕자님께서 수하의 수급을 받으신 것처럼, 저도 알면 안 되는 진실에 다가가려 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애덤은 당시 자신이 겪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메자이아 대수림를 탐사하던 당시 내부 상황을 알리기 위해 제국의 기사단과 자신의 기사단원 몇 명을 섞어 밖으로 보내려 시도했다는 것.
엘프 여왕이 확실하게 나갔다는 증언과 다르게 왕실에서는 어느 누구도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말.
그리고 그에 관해 수사를 하던 도중 왕실 내부에서 암살 시도를 받았다는 것까지.
“그렇다면 역시 아버지가 그런 겁니까?”
“예. 현재 국왕은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전 흑마법사의 수장, 고든이 속해 있는 무명이라는 단체와 결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무명이라…….”
하지만 그렇다 한들 메이슨 왕자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명이라는 단체와 결탁했다는 것과 별개로 왕국은 무사태평하지 않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애덤의 말에 메이슨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현재 제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 따로 지하도시를 수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은 의심하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전국적으로 테러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전혀 상상도 못한 소식 때문이었다.
* * *
“테러…… 말입니까?!”
며칠 전.
애덤은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현재 하이엘 왕국의 국왕이 뭐가 아쉽다고 테러를 일으킨단 말인가?
현재 하이엘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호황의 시기를 달리고 있을 때가 아니던가.
“아마 그게 조직에서 국왕에게 내건 조건이었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테러라니요. 자칫 잘못했다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이엘의 국왕이 젊음에 미쳤다고는 해도, 전쟁까지 일으킬 위인은 아니다.
적어도 애덤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셰인은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알았으나, 굳이 애덤의 편견을 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이엘의 국왕은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을 테니.
“거기까지 가진 않을 거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아직 조직이 바라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바라는 순간…… 말입니까.”
“그래.”
조직은 자신들이 그리고 있는 완벽한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먼저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아직 내부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놈들이다.’
현재까지 조직은 인간 정보원을 많이 쓰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 시대가 인류에 의해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지, 결코 인간을 위해 쓰이는 게 아니다.
훗날 전쟁이 일어나면 아카샤의 대봉인에서 뛰쳐나온 이종족과 몬스터가 조직의 가장 큰 무력을 차지하게 될 테니.
‘그때까지 놈들은 일을 그르칠 생각이 없을 거다.’
지금의 시기라면 아직 내부 정리가 끝나지 않았을 시점이니…….
‘그렇다면 지금은 그 밑 작업이라 봐도 좋겠지.’
이종족을 끌어들여 테러를 일삼도록 만들고, 인류 전체에게 이종족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주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
하이엘의 국왕이 이종족 노예를 끌어들이는 이유 또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하이엘의 2왕자에게 준비를 해 두라고 일러 둬라. 그나마 그자의 밑에 있는 이들이 충직한 편이니.”
결국 이와 관련된 일을 전부 끝마치기 위해서는 지하 경매가 진행되어야만 한다.
테러가 일어나든, 뭐가 일어나든.
어찌 됐든 간에 지하 경매가 시작되어 4층과 5층의 정보를 얻어야만 했으니.
* * *
지하도시의 정보상은 대부분이 점조직 형태로 이어진다.
거기다 조심성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끄나풀을 잡아서 기억을 읽는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아래서부터 죽여 가며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둠의 정령…… 검둥이에서 아나스타샤의 극구 반대로 ‘아르카네’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받은 그녀의 물음에 셰인이 답했다.
“말했잖나. 조심성이 많다고. 아랫것들이 하나둘씩 죽기 시작하면 아예 자취를 감춰 버릴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셰인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한들 이번 일을 벌인 주동자에 다다르기도 전에 놈들이 숨어 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한편 아르카네는 딱히 그 사실이 궁금했다기보단 영혼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받게 되는 오리진이 없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한편, 옆에서는 또 다른 소녀가 셰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
“왜 그러지, 에블린.”
밤하늘의 달처럼 은은하면서도 찬란한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한 채 셰인을 바라봤다.
“배고파요.”
“먹보. 항상 주인님께 할 말이 배고프다는 말 밖에 없어?”
“그래도 배고픈데.”
흡혈귀.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이 소녀에게도 이름을 지어 줄 때, 아나스타샤에게 드문 힐난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대…… 동물을 제외한 다른 무언가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말도록. 이토록 아름다운 소녀에게 흡혈이가 가당키나 한 이름인가!’
나름 2년 동안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힘을 조절하는 방법까지 배운 에블린은 이젠 비교적 대화를 나눌 수준은 됐다.
물론, 수백 년 동안 고통 이외에 맛본 것이 없는 만큼 자신의 의지를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긴 했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곧 식사할 시간이 찾아올 테니.”
“주인님 거 마시면 안 돼요?”
“가끔은 외식도 해 봐야지.”
“다른 피는 맛없던데…….”
“주인님이 하시는 말씀에 토 달지 마. 흡혈귀.”
“응. 알았어.”
말은 저렇게 해도 항상 같은 일을 반복하는 에블린이기에, 아르카네는 못 미덥다는 눈치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편 에블린 또한 아르카네가 자신 못지않은 먹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녀가 하는 말은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편이었다.
그렇게 둘이 투닥거리고, 셰인은 이를 지켜보며 갈 길을 걸었다.
언뜻 보면 아름다운 두 소녀가 투닥거리며 길을 걷는 평화로운 풍경처럼 보일지 모르나…….
지하도시에서 그런 시선을 받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독특한 외모를 한 두 여자와 가면남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에서 시선을 한가득 받은 셋은 이내 4층으로 향했다.
4층엔 셰인만큼이나 시선이 끌리는 존재들이 여럿 있었다.
셰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가면이나 로브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많은 경호를 거느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오늘이 바로, 지하 경매가 시작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5화
95화 지하 경매장 (2)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에 대한 소식이 조금씩 식어 가고 있을 무렵,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개장수는 자신이 거래 장부를 손에 넣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포 패밀리 전원을 모아 회의를 진행했다.
“하, 아닌 듯 보이면서 정작 이틀을 남겨 두고 회의를 진행하는군.”
그에 참여한 포 패밀리 중 금광은 통짜 금으로 만들어진 턱을 쓸어내리며 그리 말했다.
“아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좀 양해를 구하지. 이쪽도 좀 쫄려서 말이야.”
“천하의 개장수가?”
“이거 물건을 건네받은 루트가 좀 비이상적이어야지. 상대가 상대다 보니 나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걸 노리는 놈들도 그만큼 위험할 테고.”
“어머나. 우리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그리 조심스러웠는지 모르겠네?”
한편 개장수의 쌍둥이인 미스 슈도 거들자 개장수가 피식 웃었다.
“뭐야. 너희 둘. 언제부터 연애를 시작한 거야? 둘이 아주 짝짜꿍이 맞군그래.”
“그야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어때, 자기. 우리 오늘부터 1일?”
“지랄 말지? 내 고귀한 피는 너 따위가 받아 낼 게 아니다.”
“어머, 별꼴이야. 여자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정말.”
말하는 것과 다르게 미스 슈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곧장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물건은 확실히 받았다는 것 같고. 우리를 부른 것도 방어를 위해서지?”
“맞아. 내가 최근에 알아보니 이게 또…… 제국과 연관이 있단 말이지.”
“제국?”
“설명은 아까부터 입 다물고 있는 시궁쥐에게 들어 보지.”
그러자 아까부터 신문을 얼굴에 덮은 채 자고 있던 사내가 퍼뜩 일어났다.
“어, 엉? 누가 나 불렀냐?”
“그래, 너. 기껏 불러 놨더니 잠이나 처자는 네놈을 부른 거다.”
“어어, 뭔 일인데 이리 날카로우실까. 무슨 일인데?”
“이번 일에 제국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지 않았나?”
“어…… 그렇지?”
“그걸 자세히 말해 보라는 거다.”
시궁쥐는 여타 다른 패밀리의 리더들과 다르게 굉장히 꾀죄죄한 몰골을 한 채, 더벅머리 끝자락을 입으로 씹으며 입을 열었다.
“어이쿠. 아무리 그래도 우리 쥐새끼들이 피땀 흘려 가며 얻은 정보인데, 너무 막 풀라고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이미 충분한 정보를 풀었다고 보는데. 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싶나?”
“커흐흠. 그건 아니지. 그래도 오늘은 식당에서 밥 좀 먹고 싶은데…….”
“쯧.”
시궁쥐의 말에 보다 못한 금광이 대신 금화를 던졌다.
“어이쿠. 이거 감사합니다~!”
그제야 목을 가다듬으며 시궁쥐가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제국…… 황실이라…… 황실. 그래, 맞아. 황실에서 들개를 풀 거라고 하던데?”
“들개?”
“우리 개장수 아저씨 장사가 잘될 날인가 보구먼.”
“들개라는 게 정확히 뭐지?”
“정확히 말하자면 황실은 아니고, 황태자가 직접 키운 사냥개라던데…… 정확한 규모까지는 나도 모르겠구먼.”
“그렇다면 그 외에는?”
“별의별 잡다한 것들이 다 모이겠지 뭐…… 아니, 근데, 그전에 이 멤버부터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시궁쥐의 말에 다른 세 명이 인상을 썼다.
“우리를 좀도둑 취급하는군.”
“맞아~ 우리 중 하나가 박살 나면 어떤 꼴이 일어나는지, 이미 38년 전에 봤잖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로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지, 시궁쥐.”
“어이쿠야. 이거 반응들이 뜨겁구먼. 언제부터 우리끼리 이렇게 형제애가 넘쳤다고. 큼큼. 뭐, 아님 말고. 그보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 물건을 받게 된 루트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시궁쥐의 의문에 다른 둘도 개장수를 바라봤다.
확실히, 자기 몸 챙기는 거 하나만큼은 이 패밀리 중 가장 신중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이가 어떤 방법으로, 이들 셋 중 어느 누구도 모르게 물건을 전달받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객의 정보를 풀어서야 쓰나. 관심 갖지 말지?”
“오케이. 그렇다면야 뭐.”
애초에 그저 한번 찔러 본 것에 불과했던 시궁쥐도 알았다는 듯 관심을 끊었고, 다른 이들도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경매를 순조롭게 풀어낼지 고민해 보도록 하지.”
긴 사담 끝에서야, 그들은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회의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번 경매가 결코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 * *
지하도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두운 장소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다른 층이라면 몰라도 VIP 중 VIP만 들어올 수 있는 4층의 경우에는 천장을 전부 태양석이라 불리는 발광석으로 대낮처럼 밝은 거리를 유지한다.
거기에 지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함을 자랑하기에, 처음 이곳에 찾아온 이들은 개장수가 지어 둔 웅장한 성체에 넋을 놓기도 했다.
때문에 이곳이 개방되는 경매 날에는 무수히 많은 이들이 찾아오나, 오늘은 특히 더했다.
덕분에 성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하나같이 신분을 확인하느라 바빴고, 수많은 인파는 줄을 서 가며 경매장으로 들어가길 고대했다.
“진저리 치게 많구먼.”
“그러게. 특히 이번에는 경매품이 하나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쯧. 살리에르 백작인지 뭔지가 도대체 뭐길래 저러나.”
“이 멍청한 놈. 그 인간하고 연류된 귀족이 어디 한둘이겠어? 듣기로 이번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벌써부터 자수하는 양반들이 나오고 있다던데.”
“뭐? 아니, 누구 좆되라고 그 내용물을 사방팔방에 풀겠어? 아무리 그래도 자수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왜겠어. 최근에 지상에 귀족 살해자라는 놈 때문에 그렇겠지.”
“아아…… 그건 나도 소문으로 들었지.”
몇몇 경비병들의 그러한 수다는 이내 경비대장의 등장으로 끝맺음을 지었고, 그들은 삼엄한 경계 속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성 내부로 들어서면 화려한 장식과 함께, 마치 정말 귀족들의 연회라도 되는 것처럼 수많은 음식들이 기다란 테이블 위로 올라가며 찾아온 손님들의 입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손님들이 들어왔을까.
몇몇 연이 있는 손님들은 서로 뭉쳐서 앉기 시작했을 무렵, 화려한 연회장의 발광석이 꺼지기 시작하며 은은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도 이곳 프티크에 찾아오신 것에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경매사가 단상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각자 대화를 나누고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몰렸다.
잠시의 침묵 끝에 경매사가 과장스러운 몸짓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은 처음 뵌 분들도 참 많이 보이는군요. 그만큼 이번 경매에 올라올 물품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겠죠.”
그의 말처럼 오늘 처음 경매장에 찾아온 이들도 한쪽에 무리를 짓고 그런 경매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경매사 또한 수많은 손님들을 바라보며 가면 속에 숨겨진 그들의 표정을 읽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곳 4층의 지하 경매장에서 경매사를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눈치가 필요한 법이었다.
‘저쪽은 시궁쥐의 사람들인가? 그리고 방금 했던 말로 움찍거린 인간들은 장부에 적혀 있는 놈들이겠군.’
이번 경매에 가장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인물들이 바로 장부 속 등장인물들 아니겠는가.
이 또한 정보가 되기에, 경매사는 끊임없이 그러한 기록들을 머리에 욱여넣으며 숙련된 자세로 진행했다.
“그렇다면 거두절미하고, 이번 경매의 진행 방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대장에 적혀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이번 경매는 단 한 물품만을 가지고 진행됩니다.”
“또한, 시작 단가는 1,000골드부터입니다. 입찰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50골드 이상부터 진행이 가능합니다.”
“경매품은 인챈트가 적용되어 내용물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하여 입찰에 성공하신 이후 판매자가 직접 인챈트를 해제할 예정이오니, 이 점 참고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프티크에서 경매품을 보호해 주는 구간은 정확히 물품을 건네드린 순간부터이니, 판매 이후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점 또한 상기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손님들 간의 신경전이 이어지는 과정 중, 단상 위로 조명이 집중됐다.
“그럼 소개합니다. 화제의 물건, 살리에르 백작의 유품인 거래 장부입니다!”
집중된 조명 위로 유리 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는 거래 장부의 모습이 드러남과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파란빛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러자 거래 장부가 담긴 유리 케이스 위로 푸른빛이 흘러나오며 1,000으로 표시되던 숫자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완벽한 블라인드 경매를 위해 마련된 마법 장치였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숫자는 끊임없이 올라갔고, 조용한 클래식만이 흘러나오는 내부와 다르게 손님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눈치 싸움이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 * *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야 해!’
‘제발, 그게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만큼은!’
그중에서 가장 절박한 이들은 앞서 살리에르 백작과 거래를 했던 전적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한때의 욕망으로 인해 일을 저지른 과거의 자신을 백 번 천 번 저주하며 끊임없이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봤다.
이미 단가는 시작 금액의 1천 골드를 넘어 4천 골드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
살리에르 백작과 거래를 했던 귀족들은 새뮤얼 황태자의 도움으로 이렇듯 다 같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새뮤얼 황태자의 자금까지 더해진 지금, 돈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아무래도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 확신할 순 없었다.
동시에 과거의 자신들만큼이나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린 살리에르 백작에 대한 원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 멍청한 자식은 왜 장부 같은 걸 남겨서!’
‘그렇게 조심하더니 혼자 편히 뒤져 버렸구나!’
그 생각을 하는 짧은 사이에도 어느덧 금액은 6천 골드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작은 도시의 1년치 세금을 훨씬 넘긴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숫자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한편, 그런 귀족들과 다르게 제법 여유로운 표정으로 경매에 가담하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금광의 엘도라트의 수하, 엘리엇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그는 한쪽에서 치열하게 숫자판을 노려보고 있는 귀족무리를 보며 비소를 지었다.
필시 저 물건은 놈들이 생각하는 금액 그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얼마의 출혈이 있든 간에, 시간을 들여 저들을 상대로 뽑아낼 수 있는 돈은 훨씬 많을 테니까.
뿐만 아니라 저 물건은 양지로 올라가 자리를 잡게 해 줄 열쇠나 마찬가지다.
본래라면 이곳 지하도시에 저런 식으로 거래 장부가 등장하는 일도 극히 드물다.
애초에 장부는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소유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여는 순간 파괴되도록 만드는 게 기본이니까.
어느 정도 지하도시에서 거래를 해 온 이들이라면 모두가 했을 법한 행동이었으나, 살리에르 백작은 그 작업을 하는 것조차 혹여 황태자에게 걸릴까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사달이 일어난 것이지만, 엘리엇이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따르는 주인을 위해 저 물건을 앞에 내놓을 수만 있으면 됐으니.
적어도 부귀영화에 빠져 돈을 탕진해 온 저따위 귀족들보다,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지하도시의 금화가 훨씬 더 높게 쌓아져 있으리라.
엘리엇이 그렇게 저들에게 시선을 떼고 있는 사이에도 경매 금액은 계속해서 올라가 1만 골드를 찍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쯤 되자 가장 먼저 초조해진 것은 귀족 무리였다.
아직 여유 금액은 여전히 많았으나, 금액이 올라가는 속도가 전혀 줄어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경매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시작 금액이 너무 적었던 모양입니다. 이제부터는 호가를 500골드로 올리겠습니다!”
“이런 젠장! 10배나 올리는 게 말이나 돼?!”
그러자 곳곳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6화
96화 지하 경매장 (3)
가격을 올려 부를 때마다 500골드씩 상승하기 시작하자 절반이 넘는 인원이 입찰을 포기했다.
이어서 2만 골드까지 치솟았을 때는, 거기서 절반이 더 줄어들었고, 계속해서 5만 골드에 다다랐을 쯤엔 몇몇 인원들만이 참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미, 미친…….’
‘회수 가능한 금액이 맞기나 한 거야?’
‘아무리 저걸로 털어먹는다 해도 5만 골드까진 안 나올 것 같은데…….’
‘광기의 현장이로군.’
작은 도시라면 몇 년은 쓸 예산이 단 하나의 거래 장부에 의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한편, 장부에 이름이 실린 귀족들은 얼굴이 몇십 분 사이에 핼쑥해졌다.
‘어, 어쩔 거요?’
‘여기서 더 지른다고? 감당이 가능한 일이 맞소?’
‘세상에, 이제 6만 골드란 말이오!’
일찍이 귀족들은 자신들끼리 모은 돈은 모두 끌어다 쓴 상태고, 이제는 황태자의 지원금마저 손을 대고 있는 상황.
하지만 여전히 숫자가 올라가는 기세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귀족 무리와 다르게 여전히 입찰을 시도하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여유로웠고, 금세 가격은 8만 골드까지 올라 버렸다.
이제부터는 정말 치킨 게임이다.
귀족 무리도 황태자에게 큰 약점이 잡히게 된 마당에 황태자의 돈을 아낌없이 끌어다 쓸 것이고, 여타 다른 참가자들 또한 물러설 생각이 없었으니.
이윽고 10만 골드, 12만 골드, 그리고 15만 골드에 다다랐을 때부터는 귀족들 중 한 명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이 이상 돈을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미 귀족들끼리 모은 돈보다 황태자가 내야 할 금액이 더 늘어난 상황이다.
세상에.
15만 골드가 어디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대영지를 다루는 귀족이거나 대형 상단을 꾸리는 이들이 볼 법한 숫자이지 않나.
하는 거라고는 영지민들에게 세금을 걷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돈벌이가 없는 귀족들은 더 이상 글렀다고 판단했다.
‘여기까지 합시다.’
‘아, 아직이오! 이렇게 포기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이럴 때를 대비해 황태자께서 준비해 둔 게 있다고 하지 않았소!’
‘하, 하지만…….’
‘이제 16만 골드요! 우리가 나서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액이 계속 올라가고 있지 않소! 정말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보시오?’
‘크윽…….’
황태자가 준비해 둔 수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 두고 싶었다.
자칫 잘못해서 일이 어그러지기라도 했다간 일이 어찌 되겠는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올 게 뻔했다.
‘알겠소…….’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이 내몰릴 구석 같은 것은 없었다. 이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저 황태자의 플랜대로 일이 잘 돌아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귀족 무리가 입찰을 포기했든 아니든 경매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이제는 거의 20만 골드 단위로 넘어갔는데, 지켜보고 있는 이들조차 정말 저 거래 장부에 저만한 이점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렇게 23만 골드에 다다랐을 때가 되어서야 입찰 경쟁은 끝맺음을 맺었고, 경매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총 금액 23만 2천 골드로 49번님께서 입찰에 성공하셨습니다!”
이곳 지하도시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금액의 거래가가 나오자 몇몇은 탄성을 질렀고, 또 몇몇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그저 한 번 찔러나 보자 싶어서 온 이들이었기에 ‘아니면 말고’라는 표정이었고, 한탄을 한 자들은 대부분이 귀족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49번 팻말을 들고 있던 엘리엇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까지 자신과 경쟁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시궁쥐의 쌍둥이 여동생, 미스 슈의 수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경매는 포 패밀리 중 금광이 승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저걸 어떻게 들고 가느냐인데.’
아마 당장 문제가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경매장은 포 패밀리에 의해 삼엄한 경비가 진행 중이지 않은가.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굳이 지금 벌집을 건드릴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실상 포 패밀리의 수하쯤 된다면 여기서 가면을 쓴다 한들 소용이 없는 일이니.
엘리엇을 잘 기억해 뒀다가 대상이 물건을 받는 직후에 공격을 가해 올 터.
하지만, 세상이란 게 원래 사람의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가지 않던가.
“그럼 이번 입찰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이후 진행되는 만찬회에도 많은 참석 부탁드립…… 어?”
그때, 경매장 전체에 푸른빛의 마력 파티클이 흩뿌려졌다.
순간 무슨 상황인지 뒤늦게 파악한 경매사가 재빠르게 경비대를 부르는 호출기를 눌렀다.
동시에 경매사는 손님들을 안심시키려 했으나.
마력 파티클이 뿌려지는 여러 공간으로부터 텔레포트 마법의 포탈이 펼쳐졌다.
“어, 어떻게?!”
이곳 지하도시도 텔레포트 차단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푸른빛 입자가 뭉쳐 끝내 포탈이 완성되었다.
“꺄, 꺄아아악!”
“저게, 저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포탈에서 등장한 것은 새하얀 털과 긴 귀를 지닌 짐승. 토끼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토끼와는 다르게 그 크기가 하나같이 성인 남성과 비교될 정도로 거대했고, 또 동시에 기괴했다.
헝겊으로 만들어진 정장의 옷차림.
그러나 두 눈은 터질듯 부풀어 오른 상태였고, 이빨은 토끼가 아니라 사나운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나 있다.
그런 토끼 수십 마리가 포탈에서부터 꾸역꾸역 들어왔고.
이윽고 50여 마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울 무렵, 닫혀 가는 포탈에서 누군가가 물 흐르듯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포탈에서 나온 존재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화려한 파티장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서 찾아온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탈에서 나온 존재는 품위 있는 말투로 그리 말해 봤으나, 그 말을 듣고 안심하는 손님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그야, 저 존재 또한 토끼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몸은 사람처럼 보였으나, 머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토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토끼의 얼굴이 사람 말을 하는 기묘한 현상.
다른 토끼들보다는 인간의 형태에 가까운 그는 길쭉한 다리에 어울리는 세련된 정장, 그리고 허리춤에 달린 회중시계를 손에 들며 시간을 확인하듯 바라봤다.
“안타깝게도 초대장을 받지 못했기에, 이렇게 난입하게 되었군요. 부디 우리들에게도 이번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토끼 신사가 말은 정중하게 했으나 그의 수하로 보이는 토끼들은 이미 이곳저곳에 퍼진 연회장의 음식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에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쪽 구석으로 몰렸다.
그 작태를 지켜본 경매사가 사납게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는 것이냐!”
“이런. 정말 안 되겠습니까?”
토끼 신사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물어봤으나, 대답으로 돌아오는 것은 경매사의 거부가 아니라 연회장의 입구로부터 들려왔다.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발생했다. 전원 도핑을 마치고 놈들을 상대해!”
경매사의 호출기에 반응해 곧바로 난입해 온 경비대가 각자의 품에서 알약을 꺼내 들어 망설임 없이 먹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대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 상태로 각자의 무기를 든 경비대가 한참 테이블 위의 음식을 폭식 중인 토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우리 아이들은 좀 사나워서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그러나 토끼 신사의 걱정과 다르게, 경비대는 각자의 무기에 마력을 두른 채로 한참 포식 중에 있던 토끼들을 무참히 베어 나갔다.
검에 목이 베이고, 메이스에 머리가 깨져나가는 토끼들.
하지만 토끼들도 잠자코 당해 주기만 하지는 않았다.
먼저 공격이 들어온 이상, 토끼들도 토끼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들이대며 경비대에게 달려들었다.
경비대는 이런 마수와 전투를 치른 경험이 제법 있던 모양인지 쉽사리 당해 주지 않았으나, 전투의 양상은 그리 일방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끄아아악!!”
첫 번째 피해자가 나왔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토끼가 내장을 질질 끌며 경비병의 다리를 물어 버린 것이다.
턱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호구조차 씹어 삼키며 경비병의 다리가 뜯겨져 나갔다.
“조심해라! 놈들의 생명력이 비정상적이야!”
피해자가 연속해서 속출하자 경비대장이 그리 외쳤다.
바닥에 쓰러진 토끼들이 마치 좀비마냥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채 끝까지 들이대고 있다.
아니, 머리가 부서지고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지 않나.
저건 생명력이 끈질긴 게 아니라 죽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머리와 사지를 주로 공격해라! 놈들이 쓰러지고도 공격하지 못하게 막아!”
연이어 경비대장의 명령이 내려오자 경비병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그로테스크한 광기의 현장.
이를 지켜보던 손님들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몇몇 토끼들이 그런 손님들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가서 막아!!”
경매는 이미 망쳤으나, 손님이 다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이번 경매를 진행한 개장수의 이름이 추락할 테니까.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몇몇 경비병이 달려들었다.
“경매에 참여만 시켜 주셨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로군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토끼 신사는 손에 들린 회중시계의 끝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이, 이게 무슨!”
“이거 뭐 하는 놈들이야!!”
그 작은 행동은 전장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방금까지 피와 내장을 줄줄 흘리던 토끼 괴물들이,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기라도 하듯 원상복구가 되는 게 아닌가.
“저 새끼부터 잡아!”
그에 눈치 빠른 경비대장은 이 사건의 발단인 토끼 신사부터 노리라는 명령과 함께 자신도 토끼 신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토끼 신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의 품에서 아이 손바닥만 한 지팡이가 들려 나오더니, 어느새 성인이 집고 다닐만한 지팡이로 변모한 것이다.
토끼는 마치 펜싱을 하듯 자세를 잡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경비원을 나무랬다.
“명을 달리할 선택을 하셨군요.”
동시에 토끼 신사가 자세를 낮추는가 싶더니, 찰나의 순간 모습이 사라졌다.
“뭣.”
하지만 단순히 사라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달려들던 경비병 몇몇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헛!”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토끼 신사가 지팡이를 내보였다. 지팡이에는 방금 쓰러진 자들의 심장이 꼬챙이처럼 꿰여 있었다.
“무, 무슨.”
그 광경을 확인한 경비대장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또다시 토끼 신사가 전장을 지배하듯 돌아다녔다.
“젠장…… 보통 놈이 아니다. 중복 도핑을 해!”
결국 부작용을 각오하고 중복 도핑을 시도하라는 경비대장의 말에 지금도 꾸역꾸역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경비병들이 중복 도핑을 시도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비대하게 커진 그들의 근육이 보다 몸집을 키우며 전투의 양상을 바꿔 갔다.
검으로 그저 베는 것이 아니라 마력의 파동을 일으켜 공격당한 토끼의 신체를 분해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중복 도핑을 하지 않은 경비병들은 구석에서 아직까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손님들을 비상 탈출구로 안내했다.
그때.
콰아아아아앙─!!
외부로부터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끄아아아아악─!”
경비병들이 들어오던 통로로부터 비명이 들려왔다.
새로운 침입자들의 등장.
복도의 경비병을 뚫고 연회장에 찾아온 이들의 첫인상은 과연 인간이 맞기나 할까 싶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새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느껴지는 피부.
하나같이 털 한 가닥 남지 않은 머리와, 입마개를 쓴 채 등장한 그들은, 투명한 피부와 대조되게 경비병들의 피로 온몸을 흠뻑 적신 상태였다.
“이런…… 토끼들의 놀이터에 들개가 난입했군요.”
“백염……?!”
침입자들은 하나같이 양손에 하얗게 타오르는 오러를 검처럼 감싸 만든 상태로 서 있었다.
황태자의 들개가 귀족 무리의 호출에 의해 등장한 것이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가 되어 가는 풍경 속.
난장판인 아래층과 다르게 2층에서 이 상황을 직관하고 있던 민무늬 가면의 사내는 조용히 읊조렸다.
“개판이군.”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7화
97화 지하 경매장 (4)
셰인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1층의 연회장을 바라보며 비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고작 장부 하나로 인해, 고작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더 많은 피해가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새롭게 난입한 들개들은 과연 새뮤얼이 직접 키운 만큼의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백염은 현 인류 사회에서 가장 이기적인 능력이다.
맞닿는 상대의 마력은 즉시 흩트리면서, 정작 자신은 인류의 가장 무기 중 하나인 오러를 사용하니까.
불합리함의 극치일 수밖에 없었고, 마법사에게는 저승사자인 이유가 있었다.
셰인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렸다.
전생에도 들개의 존재는 있었으나, 애초에 황태자가 무너진 이유는 철혈의 정의, 아네이스 때문이었지 조직 때문이 아니었다.
해서, 들개의 정확한 전력을 모르고 있던 셰인에게 이번 전투는 그들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체적인 전투력은 저지먼트 기사단보다는 못하군.’
들개의 전투는 마치 짐승 같았다.
실제로 놈들에게 자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나하나가 눈빛에 진득한 살기만이 가득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현 시점에선 저지먼트 기사단과 비교하면 확실히 밀리는 추세다.
그럼에도 백염이라는 사기적인 성능의 오러와, 저렇듯 비교적 양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새뮤얼은 이미 상당한 고점을 매겨 뒀을 터.
실제로 셰인이 보기에도 활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하지만 애초에 저지먼트 기사단의 순수 전투력도 셰인의 눈에 차지 않는 마당이니, 딱 그 수준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던 셰인으로서는 비웃음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과연 놈들은 알까.
지금 저 현장 자체가 더 이상 벗어나오지 못하는 거미줄과 같다는 것을.
몸부림치면 칠수록, 거미줄은 놈들의 목을 더더욱 죄어 나갈 터.
그러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셰인의 비소는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한편, 이 상황을 전혀 웃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금광 패밀리의 엘리엇이었다.
* * *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냐.’
입찰에 성공한 엘리엇은 저 거래 장부를 자신의 주인에게 가지고 돌아갈 의무가 있었으나, 도저히 그럴 틈이 보이지가 않았다.
목표인 거래 장부는 전장의 한가운데 있는 상황이었고, 더불어 개장수가 특별히 마련한 보안 케이스에 들어가 있어 몰래 빼내는 것조차 쉽지가 않은 상황이다.
‘저게 황실의 들개들이라고?’
거기에, 새롭게 개입하기 시작한 들개의 출현은 엘리엇의 심경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반마력 파장.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마력의 흐름을 흩트리는 저 힘은 분명 저지먼트 기사단만의 특권일 텐데, 어째서 저들이 쓰고 있는 걸까.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콰아아앙─!
그런데 그때, 또다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아까도 복도 방향에서 들려오던 소리였는데, 성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하자 몇몇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천장을 비추던 샹들리에가 흔들거리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추락해 그 파편이 사방에 튕겨져 나가고, 또다시 폭발음이 들려왔다.
“밖에 있는 경비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내부에 침입자들이 발생했다지만 외부를 지키는 인력도 있을 터인데 계속해서 이런 폭발음이 들린다.
포 패밀리가 동시에 지키는 만큼 병력이 적은 것은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말이 되질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만큼 대대적인 공격이 들어오고 있지 않나.
저만한 폭발을 일으킬 정도의 폭발물이나 마법이 정보망에 걸리지 않을 이유가 없음에도, 이런 상태라면…….
‘설마.’
그리 좋지 않은 상상이 떠오르기 직전, 다시 한번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며 천장이 무너지는 것을 시작으로 엘리엇의 시야가 차단됐다.
* * *
“쿨럭!”
먼지 구덩이 틈에서 살아남은 엘리엇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폭발은 연회장을 무너뜨리는 것에만 집중했는지, 살상력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다.
“으윽…….”
“젠장,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또한 지하도시의 4층까지 올 수 있는 VIP들이 모래처럼 많은 곳이지 않나.
물론 모래라고 하기엔 과장이 좀 심했으나, 적어도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자기 몸 하나 지킬 정도의 재력은 충분했다.
하나같이 자신을 보호해 줄 방어 마법 인챈트 스크롤이나, 혹은 스스로 그럴만한 실력자들은 무사히 폭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개장수가 고생 좀 하겠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님들 입장에 이만큼 화가 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기껏 VIP라고 대접해 놓고 이러한 상황이 일어났으니.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 개장수가 고생할 게 훤하리라.
‘이럴 게 아니지.’
금세 정신을 차린 엘리엇은 자신의 원래 목표를 떠올렸다.
살리에르 백작의 거래 장부.
본능적으로 장부가 위치했던 자리로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그 주변으로는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괴물 같은 놈들…….”
경비대는 도핑 효과와 더불어 포 패밀리의 지원으로 받은 장비 탓에 큰 피해는 없어 보였다.
이전에 부상을 입은 이들이야 죽음을 면치 못하겠으나, 아직 건재한 이들은 이 상황에서도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토끼 신사 또한 멀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니, 멀쩡할 뿐 아니라 깔끔한 정장에 먼지 한 톨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반대로 들개는 제법 부상이 많은 듯 보였다.
백염이 마력을 쓰는 상대에 한해서는 무적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나, 그 외의 물리력에는 평범하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천장의 돌무더기를 완전히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던 모양인지, 여기저기 깔려 죽은 들개들이 여럿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가…….’
뿐만 아니라 토끼들도 깔린 상태에서 신체를 복구하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모양인지, 아직 돌무더기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홀로 남은 토끼 신사 또한, 발을 디딜 곳이 불안정한 지금, 이전만큼 날뛰지는 않고 있었고.
반대로 경비대는 아직 전력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물건을 건네받기에는 썩 괜찮은 상태처럼 보였다.
‘일단 물건부터…….’
그렇게 엘리엇은 소싯적 암살자로 활동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기척을 죽인 채로 거래 장부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더……. 바로 지금!’
쏜살같이 장부를 향해 달려들던 그 순간.
그 경로 밑, 돌무더기에서 손이 튀어나오며 그런 엘리엇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뭣!”
“순서를 어기면 곤란하지요.”
“너!”
돌무더기에서 튀어나온 이는 엘리엇에게 익숙한 존재였다.
“1호, 감히 지금 내 앞을 막아선 거냐?”
“감히라 할 게 뭐 있겠습니까. 피차 노리는 목표물도 같은 마당에. 흐.”
1호. 미스 슈의 수하.
토끼 신사가 난입하기 전, 경매장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엘리엇과 경쟁했던 미스 슈의 수하였다.
“네놈, 개장수를 배신할 생각인가?”
“이 바닥에 배신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자식새끼도 시장에 팔아먹는 세상인데.”
“개자식들이…….”
“그건 저기 있는 들개 놈들에게나 할 말이고. 아무튼 이건 내가 챙겨 가겠수다.”
그러면서 1호는 여유로운 태도로 거래 장부를 향해 걸어갔다.
“누구 마음대로!”
그에 격분한 엘리엇이 휴대용 라이터를 양 주먹에 쥐고 달려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라이터처럼 보이나, 실상은 마도구인 그 장비에 마력을 부여하자 금세 엘리엇의 주먹을 감싼 건틀릿으로 변형되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런 1호에게 미처 다가가지 못했다.
“경비대장! 설마 네놈도?”
“뭐, 그렇게 됐습니다.”
경비대 중 일부가 엘리엇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경비대장은 엘리엇 또한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에, 그는 몇 걸음 물러섰다.
“네놈들……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 것 같으냐?”
“어쩌겠습니까. 이쪽도 둘이 붙은 상황인데.”
“……둘?”
그제야 엘리엇은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쥐새끼랑 창녀가 붙었군.”
“역시 눈치 하나는 백단이시라니까.”
뒤에서 거래 장부를 팔랑거리는 1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그래도 끗발은 이쪽이 더 있지 않겠어? 그쪽처럼 패배자들끼리 뭉쳐 있는 곳보다야, 용의 꼬리만도 못하는 것보다 뱀의 머리가 낫지 않겠냐고.”
패배자. 용의 꼬리만도 못한 존재.
이는 금광, 엘도라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뱀의 꼬리라는 건…… 그렇다면 이 폭발 사건도 저 새끼들이 만들어 낸 거라는 거고.’
그 많은 수의 경비대의 수색을 피하고 연회장을, 더 나아가 개장수의 성을 일부 무너뜨릴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으니 이건 가져가겠수다. 슬슬 다른 날파리도 꼬일 것 같으니.”
“그렇게 둘 것 같으냐!”
비록 엘리엇 혼자 저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힘들겠으나, 그렇다고 시간을 끌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저쪽은 지켜야 할 게 있지 않나.
당장 파괴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놈들도 저게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참 거치적거린다니까.”
그에 1호도 롱 나이프를, 경비대장 또한 무기를 쥐고 오러를 피워 올리던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흐릿한 검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장미……?”
그것은, 검은 장미의 꽃잎이었다.
그런 꽃잎이 하늘에서 수백 장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게 뭔…….”
그에 경비대장의 밑에 있던 수하 중 하나가 무심코 꽃잎을 만졌다.
그 순간.
“엇.”
단순한 꽃잎이 아니었던 걸까.
꽃잎의 끝자락에 손가락을 베인 경비병이 따끔한 감각에 손을 뺀 직후.
“어어?”
마치 탈진이라도 한 듯 다리에 힘이 풀린 경비병은 그대로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억, 그어어억!”
그와 함께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그런 경비병의 손끝으로 검은 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
이라고 중얼거리기도 전에 엘리엇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기 싫으면 알아서 몸을 보호해라.]
“……?!”
놀란 엘리엇은 본능처럼 마력을 일으켜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꽃잎의 위험을 눈치채는 게 늦어 반응이 늦었고, 그 대가는 참담했다.
“아악, 아아아아악!!”
“이게 도대체 무슨…… 끄아아악!”
“……?! ……!!”
“끼이이익!”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경비병도, 들개도, 기괴한 토끼마저도.
꽃잎에 닿는 즉시 생채기를 입음과 동시에 전신에서 검은 꽃이 피어올랐다.
1호와 경비대장은 엘리엇이 몸을 보호하는 것에 반응해 재빨리 대비를 한 덕에 그 참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냐!!”
1호가 무너진 건물 사이로 걸어 나오는 존재들을 향해 소리쳤다.
터벅- 터벅-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사삭-
기척 없는 발걸음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며 그들을 포위했다.
검은 의상으로 몸을 가리고, 마찬가지로 검은 민무늬 마스크로 얼굴마저 가린 존재들.
그러나 마스크 너머로 검은빛 피부의 뾰족한 귀는, 그들의 종족을 예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크엘프……?”
다크엘프의 등장과 함께.
“보는 눈은 있는 편이군.”
건물 너머에서 새하얀 민무늬 가면을 쓴 존재, 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8화
98화 지하 경매장 (5)
남루한 차림새에 더벅머리의 남자, 시궁쥐는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흐아암. 이걸로 지하도시는 얼추 정리가 됐으려나…….”
그러면서 어기적 일어난 그는 자그마한 케이스에 담긴 쥐 한 마리를 꺼내 다리에 작은 쪽지 케이스를 달았다.
“난 귀찮으니까 네가 대신 가라.”
갈색의 쥐는 마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쪽지 케이스를 다리에 매단 채 뽈뽈 움직여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한 여성이 그런 시궁쥐의 거처에 들어왔다.
다만 혼자서는 아니었는데, 왕좌처럼 생긴 의자 아래를 노예들이 받치며 들어오고 있었다.
“어어, 왔어?”
“하아. 언제 와도 냄새가 역한 곳이네. 돈도 많이 벌 텐데, 좀 꾸미고 사는 게 어떨까?”
미스 슈.
그녀가 부하와 함께 등장하며 지저분한 시궁쥐의 거처를 나무랐다.
“귀찮은데 어쩌겠어. 그보다 일 처리는 어때?”
“성이 무너지는 것까지 보고 왔어. 그 멍청한 개장수도 이제 끝이야.”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번 작전은 생각보다 즉흥적인 감이 있었다.
본래라면 시궁쥐도 이렇게 빠르게 이빨을 들이밀 생각은 없었으나, 도대체 누구의 실력인지 살리에르 백작의 장부를 활용해 지하도시 전체를 광기에 빠뜨리지 않았나.
때문에 지금이 위기이자 기회라고 판단한 시궁쥐는 곧바로 미스 슈에게 은근슬쩍 정보를 흘렸다.
“하이엘 국왕이 젊어지고 있는 방법을 얻을 루트가 정말 있단 말이지?”
이렇게.
미스 슈는 예전부터 나이에 대한, 그리고 더 나아가 미모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필요하면 자신의 유일한 혈육조차도 배신할 정도로.
때문에 이런 식으로 정보를 푼다면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넘어올 줄은 몰랐군.’
사실 혈연이라는 게 어찌 보면 참 애매하지 않나.
어떨 때는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을 것처럼 단단하다가도, 또 어떨 때는 나뭇가지 꺾는 것보다 쉽게 꺾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미스 슈의 경우에는 개장수와 함께 이 지하도시에서 겪어 온 역경이 있으니 나름 끈끈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시간이 흐르자 달라진 모양이다.
“물론이지. 하이엘 국왕의 약점을 잡고 있는 카드도 이쪽에 있다고.”
“그게 뭔데?”
“2년 전에 메자이아 대수림에서 생환한 애덤이라는 기사. 놈에게 암살 청부를 맡겼던 게 바로 그 국왕이야. 거래 내역도 확실하게 남아 있고.”
“흐응…… 그렇단 말이지.”
메자이아 대수림은 지금도 떠들썩한 이슈다.
무려 100년 만에 개방된 요람이며, 지금도 탐사대를 이끌었던 라비아타에 대한 칭송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이다.
거기에 하이엘 왕국의 민심 또한 자국에서 영웅이 탄생했다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으니.
만약 그 영웅의 죽음이 사실 국왕의 암살 모의였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실 국민의 지지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문제는 국왕의 실수를 지금까지 두 눈 똑바로 뜬 채로 기다리고 있을 세 왕자의 존재다.
미스 슈도 그러한 사실을 곧바로 간파하고 금세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개장수를 버리는 카드로 쓰는 이유가 뭐야?”
“흥, 내 오빠라는 작자지만, 간이 너무 작잖아? 우린 몇 번이고 지상으로 자리를 옮길 기회가 있었어. 그런데도 이곳이 안전하다는 이유로 나갈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았지.”
그러면서 미스 슈는 잔주름이 보이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이곳 지하도시의 생태가 어떤지.”
“약해지면 잡아먹히지.”
“그래. 아무리 이곳에서 절대 권력을 쥐고 있다 한들, 약해지면 바로 잡아먹히는 거야. 우린 명분 따위 필요 없으니까.”
지상에서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훗날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테지만, 이곳 지하에서는 나이가 들어 약해지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만한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혀 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여성인 미스 슈는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인 미모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난 이 기회에 지상으로 올라갈 거야. 겁쟁이는 여기서 살라지. 아니, 죽으라지.”
실제로 이번 지하 경매 사건으로 인해 개장수가 어디까지 밀려 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함께 피해를 본 금광이 이를 두고 볼 일은 없을 테니 완전히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 봐야 금광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더 되겠나.
‘그렇게 돼도 지하도시의 패권은 이쪽이 확실하게 부여잡겠군.’
멀쩡한 금광과 이번 사건으로 인해 기반을 반쯤 잃게 된 개장수.
그에 반해 전력을 확실하게 보전 중인 미스 슈와 시궁쥐.
이들의 패권 다툼의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이후 지하도시의 권력 계층이 바뀐 후에는 미스 슈도 염원하던 지상으로 자리를 옮길 터.
그리되면 지하도시의 실질적인 패자는 바로 시궁쥐가 된다.
‘이번 일이 다 끝나면 좀 푹 쉬어야겠어.’
자신답지 않게 급하게 움직이느라 몸이 노곤했다.
적어도 한동안 귀찮은 일은 생기지 않을 테지.
“흐아암. 그놈의 힘이 뭐라고 이러고 있는지…….”
그렇게 그가 나태하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무렵, 복도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상황 보고가 들어왔어.”
그사이 경매장 쪽 상황이 정리가 된 걸까.
시궁쥐는 수하의 목소리에 나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 들어와.”
“보, 보스, 상황 보고가 들어왔어.”
“그래! 들어오라니까? 응……?”
“보, 보스, 보스, 사, 상황 보고, 보고가 들어왔어.”
그때, 눈을 열고 들어온 수하의 눈동자를 본 시궁쥐는 순간 강렬한 불길함을 느끼며 외쳤다.
“제길, 막아!!”
그 외침과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 숨어 있던 암살자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검이 수하의 목을 치기 전에, 먼저 들어온 수하의 핏빛 눈동자가 맹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보랏빛을 머금은 검은 장미꽃잎이 허공에 나풀나풀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다크엘프와 셰인의 모습은 얼핏 몽환적으로 비춰졌으나, 그 꽃잎이 일으키는 광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끄으, 흐아아악!”
“마, 마력이익……!”
나풀나풀 떨어지는 꽃잎에 의해 생채기가 생기는 순간, 그 상처로부터 마력과 생명력이 뽑혀 나가 새로운 보랏빛 꽃이 발아한다.
그렇게 쓰러진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꽃잎에 의해 더욱 베이고, 또다시 꽃이 발아하기 시작한다.
죽은 자들의 위로 꽃이 한 무더기로 개화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공포의 현장 속.
이 상황의 주동자처럼 보이는 셰인은 다크엘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살아남은 것들부터 정리하도록.”
“예.”
2년간 인간의 언어를 배운 다크엘프의 수장이자, 엘프 여왕 프리실라와 같은 핏줄을 타고난 오베른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다크엘프들이 움직였다.
뒤늦게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한 이들은 이어지는 다크엘프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려 나갔다.
떨어지는 꽃잎을 막기 위해 전신에 마력을 두른 것만으로도 불리한 마당에, 재빠른 다크엘프의 공격마저 피하기엔 역부족이었으니.
“……! ……!!”
백염을 두른 황태자의 들개들도 주변을 날아다니는 꽃잎을 불태우며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다크엘프의 공세에 대비했다.
들개와 다크엘프의 검이 맞부딪혔다.
그러나 들개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다크엘프의 검은 백염에 의해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는데, 이는 세계수의 가지로 연마한 검이었기 때문이다.
“흡!”
뿐만 아니라 다크엘프들 또한 마력을 쓰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그들에게는 세계수의 정기가 있었다.
정기로 신체를 강화하고, 그저 짐승처럼 덤비기만 하는 들개와 다르게 그들은 동료와 함께 검술을 구사하며 완벽한 팀워크를 선보였다.
그러자 들개들도 하나둘씩 밀리기 시작했고, 전황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뭐 하는 놈들이냐!”
한편, 셰인을 마주한 1호와 경비대장은 그런 셰인을 잔뜩 경계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유리했던 전장의 상황이 급격히 기울었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한참 날뛰고 있던 토끼 신사도 셰인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셰인은 1호와 경비대장을 보기보다, 그런 토끼 신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의 주인에게 안부를 전해 주거라.”
“……이거, 듣던 대로 정말 흥미로운 분이시군요.”
셰인을 알아본 토끼 신사는 아직도 꽃잎에 죽어 가는 자신의 괴물 토끼들을 바라봤다.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닐뿐더러,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는 무너진 개장수의 성을 바라보고는 허공에 손을 올렸다.
“주인님의 명도 있으시니,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쇼에서 뵙도록 하죠.”
그대로 그가 손을 내리긋자, 왔을 때처럼 텔레포트 포탈이 열렸다.
토끼 신사는 금세 그 안으로 사라졌고 뒤이어 괴물 토끼들도 연기처럼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마치 원하던 것은 다 얻었다는 듯, 아무런 미련도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모습. 뒤늦게 1호가 허공에 대고 외쳤다.
“이봐,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 어디로 가는 거야!”
그러나 그의 외침에 돌아오는 말은 없었고, 그는 잔뜩 핏발이 선 눈으로 셰인을 노려봤다.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못 걸린 줄 알아라.”
“후우, 한동안 앓겠군.”
그러면서 1호와 경비대장은 품에서 꺼낸 약을 집어삼켰다.
변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1호의 덩치가 불어남과 동시에 멀쩡한 피부에서 털이 솟아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경비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1.8미터쯤 되어 보이던 그들의 덩치가 어느새 3미터까지 늘어나는 과정을 바라보던 셰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든의 연구가 그래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군. 수인족의 피를 정제한 약인가.”
이미 죽어 사라진 존재지만, 여전히 그가 남긴 흔적은 세상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그래 봐야 불완전한 건 똑같지만.”
그에 짐승으로 변한 1호와 경비대장이 달려들자, 셰인의 주변으로 다크엘프들이 모여들었다.
오베른의 검이 날카로운 1호의 발톱을 막고, 경비대장은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에 경로가 막혔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지.”
그러면서 셰인은 바닥에 팽창 룬 마법을 새겨 발동시켰다.
“뭐, 뭐냐!”
“흐읍?!”
견족 수인인 1호와, 웅족 수인인 경비대장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수인족의 마력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불완전한 마법에 기대니 그런 꼴이 나는 거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크흐으윽……!”
한편, 경비대장은 강제로 수인족의 마력에 분리되는 과정으로 인한 부작용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굳이 저 마법의 약점을 강의해 줄 생각이 없던 셰인은 허공에 무수한 검을 소환했다.
“그럼, 이만 정리하도록 하지.”
“크아아악!!”
순식간에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경비대장의 몸에 쑤셔박혔고, 뒤이어 셰인이 소환한 바람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끝날 성싶으냐!!”
어찌 된 일인지 경비대장과 다르게 부작용 증세를 전혀 보이지 않은 1호는 바닥에 연막탄을 던져 시야를 차단시켰다.
그러는 사이 약을 다시 한번 섭취한 1호는 늑대의 형상을 취한 채 그대로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어느새 저 멀리까지 달려 나간 것이다.
“반쪽짜리 수인이었나.”
“……따라갑니까?”
“흐음. 아니, 됐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쳐 봐야 죽을 곳을 찾아가는 것이니.”
“알겠습니다.”
셰인의 말에 별다른 의문도 가지지 않고, 오베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거래를 마저 해 볼까.”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한편,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엇은 간신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셰인의 말에 대답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99화
99화 늑대와 기사
지하 경매장에서 간신히 벗어난 1호는 미스 슈 패밀리의 간부들만이 이용하는 통로를 통해 5층으로 향했다.
‘겨우 살았나.’
경비대장은 허무하게 죽어 버렸지만,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번 일을 일으키며 경비대장 정도야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지 않았나.
비록 경비대장의 밑에 있던 수하들마저 죽은 것은 뼈아팠으나, 그건 개장수도 마찬가지.
애초에 경비대장 자체가 개장수의 수하였던 만큼, 놈의 배신으로 인해 개장수의 손해만 크다고 봐야 했다.
‘이대로 주인님과 합류해서 지하 경매장을 정리해기만 하면 되는데…….’
도대체 마지막에 등장한 민무늬 가면의 정체가 무엇일까.
토끼 신사야 앞서 시궁쥐에게 들었던 인물이었으니 그러려니 했으나, 민무늬 가면의 등장은 1호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더군다나 황태자의 들개마저 손쉽게 처리하던 다크엘프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래 봤자 장부는 이쪽에 있다.’
1호는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치지 않은 장부를 보며 그래도 속으로 안심했다.
만약 그 가면의 사내가 이 장부를 원한다면 이걸 통해 거래를 할 수도 있을 테니.
‘그러니 일단 돌아가야…… 응?’
그렇게 통로를 걸어 나온 1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고요하다.
물론 5층에서, 그것도 시궁쥐의 영역에 소란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 흔한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근처에 경비 겸 수면을 취하고 있을 거지들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전쟁 준비에 들어가고 있나?’
어딘지 모를 불안감을 떨친 1호는 그리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준비가 빠르군.’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오는 길에 사람 하나 마주치지 못한 1호는 금세 시궁쥐의 거처까지 도착했다.
이곳에 있을 자신의 주인, 미스 슈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반긴 것은 수많은 거지 차림의 사람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이었던 것들이었다.
“어……?”
너무 충격적이라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했던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1호는 잠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거…… 주인님 건데.”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에, 피가 흐르듯 붉은 눈동자의 소녀가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의 위에 올라타 그런 1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냐. 넌 도대체……!”
시궁쥐의 전력은 1호조차도 다 파악하지 못했다.
워낙에 비밀스러운 것도 그랬지만, 그가 거느리는 거지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특급 암살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소녀의 의자가 되어 있었다.
“나……? 에블린. 주인님의 명령을 받아서 왔어. 근데…… 놓쳐 버렸네. 둘 모두. 그래도, 네가 찾아와서 다행이야. 그거 가지고 가면 주인님이 칭찬해 주시겠지.”
“뭣…….”
1호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피처럼 붉은 눈과 마주하자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가 된 듯, 온몸이 긴장하여 움직이지 못했다.
압도적인 포식자.
1호가 본 소녀는 그러했다.
“얘들아, 저걸 가져와.”
이 자리에는 1호와 소녀 외에는 아무도 없는데 저 소녀는 누구에게 저리 말하는 것일까.
설마 숨어 있던 누군가가 있는가 싶어 주변을 둘러본 1호였으나, 이내 그는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잡은 순간 소녀가 말한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 시체가……!”
그의 발치에 쓰러져 있던 시체.
그리고, 소녀에게 깔려 있던 시체들이 몸을 일으켜, 소녀처럼 붉게 변한 눈으로 그런 1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 * *
“죄송합니다. 물건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니, 괜찮다. 그래도 네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여 보고하는 엘리엇의 모습에 금광 엘도라트는 그런 그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어.”
“…….”
“그래, 거래 장부의 주인이자, 바깥에서는 귀족 살해자라 불린다지. 뭐라 부르면 되지?”
“아무렇게나 불러라.”
“그럼 대충 흰 가면이라 부르도록 하지. 그래, 흰 가면 씨. 나에게 볼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하하,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 말이야. 고향에서는 시달린 게 좀 있었지.”
“그런가. 그럼 본론부터 말하도록 하지. 거래를 하러 찾아왔다.”
“거래라…… 장부는 이미 놈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방금 막 들었는데.”
엘도라트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셰인을 바라봤다.
“내용물만 안다고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장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도 있으니.”
엘도라트가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으나,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 목적은 고작 거래 장부 따위가 아니지 않나.”
“흐음. 마치 내 목표가 뭔지 아는 눈치인데.”
“지상.”
“음?”
“고향의 땅을 떳떳하게 밟는 것. 그렇지 않나, 황제의 피를 이은 자여.”
“……!”
셰인의 이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인물은 엘리엇이었다.
그는 순간 셰인을 기습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뒤이어 그런 그의 목 아래로 서늘한 감각이 느껴져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소환된 어둠의 정령, 아르카네가 칼날로 변한 팔을 그의 목에 두고 있던 것이다.
“크흐흐…… 그것까지 알고 있단 말이지. 정체가 정말 너무 궁금해지는데…… 일단 그 칼은 좀 치워 주지. 이래봬도 내가 유일하게 믿는 수하라서 말이야.”
“아르카네.”
“예…… 주인님.”
셰인의 부름에 아르카네가 조용히 팔을 거두자, 그제야 엘리엇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말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뒤로 향한 엘리엇은 방금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눴던 소녀를 바라봤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로즈베리 눈동자를 지닌 소녀는 방금 전, 엘리엇에게 흉흉한 기세를 내뿜던 것과 달리 다소곳한 자세로 셰인의 곁에 서 있었다.
‘도대체…….’
한편, 엘리엇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엘도라트는 여전히 눈앞의 민무늬 가면의 사내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 정체를 알고 있다니 재미있기는 한데…… 날 어떻게 위로 올려 보내 주겠다는 거지?”
엘도라트.
본명은 제페르 디 퀘이어트 엘라인.
현 황제의 형제이며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해 지하도시로 들어와 42년 동안 버텨 온 사내다.
“애초에 너의 목적은 황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 건 진작에 포기했지.”
한때는 그러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곳 지하에서 쥐새끼처럼 숨어 살다가, 언젠가 다시금 황위에 도전할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38년 전에 일어났던 흑마법사의 테러 사건.
그리고 그 후에 분노한 제국을 지켜본 엘도라트는 그 순간부터 황위 탈취에 대한 꿈을 완벽하게 접어 버렸다.
“그 빌어먹을 백염 앞에서는, 뭘 할 수가 없었으니까.”
지하도시에서 무력으로 가장 강했던 흑마법사가, 저지먼트 기사단 하나에 의해 붕괴되고 와해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본 엘도라트는 자신의 꿈을 진작에 포기했다.
“이제는 저 빌어먹을 인공 천장만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때문에 엘도라트는 그저 지하도시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만족했으나, 나이가 들어 갱년기라도 온 것일까.
여전히 그의 가슴 한편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 있었다.
황제 같은 게 아닌, 제대로 된 황족으로서의 권위를 이어 영지를 지배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게 가능하리라 보나?”
셰인의 확언에 엘도라트의 두 눈에 희미한 열망이 깃들었다.
이젠 나이가 들어 눈가에 잔주름이 가득함에도 그는 지상으로의 귀환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멀쩡한 영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애초에 그런 영지가 남아 있지도 않겠지만.”
“흐음.”
“하지만 상당한 크기에 미래가 충분한 영지라면 있지. 어떤가?”
“그런 영지가 남아 있다고?”
그런 곳에 과연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황족을 보내 줄까?
하지만, 이어지는 셰인의 말에 엘도라트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추위는 잘 견디나?”
* * *
엘도라트와의 만남이 성사된 이후, 셰인은 금광이 따로 마련한 저택으로 몸을 옮겼다.
“정말 해내셨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 미리 연락을 받은 애덤이 찾아왔다.
휘황찬란한 저택에 들어온 애덤은 자신의 정보망을 통해 한참 난리가 난 지하도시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고 있었다.
워낙 이런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는 동네가 아니던가.
그 난리 속에서 목숨을 건진 손님들이 이미 관련된 소문을 쫙 퍼뜨리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이번 사태가 일어날 줄 아셨던 겁니까?”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애덤 또한 이번 습격이 경매가 끝난 이후, 물건이 넘어가는 시기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셰인은 예상이라도 한 듯 다크엘프를 대동하고 그 장소에 찾아갔다.
“다른 건 몰라도 황태자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겠지.”
“황태자? 들개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놈 또한 사람을 풀어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고, 애초에 물건이 경매장에 넘어가기 전에 일을 처리하려 했을 거다.”
“아…… 그런데 소리 소문 없이 물건이 넘어갔지요.”
“그래, 맞아.”
다른 때라면 모를까, 이번 살리에르 백작의 장부는 지하도시를 한동안 시끄럽게 만들던 물건.
거기에 다른 층과 다르게 4층의 유일하게 존재하는 경매장, 그것도 포 패밀리의 일원인 개장수에게 물건이 들어갔다.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마당에 소리 소문 없이 물건을 건네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셰인은 이를 해냈다.
“황태자 입장에서는 불안했겠습니다.”
“그래. 입찰자에게 물건이 건너가는 상황조차도 허무하게 놓치긴 싫었겠지.”
그러므로 입찰이 실패한 순간부터 황태자가 키운 들개의 난입은 필수적이었다.
“황태자가 만약 입찰에 성공했다면 어쩌실 생각이었습니까?”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지. 아무리 금화가 지하보단 지상에 굴러가는 게 많다지만, 몰래 쓸 수 있는 돈도 그럴까?”
“음. 확실히, 검은 돈의 양만 따지면 지하를 이길 수는 없겠지요.”
“그래.”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지하 경매장처럼 비밀리에 진행되는 곳에 그만한 금액을 투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거기까지 이해한 애덤이 제3의 세력인 토끼 신사에 관해 물으려던 찰나.
“다녀왔어요, 주인님.”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에블린에 의해 그런 애덤의 말문은 닫힐 수밖에 없었다.
“바빠요?”
“아니, 안 그래도 널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가서 한 일은?”
“미안해요. 두 마리는 놓쳤어요.”
“시궁쥐와 미스 슈겠군.”
“네. 휘리릭- 하더니 후루룩- 사라졌어요.”
에블린의 황당한 설명에 애덤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에블린은 여전히 당당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건 챙겨 왔어요.”
끼이익.
“헉!”
이어지는 애덤의 기겁한 목소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열린 문 너머로부터 기척을 숨긴 채 움직이고 있는 마흔 명의 노숙자…… 시궁쥐의 청부업자들이 서 있었으니까.
그들은 피처럼 붉은 눈에 초점을 잃은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셰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에블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그중에는 청부업자들과 다르게 유독 옷이 멀쩡한 자가 껴 있었다.
얼굴도 익숙한 그는 지하 경매장에서 도주했던 1호였다.
“애덤. 네가 가진 능력을 각성시킬 때가 온 것 같군.”
“예, 예?”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려오는 말은 애덤을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00화
100화 흑마법사의 비사
셰인은 풀린 눈을 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1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의 품에서 약 케이스를 꺼낸 셰인은 이리저리 약을 훑어보고는, 애덤에게 넘겼다.
“이게 뭡니까?”
“이종족의 피를 정제하여 만든 도핑제더군.”
“피, 피를 정제합니까?”
“그래.”
도핑제를 유통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미스 슈였으니, 어쩌면 그녀가 흑마법사와 커넥션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애덤은 그런 약 케이스를 꺼림칙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혹, 부작용은 없는 겁니까?”
“보아하니 같은 혈통의 수인족을 대상으로는 부작용이 거의 없던 것 같더군.”
적어도 1호는 허무하게 죽은 경비대장과 다르게, 두 번이나 약을 먹었음에도 멀쩡하게 돌아다녔다고 한다.
물론 연속해서 복용한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안 좋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복용은 한 번만 할 거다. 자기가 가진 힘을 약에 의지해야만 쓸 수 있는 반푼이 같은 능력은 아무런 소용도 없지.”
당장 경비대장이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린다면, 셰인의 입장에서는 가치를 논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저것과 다르게 네가 가진 수인족의 피가 더 옅은 것 같으니 그걸 손봐야겠지. 지금은 단지 피가 가지고 있는 수인족의 힘을 한차례 일깨우는 용도에 불과하다.”
“음…… 알겠습니다.”
셰인의 말에 애덤은 표정을 바로하고 진지하게 붉은 알약을 바라보다, 망설임 없이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크, 크윽……!”
애덤의 피에 깃든 수인족의 피가 도핑제에 깃든 수인족의 혈마력에 반응하며 전신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애덤은 압도적으로 밀려오는 고통에 순간 정신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기사로서 단련된 단단한 근육이 찢어졌다 재생되길 수십 차례 반복하고, 그럴 때마다 그의 신장이 비정상적으로 크기를 부풀렸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동시에 그의 정신은 순식간에 수인족의 야성에 물들어 갔다.
이윽고 인간의 세상이 아닌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은빛 털이 애덤을 감쌌다.
“은랑족이라…….”
셰인은 잠시 전생에 만나 봤던 수인족, 그것도 견족 수인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아 숭배를 받던 은랑족을 떠올렸다.
은랑족은 모든 견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지만, 그들이 견족에게 숭배를 받는 이유는 다름 아닌 뛰어난 육감 때문이다.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으나, 은랑족은 자신들이 가진 육감으로 위기를 예지하고 동족들을 챙겼기에 견족에 숭배를 받을 수 있던 것이다.
애덤은 바로 그 은랑족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였다.
“근데 역시 반푼이로군.”
하지만 그 피를 일깨우는 데 들어간 혈액이 일반 견족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일까.
애덤은 이지를 상실하고 앞으로 돌출된 주둥이를 으르렁거리며 셰인을 향해 적의를 보였다.
그러자 그 적의를 감지한 어둠의 정령, 아르카네가 셰인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그런 애덤과 대치했다.
“아르카네. 정신 차리게 해 줘라.”
“예, 주인님.”
“……멍멍이. 털이 부드러워 보여.”
한편 에블린은 그런 애덤을 바라보며 두 눈을 빛냈다.
아무리 수인족 중에서도 알아주는 은랑족이라지만, 고귀한 진혈의 흡혈귀 앞에서는 그저 은빛 강아지로 보일 따름이었다.
* * *
애덤은 금방 아르카네에 의해 제압되었다.
한편 셰인은 에블린이 데리고 온 미스 슈와 시궁쥐의 수하들의 기억을 쭉 훑으며 머릿속의 계획을 차곡차곡 정리해 나갔다.
“이때부터였군. 시궁쥐가 무명에 가담하게 된 건. 아니, 어쩌면 무명에서 보낸 게 시궁쥐였을 수도 있겠어.”
전생의 기억대로, 시궁쥐는 이 시점부터 무명에 가담하고 있었다.
다만 전생의 이 시점에 셰인은 아직 말단에 불과한 조직원이었기에 시궁쥐와 얽힐 일이 없어서 확신하진 못했다.
‘미스 슈가 개장수로부터 암시장의 정보를 파악하고 시궁쥐가 이종족을 긁어모은 건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셰인은 어느새 도착한 목적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미스 슈의 본거지.
그녀의 본거지는 금광과 개장수의 성하고 제법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지하에 있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외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철저하게 귀족의 흉내를 내는 것 같다고 할까.
한눈에 봐도 복도마다 미술품과 값비싼 풀 플레이트 갑옷 거치대를 마련해 둔 것이 황실의 복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추하군.”
하지만 그래 봐야 모든 게 한순간에 사그라들 거품이다.
셰인은 그리 짧은 평을 내리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전투가 있을 줄 알았으나, 미스 슈의 수하들은 사라진 자신들의 보스를 찾기 위함인지, 아니면 애초에 자신의 거처에는 사람을 두지 않는 것인지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저택을 수색하고 다니던 셰인은 1층 중앙 로비로 돌아와 주변을 훑어봤다.
“흐음.”
로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벽에 걸린 거대한 그림이었다.
미스 슈의 초상화.
뇌쇄적인 차림새와 포즈를 취한 채 그려진 그림을 잠시 바라본다.
“찢어라.”
“예, 주인님.”
명령을 받은 아르카네가 즉시 반응해 그림을 찢어발기자, 그 너머로 나무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에 마력을 집중하자, 내부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슨 소리지?”
“글쎄…… 오늘따라 위가 조용하던데.”
“그 미친년이 다시 돌아오려나 보군.”
“쉿, 조용히 해.”
“젠장. 어쩌다 우리가 이런 꼴을…….”
초조, 분노, 절망, 회한 등등.
다양한 부정적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자, 그곳에는 역한 냄새와 함께 비쩍 마른 20여 명의 노인들이 메마른 눈으로 셰인에게 시선을 보내 왔다.
“흑마법사들인가.”
“……?”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구시오?”
문 너머는 작업실에 비루한 차림의 노인들이 그런 셰인을 바라보고 물었다.
평소 자신들을 찾아오는 미스 슈나 그녀의 수하와는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지 않나.
“그렇군. 38년 전으로부터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인가.”
“……!”
“어, 어디서 뭐 하는 누구시오!”
“정체를 밝히시오!”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큰 동요가 일어났다.
흑마력을 양손으로 두른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셰인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마법사라면 일단 공격부터 하고 봤을 텐데, 그들은 어째서인지 두려움을 먼저 느끼고 있던 것이다.
“흑마법의 패턴도 이상하군. 고든의 그것과는 달라.”
“……! 고든!”
“그 개밥으로 줘도 시원찮은 놈을 아는 것이냐!”
그 말에, 그제야 그들의 감정이 보다 격해졌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두려움보다도 뿌리 깊은 분노였다.
“고든을 아나?”
“그걸 말이라고 묻는 것인가?”
“그놈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데!”
흑마법사들의 반응은 셰인에게 있어 퍽 재미있게 다가왔다.
고든은 모든 흑마법사들의 스승이자 존경의 대상이고 또 두려움을 선사하는 존재이지 않나.
그러나 저렇게 분노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셰인도 처음 봤다.
“고든은 죽었다.”
해서 셰인은 먼저 대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셰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흐흐, 그래. 그렇게 생각하겠지. 무식한 놈들이 뭘 알겠느냐.”
“놈은 살아 있다. 고작 날붙이 따위에 베였다고 죽을 작자가 아니란 말이다!”
“마력을 죽이는 백염이라 해서 놈의 영혼마저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저들의 불신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대 흑마법사의 수장이었던 고든은 그만한 인간이었으니.
하지만 셰인은 알고 있었다.
고든의 영혼이 어떻게 분해되어 사라져 갔는지.
“그렇겠지. 네크로노미 마스크를 연구하며 영혼 분리 마법에 통달한 작자였으니.”
“……! 그걸 어떻게!”
“혈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단 말인가?”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38년 전, 제국과 흑마법사들의 전쟁에서 고든은 혈마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아직 완성되지 못한 네크로노미 마스크의 불안정한 실험으로 인해 테러처럼 보이는 사고가 일어났고, 그에 분노한 제국이 지하도시까지 처들어와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인 것이지 않나.
38년 전의 진상을 알고 있던 흑마법사들은 들끓는 감정을 조율하며 다시금 셰인을 바라봤다.
“다시 묻겠소. 그대는 누구시오?”
“고든을 죽인 자. 그리고 놈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한 사람이다.”
“……믿을 수 없군. 이곳은 어떤 연유로 찾아오게 된 것이오? 미스 슈의 허가를 받은 것인가?”
“그 여자의 허가를 받을 이유가 없지. 꼬리를 만 개처럼 이미 도망쳤는데.”
“도망……? 그 여자가?”
흑마법사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봤으나, 셰인은 이를 설명하기보단 행동으로 보였다.
“에블린.”
“네, 주인님.”
셰인의 부름을 받은 에블린이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 소녀……?”
“그림자에서 나왔다고? 음차원을 저렇게 쓸 수도 있는 건가?”
“느껴지는 저 영혼의 격은 도대체…….”
남루한 저 차림세와는 다르게 흑마법사들은 에블린의 격을 금방 알아보고 떨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놈을 저들에게 보여 봐라.”
“알겠어요.”
그 말에 에블린은 다시금 그림자로 들어갔다가, 한 사람의 수급을 챙기고 나왔다.
“1…… 1호!”
“저 빌어먹을 개자식이 어떻게?”
“저자의 말에 사실인가?”
본래 이곳에 남아 있을 미스 슈의 수하들에게 보여 기를 꺾고 시작할 생각으로 들어왔던 1호의 수급은 흑마법사들에게도 잘 먹혀들었다.
“이제 대화를 나눌 생각이 좀 들었나?”
“……만약, 그대의 말대로 미스 슈가 없다면…….”
“지금이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가.”
“이 빌어먹을 곳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오?”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아 그들은 이곳에 자체적으로 있던 게 아닌 감금과 비슷한 형태로 있던 모양이다.
“따라와라. 적어도 여기보단 비교적 안전한 곳이 있으니.”
“……이보게들. 일단 저자를 따르는 게 좋겠구먼.”
“하, 하지만 이렇게 나가도 괜찮은 것입니까? 만일 저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슨 유리병에 갇힌 벼룩인가! 그 이상 뛸 수 있음에도 뛰지 못하는 병신은 아니지 않나. 우린 지금 바깥으로 도약해야 할 때일세!”
“아……!”
그나마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흑마법사의 설득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고, 굳은 결심이 보이는 표정으로 셰인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설득된 흑마법사를 데리고 조금 더 미스 슈의 저택을 탐색하던 셰인은 몇몇 자료를 찾아낸 것으로 만족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금광의 저택으로 돌아가, 흑마법사들의 사정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우린 고든과 다른 학파의 흑마법사였다네.”
“다른 학파? 흑마법사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나?”
“물론 일반인들이 보기에 우리 흑마법은 그저 음침한 이들이 모여 사악한 악마를 다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고든 그 미친 작자가 가진 사상과 우리가 가진 사상은 전혀 다르다네.”
“사상이라.”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흔히들 흑마법이라 하면 방금 저 늙은 마법사가 말했던 것처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저주에 걸린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흑마법 또한 마법에 불과했고, 세상의 이치 내에 존재하는 힘이며 인간의 능력으로 컨트롤이 가능하다.
“흥미가 생기는군. 자세히 듣고 싶은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그리고 이어지는 늙은 흑마법사의 이야기는, 셰인도 처음 들어 보는 그들만의 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