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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beat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文集 220512

11 0 2022-5-12 21:06
[원랑] Heatbeat (교정)





CHAPTER 1





투명하게 비치는 맑은 물과 수면에 이지러지며 반사되는 빛살, 아득한 물마루로부터 바다를 감싸 안는 뜨거운 하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남국의 바다의 아름다움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에메랄드 빛 해수면을 가로지르는 선체 옆으로 하얀 포말이 시원하게 튀었다. 사토 아야코는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19살 때 첫 해외여행의 시작을 타이로 정한 그녀는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남국의 바다는 항상 새로운 감흥으로 그녀를 매료하였다.

지난 두 번의 여행이 방콕과 팟타야, 푸껫, 치앙마이 등지를 관광하는 표준적인 타이 여행 코스였으므로, 세 번째 타이 여행은 여행사의 가이드에 의존하지 않고 그녀가 직접 발품을 팔아 정보를 수집했다. 야이쑤코 섬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접한 건 졸업을 앞둔 남자 선배 몇몇의 숙덕거림이었다. 지난 두 번의 여행 동안 여행사는 물론이거니와 현지 가이드에게서도 전혀 듣지 못한 생경한 이름의 섬이라 선배들에게 질문했지만, 그들은 정확한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를 피했다. 영문 모를 반응 탓에 더욱 호기심이 생겨 인터넷의 여행 동호회에서 수소문해 보았지만 의문을 해결해 줄 정보는 찾지 못했다. 결국 사토는 직접 여행사에 문의하였고, 야이쑤코 섬이 푸껫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해변 리조트가 조성되어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여행사에서 보게 된 해변가의 사진도 마음에 들었고, 유명세를 타지 않은 만큼 여행객도 드물 테니 하루쯤 느긋하게 보내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판단이 들었다. 함께 여행하기로 한 친구도 동의하였기에 사토는 야이쑤코 섬을 세 번째 여행 코스에 추가하였다.

우기의 끝자락인 10월인데다 시드니 올림픽의 폐막과도 맞물리는 때다. 그녀처럼 휴학생이 아닌 이상 따로 휴가를 내기는 어려울 테니 젊은 사람이 많이 없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같은 배를 탄 관광객의 대다수가 중장년의 남성들이라는 건 역시 이상하게 느껴졌다. 일본인이라는 게 반가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도 야이쑤코 섬을 당일치기로 방문하는 게 아니라 하루 이상 머무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처럼 여행 코스 중 하루가 아니라, 휴가 일정의 대부분을 야이쑤코 섬에 투자하고 있었다. 의아하기는 하였으나 초면인 사람들에게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토와 친구는 그냥 적당히 웃으면서 응대하였다.

"이번에 저희가 가고 있는 야이쑤코 섬은 뜨랏에서 1시간 30분 정도 배를 타야 합니다. 일본에서는 소위 아는 사람에게만 알음알음 전해진 곳이지만, 실제로는 타이의 도시 중에서 외국인이 많기로는 으뜸으로 손꼽힐 만하죠. 정기선이 거의 없으니 늦잠 주무셔서 배를 놓치게 되면 큰일이 납니다."

동승한 관광객들을 통솔하는 가이드가 책을 읽는 것처럼 열의 없이 설명했다. 배낭 여행이긴 하였으나 같은 일본인이기도 하고 배에 탔으니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사토의 옆구리를 친구가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저 남자, 진짜 괜찮지 않아?"

굳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선착장에서부터 사토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남자가 그녀 일행의 자리에서 사선에 앉아 있었다.

일본인으로 가득한 배 안의 유일한 서양인이었다. 스물 후반이나 되었을까. 이국의 햇살에 반짝반짝 부서져서 거의 은빛으로 보이는 플래티넘 블론드를 귀 뒤로 넘긴 젊은 남자는 길고 늘씬한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는 채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선글라스를 써서 한눈에 알아볼 수는 없지만 드러난 이마와 코, 턱 선만으로도 빼어난 용모임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닫힌 입매와 날렵한 이목구비는 화려하지만 우아한 아름다움을 남자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우락부락하지도, 지나치게 야위지도 않은 후리후리한 체격을 빈틈없이 감싼 백색 서머 슈트가 수려한 분위기를 더욱 빛냈다. 어지간하면 소화하기 힘든 백색 슈트를 맵시 있게 입었다는 점만으로도 100점 만점에 120점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선글라스로 가려지지 않은 이마와 눈 밑에 칼자국만 없었다면 모델이라고 여겼을 법하다.

"염색이 아니라 천연이겠지?"

머리칼 색이 정말 예쁘다며 친구가 감탄했다. 사토도 동감이었다. 슈트 차임인데다 커다란 슈트케이스도 지니고 있으니 여행객이 아니라 사업차 섬을 방문하는 것일까. 문득, 야이쑤코 섬에 외국인이 많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떠올랐다.

"책자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구두로 거듭 주의 드렸다시피 야이쑤코 섬에서 제일 주의하셔야 하는 건 외국인입니다. 특히......."

가이드의 목소리는 느릿느릿하게 이어지고 있었으나 그녀의 귀에는 어렴풋이 흘러지나갈 뿐이었다.

갑자기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사토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흠칫했다.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지만 분명히 시선이 마주쳤을 것이다. 훔쳐본 게 너무 노골적이었을까. 지나치게 무례하였다는 걱정에 얼른 고개를 돌리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쓰는 그녀의 심장을, 남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직격했다.

"어딜 꼴아봐, 썅년들아. 대낮부터 발정 났냐? 눈 안 깔아?! 어?!"

남자의 영어는 러시아어 억양이 지나치게 강하여 명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거칠게 섞인 욕설 정도는 바로 이해되었다.

가이드의 말을 끊을 정도로 커다란 욕설은 그나마 그녀의 친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행객들의 안색까지 창백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가만히 앉아만 있던 남자가 움직이자, 그의 움직임은 곧 공기를 좌우하였다. 여행의 흥분으로 들떠있던 선실은 경직된 분위기에 잠식되었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별 잡년들까지 지랄하네."

뻗고 있던 다리를 꼬기도 하고, 떨기도 하고, 탁탁탁 바닥을 치기도 하던 남자는 결국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 슈트케이스의 지퍼를 약간 열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선실의 관심을 끌고 있던 남자였다. 슈트케이스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 새까만 색의 권총이 들려있자 사람들은 기겁하였으나, 다행히 그들이 비명을 지르기 전에 남자가 트리거를 당겼다. 총구에서 찰칵 불이 나오며 담배에 붙었다.

라이터를 도로 슈트케이스에 쑤셔 넣은 그는 다시 의자에 늘어졌다. 선실이 금연이라는 사실은 망각한 듯한 태여한 끽연이었다. 사토에게 조금만 더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면 배의 선원들이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남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자,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셔야 하니까 잠시만 주목해 주시겠어요?"

가이드만이 이 조용하지만 격렬한 소동에도 별다른 변화 없는 안색으로 여행객들의 주의를 모았다. 거친 욕설만 뱉었을 뿐 위험을 가하지 않아 조금이나마 안도한 여행객들은 다시금 가이드를 보았지만, 그 평온은 일 분도 지속되지 않았다.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이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토는 기겁하여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이 같은 사태의 원인이 자신이 그를 먼저 쳐다보았기 때문인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갑판에서 담배를 피우려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소박한 희망은 남자가 첫걸음을 내딛자 산산이 깨졌다.

남자는 정확히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왔다. 느슨하게 풀어지려던 공기가 삽시간에 팽팽해진다. 사람들이 바짝바짝 긴장해 있음이 살갗으로 느껴졌다. 점차 가까워지는 남자의 구두 소리가 고막을 쿵쿵 찔렀다. 무릎 위에 꼭 움켜쥔 두 주먹이 가늘게 경련했다. 뚜벅뚜벅 가까워지던 발소리는 그녀의 3미터 앞에서 멈췄다. 조마조마한 숨을 삼키면서 슬그머니 시선을 올린 사토는 헛숨을 삼켰다. 남자는, 가이드의 어깨에 팔을 턱 걸치고 있었다.

"어...... 너, 이름이......."

제법 친근한 척 가이드의 어깨를 둘러 안은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숙여 가이드의 목에 걸린 명찰을 읽었다. H. Nishimura. 운해정행공사.

"음, 니시무라? 중국? 일본?"
"일본인입니다."

놀라지도 위축되지도 않은 담담한 어조로 가이드는 대답했다. 얼핏 보아도 170cm는 가뿐히 넘는 가이드의 정수리를 웃도는 시선이 희게 드러나 목덜미로 내려왔다. 맞은편에 있는 사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를 안고 있던 남자의 손은 어느 틈인지 매끄럽게 등허리를 훑으며 내려와 그의 엉덩이를 쓸고 있었다.

"일 몇 시에 끝나냐? 오입질하는 데까지 따라나서는 건 아닐 거 아냐. 난 저녁에 일정 없어. 한가하니까 네 시간에 맞춰줄게."

사토는 하마터면 입을 떡 벌릴 뻔했다. 이제까지의 정황은 자르고 대화만 놓고 보면 뻔하디뻔한 상황극이다. 그녀는 귀를 의심하며 서툰 영어 실력 때문에 오해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힐끔 돌아본 친구의 표정도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용모와 상반되는 험악한 입을 가진 남자는 동성인 가이드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즉흥적인 방식으로.

가이드는 모든 사람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수작질을 걸고 있는 남자에게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 세상에 러시아 남자는 많고, 잘생긴 러시아 남자도 많고, 야이쑤코 섬에도 러시아 남자가 많지만 그가 알기로 젊은 미청년이며, 야이쑤코 섬에 거주하며, 난폭한 성격이며, 게이이기까지 한 러시아 남자는 한 명뿐이었다.

"미스터 슈이스끼."
"엉? 날 알아? 우리 혹시 잔 적 있었던가? 너 멜닛 스트리트에서 투잡 뛰냐?"

뻔뻔스럽게 남창이냐고 묻는 남자에게 가이드는 딱 한마디만 덧붙였다.

"제의는 감사합니다만, 저희 여행사는 미스터 팡의 산하에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남자는 바로 손을 뗐다.

"쳇. 모처럼 쫄깃해 보이는 엉덩이였는데 중국 놈 거였나."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가이드의 엉덩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두들기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후에도 입맛을 다시며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더는 수작을 걸지도, 방해하지도 않았다.

가이드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본어로 입을 뗐다.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외국인 중에서도 특히 러시안, 중국인, 남미인과는 절대 시선도 마주쳐서는 안 됩니다. 야이쑤코 섬의 러시안, 중국인, 남미인의 95%는 마피아입니다. 그럼 나머지 5%는 누구일까요? 바로 마피아의 가족입니다."

뒷말은 우스갯소리로 덧붙인 것 같았지만 여행객들의 반응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머쓱해하는 기색도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겁먹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관광지구는 안전하니까요. 제가 주의를 부탁드리는 건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좆같이 덥네. 이놈의 배는 언제 도착하는 거야? 개새끼들, 비행기 연착했다고 마중도 안 나오다니."

딱딱하게 굳어 가이드의 당부를 경청하던 사토는 먼발치에서 들려온 남자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심코 곁눈으로 남자를 훔쳐보고야 말았다. 남자의 재킷의 깃을 쥐고 팔랑팔랑 어설픈 바람을 부치고 있었다. 저렇게 더우면 재킷을 벗으면 될 텐데 왜 굳이 입고 있는 걸까 궁금해졌지만, 재킷으로 가려진 남자의 옆구리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시커멓고 단단한 물체가 그녀에게 본능적인 해답을 주었다.

저건 방금 전의 라이터처럼 모형이 아니라, 진짜 권총이었다.

사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선실 바닥에 내리꽂으며 절대 남자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을 것임을 굳게 다짐하였다.

"저.......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여행객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아까의 저분도, 그거, 인 건가요?"

남자가 일본어를 모를 확률이 높았지만 '마피아'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저어되는지 여행객은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가이드가 턱을 주억거렸다.

"네, 유명한 사람이죠. 이건 야쿠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조폭이 젊은 나이에 유명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시겠지요?"

그러며 그는 한마디를 더했다.

"러시안, 중국인, 남미인은 외모에도 속으시면 안 됩니다."

이 역시 우스갯소리였지만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여전히 짜증스럽게 재킷을 펄럭이고 있었다.





야이쑤코 섬에는 두 곳의 큰 선착장이 있다. 경기선이 왕복하여 관광객이 이용하는 북쪽 항과, 섬의 이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용하는 동쪽 향이 그것이다. 북쪽 항에서 시작되는 해변 리조트와 관광지구를 넘으면 총성이 공포와 위협이 아니라 소음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진짜' 야이쑤코 섬이 펼쳐진다.

야이쑤코 섬이 언제부터 마피아에게 장악되었는지 뚜렷한 계기와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마피아에게는 원인과 이유 따위야 사소한 것이었고, 결과물인 현물을 손에 쥐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제조되는 마약의 중간 유통지로서 시작된 마피아의 사업은 총기 밀매로 커졌고, 70년대에 군부 쿠데타를 지원하여 타이 정부로부터 일종의 치외법권을 인정받았다. 그 후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야이쑤코 섬은 마피아에게는 무법지로,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로 위장 중이었다. 80년대에 들어 마피아가 시작한 섹스 관광과 카지노는 일반인에게 좋은 위장 사업이 되어 주었다.

섬의 이권을 둘러싼 치열한 항쟁 끝에 현재 야이쑤코 섬을 장악 중인 세력은 모스크바에 기반을 둔 러시아 마피야(Mafiya) 란뜨제프스카야, 홍콩계 삼합회 적련방, 멕시코 모렐로스 카르델이었고, 이들은 세력의 균형이 얼추 비슷한 무게추를 갖게 되자 손을 잡고 야이쑤코 섬을 삼분하여 지배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물론 근본이 조직폭력배이니만큼 협정 후에도 자잘한 분쟁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총을 꺼내어 살상하지 않기로 합의한 세 장소만큼은 섬에 폭탄이 투하되어도 잠잠할 정도였다. 바로 야이쑤코 섬의 유일한 성당과 병원을 비롯하여 홍가라는 중국 식당이었다. 마피아들에게도 주일에 기도하러 가고 감기약을 사러 가거나 잠시나마 마음 편하게 술 마실 곳은 필요했다.

러시아 마피야 란뜨제프스카야의 간부, 옐리세이 슈이스끼는 『홍가(洪家)』라는 글자만 새겨진 성의 없는 붉은 간판을 힐끗 보고는 문을 밀어 열었다. 쌀쌀하게 느껴질 정도의 에어컨디셔너 바람이 그를 반겼다. 관광지구를 벗어나며 더는 총을 감출 필요도 없기에 재킷을 벗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던 더위다. 푹푹 찌는 더위에서 탈출하니 겨우 생기가 돌았다. 불과 하루 전만 하여도 고향인 러시아의 공기를 마음껏 즐겼던 옐리세이에게 시차보다 더 적응하기 어려운 건 온도차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근처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멕시간이 이죽거렸다.

"어쩐지 돼지우리 냄새가 난다 했더니 카반(러시아어로 멧돼지)이구만. 두 달이나 안 보여서 뒈진 줄 알았더니만."

자신의 별명을 부르며 빈정거리는 모렐로스 카르델 조직원에게 만국 공통의 욕인 중지를 치켜세워주고 가게 안을 휘둘러보았다. 홍가는 점심시간부터 영업을 개시하는 식당이지만 대개 저녁 무렵에 술을 마시러 오는 마피아들이 많은 곳인데 두 달 만에 보는 식당은 오후 2시가 지나기 전임에도 손님들로 북적였다.

구석 테이블에서 익숙한 모습을 찾은 옐리세이는 '어서 옵쇼'같은 친절한 인사는 하지 않는 중국인 종업원 중 ㅡ물론 가게를 찾는 마피아들도 친절한 인사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ㅡ 아무나 한 명을 붙잡아 딤섬과 맥주를 주문하곤 걸어갔다. 마침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테이블에 마주앉아 있던 두 남자 중 한 명이 일어나며 인사했다.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여깁니다!"

덕분에 주변에서도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옐리세이는 모스크바에서 안 뒈지고 살아 남았냐, 네놈 상판을 보니 먹던 것도 얹히겠다 등등의 덕담이 쏟아지는 걸 무시하며 일행에게 다가갔다. 욕설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 하는 세심한 신경을 가진 작자들은 대개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대로변에서 시체로 발견되곤 한다.

옐리세이는 오랜만에 만나는 동료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대신에 그가 오든 말든 <허슬러> 에서 포르노 배우들의 레즈비언 섹스 신을 보고 있던 이오시프 실로바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개새끼야. 비행기 연착 좀 했다고 보트로 마중을 안 나와?! 일반인 틈에 끼여 오느라 불편해 죽는 줄 알았잖아!"
"네가 언제 올 줄 알고 나더러 하염없이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 시간에 폐막식이나 기다리고 있지."
"폐막식 시작하려면 멀었구만 뭔 정신 나간 소리냐. 형님이 두 달 만에 오시는데 당연히 마중을 나와야지."
"형님 같은 소리 하네. 내가 너보다 이 년 하고도 다섯 달이나 먼저 응애응애 울었다."
"동정은 내가 너보다 먼저 뗐거든?"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은 옐리세이에게 부하인 빠벨 홀로드니가 다시금 웃는 낯으로 인사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쉬시질 않고요."
"보스가 안 계시더라고. 다섯 시 넘어서 오신다길래 돌아가서 쉬기로 뭣해서 점심이나 먹으러 왔다."

종업원이 맥주를 먼저 테이블로 가져왔다. 300cc 맥주 한 잔을 단번에 꿀꺽꿀꺽 들이켜는 팔뚝과 손등에 새겨진 문신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꿈틀거렸다. 옐리세이는 빈 맥주잔을 탕 내려놓고 캬아, 하는 과장된 신음을 내며 늘어졌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이 엿 같은 날씨는 몇 년을 살아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이오시프가 여전히 잡지를 팔랑팔랑 넘기며 물었다.

"본국 상황은 어때?"
"뭐, 잘 돌아가고 있지. 대두목도 정정하시고......."

배에서 꾸루룩 소리가 났다. 식당 여기저기에서 풍기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뱃속을 더 요동치게 하는 것 같아 옐리세이는 허전한 입맛을 다셨다.

"스베뜰라나 샬....... 뭐라고 하는 배우를 새 첩으로 들이셨던데?"
"어, 설마 스베뜰라나 샬리노프입니까?!"

빠벨이 기겁하며 테이블에 바짝 몸을 굽혔다. 옐리세이는 이 새끼가 왜 이러나 싶은 뚱한 얼굴로 보며 입 속으로 이름을 두어 번 굴려 보았다.

"스베뜰라나 샬리노프........ 대충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아는 사람이냐?"
"당연하죠!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 후보까지 올라갔던 유명한 배우인데요! 작년 말에 갑자기 은퇴했다는 소식이 들리길래 사생아를 낳았다든가 스파이 혐의로 숙청당했다든가 몰래 결혼하였다든가 온갖 소문이 다 돌았습니다. 근데 대두목의 정부가 된 거였다니."
"많이 아끼시는 여자인가 봐. 소치의 다차(러시아의 별장) 중 하나를 그 여자에게 주셨더라고. 그 왜, 6년 전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던 곳 말이야."
"직접 만나보셨어요?!"
"한 번. 사인이라도 받아올 걸 그랬나."

배우든 뭐든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는 옐리세이는 시큰둥했지만 빠벨은 부러움에 땅을 쳤고, 이오시프는 소치의 다차라는 말에 반응했다.

"대리석으로 도배된 그 호화로운 다차 말이야? 크, 부럽다. 거기 정원의 조각상 하나만 팔아도 10년은 먹고 살 텐데."
"억울하면 너도 대두목 정부가 되든가."
"내일이라도 당장 모스크바 가는 비행기 표 끊어야겠구만."

시시덕거리는 사이에 요리가 나왔다. 이오시프와 빠벨이 홍가에 도착한 시각도 옐리세이와 비슷했는지 테이블에는 옐리세이가 주문한 딤섬을 비롯하여 세 사람의 요리가 같이 차려졌다. 옐리세이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어, 뭐야. 벱스뜨로가나프(러시아 요리-볶은 쇠고기 요리) 아냐? 여기 언제부터 중국 요리 말고 우리나라 요리도 했냐?"

이오시프는 소스를 듬뿍 얹은 고기를 한 점 먹고 만족한 표정이 되었다.

"한 달 전에 새로 온 요리사가 있는데 요리를 잘해. 간단한 요리라면 대충 레시피 알려주면 메뉴판에 없어도 만들어줘. 대신에 가격이 좀 비싸긴 한데 그 정도쯤이야."

과연.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뜬금없이 요리책을 사오라고 하더니 그런 이유였나. 옐리세이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 테이블을 훑어보았다. 본래 메뉴인 중국 요리 외에도 이국적인 요리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이오시프의 접시에서 고기와 버섯을 포크로 쿡 찔러 한입에 먹은 옐리세이는 감탄했다.

"세상에. 우리 엄마보다 만든 벱스뜨로가나프보다 더 맛있잖아."
"네 혀는 14년 전의 요리 맛도 기억하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끝까지 꼬투리잡긴."

옐리세이는 딤섬은 밀어두고 벱스뜨로가나프를 뻔뻔하게 계속 입으로 옮겼다.

"어제까지 고향 음식 잘 처먹고 온 놈이 왜 남의 접시를 빼앗아?"
"야. 모스크바에서 먹는 벱스뜨로가나프랑 야이쑤코에서 먹는 벱스뜨로가나프랑 같겠냐."

유치한 투덜거림에 빠벨이 자기 몫의 접시를 옐리세이에게 밀어주려던 때에, 술을 마시며 카드를 치던 중앙 쪽 테이블에서 소란이 일었다. 에스파냐어로 싸우고 있어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었으나 보나마나 속임수를 쓰던 게 들켰거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지다가 욱하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금세 흥미를 잃고 늦은 점심으로 의식을 되돌리려 했지만 시끄러운 다툼은 쉬이 진저되지 않았다. 어차피 가게 안에서는 총기의 사용이 엄금되어 있으니 싸워봤자 주먹질로 끝날 텐데 뭐가 이리 계속 시끄러운 건지 짜증이 났다.

걸쭉하게 욕설이나 퍼부어주려고 등을 돌린 옐리세이의 앞으로 빙글빙글 도는 무언가가 묵직하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이윽고 텅, 하는 둔탁하지만 예리한 소리가 식탁 중앙에서 꽂혔다. 반사적으로 놈들의 식탁을 확인한 옐리세이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정확히 식탁 정중앙에 두껍고 커다란 중화식도가 박혀 있었다. 불과 1초 전까지만 하여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싸우려면 가게 더럽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싸워. 쓰레기들아."

주방 카운터 안쪽에서 나직한 으르렁거림이 넘어왔다. 멱살을 잡을 기세이던 두 멕시코인은 투덜대며 지폐 몇 장을 식탁에 내던지고는 가게를 나갔다.

시시하게 다툼이 정리되자 잠깐 구경거리에 주목했던 마피아들은 제각기 자신의 용무로 돌아가 요리를 먹거나 술을 마셨다. 식당은 다시금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이오시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이야."
".......어?"
"저놈이 새로 온 요리사라고."

식칼을 던진 장본인이며, 목소리의 주인이며, 솜씨 좋은 새 요리사이기도 한 동양인 남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걸어 나왔다. 분주하게 식탁을 정리하던 종업원이 얼른 식칼을 뽑아서 건넸다. 남자가 엷게 미소했다. 짧은 중국어 대화가 몇 마디 오가고 나자는 이내 등을 돌려 도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인마. 침 떨어진다."

입을 헤 벌리고 남자의 뒷모습, 정확히는 엉덩이를 정신없이 보고 있던 옐리세이는 이오시프의 핀잔에 멈칫하며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햇볕에 바래 살짝 변색할 기미가 보이는 폴로 셔츠와 면바지에 뒤축을 구겨 신은 스니커즈라는 평범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복장의 남자였으나, 무던한 복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육체미가 그곳에 있었다. 짧은 시간 눈앞을 지나갔던 남자의 차진 엉덩이를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옐리세이는 침을 삼켰다. 적련방에 속해 아쉽게 포기했던 여행사 가이드의 쫄깃한 엉덩이를 단번에 지울 만큼 완벽한 엉덩이였다.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탄력 있게 올라붙은 맨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는 것만 같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난 옐리세이의 옆에서 이오시프가 히죽거리며 빠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 봐라. 내가 5분도 안 간다고 했지?"
"에이,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아무리 그래도 5분은 생각해 주셨어야죠."

빠벨이 아쉬워하며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10달러를 꺼냈다. 반쯤 홀린 기분으로 엉덩이를 쫓아 주방으로 향하려던 옐리세이는 이 쑥덕거림에 이성을 손톱만큼 회복했다.

"그거 뭔데?"
"딱 네 취향의 엉더이잖아. 네가 저 자식 엉덩이를 보면 한눈에 반해서 5분도 못 버티고 쫓아갈 거라고 내기했지."
"누구를 내깃거리로 삼는 거냐. 썩을 놈들."

그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냉큼 3달러를 자기 몫으로 챙겼다.

"이오샤(이오시프의 애칭). 근데 쟤 엉덩이에 박은 놈 있냐?"
"그런 소문은 못 들었는데. 네가 생각하는 거산큼 야이쑤코에서 남자 엉덩이에 환장하는 호모는 많지 않아."
"씨발. 저 엉덩이는 헤테로도 호모로 만들 꼴리는 엉덩이라고. 아무튼 처녀라 이 말이지, 좋아."

어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은 옐리세이는 손바닥을 비비며 지체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이오시프는 친구의 건투를 빌며 옐리세이 몫의 딤섬까지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마침 남자도 검은색 쓰레기봉투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자신에게 용건이 나갔고, 옐리세이도 유혹적으로 흔들리는 엉덩이를 핥듯이 보며 쪼르르 따라 나갔다.

남자는 뒷문을 열면서 그제야 옐리세이를 보았다. 날 따라온 거냐고 묻기도 전에 옐리세이는 얼른 등을 밀어내며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가 뒷손으로 문을 닫았다. 저 엉덩이를 마음껏 탐하려면 사람이 없는 편이 낫다.

조금 찌푸린 표정이기는 했으나 일단은 순순히 밀려 나온 남자가 옐리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랬다. 남자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동양인 주제에 뭐가 이렇게 키가 커!'

옐리세이는 확 인상을 썼다. 약간 구부정하게 서 있을 때는 잘 실감하지 못했지만 등을 곧게 펴니 올림 하여 185cm인 자신의 머리 위에 놈이 있었다. .......뭐, 하지만 키가 비슷하면 ㅡ자기보다 큰 게 아니라 비슷한 거라고 옐리세이는 정신 승리 중이었다ㅡ 서서 떡 치기 좋으니까 괜찮겠지. 엉덩이는 키랑 상관없기도 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고쳐먹으며 남자의 전신을 눈으로 핥았다.

반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뚝을 보았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얇은 옷감으로 가리지 못한 남자의 흉근이 눈을 휘어잡았다. 적당히 햇볕에 그을어 갈색에 가까운 윤기 나는 피부가 동양인답게 체모가 적은 점도 마음에 들었다. 옐리세이의 취향은 매끄럽고 뽀얀 속살에 체모 적고 아담한 사이즈의 연하의 청년이다. 남자는 피부도 희지 않고 아담하지도 않고 하물며 나이도 연하가 아닌 것 같았지만 그 모든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는 엉덩이의 소유자였다. 어쨌든 중요한 건 구멍이니 엉덩이만 꼴리면 아무래도 좋다.

'근육 탄탄한 애들 구멍이 잘 조이긴 했지.'

상상만으로도 불끈불끈했다. 이 자리에서 당장 놈을 벽으로 밀쳐 바지를 벗기고 싶었지만 다른 칫은 다 해도 강간만큼은 하지 않는 옐리세이는 침착하게 심호흡했다.

"너, 처녀냐?"
"........."
"처녀가 아니라도 괜찮지만, 처녀라면 돈 더 줄게."
"........."

남자의 대답은 없었다. 혹여 마피아라는 걸 눈치채고 겁에 질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옐리세이는 빙그레 웃었다. 자신이 미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외모라는 무기를 완벽히 활용할 수 있는 사내였다.

"걱정하지 마. 오빠는 네 후장 강제로 따먹고 버리는 그런 나쁜 놈 아냐. 처녀를 따먹은 적은 많지만 구멍 찢어진 적은 없어."

동시에 그는 자신의 외모와 언행의 괴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내이기도 했다.

물끄러미 옐리세이를 보기만 하던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나직하게 울리는 저음이 그를 향했다.

"쉽게 말해서 나랑 붙어먹고 싶다는 뜻인가?"

외국인에 듣기에 어눌한 홍콩 영어가 아니라 매끄러운 영국 영어였다. 남자는 입이 작았다. 젠장. 옐리세이는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저 작은 입에 자신의 훌륭한 물건을 쑤셔 넣고 목젖까지 닿도록 퍽퍽 박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얘기 잘 통해서 좋네."

남자에게 바짝 다가서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팽팽하게 발기한 앞섶이 남자의 사타구니를 스쳤다.

"이렇게 매력적인 엉덩이는 처음이야. 난 여기서 한 번 몸 풀고 싶은데 넌 어때? 밖이라서 안 내키면 호텔로 가도 되고."

흥분을 참고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신의 배려를 자찬하며 옐리세이는 슬금슬금 손을 움직였다. 허벅지를 지분거리며 나아간 손끝에 고지가 닿는다. 엉덩이까지 지척이었다.

노골적인 희롱에도 잠자코 있던 남자가 미소했다. 이 미소는 필시 긍정의 뜻이다. 확신한 옐리세이는 자신도 미소하며 벨트를 풀었다.

필시 풀었을 것이다. 끔찍한 고통이 그의 고간을 강타하기 직전까지는 분명 그러하였다.

"끄아아아악!!!"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쓰러진 그의 등으로 싸늘한 일갈이 떨어졌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딱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바퀴벌레야. 다른 하나는 뭔지 아냐? 바로 너 같은 호모다. 이 더러운 호모 새끼야."

같은 남자이니 그 고통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인정사정없이 그의 고간을 무릎으로 찍은 남자는 쓰레기봉투를 내려놓고는 고통으로 나뒹구는 옐리세이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돌아갔다.

"끅....... 너, 너! 씨발년아! 당장 서!"

신음을 짓씹으며 사납게 외쳤지만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글썽글썽 눈물까지 맺힌 시야로 엉덩, 아니 발이 점차 멀어지는 걸 보며 옐리세이는 이를 갈았다.



***



"레샤(옐리세이의 애칭). 얼굴이 왜 그렇게 죽상이냐."

란뜨제프스카야 타이 지부의 두목 체자르 주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의 부하를 보았다. 옐리세이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뚱하게 대꾸했다.

"별일 아닙니다."
"별일이 아닐 리가 있나."

체자르의 눈매가 마뜩찮게 찌푸려졌다. 옐리세이는 최초로 야이쑤코 섬에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그의 부하였고, 5년 동안 동고동락한 측근이기도 하다. 굳이 KGB 출신인 그의 예리한 관찰력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녀석의 기분이 어떠한지 정도는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었다. 즉흥적이고 솔직한 옐리세이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

"본국에서 일이 있었나?"

두 달 동안 조직의 일을 맡아 모스크바에 다녀온 녀석의 얼굴이 신통치 않으니 적잖이 우려되었다. 그러잖아도 모스크바의 사정이 썩 낙관적이지 않다는 첩보를 받은 참이다. 옐리세이는 체자르가 제일 신뢰하는 부하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에 두 달이나 보낸 것은 유독 무더위에 약한 그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동물적인 육감에 기대를 거는 바도 있었다.

올 초 크렘린 궁의 새 주인이 된 블라지미르 푸틴은 전례 없는 강경한 대응책으로 마피야를 관리했고, 군소 조직은 몰락과 해체의 길을 걸었다. 란뜨제프스카야는 러시아 정부와 밀약한 대 조직 중 하나라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으나 급격한 변혁은 인식을 넘어선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체자르느 산하 조직이 공식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 이외의 것이 필요했다. 분위기의 변화이든 사소한 실마리이든 무엇이든 좋았다. 세상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국제 전화나 PC를 사용하면 바로 옆집과 대화하는 것만큼 실시간 연락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동남아시아의 구석과 러시아 본국은 거리가 너무 멀다.

"아씨, 쪽팔린데......."

온화하지만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채근에 옐리세이는 결 좋은 머리칼을 벅벅 긁었다.

"저, 체자르 끼릴로비치. 진짜 진짜 진짜 별거 아니거든요. 근데....... 꼭 비밀 지켜주셔야 합니다. 꼭이에요, 꼭."
"본국 일이 아닌 거냐?"
"네. 제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염려하였던 사안은 아닌 것 같아 체자르는 표정을 풀었다.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시가를 커팅하고 불을 붙였다. 공들여서 향을 잘 입힌 감미로운 맛이 그윽하게 입 안쪽으로 번졌다. 느긋하게 등을 기대자 의자가 작게 삐걱거렸다.

"별일이든 아니든 일단 들어봐야 알 것 같으니 말해 봐라."

옐리세이로서는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까지 밝혔으니 체자르가 호기심을 거두어주길 바랐건만, 그는 영 발언을 철회할 낌새가 안 보였다. 오히려 경청하겠다는 듯 여유롭게 시가를 빨고 있는 모습에 반쯤 자포자기하여 입을 뗐다.

"실은요, 방금 점심 먹은 가게에 새 요리사가 고용되었더라고요. 아무래도 일반인 같은데......."

수작을 걸다가 사타구니를 찍히고 본전도 못 건졌다는 요지의 말을 우물거리면서 늘어놓는 통에 체자르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저 녀석 얼굴이 저렇게 죽상인 것도, 쪽팔려서 이야기를 못 하겠다는 것도 바로 이해되었다.

어이없어하는 기색을 감추지도 않는 체자르에게 옐리세이는 우물쭈물 변명까지 했다.

"제가 거기에 다마 몇 개를 모스크바에 가기 전에 넣었잖습니까. 하필이면 그 부분이 찍혀서 피부를 찢고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고요. 혈뇨가 나오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화장실도 세 번이나 갔다 왔어요."
"일은 안 터졌냐?"
"존나 쪽팔리긴 한데, 그래도 제 다리 사이의 매그넘은 멀쩡합니다."
"그러게 왜 다마 따위를 넣어."
"멋있잖아요."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 언뜻 보았던 옐리세이의 물건을 무심코 회상한 체자르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게 멋있다고? 저 녀석이 한물간 야쿠자 영화에 심취하였을 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등짝을 걷어차서 TV 앞에서 내쫓았어야 했다.

"여자들은 보형물 박는 거 안 좋아한다. 자지러진다는 거 다 헛소리야."
"남자들은 좋아할지도 모르죠!"

오늘 크디큰 쪽팔림과 고난을 넘기고도 무사히 생존한 자신의 것을 떠올리니 기력이 샘솟은 옐리세이가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세웠다. 보형물 삽입 수술을 하고 안정되자마자 러시아행 비행기를 탔고, 러시아에서는 눈치 보느라 바빠서 사창가를 찾아갈 시간이 없었던지라 본의 아니게 금욕 기간이 길어지고 있는 그는 꽤 욕구불만 상태였다. 구슬을 삽입하긴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써먹지를 못하여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성기에 삽입되는 여자가 질색하는데 성기도 아닌 구멍으로 삽입되는 남자가 좋아할 리가 있겠느냐는 퉁박이 체자르의 혀끝을 살살 간질였지만 길게 이야기할 만큼 흥미있는 소재도 아닌 탓에 화재를 돌렸다.

"아무튼. 그 요리사 엉덩이가 이쁘던?"
"죽여줍니다."
"뭐라고 작업 걸었길래 대뜸 거기부터 걷어차였냐."
"음. 평소랑 똑같이 작업했죠."

처녀부터 시작해서 호텔까지 이어지는 '평소와 같은' 작업 멘트를 들은 체자르는 무겁게 침음했다. 그 요리사가 제아무리 호모포비아라 할지언정 일반인이 이마에 '나 마피아요'라고 써 붙인 듯한 옐리세이의 사타구니를 가격하였다는 사실이 미심쩍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단번에 그 심정을 공감했다. 자신이었다면 반쯤 죽여 놓았을 것이다.

체자르는 시가 향을 입속에서 굴렸다.

"넌 어떻게 된 놈이 일반인을 남창 대하듯이 취급해?"
"엥? 그럼 어떤 취급을 해야 하는데요?"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나아가야지. 넌 강간은 안 하잖아."

호감을 쌓고 좋은 시간을 보낸 뒤에 멋진 분위기 속에 식사도 하고 섹스를 한다는 보편적인 데이트 코스를 들은 옐리세이가 손사래를 쳤다.

"빠구리 한 번 뜨고 말 건데 절차가 뭐 그렇게 복잡해요?"
"쉽게 하려면 남창을 찾아가고. 그놈 꼬시는 거 도와줄까?"

체자르는 동성애자를 편견 없이 대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옐리세이는 호모이기 전에 그가 꽤 귀여워하는 부하였고 심심풀이 소일거리로는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뒤끝 없고 부담 없이 원나잇할 수 있는 남창만 상대하던 녀석이 일반인에게 첫눈에 반했다니 궁금하기도 했다.

으음, 하고 나름대로 고민하던 옐리세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꼬실래요. 저 좋다고 질질 싸면서 엉덩이 흔드는 년들 많으니까 필요 없어요. 고분고분 옷 벗고 다리 벌리는 년이 좋지 가시 세운 건 딱 질색입니다."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충격이 여전한지 그는 아주 치를 떨었다.

보고를 마친 옐리세이가 서재를 나간 후에야 문득 체자르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녀석이 야이쑤코를 비웠던 두 달 동안 새로이 고용된 요리사는 그가 알기에 한 명뿐이었다.

'허어. 레샤가 말한 사람이 홍가의 그 남자는 아니겠지.'

가끔 조직원들이 만들고는 하는 고향 요리보다 훨씬 더 맛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어 부하를 시켜 포장해 오게 한 적도 있었다.

'홍가의 새 요리사라면 자칫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설마,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곧 지웠다. 그가 야이쑤코의 모든 음식점의 정황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두 달 사이에 새 요리사가 온 가게는 홍가 이외에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홍가의 새 요리사가 어딜 봐서 일반인으로 보인단 말인가.





핥으면 달콤한 초콜릿 맛이 느껴질 것 같은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양쪽 관자놀이를 움켜잡고 내키는 대로 박아대던 성기를 빼냈다. 남자가 기침을 쿨럭거리며 가쁘게 헐떡였다. 돌기처럼 오돌토돌 돋은 구슬이 입천장을 긁었는지 피가 약간 묻어 있었다. 침으로 질척하게 젖은 성기를 남자의 콧잔등과 뺨에 문댔다. 희뿌연 체액이 이마와 머리카락까지 튀었다. 혀를 내밀어 끈덕지게 흐르는 정액을 받아 삼키며 남자가 속삭였다.

'.......제발, 넣어줘.'

남자의 손이 엉덩이를 부여잡고 양쪽으로 한껏 벌렸다. 농락당하여 붉게 부은 구멍에 침을 삼키며 옐리세이는 눈을 떴다.

"씨발, 또......."

잠에서 깨자마자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은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속옷이 질척했다. 또다, 또.

"아오. 이틀 내내 몽정이라니 14살 때도 이런 짓은 안 했어."

옐리세이는 자괴감에 머리를 싸맸다. 그에게도 학교 선배를 향한 풋풋한 사랑을 키우며 선배를 반찬 삼아 자위나 몰래 하던 수줍은 첫사랑의 추억 정도는 있었지만, 수줍음과 십 대의 혈기가 동시에 불끈거리던 그 시절에도 선배를 꿈꾸면서 이틀 연속으로 몽정한 적은 없었다.

어제 처음 몽정하였을 때에는 금욕 기간이 길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늘은 멜닛 스트리트에서 남창을 사서 질펀하게 뒹굴고 돌아온 참이다.

그런데도 또 이 모양이다.

어두컴컴한 천장에 남자의 야릇한 얼굴과 엉덩이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고것 참, 맛깔스럽게 생겼는데.......'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꿀꺽. 목 안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에 제풀에 멈칫한 그는 일단 날이 새기 전에 팬티라도 빨아야겠다는 생각에 비척비척 일어났다.

바닥에 발을 딛자 어슬렁거리며 방 안을 가로지르던 도마뱀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랐는지 쪼르르 방구석으로 사라졌다. 처음 타이에 도착했을 때는 도마뱀이 제집처럼 드나드는 것에 깜짝 놀랐으나 이제는 익숙해졌다. 반쯤 애완동물 삼아 이름까지 붙여주고 있지만 이름을 붙여준 그놈이 내일도오는지 새 도마뱀이 내일 오는지는 알지 못했다.

속옷을 갈아입고 방 밖으로 나갔다. 블라인드 사이로 희붐하게 스미는 햇살이 거실 모서리에 걸린 이콘을 비쳤다. 성모님 앞으로 정액에 젖은 팬티를 들고 가자니 부쩍 민망해졌기에 옐리세이는 반사적으로 성호를 긋고는 후딱 화장실로 들어갔다. 함께 살고 있는 빠벨이 깨기 전에 팬티를 빨아야 했다. 아침부터 빨랫줄에 팬티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 있는 걸 보면 무엇 때문에 빤 건지 눈치를 채긴 할 테지만, 몽정한 팬티가 발각되는 것보다는 덜 쪽팔릴 것이다.

화장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팬티를 빠는 것으로 정신을 분산시켰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엉덩이는 내도록 머릿속을 아른아른 맴돌았다. 차라리 한 번이라도 그 엉덩이를 주무르며 쑤셔 박았으면 금방 잊었을 텐데 손가락으로 찔러 보기만 하고 못 먹은 떡이 되었으니 잊으려고 해도 자꾸만 상기된다.

".......빌어먹을."

섰다. 남자가 작은 입으로 힘겹게 자신의 물건을 빨던 꿈을 떠올리자 주책없는 분신이 반응했다.

옐리세이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김느 라씨스꺼이 피지라찌(러시아 국가)를 부르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웅장한 음악을 상상하니 흥분이 다른 쪽으로 쏠려 아랫도리는 가라앉았다. 빨랫줄에 내던지듯이 팬티를 매달고 방으로 돌아왔다. 잠은 거의 다 날아갔지만 어쨌든 자야 했다. 더 눈을 뜨고 있다가는 무슨 상상을 하게 될지 두려웠다. 혹시 놈의 엉덩이를 떠올리며 수음하게 될지도 모른다. 최악이었다.

노력이 효과가 있어 어떻게든 잠이 들었고 정오 무렵에야 일어났다.

천만다행으로 놈의 꿈은 꾸지 않았다. 몽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이 수마의 깊은 곳에서 헤어 나오자마자 놈의 엉덩이를 떠올렸다.

옐리세이는 자신이 놈의 엉덩이에 단단히 홀려 있음을 힘겹게 자인했다.

카지노 갈락씨아는 체자르가 4년 전 모렐로스 카르텔의 당시 타이 지부 보스에게 포커 승부에서 이겨 양도받은 곳으로 현재 지배인은 이오시프였다. 고통스러운 자인의 시간이 끝나자 옐리세이는 점심을 우유 한 잔으로 떼우고 털레털레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카지노 스태프들이 사용하는 뒷문을 통해 사무실로 향했다. 마주치는 조직원들이 하는 인사에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끄덕하며 사무실을 노크했다.

"어라.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마침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고 있던 이오시프가 갸웃했다.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르다시피 직행하긴 했지만 막상 음식을 보니 허기가 일어 맞은편에 털푸덕 앉으며 감자튀김을 입으로 가져왔다.

"모스크바 다녀온 일로 며칠 휴가받았어."
"점심 빼앗아 먹으러 왔냐?"
"그래, 인마."

옐리세이는 우걱우걱 감자튀김을 씹어 삼켰다. 몸이 꼴리니 섹스하고 싶고, 배가 고프니 처먹는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동물적인 본능으로만 살아가는 것 같아 왠지 한심해졌다.

"이오샤. 너한테 부탁할 게 있는데."
"그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냐."

입술 끝에 묻은 소스를 핥으며 이오시프가 거들먹거렸다.

"이런, 젠장. 이야기부터 좀 들어보고 구박하라고!"

울컥하여 외치긴 했으나 어디까지니 지금 굽히고 들어가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옐리세이는 한심한 신세에 한숨까지 나오는 걸 삼키며 중얼거렸다.

"이오시프 게오르기예비치. 간절히 바라옵건대 소인의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제발."
"말로만 때우려고?"
"한잔 쏜다, 개자식아."

이오시프가 그제야 킬킬거리며 턱짓했다. 친구인지 웬수인지 모르겠다고 툴툴대며 옐리세이는 남은 감자튀김을 쓸어 입속으로 밀어 넣고 우물거렸다.

"너 제수씨랑 연애할 때 어떻게 했어? 일반인 하나 꼬시려고 하는데 참고 좀 하려고."

이오시프는 기념품 가게의 현지인 종업원, 즉 일반인과 2년간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하여 달콤한 신혼을 만끽 중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등 구 소비에트 여방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팔러 온 매춘부도 아닌 현지인과 결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이기도 하였다.

거창하게 부탁까지 한 것치고는 대수롭지 않은 용건이라 이오시프는 선선히 대꾸했다.

"특별할 게 있나. 데이트 신청하면 유이가 받아주긴 했는데 내가 마피아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무서워서 응해 주는 것 같은 눈치더라고. 그래서 유이 앞에서는 되도록 마피아 티를 덜 냈지. 권총도 안 보이게 숨기고 언성도 안 높이고 길 가다가 시비도 안 걸고....... 뭐, 그렇게 평범하게 배려해 줬어. 지금도 유이랑 있을 때는 일얘기 안 해. 그러다 보니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더라. 네가 마피아라는 인식을 덜 하게 하려면 부드럽게 대해 줘. 기둥서방 노릇하려는 게 아니라면 절대 주먹 올리면 안 돼. 두들겨 패면서 여자 길들이기 시작하면 일반인이 아니라 창녀 길들이는 거랑 똑같지."

고개까지 끄덕끄덕하며 경청하던 옐리세이가 질문했다.

"데이트도 제대로 해야 한다며. 데이트 코스 추천 좀."
"야이쑤코에는 식당이나 영화관 외에는 갈 만한 데 없어. 네가 꼬시려는 그 남자 데리고 사창가를 가겠냐 클럽에 가겠냐 카지노를 가겠냐. 차라리 시간 날 때 꼬창에 일박 일정으로 다녀오는 게 나아."
"제기랄. 씹질 한 번 하러 꼬창까지 가란 말이야?"
"떡 치려고 꼬시는 거냐?"
"당연하지!"

어처구니없어 튀어나온 질문을 옐리세이는 단호하게 긍정했다.

"그 새끼가 말이야, 처음 꼬셨을 때 날 찼다고. 그래서 꼬시려는 거야."
"뭐야. 벌써 작업 걸다가 차였냐? 너 싫다는 놈 꼬셔서 뭐 하게? 구질구질한 거 안 좋아하잖아."
"복수해야지."

음험한 미소가 옐리세이의 입가에 감돌았다.

"복수할 거야. 그 엿 같은 새끼 꼬셔서 침대에 쓰러트린 뒤에 내 훌륭한 물건과 절륜한 테크닉으로 천국을 보여주고 나 없이는 못 사는 몸으로 만든 다음에 나도 찰 거다. 하하하!!"

엉덩이를 따먹겠다는 당초의 욕망도 충족되고 걷어차인 사타구니에 대한 보복도 되는 일석이조의 계획이었다. 그놈이 자신의 발빝에 엎드려서 눈물콧물 흘리며 제발 박아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짜릿짜릿한 쾌감이 척추에서 튀었다. 뭐, 엉덩이도 잘 조이고 애걸복걸하면 가끔 박아줄지도.

이오시프는 고작 그런 이유로 꾄다는 얘기에 한심하고 쓸모없는 물건을 보는 듯한 시선을 조금도 숨기지 않으며 혀를 찼다.

"거참, 굉장히 장대하고 멋진 복수이시긴 한데요........ 차라리 애들 몇 명 불러서 돌리고 비디오라도 찍지 그러냐? 미국 쪽은 게이 포르노도 잘 팔리잖아. 용돈 벌이도 되고 좋네."
"야. 난 강간은 안 해."

히죽히죽 음흉하게 웃던 옐리세이가 정색했다. 이오시프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다. 옐리세이의 결벽도 결벽이거니와, 일반인 사상자는 수습이 곤란하다. 마피아나 마피아에 고용된 프리랜서 용병은 팔다리가 뽑히든지, 죽든지, 죽느니만 못한 신세가 되든지 타이 경찰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지만.

"여튼 레샤, 눈독 들인 일반인이 누군데? 일반인은 여태 관심 없었잖아. 나도 아는 사람인가?"
"음......."

옐리세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속으로 말을 골랐다. 본인 입으로 말하자니 참 체면도 서지 않는 쪽팔린 일이긴 했지만 사타구니가 걷어차였다는 점을 숨겨도 얼추 대답은 될 듯했다.

"홍가의 요리사야. 새로 왔다는 그 새끼."

이오시프는 무심코 '말도 안 돼.'라고 대답할 뻔했다. 본국에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일반인을 유혹하겠다고 들썩거리고 있으니 누군지 혼자 추측해 보긴 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식당에서 요리사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나간 지 몇 분 되지 않아 요리사 혼자만 돌아오고 옐리세이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시뻘겋게 상기한 얼굴로 돌아왔으니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건 짐작이 갔지만, 계속 노리고 있을 줄이야.

'어떻게 차였길래 저 자식이 이렇게 날뛰는 거야.'

몹시 궁금하긴 했지만 호모들의 치정극을 자세히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조용히 의문을 접었다. 대신에 다른 의문을 꺼내어 던졌다.

"진짜 일반인이 맞긴 하냐? 다른 곳도 아니고 홍가의 종업원인데?"

홍가의 주인은 모 차이니즈 마피아 보스의 정부라는 소문까지 있는 사람이다. 종업원들도 면면이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생김새가 조직원이 아니냐는 수군거림까지 돌고 있으니 새로 고용된 요리사도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자칫 불똥이 애먼 곳으로 튀지 않을지 걱정하며 물었지만 옐리세이는 콧방귀를 꼈다.

"흠, 설마 마피아겠냐. 이 동네 차이니즈 마피아는 적련방이 꽉 잡고 있는데 다른 조직에서 일부러 이 먼 곳에 식당 하나를 내겠어? 깔보이지 않으려고 소문만 그렇게 낸 것일 수도 있지."

단순하고 저돌적이며 다혈질이라 멧돼지라는 별명까지 붙은 옐리세이답지 않게 논리적인 답변이었다.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혹 진짜 마피아라도 연애하다가 깨졌다는 이유로 엉뚱한 복수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일단은 걱정을 접었다. 여자를 빼앗긴 것도 아닌, 호모 치정극이라니 어느 조직에도 명분이 되지 않을 사유다.

"잘해 봐. 넌 얼굴은 받쳐주니까 분위기만 잘 잡으면 의외로 쑥쑥 진행될지도 몰라. 주둥아리 나불거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왜 발언을 조심해야 하는 건지 옐리세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넌 입만 열면 깬다.'라는 직설적인 말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본인이 깨달아야 하는 거지 주변에서 충고해 준다고 고칠 수 있는 입버릇이 아니었다.

"일반인이나 요리사라고 계속 부르는 것도 뭣한데, 이름은 뭐야?"

옐리세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모르는데?"
"........꼬셨다며?"
"어."
"이름도 모르면서 어떻게 꼬셨는데?"
"돈 줄 테니 호텔 가자고 했지."
"........."

갈 길이 구만리였다. 이오시프는 손목시계를 보고 여유 시간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사창가만 뻔질나게 드나들었지 연애는 처음이나 다름없는 친구에게 연애의 기초부터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했다.



***



야이쑤코 관광의 진짜 목적이 매춘과 도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일부 관광객이 현지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겠다는 이유로 관광지구를 벗어나 가이드 책자에도 기재되지 않은 거리와 가게를 탐방하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었다. 홍가는 차이나타운이 아닌 시가지에 있는 중화식당이라는 점에서 호기심 많은 관광객의 주의를 붙잡기에 좋은 가게였다.

조심스럽게 홍가의 문을 열고 들어온 관광객은 제아무리 관광지라도 가게의 손님 중에 현지인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라고, 위험한 인상과 분위기에 두 번째로 놀랐다.

관찰력이 좀 더 깊은 사람이라면 손님들의 옷 안이나 뒤춤에 권총이나 나이프 등이 적어도 하나 이상 꽂혀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대부분은 이쯤에서 발길을 돌려 나가지만 눈치가 없거나 반응을 부리는 관광객은 식사를 주문하기도 했다. 손님이 적은 점심 무렵이라면 조용히 식사만 하고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슬슬 마피아들이 술을 한잔 꺾으러 오는 저녁때라면 달랐다. 길을 잘못 든 관광객은 상스럽고 거친 말투로 시끌벅적하게 사방을 메운 요란한 다국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식사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어치운 채 나가기 일쑤였다.

홍가의 주인 홍위롄은 홍콩계 삼합회의 제일 큰 세력 중 하나로 적련방과 대립하는 송의방의 전대 총주 차오쑹왼의 정부였다. 3년 전 차오쑹왼이 암살당하여 정부와 외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그녀는 유산을 정리하고 야이쑤코에 정착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태국인에게서 가게를 인수하고 자신의 성씨만을 붙인 무성의한 간판을 올리는 것으로 홍가는 본격적으로 개정하였다.

처음부터 홍가가 불가침구역이 된 것은 아니었다. 식사 중 느닷없이 총격전이 벌어져 가게가 반파된 적도 있었다. 야이쑤코에서는 특기할 것 없는 평범한 사고였다. 관우상 옆에 나란히 놓인 두 자루의 청룡도는 장식 겸, 은퇴한 조직원으로 구성된 홍가의 종업원들이 그 사고 이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겸 걸어 놓은 무기였다. 하지만 둔탁한 날을 위협적으로 빛내는 청룡도가 무기로써 사용된 적은 없었다. 세 마피아 세력 두목들의 정례 회의에서 적련방 타이 지부의 보스 광룽이 주도하여 홍가를 안전지대로 공인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다.

그렇게 홍가는 화교의 가게임에도 적련방을 비롯한 세 마피아의 직접적인 영역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비록 홍가가 적련방의 보호하에 있는 가게는 아니지만, 그녀를 비롯한 종업원들이 화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동포의 사회와 절연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었기에 홍위롄은 차이나타운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섞이려 노력하였다. 하여 근래 그녀의 일과에는 차이나타운에서 어린아이들에게 태국어를 교습하는 시간이 추가되어 있었다.

저우룬칭이 그녀의 일과와 자신의 일과를 맞추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얘는. 몇 번을 말하지만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대두."

화장기 없는 수수한 낯에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펑퍼짐한 원피스 차림이지만 홍위롄에게는 홍콩 환락가에서 제일 늦게까지 불을 밝히던 술집의 마담다운 요염함이 남아있었다.

"예전에도 롄 누님이 출퇴근하실 때 제가 운전기사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저우룬칭은 대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태연히 대꾸했지만 홍위롄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여 네가 애송이였던 시절이잖아. 대체 몇 년 전 얘기를 하는 거니?"
"지금은 백수니까 그때랑 다를 것 없군요."
"우리 가게의 으뜸가는 요리사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그녀에게도 운전면허는 있거니와 홍가가 있는 와아딴 스트리트에서 차이나타운까지 직행하는 버스도 있다.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번번이 기사 겸 보디가드를 자청하는 저우룬칭에게 괜한 수고를 안길 수 없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사양하였지만, 그의 고집도 꺾이지 않았다. 결국 홍위롄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저우룬칭은 얌전하지만 고집 센 꼬마였다.

"볼일 다 보고 돌아오시기 전에 꼭 전화주세요. 지난번처럼 혼자 돌아오지 마시고요."
"알았어. 잘 들어가렴, 아칭. 이따 전화할게."

홍위롄이 아리들을 가르치는 회관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저우룬칭은 차에 탔다. 그녀의 말마따나 멀지 않은 거리이기에 홍가에는 곧 도착할 수 있었다. 슬슬 개점 할 시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뒤편의 공간에 차를 주차하고 뒷문으로 들어가니 그와 같이 주방에서 일하는 장쯔궈가 반색하여 맞았다.

"아, 칭 형님! 기다리던 참입니다."

다리 보조기의 끼긱거리는 소음이 성조의 굴곡이 큰 광둥어의 울림에 섞였다.

"음?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저우룬칭은 깨끗이 세탁한 앞치마를 꺼내다 말고 장쯔궈를 보았다. 장쯔궈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난감한 눈치로 허공에서 손가락을 버벅거리다 무턱대고 그를 당겼다. 그리고는 의아한 얼굴로 따라온 저우룬칭의 옆구리를 찌르며 주방 카운터 밖을 눈짓했다. 장쯔궈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내밀어 식당 내부를 살펴본 그는 무심코 욕설을 뱉을 뻔했다.

중앙 자리에 떡하니 앉아 방정맞게 다리를 달달달 떨며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는 남자는 사흘 전의 그 호모였다.

"개시도 안 했는데 저 새끼 뭐야?"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걱정되어 얼른 장쯔궈를 주방 안쪽으로 당기며 속닥거렸다. 장쯔궈가 난감해했다.

"개점 시각 아니라고 했는데도 다짜고짜 문을 열라고 밖에서 외쳐대니 도리가 있나요. 식사가 바로 안 된다고 해도 일단 들어와서 기다리겠대요."

저우룬칭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호모를 힐끔 곁눈질한 뒤에 신중하게 물었다.

"........설마 날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겠지?"

그의 실낱같은 기대는 가뿐히 거절되었다.

"아는 사이 맞았어요? 엉덩이 끝내주는 요리사를 찾는다길래 일단 저는 본 적이 없으니 아니고, 바오 아저씨도 요즘은 거의 가게에 안 오시니 아니겠고, 남는 사람이 칭 형님뿐이라 혹시나 했는데........"
"........."
"저 자식이 형님 엉덩이는 언제 봤습니까?"

입속으로 빌어먹을 호모 새끼에게 사나운 욕설을 퍼부은 후에 저우룬칭은 다시 입술을 뗐다.

"가게에서 잠깐 얼굴 봤을 뿐이야. 근데 뭐라던?"
"엉덩, 칭 형님을 뵙고 직접 이야기를 할 게 있댑니다."

그러며 장쯔궈는 '어떻게 할까요.'라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우룬칭은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정말이지, 이젠 호모라면 치가 떨렸다. 자신의 인생에서 호모라는 두 글자를 잘라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한 달 전, 내쫓기다시피 홍콩을 나와야 했을 때만 해도 더 이상 호모와 엮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은 기꺼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촌구석까지 와서도 호모가 꼬이다니.

'제기랄. 전생의 나는 백 명의 호모를 복상사시킨 요부였던 게 아닐까. 호모의 원혼들이 환생한 후에도 계속 들러붙어 있는 거야.'

그 혼자만의 몸이었다면 저 변태 같은 호모 새끼를 족치든가 조용히 담가버리든가 했을 텐데 불행히도 그는 홀몸이 아니었다. 필시 마피아일 게 뻔한 저 변태 호모가 난동이라도 부린다면 영업 방해는 물론이거니와 홍위롄에게까지 해가 가게 된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앞치마를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내팽개쳤다.

"아궈. 냉수나 한 잔 줘."
"차 타 드릴까요?"
"됐어. 변태에게는 찻잎이 아까우니까."

저우룬칭은 주방 밖으로 탁탁 소리 나게 걸어 나가 변태 호모의 앞에 물컵을 탕 내려놓았다. 반 이상 담겨 있던 물이 찰랑거리며 밖으로 넘쳤다. 애써 변태를 무시하며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정리하던 리뎬차이와 리뎬신 두 형제는 저우룬칭의 심기가 편치않아 보이자 얼른 안으로 사라졌다.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어졌으므로 반쯤 눈을 감고 하품하던 옐리세이는 탕 하는 소리에 괴고 있던 손에서 턱을 미끄러트렸다.

"깜짝이야......."

투덜거리며 반도 태우지 않은 켄트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재떨이에는 다섯 개비의 꽁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저우룬칭이 위압적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찾았다며."

섹시한 바리톤이었다.

옐리세이는 테이블 위로 드러난 저우룬칭의 허벅지부터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핥아올렸다. 첫 만남에서는 엉덩이에 온 정신이 쏠려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키도 크고 몸도 좋은 그는 얼굴도 봐줄 만했다. 삼백안에 초리가 길고 날카로운 눈매가 퍽 사나운 인상이지만, 콧대가 반듯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무엇보다 외꺼풀이 매력적이었다. 단단히 닫힌 얇은 입술은 못마땅하게 비틀려 있었지만 저 입이 자신의 물건을 정성 들여 빨던 것을 목격하였던 ㅡ물론 꿈에서ㅡ 옐리세이에게는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가게 오픈할 시각이 되어가니까 용건 있으면 빨리하시지?"

머릿속으로 멍하니 저우룬칭의 입술에 정액을 문대던 옐리세이는 그제야 정신을 수습하고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신의 차림을 점검했다. 어제 늦게까지 이오시프에게 연애 강습을 들은 후에 '평범'하게 보이기 위하여 즐겨 입던 슈트가 아닌 새 옷까지 샀다. 평범이라는 단어를 구현한 듯한 반소매 티셔츠에 블루진 차림이었기에 그는 흐뭇했다. 이 정도면 마피야가 아니라 유학 온 학생으로 보일 것이다.

옐리세이는 평범한 유학생은 벨트에 권총을 찔러 넣고 있지 않다는 것도, 드러난 맨살에 노골적인 문신을 새기지 않는다는 것도, 얼굴에 왼쪽 이마부터 오른쪽 눈 밑까지 비스듬히 가르는 흉터가 있지 않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안녕."
".......어어."

본인이 사흘 전에 무슨 짓을 했으며 무슨 짓을 당하고 갔는지 망각한 것 같은 해사한 인사에 저우룬칭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변태 호모가 해맑게 웃으며 용건을 꺼냈다.

"우리 친구부터 시작하자."

이 양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걸까.

"연애는 친구부터 시작하는 케이스도 많다며? 난 너랑 연애를 하고 싶어. 물론 내 궁극적인 목적은 널 따먹는 거고. 나랑 자자고 재촉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 천천히 친구부터 시작하는 거야."
"........"

이 뻔뻔한 변태의 멱살을 움켜쥐고 바닥에 메다꽂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거리에서 우연히 보았다면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눈길이 갔을 법한 귀족적인 화려한 용모의 미남이었으나, 현재 그의 주의를 끈 건 얼굴이 아니라 뒤춤에 언뜻 보이는 권총이었다. S&W M29이다.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지닌 44구경의 저 권총이 가게에 끼칠 피해와 조직원과 시비가 붙었을 때 러시아 마피아가 어디까지 보복을 할 것인가, 따위를 머릿속으로 계산한 후에 저우룬칭은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침착히 대꾸했다.

"너랑 친구하기 싫은데."
"튕기긴."

물론 변태는 그의 거절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옐리세이 슈이스끼라고 해. 풀네임은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슈이스끼."
"........"
"뭐 하냐? 빨리 내 이름 불러줘야지."
"내가 네 이름을 왜 불러야 하는데?"
"밑에 깔린 애들이 내 이름 부르면서 헐떡이는 거 존나 꼴리거든."

저우룬칭은 천장과 옐리세이의 권총을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잠깐 호흡을 다스렸다. 옐리, 뭐라고 하는 부분부터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하여간에 러시아 놈들 이름이란.

"너무 길어."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슈이스끼. 친구들은 옐랴나 레샤라고 불러."
"그래. 슈이스끼."
"옐라나 레샤라고."
"미스터 슈이스끼."
"야. 너 나랑 친구하기 싫냐?!"

무해한 짐승처럼 헤실헤실 웃고는 있지만 결국은 조폭 새끼였다. 대번에 인상이 사나워지며 주먹이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아까부터 친구할 마음 없다고 했잖아."

침착한 응대에 옐리세이는 주먹을 몇 차례 쥐었다 폈다 하며 그의 전신을 아래위로 보더니 다시 인상을 누그러뜨렸다.

"하다못해 이름으로라도 불러 봐라."

저우룬칭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 "옐리세이."라고 부르는 섹시한 목소리를 들은 옐리세이는 일단 이 정도에 만족했다. 첫날에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 된다고 이오시프가 충고했다.

".......뭐, 좋아. 그럼 이제 네 이름을 말해 봐."

명령하는 투도 마음에 들지 않아 저우룬칭은 대충 둘러댈까 고민하다가 순순히 대답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에 갓 부임하였던 영국인과 거래차 만났을 때 성만 대충 알려줬더니, 나중에 부하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름이 '칭꺼'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걸 설명하는 게 더 귀찮았다.

"저우룬칭."
"이름이냐, 성이냐?"
"저우가 성."
"그럼 이름은....... 어, 루....... 운친? 칭?"

낯선 발음이 어색한지 옐리세이가 입안으로 어설프게 이름을 몇 번 굴렸다. 익숙한 상황이었기에 저우룬칭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본에서는 슈 리세츠라고 부르기도 했으니까 발음하기 편한 쪽으로 불러."
"뭐야. 너 이름이 두 개냐? 어떤 게 본명인데?"

이름이 두 개인 게 아니라 읽는 방식의 차이라는 상세한 설명을 해 줄 호감은 전혀 없었기에 저우룬칭은 또 다른 이름을 댔다. 그의 보스였던 차오쑹윈에게 영어식 작명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충고를 듣고 2초간의 고민 후에 만들었던 이름이었다.

"어려우면 그냥 루이라고 해라. 영어 이름이니까."
"오, 좋아. 루이."

이름을 알려줬으니 할 도리는 다했다. 루이, 라는 이름을 두어 번 뇌며 만족한 기색인 옐리세이를 남겨두고 돌아가려던 왼쪽 손목이 턱 붙잡혔다.

뚱한 표정으로 이름만 성의 없이 말한 저우룬칭이 등을 돌리려 하자 반사적으로 손목을 붙잡은 옐리세이는, 그의 피부에 손이 닿자마자 당초의 목적을 망각했다. 굳은살이 박였음에도 커다란 손의 피부는 부드러웠다. 손가락도 길었다.

'씨발. 왜 이렇게 야들야들하냐.'

옐리세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엄지로 손등의 피부를 슬슬 어루만졌다. 두툼히 배가 나온 중년 남자가 어린 소녀를 희롱하는 것 같은 느끼한 손짓에 소름이 오싹 돋은 저우룬칭은 야멸치게 손을 뿌리쳤지만 옐리세이가 이미 그의 손등은 본 후였다. 손등부터 팔뚝을 휘감으며 올라가는 문신은 옷소매 안쪽으로 사라졌다. 갓 새긴 건지 꾸준히 관리하는 건지 섬세한 문신은 막 떨어트린 잉크처럼 선명한 검은색이었다. 옐리세이는 처음 보는 문양이 신기하여 눈으로 주욱 훑으며 생각했다. 저 문신에 자신의 물건을 문지르다가 정액으로 더럽히면 기분이 끝내줄 것 같았다.

다분히 욕망에서 기인한 충동이 일었지만 후일의 즐거움으로 미뤄두고 이오시프의 충고를 한 번 더 되새겼다. 통성명한 후에는 대화를 하여 취미나 취향 등에서 공통된 요소를 찾아서 화제를 이끌어나가라고 했었다. 통성명하자마자 공통점을 발견한 옐리세이는 신이 났다.

"나도 문신 있는데!"

옐리세이가 희희낙락하며 자신의 양쪽 팔뚝을 올려 보여주었다.

"이거 부티르카 형무소에서 새긴 거야. 잘 나왔지? 네 문신도 형무소에서 새겼냐?"
".......아니, 감옥 들어간 적은 없는데."

저우룬칭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 변태가 왜 갑자기 반색하는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대놓고 좋아하니 왠지 기분이 나빴다. 양쪽 팔뚝뿐만 아니라 손목과 손등에도 크고 작은 문신이 있었고 열 손가락에는 키릴 문자가 한 글자씩 적혀 있었다.

저우룬칭은 러시아 마피야에게 문신이란 곧 본인의 신상임과 동시에 범죄 이력이라는 의미를 몰랐고,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이 기분 나빠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다른 문신도 보여줄게."

서슴없이 웃통을 벗으려 하는 옐리세이를 제지했다. 왼쪽 팔에서 오른쪽 다리까지 이르며 저우룬칭의 전신을 휘감은 삼룡(三龍)의 문신은 문화대혁명 때 망명한 본토 출신의 문신사에게 50만 홍콩달러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2년 반에 걸쳐 새긴 것이었다. 형무소에서 한 싸구려 문신 따위와 비교하다니 우습지도 않았다.

"안 보여줘도 돼."
"쳇. 문신 한 번 보여주고 말하는 게 편한데."

러시아 마피야가 아닌 저우룬칭은 문신의 의미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옐리세이는 섭섭해하며 대신 입으로 자신의 프로필을 생각나는 대로 읊었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연애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이름은 아까 말했듯이 옐리세이 슈이스끼, 란뜨제프스카야의 조직원이야. 간부고. 고향은 보스크레센스크라고 모스크바 옆에 붙어 있는 동네야. 아버지는 엔지니어, 어머니는 교사, 그리고 세 살 많은 형이 한 명 있었는데 내가 14살에 가출해서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몰라. 지금은 28살이고 조직에 들어간 건 10년 전, 야이쑤코에 온 건 5년 전이다. 폭행죄로 재수 없게 짭새한테 걸려서 감옥 간 건 20살 때였는데 2년 복역하고 출소했고. 음....... 그리고 또 뭘 말해야 하지. 아, 맞다. 내 이상형은 너랑 정반대이지만 네 엉덩이가 정말 마음에 들어."

엉덩이라는 말에 저우룬칭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옐리세이는 마냥 태평하게 재촉했다.

"이제 네가 프로필을 말할 차례야. 나이는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몇 살이냐?"
"싫어."
"왜? 내 프로필 들었으니 너도 말해."
"프라이버시라서 말하기 싫어."

프라이버시라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냐고 순순히 물러나면 대화를 이을 수가 없다. 옐리세이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국적 정도는 물어도 괜찮을 것이다.

"국적은 어딘데? 그것도 프라이버시냐?"

당당하게 질문하는 옐리세이를 보는 저우룬칭의 시선은 변태 호모를 보는 시선에서 꼴통 호모를 보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뉴페이스라서 낯설다지만 화교가 운영하는 화교의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화교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야이쑤코에서 5년이나 있었으면 화교에 대해서도 대충은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이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 걸까.

"동남아 쪽 얼굴은 아니고. 중국? 일본? 어딘데?"

성의는 없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않던 저우룬칭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한국 사람이다. 남쪽 말고 북쪽."
"엥? 북한? 거짓말 아냐? 북한에서 어떻게 해외로 나와? 당 간부 아들이냐?"
"원래 남파 공작원이었는데 전향해서 남한에 귀순했지."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뻥은 술술 이어졌다. 러시아에서 고려인은 몇 번 봤지만 북한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라며 옐리세이가 신기해했고, 저우룬칭은 한심해했다.

"지난번에 네가 식칼 던지는 거 보고 닌자인 줄 알았어!"
"닌자 교육도 받았어."

주방에서 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식당 내의 대화라 본의 아니게 듣고 있던 장쯔궈의 웃음소리였다. 저우룬칭이 돌아보자 장쯔궈는 얼른 헛기침하며 허리를 숙이고 야채를 손질하던 본래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럼 그 문신도 북한에서 새긴 거냐? 무슨 도마뱀 꼬리 같은데, 맞아? 도마뱀치고는 희한하게 생겼네."
"아....... 북한에서만 자생하는 도마뱀이라서 그런 거야."
"희귀종이구나."

이쯤 되면 거짓말이라는 의심을 할 법도 한데 곧이곧대로 들은 옐리세이가 감탄하며 거듭 끄덕였다. 저우룬칭은 이 멍청이를 여태 상대한 시간을 매우 아까워하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전향한 간첩이라서 나랑 길게 얘기하면 너도 위험해. 북학에서 보낸 암살자가 어디에 있을지 몰라.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라. 착하지?"

옐리세이는 암살자를 왜 무서워해야 하냐는 대꾸를 하긴 했지만 통성명을 하고 공통 관심사를 찾는다는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하였으니 선선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놈의 흔적은 담배 냄새만이 남게 되자 저우룬칭은 한숨을 쉬었다. 30분 남짓한 대화였는데 30시간을 상대한 것처럼 피곤했다.

장쯔궈가 카운터 위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며 웃었다.

"칭 형님이 28살이냐고 묻다니 엄청 어리게 봤네요."
"빌어먹을. 어리다고 착각하고 만만히 여겨서 더 지랄을 하고 간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에이, 설마요. 슈이스끼는 원래 제멋대로인 놈이라고 하던데요."
"유명한 놈이냐?"
"네, 좀. 위험하기도 하고요. 별명이 멧돼집니다."

저우룬칭은 턱을 주억거렸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참 잘 지은 별명이었다. 여상하게 대화가 오가자 괜스레 숨을 죽이고 있던 리뎬신이 농담을 했다. 홍콩에 있을 때부터 저우룬칭의 측근이었던 장쯔궈와는 달리 가까이에서 말을 섞으며 교류하는 건 야이쑤코가 처음이라 리뎬차이와 리뎬신은 아직도 저우룬칭을 어려워했다.

"칭 형님이 슈이스끼를 죽이시려는 줄 알았어요."

거의 입도 대지 않은 물컵을 도로 주방으로 들고 돌아오며 저우룬칭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멱을 딸까 했는데 롄 누님 가게에 피를 묻히기는 싫어서."
"아......."

리뎬신이 어깨를 굳혔다. 지금이야 순한 양처럼 주방에서 밥이나 하는 신세지만 저우룬칭은 사람을 때려죽인 첫 살인이 12살이었다는 소문마저 있는 남자였다. 차오쑹윈의 동생인 차오쑹젠에게 그 새끼는 삼합회가 되기 위하여 태어난 새끼라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호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리뎬신을 본 저우룬칭이 피식거렸다.

"농담이야, 인마. 한창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때도 아니고 내 나이가 몇 갠데 기분 나쁘다고 사람을 죽이겠냐. 보아하니 발정 난 수캐인 것 같은데 적당히 상대해 주면 저도 곧 싫증내고 떨어져 나가겠지. 슬프지만 호모는 익숙해."
"건투를 빕니다."

장쯔궈가 분위기를 풀려는 듯 괜스레 능청맞게 화이팅 자세를 취했다. 저우룬칭은 옐리세이의 존재를 머리에서 지우며 주방에 들어섰다.





「샤오저우. 널 혐오하거나 증오하는 건 아니야. 아들 녀석 스캔들 때문에 이러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생리적으로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은 있지 않나? 나에게는 그게 너였던 거다. 형의 복수를 하고 있을 무렵의 넌 사람이 아닌 악귀 같았지.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다. 언제고 나는 너를 쳐내야 했을 테고, 스캔들은 그저 계기에 불과했던 거야」

남자의 넓은 등과 단단한 어깨 너머로 하늘이 엿보였다. 흰 구름이 솜을 뭉쳐 찢은 듯이 뭉게뭉게 흩어진 가을 하늘은 시리도록 맑은 햇살을 마천루에 흩뿌렸다. 어렸을 때는 거의 보지 못하였던 창공은 언제부터인가 항상 그의 머리 위에 존재하였다.

존재가 익숙해지면 소중함도, 필요성도 무디어진다.

저우룬칭은 아마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홍콩의 하늘을 창밖으로 응시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만, 처음부터 네가 꺼림칙했다. 넌 도리만 알고 있을 따름인 짐승이야. 형이 어떻게 너 같은 짐승을 길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포기했다. 지금에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마는, 3년 전에 위롄을 홍콩에서 내보냈을 때 이미 포기한 거나 다름없지. 형이 죽은 마당에 네게 목줄을 채우려면 위롄을 내 밑에서 보호했어야 옳다」
「.......」

남자가 말을 끊자 사무실에는 침묵만이 차올랐다. 3년 전,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선출 된 후 죽은 형이 사용하던 사무실을 쓰고 있는 차오쑹젠은 오래도록 건물이 빡빡하게 들이찬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저우룬칭은 가늘게 눈을 뜨며 차오쑹젠의 뒷모습 위로 차오쑹윈의 모습을 겹쳐 보았지만,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평을 들었던 두 형제의 모습은 온전히 겹쳐지지 못하고 잔영이 되어 스러졌다.

이윽고 무거운 탄식과 함께 돌아선 차오쑹젠이 책상 서랍에서 두 장의 봉투를 꺼내 손끝으로 밀었다. 저우룬칭은 말없이 책상 맞은편에서 봉투를 받았다.

「내일 타이로 가는 첫 비행기와 방콕에서 뜨랏까지 가는 타이 국내선 비행기 티켓이다. 두 번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만.......」

말을 시작하기 전보다 부쩍 피곤이 내려앉은 것 같은 차오쑹젠이 얼굴을 문질렀다. 차오쑹윈이 죽고 겨우 3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는 생전의 차오쑹윈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평생 형의 그늘에서 살아온 남자는 형의 망령이나 다름없는 저우룬칭을 향해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살아있을 때에는 귀국하지 마라, 샤오저우. 언제 어느 방법이라도 네가 홍콩땅을 밟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즉시 추살할 테니까」

예상하였던 용건이었기에 분노하지도 경악하지도 않았다.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실로 의아할 만큼 담담하게 비행기 티켓을 챙기고, 더 이상 그를 보지도 않는 차오쑹젠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물러 나왔다.

그것이 홍콩의 마지막 날이었다.

저우룬칭은 가게 뒤쪽 벽에 쭈그리고 앉은 채 멍하니 홍콩의 마지막 날을 회상하였다. 반평생을 헌신한 조직에서 팽당하였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유는 알고 있다.

자신에게 있어 송의방은 곧 차오쑹윈이었고, 차오쑹윈이 없는 송의방은 그럴싸하게 같은 모양만 가진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차오쑹젠이 아들의 게이 스캔들을 용납하지 못할걸 알면서도 유혹을 완전히 떨쳐내지 않은 건 스스로 조직에서 손을 씻을 결심을 하지 못한 자신이 이 같은 결말을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저우룬칭은 곰곰히 생각했다.

ㅡ이젠 무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샤오저우. 넌 3년 전 그때 죽었어야 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젠 형님.'

속으로 중얼거리며 윈스턴의 연기를 깊이 빨았다. 담배 또한, 3년 전까지는 입에 대지도 않던 것이다.

차오쑹젠의 말은 다 옳았다. 자신은 살아남아서 차오쑹윈이 존재하지 않는 껍데기만의 조직에 충성하는 척하며 시체처럼 배회하고 다닐 게 아니라, 3년 전에 죽었어야 했다.

"저, 칭 현님. 잠깐 괜찮으십니까?"

뒷문을 연 리뎬차이가 조심스럽게 나왔다.

"왜."

저우룬칭은 쪼그리고 앉은 그대로 눈동자만 힐긋 옆으로 굴려 그를 보았다.

"안주 만들어 오라고 진상 부리는 놈 있으면 재료 다 떨어졌다고 말하고 술이나 줘."
"그건 아닙니다만."

리뎬차이가 곤란한 기색으로 짧게 친 머리칼을 긁적였다.

"형님을 찾는 손님이 있습니다. 궈 형님이 일단 상대하고 있으시긴 한데 아무래도 형님이 직접 나가보셔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서요."
"나를 찾아?"

지난 한 달간 홍위롄을 마중 나가거나 시장에 갈 때가 아니면 거의 가게 밖에 나간 적이 없는 저우룬칭은 자신을 찾는다는 전언에 갸웃했다. 그가 야이쑤코에서 만난 사람이래 봐야 도착한 날 인사차 찾아갔던 광룽과 차이나타운의 몇몇이 전부다.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던 존재를 떠올린 건 괜히 면목없어하는 리뎬차이의 대답을 들은 후였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낮에 찾아왔던 그 러시아 마피압니다."
".......아. 그 변태."
"가게에 들어오기 전부터 불콰하더라고요."

술 취한 변태라. 생각하기 싫은 조합이었다.

일단 리뎬차이를 들여보낸 저우룬칭은 한 모금을 더 빨고는 짧아진 담배를 벽에 비벼 껐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면 따로 언질 주었을 텐데 단순히 술에 취해서 부른다는 걸 보니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닌 것 같았다. 주정뱅이가 난동을 부리는 것 정도야 적당히 응대하고 내보내면 될 일이니 별다르 생각 없이 홀로 나가려던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2층으로 올라갔다. 가게 건물은 총 3층이었고 1층은 홍가, 2층은 그를 비롯한 종업원들의 숙소, 3층은 홍위롄의 집이었다.

방에 들러서 목적한 물건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저우룬칭은 하품하며 내려갔다. 근래 저우룬칭의 요리 덕에 낮에도 오는 손님이 조금 늘긴 했지만 본래 홍가의 본격적인 영업은 저녁 무렵이다. 홍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종의 대다수를 만날 수 있는 야이쑤코의 축소판이다. 오늘도 홀은 만석이었다. 변태는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었던 낮과는 달리 슈트 차림이었다. 허여멀겋던 피부를 빨갛게 물들인 채 희희낙락 떠들어대는 옐리세이의 옆에서 장쯔궈가 '그래, 그래.'하고 무성의하게 대꾸하며 술을 따르고 있었다.

저우룬칭은 잠시간 그 모습을 구경했다. 취기가 올라 눈이 반쯤 풀려 있는 옐리세이는 장쯔궈가 술을 따르는 대로 연거푸 꿀꺽꿀꺽 마시기만 했다. 상대하기도 귀찮으니 술 먹여서 보내 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이미 술의 반은 입으로 들어가고 반은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굳이 따로 자신이 준비해 올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을 하곤 옐리세이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어, 어.......! 우와, 내 엉덩이!"

얼굴이 구겨졌다. 취한 와중에도 용케 그를 알아본 옐리세이가 시시덕거리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누가 네놈의 엉덩이라는 거냐."

저우룬칭은 만세를 부르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옐리세이의 팔을 밀어내며 장쯔궈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장쯔궈가 다리 보조기를 삐걱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작게 속닥이는 그에게 ㅡ바로 옆에서 크게 외쳐도 만취한 옐리세이가 제대로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ㅡ 어깨만 으쓱했다.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옐리세이가 혀 꼬인 발음으로 환호하며 저우룬칭의 어깨에 매달렸다. 볼을 부비적거리며 뭐라고 시부렁거리긴 했지만 취해서 발음이 엉망인데다 러시아어인 것 같기도 하여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우룬칭은 광둥어와 영어뿐만이 아니라 푸퉁화와 일본어도 유창했고 독어는 의사소통 정도 가능하였지만 러시아어는 깜깜했다. 그리고 메이드 인 러시아 변태가 들어붙어 있는 이 순간, 러시아어는 절대 배우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엉덩이를 만지려 한다면 의자를 걷어찰 작정이었지만 들러붙은 변태는 손을 허우적 거리긴 했어도 엉덩이까지 내리지는 않았다. 늘어뜨린 손이 등 뒤쪽을 오락가락하는 품새를 보니 외간 남자의 엉덩이를 만지지 않는 매너를 갖춘 게 아니라, 단순히 취해서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일단 의도와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만지지는 않았으니 저우룬칭은 조금 인내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비비적거리던 옐리세이가 느닷없이 일어났다. 휘적대며 일어나는 놈이 저대로 고꾸라져 바닥에 머리를 박고 기절이라도 하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놈은 휘청거리면서도 등을 폈다. 그리고 테이블에 한쪽 다리를 턱 올려놓았다.

"В э r л я д!!"

시끌벅적한 홀 안에 카랑카랑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손님들의 이목을 모은 옐리세이가 이어 무어라 외쳤지만 그 외침은 러시아어였고, 때마침 가게 안에는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썅년아! 술 처먹고 국영 농장에서 감자라도 캐다 왔냐!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떠들어!"

누군가가 야유하자 옐리세이는 취한 와중에도 용케 알아들었는지 영어로 바꿔서 말했다. 몇몇 단어는 여전히 러시어아가 섞여들어 가기는 했지만 얼추 문맥 파악은 가능했다.

"야, 야! 오물통의 쓰레기들아. 귀 후비고 잘 들어! 여기 이, 야이쑤코에서 제일 완벽한 я r о д и ц ы....... я r о д и ц ы가 영어로 뭐더라. 아, 맞아. 제일 섹시한 엉덩이를 가진 ㅡ라고 말하며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의 어깨를 꽉 쥐었다ㅡ 루니는 오늘부터 내 엉덩이니까, 이 자식 엉덩이 넘보는 새끼에게는 대가리에 좆 찔러 넣을 구멍을 내줄 거다!!"

아, 맙소사. 저우룬칭은 이마를 짚었다. 차라리 얌전히 엉덩이나 만질 것이지.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렸다.

"지랄 염병을 하네. 사내새끼 똥구멍이 좋아서 쫓아다니는 건 너 말고 없어, 새끼야!"
"흥! 멜닛 스트리트가 괜히 만들어졌냐! 네가 남자 맛을 아직 못 봐서 그래. 벼엉신."

남창들이 대다수인 사창가를 들먹이며 옐리세이가 코웃음을 쳤다.

"아무튼! 루이의 엉덩이가 내 엉덩이가 된 기념으로 한 잔씩 돌린다! 야, 청크(Chink). 보드카 가지고 와!"

헛소리하지 말고 술이나 처마시라던 야유가 쏟아지던 사방에서 휘파람 소리가 섞였다. 공짜 술을 마다할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그것이 호모가 주는 술이라도 말이다.

옐리세이의 언행도 언행이었거니와 저 발정 난 놈을 홀린 백만 불짜리 엉덩이를 보자는 둥의 빈정거림이 저우룬칭에게 쏠이고 있었기에 장쯔궈와 리뎬차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마코 있던 저우룬칭은 옐리세이의 말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테이블마다 사람 수에 맞추어 술잔이 돌려졌다.

술잔은 제일 먼저 옐리세이의 테이블에 놓였다. 야유하는 남자와 취할 대로 취하여 대거리하던 옐리세이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분주하게 술잔을 돌리면서 이쪽을 살피던 두 종업원과, 이죽거리며 건너다보던 대다수의 손님은 목격했다. 저우룬칭이 주머니에서 꺼낸 약을 보드카에 타고 휘젓는 것을.

"마셔라."
"난 네가 키스로 마시게 해 주면 좋겠는데."

옐리세이가 능글능글 웃으며 어깨를 매만졌지만 저우룬칭은 고개를 내저었다.

"우린 아직 친구도 아니잖아."
"맞아. 친구부터 시작하기로 했지."

헤벌쭉하며 독한 술을 한입에 벌컥벌컥 마신 옐리세이는 고개를 젖힌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요란하게 나뒹구는 소리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읏차."

옐리세이가 쓰러지기 직전에 술잔을 잡아 깨지는 걸 막은 저우룬칭은 기절한 건지 잠이 든 건지 구별되지 않는 그를 가뿐히 들어 올려 어깨에 둘러멨다.

"이봐. 침실은 위층 아냐?"

둘러메고 터버터벅 걸어나가니 이죽거리는 시비가 있었지만 저우룬칭은 깔끔히 대꾸했다.

"쓰레기 버리러 가는 거야."

그리고 정말 가게 밖에 기절한 옐리세이를 버리고 돌아오자 흥미를 갖고 보고 있던 손님 중의 일부는 하는 짓이 마음에 든다고 킬킬거리며 술을 권했다. 합석한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진 덕분에 그는 본의와는 상관없이 야이쑤코의 사회에 자신의 얼굴을 알리게 되었다.





"아....... 죽여준다."

옐리세이는 소파에 시체처럼 드러누워 일어난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신 건 맞지만 이 정도 숙취가 밀려올 만큼 마시지는 않은 것 같은데 머리가 너무 아팠다. 필름이 끊긴 적은 더러 있었으나 이렇게 고통스러운 후유증이 남은 적은 없었다. 게워내서 속이라도 시원해지면 좋으련만 뱃속보다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찬찬히 머릿속을 되짚어보았다. 이오시프를 비롯한 조직원 중 친한 녀석들과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다들 호스티스 하나씩 끼고 마시는 와중에 혼자만 옆구리가 허한 게 짜증이 나서 술을 평소보다 더 들이켜긴 했다. 그는 유명한 게이였고, 란뜨제프스카야 조직원들이 자주 들르는 술집의 주인도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불행히도 그 술집에는 호스트가 없었다. 여자들이 가슴을 들이밀며 아양을 떨어 봤자 소름만 돋을 뿐이었다.

2차까지 갔다가 술자리는 파했고, 남들이 다 여자 하나씩 끼고 주무를 때 혼자 술잔만 주무르고 있었던 억울함이 술기운에 북받쳐서 홍가를 찾아갔다. 찾아가서, 웬 중국놈 하나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다가 ㅡ남자라서 그나마 기분은 나았다ㅡ 저우룬칭이 나왔다.

이놈은 내 것이니 넘보지 말라고 거창하게 선언까지 한뒤에 본격적으로 그를 주무르며 술을 마시려 했는데, 했는데, 했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젠장. 열심히 주무른 걸 다 까먹었으면 어쩌지.'

억울함에 몸부림치던 옐리세이는 날뛰니 두통이 더 심해진다는 것만 깨닫고는 얌전한 시체가 되었다. 머리가 장난 아니게 아프다. 커다란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씌우고는 탕탕탕 사방에서 두드려대는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저우룬칭을 만나러 갔을 때 필름이 끊어졌을 것이다. 필름이 끊긴 자신에게 귀소본능 따위는 없었으므로 혹시나 저우룬칭의 방이 아닐까 잠깐 설렜던 그는 주위를 휘둘러보곤 곧 낙담했다. 전반적으로는 흔한 타이의 가정이었으나 러시아 풍 소품이 이국적인 맛을 더하는, 꼴같잖게도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이 방, 보다 정확히는 거실의 주인은.

"그만 처자고 일어나. 빌어처먹을 놈아!"

이오시프였다.

"아오. 머리 울려. 조용히 해 봐."

요란한 고함에 이젠 숫제 양동이째로 머리를 두들겨 대는 것만 같은 고통이 들이닥쳐 투덜거렸지만 이오시프의 목소리는 작아지지 않았다.

"미친놈아. 내가 술 처먹었으면 얌전히 집에 기어들어가라고 몇 번을 말해?! 여기가 러시아였으면 넌 어젯밤에 얼어 뒈졌어!! 스콜이 안 온 걸 다행으로 알아!"
"그러고 보니 너네 집까지 내가 어떻게 왔냐? 그리고 10월에는 동사 안 해."
"어떻게 오긴 어떻게 와! 술 처먹고 쓰레기통 옆에 뻗어 있는 걸 애들이 발견해서 데려왔지!!"

먼저 집으로 연락했으나 동거하고 있는 빠벨은 어젯밤에 야간 근무를 서던 중이라 집은 비어 있었다. 별수 없이 이오시프는 막 잠이 들자마자 깨어나야 했고 유이도 덩달아 잠을 설쳤다.

"유이는 어디 있는데?"
"출근했지! 지금이 몇 신 줄이나 아냐?"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밖은 훤했다.

"우리 애들이 바로 발견해서 다행이지만 다른 놈들이 발견했으면 어쩔 뻔했냐? 맨쇼프스카야가 야이쑤코에서 지분 넓히려고 이탈리아 놈들까지 끌어들인 거 모르냐?"
"내가 매력적이긴 하지."
"호모 새끼 때문에 항쟁이 터지면 쪽팔려."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여보."

끊임없이 이어지는 닦달에 옐리세이는 입을 나불거리면서도 두통으로 끙끙거렸지만, 그 말 한마디가 이오시프에게 불을 붙였다.

"야이 새끼야! 그 여보 소리는 내가 그만하라고 했잖아!! 유이가 진짜 너랑 나랑 그런 관계인 줄 안다고!!"

질풍노도의 시기에 가출하여 길거리에 나앉아 더더욱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낼 무렵에 만난 이오시프는 옐리세이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 무렵에 이미 학교 선배를 짝사랑하게 되어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했던 옐리세이였지만 이오시프를 연애나 성적인 대상으로 본 적은 없었다.

단지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능글능글한 성격을 더하여 이따금 여보이니 마누라이니 하고 부르는 소리를 종종 하였고, 한창 이오시프의 구애를 받고 있던 유이의 귀에도 들어갔었다. 덕분에 이오시프는 유이에게 청혼하고 뺨을 맞았다. 마피아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봐 어지간한 일은 참아 넘기던 그녀는 게이 파트너가 있는 주제에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며 펄펄 뛰었고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이오시프는 무릎까지 꿇고 쩔쩔맸다.

간신히 오해는 풀었지만 유이는 결혼한 후에도 이따금 옐리세이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다.

이오시프는 입에서 불을 뿜었지만 겨우 낑낑거리며 일어나 앉은 옐리세이는 귀를 후볐다.

"우리는 그런 관계 맞잖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한 거야, 우리 자기. 생리 시작했어?"

이오시프는 더 이상 군말 없이 주먹을 뚜둑거리며 다가갔고, 옐리세이는 두통도 잊은 채 어마뜨거라 황황히 욕실로 달음박질쳤다. 욕실로 도망치자마자 밖에서 이오시프가 외쳤다.

"식탁에 죽이랑 반찬 사다 놨으니까 알아서 먹고 가. 난 출근한다."
"사랑해."

대답은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한 발길질이었다. 좁은 욕실이라 소리가 크게 울린다. 옐리세이는 어깨를 움찔하며 내씹었다. 자기네 집 문짝인데 살살 걷어찰 것이지.

뜨뜻한 물에 씻고 나자 조금이나마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젖은 머리칼에 대충 수건을 얹어놓은 그는 벗어 던진 옷을 입으려다 멈칫했다. 쓰레기통 옆에 쓰러져 있었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얀 슈트에 군데군데 이상한 얼룩도 있었다.

‘이거 지워지기는 할까. 에이씨, 좋아하는 옷인데.’

속상했지만 홀딱 벗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옷을 빌려 입으려고 해도 이오시프는 그보다 체격이 작다. 찝찝하였으나 일단은 꿰입었다.

제집처럼 주방으로 휘적휘적 가서 생선죽과 팍깟덩(타이 요리. 채소 절임), 얌운쎈(타이 요리. 당면 샐러드)이 담긴 비닐봉지들을 뜯고 접시에 부었다. 골을 빠개는 것만 같은 숙취가 몹시 심하긴 했으나 뱃속은 덜 쓰라렸으므로 어떻게든 죽 한 그릇은 비울 수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빈 접시를 건조대에 정리한 옐리세이는 손을 툭툭 털며 이오시프의 집을 나왔다. 문을 잠그고 열쇠를 창틀의 작은 화분 밑에 밀어 넣자 이오시프의 집에서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났다.

이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옐리세이는 남국의 햇살 아래 허우적거리며 거리를 걸어갔다. 빈 툭툭이 한 대 옆을 지나갔지만 저걸 탔다가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더럽게 뜨겁네. 빨리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다.'

버스 정류장이 너무 멀었다.





러시아산 변태가 찾아왔다.

"........"
"안녕, 루이. 오빠 보고 싶었지?"

머리 뒤로 역광을 받으며 싱그럽게 미소하는 얼굴은 그대로 박제하여 화보로 만들어도 부족함이 없을 아름다움이었으나 그의 실체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얼굴이 아깝다는 감상밖에 들지 않는다. 저우룬칭은 문가에 비뚜름히 기대어 섰다.

"마침 잘 됐다. 찾던 참인데."
"드디어 내 매력을 깨달았구나. 타야록 스트리트에 내가 좋아하는 호텔이 있거든? 전망이 끝내줘서 유리창에서 벽치기하면 존나 기분 좋아. 우리 구역 호텔이라서 반값 할인도 돼. 가자."

옐리세이가 반색하며 그의 손을 잡으려는 걸 탁 쳐냈다.

"호텔 안 가."
"에엥. 호텔 안 좋아하냐? 아님 비싸서 그래? 오늘이 처음이니까 길거리에서 하긴 좀 그렇고 호텔비는 내가 낼 게."
"너랑 자려고 기다린 게 아니라........"

저우룬칭은 기대어 선 그 자세 그대로 손가락만 까닥거렸다. 손바닥을 위로 치켜들며 까닥거리니 옐리세이가 갸웃거리다가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지만, 다시 한 번 탁 쳐냈다.

"돈."
"무슨 돈?"
"어제 네가 마신 술값이랑 홀 전체에 한 잔씩 돌린 술값."
"........내가 홀에 술을 다 돌렸다고?"

어제 홍가에 들어오기 전부터 거나하게 취해 있었던 주정뱅이는 삥을 뜯기는 표정이 되었지만 저우룬칭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쳇. 뭐, 좋아. 너한테 선물이라도 한 셈 치지."
"그깟 술값 몇 푼이나 된다고."

당연히 내야 하는 술값인데도 거들먹거리는 옐리세이에게 핀잔을 준 저우룬칭은 그에게 받은 지갑째 뒤로 던졌다.

"뎬차이. 어제의 러시아 변태 술값 계산해라."

옐리세이가 광둥어를 알아들었다면 러시안 변태가 아니라 '옐리세이'라고 부르라며 친절한 정정을 해 주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의 지식에서 중국어는 작대기가 가득한 글자라는 것뿐이었다.

리뎬차이에게 지갑을 던진 후에도 문가에 기대어 서 있는 저우룬칭을 밀어냈지만 그는 바닥에 고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가 일반인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옐리세이는 차마 일반인에게 완력을 쓸 수는 없었기에 뾰족하게 말로만 쏘았다.

"난 손님으로 왔거든? 손님 대접을 하라고. 영업시간 맞잖아?"

손님이라는 걸 피력하자 저우룬칭도 한 걸음 물러섰다. 선선한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겨우 땀이 식는 시원한 기분에 어깨를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귀가하려던 참에 문득 생각이 나서 걸음을 돌려 평범한 옷까지 사서 갈아입고 홍가로 바로 찾아온 참이라 꽤 더웠다.

가게 안의 손님은 중국인 일행뿐이었다. 신문을 보고 있는 남자 한 명만 자리에 앉아있고 경호원으로 보이는 네댓 명이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걸 보니 적련방 아니면 다른 군소 트라이어드의 간부 중 하나이리라. 관심을 끊고 갈아입은 슈트를 차곡차곡 개서 넣은 쇼핑백을 의자 옆에 내려놓은 옐리세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더위는 가셨지만 지끈거리는 두통은 여전했다. 어제 다른 술집에서는 평범하게 술 마신 기억뿐인데 왜 머리만 아픈 걸까.

저우룬칭이 앞에 와서 섰다.

"뭐 먹을래?"
"밥은 됐고........ 보드카나 한 잔 줘. 숙취 때문에 죽겠다. 홍가에서 내가 술이라도 섞어서 마셨냐?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네."
"그냥 럼주였는데. 아무튼 해장술 마시면 속 버려. 멍청아."

어제 옐리세이에게 약을 먹인 건 전혀 후회하지 않았지만 넉살 좋은 놈이 끙끙거리는 걸 보니 저우룬칭도 손톱만큼의 책임감은 느꼈다.

"나이차, 아, 밀크티 타 올 테니까 마시고 가라."

비키려는 그를 당연히 옐리세이가 붙잡았다. 옐리세이는 끙끙거리는 와중에도 옆의 의자를 빼내어 자리를 만들었다.

"밀크티는 다른 놈한테 가져오라고 하고 얘기나 하자."

옐리세이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이오시프는 대화를 많이 하여 공통점을 찾아보라고 했지만 기껏 얻어낸 문신이라는 공통 관심사는 놈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른 공통점을 찾긴 해야 할 텐데 국적도 다르고 직업도 다른 그와 자신 사이에 교집합을 발견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대화다.

손수 의자까지 빼줬지만 앉을 의사는 전혀 내비치지 않는 저우룬칭에게 눈을 부라리려다 무서운 마피아가 아닌 부드러운 남자가 되기 위하여 인내하고 대화를 시도했다.

"넌 취미가 뭐냐?"
"없어."
"특기는?"
"없어."
"좋아하는 영화는 없어?"
"없어."
"고양이나 개는 안 키워?"
"안 키워."
"........하루에 도대체 뭘 하고 있는데?"
"일어나고, 개점 준비하고, 일하고, 정리하고, 자고."
"휴일에는?"
"잔다."
"하루 종일?"
"어."
"........"

대화고 뭐고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었다. 옐리세이는 그럼 가게에 오기 전에는 뭘 했느냐, 라고 물으려다 참았다. 간첩이었다지 않은가. 북한이 김정일이 대를 이어 독재하는 폐쇄적인 공산국가라는 건 뉴스와 신문을 안 보는 옐리세이도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스탈린 치하에서 고변당하여 누명을 쓰고 MGB(소련의 국가안보부. KGB의 전신.)에 체포되어 고문당하다가 루뱐카(체카, MGB, KGB 등을 비롯한 구소련의 비밀경찰과 현 FSB의 본부.)에서 사망하고 외할머니는 연좌제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 흐루쇼프의 서기장 취임 후에야 석방되었노라고, 당시 갓 돌이었던 어머니만 무사할 수 있었다고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의 아픈 과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참았다. 그 북한의 혹독한 간첩 교육은 루뱐카에서 고문당하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아픈 과거와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대화를 이어갈 방도가 전혀 떠오르지 않은 옐리세이는 일단 차나 갖다 달라고 저우룬칭을 보냈다.

"아, 저우 선생. 여기에도 수미차를 주게."

홀 안쪽에 앉아 있던 중국인이 한 손을 올렸다. 자신을 제외한 유일한 손님 일행을 무심코 흘긋 본 옐리세이는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신문에 얼굴이 가려있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적련방의 타이 지부 보스인 광룽이었다. 광룽은 옐리세이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인사했고 옐리세이도 얼결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금이야 란뜨제프스카야와 적련방이 항쟁 중인 건 아니지만 일반 조직원도 아닌 보스를 사적인 자리에서 마주치니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경호원들 한 무더기 이끌고 이런 데를 왜 오냐고. 차이나타운에나 갈 것이지.'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크고 화려한 중화요리 가게의 사장인 주제에 이런 보잘것없는 식당 겸 술집에 오는 것을 괜스레 투덜거리며 옐리세이는 등을 돌렸다.

끓이는데 시간이 걸리는지 저우룬칭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애꿎은 물만 벌컥벌컥 들이켜며 무료히 기다리던 옐리세이는 하품을 하다가 얼굴을 식탁에 처박았다. 어제 술을 퍼마셔서 머리가 아픈 탓에 아침에 너무 일찍 깼다.

저우룬칭이 리뎬차이에게 계산을 끝낸 지갑까지 받아 홀로 나왔을 때 그는 식탁에 엎드린 채 낮게 코까지 골며 숙면 중이었다. 어깨를 흔들며 깨웠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이걸 어쩌지. 이대로 방치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다지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니 영업에 지장이 생길 것이다. 거추장스럽기도 하겠고. 고민하던 그는 지갑을 의자 옆에 있는 쇼핑백에 밀어 넣고 곤히 잠든 옐리세이를 어깨에 둘러멨다.

놈과 쇼핑백을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 던져 놓고 내려오자 신문을 보고 있으면서도 유심히 구경 중이던 광룽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저우 선생은 남자에게 인기가 많군."
"부러우시면 나눠 드릴까요?"
"사양하겠네."

광룽이 웃으며 수미차로 입술을 적셨다.

"슈이스끼, 저 친구를 제어하려면 자네도 고생 퍽 하겠는걸."
"아시는 놈입니까?"
"미스터 주인의 최측근 경호원이니 정기 회합 때마다 보는 얼굴이지."

의외였다. 보스를 최측근 경호한다면 조직의 간부로 보스에게 가장 신임받는 부하 중 하나라는 뜻이다. 본인이 간부라고 소개하기는 했어도, 낮이고 저녁이고 들락거리는 놈이라 그저 그런 말단 조직원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저우룬칭은 낮은 감탄사를 흘렸다. 하긴 그렇게 여기고 보면 말단 조직원치고는 몸가짐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분위기가 드러나긴 했다. 러시아 마피아는 군대처럼 훈련한다던가.

"4년 전에 란뜨제프스카야와 사소한 시비가 붙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굉장했어. 진짜 유명한 건 이 동네 남창 중 얼굴 반반하거나 몸매 괜찮은 놈들이라면 죄다 건드렸다는 소문이지만."

저우룬칭의 안에서 약간이나마 올라갈 듯하던 옐리세이의 평가가 다시 후려 깎였다.

"호모 자식의 소문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으시다니 한가하신 모양입니다."

광룽이 호의가 아닌 흥미 본위로 대화하고 있음은 명백하였지만 저우룬칭이 언짢음을 표현할 수 있는 선은 이 정도까지였다.

옐리세이가 조용해지니 다음은 광룽이다. 앞문의 호랑이를 피하니 뒷문에서 이리와 마주친다는 속담이 딱 정확했지만 옐리세이와는 다른 의미로 광룽은 소홀히 대접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가 차이나타운의 지배자라는 점은 차치하고도 홍위롄의 가게가 중립지대로서 무사할 수 있는 것에 광룽의 조력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저래 봬도 간부라고. 정보는 중요한 법이지. 여차할 때 남자로 미인계를 쓰면 꽤나 잘 먹힐 것 같지 않나?"
"........"

부정할 수 없었다. 그냥 입을 닫고 옐리세이의 자리를 치우는 저우룬칭에게 광룽이 화제를 돌렸다.

"수미차의 맛이 영 흐릿하군. 본국에서 직접 가져오는 차를 내 가게에서 쓰는데 필요하면 말해. 원가에 팔아줌세."
"진짜 맛을 즐기는 사람은 홍가에 안 올 테니까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홍 여사가 취미로 연 가게라고 해도 손님 앞에서 너무 야박한 평가인걸. 그보다 오늘 저녁을 함께하고 싶은데 홍 여사는 언제쯤 귀가하시나?"
"오늘은 친구분들을 만나러 가신 거라 정확한 시각은 모르겠습니다."

차이나타운에서 홍위롄의 행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샅샅이 다 꿰고 있는 주제에 몰랐다는 표정을 하는 게 뻔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쉽군. 홍 여사에게는 잘 먹고 간다고 전해 주게."

광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살펴 가십시오, 팡 대인."
"자네도 빨리 정착하길 바라네."

악담인지 덕담인지 모를 소리를 남긴 광룽은 들어왔을 때처럼 경호원 무리를 이끌고 가게를 떠났다. 조용하지만 묵직이 내리누르던 존재감이 사라지고 나니 가게는 갑자기 선뜻하리만큼 조용해졌다.

"칭 형님. 잠시만요."

광룽이 나가자마자 주방에서 나온 장쯔궈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게 뒤편으로 나와 둘만 남게 되자 장쯔궈는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저우룬칭은 윈스턴에 불을 붙이고도 바로 빨지 않고 장쯔궈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게 아닌가?"

장쯔궈가 낯을 굳히며 습관적으로 무릎을 주물렀다. 3년 전부터의 습관이었다.

"형님은 괜찮으십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면서도 저우룬칭은 "괜찮고 말고 할 게 있나?"라며 뜸을 들였다. 장쯔궈의 낯이 안 좋아졌다.

"러시아 놈이야 칭 형님과 관계가 없던 놈이기도 하니 제가 간섭할 일은 아닙니다만, 형님이 광룽에게까지 조롱당하시는 건 보기 힘듭니다."
"저 양반 성격이 원래 그러니 새삼스럽게 기분 나빠할 이유도 없지. 거기다 난 이제 조직원도 아니니까 말이야."

생각했던 대로의 용건이었기에 저우룬칭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벽에 등을 붙였지만, 장쯔궈는 아니었다.

"형님은 화도 안 나십니까? 광룽만이 아니라 본국에서도........"

저우룬칭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슴 안에 담아 놓은 말이 많았는지 장쯔궈의 언성은 차츰 높아졌다. 저우룬칭의 앞에서 너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걸 자각한 그는 잠시 입을 닫고 호흡을 다스렸다. 이어 나온 목소리는 한결 차분해졌지만 그 안에 깃들어 있던 격양까지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다.

"한푸민 아시죠? 후 형님 밑에 있던 녀석이요. 제가 여기 오게 된 후에도 가끔 연락하고 있는데 그 자식이 그럽디다. 회장님이 일부러 형님에게 작은 도련님의 스캔들을 조작해서 뒤집어씌우고 쫓아낸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 물론 회장님 입장에서 여전히 돌아가신 분께 충성하는 형님은 계륵이었을 테지만, 그래도 형님이 조직에 몸바친 세월이 몇 년이고 조직을 위해서 하지 않은 일이 없는데 이런 야비한 수단으로,"
"네가 어떤 생각을 해서 나에게 말한 건지는 아는데........"

저우룬칭은 담배를 들지 않은 손을 올려 장쯔궈의 말을 끊었다. 차오쑹젠이 예전부터 그를 눈엣가시로 여겨오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들의 앞길까지 망쳐가며 이용할 사람은 아니었다. 차오원웨이를 노리던 파파라치에게 사진이 찍힌 건 정말 실수였다.

"내가 원웨이랑 잔 건 사실이야."
"........뭐라고요?"

한 톨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는지 장쯔궈는 진심으로 놀라워했고 저우룬칭은 머쓱해졌다.

"그게........ 네가 야이쑤코로 온 이후의 일이라서 잘 모를 텐데, 퇴원할 무렵부터 원웨이가 정말 심각하게 날 쫓아다니기 시작했거든. 젠 형님이 보다 못해서 아프다는 핑계로 강제로 일까지 중단하게 하고 머리칼 밀어서 산사에 처박아 버렸는데 머리가 자라자마자 탈출해서 제일 먼저 찾아온 게 나였을 정도야."

장쯔궈의 입이 떡 벌어졌고 저우룬칭은 괜스레 헛기침하였다.

"그럼........ 진짜, 그거였습니까, 그거?"

저우룬칭은 차마 사귀었다든가 애인이었다든가 정부였다든가 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 장쯔궈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이다음은 자신이 생각해도 참 쓰레기 같은 발언이었다.

"아니. 난 요만한 원웨이가 아장거리면서 유치원 다닐 때부터 봤다고. 걔가 남자라는 걸 떠나서 나랑 띠가 같은 정돈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른 마음이 생길 것 같냐? 난, 그냥........ 한 번 자주면 만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젠 형님 귀에 들어가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고 자포자기하기도 했었고........"

그리고 지금은 차라리 차오쑹젠이 알게 되어 조직에서 공공연히 팽당하는 걸 바랐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거기까지는 장쯔궈에게 말하지 않았다. 수족 같이 지내온 부하라 할지라도 해서 용납이 될 말과 용납이 되지 않을 말 정도는 있는 법이다.

"그러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세 번이 네 번이 되고 슬슬 소문이 나고, 뭐........ 이렇게 된 거지."

차오원웨이와의 일이 더 커지면서 불거진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 더 있었지만, 상세한 사정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 혼자만 연루된 일이 아닌 탓이다.

너무나 예상외의 사실을 알게 된 충격 때문인지 장쯔궈는 한동안 담배만 뻐끔거렸다. 두 개비의 담배를 연이어 피운 후에 입술이 열렸다. 살기등등하게 높아졌던 목소리는 푹 꺾여 있었다.

"........아무튼, 슈이스끼라도 처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광룽만이 아닙니다. 어젯밤만 해도 놀림거리가 되질 않으셨습니까. 원인이 죄 슈이스끼 놈인데 저까지 화가 치민다고요."
"죽이는 건 쉽겠지만 뒷수습은 어떻게 하려고?"
"얼굴 뭉개고 토막 내서 바다에 뿌리면 돼요. 여기에서는 팡다리 한 토막이 해변에 밀려와도 경찰에서 형식적인 조사만 합니다."

변태 호모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에서 저우룬칭은 잠깐 솔깃하긴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러시아 마피아 놈들이 눈치라도 채면 끝이야."
"증거가 없잖습니까."
"조폭에게 증거가 필요하면 그게 무슨 조폭이냐?"

맞는 말이었기에 장쯔궈는 말을 삼켰다. 심증만으로도 얼마든지 일을 키울 수 있는 게 조폭이다. 장쯔궈는 곧 다른 방법을 꺼냈다. 그도 고심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칭 형님이 여기 계시는 건 롄 누님 때문이잖습니까. 롄 누님 모시고 다른 곳, 아예 신주쿠로 옮기는 건 어떠세요? 신주쿠에 저희 지부도 있고, 일본이라면 누님도 적응하기 편하실 테고요."

이번에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일본도 안 돼. 히데가 아직 살아 있어."
"........그 새끼 안 뒈졌습니까?"
"어. 시체는 발견 안 됐었잖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날 만나러 홍콩에 왔더라고. 슈이스끼는 내게만 껄떡거리지만 히데는 롄 누님을 죽이려 들 걸. 변태가 미친놈보다는 낫지."

저우룬칭이 일본에서 몇 년간 머무를 당시에 그에게 광적으로 집착하여 그의 동거녀를 살해한 청년을 떠올린 장쯔궈의 낯빛은 해쓱해졌다. 더 이상 자신으로서는 다른 방도도 생각나지 않아 아연히 중얼거리기만 했다.

"........진짜 남난(男難)이시네요........"
"나도 죽겠다."

남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둥 남난이라는 둥 하는 말이 농담이나 엄살이 아닌, 진실이라는 것에 새삼 서글픔을 느끼며 저우룬칭은 한숨을 쉬었다.





저우룬칭의 방이다.

근거는 없었지만 옐리세이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그렇게 확신했다. 적어도 근처의 모텔로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참을 잤는지 두통은 한결 덜했다.

저우룬칭의 방이라는 확신을 한 후, 근거를 찾기 위해 방 안을 탐색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려봤지만 저우룬칭의 체향이라든가, 담배 냄새라든가, 느낌이라든가, 따위는 전혀 들지 않는다.

'당연하지, 빌어먹을! 뭘 벗겨 봐서 맛을 봤어야 냄새를 알 거 아냐.'

새삼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옐리세이는 이를 갈았다. 저우룬칭은 특별히 쓰는 향수도 없고 아침에 스킨 냄새를 맡은 적도 없고, 살 냄새를 맡은 적은 더더욱 없다. 담배를 피우는지도 잘 모르겠다. 자각하자 급작스러운 회의감이 치밀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방금 전에도 돈만 받고 문 앞에 서서 들여보내지 않으려는 그를 억지로 밀고 들어왔지 않은가.

그 엉덩이 한 번 따먹겠다고 황금 같은 휴가를 투자해 가면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의 베개를 끌어안은 채 심각하게 고뇌했다. 게이바나 클럽에서 비비적거린 적도 없이 속전속결로 남창을 사서 꼴리는 대로 섹스하는 과정을 거쳐 왔던 그에게 낚싯대를 던지고 목표물이 떡밥을 물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는 연애라는 과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 낭비였다.

'얼굴도 그만하면 괜찮고, 목소리도 섹시하고, 엉덩이도 탱탱하고........ 으으음........'

머릿속에서 저우룬칭을 주욱 벗겨 보았다. 외모는 확실히 합격점인데.

딱히 대화라고 할 만한 걸 한 적이 없어서 성격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튕기는 맛이라는 건 있었다. 콧대를 깔아뭉개고 싶다는 정복욕이 자극된다는 점에서 그가 꽤 좋아하는 요소였다.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보이지 않는 벽을 칠 때마다 어디 두고 보자는 오기도 든다.

'이오샤가 연애는 밀당은 잘해야 한다고 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저우룬칭은 밀어내기는 아주 확실히 잘 이행하고 있었다. 젠장맞을.

한쪽에는 벗겨 놓은 저우룬칭을, 반대편에는 귀찮음과 시간 낭비라는 무게추를 올려놓고 이리저리 저울질해 보았지만 머릿속의 저울추는 오락가락 흔들릴 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끙끙거리던 옐리세이는 일단 놈의 방이나 관찰해 보자는 쪽으로 적당히 타협했다.

방은 그의 방보다 조금 넓었다. 저우룬칭은 야이쑤코에서 한 달 전부터 보였다고 알고 있지만 방에서 새집 특유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뭐, 오래된 집에 이사 온 후 벽지라든가 리모델링을 전혀 안 할 수도 있는 거니까. 저우룬칭이 이곳에 머무른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증거는 방 안에 마련된 기물이 적다는 것 정도였다. 옐리세이는 끄응차, 하고 뭉그적거리고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죽이나 깨작거린 탓에 뱃속이 허했지만 입맛은 들지 않았다.

그가 조금 전까지 누워있던 침대와 반대편의 작은 옷장, 그리고 커튼으로 반쯤 거린 창과 그 옆에 있는 책상, 미싱 정도만이 눈에 뜨였다. 옐리세이는 우선 옷장부터 열어보았다. 주인 없는 방을 뒤진다는 조심스러움과 주저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손길이었다. 옷장에는 옷도 몇 벌 걸려 있지 않았다. 짧은 반소매 셔츠와 바지가 전부였다. 흔한 슈트 한 벌 찾을 수 없었다. 옷장 바닥에 눕혀 있는 여행용 슈트케이스도 텅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서랍을 열어보았다. 가지런히 개킨 속옷과 털실 뭉치 대여섯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린 제일 위의 서랍에는 헤이싱 두 정과 콜드 파이슨 한 정, 탄약 박스와 건오일을 비롯한 손질 기구 등이 있었다.

"오, 과연 간첩."

옐리세이는 휘파람을 불며 콜드 파이슨의 약실을 돌려 보았다. 손질이 잘 된 총은 딸깍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총을 도로 돌려놓고 책상으로 갔다. 닌자 교육을 받았다고 하니 수리검이나 표창 따위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수리검은 없었다. 책상에는 랩톱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을 뿐이었다. 제일 먼저 랩톱의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패스워드가 걸려 있었다. 쳇, 하고 소리 내어 혀를 차고는 책을 한 권씩 빼 보았다. 하얀 종이 빼곡히 적힌 한자는 보니 머리가 아팠다. 그나마 그가 읽을 수 있었던 건 영어로 된 태국어 교재 한 권이었다.

태국어는커녕 공부라면 치가 떨렸기에 책을 향한 관심을 금방 끊은 옐리세이는 이어 책상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책상이라고 하여 빼곡히 기물이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얼마간의 필기도구가 전부였다. 개중에 눈에 들어오는 건 반짇고리 정도였다. 털실에 반짇고리에 미싱이라. 옐리세이는 절대 장식용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싱을 흘끔거렸다. 여기 설마 그놈의 방이 아니었나........?

이제 와서 착각이었다니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확신이 흔들리자 조금 불안하게 책상을 뒤졌다. 저우룬칭의 것으로 보이는 다이어리나 수첩도 하나 발견되지 않아 정말 여기가 다른 사람의 방인지 의심하던 그는 열려 있던 랩톱 뒤에서 액자를 발견했다.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인 듯했다. 의자에 앉은 중년의 남자와 그 옆에 서 있는 젊은 청년이 투박한 액자 틀에 박제되어 있었다. 지금보다 한결 어려 보이는 앳된 인상이었으나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청년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목 끝까지 단단히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맨 복장은 낯설었지만, 잘 벼린 칼날 같은 날카로운 눈매와 야무지게 닫힌 입매는 여전했다. 옷장에도 없었고 슈트를 입은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잘 상상하지 못하였으나 다부지고 날렵한 체신에 슈트는 꼴리는 조합이었다.

슈트를 입혀 놓고 벗기는 것도 꽤 괜찮을 것이란 상상을 하며 옐리세이는 시선을 내렸다. 남자는 홍가에 들락거리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테가 가는 안경을 쓴 동양인 남자는 온후한 미소를 흐트러트리지 않으며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저우런칭의 굳은 표정과는 퍽 대조적이다. 부드러운 인상만 봐서는 상아탑의 도저한 학자 같은 풍채다. 나이가 좀 많아 보인다는 점만 제외하면 외모는 제법 그의 취향이었다.

여하튼 저우룬칭의 방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여 액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창밖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홍가의 2층인 듯하다. 아래층에는 저우룬칭이 있을 터. 내려가서 식사나 할까, 방을 조금 더 구경할까 고민하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

낯선 중국어를 말하며 들어온 여자는 멀뚱히 서 있는 옐리세이를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
"엉?"

전혀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이자 그녀는 영어로 바꿔서 다시 물었다. 야이쑤코의 중국인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홍콩 영어였다.

"누구신가요?"

크게 머리를 쓸 것 없이 명령받은 대로,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옐리세이가 한 시간도 안 되어 두 번이나 고민했다. 아직 그와 저우룬칭은 애인 관계는 아니다. 연애의 ㅇ는 아직도 요원했다. 그럼 친구인 걸까. 저우룬칭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간첩이라는 과거뿐이지만 친구부터 시작하기로 했으니 친구가 맞을 것이다.

옐리세이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이 방 주인의 친구인데."

친근하게 방까지 찾아온 저 여자와 저우룬칭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말투는 모호했다. 혹시 애인이라면 당장 헤어지라는 으름장을 놓을 요량이었지만 그녀는 친구라는 말에 반색하며 웃었다.

"어머나. 이전부터 룬칭과 아시던 분이세요? 가게랑 시장 말고는 나다니는 걸 전혀 못 봐서 걱정했는데 친구가 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어, 뭐........ 그냥. 근데 당신은 누구?"

누구냐는 질문에 옐리세이가 고민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여자가 약간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 뻔뻔하게 수습했던 그와는 다르게 그녀는 곧 능숙하게 안색을 다스렸다.

"아는 누나예요."
"애인은 아니고?"
"아하하. 애인이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연하는 취향이 아니라서."

애인은 아니랜다. 옐리세이는 안심하고 웃었다. 그의 성격을 겪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에게 너그러운 호감을 갖게 하는 우아한 미소가 입가를 물들였다.

"반갑습니다. 루이의 친구인 옐리세이 슈이스끼입니다."

여자는 사근사근하게 '루이의 친구'에 강한 악센트를 넣으며 내민 옐리세이와 악수했다.

"홍위롄이에요. 영어 이르은 제니니까 편하게 부르세요. 미스터 슈이스끼는 러시아 분이시군요?"

홍위롄의 시선이 옐리세이의 문신을 더듬었다. 러시아 마피야라는 걸 알았을 텐데도 태연한 태도다. 저우룬칭과 아는 사이라면 이쪽도 북한 사람, 혹 간접 출신일까. 그녀의 홍콩 영어를 알아들었음에도 옐리세이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네. 루이는 아래층에 있습니까?"
"방에 없으니 그럴 것 같네요. 얘는 친구를 내버려 두고 어딜 갔담."

그녀가 붙임성 있게 웃으며 같이 내려갈 거냐고 의사를 물어보았기에 옐리세이도 쾌히 응했다. 방에서 둘러볼 수 있는 건 다 보았다.

방은 바로 거실로 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막 방에서 나왔을 때 거실 저편의 계단으로부터 훤칠한 인영이 올라왔다.

"아........"

홍위롄을 보고 느슨해졌던 얼굴은 한 걸음 뒤에 따라오는 옐리세이를 보고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친구에게 인사하는 기색치고는 떨떠름한 눈치였기에 홍위롄은 조금 의아했지만 당장은 캐묻지 않았다.

"아칭. 저녁에 시간 되니?"
"시간이야 언제나 많죠. 왜 그러십니까?"
"아까 차에서 얘기했던 그 인형인데........"

홍위롄이 머쓱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인형으로 입가를 가렸다. 유아가 가지고 놀 법한 큼직한 인형의 한쪽 팔과 치마가 위태로이 뜯겨서 흔들거렸다.

"내가 꿰매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구. 오히려 더 찢어질 것 같지 뭐니."
"알았어요. 오늘 안으로 수선하고 드릴게요."
"천천히 해도 돼. 고마워, 부탁할게."

선선히 내민 저우룬칭의 손에 인형을 건넨 그녀는 친구분도 잘 놀고 가시라며 옐리세이에게 인사하고는 위층으로 총총 올라갔다. 저우룬칭이 눈을 치떴다.

"친구라고?"
"우리 친구부터 시작하기로 했잖냐."

옐리세이는 짐짓 가슴을 쭉 펴며 이죽거렸다.

"시작했으니 이제 끝내면 안 될까."
"내 밀에서 다리 한 번 벌리면 끝내도 되지."
"됐다. 일어났으니까 돌아가."

손을 휘휘 저으며 들어간 저우룬칭이 방문을 닫기 전에 옐리세이는 냉큼 끼어 들어 갔다. 홍위롄이 난데없이 인형을 떠넘기고 갔으니 궁금하기도 했다. 그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히 저우룬칭에게 인형의 수선을 부탁한 것인데. 옐리세이의 눈길이 전혀 섬세하게 보이지 않는 놈의 큰 손을 흘끔거렸다.

저우룬칭은 그를 한 번 노려보기는 했으나 별말 없이 책상 서랍에서 반짇고리를 꺼냈다. 바늘에 실을 꿰고 뜯어진 팔을 수선하는 손길이 매우 빠르고 능숙하다. 옐리세이는 입을 떡 벌렸다.

"야! 너 특기 있잖아! 바느질 겁나 질하네! 아까는 없다며!!"
"음?"

입으로 실을 끊은 저우룬칭은 숫제 삿대질까지 하며 펄펄 뛰는 옐리세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수선을 덜 끝낸 인형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짜증이 설핏 섞인 한숨이 인형에 떨어졌다. 쉬려고 올라온 건데 왜 변태에게 이런 닦달을 들어야 하는 걸까.

"글쎄, 특기인가........"
"너 바른대로 다시 말해. 한 번만 더 거짓말하면 죽인다!!"
"그전에 말이야. 왜 내가 너에게 취미니 특기니 하는 걸 낱낱이 고해바쳐야 하는 건데?"

친구라고 주장하는 호모는 당당했다.

"당연히 우리의 공통 관심사를 찾아서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하니까!"
"........"

어디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걸까. 저우룬칭은 깊이 침음하며 이마를 쓸었다. 엉덩이, 내 엉덩이가 문제인가? 하지만 엉덩이가 박음직스럽다는 소리는 10살 때 딱 한 번 들었던 적 이후로는 처음인데. 애초에 나이 서른이 넘은 남자를 붙잡고 엉덩이가 꼴리게 생겼으니 섹스하자고 집적거리는 추파가 정상인가?

그는 본인의 성적 성향과는 다르게 게이에게 인기가 많았다. 애인이 있을 때에도 이를 개의치 않을 만큼 온갖 유혹을 다 받아 보았지만 옐리세이처럼 적나라하고 즉물적으로 다리를 벌리라는 강압적인 유혹은 겪지 못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시하면 여자라고 해도 껄끄러울 판에 남자다.

"까먹은 거 같아서 한 번 더 말해 주는 건데……. 난 호모를 싫어해. 남자랑 자는 거 관심 없어. 너랑 자고 싶은 생각도 없고."
"처음엔 다 그래. 그런 말 하면서 뒤로 빼던 놈들도 뒷구멍 쑤셔 주면서 앞을 만져주면 자지러진다니까?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오빠 섹스 잘해."

그야 그렇게 해 주면 좋아하는 것 같긴 했지만. 저우룬칭은 차오원웨이를 비롯하여 그가 짧게나마 관계를 가졌던 남자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리고 옐리세이를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을 보며 생각했던 고뇌를 또다시 회상했다.

'한 번 자주면 떨어질까.'

물론 자신이 박히는 입장이 되어서 자지러질 작정은 추호도 없었다. 저우룬칭은 짧지만 깊은 고뇌를 끝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옐리세이의 뺨을 붙잡고 키스했다.

"........"

상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썹만 깜빡이고 있던 놈은 언제 멈칫했느냐는 듯 그를 벽으로 밀치며 탐욕스럽게 입술을 집어 삼켰다. 거칠게 등허리를 더듬던 손이 폴로 셔츠를 찢을 듯이 잡아당기며 위로 벗겼다. 허벅지를 벌리며 밀어붙이는 뜨거운 하체를 느끼고 저우룬칭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 되겠다. 이 자식은 그냥 자는 게 아니라 자신을 엉망으로 범하며 쑤셔 박아야 만족할 놈이었다.

"........왜?"

드러난 가슴과 복근을 더듬으며 내려가던 얼굴을 붙잡아 밀어내자 숨을 헐떡이며 되물었다. 이글이글 욕정이 불타오르는 눈동자의 색이 평소보다 깊었다. 저우룬칭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만하자."
"어?"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되묻는 그를 밀어내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옷을 주워입으며 핑곗거리를 만들어 냈다.

"음, 키스해 보고 느낀 건데 네가 별로 안 끌려. 아무래도 넌 나에게 성적 매력이 없는 것 같다."
"뭐?"
"한 마디로 안 땡긴다고. 안 설 것 같아."
"으엉?"

저우룬칭은 매력이 없다는 둥 별로라는 둥 하는 타박을 난생처음 듣는 탓에 바로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 않아 눈만 크게 뜬 옐리세이를 꾹꾹 밀어서 문밖으로 내보냈다.

"잘 가라."

그리고 착실히 마지막 인사까지 해 준 뒤에 문을 탕 닫고 잠갔다. 몇 호흡 뒤, 문을 박살 낼 듯이 쾅쾅 두들겨 대는 험악한 욕설이 방을 쟁쟁 울렸다.

"씨발년아! 너 반드시 내 밑에 깔려서 울부짖게 만들어 주마!! 그때 가서 앙앙 울면서 후회해도 늦었어!!!!"

저우룬칭은 어깨만 으쓱하곤 인형과 바늘을 손에 들었다.



***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나 죽겠네!! 저 좆같은 새끼를 조지지도 못하고 허구한 날 이게 무슨 꼴이냐고!!"

이오시프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는 친구에게 친절한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럼 생각을 하지 마."

대번에 사납게 부라리는 눈초리가 쫓아왔으나 이 자리에서 그의 험상궂은 눈매에 쫄 사람은 없었다. 옐리세이도 곧 마음을 고쳐먹고 째려보는 대신 대나무 숲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오시프의 사무실은 금세 울화통을 토로하는 장으로 변질되었다.

"이게 말이 되냐?! 지가 먼저 꼬리 쳐 놓고 정작 옷 다 벗기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안 설 것 같다고? 나에게 매력이 없어?!!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개같은 경우는 처음 겪는다!!"

이야기는 들어주지만 호모의 치정극을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컴퓨터로 장부를 정리하며 이오시프는 건성으로 끄덕거리기만 했다. 한 가지 의문은 있었다. 저 녀석이 더 많이 화가 난 건 먼저 꼬리 친 주제에 거부했다는 점일까,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일까.

"내가 게이만 만나서 그렇지 헤테로도 만나면 5분 안에 남자에게 발정하는 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정확히는 '남창만' 만난 것이겠지만. 여하튼 게이이든 헤테로이든 물건의 크기와 테크닉에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는 건 어쩔 수 없는 남자의 습성인 것 같았다. 한 가지 깨달음을 얻은 이오시프는 "그렇겠네."하며 영혼 없는 대답을 해 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시큰둥한 반응이자 옐리세이가 뱁새눈을 떴다.

"너도 5분 안에 뿅 가게 해 줄까? 나 펠라 잘해."
"미친놈."

이오시프의 팔뚝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소름이 절대 실내의 온도를 대폭 하강시키고 있는 에어컨 바람에서 기인한 건 아닐 터였다. 진심을 담아 욕을 해 주자 옐리세이는 외려 코웃음을 쳤다. 그를 한 번 노려보고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네가 싫다고 하는 놈한테 집적거리는 거 자존심도 안 상하냐?"
"야. 난 이런 모욕을 준 놈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더 자존심 상해. 이젠 저놈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남자로서의 자존심 싸움이라고."

그 자존심 참으로 값싸기도 했다.

일반적인 조폭의 경우라면 이렇게까지 상대의 자존심을 뭉개가며 콧대를 세우는 여자는 일전에 옐리세이에게 하였던 조언 아닌 조언 그대로 이미 강간당하여 사장가로 팔려가고도 남았으리라. 조폭이 눈독 들인 여자의 몰락이란 대개 비슷했다. 절대 강간은 하지 않는다는 결벽증을 가진 옐리세이이니 어쭙잖은 연애 놀이를 지속 중인 것이다.

이오시프도 그다지 깨끗한 바닥에서 뒹굴지 않은 탓에 쉬운 길 놔두고 뭐 그렇게 골치를 썩이고 있느냐는 빈정거림이 목을 간질간질하게 하였지만, 옐리세이의 결벽증과 더불어 자신 또한 어떻게든 아내에게 조폭의 습성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지라 점잖은 방향으로 궤도를 돌렸다.

"직구가 안 먹히면 돌아가는 방법도 있지. 이름이 루이라고 했지? 그놈이랑 친한 사람을 노려 봐."
"루이랑 친한 사람을 납치해서 협박하라는 거냐?"
"……주변에 먼저 좋은 인상을 심어주라고. 병신아."

뭘 어떻게 생각하면 대뜸 협박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지 사고 회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낼모레 서른인 녀석이 여태 연애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않은 점을 가엽게 여겨 참았다.

옐리세이가 그제야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안 그래도 친해 보이는 여자가 하나 있더라고. 어떻게 하면 될까?"
"뭐, 별다른 게 있겠냐."

이오시프가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짝 펴고 흔들어 보였다. 옐리세이가 오오 하고 감탄했다.

"좋았어. 난 있는 게 돈뿐이니까!"

"쓸 곳이 없어서 쌓아두기만 하는 주제에. 암튼 돈도 많으신 분이니 오랜만에 한판하고 가는 거 어때? 마침 오늘부터 빅또르가 휴가 끝나고 일 시작했는데."

꽤 좋아하는 엉덩이를 가진 딜러의 이름을 들먹이자 옐리세이는 솔깃했다.

"온 김에 빅따(빅또르의 애칭)의 엉덩이나 두드려 주고 가야겠네. 이오샤, 나 돈 좀 빌려줘."
"돈 많다며?"
"제길. 아까 지갑을 홍가에 놔두고 왔단 말이야. 아님 칩만 공짜로 줘도 돼."
"꺼져."

돈 안 되는 손님을 가차없이 밀어내고 일하기 시작한 이오시프에게 엉겨 붙어 귓가에 바람을 훅 불어 넣은 성과로, 한 손에는 300달러를, 한 손은 멍이 들 것처럼 후려 맞은 등짝을 문지르며 카지노로 들어간 옐리세이는 세 시간 후 칩과 교환한 320달러를 손에 쥐었다. 빌린 300달러를 갚고 나자 수중에는 딱 20달러 지폐 한 장만이 남았다. 빅따는 유능한 딜러였다.

해거름이 겨우는 밖을 선선한 공기가 쓸었다. 카지노가 있는 블록을 벗어나자 마피아와 여행객이 대다수였던 거리에 야이쑤코의 주민이 섞였다. 일상과 비일상, 무법지대와 민간인이 공존하는 도사 그곳이 야이쑤코였다. 산보를 할 겸 느긋하게 보도를 걷는 옐리세이의 옆으로 검은색 메르세데스 벤츠가 속도를 늦춰 따라왔다. 클랙슨이 빠앙, 하고 크게 울렸다. 행인의 시선이 잠깐 모이고, 벤츠가 따라오는지도 모르고 걷던 옐리세이는 상체를 크게 움찔했다.

짙은 스모크색 유리 너머로는 차주가 판별되지 않았다. 허나 번호판이 부착되어 있지 않은 자동차는 대개 홍콩계 마피아의 소유다. 본국에서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자신에게 아는 척할 홍콩계 마피아는 없었으므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경계하며 돌아보는 옐리세이의 앞에서 뒷좌석의 차창이 스르륵 내려갔다.

"뒷모습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미스터 슈이스끼가 맞군요. 지갑과 옷을 놔두고 가셨다고 루이가 찾더라구요."

차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자가 낯설었기에 더욱 경계하던 옐리세이는 루이 운운 하는 발언에서 간신히 몇 시간 전에 만났던 여자의 모습을 겹쳤다.

"미스 제니였습니까?"

홍위롄이 아하하 웃었다.

"아이, 참. 아까는 화장을 안 했던가요?"

목 뒤로 질끈 묶은 머리칼을 늘어트린 수수한 차림새였던 그녀는 짙은 화장을 하고 부드럽게 컬한 머리칼을 올려 고정한 것만으로도 영판 다른 사람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거리의 불빛을 받은 원피스는 붉은색 차이나 드레스였다.

"일간 저희 가게에 한 번 들러주세요. 아님 댁의 주소를 알려주시면 우편으로 보내드릴 게요. 루이, 그 아이가 친구라더니 연락처도 모르지 뭐예요."

그녀의 변모에 혀를 내두르던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이 언급되지 반사적으로 이오시프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주변인부터 공략하라고 했었지. 잠깐만 기다리라며 홍위롄을 붙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머니에 있는 건 달랑 20달러뿐인데 선물로 둔갑시킬 만한 가게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아오. 이럴 줄 알면 뭐 사면 될지 이오샤에게 물어보기나 할걸!’

언제까지고 그녀를 도로변에 멀뚱거리며 놔둘 수는 없으니 초조하게 발을 굴리다, 퍼뜩 시야의 구석에 스친 가게가 그의 머릿속에 불을 번뜩거렸다.

홍위롄의 옆자리에서 얼른 가자는 듯한 불편한 헛기침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잽싸게 반대편 블록의 야채 가게로 뛰어간 옐리세이는 양팔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안고 헐레벌떡 돌아왔다.

"예전에 알던 까료사람(러시아어로 고려인) 들었는데 한국인은 매운 걸 잘 먹는다면서요?"
"네, 네 ?"
"선물이니까 루이랑 같이 드십쇼."

그러고는 그녀가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차창 너머로 비닐봉지를 밀어 넣고는 멋진 미소 一 그의 성품을 고려하지 않은 객관적인 판단으로는 충분히 멋진 미소였다 一 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져 갔다.

지갑을 가져가라고 했더니 왜 갑자기 한국인 운운을 하는 걸까. 까…… 뭐라는 건 또 뭐고. 어리둥절해하며 비닐봉지를 내려다본 홍위롄은 더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까만 비닐봉지에 한 아름 담긴 그것은 바로, 맵기로 유명한 태국 고추 프릭끼누였다.

그녀가 홍콩에서 물장사를 하고 있을 때 한국인 손님도 물론 찾아왔으나 매운 걸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프릭끼누와 자신과 한국인의 연관관계는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내도록 못마땅한 기색이던 팡룽이 투덜거렸다.

"내가 옆에 있는데 잘도 넙죽넙죽 다른 남자의 선물을 받는군."
"어머나. 제가 당신 여자이기라도 해요?"
"아니었나?"
"유감이지만 흑사회 남자는 지긋지긋하거든요."

차창이 올라가고 팡룽은 기사에게 출발을 지시했다. 홍위롄이 자그마한 프릭끼누 하나를 들어 팡룽의 눈앞에 흔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공짜로 받았으니 오늘 저녁은 룬칭에게 쓰촨 요리라도 만들어 달라고 할까요? 당신도 같이 먹을래요?"

팡룽이 울컥했다.

"이봐, 위롄. 방콕에서 불러온 오성급 호텔 셰프가 만들고 있는 요리보다 ‘당신의 아칭’의 요리가 더 맛있다는 거야?"

언성이 조금 높아지고 앞좌석에서는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홍위롄은 태연했다.

"그야 맛은 크루저의 조리실에서 열심히 땀 빼고 있는 셰프의 요리가 낫겠죠. 하지만 룬칭이 쓰촨 요리를 배운 건요, 저 때문이라구요. 칭즈를 임신했을 때 입덧이 너무 심해서 물까지 역할 지경이었는데 룬칭의 요리, 특히 매운 요리만 먹을 수 있었다니까요. 몇 달 내내 룬칭이 삼시세끼 요리를 해서 저에게 줬어요. 당신은 입덧을 안 해 봤으니까 그 고마움을 모르죠."

팡룽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흥. 걱정하지 마. 난 요리는 할 수 없어도 당신이 입덧인지 뭔지로 그 빌어먹을 아칭의 요리밖에 먹을 수 없게 되면 전속 요리사로 고용해 줄 수는 있으니까."
"맙소사. 이 나이에 당신 애를 가지란 거예요?"
"안 낳겠다고?"
"홍콩에 있는 자식들이나 잘 키워요 나 원, 이래서 흑사회 사내들이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홍위롄의 머리 뒤로 야이쑤코의 야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홍위롄이 프릭끼누의 정체를 알게 된 건 크루저의 근사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귀가 한 후였다.

"어유, 요즘 뱃살이 붙었는데 저녁을 너무 먹어서 옷 솔기가 뜯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렇지만 케이포는 낙낙하게 입으면 안 예뻐서."

얼굴이 발그레하게 붉어질 만큼 기분 좋게 취한 홍위롄은 마중을 나온 저우룬칭의 팔에 매달려 계단을 올라가며 재잘거렸다.

"글쎄요, 전 누님보다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는데."
"말은 잘해."

홍위롄이 깔깔 웃으며 그의 어깨를 탕탕 쳤다. 3층까지 동행한 저우룬칭이 얼른 쉬라며 들고 있던 핸드백과 비닐봉지를 건네주자 술기운이 올라 다소 멍하게 있던 그녀는 아차차, 하고 말을 이었다.

"참. 아까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슈이스끼를 만났거든."
"……무슨 일 안 당하셨습니까?"
"무슨 일이라면 무슨 일이랄까. 웬 선물을 하나 받았지 뭐니."

저우룬칭의 고개가 홍위롄이 가리킨 비닐봉지로 비뚜름히 꺾였다. 안 그래도 프릭끼누의 정체가 궁금하던 차였다. 깔끔 떨며 거들먹거리는 팡룽이 그녀에게 줄 선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

"한국인은 매운 걸 좋아한다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너랑 같이 먹으라는 거야. 넌 왜 그런지 알겠어?"

저우룬칭도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정체불명의 프릭끼누를 멀뚱멀뚱 내려다보던 그는 홍위롄이 고개를 돌리며 작게 하품할 무렵에야 턱을 주억거렸다.

"지난번에 하도 꼬치꼬치 캐묻길래 제가 북한 출신 간첩이라고 거짓말을 했었습니다. 롄 누님까지 북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요?"
"뭐어?"

지나치게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홍위롄은 취기까지 달아났다.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믿어? 그보다 친구라며?"
"친구 아닙니다."

표정까지 싹 굳히는 정색에 그녀는 더 아리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별난 사람이네."
"이상한 변태죠."

‘변태’라는 그 한마디가 어렴풋한 확신을 주었다. 저우룬칭의 남난은 그녀도 익히 아는 바다.

"힘내."
"익숙해요."

저우룬칭은 태연히 응수하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이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쉬십시오."

인사를 하고 1층으로 내려온 저우룬칭은 야채저장고에 프릭끼누를 봉지째 넣었다. 가게 메뉴에 쓰촨 요리는 없지만 보관해 두며 쓸 곳은 있을 것이다. 타이 요리에 써 봐도 되고.

대개 간소한 마른안주를 먹기에 홍가의 주방은 밤이 깊을수록 더 한가했다. 주방 구석에 설치된 TV를 보던 리뎬신이 인기척에 돌아보며 인사했지만 야채저장고를 여닫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수고하고 일이 있으면 부르라며 뒷문으로 돌아 나온 저우룬칭은 라이터의 불을 입에 문 윈스턴에 댕겼다.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라는 게 뻔한 헛소리를 아직까지 믿다니, 저우룬칭 자신이 더 놀랐다.

‘멍청한 거냐, 바보인 거냐.’

옐리세이를 방에 던져놨을 때 그가 방을 뒤진 흔적이 있었다. 그는 방을 탐색하는 데는 능했을지 몰라도 원 상태로 되돌려 정리하는 데는 흥미가 없어 보였으니까. 성인식 날 차오쑹윈과 찍었던 사진은 책상 반대편에 놓여 있었고, 랩톱의 전원을 끄는 기본 적인 작업조차 하지 않은 놈이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은 온통 중국어가 적힌 책뿐이고 옷장에는 차이니즈 마피아가 주로 사용하는 중국제 토카레프인 헤이싱까지 있는데 어째서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믿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날 속였다고 길길이 날뛰는 놈이라면 적당히 맞춰서 응수해 주겠는데 엉성한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는데다 홍위롄에게까지 선물을 줄 정도라니 어지간해서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홍위롄에게 쉽게 접근이 가능한 것도 꺼림칙하다.

‘어떻게 한담…….’

저우룬칭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담배가 하나도 맛있지 않았다.





휴가를 빙자한 방종의 시간을 허락받았음에도 옐리세이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남국의 풍광을 만끽하기에는 더위를 많이 탔으며, 5년이나 지내다 보니 시큰둥해졌다. 그렇다고 사창가에 가는 것도 지겨웠다. 모스크바에서야 날마다 새로운 얼굴의 남창을 발견할 수 있지만 야이쑤코는 모스크바에 비하면 현격히 작은 도시다. 창녀보다 수요와 공급도 적은 남창의 숫자는 고만고만했고 옐리세이는 지겨워졌다.

결국 지난밤에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시간 죽이기는 술 정도였다. 게임도 내키지 않아 무료하게 TV채널도 돌리고 게이 포르노 비디오도 보며 맥주를 홀짝이다가 빠벨이 귀가하여 새벽까지 술판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매우 늦게 술에 취하여 잠이 든 옐리세이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현관의 차임벨 소리를 무시하며 꿋꿋하게 수면 시간을 이어갔지만 방문자는 옐리세이보다 더 끈질겼다.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이불을 뒤집어써서 짜증나는 벨 소리로부터의 도피를 꾀하던 옐리세이는 끝내 이불을 걷어차며 자리를 박찼다. 외판원이면 죽여 버리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드로어즈만 입은 차림 그대로 문을 쾅 밀어 연 그의 시야에 잡힌 건 멀뚱멀뚱 쳐다보는 삼백안이었다.

"으엉?"

잠이 덜 깼는지 아니면 꿈꾸고 있는 건지 이상한 의문이 들어 눈을 부비는 그에게 저우룬칭은 평소처럼 시틋하게 입술을 뗐다.

"지갑 배달 왔는데."

아, 그래. 지갑. 내 지갑.
여전히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아 얼떨떨하게 바라보고만 있자니 그가 한 걸음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

아무리 옐리세이라도 저우룬칭이 하룻밤 만에 마음을 바꿔먹어 자신과 섹스하러 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안 꼴린다는 둥 실로 모욕적인 발언까지 하며 밀쳐 냈던 그를 보는 눈길이 미심쩍게 가늘어졌다.

"너 우리 집 어떻게 알았냐."

저우룬칭이 지갑과 옷이 든 쇼핑백을 꺼내 휙 던졌다.

"란뜨제프스카야 사무실에 전화해서 물어봤지."
"사무실 연락처는 어디서 들었는데?"
"전화번호부."
"……."

란뜨제프스카야도 물론 대외적으로 위장하여 번듯한 간판을 내건 사업을 하고 있다.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진 옐리세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저우룬칭은 내처 설명했다.

"내가 홍가의 루이라니까 여기 주소도 바로 알려줬다마는."
"……."

여기에도 의심할 구석은 없었다. 엊그제 조직원들과 술을 마셨을 때 홍가의 루이는 내가 점 찍어뒀다고 신나게 떠벌렸었으니까.

‘아무튼 그건 됐고, 이 자식은 철벽을 그렇게 치더니 왜 여기까지 왔냐고, 무슨 속셈이야?’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간 옐리세이가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저우룬칭은 스스럼없이 실내를 둘러보았다.

"여긴 부엌 없는 아파트냐?"
"……어, 뭐. 없긴 한데."
"잘됐네. 혹시 주방 없을까봐 만들어서 가져왔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상자를 대충 바닥에 내려놓았다.

"너네 러시아 놈들이 잘 먹던 벱스뜨로가나프니까 나중에 데워 먹어. 부엌은 없어도 전자레인지 정도는 있지?"

옐리세이는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독 탔냐? 아니면 설사약?"
"그러고 싶긴 했는데 이번에는 아냐. 어제 프릭끼누 사 준 것에 대한 보답이야. 네게 빚지기 싫다."
"흠."

타당한 이유였다. 그렇다면야 더 의심할 건 없다.
겨우 표정을 푼 옐리세이에게 저우룬칭은 현관에 선 그대로 아침부터 이곳을 찾아온 진짜 목적을 꺼냈다.

"앞으로도 계속 추근거릴 작정이지?"
"물론이지. 널 굴복시키고야 말 거니까."

잘 것이냐 안 잘 것이냐는 단순한 쾌락 본위를 넘어 자존심 싸움이라는 인식을 시작한 옐리세이는 절대 중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가볍게 코웃음 쳤다. 저우룬칭이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어쩔 수 없지. 질리거나 단념할 때까지 만나줄 테니까 가게에서 영업 방해는 하지 마라. 가게의 다른 사람에게도 접근하지 말고."

홍위롄은 차오쑹윈과 그의 아들인 차오칭즈가 사망한 현재, 저우룬칭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그녀라고 특징지어 지적하면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까발리는 셈이 된다. 홍가가 일종의 불가침 구역이긴 하여도 조폭이란 원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 약간의 빌미조차 옐리세이에게 남겨두기 꺼려졌다.

옐리세이가 "허어."하며 눈을 치뜨더니, 이내 음흉하게 웃었다.

"진작 고분고분히 말을 들을 것이지. 이리 들어와."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며 침실로 데려가려는 그의 팔을 밀어냈다.

"잔다는 말은 안 했다. 몇 번째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남자를 싫어해."
"그건 네가 남자 맛을 못 봐서 그렇다니까."
"앞으로도 맛볼 예정은 없어. 아무튼 할 말은 다 했으니 난 이만 간다."
"뭐야. 벌써 가냐?"
"영업 준비해야 돼."

미련 없이 등을 돌리려는 저우룬칭의 어깨가 붙잡혔다.

"연락처나 내놓고 가, 새끼야. 부르면 바로바로 튀어나오라고."

침실로 후딱 달려가 휴대폰을 들고나온 옐리세이가 엄지로 폴더를 탁 밀어 열고 휴대폰 번호를 입력할 만반의 준비를 하였지만, 저우룬칭은 턱을 가로저었다.

"휴대폰 없다."
"야. 요즘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들도 다 휴대폰 하나씩은 들고 다녀. 돈 없어서 그래?"

저우룬칭도 당연히 홍콩에 있을 때는 개인용, 사업용, 추적을 피하기 위한 프리메이드 휴대폰 등등 여러 대의 휴대폰을 사용하였지만 야이쑤코로 오면서 정리했다. 연락할 사람도 홍가의 사람들뿐이고 가게에도 전화기가 있으니 딱히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야 쉽지만 그렇다면 자신의 거짓말을 해명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거짓말이라고 얘기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모르는 척할지 대답을 고르는 사이에 옐리세이는 돈이 없어서 사지 못 한 것이라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하나 사 줄 테니까 같이 나가자."
"됐어. 너한테 빚지기 싫다니까."
"먹을 걸로 갚아. 우리 엄마가 만든 요리보다 네가 만든 게 낫더라."

한 번 고집을 세운 놈이 도무지 밀려날 것 같지 않았으므로 저우룬칭은 오래 실랑이 하지 않았다. 바로 옷을 주워 입고 나가려는 놈을 눈곱이나 떼고 오라고 욕실로 보낸 그는 거실 모서리에 있는 냉장고에 가지고 온 도시락 상자를 넣어 두었다.





CHAPTER 2





송의방의 조직원이었던 리뎬차이와 리뎬신, 두 쌍둥이 형제는 홍콩경찰이 왕립이었을 시절(홍콩이 영국에 조차되어있을 당시의 정식 명칭은 왕립홍콩경찰), 견습독찰의 살인혐의로 나란히 수배되었다. 본국을 떠나느냐 체포되느냐 양자택일의 길에서 형제는 전자를 택했고 차오쑹윈은 야이쑤코로 밀항할 수 있게 뒷배를 봐주었다.

차오쑹윈이 암살된 후 장쯔궈와 함께 야이쑤코로 건너온 홍위롄이 홍가를 개점하였을 때 형제는 고용되었고 현재까지도 주욱 홍가에서 일하며 새 터전을 꾸려가고 있었다. 차오쑹윈의 정부로 몇 년이나 내로라하는 술집의 마담으로 있던 그녀에게 홍가의 경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최초의 난관은 요리였다. 개점할 당시에는 세 사람 모두 요리가 서툴렀으므로 요리사 양탕바오를 따로 고용하였지만, 양탕바오가 자신의 가게를 오픈하여 나간 후에는 그에게 요리를 배운 장쯔궈가 주축이 되어 유지 중이었다. 애초에 홍가는 요리의 맛보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술 한잔할 수 있다는 편안함 때문에 마피아들이 찾는 곳이었기에 일류라고 할 수 없는 요리라도 장사에 지장은 없었다.

한 달 전, 저우룬칭이 주방에 들어가게 되며 요리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홍가의 근본이 바뀌지는 않았다. 나이를 속이고 호스티스가 된 후 이십여 년을 불야성의 환락가에서 살아온 홍위롄은 홍콩을 벗어났는데도 시간에 쫓겨 숨 가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며 가게의 경영도 상당히 느슨하게 하였다. 차오쑹젠이 긴자에 가게를 낼 수 있는 자금을 줄 테니 일본으로 가라고 권하여도 굳이 사양하고 멀리 떨어진 타이를 선택할 정도였다.

덕분에 점심시간 이후의 휴식 시간과 폐점 시각을 칼같이 지키는 홍가는 3시가 되자 휴식중이라는 팻말을 내걸고 문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테이블을 한 번씩 훔치던 리뎬신이 낯선 휴대폰을 구석 테이블에서 발견한 건 그 무렵이었다.

"혹시 휴대폰을 놓고 간 손님이 있었습니까?"

일찌감치 앞치마를 벗고 타블로이드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던 저우룬칭이 한손을 올렸다.

"아, 내 휴대폰이야."
"언제 휴대폰을 사셨습니까?

저우룬칭이 ‘오늘 아침’이라는 대꾸를 하기 전에 착신음이 리뎬신의 손안에서 들렷다. 휴대폰에 내장된 기본 벨소리 중의 하나였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리뎬신에게 휴대폰을 건네받은 저우룬칭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의 전화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 휴대폰의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도, 연락처에 저장된 사람도 한 명 뿐이었으니까.

"왜."

별반 흥미도 없는 신문의 광고란이나 훑으며 무성의하게 전화를 받았다. 새된 음성이 짜증스럽게 전파를 타고 왔다.

「넌 무슨 전화를 이따위로 받냐?」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아, 쫌!!」

콱 소리를 내질러 폴더를 닫으려던 손을 막은 옐리세이가 구시렁거렸다.

「염병. 더럽게 까칠하네. 아무튼 홍가 다 와 가니까 나와라」
"영업시간이야. 일해야 돼."
「3시 넘었잖아. 내가 너네 가게를 하루 이틀 들락거렸냐. 지금 노는 거 다 알거든?」
"저녁 영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 생각하지 않냐?"
「그 전에 보내줄 테니까 걱정 놓으슈」

끊지 말라며 소리친 주제에 전화는 일방적으로 먼저 끊겼다. 저우룬칭은 미간마저 찌푸리며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노려본들 기분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옐리세이가 강압적인 요구를 거두는 것도 아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빠앙빵 커졌다. 지금 홀에 있는 사람은 그와 리뎬신뿐이었다. 얼추 통화의 내용은 들었을 텐데도 리뎬신은 궁금해하거나 관계하지 않겠다는 투로, 비뚤어진 의자를 바로하고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클랙슨이 한 번 더 들렸다. 민폐가 되든 말든 나올 때까지 소음 공해를 계속 일으키고도 남을 놈이다. 안면을 튼 지 불과 며칠 만에 이전까지는 이름 하나 모르던 러시아 마피아에 대하여 퍽 많은 걸 알게 된 저우룬칭은 그 사실에 서글픔과 약간의 짜증을 느끼면서 신문을 접었다.

도리 없이 뒷문으로 돌아나가는 사이에도 클랙슨 소리는 두 번 들렸다.

"빨리 나오라니까."

옐리세이가 툭툭에서 마구 손짓했다. 미리 목적지를 이야기했는지 저우룬칭이 맞은 편에 올라앉자 툭툭은 바로 출발했다.

"몇 시간 전에 봤는데 안 지겹냐?"

어쩌다 이런 놈에게 찍혔는지 한심하기도 하여 묻자니 옐리세이가 심각한 빛으로 끄덕거렸다.

"맨날맨날 보고 있으니까 좀 지겹긴 해."
"그럼 안 보면 되잖냐."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다고. 나 휴가 며칠 안 남았어."

옐리세이는 운전석의 기사가 듣든 말든 ‘보스에게 받은 휴가가 끝나기 전에 널 따먹겠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고, 저우룬칭은 지금이라도 성이 풀릴 때까지 만나는 주겠다는 발언을 취소할까 고민하였다.

"그나마 네가 잘생겼으니까 얼굴 보는 맛은 있어."

솔직한 칭찬을 받았지만 남자에게 잘생겼다는 소리를 물리도록 들은 저우룬칭은 별 감흥이 없었다.

사이드가 트인 차로 여름의 열기가 남은 공기가 밀려들었다. 복잡한 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간 툭툭은 관광지구 외곽의 번화가에서 멈췄다. 야이쑤코에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저우룬칭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하는 거리였다. 뭘 하려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마피아의 ‘사업’을 위한 관광지구에서는 제아무리 멧돼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놈이라도 이상한 일로 날뛸 일은 없을 테니 그 점은 안심이었다.

옐리세이가 미리 끊어 둔 영화표 두 장을 꺼냈다.

"갑자기 웬 영화?"
"데이트의 정석 코스가 영화래."

그 말은 맞았지만 며칠 사이에 옐리세이의 성격을 꽤 파악하게 된 저우룬칭은 의심이 먼저 들었다. 놈이 끌고 온 곳은 포르노 무비가 아닌 일반적인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영화관이었으나 무얼 상영하든 영화관에는 공통점이 있다.

조용하고, 어둡다.

"성추행하려고 그러지?"
"어."
"만지면 손목을 분지를 거다."

다분히 진심을 담은 말이었으나 옐리세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야이쑤코 관광의 목적은 뻔하였기에 영화관에서 구태여 시간을 낭비하는 여행객은 드물었으므로 평일 대낮의 영화관 좌석을 드문드문 채우고 있는 사람은 대개가 현지인이었다. 미리 표를 예매하지 않아도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 듯하였다.

팝콘과 콜라를 하나씩 사서 나란히 좌석에 앉았다. 얼추 상영 시각과 엇비슷하게 도착하였던지라 상영관 내는 곧 어두워졌다. 옐리세이가 고른 영화는 의외로 로맨스 영화였다.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언뜻 광고가 스쳐 지나가는 걸 본 기억이 났다.

"제목이 뭐였지?"
"〈왓 위민 원트〉. 영화표도 안 봤냐."

옐리세이가 이죽거렸다.
영화를 자주 보는 건 아니었고 로맨스 영화는 더욱 취향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공짜로 보는 영화이니 저우룬칭은 불만 없이 잠자코 앞을 응시했다. 태국어 자막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더빙이 아닌 할리우드 영화였기에 감상하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영화평론가나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후한 평점을 받을지도 모르겠으나, 곧 하품이 나왔다. 목적은 어느새 영화 감상이 아닌 팝콘과 콜라 시식으로 변해 있었다. 깜빡 졸다가 고개를 푹 떨군 서슬에 놀라 움찔 잠에서 깬 저우룬칭은 뻐근해진 목을 주무르며 힐긋 시선을 돌렸다. 옐리세이는 아예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

아니, 이런 영화가 본인 취향도 아니었다면 차라리 다른 영화를 골랐어야 하는 거 아닌가. <미션 임파서블〉 과 〈글래디에이터〉 포스터도 옆에 있었는데.

저우룬칭의 휴식 시간과 방영 시간대가 맞는 영화가 〈왓 위민 원트〉 뿐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옐리세이가 들었다면 넌 배려를 해 줘도 지랄이냐며 역정을 낼 타이밍이었지만, 잠깐 사이에 깊이 잠든 그는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공짜 영화라서 불만 없이 보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로 공짜 영화이니 돈 아까워할 이유도 없었다. 저우룬칭도 반쯤 먹은 팝콘을 바닥에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본격적으로 졸기 시작했다.

잠은 눈꺼풀 위로 스크린에 영사되는 빛이 점멸하기를 반복하고 감정이 격양된 배우들의 대사가 저마다 귓전을 두드렸지만 선잠에는 지장이 없었다. 저우룬칭의 잠을 방해 한 건 영화가 끝나 밝아진 조명도 아니었고, 영화의 전개에 따라 잔잔히 올라가는 배경 음악도 아니었다.

허벅지를 슬금슬금 더듬는 손이었다.
한참을 졸다가 낯선 감촉에 눈을 뜬 저우룬칭은 오른쪽 옆자리에서 팔걸이 너머로 슬그머니 뻗어온 손이 자신의 허벅지 위에 턱 하니 올려 있는 걸 목격했다. 이 새끼를 어쩌면 좋을까.

방금 전까지 잘 졸고 있던 저우룬칭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손은 점차 대담하게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허벅지만 좀 만졌다면 적당히 밀어냈을 테지만, 사타구니로 흘러들어온 손은 옷 위를 만지는 걸 넘어서 지퍼로 향하고 있었다. 저우룬칭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내가 분명히, 성추행하면 손목을 분지른다고 했을 텐데.

"끄아아아악!!!"

상영관 안에 우렁찬 비명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대번에 사람들이 투덜거리거나 욕하면서 시선을 돌렸지만 비명을 지른 장본인이 백인이라는 걸 보고는 그 이상의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야이쑤코에서 관광객이 아닌 외국인 대다수가 마피아나 마피아의 관계자라는 건 3살짜리 어린아이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아아악! 야이 씨발새끼야! 만진다고 닳냐!!!"
"어. 닳아."

저우룬칭은 심상하게 대꾸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옐리세이의 팔뚝을 붙잡아 질질 끌며 상영관을 나왔다. 뼈를 부러트린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손가락뼈 하나 탈골 된 걸 가지고 엄살이 심한 놈이었다.





"근육도 안 상했고 예쁘게 잘 부러졌구먼. 자네, 전문가로군?"

추 노인은 환부를 만지며 저우룬칭의 깔끔한 솜씨를 칭찬했다. 가는귀가 살짝 먹은 추 노인은 옐리세이가 비명을 지르든지 말든지 탈골된 뼈를 뚜두둑 맞춰 끼우고는 퉁퉁 부어가는 손가락과 손등에 침을 놓았다.

"빌어먹을! 이 영감 믿을 만해?! 내 손가락 썩어서 잘려나가는 거 아냐?!"

차이나타운에 단 하나 있는 접골원의 원장인 추 노인이 들었다면 상당히 언짢아했을 불신이었지만 추 노인은 영어를 하지 못했고 옐리세이는 중국어를 하지 못했다. 통역을 맡게 된 저우룬칭은 한마디만 해 주었다.

"소리 빽빽 지르면서 날뛰면 엉뚱한 곳에 시침돼서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해 달라고 하시는군."

옐리세이는 추 노인이 침을 놓으며 했던 기침 소리가 어째서 이렇게 기나긴 문장으로 번역되었는지 매우 의심되었지만 지금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았다. 엄청난 불신의 시선으로 술렁술렁 시침하는 추 노인을 보기는 했지만 일단 입은 닥치자 실내는 금방 조용해졌다.

"거, 이 백인 총각 안색도 안 좋고 어깨도 근육이 많이 뭉친 것 같은데 부항이라도 뜰 생각은 없누? 오늘 손님도 없으니 싸게 해 줌세."

이번에는 그대로 통역해 주었다.

"부항? 그게 뭔데?"
"몸에 좋은 거. 너네 양놈들이 좋아하는 동양의 신비로움 중의 하나야."
"동양의 신비 좋아하는 건 서구 놈들이겠지."

퍽 편견에 가득한 저우룬칭의 발언에 옐리세이는 투덜거리기는 했으나 몸에 좋다는 발언이 제대로 먹혀 고분고분히 부항에 응했다.

"오늘 치료비는 내가 지불할 테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딴에는 배려해 주었지만 옐리세이의 눈꼬리는 대번에 하늘로 치솟았다.

"뭐? 그거야 당연하지. 새꺄, 넌 남의 귀한 손가락을 부러트려 놓고 돈까지 떠넘길 심산이었냐? 내가 선량한 마피아라서 치료비만 받는 거지, 다른 놈이었으면 넌 장기까지 탈탈 뜯겼어."
"선량한 건 나지. 성범죄자를 고소하지도 않고 친절하게 치료까지 해 주고 있잖아."

투덕거림은 거 시끄러우니 조용히 좀 하라는 추 노인의 잔소리에 잠잠해졌다. 입 다물고 있으니 심심하기도 하고 부항을 뜰 때 웃통을 벗으라는 말 정도는 보디랭귀지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기에 저우룬칭은 추 노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옐리세이가 환자 두고 빨빨거리며 나가지 말라고 짜증을 냈지만 듣지 않았다.

빨리 나오라는 옐리세이의 채근에 앉아 있던 그대로 나온 탓에 주머니에는 담배 한 갑도 없었다. 한 블록 건너편에 있는 담배 가게에서 윈스턴 한 갑과 라이터를 사서 돌아온 저우룬칭은 새 담배의 비닐을 뜯었다. 습관적으로 담뱃갑을 손끝으로 두어 번 두드려서 한 개비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한 대 피운 후 첫 담배였다.

담배 연기를 깊게 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가는 사람은 전부 중국인이고 들려오는 대화 소리는 광동어다. 이곳이 이역만리 타향이 아니라 홍콩의 거리이고, 조금만 발을 더 옮겨 나가면 하늘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고층 건물의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묘한 감상이었다.

무심코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차오쑹젠이 죽기 전에는 마음대로 홍콩 땅을 밟지도 못하는데 벌써 향수병이 생기면 큰일이었다. 2, 3년 동안 왕립홍콩경찰의 눈을 피해 도일(渡日)하여 홍콩 땅을 떠나 있었던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곧 귀국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었다.

단순히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차오쑹윈의 장례식 후 지체 없이 홍콩을 떠나기로 선택하였던 홍위롄의 결단력만큼은 대단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 손님. 저우 선생…… 맞으시죠?"

저우룬칭은 다사하게 이어지던 상념을 끊으며 쪼그리고 앉았던 허리를 폈다. 접골원에서 그들을 안내해 주었던 추 노인의 손녀였다. 인사할 때 이름을 밝힌 기억은 없어 "맞습니다만……."하고 떨떠름하게 대꾸하자니 여자가 애매하게 웃었다.

"역시 기억 못 하시나 보다. 롄 언니 마중하러 오실 때 종종 뵈었거든요."

소개를 듣고도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굳이 좁은 화교 사회에서 홍위롄과 아는 사이라는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저우룬칭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어쩐 일로 언니와 같이 안 오셨어요? 아까 웬 낯선 외국인과 오시길래 조금 의외였거든요."
"롄 누님은 다른 약속이 있으십니다."

어제 홍위롄이 정말 ‘저녁 식사만 하고’ 귀가한 탓에 잔뜩 기분이 틀어진 팡룽이 아침나절부터 들이닥쳐 홍위롄을 데리고 나간 탓이지만 거기까지 시시콜콜 이야기할 필요성은 없었다. 여자도 단순한 인사였는지 그 이상의 호기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저희 사이에서 유명해요. 한 달 전부터 꼬박꼬박 롄 언니를 데려다주고 마중 나오는 남자분이 있으시다고. 언니는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진짜 아무 사이 아니세요?"

초면이나 진배없는 사이에 무례하게까지 여겨질 수 있는 화제였으나 애교스럽게 웃는 그녀의 화법에는 친근감이 있었다. 저우룬칭도 그냥 피식 실소했다.

"누님의 하인 겸 보디가드인 사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하하. 이렇게 멋있으신 하인이 어디 있어요?"

웃음소리에 섞여 시답잖은 화제가 이어졌다. 홍가의 종업원이 아닌 외부의 동향인과 길게 이야기하기는 오랜만이기도 하였거니와 그녀가 붙임성 좋은 미인이라는 점까지 더하여 대화는 즐거웠다. 남자만 잔뜩 꼬이는 팔자였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여자를 좋아 하는 보편적인 성적 취향의 남자였다.

"참, 저우 선생. 전신에 용 문신이 있다는 게 진짜인가요?"

여자의 눈길이 무례하지 않게 용의 꼬리가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저우룬칭의 왼쪽 팔뚝을 가만히 훑었다. 저우룬칭도 얼결에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실은요, 작은 오빠가 팡 대인의 밑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저우 선생이 여기에 오셨을 때 본국 송의방의 유명한 간부가 왔다고 호들갑을 떨더라구요. 온몸에 문신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도 그때 언뜻 들었었는데, 그분이 바로 저우 선생인 줄은 얼마 겨에 알았지 뭐예요."
"하하."

저우룬칭은 짧게 웃으며 팔뚝의 문신을 문질렀다.

"저보다는 문신이 유명하죠, 문신사가 꽤 유명하신 분이었던데다……. 엄청 비쌌든요."
"어머, 정말이었어요? 언젠가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에게 호감을 가진 게 분명한 그녀의 은근한 발언에 저우룬칭은 말없이 미소를 깊게 했다. 구애라기보다는 강압에 가까운 옐리세이의 저돌적인 부딪힘만 받다가 외면 화법도 괜찮은 여자의 호의를 받으니 숨통이 트일 지경이었다.

한동안 여자를 만나지 않기도 했고, 그녀와 가벼운 교제를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막 연락처를 물으려던 찰나, 등 뒤에서 문이 드르륵 열렸다.

"아, 끝났냐?"
"……어어."

어쩐지 옐리세이는 불퉁한 얼굴이었다. 잘 치료 받은 온 놈이 왜 저러나 싶긴 했지만 일단 추 노인에게 진료비를 지불했다.

"약국에서 소염제나 사다 먹이고 2, 3주 정도 조심하면 될 게야. 부항 뜰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말해 줘."
"감사합니다."
"홍 여사에게 요통은 괜찮은지 안부도 전해 주고."

주 노인에게도 정식 소개는 하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다. 생각 이상으로 홍위롄이 차이나타운의 유명인이라는 걸 실감한 저우룬칭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접골원을 물러 나왔다.

괜찮으냐고 예의상 물어보았지만 시큰둥한 대답만 돌아왔다. 그답지 않은 부루퉁한 태도에 저우룬칭은 갸웃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거리를 걸어갔다.

자이나타운 입구의 버스 정류장까지 나와서야 옐리세이의 말문은 트였다.

"야. 루이."
"음?
"너, 나한테눈 왜 그렇게 안 웃냐? 아까 그 여자랑 되게 즐거워 보이던데."

저우룬칭은 접골원 문이 투명한 창으로 되어 있던 걸 떠올렸다. 의도치 않은 목격은 당하였지만 딱히 숨길 만한 내용도 아니었던지라 대답은 솔직했다.

"네가 내 입장이라면 웃음이 나오겠냐. 입이 아프도록 말하지만, 난 남자에게 흥미 없고 그녀는 매력적이라고."

보나마나 빼액 소리 지르며 울컥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옐리세이는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리기만 했다.

"옛날에 내 첫사랑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쪽도 헤테로였나 보지?"
"그냥, 뭐……."

옐리세이는 시선을 숙이며 붕대를 감지 않은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예리하게 그의 안면을 가르는 흉터가 손바닥 아래로 사라졌다가 드러났다.

짧은 침묵 끝에, 옐리세이는 고개를 올렸다.

"근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뭘 어째."
"내 손 말이야, 손."

그가 보란 듯이 붕대를 처맨 왼손을 눈앞까지 올렸다.

"오른손잡이라서 망정이지, 손 하나가 이렇게 되었으니 나을 때까지 불편하잖아.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씻는 것도 힘들단 말이다."
"오른손잡이라며. 오른손으로 다 하면 되지."
"헛소리하지 말고 책임을 져, 새꺄."

꿀릴 게 없는 저우룬칭은 ‘네놈이 날 더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라며 정당한 항변을 하려 했지만 때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낯 뜨거운 소리로 민망하게 떠들 작정은 없었기에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옐리세이는 한없이 당당하고 뻔뻔했다.

"허벅지 한 번 만진 것치고는 위자료가 너무 비싼 거 아냐?"

조용히 닥치라는 뜻에서 버스비까지 내주었지만 뒤따라 버스에 탑승하는 놈의 입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역시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을 분질렀어야 하는 건데.

저우룬칭은 오만상을 쓰며 뒤쪽의 빈자리에 앉았고 옐리세이도 당연하다는 듯이옆 에 앉았다.

"씨발, 맨살이라도 만졌으면 억울하지나 않아. 항쟁이라도 나면 어쩔래? 이 병신 같은 손으로 총을 쏘란 거야 나이프를 휘두르라는 거야, 어?"

결국 그는 옐리세이의 입을 턱 막았다.

"그래서, 뭘 바라는 건데?"

옐리세이가 입을 막은 손을 끌어 내렸다.

"생각해 봐야지. 일단 홍가로 가자."
"하아아……."

손목이 아니라 목을 분질렀어야 했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은 법이고 버스는 차라리 홍가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의 바람과는 달리 부지런히 도로를 달렸다.





이오시프는 눈을 의심했다.
그는 미간에 세로줄 주름까지 세우며 재차 저 의심스러운 놈을 관찰하였다. 자신의 교우 관계를 뒤져보면 녹아내릴 것 같은 백금발과 열은 잿빛 눈동자를 가진 놈은 몇몇 찾을 수 있을 터이나, 개중 ‘내가 너무 잘생겨서 썩을 놈들이 만만하게 여긴다’라는 또라이 같은 이유로 자신의 얼굴에 칼을 그을 정신 나간 놈이 두 명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一그런데, 왜 그 세상에 둘도 없을 정신 나간 놈이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술잔을 나르고 주문까지 받으며 서빙 중인 걸까.

저놈이 내가 아는 그놈이 맞는 건지 끝내 확신을 못하고 있는 이오시프의 어깨를 필 리몬 부돈니가 건드렸다.

"야, 이오샤. 저거 옐리세이 맞냐? 내가 아까 약을 좀 하고 왔는데, 그래서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닌 건 맞지?"
"가만있어 봐. 나도 내가 방금 약을 한 게 아닌지 고민 중이니까."

이오시프 일행을 혼란과 불신에 빠트린 장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접객에 열중했다.

"헤이, 아미고."

프리랜서 용병인 콜롬비안이 손을 흔들었다. 옐리세이는 볼펜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갔다.

"드디어 사고 치고 미스터 주린에게 잘렸냐? 아니면 미래를 위한 알바? 빚이라도 졌다든가? 괜찮은 부업 자리 알아봐 줄까? 요즘 장기 시세도 올랐고 넌 건강하니까 좋은 값 받을 것 같은데. 금발의 백인은 언제나 수요가 높지."
"시꺼. 술집에 왔으면 닥치고 주문이나 말해."

주제에 제법 종업원 태가 난다고 낄낄거리며 콜롬비안은 테이블 사람당 버드와이저 한 병씩을 주문했지만 일행 중 하나가 손을 내저었다.

"난 술은 됐고, 우유나 한 잔."
"오, 나도 나도 우유. 난 꿀 없으면 안 마시니까 꿀은 꼭 타서."

다른 일행도 동조하며 킬킬거렸다. 뻔히 놀리려는 수작인 걸 알면서도 옐리세이는 눈을 치떴다.

"야이 빌어처먹을 놈들아. 술집에서 우유를 왜 찾냐? 그렇게 우유가 먹고 싶으면 집에 가서 엄마 젖이나 빨아."
"이런이런. 우리 엄마는 막냇동생을 낳은 후에 교구 신부님에게 잔뜩 우유를 먹여 드려서 내가 먹을 건 남아 있지 않은걸."
"이봐, 카반. 손님이 원하는 건 빨리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네가 좋아하는 섹시한 엉덩이를 가진 요리사에게 안 배웠어?"

말싸움이 일어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대화에 왠지 한숨이 나와서 이오시프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역시, 좀.

"에라이, 씨발. 쪽팔려서. 저 새끼는 꼭 남자를 골라도."

필리몬이 이오시프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옐리세이가 홍가의 요리사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건 본인이 전혀 숨기지를 않았기에 알 만한 사람들은 얼추 한 번씩 접했다. 이오시프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며칠 전에는 옐리세이가 술집에서 떠들썩하게 선언한 적도 있었다. 그 후에 발생한 쪽팔린 일은 덤이었고.

호모라는 점만으로도 얕잡아 비웃음당하기 십상인데, 이젠 그 호모의 가게에서 일까지 도와주고 있다. 중요한 건 상세한 내막이 아니었다. 겉으로 내비치는 모습만으로도 조롱감이 되기에는 아주 충분했다. 이 일을 빌미로 거리의 놈들에게 덤으로 싸잡아서 비웃음을 당할 일을 생각하니 골치가 아파왔다.

"엥, 언제 왔냐. 술 마시러?"

버드와이저와 우유 속에서 타협하는 대신에 멋대로 술병 세 개를 놈들의 테이블에 던져 놓은 옐리세이가 이오시프 일행을 발견했다.

"너 이 새끼야. 네가 남자 똥구멍에 환장을 하든 좆방망이를 휘두르든 알 바는 아닌 데 너 때문에 우리까지 호모로 싸잡히는 건 도저히 못 참겠다."
"이건 또 갑자기 왜 발정이야."

옐리세이는 발화점이 낮다. 그러잖아도 익숙지 않은 서빙과 더불어 이곳저곳에서 쏘아대는 비아냥거림 때문에 짜증이 슬슬 쌓여가고 있었는데 필리몬이 대뜸 시비를 거니 속이 꽉 치밀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주문표를 필리몬의 얼굴에 집어던지기 직전에 이오시프가 테이블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좀 해라. 여기에서는 못 싸우는 거 알잖아."
"……쳇."

필리몬이 먼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옐리세이도 막 치켜들었던 손을 내리고는 구시렁거리며 테이블의 빈 의자를 끌어다 엉덩이를 걸쳤다. 테이블에 주문표를 내팽개친 그는 뒷주머니에서 켄트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어디서 뭘 하다가 다쳤는지 오늘 점심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왼손에 감긴 붕대를 보며 이오시프가 혀를 찼다.

"하루 종일 어디서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러고 있냐?"
"제기랄. 나한테 묻지 마. 나도 내가 여기에서 왜 이 지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루이인지 뭔지 하는 놈이 엉덩이 들이미니 넙죽 넘어갔겠지."

영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 필리몬이 노골적으로 야유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옐리세이의 심화에 다시 불이 붙었으나 재점화는 필리몬이 예상하지 않은 방향이었다.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으니까 입 닥쳐. 그 엉덩이 만져 보기나 했으면 홀에서 하루 종일 뺑이 쳐도 억울하지도 않지!"
"뭔 소리야?"
"루이가 얼마나 독한 놈인지 아냐? 다리 한 번 쓸었다고 손가락을 잡아 빼놓는 놈이라고! 가시도 그런 가시가 없어. 내가 어쩌다가 저딴 새끼한테 홀려서!"

필리몬과 이오시프는 동시에 말문을 닫았다. 목울대가 한 번 꿀쩍 움직였다. 이오시프가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왼손을 곁눈질했다.

"……그 손가락, 그거 때문에?"
"아우, 쪽팔려."

옐리세이의 이마가 테이블에 쿵 떨어졌고, 필리몬은 화를 낼 기운도 사라졌는지 기가 막힌 실소를 흘렸다.

"왜 사냐. 그냥 뒈져 버려."

이오시포도 매우 동감이었다. 옐리세이도 동감인지 변명도 화도 내지 않았다. 테이블에 처박은 얼굴에서 끙끙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었냐? 네 대가리에 좆질만 가득 차 있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만, 그나마 몸뚱이만이라도 쓸 만했는데 이젠 그 몸뚱이도 퇴물이 다 됐으니 빨리 총이라도 입에 무는 게 우리 조직이나 보스를 위해서 좋은 일이 될 거다. 병신 같은 놈."

신랄하고 저열한 도발에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던 옐리세이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퇴물인지 아닌지 확인시켜 줄까? 어?"

새파랗게 이글거리는 눈매가 사납다. 이오시프가 가게에 들어오고 벌써 세 번째인 한숨을 쉬면서 중재하려던 때에, 주방 카운터 안에서 부름이 들렸다.

"옐리세이. 바쁘냐?"

낮고 굵직한 목소리는, 테이블마다 여기저기의 대화들로 소란스러운 홀 안에서도 선명하게 옐리세이가 있는 테이블까지 닿았다. 옐리세이가 막 쥐었던 주먹을 풀며 일어났다. 고분고분히 주방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필리몬이 검지를 관자놀이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미친 거 아냐?"

부정할 수 없었던 이오시프는 잠자코 물잔의 얼음만 오도독 오도독 깨물었다.

"니미. 목소리라도 덜 섹시했으면……."

흐느적흐느적 주방으로 돌아가는 놈이 나직이 흘린 혼잣말을 필리몬이 듣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 옐리세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빈 테이블에 엎어졌다. 바쁘기야 바빴지만 딱히 일을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익숙하지 않았던 일이라 그런지 부쩍 피곤한 느낌이었다. 시비를 걸어대는 놈들 때문에 부쩍 신경을 쓴 탓도 있으리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의 울림 속에 덜그럭거리며 홀 안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기척이 났지만 옐리세이는 꿋꿋하게 엎드려 있었다. 애초에 그가 부탁받은 것은 부상을 당한 리 뭐시기라는 一 입에 선 중국어로 된 이름을 제대로 외우는 건 퍽 지난한 과제였다 一 놈을 대신해서 홀 서빙을 해 달라는 것이었으니 그의 임무는 다 끝났고, 주변에서 정리를 하든 말든 부산해도 그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힐끔거리는 시선에 등이 살살 간지럽고 알지 못할 중국어가 사방에서 흘러넘치고 바로 발치까지 빗자루질이 지나가도 옐리세이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옐리세이."

엎드린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는 손가락 끝이 아니었다면 의지 있게 깜빡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옐리세이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하품을 길게 뱉으며 허리를 폈다. 앞치마를 벗은 저우룬칭이 앞에 있었다. 일을 다 끝냈는지 장쯔궈와 리뎬신이 저우룬칭에게 인사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옐리세이에게도 인사했지만 듣지 않았다. 딱히 중국놈들과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이 돌아가자 홀은 금세 썰렁해졌다. 저우룬칭의 등 뒤로 보이는 조각상 ― 옐리세이는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관우상이었다 — 이 오늘따라 더 괴상하게 보인다는 생각을 멍청하니 하고 있을 때 저우룬칭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고마웠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입에 발린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지난 며칠간 옐리세이를 상대함에 있어 한 번도 성실하거나 진심이었던 적이 없지만 오늘만큼은 그로서도 옐리세이의 조력이 퍽 고마웠다. 상처만 치료해 주고 떨어트리려 했던 놈을 뒤꽁무니에 달고 질질 끌며 홍가로 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 자식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허나 골칫덩어리로만 여겼던 놈은 의외의 면에서 도움이 되어 주었다,

원인은 리뎬차이였다.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그는 발목을 삐끗해 거동할 수 없게 되었다. 하루 이틀 정양하면 나을 부상이었고, 마침 내일은 휴일이었으나 문제는 오후의 영업이었다. 장쯔궈는 다리가 불편하여 홀 서빙이 어렵고 저우룬칭은 주방을 떠날 수 없다. 아르바이트생을 찾을 시간도 없었다. 자신의 가게를 오픈하여 나간 양탕바오에게 언제까지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고민하던 차에 장쯔궈가 홍위롄에게 연락하니, 그녀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오늘 오후부터 쉬라는 대답을 하였다.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대답이었지만 막상 문을 닫자니 찝찝하여 종업원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저우룬칭이 귀가했고, 그의 뒤에는 백수나 다름없이 홍가를 들락거리고 있는 잉여 인간이 딸려 있었다.

"말로만?"

한쪽 눈을 비딱하게 뜨며 올려다보는 시선에 고마움이 약간 희석되기는 했지만 저우룬칭은 참을성 있게 말을 받았다.

"일당 쳐 주마."
"내가 돈 몇 푼이 없어서 이런 중노동을 하겠냐. 오빤 비싼 남자야."

옐리세이가 투덜거리며 귀를 후볐다.
고마움이 조금 더 희석되었다.

"……그럼, 뭘 해 줄까?"
"고민 좀 해 보고. 너 나한테 빚 두 개나 졌어."

멀쩡한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쫙 편 옐리세이가 보란 듯이 저우룬칭의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한껏 거만하게 뻗대던 그는 이내 기운 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전에 밥 있냐?"

돌아오자마자 간단하게 일을 가르쳐 주고 밑 준비를 하느라 저우룬칭도 제대로 식사 하지 못한 건 매한가지였다. 잠시만 기다리라며 주방으로 들어간 저우룬칭은 남은 재료들로 간단한 볶음 요리를 만들어 왔다. 서양인의 입맛에 맞을까 싶긴 했지만 옐리세이는 군말 없이 접시를 싹싹 비웠다. 타이 생활이 5년째라더니 젓가락질도 잘했다. 유달리 젓가락질이 서툴러서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저우룬칭 자신이 가르쳐도 끝내 제대로 젓가락을 잘 사용하지 못했던 어린 차오칭즈를 어렴풋이 떠올린 그는 이내 쓴웃음과 함께 기억을 목 안으로 넘겼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잘 먹었어. 사람을 부려 먹어도 밥은 먹이고 부려 먹여야지."

배를 두드리며 의자에 기댄 옐리세이가 차를 마시며 히죽 웃었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요리사로서 음식을 맛있게 잘 먹으니 언짢은 건 아니었기에 저우룬칭도 느슨해졌다.

"다른 때라면 여유 있게 식사했을 텐데 뎬차이가 갑자기 다칠 줄은 몰랐지. 아무튼 오늘 고생 많았다. 실은 부탁했을 때 들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마찬가지야. 혹시 일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네가 정신이 나간 줄 알았다니까."
"……용케도 오케이 할 마음이 들었군."
"나도 그 점이 의문이긴 한데……."

갑자기 옐리세이가 정색하며 저우룬칭을 뚫어지게 살폈다. 이 자식이 또 무슨 헛짓 거리를 하려고 이러는 건가 싶어 저우룬칭은 무심코 어깨를 경직시켰지만 염려와 다르게 그는 입만 움직였다.

"왠지 너한테 은근슬쩍 약해지는 것 같아서,"
"잠깐만."

어이가 없어진 저우룬칭이 말허리를 끊었다.

"약하다니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너라면 네 거시기를 걷어차거나 손가락 분지르거나 분위기 잘 잡더니 내쫓는 새끼를 가만히 놔두겠냐?"

그건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라면 바로 드잡이질을 했을 것이다.

할 말이 없어진 저우룬칭이 잠자코 입을 다물자 옐리세이는 닥치고 들으라며 구시렁거렸다.

"여튼 나도 그 점이 의문이라서 고민을 했는데……. 아무래도 내 첫사랑을 닮은 것 같아. 너처럼 선배도 가늘고 예리한 눈매에 외까풀이 되게 매력적이었기도 했고……."

첫사랑을 닮았다는 고백은 네 번째로 들었기에 여기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물론 네 번 다 남자였다.

"네 첫사랑도 동양인이었냐."
"아니. 내가 아는 까료사람은 마피야뿐이야. 지금이야 뭘 하고 사는지 모르지만 그때 선배는 평범한 학생이었어. 눈매도 닮았지만 그보다는, 음……. 역시 나에게 친절함이 비슷한가?"
"친절해……?"

저우룬칭은 자신이 단어를 잘못 들은 건지, 이 무식한 러시아 놈이 단어를 잘못 말한 건지 의문에 빠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청력과 옐리세이의 어휘력은 정상이었다.

"응, 그래. 친절. 맞아……. 넌 선배처럼 친절해."
"친절의 기준이 대체 뭔데?"

옐리세이가 거의 바닥을 보이는 찻물을 따랐다.

"까칠하고 날카롭고 튕기고 질색하고……. 뭐, 그렇게 친절했지."
"내가 아는 친절과는 단어의 뜻이 다른 것 같다만."
"친절한 게 맞다니까."

뜨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물을 불며 옐리세이는 당당하게 주장했다.

"매달리면서 스스로 옷 벗고 다리 벌리는 걸 좋아하기는 하는데, 적당히 튕기면서 정복욕을 자극해 주는 친절함도 싫지는 않아. 넌 지나치게 친절한 게 문제지만, 제기랄. 하지만 그런 네가 내 밑에서 쾌락에 젖어 울부짖는 걸 보려고 열심히 참고 있다고."
"아니. 내가 아무리 친절하다고 해도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세상이 멸망해도 없어."

진저리를 내며 대꾸하면서도 저우룬칭은 평소보다 그의 앞에서 입이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급하고 바쁠 때 도와준 건 사실이었으나 약간이나마 보답을 하기 위함일까. 찻물이 아니라 옆에 술이 있었으면 나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단 두 사람이 머물기에는 지나치게 넓고 고요한 한밤의 홀에 대화 소리만이 조용히 섞여갔다.

"흠."

문득 옐리세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칼자국도 근육과 함께 잘게 움찔거렸다.

"엄마나 아빠 살아 있냐?"
"두 분 다 안 계신다만."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이 의아하기에 앞서 이 자식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러는 건지 의심이 드는 걸 보면 싫든 좋든 이미 익숙해졌다는 뜻인 것 같아 살짝 우울해 졌다.

이번에는 저우룬칭의 의심이 맞았다.

"내가 부모님 만날 수 있게 해 줄게."
"뭔 개소리야?"
"천국 보게 해 준다고. 잘 못 믿는 모양인데 내 테크닉 끝내줘. 물론 물건도 뒤지지는 않고."

한 번밖에 못 써먹은 보형물을 떠올리며 옐리세이는 어깨에 힘을 빡 세웠지만 저우룬칭의 낯은 일그러졌다. 저우룬칭은 사생아였기에 아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10살밖에 안 된 자식을 팔아치운 어머니가 천국에 가지 못했을 것이란 건 확실했다. 중요한 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어머니의 천국 승천 여부가 아니긴 했지만.

이 말까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확실하게 부정하는 게 좋겠다 싶은 판단에 입술을 뗐다.

"남자랑 잔 적 있어."

말이 혀끝에서 튀어나오자마자 서두를 잘못 선택했다는 걸 자각한 저우룬칭은 옐리세이의 표정이 변하기 전에 화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내가 깔린 건 아니고 안는 쪽이긴 했는데."

부연 설명으로도 옐리세이의 썩어가는 표정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기는 무리였다.

"야!!! 너 남자는 싫다며!!! 거짓말한 게 벌써 몇 개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숫제 삿대질까지 할 기세인 옐리세이의 고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우룬칭은 의자를 슬쩍 뒤로 뺐다.

"침착하게 들어 봐. 나도 좋아서 남자랑 잔 게 아니니까."
"뭐가 문제인데!! 처녀도 아닌 주제에 왜 자꾸 튕기고 지랄이냐고!!"
"좋아서 잔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안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고 명확하게 부정해 주었지만 옐리세이는 제대로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대로 테이블을 뛰어넘어 덮치기라도 할 것처럼 입에 불을 물고 왁왁거리는 그의 기색을 살피며 저우룬칭은 젓가락을 슬며시 쥐어 여차하면 찔러 버릴 준비를 했다.

이를 빠득빠득 갈던 옐리세이는 몇 호흡이 지나서야 씨근덕거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좋아. 일단 말하기나 해 봐."

일말 진정하긴 했으나 저 다혈질 멧돼지가 언제 표변할지 모르므로 저우룬칭은 젓가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말했지만, 난 호모를 싫어한다. 유독 날 좋아한다고 하는 남자들이 많아서 떨어트려 놓으려고 일부러 몇 번 자주기도 했는데, 섹스 자체를 할 수 없었던 건 아니니 어느 정도 양성애 성향이 나에게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문제는 섹스가 아니야."

이젠 지난 일이지만 회상하려니 가슴 안쪽에서 또 슬금슬금 부아가 치미는 것 같았기에 저우룬칭은 다 식어빠진 찻물이나마 꿀꺽 목 안으로 넘겨 심화를 삭였다.

"호모가 내 인생을 세 번이나 말아먹었다고."

저우룬칭은 구룡성채에서 태어났다.
매음굴의 가장 밑바닥 창녀였던 그의 어머니는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아기를 낙태 시기를 놓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출산했다. 그는 성냥갑처럼 쌓아올린 철근과 콘크리트로 된 벌집 같은 세상에서 여타 수십 명의 아이처럼 평범하게 자라났다. 부모들이 일할 시간에는 어린이집에 다글다글 모여 낡은 TV에서 수신되는 외부의 현대적인 시가지를 꿈꾸기도 했고, 머리가 굵어져 학교에 다니게 될 무렵에는 꿈과 망상이 구체화되기도 하였다. 홍위롄은 아파트의 같은 집에서 복닥거리며 살던 다섯. 가구 중 한 가족의 막내딸로, 육아를 방기한 어머니 대신 친누나처럼 그를 돌보며 함께 자라났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이유를 들어 구룡성채의 철거와 홍콩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별세계의 일이었다. 어른이 되면 꼭 구룡성채가 아닌 진짜 ‘홍콩’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던 저우룬칭의 소박한 인생이 급변한 건 10살이 되던 해였다.

구룡성채에는 유명한 것이 세 가지 있었다. 마약, 매음, 치과.
저우룬칭의 어머니는 앞의 두 가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극도의 마약 중독자였던 어머니는 더 이상 팔아치울 세간이 남아있지 않게 되지, 도리 없이 출산한 후 한 줌의 정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던 아들에게서 헤로인 값을 마련했다. 그녀는 중독증상으로 인해 덜덜 경련하는 손으로 마약을 깊게 흡입하며, 그 순간만큼은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빚쟁이들의 독촉을 잊을 수 있었다.

자신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가 억지로 약이 주사된 후 내던져진 작은 방에서 첫 손님으로 만난 페도필리아가 남자였다는 점에서 남자와의 악연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 선까지는 그럭저럭 무던히 넘길 수 있었다.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았고, 또래에 비해서 조숙하기도 했던 그는 약으로 머릿속이 몽롱한 와중에도 남자가 바지를 벗기도 전에 조촐하게 침실을 장식한 수석을 쥐고 내리쳤다. 손에 잡히는 대로 정신없이 내던지고 후려치고 나니 남자는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골이 빠개져 있었으며 뒤늦게야 달려온 기도들이 그를 잡고 끌어냈다. 조직의 사업차 근처의 가게를 방문하였다가 이 소란에 호기심을 갖게 된 차오쑹윈과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딱히 나쁜 기억만은 아니었다. 힘겹게 높디높은 건물의 옥상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이 탁 트인 하늘을 차오쑹윈의 차에서 볼 수 있게 되었던 당시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했다.

문제는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후부터 시작되었다.
접근하는 남자들을 거절하고, 거절해도 쉬이 떨어지지 않으면 적당히 동침하기도 하던 저우룬칭에게 한 명의 남자가 접근했다. 여기까지는 물리도록 겪은 지긋지긋한 일과 중 하나였지만,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 남자는 드래그 퀸이었고, 왕립홍콩경찰 고급 조리처장의 정부였다는 점이었다.

수년이 지났음에도 새삼 돌이키니 소름이 돋을 만큼 진저리가 났기에 저우룬칭은 팔뚝을 문질렀다.

"인생을 말아먹은 첫 번째 호모가, 젠장. 고급조리처장의 첩년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 간부의 첩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건드리겠냐. 동티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조직까지 죄 엮여서 걸려들어 가게 생겼는데."

옐리세이가 무슨 말을 하면서 집적거려도 크게 언성을 높이지 않던 저우룬칭이 이까지 악물며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았던 일이었음이 짐작되었다. 그리고 가만히 듣고 있는 옐리세이의 심기도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무슨 조직이야. 간첩들 사이에도 조직이 있나?’

일단은 더 들어 보기로 했다.

"그년이……."

저우룬칭의 잇새에서 까드득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자살을 했어."

김이 탁 샜다. 고작해야 자살한 걸 가지고 유난을 떨었느냐며 비웃어주려던 옐리세이는 이어지는 부연에 "오오."하고 반사적인 추임새를 넣었다.

"나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유서를 자기 정부에게 남기고."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만나주면 더 귀잖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필사적인 애원에 어쩔 수 없이 처장이 마련한 정부의 맨션을 잦아갔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뒷목이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은 들어갔다. 어쩐지 선뜻하기까지 한 넓은 맨션 안을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침실을 열었을 때 그가 정면으로 마주한 건 장롱 손잡이에 목을 매고 자살한 정부의 시체였다. 기겁한 저우룬칭이 냉정을 수습하기도 전에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맨션에서 도망쳤다. 지문을 닦을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몇 시간 후, 그는 강간교살죄로 수배되었다.

그 무렵에 이미 송의방의 산하 조직 하나를 맡아 차오쑹윈의 오른팔로써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고 있던 저우룬칭은 모든 기반을 다 버리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처장이 자기 첩년을 죽였다고 혐의만 있던 온갖 죄목을 다 나에게 뒤집어씌워서 눈이 벌게져라 쫓아다니는데 어떻게 배겨나겠냐. 도쿄에도 조직이 진출해 있었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지."

‘역시 이상한데.’

누명을 쓴 억울한 사연도 딱하고 사정없이 뿌드득뿌드득 맞물리고 있는 저우룬칭의 치아도 딱했지만, 들을수록 뭔가 이상했다. 간첩의 세계에 대해서 유식한 건 아니었지만 직속상관인 체자르가 전 KGB이기도 하고 스파이는 할리우드에서 단골로 다루는 소재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우룬칭에게 듣는 간첩의 세계와 그가 알고 있던 간첩의 세계가 잘 매치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말허리를 끊고 진상을 캐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프라이버시라고 연령도 말해 주지 않던 놈이 자기 과거를 일부나마 알아서 고해바치고 있다는 귀한 기회를 날려버리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북한이니, 북한 간첩의 세계는 다른 나라의 간첩과는 다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대륙이나 대만으로 도피하기에는 위험하기도 했고, 일본어에 유창하다는 이유도 있어 도쿄행 배에 몸을 실으면서도 저우룬칭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해외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추진하면 본국에서 할 수 없는 경험을 쌓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지."
"두 번째 호모가 일본인이었냐?"
"그것도 야쿠자였어."

당시 송의방은 간토 지방 최대 세력 야쿠자인 우지이에 연합회와 협력 관계에 있었다. 그의 인생에 큰 굴곡을 남긴 두 번째 남자는 우지이에 연합회 산하인 쿠라다 구미의 말단 조직원이었다. 저우룬칭이 히데라고 친근감 있게 불렀던 청년은, 야쿠자 주제에 대학생처럼 어리고 해사한 얼굴로 순진하게 웃었고 그를 동경했다. ‘슈 상은 정말 굉장해요.’라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때때로 애달픈 달콤함이 서려 있음을 감지하였음에도 자신에게 향하는 호의를 뿌리치지 못했다. 맹목적으로 따르며 자신을 향한 동경을 숨기지 않는 순수한 청년을 동생처럼 귀여워하기도 했었다.

"오산이었지. 양가죽을 뒤집어쓴 늑대 새끼였다."

히데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의 한심함에 기가 막힐 지경이라 저우룬칭은 침울하게 중얼거렸지만, 옐리세이는 눈치 없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나 그거 알아. 그런 콘셉트의 GV 본 적 있어. 가죽을 벗으니까 흑형의 팔뚝만 한 양물이 벌떡거……."
"……."
"아니, 그냥……. 그렇다고. 얘기 계속해."

저우룬칭은 삼켰던 침음을 뱉었다.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위가 꼬일 것 같은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기억이지만 유일한 청자인 옐리세이가 전혀 심각하게 듣고 있지를 않으니 자신의 격정도 꽤나 옅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때 야쿠자와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어."

송의방의 일본 지부 보스가 쿠라다 구미의 조장과 직접 만나 언성을 높이기도 하였고 발포 직전까지 간 경우도 더러 있어 신주쿠의 공기는 날로 험악하였지만, 이는 조직이 거래를 넓히면서 으레 겪는 진통이었다. 겉으로 적당히 기세 싸움을 하며 으르렁거리고, 물밑으로는 타협점을 찾아 조율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송의방은 마약 거래 루트를 확장할 수 있었을 터였고, 우지이에 연합회도 간사이 야쿠자와의 항쟁에서 송의방을 든든한 지원군으로 삼을 수 있었을 터였다.

"해피엔딩으로 해결될 예정이었는데 그 녀석이, 어디 한 군데 빡 돌아 있는 놈이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지."

자동응답기에서 ‘누구도 슈 상을 방해하지 못 하게 할게요.’라는 히데의 목소리를 듣고 의아해하던 차에 장쯔궈의 급보를 받았다. 경찰들이 출동하기 전에 쿠라다 구미의 사무실로 화급히 달려간 저우룬칭은 핏물과 살점과 내장으로 새로운 인테리어를 한 쿠라다 구미의 사무실 내부와 계단부터 옥상까지 쌓인 조직원들의 시체를 목격했다.

자정이 지나서야 겨우 귀가한 그를 맞이한 건 동거 중이었던 홍콩 출신 호스티스의 시체였다.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여실한 그녀의 시체 옆에서 저우룬칭은 단정한 필체로 또박또박 적힌 편지를 보았다. ‘당신을 방해하는 건 모두 없어졌으니까 안심하세요.’

옐리세이가 혀를 내둘렀다.

"우와, 미친놈이네. 그 새끼 안 잡혔냐?"

저우룬칭은 고개를 저으면서 이야기하느라 칼칼해진 목을 찻물로 적셨다.

"잡혔으면 속이라도 시원했겠지. 경찰은 흔적도 못 잡았고, 우지이에 연합회에서 잡았느니 죽였느니 말은 많았는데 얼마 전에 직접 날 찾아오기도 했으니 일단은 살아있는 모양이고……."
"저런 미친놈이 멀쩡히 백주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니 무서운 세상이군. 말세야."

그 무서운 세상에 아주 큰 일조를 하고 있는 마피아 따위가 하는 말이니 우습지도 않았다. 저우룬칭은 헛웃음을 흘리며 찻물과 함께 뒷말을 삼켰다. 그가 일본에 온 지 이태 후에 고급조리처장은 배임수재죄와 뇌물수수죄 스캔들이 크게 터져서 옷을 벗었고, 처장의 입김이 사라지면서 그의 수배도 흐지부지 잦아들었지만 청년이 저질러 놓고 잠적한 일들의 뒷수습을 하느라 바로 홍콩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일본에 있는 사이에 차오쑹윈은 암살당했다.

"세 번째는?"

저우룬칭은 머리를 한 번 휘젓고 말을 이었다.

"세 번째는……. 내가 그 무렵에 모시게 된 형님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그 녀석의, 음…… 직장 동료와……." 까지 입에 올리다 이내 흐지부지 말문을 돌렸다.

"이 일은 나만 얽힌 게 아니라서 길게 얘기하기는 좀 그렇고, 아무튼 표면적으로는 내가 이런 동남아 촌구석까지 쫓겨 나오게 된 계기가 그 녀석과의 스캔들 때문이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엮인 호모 치정극이 벌어졌더라고."

스물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생의 굴국을 명료하게 설명한 저우룬칭은 이쯤하면 내가 왜 호모를 싫어하는지 아주 명쾌한 이유가 되지 않겠느냐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옐리세이는 외려 갸우뚱 고개를 꺾었다.

"루이. 넌 지금 매우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어."

옐리세이가 오른손을 엄지부터 하나씩 꼽았다.

"첫째, 경찰 간부 첩년이 네게 강간당했다는 유서까지 쓰고 뒈진 건 널 좋아했기 때문일 거고, 둘째, 정신 나간 야쿠자 놈도 너에게 특별한 마음이 있으니까 멋대로 방해물을 제거한 것일 거고, 셋째, 둘째 아들인지 하는 놈도 치정극이라면 널 좋아한 게 맞겠지?"

저우룬칭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뭐, 대강 그렇겠지."

하나씩 꼽은 손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옐리세이가 히죽 웃었다.

"난 널 좋아하는 게 아니야. 빠구리를 뜨고 싶은 거지. 섹스 말이야, 섹스. S.E.X 우리나라 말로는 c e к с. 북한말로는 모르겠다만."
"……."

그 반박 아닌 반박은 지나치게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기에 저우룬칭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잠시 그를 바라다보다가, "……아."하며 긍정도 부정도 감탄도 탄식도 아닌 모호한 침음만을 흘렸다.

저우룬칭의 표정이 떠름하게 구겨지거나 말거나 옐리세이는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

"굳이 좋은 점을 말해 보자면, 엉덩이? 하지만 네 엉덩이가 좋다고 내가 너한테 강간당했다는 유서를 쓰겠냐, 주변 사람들을 죽이겠냐, 치정극을 벌이겠냐? 그냥 눈 딱 감고 내 밑에서 다리 한 번만 벌리면 모든 게 다 해결이 돼. 아, 물론 네가 이 옐리세이님의 테크닉을 잊지 못하겠다면 이후에도 만나줄 수는 있어."

매력적인 얼굴과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하니 묘한 설득력이 있는 궤변이었다. 말의 내용이 문제였지만.

저우룬칭은 놈의 얼굴과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어 자아내는 궤변을 튕겨 내며 참을성 있게 대화를 이어갔다.

"내 말의 요지는, 네가 날 좋아해서 귀찮게 만든다는 게 아니라 호모가 싫다는 뜻이었다."
"남자랑 잤다며 ?"
"……자기야 잤지."
"그럼 뭐가 문젠데?"
"과거에 잤던 적은 있어도, 어쨌거나 호모는 싫다고."
"인마. 네 취향의 호오를 묻는 게 아냐. 중요한 건 남자랑 잔 적이 있다는 거잖아. 섰냐?"
"……뭐어."
"좋아. 섰다면 오케이.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하냐?"
"……."

대화는 서로 목표가 다른 방향으로 열심히 나아가고 있었다. 저우룬칭은 오래된 심화까지 끓어가며 목 아프게 이야기하였던 사정이 ‘남자랑 잔 적이 있다.’ 라는 한 줄로 깔끔하게 요약된 걸 보며 후회했다. 차라리 잔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서 부정이나 할 것을, 머릿속에 욕망만 가득 차 있는 저놈을 어떻게 잘 피해가며 질릴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곰곰이 고민했다.

"……."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가 접근하면 먼저 거절하고, 도저히 안 되면 몇 번 더 만나서 섹스 파트너 비슷하게 해결하곤 했던 그였으니 과거의 경험에서 찾으려 해 보아도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저우룬칭은 테이블 모서리에 한쪽 발을 대고 건들거리는 맞은편의 옐리세이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고는 착잡하게 입을 뗐다.

"네가 안긴다면 자줄 수는 있,"
"미쳤냐?! 그건 절대 안 돼!"

그러나 그가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옐리세이가 펄쩍 뛸 듯이 고함을 백 질렀다.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부르르 경련했다.

"제기랄. 이 바닥에서 호모로 낙인찍히는 게 얼마나 지랄 맞은 지 아냐? 그나마 내가 남창 찾아다니면서 박아대니까 입으로만 까고 마는데, 포지션 뒤바뀌면 사내 이전에 인간 취급도 제대로 못 받아. 씨발년놈들이 까대는 게 하도 엿 같아서 뒤로 하는 건 짭새들한테 잡혀가면서 딱 끊었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소위 말하는 ‘여자 쪽’의 게이가 마초이즘이 가득한조직 폭력배의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저우룬칭도 잘 알았다. 이 같은 관념에 대해서는 홍콩 마피아나 러시아 마피아나 큰 차이가 없을 터이다.

여느 때였다면 저우룬칭도 굳이 강요하지 않고 이쯤에서 말을 접었을 테지만, 방금 전에 옐리세이에게 당한 게 있었다. 그는 옐리세이를 똑같이 흉내 냈다.

즉,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걸러 듣기로 했다.

"뒤로 한 적이 있다는 거군 "
"아, 쫌!! 자그마치 8년 전이라고!"
"어쨌든 한 적이 있다는 거잖냐. 난 한 번도 없어."
"새 경험을 쌓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오빠 존나 잘한다니까? 이만한 다마도 몇 개 넣었으니까 더 죽여줄 거야. 보장해. 틀림없어 "
"아예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는 경험이 있는 사람이 더 익숙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흉측한 물건을 어디에 들이대는 거냐."

당연히, 결론은 영원히 나오지 않을 문제였다.

유치하다는 자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깔리느냐에 대하여 티격태격 하릴없는 말 싸움만 하던 저우룬칭은 찻주전자가 바닥을 보이자 먼저 손을 들었다.

"그만하자. 타협의 여지가 없으니 얘기해 봤자 힘만 빠지겠다."
"야. 말하던 건 끝내야지! 어떻게 할 건데?"

저우룬칭은 시큰둥하게 빈 접시와 젓가락 등을 정리했다.

"어쩌긴. 지금처럼 난 거절하고 넌 달라붙는 거지."

그리고는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한테 엉겨 붙는 시간에 다른 남자를 찾아갔으면 10명은 만났을 텐데."
"……."

실로 동감이었기에 옐리세이도 할 말이 없었다.

"택시 불러줄까?"

택시비 정도는 내줄 생각으로 물어보았지만 옐리세이는 한껏 인상을 쓰며 붕대를 감은 왼손을 올렸다.

"자고 간다. 내일 일정 없지? 있어도 취소해."
"뭘 할 건데?"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저 생각 없이 사는 놈은 똑같은 소리를 세 번째 지껄이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지나 모르겠다.

"내 방 알지? 올라가 있어라. 계단에서 오른쪽 끝 방에 있는 욕실을 공용으로 쓰니까 거기서 씻어도 돼."

옐리세이는 빨리 끝내고 올라오라는 불통한 말을 남기고 계단으로 사라졌다. 되도록 느릿느릿 남은 설거지를 하고 테이블을 훔친 후에 불이 꺼진 2층으로 올라가니 그는 기다리다 지쳐 먼저 잠이 든 양 침대에 이상한 방향으로 쓰러져 곤히 숙면 중이었다. 저녁때 익숙하지 않은 일을 했으니 딴에는 피곤하기도 할 터였다. 저우룬칭은 그가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여분의 베개와 이불을 갖고 거실로 나갔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다.





옐리세이가 게이임을 자각한 건 첫사랑을 만난 14살 때였다.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거동을 쫓게 하였던 이는 중등학교 2학년 위의 선배인 이반이었고, 남자였다. 눈에 담을 때마다 심장의 고동이 격해졌다든가, 양 뺨에 홍조가 올랐다든가, 하는 막연한 영혼의 속삭임을 들었을 때가 아니라 이반을 대상으로 몽정하였을 때 어럼풋이 의심했다. 결정적인 자각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옐리세이는 보기 드문 미소년이었다. 2차 성징을 맞으면서 목소리가 거칠어지고 여드름이 울긋불긋하게 얼굴을 뒤덮는 사내애들 사이에서 실로 군계일학이리만치 뽀얗고 멀끔한 미모를 유지하였기에 인기도 많았다. 학년에서 제일 예쁘다는 평가를 받는 나딸리야와 사귀던 그는 나딸리야의 부모님이 휴일에 출근하였을 때 그녀의 집을 방문했고, 당연한 수순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리고 30분 후에 전혀 발기하지 않는 자신의 아랫도리에 절망하며 귀가했다. 나딸리야는 처음에는 긴장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위로해 주었지만 그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꿈속에서 여자 친구 대신 이반을 침대로 쓰러트리며 두 번째 몽정을 한 날, 옐리세이는 시험 삼아 이반을 떠올리며 자위하였고 잠잠하였던 아랫도리는 이전과 다름없이 불끈거렸다.

그는 자신이 게이라는 것과 첫사랑을 동시에 자각하였다.

나중에 첫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이오시프는 본능밖에 없는 짐승 새끼라며 비웃었지만, 옐리세이에게는 사춘기 청소년의 방황 하나를 성공적으로 뛰어넘은 좋은 징후였다.

옐리세이는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다.

교분이 깊은 건 아니었지만 낯이 익은 후배를 평범하게 대하던 이반의 태도가 ‘친절’ 하게 바뀌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묘하게도, 옐리세이가 십수 년이 지난 작금에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그에게 친절하였던 이반의 모습이었다. 일전에는 다정한 말 한마디 들었을 법도 한데 쌀쌀하게 내뱉는 거절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했다.

외까풀의 눈매를 한껏 찌푸리며, 멸시를 담은 것 같기도 하고, 짜증을 담은 것 같기도 하게, 옐리세이, 라며 그윽한 울림으로 그를 부르곤 하였던—

"一스끼. 슈이스끼."

어깨가 탁탁탁 흔들렸다. 옐리세이는 웅얼웅얼 신음하며 눈을 떴다. 그의 망막에 꽉 찼던 희끔한 낯의 십 대 소년의 모습이 차츰 물에 뭉개지듯이 번지며 라이트 브라운으로 염색한 동양인 청년의 낯으로 바뀌었다.

"……뭐야."

비몽사공 꿈결의 언저리에 걸쳐져 있는 목소리는 몹시도 탁하고 낮았다. 엘리세이가 리 뭐시기, 라고만 머릿속에 넣고 있는 쌍둥이 형제의 형인 리뎬차이가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슈이스끼.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할 거지? 바로 내려올 생각인가?"
"아침……?"

왜 난데없이 중국 놈이 내 앞에 있는 거지, 아직 잠이 덜 깼나, 기왕 잠에서 덜 맨 거라면 루이가 나오는 게 나은데, 따위의 두서없는 생각을 머릿속에 동통하게 흩뿌리던 옐리세이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끔뻑거렸다.  ……아, 그래 어젯밤에 홍가에서 잤었다.

그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나중에."

우물우물 불분명한 음색으로 기어나간 목소리에 알겠다고 짤막하게 대답한 리뎬차이는,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무색하게 인사했다.

"어제 일 도와줘서 고맙다."

‘네가 이뻐서 도와준 줄 아냐. 망할 루이 놈 때문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입속으로 웅얼거리기는 했으나 수마에 눌린 발음이 그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을지는 의문이었다.

옐리세이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으나 한 번 어렴풋하게나마 달아난 잠은 통 돌아오지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침대에서 꿈틀거리다 끝내 구시렁거리면서 이불을 밀어냈다. 목 뒤와 어깨부터 사지가 뻐근했다. 어느 정도 근육통이 있을 거란 건 예상했지만 몸이 묵직하니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차라리 밤새도록 싸움질하는 게 낫겠다.’

침대에 일어나 앉아 의미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잠기운에 덮여 불분명하게 흐린 시야가 망막에서 일렁거렸다.

불쾌한 기분의 이면에는 오랜만에 꿈속에 등장한 첫사랑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풋사랑으로 가슴을 설레며 두근거렸던 기간은 길지 않음에도 그의 인생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건 사실이었다.

갑자기 담배가 당겨 머리맡에 M29과 함께 널브러진 켄트에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알싸한 담배 연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며 수마와 함께 침전물처럼 뇌에 들러붙은 첫사랑의 기억을 털어냈다. 느닷없이 회상에 방문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가출과 더불어 소식을 접할 수 없게 된 이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지, 확실히 궁금하긴 했다.

‘개새끼. 만나기만 하면 죽여 버릴 텐데.’

신경질적으로 필터를 씹던 옐리세이는 책상에서 재떨이를 발견하곤 반 넘게 남은 켄트를 비벼 껐다.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잠기운도 완전히 떨쳐냈다.

어슬렁어슬렁 계단을 내려가자니 중간 어림부터 왁자한 중국어가 들려왔다. 식사를 거의 끝냈는지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대화 소리에 섞였다. 옐리세이는 걸음을 멈추고 벽에 비딱하게 기대어 섰다. 저우룬칭이 중국어를 사용하는 건 그리 자주 듣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렵잖게 판별이 갔다.

옐리세이는 중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좋든 싫든 차이니즈 마피아와 부대끼며 듣게 된 몇 가지의 욕설이 귀에 익은 정도였다. 하지만 저우룬칭은 그의 정확한 영어 발음처럼 중국어도 아주 정확하고 또박또박 발음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칼칼하기도 하고 묵직하기도 한 남자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것 같은 저우룬칭의 낮은 목소리는 한 오라기도 새어나가지 않고 고스란히 그에게 밀러 왔다. 웃음은 중국어보다 더욱 낯설었다.

의미도 알 수 없는 이국의 언어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대어 있던 옐리세이는 계단을 올라오는 기척에 퍼뜩 눈을 떴다. 다리를 절룩이며 앞장서서 올라오던 장쯔궈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뭐야. 일어났으면 진즉 식사하러 오지 않고."
"흥. 내려가려던 참이었어."

괜스레 장쯔궈와 쌍둥이 형제들에게 불퉁거린 옐리세이는 한 걸음에 두 칸씩 계단을 겅중겅중 내려갔다.

휴일 아침이라는 풍경이 펼쳐진 나른하고 조용한 홀에 앉아 있는 건 저우룬칭 뿐이었다. 아침 식사를 한 흔적이 남은 테이블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던 저우룬칭이 인사했다.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주 약간 낯설었다.

"여, 잘 잤냐?"       
"아니. 악몽을 꿔서 기분이 더러워."

저 녀석이 안경도 썼었나 싶어서 멀뚱멀뚱 보고 있자니 저우룬칭은 신문을 접으며 안경을 벗었다.

"가끔 쓰는 거다, 가끔."
"누가 뭐랬냐."
"또 숨겼냐면서 난리 법석을 떨 것 같아서 말이지."
"아, 그러고 보니 타이밍을 놓쳤군."

하품한 옐리세이는 부스스하게 뻗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대충 쓸어 넘기며 맞은편에 착석했다.

"아침은 지금 먹을 거냐?"

고개를 끄덕끄덕하자니 이번에는 저우룬칭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청판(중국 요리. 쌀전병)과 죽을 담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 식사가 일인분이라 넌 안 먹느냐고 물으니, 그는 "아까 애들이랑 같이 먹고 네가 내려올 때까지 조금 기다리고 있었어."라는 대답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는 신문을 펼쳤다. 이번에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막 내려온 터라 입맛이 없어서 아침 식사가 넘어갈까 싶었는데 한 입 베어 무니 부담 없이 넘어가는 반죽 피 안의 마른 새우가 고소하게 입안에서 씹혔다. 저우룬칭에게 시답잖은 수작을 부리는 것도 잊고 열심히 젓가락을 접시와 입으로 왕복 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오늘 아침은 내가 한 거야. 죽은 끓이기 귀찮아서 사오긴 했다만."

언제부터인지 저우룬칭은 신문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었다. 옐리세이는 마지막 남은 청판 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다.

"우리 엄마보다 요리를 더 잘한다는 말을 내가 했던가?"

저우룬칭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올랐다. 접골원의 아가씨와 대화할 때 느슨하게 그의 낯을 감돌던 미소였다.

"네 별명이 카반, 이었던가. 아무튼 멧돼지라는 뜻이라며? 기가 막히게 잘 지은 별명 인데. 무슨 요리를 해도 정말 돼지같이 잘 먹는군."
"……인마. 밥 잘 먹고 있는데 욕이냐?"
"칭찬이야, 칭찬. 자기가 만든 요리를 잘 먹어주는데 싫어하는 요리사는 없지. 백돼지."

끝끝내 마지막에 돼지라는 한마디를 덧붙였기에 옐리세이는 이게 정말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렸으나, 애칭이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멧돼지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으니 멧돼지나 백돼지나 거기서 거기였다. 어딘가 인종차별적인 뉘앙스가 깃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피부 누런 동양 놈들 차별하는 건 그도 매한가지였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근데 넌 어디에서 요리를 배운 건데? 야이쑤코 오기 전에도 요릿집에 있었나?"
"특별히 가게에서 배웠다기보다는 단순히 취미야. 어머니가 헤로인 중독자였는데 집안일을 거의 안 하셔서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살려면 내가 집안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거든. 같이 살던 아주머니들이 집안일 도와주시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어야지. 끼니때 되면 요리도 하고, 단추 떨어지거나 양말에 구멍 나면 꿰기도 하고."

저우룬칭의 입에서 또 본인의 이야기가 나왔기에 一 이번에는 무려 취미까지 직접 말하며 — 귀를 쫑긋거리며 경청하던 옐리세이는 조금씩 풀려나오는 과거지사에 어젯밤에 묻어두었던 의문이 떠올랐다. 북한은 식량까지 지원받는 최빈국이라던데 마약은 어디에서 구한 거지.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 정말 북한 출신 전직 간첩이 맞느냐는 돌직구 질문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아칭 ! 쯔궈 ! 안에 있니?" 문 너머로 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저우룬칭은 종종걸음으로 뒷문을 향했다.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여니 막 토트백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던 홍위롄이 반갑게 양팔을 벌렸다.

"아치잉! 용케 들었구나! 열쇠를 까먹고 안 가지고 갔었어."
"아래층에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보다 만 하루만의 귀가이신데요."
"정확히는 23시간이라고 해 줘, 얘."

홍위롄은 졸린 기색으로 뺨을 문질렀다.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너무 힘들었어. 정말이지, 그 인간은 순 제멋대로라니까! 갑자기 꼬창까지 끌고가다니 이게 납치가 아니고 도대체 뭐니? 야이쑤코가 촌구석이라 보트나 헬기로는 방콕까지 못 가서 망정이지 까딱하다가는 타이 전국 유람 일주를 하게 생겼다니까. 홍콩에 있을 때부터 신사연하는 깡패 새끼 인 줄은 알았지만 여기에선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어. 자기 뜻대로 안 풀리면 성질이 아주 그냥! 어휴, 내 팔자야. 역시 타이가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으로 갈 걸 그랬나 봐. 살기가 더 힘들었겠지만 최소한 저 인간은 다 안 만났겠지!"

쉼 없이 불만을 늘어놓던 홍위롄은 쏟아지는 광둥어의 흥수 속에 멀거니 앉아있는 옐리세이를 뒤늦게야 발견했다.

"어머머, 손님이 계셨잖아? 좋은 아침이에요 미스터 슈이스끼."
"아, 예에."

볼 때마다 인상이 달라지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어물쩍 대답하는 옐리세이에 오랜 시간 단련된 영업용 미소를 살포시 날려준 홍위롄은 곧 하품하며 계단으로 사라졌다.

"방에 가서 폰 끄고 눈 좀 붙일 테니까 혹시 팡 사장이 찾으면 죽었다고 말해 줘."
"하하."

푸념 섞인 매몰찬 마지막 말에 저우룬칭은 짧게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식사 다 끝냈으면 치울까?"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돌아보며 묻자, 그러잖아도 홍위롄의 입에서 끝도 없이 흘러넘치던 억양 강한 광둥어에 휩쓸려 어리벙벙하게 있던 옐리세이는 물으려던 질문도 깜빡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할 건데?"
"글쎄, 뭘 할까……."
"……."
"뭘 하면 좋겠냐?"
"아무것도 안 하는 거."
"……."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을 한 번 노려보고는 심각한 고민을 시작했다. 때마침 책상 앞에 앉아 있으니 사색하기에도 적절한 장소였다.

데이트 코스의 정석이자 만만한 선택지라면 역시 영화관이겠으나 당분간은, 적어도 손이 나을 때까지는 꼴도 보기 싫었다. 부목과 붕대로 칭칭 처맨 왼손을 한 번 보고 영화관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침 식사한 직후라 식당이나 카페도 가고 싶지 않았다. 당구장과 카지노처럼 시간 죽이기 쉬운 곳은 영업 시각이 되지 않았다. 술집도 오픈할 시각은 아니다.

머릿속으로 선택지를 하나씩 지워가며 고심했지만 뾰족한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갈 만한 곳들이 오픈해도 문제였다. 선택지가 제일 많은 곳은 무어래도 옆에 여자들을 한 명씩 끼고 있는 유흥주점이나 쇼걸이 나오는 클럽 등인데 그런 곳은 자신이 가기 싫었다. 쇼걸이 있는 업소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데, 쇼보이가 있는 업소는 이런 촌구석에서는 찾기조차 힘들다니 게이에게 평등한 세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슬슬 더위가 한풀 꺾이는 무렵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야이쑤코의 기온은 높고 습했고, 이런 날씨에 공원이나 거리를 산책하며 데이트를 빙자한 고문을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야. 우리 해변가에 갈래?"

선택지를 지워가며 겨우 남은 장소에 넌지시 운을 띄웠으나 거절은 단호했다.

"맨날 보는 게 바다였을 텐데 안 지겹냐?"
"……그렇긴 한데."

빚을 빌미로 끌고 가지 못할 건 아니었으나 옐리세이도 억지로 해변까지 가고 싶은 간절한 바람은 없었기에 쉽게 포기했다.

의자에 거꾸로 앉아 등받이에 턱을 괴고 무료하게 어기적거리는 옐리세이를 보다 못한 저우룬칭이 실내에서 시간을 무익하게 보낼 방안을 제의했다.

"컴퓨터로 영화라도 보는 건 어때? 의향 있다면 뎬신에게 CD 빌려 오마."

딱히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시간을 때우기에는 적격이었다. 옐리세이가 끄덕끄덕 동의하자 저우룬칭이 걸터앉았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랩톱의 전원을 켠 옐리세이가 방을 나가는 그의 등에 물었다.

"비밀번호는?"
"1234."

허무한 비밀번호였다.
기동음과 함께 랩톱이 부팅되었다. 바탕 화면은 윈도우 로고가 들어간 밋밋한 기본 설정이었다. 필요한 아이콘만 나열되어 깔끔하게 정리된 바탕 화면을 지나 무작위로 폴더를 뒤져 보았지만 신통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윈도우에 기본으로 내장된 프로그램이었고 그 흔한〈스타크래프트〉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와, 이 자식은 무슨 재미로 컴퓨터 하는 거야.’

인터넷 방문 기록도 찾아보았지만 야후! 차이나와 바이두를 시작으로 한 중국어의 압박에 포기하고 떨어져 나왔다. 영판 모르는 언어라도 성인 사이트는 쉽게 분별이 가는데 그마저도 없었다.

더럽게 재미없는 놈이라는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을 무렵에 저우룬칭이 돌아왔다. DVD라도 가져오는 줄 알았더니 손에 들린 건 큼직한 CD 케이스 하나가 전부였다.

"다운 받아서 구운 거냐?"
"어."

엄연한 불법 다운로드였으나 준법정신을 가진 사람은 이 방뿐만 아니라 홍가 내에 아무도 없었기에 두 사람 다 여상하게 넘겼다.

저우룬칭이 랩톱 옆에서 CD 케이스를 오픈했다. CD 30장 정도가 수납되는 케이스였다.

"음, 영제가 적힌 건 네가 읽으면 될 거고.......〈라이언 일병 구하기〉, 〈셰익스피어 인 러브〉, 〈어플릭션〉……."

CD를 한 장씩 넘기며 저우룬칭이 한자로 음차하거나 자국어화한 제목을 영제로 번역하여 하나씩 읽는 걸 듣던 옐리세이는 10장도 넘어가지 않아서 뾰족하게 내질렀다.

"야. 한 번 듣고 다 외우란 거야? 그럴 머리가 있으면 내가 대학에 갔겠다. 액션이나 칼질하는 영화는 없냐?"

저우룬칭이 CD 케이스를 뒤적거렸다.

"〈언리미티드〉랑 〈와호장룡〉이 있군. 무협 영화도 보냐?"
"〈언리미티드〉줘."

냉큼 CD를 낚아챈 옐리세이는 랩톱에 CD를 넣었다. CD 드라이브로 들어가서 클릭 하자 이윽고 플레이어가 열리며 영화가 재생되었다. 딸깍거리며 음향을 높이는 옐리세이의 등 뒤에서 팔을 뻗은 저우룬칭이 책장에 꽂힌 태국어 교재를 꺼냈다.

"넌 안 보려고?"
"본 거야. 방해 안 할 테니까 다른 영화도 보고 싶으면 봐라."

서랍에서 워크맨까지 꺼낸 저우룬칭은 책을 들고 침대로 돌아갔다.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진짜 공부를 하려는 모양인지 벽에 기대어 앉아 교재의 테이프를 삽입한 워크맨을 재생하여 이어폰을 착용하고, 안경을 쓴 후 연필을 손에 쥐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황금 같은 휴일에 공부를 하다니 별 희한한 변태가 다 있었다. 옐리세이는 곧 관심을 끊고 모니터에 가득 펼쳐지는 제임스 본드의 매력으로 골인했다.

그러잖아도 개봉 시기를 놓친 걸 아쉬워하고 있었기에 120분 남짓한 러닝 타임은 쏜 살같이 지나갔다. 영화를 다 본 후의 만족감과 약간의 아쉬움에 젖어 옐리세이는 낮게 탄성했다.

"루이. 역시 007시리즈는 본드걸이 아니라 제임스 본드가 제일 섹시하지 않냐? 걸어오면서 총 쏘는 거 죽인다니까."

신나게 수다하며 침대를 돌아본 옐리세이의 입술이 애매하게 닫혔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꺾이어드는 햇살이 잠든 저우룬칭의 얼굴로 쏟아졌다. 허벅지에 놓인 교재 가운데에 연필이 굴러 들어가 있고, 테이프는 재생이 끝났는지 워크맨이 기동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옐리세이는 살그머니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상당히 불편한 자세일 텐데 피곤했는지, 혹은 무료했는지 깊이 잠든 저우룬칭은 인기척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슬쩍 안경을 벗겨 보았다. 미동도 없었다.

"음……."

침이 목울대로 꿀꺽 넘어갔다.
옐리세이는 살인과 폭행에 있어서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였지만 강간만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려 놓은 밥상을 마다할 만큼 정직하고 선량한 남자는 절대 아니었다.

‘삽입만 안 하면 되겠지. 삽입만…….’

오류 가득한 변명을 스스로에게 씨불이며 고개를 숙였다. 두 번째의 접촉이었다. 급하게 덤벼들었던 때와는 다르게 규칙적으로 가늘게 흘러나오는 그의 숨결을 가만가만 들이 마시며 입술을 머금었다. 거스러미가 약간 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고 가지런한 치열을 더듬었다.

잠든 저우룬칭에게 키스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기이한 기시감이 있었다. 무엇일까. 좀 더 혀를 깊이 밀어 넣어 아래에 잠잠히 깔린 혓바닥을 훑으며 생각했다.

‘……아, 맞아. 그때였지.’

아침에 꿈을 꾸었을 때와 같은, 지나치게 오래 되어 낯설기까지 한 감각이 둥글게 가슴 안에 번졌다. 그때에도 이렇게, 빈 교실에서 잠이 든 이반에게 살며시 다가가 입술을 훔쳤다. 도둑 키스만으로도 눈앞이 하얗게 될 만큼 가슴이 흥분되어 가쁜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 이반이 잠에서 깼다. 옐리세이를 설레게 하며 망상 속에서 몇 번이나 키스하며 더듬었던 이마에 불쾌감과 짜증이 섞인 그늘을 드리운 그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옐리세이가 무엇을 했는지 깨닫고는, 그리고.

"……暗好…… 文章……"

잠꼬대 같은 소리를 웅얼거리며 저우룬칭이 옐리세이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 손을 붙잡아 손바닥을 핥았다. 미미하게 찌푸리기만 하던 저우룬칭이 퍼뜩 눈을 크게 떴다. 잠이 확 달아난 얼굴이었다. 그때, 이반도 이런 얼굴이었다. 옐리세이는 단숨을 뱉으며 저우룬칭의 손끝을 깨물었다. 당혹감은 입술에 남은 감촉과 눈앞의 사실을 조합하고 자신이 잠들었을 때 일어난 일을 깨달으며 변한다.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당신이 좋아요」

지독한 경멸로 물들어가는 이반의 앞에서 충동적으로 뱉어냈던 고백을 상기하며 옐리세이는 느릿느릿 속닥였다.

"야, 루이. 왠지 널 보니까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이게 바로 14년 만의 사랑일까?"

저우룬칭이 눈을 깜빡였다. 옐리세이는 이후의 전개를 상기했다. 주먹따귀를 맞고, 더러운 호모 새끼라고 욕을 듣고, 침이 뱉어졌다. 정말이지 친절한 선배였다. 그 후까지도.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난 네 마음이 아니라 몸만이 목적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였던 남자를 지그시 응시한 저우룬칭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니. 부정맥이 안 좋은 거 같다."

옐리세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정맥? 그게 뭔데?"
"병이야. 자세한 건 검진 받아 봐라. 여기에도 병원 있지?"

낯선 단어와 낯선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진 옐리세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손을 빼낸 그가 턱짓했다.

"담배 많이 피우지?"
"어."
"술도 많이 마시고?"
"어."
"커피도 물론 마시겠지."
"……어어."
"마약 한 적은?"
"몇 년 전에 잠깐."
"그게 다 부정맥이 안 좋아지는 원인이야."

그렇게 따지면 부정맥 증상이 없는 사람이 더 드물 터이지만 단정 지어 말하는 저우룬칭의 말에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그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옐리세이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방치하다가 자칫하면 심장 마비로 죽는다. 병원 가."
"……어?"

죽는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했다. 저우룬칭의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조심해야지. 아직 젊은데 하지 못한 것도 많을 거 아닌가? 일단 병원부터 가라."
"으으음."

그리고는 머릿속으로는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느닷없는 박력에 밀려 우물우물 대답만 하는 옐리세이의 팔을 저우룬칭이 잡아끌며 일어났다.

"데려다줄 테니까 병원에 가자."

병원이나 가라는 말에 연타당한 옐리세이는 갸웃거리면서도 일단은 따라갔고, 저우룬칭은 방심한 틈에 자신의 정조를 노리려 한 변태를 성공적으로 방에서 내쫓았다.





CHAPTER 3





야이쑤코 섬에는 관광지구와 마피아가 활개 치는 무법지대의 경계에 미묘하게 걸쳐진 병원이 있었다. 무어라 하는 병원명이 번듯하게 걸려 있고 전화번호부에도 등재되어 있지만 그냥 ‘병원’이라는 한 마디면 다 통했고, 병원명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관광객들이 드나드니 관광지구이다, 마피아들이 더 많이 드나드니 이쪽 구역이다, 라며 서로 자신만의 논리를 내세우는 마피아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테러의 위험을 비껴가던 병원에도 기어이 불똥이 튄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 마피아 보스가 맹장수술로 입원하였을 때 병실에서 폭탄이 터졌고, 그 배후가 타 조직인지 내부의 배신자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마피아들의 항쟁이 발발했다. 사상자가 날마다 병원으로 실려 왔지만 병원마저도 폭탄 테러의 수습 때문에 일손이 부족했고 유일한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부상자들은 응급처치만 받고 뜨랏까지 긴급 이송되거나, 도중에 사망 했다.

마피아들에게 달마다 월급처럼 뇌물을 받아, 어지간하면 간섭하지 않는 야이쑤코의 경찰서장으로부터도 적당히 자중하라는 충고가 넌지시 전해졌다. 항쟁이 종료되자 각 마피아의 보스들은 병원을 불가침구역으로 하자는 요지의 회합을 가졌다.

그 이투 병원은 관광지구이든 아니든 불가침구역이 되었지만 마피아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병원이 완벽히 안전한 곳이라는 장담은 아무도 할 수 없었다. 하물며 대낮에 길을 걷다가도 총격전에 휩쓸려 유탄에 죽을 수도 있는 곳이 야이쑤코 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이쑤코에서 병원이 멀쩡히 개업 중이며 의료진이 부족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돈이었다. 야이쑤코의 진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의사는 애초에 검은돈을 유통하는 마피아와도 연줄이 있게 마련이다. 마피아의 연줄로 비합법적인 의료 행위를 하였던 의사는 큰 거부감 없이 통상적인 병원보다 연봉이 높은 야이쑤코의 병원으로 이직하였다.

현 병원장인 제이슨 킨은 걸프전과 소말리아 내전 참전 경험도 있는 군의관 출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지만 본국에서 의사 면허를 박탈당한 후 야이쑤코로 왔다. 타이 사람인 병원 이사장은 미국의 의사 면허 따위에는 개의치 않았고, 실제로도 제이슨은 유능한 의사였다. 돈은 많이 밝혔지만.

"부정맥이 안 좋은 게 맞구만."

제이슨이 무덤까지 돈 가방을 싸들고 갈 만큼 돈에 환장한 작자이긴 해도 실력만은 믿을만하다는 걸 잘 아는 옐리세이는 심각해졌다.

"많이 위험한 건가?"
"부정맥 악화로 죽을 확률이……."

제이슨의 굵은 목소리가 낮아졌다. 옐리세이는 침을 꿀쩍 삼켰다.

"요 정도?"

쌀알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 싶을 만큼 틈새가 벌어진 제이슨의 검지와 엄지에 옐리세이의 입에서 김빠지는 소리가 났다.

"뭐야. 그 확률이면 로또 1등 당첨보다 어렵겠구마는."
"야이쑤코에서 애완견이랑 산책하다가 약쟁이의 눈먼 총에 맞아죽을 확률보다는 적지."

제이슨이 히죽 웃으며 진단서를 철한 서류를 책상에 툭 던졌다.

"부정맥 증상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할 것도 없어. 운동 열심히 하고 술과 담배를 적당히 줄이는 정도로 조절하면 될 거야. 정히 걱정되면 처방전을 써 주기는 할 텐데,  솔직히 약까지는 안 먹어도 돼."
"10년 감수했네."

휴우, 하고 과장된 한숨을 뱉으며 옐리세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애 떨어지게 왜 겁을 주고 그러쇼? 난 이제까지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는 건강하신 몸이라고."
"당연하지. 바보는 원래 감기에 안 걸리거든."

자연스럽게 욕을 들은 것 같은 옐리세이가 눈을 부라리기도 전에 제이슨이 재빠르게 뒷말을 이었다.

"자네는 부정맥보다 무분별한 성생활로 인한 에이즈나 성병을 조심해야 할걸."
"콘돔은 꼬박꼬박 쓰고 있어. 그보다 내 손가락은 멀쩡해? 잘 붙고 있냐?"

부정맥 검사를 받으며 겸사겸사 엑스레이까지 찍었던 왼손을 쳐들자 제이슨이 엑스레이 사진을 서류철에서 빼내 보여주었다. 볼펜 끝이 하얗게 비치는 뼈를 톡톡 가리켰다.

"여기가 탈골되었던 부위인데 보다시피 예쁘게 잘 붙었어. 차이나타운에서 접골했다며? 닥터 추의 솜씨라면 염려 놓아도 돼. 자넨 뼈도 잘생겼군."

뼈가 잘생겼다는 말이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애매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부가 성히 아물고 있다니 그 점은 다행이었다.

"그건 그렇고. 카반, 마침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 왔어."

정말 어딘가 안 좋기라도 한 건지 옐리세이의 심장을 한순간이나마 벌렁거리게 하였던 진단서를 ‘그건 그렇고’라며 휴지 버리듯이 대충 책상에서 밀쳐낸 제이슨이 사뭇진지하게 손가락을 깍지 꼈다.

"한동안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낯설 지경인데, 항쟁 일어날 조짐은 안 보이나? 부상자가 많이 생겨야 돈을 벌지. 내가 창녀들 성병 검시를 하거나 관광객에게 항생제를 주려고 야이쑤코에 온 건 아니지 않나."
"우리가 댁 통장 채워주려고 항쟁을 하냐?"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자네들도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서 항쟁하는 건 아니잖나. 돈 때문에 하는 거지. 나도 돈이 좋고, 자네들도 돈이 좋고 세상을 지배하는 건 결국 돈이야."
"차라리 죽으라고 기도를 하지 그러쇼."
"우리 병원은 장례식장도 겸업하고 있으니 사망자가 나와도 좋지."

건전하고 올곧고 바른 제정신을 가지고 야이쑤코에 오는 사람은 없긴 하지만 마피아 앞에 두고 너네 언제 죽을 거냐는 말을 하는 간 부은 사람은 드물었다. 옐리세이가 어떻게 하면 저 망언을 효과적으로 받아칠 수 있을까 끙끙거리며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는 틈에 제이슨이 태연히 화제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안 그래도 오늘 인사차 들렀다는 페카를 만났어. 아침에 헬기로 도착했다더군. 그 친구가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으니 뭔가 조짐이 보이질 않나 싶은 거지."
"페카가?"

이번에는 옐리세이도 심상치 않은 기분이 되었다. 페카 스키예르벡은 제이슨의 말마따나 돈 냄새는 열흘 주린 맹수가 고기 냄새를 맡는 것보다 더 더 기가 막히게 포착해 내는 무기상이다.

"지나가던 길에 들른 건 아니고?"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장기간 체류할 것 같더만. 아까 자네가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을 때 얼굴을 비쳤는데, 자네도 병원에 있다는 얘기를 하니까 밖의 용건만 보고 곧 돌아온다더군. 기다리겠나?"

어차피 할 일은 없었기에 옐리세이는 쾌히 응했다. 기다리는 동안 제이슨이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왔다.

"커피? 녹차? 홍차?"
"홍차."

인스턴트 홍차 티백을 우린 종이컵을 홀짝이고 있자니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사람은 간호사가 아닌 두 명의 남녀였다. 스트라이프 서머 슈트 차림의 훤칠한 청년과, 검은색 라운드 티셔츠에 전투복 바지라는 투박한 차림새의 여자였다. 한 걸음 앞에 들어온 청년이 옐리세이를 보자 반색했다.

"와, 레샤, 이게 얼마 만이죠? 검사는 잘 끝났고요?"
"안녕. 아기 돼지."

옐리세이는 그에게 카빈一 멧돼지라는 별명을 붙인 페카의 경호원은 무시하고 페카에게만 인사를 했다.

"잘 지냈냐? 신수가 훤해진 걸 보니 돈도 많이 번 모양인데?"
"무기상은 고래로 항상 불황 없는 유망직종이었죠. 단 한 순간이라도 전쟁이 치러지지 않은 적은 없으니까요. 닥터, 전 커피로 한 잔만요."

옐리세이의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페카가 자연스럽게 부탁하자 제이슨은 여기가 다방인 줄 아느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커피를 탔다. 페카의 경호원인 메이탈 베나도는 의자에 앉는 대신 느슨하게 뒷짐을 쥔 채 페카의 등 뒤에 섰다. 언뜻 무방비한 자세였지만, 마초적인 사고를 지닌 러시아 남자답게 그녀를 만만하게 여기고 시비를 걸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멧돼지라는 별명만 얻은 옐리세이는 무심코 등줄기를 긴장시켰다. 메이탈이 사이렛 매트칼(이스라엘의 대테러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었다는 건 된통 털리고 난 후에야 알았다.

"옷 꼴은 왜 그래?"
"아, 여기요?"

제아무리 땡볕의 폭염이라도 쓰리피스 정장을 고수하여 멋 부리다가 더위 먹어 죽을 놈이라는 야유까지 받던 페카가 재킷 안에 얇은 드레스 셔츠 하나만을 입고 있으니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셔츠 안쪽이 두툼한 것이 무언가 다른 것을 받쳐 입은 것 같기도 했다. 설마 방탄조끼는 아닐 테고.

커피를 받은 페카가 "잘 마실게요."라는 인사에 덧붙이듯이 말했다.

"미얀마에 일하러 갔다가 갈비뼈에 금이 갔습니다. 덕분에 휴업 간판을 올렸으니 한동안 야이수코에서 요양이나 할까 하고요."
"흠, 돈 냄새를 맡은 건 아니란 말이지?"

제이슨이 눈에 띄게 실망했다.

"하고많은 휴양지 놔두고 하필이면 이런 화약저장고 같은 촌구석에서 요양이라니 자네도 참 별나."
"야이쑤코만큼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어요?"

무기를 팔기 위해서라면 범법도 서슴없이 자행하는 무기상의 발언에, 돈을 벌기 위하여 항쟁을 기원하는 의사와 제 꼴리는 대로 사는 마피아는 동의했다.

"미얀마에서 뭘 하면서 굴렀길래 뼈까지 작살났냐?"
"생각하면 혈압이 오르는데요."

페카가 뜨거운 종이컵을 후후 불며 부드러운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며칠 전에 미얀마의 군벌 하나와 거래를 했는데, 그 양반이 물건을 받고 잔금의 50%만 겨우 지불하더니 자기 기지를 함부로 누설하면 안 된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감금하려고 하질 뭡니까. 누설은 무슨, 돈 주기 아쉽고 무기도 필요하니 뜯어먹으려고 가둔 거지. 하, 이래서 일은 역시 선불 결제로 해야 한다니까요."

거래처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불협화음이 일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건 어느 직종이나 매한가지였다. 페카의 심기가 언짢은 이유는 알았지만 일개 소대의 화력에 버금가는 무장 경호원들로부터 호위를 받는 그가 군벌의 기지에서 탈출하며 부상까지 당하였다는 건 의문이었다.

동시에, 고용주를 지키지 못한 경호원을 빈정대기에는 좋은 기회였다. 옐리세이는 등받이에 팔을 걸어 허리를 쭉 편 채 껄렁거리며 메이탈을 돌아보았다.

"아줌마.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본인은 사지 멀쩡하고, 이 자식은 뼈를 작살 내? 삭신 쑤시고 뼈 삭아서 기름칠할 때 되었으면 고집부리지 말고 슬슬 은퇴나 하쇼. 더 흉한 꼴 보이기 전에."
"아기 돼지가 짖어대는 소리도 오랜만에 들으니 반가운걸?"

메이탈은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맞받아쳤다.

"나는 아프간 한가운데에 떨어져도 도련님을 안전지대까지 무사히 보호하여 구출할 자신이 있지만, 전능은 아니니까 도련님이 위험을 자초하는 건 완전히 못 막지. 계약서에도 없는 사항이야."
"뭔 헛소리야?"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들을 생각이 애초부터 없는 옐리세이는 귀를 후볐지만 페카가 겸연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아하하. 그러니까 말이죠……. 기지에서는 무사히 탈출했는데 하산하다가 내리막길에서 발을 헛디뎌서 굴렀어요. 구르다가 잘못 부딪혀서 뼈가 살짝……."

고백하는 것도 몹시 장피한지 뒷말은 어물어물 흐려졌다. "어이쿠."하며 혀를 쯧쯧 차는 제이슨의 맞은편에서 잠시 기가 막혀하던 옐리세이는 한마디만 했다.

"피융신."
"……부정할 말이 없네요."

페카가 면목없어했고, 메이탈이 소리 높여 웃었다.
주로 동아시아에서 사업을 하며 각국을 유랑하는 페카가 야이쑤코에 들른 건 근 반 년만이었던지라 야이쑤코의 근황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두런두런하다 보니 커피 한 잔이 비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페카가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며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일하시는데 방해는 그만하고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레샤, 이르지만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요? 검사하느라 점심도 걸렀다면서요."

저녁 시간을 죽일 마땅한 일정도 없는 옐리세이는 끄덕거렸다. 진료가 고맙다는 게 아닌, "홍차 잘 마셨수다."라는 인사를 제이슨에게 남기고 나와 원무과에서 진료비를 납부했다. 병원에서 노닥거리는 사이에 한 차례 지나간 스콜 덕에 무더위는 변함없었으나, 공기는 선뜩하니 맑았다.

"여긴 다 좋은데 더위 때문에 미치겠다니까요."

핀란드인인 페카도 옐리세이 못지않게 남국의 더위에 저항성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에어컨이 보호해주는 병원 건물을 나가 주차장까지 가는 몇 미터의 거리도 걷기 싫은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주제에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다니는 놈이니 어떤 의미로는 굉장한 근성이었다.

"점심은 어디서 먹을 건데?"
"음. 마힌야 스트리트에 있는 타이 커리 가게 어떠세요?"

식사 메뉴를 딱히 가리지 않는 옐리세이가 거절할 이유는 이번에도 없었다. 메이탈을 등 뒤에 세운 페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시한 한담을 하며 대기실을 지나 정문으로 향하던 옐리세이의 뒤통수로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부름이 닿았다.

"……저, 미스터 슈이스끼 맞으십니까?"
"이래서 인기 많은 것도 피곤하다니까." 따위의 한탄을 씨부렁거리며 돌아보았지만 대기실 의자에서 막 일어나는 동양인은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타이에서 차이니즈 마피아를 비롯한 많은 동양인을 만난 경험이 있기에, 동양인의 구분이 어려워 낯선 건 아니었다. 그냥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확신한 옐리세이는 퉁명스레 내질렀다.

"누구야?"

동양인 청년은 머쓱해하는 기색도 없이 가느다란 입술을 벌렸다.

"일전에 야이쑤코로 입항하는 배에서 뵈었던 운행정행공사의 가이드입니다."

아하. 옐리세이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청년의 소개나 얼굴이 아닌, 늘씬한 몸매를 보고 생각이 났다. 몇 시간 후에 저우룬칭을 알게 되어서 깜빡 기억에서 사라지기는 하였으나, 평시였다면 두고두고 아쉬워하였을 엉덩이의 소유자였다.

"참. 이름이 리, 음……."
"니시무라입니다."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옐리세이가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난 눈치이자 페카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라며 메이탈과 먼저 걸어갔다.

"관광객 한 분이 일사병으로 쓰러져서 병원까지 데려온 참이었는데, 미스터 슈이스끼까지 뵙게 되니 잘 되었네요. 일전에는 일하는 중이라 무례하게 말씀드렸던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정중한 일본인다운 태도로 니시무라가 허리를 거의 직각에 가깝게 굽혔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지라 사과를 받은 옐리세이는 오히려 떨떠름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됐으니까 넣어둬."
"사과의 의미로 식사라도 대접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됐다니까."
"一라는 핑계로 만나 뵙는 것도 안 될까요?"

그가 가늘게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목소리도 어느 틈인지 사근사근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하. 이놈의 인기란. 너무 .매력적인 것도 곤란하군.’

옐리세이는 무심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어깨를 쭉 폈다. 없는 밥상도 차려다 먹을 판에 밥상이 되겠다며 자진하는 놈을 걷어찰 만큼 배부른 인생을 살지는 않았다. 지금이야 저우룬칭에게 몰두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에게 굴복할 것이니 一 옐리세이는 자신이 저우룬칭을 울릴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 그다음 타깃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저우룬칭만은 못하여도 몸매와 엉덩이가 취향이었으니까.

"좋아.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안 되고, 나중에 연락해 봐라."
"감사합니다. 일단 제 연락처부터 드리겠습니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낸 니시무리가 또 허리를 굽히며 양손으로 공손히 명함을 건넸다. 니시무라의 태도가 시종 너무나 정중하였기에 옐리세이는 얼결에 합장하고 명함을 받았다. 받고 나서야 합장은 태국 사람의 예의라는 걸 떠올렸지만 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어쨌든 동양인이니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연락처도 니시무라에게 알려준 후에 관광객의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그와 작별했다. 명함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뒷주머니에 건성으로 찔러 넣은 옐리세이는 저만치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페카에게 손을 올렸다.

"용건은 다 끝나셨어요? 마르코에게 차를 돌려서 나오라고 했으니까 바로 가죠."

페카의 말처럼 SUV 한 대가 더위에 시달리지 않게끔 병원 정문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메이탈이 열어주는 문으로 페카에 이어 뒷좌석에 동승하자 운전석의 남자, 마르코 비토가 백미러로 싱글거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인데 전혀 안 변했네, 옐리세이."
"안녕하쇼."

메이탈이 조수석에 탑승하자 SUV는 곧 출발했다. 병원 부지 밖에서 시동을 끄지 않고 도로에 주차하고 있던 다른 한 대의 SUV도 뒤를 따라왔다. 뒤따르는 차 역시 페카의 경호원이 탑승해 있었다.

"페카. 어디로 가면 되나?"
"타이까지 왔으니 커리는 먹어야죠. 마힌야 스트리트로 가주세요."

마르코에게 목적지를 알려준 페카가 좌석에 등을 푹 기대어 앉으며 옐리세이를 돌아보았다.

"아까는 닥터도 있어서 말을 삼갔지만, 야이쑤코에 불온한 징조가 있는 건 맞아요. 실은 야이쑤코에 온 건 휴양도 휴양이지만 소소하게 용돈벌이는 되겠다 싶었습니다. 뭐, 그래 봤자 마피아들의 항쟁이니 무기를 팔아도 알바비 수준이지만. 전 개인 거래는 취급 안 해도 당신이라면 적정 가격에 넘겨줄 테니 필요하면 말하세요."
"에앵, 무슨 일이 터질 것 같길래 그러냐?"
"내부가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서요. 크렘린 궁에 즉위한 새 짜르가 올리가르히(러시아의 신흥재벌)와 마피야를 솎아내면서 분위기가 영 안 좋아요. 두 달간 모스크바에 다녀오셨다니 대충 아시겠지만."

야이쑤코를 방문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의 행적을 쉽사리 파악한 페카의 정보력에 옐리세이는 혀를 내둘렀다.

"레샤. 당신도 익히 짐작하셨다시피 내부에서 버티지 못한 조직은 궤멸하거나, 혹은 외부로 도피처를 찾으려 할 겁니다. 유럽과 미국 시장은 쫓겨나가는 마피아가 크게 두드려 열기에는 위험하고, 동북아시아 시장은 푸틴의 아래에서도 살아남은 거대 러시아 마피오 차이니즈 마피아가 꽉 잡고 있죠. 남미 쪽을 뚫고 나가느니 차라리 시베리아 형무소가 나을 테고요.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는 그리 남지 않은데 개중 제일 혼란하고 제일 역학 구도가 뒤 바뀌고 있어 제일 상황 타개의 가망성이 높은 곳이 바로 야이쑤코입니다."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공기가 살벌하니 우리도 조심해야겠다, 처럼 막연히 본능적으로 느끼기만 했던 옐리세이는 마치 자신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진지하게 호응했다.

"최후의 발악으로 우리 조직을 치려 할지도 모르니까."
"당신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러시아 마피야는 지부라도 완전한 상하 관계가 아니니 체자르 끼릴로비치가 대립하는 대신에 손을 잡고 독립을 고려할 수도 있고요."
"흠."

옐리세이라도 공으로 마피아에서 구른 건 아니니만큼, 머리 나쁜 자신이 넌지시 떠보는 머리 좋은 페카의 말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뚜렷한 반응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냥 어깨만 으쓱하자 페카는 싱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평화가 최고죠."
"무기 팔아먹는 놈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데."
"평화를 쟁취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래 봬도 평화주의자인걸요."

요 며칠 들은 소리 중 가장 웃기는 헛소리였기에 옐리세이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평화주의자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문득 인식했지만, 이 녀석은 자신의 주변에서 그나마 일반인 흉내가 쉬운 놈이었다.

"참, 그래그래. 너한테도 물어보면 될 것 같다."
"네? 무슨 일인데요?"

느닷없이 질문의 방향이 바뀌자 페카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옐리세이는 사뭇 신중한 표정을 가다듬었다.

"너……. 연애는 어떻게 하냐?"

두 사람의 대화에 참견하지 않고 낮게 자신들의 대화를 속삭이던 앞좌석에서도 흠칫하는 기척이 있었다. 옐리세이와 연애라니 전혀 교집합을 찾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였거니와 정말 뜬금없었기에 페카는 살짝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남, 남자 친구 생겼어요?"
"안 생겼으니까 이러지."

옐리세이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쪽팔린 일들은 생략하고 ‘며칠 내내 쫓아다니는 놈이 있는데 그놈이 튕기는 게 아주 철벽이다.’라는 요약이 차 안을 한 바퀴 돌았고,  메이탈이 푸하하 박장대소했다.

"아기 돼지 주제에 연애는 무슨. 그냥 약 먹이고 자빠트려."
"시끄러워, 이 아줌마야. 아줌마가 그 모양이니까 약혼자가 도망을 치지!"

발로 좌석 밑을 퍽 걷어찼지만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내가 있는데 왜 연애 조언을 페카에게 구해? 도와줄까?"
"됐어. 이탈리아 놈이 하는 연애담은 들어 봤자 어차피 혀가 꼬여서 실행 못 할 테니까."
"21세기가 벽두에 들이닥쳤는데도 상당히 구시대적인 편견이로군. 그러니까 네가 그 나이 먹도록 연애를 못한 거야. 내가 너랑 같은 나이일 때에는 여자 다섯 명과 양다리를 걸쳐서 귀싸대기와 키스를 동시에 받았다고."
"아기 돼지. 와인 들고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도 해 보는 건 어때?"
"너희는 도움 안 되니까 닥쳐!"

기회를 잡았으니 놀려 먹으려는 기색이 다분한 두 사람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도움이 안 되는 건 페카도 마찬가지였다.

"어어……. 그러니까, 그 남자분이 당신을 싫어한다는 거 아네요?"
"내가 싫다는 건 아냐. 호모가 싫다는 거지."

"네가 곧 호모니까 네가 싫다는 걸 돌려 말한 거야."라는 메이탈의 간섭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페카가 버벅거리며 말을 이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계속 대시하는 것 자체가 좋은 일 같지는 않은데요. 단념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의외로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 괜찮은 남자가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엉덩이를 포기하라니, 내가 미쳤냐?! 이제까지 들인 공이 얼만데!"
"연애를 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엉덩이를 만지고 싶은 거예요?"
"아, 그거야 당연히 섹스지."

페카는 그냥 입을 닫았고, 메이탈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맞아. 남자는 어차피 그 짓 할 생각밖에 머리에 없는 하반신 생물이지. 아기 돼지는 솔직한 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니까."
"오, 아니야. 난 모든 여성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사랑해. 그러니 내게도 기회를 주지 않겠어, 누님 ?"
"운전이나 똑바로 해."

시끌벅적한 시시덕거림 속에 어느덧 차는 시내로 접어들었다. 속도를 줄인 차창으로 지나치는 거리의 풍광과 행인을 시야의 구석으로 흘려 넘기며 날 병원에 팽개치고 튄 그 새끼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하고 옐리세이는 뜻 없이 생각했다.





귀가 가려웠다. 누군가가 험담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홍콩에서 욕하는 영향이 여기까지 끼칠 리는 없으니 보나마나 옐리세이겠지. 저우룬칭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양팔에 받쳐 든 타이 실크로 시선을 내렸다. 천연 염색을 한 비단실로 직초한 화려한 비단이 팔뚝 아래로 묵직하게 늘어졌다.

옐리세이를 병원에 떨구어주고 바로 귀가하려다 모처럼 멀리 나왔으니 지리도 익힐 겸 시장을 둘러보았다. 그간에는 필요한 식료품만 구매하고 귀가하였기에 여유롭게 구경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발길이 닿는 데로 이곳저곳 걸으며 구경하다 감탄이 나와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이, 이 타이 실크였다. 중국의 비단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확연한 차이가 있는 태국 비단이 손끝에 매끄러운        감촉을 남겼다.

충동구매도 하고 감상도 마음껏 하였으니 이제 이 옷감으로 무엇을 하면 될지 고심했다. 저우룬칭의 재봉 기술은, 기초는 익혔어도 본격적으로 미싱을 시용하거나 본을 떠서 옷을 만들 실력까지는 아니었다. 어려운 디자인은 무리였다.

‘애매하네……. 커튼 장식이나 식탁보로 만들어도 괜찮겠지만 식당의 식탁보로 사용하면 그 섬세하지 못한 놈들 때문에 금방 더러워질 테고…….’

실크의 무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머릿속에 반짝 불이 켜지며 고민이 걷히지는 않았다. 당장 용처가 급한 것도 아니니 천천히 고민해 보자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며 옷장 서랍의 빈자리에 가지런히 말아 넣었다. 충동구매하는 물품의 대개가 그러하듯이 이 타이 실크도 겉보기에만 예쁜 소품이 되어 방구석을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어선 김에 방 안을 정리했다. 책상에는 랩톱의 전원만 꺼졌을 뿐, 옐리세이가 영화를 봤던 흔적 그대로였다. 랩톱을 닫고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널린 CD를 케이스에 차곡차곡 넣었다. 리뎬신에게 돌려주러 케이스를 막 들어 올리니, 눌려 있던 머리칼이 한 올 흐늘거리며 떨어졌다. 머리칼의 색은, 백금발이었다.

"……."

그 녀석, 진료는 끝냈겠지.
불과 몇 시간 전에 이 방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회상하니 웃음이 나오려는 건지 한숨이 나오려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졌다.

저우룬칭은 남자의 접근에 아주 이골이 났다. 고백을 받았을 때에 대응책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려한 몇 가지의 패턴이 있었으나, 개중에서 ‘부정맥이 안 좋다.’라는 대응책이 먹힌 건 최초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먹히지 않을 방법이기에 우스갯소리로 한 번 생각만 해 보고 접어 둔 것인데, 이렇게 효과적으로 통할 줄은.

의혹이 서려 있음에도 얼떨떨하게 입술만 벌리고 있던 녀석의 얼굴에까지 회상이 미치자, 의식하지 못한 실소가 나왔다. 이 시각이면 병원에서 나왔을 텐데 속아 넘어갔다고 화를 낼지, 부정맥이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을지 슬며시 궁금해졌다.

잇새에서 흐르는 듯한 짧은 소리가 잠깐 귀를 지나 허공에 번졌고, 저우룬칭은 그것이 자신의 웃음소리였다는 것을 자각했다.

입술을 꾹 다물자 방에는 방금처럼 에어컨이 기동하는 소리만이 웅웅 들려올 따름인 적막으로 하강했다. 저우룬칭은 머리칼을 쓸어 휴지통에 버리고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널브러진 채 있던 교재와 워크맨이 팔 아래에서 불편하게 배겼다.

졸고 있었다고는 해도 키스를 당하다니 너무 방심했다. 저우룬칭은 반성했다. 잠결에 당한지라 시간관념이 제멋대로 엉겨서 차오원웨이가 키스했다고 착각했다. 옐리세이가 키스한 줄 알았다면 얼굴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배를 걷어찼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 또다시 실소했다.

돌이키면, 참 오랜만이다. 새로운 사람이 그에게 스스럼없이 접근하는 것은.

같은 가게에서 동거하며 일한 지 두 달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리뎬차이와 리뎬신 형제는 여적 그를 어려워했다. 홍콩에서 야이쑤코까지는 반나절 남짓 소요되지만, 소식과 정보를 접하기 위한 전화 한 통화는 한순간이다.

홍콩에서의 그, 적어도 3년 전의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하는 게 당연했다.

그를 일컬어 악귀라며 비난하였던 차오쑹젠의 험언은 타당하였다. 차오쑹젠은 그를 탐탁지 않아하는 만큼 적확한 판단을 한다.

3년 전의 그는, 차오쑹윈의 죽음으로 비롯된 절망과 차오쑹윈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악감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오쑹윈을 암살한 배후가 화공당임이 밝혀지자 그대로 장쯔궈를 비롯한 직속 부하 십여 명을 데리고 잠적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얼마되지 않아 군경의 경계가 삼엄하던 시기다. 차오쑹젠은 공적으로는 조직의 총주이자 사적으로는 친형인 차오쑹윈의 복수보다 잠적한 저우룬칭의 행방을 먼저 쫓았다.

차오쑹젠의 판단은 이번에도 적확했다. 저우룬칭은 며칠 후 암살을 주도한 화공당 총주의 일가를 몰살함으로써 행적을 드러냈다. 보복을 경계하여 가족을 안가로 대피시켜 물 샐 틈 없는 이중 삼중의 경호를 하던 화공당 총주는 그의 피가 이어졌다면 태어 난 지 이태도 되지 않은 막내 손녀까지 살해당하였다는 비보를 받아야 했다.

중국인에게, 특히 그들과 같은 삼합회에게 있어서 가족의 복수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나 죄 없는 아기까지 죽이지는 못하여 주저하는 부하의 손에서 샷건을 빼앗고, 엄마의 시체에 깔려서 앙앙 우는 아기의 머리에 직접 쏘았다. 기준치가 정해지자 그 이후의 처단은 일사천리였다.

차오쑹윈의 장례식부터 화공당 사무실을 습격하여 총주의 등을 베고 뒷목을 청룡도로 찍어 베기까지의 기억은 어딘지 애매했다. 뇌가 열에 들뜬 듯 몽롱하기도 했고, 시야에 습막이 가득 차기라도 한 듯 흐릿하기도 했다. 몇십 명을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그마저도 애매했다. 홍위롄의 말처럼 당시의 자신은 무언가에 ‘씌어’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중환자실에 오고 난 후에야 겨우 앞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차오쑹젠이 바닥까지 드러낸 그를 향한 도의를 닥닥 긁어내어 행동을 취한 건, 딱 거짓 주범을 만들어 습격 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위장한 선까지였다.

저우룬칭의 직속 부하 중에서 생존자는 네 명이었고, 그중 한 명은 수술 중에 사망하였으며, 두 명은 수술 후에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은 생존자인 장쯔궈는 다리에 평생 회복 불가한 상처를 입고 홍위롄과 타이로다. 모든 건, 그가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고 있을 때 끝났다.

「샤오저우. 이건 총주로써 조직원을 보호한 게 아니야. 너를 길들여 키우고도 마무리를 짓지 못한 형을 대신한 거다」

겨우 의식을 회복한 그에게 차오쑹젠은 단 한마디만을 던지고 돌아갔다. 그리고 퇴원하여 송의방에 복귀할 때까지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복수를 할 때에는 영혼까지 불사를 듯한 광기로 매진하였으나, 모든 것이 끝나자 저우룬칭은 완전히 무기력해졌다. 그럼에도 몸에 밴 피비린내와 살기는 가시지 않았는지, 투명한 장막이 두껍게 내걸린 것처럼 그의 주변은 소거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따랐던 차오원훼이만 제외하면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원훼이를 제외하면 남자에게 시달리는 것도 히데 이후로 3년 만이었군.’

홍콩을 떠나 홍위롄과 장쯔궈가 있는 야이쑤코로 오면서 자신이 많이 무디어진 탓일까, 또는 놈이 무례한 탓일까. 왠지 지나치게 무람없는 옐리세이라면 서슴없이 후자라 일컬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것이 나의 매력 운운하는 소리까지 덧붙여서.

문을 노크하는 홍위롄의 목소리가 있었다. 저우룬칭은 다사하게 꼬리를 물고 뻗어가던 상념의 가지를 접으며 일어났다.

"네, 누님."

문을 열자 그녀가 문틈으로 빠끔히 올려다보았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니? 네가 혼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 만이야."
"……제가요?"

저우룬칭은 다소 당황하여 뺨을 문질렀다. 홍위롄이 보조개가 깊이 파일 정도로 미소하며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는 홍콩도 아니니까 어깨에 힘도 빼고 긴장도 풀고, 그렇게 지내. 요즘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네가 야이쑤코에 막 도착하고 인사하러 왔을 때는 참 놀랐어."

홍위롄은 뒷말을 삼갔지만 그녀가 어떤 말을 삼켰는지는 짐작이 갔다.
살기만 남은 채 걸어 다니는 빈껍데기. 제어하지 못하는 짐승. 지난 3년간 도드라지는 살생은 크게 없었음에도 화공당을 궤멸한 여파는 그림자처럼 찐득거리며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었다.

"진부한 말이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무엇이든 좋으니 네가 천천히 마음 붙이고 정착할 수 있길 바라."

다른 사람의 위로였다면 한 귀로 흘리며 염두에 두지 않았을 테지만, 홍위롄과 그는 같은 사람을 잃고 같은 단장의 고통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도 함께 보냈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담담한 목소리에 저우룬칭은 말없이 시선만 내리떴다.

홍위롄이 이내 화제를 밝게 바꾸었다.

"오늘이 휴일이기도 하니 저녁때 특별한 일 없으면 모처럼 바오 아저씨 가게에서 외식이나 하지 않을래? 쯔궈는 데이트, 뎬신은 약속이 있다고 외줄해서 남은 사람은 나랑 뎬차이뿐이지만 말이야."
"좋죠. 안 그래도 아궈에게 양 선생의 솜씨가 좋다는 얘기를 들어서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가게의 전 주방장에게 라이벌 의식이라도 갖게 된 거니?"
"하하, 설마요. 저는 취미 생활이고 양 선생은 업인데요."
"어머나, 얘. 그래도 가게에서 일할 때는 프로의 마음가짐으로 해 줘야지."

홍위롄이 밉지 않은 핀잔을 주며 가늘게 눈을 흘겼다.

"슈이스끼도 있으면 같이 갈까 싶었는데, 그 사람은 돌아갔니?"
"오전에 누님이 주무시고 있을 때 갔습니다."
"별일 있었던 건 아니지?"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신중하게 되물었다.

"넌 익숙하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자꾸 걸려. 마피아가 너에게 추근거리는 건 전에 없던 일이잖아. 팡 사장에게 슬쩍 물어보니 꽤 난폭한 남자라고 하기도 했고……."
"난폭한 놈인 건 사실이지만……."

홍위롄의 말뜻도, 그녀의 염려도 잘 알았다. 마피아는 폭력과 강압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에 익숙한 족속이다. 조직의 이권이 깊게 얽혀 있는 환락가에서 삼합회 총주의 정부로 몇 년을 살았던 그녀의 염려는 타당했다.

타의든 자의든 손을 씻은 저우룬칭은 조직의 영향에서 벗어났고, 하물며 그녀라는 약점까지 등에 얹혀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는 짐짓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녀석이 저를, 뭐, 강간이라도 불사하겠다고 덤벼도 새삼스럽게 겁먹지는 않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그런 천둥벌거숭이를 제압하는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지막 말을 이으며 또렷하게 입가에 오른 그의 미소에, 홍위롄도 표정을 풀었다.

"그래. 네가 송의방에서도 제일가는 무투파였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아는데 말이야. 정말이지 난 아직도 네가 내 목을 꼬옥 끌어안고 등에 업혀 있던 어린아이로 여겨지나 봐."
"그때의 어린아이가 30년이 지나도 누님의 동생으로 있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30년이나 지났다니 거짓말 같아."

정수리로부터 한참 위에 있는 저우룬칭의 얼굴에서 꼬물거리는 손을 맞잡으며 따라다녔던 아이의 얼굴을 연상하기라도 하는지 그녀는 잠깐 추억에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다, 빙긋 웃었다.

"이따 6시가 되면 뎬차이랑 같이 홀로 내려와."

총총총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녀를 배웅하고, 지우룬칭은 문을 닫았다.





빠벨이 미리 일렀다.

"샤워기 틀 테니까 눈 감아주십쇼."

샴푸 거품을 낸 머리칼로 차가운 물이 쏟아지며 두피를 두드렸다. 옐리세이는 오른 손 하나로만 물줄기 아래에서 머리를 행궜다.
"됐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보다 손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신 겁니까?"

물기가 줄줄 흐르는 머리칼을 정수리 쪽으로 쓸어 넘기는 오른손이 당연한 질문에 괜스레 움찔했다. 이오시프나 필리몬에게는 이실직고했지만 아랫사람인 빠벨에게까지 수작 부리다가 탈골당했다는 고백을 할 만큼 배알이 없지는 않았다.

"문틈에 끼였지, 뭐. 달리 있겠냐."
"크게 안 다치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한동안은 손 병신으로 살아야 하지만 별수 있나."

길게 화제를 담고 싶지 않아 샤워를 해야겠다며 얼른 빠벨을 내보냈다. 붕대를 처맨 왼손을 감싼 비닐봉지에 물기가 들어가지 않게끔 신중하게 몸을 씻었다. 창상이 아니니 물이 들어가도 상처가 덧나지는 않지만 물에 젖은 붕대를 다시 감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등줄기에 고여 있던 땀과 열기가 찬물에 씻겨 배수구로 흘러내렸다. 서늘한 한기가 기분 좋게 피부에 머무르자 만족하여 샤워기를 끄고 몸을 닦았다. 드로어즈만 갈아입은 채 욕실 밖으로 나오자 빠벨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참,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휴가가 언제까지셨죠?"
"이번 주."

개운하게 씻고 나오니 맥주라도 한 캔 따고 싶었지만 빈속에 알코올을 들이붓는 건 자주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인지라 참았다. 구두를 다 신은 빠벨이 허리를 펴며 돌아보았다.

"휴가 끝나기 전에 보스를 한 번 찾아뵙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나가는 말처럼 혼잣말을 하시긴 했지만 사내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연락 한 번 없다니 휴가를 괜히 줬다고, 그렇게 중얼거리시더라고요."
"……        나랑 루이 일 알고 계시겠지?"
"조직 안에 모르는 사람이 더 없을 걸요."

옐리세이가 게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고, 현재 홍가의 요리사에게 열이 올라 있다는 건 반쯤 옐리세이 스스로 낸 소문이다. 춘삼월 발정 난 암말처럼 휴가 내내 저우룬칭만 쫓아다니고 있으니 체자르가 못마땅하게 여길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옐리세이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휴가가 있으면 뭐하는가. 가시만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장미 한 번 꺾어보겠답시고 쫓아다니는 통에 제대로 놀지도 못했는데.

"알았다. 오늘내일 중에 한 번 찾아뵈마."
"넵. 그럼 전 다녀오겠습니다."

사무실로 나서는 빠벨을 배웅할 무렵에는 몸에 약간 남아 있던 물기도 다 말랐다. 대충 반바지에 구아야베라 셔츠를 주워 입고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밖에서 사온 봉지에 담긴 죽과 반찬 몇 가지 외에는 먹을 만한 게 없었다. 저우룬칭이 해 주었던 벱스뜨로 가나프도 마지막 한 점까지 다 먹어치운 지 오래다.

외식과 비닐봉지 포장 음식이 보편화된 타이에는 부엌이 없는 아파트가 많다. 란뜨 제프스카야 조직원의 일부가 거주하고 있는 이 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갑갑한 게 싫어서 싱크대와 냉장고, 식탁 정도만 있던 주방을 거실과 튼 건 옐리세이였다. 덕분에 냉장고는 너른 거실의 구석에 놓이게 되었고, 원래도 요리를 하지 않던 옐리세이가 집에서 요리할 가능성은 제로가 되었다.

냉장고의 반찬들은 입맛이 안 당기니 밖의 노점에서 뭐라도 사올까, KFC까지 갔다 올까, 한가하지만 진지한 내적 갈등 속에 조그만 불평을 했다.

‘홍가가 가깝기만 했어도 아침 먹으러 가는 건데.’

어제 아침에 먹었던 저우룬칭의 요리는 참 맛있었다. 편식하지 않고 이것저것 먹성 좋게 잘 먹는 축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은 맛있는 음식을 택하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어차피 이른 시간도 아니니 우유 한 잔으로 때우고 좀 이르게 점심을 먹으러 홍가에 나갈까. 그 자식에게 할 말도 있고…….’

부정맥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 주어야 했다.
내적 갈등을 끝낸 옐리세이가 뭐라도 좋으니 러시아 요리 하나 준비해 두라는 전화를 저우룬칭에게 하기 위하여 막 휴대폰을 들었을 때였다.

타이밍도 좋게 착신음이 울렸다. 폴더를 열기까지 0.5초 정도 살짝 설렜지만 액정에 찍힌 발신번호는 등록도 안 된 번호였다. 인간관계가 한정되어 있는 옐리세이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그 소수의 사람은 모두 휴대폰에 등록되어 있었다.

통신사에서 이상한 가입 권유 전화라도 한 거라면 욕을 해 주겠다고 다짐하며 전화를 받았다.

"뉘쇼."
「니시무라입니다. 미스터 슈이스끼 맞으신가요?」
"아."

무심코 낮게 침음했다. 적련방의 사업체 중의 하나인 운행정행공사의 가이드에게 연락처를 알려준 직후에 페카 일행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느라 깜빡했다.

"어어. 그래."

어물쩍 대답하며 어제 벗어놓은 슈트를 뒤졌지만 화장실에서 잃어버리기라도 했는지 니시무라의 명함이 발견되지 않았다. 명함을 받고 제대로 보지도 않았으니 연락처가 기억날 리 만무했다. 수신된 번호를 저장하면 되는 일이라 명함을 찾는 건 빠르게 포기 했다.

「오늘 일정이 어떠신가 하여 연락을 드렸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첫 배로 출항하는 여행객을 배웅하고 시간이 좀 남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점심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점심? 음……,"

점심은 홍가에서 저우룬칭의 요리를 먹을 예정이었던지라 一 당연히 저우룬칭의 의향은 중요하지 않았다 一 다시금 내적 갈등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홍가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것 외에 저우룬칭과 유익한 시간을 보낼 확실한 일정을 세워놓은 것도 아니다. 아마도 어제처럼 식사하고 뭉그적거리다가 방에서 영화 좀 보고 뭉그적거리다가 저녁 먹고 뭉그적거리다가 귀가하게 될 확률이 꽤 높았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려면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같은 시간을 보내도 한 명은 영화 보고 한 명은 공부하는 게 과연 도움이 될지 의심스러웠다. 명확한 계획 없이 가 봤자 뭘 하면 될지 멍 때리고 있을 테고, 그렇게 죽이는 시간을 새삼 떠올리니 아까웠다. 그러잖아도 체자르가 좋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는데 더 빈둥거리다가는 자칫 며칠 남지도 않은 휴가가 깎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은 체자르에게도 들리고 어떻게 저우룬칭과 유익한 시간을 보낼지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지, 뭐. 어디에서 만나면 되냐? 미리 말하지만 적련방 사무실 근처에서 만나는 건 사양이다."

먹지 못하는 요리가 있느냐 물은 니시무라는, 미리 생각해 둔 가게가 있는지 바로 상호를 댔다. 마힌야 스트리트의 타이 요릿집은 그도 좋아하는 가게였다.

약속 시각을 정하고 통화를 끝냈다. 옐리세이는 이제 약속 시각까지 뭘 하고 시간을 때울지를 고민하며 냉장고에서 우유와 시리얼을 꺼냈다.





"차이나타운에서 만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전 중국인도 아니고 마주치면 껄끄러운 사람들이 있어서요. 실은 제가 야이쑤코에 온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아서 이 가게도 회사 동료에게 물어서 알게 된 겁니다. 원래는 러시아 요리 전문점이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맞아. 오너가 카지노에서 전 재산 꼴아박고 입에 권총을 물었지. 멍청하게도 22구경 권총으로 자살기도를 한 덕분에 즉사도 못하고 반병신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목 아래는 멀쩡하니까 우리가 배를 쨌는데도 내장이 술 담배에 찌들어서 빚을 탕감할 액수도 얼마 안 나오더라고. 손해 봤어."

육체로 갚는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를 행하였어도 빚이 남자 차라리 고향의 요리나 마음껏 먹게 회사 식당의 요리사로나 일하게 할 것을, 하고 체자르가 2분 정도 후회하기도 했었다.

밥을 먹으면서 입에 올릴 만한 화제는 아니었지만 옐리세이는 태연하게 지껄이며 쟁까이(타이 요리. 닭고기 찌개) 를 떴다. 맞은편의 니시무라도 마피아의 밑에서 일하면서 내성이 생겼는지 별반 표정의 변화 없이 식사를 했다. 오히려 대화를 이어가기까지 했다.

"현재는 장기 매매의 수익이 높지만 앞으로 사형 제도가 존속되고 있는 중국 블랙마켓이 크게 열리면 점차 시세가 추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더라고요. 물량 공세에서 버텨 낼 방도가 있겠습니까."

장기 매매에 깊이 관여한 적도 없고 차후의 시장도 고려한 적 없는 옐리세이는 "오호."하는 묘한 감탄성만 흘렸다. 니시무라가 말을 짧게 끊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조직 형님들의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지만요. 제가 트라이어드의 조직원은 아니지만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가끔 여행사 직원들 앞에서도 합니다."
"어쩌다가 야이쑤코까지 와서 중국 놈 사업체에서 일하게 된 건데? 그쪽에서 일하는 일본인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원래 필리핀에 유학을 갔었는데 돈이 떨어져서 휴학하고 일 년 정도 등록금을 벌 수 있을 만한 알바를 찾다가 필리핀의 트라이어드에게 야이쑤코 이야기를 들었어요. 요 근래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서 마침 일본어에 유창한 사람을 가이드로 찾고 있더라고요. 야이쑤코가 위험한 곳이긴 하지만 취업 비자도 필요 없고, 월급도 다른 곳 보다 훨씬 높다 보니 단기간만 일할 저에게는 딱 알맞은 일자립니다."

이번에야말로 옐리세이는 식사하는 것마저 잊고 감탄했다.
알파부터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더함도 뺌도 없는 그야말로 ‘일반인’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14살의 가출 이후 그가 만난 일반인이라고 해 봤자 폭행하거나 고문하거나 살인하거나 등등 조직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만난 사람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는 일반인을 꼬시는 방법을 찾아 골몰하는 중이었다.
옐리세이는 남은 깽까이와 밥을 후루룩 입에 털어 넣고 후식으로 카우 팟(타이 요리. 바나나 떡)을 주문했다. 니시무라도 일찌감치 그릇을 비우고 그가 다 먹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잘됐다. 너 혹시 애인 있냐?"

꽤나 프라이버시를 직격으로 건드리는 질문이었지만 니시무라는 선선히 대답했다.

"지금은 없습니다."

과거에는 있었다는 소리였다. 좋은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요즘 꼬시는 놈이 일반인이라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냐. 일반인은 도대체 어떻게 연애를 시작해서 사귀냐? 그놈이 북한 사람인데, 일본이 바로 옆 나라 맞지? 그럼 내 친구들보다는 좀 더 잘 알고 있지 않겠냐?"
"북한 사람이요? 홍콩 사람이 아니라요?"

바로 되받아치는 반문에 옐리세이는 반사적으로 등을 슬쩍 긴장시켰다. 그는 니시무라에게 저우룬칭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게 처음이다. 홍콩 사람이냐는 물음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주저 없는 반문이 의심스러워 눈을 가늘게 뜨자, 심상찮게 급변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니시무라가 얼굴을 옆으로 저었다.

"일부러 당신의 뒤를 캐낸 게 아닙니다. 홍콩 사람이 경영하는 가게에 관심 있는 남자가 있어서 자주 들락거리신다고 들었거든요."
"……적련방 놈들에게?"
"네에……."

옐리세이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뻗을 문질렀다. 마침 종업원이 두 사람 몫 카우 팟을 가지고 와 날을 세울 뻔하였던 분위기도 꺾였다. 란뜨제프스카야의 동료 조직원들도 저우룬칭에게 접근하는 걸 마뜩찮게 여겨 앞에서 갖은 욕설을 하는 판국에 차이니즈 마피아가 뒤에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니시무라가 눈치를 살피며 신중하게 말을 삼가고 있지만 적나라하고도 원색적인 야유를 들었으리란 건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염병할. 이 좁아터진 촌구석 같으니. 소문이 왜 이렇게 빨라?"

그는 욕설과 함께 카우 팟을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북한 사람 맞아. 자기 입으로 그렇다고 말했으니까 일단은 믿어야지."
"그렇군요."

니시무라가 턱을 주억거렸다.

"일본에 있을 때 남한 사람은 좀 만난 적이 있지만 북한 사람은 어렸을 때 조총련계 아이를 한 명 사귄 게 전부라서 원하시는 만큼 큰 도움은 되어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원래는 같은 나라였으니까 거기서 거기겠지. 암튼 좋은 생각 떠 오르면 말해 봐."
"그렇다면 국적에 상관없이 연애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좋아한다는 고백은 하셨나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네 엉덩이에 넣고 싶다는 말은 숱하게 했지만 그것이 연애의 첫걸음이 되는 고백이 아니라는 건 연애 경험이 없는 옐리세이도 알았다. 그나마 부정맥이 안 좋다는 걱정이나 들었던 고백 비스름한 것은 애매한 의문형이었다.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카우 팟을 입에 문 채 우물거리며 고개를 젓자, 니시무라가 별반 표정의 변화도 없이 대꾸했다.

"반드시 고백이 진심일 필요는 없죠."
"그런가?"
"네에. 연애의 첫 시작이 반드시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되리란 법은 없으니까요."
"그렇군."

연애 경험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는 일반인이 단정 지어 말하니 옐리세이도 아무 생각 없이 그런가 보다, 하고 끄덕거렸다.

"그럼 고백은 어떻게……. 아, 혹시 너 북한말은 할 줄 아냐? 기왕이면 그 녀석 모국어로 고백하는 게 더 그럴듯한 것 같은데. 일본이랑 같은 말 쓰던가?"

본인이 미안해할 상황은 아님에도 니시무라는 송구스럽다는 태도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할 줄 아는 외국어는 영어와 광둥어뿐입니다. 일본어와 한국어는 다르기도 하고요."

옐리세이는 조금 실망했지만, 낙담하기에는 일렀다.

"동료 가이드 중에 한국어에 유창한 사람이 있는데 대신 물어볼까요?"
"오, 좋지! 얼른 전화해 봐."

희희낙락 들썩이는 옐리세이에게 양해를 구한 니시무라가 전화를 걸었다. 오래지 않아 통화가 연결되었는지 광둥어가 빠르게 오고 갔다.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낸 그가 동료가 부르는 단어를 또박또박 적고 한 번 더 되물으다 확인하는 듯했다.

통화가 끝났다. 테이블 위로 허리를 쭉 뺀 옐리세이에게 니시무라가 메모지를 찢어서 주었다.

"남한말과 북한말이 조금 달라서 자신이 없긴 한데 아마 맞긴 할 거랍니다. 어쨌든 뜻은 통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고맙다!"

메모지를 낚아챈 옐리세이는 반 이상 남은 디저트 접시를 두고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밖으로 달려나가려다 뒷걸음질을 해서 니시무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혹시 중국 놈들 입김이 안 미치는 양아치 새끼들과 마주치면 내 이름 대고 빠져나와도 돼."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미스터 슈이스끼."
"다음에 볼 때는 그냥 이름 불러라."

겉보기보다 잘 단련되어 있는지 근육이 단단한 그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린 옐리세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나갔다.

우선 조용한 곳을 찾아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갔다. 으슥한 곳까지 들어가 도로에 오가는 자동차와 행인의 소음아 거의 닿지 않는 곳에 접어들자 심호흡부터 했다. 그는 자신의 한 손을 왼쪽 가슴에 얹었다. 심장은 평소처럼 적당한 속도로 맥동하며 혈관으로 피를 보내고 있었다.

"좋았어."

시간도 괜찮다. 3시가 막 넘어간 시각이었다.
단축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하는 몰개성한 통화연결음이 초조하여 입술 끝을 씹었다. 2분 정도 지나서야 대기음이 끊겼다.

「뭐냐, 백돼지」

‘왜’라며 전화를 받았던 지난번의 무성의함보다 한 마디라도 늘어났음에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고 자축하여야 하는지, 이름도 아닌 돼지라고 부르는 것에 짜증을 내야 하는지, 고민할 여력은 없었다.

육성에 비하여 살짝 첫소리가 더해진 저우룬칭의 목소리가 전화를 넘어 고막으로 흘러들자, 심장이 두근, 하고 크게 움찔거렸다. 씨이발. 부정맥은 무슨 얼어 죽을 부정맥.

「잘못 걸었냐? 일 없으면 끊을까?」
"망할 놈아. 진득하게 좀 기다려 봐.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고백은 역시 진심이지. 잠깐 사이에 연애 박사라도 된 양 옐리세이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메모지가 손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으음……. 그러니까, 어, DONGMUREUL SARANGHAMNEDA……? JE MA, MAEUMEUL BA…… DAJUSILAYO."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철자만 더듬거리며 따라 읽은 옐리세이는 첫사랑에게 충동적으로 고백하였을 때보다 더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미 충분히 자신에게 ‘친절’한 저우룬칭이니 새삼스럽게 호모라는 경멸을 뱉지는 않을 테지만 무어라도 좋으니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휴대폰 너머로 저우룬칭의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숨소리만 들렸다.

「…….」
"……."
「…….」
"야!! 들었으면 뭐든지 반응을 해!"

먼저 인내심이 끊어진 옐리세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니 외려 얼떨떨한 목소리 넘어 왔다.

「어, 어? 말 다 끝났냐? 뭐라고 한 건데? 난 러시아 하나도 몰라. 기왕이면 영어로 번역해다오, 아님 러시아어로 내 욕이라도 한 건가?」

기가 막히고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야!! 북한말이잖아, 북한말!! 네 나라말로 네놈에게 고백했잖아!!"
「북……. 아, 아아……. 맞다, 북한말……」
"그래! 북한말!! 한 번 더 말해 줘?! SARANGHAMNEDA!!!」

갑자기 전화음이 멀어졌다. 송화구를 손바닥으로 덮기라도 했는지 얼마간 둔하게 눌린 소리만이 들려오다가 옐리세이의 두 번째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에 저우룬칭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발음도 안 좋고 억양이 이상해서 그렇잖아」
"뭐라?!"
「넌 영어도 러시아어처럼 말하더니 북한어도 러시아어처럼 말하냐? 그래서 잘 못 알아들은 거라고. 아차, 물 끓는다. 그럼 이만」

그러고는 말을 붙일 틈도 주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옐리세이는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긴 후에야 이 자식이 결국 고백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재다이얼을 눌렀지만 부재중통화 안내음으로 넘어갈 뿐이었다.

"아아악! 이 개년아!! 좋든 싫든 대답을 하라고!!"

애꿎은 휴대폰이 벽에 퍽 부딪혀서 박살이 났다. 뒤늦게 후회감이 닥친 건 폴더가 부러져 반으로 똑 동강 난 휴대폰에서 빠진 배터리가 구두코에 부딪혔을 때였다.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다.





란뜨제프스카야가 표면적으로 위장하는 사업 중 하나인 무역 회사 빌딩 앞에서 옐리세이는 심호흡하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휴대폰까지 박살 내고 오는 내내 설렘과 기대감이 아닌 심화로 펄떡거리던 심장이 휴가 기간에 직장에 걸음 한다는 무거운 현실을 맞닥뜨리고 차분해졌다. 마음 같아서야 홍가로 찾아가서 빌어먹을 새끼의 멱살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에게도 감수해야 할 사회적인 지위는 있었다.

"아.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웬일이십니까?"

로비 데스크의 직원이 의아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옐리세이의 취향에 부합하는 외모와 몸매의 청년이었기에 평소였다면 시시껄렁한 수작 한마디라도 걸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보스를 뵈러 왔는데 언제 시간 나시는지 물어봐."

비서실과 내선 통화를 끝낸 직원이 말을 전했다.

"지금 바로 올라오셔도 된답니다."
"고마워."

가벼운 감사 인사를 날리고 로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거울에 비춰 보며 차림새를 점검했다. 타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슈트에 국물이라도 튀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깨끗했다. 몇 달 미용실에 가지 않아 약간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을 무렵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몇 마디 인사하고 사장실에 들어가자 체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체자르가 과장되게 인사했다.

"이게 누구신가,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아니십니까."

옐리세이는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또 사고 쳤냐?"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체자르가 실소하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혼자 체스를 두고 있었는지 체스판에는 흑백의 말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킹을 노리고 있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웬일이냐? 지금쯤이면 옆에 남자 하나 꿰차고 해변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줄 알았다만. 설마하니 갑자기 내가 그리워져서? 미안하지만 난 게이가 아니야."
"저도 취향이란 게 있습니다!"

정색한 옐리세이가 파르르 떨자 웃음소리는 더 높아졌다.

"그러잖아도 오늘은 한가한 참이라 심심했는데 잘 됐군."

마피아 보스가 일 없어서 심심하다니 세상이 약간은 평화로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휴가 기간 늘려달라고 온 건 아니지?"

옐리세이는 귀를 쫑긋했다,

"늘려주실 겁니까?"
"안 돼."

애초에 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는 것처럼 단호하게 내지른 체자르는 시가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냈고, 동전 하나만큼 쌓았던 기대감마저 꺾인 옐리세이는 약간 기가 죽어 라이터를 대령했다.

"손은 또 왜 그래?"

예의상이든 걱정이든 마주치는 사람마다 부상에 신경 쓰고 있으니 옐리세이도 대답에 이골이 났다. 그는 니시무라만이 유일하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을 떠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사랑의 증명이죠."
"아하아. 남자에게 물어뜯기기라도 했나?"

꽤 정답에 근접한 추리였다.
체자르가 시가를 입술 끝에 문 채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너 요즘 뭘 하고 사는지 물어보면 죄다 남자 엉덩이 쫓아다니느라 바쁘다고 하던데, 대체 어떤 경국지색이길래 얼굴 보기도 힘들어? 일전에 말했던 그 요리사인가?"

짐작은 했지만 상관이자 두목에게까지 자신의 염문이 흘러들어 가 있다는 걸 확인하자 괜히 머쓱해져 헛기침을 흠흠 했다.

"맞습니다. 루이라는 녀석이고요."

체자르의 한쪽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루이? 홍가의 저우一 저우룬칭 말이냐?"

옐리세이는 체자르가 일개 요리사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 낯선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였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어떻게 제가 그 자식 이름 부를 때보다 발음이 더 좋으십니까!"
"지금 네가 놀라야 할 부분은 그게 아니자 않냐? 세상의 반이 남자인데 남자를 골라도 어째서 그런 놈을 골라? 쌍둥이나 다리병신이 아니라 키 크고 사납게 생긴 놈 맞나?"

체자르가 혀를 쯧쯧 찼다.

"누구인지 알고서 만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저우가 어떤 인간이냐면……."

저우룬칭이 북한 간첩이라는 전적 외에 끝끝내 말하지 않고 있는 一 그나마도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는 — 프로필이 체자르의 입에서 술술 새어 나오는 황금 같은 찬스였지만 옐리세이는 비장하게 귀를 막았다.

"정보는 감사합니다만 듣지 않겠습니다. 제가 직접 루이에게 들을 예정이거든요. 14년 만에 아마르의 전조를 느끼는 중이라고요."
"아마르? 그게 뭐지?"
"프랑스어로 사랑입니다, 사랑."

으쓱거리는 옐리세이에게 아마르가 아니라 ‘아무르’라고 정정해 줄까 고민했다.

이 바보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만큼 공부를 했다는 게 경이로웠다. 본인 말로는 14살에 가출하는 바람에 중등학교도 졸업 못 하고 가방끈이 짧아서 이렇게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고 있다지만, 학제를 제대로 이수하였어도 과연 머리 쓰는 일자리에 취직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보다 체자르 끼릴로비치. 정보 말고 저에게 조언을 해 주세요. 일반인과 생전에 하지도 않던 연애를 하려니 뒈질 것 같습니다."
"일반인이라니? 루이 쫓아다니고 있다며?"
"루이가 일반인이잖습니까."
"……."

체자르는 두 번째 고민에 접어들었다.

사람 하나둘은 무리 없이 때려잡을 것처럼 보이는 칼 같은 인상은 차치하고도, 이 바보는 홍가에 뻔질나게 들락거리면서도 저우룬칭이 요리사로 일하게 된 후부터 보스인 팡룽을 제외한 적련방 조직원의 발길이 딱 끊어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걸까. 그 점이 이상하여 체자르는 따로 조사를 했었다.

차이니즈 마피아는 동양계 마피아 중에서 제일 손속이 잔혹하고 무도하다. 저우룬칭은, 그 차이니즈 마피아 중에서도 특히 도드라지는 남자였다. 10대 후반에 경찰 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마크되면서 두각을 드러낸 그가 정점을 찍은 건 3년 전 화공당 총주의 암살 사건이었다. 암살이라기보다는 테러나 학살이라 칭하는 게 더 적확할 것 같다고, 자료를 보았을 때 체자르는 판단했다.

그 뒤로는 별다른 행동 없이 잠잠하였으나 그가 야이쑤코에 도착하게 됨으로써 차이니즈 마피아는 술렁였다. 세력과 상관없이 조직원들 사이에는 대부분 송의방이 세의 확대를 위한 교두보로 삼는 것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떠돌고 있었다. 홍위롄은 송의방 전대 총주의 정부였던 여자고, 저우룬칭을 위시한 종업원들은 전 조직원들이니 짜장 무근지설은 아니었다.

차이니즈 마피아의 긴장과는 별개로, 직접 관여되지 않은 제삼자인 체자르는 저우룬칭이 진짜 송의방의 선봉일 확률은 높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송의방의 주된 해외 사업은 일본이다. 폭력단대책법(1992년부터 시행된 일본의 폭력단원에 의한 부당한 행위 방지 등에 관한 법률) 이후 야쿠자의 위세가 한풀 꺾인 일본에서, 간토 지방 최대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우지이에 연합회와 협약 중인 송의방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야이쑤코에 진출할 메리트가 적었다.

팡룽만이 변함없이 홍가에 드나들며 홍위롄과 만나고 있으니 그도 자신과 비슷한 판단을 내렸을 거란 짐작은 들었지만, 굳이 조직원들의 긴장과 동요를 다스리려 하지는 않고 있었다.

‘......뭐, 이 이상 깊이 파고드는 건 차이니즈 마피아의 관할이니.’

체자르는 고민을 끝냈다. 이무래도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이 일반인이라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평소처럼 깝치다가 놈에게 호되게 데면 껄떡거리는 남자 버릇이 고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오질 나게 말도 안 들어처먹는 그 구슬도 뺐으면 좋겠군.’

저우룬칭도 야이쑤코의 역학관계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테니 옐리세이에게 한도 이상의 위협을 가하는 일은 없을 테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망을 선회한 체자르는 혼자만의 오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옐리세이를 측은하게 보며 관용을 베풀어 주었다.

"어떤 조언이 필요한 거냐?"
"돌아가신 사모님과 어떻게 연애하셨어요?"

수년 전에 병으로 사망한 아내를 오랜만에 떠올리며 잇새에 문 시가의 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장인어른이 사업을 하고 있으셨지. KGB에 현역으로 있을 때였다만, 그 사업에서 장인어른이 몇 가지 불온한 이념을 암시하는 언동을 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아내와 사귀다가 결혼하게 된 거다."

계기라는 한 단어로 간단하게 표현하였지만 결국은 아버지를 빌미로 협박을 하였다는 뜻이었다. 옐리세이도 행간에 숨은 의미 정도는 파악하여 입을 헤 벌렸다.

"범죄잖아요?"
"오해는 하지 마라. 협박이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우리 결혼은 서로에게 윈윈이었어. 나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배우자로 삼을 수 있어서 좋았으며, 아내도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본인에게까지 연좌되는 걸 막을 수 있었으니까. 너도 알겠지만 KGB와의 결혼이 그녀에게 득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될 리도 없었고. 굳이 원흉이자 은인을 따지자 면 장인어른의 경솔이었지."
"그럼 좋은 방법이네요."

마피아 주제에 이제 와서 새삼스러이 범법 행위를 삼갈 리도 없고, 협박도 직접적인 강간은 아니다. 옐리세이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저우룬칭을 협박할 빌미도 찾아 봐야겠다고 고려했다.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겠지만.

체자르가 기지개를 주욱 길게 켜고는 체스판의 말을 거두며 정리했다.

"어차피 할 일 없을 테니 체스 상대나 하고 가라."

옐리세이는 펄쩍 뛰었다.

"저는 체스 규칙도 모르고 말 이름도 모릅니다!"
"알아. 가르쳐 주마."
"무엇보다 머리 쓰는 건 싫어요!"
"멍청한 게 자랑이냐."
"이제야 고백하는 거지만, 전 사실 왼손잡이입니다. 손가락을 다쳐서 말을 움직일 수가……."
"이로 물어서 움직여."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끝내 심심하다는 상관에게 붙들려 저녁과 야참까지 배달시켜 먹고 생전에 쓰지도 않던 두뇌를 풀가동한 옐리세이가 탈력하여 사장실을 나왔을 때에는 하늘에 새까만 밤의 장막이 드리웠을 무렵이었다.

어쨌거나 식사는 맛나게 먹었으므로 배를 두드리며 귀가하던 그는 아파트 앞에서야 휴대폰 구입을 까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날, 대리점이 개시하자마자 첫 손님으로 들이닥쳐 휴대폰을 구입했으나 오늘 개통은 익일, 빠르면 오후에 될 예정이라고 했다. 요행히 칩은 무사했으므로 전화번호부도 이동할 수 있었다.

서서히 찾기 힘들어지는 공중전화를 찾아 거리를 방황한 옐리세이는 경찰서 근처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필이면 바로 옆이 경찰서라는 점에서 지은 죄가 없음에도 一 정말 요 며칠 사이에는 사람을 폭행하지도, 협박하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 괜히 찜찜했지만 다른 곳을 잦기에는 귀찮았다.

경찰이 아는 척이라도 할까 봐 야구모자까지 사서 깊이 눌러썼다. 선글라스로 얼굴도 반쯤 가렸으니 이만하면 괜찮은 위장이었다. 슈트에 야구모자가 더 눈에 띈다는 현실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전화카드를 밀어 넣고, 휴대폰에서 저우룬칭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이번에도 휴대폰을 꺼놨다면 계획이고 뭐고 홍가에 들이닥치려 했지만 몰개성한 연결음이 그를 맞았다.

통화는 거의 부재중통화로 넘어가기 직전에야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얼굴이 반사적으로 구겨졌다. 저우룬칭의 목소리가 아니다.

"너 누구야. 루이는 어디 갔어?"
「난 장쯔궈고, 칭 형님은 지리를 비우셨다」
"어디 갔는데?"

기껏해야 화장실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옐리세이는 짤막한 대답에 기겁했다.

「여행」
"…뭐라고?!!"

밀폐된 전화박스에 목청 높이 오른 고함이 꽉 들어찼다.

"여행이라니 뭔 말이야!!"
「여-행. T-R-A-V-E-L」
"젠장! 여행의 스펠링 따위는 나도 알아!! 그 자식이 여행 간다는 소리 못 들었다고!!"
「목소리 좀 낮춰. 귀 따가우니까」

힐난하는 장쯔궈의 목소리 또한 당장에라도 끊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오후에 갑자기 일정이 정해져서 새벽에 출발하셨다. 며칠 걸릴 거야」
"나한테도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냐!! 하루 이틀 가는 것도 아니면서!!!"
「밤에 전화했는데 전화기가 꺼져있었다고 칭 형님께 들었다만」
"……아오!"

하필이면 휴대폰이 두 쪽이 나 있을 때다. 휴대폰을 그 모양으로 만든 게 자신이라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옐리세이는 바로 옆이 경찰서라는 사실을 열심히 머릿속으로 되뇌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언제 오는데?"
「왜 거기까지 말해 줘야 하냐. 네가 형님의 첩이나 애인이라도 돼?」

전화는 거기에서 톡 끊겼다.

"여보세요? 여보세, 씹새끼야!! 전화 받아!!"

뚜- 뚜- 소리만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욕설을 퍼부어 보았자 전화가 다시 연결되지는 않는다. 열이 오를 대로 올라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씨발! 어제부터 왜 이러냐고!!"

분통을 이기지 못하고 전화기를 주먹으로 내려찍은 옐리세이는 그 대가로 뼛속까지 울리는 둔중한 아픔에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간신히 아픔을 진정시키고, 일단 홍가부터 가보자는 결심 속에 문을 열자 스콜이 쏟아졌다. 옐리세이는 전화박스를 타다앙 때리는 빗줄기 속에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CHAPTER 4





저우룬칭은 털끝도 보이지 않았다.

옐리세이는 나날이 인내력의 한계치를 갱신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에게 있어서 가장 만만한 상대도 덩달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꺼져. 내 사무실이 네 안방이냐?"
"혼자 있으면 루이 그 새끼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난 너 때문에 짜증이 난다."

이오시프는 가능하다면 매일 같이 카지노 사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 사무실 한 중간에 떠억 널브러져 징징거리는 놈의 뒤통수에 컴퓨터 모니터를 집어던지고 싶었지 만 인내했다.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물체도 아닌 덩치도 큰 놈이 징징거리고 있으니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잘하는 짓이다. 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따라다니더니 성과는 하나도 없냐?"
"좆은 핥고 싶었지."

핥지도 못한 놈이 말은 잘했다.
딸깍딸깍 마우스를 클릭하는 작은 소음 사이로 귀찮음이 역력한 이오시프의 음성이 섞였다.

"그냥 네가 보기 싫어서 튄 거 아냐? 그 새끼 헤테로라며. 나라도 변태 호모 새끼가 엉덩이에 박게 해 달라고 쫓아다니면 도망칠 거다."

테이블에 팔을 괴고 얼굴을 처박고 있는 옐리세이의 목소리가 낮게 웅얼거리는 것처럼 팔 아래에서 울려 올라왔다.

"루이 놈이 나한테 거짓말한 게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일로는 거짓말 안 할 거야. 이렇게 빙빙 우회하는 게 아니라 직접 꺼지라고 할 놈이거든."
"다행이구만."

무성의한 응답을 들으며 옐리세이는 테이블을 벅벅 긁었다.

저우룬칭이 여행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날, 당장에라도 홍가에 쳐들어가 드잡이 질을 할 기세였지만 스콜이 멎을 때까지 영락없이 전화박스에 갇혀 있게 된지라 외려 상황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반추하는 것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휴대폰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게임이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하는 스도쿠뿐 이었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휴대폰이 부서져서 꺼져 있었던 건 사실이니 저우룬칭이 일부러 자신을 피하기 위해 연락도 않고 여행을 간 건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 여행 자체가 미심쩍었다. 장쯔궈도 주방에서 일을 하지만 요 두 달 사이에 주된 요리는 저우룬칭이 맡고 있었다. 아무리 홍가가 설렁설렁 운영 중이고, 식재료가 떨어지면 안주 없으니까 집에 가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하는 불성실한 가게이더라도 최소한의 기본은 이행하였다.

저우룬칭이 가게를 비우는 동안 문을 닫는 건가 싶어 스콜이 지나가자마자 홍가로 직행했다. 그가 그곳에서 목격한 건 며칠간 저우룬칭을 대신하여 주방에 일을 하게 되었다는 낯선 중국인 요리사였다.

솔직히 저우룬칭의 요리보다 더 맛있었다.

딤섬을 해치우고 샤오롱빠오를 싸들고 일단 귀가하였다.

그 다음 날부터 아침 점심 저녁으로 저우룬칭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 좀 작작하라는 신경질적인 장쯔궈와 목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전파는 오늘도 장쯔궈의 목소리를 실어주었다.

"젠장. 당이 부족해!"

이쁘지도 않은 놈의 목소리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으니 더욱 속이 뒤집혔다. 상체를 벌떡 튕긴 옐리세이는 초코바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이오시프가 들으라는 듯이 아주 큰 소리로 혀를 찼다.

"쯧쯧. 이제 어지간하면 포기해라. 싫다는 놈한테 왜 자꾸 들이대? 자존심도 안 상하냐."
"그 새끼를 깔아보지도 않고 이대로 도망치는 게 더 자존심 상한다니까!"
"깔 수 있을 조짐도 안 보이는구만."

이오시프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루이는 세상의 모든 남자와는 다 자도 너와는 안 잘 것 같다."
"......솔직히 나도 그게 좀 걱정스러우니까 입 닥쳐. 휴가 끝나기 전에 따먹으려고 했는데 내일 끝나잖아. 빌어처먹을."

않는 소리를 낸 옐리세이가 고개를 도로 처박았다.

"아〜 루이 따먹고 싶다〜〜"

이오시프는 신성한 사무실에서 불경한 소리를 씨불이는 저놈의 주둥이에 마우스를 처넣는 대신에 손톱만큼이라도 써먹을 구석을 찾아보기 위하여 가까이 불렀다.

"레샤.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고 이리와 봐."
"뭐가 어쩌고 어째? 루이 따먹은 날 그 새끼의 처녀혈을 너한테 보여주고야 말겠어!"

그러다 역으로 옐리세이가 따먹히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랄 발광할까 봐 입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투덜대며 책상 옆으로 다가온 옐리세이가 허리를 굽혔다.

"뭔데?"

이오시프는 CCTV를 재생 중인 모니터를 가리켰다.

"2시간쯤 전에 카지노에서 시비가 붙었거든. 조용히 끝나긴 했지만 혹시나 싶어서 당시 영상을 돌려보고 있는데……."

마우스를 움직여 녹화한 영상을 뒤로 몇 분간 되감은 이오시프가 검지로 모니터를 톡톡 건드렸다. 옐리세이가 그의 등을 후려쳤다.

"너 왜 내가 쓰다듬지도 못한 빅따의 엉덩이를 문지르고 그러냐."
"새꺄! 딜러 말고 그 옆의 손님을 보라고!"

등을 돌리고 선 채 룰렛 테이블 앞에 서 있는 빅또르의 바로 옆을 지나가는 덩치 큰 꽁지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일행으로 보이는 시폰 드레스의 여자가 바짝 붙어 귓가에 소곤거리는 중이었다.

옐리세이는 진지하게 사내를 보았다.

"근육이 너무 많아. 근육 돼지는 내 취향이 아닌데."

이번에는 이오시프가 그의 등을 후려쳤다.

"어련하시겠냐. 몸매 말고 얼굴을 보라고. 어딘가 낯익지 않냐?"
"CCTV로는 잘 안 보이는데……."

슈트가 터질 것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이 팽팽한 사내의 얼굴부터 몸매까지 주욱 훑었지만 뾰족이 떠오르는 인상은 없었다.

"네 말을 들으니까 낯익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이 새끼에게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과 함께 실낱같은 기대감을 단호하게 끊은 이오시프는 그를 밀어냈다.

"됐다. 됐으니까 청승맞게 남의 사무실에서 굴러다니지 말고 밖에 나가라. 멜닛 스트리트에라도 가서 한 발 빼. 그럼 머리도 가벼워지고 성욕도 만족되고 네 주둥이도 다물어지겠지."
"별로 섹스 생각은 없는데……."
"안똔! 차 대기시켜!"

옐리세이가 내키지 않는 태도를 보이거나 말거나 한 톨의 도움도 안 되는 놈을 사무실에서 처리해 버리겠다는 이오시프의 의지는 확고하였다. 그는 부하에게 전화한 것으로도 모자라 미적거리는 옐리세이의 팔뚝을 움켜쥐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일반적인 집창촌인 끄이람 스트리트와, 남창과 트렌스젠더가 있는 멜닛 스트리트는 이어지는 거리이다. 때문에 가이드의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제대로 듣지 못한 여행객은 끄이람 스트리가 아닌 아닌 멜닛 스트리트로 갔다가 기겁하여 돌아 나오곤 하였다.

이오시프는 끄이람 스트리트 바로 앞에 옐리세이를 세워 주었다.

"어차피 사내새끼들은 다 똑같아. 네가 요즘 본의 아닌 금욕 생활이 길어져서 더 지랄 발광인 것 같은데, 한 번 빼고 나면 기분도 나아질 거다. 잘 놀고 와라."

옐리세이는 ‘할 마음 없다는데 왜 억지로 데리고 오냐.’라는 요지의 항변을 하고 싶었지만 그를 발로 꾹꾹 밀어 차 밖으로 쫓아낸 이오시프는 차 문을 쾅 닫고 즉시 출발했다.

"내가 짐승이냐? 시도 때도 없이 그 짓만 하고 싶어 하게?"

‘루이 엉덩이에 박고 싶다.’를 달고 다니는 입에서 나오기에 적절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옐리세이는 짜증을 내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깡통을 걷어찼다.

장부가 여자이냐 남자이냐는 차이는 있지만 끄이람 스트리트와 멜닛 스트리트의 분위기는 유사하다. 가게마다 요염한 포즈를 취한 창부의 사진이 걸려 있고, 전면창으로 헐벗은 창부가 호객하기도 하고, 그보다 급이 낮은 창부는 으슥한 골목 사이사이에서 손님을 찾았다. 거리를 꽉 매운 술에 취한 행인들이 질펀한 음담패설로 창부들을 희롱하며 밤의 어둠 사이로 들어갔다. 붉은 조명과 네온사인이 상호도 붙지 않은 건물에서 번들거리며 저속한 욕망을 부추겼다. 야이쑤코에서 가장 저 열하고 적나라한 본능이 넘실거리는 퇴락의 거리였다.

이 거리에서 가게를 구분하는 방법은 하나다. 러시아 년. 타이 년. 중국 년. 필리핀 년. 멕시코 년. 기타 등등 인성이 아닌 상품으로서 취급되는 무분별한 국적의 난립. 대개 득세하는 마피아의 국적에 따라 창부의 숫자는 변동되어 왔다.

‘오랜만이긴 하네.’

한때는 밤에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왔지만, 최근에는 저우룬징을 쫓아다니느라고 그간 걸음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확실하게 정하지 못한 채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취객의 술 냄새와 창부의 향수 냄새가 불쾌하게 뒤엉긴 채 거리 이곳저곳에서 치솟는 고성과 천박한 웃음소리에 섞였다. 유두까지 아슬아슬하게 패인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대는 걸 보아 봤자 불쾌해질 뿐이었기에, 그러잖아도 스트레스가 한계까지 우걱우걱 쌓여 있던 옐리세이의 기분은 점점 더 저조하게 바닥을 쳤다.

‘망할 놈. 데려다줄 거면 멜닛 스트리트에 떨어트려 놓을 것이지. 분명히 나 엿 먹으라고 끄이람 스트리트 앞에 떨구어 놓은 게 확실하다고.’

자다가 마누라의 발에 걷어차여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라는 저주를 이오시프에게 퍼부으며 그와는 별세계나 다름없는 끄이람 스트리트를 걷던 옐리세이는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튜브톱을 입고 만취하기라도 한 듯 벽에 기대어 앉아 널브러진 여자는 이 골목에서 그리 특기할 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지나가던 남자들이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벌어진 미니스커트 안쪽을 흘끔거리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옐리세이의 발목을 붙잡은 건 늘어진 여자가 허우적거리면서 "불이야, 부울……."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점과,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언어가 러시아어였다는 점이었다.

여자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일순 "헉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쳐들더니 동공이 풀린 눈으로 옐리세이를 빤히 보다, "바바 야가(슬라브계 민단의 마녀) 잖아! 나에게 횃불을 줘! 다 태워 줄게!" 라며 깔깔깔 웃었다.

더 이상 살펴볼 것도 없이 마약을 복용한 게 분명했지만 혹시나 하여 여자의 소지품을 뒤졌다.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도 꼭 쥐고 있던 오른손을 펴자 자그마한 약통이 굴러 떨어졌다. 옐리세이는 약통에서 손등으로 덜어낸 기루를 코로 흡입하려다 여자가 사용한 대롱을 재사용하고 싶지는 않아 혀끝으로 살짝 핥았다. 이내 침과 함께 뱉었다. LSD와 코카인을 섞었는지 조잡한 맛이 혀끝을 태웠다.

"이 년이."

우악스러운 따귀가 뺨으로 날아들었다.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따귀를 한 대 더 날리며 윽박질렀다.

"씨발년아. 누가 약 처먹고 영업하러 나오랬어?! 어?! 너 어느 가게야 당장 말해!"
"사람 살려! 아니야, 아냐! 내가 불 질렀어. 그래, 다 태웠다구. 아빠아, 잘못했어요!"

피범벅이 된 입술에서는 통증과 더불어 마약이 안겨 주는 환각으로 인한 헛소리마이 웅얼웅얼 비명에 섞였다. 더 두고 있어 봤자 약기운이 빠지기 전에는 원하는 대답을 듣기가 어려워 보였다.

옐리세이는 물에서 헤엄지는 것처럼 허우적거리는 여자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휘청 거리던 여자는 무릎을 꺾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비명만 지르는 여자를 질질 끌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으슥한 벽에 기대어 선 채 한창 추납질에 열중이던 남녀가 발버둥 치는 여자의 다리에 걷어차여 욕설을 퍼부었다.

란뜨제프스카야가 끄이람 스트리트에서 운영하는 가게 중 하나는 금방 찾았다. 으슥한 골목을 돌아 근방에서 가까운 가게의 뒷문을 쾅쾅 두드렸다. 험상궂은 인상의 기도가 옐리세이를 알아보고는 굳은 표정이 되었다.

"어, 어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포주 불러와."

끌고 다니던 여자를 내팽개쳤다. 목청껏 비명 지르던 여자는 허위허위 내저으며 바닥을 기어가 구석 에 옹송그렸다.

주인은 곧 나왔다. 그는 입술이 찢어지고 피범벅이 되도록 맞았음에도 약기운이 만연한 취한 낯으로 중얼거리는 여자와 옐리세이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기집년들 간수 똑바로 안 하지?"
"애들 단속을 못 한 건 제 잘못입니다만……."

남자는 허리를 굽혀 이제 엄마를 찾으며 엉엉 우는 여자의 턱을 올렸다. 붓고 터진 여자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엉망이 될 게 뻔했다.

"장사 밑천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면 내일부터 일은 어떻게 합니까?"
"SM클럽에 며칠 보내."
"……계약이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알겠습니다."

여자가 약기운이 빠질 때까지 방에 옮겨 놓으라고 명령한 남자는 옐리세이를 다시 돌아았다.

"안쪽에서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

됐다며 남자의 권유를 짤막하게 내지른 옐리세이는 켄트를 입에 물고 가게를 나왔다. 밖까지 몇 걸음 마중을 나온 남자의 정중한 인사에 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하지 않았던 해프닝까지 겪은지라 기분은 더 꿀꿀했다. 이래서는 남창이고 뭐고 설 것도 안 설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내키지 않던 걸음이었으므로 옐리세이는 얌전히 귀가하여 캔맥주나 따자는 쪽으로 방함을 선회했다.

하여, 목격할 수 있었다.

이오시프가 끄이람 스트리트의 입구에 내려주자 않았거나, 마약을 복용한 여자를 란뜨제프스카야의 가게에 내치지 않았거나, 귀가하자는 결심을 굳히지 않았다면 조우하지 못하였을 짧은 순간이 옐리세이의 시야를 스쳤다.

저우룬칭이었다.
옐리세이는 담뱃재를 털어내야 한다는 것마저도 잊고 눈을 치떴다.
거리가 멀어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놈을 잘못 볼 리가 없었다.

길 건너편에서 요염한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팔짱을 끼고 모텔 입구로 들어 가는 남자는 저우룬칭이 분명했다.

"……하."

일순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져, 옐리세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우룬칭과 여자의 뒷모습은 모텔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 잔상만큼은 끈질기게 망막에 남았다.

여행을 갔다는 놈이, 여자를 옆에 끼고 놀고 있어?
생각이 미치기에 앞서 모텔까지의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무료한 얼굴로 TV를 보며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이 살벌한 옐리세이의 기세에 주춤거렸다.

"몇 명이 오셨,"
"방금 들어왔던 동양인 남녀 두 명, 그 연놈들 몇 호실이야?!"

손님의 정보를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인 논리는 야이쑤코의 뒷거리에서 통하지 않는다. 주인은 더듬거리며 토설했다.

"3, 302호실입니다."
"열쇠."

예비 열쇠가 바로 카우터를 넘어 옐리세이의 손까지 전해졌다.

단번에 계단을 겅충겅충 뛰어 올라간 옐리세이는 302호라는 표식이 적힌 문 앞에 멈춰 섰다. 이 문을 열고, 저우룬칭이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을 것이다.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콰앙-! 잠금이 해제되자마자 걷어찬 문짝이 반대편 벽에 부딪혔다. 침대에 누워 있던 저우룬칭과, 그의 어깨와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고 있던 여자가 동시에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희게 질린 옐리세이의 주먹에서 굵은 힘줄이 꿈틀거렸다.





행여나 전화가 또 걸려 오기라도 할까, 통화를 끊자마자 아예 휴대폰의 전원을 끈 저우룬칭은 그제야 입을 막고 참았던 폭소를 터트렸다. 영업시간이 지나 한갓진 홀에 그의 웃음소리만이 활달하게 울리다, 벽에 반사되어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장쯔궈가 있었다면 ‘과장 보태어 3년 만에 듣는 큰 웃음이신데요.’ 라며 넉살 좋은 맞장구를 칠 법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홀에 있는 사람은 그 혼자였다.

숫제 테이블에 엎드린 채 박장대소하던 그는 물결치던 어깨가 잠잠해 지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도 웃음의 여운이 남아 올라간 입꼬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복근이 당길 만큼 폭소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맙소사. 북한 간첩이라는 거짓말을 아직도 진지하게 믿고 있었던 건가? 북한 말은 또 어디에서 배운 거야.’

알지도 못하는 언어를 더듬거리며 고백이랍시고 하던 녀석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이건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좀, 귀엽긴 했나.’

입가에서 잔웃음이 잘게 흘렀다. 그간의 인생에서 기발하고 기억에 남는 고백의 순위를 정한다면 오늘의 옐리세이가 으뜸으로 꼽힐 것이다.

빨리 오해 아닌 오해를 풀어주지 않으면 북한 주석 일가의 사진을 선물로 주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한참이나 거짓말을 하고 있었으니 사실을 고백하면 저 다혈질에 불같이 화낼 것은 자명한바, 가급적 녀석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을 고심했다.

끼이, 하고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뒷문으로 들어온 홍위롄이 그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저우룬칭에게 반갑게 다가섰다.

"아치잉∼∼ 바로 만났네. 마침 잘 됐어, 얘. 너 내일부터 며칠 시간 있니?"
"예? 저야 가게에 매인 몸이니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만."
"저기, 그럼 여행이나 같이 갈래? 멀리는 아니고 타이 국내 여행."

점심때 팡룽을 만나러 나갔으니 저녁 무렵에야 돌아올 거라 예상했던 그녀의 귀가가 빠른 것도 의외였거니와, 난데없는 권유도 의아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려는지 손짓해서 저우룬칭도 앉힌 그녀가 자신도 바로 옆 의자를 빼서 앉았다.

"단둘이 가자는 건 아니고, 팡 사장도 동행할 거야. 이제까지 여행 가자는 걸 계속 거절했는데 이번만큼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지 뭐니."
"며칠 걸리는 여행인데요?"
"4박 5일."

5일간의 여행이야 크게 문제없지만 팡룽과 동행이라는 점이 아주 많이 마음에 걸렸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저우룬칭은 머쓱하게 반문했다.

"전 상관없지만 제가 같이 가면 팡 대인이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엄청 질색할 텐데요."
"그 인간이 칠색 팔색을 하든 내 알 바는 아니고."

홍위롄이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고는 핸드백에서 버지니아 슬림 한 갑을 꺼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 정조의 가이드가 되어줘."
"……팡 대인이 단둘이 여행 가면 누님을 겁간이라도 하겠답니까?"
"아니, 그렇게 노골적인 건 아닌데……."

뺨을 희미하게 물들인 그녀가 슬며시 눈을 내리떴다.

"이제까지는 잘 버텼지만 여행까지 갔는데 너라도 없으면 내가 그 인간의 유혹을 못 이기고 침대까지 직행할 것 같단 말이야."

저우룬칭의 어깨가 흠칫했다.

"3년 동안, 어, 그러니까, 두 분이 설마 한 번도……."
"맞아. 안 잤어. 안 잤다구. 3년 동안 한 번도."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여 더듬거리는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소리를 크게 높인 홍위롄이 화끈거리는 양 뺨을 감쌌다.

팡룽은 홍위롄이 차오쑹윈의 정부가 되기 전에 연인 비슷한 관계에 있었고, 동거 비슷한 관계이기도 했었다. 당시에 두 사람이 결혼하기 직전의 행보까지 밟았다는 걸 아는 저우룬칭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뭉게구름처럼 샘솟았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친밀한 사이어도 예전과는 다르게 왜 지금은 섹스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아이참."

계면쩍음을 숨기려는 것처럼 홍위롄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웠다.

"옛날에 팡 사장과 대판 싸우고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적이 있었잖니. 그때 싸운 원인이 기억나지? 저 빌어먹을 인간이, 나밖에 없다는 둥 너만을 사랑한다는 둥 귀에 설탕을 처바르더니 밖에서는 대뜸 다른 여자에게 애를 낳게 한 거."

무어라 섣부른 말을 하기에도 저어되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닮은꼴처럼 성격이 강했던 홍위롄과 팡룽의 다툼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그 싸움은 굉장히 컸었기에 저우룬칭도 기억하고 있었다.

"애 낳은 년이 일하는 가게까지 찾아와서 난장판을 벌여 놨던 건 지금도 치가 떨린다니까."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홍위롄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문득, 저우룬칭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칭."
"네, 네?"
"넌 애인에게 잘못한 게 있으면 미적거리지 말고 사과하도록 해. 당한 사람은 쉽게 못 잊어. 팡룽 그 인간은 말이야, 지금도 꿀 바른 혀로 온갖 헛소리를 지껄이면서도 그때 일을 아직도 사과하지 않았어!! 그렇게 날 배신해 놓고, 뭐? 결혼을 하자고? 뻔뻔한 새끼가! 어림도 없지!!"

앞에 팡룽이 있었다면 그녀의 펄펄 뛰는 기세만으로도 화살꽂이가 되었을 것이다. 저우룬칭은 조심스럽게 말을 찔렀다.

"……팡 대인 성격으로 봐서는 까맣게 잊고 있을 게 뻔한데요."

가차없는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나와는 영원히 쫑 나는 거야, 영.원.히."

저우룬칭은 홍위롄이 철벽을 치고 있는 원인도 모르고 안달복달하고 있을 팡룽에게 짧은 애도를 하며, 여행 계획에 동의했다. 홍위롄은 즉시 팡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룽? 나예요. 내일 가기로 한 여행, 좌석 하나씩 더 끊어 놔요. 룬칭도 동행할 테니까 …… 아, 시끄러우니까 소리 지르지 마요! 당신도 보디가드를 데려가는데 나는 왜 못 데리고 간다는 건데요? …… 뭐어? 내가 어디 그늘에 있었는지 까먹었어요? 적련방 놈들을 어떻게 믿어?!"

휴대폰 너머로도 팡룽의 성난 음성이 꽂혔고, 홍위롄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저우룬칭은 슬쩍 자리를 피해 주방으로 들어가 차를 끓였다. 일부러 느적느적 굼뜨게 차를 끓이고 홍위롄의 몫까지 가지고 나왔을 무렵에야 통화는 일단락되었다.

"흥. 알았으니까 아무튼 내일 봐요. 룬칭이랑 같이 나갈 테니까. 이만 끊어요."

삿대질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목이 아프리만큼 싸워 최우선 목적을 관철한 홍위롄은 상쾌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저우룬칭은 차를 끓이다가 떠오른 궁금증을 그녀에게 물었다.

"롄 누님. 제가 가는 건 좋지만 그사이에 가게 일은 어쩝니까? 아궈가 혼자 하기에는 어려울 텐데요."
"어머. 그 생각을 못 했네. 정 뭣하면 쉬어도 되긴 하지만……."

깔깔해진 목 안쪽을 따뜻한 찻물로 적시며 눈을 굴리던 홍위롄은 이내 득의만면하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룬칭이 자리를 비울 동안 주방에 설 요리사 하나 보내 줘요."

이번의 통화는 길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듯한 팡룽에게서 손쉽게 원하는 것을 따낸 그녀는 빙긋거렸다.

"취천원의 보조 요리사를 보내준대. 차 마시고 여행 준비 겸 쇼핑이나 하러 갈까? 너 여기 올 때 카메라도 안 가져 왔지? 이번 여행은 나 때문에 끌려가는 거니까 디카 하나 사 줄게."

저우룬칭은 그다지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홍위롄은 디지털카메라부터 시작하여 선크림, 여행용 가방, 충전기, 모자, 가이드북 등등 소소한 물품까지 하나씩 꼽았다. 옷가지만 넣은 슈트케이스 하나를 들고 야이쑤코에 도착하였던 그에게는 온통 부족한 것 투성이였다.

그녀의 손에 반쯤 끌려가다시피 하여 휴식 시간을 전부 투자하고 쇼핑을 끝낸 저우룬칭은 쇼핑한 물품을 정리하며 옐리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일 같이 찾아오던 놈이니 헛걸음하지 않게 여행 간다는 언급은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저녁 시간에 일하는 짬짬이 통화를 시도했으나 여전히 전화는 먹통이었다.

다음 날 홍가에서 출발하기 전의 새벽에 건 마지막 전화도 역시, 연결되지 않았다.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4박 5일의 타이 북부 여행 내내 팡룽에게 씹어 먹힐 듯한 눈초리를 받긴 했으나, 일단 여행은 그럭저럭 무탈하게 끝났다. 사고도 없었고, 다른 조직이 노리지도 않았고, 홍위롄도 팡룽과 배드인하지 않겠다는 당초의 목적을 이행했으니 팡룽을 제외한 두 사람에게는 무탈한 여행이었다.

시장에서 샀던 타이 실크에 흥미를 느낀 저우룬칭은 남부 지방과는 다르게 천연의 색감을 유지하여 거칠게 직조한 북부 지방의 실크를 몇 필 더 샀고, 요리법도 서너 가지 메모했으며, 디지털카메라의 메모리도 사진으로 가득 채웠다.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던 여행이었으나, 결국 마지막 날에 팡룽의 눈 밖에 단단히 나 버린 저우룬칭의 앞길을 삐걱거리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발단은 치앙마이 공항에서 뜨랏으로 가는 국내선을 기다리던 무렵이었다.

"저우 선생. 이리 와 보지?"

팡룽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호명될 때에는 경칭이 아니라 비칭처럼 들리곤 한다. 휴대폰을 붙들고 수다 중인 홍위롄을 애매한 표정으로 흘끔 본 저우룬칭은 다가갔다. 팡룽이 자신보다 15cm 이상 더 큰 그의 어깨에 친근한 척 팔을 걸며 아래로 가까이 당겼다. 팡룽의 보디가드들까지 떨어트리자, 벽을 마주 보고 선 이마가 엇비슷하게 맞닿아 본격적인 밀담을 나누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제 와서 팡룽이 갑작스럽게 친한 척할 이유 따위는 없다. 살짝 긴장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저우룬칭을 팡룽이 더 가까이 당겼다. 이젠 호흡마저 얽혔다. 저우룬칭은 굽힌 허리를 조금 뒤로 뺐다.

"지난번에 내가 홍가에서 했던 말 기억나지 않나?"
"음, 글쎄요……."
"빨리 정착하라고 했던 충고 말일세."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말도 했던가 싶어서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는데 팡룽이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자네에게 배우자가 있었으면 이렇게 우리 둘의 밀월여행에 끼어들어 방해할 수 있었겠나? 이게 전부 자네가 홀몸이라서 그런 게 아닌가."

밀월여행이라고 여기는 건 팡룽 혼자뿐인 것 같았지만 그 말을 했다가는 성질을 더 긁을 게 뻔했으므로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야이쑤코에 정착한 이후로 여자를 사거나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사지 멀쩡하고 신체 건장한 남자가 홀아비처럼 지내서야 쓰나. 자네 의향만 있다면 내가 참한 아가씨를 소개해 주지. 자네는 손 씻었으니 원한다면 흑사회와 연관이 없는 양갓집 규수라도 찾아주겠어."
"아니, 저는 그다지 여자 생각이,"
"당장 수소문하는 건 어렵겠지만 아침에 야이쑤코에 연락해서 가게에서 지명도 톱인 여자를 대기시켜 놓았으니까, 오늘은 그녀를 만나 봐. 오랜만에 여자를 안는 육욕을 깨우쳐 줄 테니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여자가 필요한 건 아니,"
"내 호의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

저우룬칭이 무어라 거절하든 말허리를 죄다 끊어먹으며 자신의 용건만을 내세운 팡룽이 눈을 부라렸다. 저우룬칭은 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팡룽은 차이나타운의 지배자다. 그러잖아도 좁은 야이쑤코와 더 좁은 야이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차후의 일이 곤란해질 것임은 자명한바.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마땅한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권유를 빙자한 강압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저 같은 놈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팡 대인."

팡룽이 그제야 흡족한 빛으로 허리를 폈다. 그리고 가볍게 저우룬칭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밑의 사람들을 내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나? 교제하길 원하는 이상형의 여성은 천천히 고민해서 알려주게."
"네. 감사합니다……."

한숨을 삼키며 어물쩍 멀어지는 저우룬칭에게 통화를 끝낸 홍위롄이 "어머, 날 빼고 둘이 뭐 얘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속닥거리는 거예요?"라며 다가왔다. 이윽고 비행기 탑승 시각이 되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뜨랏의 항구에는 적련방 소유의 보트가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도록 홍위롄에게 속살거리던 팡룽은 피곤하니 집에 일찍 가서 쉬겠다는 그녀에게서 기어이 데이트 약속을 얻어냈다. 홍위롄이 팡룽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점은 곧, 저우룬칭이 혼자 남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홍위롄을 핑계 삼아 오늘의 원치 않은 만남을 회피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하였던 저우룬칭은 "저녁 시간 빼두었으니 잊지 말고 찾아가게."라는 팡룽의 조용한 윽박지름에 단념했다.

홍가에 우선 도착했을 때는 저녁 시간과 맞물려 하루 중 제일 번다할 무렵이었으므로 장쯔궈와 쌍둥이 형제에게 제대로 인사하거나 여행 선물을 줄 겨를이 없었다. 세탁소에 맡길 옷가지를 분류하는 것으로 대충 짐을 정리한 저우룬칭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기분으로 터덜터덜 버스를 탔다.

토파즈는 팡룽이 사장인 술집이다. 야이쑤코에 정착한 이후 동선이 홍가와 시장과 차이나타운뿐이었던 저우룬칭은 중국과 러시아와 멕시코를 비롯한 각국 도시 환락가의 일부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거리에 이방인처럼 섰다. 야이쑤코 제일의 번화가인 집창촌만큼은 아니지만 관광객으로 보이는 행인과 일부의 마피아가 거리에 산재했다.

한자와 영어로 적혀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술집 간판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지만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어서 오십쇼! 지명하실 아가씨는 있으십니까?"

문을 열자마자 홀에서 누군가가 一 아마 호스티스 중 한 명일 테지만 一 부르는 노랫소리가 먼저 그를 맞았고, 이어 웨이터가 깍듯이 인사하며 접객했다. 개점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각인지라 빈 테이블이 많았고, 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호스티스들은 대기석에 앉아 재잘재잘 수다 중이었다. 홍콩 번화가의 클럽처럼 호화찬란하지는 않았지만 말마따나 동남아 촌구석의 클럽치고는 퍽 화려한 내장이었다. 홀 중앙에는 은은한 불빛을 반사하는 작은 수반도 있었다.

저우룬칭은 불과 두어 달 전만 하여도 자신과 근접하였던 세계를 낯선 눈으로 휘둘러보고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뗐다.

"팡 대인의 소개로 왔다만……."
"아! 저우 선생이십니까? 미처 알아 뵙지 못하여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웨이터는 그를 2층의 VIP룸으로 안내했다. 팡룽이 다른 부분까지 언질해 두었는지 그가 따로 주문하지 않았음에도 로얄 샬루트와 안주가 들어왔다.

호스티스들은 손님이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하며 기대감이 최고조로 치솟았을 시간을 가늠하며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샤오린입니다."
"슈슈예요."

클럽에서 본명을 사용할 리는 없을 테지만, 일단 슬릿이 깊이 파여 허벅지와 엉덩이가 은근히 드러나는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샤오린이라 이름을 밝힌 여자가 팡룽이 말한 넘버원인 것 같았다. 샤오린이 저우룬칭의 왼편에 바짝 밀착하여 앉고, 슈슈가 오른편에 그의 손을 방해하지 않을 거리에 앉았다.

"팡 대안께 잘 모시라는 당부를 받았어요. 마음 놓으시고 폭 노시다 가세요."

슈슈가 술을 따르는 사이에 샤오린이 눈웃음치며 은근히 속삭였다. 스물 초반쯤 되었을까. 이유 없이 넘버원이라는 명성을 얻은 건 아닌지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와 가느다란 웃음마저 교태가 뚝뚝 흘렀지만 저우룬칭은 난감하기만 했다.

얼음을 띄운 로얄 샬루트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켠 그는 탕 소리 나게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입장도 곤란해. 여자를 만나서 즐길 기분이 아니거든. 팡 대인이 뭐라고 하셨나?"

그녀에게 전혀 흔들리지 않는 저우룬칭의 무뚝뚝한 말에 샤오린은 새침하게 입술을 모았다. 삐친 듯한 반응도 치밀하게 계산한 교태이리라.

"클럽은 물론이거니와 밖에서 2차까지 모시라고 하셨어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다면 다른 아이를 들여보내도록 할게요."

저우룬칭은 얼굴을 쓸었다.

"얼굴 보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술도 마셨으니 이만 돌아가면 안 될까?"
"정 내키지 않으시면 저희가 강요할 수 없지만, 팡 대인이 직접 당부하신 귀빈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면 진노하실 텐데……. 걱정이네요."

처연하게 말꼬리를 흐렸지만 깃든 속내야 뻔했다. 명령하는 대로 행하는 입장일 뿐 인 그녀와 길게 실랑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바로 나가지. 근방에 모텔 있던가?"
"어머. 벌써 2차 가시게요?"

다른 손님이었다면 수입과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값비싼 양주며 안주를 주문하게끔 교묘하게 졸랐을 테지만 팡룽이 지목한 손님이기 때문인지 샤오린은 채근하지 않았다.

"클럽과 연계된 호텔로 가시겠어요? 택시를 타면 10분도 걸리지 않아요."

술집과 호텔이 제한된 야이쑤코에서는 클럽의 호스티스들이 2차를 뛰는 호텔이 연계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저우룬칭은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호텔도 보나마나 팡룽의 소유일 텐데 만에 하나 그곳에서 홍위롄까지 마주치기라도 했다가는 곤란하다.

"허름하더라도 조직과 엮이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은데. 음, 끄이람 스트리트라고 했던가? 그 근방에는 모텔이 없나?"

거리의 창녀들이 손님을 실내로 끌어들일 때 사용하는 모텔로 가자는 소리에 샤오린은 아미를 찌푸렸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물론 있죠. 슈슈도 같이 갈까요?"
"…거기까지는 해 본 적이 없다."

쓰리썸 제안을 물리자 샤오린이 쿡쿡 웃었다.

"다음번에는 팡 대인의 말씀이 없더라도 꼭 들러주세요. 절 지명해 주신다면 금방 모시러 올 테니까요."

그럴 리는 절대 없을 테지만 알겠다는 대답은 해 주었다.

더 마시지 않고 벌써 나가시느냐는 웨이터의 인사를 뒤로하며 거리로 나왔다. 풍만한 젖가슴을 팔뚝에 문지르듯이 밀착하여 팔짱을 낀 그녀가 장난스레 속닥거렸다.

"가슴에 메스 안 댔어요. 순수 자연산이죠. 이따 만져보시면 바로 아실 거예요."
"하하……."

할 말이 없었기에 저우룬칭은 그냥 힘없이 웃었다. 일전에 추 노인의 손녀를 만났을 때 교류를 고려하기도 했었고, 그도 남자이니만큼 코끝에 부드럽게 감도는 여자의 향수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팡룽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여 여자를 만나 보았자 흥이 날 리가 만무했다.

택시를 타니 끄이람 스트리트까지는 금방이었다. 거리 중심부에서 떨어진 외곽의 모텔에서 졸고 있는 타이 현지인 주인을 깨워 열쇠를 받고는 3층으로 올라왔다.

"샤워는 먼저 하시겠어요?"

저우룬칭은 우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목을 축였다. 그리고 여직 일의 연장선에 있는 그녀에게 여기까지 온 목적을 전했다.

"얼추 시간은 보냈으니 너만 입을 맞춰준다면 굳이 2차까지 가지 않아도 팡 대인께 말씀 드릴 수 있지 않겠나?"

모텔까지 들어와 놓고 없던 일로 하자는 그의 말에 샤오린이 "흐응."하며 그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가슴을 톡 밀어 침대로 넘어뜨렸다. 그녀의 체중이 함께 실린 침대가 삐걱거렸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팡 대인이 아니어도 꼭 잦아와 주셨으면 한다고."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린 손가락이 턱과 목을 지나 얇은 옷 아래로 느껴지는 흉근을 더듬었다. 애매하게 넘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보다 단호하게 거절하기 위해 막 입술을 뗐을 때였다. 문이 사납게 쾅 열리고,

"야! 루이一!!"

평소의 경박함이 싹 사라진 옐리세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샤오린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 미친 새끼야! 너 뭐야?!!"

앙칼진 외침이 비명의 뒤를 이었지만, 옐리세이는 머리채를 휘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던 것처럼 이번에도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가랑이를 찢어버리기 전에 꺼져! 허벌창년이 누구 앞에서 더러운 가랑이를 벌리는 거야!"

샤오린은 뭘 하고 있느냐는 듯 저우룬칭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샤오린이 내팽개쳐진 것보다 옐리세이가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사실에 더 놀라서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중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밤거리에서 닳은 그녀다. 이 낯선 백인의 행패가 저우룬칭과 관련이 있는 듯하자 그녀는 길게 실랑이하지 않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핸 백을 주워든 샤오린은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와 피범벅인 입술을 닦을 여유도 없이 다급한 걸음으로 방을 떠났다.

문이 탕 닫히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수습한 저우룬칭이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네가 여기에는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알고?"
"닥쳐!!"

저우룬칭으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옐리세이에게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어쭙잖은 회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열이 바짝 오른 머리에 노기가 치밀었다. 더는 상황을 살필 이유도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저우룬칭은 어리둥절한 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팡룽이 고른 여자와 억지로 동침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 점은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만,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되도록 노발대발하고 있는 옐리세이에게 쉬이 말을 붙이기도 저어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화가 난 원인이 자신인 것 같아 기색을 살피고만 있는데, 옐리세이가 이를 꽉 악무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왔다.

"엇……!"

묵직하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주먹을 반사적으로 턱 받으며 움켜잡았다. 손바닥 안에 꽉 쥐인 주먹이 파르르 경련했다. 이건 설마 맞아주어야 했던 주먹인가, 하고 오랜 세월 몸에 익힌 싸움꾼의 본능으로 일단 주먹부터 봉쇄한 저우룬칭은 고민했지만 그가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왼손이 날아왔다.

붕대가 감겨 있는 왼손이었다. 아직 주먹질을 하면 안 될 텐데. 내심 중얼거린 저우룬칭은 주먹에 맞거나 아까처럼 봉쇄하는 대신에, 움켜잡고 있던 그의 오른손을 세게 잡아당기며 발로는 다리를 걷어차 균형을 무너트렸다. 주먹질하느라 동작이 커졌던 옐리세이가 휘청거리는 사이에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며 몸을 반전시켰다. 침대 위로 등부터 떨어지는 옐리세이의 몸을 받은 싸구려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또 주먹질을 할까 싶어 그의 오른팔을 붙잡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화를 내냐?"
"……왜 화를 내냐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따라 하며 곱씹은 옐리세이의 잇새가 빠드득 맞물렸다.

"씨이발! 정말 몰라서 묻냐!? 뻔뻔한 새끼!!!"

차분히 대화로 풀어가고 싶었는데 말이 안 통했다. 말 대신 날아온 건 발길질이었다. 대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저우룬칭은 일단 손을 놓으며 몸을 뒤로 젖혀 피했다.

"C y к и н  с ю н !! Ж р и  г о в н о и  с п о х н и!!"

러시아어라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보나마나 욕일 것이다. 대화가 통하더라도 이 말의 뜻은 굳이 묻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꺾었다. 살벌한 소리를 내며 주먹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주먹질을 해도, 발길질을 해도, 저우룬칭이 한 대도 맞지 않고 요리조리 피하기만 하자 더더욱 분이 치민 옐리세이가 테이블을 거의 걷어차듯이 세게 밀었다. 맞서지 않고 피하다 보니 벽까지 몰린 저우룬칭은 테이블 가장자리를 오른발로 받아내며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났다. 등이 벽에 턱 부딪혔다. 동시에 옐리세이가 의자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저우룬칭도 조금 위험했다. 주저앉듯이 몸을 아래로 꺼트린 그의 머리 위로 벽에 강타당하여 파편이 된 나뭇조각들이 두두둑 떨어졌다. 그 파편들을 감지하기도 전에 체중을 실어 테이블을 어깨로 밀쳐냈다.

"큭!"

테이블에 밀린 옐리세이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것 같아 뇌진탕이 염려되었으나 다행히도 옐리세이는 일어나려고 악을 썼다. 물론 함께 나동그라진 테이블이 가슴 위에 거꾸로 눕고, 그 테이블을 저우룬칭이 체중으로 억누르고 있으니 일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겨우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 이유를 모르겠는데. 싸우는 건 좋은데 설명은 해 줘야지."

저우룬칭 딴에는 침착하게 대화로 풀어가려 한 시도였으나 당연히 역효과였다.

"Б п Я д ь ! И Д и т ы  н а  ф иг! И Д и  к  Ч е Р т у!!"
"영어로 해. 영어로."
"비켜!!!"
"비키면 때릴 거잖냐."

다시금 현란한 욕설이 쏟아졌으나 러시아어였기에 저우룬칭에게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가슴이 압박 받는 상태에서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외치고 있으니 꽤 숨이 가쁠 텐데,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옐리세이가 콜록거리며 욕설을 멈추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벌써 다섯 번쯤은 찢어발겨졌을 사나운 시선으로 저우룬칭을 노려보며 숨을 몰아쉬더니, 쩌렁쩌렁하게 일갈했다.

"아가리 닥쳐 ! 날 속인 것도 모자라서 내 앞에서 여자와 씹질 하려 한 주제에 무슨 개소리야!! 썅. 아까 그 걸레년을 쳐 죽였어야 하는 건데!"
"으음……."

저우룬칭은 잠시 눈까지 감으며 상황을 되짚었다.

옐리세이가 화를 냈다. 화를 낸 원인은 여자와 섹스하기 직전의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간단했다. 그 여자와 진짜 섹스하려 한 건 아니었다는 설명을 해 봤자 이렇게 눈이 뒤집힌 상황에서는 믿지 않을 것이다.

대신 저우룬칭은 근본적인 의문을 되물었다.

"내가 여자랑 모텔에 들어온 게 뭐 어때서?"

저우룬칭도 명쾌한 대답을 돌려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고, 옐리세이도 그 기대에 부응하며 욕설로 되돌려주었다.

묻기는 하였으나,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렇게 한 번만 자자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여자랑 침대에 있는 걸 보면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자신과 옐리세이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근본적인 오류만 제한다면.

‘너랑 나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화를 내냐.’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꿀꺽 되삼켰다. 그 말을 뱉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환했다. 좁은 모텔 방에서 뿔난 멧돼지와 마주하기는 싫었다.

"난감하네……."

비키라고 악을 쓰는 몸부림을 못 본척하며 두 번째로 눈을 감았다.

대화는 시도했지만 대화가 안 통하는 상대이다. 제정신일 때도 논리적인 반박이 잘 통하지 않는 놈인데 노염으로 이성이 끊어진 지금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깔아뭉개고 있으면 어쨌거나 놈도 사람이니 지쳐서 조용해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조용해진다는 게 이성을 되찾아 화가 풀리게 된다는 것과 동의어는 결코 아니었다.

‘하염없이 깔아뭉개고 있을 수도 없고.’

저우룬칭은 옐리세이를 힐긋 곁눈질했다. 제 분을 못 이기고 시뻘겋게 격앙되어 일그러진 얼굴로 씨근덕거리고는 있지만 그가 만나왔던 그 어떤 남자들보다 훤칠하다.

‘잘생기긴 했지…….’

자신이 게이였다면 적어도 외모만큼은 합격점을 주었을 것이다.

놈을 두들겨 패서 기절시키는 것도 어렵지는 않겠지만 단순한 미봉책밖에 되지 않는다. 정신을 되찾으면 홍가까지 찾아와서 패악을 떨 게 뻔했다. 지금에야 이성이 한 톨만큼이라도 남아 있는지 총을 꺼내 들지 않았지만 놈이 총을 손에 쥐게 된다면 분명히 사상자가 나온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타개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100%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충 지금 상황을 모면할 정도는 될 방법. 저우룬칭은 짜증 섞인 한탄을 가늘게 흘렸다.

"망할. 팡룽 좋은 짓만 하는군."

홍위롄에게서 떨어트리기 위해 호스티스까지 떠넘긴 팡룽이 쾌재를 부르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테이블을 끄응차 치웠다. 테이블에 깔려서 헉헉거리던 옐리세이가 테이블을 치우자마자 주먹을 쥐었지만 가뿐히 피한 저우룬칭은 그의 멱살을 잡고 키스 했다.





호흡이 멈추었다.

패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살벌하게 헉헉거렸던 때가 거짓말처럼 호흡이 멎었다. 뿌리치지도 않고 호응하지도 않고, 굳은 듯 무시하는 듯 가만히 있는 녀석의 입술을 탐색처럼 핥으면서 혀를 밀어 넣었다. 가늘게 열린 잇새로 들어간 혀가 멈추어 있는 호흡을 얽자 어깨가 흠칫 흔들리고, 옐리세이의 미간이 모였다.

저우룬칭은 고개를 틀며 입술을 뗐다. 그의 혀를 꽉 깨문 엘리세이가 떨어지는 저우룬칭의 뺨을 당겨 안으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제기랄. 이딴 걸로 무마하려는 수작을 누가 모를 줄 알고?! 하지만 널 따먹는 게 급하니 일단은 넘어가 준다!!"

과연. 그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었던 듯하다.

옐리세이의 지성을 폄하하였던 저우룬칭이 반성하는 사이에 그가 입술과 혀를 집어 삼킬 듯이 탐욕스럽게 키스했다. 크고 단단한 손이 등허리를 더듬으며 엉덩이께에 이르렀다고 느낀 순간, 몸이 빙글 반회전하며 등이 바닥에 닿았다. 저우룬칭은 눈매를 찌푸렸다. 이 녀석이 일단 화를 뒤로 넘기고 눈앞의 성욕에 집중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깔리는 건 절대 안 될 일이다. 절대. 저얼대.

키스하며, 몸을 옆으로 굴렸다. 옐리세이가 바닥에 깔렸다.

"씹."

타액과 살덩이가 질척거리는 두 입술 사이로 욕설이 씹혔다. 저우룬칭의 몸이 뒤집혔다. 옐리세이가 올라탔다. 저우룬칭은 한 번 더 몸을 뒤집었고, 옐리세이도 질세라 몸을 뒤집었다. 저우룬칭이 또 한 번 더 뒤집자, 옐리세이도 뒤집었다.

"……."

뒤집으려고 했지만 머리가 침대 다리에 닿았다. 뒤집을 공간이 없다. 허리 위에 올라탄 옐리세이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처녀니까 좀 아플 거야. 하지만 오빠만 믿어. 금방 뿅 가게 해 준다니까?"
"필요 없어."

저우룬칭이 한숨을 쉬거나 말거나 의기양양해진 옐리세이는 다소 조급한 손길로 넥타이를 풀고 재킷을 벗었다. 자신의 셔츠를 벗기려는 그의 손길에 건성으로 호응하여 윗옷을 벗으면서 천장으로 눈을 굴렸다. 햇볕에 바래고 지저분한 천장의 구조와 벽지의 무늬에 심도 있는 흥미가 생긴 건 물론 아니었다. 옐리세이의 시선을 피하며 몇 가지의 상황을 가정한 저우룬칭은 어떤 최악의 상황이 되든 옐리세이에게 깔려서 ‘따먹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옐리세이."

이제 발기한 성기를 엉덩이 사이에 쑤셔 넣기만 하면 되는 염원의 성취가 코앞까지 다다른 옐리세이는 신나고 즐겁고 흥분된 얼굴로 "으응?"하며 섹시하게 웃어주었고, 저우룬칭은 완전히 방심한 그의 명치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컥!!"
"미안. 한 대만 더 맞아라."

명치를 연이어 가격당한 옐리세이가 꺽꺽 숨을 토하며 고통스럽게 몸을 꺾었다. 호흡이 치받혀 기침도 제대로 못 하며 끅끅거리는 그를 쓰러트린 저우룬칭은 고통에서 회복되기 전에 서둘러 벗어 던진 넥타이로 양손을 결박했다.

후려 패고 묶어 놓기까지 하였으니 얼굴을 보고 하는 건 양심에 켕겨서 등을 돌려 엎드리게 했다. 옐리세이가 겨우 말이나마 할 수 있게 된 건 침대 다리와 연결되어 결박된 손이 머리 위에 뻣뻣하게 고정되었을 때였다. 저우룬칭은 그사이에 콘돔과 러브젤까지 찾아서 올 수 있었다.

"이, 개새…… ! 큭, 풀지, 콜록……. 못하냐?!!"
"금방 끝내고 풀어 줄게."

약만 올리는 성의 없는 소리를 읊조리며 옐리세이의 바지를 벗겼다. 벨트가 철걱거리며 풀리고 허벅지에 서늘한 공기가 닿자 그때까지 힘겹게 쿨럭거리던 옐리세이는 기겁을 했다.

"씨발! 지금 풀면 너! 한 대만 패는 걸로 용서해 줄 테니까!! 야이쌍년아!! 죽고 싶냐!! 죽일 거야!!"

욕설뿐만이 아니라 몸부림까지 쳤으나, 넥타이는 옐리세이 못지않은 폭력의 전문가인 저우룬칭이 꼼꼼하게 묶었고, 침대 다리도 튼튼했다.

‘강간하는 것 같아서 기분 진짜 이상하네.’

버둥거리는 옐리세이의 양다리를 무릎으로 억누르며 엉덩이골 사이로 러브젤을 주욱 짜내다, 정정했다. 강간이 맞았다.

썰어 죽이겠다는 둥 내장을 파버리겠다는 둥 갖은 욕설을 퍼부어대던 옐리세이는 콘돔을 씌운 손가락이 엉덩이에 처발린 러브젤을 문지르자 파드득 경련했다.

"야, 잠깐만, 잠깐만! 나 뒤로 했던 건 몇 년이나 지나서 진짜 안 돼!! 처음 했을 때도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단 말이야!! 다른 건 다 해 줄 테니까 뒤로만 하지 마! 제발!!"

체면 불고하고 애원하기 시작했으나 저우룬칭은 강간범답게 "걱정 마. 안 아프게 재개통해 줄 테니까."라는 말로 옐리세이의 혈압만 더 돋우며 손가락을 깊숙이 움직였다.

"흐으……!"

꽉 다물린 입구를 비집어 열자 요동치던 등줄기가 뻣뻣하게 긴장되었다. 파르르 떨리는 등을 못 본 척하며 검지와 중지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한동안 하지 않았다는 말처럼 그의 안은 격렬하게 경직되어 이물질을 거부했다.

"너…… 끝나기만 하면, 죽인다!"

억눌린 숨을 몰아쉬며 옐리세이가 악을 썼다. 그 살벌한 기세에 직통으로 내리꽂혀,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아예 시작 하지 않은 것만 못하리란 생각도 들었다.

요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기세 싸움이다. 자존심 싸움이라는 옐리세이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저우룬칭은 입구 부근을 넓히던 손가락을 단번에 마디 끝까지 푹 찔렀다. "아윽!" 욕을 뱉던 옐리세이가 갑자기 입을 앙다물었다. 속으로 자신을 죽일 계획을 짜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선 조용해지긴 했다.

쌕쌕 가파르게 올라오는 숨소리를 흘려 넘기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깊숙이 삽입된 검지와 중지가 내벽을 문지르며 넓혀갔다. 손가락 마디를 굽혀 손끝으로 내벽을 툭툭 건드리며 비벼도, 등을 움찔거리기만 하는 옐리세이에게서는 그 이상의 격한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섹스가 끝나자마자 죽일 작정일지도. 저우룬칭은 아까 테이블에 깔리던 와중에 저만치 굴러간 옐리세이의 M29를 흘금 보았다. 저 총에 맞으면 단순히 아프다는 선에서는 끝나지 않을 텐데.

상념을 좆는 와중에도 착실히 손가락을 움직이다 이만하면 되었겠지 싶어 손가락을 빼냈다. 새 콘돔을 뜯고 성기를 문지르며 씌우려던 저우룬칭은 멈칫했다. 그게, 그러니까. 저것은.

"옐리세이. 너……,"
"뭐!!! 당장 풀어줄 거 아니면 닥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자존심을 고려하여 ‘너 섰냐.’ 라는 말을 꼴깍 되삼켰다. 어쩐지 도중부터 입을 열지 않더라니. 손가락을 막 넣을 때까지만 하여도 풀이 죽어 있던 성기가 딱딱해져 있었다.

삽입할 때 아플 테니 성기라도 애무하여 긴장을 완화해 주려 했지만 진짜 구슬이 박혀 있는 걸 보니 만질 마음이 싹 사라져 엉덩이만 옆으로 벌렸다.

"아, 아앗……!"

러브젤이 물컹하게 고여 흘러내리는 항문을 비집어 열며 천천히 삽입했다. 넥타이에 묶인 옐리세이의 손등에 힘줄이 곤두섰다. 충분히 애무를 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빡빡했다. 뜨거운 살벽이 척척 달라붙었다. 저우룬칭은 몇 번 숨을 되삼키며 옐리세이의 허리를 안았다. 셔츠의 단추를 풀고 꼿꼿하게 곤두선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머리칼이 달라붙은 뒷덜미에서는 짭짜름한 땀이 핥아졌다. 여기에서 힘 빼라 운운하는 말을 가는 대번에 욕설이 따라붙을 것이다.

이곳저곳을 애무하였지만 긴장된 내벽은 도무지 침입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우룬칭은 제일 만지기 싫었던 부분을 손으로 쥘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안 둘……!! 으, 으읏……."

뒤로 박히면서 흥분된 증거가 손안에 쥐이자 옐리세이는 펄쩍 뛰었지만 쾌감도 분명히 있었다. 말허리에 여직 참았던 신음이 섞이고 경직된 허리가 녹진녹진 녹아들었다.

저우룬칭은 "조금만 침아라."고 귓가에 속삭이고는, 허리를 세게 쳤다.

"흐악一! 루이, 너, 씹! 아프단, 말…… 하윽!"

욕설도 비명도 온전한 형태를 이루지 못한 외마디가 거칠게 내뱉어졌다. 그리고 이내, 잇새에서 꽉꽉 눌린 신음이 되었다. 큰 신음을 내지 않으려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옐리세이의 뒷목으로 연방 땀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뒷목을 훑자 내벽이 호응하듯 꿈틀거렸다. 이런 걸 보고, 그래, 입과는 달리 몸은 솔직하다고 하던가.

솔직하고, 민감한 옐리세이의 몸은 본능적인 욕정에 지배당하는 듯, 그를 빨아 당겨 씹어 삼키기라도 할 듯, 성기를 압착하며 흔들었다. 무턱대고 적당히 쑤시기만 하던 단단한 음경이 그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모양이다. 일순, 더 이상 조이지 않으리라 여겼던 내벽이 격하게 꿈틀거리며 죄어들었고 옐리세이의 입에서는 "아훗, 응!" 하는 명백한 교성이 터졌다. 옐리세이가 퍼뜩 등을 긴장하며 이를 앙다물었지만 한 번 고삐가 끊어진 교성은 다물린 잇새에서 연신 물결치듯이 흘렀다.

"……아, 젠장. 미치겠네."

허리를 붙잡고 추삽질하던 저우룬칭은 낮은 신음에 욕설을 섞었다. 장신에다 육체도 잘 단련되어 있고, 본인이 전신전력으로 나는 탑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놈이라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시쳇말로 끝내줬다. 그가 가끔 겪었던 그 어떤 남자보다도, 아니 여자보다도 굉장했다. 남자에게 이런 표현이 걸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명기였다.

아프도록 죄였던 초반의 벽을 넘자 그의 구멍은 구멍이 아닌 하나의 성기처럼 오물거리며 잡아당겼다. 기분 좋은 압박감과 저릿저릿한 쾌감이 동시에 척추를 내달렸다. 당장 내 안에 모든 걸 토해 내라는 듯 사정없이 삼켜 왔다. 극렬히 거부하는 걸 억지로 범하는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 지금도 싫어하고 있다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중년 변태 같은 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우룬칭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정말 감도가 좋다……. 이런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8년이나 뒤로 안 했냐."
"З а т к н и с ь ! Д о л б о е б!!"

오늘 알아먹지도 못하는 러시아어 욕을 신나게 듣고 있었다. 성감대를 성기 끝으로 문질러 교성을 뱉어내게 하지 않았다면 욕설 퍼레이드를 들었을 것이다.

옐리세이가 작정하고 요분질을 하면 그가 언젠가 씨불였던 헛소리처럼 천국을 보고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며 허리짓에 박차를 가했다.

"우윽……!"

먼저 사성한 건 옐리세이였다. 성기를 쥐고 흔들던 손바닥이 뿌연 액체로 더러워지고, 이어 여느 때보다 성기를 사납게 죄며 안쪽 깊숙이 꾹꾹 삼키는 내벽의 압박감에 저우룬칭도 사정했다. 시정을 하고도 바로 성기를 빼내지 못하고 뭉근한 쾌감과 탈력감에 젖어있다, 천천히 몸을 뗐다. 발긋하니 부은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살덩이를 따라 러브젤이 진득하게 늘어졌다.

피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신음을 참고 있던 옐리세이는 성기가 완전히 빠져 나가고 난 후에야 긴 숨을 헐떡이면서 바닥에 늘어졌다.

옆에서 저우룬칭이 부스럭거리며 뒷정리를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동안늘어져 있던 옐리세이는 기력이 회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닥에 자신이 사정한 정액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걸 보고 열이 받아서 몸을 일으켰다.

"씨발새끼야! 넥타이 풀어!!"
"아, 맞다. 푸는 거 깜빡했네."

저우룬칭이 여전히 뻔뻔한 소리를 하며 가까이 왔다.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매듭이 잘 풀리지도 않아 그도 몇 분간 헤매야 했다. 겨우 해방된 손목에서 혈류가 한 바퀴 돌기도 전에 옐리세이는 주먹을 휘둘렀다. 방심하여 결박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꽉 쥔 주먹에 실린 힘은 묵직하고도 예리하게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저우룬칭은 상체를 젖혀 피했다. 얼마나 재빠른지 여태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분통이 터져 죽을 맛이었다.

"아아악!! 너도 씨발, 좆 달린 사내새끼라면 피하지만 말고 처맞으란 말이야!!"
"미안, 그만 반사적으로. 이번에는 안 피할 테니까 다시 때려라. 한 번 강간했으니까, 한 대."
"아가리 닥쳐!!"

사람의 염장을 아주 효과적으로 지르는 녀석의 말에 더 치솟은 울분을 담아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얄미우리만큼 잘만 피하던 놈의 얼굴에서 비로소 뻐억一!! 하는 둔탁하고도 신나는 타격음이 들렸다. 턱에 제대로 꽂혔다. 팔뚝까지 전해지는 묵직한 타격의 울림에 힘을 얻어 주먹을 한 번 더 올렸지만 저우룬칭의 손에 잡혔다. 머리까지 충격이 전해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도 손목을 틀어쥔 그가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한 대만 맞아준다니까."
"까고 있네!! 놔!!"

저우룬칭이 한숨을 쉬었다.

"좋아. 한 대만 더 때려라."

빠아악―! 손목이 풀리자마자 양손을 깍지 끼어 스매싱하듯이 날렸다. 저우룬칭의 몸이 사이드테이블에 쾅 부딪히며 나동그라졌다. 사이드 테이블도 뒤뚱거리다 요란하게 쓰러졌다. 당연히 두 대로 끝낼 생각이 없던 옐리세이는 저 멀리에서 뒹굴고 있는 M29를 주워 무기 삼아 두들겨 패려다, 허리가 아파서 주저앉았다.

"아오!! 저 개씹새끼를!!"

분노가 잠시 통증을 잊게 하긴 했지만 진짜 아팠다. 무지막지하게 아팠다. 14살 때의 첫 경험도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억지로 뻐근하게 열린 골반이 숨을 쉴 때마다 척추를 통증으로 진동시켰다. 도로 엎드려서 끙끙거리는 그의 옆으로 저우룬칭이 다가왔다.

"너 주먹 꽤 센데."

그의 주먹에 두 번이나 얼굴에 직격당하고도 멀쩡하게 걸어오는 놈의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만한 기력이 나지 않았다. 옐리세이는 한껏 분노를 끌어모아 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깨를 살짝 흠칫하기는 했으나 저우룬칭은 순순히 멱살을 잡혀주었다.

"날 깔았다는 거 떠벌리고 다녔다가는 죽인다!!! 네 부모가 찾아와도 못 알아볼 만큼 엉망으로 짓이겨서 죽여 버리고 말겠어!!!"
"얘기하고 다닐 리가."
"알았으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어딘지 미흡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저우룬칭은 군말 않고 그가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히 방을 나갔다. 놈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분통을 참지 못하여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욱신거리는 엉덩이의 열이 너무 뜨거웠다.





세면대 앞에 서서 얼굴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맞은 건 정확히 딱 두 대지만 밤새도록 시커멓게 부은 부위를 보니 작정하고 주먹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영 못 볼 꼴이 되었다. 어젯밤은 경황없이 귀가하느라 약국에 들르지 못했는데 오늘은 짬을 내서 연고라도 사야 할 것 같았다.

‘힘도 센 놈 같으니.’

세수할 때 손가락으로 잘못 건드려서 절로 나온 신음을 삼키며 수건으로 닦았다. 요조숙녀도 아니고 얼굴로 먹고사는 것도 아니니 붓고 터진들 무슨 상관이랴 싶으련만, 홍위롄이 보고 걱정하게 되는 게 문제다. 홍콩에 있을 때야 부상 따위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나, 이곳에서의 그는 흑사회 사람이 아니었다. 강간하고 처맞았다며 이실직고할 수는 없으니 적당한 핑계를 강구해야했다.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막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장쯔궈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뜸 나온 인사말이었다. 아침 인사치고는 참 부담스러운 것이라 저우룬칭은 멍든 턱을 면구하게 문질렀다.

"……티 많이 나냐?"
"밤에 술 취해서 전봇대와 싸우기라도 하신 것 같은데요."

걱정과 어이없음이 반반씩 섞인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홍위롄에게 댈 핑계는 하나 건진 것 같다.

"싸운 건 아니고 일방적으로 맞았지. 누님께는 비밀이다."
"네? 빚이라도 지셨어요?"

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그를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리뎬신의 눈도 휘둥그렇게 되었다.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는 안부부터 물을지,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는 걱정부터 할지 헤매는 그에게 "선물은 나중에 주마. 얼굴은 어젯밤에 전봇대와 싸웠다."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는 날계란을 꺼냈다.

두 번째 일격으로 관자놀이에 생긴 시커먼 멍을 날계란으로 문지르고 있자니 곧 장쯔궈도 맞은편에 앉았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팡룽에게 씹어 먹히는 줄 알았어. 눈총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 기세더라고."
"덕분에 여기는 조용하고 좋았습니다. 팡룽이 누님 뵈러 들락거리지를 않으니 살만하더라고요."

실소가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따금 팡룽이 홍위롄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홀에 죽치고 있으면서 점심을 먹거나, 홍위롄의 귀가를 기다리곤 할 때면 켕기는 게 없어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사적인 관계는 차치하여도 본국에서 서로 적대하는 조직의 간부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썩 추천할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누님은 돌아오셨냐?"
"네. 여독이 많이 쌓였다고 팡룽과 저녁만 드시고 바로 귀가하셨습니다. 아직 안 내려오시는 걸 보니 계속 주무시는 모양입니다. 그보다 형님. 어제 혹시 슈이스키를 만나셨습니까?"

괜스레 등이 움찔했다. 갈아입은 옷에 그 자식의 흔적 따위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자신의 아래위를 훑었다.

"어, 뭐……. 팡룽 덕택에 밖에 나갔다가 마주쳤어. 근데 왜?"
"별건 아니고요."

장쯔궈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며칠 전에 맡기고 갔던 그의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잠잠해서요. 형님 안 계실 동안 전화통에 아주 불이 났었지 뭡니까. 시도 때도 없이 루이 왔냐 루이 왔냐 하고 찾아대는데, 여기였으니까 참았지 본국이었으면 아주 그냥……."

아작을 냈으리라 말하며 장쯔궈는 진저리를 냈다. 하긴, 그 다혈질에 갑자기 기별도 없이 사라졌으니 난리가 났을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이럴 것 같아서 떠넘기고 간 것이지만. 그러게 왜 온종일 휴대폰을 꺼놔서 연락도 할 수 없게 하였는지 저우룬칭은 혀를 쯧 찼다. 여행 가기 전에 연락이 제대로 되었다면 그를 기만하고 여자를 만나러 간 게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이해했을 텐데.

‘그럼 어젯밤의 그 일도 없었으려나.’

의식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전날의 강간 사건으로 돌아갔다. 팡룽의 말마따나 한동안 여자를 만난 적이 없으니 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기회가 아주 꺼려졌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이나, 단순히 욕구의 해소만으로 끝내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옐리세이의 오해를 풀 방도도 없었고, 남자에게 깔릴 생각도 추호도 없었기에 일단 그를 짓누르기는 하였으나 과연 그것만으로 해결이 될까. 자신의 욕망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치달았으니 길길이 날뛸 게 뻔한 그 녀석을 감당해야 한다는 걸 상상만 해도 가슴이 무거웠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보였는데 잘 돌아갔을지나 모르겠군.’

몇 분간 버티지도 못하고 도로 쓰러져서 허리를 누르며 고통을 씹던 옐리세이의 얼굴 위로 문득 자신의 아래에서 허덕이며 고통을 누르던 모습이 어룽거렸다. 적당히 상대하고 피할 궁리만 하느라 눈여겨본 적이 크게 없었는데, 어젯밤의 모습은 꽤나…….

"칭 형님."

목 뒤도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혀가며 신음을 억누르던 옐리세이의 얼굴로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던 저우룬칭은 화들짝 놀라 등을 바로 폈다.

가게에 언제 전화가 걸려 왔는지 장쯔궈가 카운터에서 송화구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빠르게 말했다.

"전화 받으십시오. 팡룽입니다."
"……."

받기 싫었다.
진짜 받기 싫었다. 하지만 받아야 했다.

저우룬칭은 두어 번 심호흡을 한 후에 빚 독촉 전화를 받는 심정으로 카운터까기 걸어갔다.

"전화 바꿨습니다. 저우룬칭입니,"
「이봐. 저우 선생」

팡룽이 대뜸 말허리를 잘랐다.

「샤오린에게 어젯밤의 일을 들었는데, 자네와 치정극을 연출한 남자가 설마 슈이스끼는 아니겠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저우룬칭은 이마를 짚었다. 샤오린이 그와 있었던 일들을 처음부터 미주알고주알 팡룽에게 고할 작정이었다고까지는 여기지 않았지만, 난데 없는 폭행까지 당했으니 그녀로서도 비밀을 지킬 의리는 없을 것이다.

"……샤오린이 오해를 했군요. 상상하시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슈이스끼는 맞다는 거군」
"……."

수화기 건너편에서 큭큭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자네가 남자에게 단단히 코 꿰일 줄은 알았다니까」
"……그게 아니라니까요."
「뭐, 아무래도 좋아. 남자든 여자든 자네가 홍 여사에게서 떨어진다면 나야 쌍수 들고 환영이니까」

따지고 보면 근본적인 원인은 강제로 여자를 떠넘기려 하였던 팡룽이 아닌가. 원흉이 히죽거리고 있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팡룽의 사무실로 들이닥쳐 멱살잡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지라 해소할 방도는 ㅇ벗었따.

어제오늘 참 많은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설마 올해가 삼재였던가.

「그보다 우리 가게의 톱 얼굴을 엉망으로 해 놨으니 이 배상은 어떻게  할 거지? 며칠간 일도 못 나가게 생겼는데?」
"돈으로 배상해 드리면 됩니까?"
「샤오린의 자존심에 흠이 간 건 돈으로 배상이 안 되지. 이 빚은 다음에 묻겠네」

언제부터 호스티스들의 자존심까지 일일 챙겼다고 샤오린의 자존심 운운하는 건지. 뻔한 수작에 속이 더 끓었다. 그니까 당장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에 한숨 돌리며 전화를 끊었다. 슈이스끼에게 진 빚도 모자라서 이번엔 팡룽이라니. 나날이 채무자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저우룬칭은 휴대폰에 ‘aaaa’라는 성의 없는 이름으로 저장된 유일한 전화번호를 바라보며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리뎬신이 식사를 가져오는 기척에 폴더를 탁, 닫았다.





옐리세이가 이상했다.
놈이 이상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요 며칠은 더욱 이상했다.

어딘가 넋을 잃은 듯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가 불현듯 제풀에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이를 갈기도 했다. 그러다 죽는소리를 내며 벽에 얼굴을 처박았다. 단순히 다혈질인 성격 탓이라고 여기기에도 어려웠기에 저놈이 약을 다시 시작했는지 의심했을 정도다.

체자르를 경호하는 본래의 업무에 복귀하여 일은 제대로 수행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혼자 있을 때에는 이상 행동을 반복했다. 휴가가 끝난 후유증치고는 너무 오래 갔다.

일터가 다르니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며칠 동안 틈이 날 때마다 엘리세이를 관찰한 이오시프는 저 단순한 놈답지 않게 심화가 쌓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야, 레샤."

체자르에게 보고하기 위해 무역 회사 빌딩을 방문한 이오시프는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멍하니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옐리세이는 어깨를 두드려서야 겨우 돌아보았다.

"……어? 왜?"

목소리마저 묘하게 힘이 없었다.

"오늘은 일 몇 시에 끝나냐."
"7시."
"오랜만에 홍가에서 저녁이나 같이 먹을래?"

근래 옐리세이의 컨디션을 들쑥날쑥 좌우하는 원인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기에 넌지시 찔러 보았는데, 역시나 정답이었다.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옐리세이가 정색했다.

"안 가."

원인은 루이다
120% 확신했지만 캐묻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았다. 이놈이 알기 쉬운 놈이라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일단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뭐, 거기가 저녁 먹기에 좋은 곳은 아니니까. 먹고 싶은 건 있냐?"
"……저녁은 됐고."

옐리세이는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술이나 먹자."

몇 시간 후, 두 사람은 홍가에서 꽤 떨어진 술집의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술집이었기에 접대하는 호스티스도 없으니 옐리세이에게는 그럭저럭 편한 가게였다. 물론 그가 이 가게를 고른 이유 중에는 홍가와의 거리가 멀다는 점도 한 몫 하였으리라고 이오시프는 확신했다.

"요즘 얼굴이 아주 반쪽이더만. 고민 있냐?"

안주가 나오기 전에 두 사람은 술부터 따라 마셨다. 어두컴컴한 술집의 조명에 비치는 옐리세이의 낯이 더욱 어두워졌다. 잘생긴 놈은 인상을 써도 잘생겼다는 쓸데없는 감상을 하며 이오시프는 술을 홀짝였다.

옐리세이는 술잔을 입술에 대고, 술을 마시지도 술잔을 놓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로 있다가 응얼거렸다.

"그냥 좀……. 짜증나는 일도 있고."

아무리 친구라 하여도 차마 저우룬칭을 따먹으려다가 역으로 따먹혔다는 사실을 이실직고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우물거리던 그는 홧김에 술잔을 죽 들이켜고는 새 술을 따르고, 또 들이켰다. 술 한 병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이오시프가 천천히 마시라며 마침 나온 안주 접시를 밀었지만 연거푸 술만 따랐다.

그러잖아도 식사를 하지 않은 빈속에 도수 높은 알코올이 꿀렁꿀렁 들어찼다. 옐리세이는 빈 술잔을 테이블에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의자에 등 기댔다. 이오시프가 말리지도 못하고 안주로 나온 훈제 햄을 우물거렸다.

속이 홧홧하게 뜨거웠다. 급하게 술을 마셨기 때문이리라 치부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옐리세이 자신이 잘 알았다.

그날 밤부터, 뱃속에 뭉근하게 남은 열이 사라지지 않는다.
놈에게 속절없이 당하였다는 노염과 수치가 부글부글 끓었다. 속이 풀릴 때까지 후련하게 두들겨 패기라도 하였으면 나았을까. 상상해 보았지만 썩 시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었을까. 놈을 쓰러트리고 허리에 걸터앉았을 때 방심하지만 않았어도, 적어도 명치를 연타당하지만 않았어도, 손목이 묶이지만 않았어도, 놈을――

"……제길."

저녁 대신에 푸짐하게 주문한 안주를 혼자서도 열심히 먹던 이오시프가 나직이 들려온 욕설에 눈을 치떴다. 옐리세이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만 불안정하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숫제 술병째 병나발을 불었다. 술의 일부는 목안으로 꿀꺽꿀꺽 넘어가고 일부는 입술과 턱을 적시며 방울방울 셔츠까지 떨어졌다.

이오시프가 혀를 찼다.

"인마, 너 빈속에 그러다가 진짜 골로 간다."
"씨발! 미칠 거 같단 말이야!!"

옐리세이는 술병을 거의 옆자리에 던지고는 새 술을 땄다. 새 술도 술잔에 따르는 과정을 생략하고 옐리세이의 목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대체 왜?"
"그게……!!"

단숨에 반을 비워 벌겋게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왈칵 외치려던 옐리세이는 찰나 이성을 붙잡고 입을 꽉 다물었다. 그렇게 또 술병만 비우던 그는 기다리다 지친 이오시프가 새 술과 안주를 더 주문하고 나서야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모……."
"모?"
"모, 몽……."

옐리세이의 얼굴이 테이블에 처박혔다.

"몽정했어, 씨발……."
"……."
"……나 어떡하냐."
"……."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계속 그러는데……."
"……."
"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싶다."
"……."

이오시프는 비웃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몽정이, 이렇게나 크나큰 스트레스를 선사하는 주범이었던가? 그럼 남자들은 10대에 이미 가중된 스트레스로 속병이 걸리거나 자살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난 스트레스를 받았던가? 내 첫 몽정은 뭐였지?

심각한 고민 속에 과거를 되짚어보고 있는 그를 내버려두고 옐리세이는 홀로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았다.

그냥 몽정도 아니었다. 저우룬칭에게 박히면서, 가는 몽정이었다. 빠듯하게 맞물린 육체가 억지로 비집어 열리고, 굵고 단단한 성기에 꿰뚫리고 짓눌리면서, 기어이 절정에 달하여 욕망을 분출하고야 마는, 그런 몽정이었다.

엉덩이 안쪽이 홧홧하게 뜨거웠다. 딱 한 번 놈에게 삽입 당하였던 감각을 되새기는 욕정이 꿈틀거렸다. 몽정할 때마다 벌떡 깨어 찬물로 시릴 때까지 샤워를 했지만, 이도 힘에 부쳤다. 오늘 새벽에는 이불을 물고 신음하다가 잠결에 손을 성기가 아닌 엉덩이 쪽으로 움직일 뻔하였다.

"……접싯물에 코 박고 죽을까."

다분히 진심이 섞인 소리를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보다 키도 작고 어렸던 10대에는 뒤로 한 적이 더 많았고, 분명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감옥에 수감되고 단순한 거리의 불량배에서 마피아에 본격적으로 투신하며, 얕보이기 쉬운 습관은 싹 버렸다.

그렇게 8년이 지났다. 뒤로 한다거나, 엉덩이로 느낀다거나 하는 감각은 모두 잊혀서 자신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나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는데, 놈이 단 한 번의 섹스로 모든 걸 일깨웠다. 그것도 더욱 강렬하게.

"어쩌지……."

몽정했다고 죽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이오시프는 입술만 벙싯거리다가 술을 따랐다.

"마시자."

옐리세이는 죽고 싶어 하는 얼굴로 다시 술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서 숲은 마시는 둥 마는 둥 입술만 적시며 고민하던 이오시프가 일단 몽정은 집어지우고, 보편적인 고민에 대한 조언을 내놓았다.

"고민되는 게 있으면 원인부터 해결하는 게 낫지 않겠냐. 계속 끙끙 앓기만 하는 건 너답지 않잖아."

욕구불만인 것 같으니 괜찮은 놈 찾아서 질릴 때까지 뒹굴고나 오라는 뜻에서 한 조언이었으나, 옐리세이는 다른 쪽으로 해석했다.

‘맞아……. 그 새끼한테 박혀서 이러는 거니까, 내가 그 새끼를 박으면 되는 거잖아?’

이오시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옐리세이는 벌떡 기립하였다가 술기운이 확 올라 도로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이마를 누르며 신음하던 그는 얼음을 띄운 차가운 물잔을 정수리에서 거꾸로 들었다. 정수리와 이마를 때리며 물과 함께 쏟아진 얼음이 의자와 레이블로 타다닥 떨어졌다.

옐리세이가 젖은 머리칼을 쓸면서 일어나자 이오시프도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어딜 가려고?"
"홍가."

벽을 짚고 걸어가면서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휘청거리는 옐리세이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여 술집을 나왔다. 평소 주량 이상으로 마신 건 아니었지만 빈속에 연거푸 들이 켠 탓인지 좀체 걸음을 가누지 못했다. 허우적거리며 걷다 결국 끄응, 하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싸맸다.

"택시도 못 잡을 것 같다. 나 좀 데려다주라."
"이렇게 취했는데 가서 뭘 어쩌려고."
"씨발. 루이 새끼 따먹을 거야."

이오시프는 더 만류하지 않고 자신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옐리세이를 위태로이 부축하여 차 문을 열었다. 술 취한 놈이 제대로 거시기를 세울 수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과연 투철한 본능이었다.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조수석에 늘어져 있던 옐리세이는 홍가로부터 2km 떨어진 부근에서 부탁했다.

"여기에서 세워줘. 술도 깰 겸 걸어갈래."

술 처먹고 비실거리는 놈이 홍가까지 가다가 린치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우려가 일기도 했지만 말린다고 들을 놈도 아닌지라 차를 인도 옆에 댔다.

"잘해 봐."
"이 형님이 그 새끼 처녀 맛이 어땠는지 내일 말해 주마."
"그건 됐고."

인사인 듯 손을 붕붕 휘저으며 내린 옐리세이는 두 걸음도 떼기 전에 허리를 휘청 꺾으며 고꾸라지는 듯하였으나 용케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상당히 위태로웠으나 제 갈 길은 잘 찾아가는 모습에 이오시프도 시선을 거두고 차를 돌렸다.

홍가가 있는 거리는 관광지구가 아닌지라 해가 지고 나면 인적이 적다. 그렇지만 길가다가 알아보는 놈을 만나서 시비가 붙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으므로, 옐리세이는 고개를 푹 꺾은 채 비틀비틀 걸어갔다. 결과적으로 술기운이 꼭뒤까지 오른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10분쯤 걸었을 때, 참지 못하고 반쯤 허리를 굽혔다. 입맛이 없어서 점심도 제대로 먹지 않았던지라 식도를 거꾸로 타고 오른 건 술과 위액뿐이었다. 한참을 웩웩거리며 토하다 겨우 진정하고는 숨을 골랐다. 생리적으로 맺힌 눈가의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거칠게 닦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가게의 입간판을 발견했다. 철제는 아니지만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단단해 보인다. 쓸모가 있을 것이다.

토하고 나니 머리는 한결 맑아졌다. 옐리세이는 식은 밤공기가 술기운을 더 떨쳐주길 바라며 입간판을 한 손으로 질질 끌고 한참을 더 걸어갔다.

오늘 홍가는 휴일인 모양이다. 불이 꺼진 간판 아래의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방해꾼이 없으니 잘 됐다. 좋은 징조였다. 옐리세이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발로 걷어찼다.

"야! 루이!! 당장 나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하늘로 올라갔다. 행인들이 흘끔거렸지만 총소리가 나도 곧 신경을 끄는 무딘 야이쑤코의 주민들은 고함 정도로는 놀라지도 않고 이내 제 갈 길을 갔다.

문을 걷어차며 외친 지 3분도 지나지 않아 홀에 달칵 불이 켜지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나온 검은색 머리칼의 주인은 그보다 반뼘 가량 위에 있는 남자다 저우룬칭이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옐리세이는 즉시 입간판을 양손으로 들고 그의 머리를 겨냥하여 세게 휘둘렀다.





"어쩐지 요새는 더 조용한 느낌인데요."

휴일 저녁의 단출한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배달시킨 피자를 입으로 옮기던 저우룬칭은 힐긋 리뎬차이를 보았다. 뜻 없이 보았을 뿐인데 그를 어려워하는 리뎬차이는 어깨를 굳히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마피아들의 항쟁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2년 전에 터졌던 큰 항쟁 이후로는 잠잠하더라고요"

형을 도우려는 듯 리뎬신도 얼른 말을 받았다. 완충해 주는 장쯔궈가 있었다면 두 형제의 긴장이 한결 누그러졌을 테지만, 휴일마다 데이트로 바쁜 그는 오늘도 가게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 눈에 띄게 긴장하는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있지만, 딱히 이를 다독여 줄 작정은 없는 저우룬칭은 피자를 우물우물 씹어 삼키며 콜라를 들었다.

"조용한 건가? 어제만 해도 시장에서 웬 마약쟁이들이 우르르 모여서 서로 총질을 하던데."
"그런 건 일상이니 익숙해지실 겁니다. 2년 전에 적련방, 란뜨제프스카야, 모렐로스 카르텔의 총 항쟁 이후로는 큰 소란이 없었습니다."

세력을 갖고 있는 군소 마피아 패밀리까지 합산하면 10개가 넘는 조직이 난립하고 있지만 개중 압도적인 세를 유지하고 있는 조직은 적련방, 란뜨제프스카야, 모렐로스 카르텔 세 곳이다. 그 셋의 총 항쟁이 있었다면 야이쑤코 전역이 들썩거리는 분쟁이었을 것이다.

연유를 묻자, 리뎬차이가 덜 먹은 피자도 접시에 내려 두고 설명을 했다.

"2년 전의 야이쑤코는 적련방과 란뜨제프스카야의 이강 구도였습니다. 모렐로스 카르텔이 그다음으로 꼽히긴 했지만, 보스가 체자르 주린과 내기 포커에서 져서 구역의 카지노를 빼앗길 정도였으니 그 세는 비할 바가 아니었고요. 그렇게 장기간 이강 구도로 유지될 것처럼 보였는데, 모렐로스 카르텔의 이인자였던 파울라 알레만이 보스를 히트하고 대신 조직을 집어삼키면서 균형이 깨졌습니다."
"알레만은 현재 모렐로스 카르텔의 보스가 아닌가?"
"맞습니다. 그 여자의 수완이 보통이 아닌지 남미계 조직을 하나씩 병합하면서 단숨에 세를 불리더군요. 그러다가 적련방 쪽의 호스티스 한 명이 모렐로스 카르텔 몇몇에게 간살 당한 사건을 계기로 항쟁이 발발되고, 거기에 란뜨제프스카야까지 얽혀 들어가면서 야이쑤코 전체가 휘말렸습니다. 한동안 관광지구마저 폐업하였을 정도로요."

저우룬칭은 피자를 먹으며 남 얘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롭게 끄덕거렸다.

"관광까지 중단해야 했다면 어떤 규모였는지 얼추 짐작이 가긴 하는군,"
"네. 여기는 안전했지만 바로 옆 가게가 RPG에 맞아서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후에 새로 개축해서 이 골목에서 제일 깨끗한 건물인 겁니다."

치안이 좋은 홍콩과 도쿄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저우룬칭은 백주대낮 시가지에서 로켓탄까지 사용되었다는 말에 그만 웃고 말았다.

"재미있었겠는데?"
"어우, 난 무서웠어."

하루 내내 방에서 자다가 아침, 점심 다 거른 탓에 정신없이 피자를 먹던 홍위롄이 겨우 배가 찼는지 콜라로 입가심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탄에 맞기라도 할까봐 차이나타운까지 가지도 않고 가게에만 처박혀 있었지 뭐니."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겨울 정도로 조용하긴 해. 그보다 근래 들어서 더 조용해진 것 같은 역시 팡 사장이 안 와서 그런 게 아닐까?"

체증이 해소된 듯 반짝반짝 윤기가 도는 얼굴로 그녀가 킥킥거렸다.

"나랑 치앙마이 여행을 갔던 게 상당히 무리해서 일정을 뺀 거였나 봐. 바빠 죽겠대. 덕분에 귀찮게 하는 주범이 사라졌으니 가끔은 여행 다녀 줄만도 한걸."
"변태 호모도 안 보이고요"

우스갯소리로 대화를 이은 리뎬신이 말끝에 저우룬칭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 맞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옐리세이가 감감무소식 이었다. 그러잖아도 신경의 한구석을 슬금슬금 긁고 있던 놈의 존재가 타인에 의하여 다시금 일깨워지자 저우룬칭은 잠깐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저우룬칭은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여 읽다가, 랩톱을 끄고 태국어 교재를 꺼냈다.

제대로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그는 학업에 약간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차오쑹윈은 삼합회가 되든 올바른 직업을 가지든 홍콩에서 사업하기 위해 필수적인 영어는 직접 영국인 교사에게 배울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그 이상의 혜택은 베풀어주지 않았다. 저우룬칭은 독학하거나 스스로 번 돈으로 학원에 다녔다. 콤플렉스가 있는 만큼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자체에 지속적인 흥미를 갖는 그는 야이쑤코에서도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것을 찾았다. 홍위롄이 언제까지 야이쑤코에서 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향후 몇 년간은 몸을 둘 테니 태국어를 배우면 도움이 될 것이다.

‘실크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으니 재봉도 배워 볼까.’

교재를 펼쳐 놓고 하염없는 잡념의 가지를 좆던 그는 자신이 집중하지 못하는 원인이 옐리세이에게 있음을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기력을 회복하면 당장 다음 날에라도 찾아와 깽판을 놓을 것 같았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불길한 예감만 든다. 놈의 성격상 절대 넘길 일이 아닐 텐데.

‘슬슬 붕대를 풀 때도 되었는데…….’

밖에서 소란이 있을 때마다 옐리세이가 총이라도 빼 들고 들이닥치지 않았는지 우려하며 기척을 살피는 것도 은근히 기력을 소모했다. 오늘은 차라리 총 들고 뒤에서 덮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올 때마다 시끄럽게 조잘거리던 놈이라 부재감이 컸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 한 번도 울리지 않고 있는 잠잠한 휴대폰을 보았다. 문득 더듬더듬 어설픈 북한말을 고백이랍시고 중얼거리던 녀석의 목소리가 상기되었다. 그건 진짜, 재미있었는데. 과연 무슨 말이었을까.

가벼운 웃음과 함께 기분이 풀렸으므로 저우룬칭은 교재로 의식을 돌렸다.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오지 않을 것 같으니 걱정은 내일로 미루어두었다.

그러나 저우룬칭은 두 시간도 되지 못하여 책상에서 일어나야 했다.

"야! 루이!! 당장 나와!!"

2층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문까지 쾅광쾅 두드린다.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쌍둥이 형제는 물론이거니와 홍위롄까지 계단 위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아칭. 네가 아는 사람이니?"
"예. 만에 하나 소란이 커질 수도 있으니 누님은 절대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마십시오."

저우룬칭은 쌍둥이 형제에게 홍위롄을 잘 지키라며 눈짓하고는 계단을 2, 3칸씩 건너뛰며 서둘러 내려갔다. 1층 홀의 불을 켜자 문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두드려대던 소리가 멎었다. 언뜻 비치는 실루엣은 옐리세이가 확실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저우룬칭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문의 잠금을 해제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사적으로 왼팔을 올려 머리를 보호했다. 콰앙! 하는 소리가 그의 팔뚝을 둔탁하게 내려찍었다. 팔뚝을 지나 어깨까지 저릿저릿한 통증이 거세게 치달았다. 하지만 고통을 돌이키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무엇으로 구타했는지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형태로 미루어 일반적인 둔기는 아니었다. 머리에 그대로 맞았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저우룬칭은 신음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놈이 둔기를 휘두르는 속도가 그의 걸음 보다 빨랐다. 두 번째의 가격이 팔을 강타했다. 이러다가 뼈에 금이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무기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무기 대용으로 쓸 만한 건 많이 있었다.

"칫……!"

손에 잡히는 의자를 빼어 그대로 바닥을 쓸 듯이 밀어 던지자 옐리세이가 혀를 차며 몸을 피했다.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은 저우룬칭은 벽 쪽으로 몸을 움직였고, 엘리세이도 둔기를 휘두르며 재빨리 접근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저우룬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사거리에 있는 카페의 입간판이잖아. 언제 저런 걸 가지고 온 거야.

하지만 입간판이든 쇠파이프든 유리병이든 맞으면 부상을 당한다는 건 똑같다. 옐리세이의 완력으로 휘두르는 입간판은 일견 단순하리만큼 반복적인 공격 패턴이었으나, 그만큼 묵직한 흉기였다. 퍼억, 퍽 하며 부딪히는 소리가 날 때마다 화분이며 진열장의 접시들이 깨졌다. 상당히 위력적인 공격이었으나, 그 점이 옐리세이의 짜증을 더 북돋는 모양이었다.

"썅!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얌전히 처맞으라고!!"
"맞으면 아플 것 같다만."
"간지러우라고 때리겠냐!!"

그사이에 목격하였던 지점까지 몸을 옮길 수 있었던 저우룬칭은 벽을 등지고 섰고, 옐리세이가 이번 일격으로 끝내겠다는 듯이 천장으로 입간판을 높이 쳐들었다. 입간판이 그의 머리를 겨냥하며 내리쳐짐과 동시에 저우룬칭은 비스듬히 등 뒤로 빼두었던 팔로 벽에 걸린 청룡도의 도병을 움켜쥐었다.

쿵一 힘이 실린 청룡도의 칼끝이 입간판의 한중간을 관통하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옐리세이가 화를 내며 입간판을 빼내려 하였으나 삐걱거리는 소리만 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치사한 새끼가! 내가 얌전히 나왔는데도 무기를 꺼내?!"

누가 얌전히 나왔다는 건지 참으로 적반하장 격의 태도였으나, 한껏 씨부렁거리는 입과는 별개로 손은 이미 뒤춤으로 넘어가 있었다. 보나마나 늘 갖고 다니는 총을 잡은 것이리라.

단거리에서는 총보다 칼이 유리하다. 그리고, 이 거리는 청룡도의 간격 내였다. 저우룬칭은 바닥에 내려찍은 청룡도를 뽑으며 손안에서 빙글 돌려 칼등을 옐리세이에게 향했다. 관찰과 사고의 과정은 길었지만, 옐리세이가 입간판을 놓으며 총을 전 것과 저우룬칭이 청룡도를 뽑은 것은 찰나였다.

그러나 총소리는 홀이 아닌 계단에서 들려왔다.

"칭 형님!"

리뎬차이였다. 계단에서 옐리세이의 발 바로 옆에 총을 쏜 리뎬차이가 양손으로 쥔 총을 겨냥한 채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려왔다.

"이 개새끼들이!"

저우룬칭의 청룡도와 리뎬차이의 총을 번갈아 본 옐리세이가 이를 빠득 악물었으나 도리 없이 양손을 펼쳐 허리 옆으로 비스듬히 올렸다. 다혈질이기는 해도 상황파악은 제대로 하는 녀석이었다. 저우룬칭은 낮게 죽였던 숨을 길게 뱉으며 허리를 폈다.

"총 빼서 이리로 던져."

완전히 무장해제를 하라는 리뎬차이의 말에 옐리세이가 다시 화를 내기 전에 저우룬칭은 먼저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으니 나머지는 나에게 맡겨도 돼. 고맙다."

그리고 옐리세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옐리세이. 우리 문명인답게 치분하게 대화로 해결하지 않겠냐?"
"……흥."

그는 비딱하게 고개를 틀며 팔짱을 꼈다.
리뎬차이가 주저하며 총구를 내렸다.

"주제넘는 말이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누님도 놀라셨을 텐데 올라가서 안심하시라고 전해다오."
"알겠습니다."

더 이상 군말하지 않은 리뎬차이가 마지막으로 힐긋 옐리세이를 노려보고는 올라갔다. 노려보거나 말거나 옐리세이는 툴툴거리며 넘어진 의자 하나를 일으키고는 털푸덕 엉덩이를 붙였다.

"아오, 그거 좀 움직였다고 머리가 더 어지럽네."

저우룬칭은 청룡도를 본래의 관우상 옆에 걸고 하마터면 박살이 날 뻔한 제단을 원래의 위치로 옮겼다.

"술 냄새가 나는데 많이 마셨나?"
"씨발놈아. 너 때문에 마신 거야!"

입간판을 들고 날뛸 때는 멀쩡해 보이더니 자리에 앉아서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욕을 했다. 그냥 단순히 자신에게 욕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며 넌지시 물었다.

"나이차라도 한잔 타 줄까?"
"그게 뭔데?"
"밀크티. 술 마신 후에 마시면 좀 낫지."
"뭐든 갖고 와. 목도 말라 죽겠네."

끙끙거리며 테이블에 엎어진 옐리세이를 뒤로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이차를 끓여서 나왔을 때도 옐리세이는 여전히 테이블에 뻗은 채였다.

"진하게 탔으니까 마셔."

적당하게 데운 찻잔이 앞에 들이밀어지자 옐리세이가 힐끔 눈을 올리더니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한 모금을 슬쩍 입술로 적시더니 입맛에는 맞는지 타박 없이 홀짝홀짝 마셨다.

일단은 얌전히 나이차를 마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입간판으로 날 두들겨 팬 다음에 뭘 어쩔 작정이었나? 쓰러트려 놓고 강간이라도 하려고?"
"난 다른 건 다 해도 강간은 안 해, 새꺄. 강간할 바에야 죽이고 말지."

옐리세이가 코웃음을 쳤다. 찻물은 호록호록 그의 목 안으로 잘 넘어가고 있었다.

"그냥 꼼짝 못 하게 묶어 놓은 뒤에 제발 박아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좀 괴롭히려고 했지."
"……그게 강간 아닌가?"
"강간은 저번에 네가 한 게 강간이고! 一 저우룬칭은 이 말이 나오자 입을 다물었다 一 나는 그냥 내 절륜한 테크닉으로 널 녹이려고 했던 거고!"

그날 밤의 일을 돌이키니 다시금 울화가 끓긴 했으나, 차는 맛있었다. 찻잔을 깨끗하게 비운 옐리세이는 어떤 냉동 참치 같은 놈도 앙앙거리게 만드는 자신의 테크닉을 설파하였다.

"너도 나한테 한 번 박았으니까, 이젠 한 번 박혀야 되는 거 아냐? 무서워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니까. 네가 의심이 많아서 못 믿는 모양인데 나 존나 잘해."
"음, 뭐……. 굉장하긴 했지."

저우룬칭의 시선이 무심코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갔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아래로 숙인 옐리세이는 그가 보고 있는 위치를 깨닫고는 자증을 내며 발로 걷어찼다.

"에이씨, 거기 말고 앞! 앞! 내 물건!!"
"그래. 구슬 굉장하더라. 야쿠자 이후로 거기에 구슬 넣는 새끼는 참 오랜만이야."
"그 구슬 넣은 좆에 한 번 박혀 보면 질질 싸면 달려들걸?!"

한 번밖에 써먹어 보지 못한 주제에 뻥뻥 큰소리치며 가슴을 쫙 폈다. 쓸데없는 일로 열을 올려서 그런지 괜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머리만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앞도 좀 흐렸다. 술기운이 갑자기 올라오는 건가. 싶어서 관자놀이를 누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을 가져오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에서는 우물거리는 신음만 날 뿐이었다.

점차 흐릿하게 멀어지는 시야에 비치는 저우룬칭의 모습이 일렁였다. 힘을 잃고 고꾸라지는 그를 보며 중얼거리던 저우룬칭의 목소리가 외부와 접한 옐리세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무튼....... 좋은 아이디어는 고마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경각심이 퍼뜩 등골을 울렸으나, 의식이 암전하기까지는 순간 이었다.





목이 말랐다.
바짝 마른 목이 칼칼하니 따가워 마른기침을 쿨럭였다. 옆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의식이 낯선 기척을 확인해야 함을 알렸지만, 자꾸만 나오는 기침이 눈을 뜨고 기척의 방향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방해하였다.

콜록거리고 있자니 기척이 바짝 얼굴로 붙었다. 이어,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고 시원한 내음이 밀려들었다. 옐리세이는 입을 열고 정신없이 물을 받아마셨다. 한 번,  두 번, 세 번. 상대는 말없이 입술로 물을 옮겨 주었다. 반 이상 턱과 목으로 흘러내린 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목이 어느 정도 트여 기침이 멎자 생수통의 주둥이가 입에 닿았다.

시원한 물이 갈급을 해소하자 몽롱하게 풀려 있던 의식도 돌아왔다.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일어나려던 옐리세이는 멈칫했다. 아까부터 운신이 묘하게 불편한 이유를 비몽사몽지간이라 착각했다고 여겼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상체를 틀었다. 머리 위로 올려 결박된 손목이 흔들림에 따라 침대가 삐걱거렸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루이! 개쌍년아! 너 이거 무슨 짓이야!!"

저우룬칭이 빈 생수통을 휴지통에 던졌다.

"네가 나한테 하려고 했던 짓"
"야!!!"

언성이 확 높아졌다. 순간 열이 북받쳐 눈앞이 새하얗게 어지러웠다. 옐리세이는 뒷목 붙잡고 뒤로 넘어가는 사람의 빡침을 생생히 실감했다. 저우룬칭이 침대가에 앉았다. 목소리는 얄미우리만큼 덤덤했다.

"난 그냥 널 재우든가 해서 일단 진정시킨 뒤에 천천히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날 강간하려고 했다는 걸 알고 나니까 넘어갈 수가 없더라고."
"씨발년아! 네가 먼저 강간했잖아!!"

분을 이기지 못한 옐리세이가 몸부림을 쳤지만 손목을 동여맨 밧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 동의가 없었으니 강간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만, 너도 조폭이잖아. 강간에 무슨 문제라도? 이제 널 두들겨 패면서 길들인 다음에 기둥서방 노릇을 좀 하다가 지겨워지면 사창가에 팔면 되나?"
"……."

악악거리며 발버둥 치던 옐리세이는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닫았다.
그 말도 맞았다. 조폭에게 강간이 뭐 그리 대단한 범죄란 말인가. 하지만 억울했다. 난 성모님께 맹세코 단 한 번도 강간한 적이 없는데! 루이 새끼 괴롭힐 때도 지 입으로 박아달라는 애원을 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야! 난 한 번도 강간한 적 없어!!"
"나도 네가 처음이야."
"이이익!!"

무슨 말을 하든 담담하게 받아치니 더 약이 올랐다. 침대가 요동치리만큼 팔을 버둥거리며 풀어내려고 했지만 손목이 더 조여들기만 했다.

"망할! 어쨌든 이것부터 풀어!! 새꺄!!"
"풀면 때리려고 할 거잖냐."
"당연하지!!"
"너랑 드잡이질하면서 힘 빼기 귀찮아."

저우룬칭이 머리를 긁적이며 몸부림치는 옐리세이의 허리에 걸터앉았다. 묵직하게 걸리는 하중보다 놈이 가까워졌다는 것에 옐리세이는 딸꾹질할 만큼 놀랐다.

"무, 뭐, 뭐, 뭐하려고! 꺼져!!"
"네가 나한테 하려고 했던 짓."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한 저우룬칭이 천천히 손을 움직여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날뛰다가 단추가 뜯어지기라도 하면 돌아가기 곤란할 테니까 얌전히 있어 줬으면 한다."
"미친 새끼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아악!!"

너무 열 받아서 생각이 영어로 전환되지 않는 상태가 된 옐리세이는 모국어로 욕설을 퍼부으며 난동을 부렸다. 다리는 자유로웠지만 놈이 허리에 걸터앉아 있는 상태라 발길질을 할 수도 없었다.

옐리세이가 날뛰자 저우룬칭은 옷을 벗기려던 손을 멈추었다. 제압할 생각도 않으며 날뛰는 허리에 앉아있기만 하던 그는 결국 먼저 지친 옐리세이가 헉헉거리며 늘어지고 나서야 입을 뗐다.

"널 두 번 강간할 생각은 없다."
"그럼 비켜!!"
"하지만 우리 사이의 포지션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건 너도 동의하지 않냐? 둘 다 깔리기 싫어하니까 결론이 나지 않는 거라고. 나는 전에도 말했듯이 네가 안긴다면 섹스해도 상관없어."

열 받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개새끼야! 그래서 넌 멋대로 남을 강간한 주제에 이제 와서 포지션 타령이냐?!’를 영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고민하는 사이에 저우룬칭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안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내 애무를 한 시간만 버티면 네게 안기마."

일단 생각나는 개새끼부터 외치려고 했던 옐리세이는 말을 꼴깍 삼켰다. 이 새끼가 지금, 먼저 안기겠다고 한 게 맞나? 반짝반짝 맛있는 윤기가 흐르는 저우룬칭의 엉덩이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옐리세이는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뒤에 저우룬칭을 노려보았다. 얼굴의 칼자국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누구 맘대로 한 시간이야?! 5분으로 해."
"너무 짧잖아."
"5분!"
"50분."
"5분!!"
"넌 그거 버틸 자신도 없냐?"

가벼운 도발이었지만 당연히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옐리세이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여전히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우룬칭이 가까이 다가와 육체를 밀착하자 마음과는 다르게 엉덩이 구멍이 바짝 긴장하여 움찔거렸다. 미칠 지경이었다. 놈을 쓰러트리고 다리를 벌리게 해서 엉망이 될 때까지 범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소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악다구니 끝에 두 사람은 30분으로 타협했다. 30분 정도면, 괜찮겠지. 옐리세이는 비장하게 앙다물었다. 기도문을 외우든가 김느 라씨스꺼이 피지라찌를 부르든가 하면 30분은 금방 지나간다. 혀를 끊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박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휴대폰에 30분 후의 알람을 맞춘 저우룬칭은 시작도 하기 전에 다소 피곤한 안색으로 옐리세이의 옷을 벗겨갔다. 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시각적인 자극이 되었기에 옐리세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셔츠가 사락거리고 단단한 손끝이 문신을 따라 맨살을 쓸었다.

"읏……!"

낭패다.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입술 안쪽의 살을 꾹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저우룬칭이 가슴을 더듬었다. 바짝 긴장하여 곤두선 유두가 손가락에 희롱당했다. 손톱으로 유륜을 살살 긁던 손가락이 유두를 꾹 쥐며 눌렀을 때 하마터면 신음이 터질 뻔하였으나 이번에도 참았다. 발가락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저우룬칭은 가슴에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복부로 내렸다.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린다. 바지가 침대 옆 바닥으로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약간 두툼하게 부푼 드로어즈로 놈의 시선이 느껴졌다. 긴장한 허벅지가 놈의 시선을 따라 가늘게 떨렸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뭐 하냐?"

시간(視姦)이라도 당하는 기분이라 옐리세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짐짓 날카롭게 물었다. 저우룬칭이 다소 난감한 빛으로 한숨을 쉬었다.

"으음, 그러니까……. 구슬이 좀."
"뭐?"
"아니다. 아무것도."

어딘지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그가 마지막 속옷까지 벗겼다. 옐리세이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것이나이다. 아멘! 제발, 제발, 30분만……!!

러브젤이 회음부와 엉덩이골로 주르륵 짜였다. 옐리세이는 기겁하여 외쳤다.

"어, 야!! 잠깐만!! 너 설마|!"
"걱정하지 마. 손가락만 넣을 거야."
"미친! 웃기지…… 앗!"

검지가 대뜸 비부를 벌리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고작해야 손가락 하나였지만, 가장 내밀한 부위를 자극하며 체내에 삽입되는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빼!! 씨발! 손가락 빼!!"

저우룬칭이 격하게 날뛰는 옐리세이의 허벅지를 자신의 허리에 확 붙여 끌어안으며 중지까지 꾹꾹 밀어 넣었다. 자극에 깨어난 내벽이 이물질을 받아 삼키며 꿈틀거렸다. 깊숙이 파묻힌 손가락이 체내에서 움직이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연하여 미칠 같았다.

더 미칠 것 같은 상황은, 다음에 발생했다.

"죽인, ……아!"

요동치는 몸을 억누르며 파고든 손가락이 도톰하게 부푼 예민한 부위를 바로 찾아냈다. 성감대가 자극되자 허리가 저절로 휘며 신음이 나왔다. 바로 며칠 전에도, 손가락보다 훨씬 굵고 단단한 성기에 삽입당해, 이곳을 애무당하여——

감각이 돌이켜지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지펴지기에 충분했다. 한결 힘이 들어간 성기에 기다란 손가락이 얽혔다. 볼록한 구슬이 도드라진 기둥을 아프지 않게 손끝으로 누르며 귀두를 비볐다. 체내에 파고든 손가락은 여전히 집중적으로 예민한 부위를 쑤시며 들문질렀다. 가장 민감한 성감대들이 동시에 자극되자 아찔한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부감으로 요동치던 허리가 쾌락에 휩쓸려 꿈틀거리고 발끝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하옥, 아……. 읏!"

잇새로 신음을 뱉어내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며 헐떡이던 옐리세이는 사정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 차라리 한 번 빼고 나면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 내 입으로 박아달라는 말은…….

"어……?"

방심한 당혹성이 가늘게 흘렀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저우룬칭을 보았으나 그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옐리세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너, 너……!"
"왜? 만져 줄까?"

한창 오르가즘으로 치닫고 있을 때 발기한 성기에서 손을 딱 땐 저우룬칭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래를 쑤시던 손가락도 성감대에서 떨어져 내벽을 둥글게 휘저으며 풀었다. 온전히 달하지 못한 쾌감이 텁텁하니 가슴을 치댔다.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어 입술만 깨물고 있자니 세 번째 손가락이 삽입되었다. 체내를 휘젓는 질량이 한결 묵직하게 늘어난다. 손가락들은 크게 벌어지기도 하고 둥글게 굽히기도 하며 예민한 점막을 들쑤셨다. 하지만 절대 성감대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익......! 으!"

가파르게 치닫던 쾌락의 곡선이 뚝 꺾였다. 오를 듯 말 듯 미진하게 자극되는 감각에 입안이 바짝 마르고 애가 탔다. 무의식중에 허리를 움직여 손가락을 유도했다. 실수였다는 건 한 번 더 세게 문질러지고 난 후에 깨달았다. 애매하게 돋우어진 성감이 오히려 안쪽을 깊숙이 꿰뚫리며 절정에 달하는 감각만을 인식시켰다. 손이 자유로웠으면 스스로 성기라도 애무했을 테지만 여전히 묶여 있는 터다. 식은땀이 관자놀이에 흐르고 허리가 뒤틀렸다. 연방 흠칫거리는 발아래에서 시트가 구겨졌다. 엄지가 늘어진 음낭을 만지며 회음부까지 죽 쓸었다. 허리가 크게 경련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저우룬칭이 허리를 굽히더니 헐떡거리는 그의 숨을 삼키듯이 입술을 겹쳤다. 두툼한 살덩이가 마른침만 고이던 입안을 거칠게 탐했다. 깊이 휘몰아치는 키스를 당하며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던 옐리세이는 입술이 떨어지자 발작적으로 외쳤다.

"야이 더럽고 치사한 새끼야! 박아! 박으라고!!"

알람을 맞추고 딱 10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였다는 자괴감과 드디어 마음 놓고 쾌락을 탐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상반되어 참으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옐리세이의 앞에서 저우룬칭이 옷을 벗었다. 햇살을 머금고 잘 단련된 다부진 상반신이 시야에 찼다. 이제껏 그를 벗길 때마다 욕정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던지라 잘 보지 못했지만 왼팔 전체와 어깨로 언뜻언뜻 비치는 흑색 문신이 묘하게 섹시했다. 저 문신, 도마뱀이랬던가. 등 뒤도 보고 싶다는 충동 속에 입술을 핥았다. 이어, 저우룬칭이 블루진을 벗기 시작했다.

저우룬칭의 알몸이 드러남에 따라 이번 고비만 넘기고 다음의 섹스는 다음에 생각하자는 기대감이 더욱 부풀어 올라 허덕이던 옐리세이의 눈동자가 갑자기 허옇게 질렸다. 한껏 발기하여 선액으로 번들거리던 성기가 움츠러들어버린 듯한 착각마저 일 정도다.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붕붕 휘젓다가 다시 앞을 보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여전했다.

아니, 쌍! 어쩐지 첫 경험 때보다 더 아프더니!! 착각이 아니었잖아!

"너…… 흑인 혼혈이냐?!"
"아니."

콘돔을 입으로 뜯으며 대꾸하느라 발음이 약간 새었다.

"말도 안 돼! 동양인 주제에!! 야, 야! 너 설마 그걸 나한테 넣겠다는 개소리를 씨불이는 건 아니겠지?! 찢어져, 새끼야! 안 돼!!"
"저번에 안 찢어졌잖아."
"차라리 바이브나 애널비즈를 박아! 나 죽어! 죽는다고!"

지난밤에는 엎드린 채 뒤에서 박히느라 제대로 목격하지 못하였던 엘리세이는 거의 비명까지 지르며 머리맡으로 기어 도망쳤지만 손목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침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악! 그런 흉물을 누구 몸에 쑤셔 박겠다는 거야! 미친놈아! 당장 꺼져!!"
"흉물은 구슬 넣은 네 것이 흉물이고."

사색이 되어 바락바락 발악하며 턱을 걷어차려는 옐리세이의 발목을 탁 붙잡아 어깨에 다리를 걸친 저우룬칭이 하체를 바짝 밀착했다. 콘돔을 씌운 성기가 젤로 미끈미끈 한 회음부를 문질렀다. 압도적인 체적이 직접 피부로 느껴졌다. 하얗다 못해 시퍼레진 옐리세이는 자신이 침대에 묶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더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버둥거렸지만 이미 성기의 끝 부분이 지그시 구멍을 벌리며 들어왔다.

"으…… 아윽!"

목이 크게 젖혔다. 손자국이 남으리만큼 엉덩잇살을 움켜쥐어 벌린 저우룬칭이 허리를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한계에 달해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구멍이 점점 더 벌어지며 성기를 삼켜갔다.

"아, 앗! 아프, 으……!"

아프다는 비명성을 내뱉으려던 혀를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붙잡았다. 힘에 겨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진땀만 흘리는 그의 얼굴에 입술이 닿았다. 아이를 달래듯이 쪽, 쪽 소리가 나도록 이마와 뺨과 콧잔등에 키스하는 행동이 익숙했다. 옐리세이는 이 놈 밑에 깔려서 저 물건을 받아냈어야 했던 여자와 남자를 동정하는 한편 자신의 신세에도 이를 갈았지만 긴장되었던 몸이 풀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아……."

드디어 성기가 완전히 삽입되어 회음부에 까슬까슬한 거웃이 문질러지자 완전히 탈력한 기분이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숨을 골랐다. 저우룬칭의 것으로 그득하게 꽉 들어찬 뱃속이 너무 뜨거웠다.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육체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놈이 정복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움직여도 될까?"
"……씨발놈이."

호흡으로 복부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안을 정복한 저우룬칭이 지나치게 생생하여 옐리세이는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네가 언제, 하아……. 내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냐?"

저우룬칭이 쿡쿡 웃었다.

"그것도 그렇군."

웃음소리에 이어 단단한 성기가 몸 안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거의 체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릿하게 내벽을 문지르던 진퇴에 차츰차츰 속도가 붙었다. 귀두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성기가 단번에 퍽, 깊숙이 처박혔다. 숨이 꽉 막히며 내장이 입 밖으로 거꾸로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 여전히 통증은 남아 있었으나 손가락으로 만져질 대와는 비할 수 없는 쾌감이 척추를 울렸다. 아흐, 학, 하고 짧게 끊어지는 신음이 잇새에서 울렸다.

사실은, 마음껏 높은 신음을 올리며 그에게 매달려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그조차도 완전히 잊고 있던 감각이 저우룬칭에 의하여 깨어났다. 자신의 안에 이같이 민감한 곳있었던가 하고, 옐리세이는 아득하게 자각했지만 그 자각마저 쾌락의 물결에 휩쓸렸다.

빠듯하게 벌어져서 부들거리던 내벽이 질척거리며 달라붙었다. 한껏 오그라든 발끝이 시트를 거칠게 왕복하며 구겼다. 그대로 다리를 들어, 저우룬칭의 허리에 감고 바짝 죄어 당기고 싶다는 충동과 자존심이 서로 칼끝을 세우며 아찔한 육락으로 허덕이는 마지막 이성의 끝을 붙잡았다.

저우룬칭이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국어를 말을 뱉는가 싶더니, 거칠게 헐떡이며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맙소사. 옐리세이, 네 몸……. 정말이지……."

이가 까득까득 맞물리는 소리가 나도록 신음을 억누르고 있던 옐리세이는 이어질 뒷 말을 직감하고는 기겁했다.

"하, 하지 마……! 그 말 하지, 아웃, 옥! 말하면 죽일…… 학!!!"
"굉장해. 최고야……."
"아아악!!"

듣고야 만 찬사에 교성이 아닌 비명을 지르며 치를 떨었지만 이마저도 곧 신음이 되었다. 저우룬칭이 허리를 높이 세우고는 옐리세이의 양 무릎을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몸이 크게 굽혀지며 한껏 발기한 성기가 더 깊숙한 곳까지 두드려 열었다. 지금까지는 전희에 불과하였다는 듯 그가 세게 추삽질했다. 삽입될 당시에 움츠러들었던 성기는 어느새 곧추서 두 명의 복부 사이에서 덜렁거렸다.

끝내 옐리세이의 입에서 교성이 나왔다. 난폭한 추삽질이 마지막 남은 이성을 새하얗게 태우며 죽을 것 같은 생생한 쾌락을 강제로 몸 안에 때려 박았다. 언제 저우룬칭이 풀어주었는지 자유를 얻은 양손은 그를 후려갈기는 대신에 정신없이 팔목과 어깨를 끌어안으며 손톱을 박았다. 흔들거리다 어깨에서 떨어진 양다리가 저우룬칭의 허리에 휘감겼다. 좁은 모텔 방 안에 살과 살이 거칠게 철퍽거리며 부딪는 소리와 새된 교성이 들어찼다.

"아! 흐아앗一!"

날카롭게 꺾이는 교성과 함께 뿌연 정액이 사출했다. 절정의 여운에 젖을 틈도 없이 저우룬칭이 몸을 옆으로 돌려 눕히고는 허리를 쳤다. 땀에 젖은 손이 성기를 잡고 주무르며 귀두를 난폭하리만큼 세게 문댔다. 사정 직후라 한껏 민감한 성기가 자극되자 거의 고통에 가까운 쾌감이 그를 뒤흔들었다. 옐리세이는 비명과 구분되지 않는 교성을 내지르며 온몸을 떨었다. 허리를 둘러 안은 팔뚝을 할퀴듯이 부여잡고 몸부림을 칠 때 마다 저우룬칭을 머금은 살벽도 요동을 쳤다.

한계 이상 주어지는 쾌락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웠다. 새하얗게 탄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된 옐리세이가 그저 짐승 같은 신음만을 내지르고 있을 때 정액도, 소변도 아닌 투명한 액체가 요도에서 세차게 분출하며 시트를 더럽혔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적인 쾌감이 꿰뚫었다. 저우룬칭도 사정하였는지 허리짓을 멈추고 그를 안은 팔을 늘어뜨린 채 거친 숨을 뱉었다.

미칠 것 같았던 오르가즘의 끝에서 헐떡였다. 눈앞이 온통 뿌옜다. 벌벌 경련하는 손을 올려 눈가를 홈치고서야 자신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동안 숨을 고르던 저우룬칭이 힘을 잃은 성기를 빼냈다. 한 몸처럼 맞물려 자신의 안을 마음껏 유린하던 성기가 사라지자 일순, 아쉽다는 생각을 해 버린 옐리세이는 자조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몸이 식었다. 이성이 차츰 돌아오자 저우룬칭에게 다리를 벌리고는 정신을 놓고 교성을 올리던 몇 분 전의 과거가 돌이켜진다.

"먼저 씻는다?"
"……꺼져, 새끼야!!"

쉰 목소리가 발악처럼 외치자 저우룬칭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욕실로 향했다. 문틈으로 들려오는 물소리에 더욱 절망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죽고 싶었다.

씻고 나온 저우룬칭이 옷을 입을 때까지도 옐리세이는 이불을 뒤집어쓴 재 웅크리고 있었다.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통을 꺼내 목을 축인 그는 옐리세이에게도 생수통을 내밀었다.

"목 안 마르냐?"
"개새끼!!"

무작정 욕을 하며 옐리세이가 생수통을 빼앗았다. 주춤주춤 일어나 앉으려던 옐리세이는 허리를 펴자마자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더니 화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한껏 끙끙거리며 힘겹게 몸을 틀었다. 등을 돌리고 앉은 그는 단숨에 생수통의 반을 비웠다. 들이붓는 수준으로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통에 쿨럭거리는 잔기침이 새었다. 옐리세이는 생수통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생수통에서 흐른 물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침대에 기댄 그에게 저우룬칭이 다시 물었다.

"안 씻으려고?"
"닥쳐."
"자고 새벽에 나갈 작정이면 그렇게 해도 되긴 되는데 옷은 입는 게 좋지 않을까."
"닥치라고!"

울컥하여 소리를 꽥 지른 옐리세이는 소리친 여파로 저릿저릿 울리는 통증에 허리를 싸매며 신음했다.

"네 무식한 좆 때문에 허리가 아파서 못 움직이겠단 말이야!!"

이유 없이 화가 나서 책임을 전가하자 저우룬칭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기로 작심했는지 의자에 앉아 TV를 켜는 기척이 느껴졌다. 덕분에 벌게진 얼굴이 저놈에게 들키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자괴감에 머리를 벽에 처박았다.

미치겠다. 섹스 후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허리는 아파 죽을 지경이지만 당장에라도 이 차전을 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박는 게 아니라, 박히는 쪽으로.

‘어떡하지, 씨발. 존나 좋잖아.’

끝내줬다. 요 몇 년간, 아니 H살의 첫 경험 이후로 이런 섹스는 처음이었다. 남자에게 후장을 따이면서 쾌감을 느끼다 못해 울기까지 하다니. 생각만으로도 쪽팔렸다. 쪽팔림만큼 죽여주는 섹스였다.

‘한 번 더, 하고 싶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무심코 생각해 버린 옐리세이는 제 생각에 자신이 제일 놀라 기겁했다.

코미디 영화가 나오는 채널에 고정된 TV에서는 과장된 음성과 음향이 연방 나왔지만 한 번도 웃지 않고 시선만 멀거니 TV쪽으로 돌려두고 있던 저우룬칭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옐리세이. 여행 가기 전날에 전화했던 적이 있었잖아. 그때 한 말이 무슨 뜻이었냐?"

주먹으르 허리를 콩콩콩 두드리고 있던 옐리세이가 퍼뜩 고개를 올렸다.

"빌어먹을, 맞다. 그 뒤에 너무 열 받는 일이 있어서 까먹고 있었네."

그는 굴러다니는 베개를 들어 저우룬칭의 뒤통수에 던졌다. 퍽, 하고 베개에 맞은 저우룬칭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돌아보았다.

"인마. 내가 고백까지 했는데 답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참고로 부정맥은 아니다. 의심 가면 진단서 떼 줄까?"
"......그 고백이 무슨 뜻이었는데?"
"모르지. 북한말 아는 놈이 불러주는 대로 그냥 읽어서."

자신이 한 고백의 내용을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도 당당한 태도였다. 저우룬칭이 몇 번 입술을 여닫다가 다시 물었다.

"어쨌거나 고백을 했다면 날 좋아한다거나, 뭐, 이런 뜻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까?"
"도대체 내 어디가 좋길래?"
"엉덩이."
"……."

좋아하는 게 맞느냐는 질문에는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더니 왜 좋으냐는 질문에는 서슴없이 즉답하는 옐리세이를 본 저우룬칭이 이마를 누르며 침음했다.

"……거, 기왕 외견이 마음에 든다면 엉덩이 말고 얼굴로 해 주면 안 되겠냐."

옐리세이가 가차 없이 코웃음을 쳤다.

"야. 내가 맨날 거울에서 보는 게 뭐겠냐?"
"……네 얼굴?"
"그렇지. 그런데 새삼 나보다 못생긴 다른 놈들 얼굴을 보고 반할 것 같아? 넌 엉덩이뿐만 아니라 얼굴도 썩 괜찮지만, 나보다 잘생긴 건 아니지. 턱도 없는 소리를 하네."
"……."

기가 찼지만 부정할 말도 없었다. 옐리세이가 잘생긴 건 사실이니까.

얼굴에 사나운 칼자국이 있음에도, 동서양의 인종을 불문하고 배우나 모델이 아닌 보통 사람 중에서 옐리세이보다 잘생긴 남자는 저우룬칭도 보지 못했다. 입만 열면 또라이 같긴 하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외모만으로는 지금 당장 런웨이를 걸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뭐, 그 문제는 넘어가고. 고백도 했으니, 이제 나랑 뭘 하고 싶은 건데?"

이번에는 옐리세이도 갸우뚱했다. 저우룬칭을 따먹겠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섹스는 성공하였고, 매우…… 좋기도 하였다.

인정한다. 최고의 섹스였다.
고민 끝에 옐리세이는 애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연애질? 야, 연애는 어떻게 하냐? 넌 경험 있지?"
"연애가 별거 있냐. 만나고 데이트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거지."
"섹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옐리세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한 거랑 별로 다른 것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겠지."
"좋아. 여기서 섹스만 계속하면 되겠군."

대뜸 대답한 그는 화급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야, 야. 오해하지 마. 너한테 박히는 게 좋아서 섹스하자고 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 계속 섹스하다 보면 언젠가 네 처녀를 따먹을 날이 올 거라고."
"그럴 일은 절대 없을걸."
"흥."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그는 통증이 약간이나마 덜어진 허리를 누르며 끄응차 일어났다.

"우리는 오늘부터 연애 시작한 거야. 또 그때처럼 다른 연놈 만나는 거 내 눈에 뜨이면 죽인다. 이번에는 절대 안 봐줘."

그리고 저우룬칭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부리나케 욕실로 달려갔다.

"내 의견은 무시하냐?"

살짝 어깨를 늘어뜨리며 반문하였지만 이미 욕실 문을 닫고 샤워기까지 튼 옐리세이의 귀에 들릴 리는 만무했다. 여하튼, 고백에 대한 답을 얼버무리는 데는 성공하였기에 저우룬칭은 무료히 TV채널을 돌리며 그가 다 씻기를 기다렸다.

모텔에서 나왔을 때는 새벽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하품하는 옐리세이를 아파트까지 데려다준 저우룬칭은 그가 들어가는 것만 보고 차를 돌려 나오려다 불현듯 창문을 내렸다.

"어이, 백돼지."
"으엉?"

하품하며 대답하느라 퍽 기이한 목소리로 돌아보는 옐리세이에게 내처 말했다.

"훗카이도가 러시아랑 가깝다 보니 그쪽 마피아들은 야쿠자 영향을 받아서 구슬 같은 보형물을 넣은 놈들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넌 이런 동남아 구석의 촌동네에서 대체 뭐냐?"
"남이사."
"제거할 생각은 없고?"
"왜 빼. 멋있기만 한데."

이죽대는 그에게 딱 한마디만 던진 저우룬칭은 창문을 올리고 출발했다.

"구슬 제거하면 빨아 주마."

골목을 빠져나가며 힐끗 본 백미러로 하품하던 턱이 바닥으로 떨어진 옐리세이의 모습이 비쳤다.





CHAPTER 5





구슬 제거하면 빨아 주마.
구슬 제거하면 빨아 주마.
구슬 제거하면 빨아 주마.
구슬 제거하면 빨아 주마.
구슬 제거하면 …….
나직한 음성이 감미롭게 뇌리를 휘돌았다.

저우룬칭은 입이 작다. 그 작은 입에 완전히 발기한 자신의 것을 쑤셔 넣고 목젖까지 박아서 흔들고 싶다는 충동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 안에 자리하였던 욕망 중 하나였다. 놈이 하는 짓을 보아하니 입에 억지로 넣으면 끊어 먹고도 남을 것 같아서 참고 있었지만 제가 먼저 빨아 준다질 않나.

‘그럼 제거해야지.’

옐리세이는 몽롱함에 젖어 결심했다. 엉덩이를 실패했는데 입까지 실패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한 번밖에 써먹어 보지 못한 거, 왜 구슬을 박았는지 갑자기 후회감이 들었다. 보형물 제거 수술을 하고 나면 한동안 섹스할 수 없을 텐데.

어젯밤의 섹스도 본의는 아니었지만 몹시 만족스러웠고, 차후의 펠라티오도 몹시 만족스러울 것이다. 수면은 몇 시간 취하지 못했지만 흥분감에 졸리지도 않았다. 반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감각으로 흐늘흐늘 무역 회사 빌딩에 들어갔다.

빌딩 최상층 전체를 체자르는 사택으로 이용하고 있었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마피아 사업상의 기밀과 더불어 보스의 신변 경호를 해야 하기에 빌딩의 보안은 매우 엄격하였다. 체자르의 최측근으로써 경호팀장을 맡고 있는 옐리세이는 보안실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나오셨네요."

야간 근무를 하며 진하게 내린 커피를 마시던 빠벨이 인사했다. 사무실의 야간 근무 팀은 빠벨을 제외하고 2명이 더 있었다. 유리 시베드와 짐 키를로프였다. 그들도 빠벨의 뒤를 이어 옐리세이에게 인사했다.

"빠벨까(빠벨의 애칭). 어젯밤에는 별일 없었고?"

곁눈으로 CCTV를 훑어보며 물었다. 큰일은 없었다고 대답한 빠벨은 피로한 기색으로 기지개를 길게 켰다. 그리고 보안 기록과 일지를 가지고 왔다.

의례적인 보고가 끝나자 빠벨이 히죽 웃었다. 평소에는 신중한 녀석이 어쩐지 음흉하기까지 한 얼굴로 웃음 지은지라 옐리세이는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이 자식이 새벽에 야참을 잘못 처먹기라도 했나.

"간밤에 좋은 일이 있으셨다면서요?"

흠칫 어깨가 굳었다.
좋은 일. 그래, 좋은 일이 있기는 하였다. 남자 밑에 깔려서 허덕거리면서 쾌감에 젖어 울었던 좋은 일.

다른 일도 아니고, 같은 남자의 아래에서 여자처럼 다리를 벌렸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그의 조폭으로써의 인생은 아주 많이 고달파질 것이다. 설마 모텔 창문으로 목격한 놈이 있지는 않을 터인데, 설마.

조마조마 마른 침을 삼키는 옐리세이의 염려를 알 리가 없는 빠벨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모텔에서 홍가의 그 남자, 이름이 저우였던가요? 아무튼 같이 나오시는 걸 본 녀석이 있었습니다."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당황하여 대꾸도 못하고 입술만 벌렸으나, 빠벨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하하. 어떠셨어요? 그렇게 탐을 내시던 엉덩이요."
"어? 아, 아아……. 하하! 하하하."

빠벨의 말을 빠르게 되짚어 본 옐리세이는 짐짓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엉덩이랜다,  엉덩이. 내 엉덩이가 아니라 루이의 엉덩이.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모텔에서 나란히 나오는 걸 목격하였다면 자신이 저우룬칭에게 깔리는 게 아니라 그 반대를 상상할 터였다. 최소한 옐리세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가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리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저우룬칭이 어제 손목을 묶을 때 손수건을 덧대어 흔적이 남지는 않았지만 괜스레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가 게이라는 건 잘 알려진 소문이지만 10대에 바텀이기도 했다는 건 이오시프만 알았다.

"인마, 꼭 내가 말을 해야 알겠냐. 그 자식은 엉덩이만 환상적인 게 아니라 속살도 끝내주게 쫄깃쫄깃해. 운동을 해서 그런지 죽여주더라고."

옐리세이는 자신의 망상을 사실인 양 뻔뻔하게 포장하여 늘어놓았다. 신나게 말을 늘어놓다 보니 거짓말은 점점 더 부풀었다. 제발 박아달라고 애원을 했다는 둥 울면서 매달렸다는 둥 처녀의 조임은 남다르다는 둥 온갖 뻥이 난무하였다. 뭐, 저우룬칭의 귀에 들어갈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저도 예전에 처녀 하나 딴 적이 있는데요, 그년이 어찌나 앙칼지던지……."

옐리세이의 이야기는 게이이든 헤테로이든 남자들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성경험담으로 발전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보안실에 음담패설이 떠돌았다.

홀쭉하니 마른 청년이 끼어들었다. 빠벨과 같이 지난밤에 아간 근무를 하였던 멤버 중 가장 어린 짐이었다.

"그 자식이 남자라는 게 아쉽네요. 여자이기만 했다면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께서 지겨워지셨을 때 저희도 돌려 먹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다. 옐리세이와 다년간 동거하기도 하여 그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빠벨이 다급히 옆구리를 치며 눈치를 줬지만 이미 옐리세이의 귀에 들어가고 난 후였다.

"아님, 그 정도로 조임이 좋다면 남자라도,"

짐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뻑! 하는 둔탁한 타격음이 뒷말을 삼켰다. 허공에 피를 뿌리며 뒤로 발이 붕 뜬 그는 의자에 걸려 나동그라졌다. 빠벨은 한숨을 삼키면서 이마를 감쌌다. 나른한 아침을 화기애애하게 물들이던 분위기가 단숨에 냉각되었다.

"너 뭐라고 했냐. 다시 한 번 지껄여 봐. 누구를 어쩐다고?"

격의 없이 대화하며 싱글싱글 웃었던 게 거짓말처럼 흉흉한 기세가 살벌하게 드리웠다.

"죄, 죄송합……꺽!"

피가 쏟아지는 코를 닦을 여유도 없이 허둥지둥 일어나서 사죄하는 짐의 얼굴을 옐리세이가 거머쥔 채 벽에 쾅쾅쾅 연속으로 처박았다. 비명에 섞여 두어 개의 이가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씨발년이. 오냐 오냐 해 주니까 내가 아주 그냥 우습고 만만하지? 어?! 그 자식을 길바닥 허벌보지 창년들과 똑같이 걸레 취급하는 건 나까지 깔아보고 있다는 거야, 새끼야!!"
"요, 용서, 끄아아악!"

어눌한 발음으로 정신없이 잘못을 비는 청년의 머리채를 바닥에 내던진 옐리세이는 접는 의자를 허공에 높이 쳐들고는 그대로 연거푸 내리쳤다. 차츰 피비린내가 나기 시작하는 보안실의 험궂은 공기에 자라목이 되어 있던 빠벨과 유리가 짐의 비명성에 섞인 이질적인 소리에 움찔했다. 모를 리가 없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다.

짐의 팔이 확연히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음에도 노염이 풀리지 않아 넥타이를 한 손으로 끄르며 다가갈 때, 누군가가 반쯤 열려 있던 문을 탕탕 세게 노크했다.

"옐리세이. 용건이 있는데 많이 바쁜가?"

시퍼런 살기가 어린 시선이 뒤로 꺾였다.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여자가 위축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옐리세이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피가 튄 주먹을 내렸다.

"나스따시야 발롄찌노브나? 당신은 또 왜?"
"방해해서 미안하다만, 보스의 경호 문제로 할 말이 있어서."

나스따시야 우스치노바는 체자르의 비서였지만 단순한 부하가 아니라, KGB 산하의 스빼츠나츠인 빔펠 그룹(러시아의 특수부대 중 하나) 출신으로 체자르와는 KGB 시절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이다. 옐리세이로서도 성질 뻗치는 대로 경솔하게 대거리할 수 없는 여자였다. 더욱이 체자르의 경호 문제라면 더 할 말이 없어진다.

"알았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3층 줴(Ж) 회의실에 있을 테니까 피나 씻고 와라."

나스따시야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멀어졌다. 옐리세이는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는 짐을 한 번 걷어차고는 보안실을 나갔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세수까지 하였지만 재킷에 튄 피까지 씻지는 못했다.

즐겁게 시작된 아침을 완전히 잡쳐 바닥에 침을 뱉고는 계단을 올랐다. 그가 앉자마자 나스따시야는 폐일언하고 서류철에서 꺼낸 사진 한 장을 툭 던졌다.

"누군지는 알지?"

골프 웨어를 입은 몇 명의 사람들이 포즈를 취한 사진 속 왼쪽에서 두 번째 남자의 얼굴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옐리세이에게도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불과 한 달 간에 직접 대면한 적이 있기도 하다. 드미뜨리 베레조프스끼. 사진에 찍힌 다른 사람들과 란뜨제프스카야의 모스크바 본부의 대간부다.

"베레조프스끼의 야이쑤코 방문 일정이 잡혔다. 3박 4일 제류 예정이니 경호 루트를 짜줘야겠어."

나스따시야는 드미뜨리의 체류 일정표를 테이블 위로 밀어 주었다.

"뭐가 이렇게 갑작스러워?"
"나도 보스께 오늘 아침에 전달받은 거다. 명목은 다음 달에 있는 보스의 생일 축하지만 실상은 감사와 감시겠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찰을 보내다니 본국 사정이 생각보 다 더 안 좋은 것 같군."

얼마 전에 페카에게 들은 얘기도 있었기에 옐리세이는 무슨 사정이냐는 얼빠진 질문을 하지 않고도 어렵잖게 전후 맥락을 파악했다. 체자르가 독립하거나 타조직과 내통하게 되는 상황을 저어하고 있으리라.

"내일 안으로 끝낼 수 있겠지?"
"알았어."

툴툴거리며 일정표를 반으로 접어 갈무리했다. 연애할 시간도 부족한데 일을 해야 한다니.
용무는 끝난 것 같아 돌아가려는 옐리세이에게 나스따시야가 물었다.

"오늘 점심때 시간 되나? 오랜만에 점심이나 같이하면서 얘기를 하고 싶은데."
"바쁜데. 병원 가야 돼."

생각할 것도 없이 즉답했다.

"병원? 어디 아픈가?"
"아픈 건 아니고, 다……. 붕대 풀고 검진받으러. 여기 탈골됐었거든."

하마터면 다마를 빼기 위해서 간다는 대답을 할 뻔하였던 옐리세이는 다급히 말을 바꿨다. 붕대를 풀 때가 되기도 했다. 나스따시야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손이 그 모양인데도 여전히 S&W M29를 가지고 다니나? 탈골상이라면 재활훈련도 할 텐데 유사시에 한 손으로 쓰기 쉽게 22구경으로 바꾸지그래."
"신경 끄쇼. 빗맞아서 뒈져도 내가 뒈지니까."

그녀의 말이 옳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순순히 인정 싫어서 일부러 내쏘았다. 나스따시야가 혀를 찼다.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런 때에 손가락 골절이라니. 자기 관리가 아주 엉망이야. 네가 내 부하였으면 불알을 걷어차서 터트려줬을걸."
"당신이 남자였으면 나한테 벌써 따먹혔어."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체자르의 밑에서 같이 일을 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결코 서로가 잘 맞는 동료는 아닌 탓이다.

잠시 냉각의 시간을 가진 두 사람은 이틀 후 낮으로 점심 약속을 정했다. 옐리세이는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제이슨에게 전화하여 수술 예약을 했다.

보형물 삽입 수술처럼, 제거 수술도 금방 끝났다. 탈골되었던 손가락도 잘 아물었다. 제이슨은 삽입 수술을 하였을 때와 같은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덥더라도 샤워는 며칠 참고, 나흘 후에 한 번 더 병원에 들러. 경과를 봐야겠지만 큰 문제가 없으면 실밥은 다다음주에 풀면 될 거야. 아, 그리고 나가는 길에 로널드에게 들러서 손가락 재활훈련법을 배우도록 해."

아랫도리에서는 무언가의 허전함을, 왼손에서는 시원함을 느끼며 끄덕거리는 옐리세이에게 제이슨이 넌지시 떠보았다.

"근데 수술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제거하는 거야? 희희낙락 좋아하더니만. 나야 간단한 수술로 돈만 받으면 땡이지만 여자들은 보형물 안 좋아하니까 숙고하라고 진즉 충고하질 않았나."

옐리세이가 으스대며 어깨를 폈다.

"내 애인 一 이 단어의 어감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一 이 제거해 달라고 해서. 안 그래도 내 물건이 커서 버겁대."

이미 한 번 빠벨을 비롯한 부하들의 앞에서 신나게 나불거렸던 뻥은 이번에도 술술 나왔다.

"허, 애인? 그런 것도 키웠나?"

사창가에서 이 남창, 저 남창 분별없이 만나고 다니던 옐리세이의 입에서 절대 나올 리가 없다고 여겼던 단어의 등장에 제이슨이 매우 놀라워하였다. 옐리세이는 더욱 의기 양양해하였다.

"어제부터 사귀기로 했어. 그래서 말인데, 섹스는 언제부터 가능하냐? 이번에도 한 달은 지나야하나?"
"당연하지."

제이슨은 놀라워하는 한편으로 성실하게 의사로서 답변해 주었지만 옐리세이는 긴장했다. 한 달이라니. 말도 안 된다. 똑같은 금욕 기간이라도 삽입 수술을 하였을 때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음, 거시기, 뭐랄까…… 꼭 삽입 하지 않아도 섹스의 방법은 많잖아? 손도 있고 입도 있고."
"자네도 블로우 잡은 성교가 아니라는 주장을 할 작정인가?"

혀가 끊어져도 절대 내가 엉덩이 구멍을 쓰게 되었으니까 앞을 안 쓰는 섹스는 가능하지 않겠냐,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애매하게 얼버무린 그에게 제이슨이 농을 하며 은근하게 웃었다.

"거칠게 하지 않는다면 가능은 하지만 적어도 실밥은 뽑고 난 후로 미뤄두는 게 좋을 거야. 성교를 며칠 참지 못해서 무리하게 했다가 두 번 다시 쓰지 못하게 되고 싶지는 않겠지?"

물론이었다. 자신의 것보다 훨씬 큰 사이즈를 지닌 저우룬칭의 것을 보고 같은 수컷으로써 주눅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옐리세이는 그의 차진 엉덩이에 자신의 물건을 처넣고야 말겠다는 욕구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원장실을 나가는 그에게 제이슨이 마지막 충고를 해 주었다.

"아, 허벅지에다 하는 건 안 돼."

물리치료사에게 재활 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병원을 나오는 길에 전화를 걸었다 한창 바쁜 시간일 텐데 통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어」

느슨하게 긴장이 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 옐리세이는 자신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싱긋 웃었다.

"나 수술했지롱. 이제 네가 빨아주기만 하면 돼."
「빠르기도 하다」
"네 마음이 바뀌어서 나중에 이상한 소리 하면 안 되잖냐."
「그런 거짓말은 안 해. ……아, 잠시만」

저우룬칭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번다한 주방의 소음 사이로 몇 마디 오고가는 중국어가 희미하게 들렸다. 얼마 뒤 저우룬칭이 다시 휴대폰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수술하고 바로 섹스는 못 할 거 아냐.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건데?」
"2주. 왜, 내 훌륭한 물건을 빨지 못해서 아쉽냐?"
「아쉽다면 앞쪽이 아니라 뒤쪽이겠지」
"그건 닥쳐!!"

네 몸이 좋았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또 나오기 전에 옐리세이는 소리를 꽤 질러 말허리를 끊었다. 반대편 손으로 부채를 펄럭펄럭 부치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한 며칠 바빠서 홍가에는 못 갈 것 같아. 오빠가 보고 싶더라도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잘 견디고 있어라, 알겠냐?"

「흠, 그래? 네 아파트 꼴을 보니 미엔 음식을 사 먹기만 하는 것 같길래 여기 오면 저녁 식사 정도는 만들어 주려고 했었는데, 바쁘다니 어쩔 수 없지」
"기다려. 늦더라도 오늘 간다."
「뒷문에서 주방으로 바로 와라」

바쁘다며 통화는 오래 하지 못하고 곧 끊어졌지만 옐리세이는 마냥 신났다. 저우룬칭이 오라고 한 건 처음이었다.

‘이게 연애의 맛이구나……!’

진즉 연애를 할걸 그랬다. 아침나절에 겪었던 불쾌한 감각이 싹 사라졌다. 빨리 일을 해치워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쳤으므로 옐리세이는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대신에 택시를 잡았다.





화공당 총주의 암살 이후 삼 년이라는 공백이 있긴 하였으나, 장쯔궈는 저우룬칭이 홍콩의 흑사회에 몸을 담게 된 십 대 후반부터 십 수년간 동고동락하였던 최측근이었다. 순전히 저우룬칭에게 반하여 홍콩중문대학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포기했을 정도다. 그 후로도 생활 영역의 일부만이 교차하는 홍위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고로, 저우룬칭의 본의와는 반대로 그에게 꼬이는 숱한 남자들을 저우룬칭만큼이나 목격한 사람이었다.

옐리세이는 장쯔궈가 목격한, 저우룬칭에게 접근하였던 남자 중 가장 무례하였고 가장 재수 없었고 가장 변태였고 가장 막돼먹었고 가장 무람없었으며 가장 껄떡거렸으며 가장 지랄 맞았으며 가장 뻔뻔했다. 어젯밤만 하여도 저놈이 난동을 부린 탓에 홀이 엉망이 되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홍위롄의 안전과 평화라는 약점이 걸려 있다고는 하나 왜 저우룬칭이 이 변태 호모를 야멸치게 떨어트리지 못하는지 의문이었다. 야이쑤코에서 홍위롄을 보호하는 사람이 그 혼자만이 아닌데도 말이다.

오늘도 이 변태는, 넙죽 주방으로 들어와서 요리 중인 저우룬칭의 엉덩이를 슬쩍 만지려다가 중화식도의 칼등으로 손을 후려 맞고 부루퉁하게 앉아 있었다. 자신이 저우룬칭의 입장이었으면 칼등이 아니라 칼날로 후려쳤을 것이다.

"야, 중국 놈."

벌겋게 된 손등을 문지르던 옐리세이가 아니꼽다는 투로 불렀다. 장쯔궈는 얼굴을 구겼다.

"내 이름은 장쯔궈라고 말했을 텐데?"
"중국 놈이든 장 뭐시기든 내가 알 게 뭐냐."

친절하게 정정해 주었지만 옐리세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대신에 이죽거리며 짜증을 냈다.

"새꺄. 날 앞에 두고 있으니 안달복달 가슴이 설레고 아랫구멍이 움찔거릴 정도로 동하는 건 알겠는데, 백날 쳐다봐도 너한테 기회 안 돌아가. 넌…… 너무 내 취향이 아니거든. 엉덩이도 처진 놈이."

탕탕탕 고기를 썰던 저우룬칭의 칼 소리가 움찔 멎었다.
저 변태의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아 설거지하던 것도 멈추고 두어 번 곱씹은 장쯔궈는 잠시 후에야 붉으락푸르락했다.

"정신 나간 새끼야! 네놈 대가리에는 좆 휘두르는 생각밖에 없냐?!"
"씨발놈. 꼴에 눈 달렸다고 잘생긴 건 알아서."
"아니라니까!!"

변태에게 변태라는 오해를 받는 것만큼 분통이 터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옐리세이는 그가 화를 내든 말든 귀를 후비며 듣지도 않았다. 수세미를 변태 새끼의 얼굴에 집어던지며 폭발하기 직전에 저우룬칭이 광둥어로 다독였다.

"신경 쓰지 마. 저 자식 말에 일일이 반응하면서 화내면 네 수명만 닳는다. 무시해."
"하지만요……!!"
"어차피 너한테 말한 거 뒤돌아서면 까먹을걸."

옐리세이의 제 1 피해자인 저우룬칭의 충고인지라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장쯔궈는 언젠가 저 자식 뒤통수를 갈겨 버리고 말 것이라는 결의를 다지며 개수대의 물을 틀었다.

저우룬칭은 고기를 볶기 전에 찜기를 열고 잘 익었는지 확인했다. 만두야 많이 만들어 보았지만 뻘몌니(러시아 요리. 만두)는 처음인데 첫 시도치고는 그럭저럭 선방한 것 같았다. 찜기에서 뻘몌니를 옮겨 담고 졸린 얼굴로 앉아있는 옐리세이를 불렀다.

"하나 먹어 봐라."
"오, 벨몌니잖아."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옐리세이는 갓 쪄내 뜨거운 김이 풀풀 올라오는 벨몌니를 호호 불어가며 먹고는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 엄마보다 네가 더 낫다니까. 저녁도 안 먹고 쫓아온 보람이 있군."
"9시가 넘었는데 하나도 안 먹었냐?"
"일하다가 편의점에서 빵이랑 우유만 좀 사다가 배 채웠어."
"아까 보니까 너네 조직 놈들이 있던 것 같은데 가지고 가서 먹을래?"

한 손에 접시를 든 채 옐리세이는 카운터 밖으로 고개를 쪽 뺐다. 저우룬칭이 말한 조직원은 곧 찾을 수 있었다. 빠벨과 빠벨의 동료들이다.

큰 테이블을 차지하고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그들과 행여나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까 얼른 주방으로 돌아왔다.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깝죽거렸던 짐을 자근자근 밟아주었으니 저우룬칭의 앞에 대고 허튼소리를 지껄일 녀석은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루이의 처녀를 깼다느니 앙앙 울면서 안겼다느니 온갖 뻥을 다 친 마당에 저우룬칭의 앞에서 빠벨과 같은 자리에 있는 건 아주 많이 켕겼다.

"됐어. 여기서 네 엉덩이나 보면서 먹을래."
"……홀에서 먹는 게 편할 텐데."

또 시작된 엉덩이 타령에 저우룬칭은 한숨을 쉬기는 했지만 밖으로 가지고 나가라는 종용은 하지 않았다. 저녁을 매우 부실하게 때워 꽤 주렸던 옐리세이는 빠른 속도로 벨몌니를 입으로 옮겼다. 넉넉하게 만들었던지라 남으면 러시아 마피아들의 테이블에 서비스로 내줄까 했지만 그가 먹는 걸 보니 오히려 부족한 게 아닐까 우려되었다.

장쯔궈는 숫제 무시하기로 작심한 듯 아예 옐리세이 쪽으로 돌아보지도 않으며 설거지를 끝내고 리뎬신이 가져온 새 주문을 받아 안주를 준비했다. 저우룬칭이 커다란 중화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옐리세이가 먹느라 조용해지자 주방에는 한동안 주방 본연의 소음으로 복닥거렸다. 가출하지 않았을 때에는 설거지 정도만 했고, 가출한 후에는 물론이거니와 마피야가 된 지금까지 제 손으로 변변한 음식을 한 번 만들어 먹어 본 적이 없었던 옐리세이에게는 굉장히 낯선 장소였으며,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똑같이 주방에 있음에도 자신은 부외자저럼 떨어져 있으나, 요리를 하는 저우룬칭의 뒷모습은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들어 제 역할을 다했다. 요리로 인해 후끈후끈한 주방의 열기와, 맛있게 풍기는 냄새와, 보글보글 끓기도 하고 지글지글 익기도 하는 소리와, 이따금 하나씩 들어오는 새 주문을 외치는 음성과, 깨끗하게 닦인 식기와 맛있는 요리로 재탄생할 준비를 갖춘 식재와, 오감을 일깨우는 모든 것들이 저우룬칭과 어우러져 있었다.

여기가 저우룬칭의 공간이었다.
처음으로 엿보게 된, 그리고 그가 허락해 준 저우룬칭의 영역이었다.

"다 먹었냐? 안 부족해? 배고프면 다른 거 만들어 줄까? 러시아 요리가 더 준비된 게 없어서 늘 가게에 있는 메뉴겠지만."

고기와 야채를 볶은 접시를 리뎬차이에게 건네준 저우룬칭이 다음 주문이 있는지 확인하며 물었다.

옐리세이는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살짝 흠칫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배는 빵빵해."

그러다 문득 입을 다물었다. 식사를 하라고 불렀으니, 식사가 다 끝났으면 돌아가야 하나? 물론 순순히 돌아갈 그가 아니었다.

"먹을 건 됐고, 안주는 없어도 되니까 보드카나 좀 줘."
"상관없긴 하다만……."

저우룬칭이 주방 밖으로 나가 차갑게 식힌 보드카와 술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술도 여기서 마시려고? 많이 바쁜 건 아니지만 너랑 놀아줄 만큼의 시간은 없다."

네 영역에 한쪽 발을 담가 구경하는 게 즐겁다, 라는 말을 하기엔 아무리 옐리세이라도 목 안이 간질간질했다. 그는 술을 따르며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본다고 네 엉덩이가 닳기야 하겠냐."
"아예 내 엉덩이 사진을 찍어서 들고 다니지 그러냐."

어처구니가 없다는 저우룬칭의 핀잔에 귀가 솔깃했다.

"좋은 생각이군. 내일 사진기 가져올 테니까 예쁜 속옷 입고 기다려. 아예 안 입을수록 환영이야."

안 들으려고 해도 한 공간에 있어 안 들을 수가 없던 장쯔궈의 손에서 양념통 하나가 미끄러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중하게 사양하도록 하지."

더 추근거리기라도 말까 저우룬칭은 서둘러 말을 끊고 할 일로 돌아갔으며, 옐리세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오래도록 구경할 준비는 만반이었으나 지난밤에 몇 시간 수면하지 못하였던 것과, 주방의 따끈따끈한 열기와, 얼큰하게 오르는 취기라는 복합적인 요소는 옐리세이를 곧 수마의 늪으로 이끌었다. 조리대에 팔을 괸 채 꾸벅꾸벅 존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저우룬칭이 깨웠다.

"집에 돌아가든가, 졸려서 못 갈 것 같으면 그냥 내 방에 올라가서 자라. 위치는 알지?"
"……어, 응? 안 졸았어. 인마."

괜히 졸앗던 걸 부정하며 뾰족한 목소리로 내지른 옐리세이는 온도가 밍밍해진 채로 잔에 남은 보드카를 몇 모금 더 마셨지만, 역시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얼굴이 아래위로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다가 훅 꺾이는 기세에 제풀에 놀라 흠칫 눈을 뜬 그의 앞에 참 딱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는 저우룬칭이 있었다.

"쳇."

반쯤 수마에 잠긴 와중에도 구시렁거리고는 일어났다. 당연히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뒷문이 아닌,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불이 꺼진 저우룬칭의 방에 하품하며 들어와 어둠 속을 더듬어 침대에 안착하고는 신발을 벗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저우룬칭의 뒷모습을 상기하다가 잠이 들었다. 창밖에서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빛이 어둠을 틈타 넘어왔다.

낯선 방과 낯선 침대였던지라 깊이 잠들지 못하였는지, 살그머니 문을 여는 기척이 수마의 바닥에 잠겨 있던 의식의 가장자리를 끌어올렸다. 거의 발을 내딛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기척은 침대 머리맡에 얼마간 머물렀다가 장롱 방향으로 향했다. 장롱문이 여닫히고, 무언가 한 아름 양팔에 안은 듯한 기척이 방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하고는 몇 걸음 돌아왔다. 가볍게 어깨를 흔드는 기척이 의식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내일 아침 몇 시에 깨워주면 되냐?"
"……으응?"
"몇 시에 일어 나냐고."
"음……. 응……."

혼몽함에 젖어 명확한 언어가 되지 않는 소리를 웅얼거리던 그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C е м ь  ч а с о в……."
"영어로 말해 봐."
"…… C е м ь ……. 7시……."
"알았어. 자라."

저우룬칭은 어깨를 한 번 토닥여주고는 등을 돌렸다. 옐리세이는 축축 바닥으로 처지는 팔을 간신히 올려 그가 안고 있는 얇은 이불을 붙잡아 당겼다. 더 할 말이 있는지 의아해하며 허리를 깊이 숙인 그를 잡아당겨 침대에 쓰러트리고는 허리를 안았다.

"침대 좁은데……."

곤란한 투로 중얼거리기는 했으나 저우룬칭은 억지로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누웠다. 옐리세이는 큰 베개를 안고 자는 것처럼 그의 등과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아침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다 왔다. 일어나."

저우룬칭의 채근에 세상모르고 졸던 옐리세이는 눈을 부볐다. 차창 너머로 익숙한 광경이 보인다. 란뜨제프스카야의 무역 회사 빌딩이다.

"넌 어떻게 된 놈이 그렇게 자고도 또 자냐?"
"만성 피로 모르냐? 만성 피로."

대놓고 주는 핀잔을 옐리세이도 받아치며 기지개를 좌석 뒤로 길게 켰다. 어제 아침에 저우룬칭이 데려다주었을 때에도 조수석에서 정신없이 자 버린 탓에 물어물어 길을 찾더니, 오늘은 제대로 잘 찾아온 모양이다.

늘어지는 하품이 나왔다. 엊그제는 홍가에서 잠들어 저우룬칭이 아침에 데려다주었다. 어제도 일이 늦어 홍가에서 저녁 식사라기에는 퍽 늦은 저녁을 먹고 잠든 탓에, 오늘 아침도 저우룬칭이 데려다주었다. 삼일 내내 같은 옷을 입고 나와도 되는 걸까.

"너도 그날 새벽에 잤을 텐데 안 피곤하냐?"
"졸리긴 한데, 오후에 낮잠도 자고 하니까 그럭저럭?"
"나도 낮잠이나 자고 싶다. 휴가 때가 좋았지……."

옐리세이는 아련하게 중얼거리며 창문에 얼굴을 기댔다. 빌딩 앞에 도착하니 몹시 들어가기 싫어져서 자꾸만 뭉그적거리게 된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에는 사무실을 지키거나 시간을 가리지 않고 보스를 경호하였지만, 야이쑤코에서는 체자르의 행동반경이 좁아 대부분의 일을 보안에 할애하다 보니, 이건 마치 정시 출근하는 회사원 같지 않은가. 요 근래 큰 잡음 없이 평화롭다는 점도 좀을 쑤시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확 항쟁이라도 터지면 신날 텐데. 베레조프스끼가 암살당하면 굉장하겠지? 화끈하게 총질이나 하고 싶다아…….’

불손한 상상을 하며 꿈지럭거리고 있자니 저우룬칭이 퉁바리를 놓았다.

"출근하는 회사원이 따로 없구만."

딱 두 번 봤을 뿐인데 예리한 관찰력이었다.
흘끔 시선을 옆으로 움직였다. 옐리세이를 아침에 깨우고 데려다주느라 덩달아 일찍 일어나게 된 저우룬칭도 아닌 게 아니라 졸린 낯이었다.

어제는 모처럼 손님이 없어 가게도 일찍 문을 닫아 저우룬칭과 술을 마셨다. 시덥잖은 한담이었다. 옐리세이는 무용담처럼 야이수코에서 있었던 항쟁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저우룬칭도 가게에 찾아온 어리벙벙한 관광객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성적인 의도를 내포한 남자와 한 공간에 있으면서 섹스하지 않고 이야기만 한 건 처음이었지만, 섹스를 하지 않고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렇다고 섹스하기 싫다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충동적으로 운전석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운전하느라 쓴 저우룬칭의 안경을 벗기며 키스했다. 목을 당겨 안자 멈칫하기는 했지만 피하지 않고 순순히 입술을 열며 호응했다. 좁은 차 안이 질척거리는 물소리와 가쁜 숨소리로 달아올랐다.

"아씨……."

저우룬칭의 바지로 미끄러지려는 손을 애써 꾹 주먹 쥐며 안절부절못하다 그의 입술을 깨물고 빨며 끙끙거렸다. 실밥도 안 뽑았는데 지나치게 발기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다아……."
"끔찍한 소리를 다 하네."
"빌어먹을. 다마 괜히 넣었어."

삽입 수술 이후 체자르에게 갖은 구박을 받아도 꿋꿋하기만 하였던 후회감을 처절히 곱씹으며 다시 혀를 섞었다. 갑자기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빵빵빵 울렸다.

"개씨발 호모 새끼들아! 아침부터. 재수 옴 붙게 들러붙지 말고 차나 빼!!"

다짜고짜 퍼부어지는 욕설에 옐리세이가 확 인상을 구기며 차 문을 열었다. 저우룬칭은 머쓱하게 입술을 닦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석 밖으로 고개를 빼고 짜증을 내는 뒤차를 확인한 옐리세이는 같이 운전석 옆으로 가서 대거리질하는 대신에 멋대로 조수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목소리가 너 같더라니까. 왜 듣는 호모 기분 나쁘게 욕을 지랄이야?"
"넌 줄 알고 욕한 거야. 우리 빌딩 앞에서 차도 안 빼고 들러붙을 간 큰 호모가 너 말고 누가 있냐?"

이오시프가 투덜거리며 차를 몰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왔는데?"
"내가 보스께 보고할 게 없으면 여기까지 오겠냐. 그보다 아까 그거, 루이 아냐? 모텔에서 나오는 거 목격당했다는 소문은 애들한테 들었다만."
"젠장. 벌써 네 귀에 들어갔냐? 그 잡놈들은 남의 연애사에 뭔 관심이 이렇게 많아?"

제일 먼저 저우룬칭을 목표 삼았음을 떠벌리고 다녔던 장본인이 뻔뻔하게 구시렁거리자 이오시프는 어이가 없어서 가자미눈으로 노려보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옐리세이부터 차에서 내쫓으려는데, 옐리세이가 문득 마른침을 삼키며 속닥거렸다.

"이거 비밀인데…….  너한테만 고백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말하지 마."
"뭔데?"
"루이 놈이랑 자긴 했는데, 음……. 실은 내가 그, 밑에…… 깔렸어."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거니 싶어 시동을 끄고 하품하다, 이오시프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잠기운이 확 달아났다.

"지, 진짜냐?"
"어어……."

옐리세이가 대시보드에 얼굴을 푹 처박았다. 이 바닥에서 남자에게 깔리는 년은 사내 취급도 제대로 못 받고 조롱거리가 된다는 걸 익히 잘 아는 이오시프는 뭐라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쩌다가?"
"처음부터 원해서 깔린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근데 그 새끼가 말이야. 씨발……. 커……."
"……크냐?"
"존나 커."

한숨을 푹푹 쉬는 옐리세이의 표정은 상당히 오묘했다.

"루이보다 큰 사이즈는 GV에서밖에 못 봤다니까. 그것도 GV 배우는 흑인이었다고. 루이 새끼는 동양인 주제에, 미친. 저런 흉기가 내 몸 안에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했네."

호모들의 섹스 따위를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상상이 갈 수밖에 없는 적나라한 발언이었기에 이오시프의 안색은 점차 누렇게 되어 갔지만 옐리세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망할 놈이 크기만 큰 게 아니라 테크닉도 죽여주더라니까. 아, 씨발. 진짜 깔렸다는 것만 생각하면 죽고 싶은데 섹스가 워낙에 굉장해서 몸은 근질거리고……. 미치겠다. 야."
"어, 그래……."

떨떠름한 대꾸가 이오시프의 입에서 나왔다. 저놈이 행여나 강간이라도 당해서 깔리게 되었다면 루이 새끼 죽이러 가라고 친절하게 총을 쥐여 주며 위로해 줄 작정이었지만 게속 듣다 보니 자랑인지 한탄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남자가 스쿼팅하는 건 AV에서만 봤는데, 그걸 내가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
"……AV? GV가 아니라?"
"어. GV에서는 스쿼팅을 괜찮게 하는 걸 아직 보기 힘들어. 당연히 내가 본 AV는 여자 스쿼팅이 아니라 남자 스쿼팅이었고, 남자 스쿼팅 전문가인 여자 배우가 나온다고 해서 역겨운 거 참고 봤는데 남자 배우가 페깅당하다가 허리 흔들면서 질질 싸는 게 아주 그냥……."

주섬주섬 말을 잇던 옐리세이는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헛기침을 흠흠 했다. 당시에는 그 남자 배우를 보며 꽤 꼴렸지만, 생각해 보니 저우룬칭에게 안겨서 허덕였을 때의 자신도 딱 그 모양이었을 게 아닌가.

"아무튼 직접 겪어 보니 상상 이상으로 존나 좋더라. 하마터면 복상사하는 줄 알았어. 그 영상 구워 놨으니까 빌려줄게. 너도 유이한테 해 달라고 해 봐."
"뭐, 고맙…… 다."

역시 들을수록 자랑질 같아 대답은 상당히 애매하게 나왔다. 의심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는 이오시프에게서 고개를 휙 돌린 옐리세이가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난 먼저 간다. 나중에 보자."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옐리세이의 뒷모습에 이오시프는 의심이 확신이 되는 걸 감지하였다. 애초에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차에 탄 거였잖아, 저 새끼.





옐리세이는 2시경에 나스따시야의 내선 전화를 받기 전까지 그녀와 오늘 점심 약속을 하였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낮에는 일하느라, 밤에는 저우룬칭과 노닥거리느라 바빠서 까먹었노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어디에서 먹으려고? 정해 둔 가게는 있냐?"

딱히 생각해 두고 있는 곳이 없다고 하면 겸사겸사 홍가로 갈 예정이었지만 나스따시아는 줴 회의실로 오라는 말만 하고 끊었다. 그곳에는 방금 배달받은 것으로 보이는 피자 한 판이 있었다.

"……꼴랑 피자 먹으려고?"
"난 좋아한다만?"

피자든 뭐든 음식은 가리지 않지만 저우룬칭을 정당한 이유로 만날 기회가 한 번 사라졌다는 생각에 괜스레 심통이 나서 투덜거리며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더러운 미제 자본주의의 상징인 피자 따위를 배달시켜서 먹어도 되냐? 나스따시야 발렌찌노브나 동지?"
"본래 피자는 이탈리아의 요리다만."
"콜라는 코카콜라잖아."

배달 도중에 콜라가 꽤 흔들렸는지, 뚜껑을 따자마자 기포가 끓어올랐기에 옐리세이는 기겁하여 떨어졌고 잠깐의 소동으로 불만을 잊고 얌전히 피자를 먹었다. 어쨌든 따끈따끈하고 두툼하고 토핑이 듬뿍 있는 피자는 맛있었다. 점심을 먹긴 했지만, 나가기 귀찮아서 부하를 시켜 사오게 한 편의점 음식으로 때웠던지라 피자는 술술 넘어갔다.

말없이 경쟁하듯이 피자를 먹으며 막 세 번째 조각에 손을 뻗었을 때 나스따시야가 자신의 피자 조각에 소스를 뿌리면서 바로 용건을 꺼냈다.

"스키예르벡, 무기상 페카 스키예르벡과 계속 친분을 유지 중인가?"

그녀의 딱딱한 말투는 마치 자신이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페카와 친하게 지낸다는 뉘앙스를 풍겼기에 다소 언짢아졌다.

"페카가 야이쑤코에 있을 때는 종종 만나지. 근데 왜?"
"거래할 게 있으니 다리를 놓아주었으면 한다. 무기가 부족해."

조직의 거래를 왜 날 통해서 하냐며 바로 되묻지 않은 건 피자를 우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짢음으로 찌푸려진 그의 낯을 다른 쪽으로 해석하였는지 나스따시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공식적인 루트로 스키예르벡과 거래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 필요한 부분은 정보이거든.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지만 스키예르벡과 친한 널 통하면 찔러 볼 구석은 생기겠지."

옐리세이는 하마터면 자신이 되물을 뻔하였던 질문이 상당히 멍청한 내용이었음을 깨닫고는 태연한 척 피자를 마저 씹어 삼켰다.

"뭐가 궁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식이 생긴 건 얼빵해도 일처리는 칼 같아서 절대 안 먹힐걸?"
"말했잖나.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두드려 보기는 해야지. 그리고 무기가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

나스따시야는 거기에서 말을 멈추고 남은 피자를 입으로 옮겼다. 그 사이에 옐리세이도 네 조각째의 피자를 빠르게 해치우고는 미제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입가심을 했다. 그녀도 곧 피자를 다 먹고 물휴지에 손가락을 닦았다.

피자를 먹으며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던 그녀는 그럭저럭 결심이 선 표정이었다.

"네 조력을 원하니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도리겠지. 옐리세이, 얼마 전 모스크바에 갔을 때 베레조프스끼를 만난 적이 있질 않나?"

옐리세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를 회상했다. 명목은 정례 보고였지만 실상은 본국의 상황을 탐지하는 것이었기에 두 달 내내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조직과 간부들의 눈치를 살피며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모스크바에 체류하기 위해 체자르가 다른 간부의 일을 돕는다는 핑계를 만들어 주었기에, 일거리도 늘어 신경은 두 배로 쓰였다. 두 달 사이에 4kg는 족히 빠졌을 거라고 확신했다.

베레조프스끼 또한 그 과정에서 마주하였던 간부 중 하나였다. 희게 센 머리칼을 넘긴 노년의 남자는 강퍅한 인상에 걸맞은 마뜩찮은 시선으로 옐리세이의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체자르의 부하냐며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을 하였다.

더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태도로 지나쳤던 그의 뒷모습이 상기되자, 30년만 젊었어도 깔아뭉개는 맛이 있는 콧대라는 생각까지 당시에 하였다는 것도 떠올랐다.

"보스를 되게 싫어하는 것 같던데."

나스따시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며 엄지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체자르 끼릴로비치뿐만 아니라 나도 싫어하지. 정통적이고 고루한 마피야의 사고를 지닌 베레조프스끼는 보스나 나와 같은 체키스트(KGB의 요원을 일컫는 말. KGB의 전신인 체카에서 비롯됨.)를 불신하니까. 문제는 보스를 불신하는 자가 사찰하게 되었다는 점이고. 이게 무슨 뜻인지는 너라도 알겠지?"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옐리세이는 바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눈썹만 깜빡였을 뿐인데 나스따시야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확신했는지 설명해 주었다.

"명심해야 할 건 베레조프스끼가 조직 내에서 반 체키스트의 목소리를 제일 크게 높이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이야. 더욱이 자신의 부하에게 야이쑤코 지부를 맡기려고 작심하고 있었는데 체키스트인 보스가 보기 좋게 이 자리를 낚아챘지. 당연히 보스에 대한 악감정만 겹치질 않겠나? 헌데 그가 사찰하게 되었다는 건, 이것이 대두목의 의향이시든 간부회의의 결과이든 본국에서 우리를 위험 요소로 보고 있을 확률이 크다."

알아서 설명해 주니 편하기는 했지만, 마치 자신이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씩 풀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니 기분은 더 나빠졌다. 도대체 내 지성을 어디까지 깎아보고 있는 거냐, 이 년은.

"그건 나도 알아."

‘나도’와 ‘알아’의 사이에 ‘생각해 보면’이라는 단어를 쏙 생략하며 내씹었다.

"내가 궁금한 건 베레조프스끼가 오는데 왜 페카에게 정보를 캐내려는 거냐고."
"뻔하지."

여전히 옐리세이의 지성을 신뢰하지 않는 투로 나스따시야가 말을 이었다.

"옐리세이. 야이쑤코에 우리 말고 다른 마피야가 어딘가?"

옐리세이는 이 같은 화법이 귀에 익었다. 어머니가 초등학교 교사였던 탓에 집에서도 종종 아들들에게 ― 가끔은 아버지에게도 ― 이처럼 질문을 먼저 던져 사고와 대답을 유도하는 화법을 무의식적으로 말하였던 탓이다.

28살씩이나 되어서 이 화법을 겪으니 상당히 기분 나빴다. 당장에라도 다 먹은 피자 판을 나스따시야의 면상에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으며 퉁명하게 대꾸했다.

"멘쇼프스카야."
"그걸 알고 있다면 결론은 간단하지. 베레조프스끼가 멘쇼프스카야에 줄을 대고 있는 것 같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이건 단순한 추측이지만, 멘쇼프스카야의 힘을 빌어 우리를 친 다음에 둘 다 약해진 틈을 타 본국에서 추방된 마피야 중 그의 입김이 몰래 닿는 조직이 우리를 대체하도록 지원하거나, 혹은 체자르 끼릴로비치를 축출하여 자신의 부하를 직접 앉히는 게 베레조프스끼의 베스트 플렌으로 여겨지는군."

음습한 음모가 난무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맛있게 잘 먹은 피자가 위 속에서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거, 그냥 대두목께 베레조프스끼가 딴 맘 품고 있다고 찌르지 그러쇼."
"증거가 없어."

그녀는 손을 깍지 끼어 책상에 얹었다.

"또 이런 정보는 낱낱이 까발리는 게 아니라 골수까지 우려먹다가 결정적인 때에 터트려야지."

누가 공작 부대인 빔펠 그룹 출신 아니랄까봐 티를 낸다고 옐리세이는 속으로 군소리하였다.

"이야기가 길어졌다만, 결론적으로 멘쇼프스카야가 항쟁을 주비하고 있는지 정도만 파악해도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옐리세이는 귀찮음을 듬뿍 담아 손을 허위허위 내젓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페카는 거의 부재중통화로 넘어가기 직전에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레사?」

텁텁하니 잠긴 목소리가 바닥을 긁고 있었다. 옐리세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시간이 몇 신데 처자고 있냐?"
「저는 환자의 신분으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페카가 전화기 너머로도 소리가 들릴 만큼 늘어지게 하품했다.

「무슨 일인데요?」
"너랑 거래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아, 내 개인 거래가 아니라 조직을 대표해서 말하는 거야."
「음, 그런가요」

한 번 더 하품한 페카가 물었다.

「옆에 거래 얘기 꺼낸 사람 있어요?」

과연 머리가 좋은 놈은 방금까지 숙면하다가 들은 한마디로도 얼추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힐끔 나스따시야를 쳐다보자 그녀가 대답해도 된다는 듯 턱을 주억거렸다.

"어. 우스치노바랑 같이 있는데."
「우스치노바라면……. 아, 체자르 끼릴로비치의 비서인 나스따시야 발렌찌노브나? 상황은 대충 알 것 같네요. 근데 지금 저희 회사 수송기랑 대형 선박이 대부분 서남아시아 쪽에 있어서 당장 큰 거래는 어려워요. 최대한이라고 해도……. 트럭 5대 분량인데 이 물량으로도 괜찮겠어요?」

페카의 말을 전해주자 나스따시야가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모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좋아요. 거래 날짜를 이번 주 내로 잡아서 이따가 장소랑 같이 연락할게요. 자다가 깨서 영 머리가 안 돌아가니까 잠 좀 깨고요」

통화가 끝나자 나스따시야가 한 손을 내밀었다.

이 여자가 웬 수작을 부리는 건지 의심하며 마시다 남은 콜라가 든 종이컵을 주니 산상을 구기며 밀어냈다.

"피자값을 줘야지."
"뭐? 당신이 쏘는 거 아니었어?"

게이라는 성적정체성과 별개로, 가부장적 사고가 강한 보편적인 러시아 남자답게 여자에게 식사를 대접받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았으나 이번은 조직의 일이든 무엇이든 자신에게 부탁하는 입장이다. 당연히 그녀가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라 믿고 있던 옐리세이가 어이없어하며 반문했지만 그녀는 외려 눈을 지떴다.

"내가 사준다고 했던가? 일단 지불은 내가 했으니 더치페이하자고."

치사한 년.

돈 몇 푼을 가지고 실랑이하기도 더러워서 옐리세이는 오만인상을 쓰며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가 피자 사고 만다." 그러다 멈칫 굳었다.

가슴 안쪽이 허전했다. 지갑이 없어졌다.

"이런, 씨……. 어디 갔지?"

허둥지둥 다른 주머니를 뒤졌지만 없는 지갑이 튀어나올 리는 만무하다. 나스따시야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다. 구질구질하게 쇼하지 마. 이번은 내가 샀다고 하지."
"제기랄! 내가 그깟 10달러밖에 안 되는 돈 때문에 이러겠냐! 당신한테는 더러워서 안 얻어먹는다고!"

어제 홍가에 갈 때만 하여도 지갑이 있었으니 지갑을 떨어트렸다면 분명히 홍가일 것이다. 더 초조해졌다. 밖에서 잃어버리는 게 낫지, 홍가에서 잃어버렸다면 저우룬칭이 그것을 볼지도 모른다.

옐리세이는 당장 지갑 찾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내지르고는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서 낯선 남성용 지갑을 하나 주웠다. 홀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면 모를까, 계단에 떨어져 있었으니 이 건물에서 살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주인일 텐데 일단 저우룬칭 자신의 지갑은 아니었다.

별 뜻 없이 지갑을 열어보았다. 지갑에는 VISA 신용카드와 전화카드가 각각 한 장, 30달러가량의 현금이 있었다. 이래서야 누구의 지갑인지 알 수가 없다. 필름칸에는 신분증이나 사진 대신 긴 끈이 달린 부적집처럼 보이는 봉투가 있었다. 구겨지지 않도록 살살 봉투를 빼낸 저우룬칭은 그제야 지갑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겉봉에 그려진 건 갈레리아 십자가(러시아 정교의 십자가.) 였다.

하는 꼴을 봐서 나일론 신자처럼 여겨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정교회 신자인 듯하다.

남의 부적을 함부로 열어볼 수 없기도 했고, 정교회 신자도 아닌 저우룬칭은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봉투를 원래의 필름칸으로 밀어 넣으려다 또 다른 종이를 발견했다. 일반 종이가 아닌, 인화지 뒷면이었다.

지갑 안쪽에 거꾸로 뒤집어서 보관 중인 사진이라니. 이번에야말로 호기심이 생겨 사진을 꺼냈다. 단란해 보이는 4인의 가족사진이었다. 10대 초중반의 두 소년과 그 뒤에서 소년들의 어깨에 나란히 손을 얹고 있는 한 쌍의 부부가 옐리세이의 부모라는 건 금방 알아보았다. 중년의 남자는 옐리세이를 빼닮은 얼굴이었다. 아주 잘생겼다. 십수 년이 지나면 옐리세이도 비슷한 얼굴이 될 것 같았다.

그럼 앞에 있는 두 소년 중 누가 옐리세이일까. 형제가 있다고 말한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났는데 동생이었는지 형이었는지는 가물가물했다. 소년들을 신중하게 관찰한 그는 동생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옐리세이일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형보다 동생 쪽이 더 예쁘장하고 귀여운 생김새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천사 운운하는 외모적인 칭찬도 많이 들었으리란 것까지 상상이 미치자 그만 웃음이 나왔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실없는 웃음을 계속 흘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우룬칭은 서둘러 사진과 종이를 지갑에 넣고 손님이 없는 홀을 가로질렀다.

"네. 홍가입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저우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사근사근한 남자의 목소리가 인사했다. 아는 사람의 목소리도 아니었고, 야이쑤코에 서 그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기에 의아했다.

"제가 저우입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저는 SPC사의 페카 스키예르벡이라고 합니다. 요전 홍콩에서 미스터 쑨에게 말씀을 들은 적이 있어요」

SPC는 거물 무기상들이 소속된 회사이다. 무기 밀매를 주로 담당하였던 쑨용을 떠올리며 일단 인사는 했다.

「음, 그러니까…… 저우 선생?」

페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가 어설픈 광둥어 발음으로 ‘신상(先生)’이라며 경칭하였기에 편하게 부르라며 대답해 주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한결 경쾌해졌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저우. 다름이 아니라 거래 계약을 할 장소를 찾는 중인데, 나흘 후에 홍가를 전세 낼 수 있을까요? 영업을 하지 않으시는 3시 30분부터 약 한 시간 정도면 될 듯한데요」
"글쎄요. 지금 사장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바로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연락처를 알려 주시면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영업하지 않는 시간에 가게를 세놓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고, 물어볼 만한 사람들은 위층에 있어 애매하게 대답했다. 페카는 홍가가 안 되면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하니 빨리 연락해주면 고맙겠다는 인사를 하며 휴대폰 번호를 불러주었다.

저우룬칭은 지금쯤 차이나타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홍위롄에게 전화를 했다.

「응, 아칭. 웬일이니?」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는 여태껏 없었던 일이라며 갸웃했다.

「귀찮게스리 왜 영업시간도 아닐 때 빌려달라고 그런다니. 한 시간 전세 요금이 500 달러라고 해 버려. 오케이 하면 돈 벌어서 좋고, 거절해도 손해 보는 건 없고」

저우룬칭 자신이라도 그 돈을 내고 이런 가게를 한 시간 전세 내느니 호텔 스위트룸을 빌려서 만남을 가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페카에게 그대로 말했다.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 여겼지만 그는 선선히 응했다.

「좋습니다. 요금은 바로 계좌로 이체해 드릴까요?」
"오셨을 때 지불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흘 후에 뵙죠」

페카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전하자 홍위롄은 500달러가 아니라 5,000달러쯤 부를 걸 잘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귀가하는 홍위롄을 마중 나갈 5시 30분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으므로 위층에서 눈이라도 붙일 겸 올라가려던 때에 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젠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저 험악한 기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문을 열자마자 예상대로 옐리세이가 뛰어 들어왔다.

"야, 야! 혹시 내 지갑 못 봤냐? 은색 가죽으로 된 건데……."
"저거?"

통화를 하느라 카운터에 놔두고 깜빡하였던 지갑을 가리키자 그가 쏜살같이 내달렸다. 내용물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할 생각도 않고 얼른 지갑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은 옐리세이가 곁눈으로 눈치를 살폈다.

"……혹시, 봤냐?"
"내용물을 말하는 거라면 보긴 했다만."
"이콘이랑 기도문을 넣은 봉투를?"
"봉투는 열지 않았지만 내용물이 기도문이 맞다면 그거랑, 사진도."

옐리세이의 얼굴이 갑자기 벌게졌다. 설마 부적을 봤다고 얼굴을 붉히지는 않을 것이니 원인은 역시 사진일 것이다. 엄청나게 보여주기 싫어하였음이 고스란하 드러나는 태도라, 저우룬칭은 짧게 웃었다.

"귀엽던데? 동생 쪽이 너 맞지?"
"다, 다, 닥쳐!"
"가출했다고 하더니 지금까지도 가족사진을 고이 보관하고 품고 다니는 것도, 음....... 귀여운 건가?"
"닥치라니까! 아씨, 쪽팔리게!!"

옐리세이가 발을 동동 굴리며 얼굴을 휙 돌렸다. 드러난 귓불과 목덜미까지 온통 시뻘겠다. 피부가 흰 놈이라 그런지 한 번 붉은 기가 오르자 아주 도드라진다는 생각을 하며 심상히 물었다.

"가족이랑 사이가 나빠 보이지도 않던데 왜 가출까지 했냐?"

쪽팔림으로 안달복달하던 시선이 저우룬칭에게 향했다가 더 빠른 속도로 획 돌아갔다. 그는 시선을 피한 채 우물거렸다.

"첫사랑에게 고백했더니, 망할 개자식이 날 경멸하면서 비웃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친구들 불러서 돌림빵을 하려고 하잖아. 그래서 그 새끼들이랑 대판 싸웠는데 재수 없게 선생에게 발각돼서 정학 먹었어. 나는 쪽팔려서 돌림빵당할 뻔했다는 말도 못 꺼냈는데 그 새끼는 내가 저를 강간하려 해서 어쩔 수 없이 싸웠다고 책임을 돌리는 바람에 나만 사방에서 욕 처먹고, 엄마는 나만 보면 울고 아빠는 한숨만 쉬고, 하도 집안 분위기가 갑갑해서 가출한 거야. 씨발, 그냥 그 새끼 두 눈깔을 뽑아버렸어야 했는데."

큰일은 안 당했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보다 귀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네 첫사랑을 닮았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욕이었냐?"

옐리세이가 다시 한 번 저우룬칭을 돌아보더니, 또다시 화닥닥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냐. 그 새끼가 상종 못 할 개자식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정말 좋아했어. …… 그 일 겪은 후에도 얼마간은 좋아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네가……."

뒷말은 우물거리는 입속에 갇혀서 거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려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버럭 외쳤다.

"내가 아직도 아빠랑 엄마랑 형 사진 갖고 다니는 거 절대 마, 말하지 마!! 떠들고 다니면 죽인다!!"

저우룬칭이 ‘지금 동네방네 다 들리게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게 바로 너다.’ 라는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뒷모습이 골목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저우룬칭은 일별하고 문을 닫아 잠갔다.

홀은 완전히 조용해졌지만 허공에는 옐리세이가 남기고 갔던 고조된 감정의 파편들이 여전히 남아 몽실몽실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가……」

그 후에 무슨 말을 이으려고 했던 걸까. 저우룬칭은 한동안 귓가에 울리는 옐리세이의 목소리를 좆았다.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럼 안 쪽팔려도 되니까.

‘아아악! 어쩌다 다른 놈도 아닌 루이 새끼에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버둥거리던 옐리세이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하고는 화들짝 놀란 가슴을 쓸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덜 버둥거리는 방향으로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하였다.

윤간을 당할 뻔하였다든가 가족사진을 소중하게 갖고 다닌다든가 하는 일은 이오시프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였던 사이다. 얼마나 하찮고 우습게 보이겠는가. 이오시프가 제일 친한 친구인 건 맞지만, 이오시프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고백한다면 우정과는 별개로 어느 정도는 한심하게 여겼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조폭 새끼였으니까.

그런데 그때의 자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우룬칭에게 술술 불었을까. 사진이 발각된 것이야 그렇다 쳐도 윤간당할 뻔하였다는 과거까지 실토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한데 이상하게도 당시에는 저우룬칭의 앞에 서니 마음이 빗장이 빗겨지기라도 한양 경계심이 녹듯이 사라졌었다.

제정신이 돌아오니 너무 쪽팔려서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 홍가의 문턱도 밟지 않았다. 저우룬칭에게 간간히 전화가 걸려 오기도 했지만 씹거나 바쁘다며 바로 끊었다. 저우룬칭이 경망스럽게 타인의 소문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도 알고 있지만,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는 건 무리였다. 그 자식을 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던 그때의 모습이 상기될 것 같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에 희미한 그늘마저 드리운 채 경청하던, 그 얼굴.

‘망할 놈의 표정이 문제였어.’

그냥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하였던 것처럼 가족과 싸우고 가출하였다는 흔하디 흔한 핑계를 댈 수도 있었는데, 그 표정을 보니 왠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숨김없이 진실된, 오롯한 자신의 이야기를.

이젠 놈의 엉덩이만 홀리는 게 아니란 말인가.

‘그 자식이 못난 면상은 아니지만, 나보다는 못생겼잖아?’

상념은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엉덩이를 제외하고도, 객관적으로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인공적인 선탠이 아닌 태양 빛을 머금은 구릿빛 피부는 야성적이었으며, 옷 위로도 확연히 드러나는 옹골찬 근육이 수컷 냄새를 한결 짙게 풍기게 하였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상완근과 전완근에서 꿈틀거리는 문신도 섹시했다. 실밥만 뽑고 나면 문신이 어디까지 새겨져 있는지 홀딱 벗겨서 볼 것이다. 문신을 정액으로 문댈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러잖아도 눈초리가 길고 매서운데 삼백안이기까지 하여 방금 전까지 사람을 썰고 온 듯한 사나운 인상이지만, 웃음을 지을 때 분위기가 누그러지는 것도 알았다. 문득 웃을 때 가늘게 접히는 눈가의 주름이 핥고 싶어져 입술을 축였다.

엉덩이는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두 번이나 섹스하면서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지만 바지 밖으로 드러나는 그대로 하트 모양으로 올라붙어 탄력 있고 탱탱할 것이라는 건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동양인 따위가 기분 나쁘게 키도 크다. 자신보다도 l0cm가량 클 것이다. 구두에 깔창을 넣는 걸 고려해 봐야겠다.

다른 곳도, 크다.
자신의 것도 어디 가서 절대 작다는 소리를 들을 사이즈는 아니었으나, GV에 출연하는 대물들을 보며 남자는 크기보다 테크닉이 더 중요하다는 정신 승리를 해왔지만 역시 큰 건 좋았다. 거기다가 테크닉이라고 뒤처지는 건 아니다.

‘빌어먹을. 왜 그놈은 하반신의 앞뒤가 다 완벽한 거냐고.’

이 역시 두 번이나 섹스하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허릿심이 좋으니 허벅지 근육도 말처럼 탄탄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저우룬칭은 두 번의 섹스 내내 묶어놓고 온몸을 다 보고 만졌는데 왜 자신은 제대로 보지조차 못했단 말인가. 다음번에 섹스할 때에는 저우룬칭을 묶어놓고 문신부터 엉덩이까지 전부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불끈거리며 발기한 그놈의 그 크고 굵은 것 위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들…….

"헉!"

갑자기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실밥도 안 뽑았는데 하마터면 제대로 발기할 뻔했다.

끝없는 공상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현실로 돌아온 옐리세이는 아직도 너무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휴대폰을 찾았다. 저우룬칭의 전화라면 아예 배터리를 빼고 다시금 쪽팔림에 몸부림치려고 했는데 다행히 이오시프였다.

"자기야, 웬일이야? 오빠 보고 싶었어?"
「너 지금 어디야?」

이오시프의 목소리가 어딘지 급박했다. 그가 질색하는 장난을 쳤음에도 성내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내는 걸 보니 진짜 급해 보였다.

"집인데. 왜?"
「그럼 컴퓨터 좀 켜 봐」
"왜 그러냐니까."
「말로 하려면 복잡해」

혹시 조직에 뭔가 일이 터진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오시프의 목소리에도 급한 기색은 있었지만 불안감이나 공포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느직느직 침대에서 굼뜨게 일어나 컴퓨터를 부팅하며 생긴 짧은 침묵 너머로 유이와 대화하는 이오시프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태국어로 대화하고 있어서 어떤 내용인지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내 때문에 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이젠 어설프게나마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하게 된 듯하다.

‘하여간에 지극정성이라니까. 마누라가 그렇게 좋을까.’

하품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부팅이 완료되어 바탕화면이 떴다. 돌체 앤 가바나의 화보가 배경으로 깔린 바탕화면의 아이콘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켰어. 어딜 들어가면 되냐?"
「난 아까 유이랑 영화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보긴 했는데……. 야후나 구글에서 홍콩 배우인 에드워드 차오를 영어로 검색해 봐. 차오의 스펠링은 c-a-o」
"잘생겼냐? 몇 살인데?"
「……뭐, 잘생겼지. 할리우드 진출 예정인 배우니까」

이오시프의 대답에 상당히 오묘한 뉘앙스가 들어가긴 했지만, 잘생겼다는 말에 의욕이 약간 더 생기는 걸 느끼며 에드워드 차오를 검색했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유명한 배우인지 검색 결과는 많이 떴다. 사진을 보니 옐리세이에게도 어느 정도 낯은 익은 배우였다. 홍콩 영화에서 종종 만났다.

검색해서 뭘 찾아보라는 건지 의아해하며 일단 최근의 뉴스부터 클릭했다.

‘10살에 제임스 왕 감독의 〈유미려〉로 데뷔한 연기파 배우 에드워드 차오(22. 본명 차오원웨이)가 최근 2002년 하반기 개봉 예정으로 프랭크 밀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블루 로드> 로 본격적인 할리우드 입성을……’으로 시작된 기사를 성의 없이 스크롤을 내려 읽었다.

"홍콩 배우가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내 취향으로 생긴 배우를 소개해 준 거라면 고맙다고 해 줄게."
「기사 보고 있는 거냐?」
"엉."
「할리우드 얘기 말고 다른 기사는 없어? 몇 달 전에 스캔들 때문에 영화 촬영을 엎었다는 내용으로」

별 희한한 요구도 다 한다고 생각하며 뉴스를 좀 더 뒤졌다. 이오시프가 말한 스캔들이 언급된 뉴스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지난여름, 스캔들로 인하여 그의 데뷔작이기도 하였던 〈유미려〉의 왕 감독의 신작 영화 촬영장에서 하차한 에드워드 차오가 홍콩이 아닌 할리우드의 영화로 스크린에 복귀하게 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홍콩 연예계에 남아 있는 스캔들의……’

건성으로 스캔들 기사를 읽어주자 이오시프가 짜증을 냈다.

「야. 제대로 된 기사 말고 좀 찌라시 같은 걸 찾아봐」
"그냥 네가 가르쳐 주면 되잖아.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자꾸 성질이냐."

귀찮긴 했지만 이오시프와 얘기라도 하지 않으면 또 이상한 망상을 하게 될 것 같아 성실하게 뉴스를 뒤졌다.

"음……. 커리어 말아먹은 스캔들이 게이 스캔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얘 게이냐? 오올. 이쁘게 생겼네. 몸매도 좋고."

새삼 에드워드 차오의 사진을 뜯어보며 ― 게이라는 말을 들어서 괜히 호감이 갔다. ― 흥미 유발 위주의 기사의 스크롤을 슬렁슬렁 내리던 마우스 커서가 딱 멈췄다.

"……잠깐, 이거 뭐야."
「찾았냐?」
이오시프의 말에 대꾸하는 것도 잊은 옐리세이의 시선이 모니에 못 박혔다. 스캔들이 터졌을 당시에 공개되었던 사진들이 기사에 기재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차오가 남자와 호텔에서 나오는 사진이었다.

「언론에 공개된 사진은 호모 같다기보다는 그냥저냥 얌전하지만 당시 홍콩 웹에서는 영상 유출까지는 아니라도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사진이 돌았나 봐. 에드워드 차오가 유명한 여자 배우와 공개 연애를 하고 있던 중이라 파장이 더 컸던 모양이더라고」

이오시프가 침을 한 번 삼키더니, 천천히 물었다.

「…… 루이처럼 보이냐?」

옐리세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에 얼굴을 바싹 붙여 사진을 더 세심하게 뜯어보았다. 에드워드 차오의 상대로 보이는 남자는 모자이크로 신상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모자이크 처리가 된 부분은 딱 얼굴뿐이었다. 멀리에서 도촬한 듯한 저화질로도 반소매 셔츠 아래의 독특하고 짙은 문신과, 갈색 피부와, 190cm를 훌쩍 넘는 장신과, 탄탄한 근육질의 체신은 숨겨지지 못했다.

「야, 야. 루이 맞지? 맞지? 저런 문신이 흔한 게 아니잖아? 그놈은 뭘 하고 살았길래 홍콩 젊은 배우 중에서 제일 잘나간다고 하는 놈이랑 배가 맞았다냐?」

이제 완전히 호기심으로 들썩들썩하는 이오시프의 목소리가 왼쪽 귀로 들어왔다가 오른쪽 귀로 고스란히 나갔다. 옐리세이는 이를 꽉 앙다물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씨발놈이 북한 간첩이라더니."
「어?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다음에 루이를 만나면 어떻게 연예인을 꼬셨는지 꼭 물어봐 달라는 이오시프에게 건성으로 응대하고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침대에 집어던지며 一 또 박살날까봐 벽에 던지지는 못했다 一 우렁찬 짜증을 폭발시켰다.

"쳐 죽일 놈!! 입만 열면 거짓말이잖아!!"

여기까지 발각되면, 제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옐리세이라도 북한 간첩이라던 놈이 홍콩에서 배우를 유혹하는 공작 활동을 하였으리란 추측은 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북한 간첩이었다는 전직 자체가 매우 의심되고 있던 차다. 당장에라도 홍가에 쫓아가서 거짓말만 줄줄 내뱉는 주둥아리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었지만, 짜증보다 쪽팔림이 여직 더 크게 남아 있었다.

결국 옐리세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침대 위를 나뒹굴며 신경질만 냈다. 한참이나 분을 삭이면서도 마음을 가라앉혀 진정하지 못하던 그는 벌떡 튕기듯이 상체를 일으키고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휴대폰을 주워왔다. 저우룬칭에게 물어봤다가 그 썩을 놈이 궤변을 나불거리며 헛소리하면 또 속아 넘어갈 것 같았다. 자신의 지적 능력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는 옐리세이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증거를 잡아야 한다.

무심한 듯 지루한 듯 담담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니시무라가 옐리세이라는 걸 알자 반색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옐리세이. 잘 지내셨어요?」
"어, 뭐.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가깝다, 그러니 나보다는 더 잘 알 것이다. 라는 억지스러운 이단 논법으로 지푸라기를 붙잡은 옐리세이가 신중하게 물었다. 러시아눈 중국, 한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은 고의로 무시했다.

"중국 놈이랑 한국 놈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냐?"

뜬금없는 물음이라 니시무라는 다소 놀란 듯이 반문하기는 했지만, 성실하게 응답은 해주었다.

「일단, 쓰는 언어가 다르고요」
"말이야 외국어 배울 수도 있는 거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냐?"
「중국인 중에서 소수 민족을 뜻하시는 건 아니죠?」
"그게 뭔데?"
「아니시라니 됐습니다. 음…….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거라면, 이름일까요?」

맞다. 이름이 있었다.
옐리세이는 니시무라의 똑똑함에 손가락을 딱 튕겼다. 과연 가까운 이웃 나라였다. 설마 이름까지 뻥을 치지는 않았겠지.

"넌 중국이랑 한국 이름 구분할 수 있냐?"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충은요. 하지만 100%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일중한이 동일한 한자권이긴 하지만 똑같은 한자로 써도 읽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어 제 성인 니시무라는 중국어로 시춘이라는 발음이 됩니다. 그래서 회사 사람들은 절 니시무라가 아닌 시춘이라고 더 많이,」
"복잡한 건 됐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른 설명을 끊었다.

"어쨌거나 구분은 된단 말이지?"
「한자로 쓴 이름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요」
"좋았어."

이번에야말로 저 거짓말쟁이의 꼬리를 붙잡고야 말겠다는 결의 속에 옐리세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폴더를 탁 닫았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긴지 계속 통화 중이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다. 요 며칠, 즉 지갑을 찾으러 왔다가 부리나케 도망쳤던 날 이후로 옐리셰이는 의도적으로 그의 연락을 무시하고 있었다. 저우룬칭은 윈스턴을 입에 물었다.

‘밀당을 하자는 건가?’

연애 초보에게는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수법이지만, 왠지 옐리세이라면 시도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연애 기술이라기엔 연락을 꺼리고 있다는 게 너무 빤히 보이기는 했지만.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면서 도망친 주제에 꿋꿋하게 무시 중인 태도가 왠지 재밌기도 하여 안 받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전화를 더 걸었다. 끈기 있게 연락하는 이유 중에는 말이 더 꼬이기 전에 슬슬 사실을 실토해야 할 것 같다는 결심도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자신을 북한 간첩으로 알고 있을 건지, 원.

‘그럼 이번에는 광둥어로 고백해 주는 걸까.’

상상하니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 녀석이라면 푸통화와 광둥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푸퉁화를 받아 적어 올 것이라는 데에 내기를 해도 좋았다.

정말 시끄럽고, 제멋대로에다, 본능적이기까지 한 놈이지만 옆에 있으면 지루하지는 않았다. 어렴풋이 가늠하다가 두어 번 그와 손을 섞어보고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지만, 다혈질인 옐리세이가 이성이 끊어져 패악을 부린다 하여도 어렵잖게 제압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도 옐리세이 옆에서 여유를 갖게 되는 이유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이니까 그 녀석이 들러붙어도 끄떡없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육체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라는 상상을 하다가, 이건 지나치게 자찬하는 과신이 아닌가 싶어, 또 실없이 웃었다.

‘맨날 들락거리다가 며칠 안 오니까 심심하긴 하네.’

이것이 옐리세이가 의도한 밀당의 성과라면 꽤나 훌륭하게 이행 중이리란 생각 끝에 한 차례 더 전화했지만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다 태운 담배를 벽에 비벼 끄고 재떨이 대용으로 사용하던 종이컵에 꽁초를 넣었다. 주방에서 영화 프로그램을 보고 있던 장쯔궈가 들어오는 기척에 TV를 껐다.

"계속 보지 않고?"
"아닙니다. 재미있는 영화가 별로 없네요. 태국어를 잘 못 하기도 하고요. 잠깐 올라가셔서 쉬세요. 바쁘면 부르겠습니다."

왠지 장쯔궈는 서두르는 기색이었지만 큰 의심 없이 막 다시 두르려던 앞치마를 의자에 걸쳤다. 까다롭게 안주를 주문하는 손님은 없어 보였다.

"알았다. 이따가 다시 내려오마."

저우룬칭은 위층으로 올라가며, 내일 SPC사의 무기상과 란뜨제프스카야의 거래에서 옐리세이도 동석하는 건지 아닌지 의미 없는 고민을 했고, 그 고민을 시간을 보내기에 퍽 유용한 소일거리였다.





이제까지 페카가 야이쑤코에서 선택한 거래 계약 장소는 호텔이나 상대 마피아 사업체의 빌딩 상층이었다. 야이쑤코에서는 한 번도 거래가 무산되며 총알이 난무한 적이 없었지만,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여 저격에 유리한 위치를 고려하였기 때문이리라. 그런 페카가 느닷없이 홍가를 거래 계약 장소로 정한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어 나스따 시야의 낯에는 약간의 긴장과 못마땅함이 뒤섞여 있었다. 홍가는 시가지의 한복판이었고, 가게 인근에 나스따시야와 페카의 경호원이 있다면 눈에 띄게 마련이다.

"우리와 거래 중이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나스따시야는 못내 마뜩찮은 기색이었지만, 옐리세이는 그녀의 염려와는 별개의 문제 때문에 홍가의 문턱을 넘기가 어려워서 비비적거렸다.

"뭘 하고 있나, 옐리세이?"
"……알았어, 알았다고."

재촉에 주먹을 한 번 꾹 쥐었다가 홍가의 문을 열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비어 있는 홀에는 저우룬칭만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란뜨제프스카야 분이십니까?"
"반갑습니다. 란뜨제프스카야의 나스따시야 우스치노바입니다."

짧게 악수하며 인사한 저우룬칭이 자리에 안내해 주었다. 그러며 그를 흘끔 보았지만 옐리세이는 갑작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벽에 걸린 시계는 약속 시간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스따시야의 등 뒤에 선 옐리세이는 그녀의 귓가로 슬쩍 허리를 숙였다.

"가게 밖에서 대기 중인 애들 안으로 안 데리고 와도 되겠냐? 페카는 보나마나 메이탈을 경호원으로 대동해서 올 텐데, 혹시 일이 꼬이기라도 하면 나 혼자서는 당신 못 지켜, 메이탈이랑 일대일로 붙었을 때 30초 이상 버틸 자신 없어."
"베나도가 그렇게 강한가?"
"당연하지. 괜히 특수부대 출신이 아니라니까. 저번에 붙었을 때 까딱하면 난 척추가 나가고 하반신 불수가 돼서 두 번 다시 섹스를 하지 못 할 뻔했다고."
"흥."

나스따시야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여기에서 특수부대 출신이 베나도뿐인 건 아니지."

옐리세이도 코웃음을 쳤다.

"당신, 현장에서 은퇴한 지 몇 년이나 됐수? 그 아줌마는 낼모레 마흔인데도, 쌩쌩한 현역이라니까. 저번에 옷 갈아입을 때 보니까 배가 아주 그냥 빨래판이 따로 없어. 여자 배에 복근이 있을 정도면 끝난 게임이라고."
"미국에 기생하는 나라 따위의 특수부대보다 조국의 자랑스러운 스빼츠나츠의 기량이 부족하다는 발언을 하는 건가?"

젠장, 이래서 정부에 속했던 놈들은. 자부심이 자극되자 고깝게 올라간 나스따시야의 목소리 톤이 영 마뜩잖았다. 베레조프스끼가 KGB 출신을 꺼리는 이유도 일말은 타당했다. 그녀와는 다르게 체자르의 성품이 무던하지 않았다면 밑에서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설핏 짜증을 삼키며 반박하려던 그는 이어 문이 열리는 기척에 말을 삼켰다. 나스따시야가 빠르게 속삭였다.

"처음부터 얕보일 필요는 없다. 여차하면 널 방패로 삼을 테니 그런 줄 알고 있어라."

본질적으로 현재 임무가 나스따시야의 경호 및 안전이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들으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울컥하기에도 전에 페카가 들어왔다. 가게 안까지 대동한 유일한 경호원은 역시 메이탈이었다. 늑골 보호대를 풀지 않았는지 페카는 드레스 셔츠만 재킷 안에 낙낙하게 입은 차림이었다.

나스따시야와 인사한 페카가 자리에 앉기 전에 저우룬칭에게 얇은 봉투를 하나 건넸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반문 없이 봉투를 받은 그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차는 뭘 드시겠습니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여기는 카페가 아니라서 본래 가게 메뉴에 있는 차 외에는 인스턴트나 티백뿐입니다 "

저우룬칭은 메뉴판을 가리켰고, 커피를 주문하려던 나스따시야가 인스턴트라는 말에 되삼키고는 메뉴판에서 적당히 골랐다.

"전 홍차 티백이요."

페카의 주문까지 받은 저우룬칭은 옐리세이와 메이탈의 몫까지 4잔을 갖다 주고 필요한게 있으면 부르라는 말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에서 문을 닫고 있으면 아래층의 이야기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라는 말도 해 주었지만, 나스따시야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자, 그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거래 얘기나 할까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페카가 티백을 건져 내서 재떨이에 놓았다. 각각 의자 뒤에 배석하고 선 옐리세이와 메이탈은 자신 몫의 차는 입에도 대지 않은 채였다.

페카는 아타세 케이스에서 서류철들을 꺼냈다.

"전화로 말씀하신 품목과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은 신상품이니 체크해 보세요. 성능에 대해 궁금하신 게 있으면 물어주시고요."
"전부 이것뿐입니까? SPG사의 거래는 폭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종이 전체를 눈으로 슥 훑은 나스따시야의 물음에 페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 지금 휴가 중이기도 하니 빠르게 조달 가능한 건 이뿐이라서요. 따로 구하고 싶은 게 있으시면 말씀하셔도 됩니다만, 대신 시일은 걸리죠."

외판원 같은 언행이었지만 종이 위에서 오고가는 품목의 정체는 정규군의 장비 못지 않은 무기다. 나스따시야는 차가 식을 때까지 꼼꼼히 읽으며 체크했다.

어깨 너머로 읽어 봤자 흥미도 일지 않았기에 지루함에 하품하다 메이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입술만 움직여서 ‘아기 돼지.’ 라며 불렀다. 눈을 부라리니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그의 척추를 아작 낼 뻔하였던 때와 비슷했기 때문에 옐리세이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페카는 괜찮은 놈이지만 저 아줌마는 제발 친한 적 좀 안 했으면 좋겠다.

품목 정리를 다 끝낸 나스따시야가 파일을 돌려주자 페카도 재차 확인했다.

"음, 이 정도 양이면 운송선으로 한 번에 다 실어올 수 있겠네요. 3일 뒤 저녁 10시 동쪽 선착장, 괜찮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소액이니 전액 선불로 받죠. 내일 낮 12시까지 이 계좌로 결제 바랍니다."
"그건 문제 없습니다만……."

계약서와 함께 내민 계좌를 받은 나스따시야가 계약서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쳤다.

"여기, 전세료 500달러는 뭡니까?"
"아, 제가 깜빡하고 말씀을 안 드렸네요. 홍가를 한 시간 빌리는데 든 비용이요."
"……500달러나 되었습니까?"

어차피 영업시간도 아닌 때의 한 시간 전세 비용에 나스따시야는 다소 기가 차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페카는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얼굴로 되받아쳤다. 그녀는 길게 시시비비를 끌지 않고 순순히 계약서에 서명했다.

나스따시야 발롄찌노브나 우스치노바. 페카 에드바르 스키예르벡.

간인한 계약서를 각각 나눠 갖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나자 나스따시야는 어깨의 긴장을 풀며 비스듬히 앉았다. 그때까지도 메이탈과 서로 시선의 대화를 빙자한 일방적 부라림을 하고 있던 옐리세이는 자세를 바로 했다. 나스따시야가 페카와 계약을 한 진짜 목적이 슬슬 나올 무렵이었다.

"부상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상세는 어떠하십니까?"
"염려해 주신 덕에 지금은 꽤 나았습니다. 여름에 바빠서 휴가도 없었으니, 요양도 할 겸 겨울 휴가도 보낼 겸 겸사겸사 야이쑤코에 장기간 체류할 예정이에요. 이제 우기도 끝났고 덜 더울 테니 휴양하기 좋은 시기죠. 또 물건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알바라도 안 하면 심심하거든요."

페카가 붙임성 있게 웃자 나스따시야도 미소하는 듯하였다. 자신에게는 절대 하지 않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는 옐리세이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언제까지 머무실 일정입니까?"
"글쎄요, 지금 계획으로는 크리스마스 휴가까지? 야이쑤코의 거래를 트면서 타이에 별장을 지은 지 몇 년이 됐는데도 크리스마스를 보내거나 러이끄라통 축제(11월경에 있는 타이의 축제)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더라고요. 그때 큰 싸움이나 없었으면 좋겠는데."
"러이끄라통 축제를 보시려면 야이쑤코보다는 내륙 쪽으로 가 보십시오. 야이쑤코는 도시도 크지 않은데다 거주 중인 현지인도 적어서 전통 축제는 아무래도 심심하더군요."
"오, 그래요? 주전 감사합니다."

옐리세이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바로 앞의 메이탈과 눈을 마주치며 서 있지만 않았어도 하품하며 늘어졌을 것이다.

지루함을 온 얼굴에 다 드러내고 있는 옐리세이를 곁눈질한 페카가        말문을 돌렸다.

"나스따시야 발롄찌노브나께서는 스빼츠나츠의 장교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맞나요?"
"그렇습니다. 빔펠 그룹에서 상위로 전역하였죠."
"아, 과연."

뚜렷한 자긍심이 깃든 그녀의 대답에 페카가 짧게 감탄했다.

"역시 군 출신이셔서 그런지 얘기가 빠르게 진행되어서 좋더라고요. 일전의 거래 때는 군 경험이나 연줄이 없는 민간인이었는데, 새로 개발된 무기에 대해서는 정보가 어찌나 어두웠던지 설명하느라 목이 다 탔어요. 랩톱을 가지고 와서 시연 영상이라도 보여줄 걸 후회했다니까요."
"저런. 미리 예습해 오길 천만다행이네요."

옐리세이에게는 전혀 재미없는 이야기였지만 두 사람은 즐겁게 웃었고, 대화는 휴양 하기 좋은 태국의 관광지로까지 넘어갔다. 이러다가 입으로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돌겠다는 불만을 툴툴댈 무렵에야 겨우 한담이 마무리되었다. 시간은 이럭저럭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미스터 저우! 저희 얘기 다 끝났습니다!"

일어나서 나스따시야와 악수한 페카가 큰소리로 외쳤다. 잠시 후 계단이 삐걱거리며 지우룬칭이 내려오는 기척이 났다. 페카가 문득 옐리세이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당신이 일전에 말하였던 엉덩이가 예쁜 사람이 미스터 저우가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 하여간에 정보는 빠르다니까."
"하하. 일은 잘 풀린 거예요?"

옐리세이는 히죽 웃으며 주먹을 쥔 검지와 중지 사이로 엄지를 왔다 갔다 하는 적나라한 제스처를 했고, 페카는 푸하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잘됐네요. 축하해요, 레샤."

말의 끝과 더불어 저우룬칭이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페카와 나스따시야는 그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하고 가게를 나섰다. 페카가 먼저 SUV에 탑승하여 출발하자 나스따시야는 미소를 싹 거두며 낮게 속삭였다.

"멘쇼프스카야가 스키예르벡과 거래한 게 맞다. 굼벵이도 뒹구는 재주는 있다더니 너도 쓸모는 있군."

어쩐지 뒷말이 매우 욕 같이 들렸지만 우선 의문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페카랑 얘기할 때 맨쇼프스카야의 미음도 안 나왔는데 뭔 소리야?"
"멘쇼프스카야의 야이쑤코 지부 간부 중에는 군 출신이 한 명도 없어."

겨우 그것만으로 확신할 수 있는 건지 의아하였지만 머리 좋은 두 사람이 어련히 알아서 대화했겠거니 싶어 더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무기 거래 비용의 행간으로 암묵적인 정보료가 오고 갔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체 없이 바로 차에 타려는 나스따시야를 얼른 붙잡았다.

"밖에 잠깐 볼일이 있는데 이제 내가 경호 안 해도 상관없지?"
"그러고 보니 이 가게에 너의 그 유명한 루이가 있었던가."

바늘로 찌르면 피가 나오는 게 아니라 바늘이 부러질 것 같은 이 여자에게도 자신의 염문이 흘러들어 갔다는 사실에 울컥한 옐리세이는 서슴없이 거짓말을 했다.

"당신은 내가 연애질만 하는 줄 알아?"
"남창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주제에 연애라니 사치스러운 소리를 하는군."

끝까지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남긴 나스따시야는 알아서 하라며 문을 닫고 차를 출발시켰다. 나스따시야가 탑승한 차의 앞뒤로 경호 차량이 더불어 출발하자 거리는 한산해졌다.

후미의 차가 거리를 돌아 안 보이게 되자마자 옐리세이는 얼른 홍가로 도로 튀어 들어갔다. 테이블을 정리하던 저우룬칭이 허리를 폈다.

"안 갔냐? 마침 잘됐다. 너한테 할 말이,"
"루이."

말허리를 재빨리 끊은 옐리세이는 그와 오늘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하자 쪽팔림과 분노, 그리고 며칠 만에 만난 설렘 등을 포함한 복합적인 감정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고는 얼른 주변을 훑었다. 메모할 만한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페카에게 종이라도 한 장 받아놓을 걸 후회하다가, 카운터로 갔다.

영문도 모르고 뒤를 따라온 저우룬칭이 주문표 뒷면에 연필로 쓰는 걸 어깨 너머로 잠자코 보았다.

"자. 이게 바로 우리나라 말로 쓴 내 풀네임이야."

또박또박 정자로 쓴 ‘Е л и с е й  Ф и л а к т о в и ч  Ш ч й с к и п’를 눈으로 한 번 읽은 저우룬칭이 ‘그래서, 뭐?’ 라는 표정으로 응시하였다. 옐리세이는 가능한 의심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물었다.

"네 이름은 어떻게 쓰냐? 아, 한자로."

매우 부적절한 상황에서 부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부적절한 언행이었지만 저우룬칭은 크게 개의하는 기색 없이 새 주문표의 뒷면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周倫淸.  (주윤청)

옐리세이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작대기가 왜 이렇게 많아?"
"내 눈에는 러시아어도 이상해 보인다만."
"인마. 그래도 영어 알파뱃보다 훨씬 멋있잖아."

끼적거리며 저우룬칭이 쓴 이름을 따라서 그려 보던 – 쓰는 게 아니었다 – 옐리세이는 곧 포기하고 그가 직접 이름을 쓴 주문표를 냉큼 챙겼다.

"이만 간다."
"벌써?"
"흥. 오빠 며칠 못 봐서 외로웠냐?"
"조금은."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대꾸가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시큰둥하게 물었던 옐리세이는 바람 소리가 날 만큼 휙 돌아보았다. 귀까지 의심했지만 저우룬칭의 싱긋거리는 표정으로 보건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니다.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목구멍으로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대로 저 자식의 멱살을 틀어잡고 키스하며 벽으로 밀쳐 이번에야말로 탱탱한 엉덩이를……!

순간 유혹에 넘어갈 뻔한 옐리세이는 화닥닥 얼굴을 휘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엉덩이도 좋지만 그에게는 더 시급하고도 중차대한 용건이 남아 있었다.

"나보다 못생긴 주제에 미남계를 쓰다니 치사한 새끼……!"
"뭐?"
"암튼 난 바빠! 나중에 올 테니까 엉덩이 잘 씻고 기다리고 있어!"

어처구니없어하는 저우룬칭을 뒤에 남긴 옐리세이는 쌩하니 달려 나갔다. 단숨에 두 블록을 달려온 뒤에 헥헥거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야, 니시무라. 어제 말했던 그걸로 좀 만나고 싶은데 시간 되냐? 바쁘면 내가 회사 근처까지 갈게."
「저희 회사까지 오신다니 정말 급하신 모양이네요」

니시무라가 작게 웃었다.

「일하는 중이라 호텔에 있긴 한데 지금이 관광객들 자유시간이라서 잠깐 얘기 나눌 정도의 시간은 있습니다」

불러주는 호텔의 위치와 이름을 확인하며 택시를 잡았다. 관광지구에서는 총신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걸 겨우 떠올리고 숄더 홀스터에 총을 갈무리한 건 택시에서 내리기 직전이었다. 니시무라는 호텔 1층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대뜸 손에 움켜쥐고 온 종이를 주었다.

"이게 그 자식 이름이야."

꾸깃꾸깃 접힌 종이를 바르게 눌러 편 니시무라가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얼핏 주워듣기로 한자는 글자 수가 엄청나게 많다고 하던데 이 자식이 못 읽는 한자인 건 아니까. 심각한 와중에 눈치 없이 다가온 직원이 주문은 하지 않으시냐고 묻다가 욕설과 짜증이 섞인 일갈에 대경하여 사라진 해프닝만 제외하고 테이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초조하게 기다리고만 있던 옐리세이가 손톱을 물어뜯기 직전에, 니시무라가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보는 시선과 음성은 평연하였다.

"죄송합니다. 번체자라서 생각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네요. 우선 이 이름은 일본에서는 ‘슈 린세츠’라고 읽습니다."

일본인은 확실히 아니었다. 일본식으로 읽어도 어감이 귀엽다는 잡념 속에 옐리세이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말씀하셨던 그분의 이름이 정확히 어떻게 되나요?"

저우룬칭, 이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발음이 자꾸만 혀에서 엉겼다. 허구한 날 루이라고 간단한 영문명으로만 불렀으니 그의 본명임에도 막상 입으로 옮기려니 굉장히 낯설었다.

"어, 으음……. 내 발음이 안 좋아서 정확하지가 않아. 한국어로 어떻게 읽는지 먼저 가르쳐 줘."
"잠깐만요. 회사 동료에게 전화해 보겠습니다."

언젠가 점심을 함께했을 때처럼 그는 한국어에 유창하다는 동료와 통화를 하였다. 옐리세이로서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광둥어가 솰라솰라 꼬리를 잇고, 또다시 초조감에 휩싸일 무렵에 니시무라는 휴대폰을 닫았다.

"한국어로는 주……. 안 되겠네요. 저도 발음에 자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읽나봐요."

니시무라가 새 메모지에 발음을 적었다. Ju Ryuncheong. 입속으로 얼추 읽으니 저우룬칭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애초에 그의 이름을 정확히 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한국인이 맞는 걸까? 그놈이 진짜 북한 간첩 출신으로 홍콩의 유명 배우에게 몸 로비라도 했다는 뜻인가?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가는 상상의 나래 속에서 나직한 한마디가 울렸다.

"……저우룬칭."
"어?"

옐리세이가 퍼뜩 시선을 향했다. 니시무라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중국식 발음이에요."

저우룬칭. 중국식 발음.

두 마디의 단어가 귓가에 들어오자마자 옐리세이는 이를 아득 악물었다. 이 호로새끼. 드디어 낚았다.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체자르에게 저우룬칭의 국적을 물었다면 바로 대답을 들을 수 있었으리란 생각은 하지도 못한 옐리세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도로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테이블에 혼자 남은 니시무라는 머뭇거리는 직원에게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는 구겨진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야, 칭크! 더 이상은 안 봐……."

기세등등하게 문을 쾅 밀어젖히며 홍가에 들어간 옐리세이는 홀의 중앙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시커먼 정장의 무리에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저놈들, 차이니즈 마피아 같은데 내가 방금 뭐라고 말했더라?

노골적인 비하 발언에 홀에 득실득실한 중국인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싸우는 거야 상관없지만 쪽수로 너무 밀리는데. 옐리세이는 흘끔 등 뒤를 살폈다. 그가 홍가를 자주 들락거린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제지하지 않고 문을 통과시킨 중국인들의 표정도 썩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웬 소란인가 싶어서 주방에서 얼굴을 내민 쌍둥이 형제만이 옐리세이라는 걸 알고 익숙한 얼굴로 사라졌다.

"오랜만이군, 슈이스끼. 날 부른 건가?"

테이블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던 팡룽이 감고 있는 눈도 뜨지 않고 그를 불렀다. 우글거리는 정장 무리는 그의 경호원이었던 모양이다. 옐리세이는 헛기침을 흠흠 했다.

"전 다른 볼일로 왔습니다."
"중국인을 찾은 게 아니었나?"
"여기에 중국인이 미스터 팡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고의는 아니었을지라도 중국인들 사이에서 중국인을 모멸했으니 지레 움츠러들 만도 하지만, 옐리세이는 뻣뻣한 태도를 고수했다. 자신은 달랑 혼자뿐이었으나 이런 기세 싸움에서 밀리면 조직의 체면도, 그의 자존심도 깎여 나간다.

물론 이 뻣뻣한 태도의 이면에는 홍가가 불가침구역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팡룽이 서늘한 눈매를 치뜨며 그를 바라보았고, 옐리세이는 가슴 안쪽에 듬직하게 자리하고 있는 권총의 무게에 안정감을 받으며 시선을 받아쳤다. 나직이 내깔리는 침묵 속에 긴장이 조금씩 차올랐다.

가볍게 비틀린 팡룽의 입술이 무어라 달싹였을 때, 계단을 밟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하강하며 침묵을 끊었다.

"준비 다 끝났어요. ……어머, 분위기가 왜 이래? 싸움은 안 되는 거 알죠?"

저우룬칭과 나란히 내려오던 홍위롄이 깜짝 놀라며 홀을 훑었다.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옐리세이를 발견한 그녀는 반갑게 인사하였고, 그녀의 인사는 긴장을 완전히 완화하였다.

팡룽이 혀를 차며 일어났다.

"타이밍 한번 끝내주는군."
"하루 종일 하는 거라곤 먹고 자고 싸고 싸움질밖에 할 줄 모르는 남자들과 부대끼다보니 본능이 터득하더라구요."

그녀가 먼저 생글생글 웃으면서 팔짱을 끼자 팡룽도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옐러세이를 일별하였다.

"오래 살려면 바른 말 고운 말 착한 말을 써야지?"
"피와 살이 되는 유익한 충고 감사하네요."

끝까지 이죽거리기는 했지만 옐리세이도 그쯤에서 말을 끊었다.

"영화 시간 늦겠네. 얼른 나가요. 그럼 너희도 수고하렴. 손님 없으면 일찌감치 문 닫고 쉬는 거 잊지 말구."

저우룬칭과 쌍둥이 형제의 인사를 받은 홍위롄이 팡룽을 잡아끌듯이 하며 밖을 나가자 우르르 모여 있던 적련방의 조직원들도 경호를 위해 빠져나갔다.

국적의 비밀을 알고 저우룬칭을 족칠 작정으로 뛰어 들어왔던 옐리세이지만, 느닷없는 조우로 인해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렇지만 태연한 얼굴로 "또 왔냐?"며 돌아보는 저우룬칭을 보니 다시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썩을 새끼가 한두 번도 아니고,"
"마침 잘됐다. 자꾸 얘기할 기회를 놓쳤는데 나 북한 사람 아니다."
"어디에서 자꾸 간첩이라는 씹...... 어?"
"북한간첩 아니라고."

말문이 턱 막혔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지?

"너 무슨 말을......"

우렁차게 치솟았던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 저우룬칭은 차분하게 반복해 주었다.

"지난번에 북한 간첩이라고 했던 건 거짓말이야."
"……야!!"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가슴 깊이 이해하기에 앞서 분통이 터졌다.

"씹새끼야! 그걸 네가 먼저 까발리면 어떡해!! 내가, 내가……!! 아오!!"

홀 가운데에서 ‘아오으아으ㅏ ㅇ아아아아네아아아아 ㅇ아아아악!!!!!!!!!, 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는 옐리세이를 저우룬칭이 서둘러 뒷문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혼자 무언의 발광을 하던 옐리세이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저우룬칭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개 같은 새끼야!! 이럴 때까지 치사하게 선수를 치는,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애초에 네가 거짓말을 안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아!! 내가 우습게 보이냐? 영?!"

대답하라고 고래고래 외치던 그는 저우룬칭의 얼굴이 벌겋게 된 걸 보고서야 자신이 멱살을 너무 세게 잡아서 말을 할 수 없다는 상황을 깨닫고는 사납게 놓았다. 순순히 멱살을 잡혔던 저우룬칭이 허리를 굽히며 기침을 콜록콜록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네가 이렇게 쉽게 믿을 줄은 몰랐다."
"그딴 걸 지금 변명이라고 씨불이냐?"
"미안."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무마될 거 같아?!"
"거짓말해서 미안."
"……이익!"

열불이 치밀었지만 당사자가 구차한 변명도 없이 고분고분 사과하니 거기에 대고 더 화풀이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저우룬칭의 거짓말을 받아쳐서 작살을 내고 말리라는 울분이 불완전연소 되었다. 불완전연소 된 미진함과 갑갑함이 명치까지 꾹꾹 쌓여 전부 스트레스로 전환되었으므로 옐리세이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왔다 갔다 씩씩거리며 분을 삭였다. 저우룬칭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그냥 벽에 기대어 섰다.

"야! 너!"

정서불안으로 여겨지리만큼 서성거리던 옐리세이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무턱대고 삿대질부터 했다.

"음?"
"처음에 거짓말한 건, 그래, 초면이었으니까 그렇다 쳐. 근데 왜 사실을 밝히지 않고 북한 간첩인 척한 거냐? 남은 북한말로 고백까지 했는데!"

고백 이후 며칠 동안 저우룬칭의 행방아 묘연해진 탓에, 역시 불완전연소 되었던 당시의 화가 되살아났다. 이러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병원비를 모조리 저놈에게 청구할 것이라는 굳은 결심 속에 대답 여하에 따라 턱을 날려 버릴 준비를 했다.

"네 반응이 재미있어서."
"......뭐라?!"
"사실 그 고백, 제법 귀여웠지."

회상만 해도 유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낮게 웃음 지었다.

솔직히, 화가 났다. 남을 속여 가며 재미있다느니 귀여웠다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우롱이 아니면 무엇인가. 허나 눈꼬리를 가늘게 늘어뜨리며 입술만으로 미소하는 얼굴이 꽤 섹시하였기에 옐리세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애꿎은 바닥만 걷어찼다.

"속은 내가 병신이지! 두 번 다시 네가 하는 말을 믿나 봐라!"
"북한 간첩이었다는 말 외에는 거짓말한 거 없어."
"믿을 것 같냐!!"

씨근덕거리다 담배를 꺼내자 저우룬칭이 얼른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양심에 찔리기는 한 모양이다. 옐리세이는 짐짓 코웃음을 쳤다.

"중국인이 맞긴 하냐?"

담배를 문 잇새에서 으르렁거리는 발음이 새었다. 저우룬칭이 턱을 주억거렸다.

"정확히는 홍콩인이지. 홍콩과 중국은 달라."
"중국이나 홍콩이나."

괜스레 시비를 걸듯이 툴툴거리고는 궁금했던 점을 하나 물었다.

"키는 몇인데?"
"10년 전에 쟀을 때 194였던가 5였던가."
"194cm로 해."

lcm라도 깎기 위해 말을 딱 잘랐다.

"동양놈 주제에 월 처먹고 짜증나게 키까지 크냐?"
"글쎄……,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해서 그런가"
"무슨 운동?"
"사람 패는 운동."

이놈이 이딴 소리를 농담이랍시고 하나 보다. 어렸을 때부터 홍콩의 뒷거리를 제집처럼 종횡무진으로 활동하였던 저우룬칭은 반쯤 진심이었지만 헛소리로 치부한 옐리세이는 짜증을 내며 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훅 뿜었다.

"그럼 거 뭐냐. 에, 에……. 맞아. 에드워드 차란 놈은 네 구남친이냐?"

선선히 대답하던 저우룬칭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 녀석 얘기를 누구에게 들었나?"

목소리마저 한 톤 낮아졌지만 옐리세이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오늘에야말로 이 자식을 낱낱이 까발리고야 말겠다는 결의만이 분노를 대신하여 충천하였다.

"듣긴 될 들어. 차오가 너랑 났었던 스캔들을 덤으로 붙여서 할리우드에서 데뷔한다고 떠들썩하더구만."
"아....... 그래? 원웨이가 다시 영화 촬영을 하는군……"

그가 낮은 혼잣말을 뇌까렸다. 상황 설명도 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게 못마땅하여 다리를 퍽 걷어차며 대답하라고 윽박질렀다.

저우룬칭은 바지에 묻은 흙을 북북 털며 말을 골랐다. 홍콩의 연예계는 삼합회와 깊이 유착되어 있고, 송의방 또한 연예 기획사를 설립하여 양지에서까지 공공연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흥미를 보여 연기 활동을 시작한 차오원웨이는 기획사의 간판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이 같은 상세한 사정까지 설명하면 쓸데없는 사실을 붙인다고 화를 낼 것 같았기에 생략하고 그가 원하고 있을 대답만 했다.

"남친 같은 건 아니야. 남자와 연애한 적 없다고 예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그럼 스캔들은 뭔데? 합성이냐?"
"호모 때문에 인생 말아먹을 뻔했다는 이야기한 적 있지? 그때 말했었던 세 번째가 걔야."
"직장 동료와 호모 치정극이 어쩌니 했던, 그놈?"

직장 동료라기에 회사원이 추근거렸나 싶었는데 연예인이었다니 이건 또 상상 밖이었다. 설명을 잇는 저우룬칭의 등 뒤로 기울어지는 햇살이 비치었다. 오늘 하루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시간을 체감하자 못했는데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옐리세이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발로 비벼 껐다.

"요약하면 간단해. 원웨이…… 아, 에드워드가 원래 사귀던 남자 배우가 있었는데 나와 관계가 되면서 옛 애인과는 헤어졌다. 원만하게 헤어진 건 아니라서 옛 애인이 앙심을 품고 나와의 스캔들을 언론에 팔아 치운 거고."
"남자랑 사귀었다고? 기사에는 여자랑 공개 연애했다고 하던데? 대체 몇 각 관계야?"
"에드워드가 예전부터 간혹 게이 루머가 불거져서 의혹을 덮으려고 위장 연애를 한 거야. 참고로 위장 연애의 상대였던 여자는 모 관료의 첩으로 은밀히 자식까지 낳았지. 그렇게 되면 5각 관계인가?"

홍콩 연예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솔깃해할 만한 비사가 줄줄이 나오고 있었지만 옐리세이는 시큰둥하게 "존나 막장이네."란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 지경까지 갔는데도 사귀는 건 아니었다는 말을 하는 거냐?"

이오시프의 말을 듣자니 사진이 한두 장 유출된 게 아니었다. 퍽 친밀한 관계인 것 같은데 잠만 잤다고 우기니 절로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옐리세이는 이제부터 저우룬칭이 하는 말은 그게 무엇이든 일단 의심부터 하자고 작심하였다.

크게 면구한 질문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저우룬칭은 난감한 빛을 얼핏 드러내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게 말이지……. 이것도 대답해야 하냐?"

망설이는 기색에 바로 인상을 써 주었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원웨이, 아니 에드워드가 너무 원해서 가끔 자긴 했지만 애초에 그 녀석은 나와 띠동갑, 그러니까 나보다 12살이나 어려. 그뿐만이 아니라 유치원 다닐 때부터 봤던 녀석인데 연애 감정이 형성되기란 무리였다고."

홍위롄이 차오칭즈를 낳기 전까지 자식이 없던 차오쑹윈의 조카이기도 하였고, 동생처럼 귀여워했던 차오원웨이와 섹스 파트너 비슷한 관계가 된 것은 지금 돌이켜도 후회 만이 남는 일이라 저우룬칭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배였지만 옐리세이가 반응한 건 다른 포인트였다.

"12살이나 어려? 넌 미성년자까지 건드렸냐? 그 흉기 같은 좆으로? 와, 씨발놈인 줄은 진즉 알았지만 상종 못 할 새끼네. 내가 조폭 새끼이긴 해도 미성년자는 안 건드려. 씨발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보다 12살이나 어리다며. 그람 많아 봐야 십 대 후반이잖아."

저우룬칭은 잠시 입을 다물고 옐리세이를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기사에 에드워드의 나이는 안 나왔던가?"
"까먹었지."

실로 당당한 대꾸에 그는 다시금 할 말을 잃었다. 일전에 자신의 과거를 얘기했을 때도 느낀 거지만,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분위기 전환 하나는 아주 탁월하게 하는 놈이었다.

"34살."
"엉?"
"34살이라고, 나."
"……."
"……."
"……거짓말!!"

옐리세이가 버럭 외쳤다. 도 멱살이라도 잡히는 건가 우려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그는 양손으로 저우룬칭의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요리조리 돌리며 온 얼굴을 뜯어보았다.

"34살? 34사아알?! 나보다 6살이나 많다고? 기껏해야 한두 살 연상일 줄 알았는데 34살이라니! 완전 아저씨 아냐, 이거?!!"

지은 죄가 있어 멱살이 잡혀도 얌전히 있었지만 34살로 연타를 당하다 아저씨 소리까지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저우룬칭은 뺨에 손자국이라도 남길 듯이 꾸아악 움켜진 옐리세이의 손목을 붙잡아 얼굴로부터 떨어트렸다.

"너도 2년만 지나면 서른이야."
"내가 30살이 되면 넌 36살이잖아. 반올림하면 40살이라고! 맙소사!"
"키는 깎더니 나이는 반올림이냐."

유치한 불만을 곱씹긴 했지만 옐리세이의 호들갑 덕에 분위기가 전환된 건 사실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며 얼굴이 가려울 정도로 이모저모 살펴 보았다.

저녁 개점 시각아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주방의 밑 준비를 도우며 간단히 식사라도 때워야 할 것 같아 못다 한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하자는 말을 꺼내려 했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옐리세이가 정색했다.

"젠장. 너무 놀라서 또 까먹을 뻔했네. 스캔들까지 났던 에드워드랑 잠만 자는 관계였다면 난 어떤 관곈데?"
"연애하자며?"
"내가 연애하자는 말을 해서 그런 거냐?"
"뭐어……."

얼버무리며 옐리세이의 훤칠한 모습을 아래위로 재삼 훑어본 저우룬칭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섹스도 꽤 좋았지."

섹스‘가’ 아니라 섹스‘도’ 좋았다는 뜻이었지만 옐리세이는 전자의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잘생긴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씨발. 그러니까 내 몸만 필요하다, 이거 아냐?"

엉덩이만 필요하다고 대놓고 말하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거짓말을 한 번 하였던 죄로 오늘 저우룬칭은 알게 모르게 이것저것 양보해 주고 있었다. 옐리세이는 알아봤자 전혀 신경도 안 쓸 것 같았지만.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콧대가 하늘로 치솟는 듯한데 나도 자존심이 있다 이거야. 그렇게까지 섹스가 꼴렸다면, 내 모, 모, 내, 내……"

‘내 몸’ 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뻔히 보였지만 옐리세이는 그 한마디를 좀처럼 뱉어내지 못했다. 섹스 도중에 몸을 칭찬하니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던 얼굴이 상기되어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겨우 되삼켰다.

옐리세이가 결연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내 몸의 노예로 만들어 주마!!"

이어 비장하게 선언했다.

"나에게 푹 빠져서 나 없이는 살지 못하는 몸이 된 후에 오늘 일을 후회해도 늦었어!!"

그 우렁찬 결심에 저우룬칭은 왠지 박수를 쳐야 할 것 같았고, 충동을 행동으로 옮겼다.

"아, 그래. 건투를 비마. 파이팅."
"새꺄! 네 일이라니까?! 잘난 척하는 것도 지금뿐이야! 반드시 무릎 꿇고 구두에 키스하며 애원하게 해 주지!!"

옐리세이는 마지막 삿대질을 그의 코앞에서 휘두르며 멋진 퇴장을 하였다. ‘내 몸’ 이라는 단어의 여운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잘생긴 놈이 행동하니 무슨 짓을 해도 그럴듯해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육체의 노예로 만들겠답시고 또 엉덩이를 노리면 곤란하다는 실없는 생각 속에 막 담뱃갑을 꺼냈을 때, 갑자기 옐리세이가 문틈으로 빼꼼히 얼굴만 내밀었다.

"야. 저녁때 오면 밥 준다며. 밥 내놔."
"……자존심이 상했는데 내가 만든 밥은 넘어 가냐?"
"당연하지. 인간의 3대 욕구가 뭔지 모르냐? 무식한 놈. 너 때문에 소리쳤더니 배가 더 고파."

욕구에 따르는 본능만으로 살아간다고 말하는 게 자랑인지, 원. 저우룬칭은 잠자코 담뱃갑과 라이터를 도로 넣고 뒷문을 열었다.





CHAPTER 6





옐리세이가 저우룬칭을 호명하는 레퍼토리가 하나 더 늘었다.

「헤이, 늙다리」

엉덩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지, 이젠 숫제 6살 더 많다고 영감 취급이었다. 망할 거짓말을 한 번 했다고 뭐라고 부르던 신경 쓰지 않으려던 그도 며칠이 지나자 되받아쳤다.

"그래, 불렀냐. 명기."

명기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휴대폰에서 얼른 귀를 떨어트렸다. 판단은 옳았다. 왁왁 거리는 악다구니와 욕설이 허공으로 쏟아졌다. 돼지라고 불러도 별 반응이 없던 놈이 명기라 부르니 부모의 원수라도 만난 양 쌍욕을 퍼붓는다. 명기를 명기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부른단 말인가.

옐리세이가 욕하다 지쳐 잠잠해지고 나서야 전화기를 가까이 했다. 헥헥거리는 숨소리가 귓전을 자극했다.

「흥! 언젠가 네가 내 밑에 깔려서 살려 달라고 엉엉 울게 되는 날이 올걸!」
"음, 맞는 말이야. 네 안에 삽입했을 때 죽을 것 같긴 하더라. 여자보다 더 쫄깃하게 물던데:."

욕설이 두 번째로 쏟아졌다.
몇 분을 소모하고 난 후에야 옐리세이는 저우룬칭과 대화할 준비를 갖추었다.

"무슨 일인데?"
「젠장! 방금 실밥 빼고 왔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
"음?"

실밥을 빼고 왔다는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아 되물으니 짜증스럽게 외쳤다.

「좆에 있던 실밥을 됐다고! 섹스해도 된다고 오케이 받았다고!」

아, 벌써 시일이 그렇게 되었던가. 저우룬칭은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본의 아니게 금욕 생활한다고 고생했네."
「알면 당장 튀어와. 여기 모텔 잡아놨으니까」
"지금? 어제 늦게 자서 저녁 영업하기 전에 한숨 자려고 했다마는."
「네 말마따나 너 때문에 내가 금욕 생활을 얼마나 하고 있는 줄 아냐?! 오지 않으면 남창을 사러 가버릴 테다」

그걸 협박이라고 하냐는 비웃음이 나올 법도 하지만, 놀랍게도 그 협박이 통했다. 무심코 침대에서 일어난 저우룬칭은 왜 이 협박이 자신에게 먹혔는지 스스로 놀라움을 되짚기도 전에 대답했다.

"알았어. 어딘데?"
「저번에 네가 비열한 수작으로 약 먹여서 데리고 왔던 거기야. 찔리냐, 강간범?」

이죽거리는 옐리세이에게 호실까지 전해 들은 저우룬칭은 지갑을 갖고 홍가를 나왔다. 녀석도 낮에 빠져나왔으니 밖에서 오래 지체하지는 못할 테고 얼추 저녁 영업을 준비하기 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옐리세이는 TV의 성인방송에 채널을 맞추고 캔맥주를 마시며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엉덩이 잘 씻고 왔냐."는 그다운 인사를 넘기며 어깨 너머로 성인방송을 얼핏 보았다. GV가 아닌 AV이길래 영상이라면 꼭 게 이물이 아니어도 보는 건가 싶었는데, M 설정인 듯한 남자 배우가 후배위로 밧줄에 묶여서 엉덩이로는 페깅을 당하고, 입으로는 다른 여자 배우의 발을 핥고 있었다.

"저런 엉덩이가 취향이냐?"
"내 취향은 널 만났을 때부터 네 엉덩이였어."

엉덩이라는 단어만 제외하면 꽤 감동적일 수도 있었던 대사를 음흉하게 내뱉은 옐리세이가 TV를 껐다.

"아직도 GV는 방영이 안 되다니 이 세상은 차별적이고도 미개해."

헐떡거리던 신음이 꺼지자 훤한 모텔 방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대낮부터 모텔에 들락거린 적은 없었던지라 섹스를 하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인식하자 약간의 머쓱함이 감돌았다. 저우룬칭은 헛기침을 흠흠 했다.

"그럼……. 먼저 씻고 오마."
"가긴 어딜 가냐."

그의 손목을 붙잡은 옐리세이가 침대로 끌어당겼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이끌려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옐리세이가 입술을 핥으며 허리에 올라탔다.

"말했지? 널 내 노예로 만들어 주겠다고."
"네 몸의 노예라고 정확히 말해야지."
"조용히 해!"

거침없는 손길이 윗옷을 벗겨갔다. 탐스럽게 시선으로 핥으며 저우룬칭의 얼굴과, 목과, 어깨와, 가슴과 복부를 쓸며 내려온 손이 바지 벨트 위에서 멈칫했다.

그의 왼쪽 팔을 붙잡아 올린 옐리세이가 손등부터 시작되는 문신을 만지작거렸다.

"접때 보니까 문신이 얼추 어깨에서 보이는 것 같은데 등까지 있냐?"
"정확히는 전신 문신이야."

저우룬칭이 상체를 일으켰다. 문신이 궁금했던 옐리세이는 얼른 허리에서 내려왔고, 이윽고 그가 등을 돌려 엎드렸다.

낮은 감탄성이 나왔다. 다분히 성적인 목적으로 그를 어루만졌던 방금 전과는 다르게 순수한 감탄과 호기심으로 피부와, 그 위에 새겨진 문신을 쓰다듬었다. 왼쪽 손등에서 그의 팔을 휘감으며 시작된 문신은 어깨를 지나 등으로 넘어오며 섬세하게 수놓은 뒤 바지를 착의한 하체로 사라졌다.

"북한 자생 도마뱀이라고 했던 건 당연히 뻥이겠지?"
"아,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냐."

간지러운지 등을 쓰다듬을 때마다 가늘게 흠칫거리던 저우룬칭이 소리 죽여 웃었다.

"용이야. 서양에서 말하는 용이 아니라 동양의 용."
"나도 서양 용이랑 동양 용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거든? 이 새끼가 날 아주 무시하네."
"호, 어떻게 알았냐?"
"디즈니가 가르쳐줬다. 왜."

하지만 〈뮬란〉에서나 봤던 조그맣고 귀여운 용과는 전혀 달랐다. 부리부리한 눈매를 번들거리는 세 마리의 용이 등 중앙의 여의주 하나를 움켜쥔 채 생생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기다란 몸체가 한데 얽힌 세 마리의 용은 자웅을 결하는 듯도 하였고, 화합하는 듯도 하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된 한 폭의 훌륭한 동양화나 진배없었다.
저우룬칭이 한 마리는 팔부터 등까지, 한 마리는 등부터 다리까지, 한 마리는 등에 똬리를 틀고 있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2년 반이나 걸렸지. 원래는 한 마리만 그리려고 했는데 문신사가 장인 의식을 너무 투철하게 발휘해서 정신 차려보니 용 세 마리의 도안이 되어 있더라고. 영감님이 당신도 이제 나이가 많아 내 문신을 끝으로 은퇴해야 할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실력 발휘를 하고 싶다고 해서 승낙했고."

허나 문신사의 열정이 지불해야 했던 금액을 할인해 주지는 않았다.

"쓰리썸이네."

알기 쉽게 한 마디로 요약한 옐리세이는 선명한 묵빛을 머금은 용이 울부라리고 있는 통방울 같은 눈동자를 핥았다. 느슨하게 엎드려 있던 저우룬칭의 등이 약간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입술로 문신을 더듬으며 내려온 그는 여의주 부근에 숨을 길게 뱉으며 중얼거렸다.

"문신이 엉덩이에도 있는 거냐?"

저우룬칭은 한 호흡 뒤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빌어먹을. 그 문신사는 네 엉덩이와 은밀한 곳까지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만져봤겠네. 나도 만지지 못한 엉덩이를."

그가 소리 내어 웃자 잘게 떨리는 근육 위로 문신이 꿈틀거렸다.

"세상에 너 같은 변태만 있는 줄 아냐."
"흥. 변태가 뭐가 나빠. 네 차진 엉덩이에 박고 싶어 하는 게 뭐가 나빠."

욕망에 충실한 변태는 욕구를 충실하게 이행하며 바지 안쪽으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손끝이 속옷과 피부의 경계선에 닿자 저우룬칭이 황급히 그를 뿌리치며 몸을 돌렸다.

"아니, 이 새끼가? 가만히 누워 있……."

불평은 허공이 아닌, 저우룬칭의 입안으로 흩어졌다. 뺨을 안으며 키스한 그가 침대로 풀썩 쓰러트렸다. 왜 이놈이 주도권을 가져가려 하는 건지 불만스럽기는 했으나 일단은 그의 혀에 자신의 혀를 얽으며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체가 깊이 맞물렸다. 양손에 저우룬칭의 엉덩이가 꽉 잡혔다. 예상대로 감촉이 너무 좋았다.

"진짜 탱탱하다. 너어……."
       
옷 위로도 손바닥에 착착 감기는 느낌인데 직접 맨살을 만지면 얼마나 좋을까. 옐리세이는 흥분감에 허덕이며 서둘러 그의 바지를 벗겨내려 했지만 이번에도 저우룬칭에게 저지당했다. 정확히는, 저우룬칭이 먼저 그의 바지 버클을 풀며 손을 집어넣었다. 속옷을 젖히며 들어간 손이 바로 민감한 부위를 쥐어 옐리세이는 숨을 들이켰다. 저우룬칭이 입술 사이로 속삭였다.

"이것 봐. 구슬 빼니까 얼마나 좋냐. 만지는 감촉이 완전히 다르잖아."
"그건 내 물건이 원래 훌륭해서 그런, 으음……. 거고."

끝까지 지지 않으며 항변하는 혀끝에 맺힌 목소리를 핥으며 저우룬칭이 깊이 혀를 섞었다. 그의 손에 쥐인 성기에 차츰 힘이 들어갔다.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 성감이 모인 부위를 애무하는 걸 느긋하게 즐기던 옐리세이는 잊고 있던 사실을 퍼뜩 떠올렸다.


오늘 자신은 저놈을 몸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온 것이다.

"야, 야! 멈춰. 내가 빨아 줄게!"

저우룬칭이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어깨를 밀쳐 침대로 쓰러트리고는 얼른 허리 위에 올라탔다. 얼결에 깔리게 된 그의 얼굴이 상당히 묘했다.

"내가 친히 빨아 주신다는데 표정이 왜 그 모양이냐? 불만 있어?"
"음……. 진의가 의심스러우니까?"
"시끄러. 주둥이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놈이."

더 지체할 것도 없이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겼다. 속옷까지 한꺼번에 끌어 내린 그는 무심코 숨을 길게 들이켰다. 일단 놈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목적의식만 불태우느라 깜빡 했는데 이놈은, 컸다.

컸다.
아주 컸다.

마른침이 목 안으로 꼴깍 넘어갔다.

‘밑으로도 넣었는데 입으로도 넣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은 했지만 막상 입에 넣으려니 망설여졌다. 뚫어지게 내려다보기만 하고 있자니 저우룬칭이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저기, 좀 민망해지는데."

핫, 하고 정신을 차린 옐리세이는 괜히 툴툴거렸다.

"썅. 그러니까 왜 이렇게 큰 거냐고. 사람이 적당할 줄도 알아야지."
"작았으면 좋겠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무심코 본심이 튀어나왔다. 저우룬칭의 낮은 웃음소리가 뒤를 잇자 홧김에 고개를 숙여 놈의 것을 머금었다. 채 발기하지 않은 사이즈라 입에 넣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부터겠지만.

심호흡하며 귀두부터 천천히 빨았다. 음경을 입으로 핥는 것이 오랜만이라 맛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면 단지, 놈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침이 한 번 더 꿀꺽 넘어갔다. 저우룬칭의 다리 사이에 엎드려서 성기를 빤다는 굴종적인 자세가 어쩐지 흥분을 더욱 부채질하는 감각이 있었다.

고환을 굴리던 손가락으로 뿌리 부분을 쥐고 기둥을 혀로 주욱 훑었다. 혓바닥에 어느 정도 심이 굳고 단단해진 성기가 얽혔다. 금욕생활을 보내는동안 머릿속에서만 오락가락하던 환상이 현실이 되어 그의 손안에 있었다. 놈의 것을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발기할 것만 같았다. 이니, 이미 발기하였다. 아랫도리가 묵직했다.

옐리세이는 단숨을 뱉으며 성기를 적시다가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부풀어 오르는 체적이 빠듯하게 입안을 채웠다. 저우룬칭의 복근이 격하게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양손이 그의 관자놀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추삽질하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선단이 입천장과 목 안쪽을 연방 긁었다. 억지로 목젖을 젖히며 목구멍까지 쑤셔 넣지는 않았지만, 필시 그 어떤 놈의 것을 물었을 때보다 가장 깊은 안쪽을 그가 범하고 있는 게 분명했고, 그 생각은 옐리세이를 더욱 흥분하게 하였다. 텁텁하게 느껴지는 풋내와 진한 체향이 지나치게 달았다.

넣고 싶었다. 빨리 넣고 싶었다. 이 크고 굵은 것이 엉덩이를 한껏 벌리며 배 안쪽을 퍽퍽 치받길 바랐다.

"하아, 하아……. 안, 안 되겠다."

옐리세이는 자신을 붙잡은 저우룬칭의 팔을 밀어내며 화급히 얼굴을 뗐다. 1분 1초가 아까웠다. 처음은 자신이 먼저 오럴섹스를 하고 이어 저우룬칭의 오럴섹스도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드디어 실밥을 푼 자신의 물건을 거짓말만 하는 놈의 입에 쑤셔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삽입이 더 급했다.

조급한 손으로 바지를 벗자 저우룬칭이 콘돔과 러브젤을 갖고 왔다. 콘돔을 찢는 잠깐의 틈마저도 조급하여 입술이 말랐다.

빨리하라고 재촉하려던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저우룬칭까지 멈칫하여 옷을 벗을 때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옐리세이의 휴대폰이었다. 당연히 옐리세이는 무시했다. 몸이 안달이 났는데 전화를 받을 심적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신경 쓰지 마."

단호하게 무시하자 저우룬칭도 고개를 돌렸다. 벨소리가 끊어졌다. 그러나 끊긴 직후 또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저우룬칭이 약간 무색한 어투로 말했다.

"받든지 끄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것 같다만."
"……아오! 어떤 새끼가 눈치 없이 전화질이야!"

흥분이 한풀 꺾여 더 화가 났다. 배터리를 뽑아서 아예 방구석으로 집어던질 요량으로 팔을 뻗어 휴대폰을 잡았지만 번호가 심상치 않았다. 나스따시야의 번호였다. 나스따시야와 그는 사적인 친분 관계가 전혀 없다. 그녀가 따로 연락을 했다는 건 조직의 일이라는 의미였다.

안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 짜증으로 이를 아득바득 갈며 통화 버튼을 눌렸다.

"왜 부르슈."
「어디인가?」
"병원. 손가락 탈골된 적 있다고 했잖아. 잘 낫고 있는지 검사받으러         왔어."

실밥을 제거하러 병원에 가기 전에 대었던 핑계를 고스란히 읊으니 나스따시야가 미심쩍어했다.

「병원에 먼저 전화를 했다만, 닥터는 네가 나간 지 한참 되었다더군」
"바람 좀 쐬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예상했던 물음이라 뻥은 술술 잘 나왔다. 하지만 나스따시야는 거짓말이든 참말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볼일 끝났으면 들어와라」
"나 멀리 나왔어."
「멀어봤자 야이쑤코 내겠지. 배 타고 뜨랏에 갔다면 이해해 주마」
"아씨, 왜 부르는 건데?!"

핑계가 씨알도 먹히지 않자 언성이 높아졌다.

「보스께서 찾으신다」

체자르가 찾으니 돌아오라는 말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휴대폰을 떨어트리고 잠시 입속으로 욕을 구시렁거린 옐리세이는 재차 물었다.

"한 시간…… 아니, 30분만 있다가 들어가면 안 되냐? 나 급해!"

대답은 코웃음소리와 함께 돌아온 비아냥거림이었다.

「올해 들은 농담 중 제일 같잖군」

전화는 그 말을 끝으로 끊어졌다. 옐리세이는 휴대폰을 질대에 집어던지며 짜증을 폭발시켰다.

"망할 여편네! 세상에서 지가 제일 잘났지!!"
"……가 봐야 되냐?"
"씨발!!"

얼추 대화로 맥락이 파악되었는지 저우룬칭은 슬금슬금 옷을 끌어올려 입었다. 저 튼실한 물건과 이번에도 미처 보지 못한 엉덩이가 속옷과 바지로 감추어지자 환장할 것 같았다.

"야! 네 엉덩이 절대 다른 놈들 보여주면 안 돼!"
"관심 갖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니까."
"아무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옐리세이는 거의 울부짖으며 옷을 챙겨 입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문신 감상할 때 엉덩이부터 볼 것을!

저우룬칭의 엉덩이는 여전히 요원했다.





좀비같이 귀환하자, 사장실에는 나스따시야뿐만이 아니라 이오시프까지 있었다. 비서인 나스따시야가 사장실에 있는 건 당연하지만 카지노 경영에 관한 일이 아니면 거의 방문하지 않는 이오시프가 있는 건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다 자신까지 불렀다면 더욱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된다.

골치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당장에라도 등을 돌려 떠나고픈 마음을 다잡으며 기력 없이 인사하는 그를 체자르가 책상으로 가까이 불렀다.

"이오시프가 가져온 영상이다만,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 뒤로도 몇 번 더 카지노에 찾아왔어. 고의 인지는 모르겠다만 돈을 잃고 딜러에게 몇 번 시비를 걸다가 기도들한테 강제로 쫓겨난 적도 있고."

옐리세이가 보기 쉽도록 비뚜름히 돌린 모니터에 뜬 정지 영상은 일전에 이오시프가 낯익지 않으냐며 보여주었던 카지노의 CCTV였다. 곁눈으로 이오시프를 보니 모니터를 눈짓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눈짓인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때와는 다르게 보스가 직접 말한 것이니 옐리세이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 남자를 뜯어보았다.

키도 크고 등빨도 있고 근육도 우람하다. 볼수록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저 덩치에 꽁지머리라니, 어떤 의미로는 깜찍해 보이긴 하지만. 얼굴이 귀엽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CCTV 영상으로는 영 자세히 보기가 어려웠다. 영화나 미드에서는 CCTV 영상 캡처의 보정도 잘하던데 역시 그건 미국의 음모였나. 암스트롱과 올, 올...... 뭐더라, 아무튼 우주비행사들의 달 착륙 영상도 NASA에서 조작한 게 분명해. 우리나라도 아직 못한 일을 미국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야, 야."

이오시프가 옆구리를 꾹꾹 찔러서야 옐리세이는 허우적거리던 잡념에서 고개를 들었다.

"자세히 좀 봐라."
"잘 안 보인단 말이야."

어깨에 팔을 건 이오시프가 당기는 대로 끌려가 남자를 관찰했지만 별 신통한 느낌은 안 들었다. 이오시프가 답답하다는 듯 모니터를 가리켰다.

"작년에 너랑 나랑 모스크바 같이 갔을 때 만났던 그 남자 아냐?"

그 말을 듣고서야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뜩, 하는 게 있었다. 기억력이 비상하지도 않고 쓸데없는 일은 잊자는 주의의 옐리세이였지만 그때의 만남은 퍽 강렬했기 때문에 잊히지 않고 있었다.

옐리세이는 새삼스러이 어렴풋한 윤곽의 남자를 살펴보았다. 맞다. 이 자식은 그도 아는 놈이었다.

"이제야 기억이 났네요. 이름은…… 이오시프가 대답해 줄 겁니다."
"시초프입니다, 체자르 끼릴로비치."
"흠."

체자르가 감탄인지 침음인지 애매한 소리를 흘리며 턱을 괴었다.

"시초프라는 남자가 쿠즈민스카야의 조직원이라고 했지? 어쩌다가 쿠즈민스카야 쪽 놈들과 알게 된 거냐?"

이오시프는 민망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하였고, 옐리세이는 되살아난 기억을 신나게 주워 올렸다.

"저 새끼도 게이거든요. 돼지 새끼가 건방지게 주제도 모르고 저한테 추근거리더라고요. 돈 줄 테니 한 번 대달라고 해서 두들겨 패 줬죠. 여기, 보이시죠? 그때 코뼈 내려 앉은 거 못 고쳤나봅니다. 밖에서 만난 것만 아니었다면 팔뚝만 한 딜도라도 구해서 저 새끼의 후장에 꽂아 버."
"거기까지는 됐고."

기세 좋게 시작된 이야기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자 체자르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반년 전에 쿠즈민이 투옥되면서 조직도 와해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잔당이 야이쑤코에는 왜 온 거지?"
"남창이 많으니까요?"

야이쑤코에서 남창의 거리인 멜닛 스트리트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옐리세이는 반사적으로 툭 내뱉었고, 다행히 체자르는 그의 대답을 무시함으로써 뒤늦게 밀려들었던 쪽팔림을 어느 정도 상쇄해 주었다.

"멘쇼프스카야에 포섭되었을 기능성은 없을까요?"

혼잣말에 가까운 이오시프의 의문에 나스따시야가 대답했다.

"차라리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지."
"……정말이지, 여기는 돈은 잘 벌려도 정보가 너무 늦는군."

체자르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시가를 피우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서성이다 옐리세이를 돌아보았다.

"레샤. 모스크바에 갔을 때 까지미르에게 쿠즈민스카야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나?"
"아니요. 제가 보고 드린 것 외에는 그분도 특별한 언급이 없으셨습니다."
"……하긴. 오늘 통화했을 때도 얘기는 없었으니."

나스따시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베레조프스끼와 함께 야이쑤코를 방문하기로 하셨으니 그때 다시 말씀을 나눠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아무래도 전화상으로는 상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뭣하니까 말이야. 만에 하나 도청 위험도 있고……."

쿠즈민스카야라든가 베레조프스끼라든가 조직의 안위를 위협하는 사안에 대한 의논은 자신보다 훨씬 똑똑한 체자르와 나스따시야가 할 것이다. 그렇기에 머릿속으로 시초프를 그때 패는 게 아니라 죽여 놓을 걸 그랬다고 딴생각을 하고 있던 옐리세이는 무시 하지 못할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 중에 휙 지나가는 걸 듣고 멈칫했다.

"보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해 봐."
"방금 까지미르 까지미로비치께서도 베레조프스끼와 동행하여 야이쑤코에 온다, 뭐 이런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아, 그래. 이것도 같이 얘기하려고 했었다."

체자르가 턱을 주억거렸다.

"오늘 받은 연락이지만 일정이 변경되어서 까지미르도 베레조프스끼와 동행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

까지미르 돌고프루데니는 체자르의 오랜 친구로 란뜨제프스카야에서도 같은 파벌에 속해 있다. 옐리세이가 모스크바에 두 달 동안 머무를 수 있는 편의와 공식적인 이유를 제공해 준 지원자이기도 하다.

체자르의 동료이기도 하고 정보원이기도 한 끼지미르가 베레조프스끼와 대동한다는 것은 체자르에게 있어서 숨구멍이 하나 트이는 일이기도 하였기에 환영할 방문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람이 한 명 더 - 물론 그 한 명에는 까지미르의 부하들도 포함되겠지만 一 늘었을 뿐인데 굳이 일정이 변경되었다는 첨언까지 한 걸까.

그리고, 폭탄선언이 투하하였다.

"베레조프스끼가 야이쑤코에 들르기 전에 방콕 인근에 체류하였다가 올 것이라는군. 명목상의 이유도 있지만 관광 이유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겠지."
"네에에엑?!!"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일반 회사에 비유하자면 외국 출장을 오는 것과 비슷한데 출장 오기 전에 관광 여행부터 한다고? 물론 그 영감이 관광 여행을 하든 도박 여행을 하든 알 바는 아니지만, 덕분에 옐리세이의 일이 더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보스, 설마 저희 쪽에서 베레조프스끼가 방콕을 놀러 다닐 때의 경호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우리는 야이쑤코 지부가 아니라 타이 지부야, 레샤."
"……."

체자르의 앞만 아니더라도 짜증과 욕설을 버무려서 걸쭉하게 뱉어버렸을 것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는 그의 표정을 정면에서 목격한 체자르는 그냥 실소했지만, 나스따시야는 진지했다.

"우리 조직과 거래하는 타이의 마피아를 만나는 것이니 경호가 소홀하면 모든 책임은 바로 이쪽으로 넘어오게 된다. 이 정도는 이해했겠지?"
"내가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바보냐?!"
"알겠다면 다행이군. 경호 일정도 새롭게 짜야 할 거다. 수고해라."
"수고."

이오시프마저도 싱긋거리며 한 손을 흔들었다. 약이 올랐지만 옐리세이는 5분 후에 베레조프스끼의 새 일정표를 가지고 터덜터덜 사장실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일찍 끝나면 도로 저우룬칭을 불러내려 했는데 시간마저 애매하다. 홍가가 저녁 영업을 개시할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옐리세이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바쁠 시간인데 예상외로 저우룬칭은 금방 받았다.

「일은 다 끝났냐?」
"안 끝났어. 씨발!! 더 생겼어!!"
「저런」

저우룬칭이 혀를 찼다. 자리를 옮기는지 목소리 뒤로 주방 특유의 소음이 밀려나가고 계단이 삐걱거리다가,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야기를 받아주는 사람이 생기자 옐리세이는 아예 빈 회의실로 기어들어가 휴대폰을 붙잡고 본격적으로 짜증을 폭발 시켰다.

"아니 왜 고생해서 기껏 플렌 다 짜놓은 걸 엎고 새로 만들게 하냐고! 이럴 거면 처음부터 이렇게 시키든가, 아니면 일찍 맡기지를 말든가! 난 가끔씩 내가 마피아가 아니라 착실한 회사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빌어처먹을."

아무리 짜증이 한계치까지 치민 상태라도 조직의 일을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는 이성이 남아 있기에 상당히 애매모호한 불평이 되긴 했지만, 저우룬칭은 잘 들어주었다.

「회사원은 법으로 정해진 야근수당이라도 받지 않나?」
"내 말이 그 말이야! 거기다가 말이지, 내가 머리 쓰는 일 하러 조폭이 됐겠냐? 난 학교 다닐 때도 등수를 뒤에서 헤아리는 게 더 빨랐어."
「무식해도 당당하니 보기는 좋네」
"뭐라?!"
「칭찬이야, 칭찬」

작은 웃음소리로 옐리세이의 부루퉁한 반문을 막은 저우룬칭이 말을 이었다.

「그럼 내일도 바쁘냐? 휴일이라서 시간 되면 만날까 했는데」
"……아아아악!"

옐리세이는 유혹적으로 손짓하는 저우룬칭의 엉덩이가 저 멀리 훠이훠이 날아가는 환상 속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그도 되묻지 않았다.

자꾸만 연장되는 금욕 생활에 휴대폰을 붙들고 통곡이라도 하고 싶어 기력 없이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자니, 저우룬칭이 입속으로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다 물었다.

「지금은 혼자 있냐?」
"어."
「옆에 아무도 없고?」
"어. 빈 회의실인데."
「회의실 문을 잠가 봐」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의아하였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안쪽에서 문을 잠갔다.

「그 회의실에 CCTV 혹시 달려 있나?」
"없을 텐데."
「확실히 찾아봐라」

옐리세이는 천장과 모서리까지 구석구석 둘러보고 착석했다.

"없어."
「확실하냐?」
"속고만 살았냐."
「음, 좋아. 폰섹스해 주마」

순간 그는 자신의 욕구 불만이 극에 달한 나머지 환청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휴대폰이 고장이 났거나.

"한 번 더 말해 봐. 잘 안 들렸어."
「폰섹」

폰섹, 폰섹스.
옐리세이는 급격히 숨을 들이켰다.

"지, 진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저우룬칭과 폰섹스라니, 상상만으로도 발기할 것 같았다. 침이 연방 목 안으로 꼴깍 꼴깍 넘어갔다.

"뭐,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일단…… 지퍼를 내려 봐」

기대감으로 벨트를 풀고 속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수술하고 난 뒤에는 제대로 못 봤는데, 흉터 같은 게 남았나?」
"약간. 그렇지만 수술 흔적은 곧 없어진다고 했어."
「거기, 혀로 핥으면서 빨아주면 기분이 어떨 것 같냐?」
"좋, 좋지…… "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야가 어둡게 차단되자 머릿속에 저우룬칭의 목소리만 들어찼다. 톤이 낮은, 저음의 그윽한 목소리.

목소리가 속닥였다.

「상상해 봐.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

상상했다. 저우룬칭이, 의자에 앉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그 작은 입으로 성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아직은 완전히 발기하지 않았으니 놈의 작은 입으로도 성기를 삼키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델 듯이 뜨거운 구강 내에서 기둥에 질척한 혓바닥이 감기고, 그리고…….

입술로 혀끝을 축였다.

"이루마티오하고 싶은데……. 너 꼼짝도 못 하도록 머리를 꽉 쥐고, 흔들고 싶어. 나 그거 좋아해."
「아」

건너편에서 저우룬칭이 작게 웃었다.

「너답군. 그리고?」

그의 성기를 입으로 받아내며 힘겨워하였던 남창들의 얼굴 위로 저우룬칭의 얼굴이 겹쳐졌다. 삼백안의 눈매를 한껏 찌푸리며 턱이 뻐근하도록 입을 벌린 그의 괴로운 얼굴. 타액이 줄줄 흘러 턱을 적시고, 한껏 벌리고 있을 테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이니 이가 닿을지도 모른다.

"입, 크게 잘 벌려야 돼. 너……."

축축하고 홧홧하리만큼 뜨거운 저우룬칭의 입에 거칠게 추삽질하는 광경을 상상하며 성기를 쥔 손을 흔들었다.

"목구멍도 잘 열고, 깊이 넣을 거니까."
「……목젖을 넘어서?」
"그래. 끝까지 쑤셔 넣어서, 하아, 추삽질할 거야."

눈물까지 흘리며 격한 구토감에 컥컥 괴로워하면서도 입을 크게 벌리려고 애쓰는 저우룬칭의 얼굴이 흥분감을 부채질했다. 상상 속의 저우룬칭은 깊고, 좁고, 뜨거웠다. 아, 정말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싶다.

"혀 내밀어서……."
「으음」  
"불알까지 잘 빨면 밖으로 조금 빼 줄게."

들릴 듯 말 듯 하였던 저우룬칭의 대답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옐리세이는 잘게 헐떡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숨통이 트여서 콜록거리면 다시 쑤셔 박을 거야. 공기랑 구토감이 내 좆과 함께 억지로 목구멍 안까지 밀려들어가니까 더 괴롭겠지. 하지만 참아야 돼. 난 정말 기분이 좋거든. 네 작은 입과 좁은 목구멍을 내 좆으로 가득 채운다면 끝내주는 정복감이 들 거야. 다른 놈들은 빨다가 이를 세우면 뺨을 후려쳤지만, 너한테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입 잘 벌리고 목구멍 조여서…….

"읏!"

목구멍 안까지 깊숙이 찔러 넣은 성기에서 정액이 분출하는 상상과 함께 사정했다. 옐리세이는 떨어트릴 뻔한 휴대폰을 겨우 제대로 쥐면서 테이블에 엎드렸다. 가쁜 숨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하아, 하. 목구멍에 한 번 싸고, 남은 좆물은 혓바닥에 문질러 줄 테니까 잘 받아 삼켜."

저우룬칭도 숨을 고르는 듯 대화가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하고 싶은 플레이냐?」
"어."
「구슬을 제거해서 다행이군. 일 열심히 해라」

그래서 해 주겠다는 건지 아닌 건지 질문하려 했지만 전화는 그것으로 끊어졌다. 옐리세이는 통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테이블에 늘어져서 흥분을 가다듬었다.





짜증 섞인 외침이 우렁차게 울렸다. 오늘 아침부터 끊이지 않던 광경이었다.

"씨발아! 몇 번을 말해. 네가 여행사 직원이냐, 내가 여행사 직원이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가 가이드로서의 일을 하는 건 야이쑤코 내로 국한되어서 정말 방콕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야. 그럼 내가 일일이 다 찾으리? 자료라도 준비되어 있을 거 아냐."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란뜨제프스카야 산하의 여행사 직원이 거듭 송구하다는 대답을 하며 굽실거렸다. 기껏 전화까지 했는데도 전혀 성과가 없자 옐리세이는 짜증을 내며 수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아침부터 옐리세이의 기분이 상당히 저조하였기에 부하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하나둘 씩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아 현재 옆에 있는 사람은 빠벨뿐이었다.

옐리세이는 책상에 두 다리를 꼬아 올려놓고는 의자를 뒤로 길게 빼어 늘어졌다. 그의 체중을 받은 의자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야이쑤코 내의 일정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어찌어찌 변경이 끝났는데, 문제는 방콕이었다. 방콕에는 오전에 도착하지만 타이의 마피아 보스와 회합을 갖는 건 저녁이었다. 그 틈을 메워야했다. 경호에도 용이하고 관광 욕구도 충족될 수 있는 장소로.

"아오! 나도 방콕은 공항 외에는 가본 적이 없다고! 내가 가이드야?!"

오늘 아침부터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짜증이기에 빠벨은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혼자서 한참을 씩씩거리며 짜증을 삭이던 옐리세이는 문득 자신이 알고 있는 가이드를 한 명 더 떠올렸다. 그놈도 야이쑤코의 가이드인 건 매한가지지만 다른 정보를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뭐든 매달리고 봐야 할 것 같았던 옐리세이는 휴대폰으로 니시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간 울리던 전화는 부재중알림으로 연결되었다. 한 번 더 전화를 해 봐도 마찬 가지였다.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빠벨에게 턱짓했다.

"야, 빠벨까. 운해정행공사 전화번호 좀 알아와 봐."

빠벨은 성실하게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리고 책상 밖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옐리세이를 대신하여 그의 전화기의 번호를 눌러 수화기를 주었다.

「안녕하세요. 운해정행공사의 왕잉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상냥한 목소리가 인사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기에 옐리세이에게는 그다지 상냥함이 와 닿지 않았다.

"니시무라를 바꿔 주쇼."
「죄송합니다만, 저희 회사에는 니시무라라는 성씨의 직원이 두 명 있습니다. 어느 분께 용건이 있으신 건지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니시무라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옐리세이는 끄응, 하고 미간을 모았다.

"가이드인데, 남자고……."

이 외에 딱히 알고 있는 인적 사항이 없어서 얼버무렸는데, 다행히 세 조건을 모두 갖는 직원은 한 명뿐이었던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연결해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선 연결음이 이어지다, 이윽고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니시무라입니다」
"겨우 연결되네. 나야, 옐리세이. 휴대폰으로 안 받아서 회사로 전화했다."
「아, 죄송해요. 무음으로 해 놨더니 전화 오는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그때 이름을 확인하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뭐...... 예상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해결되긴 했지. 미안한데 부탁 한 가지만 더 해도 될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요. 뭡니까?」
"방콕의 여행지에 대해서 아는 거 있냐?"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는지 니시무라는 즉답하지 못하고, 얼마간 뜸을 들였다.

「여행이라도 가시게요? 때마침 성수기이긴 합니다만……」
"내가 가는 건 아니고, 알아봐야 할 게 있어서."
「그러시군요. 저희 쪽 일이 방콕에도 있는 건 아니지만 혹시 관광객이 질문을 할까 싶어서 약간 공부해 둔 게 있긴 합니다. 딱 기본적인 지식 정도지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옐리세이는 반색했다. 그래, 가이드라면 이 정도 소양은 숙지하고 있어야지!

"오, 내가 원하는 게 그거야! 괜찮으면 오늘 가르쳐 줄 수 있냐?"
「상관없지만 오늘은 5시까지 일하는데 그 후라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난 지금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거든."

니시무라가 작게 웃었다.

「퇴근하는 대로 바로 나가겠습니다. 장소는……. 음, 저번에 갔었던 타이 레스토랑 맞은편에 카페가 하나 있거든요. 거기서 뵐까요?」

옐리세이도 간 적이 있었던 카페였다. 만날 약속을 끝마치니 왠지 일을 다 해결한 듯한 상쾌한 기분이 되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질 않았던가.

약속 시각인 5시까지는 1시간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겨우 한 가지 난관을 넘은 참에 더 일을 만들어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길, 나도 모르겠다. 5시까지는 놀 테다."

근래 그가 가장 유익하게 놀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옐리세이는 내던졌던 휴대폰을 도로 주워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야. 오늘 휴일이라며. 뭐 하고 있냐?"
「뭐 하긴. 공부하고 있었지」
"와, 변태 새끼."

즐거운 휴일에 공부를 한다는 변태에게 혀를 차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안경도 쓰고 있냐?"

잠시 대답이 없었다. 기다리던 옐리세이가 "뒈졌냐?"라며 빈정거려 주자, 그는 주저하며 물었다.

「…… 안경 쓰고 있을 때 내 얼굴에 페이셜하고 싶어서 물은 건 아니지?」
"쳇. 들켰네."
「꿈 깨」
"웃기지 마."

옐리세이는 이죽거리며 한 손으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GV에서 안경 쓴 얼굴에 싸는 거 나름 꼴리던데. 일단 저우룬칭을 대상으로 삼은 섹스 버킷 리스트에 이라마티오와 디프 스로트 다음으로 페이셜을 추가해 두기로 했다.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놈의 처녀였다.

팔걸이를 탁탁탁 두드리며 눈짓하자 빠벨이 눈치 빠르게 잰걸음으로 다가와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일 때문에 바쁘다더니 헛소리할 시간은 있나 보군」
"휴식 시간이야, 인마. 오늘 진짜 바쁘고 짜증났단 말이야. 스트레스 쌓여서 위가 쑤실 지경이라니까. 내가 방콕 여행지에 대해서 알 것 같냐?"
「여행지를 조사했나?」
"그래. 성질이 안 나게 생겼냐고."
「치앙마이 부근이라면 얼추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얼마 전에 갔다 왔거든」

이건 또 금시초문이었다.

"엥? 언제?"
「언제겠냐. 네가 모텔에서 지랄했을 때지」
"여자 만나러 간 거 아니었어?! 설마 그년 데리고 치앙마이까지 갔었냐?!"

깜짝 놀란 옐리세이는 책상에서 건들거리고 있던 다리마저 바닥으로 내리며 정색했다. 저우룬칭이 한숨을 쉬었다.

「상상력은 좋군. 정말 여행만 갔다 온 거야.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니까 믿어」
"그럼 그년은?!"
「그 여자는 아는…… 형님이 만나보라고 소개해 주신 여자야. 그날 처음 만났고 원해서 소개를 받은 것도 아니었어. 음, 네가 그날 잘한 일 중 하나는 그녀를 쫓아낸 거였군」
"등신아. 그럴 때에는 나라는 애인이 있으니까 여자 따위는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어야지."

저우룬칭이 어처구니없어하며 웃었다. 당연히 휴대폰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옐리세이는 괜히 눈을 부라렸다.

"지금은 그렇게 웃고 있는데 나중에 눈물콧물 뽑으면서 주인님, 주인님하고 울 날이 올걸? 넌 내 노예 확정이라고."
「네, 주인님. 이제 됐나?」
"어쭈? 까불어? 지금이라도 날 좋아한다고 말하면 관대히 봐 주지."
「날 좋아한다」
"주인님을 좋아한다고 말해야지!"
「주인님을 좋아한다고 말해야지」
"야. 차라리 입을 닥쳐!"

휴대폰을 붙잡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며 노닥거리자니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발열로 휴대폰이 후끈후끈 뜨거웠다.

"아무튼 바쁜 일만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
「엉덩이 잘 씻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잘 아네."
「그럴 일은 없을 거라니까」
"흥."

코웃음을 쳐 주고 전화를 끊었다. 배터리도 거의 아슬아슬하게 닳아 있었기에 갈아 끼웠다. 시시덕대는 잡담으로 이렇게 오래 통화한 건 처음이었기에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묘한 기분이었다. 연애라는 거,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빠벨에게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저녁 먹으라는 말을 하고 빌딩을 나왔다. 약속 장소에는 니시무라가 앞서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히 음료를 주문하고 그가 가지고 온 가이드 북을 보았다. 다행히 영어로도 적혀 있었다.

"좋아, 좋아. 혹시 방콕에 여행을 간 적은 있고?"
"네. 여기에 취직하기 전에 한 번 가볍게 둘러보기는 했습니다."
"그럼 말이지, 방콕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을 만큼 적당히 가깝고, 기왕이면 사람도 적은 곳이 어디일까?"
"관광을 하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가요?"
"영감."

니시무라가 가이드북을 뒤적거리며 고민하다가 두어 곳을 가리켰다.

"방콕 내에서 둘러본다면 나이도 있으신 분이니 짜뚜짝 공원이 괜찮을 것 같고요. 사람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면 왕궁과 사원도 둘러보기에 좋죠. 차를 좀 타고 나가도 된다면 쑤언 쌈 프란과 쩌라케도 있습니다."

관광지에 대한 몇 가지 부연 설명을 더 들었다. 대충 고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머지 비는 시간에는 술집에나 처박아서 호스티스를 옆구리에 끼게 하면 될 것이다.

"네 덕분에 살았다, 고마워. 저녁 전이지? 내가 쏠 테니까 홍가에 갈래? 너도 알지? 중국 요리랑 술 파는 가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중국 요리는 잘 못 먹어서요."
"아, 그러냐? 그럼 가고 싶은 곳 있어?"
"간단하게 꾸어이띠여우(타이 요리. 쌀국수)는 어떠신가요? 오늘 속이 안 좋네요."

저녁으로 면 요리는 부족할 것 같긴 했지만 어차피 오늘은 늦게까지 일해야 하니 야참을 따로 먹어야 하긴 했다. 그렇게 하자고 끄덕거린 옐리세이는 반 정도 남은 밀크쉐이크를 한입에 털어 마셨다. 가이드북을 챙기며 일어나려는데,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참. 그런데 너 이름이 뭐였더라? 운해정행공사에 전화했을 때 니시무라가 두 명이 있다고 하더라고."
"다른 니시무라는 여자 분이세요. 제 이름은 명함에 있었을 텐데 잊으셨어요?"
"어. 깜빡했어."

정확히 말하자면 보지도 않고 까먹어서 흘렸지만 뻔뻔하게 대꾸했다. 명함 따위가 뭐 대수로운 일이란 말인가. 니시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별반 언짧은 기색 없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히데아키. 니시무라 히데아키입니다."





매운 손이 등을 찰싹 때렸다.

"오빠, 오빠아〜 내 얘기 듣고 있긴 하는 거야?"
"앗, 미안.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며 걷느라 여자 친구의 말을 듣지 못한 장쯔궈는 얼른 사과했다. 천링링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야이쑤코에 정착한 후 양탕바오의 소개로 사귀게 되었으니 이럭저럭 3년이나 되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데?"
"오빠네 가게의 저우 선생, 그분 말이야. 결혼은 안 하셨지? 혹시 사귀는 사람이나 따로 만나는 사람은 있으셔 ?"

그 말에 불현듯 옐리세이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기에 식겁하여 머릿속을 털어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없어. 내가 알기로는 없으신데, 왜?"

천링링이 다행이라며 반색했다.

"잘됐다. 진구가 예전부터 저우 선생에게 관심은 있었는데, 오빠도 알잖아. 인상이 좀 무서우신 거. 겁이 나서 먼저 얘기를 못 걸겠더래. 오빠가 중간에서 말을 잘해서 개랑 소개팅 자리 좀 만들어주라."
"......네 친구가 남자는 아니겠지?"
"응? 여자앤데 혹시……."

의미심장한 장쯔궈의 물음에 그녀는 바짝 팔에 붙으며 속닥거렸다. 저녁시간대의 번화가라 행인들로 북적거리기는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이셔?"
"아니. 아니야. 설마해서 물어본 거야, 하하하."

어설프게 무마하는 웃음에 천링링도 표정을 풀며 어깨를 툭탁거렸다.

"오빠도 차암. 만약에 내 친구가 게이라도 어떻게 대뜸 소개시켜달라고 그러겠어?"
"그렇지. 지가 게이라고 막무가내로 들이닥쳐서 집적거리는 놈이 정신 나간 놈이지."

특정적인 누군가를 떠올리며 장쯔궈는 강하게 긍정했다.

"오케이하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물어는 볼게."
"고마워, 오빠! 걔랑 잘되면 좋겠다. 아, 나 여기 카페 잠시만. 어제 친구랑 왔다가 지갑을 놔두고 갔어."

천링링이 팔짱을 풀고 막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밖에서 기다리려다 장쯔궈도 슬렁슬렁 따라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보관 중이던 지갑을 받은 그녀는 고맙다며 거듭 인사하고는 테이크아웃 음료라도 주문하기 위해 장쯔궈에게 손짓했다.

"오빠는 뭐 마실래?"
"카라멜 프라푸치노."

그녀가 음료를 고르는 동안 뜻 없이 가게 전경을 휘둘러보던 장쯔궈는 불현듯 눈을 치떴다.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며 느슨하게 이완되어 있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카운터 앞에 비치되어 있는 메뉴판을 하나 들어 읽는 척하며 얼굴을 가리고 다시 한 번 더 살폈다.

카페의 가장 안쪽, 대로의 전면창에서는 절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에 옐리세이와 마주 앉은 동양인 청년이 가면처럼 공허하게 미소하고 있었다.

잘못 본 게 절대 아니었다. 시춘, 니시무라 히데아키였다.





"시춘을 봤습니다."

데이트를 하러 나가더니 한 시간 만에 돌아온 장쯔궈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저우룬칭은 일순 대답마저 잊고 입을 몇 번 여닫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른 목소리로 되물었다.

"……히데가 확실하냐?"
"제가 그 새끼를 잘못 볼 리가 없잖습니까. 다리만 이렇지 않았어도 바로 잡아서……."

장쯔궈가 이를 악물었다. 3년 전에 니시무라에게 살해당한 저우룬칭의 애인 장치샹은 그의 육촌누이이기도 하였다. 가족을 지키지 못한 건 그도 저우룬칭과 같았다.

"시춘 새끼와 홍콩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하셨죠? 뭐랍디까?"
"살아있다는 인사 외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때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등 뒤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었거든. ……란콰이펑이었지."

화공당 총주의 암살로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경찰에 마크되고 있던 저우룬칭에게 란 콰이펑의 거리를 오가는 행인 모두를 인질로 잡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므로 큰 대응을 하지 못하고 대화에 응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몇 마디 얘기만 하고 금방 사라지더군. 그런데 하필이면 이 시기에 야이쑤코까지 왔다면……,"
"절대 우연은 아닐 겁니다."
"목적은 롄 누님일 거야. 내 주변 사람을 정리하고 싶어 했으니까."

시체가 되어 귀가하는 그를 맞이하였던 장치샹의 뱃가죽에 중국어로 새겨진 ‘당신의 여자(仰的女人)’라는 글귀가 생생했다. 그 사건 이후, 홍콩에서 차오쑹윈의 죽음이라는 더 큰 사건에 맞닥뜨리고 이곳 야이쑤코에서 긴장감 없는 느긋한 생활을 보내는 동안 시간에 무디어져 기억 너머로 사라졌던 당시의 상황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뜩해졌다.

"누님께는 반드시 비밀로 하고, 뎬차이와 뎬신에게는 주의하라고 전해다오. 나머지 일은 내가 처리하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시춘과 카페에 동석했던 사람이……."
"음? 사람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던 장쯔궈는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나간 후에도 저우룬칭은 한동안 방을 서성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저우룬칭과 홍위롄이 친오누이나 다름없는 사이라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그에게 집착하였던 니시무라가 다음 타깃으로 선택하기에 아주 충분한 조건이다. 그녀가 차오쑹원의 사후 신변을 정리하고 야이쑤코에 정착하였다는 사실 또한 비밀이 아니다. 어쩌면, 니시무라는 그보다 먼저 야이쑤코에 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홍위롄을 지키기 위한 조력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에게는 그의 개인적인 연락처가 없다. 결심한 저우룬칭은 조용히 복도로 나왔다. 살그머니 계단 끝까지 오르니 홍위롄이 샤워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오늘 저녁 약속이 있었다.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실의 방문을 열었다. 요행히 휴대폰을 바로 발견했다. 충전 중인 휴대폰에서 전화번호 하나를 찾아낸 저우룬칭은 들어왔을 때처럼 소리 없이 자신의 방까지 돌아왔다. 문을 닫고, 외워온 번호를 눌렀다.

「누구요?」

낯선 번호에 경계하는 듯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쏘았다. 저우룬칭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접니다, 팡 대인."
「접니다라고 하면 누군지 어떻게 아나?」

그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들은 팡룽이 가볍게 비아냥거렸다.

「이 번호는 위롄에게 들었나 보지?」
"아닙니다. 누님께는 비밀로 하고 연락을 드리는 겁니다."
「......무슨 일인가?」

그 말 한마디로 팡룽은 이상을 파악했다. 경계가 풀렸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저우룬칭은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말입니다만, 제가 3년 전 일본에 있을 때 저희 거래 하나가 상대 조직의 몰살로 파투가 날 뻔했다는 건 혹시 아십니까?"
「그 사건은 일본 뉴스에서도 떠들썩했으니 나도 들은 건 있지」
"실은 그때의 범인이 저와 관련된 사람입니다. 범인이 제 여자도 살해했고요. 그녀 역시 홍콩인이었던지라 일본 경찰에 사건을 접수하지 않고 저희 쪽에서 묻었기에 공표 된 내용은 아닙니다."
「사설이 길어」

저우룬칭은 마른침을 삼키며 바로 결론을 얘기했다.

"그 범인이, 야이쑤코에서 롄 누님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누님이 외출 중이실 때 은밀히 경호를 부탁드립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바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통보를 기다리는 심정처럼 침묵했다. 팡룽이 으르렁거리듯이 내질렀다.

「제 가족도 지키지 못하는 천하의 머저리 새끼 같으니라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얘기를 할 거면 애초에 제대로 지켰어야지. 해서, 갖고 있는 무기는 어떻게 되나?」
"전 헤이싱과 콜드 파이슨이 있고, 동생들도 비슷할 겁니다."
「자동소총 몇 정과 탄약 박스를 애들 편으로 보내주마. 또 필요한 건?」
"청룡도 한 자루가 있었으면 합니다. 가게에 있는 칼은 홀에서 노출되어 있다 보니 관리는 했어도 기름때가 까고 날도 많이 상했더군요."
「알겠네. 자넨 예전부터 총보다 칼 쓰는 걸 좋아했지」

저우룬칭은 니시무라의 행적을 찾아달라는 부탁도 할까 하다가 접었다. 적련방이 움직인다면 니시무라도 눈치채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또 어디로 잠적할지 모른다. 꼬리를 드러내고 목표가 명확한 지금 그를 잡아야 했다.

한때나마 친아우처럼 아꼈던 녀석이다. 죽여야 할지, 목숨은 붙여줄지 명확한 결심은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신은 있었다.

이제는 절대, 자신의 가족을 잃을 수 없었다.





CHAPTER 7





회관까지 홍위롄을 데려다준 저우룬칭은 그녀가 회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니시무라가 목격된 이후 그녀의 신변에 특별히 우려할 만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전보다 더욱 주의 깊게 그녀를 따랐다. 백미러를 움직여서 주변을 살펴보니 적련방의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남자들이 행인처럼 위장해 있었다. 만약 그가 납치, 혹은 상해 의도를 갖고 있을 시에 은신하기 위해 선택할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차이나타운 내에서의 이 경호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면 좋으련만.

더 둘러보았지만 이상은 없었다. 낮은 한숨을 뱉고 차를 돌렸다. 가게로 거의 돌아왔을 즈음에 전화가 울렸다. 그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팡룽은 아니었다. 저우룬칭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
「아오! 환장하겠다, 진짜!!」

받자마자 대뜸 고함이었지만 언짢아지지는 않았다. 요 며칠 바쁘다고 홍가까지 오지도 않고 一 억지로 시간을 빼서 만났는데 피곤해서 안 서기라도 하면 절망할 것이라는 실로 그다운 이유였다 一 전화 통화만 했었는데, 전화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이기는 했으나 오늘처럼 부아를 낸 적은 없었기에 이유가 궁금했다.

가게 뒤쪽에 차를 주차하고 그대로 운전석에서 전화를 이었다.

"또 무슨 일인데?"
「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겠냐?」

옐리세이의 뒤로 들려오는 배경의 잡음이 밀폐된 사무실 같지는 않았다. 밖에 나와 있는 거냐고 물으니 입에서 불을 내뿜었다.

「선착장이라고 선착장! 30분 뒤에 배 타고 뜨랏 가게 생겼어!! 그리고 바로 방콕!!」
"방목에 간다고? 내일부터 손님 맞느라 아예 회사 빌딩과 호텔에서 못 나올 테니까 오늘 밤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시간을 뺀다고 하질 않았나?"
「그러려고 했지! 근데!!」

분노와 짜증을 반반씩 버무려서 폭발시키는 옐리세이의 노성을 요약하면 대강 이러 하였다. 그는 내일 조직을 방문하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완벽한 플렌을 짰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고 부하들도 발견하지 못하였던 ‘작은’ 실수 탓에 하루 일찍 방콕으로 끌려가게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어쨌거나 크든 작든 본인의 실수였다는 게 아닌가.

"그러게 왜 실수를 하고 그러냐."
「야! 내일이 러이끄라통인 걸 까먹은 게 내 탓이냐?!」
"네 탓이지."
「내가 까먹었으면 부하 놈들이라도 기억을 해야지, 어째서 죄다 깜빡할 수가 있냐! 내가 태국력으로 헤아리는 걸 어떻게 일일이 다 체크해? 난 양력으로 사는 남자다! 우리나라는 소련부터 그, 그, 그레…… 아무튼 그 달력 쓴다고!」

러이끄라통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끝끝내 뻔뻔한 옐리세이의 발언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과오는 아주 명확해 보였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었을 멧돼지의 절규가 훤하여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정말 옐리세이다운 모습이기는 했다.

그리고 자신의 웃음소리를 들은 옐리세이가 더 날뛰기 전에 재빨리 물었다.

"그래서 그 러이끄라통이 뭔데?"
「태국 축제. 끄라통이라는 조각배를 만들어서 촛불에 불붙이고 강 같은 데에 띄우면서 액땜도 하고, 소원도 비는 명절인데 날짜가 양력이 아니라 태국력이란 말이야」

대충 원소절과 비슷한 분위기인가 보다, 하고 저우룬칭은 이해했다.

"태국 명절이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그전에 분위기 같은 건 느끼지 못했냐?"
「야. 여긴 현지인들끼리만 조용하게 보내서 낌새고 뭐고 말 안 하면 모른다고. 넌 내일이 태국 명절이라는 걸 알았냐?」

물론 저우룬칭도 내일이 명절이라는 건 전혀 몰랐다. 홍위롄에게 주의가 쏠려있던 탓도 있었지만 사사로운 교분이 있는 현지인도 없었다. 여하튼 중요한 건 태국의 명절에 관한 논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 볼 수 있는 건데?"
「……5일 후에」
"구슬을 빼 면 뭘 하냐."
「시, 시끄러워! 날짜가 이렇게 잡힌 게 내 탓이야?!」
"명절을 까먹은 건 네 탓이지."
「바빠서 까먹은 거야」

끝내 큰소리는 뻥뻥 쳤다. 그러더니 불현듯 목소리를 은근히 낮췄다.

「참,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난 내일부터 영감 뒷바라지하느라 바쁘거든? 넌 안 바쁘지?」

가게 일 때문에 바쁘다는 대답을 했지만 옐리세이는 깡그리 무시하고 제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대신 소원이나 빌어줘. 현지인들 사는 동네 가면 끄라통을 파니까 향초랑 동전 같은 거 넣고 띄우면서 소원을 빌면 돼」
"무슨 소원이길래?"
「네 처녀」
"끊는다."
「야, 야! 잠깐만! 하나 더 있어」
"다른 소원은 내가 노예가 되는 거겠지."
「씨발. 루이 넌 왜 이렇게 나를 잘 아냐? 역시 나에게 관심이 지대하군. 반했지?」
"네가 단순한 거야."

푹 빠졌다고 순순히 인정하라며 옐리세이가 으스댔다. 목소리 뒤로 들려오는 잡음에 소란이 더해졌다. 승선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제 가는 거냐?"
「어. 제기랄, 3박 4일 내내 망할 영감탱이 뒷바라지할 생각만 해도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네. 그 영감이 30년만 젊었어도 내가 확……」
"30년만 젊었어도, 뭘?"

뜻 없이 되물었으나 옐리세이는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으흠, 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지금 내 관심은 너뿐이라니까? 그 영감이 나한테 ‘친절’하긴 한데 딱히 내 취향은 아냐. 30년 후에도 넌 멋지고 예쁜 엉덩이를 갖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도 엉덩이 타령을 빼놓지 않은 옐리세이는 곧 배에 올라타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젠 녀석과 이야기할 때마다 엉덩이 칭찬을 듣지 않으면 허전할 정도였다. 전화 너머에서도 여전히 수선스러운 녀석이지만 덕분에 가라앉았던 마음은 어느 정도 전환 되었다.

통화가 끝나고도 저우룬칭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고민에 잠겼다. 옐리세이는 구체적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언뜻언뜻 홀리는 단어를 조합하면 얼추 짐작이 되었다.

조직 전체가 들썩거리면서 맞이하는 손님이라면 러시아 본국 조직의 사람일 테고, 그 손님을 칭하는 그의 태도에 썩 호감이 없었으니 야이쑤코의 지부와 적대적인 성향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옐리세이가 주의해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안경을 벗고 미간을 주무르며 생각하던 저우룬칭은 다시 시동을 걸고 차를 뒤로 뺐다. 옐리세이가 말하는 소원을 대신 빌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기왕 맞게 되는 태국의 축제에 어우러지는 건 나쁘지 않았다. 하루 전날에도 끄라통을 팔 거나 전야제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왕 밖에 나와 있으니 둘러보기로 했다. 만약 옐리세이가 자신이 빌게 될 소원을 들으면 수선을 피울지 거들먹거릴지 궁금했다.





그러잖아도 성수기의 관광 시즌인데 러이끄라통까지 겹쳐 인파가 폭발하는 방콕 시내에서 사람 한 명을 엄중히 경호하느니 총 한 정 들고 모렐로스 카르텔에 뛰어드는 게 속은 편할 것이다. 만에 하나 베레조프스끼가 끝내 의향을 철회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하여 하루 전에 예정하였던 관광지를 답사하였지만 역시 무리라는 결론만 나왔다. 더욱이나 상대가 체자르의 흠결을 포착하려고 눈이 벌건 사람이라면.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지만 당장 베레조프스끼를 설득해야 하는 사람은 나스따시야이니 당분간은 편안한 마음을 갖기로 작심했다. 괜히 스트레스를 받아서 수명이 깎이면 자신만 손해이지 않은가. 절대 일찍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는 저우룬칭과 하고 싶은 섹스 버킷 리스트를 상기하며 심호흡을 하였고, 그 과정은 그에게 탁월한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데 성공하였다.

"……젠장."

팔짱을 끼고 선 나스따시야가 낮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옐리세이는 부외자처럼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오래지 않아 국제선의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안내되었다. 베레조프스끼 일행은 대부분의 탑승객이 게이트를 빠져나온 후에야 나타났다. 세계 각국의 인종을 만날 수 있는 돈므앙 국제공항에서도 베레조프스끼 일행은 다분히 이질적이었다. 베레조프스끼와 까지미르는 연륜 있는 사업가처럼 보였으나 그의 수행원들은 대부분이 얼굴에 나는 조폭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듯한 거친 표정이다. 옷깃에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와 손등에서 엿보이는 문신이 의혹을 짙게 하였다. 남자들도 문신을 미용으로 많이 하는 태국에서까지 직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저 일행을 그대로 러시아에 옮겨다 놓으면 볼만할 것이다. 러시아에서 노골적인 문신을 한 남자의 대부분은 마피야가 아니면 네오 나치다.

옐리세이는 자신이 조폭처럼 보이는 건 당연하지만, 저들처럼 우락부락하고 무식한 조폭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아 무심코 차림새를 정돈하다 하마터면 한 걸음 앞서는 나스따시야의 뒤를 놓칠 뻔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드미뜨리 고르제예비치, 까지미르 까지미로비치."
"누군가 했더니 체자르의 발을 핥는 그 퇴물 암캐로군."

정중히 인사하는 나스따시야의 머리 위로 베레조프스끼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적의를 감추거나 포장하는 최소한의 겉치레조차 하지 않은 명백한 비아냥거림에 옐리세이는 욕이 반사적으로 튀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혀끝을 깨물어야 했다. 나스따시야가 저 모멸적인 발언을 들어서 망정이지 자신이었다면 벌써 원색적인 욕설로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표정을 흐트러트리지는 않았지만 나스따시야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그러잖아도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냉막하게 변질되기 전에 베레조프스끼의 옆에 있던 까지미르가 웃음으로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자, 자. 여기에 서서 이러지들 말고 우선 호텔로 가죠. 안내하게, 우스치노바."
"……따라와 주십시오. 가시는 길에 설명부터 드리겠습니다."

베레조프스끼와 까지미르의 옆에 나스따시야가, 한 걸음 뒤에 옐리세이, 그리고 옐리세이의 뒤로 베레조프스끼의 수행원과 옐리세이가 대동하여 온 타이 지부의 조직원이 움직였다.

나스따시야는 극도로 절제되어 사적인 감정이 깃들지 않은 딱딱한 어조로 설명했다.

"어제 미리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느긋하게 방콕에서 관광을 즐기실 수 있을 만한 형편이 못 됩니다. 공교롭게도 태국의 큰 명절과 시기가 겹쳐 관광지는 물론이거니와 시가지도 번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송구하오나 머무시기로 한 호텔에서 여독을 푸시고 저녁때 회합을 가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자신이라면 관광객들에게 치여서 고생하느니 호텔의 풀 서비스를 택할 테지만, 베레조프스끼는 일단 무엇이든 못마땅하게 여기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요는 사람을 피해서 숨으라는 뜻이로군. 타이 지부의 경호 인력 부족과 미숙으로 봐도 좋겠나? 아니면 타이에서 내가 모르는 항쟁이라도 있었던가? 어느 쪽과 항쟁 중이지? 차이니즈 마피아? 멕시코 카르텔?"
"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희는 다만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하고자 함이었으니, 드미뜨리 고르제예비치께서 원하신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혀 좋은 방향으로 해석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정론적인 웅대를 하며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나스따시야를 그녀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불쌍하다고 여겼다. 나스따시야가 가엽게 여겨질 정도라니 과연 주는 것 없이 짜증나는 영감이었다.

걸어가는 내내 실컷 빈정거리더니 출구에서 대기 중이던 벤틀리에 올라타기 직전에야 호텔에서 저녁까지 쉬겠다는 확답을 겨우 해 주었다. 원하던 대답은 들었으나 앞으로도 베레조프스끼와 같은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나스따시야의 표정은 썩 밝아지지 않았다. 옐리세이는 저 영감과 동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얼른 차 문을 열었다. 까지미르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벤틀리에 탔다.

일행들이 뒤따라 각자 차에 오르자 이십여 대의 차량이 줄을 이어 출발했다. 베레조프스끼와 잠시나마 떨어지기는 했지만 방콕에 있는 이상 마음이 완전히 놓일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야이쑤코, 그의 영역으로 돌아가야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아이고. 루이 엉덩이나 주무르고 싶다. 그럼 힐링이 될 텐데.’

"체자레치까(체자르의 애칭)는 어떤가? 야이쑤코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까지미르의 옆에 탔다는 것도 깜빡 잊고 몽글몽글 눈앞을 떠다니는 저우룬칭의 엉덩이를 좆던 옐리세이는 얼른 등을 바로 폈다.

"네. 탈 없이 잘 굴러가고 있긴 하지만 탈을 만들어 내어서 트집을 잡을 분이 있는지라……."

앞서가는 차를 곁눈질할 필요도 없었다. 까지미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드미뜨리 고르제예비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체자레치까에게 미리 전해 줄 걸 그랬군. 이제는 연세가 있으셔서 예전만큼 혹독하지는 않으시다. 사실 은퇴하여 손자들 재롱이나 보며 유유자적하게 지내실 때가 되긴 했지. 체자레지까가 타이 지부를 맡게 되었다는 걸 알고 노발대발했을 때가 마지막 전성기이셨을 거야, 아마. 체자레지 까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독립한다느니 조직을 배신한다느니 하는 마음은 품지 않았을 테니 염려할 건 없다."
"아, 네에……."

불과 몇 분 전까지 나스따시야를 갈구던 베레조프스끼를 떠올리니 대답은 굉장히 애매하게 나왔다.

"어째서인지 영 못 믿겠다는 표정인데?"
"잘못 보신 겁니다."

까지미르와 교분을 튼 건 체자르의 명령으로 모스크바에 갔었던 몇 달 전이었지만, 까지미르의 성품이 너그럽기도 한데다 체자르의 최즉근 부하라는 이유로 그를 스스럼없이 대해 주었기에 옐리세이도 어렵지 않게 대했다.

이번에도 까지미르는 건방진 대답을 꾸중하는 대신 푸하하 웃었다.

"자네는 생각하는 게 그대로 얼굴로 드러나서 잘못 볼 리가 없다고. 아까도 드미뜨리 고르제예비치의 주의가 온통 우스치노바에게 쏠려 있길 망정이지 자넬 보기라도 했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걸. 좀 더 위로 올라가려면 감정을 갈무리하는 방법부터 익히는 게 좋을 거야."

자신이 그렇게나 썩은 표정을 하고 있었나 싶어 저도 모르게 뺨을 문지르던 옐리세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이상 출세하고 싶은 야망은 없습니다. 지금처럼 체자르 끼릴로비치의 부하로 그 분을 섬기는 게 좋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부양할 가족이 생길 리 없고, 저 하나만 건사 하면 되니 돈 욕심도 크게 없고요. 마약도 끊고 도박도 적당히 자제할 줄 알게 되니까 이 상태로도 만족스럽습니다."
"체자레치까는 좋은 부하를 가졌군."

까지미르가 다리를 꼬며 좌석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체자레치까와 전화했을 때 들은 이야긴데, 드디어 뺐다며?"

하마터면 옐리세이는 딸꾹질을 할 뻔했다.

"뭐, 뭘요?"
"뭐긴 뭐겠나. 그거지."

까지미르의 검지가 옐리세이의 고간을 정면으로 가리켰다. 옐리세이는 기겁하여 다리를 조신하게 모았다.

"……두 분 통화하실 때 그런 얘기까지 하십니까?"
"홀아비 두 명이 외롭다 보니 국제전화비가 아까운 얘기를 좀 많이 하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뺐나?"
"애인이 빼달라고 했습니다."

남의 거시기에 있는 구슬의 유무가 수천km를 가로질러 오고 갔다니 좀 쪽팔리긴 했지만 쪽팔림과 저우룬칭은 별개의 문제였다. 애인을 당당하게 긍정하니, 그를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였던 것과 비슷한 반응을 까지미르도 하였다.

"확실히 21세기가 다가오니 놀라운 일이 많이 생기는군."
"사랑이니까요."

저우룬칭이 자신의 노예가 된 상상을 하며 옐리세이는 즐겁게 대꾸했고, 그의 대답은 까지미르의 웃음을 또 한 번 자극했다.

차는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도로가 막히니 호텔을 예약한 시암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릴 것이다. 본격적으로 끄라통을 띄우는 행사는 시작되지 않았으나 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명절이라는 사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거리 곳곳에는 활기가 넘쳤다. 야이쑤코에서도 슬슬 준비 중일 텐데 그 녀석이 소원을 제대로 빌까?





옐리세이가 바라던 방향은 아니었으나 저우룬칭은 끄라통을 띄우며 소원을 빌었다. 간혹 저우룬칭처럼 거주 외국인이 호기심을 갖거나, 소수의 관광객이 구경하러 오기도 하기에 러이끄라통 행사가 열리는 호수 근처에는 끄라통을 파는 가판대가 있었다. 유명한 관광지에는 끄라통이 멀리 떠내려갈 수 있도록 미리 입수한 사람들이 물살을 따라 밀어주기도 한다는 모양이지만 야이수코의 끄라통은 물살에 흐느적흐느적 떠내려가다가 오래지 않아 가라앉았다. 향초에 불을 붙이고 동전과 꽃을 넣은 바나나 잎으로 만든 작은 배가 느긋하게 나아가는 걸 보며 저우룬칭은 멧돼지가 사고 치지 않고 무사히 3박 4일을 버티기를 기원하였다. 보름달이 비치는 잔잔한 호수에 자그마한 광원을 깜빡이는 끄라통들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이후에는 초에 불을 밝힌 종이등을 하늘로 높이 띄워 날려 보내는 행사도 있다고 하였지만 가게에서 일하던 도중에 나왔으므로 끄라통만 띄우고 호수를 떠났다. 관광 목적이라기보다는 현지인들만의 행사라 소박하지만 재미있었다.

홍가의 뒷문으로 들어오니 홀의 일을 하는 도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리뎬신이 멈칫하였으나 저우룬칭인 걸 확인하고는 표정을 풀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응. 같이 갔으면 재미있을 텐데 아쉽군."
"작년에는 휴일과 겹쳐서 저희도 떠들썩하게 놀고 왔습니다. 야이쑤코에 몇 년이나 있었으면서 직접 구경을 한 건 작년이 처음이었는데 괜찮더라고요."

가벼운 잡담을 하던 그는 술을 더 가져오라고 부르는 소리를 따라 얼른 걸음을 옮겻다. 저우룬칭은 잠시 자리에 서서 홀 안을 휘둘러보았다. 팡룽에게 자동소총을 받은 후 가게 내에 외부인의 시선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위치에 무기들을 숨겨 두었다. 만에 하나 니시무라가 진짜 가게를 습격한다고 하여도 빠른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홍위롄의 안전을 고려하면 니시무라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최선일 테지만, 화근을 제거하려면 니시무라가 행동에 나섰을 때 그를 포착해야 한다. 저우룬칭은 그가 나타나길 바라는 건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스스로도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죽여야 하는지, 살려두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도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저우룬칭은 머리를 한 번 내젓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시야에 러시아 마피아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내일 큰 손님이 야이쑤코에 당도한다고 하니, 란뜨제프스카야의 조직원이 한가로이 술이나 마시러 나다닐 수 없는 건 당연하지만 멘쇼프스카야의 조직원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의아하긴 했지만 근래 니시무라의 일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이리라 여기고는 털어냈다. 단순히, 술을 마시기에는 시간이 이른 탓도 있지 않겠는가.






☆★☆★☆★☆★1. 처녀 ☆★☆★☆★☆★
2. 이라마티오
3. 디프 스로프
4. 페이셜

머릿속으로만 정리해 두었던 버킷 리스트를 종이에 끄적이던 볼펜이 5번에서 멈추었다. 저우룬칭에게 이것 외에 무슨 짓을 하고 싶었더라.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곰곰이 떠올려 본 옐리세이는 이내 "아하."하며 손가락을 튕기고는 볼펜을 움직였다.

5. 문신에 정액 바르기

또 뭐가 있을까. 볼펜 끝을 깨물며 더없이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나 저우룬칭이나 섹스 경험이 적어서 미숙하거나 부끄러워서 엉덩이를 뒤로 빼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남자와 남자가 가능한 고난도의 상위 체위에도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속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여자 스쿼팅보다 더 귀한 남자 스쿼팅이 가능하다니 저우룬칭은 테크닉도 장난이 아니었다.

당시의 황홀함을 아련하게 떠올리던 옐리세이는 빠벨이 재채기를 하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이러다가 흥분하면 어제처럼 화장실에 기어들어가서 처량하게 자위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인도 생겼는데 화장실에서 빼야 하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가.

종이로 주의를 돌린 옐리세이는 생각나는 온갖 체위들을 떠올려 보다가 우선 간단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것부터 적었다.\

6. 69

"흠. 그래도 종이가 남는데……. 야, 빠벨까. 유리."

CCTV 앞에서 하품하던 빠벨과 유리가 돌아보았다. 일전에 구타당하여 입원하였던 짐은 아직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옐리세이는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너네 빠구리 뜨고 싶은 시추에이션 같은 거 없냐? 우아한 말로 섹스 판타지."

뜬금없는 물음에 빠벨과 유리는 의아한 얼굴이긴 하였으나 변동 없는 CCTV 앞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탁월한 선택이었기에 두 사람은 입을 열었다.

"카섹스죠."
"야외섹스? 창녀랑 골목길에서 하는 것 말고요."

카섹스와 야외섹스라. 옐리세이는 심사숙고했다. 카섹스는 자차가 없어서 해 본 적이 없고 야외섹스는 10년 전쯤에는 가끔 했었다. 두 섹스를 모두 저우룬칭과 하는 상상을 해 보았고, 상상만으로도 꼴렸으나 역시 무리였다. 외부인의 시선에 노출될 수 있는 상황에서 섹스를 하였다가 자신이 바텀이라는 비밀이 들통 나면 끝장이다. 옐리세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머릿속으로 엑스 표를 그었다.

"또?"
"음. 유니폼 입고 하는 거요?"
"아, 전 간호사 복장 입은 년이랑 해 본 적 있어요."

유리의 신난 대꾸에 옐리세이는 오호라 되물었다. 아무래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창녀에 비하여 남창은 바리에이션이 부족하다.

"좋냐?"
"좋죠."

유리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들어와서 ‘손님, 주사 맞을 시간입니다〜, 뭐 이런 상황극이 살짝 오글거리기는 하는 데 괜히 색다른 느낌이 들더라고요."

주사. 그 단어의 어감을 머릿속에서 굴렸다. 저우룬칭에게는 아주 크고 굵은 주사가 있다. 그것으로 맞으면, 씨발, 죽여주겠지.

"그런 거라면 경찰복이 더 안 낫겠냐? 진짜 앙칼진 경찰년을 깔아뭉개는 맛이 날 것 같은데."

빠벨의 적절한 질문에 유리는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경찰복을 고르고 싶었는데 인기 폭발이라 업소에 예약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렵답니다. 조폭 새끼들이 생각하는 건 다 똑같더라고요."

세 사람은 입을 모아 킬킬킬 웃었다. 똑같은 유니폼이라면 간호복보다는 경찰복을 찢고 능욕하는 시추에이션이 그들의 입장에서 더 짜릿한 건 사실이다. 경봉이나 유니폼에 딸린 모형 건으로 밑구멍을 쑤셔 주면 더 더욱 짜릿할 것이고. 일단 이것도 적었다.

7. 유니픔

그리고 간호복이라는 말에 생각난 것을 한 가지 더 추가했다.

8. 병실 섹스

일인실에서 한다면 남들 눈에 뜨이지는 않을 것이다. 저우룬칭이 성적인 의도를 갖고 야하게 개조한 간호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 봤지만 이번에는 꼴리기보다는 웃겼다. 분명히 찢어지거나 솔기가 터질 것이다. 음지에서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을 남자 간호복은 구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왠지 제이슨에게 돈을 찔러 주면 금방 구해다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자 경찰복은 더 구하기 어려울 테지만 상상하니 좀 멋있었다. 맨날 활동하기 편한 셔츠에 블루진 따위나 입고 있으니 몸매가 아까울 판이다. 가끔은 슈트라도 입을 것이지.

또 추가할 게 생각났다.

9. 차이나 드레스

기왕 적은 김에 10개는 채우고 싶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다 일전에 과감히 도전하였지만 처참한 결과만을 낳았던 시도를 떠올렸다.

10. 영화관에서 핸드잡이나 펠라티오

설마 또 손가락을 탈골시키지는 않겠지.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애인인데. 애인. 애인. 감미로운 단어다. 이제 곧 애인이 노예로 진화할 날도 머지않았다.

생각하였던 10개는 넘었지만 마지막으로 제일 밑에 추가했다

11. 주인님으로 불리기

"오, 좋아. 완벽하군."

만족한 옐리세이는 지갑에서 기도문을 봉한 봉투를 꺼내 섹스 버킷 리스트를 적은 종이도 잘 접어서 이콘과 기도문 뒤로 살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십자가와 봉투를 같이 목에 걸었다.

"섹스 판타지를 접어서 기도문이랑 같이 넣으신 거예요? 싸우러 가십니까?"

예로부터 러시아 정교의 신자는 전쟁터에 나서기 전에 기도문을 부적처럼 목에 걸고는 하였다. 마피야인 그들로서는 보통 싸우기 전에 관습처럼 취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옐리세이는 히죽 웃으며 나란히 걸린 십자가와 봉투를 탁탁 두드렸다.

"아까 적은 건 마음을 안정시키는 주문이야. 직접 총 들고 싸우러 가는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피곤한 상대가 있잖냐."

누구를 뜻한다고 굳이 정확히 밝힐 필요도 없었다. 빠벨과 유리는 동조자의 웃음을 터트리며 맞장구를 쳤다.       

"관짝에 드러누워도 될 영감이 회계 감찰인지 뭔지로 얼마나 까탈스럽게 뒤지는지 3박 4일이 한 달처럼 느껴지고 있다니까요. 군대 훈련을 받을 때에도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휴, 관짝은 무슨. 정력이 아직도 펄펄하던데요? 어젯밤에는 제가 호텔에서 경호했었는데 호스티스 세 명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가더라고요. 누구는 자기 때문에 여자 셋은커녕 한 명도 며칠째 못 만나고 있는데."
"뭐야? 4p? 나도 안 해본 짓을 감히 죽을 날짜 받아놓은 노친네가 했다고?"

유치한 이유로 울컥하자 빠벨이 실실 웃음을 쪼겠다.

"아까 적으신 그 목록에 4p도 추가해 보십쇼."

나는 못해보고 남은 해봤다는 것에 울컥하긴 했지만 실지 행동에 옮기고 싶지는 않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혼자 감상하기에도 아까운 저우룬칭의 엉덩이를 왜 남과 공유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보다 난 한 번도 안 해 봐서 모르겠는데 둘 이상의 상대랑 하면 기운이 안 후달리냐?"

쓰리썸 이상을 해 보지 않은 건 빠벨과 유리도 매한가지였다. 기나긴 밤을 지새우기 위한 남자들의 본격적인 성적 담론이 시작되었다.

"저희 가게 애들이랑 술 마시다가 들은 건데 호기롭게 애들 둘 데리고 들어갔다가 한 명과 먼저 씹질하고 난 뒤에는 발기도 못 했던 놈도 있고, 졸라 간신히 두 명이랑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놈도 있고 별놈들이 다 있더라고요. 밑구멍도 다 마르고 반응도 안 오는데 좋아하는 척하느라 힘들었댑니다. 조루랑 하는 게 연기하기에는 편했대요. 물건도 제대로 못 세우는 것들이 뭔 근거도 없는 자신감으로 지랄들인지."
"유리 넌 애들이랑 친하냐? 나중에 영감이랑 들어갔던 애들도 살살 구슬려서 그 나이에 세우기나 했는지 얘기 좀 들어봐."
"혼자 두 여자 상대하다가 버거워서 안 되겠으니까 기구 가져오라고 했던 놈도 있었다던데 혹시 그 영감도 그런 거 아닐까요?"
"비아그라도 있잖아요."
"야아. 비아그라 처먹다가 복상사라도 하면 재밌겠네. 신문 일 면에 축 늘어진 자지 사진과 같이 실어주자."

상대하던 호스티스는 무슨 죄냐며 유리가 킬킬거렸다. 이어 섹스 도중에 여자가 너무 놀라면 질이 수축되어 안 빠질 때도 있는데 복상사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는 방향으로 시작된 음담패설은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그리고 한 명의 게이가 두 명의 헤테로에게 전립선 애무와 드라이 오르가즘에 대하여 열띤 강의까지 하게 되었을 때 누군가 보안실의 문을 노크했다. 어떤 염병할 새끼가 맥을 끊는지 짜증을 내며 들어오라고 내지르며 휙 돌아본 옐리세이는 황황히 일어났다.
빠벨과 유리도 허둥지둥 인사했다.

"까지미르 까지미로비치. 이 시간까지 안 주무셨습니까?"

까지미르의 등 뒤에 베레조프스끼가 혹처럼 딸려 있는 건 아닌지 얼른 곁눈으로 CCTV를 보았지만 다행히도 베레조프스끼는 아까 확인했을 때와 같은 사무실에서 회계사와 서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호텔에 가기 전에 들러봤지.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고 있나?"
"남자 셋이 오밤중에 모여서 할 얘기가 하나 말고 더 있겠습니까?"
"아쉽구만. 조금 일찍 와서 나도 끼어들 걸 그랬어. 모스크바 업소의 최신 유행을 알려줄 수도 있는데 말이지."

옐리세이의 유들유들한 대답에 까지미르도 맞장구를 쳤다. 체자르는 아랫사람에게 관대한 성품이지만 측근 부하가 아니면 이 정도로까지 격의 없는 언행은 하지 않는다. 허물없는 태도인데다, 깐깐하고 고압적으로 타이 지부를 내리까는 베레조프스끼와 대조되어 까지미르는 퍽 많은 호감을 받고 있었다. 상하관계를 떠나 사사로운 교분을 쌓아도 재미있을 사람이었다.

나스따시야가 지나가는 말로 옐리세이에게 ‘까지미르 까지미로비치가 베레조프스끼와 보스의 사이에서 쿠션이 되어 주고 있다.’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이니 실질적으로도 조직에 긍정적인 도움이 되고 있을 것이다. 옐리세이의 호감도는 모스크바에서 만났을 때보다 한 단계 더 높아져 있었다.

"옐리세이, 자네를 만나러 왔는데 안 보여서 한참 찾았지 뭔가."
"호모 따위가 조직 내를 활보하고 다니면 점수가 깎일 테니 일찌감치 도망쳐서 숨어있었죠."
"하하하. 설마. 드미뜨리 고르제예비치가 동성애자에게 편견이 없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사사로운 일로 평하할 만큼 편협한 분은 아니니 마음 놓고 활보하도록."

야유를 듬뿍 담은 핑계를 까지미르가 점잖게 받아치며 베레조프스끼를 은근히 두둔하기까지 하니 옐리세이는 열없어졌다. 제아무리 격의 없이 대하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상관인 베레조프스끼를 비꼰 것은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실수를 시인하며 바로 사죄하자 까지미르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특별히 자네를 책망하려고 한 것은 아니야. 드미뜨리 고르제예비치가 데려온 눈과 귀가 많으니 입 조심을 하라는 정도였지."

체자르가 타이 지부의 수장으로써 본부의 방침과 위배되는 방향의 속내를 품고 있는 건 아닌지, 내통하는 타 조직이 없는지 철저히 감시하며 조사하느라 베레조프스끼의 수행원은 야이쑤코 지부의 어느 곳에서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물론 체자르도 베레조프스끼가 멘쇼프스카야와 은밀히 연통하는 확실한 물증을 잡기 위해 24시간 긴장 상태였다. 옐리세이와 보안팀도 베레조프스끼와 수행원이 녹화된 CCTV를 때때로 돌려보며 이상을 찾고 있었다.

"자, 받게. 일부러 자네를 찾은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지."

까지미르가 손에 들고 있던 포장된 작은 사각형의 상자를 던졌다. 던져주니 받긴 했지만 이게 뭐냐는 궁금증이 어른거리는 얼굴로 바라보는 그에게 웃으며 부연하였다.

"드미뜨리 고르제예비치의 방문 목적과 진의가 다른 곳에 있었다고는 해도, 내일…… 아, 자정이 지나갔으니 오늘이군. 오늘 체자레치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게 아니었나. 야이수코에 오기 전에 체자레치까의 생일 선물을 사다가 자네가 모스크바에서 고생 했던 일도 생각나서 샀어. 마침 애인이 생겼다는 좋은 소식도 들었고 말이야. 겸사겸사 축하 선물로 여겨주면 되겠군."
"와. 감사합니다! 뜯어 봐도 되나요?"

선물이라는 말에 옐리세이는 얼른 포장을 뜯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쵸트키(러시아 정교의 묵주)였다. 불량 신자이긴 해도 일단은 정교회 신자인 그에게도 습관적으로 소지 중인 쵸트키가 있긴 했으나 공짜이기도 하고, 선물을 준 당사자가 앞에 있기도 하여 팔목에 쵸토키를 감았다.

까지미르가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가자 옐리세이는 보란 듯이 빠벨과 유리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짜식들아. 이 형님께 애인이 있다고 까지미르 까지미로비치께서도 이렇게 선물을 주셨는데 너희는 뭐 없냐?"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어설프게 웃었다.

"저...... 콘돔 한 박스는 어떠세요?"
"가게 애들에게 추천받은 기구라도……."
"쯧쯧. 머릿속에 떡 치는 생각밖에 없는 좆의 숙주들 같으니라고."

몇 분 전까지 함께 열을 올리며 음담패설을 하였다는 사실 따위는 편리하게 싹 잊은 옐리세이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검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체자르가 사무실의 책상에 놓인 상자를 발견한 건 사실로 올라가서 쉬기 전, 마지막으로 마무리를 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였다. 깨끗이 정리된 책상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놓인 작고 길쭉한 상자 옆에는 편지까지 한 통 동봉되어 있었다.

먼저 편지의 겉봉을 뜯어 읽는 체자르의 낯에는 간질간질한 고마움과 기이한 죄책감이 뒤섞였다. 편지를 봉투에 잘 갈무리한 뒤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우아한 윤이 감도는 바쉐론 콘스탄틴이었다.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벗고 새 시계를 찬 체자르는 휴대폰을 꺼냈다.

"미라(가지미르의 애칭). 잘 들어갔나?"
「아, 음. 방금 호텔로 돌아온 참이야. 이제 씻고 자려고」
"생일 선물 잘 받았다. 말도 없이 두고 가서 못 봤으면 어쩌려고 했나?"

까지미르가 낮게 웃었다.

「지금 확인 못 해도 아침에는 어차피 보게 될 건데, 뭘. 한가하게 생일이나 축하할 타이밍은 아니긴 하지만 아무튼 축하한다」
"조이쉬까(조야의 애칭) 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다오."

책상에 비스듬히 엉덩이를 걸쳐 앉은 체자르의 손끝이 편지의 겉봉을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네 생일 때 만나게 될 거라고 하니까 조이쉬까가 자기도 선물을 주고 싶으니 전해 달라고 조르더라고. 내 선물은 조이쉬까의 편지에 달린 덤이라고 생각해 줘. 그 애가 벌써 초등학생이야. 멋지지?」

자신의 기억에는 여전히 어린아이로만 있는 까지미르의 딸 조야를 떠올린 체자르는 의식하지 못한 미소를 희미하게 덧그렸다.

"편지에 이젠 자기가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썼더군."
「하하. 그럴 줄 알았어. 혼자서는 머리도 잘 못 감는 꼬맹이가 이제 어른이라도 된 양 행세하고 있다니까」

웃음기 섞인 까지미르의 대답이 문득, 낮아졌다.

「나 혼자 기르느라 버거울 때가 있기는 해도 우리 가족은 잘 지내고 있어. 조이쉬까도 나도 널 원망하지 않아, 체자레치까. 만삭일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내 잘못도 크지 ……」

체자르는 무거운 탄식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닫아야 했다.
까지미르가 부재중일 때 그의 아내는 예정일보다 훨씬 이른 진통에 힘겨워하며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체자르는 한밤중에 까지미르의 아내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고, 병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를 노리던 암살자들에게 습격당하였다. 위중한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체자르는 살아남았고, 까지미르의 아내는 태중의 아이와 함께 사망하였다. 체자르가 절대 씻을 수 없고, 씻어서도 안 되는 부채였다.

「그러니까 슬슬 본국으로 돌아왔으면 한다. 돈이야 잘 벌리지만 중앙에서 동떨어진 야이쑤코까지 온 것도 그 일 때문이잖아. 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체자르의 숨소리만이 침묵을 메웠다. 이윽고 까지미르가 분위기를 환기하며 대화를 돌렸다.

「야이쑤코가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영감님도 분위기 자체는 마음에 들어 하시더군. 마음에 들수록 네가 냉큼 타이 지부를 낚아채간 것 때문에 또 부아가 치미시는 것 같긴 하더만」

짐짓 건네는 가벼운 농에 체자르도 억지로나마 웃음을 지었다.
베 레조프스끼의 방문으로 평소보다 훨씬 번다하고 긴장된 24시간이기는 하였으나 란뜨제프스카야의 하루는 비교적 무난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린 건4일 만이었다. 한창 손님이 몰릴 시간에 걸려온 탓에 최초의 전화벨은 미처 듣지를 못했다. 두 번째 전화벨이 울리고도 부재중 통화로 넘어가기 직전에 저우룬칭은 벨소리를 포착했다.

"어, 그래. 손님은 갔냐?"

어깨에 휴대폰을 괸 채 야채 볶음을 냄비에서 접시로 옮겨 담으며 물었다. 오늘은 옐리세이가 그토록 강조하던 ‘영감이 야이쑤코를 뜨는 날’이었다. 벌써 저녁 무렵이니 네 엉덩이를 만지러 오겠다고 강조하였던 것치고는 늦은 연락이었다. 해방되자마자 가게로 들이닥치고도 남았을 놈이 전화만 하고 있다. 그리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염병!!」

예감이 적중한 모양이다. 리뎬차이에게 접시를 주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그 빌어처먹을 영감탱이가 우리 조직을 탈탈 털어먹겠다고 체류 기간을 하루 더 연장했어! 기집년들 끼고 밤마다 놀아재끼고 있으니 돌아가기 싫기도 하겠지!!」
"저런."

강제 금욕은 하루 더 연장되었다.

"내일 가는 건 확실하고?"
「몰라!! 안 간다고 해도 배에 태워 버릴 거야!!」

직접적으로 설명은 해 주지 않았지만 대충 말할 때 흘리는 단어들로 보아 그 영감이라는 손님이 러시아 본부의 간부인 건 확실한데 어떻게 돌려보내겠다는 건지, 원.

저우룬칭은 욕구불만으로 길길이 날뛰고 있는 ‘애인’을 조금 달래주기로 했다.

"나 내일 휴일이야."

오빠, 내일 우리 집 비었어.

휴대폰 건너편에서 옐리세이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거냐?」
"하루 종일은 체력이 달려서 힘들지. 성기발랄한 10대도 아니고."
「아무튼지간에! 어, 어어…… 음, 너 내일 아침에 바로 어디 모텔 하나 잡아서 연락을, 아니지. 우리 집 알지? 우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부하랑 같이 사는데 그 녀석도 온종일 경호 중이니까 내일도 비어 있을 거야」
"열쇠는?’,
「메일 박스에 있어」
"알았다."
「참. 오기 전에 콘돔 한 박스 사와라」

저우룬칭은 헛웃음을 흘렸다.

"몇 번이나 하려고?"
「네 좆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실로 원대한 포부에 실소하기는 했지만, 일단 다음 날 옐리세이의 아파트에 가기 전에 약국에 들러 콘돔 한 박스를 샀다. 20개입짜리였다. 홍위롄도 오늘은 팡룽과 있을 테니 그녀에 대한 염려도 덜 수 있었다.

열쇠는 옐리세이가 말하였던 메일 박스에 있었다. 열쇠를 이런 곳에 보관해도 도둑에게 한 번도 털리지 않는 걸까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야이쑤코에서 도둑질로 먹고 사는 놈이라면 마피아들의 집 위치 정도는 전부 꿰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

이미 한 번 와 봤던 곳이기도 하니 새삼스럽게 긴장하거나 할 필요도 없는데. 저우룬칭은 입에 문 담배 필터를 살짝 깨물고는 계단을 올랐다. 지난 며칠 동안 집은 거의 비어있었는지 문을 열자 서늘하게 식은 빈집 특유의 썰렁한 공기가 물씬 다가왔다.

주인도 없는 빈집에 들어오려니 괜스레 멋쩍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현관으로 들어왔다. 이제 무엇부터 하면 될까, 고민하다가 일단 탁 트인 거실의 블라인드부터 걷어 올렸다. 하오의 햇살이 따갑게 쏟아졌다. 선선해지는 시기라도 이 시간의 햇살은 여전히 밝다. 옐리세이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가 있으라고 닦달했지만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 보니 이럭저럭 점심 무렵이었다. 지금까지도 전화가 없는 걸 보니 아직 손님은 떠나지 않은 듯하다. 이러다가 또 기간이 연장되면 저 멧돼지의 인내심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했다.

창문을 마저 열고 냉장고에 가지고 온 음식을 넣었다. 거실 바닥을 도마뱀이 타다닥 기어가는 바람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도시락 상자를 떨어트릴 뻔하였다. 냉장고에는 생수, 약간의 과일, 그리고 술과 레토르트 식품 몇 개가 전부였다. 주방이 없는 아파트이긴 했지만 집에서는 전혀 음식을 해 먹지 않는 모양이다. 볶음밥을 냉동 보관해서 먹으면 레토르트보다는 나을 텐데 다음에는 그걸 가지고 올까.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에는 얼른 용건만 끝내고 돌아가자는 마음밖에 없어서 제대로 보지를 못했었다. 방이 두 개인 아파트는 독신자 두 명이 살기에 그럭저럭 너른 평수였다. 두 개의 방 중 어느 방이 옐리세이의 방인지는 듣지 못했다. 설마하니 부하와 살면서 같은 방을 쓰지는 않을 테고.

우선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벽이며 컴퓨터 책상 등에 장식된 액자들에서 방의 주인인 것으로 여겨지는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옐리세이는 아니었다. 옐리세이보다 덩치가 크고 숏컷을 한 근육질의 젊은 남자였다. 아마 같이 산다는 부하일 것이다. 사진보다 옐리세이의 방이 아니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던 건, 침대에 몇 권인가의 책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화책이긴 했지만.

과연 왼쪽의 옐리세이의 방에는 책이든 만화책이든 글자가 있는 건 단 한 권도 없었다. 세탁하려고 벗어둔 옷인지 건조까지 끝낸 옷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옷가지들은 난잡하게 침대에 흐트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아령과 빈 탄약 박스가 나뒹굴었다. 옐리세이의 방에도 액자들은 있었지만 물론 가족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저우룬칭은 왠지 생경한 기분으로 크고 작은 액자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화보 같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정말 잘생겼다니까…….’

공부 머리는 일절 없으니 마피아가 되지 않았다면 모델로 진로를 잡아도 괜찮았을 것 같았다. 배우가 되기에는 대본을 못 외울 것 같고.

우월한 외모와 저렴한 언변을 동시에 내려주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로 만들다니 과연 조물주는 공평했다.

옐리세이로부터는 아직 전화가 오지 않았다. 네 아파트에 왔다는 문자를 보냈지만 답신도 바로 오지 않았다. 달리 할 일도 없었으므로 방 구경을 끝낸 저우룬칭은 며칠간 텅 비어 있던 집이나 청소하기로 했다. 널브러진 옷을 모아 세탁바구니에 집어넣고 바닥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정리하여 책상에 올려 두었다. 부하의 방은 손을 대지 않았다. 창문을 다 열고 거실 소파 뒤에서 가져온 청소기를 작동했다. 구석구석 먼지를 치우고, 쌓여 있던 설거지를 해치우고, 싱크대까지 깔끔하게 닦고 난 후에도 전화는 없었다. 이 러다가는 화장실 청소까지 해 버릴 것 같아서 손을 씻고 옐리세이의 방으로 돌아갔다.

심심했다. 청소 도중에 온 답신도 기다리고 있으라는 짤막한 한마디뿐이었다. 이렇게 한참 기다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가져올 걸 잘못했다. 멀거니 앉아있던 저우룬칭은 컴퓨터를 부팅했지만 신통찮은 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켜 봤자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뉴스 기사 몇 개를 보고, 내장되어 있는 카드 게임이나 좀 하다가, 그것 마저 지겨워져 그냥 꼈다.

무료함에 하품이 나왔다. 낯선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자니 상념만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홍위롄이 귀가하기 전에는 가게로 돌아가 봐야 할 텐데. 장쯔궈뿐만이 아니라 쌍둥이도 밖을 나갈 때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나 니시무라의 종적은 그 이후로 포착되지 않았다. 관광객도, 타지인도, 뜨내기도 많은 도시이니만큼 제 한 몸을 감추는 건 어렵지 않다. 마약중독자들이 주로 몰려 있는 뒷골목이나 제각각 프리나 소규모로 일을 뛰는 프리랜서 용병들 사이에 섞이면 묻히기에도 쉽다. 니시무라는 앳된 외양과도 다르게 실력도 있고 손속도 잔인한 야쿠자다. 솜씨가 쓸 만한 동양인 용병이라는 점에 초점을 둔다면 니시무라의 경계를 사지 않고 행적을 쫓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얼핏 듣기로는 용병을 중재하는 업자도 있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보고 장쯔궈와 의논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야이쑤코의 용병은 체계적인 그룹을 이루고 있지 않았다. 많이 소속되어 봤자 다섯 명이 넘는 팀이 극히 드물고, 대개는 개개인이 각자 프리로 뛴다. 때문에 마피아가 병을 고용할 때에는 개별적인 연락을 취하기보다는 주로 중개업자를 통하는 일이 잦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그 업자들은 직접 발을 딛고 있는 마피아들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돌아가는 흐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던 날 이후로 주의 깊게 홍가의 손님들을 관찰하였지만 멘쇼프스카야의 조직원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란뜨제프스카야보다 적은 규모라지만, 란뜨제프스카야에 러시아 본부에서 귀빈이 방문한 날부터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미심쩍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반평생을 흑사회에 몸담았던 저우룬칭은 제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의혹이나 예감일지라도 일단 되짚어 보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신중함은 그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르침 중 하나였다. 생각이 난 김에 중 개업자의 연락처를 아느냐고 장쯔궈에게 물어보려 막 폴더를 열었다가, 멈칫하였다.

어디까지나 러시아 마피아의 일이다. 자신은 제삼자다. 게다가 이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굴렀을 중개업자가 홍가의 요리사 따위에게 호락호락 정보를 제공할 것 같지도 않았다. 혹 팡룽을 통한다면 길이 트일지도 모르나, 차이니즈 마피아의 보스에게 러시아 마피아의 일에 간섭해 달라고 어떻게 설득하란 말인가.

결국 저우룬칭은 휴대폰을 도로 닫았다. 정보가 전혀 없는 자신이 의심하고 있을 정도이니 란뜨제프스카야에서도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믿는 도리밖에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사한 상념 속에 얼핏 잠이 들었다. 낯선 침대에서 선잠을 자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하여 몇 번 얕게 깨기도 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산속을 달리다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꿈을 꾼 탓에 다리를 흠칫 떨며 잠에서 깬 저우룬칭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면서도 자신이 아직도 꿈의 연장선에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커다랗고 시커먼 형체가 그의 다리 사이에서 솟아 있었다.





갔다.
베레조프스끼가 갔다.
근래 그의 가장 큰 스트레스의 근원이었던 우라질 영감이 드디어 갔다.

나이가 들어서 유해졌다는 까지미르의 말이 맞았는지, 체자르가 티끌만큼이라도 책 잡힐 일이 없도록 완벽하게 정산하고 서류를 정리한 보람이 있는지, 베레조프스끼는 못마땅한 안색을 한 번도 펴지 않았으나 큰소리는 내지 않고 돌아갔다.

멀어지는 배를 향해 꽃을 뿌리며 손수건이라도 흔들고 싶은 심경으로 옐리세이는 환호성을 삼켰다. 더욱 환영할 일은 멘쇼포스카야도 잠잠하다는 사실이었다. 평소에는 텁텁하고 짠 내가 나서 꺼려했던 바닷바람마저도 달았다.

옐리세이는 화장실에서 덜 끊고 나온 사람의 표정을 한 나스따시야에게 이기죽거려 주었다.

"페카한테 제대로 정보 얻은 게 맞긴 하쇼? 당신이 군인 출신이라서 잡담을 한 게 아니라?"
"……."

다른 사람도 아닌 옐리세이에게 빈정거림을 듣자 그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뭐……. 큰일이 없었으니 다행이지."

체자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긴 포말의 궤적만을 남긴 배가 완전히 물마루 너머로 사라지자 등을 돌렸다.

"일단 돌아가자. 베레조프스끼가 귀국하고 난 뒤에 들이닥칠 일은 그때 가서 고민하도록 하고."
"회계사를 쥐 잡듯이 잡아가며 혹사시켰는데도 트집거리가 없었을 테니 저 영감도 단단히 약이 올랐을 걸요."
"그래서 여자 가슴을 열심히 주물렀구만요."

긴장이 풀린 수행원들 사이에서 터진 왁자지껄한 웃음은 돌아오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행여나 베레조프스끼의 일행 앞에서 말실수라도 할까 저어하느라 지난 며칠 내내 술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고, 입 단속하느라 숨이 막혔던 그들은 수다스럽게 입을 놀렸다. 체자르마저도 쓴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잊지 못할 생일이야."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체자르는 측근 수행원들과 늦은 점심 후 그들을 란뜨제프스카야 산하의 술집으로 데려갔다. 여느 때라면 호스티스가 옆에 붙어 있는 것만 불쾌하게 여겼을 뿐, 못 마셨던 술을 들이부으며 신나게 놀았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하면서 엉덩이를 들썩이던 옐리세이는 체자르의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슬그머니 운을 뗐다.

"저어, 체자르 끼릴로비치. 죄송합니다만 전 먼저 돌아가도 될까요? 근 이틀 밤을 세웠더니 눈을 붙이고 싶어서요."

이 핑계를 대기 위하여 옐리세이는 일부러 야간 근무를 자청하였다. 게슴츠레하게 취한 시선을 올린 체자르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앗싸. 옐리세이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고개를 숙이고는 후딱 술집을 뛰쳐나왔다.

택시를 붙잡아 타고 귀가하는 시간이 너무 초조했다. 술집에서 나오기 전에 지금 간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 새끼 설마 내가 늦는다고 돌아간 건 아니겠지. 그사이를 못 기다리고 쪼르륵 돌아갔다면, 갔다면……. 어떻게 아작을 내줘야 하나.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에 아파트에 도착했다. 지폐 몇 장을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기사에게 내던진 옐리세이는 한달음에 계단을 올라갔다. 빠벨에게 받아온 열쇠로 문을 여는 손이 조급하게 미끄러졌다.

"루이! 오빠 왔다!"

비어 있는 집에 옐리세이의 외침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빌어먹을 놈이! 한껏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던 그는 혹시나 하여 방문을 열었다. 짜증은 이내 흥분으로 변하였다. 저우룬칭이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엉덩이도 훤히 보이는 바람직한 포즈였다.

차려 놓은 밥상이다.

옐리세이는 넥타이부터 하나씩 벗으며 침대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바로 흔들어 그를 깨우려다, 생각을 달리 먹고는 조심스럽게 바로 눕혔다. 저우룬칭은 미간만 찌푸렸을 뿐 잠이 든 그대로 순순히 이끌렸다.

저우룬칭이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노예에 근접한 상황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드디어 이 자식의 몸을 마음껏 조몰락거릴 수 있다. 엉덩이가 당겼지만 제일 맛있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옐리세이는 어깨를 거칠게 들썩거리며 오늘도 대충 꿰입고 온 듯한 주우룬칭의 V넥 티셔츠를 슬금슬금 밀어 올렸다. 뚜렷한 굴곡이 패인 복근이 호흡과 함께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쇄골 언저리까지 말린 티셔츠 아래로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아, 씨발. 근육 봐. 미치겠네."

저우룬칭 이전까지 자신의 취향은 근육이 아니라 여리여리하고 늘씬한 몸매였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저우룬칭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마저 깜빡하고 가슴을 정신없이 빨고 만지다가 그가 뒤척이는 기척에 흠칫했다. 다행히 깨지는 않았다. 안도의 숨을 돌리며 잇새에 가볍게 물고 쪽쪽 빨던 유두에서 고개를 들었다. 안심하고 성추행할 수 있도록 언젠가 눈치 봐서 꼭 수면제를 먹여야겠다.

벨트를 풀고 지퍼까지 내렸다. 드로어즈에 감싸인 성기는 잠잠히 숨죽어 있었다. 허리를 슬쩍 들어 올려 허벅지까지 바지를 내렸지만 여전히 잠든 채다.

‘......이대로 따먹어도 모를 것 같은데.’

일단 삽입만 하면 깨든 말든 알게 뭐란 말인가. ‘애인’의 집에서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으니 이건 강간이 아니다. 절반의 합의다.

하지만 자기합리화를 하며 속옷까지 내린 순간, 반쯤 발기하였음에도 위용을 자랑하는 성기가 눈에 들어왔고, 옐리세이는 즉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저우룬칭의 처녀보다 자신의 뒷구멍이 더 급했다.

그가 깨는 것도 아랑곳 않고 대뜸 성기를 입으로 삼켰다. 우물우물 빨면서 핥으니 반응은 금방 돌아왔다. 지난번처럼 체자르에게 호출될 염려도 없다.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의 것을 정성껏 빨며 침을 뱉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뒤도 풀었다. 손가락이 항문을 비집어 열자 등이 반사적으로 잘게 떨렸다. 타인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과 자신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건 비슷하면서도 판이한 감각이었다. 스스로 뒤를 애무하는 것도 8년 만이다.

불현듯 저우룬칭의 허벅지가 펄떡 경련하듯이 움직였다. 꼿꼿이 발기한 성기가 고환을 핥던 옐리세이의 관자놀이와 뺨을 때렸다. 와, 미친. 옐리세이는 욕을 뱉었다. 존나 좋았다.

"어……. 어? 옐리세이……?"

얼떨떨한 목소리가 밑에서 올라왔다. 그간 옐리세이가 들은 저우룬칭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멍청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5분만 더 자고 있질 그랬냐."

신나게 피스톤질하고 있을 때 쨌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히죽거리며 올라탔다. 저우룬칭이 기겁하여 손을 휘저었다.

"자, 잠깐만."
"너 같으면 잠깐 하겠냐?"
"아니, 그게…… 콘돔이 저기 봉지에……."

잠이 덜 맨 와중에도 콘돔을 챙기는 매너에 감동할 법도 하지만 옐리세이는 아예 무시했다.

"닥치고 잘 세우고 있기나 해."

그리고 벼르고 벼르고 별렀던 때를 위하여 허리를 내렸다.
대망의 삽입이었다.

"아윽……!"
"큭."

하지만 마음만큼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큰데 러브젤도 없이 손가락만으로 푸는 건 무리였다. 겨우 선단만 삼켰을 뿐인데 눈앞이 하얘졌다. 억지로 넣다가 찢어지면 어떡하지. 그럼 내가 바텀이라는 게 소문날 텐데.

이 와중에도 비밀이 발각되는 걸 제일 먼저 걱정하는 옐리세이에게 저우룬칭이 잠이 덜 깬 목소리를 건넸다. 그도 아픈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좀…… 천천히 하자. 러브젤도 같이 샀으니까……."

그 말만 했으면 옐리세이도 몸을 뗐을 것이다. 그러나 저우룬칭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안 그래도 넌 너무 조인다고."
"입 닥쳐!!"

여자보다 차진 자신의 구멍이 언급되자 반사적으로 울컥하여 외친 옐리세이는 이를 악물었다. 씨발, 찢어지면 아네로스 쓰다가 실수했다고 하면 되겠지!

총도 맞고 칼도 찔려 봤는데 살이 찢어지는 게 대수일까. 저절로 비명이 터지려는 입술을 깨물며 막무가내로 허리를 내렸다.

"야, 너……!"

저우룬칭이 급격히 숨을 들이켰다. 골반이 삐걱거리는 환청마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옐리세이는 깡그리 무시하며 무작정 삽입했다. 기둥뿌리를 잡고 끙끙거리다 이만하면 거의 되었으려니 싶어 손가락을 쓸어 올려 보았지만 아직 반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앞이 까마득했다. 저걸 언제 다 넣냐. 미치겠다.

"……안 되겠다."

빼지도 넣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헐떡거리기만 하는 그의 엉덩이를 저우룬칭이 붙잡았다.

"아파도 참아라."

그러며 옐리세이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아래로 확 잡아당겼다. 단단히 닫혀 있던 몸이 단번에 열리며 성기가 뿌리까지 박혔다. 억지로 씹고 있던 비명이 날카롭게 터졌다.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아팠다. 너무 아팠다. 하얗게 비어 버린 머리에 아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삽입의 충격으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헉헉거리는 그가 진정하기도 전에 저우룬칭이 밑에서 허리를 쳐올렸다.

"하읏! 아! 아아!!"

좀 천천히 하라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은 온전한 단어로 만들어지지도 못하고 교성이 되었다. 강압적이리만큼 강제된 추삽질의 효과는 있었다. 팡, 팡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치대는 허리에 정신없이 흔들리기만 하던 내벽이 슬슬 풀리며 저릿저릿한 쾌감을 척추로 보냈다. 맞다. 이것이었다. 내도록 안달복달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좇았던 쾌락이었다.

주도권은 옐리세이에게 넘어왔다. 한껏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주무르며 요령 있게 허리를 놀렸다. 깊이 삽입된다는 것 외에도 이 체위의 좋은 점이 더 있었다. 저우룬칭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의 주도하에 쥐어짜이는 쾌락 속을 허우적거리는 놈의 표정이었다. 때로는 얄미우리만큼 여유만만인 놈이 자신으로 인한 육락에 내몰리며 신음하는 얼굴이 꼴려서 미칠 것 같았다. 왜 손에 지금 캠코더가 들려 있지 않은 거란 말인가.

"헉!"

내벽을 꽉 죄자 저우룬칭이 크게 신음하며 가슴을 들썩거렸다. 옐리세이는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한 손을 올려 벽 귀퉁이를 가리켰다.

"다음에는, 아윽, 내가 저기에…… 카메라 설치해 놓을 테, 니까……!"

저우룬칭의 얼굴이 가장 잘 잡히는 각도에 설치하고 촬영하면 끝내줄 것이다. 그가 섭렵하였던 그 어떤 GV보다 강력한 흥분제가 되리란 것도 자명했다.

"크, 무슨 헛소리야."

어처구니없어하며 체위를 바꾸려는 저우룬칭의 어깨를 강하게 누르며 허리를 움직였다. 시도를 포기한 저우룬칭이 그의 허리와 가슴을 매만졌다. 꼿꼿하게 곤두선 유두가 단단한 엄지에 눌리며 긁혔다. 옐리세이는 가파른 교성을 허덕이며 반대편 손을 정신없이 사타구니로 이끌었다, 저우룬칭이 매끄러운 표피의 성기를 쥐었다.

끝이 가까웠다. 집어삼킨 이물질의 모양대로 늘어난 내벽이 성기를 사납게 물어뜯는 것과 동시에 저우룬칭의 가슴께까지 뿌연 액체가 튀었다. 몇 번 허리를 더 흔들던 저우룬칭도 이내 그의 안에서 사정했다. 정액이 꿀렁꿀렁 뱃속에 쏟아졌다. 짜릿했다.

옐리세이는 허리를 꺾으며 앞으로 쓰러졌다. 거칠게 들썩이는 어깨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저우룬칭의 손이 땀에 흠씬 젖은 목덜미며 등을 살살 어루만졌다. 예민해진 살결을 쓰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호흡을 찬찬히 가라앉히며 나른한 후희를 즐기다 문득 시신이 고정되었ᄃᆞ. 사정할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몰랐는데 자신의 정액이 꽤 멀리까지 튀었다. 조금만 더 멀리 튀었다면 저우룬칭의 얼굴까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아직 이놈에게 못한 게 있다.

"끄응."

힘을 잃고 늘어지려는 허리를 펴며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켰다. 깊이 삽입되었던 성기가 빠지며 벌어진 구멍으로 정액이 허벅지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음?"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저우룬칭이 그의 상체를 기어오르고 있는 옐리세이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작게 벌어진 입을 보니 절로 허리가 들썩였다. 탐욕스럽게 입술을 핥았다.

다 올라왔다. 저우룬칭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가둔 옐리세이는 침대 머리맡의 벽에 한 손을 짚으며,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성기를 쥐곤 그의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야, 빨아."
"……."

저우룬칭은 잠시 말이 없었다. 옐리세이는 얼른 벌리라며 선단으로 입술을 문댔다. 고개를 돌려 성기를 피한 그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좀 쉬다가 하자."
"웃기지 마. 네가 먼저 빨아준다고 했잖아. 강제로 빨라고 내가 시키기라도 했냐, 강요라도 했냐. 다마까지 뺐는데 성의를 보이라고, 얼른."
"안 빨아준다는 게 아니고, 기다리느라 점심도 못 먹었더니 배도 고프니까 뭐라도 먹,"

조잘조잘 시끄러운 입을 성기로 틀어막았다. 항의하는 눈빛이 따가웠지만 무시하고 더 밀어 넣었다. 설마 하나밖에 없는 ‘애인’의 좆을 물어뜯기라도 하겠느냐는 뻔뻔함이었다.

눈매를 살짝 찌푸리긴 했지만 저우룬칭도 입을 크게 벌렸다. 습하고 좁은 구강으로 빨려 들어간 성기가 뜨겁게 죄였다.

"후우……."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옐리세이는 낮게 신음하며 혓바닥에 문지르듯이 성기를 마찰 시켰다. 저우룬칭이 입술을 모아 기둥을 빨았다. 느리게 왕복하다 걸터앉는 것처럼 허리를 퍽 내렸다. 성기가 단번에 목젖까지 찔렀다. 쿨럭거리는 기침이 괴롭게 목 안에서 터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고환이 턱에 부딪힐 만큼 세차게 찔러 넣을 때마다 구역질이 치미는지 더욱 힘겹게 일그러지는 저우룬칭의 낯이 시각적인 쾌감까지 주었다.

괴롭게 오락가락하던 저우룬칭의 손이 허벅지를 잡긴 했지만 추삽질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힘들어하면서도 그의 성기를 목 안 깊숙이 삼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구슬 제거, 진짜 잘했다.

사정이 가까웠다. 허릿짓하며 목 안에 그대로 토정하려던 옐리세이는 생각을 바꾸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급격히 공기를 받아 삼키며 연신 기침하는 저우룬칭의 얼굴에 사정했다. 콧잔등이며 입술이며 뺨에 백탁의 액체가 투두둑 떨어졌다. 잔기침을 멎지 못하는 입으로 입술에 묻은 정액을 귀두로 훔치며 밀어 넣었다. 저우룬칭이 콜록 거리면서도 혀로 귀두를 빨아주었다.

나른한 만족감에 옐리세이는 배부른 짐승처럼 킬킬 웃었다. 섹스 버킷 리스트의 항목 하나도 지울 수 있었으니 더 흡족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만족스러웠으나 의외의 면도 하나 발견했다.

"펠라는 못하네?"

디프 스로트 이전의 저우룬칭은 어설프게 빨고 핥기만 했다. 펠라티오하는 입장에서 버거운 체위라는 걸 고려하여도 영 서툴렀다. 정액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숨을 크게 몰아쉬며 얼굴을 늘어뜨리고 있던 저우룬칭이 힐긋 눈동자를 올렸다. 벽을 짚고 있느라 팔 밑으로 보이는 얼굴이 섹시했다. 역시 남자는 위에서 깔아봐야 제맛이다.

"넌 맨날 고의로 까먹는 것 같지만, 나는 게이가 아니라 헤테로라고."
"이전에 남자랑 씹질을 한 번도 안 해 본 순결한 몸인 것처럼 말하냐."
"남자와 섹스할 때에도 블로우 잡을 받는 쪽이었지 내가 해 준 적은 거의 없었지, 당연히. 뭐가 좋다고 남자 걸……."
"흐흥."

옐리세이는 히죽 웃었다. 펠라티오해 주는 걸 안 내켜하던 놈이 구슬을 빌미로 하였든 어쨌든 스스로 빨아준다고 했다, 이 말이지.

"잘했어, 잘했어. 다른 새끼들 물건 빨아서 뭐 하냐. 내가 하나씩 차근차근 잘 가르쳐 줄 테니까 내 것만 빨아."
"……그쪽보디는 역시 이쪽이 낫군."

기다란 손가락이 불시에 항문으로 삽입되어 옐리세이는 기겁했다.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크게 흠칫하며 죄었다.

"정말 잘 조인다니까."
"시끄…… 억!"

입 닥치라는 항변을 외칠 새도 없이 저우룬칭에게 밀려 침대로 털퍽 넘어졌다.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던 옷을 다 벗은 저우룬칭이 그의 몸 위에 엎드렸다.

"카메라를 뭘 어쩐다고?"
"널 묶어서라도 반드시 촬영하고 말, 아! 으웃, 응……."

다시 체내로 들어온 손가락이 정액의 일부가 채 흘러내리지 않고 고인 내벽을 쑤셨다. 엉덩이 안쪽이 슬금슬금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음, 그래.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도 섹시한 것 같긴 하다.

옐리세이는 일단 카메라를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저우룬칭의 등허리에 팔을 둘러 아래로 당겼다. 손바닥에 감기는 엉덩이의 탄력 있는 감촉이 황홀했다. 신나게 엉덩이를 주무르는 그에게 저우룬칭이 고개를 숙였다. 허공에서 혀가 얽히며 방 안의 공기는 단 숨에 뜨겁게 데워졌다.





거슬리는 소음이 귀를 긁었다. 잔잔히 수마에 잠긴 의식의 건너편을 자극하는 낯선 소음이 거북하여 잠결에도 미간을 모았지만 이내 고요가 찾아왔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들썩이며 올라갔던 신경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멀어졌던 잠을 좆았다.

평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소음은 재차 날카롭게 사방에 울려댔고, 저우룬칭은 잠에 눌린 이성으로 이 소음이 휴대폰의 벨소리라는 걸 간신히 파악했다. 자신의 휴대폰은 진동이니 전화를 건 사람이 찾는 주인은 따로 있었다.

언제 해가 떨어졌는지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고즈넉한 어둠이 내린 사위를 벨소리가 요란하게 찢어댔다. 상체를 일으키려했지만 그의 오른팔을 베고 누운 옐리세이는 이 소음에도 깨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본부의 귀빈을 맞느라 내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했을 테니 피곤하기도 할 터였다.

저우룬칭은 왼팔만 한껏 밑으로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다행히 옐리세이의 옷 위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이 잡혔다.

"여보세,"
「Е л и с е п ! Т ы  г д e ?!」

전화를 받자마자 러시아어 외침이 다급하게 쏟아졌다. 그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세상모르게 잠든 옐리세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 대답했다.

"옐리세이는 지금 자고 있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 있었다. 전화를 건 여자가 영어로 바꿔 되물었다.

「옆에 옐리세이가 있습니까?」
"네."
「당장 깨워서 바꿔주십시오」

상당히 시급한 상황이라는 건 그녀의 언성으로도 짐작이 갔기에 저우룬칭은 두말 않고 옐리세이를 흔들었다.

"……        З a ч е м ……. Ч т о  с л у ч и д о с ь ……?"
"전화 받아. 급한 일인 것 같다."

눈도 뜨지 못하고 입속으로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는 옐리세이의 귀에 휴대폰을 대 주었다.

"А л л о ……."

휴대폰에 손도 대지 않고 전화를 받는 둥 마는 둥 졸고 있던 옐리세이가 갑자기 벌떡 상체를 통겨 일어났다. 그 서슬에 저우룬칭이 놓친 휴대폰에서 여자의 외침이 카랑카랑 하게 울렸다. 화급히 침대에 떨어진 휴대폰을 다시 집은 옐리세이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심각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잠기운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통화가 끝났다.

"П р о к л я т ы й !!"

옐리세이가 거친 욕설을 뱉으며 주먹으로 벽을 쾅 때렸다.

"……심각한 일이냐?"

러시아어로 대화하고 있었기에 정확히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무언가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짐작이 갔다. 옐리세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 권총의 약실을 점검하고는 책상 서랍에서 여분의 총알을 챙겼다.

"루이."

조용히 돌아보는 목소리는 전에 없이 진지했다.

"앞으로 며칠간 홍가 밖으로 나가지 마라. 나갈 일이 있을 때에도 되도록 관광지구나 현지들 사는 곳으로 가고,"
"위험한가?"
"자칫하면 항쟁이 터질지도 모르겠어."

조심하라고 당부하다, 울적한 얼굴로 혀를 찼다.

"야. 차라리 네가 진짜 북한 간첩이라면 좋겠다. 간첩 훈련을 받은 놈이라면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것 아냐. 일반인이 미쳤다고 야이쑤코 같은 데에 기어들어 와선."
"……아니, 그건."

북한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마피아였다는 이야기는 안 했던가? 저우룬칭은 자신이 일반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 꿀꺽 되삼켰다. 이제 와서 전직을 고백하자니 타이밍이 안 좋았다. 안 그래도 심란해 보이는 녀석에게 신경 쓸 거리를 던져 주기가 저어되기도 했다.

"난 걱정하지 말고 조심해. 총알 오는 거 보면 잘 피하고."

농담 섞인 염려에 옐리세이도 얼굴을 약간이나마 풀며 피식 웃었다.

"인마, 네 엉덩이를 남겨 두고 내가 죽기라도 하겠냐."

돌아오면 콘돔 한 박스를 다 쓰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옐리세이는 서둘러 아파트를 나갔다. 그다운 인사였다.

저우룬칭은 멀어지는 옐리세이의 모습을 창밖으로 지켜보았다. 가로등의 불빛이 남긴 마지막 그림자까지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창문 옆에 서 있다, 무거운 시선을 돌리며 몸을 뗐다. 야이쑤코에서는 옐리세이의 말처럼 소속된 세력도 없는 일반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베레조프스끼가 탑승하였던 배가 해상에서 폭파되었다는 소식은 그 사안의 심각함에 비하면 퍽이나 늦게 란뜨제프스카야에 전해졌다. 해상에서 긴급 신호를 보낼 겨를도 없이 배가 폭파된 탓에 뜨랏에서 기다리던 조직원들이 도착 예정 시각이 지나서야 조사에 착수하였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탈 없이 감사가 끝난 탓에 긴장이 풀려 방심하고 있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긴급히 간부 회의가 소집되었으나 회의실 내에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사람이나 여자와 뒹굴던 중이었다는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드문드문 빈자리마저 있었다. 체자르만 하여도 잔뜩 흐트러진 차림이었다.

"니미. 모처럼 얌전히 내보냈나 싶더니 이게 뭐요?"
"맨쇼프스카야의 짓입니까?"
"아직은 모르죠. 그런데 그놈들이 우리도 아닌 본부 쪽 사람을 왜 칩니까? 더구다나 베레조프스끼와는 커넥션도 있다던데."
"잘라내기 일 수도 있지. 모스크바보다는 야이쑤코에 있을 때가 암살하기에 쉬우니까."
"증거가 없어, 증거가! 우리가 백날 추측해 봤자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본부에서는 우리를 의심할 게 뻔하다고!!"
"우리가 병신도 아니고 이렇게 뻔한 수법으로 암살을 한다고요? 씨발."
"베레조프스끼의 파벌이 모스크바에서 우리와 그놈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대면 대두목께서도 기울어질 수밖에 없죠."

저마다 목청껏 주장을 내세우느라 회의실 안은 소란이 가득했다. 머리 굴리는 일에는 자신이 없기도 하였거니와 기분도 저조하여 옐리세이는 난장판에 끼어들지 않고 턱 만 비딱하게 괴었다.

몸도 근질근질하던 참이니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었던 베레조프스끼가 암살당하여 분쟁의 촉발이 되는 건 환영이었다. 허나, 베레조프스끼의 암살에 휘말려 까지미르도 죽었다. 폭파된 배에서 생존자는 한 명도 없다는 보고였다. 호의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고 체자르의 친우이기도 한 이가 죽었다는 소식은 그를 착잡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걱정이 되어 곁눈질로 체자르를 힐긋 살폈다. 상석에 앉은 체자르는 입술도 벙긋하지 않고 내도록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고 있었다.

"……뭐?!"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회의실의 소란을 찢었다. 바쁘게 여기저기 전화를 하던 나스따시야의 경악성에 목청껏 언성을 높이던 간부들마저 토론을 빙자한 언쟁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할 정도였다. 나스따시야가 침을 꿀꺽 삼키며 체자르를 보았다.

"체자르 끼릴로비치. 바실리 세르게예비치께서 살해되셨습니다."

옐리세이는 반사적으로 바실리의 빈자리를 노려보았다. 대경한 침묵이 회의실을 점령하였다.

"콜걸을 호출하여 호텔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안쪽에서 영 기별이 없어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콜걸은 사라지고 없고, 바실리 세르게예비치는 목이 베인 채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체자르가 처음으로 입술을 뗐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현재 몇 명이지?"
"바실리 세르게예비치를 포함하여 5명입니다."
"전부 다시 연락해라."

암살자를 콜걸로 위장하여 들여보냈다면 절대 즉흥적인 계획이 아니다. 회의실은 이제 단순히 베레조프스끼 한 명의 암살을 넘어 선 사태의 위중함으로 술렁였다. 1분도 되지 않아 외부에서 다급한 연락이 전해졌다. 이 또한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간부의 암살 소식이었다.

차례대로 간부가 암살당하였다는 급보에 퍼뜩 불길한 예감이 들어 옐리세이는 그나마 덜 소란스러운 회의실 구석에서 빌딩을 경비하는 부하들과 무전 연락을 취햇다.

"……젠장."

예감이 맞았다. 서둘러 캐비닛에서 M16 한 정을 꺼내어 장비하였다.

"1층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연락이 끊겼어요."

날 선 긴장감이 물씬 묻어나는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를 빽빽하게 경호 중인 부하들 중에서 빠벨과 유리를 불렀다. 두 사람도 다른 조직원들처럼 자동소총으로 무장 중이었다.

"아래층에 내려간다, 따라와. 그리고 뾰뜨르. 어느 조직인지는 모르지만 경계가 뚫렸을 가능성이 있으니 바짝 긴장해 있으라고 다들 연락해."
"알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부하의 인사를 뒤로하고 복도를 걸었다.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더디게 바뀌어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 딱 좋겠는데. 짜증스럽게 몸을 뒤척이는 통에 손목에 걸린 쵸트키의 나무 구슬이 개머리판에 부딪혀 짤그락거렸다.

"……까지미르 까지미로비치께서 선물하셨던 그 쵸트키입니까?"

빠벨이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옐리세이는 쵸트키를 한 번 만지작거리고는 대답 없이 끄덕이기만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쵸트키가 그의 유물이 된 셈이다. 숫자가 2로 바뀌었다. 빠벨과 유리가 긴장한 낯으로 총구를 앞으로 겨눈 채 대기하였다.

一 1층입니다.

안내 소리에 이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사방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한 떼던 그들은 홀 건너편에서 경계 중인 조직원들의 등을 보고 일말 안도하였다. 여기까지는 안전하다.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정문은 이상이 없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긴장 풀지 말고."

가볍게 독려하고 빠벨과 유리에게 손짓했다. 연락이 끊긴 쪽은 뒷문을 경비하던 이들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내달리다시피 홀을 돌아 나갔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옐리세이가 발견한 건 기둥 뒤에 숨겨진 조직원들의 시체였다.

급히 침입자가 있음을 무전으로 알리는 빠벨의 옆에서 허리를 굽혀 시체를 살폈다. 시체의 온기가 남아 있다. 베레조프스끼의 배웅으로 어수선할 때 잠입하여 지금 처리를 했든, 직전에 침입을 하였든 놈들이 빌딩을 돌파한 지는 몇 분 되지 않았다.

"보안실은?"
"……연락이 안 됩니다,"
"우선 가 보자."

목적이야 당연히 체자르나 회의실에 모인 간부들이겠지만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인원을 파악해야했다. 2층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빠벨이 입을 열었다.

"멘쇼프스카야겠죠?"
"대충 그렇겠지."
"왜 저희 빌딩을 습격했을까요? 대규모로 치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습격해 봤자 소용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건 옐리세이도 의문이었다. 베레조프스끼의 배웅과 암살 탓에 허를 찔리긴 했으나 멘쇼프스카야는 란뜨제프스카야에 비하면 현격히 작은 규모의 조직이고, 란뜨제프스카야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빌딩을 습격한다는 행위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진배없었다.

"나도 몰라, 자식아. 우라돌격 부대라도 만들었나 보지."
"……폭탄을 설치한 건 아니겠죠?"

유리가 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다 같이 정답게 뒈지는 거고."

말을 함과 동시에 발로 보안실의 문을 걷어차서 열었다. 예상은 했지만 보안실의 인원은 모조리 살해당해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은 CCTV 모니터까지 깨져 있다는 점이었다. 확인을 끝내자마자 보안실을 나왔다.

"나다. 보안실이 습격당해서 인원과 경로 파악이 안 돼. 우리도 금방 올라갈 테니 경비를,"

뾰뜨르에게 무선을 끝내기도 전에 드르륵 하는 총소리와 외침이 난무했다.

"젠장! 벌써 올라갔어!"

엘리세이는 이를 꽉 물고는 복도를 내달렸다. 어디까지 점거하였고 어디부터 습격하였는지 모르니 엘리베이터는 위험하다. 잘 사용하지 않는 건물 뒤편의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넓지 않은 계단을 요란한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꽉 매웠다. 총소리가 웅웅거리면서 진동했다. 한창 총격 중인지 뾰뜨르와 교신도 잘 되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며 단번에 질주하다 문득 손을 뻗어 빠벨과 유리까지 세웠다. 두 사람이 씩씩 거칠게 호흡을 고르며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옐리세이는 입술에 검지를 세우고는 소리 죽여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체자르와 간부들이 회의 중인 아(A) 회의실은 바로 위층이었다. 총격전 소리가 더욱 크게 천장을 울렸다.

그는 주머니 에서 휴대폰을 꺼내 꺾인 계단 위쪽으로 휙 던졌다. 탕, 하고 계단에 휴대폰이 나동그라지기가 무섭게 총알이 타다당 쏟아졌다. 얼른 벽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얼굴은 봤냐?"
"우리 애들은 아닙니다."
"쏴."

빠벨과 유리가 옐리세이의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계단 위로 응전하였다. 세 명의 남자가 허공에 단말마의 비명성을 흩뿌리며 층계참 너머로 나동그라졌다. 위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된 후에도 얼마간 더 총을 쏜 후에 계단을 올라갔다. 유리가 경미한 부상을 입은 것을 제외하면 피해도 없었다.

그들이 복도 뒤편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즈음에는 상황도 거의 정리되어 있었다. 매캐한 총탄 연기와 피 냄새가 부상자들의 신음에 섞이어 허공을 떠다녔다. 가슴을 고양 시키는 최적의 흥분제다. 옐리세이는 폐를 열어 공기를 한껏 들이켜고는 히죽 웃었다.

"항쟁 맞네."
"저 자식 아는 얼굴입니다. 멘쇼프스카야예요."

발치에 나뒹구는 시체를 발로 밀어 얼굴을 확인한 빠벨이 중얼거렸다.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본 뾰뜨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총격 도중에 다쳤는지 어깨가 온통 피범벅이었으나 중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정확한 인원수는 헤아려봐야겠지만 열 명 정도로 전멸시켰습니다."
"좋아, 잘했어. 엔지니어 불러서 CCTV 모니터를 교체만 하면 되는지 기기까지 박살 난 건지 제대로 확인하라고 하고, 잔당이 있을지 모르니 세 명씩 조를 짜서 건물 전체를 수색해라."

상처 입지 않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옐리세이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첨언하였다.

"아, 폭탄이 설치된 건 아닌지도 살펴보고."

빠벨과 유리는 복도에서 대기하게 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총성 속에서도 끊임없이 언쟁하였는지 회의실 내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였다.

"대충 정리는 끝났습니다. 들으셨겠지만, 멘쇼프스카야고요."
"참석하지 않은 간부 중에서도 4명이 살해당했네. 막심만 겨우 목숨을 건졌어."

조직에서 체자르 바로 아래의 지위인 블라질롄 카잔이 침중한 낯빛으로 설명했다. 옐리세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계획적인 습격이네요."
"그런 것치고는 무모하지만 말이지."
"보안실이 습격당해서 구멍이 좀 뚫렸습니다. 정확한 건 엔지니어가 점검을 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기기까지 박살을 내놨겠죠."

까지미르의 사망은 애석하였지만 망자는 망자이다. 까지미르의 죽음을 넘어, 항쟁이 선명한 형체를 이루어 나타나자 옐리세이는 흥분으로 들뜨기 시작하는 마음을 억지로 억눌렀다. 체자르의 앞에서 눈치 없이 흥겨운 기색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체자르는 의자를 돌리고 앉은 채 시가만 피우고 있었다. 나스따시야가 입을 뗐다.

"경비에 허점까지 생겼다면 여기에서 치고 들어오는 걸 기다릴 게 아니라 저희가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는 게 좋겠군요."
"별동대를 따로 만들지?"

논의의 가닥을 잡은 간부들이 의견을 종합하기 시작했다. 옐리세이는 제대로 총을 쓰지 못한 감각에 미진함을 느끼며 잠자코 착석했다. 별동대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의 현재 위치는 체자르의 경호였다. 항쟁이 시작되었다지만 빌딩에서 손가락이나 쪽쪽 빨며 무료하게 시간이나 죽이고 있게 생겼다.

‘어지간해서는 빌딩을 재차 습격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대전차 로켓을 장착한 차를 몰고 오는 거라면 또 몰라도.’

하릴없이 공상이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체자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별동대는 내가 직접 이끌겠다."

느닷없는 발언의 진의를 옐리세이가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나스따시야가 대경하여 외쳤다.

"위험합니다!!"
"체자르 끼릴로비치! 다시 고려해 보십시오! 방심했다고는 하나 간부들도 벌써 4명이나 살해당했습니다!"

사방에서 안 된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체자르는 단호했다.

"까지미르는 모스크바에 딸이 있어. 그 애는 나 때문에 어머니와 동생을 잃고, 이제는 아버지까지 잃었지. 그런데 난 친구가 죽었는데도 뒷짐이나 지고 안전한 곳에 있으란 말인가?"

좌중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그 중 누군가는 주저하면서도 만류했지만 이어지는 확고한 부언에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건 죽은 친구를 추모하는 나의 싸움이야."





"……칭. 아칭? 괜찮니?"

연거푸 재촉하며 올려다보는 목소리에 저우룬칭은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홍위롄이 발돋움까지 하며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일 있으면 나 혼자 가도 돼."
"아닙니다. 요즘 분위기도 흉흉하고 위험한데 안 바래다드릴 수가 있나요."

내켜하지 않는 홍위롄을 억지로 만류하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차에 탑승할 때까지도 그녀는 그냥 가게에서 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며 저어하는 기색이었지만 저우룬칭은 완강하게 차에 올라탔다.

골목을 빠져나온 지 얼마 가지 않아 폭격이라도 당한 양 유리창이 죄 깨지고 전면에 무수한 총탄 자국이 남은 술집이 보였다. 근래 야이쑤코의 한구석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 간 항쟁의 결과였다. 멘쇼프스카야의 간부 한 명이 지배인으로 있는 이 술집이 습격을 받은 게 불과 이틀 전이다. 시체는 수습되었지만 사방에 된 핏자국은 씻기지 못한 채 처참하였던 총격전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데 어떻게 누님 혼자만 나가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으응, 그것도 그렇지만……."

홍위롄이 차창 밖으로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술집을 따라 고개를 뒤로 꺾었다.

"2년 전보다는 얌전하긴 해. 적어도 러시아 마피아들의 세력권 내에서만 주로 싸우고 있잖니? 우리 장사에도 지장이 없구. 2년 전에는 사방에서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이게 비교적 얌전한 분위기라니 놀라운데요."
"여기 살다 보니 신경이 날이면 날마다 무뎌지고 있다는 걸 확실히 실감하고 있지 뭐니, 얘. 이러다가는 진짜 전쟁이 터져서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다녀도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게 될 것 같아."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이나타운에 도착하였다. 아이들에게 태국어를 가르치는 회관 앞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려던 홍위롄은 인사하기 위해 저우룬칭을 돌아보았다가, 도로 문을 닫았다.

"안 내리십니까?"
"아칭.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돼. 야이쑤코에서 이런 싸움 정도야 비일비재한걸. 홍콩보다 치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체적인 방범은 나름대로 잘 되어 있어. 눈먼 총알에 맞는 게 걱정되긴 하지만 말이야."

크게 우스운 발언도 아니었는데,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뜻인지 홍위롄이 소리 내어 쿡쿡 웃었다. 저우룬칭도 그녀를 따라 입꼬리를 느슨하게 끌어올렸다.

"위험한 곳인데 홍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세요?"
"글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 홍콩에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만 슬픈 기억도 많거든. 야이쑤코에 온 지 3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갈피를 못 잡겠네. 넌 어떠니?"

저우룬칭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전 가고 싶어도 못 돌아갑니다. 젠 형님이 당신 생전에는 홍콩 땅을 밟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거든요."
"……작은 도련님의 일 때문이야?"
"그 일도 있고요, 원인이야 많습니다. 젠 형님은 예전부터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하셨으니까요,"
"내가 회장님께 너그러이 봐 달라고 한 번 부탁드려 볼까?"

차오쑹윈의 생전에는 술집 마담인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본부인이나 다름없이 행세하였던 홍위롄이었고 차오쑹젠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지만, 차오쑹윈이 사망하고도 3년이나 지난 지금 그녀는 고작해야 전대 총주의 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부탁을 경청하기만 하는 것조차 차오쑹젠의 변덕에 달려 있을 테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괜찮습니다. 홍콩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딱히 없고요."

저우룬칭은 낮게 한숨을 쉬며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홍콩에 돌아가려면 훨씬 더 일찍 돌아갔어야 했습니다. 윈 형님의 암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는 게 아니라, 야쿠자와 계약을 제대로 체결하자마자 즉시 귀국했어야 했어요. 3년 전에 계약이 중간에 어그러지지만 않았어도 제때 귀국하여 윈 형님을 모실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한 번 말문이 터지니 마음 깊이 가두었던 후회가 물꼬가 터진 것처럼 흘러넘쳤다. 마피아들의 항쟁을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겪게 된 탓일지도 몰랐다.

"지금도 생각합니다. 제가 곁에 있었으면 암살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제가 죽더라도 형님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형님과 함께 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요……."
"그런 말 하지 마."

홍위롄이 후회감에 젖어 늘어지는 그의 말허리를 끊으며 손을 꽉 잡았다.

"그이는 널 정말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어. 아들이 같이 죽기를 원하는 아비가 세상에 어디 있겠니? 그이는 당신이 암살당하던 때에 네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을 거야."

저우룬칭은 시선을 내리뜨며 그녀에게 잡힌 손을 늘어트렸다.

"롄 누님. 화공당 습격 당시의 부상으로 수술을 해야 했을 때, 차라리 눈을 뜨지 않길 바랐습니다. 아무리 복수하고 사람을 죽여 봤자 여전히 형님이 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고, 제 사람이라고 여겼던 여자도 살해당했고, 윈 형님마저도 잃었습니다. 전 구룡성채에서도, 도쿄에서도, 홍콩에서도 단 한 번도 가족을 지키지 못한 병신이에요."
"아칭 ……."

섣불리 위로하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 홍위롄은 다만 꼭 쥔 손을 힘주어 다잡았다. 치유되지 못하고 묵어 곪기만 하는 침묵이 켜켜이 쌓이고 있을 때, 차창을 똑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팡룽이 조수석의 차 문을 열었다.

"내 앞마당에서 외간 사내와 밀회라니 대담한 짓을 하는군그래."
"밀회 중인 걸 봤으면 자리를 피해 주는 센스는 있어야죠. 눈치도 없는 작자 같으니."
"유감이지만 당신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 건 한 번으로 족하거든."
"그래서 스토킹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스토킹하고 싶은 마음이야 언제나 있지만 오늘은 아냐. 요 앞의 장 할머니 가게에 점심을 먹으러 왔다가 홍가의 차가 보이길래 들른 거야. 아무튼 당신을 기다리는 꼬마들이 꺅깍대고 있으니까 가서 모이라도 줘."

팡룽의 재촉에도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저우룬칭은 애써 미소했다.

"시간이 늦었네요. 전 괜찮으니까 가서 일 보십시오."

못내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수업 시간에 늦은 것도 사실이었다. 홍위롄은 눈치 없는 타이밍에 나타난 팡룽을 흘겨보고는 종종걸음으로 회관에 들어갔다.

"이거야, 원. 늦었다고 충고를 해 줘도 힐난이니."

짐짓 크게 한탄한 팡룽이 터벅터벅 걸어 벤치에 앉았다. 담배를 꺼내자 경호 중이던 부하가 허리 숙여 라이터 불을 붙여주었다. 일부러 홍위롄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는 건 사실인지, 늘 말쑥한 차려입던 정장이 아니라 레이온 셔츠에 면바지라는 편한 차림이었다. 머리칼도 깔끔하게 빗어 넘기지 않고 이마에 어중간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남자에게 관찰당하는 취미는 없네만."

벤치에 팔을 걸친 팡룽이 담배 연기를 잇새로 흘렸다.

"저우 선생, 할 말이 있으면 계집애처럼 쳐다보기만 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게. 아니면 돌아가든가."

무의식중에 팡룽을 주시하던 저우룬칭은 깜짝 놀라 시선을 거두었다. 묵혀두고만 있는 감정을 토로하느라 빗장이 풀려 많아 방심하고 있기는 하였나 보다.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팡 대인. 여쭤볼 게 있습니다만."

팡룽이 담배를 든 손만 까닥거렸다.

"이번 항쟁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습니까? 야이쑤코에서는 처음 겪는 일이라 저로서는 도통 감이 안 잡힙니다."
"흐음. 며칠 안으로는 해결되겠지."

큰 관심이 없다는 투로 팡룽이 대답했다. 러시아 마피아의 세력 변화에서 적련방이 자유로울 수는 없을 텐데도 시큰둥한 태도였고, 저우룬칭도 이어지는 부연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란뜨제프스카야와 멘쇼프스카야는 싸움이 안 돼. 멘쇼프스카야가 이탈리아 마피아와 연합한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막상 항쟁의 정황을 보아하니 이탈리아 놈들이 합세한 것 같지도 않더군. 며칠 안으로 해결이 날 걸세. ……음, 그러니까 저우 선생. 자네가 화공당을 칠 때 부하들이 스무 명이 안 되었지?"
"네. 비슷합니다."
"란뜨제프스카야가 독하게 마음먹고 그보다 약간 많은 인원을 결사대로 추리기만 해도 멘쇼프스카야를 이길 수 있이. 그만큼 차이가 난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시에 제 부하 중 거개가 사망했습니다."
"안 죽고 이기는 싸움이 있던가?"
"……."

정곡이 찔렸기에 저우룬칭은 침묵했다. 팡룽이 하품하며 말을 이었다.

"요는 란뜨제프스카야가 어느 정도의 피해만으로 이기는가, 하는 점이야. 이 기회에 멘쇼프스카야와 공멸하기라도 한다면 나야 좋겠지만 멘쇼프스카야 조직원들이 죄 자폭 테러라도 한다면 모를까, 공멸 가능성은 없고……. 아니지. 러시아 마피아가 쓸려 나가서 파울라 알레만 그 여자와 단둘이 붙게 되는 상황은 좀 사양하고 싶군."

팡룽의 추측대로 흘러간다면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옐리세이는 보스를 경호하는 위치에 있다고 하였으니 란뜨제프스카야가 궁지에 몰리거나 삼엄한 경호를 뚫고 보스를 직접 암살 대상으로 노리지 않는 이상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저우룬칭은 옐리세이의 뒷모습을 일별한 후부터 가슴에 드리우고 있던 불길한 예감이 어느 정도 옅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팡룽의 예측은 틀렸다.
옐리세이를 보낸 후 두 번째로 맞는 휴일이 돌아올 때까지 러시아 마피아의 항쟁은 종료되지 않았다. 그동안 저우룬칭은 그의 소식은커녕 전화 통화조차 하지 못하였다. 휴대폰은 언제 걸어도 항상 전원이 꺼져 있었으며 문자를 보내어도 답신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이같이 언제 총소리 한 번에 죽을지 모르는 항쟁 속에서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건 염려를 증폭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침착하게 절제하였기에 긴 시간을 보낸 홍위롄과 장쯔궈만 어렴풋이 저우룬칭이 심란하다는 걸 눈치챘을 뿐, 쌍둥이 형제는 낌새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사람은 눈치를 채긴 했으나 먼저 깊이 캐묻지는 않았고, 이것은 오롯한 자신 혼자만의 일이기에 저우룬칭도 두 사람에게 의논하지 않았다. 설사 머리를 맞대어 본들 뾰족한 수도 없었다.

대신 저우룬칭은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러시아 마피아 간에는 피로 피를 씻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다른 마피아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이나 다름없었고 홍가는 여전히 성황 중이었다. 그는 주방이 상대적으로 한가한 밤 시간에 평소처럼 주방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지 않고 홀의 테이블에 섞여 들었다. 옐리세이의 호들갑 탓에 저우룬칭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럭저럭 많았고, 술자리에서 억지로 내치는 무리는 없었다.

팡룽만이 아니라 야이쑤코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一 심지어 경찰서장까지도 一 란뜨제프스카야의 낙승을 예감하였다. 도박판이 벌어져도 멘쇼프스카야의 승리가 아닌, 란뜨제프스카야가 며칠 만에 승리할 것인지에 판돈이 걸렸을 정도다.

도박사들은 전부 패배하였다. 멘쇼프스카야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고, 심지어는 거의 비등한 세이기까지 하였다. 어디의 자금줄을 잡았는지 부족한 화력을 메우기 위하여 프리랜서 용병을 닥치는 대로 고용해 가며 싸우고 있었다.

이제 도박판의 흐름은 란뜨제프스카야가 어디까지 밀릴 것이냐, 를 주제로 삼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적련방과 모렐로스 카르텔의 이강 구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신중한 추측마저도 일각에서 있었다.

저우룬칭이 의외의 손님을 맞은 건, 이렇게 건너 건너 수집하는 피상적인 정보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무렵이었다. 홍가의 손님들이라고 해 봤자 마피아의 조직원이나 용병이고, 거물급은 특별한 용건이 없는 이상 걸음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짜 정보는 홍가에 걸음하지 않는 그 거물들의 사이에서 도는 법이다.

"오늘은 영업 안 합니다."

휴일이라는 팻말을 문에 걸어두었음에도 가끔 거나하게 취한 자들이 술을 내놓으라며 문을 두드릴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만취한 취객이 돌아다니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금만 더 거침없고 난폭하였다면, 옐리세이가 밖에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스터 저우를 뵈러 왔는데요."

문밖에 선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완전히 낯선 목소리는 아니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텅 빈 홀에 혼자 앉아 있던 저우룬칭은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한 쌍의 남녀가 문밖에서 그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접때 인사드렸던 스키예르벡입니다."

홍가를 전세 내어 란뜨제프스카야와 계약하기도 하였던 SPG사의 무기상이었다.

"절 만나러 오셨다고요? 또 계약하실 게 있습니까?"
"아니요. 계약 문제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니고요 실례합니다만, 들어가서 얘기를 해도 뭘까요?"

페카가 붙임성 있게 웃으며 안쪽을 가리켰다. 미심쩍기는 했지만 찾아온 손님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어 일단 안으로 들였다. 페카의 한 발자국 뒤로 경호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따라 들어오며 그에게 싱긋 눈웃음 했다. 그날 계약을 할 때에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저우룬칭의 눈길을 잡았던 건 이 여자였다. 강한 사람이다. 저우룬칭은 본능적으로 직감하였다. 그녀는 느슨하게 어슬렁거리고 있는 맹수였다. 그리고 일개 경호원으로 고용하고 있는 페카도 범상한 사람은 아닐 터였다.       

"앉으십시오. 차라도 가져올까요?"

문을 닫고 우선 자리에 안내했으나 페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길게 이야기할 것은 없고……."

명료한 태도로 들어왔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정작 용건을 바로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태도였다. 다소 주저하며 입안에서 말을 굴려보는 듯하던 페카는 오래지 않아 입술을 뗐다.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니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러시아 마피아 간의 항쟁은 알고 계시죠?"
"……그렇습니다만."
"으음, 고백하자면 전 여기에 와서는 절대 안 되는 거였어요. 저희 회사는 정치이든 군벌이든 마피아이든 철저한 중립을 유일한 원칙으로 갖고 있습니다. 설령 회사에 이득이 되는 방향이라도 중립을 깨트리고 개입하게 되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있어요. 하하. 오늘 일이 발각되면 회사에서 잘리고 백수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자조적인 웃음은 반향 없이 떨구어졌다. 페카가 손바닥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그렇지만 옐리세이는 소중한…… 친구예요. 그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느닷없는 방문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겨 약간 긴장하고 있던 저우룬칭의 등이 퍼뜩 굳었다.

"……항쟁에 대하여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란뜨제프스카야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하지 않았던 확언을 페카가 낮게 읊조렸다. 저우룬칭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거든요. 그리고 옐리세이는 현재 최전선에 있죠."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사사로이 시작되었던 그 의심은 차츰 암귀가 되어 일행의 뇌리에 번졌다. 배신자가 있지 않고서야 백전필패가 설명되지 않는다.

체자르가 이끄는 별동대는 멘쇼프스카이와의 싸움에서 한 번도 우세를 취하지 못하였다. 멘쇼프스카야의 조직원을 고문하여 알아낸 안가를 습격하였다가 외려 역기습당하였을 때는 놈들이 고의로 흘린 정보라고 여겼다. 하지만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이제 체자르 일행이 은신한 안가가 기습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모두의 가슴에는 의심이 차츰 뚜렷한 형상을 이루게 되었다.

블라질롄이 주축이 된 본부의 조직이 단기간에 쏟아붓는 멘쇼프스카야의 물량 공세를 버텨내고 있지 않았다면 항쟁의 승패는 일찌감치 결정되었을 것이다.

"아고고."

옐리세이는 죽는소리를 내며 허리를 주물렀다.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니지만 내도록 바짝 긴장한 채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더니 온몸이 쑤셨다. 이 통증은 분명히 예전에 메이탈에게 꺾였던 후유증임이 분명했다. 남자에게 허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빌어먹을 여편네 같으니.

……상당히 팔자 좋은 엄살이기는 하였다. 비스듬히 세워 기댄 M16을 고쳐 안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항쟁이 시작되었을 무렵의 면면과는 많이 다르다. 죽은 사람도 있고 다친 사람도 있어 본부에서 인원을 거듭 보충하여야 했다. 오늘 낮에 시내의 은신처 한 곳이 발각되어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쫓겨 온 팀은 아직도 피가 배어나는 붕대를 감은 채 보드카로 통증을 달래고 있었다.

‘여기는 안전할 것 같지만.’

현재 그들이 은신한 곳은 시외에 있는 건설 회사의 사무실로, 현지인을 대리 사장으로 내세워 계약하고 운영 중인 곳이라 란뜨제프스카야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옐리세이도 도착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그들의 움직임을 은밀히 멘쇼프스카야에 흘리는 내통자가 이 사무실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니미씨발."

자신이 생각하고도 소극적이고 무력하기까지 한 바람에 옐리세이는 낮은 욕설을 씹었다.

"체자르 끼릴로비치. 배신자가 있는 게 아닙니까?"

귓속말에 가까울 만큼 속닥이거나 신음하는 것 외에는 지칠 대로 지친 패배감과 무력감이 짓누르고 있던 사무실 내의 정적이 거칠게 찢어발겨졌다. 누구나 다 생각은 하고 있지만 차마 말로 만들어 내놓지를 못하던 발언을 한 용자가 누구인가 싶어 돌아본 옐리세이는 발언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필리몬이었다.

항쟁의 시작, 정확히는 까지미르의 죽음 이후 말수가 확 줄어 있는 체자르가 기대고 있던 소파 등받이에서 얼굴을 올렸다.

괄괄한 성격의 필리몬은 술렁이는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처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도 동료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저희 작전이나 은신처가 발각되니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 같은 생각일 겁니다. 안 그러냐?"

필리몬이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동조하는 기색이었다. 못마땅한 놈이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기에 옐리세이는 비뚜름히 턱을 괴었다.

"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망설이는 기색으로 빠벨이 눈치를 살폈다. 좌중의 시선이 쏠리자 그는 헛기침하기는 했지만 의도한 이야기는 또렷이 이었다.

"예전부터 의심쩍긴 했는데요…… 저희가 은신처나 안가를 옮겨 다니고 있는 건 본부에서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통자의 정보를 받은 멘쇼프스카야가 옮길 예정의 은신처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미리 기습을 대기한다면 저희는 영락없이 말려들 게 될 텐데, 그렇게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뭐야, 그럼. 내통자가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책상 뒤의 구석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빠벨은 겸연쩍은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기가 막힌 우연, 아니면 내통자가 있더라도 저희 행적을 바로바로 파악할 수 있을 자리는 아닌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혹은 우리에게 꼬리가 붙어 있을 수도 있겠지. 위치추적기 따위라든가."

빠벨의 조심스러운 추측을 받은 사람은 체자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모두에게 외쳤다.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 소지품을 철저히 확인해라."

혹시나 하는 부산한 기색이 좌중을 쓸었다. 얼마간 분주하게 각자 주머니 속까지 소지품을 살살이 뒤져 보았지만 위치추적기로 추정되는 물건은 발견하지 못했다. 옐리세이도 주머니를 탈탈 털어 보았지만 매한가지였다. 영화처럼 ‘여기 수상한 게 있습니다!’ 라는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밖에서 경비 서고 있는 애들도 찾아보라고 할까요?"

필리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지만 체자르는 무언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하는 눈치이다가, 불현듯 시선을 고정했다.

"레샤."
"예, 예?!"

속옷에 발신기가 붙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까지 하고 있던 옐리세이는 갑자기 호명되자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체자르의 가라앉은 시선이 그의 팔목 언저리에 닿았다.

"……네가 원래 쵸트키를 소지하고 다녔던가? 아니질 않나?"

그도 엄연히 세례까지 받은 러시아 정교의 신자이기는 하였으나 부활절 예배, 성탄절 예배, 사순절 기간의 성찬예배 같은 때가 아니라면 거의 성당에 걸음하지 않았다. 쵸트키도 성당에 갈 때나 가끔 혼자 기도할 때 패용하였다. 이 쵸트키도, 까지미르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이자 그의 유품이 아니었다면 적당한 곳에 보관하였을 것이다. 옐리세이는 무심코 쵸트키를 만지작거렸다.

"선물 받은 것이라서 갖고 있습니다만……."
"줘 봐라."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가슴 안쪽에서 불온한 의심이 들끓었지만 순순히 쵸트키를 손목에서 끌러 체자르에게 건넸다. 쵸트키를 책상에 올린 체자르는 권총을 거꾸로 쥐고는 매듭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꿴 나무 구슬을 손잡이로 내리쳤다. 퍽, 하고 나무 구슬이 쪼개지며 파편이 잘게 튀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체자르는 다음의 나무 구슬을 내리쳤다. 나무가 쪼개지는 파열음이 단조롭게 이어졌다. 좌중의 시선이 침묵 속에 응집되었다.

체자르가 손톱만 한 사이즈의 위치추적기를 발견 한 건 최후의 나무 구슬을 쪼갰을 때였다. 옐리세이의 안색이 하얗게 되었다가, 이어 파랗게 질리며 부들부들 경련했다. 빠벨이 더듬거리며 손가락을 올렸다.

"저, 저 쵸트키는 까지미르 까지미로비치께 받은,"
"입 닥쳐!!"
"……."

체자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노여워하지도 놀라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으며 손바닥 위의 위치추적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까지미르 까지미로비치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지요."

다리의 상처를 스테이플러로 임시 봉합하고 통증을 잊기 위한 보드카를 들이붓던 스또얀 토쉐초친이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시발이라도 된 것처럼 꽉 막힌 경악이 짓누르던 사무실 내에 술렁거림이 번져갔다. 해상의 사고이기도 하고 직후 발발한 탓에 여유가 없어 그들이 인양할 수 있었던 주검은 배의 파편에 걸려 있던 베레조프스끼와 그의 측근 두엇뿐이었다.

"위치추적기로 발각되었다면 여기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불현듯 필리몬이 외쳤다. 체자르가 그제야 고개를 올렸다.

"블라질롄에게 당장 연락하고 철수한,"

탕탕탕! 야음을 쩌렁쩌렁하게 찢는 총소리가 체자르의 말끝을 먹어치웠다. 건물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멘쇼프스카야의 습격이었다.

퍼들퍼들 경련하는 턱을 앙다물고 있던 옐리세이는 통기듯이 몸을 일으키고는 M16을 쥔 채 사무실 밖으로 내달렸다. 필리몬이 다급히 소리쳤다.

"무식한 새끼야! 돌아와! 넌 보스를 지켜야지!!"
"나 때문에 발각된 거잖아! 저 씨발놈들 전부 죽이고야 말겠어!!"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 복도를 달렸고, 눈치를 보던 빠벨도 따라 나왔다.
계단을 타다당 뛰어 내려갈 때에도 총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밖에서 경비를 서던 조직원들은 전부 사망한 듯하였으나 아직 1층은 돌파되지 않았다. 옐리세이는 허리를 숙이고 정문 근처의 엄폐물로 달음박질했다. 빠벨도 미끄러지듯이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총구를 앞으로 겨누었다. 정신없이 응사하던 유리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보스는요?"
"멘쇼프스카야 새끼들을 한 놈이라도 더 내 손으로 죽여야지!!"

사생결단이라도 낼 듯한 살벌한 기세로 이를 뿌득뿌득 갈며 총을 갈기는 모습에 유리는 더 의문인 것 같았지만 한가하게 다른 고민을 할 여유는 없었으므로 방어에 집중 했다.

이 자리에서 승부를 보려는지 프리랜서 용병이 포함된 멘쇼프스카야의 조직원은 여느 때보다 많은 숫자였다. 체자르도 위층에서 블라질텐에게 연락하고 방어 사격을 하고 있을 테니 관건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였다. 그리고 눈이 뒤집힌 옐리세이의 관건은 멘쇼프스카야를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었다. 보스까지 신뢰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가 있지만, 이가 옐리세이 자신의 변명은 되지 못하였다. 내가 멍청하게 속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핀치에 몰리고, 동지들이 죽거나 부상당하지 않았겠지. 죄책감을 양분으로 한 분노가 행동을 이끌었다.

머리 위로 총탄이 쉴 새 없이 오가고 건물 내의 집물이 산산조각 나며 비명과 어우러져 실내에 사납게 요동치고 있을 때, 비스듬히 사선 위치에 있는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주먹만 한 단단한 물체가 달그락거리며 엄폐물 뒤로 떨어졌다. 빠벨이 비명을 질렀다.

"피하세요!!"

옐리세이는 떨어진 수류탄을 반사적으로 즉각 집어 들고는 내던졌다. 정면으로 날아 가던 수류탄이 허공에서 콰앙 폭발했다. 벽면에서 돌출된 기둥이 폭발의 여파에 휩쓸렸다. 분진이 하얗게 일어나며 사방에서 난무하던 총성이 아주 잠시 멎었다.

"이, 씹……!!"

수류탄을 던지기 위해 일어서느라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옐리세이는 허리를 꺾으며 옥설을 씹었다. 슈트가 금세 벌겋게 젖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빠벨이 당황하여 허둥지둥 부축하려다 하마터면 총에 맞을 뻔하고는 그를 쓰러트리다시피 엄폐물 안쪽으로 피했다. 그 서슬에 옆구리에 박힌 파편이 상처를 더 크게 찢어 옐리세이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부하들의 앞만 아니었다면 울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기둥이 허물어지는 북새통 속에 전열의 한쪽이 뚫렸다. 멘쇼프스카야는 이제 언성을 높이면 대화 소리도 들릴 만큼 접근했다.

"헤이, 슈이스끼! 벌써 뒈진 건 아니겠지?"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이죽거림이 들렸다. 진땀을 뻘뻘 흘리던 옐리세이는 놈을 알아보았다. 가라앉은 코뼈가 원 상태로 돌아오지 않은 시초프가 벽 뒤에 있었다.

"제발 죽지 말라고. 널 붙잡아서 코부터 뭉개 놓고 난 뒤에 구멍이란 구멍은 다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강간하고, 스너프 필름까지 알뜰하게 찍어줄 테니까."
"좆도 새끼손가락만 한 새끼가 강간 같은 소리하고 있네 ! 내가 그리워서 이 촌 동네까지 쫓아올 정도였다는 게 불쌍해서 벌려 줄 테니까 어디 한 번 박아봐. 내 앞에서 울면서 딸치던 꼬라지 보니까 박혀 봤자 별 느낌도 안 오게 생겼드만. 좆같지도 않은 걸 휘두르면서 강간을 하겠다니 용기가 가상하네. 날 강간하려면 딜도를 갖고 와. 쌍년아."

없는 소리를 지어내며 옐리세이는 더 큰소리로 되받아쳤고, 남자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깔아뭉개는 그 발언은 란뜨제프스카야의 조직원뿐만이 아니라 멘쇼프스카야의 조직원과 그들에게 고용된 용병들까지 실소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어이! 레샤! 내가 이 자식보다 다섯 배는 더 클 텐데 그럼 너랑 씹할 수 있냐?"
"새끼손가락X5 해 봐야 손가락이지! 너도 안 돼!"

졸지에 한편으로부터도 비웃음을 당한 시초프가 붉으락푸르락하며 위험하리만큼 몸을 내밀어 옐리세이가 있는 방향으로 자동소총을 타다당 연사했다.

그때였다.

건물 내가 아닌, 외부로부터 굉음이 격발하였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굉음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격중하였다. 후각을 찌르는 매캐한 포연에 당혹한 비명성이 혼탁하게 섞이었다. 순간 블라질롄이 본부의 인원을 이끌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이내 부정하였다. 블라질롄의 지원이 도착했다고 여기기에는 너무 빠르다.

배후의 기습으로 우왕좌왕하는 멘쇼프스카야에게 총탄이 쏟아졌다. 옐리세이는 어안이 벙벙하여 앞을 살폈다. 기습한 자들이라고 여겨지는 외침이 들렸다. 중국어였다.

옐리세이는 시초프와 대거리하느라 더 아파 오는 상처의 고통에 끙끙거리며 빠벨을 툭툭 건드렸다.

"야. 우리 보스가 언제 적련방이랑 협의를 하셨냐?"
"저도 금시초문인데요……."

빠벨 역시 혼란스러운 눈초리이긴 했으나 곧 정면으로 총을 쏘았다. 어쨌거나, 살아 남은 것 같기는 하다. 옐리세이는 탄창이 거의 빈 M16을 내려놓고 대신 애용하는 권총인 S&W M29을 쥐었다. 시초프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죽일 것이다.

복부의 고통으로 인해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선수를 채기 전에 이를 악물고 전진하려던 옐리세이는 멈칫 몸을 굳혔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중국어 사이에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익숙하지만, 여기에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였다.

‘요즘 그 자식 엉덩이를 굶었더니 환청이 들리나 보다.’

얼른 싸움 끝내고 놈의 엉덩이를 주물러야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다지는데, 또 들렸다. 이번엔 환청뿐만이 아니었다. 환각마저 보였다.

환각을 본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 저 남자, 루이 아닙니까?"
"……너도 루이가 보이냐?"

옐리세이는 시초프를 족쳐야겠다는 짜증마저 잊고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봐도 저우룬칭이 맞았다. 용케도 깨지지 않고 있는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얼굴은 분명히 저우룬칭이었다. 엉덩이도 저우룬칭이었다.

저우룬칭이, 싸움의 한중간에서 총을 들고 종횡무진으로 날뛰고 있었다. 단말마의 비명성이 여기저기에서 솟구치는 혼란의 와중에 그의 총은 착실히 목표를 한 명씩 제거하고 있었다. 옐리세이는 입마저 쩍 벌렸다. 싸움에 굉장히 능숙한 모습이었다. 하루 이틀의 경험으로 숙달되는 솜씨가 아니다.

시체를 방패삼아 몸을 숨기고 총을 쏘던 저우룬칭은 자동소총의 탄창이 다 비었는지 시체를 내던지며 개머리판을 둔기처럼 휘둘러 가까이 접근한 용병의 다리를 후려쳤다. 그리고 바닥에 미리 꽂아둔 것처럼 보이는 청룡도를 쥐고 난자했다. 그가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비명이 피비린내를 찢고 육편이 튀었다. 피에 젖은 칼날이 선연하게 번들거렸다. 옐리세이의 동공이 떨렸다. 저 칼, 저거, 홍가 벽에 걸려 있던 장식품이 아니었나        ……?

총까지 내리고 본격적인 구경꾼의 모습을 하고 있던 유리가 주절거렸다.

"저게 뭔지 압니다. 홍콩 영화에서 봤어요."
"뭔, 뭔데?"
"무림의 고수요."

맞아. 무협 영화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멍한 얼굴로 저우룬칭의 모습을 좆았다. 시초프는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淸哥! 香招 !!"

무림의 고수는 칼이 아니라 총을 들어도 고수였다. 저우룬칭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자동소총을 가뿐히 받아 쥐며 겨냥하였다. 단숨에 탄창을 다 비우고 청룡도를 쥔 채 다시금 정면으로 뛰어든다. 피를 머금어 더욱 스산하게 빛을 반사하는 칼날이 현란하게 사방을 휘저었다.

"야, 야."

옐리세이는 어느새 갤러리가 된 주변을 채근하며 열심히 저우룬칭을 가리켰다. 그 와중에도 눈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봐. 저 자식이 내 애인이야. 굉장하지?"

동조의 소리가 실내 이곳저곳에서 끄덕끄덕 들려왔다. 블라질롄의 지원이 들이닥쳤는지 건물 밖의 소요가 가일층 커졌지만 거기까지 헤아려 짚을 정신이 없었다. 신경은 온통 한곳으로 쏠려 저우룬칭의 일거수일투족만 눈에 담았다. 심장이 늑골을 빠개고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피가 쭉 쏠렸다. 파편이 박힌 복부의 출혈까지 심해지는 것 같다.

어떡하지, 씨발. 옐리세이는 격하게 헐떡거렸다.

너무 멋있어서 설 것 같아.





「이상하더라고요. 멘쇼프스카야가 저를 통해서 무기를 구입하기는 했지만 란뜨제프스카야와 이렇게 오래 맞설 저력은 안 되거든요. 그래서 경로를 역추적했습니다」

마음을 굳힌 페카는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었다.

「그 결과, 까지미르 돌고프루데니라는 남자에게까지 닿았습니다, 란뜨제프스카야 본부의 간부 중 한 명으로 이곳의 보스인 체자르 주린과 같은 파벌이며 또한 오랜 친구이기도 합니다. 왜 돌고프루데니가 사적으로는 친구이기도 한 주린을 배신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란뜨제프스카야의 대두목이 주린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고요. 멘쇼프스카야의 자금원이 오롯이 돌고프루데니로부터 비롯된 거라면 일개 개인이 융통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거든요」

란뜨제프스카야 내부의 알력이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저우룬칭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단숨에 긴 말을 하느라 페카는 목이 조금 따가운 듯하였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대치가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양측 모두 자금이며 인력을 소모할 만큼 소모하였으니 며칠 안에 결착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용병 시장 쪽을 둘러보니 멘쇼프스카야가 어제오늘 쓸 만한 용병을 깡그리 긁어모았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아마…… 오늘 밤이 분수령이 되지 않을까 해요」

페카의 정보야말로 저우룬칭이 원하던 ‘진짜’ 정보였다. 가볍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가 이 정보를 모으기 위하여 투자한 자금과 노력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그에게 전부 전한 페카는 결정적인 정보를 마지막에 덧붙였다.

멘쇼프스카야의 간부 중 한 명의 행적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여기까지입니다」

무언가 첨언할 것 같아 보였던 페카는 말을 되삼키고는 살짝 묵례했다.

그가 방문하였을 때처럼 조용히 돌아가고 난 후에도 저우룬칭은 자신이 취해야하는 행동의 향방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항쟁의 한가운데에 있을 옐리세이가 걱정되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여 자신의 혼자 힘으로 가능한 정보를 취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는?

정보를 확인한 후에는 무얼 어떻게 하고자 싶었던 것일까. 단지 뜬소문이나마 옐리세이의 무사를 확인하고 안도하면 만족하였을까. 허면, 그가 무사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게 된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저우룬칭은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작해야 일개 중화식당의 요리사라는 개인에 불과하였다. 야이쑤코라는 거대한 힘의 흐름 앞에서 개인인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그 자신이 무엇을 바라든, 결국 그 힘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 것이다.

스키예르벡은 무엇을 바라고 자신에게 모든 정보를 넘겼을까. 혼자 무모하게 옐리세이를 구하러 총 한 정을 쥐고 뛰어가기라도 바란 걸까.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허황된 만용이며 자살의 또 다른 이름이다. 두 마피아의 치열한 항쟁을 일개 개인의 무력 따위가 종결지을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각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 명확한 사실 하나만이 되씹혔다.
하지만 이대로 두 손 놓고 란뜨제프스카야가 패하기를, 옐리세이의 신변에 위험이 닥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머릿속은 지지 부진하게 같은 말만을 반복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칭 형님."

속절없는 시간만 무의하게 흘려보내고 있을 때에 그를 부르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있었다. 저우룬칭은 퍼뜩 시선을 돌렸다. 층계참에 리뎬신이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거실에 있다가 홀의 목소리가 울려서 본의 아니게 대화를 나누시던 걸 엿듣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사과할 것 없으니 신경 쓰지 마."
"슈이스끼를 구하러 가실 때는 저와 형도 돕게 해 주십시오."

지극히 당연하다는 투로 나온 리뎬신의 말에 저우룬칭은 눈을 홉떴다. 그는 무심코 말을 받아 되뇌었다.

"구하러, 간다고?"
"네? 안 가시는 겁니까?"

리뎬신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거기에 무어라 대답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다 말문을 슬쩍 돌렸다.

"가게 된다 하더라도 이건 내 개인 일이야. 위험한 일에 슈이스끼와 친분도 없는 너희 형제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어."

쌍둥이 형제와 두터운 친분을 쌓지 않은 저우룬칭으로서는 타당한 대답이었으나, 리뎬신에게는 아니었다.

"빈말로도 슈이스끼와 친하다고는 할 수 없고 제대로 말도 섞어보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형님께는 조력이 되고 싶습니다. 형님이 저희 형제를 대동하지 않으려 하신다는 건 짐작했지만, 궈 형님은 당연히 칭 형님의 뒤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저희 형제만 멀뚱멀뚱 뒤에 남아 있게 되고 맙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저희도 형님이 아직 조금 어렵고, 형님이 저희에게 선을 긋고 있는 건 알고 있어요."

저우룬칭의 눈치를 살피기는 하였지만 리뎬신은 주저하면서도 말을 끊지않았다.

"저희 형제뿐만이 아니라 롄 누님도 궈 형님도 모두 혈혈단신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와 형은 홍가를 새로운 집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롄 누님과 궈 형님을 가족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오신 칭 형님도요. 네에, 저, 그렇습니다."

서투르게나마 자신의 뜻을 밝힌 리뎬신이 계면쩍은 기색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의 말 한마디가 무형의 둔기가 되어 뒤통수를 후려친 느낌이었다.

차오쑹윈이 암살당하고, 악귀처럼 복수를 끝마친 그는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차오쑹윈과 함께 죽지 못하였다는 죄로 시체처럼 조직 내를 배회하다, 차오쑹젠이 용인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차오원웨이의 유혹에 응하고, 홍콩에서 추방되어 차오쑹윈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자 그의 남은 유일한 가족인 홍위롄이 있는 곳으로 왔다.

야이쑤코에서 이전보다 훨씬 가깝게 지인들과 부대끼면서도 리뎬신처럼 이곳이 자신의 집이라든가 터전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새로이 인연을 갖게 된 쌍둥이 형제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도 그 탓이다.

타성처럼 내쫓겨와 과거의 기억이 남긴 유물을 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장소만이 바뀌었을 뿐, 그는 여전히 배회하는 시체였다.

옐리세이는, 거침없이 시체가 친 방벽을 무너트리며 들어와 자신의 존재를 그의 안에 확립하였다. 무력하고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죽이고 있던 그의 시선을 붙잡아 보게 하였다. 본의로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으나 차오쑹윈의 사후 최초로 그가 현재를 걸을 수 있게 한 사람이었다.

옐리세이를 구하기 위한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뎬신."
"아, 네!"
"슈이스기가 위험해. 날 도와다오."
"그럼요."

리뎬신이 얼굴마저 희미하게 붉히며 대답했다.

늦은 시각까지 낮잠을 자고 있던 장쯔궈를 깨우고, 저녁 약속이 있어 외출 중이던 리뎬차이까지 불러들여 페카가 말해 준 장소로 향했다. 단잠을 자다가 깬 장쯔궈는 하필이면 옐리세이를 구하러 가야한다는 말에 표정을 구기긴 했으나 순순히 따라 왔고, 리뎬차이도 동생과 같은 흥분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페카가 넘긴 멘쇼프스카야 간부의 이름은 갈락찌온 오레홀프였다. 하루하루 급박하게 흘러가는 항쟁의 와중에도 정부의 집을 들락거리는 걸 잊지 않는 사내다. 오레홀프의 정부가 사는 아파트 아래에는 그의 경호원으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들이 BMW 옆에서 잡담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번호판을 확인하였다. 오레홀프의 차량이었다. 항쟁의 와중에 있음에도 이젠 거의 이긴 싸움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지 여유로운 태도였다. 저우룬칭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장쯔궈를 제외한 세 사람은 잡담을 하는 척하며 골목을 걸어갔다. 경호원들도 세 사람을 보았지만 특별히 경계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들이 홍가의 종업원이라는 건 비밀도 아니었거니와, 설사 얼굴을 미처 알지 못하고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삼합회가 아닌가 의심하였던들 현재 멘쇼프스카야가 척을 지고 있는 삼합회는 없었다. 한 번 힐긋 시선을 던지고는 다시금 떠들썩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 간 경호원들을 습격했다. 리뎬신이 실수하여 한 명을 놓칠 뻔하였으나 자신이 맡은 사내의 목을 이미 칼로 그었던 저우룬칭이 옆구리에 칼날을 박았다. 폐를 찢긴 사내는 연이은 참격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사망하였다. 죽은 남자들의 시체를 주차된 차와 벽 사이의 그늘에 던지고 몸을 숨겼다. 행인이 혹 주검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신고는 날이 밝은 뒤에나 할 것이라고 장쯔궈가 설명했다.

"경찰이 신고를 받더라도 먼저 근처의 조직에 연락을 해서, 만약 조직과 연관이 있는 사건이라면 해당 조직이 수습한 뒤에 출동합니다. 그런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두어 블록 건너편에서 총소리가 나든 말든 태연히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을 보거나, 폭파된 건물의 잔해를 보는 것만큼이나 야이쑤코가 어떠한 곳인지 실감이 나는 설명이었다.

기다린 지 30분가량 지났을 때, 장년의 사내가 나오는 기척이 있었다. 사내는 BMW만 덩그러니 있을 뿐 경호원이 사라진 걸 보고는 대번에 위험을 직감하고 총을 꺼내려 하였으나 저우룬칭이 더 빨랐다.

"멘쇼프스카야의 갈락찌온 오레홀프가 맞나?"

경동맥이 압박당한 사내는 호흡곤란으로 끅끅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우룬칭은 오레홀프의 뒷목을 수도로 후려쳐 기절시키고는 BMW에 실었다. BMW는 동쪽 항구로 향했다. 장쯔궈가 지인에게 빌린 컨테이너의 바닥에 오레홀프를 고정시킨 후 뺨을 후려쳐서 깨웠다.

"으, 읍!!"

오레홀프는 발버둥을 치려 했지만 온몸에 칭칭 감긴 공업용 테이프가 움직임을 봉쇄하였다. 입이 막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그의 눈앞에 나이프를 들이대며 조용히 물었다.

"영어는 할 줄 알겠지? 많은 건 바라지 않는다. 묻는 말에 얌전히 대답만 해 준다면 서로 편할 거야."

충분히 알아듣도록 설명한 후에 입을 막은 테이프를 좌악 뜯어냈다. 오레홀프가 헉헉거리며 정신없이 외쳤다.

"중, 중국인?! 란뜨제프스카야에서 고용한 용병이냐?! 무조건 그 새끼들이 지불한 금액의 두 배, 아니 다섯 배를 줄 테니,"
"말했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라고."

컨테이너 내부를 침침하게 밝히는 램프 빛 사이로 저우룬칭의 칼날이 번뜩였다. 오레홀프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저우룬칭은 잘라낸 왼쪽 귀를 그의 얼굴에 툭 던지며 부러 심드렁한 투로 물었다.

"멘쇼프스카야가 총력으로 란뜨제프스카야를 친다는 날이 오늘, 맞나?"
"어, 어떻게 그걸……!"
"네, 또는 아니오 라고만 대답해."

칼날이 오른쪽 귀로 내려오자 오레홀프가 비명처럼 다급히 수긍했다.

"맞아! 맞아. 오늘 밤이야!"
"위치가 어디지?"

그 질문에는 오레홀프도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칼날이 오른쪽 뺨을 건드리며 귓가를 할퀴어도 눈만 질끈 감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저우룬칭은 쪼그리고 있던 허리를 폈다. 명색이 산전수전 다 겪었을 조직의 간부인데 겨우 이 정도의 고문으로 실토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뎬차이. 뎬신."

미리 얘기해 두었던 대로 손짓하자 쌍둥이 형제가 다가왔다. 뎬차이의 손에는 전기톱이, 뎬신의 손에는 공업용 토치가 들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의도를 직감한 오레홀프의 안색이 새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되어 경련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고문을 시행 중인 사람답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오른손잡이인가? 뭐, 이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오른손잡이의 비율이 더 많으니 너도 오른손잡이라고 생각하지. 왼손잡이라면 미안하고. 아무튼 전기톱으로 네 왼쪽 다리의 발목, 무릎, 허벅지, 그다음에는 오른쪽 다리, 그 다음에는 왼쪽 팔의 손목, 팔꿈치, 어깨, 그다음에는 오른쪽 팔. 이렇게 순서대로 자르면서 한 번씩 물을 거야. 너에게는 총 12번의 기회가 있는 셈이지. 고분고분히 묻는 말에 대답한다면 단번에 죽여주고 오른쪽 어깨를 절단할 때까지 버틴다면 살려주마. 아, 그전에 과다출혈로 실혈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토치로 자른 부위를 지져서 출혈까지 막아줄 테니까. 친절하지? 감사 인사는 사양하마."

행여나 공포에 질린 오레홀프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라도 할까 싶어 저우룬칭은 또박또박 느린 목소리로 설명하고는 그의 입을 다시 테이프로 봉하였다.

"시작해라."

한 발자국 물러나서 윈스턴에 불을 붙였다. 시동이 걸린 전기톱이 윙윙거리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공기를 진동하였다. 이윽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썰 때나 들을 법한 절단음이 전기톱의 진동에 어우러졌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갈리며 살점이 튀었다. 테이프로 틀어막힌 오레홀프의 입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전기톱이 발목을 완전히 절단하였을 무렵에는 이미 눈이 허옇게 까뒤집힌 채 기절했다.

리뎬신이 개조된 공업용 토치의 불길을 절단 부위에 가져갔다. 치이익 하고 생살이 타는 소리와 더불어 피비린내가 떠돌던 허공에 텁텁하고 역겨운 노린내가 섞였다. 산 채로 신체가 전기톱에 썰리는 고통으로 기절하였던 오레홀프는 생살을 지지는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자마자 처참한 비명성을 내질렀다.

천천히 세 개비째의 담배를 태우고 있던 저우룬칭은 피가 멎자 오레홀프의 입을 막았던 테이프를 뜯었다. 목이 갈라진 채 씩씩거리는 거친 호흡에 핏물이 맺힌 것만 같았다.

"위치는 어디지?"

똑같이 반복되는 물음에 오레홀프는 입술을 달싹거리는 듯했지만 꽉 다물렸다. 저우룬칭은 두 번 묻지 않고 테이프를 붙였다.

"좋아. 벌써 실토하면 나도 재미없지. 조금 더 견뎌 봐라."

다음은 무릎이었다. 피가 흠씬 배고 살점이 덕지덕지 톱날 사이에 낀 전기톱이 기동했다. 몇 분 전의 광경이 반복되었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갈리며 살점이 튀었다. 피 비린내가 한층 짙어졌다.

톱날이 무릎의 절반가량 절단했을 때 몸부림치며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던 오레홀프가 갑자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우룬칭은 리뎬차이에게 중지하라는 손짓을 하고는 테이프를 뜯었다. 그가 묻기도 전에 오레홀프가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내뱉었다.

"날랏 스트리트 177 버, 번지 ! 웡싸멧 건설 회사 사무, 사무실! 나, 남쪽 간선도로를 타고 교외로 나, 나가는 길목에 있는 거기!"
"아는 곳이냐?"

장쯔궈가 수긍했다. 위치가 확인되자 저우룬칭은 초점이 거의 잡히지도 않는 오레홀프의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하던 건 마저 끝내야지."

전기톱이 남은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번에는 최후까지 기절하지도 못하고 분비물로 엉망이 된 낯을 부들부들 경련하는 오레홀프의 머리에 헤이싱의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더 쏘아 머리를 완전히 곤죽으로 만들어 신원 확인을 어렵게끔 만들까 싶었지만, 옐리세이에게 들은 바론 어차피 러시아 마피아는 문신으로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할 것 같아 총을 거두었다.

리뎬차이와 리뎬신이 시체를 바다에 던지고 뒷정리를 하는 동안 장쯔궈가 다가왔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저우룬칭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장쯔궈를 응시하였다.

"고문하는 것 정도야 발각만 안 되면 개인 대 개인으로 끝낼 수 있지만, 이 앞은 진짜 조직 간의 항쟁에 뛰어드는 거야. 위험하다."

장쯔궈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위험하다고 몸을 사렸다면 전 지금쯤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영국계 기업에 취직한 화이트칼라가 되었을 걸요?"

저우룬칭도 피식 웃고는 꽁초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야이쑤코에서 저우룬칭이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조직은 하나뿐이었다.





취천원은 팡룽이 소유하고 있는 차이나타운 으뜸의 중화요리 가게이다. 최상층의 특실에서 홍위롄과 저녁 식사를 하던 팡룽은 약속도 없이 대면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고, 그 사람이 저우룬칭이라는 것에 맛있게 잘 먹던 식사가 얹힌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응? 룬칭이 왜 여기까지 당신을 찾아온 걸까요?"
"당신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생선볶음을 옮기던 젓가락을 입술에 댄 채 갸웃하는 그녀의 모습에, ‘어째서 위롄은 저렇게 나이와 안 맞는 행동을 해도 귀엽지.’라며 퍽이나 팔불출 같은 감상을 한 팡룽은 약간 마음이 풀려서 저우룬칭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부하의 안내를 받아 특실로 들어온 저우룬칭을 본 팡룽은 무심코 "허어."하는 감탄사를 흘릴 뻔하였다. 눈빛이 변하였다. 의욕 없이 수동적이던 근래의 눈빛도 아니고, 시체처럼 공허하고 스산하던 지난 3년간의 눈빛도 아닌, 차오쑹윈이 살아있을 때만큼이나 생기가 감도는 눈빛이었다.

"어머, 아칭. 무슨 일 있었니?"

홍위롄도 변화가 있음을 눈치챘는지 반가운 기색으로 그를 맞았다. 물론, 그녀는 저우룬칭의 주변에 은은히 감돌고 있는 피비린내는 미처 감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식사까지 방해하는 용건이 뭔가?

저우룬칭이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팡 대인과 독대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롄 누님도 없는 곳에서요."

홍위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얘. 내가 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 생겼어? 위험하니?"

그녀는 이십 여년을 훅사회 남자들과 부대끼며 보내었다. 오랜 세월의 경험에서 비롯된 직감이 예리하게 이상을 경고하여 걱정스럽게 저우룬칭을 올려다보았다.

홍위롄의 말이라면 하지 못할 것이 없는 저우룬칭이다. 그런 그가 그녀마저 배제한 용건이 있다고 하니 외려 호기심이 자극된 팡룽은 젓가락을 테이블에 놓으며 주변을 물렸다.

"당신도 나가 봐. 남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다질 않나?"
".,....둘이 싸우지만 마요."

못내 걱정되는 눈치이기는 했지만 홍위롄은 두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하들까지 완전히 자리를 비키고 단둘이 남게 되자 저우룬칭은 폐일언하고 용건을 꺼냈다. 시시한 사설이 길어 봤자 팡룽의 심기를 거스를 뿐이다.

"무기를 빌려주십시오."
"일본 놈 때문에 지난번에 준 게 있질 않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한가?"
"최소한 RPG 정도는 빌려주십시오."

로켓탄을 빌려달라는 말을 이웃집에 찾아가서 쌀을 빌려달라는 투로 말하니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문을 닫았다. 무슨 짓을 할 속셈이냐 물어서 얻은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슈이스끼를 구하려고 합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멘쇼프스카야가 곧 一 어쩌면 이미 행동에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만 一 란뜨제프스카야의 은신처를 총공격할 예정입니다. 란뜨제프스카야가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고, 저는 그곳에서 슈이스끼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가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저우룬칭은 필요한 말을 늘어놓았다.

기가 막힌 팡룽은 슈이스끼가 누구인지조차 즉시 떠올리지 못했다가, 겨우 그가 알고 있는 멧돼지와 저우룬칭이 말하는 슈이스끼를 매치하였다.

"이봐, 저우 선생. 지금 자네 혼자 그 난리통에 뛰어들겠다, 이 말인가? 적극적인 자살을 하고 싶어?"
"적련방의 조직원까지 빌려주신다면 더 감사하고요."

들을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저 자식이 지금 란뜨제프스카야와 멘쇼프스카야의 자리다툼에 적련방까지 끼워 넣으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왜 러시아 놈들 일에…… 아니지. 저우 선생. 자네, 드디어 돌았나? 망할 멧돼지와 무슨 관계라고 죽으려고 용을 써?"
"애인입니다."
"……뭐? 애인?"
"사귄 지는 한 달이 좀 넘었습니다.
"……."

예상하지 못하였을 발언을 뻥뻥 터트려 팡룽을 당혹하게 만드는데 성공한 저우룬칭은 그가 냉정을 찾기 전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청하였다.

"외람된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팡 대인만이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        지금 내 앞에서 무릎까지 꿇어가며 쇼라도 하는 건가? 안 돼. 자네 부탁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세. 무기를 빌려주는 것 자체가 러시아 놈들의 진흙탕에 발을 담그게 되는 거야."
"형."
"……."

머리 위에서 숨을 들이켜는 기척이 났지만 저우룬칭은 바닥에 내리꽂은 고개를 올리지 않았다.

"룽 형. 제발 부탁이야, 내 손에 닿으면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체 무력하게 또 잃을 수는 없어."

팡룽이 묵직하게 침음하며 얼굴을 쓸었다.

"......샤오저우. 너에게 형 소리를 듣는 것도 십 년만이군."

그는 어딘지 지친 기색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영감이 너도 위롄도 다 빼앗아갔는데, 이제 와서 내가 필요하니까 형 운운인가?"
"……."

저우룬칭은 침묵으로 팡룽의 결정을 기다렸다. 결정은 바로 내려지지 않았다. 자신의 언행으로 인해 허를 찔리긴 하였으나 팡룽은 조직의 수장이었고 감정에 휩쓸려 조직의 향방을 결정하는 아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적련방이 란뜨제프스카야에 협력하였을 때와, 멘쇼프스카야가 이대로 승리하였을 경우의 수를 대조하여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한 것은 이처럼 기회를 만든 것과, 팡룽의 저울추에 감정의 격동으로 인한 약간의 무게추를 실어주는 것 정도였다.

까마득하기만 한 기다림이 끝나고, 이윽고 팡룽이 입술을 뗐다.

"추진! 추진! 밖에 있나?"

호명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팡룽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린 저우룬칭을 보고는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일단 팡룽에게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오늘 멘쇼프스카야를 칠 테니 창하이에게 연락해서 준비하라고 해라. 자세한 건 내가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고."

이어지는 명령에 남자는 더욱 놀라 황황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저우룬칭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팡 대인."
"형이라고 불러."

쌀쌀맞게 내지른 팡룽이 비딱하게 팔짱을 꼈다.

"이 대가는 톡톡히 받을 테니 기대하고 있어라. 샤오저우, 우선 네가 알고 있는 정보부터 말해. 시간 없으니 간단히 요약해서 세 줄로."





다리가 성치 않은 장쯔궈는 옆 건물의 옥상에서 저격을 담당하였고, 리뎬차이가 그를 보조하였다. 예전처럼 저우룬칭과 나란히 총을 들고 한바탕 휘저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뒤에서 백업을 하는 것도 꽤 쏠쏠한 기분이라고, 저우룬칭을 노리던 용병을 쏘아 맞히며 생각했다. 머리를 쏘려던 겨냥이 빗나가서 팔에 맞았지만 덕분에 총을 덜어트리느라 생긴 빈틈으로 저우룬칭의 청룡도가 날아들었으니 결과는 좋았다.

란뜨제프스카야의 지원이 당도하면서 장내는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세가 확연히 기울자 용병들은 두 손을 올리고 항복하여 재빨리 빠져나갔고, 멘쇼프스카야의 조직원들만이 악바리처럼 물고 늘어졌다. 기적처럼 멘쇼프스카야의 증원이 다섯 배쯤 몰려오지 않는 한 승패는 결정되었다.

한결 편해진 마음이 되어 느긋하게 아래쪽을 구경하였다. 쌍안경까지 들고 저우룬칭의 행동을 열심히 쫓던 리뎬차이가 혀를 내둘렀다.

"얼마나 대단하신지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상상 이상이네요. 과연 삼합회가 되기 위해 태어난 남자……."
"……뭐, 그 말은 욕 같지만."

‘그 새끼는 삼합회가 되기 위하여 태어난 새끼’라며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던 차오쑹젠의 모습은 절대 칭찬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리뎬차이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칭 형님이 12살 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은 사실입니까?"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렸대냐."
"하하. 아무리 그래도 12살은 좀 오버였죠?"
"내가 형님께 직접 듣기로는 10살 때였어. 골통을 아주 빠개놔 버렸다고 하시던데."
"……아."

리뎬차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쌍안경을 움직였다. 상황이 정리되자 저우룬칭도 칼을 늘어뜨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과 면한 도로변은 사상자는 차치하고도, RPG의 연이은 격중으로 움푹움푹 패고 외벽이 부서진 잔해로 엉망이었다. 가로수로 심은 야자나무들도 뭉텅뭉텅 부러져 쓰러져 있었다. 이 와중에 소화전이 터지지 않은 게 용했다. 마피아에게 봉쇄된 도로도 현 상황을 봐서는 내일 중으로 풀릴 수 있을지나 의문이다.

저우룬칭이 완전히 건물로 사라지자 장쯔궈도 AWM 저격소총을 손에서 놓고 일어나 앉았다. 매트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실수했다. 차갑고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내도록 엎드려 있었더니 배까지 아린 기분이었다.

"근데 좀 의외긴 하다."
"네? 뭐가요?"

리뎬차이도 쌍안경을 내려놓으며 허리를 폈다.

"칭 형님이 너희를 먼저 여기까지 데려오려고 하실 줄은 몰랐거든. 형님 성격으로 봐서는 분명히 연관시키지 않으려고 하셨을 텐데."
"실은 뎬신이 저희를 배제하려 하셨던 칭 형님께 먼저 말씀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의 입으로 전해지는 리뎬신의 말을 들은 장쯔궈는 혀를 내둘렀다.

"젊구나. 잘도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면전에서 직접 말할 줄은......"
"뎬신이 좀 어리긴 하죠."
"그래. 너보다 무려 5분이나 어리지."

중국인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가 가족이다. 핀잔을 주긴 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쌍둥이 형제가 자신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장쯔궈의 기분은 좋았다.

문득 리뎬차이가 히죽 웃었다.

"궈 형님. 이제 칭 형님과 마작을 할 수 있겠죠? 롄 누님이 마작을 안 좋아하시니 바오 아저씨가 가게를 그만두신 후로 마작판 인원수 채우기가 어려워서, 어휴. 손이 근질근질했습니다."

저우룬칭과 어울려 마작을 한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여, 감히 같이 판을 깔자는 제안도 못 했던 리뎬차이는 신난 얼굴이었다. 장쯔궈도 킬킬거리며 은밀히 속닥거렸다.

"한 가지 비밀을 말해 줄까?"

리뎬차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얼굴을 가까이 숙였다.

"칭 형님이 마작을 안 즐기시는 건 아닌데, 진짜 못하셔. 마작이 머리만 좋아서 되는 게 아니라는 산 증인이시라니까.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마작할 때의 형님은 좀 호구야."
"......진깝니까? 칭 형님도 못하시는 게 있어요?"

싸움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얼굴도 빠지지 않는 저우룬칭의 약한 면모를 발견한 리뎬차이는 불신의 시선이 되었고, 장쯔궈는 3박 4일을 거의 꼬박 지새우며 마작판을 벌였던 당시가 전설처럼 회자되는 저우룬칭의 연패 일화를 들려주었다.





적당히 대응하며 시간을 끌던 적련방은 란뜨제프스카야의 지원이 몰려오자 한 발 물러났다. 지원이 오고도 얼마간 건물 앞을 정리한 저우룬칭은 숨을 몰아쉬며 팔을 늘어뜨렸다. 호흡이 거칠었다. 오랜만의 현장이라 그런지 땀과 피가 온몸에 척척 감긴 느낌이었다. 목깃을 올려 눈꼬리까지 흐른 땀을 닦았다. 몸 상태를 돌아보니 자잘하게 입은 상처는 있어도 큰 부상은 없었다.

‘나도 아직까지는 쓸 만하군…….’

날이 많이 상한 청룡도를 버 릴까 하다가 일단은 손에 쥐고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질해서 안 되면 팡룽에게 새 청룡도를 달라고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무심코 했다가 이제는 자신이 팡룽을 숫제 화수분처럼 여기고 있는 건가 싶어 쓰게 웃었다.

사무실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난장판이었다. 창이란 창은 죄 깨져 있고, 벽이며 바닥에 총탄이 패지 않은 부분을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다. 무엇에 격중당하였는지 돌출된 벽도 허물어져 있었다. 이 사무실을 수습하려면 수리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건물을 헐고 새로 지어야 할 것 같았다.

예상 이상으로 처참한 몰골에 늑골 안쪽이 지끈거렸다. 이 지경으로 당했는데 옐리세이는 무사하기나 할지. 간간이 낮은 신음이나 러시아어의 대화만이 오고가는 어수선한 사무실 문간에 이방인처럼 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상자들부터 찾아봐야 할까.

그때, 탄창을 갈고 밖으로 달려 나가 막 합세할 기세이던 조직원 한 명이 저우룬칭의 팔을 건드리고는 서툰 영어로 뒤를 가리켰다.

"옐리세이 페오필락또비치는 저쪽에 계셔."
"등신아. 저쪽이라고 하면 이놈이 어떻게 아냐. 탁자랑 캐비닛 넘어트린 엄폐물이야."
"그래. 저쪽."
"당신 잘 싸우더라."
"역시 동양 남자는 전부 무술을 배우는 게 확실하다니까. 브루스 리나 재키 찬을 보라고."
"와이어 안 쓴 거 맞지?"

조직원은 한두 마디씩 툭툭 던지며 저우룬칭의 앞을 지나쳤다.

"……."

안면도 거의 익히지 않은 러시아 마피아 놈들이 왜 묻지도 않은 옐리세이의 행방을 알려주며 갑자기 친한 적을 아는 건지 몹시 의아했지만, 일단 가르쳐준 곳으로 갔다.

"헤이."

엄폐물 뒤에서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옐리세이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의 옆에 있던 두 명의 남자들은 一 한 명은 옐리세이의 아파트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부하였다 一 분위기를 흘금 살피더니 자리를 옮겼다.

블루그레이색 슈트에 벌겋게 번진 핏자국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진땀을 흘리면서도 멀쩡해 보이는 얼굴이라 안도했다.

"살아 있냐?"
"아파서 뒈질 것 같아. 배 뚫리는 줄 알았어."
"살아 있으면 됐고."

목소리도 멀쩡했다. 저우룬칭은 무의식중에 숨을 크게 토했다.

손바닥에 흠씬 묻은 핏물 탓에 손잡이를 놓친 청룡도가 바닥에 탕 떨어졌다. 얼결에 시선이 돌아간 그의 허리를 옐리세이가 당겼다. 허리를 안는 듯하던 손은 자연스럽게 엉덩이로 내려와 양손으로 주물럭거렸다. 저우룬칭은 성추행 범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뭐 하냐?"
"실감이 안 나서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해 보려고. 씨발, 이 촉감은 내 엉덩이 맞네."
"……."

숫제 벨트를 풀고 속옷 안쪽으로 기어들어올 기세로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녀석의 손등을 꼬집어 떨구어내려다, 부상자라는 걸 떠올리고 참았다. 맞다. 이 자식은 부상자였다.

"배에 박힌 파편은 기념품으로 챙기려고 안 빼고 있냐?"
"아까 정신이 없기도 했고, 지혈할 붕대도 없어서 병원 갈 때까지 참고 있어."

제지하지 않자 신나게 탐닉되고 있는 엉덩이로부터 정신을 돌리려고 노력하며 근방을 살펴보았지만 붕대 대용으로 쓸 만한 천이 보이지 않았다. 저우룬칭은 피와 땀범벅인 자신의 셔츠를 슬며시 내려다보았다. 이거라도 찢어서 쓸까.

우선 옷을 벗기 위해 옐리세이의 팔을 떨어트리자, 그제야 그가 고개를 쳐들고는 인상을 썼다.

"잠깐만. 너 설마 옷을 벗겠다는 거냐?"
"붕대 대용으로 쓸 참이다만."
"미친! 안 돼. 누구 허락도 없이 외간 놈들 앞에서 속살을 드러내겠다는 거야?!"

이건 또 새로 듣는 신박한 헛소리였다. 이이가 없어 대꾸를 하지 않고 있자니 이는 더더욱 단호하게 양팔을 교차하여 엑스 표를 만들었다.

"넌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수영장도 가지 마. 해변도 나랑 같이 가지 않으면 못 가. 세상에 게이와 잠재적 게이와 성추행범과 변태가 얼마나 많은 줄 아냐?"
"그중 제일 변태는 너잖아."
"나는 네 애인이니까 상관없지."

변태라는 지적은 부정하지 않는다.

배에 파편이 박혀서 통증으로 가늘게 떨고 있는 놈이 입은 살아서 잘도 조잘조잘 움직였다. 반박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아직도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놈을 자극하지 않으려 탈의를 멈추었다. 그러다 시선이 문득 옐리세이의 재킷에 닿았다. 저우룬칭은 헛웃음을 흘렸다. 지저분하긴 하지만 자신의 셔츠보다 훨씬 깔끔한 천이 저기에 있는데 여태 인식도 하지 못하다니.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이 당황했던 게 맞긴 한가 보다.

"파편부터 뽑고, 재킷 벗자."

옐리세이가 의심스러운 눈을 치떴다.

"내가 아무리 네 엉덩이에 환장을 했어도 이런 데에서 붙어먹을 만큼 섹스에 눈 돌 가지는 않았거든? 때와 장소도 못 가리는 변태 새끼. 건물 뒤로 옮겨야지. 나 좀 선 것 같으니까 보스 내려오시기 전에 얼른 한 발만 빼자."

배에 구멍이 날 지경인데도 성욕이 모든 욕구의 최우선순위로 놓이는 현장 앞에서 저우룬칭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재킷 이콜 붕대. 오케이?"
"웃기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버럭 외치려던 옐리세이는 흥분한 탓에 상처를 건드리고는 신음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렇지만 여전히 입은 살아 있었다.

"야!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라! 이게 얼마짜린 줄 알기나 해?!"
"사 주마."
"네 센스를 뭘 믿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넌 옷 입는 센스가 아주 씹창이야!"

목에 핏대를 세우든가 말든가 무시하며 옐리세이의 배에서 파편을 확 붙잡아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떠는 그의 재킷을 벗겨 나이프로 적당히 길게 찢은 뒤에 상처 부위에 칭칭 동여매어 지혈했다. 임시방편이지만 병원에 이송될 때까지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올 것이다.

"씹……, 존나 아파……."
"안 아픈 게 비정상이지."

그의 옆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옐리세이가 끙끙 신음하며 몸을 기댔다. 멀쩡한 척 입을 나불거리는 허세는 꿋꿋했지만 진땀에 젖은 목덜미는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저우룬칭은 그의 손을 잡고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손끝이 새하얗게 질릴 만큼 저우룬칭의 손을 움켜쥐며 통증을 누르던 옐리세이가 불현듯 시선을 올렸다.

"맞다……. 너 밖에서 혹시 코뼈가 뭉개진 곰 같은 새끼 못 봤냐?"
"글쎄? 일일이 얼굴 확인하면서 총을 쏘지는 않았다마는."
"뒈져서 나자빠졌으면 안 되는데."

옐리세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상처 부위를 부여잡으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저우룬칭이 얼른 부축했다.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그러냐. 밖이 정리되고 앰뷸런스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내 손으로 꼭 죽여야 하는 씹새끼가 있단 말이야."

이유도 있으니 더는 만류할 수가 없었다. 저우룬칭은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른 옐리세이의 허리를 감고 안다시피 하여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총성은 멎어 있었다. 저 멀리에서 팡룽이 낯선 얼굴의 백인 남자와 대화 중인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놈의 목소리를 들은 장소라며 옐리세이가 가리킨 곳에 가 보았지만 찾던 사람은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옐리세이는 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헉헉거리는 한 메소티소 남자의 다리를 걷어찼다.

"어이, 뻬뻬. 처자지 말고 대답이나 해. 시초프 새끼 어딨냐?"
"왜 걷어차고 지랄이야. 네 예비 강간범은 벌써 저 뒤쪽으로 간 지 오래다. 그것보다, 레샤. 농담 아니고 나랑 한 번 하지 않을래? 안 자봐서 이제까지 몰랐던 거지, 의외로 우리 궁합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네 좆이나 네 구멍에 처박아."

중지를 치켜세운 옐리세이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남자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갔다.  

"생각 바뀌면 언재라도 연락해!"라는 외침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우룬칭은 묘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인기 많군."

통증을 딛고 입이 살아난 옐리세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흐흥. 오빠가 인기 많으니까 빼앗길까봐 겁나냐?"
"다른 남자 만날 배짱은 있고?"
"……."

정곡이 찔렸다.

멋지게 되받아치며 인기 많은 자신의 잘난 모습을 입증할 반박을 말해야 하는데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상처의 고통 때문에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거다. 진짜다.

요행히 옐리세이가 우물거리는 사이에 금방 시초프를 발견했다. 다리에 부상을 입어 도주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옐리세이를 보자마자 총을 치켜들었지만 철컥, 하고 공이치기 헛도는 소리만 났다.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의 부축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는 걸음이나마 시초프에게 총구를 겨누며 다가갔다.

"내 구멍을 뭐 어떻게 하겠다고?"
"……쌍. 모스크바에서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총부터 쏘고 강간했어야 하는 건데."
"냐아말로 그때 네놈 뒷구멍을 총구로 후벼 파지 않은 게 후회된다."

승자는 어쨌든 작년 모스크바에서나 오늘이나 자신이다. 옐리세이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어깨 너머에서 넘어온 손이 총을 아래로 내렸다. 어떤 놈이 어르신의 행사를 훼방 놓느냐며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본 그는 얼른 욕을 삼켰다.

필리몬을 대동한 체자르였다.

"하나만 묻지."

체자르가 시초프를 향했다.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대답해다오. 쿠즈민스카야가 해체되고 난 뒤에 멘쇼프스카야에 입단하였던 건가? 아니면 그저 단순한 용병인가? 무엇 때문에 우리 구역의 카지노에서 소동을 일으켰는지 궁금하군."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을 것임을 아는지 시초프는 한껏 깐작거렸다.

"란뜨제프스카야의 간부께서 나 같은 놈의 행적이 뭐가 그렇게 궁금하쇼?"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았나?"
"카지노에서 내키는 대로 큰돈을 날리고도 다음 날에 또 꼴아박으려면 어지간한 자금줄로는 안 되지."
"……알겠다."

원하던 대답이 되었는지 체자르는 한 걸음 물러섰다. 무언의 허락을 얻은 옐리세이는 히죽거리며 트리거를 당겼다.

"죽어서 네 엄마랑 씹질이나 해."

시초프의 뒤통수에서 붉은 피와 뇌수가 퍽 튀었다. 지근거리에서 44구경의 총에 맞아 머리가 수박처럼 깨진 채 나동그라진 시체 앞에서 의기양양하였던 것도 잠시, 허리를 숙이고 진땀을 흘리던 옐리세이는 체자르가 걸음을 옮기자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체자르 끼릴로비치! 어디에 가십니까?"
"오늘이 끝나기 전에 멘쇼프스카야를 완전히 청소해야지. 넌……."

체자르가 그의 아래위를 죽 훑더니 혀를 쯧 찼다.

"병원이나 가라."

옐리세이가 정색하며 허리를 쭉 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건 침 바르면 낫습니다. 제가 보스를 안 지키면 누가 지켜요."

오고가는 대화가 러시아어라 저우룬칭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얼추 눈치를 보니 옐리세이가 부득불 저 남자를 따라가려는 것 같았다. 그는 잠자코 옐리세이의 옆으로 다가가 팔꿈치로 상처를 퍽 후려쳤다.

"끄아아악!!"

옐리세이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아 배를 싸맸다. 체자르는 저우룬칭을 한 번 힐긋 보고는 옐리세이를 뒤에 남겨 두고 팡룽과 대화 중인 블라질텐에게로 걸어갔다.

"병신."

필리몬도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비아냥거리고는 체자르를 뒤따랐다.

그가 끙끙거리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체자르의 뒷모습만 작게 보이고 있었다. 제 한 몸도 못 가누는 주제에 뒤에 남았음을 억울해하는 옐리세이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러시아어를 배우는 게 좋을까, 하고 저우룬칭은 잠깐 생각했다.





멘쇼프스카야의 사무실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허물어졌다. 고용되었던 용병들은 란뜨제프스카야가 적련방과 손잡았다는 정보를 접하자 침몰하는 배에서 도망치는 쥐떼처럼 재빠르게 발을 뺐다, 남아 있는 멘쇼프스카야의 조직원으로는 승패를 뒤집는 게 불가능했다.

항복하기도 하고 최후까지 저항하기도 하는 멘쇼프스카야의 정리와 보스의 수색을 블라질롄에게 일임한 체자르는 목적하였던 사람을 찾아 나섰다. 까지미르는 사무실 뒤 편의 공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필리몬을 비롯한 경호원들이 따라나서려는 것을 제지했다. 싸움 중에 유탄에 맞았는지, 혹은 전구의 수명이 다 되었는지 공터를 밝혀야 하는 가로등은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했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불빛만이 희미한 광원이 되어 주는 작은 공터를 체자르는 터벅터벅 가로질렀다.

"미라."

으슥한 구석에 우두커니 선 채 줄담배를 피우고 있던 까지미르가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했다. 반사적으로 친구의 이름부터 부른 체자르는 쉬이 뒷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책망처럼 첫마디를 꺼냈다.

"포위되기 전에 도주하려면 도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여기에 있나."

까지미르가 실소했다.

"조직의 돈을 횡령까지 한 몸이야. 늦든 빠르든 어차피 들통 나서 처단당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도망쳐 봤자 뭘 하겠어? 참고로 너에게 선물했던 그 시계도 횡령한 돈으로 산 거야. 시계 내부에 발신기도 예쁘게 넣어 놨는데 내가 죽은 이후로는 시계를 착용하지 않았다니 유감이군."

옐리세이에게 선물한 건 어디까지나 보험이었는데, 라는 뒷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까지미르는 담뱃갑을 꺼냈다가 자신이 방금 피운 것이 돗대였음을 확인하고는 구겨서 버렸다. 체자르가 새 담뱃갑을 건넸다. "고마워." 까지미르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깊숙이 들이켰다.

"이상하긴 했지."

체자르가 자신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시초프를 고용하여 주의를 멘쇼프스카야뿐만이 아닌 다른 곳까지 돌리게 한 것, 다른 사람도 아닌 베레조프스끼가 감사를 온 것, 먼저 우리 사무실을 쳐서 밖으로 튀어나갈 수밖에 없게 한 것, 네가 죽었다는 걸 알면 내가 제일 먼저 앞장서리라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내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이 뒤에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불필요한 건 모두 일절 몸에서 떼어놓고 갔다."
"아하. 역시 KGB 출신은 다르시군. 옐리세이에게 보험을 들지 않았다면 시원하게 망할 뻔했어."

까지미르의 낮은 웃음에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어두운 허공으로 흩어진 담배 연기는 가뭇없이 흐느적거리며 사라졌다. 체자르는 까지미르의 시선을 피하며 낮게 물었다.
착잡한 음성이 바닥으로 내깔렸다.

"......네 아내의 일 때문인가?"
"음, 결정적인 계기는 그래."

오늘의 날씨를 입에 올리는 것처럼 까지미르는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다,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체자레치까. 네 안에 아직도 나를 친구라고 여기는 감정이 실낱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너에게 품었던 열등감을 하나씩 까발려서 바닥까지 추하게 드러내기 전에 끝내주지 않겠냐? 이제 와서 이유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어떠한 이유와 정당성을 덧붙이더라도 까지미르는 조직을 배신하였고, 체자르는 배신자를 처단할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체자르는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무수하게 널브러진 꽁초 위로 재가 가늘게 떨어졌다. 까지미르가. 생전 마지막 한 모금이 될 담배를 빨았다.

"조이쉬까를 부탁해."

담배 연기를 머금은 유명은, 야음과 함께 총소리에 젖어들었다. 란뜨제프스카야라 멘쇼프스카야의 항쟁을 종결짓는 최후의 총소리이기도 하였다.





CHAPTER 8





병원은 연일 성황이었다. 제이슨이 희희낙락 돈다발을 헤아리는 광경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상상될 지경이다. 특히 총격전으로 항쟁이 종료된 오늘 밤에는 더 많은 부상자가 실려와 북적거렸다.

덕분에 상처의 경중 순위에서 밀린 옐리세이는 바로 수술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만 받은 후 순서를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우라질. 먼저 와서 접수한 순서대로 수술을 해야지 왜 위중한 순서대로 수술을 하냐,"
"상처가 덜 심하다는 거니 다행이지."

당연한 소리를 당연하지 않게 투덜거리는 옐리세이를 다독거려주었다.

사람들과 신음과 소독약 냄새로 북적북적한 대기실에 두리번거리며 막 들어온 남자가 다가왔다. 통증 탓에 온갖 인상을 쓴 채 저우룬칭의 손을 움켜쥐고 앓는 소리를 내던 옐리세이가 후딱 등허리를 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올라, 아미구."

총격전의 현장에 드러누워서 헉헉거리다 옐리세이에게 걷어차였던 그 메소티소 남자였다.

"넌 다치지도 않은 놈이 여기서 뭐 하냐?"
"감기가 심해서. 아까 싸울 때도 계속 기침이 나서 곤란해 죽는 줄 알았어. 기침 때문에 겨냥이 흔들리지만 않았어도 네 배에 구멍을 내줬을걸?"

남자는 저우룬칭에게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루이 맞지? 소문으로만 듣다가 직접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 내가 술을 못 마시거든. 난 호세 힐라리오. 편하게 뻬뻬라고 불러."

오늘따라 옐리세이 주변의 사람들이 괜히 친한 척을 한다는 생각을 하며 저우룬칭도 악수했다.
"반갑다."
"난 쓰리썸이라도 좋은데 생각 없이? 성병도 안 걸렸고 콘돔도 잊지 않을 게. 진단서라도 떼 올까?"
"……."

인사를 하자마자 대뜸 나온 발언이 이것이었다. 과연, 옐리세이의 옆에서 친한 척을 하려면 보통 신경줄로는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저우룬칭이 옐리세이의 성격과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을 새로이 하고 있자니, 그 당사자는 인상을 쓰며 발로 호세의 허벅지를 밀쳤다.

"꺼져. 감히 누구 옆에서 누구를 넘보는 거야?"
"루이도 꽤 잘생겼지만 넘보는 건 당연히 너지."
"애인 있는 남자에게 작업을 걸다니 상도덕도 없는 새끼. 그리고 넌 내 취향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냐? 너랑 떡칠 바에야 남창을 사고 말지."

밀려나면서도 저우룬칭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호세를 툭 쳐낸 옐리세이가 거지라도 내쫓듯이 훠이훠이 손짓했다.

이 상황이 약간의 진통제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저우룬칭은 가만히 손이 잡힌 채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한 안색의 간호사 한 명이 들어왔다.

"미스터 슈이스끼! 안에 계신가요?"

옐리세이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는지 그녀는 대기실 내를 한 번 휘둘러보더니 곧 일행에게 걸어왔다.

"수술 대기 중이니까 수술복으로 갈아입…… 어머, 저우 선생?"

여전히 손을 잡고 있는 호세와 무언의 거절이 담긴 눈의 대화를 하느라 간호사를 자세히 보지 못했던 저우룬칭은 자신과 면식이 있는 듯한 인사에 돌아보았다. 장쯔궈의 여자 친구인 천링링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여자 친구가 간호사라던 장쯔궈의 말이 기억났다.

"아, 천 소저. 안녕하십니까."
"이런 데서 뵐 줄은 몰랐네요."

붙임성 있게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던 그녀는 한 손은 옐리세이에게, 한 손은 옐리세이에게 붙잡혀 있는 저우룬칭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살짝 굳은 표정이 되었다. 왠지 이 오해를 풀어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옐리세이가 짜증을 내며 일어나 저우룬칭과 호세의 악수한 손을 떼어냈다.

"뻬뻬. 약이든 뭐든 후딱 처먹고 얼른 꺼져. 수술하는 동안 루이 옆에서 얼쩡거리는 거 들켰다가는 죽인다."
"너무한데."

호세는 유들유들하게 수작을 걸긴 했지만 옐리세이가 진짜 화를 내기 전에 발을 빼어 사라졌다.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긴 했지만 천링링은 간호사의 본분을 다하여 옐리세이를 탈의실로 안내했다.

"오빠 수술 받고 올게. 얌전히 잘 기다리고 있어."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저우룬칭에게 손을 흔들던 옐리세이가 두 발자국도 떼기 전에 퍼뜩 생각이 난 얼굴로 천링링을 붙잡았다.

"참. 우리 조직원들은 지난번처럼 우리끼리 같은 병실에 입원하게 됐냐?"
"네. 늘 그렇죠."
"병원비를 사비로 더 낼 테니 난 일인실로 따로 빼줘."
"이따 입원 절차 밟을 때 다시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특별한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옐리세이는 굳이 뒤를 돌아보며 저우룬칭에게까지 들리도록 말했다.

"다인실에서는 섹스하기 곤란하거든. 누가 엿보면 흥분되기야 하겠지만 우리 애들 앞에서 하는 거라면 좀 그렇지."
"……잠깐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발언이 튀어나왔다. 저우룬칭은 낯을 굳혔지만 옐리세이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내 섹스 버킷 리스트 중에 병실 섹스가 있어."
"……난 거기에 동의한 적이 없는데?"

옐리세이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언제부터 네 동의가 필요했냐?"
"……."

이놈이 이러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그 버킷 리스트 당장 찢어버리라고 다그치려 했으나, 이런 때에는 재빠른 옐리세이는 왼손의 검지와 엄지로 둥근 원을 만들고 오른손의 중지로 원 안쪽을 왔다 갔다 하는 적나라한 제스처를 하며 복도를 돌아갔다. 입을 벌리고 있던 천링링도 화급히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

근처 에 있어 본의 아니게 대화를 듣게 된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거나 뜨겁다는 빈정거림을 보내는 야유 속에 지우룬칭은 이마를 싸매며 침음했다. 이 나이에 쪽팔려서 못 살겠다, 진짜.

그리고 두어 시간 후 짬을 내어 야식을 먹는 도중에 천링링은 친구에게 저우룬칭이 게이인데다가 이미 파트너도 두 명이나 있으니 포기하라는 문자를 보냈다.





"너 진짜 북한 간첩 아닌 거 맞냐?"

편하게 침대에 드러누워 저우룬칭이 잘라주는 망고를 야금야금 입으로 가져가고 있던 옐리세이가 물었다. 저우룬칭은 망고를 귀여운 별 모양으로 자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무시할까 자르는 척이라도 할까 고민하며 건성으로 입을 뗐다. 평소에도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던 그는 입원 후에 대놓고 옐리세이의 군것질 셔틀이 되어 있었다.

"아니라니까. 갑자기 왜 물어?"
"간첩 훈련도 안 받은 놈이 싸움은 존나 잘하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무술이라도 배웠냐?"

그러고 보니 이 문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힐 기회가 온 듯하다. 망고 한 조각을 과도 끝으로 찍어 입에 넣은 저우룬칭은 몇 번 씹는 것으로 꿀꺽 삼켰다.

"나도 마피아였으니까."
"엉? 넌 요리사잖아?"
"야이쑤코에 오기 전에 손을 씻어서그래."
"……젠장. 동종업계였냐. 같은 업계인 줄 알았다면 공통 관심사를 진작 찾아냈을 텐데."

옐리세이가 혼잣말로 툴툴거렸다.

"어쩐지 아무리 패려고 해도 한 대도 안 맞고 얄밉게 잘 피하더니만."

북한 간첩이라는 것보다는 현실성 있는 직업이었는지 옐리세이는 곧 납득했다.

"적련방 쪽이었냐?"
"아니. 송의방이라고, 야이쑤코에는 진출하지는 않았지만 적련방만큼이나 큰 조직에 있었지."

설명은 해 주었지만 또 간첩 운운하다니 옐리세이의 지성이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처음 거짓말했을 때야 그렇다 치더라도 경찰 간부를 피해서 도주했다거나 일본 야쿠자와 엮였다는 과거사를 듣고, 간첩이 아니라는 확답까지 받았으면서도 왜 또 끌어온단 말인가. 성질머리가 더러운 데다가 조폭까지 되었으니 망정이지, 이 바닥에 물들지 않고 평범한 직업을 가진 일반인이었다면 폰지 사기 등에 당하거나 보증 서다가 망하거나 둘 중 하나의 말로를 맞았을 것 같았다.

"옐리세이. 넌 돈 버는 걸 다른 투자로 불릴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얌전히 은행에 저축해 둬라. 그리고 갑자기 옛날 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일단 의심부터 해. 사람 찾는 정보망은 경찰 못지않을 테니 옛 친구가 지금 뭘 하고 사는지 확실히 알아봐라"
"뭔 말이야?"
"조심하라고."

별 희한한 놈을 다 본다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저우룬칭을 노려보며 옐리세이는 날름날름 망고를 한 조각씩 먹었다.

"넌 이제 나한테 숨기는 거 없댔지?"
"어."
"그럼 솔직하게 말해 봐. 멘쇼프스카야 놈들이랑 싸우던 곳에 들이닥치면서 무슨 생각했냐? 오빠가 걱정됐어?"

걱정되지 않았으면 팡룽에게 숙이며 애걸해서까지 다른 조직의 싸움에 끼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본능이 ‘yes’라고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저우룬칭에게 옐리세이가 음흉한 미소를 던졌다.

"짜식, 귀엽긴. 그게 바로 나에게 반했다는 증거야. 내 노예가 되기 위한 걸음을 착실히 옮기고 있군. 주인님이라고 불러. 빨리."
"천만에."

생각할 것도 없이 부정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웃기지 마. 안절부절못하다가 허겁지겁 달려온 꼴이 선하드만."
"그럴 리가."

여기에서 순순히 인정했다가는 머리 꼭대기에서 으스대며 기고만장해할 것이 뻔하기에 저우룬칭은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미스터 팡이 너희 조직과 손을 잡아야겠다고 하셔서 도와준 거지. 그분께는 신세진 것도 있고 해서."

전후 관계가 바뀌긴 했지만 짜장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누가 절대 손해 보ㄴㄴ 장사는 하지 않는 중국인 아니랄까봐 팡룽은 란뜨제프스카야로부터 야무지게 대가를 받아 냈다. 네가 야이쑤코에 오고 난 후 유일하게 잘한 일이라며 칭찬까지 받았다. 과격파인 모텔로스 카르텔을 견제할 수 있게 된 건 덤이었다.

사사롭게는 이번 일에 개입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부하가 되라는 팡룽의 권유를 뿌리 치고 송의방에 입단하였던 일과 一 저우룬칭은 당연히 처음부터 차오쑹윈의 아래로 들어갈 작정이었기 때문에 이 점은 상당히 억울하긴 했다 一 팡룽이 홍위롄과 크게 싸우고 화해하지 못한 채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저우룬칭에게 차오쑹윈을 소개 받은 홍위롄이 그의 정부가 됨으로써 단단히 틀어졌던 관계가 그럭저럭 회복하게 된 점은 다행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었다.

"원래 널 도와주려고 작정한 건 아니었다니까."

더 길게 얘기를 하다가는 말꼬리가 잡힐 것 같았다. 옐리세이가 뱁새눈으로 노려보거나 말거나 저우룬칭은 괜히 분주하게 과일의 잔해를 정리하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밤이 깊기도 하였다. 옐리세이의 입원 후 영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 틈틈이 들렸으나 오늘은 낮에 장을 보느라 짱을 내지 못해서 영업이 끝나고야 찾아올 수 있었다. 자정을 넘긴 지는 이미 한참이다.

서둘러 도망치려는 저우룬칭의 셔츠를 옐리세이가 꾹꾹 잡아당겼다.

"야. 저기 선물 있으니까 봐봐."

턱 끝으로 가리키는 침대 옆 바닥에 커다란 쇼핑백이 하나 있었다. 병원에 내도록 입원해 있는 놈이 선물은 어디에서 난 건지 의아해하며 쇼핑백 안에 있는 두툼하고도 가벼운 꾸러미의 포장지를 뜯은 저우룬칭의 표정이 썩어갔다.

"……."
"남자 간호복은 아직 못 구했어, 빌어먹을. 제이슨이 새로 주문했으니까 도착하려면 며칠 더 걸릴 거래. 아쉬운 대로 특대 사이즈의 여자 간호복이라도 갖고 왔지."
"……."

저우룬칭은 성적인 목적을 위해 야하게 개조된 여자 간호복을 손에 든 채 잠시 병실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요즘은 여자 간호사들도 다 바지 유니폼을 입는데 왜 코스툼 플레이의 세계에서는 치마 유니폼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뭐하냐. 빨리 입어. 오빠 앞에서 옷 벗는 게 부끄러우면 화장실에서 갈아입어도 돼.
"……."
"야."
"……."

단언컨대 그에게는 제복과 관련한 페티시나 섹스 판타지가 없었다. 그래도 평범한 남자 유니폼이라면 못 입어줄 것도 없었지만 여자 유니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저우룬칭은 길게 말하지 않고 간호복을 쇼핑백에 쑤셔 넣은 뒤에 쓰레기통에 버렸다.

옐리세이는 당연히 화를 냈다.

"씨발아! 입으라고 준 옷을 왜 버려!!"
"너나 입어."
"내가 왜 입냐!? 난 여장 취미 따위 없어!"
"나도 없어."
"지금부터 만들어!!"

상처에 붕대를 칭칭 감고 요양 중만 아니었다면 저우룬칭을 강제로 탈의시켜 억지로 간호복을 입힐 기세였다.

"왜 뜬금없이 간호복에 집착하냐?"
"병원에서 섹스하려면 당연히 간호복이지!"

뭐, 슬슬 이 말이 나올 타이밍이긴 했다. 실밥 터지지 않게 주의하라는 담당의의 당부가 며칠이나마 약발이 떨어지지 않은 게 용했다.

"탱탱하게 꽉 죄는 치마 위로 네 엉덩이를 만지면 끝내주지 않겠냐? 응?"

저우룬칭은 여장과 병실 섹스 중 기꺼이 후자를 선택했다.

"그냥 만져."
"……내가 이걸로 호락호락 넘어갈 줄 알았다면 아주 큰 오산이야."

말과는 다르게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의 뒤로 손을 뻗어 엉덩이를 조몰락거렸다. 또 기선을 빼앗기기 전에 저우룬칭은 자신이 먼저 그를 눕히며 단추를 풀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간호사가 몇 시쯤에 지나가던가?"
"몰라. 간호사가 엿들으면 더 짜릿해질 것 같기는 하네."

저우룬칭은 시선을 흘금 옆으로 돌려 보았다. 병실 문은 잠겨 있었다. 딱히 기억은 없지만 자신이 입실하기 전에 무의식중에 문을 잠근 모양이다. 어쩌면 은연중 오늘쯤 옐리세이가 그놈의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려고 들이댈 것이라는 예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환자복의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매끈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목덜미로부터 쇄골과 흉근까지 느슨히 손바닥으로 쓸었다. 단단한 가슴의 근육이 손바닥을 누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불까지 훤히 켜진 상태에서 차분히 옐리세이를 탈의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저우룬칭은 오늘은 애무를 즐기기로 했는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 옐리세이의 빗장뼈 언저리에 새겨진 별 형태의 문신을 더듬었다. 가슴팍의 중앙에 새겨진 성당처럼 보이는 문신은 붕대에 감긴 복부까지 이어졌고, 어깨, 팔뚝, 손등 등에도 크고 작은 각양한 검은 색 문신이 흰 피부에 도드라졌다.

"몸이 무슨 도화지도 아니고……. 등이랑 다리까지 전부 문신이 몇 개냐?"
"어쭈. 넌 문신이 없는 것처럼 지껄인다?"
"내 문신은 예술이지."

진심으로 삼룡의 문신을 예술이라 여기는 저우룬칭은 더 말을 섞지 않고, 옐리세이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리며 대뜸 성기를 핥았다. 욱해서 자신의 몸에 그린 문신의 의미와 이력을 하나씩 설명하려던 그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나왔다.

시끄럽게 조잘거리는 옐리세이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키스만큼이나 유용한 방법이었다.





망할 놈이 기별도 없다.
무심결에 휴대폰을 찾다가, 멘쇼프스카야의 침입이 있었을 때 박살이 났다는 걸 떠올리고는 괜스레 베개에 짜증을 해소했다가, 그런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잊그제 빠벨에게 콘돔과 러브젤만 사서 오게 하는 게 아니라 휴대폰도 사오라고 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제일 중요한 건 콘돔과 러브젤이 맞긴 하지만 말이다.

병실의 전화기는 있어 봤자 쓸모가 없었다. 망할 놈의 휴대폰 번호를 외우지 않고 있었으니까.

‘……아. 새 휴대폰이 있어도 전화 못 했잖아?’

휴대폰 번호를 적어 두지도 않았다는 근본적인 실수를 하고도 이제야 깨달았다는 자괴감에 더욱 짜증이 났다. 전화번호 따위를 외울 필요도 없는 엿 같은 문명의 이기. 짜증나서 수명이 짧아질 것 같다. 밝고 긍정적인 상상을 하기로 하였다.

저우룬칭에게 유니폼은 입히지 못했지만 병실에서의 섹스는 꽤 만족스러웠다. 불이 켜진 복도에서 이따금 링거 걸이대를 끌며 지나가는 발소리나 목소리 등의 상반되는 일상적인 기척과, 언제 간호사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약간의 스릴감과, 모텔보다 좁은 일인실의 밀폐감과,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신음이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저우룬칭의 삽입된 성기를 세게 조였을 때 녀석의 당혹 어린 쾌감과, 신음을 삼키려 거칠게 키스하던 놈의…….

"……니미."

회상하다가 설 뻔했다.
옐리세이는 성호를 그으며 부지런히 기도문을 외웠다. 외우는 한편으로 엊그제의 섹스 후 이틀째 연락이 없는 놈의 안면을 정액으로 더럽히는 상상을 했다. 아, 젠장. 또 꼴리잖아.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 TV를 켰다. TV 내용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우룬칭의 얼굴만 몽글몽글 떠다녔다. 그 빌어처먹을 새끼는 멘쇼프스카야와 붙었던 현장에 헐레벌떡 뛰어왔다는 게 뻔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는데도, 자기는 전혀 안 그랬다는 거짓말을 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그 점을 지적당하니 제풀에 찔려서 소식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저우룬칭이 나에게 완전히 푹 빠져서 내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진실을 실토하게 만들까 고민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항쟁을 또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곧 TV채널 돌리기도 시들해져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천장의 무늬를 헤아리다가 차라리 잠이라도 자자며 눈을 감았지만 오전 회진이 끝나고 또 자다가 한 시간 전에 깬지라 잠도 오지 않았다.

심심해 죽을 것 같았다. 저우룬칭이 올 때는 그 녀석을 기다리는 재미라도 있었지만 빌어먹을 새끼가 소식이 없으니 짜증까지 북받쳐 시간은 더 안 흘러갔다. 섹스는 했으니 조직원들이 입원해 있을 다인실로 옮길까, 하다가 안 오는 놈을 하염없이 기다릴 게 아니라 놀러라도 가자고 마음을 굳혔다. 사실 퇴원 날짜가 며칠 안 남아서 옮기려니 번거로웠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망할 놈인가 보다.

바닥에 발을 내딛고 있던 옐리세이는 얼른 침대로 돌아가 누우며 자신은 절대 심심하지 않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TV의 볼륨을 높였다.

"들어와."

문 사이로 들어온 흑발의 남자는 동양인이긴 했지만, 저우룬칭보다는 시선이 한참 아래에 있었다. 니시무라였다. 갑자기 푸시식 김이라도 빠지는 기분이라 옐리세이는 시큰둥하게 인사했다.

"어, 웬일이냐."
"란뜨제프스카야가 항쟁에 휩쓸렸다길래 잘 계시나 전화했더니 입원하셨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좀 괜찮으세요?"

저우룬칭이 아니었다는 실망감 때문에 옐리세이는 조금 불퉁하게 대답했지만 그가 주는 아이스크림 통에 기분이 풀렸다. 역시 짜증 날 때는 단것이 최고다.

예의상 너도 같이 먹자고 물어보았지만 니시무라는 고사했고, 두 번 권하지 않는 옐리세이는 스푼으로 다섯 가지 맛이 섞인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퍼먹었다. 시원하고, 달고, 맛있다. 기분이 조금 더 풀렸다.

아이스크림과 같이 가지고 온 병문안용 꽃바구니를 놓아두려는지 병실을 둘러보던 니시무라는 사이드 테이블에 있던 꽃병을 볕이 잘 드는 창가의 선반으로 옮기고, 꽃바구니를 올려놓았다.

"실은 병원을 방문하는 게 내키지 않았습니다."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은 니시무라가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껏 병문안까지 와 놓고 병원 오는 걸 싫어한다니, 내가 이만큼이나 마음 써주고 있다는 걸 유세라도 하고 있는 걸까. 희한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스크림 앞에서는 너그러운 기분이 되었다. 니시무라의 이야기를 듣든, 아이스크림을 먹든 심심풀이로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병원에 좋은 기억이 없거든요. 어머니가 물장사를 했는데 남자에게 속는 게 일상이었어요. 저와 제 누나도 아버지가 각각 다르고, 그나마 누나의 아버지랑은 정식으로 결혼까지 했는데 남자가 술 먹고 싸우다가 칼에 찔려서 비명횡사했죠. 밖에 다른 여자가 있다 보니 집에는 거의 오지 않아서 기억도 안 나지만요. 제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마지막 남자는 야쿠자 조무래기였는데 심심하면 어머니를 됐어요."
"뭐, 남자한테 잘못 걸려서 인생 말아먹은 술집 년들은 계속 남자 때문에 고생하긴 하더라."

긍정적이지 않은 과거사가 느닷없이 튀어나왔기에 이 자식이 낮술이라도 하고 온 건 아닌지 의심하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니시무라가 엷게 웃었다.

"제 어머니가 그런 여자들의 대표적인 케이스이긴 합니다."

그는 말을 계속 이었다. 화창한 바깥 날씨와는 대조적인 울적한 내용인데다 상당히 뜬금없이 시작되긴 했지만 남의 인생사는 심심풀이 안주로 제격이기에 옐리세이도 제지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러시아이든 일본이든 기둥서방에게 후려치기 당하는 술집 여자들의 삶은 비슷비슷했다.

니시무라의 양아버지는一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 그린 듯이 무능력한 말단 야쿠자였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빠찡코에서 돈을 날리고, 돈이 떨어지면 어머니를 구타하면서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런 주제에 조직에서는 구제 못 할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사무실에서 아주 가끔씩 주는 일이라고는 사설 도박장의 기도였다. 조직의 일을 하고 온 날에는 더 난폭해졌다. 자신보다 늦게 조직에 들어온 사제마저도 작으나마 일가를 가진 두목이 되어 금배지를 달고 활보하는 현실에 열등감이 폭발하여 어머니와 그와 누나를 때렸다.

온몸에 멍이 가시는 날이 없었음에도 어머니가 입원한 건 딱 한 번뿐이었다. 듣다 못 한 옆집에서 신고를 하여 인사불성이 된 채 응급실로 실려 간 어머니는 나을 때짜지 병원에서 치료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의 입원비까지 빠찡코에서 탕진하였던 양아버지는 퇴원하자마자 죽일 듯이 어머니를 구타하였다.

"그 무렵이 제가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였는데, 어머니가 퇴원하고 이틀 후였나 하교하고 집에 오니까 그 새끼가 기절한 어머니 옆에서 누나를 강간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주방에서 식칼을 갖고 와 사람이 뒤에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열중하는 그 새끼의 등을 찔렀어요, 계속."

제 여자를 패는 새끼들은 하나같이 어쩌면 저렇게 몰개성한 쌍놈들일까, 라는 무료한 생각을 하던 옐리세이는 칼로 찔렀다는 언급이 나오자 "오오."하며 감탄했다.

"잘 찔렀네. 뒈졌냐?"
"네."
"잘 죽었네."
"덕분에 소년원에 가기는 했지만요."

옐리세이에게는 먼 나라의 얘기나 다름없었던 ‘대학을 다니고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프로필을 갖고 있는 평범한 인생이라고 여겼지만, 막상 사정을 듣고 나니 보편적인 인생을 산 놈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갔다 왔다니 옐리세이 주변의 기준에서는 평범한 축이긴 하지만.

니시무라에 대한 호감도가 약간 더 높아지는 걸 느끼며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입으로 옮겼다. 스푼에 바닥이 긁히고 있었다.

"근데 어머니는 아니시더라고요."

니시무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엷은 미소가 올라 있었다.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이라 아무리 쓰레기 같은 놈이라도 남자에게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당신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이 맞고 딸이 강간당해도 남자가 있어야 했던 거였어요."
"그런 여자들 있지."

옐리세이는 다 먹어치운 아이스크림 통을 허전하게 내려다보며 끄덕거렸다. 남자에게 학대받는 게 만성이 되고, 학대받으며 자존감이 바닥까지 물어 뜯겨 폭력에 길들여 지는 여자들을 많이 봤다. 감각이 마비되고 사고가 고장 나게 되는 것이다.

"재판 받을 때는 얼굴도 안 비치다가 소년원에 있을 때 면회를 오셔서는 원망과 욕을 퍼붓고 가셨어요. 퇴소하고 사회로 나와 보니 이사를 간 지 한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술집 여자들과 야쿠자가 싫습니다."

예상했던 마무리였다. 야쿠자가 재패니즈 마피아라고 알고 있는데 차니이즈 마피아의 밑에서 일하다니 이 자식도 야이쑤코의 주민답게 신경줄이 보통은 아니었다.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시간 죽이기 용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시시껄렁한 대화들이 보통 그렇지 않은가. 아이스크림을 사 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하품이 나오는 걸 참았지만, 니시무라의 말은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정말 싫었어요. 제 인생에서 유일한 빛이었던 그 사람을 술집 여자와 야쿠자 따위가 방해하고 있다는 현실이요."

‘인생의 유일한 빛’이라는 대사를 영화도 아닌 현실에서 입으로 직접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옐리세이는 이상한 구석에서 감탄하며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슈 린세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일본인들의 신상을 기억 속에서 탈탈 털어내고 있자니, 니시무라가 조용히 첨언했다.

"본명은 저우룬칭입니다."
"오, 맞아. 루이 이름을 일본에서 그렇게 읽는다며? ……아, 잠깐만. 너 언제 루이를 만났……."

고개를 든 옐리세이가 목격한 건 꽃바구니에서 꺼낸 것으로 보이는 루거 Mk.Ⅱ의 총구였다. 금속성의 빛을 띤 하얀 총신에 얹혀 있는 꽃잎의 아이러니함에 그는 실소했다.

"너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총 쏠 줄이나 아냐?"
"사람은 죽여 봤죠."

니시무라가 담담히 대꾸했다.

"전 대량 살인으로 일본에서 지명수배당해 있어요."
"대학생이라며?"
"거짓말입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의 주변에 일반인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괜스레 투덜거리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이 자식이 왜 갑자기 총을 들이민 것인지는 한가하게 이유 따위를 고민할 틈은 없었다. 자신은 무방비였고 놈은 무기가 있다. 옐리세이는 현실 하나만을 받아들였다.

손만 뻗으면 잡힐 만한 곳에 과도가 있다. 니시무라가 겨누고 있는 총은 22구경이니 급소에 맞지만 않는다면 얼마간 버틸 수는 있을 것이고, 병원 내이기도 하니 치료도 용이하였다.

상황을 타개할 묘수를 궁리하다, 문득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좋은 생각이 났다.





홍가에서는 며칠 내내 작탁에서 마작패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인원수가 맞지 않아 상대적으로 밋밋한 삼인장(세 명이 하는 마작)이 아니면 차이나타운까지 가서 마작을 할 수 있었던 홍가의 종업원들은 단 1국이라도 할 만한 틈만 나면 판을 벌였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터치하지 않는 홍위롄마저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는 잔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쌍둥이 형제는 장쯔궈가 말하였던 호구 저우룬칭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났다, 마작!"

제일 먼저 몸통과 머리를 맞춘 리뎬신이 승리 선언을 하며 마작패를 작탁에 좌르륵 눕혔다. 저우룬칭이 작탁의 중앙에 버린 패에서 주쒀를 집으며 아쉬워했다.

"이것만 가져오면 화료(마작에서 역이 완성되어 국을 종료하는 행위)였는데."
"패자의 비겁한 변명입니다."

장쯔궈가 지고도 킬킬 웃었다.

이번 국의 점수를 계산하니 저우룬칭이 2등이었다. 16국 내도록 한 번 1등하는 광경을 보기 힘든 저우룬칭으로서는 놀라운 성과였다. 사람이 마작운이 없으면 이렇게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쌍둥이 형제는 요 며칠 동안 실감했다. 심지어 그는 주사위를 던지는 운마저 없었다. 마작을 쌓은 벽의 시작 시점을 택하기 위한 주사위는 차치하더라도, 동(陳, 마작에서 주사위를 던지고 패를 선택하여 결정되는 최초 시작 자리)에 앉은 적마저 드물었다.

이만큼 운이 없다면 마작에 흥미를 잃을 법도 하건만 저우룬칭은 나름 즐기는 기색이었다. 마작패를 섞는 도중에 장쯔궈가 물었다.

"왠지 예전보다 실력이 떨어지신 것 같습니다?"
"네가 없으니까 마장까지 가지 않으면 나랑 마작하겠다는 사람이 없더라고. 그나마 없던 실력까지 녹슬었나 봐."

웃음소리와 함께 각자 차례대로 13개의 마작패를 가져갔다. 저우룬칭이 자신의 마작 패의 위치를 움직여 순서대로 정렬하였다. 홍가에 다시금 작탁에 마작패가 탁탁 놓이며 패를 부르는 소리가 섞이기 시작하였다.

휴일임에도 새벽부터 기상하여 一 심지어 가게를 열 때보다 더 이른 기상이었다 一 아침을 먹자마자 벌어졌던 마작판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무렵이 되어서야 중단되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홍위롄과 더불어 간소한 점심을 먹는 와중에 저우룬칭은 어제 레시피를 찾아두었던 간단한 러시아 요리를 만들었다.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려서 섹스는 했지만 정신이 드니 굉장히 쪽팔렸다. 덕택에 병원을 찾아가지 않은 게 이틀째다. 어쩌다가 다른 곳도 아닌 병실에서 섹스까지 하게 되었는지 아무리 돌이켜봐도 믿기지 않았다. 녀석의 망상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옐리세이가 조금만 더 똑똑했어도 그에게 최악을 강요하여 차악을 택하게 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다고 판단하였으리라

‘……아주 나쁜 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라도 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히죽거리며 올려다보다가 느닷없이 어깨를 밀치며 쓰러트려 허리에 올라앉아 체위를 바꾸더니, 벗지 않고 있던 티셔츠의 목깃을 멱살을 쥐듯이 붙잡아 게걸스럽게 키스하던 녀석이 꽤…….

돌이키기에도 무서운 병실 섹스를 무심코 상기한 저우룬칭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생각을 중단했다. 옐리세이에게 물들고 있는 걸까.

지금쯤 단단히 뿔이 났을 테니 먹을 걸로 우선 달래자는 속셈으로 블리느(러시아 요리. 크레페.)를 요리했다. 요리에 열중하며 잡념을 흩트렸다. 다진 고기와 야채 속을 넣어 말고 시식해 보았다. 원래 러시아 본토의 맛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나쁜 맛은 아니었다. 뭘 가져다주어도 녀석은 잘 먹을 것이다.

너도나도 마작을 하고 있으니 오랜만에 내켰는지 홍위롄도 재차 이어지는 마작판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운 작탁 아래며 의자 뒤편 등에 각자 헤이싱 한 정씩을 숨기고 있는 것을 확인한 저우룬칭은 안심하고 홍가를 나왔다. 니시무라도 세 명이 홍위롄의 곁을 지키고 있다면 쉬이 접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옐리세이의 표찰이 적힌 병실 앞에서 헛기침을 하고는, 부러 쾌활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어이, 백돼지. 네가 좋아하는 러시아 요리 가져 왔다."

만면으로 웃었던 결심이 무색하게도, 병실은 비어 있었다. 화장실을 노크해 봤지만 답은 없었다. 침대의 이불은 발치에 밀려 있었다. 답답해서 바깥에 바람이라도 쐬러 갔거나 다른 조직원들의 병실에라도 놀러갔으려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냉장고에 블리느를 넣었다. 못 보던 꽃바구니가 있는 걸 보니 누군가가 병문안을 왔던 듯했다. 꽃향기가 선연하니 달달하다.

뜻 없이 꽃향기를 맡아 보며 옐리세이를 찾으러 갈까,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까, 고민 하던 시야의 한구석을 이질적인 무언가가 자극하였다. 이유 없이 신경을 거슬리는 감각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이불이 젖혀 드러난 침대 시트 위에 떡메모지에서 뜯은 종이가 한 장 있었다.

저우룬칭은 반사적으로 종이를 들고 읽었다.

『シ ユ ウ さ ん 。 ろ こ で 待 つ て い ま す 。』

눈에 익은 필체다.
옐리세이가 사라졌다.
손아귀에서 종이가 사납게 구겨졌다.





실종된 사람을 찾을 때에는 우선 목격자부터 확보해야 함은 불문가지다. 급히 병실을 나온 저우룬칭은 옐리세이의 행적을 수소문하였고, 접수처의 간호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스터 슈이스끼요? 아까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일행과 함께 외출하시는 걸 봤습니다."
"……실례지만 일행이 누구인지는 아십니까?"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실수할 수도 있으니 조직의 유명한 간부들은 얼추 알지만, 일행은 낯선 얼굴이었어요. 참, 동양인 청년이었습니다. 현지인은 아니었으니 아마도 중국인이 아닐까 싶군요."
"키나 체격은 어땠습니까?"
"신장은… 미스터 슈이스끼와 비교해 봤을 때 170cm는 넘었을 정도? 적당히 호리호리 말랐고, 얼굴은 자세히 못 봤습니다."

그 외에 기억나는 게 없느냐 물어보니 간호사는 곰곰이 되새기다가 첨언하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바짝 붙어서 가시더라고요. 미스터 슈이스끼의 부상이 현재 부축이 필요할 정도는 아닌데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서 불편한 곳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에게서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는 듯하였다. 저우룬칭은 짤막하게 사의하고 자리를 비켰다. 신장이나 체격 조건은 니시무라와 일치하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접촉한 상태로 걸었다면 총이나 칼로 은밀히 위협을 당하고 있을 정황이 있다.

문제는 옐리세이가 멀쩡한 외견으로 고분고분히 니시무라의 위협에 응하여 병원을 빠져나갔다는 점이었다. 복부의 상처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싸우러 가겠다는 고집과 허세를 부리던, 그 옐리세이가?

"……."

아무리 궁리해 봐도 미심쩍었다.
묘한 의심이 새록새록 싹트기 시작했다. 병실로 돌아온 저우룬칭은 옷장을 열었다. 옐리세이의 부하가 아파트에서 가지고 온 슈트와 구두가 안 보였다. 병원복은 대충 구겨진 채 빈 옷장에 던져져 있었다. 병원복을 살펴보니 피가 튀긴 흔적은커녕 찢어진 곳도 없었다.

니시무라가 위협하는 앞에서 얌전히 옷을 갈아입고 졸졸졸 따라가는 옐리세이.

"……."

정말 상상 안 되는 그림이었다.
애초에 옐리세이를 위협한 사람이 니시무라가 맞긴 할까? 필체 따위야, 위조할 후도 있다. 왜 하필이면 니시무라의 필체를 위조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차치한다면 말이다.

근본적인 의심을 하게 된 저우룬칭은 일단 확인차 장쯔궈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기음은 20번 이상 이어지고서야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칭 형님?」

한창 마작을 하고 있는 중인지 장쯔궈의 목소리 뒤에 섞인 소음 사이로 "깡〜" 이라 말하는 홍위롄의 신난 목소리도 들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슈이스끼 놈의 병문안을 가신 게 아녔어요? ……아, 잠깐만. 나 전화 좀 하고」
"일전에 히데를 봤을 때 동행이 있었다고 했지?"
「……네」

장쯔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자리를 옮기는지 배경의 소음이 멀어졌다.

"동행이 누구였냐? 설마 슈이스끼는 아니었겠지?"
「……슈이스끼가 맞습니다. 시춘의 얼굴을 확인하고 바로 돌아 나와서 어째서 두 사람이 동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형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미간에 살짝 그늘이 생기긴 했지만 왜 옐리세이가 동행했다는 걸 알고도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책은 하지 않았다. 옐리세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장쯔궈의 입장을 알고 있을뿐더러, 니시무라가 어쩌다가 러시아 마피아와 어울리게 되었는지 저우룬칭 자신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건 돌아가서 얘기해 주마. 오늘은 조금 늦을 것 같으니까 누님께는 내색하지 말고."

정황은 여전히 아리송했지만 적어도 옐리세이와 나간 사람이 니시무라일 확률은 높은 듯하였다. 전화를 끊고 몸싸움을 한 흔적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병실을 살살이 뒤졌다. 바닥에 총알이 굴러다니지도 않았고 천장이나 벽에 탄착이 있지도 않았다.

역시, 이상하다.
의심이 차츰 확신이 되어가는 걸 느끼며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슈 상.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곳’은 또 어디란 말인가. 여기가 도쿄라면 니시무라와 자주 갔던 곳이나 특별한 기억이 있는 장소 등을 특정하고 목표를 좁힐 수 있었을 테지만, 이곳은 야이쑤코였 다. ‘그곳’ 은커녕 그는 야이쑤코 시내의 지리도 제대로 몰랐다. 그렇다고 다른 메모를 적은 종이가 발견되거나 뒷면에 위치가 적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종이를 태우거나 물에 적시면 다른 힌트가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추측마저 하며 이리저리 종이를 살피던 그는 햇빛이 투과되는 얇은 종이의 위에 무언가가 눌려 있는 흔적을 발견했다. 위에 글씨를 덧써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떡메모지의 바로 윗 페이지에서 글씨를 썼던 자국이 새겨진 것 같았다. 병실을 뒤질 때 목격하였던 것이 퍼뜩 떠오른 그는 쓰레기통을 거꾸로 뒤집었다. 싹싹 긁어 먹어 빈 아이스크림 통 안에서 구겨진 종이가 나왔다. 아이스크림이 손에 묻는 걸 개의치 않으며 종이를 폈다.

종이에는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シ ユ ウ さ ん 。 港 の 北 の 創ろ庫  で 待 つ て い ま す 。』

항구의 북쪽 창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니시무라는 ‘항구와 북쪽 창고’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내용을 썼다가 버리고 ‘그곳’ 이라고 수정한 듯하다.

너그럽게 해석하자면 메모를 적은 종이는 미리 준비해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버리고 새로 메모를 작성한다는, 참으로 빈틈이 많이 보이는 행동임에도 위협을 당한 게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옐리세이.

"……제기랄."

결국 욕이 나왔다.
확신하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하지만 일단 니시무라와 옐리세이가 같이 있는 건 확실하니 둘 중 한 명이든, 둘 다이든 일단 족치러 가기는 해야 한다.

저우룬칭은 무장을 점검하였다. 니시무라가 야이쑤코에 계류 중임을 알게 된 후로 외출할 때면 늘 꼬박꼬박 잊지 않는 헤이싱의 탄창은 꽉 차 있었다. 예비 탄창도 하나 있었다. 과장을 보태어 수류탄이 발에 차일 만큼 굴러다니는 동네이니 니시무라가 어느 정도의 무장을 하고 있을지 불분명했기 때문에 아까 병실을 뒤질 때 봐두었던 선반에서 옐리세이의 M29도 챙겼다. 꿩 대신 닭이라고 과도도 칼집째 뒤춤에 찔러 넣었다.

준비는 끝났다. 저우룬칭은 차를 몰아 동쪽 항으로 향했다. 일반 선박이 드나드는 북쪽 항을 뜻하는 건 아닐 터였다. 항구에 즐비한 컨테이너와 창고들이 저우룬칭을 반겼다. 이제 저 많은 창고들 중에서 니시무라와 옐리세이가 있는 창고를 찾아야 한다. 인부들이 드문드문 보이긴 했지만, 멘쇼프스카야의 간부를 고문하였을 때처럼 창고 내에서 총성이 난다 한들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최북단부터 뒤지기로 작심한 저우룬칭은 창고의 소유주가 중국인, 러시안, 맥시칸이 아닌 곳부터 하나씩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다.

옐리세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모르고 싶었다 一 니시무라는 그의 사람을 또 건드렸다.

드디어 결심이 섰다.





".......그래서, 잤어요?"
"잔 게 아냐. 자준 거지."

양손이 자유로웠으면 손사래라도 쳤을 법한 태도로 옐리세이가 으스댔다.

"오빠는 성욕만 충족시키면 땡인 짐승 같은 섹스는 원하지 않는 그런 매너 있는 남자거든? 뭐랄까, 섹스를 할 때는 역시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충족되어야 하잖냐? 그래서 루이에게 말했지. 네가 날 좋아해서 나 없이는 살지 못하겠다는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금 더 사귄 후에 섹스를 하자고 했지."

떠벌리는 와중에도 의자 등받이 뒤에 결박된 손목을 슬쩍슬쩍 당겨 보았지만 수갑이 채워진데다 팔뚝까지 등받이에 묶은 밧줄은 지나치게 튼튼했다. 수갑은 옛날에 체포되었을 때 이후로는 처음인데. 아, 수갑 플레이. 좋지. 저우룬칭에게 수갑도 채워 보고 싶다. 아주 꼼짝도 못 하도록 침대에 꽁꽁 묶어서.

"차분히 타일렀는데도 루이가 자꾸 섹스를 조르더라고. 어쩌겠냐.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자줄 수밖에. 그 자식이 나보다 못생기긴 했지만 엉덩이는 최고로 예쁘잖냐?"
"네에......."
"휴. 영상이라도 찍어 놨으면 너한테도 보여주는 건데. 루이가 침대에서 얼마나 예쁘게 울면서 허리 흔드는지 아냐? 내 밑에 깔려서 더 박아 달라고 질질 싸고 적시면서 앙앙 우는 그 모습이,"

타앙ㅡ!

예고도 없이 총이 발사되었다. 옐리세이는 신나게 나불거리던 입을 어마뜨거라 황황히 다물었다. 총소리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총알이 격중한 곳이 문제였다.

총알은 그의 사타구니로부터 정확히 5cm 앞의 의자 밑판을 뚫고 창고 바닥에 박혔다.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권총을 루거 Mk. II 에서 헤이싱으로 바꿔 든 니시무라가 평연히 물었다.

"저기, 옐리세이. 제가 도쿄에 있을 때 슈 상의 여자를 어떻게 고문하고 죽였는지 설명해 줬던가요?"
".......안 들어도 알 것 같다."

옐리세이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자신의 빅 매그넘을 지키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난 네 절박함을 십분 이해한다니까? 봐, 안 그러면 이렇게 얌전히 반항도 없이 따라 왔겠냐? 메모를 수정하라는 친절한 충고까지 해 줬잖아. 그 자식은 ........너에게 안달이 나서 쫓아와야 할 필요성이 있어."

하마터면 '나에게'라고 말할 뻔한 그는 얼른 말을 수습했다. 니시무라가 여전히 총구를 그의 다리 사이에 겨누어 오싹오싹한 분위기를 조성한 채로 말했다.

"그런 부실한 메모로 슈 상이 오늘 안에 이곳까지 찾아올 수나 있을까요? 전 딱히 안달이 난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닙니다."
"급한 놈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쫓아오게 되어 있지."
"뭐, 상관없어요. 해가 저물 때까지만 기다려 볼게요."

해가 지면 뭘 할 작정인지는 그다지 묻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옐리세이는 수갑을 찬 손을 덜그럭거리면서 저우룬칭에게 빨리 좀 오라는 텔레파시를 열심히 보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거른 채다.

"야, 니시무라. 항구 밑에 편의점이 있는데 뭐라도 먹고 기다리면 안 될까? 이러다가 루이인지 슈인지 오기 전에 굶어죽게 생겼다고."
"꽃바구니랑 아이스크림 산다고 현금을 다 썼습니다."
"나 지갑 있어."
"누가 먹을 걸 사오는데요?"
"........"

명색이 인질인 자신과 납치범인 니시무라 중 한 명만 따로 움직이기도 그렇고, 둘 다 움직였다가 혹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저우룬칭이 허탕이라도 치고 가면 곤란하다. 옐리세이는 올라오면서 편의점을 지나친 자신의 과거를 책망하며 침만 삼켰다.

‘배고파. 루이가 해 주는 밥이 먹고 싶다아.......’

지난번에 저우룬칭의 과거를 들었을 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 두 사람이 어쩌다 알게 되었는지를 니시무라에게 짧게나마 들어 보니 저우룬칭은 일본 체류 경험도 몇 년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 요리도 잘할 것이다. 일식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저우룬칭이 해 준 요리와, 앞으로 저우룬칭이 해 줄 요리를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되새기다 보니 배가 더 고프다는 단점이 있음에도 시간은 잘 흘러갔다.

텔레파시는 빨리 와서 밥을 해 달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꾼 텔레파시는 효과가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언제 열릴까 목이 빠지랴 기다리던 창고의 문이 쾅 젖혀지며 외부로부터의 빛이 쏟아졌다. 비스듬히 역광을 등에 진 저우룬칭의 총구가 정확히 니시무라를 겨누었다.

"썅."

옐리세이는 머리를 기웃거리며 저우룬칭을 자세히 보려고 애썼지만 역광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서 애가 타고 있는 얼굴을 꼭 봐야 하는데.

창고의 문이 젖혀진 순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왼손의 권총으로는 옐리세이를, 오른 손의 권총으로는 저우룬칭을 겨냥한 니시무라가 먼저 인사했다.

"홍콩에서는 얼굴을 못 뵈었지요. 잘 지내셨어요?"

저우룬칭은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건네는 듯 평화로운 인사가 마뜩잖아 인상을 찌푸렸다.

"잘 지냈을 것 같냐."

한편으로는 빠르게 창고를 훑으며 내부를 파악하였다. 제일 먼저 확인한 옐리세이는 의자에 묶여 있기만 할 뿐 멀쩡해 보였다. 심지어 들뜬 표정이기까지 하였다.......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일단 무사하긴 하니 뒤로 미뤄두고 니시무라에게 의식을 집중하였다. 그렇지만 저우룬칭의 다짐은 몇 초 지속되지 못하였다.

"슈 상. 당신이 옐리세이에게 깔려서 앙앙 울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저우룬칭은 하마터면 총을 떨어트릴 뻔하였다.

"……옐리세이가 그러던?"
"네."
"……."

대치중인 상황이다. 대치중인 상황이다. 대치중인 상황이다. 연거푸 되뇌면서 진정하려고 노력하던 그는 결국 실패하고 살벌하게 내쏘았다.

"야. 백돼지. 내 앞에서 다시 말해 봐."

팝콘이라도 있었다면 열심히 퍼먹으며 구경하였을 법한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근거리던 옐리세이가 멈칫했지만, 이내 뻔뻔하게 대꾸했다.

"내가 네 위에 올라탄 건 맞잖냐. 멀리 회상할 것도 없이 엊그제 병실을 떠올려 보라고,"
"썩을 놈아!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내 허리 위에 올라타서 요분질을 한 거잖아! 너 설마 밖에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 아니, 그전에 납치당한 새끼가 납치범과 섹스 얘기를 왜 해!!"
"으응? 나 러시아 사람. 돈 벌러 북쪽에서 왔어. 영어 몰라. 무엇, 요분질? 영어는 어렵다해. 러시아 추워. 여기 더워. 눈은 오지 않는 것? 엄마, 보고 싶어요."
"……."

뒷골이 땅겼다.

"난 돌아갈 테니까 둘이 알아서 잘 해결해라."

그러며 정말 한 걸음씩 뒷걸음질을 치자 옐리세이가 빽 소리쳤다.

"야! 오빠는 지금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 위험한 상황이거든?"
"나도 홍콩 사람이라 영어 몰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으니까 두 분 다 조용히 해 주세요."

타앙. 총성이 또 한 차례 창고를 울렸다. 옐리세이는 나란히 의자 밑판을 관통한 두 개의 총알에 뜨끔하여 조용해졌다. 이 새끼는 왜 자꾸 언젠가 루이의 처녀를 따먹어야 할 내 금쪽같은 빅 매그넘을 노리고 지랄인지. 입속으로 투덜투덜 불만을 중얼거리긴 했지만, 저우룬칭의 종구는 창고에 난입하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니시무라의 얼굴에서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저우룬칭은 광둥어로 대화할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일본어로 말문을 열었다. 혹여 옐리세이가 광둥어로 하는 대화의 몇 토막이라도 기억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야이쑤코에 중국인은 많아도 일본인은 드물다.

"히데. 왜 옐리세이였냐?"

옐리세이가 총격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는 반대쪽 방향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느릿느릿 발을 움직였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듯 니시무라는 자신도 간격을 유지하며 옐리세이를 위협하고 있던 왼손의 헤이싱까지 저우룬칭을 겨냥했다.

"순서를 정했어요. 우선 당신이 자주 말했던 코 교쿠롄(홍위롄의 일본어 발음)부터 시작하려고 야이쑤코로 왔습니다. 얼마 뒤에 당신까지 야이쑤코에 정착하고, 웬 러시아 마피아의 소문이 돌지 않았다면 코를 정리하는 데에 올해를 넘기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내 주변의 사람을 전부 죽이겠다는 뜻인가?"
"전부는 아닙니다. 당신을 방해하는 사람들만 정리할 예정이었어요. 코, 그 호스티스는 어렸을 때부터 당신을 속박하는 짐이었잖아요."
"누님은 내 가족이야."

니시무라가 담담히 빙긋거렸다.

"슈 상은 여전히 상냥하시네요. 인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가족이 바로 짐이에요. 당신이 평생 뒤따를 것이라 하였던 그 남자도, 암살당하지만 않았다면 제가 정리사였을텐데."

저우룬칭의 어금니가 으득 맞물렸다

그리고 옐리세이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야쿠자 영화를 종종 봐서 이놈들이 솰라솰라 주절거리고 있는 말이 일본어라는 것 정도는 알겠는데 대화의 내용은 하나도 파악되지 않았다. 그는 발을 탕탕 굴렸다.

"아오! 야이 무식한 새끼들아! 만국 공용어가 뭔지 모르냐? 영어로 말해, 영어로! 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나도 좀 알자!! 씨발, 일본어 안다고 유세냐?! 그깟 아시아 구석탱이의 일본어보다 러시아어 쓰는 인구가 더 많아!! 더럽고 치사한 새끼들!!"

당연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지 못하고 답답해하도록 일본어로 얘기하고 있는 저우룬칭은 그의 짜증을 무시하며 일본어로 대화를 계속하였다. 자신이 이미 옐리세이를 내 사람이라는 영역에 넣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콧대가 하늘로 치솟을 것이다.

".......차라리 날 건드렸으면 괜찮아. 치샹을 죽였을 때도 너에게 복수하겠다는 결심은 하지 않았다. 치샹은 내 여자였지만, 넌 내 동생이었어, 히데. 근본적인 문제와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여겼지. 하지만 두 번째는 안 돼. 널 용서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나에게 뭘 원하는 거냐?"

니시무라가 희미하게 미소하였다.

"저도 그게 궁금해요."

그리고 트리거에 걸려 있던 손가락이 움직였다. 저우룬칭이 허리를 숙이고 빠르게 몸을 달려 피하며 총구를 올렸다.
한 쌍의 총성이 옛 인연을 청산하는 시발이자 종극처럼 치솟았다.





옐리세이는 조금 서러웠다. 왜 저 망할 놈들은 누가 전직 마피아들이 아니랄까봐 선량한 인질을 풀어줄 생각도 않으며 총질부터 하는 걸까. 저우룬칭이 자리를 옮겨서 자신이 결박되어 있는 위치가 총격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철골에 빗맞아 튕긴 유탄이 날아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는 소중한 빅 매그넘을 지켜야 했다.

몸을 뒤틀었지만 밧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으로 푸는 걸 포기하고 의자를 넘어뜨렸다. 의자와 함께 바닥에 고꾸라지며 부딪힌 어깨가 좀 아프긴 했지만 상체를 크게 움직이며 다리로 의자를 밀어냈다. 바닥의 흙먼지를 온몸으로 쓸며 얼마간 꿈지럭거리고 나서야 겨우 등받이가 밧줄 밑으로 밀려 나왔다. 일단 한 단계는 넘었다. 옐리세이는 총알이 날아오기 전에 얼른 미리 봐두었던 드럼통들 뒤로 후다닥 뛰어갔다.

드럼통은 사람 한 명을 넣고 콘크리트를 굳혀 바다에 던지기에 딱 적당한 크기였다. 경험상 그다지 효율적인 시체 처리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위협하여 윽박지르기에는 좋은 방법이다. 어쨌든 안전하게 몸을 숨기며 총격전을 구경하기에는 적절한 크기였다.

등 뒤 수갑에 결박된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보았다. 철사 비슷한 기다랗고 얇은 금속이 집혔다. 철사를 열쇠 구멍에 넣고 달그락거리고 있자니 좀 짜증이 났다. 양아치 새끼도 아니고 이게 무슨.

정말 경찰들이 사용하는 수갑이었다면 못 풀었을 테지만, 성인용품판매점에서 적당히 구해 온 듯한 허술한 수갑은 간간이 울리는 총성을 노동요로 삼아 끙끙거리자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풀렸다.

"더럽게 꽁꽁 묶어 놨네."

옐리세이는 투덜거렸다. 이제 남은 건 팔뚝과 몸통을 묶은 밧줄이었다. 벽이나 창틀의 깨진 부분을 찾아서 뾰족한 곳에 문지르며 잘라야 하는 건 아닌지 막막하게 연장만 찾고 있자니 언제 가까이 다가왔는지 저우룬칭의 목소리가 들렸다.

"옐리세이. 받아."

그는 옆으로 줄지어 선 트럼통 끄트머리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살짝 내밀어 니시무라의 기척을 살피면서 나이프 하나를 휙 던졌다. 보지도 않고 던진 나이프가 옐리세이의 발 언저리에 떨어졌다. 병실에 있던 과도였다.

과도는 또 언제 가져왔느냐고 묻기도 전에 저우룬칭은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니시무라와의 거리를 좁혔다. 탕. 탕. 탕! 달음박질하는 걸음 옆으로 탄환이 튀었다.

"흐흥."

웃음이 히죽 나왔다. 그러니까, 일부러 과도를 주려고 왔단 말이지.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마음으로 과도를 집어 들고는 또 열심히 밧줄을 잘랐다. 저우룬칭은 이제 상자 뒤에 비스듬히 은신해 있었다. 먹이를 사냥하기 위하여 웅크린 야수 같다.

당장에라도 튀어나갈 수 있도록 전신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굳은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는 그의 옆모습은, 지금 바로 쓰러트리고 올라타고 싶을 만큼 섹시했다. 특히 단단히 다운 입매로부터 목을 지나 셔츠 안쪽의 쇄골까지 떨어지는 턱 선이. 멘쇼프스카야와의 항쟁에서 종횡무진 활약하였던 역동적인 감각과는 다른 정적인 예리함이 공기를 꽉 옥죄며 자신의 심장까지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요리할 때의 모습도 좋지만, 역시 이렇게 수컷 냄새 풍기는 게 제일 맛있게 보인다.

저우룬칭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이자 옐리세이의 목 안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정작 총질하고 있는 건 저우룬칭인데 자신까지 흥분한다. 격한 아드레날린의 분비 속에 부지런히 과도를 움직였다. 저우룬칭이 지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이도 탄탄한 믿음이 있었지만 혹시 모를 여차한 순간에 돕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운신이 자유로워야했다.

대치가 길어지며 총성이 잦아들었다.

"슈 상. 총격전, 특히 일대일로 싸울 때에는 상대방의 탄환이 몇 발이나 남았는지도 헤아리라고 가르쳐 주셨죠?"
".......아, 그랬지."
"헤이싱의 탄창은 8발. 도중에 한 번 탄창을 갈았으니 예비 탄창이 더 없다면 2발이 남으셨겠네요. 예비 탄창은 더 있으세요?"
"글쎄."

저우룬칭은 말끝을 흐리며 니시무라의 기색을 살폈다. 애매한 대꾸였지만, 니시무라에게는 애초 그의 대답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던 듯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

"당신은 사격에 자신이 있으니까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예비 탄창은 둘 이상 들고 다니지 않잖아요. 혼자 오신 걸 보니 홍가에 들르지도 않으신 것 같고요, 맞죠?"

니시무라의 판단은 정확하였다. 저우룬칭은 손바닥의 땀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고 탄환이 두 알밖에 남지 않은 헤이싱을 고쳐 쥐었다.

"네가 몇 시까지 오라는 말을 해 줬다면 넉넉히 홍가에 들렀다가 왔겠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무 불친절한 메모였어."
"절반은 옐리세이의 작품이었습니다."

고개를 살짝 들었다. 또다시 일본어가 오고 가기 시작하자 온갖 인상을 다 쓰고 있는 옐리세이의 얼굴이 곁눈으로 보였다. 납치되는 주제에 오히려 일을 더 꼬았다니, 망할 멧돼지 같으니라고.

"또 하나 더 가르쳐주신 게 있잖아요. 주의는 과하여도 부족할 게 없으니 먼저 함정을 파고 기다릴 때에는 무기를 여유 있게 숨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셨죠. 그래서 퀴즈. 제가 총과 탄창을 몇 개 준비해 두었을 것 같으세요?"

학습의 결과를 선생에게 자랑하는 아이 같기도 하고, 몰아세우며 조롱하는 뉘앙스인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니시무라를 방심시켜 모습을 드러내게 해야 했으므로 저우룬칭은 대답을 계속하였다.

"내 머리에 명중시킬 개수로는 충분하겠지."

가성 같은 흐린 웃음소리가 이리저리 쌓인 상자 건너편에서 들려 왔다. 이렇게 상자며 기물을 쌓아 엄폐하기 쉽도록 대결 장소를 연출한 것도 아마 니시무라의 작품일 것이다.

"저도 헤이싱을 갖고 있으니까요, 먼저 탄창을 발견하면 당신의 승리예요."
"고마운 일이군."

이래서 자신의 습관이며 행동 패턴을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과 상대하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지난하다. 헤이싱의 탄창은 크지 않다. 마음만 먹는다면 곳곳에 숨길 장소는 많았다. 벽 구석, 창틀 아래의 그늘, 화분 뒤쪽, 구멍 뚫린 상자의 밑바닥. 창고인지라 광도가 낮으니 바닥에 잡동사니처럼 굴려 놓아도 금방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예비 탄창을 숨겨 놓았을 곳은 어디쯤일까.

니시무라가 그를 잘 안다는 것은, 그 역시 니시무라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과 상통했다. 저우룬칭은 남은 두 발 중 한 발을 상자 너머로 힐끗힐끗 보이는 니시무라의 머리에 위협사격을 가한 후 몸이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 않으며 두툼히 쌓인 포대 뒤로 달려갔다. 니시무라가 쏜 탄환이 포대에 퍽퍽 박히며 흰 가루 같은 것이 흩날렸다. 손만 포대 위쪽으로 올려 방금 탄환이 내쏘아진 방향으로 마지막 탄환을 쏘았다. 저우룬칭은 오른손을 포대 사이로 밀어 넣었다. 있다. 딱딱한 금속의 질감이 손끝에 감지되었다.

"론."

니시무라의 총구가 10m 앞에 있었다. 탄창을 쥔 손을 조금씩 밖으로 빼내며 왼손은 비스듬히 등 뒤로 늘어뜨렸다. 애초에 니시무라를 상대하면서 상처 하나 없이 이길 수 있으리란 여유는 갖지 않았다.

니시무라가 자신이 한 말을 한 번 입에서 되뇌는 듯하더니, 갸웃하며 물었다.

"마작에서 체크메이트랑 비슷한 상황에 말하는 거 맞죠? 전 도박은 영 별로라."
"비슷해. 나와는 인연이 없긴 하지만."
"여전히 마작 운은 안 좋으세요?"
"마작사로 먹고 살 팔자는 안 되는 것 같아."

대화중에도 오른쪽 팔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게 고정되어 있던 니시무라의 눈동자가 아주 약간, 오른쪽 팔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동시에 저우룬칭은 왼손에 쥐고 있던 헤이싱을 떨어트리며 M29를 쥐었다.

한 쌍의 총구가 서로 마주 보고, 격발하였다.





총성이 아닌, 폭발음과 비명성이 공기를 한바탕 들썩였다. 트리거를 당기기 직전에 총구로 날아와 박힌 나이프로 총이 폭발하고 저우룬칭의 총알이 격중한 니시무라의 오른쪽 팔은 피투성이었다.

"헉."

언제 그의 등 뒤로 몰래 움직였는지, 본인이 던지고 본인이 제일 놀란 것 같은 옐리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총구에 딱 명중했지? 나가서 바로 로또 사야겠다."

끝나면 칭찬의 키스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차 트리거를 당겼다. 막 왼손에 쥐고 있는 총을 올리려던 니시무라의 왼쪽 어깨와 팔뚝을 묵직한 44구경의 총알이 관통하였다. 세 번째 발사음은 그의 복부를 헤집어 내장을 찢으며 등을 뚫었다.

"크헉, 컥!!!"

피를 쏟으며 휘청거리는 니시무라의 복부를 걷어찼다. 바닥에 고꾸라진 니시무라의 몸이 쇼크로 인해 간헐적으로 경련하였다. 저우룬칭은 가슴팍을 지그시 발로 밟으며 총을 겨누었다. 니시무라가 핏물을 쿨럭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구경 큰 거, 백업 총, 안 좋아........ 하시잖아, 요."

어깨를 으쓱했다.

"옐리세이 총이야."

허탈한 것 같은 얼굴로 그가 숨을 끅끅 몰아쉬었다. 이대로 방치하고 돌아가도 니시무라는 죽을 것이다. 그에게 닥친 죽음은 시간문제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저우룬칭은 겨냥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히데. 너도 삼합회와 교제하였으니 잘 알지? 나 같은 홍콩인은 물론이고 본토인, 대만인, 모든 중국인의 공통점을 말이야."

니시무라가 씩씩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 맞다. 아주 확실하고 철저하고 깔끔한 복수지. 우리는 일본 야쿠자처럼 맹탕이 아니야. 네 어머니와 누나와 조카들까지 모두 죽여주마. 먼저 가서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어라."

짓밟히어 눌린 가슴이 격하게 경련하였다. 환한 웃음소리가 발작적인 기침에 섞여 핏물과 함께 터졌다.

"봐요....... 당, 신은 언제나 제가, 워, 원하는........ 것을 주, 주잖....... 아요."
"잘 가라."

타앙. 탕!

힘없이 늘어져 있던 니시무라의 육체가 반동으로 펄떡 뛰었다. 그리고 잠잠해졌다.

저우룬칭은 한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내렸다. 이제야 초연과 피 냄새가 뒤섞인 비릿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깨가 뻐근하였다. 공기가 너무 무겁다.

"안 다쳤냐?"

옐리세이의 목소리였다. 저우룬칭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한 차례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창고를 비추는 흐린 광원으로도 앞이 선명하게 보인다.

고개를 숙이니 붉고 질척하게 고인 핏물을 밟고 있는 스니커즈가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그의 현재였다.
가족을, 그리고 현재를 지켜 냈다.

저우룬칭은 몸을 뒤로 돌렸다. 스니커즈가 점점이 옅어지는 핏물의 흔적을 바닥에 남기며 앞으로, 옐리세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얼른 오빠의 넓은 가슴에 몸을 던지라며 양팔을 벌리고 미소하는 옐리세이에게 안길 듯이 걸어가, 복부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컥!!!"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옐리세이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허리를 꺾었다. 웅크린 등이 부들부들 경련하였다. 상처를 피해서 때리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아플 것이다. 저우룬칭은 그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지칭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빌어먹을 명기 새끼. 너 일부러 잡혔지? 어?"
"이, 씹.......!"
"정신머리가 붙어 있긴 하냐? 내가 제시간에 못 왔으면, 내가 당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넙죽 따라가서 시시덕거리고 있냐? 너도 뱃가죽에 칼로 글씨 새겨지고 싶어? 오늘부터 별명을 멧돼지가 아니라 광돈으로 바꿔. 미친놈아."
"씨발. 아무리 그래도, 환자를 때리냐!"
"내가 얼마나 놀라고 걱.......!"

뺀질뺀질하게 웃는 낯을 보자 항구로 오는 동안, 창고를 뒤지는 동안 벼르고 별렀던 울화가 왈칵 치솟아 옐리세이를 닦아세우던 저우룬칭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화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반토막이나마 밖으로 나온 후였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노려보던 옐리세이의 표정이 차츰 음흉해졌다.

"오구오구. 오빠가 걱정됐쩌요?"
"……젠장."
"내가 납치된 거 알고 엄청나게 쫄았지? 심장이 무지막지하게 펄떡거리면서 난리 치지 않았냐? 두 번 다시 날 못 보면 어떡하나, 나 없이는 못 살 텐데 어떡하나, 걱정돼서 미치는 줄 알았지?"
"……."
"새끼야. 그게 바로 아마르야."

득의만면한 옐리세이의 콧대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치솟았다. 저우룬칭은 단호한 부정으로 그 콧대를 꺾었다.

"키우던 개가 납치당해도 걱정은 되지."
"야. 내가 개냐?"
"넌 돼지고."
"흥."

그렇지만 옐리세이의 의기양양함은 여전히 굳건했다. 그는 가차없이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다음에 내가 또 납치당해서 후회해도 늦었어."
"그래라. 간섭 안 할 테니까 납치범과 마음껏 놀아."

손을 휘휘 내젓자 옐리세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넌 어떻게 된 새끼가 한마디도 안 지려고 그래? 순순히 인정하면 누가 와서 혀라도 잡아 뽑냐? 엉?"

몹시 담배를 피우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저우룬칭은 오히려 되물었다.

"나도 하나만 묻자. 접때 아빠랑 엄마랑 형이랑 ㅡ그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하며 말하였다ㅡ 사진 찍은 걸 봤을 때 말하다 말고 도망간 적 있었잖아. 넌 뭐라고 하려고 했던 건데?"
"........쓸데없이 기억력 좋은 새끼 같으니."

옐리세이가 혼잣말로 투덜거리다, 내처 말했다.

"내가 대답하면 너도 인정하는 거냐?"
"들어보고."
"쳇."

러시아어로 무언가 욕설을 웅얼거리더니 심호흡을 크게 하였다. 입술 사이로 나오는 목소리는 미미한 열기로 살짝 떨렸다.

"그러니까, 네가 첫사랑과 닮았다는 건 욕이 아냐. 좋아하는 게, 맞아. ........라고 대답하려고 했었다. 됐냐?"

저우룬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됐어."

그러며 뺨을 긁적거리고 있는 옐리세이의 앞을 지나쳐 창고를 나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지나쳐간 탓에 그를 붙잡을 기회를 놓친 옐리세이가 잠시 뒤에야 화를 냈다.

"야!! 너도 인정한다며?! 빨리 불어!!"
"내가 언제."
"씨발년!!"

길길이 날뛰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은 몸으로는 뛰어올 수도 없었다. 어기적거리며 굼뜬 걸음을 옮기는 옐리세이를 뒤에 남겨두고 전화를 걸었다.

"룽 형.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시체를 처리해 주었으면 하는데......."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전화하지?」
"일전에 말했던 그 일본인을 죽였어. 롄 누님은 이제 안전하셔."
「.......부탁 들어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툴툴거리는 광룽에게 창고의 위치와 번호를 불러주었다.

통화가 끝나고도 계속 전화를 하는 척 귓가에 휴대폰을 댄 채 서 있었다. 옐리세이의 구시렁거림이 차츰 가까워졌다.





- 끝. 357페이지 -





EPILOGUE  (358〜362)





몰래 들어오려고 했지만 옷도 더러워졌고 간호사에게 말도 없이 병실을 비웠으니 들통이 안 날리는 없었다. 병원을 탈주하였다고 담당자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표정이 썩어가는 옐리세이를 남겨두고 인적이 드문 뒤편의 계단으로 나왔다.

국제 전화 발신음이 뚜뚜 이어졌다. 마른침으로 입술을 적셨다.

"제 형님. 저 룬칭입니다."
「오. 룬칭이냐? 하하하. 살아있었구만. 롄 누님은 잘 계시고?」

송의방의 일본 지부 두목인 쉐러제가 반가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야이쑤코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린 후 오랜만에 갖게 된 연락이라 안부를 주고받았다. 몇 마디 근황을 나누는 인사가 오가고, 저우룬칭은 용건을 꺼냈다.

"방금 시춘을 죽이고 오는 길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쉐러제의 놀란 침음 소리가 들렸다. 그가 몇 호흡 뒤에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새끼가 타이까지 쫓아갔었냐?」
"롄 누님을 해치려고 왔다더군요. 누님은 무사하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춘이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했어요. 그래서 형님, 시춘이 죽기 전에 가족의 신상을 알아냈습니다."

3년 전에 이미 니시무라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니시무라가 장치샹을 살해하고 조직의 거래를 그르게 할 뻔하였어도 침묵하였던 사실을 밝히며 약간의 거짓말을 섞었다.

"시춘도 3년 전까지의 행적만 알고 있더군요. 편모슬하에 누나가 한 명 있습니다. 어머니의 처녀 때 성을 쓰고 있어서 본명은 일본어로 센다 히데아키입니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이름은 센다 미치코, 2살 터울의 누나는 센다 치에, 17년 전에 사망 한 어머니의 마지막 재혼 상대의 이름은 센타 타케시입니다."

받아 적는 쉐러제에게 세 사람의 이름 한자를 차례대로 불러주었다.

"적어도 3년 전까지 두 사람은 첸예(일본 치바 현의 중국어 발음.)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름과 같은 미치코라는 스낵바를 경영하고 있고, 누나 쪽은 술집을 전전하는 호스티스입니다. 최근에 있던 가게는 캬바쿠라 '미라클 진'이고요. 미혼으로 연년생의 남매를 낳았습니다. 큰애가 올해로 7살쯤 되는 여자앱니다."
「좋아. 우지이에 놈들도 알아내지 못했던 그 새끼의 가족 사항을 용케도 알아냈구나. 첸예라니 의외로 가까운 곳이었어」

쉐러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며칠만 기다려라. 늙은 년은 죽이고, 젊은 년은 약에 절여서 동남아에 팔아치우마. 애새끼들도 환장해서 달려들 놈들이 많지.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되나?」
"네. 제 개인 휴대폰입니다."
「이제야 제대로 갚아줄 수 있게 되었구만. 3년 내내 뒤를 안 닦고 나온 기분이었다니까. 잘했다, 아주 잘했어. 룬칭」

크게 흡족해하는 쉐러제의 웃음을 뒤로 남기고 병실로 돌아갔지만 의사의 잔소리는 현재진행형이었으므로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무심코 담배를 꺼내어 간호사에게 지적당하였다.

부하들을 다그치며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였는지 옐리세이가 퇴원하기 전날인, 겨우 이틀 후에 쉐러제로부터 연락이 왔다. 니시무라의 가족은 3년 전에 모두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쯧. 이웃이 범인을 목격했는데 인상착의가 시춘 새끼야. 온 방을 피 칠갑으로 만들면서 죄 난도질하여 죽였다는군. 유출한 사진을 봤는데 천장까지 피가 튀었어. 유일한 생존자가 당시 3살짜리 사내애인데, 이 애새끼가 사건 후에 보내진 고아원마저 1년 후에 불이 나서 서류는 말소되고 애들은 각기 다른 고아원으로 찢어져서 소식이 끊겼다」
"........시춘이 도쿄에서 사달을 일으킨 후입니까?"
「그래. 바로 당일 새벽이야. 쿠라다 구미 몰살 뉴스가 워낙에 크게 나서 센다 일가 살해 소식은 묻혔더라고」
"그랬군요......."
「영 찝찝한 마무리이긴 하다만 시춘 새끼라도 죽여서 잘됐다. ........씨발, 그 미친 새끼 눈이 확 돌아가 있는 걸 진즉이 알아챘어야 했는데」

못내 마뜩찮아 하였으나 해결이 되었다는 점만큼은 그럭저럭 개운한 기색이었다. 쉐러제와 통화를 끝내고도 저우룬칭은 바로 걸음을 떼지 않고 계단참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병실로 돌아갔다.

옐리세이는 병실을 나갔을 때와 전혀 변함이 없어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TV를 보고 있었다. 감자칩은 언제 다 먹어치웠는지 새 과자 봉지를 뜯어서 냠냠거렸다. 변함없는 그를 보니 니시무라를 죽인 후 내도록 씁쓸하게 고여 있던 멍울 같은 것이 어느 정도 희석되며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분명히 입원 기간 중에 살이 쪘을 것이다. 저러다가 멧돼지가 아니라 그냥 돼지가 되겠군. 해달라는 음식을 해다 먹이며 그의 체중 증가에 아주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저우룬칭은 소화 안 되니 앉아서 먹으라며 등짝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우리 엄마도 안 했던 잔소리를 네가 왜 해?"

군소리는 했지만 엎드린 몸을 일으켜 앉기는 했다.

"옐리세이."
"엉."
"실은 네 퇴원 선물로 좋은 소식을 하나 주려고 했거든. 니시무라와 엮이게 된 건 내 책임이 맞으니까."
"왜 불길하게 과거형이냐. 얼른 내놔."

돈 떼먹은 빚쟁이를 상대하는 듯한 태도로 옐리세이는 손바닥을 내밀었고, 저우룬칭은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손바닥을 탁 쳐냈다. 옐리세이의 눈썹이 실룩거렸지만 못 본 체했다.

"대신에 다른 걸 주마.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 봐."
"처,"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즉답이 튀어나왔고, 저우룬칭은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뒤 대주는 건 빼고."
"야비한 새끼."

또 기회를 놓친 옐리세이가 사납게 노려보았다. 두 번째 답도 금방 나왔다.

"한 달 동안 내 노예나 해라."
"기각."
"야! 네가 소원 들어준다며!!"
"한 달은 너무 길잖아. 하루는 어떠냐?"
"뚫린 입이라고 지랄한다. 한 달!"
"하루."
"한 달!"
"이틀."
"한 달!"
"흥정할 줄 모르는군, 하루."

TV 소리마저 지워가며 옥신각신하던 흥정의 마무리는 저우룬칭이 하였다.

"옐랴. 일주일이면 되겠지?"

옐랴.

주로 가족이 불렀던, 14살이 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물리도록 들었던 애칭이다. 오랜만에 듣는 애칭이었으나, 애칭으로 호명된다는 사실 자체가 새삼스러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도 내켜하지 않았던 저우룬칭이 그때 단 한 번 말하였던 자신의 애칭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 애칭으로 자신을 불렀다는 것에 놀라 멍하니 대답했다.

"어, 어...... 어어......."

쿵쿵쿵.
심장이 또 두근거렸다.

보기 좋게 넘어갔다는 걸 깨달은 건 싱긋 웃는 저우룬칭의 표정을 보고 난 후였다.

".......아아악!! 저 새끼 아가리를 꿰매어 버릴 수도 없고!!"
"무르기는 없다."
"이익!!"
"주인님. 됐나?"

주인님. 그 달콤한 울림에 하마터면 혹할 뻔하였으나 파르르 어깨를 떨며 얼른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안 돼, 안 돼. 오늘은 다 지나갔으니까 내일부터 계산해! 정확히....... 어, 24 곱하기 7이 뭐더라?"
"148."
"정확히 148시간 동안 널 부려먹어 줄 테니까!"

저우룬칭이 재차 확인하였다.

"148시간이라고 했지?"
"그래. 14....... 잠깐 기다려 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손바닥에 숫자를 써서 곱하기를 한 옐리세이가 입으로 불을 내뿜었다.

"씨발! 168이잖아!! 방심을 못 해!"
"학습 능력은 있군."
"너한테 한두 번 속았냐!!"
"옐랴. 이따 간식으로 야참은 뭐 먹을래?"
"블리느. 엊그제 만든 거 맛있....... 제기랄!"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대답에 옐리세이는 괴로워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먹을 것으로 길들여지고 있다는 자각은 아직 없었다.

이렇게 된 것 먹을 것이나 잔뜩 뜯어내고 말겠다는 비장한 결심 속에 외쳤다.

"잼이랑 크림도 같이 가져와!"
"알았다."
"그리고 내일 퇴원하고 먹게 할라데쯔(러시아 요리. 육수를 굳혀 만든 고기 젤리.)도 만들어."
"할라데쯔? 알았어. 찾아보마."

몇 시간 동안 육수를 우려내야 하는 할라데쯔를 염치없이 요구하였지만, 낯선 요리 이름에 저우룬칭은 갸웃하기만 할 뿐 선선히 응했다. 옐리세이는 내심 후후후 음험하게 웃었다. 오늘부터 재료를 준비하고 육수를 내고, 굳혀서 내일 점심으로 먹을 수 있게 젤리로 만들려면 이 자식은 밤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맛없으면, 아니 맛있어도 다시 만들라고 퇴짜를 놓아야지. 어쨌거나 내일부터 노예잖아.'

내일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히죽 웃자 저우룬칭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보았지만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지가 아무리 의심해 봤자 내 노예지, 암.





After Story (365〜454, Hidden trak 455〜456)





"빌어먹을."

이오시프가 인상을 구겼다.

"벌건 대낮부터 사내새끼 단둘이 카페에 처박혀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
"어쩌라고."

옐리세이도 인상을 구겼다.

"당분간 술은 마시지 말해잖아. 망할 의사 년 잔소리가 얼마나 심한지 아냐. 정 뭣하면 유이라도 데려와서 네 무릎에 앉히든가."
"너랑 동석하게 하다니 내 여자한테 무슨 억하심정으로 변태균을 옮기려는 거냐."
"야. 변태가 있어야지 성문화가 발전되는 거야."

며칠 전 병원을 탈주하였다가 돌아왔을 때 귀가 쟁쟁 울리도록 잔소리에 시달렸던 쓰라린 기억을 회상한 옐리세이는 치를 떨며 파르페를 퍼먹었다. 이오시프도 같이 주문한 걸 왜 너 혼자 처먹느냐는 얼굴로 스푼을 들었다.

얼마간 서로 경쟁적으로 파르페를 먹느라 테이블은 조용했다.

"그래서, 의논할 거란 게 뭔데?"

단기간에 차가운 파르페를 먹느라 입안과 목이 거북해진 이오시프가 입가심이나 할 겸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이내 찌푸리며 커피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옐리세이는 보란 듯이 파르페에 곁들여진 과자를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퇴원하기 전에 루,"
"아미구. 언제 퇴원한 거야?"

성큼 다가온 칼칼한 음성이 말허리를 덥석 끊었다. 호세가 과장되게 반가워하며 인사하였다.

"퇴원 축하해. 근데 왜 내 전화는 안 받아? 어디에 있는지 한참 찾았잖아."
"아, 그게 네 전화였냐? 난 또 모르는 번호길래 스팸인 줄 알았지."

옐리세이는 테이블 구석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열었다.

"휴대폰이 항쟁 때 박살 나서 새로 사느라 내 번호는 입력을 못 했어."

카페에 들어오기 전에 걸려 왔던 발신번호를 찾아 저장하였다. 본인의 전화번호 하나만 외우고 다니는 옐리세이이기에 새 휴대폰을 장만하며 저장할 수 있었던 번호는 조직원들뿐이었다. 단축번호 0번은 저우룬칭이다. 망할 놈이 자신의 번호를 'aaaa'로 저장해 두었기에 복수하는 의미에서 그는 'zzzz'로 저장하였다.

만족한 호세가 자연스럽게 옐리세이의 옆자리에 앉으려고 했으나 그는 눈을 부라리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2인용 의자에서 사람 한 명이 앉을 자리를 양보하지 않자 호세는 어쩔 수 없이 맞은편으로 갔다. 이오시프는 영문도 모르고 벽 쪽으로 엉덩이를 조금 빼 주었다.

"나한테 말도 없이 애인을 만들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뭐? 지랄하네. 야이쑤코를 몇 달이나 비운 인간이 누군데?"
"젠장. 올림픽과 엄마 생일과 동생 결혼식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집에 안 갈 수가 있겠냐."

지극히 브라질리언다운 대꾸를 옐리세이는 하하하 비웃으며 빨대로 모히또를 쪽쪽 빨았다.

"그래 봤자 축구에서 메달도 못 딴 주제에. 올림픽은 포기해, 등신아."

호세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도 미국에 밀린 2등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용케 중국은 이겼네."

올림픽이나 월드컵 기간에는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 자국 선수를 응원하는 옐리세이는 눈을 치떴고, 이오시프는 짜증을 냈다.

"니들 같은 팔자 좋은 백수랑은 달라서 유능하고 바쁘신 이 몸은 너무 늦지 않게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하거든?"
"야. 누가 백수냐? 난 영예로운 부상으로 인한 휴가잖냐."
"그래. 나도 감기나 덜 나아서 자체 병가야."

그렇게 말을 하는 호세의 앞으로, 들어오면서 주문하였던 듯한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얼씨구."
"뭐. 왜. 뭐."

당당하게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퍼는 호세를 무시하고 옐리세이는 용건이나 계속 잇기로 하였다.

"아까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퇴원하기 전에 뭘 했다며."
"아, 그랬지. 퇴원하기 전에 내가 루이를 노예로 만들었어."
"........"

가장 최근에 옐리세이가 부탁하였던 조언이 일반인과 연애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번에도 범상한 용건은 아니리란 추측은 했지만,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신기한 놈이었다.

"........축하하면 되는 거냐?"
"8일까지 단기 노예야, 제기랄. 그나마도 마지막 날을 루이 놈 휴일이랑 맞춰서 뽕을 뽑으려고 나중에 빡빡 우겨서 하루 더 늘린 거라고. 독한 새끼. 한 번도 져줄 생각을 안 해."

노예 계약을 무려 하루나 더 늘려 주었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져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남의 연애 생활에 참견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 무시했다.

"여튼 루이를 노예로 만들었는데도 쓸모가 없어."
"뭘 시키는데?"
"식사 만들어 오게 하거나, 어깨 주무르게 하거나, 이불 정리시키거나, 리모컨 가져오게 하거나, 편의점에 심부름시키거나, 캔맥주를 따게 하거나, 안주 만들게 하거나, 머리 감기게 하거나, 게임기 대신 켜게 하거나, TV 채널 돌리게 하거나, 비디오 빌려오게 하거나, 뭐....... 그런 정도?"
"충분히 쓸모가 있구만."

옐리세이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이건 노예가 아니라 평소에도 시킬 수 있는 거고!"

역시 충분히 져주고 있었다. 마누라 앞에서 설설 기고 있는 이오시프는 저우룬칭이 들었다면 질색하였을 법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달리 시킬 수 있는 게 뭔데? 요즘 세상에 채찍으로 등 때려 가며 배를 젓게 할 거냐, 농장에서 밀을 베게 할 거냐, 말한테 귀리 까샤(러시아 요리. 알곡을 끓인 죽.)를 먹이게 할 거냐?"
"그걸 모르겠으니까 너한테 물어보는 거 아냐. 보다 효율적으로 노예를 부릴 수 있는 방법을. 이제 나흘밖에 안 남았단 말이야. 그 새끼는 나흘리 딱 지나면 1초도 봐 주지 않고 바로 노예를 청산할 놈이라고."
"성노예는 어때?"

당연히 이 대사는 이오시프가 한 말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잘 마시던 커피를 뱉은 뻔한 이오시프는 귀를 의심하며 옆을 돌아보았고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반 이상 먹어치운 호세가 히죽 웃었다.

"노예라면 당연히 성노예자 너도 아직 순진하구나, 레샤."

순진하다는 말을 욕으로 해석했는지 옐리세이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당연히 섹스할 때도 이것저것 명령해서 시켜. 빨라면 빨고 핥으라면 핥는다고."
"벌리라면 벌리고?"
"……어, 어음. 물론이지. 자기 손으로 허벅지를 쥐면서 벌리는 게 최고지."
"그건 네 말처럼 평소에도 시킬 수 있는 거잖아."

얼굴도 알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게이 섹스 언급에 이오시프의 낯은 대화가 지속될수록 썩어갔지만 두 변태는 멈추지 않았다.

"모든 걸 네 명령대로 할 순종적인 성노예를 들이고도 왜 나흘이나 쓸데없는 일로 허비하냐.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그…… 이름이 루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네 애인이 싫어해서 안 했던 플레이 같은 거 없어?"

옐리세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떠졌다.

"씨발. 천재 새끼."
"하하하하하. 내가 좀."
"추천하고 싶은 플레이는 없냐? 루이 놈 까다로운 게 장난이 아냐. 지가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려고 해. 기껏 간호복까지 구해 왔는데 못 입혀 봤다니까."
"그 자식 체격도 있던데 입어 봤자 간호복은 찢어졌을 것 같다. 본디지는 어때?"
"SM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음, 그럼……."

두 사람은 시시덕거리며 효율적인 성노예의 활용에 대한 열띤 토론을 늘어놓았고, 이오시프는 벽으로 틀어박히며 귀를 막았다. 변태가 한 마리인 것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제곱이 되니 쌍으로 날뛴다.





노예가 되라고 하여서 얼마나 괴랄한 짓을 시킬지 걱정이 되긴 했으나, 의외로 옐리세이의 요구는 정상적인 범주 내였다. 사소한 심부름이야 약간의 품만 팔면 되는 것이고 섹스 중의 요구 사항도 특별하지 않았다. 대개 펠라티오나 기승위 정도를 원했다. 자신이 바텀이라는 소문이 나는 걸 질색하지 않았다면 평소에는 저우룬칭의 거부로 실현하지 못하였을 야외 섹스 따위를 요구하였을 텐데 다행이었다.

억지로 우겨서 추가힌 하루를 포함하여 4일이 남았다. 이미 반이 지나갔으니 남은 반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저우룬칭은 벌써 노예 기간이 끝난 듯한 홀가분한 심정으로 옐리세이를 기다렸다.

「헤이, 노예. 주인님 오셨다」

......그래도 밖에서 노예이니 주인님이니 운운하는 건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가게 앞에 도착했으니 얼른 나오라는 옐리세이의 전화를 끊고 가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툭툭이 대기 중이었다.

"탔으니까 출발하쇼."

옐리세이가 운전석으로 말하자 곧 툭툭은 출발했다. 훤히 트인 툭툭 내부로 스미는 공기가 한결 선선했다.

"오늘은 또 어딜 가려고?"

어제는 3시가 되자마자 불려 나가서 호텔 창에 기대어 선 채 섹스하였다. 그동안 쌓였고, 앞으로도 쌓일지 모르는 욕구 불만을 이참에 전부 해소하려는 것처럼 옐리세이는 눈만 마주치면 그를 붙잡고 뒹굴었다. 섹스 횟수만 보면 신혼부부가 따로 없었다. 지난 번에 샀던 20개입 콘돔 한 박스가 텅 비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실은 영화관에 가려고 했지."
"영화?"

정말 평범한 데이트 코스였다. 저도 모르게 감탄하였던 저우룬칭은 이어지는 말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 되었다.

"영화관에서 대딸시키려고. 저번에 내 손가락을 뽑아 버린 대가는 치러야 할 것 아냐, 노예."
"……."
"근데 마음을 바꿨어. 주인님의 변덕을 감사히 여기도록."

영화관의 핸드잡에서 바뀌어 봤자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영화관의 오럴 섹스로 변경한 것만 아니길 바라며 잠자코 툭툭이 지나가는 도로의 풍경만 살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팔짱을 낀 손가락이 슬며시 초조하게 팔뚝을 톡톡톡 건드리고 있는 걸 보며 옐리세이는 음험하게 미소하였다.

드디어 도착한 곳은, 저우룬칭이 처음 오는 곳이었다.
사실 밖을 잘 다니지 않는 저우룬칭으로서는 야이쑤코의 어딜 와도 처음 오는 곳이긴 하였다. 영어, 일본어, 한국어, 태국어라는 4개 국어로 적힌 간판을 보았다. 간판을 읽지 않아도 전면창의 디스플레이만으로도 익히 짐작이 갔다.

성인용품점이었다.

"……."
"빨랑 문 열어. 주인님 들어가신다."

이 상황에 혼란스러워해야 하는지 안심해야 하는지 고심하는 저우룬칭의 등을 옐리세이가 찰싹 때렸다. 일단 사람들의 눈이 많은 번화가로 나왔으니 안심하자는 방향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문을 열었다.

"어서 옵쇼〜〜"

만화책을 넘기던 종업원이 건성으로 인사했다.

"……."

야이쑤코의 특성상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꽤 큰 가게였다. 빽빽하게 늘어선 선반마다 특정한 용도를 지닌 각양각색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주로 미국에서 제조되는 성인용품을 수입하는지 영어로 적힌 상품 이름과 설명이 많았다.

특별한 기구를 이용하는 플레이를 한 적도 없었고 크게 흥미도 없었기에 성인용품 가게에 들어오는 건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낯설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한 기분으로 입구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데. 옐리세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싱글거리며 손바닥을 비볐다.

"주인님이 특별히 하사하여 줄 테니까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도 돼."
"여기서 사 봤자 어차피 너한테 쓰는 건데?"
"흥. 과연 그럴까?"

상당히 의미심장한 뉘앙스의 코웃음을 남긴 그는 목적한 물건이 있는지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선반 너머로 스르륵 사라졌다. 점원은 손님에게 무례하리만큼 신경을 끊고 만화책을 탐독 중이었다.

멀뚱멀뚱 서 있기도 뭣하여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뜻 없이 돌린 시선에 가장 먼저 포착된 건 오나홀이었다. …배우의 사진이 부착된 제품도 있었고, 미소녀 CG가 부착 된 제품도 있었다. 설명서를 읽어 보니 AV배우의 사진은 해당 배우의 성기 내부를 모방하였다는 콘셉트였고, 미소녀 CG는 종류대로 이름과 설정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훌륭한 애인이다. 두 개의 삽입구가 있는 자매 덮밥 콘셉트의 오나홀도 있었다.

이쪽 선반은 전부 일본 제품이었다. 스팽킹 패들, 펠라티오 전용 로터 一 옐리세이에게 절대 보여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양면 딜도, 무선 에그 진동기를 지나 애널 플래그 앞에서 멈췄다. 막대처럼 돌출된 애널 플래그에 고리를 던져 걸며 놀 수 있는 도구였는데, 좀 웃길 것 같아서 솔깃했지만 실제로 사용했다가는 옐리세이가 총을 들고 날뛸 게 분명하므로 생략하였다.

생각 없이 보기 시작하였으나 사람의 상상력은 다채로웠고, 그 다채로움은 성인용품 은밀하고도 적나라한 욕망이 표출되는 영역에 이르자 극대화되고 있었다. 구경만 해도 재미있는 게 많았다.

슬렁슬렁 둘러보며 미국에서 수입한 성인용품이 진열된 선반으로 갔다. 10대들의 요란법석한 모임이나 배철러 파티 · 배철러레트 파티에 쓰는 파티용품이 먼저 보였다. 삽입 가능한지나 의문인 팔뚝보다 큰 딜도는 사람을 때려죽이기에도 충분한 무기가 될 것이다. 울룩불룩한 돌기가 돋은 콘돔을 보니 옐리세이 생각이 났다. 구슬을 뺀 건 백 번 잘한 일이었다. 형광으로 번쩍이는 콘돔은 의문이었다. 거기가 형광으로 빛나면 뭐가 좋다는 건지.

소소한 러브젤 등을 진열한 선반에서 걸음을 멈췄다. 몇 번이나 몸을 섞어도 옐리세이는 언제나 처음처럼 힘겨워했기에 다량으로 사용 중인 러브젤을 살 때가 되긴 했다. 착향까지 된 러브젤들 사이에서 그나마 무난해 보이는 것을 고르고, 망설이다가 거품 입욕제도 하나 골랐다.

"아, 그건 합법과 위법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약물입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위법이나 마약은 아니니까 걱정은 놓으시고요. 자주 쓰지만 않으면 돼요. 저도 써 봤는데 효과가 아주 그냥 직빵입디다."

만화책을 뒤적이다가 눈에 띄었는지 점원이 히죽거리며 설명해 주었다. 입욕제가 위법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다시 보았다. 입욕제 옆에 최음 성분의 약물이 있었다. 흥분제를 이렇듯 공공연하게 판매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긴 하지만 신고를 하는 사람 따위는 역시 없는 듯하다. 점원은 그가 입욕제가 아닌 흥분제를 보고 있었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이 가게에서 그에게 제일 필요 없는 물품이었다. 지금도 옐리세이는 충분히 뜨겁고, 격렬하고, 정열적이다.

"다 골랐냐?"

옐리세이가 이것저것 담은 바구니를 들고 모습을 나타냈다. 바구니 안에 러브젤과 입욕제를 넣으며 뭘 샀는지 보려고 했지만 후딱 등 뒤로 바구니를 감추었다.

"넌 먼저 나가 있어."
"뭔데?"
"어허. 주인님아 말씀하시는데 어딜 감히."

짐짓 엄한 목소리로 엄포를 놓으며 그를 휘휘 떨쳐 냈다. "이야, 보기 좋으신데요. 본격적인 SM 용품은 뒤쪽 선반에 있는데 둘러보셨어요? 추천해 드리고 싶은 건......"

주인님이 꺼지라고 친히 명령까지 하시니 점원이 히히거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떤 걸 샀는지 꽁꽁 감추고 안 알려주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 와서 자신에게 쓸 딜도나 애널 확장 기구 같은 걸 사지는 않았겠지. 뒤는 안 대준다는 조건이었는데, 설마.

신나게 카드를 긁고 나온 옐리세이는 쇼핑백을 저우룬칭에게 휙 던졌다. 그가 현재 숙박 중인 호텔까지 짐꾼이 되어 쇼핑백을 배달한 저우룬칭은 못내 미심쩍은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홍가로 돌아왔다.





오늘은 손님이 적어 일찍 가게 문을 닫았다. 뒷정리를 하고 호텔로 왔을 때에는 자정을 막 넘길 무렵이었다. 저우룬칭의 노예 기간인 7박 8일 동안 옐리세이는 아예 호텔 특실을 빌렸다. 그를 노예로 부리면서 뽕을 뽑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의 소산이었다. 덕분에 저우룬칭도 호텔에서 숙식하며 홍가까지 출퇴근하였다. 반쯤 동거하는 기분이라 색다른 재미는 있었다.

훤히 불이 켜진 리빙룸에 요란한 발사음과 폭발음이 배경 음악에 뒤섞여서 들렸다. 영화를 보고 있나 했더니 게임 삼매경이었다. 저우룬칭이 일하는 동안 옐리세이도 밖에서 이오시프나 지인을 만나며 놀긴 했지만, 호텔에서 뒹굴거릴 때도 많았다. 혼자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방법을 궁리하여 어제까지는 영화를 주야장천 보더니, 오늘부터는 게임으로 전환한 모양이었다.

"왔다."
"어."

게임기 패드를 양손으로 쥐고 한창 몰입 중인 옐리세이는 보는 둥 마는 둥 인사도 건성으로 받았다. 가게 문 닫자마자 튀어오라고 한 건 어디의 누구였을까. 저우룬칭은 TV와 연결한 플레이스테이션2의 케이블을 실수인 척 뽑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면서 소파 옆에 앉았다.

TV에시는 옐리세이가 플레이하는 기체가 다분히 SF틱한 분위기의 기지 내에 무기를 발사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플레이 흐름에 따라 간간이 사람 음성이나 기계음의 메시지가 전해지기도 하였다. 얼마간 구경하다가 지루해져 소파에 나뒹굴고 있는 게임CD 케이스를 보았다. 〈아미드 코어2〉라는 이름이었다.

"악! 제기랄! 뒤졌잖아!!"

옐리세이가 왈칵 짜증을 냈다. 케이스에 동봉된 게임 매뉴얼을 팔랑팔랑 읽고 있던 저우룬칭은 시선을 올려 게임 오버 화면을 보았다.

"게임에서 죽은 건데 뭘 또 짜증을 내냐."
"새꺄. 아머드 코어는 단순한 게임이 아냐. 인생이야."

오늘부터 시작한 주제에 참 훌륭한 인생이었다. 옐리세이는 패드를 조작하여 메인화면으로 돌아가며 구시렁거렸다.

"게임하다가 아깝게 죽었는데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 같은 게 있겠냐. 꼭 지는 안 그러는 것 같이 지랄하는구만."
"게임? 게임이라면……. 음. 난 옛날에 패미컴만 좀 했었는데. 슈퍼 마리오나 펭귄 나오던 거 ?"
"패미커어어어엄?!"

게임에 크게 흥미를 붙이지 않았던 저우룬칭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옐리세이는 언성까지 높이며 과장되게 반응하였다.

"와, 패미컴이라니 세대 차이 씹창 난다. 이 60년대 생아."

기실 패밀리 컴퓨터一 패미컴이 유행하던 무렵의 옐리세이는 가출한 불량 청소년이었기에 게임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뿐이지만, 그 사실은 쏙 빼먹었다. 저우룬칭이 조금만 더 게임에 관심이 있었다면 얼추 나이를 역산하여 그의 뻔뻔함을 반박할 수 있었을테지만 몇 번 건드려 본 게 전부였던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냥 또 운운하기 시작한 나이 언급에 어이없어하는 정도였다.

"너랑 나랑 몇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심심하면 자꾸 얘기 꺼내냐. 고작해야 6살이잖아."

옐리세이가 정색했다.

"생각을 해 봐. 6살 차이라는 건 네가 성인이 되었을 때 난 겨우 초등학교나 졸업한 파릇파릇한 미소년이었다는 뜻이라고. 이렇게 어리고 싱싱하고 잘생긴 애인을 사귀게 되었으면 떠받들고 모시면서 감사할 줄 알아야지, 어디서 큰소리냐?"
"잘생긴 건 인정하는데……."

저우룬칭이 옐리세이의 아래위를 슥 훑었다.

"어리고 싱싱한지는 잘 모르겠다."
"야, 나의 이 탄력 있고 보들보들하고 매끌매끌한 백옥 같은 아기 피부가 안 보이냐?"

보란 듯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팔뚝을 들이밀었지만 보이는 건 문신뿐이었다. 티격태격하다가 어디 너도 한번 해 보라는 옐리세이의 말에 저우룬칭도 패드를 쥐었다. 그리고 30분 후 그가 깨달은 건 자신은 마작뿐만이 아니라 게임 자체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게임기를 옐리세이에게 떠넘긴 저우룬칭은 자기 전에 거품 목욕이나 준비하라는 옐리세이의 ‘명령’에 낮에 샀던 입욕제를 욕조에 풀었다. 예상대로 지나치게 달착지근한 싸구려 향이 강하게 풍겼다. 물의 색깔은 형광 핑크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시킨 일 잘하고 있는지 감독하겠노라며 들어온 옐리세이마저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이 물을 마시면 엄청나게 자극적인 단맛이 날 것 같지 않냐. 예를 들면 독한 물약을 억지로 마시고 입가심을 위해 사탕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맛?"

꽤나 구체적인 표현이었으므로 저우룬칭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리란 확신을 했다.

"그냥 물 뺄까?"
"기왕 샀으니 써야지."
"그래. 잘 씻어라."
"넌 안 씻을 것처럼 말하냐."

아, 오늘은 이 플레이인가. 거품 목욕이라는 말에 얼추 짐작은 했었다. 저우룬칭은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탈의하러 나갔다. 덕분에 능청스럽게 웃는 옐리세이의 표정은 보지 못하였다.





"……뭐라고?"

저우룬칭은 이 자식이 정신이 나간 건지, 자신의 청력이 맛이 간 건지 의심하며 되물었다. 풍성한 거품이 가득한 욕조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옐리세이가 턱을 젖히며 히죽 거렸다.

"주인님을 씻기라니까, 노예."
"그러니까 뭘 어떻게 씻기라고?"
"거품을 잔뜩 묻힌 가슴으로 내 몸을 문지르면서 씻기라는 명령 못 들었냐. 음, 한마디로 인간 샤워타월?"

인간 샤워타월이라니. 왠지 한숨이 나왔다.

"……네 아이디어냐? 일본에 비슷한 풍속점이 있다고 는데."
"엥? 그게 뭔데?"
"소프랜드라고, 직접 가본 적은 없고 다른 놈들에게 들었는데 목욕탕과 비슷한 설비의 업소에서 여자가 비누 거품으로 온몸을 마사지해 주기도 하고, 매트 플레이나 잠......."

무심코 소프랜드의 풀코스를 말할 뻔하였던 저우룬칭은 얼른 말을 되삼켰다. 한껏 주인님 기운에 취해 있는 저놈이 다른 플레이까지 시키면 곤란했다. 요행히 옐리세이는 쓸데없는 잡소리하지 말고 얼른 들어오라며 다그쳤다.

비누 거품이라. 이 정도는 상식적인 선 내의 행위일까. 기대감으로 벙싯거리며 욕조에서 기다리는 옐리세이를 보니 한숨이 또 나왔다.

크게 괴악한 짓은 아니니 안심해야 할지, 전초전일지도 모르니 두려워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며 일단은 욕조로 들어갔다. 욕조에 참방이던 물이 그의 체중만큼 차오르며 밖으로 쏴아아 떨어졌다.

"제대로 해야 해."

옐리세이가 등을 돌려 앉았다. 견갑골 언저리부터 성모 마리아 문신이 새겨진 훤칠한 등이 비누 거품 아래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저 등을 거품을 듬뿍 낸 자신의 가슴으로 문질러야 한단 말이지.

혹시나 하여 물어보았다.

"팔에 거품을 내면 되겠지?"
"지랄 마. 가슴. 가슴이야. 가아아아아아슴."

망할 놈.

저우룬칭은 옐리세이가 뒤 돌아앉아 있어서 자신의 구겨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가슴에 풍성한 비누 거품을 냈다.

가슴에 비누 거품을 듬뿍 얹고 욕조의 물을 참방이며 옐리세이의 등으로 바짝 다가갔다.

"……."
               
이유 없이 긴장되었다. 가슴을, 문지르기만 하면 되는데.

손가락으로 슬쩍 등의 근육을 더듬으니 옐리세이가 짜증을 냈다.

"야, 치워. 가슴이라는 말 못 들었냐."
"……알았다."

아무래도 피할 방도는 없을 듯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가슴을 등에 밀착하였다. 긴장한 탓인지 물과 거품에 젖은 피부가 가슴에 닿는 감촉이 지나지게 생생하다. 그대로 숨을 들이켜고는, 아래위로 가슴을 천천히 문대었다. 유두가 피부에 꾹 눌리며 밀착되는 감각이 오싹하여 슬며시 떨어트리니 바짝 붙이라는 명령이 바로 돌아왔다. 저우룬칭은 한숨을 삼켰다. 이게 무슨 짓이지, 대체. 죽겠다.

아무리 마피아 놈 등짝에 새겨졌다지만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문신 위를 명백한 성적 의도를 담고 문지르고 있자니, 크리스천이 아님에도 불경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올려 천장에 고정시킨 채 상체를 움직였다.

"와."

옐리세이가 낮은 감탄성을 흘렸다.

"진작 시킬 걸. 나흘이나 시간 낭비했잖아."
"……여자도 아니고 남자 가슴으로 하는 게 흥분되냐?"
"여자 가슴에 왜 흥분해? 징그럽기만 하구만."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소리를 들었다는 목소리로 옐리세이가 내쏘았다. 할 말이 없었다. 맞다, 이 자식은 호모였다. 저우룬칭은 그냥 묵묵히 입을 다물고 등을 문질렀다.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리면 이 쪽팔린 행위를 슬그머니 그만두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속셈에 어깨를 안마하며 뒷목까지 마사지하였다. 옐리세이가 얕게 신음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몸을 거듭 겹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지만, 이 부분은 그의 성감대이기도 하다. 꾹꾹 지압하며 문지르다 뒷목에 이를 세우며 핥았다. 가벼운 콧소리가 습기로 척척한 욕실의 공기를 가늘게 울렸다. 저우룬칭은 어깨부터 등까지 둥글게 손바닥으로 쓸며 강하게 바랐다. 타월인지 뭔지 그만두고 빨리 섹스나 하자고 말해라. 빨리.

"좋아. 등은 이제 됐고."

옐리세이가 몸을 돌려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벌려 세우며 손짓했다.

"이제 가슴 해야지."
"……끝난 거 아니냐?"
"지랄. 넌 씻을 때 등만 씻냐?"

온몸을 다 문지르게 할 때까지 그만둘 작정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드러내놓고 한숨을 쉬면 이 자식이 더 신날 것 같았기 때문에 담담한 척 표정을 가다듬으며 가슴에 거품을 더 냈다. 이왕 버린 몸. 몇 분만 더 견디자.

하지만 등을 문지를 때와는 달랐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시선이 얽히기도 하고, 호흡이 섞이며, 겹쳐지는 육체의 면적이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알몸도 봤고, 섹스도 했는데, 옐리세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치도록 민망했다.

"부끄럽냐? 오빠가 그렇게 좋아?"

음흉하게 웃는 변태의 은근한 수작은 무시하고 가슴을 문질렀다. 빨리하고 끝나자는 생각에 무턱대고 오고 가던 가슴이 퍼뜩 경직되었다. 유두와 유두가 정면으로 비비졌다. 기겁하여 얼른 몸을 메려 하였지만, 엘리세이가 허리를 잡으며 끌어당겼다.

"아, 이거 기분 좋아……. 작게 움직여 봐."
"……."

별 희한한 요구를 한다는 항의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일단 참고 유두가 맞닿은 채로 슬슬 가슴을 둥글게 그리듯이 문질렀다. 옐리세이가 욕조에 길게 등을 기대며 잘게 끊어지는 숨을 토했다. 허리에 두른 팔을 바싹 당겨 안으며 양손으로 엉덩이를 꽉 쥐었다, 첨벙거리는 수중에서 하체가 밀착되었다. 옐리세이가 킬킬 웃었다.

"섰네 ?"
"……이건 그냥, 생리적인 반응이고."

하체를 뒤로 빼려 했지만 그는 엉덩이를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기며 자신의 허리를 부볐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수중에서 닿았다. 으음. 저우룬칭은 무심코 흐린 신음을 흘리며 입술 끝을 깨물었다. 옐리세이가 성기를 쿡쿡 찌르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하고 싶냐? 오빠한테 넣고 싶어?"

능글능글 희롱하듯 속삭이며 저우룬칭의 귓불을 깨물었다. 엉덩이와 허벅지를 지나 슬금슬금 내려온 손이 성기를 쓰다듬으며 느슨하게 움직였다. 참방참방 흔들리는 물이 예민한 부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저우룬칭은 조금씩 가빠지려는 숨을 다스리며 낮게 한숨 쉬었다.

"나랑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서지? 내 치명적인 섹시함에 몸이 달아올라 죽겠지 ?"

건들거리는 말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뚜렷하게 흥분한 증거가 놈의 손안에 잡혀 있으니 할 말은 없었다. 저우룬칭은 슬쩍 시선을 내렸다. 많이 사라진 비누 거품 안쪽으로 발기한 옐리세이의 성기도 보였다. 녀석도 슬슬 구멍이 근질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럴 때 오래 버티지 못하는 건 옐리세이 쪽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섹스 명령은 욕실 섹스가 되겠지.

저우룬칭의 예상에는 그간의 경험에서 비롯된 근거가 있었으나, 놀랍게도 옐리세이는 애무하던 손을 떨어트렸다. 그러며 의외라는 얼굴로 바라보는 그에게 히죽거렸다.

"노예. 넌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자위를, 아니 아예 네 손으로 네 좆을 만져서는 안 돼. 알겠냐?"
"……또 무슨 이상한 짓을 시키려고?"
"이상한 짓이든 뭐든, 주인님의 명령이라고."

주인으로서의 명령을 들먹이면 저우룬칭은 할 말이 없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옐리세이가 만족한 투로 욕조에서 일어났다. 물이 쏴아아 크게 흔들렸다.

샤워기를 틀어 비누 거품을 씻어낸 옐리세이는 5분 동안 기다렸다가 나오라며 먼저 욕실 문을 열었다. 조금 이상했다. 분명히 흐름으로 봐서는 욕실 섹스를 명령하고도 남을 타이밍이었는데.

예측과 빗나가면 빗나갈수록 걱정이 되었지만 욕실에 혼자 남아 있다 보니 어느 정도 흥분은 가셨다. 뭘 시키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덤이었다. 아무래도 낮에 들렀던 성인용품점에 고민에 대한 답이 있을 것 같아 기억을 돌이켜 보았지만 그가 무얼 샀는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작지 않은 사이즈라는 건 얼핏 보였지만 설명도, 이름도, 사진도 제대로 못 봤다. 어차피 당해야 할 일이라면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면 좋을 텐데. 역시 노예 생활 8일은 너무 길었나.

고민하다 보니 시간은 얼추 5분가량 지났다. 저우룬칭은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몸을 씻었다.

베스가운을 입고 침실로 들어간 저우룬칭을 기다리고 있는 건, 페니스 밴드였다.

"보지만 말고 빨리 착용해."
"……."
"5초 준다. 5. 4. 3. 2,"
"잠깐만."

저우룬칭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상식적인 선에서 납득이 안 가는 그것을 가리켰다. 도대체 남자에게 페니스 밴드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네가 아직까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도 페니스는 있어."
"알아."

침대에 쏙 들어간 옐리세이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노예가 뭐라고 생각하냐, 넌?"
"……주인에게 봉사하는 거?"
"맞아. 노예는 주인에게 봉사하며 섬겨야 하는데 너랑 나랑 섹스를 하는 게 봉사가 아니잖아? 너도 흥분해서 내 몸에 달려들고 찌인〜하게 사정까지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주인님과 노예의 섹스는 아닌 것 같더라고."
"섹스라는 건 원래 그런 거잖아,"
"보편적인 애인 관계의 섹스겠지. 하지만 우리는 애인이 아닌 주종 관계야. 안 그러냐?"

애인이라고 강조하던 놈의 뻔뻔한 태세 전환에 기가 찼지만 옐리세이는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주인님은 사정해도 노예는 사정해서는 안 되지. 넌 페니스 밴드를 입고 섹스하는 것처럼 딜도를 써. 그럼 나는 흥분돼서 좋고, 넌 페니스 밴드 안쪽으로 좆이 눌리니까 사정을 못 하겠지."
"……."
"원래는 너한테 사정방지링이나 아예 요도구를 막고 성기에 둘둘 감기는 정조대를 쓰려다가 페니스 밴드 따위로 양해해 줬다고. 얼마나 너그러운 주인님이냐?"
"……."

마음 같아서는 감격스러워하라며 히죽대는 면상에 페니스 밴드를 집어던지고 싶었으나, 그가 퇴원한 지 며칠 안 되는 부상자라는 것과 자신의 은원으로 인하여 약간이나마 고초를 겪었다는 저간의 사실을 되새기며 참았다. 4일. 4일 남았다.
저우룬칭은 입술을 감쳐물며 페니스 밴드를 입었다.





거친 숨소리가 귓전에서 헐떡였다. 여느 때의 뜨거운 열기가 스민 허덕이는 호흡이 아닌, 흥분과 힘겨움이 뒤범벅된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신음이었다. 상대가 관계 도중 자신으로 인하여 흥분한다는 만족감도 짜릿하지만, 관계 도중 상대를 쥐고 흔드는 정복감은 더욱 황홀하다. 옐리세이는 입술을 핥으며 저우룬칭의 허리에 교차하며 감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아……."

모조 성기가 더 깊이 삽입되었다. 비부에 여느 때와 같은 거웃이 아닌 반질반질한 질감이 닿았다. 한 겹의 레자 너머에 제대로 발기하지도 사정하지도 못하며 억눌린 저우룬칭의 흥분이 있었다. 허리를 돌리는 척하며 그 위를 눌렀다. 저우룬칭이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떨어졌다.

진동 기능까지 내장된 모조 성기도 충분히 크고 굵어, 단순히 자극당하여 사정하기까지의 육체적인 쾌감은 있지만 역시 저우룬칭과 직접 섹스하는 것만은 못하다. 허나, 그가 자신과 섹스 흉내를 내면서도 온전히 맺히지도 못하고 해소도 할 수 없는 쾌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은 미진한 육체의 자극을 채우고도 남는 정신적인 만족감이었다. 몇 번 안타깝게 허리짓하던 그가 허덕이며 옐리세이의 몸을 덮었다. 팔이 상체를 꽉 끌어안고 물어뜯는 것 같은 거친 키스가 떨어졌다. 숨결을 핥으며 깨물던 입술이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었다. 애타는 숨소리가 잇새에서 떨어졌다. 옐리세이는 자신에게 매달려 무언의 애걸을 하는 저우룬칭에게 속닥거렸다.

"하고 싶냐?"

머리칼이 뺨을 부비듯이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좋아. 해. 하지만 삽입은 하지 말고, 자위로 풀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저우룬칭이 성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체내를 메우고 있던 모조 성기가 빠르게 쓸려나가는 감각에 옐리세이는 나른하게 신음했다. 벗겨진 페니스 밴드가 침대 위를 굴렀다. 저우룬칭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이런 걸 보고 뭐라고 하더라. 흥분감으로 잔뜩 달아올라 한껏 조급해진 저우룬칭을 보며 옐리세이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절경이네."

오래지 않아, 옐리세이 자신의 정액으로 더럽혀진 복부에 흰 액체가 투두둑 떨어졌다.





옐리세이는 기계나 컴퓨터를 능숙히 다루지 못했다. 새 기기를 장만하여도 사용설명서부터 꼼꼼하게 읽는 게 아니라, 무작정 전원 버튼부터 눌렀다. 무기라면 자신 있지만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리면서 원하는 결과물을 이끌어내는 건 영 어려운 과제였다.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몇 차례 만지작거려 보았지만 마음이 원하는 결과물을 손이 빠르게 따라가지 못하자 짜증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버티지 못하고 5분 만에 SOS를 요청했다.

"이오샤. 너 동영상 편집할 줄 알지?"
「간단한 것 정도는」
"나 좀 가르쳐 줘."
「전화로 설명하려면 복잡한데. 직접 면대면으로 설명해 줘도 네가 알아들을 수 있겠냐」
"알았어. 지금 간다."
「엉? 안 돼, 새꺄. 사무실에서 일하, 」

듣지 않고 끊은 옐리세이는 바로 호텔을 튀어나와 택시를 잡았다. 도중에 편의점에 산 들렀다가 카지노 갈락씨아까지 직행하여 사무실 문을 노크도 없이 광 열어젖히니 뭐 씹은 표정의 이오시프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넌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데 꼭 방해를 해야겠냐? 이 백수 새끼야."
"자기는 무리하지 말고 쉬어가면서 일하라는 오빠의 배려를 왜 몰라?"
"씨발아! 그 징그러운 짓 좀 하지 말랬지!!"

이오시프가 소름이 돋은 것처럼 양 팔뚝을 문지르면서 질색했다. 이번에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쪽은 자신이었기에 옐리세이는 더 티격태격하지 않고 뇌물로 사온 캔맥주와 안주를 바쳤다.

"이오시프 게오르기예비치. 좋아하시는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드시고 소인에게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응?"
"흥. 뭔데."

캔을 따는 이오시프의 옆에 과자 봉지도 뜯어서 펼쳐 놓은 옐리세이가 가져온 녹화 테이프를 주섬주섬 꺼냈다.

"캠코더로 녹화한 영상인데 편집이 어렵더라. 어떻게 해 보는지 프로그램 깔았다가 바로 포기했어."
"어떻게 편집할 거냐? 나도 전문적인 편집은 못 해."
"잡음 지우고 배경 음악 깔고 화면 색감 조정하는 건 안 되냐?"
"지랄."
"……쳇."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한다는 코웃음이 옐리세이의 원대한 목표 하나를 꺾었다.

"그러면 뭐……. 적당히 필요한 부분만 자르고 붙이는 것만 알려줘."
"컴퓨터에 옮겨서 변환하는 것부터 시간이 오래 걸릴걸. 간단한 거라면 내가 해 줄까? 아, 당연히 수고비로 맥주 한 캔은 턱도 없고."
"네 정신 건강에 안 좋을 거야."
"뭘 녹화했길래 그러냐?"
"어젯밤 루이와 섹스 동영상."

이오시프는 징그러운 벌레라도 된 양 반사적으로 테이프를 던졌고, 저만치에 나뒹구는 테이프를 옐리세이는 울컥하여 도로 가지고 왔다.

"야! 테이프 손상되면 어쩌려고 막 던져?!"
"그딴 걸 보여주려고 들고 온 사람이 누군데!"
"내가 언제 보여준다고 했냐! 편집 가르쳐 달라고 했잖아!"
"애초에 왜 찍어, 정신 나간 놈아!"
"너도 성노예 생겨 봐!!"

노예에서 성노예로의 진화 후 이틀째 되는 밤의 영상이다. 첫째 날에는 페니스 밴드를 입히고 희희낙락하느라 촬영하는 걸 깜빡했고, 둘째 날에는 침대 머리맡에 단단히 캠코더를 고정하였다. 저우룬칭은 엄청나게 찜찜해 하며 캠코더를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성노예답게 촬영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간단하게나마 성노예로 부려 먹은 이틀 밤의 일화를 들은 이오시프의 표정이 매우 안 좋아졌다.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어. 썩을 놈아."
"성노예가 얼마나 좋은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잖냐."
"꺼져."

이오시프는 두말할 것 없이 옐리세이가 앉은 의자를 발로 죽 밀어냈다. 바퀴 달린 의자가 주르륵 밀려났다.

"네놈 섹스 라이프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데 뒷감당할 자신은 있냐. 그 자식도 성격이 보통은 아니잖아? 노예 기간이 평생인 것도 아닌데 며칠 후에 감당할 수나 있겠냐."

기실 옐리세이도 그 점이 걱정이었다. 지금이야 ‘애인’이자 ‘노예’인 몸이지만 과거의 저우룬칭은 영화관에서 좀 더듬다가 고간으로 손이 올라갔다고 바로 손가락뼈를 탈골 시킨 놈이었다. 본래 성격이 어디 가기야 하겠는가.

무심코 왼손의 검지를 만지작거렸다. 어제와 오늘, 남은 이틀 동안 놈에게 했던, 그리고 할 짓을 되새겨 보면 손가락뼈 정도가 아니라 손목을 분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가 두려워서 현재를 포기하면 그게 남자냐."
"얼씨구."

비장한 척해 봤자 섹스 플레이 주제에 표정만은 구국의 결단을 내리는 장엄함이다. 한순간의 불빛에 홀려 불구덩이로 날아드는 부나방 같은 친구를 가련히 여긴 이오시프는, 친구의 남은 짧은 시간을 애도하며 동영상을 편집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지만 감당하지 못할 미래의 뒷수습을 제물로 바쳐 현재 이 순간의 섹스를 쟁취한 옐리세이는 설명을 들어도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자르고 붙이고 새 동영상으로 만들기만 하는 건데, 어렵냐? 정 어려우면 차라리 영상 촬영과 편집 전문으로 하는 놈들한테 의뢰하는 게 어때?"

말이 좋아 촬영과 편집이지 실상은 AV를 촬영하는 회사이다. 전문 AV배우는 아니어도 다양한 인종의 여성을 쉽게 캐스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은 규모나마 사무실이 있었다. 이 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자들이니 적당한 알바비를 찔러 주면 옐리세이가 원하는 간단한 영상 편집 정도는 뚝딱 해 줄 테지만, 그는 질색했다.

"루이 영상을 그런 놈들한테 어떻게 보여주냐. 나만 볼 거야. 그리고……."

그러며 우물쭈물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바텀이란 말이야."

이오시프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난번에 뻬뻬랑 얘기하면서 루이가 다리를 벌리니 어쩌느니 하더니만?"
"그거야 당연히 뻥이지."

허세를 부리는 놈이 목소리는 컸다. 그러면 그렇지 싶은 생각에 이오시프는 끄덕였다.

"루이 엉덩이는 포기했나 보군:’
"그건 아냐!"

언성이 더 높아졌다.

"노예 계약 중에 그 자식 따먹는 부분은 제외되어서 참고 있는 거야. 언젠가는 루이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면서 내 밑에서 울게 될걸?"
"그 ‘언젠가’가 대체 언젠데."
"올해…… 는 다 지나갔으니 내년, 그래. 내년을 목표로 삼겠다!"

목표 기간이 한 달도 아니고 일 년이랜다, 일 년. 일 년이 아니라 십 년이 지나도 옐리세이가 원하는 포지션의 변동은 요원해 보였다.

"물건도 네가 더 작다며."
"……남자는 테크닉이거든?!"
"뭐, 그렇게 주장하고 싶겠지. 잘해 봐라."

노골적으로 측은한 시선을 던지는 이오시프에게 옐리세이는 펄펄 뛰며 새로이 결심을 다졌다. 내년에는 꼭 포지션을 뒤집어서 루이의 엉덩이를 따먹고야 말 것이다.

굳건한 목표 의식은 생겼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그는 저우룬칭의 꼴리는 영상만을 모아서 딸감으로 쓰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오시프의 일을 방해하며 노닥거리다가 저녁까지 먹고 온지라 밖은 많이 어두웠지만 저우룬칭의 퇴근 시각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게임을 몇 판 하다가 지겨워진 옐리세이는 어제 녹화한 캠코더를 재생하였다.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될까. 꼭 촬영을 해야겠냐?」

적절한 위치를 찾느라 캠코더를 움직이어 화면을 확인하며 녹화된 영상에서 저우룬칭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침실 구석에 도피해 있던 그의 방향으로 캠코더를 움직이자 흠칫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피해 봤자 어차피 찍히게 될 운명인 것을.

「영상은 절대 공유 안 한다니까?」
「촬영해서 파일이 남는 것 자체가 좀……. 홍콩에서 스캔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도 알잖아」
「뭐?! 네 인생을 말아먹은 세 번째 호모 놈과 스캔들 터졌을 때 사진 말고 동영상도 유출됐었냐?」

당장 그 영상을 찾아봐야겠다며 결심을 다지고 있는데 저우룬칭이 옆으로 몇 발자국 더 비켜서며 말을 이었다.

「동영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흔적이 남는 것 자체가 찜찜해」
「오빠 못 믿니? 에드워드는 네 인생을 말아먹은 호모지만 오빠는 네 인생을 꽃피워 주고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호모잖아?」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섞은 영상이 저우룬칭의 옆모습으로부터 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 주인님이고 넌 노예야. 새꺄」

결국 저우룬칭은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예의 페니스 밴드를 입고 영 불안한 얼굴로 엉거주춤하게 침대에 앉은 저우룬칭을 뒤로 쓰러트렸다. 영상을 빨리 감았다. 어디까지나 저우룬칭을 촬영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감기는 영상의 잔영은 대부분 저우룬칭의 상반신이었다.

목적했던 지점이다. 옐리세이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젯밤의 감각도 재생되는 화면과 함께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의 다리 사이에 엎드린 저우룬칭의 얼굴로 카메라가 이동했다.

「그것 좀 치우라니까……」
「닥치고 빨아」

울적한 시선을 내리며 망설였지만 옐리세이의 재촉에 고개를 숙여 그의 것을 입으로 물 수밖에 없었다.

「화면에 잘 찍히게 얼굴 살짝 올리고, 웃…… 그래, 그렇게」

저우룬칭은 여전히 오럴 섹스에 능숙하지 못했다. 작은 입을 오므리며 딴에는 성의껏 빨고 있지만, 남창이었다면 제대로 하라며 귀싸대기가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대상이 저우룬칭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이 있었다.

"하아......."

옐리세이는 캠코더 영상을 재생하는 한편으로 다른 손으로는 지퍼를 내리고 성기를 쥐었다, 캠코더 화면 너머로 저우룬칭이 직접 자신의 것을 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영상 속의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를 핥고 있었다. 뜨겁게 죄는 그의 구강과 목 안쪽으로 성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쾌감이 좋았다.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는 저우룬칭의 입안에 다시 성기를 밀어 넣고 뺨을 안쪽에서 쿡쿡 찔렀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뺨의 굴곡을 매만지니 귀두가 양쪽에서 동시에 자극되는 느낌이었다.

"음, 응……."

옐리세이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캠코더에서 성기를 핥는 질척한 물소리가 조용한 리빙룸도 적셨다. 볼륨을 크게 키웠다. 두 겹으로 겹친 자신의 신음과, 저우룬칭의 가쁜 숨소리가 삐걱거리며 절정으로 올랐다.

「허억, 헉…… 얼굴, 들어……!」

사정 직전 성기를 빼냈다. 저우룬칭의 콧잔등과 뺨 위로 점성의 체액이 투두둑 떨어졌다. 동시에 휴지를 쥔 옐리세이의 손바닥도 젖었다. 이제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입가로 흘러내리는 정액을 핥아 먹는 저우룬칭에게 킥킥거리며 속닥였다.

「난 네 얼굴에 쌀 때 기분이 좋더라」

저우룬칭이 손등으로 뺨에 묻은 정액을 문질러 닦았다.

「음. 나도 네 몸 안에 쌀 때 좋아. 여자보다 더 녹진녹진 녹거든」
「시끄러워! 이 새끼는 노예 주제에 말대답을 왜 이렇게 잘하냐?! 넌 노예 끝날 때까지 절대 내 몸에 못 쌀 거다」

구시렁거리며 캠코더를 다시 침대 옆에 고정하였다. 침대가 삐걱거리고 영상에 비치는 저우룬칭의 상체가 괴롭게 들썩였다. 그가 이제까지 보았던 그 어떠한 야동보다 최고의 딸감이었지만 참고 재생을 중단하였다. 정력을 아껴 뒀다가 오늘 밤에 저우룬칭에게 써야 했다.





오늘은 퇴근이 늦었다. 옐리세이는 영화를 보며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소파에 불편하게 누웠다가 깨 보니 TV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중이었고 시야의 비스듬한 구석에는 등을 돌리고 있는 지우룬칭의 뒷모습이 있었다. 방금        돌아왔는지 그에게서 서늘한 밤바람이 묻어났다.

하품하며 인사하려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이 캠코더의 영상이라는 걸 알고는 잠이 확 달아났다. 촬영하고 있던 것이야 물론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알고 있었던 것과 촬영한 영상을 직접 보게 되면 받아들이는 충격이 다를 것임은 명백했다. 옐리세이 자신도 촬영할 때 꼴리던 것과, 영상을 재생시키며 꼴리던 것의 느낌이 사뭇 달랐으니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 새끼가 더 이상 노예 노릇 못 해 먹겠다면서 빡치면 어떡하지. 아니, 씨발. 내가 노예를 하라고 명령하기라도 했냐, 강요하기라도 했냐, 협박하기라도 했냐. 지가 한다고 한 건데. 난 주인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죄밖에 없다고. 빡칠 땐 빡치더라도 테이프만큼은 사수해야 하는데. 내 총이 어디 갔더라.

테이블로 길게 팔을 뻗으면 총에 손이 닿을 것 같기도 하였다.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여 슬금슬금 팔을 뻗고 있으려니, 문득 캠코더의 재생이 멈추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던 정사 중의 질척한 소리가 뚝 사라졌다.

아, 젠장. 내 테이프. 어떻게든 테이프만이라도 사수하기 위하여 옐리세이는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저우룬칭이 등을 돌렸다.

"아, 자고 있길래 가만히 뒀는데 깼냐?"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한다. 여상한 인사였으나 등골에는 소름이 돋았다. 저 미소, 어디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있는데.

옐리세이는 엉거주춤하게 뻗고 있던 손을 거두며 어설프게 인사하였다. 당장 집어치우라며 캠코더를 작살내는 게 아니라 웃고 있는 낯이라는 게 더 불길하다.

"늦었네?"
"미안. 오늘은 뒷정리할 게 많아서."

그가 웃는 낯으로 캠코더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얌전하게 내려놓으니 오히려 수상쩍다. 바닥에 내팽개치고도 남을 것 같았는데.

슬금슬금 의심의 시선을 던지고 있노라니, 그가 먼저 웃으면서 한 발자국 다가왔다.

"오늘은 나도 좀 피곤하고 너도 쉬어야 할 테니까 적당히 술이나 마시다가 자는 건 어떠냐?"
"난 종일 쉬었는데?"
"내일 밤을 불태워야하지 않겠냐."

여전히 웃는 낯은 꺼림칙했으나 내일을 위한 체력 비축을 하자는 말 자체는 그른 것이 없었다.

내일은 7박 8일이라는 장대한 노예 기간 중 마지막 7박이다.
본래 오늘을 위하여 옐리세이도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제이슨에게 따로 주문하였던 남성용 간호복이 드디어 도착하였다. 그런 고로 성인용품점에서 샀던 수갑을 채우고, 간호복을 입혀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기타 등등 남남 쩝쩝.

간호복과 휴식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진짜 맛있는 건 내일 먹을 수 있으니까 하루 정도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홍콩경찰복이 완성된다. 물론 어둠의 루트로 멀고 먼 홍콩의 경찰복을 구한 건 아니고 수선집에 따로 재단 주문을 넣은 옷이었다. 영화에서 보았던 홍콩경찰복을 프린트하여 비슷하게 만든 옷이기는 하지만 입히면 장땡이니 문제될 건 없었다. 간호복과 수갑보다는 경찰복과 수갑이 훨씬 더 조화로울 것이다.

"그러지, 뭐."
"그래, 그래. 술은 미니 바에 있는 걸로 마시고 안주는 룸서비스 메뉴에서 적당히 골라 놔. 내가 주문할 테니까. 주인님은 쉬고 있어야지? 응?"
"……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노예를 자처하고 있는 걸 보니 의심은 점점 더 부풀었지만, 일단 오늘을 즐기기로 결심하였다. 설마 하나밖에 없는 애인을 죽이기야 할까. 금주 명령은 철회되지 않은 상태지만 애인과 분위기 돋울 겸 한 잔 정도 마시는 건 괜찮을 것이다.

"룸서비스 기다리는 동안 족욕이나 할 테니까 발 씻을 물 가져와."
"알았다."
"네가 씻기는 거야."
"알아."

고분고분히 대답한 저우룬칭이 우선 술을 고르기 위해 미니 바로 갔다. 옐리세이는 그의 뒷모습을 주욱 훑으며 히죽 웃었다. 저 몸매에 유니폼을 입혀 놓으면 끝내줄 것이다. 닥치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면서 살 필요가 있나. 한 번뿐인 인생, 즐겨야지.





기껏 가게에서 편하게 마작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옐리세이가 퇴원하자 오히려 저우룬칭의 시간이 없어졌다. 니시무라와 관련되어 위험해질 뻔하였기 때문에 대신 며칠간 수발을 들어주게 되었다는 간략한 설명이 붙여지긴 했지만 며칠간 재미나게 하던 마작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심심하긴 했다. 저우룬칭은 한술 더 떠서 홍위롄을 기다리고 있던 팡룽을 빈 작탁에 앉혀두고 옐리세이를 만나러 외출하기까지 하였다.

저우룬칭과 팡룽이 과거에는 친밀한 사이였다는 걸 알고 있는 장쯔귀는 팡룽이 옆에 있다는 것에 언짢기만 하였을 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리뎬차이와 리뎬신은 바짝 하여 마작패를 제대로 옮기지도 못하였다.

저우룬칭이 말하였던 ‘수발’이 ‘노예’라는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옐리세이는 너무나도 경쾌한 얼굴로 사람이 있든 없든 스스럼없이 노예를 호명하였고, 홍위롄은 눈까지 부릅떴다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저우룬칭의 등을 격려하는 것처럼 톡톡 두들겨주었다. 장쯔궈는 험악하게 인상을 굳혔고, 리뎬차이와 리뎬신은 옐리세이가 올 때마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스르륵 사라졌다.

저우룬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옐리세이가 아무리 노예라고 노래를 불러도 표정만큼은 평연하였으나, 장쯔궈는 저우룬칭이 엄청나게 인내하면서 쌓아두고 있는 중 이리라 확신하였다.

"이쁜아〜 오빠 왔다〜〜〜"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뒷정리를 할 무렵이었다. 밖에서 한 잔 꺾고 왔는지 옐리세이가 살짝 혀가 꼬인 목소리로 뒷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장쯔궈는 보았다. 무표정하게 손을 씻던 저우룬칭의 얼굴에 금이 갔다가, 빙긋 웃는 낯으로 바뀌는 것을. 아, 이거 분명히 꽤나 쌓여있다는 건데.

장쯔궈는 원인이 되었을 놈을,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을 보듯이 혀를 찼다. 놈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 저우룬칭이 빙그레 웃으며 인사하자 입가가 가늘게 떨리긴 했지만 이내 자신도 하하하 소리 높여 웃었다.

"다 좋은데 내가 왜 이쁜이냐?"
"엉덩이가 이쁘잖냐. 그리고 주인님 말에 어디 사사건건 말대꾸야?"
"흠."

저우룬칭은 반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폭풍전야의 고요 같았다. 장쯔궈는 관심을 끄기로 하였다.

저우룬칭의 웃음에 이유 없이 술이 살짝 깨는 느낌이었지만, 오늘의 즐거움을 위하여 내일의 고뇌를 모르는 척하기로 한 옐리세이는 들고 온 쇼핑백을 신나게 내밀었다.

"입어."
"……뭔데?"

그가 웃는 와중에도 의심스러운 시선을 움직였다.

"경찰 유니폼. 특별히 수제작한 거다, 이 말씀."
"또 치마는 아니겠지?"
"남자 옷이야, 남자 옷."
"음, 그렇다면."

수건에 손을 닦은 저우룬칭이 쇼핑백을 들고 주방을 나갔다. 위층에서 갈아입으려는 듯하였다. 옐리세이는 괜히 장쯔궈를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저 눈치 없는 중국 놈만 아니었으면 옷을 갈아입는 저우룬칭의 스트립쇼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오래지 않아 저우룬칭이 내려왔다. "와우." 무심코 휘파람이 휘익 나왔다. 옷이 날개란 말이 맞았다. 매번 성의 없이 적당한 사이즈의 적당한 재질의 적당히 편한 셔츠와 바지만 입던 놈에게 날렵한 선이 떨어지는 검은색 제복을 입혀 놓으니 눈이 호강한다. 몸매 좋은 놈이, 핏이 잘 빠진 제복을 입으니 진짜 섹시했다. 제복을 검은색으로 택한 홍콩경찰에게 만세를 보냈다.

경찰을 보면 자동적으로 경직되는 범죄자였던 장쯔궈는 사례가 들려 기침을 쿨럭거렸다.

낯선 옷이 어색한지 소매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던 저우룬칭이 조금 무색한 어조로 물었다.

"평복도 아니고 정복을 어디에서 구해 왔냐?"
"그냥 홍콩 영화에서 본 걸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와, 존나. 역시 몸매가 좋으니까 옷빨이 잘 받네."

감탄하며 한 바퀴 돌아보라는 말에 저우룬칭이 어색하게 몸을 빙글 돌렸다. 벨트 재킷인지라 엉덩이가 옷자락에 가려지는 부분이 아쉽기는 했지만 완벽한 핏이었다. 그래, 핏은 확실히 간호복보다는 경찰복이 더 잘 나오지. 어제는 굶었으니 오늘은 꼭 포식하고야 말 것이다.

저우룬칭을 가까이 부른 옐리세이는 옷과 함께 가지고 온 소품을 꺼냈다.

철컹. 싱그러운 마찰음에 이어 저우룬칭의 왼쪽 손목과 옐리세이의 오른쪽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장쯔궈는 한심한 생각과 한심한 표정을 감주지 않았지만 수갑과 경찰복에만 정신이 팔린 옐리세이는 미처 보지 못하였다.

"……수갑은 왜?"
"야. 경찰은 당연히 수갑이지."
"경찰인 내가 너에게 수갑을 채우는 게 아니라?"
"오늘은 경찰이 마피아를 체포하려다가 역으로 당해서 갱뱅당하러 끌려간다는 설정이거든."
"아, 그러냐."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장쯔궈는 중간에 딴죽을 걸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폭풍 전야 같은 저우룬칭의 덤덤한 표정을 보고는, 목을 간질이는 말을 눌러 삼켰다.

수갑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얼른 가자고 채근하는 옐리세이와, 옐리세이의 수갑에 끌려가던 저우룬칭이 문턱을 넘기 전에 뒤를 돌아보며 광둥어로 말했다.

"내일…… 아니, 모레 늦게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미리 사과하마."
"네. 잘 다녀오십쇼."

내색 없이 저우룬칭을 배웅했지만, 장쯔궈의 귀에는 내일이 옐리세이의 제삿날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옐리세이는 나오자마자 호텔로 직행하려했지만 저우룬칭이 만류하였다.

"옐랴. 기껏 유니폼까지 입었는데 섹스만 하는 건 좀 아깝지 않냐?"
"섹스를 하는 게 뭐가 아까워. 섹스가 얼마나 좋은데!"

여기가 도로변만 아니었다면 내 몸에 넣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거냐며 한껏 깐죽거려주었을 텐데 아쉬웠다.

그대로 무시하고 택시를 잡으려는 옐리세이의 손을 저우룬칭이 또 끌어당겼다. 서로 수갑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자신이 저우룬칭을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지만, 저우룬칭 또한 자신을 내키는 대로 끌고 오니 은근히 부아가 났다. 망할 노예 놈이.

"잘 생각해 봐. 섹스를 하려면 유니폼을 벗어야 하잖냐?"
"단추 풀고 바지 지퍼만 내릴 건데."
"옷이 더러워지잖아."
"영상 촬영할 테니 문제없어."

오늘을 위하여 테이프도 넉넉하게 준비하였다. 침대에 쓰러트려서 수갑도 채우고, 제복을 입은 채 섹스도 하고, 간호복과 경찰복이라는 두 제복으로 스트립쇼도 시키려면 오늘 밤새 촬영을 하여도 부족할 것이다.

루이라는 제목의 포르노 비디오를 찍으면 딱 좋을 텐데. 옐리세이는 탄탄한 근육과 아찔한 핏으로 쫙 빠진 저우룬칭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페니스 밴드와 경찰복도 그리 나쁜 조합은 아닐 것이다.

또다시 언급된 캠코더에 저우룬칭이 슬며시 웃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옐리세이의 귀에 속삭였다.

"영화관 가자."

저우룬칭이 무슨 핑계를 대며 기피하여도 심드렁하게 반응하던 옐리세이의 귀가 번쩍 뜨였다. 평범한 애인이라면 이 시간에 영화를 보러 가자는 말이 심야영화나 밤샘 영화라 읽히겠으나 영화관에서의 아주 짜릿한 추억이 있는 두 사람은 달랐다.

짐짓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영화관에 가자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물론."
"너한테 펠라 시킬 거야."
"알아."
"대딸도 있고."
"음."
"삽입만 빼고 다 시킬지도 모르는데?"

저우룬칭이 어깨를 으쓱하였다.

"대신에 사람이 없는 구석 자리에서."

흥정은 성공하였다.

"콜."

계약 기간이 내일까지이니 섹스는 돌아가서도 시킬 수 있지만 저우룬칭이 스스로 영화관에 가자고 하는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른다.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버킷리스트의 항목 하나를 성취할 기회이기도 하다. 옐리세이는 즉시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붓으로 그리어 수작업한 오래된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는 작은 영화관은 때가 지난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였지만 주된 수입원은 심야 영화였다. 데이트 콘셉트의 창녀와 은밀한 섹스를 즐기러 오는 관광객의 루트 중 한 곳이었다.

평소의 옐리세이는 돈 주고 하는 씹질에 데이트 콘셉트질까지 하냐며 비웃었지만 오늘은 당당하였다. 저우룬칭과 자신은 진짜 데이트를 하고 있으니까.

상영되는 영화는 도둑들이 들어와 남편이 보는 앞에서 강간당하는 유부녀라는 내용의 포르노였다. 결박과 유부녀와 NTR과 강간과 쓰리썸이라는 인기 요소가 섞여 있지만, 옐리세이로서는 단연 부인을 묶어두고 남편을 범하는 쪽이 취향이었다. 저우룬칭을 묶어두면 더 좋고.

다른 때라면 포르노 감상은커녕 쳐다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유부녀를 묶고 범하는 도둑들의 체위를 연구하며 저우룬칭을 묶을 체위도 궁리하였다. 수갑 하나만 가지고는 부족할 것 같은데 돌아기는 길에 밧줄이라도 사야겠다. 근데 이 시간에 밧줄을 어디에서 산담.

고민은 잠시 뒤로 미루고 수갑을 찬 손을 당겼다. 따분한 얼굴로 하품하며 영화를 보고 있던 저우룬칭이 고개를 돌렸다. 옐리세이는 두말할 것 없이 검지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영화의 음향이 꽤 컸기에 세세한 판별은 어려웠으나 이곳저곳에서는 이미 한창 재미를 보는 중일 것이다.

저우룬칭은 주변을 한 번 휘둘러보고, 상영관 내에서 다른 일행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한가한 사람이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하고는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수갑이 채워지지 않은 오른손으로 옐리세이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잔뜩 기대감으로 흥분된 상태인지 앞섶이 벌써 두툼했다.

이런 목적을 갖고 이런 목적으로 오는 영화관이라는 건 들었지만 막상 펠라티오를 하려니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라 침만 삼키고 있자니, 오래 인내하지 못한 옐리세이가 뒷목을 잡고 자신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꾹꾹 누르며 비렸다. 속옷에 부벼지는 뺨으로 옐리세이가 흥분하고 있는 증거가 선연히 닿았다. 저우룬칭은 몰래 한숨을 삼켰다. 야이쑤코에 지인이 거의 없는 게 다행이다. 누가 목격하여도 소문은 나지 않겠지.

옆자리로 바짝 굽히고 있는 허리가 불편했다. 얼른 하고 끝내자는 작정으로 드로어즈를 밀었다. 드로어즈에 불편하게 눌려 있던 성기가 불뚝 튀어나왔다. 뿌리와 고환을 느슨하게 주무르며 귀두부터 머금었다. 부드럽고 예민한 해면체가 혓바닥을 간질였다. 옐리세이는 귀두를 핥아주는 걸 좋아한다.

"으응……. 응."

목덜미를 누르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빠지고 단 신음이 옐리세이의 코끝에서 흘렀다. 이를 세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성기를 입안으로 삼켜갔다. 텁텁한 체향이 물씬 풍겼다. 으슥한 어둠이 장악한 상영관에 알몸과도 같은 횐 빛이 번들거렸다. 여자 배우의 가파른 교성이 귓전을 쟁알쟁알 자극하였다. 습하게 데워진 공기에는 누군가의 신음이며 정액이 스며 있을 것이다. 오감이 난잡한 섹스로 가득하다. 묘하게 자극되는 불쾌감이 배덕적인 쾌감을 건드렸다.

부풀대로 부푼 성기를 세게 흡입하였다. 옐리세이가 허리를 튕기며 야릇하게 신음하였다. 신음이 들리자 반사적으로 왼손을 올려 입을 막았다. 수갑에 연결된 채라 자신의 손도 같이 딸려 올라온 옐리세이가 밀어내려 하였지만, 그의 손가락 사이로 그대로 깍지 낀 채 자신의 손가락을 옐리세이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혓바닥을 세게 누르며 손가락을 깊숙이 삽입했다. 콜록콜록 잔기침하며 밀어내려던 옐리세이도 이윽고 츕츕 소리를 내며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 저우룬칭의 손가락 사이에 불편하게 걸린 옐리세이의 손가락이 움찔움찔했다.

신경을 너무 손가락에 쏠리게 하지 않고 오럴 섹스에 집중하려 애썼다. 타액으로 흠씬 젖은 기둥에 핏줄이 불거졌다. 저우룬칭 자신의 호흡도 가빴다. 막판 스퍼트를 가하듯 기둥을 아래위로 빠르게 우물거리며 사정을 재촉했다.

"흣......!"

옐리세이가 거의 그의 손가락을 깨물며 사정하였다. 뜨거운 액체가 목 안과 입천장을 세게 적셨다. 뱉어내려 했지만 뒷목에 넌지시 얹고 있던 손이 꾹꾹 누르며 삼킬 것을 무언으로 종용하였다. 결국 목울대를 움직여 정액을 삼키고야만 저우룬칭은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폈다. 몽롱한 쾌감에 젖은 옐리세이의 얼굴 위로 영사되는 빛이 늘어졌다.

"좋냐?"

바지를 추스를 생각도 않으며 늘어진 옐리세이가 끄덕였다. 그래, 뭐, 좋았다면 다행이지만. 입안에 침과 함께 고인 비릿한 정액 맛을 뱉어내려던 저우룬칭은 팔자 좋게 즐기기만 한 옐리세이를 흘금 보고는 그가 무어라 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이 대뜸 입을 맞췄다.

옐리세이는 "씹! 어따 키스, 익!" 펄쩍 뛰며 밀치려 했지만 손목이 연결된 수갑 때문에 행동이 부자연스러운데다 나른한 쾌감에 젖어 무방비 상태였던지라 반응이 늦었다. 입안의 씁쓸한 맛까지 몽땅 옐리세이에게도 넘겨 보내고야 저우룬칭은 얼마간 복수한 기분으로 입술을 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정액 맛을 알게 된 옐리세이가 오만상을 썼다.

한창 강간을 당하고 있는 배우의 간드러지는 교성이 짧았던 오럴 섹스의 여운을 뒤 덮었다.

영화는 강간을 당하였던 몸의 기억을 잊지 못한 유부녀가 남편 몰래 도둑들이 침입하기 쉽도록 밤마다 은밀히 집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장면으로 끝났다. 펠라티오 외에도 온갖 걸 다 시키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던 옐리세이였지만 펠라티오가 만족스러웠고, 직후 얼결에 알게 되었던 자신의 정액 맛 덕분에 기분이 잡치기도 하여 얌전히 영화만 보고 나왔다.

영화를 다 보고 一 안 좋은 해프닝은 있었지만 一 펠라티오도 끝냈으니 이번에야말로 호텔로 돌아가야 할 때다. 하지만 저우룬칭이 또 수갑째 당기며 붙잡았다.

"가기 전에 입가심할 겸 술이나 마시지 않겠냐? 의사가 이제 술 마셔도 된다고 허락 해 줬다며?"

입가심이 필요하긴 했다. 몇 번이고 침을 뱉었지만 입안에 남은 비릿한 맛이 개운하게 가시질 않아 영 찝찝했다. 하지만 술은 호텔에도 있다.

턱도 없는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저우룬칭의 제안은 끝난 게 아니었다.

"엉덩이 만지게 해 주마."
"흥. 주인님이 노예의 엉덩이를 만지는 데 일일이 허락이 필요할 것 같냐."
"둘만 있는 조용한 곳에서 만지는 것과 다른 사람들도 있는 곳에서 몰래몰래 만지는 건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모처럼 제복도 입었고."

솔깃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놓고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것과 은밀히 만지작거리는 성추행은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들 터였다. 어쨌거나 엉덩이를 추행한다는 전제는 변하지 않으니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았지만 이놈이 자꾸 먼저 제안을 한다는 게 거슬렸다. 설마하니 시간을 끌려는 작정은 아니겠지.

"오늘 밤부터 내일 하루 종일 내도록 밖을 빙빙 돌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그렇게 뻔한 수작이라면 아무리 너라도 넘어가겠냐."

은근슬쩍 비하 발언이 섞인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은 들어주었다.

"오늘이 노예 생활 마지막 날이기도 하니 너와 즐거운 추억을 갖고 싶어서 그렇지. 안 그래,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실로 황홀한 단어가 아닌가. 옐리세이는 자신의 노예를 새로이 확인하며 호기롭게 외쳤다.

"좋아. 술이나 마시러 가자. 대신에 딱 한 시간만 있다가 올 거야."
"마음대로."

저우룬칭이 쾌히 응했다. 옐리세이는 그의 허리를 꽉 잡아당겨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수갑에 묶인 손이 엉덩이를 더듬는 옐리세이의 손과 함께 끌려가 불편한 자세이긴 했지만 저우룬칭은 별다른 말없이 옐리세이를 따라갔다.

이참에 저우룬칭에게 술이나 열심히 퍼먹여서 취하게 해야겠다. 취한 놈이라면 다루기에 더 쉽겠지. 침대에 쓰러트려 수갑을 채우기로 할 작정이었던 계획의 첫머리에 ‘술에 취하여 해롱거리는’이라는 묘사를 추가하며 옐리세이는 만족스럽게 가슴을 젖혔다.

"후후후!"
"하하하."

음험하게 웃으면서 돌아보니 저우룬칭도 그냥 따라 웃었다. 저 웃음이 곧 애원하는 목소리로 바뀔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여 옐리세이는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저우룬칭의 주랑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은 그의 머릿속에 미처 떠오르지 못했다.





의식이 몽롱했다. 잠에서 깨긴 한 것 같은데 명확한 이지가 제대로 서지 않는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하지만 꿈에서까지 이렇게 힘들 이유가 있나. 골이 빠개질 것 같았다. 이미 2/3쯤 빠개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머리도 쑤시고 앞도 안 보이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옐리세이가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끙끙거리는 신음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자각하기까지는 몇 초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대체 어제 얼마나 퍼마신 거지.

둔탁한 어둠에 갇힌 채 어젯밤을 회상하였다. 딱 봐도 경찰복처럼 보이는 유니폼을 입은 저우룬칭과 술집에 들어가자, 경찰이 왜 여기까지 왔느냐는 아니꼬운 시선은 두 사람의 손목 사이에서 잘그락거리는 수갑에 ‘아, 그런 플레이군.’이라며 납득한 시선으로 바뀌고, 시선이 바뀌자 관심은 끊어졌다. 옐리세이를 알아본 지인 몇몇 희떠운 소리를 받아치는 내내 저우룬칭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쪽팔려서」

왜 그러느냐는 물음에 한숨을 쉬었다. 못 올 자리에 온 것처럼 낯없어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더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술을 마셨다. 망할 놈이 밀크티에 약을 탄 적이 있었기에 혹시 이번에도 그런 호작질로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술은 항상 그가 따랐다.

그리고 마셨다. 마셨다.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마셨다.

입에 안주를 넣으라는 명령에 저우룬칭이 먹여주는 안주를 날름날름 받아먹으면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난다. 거의 비슷한 속도로 술잔을 비워가고 있었는데 취한 기색이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저우룬칭을 보며 이 자식 왜 이렇게 주량이 세냐는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게 기억의 끝이었다. 술집에서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침실에 술 냄새가 진동하고 배가 쓰라리고 머리도 아픈 걸 보니 필름 끊긴 술떡이 되었으리란 건 기억나지 않아도 뻔한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루이는 어떻게 된 건데.’

술에 취해서 하룻밤을 날려 버렸다니 미치도록 아까웠다. 이건 아무래도 루이 놈의 수작에 또 넘어갔다라는 의심밖에 들지 않는다. 컴컴한 침실에는 혼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노예 새끼를 호출하려고 입술을 뗐지만, 목소리가 아닌 기침 소리만 목을 긁으며 터졌다.

울렁거리는 속이 요동쳤다. 얌전히 베개에 머리를 뉘고 죽은 듯이 늘어져 있다가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일어나려고 했다. 생각만 했다는 뜻이다.

"……어?"

멍청하게까지 들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술에서 났다. 옐리세이는 일어나기 위해 팔을 움직였다. 철컹철컹. 다리도 뻗어 보았다. 철컹철컹. 술이 확 깼다. 둔하게 눌려 있던 감각이 대번에 경각했다.

"자, 잠깐만."

당황하여 손발을 마구 움직였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철컹철컹철컹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었다. 손목과 발목이 동그란 철제 기구 안에서 헛돌며 부딪혔다.

"……씨발."

인정해야 했다. 그의 팔다리는 지금 수갑이 채워져 침대에 결박되어 있다.

하나의 사실을 인정하고 나자 눈앞을 갑갑하게 죈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침실이 어두운 건, 비단 그가 눈을 감고 있거나 커튼으로 빛이 가려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과 얼굴에 감긴 두꺼운 천이 그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범인은 한 명밖에 없다.

"루이! 야이 개 같은 년아! 너 밖에 있지?!!"

토기가 올라올 것 같은 속을 누르며 쩌렁쩌렁 외쳤다. 바짝 마른 목으로 큰소리를 내려니 목이 따가워 결과적으로 요란한 기침이 되긴 했지만 그의 의사를 침실 밖까지 전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에 이어 둔한 어둠 너머로 가느다란 빛살이 들어왔다.

"깼냐."

깼냐. 깼냐고 물었다. 저 빌어처먹을 새끼가.
지나치게 평연하여 야유하는 것처럼 들리는 인사에 열이 확 뻗쳐 욕설을 퍼부었다.

결과적으로 체력만 소모하는 꼴이 되고 만 옐리세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너, 이......! 수갑은 언제 푼 거야?!"
"네가 취했을 때 네 바지 주머니에서 슬쩍."
"내 수갑도 당장 풀어!!"
"싫은데."

당연히 저우룬칭은 거부하였다.

"씨발년이!!"

다시금 화려한 욕설을 내쏘아도 저우룬칭은 별반 반응이 없었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신랄한 욕설 퍼레이드를 하던 옐리세이는 마지막 한 줌 남은 기력까지 전부 소모하여 늘어졌다. 가슴을 들썩이며 헉헉거리고 있는데 자신의 숨소리 외에도 다른 잡음이 섞여 있었다. 우물거리기도 하고, 마시는 것 같기도 했다. 손이 결박되어 있는 건 차치해도 앞이 안 보이니 갑갑해 죽을 맛이다.

"야! 너 지금 밥 처먹고 있냐?!"
"사람이 먹고 살아야지. 벌써 점심때야. 너도 먹을 거냐?"
"지랄하지 마! 넌 지금 무슨 신세라는 걸 잊었냐?! 노예가 되겠다고 한 건 너야!!"

노예가 되겠다고 한 것도 거짓말이냐, 거짓말만 날리는 아구창을 날려 버리고, 어쩌고저쩌고 욕할 때만 기운이 솟아나는 옐리세이가 세 번째로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저우룬칭은 묵묵히 토스트를 먹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토스트나 처먹고 있다는 게 더 얄미워 언성은 더 높아졌다.

"옐랴."

손을 탁탁 터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저우룬칭이 나직한 목소리로 호명하였다. 헥헥거리던 옐리세이는 저 새끼가 무슨 개수작을 하더라도 욕으로 받아쳐 줄 준비를 하였다.

"네가 퇴원한 게 몇 시였는지 아나?"
"개쌍…… 어, 어?"

뜬금없는 물음에 허가 찔린 그가 더듬거리는 사이에 저우룬칭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정확히 오전 11시 28분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계약은 168시간에 하루 24시간을 더 하여 192시간이지."

차분하게 논리를 전개하니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옐리세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저우룬칭이 담담히 마무리를 맺었다.

"그리고 지금은, 오후 1시 19분이야. 이미 우리의 노예 계약은 1시간 51분 전에 끝났다고."
"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기겁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옐리세이에게 저우룬칭은 친절히 커튼을 젖혀 주었다. 안대 너머로도 확연히 감지할 수 있는 밝은 빛살이 쏟아졌다. 옐리세이는 펄펄 날뛰었다.

"씨발! 7박 8일로 한 거잖아! 아직 8일째 덜 지났어!! 씹년아!!"
"옐랴. 네가 한 말을 까먹었냐? 넌 그때 분명히 168시간이라고 말했어."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움찔했지만 지금은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뻔뻔하게 나가야 할 때였다.

"누가 168시간이라고 씨불였다는 거야?! 날짜로 헤아려서 7박 8일이야!!"
"음, 그래. 넌 계속 7박 8일로 생각해도 돼. 난 192시간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저우룬칭이 다가왔다. 기척이 바짝 가까워지며 침대가 삐걱거렸다. 옐리세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침대 반대편으로 도망치려 하였지만 손목과 발목을 붙잡아 놓고 있는 수갑은 그에게 그리 큰 자유를 선사해 주지 않았다.

"뭐, 뭐, 뭘 할 작정인데?"

바짝 긴장된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나왔다. 이건 긴장해서 더듬거리는 게 아니라 목이 아파서 더듬거리는 것이라고 자기 위안을 하는 옐리세이의 뺨 저우룬칭이 만지작거렸다.

"노예의 반란이라고나 할까."

그러며 상냥하게 웃었다.

"네 영상도 예쁘게 찍어주마."





이건 진짜 미친 짓이었다. 세상에 많고 많은 것이 야동인데 왜 굳이 캠코더를 들고 고생해서 찍는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절대 안 된다.

패악을 떨어도 먹히지 않자 옐리세이는 설득을 시도하였다.

"야, 야. 나야 게이니까 널 찍어도 좋았지만 넌 헤테로잖아? 남자 영상 따위를 찍어서 뭐하게?"

말을 하면서도 상체를 움찔움찔 뒤틀며 손을 피하려 했지만 저우룬칭은 아랑곳하지 않고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 뛰지 마, 단주 뜯어지니까. 그리고 남자 영상이 아니지. 애인 영상이잖냐?"

애인. 그 마법 같은 단어에 순간 멈칫하였지만 곧 정신을 되찾고 허리에 올라탄 저우룬칭을 떨어트리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저우룬칭은 두말 않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옷감이 좌악 뜯어지는 소리가 상쾌하게 들리며 튕겨 나간 단추가 몸 위로 떨어졌다.

"야!! 이 셔츠 존나 비싼 거란 말이야!!"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지난번에 재킷을 찢을 때는 사 준다는 말이나 했었는데 一 퇴원하고 정말 사 주긴 했다 一 이젠 그런 말도 없었다. 이 자식, 진심인가? 등줄기가 뻣뻣하게 긴장되었다.

"흐음."

저우룬칭이 낮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손끝이 목덜미부터 느슨하게 쓸어내렸다. 분명히, 애무 같기는 한데 기분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오싹해서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날렵하게 뻗은 쇄골을 따라 문신 위를 덧그리던 손이 피부 위를 흘러내렸다. 손가락이 피부를 덧그릴 때마다 체온이 0.1℃씩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긴장으로 뻣뻣해진 유두가 문대어져 무심코 소리를 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플래시가 동시에 터졌다. ……찰칵?

"좋은 표정이야, 옐랴."
"네! 사진도 찍냐?!!"
"물론."

대답하는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덤덤하다.

"한 손으로 카메라 들고 사진 찍자니 번거로우니까 얌전히 있어라."
"아악! 아아악!!!"

너무 열 받아 괴성과 분간이 가지 않는 욕 폭탄을 터트리거나 말거나 저우룬칭은 담담히 왼쪽 발목의 수갑을 풀고, 담담히 걷어차는 왼발을 붙잡고, 담담히 바지를 벗기고, 담담히 드로어즈를 찢었다. "속옷은 벗기기도 귀찮군."이라는 혼잣말은 덤이었다.

이젠 체면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았다. 서늘한 아랫도리에서 또 한 번 플래시가 터지자 옐리세이는 분노와 설득의 단계를 넘어 애걸을 시작하였다.

"루, 루이. 난 그래도 펠라할 때 외에는 네 상체만 찍었잖아. 난 영상 찍으면서도 널 배려해서 노골적인 부위는 촬영 안 했다고. 우리 애인적으로 애인답게 상반신만 서로 씩는 걸로 타협하자. 응?"
"상체만 찍은 건……."

저우룬칭이 카메라를 내려놓고 캠코더를 빈손에 드는 것 같았다. 캠코더의 전원이 켜지고 기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치겠다.

"네가 박히는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서겠지."

정곡이 찔렸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넌 내 배려를 그렇게 몰라 주냐?! 내가 얼마나 널 배려하고 있는데!"
"음. 몰라줘서 미안."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다리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이어, 차가운 점성의 액체가 회음부와 비부로 주욱 짜였다. 러브젤이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하려 한다는 예감에 어떻게든 피해 보려 발버둥질했지만 사지가 결박된 상황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나마 자유로웠던 왼 다리도 저우룬칭이 다시 수갑을 채웠다.

"다 폐기할 게! 영상 다 폐기할 테니까 제발 촬영만은, ……읏!"

그의 목소리를 끊을 듯이 손가락이 삽입되었다. 캠코더의 작동음은 그의 다리 사이에서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저우룬칭이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캠코더 화면으로 보니까 육안으로 볼 때와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군. 나까지 더욱 흥분되는 느낌이야. 특히, 네 구멍이 오물거리면서 손가락을 물고 있,"
"다, 닥쳐!!"

촬영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치태는 보이지 않아야 했다. 옐리세이는 한 마리의 냉동 참치가 되기 위한 비장한 결의 속에 이를 앙다물었다.

그렇지만 저우룬칭도 알고 있고, 옐리세이도 알고 있지만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의 몸은, 매우 감도가 좋았다. 더하여 저우룬칭은 그의 성감대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혀끝을 깨물어가며 신음은 참았다. 허나 생체적인 반응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으읏, 응……."

비부를 파고든 손가락이 체적을 하나씩 늘려갈 때마다 진땀이 흘러나왔다. 캠코더를 든 저우룬칭은 한 손만으로 능숙하게 그의 내부를 애무하며 풀었다. 마디를 살짝 굽히어 내벽을 자극하기도 하고 옆으로 벌려 안쪽을 넓히기도 하였다. 러브젤이 질척하게 고인 살벽을 찌꺽찌꺽 문지를 때마다 짜릿짜릿한 쾌감이 허리에서 튀었다. 시야가 차단 된 탓인지 체내를 헤집는 손가락들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고 기도문도 외워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저우룬칭은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가장 예민한 부위를 거침없이 공략하였다. 살짝 들린 허리가 쾌감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흐, 아, 앗."

간신히 앙다물고 있는 잇새에서 신음이 부서졌다. 당장에라도 허리를 흔들며 마음껏 교성을 내지르고 싶어 미질 지경이었다. 배꼽까지 닿을 기세로 잔뜩 발기한 성기에서 쿠퍼액이 뚝뚝 떨어졌다.

절정에 달할 듯 말 듯한 미진한 쾌감에 애가 탔다. 성기를 쥐어짜듯이 압박하며 애무하고, 애무당하고 싶었다. 캠코더 집어치우고 구멍에 박든가 좆을 만지든가 둘 중 하나를 하라고 저우룬칭을 윽박지르고 싶었다.

저우룬칭이 속삭였다.

"만져 줄까?"

캠코더가 그의 손가락을 먹어치우고 있는 구멍으로부터 회음부를 지나 곤두선 성기까지 핥듯이 주욱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우룬칭을 촬영할 때가 문득 떠올랐다. 육안이 아닌, 녹화 중 표시가 뜬 액정 너머로 보였던 저우룬칭의 모습. 똑같은 상황임에도 화면이라는 하나의 매체가 작용하니, 은밀히 목격하는 것 같은, 원하지 않는 행위임에도 속속들이 기록한다는 묘한 정복감과, 그로 인한 야릇한 쾌감.

바로 지금의 저우룬칭에게도 보이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으……!"

결국 뒤의 애무만으로 절정을 맞은 옐리세이의 성기에서 정액이 투두둑 복부로 떨어 졌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절경이네."
"……개년."

사정 한 번에 꽤 탈력한 기분을 느낀 옐리세이는 베개에 머리를 떨구었다. 저우룬칭이 손가락을 빼내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비워진 구멍이 허전하여 움찔거리는 입구에서 떨어지는 러브젤까지 알뜰하게 촬영한 캠코더가 침대 머리맡에 고정되는 기척이 났다. 바로 옐리세이 자신이 수차례의 시도로 가장 적절한 촬영 각도를 찾아낸 곳이었다.

젠장맞을.

"씨발. 할 거면 빨리하고 끝내!"

이렇게 되었으니 캠코더를 작살내야 한다. 설마하니 이렇게 꼼짝도 못 하도록 묶어 놓은 불편한 체위로 저우룬칭이 섹스를 지속하려 하지는 않을 테니, 섹스가 끝나자마자 캠코더를 박살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있는데 그는 침대가에 도로 걸터앉았따.

"나도 빨리하고 싶은데 약발이 아직이라서. 원래 약효가 늦게 도는 건지, 네가 지나치게 일찍 사정한 건지 모르겠군."
"약? 너 마약했냐?"
"마약은 아니고, 이거."

저우룬칭이 말에 이어 눈가리개를 풀어주었다. 커튼을 걷은 창문으로 내리쬐는 햇볕에 갑자기 눈이 부셔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눈꼬리로 흐른 생리적인 눈물을 저우룬칭이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약 상자를 보여주었다.

"너랑 갔었던 성인용품점의 점원이 추천해 준 약인데, 아, 슬슬 오기 시작하는 것 같다."

옐리세이는 눈을 의심하였다. 자신의 기억이나 시력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흥분제는 필시 코끼리 발정제에 버금가는 최음제다. 점원이 침이 마르도록 영업을 하여 얼마나 약효가 대단한지 궁금했지만, 진짜 복용해 본 부하 녀석 중 하나로부터 복상사하는 줄 알았다는 후기를 들은 후에 얌전히 포기한 흥분제였다. 오래오래 살아서 섹스해야지 한순간에 모든 걸 불태우는 섹스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 어마무시한 약효를 체감하기 싫었던 옐리세이는 질색했다.

"뭐?! 최소한의 상도덕은 지켜야 할 거 아냐, 씨발놈아! 잠든 사람에게 흥분제를 주사 하다니 그게 강간이랑 뭐가 다르냐? 어? 묶어 놓고, 사진 찍고, 촬영하고, 흥분제 놓고, 이젠 다음에는 뭘 할 거냐? 돌림빵이라도 하려고?!"
"음? 무슨 소리를 하냐? 흥분제를 주사한 건 네가 아니라 난데."
"엉?"
"나."

저우룬칭이 차분하게 대꾸하며 엄지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동자가 아까보다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이 흥분제, 내가 썼다고."
"……."

부하의 후기로는, 자신은 복상사하는 줄 알았지만 그를 상대하였던 두 명의 창녀는 아랫도리가 온통 헐고 녹초가 되어 며칠 내내 손님을 받지도 못하여 그 가게에는 약물 엄금이 제일 첫 번째 규칙으로 땅땅 못 박히게 되었다고 했다.

전문가 두 명이 관계했는데도 후유증이 남았다.
자신은 한 명이다.
거기다 이놈은, 크다.

옐리세이는 경련하는 눈동자를 슬그머니 움직였다. 발기 전에는 평균 사이즈였기에 블루진을 입고 있어도 그다지 표시가 나지 않았던 저우룬칭의 바지 앞섶이 벌써 부풀었다.

현실적인 공포가 그를 엄습하였다.

"저기, 저기요……. 루이 동지. 진정하시고 우리 지성인답게 침착하게 말로 이 상황 해결하면 안 될까요?"
"동지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을. 홍콩은 자본주의이고 나도 자본주의자야."

말투와 어조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간밤에 보드카를 몇 병이나 비워도 까딱하지 않던 얼굴이 혈관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붉고, 거친 호흡으로 어깨가 들썩이는 저우룬칭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 환장하겠다. 약효 굉장하네, 이거."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옐리세이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댔다. 뜨거운 숨결이 피부에 쏟아졌다. 성급한 손길이 벨트를 철컥철컥 풀었다.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불뚝 튀어나왔다. 힘겨울 만큼 크기는 크지만 자신에게 죽을 것 같은 쾌감을 선사해 주었던 그 우람한 물건이, 진짜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수갑에 연결된 침대가 요동을 쳤지만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새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옐리세이의 뺨을 핥는 나른한 속닥거림이 건너왔다.

"백돼지."
"으, 으응?"

저우룬칭이 섹시하게 웃었다.

"넌 죽었어."

그 순간, 옐리세이는 지옥을 보았다.





"후......."

저우룬칭은 길게 신음하며 이마를 눌렀다. 이 흥분제가 합법과 위법의 경계에 있다고 했던 점원의 말을 전부 믿은 건 아니었지만 직접 복용하니 확실하였다. 약 성분을 분석하면 120% 위법일 것이리라 확신하였다.

밤새도록 독주를 들이부은 뒤에 성분마저 의심스러운 흥분제를 주사하였더니 머리도 아프고 어지럽고 세상이 노랗게 변해서 뒤집히고 삭신은 쑤시고,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뭐, 그래도 이만큼 한 보람은 있지.’

아픈 와중에도 실소가 나와 침대를 돌아보았다. 네온사인이 점멸하는 도시의 어둠 속에, 옐리세이가 있었다. 팔다리의 결박은 푼 지 오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기절해 있었다. 복부와 다리 사이는 그 자신과 저우룬칭이 사정한 허옇게 말라붙은 정액으로 난잡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허벅지 안쪽에 멍도 생긴 것 같았다.

저우룬칭은 허리를 숙여 옐리세이의 뺨을 더듬었다. 마른 눈물자국이 만져졌다. 눈물까지 흘렸던가. 생각해 보았지만 그 자신의 기억도 명료하지 않았다. 시달리다 못해 그만하라고 애원하는 옐리세이의 입술을 물어뜯을 듯이 키스하며 몰아붙이다가, 잠깐의 소강 중에 기절한 것처럼 늘어진 그를 또 다그쳐서 허리를 들어 올리고, 삽입하고, 또 삽입하였던 느낌만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눈물 자국을 슥슥 닦아주고 빨갛게 부은 눈가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니 그대로 세상이 꿀렁거리며 그를 덮쳐왔다.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하였다가 겨우 벽을 붙잡아 지탱한 저우룬칭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속을 억누르며 한참을 서 있다가 비틀비틀 걸음을 뗐다. 리빙룸의 테이블에 옐리세이가 촬영하였던 캠코더의 테이프가 있었다. 테이프의 필름을 분리하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합성수지가 타는 독한 냄새에 또 속이 울렁거렸기에 얼른 창문을 열고 환기하였다.

이것으로 모든 증거는 사라졌다. 그가 옐리세이를 찍고 촬영하는 시늉을 하였던 카메라와 캠코더에는 애초에 필름과 테이프가 들어 있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손에 필름과 테이프가 있다고 옐리세이가 착각하고 있을 테니 효과는 충분하다.

두 번 다시, 적어도 향후 몇 년간 성노예가 되라든가 촬영을 하자는 소리는 입도 벙긋하지 않을 것이다.

‘……몇 년이라.’

무심코 떠올린 단어에 스스로가 놀라워 입속에서 곱씹었다. 차오쑹윈의 사후, 단 하루도 제대로 사는 것 같지 않았던 자신이 몇 년 앞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게 얼마 만인지.

묘한 상황에서의 묘한 생각이지만, 실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저우룬칭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침실로 돌아갔다. 옐리세이는 나갈 때와 똑같이 미동도 없이 잠든 채였다. 수갑의 흔적이 남지 않게 하려고 붕대를 감이두긴 했지만 뼈가 부딪혀서 퍽 아팠을 살갗을 혀로 살살 핥았다. 옐리세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잠꼬대를 듣지는 못 했지만 필시 자신의 욕을 하는 게 분명할 것 같아 또 실없이 웃고는, 그의 옆에 머리를 뉘었다.

그리고 옐리세이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깊은 잠이었다.





정기적인 결산 보고를 하기 위해 란뜨제프스카야의 빌딩을 방문한 이오시프는 복도의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친구의 익숙한 뒷모습에 반색하며 인사하였다. 어제 오늘 중에 복귀한 모양이다.

"레샤. 이제 몸은 좀 괜찮냐?"

찌푸린 시선이 돌아보았다. 반갑게 인사하였던 이오시프는 멈칫했다. 노예까지 부리면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다가 온 놈의 얼굴이 아주 반쪽이었다. 퀭한 눈 밑이 거무죽죽한 건, 설마 다크서클인가?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내 얼굴이 뭐."

목소리마저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더욱 놀랄 일이었다. 며칠 전만 하여도 저우룬칭을 성노예로 부리겠다고 희희낙락하던 변태 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저우룬칭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이오시프는 굳이 옐리세이에게 물었다.

"네 그 잘난 노예랑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냐."

예상은 적중하였다. 옐리세이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처절하게 치를 떨었다.

"내 앞에서 노예의 니은도 꺼내지 마!"

그리고는 쌩하니 찬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인정사정없이 몸을 휙 돌리고는, 한 손으로는 허리를 억누르며 쩔뚝쩔뚝 복도를 돌아나갔다.

이오시프는 잠자코 친구를 배웅하며 깨달음을 재삼 확신하였다.

엿 먹이려다가 엿 됐군.




외전 2.





지금쯤 러시아는 하늘에서 구멍이 뻥 뚫리기라도 한 듯 온 세상을 뒤덮어 질식시킬 기세로 눈이 내리는 계절인데, 남국의 하늘은 청명하고 맑기만 하였다. 우기보다는 선선해졌다지만 야이쑤코 섬은 오늘도 더웠다. 사람들의 시선만 없다면 홀딱 벗고 야외를 뛰어다녀도 감기가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도 속옷만 입고 테라스에 나와 있던 옐리세이는 괜스레 향수병이 도지는 기분이라 담배를 뻑뻑 피웠다. 눈이 없는 성탄절을 또 맞아야 한다니.

화창한 하늘에 담뱃재를 열심히 흩날리고 돌아왔는데도 저우룬칭은 숙면 중이었다. 벽시계를 보니 이럭저럭 10시가 되어간다. 비번인 내가 이렇게 일찍 쨌는데 일 나가야 하는 놈은 뭐 이리 늦잠인지. 다이빙하듯이 킹사이즈 침대로 몸을 날려 매트리스가 출렁거렸음에도 저우룬칭은 깨지 않았다.

‘몇 시에 깨워줘야 했더라…….’

심심한 김에 볼을 잡아당겨도 계속 잠을 잘까 말까 상상했다. 대개 먼저 일어나서 옐리세이까지 깨우는 사람이 저우룬칭이었기에 혼자 일어난 아침이 낯설기도 했거니와, 저우룬칭이 가게 오픈 전에 몇 시까지 가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모텔보다 호텔이 지내기에 편한 건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만큼이나 자명한 진리였고, 저우룬칭을 노예로 부리던 一 옐리세이는 노예를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치를 떨었다 一 7박 8일간 마음껏 호텔에서 빈둥거리며 편안함을 누렸던 옐리세이는 그와 일박할 일이 있으면 꼬박꼬박 호텔에 묵었다. 란뜨제프스카야 산하의 호텔이었기에 호텔비를 할인받는 건 덤이었다.

빠벨이 야간에 경비를 서는 날에는 저우룬칭을 아파트에 부르긴 했지만, 부하와 같이 살고 있는 집에 애인을 끌어들여 섹스한다는 게 가끔 계면쩍어질 때도 있었다. 역시 돈으로 후려칠 수 있는 호텔이 최고다 노예 기간 때처럼 특실은 아니었지만 일반실도 쾌적했다.

저우룬칭의 휴일과 그의 비번이 하루 차이였기에 어제는 저녁부터 호텔 레스토랑과 바와 호텔 야간수영장이라는 정석적인 코스를 밟으며 데이트를 하였다. 데이트. 애인 다음으로 좋은 말이다.

밤늦게까지 데이트하고, 기분 좋은 섹스를 하고, 느긋한 숙면 끝에 깬 나른한 아침의 때기를 담뿍 즐기던 옐리세이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얼마 전에 드라마에서 보고 저우룬칭에게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던 장난이 있었다. 거의 저우룬칭이 먼저 기상하였기에 실행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기회가 좋다.

생각이 닿았으니 행동에 옮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번거로워도 꼬박꼬박 들고 다니던 포트폴리오백에서 매니큐어를 가지고 왔다. 아주 새빨간 색의 매니큐어다. 뚜껑을 열자 특유의 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입한 뒤에 한 번 열어보기는 했지만 두 번째로 맡아도 적응이 안 되는 냄새인지라 팔랑팔랑 손부채로 냄새를 조금이나마 흩었다.

단잠을 자고 있는 저우룬칭의 발치로 슬금슬금 움직여 앉았다. 시험 삼아 색을 듬뿍 머금은 매니큐어 솔을 메모지에 스윽 그려 보았다. 음, 선명한 발색이었다. 이런 느낌으로 칠하면 되는 거겠지.

저우룬칭의 오른발을 허벅지에 올리고 일단 엄지부터 매니큐어를 칠하였다. 딱히 여장 취항은 없었던 그는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도 처음이라 이따금 TV에서나 목격하였던 연예인들의 매니큐어를 떠올리며 조심조심 가지런하게 바르기 시작했지만, 손이 삐끗 하여 매니큐어를 가로로 주욱 길게 그어버린 실수 후에는 그냥 발톱 면적 전체에 막 칠했다.

엄지에 다 바르고 나니 좀 웃기고 재미있었다. 피부색이 짙은 편이라 진빨강보다는 검은색이 더 재미났을 것 같기도 했다. 혼자 킥킥 웃은 옐리세이는 다른 발가락에도 매니큐어를 하나씩 칠했다.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할 때 발가락 사이에 뭔가를 끼우는 것 같기도 했다는 생각이 얼핏 들긴 했지만 일단 무턱대고 발랐다.

열 개의 발톱에서 빨간 매니큐어가 반들거렸다. 초록색 매니큐어도 준비해서 하나씩 번갈아가면서 발랐으면 성탄절 분위기가 났을 텐데. 색깔에 대한 뒤늦은 아쉬움은 남았으나 첫 시도치고는 괜찮은 결과에 만족한 옐리세이는 매니큐어가 빨리 마르도록 룸서비스 메뉴판을 들고 팔랑팔랑 바람을 부쳤다.

발톱이 성공하자 이번에는 손톱에 도전해 보았다. 일단 요리로 먹고사는 놈이니 아주 많이 양보하여 양손의 계지와 약지에만 매니큐어를 칠했다. 여자의 손가락에 비하여 굵고 투박한 남자의 손가락에 붉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모습도 나름 섹시했다.

처음에는 그가 깨지 않도록 살살 다리를 올렸지만, 매니큐어를 바르는 흥이 더해질수록 이리저리 멋대로 팔다리를 자신이 편한 쪽으로 움직였음에도 저우룬칭은 뒤적거리기만 할 뿐 쉬이 눈을 뜨지 않았다. 많이 피곤한가.

‘어젯밤에 힘을 꽤 쓰기는 했지.’

휴지통에 버려진 콘돔들을 곁눈질하며 히죽 웃었다. 돌이킬수록 진저리가 나는 노예생활이지만 아예 소득이 없던 건 아니었다. 본격적인 SM까지는 아니어도 코스튬 플레이와 더불어 저우룬칭을 가볍게 묶거나 결박하는 것에 재미가 들린 옐리세이는 이따금 가는 밧줄이며 수갑을 준비해 왔고, 저우룬칭은 썩 내키지 않아했지만 세 번에 한 번은 응해 주었다.

어젯밤에도 경찰복을 입은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위에 올라탔다. 수갑이 스치며 붉게 부은 흔적이 아직 손목에 남아 있었다. 수갑보다는 밧줄로 묶어서 손목에 선명하게 흔적이 남는 게 더 좋긴 했지만 저우룬칭의 사회적 체면을 고려하여 자주 요구하지는 않았다. 애인의 평판까지 배려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갸륵한 애인인가.

"음……."

볼을 잡아당기니 깨어날 것처럼 눈가를 설핏설핏 떨다가, 큰 한숨만 뱉고는 잠이 들었다. 진짜 잘 잤다. 이대로 번쩍 들고 납치하였다가 산속에 파묻어도 계속 잘 것 같다.

一박아도 모르지 않을까.

휴일의 아침을 노곤노곤하게 만들던 느슨한 분위기가 일순간에 달아났다. 옐리세이는 심호흡을 하며 살그머니 불러 보았다.

"루이…… 루이? 미스터 저우? 여보세요?"

이름을 불러도 변함이 없었다. 숨소리가 다소 불규칙하게 변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꿈길을 헤매었다. 오, 맙소사. 흥분이 고스란히 심장을 직격하였다. 격하게 펄떡거리며 펌프질하는 심장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혈류가 전속력으로 전신을 치달았다. 특히, 아랫도리에 집중적으로.

옐리세이는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며 저우룬칭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갔다. 호흡을 따라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복부 아래가 무방비하다. 아침의 생리 현상으로 발기하여 살짝 솟은 드로어즈 위를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첫 경험이기도 하고 출근도 해야 하니까 빠르게 10분 만에 끝내줘야겠다. 일단 길만 트여 놓으면 두 번째, 세 번째 경험까지는 일사천리겠지. 이 자식도 뒤로 하는 쾌감에 길들면 나의 훌륭한 물건을 제발 박아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야.

발기차고 색욕적인 미래가 그의 앞을 열정적으로 밝혔다. 득의만면하게 러브젤과 콘돔까지 착실하게 챙긴 옐리세이는 "잘 먹겠습니다."라는 감사인사를 거친 숨에 섞어 뱉으며 속옷의 밴드 부분을 붙잡아, 벗겼다.

"야."

벗겼을 것이다. 느닷없이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막 밴드를 잡은 손가락이 파르르 경련했다. 옐리세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슬그머니 눈만 위로 올렸다.

"너 뭐하냐."

잠기운은 남아 있었지만 또렷한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노려보고 있었다. 옐리세이는 어설프게 웃으며 벌리고 있던 저우룬칭의 허벅지를 오므리게 하였다.

"간밤에 네가 고생을 많이 해서 마사지해 주려고 했지."
"어디를?"
"허리라든가, 다리라든가?"
"러브젤은 뭔데?"
"마사지 오일이 없어서 대용품으로."
"팬티는 왜 벗기려고?"
"마사지하기 전에 내 것을 구경하려고 했는데 문제 있냐? 네 몸에 달려 있어도 어차피 내 건데."

변명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말을 하면서도 저우룬칭이 이 변명을 믿으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은 옐리세이는 몰래 엉덩이를 뒤로 빼며 도망치려 하였지만 저우룬칭이 더 빨랐다.

그는 옐리세이의 팔목을 붙잡아 침대로 내던지듯이 쓰러트리며 온몸으로 덮쳐 눌렀다. 이 자식 왜 이러냐며 밀어내려 하였지만 이어 키스가 닥치고 하체를 비비자 정신이 몽롱해졌다. 아침의 발정일까. 좋긴 좋은데 타이밍이 왜.

의아했지만 일단 스스로 차려 놓은 밥상이 되겠다고 하니 즐겁게 먹어치우기로 하였다. 다리를 겹치며 오늘도 탄력 있고 탱탱한 엉덩이를 양손으로 주물거렸다. 저우룬칭이 그의 양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며 붙잡았다. 성급하게 누르는 손이 손바닥을 쓸다 손가락을 깍지 끼기도 했고, 손목을 누르기도 했다.

옐리세이에게는 근래 자각해 가는 은밀한 성벽이 하나 있었다. 저우룬칭을 결박하여 행동을 봉쇄한 채 섹스할 때에는 그의 쾌감을 자신의 뜻대로 휘두르는 정복욕에 흥분한다. 저우룬칭도 그걸 알고 있어서 가끔 원하는 대로 순순히 묶여 주는 것 같았다.

저우룬칭에게도 말하지 않은 새 성벽은, 반대로 저우룬칭에게 결박될 때였다. 저우룬칭이 자신을 꼼짝달싹 못 하게 옭아맬 만큼 직접적으로 욕망을 부딪치는 게 은근히 짜릿했다. 남자랑 자기 싫다며 사타구니를 걷어차던 놈이 이젠 자신에게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원했던 포지션과는 정반대의 상황이긴 했지만, 욕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즐거웠다. 첫 섹스부터 묶였던 과거도 이유의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두 번째 섹스 때에도 묶였었다. 이런 젠장맞을 강간범 같으니.

하지만 입이 찢어져도 날 묶어 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기에 저우룬칭이 한창 섹스 도중에 흥분하여 그를 꽉 억누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아, ……응."

핏기가 통하지 않아 손목이 하얗게 되리만큼 저우룬칭이 손목을 누르고 있으니 저절로 신음이 코끝에 걸렸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철컹. 또 철컹.

"……어?"

몹시도 익숙한 소리였다. 바로 어젯밤에도, 들었던 소리다.

깜짝 놀란 옐리세이가 자신의 손목을 확인하기도 전에 저우룬칭이 베개 밑에 깔려 있던 옐리세이의 넥타이를 눈가리개 삼아 얼굴에 묶었다. 철컹하는 소리가 들리고 5초도 경과하기 전에 옐리세이는 그 자신이 차려 놓은 밥상이 되고 말았다.

"이, 이거 뭔데?!"

오랜만에 묶여서 흥분되긴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바로 직전에 저우룬칭을 따먹으려던 시도가 발각되었던 일이 제풀에 켕겨 더듬거리는 그에게 저우룬칭이 이불까지 덮어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기다려. 좋은 거 갖고 올 테니까."

저우룬칭의 목소리가 갑자기 상냥해지면 그리 좋은 결과가 있지 않다는 것을 노예 생활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실감한 옐리세이의 등이 오싹 떨렸다.

"또 약 가지고 오면 죽일 거다!"
"그건 안 써. 두 번 썼다가는 네가 죽이기 전에 내가 죽겠더군."

‘그건’ 안 쓴다면 이번에는 대체 뭘 쓰겠다는 말인가. 옐리세이는 더듬거리며 외쳤다.

"촤, 촬영도 안 돼! 사진도 안 돼!"

그가 두려움에 쪼그라들거나 말거나 저우룬칭에게서는 벌써 부스럭거리며 옷을 입는 기척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냐!"
"그러게 왜 잠자는 사람을 강간하려고 한 거냐."
"마사지해 주려고 했다니까?!"
"음, 마사지의 보답이라고 생각해라."
"마사지하지도 못했으니 보답은 필요 없……!"

그렇지만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저우룬칭은 휭하니 방을 빠져나갔다.

침대에 묶이고, 눈까지 가려진 채 홀로 남게 되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달리 크게 째깍째깍째깍 움직였다. 몇 분 전까지의 흥분은 씻은 듯이 가시고 빈자리를 초조함과 염려가 채워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놈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좀 있으면 그 자식도 출근해야 하니까 별로 할 만한 게 없지 않을까……? 아니, 없어야만 해. 없어야만 한다고.’

목이 바짝바짝 타고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대로 침대째 사라졌으면 좋으련만, 야속한 침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째깍째깍째깍 빠르게 움직이는 초침 소리와 함께 불안감이 극에 달하였을 때, 문이 열리며 저우룬칭이 돌아왔다. 옐리세이는 왔냐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쓸모가 없는 줄 알면서도 침대 반대편으로 꿈틀거리며 최대한 몸을 빼내는 그의 옆에 선 저우룬칭이 무언가를 부스럭거렸다.

"……뭐, 뭔데?"
"잠깐만.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서 사용설명서부터 봐야겠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도대체 뭘 사 왔길래 사용설명서 씩이나 숙지해야 한단 말인가. 불안감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무럭무럭 팽창하였다. 생각나는 성인용품들을 하나씩 머리에서 넘겨 보았지만 무려 사용설명서나 필요한 어른의 장난감은 전문적이고도 하드한 난도의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변태 새끼야! SM은 안 돼! 밝고 건전한 SM은 상호동의하에 이루어지는 거지, 네가 나한테 하려고 하는 짓은 강간이야!".
"......아니, 이건 그냥 에그 로터인데. 상상력이 쓸데없는 방향으로 풍부하군."

달깍. 전원을 켰는지 우웅 하고 에그가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긴장이 탁 풀렸다. 이 호로새끼는 왜 에그 따위를 쓰기 전에 시용설명서 같은 걸 읽어서 사람을 애간장을 태우고 지랄이란 말인가. 야동 한 번만 보면 아는 것을!

"야! 사람을 쫄게 만드는 새 플레이냐?!"
"처음 써 보는 것이기도 하고, 몇 시간 지속되는지는 알아야지."
"엉?"
"제일 오래 지속된다고 하는 걸로 사오긴 했다만……."

‘몇 시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옐리세이가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다리가 벌어졌다. 깜짝 놀라 오므리려 하였지만 그의 허벅지를 바닥에 꾹 누른 저우룬칭이 드로어즈를 벗기고 에그를 밀어 넣었다.

허리가 흠칫 경직되었다. 소형 구체였기에 안쪽을 풀어주지 않았음에도 에그는 어렵잖게 삽입되었다. 힘겹지는 않았지만 감각이 낯설었다. 뿐만 아니라 저우룬칭의 진의도 애매모호한 터다.

불안하기도 하고 찜찜하기도 하여 에그를 밀어내려고 허리를 뒤틀고 있는데, 불시에 진동이 시작되었다.

삽입되었을 당시에는 애매한 이물감만 있던 것이, 전원이 켜지자 요란하게 존재감을 알렸다. 뱃속 깊은 곳부터 웅웅거리는 진동이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신음을 높일 뻔한 옐리세이는 입술을 깨물었으나, 손가락을 꾹꾹 밀어 넣은 저우룬칭이 에그로 전립선까지 자극하자 허리가 저절로 벌벌벌 떨리며 신음이 터졌다.

커다란 손이 그의 복부를 눌렀다. 안쪽과 내부가 동시에 눌리는 감각에 비명 같은 신음을 지르기도 전에, 서늘하고 단단한 질감이 비부에 닿았다. 길고 두툼한 것이 입구를 벌리며 또 하나 더 삽입되었다.

"야! 그, 그건 또…… 하옥一!"

손이 묶여 있고 앞아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은 이상한 방향의 상상을 자극하였다. 이 자식이 무슨 짓을 할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아 복부를 누르는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저우룬칭은 에그의 진동을 한 단계 높여 그의 입을 막았다.

"별거 아니라니까. 평범한 바이브야."

에그를 썼는데 바이브를 또 왜 넣냐는 의문은 언어로 만들어지기도 전에 해결되었다. 꽉 물린 살벽을 벌리며 들어온 바이브레이터의 선단이 전립선에 밀착한 채 진동하고 있는 에그와 닿았다. 그렇게 바이브레이터를 써서 에그를 고정한 저우룬칭은, 바이브레이터의 진동도 넣었다.

"아윽! 읏!!"

신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겹치지 않는 엇박자의 진동이 뱃속을 뒤흔들면서 쾌감을 태웠다. 페니스 밴드에 부착된 모조 성기를 사용하여 저우룬칭과 관계한 적은 있지만, 오롯이 기구만 사용되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전희도 없이 다짜고짜 기구만 삽입하여 때려 박히는 기계적인 괘감이 분하였으나,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조여 오는 쾌락에 치이는 머리로는 도무지 생각을 오래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앞이 훤해졌다. 저우룬칭이 눈가리개를 풀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너, 이거 당장……! 으, 하으, 응!! 빼……!"
"일하러 가야 돼. 늦었다."
"......뭐?!"

여상한 어조로 대꾸한 저우룬칭은 그대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나갔다. 정신없이 두들기는 체내의 자극에 사고 회전이 둔해진 옐리세이는 저우룬칭의 언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가 자신에게 기구를 삽입한 채 방치하고 사라진다는 뜻을 깨달았을 때는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고해라, 강간범."
"개씨발새끼야!!!"

뒤늦게 외쳐 보았지만 저우룬칭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뒤였다. 옐리세이는 억울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강간범 같은 소리 하네 ! 넣어 보고 이렇게 됐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미수잖아!!

그 억울함도 짧았다. 방치된 채 홀로 남게 되었다는 오싹한 상황과, 삽입된 에그와 바이브레이터가 쉴 새 없이 진동하며 강제적인 쾌감을 부여하고 있는 상황이 차츰 이성을 앗아갔다.

"읏…… 으, 흐읏一!"

방에 혼자 있음에도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던 옐레세이는 끊이지 않고 재촉하기만 하는 쾌락을 버티지 못하고 기어이 허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사정하였지만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설마 정말 이대로 간 건 아니겠지? 일 끝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는데……? 진짜?!’

밖은 잠잠했다. 돌아오는 기척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에그와 바이브레이터만이 꾸준히 쾌감을 부추겼다.

"씹......!"

사정의 여운에 휩싸이기도 전에 자극당한 성기가 단단해졌다. 미칠 것 같았다. 욕설도 잠시, 널찍한 방 안에는 엇갈리는 두 개의 진동소리와 신음 소리만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일렁거렸다.





저우룬칭이 손톱의 매니큐어를 발견한 건 돌아오는 도로였다. 핸들에 얹은 손에서 붉은색이 유독 도드라지게 시야의 한쪽을 찔렀다. 촌스러울 정도로 새빨간 매니큐어가 발린 계지를 무심코 엄지로 문지르며 실소하였다. 발톱에만 바른 줄 알았더니 손톱까지 건드렸었나.

옷을 입을 때 새빨간 발톱을 목격하고는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던 걸 간신히 참았었다. 매니큐어를 바른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얻어온 건지, 원.

호텔로 돌아갈까 망설이는 사이에 신호등이 바뀌었다. 성미 급한 뒤차가 클랙슨을 연이어 빵빵 울렸다. 저우룬칭은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홍가로 차를 몰았다.

홍위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전년도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일하고 있는데 방해한 것 같아 머쓱한 기분으로 그녀에게 부탁하였다.

"롄 누님. 혹시 매니큐어를 지우는 약 같은 거, 음…… 아세톤이었던가요? 아무튼 빌 릴 수 있을까요?"
"응. 빌려줄 수 있는데 옷에 묻기라도 했어? 옷에 묻은 거라면 아세톤만으로는 잘 안 지워져."
"그런 건 아닙니다."

저우룬칭은 살짝 무색한 투로 손등이 보이게 손을 올렸다.

"매니큐어를 지우려고요. 아무래도 요리하는데 매니큐어는 조금……."

홍위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되더니, 이내 반달처럼 가늘어지며 웃음이 되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으라며 손짓하고는 화장대에서 아세톤과 화장솜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에어컨을 끄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빌려주시면 제가 지우겠습니다."
"됐어. 손이나 줘. 남자가 제대로 지울 수나 있겠니?"

어딘지 즐겁기까지 한 기색으로 홍위롄은 화장솜에 아세톤을 묻혀 그의 손톱을 슥슥 닦았다.

"네가 직접 칠했을 리는 없을 것 같고, 누구 작품이야?"

자고 있을 때 옐리세이가 발랐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아세톤을 빌려 달라는 말을 할 때보다 더 큰 민망함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슈이스끼가? 어머나."

저도 모르게 소리 높여 웃었던 홍위롄은 얼른 손사래를 치면서 사과하였다.

"미안해. 웃으려고 한 건 아닌데,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남자가 몰래 매니큐어를 칠했다니 상상도 되지 않고 의외이기도 하고……. 뭐, 그러네. 손톱만 칠한 거야?"

".......실은 발톱에도요."

홍위롄이 또 까르륵 웃음보를 터트렸다.

"발톱은 안 지우려구?"
"기념으로 놔둘까 합니다."
"상냥한 애인이네. 난 어렸을 때 다른 년들 넘보지 말라고 팡 사장 발톱에 예쁘게 매니큐어를 발라줬는데, 나중에야 알고 남자 체면이 깎인다는 둥 칠색 팔색을 했지 뭐니. 체면이래 봤자 조폭 새끼 체면 주제에."

과거 일까지 끌어와 팡룽을 흉보며 그녀는 매니큐어를 꼼꼼하게 문질러 닦았다. 저우룬칭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룽 형이라면 오히려 발라달라고 매니큐어를 한 보따리 싸들고 쫓아올 것 같은데요?"
"흥. 지랄하지 말라고 그래."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으나 그녀의 코웃음으로 보건데 팡룽은 아직도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헛다리를 짚고 있는 모양이다.

문득 홍위롄이 작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무척 놀랍지 않니? 그렇게 남자라면 질색을 하던 너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왼손 계지를 마지막으로 그녀가 매니큐어를 다 닦아냈다. 저우룬칭은 말끔해진 손톱을 조금 허전하게 문질렀다.

"멧돼지의 저돌성에 치였나 봅니다."
"응? 멧돼지?"
"아, 그건 모르셨어요? 슈이스끼의 별명이 카반이거든요. 러시아어로 멧돼지라는 뜻이랩니다."

팡룽에게 들었던 옐리세이의 평판과 멧돼지라는 단어의 어감을 매치해 보던 홍위롄은 그 별명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잘 지었다면서 싱글거렸다.

"돌진하는 멧돼지에게 치이면 엄청난 중상이지. 상처도 평생 갈 걸?"

장난기 가득한 놀림에 저우룬칭은 또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도 홍위롄은 그가 교제하였던 여자들을 알고 있긴 하였지만, 유달리 그녀가 옐리세이를 언급할 때면 굉장히 멋쩍어지고는 하였다.

남자와 교제하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해 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딘지 미흡하였다. 옐리세이처럼 극적이고 밀도 깊은 만남을 거듭하였던 관계는 없었다. 첫 만남부터 강렬했기 때문일까. 낭심을 걷어차여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는 옐리세이를 남겨두고 돌아섰을 때만 하여도 그가 이렇게 자신에게 깊은 족적을 남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의 옐리세이는 구슬을 삽입하고 있었을 텐데 그곳을 걷어차였다면.

그 고통을 떠올리니 같은 남자로서 절로 오싹하여 저우룬칭은 등을 부르르 떨었다. 과거 일이긴 하여도, 음, 역시 호텔에 방치하고 온 건 좀 심했나.

낮 시간의 영업이 끝나고 서둘러 주방을 정리한 저우룬칭은 호텔로 돌아갔다. 슬쩍 문을 여니 거세게 응응하는 진동 소리가 가장 먼저 그를 맞았다. 그다음은, 에어컨을 틀어도 후끈한 허덕거림과 비릿한 밤꽃 냄새.

멈칫하긴 했지만 우선 침대로 갔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베개며 이불이 죄 바닥에 떨어져 구겨져 있었다.

"아흐…… 흣……."

옐리세이는 신음도 제대로 못 내며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체내의 진동이 올라올 때마다 간헐적으로 흠칫흠칫 떨며 맥 빠진 울음을 흘렸다. 다리 사이와 시트가 온통 흥건하게 묻은 정액으로 지저분했다.

전지가 다 닳았는지 에그는 진동이 멎어 있었지만, 기계적으로 진동하고 있는 바이브레이터까지 얼른 끄집어냈다. 겨우 진동 소리가 사라진 방 안에 히끅거리는 숨소리가 잘게 떨렸다.

참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일단은 물어보았다.

"……괜찮냐?"

눈물에 흠씬 젖어 초점이 풀려 있던 눈동자에 겨우 한 점이나마 빛이 돌아왔다. 경련하던 눈동자가 저우룬칭의 얼굴에 고정되고, 텁텁하게 쉰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Я у б ь ю ……т е б я ……."

옐리세이는 그대로 의식을 놓았다. 태국어를 공부하던 걸 접고 옐리세이 몰래 틈틈이 공부하는 있는 러시아어로 약간이나마 귀가 트인 바에 의하면 아마도 자신을 죽이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몇 대 맞아줘야 할 듯하다.

목덜미를 문지르며 옐리세이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따뜻한 물을 받아와서 옐리세이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었다. 에그와 바이브레 이터까지 쓸어서 휴지통에 버리고 깨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저녁 영업 시각이 되어 홍가로 돌아가기 전까지 옐리세이는 죽은 것처럼 숨소리도 거의 없이 끓아떨어져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주방에서도 틈틈이 홀을 살피는 그가 눈에 뜨였는지 빈 접시를 개수대로 옮기던 뎬신이 물었다. 저우룬칭은 다소 겸연쩍어 흠흠 헛기침을 하였다.

"슈이스끼는 안 왔지?"
"네. 오늘은 안 보이던데요? 가게에서 만나기로 하셨어요?"
"만나기로 한 건 아닌데……. 그 녀석이 날 죽이러 올 것 같거든. 내가 못 보는 사이에 오면 빨리 말해다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죽이러 오겠다는 말의 뉘앙스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리뎬신의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저우룬칭이 태연히 손을 내젓자 알겠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설거지를 하러 갔다. 그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얼추 짐작이 갔지만, 정확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교제를 지속함에 있어 자연히 수반되는 다툼의 강도가 너무 높다. 남자라는 건 차치해도 현직 조폭이니, 원.

언제 들이닥쳐 패악을 떨지 모른다는 염려로 초조하게 홀을 살폈지만 정작 기력을 회복하고 분기탱천한 옐리세이가 나타난 건 11시가 넘었을 무렵이었다.

"루이!! 이 씹새끼야!!"

가게 정문으로 들이닥쳐서 홀을 뒤엎는 걸 우려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욕설은 뒷문에서 들려 왔다. 비는 시간에 올라가서 쉬지도 않고 이제나저제나 옐리세이의 돌입을 경계하고 있던 저우룬칭은 통기듯이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개호로, 읍! 으읍!!"

무슨 소리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입부터 틀어막자 인상이 더 험악해졌으나 일단 불문 곡직하고 가계 밖까지 그를 질질 끌고 나왔다. 장쯔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이 언뜻 시야 구석에 비쳤다.

나오자마자 옐리세이가 사납게 손을 뿌리쳤다.

"아가리 처물어!"

동시에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을 방어하며 붙들었다. "이익!" 붙잡힌 주먹이 옴짝달싹도 하지 않자 옐리세이가 핏대까지 곤두세우며 용을 썼지만 저우룬칭도 버텼다. 우선 반대편 손에 총이나 기타 다른 둔기가 쥐여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는 짐착하게 조건을 제시하였다.

"몇 대 때릴 건데?"
"몇 대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피똥 사면서 뒤질 때까지 팰 거다! 왜?!"
"애초에 발단은 너잖아. 앞으로 네 옆에서 불안해서 잠이라도 잘 수 있겠냐."
"야! 미수잖아, 미수! 네 그 잘난 엉덩이에 손가락도 못 대봤어!!"
"어쨌든 시도는 한 거잖아. 강간은 안 한다며?"
"우리는 애인인데, 뭐! 씨발아!"
"내 동의가 없으면 강간이지."

일터 옆에서 강간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입에 담고 있으려니 매우 민망하였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하였다. 여기에서 밀리면 옐리세이 옆에서 안전한 수면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앞으로 두 번 다시 옐리세이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지 않겠다는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몇 마디 더 대거리하던 옐리세이의 얄팍한 인내심이 툭 끊어졌다.

"넌 씨발, 얌전히 입 닥치고 처맞아, 새꺄!!"

잡히지 않은 반대쪽 주먹이 아래에서 치고 들었다. 원인이 있었지만 어쨌든 옐리세이를 방치하고 간 죄는 있으니 저우룬칭은 한숨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뻐억! 둔중한 타격음이 복부를 가격하였다. 휘청거리는 턱으로 주먹이 날아들고, 반대편 손이 뒷덜미를 붙잡더니 무릎으로 찍었다.

연이어 다섯 대쯤 패고 나서야 옐리세이는 씩씩거리며 손을 놓았고, 저우룬칭은 겨우 속을 게워내지 않고 버텼다. 기침을 쿨럭쿨럭 뱉어내며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턱을 직격당했는데 이가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진짜 아프다니까."
"좆 까고 있네. 아무리 패도 고꾸라지지도 않는 새끼가 엄살은!"

씩씩거리고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 분이 풀리긴 했는지 대화는 가능해졌다.

"내가 잘 때 안 덮치겠다는 한마디만 하면 되잖냐."
"이제까지 내가 계속 대 줬는데 너도 한 번쯤 대 주면 안 되냐?"
"어차피 엉덩이는 원할 때마다 만지고 있잖아. 만지기 싫어졌냐? 싫으면 만지지 말,"
"누가 싫대냐! 만지다 보면 박고 싶어지니까 그렇지!"
"뒤로만 해도 갈 정도로 잘 느끼는 몸인데, 뭘 굳이 앞을 쓰려고 "
"시, 시끄러워!!"

악다구니에 가까운 대화 끝에, 엉덩이를 따먹겠다는 의지는 굽히지 않았으나 적어도 동의 없이 몰래 덮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겨우 받아낸 저우룬칭은 안도의 숨을 돌렸다.

눈앞이 하얗게 돼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두들겨 맞은 직후에 빽빽거리는 놈을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자니 많이 힘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쑤셔오는 턱을 문지르면서 옐리세이를 돌아보았다. 깨어나자마자 바로 튀어왔는지 아까부터 꼬르륵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옐랴. 밥 안 먹었냐? 저녁 줄까?"

옐리세이가 눈을 부라렸다.

"저녁을 준다는 말이 나오냐? 너 때문에 못 먹은 건데 저녁을 바쳐야지!"
"알았어, 알았어. 아까 뻴몌니 만들어 놓은 거 있으니까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따끈따끈하게 잘 덥혀 와."

혹시나 하여 미리 뻴몌니를 만들어 둔 게 다행인 듯하다. 먹을 것 앞에서 한풀 꺾인 옐리세이가 사라지자 저우룬칭은 배를 싸매며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뚜두둑 하며 뼈마디가 부딪는 소리는 정신건강을 위해 환청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랫배가 자줏빛으로 시뻘건 걸 보니 된통 멍이 올라올 것 같았다. 그보다 문제는, 얼굴인데. 입술도 터지고 맞고 부었을 얼굴을 어떻게 가려볼까 고민했지만 붓기가 가시고 멍이 사라질 때까지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고민하다가 우선 문 앞에서 먼지를 툭툭 털고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며 안으로 들어갔지만, 오셨냐며 돌아보던 장쯔궈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저우룬칭은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묻지 마."

무어라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는 그냥 입을 다물었고, 저우룬칭은 갈수록 커지는 남세스러움에 재빨리 스튜에 넣어 끓여 두었던 뻴몌니를 옮겨 담았다. 조금 식기는 했지만 알아서 잘 먹을 것이다.

"......그 새끼 아직 안 갔습니까?"
"음, 뭐……. 잠깐만 올라 갔다 오마."

상당히 오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장쯔궈로부터 도망치듯이 뻴몌니 접시를 올린 쟁반을 갖고 주방을 나왔다. 방으로 갈 때까지 다른 사람들과는 마주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문을 열었다. 랩톱을 부팅하고 하릴없이 웹서핑하며 마우스를 깔짝거리던 옐리세이는 굳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하는 듯하였으나, 맛있게 접시에 담긴 뻴몌니를 보고는 슬그머니 풀어지려는 입꼬리를 완전히 감추지 못하였다.

속이 꼬이지 않고, 보이는 것만큼 알기 쉬운 성격이니 옆에 있으면 어렵지 않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약간 식긴 했는데, 괜찮지?"
"흥. 덥혀 오라는 말 못 들었냐."

말과는 다르게 옐리세이는 얼른 포크를 쥐고 뻴몌니를 우물우물 입속으로 삼켰다. 먹성 좋게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저우룬칭도 뻴몌니가 당겼으나 바로 직전에 입안이 터질 만큼 맞았는데 스튜를 먹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손을 거두었다.

"아, 너한테 줄 게 있었는데."
"줘."

포크를 들지 않은 손을 옐리세이가 당당하게 내밀었다. 저우룬칭은 코앞까지 들이민 손을 밀어내고는 옷장을 뒤적거렸다. 곧 옐리세이 쪽을 돌아보는 그의 양손에는 가지런히 접은 숄이 들려 있었다.

"가져가라. 요즘 날씨로 봐서는 별로 필요 없을 것 같긴 한데 밤에는 그래도 쌀쌀할 때가 있더라. 아니면 야간에 근무할 때 써도 되고."

예전에 구입하였던 타이 실크의 용처를 고민하다가 홍위롄이 저녁 무렵에 숄을 두르는 걸 보고 떠올라서 만든 숄이었다.

"오, 네가 직접 만든 거냐?"

우물거리던 뻴몌니를 서둘러 꿀꺽 목 안으로 넘긴 옐리세이가 싱글벙글하며 숄을 받았다.

"되게 보들보들해."
"원단이 워낙에 좋아서.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봉제만 한 거야."
"잘 쓸게."

옐리세이는 남아 있던 앙금이 싹 가신 신난 얼굴로 숄을 만지작거렸다. 일부러 싸웠을 때를 대비하여 남겨두었다가 준 건 아니었지만, 녀석이 즐거워하니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되나?"
"일요일? 7일?"

식사하던 것도 잠깐 내려놓고, 숄 이곳저곳 만지작거리며 훑어보는 채로 옐리세이가 대답했다.

"당연히 성당에 가야지.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

무심코 목소리까지 높여 반문했다. 크리스마스는 며칠 전에 지났고, 이미 해도 바뀐 1월이었다. 아무리 옐리세이라도 크리스마스가 언제인지 헷갈리지는 않을 텐데.

"크리스마스는 지나지 않았냐?"
"우리나라에서는 이번 주 일요일이 크리스마슨데?"

역시 여상히 대꾸하던 옐리세이는 자신이 생각해도 뭔가 미흡한 설명이었는지 한마디를 더 첨언하였다.

"우리나라는, 거시기, 가톨릭이 아니잖냐. 어, 음…… 그러니까 정교는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7일이 성탄절이야. 예배는 그 전날부터 있고."

중언부언하는 투였지만 정교의 성탄절이 1월 7일이라는 사실은 전달되었다.

"성당에는 꼬박꼬박 다니는 모양이지?"
"아니. 부활절이나 성탄절처럼 큰 예배 있을 때만 가. 근데 일요일에는 왜?"

기껏해야 일요일에 비번이 아니라는 답변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하지도 못한 종교적 차이가 나와 저우룬칭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아냐. 성당에 잘 다녀와라."
"흠."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기는 하였으나 옐리세이는 숄 구경에 다시 몰두하였고, 저우룬칭도 그냥 피식 웃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해변의 바람이 파도가 쓸리는 소리를 안으며 밀려왔다. 야이쑤코를 순수한 휴양지로 여기어 여유 있게 쉬러 온 소수의 관광객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음도, 잔잔한 바닷바람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어우러졌다. 복닥거리는 소리가 몇 겹의 장벽 너머에 있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양 아련하게 잦아들고, 모래알을 씻기여 밀려드는 파도 소리는 세상과 떨어진 별천지처럼 긴장을 이완시키며 두둥실 감쌌다.

한적한 해변의 리조트는 매우 좋은 것이었다. 그가 머물고 있는 리조트가 아니라 페카의 별장이라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다음 휴가 때는 저우룬칭과 묵을 리조트를 빌려야겠다.

"상그리아로 괜찮죠?"

테라스의 비치 의자에 길게 드러누워 나태함을 한껏 만끽 중이던 옐리세이는 선글라스를 밀어 올리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의 입맛은 역시 보드카였지만 페카는 주량이 약했기에 페카와 마실 때는 어느 정도 배려해 주었다.

곧 페카가 상그리아 와인과 카나페를 차례대로 테라스의 테이블로 옮겨 왔다. 레드 와인으로 만든 상그리아가 찰랑거렸다. 향긋한 과실주의 향기가 기분 좋았다.

"우리 둘뿐이야? 다른 녀석들은?"
"메이탈이랑 쿠언은 위층에서 쉬겠다고 해서 안 불렀고요, 다른 사람들은 시내에 놀러 갔습니다."

메이탈이 위층에 있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옐리세이의 얼굴에 금이 갔다. 페카가 쓴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메이탈에게 시비 걸지 마세요. 날이 안 좋아요."
"뭔 날인데?"
"……생리요."

여자에게 본전도 못 찾을 정도로 호되게 당했다는 쪽팔림에, 메이탈을 여자가 아닌 별세계의 생물체 정도로 치부하고 있던 그는 생물학적으로 엄연히 여자라는 증명이 튀어나오자 질색하였다.

"그 아줌마도 여자였냐."
"바로 그런 시비를 메이탈에게 걸지 말라는 거예요."
"시비는 무슨. 난 얼굴도 보기 싫다고."

툴툴거리며 잔을 올렸다. 페카가 한 손에 들고 있던 나무 박스를 건넸다.

"건배하기 전에 이건…… 이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박스에 담긴 와인은 뵈브끌리꼬였다. 옐리세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난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 못 했는데?"
"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요, 뭘. 됐어요. 나중에 거하게 식사나 사 주면 되죠."

직업의 특성상 각국을 배회하느라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어느 나라에 있는지도 파악 되지 않고, 본가라고 할 만한 곳도 없는 페카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가 보편적인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때 야이쑤코에 머물렀던 적이 없던지라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번도 준 적이 없던 옐리세이는 겸연쩍어하기는 했지만 선물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에 섬을 나갈 예정이라 토요일에라도 줄까 했는데, 그때는 소첼닉(러시아의 크리스마스이브) 못 만날 것 같더라고요."

성당에도 슬렁슬렁 내킬 때마다 가는 불량 신자 옐리세이는 크게는 일 년에 수차례, 작게는 일주일에 이틀씩 있는 정교회의 금식 기간은 전혀 지키지 않았지만 성탄 전야와 신현축일(예수의 세례를 기리는 정교의 축일) 전야 금식 정도는 어기지 않았다.

뵈브끌리꼬를 냉큼 받아 챙기며 혀를 내둘렀다.

"넌 루터교 믿는 놈이 나보다 정교회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클라이언트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종교적 배경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니까 얼추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것저것 알고 있는 것뿐이에요. 문화에 대한 무지로 실수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고요."
"먹고살기 힘들구만."

페카가 웃으며 잔을 올렸다. 챙, 한 쌍의 유리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가볍게 부딪혔다. 달달한 과실주가 목 안쪽을 적시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다음에 야이쑤코에 오기 전에는 미리 연락해. 방콕의 맛있는 가게를 미리 알아놓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하. 기대할게요."

본래는 크리스마스 휴가까지 야이쑤코에서 보낼 예정이었다던 페카였지만, 멘쇼프스카야와의 항쟁이 종료된 다음 날 일찍 섬을 떠나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었다.

옐리세이는 크림치즈를 올린 카나페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다친 김에 뽕을 뽑으면서 놀겠다더니 왜 갑자기 떠났냐? 본사에 일이라도 생겼어?"
"음, 별일은 아니고요."

페카도 상그리아를 홀짝이며 비치 의자에 느슨히 누웠다.

"제가 사적인 용무로 돈을 급하게 쓸 일이 생겼었거든요. 예치해 뒀던 목돈을 하루아침에 인출하니까 고모님도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라서 알아서 길 겸, 통장에 구멍이 뚫린 걸 메우기라도 할 겸 거래 일정 잡히는 대로 바로 떴습니다. 한동안은 일개미처럼 바지런히 돈을 벌어야 해요."

페카의 고모는 SPC사의 사장이다. 옐리세이는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고, 페카의 직업도 평범과 거리가 멀긴 했지만 상사가 친척이라면 생판 타인보다 불편한 점이 있으리란 추측은 되었다.

"입원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병문안도 못 가서 미안해요."
"야, 야. 겨우 긁힌 상처 가지고 병문안은, 무슨. 병원에서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일부러 오래 입원해 있었던 거야. 상처 볼래?"

짐짓 호기롭게 허세를 부리며 윗옷을 슬쩍 들쳤다. 길게 찢어진 연홍색 상혼이 문신 위를 가로질렀다.

"……아팠겠는데요."
"팔다리 멀쩡하면 됐지, 뭘."

울고 싶을 정도로 아팠었던 과거를 깔끔히 망각한 옐리세이는 으스대며 어깨를 폈다.

"근데, 페카. 좀 덥지 않냐?"
"오늘은 날이 선선하길래 일부러 에어컨 안 켰는데, 더워요? 에어컨 켤까요?"
"자고로 최고의 호사는 에어컨 바람 쌩쌩하게 틀어 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니겠냐. 이불 대신 요런 숄도 좋고."

옐리세이는 무릎 담요처럼 덮고 있던 숄을 냉큼 들어 올렸다.
저우룬칭에게 받은 후 내도록 들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모르는 페카는 뜻 없이 숄로 눈길을 돌렸다가, 히죽히죽 웃는 그의 낯에 알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미스터 저우가 준 거죠?"
"그냥 준 게 아니야. 무려 수제작이라고, 수제작. 이탈리아 장인만큼이나 한 땀, 한 땀 정성이 들어간 수제작이지."

페카는 벌써 수십 번도 더 한 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지도 않고 늘어놓는 그에게 살짝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안쪽으로 갈무리하며 미소하였다.

"미스터 저우와 잘 지내고 있어요?"
"정확히는 그 자식이 나한테 매달리면서 애걸복걸하는 거지."

귀찮아하는 어조와는 다르게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하였다. 흥이 난 옐리세이는 시작한 김에 저우룬칭의 요리에 대한 자랑도 멈추지 않고 줄줄줄 이어갔다. 엷게 미소하며 가만히 듣던 페카는 한 마디로 정의해 주었다.

"사랑이네요."
"사랑이지. 21세기잖아."
"그럼 이 잔은 레샤의 사랑을 위해 건배."

무척이나 느끼한 단어의 조합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새 천 년을 맞은 21세기가 아닌가. 옐리세이도 씨익 웃으며 페카의 잔에 가볍게 맞부딪혔다.





야이쑤코를 장악한 마피아들의 종교는 제각각이었다. 세계적으로 마피아가 분포된 성향상 대개 크리스천이기는 하였으나 세부적인 종파는 모두 달랐다. 허나 마피아가 바뀔 때마다 교회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을 수는 없었던지라, 교회를 건축한 양식은 그대로 유지하며 내부만 적당히 수리하는 선에서 현실과 타협한 채 이어지는 중이었다. 야이쑤코 교구에 부임한 성직자도 어지간한 배짱과 배포가 아니면 견뎌낼 수 없었기에 이처럼 남다른 건축 양식과 행태를 묵인하며 신실한 임무를 이행하였다.

현재 야이쑤코의 교회는 건물을 양분하여 한쪽은 러시아 정교가, 다른 한쪽은 가톨릭의 예배당으로 이용 중이었다.

러시아 전역으로 생중계되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성탄 예배와 함께하지는 못 했지만, 야이쑤코에서도 성탄 전야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예배가 시작되었다.

성탄절의 날이 밝은 후에야 옐리세이의 입장에서는 좀이 쑤시는 길고 긴 예배가 끝났다. 이맘때 즈음의 모스크바에는 익숙한 설경이 펼쳐져 있을 테지만, 일 년 내내 눈을 볼 수 없는, 눈을 보아서도 안 되는 야이쑤코는 여전한 여름 풍경이었다. 예배를 끝낸 러시안들은 성당을 나와 크리스마스를 자축하며 예약해 두었던 식당을 향했다.

옐리세이도 이오시프와 필리몬을 비롯한 동료 몇몇과 어울려 시내를 걸었다.

맞은편에서 동양인 여자 네댓 명이 저마다 잡담하며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여행객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차이나타운의 중국인일 것이다. 러시아 마피야들과 중국인 여성들 일행은 서로를 인식하지 않고 엇갈려갔으나, 불현듯 옐리세이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미스터 슈이스끼 아니세요?"

여자가 자신을 부른다는 것에 괜히 놀란 옐리세이는 걸음을 멈췄다. 본 것 같기도 하고, 안 본 것 같기도 한 여자였다. 미간까지 찌푸리며 여자를 내려다보던 옐리세이는 겨우 화장한 홍위롄과 화장하지 않은 홍위롄의 모습을 각각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건져 낼 수 있었다. 오늘은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 그러니까, 음. 미스……."
               
하지만 이름까지 기억이 나는 건 아니었다. 본래 그는 관심이 전혀 없는 여자의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레샤! 우리는 식당에 가 있을게!" 이오시프가 휘휘 팔을 내저으며 남긴 목소리 위로 홍위롄의 웃음소리가 겹쳤다.

"제니예요."
"아, 미스 제니, 안녕하십니까."

등을 돌리면 또 까먹을 것 같기는 하지만 일단 이름은 들었다. 왠지 마음이 놓인 옐리세이는 품에서 켄트를 꺼냈다. 반쯤 남은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어 막 입에 물자 홍위롄이 파우치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의 손 아래에서 불을 붙여 주었다.

"……응?"

불을 붙여주니 받기는 했지만 이 여자가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며 친밀한 하는 건지 매우 미심쩍었다. 홍위롄도 당황하며 라이터를 얼른 핸드백으로 되돌렸다.

"어머, 미안해요. 제가 예전에 물장사를 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남자분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그만 자동적으로 손이 나가질 뭐예요. 고치려고 하는데도 의식하지 않으면 자꾸 무심코 이러네요."
"미안할 것까지야……."

옐리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우룬칭의 상사이기도 하고 친숙한 관계처럼 보이기도 하였기에 그로서는 나름대로 그녀에게 굉장한 예의를 발휘하는 중이었다.

"근데 저한테 무슨 용건이 있습니까?"
"아, 큰일은 아니구요. 오늘 루이랑 안 만나고 있으시길래 저도 모르게 말을 걸고 말았어요. 친구분들과 있으셨던 것 같은데 방해가 되었다면 사과할게요."
"……오늘?"

안부 인사에 가까운 대수롭지 않은 그녀의 말이 이유 없이 깔끄럽게 걸렸다. 그녀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잊고 있긴 하였으나 일전에 저우룬칭도, 오늘 ―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이 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길래요?"
"네?"

옐리세이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는데, 홍위롄은 오히려 이상한 질문을 듣기라도 하였다는 듯 놀란 목소리로 반문하였다.

"루이 생일이잖아요? ……음, 하긴 이 나이 되면 생일 같은 게 의미가 없어지긴 하죠. 한 살 더 먹는 걸 축하받기도 민망하고."

그녀는 말을 하며 스스로 납득한 기색이었지만 옐리세이는 아니었다.

너무 놀라서 반문도 제대로 못 하고 대경실색한 낯빛을 굳히고 있는 옐리세이의 얼굴을 잠시 뒤에 읽은 그녀는 뒤늦게야 입을 손으로 가렸지만 생각 없이 쏟은 말을 주워 담기에는 늦었다.

"어…… 못, 들으셨이요? 세상에. 어쩜 좋아."

옐리세이의 태도로 보아 깜빡 잊은 게 아니라 저우룬칭에게 전혀 귀띔받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걸 직감한 그녀는 말실수를 자책하며 거듭 사과하였지만 옐리세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리며 그대로 등을 돌려 달려갔다. 당혹하여 어쩔 줄 모르는 홍위롄에게 인사할 여유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오, 일찍 왔네. 아직 식사는 안 나왔,"

예약하였던 레스토랑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옐리세이는 앉으라며 자리를 가리키는 이오시프의 멱살을 움켜쥐듯이 그를 끌고 나왔다. 필리몬이 저 새끼 또 왜 지랄이냐며 혀를 찼다.

그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힘도 센 옐리세이에게 반항도 못 하고 속절없이 가게 밖까지 끌려온 이오시쓰가 숨이 막혀서 켁켁거리는 소리를 들어서야 옐리세이는 손을 놓았다.

"야! 좀 점잖게 나오자고 말을 하면 안 되냐?!"

지금 이오시프의 짜증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용건이 더 급했다.

"너, 유이 생일에 뭐 해줬냐?!"
"엉?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오늘이 루이 생일이래!!"

옐리세이는 실로 극적인 비명을 질렀다. 이무리 연애 경험이 없어도 애인의 생일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았다.

지나가던 행인마저 그 큰 비명에 깜짝 놀라며 쳐다보는 통에 덩달아 쪽팔린 이오시프가 마구 팔을 당겨 벽 구석으로 데려왔다.

"등신아. 오늘이 생일인데 생일 선물을 이제 챙기냐?"
"나도 몰랐단 말이야! 그 새끼가 얘기를 해 줘야 알지!!"

저우룬칭이 미리 언급하지 않았다면 옐리세이가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되어서 당황하고 있는 진귀한 구경을 계속하고 싶었던 이오시프는 부러 심각한 척 목소리를 내깔았다.       

"사귀고 난 후에 루이 생일은 처음이잖아? 그걸 못 챙겼으니 차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차일 거야. 나라면 찬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망할 놈이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에 태어나서!!
"예수님이랑 생일도 같고 좋네."
"지금 그게 중요하냐!!"

당혹감을 못 이긴 옐리세이가 쓰레기통을 발로 뻥 걷어찼다. 쓰레기통은 대로에 비스듬히 가로 지르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다행히 쓰레기는 거의 들어있지 않아 길거리에 온통 쓰레기가 나뒹구는 흉한 모습은 면하였다.

더 애를 태웠다가는 자신도 저 쓰레기통처럼 굴러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에 이오시프는 아쉽지만 옐리세이를 놀려 먹던 걸 접었다.

"난 올해, 아니 작년이네. 아무튼 작년 유이 생일에는 쇼핑하고 싶다고 하길래 휴가 일정 맞춰서 해외여행도 할 겸 겸사겸사 홍콩에 쇼핑하러 갔어."

듣고 나서야 떠올랐지만 작년에 이오시프가 홍콩에 여행을 갔다 왔었다. 그때도 유이 생일 운운하면서 그에게도 여행 선물을 사준 적이 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홍콩에서 뭐 사 줬는데?"
"카드. 내가 뭐 여자 옷 보는 눈이 있어야 말이지. 사고 싶은 거 다 사라고 줬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맞추더라고. 솔직히 생각했던 예산 이상으로 써서 타격을 입긴 했는데, 그래도…… 정말 예뼜지. 유이는 늘 예쁘지만."

옐리세이가 심각해 하거나 말거나 입꼬리가 풀린 이오시프는 혼자 만족해하여 후후 웃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옐리세이가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그대로 달려갔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는 겅중겅중 거리를 뛰어넘어 벌써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다.

"야! 어디 가!"
"항구에!!"

그 말 한마디만 남긴 옐리세이는 먼저 택시를 잡은 사람을 밀쳐내며 후딱 탑승하였다. 얼결에 새치기당한 사람이 퍼붓는 욕설 속에 이오시프는 고민하였다. 설마 저 멧돼지 놈이 홍콩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왠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던 저우룬칭은 결국 뒤척거리기만 하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계의 시침이 숫자 3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혹시나 하여 거실로 나와 봤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자고 있는지 2층과 3층은 어둠 속에 잠겨 고요 하였다. 하릴없이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탁 두드리기도 하며 괜스레 어둠 너머의 벽을 쳐다보기도 하다가, 그냥 담배를 집어 들었다. 침실로 가기 전에 한 개비 피우다가 깜빡하여 거실에 두고 간 담배가 불면증에 요긴하게 쓰였다.

어둠 속에 한 점의 붉은 빛이 깜빡였다. 저우룬칭은 담배 연기로 어둠의 한 자락을 적시며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성탄절이니 성당에 가야 한다고 하여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옐리세이가 시간이 났다면 근처의 적당한 관광지에 같이 일박으로 다녀올까 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성수기라 갑자기 숙소를 찾기도 어려웠을 텐데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실소가 나왔다.

‘잘 되긴, 뭘, 그냥 아쉬워서 하는 소리지.’

예배를 언제까지 하는지 몰라 저녁 즈음에야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바쁜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번화가에는 러시안들이 한껏 자신들만의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었는데 옐리세이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이니 친구나 지인과 어울려 논다고 정신이 없어 자신의 전화를 미처 받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술독에 고꾸라져서 기절해 있을지도 모르고.

생각이 난 김에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내일 일어나면 연락하라는 문자를 보냈다.

휴대폰 액정에 전송 알림 표시가 뜨고 난 후에도 멀거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은 탓인지 정신이 오히려 더 맑아져 잠이 더욱 달아났다.

가볍게 운동이라도 하면 잠이 올까. 저우룬칭은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일어났다. 잠도 오지 않으니 가게 근처를 한 바퀴 산보라도 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스니커즈로 갈아 신었다.

심야의 고즈넉한 어둠이 점령한 홀에 목조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깔끔하게 정돈된 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본 저우룬칭은 주방 쪽 뒷문으로 걸어 갔다. 정문 밖으로 난 도로에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찾아올 손님이 있을 턱도 없고, 술 취한 운전자가 사고라도 냈나 싶은 우려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동차의 전조등이 지나가며 일렁이는 빛에 비친 하나의 실루엣이 있었다.

설마, 하는 예감에 짧게 숨을 들이켜고 있을 때, 실루엣이 문을 두드렸다.

"루이! 자냐? 자도 일어나!"

더 지체할 것도 없었다. 저우룬칭은 잰걸음으로 빠르게 다가가 안쪽에서 문을 열었다.

"루, 어? 뭐야. 벌써 내려왔냐?"

두드리자마자 열린 문에 옐리세이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저우룬칭은 이 시간에 남의 집에 와서 요란을 떨고 있다니 이 자식이 또 취했다고 지레짐작했다.

"나 혼자 사는 것도 아니니까 앞으로는 전화부,"’
"이거 받아!"

불현듯, 시야가 색색의 색깔들로 화려하게 물들었다.

눈앞을 기득 채우며 안겨든 커다랗고 묵직한 다채로운 색상의 어우러짐이 꽃다발이라는 것을 저우룬칭이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호흡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농후한 꽃향기는 그 후에야 맡을 수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얼떨결에 양팔에 가득 안은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당황하고 있자니, 옐리세이가 쇼핑백 하나를 더 팔에 안겼다.

"이것도 받아!"

당혹감은 더욱 커졌다.

부지불식중의 일이라 이게 뭐냐는 반문도 못 하고 있는데 옐리세이가 마구 헛기침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야. I2시가 지나긴 했지만 시차 때문에 홍콩은 지금 7일이거든? 7일이야. 7일이라고."
"음? 시차? 시차를 계산해도 홍콩도 8일,"
"닥쳐. 아무튼 7일이야. 내가 7일이라면 7일인 거야."

정확한 날짜로 정정해 주려는 저우룬칭의 말을 딱 잘라 끊는 옐리세이의 헛기침이 더욱 심해졌다. 무턱대고 7일을 강조하며 큰소리를 친 그는 힐끔힐끔 저우룬칭의 표정을 살폈다. 한 손에는 꽃다발, 한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눈썹만 깜빡거리는 얼굴이 답답한지 인상이 확 구겨졌다.

왜 새벽에 찾아와서 영문 모를 것을 강제로 안겨주며 화까지 내는 건지 이유를 더듬고 있자니,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쯤 하면 좀 알아 처먹어!"
"어?"
"생일 축하한다고! 새꺄!! 생일 축하 노래까지 불러줘야 되냐?!"

생일을 축하한다는 험악한 목소리가 어둠을 찢으며 그에게 닿았다. 생일? 생일이라는 말도 한 적이 없는데? 어쩐지 상당히 비현실적인 기분이 되어 저우룬칭은 꽃다발과 쇼핑백을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옐리세이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획 돌리며 그를 외면하였다. 가로등에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목덜미가 붉었다.

"그거 슈트 한 벌이야. 네 사이즈를 정확히 몰라서 눈대중으로 짐작한 게 좀 불안하긴 한데, 입어 보고 안 맞으면 내가 수선집에 맡기든가, 아니면 너 휴일 때 방콕 백화점에 같이 가서 바꾸자. 가는 김에 데이트도 해 줄게."
"방콕?"

모호한 기분으로 옐리세이의 말을 듣기만 하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단어를 무심결에 반문하였다. 느닷없이 방콕이라니, 야이쑤코 인근의 도시를 잘못 말한 건 아닐까. 하지만 그 질문은 옐리세이에게 있어 의외의 곳을 직격하는 질문이 되었던 것 같았다. 그는 어딘지 당황한 듯한 기색으로 다급히 말을 주워섬겼다. 목덜미가 더 붉어졌다

"야, 야. 내가 원래는 홍콩에 가려고 했거든? 홍콩에 쇼핑할 곳도 많고, 네 고향이기도하고, 그렇잖아. 진짜야. 여권도 챙겨갔어. 근데 성수기라서 그런지 비행기 표 구하기가 어렵더라. 어떻게 방콕까지는 가서 취소표를 기다리긴 했는데,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계산해 보니까 아무리 빨리 갔다 와도 네 생일에 못 맞추겠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방콕에 있는 백화점에 가서 고른 거고. 방콕 백화점도 좋아, 인마."

주절주절 늘어놓는 대화의 맥락이 이제야 간신히 파악되었다. 저우룬칭은 가지런히 개킨 슈트가 있을 쇼핑백과 꽃이라고는 장미와 안개꽃밖에 모르는 그의 무딘 눈으로도 풍성하고 고운 빛으로 피어난 꽃다발을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생일 선물이었다.
이제야 겨우 실감이 났다.

"……이걸 사려고 오늘 방콕까지 갔다 온 건가?"

옐리세이가 뜨끔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 그래. 일찍 알았으면 미리 준비해 뒀을 텐데 네가 말을 안 해서 늦은 거잖아. 왜 생일이라는 것도 제대로 말을 안 하고 지랄이냐? 네가 말 한마디만 했어도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
"고맙다."
"알아서 잘 챙겨…… 어?"

버벅거리는 옐리세이의 코앞으로 꽃다발이 훅 안겨드는 듯하다가 그의 등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변명을 늘어놓던 와중에 갑자기 끌어 안겨 어버버 벌어진 입술이 삼켜졌다. 뜨거운 호흡을 안은 살덩이가 잇새로 파고들며 그의 혀를 휘감고, 단단한 팔뚝이 허리를 부둥켰다. 그러니까, 키스였다. 키스. 저우룬칭과의 키스

"……."

깊게 맞물렸다가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은빛으로 빛나는 투명한 실이 가늘게 늘어졌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키스에 호응하지도 못하고 있던 옐리세이의 어깨를 저우룬칭이 또다시 힘주어 안았다.

"엘랴, 정말 고마워."

맞닿은 가슴과 피부와 체온 너머로 쿵쿵거리는 박동이 닿았다. 귓가로 나직이 스며든 속삭임이 묵직하게 뛰는 박동을 부드럽게 감쌌다. 옐리세이가 그 박동을 온전히 좇기 전에, 저우룬칭이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하고는 그의 어깨를 안으로 가게로 들어왔다.

"늦었지만 조금이라도 있다가 가라. 배고프지? 금방 야식이라도 가져오마."

홀의 불을 켜고 옐리세이를 인도하여 의자까지 빼서 그를 앉힌 저우룬칭은 꽃다발이 손상되지 않도록 살그머니 테이블에 올려두고는 두어 번 꽃다발과 쇼핑백을 돌아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농밀한 꽃향기가 홀 안의 공기도 물들였다. 옐리세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느닷없는 키스도 키스지만, 저우룬칭이 앉으라며 손수 의자를 빼 준 것 도 전에 없던 친절이었다. 그럼…… 선물이 마음에 든 게, 맞겠지……?

겨우 안도하며 숨을 돌렸다. 그러잖아도 생일을 지나칠 뻔하여 놀란 와중에 이오시프가 차일 거라며 겁을 준 탓에, 내도록 가슴 안쪽에 묵직하게 고여 있던 불안감이 가셨다.

‘차이긴 뭘 차여. 망할 놈.’

이오시프에게 욕을 하는 한편으로, 새벽에 느닷없는 부탁을 받고도 군말 없이 뜨랏에서 야이쑤코까지 바로 올 수 있도록 자가용 헬리콥터로 그를 도와준 페카에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저우룬칭이 곧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오늘 심심해서 꿀리바까(러시아 요리. 고기 파이)라는 걸 만들어 봤거든. 저녁때 만들어 먹고 남은 것이긴 한데 맛이 괜찮은지는 모르겠다."
"오, 좋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느라 제대로 식사를 챙겨 먹지도 못한 옐리세이는 급한 대로 꿀리뱌까를 먹었다. 저우룬칭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힐끗 시선을 올렸다가 눈이 마주친 옐리세이는 괜히 반주로 나온 보드카를 마시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 자식이 이렇게 풀어진 얼굴로 코앞에서 쳐다보고 있으니 왜인지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얼추 급한 불은 끌 만큼 배를 채우자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옐리세이는 의자에서 늘어져서 입가심하라며 저우룬칭이 가져온 차를 마셨다. 설탕을 한 스푼 입에 머금고 진하게 우린 차를 마시니 오늘 하루 내도록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긴장되었던 신경이 흐물흐물 풀렸다.

꽃다발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옐리세이가 식사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기도 하던 저우룬칭이 입을 뗐다.

"선물 열어봐도 될까?"
"당연하지. 네 선물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쇼핑백에서 슈트를 꺼냈다. 네이비색의 서머 슈트 한 벌이었다. 저우룬칭이 재킷을 가슴 앞에 대어 보며 옷소매의 끝단을 쥐고 팔을 옆으로 벌렸다. 사이즈는 적당히 맞는 듯하였다. 백화점까지 급하게 가긴 했지만 선물만큼은 꼼꼼 하게 고른 옐리세이는 뿌듯해졌다.

"다음번에 데이트할 때 너 그 슈트 꼭 입고 와. 어떻게 된 놈이 매번 티셔츠에 면바지나 블루진만 입고 다니냐?"
"나도 홍콩에서 일할 때야 정장을 갖춰 입었지. 하지만 여기에서는 딱히 일 관계로 만나는 사람도 없고, 잘 보일 사람도 없다 보니 편하게 입는 거야. 주방에서 정장을 입고 일하겠냐?"

콩닥거리던 불안과 어리벙벙하게 있던 혼란에서 회복되어 본래의 기세를 되찾은 옐리세이는 코웃음을 쳤다.

"야. 잘 보일 사람이 왜 없냐? 오빠가 있잖아. 오빠한테 잘 보여야지."

으쓱대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런 말을 하였을 때 저우룬칭은 대개 어이없다는 얼굴로 실소하거나 면박을 주곤하였다. 당연히 옐리세이도 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말은 순순한 시인이었다.

"그래, 맞아. 너한테 잘 보여야겠다."

소리 없는 웃음이 조용히 건너왔다. 옐리세이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간 겪어 안 당한 게 있는데, 고분고분하게 웃고 있으니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예배는 잘 끝났냐? 내 선물 산다고 크리스마스도 제대로 못 즐겼겠네."
"뭐,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맨날 보는 그놈이 그놈인데 상관없어. 눈이 없으니까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잘 안 나."

언제 어떻게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는 경계 속에 옐리세이는 대화를 이었다.

"너도 생일 잘 보냈냐?"
"음, 그냥저냥 특별한 일 없이 보냈지."
"그러게 진작 이실직고했으면 내가 놀아줬을 거 아냐. 솔직히 말해 봐, 생일에 내가 없으니까 외로웠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지?"

매우 놀랍게도, 이번에도 저우룬칭은 웃으며 수긍하였다.

"널 만나니까 겨우 생일인 것 같다."

낯간지러운 말을 하고 있는 건 저우룬칭인데 듣고 있는 자신의 뺨이 차츰 붉어졌다. 이러다가는 괜히 얼굴이 빨개져서 그에게 약점이 잡힐 것 같아 서둘러 말문을 돌렸다.

"내년에는 뭐 받고 싶냐?"
"내년 생일 선물?"
"이제 네 생일도 알았으니 내년에는 까먹지 않고 미리 준비해 둘게."
"음……."

저우룬칭이 재킷을 차곡차곡 개어 쇼핑백 안에 되돌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테이블에는 여전히 짙은 꽃향기가 감돌았다. 야이쑤코에 도착해서 꽃가게를 찾아간다면 시간이 맞지 않을 것 같아 방콕 백화점에서 슈트와 함께 사느라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도 꽃잎이 떨어지지도 않고 어디 한 곳 꺾인 구석 없이, 처음 샀을 때처럼 예쁜 모양새라 뿌듯했다. 마음이 급해서 무슨 무슨 꽃을 중점으로 무슨 무슨 꽃을 배치하여 어쩌고저쩌고하는 플로리스트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못 한 게 아쉬웠다.

"……백"
"엉?"

내년에는 선물과 케이크와 꽃다발까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도록 준비해야지, 따위의 생각을 하느라 저우룬칭의 대답을 미처 듣지 못했다. 저우룬칭이 그와 지그시 시선을 마주치며 입술을 움직였다.

"중국어로 고백 듣고 싶다. 지난번에 북한말로 한 고백, 그거 좋았거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옐리세이는 굉장히 떨떠름해지는 기분으로 반문하였다.

"거시기, 그러니까 네 말은……. 중국어를 배워서 중국어로 고백해 달라, 뭐 이런 거냐?"
"바로 그거지,"

이런 씨발. 갑자기 앞이 암담해졌다 이 새끼가 어쩐지 오늘은 순순히 말을 잘 듣더라니 결국 함정이 튀어나왔다.

".......그냥 돈으로 해결하면 안 되겠냐."
"돈은 나도 많아."
"니미럴."

몹시 담배가 당겼다. 동시에 학교 다닐 때도 안 한 공부를 이 나이에 하라며 요구하는 놈의 아구창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휴일에 공부하는 변태 새끼가지 혼자 변태인 것으로도 모자라서 애먼 자신까지 같은 변태로 오염시키려 하고 있었다.

"야. 네가 모르나 본데 난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싫어. 우리나라 말도 맨날 스펠링이랑 문법이 틀린단 말이야."
"너랑 공부가 안 맞는다는 건 안 들어도 눈치로 안다."
"근데도 중국어를 배우라는 거냐? 모국어도 시험 치면 빵점 맞을 텐데 이 판국에 외국어를 또 배우라고? 내가 영어 배우면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냐? 중등학교 중퇴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지 마. 난 초졸이라고, 초졸."
"귀여웠으니까."
"뭐라?!"

용납하지 못할 수식어가 튀어나오자 반사적으로 두 눈에서 쌍심지를 돋았지만, 저우룬칭은 전혀 타격 없는 태연한 목소리로 계속하였다.

"내 모국어로 고백해 준 게 정말 로맨틱하다는 뜻이야, 옐랴."

당시를 회상하는지 웃음기 섞인 저우룬칭의 목소리가 꽃향기에 섞여 달달하게 번졌다. 옐리세이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슬며시 목소리를 내깔며 물었다.

"......북한말로 고백한 거, 좋았냐?"

저우룬칭의 얼굴이 아래위로 끄덕끄덕했다. 옐리세이는 통탄스러웠다. 제기랄, 진즉 홍콩 사람이라는 걸 실토했다면 비빌 구석이 있을 때 중국어를 물어서 받아 적어두는 거였는데.

중국어로 고백해 달라는 청을 들었던 직후에는 망설임 없이 단칼에 거절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주저함이 생겼다. 왠지 이 자식과 얘기를 길게 하다 보면 내가 말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겠지.

고민은 커졌지만 365일이나 남았으니 골치 아픈 얘기는 일단 접었다. 내일부터 고민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참, 너 생일 지나갔으니까 오늘부터 35살이네?"
"음."
"드디어 반올림하여 40살이 되는 날이 되었군."
"......얘기가 또 그렇게 되냐."

옐리세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이며 수긍하던 저우룬칭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생겼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좋아. 40살 하지, 뭐. 12살이나 어린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애인 맛보면서 회춘하고 살면 되겠군."
"새꺄! 소름 돋는 소리 작작 지껄여! 변태 중년 같으니!"
"네가 한 말을 고스란히 따라 옮긴 것뿐인데."
"흥! 내가 언제!"

어렴풋이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싹 구겨서 치워버린 옐리세이의 뻔뻔한 응답과 더불어 저우룬칭의 낮은 웃음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35번째이자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최초의 생일이었다.





"이오샤. 상담할 게 있어."

요 몇 달간, 옐리세이의 상담 주제는 매우 일관적이었다. 이오시프는 이 녀석이 무엇 때문에 어떤 고민을 왜 하는지에 대한 염려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으며 대신 손바닥만 내밀었다. 옐리세이가 투덜거리며 미리 가지고 온 캔맥주를 바쳤다.

"루이가 또 뭐래냐."

자신의 사무실이 연애 상담실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꺼림칙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옐리세이가 흉터를 실룩였다.

"내 고민 대상이 루이밖에 없냐?"
"그래서 루이 때문에 상담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고?"
"맞지."

뻔뻔한 대꾸에 이오시프는 코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어쨌든 시원한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맛있었다. 바퀴 의자를 도르륵 끌고 와서 앉은 옐리세이가 턱을 괴었다. 마주 보고 앉기에는 부담스러운 가끼운 거리였지만 뭘 해도 잘생긴 놈이니 얼굴 감상하는 맛은 있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잘생긴 놈을 왜 이렇게 또라이로 만들었을까.

옐리세이가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본격적인 고민 상담을 시작하였다.

"중국어 어렵냐?
"루이가 중국어 배우라던?"
"다르지만 비슷해."

다행히 잠자리 사정 같은 변태적인 고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고민이었다. 국제 연애를 하다가 국제 결혼에 성공한 이오시프에게 상담하기에 적절한 고민이기도 하였다. 물론 옐리세이가 그렇게까지 섬세하게 헤아린 건 아니고, 상담할 만한 친구가 야이쑤코에는 자신 혼자뿐이라는 이유였겠지만.

이오시프는 술을 홀짝이며 친구의 고민을 함께 생각해 주었다. 피부가 얼 듯이 차가 운 날 따뜻한 방 안에서 싸늘한 청량감이 있는 보드카를 마시는 건 최고의 일미이지만, 더운 날씨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것도 썩 괜찮았다.

"나도 중국어는 잘 모르지만 글자가 존나 많지 않냐? 성조였나? 무튼 발음 같은 게 있어서 엄청 복잡하다던데."
"아오. 뭐 하나 쉬운 게 없냐."

막연히 중국어도 어렵겠거니라는 생각만 하고 있던 옐리세이는 이오시프가 어설프게나마 예시를 들어주자 좌절하였다.

"남의 나라 말 배우는 게 쉽겠냐. 우리나라 말도 외국인이 배우기에는 어렵지 않겠냐"
"외국인 이전에 국산인 나도 우리나라 말 어려워."
"정 안 되겠으면 루이한테 러시아어 배워달라고 해 봐."

저우룬칭의 어학 실력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완벽한 영국 영어를 구사하던 걸 떠올리며 넌지시 찔러 보았다. 솔직한 생각으로는, 옐리세이가 백날 중국어를 붙잡고 끙끙대는 것보다 아무리 느려도 저우룬칭이 러시아어를 배우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는 주측이었다.

옐리세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루이가 러시아어 배운다면 나보다 더 잘할걸. 그 자식은 영어로 된 교재로 태국어를 공부하는 놈이야. 믿겨지냐? 자국어도 아니고 외국어로 외국어를 독학하고 있다고."

이곳에서 러시아어로 편집된 태국어 교재를 구할 수가 없어서 이오시프도 편의상 영어 교재로 태국어를 배우고 있긴 했지만, 아내인 유이가 일대일로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따로 가르쳐주는 교사도 없이 독학이라니.

"너랑 어쩜 그렇게 대비되냐?"
"흐흥, 내 애인이 좀 잘났지. 휴일에도 공부한답시고 안경 썼을 때는 웬 희대의 변태 새끼인가 했는데 안경 쓰니까 눈매가 가려져서 샤프한 인상이 되니 나름 괜찮더라. 제길, 안경 쓰고 있을 때 안면에 싸고 싶었는데 한 번도 못 해 봤네."

잘 나가다가 또 대낮부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옐리세이의 정강이를 퍽 걷어차서 음담패설 대신 욕설을 하게 만든 이오시프는 악다구니를 무시하며 원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근데 외국인과 연애하면서 상대방의 언어를 배우는 건 좋은 생각이야."
"야. 루이랑은 지금도 말 잘 통해."

네이티브나 다름없는 완벽한 영국 영어와, 욕지거리만 청산유수일 뿐 슬랭이 뒤범벅되고 문법도 맞지 않을 때가 잦은 러시아어 억양과 발음의 영어였지만 어쨌든 서로 의사소통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옐리세이는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이오시프는 까닥까닥 검지를 저었다.

"대화만 통한다고 전부인 건 아니지. 너희가 살아온 환경과 생활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르잖냐. 언어라는 건, 그 나라의 관습과 문화가 담겨 있는 거야. 나도 유이와 영어로 대화하면 되는데 왜 굳이 어려운 태국어를 배운다고 생각하냐? 그리고 영어를 못하는 유이의 친구나 가족과 만났을 때 되게 불편하기도 해."

후자는 별반 필요 없는 부분이라고 여겼지만 一 적어도 야이쑤코에 있는 저우룬칭의 지인들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 전자는 옐리세이도 한 번 더 고민하게 하는 말이었다. 항상 깍듯하게 러시아식 호칭을 쓰는 페카가 생각나기도 하였다. 단순히 클라이언트의 국적과 문화를 존중하여 사소한 말버릇 하나까지 주의를 기울이는데, 저우룬칭은 애인이 아닌가. 애인. 애인. 애인.

"하긴……. 크리스마스가 루이 생일이었는데도 내가 성당 가야 한다고 먼저 알려주니까 아예 말을 안 했더라고. 우리나라는 그때가 크리스마스란 걸 전혀 몰랐대."
"난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애로가 생기는 문제만 아니었다면 불교로 개종했을 거야. 유이도 개종은 하지 않아도 된다며 말리기는 하지만……. 상냥하기도 하지......."

이오시프의 시선이 아련해졌다. 팔불출은 시도 때도 없이 극성이었다.

옐리세이는 인상을 쓰며 아까 자신이 맞았던 것처럼 이오시프와 다리를 걷어찼다.

"악!! 씨발놈아! 이건 또 무슨 지랄이야?!"
"내 팔뚝에 닭살 돋은 거 안 보이냐? 마누라 자랑 좀 적당히 해, 이 팔불출 놈아."
"좆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방금 루이 자랑한 건 뒷구멍으로 까먹었냐?"
"루이는 진짜 잘났잖냐."

얼굴도 몸매도 뒤처지지 않고, 싸움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이젠 어학 실력도 탁월하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잘난 건 사실이었지만 옐리세이의 입에서 들으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이오시프는 한껏 빈정거려 주었다.

"네 애인은 그렇게 잘났는데 넌 왜 그 모양이냐."
"뭐 이 새끼야? 내가 뭐가 부족한데?"
"얼굴 빼고 전부."
"얼굴만 잘났으면 됐지!"

자신이 잘생겼다는 건 전혀 부정하지 않으며 옐리세이는 큰소리를 쳤다.

"뭣보다 남자의 가치는 다리 사이에 있는 법이야."

즉시 한층 커진 비웃음이 돌아왔다.

"야. 너 바텀이잖아? 어차피 화장실 갈 때 말고 쓰이지도 않는 거 백날 잘나 봤자 뭐 하냐."
"다, 다, 닥쳐! 내가 언젠가 꼭 루이 엉덩이 따 먹는다니까?!"
"올해 안에 따먹는다며? 가능하겠냐?"
"흥! 당연하지!"
"퍽이나."

노골적인 이기죽거림을 던지며 남은 맥주를 원샷하는 이오시프를 옐리세이는 매우 노려보았지만, 그에게 익숙한 친구는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얄미운 소리를 듣긴 했으나 이와는 별개로 고민을 끝내고 아주 중대한 결심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옐리세이는 오후에 바로 중국어 교재를 주문하였다. 어떤 변태처럼 영어로 중국어를 공부할 작정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지인에게 부탁한 교재였다.

그리고 중국어 교재가 국제 배송되어 도착할 동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최후의 휴일을 즐겼다.





란뜨제프스카야 본부에서 직접 파견된 베레조프스끼의 암살과 이어 발발한 항쟁을 모스크바에서는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현격한 격차가 있는 멘쇼프스카야를 쉬이 제압 하지 못하자 의심은 시간이 지속되는 것과 비례하여 짙어졌다. 최후에 배신자로 판명된 까지미르를 사살하고, 멘쇼프스카야의 보스로부터 이에 관한 증거와 증언을 확보하여 본부에 보고하고 난 후에야 모스크바는 체자르를 향한 신뢰를 회복하였다.

그 후 눈에 두드러지는 변화는 없었다. 체자르는 란뜨제프스카야의 대두목에게 신임 받는 간부였고, 야이쑤코 내에서 란뜨제프스카야의 영향력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적련방에게 많은 이문을 양보하였으나, 멘 쇼프스카야의 구역을 확보하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비슷하였다. 단지 체자르가 예전보다 말수가 조금 줄었고, 잠을 깊이 자지 못하게 되어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을 때가 잦아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선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잠에서 깬 체자르는 다시 잠들지 못하였다. 수면 중에도 잘 벗지 않게 된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면서 우두커니 어둠 속에 누워 있던 그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잠을 자지 못하는 밤에는 종종 빌딩 내를 서성이곤 하였기에 야간에 경비를 서는 조직원들은 바짝 긴장하였다.

부하들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다는 걸 알기에 체자르도 되도록 사실에서 나가지 않았지만 오늘도 결국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손상되고 피가 튄 내벽을 말끔 하게 수리하고 청소하여 원상 복귀된 건물 내에서는 항쟁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체자르는 당시의 기억이 자신에게 평생 남게 되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문밖에서 경호하던 조직원들이 또 밤중에 침실에서 나온 그를 익숙하게 맞았다. 이제는 잠자리가 편치 않으시냐는 예의상의 안부를 듣기도 번거로워진 체자르는 인사하려는 부하들의 입을 막고 잠자코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며 멍하니 머릿속을 비우다가, 상념이 그득 차오르면 발을 멈추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또 무작정 걷기도 하였다. 조직의 보스라는 입장상 경호도 없이 섣부르게 외출하였을 때의 위험만 아니었다면 정처 없이 빌딩 밖의 어둠을 거닐었을 것이다.

의식 없이 발이 움직이는 대로 걷던 체자르는 문득 보안실이 있는 2층까지 내려왔음을 인식했다. 오늘은 옐리세이가 경비를 담당하는 날이었던가. 발길은 저절로 보안실로 향했다. 두 명의 경호원을 비롯한 세 쌍의 발소리가 복도에 뚜벅뚜벅 반사되었다.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 CCTV로 그가 건물 내를 배회하는 건 알았지만 직접 보안실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인사하는 유리를 만류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옐리세이는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읽느라 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다. 그냥 책도 아니었다. 귀 에 워크맨의 이어폰을 꽂고, 한 손에는 샤프까지 쥐어 끼적거리는 걸 보니 무려 공부를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옐리세이와 몹시 닮았지만 옐리세이가 절대 아닐 낯선 사람이 아닌가, 싶은 우스운 의심까지 하였으나 무릎에 곱게 덮여 있는 숄은 옐리세이가 그에게도 입이 닳도록 자랑하였던 ‘루이가 정성스럽게 수제작한 숄’ 이 맞았다.

손짓해서 유리를 앉힌 체자르는 손수 커피를 두 잔 탔다. 옐리세이는 그때까지도 끙끙거리며 폭폭 한숨만 쉬고 있을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례샤."

커피잔을 앞에 내려놓자, 그제야 옐리세이가 위로 올려다보았다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 이어폰을 뺐다.

"언, 언제 내려오셨어요?"
"방금."

체자르는 자신의 커피를 마시며 테이블에 앉았다. 무얼 그리 심각하게 공부하고 있는지 살펴보니 중국어 교재였다.

"저우짓이군."
"어째서 제가 중국어 교재를 보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전부 루이와 관련된 거라고 아는 겁니까?"
"그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나?"
"아니요……."

루이의 엉덩이를 사방에 떠벌리고 다닌 장본인은 얌전히 입을 닥쳤다.
체자르는 매우 낯설고 진귀하며 희한한 생물체를 관찰하듯이 중국어 교재와 옐리세이를 번갈아 바라보아 뻔뻔한 옐리세이마저 조금 민망하게 만들었다.

옐리세이가 누구인가. 야이쑤코에 오기 전에는 영어도 ‘하이 헬로우 섹스’밖에 모르던 놈이었다. 영어와 태국어 중 하나를 하지 못하면 식당에서 밥 한 끼조차 사 먹을 수 없는, 생존과 연관된 상황만 아니었다면 절대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알파벳부터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던 옐리세이를 기억하고 있는 체자르는 정말 신기하였다.

그런 옐리세이가 자청하여 중국어를 배우다니, 생존에 직결하였던 문제만큼이나 그 중국 놈이 좋다 이 뜻인가.

체자르의 짐작에 진실과는 살짝 다른 오해가 있기는 하였지만 옐리세이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공부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공부는 잘 돼 가나?"
"죽겠습니다!!"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옐리세이는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이래 숄 자랑이 쏙 들어갈 만큼 죽고 싶어 하는 모습을 질리도록 봤던 유리는 스리슬쩍 외면하며 CCTV를 열심히 둘러보는 척하였다.

진짜 미치겠습니다, 체자르 끼릴로비치. 영어는 알파벳 개수나 적고 생긴 게 키릴 문자랑 비슷하기나 했지 중국어는 수천 개나 된다고요!"
"한자를 전부 다 사용하는 건 아니질 않나? 상용한자는 3,000개 내외라고 알고 있는데?"
"3,000개가 아니라 300개라도 못 외웁니다!"

그는 매우 당당하게 교재에 삿대질하였다.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변태 같은 글잡니다. 작대기 하나 덜 썼다고 발음이랑 뜻이 바뀔 정도라니 완전히 미친 거 아닙니까? 사람이 글자 쓰다 보면 작대기 수십 개 중에 하나 덜 쓰는 실수를 할 수도 있잖습니까! 숫자도 제정신이 아니에요. 1, 2, 3을 작대기 한 개, 두 개, 세 개로 스타트를 끊었다면 최소한 10까지는 작대기 개수대로 가야죠!"
"10은 어떻게 쓰는데?"
"이렇게요!"

옐리세이가 매우 분개하며 노트 끄트머리에 열십자를 썼다. 체자르는 뜨거운 커피에 입김을 후 불어 식히며 진지하게 끄덕였다.

"선이 두 개니까 열 개보다는 쓰기 쉽겠군."
"전 그냥 열 개를 긋고 싶어요!"
"100은 백 개 그으려고?"
"100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안 쓸 거예요. 100 따위 나가 죽으라죠!"

진절머리가 난다는 얼굴로 치를 떨었다. 싸우러 가라고 하면 아무리 불리한 정황이어도 히죽거리면서 가는 녀석이 고작해야 글자 몇 개를 외우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으니 여러모로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독학하고 있는 거냐?"
"중국어 할 줄 아는 녀석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대답하며 옐리세이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순간 눈에서 반짝거렸지만 체자르는 단호하게 그 희망을 꺾었다.

"유감이군. 나도 중국어는 간단한 인사 정도밖에 모른다."
"혹시 KGB 시절에 중국에 가 본 적은 없으십니까?"
"주로 동유럽 쪽이었지. 우크라이나어 배워볼 테냐? 우리나라 말과 거의 비슷해서 배우기 정말 쉬워."
"……다음생에 배우겠습니다."

이보다 더 끔찍한 말은 들은 적 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착잡하게 가라앉아 도무지 회복될지 않을 것 같았던 무거운 심경이 그와 대화하며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아 체자르는 엷게 웃었다. 꾸밈없이 솔직하고 직격으로 부딪히는 옐리세이와의 대화는 항상 즐겁다.

"태국에 화교가 많으니까 뜨랏 정도만 가도 중국어 학원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하군."
"뜨랏까지 가는 걸 옆집 가는 것처럼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다못해 육지 왜 연결되었어도 제가 열심히 가보겠는데요……."
"면허도 없는 녀석이 큰소리는."

이론 공부하기 싫어서 운전면허도 따지 않은 옐리세이가 찔끔했다.

"버, 버스나 기차가 있죠! 아니, 근데 제가 면허가 없어서 그렇지 운전은 잘합니다."
"아무래도 좋은데 날 뒷좌석에 태우고 운전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가차없는 면박에 시무룩해졌다. 이래저래 고난이 많아 보이지만 스스로 무려 공부씩이나 하고 있는 모습이 퍽 기특하기도 하였기에 체자르는 조금 힘을 북돋워 주었다.

"저우에게 배워보지 그러냐?"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애인한테 빌붙습니까?"

묘한 곳에서 이상한 쪽으로 발현되고 있는 자존심이었다.

"아니면 차이나타운에서 트라이어드와 관련되지 않은 일반인을 찾아보지그래. 너 혼자 독학하다가는 평생이 지나도 저우에게 중국어로 인사 한마디도 하지 못할 게 훤하군."

조언과 핀잔이 섞인 그의 말을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옐리세이가 고통스럽게 머리를 싸맸다.

"저 좀 살려주세요……."

체자르는 실소하며 조금만 더 찌르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부하의 어깨를 격려차 토닥토닥 두드렸다.





환장하겠다. 머리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익히고 배우라고 만든 글자가 절대 아니었다. 개수가 많으면 외우기나 쉽게 개성적인 모양새를 가지고 있을 것이지, 그놈이 그놈 같고 이놈이 이놈같이 생긴 똑같은 글자인데 알고 보면 다른 한자란다. 모양이 다른 한자인데 발음이 같은 것도 있었다. 상용한자를 나열한 책만 해도 벌써 한 권이었다. 성조고 나발이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옐리세이는 최선을 다하였다. 몇 마디 간단한 회화도 익혔고, 한자도 외우려고 노력하였다. 모처럼 저우룬칭의 휴일과 겹치는 비번마저 데이트를 오후로 미루고 오전에는 중국어 공부를 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며칠 전 홍콩의 명절이라는 구정 때도 하루밖에 만나지 않았다.

허나, 새벽녘에 온몸으로 한자들이 날아들어서 둔중하게 떨어져 박히는 악몽을 꾸며 깨어난 후 날이 완전히 밝을 때까지 깊은 고민을 하다가 중국어를 손에서 놓았다.

연애. 그래, 연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연애도 살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이대로 중국어를 배우다가는 과부하가 걸린 머리가 터져 죽을 것이다.

‘루이는 중국어로 고백해 달라고 했으니까.’

‘고백’을 해 달라고 했지 정확히 ‘중국어를 공부해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다. 거리에 나가면 많고 많은 게 중국인이니 아무나 적당한 사람을 붙잡아서 북한말로 고백했을 때처럼 발음을 적어오면 될 것이다.

성공적인 자기합리화를 하였으나 그래도 저우룬칭에게 자신은 최선을 다하였다는 증명과 유세를 하기 위하여 교재를 뒤적거렸다. 공부를 시도하였다는 증명은 될 것이다.

노트를 한 장 찢어 중국어 문장의 한자를 따라 그리고 一 그리는 데 한참 걸렸다 ― 발음을 갈겨썼다. 저우룬칭과 만나기로 한 건 오후였으니 이 시간에는 아직 홍가에 있을 것 같았다.

결심과 행동이 빠른 옐리세이는 10분 후에 택시를 잡아타고 홍가로 향했다. 휴일인 홍가의 문은 닫혀 있었으나 제집처럼 쾅쾅쾅 두드렸다. 안쪽에서 오늘 영업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건너왔다. 저우룬칭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무시하고 문을 더 두드렸다.

동양인 청년이 구시렁거리며 안쪽에서 문을 열었다. 종업원인 리 뭐라는 쌍둥이 형제 중 하나가 옐리세이를 보고는 ‘그러면 그렇지.’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묘하게 언짢아지는 표정이었지만 중요한 건, 중국인이다. 옐리세이는 헛기침을 흠흠 하곤 쥐고 온 종이를 폈다.

"어…… 음, 그러니까……. 我是來见路易的, 路易在家吗?"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교재에 있는 그대로 ‘루이를 만나러 왔습니다. 루이는 집에 있습니까?라고 베껴 왔으니 얼추 말은 통할 것이다. 자신의 중국어가 먹히는 최초의 현장을 두근두근하며 관찰하고 있는데, 쌍둥이는 입을 약간 벌린 채 쳐다보다가 영어로 물었다.

"슈이스끼. 너 뭐라고 한 거냐?"
"……."

그대로 읽었는데 이 새끼는 왜 모른다고 하는 걸까. 성조인지 뭔지 그게 문제였나. 아니면 병음인지 뭔지를 무시하고 대충 영어로 적은 발음 탓인가. 초보 외국인에게 뭘 바라는 거야.

옐리세이는 다시금 발음을 또박또박 읽었다.

"我是來见路易的, 路易在家吗?"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시비 걸러 온 건 아니겠지?"

쌍둥이의 얼굴에는 계속 물음표가 떠 있었다. 그러잖아도 얄팍한 인내심이 슬슬 짧아지고 있었다.

"我是來见路易的, 路易在家吗?!"

빽 높아진 소란통에 안쪽에서 다른 쌍둥이 한 명이 나왔다. 옐리세이는 쌍둥이를 앞에 세워두고 문장을 두 번씩 더 읽어주었고, 쌍둥이는 그의 말을 해석하지 못했다.

"잠깐 기다려 봐."

우선 옐리세이부터 조용히 시킨 리뎬차이가 동생을 돌아보며 중국어로 속닥였다.

"영어는 아니질 않냐?"
"내가 아까부터 계속 들어 보니까 확실히 영어는 아냐."
"러시아언가?"
"러시아어를 우리한테 왜 말해?"

두 사람이 속닥거려 봤자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리뎬차이는 옐리세이에게 눈짓했다.

"한 번만 더 말해 봐."

옐리세이는 당연히 울컥했다.

"야이 씨발 장난하냐?!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했잖아!"
"그럼 영어로 하면 되잖아."

인내심은 끊어지기 직전이었지만 오기가 버티고 있었다. 옐리세이는 짜증스럽게 단어 하나하나를 콱콱 힘주어 가며 발음하였다.

"我是來见路易的, 路易在家吗!!"

뭘 해도 러시아어 억양이 사라지지 않는 옐리세이의 기묘한 외국어를 제일 많이 반복해서 들은 리뎬신이 머리를 긁적였다.

"형. 이 자식이 지금 푸통화로 얘기하는 거 아냐?"

리뎬차이도 그럴듯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연거푸 반복하는 발음이 푸통화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쌍둥이가 푸통화를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저우룬칭은 당연히 유창했고, 명문대에 합격하였던 장쯔궈와 술집 마담으로써 본토에서 방문하는 손님을 맞기도 하였던 홍위롄은 그럭저럭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지금 홍가에 있는 사람들은 쌍둥이뿐이었다.

"그냥 종이를 줘 봐."

빼앗듯이 종이를 가져온 리뎬차이의 어깨 너머로 리뎬신도 같이 읽었다. 종이에 삐뚤빼뚤 그려진 한자를 읽으니 옐리세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겨우 짐작되었다.

"칭 형님은 아까 공부할 게 있으시다고 요 앞의 카페에 가셨어."
"이런, 젠장. 망할 변태 새끼가 또 공부하러 갔네. 근데 내 발음이 그렇게 엉망이냐?"

내년 저우룬칭의 생일 때 기껏 중국어로 고백해 주었는데 발음 문제 때문에 못 알아 듣는다면 큰일이다.

"발음이 안 좋은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가……."

절로 근심 어린 표정이 된 옐리세이에게 리뎬차이가 설명해 주려던 때, 거리 저편에서 저우룬칭의 모습이 보였다. 제일 먼저 발견한 리뎬신이 꾸벅 인사하자 차례대로 옐리세이와 리뎬차이도 돌아보았다.

한 손에 숄더백과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술렁술렁 걸어오던 저우룬칭은 옐리세이가 가게 앞에 서 있는 걸 발견하고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약속 시각이 오후가 아니었나?"
"할 말이 있어서 먼저 왔어. 일찍 보니까 좋지?"

저우룬칭이 피식 웃고는 옐리세이의 어깨를 안으며 2층으로 올라왔다. 쌍둥이 형제는 몇 달 사이에 퍽 익숙해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일별하고 하던 일로 돌아갔다.

홍위롄과 장쯔궈가 외출한 가게 위층은 조용했다. 저우룬칭이 방의 에어컨을 켜는 사이에 옐리세이는 침대에 풀썩 앉았다.

"온다고 미리 연락을 하질 그랬냐."
"흥. 우리가 용건 없으면 못 만나는 사인가?"
"옷 갈아입어야지. 슈트 몇 벌과 구두를 며칠 전에 새로 샀거든."

뾰족하게 던진 말에 말랑말랑한 대꾸가 돌아왔다. 옐리세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나 만날 때 입으려고?"
"너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잘 보이겠냐."

다부지고 옹골찬 근육으로 꽉 죈 저우룬칭의 위아래를 주욱 훑으며 씨익 웃었다.

"이따가 저녁에 나갈 때 갈아입어."

상상만으로도 흐뭇했다. 옷걸이가 좋은 놈이니 옷도 좋은 걸 입어야지. 중국어의 좌절을 상쇄할 만큼 기분이 풀린 옐리세이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종이를 다시 읽었다.

저우룬칭이 다소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미소했다.

"난 집에 있지, 그럼."
"와 넌 바로 알아듣네? 아까 쌍둥이들은 전혀 못 알아듣던데? 역시 사랑의 힘인가?"

중국어 고백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단숨에 들떠 신나게 들썩 거리는 그의 오류를 저우룬칭이 차분히 정정했다.

"그야 넌 푸통화로 말했고 재들은 푸통화를 모르거든."

이건 또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말이었다. 옐리세이는 설마 러시아에서 교재를 잘못 보내준 건 아닌지 의심하며 되물었다.

"푸, 뭐? 난 분명히 중국어 교재에 있는 걸 그대로 베꼈는데?"
"푸통화."

저우룬칭이 책상에서 노트를 꺼내 ‘普通括’를 썼다.

"푸통화가 표준중국어라서 네가 베꼈다던 교재도 아마 푸통화 기준으로 되어 있을 거다. 나 같은 홍콩 사람은 광둥어, 쉽게 말해서 홍콩 사투리를 써서 따로 배우지 않는 이상 푸통화는 몰라. 발음이나 표현이 다르다고 하면 이해하겠나?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依好)’는 네 교재에 ‘닌하오’라는 발음으로 되어 있겠지만 광둥어 발음은 ‘네이호우’ 야. ‘고맙습니다’는 푸통화로 ‘樹樹’ 라고 쓰고 ‘셰셰’ 로 읽지만, 광둥어로는 ‘多謝’라고 쓰 고 ‘또제’ 라고 읽거나 ‘唔設’ 라고 쓰고 ‘음꼬이’라고 읽지."

글자까지 써주는 차근차근한 설명이었지만 옐리세이의 머릿속은 뺑글뺑글 돌아갔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중국어가 그 푸 뭐라는 거랑 홍콩 사투리랑 두 개 있다,  그런 뜻?"
"홍콩만 사투리가 있는 게 아니라 지역마다 더 있어."
"……        이런 씨발."

첩첩산중이었다. 중국어만으로도 골이 빠개지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게 많다고? 인상이 썩어가는 그의 앞에서 저우룬칭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러시아도 사투리는 있지 않나?"
"우리나라는 모스크바에서 쓰는 말이나 사투리나 크게 차이가 없어서 이렇게 못 날아처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땅이 그렇게 넓은데도?"
"어어, 어……. 뭐라더라. …… 소련 시절에 국어 교육을 빡세게 해서 그렇대. 나도 그렇게 국어 수업 들었어."
"아, 다행이군."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우룬칭은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옐리세이는 하나도 안 다행이었다.

"야. 그 많은 중국어 중에서 내가 어느 쪽 말로 고백해 주길 바란 건데?"
"나야 둘 다 할 줄 아니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하지만 광둥어가 푸퉁화보다 성조도 많고, 표준어에는 없는 한자도 있고, 한자도 번체로 쓰니 외국인이 배우기엔 더 어렵지 않을까 싶군."

그가 며칠 동안 공부한 중국어보다 더 어려운 말이 있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옐리세이는 치를 떨었다.

"됐어. 중국어든 뭐든 지긋지긋하니까. 포기, 포기! 난 안 해!"
"중국어 공부하는 거 아니었냐?"
"했었지! 오늘 아침까지는!"

옐리세이는 그야말로 입에서 불을 뿜으며 한자의 불합리성과 변태스러움에 대하여 일장연설을 터트렸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저우룬칭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어 기침을 콜록거리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어려웠냐?"
"내가 마조히스트라면 아주 환희하면서 배웠을 거다."

진절머리를 내며 머리까지 휘휘 내젓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문득 화제를 돌렸다.

"네 생일에는 뭘 받고 싶냐? 아, 포지션 바꾸는 건 제외하고."
"제기랄. 그 조건 달 줄 알았어."

옐리세이는 여전히 부루퉁했다.

"안 대 줄 거면 차이나 드레스나 입어."
"……치마는 네가 입는 게 안 낫겠냐. 나보다는 네가 가늘잖아?"

옐리세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끔찍한 소리를 들은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이번에는 절대 용납하지 못할 소리가 그의 고막을 찔렀다.

"뭐이 새끼야?! 야, 내가 요새 근육을 안 키워서 그렇지 조금만 운동하면 금방 너보다 어깨도 넓어지고 가슴도 두툼해지고 팔다리도 굵어질 예정이거든?!"
"오, 훌륭한 태도군. 그래서 간식은?"
"먹어야지."

직전에 운동하겠노라 큰소리를 친 주제에 음식에 대한 대답은 매우 척추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좌절한 옐리세이를 두고 저우룬칭은 금방 차를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에어컨 바람만이 기동 소리와 어우러져 그를 맞이하는 방에 널브러진 옐리세이는 요상한 확신을 하였다. 원래 저우룬칭이 이것저것 먹을 것을 잘 챙겨주기는 했지만 요새 내주 그를 먹이는 데에 재미라도 들린 것 같았다. 러시아 요리의 가짓수도 차츰차츰 증가하는 중이다.

‘날 진짜 돼지로 만들 작정인가.’

인류 최대의 난제인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까.’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가만히 있어도 식사와 간식이 알아서 뚝딱 자려지는 건 정말 편했다. 맛도 있다 사랑도 있다.

‘오늘까지만 먹고 다이어트하면서 운동하고 근육 키워야지.’

실현 가능성이 없는 다짐을 굳건히 다진 것으로 만족한 그는 느긋하게 뒹굴거리며 저우룬칭을 기다렸다.





‘……어떡하지. 귀엽잖아.’

문을 닫자마자 저우룬칭은 입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떠듬거리면서 띄엄띄엄 중국어를 하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울렸다. 큰일이다. 멀대처럼 키도 큰 녀석이 진심으로 귀엽게 보이는 날이 오다니.

아이처럼 어설프게 중국어를 말하는 모습도 귀여웠지만, 그가 중도 포기는 하였음에도 중국어 공부에 도전하였다는 사실도 은근히 가슴을 울렸다. 사고와 행동 패턴이 단 순한 녀석인데도 이따금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치고 들어와 방심을 직격하여서 곤란하다. 홍위롄의 도움을 받아 드라이플라워로 만드는 중인 생일 꽃다발을 떠올리니 저절로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저우룬칭은 미소를 덧그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공부하는 걸 저렇게나 싫어하니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만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였다. 자신이 몰래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은 왠지 숨기고 싶었다. 나중에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면 유치한 이유가 될까.

‘유치해지는 게 점점 옐리세이를 닮아가는 것 같군.’

이 말을 들으면 또 길길이 날필 그를 상상하며 적당히 다과를 챙겼다. 방으로 돌아오니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옐리세이가 양팔 벌려 다과를 환영하였다. 몇 분 전에 근육을 키우겠다고 하던 분은 어디를 가셨을까.

"쿠키도 네가 만들었냐?"
"아까 카페에 갔을 때 맛있길래 좀 사 온 거야. 쿠키는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데……. 왜, 먹고 싶냐?"
"어. 쿠키랑 케이크 같은 것도."
"뭐, 그럼 한 번 시도해 보마."

잼을 듬뿍 덜어 차에 탄 옐리세이가 빵도 만들어 보라고 덧붙였다. 요리하는 건 좋아 하고, 그 요리를 옐리세이가 먹는 걸 보는 것도 좋아하니 알겠다고 끄덕거리긴 했지만, 자신을 만나고 몇 kg이 불었을지 솔직히 궁금했다. 이러다가는 근육이 아니라 살집 때문에 자신보다 팔뚝이 굵어지게 생겼다. 그쪽도 상관없긴 하지만.

옐리세이가 차와 쿠키를 오물오물 열심히 먹었다. 점심을 카페에서 간단히 샌드위치만 먹었더니 좀 허전하긴 했지만 옐리세이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 느낌이라 저우룬칭은 차만 마셨다. 러시안 티는 그의 입맛에 조금 달아 홍차에 잼은 타지 않았다.

"참. 한자는 글자마다 뜻이 다 있던데 네 이름 뜻은 뭐냐?"

저우룬칭은 아까 썼던 노트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周倫淸.

"저우는 성이라서 의미를 고려하고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굳이 뜻을 설명하자면 두루두루, 룬은 인륜, 칭은 맑다."

옐리세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한자 상식 중 하나가 나왔다. 칭에 있는 저건 삼수 변이었다. 조금 신이 난 그는 저우룬칭이 쓴 글자 옆에 자신의 이름도 써 봤다.

"내 이름 옐리세이는 하나님이 내 빽이시라는 뜻이야. 뭐, 뜻과는 상관없이 할아버지랑 같은 이름이지만."

저우룬칭의 이름 옆에 E л и c e й 도 또박또박 적혔다. 지난번에 이름을 적었을 때도 느꼈지만 휘갈기는 악필일 것 같은 녀석이 필체는 아이인 양 크고 동글동글했다. 하지만 필기체로도 써 보라고 했더니 러시아어를 막 공부하기 시작한 그로서는 단숨에 해독 불가능한 미지의 언어가 되었다.

"할아버지도 잘생기셨나?"

옐리세이의 얼굴에 세월만 깃들인 것 같았던 그의 아버지 사진을 떠올리면서 묻자, 옐리세이도 끄덕거렸다.       

"옛날 젊었을 때 사진 보면 나만큼 잘생기셨더라. 그런데 강제수용소에서 고생도 많이 하시고 얼굴도 심하게 다치셔서 아예 거울을 안 보고 사셔. 얼굴을 볼 때마다 수용소 때의 일이 생각나서 힘드시대."
"지금도 잘 계시냐? 아, 가출했으니까 소식은 모르겠군."

대화의 맥락을 잇는 자연스러운 물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옐리세이의 뺨이 붉어졌다. 힐끔힐끔 저우룬칭의 눈치를 살피면서 괜스레 쿠키를 입에 쑤셔 넣기도 하던 그는 한참 후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건 비밀인데……. 실은 가끔 사람을 고용해서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있어. 한 달 전에 소식 들었는데 할아버지도 정정하시고 엄마가 감기에 걸린 것 말고는 다들 잘 계시더라. 형도 둘째 조카 낳았고."

이어 성급하게 덧붙여진 물음은 부끄러움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처럼 들렸다.

"네 이름도 가족이랑 같은 이름이냐?"

붉어진 뺨에 파닥파닥 손부채를 부치는 옐라세이를 빤히 쳐다보던 저우룬칭은 더욱 민망해진 옐리세이가 울컥하기 직전에 대답했다.

"사생아이고 가족도 어머니 혼자뿐이어서 일가친척의 이름을 따온 건 아니고, 옆집 살던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거야. 어렸을 때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서양 교육을 받으셨던 신사(紳士)로 학교 선생도 하시고, 군벌의 고문으로 지내기도 하셨어."

몇 달 전이었다면, 이쯤에서 대답을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삼십 여년 전의 어슴푸레한 기억을 떠올렸다.

"종종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기도 했었는데, 우리 집은 다섯 가구가 살았고 할아버지 댁은 세 가구가 살아서 그나마 조금 넓었지. 나는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오래된 고서를 뒤적거리면서 옛날이야기도 곧잘 해주셔서 좋았어."

자연광이 잘 들지 않는 좁고 습한 방. 바로 방 건너편에서 복닥거리며 시끄럽게. 꽉 메우던 일상의 소란. 노인 특유의 냄새. 이도 거의 빠진 노인의 옆에서 듣던 과거의 잔상.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 거북이의 등을 쪼개어 점을 치던 시대로 가기도 하였고, 노인이 고문으로 있던 군벌의 피비린내 나는 혈전으로 가기도 하였다. 그때만은 그의 마음도 좁디좁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길을 넘어 멀리 커지는 것 같았다. 유년기의 몇 안 되는 선명한 기억 중, 하나였다.

10살 이전의 삶이 썩 즐거운 추억이 아니었기에 어렸을 때 같은 집에서 살았던 홍위롄과 그를 구하였던 차오쑹윈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회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옐리세이는 입을 작게 벌렸다.

"와, 그렇게 좁은 집에서 살면 안 힘드냐."

이런 반응을 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기에 저우룬칭도 가볍게 웃었다. 그렇기에 더욱 옐리세이에게는 부담 없이 과거를 말할 수 있는 것일 터다.

"우리 집도 돈이 많은 건 아니라서 흐루쇼프까(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의 정책으로 지은 서민 아파트)에서 살긴 했는데 그래도 한 집에 한 가구였어. 엄마랑 아빠 세대에는 한 집에 여러 가구가 살던 일이 흔했다고 하시긴 했는데……. 되게 불편했겠다."
"그래도 여러 가구가 살아서 내가 안 죽고 살아남게 되었을걸."

저우룬칭은 웃음의 여운 속에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가 원하지도 않던 날 낳고 우울증이 엄청 심해져서 마약까지 시작하면서 육아 방치를 했었거든. 같이 살던 아주머니들이 아기가 무슨 죄가 있냐며 틈틈이 돌봐주지 않으셨다면 죽었을 거야. 언젠가는 어머니가 내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던 적도 있었는데 롄 누님이 목격하고 비명을 질러서 살아났지."

아기였을 때 직접적인 상해를 입은 이야기가 나오자 옐리세이마저 숨을 들이켜며 그의 목 언저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우룬칭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기억 안 난다. 멍 같은 게 계속 남아 있지도 않았고."
"아오. 그래도 목 졸리면 존나 고통스러운데. 애새끼한테 무슨 짓이야."

혀를 쯧 찬 옐리세이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매만졌다.

"롄 누님은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냐?"
"음. 우리 가게 사장님."
"홍가 사장이라면 미스……."
"제니."
"오, 미스 제니."

옐리세이는 이번에야말로 이름을 잊지 않겠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음에 만나면 잘해 줘야지. 그래서 어머니는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데?"
"글쎄……. 10살 때 헤어져서 지금은 살아계시는지도 모르겠다."

차오쑹윈과 구룡성채를 나온 후에 저우룬칭은 발도 들이지 않았고, 후에 구룡성채가 철거됨으로써 어머니와의 한 가닥 인연은 영영 끊어졌다. 구룡성채의 철거 후에도 구룡 성채 거주민들의 연락망은 지속되고 있으니 홍위롄을 통하면 최소한 생사 정도는 알 수 있을 테지만,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고 그녀도 먼저 어머니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흠."

과거야 어떻든 낳아주신 어머니라거나, 하나뿐인 가족이라거나 하는 입바른 말 없이 옐리세이는 그냥 그러냐, 하고 턱만 주억거렸다. 그래서, 좋았다.

그는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렇듯이 어머니의 생사를 확인하거나 만나고 싶다는 바람은 품지 않았다. 허나 옐리세이와 함께 있으면 언젠가 어머니의 소식이 궁금해질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야. 그래도 말이야."

불현듯 옐리세이가 음흉하게 웃으며 거리를 좁혀 앉았다.

"죽거나 크게 안 다치고 무사히 잘 자라나서 다행이지? 어렸을 때 네가 고생은 많았겠지만 지금 날 만났으니 이제 안심해도 돼. 앞으로 네 인생은 내가 있어서 황금빛 전성기가 될 거라고."
"……그러네. 안 죽고 살아있길 잘했다. 애완 멧돼지도 생기고."
"뭐라?! 애완?!!"

음흉하게 가늘어졌던 눈매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주인님이 생긴 거겠지!"

저우룬칭이 "아."하고 말꼬리를 길게 끌며 웃었다. 옐리세이가 반사적으로 흠칫했다.

"주인님? 오랜만에 듣는 정겨운 표현이로군. 노예 생활 2주차 시작할까?"
"……기다려 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기간이 필요해."

제대로 노예 뽕도 뽑지 못하고 저우룬칭에게 밤새도록 시달린 기억이 떠오른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마지막 날만 아니면 완벽했는데, 쌍." 입속으로 투덜거리는 그의 옆에 한자로 奴隸를 쓰며 노예라고 알려주자, 질 새랴 х о з я и н 라며 주인님을 썼다.

저우룬칭은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었다.

"옐랴. 정말 중국어를 배울 생각은 없나?"
"네가 평생 내 노예가 된다고 해도 안 돼."

단호하게 양손으로 엑스 표를 만드는 그를 잠시 보다가, 벽시계를 확인하였다.

"2001年1月28日 下午3點, 這一刻我們會一起度過, 只屬於我們雨個人的珍貴瞬間, 我永生難忘"

느닷없이 중국어가 튀어나오자 옐리세이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뭔 뜻인데?"
"살짝 바꾸긴 했지만 영화 대사. 2001년 1월 29일 오후 3시. 우리는 이 순간을 함께 했어. 난 우리 둘만의 소중한 순간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오, 좀 멋있다. 홍콩 영화야?"

마지막 남은 쿠키를 입으로 옮기려는 옐리세이의 손을 쥐며 손등에 부드럽게 키스 다. 그리고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耶娃。你的存在喚醒了我遺忘已久的心臟, 令本來已死去的我再次活過來。你成爲我的邦一瞬間, 我的現在。和你在一起的時候我心臟的律動, 仰聽了嗎。"
(옐랴. 넌 존재조차 잊고 있던 내 심장을 일깨워 시체에서 인간이 되도록 해 줬지. 네가 나의 순간이고, 나의 현재다. 너와 있을 때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넌 듣고 있을까.)

"……그건 또 뭔데?"

분위기를 잡더니 또 중국어를 솰라솰라 내뱉자 어리벙벙한 얼굴로 빤히 보는 옐리세이를 저우룬칭도 시선을 올려 빤히 마주 보며 빙긋 미소했다.

"네가 중국어를 배우면 직접 해석할 수 있겠지."
"……아오! 좆같은 새끼가!!!"

풀쩍 뛰며 파르르 경련하는 옐리세이의 손등에 다시 한 번 더 키스했다.

"고백이었어."
"더럽고 치사한 새끼야! 할 게 없어서 이젠 고백 가지고 협박까지 하냐!!"
"중국어 가르쳐 주마."
"일없어!!"
"중국어를 배운다는 핑계로 데이트할 수도 있지 않겠냐."

진저리를 내면서도 뿌리치지는 않고 있던 손이 데이트라는 말에 움찔했다. 순간 솔깃한 표정이 된 옐리세이에게 저우룬칭은 쐐기를 박았다.

"눈치 볼 것 없는 합법적인 데이트."
"난 지금도 눈치 안 봐."
"그렇지만 더 뻔뻔하고 더 당당하게 만날 수 있겠지."

옐리세이의 얼굴에 비치는 망설임이 커졌다.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그는 결국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고민할 시간 좀."
"천천히 생각해라."

또 한 번 쪽 소리가 나도록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옐리세이가 인상을 쓰며 잡히지 않은 손의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가리켰다.

낮은 웃음소리에 이어 저우룬칭은 그를 당겨 안으며 키스하였다.

영원히 잊지 않을, 함께한 소중한 순간이었다.





HIDDEN TRACK





여름이 돌아왔다. 옐리세이가 죽어가는 계절이 돌아왔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서늘한 카페에서도 그는 완전히 지친 얼굴로 늘어져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러시아 가고 싶다......"
"많이 덥냐?"

제과와 제빵도 차츰 관심이 생기고 있는 저우룬칭은 케이크 레시피 책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관에 발을 하나 걸친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디질 것 같아. 네 얼굴이 멀쩡해 보여서 더 더워, 빌어먹을."
"홍콩도 덥거든."

한 손으로는 요리책을 넘기고 다른 손으로는 아이스커피를 마시던 저우룬칭이 시선을 옮겼다. 우거지상을 쓰고 테이블에 뻗어 있는 옐리세이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주었다. 차가운 잔을 잡고 있어 조금이나마 싸늘한 손끝이 닿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식욕이라도 나게 먹고 싶은 거 해 줄까? 뭐 먹고 싶냐? 더울 때는 매운 게 당기던데."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거."

옐리세이가 테이블에 처박은 얼굴도 올리지 않은 채 입만 웅얼거렸다.

"케이크?"
"어. 발렌타인데이 때 만들어 줬던 초콜릿 케이크."
"알았다. 그거 말고는?"
"......더워서 생각도 안 나. 뇌가 녹아버린 것 같아."

지칠 줄 모르고 날뛰던 녀석이 더위를 먹어서 축 쳐져 있는 모습을 보니 좀 안쓰러웠다. 카페 안도 더위를 피해 온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어딜 가나 에어컨을 쌀쌀하리만큼 기동하는 태국인지라 여름 감기가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옐리세이는 일단 눈앞의 무더위를 피하는 게 더 급선무인 듯하였다.

"이런 촌구석에서 벌써 6년째 여름을 보내고 있다니 우울하다....... 눈 보고 싶어....... 눈싸움하고 싶어....... 눈사람 만들고 싶어....... 눈 위에서 팔다리 허우적거려서 천사 만들고 싶어....... 폭설 때문에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싶어....... 버스 타고 가다가 눈보라가 몰아쳐서 도로에 갇히고 싶어....... 동상 걸리고 싶어......."

오죽했으면 동상이 걸리고 싶다는 말까지 나왔다. 저우룬칭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여기에는 내가 있잖아. 나와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냐?"

짐짓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거렸다. 나른하게 젖은 채 귓속으로 스미어드는 목소리가 섹시하여 무심코 끄덕끄덕하던 옐리세이가 잠시 후에야 얼굴을 올렸다. 널브러져 있던 뺨은 테이블에 눌린 빨간 자국이 남은 채였다.

"말인즉슨, 네가 나 없으면 못 살겠다, 뭐 그런 뜻이지?"
"무슨 단계를 건너뛰면 바로 그런 해석이 나오는 거냐."
"흥. 순순히 인정하라고."

화제가 이 방향으로 넘어오자 옐리세이는 조금이나마 원기를 회복한 기세였다.

"고향의 추위와 눈이 그리워서 향수병에 걸릴 것 같은 애인을,"

잠자코 듣던 저우룬칭은 고개를 숙여 옐리세이의 입술에 쪽 키스하며 말을 막았다. 옐리세이가 인상을 구기며 얼굴을 피했다.

"애인을 굳이 머나먼 이국에 붙잡으면서 나로는 부,"

쪽.

"........부족하지 않느냐는 핑계가,"

쪽.

"곧 애원하고 사정하면서 너 없으면 죽을 것 같으니 제발 내 옆에 있어 달라는 말뜻이 아니고 뭐란,"

쪽. 쪽,

"아오! 감질나게 그만 쪽쪽 거려!!"

왈칵 소리친 옐리세이가 저우룬칭의 멱살을 틀어쥐며 키스하였다. 거친 행동의 여파로 발에 차인 테이블이 잠깐 삐걱거렸다.

저우룬칭이 얼음이 담겨 물기가 밖으로 밴 유리잔을 옐리세이의 뺨에 댔다.

"이제 좀 덜 덥지?"
".......더워. 덥다고."

옐리세이는 다시 툴툴거리며 테이블에 널브러졌다. 덥다, 덥다 불평하면서도 나란히 밀착하여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저우룬칭은 더위를 극복하는 보양식 중 옐리세이가 맛있게 잘 먹을 만한 것이 있을지 고민하였다.





끝. Hidden Track (45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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