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가즘...
(1)
너무도 절실하고 지독한 사랑을 한 사람이 있었다지...
그치만 결코 이루어 질수 없는 운명이었다지...
그런 운명이었는데도....도저히 그 사랑을 멈출수 없었다지....
너무도 간절히 사랑했지만...사랑하는 사람과 결국 이룰수 없었고....
그가 죽을 때 흘린 눈물이....붉은 빛이었대....
그 눈물을 위로하는 술........'레드 티어즈'(red tears).....
붉은.....눈물........
짜증나......
꼭 내 얘기 같아서......좆나게 짜증나.....
이룰수 없는 운명이란걸 알면서도....멈추지 못하는......
좆같은.........그런........
............제기랄.....
지독하게 선명한 붉은 빛깔의 술을 바라보는 주혁의 입술사이로...
한숨과 함께 섞여 새어나오는 희뿌연 담배연기......
비스듬히 앉아있는 그의 자태가.....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하고 있는 사람마냥....
처참한 핏빛향기를 뿜어낸다......
그리고....소리없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
주혁은 돌아보지 않고도....벽에 드리워진 실루엣만으로도....
그림자의 주인공을 알수 있었다..
".....안자고...뭐해....?..."
깊은 늪속에서 끌어올리는 것처럼 무겁고.....
하지만 가슴이 싸아-해질 정도로 감미로운....그의 목소리.....
그 음성이 귓가에 닿아오자....무조건반사적으로 주혁의 촉각이 곤두서며...
온몸으로 곁에 다가온 그의 존재를 감지한다...
그건......어쩔수 없이 나오는 본능적인 반응이다...
".....또...술마시는거야, 혼자....?"
다시 한번....허공에 흩어지는 나즈막한 음성.....
주혁은 결코...그 마법에서 빠져나올수 없다.....
더 이상은 못참겠다는 듯...그를 향하는 주혁의 시선.....
그리고....눈동자 가득 아프도록 급속하게 들어와 박히는 그의 모습에.....
주혁은 순간적으로 실명할 것 같은 위기감마저 느낀다....
......그는......눈을 멀게할 정도로....아름답다.......
"............안혁수......."
주혁은 자기도 모르게....최면에 걸린듯한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르면 부를수록....심장의 통증을 가중시키는....
눈물샘을 자극하는.....희한한 세글자.....
"새벽 3시 넘었어....아직까지 안자고 있었던거야.....?"
대답이 돌아오지도 않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대는 혁수....
.....그 몸짓이....너무..공허하다.....
"자다가 목말라서 물 마시려고 나왔는데.....불 켜져있길래....와본거야...."
손으로 쇄골 근처를 문지르며....어설픈 얘기들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을 보자....
우습게도......주혁은 욕망이 치밀어 오른다.....
그 작은 움직임 조차.....주혁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저어....나 올라갈게.......너도 그만 자라.....피곤할텐데......"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2층의 자기방을 향해 계단을 올라간다..
그런 혁수가 눈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줄곧 혁수를 응시하던 주혁의 시선이...
다시 '레드 티어즈' 로 옮겨가고....
여전히 도드라지게 선명한....붉은 빛깔의 액체를 보자....
이상하게도....주혁의 머릿속에 혁수의 알몸이 연상되었다.
그의 몸을 애무하는 듯한 느낌으로...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모금 들이키는 주혁...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 쌉싸름한 맛이....
혁수의 초콜릿빛 피부를 핥아내릴 때와 흡사했다..
그러나.......술로써 만족되지 않는 주혁의 욕망.....
그 원천지를 향해....주혁은 발걸음을 돌렸다.
한걸음..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진하게 맡아지는 혁수의 향기.....
가까워지는 그의 체취.......그 누구도 소유하지 못한 그만의 살내음.....
주혁의 거친 손아귀가 혁수의 방문 손잡이를 잡아 당기고....
벌컥 열어젖혀지는 문사이로...화들짝 놀라 돌아보는 혁수의 작은 얼굴...
하지만.....주혁이 올줄...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이다...
너도 알고 있지........
내가 너에게로 밖에 올수 없다는 거....너도 다 알고 있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왜...전혀 몰랐다는 듯..놀라하는 거야.....
......그건.....날 더 미치게 할뿐이야......
자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주혁을 보며....울상이 된채 도리질 치는 혁수...
"....아..안돼....주혁아....안돼.....제발....!!"
그러나 혁수의 애원을 철저히 무시하고서....
거칠게 그를 한쪽 벽에다 밀어붙인 후 두 손을 벽에다 짚고...
자신의 팔안에 혁수를 가두는 주혁....
무릎으로 혁수의 허벅지를 꽉 누르며.....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우,주혁아......이러지 마......이러지 말자....우린, 우린 이러면 안돼.....너도 알잖아..응...??"
"......난 그런거 몰라..."
혁수의 얼굴에 닿을 듯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차갑게 대꾸하는 주혁...
하지만....혁수의 입술에 느껴지는 주혁의 숨결은...데일 듯 뜨겁기만 하다....
그 숨결에....또 다시 흐트러지는 혁수의 나약한 이성.....
그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혁수......
두 손으로 주혁의 가슴을 밀어내 보지만.....꼼짝도 하지 않는다.....
".....난.......안혁수....너밖에 몰라......"
이번에는 혁수의 왼쪽 귓가에 부서지는 주혁의 중저음과 향긋한 입김...
그 짜릿한 감각에 혁수는 이미....저항할 힘조차 잃어버렸다...
또 한번......감정에..느낌에...무릎을 꿇는 혁수의 이성....
이래서는 안되는데.......
이건 아닌데......아닌데......
그런 혁수의 마지막 절규를 조롱하는 듯....혁수의 귓볼을 핥는 주혁의 혀...
순간, 혁수는 터져나오려는 신음성을 가까스로 삼키고...
대신 불규칙적인 호흡만을 뱉어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혁수의 갈색 눈동자...떨림을 감추지 못하며 주혁의 얼굴을 바라보고...
제발.....한번만이라도....눈빛이 아닌, 입으로 소리내서 말해 봐.....
솔직하게.....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네가 느끼는 대로.....
눈으로 말고.....입으로 얘기해 봐......
"......날...원하지....? .....내가 이러는 것처럼....사실은 너도....날...원하지....?"
그러나 눈빛과는 다르게....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혁수의 입술은....여전히...잔인하다....
"....아니야....그렇지 않아.....난 널 원하지도 않고....또...원해서도 안돼.......안돼....."
겉보기에는 한없이 예쁘고 유혹적이기만 한 입술이....
그토록 잔인한 말들을 쏟아놓는다....
그 가증스런 모순을 없애버리려는 듯...격노에 찬 주혁의 입술이...
혁수의 분홍빛 입술을 난폭하게 파고든다..
주혁의 잔혹한 공격을 견디다 못한 혁수의 입술이 벌어지고...
섬세한 공간 속으로 비집고 들어간 주혁의 혀가 혁수의 혀를 찾아 휘감았다.
혁수의 뒷통수에 날아드는 아찔함......
한참동안 혁수를 점령하던 주혁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혁수를 두 팔로 안아드는 주혁....
"....안돼!! 제발!! 이러지마...!! ...주혁아, 제발...!!"
절박하게 소리지르며 발버둥 치는 혁수를 너무나 쉽게 제압하고... 무서운 기세로 침대 쪽으로 향한다.
커다란 침대 위에 혁수를 내려놓자마자 바로 위에서 덮쳐누르는 주혁....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로...열망과 분노와 좌절이 뒤섞여 묻어나는 음성으로...
"......제발 뭐...? 네가 원하는 게 대체 뭐야??
넌.....넌......정말 웃겨......... 네가 거부하면 거부할수록...널 갖고싶은 욕망이 더 짙어져.....
왠줄 알아?? 입으로는 '안돼' 라고 도리질 치면서....
네 눈은.....애처로울 정도로 날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야......무슨 말인지 알아, 안혁수??"
"아니야....아니야.....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거야......난...절대 그렇지 않아....."
"호오~~그래?! 이래도???"
얼음처럼 싸늘하게...악마적인 냉소를 지으며 혁수의 옷가지들을 벗겨내기 시작하는 주혁...
혁수의 흰색 면티가 머리 위로 벗겨지고...이내 노출되는 혁수의 매끈한 상반신...
곧이어 혁수의 목덜미에 퍼부어지는 주혁의 키스가....혁수를 쾌락의 늪으로 침전시켰다..
사납게 몸부림치던 혁수의 육체가...주혁의 입맞춤에 서서히 녹아들어가며...
어쩔수 없이....주혁의 손길에 순응한다...
그에 따라 점점 더 부드러워지는 주혁의 키스....
....아래로.....아래로....이어지는 그의 입맞춤.....
"하아.......하아......으음......."
강도를 더해가는 쾌감에 더 참지 못하고...신음을 내지르는 혁수...
그의 몸은 이미....자기것이 아니다......
한손으로 자신이 입고있던 검은색 반팔 T셔츠를 벗어던지는 주혁...
그리고 눈부시게 드러나는 주혁의 상체......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달빛에 반사되어....새하얗게....투명하게...빛나고.....
주혁의 나신을 마주하자...그를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에 부풀어오르는 혁수의 육체...
그런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끼는 동시에 체념하는 혁수...
주혁은 입고있던 옷들을 모두 벗어던지고...혁수의 몸에 걸쳐진 옷들도 전부 벗겨내고...
맥없이 벽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고 있는 혁수의 얼굴을 한손으로 잡아 돌려서 그의 갈색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혁수의 눈 속에서.....주혁이 읽을수 있는건.....
....갈등...두려움....죄의식.......그리고......욕망.......그것뿐.....
주혁이 찾고 있는....그가 애타게 바라고 원하는 그것은.....
....아직...보이질 않았다....
절망감에 몸서리 치며...주혁은 그래도 혁수를 원해 달아오른 자신의 육체를 충족시키기 위하여.....그의 몸안으로 자신을 밀어넣었다..
"......으읏......아아....!!..."
........제기랄.....
이런 비참함 속에서도....그의 신음소리는...달콤하기만 하다...
내 아래에서 꿈틀대는 초콜릿 빛 육체는....그 비참한 감정을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렇게나마....그를 내것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이렇게밖에 그를 가질수 없다는 사실....
그 두가지 사실은...주혁에게 있어...환희와 비탄의 쌍곡선....
"하아......아아....으윽...."
절정을 향해....오르가즘을 향해....더욱 더 거칠어 지는 주혁의 움직임...
모든 것을 망각한 채....오직 자신 안에서 격렬히 운동하는 주혁만을 느끼고 있는 혁수...
주혁이 힘을 가할때마다 혁수의 몸안에 쌓여가는 자극....흥분....
그러다.....주혁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뚝 멈추고...
그 욕망의 결정체가 혁수의 몸안에서 폭발했다..
그와 동시에....긴장하고 탄탄해졌던 혁수의 근육이
....버티다...버티다 못해....한꺼번에 모든 힘을 상실하며....
대신에 혁수의 전신을 강하게 휩싸는 극치의 희열과 쾌감이...
혁수를 최고의 정점으로 데려다 주었다..
혁수의 몸안에서 빠져나오며....주혁은 목구멍 깊숙히까지 차오르는 비애감에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자신을 더없이 초라하게 만들지도 모를 그말을....
입안에서만 되뇌었다....
(2)
##룸싸롱 앞에 검은색 XG가 멈춰섰다.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안에 타고 있던 사내가 내리자...
룸싸롱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약 스무명 가량의 '충의회' 조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룸싸롱 안으로 들어가는 사내...
그가 바로, 현재 서울의 지하조직 중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갖고있는 '충의회'의 보스, 이재준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를 가진 조직의 보스라고 하기엔 너무 앳띤 얼굴...
실상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갓 스물이 되었을 뿐이었다.
전대 회장인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아버지보다 훨씬 더 탁월한 능력과 수완으로 흔들림 없이 지하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충의회'의 우두머리, 이.재.원....
스무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그에게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타고난 카리스마와 힘이 있었고
겉보기에는 무척 마른 몸이 부실해 보이지만... 그 누구도 따라올수 없는, 최고의 주먹을 자랑하는 싸움꾼이었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불꽃처럼 살아 번뜩이는 눈빛을 제외한다면...
여리고 순진한 미소년 그자체이다....
어찌보면 섬약하다고 까지 할수 있을만큼 고운 인상의 미소년....
"회장님, 오셨습니까?! 이리로 모시겠습니다... '일신회' 의 회장님께서는 벌써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재준을 보자마자 그에게로 다가와 굽신거리며 입을 놀리는 룸싸롱의 사장...
"벌써 오셨단 말입니까??"
"예, 오신지 10분쯤 되셨습니다. 이리로 오시죠...제일 좋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사장이 손짓하는 곳으로 따라 들어가자, 화려하고 야한 옷차림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 다니는 호스테스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중에 한명이 재준을 발견하자, 반색을 하며 포르르 달려왔다.
"어머~~회장님!! 너무 오랜만에 오셨다~~~얼굴 잊어버릴 뻔 했어요, 호호...."
교태로운 웃음을 지으며 재준의 팔에 엉겨붙는 여자....
재준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흘깃 내려다 보았다.
언젠가 한두번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는 여자였다.
재준은 형식적인 웃음을 지어보이며, 건조한 말투로 그녀의 인사를 받아넘겼다.
"그래....못본 사이에 예뻐졌다...."
이런 일에 종사하는 모든 여자들에게 의례적으로 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마냥 좋은지 과장되게 소리내어 웃으며 기뻐했다..
"호호호~~~정말?? 회장님도 너무 멋져지셨어요~~~ 회장님~~제가 잘해드릴게, 오늘 밤에 저랑 있어요, 네??
나 오늘 회장님 오신다고 해서 머리도 새로하고, 화장도 신경썼단 말야~~ 정말 화끈하게 해드릴게....오늘 밤엔 나랑 해요, 응??"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재준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찰싹 달라붙는 여자...
그녀의 목표는 재준과의 잠자리 자체보다는, 그와의 섹스 이후에 받게되는 몇장의 수표임이 분명할 터였다.
재준은 그녀에게 피식 비웃음에 가까운 냉소를 날리고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 몇장을 그녀의 가슴 사이에 찔러넣어 주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엉겨붙는 여자를 슬쩍 떼어놓으며...
"미안한데, 오늘은 바빠서 안돼. 그걸로 옷이나 한벌 해입어"
"어머나~~고마워요, 회장님!! 역시 최고라니까!!"
여자는 뜻밖의 수확에 입이 귀까지 찢어지며...
깡총 까치발을 해서 재준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동료들에게 자랑을 하러 다시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재준의 얼굴에 짜증스런 표정이 스치고....
'일신회'의 보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룸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이재준입니다."
"회장님, 저 환성입니다.."
재준의 오른팔격인 환성이었다.
"어 그래, 어떻게 됐니?"
"예, 아들놈이랑 딸이랑 둘다 잡았습니다. 예상대로 강릉의 별장에 있더군요..
의외로 쉽게 찾을수 있었습니다. 지금 둘다 데리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수고 많았다. 내가 지금 '일신회' 회장 만나고 있거든? 어딘지 알겠지?"
"## 룸싸롱 말씀이십니까??"
"어, 맞아...일단 여기로 데리고 와라...와서 다시 전화해..."
"예, 알겠습니다. 지금 곧 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재준은 핸드폰을 접어 다시 안주머니에 넣고는, '일신회'의 회장을 만나기 위해 VIP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호스테스가 노닥거리고 있던 '일신회'의 보스, 김영식은 재준이 등장하자 똑바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반가운 표정을 했다.
"여어~~이회장, 이거 정말 간만에 뵙습니다....허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재준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김영식은 껄걸 웃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하!! 물론 나야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자, 어서 앉으십시오, 어서...."
재준이 자리에 앉고, 여기선 최고로 예쁘다는 호스테스들이 재준의 시중을 들기 위해 그의 양 옆에 자리했다.
김영식은 재준의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조금은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듣자하니, 조금 골치 아픈 일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그거요? 뭐...이제 거의 다 해결 됬으니까요....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준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고...
그가 술잔을 비우자, 오른쪽에 앉아있던 호스테스가 안주를 한점 집어 재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역시....이회장 답습니다....제가 알기로는 '은명회'의 강진혁이 상대였다고 하던데...
'은명회'라면 그래도 경기인천 지역은 꽉 잡고 있는 세력 아닙니까??
만만치 않은 상대였을텐데....어떻게 그렇게 쉽게 마무리를 하셨는지..... 존경스럽습니다....허허....."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더군요....의외로 허점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조직 내에서 분열이 있어서 그런지 맞짱 붙었을 때도 솔직히 무슨 동네깡패들하고 싸우는 기분이었어요....
무슨 배짱으로 우리 애들을 건드린건지 신기할 정도였다니까요....
아마, 강진혁 그놈이 우리 '충의회'를 너무 얕잡아 본 것 같습니다...
제가 또 나이도 어리고 그러니까...지네들 생각으로는 한번 맞짱떠서 우리 파를 접수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뭐....지무덤 지가 판 꼴이죠...."
재준이 섬뜩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고...
듣는 김영식은 그런 그의 모습에 약간은 질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재준은 개의치 않고 단호하면서도 오싹한 어투로 말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보여줄 겁니다. 우리 '충의회'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확실한 본보기로 삼을 겁니다...
안그래도 제 나이게 워낙 어리다 보니...같잖게 생각하시는분들이 계신데.....
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랑말랑한 놈 아니라는거....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야 우리 '충의회'가 정상적으로 사업을 해나갈 수 있겠어요...."
진지한 결의로 매섭게 빛나는 재준의 검은 눈동자.....
그 칼날같은 기운에 쫄아붙은 김영식은 짐짓 태연한 척 술잔만 비워댔고...
재준이 말을 마치자 어색하게 허허 웃음을 날리며...
"거....역시 '충의회' 보스다우십니다....전대 보스께서 아드님 하나는 기똥차게 두셨습니다 그려~~~
야, 너희들 앞으로 이회장님 잘 모셔야 겠다~~~ 이회장님 덕분에 팔자 고칠지 누가 아냐? 허허..."
가식적으로 칭찬을 늘어놓으며, 재준의 술시중을 드는 여자들에게 농담같지도 않은 농담을 해댄다..
얼마동안 재준과 김영식이 소위 '사업'에 관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때...
또다시 재준의 핸드폰이 울리고 재준은 영식에게 양해를 구하며 핸드폰을 받았다.
"네, 이재준입니다.."
"아, 회장님! 저 환성입니다."
"어, 데리고 왔니? 어디야?"
"예, 지금 룸싸롱 입구에 와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들어와서 사장한테 나 어딨는지 물어보고, 내 옆방에 데려다 놔.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얘기 대충 마무리 짓고 금방 갈테니까.."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재준은 핸드폰을 접어 넣으며...공손한 말투로...
그러나 언제나처럼 상대를 주눅들게 하는 위압감을 동반한 채...
영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처리해야 할 문제가 남아서요..."
"아~~'은명회'하고의 일인가 보지요?"
"예....오늘 못다한 얘기는 내일이라도 제가 찾아 뵙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그래요, 그럼....다음에 또 봅시다...."
"예...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재준은 정중하게 영식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술시중을 들던 여자들에게 얼마의 팁을 준 다음,
환성이 데리고 온 강진혁의 아들과 딸을 만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옆방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환성이 벌떡 일어나며 재준에게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오느라 수고했다. 어디, 이리 데려와봐...."
재준은 한쪽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와
여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고, 환성은 그들을 재준 앞으로 가까이 데려왔다.
여자는 거의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와들와들 떨고 있었고..
그 옆의 남자는 그다지 많이 표시가 나진 않았지만 내심 두려워 하는 눈치였다.
잠시동안 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재준....
그들과 키를 맞추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더니...
여자의 긴 머리채를 움켜잡고 당겨 얼굴을 자신쪽으로 향하게 했다.
아픔보다는 공포 때문에 여자의 입에서 '악'하는 비명이 터져나오고...
옆에 있던 남자도 놀라서 고개를 들어 재준과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을 살피던 재준이 냉혹한 조소를 머금으며...
빈정거리는 투로 싸늘하게 내뱉었다..
"뭐....창녀촌에 갖다 팔면....제법 몸값은 하겠군......"
(3)
한바탕 격렬한 섹스를 끝마친 후, 주혁이 자기 방으로 돌아간 뒤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갖가지 상념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혁수였다.
거뭇거뭇해진 눈자위를 더듬더듬 만져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혁수....
아무리 봐도...객관적인 의미의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한쪽만 쌍커풀이 져서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짝눈에, 전혀 날렵하지도..오똑하지도 않은 코와...
약간 튀어나온 두꺼운 입술까지.....
그런데도 왜 그는...그토록...나를 원하는 걸까.....
그는.....그는....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정도로 특별한 미(美)를 지니고 있는 사람인데...
왜 그런 그가....이렇게 보잘 것 없는....지극히 평범하기만 한 나의 육체를... 그토록...원할까......
또 다시 그가 나의 몸을 탐하려 하면....그것에 대해 물어봐야겠다....꼭.....
"혁수도련님, 식사하세요.."
혁수의 상념을 깨뜨리는 가정부의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1층의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나다 내려가는 통로인 계단 앞에서....
역시 아침식사를 들기 위해 밖으로 나오던 주혁과 마주쳤다.
순식간에 둘 사이에 형성되는 서먹서먹한 기류....
혁수는 절대 먼저...주혁의 눈을 보지 않는다....
언제나 시선을 건네는 쪽은....주혁이다....
어김없이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가 혁수에게로 가 박힌다...
고개를 떨군채, 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혁수....
와인빛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무늬를 그리며 드리워져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혁수를 보자마자...몇시간 전에 있었던 그와의 정사가 생각나고...
바로 몇시간 전....어둠속에서 느껴지던 그의 머리칼과 살결과...
가장 비밀스러운 그 부분의 감촉 까지...주혁에게 생생히 되살아 난다...
하지만 어둠이 그 자취를 감춰버린 지금....
밝은 빛으로 가득한 공간속에서 그들은.....
완전히 다른 관계가 되어야 한다...
끝내 주혁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그를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혁수...
주혁 역시 씁쓸한 미소조차 보이지 않는...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혁수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선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식탁 위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들...
제일 상석에 앉아계시는 아버지와, 그 왼쪽에 자리한 어머니...
그리고....늘 앉던 그 자리에....혁수.....
"안녕히 주무셨어요.."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억양없는 말투로 부모님께 아침인사를 드리며...
주혁은 혁수 옆에 앉았다.
"오냐~~너희들 오늘부터 개강이라고 그랬지?"
주혁의 아버지, 인하가 쾌활한 목소리로 혁수와 주혁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좀전에 했던 인사만큼이나 차분한 음성으로 '예...'라고만 대꾸하는 주혁...
그리고 주혁을 대변인으로 내세운 것처럼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밥만 퍼올리는 혁수...
"이제 2학년이구나 우리 혁이랑 혁수도....오늘 후배들은 처음 보는 거겠네?"
"그렇죠....."
여전히 짤막하게 대답하는 주혁과 침묵을 지키고 있는 혁수 때문에 맨숭맨숭한 분위기..
그 속에서 식사를 마친 혁수가 '잘먹었습니다' 라는 멘트와 함께 도망치듯 일어나 자리를 뜨고....
주혁은 아무도 눈치 챌수 없게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혁수는 가방을 열고 지갑이며 노트, 책등을 챙겨넣었다.
차키를 들고 학교를 가기위해 방문을 나서려는 혁수의 눈에, 불현 듯 들어오는 연보라색 시트의 침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새벽에 있었던 주혁과의 정사....
주혁의 몸이 위에서 덮쳐 누를때의 묵직한 느낌....
입안에서 율동하는 그의 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육체가 안으로 들어올 때....
온몸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그 느낌.....
혁수의 손바닥이 저려온다...
욕구를 느낄때마다 나타나는 반응이다..
넓은 방 안에는 혼자뿐인데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그런 반응을 보이는 자신의 몸이 발정기의 수컷의 그것처럼 볼썽 사납게 느껴진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침대를 주시하고 있는 혁수의 귓가에 들려오는 문소리...
들어온 사람은....혁수가 느낀 욕망의 대상....주혁이었다..
괜스레 당황스러워지는 혁수....
그러나 혁수를 바라보는 주혁의 눈동자는....
몇시간 전과는 다르게 잔잔히 가라앉아 있다..
"학교...지금 갈거야...?"
"......어어....1교시에 수업있어....."
"그럼 같이 가자....내차..엔진이 이상해서 어제 카센타에 맡겼거든..."
"그러지 뭐....나가자...나 지금 가야 돼....."
주혁의 눈을 피하며 서둘러 대답하고는 먼저 방을 나서는 혁수...
그리고...약간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혁수의 뒤를 따라 내려가는 주혁...
두 사람을 태운 차가 골목길을 벗어나 도로로 접어들자...
주혁이 그때까지 계속 이어지던 침묵을 깨며..입을 열었다.
".....왜 자꾸....내 눈을 피해....?"
그러나 혁수는 대답없이...운전에만 열중하고 있다..
아니....열중하는 척 한다...
"특히 섹스하고 난 다음날엔...날 무슨 전염병 환자처럼 대하잖아..."
"....그런적 없어...."
부드럽게 얘기하려던 혁수의 마음과는 달리, 쌀쌀맞게 나와지는 대답...
주혁의 얼굴에 더 짙은 그늘이 내려앉고...
듣기 좋은 중저음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둔중하고..늘어지는 듯 하다..
"솔직히 말해봐....나랑 하면서....무슨 생각해....?"
병신아....무슨 생각을 하냐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아무 생각도....
논리적으로 사유할수 있는 인간본연의 절대적 기능을...
네 앞에서만은...모조리 상실해 버려.....
입을 다물고 있는 혁수에게 눈을 돌리며...주혁은 답답해 미치겠다는 얼굴이다..
"왜 대답이 없어? 진짜 심각하게 물어보는 거야...대답해 줘..."
"너랑 하면서....드는 생각은 딱 하나야......이러면 안된다는 거"
애써 냉정을 가장하며...거짓말을 하는 혁수..
제기랄...제기랄.....
위선자....안혁수.....위선자.......
바로 몇시간 전에 그와 함께 쾌락에 몸을 떨었어...
그를 받아들이면서 신음소리를 내질렀어...
내 두 팔로 그의 알몸을 끌어 안았어.....
그래놓고.....그래놓고선......지금은...뭐라고....??
쳇....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건지.....
안혁수.....넌....더러운 위선자야.....
.........역겨워...
자신에게 이루 말할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며...맹렬한 비난을 퍼붓는 혁수...
그런 혁수의 심중을 알턱이 없는 주혁은...공허감에 가득찬 허탈한 음성으로...
힘없이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래...안되지.....안돼......"
우린 안돼....안돼......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언제나 그것 뿐....
단 한번이라도...다른 얘길 한적이 없어....
넌 항상 날 경계하고..차단하고...선을 긋고....
난 항상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너의 차단막을 파괴하고...
네가 그은 선을 넘어서서.....그렇게 해서라도....
너에게 닿으려 발광을 하지.....
그래봤자.....내게 주어지는 건.....
너의 육체를 맛볼수 있는 아주 잠시동안의 시간뿐...
뒤에는 몇배 더 큰 허무함과 고독으로 돌아오는...짧은 순간의 오르가즘....
그것 말고는....없어.......
하지만 난....다른걸 원해.....다른 걸......
가슴속에서 아우성치는 이야기들이 너무 버거워서...
주혁은 차라리 혁수를 외면하고...뇌를 갉아먹는 듯한 쓰디 쓴 상념들을 떨쳐버리기 위해...카스테레오에 CD를 넣고 볼륨을 높였다..
스피커가 찢어질 듯 악을 쓰며 노래하는 락커의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고 싶은 욕구를 대리 만족하는 주혁이었다..
- "주혁아!! 장주혁!!!"
수업을 마치고 조소과 실습실로 향하는 주혁을 누군가 다급하게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과대표인 태현이었다.
특유의 넉살좋은 웃음을 지으며 주혁에게 다가온다..
"여어~~진짜 오랜만이다!! 뭐하느라 방학동안 코빼기도 안 비쳤냐??"
"태현형...잘있었어..?"
"그렇지 뭐~~너 근데 진짜 너무했다. 어떻게 방학동안 연락 한번을 안하냐, 새꺄??"
"미안해....어쩌다 보니 그렇게 됬네...."
"재수없는 새끼...정말 정이 안간다니까....-_-++++ 그건 그렇고, 어디가냐? 수업들으러?"
"아니....수업은 끝났고....실습실에...."
"실습실? 뭐 새로 만드는거 있어?"
"응....시작한 지 얼마 안됬어.....이제 겨우 뼈대만 완성했는데, 뭐.... 근데 나 왜부른거야? 뭐 할말 있던거 아니었어?"
"아, 참!! 중요한걸 얘기해야지...
야, 너 오늘 작업 대충 끝내고 7시까지 '카오스(chaos)'로 나와라...
오늘 개강파티 겸 우리과 새내기들 환영식 있으니까..알았지?"
"글쎄...난 별로....나 그런자리 별로 안 좋아하는거 알잖아...."
주혁이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얘기하자 태현이 무섭게 눈을 부릅뜨며 주혁의 말을 자른다.
"웃기지 마!! 너 저번에 종강파티도 빠지고, MT도 안오구....
인간이 그렇게 살면 못쓴다~~~이번에도 빠지면 넌 우리 조소과에서 최초로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 될거야....
게다가 네가 또 조소과 최고의 킹카 아니냐!! 여자 새내기들이 너 오기만을 목빠지게 기둘리고 있다~~?
너 안오면 나 엄청 욕먹을 거야....그러니까 알아서 해!!
다시는 내 얼굴 보기 싫으면 안와도 돼...그렇게 알아라~~장주혁~~~"
으름장을 놓고 사라지는 태현의 뒷모습을 보며..주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떠들썩한 술자리는 정말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주혁이다..
웃기지도 않은 농담들을 늘어놓으며, 또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허풍을 떨어대는 남자들과....
바비인형처럼 멍청한 미소만을 매달고 내숭을 떨거나, 아니면 짜증스러울 정도로 오버하며 설쳐대는 여자들...
껍데기만 오고가는 대화와 연출된 것처럼 가식적인 웃음....
모든게 다...불편하기만 할 뿐이다.....
"후우~~~씨발....진짜 가기 싫은데....."
실습실 한 구석에 가방을 던져 놓으며 궁시렁 거리는 주혁...
가뜩이나 혁수 때문에 심란하던 상태였는데...
거절하고만 싶은 초청까지 받고나니...더욱 기분이 저조해졌다..
이런 엿같은 기분을 바꾸는데는...작업이 최고다....
주혁은 얼른 에이프런을 두르고, 진흙더미를 반죽하면서...
구상해 놓은 조각의 모형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4)
"뭐....창녀촌에 갖다팔면 제법 몸값은 하겠군..."
각본을 읽어내리는 배우처럼...의미심장한 재준의 말투에 여자와 옆에 있던 남자 모두 사색이 되었다.
재준은 창백하게 질려버린 여자에게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고...써늘한 냉기를 뿜어내며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잔인하면서도 분명하게...환성에게 명령했다.
"내일이라도 당장...적당한 포주한테 이년 넘겨버려.. 얼굴이 꽤 반반하니까 몸값도 두둑이 받을수 있을거야...
어설픈 새끼한테 주지 말고..확실히 다룰줄 아는 놈한테 보내라..."
"아,안돼!!!"
고함을 지른 사람은, 남자였다.
정작 여자는 너무 심하게 충격을 받았는지 소리도 못내고 있었다.
재준은 그제서야 처음으로...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재준의 눈에...야릇한 생기가 돌았다.
호기심과 흥미가 엿보이는 눈빛이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동자로...온몸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며...재준을 쏘아보고 있는 남자...
탄성이 새어나올 정도로 잘생긴, 아니 잘생겼다기 보다는 '예쁜' 얼굴이었다.
누군가가 조각해서 다듬어 놓은 듯 흠잡을데 없는 완벽한 얼굴...
하지만 그런 단순한 미(美)를 뛰어넘어서...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특별한 매력과 분위기가 재준을 사로잡았다.
재준은 빙그레 웃음을 띄우며...천천히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긴장하며 도사리는 그의 몸....
".....안돼...? 네 맘대로....?.."
조롱하듯 삐딱한 어투...그리고 공포심을 한 층 더하는..어투에 실린 위압감...
"우리 누나는....안돼요....병이 있어요...아프다구요..."
좀전보다 한풀 꺾인 기세로...애처롭게 재준을 올려다보며 사정하는 남자..
엉뚱하게도 그의 그런 모습에...재준은 불쑥 그의 몸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시트 속에서 내 몸 밑에 깔려...저런 눈빛으로 날 올려다 보면...
정말....끝내줄 것 같다...
"병이 있어...? 무슨 병인데? 성병이야?"
"그,그게 아니라....심장이 약해요...악성빈혈도 있고..."
"쳇...온실속의 화초처럼 곱게만 자라놓으니까 쓸데없이 그딴 병에나 걸리지...
상관없어. 성병만 아니면 몸파는데 별 지장 없으니까....
환성아, 신경쓰지 말고 얘기한대로 해라..."
재준이 한심해 죽겠다는 얼굴로 말하며 남자의 애원을 외면하자...
남자는 다급한 손길로 재준의 다리를 붙잡으며..숨이 넘어갈 듯 절박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제발!! 우리 누나는 그냥 놔두세요....차라리 저를...!!"
"너를? 하하하!! 네가 창녀촌에 가겠다, 이말이야? 킥...."
가벼운 비웃음을 날리는 재준과는 달리, 남자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간절하기 까지 했다.
"뭐라도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우리 누나만을 건드리지 마세요!! 제가 뭐라도 다 할테니까...."
"그래? 자신있어?"
"예...정말이에요...."
목이 부러져라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는 기회를 놓칠세라 재빠르게 대답했다.
재준은 잠시 무언가 생각해 보더니...의미를 알수 없는, 묘한 웃음을 머금은채 입을 열었다.
"좋아....일단 네 누나는 풀어주겠어....대신, 조건이 있다. 그 조건에 응할 생각이 있나?"
"예! 누나만 풀어준다면...뭐든 하겠습니다...."
역시나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는 남자....
그의 누나는 이미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사리분별력을 잃어버렸다.
초점없이 멍한 눈으로...동생이 하는 양을 내러려 두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환성아, 이 여자 데리고 나가라....아까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고...입단속 잘 시켜서 풀어줘....
뭐, 어차피 하소연할 데도 없어졌으니까... 그래도 엉뚱한 짓거리 안하는지 잘 감시하고...."
"예..알겠습니다.."
환성은 군소리 없이 재준의 명령대로 여자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무언가 잘못 되간다는걸 느꼈는지...몸을 뒤틀며 저항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미미한 몸짓에 불과했다.
환성의 손에 의해 무력하게 끌려나가는 여자...
이제 방안에 남겨진 사람은, 재준과 남자...둘뿐이었다.
불안과 의심, 공포로 얼룩진 눈을 들어, 떨리는 음성으로 재준에게 묻는 남자...
"....우리 누나.....정말 풀어주는거죠...? 거짓말 아니죠...?"
그 모습이 마치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어리숙하다..
재준은 또 한번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누르며...그 욕정을 달래려는 듯 천천히...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뿌연 담배연기 사이로 보여지는 남자의 모습은....더 자극적이다..
"...그건 걱정할 것 없고...그보다, 이름이 뭐야?"
".....강태..라고 하는데요...."
"강태라......쿡...재밌네....."
강태.....
녀석하고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마음에 들어......
상당히..섹시해.....
"조건이 뭔지...궁금하지도 않나?"
여전히 빈정거리며 놀리는 투로 묻는 재준...
그의 질문에...다시 경직되는 강태의 몸....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차마 입을 열지는 못하고...
가만히 앉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건은 간단해....한마디로 얘기하자면....네가 내 종이 되는거야..
난 네 주인이 되는거고.....계약기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내가 너에게 싫증이 나는 그 순간까지. 어때? 이해가지?"
사뭇 즐거운 듯 이야기 하는 재준의 말을 들으며..강태는 절벽 끝으로 추락하는 새처럼 처참함을 맛보았다.
인간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부여받는 '존엄성'을 상실하는 순간이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강태는 힘겹게..입을 열어 재준에게 대답했다.
"..........예....."
그러자 재준의 하얀 얼굴에 번지는 만족스러운 미소....
앞으로 펼쳐지게 될 아주 재미있는 일을 기대하는 소년처럼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재준은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지금 강진혁 아들이 나갈거거든?...걔..우리집에 데려다 놓고 사무실로 다시 와. 처리할 일이 남았으니까....그래, 그렇게 해라..."
냉랭하고 빈틈없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고는, 역시나 반발을 절대 허용치 않는, 무섭고도 낮은 음성으로 강태에게 경고하는 재준...
"혹시라도 도망을 친다거나 그런 허튼짓을 하면...우리 계약은 바로 무산되는 거야..
그리고......계약 전의 방침대로 너희 누나는 미아리 텍사스 촌으로 가게 될거야...잘 기억해 둬....."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강태...
"밖으로 나가 보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거야...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
"....네..."
"....그럼...좀 있다 보자구......나가봐, 어서..."
다시 야릇한 웃음을 지어보이며...턱짓으로 문을 가리키는 재준...
강태는 주춤주춤 얼빵한 걸음걸이로 뒷걸음질 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재준의 말대로 룸싸롱에서 빠져나오자...그에게로 다가오는 한 남자..
강태의 팔을 잡아 끌더니 검은색 XG에 그를 태웠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며...그가 강태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은명회'의 강진혁 아들이냐?"
내키는 대로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있던 강태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기사의 목소리에 퍼뜩 놀라며...
움츠러드는 말투로 웅얼웅얼....'예..' 라고 대꾸했다.
"네 인생도 참...부모 하나 잘못 만나서 개판 됐구나...어이그~~~안됐다...쯧쯧....."
백미러를 통해 강태를 쳐다보며...진짜 불쌍하단 표정으로 혀까지 쯧쯧 차는 운전사..
"너희 아버지가 실수해도 엄청 크게 실수한거야.... 바보같이 '충의회'를 함부로 건드려가지고.....
우리 회장님 나이가 어리다고 '충의회'를 깔본 모양인데....착각한 거지.....뭘 몰라도 한참 몰랐어, 너희 아버지...
우리 회장님이 나이는 어려도...전대 회장님보다 훨씬 뛰어나시고...그나이에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지...정말 대단하다니까...."
쉴새없이 입을 놀려대는 기사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턱이 없는 강태...
그저 창밖의 풍경에만 시선을 주며...자신에게 벌어진,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되새겨 볼 뿐이었다.
"넌 지독하게 재수가 없는거야....안그래도 회장님이 벼르고 계셨거든...
'충의회'를 업신여기는 사람들한테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근데 니네가 딱 걸려든거지....사실 너희 아버지를 죽일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런 생각 때문에 회장님이 훨씬 더 심하게 하신 것 같더라구...
하여튼 정말 무섭다니까....스무살 밖에 안된 분이 어쩜 그렇게...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던 강태도,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스무살.......나와 동갑이라니......
너무 동안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두 설마 했는데....
부모님을 죽이고, 평화롭던 가정을 파괴하고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켜 버린 사람이 자기와 같은 나이라는 사실은...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기보다는...오히려 더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새삼 그가 소유하고 있는 힘의 거대함이 느껴지고....
벗어날 수 없는...놓여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
영원히 이 지옥같은 현실 속에서 갇혀 살아야만 할 것 같은...
그런...두려움에 강태는 절망하고 진저리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왜 이런 일이 생긴걸까......
난.....난....잘못이 없는데......
왜 나에게.....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닥친거지...?
믿을수가 없어.....그냥....그냥 다 꿈같아.....
자고나면 뇌리 속에서 싹 사라져버릴....그런...꿈같아......
아아....제발 꿈이기를......
이 모든게....전부다 지랄맞은 악몽이기를......
.....제발.....
세상이 빙빙 돌아가는 듯한 어지럼증에..감겨진 강태의 눈에서...
끝내는 한 줄기의 눈물이....흘러나와 그의 뺨을 적셨다..
(5)
한참동안 작업에만 푹 빠져있던 주혁이 다시 시계를 봤을 때는 이미 7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난리를 치고 있을 태현의 얼굴이 떠오르자, 주혁은 서둘러 손에 묻은 흙들을 닦아내고 에이프런을 벗어 던진 후, '카오스'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예상 했던대로 태현이 벼르고 별렀다는 듯 주혁에게 잔소리를 한 바가지 퍼붓는다.
"이 웬수, 이 웬수-!! -O-!!! 아주 사람 속을 뒤집어 놔요....
좀 일찍 오면 어디가 덧나냐? 꼬옥~싸가지 없게 몇십분씩 늦어서 사람 곤란하게 만들고 말야....우쒸....-_-++++"
"미안해, 형....작업하다 보니까...."
"아이구~~ 지금이라도 와주신게 어딥니까!! 아주 황송해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자, 장주혁 왕자님~~ 이쪽으로 오셔서 아랫것들에게 인사를 해주셔야죠...-_-"
태현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주혁을 모여있는 아이들에게로 이끌고 갔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모두들 관심어린 눈으로 주혁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 여러분!! 우리 H대학교 조소과의 최고 킹카, 장.우.혁.군께서 왕림하셨습니다-!!"
그러자 박수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나오며..모두 주혁을 반겨 맞았다.
특히 여학생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며...삽시간에 술자리의 중심이 주혁에게로 옮겨간 느낌이었다.
단순히 외모뿐만이 아니라 주혁이 갖고있는 모든 것이...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신비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주혁은...사람들의 시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거북스럽다...
표면적으로는 술자리에 동화된 주혁...
안면이 있는 몇몇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술을 홀짝이고..
노골적으로 호감을 나타내며 질문공세를 펴는...아직은 앳띤 여자 후배들을 건성으로 상대하며,
주혁은 꽤 사람이 많이 들어찬 술집 안을 한번 쫙 훑어보았다.
무료하게 배회하던 주혁의 눈동자가....한 순간....
2층에 벌어진 술판에서 맥주를 들이키는 한 남자에게 붙박혀 버렸다.
혁수였다.
혁수가 속해있는 서양화과도 이 곳에서 개강파티를 하는 모양이었다.
주혁과는 달리 혁수는....의외로 이런 종류의 모임에 썩 잘 어울리는 타입이다..
주혁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유달리 튀어보이지도 않고....
그들과 같은 분위기 속에 쉽게 혼합되는....
저럴때의 혁수는...영락없는 '대학생' 이다.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통학하고, 미팅에 나가서는 맘에 드는 여자와 짝이 되기 위해 요령도 피우고,
캠퍼스에 펼쳐진 잔디밭에 누워 전공서적을 탐독하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대학생' 의 모습....
그런데....정말 신기하지.....
그런 그의 내부에...날 이토록이나 미치게 하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게...
나밖에 모를거야.....안혁수의 진짜 모습.....
사람을 완전히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말고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하는....
엄청난 마력을....나 밖에 모를거야....
아니....나만..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지....
그에 대해...나 혼자 환상에 들떠 있는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내 생각엔....내 생각엔 말이야.....
....난...죽었다 깨어나도.....이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아....
안혁수.......
그 달콤하고 향기로운....초콜릿의 환타지....
맥주를 마셔대는 혁수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우울함이 짙게 배어난다..
옆에서 조잘대는 새내기 여학생에게 의식적으로 지어주는 웃음조차..웃는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슬퍼 보인다..
혁수가 짓는 미소는 아주아주 예쁘긴 해도...빛을 갖지 못해 어둡고..암울하다..
하지만...주혁의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기에는...부족함이 없는 혁수의 미소..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미소는...주혁에게로 절대 향하지 않는다...
어쩌면...많은걸 바라는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혁수가 자신을 향해 작게...작게나마 웃어주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장주혁!! 뭘 그렇게 넋놓고 보구있냐?"
벌써 얼근히 취기가 올라 혀꼬부라진 발음으로 태현이 주혁에게 물었다.
"어?? 저거 혁수 아냐? 쟤네과도 여기서 하나보지?어!! 장주혁, 어디가!!"
아까부터 좀 과하게 술을 들이킨 혁수가 구토증세를 보이며 화장실로 향하자, 주혁이 총알같이 튀어오르더니 혁수를 따라갔다.
화장실로 들어서니, 변기에 대고 토악질을 하는 혁수가 보인다.
주혁은 얼른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며...걱정과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한숨을 내쉰다..
"후우~~ 그러기에 몸도 제대로 안 받으면서 왜그렇게 마셔대...적당히좀 하지..."
위속에 들어차 있던 오물들을 모조리 쏟아놓고...
역하게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위액을 침과 함께 뱉어내는 혁수..
그 작은 얼굴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가지고, 털썩 화장실의 타일 바닥 위에 주저 앉는다..
그러더니 술기운 때문에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힘없이 주혁을 올려다 보며..
흐느끼는 듯한 음성으로 얘기한다..
"......정말......역겨워..죽겠어...."
이런 식으로 거칠게 말한다는 건 그가 많이 취했다는 증거다.
맨 정신으로는 절대로 자신의 속을, 손톱만큼도 드러내지 않는 혁수이기 때문이다.
'취중진담' 이라는 통속적인 속성이 그에게도 내재되어 있는 모양이다.
"....장주혁....나는......내가 너무 싫어....내 자신이..너무...싫..어....."
"너 많이 취했어....그만 집에 가자.."
혁수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딴데로 화제를 돌리며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일으키는 주혁....
남자의 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혁수의 몸이 쉽게 들어올려지고..
맥없이 축 늘어진 혁수를 업고 나가는 주혁....
거나하게 무르익어가고 있는 술자리로 다시 갔다.
"얼레? 혁수 아냐?? 얘 벌써 나가떨어진거냐?"
"어...얘 원래 술 약하잖아.....미안한데, 나 가봐야겠다. 혁수 때문에..."
"쳇...어련하시겠어~~~ 그저 혁수라면....-_-+++몰라!! 네 말대로 해!!!"
혁수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뜨려하는 주혁을 붙잡아 둘 꺼리가 없자 심통이 난 태현은 앙팡지게 한번 쏘아부쳐 주고는 더 이상 뭐라하지 않았다.
그런 태현에게 한번 웃어주고 나서, 과 친구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혁수를 등에 업은 주혁은 바깥에 세워둔 혁수의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혁수의 바지 주머니를 뒤져 차키를 꺼내 문을 열고, 조수석에 혁수를 내려놓고...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거는 주혁..
".....장주혁........."
잠든 줄 알았던 혁수가 갑자기 자기 이름을 부르자 놀란 주혁이 그를 홱 돌아보았다.
거의 반쯤 누운 자세로, 오랫동안 심한 육체노동을 한 것처럼 진이 다 빠져보이는 그의 모습...
그 모습 만큼이나 지치고 피곤에 절은 혁수의 음성이 주혁의 가슴을 더 무겁게 내리누른다..
"....안자고 있었어...?.."
언제나처럼 차분하게..물어오는 주혁...
혁수는 문득, 섹스할 때의 그와 그렇지 않을때의 그의 모습이 너무 판이하다는 생각에....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의미를 알수 없는 혁수의 웃음에 의아하기만 한 주혁...
술에 취했을 때 혁수는, 상당히 거칠고 시니컬해 진다..
평상시에는 그의 부드러움과 신사도에 가려져 있던 야성이...
'알콜' 의 효력을 빌어 잠시동안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 같다..
".....섹스할 때 네가....지금처럼 이렇게 차갑고 그런다면....그래도 난....오르가즘을 느낄까.....?"
역시...많이 취했다...
'섹스', '오르가즘' 등 적나라한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뱉어내는 걸 보면...
"훗....아마 그럴거야......네가 지금처럼 얼음같이 차갑게 날 다룬다고 해도....
그래도 난......네 목에 매달려서 헉헉댈거야......분명히 그럴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자..."
술에 취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토로하는 혁수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허스키하고 끈끈하다..
그래서 계속 듣고 있으면...당장이라도 그를 덮쳐버리고 싶은 욕망에 무척 곤란해지고 만다...
주혁은 아직 이성의 힘이 남아있을 때, 그의 말을 끊어 버리려 했지만..
혁수는 그런 주혁을 무시한 채 입을 다물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아...? 난.....나는....나 안혁수는.....동물이기 때문이야....아주 더러운 동물......
안돼, 안돼 그러면서도....결국은 할거 다하는......그런 추잡한 호모새끼...그게 바로 나야.......
그래서 난....내가 싫어.......
네가 조금만 건드려도 바로 바로 반응하는 내 몸도 싫고...
속으로는 은근히 바라면서 괜히 내숭떠는 내 모습도....너무 혐오스러워....
...토할 것 같아......."
자괴감에 흠뻑 젖어...정말 메스껍다는 표정으로 얘기하는 혁수의 말이 끝나자...집에 도착한 두 사람...
주혁은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며, 애써 담담한 투로 입을 열었다.
"다왔어......그런 꼴로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많이 화내실거야...나 먼저 들어갈테니까 넌 술 좀 깬 다음에 들어 와....알았지?"
그렇게 얘기하고 차에서 내리려는 주혁의 팔을 잡는 혁수..
그의 손길이 닿자...철저하게 단속해 오던 주혁의 본능이...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주혁의 눈동자가...일부러 외면했던 혁수의 얼굴에 머무르고...
탁하게 흐려진 갈색 눈동자로, 술기운 때문에 발그레하게 홍조가 피어오르는 두 볼을 가지고....주혁의 욕망에 불을 당긴다..
"........술을....한번에 말끔히 깰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러더니 대담하게도 주혁의 페니스에 손을 갖다대며...
사악하기 조차 한 눈빛으로 한 마디 내뱉는다..
".....바로 이거.."
상상하지도 못했던 혁수의 행동에 주혁은 입을 딱 벌린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오늘 새벽....두려움에 가득찬 눈빛으로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던 '안혁수'가 맞는지...의심스러웠다..
"....왜...? 하기 싫어....? 맨날 나 먹고 싶어서 안달을 하더니....이제 또 싫어졌냐....?
왜그래.....내가 먼저 하자니까 놀래서 그러는 거야.....?
그럴거 없어.....너 아까부터 참고 있었잖아, 장주혁.....나도 다 알어......나도...다아.....안다구......."
(6)
재준의 집은 2층으로 지어진 80평 남짓한 빌라였다.
아래층에는 거실과 주방, 재준의 침실, 옷방이 있었고..
윗층으로 올라가니 각종 다양한 술이 구비되어 있는 그럴듯한 홈 바와 쓰지않은채 비어있는 10평정도 되어 보이는 방이 하나 있었다.
재준이 오기를 기다리며...주인 없는 넓은 집에 홀로 남겨진 강태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집안을 여기저기 구경하는 중이었다.
너무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와들와들 떨리는 심장의 진동을 견뎌 낼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재준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조바심을 치며 서성거리던 강태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헉'하고 신음을 내지를 만큼 놀랐다.
그러고는 얼마동안 망설이다가...조심스레 손을 뻗어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연이어 들려오는 재준의 목소리....
아까보다는 약간 피곤이 묻어나는 듯 하다..
"왜 이렇게 늦게 받어? 전화 처음 보냐?"
"....아,아니요....그냥....."
"나 지금 차안인데, 30분 안으로 갈테니까 씻고 준비하고 있어..."
"........네에...."
그러고 툭 끊어지는 전화...
도대체 뭘 준비하라는 것인지 영문도 모른채, 강태는 그저 '네'라고만 대답했다.
무슨 소리지....뭘 어쩌라는 거야....?
젠장....알수가 있어야 뭘 하든 말든 할거 아냐......
어쨌든....씻으라고 했으니까.....
강태는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며 재준의 말대로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는데...문소리가 들리며 재준이 들어왔다.
불에 덴 듯 발딱 일어서는 강태...
그런 그에게 슬쩍 눈길을 주더니 말없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는 재준...
강태는 재준을 따라 그의 침실로 향했다.
입고 있던 옷가지들을 하나씩 벗어던지며, 억양없는 건조한 음색으로 지시하는 재준...
"자켓이랑 바지는 옷방에다가 정리해놓고, 와이셔츠랑 양말은 빨래하는데 내놔...."
그렇게 얘기하며 서슴없이 강태 앞에서 옷을 벗는다...
새하얗게 드러나는 그의 알몸에 괜시리 민망해진 강태는 얼른 그가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들고, 재준에게서 물러났다.
그가 지시한대로 이행한 다음, 다시 침실로 돌아오자..재준은 샤워를 하는 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강태는 또 멀뚱히 서서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흰 목욕가운 차림으로, 노랗게 염색한 머리칼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밖으로 나오는 재준...
씻은 직후라 더욱 아기처럼 뽀얀 피부가...아무리 봐도 지하조직의 보스라고 하기엔 너무 가녀린 인상이다..
게다가 양복을 입고 있을때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는데, 목욕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으니...
길고 마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며..여려보이기 까지 했다.
남다른 강태의 시선에 이상함을 느낀 재준이 예의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태에게 질문한다.
"뭘 그렇게 쳐다봐? 멍청히 서가지고...."
"...아,아닙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얼버무리는 강태...
어느새 두 뺨이 사과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어색한 포즈로 서서 바닥에만 눈을 두고 있는 강태의 순진하고 벙벙한 모습에..
잠시 접어 두었던 욕망이 되살아 나는 재준....
느릿한 걸음걸이로 침대에 가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쓰윽 말아올리며 기대감에 들뜬 음성으로..
"자....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무슨 소린지 이해할 턱이 없는 강태의 머릿속이 궁금증으로 가득차고...
재준은 솟구치는 욕정을 지그시 억누르며...
영문을 몰라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강태에게 힘주어 말했다.
"옷 벗어. 속옷까지 전부 다.."
"네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강태의 눈이 커지며 괴기적으로 반문한다..
그러나 재준은 태연자약하게, 오히려 강태를 이해 못하겠다는 투로 다시 입을 연다.
"옷 벗으라구...무슨 말인지 몰라?"
"오,옷을..왜......."
"참내....너 괜히 모르는 척 하는거냐, 아니면 진짜 모르는거냐??"
"무,무슨..말씀을....하시는..건지....."
"너 정말 내가 너한테 뭘 원하는지...몰라?"
양미간을 살짝 찌푸리며..강태를 똑바로 응시하는 재준...
그러나 강태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다.
재준은 빙그레 미소를 띄우며...조금은 흐트러진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 말이야....정말 장난아니게 쌔끈하다.....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여자보다...제일 먹음직하고....섹시해..."
그 말을 듣자....재준이 원하는게 무언지...짐작이 간 강태는 치욕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내가 너하고 계약을 한 이유는 단 하나야....너와의 섹스..
솔직히 내 시중을 들 사람은 굳이 네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널 택한 이유는...........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너한테 맡겨진 주된 임무가 뭔지 말이야....쿡...."
이건....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끔찍했다..
자신이 이런식으로 까지 비참해 질줄은...상상도 못했다..
머릿속이 멍하니 텅 비워지며...어디선가 들려오는 속삭임이 강태로 하여금 모든걸 포기하라고 충고하고 있었다..
넌 끝났어.....네 인생은...이제....완전히 끝난거야......
포기해.....포기해...강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니...눈물은커녕 무감각해져 버린다...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이런 것인지....
극도의 불행과 마주하자...의외로 담담해 지면서....
빨리 체념하게 되는 자신이 강태도 신기했다.
그래....난 이제 이사람의 종이니까......
종은....물건이나 마찬가지야......
이 사람에게 있어 난....소유물에 불과해......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장난감......
난...'이재준'의 장난감인거야.......장난감.....
"뭐해? 벌써 세 번째 얘기하는 거야....옷 벗어...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시 강태를 일깨우는 재준의 목소리...
처참히 유린당할 각오를 하며...강태는 베이지색 스웨터를 머리 위로 벗어냈다.
이어서 천천히....안에 받쳐 입었던 셔츠와, 카키색 면바지를 벗었다.
강태의 동작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재준...
강태가 마지막 남은 팬티를 벗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재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리와서 누워..."
그러자 뻣뻣하게 굳은 강태의 몸이 침대로 와 재준 옆에 눕고..
재준은 걸치고 있던 목욕가운을 벗어 던진 다음, 미동도 하지 않은채 얌전히 누워 있는 강태에게로 눈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씨발....이 새끼 진짜 장난 아니네......사람 미치는 구만....."
재준의 말대로, 강태의 나신은 거의 예술품에 가까웠다.
적당하게 그을은 구릿빛 피부와, 몸전체를 형성하고 있는 신체 곳곳의 곡선들이....기가 막히게 관능적이었다..
윤기 흐르는 도톰한 강태의 입술이....재준을 끌어 당기고....재준은 굶주린 맹수처럼 게걸스럽게 강태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단단하고 탄력있는 그 입술을 깊이 깊이 빨아들이는 재준...
급격히 밀려오는 짜릿한 쾌감에 제 정신을 잃은지 오래였다.
차갑게 식어있던 강태의 몸도...재준의 뜨거운 키스와 애무에 견디지 못하고.....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마음과는 다르게 육체는....재준의 손길을 애타게 갈망하며..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제기랄......구역질 난다......
전신을 휘감아 오는 느낌들을 뿌리치려고 노력해 보지만...그럴수록 재준의 공격은 그 농도를 더해간다..
강태의 입술에서 턱으로..목으로...어깨와 가슴으로...쉴새 없이 이어지는 재준의 키스...
재준의 입술이 강태의 목덜미에 난 작은 돌기들을 잘근잘근 깨물어대자...
끝내는 강태의 입에서 억눌렸던 신음성이 터져나온다..
"...흐...읏......으음....."
강태의 신음성을 즐기며....재준은 입술을 그의 가슴을 미끄러트렸다.
갈색 빛 유두를 살짝 혀로 핥으며...손으로는 귓불을 애무했다.
능숙한 재준의 손놀림에...점점 황홀경으로 빠져들어가는 강태의 육체...
가느다란 허리와 편평한 배를 어루만지던 재준의 손이...
강태의 허리에 걸쳐져 있는 속옷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수치심에 움찔거리는 강태의 몸...
재준은 그런 그의 반응이 귀엽기만 하다...
약간은 악마적인 웃음을 띈 채...재준은 고개를 숙여,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강태의 페니스를 입에 넣었다.
순간, 몸을 뒤틀며 저항을 해보지만....
재준의 두 손이 강태의 허리를 꽉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뼈속까지 스며드는 모멸감에 그만 눈을 감아버리는 강태..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매끄러운 혀와 입술을 이용해 강태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재준...
그리고....그 자극을 견디다 못해...자신의 욕망을 분출해 버리는 강태...
그 순간....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는 그였다...
"......자...이제 내 차례야....."
기다렸다는 듯이 얘기하며...재준은 강태의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려, 자신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리고 가차없이 강태의 몸안으로 자신을 집어넣었다..
"......아아!!....으윽....."
고통과 희열로 얼룩진 강태의 신음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퍼지고...
재준이 피스톤 운동을 시작하자, 강태의 신음성은 절정에 달했다.
처음이라 그런지...쾌감보다는 아픔이 더한 그였다..
하지만 재준은 거기에 조금도 귀기울이지 않고 갈수록 힘차고 노련하게 몸을 움직였다.
".....아아....그만...그만해......아파.......아..파......하아....!!..."
강태는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재준의 어깨를 부둥켜 안았다.
강태가 애원하면 할수록...재준은 더욱 흉포하게 그를 파헤쳤다..
강태의 감은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자신의 몸이 산산이 부서진다고 느낄 때....
재준이 강태 안에서 사정했다..
거대한 파도가 머리 위로 덮쳐온다고 생각되는 순간....
강태는 마침내 기절하고 말았다..
(7)
다 안다고....다 안다.....
웃기지 마.....안혁수 네가 뭘 알아.....
알기는 뭘 아냐고.....
술에 취해서...한번쯤 객기를 부리느라 날 유혹하는 네 모습조차도..
박제해서 고대로 간직하고 싶을만큼 사랑스럽게만 보이는...이런 나를....
.....네가....알기나..해....?
싫다고 도리질 치면서 날 밀어낼 때에도...
지금처럼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찔하게 내게 먼저 손을 내미는 때에도..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간에.....
....나는.....널 너무...갖고싶어....
자신의 절실한 마음을 허투루 보는 듯한 혁수가 야속해서 일까..
주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더니, 혁수의 손을 거두어냈다.
그리고 표정보다 더 냉랭한 음성으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딴식으로 매도하지마....취해도 할말이 있고 안 할말이 있는거야...."
비수를 찔러넣듯 툭 말을 내뱉고 차에서 내려버리는 주혁...
혁수를 돌아보지도 않은채,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주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때까지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혁수가...
몹시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겨우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독한 염산처럼 따갑게...
혁수의 볼을 적시고...
흐느낌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혁수의 음성...
"......그런게 아니야..주혁아......그런게..아니야....."
왜그렇게 몰라....이런식으로 밖에 말할수 없는 나를....
왜그렇게 이해 못하는 거야.....
이렇게 나마 얘기할수 있는것도...'술'의 힘을 빌었기 때문이란거...
너 정말 모르니....?
왜 그런식으로 오해하는 거야....
너의 그 오해가...날 얼마나 절망하게 만드는지....
너야말로 알기나 해.....?
처음으로......정말 처음으로 내가 먼저...널 원하는 마음을 보여줬는데...
그리고 어쩌면.....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데......
나의 진심을 비치는 것.....
처음이자...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 혁수를 내버려두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주혁..
가슴속에 소용돌이 치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거칠게 메고 있던 가방을 집어 던진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한쪽 구석에 처박히는 가방....
그것과 자신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날 정말 그렇게 밖에 보지 않은거야?
내가 오로지 너의 육체만을 원해서 너와 섹스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날 그런 추잡한 색마로 여겼던 거냐구....
그래....네 몸을 원하는 건 사실이야....
네 몸은 잠자고 있던 내 욕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히, 넘치게 매혹적이고 아름다워..
네 육체를 보고.....욕구를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면..거짓말이야....
하지만....그게 너를 향한 내 감정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난....혁수 너한테...정말 서운해.....
한번도...조금이나마 널 미워한적 없지만....
지금은.....네가 밉다.....그것도 아주 많이......
주혁의 가슴속에서 격하게 타오르던 분노가 차츰 가라앉으면서..
서글픈 허전함으로 바뀌어 간다...
더 할수 없이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당한 것처럼....
단지, '안혁수'라는 한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임에도..
온 천지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듯 하다...
하기사....온 천하를 얻는다 한들...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혁수'... 그 하나면...
그 사람 하나 가질수 있다면....
세상 전부를 버려야 한 대도...기꺼이 그리할 주혁인데....
주혁에게 있어 혁수는...
천지만물을 대신하는....또 하나의 우주다....
슬픈 상념에 빠져있던 주혁의 귓가에, 문소리와 함께 가정부의 놀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에그머니~~~ 도련님! 어디서 이렇게 술을 드시고....!!"
취기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혁수가 집으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주혁은 자동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혁수를 부축하며 낑낑대는 가정부가 눈에 들어왔다.
주혁은 얼른 다가가 그녀에게서 혁수를 받아들었다.
"죄송해요, 아줌마.....오늘 개강이라고 술자리가 있었나봐요....
혁수 제가 데려다 놓을 테니까 그만 가서 주무세요....많이 늦었는데...."
"아유~~술도 잘 못하시는 양반이 어쩌자고 그렇게 마셨을까...
사모님이랑 회장님이 잠드셨으니 다행이네....뭐 필요한건 없어요?"
"예, 괜찮아요.....내일 아침에 해장국이나 잘 끓여주세요..."
"그래요, 걱정 말아요....쯧쯧...."
안쓰러운 얼굴로 혀를 차는 가정부에게 인사를 하고는, 혁수를 끌고 그의 방으로 올라가는 주혁...
주혁과 비슷한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독 가볍게 느껴진다..
주혁의 기분 탓일까....
연보라색 시트가 깔린 침대위에 그를 눕히고, 양말과 검정색 가죽 자켓을 벗겨주었다.
그리고 나서, 주혁이 혁수의 검은색 체크남방의 단추를 풀어내려고 그에게로 몸을 수그렸을 때....
혁수의 두 팔이 주혁의 허리를 감아 자신에게로 밀착시켰다..
혁수의 가슴과 주혁의 가슴이 맞닿고...
혁수의 입술이 주혁의 입술 바로 앞에 있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닿을 거리에....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부드러운 유혹이...무방비 상태로 반짝이고 있다..
초인적인 의지로, 최대한의 이성을 발휘해 그 유혹을 뿌리치려하는 주혁에게...
혁수가 아까 전과는 사뭇 다른...애처로이 젖은 눈망울로...속삭인다..
"......주혁아......해줘......"
하지만 주혁은 망설인다..
혁수에 대한 야속함이 남아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단지 그의 몸만을 원하는 줄 아는 혁수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인지...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다..
가만히 있는 주혁의 귓가에...다시 한번 다가오는 혁수의 숨결...
"......섹스....하고 싶어......너랑...."
섹스.....
너와 나를 형제가 아닌 다른 관계로 맺어주는 유일한 매개체...
그래...바로 그거야......
너와 섹스를 하는 이유는....바로 그것 때문이야, 안혁수....
넌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난.....그 이유 때문에.....너의 몸을 갖고 싶어...
약간 벌어진 혁수의 입술이 무척이나 도발적이다..
그 조그마한 틈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주혁의 혀...
그 혀를 매끄럽게 감싸는 혁수의 입술...
시작한 건 주혁인데, 어느새 키스의 주도권이 혁수에게로 넘어간 듯 하다..
어쩌다 한번 느낄수 있는 거지만...혁수는 키스를 잘한다.
미끈미끈한 구강점막을 통해 가장 원색적이고 은밀한 감각을 전달해주는 그의 키스...
한참만에 입술을 떼어낸 혁수가 아직 채워져 있는 남방의 단추들을 다 풀어낸 뒤, 팔을 움직여 그것을 벗어냈다.
그러자 하얀 반팔 T셔츠에 싸인 혁수의 가냘픈 윤곽이 드러난다..
그래도 남자의 몸인지라 제법 골격이 있는 체형이다.
딱 벌어진 어깨나,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목울대 등이 어느정도 남성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느다란 허리와, 섬세한 가슴굴곡이 이루어 내는 모양새는...
여성적이다 못해...심지어는 선정적이기까지 하다..
혁수가 반팔 T를 벗자, 그것들이 완전히 노출되며...
주혁의 자제심을 공중으로 휘발시킨다...
주혁은 다급한 손길로 옷을 벗었고, 혁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알몸이 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미친 듯이 끌어안았다..
그리고....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리듬이 시작됐다..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둘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하모니....
그 완벽한 율동의 경지를 위해...
주혁의 붉은 입술이 고개를 뒤로 젖혀 자극적으로 팽팽히 당겨진 혁수의 목덜미에 파묻혔다.
그 새틴같이 보드라운 살갗의 감촉이 세포 구석구석마다 시리도록 생생하게 스며들고..
주혁의 판판한 등에 감겨진 혁수의 팔은 힘을 줬다 뺐다 하며..
주혁의 세기와 속도를 민감하게 조절해주고 있었다..
단단해진 주혁의 남성이 혁수의 아랫배에 느껴지자...
기어이 혁수의 입술을 열고,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끈적끈적하게 울려나오는 신음소리..
"......아아....혀..혁아....."
성교 시에 혁수는 항상 주혁을 '혁아' 라고 부른다..
희한하게도 혁수의 그런 호칭은 주혁의 욕망을 몇 배 더 증가시킨다.
굉장히....원초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불에 달구어진 석쇠처럼 뜨거운 주혁의 입술이 혁수의 쇄골을 타고 가슴께로 내려온다.
혁수의 손은 주혁의 검은 머리카락을 반복해서 쓰다듬고 있다..
그런 혁수의 손길이 주혁의 욕망의 속도를 한 템포 늦춰주고...
주혁은 한결 부드러워진 움직임으로 혁수의 육체를 연주해 나갔다..
주혁의 손이 혁수의 팔 근육을 간질이듯 어루만지고...
가슴과 배를 거쳐 혁수의 페니스에까지 다다른 주혁의 입술이 그곳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혁수의 마르고 긴 허벅지 안쪽으로 달콤한 입맞춤을 이어나간다..
아래로....아래로.....혁수의 발가락 끝까지 긴 키스를 멈추지 않은 주혁...
혁수의 사랑스러운 알몸을 부지런히 애무하다가....
혁수가 자신의 등에 손톱을 박자..두손으로 그의 작은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주혁의 허리에 다리를 감는 혁수...
눈을 감고...주혁이 몸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주혁을 위해...오직 주혁만을 위해....
개화된 꽃봉오리처럼 활짝 열려있는 혁수의 육체....
그 안으로 자신을 담는 주혁.....
연이어서 터져 나오는 혁수의 신음성...
"....하악.....아앗......아아.....!!"
지금 이순간 만큼은....내 목숨이 끊어진다 해도..
황홀경 속에서 숨을 거둘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넌 나의 형제 안혁수가 아닌....
나를 원하는 한 남자일 뿐이다...
비록....네가 원하는 것이 나의 육체...
그리고 나의 육체를 통한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도...
너와 나를 얽매는 그 저주스러운 '형제'의 끈이..
잠시나마 끊어진 것 만으로도...
난....난....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일시적이지만.....한순간이긴 하지만.....
희열에 들떠 신음하는 혁수를 내려다 보며....
주혁은 움직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행위가 절정으로 치달아 갈 때....
흥분된 숨결을 뱉어내며...혁수가 입을 연다..
"......자..장주혁......"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껄끄러운 음성으로...
고통과 괴로움에 칭칭 휘감겨 쥐어짜는 듯한 소리로....
"......나....난......절대로....너를.....사랑하지 않아......"
심장을 후벼파는 아픔이 명치께를 둔중하게 압박해 오는 것을 느끼며...
주혁은 혁수의 몸 속에...자신의 정액을 쏟아 넣었다...
그리고 목구멍에 쓴물이 차오르는 비참함 속에서 주혁이 몸을 빼자...
잔인하게...정말 지독하게 잔인한 음성으로....혁수가 마지막 말을 뱉었다..
"....이제.....너랑.....끝낼거야.......널......지울거야......깨끗이......"
(8)
허벅지와 가랑이 사이에 보드랍고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강태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생소한 천장의 무늬가 시야를 가득 메워온다.
강태의 몸안에 잔재해 있던 졸음이 순식간에 달아나며...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강태..
그러나 곧이어 척추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그 잘생긴 얼굴을 온통 찌푸리게 만들었다.
허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욱신거리는게...
처음 치뤘던 정사의 후유증이 아침까지 이어지는 듯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침실 안에는 혼자뿐이다.
재준이 먼저 일어났다는 걸 깨닫자, 강태는 놀랍고 걱정스런 마음에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다 자신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는...
붉어진 얼굴로 허둥지둥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입었다.
손으로 대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침실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깔끔하게 외출준비를 끝낸 재준이 식탁 위에 간단한 토스트와 시리얼 등을 갖다놓고 있다..
"죄,죄송합니다...제가 먼저 일어났어야 하는건데..."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는 강태의 목소리에, 재준의 고개가 그 쪽으로 돌려지고..
예의 심드렁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입을 연다.
"일어났군.....어젯밤에 처음 치고는 너무 무리를 했으니까..아마 많이 아플거야, 그렇지?"
"아,아니요....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오는 재준과는 달리, 강태는 못할 말을 하는 사람처럼 어쩔줄을 몰라한다..
그런 강태의 모습에 귀엽다는 듯 가벼운 실소를 흘리며... 다시 말하는 재준..
"어쨌든, 오늘만 봐주는 거야...내일부터는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거 용납 못해.."
"...네......."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까는 강태...
저럴 때 조차도 그가 요염하고 관능적으로 보이는 건...재준만의 착각이라고 해야할까..
다시 강태를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자신에게 기막혀하며...
재준은 일부러 더욱 강압적으로 쌀쌀맞게 말한다..
"빨리 아침먹어...."
권하는게 아니라 숫제 명령조다.
먹기 싫어도 억지로 위장 안에 꾸역꾸역 처넣어야 할 것 같은..
그래서인지 강태는 전혀 입맛이 없음에도, 식탁 의자에 앉아 재준이 차려놓은 음식들을 입으로 가져간다..
슬쩍 곁눈질로 강태의 먹는 모습을 훔쳐보는 재준...
오물오물 거리며 토스트를 씹어삼키는 빨간 입술이 참을수 없을만큼 외설적이고 요사스럽다...
제길...저 새끼는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하는 짓거리마다 전부 색기가 좔좔 넘쳐흐르는 건지..
성격은 전혀 안 그런 놈이....
도통 알 수가 없는 녀석이라 생각하며 재준은 억지스레 강태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옷방으로 들어가 미리 꺼내놓았던 진회색 자켓을 걸쳐입는 재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살펴보며, 옷매무시와 헤어 등을 가다듬고...
강태를 향해 크게 소리지른다..
"거실에 있는 핸드폰 갖고 와!"
투닥투닥 발소리가 나더니 강태가 옷방으로 들어서며 공손하게 두손으로 핸드폰을 건네준다.
받아서 주머니에 찔러넣고는, 강태를 지나쳐 방을 빠져나가며 입을 여는 재준..
"이리 따라와, 오늘부터 네가 있을방을 보여줄테니까..."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가는 재준을 잰 걸음으로 뒤쫓으며 따라가자, 어제 강태도 본적이 있는, 2층의 빈 방이 나왔다.
보통 사이즈의 더블 침대와 회색 목재책상, 옷장이 조금은 썰렁한 느낌을 자아내며 건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강태의 마음에 드는 거라곤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할만큼 커다란 창문 뿐이었다.
"환성이가 며칠 전까지 썼던 방인데, 필요한거 있으면 이 돈으로 사고...네방이니까 네맘대로 꾸며도 좋아.....
뭐....한동안 이 방에서 자는 일은 드물겠지만 말야...킥...."
의미심장하게 마지막 말끝을 흐리며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는 재준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재준의 눈을 피하는 강태..
벌써 몇 번째 이런 광경이 연출되는 지 모르겠지만...
그럴때마다 재준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강태처럼 섹스에 대해 수줍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별로 본적이 없는 탓인가보다..
강태에게 수표 몇 장을 쥐어주고 발을 돌려 다시 1층으로 향하는 재준..
그 뒤로 강아지처럼 줄레줄레 따라 내려오는 강태...
외출하기 위해 대문으로 나가는 재준에게 강태는 조심스럽게, 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저기.....궁금한게 있는데....."
"......??"
입은 굳게 다문 채 무표정한 얼굴로 강태를 내려다보며 눈으로만 묻는 재준..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그 눈빛에 눌려, 또 잠시동안 머뭇머뭇거리던 강태는,
빨리 말하지 않으면 재준이 무시하고 뒤돌아 설 것만 같은 불안감에 못 이겨 어렵사리 다시 입술을 떼었다.
"우리 누나는.....어떻게 된거죠....?"
"너희 누나...? 네가 본 것처럼 풀어 줬어...아직 감시하는 놈을 붙여놓긴 했지만..."
"그럼....집으로 돌아간 건가요...?"
"글쎄...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아직 몰라...오늘 보고받으면 알 수 있으니까 오늘밤에 들어와서 얘기해줄게...
어쨌든, 그 길로 놓아준건 확실해...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될거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재준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운 위로나 따스한 배려 따위는 일절 들어있지 않다..
그런 차가운 재준의 음성에 더욱 강한 불신을 느낀 강태...
자기 처지를 잊어버리고 발끈해서는 가시돋힌 날카로운 목소리롤 따지듯 반문했다.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죠?! 당신이 우리 누나를 정말로 놔줬는지..내가 어떻게 믿냐구요?!
막말로 내 앞에서는 놔주는 척 하면서, 뒷구멍으로는 나 모르게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거 아니에요??"
예쁜 눈동자에 의심과 비난, 살기를 가득 담고서 싸늘하게 재준을 쏘아보는 강태..
그런 강태의 시선을 덤덤하게 맞받아치던 재준의 검은 눈동자가 점점 가늘어지며..
하얀 얼굴이 서서히 쟂빛으로 굳어지더니....눈깜짝할 새에 무서운 힘으로 강태의 뺨을 후려쳤다.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때렸기 때문에 강도가 훨씬 심했다.
소리도 못내고 단번에 바닥으로 나가떨어지는 강태의 몸...
공포와 충격으로 아연해진 얼굴을 들어, 재준을 올려다보자...
재준이 아주 같잖다는 식의 조소를 입가에 매달고 강자만이 누릴수 있는 여유와 자만이 흥건히 묻어나는 음성으로...
"너 아직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네 위치가 어딘지..제대로 알았으면 좋겠어..
넌, 내 종이야...난 네 주인이고....주인과 종은 말 그대로 주종관계야...
난 명령하고, 넌 복종하고....내 말에 무조건 그대로 따르는게 네가 할 일인거야..
내 말에 믿음이 가든 안가든, 설령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너더러 죽으라고 한다 해도, 넌 잔소리 없이 죽어야 하는거라고!!
너한테 요구되는 건, 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완벽한 복종일 뿐이야...
그게 네 자리야.....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면 빨리빨리 자각하는게 좋을거야...
그래야 앞으로 네가 더 편해져...쓸데없이 기운 낭비하지 말고....알았냐...?"
강태는 고개를 끄덕일 힘조차 없다..
....그냥...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뿐.....
온몸으로 패배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강태의 모습에 재준은 또 한번 가학적인 만족감을 느낀다...
동정심이나 죄책감 따위는커녕, 오히려 '강태' 라는 기가 막히게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한 인간을 온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는 기쁨이 충만했다.
재준은 싱글싱글거리며 강태에게로 다가가 그와 키를 맞추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꺾여진 자존심과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감당하지 못해 처참히 떨어진 강태의 고개를 한 손으로 받쳐 올리며...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젯밤엔 정말 끝내줬어..남자랑 하는 건 네가 처음이었는데....정말 최고였어...
여자랑 하는거랑은 비교도 안되던데...?"
강태로서는 기억하기도 싫은 지난밤의 정사에 대해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재준..
그의 조롱하는 듯한 눈빛을 쳐다보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아, 강태는 긴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며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런 강태의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희롱하다가...
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손가락을 살짝 밀어 넣으며...
다른 한손으로는 강태의 쇄골 언저리를 따라 그리는 재준...
"넌 말이지....선천적으로 사람을 홀리게 생겼어.....
넌 잘 모르겠지만...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줄 알아..?
지금까지 네 주위에 있던 사람들....남자건 여자건 내색은 안했겠지만...아마 한번쯤은 다들 널 떠올리며 자위행위를 했을걸?
그정도로 네가 먹음직스럽다~~이말이야....정말 그래....."
재준의 엄지손가락이 강태의 혀를 건드리다가...손가락을 빼내는 대신 자신의 혀를 그의 입안으로 들여보냈다..
촉촉하게 재준의 혀를 감싸는 강태의 입술 감촉이....습기를 가득 머금은 그 입술이....
여자의 질 벽처럼 끈끈하면서도 은밀한 느낌이다..
이대로 강태를 쓰러트리고 그의 몸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불일 듯 치솟았지만...
재준은 최대한의 자제력을 동원 해 그에게서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아쉽지만 지금은 이정도로 해야겠어....이제 나가봐야 되니까....아까 준 돈으로 필요한 거 사고.....참, 이거 받어.."
재준이 강태에게 내민 것은 최신형 모델의 핸드폰이다.
강태는 단박에 그것이 어떤 용도로 쓰여질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종이 된 강태에게 채워지는, 전화기 모양의 족쇄였다.
"꺼놓지 말고 갖고다녀...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알았지?"
".....네...."
"그럼...이따 밤에 보자구.....기대 하도록 해...어제보다 훨씬 오랫동안 즐겁게 해줄테니까...."
(9)
'널....지워버릴거야.....깨끗이....."
정사의 클라이막스에서 중얼거리던 혁수의 마지막 말이 주혁의 귓전에 메아리쳤다..
그 말을 뱉어내곤, 마취주사를 맞은 것처럼 온 몸을 축 늘어뜨리며 잠속으로 빠져들어가던 혁수...
주혁은 그런 말을 한 혁수의 의중이 무엇인지...머리가 새도록 고민하며 그와 얘기를 나눌 기회만을 엿보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며칠 간 혁수와 얼굴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아마도 일부러 혁수가 주혁과의 대면을 피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얘기를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혁수가 귀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주혁...
오늘따라....이토록 혁수 하나에게만 매달리는 자신이 더 없이 우습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런 기분이 드는 날은....꼭 그에게서 상처를 받았다..
오늘도 그 예감이...빗나갈 것 같지는 않은 불길한 생각이 주혁의 사고를 지배하고..
주혁은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시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벌써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이렇게 늦게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건지...원망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봐도 밧데리가 나갔는지 연결이 안된다..
'혹시...작업실에 있을지도 몰라....'
그림에 열중하면 5,6시간은 기분으로 넘기는 혁수이기에,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주혁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점퍼를 집어들고 학교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불이 켜져 있는 창문이 꽤 많이 눈에 띄였다.
미술대학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주혁은 서양화과 작업실로 발을 내딛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려퍼지는 자신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고...
살며시 작업실의 철문을 열어젖히자...주혁의 눈에 보여지는 혁수의 모습..
그리고...혁수 옆에 바싹 붙어 앉아...밝게 미소짓고 있는 한 여자...
혁수와 같은 과로, 청순하고 단아한, 여성스러운 매력 때문에 교내에서 남학생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소빈' 이란 여자아이였다.
긴 생머리에 약간 마른듯한 체구가...혁수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거기서부터....이미 주혁의 불길한 예감은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단 둘이 있다는 건...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일거다..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져 주는게 예의라는 걸 알면서도, 주혁은 밉살맞은 불청객을 자청한다..
일부러 거슬리게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여는 주혁...
이렇게 유치해져 보기도 난생 처음이라는 생각에 쓴웃음 마저 지어진다.
"어,어머...주혁아...."
소빈은 이미 주혁을 알고 있는 듯 하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사이인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주혁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주혁에게는...상냥하고 부드러운 소빈의 음성이 거북스럽고 언짢기만 하다...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 소빈과...
그 옆에 앉아 땡그래진 눈으로 주혁을 응시하는 혁수..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되는 듯 하다..
주혁과 혁수, 그리고 소빈 세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서먹한 분위기가 넓은 작업실을 무겁게 채우고...
침착을 되찾은 혁수의 눈동자는 갈색 빛 심연으로 잔잔히 가라앉아 있다..
역시 조금도 동요함이 없는 차분한 음성으로, 소빈에게 양해를 구하는 혁수..
"....소빈아, 미안한데....나 주혁이랑 할 얘기 있어서....자리 좀 비켜줄래...?"
"....어어....그래....그럼 내일 보자, 갈게...."
"고맙다...잘가...."
엷게 미소지으며 주혁에게 간단히 목례를 해보이고는 얌전한 걸음걸이로 총총히 작업실을 빠져나가는 소빈...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주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철문을 밀어 닫고 혁수에게로 가까이 갔다..
질투심과 혼란, 궁금증으로 뒤범벅이 되어 어지럽게 흔들리는 주혁과는 달리, 혁수는 여전히 냉정하고 범상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그런 혁수의 태도가 더욱 주혁의 화를 부추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주혁은 극도로 격노하면...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평소보다 한층 더 낮고 고요한 음성으로 돌변 해, 상대방을 제압한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안혁수...."
"....내가 뭘....?..."
분노 때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주혁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혁수는 약간 건방진 투로 되물었다.
너무 어이없는 혁수의 반문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심장을...
손마디가 새하얘지도록 꽉 주먹쥐며 가까스로 진정시키는 주혁...
"난 네가 한 말 때문에 몇날 몇일을 밤새면서 고민했는데...넌 여자랑 노닥거리고나 있어?!
대체 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거야, 응?!"
"말 그대로야... 너랑 끝낸다고...."
간단명료하게 딱 잘라 대답하는 혁수...
이렇게 차갑고 무심한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끝내...? 하!! 너랑 나랑 언제 시작이나 했었어?? 도대체 뭘 끝내겠다는 거야?!"
"더 정확하게 얘기해 줄까? 한마디로....너와의 섹스를 끝내겠다는 뜻이야..."
그건....더 이상 주혁과 '형제' 가 아닌 또 다른 관계로 맺어지기 거부하는 발언이었다..
주혁의 불길한 예감은...아주 절묘하게, 완벽하게 들어맞아 가고 있다..
사형선고를 받는 재판정의 피고와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초점을 잃어가는 주혁의 눈동자 속에...혁수의 닮은 '레드 티어즈'의 비애와 슬픔이 일렁인다.....
그 지독하게 간절하고....지독하게 서러운....핏빛 액체....
"너하고의 섹스는.....날....망가지게 해......그것도 아주 저질스럽게...."
저질스럽게....결국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건가...? 저질스럽다.....?
"안된다, 안된다 하면서도...매번 널 받아들이는 내 자신이...얼마나 싫었는지 알아?
밤에는 침대에서 너랑 뒤엉켜가지고 헐떡거려놓고...
아침에는 어머니,아버지 앞에서 태연하게...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정말....지긋지긋해......"
입 속에서 아주 더러운 것들을 토해내듯 주혁만큼이나 낮고,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절제된 음성의 혁수...
주혁은 힘들게 사수하고 있는 '자존심'이라는 방어벽을 모조리 무너뜨리고...
그대로 혁수 앞에 몸을 던지며...제발 더 이상은 말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꼴같지 않은 이성이 그것을 말리고 있다..
겉으로는 혁수와 비슷한 '냉정'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가면 속에 가려진 얼굴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인해 새파랗게 질려있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로....주혁은 마음과는 다르게 단조로운 목소리를 낸다..
"....나랑 섹스하는게.....지겨웠단 말이니....? 이제 지겨우니까....그만하겠다..이거야...?"
"그래, 지겨워!! 지긋지긋해!! 넌 재밌고 즐거울지 몰라도, 난...난...괴로워서 미칠 것 같다구!!
또 다시 네가 유혹해 오면 어떡할까 조바심치는 것도 신물나고, 네 밑에 깔려서 좋아 죽겠다고 몸부림치는 내 모습도 더 이상은 역겨워서 못참겠어!!
사람들 앞에서....티 안낼려고 조심조심 행동하는 것도...이젠 정말 지겨워서 못해 먹겠어!!"
이때까지 계속 지켜왔던 잔잔함과 고요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혁수의 격한 고함소리가 넓은 작업실의 사면 벽에 부딪쳤다가 이리저리 허공을 맴돈다...
혁수는 자신의 진심을, 주혁이 이해해 주기를 기대한다..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봐 주기를....
나의 말이 아닌 눈동자에 담겨있는, 진정한 바램이 무엇인지 눈치 채 주기를...
주혁에게 기대해 본다....
하지만...주혁은 노력할 마음이 없나보다...
아니...노력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 같다...
섹스를 할때에는, 혁수의 눈동자에 서린 갈망과 번민을 그렇게도 속속들이 읽어내던 주혁이....
지금만큼은 눈꺼풀에 검은 차양막이라도 씌워진 건지...
그 독심술의 효력을 상실했다..
혁수는 섹스를 끝내겠다고 했다..
주혁은 지난 1년동안, 혁수를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둘의 관계에 대해 곱씹어 본다..
그를 처음 봤을때...그와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그가 나의 새로운 '형제'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갈등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주혁은 혁수와....형과 동생의 관계로 맺어지고 싶지 않았다..
달라지고 싶었다...다른 방식으로 그와 연결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섹스'였다..
형과 동생사이에는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유일한 금기.....
그것을 통해 주혁은 혁수와 '형제'가 아닌 다른 관계로 위치 지어질 수 있었지만..
그걸로 만족된게 아니었다...그걸로 모든 바램이, 소망이 채워진게 아니었다..
주혁이 원했던....또 혁수가 원했던....'또 다른 관계'의 본질은...
단순히 섹스만을 가지고서는 이루어 낼수 없는....
더 먼곳, 더 높은 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혁의 생각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혁수의 선언을 곰곰이 되새긴다.
'섹스'를 끝내겠다....그것은.......
주혁과 혁수를 이어주던, '또 다른 관계'의 가장 기본적이고 튼튼한 끈을...잘라버리는 이야기다..
결국 주혁에게는...희망과 기쁨과 위안....그 모든 것들의 종말을 뜻하는 것...
말 그대로.....끝이다............
일단은...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의식을 잃어버리고 쓰러지려 하는 몸을...혼신을 다해 추스르는 것만이..
지금 주혁에게 가능한 일이다...
소용돌이 치는 바다의 폭풍우 속에 난파한 돛단배처럼...
방향도, 목적지도 모른채..아무데로나 내몰아쳐지고 있는 주혁의 귓가에...
혁수의 음성이 닿아온다...
잔인하다고 하기엔 너무 달콤하고 감미롭다..
"나....소빈이랑 사겨......아까 보고 짐작 했겠지만...."
"................."
"좋은애야...착하고..귀엽고....또 나 많이 좋아해 주고.....
너도 얼른 소빈이랑 친해졌음 좋겠다...앞으로 자주 마주칠테니까...."
"그앨.....좋아하니....? 진심으로...?"
주혁에게 중요한 건 혁수가 소빈과 사귀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 따위는....아무래도 좋다...
발목을 잡듯이 정곡을 찌르는 주혁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혁수는 이내 차갑게 표정을 굳히며...
그 어느때보다도 단호하고 분명한 말투로, 마지막 틈새까지 철저하게 봉쇄한다..
"내가 소빈이를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그애와 사귀기로 한 이상, 나는 그애 남자야....
그러니까.....이제 내 몸에 손 대지 마....내 몸은 더 이상....네 거가 아니니까....."
(10)
D대학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는 강태의 발걸음이 추라도 매단 듯 무겁다.
개강을 해서 다시 활기를 되찾은 3월의 캠퍼스...
게다가 신입생들의 입학 때문인지 더욱 발랄하고 신선한 분위기이다..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한 무리의 새내기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강태 옆을 스쳐가고...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들 중 하나일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사람일은 모르는 것' 이라는 진부하고 시시껍절한 명제가 강태의 마음에 사무치도록 각인된다..
하긴....원래 통속 자체가 진리가 되는 법이니까....
강태의 얼굴에 비릿한 냉소가 번진다..
이상하게도...재준의 웃음과 많이 닮은 강태의 웃음...
아이러니컬 할 따름이다.
D대학은 중학교 시절부터 강태가 선망하던 학교였다.
특히 공연예술 쪽에 탁월한 교육효과를 보이고 있는 학교였기에...
영화감독을 꿈꾸는 강태에게는 단연 제일 입학하고 싶은 학교였다.
강태가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정하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의 출중한 외모를 보며 배우가 되기를 권했지만..
강태는 그보다 연출 쪽에 더 많은 재능과 열정을 나타냈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한 만큼 노력도 남다른 강태였다.
그 흔한 여자친구 한번 사귀지 않고...강태는 학창 시절 내내 오로지 '영화'에만 심취했다.
공부도, 운동도...영화를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했다.
그 결과...6년동안 그렇게 바라던 D대학 연극영화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고..
강태는 이제 진정한 영화학도이자 예술가로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강태는 지금 입학식도 치루지 못한 채, 휴학계를 내러 가고 있는 중이다..
휴학계를 내지만...과연 이 학교의 학생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그것조차 의문이 든다..
학생복지과에 가서 휴학계를 내고, 의문스럽게 쳐다보는 직원들의 시선을 뒤로하며 나오는 강태...
이런 참담한 기분은 정말...질려버릴 지경이다...
이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환멸스럽다..
그냥...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강태는 생각한다.
그저...남들보다 조금 더한 불행이 닥쳤을 뿐이라고...
나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널리고 깔렸다고..
강태는 그렇게 의식적으로 낙관주의자가 되려한다..
그게...현실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지금의 끔찍한 현실을 선택하게 했던 단 하나의 이유...
하나뿐인 자신의 혈육...
강태는 가까이 서있는 공중전화로 가 집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오늘 아침, 재준에게서 받은 핸드폰이 주머니에 있지만...
왠지 그것은 재준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통신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에 강태는 공중전화를 택한다..
신호가 가고....떨리는 마음이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는 강태..
"여보세요?"
누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영 생소한 목소리도 아니다.
누구일까 머릿속으로 열심히 짚어나가는 강태에게 다시 들려오는 음성..
"강태니?! 나 이모야!!"
아아...강태는 그제서야 이모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강태의 전화를 몹시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가움이 가득 찬 음성이다..
그도 그럴것이, 강태와 그의 누나 연이가 재준에게 붙잡혀서 연이만 무사히 돌아온 후..강태에게서는 일절 연락이 없었던 터였다.
"이모....저에요....."
아직은 눈물을 내비치지 않은 강태...
애써 의연하고 덤덤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 어디 다친데 없니? 괜찮아?? 너 지금 어디있어?!"
"저 잘있어요, 이모.... 누나는 좀 어때요?"
"아휴~~~말도 마라...연이는 네 걱정 때문에 아주 앓아 누웠어...
아무것도 안 먹고...학교도 안 가고...저러다 애 하나 잡는거 아닌지 무서워 죽겠다....
방금까지도 계속 끙끙거리다가 이제야 겨우 한숨 자고 있어....너 정말 괜찮은 거니, 타야??"
"네.....저기, 이모....저 아무래도 당분간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여기, 회장님 밑에서 일하게 됐거든요...그래서 회장님이랑 같이 지내게 됐어요.....그러니까...
누나한테는 걱정하지 말라구 전해주시구요... 이모가 저 대신 누나 좀 잘 돌봐주세요...."
갑작스런 강태의 이야기에 그의 이모는 이것저것 물어오지만...
강태는 눈알이 쓰라리도록 흠뻑 고인 눈물에 온 신경이 쏠려서 그녀의 질문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제발...이 빌어먹을 놈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서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 없기를....
제발...더 이상은 왜소해지지 않기를.....
이모의 질문들엔 대답하지도 않은채, 강태는 황급히 마지막 얘길 하고 전화를 끊는다.
"나중에 제가 또 연락할게요, 이모....안녕히 계세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동시에....강태의 간절한 바램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줄기 차가운 눈물이 그의 뺨에 주르르 자국을 남긴다..
손등으로 그 자국을 닦아내며...강태는 별로 신빙성이 없어보이는 약속을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강태, 자기 자신에게...
마지막이라고.....내게 벌어진 일들 때문에 우는 것은...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시는...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모든 것을...선선히 받아들일 거라고.....
- 재준의 빌라로 돌아와 보니, 예전에 자기가 쓰던 물건들이 죄다 옮겨와 있었다.
강태는 방에 쌓여있는 옷가지와 책, 비디오 테이프 등을 보며...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재준이 지시한 일인 것 같다.
뭐...어쨌든 강태로서는 편해진 셈이다.
아까보다 감정이 많이 가라앉은 강태는 부지런히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가지들은 옷장에 걸어놓고, 책들은 책장에 꽂아넣고, 보물 1호라고 할수 있는 100인치 짜리 스크린과 필름 영사기 캠코더와 비디오 테이프들....
그것들을 보자....잠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예쁜 미소가 강태의 얼굴에 다시 피어오르고...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로 그것들을 하나씩 쓸어본다..
이런 상황에서도...강태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지금의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일종의 청량제처럼 강태에게 다가온다..
역시...강태의 탈출구는 스크린 속의 가상 현실세계 뿐이다..
한참동안 물건들을 정리하고 일을 끝낸 강태가 시계를 보니 어느새 9시가 넘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생각하는데, 덜컹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저벅저벅 재준의 발소리가 이어진다.
화들짝 놀라 부리나케 1층으로 내려가는 강태...
재준과 마주하자, 습관처럼 그의 눈을 피하며 우물우물...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다녀..오셨어요...."
"어....네가 쓰던 물건, 잘 받았지?"
어색해 하는 강태와는 대조적으로 재준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말투로 이야기하며 양복 자켓을 벗는다.
얼른 그에게서 자켓을 받아드는 강태...
"너....영화에 아주 관심이 많던데...?"
"아, 예....."
"필요하면 네 방에 놓을 TV랑 VTR 하나씩 사든지 해..."
배려라기 보다는 동냥에 가까운 어조다...
거지한테 동전 몇 푼 던져주는 듯....
"아, 아니요....괜찮아요...."
재준의 무성의한 말투에 마음이 상한 강태는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재준은 강태의 심중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심드렁하게 '너 좋을대로 해~' 라고 한마디 던진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한다.
재준이 벗어놓은 옷을 들고 침실 밖으로 나가는 강태...
어제 했던 대로 쟈켓과 바지는 옷방의 장롱 속에, 아이보리색 포멀셔츠와 양말, 속옷은 세탁기가 있는 빨래터에 갖다 놓는다.
그리고 다시 침실로 들어와, 재준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어제처럼....
그는 또 분명히 섹스를 요구해 올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강태에게 주어진 '주된' 임무가 그거니까...
불현듯 아침에 재준이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나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색기에 가득 차 있다고...
선천적으로 사람을 홀리게 생겼다고...
예전부터 여자처럼 이쁘게 생겼다는 말은 숱하게 들어 온 강태였지만...
'색스럽다' 라는 말은 재준에게서 처음 듣는 거였다.
한번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본적 없는데...
재준의 안목이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알수 없는 일이다.
강태가 홀로 상념에 빠져있는데 샤워를 마친 재준이 수건 한 장만 허리에 두른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순간, 강태는 머릿속의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듯 움찔하며 얼른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그런 강태를 보고 피식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으로 눈을 돌리는 재준...
재준이 자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음을 확인하자...강태의 두 눈동자가 슬금슬금...도둑고양이처럼 재준의 반라를 훔쳐본다..
넓지는 않지만 섬세하고 고운 선을 이루고 있는 어깨와, 말랐지만 단단하고 균형잡힌 가슴, 강태만큼이나 가늘고 맵시있는 허리..
강태보다 더 작은 엉덩이....
수건에 가려져 있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위로 딱 올라붙은 엉덩이가 상당히 섹시했다.
길고 곧게 뻗은 다리는...대지 위에 탄탄히 지탱하고 서 있는 수컷의 강인함과 당당함을 상징하는 듯 하다..
강태는 처음으로...그의 몸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몸은...강인함과 연약함, 거친 야성과 여린 미성, 난폭함과 부드러움이 혼재하는....야누스의 공간이었다.
극한 대립을 보이는 양면성의 매력이....강태로 하여금 재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주문에 걸린 것처럼 도취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강태에게..약간은 악마적이고 섬찟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는 재준...
"그렇게 뚫어져라 내 벗은 몸을 쳐다보는걸 보니...너두 꽤나 하고싶은 모양이지? ...쿡....
역시 넌....색기가 다분하다니까....겉으로는 얌전한 척 가만있어도....그게 잘 감춰지나......"
이런 식으로 창피를 줄 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아니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며 부정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일테고..
그렇다고 묵과하자니 영락없는 색광으로 몰리게 생겼으니...
결국 강태는 탐스러운 구릿빛 피부를 빨갛게 물들이며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 것으로 무언의 항의를 대신한다..
"너무 안달할 것 없어....이제부터 숨도 못 쉬게 만들어 줄테니까... 기대해도 좋을거야....킥...."
그런 재준의 말에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야릇한 충동을 느끼는 자신이 저주스러운 강태...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강태를 눕히며 그의 양말을 벗기는 재준...
그저 강태의 양말 하나를 벗겼을 뿐인데도 재준의 몸이 급속도로 달구어지며..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시야를 뿌옇게 흐려온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강태의 회색 T셔츠와 청바지를 벗겨내는 재준...
능숙한 그의 손놀림에 조금씩 조금씩 알몸이 되어가는 강태...
그의 몸을 가리고 있던 하나 남은 천조각을 제거해 버리고, 재준은 허리에 둘러져 있는 수건을 풀어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두 사람 다 알몸이 되자...
흐려졌던 재준의 시야가 트이며 강태의 나신이 또렷하게 재준의 눈 속에 들어온다..
"후우....정말....예술인데.....?..."
어제와는 또 다른 감동을 안겨주는 강태의 육체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재준이 중얼거린다..
어느새 재준의 머릿속은 지금 자신의 몸 아래에 펼쳐져 있는 완벽한 미(美)를 철저하게 정복하겠다는 일념 하나로만 가득하다..
재준의 입술이 강태의 목덜미를 급습하고, 재준의 두 손이 그의 가슴과 허리에서 어지럽게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강태는 시체처럼 뻣뻣이 굳어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끈질기게 파고드는 재준의 키스와 애무공격에 여지없이 허물어져 내리는 강태의 몸....
메말라 있던 구릿빛 피부가 촉촉한 윤기를 되찾으며...재준과의 결합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재준은 오른쪽 팔로 강태의 어깨를 부둥켜 안고, 왼쪽 팔로는 그의 허리를 감아 들어 올리며...
잔뜩 가라앉은 허스키 보이스로 단호히 명령했다.
"......다리 벌려......"
까마득히 밀려오는 수치심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며..살며시 강태가 다리를 벌리고...그 안으로 빠르게..강하게 들어서는 재준....
자동적으로 터져나오는 단말마적인 강태의 신음성...
격정적으로 절정을 향해 치달아 가는 두 사람...
그러나,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기 직전, 재준은 엄청난 자제력으로 사정을 참았다. 그리고 강태에게서 몸을 뺐다.
아직도 당겨질 대로 팽팽히 당겨진 강태의 전신 근육...
오르가즘의 문턱을 넘지 못한 강태의 육체가 미친 듯이 타오르며 재준의 페니스를 갈구한다..
이번에는 강태를 돌아 눕혀 엎드리게 하고는...
점 하나 없는 말끔한 등에 무수한 키스마크를 남기며...
재준이 강태의 몸 안에 삽입하려 하는 순간...
난데 없이 들려오는 문 두들기는 소리에..
뜨겁게 달아오르던 두 육체가 칼로 자르듯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야~~~이재준~~~!!! 너 빨리 문 안열어??!! 문 열어, 이재워어어언~~~!!!"
(11)
진흙반죽 더미와 먼지끼인 조각상들에게서 폴폴 풍겨져 나오는 매캐한 냄새...
노오란 전등 불빛 하나만 밝혀져 있는 조소과 작업실...
어찌보면 피폐하고 황량한 느낌을 주는 그 공간속에서..
손에는 조각용 나이프를 쥐고, 입술은 한일자로 꾹 다문채 앞에 있는 흙덩어리를 닳아 없어져라 노려보는 주혁...
그의 검푸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광이 차가운 푸른빛을 발산한다..
그건 절망이고 상처이고 또...상실감이었다..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의....고통...
눈 앞에 하루종일 붙어다니던 혁수와 소빈의 영상이 느리게 재생된다.
학교식당에서 마주보고 앉아 함께 식사를 하던 그들, 따뜻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함께 자판기 커피를 마시던 그들..
팔짱을 끼고 봄햇살을 내리쬐며 산책을 하던 그들..
트렌디 드라마 속의 잘 어울리는 청춘남녀처럼..어느 누가 봐도 빙그레 미소를 띄울만큼 자연스러웠던 혁수와 소빈..
화가난다. 혼란스럽다. 혁수가 밉다. 소빈이란 그 여자가 더 밉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장 미운 사람은...
바로 주혁 자신이다.
마음 같아서는...누가 자기를 흠씬 두들겨 주었으면 좋겠다..
소빈의 곁에 앉아있는 혁수를 보면서...주혁의 머릿속에는 갖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혁수한테로 다가가서 손목을 낚아채 끌고 와버릴까?
그리고 넌 내꺼니까 어느 누구한테도 줄 수 없다고 고래고래 악이라도 써볼까?
그럼 혁수는 아주 신랄하게 비웃겠지...
아니면, 나도 혁수처럼 아무 여자하고나 사귀어 버릴까?
그리고 혁수가 하는 것처럼 그 여자와 다정한 모습으로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볼까?
그러면...혁수가 아주 조금이나마..질투를 할까?
쳇...뭘 기대하는 거냐, 장주혁...병신같은 놈...
이제는 혁수때문에 안달복달 하며 요모조모 머리를 굴려대느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래서 일부러 작업에 몰두하면서...의식적으로 잊으려 노력해 보지만..
전혀 효과가 없다..
제길...제길...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녀석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씨발...
결국 주혁은 손에 들고있는 나이프를 거칠게 내던지고 입고 있던 에이프런을 벗어 탁 소리나게 책상 위에다 팽개친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옆에 놓인 등받이 없는 간이의자를 발로 걷어차버리는 주혁..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내며 코당탕 넘어지는 의자를 차가운 눈길로 응시하던 주혁이 별안간 몸을 홱 돌려 가방을 집어들었다.
작업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생각들은...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주혁은 작업실을 나와 과실로 향했다.
- "웬일이냐, 장주혁?! 네가 나이트에 다 가자 그러고??"
"그러게~~희한하네...오늘 뭔일 있었냐?"
의외라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주혁에게 모으며, 입을 놀려대는 태현과 또 다른 두명의 친구들...
주혁은 다만 형식적인 웃음만을 지어보이며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춤을 추면.....잠시동안은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저 들리는 음악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잡념들을 떨쳐버리면...순간적이나마 자유를 맛 볼수 있다..
그게 주혁이 춤을 추는 이유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혁은 춤을 좋아한다..
주혁의 학교인 H대학 자체가 워낙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대학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주변에는 유흥업소가 즐비했다.
번화가로 들어서자, 앞다투어 주혁과 친구들에게 들러붙는 삐끼들...
귀찮다는 손짓으로 그들을 쳐내며, 주혁은 몇 번 가본적이 있는 나이트 클럽으로 태현과 친구들을 안내했다.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래지며 감탄사를 터뜨리는 태현..
"우와~~장주혁 너 완전 쑥맥인줄 알았더니, 언제 이렇게 좋은데를 알아놨냐?? 여기 진짜 분위기 짱인데??
오우~~장주혁~~다시 봤어~~~!! ^^"
다른 친구 두명도 놀라워 하는 얼굴이다.
웨이터 한 명이 네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하고, 주혁은 맥주와 양주, 과일 안주등을 주문했다.
"야아~~~주혁이 네가 쏘는거야??"
기대감에 가득 차서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어오는 태현에게, 주혁이 짧게 대꾸한다..
"내가 오자고 그랬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가--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기가 사겠다는데 뭐 어떠랴..
태현과 나머지 두 사람은 그거 좋다고 호들갑을 떨어댄다..
잠시 후,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오고, 어느정도 술이 들어가는 분위기에서 태현이 스테이지에 나가자고 일어섰다.
세 사람에게 먼저 나가라고 손짓을 해 보인후, 담배를 피워 무는 주혁...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며..어지럽게 돌아가는 사이키 조명을 향해 희뿌연 담배연기를 뱉어낸다..
허공중에 흩어지는 알싸한 담배연기...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하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그렇다고 나쁜 기분도 아니다..
그냥...약간 센티멘탈 해진다고 해야하나?
센티멘탈....
자신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주혁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감성적'인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착각하고 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이미지 전부가 그의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는 아주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정하지 않지만...장주혁은 '감성적'인 남자다..
그런데 주혁이 자신의 '감성'을 인정하는 부분이 딱 한가지 있다.
'안혁수'라는 이름 석자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주혁은 아예 이성과 냉정을 결핍한...감정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혁수가 떠오르자...다시 가슴속이 답답해 진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울분 같은 것이 용솟음 친다..
주혁은 단숨에 양주 한잔을 들이키고 비틀비틀...스테이지로 향한다..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안혁수를 향한, 주체할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조명 아래에 서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모든 신경을 쏟아붓는다.
서서히...머릿속이 백지처럼 비워져 가고...
몸이 움직인다...
주혁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따라가는 것 뿐이다..
음악 속의 리듬과 비트에 따라 주혁의 관절이 꺾이고..
근육이 수축하고..그것들이 '춤'이라는 환상적인 형태로 재탄생한다..
주혁은 무아의 경지에서 자신의 내부에 들끓고 있는 감정과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표출할 따름이다..
이미 클럽 안에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혁의 춤에 압도당했다.
몇몇은 연신 탄성을 지르고, 몇몇은 혀를 내두르며 주혁을 주시한다..
같이 온 태현과 친구들도 홀린 듯 주혁의 춤에 매료되어 있다..
지금 춤을 추는 주혁의 모습은...여태껏 그들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너무나 극단적이고 격렬하다...그리고 뜨겁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위태로운지...음악이 끝나지 않고 조금만 더 이어졌더라면 주혁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태현과 친구들의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주고는 먼저 자리로 돌아와 앉는 주혁..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의 이목은 그에게로 쏠려있다.
하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 주혁...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방금 전 무대에서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너무나 차갑고 기계적인 주혁의 태도에
사람들도 금새 흥미를 잃고는 다시 제각각 노는데에 열심이다..
"우와와~~~주혁아!! 너 원래 이렇게 춤 잘 췄냐?! 장난 아니던데!!"
"와아~~장주혁 이제 보니까 순 내숭이잖아?? 그동안 어떻게 숨겼냐? 신기하다~~신기해~~~!!"
세 사람이 주혁에게 칭찬세례를 퍼붓고 있는데,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부킹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어~~저쪽 테이블에서 합석하자고 하시는데...어떠세요? 다들 퀸카들이에요...한번 보세요, 얼마나 쌔끈한지..저쪽입니다, 저쪽..."
웨이터의 손이 가리키는 쪽으로 따라가보니, 그의 말대로 제법 예쁘고 세련된 차림의 여자 넷이 앉아있다.
주혁을 제외한 나머지 세사람은 주혁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채, 수선을 피우며 웨이터의 부킹 제의를 받아들였고...
주혁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너무 좋아하는 세 사람 때문에 가만있었다.
신이 난 웨이터가 쪼르르 달려가 여자들을 더 넓은 자리로 먼저 이동시켰고,
잠시 후 주혁과 태현을 포함한 네명의 남자들은 그녀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넉살 좋은 태현이 먼저 나서서 호탕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하하하~~~가까이서 뵈니까 정말 미인들이십니다!!
어험~ 저희는 H대 조소과 학생들이구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윽고, 한명씩 자기 소개를 하고..술잔이 돌고..웃음이 몇번 터지고..
그렇게 무르익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오직 주혁만은...
입을 굳게 다문채, 묵묵히 술만 마셔댔다..
영락없는 외부인의 태도...
절대 동화되지 못하는 주혁 특유의 바리케이트...
이런 종류의 술자리도....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중 하나지...
주혁은 입가에 보일듯 말듯 쓴웃음을 한번 짓고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당황해하며 붙잡는 태현의 손길을 떼어놓으며..대충 인사를 하고 클럽에서 빠져나왔다.
카드로 술값을 계산하고, 출구 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는 주혁의 팔에 누군가가 팔짱을 꼈다.
내려다보니 좀 전에 합석했던 네 명의 여자 중 하나였다.
밝은데서 보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 진한 화장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꽤 화려하고 섹시하게 생긴 얼굴이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바라보기만 하는 주혁의 냉랭한 눈빛에도, 여자는 오히려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하이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때문에 부킹한건데 벌써 가면 어떡해~~내가 오빠 들어올 때부터 찜했단 말이야~~"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반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그녀의 무례함에 주혁이 불쾌한 듯 양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예민해져 있던 주혁의 심리상태인지라 평소보다 더욱 차갑고 불친절하게 여자를 대하는 주혁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주혁의 반응에 더 끌리는지...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한층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내 이름 기억 못하지? 나, 이세라야...나이는 오빠보다 한 살 어리구..학교는 안 다녀. 이정도면 됐지?"
여전히 무반응의 주혁...
잠시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그냥 무시하려는 듯 그녀에게서 팔을 빼내고 계단을 터벅터벅 오르기 시작한다..
예상 외로 세게 나오는 주혁을 마주하자, 멈칫하는 세라..
잰 걸음으로 주혁의 뒤를 쫓아가서 다시 그에게 매달린다.
"오빠 이렇게 틱틱거리니까 진짜 멋있다~~ 얼굴도 열나 잘생기고, 춤도 예술이고~~술값내는거 보니까 돈도 많은가 보네?
히야~~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혼자서 주절주절거리는 세라에게 눈길도 조지 않은채 앞만 보고 걷는 주혁...
세라도 더 이상은 참기가 힘들었던지 버럭 역정을 내며 한손으로 주혁의 점퍼 자락을 잡아당긴다..
"아이~~쒸!! 사람 말좀 고만 씹어!! 오빠 벙어리야? 왜 말을 안해?!!"
그러자 주혁의 얼굴에 짜증이 스치며...건조하고 오만한 말투로 침 뱉듯이 한마디 던진다..
"......꺼져..."
그리고는 찬 바람이 쌩 불도록 몸을 홱 돌려 골목길로 들어가 버리는 주혁...
그의 황당한 한 마디에 벙쪄 있던 세라는 그래도 끈질기게 또 다시 주혁을 따라갔다.
계속해서 자신을 쫓는 세라를 보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혁은 결국 그녀를 상대해 주었다.
"대체 왜 이래? 바라는게 뭐야??"
"별거 아니야.....섹스..오빠랑 자고 싶어..그게 다야..."
여유있는 미소까지 머금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세라...
주혁의 눈에 경멸의 빛이 역력히 서리며,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비아냥 거렸다.
"쳇...지랄하고 있네...요새 기집애들은 쪽도 없나..아무한테나 뻑하면 몸대주고....어이그..."
흉칙하게 생긴 괴물을 산채로 잡아 구경하는 듯한 눈초리로 세라를 훑어보며 빈정거리는 주혁...
그런데....세라의 어깨너머로 보여지는...
...혁수....그 옆의 소빈....
혁수의 동그란 눈동자가 의구심에 잠겨 주혁과 세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주혁의 모습에 놀란 듯 했다.
순간, 주혁은 치졸한 배신감을 느낀다..
안혁수...네가 왜 그런 표정을 짓지..?
날 버린건 네가 아니었던가..?
넌 다른 여자와 사귀면서...난 여전히 바보처럼 너한테 매달려 있기를 바란거야 뭐야...
안혁수...네가 원하는게 도대체 뭐야....
네가 진짜로 워하는게...뭐냐구.....
주혁의 가슴속에 욱 하고 애증의 불길이 치솟는다.
자신이 상처 입은만큼, 혁수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 정도로...혁수가 미웠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좋아, 이세라...오늘밤에 한번 즐겨보자..."
혁수에게까지 들리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얘기하고는..
주혁은 세라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싼 채, 가까이에 있는 모텔로 들어갔다.
바로 혁수가 보는 앞에서.....
(12)
"야!! 이재준~~!! 너 빨리 문 안열어?! 문 열어, 이재준~~!!!"
태현의 목소리였다.
재준과 유일하게 허물없이 마음을 터놓는 사이...
'충의회' 보스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댈 수 있는 단 한 사람...
무언가 또 떠벌이고 싶은 얘깃거리가 생긴 모양이다..
저렇게 발까지 동동 구르며 빨리 문 열라고 빽빽대는 걸 보면..
완벽하리만치 정확한 태현의 타이밍에 재준은 기가 차서 웃음이 다 나왔다.
한편 강태는 재준과의 섹스에 푹 빠져있던 자신을 깨닫고는..
혼자만의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얼굴을 붉히며 몸을 추스렸다.
또 다시 신경질적으로 울려오는 초인종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태현의 음성..
"이재준!! 이 새끼가 죽었나?! 빨리 문 열라니까~~!!"
재준은 알몸위에 목욕가운 하나만 걸치고 현관을 향해 걸어나갔다.
침대 위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시트로 몸을 가린 채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강태..
대문을 열어젖히니, 아니나다를까 불쑥 집안으로 들어서는 태현..
마치 자기 집인 양 거리낌 없이 신발을 벗고 거실로 향한다.
"이 미친놈아, 귓구멍이 막혔냐?! 얼마나 초인종을 눌렀는줄 알어?? 우이쒸~~!! -_-++++"
다짜고짜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던 태현은 가운 하나만 걸친 재준의 차림새를 보자,
격했던 어조가 한 옥타브 낮아지며...표정이 장난스럽게 돌변한다.
그 커다란 눈동자를 귀엽게 데굴데굴 굴리며..
능청스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담으며..
"에이~~이재준....딱 걸렸어~~ 너, 여자랑 그짓하고 있었지??"
"쳇...여자가 아니라 남자랑 하고 있었다..."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쇼파로 가서 앉는 재준..
습관대로 한 쪽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담배를 한 대 피워문다.
그러면서 심드렁하게 태현의 물음에 답한다.
"뭐어~~??!"
생각과는 다른 재준의 대답에 눈이 화등잔 만해진 태현...
곧 재준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커다란 눈이 가늘어지며..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찬다.
"미친새끼...이젠 여자도 모자라서 남자까지 손대냐? 쯧쯧....드디어 돌았구만....에~~이, 잡스러운 새끼...-_-;;"
"나 잡스러운 거 이제 알았냐...근데 이 시간에 또 웬일이야?"
가볍게 태현의 말을 받아넘기며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재준..
그러자 태현은 또 금새 얼굴이 환해지며 들뜬 음성으로 나불나불 입을 놀려대기 시작한다.
"아아~~왜 오긴, 내가 이 시간에 음악 아니면 뭣하러 오겠어~~"
"뭐 또 새로 만든거 있어?"
"응,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서 3일밤 꼬박 새면서 만들었다!
야야, 얼른 옷 좀 제대로 입고 나와서 들어봐 줘...이번엔 진짜 술술 잘 써지는게 대박인거 같애..."
대중음악, 그 중에서도 미디음악을 전공하는 태현은 음악을 만들면 언제나 가장 먼저 재준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은 재준에게 음악을 판별할 수 있는 남다른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음악 공부를 그다지 깊게 하지 못했음에도, 재준은 천부적으로 재능이 있는 것인지...음악적인 감각이 탁월했다.
재준이 듣고서 좋다고 하는 음악은 늘 전문가들에게 뛰어난 점수와 평가를 받았던지라...
자연히 태현은 음악을 만들기만 하면 1순위로 재준이 감상하게끔 했다.
"알았어..옷 입고 나올테니까 서재에 가서 플레이 준비하고 있어.."
"그래, 빨리 와..."
한번 더 다짐을 해두고는, 부리나케 디스켓을 들고 재준의 서재로 뛰어가는 태현...
재준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는,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강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수가 없어서 그대로 벌거 벗은채 멀뚱히 앉아 재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재준의 기척이 나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 강태...
"친구랑 뭐 좀 할 일이 있으니까 먼저 자..여기 불편하면 네 방가서 자도 돼..."
가운을 벗어 걸어놓고, 옷가지들을 챙겨 입으며 건조한 말투로 강태에게 이야기하는 재준..
청바지에 헐렁한 흰색 티셔츠를 입은 캐주얼한 차림으로 변신한 그는 거울을 보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몇번 가다듬더니 침대에 앉아있는 강태에게로 가까이 왔다.
그리고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강태의 쇄골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특유의 놀리는 듯 재는 듯 대담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연다..
"오늘은 정말 너 한번 죽여줄려 그랬는데...쿡...너무 결정적인 순간에 스톱해버려서 좀 미안한걸?
뭐...정 못참겠으면 여기서 기다려도 돼....친구랑 얘기 끝내고 와서 해줄게...."
치욕으로 인해 삽시간에 새빨개지는 강태의 얼굴...
미세하게 떨리는 턱뼈가 그의 참담함을 대변하는 듯 하다..
그런 강태의 심적 고통을 즐기기라도 하듯...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서재를 향해 발걸음을 돌리는 재준이었다.
-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서도, 오랜만에 만난 재준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새벽까지 담소를 나누었던 태현...
양쪽 관자놀이에 미미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워낙 술이 약한 태현이라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도 숙취가 심했다.
알알하게 쓰려오는 속을 달래려 손으로 배를 문지르며...
옆에서 자고있는 재준을 한번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오는 태현...
텁텁하게 차오르는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들어서는데...태현의 눈동자에 비친 한 사람...
늘씬하게 빠진 키에..어딘지 여려보이는 몸매...
검은색 머리칼과 조화를 이루는 구릿빛 피부에...
조각상 같은 옆 얼굴....
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나직이 탄성을 내질렀다.
"오 마이 갓......"
나른한 아침의 정적을 깨는 태현의 목소리에 강태가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정면으로 마주한 강태의 얼굴을 몇만 배 더 아름다웠다.
아름답다....
흔한 표현이지만 태현의 어휘능력으로는 그 이상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완벽했다....그리고....아주 특별했다...
방금 전 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과 속쓰림을 씻은 듯이 잊어버린채..
태현의 눈을 오로지 강태에게만 붙박혀 있었다.
몸속 깊은 곳까지 꿰뚫고 들어오는 듯한 태현의 시선에 잠시 머쓱해진 강태...
멋적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보인다.
그 작은 웃음에...다시 한번 파문이 이는 태현의 가슴...
이미 재준에게 얘기를 들어 강태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있는 태현이었다.
어젯밤 얘기를 들을때만 해도 재준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사업에 관해서 만큼은 철저히 자신의 주관과 판단대로 밀고 나가는 재준이었기에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재준의 새로운 섹스 파트너- 즉, 정부가 된 '남자'에게 잠깐동안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품고는 금방 지워버렸던 태현이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기에...그게 당연했다...
'신이시여....제발 도와주십시오.....'
헤어나올 수 없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빨려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며...
태현은 별 효험이 없어 보이는 기도를 중얼거렸다.
아아...일단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런 생각은 나중에, 혼자 골머리 싸매도 되는거니까....
일단은 얘기를 해보는거야...대화를.....
태현은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키며...침착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강태를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되도록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무진장 노력하는 태현...
어떻게 보면 상당히 바보스러운 태현의 함박웃음에 강태가 다시 작게 미소짓고...
그의 반응에 용기가 난 태현은 좀 더 진도를 나가보았다.
"하하...잘 잤어요...? ^^;;"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멍청한 말투였다.
분위기도 어색하기만 했다.
평소의 붙임성은 다 어디로 도망을 가버린 건지...
정작 필요할때는 발휘되지 않는 자신의 장점에 대고 속으로 욕설을 퍼붓고 있는 태현의 귓가에...
살포시 닿아오는 강태의 목소리...
"예에...안녕히 주무셨어요..."
약간 비음이 섞인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낮고 굵직하진 않았지만...음성 밑바닥에 스며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과 고독이 더욱 더 그를 신비스러워 보이게 했다.
동시에 그만큼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태현의 인사에 짧게 응대를 할뿐...아무 말 없이 식사준비를 하는 모습도...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한층 강화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태현은 무참히 씹힐 각오까지 단단히 하고서...일부러 과장되게 명랑하고 밝은 음색으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강태씨죠? 어제 재준이한테 들었어요. 그저께부터 재준이랑 같이 지낸다면서요? 하하~~
강태씨도 참 성격이 좋으신 분인가봐요~~재준 같은 놈이랑 같이 살 생각을 다 하시고...하하하~~!! ^^;;;
재준이랑 저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에요.. 아, 참!! 내 소개를 안했구나!
어~~저는 문/희/준이라고 하구요~~H대 실용음악과 2학년이에요~
어제도 재준이한테 새로 만든곡 들려주려고 온거거든요...재준이가 저래뵈도 음악적인 감각이 수준급이에요~~의외죠? 하하하...^^;;
그래서 전 곡 만들때마다 제일 먼저 재준이한테 들려줘요.. 쟤가 좋다고 하면 다드 ㄹ...."
"드세요, 갈증 나실텐데..."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태현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그에게 이온음료를 내미는 강태...
태현의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얼굴이다.
태현은 차가운 강태의 태도에 시무룩해져서는 입을 다물며 강태로부터 이온음료가 담긴 컵을 받아들었다.
그런 태현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준비에만 열중하는 강태..
두 사람 사이의 유쾌하지 않은 침묵을 깬건...재준이었다.
"형...언제 일어났어? 일어났음 나 좀 깨우지....지 혼자 홀랑 나가냐?"
어느새 세수까지 깨끗이 마친 재준이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강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강태의 인사를 받아주는 재준...
두 사람이 연출해 내는 광경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는 태현의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졌다..
싸구려 삼류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법한 스토리가...
지금 자신에게 생생한 현실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13)
"쟤...주혁이 맞지...?"
세라와 함께 모텔 안으로 사라지는 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있는 혁수에게 소빈이 조심스레 물어온다..
"어...그런 것 같다...."
난처해하며 대답을 얼버무리는 혁수...
여자와 모텔로 들어가는 주혁의 모습에 괜스레 혁수가 민망해 진다..
그리고...민망함보다 더 크고 무겁게 혁수의 마음 한 켠을 짓누르는 옹졸한 감정...
힐책받아 마땅한...너무나 이기적이고 조잡한 생각...
"혁수야, 무슨 생각해? 안가??"
부정하고 싶은 생각들로부터 혁수를 일깨우는 소빈의 목소리...
혁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옆에 서 있는 소빈을 내려다 본다..
커다란 눈동자로 의아하다는 듯 혁수를 올려다보고 있는 소빈의 하얀 얼굴이 아무런 사심 없이 맑다고 느껴지자, 혁수는 죄책감이 들었다.
안혁수...방금 전에 네가 했던 생각은...정말 유치하고 치졸해...
다시는...그런 생각 하면 안돼.....
지금 네 옆에 있는 여자...너한테 과분한 사람이야...
이 여자한테 상처 줄 만큼...너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다....
혁수는 위와 같은 말들로 자신을 나무라며....세뇌시킨다..
다시 돌아가려 하는 마음을 꽁꽁 가두어 두고...
자꾸만 달아나려 하는 결심과 이성을 더 단단히 붙들어 맨다..
소빈을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자신의 포카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혁수는 주혁의 영상을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그냥...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싶었다..
자신이 소빈과 사귀는 것처럼 주혁 역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는게 당연하다..
그 여자가 어떻든 간에, 주혁의 선택일 뿐이고..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든, 안 하든 주혁이 알아서 책임지고 판단할 문제이다..
그렇게 간단하다....혁수가 고민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고민하는게 이상한 노릇이다..
그렇다.....정말 그렇다......
그런데도....그 여자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그녀와 키스를 하고, 또 그녀와 몸을 섞는 주혁을 상상하자...
혁수는 기분이 급하강한다..
정말 더러운, 최악의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의 붉은 입술..하얀 살결...그의 육체를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말할수 없이 불쾌하다...
그리고 이런 불쾌감을 느끼는 자기 자신이 아주 역겹다.
제 3의 타인이 지금 자신의 심리상태와 모든 정황을 알고 있다면...
자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지독한 비난을 서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실제로 누군가 그래주기라도 한다면...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죄책감에서는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겠건만...
혁수에게는 그 만큼의 자비도 베풀어지지 않나보다...
그저 모든 것을 혼자서만 삭여야 한다.
소외감이나 고립감이라고 하기엔 이 쓰디 쓴 고통이 너무 엄청나다...
뭐라고 하소연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이 엿같은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그것조차도 감이 안 잡힌다..
"혁수야...왜 그렇게 말이 없어...? 무슨 생각하길래...."
차를 달리는 내내, 자기만의 상념 속에 빠져 침묵을 지키는 혁수가 이상하다는 듯, 조금은 걱정스런 말투로 소빈이 질문을 던진다.
"어..? 아, 아니야....별거 아니니까 신경쓸 거 없어...미안....."
소빈을 안심시키려고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정스레 대꾸하는 혁수...
학교와 가까운 곳에 사는 소빈이었기에, 어느새 포카리는 그녀의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잘 들어가고....내일 학교에서 보자.....집에 가서 전화할게...."
예의 친근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혁수가 작별인사를 하자..
소빈이 안전벨트를 불고는 무언가 할 말을 망설이며..입술을 달싹인다.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수줍어하는 소빈의 모습에 혁수가 궁금하다는 듯 재촉했다.
"왜....? 무슨 할 얘기 있어....?"
"어어....저어...새삼스럽게 얘기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음....."
여전히 쑥스러워 하며 우물쭈물거리는 소빈...
청초하고 고운 자태가 한 눈에 보기에도 무척 소담스럽다..
한동안 또 뜸을 들이더니 소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혁수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입을 열었다.
".....있잖아......나..말이지.....혁수 너....정말...좋아해.....정말 많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훨씬 더 멋있는 남자인거 같구...우리....정말 오래오래 사귀었으면 좋겠어.....
나...너한테 많이 부족하지만....그래도 열심히 노력할거야....너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되도록......"
어렵사리 고백을 끝내고 부끄러운 듯 살짝 눈을 내리까는 소빈...
혁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예상치 못했던 소빈의 이야기에 약간은 당황스럽고...많이 미안한 혁수...
그랬다.....
소빈의 고백을 듣고서 혁수가 느낀 감정은.....
'미안함'.....그리고....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다가오는 '부담스러움'....
할수 없이 혁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소빈에게 따뜻하게 웃어주며...
고작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선사할 뿐이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어설프게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 소빈을 지켜보는 혁수의 표정이....까만 밤하늘을 닮아 있었다...
아니, 혁수의 얼굴은...밤하늘의 희미한 달빛이나 별빛조차도 없는...
어두컴컴한 암흑...그 자체였다....
- 모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솜씨로 문을 걸어 잠그는 세라...
메고 있던 핸드백을 구석에다 던져놓더니, 화장실로 향하며 주혁에게 말한다..
"잠깐만 기다려...금방 나올게.."
그녀가 눈 앞에서 사라지고...주혁은 눈동자를 굴려 방 안의 풍경을 둘러 보았다.
약간 색이 바랜 벽지...침대 머리맡 바로 위의 벽지에는 여러개의 껌자국들이 나있었다.
아마도 정사 도중, 남자의 혀를 받아들이기 위해..먼저 입속의 껌을 제거해야 했던 여자들이 손 닿기 쉬운 지점일 것이다..
솜이불이 개켜져 있는 침대에는 흰 시트가 깔려 있었다.
저 시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액과 땀이 배어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주혁은 갑자기 이 모텔방 안의 모든 사물들이 더없이 불결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화장실 안에 들어가 있는 여자까지도 말이다..
혁수 때문에 욱 해서 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절실히 후회하는 주혁이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고 세라가 다시 주혁의 시야에 나타났다.
어이없게도 까만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었다.
터질 듯이 풍만한 유방이 흔들리고...손바닥 만한 팬티에 가려져 있는 엉덩이는 빵빵하게 살집이 올라 있었다.
세라는 자신의 몸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당당한 걸음걸이로 주혁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한껏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며...간드러진 목소리로 그를 유혹한다..
"오빠....나, 꽤 괜찮지?....침대 위에서는 더 잘할 자신 있어...."
허둥지둥 그녀를 침대로 끌고 갈 것이라 기대했던 세라의 생각을 무참히 깨뜨리며..
멸시와 조롱에 찬 주혁의 낮은 음성이 날카롭게 세라의 귓전을 후벼판다..
"쳇....아주 쇼를 하고 있네.....항상 이런식으로 남잘 꼬시나 보지...?
얼굴에 떡칠은 해가지고....가슴에다가 실리콘만 빵빵하게 집어넣는다고 섹시해 보일줄 아냐?
어휴~~아서라, 아서....너같은 걸레하고 뒹굴면서 내 몸 더럽힐 생각 절대 없으니까...."
세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고, 주혁은 잠시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서둘러 모텔 방안에서 빠져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는 주혁의 귀에, 악에받친 세라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악!!! 뭐 저런 씨발놈이 다 있어!!! 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하냐, 이 개새끼야!!!"
그래...네 말이 맞다....나라고 뭐 얼마나 깨끗한 놈이겠냐...
너나 나나....다 그렇고 그런 잡종이지....
하지만 그래도....나나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지금껏 오직 한 사람.....그 사람 하고만 육체를 나눴어...
그가 아닌 다른 누구도...취한 적이 없어....
심지어 생각조차 해본적 없어......맹세코....
안혁수....그가 존재하는 한.....나의 욕망은 절대로...
그 아닌 다른 곳을 향하지 않아......
- 자기 방의 책상에 앉아 세잔느의 화첩을 들여다 보는 혁수...
눈으로는 그림과 그 옆에 붙은 해설들을 쫓고 있지만...
머릿속은 온통 주혁과 소빈에 대한 생각 뿐이다..
그런 혁수의 귓가에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쿵쿵 울려왔다.
주혁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혁수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약하게 술냄새를 풍기며 자기 방으로 걸어가는 주혁의 뒷모습이...
매우 지쳐보였다...
혁수는 망설이다가 주혁의 손이 문고리에 닿는 순간, 황급히 입을 연다.
"....장주혁....."
혁수의 부름에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는 주혁...
흐릿한 눈동자가 짙은 허무와 상실감으로 채색되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의 눈빛이 저럴까....
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수는 잔혹하게, 비인간적이라고 느껴질만큼 냉정하게...주혁을 향해 말한다..
"행동 좀 조심하고 다녀....아까전에도 소빈이 앞에서 얼마나 무안했는지 알아?
그러다 안 좋은 소문 나돌면 너만 손해야....학교 근처에서는 그러지 마라, 애들 눈도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사람을 절망의 수렁 속에 빠트릴 수 있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잔인해 질 수도 있는가....
주혁은 전쟁터에서 총알세례를 받은 것처럼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기분이다.
뚫린 구멍으로 몸 속의 피와 물과 모든 세포의 조직액이 몽땅 쏟아져 나오는...
그래서 결국에는 말라 비틀어져 죽게 될 것 같은...
그런 위기감이 엄습해 온다....
그 두려움들을 혁수보다 더 두껍고 차가운 적의로 탈바꿈 시켜..
주혁은 잔뜩 비꼬는 말투로 내뱉는다..
"걱정할 거 없어....나 원래 소문따위 신경 안쓰는 놈인거...네가 더 잘 알잖아..?
그리고 난, 누구처럼 순진한 척 내숭떠는 기집애는 딱 질색이라서...
난 화끈하게 발랑 까진 년이 좋아....뭐...어차피 다 자기 취향이 있는거잖아...?"
"소빈이에 대해서 그딴 식으로 얘기하지 마....네가 데리고 다니는 그런 여자들이랑은 질적으로 틀리니까...."
"호오~~그래? 아주 좋겠어~~ 고상하고 우아한 여자랑 사귀게 돼서...
그래애~~넌 그 성모마리아 같은 여자랑 잘 해봐...내가 어떤 여자랑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말고...."
상/관/하/지/말/고....상관하지 마.....
주혁의 마지막 말이 혁수의 귓가에 메아리치고...
돌처럼 뻣뻣이 굳어버린 혁수에게 끝까지 냉소어린 시선을 던지고는...
방으로 들어가 보리는 주혁....
그러나....방문을 닫자마자 쓰러지다시피 바닥에 주저앉은 주혁의 눈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 참아왔던 눈물이...폭포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14)
"난데, 10분내로 갈테니까 목욕물 받아놓고 있어.."
언제나 그렇듯 지시사항만 간략히 통보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재준...
강태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욕실로 가 물의 온도를 맞추기 시작한다.
재준의 키가 큰 탓에 욕조의 크기도 보통보다 훨씬 큰 사이즈다..
찬물과 더운물의 스위치를 조절해가며 적당한 온도를 설정해 놓고..
강태가 욕실 밖으로 나오자, 정확하게 재준이 초인종을 눌렀다.
얼른 달려가 자물쇠를 여는 강태...
"오셨어요.."
"어..물 받아놨어?"
"예...옷 주세요..."
이제는 제법 익숙한 동작으로 재준의 겉옷을 받아드는 강태...
재준과 비교해서 그리 작은 키도 아니건만, 그의 앞에 선 강태가 유난히 작아보이는 건...아마도 '주종'으로 위치지어진 그들의 관계 때문이리라..
재준이 벗어놓은 옷들을 정리해 놓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자...재준은 어느새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한 뼘 정도 열려진 욕실 문 틈 사이로 재준의 벗은 몸이 보이고...
강태는 문 밖에서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런 강태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재준의 무뚝뚝한 음성이 문 틈으로 새어나온다..
"이리 들어와..."
주저하면서 욕실 안으로 들어서는 강태...
눈을 내리깔면서 재준의 알몸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벗고 있는 사람은 재준인데, 왜 강태가 부끄러워 하며 움츠러 드는지 모를 일이다..
"저기 장식장 위에 있는 거품비누 가지고 와서 뿌려...저 초록색 병 말야..."
재준이 가리킨대로 강태는 선반에 놓인 초록색 유리병을 가져다 욕조 안에 뿌렸다.
향수를 쓰지 않아도 늘 재준의 몸에서 상쾌한 향기가 났던 이유가 바로 이 비누 때문인가 보다..
재준이 몇 번 손으로 물을 저으니, 하얀 거품이 뭉게구름처럼 둥실둥실 물 위로 솟아오른다..
민망해진 시선을 하릴없이 비누 거품에만 고정시키고 있던 강태의 귀에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강태는 구세주라도 만난 양, 내심 반가워하며 거실에 있는 전화기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어어~~강태구나??"
생경하지만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음성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세요....?"
"에~~이, 섭섭하게...그새 내 목소리 까먹은거야? 나 태현형이야..."
아아....태현....
강태의 머릿속에 며칠 전 처음 만났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100m전방에서도 확 튈 것 같은 초록색 머리칼과 또르륵 굴러 떨어질 듯한 느낌을 주던 암갈색 커다란 눈동자만이 인상에 남아있다.
"아~~예...근데 지금 회장님 목욕중이시거든요...나중에 다시 전화 주시면..."
"아,아니야~~재준이랑 통화하려고 전화한게 아니라...너하고 얘기하려고..."
수화기를 붙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내젓고 있는 태현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그만큼 태현의 말투나 음성이 생생하고 사실적인 탓일게다..
"....저랑...요...?...왜..요....?"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되묻는 강태..
마치 알고 지낸지 오래된 사이처럼 자신을 대하는 태현이 미심쩍기만 하다..
"왜긴~~네 목소리 듣고 싶으니까....보고 싶기두 하구~~"
단 한 자락도 꾸미지 않은 담백한 태현의 음성...
지나치게 밝고 들떠있긴 했지만 과장되었다는 느낌은 아니다..
강태는 조금 얼떨떨해 져서는 이사람이 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할까..
부지런히 사고회로를 돌릴 뿐이다..
"어~~사실은...내가 어제 디게디게 좋은 노래를 하나 들었거든.. 너, 신인그룹 Fly to the sky라고 알아? 남자애들 둘이 듀엣인데.."
"아..아니요...잘 모르는데...."
"그래? 아무튼 걔네 노랜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R&B야...제목은 'Day by day'고...이 노래는 알어?"
"아니요....."
강태의 표정이 점점 더 떨떠름해 진다..
난데없이 노래 얘기는 왜 꺼내는 거지...?
시들한 강태의 반응에도 태현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모르는구나~~으음...내가 이 노래, 너한테 불러주려고 오늘 하루종일 연습했거든?
진짜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중간에 혹시 삑사리 나더라도 웃지말고 끝까지 잘 들어줘야 돼~~~ 알았지??"
갈수록 태산이군......노래를 부르겠다고...?
다짜고짜 전화해서는 노래를 하겠다니...꽤나 황당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면서도 강태는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태현은 헛기침을 몇 번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곧이어 강태의 귀에 은은하고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닿아왔다..
그리고 수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오는...태현의 청아한 음성...
희미한 떨림을 동반한......
"오늘 하루 어땠나요..괜찮았나요...어제는 너무 늦어서 전화할 수 없었죠...
괜시리 수화길 들었다 또 놨다 그렇게 밤을....지새웠어요...조금 우습죠....
당신 하루 생활이 난 궁금했어요....잠잘땐 나처럼 배게를 끌어 안고 자는지...
가끔은 잠에서 깨보면 TV만 외로이 홀로....켜져 있는지..별거 아닌데.....
나는 궁금했어요....당신이 좋아 지는 거겠죠...
그런데 난....그말을 하기가....oh baby...왜 힘이 든건지...아님 용기가 없어서 자꾸만 피하는 지.......
사랑해요...아니 모자라지요...내 안의 사랑 보여줄 수 있는 날....
기다려요....아주 천천히 많이...꺼내 들고서..앞에 서있을 그날.....
손을 뻗어 당신께 난 갔어요....꿈인줄 알았지만 멈출수는 없었지요...
내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을....도저히 멈출수가 없어요....난...
당신께 솔직히 내 맘을 털어놔요......."
태현의 노래가 끝났을때.....우습게도 강태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자신을 향한 태현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깨달아서가 아니라...
그저....태현의 목소리에서 배어나는 소중함과 따스함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냥...위로를 받고 있다는 위안감....누군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었다는.....
또 재준과의 굴욕적인 주종관계가 아닌, 인격적이고 대등한 관계로 대우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상대가 누구이던 간에....
강태는 그가 고마웠고...매우 깊은 친밀감을 느꼈다..
"헤에~~~나 노래 잘하지....? ^^;;;;"
바보스러우면서도 귀여운 태현의 발언에 강태는 맥이 탁 풀리며..그만 쿡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보통은 쑥스러워 하면서 노래실력이 부족하다고 겸손을 떨거나, 수줍어 하는게 정상인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 '나 노래 잘 하지' 라니.....
평범한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괴짜중에 괴짜임이 틀림 없다..
"왜? 나 노래 못해?? -_-;;"
강태의 웃음소리를 듣자, 태현이 또 천연덕스럽게 물어온다..
참...낯짝도 두껍다는 생각이 든다...
"아, 아니요...정말 잘하시네요...."
"냐하하~~~연습한 보람이 있군~~~기쁘다~~~^^*"
어랜애처럼 좋아하는 태현...해맑게 웃는 모습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런데...살풋이 미소를 머금는 강태의 귓가에 날아드는 재준의 음성...
태현과의 통화에 빠져, 재준의 존재를 잠시 망각한 강태였다..
"저기요, 지금 회장님이 부르셔서 가봐야 되거든요..그럼 안녕히 계세요..."
"어, 그럼 저...."
태현의 말을 듣지도 않고서 황급히 수화기를 내려놓는 강태..
긴장된 얼굴로 재빠르게 욕실로 뛰어간다..
재준의 앞에 서자마자 잔뜩 쫄아 붙어서는 궁색한 사과를 늘어놓는다..
"죄..죄송합니다...통화가 길어져서...금방 끊고 왔어야 하는건데...."
"누가 전화한 건데?"
"아, 저어......문태현 씨가....."
"태현형이? 너 태현형이랑 지금까지 계속 얘기한거야?"
"저어.....예에....."
"무슨 얘길 했는데? 나 모르는 새에 둘이 벌써 그렇게 가까워 졌나?"
"그게 아니라......."
왜 이렇게 초라한 행색으로 변명하려 드는 것일까....
설령 내가 진짜 태현이란 사람과 가까워 졌다고 해도, 그게 잘못인가?
왜 나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마냥 고개도 들지 못하고 이 사람 앞에서 오그라들고 낮아지는 것일까.....
어느새 난...'노예'와 다름없는 나의 새로운 신분에...적응이 된 것일까....
하긴...어쩌면 그게 더 편할지도 모르지....
언젠가 지금 내 앞에 누워있는 나의 '주인'이 말했던 것처럼...
내 위치가 어딘지...확실히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거...빠를수록 좋겠지....
방금 전 태현이 불러주었던 노래의 멜로디는....벌써 강태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편안하고 예쁜 기억을 담아두기엔...아직 강태의 마음은 혼란스러웠고...여유가 없었다...
자아의 주체성과 고유성을 상실한 강태에게....태현이 들려주는 음악 선율은...
헛된 꿈, 지나가는 순간적인 허상에 불과했다..
그저...온몸에 부딪쳐 오는 칼날같은 현실만이....인생의 전부였다..
쓸쓸하고 허탈한 웃음을 머금는 강태에게 단조로운 어투로 명령하는 재준..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 꺼내서 가져오고....1시간 뒤에 다시 이리로 와..."
"네...."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행하는 컴퓨터처럼...재준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강태...
그에게 시원한 버드와이저를 갖다주고, 2층에 있는 자기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문득 벽에 걸린 전신거울에 눈길이 닿자, 강태는 주의 깊게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응시한다..
그러더니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나체로 거울 앞에 섰다..
실험결과를 관찰하는 과학자 같은 눈빛으로 자신의 나신을 들여다보며..
생각의 우물로 빠져든다...
내가 그에게 선택받을 수 있었던 건.....
그럼으로써 우리 누나를 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나의 이 육체 덕분이었다...
여자도 아닌 남자의 몸으로...그의 섹스파트너가 될 만큼...
내 육체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큰 매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
강태....수치스러워 하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이것저것 재면서 고민한다는 건.....지금 너에게 있어...사치일 뿐이야....
넌...그렇게 깔끔 떨면서 몸 사릴만한 입장이 못된다구....알아들어?!
그래...이용하겠어.....
날 지배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맞설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무기를..
이대로 썩힐 수만은 없지......
이용할거야......
내 몸....내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섹스.....모든 걸 총동원해서....
나도 그로부터....조금이나마 뺏어 올 거야....
섹스를 통해 짓밟히고 정복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섹스를 통해 일면으로나마 그와 동등해지고, 나 자신을 찾고 싶어.....
그렇게라도 난.......살아 남고 싶어.......끝까지...........
(15)
"오늘 여기까지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교양필수 과목인 서양 미술사 강의가 끝나자,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미대생들...
그 중에 주혁과 혁수도 끼여있다..
맨 뒷자리에 앉았던 주혁은 가방을 둘러메며 중간쯤에 앉아 노트와 필기도구 등을 집어 넣고 있는 혁수에게 눈길을 준다..
단정하게 빗겨진 와인빛 단발머리가 오후의 기울어져 가는 햇살에 반사되는 모습이...어쩐지 처연하게 느껴진다..
우습다....
정말 비참한 꼬라지를 하고 있는게 누군데...
어째서 네 뒷 모습이 이렇게 서글퍼 보이는 거냐, 안혁수...
인간 장주혁....난생 처음 다른 사람 때문에 울어봤다..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장주혁이..
어젯 밤...울었다.....
새벽녘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
왜 그렇게 울었냐고 누군가 묻는 다면..정확히 꼬집어 대답할 순 없지만..
그냥......너무 아팠다......
다른 여자를 감싸고 도는 그의 행동이 하도 낯설어서...
아무런 감정 없이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혁수의 눈동자가 꼭 예리한 칼 같아서.....
그래서......가슴이 아팠다.....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울기라도 하지 않으면....그 자리에서 팍 고꾸라져 숨이 넘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울다 울다....말라버린 눈물샘에서 더 이상 이슬방울을 생산해 내지 못하자..
눈알을 뽑아 내는 듯한 통증 속에서 주혁은 다짐을 했다..
그를....되찾고 말겠다고.....
어떤 식으로든 다시 그를 내 곁에 두겠다고......
그는 끝내겠다고 했지만....주혁은 결코 끝낼 수 없었다...
예전에 주혁이 했던 말처럼.....혁수와 자신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작도 하지 않은 관계를 끝내겠다는 건....
가능성 마저 포기해 버리겠다는 뜻인가...?
절대로 그럴 순 없었다.
혁수를 포기하다니....그럴거면 애초에 먼저 손을 내밀지도 않았을 주혁이다.
가방을 다 챙긴 혁수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천천히 강의실을 빠져나간다..
주혁 역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강의실을 나선다..
1층의 휴게실에 이르자, 미대에 속해 있는 학과생들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혁수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소빈에게 다가가고, 소빈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긴다..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혁의 눈빛은...
아무도 눈치 챌수 없게끔 극히 짧은 시간동안만 휘청인다..
그런데.....갑자기 휴게실 안이 잠잠해지면서...
사람들의 눈이 한쪽으로 쏠린다..
자연스럽게 주혁의 시선도 그 쪽을 향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끈 대상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순간, 주혁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서렸다.
"주혁오빠!!"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주혁의 이름을 크게 외쳐부르는 그녀는 어젯밤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던 세라였다.
허벅지를 거의 다 드러낸 가죽 반바지, 몸에 짝 달라붙어 육체의 곡선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청자켓..
무릎까지 올라오는 윙 부츠, 짙고 화려한 화장까지...
학교내의 여대생들과는 판이하게 튀는 옷차림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수밖에...
그녀가 주혁의 이름을 부르자 당연히 그에게도 수십개의 이목이 집중되고...그 중에는 혁수의 눈과 귀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우~~진짜...내가 오빠 찾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어?? 대학이라는 데는 원래 다 이렇게 좆나 큰거야??
무슨 놈의 학교가 잠실 운동장만 해~~~"
주혁 가까이 오자마자 푸념을 늘어놓는 세라...
주혁은 기가 막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벌레 씹은 표정으로 입을 연다..
"네...네가 여기 왜 왔어?"
"왜 오긴~~~오빠 만나려고 왔지.... H대 조소과 장주혁..오빠에 대해 아는게 그거밖에 없으니 어쩌겠어~~
학교로 찾아올 수밖에 없잖아?? 왜? 난 여기 오면 안돼?"
고양이를 닮아 약간 올라간 듯한 도발적인 눈매로 대범하게 주혁의 눈을 마주보는 세라..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주혁은 움찔하기 보다는, 반대로 방금 전보다 한결 차분해 져서는...
본래의 냉소적이고 표피적인 모습을 되찾는다..
"왜 날 만나려고 한건데? 난 너랑 볼 일 없어...."
"그래?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
난 오빠 좋아. 오빠랑 사귀고 싶어...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솔직히 처음엔 오빠 생긴거에 반해서 같이 자자고 그랬는데...지금은 아니야.
오빤....뭔가 다른 남자들이랑은 틀린 거 같애...그래서 사귀고 싶어...."
"난 너한테 별로 관심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
억양 없이 무미건조한 어투로 툭 내뱉고 세라를 지나쳐 가려는 주혁의 팔을 그녀가 붙잡았다.
얼핏 주혁의 얼굴에 짜증이 섞이며...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는 세라의 얼굴이 보였다.
화가 나서 잔뜩 불거져 올라있을 거라 생각했던 주혁은 뜻밖의 반응을 보이는 그녀에게 의아함을 느끼며 잠시 멈칫한다..
"내가 왜 싫은데? 이유를 말해봐... 내가 아무렇게나 굴러먹는 날나리라서, 그래서 그래?
오빠는 그런거 신경 안 쓸거 같은데....내가 착각한 거야? 응??"
그러자 주혁의 입가에 비스듬한 조소가 물리며...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세라를 응시한다..
네가 나에 대해 알긴 뭘 아냐는 듯한 눈빛이다.
그리고 자학이 물씬 배어나는...비정상적인 희열에 찬 음성으로...
"누가 너 싫대? 관심이 없다고 그랬지 싫단 말은 안했어...
난 말이지....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누군지 궁금하지? 가르쳐 줄까??"
그러면서 세라의 어깨를 억세게 잡아 출입문 쪽으로 돌린다.
문가에 서서 소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혁수의 모습...
조금은 우울한 표정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생각에 잠긴 듯도 하다..
"저기 저 커플 보이지? 긴 생머리에 청바지 입은 여자랑 그 옆에 있는 남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쟤야...
어때? 그래도 나랑 사귀고 싶어??"
"무슨 소리야? 오빠가 저 여자 좋아하는거랑 내가 오빠 좋아하는거랑 무슨 상관이야?"
"저런~~잘못 짚었어....내가 좋아하는 애는.....저 여자가 아니라...남.자.야..."
세라가 받을 충격의 정도를 가늠해 보며...새디즘적인 쾌감에 젖어드는 주혁....
하지만 그는 지금....자기 앞에 서있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
연이어 돌아올 세라의 혐오감 어린 눈빛을 고스란히 다 받아낼 각오를 하며...괴상하게도 주혁은 그것을 즐긴다..
헌데.....끔찍스러워 하며 몸을 사려야 할 세라는...
황당하게도 아무런 동요가 없다...
"그래? 남자란 말이지......어디....."
지극히 일상적인 말투로 얘기하며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혁수를 구석구석 훑어본다..
뭐라고 말도 못하고 벙쪄 있는 주혁의 귓가에 낭랑한 세라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오홀~~귀엽게 생겼네....얼굴 진짜 작다....큭....귀 좀 봐, 귀......푸힛.....^^;;"
유난히 쫑긋한 혁수의 귀를 보고 키들거리던 세라는 문득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내지른다.
"아아~~~저 귀!! 저 남자...그때 골목에 서있던 그 사람이구나!!
맞아, 맞아!! 어젯밤에 모텔 앞에서 뚫어져라 우리 쳐다보던 그 남자!! 귀보니까 알겠다!!"
실로 대단한 눈썰미였다.
어두운 골목 한 귀퉁이에서 잠깐 스쳤던 사람을 이렇게 또렷이 기억해 내다니...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주혁에게 빙글빙글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세라가 특유의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이야기 한다..
"으음~~~그런거였군...왜 나랑 잘 생각도 없으면서 즐겨보자느니 어쩌니 모텔로 데리고 들어갔는지 알겠다~~~
어이그....고작 질투 때문이었단 말이야? 내가 겨우 그따위 유치한 감정 때문에 이용을 당한거란 말이지?
와아~~~오빠, 생각보다 훨씬 싸가지가 없다....허...!"
세라가 자기보다 한 수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주혁은 자존심이 상한다.
혁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인정해 주는 그녀의 개방성과 넓은 아량도....어쩐지 거북스러운 주혁이다..
하지만....계속해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흔하게 마주 칠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주혁은 자존심의 벽을 일부분 허물고, 한 발자국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선다.
틈새를 보이는 주혁을 놓치지 않고 공략하는 세라...
"뭐~~~저 남잘 좋아한다니 할수 없지...난 딴 맘 먹고 있는 사람한테 매달리는 체질은 못 되서 말야.....
그래도 난 오빠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정말로 오빠가 좋아.
보아하니....혼자 속 끓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때? 내가 도와주는 거....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주혁은 다시 혁수에게로 눈길을 옮긴다..
소빈은 그새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고, 혁수 혼자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구두코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와인빛 머리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얼굴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저 작은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걸까....
나와 세라에 대해 손톱만큼이라도 의혹을 가질까....
신경쓰기나 할까.....
저 애는 날......생각하기나 하는걸까........
세라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주혁은 이번만큼은..
제 3자와 자신의 문제를 공유하고 싶었다.
그만큼 세라가 주혁에게 강한 인상을 준 탓도 있었지만...
혁수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할수 있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정도로......절박했다.....
하지만.....누군가의 힘과 도움이 덧붙여 진다고 해서...
꼬여버린 그와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될 것 같지는 않았다..
되려.....자신의 치부와 상처만 공개하게 될 것 같다...
그건....주혁이 원하는 일이 아니다...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질색이다.
패배하고 거절당하는 자신을 보여줄 수는 없다.
"됐어....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고마운데....네 일이나 신경써..."
냉랭한 마지막 말을 던지고 휙 그녀를 지나쳐 가버리는 주혁...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세라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여유있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쳇....장주혁.....지 죽는단 소린 절대 안하지.....
잘났다, 이새끼야...됐다고 틱틱거리는게 더 불쌍해 보이는구만...
쯧.....야, 너 불쌍해서라도 내가 진짜 저 남자하고 너 이어주고 만다!!
쓰읍.....그럼 일단, 아까 그 기집애부터 따라다녀 봐야겠군...쩝....-_-;;"
(16)
1시간 뒤, 강태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목욕가운 차림의 재준이 거실의 쇼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뉴스를 보고 있었다.
하얀 목욕가운을 입은 앳된 얼굴의 미소년과 담배...뉴스...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강태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부엌으로 들어가 버드와이저 한 병을 쟁반에 받쳐 꺼내온다..
"드세요, 목마르실 텐데...."
재준이 시키지도 전에 자발적으로 그가 무언가를 서비스하는 것은 처음이다.
재준은 조금 얼떨떨해진다..
미심쩍은 눈으로 강태를 살피는 재준에게 살짝 홍조를 띄우며 웃어보이기까지 하는 강태.....
재준의 얼굴에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실소가 번지고...
강태는 그런 재준에게 태연스레 묻는다.
"왜요? 제가 뭐 이상해요?"
"아니...아무것도 아냐...나 뉴스좀 봐야되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대로 무뚝뚝하게 명령하는 재준..
강태는 고분고분 그의 말대로 침실로 향한다..
강태의 태도변화에 의구심이 치솟는 재준이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이내 그 의구심을 떨쳐버리고 뉴스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뉴스가 끝나자,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실 쪽으로 발을 옮긴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재준은 또 한번 놀랐다.
항상 목석처럼 멀뚱히 서서 재준을 기다리던 강태가...침대에 앉아있었다...
등에다가는 베게를 괴고, 두 무릎을 세운 채...
양말과 니트 스웨터까지 벗고 있는 폼이....
누가 봐도 선정적이고 요염했다..
술집 여자들의 직설적인 유혹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은근하고 수동적인 끌어당김...
재준의 얼굴을 보자, 수줍은 듯 두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는 모습이...
가히 그를 광분하게끔 만들었다..
오늘은 하늘이 두쪽 나더라도 강태를 원없이, 질리도록 탐해보리라 결심하며 재준은 강태 위로 몸을 겹쳤다.
재준이 다가오자, 세웠던 다리를 쭉 뻗고 반쯤 일으켰던 몸을 완전히 뉘이며....자의적으로 재준에게 순응하는 강태...
한술 더 떠서 두 팔로 재준의 목을 끌어안기까지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직은 소극적이다.
그래도 재준은 그런 강태의 작은 움직임이 더 사랑스럽다..
돈만 주면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값싼 여자들의 기교섞인, 능수능란한 몸짓에 지리멸렬한 재준이니까....
섹스에 대해선 문외한 격인 강태의 풋풋하고 서툰 동작 하나하나가 재준을 미치게 하는건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색기와 요염함이 넘치는 강태이기에....더욱 더 재준이 빠져드는 것일게다..
휘몰아치는 욕망의 소용돌이에 격해져 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재준은 강태의 입술을 머금는다..
탄력있는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자신의 입술 점막에 닿아오는 매끄러운 입술감촉을 음미한다..
그러다 약간 각도를 기울여, 이번에는 가지런한 치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부드러운 혀를 간질여 본다..
조심스레 자신의 혀를 감싸오는 강태의 입술을 느끼자...
몸속에서 정체모를 뜨거운 덩어리가 불끈 솟구치며 재준의 사고회로를 차단시킨다...
이제 재준은 본능에 사로잡힌 야수이다.
그를 그렇게 만든건, 누구도 아닌 바로 강태이다..
재준의 손이 거칠게 강태의 흰색 셔츠를 잡아챘다.
단추들이 툭툭 튿어져 나가며 순식간에 휴지조각처럼 바닥에 처박힌다.
거센 재준의 움직임이 두렵지만 애써 그 두려움을 감추는 강태...
1시간 전, 거울 속의 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부지게 다잡는다.
철저하게.....이용하자.......
되새김질하며 강태는 용기를 내어 재준이 입고 있는 가운의 허리끈을 푼다.
그리고 살며시 가운 자락을 젖힌다.
새하얗게 빛을 발하는 재준의 속살....
곱다는 생각이 든다...
무시무시한 암흑가 보스에게 '곱다'라는 표현을 쓰다니....
하지만 정말 그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조심스럽게 재준의 살결을 매만지는 강태의 손....
강태의 손길을 느껴보기는 처음은 재준...
어리숙하고 밋밋하기만 한 강태의 애무에 불붙는 그의 육체...
재준은 일단 격렬히 끓어오르는 욕정과 흥분을 한템포 늦추고 가라앉힌다..
오래도록 섹스의 유희를 즐기기 위해서는 '자제'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결 부드러워진 손길로 능숙하게...짜릿한 애무를 시작한다..
자기 혼자만 달아올라 버둥거리는 섹스는 안 하는게 낫다.
그건 자위행위보다 못하다.
상대방을 최고의 정점으로 픽업해 주며, 자신도 동시에 그와 같은 쾌락을 맛보는 것이 진짜 '섹스'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강태 역시 그와의 결합을 갈망하도록...
재준은 강태에게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몰아의 세계..
그 즐거움을 선사하려 하고 있다..
단 한번의 섹스를 통해, 이미 강태의 성감대가 어디인지 파악한 재준...
섬세한 입술로 강태의 귓볼을 잘근잘근 깨물며 자극한다..
뒷목을 뻐근하게 압박해오는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강태가 얕은 신음성을 뱉어낸다..
손으로는 판판한 가슴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보송보송한 강태의 피부감촉을 즐긴다..
윤기 흐르는 구릿빛 피부가 그의 섹시함과 관능미를 더해준다..
재준의 목에 감긴 강태의 두 팔에 힘이 주어지며 더 진하게 접촉해 온다...
재준의 손길에 반응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신을 풀어놓은 탓에, 전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극렬하게 달아오르는 강태의 육체....
뜨거워지고 촉촉해지는 강태의 몸을 확인하자, 재준은 기분좋은 만족감에 도취된다..
일차적인 목표를 달성한 재준은 다시 한번 리듬을 조절하며 강태가 한꺼번에 폭발해 버리지 않도록 제어해준다..
긴박하게 이어가던 애무의 속도를 나긋나긋하게 억제시키고...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강태의 바지를 벗겨낸다..
곧고 예쁜 다리가 드러나고...
여자의 것처럼 물컹물컹한 게 아니라 단단하고 팽팽한 강태의 허벅지는 색다른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한팔을 강태의 무릎에 감고 그의 다리를 쓸어올리며, 허벅지 안쪽의 가장 민감한 선을 따라 재준의 입술이 내려간다..
강태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재빨리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간간히 흘러나오던 강태의 신음소리가 끊기자, 이상히 여긴 재준이 얼굴을 들어 강태를 바라보고...
그 원인을 알아내자 귀여워 죽겠다는 식의 미소를 띄우며 단호한 손길로 강태의 입을 가리고 있던 그의 손을 치워낸다..
그리고 대신 자기 입술로 강태의 입을 덮어버린다..
밀려들어오는 재준의 혀를 받으려 강태의 입술이 벌어짐과 동시에 강태의 몸을 가리고 있던 하나남은 천 조각이 재준의 손에 의해 벗겨졌다.
한참동안 강태의 입술을 유린하던 재준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강태의 페니스가 위로 꼿꼿이 곤두 서 있는 것을 보자...흡족한 듯 빙그레 웃음을 짓는 재준...
강태는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그가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와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 욕망을 느끼는 자신이 부끄럽다거나 지저분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수치심이나 굴욕감 같은 것도 이성이 남아있을 때 자각 할 수 있는 감정들이 아닌가...
지금 강태에게는 100%의 본능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준은 일부러 강태를 애태우려는 듯 삽입을 참고 있다..
재준을 올려다보는 강태의 눈빛이 간절해지고...
그 눈빛을 마주하자 재준은 이젠 됐다는 생각으로 옆에 놓인 베게를 집어서 강태의 허리 아래에 받친다..
그리고 그의 매끈한 다리를 들어올리며...서서히....그의 내부로 들어선다..
".....아아........하아........!!...."
아직도 통증이 생기는 모양인지, 강태의 신음성에 콧소리가 섞인다.
재준의 팔뚝을 부여잡은 강태의 손에는 억센 힘이 가해진다..
재준의 움직임이 빨라지고...그에 따라 강태의 몸도 리드미컬하게 율동한다..
강태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조금만 더...조금만 더....' 중얼거린다..
극치의 절정감을 맛 볼수 있는 지점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재준은, 오르가즘의 문턱에서 일단 멈춤을 선언한다..
강태의 몸 안에서 쑥 빠져나가는 재준...
강태는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정을 참는 재준이 신기하기만 하다..
강태는 벌써 자신의 욕망의 응집체를 분출해버렸다..
잠깐동안의 휴지기를 가졌던 재준이 다시 강태의 허리를 잡아 자세를 고정시키고는 그의 엉덩이를 들어 올린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삽입할 생각이다..
겨우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던 강태의 몸에 다시 고압전류와도 같은 열망의 물결이 파도치기 시작한다..
안타까운 신음소리가 강태의 빨간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며...
강태의 다리가 자동적으로 재준의 허벅지를 휘어 감았다..
또 한번 강태의 몸 안에 자신을 담는 재준...
".....흐읏.......으음.....으읏......."
연속적으로 울려퍼지는 강태의 신음은...
잘 고른 현악기에서 연주되는 운율과도 비슷하다..
그 신음소리와 박자를 맞추어 재준의 피스톤 운동이 시작되고...
땀에 흠뻑 젖어 결합되어 있는 두 육체가 춤을 추듯 흔들린다.
그 움직임이 동물적이라기 보다는 예술적인 느낌이다..
워낙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인 두 사람의 외양이 한데 어우러져 그런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일게다..
점점 더 피치를 높여가던 재준이 서서히 힘을 빼며...
또 다시 강태의 안에서 빠져나갈 준비를 하자...
절정의 순간을 바로 눈앞에 둔 강태는 혈관 조직이 하나하나 터져 나가는 듯한 팽창감에 잔뜩 부풀어올라...
숨을 헐떡이며 애원한다...
"......안돼.....빼지 마, 제발.......끝까지 해줘...끝까지......"
자존심이고 부끄러움이고 몽땅 팽개친 채 이렇게 매달리는걸 보면...어지간히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하지만 재준은 잔인하리만치 사악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약간 쉰 듯한 음성으로 강태의 애원을 거절한다..
"......저런....아직은 안 되지....아직 좀 일러....조금만 더 기다려 봐....."
그리고 강태에게서 자신의 몸을 거두어들인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데....
뼈속까지 스며드는 불꽃같은 기운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는데....
온 몸이 산산조각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어질 것 같은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만큼 강태는
극도의 희열과 고통을 한꺼번에 맛보고 있다.....
"......아아........흐음..........으윽......"
제발 어떻게 좀 해달라고 미친 듯이 갈구하고 싶은데, 목구멍에서는 말 대신 신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강태는 격정으로 얼룩진 양팔을 들어 재준의 등을 힘껏 껴안을 뿐이다..
한동안 강태의 허리와 골반의 곡선을 쓰다듬으며 그의 애걸하는 손길을 즐기던 재준이...
거칠게 강태의 어깨를 잡아 그의 몸을 돌아 눕힌다..
말끔하고 탄탄한 등판과 등줄기에서 가느다란 허리로 이어지는 유연한 곡선...딱 올라붙은 엉덩이까지......
아무리 봐도 완벽한 몸매다.
이제는 재준도 더 이상은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강태의 어깨를 움켜쥔 채, 한손은 침대 모서리를 잡고 버티며 재준은 강태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강태의 근육이 심하게 경련하며 재준을 조여온다..
재준의 하얀 육체 밑에 깔려 몸부림치며....
강태는 마음속으로 갈구한다...
이번에는.....이번에는 제발........
이 발작적인 괴로움에서 놓여 날 수 있기를.....
그런 강태의 바램을 읽기라도 한것처럼...
재준이 끈끈한 음성으로 조금은 시니컬하게 물어온다..
"어떡할까?.....끝까지 가 볼까?....그랬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강태...
......다만......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좋아.....환상의 세계로 데려다 주지......."
큰 은혜를 베푸는 듯한 말투로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으며...재준의 동작이 거세어지더니....
비로소 강태를 '오르가즘' 의 경지에 올려다 놓으며....
그 안에서 사정했다...
(17)
그에 관한 일체의 기억마저도 떨쳐 내고자 애를 끓이기도 했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성과 자제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모진 결심으로 버티었다..
사람의 감정은 그러나, 이성이나 자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그를 잊으려고 하는 온갖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는 전보다 몇배 더 격렬히 솟구치는 그리움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 <사랑을 위해 죽다> 중에서 -
벌써 3시간 째 지하에 있는 화실에 틀어박혀 있는 혁수..
캔버스 앞에 앉아, 신중한 손길로 붓을 놀려 나간다..
얼굴에는 형형색색의 물감이 군데군데 묻어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혁수가 그리고 있는 것은 바닷가의 풍경이다.
그러나 금빛 모래사장이나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따위는 찾아 볼수 없다.
대신 먹물같이 새까만 하늘, 그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검푸른 바다..
하늘과 바다를 가로지르며 걸쳐있는 초승달... 그게 다였다.
그의 붓터치로 인해 만들어진 밤바다는...
오염되고 더러워져 죽어있는 느낌이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면...문둥병에 걸린 것처럼 피부가 썩어 문드러질 것 같다..
그런 황폐하고 삭막한 바다의 물결과, 수면 위에 떠오른 초승달의 한(恨)을 진지하게 완성시켜 나가는 혁수...
그의 갈색 눈동자가 생명력과 활기를 띄고 있다.
무엇보다 열정으로 살아 숨쉰다.
혁수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무언가 알 수 없는 절대적인 힘에 이끌려...그의 팔이 움직이는 듯 하다..
이럴 땐 현실세계의 '안혁수'가 잠시 사라진다.
그래서 현실 속의 문제와 고민들을 잊을수 있다.
하지만 이 마법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 효력이 한계에 다다르면, 현실 세계의 '안혁수'가 다시 깨어난다.
3시간 동안 그림 속 밤바다의 마술에 홀려있던 혁수..
어깨 쪽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동시에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 보니 새벽 1시가 다 되어간다.
화실 한 귀퉁이에 있는 싱크대로 가서 팔레트와 붓을 씻고, 썼던 물감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그림 도구들을 정성스런 손길로 정리해 놓는 혁수...
에이프런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은 다음, 뻐근한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2층을 향해 올라간다.
화실에서 나오니, 자신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유화용 기름과 물감냄새가 더욱 역하게 진동을 했다.
혁수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섰다.
훌훌 옷을 벗고는 뜨거운 물줄기에 몸을 맡긴다.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물의 감촉이 포근해서 좋다.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이 든다.
피곤에 절은 혁수의 한숨소리가 희미하게 물소리 사이로 섞여나오고...
혁수는 샴푸를 머리에다 문질러 거품을 내며..
잠깐동안 그림에 취해 잊고있었던...주혁에 대한 생각으로 빠져든다.
아직 그는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다.
요새 들어서는 거의 매일 12시가 넘어야 귀가하는 주혁이다.
혁수와의 대면을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세라라는 여자와 매일 만나기라도 하는건지...
혁수는 본능적으로 전자 쪽이길 바라는 구차한 자신의 마음을 발견한다.
제기랄....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정말 자기를 흠씬 두들겨 주고만 싶다..
이젠 아주 짜증스럽다...
혁수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에 묻은 물감들을 닦아낸다.
피부를 벗겨 버릴 듯 세게...두 손으로 조막만한 얼굴을 문질러 대는 혁수..
따뜻하게 몸을 감싸는 물줄기에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혁수의 고막을 울리며 벌컥 문소리가 들려오고..
확대 된 혁수의 동공에 비틀거리는 하얀 주혁이 비춰진다..
그리고 훅 끼쳐오는 고약한 술냄새...
그보다 더 진하게 맡아지는 주혁의 핏빛향기...
'레드 티어즈'의 비애......
귀신처럼 등장한 주혁은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변기통을 붙들고 토악질을 해댄다.
주량이 센 주혁이 저렇게 토할 정도면 보통 많이 마신게 아닌가 보다..
혁수는 놀라움과 걱정으로 경직 되어, 어정쩡한 포즈로 벽쪽에 달라붙어 있을 따름이다.
주혁은 혁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위장 속의 오물들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너무 심하게 토하는 주혁의 모습에 혁수는 자기가 다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속에 들어있는 내장까지 전부 다 주혁의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참혹하고 구슬픈 광경....
속에 있는 것들은 깨끗하게 게워 낸 주혁이 식은 땀으로 흥건한 얼굴을 들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을 돌린다..
질식하기 직전, 겨우 숨통이 트인 사람처럼..
허파를 최대한 팽창시켜 공기를 흡입하는 주혁...
어느 정도 괜찮아 졌는지, 다시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술기운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인다..
주혁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혁수가 있다.....
다른 사물들은 전부 흐릿하게 보이는 데...
유독 혁수만은 뚜렷한 형상으로 주혁의 눈동자에 들어와 박힌다..
혁수는....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젖어 있다.....
그리고.....나를 미치게 한다......
주혁은 정확치 못한 걸음걸이를 내딛으며 혁수에게로 다가간다..
지금 주혁은....술에 취했고...맨정신이 아니다..
그리고.....'안혁수' 라는 남자에게 미쳐있다.....
그래서 혁수는....두렵다.......
지금의 주혁이......무척이나 두렵다......
샤워 물줄기 때문에 흠뻑 젖어버린 혁수 앞에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을 이끌고 선 주혁...
붉게 충혈된 눈으로 혁수를 찌를 듯이 바라보며...
낮고 음울한 목소리를 낸다..
".....안혁수......."
그렇게 혁수의 이름을 부르더니...
주혁의 눈동자에 갑자기 짙은 그늘이 드리워 지며...
갈기갈기 난도질 당한 심장을 싸안은 채...
상처입고 매맞은 영혼으로 혁수를 마주한다..
주혁의 영혼은 메말랐고, 훼손당했고, 죽어가고 있다...
혁수도 그것을 느낄수 있다...
그럼에도 혁수는.....구원을 베풀어주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잔인하다..
잔인하게....침묵을 지키는 혁수....
주혁은 비참한 심정으로 다시 한번 구걸한다..
"......안승...호......"
마치 흐느끼는 듯 하다...
뒤틀리고 쥐어짜진 음성에선,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지쳐가는 주혁의 고통이 넘쳐흐른다..
목소리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주혁은 이제 몸짓까지 동원한다..
억세게 혁수의 손목을 휘어잡으며, 한 손을 벽에다 짚고 혁수와 가까이 선다..
덕분에 주혁 역시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물에 적셔진다.
주혁의 눈동자가 바로 앞에 다가와 있다..
좀전까지 혁수가 캔버스에 그려나가던 밤바다의 색깔과 아주 비슷한 빛을 머금고 있는 주혁의 눈....
그 밤바다의 마법이 주혁의 눈에서도 발하여 지는 것인지...
혁수는 아까처럼 현실세계를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이성이 남아있기에...
혁수는 주혁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너때문에....나 돌겠어.....안혁수 너 때문에 내가 아주 미치겠어...!!
......내가 정말 왜 이러는지....진짜 모르겠다, 씨발.....달라진거 없는데.....아무것도 달라진거 없는데......."
혁수 너 때문에 너무 힘들어.....
너를 향한 내 마음 때문에 너무 힘들어....
"너랑 섹스 안하는거....그거 하나 말고는 다 그대론데....근데....나 도대체 왜이러는 거냐고...?!
섹스야 아무하고나 하고싶으면 언제라도 할 수 있잖아...꼭 너여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데.....나 정말 왜이러지....?"
하루종일...네 생각말고는 다른걸 할 수가 없어....
널 가질 때 느꼈던 그 믿기지 않는 황홀감만이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떠다녀.....
숨막히는 갈증이 내 세포 하나하나를 붙잡고 놔주질 않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혁수를 느껴야 했다..
가슴 가득 터질 듯이 타오르는 간절함을 채우지 않으면...
단 1분도 더 살아 갈수 없을 것 같았다..
주혁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혁수를 누르며,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혁수를 통째로 삼켜 버릴듯한 눈빛으로 절실히.....애타게....간구한다..
"...혁수야....이번만....이번 한번만 더.....하게 해줘....마지막이라고 해도 좋아.....제발....혁수야......"
더 버티지 못하고...혁수의 입에서 고뇌에 찬 탄식소리가 새어나오며....그의 눈이 힘없이 감긴다..
장주혁....너 정말 어떡하려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해.....이런 널...어떻게 거절하냐구.....
왜 그렇게 날 원하는 건데....왜 그토록 나만 보는건데....
왜 하필 나인건데......
다른 사람이면 좋았잖아....나말고 다른 사람이면....
이렇게 끔찍하고 비참해지지 않아도 됐잖아......
혁수는 처음으로 주혁의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샤워 물줄기에 감춰져 드러나지 않는다.
혁수의 무언을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주혁...
거친 야생마가 되어 다급하게 혁수를 욕조에 쓰러트리고, 빠르게 젖은 옷가지들을 벗어 던진다..
그런 주혁의 몸짓이 너무 처연하다...슬프다....
그래서 혁수는....계속해서 흐느낀다....
소리 없이....보이지 않게....혁수의 흐느낌이 이어진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주혁의 몸이, 샤워 물줄기 보다 더 따스하고 더 포근한 주혁의 육체가 혁수의 전신을 감싸온다...
자신의 아래에 누워있는 혁수를 오래도록 끈질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혁...
축축이 젖어있는 혁수의 와인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시원스레 드러나는 혁수의 정갈한 이마와 쫑긋한 귀를 살며시 어루만지며....그윽하게 잠긴 음성으로...속삭인다..
"안혁수......나의 안혁수.....너무 예쁜 나의 안혁수.....
내 보물.....다시 돌려줘......다시 나한테 돌려 달라구.....
우리 혁수...뺏어가지 마.....제발...다시 돌려줘....나한테....."
끝내는 울먹이고 마는 주혁....
두팔로 으스러져라 혁수를 안으며...누구에게로인지 모를 부탁을 연신 중얼거린다..
맞닿은 주혁의 볼에서 뜨거운 눈물이 전해져 온다..
혁수는 애써 그것이...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린 수돗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착각이라도 하지 않으면....주혁의 목을 부여안고 크게 소리내어....엉엉 서러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서였다..
차가운 빗물에 젖은 장미꽃처럼....바르르 떨리는 주혁의 붉은 입술이 혁수에게 다가온다..
그 입술과 혁수의 입술이 포개어짐과 동시에...
주혁이 혁수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혁수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수가 없다..
쾌감이나 흥분을 느끼기에는...혁수의 몸안에서 운동하는 주혁의 육체가...그 움직임이.....너무 서글프다....
몸 안 가득 퍼지는 주혁의 핏빛향기가.....처절하다.....
주혁은 더 깊게 혁수를 느껴보려...그의 가냘픈 허리를 감아 자신의 배쪽으로 밀착 시킨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소나기처럼...
주혁의 몸속으로, 영혼 속으로 쏴아-하고 스며드는 혁수의 체취...
아아.....이 달콤함 속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다면...
내게 그 축복을 내려 줄 수는 없는 것인가...?
이 순간이 지나면.....이 짧은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넌 다시 차가워질텐데.....내게서 고개를 돌려버릴 텐데....
....난 또 다시....너에 대한 굶주림으로 고통스러워 져야하는데....
'안혁수'라는 초콜릿의 환타지 속에서...마지막 숨을 거두고 싶다..
그렇게 죽을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기꺼이...
날 저승으로 끌고 가는 사자(死者)의 손길을 환영하겠다..
이제 서서히 끝이 보인다...
눈물로 얼룩진 정사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주혁의 동작이 거세어진다...혁수의 율동도 격해진다..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하나의 지점을 향해 치달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비등점이 도착했을 때...
터무니 없이 거대한 절망의 무게에 짓눌린 주혁의 음성이...
뿌연 수증기 사이로 텁텁하게 울려퍼진다..
"......혁수야...나 좀 그만 밀어내....제발....나 좀 받아줘, 안혁수...."
사정을 하고 난 뒤에도 혁수에게서 몸을 빼지 않은채...
주혁은 더욱 간절히 몸부림치며...혁수를 품에 안는다..
주혁의 살갗에 돋아난 작은 돌기 하나까지 전부 혁수를 향해 뻗어있다..
그것이 느껴지자....혁수는 또 한번 주혁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18)
여느때처럼 재준이 외출하고 난 뒤, 덩그러니 혼자 남은 강태는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2층의 자기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회색 목재 책상 앞에 앉아 영화 이론에 관련된 책을 꺼내 펼친다.
한참동안 열성적으로 진지하게 책을 읽어내려가던 강태의 귓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강태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인터폰의 버튼을 누르자 메모지 만한 크기의 액정화면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며... 초인종을 누른 사람의 얼굴을 비춰보인다.
태현이었다.
특유의 커다란 눈망울로 똘망똘망하게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보이는 태현...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에 강태의 입에서 풋!하고 웃음이 터진다.
하여튼...정말 능청스러운 사람이다..
강태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현관으로 향한다.
하지만 정작 문을 열 때에는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낯가림이 심한 그의 성격 탓이다.
"헤에~~그동안 잘 있었어? ^^*"
강태가 문을 열자마자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네며 안으로 불쑥 들어서는 태현..
서슴없이 신발을 벗고 올라서더니 휘적휘적 거실로 가서 쇼파에 털썩 몸을 묻는다.
"저어...회장님은 아침에 나가셨거든요...밤이나 되야 오실텐데..."
편하게 다리를 벌리고 반쯤 누운 자세로 앉아있는 태현에게 정중히 이야기하는 강태..
태현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밝게 미소지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강태를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옆의 쇼파를 탁탁 두드리며 앉으라고 손짓한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태현의 옆에 자리하는 강태..
생각지도 못한 태현의 방문에 조금은 난감해 진다..
"재준이 보려고 온거 아니야. 그 새끼가 이 시간에 집에 있을 리가 없지~"
그것쯤이야 너보다 내가 더 절 안다는 말투다.
그렇게 얘기하더니 가지고 온 가방을 열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강태에게로 내민다.
"이게....뭐에요....?"
"어~~사탕. 오늘이 좋아하는 사람한테 사탕주는 날이라며~~"
기분좋은 너스레가 섞인, 귀염성 있는 태현의 음색...
날카롭게 곤두섰던 강태의 신경이 느슨해지면서..
조금은 자연스럽게 태현의 말에 대꾸한다.
"...어어....여자한테 주는 건데....^^;;;"
어색하긴 하지만 살풋이 미소가 번지는 강태의 얼굴에 태현은 자신감을 얻는다.
"그래?...쩝....뭐...괜찮아, 넌 여자보다 훨씬 이쁘니까...
아, 뭐해~~? 빨리 받어...어제 이거 사느라 신촌바닥을 뒤집어엎었다는 거 아니냐~~진짜야~~~"
투정을 부리 듯,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며 강태를 재촉하는 태현..
강태는 쑥쓰러운 얼굴로 태현이 내민 꾸러미를 받아든다.
금색 포장지에 빨간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는 상자가 무척 아기자기하다.
"고맙습니다..."
예의 바르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강태..
그러나 태현은 그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한귀로 흘려버리며 무언가 또 중대한 얘깃거리가 있는지...강태에게로 몸을 덥썩 기울인다.
암갈색 맑은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기대감이 가득 서린 눈빛으로...다시 입을 여는 태현..
"근데 있잖아....나 오늘 생일이거든....그러니까 선물 줘! ^O^"
역시나 뜬금없는 태현의 발언에 강태가 황당해 하는 건 당연했다.
강태의 예쁜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지며 세상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말한다.
"저어....미리 말씀을 해주시지....생일이신거 몰랐거든요...그래서 준비 못했는데....죄송해요......-_-;;"
사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더더군다나 미리 생일이라고 알려 주지도 않고선 생일선물을 요구하는 태현이 이상한 것임에도...
강태는 순진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쩔쩔맨다.
암흑가 보스의 섹스파트너 라고 하기엔 믿을수 없을만치 때묻지 않은 순수함...
지하세계의 피비린내와 더러움에 물들기에는 한없이 약하고 아깝기만한 영혼...
태현은 새삼 안타까워 진다..
이 아이의 지금 모습 이대로 지켜주어야 할텐데...
백지처럼 순결하고 깨끗한 만큼...오염되기 쉬울텐데...
세상은...왜...이처럼 천사같은 영혼을 가진 아이에게...
이 같은 시련을 주어 퇴색하게 하는걸까....
가끔은....신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우울한 생각 속에 빠져드는 자신을 건져올리며, 태현은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기로 다짐한다..
내가 지킬수 있는데 까지는...온 힘을 다해 막아줄거라고...
강태의 그늘 진 눈을 보며 결심한다..
"헤헤~~죄송할 거 없어...지금 주면 되잖아, 즉석에서..."
"준비를 못했는데 어떻게..."
"꼭 뭐 물건이어야 되나~~으음...내가 진짜 선물로 받고 싶은게 있는데..."
".......???"
".....뽀뽀해 줘!! ^^"
"예~~엣~~?!? O.O"
강태의 잘생긴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기가 막히다는 투로 반문한다.
태현은 태연스레 강태에게 왼쪽 뺨을 내밀며 철없는 유치원생 마냥 졸라댄다..
"아아~~앙...빨리이~~ 요기다 해줘, 요기~~~너한테 제일 먼저 생일선물 받고 싶단 말야~~~!!
스무번째 생일인데~~야아아~~뽀뽀 한번 해주는게 뭐가 어때서 그러냐? 강태야~~~"
이젠 아주 몸까지 흔들어 대며 칭얼거린다..(-_-;;;)
그래도 망설여지는 강태...어쩔 줄을 몰라하며..
"아휴...왜 그러세요....이러시면 제가 곤란하죠...쓰읍...-_-;;;"
"치잇~~! 디게 비싸게 구네...뽀뽀 한번 한다고 입술이 닳냐?
나 여드름도 하나도 없어!! 봐봐~~! 내 피부가 얼마나 뽀샤시 한데~~~ 아아앙~~생일인데~~선물로 해줘~~~"
정말 끈질기게 매달리는 태현에게 결국은 지고마는 강태..
하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서히 태현의 하얀 뺨에 입술을 가져간다..
강태의 입술이 태현의 뺨에 닿기 직전...
갑자기 태현이 고개를 홱 돌리고, 엉겁결에 강태는 태현의 입술 위에 키스를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잠시 태현의 하트모양 붉은 입술 위에 머물렀던 강태의 입술이 화들짝 놀라며 떨어지고...
금새 모카빛 피부를 새빨갛게 물들이며 민망해 하는 강태와는 사뭇 다르게...태현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캬캬캬캬~~~성공이닷!!! 역시 난 천재적이야!!! 냐하하하~~
강태야, 미안하다...내가 전직이 사기꾼이었걸랑~~크할할~~!!"
(일밤의 '최강의 승부사'에서 태현빠의 명대사 갈취...-_-;;;)
너무 기뻐하는 태현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강태는 그만 그를 따라 웃어버렸다..
어느새 경계심을 완전히 걷고, 편하게 태현을 마주하고 있는 강태...
태현의 타고 난 붙임성이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더 웃어제끼던 태현이 어느정도 진정을 하고는...
장난끼를 거둔, 자상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입을 연다..
"너 영화 좋아하지? 나가자, 형이 영화 보여줄게...극장 안 간지도 오래 됐을거 아냐..."
'극장' 이라는 말에 강태는 솔깃해진다..
강태가 가장 사랑하고 애착을 갖고있는 공간이 아닌가...
대형 스크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친근하고 평화로운 어둠 속에서 영화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때...
강태는 최고로 행복해지고...자유로워 진다..
구미가 당기는 듯한 강태의 반응에 태현은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 열을 올리며 떠들어 댄다..
"대신, 영화 본 다음에 나랑 내 생일파티 같이 가자.."
"생일...파티요...?"
"응, 과 친구들이랑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걔네들이 네 얼굴 궁금하다고 데리고 오래...같이 가자, 응??"
"...저를 왜...."
"아아~~그거야 내가 하도 네 얘기를 많이 하니까, 호기심 나서 그러는거지....헤헤....^^;
내가 네 자랑을 좀 많이 하고 다녔거든..열나 이쁘다고....히이....^^;;"
학교 친구들에게 자기에 대한 얘기를 떠벌이고 다녔다니...
강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생일파티에 가기 싫은건 아니지만...
또 무엇보다도 극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재준의 존재가 걸리지 않을 수 없다..
강태는...그에게 매여있는 몸이 아닌가...
시무룩해지는 강태의 낯빛에, 태현은 쪽집게처럼 그의 심중의 생각을 집어낸다.
"너 재준이 때문에 그러는구나? 걱정하지 마~~재준이한테 내가 얘기할테니까....
내 생일이라서 너 좀 데리고 논다고 하면 되지, 뭐~~
그니까 얼른 옷 갈아입고 와라...오늘형이랑 재밌게 놀자~~응?? ^^"
".......네에...."
찝찝한 감이 없지 않지만...강태는 태현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호화로운 감옥과도 같은 80평 빌라를 벗어 나, 단 하루만이라도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강태를 부추겼다.
극장의 어두침침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에 한껏 잠기고 싶었고..
자신을 친동생처럼 아껴주는 태현과 함께 있고 싶었고..
재준이 아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재준에 의하여 제한되어 있는 자신의 좁은 바운더리(boundary)로부터 잠시나마...일탈하고 싶었다..
강태는 마음 한구석에서 미미하게 일어나는 조그마한 불안감을 접어버리며...외출준비를 시작했다..
- 태현과 함께 한 하루동안...강태는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요즘 흥행하고 있는 헐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고, 캐주얼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사고..또 과 친구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도...
태현은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했으며...강태를 극진히 배려했다.
더군다나 개그맨 뺨치는 태현의 위트와 유머감각에...
가뜩이나 웃음이 많은 강태에게서는 박장대소가 끊이질 않았다..
웃음이란, 사람 사이의 서먹한 공기를 와해시키고, 돈독한 친밀감을 형성 시켜주는, 가장 전염성 강한 무기가 아닌가...
12시가 다 되어서, 태현이 강태를 집까지 바래다주고..그와 헤어지게 됐을 때..서운함까지 느끼는 강태였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태현을 돌아보며, 강태는 작별인사를 한다..
"오늘 고마웠어..정말 재밌었고......조심해서 들어가..."
"어어, 그래.....저기...저어.....강태야..."
그답지 않게 더듬더듬 뜸을 들이며...
말을 하지 못하는 태현을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는 강태..
"아까...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거....그거.....장난으로 그냥 괜히 해본 소리 아니야....."
처음 본 순간부터...네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뺏어갔어...
강태야.....천사같은 아이야.......
"....나....너 정말 좋아해......아주 많이......너랑...같이 있고 싶어.....네 옆에......"
네 육체의 주인이 재준이라면.....난...네 마음의 주인이 되고 싶어....
강태야.....사랑스런 아이야.......
(19)
까페 안으로 들어서자, 두리번 거리는 주혁의 눈에 혼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세라의 모습이 보였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쪽에 자리한 그녀...
아이스진 힙합바지에 진초록색 야구잠바 차림이 지난번과는 다르게 평범하고 수수했다.
뚜벅뚜벅 세라에게로 걸어가는 주혁...
그의 인기척을 느끼자, 세라가 고개를 들더니 주혁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한다..
"어, 왔어? 오랜만이다~~^^"
"그래...잘 지냈냐..?"
그녀의 인사를 무시하지 않고 받아주는 것부터가 주혁이 세라에게 어느정도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였다.
호감이 묻어나는 주혁의 말투에 세라는 내심 기분이 좋아진다..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 주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피를 피워 문다.
첫 모금을 맛있게 내뿜으며 먼저 입을 여는 주혁...
"그렇게 입으니까 훨씬 보기 좋다...더 잘 어울리고..."
"하하~~그래? ^^ 오빠는 좀 마른거 같다...볼이 홀쭉해졌어..."
"어어...요새 잠을 잘 안 자서 그래..."
변죽만 울리는 이야기가 맹숭맹숭 오가고...
종업원이 코코아와 아이스티를 놓고 사라지자, 주혁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세라에게 물었다.
"할 얘기 있다며...무슨 얘기야..?"
"으응~~경과보고 할려고 불렀어. 장주혁이랑 안혁수 이어주기 작전 경과보고..^^;"
뚱딴지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세라를 의혹에 찬 눈으로 응시하는 주혁..
세라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법 진지하고 열의 있는 음색으로 말을 잇는다.
"내가 얘기했잖아~~혁수오빠랑 잘 되게 도와주겠다고....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야.
그래서 우선 열흘동안 그 소빈이라는 기집애 따라다녀 봤거든? 혁수오빠 애인말야..."
"뭐어~~?!? 미행을 했단 말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반문하는 주혁...
그러나 세라의 표정은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환하다..
"응, 내 취미이자 특기가 사람 미행하는 거야...오빠도 한번 해보면 알걸? 그게 얼마나 재밌는데...
아이고, 이 얘기 할 때가 아니지....암튼 그래서 열흘동안 따라다녀 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소빈이라는 그 여자 말이야...보통이 아니야....-_-;;"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고 있던 세라의 얼굴이 심각하게 돌변하며...
몸을 주혁 쪽으로 바싹 기울여, 일급비밀을 전달하는 스파이처럼 조심스럽게 속살거린다..
"아무래도 그 기집애....원조교제 하는 것 같애....아니면 돈 깨나 있는 새끼들이랑 그렇고 그런 년들 있잖아....그런 것들 중에 하나거나...
하여튼 진짜 뻥 안 까고 거의 매일..아니, 적어도 이틀에 한번은 남자랑 호텔에 들락날락 하더라구....
근데 남자가 3,4명은 되 보여...연령층도 다양하다니까~~~어떤 놈은 20대 후반 쯤 된거 같고, 어떤 놈은 50은 넘어보이고...
한마디로 내가 보기엔, 호박씨의 대왕이야~~~ 그러면서도 혁수오빠 만나서는 완전 인간이 180도 변한다니까!!
아주 놀랍더라, 놀라워~~~그러게...얌전~하게 생긴것들이 알고보면 더 지랄이야...
내 그럴줄 알았어....벌써 척 보니까 왕내숭 티가 팍팍 나는게~~남자 여럿 등쳐먹게 생겼더라고.....얼굴도 반반해가지고...쓰읍....-_-+++"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경멸 어린 투로 말끝을 흐리는 세라...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고개까지 설레설레 젓는다..
충격적인 세라의 이야기에 주혁은 아예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세라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무엇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하겠는가? 자기에게 득될게 뭐가 있다고...
세라의 이야기의 진실성이 입증되자,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가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며...하얀 얼굴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화가 났을 때, 그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다...
분노하면 더욱 차가워지고, 잔잔하게 가라앉는 주혁...
음산하리만치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한다..
"내 생각해서 그렇게 수고해 준건 정말 고마운데....앞으로는 그런짓 하지 마라...
네가 그런식으로 행동하면.....나 부담스러워......오빠 말대로 해 줘, 세라야..."
주혁이 자기 이름을 불러준 건 처음이다..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하고는 있지만, 목소리 저편에 깔린 주혁의 격노와 증오, 원망을 세라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세라는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체험하고 있는 상실감의 고통이 얼마나 괴로울지...
하루하루 더해가는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아플지....
주혁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을거란 생각에..
세라는 감히 그를 위로해 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알았어....이제 미행같은 거 안 할게....오빠가 싫다면야 하지 말아야지...
근데 있잖아.....정말 미안하게 됐는데....나.....혁수오빠도 몇번 따라다녀 봤거든...?"
창밖에 고정되어 있던 주혁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빛을 내며 세라를 돌아본다.
온 몸의 촉각을 곤두세우며, 세라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근데 혁수오빠....한번씩 정신과에 들리더라...?
이상해서 내가 그 정신과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처음에는 안 가르쳐 주려고 하다가...
내가 동생이라고 막 졸라대니까 조금 가르쳐 주더라고....
어렵게 설명해줘서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는데...뭐 대충 들어보니까....
우울증도 있다고 그랬고....뭐라더라.....자의식 분열이라던가...자아괴리 라고 하던가....
아아~~하여튼 무식하면 평생 고생한다니까...-_-;;;;
어쨌든 뭐 그런 소리를 하더라고....오빠한테 얘기해주는게 좋을거 같아서....."
거기까지 얘기하고, 세라는 찬찬히 주혁의 눈치를 살핀다..
괜한 말을 떠들어 댄건 아닐까....
우려했던 대로 주혁은....강하게 쇼크를 받은 듯 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의 초점이 풀어지는게....
꼭 껍데기뿐인 밀랍인형이 된 것 같다..
딱 한가지 단어로 지금 주혁의 심정을 표현한다는 건 무리다..
확실한 건......혼란스럽다는 것.....
모든게....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엉켜있다는 것.....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그 매듭이 어디쯤에서 지어져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것.....뿐이다.....
- 소빈과의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혁수는 차고에다 자신의 포카리를 세워 놓은 후, 주머니를 뒤적거려 열쇠를 찾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는 혁수의 귓가에 닿아오는 생경한 음성...
"데이트는 재밌게 했어, 혁수오빠??"
가볍게 비꼬는 듯한 말투....
빙글빙글 웃음을 띄운 채로, 담벼락에 기대어 서있던 세라가 혁수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혁수의 낯에 잠시 놀라하는 빛이 스치다가 이내 시큰둥해졌다..
그러나 세라는 역시 상대방의 반응은 의식하지 않은 채 자기 페이스대로 밀고 나간다..
"근데 그 애인 말이야~~~단속 좀 잘하지 그래?
뭐...오빠도 오빠 나름대로 여자 다루는 방식이 있겠지만....
내 생각엔 있지....오빠가 너무 순딩이처럼 구니까 기집애가 아무 남자하고나 맘놓고 몸을 굴리지....러브호텔이나 왔다갔다하고...
오빠 그러다가 나중에 뒷통수 맞는 수가 있어...조심해~~~"
대화를 나누어 보기는 처음임에도, 세라는 전혀 거림낌 없이 혁수를 대한다..
갑작스럽고 황당한 그녀의 말에 순간 멍해진 혁수...
곧 세라의 이야기를 이해하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쏘아 부친다..
"허!!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그런 얘길 지껄이는거니?? 뭐 이런애가 다 있어...."
그런 혁수를 아무 말 없이 올려다보던 세라...
그럴줄 알았다는 식의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에휴~~~내가 무슨 말을 한들 믿겠어? 하여튼 도와주고 욕만 직싸게 얻어먹네, 썅....
칫, 더러워서 이 짓도 못해먹겠다....뭐 이렇게 답답한 새끼들이 있어??
서로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한 놈은 맘에도 없는 딴 여자 사귀면서 정신병원이나 들락거리고....
한 놈은 허구헌 날 죽상을 해가지고 술이나 처먹고 다니고...
가관이다, 진짜!! 씨발....짜증나서 나도 너네들 상관 안해, 이제!!"
새된 표정으로 당돌하게, 속사포 같이 뱉어내는 세라의 말에 뜨끔한 혁수..
겹겹이 싸매고 숨겨 두었던 흉터가 바깥으로 드러난 듯한 부끄러움...
그에 따라 초라해지고 남루해지는 자신의 모습....
혁수는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매몰차고 쌀쌀맞게 세라를 무시해 버리고...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거칠게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혁수에게...
세라는 체념한 듯 단조로운 목소리로...
하지만 우정 어린 진심을 담아...부탁해 본다...
"주혁이 오빠 좀 그만 힘들게 해....불쌍해서 못 봐주겠어....
한번만 다르게 생각해 봐....이건 내가 정말 주혁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얘기하는 거야.....
내가 봤을 때 주혁오빤.....많이 약한 사람이야.....
잘은 몰라도 아마 지금....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거다, 장주혁....."
안쓰러움이 잔뜩 배어나는 음성으로 나즈막하게 중얼거리며...
먼저 돌아서서 가버리는 세라....
그녀의 말들이 절절이 혁수의 심장에 들어와 박히며...
그의 가슴속을 헤집어 놓는다...
피딱지가 앉았던 상처에는 다시 고름이 흐르고...
찢어진 환부는 더 심하게 골이 패여 쓰라린다..
그 아픔을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혁수는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향한다.
계단을 오르는 자신의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물먹은 솜뭉치처럼 자꾸만 축 늘어지는 몸을 추스리기가 버겁다..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 주었으면....누군가 기대게 해주었으면...
자신을 지탱해 주었으면....혁수는 속으로 간곡히 바란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누구이기를 간절히 원하는 지....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언제나 그래왔듯이....
혁수는 그 '누군가'에게 손 내밀지 못한다...
언제나 처럼 또....혼자서 견뎌 낸다.....
혼자만의 힘겨움에 익숙해진 혁수다....
가슴속의 외침소리들을 죽이고 잠재우는 것쯤은...
그럭저럭 해 낼 수 있다....
그렇지만.....아프다.......
참을 수는 있지만.....견딜수는 있지만.....
너무도.......아프다........
영혼으로만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역시 또 영혼으로만 신음하며...
혁수는 자기 방의 문고리를 돌린다..
그러자 시야에 잡혀오는....'누군가'의 모습.....
혁수는 또 다시 냉정해 질 준비를 한다...
"내 방에서 뭐하는 거야...? 뭐 할 얘기 있어...?"
자기가 생각해도 기특하리만치 무심하고 범상한 어투다.
혁수는 속으로 자신의 연기에 시니컬한 박수를 보낸다..
미련한 주혁은 혁수의 연기에 너무 쉽게 속는다..
그리고....혁수가 쓰고 있는 차가운 가면을 보며...
또 한번 절망하고...좌절한다....
그래도....혁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대로 물러 설 수는 없는 주혁이다..
"혁수 너....정신과는 언제부터 다닌거야......
그런데 다닐 정도로 힘들었으면서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안 할 수가 있어?!
내가 너한테...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이번에는....이번에는 제발...내 애원을 들어주기를....
외면하지 말기를....따뜻이 돌아봐 주기를......
그러나....그러나......혁수는 이번에도......
"주혁이 너....그 세라라는 애 시켜서 나랑 소빈이 뒤까지 밟았나 본데....
부탁이다.....그렇게까지 유치해 지지는 마라......정말 웃기지도 않아, 장주혁....한심해......
네가 그런식으로 나한테 소빈이 까대봤자.....너만 우스워질 뿐이야.....알았어..??"
(20)
"....하앗....!!....으음...흐읏...읏....."
재준이 하체에 더 센 힘을 가하자, 재준의 몸 아래에 깔린 강태의 신음성도 높아졌다.
희열에 차 재준의 허리에 감겨오는 강태의 다리를 느끼자...
재준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안도감에 사로잡힌다..
뭐랄까....강태로 하여금 이런 쾌락을 경험하게 해 줄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일종의 우월감이 든다.
사실...강태가 없는 빈집에 혼자 들어설 때부터...
재준은 슬금슬금 기분이 저하되기 시작했었다.
열흘 남짓한 시간동안 자신을 맞아주던 '오셨어요...'란 소리에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혼자서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와, 자기 손으로 옷을 정리해놓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는 내내....
마음 한켠을 차지하고서 재준을 신경쓰이게 하던 '허/전/함'....
이재준...미친놈....
넌 언제나 혼자였잖아....새삼스럽게 왜 그래....
위와 같은 말로 자신을 질책해 보기도 했지만...
강태가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자꾸만 시계 쪽으로 향하는 눈길을 억제하기 힘든 재준이었다...
그러다가 점점....자기 자신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이는 자신에게 화가 나는 재준....
꼭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데 12시가 다 되어 들어온 강태는...
첫 데이트를 마치고 온 소년처럼 한껏 상기된 표정이었다..
태현과 보낸 하루가 무척 즐거웠던 모양인지...
재준 앞에서는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설레임에 들뜬 얼굴로 집안에 들어서는 강태를 보자....
재준은 꾹꾹 눌러왔던 뒤틀린 심사를 엉뚱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말았다..
외출하고 돌아온 강태에게 씻을 틈도 주지 않고 그를 침대 위로 올라오게 한 재준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여유나 기교를 부리지 않고, 굶주린 짐승처럼 강태의 몸을 범해나갔다...
애완동물을 길들이는 조련사처럼....
언제나 능숙한 손길로 강태의 육체를 가지고 놀던 재준이었기에...
성급하게 달려드는 그가 의아하면서도 무서운 강태였다..
하지만 뭐라고 물을 처지도 아니라서 강태는 다만 재준의 리드대로 순순히 따라가며 그의 몸을 받아들였다..
격렬하게 허리를 놀리던 재준이 거친 호흡을 뱉어내며 강태 안에서 폭발하고...
긴 여운을 남기면서 강태에게서 몸을 뺀다..
정사의 향연이 끝난 뒤, 잔잔하고 나른한 정적을 즐기며 누워있는 두 사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강태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재준은 그대로 누워서 눈으로만 그의 동작을 쫓는다..
"....주무실 거에요...?.."
헝클어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내리며...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작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강태의 모습이.....
.....예쁘다....
이렇게 아름답고 완전한 소유물을 갖고 있다는 만족감에 재준은 기분이 좋아진다..
이 아이는.....내 수중에 있다...
이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바로 나, 이재준인 것이다...
은근한 지배심리가 재준의 긴장을 느긋하게 풀어주고...
잠들기보다는....지금의 이 유쾌한 기분을 좀 더 음미하고 싶다..
"아니...별로 자고 싶지 않은데....2층에 가서 술이나 한 잔 해야겠어....피곤하면 먼저 자...."
바닥에 벗어 던졌던 옷들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입으며...재준이 말하자, 강태 역시 그를 따라 몸을 움직이더니....
스스럼없이 재준의 하얀 목욕가운을 알몸 위에 걸친다..
그 모습이 마치.....재준의 하얀 육체가 강태의 전신과 밀착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정말....희한한 녀석이다.....
다른 사람이 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인데...
저 녀석은 조금만 자기 의지대로 움직여도....
동작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성적인 느낌으르 주니 말이다..
그 타고난 색기와 요염함은 악마가 그에게 준 선물일까....
거룩하고 성스러운 신께로부터 그런 요사스러운 기운을 내려 받을리는 없을 터이니..
필시 사악한 악마로부터 전수 받은게 아닐까....
훗.....녀석에게는 너무 가혹한 말인가.....
허무맹랑한 생각에 빠져있는 재준에게 특유의 말간 웃음을 지어 보이며 얘기하는 강태...
"그럼 제가 얼른 씻고 나서, 안주 만들어 가지고 올라갈게요....먼저 가 계세요..."
하루가 다르게 사근사근해지는 강태의 태도에...나날이 의구심이 쌓여가는 재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수긍할 만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강태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가는 거라고 편하게 믿어버리면 되는걸까....
그러기에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원래 이렇게 강한 녀석인가....
부잣집 막내아들로 곱게만 자란 녀석인데...
정말 강태가 현재의 환경변화를 수용하고, 거기에 자신을 맞춰나가고 있는 것이라면....재준은 그의 유연성에 내심 감탄을 하게 될거라 생각한다..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 강태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재준도 2층에 있는 홈 바로 발을 옮긴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재준인지라, 그의 홈 바에는 흔한 맥주부터 구하기 힘든 고급양주까지 갖가지 술이 구비되어 있었다..
안주를 만들어 오겠다던 강태의 말을 떠올리며, 재준은 그에게 어울릴만한 칵테일을 한번 만들어 보기로 한다..
우선 강태의 주량을 잘 모르니까, 너무 농도가 진한 보드카나 위스키보다는 증류주를 베이스(:칵테일을 조합할 때 바탕이 되는 술)로 택한다..
스퀴저를 사용하여 레몬과 라임의 즙을 짜고...
그 즙에 시럽과 설탕을 첨가시켜 셰이커에 넣고 혼합했다..
마지막으로 유리 글라스의 입대는 부분에 껍질을 벗긴 오렌지를 얹어 향을 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로부터 오는 호젓함이나 뿌듯함을 느껴보기도..
재준으로서는 색다른 체험이다..
매우 어색하고 쑥스럽지만......기분이 나쁘진 않다....
아니....오히려 좋다......정말 좋다......
자기가 마실 것으로는 탄산수에 위스키와 소다를 섞은 하이볼을 택한다..
두 잔의 칵테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재준이 10분쯤 기다리자...
베이지색 면바지에 카키색 니트 차림의 강태가 멀끔한 얼굴로, 쟁반에 안주거리를 받쳐들고 나타났다.
"콘버터라는 건데....오늘 생일파티 갔다가 처음 먹어봤어요...."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것은, 바게뜨 빵 위에 옥수수와 치즈를 얹어놓은...특이한 요리였다..
한 입 베어물었더니 입 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맛있네...'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재준은 강태에게 칵테일을 권한다..
"방금 만든거야....이름은 '데이지'라고....처음 칵테일 마시는 사람한테 제일 적당한 걸로 골랐어..."
강태로서는 정말 뜻밖이었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투지만, 재준이 자의적으로 나서서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었다는 것 자체가 강태에게는 놀라움이었다..
조금 멍해진 얼굴로 간단하게 '잘먹겠습니다' 말하며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강태...
난생 처음 맛보는 칵테일은 달콤 쌉싸름하고 향기로웠다..
아무말 없이 술만 홀짝이는 재준....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에 대해 신경쓰는건 강태뿐인 것 같다..
괜히 쭈삣거리며 내리깐 눈으로 흘끔흘끔 재준을 훔쳐보는 강태와는 달리, 재준은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입을 굳게 다문채...
잔에 담긴 녹색 액체에만 시선을 주고 있다..
"저어....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주저하던 강태가 결심한 듯 힘주어 말문을 트고...
칵테일에만 붙박혀 있던 재준의 검은 눈동자가 강태의 얼굴에 머무르며....눈빛으로 강태의 다음 말을 재촉한다..
"한가지....제안을 하고 싶습니다....정확히 얘기하자면 부탁이라고 해야겠지만..."
"뭔데??"
강태는 잠깐 말을 멈추고, 한번 더 생각해 본다..
재준은 잠자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려 준다..
이윽고 결단이 섰는지,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며...강태가 입술을 뗀다.
"제 위치를 바꿔주세요..회장님과 저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키며, 재준이 강태에게 요구한다..
"제가 회장님의 '종'이 되는 것으로...회장님과 전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전 더 이상...'종'이라는 위치에서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저 자신이 더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건가? 무효로 하자고?"
"아니오, 그럴수야 없죠....그럴거면 애초에 계약을 맺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계약 내용을 약간 수정하자는 거죠...좀 더 현실적으로 말이에요..."
좀전까지 보이던 어리숙하고 움츠러든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당당하고 유창하게 말을 이어가는 강태...
새로운 강태의 면모에 속으로 흠칫 긴장하는 재준...
하지만 겉으로는 여유자적한 미소를 띄우며 묻는다..
"어떤 식으로 바꾸고 싶은데?"
그러자 강태는 자세를 바로 고쳐 앉으며, 재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는..
명확한 발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무게를 실어 입 밖으로 내보낸다.
"저는....정식으로 회장님의 '정부'가 되고 싶습니다.."
강태의 입에서 나오는 '정부' 라는 두 글자를 듣자, 재준은 자신이 4,50대 아저씨가 된 듯한 느낌이다..
아내가 있는 기혼자들이야.. 젊고 예쁜 여자들을 '정부'라는 명목으로 한 둘, 혹은 여럿씩 두는 경우가 이 바닥에선 허다하지만....
재준처럼 갓 스물이 지난 청년들은 자유롭게 이 여자, 저 여자를 전전하는게 보통이다.
그런 재준에게 '정부'를 삼아달라고 자청하는 강태...
확실히 아직도 지하세계의 생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강태의 제안이 그다지 싫지만은 않은 재준...
한 쪽 입꼬리를 올리고 씨익-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강태에게 가벼운 투로 되묻는다.
"정부라.......네가 내 '정부'가 되면....뭐가 어떻게 달라지는 거지?"
"그건 저보다 회장님이 더 잘 아실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회장님 같은 조직의 보스가 데리고 있는 정부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저도 그 역할을 맡게 되는거죠....뭐, 제가 짐작하기로는...
주된 할 일을 물론 당연히 '섹스'이고...그 밖에도 파티나 행사 같은데에 동행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회장님께서 그러셨잖아요.....저를 선택하신 이유는 '섹스' 때문이었다고..
어차피 그렇다면, 굴욕적으로 '종'이란 위치에 있기보다는...좀 더 나은 신분으로 회장님 곁에 있고 싶어요...
설마....제가 남자이기 때문에....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까 봐, 그게 걸리시는 건 아니겠죠?
회장님은 그런 고정관념에는 얽매이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아닌가요...?"
빈정거리듯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강태의 빨간 입술이....
참을 수 없을만치 도발적인 느낌을 준다...
저 정도라면.....충의회 보스, 이재준의 정부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재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야릇한 기대감에 들뜬 음성으로...
강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좋아, 강태.....이제부터 나 이재준의 정부로써 여기 사람들한테 알려지게 될거야....
그건.....너도 이쪽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의미한다.....
그걸 명심하도록 해......."
(21)
혁수와 처음 만난 건....작년 겨울이었다..
늦겨울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2월의 하순...
곧 있으면 펼쳐지게 될 캠퍼스 생활을 고대하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예비 대학생 주혁에게...
새로운 '어머니'가 생기던 날....
그날....
아버지와 낯선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오던 주혁 또래의 사내아이...
주혁과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키...
새로운 어머니와 더불어 주혁이 얻게 된 새로운 '형제'였다..
생일이 한 달 차이나는 동생, 안/승/호...
아버지의 재혼에 대해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은 주혁이었다.
아버지에게도 당신 자신의 삶이 있는 거니까...
아버지의 선택에 대해서 주혁이 왈가왈부 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친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지 5년만의 일이었다.
워낙 몸이 약한 탓에, 자식이라고는 겨우 주혁 하나만을 두시고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신 어머니...
주혁을 낳은 뒤로도 십수년 간 병석에 누워지내는 날이 더 많았고...
주혁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기억은 항상 창백하고 핼쓱한 얼굴로 시름시름 앓아 누워 있는 모습뿐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따뜻한 모성애나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인지..
주혁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담담하기만 했다..
그정도로 주혁에게 있어, '어머니'라는 존재는 지극히 미미한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5년 후...
새어머니가 오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에도 주혁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었다..
혹시라도 주혁이 자신에게 배신감이나 반항심을 품지는 않을까 근심했던 주혁의 아버지, 인하는...
그런 주혁의 반응에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가 막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혁의 생각에, 새로운 식구가 될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아내'라고 해야 옳았다.
솔직히 주혁 자신은 '어머니'라는 존재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건...태어나서 지금까지 진정한 어머니의 애정을 경험해 보지 못한 주혁에게는 자연적인 심리적 특성이었다.
그랬었기에....새어머니와 처음 만나게 된 그날도....
주혁은 별 다른 생각없이 그녀를 맞아 들였다.
연녹색 양장 투피스 차림의 중년부인은 주혁에게 잘 보이기 위해 꽤나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그녀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주혁은 새어머니를 밝은 미소로 환영해 주었다.
중년부인은 주혁의 서글서글한 태도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해 했다.
주혁은 사뭇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온 자신의 새 '동생'에게도 친절한 미소를 선사하려 했다..
그에게로 눈을 돌리고......
주혁은 웃을수가 없었다.
어떤 표정도 지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눈꺼풀을 깜박거릴 수조차 없었다.
그냥......순간적으로 망부석처럼 빳빳이 굳어버렸다..
평생 찾고, 헤매고, 구하고, 원했던 모든 감정과 느낌들이...
거기 다 모여 있었다...
바로 그 사람에게...전부 속해 있었다..
주혁에게는...환희와 절망, 양극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날이었다..
그 후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와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기쁨보다는 슬픔이 커져갔고...웃음보다는 한숨이 늘어갔다..
되돌리고 싶었지만....돌아갈 곳조차 알 지 못했다..
그렇게 무모하게....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만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이르렀다..
언제나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하고, 도망치려 하는 그를...
정말 악착같이, 혼신을 다해 쫓아온 주혁이었다..
그를 곁에 두기 위해...
'이복동생' 이 아닌 독립적이고 개별화 된 '안혁수' 그 자체를 얻기 위해...
주혁은 인륜적으로 엄금되고 있는 섹스라는 금단의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혁수는 여전히 주혁과의 먼 간격을 고수하고 있다.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오히려....다른 여자의 남자가 되어, 그녀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
이젠 정말......지친다......
통로가 보이지를 않는다...
혁수에게로 향하는 통로가...모두 막혀 버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어떻게 해야 할지.....주혁은 고민한다.
혁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책을 모색한다..
처음 얼마동안은...그토록 혁수에게 집착하는 자신이 용납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고...
온몸을 휩싸는 강렬한 느낌들을 매정하게 뿌리치던 주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부정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인정하고 체념한 지 오래다...
지금 이 순간, 주혁을 빈사상태로 몰고 가는 것은..
혁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거짓과 위선으로 똘똘 뭉친 계집에게 혁수를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찾아와야 한다....되돌려야 한다....
운명이 도와주지 않는다면.....내 힘으로라도 다시 찾고 말리라....
집념으로 바르르 떨리는 주혁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푸르스름한 후광을 발산한다..
그 푸른빛과 썩 근사하게 조화를 이루는 담배의 빨간 불빛..
그리고 조소실 한 귀퉁이를 밝히는 노오란 스탠드 불빛...
아무도 없는 학교 조소실에서...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는 주혁..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듯이 앉고..
적당히 다리를 벌린 자태가 무척 남성적이고 카리스마 있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칼이..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도자기 인형같은 인상이다..
그런 그에게...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그정도로 주혁에게 내재 된 신비로움과 이미지는 압도적이다....그리고 현란하다...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는 선망의 대상, 장주혁....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해 있다..
유일하게 그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한 사람...
'안혁수'에게만 고정되어 있다...
또한 안혁수는...주혁에게 허락되지 않는, 주혁이 가져서는 안될 단 한 사람임에도 틀림없다.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념들이 불쑥 튀어나와 주혁의 머릿속을 괴롭힌다.
그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그 쓰라린 고통을 숙명처럼 감내하며...
주혁은 힘없는 손길로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진다.
그리고 별로 가고싶지 않지만 갈 수밖에 없는 집을 향해 몸을 일으킨다.
문쪽으로 돌아서는 데, 희끄무레한 형체가 불분명한 윤곽을 그리며 서있는게 보였다.
궁금증에 물든 눈으로 자세히 살펴보는데...
그 형체가 주혁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자신의 실제 모습을 드러낸다...
소빈이었다...
아이보리색 면바지에 상아색 니트 스웨터 차림이 청순미를 돋보이게 해주고...
얌전하고 조신한 걸음걸이 역시 그녀의 여성스러움을 한층 더해준다..
그녀는 확실히 혁수가 좋아하는 타입이다.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아직 있었구나?"
화장기 없는 깨끗한 소빈의 얼굴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주혁에게 말을 건다.
남들이 보기엔 천사같은 웃음이지만...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는 순백의 가면 속에 숨겨진 추악한 본질을 알아버린 주혁에게는...역겹고 구역질 날 뿐이다.
"나 혁수 어딨는지 몰라. 오늘 하루종일 못 봤어..."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주혁은 애써 무덤덤한 투로 얘기하려 한다.
마음속의 증오와 미움이 표시나지 않도록...
행여라도 치졸한 질투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을까...
주혁은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아니, 혁수 얘기가 아니라...너 만나러 온거야 주혁아...."
그렇게 얘기하며 바싹 주혁에게로 다가서는 소빈...
그녀의 은은한 비누냄새가 주혁의 코끝으로 풍겨오며...
주혁을 올려다보는 커다란 소빈의 눈동자에 파릇한 광채가 감돈다.
언제나 사슴같이 순한 눈빛을 하고 있던 까만 눈동자가...
저돌적이고 대담스럽게 반짝인다..
"옛날부터 너랑 얘기 좀 하고 싶었는데...그럴 기회도 없었고..
또 주혁이 네가 너무 찬바람 쌩쌩 나게 구니까 어디 말을 붙일수가 있어야지...."
"나랑 왜? 나한테 뭐 할말 있어?"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말투에 가시가 돋힌다.
솔직히 소빈과 마주하고 있는 건 불편하다.
주혁은 어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심정이다.
소빈의 얼굴 위에 자꾸만 겹쳐 보이는 혁수의 영상이 주혁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잠깐 앉아봐....멀뚱히 서서 이러니까 더 웃긴다, 얘...."
소빈이 멋적은 웃음을 흘리며 작업용 책상위에 걸터앉자,
주혁은 얼른 그녀와 대화를 끝내려는 생각으로 맞은편 책상에 아무렇게나 털썩 엉덩이를 붙인다.
"얘기해 봐....나 기다리는 거 싫어하니까 빨리 말해..."
주혁 특유의 중저음으로 이런 말을 내뱉으면...상당히 거만하고 귀에 거슬리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소빈은 의외로 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문득 그 표정이, 지난번 세라가 자신이게 거절당하고 나서 보였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하자구.... 사실 나...주혁이 너한테 관심 있어.. 너도 눈치 챘겠지만..."
소빈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심상치 않다는걸 깨닫자, 주혁의 얼굴이 경직된다..
건성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흘려 넘기던 주혁의 청각이 민감하게 신경세포를 깨워 일으키고..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마. 내가 너한테 접근하려고 일부러 혁수를 사귄건 아니야.
처음에는 혁수가 정말로 맘에 들었어.. 사귀어 보니까 진짜 괜찮은 애고....나한테 잘 해줘....
너무 착하고...매너 좋고...생긴것도 그만하면 합격이지.... 지나치게 순진해서 탈이긴 하지만..."
소빈이 혁수를 자기 멋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느낌에...
주혁의 가슴 속에서 겨우겨우 꺼트렸던 분노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주혁은 일단 자중한다...
냉정을 잃지 말자....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교활한 주혁의 이성은 광분해서 날뛰려 하는 주혁의 감정을 지그시 붙잡아 말린다..
"그래서....지금 나랑 사귀자는 거야? 양다리를 걸치겠다~~이건가?"
싸늘한 그의 음성은 폭풍 전야의 불안하고 꺼림칙한 고요함을 담고 있다.
그러나 소빈은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전혀....솔직히 넌 사귈만한 남자는 못 돼...
너같이 무뚝뚝하고 차가운 남자는...피곤해서 사귈수가 없어..
애인으로 옆에 두기에는 혁수처럼 수더분하고 편한 애가 제일이지..
적당히 괜찮게 생겼고, 꽤 쌔끈하면서도 부담이 안 가는 스타일이잖아..
그래서 혁수가 인기가 많은거야...."
"풋...그래? 그렇게 만점짜리 애인을 옆에두고, 왜 나한테 한눈을 파는건데?
그리고 사귀자는 것도 아니라면...도대체 나한테서 바라는게 뭐야?"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얼마간 뜸을 들이는 소빈...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난 말이지....내가 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거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상관없이 말이야....
그래서 혁수도 내 남자로 만들었고...지금까지 아주 잘 지내고 있어...
근데 내가....나 이소빈이....갖고 싶은 남자가 하나 더 생겼어...
그게 바로 너야, 장주혁....
넌 정말......멋있어. 진짜 매력적이야.
생긴건 말할 것도 없고, 네 분위기가...다른 남자들이랑은 차원이 틀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어쨌든 그래.....
음....내가 원하는 건....간단해.....
너랑 한번 자보고 싶어....너같은 남자랑 하는 건 어떨지...
너무 궁금해.....난 궁금한건 못 참거든...."
교묘하게 비틀린 소빈의 마지막 음성...
주혁의 피를 끓게 했던 분노가 슬그머니 그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날카롭고 냉혹한 복수심이 주혁의 심장을 차갑게...얼음장처럼 냉각시킨다..
"그럼 제가 그 궁금증을 풀어 드려야겠네요, 이소빈 양...언제쯤 만날까요...?..."
(22)
강태가 공식적인 재준의 정부로 자리매김하게 되자, 그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재준은 충의회에 속한 모든 조직원들에게 강태의 존재를 공표했고..
조직원들 중 어느 누구도 자기들의 보스가 남자를 정부로 두었다는 데에 한 점 의혹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재준의 선택은 그 자체가 곧 진리였고 충성을 다해 따라야 할 절대명제였다..
그것이 지하세계의 논리였다.
특히 재준이 관할하고 있는 '충의회' 내에서 그 논리는 더욱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강태는 이제 명실상부한 충의회 보스, 이재준의 정부로써 조직원들은 거의 재준과 동격으로 강태를 모셨다.
그들은 강태에게 '도련님' 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재준은 운전을 하지 못하는 강태를 위해 기사까지 붙여줬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갑작스럽고 엄청난 변화 때문에 강태는 그저 정신이 멍할 따름이었다.
그에게 생긴 또 한번의 환경변화....
이전보다는 한결 받아들이기 수월했지만...아직까지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저번에도 그랬듯이, 강태는 차차 익숙해질 것이다..
어마어마한 유연성을 가진 강태의 패러다임이 아니던가..
지난 며칠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생활양식의 변화를 곰곰이 곱씹어보는 강태..
그가 의도했던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재준에게 그같은 제안을 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다가 내 몸만 상하는 것보다는...이렇게라도 그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는게 백배 낫다..
나더러 현실과 타협한 겁쟁이, 비겁자라고 욕해도 할 수 없다..
벼랑 끝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지금의 나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내 자신을 포기할 수 없다...
망가지고 썩어가는 나를 방치해 둘 수는 없다..
한없이 비굴해지고, 탐욕스러워 져서라도...
살아 숨쉬는 나의 자아를 찾아야 한다...
싱싱하게 활동하는 주체로서의 강태, 그것만은 잃을 수 없다..
가볍게 흔들리는 차 속에서, 강태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자신을 달래고 합리화시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앙칼지게 마음을 다진다..
잘 해 낼거라고.....
얼빵한 대학생 강태에서, 지하세계의 막강한 조직보스의 정부로...
보란 듯이 변신에 성공하겠노라고....
새롭게 달라진 환경 속에 새로운 나 자신을 멋지게 끼워 맞추겠다고...
다시는....싸구려 감상 따위에 젖어 약해지지 않으리라...절대로...
다부지게 결심을 바로 잡으며 주먹까지 꼭 쥐는 강태에게 들려오는 핸드폰 벨 소리...
강태는 제법 몸에 배인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귀에 가져다 댄다..
"네..."
"난데, 지금 어디야? 집에 있어?"
역시 재준이다.
강태를 지배하는 유일한 사람...
강태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충의회의 보스...
"아니오, 지금 차안인데요.... 서점에서 책 몇권 사고 오는길이에요..."
"어 그래? 그럼 기사한테 얘기해서 지금 당장 내 사무실로 와..오늘 저녁에 같이 갈 데가 있으니까...."
"어딘데요? 저 지금 옷도 대충 차려입었는데..."
"그건 신경쓸 거 없고,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해 놨으니까 그냥 오기만 해..얼른.."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강태는 핸드폰의 플립을 닫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운전을 하고 있는 기사에게 재준의 사무실로 가라 명했다.
차를 돌려 30분쯤 달리자 흰색 대리석 벽돌로 지어진 6층짜리 건물에 당도했다.
강태로서는 처음 와보는 재준의 사무실이자, 충의회의 근거지였다.
왠지 모를 위압감에 자꾸만 주눅이 드는 자신을 발견하며...
강태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짓는다..
이까짓 빌딩 하나에 오므라들다니....
충의회라는 이름이 붙여진 모든 것에 덤덤해져야 할텐데....
강태가 차에서 내리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직원들이 그를 알아보고는 깍듯하게 예를 갖춘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예에....저기, 회장님 사무실이 몇층에 있죠..?"
"6층 복도 맨 오른쪽에 있습니다....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건장한 사내의 안내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향하는 강태...
오른쪽 끝에 있는, 목재 재질의 큼지막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비서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작은 문이 하나 더 보인다.. 재준의 사무실로 통하는 문이다.
강태를 안내한 남자가 비서에게 '이분이 강태 도련님이셔' 라고 말하자
지적인 인상의 그녀는 불에 덴 듯 발딱 일어나더니 허리굽혀 강태에게 인사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련님...신지수라고 합니다..."
"네에....반갑습니다...."
훈련받은 군인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로 자신을 대하는 그녀를 마주하자...강태는 조금 어이가 없어진다..
꼭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흉기라도 들이대고 있는 것 같다..
비서가 인터폰을 통해 강태의 도착을 재준에게 알리고 강태는 머뭇머뭇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널찍한 규모에 세련된 인테리어...
스무살 짜리 젊은 회장에게 딱 어울릴만한 사무실이다..
육중한 책상에 앉아,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던 재준은 강태의 기척이 나자 고개를 들어 그를 본다..
"어, 생각보다는 빨리 왔네...거기 쇼파에 옷 보이지? 그걸로 갈아입어..."
쇼파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하얀 세미정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척 보기에도 파티용 의상이다..
"파티에 참석하는 건가요?"
"응, 우리 조직이랑 거래하는 회사가 다른 회사를 인수합병해서... 뭐...새롭게 창립하는 기념으로 리셉션을 연다는군...
웬만하면 빠지고 싶은데, 워낙 중요한 거래처라서 말이지...
중요한 분들이 거의 다 오시는 것 같아서, 이번 기회에 너도 소개시키려고 데리고 가는 거야....."
그렇군.....인간 강태가 암흑가의 조직세계에 데뷔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란 말이지...
비록 조직원이 아니라 보스의 '정부' 로서이긴 하지만....
그래도....충의회의 보스 이재준의 정부라면....
상당한 주목을 끌수 있을 것 같은데...?
게다가 나는.....남자의 몸이 아닌가.....
"그리고 앞으로 이런 자리 자주 나가게 될텐데...미리미리 익숙해져야지...오늘 가서 잘 배우도록 해...."
"네..."
그러믄요.....
이 자리를 통해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면....
최선을 노력을 다 해야겠지요....
난 잘할겁니다.....
더 이상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지만은 않을겁니다...
신께서 내게 부여한 나의 특출난 미모로 얻게된 자리, 이재준의 정부...
그 타이틀을 이용하여,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마음껏 향유할 겁니다...
- 리셉션은 어느 호텔의 이벤트 홀에서 열리고 있었다.
연회장 가득, 값비싼 옷을 몸에 두른 거물급 인사들이 바글바글 했다..
호화롭게 꾸며진 실내에서는 대화와 웃음과 음악이 끊이질 않았다..
처음 직면하게 된 화려한 별천지에 벙쪄 있는 강태를 이끌고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재준..
금방 여러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그가 이런 자리에 자주 참석하지 않는 탓도 있을게다..
보기드문 재준의 등장에, 연회장의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고...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재준과 함께 온, 강태에게로 집중된다..
그러나 강태는 파티의 성대함과 화려함, 그리고 자기에게 쏠려있는 수백개의 눈동자에 질려...얼간이처럼 굳어있었다..
"여어~~이게 누구신가~!! 충의회 이회장님 아니십니까?! 이거 정말 영광입니다요..."
두툼하게 살집이 오른 땅땅한 체구의 중년사내가 반색을 하며 재준에게 다가온다..
아마도 이 연회를 주최한 회사의 사장인 듯 하다...
재준은 조용히 웃어보이며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라고 대꾸한다..
"근데 함께 오신 이 분은 누구십니까?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노골적으로 호기심에 찬 눈을 빛내며 재준에게 질문하는 사내...
그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삭히며 재준의 대답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아...처음 인사드리는게 되겠네요...강태라고...얼마전부터 제가 곁에두고 있는 아입니다...
지난번에 우리 조직에 흡수된 '은명회' 회장 아들인데...
짐작하시겠지만, 그러는 와중에 제가 마음에 들어서....제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죠..."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하는 표정이 스쳤다..
지하세계에서 '곁에 둔다'는 표현은 곧 성적 교류가 있는 관계란 뜻이다..
부하를 소개할 때는 '밑에' 라는 말을..그 반대일 경우엔 '모신다'는 말을 쓰는게 보통이다.
명백한 상하관계만이 성립되는 이 바닥만의 풍토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내 놀라움을 수습하고 표정을 가다듬는다..
자칫하면 서울의 지하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충의회의 보스, 이재준의 기분을 언짢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눈밖에 나면 결국엔 자신들만 손해다..
사실상 그가 남자를 섹스파트너로 두었다고 해서 자기들에게 피해가 올일은 전혀 없다.
굳이 혐오감을 나타내 그의 심사를 거스를 필요가 뭐가 있는가?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몸을 사린다..
그리고 아주 선선히...자신들의 세계에 강태를 포함시켜 주는 사람들...
강태는 너무 간단히...너무 쉽게...암흑가의 당당한 일원이 되었다..
다른 남자들이 자신의 정부에게 하는 것처럼, 재준도 강태의 허리에 한 팔을 두르고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며 돌아다녔다..
강태는 기억조차 할 수 없을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을 소개받았고, 그들과 인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강태는 하나씩, 하나씩 알아갔다...
처음에는,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자신의 몸을 소유한 그가...
얼마나 막대한 파워를 지닌 사람인지...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적나라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보다 나이가 1,20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복종과 외경의 눈빛을 한 몸에 받고있는 키가 우뚝 큰 사내...
연회장에 있는 이들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지만, 최고의 카리스마와 권위로 좌중을 자기 발아래 뭉개고 있는 재준...
그는 절대자였고...아무도 그를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강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소위 '정부'라는 역할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파티에 있어서 '정부'란...하나의 장식품이었다.
여자들이 파티에 올 때, 귀걸이나 목걸이 등 악세사리를 주렁주렁 달고 오는 것처럼..
남자들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제일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을 옆에 데리고 나타나는 거였다..
그 남자의 정부가 어느 정도의 미(美)를 겸비하고 있느냐가 마치 그 남자의 능력을 상징하는 듯 했다..
재준은 다만, 자신의 장식품으로 독특하게 '남자'를 선택한 것뿐이었고..
강태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강태는 그날, 연회장에 모인 장식품들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재준의 생각도 그러했다.
어떤 여자도 갖지 못한, 남자들을 끌어당기는 선정적인 관능과..
싱그럽게 무르익은 농염함이 강태의 탐스러운 육체로부터 물씬 배어나왔다..
오늘로써....강태의 육체가 내포한 이용가치는 급격히 상승했다...
(23)
"아아~~정말 미치겠네!! 여태까지 속고만 살았어?! 일단 같이 가보면 알거 아냐~~!!"
세라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소릴 지른다..
그 앞에 선 혁수는 전혀 이해를 못하겠다는 낯빛이다.
집으로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혁수에게 같이 갈 데가 있다며 그의 손목을 잡아끄는 세라였다.
간만에 일찍 귀가했던 혁수는 모처럼 맞게 된 혼자만의 휴식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은터라, 강경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어딘지 확실한 장소도 얘기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재촉하는 세라를 믿을 수 없는 혁수였다..
몇 번 거절하면 그만둘 줄 알았던 세라가, 이토록 끈질기게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자
매너 좋은 혁수도 솟구치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냈다.
"너 정말 왜이러니?! 도대체 어딜 가자는 거야?!"
"미리 얘기해 줄수는 없어. 아무튼 오빠가 꼭 가야 돼!!
나는 뭐 할 짓이 없어서 오빠한테 이러는 줄 알아?! 내 속도 답답해서 터질 지경이니까 제발 나좀 살려주라...응..?!"
세라의 말투가 위협에서 애원조로 바뀌고...그 집요함에 혁수는 항복을 선언한다..
"휴유~~내가 졌다, 졌어....잠깐만 기달려...옷갈아 입고 나올테니까..."
그리고 잠시 후, 간편한 청 힙합바지에 베이지색 니트 스웨터를 차려입은 혁수가 나오고..
세라는 주혁이 일러 준 호텔로 그를 이끌었다.
세라가 가르쳐 주는 대로 운전을 해가니, 중간 규모의 호텔이 나왔다..
주혁과 혁수가 다니는 H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의구심에 가득 찬 혁수의 눈동자가 세라를 돌아본다.
세라는 그녀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로 입을 연다.
"805호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봐...아마 예약되어 있을거야, 혁수오빠 이름으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재밌는 일이 생길걸? 아주아주 쇼킹한 이벤트...!"
".....???"
"내가 할 일은 다 한거 같으니까 이만 가볼게....그럼 다음에 또 봐, 안녕~~~"
의미있는 웃음을 뿌리며 차에서 내리는 세라...
혁수가 뭐라 붙잡기도 전에 휑하니 그에게서 멀어진다..
쇼킹한 이벤트....
혁수는 명치끝에서부터 묵직하게 차오르는 불안과, 그에 수반되는 스릴을 느낀다..
짐작가지 않는 미지의 사건 앞에서 도망치기보다는 맞닥뜨리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위험한 호기심이 혁수를 대범하게 만들고...
혁수는 포카리에서 내려, 호텔의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다..
카운터에서 확인을 하니, 세라의 말대로 805호실이 자기 명의로 예약되어 있다.
엉터리 무당의 불길한 예언이 하나씩 맞아들어가는 듯한, 기분나쁜 영묘함이 혁수에게 엄습해오고...
혁수는 떨리는 발걸음을 내딛어 805호실로 향한다..
직원에게 받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니, TV에서 많이 나오는 흔한 호텔 방안의 풍경이 시야를 메워온다..
그래도 굉장히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는게 퍽 안락한 느낌을 준다..
혁수는 엉거주춤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방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낯선 가정에 새로 입양된 고아아이처럼...
약간의 공포와 두려움..동시에 기대와 흥분으로 빛나는 혁수의 갈색 눈동자...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혁수는 손목시계를 본다..
저녁 9시에 가까워지는 시계바늘...
여기서....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걸까....이 작은 공간 속에서....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정적 속에...
옆방으로부터 희미하게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괜히 혼자 민망해진 혁수는 헛기침을 해대며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런 혁수의 노력과 상관없이 점점 더 파고가 높아지는 남녀의 신음성...
주혁과 정사를 나누며....나도 저런 소리를 냈겠지.......
인간 사회의 문명과 지성으로부터 한없이 동떨어진, 가장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음파의 진동....
그러한 생각에 미치자 반사적으로 벌겋게 달아오르는 혁수의 초콜릿 빛 두 볼...
어떻게 보면 조금 우스운 광경이다..
그런데....혁수를 무안하게 하던 옆방의 색스러운 소리들을 잠식시키며...
혁수의 귓가에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들려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그에 이어지는 여자의 음성...
"이 호텔은 처음 와보는데....생각보다 깨끗하고 좋네..."
바로 몇시간 전, 학교에서 내내 붙어다니던 자신의 여자친구...소빈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혁수는 주혁과 함께 침대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소빈과 마주보게 되었다..
더 이상 커질수도 없을만큼 확대된 혁수의 동공이 정확하게 소빈의 두 눈을 응시하고...
침대에 귀신처럼 앉아있는 혁수를 발견한 소빈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셨다..
오직 주혁만이 흔들림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충격으로 인해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한 손으로 가린채..파랗게 질려버린 소빈...
믿을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혁수...
피를 말리는 듯, 고문과도 같은 침묵을 깨며...주혁이 입을 연다..
"놀랐지, 안혁수? 네 여자친구랑 내가 어째서 호텔방에 같이 들어왔을까??
뭐...굳이 얘기해 주지 않아도 이미 눈치 깠겠지만....더 정확하게 설명해 줄게...
여기 계신 너의 여자친구 이소빈 양께서...영광스럽게도 나같이 천한 놈과 자보고 싶으시다잖아......
성모 마리아 같은 분께서 청해주시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을 하겠냐마는...
그래도 말이야....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여자친군데....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그래서 너한테 허락 받고 하려구...
어때, 내가 이소빈 양의 욕망을 해소시켜 드려도 될까?
혁수가 보는 앞에서 하면 더 재밌을 것 같은데....안그래, 이소빈??"
소빈을 돌아보는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에 증오와 살기가 등등하다..
널 죽이지 못하는게 한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주혁의 눈동자가 칼이 되어 소빈의 가슴팍을 꿰뚫어 버릴것만 같다..
소빈은 순간 소름이 쫙 끼치며...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혁수는 관자놀이가 띵해지며...목소리조차 낼 수가 없다...
소빈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주혁의 악의에 찬 음성이 더 날카롭게 혁수의 심장을 후벼판다..
전신을 관통하는 맹렬한 통증을 참으며....혁수는 주혁의 심중의 의도를 짚어내려 한다..
이런 행동을 한, 이런 계획을 짠 이유가 무엇인지...
하지만...언제나 그랬듯이....가늠할 수 없다....
그러니...제지할 방도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주혁이 준비해 온 각본대로 조종당해야 한다..
혁수도....또 소빈도.....
"혁수야....난....난....."
겁에 질린 소빈이 어줍짢은 변명이라도 늘어놓으려 한다..
최후의 발악이었다.
그러나 주혁은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소빈을 통째로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온 방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지르는 주혁...
"닥쳐, 이 개같은 년아!! 한번만 더 아가리 놀렸다간 그대로 찢어놓을테니까 알아서 해!!!"
천둥같은 주혁의 고함소리에 혁수는 멍해있던 정신이 번쩍 나며...
두려워 지기 시작한다....
주혁이....화가났다....
무언가가 그를 격분하게 만들었고.....주혁은 그것을 억누를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가슴속에 격렬히 끓어오르는 분노의 불길을...남김없이 뿜어낼 것이다..
이성을 잃고 홧김에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행동이 아닌...
어느때 보다도 치밀하고 계산적인 그만의 논리를 바탕으로...
굳건한 의지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다...
그래서 더욱 두려운 거다.....
주혁을 저지하고 싶었다.
그가 하려는게 무엇인지 몰라도, 여하튼 혁수는 그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불가능 하다는걸 혁수도 알고 있다..
제발...돌이킬 수 없는 한계선만은 넘지 않기를...혁수는 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안혁수, 뭐가 어쩌고 어째?! 이소빈은....내가 상대하는 그런 년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구?!
허어~~그래.....차원이 다르긴 엄청 다르지......
내 주변에는 이렇게 뒷구멍으로 호박씩 까는 여잔 없으니까!!
네 앞에서는 천사처럼 얌전하길래 진짜 네 말대로 그런 여잔줄 알았어...
네가 얘기한 대로 착하고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어!!
근데.....근데....고작 이런 개만도 못한 년 때문에 내가 그렇게 비참해 져야 했던거야?!?
네가 날 떠난 이유가.....날 거부한 이유가.....저 걸레같은 기집애 때문이었어?!!"
여과없이 흘러나오는 주혁의 악담에 소빈은 그 자리에서 돌덩이가 되어버렸다.
늘 입에 발린 찬사와 칭찬에만 길들여진 소빈의 귀에...
잔인하고 독기서린 주혁의 음성이 비수처럼 날아든다..
"내가 제일 참을수 없는게 뭔지 알아?!
저런 인간 쓰레기한테....너를 뺏겼다는 사실이야...!!
안혁수 네가 순하게 구니까 기고만장해가지고...아무렇게나 날뛰는...저런 여자한테 잠시나마 널 줬었다는 게 끔찍해!!
이 병신아, 너 지금 농락당한거야....알기나 해?!?
네가 뭐가 못나서 저딴 여자한테 휘둘리는데....
네가 저년한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뭔데?!
이런 식으로 싸가지 없게 너 갖고노는 년이랑 네가 왜 같이 있는 거냐고?!?!
난........난 그것 때문에 미치겠는거야.....무슨 말인지 알아, 안혁수!!!?"
아니....모르겠어......
저 여자한테 농락당한 사람은 난데.....나보다 왜 네가 더 화를 내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지금 너의 모습......
네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난....알수가 없어....
혁수는 아무말없이 그저 고개만 숙인다..
억울해 하지도 않고, 기막혀 하지도 않는다..
소빈에게 단 한마디 비난이나 욕지거리도 내뱉지 않는다..
마치 자기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는 태도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소빈이 자신을 속인것에 대해, 황당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동안 그녀가 쓰고 있던 천사의 가면이 가진 완벽함 때문에 탄복한 것이지..
소빈의 배신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거나 우울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다만....자신보다 훨씬 심한 과민반응을 보이는 주혁이....
의뭉스러웠고, 무서웠다....
혁수의 초점은....소빈이 아닌, 주혁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다...
도사리고 앉아있는 혁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주혁...
우악스러운 손길로 혁수의 목덜미 부근의 옷을 움켜쥐고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운다..
마른 혁수의 몸이 가볍게 들어올려 지고...
주혁은 그 자리에 못박힌 채 뚫어져라 혁수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빈에게 침을 뱉 듯 이야기 한다..
"이소빈....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
안혁수랑 내가 원래 어떤 사인지.....
네가 네 남자라고 자신했던 안혁수가 사실은 누구껀지....
지금부터 확실하게 가르쳐 줄테니까!!"
그리고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혁수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그의 분홍빛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짓이긴다...
온몸을 뒤틀며 저항하는 혁수를 더 강하게 두 팔로 조이며...
주혁의 혀가 혁수의 입안으로 침범하고..
그 장면을 지켜보는 소빈의 입이 떡 벌어지더니..
부들부들 경련하며 뒷걸음질친다...
메스꺼워 죽겠다는 듯 비릿한 표정을 짓는 소빈...
"더러운 새끼들.....이제 보니까 호모였잖아....?....세상에.....허어!!.......미쳤어....토할 것 같아......"
흉측한 괴물을 구경하는 듯한 소빈의 눈초리....
그녀는 전염병 환자를 피하 듯, 허겁지겁 서둘러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그때까지 난폭하게 혁수를 공격하던 주혁이 입술을 떼고, 여전히 그를 옭아맨 팔을 풀지 않은 채...
음침하리만치 무거운 저음으로 말한다...
"이제 절대로 널......누구에게도 주지 않을거야.....
안혁수 너는....내 남자야......장주혁 꺼라고!!!
내가 가질수 없다면.....다른 누구도 널 가질수 없어!!"
(24)
강태와 만나기로 약속한 까페 유리창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는 태현..
결이 고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다듬으며 옷매무시를 살핀다.
독보적으로 빛나는 그의 초록색 머리칼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태현을 건너다 보고...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시선들을 받아쳐내며, 태현은 까페문을 당긴다.
입구에서 바로 눈에 뜨이는 자리에 가 앉고, 시계를 확인한다.
20분정도 먼저 도착한 태현...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출입문에만 눈동자를 모은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게 이렇게 짜릿한 기쁨을 안겨주다니..
그가 나에게로 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한히 차오르는 충만함...
크리스마스 날 산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들뜨고 설레이는 나의 마음...
그 사람 하나로 인해 온통 환해지는 나의 세상...
요즘 유행하는 노래 가사처럼...내 하루하루가 그로 가득하다...
태현의 생각이 지난번 있었던 강태와의 만남으로 옮아가고..
헤어지기 직전, 어렵사리 고백했던 자신의 진심을 아무 생각없이, 너무나 흔쾌히 받아들이던 강태...
태현의 감정을 단순한 우정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는게 분명했다..
말갛게 웃음 지으며 사뭇 감동한 얼굴로 '고마워, 형..' 이라고 응답하던 그에게 차마 더 이상은 얘기할 수 없는 태현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강태 때문에 얼마동안 혼자서 애를 태우던 태현은...서서히 생각을 고쳐 먹었다.
지금 강태에게 가장 필요한 건.. 편안히 쉴수 있는 안식처이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남은 자신의 혈육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강태에게....
여자도 아닌, 남자인 태현이 '사랑' 운운하며 돌진해 봤자 혼란만 가중시키고 역효과만 불러 일으킬 게 뻔하다..
일단 지금은...한발짝 물러나 있는거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너그러운, '친형' 같은 존재로...
마음을 툭 터놓고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거리낌 없이 들려줄 수 있는 '친구'의 모습으로...
먼저 그렇게 다가가고....그런 다음에....적당한 때가 되면...
진실한 내 마음을 보여주어야지....
강태의 삶 속에 내가 들어갈 만한 여유공간이 생기는 그날...
힘겹게 감춰두었던 내 사랑을....
하지만 제대로 연기해 낼 수 있을지...자신이 없다..
시도때도 없이 튕겨져 나오는, 그에대한 뜨거운 열정을 감쪽 같이 숨길 수 있을지....
그래도 노력하겠다고 태현은 다짐한다..
그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검은색 아카디아...
까페 앞에 멈춰서더니 운전석의 문이 열리면서 재빠른 동작으로 기사가 내린다.
이어서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리는 강태의 모습...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운전기사에게 뭐라고 몇마디 하더니 허리굽혀 인사하는 그를 뒤로 하고, 까페 안으로 들어선다..
강태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는 태현...
그의 걸음걸이, 고갯짓, 표정, 몸전체에서 풍기는 분위기 하나하나가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딱딱한 고치 안에 갇혀있던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로 비상한 듯..
위축되고 침체되어 있던 강태 주변의 공기가 활발하게 약동하는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넋놓고 쳐다봐? 내 얼굴 처음보는 사람마냥..."
태현의 맞은편에 앉으며, 강태가 그의 어깨를 툭 친다.
깊게 쌍커풀진 예쁜 눈매에..언뜻언뜻 엿보이던 지친 그림자의 자취가 사라졌다....
아니...가리워져 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너어...이뻐졌다...?"
"푸훗....형도 이뻐졌어....^^;;"
싱글싱글 웃으며 태현의 말을 받아넘기는 강태..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트리스에게 코코아를 시킨다.
"네가 어린애냐....코코아를 먹게....-_-;;"
"치잇...애들만 코코아 먹으라는 법 있어? 맛있으면 먹는거지...-_-++"
새된 목소리로 궁시렁 거리며 빨간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미는 강태..
재준이는....저 입술을 가져 봤겠지....
저 황홀한 육체를 품어 봤겠지....
저 애의 깊숙하고 은밀한 곳까지 들어가 보았겠지...
매일 밤...저 애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느낄수 있겠지...
재준이 부러웠다. 자신이 열등하게 느껴졌다.
씁쓸하다...
강태를 만나고 나서부터...태현은 이제껏 단 한번도 겪지 못한.. 온갖 감정과 생각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
예전에도 좋아했던 사람은 많았다.
워낙 감정의 기복이 심한 태현이라, 누군가에게 쉽사리 마음을 주고 또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좋아하는 사람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고교시절 내내 열렬히 교제를 나누었던 여학생에게조차...
이런 욕망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저...함께 있는 것이 좋았고,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지금 태현은 강태를 소유하고 있는 재준이 너무도 부럽다.
그것은 곧, 태현 자신도 강태를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강태의 육체도, 정신도...그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자신을 깨닫게 되고..
무력감에 사로 잡히는 거다..
젠장....천하의 문태현이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여자도 아니고 같은 남자한테....
이따위 한심스러운 기분은 정말....너절하다..
구질구질하게스리.....
문태현....너랑 진짜 안 어울려.....
너 좋다고 목매고 있는 여자가 어디 한둘이냐?
뭐가 아쉬워서 얘한테 끌려 다니는거야....
이 아이는...네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이자 후배의....
.....잠자리 상대라고..........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사람 앞에 앉혀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상체를 대뜸 앞으로 내밀며, 눈꺼풀을 살짝 치켜올리는 강태의 모습..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유난히 나긋나긋하고 살가운 그의 목소리와 말투....
망할....저렇게 예쁜데....아주 사람을 반쯤 미치게 만드는데.....
환장할 노릇이다...정말......
"나가자, 너 좋아하는 영화 보여줄게.."
더 이상 강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끓어오르는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의 발치에 엎드려 사랑을 애걸하게 될 것 같다..
그런 끔찍하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태현은 허둥지둥 강태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집중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 나섰다..
-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갑자기 물이 보고 싶다하는 강태 때문에 한강 고수부지로 차를 달려온 두 사람...
초봄의 쌀쌀한 강바람이 아스팔트 바닥위에 철퍼덕 앉아있는 강태와 태현의 주위를 둘러싼다..
그러자 한기가 도는지 옷 앞섶을 여미는 강태...
태현은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자기 웃옷이라도 벗어서 강태 어깨에 걸쳐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닭살스럽고 유치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오고 처음인데...오랜만에 오니까 참 좋다...."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는 유람선을 눈으로 쫓으며...
강태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가만히 강태의 말을 듣고만 있는 태현....
강태의 나즈막한 비음을 감상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친구들 다섯이랑 와서 고기 구워먹고 술마시고 그러면서 놀았었는데......재밌었어....."
그리 오래된 추억도 아니건만...
강태의 눈은.. 다시 돌아갈수 없는 옛 시절을 회상하는 노인네 처럼...아련한 그리움에 잠겨있다..
"학교 다닐때는..이 지옥에서 언제 벗어나나...그런 생각밖에 안 했었는데...
지금은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거 같아...
사람이란 게.....참 웃기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걸까....
그래, 진짜 웃긴다...그렇게 얘기해야 하나...?
참나...문태현이 살면서 말문이 막힐때가 다 있다니....
하여간 이 녀석 덕분에 색다른 경험 한번 많이 하는군...-_-;;
입을 열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태현에게 강태가 눈길을 박으며 한 옥타브 정도 올라간 음색으로 말한다..
"오늘 나 보면서......뭐 달라졌다는 생각...안했어..?"
태현의 머릿속을 해부해 본것처럼 요점을 정확히 집어내는 강태에게 놀라워 하며...
감탄이 뒤섞인 어투로 떠듬떠듬 이야기 하는 태현...
"어어...솔직히....변화가 생긴 것 같다.... 무슨 일....있었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태현에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강물에 시선을 두는 강태...
그의 다문 입술 사이로 어떤 말들이 새어나올까...
태현은 궁금하고, 기대되고, 긴장된다...
그리고....조금 두려워 진다...
"나....정식으로 회장님 곁에 있게 됐어.... 무슨 말인지...알지?..."
순식간에 흐트러지는 태현의 표정...
멍청하니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는게...
들녘에 있는 황소를 연상시킨다..
"정식으로....회장님의 정부가 됐다는 소리야... 충의회 일원들한테는 물론이고..이쪽 사람들한테 거의 알려졌어..."
"그,그럼...너어.....진짜로 그 바닥에....."
덜덜 떨리는 입술로 겨우겨우 목소리를 내는 태현과는 다르게 강태는 의연하고 차분하다..
".....가,강태..너어...그래도 괜찮아...? 사람들한테 그런식으로 알려지면...넌...넌....."
"노예처럼 기면서 사는 것 보다는 나아.... 어차피 이렇게 된거...모욕당하고 밟히면서 살 필요가 뭐 있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아니고...내몸, 내 정신만 상할 뿐이야.. 그럴수는 없어....."
"...하,하지만...넌....넌 남자잖아....같은 남자하고 그런다는게...."
"형도 같은 남자면서 나 좋아하잖아.. 근데 왜 그런 말을 해??"
태현의 뒷머리에 둔탁한 충격이 가해진다..
이젠 떨리지도 않고, 아예 눈썹조차 까딱하지 못한다..
홀연히 덩그랗게 비어버리는 태현의 눈망울...
혼이 나간 육신이 껍데기처럼 남루하게 버려진 듯 하다..
"내가 바본줄 알아?....형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거 하나 눈치 못챌 것 같애...?"
"난 네가...모르는 줄 알았어.... 저번에 얘기했을 때도 별 반응이 없길래 난....."
"알아.....나에 대한 형 마음이 어떤지.... 그리고...정말 고맙게 생각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고...친형처럼 챙겨주고....너무너무 고마운데...."
그다음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고맙다'는 강태의 말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냥 그쯤에서 입을 다물어 주기를...
닳아빠진 짝사랑의 주인공으로 나를 몰락시키지 말아주기를...
너와 함께 보낸, 행복한 하루의 마무리를...
실망과 쓰라림으로 장식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마음속으로 청원하고 있는 태현의 속삭임을 모른척하며..
끝내는 태현의 고막을 아프게 울려오는 강태의 목소리...
귀를 막고 도리질 치게 만드는...
그럼에도 단념할수 없게 하는...
결국엔....태현을 가난하고 고독한 외사랑의 행로로 몰아내게 될...
강태의 이야기...
"태현형.....나...사랑하지 마.....
형이 첫눈에 반했던...형이 사랑하게 된 강태는.... 이미 죽었어.....
그때의 강태는...이제 없어....
내가...내 손으로....죽여버렸어....."
(25)
세상의 어떤 사랑도 혼자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한 사람이 지은 죄라면, 당연히 상대방에게도 죄가 주어져야 한다..
- <실락원> 중에서..-
서양 미술사 강의가 있는 조형학부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혁수의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엉켜있다.
소빈의 얼굴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녀가 어떤 식으로 행동을 취할지...난감하기만 하다.
잘못한 것은 그가 아니라 소빈 쪽인데..
마음 졸이며 안달복달 초조해 해야 할 사람은 소빈인데..
강의동에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발뺌하게 싶어지는 자신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와인빛 단발머리로 조그마한 얼굴을 가려버리며,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혁수...
도망치고 싶어하는 자신을 호되게 다그치며...강의실의 철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더더욱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본다..
100명이 넘게 자리를 메우고 있는 아이들...
모두가 혁수에게로 눈동자를 모은다.
그 눈동자들은 혁수가 나타나기 바로 전까지, 주혁에게 집결되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맨 뒷자리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주혁...
방금까지 수많은 아이들의 눈총세례를 한몸에 받던 사람치고는 너무 태연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혁수의 등장으로 인해 잠시동안 머물렀던 침묵은 다시금 수군수군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깨어지고...
소문 한번 더럽게 빠르군..
이틀새에 벌써 이렇게까지 파다하게....
입안에서만 맴도는 투덜거림을 꿀꺽 삼키며, 혁수는 주혁과 적당히 떨어진 창가 구석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주혁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음악에 심취해서 감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혁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만 있다..
자신과 주혁을 번갈아 주시하고 있는 학생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는 혁수..
창밖의 풍경으로 눈을 돌리며 아이들의 쑥덕거림과 비아냥거림을 외면한다..
주혁과 혁수 사이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킬만한 획기적인 장면의 연출되기를 기대했던 학생들은, 예상외로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는 두 사람을 보며...
실망감에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H대 전체를 숱한 논란과 화제로 술렁이게 한, 엄청난 소문의 장본인들이.....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결국, 이기적이고 무지한 대중들은..스캔들의 진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주혁과 혁수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평소에도 깝죽거리며 곧잘 나서서 설쳐대던 남학생 하나가 조롱에 찬 음성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몽땅 다 까발려 졌는데 이제와서 웬 아닌척?? 야아~~아주 내숭이 프로급이구만..."
혁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듣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그는 정상적인 청력을 가진 건강한 사람이다..
"허! 그러게 말야~~ 야, 안혁수! 애들 눈치볼거 뭐 있냐??
어차피 다 아는 사실 아냐? 괜히 내숭 떨지 말고 장주혁 옆에 가서 앉아~~~ 괜찮으니까....킥킥...."
한명이 첫 테이프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멸시와 비난의 화살을 던져댄다..
"어쩐지~~ 장주혁 저 새끼가 혁수 보는 눈이 어째 좀 야리꾸리하다 했어..."
"저 새끼들 집에 둘이 같이 있으면 매일밤 그짓하는거 아냐?
쿡...한집에 살아서 아주 편하겠어...여관비도 안들고....형제끼리 좋아하면 그런 장점이 있구나~~ 쿠쿡...."
"에~이, 지저분한 새끼들....야!! 둘중에 누가 공이냐? 얘들아, 누굴거 같애?"
"그야 장주혁이겠지~~ 저 새끼 터프한 척은 혼자 다하잖아...
게다가 저 승혼지 뭔지 하는 새끼 봐라...기집애처럼 오밀조밀 생겨가지고...저런놈이 어떻게 공이냐??"
"아냐~~그건 모르는거다~~ 장주혁 저 새끼, 우리 앞에서는 저래도..또 누가 아냐? 저 새끼가 당하는 쪽일지....
쟤도 가만보면 꽤 이쁘장하니 기집애처럼 생겼잖아..."
"우~~욱!! 설마.....푸하핫!!...생각만 해도 넘어온다,야....꾸엑..."
"에효오~~암튼 소빈이만 불쌍하지...어쩌다가 저런 호모자식한테 걸려가지고...순진한 애가 충격 많이 받았나 보더라....쯧쯧...."
"그러게 말이야~~ 차안에서 둘이 그짓하고 있는거 소빈이가 직접 봤다며?
세상에~~~ 그 마음약한 애가 얼마나 놀랐을까....진짜 소빈이 너무 안됐다..."
그런거였다.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볼과 48시간 사이에....철두철미한 한편의 시나리오가 소빈이란 여자의 입을 통해 완성되었고...
주혁과 혁수는, 그녀가 창작한 시나리오대로 연기하는 두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관객들은...소빈이 지어낸 스토리에 열광하며...
두 주인공, 주혁과 혁수를 사정없이..엄중하게 질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그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한채로 중구난방 떠들어대는 무리들....
그냥...일어나서, 그게 아니라고..전부 거짓말이라고...한번만 소리를 지르기만 해도...
이소빈 그 여자가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장주혁과 안혁수는 그저...생일이 한달 차이나는 이복형제일 뿐이라고...
그렇게 몇마디만 외쳐도 사건은 무마될수 있다..
사람들은 어느쪽이 진실이냐를 두고 자기들끼리 침튀기며 논쟁을 할 것이고...
또 다른 화젯거리가 생기면 금새 이 문제는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질게 뻔했다..
그럼...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예전처럼...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
그런데...알고 있음에도....
주혁과 혁수,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일으킨 커다란 파문이 급속도로 번져나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는 저의는 무엇인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차마 고개를 끄덕여 보일수 없는 질문이 대체 어떤 것이길래....
- 콰당!
주혁이 앉아있던 의자가 세게 뒤로 밀리며 벽에 가서 부딪친다..
그 때문에 갑작스런 소음이 나고...
여전히 두 사람을 씹어대고 있던 강의실 안에 학생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며 주혁을 돌아본다..
가지런하게 빗겨진, 그의 정갈한 이마를 모두 덮고 있는 검은 머리칼 아래...
분노의 검을 세우고 등등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검푸른 눈동자...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강력한 의지와, 막혀있는 현실에 대한 좌절과,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제어되지 않는 감정의 사무침....
이 모든 것들을 힘겹게 부여담고 있는 주혁의 눈동자...
슬프다는 말로는....표현이 되지 않는다.....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싸늘한 핏빛향기를 뿜어내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모멸감과 싸우고 있는 혁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주혁..
절도있는 주혁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점점 더 불안해지고..
달아나고만 싶어지는 혁수...
주혁은 도사리고 있던 혁수의 팔목을 잡아 거칠게 그를 일으켜 세우더니, 누가봐도 야릇한 포즈로 혁수의 허리를 감아 자신에게 밀착시킨다..
혁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이끌려 올 뿐...
지금 주혁의 손길을 거부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는건...
오히려 우스워 보일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얌전히 있자니...혐오감과 경멸, 황당함으로 물든 사람들의 눈빛을 견뎌내기가....고역이다..
그런 혁수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혁은 그의 허리에 두른 오른팔에다가 더 힘을 주며...
마왕의 성에 갇힌 공주를 구출해낸 기사처럼 승리감에 찬 음성으로 입을 연다..
"아무렇게나 멋대로 나불대는 년이나...그 엉터리 얘기를 철썩 같이 믿는 인간들이나...
진짜 하나같이 다 똑같구만.....
그래....마음대로 지껄여라, 이 병신들아....너희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알아 둬..
앞으로 호모 어쩌구 하면서 혁수 건드리는 새끼들은 가만 안둘거야...
어떤식으로든 혁수 괴롭히면...그새끼는 그날로 좆밥되는줄 알아..."
주혁이 얘기하는 중간에 강의실로 들어오신 교수님께서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없이...
주혁은 한 팔로 혁수를 보듬어 안은채, 밖으로 나가버린다..
울컥하고 치솟는 격노의 화염을 그대로 표출하듯...
난폭한 걸음걸이로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자동차까지 혁수를 끌고 온 주혁...
혁수가 저항할 틈도 없이 막무가내로 그를 조수석에 태우고..
빠르게 운전하여 학교에서 빠져나온다..
끔찍한 지옥에서의 탈출에 성공한 것처럼, 때에 맞지 않는 안도감을 느끼는 주혁...
겨우 제정신을 되찾은 혁수가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주혁을 나무란다..
"장주혁 너 정말 왜이래?!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뭐가 해결돼??
네가 이럴수록 상황은 더 나빠진다구!! 왜 네 생각밖에 못해?!?
네가 한번이라도 내 입장에 서서 생각해 봤으면 이런일 생기지도 않았을거야!! 내 말이 틀려?!??"
혁수의 앙칼진 역정을 듣자, 주혁은 급작스런 동작으로 차를 멈춰 세운다.
술집과 노래방들이 즐비한 골목...
오전중이라 아직 다들 문을 열지 않았고, 그렇게 때문에 인적이 없었다..
먹물빛 바다가 고즈넉하게 일렁이듯....
절망의 핏빛향기에 잠긴 주혁의 눈동자가 넘실거리며 혁수의 작고 오목조목한 얼굴 위에 머무르고...
오장육부를 비틀어 짜는 듯한 고통에 절여진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러는 너는.....너는 한번이라도 내 입장이 되본적 있어?!
정말 단 한번이라도...내가 어떨지 생각해 본적 있어...??
뭐가 어째?? 왜 내 생각밖에 못하냐구? 네 입장에서 생각해 준적이 있냐구??
어떻게 네가.....안혁수,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분하고 억울하고 한이 맺힌다..
서글프고 원망스럽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진 느낌이다..
그가 나에게 잔인해 질 수 있는건 도대체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안혁수....넌...악마야.....
천사의 얼굴을 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파멸시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악마....
"지금까지...널 위해서 참고만 있었어!!
네가 곤란하지 않도록...힘들지 않도록....
오로지 네 생각만 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참아 왔어!!
하루에도 몇 번씩,...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아도...
그래도...이를 악물고 견뎠어...!!
그러다가 정말 죽을 것 같으면...숨이 끊어질 것 같으면...
너한테 가서 미친놈처럼 빌었어...빌어도 안되면 강제로라도 널 가졌어...
그렇게라도 안하면 난 정말 살수가 없을 것 같았다구!!
그렇게.......1년동안 그렇게 살았던 나야.....
널 제일 가까운 곳에 두고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게 어떤지...
넌 알기나 해?!? 응??!!
그런 내 심정이 어떨지...너야말로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 있어?!??"
마지막에 가서는 주혁의 음성이 갈라지며...
그르렁거리는 쇳소리마저 섞여 나온다..
주혁이 입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는 건...
그의 외침소리가 쓰라리도록 처연하기 때문이겠지...?
혁수를 얼른 눈을 감는다.
계속 주혁을 보고 있다가는...그의 절절한 몸부림이 눈물로 변하여 혁수의 눈가에 부끄러운 이슬방울을 맺히게 할런지도 모르므로...
혁수는 늘 써먹던 수법을 사용한다..
외면하는 것....등돌리는 것....
그에게서 더 멀리 물러서는 것....
이번에는 정말 많은 간격을 벌어지게 해야할 것 같다...
"....난...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이해하고 싶지 않아....복잡해 지는건 딱 질색이라구......
근데.....장주혁 너때문에...전부 엉망이 됐어....알아...?"
(26)
"내일 모레가 회장님 생신인거 아시죠?
여태껏 계속 저희가 챙겨드리려고 해도 그딴거 신경쓰지 말라시면서 생일날에도 일만 하시는 분이세요...
생일이 뭐 별거냐고 그러시는데....그래도 모시는 입장에서는 영 맘이 편하지 않습니다...
도련님이라도 좀 챙겨드리세요..."
이틀 전, 강태에게 넌지시 위와 같은 당부를 하던 환성의 목소리가 생각나자, 강태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재준이 들어가 있는 옷방을 힐끔거린다..
다른 조직의 보스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일 날, 성대한 파티를 열어 조직원들을 비롯해 여러 연대 인사들을 초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보통 때와 한치도 다르지 않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재준...
역시 그답다.
외출 준비를 마친 재준이 쥐색 양복자켓을 둘러 입으며 현관으로 향한다.
거실 쇼파에 앉아있던 강태는 부리나케 그의 뒤를 쫓아간다.
신발을 신으며 특유의 무미건조한 톤으로 묻는 재준..
"오늘 어디 나갈거야?"
"아니요...집에 있을건데요..."
강태의 대답에 별 관심없다는 듯 건성으로 주억거리는 재준..
물어본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허리를 굽혀 손으로 바지 깃을 바로 잡고는 대문을 열고 나가려 하는데...
조그맣게 그를 부르는 강태의 음성이 재준을 다시 뒤돌아보게 만든다..
재준의 시선을 피한 채, 선뜻 부른 이유를 얘기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강태...
빨리 나가봐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호기심에 강태를 재촉하는 재준..
"왜 그러는데? 얘기해 봐..."
재준으로서는 가볍게 던진 독촉의 질문이...강태에게는 무섭게만 들린다.
겁먹은 눈동자로 재준의 얼굴을 마주보며..등뒤로 감추었던 손을 그에게로 내미는 강태..
그리고...강태의 손에 들려진 작은 사각형 모양의 상자...
연이어 재준의 귓가에 닿아오는 강태의 목소리..
"저어기....저어.....생신..축하드려요.....이건 별거 아니지만 그래도...."
연기 경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풋내기 배우가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대사를 읊어대 듯...
강태의 축하멘트는 어색하고 억지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마치 누가 시켜서 하는 것 같다..
정작 재준은 너무 놀라서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얘기해 주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생일을 챙기는 그의 영리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생일선물을 준비했다는 것 자체가 쇼킹했다.
한번도 이런 아기자기한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강태에게서 생일 축하를 받았다는 것이 더욱 재준을 벙찌게 한다..
비록 그것이 '정부'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일종의 의무감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 하여도...
재준을 감동시키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강태의 선물...
"어어.....그,그래....자,잘 받을게...고맙다....."
창피하게스리....재준은 말을 더듬고 만다..
그런 자신에게 또 한번 놀라는 재준이다.
겸연쩍고 서툴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강태에게서 상자를 받아드는 재준..
더 이상 강태 앞에서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간 충의회 보스로서 위신과 체면이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재준은 화난 사람마냥 몸을 홱 돌려 급한 손길로 문을 열고 휙하니 나가버린다..
그런 재준의 심중을 알 턱이 없는 강태...
또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닌가..뒤늦은 후회를 하며...
재준의 냉담한 반응에 풀이 죽는다..
황망히 강태 앞에서 도망쳐 나온 재준은 대문을 닫고 빌라의 입구를 통과하자, 그제서야 날숨을 돌리며 표정을 가다듬는다.
저만치 앞쪽에 언제나처럼 검은색 XG와 함께, 자신의 오른팔격인 환성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대기하고 있다.
재준이 다가오자 환성은 꼭 짜여진 동작으로 예를 갖춘다.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뒷좌석에 몸을 싣는 재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강태가 준 선물상자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백미러로 그런 재준을 슬며시 훔쳐본 환성은 강태가 자신이 귀뜸해준 것을 따라주었다는 사실에 내심 흐뭇하고 기쁘다..
선물 상자를 내려다보는 재준의 까만 눈동자가 신선한 기대감으로 반짝인다.
영락없는 꼬마아이 같다.
지금의 재준을 보고서...암흑가의 냉혈한 조직 보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주 가끔씩 재준은...어두운 지하세계와는 상극을 이룰만큼 천진한 눈빛을 보여줄 때가 있다..
재준의 손가락이 상자에 씌여진 포장지를 뜯어내고, 내용물을 확인한다..
뚜껑을 열자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 은제 라이터...
반질반질 윤이 나는게 '나 새거에요~' 라고 뽐내는 듯 하다..
그리고 라이터 밑에 깔려있는 하늘색 메모지..
재준은 서둘러 그 쪽지를 펼쳐 읽는다..
[ 부족한 저를 보살펴 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제 성의를 표시하는 것이니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앞으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생신 축하드리고, 건강하세요... ]
단촐하고 상투적이었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딱딱하고 메마른 어투였다.
정성스럽지도 않았고 일말의 애정이나 호의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준은....
황량하게 비어있던 몸 속 어딘가의 공간이 포근하게 채워지는 것 같았고...
사장되어 버린 내면의 생명력이 소성하는 것 같았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살아있다는 느낌....숨쉬고 있다는, 깨어있다는 상쾌함...
진정으로 재준은 강태가 고마웠다.
적어도 그를 정부로 두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곁에 있어주는 그에게...재준은 처음으로....
보답을 해주리라 결심했다..
- "도련님, 저 환성입니다. 회장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셔서요..."
"회장님이 부르신다구요?"
"예...지금 출발하겠습니다.."
강태는 뜻밖에 걸려온 환성의 전화를 끊고 궁금증에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린다..
이런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언제나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어 어디에 무슨 이유로 가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주던 재준인데...
오늘처럼 환성을 시켜 무작정 강태를 데리고 오라는건 이례적이었다..
어쨌든 재준의 명령인지라, 강태는 그에게로 갈 채비를 한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옷들의 가짓수가 늘어난 장롱의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연회색 세미정장을 꺼내는 강태..
흰 폴라티를 받쳐입고, 옆가르마를 타 늘어뜨린 검은색 머리카락을 한올한올 깔끔하게 손질하고..
재준에게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환성이 강태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강남에 있는 유명한 초호화 레스토랑이었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찌할 줄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서있는 강태에게...
수려하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다가와 정중히 물어온다..
"누굴 찾으십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아...예에...저어...이재준 회장님을...."
"아아~ 충의회 이회장님 말씀이시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품위있는 걸음걸이로 앞장서는 웨이터의 뒤를 따라가니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테이블에 자리한 재준의 모습이 눈에 비춰진다..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분위기와도 썩 잘 어울리는 재준의 용모와 자태..
그는....천의 빛깔을 소유한 사람이다...
강태의 기척을 느낀 재준이 창밖에 주고있던 눈길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
웨이터는 공손하게 의자를 뒤로 빼주며 강태가 앉기를 권한다..
익숙하지 못한 동작으로 강태가 엉거주춤 의자에 앉고...
"무슨 일로 이런데에 다 오라고 하신거에요...? 누구하고...약속이 되신 건가요...?"
"아니...그냥.....오늘 아침에 선물 받은것도 고맙고 해서...저녁이나 같이 하려고 불렀어...."
겉으로는 스쳐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내뱉는 것 같지만..속으로는 쑥스럽고 민망해서 죽을 지경인 재준...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는 듯 경악스런 표정을 짓는 강태의 예쁜 얼굴을 일부러 못본 척 한다..
잠시후, 음식도 미리 다 주문을 해놓았는지...
두 사람에게 차례로 선을 보이는 프랑스 정식 풀코스 요리..
강태에게 먹으라고 권하지도 않은채 덥썩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재준은...정말 식탁매너가 형편없다...
게다가 식사를 하면서 말 한마디 없이 먹는데에만 열중하는 그 때문에 강태는 테이블 위의 진수성찬이 모조리 얼어버릴까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둘 사이의 썰렁한 침묵에 안절부절 못하는건 강태 혼자이다..
깨작거리며 제대로 음식 맛을 즐기지도 못하는 강태에게..
재준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자약하게 말한다..
"내가 원래 말주변이 좀 없어....얘기하는 거 싫어하기도 하구..."
"아, 예....괜찮아요...."
"근데...너도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아니오....전 얘기하는 거 좋아해요..."
"그럼 아무얘기나 해봐...나 듣는건 좋아하니까..."
명령조에 가까운 재준의 청탁에 강태는 난처해진다..
평소에 누군가에게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즐기는 강태이지만...
그의 앞에서 함부로 아무 얘기나 떠들어 댈만큼 강태는 아직 그를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저어...그럼, 궁금한거 여쭤봐도 되요...?"
최대한 재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강태는 그에게 청한다..
"그래, 물어봐.."
생각보다 흔쾌히 떨어지는 재준의 대답...
강태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야무지게 입술을 옹송거리며 지난 한달동안 그의 머릿속을 간지럽히던..
재준에 대한 의문의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언제부터...충의회 일을 하신거에요....? 아직 스무살이면 회장이 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 같아서..."
"나? ...태어날 때부터....'충의회'에서 태어나서, 그 속에서만 살았어...
그밖에 다른 세계는 나한테 별 의미가 없어..충의회가 내 생활의 전부야..."
어떻게 출생했고, 어떻게 자라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회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말수가 없는 재준답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고 짤막한 몇 개의 문장 속에 압축해서 이야기한다..
20년 그의 인생경로를 구구절절이 듣기란 이미 틀려버렸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강태..
찰나적으로 희미하게 허탈한 냉소를 머금더니..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회장님은....꿈이 뭐에요...?"
그러자 재준은 옆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연다..
"그런거 없어....난 다만...내가 갖고있는 것들을 뺏기지 않기위해 노력하는 것 뿐이야...
어찌됐든 이 세상은 많이 가진사람 뜻대로 움직이는 거니까...
난 충의회의 이름으로 많은 걸 갖고있고...
또 더 많이 내 재산으로 만들 수 있어....그게 다야.."
엉뚱한 강태의 질문이 효과를 발휘하는 모양이다.
재준의 이야기가 상당히 길어진다..
"충의회라는 조직을...정말로 사랑하세요...?"
이번에는 좀 더 대담한 물음을 꺼내어 본다..
강태는 인터뷰어(intervewer)로서 자신을 과대평가 하는 듯 하다..
약간 건방지기는 하지만 흥미를 돋구는 강태의 미니 청문회(?)에 슬슬 휘말리는 재준..
"푸훗...글쎄....난 그 단어 자체가 뭘 뜻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냥....충의회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최고의 재산이야...
난 거기에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
내가 끝까지 이끌어 가야할 곳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그게 내 할 일의 전부라고 배워왔고..."
강태는 이제 가닥이 잡힌다는 표정이다.
어느정도 파악이 되었노라고...시원스레 얘기하는 듯 하다..
범죄사실이 명백한 피고인을 바라보는 재판정의 검사와 같이..
재준은 온 몸을, 그의 심중까지도 간파하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벼르고 별렀던....핵심적인 질문을 뱉어낸다..
"그럼 회장님은....'충의회' 속에서....행복..하세요...?"
(27)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는 중노동이고 쓰디쓴 에스프레소 커피같이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는 것...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 같은 것이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시대 그림처럼 고통스럽고 무자비한 것이고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
-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 중에서..-
"아니 뭐 그런 찢어죽일 년이 다 있어!!? 완전 미친년 아냐!!?"
세라가 하도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녀에게 시선을 준다..
주혁에게서 자초지종을 상세히 듣고 나니, 기가차다 못해 어이가 없다.
"참내!! 대학생들은 전부 똑똑한 줄 알았더니, 어떻게 그렇게 단체로 멍청할 수가 있냐??!
순 또라이들 아냐, 또라이들~~!!!"
울분에 차서 답답함을 성토하는 세라에게 주혁은 소용없다는 식의 우울한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됐어....애들은 신경 안 쓰니까...그리고 솔직히, 소빈이 말이 아주 틀린것도 아니고..."
"뭐어~~??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계속 다닐 학굔데!!
그리고, 그 씨발년 말이 맞긴 뭐가 맞어?! 오빠랑 혁수오빠랑 그짓하는 거 봤다고 개뻥까고 다닌다며!!!"
세라는 너무 격분한 나머지 쉰소리까지 낸다.
하이힐이 신겨진 발로 테이블 아래 바닥을 쿵쿵 구르며 악다구니를 쳐대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던 주혁이..
고양이를 닮은 세라의 눈매를 지그시 응시하고...이런 말하기도 우습다는 듯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묻는다..
"나랑 혁수랑....섹스..안해 봤을거라고 생각해...?"
이미 대답을 포함하고 있는 주혁의 질문에, 세라의 두 눈이 화등잔만해지고..
주혁은 세라가 어떤 말을 할지 은근히 기대를 건다..
같은 남자끼리, 그것도 형제끼리 어떻게 그런 짓까지 할수 있냐고 책망을 할까..?
풋...열두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말은 안할 여자지...
그럼 뭐라고 할까....
'와아~ 역시 화끈한데?' 어쩌고 주절거리며 감탄사를 늘어놓으려나...
"세상에........안혁수 이 인간 진짜 바보 아냐?? 같이 그짓까지 하면서, 이 지랄을 떠는 이유가 뭔데??
우우우~~~정말!!! 그러고 보니까 나 완전 암것도 모르고 있었던거잖아!!"
주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역시나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세라..
이제는 그런 그녀에게 어느정도 적응하게 된 주혁은 조급해 하지 않고 세라가 설명해 주기를 기다린다..
"난 지금까지 주혁오빠 혼자서 혁수오빠한테 죽어라 매달린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혁수오빠도 오빠를 좋아하는 눈치가 보였긴 했지만 확실한 정도는 아니었어..
난 말이지.....혁수오빠가 주혁오빠한테 마음이 있으면서도, 자기가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단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해서...
그래서 혼란스러워 하고 일부러 여자도 사귀고 그러는줄 알았어...
동성연애자들 대부분이 그런 갈등을 하거든...
자기가 같은 남잘 좋아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 있잖아...
혁수오빠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둘이 섹스까지 했다면 얘기가 달라지잖아!!
갈데까지 갔으면서, 아직도 거부하는 이유가 뭐야?! 진짜 이해가 안돼, 안혁수!!"
세라의 폭언을 들으며..주혁의 하얀 얼굴에는 서서히..회색 빛가리개가 명암을 드리운다..
주혁의 창가에는 두꺼운 커튼이 내려쳐지고...그는 암울한 나락으로 끌려들어간다..
벌써 몇번씩이나, 반복해서 빠졌었던 질퍽한 늪으로 깊이깊이 침잠해가는 주혁..
공포스럽고....절망적이다...
거대한 힘으로 발목을 잡아당기는...늪 속의 억새풀들을 떨쳐버리려고 발버둥을 치며...주혁은 꺼져가는 음성으로 하소연 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난생 처음, 자신의 문제를 '제3자'와 공유한다..
"그래, 맞아....세라 네 말대로.....혁수는 정말 바보야.....이해를 못하겠어...
혁수가 얼마나 웃긴지 알아? 풋...그애는 말이지....평소에는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어...너도 알지?
내가 참다참다 도저히 버틸수가 없어서 그애한테 달려가면, 처음에는 안된다고...싫다고...고집을 부리다가......
나중에는....막 몸부림치면서 나한테 안겨와.....정말 뜨겁게....
근데 있잖아, 진짜 웃기는게 뭔지 알아??
....쿡....섹스할 때..위에서 내려다보면.....혁수 눈은 나한테 이렇게 말해..
널 정말 원한다고.....어서 빨리 날 가지라고......그렇게 얘기하는데..
입으로는 안된다는 말만 하는거야......안돼, 이러지마, 끝낼거야.....
후훗.....세라야, 어느 쪽을 믿어야 되는거냐? 어느 쪽이 진짤까? 응??"
아무리 술에 만취한 상태라고 해도...주혁의 입에서 저런 말까지 나오다니...
세라는 새삼, 그를 짓누르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엄청난지...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알 수 있었다.
주혁은 지금....극한에 다다른 것이다..
인내의 사선을 넘어,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는 절벽의 끝에 와 있다..
어쩌면....이미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주혁에게 있어 '안혁수'는...삶의 선택 조건이 아닌.....
절대적인 생존 그 자체이다..
그에게 무어라 응답해 주어야 할지....세라는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하고 주혁의 눈길을 외면하고 만다..
대체 무슨 말을 해준단 말인가?
이런 눈빛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시덥지 않은 위로 몇마디를 읊조린다는 건...
그의 아픔과 괴로움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세라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의 처지에 뼈저린 미안함을 느끼며..
무엇보다도 주혁이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큼...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생각해 주었다는게 고마워서....
참으로 오랜만에...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목이 메어오는 것을 간신히 뚫고, 성대를 울려 일상적인 목소리를 내는 세라..
"얘기하고 싶은거...속시원하게 다 얘기해....누가 뭐래도 나는....오빠 편이니까...."
그렇게 말하며...세라는 다짐한다...
이렇게 자신을 믿고 의지해주는 주혁을....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 혁수의 책상 위에 펼쳐진 검은색 가죽제본의 성경책...
혁수의 갈색 눈동자가 성경의 한 구절에 붙박혀 떨어질 줄 모른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심하게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로마서 1:27 ]
바로 자신과 주혁의 이야기였다.
혁수도 남자고, 주혁 역시 남자다.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운 일' 이란 섹스를 일컫는 것이고..
혁수와 주혁은 여러번 섹스를 했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망라하여 최고의 경전으로 칭송받는성경에서, 그런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릇되었고...그에 따른 응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엄격하게 그들을 단죄하고 있다..
혁수는 기독교 신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에게 있어 어겨서는 안될 신성한 율법이다.
그의 믿음대로라면...자신과 주혁은 신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이다...
두려웠다. 악랄한 마귀가 파놓은 함정으로 빠져드는 자신이 보였다.
안된다. 이대로 파멸을 향해 질주할 수는 없다.
막아야 한다. 그만두어야 한다.
더 늦기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께 용서받아야 한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면서......
- Rrrrrrrrr~~~~~
갑자기 울려대는 핸드폰 벨소리가 혁수의 상념을 깨뜨린다..
혁수는 잠시 생각을 접고, 핸드폰을 받아든다..
"여보세요.."
"혁수오빠! 나 세란데...여기 지금 오빠네 집 앞이거든?
주혁오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혼자 못 올라갈 것 같애...
내가 집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오빠가 나와서 주혁오빠 좀 데리고 들어가.."
"얼마나 마셨길래 혼자 걷지도 못해?"
"쳇!! 누구 때문에 이렇게 마신건데?! 오빠는 그런 말할 자격 없어!! 잔소리 말고 얼른 내려와!!!"
수화기 건너편에서 귀청이 떨어져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는 세라...
혁수는 약간 기분이 언짢은 표정으로 양미간에 주름을 만들며..대충 겉옷을 걸쳐입고 밖으로 나간다..
곤죽이 되어 취해있는 주혁을 낑낑거리며 부축하고 선 세라..
혁수가 나오자마자, 주혁을 혁수의 품으로 확 밀어버리며...
원망이 가득한 눈초리로 혁수에게 쏘아부친다..
"혁수오빠...정말 실망이야....오빠가 그렇게 겁쟁이에 쪼다일 줄은 몰랐어...
오빠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기나 해?!? 진짜 자기 생각밖에 못하는 건 바로 혁수오빠야!!
제발...주혁오빠도 생각 좀 해줘....불쌍하고 가여워서 볼 수가 없어!!"
너무 측은한 마음에 울음기마저 섞인 음성으로...
세라는 비난 반 애원 반의 멘트를 날리고는 휙 돌아서서 가버린다.
정수리 한 가운데에 송곳처럼 꽂히는 세라의 이야기...
혁수는 따끔거리는 심장의 통증을 의식적으로 억누르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주혁을 받치고서 안으로 들어간다..
연청색 시트가 깔끔하게 세팅 된 주혁의 침대위에 그를 눕혀놓고..
한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물끄러미 주혁을 응시하는 혁수...
술에 취해 천방지축으로 흐트러진 주혁의 모습은....
굉장히......섹시하다......
이렇듯 나사가 몇 개쯤 빠진 헐거운 상태에서 그가 맹목적으로 자신의 몸을 요구해 오면...
혁수는 여지없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만다...
혁수가 참담한 심정이 되어 체념하듯 몸을 내어주면..
주혁은 느슨하게 풀려있던 정신과 영혼의 끈을 바짝 조이며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혁수에게 몰입한다...
어느때보다 진지하고 엄숙하게...혁수와의 섹스에 임하는 것이다..
바보스러우리만치 순수한 정열을 불태우며 혁수에게 탐닉하는 주혁...
폭약을 안고 화염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처럼...
종말을 목전에 두고도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
나까지 무모해져서는 안된다...
젊은날, 한때의 불장난 같은 치기로 인해 단 한번뿐인 나의 인생을 이렇게 일찍...파괴해 버릴 수는 없다고 혁수는 되뇌인다..
이쯤에서......돌아서자......
혁수는 기계적인 손길로 뻗어있는 주혁의 옷가지들을 벗기고 그가 편한 자세로 누울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환자의 검진을 마친 종합병원의 간호사처럼...
인정머리 없게 주혁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하지만 또 다시....혁수의 옷자락을 잡아쥐는 주혁의 하얀 손...
방금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그가 한쪽 팔로만 상체를 지탱하여 일으켜 세우고...
술기운 때문에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혁수를 쳐다본다..
핏발 선 주혁의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새빨간 액체가 줄줄 흘러나올 것 같다..
주혁이 즐겨마시는 '레드 티어즈' 처럼....
지독하게 선명한 붉은 빛깔의 물이 말이다..
혁수에게 머물러 있는 주혁의 눈망울이 서서히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의 사나운 포효가 터지지 않도록 방지해주는 마지막 보루마저...
힘없이 무너지는게 보인다...
또 한번의 폭풍을 예고하는 주혁의 눈빛....
숨이 막혀온다고 느껴지는 순간, 주혁의 손아귀에 휘어채 진 혁수의 가느다란 육체가 맥없이 침대 위로 나동그라지고...
주혁은 눈깜짝할 새에 혁수 위에 올라와 있다..
단단한 허벅지로 혁수의 옆구리를 압박하며...
부르트고 갈라진 주혁의 입술이 혁수의 입술과 맞부딪친다..
혁수가 친절히 옷을 벗겨준 덕택에 사각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주혁..
천장 꼭대기에 달려 열심히 빛을 내고 있는 형광등보다 비할수 없이 눈부시고 새하얀 주혁의 살결이...
가뜩이나 어지러운 혁수의 시야를 교란시킨다...
최대한의 이성을 동원해, 입을 열려하는 혁수에게..
소름이 끼칠만큼 낮고 무거운 음성으로 경고하는 주혁...
"안된다는 말 하지마..그 소리 했다간 바로 지금 여기서 너랑 나랑 같이 죽는줄 알아..."
그나마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혁수는 다시 한번 허물어질 준비를 한다...
무서운 기세로 혁수의 몸을 가리고 있는 천조각들을 제거해 나가는 주혁..
거칠고 불규칙적으로 뱉어내는 그의 호흡이 허공 중에 끈적끈적하게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을 둘러 싼 주변의 공기가 빠른 속도로 달아오르며...
그에 따라 혁수의 육체도 주혁의 터치에 화답하기 시작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주혁을 향해 가지를 뻗는 혁수의 신경세포들이 느껴지자...
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혁수의 하나 남은 속옷을 그의 몸에서 떨구어 낸다..
그것 봐....내 말이 맞잖아......너의 온몸으로 나에게 얘기하고 있잖아....
근데 왜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왜 자꾸 안된다고 하는거야........
주혁은 가슴 속으로 절규한다..
입 밖으로 소리내었다가는....너무 추악하고 흉칙해 질 것 같아서이다..
내면에서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그를 향한 외침들을...
주혁은 혁수의 육체에 열중함으로써 잠재우려 한다..
굶주린 주혁의 입술과, 손과, 혁수를 느낄수 있는 모든 감각들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혁수에게 맹렬히 달려든다..
주혁의 팔과 다리가 칡넝쿨처럼 혁수의 가슴과 허리, 배와 허벅지에 감겨오고....혁수를 부셔버릴 듯이 억세게 옥죄어온다..
그의 광포한 갈망을 누그러뜨릴수 있는 방법은 결코 저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에...
혁수는 부드러운 손길로 땀에 젖은 주혁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를 달래고 토닥거린다...
혁수의 노력 덕분에 한결 잔잔해지는 분위기...
조금씩 잦아 들어가는 주혁의 숨결...
유연하고 온순해지는 주혁의 움직임...
치열한 공방전 끝에 힘들게 찾아 온 평화를 만끽하는 두 사람.....
그러나.....그 달콤한 망각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잠시동안 외부세계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서로에게만 몰두해 있던 주혁과 혁수에게...
사형선고처럼 들리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잠옷 차림을 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알몸이 되어 한 침대속에 뒤엉켜있는 주혁과 혁수를 발견하자..
희미해지는 의식의 자락을 놓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며...
가여운 그녀의 입에서 기어코...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졌다..
(28)
재준은 요 며칠새에 계속 저기압이었다.
특별히 안 좋은 사건이 있었다거나, 마음이 상할만한 일이 생긴것도 아니었다.
바쁘게 사업채들을 왔다갔다하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고 재준에게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언제나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충의회가 관리하고 있는 나이트클럽과 룸살롱만 해도 서울 바닥에 100여곳이 넘었고..
1%이상의 주식을 보유함으로써 대주주로 재준의 이름이 명부에 올라있는 회사가 한 둘이 아니었다.
아침에 배달되어 온 신문을 읽는것도 시간이 빠듯할 만큼..
재준은 아침부터 밤까지 쉴새없이 일에 파묻혀 살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두 회사의 주주총회에 참석하고, 새로 인수한 가게를 둘러보고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있는 정계의 의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
재준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빠르게 퍼져나가는 피로감에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긴손으로 꺼칠해진 얼굴을 문질러댄다..
그런 재준을 보자, 조수석에 있던 환성이 충심어린 목소리로 입을연다.
"피곤하시면 잠깐 눈좀 붙이십시오. 댁에 도착하면 깨워드리겠습니다.."
"괜찮아...너야말로 피곤할텐데 얼른 가서 쉬어라.."
"아니요, 저는 쌩쌩합니다!"
씩씩하게 대꾸하는 환성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재준은 좌석에 더 깊숙히 몸을 묻고는 담배를 한 대 빼어문다.
불을 붙이려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는 재준..
강태가 생일날 선물해 준 바로 그 은제라이터다..
어느새 재준의 손에 익숙해진 물건...
이것 때문에, 담배를 피울때마다 강태의 얼굴이 떠오르는 재준이다.
지금 역시....예외가 아니다...
언뜻 보기엔 꽤나 앙증맞고 귀엽게 생긴 입술 사이로 매캐한 담배연기가 새어나오고...
창문을 조금 열어 환기를 시키는 재준의 머리 한 구석에 또다시 불쑥 솟아나는...
생일 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강태가 자신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
[ 그럼 회장님은....'충의회' 속에서....행복..하세요...? ]
사실 며칠동안 재준의 기분을 가라앉힌 주원인은 다름아닌 이거였다.
그때, 재준은 마치 강태 앞에서...
속이 비고 투명한 관속에 벌거숭이가 되어 갇혀있는 느낌이었다.
손과발을 결박당해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자신의 나체를..
절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치부를...
예쁜 미소와 유혹적인 눈빛으로 무장한 강태가 샅샅이 뒤져보고 유린하는 듯 했다..
썅.....어쩐지 자꾸만 그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 새끼는...지금껏 내가 본 누구보다 더 아름답고, 아무도 지니지 못한 매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내 침대 밖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한낱 '정부'에 불과하다..
그녀석의 위치가 놀라울 정도로 승격된 것만은 분명해도 어디까지나 나의 허락을 통해 그 신분상승이 이루어진 것 아닌가?
나는 그의 윗단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 이재준은 강태를 지배하고 있다.
바뀐 것은 그의 위치이지, 나의 위치에는 변함이 없다..
재준은 그런 식으로 애매한 논리까지 들먹이며 자신을 안심시킨다..
그러나...생각은 또 다른 쪽으로 가지를 친다..
재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던 강태...
겉으로는 '질의'의 형태를 띄고있는 그 문장이..
어째서 재준에게는 '난 지금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들렸을까..?
이재준 당신은 충의회 속에서 행복할지 몰라도, 강태 자신은 충의회라는 조직에.. ]
더 나아가서는 암흑가로 표상되는 지하세계의 일원으로서...- 비록 '정부'에 지나지 않지만 -
일말의 행복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그런식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쳇....생각할수록 이상한 녀석이다.
누가 자기더러 억지로 들어오라고 했나....
자기가 원해서 이 세계에 발을 담근것이지....
내게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내가 왜 이따위 찝찝함을 느껴야 하냐고...!!
정말 이런 개운치 못한 기분은 질색이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신경쓰고 있는 자신이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강태가 행복해 하든, 불행해 하든...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람..?
선택은 강태가 한 거고, 나는 그녀석이 필요했기 때문에 받아들여 준 것뿐이다.
그와의 섹스에 대한 대가로 나는 '이재준의 정부'라는 타이틀과
그 타이틀에서 우러나오는 갖가지 편의와 혜택 - 돈, 권력, 그외 여러 가지 -를 강태에게 제공하고 있지 않은거 말이다..
철저한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일단락 지으면 그만인데...
마음 한켠이 몹시 불편하다...
언젠가, 태현과 함께 외출해서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던 강태를 혼자서 기다릴 때..
그때와는 좀 더 이질적인 감정이 재준의 뒷꽁무니에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후우~~내가 그녀석한테 너무 빠져있는 것 같군....
아무리 최고의 섹스를 나눌 수 있는 상대라 하여도..
정도를 넘어서면 큰일이다.
미색에 홀려 신세망친 남자를 어디 한두명 보았던가...
재준의 주변에도 널린 게 그런 남자들의 사례였다.
단순히 즐기기만 해야한다..
여유와 중심을 잃지말고, 느긋한 태도로 그의 탐스러운 육체를 누리자..
그리고 싫증이 나면, 미련을 두지 말고 가차없이 버리는 거다..
물론 적당한 보상을 해주어야겠지....
그게 내 방식이다.
충의회의 보스, 이재준 답게 짜여진 대인관계의 매뉴얼...
그것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말자고...재준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 "하하하하하하하~~!!!!^O^"
연속적으로 터지는 강태의 박장대소가 집안 가득 울려퍼진다.
워낙 헤프다 할 정도로 웃음이 많은 강태이기에..
태현이 가볍게 던진 농담 하나하나에도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강태...
이것저것 먹거리들을 사들고 느닷없이 집으로 쳐들어온 태현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시계바늘은 밤 11시가 넘었음을 알리고 있었지만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태현의 입담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원래부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강태였기에, 시간관념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아아~~하도 웃었더니 배 아퍼....휴우~~형, 개그맨 해라!! 그 재능 그냥 썩히기 너무 아까워...
TV에 나오는 개그맨들보다 형이 더 웃기는데...푸하핫~~!!"
"에에....제가 웃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음악을 사랑합니다! 개그맨 보다는...뮤지션이 되고 싶어요~~~(김대중 대통령 버전..^^;)"
현직 대통령의 말투와 목소리, 억양까지 그대로 흉내내는 태현을 구경(?)하며 어김없이 폭소를 터뜨리는 강태...
손뼉까지 치며 그 예쁜 눈이 곱게 가늘어져서 웃어대는 강태를 장난기 다분한 얼굴로 바라보던 태현은
강태의 웃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진지한 음색으로 말문을 튼다..
"강태 너는...웃는게 참 이뻐....."
태현의 음성에서 미묘하게 묻어나오는 서글픔과 그리움이 강태를 미안하게 만든다...
파스텔 톤으로 밝게 채색되어 있던 분위기가 태현의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칙칙한 회색으로 뒤바뀌려 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 강태는 서둘려 입을 연다.
"하하~~형두 웃는거 이쁘네, 뭐...^^; 계속 보니까 형 잘생겼다~~
눈도 크고, 피부도 디게 하얗구....난 피부 하얀 사람이 젤 부럽더라!!
형 인기 많을거 같애, 솔직히 형 좋아하는 여자애들 많지??"
일부러 생각 나는대로 다급하게 주절거리는 강태를 응시하다가...
태현은 고개를 떨군다....
낭패감.......
굳게 닫힌 문을 작은 주먹으로 두드리고 서 있는 어린아이 같이..
왜소해지고 초라해지는 자신의 존재가 억울하게 느껴지기엔...
그를 향한 감정이 너무 특별하다.....
태현은 크고 시원하게 쌍커풀진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퉁명스럽게 들릴만큼 맥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그럼 뭐하냐......정작 당사자는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데...."
아까처럼 태현이 까불거리며 농을 걸어오기를 기대했던 강태는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고 만다..
태현의 얘기가 뭘 뜻하는지 뻔히 알면서 짐짓 모르는 척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강태는 그렇게 낯짝이 두껍지 못하다..
태현은 강태가 어떤 말이든 해주기를 바란다.
지난번의 거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라도 좋으니 무언가 그에게서 또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리고 나서, 설득이라도 해보고 싶다...
시무룩하게 침묵만 앞세우고 있는 사람한테는 어찌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강태는 다문 입을 떼지 않는다.
그렇게 무참히....태현의 기대를 저버리고, 도저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고색창연한 자태를 뽐내며 앉아있다..
아찔한 전율이 일 만큼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그 찬란한 형상이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 같다..
미안함과 부담스러움이 한데 뒤섞여 작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흑색 눈동자가...
결코 태현과 같은 빛깔로 반짝이지 않는, 무심한 강태의 눈동자가...
태현을 부른다.......아주 달콤하게...매혹적으로....
이 생각이 태현 자신만의 오해라고 해도...좋다.....
그 오해에 따르는 책임과 형벌까지 감수하겠다..
일찍 풀려나기에는 너무 감미롭고 기꺼운 오해이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그의 부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설령 착각이라 하여도....어리석은 환상이라 하여도.....
태현은 무모해진다.
좋게 말하면 용기를 내는 것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이 강태의 보드라운 뺨에 가서 닿는다.
보송보송한 감촉에 태현은 정신이 다 아득해진다..
조금 더 힘을 주어 강태의 볼을 감싸쥔다..
미칠 것 같다....
여기서 강태가 자신을 밀어낸다면....
아마 정신병자처럼 날뛰거나, 코흘리개 마냥 징징거리며...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모조리 다 팽개치게 될 것이다..
그런 태현의 절박함에 동정심이라도 느꼈는지...
다행스럽게도 강태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어준다.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지만, 태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도발적으로 태현을 끌어당기는 강태의 빨간 입술 외에는...
그토록 갖기를 소원했던, 볼때마다 솟구치는 열망에
태현을 고통스럽게 했던...그 입술밖에 다른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맹인이 되자, 태현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만용을 부려본다..
태현의 초록색 머리칼이 강태의 뺨을 간질이는가 싶더니...
곧 강태의 입술 위에 태현의 입술이 포개어진다..
재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간절하다....
짜릿한 쾌감이나 성적 흥분과는 거리가 먼....
어리숙하고 수줍은 첫 키스와도 같은 태현의 입맞춤....
강태의 입술을 소유하자..태현은 지금 죽어도 좋다고 쉴새없이 뇌까린다..
이 느낌은....상상하고 꿈꾸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시간의 축을 멈추게 하고 싶다....
그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야 한 대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까지 자신의 존재가치를 추락시키는 태현에게...
신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영혼이라도 내놓겠다는 그의 간구와 서원을...신은 끝내 받아주지 않는다..
심장의 일부분이 철렁 하고 떨어져 나가는 듯한
비통함 속에서 태현이 입술을 거두어 들였을 때...
그의 망막에 가장 먼저 상이 맺힌 피사체는...
화강암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과 강태는 주시하고 있는 재준이었다...
(29)
사랑이여, 당신은 어디로 숨었는가..
고통의 핏물에 습자지처럼 젖어드는 가련한 내 모습을 당신은 보는가!
당신의 외마디 소리라도 내 귀로 분명히 듣고 싶어하는 이 공포와 떨림을,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느끼고 있는가!
- <사랑을 위해 죽다> 중에서 -
어머니와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혁수..
세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형성된 차갑고 무거운 공기와 정적...
혁수와 주혁의 정사를 직접 목격한 혁수의 어머니는 그날 이후로...주혁을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역시 핏줄은 어쩔수 없는 것인지...
그녀는 주혁의 꼬임에 순진한 혁수가 넘어간 것이라며 바락바락 우겨댔고, 주혁은...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혁수 또한....입을 봉했다..
주혁의 아버지 인하는 몸져누울 지경인 아내를 위로하고 달래며...
혁수의 '보호'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그녀에게 약속해 주었다.
주혁은 자신의 방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주혁은 이복동생을 침대로 불러들인 파렴치한이었고 가문의 수치요, 집안 망신이었다..
이렇게 격리되고 매장 당하는 주혁과는 반대로..
혁수는 스포트라이트의 중심 인물이 됐다..
주혁의 손길이 이르지 못할...안전지대로 혁수를 옮기는 것이 현재 그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엄마랑 아버지가 많이 생각해 봤는데....아무래도 네가 유학을 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근엄함 인하의 음성이 혁수의 고막을 울려오고...
혁수는 예측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즈막하게 속삭이듯 이야기한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멀리 나가 있는게...제일 낫겠어요..."
예상외로 너무 순순히 혁수가 자신들의 계획에 협조하자, 구겨져 있던 두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혁수의 손을 잡는 그의 어머니...
"그래, 혁수야...잘 생각했다....다행히 네가 비자가 있어서 바로 출국할 수 있게됐어..
아버지가 오늘 비행기표까지 예약해 오셨다..
다음주 화요일에 출국이야....일단 엄마랑 같이 가서 얼른 자리를 잡자.."
"그렇게 빨리요...? ....너무 갑작스러운데...."
"얘가 무슨 소릴 하는거야~~ 하루라도 빨리 떠나서 새로 시작해야지!
지금도 너랑 주혁이가 한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에미는 심장이 벌렁거린다...!
네가 어쩌다가 저런 녀석한테 빠져서....아이구~~~안되지!! 안돼!! 잔소리 할거 없어!
내일 당장 학교 자퇴하고, 미국으로 갈 준비해!!"
혁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완고한 어머니의 의지를 꺾을수도 없겠거니와, 또 다시 어머니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불효막심한 아들이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혁수 자신이 떠나기를 원하고 있다..
이곳에서.....떠나고 싶다.....
어디든 여기 아닌데로....가 버리고 싶다....
그래....다시 미국으로 가는거다.....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그 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한국에서 보낸 1년....정직하게 표현하자면 주혁과 함께 보낸 1년...
갈등하고 번민하고 죄의식에 빠져 허덕이고....
전신을 쥐어짜는 미칠듯한...소용돌이치며 자신을 휘두르던 감정들...
시궁창의 쓰레기보다 더 지저분하고 악취나는 존재로 자신을 전락시키던....주혁을 보며 느낀 욕망과 갈증...
이겨내려 했었다. 무던히도 부딪치고 싸웠다.
하지만....혁수의 이성은 번번히 패배하기만 했다..
결말이 뻔한 승부를 계속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제 여기쯤에서....백개를 들고 링에서 내려가련다..
섬약한 '도피행각' 이라며 손가락질 한 대도 괜찮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다. 혁수는 도망치는 거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주혁에게서..
주혁이 주는 쾌감에 중독되어가는 자신의 육체에서..
주혁의 곁에서, 그의 일부가 되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현명한 결단이라고 혁수는 스스로에게 확신을 준다..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온 것부터가 잘못이니까...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다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놓치면 안된다...
계속 이곳에 머무르면...종래에는 지금을 회상하며
안타까운 회오에 젖어 가슴을 탕탕 치게 될 수도 있다..
"저.....L.A보다 뉴욕으로 가고 싶어요...
작년에 맨하탄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입학 허가서도 받았었고..
예전에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도 대부분 뉴욕으로 옮겼거든요..."
"그래, 알았다....엄마아빠가 다 알아서 준비해 줄테니까 넌 아무 걱정말고, 다시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할 생각만 해라...
지금까지 있었던 일 다 잊어버리고....알았지??"
"네에.........."
혁수의 대답이 떨어지자, 인하와 그의 아내는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르 회복한다..
부모님과의 상의를 끝낸 혁수는,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취침인사를 남긴 후, 2층의 자기 방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때마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본다..
잘한거야, 안혁수...
옳은 결정이야.....
미국으로 가자....
다시 시작하자....
전부 잊어버리자.........
굳건해진 마음자세로..결의에 찬 눈을 빛내며...혁수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그 결심을 조롱하듯 주혁이 서 있다...
혁수는 그만 맥이 탁 풀리려고 하는 것을 가까스로 단속한다..
주혁 앞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건 혁수의 전공분야가 아닌가?
아니다.....오늘만큼은 배우가 될 필요없다...
오늘은 있는 그대로의 '안혁수'를 보여주자...
장주혁 때문에 고뇌하고 힘들어 하는 안혁수의 진짜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보자...
그도 한번쯤은...미안함과 자괴감을 느껴보아야 한다..
혁수의 눈빛이 평소처럼 잔잔하게 흐르지 않는다.
그의 갈색 눈동자 속에 원한으로 사무친 혼령이 있고, 포효하며 떠도는 짐승이 있고, 거세게 파도치는 성난 바다가 담겨 있다..
주혁은 그런 혁수가 낯설다.
그러면서도 이게 진정한 혁수의 내면의 본질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주혁은 혁수의 '가짜'에 더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슬픈 현상이다....
"유학 가겠다는 거....정말이야...?"
그렇게 물으면서도 혁수가 가지 않을거라 믿는 투다..
아마도 혁수와 부모님의 대화 내용을 끝까지 제대로 듣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뉴욕으로 가게 됐어...."
"정말로....간다구....??"
이번에는 '설마-'하는, 반신반의의 말투....
그러자 동글동글하고 다정한 혁수의 눈동자가,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아련하게 반짝이는 갈빛 심연이...
건조하고 싸늘하게 돌변하여 주혁의 자만심에 일격을 가한다..
"다음주 화요일이 출국이야...내일 학교에 자퇴신청 하려구..."
"말도 안돼!!!!"
발작적으로 터지는 주혁의 다급한 고함소리...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어느날 갑자기 불치병 진단을 받은 것처럼...
당최 현실적으로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얼굴이다..
며칠간 충분한 음식과 숙면을 공급받지 못해 허옇게 일어난 주혁의 입술 때문에 그가 더욱 초췌해 보인다..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자신임을 혁수는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떠나려 하는 것이다.
이제 그만....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폐인처럼 붕괴되어 간다는 사실....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고 비틀거리는 자신을 지탱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관두자.....처음부터 열어보아서는 안될 판도라의 상자였다...
지금이라도 속히 그 뚜껑을 닫고, 땅 속 깊이 묻어버리자...
다시는 찾을수 없게....어느 누구도 손 댈 수 없게....
"말이 안된다구?? 훗...대체 뭐가 말이 안된다는 거야? 내가 다시 미국으로 가는게 왜 말이 안되는데??
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거 아닌가? 여기 생활 다 정리하고 미국으로 가는게 쉬운 일인줄 알아??"
혁수의 말이 가시가 되어 주혁의 이마를 찌르고, 총알이 되어 주혁의 심장을 관통한다..
흉기와도 같은 언어를 쏟아내는 혁수의 영혼은...
피고름이 철철 흐르는 상처와 째지는 아픔으로 뒤덮인다..
"그래....상황이 이렇게까지 번진데에는 우리 둘아 공동으로 책임이 있으니까...
애초에 널 받아주는게 아니었는데....내가 경솔했어..."
"허...! 안혁수 네가 날 언제 받아줬다는거야?? 네가 날 한번이라도 받아준 적 있어??!"
나의 육체를...네 안에 담아주는 것...
너와의 섹스를 허락해 주는 것....
그걸 가지고 날 받아주었다고 얘기하는 거야??
너 정말 그렇게 모르는 거야?
안혁수....너 그렇게 바보였어??
"주혁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 내가 알 바 아니야!!
어쨌든 이제 정말 끝났으니까!! 그래, 가는 마당이니까 탁 까놓고 얘기하자....
솔직히 너랑 섹스하는거 좋아.. 미치게 좋아!!
네말마따나 나, 겉으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속으론 바란적도 많았어.
가만히 있다가도 불쑥불쑥 너랑 하고 싶다는 생각 한적도 있어...
너랑 섹스할 때는....정말 아무것도 생각 할 수가 없어!!
모든걸 잊어버리게 돼! 그래서 더 두려운거야....무슨 소린지 알아들어?"
"두려워하지마.....물론 혼란스럽다는 거 알아....
더군다나 너는 교회신자니까....죄책감 같은 것도 느끼겠지...
하지만 혁수야, 내 생각도 좀 해주면 안돼??
아니, 그런건 바라지도 않아...그냥.....네가 느끼는 대로....네 감정대로 한번만 따라가 봐......그런 틀 속에 널 가둬두지 말고..."
주혁은 애원한다..
자존심 따위는 그 옛날에 포기해 버렸으므로...
절대적으로 혁수 앞에 설복한다..
지금 주혁의 사고를 정복하고 있는 건 한가지 일념 뿐이다..
혁수를 보낼 순 없다...
그를 잡아야 한다...
이대로 떠나면...그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주혁의 삶은....하등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유일한 생명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주혁에게...
혁수의 음성이 들려온다...
한치의 흔들림도 용납하지 않는, 견고한 어투이다..
"싫어....네 옆에서 망가져가는 내 모습...가만히 놔둘수 없어..
여기 있다가는....난 결국...너한테서 벗어나지 못할거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게 현실인데 어떡하겠어...
그동안 내가 너무 교만했던 것 같아...
네가 곁에 있어도,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자신이 없어.....그리고....떠나고 싶어......주혁이 네 곁에서........."
(30)
태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마른침을 삼킨다.
그리고 재준의 눈을 피한다.
궁색한 변명 따위를 열거하는 건 같잖지도 않은 수작으로 보일테지...
욕을 해도 좋고, 때려도 좋다..
너로서는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니까...
그렇지만 재준에게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는 태현...
조직보스의 정부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겠다고 마음먹으며...
재준의 불호령을 기다린다..
"나가.."
지독하게 단호하고 절제된 음성으로...
재준은 그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다..
격하게 분노한 표정도 아니다..
하지만 차갑다.
소름끼치도록, 진저리 처지도록 차갑다..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얼음장 같아 보일수도 있구나-하는 감탄이 새어나올 정도이다..
생각과는 다른 재준의 반응에 태현이 약간의 두려움과 의문을 가지고 그를 바라본다..
재준과 태현의 눈동자가 일직선으로 마주하자, 재준은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강태랑 둘이 얘기해야겠어. 태현형은 좀 빠져줘..."
순간, 태현은 이대로 자신이 가버리면 강태가 난처해 질거라는 걸 자각한다..
그러자, 걱정스런 마음에 좀전까지 유지해 온 덤덤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허둥지둥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하는 태현...
"재준아, 내가 얘기할게...괜히 오해하지 말고.."
"됐어, 태현형..회장님께는 내가 말씀드릴테니까 형은 이만 돌아가.."
여지껏 침묵을 지키던 강태가 재준만큼이나 딱 부러지는 말투로 태현의 말을 끊고...
사색이 되어 하얗게 질려있을 거라 생각했던 강태의 당황스런 행동에 재준과 태현 둘다 어처구니가 없다..
강태가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은 태현은 석연치 않지만...
자신이 자리를 비켜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근심과 불안, 안타까움과 서운함이 매달려 잔뜩 무거워진 발걸음을 현관 쪽으로 내딛는다..
태현을 내보낸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가 나자, 강태와 재준만이 연계된 듯한 비밀스러운 기류가 스며들고..
교묘하게 가장된 재준의 냉랭한 눈빛이 감췄던 노여움의 불씨를 지피운다..
"이게 무슨 짓거리야.....이런 꼴 볼려고 내가 널 정부로 만든줄 알아?!"
재준은 정말 기분이 개같았다..
다른 남자를 집으로 데려와 애정행각을 벌일만큼 강태가 자신의 허투루 여긴다는 생각에 열이 받쳤고..
강태를 온전히 다스리고 있다고 믿으며 안도했던 그의 자신감에 흠집을 낸 강태가 가증스러워 보였다..
저 예쁜 얼굴로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속인 녀석...
아무 사내에게나 탐스럽게 무르익은 몸뚱이를 함부로 내주는...
나의 기대와 바램을 배반한 녀석....
"그래요, 사실대로 말씀 드리죠...태현형이 날 좋아한대요..단순한 친구나 동생 이상으로....
내가 회장님 정부라는 걸 알지만, 좋아하는 감정은 어쩔수 없는 거잖아요?
아무튼 저번에 저한테 고백을 했었는데..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태현형 마음을 받아줄 처지가 못되서...
그냥 좋은 형,동생 사이로 지내자...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리고 아까 저녁에 집으로 찾아왔길래 방금 전까지 같이 밥먹고 술도 마시고 놀다가....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져서...태현형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거에요...충동적으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당차게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는 강태를 보며...
재준은 희한하게도 더욱 화가 치민다..
태현이 강태를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강태는 충분히 태현의 마음을 빼앗을만 하다..
완벽하리만치 아름다운 외모와 갖가지 매력을 골고루 섭렵한 강태를 보고 누군들 혹하지 않겠는가....
그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다른데에 있다.
뭇사내들을 휘어잡는 강태의 출중함...
그게 재준을 초조하게 하고, 신경쓰이게 만드는 주요인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재준은 더 짙은 위기감이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낀다..
강태에 대한 자신의 소유욕이...그칠줄 모르고 눈덩이처럼 불어만 가는 것이다..
운좋게 수중에 들어온 맛있는 음식을 누군가에게 들켜서 빼앗기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아이처럼...
유치하고 조잡하게 강태에게 집착하는 자신이 짜증스럽기만한 재준...
차를 타고 오는 도중, '적당히 즐기자 그리고 버리자'라며 자신을 타이르던 그였는데...
집안에 들어서서 강태와 태현의 키스신을 목격하는 순간, 눈알이 뒤집히는 듯한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이어서 맹렬히 솟구치는 강태에 대한 미움....
"그래도 그렇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따위 짓을 해?! 네가 먼저 헤프게 굴면서 꼬리를 치니까 그런거 아냐!!"
참으로 한심한 억지까지 부려가며...
강태를 달달 볶아대고 몰아치는 재준...
강태는 기가 막히다는 듯 실소를 흘리더니 당당하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앙칼지고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쏘아대기 시작한다..
"뭐라구요?! 참내, 아무리 무식한 깡패라고 해도 그렇지...어떻게 그런식으로 말할 수가 있어요?!!
뭐요?? 내가 헤프게 굴었으니까 그런거 아니겠냐?? 아니,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왜 회장님이 이렇게 화를 내는거죠?
나는 뭐, 딴사람 좋아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내가 회장님의 정부인건 정부인거고, 내 감정은 그거랑은 별개 문제에요!!
육체적으로 날 소유했다고 해서 내 감정까지 당신이 어떻게 할 수는 없는거라구요!
그렇다고 내가 태현형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게 아니에요..
다만 내 생각이나 감정까지 당신 틀에 맞추려고 하지 말란 얘기에요!
어차피 당신이 나한테 원하는건 섹스밖에 없잖아!!!"
............절대로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참을수가 없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강태의 뺨을 무자비하게 후려치는 재준의 손바닥...
여린 강태의 몸이 맥아리없이 거실 바닥에 나뒹굴고...
강태가 공포와 충격을 수습하기도 전에, 재준의 억센 손아귀에 그의 두 어깨가 잡힌다..
천천히 강태의 몸을 일으킨 재준은 이를 악물고 험악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그를 내팽개친다..
그래도 분이 삭지 않는지....손에 집히는 물건이란 물건은 죄다 집어던지고, 깨부수고....
그 때문에 거실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해버린다..
그 한 귀퉁이에 끽 소리도 못내고 처박힌 강태는 성난 표범과도 같이 가슴속의 난폭한 분노와 사나운 열기를 발산해내는 재준을 보며...
그제서야, 꾹꾹 눌러왔던 두려움이 명치끝을 쑤셔오는 것을 느낀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지금의 이 지옥같은 광경을 뇌리에서 차단해 버리고 싶은데...
오히려 동공을 더욱 크게 확대되고, 귓구멍은 더 넓게 열려 재준의 씩씩대는 숨소리까지 또렷하게 잡혀온다..
한참을 더 광분하여 날뛰던 재준이 불현듯 잠잠해지고...
몸을 돌려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강태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강태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감추고 반대로 이전보다 훨씬 침착하고 당돌해진 눈빛으로 재준을 올려다본다..
지금쯤이면 강태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재준...
그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가자, 벼랑 끝에 내몰린듯한 위험을 실감하며...
결국에는 강태를 굴복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을 선택한다..
재준은 무서운 힘으로 강태를 덮쳐누르며 그의 허리벨트에 손을 가져간다..
그러자 온 힘을 다해 뿌리치는 강태....
허리를 비틀고 발길질을 해대며 재준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오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뼈와 가죽 뿐인듯한..
깡마른 재준의 몸 어디에서 이렇게 엄청난 완력이 솟아나는건지 놀랍기만 하다..
강태가 입고있던 반팔 면T가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며 찢어지고..
재준은 거침없이 강태의 바지버클을 끌러내린다..
재준의 손길을 거부하고 그에게 반항하기는 처음인 강태..
묘하게도 그런 강태의 항거하는 몸짓이 재준의 성적욕망에 불을 당긴다..
온몸을 뒤틀며 몸부림을 치는통에 강태의 가슴과 허리가 선정적인 곡선을 지으며 꿈틀거리고...
팽팽한 허벅지가 탄력있게 재준의 다리와 부딪친다..
"...이거 놔...!! ....싫어,...싫다구..!!.."
강태의 급절한 외침이 긴박하게 달아오른 공기속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것은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강태는 정말로, 이런식으로는 재준과 관계하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재준 혼자만의 욕구와 의도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섹스였지만..
관계를 가질 때마다 재준은 한번도...이렇게 함부로 강태를 다룬적이 없었다.
자신의 욕구충족과 쾌락이 가장 우선시 되기는 했지만..
강태에게도 똑같은 즐거움과 만족을 안겨주는 재준이었다..
그런 탓에...강태는 재준과의 성관계에서, 자신이 그의 배설을 위한 대상물로만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굴욕감이나 좌절감은커녕, 그나마 잔재해있던 약간의 수치심과 자기 혐오의 감정에도 어느덧 무뎌져버린 강태였다..
재준과의 섹스를 자연스러운 의무로 이행했고, 그것이 주는 희열과 성적 쾌감에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러나...지금 재준이 하고자 하는 행위는....
섹스라 이름붙인, 강태에게 가해지는 '형벌'이다..
진정 단순하게 강태의 육체를 원해서 그와 결합하기를 시도하는게 아니라,
오로지 강태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 때문에 재준이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다..
그건 폭력이고, 졸렬한 보복행위이다..
그리고 강태는...자신이 그런 징계를 받을만한, 합당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재준의 손길을 거역하는 거다..
그의 징벌을....납득할 수 없다....
완강한 저항의 몸짓을 보이는 강태에게, 재준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재준으로서는...강태의 의지를 꺾고, 그를 철저히 자신에게 예속시키기 위한 자신의 행동이 타당하게 느껴질 뿐이다..
"뭐가 어째?? 싫다구?! 이새끼가 이쁘다, 이쁘다 하면서 잘해주니까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감히 어따대고 바락바락 대들어?! 입다물고 가만히 있어! 넌 하기 싫을지 몰라도 난 하고 싶으니까!!"
재준의 손가락이 아프게 강태의 어깨죽지를 파고든다.
강태는 울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꼭 깨문다..
거칠게 자신의 몸을 돌아눕히고, 몸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재준을 받으며..
강태는 '강간'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리고....긴꼬리를 그리며 볼을 타고 흐르는 짭짤한 눈물이...
강태의 뺨과 밀착된 거실 바닥에 서럽게 망울진다..
(31)
'떠나야 한다......................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
- <사랑을 위해 죽다> 중에서 -
책상에 앉아, 한쪽 턱을 괴고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혁수...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정리되어 있는 앨범이다..
팔랑팔랑 갈피를 넘기던 혁수의 손이 멈춰지고...
자세를 조금 더 앞쪽으로 기울이며 맨 오른쪽 상단에 붙여진 사진을 주의깊게 응시한다..
작년 여름, 가족이서 다같이 유럽여행을 갔을 때..
로마의 네프투네 분수 앞에서 주혁과 혁수가 함께 찍은 사진...
혁수의 어깨에 한 팔을 걸치고 환하게 웃고있는 주혁..
그 옆에서 수줍은 듯 미소를 띄운 혁수..
사진 속의 우리는....이렇게 자연스러운데....
마냥 밝고 맑게만 보이는데....
아무도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필름 안에 갇혀버린 너와 나의 기억일 뿐이다..
얼마 있으면 색이 바래고 낡아서 편린으로만 존재하게 될 시시한 추억 나부랭이...
그나마도 있다는게 다행일까....?
아니야....없는게 더 나아......없는게...........
그렇게 도리질 치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혁수는 앨범에서 그 사진을 떼어낸다.
그리고 일기장 안에다가 조심스럽게 끼워놓는다.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굳이 이유를 달고 싶지는 않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엔 지금 혁수는 너무 피곤하다..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도...
내일이 출국이다. 아침 8시 비행기.
중요한 물건들은 이미 미국의 오피스텔로 부쳤다.
내일 혁수가 들고갈 짐은 중간 크기의 트렁크 하나 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려면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혁수는 스탠드 불을 끄고 침대로 가서 눕는다.
혁수의 체온에 꼭 맞게 디자인 된 듯한 시트의 포근한 감촉이 그의 몸을 감싸온다.
쾌적하고 안락하다...
혁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막상 진짜로 떠난다고 생각하니...갖가지 상념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미국에 가면 만나게 될 고등학교 때 친구들....
반갑게 맞아주겠지.....1년동안 많이 보고싶었는데....
왜 다시 돌아 왔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어어~~주혁이가 자꾸 찝적대서 여기로 피해온거야...' 라고??
풋....그러면 안혁수 넌 진짜 인간도 아니다.....
그냥....적당히 둘러 대는거야.....
'거짓말' 하면 또 이 안혁수가 일가견이 있지....
하여튼...1년동안 나쁜짓만 모조리 배웠다니까...
역시....오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야, 안혁수..솔직히 말해봐....
네가 여기에 왔던걸 후회하는 진짜 이유가 뭐냐?
정말 한톨의 거짓없이, 네 이름 석자를 걸고 정직하게 털어놔 봐...
넌....무엇 때문에 후회하고 있지...?
그건....그건 말이야........
너무 힘들어서 그래......
왔다가 다시 떠나는게.....너무 힘들고 어려워......
그를.....그를 떠나야 한다는게.....
결국은 그를 혼자두고 도망쳐 버리는게.....가슴이 아퍼.....
아퍼 죽겠어......이렇게 아플거면 차라리 오지를 말걸....
차라리 만나지를 말걸.........
괜히 왔어...괜히 만났어.....바보같이....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이렇게 포기해 버릴거면서....
혁수의 작은 머리를 받치고 있는 베겟잇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혁수는 미세하게 떨리는 턱과 입술을 감추려고 시트를 코밑까지 끌어올린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어둠속에서 숨죽여 우는 흐느낌은 비린내가 날 정도로 서럽고 참담하다...
문제는 지난 1년동안 수도 없이 그런 흐느낌 속에서 밤을 지새웠다는데 있다..
그렇다면.....오늘이 그 비참한 오열의 마지막인가?
아니.....모르겠다....자신있게 단언할 수는 없다....
차가운 손으로 눈가의 물기를 훔쳐내는 혁수의 귓가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점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혁수의 방으로 오고 있다..
자동적으로 혁수는 긴장한다..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전신의 감각으로 그의 체취와 실루엣과 음영까지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너무도 정확해서 단 한번의 어긋남도 없는 역사를 자랑한다.
덜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약하게 술냄새를 풍기며 주혁이 방안으로 들어선다..
그러나...습관처럼...혁수의 후각은 알콜 성분보다 주혁 특유의 향내를 더 진하게 빨아들인다..
콧등을 싸아-하게 메워오는.....'레드 티어즈'(red tears)의 비애....
핏물의 향기.............
비칠거리고 휘청이는 주혁의 모습이 캄캄한 암흑 속에서도 선연히 드러나 보인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지옥행을 명받은 사람이 신께 마지막 자비를 탄원하는 듯한 주혁의 움직임...
혁수는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가라앉히고 자는체 한다.
주혁이 혁수의 침대에 걸터 앉는다.
그의 체중 때문에 매트리스 한쪽이 푹 꺼지는 것을 느끼며...
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이불자락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준다..
"혁수야.........."
주혁이 입을 열자, 그의 따뜻한 숨결이 혁수의 얼굴 위로 뿌려진다..
혁수의 이름을 부르는 주혁의 목소리는....
이제껏 혁수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지치고, 절망에 찬 신음성과도 비슷한....
"혁수야......나 주혁이야.....내말 듣고 있어....?"
어째 당사자를 바로 앞에 두고 하는 대사라고 하기엔 무언가 어색한 뉘앙스다..
그만큼 주혁은 혁수가 멀게 느껴지는 것인가....
아마도 그런가 보다..
"뭐어...안 듣고 있어도 괜찮아.....그래도 얘기하고 싶으니까....."
너그럽게 선심을 쓰는듯한 말투....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혁은 혁수의 와인빛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그 부드러운 감촉에....주혁의 몸 속 깊은 곳에 뭉쳐진 응어리가 울컥 솟구치며...
그것이 눈물로 승화되어 새어나온다..
"오늘......세라랑 같이 술마시는데.....세라가 그러더라.....
그렇게 지 생각밖에 안하는 놈.....안혁수 같은 겁쟁이.....좋아하지 말라고.....깨끗이 보내고 잊어버리라고......"
그애 말대로 해....그애 말이 옳아....
나같은 겁쟁이...이기주의자.....네 안에서 지워버려.....
우리가 함께 보낸 1년...헛된 꿈이라고 생각해.....
난...여기 오지 않은거야.....널 만나지 않은거야.....
그렇게 생각해, 주혁아....제발 그렇게 생각해 줘..........
"그래, 그럴거야....혁수야, 나...노력할거다....너 잊기 위해서.....나 정말 노력하고 싶어.....
네 얼굴도..너랑 같이 있었던 시간들도....널 안으면서 느꼈던 행복도...
또....너 때문에 흘린 눈물까지....전부 다.....내 머릿속에서 싹 없애고 싶어...
왜냐면......그래야 내가 편할테니까......
너 이제 가버리고 나 혼자 남을텐데......그런 기억들이 자꾸 날 괴롭히면...나 정말 견디기 힘들거야.....
그러니까....잊어버려야 돼....그렇지...?..."
물론이야....잘 생각했어.....
그래야지....당연히 그래야지.....
혁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은 마음을 초인적인 의지로 억누른다..
주혁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울음기로 물든다..
그 때문에 연속해서 이어지는 주혁의 얘기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억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근데.....근데 말이야...혁수 너.....내가 너 완전히 잊어버리기 전에...정말로 그러기 전에....다시 돌아와야 돼.....알았지....?
혹시라도 내가....진짜 널 잊어버리고.....내 마음속에 네 자리가 없어지면....나 말이지......내 인생은......아무 의미가 없어.....
그러니까.....나 살수 있게....내가 너 잊기 전에......아직 너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을 때.....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야 돼...
안혁수.....무슨 말인지..이해하지....?..."
다시 올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을....주혁은 그렇게 어렵게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다..
'기다릴테니 돌아와라'....간단하게 말하면 될 것을....
하기사....그만큼 주혁의 가슴속에 맺힌 언어들이 많다는 뜻일거다...
단순명료한 몇마디의 어휘들로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턱도없이 모자라고 벅차기 때문이리라....
"흐윽....혁수야......가지마라, 제발......안가면 안돼...? 꼭 가야 돼....? 그냥....그냥 내 옆에 있으면 안될까....?
나 이제 욕심 부리지 않을게......쓸데없이 욕심 부리면서 네 몸에 손대고 그러지 않을게......바라만 보고 있을게..........
볼수 있게만이라도 해줘, 혁수야.....가까이서...볼 수만 있게.....우욱......"
와르르 허물어지는 주혁의 성벽.....
혁수의 얼굴을 감싸쥐며 그와 이마를 마주댄채 울음을 토해내는 주혁..
덕분에 혁수의 뺨은 주혁의 눈물과 혁수의 눈물이 섞여, 지상에서 가장 쓰디쓴...독한 액체가 흥건히 강을 이룬다..
흠뻑 젖은 혁수의 작은 얼굴을 주혁의 메마른 손바닥이 부지런히 닦아낸다..
연이어 혁수의 분홍빛 입술에 와닿는 주혁의 뜨거운 입술....
혁수의 가슴과 밀착되는 주혁의 가슴.....
서로에게 박자를 맞추는 심장의 고동소리.....
이렇게 애원해도 넌 떠날거라는거 알아.....
그래도 지금...날 받아주는 네가 고마워.....
그리고 널 느낄수 있는 이 순간이 말할수 없을만큼 황홀하다....
그래서....난....후회 안 해......
널 만난것도.....너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잠시 뿐이라 해도......
섬광처럼 지나치는 찰나라 하여도.....
깊고 오랜 키스를 끝내고...안타까움에 휘감겨 입술을 떼어낸 주혁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바로 앞에 있는 혁수조차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듣지 못할만큼..
그렇게 희미한 음성으로....속삭인다...
".....혁수야.....사랑..해......."
혁수의 영혼이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친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이슬방울을 생산해 내는 기능마저 망각한 채...탁하게...뿌옇게...흐려져 간다...
주혁이 나를 사랑한다.
나는 내일 그의 곁에서 떠난다.
나는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혁은 나를 기다린다.
왜냐하면......주혁은 나를 사랑하니까.....
그렇구나.......'사랑'이라는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설명되는구나...
여지껏 나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수많은 의문부호들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인하여 몽땅 풀어지는구나.....
그럼에도....혁수는 주혁이 처음으로 뱉어낸 '사랑'이라는 단어에...더 크게 상처입고 무너진다...
주혁의 입에서 나온 '사랑'은 혁수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의 정신을 조각조각 파편내고,
그의 영혼을 둔탁한 흉기로 내리쳐서 모든 신경을 마비시킨다..
주혁에게로 향해 뻗어있던 촉각세포들이 일순간 소멸되고...
혁수는 고통의 극한을 지나, 슬픔의 최대치를 통과한다..
죽고싶다.....죽고싶다.....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
혁수는 벙어리의 영혼으로 아우성치며....눈을 감아버린다...
- 출국 당일, 집을 나서기 전....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주혁을 바라보는 혁수의 눈빛이 처절하게 침잔한다..
주혁의 얼굴은 평화롭고 안온하다..
이런 패러독스가 있을수 있다니.....기가 차다..
한번쯤 주혁의 뺨을 어루만져 볼 수도 있는거다..
조금은 느슨한 심리상태가 되어, 그의 붉은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길수도 있는거다..
그러나....혁수는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렇기에 한발짝도 주혁의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딛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혁수는 기특하게도 주혁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그리고 주혁의 책상으로 가, 그 위에 곱게 접힌 상아색 쪽지를 올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선다...
현관으로 내려가며....혁수는 시니컬한 갈채를 보낸다..
자신의 비열한 이성과 교활한 이기심에게.....
(32)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여 버리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색깔을 바탕으로 하면서 각자의 색깔을 하나로 용해시킨 또 다른 세계를 저마다의 인생에 더하는 일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 오차아이 게이코 <바탕> 중에서 -
강태의 한손에 쥐어진 머그컵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를 한모금 들이키면서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는 강태..
낮은 한숨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옅게 새어나온다..
난폭하게 강태를 헤집어 놓던 그날 이후로...
재준은 외박이 잦아졌을 뿐만 아니라, 집에 들어와서도 강태의 몸에 손을 대기는커녕 그와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속이 후련하기도 하고 편해졌다는 생각에 심적으로 한결 부담이 덜했지만 그건 잠시였다.
요상하게도 강태는 점점 재준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 아침에 일어나 보면 아무 말 없이 휑하니 나가버리고 없는 것.
어색함과 민망함을 무릅쓰고 공손히 인사를 하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채 곧바로 침실로 향하는 재준의 뒷모습...
하나하나가 강태의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강태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터뜨린다..
정말 화를 내야할 사람이 누군데.....
제일 이해가 안가는건, 재준이 했던 말과 행동 사이의 모순이다..
그가 항상 얘기하는 것처럼 나는 그의 정부, '섹스파트너' 일뿐이다..
그런데 한낱 잠자리 상대에 지나지 않는 나를 두고서 왜 이런 싸움을 벌이며 감정소모를 하는 것인가?
조직에 관련된 사업만으로도 눈코뜰새 없이 바쁜 충의회의 보스가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따져 묻고싶다..
정말 당신이 내게서 원하는게 뭐냐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주기를 바라냐고....
당신이 내게서 기대하는게 도대체 뭐냐고...
칫- 그랬다간 또 대든다고 뒤지게 패겠지....-_-;;;
무식한 깡패새끼....힘만 세가지구....-_-++++
어느새 입을 한주먹이나 삐쭉 내밀고서 속으로만 툴툴거리는 강태..
창가에 기대있던 몸을 곧추세우며 시계를 흘끔 돌아본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오늘도 재준은 들어오지 않을 모양이다.
강태는 자꾸만 들러붙은, 그에대한 상념들을 떨쳐내기 위해 영화를 보러 거실로 향한다.
비디오 테이프를 VTR에 집어넣고, 리모콘의 버튼을 누르며 강태가 쇼파에 앉자마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대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강태의 생각과는 달리, 재준이 귀가한 것 같다..
강태는 일부러 약간 느릿한 걸음걸이로 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다가....재준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서는 여자를 보고는 강태의 발이 그 자리에 붙박힌다..
타이트한 검정색 원피스를 입은 긴 퍼머머리의 여자는 재준보다 두세살쯤 더 나이들어 보인다..
어벙벙한 표정으로 자신과 재준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하는 강태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까딱하는 그녀...
재준은 역시나 강태가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하고 지나친다..
강태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뭐라 입을 열지도 못한다.
유유히 침실로 들어가 버리는 재준과 여자...
강태를 약올리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그동안 쌓였던 부아가 한꺼번에 치민다.
강태는 리모콘을 사용해 VTR의 전원을 꺼버리고, 쿵쾅거리는 격양된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자기 방으로 올라간다..
연녹색 시트가 깔린 침대에 벌렁 누우며 머리 꼭대기까지 이불을 뒤집어쓰는 강태..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듣고 심통이 난 사춘기 소년처럼...
그 잘생긴 얼굴을 우거지상으로 구긴다..
한참을 그렇게 분을 삭히던 강태...
험악하게 일그러졌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더니...
시무룩하고 어둑어둑한 낯빛이 된다..
정수리까지 덮인 이불자락을 슬며시 걷어내고 상체를 일으켜 앉는다..
밀물처럼 몰려오는 이 서운한 감정은 무엇인가?
저 인간이 그동안 나한테 잘해준게 뭐가 있다고....
제기랄....진짜 싫다....
강태 너 바보냐? 병신이야??
저 인간은 원래 저런 놈이야....
무식하고, 성질 더럽고, 자기 멋대로에, 섹스에 미친 색마이고, 배려심 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지....
그것뿐이면 말을 안해....
지 뜻대로 안된다 싶으면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나,
자기한테 조금만 뭐라고 해도 반항한다느니 기어오른다느니 하면서 개패듯이 패고 말이야....
때리기만 해?! 강제로 그짓까지 하잖아....변태 같으니....-_-+
그래놓고는 뚱하니 삐져서는 사람을 본척도 안해??
그래도 명색이 같이 사는 '정부'인데....
그러고도 네가 조직 보스냐? 밴댕이 소갈딱지야....-_-+++
우쒸~~ 이따위로 형편없는 새끼...뭔짓을 하던 상관할 바 아닌데....
...그런데........
재준과 그 여자가 침대에서 함께 뒹구는걸 상상하니....강태는 참을 수가 없어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재준이 한데 얽혀 육체의 향연을 불태우던 바로 그 침대에서!!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재준의 키스와 애무를 만끽하고 있다는 사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재준이 그 극치의 쾌감과 희열을 선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강태는 마치 자기 자리를 도둑맞은 듯한 불쾌감과 억울함으로 느껴진다..
마침내 그는 이불을 팽개치고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잠시동안 서서 무언가를 골똘히 심사숙고하더니, 비장한 얼굴로 방문을 나선다..
- 한편, 침실에 들어온 재준은 피곤이 배어나는 몸짓으로 자켓을 벗어 아무데나 던져 놓는다.
그를 따라온 여자가 살가운 손놀림으로 재준의 셔츠단추를 풀어내고...
재준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그녀에게 몇장의 수표를 건넨다..
"어머~~이렇게나 많이요?? 이회장님 화끈하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정도일줄은 몰랐어요~~~"
여자가 함박웃음을 가득 담으며 덥썩 재준에게서 돈을 받아들고..
받은만큼 확실하게 써비스하겠다는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한껏 교태를 부리며 옷가지들을 벗어 던진다..
여자가 옷벗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재준은 거듭 눈가에 밟히는 강태의 잔상을 지우려고 계속해서 눈꺼풀을 깜박인다.
여자를 데리고 온 자신에게 경악과 당황이 뒤섞인 눈빛을 보내던 강태...
솔직히 이 여자가 섹시하고 매력이 있어서, 그래서 한번 같이 자보고 싶어서 집으로까지 불러 들인건 아니었다..
그냥...오늘밤 재준의 섹스파트너가 되고자 적극적으로 대쉬해 오는 여자를 마주 대하자..
갑자기 강태가 떠오르면서...그에게 여자를 꿰차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굳이 '강태'가 아니라도..자신의 섹스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널리고 깔렸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랬을 때 강태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 지....그것 또한 궁금했다..
유치하고 어린애 장난같은 게임이었지만 재준은 주사위를 던져 보기로 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우습게도 승자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강태는 무척 놀라고 쇼크를 먹은 듯 했지만...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재준은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일단 강태는 제쳐두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던져본다..
이재준, 이렇게 하니까 기분이 어때?
께름칙했던 마음이 이제 좀 시원해졌어??
또 다른 재준은 대답을 고심한다..
사실대로 말하면......별로야......
더 찝찝해졌어, 이상하게.......
멀뚱히 서서는 혼자만의 인터뷰에 몰두해 있는 재준에게...
어느새 알몸이 된 여자가 다가온다..
그녀가 재준의 허리벨트를 풀려고 하자, 재준은 그것을 제지시키고 억양없는, 딱딱한 어투로 그녀에게 명령한다..
"침대로 가..."
고분고분 재준의 말대로 침대에 올라가 눕는 여자...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약간 벌린 폼이 꽤나 도발적이다..
재준의 검은 눈동자가 냉랭하고 감흥없는 시선으로 여자의 육체를 훑어내린다..
그녀는...하얀 침대시트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구릿빛 피부가 아니다..
그녀의 어깨는 강인한 선으로 형성된 균형잡힌 어깨가 아니다...
그녀의 가슴은 단단하고 판판한 모양새나 느낌이 아니다..
그녀의 허벅지는 팽팽하고 탄탄하지 않다...
옆구리에서 허리, 골반으로 이어지는 곡선이 선정적이거나 요염하지도 않고,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목울대도 없다...
얼굴을 붉히거나,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지도 않는다.
고집스럽게 덤비거나, 저항하지도 않는다.
당돌한 눈빛으로 쏘아보지도 않고, 야무진 말투로 조리있게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녀는.......그녀는........강태가 아니다!!...
육감적이고 풍만한 여체를 보고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재준의 몸...
그 심각한 증세의 원인이 밝혀지자, 재준은 발작적으로 웃음이 터지려 하는 것을 겨우 눌러 삼킨다..
아아~~이재준.....병신 다 됐다, 정말......
이 게임을 계속해야 하나?
처음부터 승패를 가릴수 없는 게임이었던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재준에게 돌아온 것은 도무지 없어 보인다..
허탈하다....도대체 뭘 바라고 이런 쇼를 부린거냐?
이렇게 해서 너한테 얻어진게 뭔데.....
결과가 너무.....허망하잖아......
몸에 힘이 쭉 빠지며, 삽시간에 재준의 컨디션이 최악으로 급락한다..
허전하고 답답하다.
머릿속이 꼬인 철사처럼 복잡하게 엉켜서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 더 연구하고 분석해 볼 의욕조차 나지 않는다..
피곤하다.....쉬어야겠다....
재준은 갈색빛이 감도는 노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리며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그리고 그 특유의 심드렁한 어투로 말한다..
"하기 싫어졌어.....돈 갖고 그냥 가...."
"예~~에?! 그냥....가라구요....??"
나체의 여자가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키며 황망한 표정으로 되묻자, 재준은 기어이 소리를 꽥지르며 애꿎은 그녀에게 성질을 부린다..
"씨발, 벌써부터 가는 귀가 먹었냐?? 가라면 갈것이지 뭔 말이 많아!??"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가 쨍 하고 쪼개지는 듯 서릿발같은 재준의 고함에 침대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는 여자...
재준은 침대 모서리 쪽에 털썩 걸터앉으며 갑갑한 속을 조금이라도 틔워보려는 듯 담배를 피워문다..
쌉싸름한 니코틴 성분이 폐 속 깊숙이 스며들자 어느정도 진정이 되고 차분해 진다..
"저어.....그럼 가볼게요, 회장님.....다음에 뵈요...."
옷을 다 차려입은 그녀가 어깨에 핸드백을 둘러메며..
여자에게 등을 보인채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재준에게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멘트로 인사를 하고는 침실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문을 열어 젖히자마자...여자의 입에서 짧은 외침이 튀어나온다..
"엄마야, 세상에...! 놀라 죽는줄 알았네.....휴우....."
덜컥 한박자를 빠트리고 벌렁거리는 심장이 들어찬 가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여자...
그녀를 놀래킨 장본인은......물론, 강태였다..
(33)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텐데....
- <사랑을 위해 죽다> 중 -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떠나게 되서 미안하다.
너랑 같이 있었던 시간...그 중에서 좋은 기억들만 간직하고 싶어.
너도 그러길 바래...건강하게 잘 지내고...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편하게 웃으면서 마주볼 수 있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다..
- 혁수- '
마침내....혼자 남겨졌다..
혁수로 채워져 있던 곳곳이 텅 비어 있었다.
혁수가 앉아서 공부하고 책을 보던 책상..
벽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던 창가..
혁수가 잠자던 침대....썰렁하게 비워져 있다..
연보라색 침대시트도, 아이보리색 커튼도..하늘색 벽지도...
삭막하기만 하다...
이 공간속에....정말 어제까지 네가 있었던 거니...?
이렇게 차갑고 암울하고 숨막히는 공간 속에서...
너와 내가 사랑을 나누기도 했단 말이야..?
아니었을 거야...
여기가 그 따스하고 아늑했던 보금자리라니...
똑같은 장소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달라질 수는 없는거잖아....
주혁은 자신에게 항변조로 되풀이하여 추궁해본다.
고개도 저어보고, 눈을 감았다가 뜨기도 여러번...
그래도....옷사이를 비집고 침투해오는, 소름끼치는 냉기와 정적이 주혁의 민감한 살갗을 유린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혁수가 떠난다는 사실을 완연히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진짜 혁수가 떠난 뒤에도..주혁은 자신이 그의 공백을 잘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실제가 아닌 꿈처럼 막연하게 혁수와의 별리를 받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다독이던 주혁이었다..
그런데.....너무 생생하다...
혁수가 자신의 가까이에 없다는 것, 그를 볼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이 뚜렷한 현실감으로 주혁에게 다가온다..
잔인하게 주혁의 숨통을 조이는....
막막하게 영혼의 눈을 가리우는.....그리움......
벌써부터....이제 시작인데 벌써.....
아득히 밀려오는 두려움....
주혁은 모든 의지와 여력을 잃어버린다..
그와 동시에, 주혁의 눈앞에 허무맹랑한 환영들이 어른거린다..
책상에 앉아 화첩을 들여다보는 혁수...
창가에 기대어 바깥의 풍경을 응시하는 혁수..
연보라색 시트를 덮고 조용히 잠들어 있는 혁수...
혁수는 귀여운 짝눈을 찡긋거리며 웃기도 하고 도톰한 입술로 오물오물 무어라 얘기하기도 하고, 조그마한 얼굴에 열꽃을 피우며 화를 내기도 한다..
실사의 혁수와 똑같다...
그러나....그 특유의 살내음을 풍기지 않고, 나즈막한..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또....주혁의 손에 그의 초콜릿빛 보드라운 피부감촉이 닿아오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안혁수는......없다..
주혁이 팔을 뻗어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떠.났.다.
머리가 어지럽다. 현기증이 몰려온다.
속이 메슥메슥하고, 내장 속의 찌꺼기들이 식도를 타고 거슬러 오르는 것 같다.
호흡이 턱하고 막히며...주혁은 순간적으로 질식의 공포에 휩싸인다.
사각의 방 안, 네 귀퉁이가 점점 좁혀지며.. 주혁을 통째로 삼켜버릴 듯 하다..
주혁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엽기적인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두손으로 머리통을 감싸쥐고 허겁지겁 그 곳에서 뛰쳐나온다..
그리고는, 연쇄살인범에게 쫓기는 희생자처럼 필사적인 얼굴로...
감금되어 있던 악당들의 소굴에서 탈출하듯 집을 나선다..
-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도착하기까지는 4시간 정도 남아있다.
지금 어느 대륙 위를 날고 있을까...
혁수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육지를 유리창을 통해 내려다본다..
주혁인....지금 뭐하고 있을까...?
아까부터 자꾸만 표면으로 떠오르는 주혁에 대한 생각들을 애써 외면하던 혁수...
덫에 걸리듯, 이번에는 그 상념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어나는 주혁..주혁....장주혁...
그 이름의 라벨이 붙은 생각의 파편들...
끝끝내 그 말을 못했어.....미안하다고....
감히 용서해 달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 말은 해야 했는데..
안혁수....너는 마지막까지 네 입장만 챙기는 구나....
나쁜자식.....한심해......
속으로 중얼거리며 혁수는 오른손을 입술로 가져가 조심스레 아랫입술을 쓸어본다..
어슴푸레하게 되살아나는 어젯밤의 키스...
지금껏 주혁과 수도없이 키스를 해봤지만...
어제처럼 간절하고 순결한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주혁의 젖은 입술이 접촉해 오는 순간..
혁수는 하마터면 그의 목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애걸할 뻔했다..
내가 떠날 수 없게...어떤 방법으로든 나를 붙잡아 달라고...
지난 1년동안, 나를 형제가 아닌 다른 관계로써 네 곁에 두기 위해
네가 서슴지 않고 사용했던 그 '섹스'라는 수단을 써서라도 나를 계속 네 곁에 묶어두라고..그를 부추기고 싶었다...
혁수는 그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기막혀하며 치를 떨었고, 끔찍스러운 자아와의 부조화 때문에 더더욱 견고하게 빗장을 걸고 겹겹이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가슴속의 절규와 피맺힌 외침을 언제나 그랬듯이 태연하게 밟아 죽이고...선선히 비행기에 올랐다..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고, 한숨 한번 내쉬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튼튼한 이성과 결심을 칭찬해 주었다.
혁수 넌 정말 강한 아이라고.....잘 이겨냈다고....
하지만 혁수의 영혼은.....이제 피흘리고 아파하는 방법마저 잊어버렸다..
통증이 너무 심하면 감각을 상실하듯, 혁수의 다친 영혼은 고통의 극을 넘어서서...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 Rrrrrrr~~~~
주혁의 핸드폰이 울어댄다.
이미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주혁은 알콜기운 때문에 약간 떨리는 손으로 느릿느릿 핸드폰을 받아든다.
수화기 저편에서 퉁겨져 나올듯한 세라의 목소리가 들리고..
"주혁오빠야? 아까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았어?!
내가 몇번이나 전화했었는지 알아?? 내가 남긴 음성 못들었어? 왜 전화 안해, 걱정되게~~!!!"
그녀답게 상대방이 말할 틈도 주지않고 따다다다 쏘아대는 세라..
문득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상당히 코믹하다는 생각에 주혁은 그 와중에도 피식 웃음을 머금는다.
"오빠 지금 어딨어? 응??!"
"나....집이야...내방...."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온다.
밖에 나와있다고 하면 분명히 또 총알같이 달려올 그녀..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심리상태를 구구절절이 설명하여 세라를 납득시키는 것도 귀찮다..
그러니 이렇게 할 수밖에....
"정말 집이야? 구라치는거 아니지??!"
"훗...그래...내가 왜 너한테 뻥을 까냐....진짜야...."
얼씨구....?
장주혁...제법인데, 사기치는 솜씨가.....
주혁은 자신에게 신랄한 조소를 퍼부으며.. 입안을 맴도는, 쓰디쓴 소주의 끝맛 때문에 이마를 살짝 찌푸린다..
"오빠 괜찮아...? 내가 술 사줄게 나올래? 괜히 혼자 청승떨지 말고..."
"아니야....됐어...."
"그러지 말고~~ 그럼, 나이트 갈까? 애들이랑 나이트 가자, 응?? 이런 날일수록 싹 다 잊어버리고 노는게 좋아~~
지금 신촌으로 나와라, 오빠...내가 재밌게 놀아줄게~~"
일부러 과장되게 밝은 음성으로 오버까지 해가며 주혁을 설득하는 세라..
고맙다......정말 착한 녀석.....
나같은 놈 뭐가 좋다고 이렇게 잘해주는거냐...?
네가 이러면....내가 너무 미안해지잖아......
어이없게도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다..
세라의 따뜻한 마음씀씀이 탓인지...
갑자기 서러운 감정이 가슴 한가운데를 찔러오며..
얼얼한 취기까지 겹쳐서는...
철벽같은 수비를 자랑하던 주혁의 인내심과 자제심을 공중으로 휘발시킨다..
주혁은 울음 때문에 목이 메어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세라와의 통화를 끝낸다.
"세라야, 오빠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그러니까 다음에 보자, 끊을게..."
황급히 플립을 접고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는 주혁...
한번 터져버린 눈물샘은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주혁은 줄줄 쏟아져 내리는 눈물 사이로 어지러운 시야 때문에 비틀거리며..
대충 술값을 지불하고...네온사인이 휘영찬란한 거리로 나온다..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불빛...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왁자지껄 웃어대며 지나가는 젊은이들...
모든게 살아있고, 활발히 움직이고, 바쁘게 돌아가는 가운데..
지치고 메마른 영혼 하나가 휘청이며 걸어간다...
그게 바로 나다.....장.우.혁...
나는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 세상이나를 버렸다...
나는 아주 철저하게...처참하게....버림받았다...
나의 세상, 나의 우주...내 생명의 근원....안혁수....
그가 나를 버렸기에....그가 날 떠났기에....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걸까.....
내가 갈 곳이 없다...아무데도...
나를 환영하고 기쁘게 맞아주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
어디로....가지.....?
아아...그래...한군데 있어....
그와 나의 추억이 서려있는 장소가 또 하나 있지....
주혁은 몸을 틀어 학교 쪽으로 엉성한 걸음을 내딛는다.
눈에서는 쉬지 않고 무색의 액체가 분수처럼 솟아난다..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채..주혁은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다..
학교가 보이고....정문을 통과해서 조금 더 가니..
혁수와 함께 공부했던, 미술관 건물에 당도한다..
혁수와 주혁이 자주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던 곳이 있다.
미술관 건물의 옥상....
거기서 섹스도 한번 했던 것 같다..
뭐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주혁이 발끈해서는 거의 반강제로 혁수의 몸을 가졌었다..
그때....시멘트벽에 기대어...주혁의 육체를 받아들이던 혁수...
언제나처럼 거부하다가도, 나중에는 더욱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주혁에게 매달려 오던 혁수....
그럴때의 혁수는 불같고...자신뿐만 아니라 주혁까지 온통 태워버릴 것처럼 뜨겁다..
옥상에 이르자, 그 순간 주혁의 신경세포 하나하나에 명확히 각인 되었던 황홀감과 오르가즘의 절정감이 처연하게 되살아나고..
다시는 그러한 환희와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이 주혁의 사고회로를 차단한다..
인정할 수 없어.....싫어......안돼.....
버틸 수 없어......단 하루도......
죽어버릴래.....지금 이대로....
그와의 추억이 스며있는 여기에서.....
죽어버릴래......죽을래......
눈물이 흥건히 고여 흐릿해진 눈동자로..
모든 희망과 위안이 사라진, 체념할 수조차 없는 슬픔으로 얼룩져..
주혁은 옥상 난간에 올라선다...
그리고...쓰레기보다 더 하찮게 느껴지는 자신의 몸뚱이를 싸늘한 아스팔트 위로 던져 날린다..
(34)
'몇만명 중에 한쌍의 적합성...'
- <실락원> 중 -
담배를 피우던 재준이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자, 문지방 너머에 서있던 강태가 침실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게 재준의 망막에 비쳐오고...
재준은 얼빠진 표정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나 강태와 마주보고 선다..
그러다가 방금 전까지 강태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고 곤혹스러워했던 자신을 상기하며...다시 얼굴을 냉정과 평정으로 단속한다..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여는 재준..
"풋....너어..변태냐...?....밖에서 엿듣고 있게.."
느물느물 말끝을 흐리며 작위적인 냉소를 동반한 재준이 강태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빨간 입술을 앙다문채 파르스름한 노기가 묻어나는 눈빛으로 사납게 재준을 노려보는 강태..
그러나 그의 흑빛 눈동자에는 증오와 살기 대신..
원망과 서운함, 그리고 투기가 가득하다..
처음 대면하는 강태의 이런 눈빛에 재준은 당황스러워진다..
그 눈빛이 무얼 뜻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어리벙벙해져서는 강태를 쳐다보고만 있는 재준에게..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하는 듯, 무겁게 잠긴 강태의 음성이 들린다..
"어...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너무 속이 상해서 말까지 더듬는 강태...
점점 더 미스테리컬하게 번지는 강태의 행동에 바보가 되어가는 재준이다..
강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피치를 높이며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거 아니에요!? 전 회장님의 정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뻔히 보는 앞에서 여자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갈 수가 있어요??!"
바닥에 억눌려있던 강태의 목소리가 장애물을 박차고 튀어오르며 재준을 코너로 몰아부친다..
지난번처럼, 어디다 눈을 부릅뜨고 대드냐며 그런 강태를 무참히 짓밟아 버릴수도 있건만은...
재준은 이상하게도 입이 떼지질 않는다..
그저 돌부처처럼 가만히 서서 강태의 악다구니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을 따름이다..
"회장님이 딴 사람하고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하지만, 적어도 난 회장님을 옆에서 모시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제 입장도 최소한은 생각해 주셔야 하는거 아니에요!??
회장님이 아까 그 여자 이집으로 데려오는거 보면서 충의회 사람들이 절 어떻게 보겠어요?? 제 체면은 뭐가 되는거냐구요!!?
그래요...사람들 눈은 그렇다 쳐요...어차피 남들 눈같은거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전, 회장님이 저를 이딴식으로 막 대하시는 것 자체가 화나요!!!"
마지막에 가서는 울먹임으로 마무리 지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강태..
금세 그 흑빛 눈동자를 물빛으로 적시며...
예쁘게 쌍커풀 진 눈꼬리에 방울방울 이슬이 맺히고..
철부지 어린아이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듯이, 발까지 쿵쿵 구르며 침대 위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재준의 눈이 휘둥그래지고...심각하게 양미간을 모으며 어떻게 해야할지 갈등한다..
재준이 머뭇머뭇하는 사이, 강태는 어깨를 들썩이며 자못 서럽게 울어댄다..
"...흐윽....화가 안풀리면 차라리 저번처럼 때리던가....흑....
이런 식으로 자존심 상하게 하는건 진짜 싫어...!....딱 질색이야....이렇게 모욕당하는 건.....흐윽...우욱....."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탕탕 내리치며 앙탈을 부리는 강태의 모습에 재준은 그만 슬그머니 웃음이 비져나온다..
쿡....저런걸 뭐라고 표현하더라...?
.....귀엽다....?
맞아...그거야.....'귀엽다'......
그러면서 재준의 머릿속에 자리하는 생각은...미안하다는 거였다..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얼마나 기분이 나빴으면 차라리 때리라고 얘기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준은 진심으로 강태에게 미안해진다..
그리고 지난 며칠동안 강태에게 못되게 굴었던 자신이 무척이나 치졸하고 한심스러워진다..
진정 부끄러운 마음에 재준은 공연히 헛기침을 날리며 주춤주춤 강태에게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는다..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는 강태...
어색함과 민망함과 쑥스러움의 삼중타를 간신히 극복하고, 재준은 나름대로(?) 다정한 목소리를 내어..
강태의 무릎을 어루만지며 입을 연다..
"야아...그,그만 울어.....네가 그렇게 생각할줄은 몰랐어.....난 그냥.....저어.......휴우....-_-;;;;"
워낙 말재간이 없는 재준이기도 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감이 안 잡힌다..
쩔쩔매고 있는 재준의 귓가에 닿아오는...투정 반 호소 반의 강태의 음성..
"전요, 제 존재가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는 게 제일 싫어요...
욕 먹는것도 참을 수 있고, 맞는 것도 참을 수 있지만...
지금처럼 없는 사람인양 대접받는거...그렇게 여겨지는 건 참을 수가 없어요...
저 회장님 정부에요....여기 사람들 전부 다 알고있는 사실이구요..
그럼 최소한 제 위치를 배려해서 행동해 주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그게 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잖아요....그정도는 지켜 주셔야죠...."
그제서야 재준은 강태의 심중을 파악한다..
왜 이렇게 강태가 대성통곡까지 해가며 성을 내는지..
자신이 강태에게 어떤 잘못을 한 것인지...
그렇다.
재준은 인정한 것이다.
자신의 과오와 실수를....
이번에는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고, 강태에 대한 어리석은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이재준....대체 무슨 객기로 이 지랄을 떤거냐??
이따위 쇼를 연출한 이유가 뭐냐고....-_-+++
따끔한 회오에 젖어 자신에게 맹렬한 비난을 퍼부어 보지만...
쉽사리 대답이 나와지질 않는다..
"아니, 난.....그냥 홧김에 그런거지 일부러 계획적으로 너한테 이런건 정말 아니야....프휴....-_-;;;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아무튼, 너무 성질이 나서..."
하는 수 없이 바보천치마냥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으며 강태를 달래는 재준..
생전 처음,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그의 모습은 간과한다 치더라도....
뒤이어 강태의 고막을 울려오는 재준의 발언은 강태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놓기에 충분하다..
"그래도 너한테 이렇게까지 한 건 내가 심한 것 같다...미...미안..하다....정말......"
재준이 사과를 하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은 강태였다.
쌓인 감정에 북받쳐 난데없는 울음보를 터뜨리긴 했지만..
그런 자신을 따뜻하게 토닥여 주는 재준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또 재수없게 악악거린다고 고함이나 지르지 않을까 내심 강태는 걱정했었다.
그런데...멋적게 머리를 긁적이며 화해의 말을 읊조리는 재준을 대하자...
예리하게 날이 선 칼과 같이 날카로운 말들을 뱉어내는 강태의 혀가 봄햇살 아래의 눈처럼 녹아들고...
강태의 가슴속에서 식을 줄 모르고 들들 끓어넘치던 미움과 질시가 휘발성 기체처럼 사라진다..
강태는 손등으로 눈가의 물기를 씻어내며, 한결 온순해진 어투로 말한다..
"저도 의도했던건 아니었지만....태현형이랑 그런 모습 보여드린 거 죄송해요...
제가 더 신중하게 행동했어야 하는건데...."
"됐어.....그 얘긴 그만하고, 이걸로 눈물이나 닦아..."
퉁명스럽게 들리도록 보통 때보다 더 거칠고 차가운 억양으로 얘기하며 강태에게 손수건을 내미는 재준...
그걸로 젖은 얼굴을 말끔히 정리한 강태가 약간 충혈된 눈을 들어 재준과 시선을 맞추고....
소란을 피워서 송구하다는 듯, 수줍으면서도 은근한 미소를 띄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격한 분노와 항의를 너그럽게 감싸 안아준 재준의 아량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 같기도 하다..
어느쪽이던 간에...한가지 분명한 건...
미치게 예쁘고, 사람을 홀딱 빠지게 만드는....
강태의 전매특허 미소라는 것이다..
도발적으로 말려 올라가는 빨간 입술과, 대담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육감적인 몸 전체에서 풍기는 요사스런 기운....
하여튼 강태.....정말 희귀종이다.....
넌 조물주가 아니라, 연옥에 있는 섹스의 화신이 창조한 인감임에 틀림없어...
이러니 내가 돌아버릴 지경이라구.....제기랄.......
재준은 배부른 불평불만을 속으로 주절대며 강태에게로 팔을 뻗는다.
그러한 재준의 작은 동작만으로도 이미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강태..
진하게 맞부딪쳐오는 재준의 입술을 맞아들이며 소극적인 몸짓으로 걸치고 있던 청남방을 벗어낸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입을 벌려 재준의 혀를 자신의 섬세한 공간 속으로 들어오게 함과 동시에, 두 팔로 재준의 목을 끌어안는다..
거기에서 일단 진행을 멈추는 강태...
'정지'라는 팻말을 내걸고 재준에게로 바턴을 넘긴다..
이제부터는 그가 리드하는대로 따라가겠다는, 사랑스러운 의견 표명이다..
그 순간, 재준은 오늘밤 강태에게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최고의 열락과 만족을 안겨주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완전하고 흠 없이 아름다운 그가 절대로 자신의 곁에서 달아날 수 없도록..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기쁨과 쾌락을 강태에게 투여함으로써 그를 철저히 자신에게 종속시키겠다고....
재준은 더 깊게 키스해 들어가며 달걀껍질을 까 듯, 부드러운 손길로 강태의 옷가지들을 벗겨내고...
그 어느때보다도 세심하게 강태의 알몸을 구석구석 매만진다..
정성스런 그의 애무에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는 강태의 육체..
재준의 터치 하나 하나가 무료하게 축 늘어져 있던 강태의 감각과 신경중추들을 팽팽히 긴장시키며...
강태는 재준에게 들리지 않도록 혼자서만 중얼거린다..
그래....내가 원한게 바로 이거야....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린 느낌이야....
이 순간이 바로....내가 찾던 오르가즘의 실현....
끝나지 않고 반복해서 이어지는....오르가즘.........그거야...
강태는 연신 감탄하고 경이로워 한다..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재준은 강태의 바램과 욕구를 정확히 짚어내고..
예상했던 것보다 몇배 더 큰 충족감을 가져다준다..
어디를 어떻게 어루만지고 쓰다듬어야 할지 기적적으로 맞춰나가고..
절묘한 리듬과 템포로 강태를 정점까지 끌어올린다..
때로는 천천히 기교를 부리며 감질나게, 때로는 게걸스럽고 난폭하게 강태의 본능을 일깨우고 눈뜨게 하는 재준...
더 이상은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는지 강태가 재준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눕고..
재준은 최대한 강태가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살짝 들어올린다..
그리고 강태가 힘들지 않게 자세를 고정시켜 주면서..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강태의 내부로 들어선다..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강태의 신음성에는 콧소리가 섞여있지 않다..
그저 끈끈한 욕망과 터질듯한 팽창감만 가득하다..
거칠어지는 호흡을 고르며 재준은 강태의 몸 위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시작한다..
강태도 그와 박자를 맞추어 율동한다..
종점에 이르러, 재준은 질금거리며 자신을 조여오는 강태의 육체를 마음껏 음미하며...다시 한번 강태에게 세뇌시킨다..
지금의 이 느낌....자기 아닌 어떤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다는 걸...잊지 말라고.....
(35)
"안돼애~~~!!!"
주혁이 자신의 몸체를 공중에 띄우려고 발바닥을 난간에서 분리시키는 순간..
건조한 밤공기를 가르며 누군가의 급박한 고함소리가 들리고..
주혁의 등뒤에서 정체모를 두 팔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엄청난 괴력으로 주혁의 몸통을 낚아채 거두어들인다..
그 힘의 반동으로 두 사람은 한데 엉켜 옥상 콘크리트 바닥을 몇바퀴 구르고..
회전이 멈추자, 주혁은 자신을 얽어맨 긴 팔을 세차게 뿌리치며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동자를 옮긴다.
낯이 익은 얼굴인데 선뜻 기억이 나주지 않는다..
자주 마주쳤던 사람 같은데...
"미친새끼야!! 병신같이 왜 죽으려고 난리야?!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잖아~~!!"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확대시켜 부라리면서 주혁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남자..
고무공이 통통 튕기는 듯한 그의 음성을 듣자, 주혁은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우리학교 실용음악과 2학년...이름이...문..뭐라더라...?
암튼 작년 축제 때, 자신이 작곡한 댄스음악에 맞춰 현란한 춤을 선보여 화제가 된 인물이다..
그의 노래와 춤을 감상하면서 주혁도 내심 대단하다고 감탄해 마지않았었다.
근데..이녀석이 어떻게....?
"네가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야...."
아직 미미하게 남아있는 알콜성분 때문에 몽롱한 목소리로 거만하게 지껄이는 주혁...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 나가는 사람처럼 자포자기한 말투가 어쩐지 서글프고 안쓰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그의 눈동자가 발산해 내던 검푸른 후광마저 그 빛을 잃어버리고...
죽은 호수처럼 썩은 물이 괴어있는 듯한 주혁의 눈망울...
저렇게까지 절망적이고 암담해 보일수도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기와 혈색을 모조리 빼앗긴 채 창호지처럼 빳빳하게 굳어있는 얼굴...
'무표정'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치, 인간의 안면으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수 없을 것 같은....
주혁은....숨을 쉬는, 돌아다니는 시체라고 해야 옳다..
그런 주혁의 몰골과 마주하고 있는 태현은 동정심에 앞서, 온몸이 오싹하는 전율감을 맛본다..
그러나 태현이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붙임성과 사교성을 발휘하여 주혁과의 대화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야, 그럼 너같으면 같은 학교 학생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거냐?!
기껏 살려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뭐? 왜 참견이냐고? 참내....-_-;;;"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새된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태현...
일단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놓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에 마치 주혁을 오래전부터 친분관계가 있었던 사람인양 대한다..
"누가 너더러 살려달라고 부탁했어? 왜 네맘대로 못죽게 하냔 말야!?!
......나 죽고 싶어.....진짜 죽어버리고 싶으니까 제발 좀 가만 놔둬....
네가 날 언제부터 알았다고 친한척이야, 새끼야~!!!"
굵고 묵직한 중저음으로 이어지던 주혁의 목소리가 테너로 높아지며...고통에 찬 포효로 돌변한다..
그러면서 태현의 멱살을 움켜잡고는 애매한 그에게 한풀이를 하는 주혁..
말없이 주혁의 찢어질 듯한 외침과 절박한 부르짖음을 받아주기만 하는 태현..
거친 주혁의 손길에 따라 태현의 몸이 이리저리 마구 흔들리고...
상처입은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주혁의 핏빛향기가 태현에게 훅 끼쳐온다..
정신을 산만하게 흐트러 놓을만큼 어지러운, 주혁 특유의 체취....
한동안 미친 듯이 가슴속의 애통함과 서러움을 토로하던 주혁...
진이 빠져 태현의 목덜미 근처를 틀어쥐고 있던 양손을 맥없이 떨군다..
그리고 넋이 나간 사람마냥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멍한 음성으로 독백처럼 중얼댄다..
"보고싶어.....벌써부터 그애가....보고싶어서 미칠 것 같아.....
근데 나더러 더 어떻게 살라는거야...이렇게....이렇게 계속 살라는 건...말도 안되는 얘기야....
난 못해...절대 못해.....나는........."
주혁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던 무릎의 기력이 쇠하여지고..
주혁은 풀썩 앞으로 고꾸라지며 눈물 콧물이 범벅된 채, 그 자리에서 탈진한다..
태현은 피부에 직접적으로 전달되어 오는 주혁의 아픔에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지그시 누르며..
혼곤히 망각의 소용돌이 속으로 잠식되어 가는 그의 야윈 몸을 들쳐업는다.
혼자 자취하고 있는 아파트로 발걸음을 옮기며,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는 태현이다...
- 정확히 1년 2개월 만이다..
전에 살던 L.A는 아니지만, 어쨌든 같은 미국땅인 뉴욕...
L.A 보다 훨씬 도시적이고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미국 동부와 서부의 특징적인 차이일 것이다.
자신에게는 L.A보다 뉴욕이 더 잘 맞을 것 같다는 예감에 혁수는 자그마한 안정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혁수는 한국보다 미국에서의 생활에 더 익숙하다..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 어린시절을 보냈을 뿐...
제대로 사리분별력이 생기고 머리가 큰 다음부터는 줄곧 미국에서 성장한 혁수였기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1년만의 귀환이 그다지 생소하거나 서먹서먹하지도 않다..
다시 돌아온 미국땅...
1년전과 마찬가지로 덤덤하게 혁수를 맞아주고, 편안히 품어준다..
오피스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뉴욕의 거리풍경을 바라보며, 혁수는 의식적으로 되뇌인다..
잘 왔어, 안혁수....
백번 생각해도 올바른 선택이었어....
절대 후회하지 않을거야....보장할 수 있어....
오피스텔에 도착해서,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집안을 둘러보는 혁수..
혼자만의 공간에 남겨지자..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며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당장 침대 속에 파묻혀 숙면을 취하고 싶지만..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화하라시던 어머니의 신신당부가 떠오르자 혁수는 늘어지는 몸을 추스려 전화기 쪽으로 걸어간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고 버튼을 누르자, 뚜르르르 하는 전자음에 이어 신호가 가고...
"여보세요.."
"엄마, 저 혁수에요...방금 도착했어요.."
"그래, 혁수야~~ 안그래도 언제 전화가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하지??"
"조금요...저 잘 도착했으니까 걱정 마시고 주무세요...지금 거기 밤이죠?"
"응, 12시쯤 됐어...너도 오랫동안 비행기 타느라 힘들었을텐데 얼른 쉬어라.."
"예에....저기.....엄마....."
"어 그래...얘기해 봐..듣고 있어.."
"저어....주혁이....집에 있어요....?..."
고개를 푹 숙인채 전화기 줄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아 말며..
죄지은 사람처럼 우물우물 거리는 혁수...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이대로 그냥 있기에는....너무...불안하다...
"글쎄다.....집에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구나, 엄마도...
혁수 넌 주혁이 일절 신경 쓰지 말고 거기서 잘 적응할 생각만 해..
네가 누구 때문에 다시 거기로 간건지 몰라서 그러니??
엄마는 네 입에서 '주혁'이란 이름이 나오는 것 자체가 끔찍스럽다..
그 애랑 관련된 얘기는 꺼내지도 말어, 알았니?!"
기겁을 하며 쨍쨍거리는 그녀의 목소리...
혁수는 작은 얼굴 전체에 어두침침한 그늘을 드리우며..
예의 바르지만 힘없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마지막 멘트를 읊어댄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끊어요, 엄마.."
수화기가 놓이는, 달각하는 소리가 청승맞게도 고즈넉하다..
바로 몇분전까지만 해도 친근하고 다사롭게 다가오던 뉴욕이라는 도시가...갑자기 거대한 고립감과 소외감으로 혁수를 옥죄어 온다..
생경하고 낯설기만한 주위의 사물들이 무시무시하게 혁수의 시야를 장악하고...
혁수는 파도처럼 덮치는 외로움과 쓸쓸함에 속절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애써 접어두고 있던 한 사람의 하얀 영상을 그려본다..
나를 여기로 오게 한 사람....?
아닌데....그게 아닌데.......
그는 내게 애원했어...가지 말라고....
내가 온거야.....나 스스로 떠나 온거야.....
안혁수...그 사실을 잊어선 안돼.....
너의 선택이었어.........
- 게슴츠레 눈꺼풀을 들어올린 주혁의 망막에 맺혀지는..
처음보는 천장의 무늬...
예민하게 곤두선 주혁의 신경들이 일제히 잠에서 깨어나며..
주혁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다..
포근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베이지색 침대 시트..
거기서 나는, 익숙치않은 향내...
벙벙해진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주혁의 귀에 날아와 꽂히는 태현의 음성..
"그렇게 쫄 거 없어...여기 우리 집이야...지금 아침이구..밤새 아주 새근새근 잘자던데?.."
문틀에다 한손을 짚고 비스듬히 서서, 상대방을 놀려대는 듯한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는 태현..
하지만 그런 태현의 태도가 기분 나쁘지 않은 주혁이다..
환한 아침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밝게 미소짓는 그의 모습이 유난히도 싱그럽게 상쾌한 느낌을 주어서일까...
주혁은 경계심을 한층 걷어치우고, 방어태세를 느슨하게 풀며 밋밋한 어조로 입을 연다..
"미안하다...본의 아니게 귀찮게 해서...어제 내가 뭐 실수한 거 없어...?"
"실수?? 했지~~~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지, 네가..."
".........????"
주혁의 표정이 얼떨떨해지고...
부지런히 두뇌를 회전시켜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도통 가닥이 잡히질 않는다..
궁금증과 난처함에 물든 주혁의 눈동자가 태현의 얼굴에 머무르고..
"기억 안나? 너 어제 죽으려고 그랬잖아~~
미술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걸 내가 간신히 붙잡았는데..
휘유~~내가 너 보고서 따라갔었으니 망정이지..안그랬으면 넌 지금쯤...꾸엑...@.@"
주혁은 말문이 막혀버린다..
나의 내면 깊은 곳 어디에 그런 무모함과 어리석음이 존재하고 있었던가..
나의 영혼이 감당하고 있는 상실감과 슬픔의 무게는, 내가 감지하는 양보다 얼마나 더 크고 힘겨운 것인가...
대체 어디까지가 한계인가.....어디까지가............
"어젯밤에 학교에서 집에 가려고 정문 쪽으로 걷고 있는데..네가 지나가는 게 보이잖아...
딱 보기에도 비틀비틀 하는 게 꼭 뭔 일 낼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구....그래서 따라가 봤던거야...
다른 뜻은 없었어....쓸데없이 오해하지는 마라.."
제법 진지한 낯빛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태현...
침대에 앉아, 목구멍을 뻐근하게 메워오는 감정의 응어리들을 간신히 삭히고 있는 주혁에게..
심장을 후벼파는 듯한, 비수와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승혼지 뭔지 하는 애...미국으로 유학 갔다더니, 사실인가 보네...?"
(36)
가스렌지에 커피물을 올려놓고 강태는 재준을 깨우기 위해 침실로 향한다.
항상 강태가 들어오는 문소리만 듣고도 퍼뜩 잠에서 깨어나던 재준이, 오늘은 눈꺼풀을 몇번 움찔거리기만 할뿐 그대로 다시 곯아떨어진다..
재준의 잠든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시트를 턱까지 올려 덮고 모로 누워 쌕쌕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뱉어내는 재준..
하얀 침대 시트에 싸인 하얀 얼굴의 스무살 소년...
제멋대로 헝클어진 노란색 머리칼...
암흑가의 조직 보스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연약해 보인다...
강태는 그런 무례하고 방정맞은(?) 생각을 한 자신에게 핀잔을 주며 조심스럽게 그를 흔들어 깨운다..
"회장님...8시 다 됐는데..그만 일어나셔야죠..."
아주 살짝 손을 대기만 했는데도 재준은 번쩍 눈을 뜬다.
조직 보스로써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가해의 손길에 경계태세를 늦출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습성 탓일게다..
그러다가 강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긴장을 풀며 천천히 상체를 세운다..
재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시트자락이 흘러내려 그의 상반신이 알몸으로 드러나고..
얼굴보다 더 새하얀 재준의 속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백자도자기처럼 우아하고 찬란한 빛을 반사시킨다..
선이 고운 어깨와 섬세한 굴곡을 이루는 가슴팍이..
무척 풋풋하고 가녀린 인상을 준다..
저 몸으로 싸움질을 하고 칼부림을 한다는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이다..
강태의 눈동자가 의문과 불신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오래도록 자신을 주시하자...재준의 픽 하고 짧은 웃음을 날리며 농담조의 멘트를 건넨다..
"훗....아침부터 왜 그렇게 야시시하게 쳐다보냐...어젯밤에 그렇게 해줬는데, 벌써 또 하고 싶어..?"
비꼬는 투라기 보다는 가벼운 장난조에 가깝다..
모욕적이지는 않지만, 창피한 것만은 사실이다.
강태는 순식간에 구릿빛 피부를 복숭아 빛으로 발갛게 물들이며..
송곳에 찔린 듯 후다닥 일어선다..
"...씨..씻고 식사하세요..."
겨우 그 말 한마디를 던지고 허둥지둥 침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강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재준은 슬며시 얼굴 전체에 번져나가는 미소를 어쩌지 못하며 욕실로 들어간다..
- 식탁에 앉은 재준이 수저를 들자, 강태도 젓가락을 집으며 약간 망설이는 투로 입을 연다..
"저어...회장님....부탁이 있는데...."
찌개를 떠서 입으로 가져가던 재준은 그대로 눈동자만을 치켜떠서 강태에서 시선을 한번 준다..
듣고 있으니 계속 얘기해보라는 뜻이다..
강태는 또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잇는다..
"어어....저기요....저 오늘 이모님 댁에 좀 다녀오면 안돼요...?"
"이모집에는 왜..?"
"거기 누나가 있어서...누나 좀 만나고 오려구요...
못 본지 너무 오래 됐는데....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이모님도 걱정 많이 하고 계셔서요..한번 갔다오고 싶은데..."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 마냥, 재준의 표정과 기분을 헤아려 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는 강태...
그런 강태의 모양새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지려 하는 것을 재준은 가까스로 억제하고,
그 때문에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쑥스러운 기색을 감추려는 듯 다급히 대꾸한다..
"그래, 다녀와..."
간단하고도 흔쾌하게 떨어지는 재준의 허락...
강태는 삽시간에 활짝 웃음꽃을 피우며 밝고 경쾌한 음성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재준에게 인사한다..
저렇게 환한 강태의 함박웃음은 처음이다..
유혹을 빌미로 한, 은근하고 끈끈한 미소나..
아니면 빈정거림과 멸시가 물씬 배어나는 조소만을 재준에게 지어 보이던 강태...
지금같이 청량하고 해맑은 강태의 웃음은...
재준의 가슴속에 새로운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전혀 다른 느낌.....
사람들은 이 느낌을...'설레임' 이라고 부르던가...?
문득 자신이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된 듯한 착각에, 재준은 괜시리 혼자서 무안해진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재준은 외출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흰 이를 드러내고 계속 싱글거리는 강태의 예쁜 얼굴을 보며, 두근대는 심장의 고동을 참는 것을..더 이상 견뎌내기 힘들어서였다..
- 아이보리색 정장을 수려하게 차려입고, 갈색빛이 감도는 노란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돈한 재준...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옷방에서 나온다..
현관 앞에 서서 재준을 기다리고 있는 강태..
재준이 나오자 그를 따라 신발을 신는다..
"너도 지금 나갈려구?"
"아니요...차 있는데까지만 같이 나갈게요..."
요컨대, 밖에까지 배웅을 나오겠다는 소리다..
사실 몇몇 조직의 보스들은 조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정부의 배웅을 받는 사례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런 살가운 광경을 가끔 접할 때마다 낯간지럽다는 생각만 들 뿐, 추호도 부럽다거나 좋게 여겨지지 않았던 재준...
그럼에도 자동차 있는데까지 따라 나오겠다는 강태의 제의가 그를 우쭐하게 한다..
재준은 아무말없이 대문 밖으로 나서고, 강태는 그의 무언을 동의의 뜻으로 해석하고는 재준의 뒤를 따른다..
빌라 입구를 통과하자, 저만치 앞쪽에서 검은색 XG와 함께 여느때처럼 대기하고 있는 환성이 보이고...
그제서야 재준은 강태와 나란히 걸어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민망스럽게 느껴진다.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발부리만 쳐다보며 걷는 재준에게 한술 더 떠서 살며시 팔짱을 끼는 강태..
재준의 숙여졌던 고개가 번쩍 들리며 놀란 눈으로 강태를 돌아보고..
강태는 그런 재준에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띄운다..
재준은 부디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따름이다..
"회장님 나오십니까!......오늘은 도련님께서도 같이 나오셨네요....^^;"
정말 의외라는 듯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재준과 강태에게 문안하는 환성..
하릴없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는 재준과는 달리, 강태는 아무렇지도 않게 환성과 인사를 나누고..
재준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꼼꼼이 털어내며 귀염성이 물씬 배어나는 어투로 애교있게 당부한다..
"오늘은 웬만하면 일찍 들어오세요...맛있는거 해놓고 있을게요.."
"아,알았어...이제 들어가 봐..."
"....다녀오세요..^^"
강태는 살풋이 미소를 머금은 그대로 뒤돌아 다시 집으로 향하고..
재준은 환성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얼른 뒷좌석에 올라탄다..
조수석의 환성이 백미러를 통해 슬쩍 재준을 넘겨다보며 배가 근질거리게 재밌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요 며칠새에 도련님이랑 냉전 중이신 것 같더니, 어제 화해하셨나 봅니다...? 아주 얼굴이 환~~하시던데요...^^"
재준은 이쯤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_-;;
짐짓 무뚝뚝하게 얼굴색을 굳히며 자르는 듯한 말투로 분위기를 180도 바꾸어 놓는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오늘 스케줄이나 얘기해.."
- 두달여 만에 강태와 재회한 그의 누나 연이는, 한참동안 강태의 손목을 붙들고 흐느끼기만 했다..
처음 얼마간은 그녀와 같이 눈물을 내비치던 강태도..
그칠줄 모르고 파고가 높아지기만 하는 그녀의 울음에..
차분한 손길로 연이를 다독거린다.
"누나....나 괜찮으니까 그만 울어....두달만에 보는건데 그렇게 울기만 할거야...?"
"미안해, 강태야....나 때문에....나 때문에 네가....흐윽...."
"아이, 참...그게 왜 누나 때문이야....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그런거지...
우린 그냥....운이 나빴을 뿐이야....누구 잘못도 아니잖아, 지금 이렇게 된게...
그러니까 자꾸 누나 탓이라고 자책하지 마....
그리고 나 괜찮아...누나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힘들지 않아..."
그런 강태의 위로와 설명도 아무 소용이 없는지..
기어이 한참을 더 읍소하던 연이...
종래에는 울기도 지쳤는지 눈가와 코 주위가 새빨개져서는 맥빠진 얼굴로 강태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한다..
잠시 기묘한 침묵이 흐르고...어느정도 이성을 차린 연이가 허리를 곧추 세워 똑바로 앉으며 입을 연다..
"그래...그 짐승같은 인간 밑에서 네가 무슨 일을 하는거니..? 설마....너 그 조직에 들어간 건 아니겠지...?"
"아,아니야....그냥...심부름 같은거 하고...여러가지 도와드리고 있어..."
차마 그녀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용기는 없는 강태..
어물쩡 거리며 대강 둘러댄다..
뭐....내가 충의회의 조직원이 된건 아니니까....
꼭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렇게 강태는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그 인간이 너 괴롭히고 그러진 않니? 난 자다가도 그때 그 인간 눈빛만 생각하면 소름이 쫙 끼치는게.....
너랑 그 사람이랑 같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다 어지럽다, 야...."
"하하....^^; 그 분...겉으로 보기 보단 좋은 분이야....나한테도 잘해주시고.....나 잘 지내니까 걱정 마..."
말도 안된 다는 듯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면서도..
강태의 가식 없는 편안한 미소에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주는 연이..
무언가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을 때에 그녀의 버릇대로 입술을 실룩거리며,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린다..
"근데....강태 너, '김환성' 이라는 사람 누군지 아니..?"
"응...우리 회장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인데....왜애...?"
느닷없이 재준과 관련된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강태는 숨기고 있는 사실이 탄로 날까봐 노심초사하며 불안해하는 심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애써 범상한 투로 반문한다..
"아아....한달 쯤 전부터 통장에 매주 100만원씩 입금이 되있더라구...어디다 돈 빌려준데도 없는데 말이야...
이상해서 계좌번호 가지고 알아봤더니 예금주 이름이 '김환성' 이더라...
난 모르는 사람인데...그 뒤로도 매주 돈이 송금되더라고...
네가 아는 사람이었구나~~ 네가 일해서 버는 돈인가 보지?? 한 주에 100만원이면 엄청 많이 받는다, 너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그렇게 월급이 많은거니? 응??"
강태와 판박이처럼 닮은 흑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치뜨며 요모조모 캐물어오는 연이의 궁금증을 어설픈 미소로 무마시키는 강태..
프로그램이 입력된 자동장치처럼 재준의 얼굴을 떠올린다..
예금주 '김환성'의 실체는 충의회 보스 '이재준'이라는 배후사실을 수월하게 눈치챌 만큼, 강태는 영민하다..
그에 따라 강태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37)
태현의 입술이 '혁수'라는 두 글자를 만들어 내자, 어둑어둑했던 주혁의 낯빛이 그 회색의 빛깔마저 잃어버리고..
검푸른 유리구슬처럼 인공의 색채를 풍기는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간다..
주혁의 안색변화에 당황한 태현은 변죽만 울리는 마른기침을 뱉어내며 입을 연다.
"아,아니 나도 그냥 소문으로 들어서 아는거야...
애들이 그러더라구...혁수라는 애는 유학 간다면서 자퇴했고 주혁이라는 애는 종적을 모르겠다고...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아무 생각없이 한 소리였어..."
"훗....이번에는 말도 안되는 헛소문은 안 났구나..."
쌍꺼풀 없는 단아한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허탈함과 빈정거림이 잔뜩 묻어나는 웃음을 매다는 주혁..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져 담배갑을 꺼낸다.
습관적인 동작으로 불을 붙이고, 첫모금을 길게 뿜어내며..
테이블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은 태현에게 묻는다..
"근데 너...이름이 뭐였지....?...문....."
"문태현이야.. 실용음악과 2학년이구...넌 조소과라고 했던가?"
특유의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눈빛으로 태현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주억이는 주혁..
태현은 그런 주혁의 시선을 명명한 미소로 되받아치며, 상장 받아온 아들을 칭찬해 주는 듯한 말투로 덧붙인다..
"조소과.....너하고 잘 어울려.. 조각하는 모습, 멋있을 것 같아.."
주혁은 담배연기를 허공 중으로 분사시키며, 어깨만 으쓱해 보인다..
그렇게 얼마간 이어지는 침묵...
태현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주혁을 관찰하고..
주혁은 벽에다 등을 기대고 한쪽 다리를 쭉 뻗은 다소 시건방져 보이는(?) 자세로 묵묵히 담배만 피워댄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듯 몸을 움직여 담배를 끄더니, 여전히 자신을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는 태현에게 홍두깨 같은 제안을 한다.
"나아...여기서 너랑 같이 살아도 되냐..? 보아하니 혼자 사는거 같은데...."
어젯밤 처음 대면한 사람의 동거 제안이라....
확실히 태현에게는 구미가 당길만한 이야기이다..
더 생각해 보지도 않은채, 태현은 그저 막연한 모험심과 기대감을 의지하기로 한다.
벌써 이곳이 제집인 양, 느긋한 태도로 담배까지 뻑뻑 피워대는 녀석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그건....강태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강렬함이나 두근거림과는 이질적인...
평생 한번 만날까 말까 한, 자신과 비슷한 감성을 지닌 타인과의 접선이라고 할까...
이런 천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태현은 빙그레 넉넉한 미소를 띄우며, 시원스레 대답한다.
"좋아, 장주혁.....문태현의 첫 번째 룸메이트가 된 걸 환영한다.."
- "어머, 도..도련님...."
흠칫 놀라며 뒤로 한발짝 물러나는 가정부에게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주혁은 2층의 자기 방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딛는다.
방에 들어가서, 여행용 가방을 모조리 내놓은 후.. 옷가지들을 쑤셔 넣기 시작한다.
이제 쓸모가 없어진, 학교 공부에 필요했던 서적들은 팽개쳐 두고, 앞으로 사용할 물건들만 대충 챙겨 담는 주혁..
한창 짐을 싸는 도중에, 가정부의 귀뜸을 듣고 올라 온 혁수의 어머니, 정숙이 그에게 싸늘한 어조로 따진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니?..이게 무슨 짓이야...??"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끝까지 짐 싸는데 골몰하던 주혁은 꽉꽉 채워진 두 개의 트렁크를 바닥에 세워 놓으며 정숙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그러나 그녀처럼 독살스럽고 적의에 가득 찬 눈빛은 아니다..
평상시의 차분하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하는 주혁..
"제가 이 집에서 나가는게....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모든게 저로 인해서 시작된 일이니까...
이제 와서...어떻게 책임지지도 못하지만....어쨌든 이게 제가 어머니를 위해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아요..
솔직히 어머닌...더 이상 저하고 한 집에서 매일 얼굴 마주치는 것 자체가 싫으시잖아요....."
결코 비꼬는 투는 아니다..그렇기에 뭐라고 나무라거나 비난할 수도 없는 그녀..
어쩐지 궁지에 몰리고 있는 듯한 느낌에, 마지막 남은 보루를 휘어채는 듯 억지스런 음성으로 소리친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네 맘대로 나가 산다는게 말이 되니?!
아버지 오시면 정식으로 의논 드리고, 그러고 나서 독립해 나가던지 하도록 해라!"
주혁은 순간적으로 가벼운 실소가 터지려는 걸 허파 안으로만 삭힌다..
그가 멋대로 나가 버리면, 혹시라도 남편에게 질책을 받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그녀의 속셈이 천연덕스러울 만큼 번연하게 들여다 보이기 때문이다.
훗....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될겁니다....
내 아버지의 심중에는 아들인 내 자리보다는 아내인 당신의 자리가 훨씬 크니까....
안타깝고 섭섭하지만, 그게 사실인걸 어쩌겠습니까....어.머.니.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마지막 멘트를 남겨서 오만방자한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다..
주혁은 최대한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그러나 그 속의 본의가 사장되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최종적인 한마디를 던지고...
총총히 그녀의 곁을 지나친다.
"아버지께는 어머니같은 아내만 있으면 되지, 저같은 아들은 필요 없으십니다..."
- 학교는 9월달에 시작하므로, 4개월 정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게 된 혁수...
학비로 충당할 겸,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께서 생활비와 그밖에 필요한 돈을 부족하지 않게 보내 주시지만, 혁수는 예전부터 비상시를 대비해 항상 따로 저금을 해두는 습관이 있었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사이에 어느덧 혁수의 수중에는 꽤 짭짤한 액수의 금전이 모인 상태이다..
워낙 알뜰한 혁수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축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의 품성 역시 이러한 저축을 거드는 데 한 몫 하는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혁수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성실해 보이는 인상 덕택에 얼마 지나지 않아 집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써빙하는 일자리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첫 출근이다..
지점장은 다른 종업원들에게 새로 들어온 혁수를 소개했고 그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무적인 태도로 혁수를 맞아 주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여남은번은 레스토랑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혁수..
능숙한 솜씨로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날라다 준다..
뉴욕에서도 번화가에 위치한 식당인 만큼 손님이 상당했고,
혁수는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서 동분서주하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퇴근시간인 자정이 되자, 혁수는 유니폼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동료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레스토랑을 나선다.
오피스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데, 누군가가 그의 옆에 따라 붙으며 한국말로 말을 건다..
"집으로 가는거에요, 혁수씨?"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귀가 까실까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생경하게 닿아오는 고국의 언어..
혁수의 갈색 눈동자가 동그래지며 옆사람에게로 가서 머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방금 전까지 함께 일한, 그 레스토랑의 종업원 들 중 하나였다..
동양인이라서 조금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중국인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한국 사람이었군.....
낡은 청바지에 후줄근한 면 티셔츠 차림이 척 보기에도 이국땅에서 고학하는 유학생 티가 팍팍 난다..
여자치고는 제법 늘씬하고 다부진 체격이 활동적으로 보인다..
"아,예.....한국인이셨네요....전 중국 사람인줄 알았는데..."
"하하~~그래요? 내가 중국사람처럼 생겼나? 쩝....^^;;"
쾌활하게 생긋 웃으며 혁수를 마주보는 여자..
서글서글한 눈매가 친근하고 따뜻하게 반짝인다.
"난 이지민 이에요...뉴욕에 온지는 2년쯤 됐구요...컬럼비아 대학에서 국제 관계학 전공하고 있어요..
내가 혁수씨 보다는 나이가 든 것 같은데...말 놔도 되죠??"
"아, 예에...그러세요..."
손가락으로 와인빛 머리칼을 빗어내리며, 어색한 억양으로 대꾸하는 혁수..
너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녀가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 이를테면 '동포'를 만났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푸근하게 느껴진다..
"집이 어디야? 여기서 멀어?"
"아니요...한블럭만 가면 되요.."
"그래?...그럼 우리 집에 놀러갈래? 바로 요 앞이거든...
오랜만에 우리나라 사람 만나니까 너무 좋아서 말이지...
사실 뉴욕에 한국사람이 많기는 해도, 다들 자기 사는데 바빠서 남남처럼 지내거든....
근데 우리나라 사람이랑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되니까 너무 좋아서 그래~~~^^*
별로 안 바쁘면 우리 집에 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
하기사....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썰렁하고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하는 지민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 더 나을 성싶다..
혁수는 말갛게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따른다..
지민은 혁수가 자신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은 것에 희색만면해서는..
그를 자기 집으로 이끌며 쉴새 없이 입을 놀린다..
"근데 되게 어려보인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는거야?"
"아니요...저 스물 한 살이에요....한국에서 1학년 마치고, 2학년 다니다가 왔어요.."
"어머, 정말? 너무 어려보인다~~ 혼자 온거야? 부모님은 한국에 계시고?"
"예...회화 전공해요...9월달에 미술 아카데미 입학 하구요.."
"오호~~ 어쩐지 척 보기에 예술적인 냄새가 풍기더라...너어, 눈빛이 굉장히 슬퍼보여....분위기도 묘하고...
헤헤....내가 쫌만 젊었어도 너 꼬시는건데....^^;;"
계속해서 혁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신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으며..
지민은 조그마한 아파트 안으로 혁수를 들어오게 한다.
여자 혼자 사는 집답게 무척이나 아기자기하고 소담스럽게 꾸며진 실내...
지민은 커피를 타러 주방으로 향하고.. 쇼파에 앉아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혁수...
덤덤하게 탐색을 이어나가던 그의 눈동자가 벽 중앙에 걸린 5절지 크기의 가족사진에 이르자....휘청 하고 흔들린다.
점잖아 보이는 중년 신사와, 그의 아내인 듯한 온화한 얼굴의 여인..
그리고 방금 전에 새로 사귄 친구, 지민....
그녀 옆에 서서 약간은 장난기 감도는 명랑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세라의 모습이.....혁수의 동공에 확연히 비춰진다..
(38)
강태가 당부했던 대로 저녁 7시가 채 못된 이른 시각에 귀가한 재준..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주방으로 들어서자..
갖가지 음식 냄새가 뒤섞여 재준의 후각을 자극한다.
식탁으로 눈을 돌리니.. 해물탕, 생선초밥, 새우튀김, 생선회 등등...
온통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들로만 차려진 저녁식사가 재준을 기다리고 있다.
냉장고에서 맥주병을 꺼내며 못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강태..
재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안면근육을 미미하게 찡그리며 강태에게 면박을 준다.
"야, 내가 고래냐...? 웬 물고기밖에 없어?.."
"치이....해산물 좋아하시잖아요....특별히 신경 쓴건데...-_-;;"
도톰한 입술을 한곳으로 모아 뾰루퉁하게 내밀며 시무룩해져서는 투덜거리는 강태..
그 귀여운 모습에 재준은 또 유약해지고, 호기있게 식탁 의자를 빼 앉으며..
"아냐,아냐...좋아.....잘 먹을게.."
그러자 강태는 금세 신이 나서 생글거리며 재준의 맞은편에 자리한다..
그리고 맥주병의 뚜껑을 열어 재준의 유리 글라스에 야무진 손길로 술을 따른다..
강태가 정성들여 준비한 음식을 하나씩 맛보던 재준은 그가 따라 준 맥주를 한번에 들이키고는 옆에 놓인 빈 잔을 강태에게 건넨다.
"너도 한 잔 해야지....술은 혼자 마시면 맛이 없어.."
두 손으로 조신하게 술잔을 가져가, 웃어른 앞에서처럼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잔을 비우는 강태...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감에 따라 꼴깍 꼴깍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
깍듯하고 순종적인 강태의 모션과 태도에.. 재준은 진부한 표현 그대로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그가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은근한 지배심리와 철두철미한 소유욕이 흡족하게 채워지자, 재준은 실로 오랜만에 유쾌하고 산뜻한 기분이 된다..
강태는 예리한 육감을 통해 그런 재준의 기분을 눈치 챈다..
재준을 기쁘게 해주었다는 사실은 강태에게 뜻밖의 성취감을 안겨주고...
강태는 지금의 평화롭고 단란한 분위기를 한 층 돋구려는 심산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늘 누나 만나서 얘기 들었는데...저희 누나 통장으로 매주 돈 부쳐주신거...회장님이 시키신 일이죠...?"
"아아, 그거....별로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얘기 안하고 보냈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물탕 국물을 후- 불어 식히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받아넘기는 재준..
강태는 언뜻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미소를 띄우며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시고...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러자 재준이 식사에 열중하느라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눈동자를 들어 강태를 일직선으로 마주 본다..
강태는 자신이 무언가 말을 잘못했나 하는 생각에 긴장하며 순간 쫄아 붙는다..
촌각의 정적을 깨고, 재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힘이 들어가 있다.
"강태 네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대로, 넌 내 정부야...
누구나 자기 정부한테 다들 해주는 일을 나도 너한테 해줬을 뿐이고..
그것 가기고 고마워 할 이유는 없어.."
이런 말을 하는 재준의 의도가, 진정 강태의 감사인사를 받기엔 자신이 당치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강태가 자신의 관리하에 있는..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명백히 표시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던 간에 상관없다는 문장으로 쉽게 결론 지으며 강태는 괜히 골치 아프게 머리를 굴리고 싶지는 않다고 뇌까린다..
정말 얼마 만에 느끼는 안정감과 한가로움인가...
절대로 방해받고 싶지 않다.
강태는 깊은 사유의 골을 묻어 버리며, 화제를 전환한다..
"그럼 회장님의 정부로서, 한가지 요청을 해도 될까요? 정말 듣고 싶은게 있는데..."
"뭐야, 또 인터뷰 시작인거야??.."
타고난 호기심과 오랫동안 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재준에 대한 궁금증으로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진취적인 자세로 달려드는 강태에게 약간의 푸념 섞인 반문을 날리는 재준..
그러나 워낙 기분이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인지 별다른 거부의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어김없이 기회를 포착하는 강태...
"회장님이 어떻게 자라셨는지...지금의 위치까지 오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어린 시절 얘기도 좋고, 아무거나 다 좋아요..."
초밥 한 덩어리를 씹어 삼키며 난색을 표하는 재준..
지독하게 말재간이 없는 성격 탓에, 어디서부터 얘기를 풀어 나가야 할지 갈팡질팡 한다.
그러다가 대강의 실마리를 잡은 듯, 맥주로 목을 축이고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운을 뗀다..
"글쎄.....저번에도 얘기했다시피, 난 평생 충의회 속에서만 살았어..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겉 간판일 뿐이었지..
그나마도 고등학교 2학년 중간까지밖에 못 다녔어..
근데, 학교 가는걸 좋아하지는 않았어...그....뭐랄까.....답답해서 싫더라구..
맨날 똑같은 틀에 맞춰서 공부하고, 밥 먹고....하여튼 난 그렇게 매여 사는 생활은 질색이라서...
학교 가서도 대충 시간만 때우다가 오고 그랬었지, 뭐...."
숨죽이며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경청하는 강태...
재준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계속 한 자신에게 스스로도 대견해 하며, 연이어 자신의 개인사를 펼쳐 놓는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래서 바로 학교 자퇴하고 충의회 사업을 맡았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쪽 일을 배웠기 때문에 별로 어려운 건 없었고..
하다보니까 내 적성에도 잘 맞더라구...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이제 시원해졌어?.."
중대한 시험을 치르고 난 학생처럼 날숨을 돌리며, 책망조로 강태에게 묻는 재준..
그러나 강태는 오히려 더욱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가지만 묻겠다고 하던 아까의 약속을 새까맣게 잊은 채,
이번에는 한결 조심하는 투로 슬며시 재준에게 질문해 본다..
"부모님하고는....사이가 안 좋으셨나 보죠...?"
재준에게도 그를 보살펴 주고 지도해 주던 '부모'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 강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마치...천상의 조물주가 실수로 지상에 떨어뜨린,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성품 같다..
고유의 근본이나.. 그를 형성시키고 생장시킨 모체도 없는...
완벽한 홀로서기의 표본....
"부모라.....으음....엄마라는 건 처음부터 없었어..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더군...왜 나한테는 엄마가 없는지...
이건 내 생각인데, 아마 날 낳고 나서 도망을 쳤나 봐...아버지한테서...
뭐, 그렇고 그런 구질구질한 삼류 드라마 같은 사연이 있겠지만 그딴건 듣고 싶지도 않아...기분만 잡치니까....
그리고 아버진, 날 아들이라기 보다는 부하처럼 대했어..
'충의회'를 이끌어 나갈 차기 보스....날 그렇게만 생각했지..
아버지하고 나 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충의회의 사업에 관련된 얘기밖에 없었어...그밖에 다른 얘기는 해본 적이 없어..
아버지는 가르치고, 나는 배우고....그게 다야....."
흐릿하게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며, 평소와는 달리 주절주절 떠들어대었던 것이 객쩍은 듯, 재준은 씁쓰레한 표정으로 단숨에 맥주 한잔을 들이킨다..
의문과 기대로 반짝이던 강태의 흑빛 눈동자가 서서히 나른하게 풀어지고... 재준을 향해 고정되어 있던 시선에는 이해와 연민이 담긴다..
그런 강태의 눈빛을 더 마주하기 힘들어지자, 재준은 그답지 않게 과장된 음성으로...도저히 적응 불가능한 분위기를 적절히 변화시키려 한다.
"이제 네 차례야...너는 20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봐..."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감싸 받치며, 강태의 입이 열리기를 재촉하는 재준..
강태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특유의 나긋하고 결이 고운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전 그냥....평범하게 자랐어요...보통 애들이랑 똑같이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중고등학교 때는 거의 영화에 미쳐 살았다는 거죠....
그래도 고3때는 입시준비 하느라 덜했지만...아무튼 전....그렇게 특별한 건 없어요...."
"넌 부모님하고 관계가 원만했나보지? 아까 그런 질문을 한 거 보면..."
"아니요...솔직히 그렇지는 않았어요... 저희 부모님은, 제가 영화 하는걸 굉장히 반대 하셨거든요....
제가 공부나 열심히 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직업을 가지길 바라셨어요...
왜 있잖아요, 판사라든지 의사라든지...그런 종류의 직업...
근데 저는 영화 말고 딴 건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부모님하고는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어느덧 강태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재준...
다음에는 어떤 말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지 혼자 머릿속으로 추측해 본다..
"사실....부모님 돌아가시고...아버지가 이쪽 세계에 관련되 있다는걸 알았을 때, 정말 믿기지가 않았어요....
제 앞에서 아버진...흔하디 흔한 사업가일 뿐이었는데...어떻게 숨기고 사셨는지 신기할 정도였어요..
진짜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니까 도망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더라구요....쿡...."
두 달 전, 부모님의 참혹한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전쟁고아처럼 강릉의 별장으로 피신해야 했던 그날의 기억이 잔상으로 떠오르자.. 강태의 입가에 자조적인 냉소가 물린다.
누구를 원망하는 것도 아닌, 그저 자신의 모진 운명을 한탄하는 듯한 체념적인 조소....
숙명적인 고통을 안으로만 삭히며 감내하는..
그러기에 수치를 계량할 수 없는, 무한의 힘겨움...
어쩌면 그 비극성조차 상실해버려 흔적도 생채기도 남기지 못하는 비운...
재준은 그 순간, 어렴풋이나마 강태와 자신이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어서, 강태를 자신과 동류항으로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재준은 아직...그 깨달음에 수반되어야 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고작 이런 물음을 강태에게 디밀어 볼뿐이다..
"넌...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겠지...? 널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말이야..."
그러자 강태는 눈꼬리를 둥글게 말며, 아까보다는 조금 더 선하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습기에 차 눅눅한 웃음을 머금는다..
일련의 감정을 초월한, 사고의 윗단계에 정착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웃음이다..
"처음에는 그런 마음도 있었죠....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정말로....그런 마음 없어요...
전 그냥...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게 훨씬 편하니까요...
누구 탓으로 돌리고, 그 사람 미워하고 그러는 것도 피곤한 일이더라구요...
이제 이런 생활도 익숙해졌고..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힘들지도 않아요..
회장님의 '정부'로 지내는 거 말이에요..."
아까부터 홀짝거리며 마신 술의 효력이 이제서야 나타나는지...
강태는 발그레 취기가 오른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간다..
재준은 강태가 주창하는 '초낙천주의론' 에 혀를 내두를 뿐...뭐라고 대꾸도 하지 못한다..
대체 이 녀석은 바보처럼 착한 것인가...
인생을 편하게 살도록 정신 구조가 짜여져 있는 것인가...-_-;;;
벙쪄 있는 재준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강태...
기가 막히게도 재준의 무릎 위에 걸터앉는다.
알콜의 힘을 빌더니, 본래의 수줍음이나 소극성을 몽땅 집어치운 강태가 술기운 때문에 반음 정도 올라간 톤으로 대담하게 이야기한다..
"회장님, 제가 고백 하나 할까요...? 사실은 말이죠....난 처음부터...회장님하고 섹스 하는 게 좋았어요....
아니, 하기 전에는 끔찍하게 느껴지고 너무 모욕적이었는데요...
해보니까....진짜 좋은 거 있죠...? 풋....회장님 말대로 난 색기가 다분한가 봐요....아니라고 생각했는데....쿡...."
선정적인 빨간 입술의 한 쪽 끝 부분을 살짝 치켜올리며..
양팔을 재준의 목에 감고, 뜨겁게 달아오른 육체를 재준에게 밀착시키는 강태..
강태의 균형 잡힌 가슴 근육과 팔딱거리는 싱싱한 심장의 고동소리가 얇은 셔츠 사이로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회장님은 잘생겼고...매력 있고....그리고....다른 사람이랑은 안 해봐서 확실히 얘기할 순 없지만, 섹스도 끝내주게 잘해요.....
정말.....날 완전 미치게 만든다니까요...."
재준의 얼굴과 강태의 얼굴은 서로의 입김이 닿을 정도로 근접해 있다..
강태의 흑빛 눈동자가 매끄러운 물기를 퍼올리며 촉촉이 젖어들고..재준의 욕정에 활시위를 당긴다..
그러면서, 가장 핵심적인 말을 내뱉는다..
"지금도 하고 싶어요.....해주세요...지금......."
허스키하게 갈라지는 강태의 목소리가 정사 도중 내지르는 신음성과 흡사해지고...
재준은 그대로 강태를 바닥에 쓰러트리고 품에 안는다..
강태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하면서, 욕망의 저편... 이성의 영역으로부터 울려오는 위험경보를 무시해 버리는 재준이었다..
(39)
"어어~ 우리 식구들이야..내 옆에 서 있는 건 동생이구..으음...너보다 한 살 어려.."
양손에 머그컵을 들고 혁수에게 다가오며 사진에 대해 설명해 주는 지민..
혁수는 억지로 사진에서 눈을 떼어내며 지민에게서 커피를 받아든다.
세라의 언니였다니....이건 또 무슨 장난질인가...
그토록 끊어버리고자 했던, 주혁과 이어진 운명의 날실이..
먼 미국땅까지 도망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내 인생의 끝자락을 놓아주지 않는 것인가...?
혁수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비약까지 해 본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연결성이 지나치게 극명하다.
혁수는 아스라이 밀려오는 현기증을 몰아내려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킨다.
자꾸만 표면으로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는 케케묵은 감정의 응어리들을 진한 카페인 성분으로써 진정시켜 보려 한다.
"혁수 넌 외아들이야? 형이나 동생 없어??"
혁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지민의 목소리...
빌어먹을 '형'이라는 단어 때문에..
절대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수없이 자신을 다그쳐야 했던 누군가의 얼굴이 시각화된다..
"형이 하나 있는데...한국에 있어요.."
"그래? 형은 몇살인데?"
"...저랑...동갑..이에요..."
"에엥? 쌍둥이야??"
"아,아니요....저어...이복..형이에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먼 곳으로 밀어내며, 나즈막하고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혁수가 대답하자, 그제서야 지민은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이마를 찡그린다..
고등계 형사가 용의자를 심문하듯 꼬치꼬치 캐물은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며...지민은 허둥지둥 사과를 늘어놓는다.
"어머, 혁수야...미안해.....난 그냥 아무 생각없이 물어 본 건데...정말 미안하다, 내가 괜히....그런 줄도 모르고.....미안해, 혁수야...."
"괜찮아요....신경쓰지 마세요, 누나....^^;"
혁수가 '누나'라는 친근한 호칭을 사용하자,
지민은 마음이 놓이는지 치아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사뭇 감격한 눈빛으로 혁수의 손을 덥썩 부여잡는다..
"와아~~ 누나라고 불러주니까 기분 진짜 좋다!!
혁수야, 앞으로 우리 정말 친하게 지내자~~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알았지?? ^^*"
"네에...고마워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꾸하는 혁수....
마음 한 구석에서 비밀스러운 경고 메시지가 보내지고 있다는 것을 그 역시 느낄 수 있다..
이곳으로 온 이유와 목적을 망각하지 말라고...
어쩌면 실패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자칫하면 지민을 통해...애써 결단하고 실행한 주혁과의 단절이 한순간에, 혹은 오랜 시간에 걸쳐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혁수는 한발짝 양보하고 좀 더 너그러워진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홀로 생활해야 하는 뉴욕의 유학생 안혁수에게 관용을 베풀어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자신을 친동생처럼 돌보아 주고 아껴줄 사람이 있다는 건...절대 위험한 일이 아니다..
필수 불가결한 외로움와 고립감으로부터 구제 받을 수 있는 '행운' 이다..
자신의 학교 생활과 하고있는 공부에 대해 수다를 떨어대는 지민의 정감있는 눈망울과 선량한 얼굴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혁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굳힌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져 오피스텔로 돌아오면서...
한결 마음이 안정되고 가뿐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보며 혁수는 다시 한번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져 보기로 한다..
교묘하게 속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해보자..
안혁수 네가 기분이 좋아진 이유가 정확히 뭐냐??
단순히 친절하고 상냥한 새 친구를 만났기 때문에?
물론 그것도 포함 되겠지....
단지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닐텐데....?
어리석게 숨길 것 없어....여긴 너 혼자 뿐이고, '그'는 몇만리 떨어진 고국땅에 남겨져 있잖아....널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어....
그렇게 안심한 상태에서 진실을 말하자면....
'그'와 이어질 수 있는 통로가,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날 미친놈 취급해도 할 말은 없다..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여기까지 멀리 피해 온 당사자가 바로 '나'라는 거.....누구보다 내가 가장 먼저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완전히 막혀버린 줄만 알았던 비상구가 조금의 틈새를 보이는게....어쩔수 없는 기대와 희망을 안겨주는 걸.....
어쩌면....나 자신도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에 의해 '그'에게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내게도 변명할 거리가 생기는 거다..
나도 노력했지만....역부족이었다고.....
그러면 신께서 나에게 허락하실 수도 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나에게 인자한 축복을 하사하실 수도 있다..
아직은......아직은......문이 닫히지 않았다....!
혁수는 푸르스름한 달빛에 둘러싸여, 깨끗하고 청량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뉴욕에 온 이래 처음으로...불면증에 시달리지 않고 평화로이 잠든다..
- 주혁이 제출한 이력서를 꼼꼼히 살펴보는 중년 남자...
주혁은 그 맞은편에 앉아 무덤덤한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더 이상은 부모님께 손 벌릴 수 없는 형편이기에, 일자리를 찾는 주혁에게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백화점에서 함께 일하자고 권유한 세라였다.
판매직이 자신의 적성에 맞을까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세라의 의견에 따르기로 한 주혁..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직장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력서를 다 검토한 후, 주혁의 용모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던 남자는 이윽고 입을 열어 진지한 음색으로 주혁에게 묻는다.
"판매경험이 전혀 없는데...잘 할 수 있겠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딱 부러지는 말투로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 주혁..
그의 자신 있는 태도에 어느 정도 믿음이 가는지, 남자는 미심쩍어 하던 표정을 바꾸어 엷은 웃음을 머금고 다시 말을 잇는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4층 신사복 코너에거 근무하도록 하세요..
자세한건 팀장이 가르쳐 줄겁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장주혁씨.."
"예, 감사합니다.."
남자와 악수하고,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 다음 그에게서 물러나는 주혁..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라가 포르르 달려오며 성급하게 물어온다..
"어떻게 됐어, 오빠?"
"오늘부터 일하래...신사복 코너에서..."
"우와~~~ 처음 치고는 좋은데 맡았다! 역시..오빠는 잘생겨서 그런데로 보낼 것 같더라..."
"고맙다, 네 덕분에 일자리도 쉽게 구하고.."
"헤헤....^^; 말로만? 진짜 고마우면 이따 퇴근하고 술 한잔 사~!"
천진스러워 보이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특유의 하이톤의 음성으로 조잘거리는 세라..
주혁에 관해서라면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마치 자기 일처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해 주는 그녀의 우정에....
주혁은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애틋한 감사를 느낀다..
무조건 주혁의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하고 응원해 주는 세라...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친구'를 곁에 두고 있다는 든든함...
그녀와 마주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지 만은 않는다..
"어이구, 벌써 10시 다 됐다!! 오빠, 그럼 퇴근하고 보자!!"
주혁이 술을 사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언제나처럼 자기 멋대로 단정지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가 버리는 세라...
주혁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가에는 자그마한 웃음을 매단 채..
첫 근무를 시작하기 위하여 4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오늘 어땠어? 일하는거 힘들지는 않아?"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는 고기를 휘적휘적 저으며, 세라가 입을 뗀다..
주혁은 소주병의 뚜껑을 열고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르며 대꾸한다..
"생각보다는 괜찮더라....신사복은 다른 파트보다 손님이 좀 덜한 것 같기도 하고..."
"오빠 그거 알아? 벌써 여직원들 사이에 오빠 얘기, 장난 아니야~~"
"내가 왜...?"
"왜긴~~ 오빠가 쌔끈하니까 그렇지~~ 나더러 소개해 달라고 난린데...
어때? 한명 만나볼래? 괜찮은 애들 꽤 있어...소개 시켜 줄까??"
"됐어....뭐, 연애하려고 직장 들어왔냐.....술이나 받어.."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세라에게 술병을 들이미는 주혁..
세라는 실망스런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주혁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조금 마시고는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는다..
"치이...일편단심 민들레가 따로 없구만, 장주혁....눈물 납니다~~~!!"
조롱하는 투로 말꼬리의 억양을 높이며 지껄이는 세라...
하지만 그 음성 저변에 깔린 안타까움과 답답해하는 그녀의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주혁은 짧게 실소를 흘리기만 할 뿐 반응이 없다..
혁수가 미국으로 떠난 뒤...길길이 날뛰며 폐인처럼 망가진 하루하루를 영위할까봐 걱정스러웠던 주혁은..
의외로 경탄할만큼 훌륭하게 버티고 있다..
다만....그의 검푸른 눈동자에 스며있던 흑암의 빛깔이 조금 더 짙어졌을 뿐...
그리고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던 하얀 살결이 척박하게 메말랐을 뿐이다...
"....그렇게...잊기 힘들어....? 아직도....그렇게..좋아....?"
이런 식으로 주저주저하며 망설이는 건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그렇지만 별 도리가 없다...
세라는 그녀답지 않게 주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어렵사리 질문을 내뱉는다..
그러자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주혁...
짜증스럽게 목구멍을 메워오는, 서글픈 덩어리들을 분해시키고...
태연한 척 가장된, 그래서 더욱 가련하게 진동하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나아....그런대로 참을만 해.....어차피 혁수는 처음부터 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한번도 내 사람이 되어준 적이 없으니까....그렇게 생각하면....지금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어...
그냥....혁수가 항상 너무 가까이에 있었는데....갑자기 안 보이니까....
그래서....약간..힘든거야.....
맨날 한 집에서 얼굴 보다가....맨날 같이 밥먹고, 학교 다니고 그러다가...
갑자기 혁수가 없어지니까.....보고 싶고....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그런 것 뿐이야......"
주혁의 검은 머리칼 사이로...소주와 똑같은 형태를 지닌 눈물이 한 방울 낙하하여 술잔 속에 빠진다..
눈물이 섞인 소주의 맛은 원래보다 몇 배 더 쓰디쓰다...
독한 액체가 첨가되어서 그런가 보다..
"혁수....잘 지내겠지....? 미국에서....."
이제는 울음기를 감추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밍밍거리는 콧소리를 동반한 채, 주혁의 혼잣말처럼 읊조린다..
세라는 차마 그를 따라 울어주지 못하고 대신 어거지로 웃음을 만들어 보이며..
공허한 몇 마디 언어로 주혁의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그럼.....잘 지낼거야.....주혁오빠가 잘 견디고 있는 것처럼, 혁수오빠도 그럴거야......"
(40)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재준과 환성 그리고 운전기사를 태운 자동차가 재준의 사무실을 향해 출발하고..
재준은 집에서 가져온 조간신문을 펼쳐 든다.
굵은 활자의 기사 제목들을 읽어 내려가는 재준의 귓가에 약간 주눅이 든 듯한 환성의 목소리가 닿아온다..
"저어, 회장님...보고 드릴게 있는데요.."
"어, 말해봐..."
여전히 신문에다 눈을 고정시키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환성의 말을 받아주는 재준..
환성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상당히 위축된 폼으로 떠듬떠듬 입을 연다.
"이번에 계약하려고 했던 L호텔 말입니다..그게 '연화회'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뭐?!?"
신문이 와락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격양된 재준의 음성이 차안의 공기를 써늘하게 냉각시킨다.
백미러를 통해 건너다 본 재준의 얼굴은 말도 안된 다는 표정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90억에 계약하기로 했었잖아!!
이제와서 갑자기 '연화회' 쪽으로 넘긴 이유가 뭔데??"
"저어....전 잘 모르겠습니다만...'연화회' 쪽에서는 115억에 인수했다고 하는거 보니까 아무래도 가격 때문에 변동이 생긴 것 같은데요..."
재준의 얼굴에 짜증과 번거로워하는 기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왠지 모르게 불안정해지는 것을 느끼며, 일부러 한 층 더 딱딱하고 위압적인 어투로 환성에게 한마디 던진다.
"알았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까 넌 다른 일이나 신경 써.."
-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비서를 시켜 L호텔 계약건의 거래 당사자인 L그룹 회장에게 전화를 건 재준..
몇 분 후, 재준의 인터폰이 단조로운 기계음을 내고..
이어서 들려오는 비서의 낭랑한 음성..
"회장님, 1번 전화에 L그룹 정회장님과 연결 됐습니다.."
재준은 재빨리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댄다.
어처구니없이 흥분되는 감정상태와는 달리, 최대한 침착하게 목소리 톤을 가라앉히며...재준은 입을 연다.
"안녕하십니까, 정회장님...'충의회'의 이재준입니다.."
"여어~ 이회장님, 아침부터 직접 전화를 다 해주시고, 웬일입니까?"
천연덕스럽게 철판 깐 낯짝을 들이미는 상대방에게 욕설이라도 실컷 퍼부어 주고 싶지만...
재준은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참을성 있게 얘기를 계속한다.
"그거야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아도 정회장님께서 먼저 알고 계실거라 생각하는데요...
어째서 호텔을 '연화회'가 인수하게 된거죠? 분명히 저희 '충의회'가 넘겨받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 얘기라면 이화장이야말로 할 말 없는 입장일텐데요...
이회장, 어제 저녁에 우리 L그룹 주주총회가 있었던 거 모르셨습니까??"
자신있고 당당하게 질문해오는 그의 음성에 움찔하는 재준...
어제 저녁...재준은 요 며칠새에 계속 그랬듯이 강태와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분명히 알고 계셨을겁니다..
어제 있었던 주주총회는, 저희 회사의 지분을 0.01%라도 갖고 계신 분이면 모두 참석하셔서 앞으로
사업채들을 운영해 나갈 방안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꼭 오셔야 할 모임이었는데...
저희 주식을 10%나 가지고 계신 이회장님께서 불참하셨다는 건, 이회장께서 우리 L그룹에 별 관심이 없으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충의회' 쪽에 호텔을 맡길 수 있나요...
당연히 더 성실하게 관리해 주실 분한테 드려야지요...
이건 엄연한 사업입니다, 이회장...."
재준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그대로 책상 위에 털썩 기대앉는다.
입안에는 마른침이 고이고,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진다..
관자놀이가 띵하게 울려오며 명치 께가 콕콕 쑤셔온다..
단 한마디의 반박이나 항의조차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입다물고 서서 상대방의 신랄한 비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재준..
태어나서 최초로 경험하는 패배감과 모욕감 때문에 기어들어가려는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내어,
아까 전과 다름없는 차갑고 견고한 어조로 통화를 끝낸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 드리죠...안녕히 계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자, 재준은 고르지 못한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한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위태로워 보이는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자신을 타이르는 재준...
진정하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
뭐가 어떻게 잘못 된건지...
이번 L호텔 인수 사업은 중요한 일이었어..
성사되면 '충의회'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는데..
거의 다 성공시켜 놓은 걸 내 실수 때문에 망쳐 버렸어...
내가 실수했어.....
일에 있어서 만큼은 언제나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재준이었기에, 중대한 프로젝트를 무산시킨 자신의 과오와 허점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부모님이 아끼시는 귀중한 물건을 망가뜨리고 나서 안절부절못하는 천방지축 개구쟁이처럼..
초조해지고 불안해 지는 재준...
너무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위기감과 침몰하는 배에 타고있는 듯한 기분에 재준은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 진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이성의 잣대로, 요 근래 자신의 생활을 되짚어보는 재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요소는 역시 강태이다..
얼마동안의 냉전이 종식된 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애교스럽고 다정하게 변신한 강태...
재준은 그야말로 강태와의 시간에 흠뻑 취하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자각한다..
자연히 일은 등한시하게 되고...
대여섯시만 되면 강태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재준은 기가 막혀 헛웃음마저 나온다..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어, 이재준...
네가 지금 어떤줄 알아??
미색에 홀려서, 사업은 안중에도 없이 저녁마다 정부를 옆구리에 끼고 띵까띵까....정말 가관이군.....
덕분에 몇백억짜리 사업채가 한순간에 남의 손으로 날아가 버렸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네가 지금 제 정신이야?!?
재준은 엄중하고 단호하게,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질타하고 꾸짖는다..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 지는 것은, 파멸로 직진하는 지름길임을 굳게 믿고 있는 재준이다..
이재준....넌 '충의회'의 보스야...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
네 밑에는 널 따르는 수백명의 조직원들이 있고, 이 서울 바닥에만 해도 네 소유의 사업채가 수십개야..
그리고 넌...그 모든 것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해...
어느 하나라도 빼앗겨서는 안돼....
네가 가진 건.....이게 전부니까....
그까짓 정부 하나 때문에 평생을 몸담고 지내온 '충의회'를 망가뜨릴 수는 없다..
이제껏 '충의회' 안에서만 살았고, 내가 아는 곳은 여기 뿐이다..
'충의회' 밖의 세상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재준은 막중한 책임감과 생존에 대한 열망으로 마음을 단단히 다지며..
주문을 거는 것처럼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적당히 즐기자, 깊이 빠지지 말자, 무엇보다...절제하자..
느슨하게 풀어진 긴장의 끈을 다시 튼튼하게 조이며 강태로 인해 벌어진 틈새를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는 재준의 귀에 또 한번 와닿는 인터폰의 기계음...
"회장님, 문태현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여보내요.."
좀전까지의 상념들을 떨쳐 버리고, 예상치 못한 태현의 방문에 어리둥절해하며 대꾸하는 재준..
철컥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태현의 모습이 재준의 시야에 잡혀온다..
검은색 힙합바지에 빨간 티셔츠, 거기다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둘러 멘 차림새가 영락없는 평범한 대학생 그 자체다..
발랄하고 가벼운 패션과는 대조적으로, 태현의 표정은 어둡고 경직되어 있다..
"형이 웬일로 사무실까지 다 찾아온거야? 또 음악 만들었어?"
"아니....할 얘기가 있어서..학교 가는 길에 들린거야..지금 시간 좀 있어? 바쁘면 다음에 얘기할게..."
"어, 괜찮아...그렇게 안 바쁘니까 얘기해 봐.."
사무실 중앙에 배치된 쇼파로 가서 앉는 재준을 따라 태현도 그와 마주보고 엉덩이를 붙인다..
재준의 태현과 강태의 키스 장면을 목격한 이후로 처음 대면하는 두 사람...
생각보다 훨씬 껄끄럽고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다..
재준이야 원래부터 무뚝뚝하고 밋밋하게 태현을 대하는 편이지만, 늘 스스럼없이 편하게 재준 앞에서 까불거리던 태현은...
우울하다 못해 음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새삼스럽게 얘기 안해도 알겠지만....그때 네가 본대로...나아....강태 좋아한다.."
망설임이나 쑥스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너무도 신중하고 진지한 음색...
재준은 더욱 무표정하게 얼굴빛을 감추며, 의도한건 아니지만 약간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어투로 묻는다..
"그래서...그 얘기하려고 아침부터 여기까지 찾아 온거야?"
"그게 아니라....난....네가 강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서 왔어.."
"그거야 간단한 거 아니야? 당연히 내 정부로 생각하지...그게 사실이잖아..."
"단지 그것 뿐이야? 그냥 단순한 섹스 파트너일 뿐이냐구?! 그걸 묻는거야, 나는!!"
격하게 고조된 태현의 음성이 따갑게 재준의 귓전을 후려갈긴다.
화가 나서 잔뜩 불거져 오른 태현의 얼굴...
또 다시 '강태'와 관련된 문제로 신경이 복잡해지자, 재준은 이런 교란상태를 겪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만스럽다..
대체 강태 그 자식이 뭐길래.. 그 녀석 하나 때문에 내 사업도, 교우관계도 온통 엉망진창이 되버렸냐는 말이다!
마침내 재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사자도 아닌 태현에게 모호한 분노를 표출하고 만다..
"그럼 또 뭘 더 바래?! 그 새끼는 처음부터 섹스하려고 옆에 둔 애야!!
좆나 이쁘고 섹시해서 내가 밤마다 침대에서 같이 뒹구는 놈일 뿐이라고!
그리고 리셉션이나 파티 같은데 가서는 훌륭한 장식품이 되주지...
그 대가로 나는 강태를 돌봐 주는거고!
걔가 사달라는 건 뭐든지 사주고, 걔 누나한테 매주 100만원씩 보내주고 있어.. 그게 우리 관계야!!"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존재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어!
......난......강태를 사랑해.....
그애가 그렇게 사는 거 정말 원하지 않아.. 두고 볼 수가 없다구!!"
사랑......
태현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져 나오는 그 어휘가..
재준에게는 거북스러울 정도로 생소하고, 심지어는 공포감마저 느낀다..
근원조차 파악할 수 없는 희미한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재준은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으로 태현을 쏘아보며 심술궂게 한 글자씩 입 밖으로 내보낸다..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강태는 내 정부야.. 나한테 속한 사람이라고...
'충의회' 속에 있는 다른 것과 똑같이 강태도 내 재산이야.. 다만 돈이 아니라 사람일뿐이지..
어쨌든, 강태 역시 내가 내 능력으로 얻은 재산이고..내 재산은 내 방식대로 관리해..
거기에 대해서 형이 뭐라고 말 할 권리는 없어.."
그리고 정말 악랄하다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밉살스러운, 오만과 욕심이 가득 채워진 검은 눈동자로..
그 눈빛과 어울리지 않게 앙증맞고 귀여운 모양새를 띈 입술로 말을 잇는다..
"태현 형이 강태를 탐내는 건 이해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니까...
그렇게 강태랑 자 보고 싶으면 하룻밤 빌려줄게 실컷 데리고 놀아 봐..
다른 사람은 안되도, 형이라면 하루쯤 양보할 수 있어..."
태현의 하얀 얼굴이 핼쓱해지더니 곧이어 실망과 미움을 넘어선, 잠시도 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3년동안 재준과의 교제 속에서 충실히 쌓아 올려왔던 신뢰의 성벽이 허무하게 붕괴되는 것을 지켜보며...
태현은 보고서를 낭독하는 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진다..
"아주 감동적인 우정이네요, 이재준 회장님..."
그리고 다시는 재준을 만나지 않을 것처럼..
냉풍을 일으키며 재준에게 등을 돌린다..
(41)
거실의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 TV를 시청하고 있는 주혁..
시청률 1위를 구가하고 있는 토크쇼라고 하기에 채널을 맞추어 보았더니
시시껄렁한 말장난들만 난무하는 것이 다른 프로그램과 별반 차이점도 없어 보인다..
재밌어 죽겠다고 자지러지는 출연자와 방청객들을 감흥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혁..
저 사람들은...사는게 참 즐겁나보지...?
저따위 밍숭밍숭한 농담 몇 마디에도 배꼽을 잡고 넘어가니...
내가 정신이 이상한 건가...
저 이야기들이 조금도 우습지 않은 내가...비정상인가...?
괜시리 우울한 생각에 주혁은 리모콘을 들어 TV를 꺼버린다.
연신 깔깔대고 웃어젖히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아웃사이더가 된 듯한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얼마전부터 새로 기거하게 된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는 주혁..
전의 방보다 턱없이 비좁고 누추하지만, 훨씬 편안하고 안락하다..
하루종일 매장에 서서 고객들을 상대했더니 몸이 찌뿌둥한게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 일에도 제법 익숙해져서 여느 직원 못지 않은 판매실적을 올리는 주혁...
건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그의 태도뿐만 아니라, 수려하게 돋보이는 외모까지...
고객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요소가 주혁에게는 두루 갖춰져 있었고..
인사 책임자는 그런 그에 대해 매우 흡족해 했다..
주혁 자신도 그럭저럭 일에 흥미를 붙여가는 상태였다.
이따금씩 학교 생활이 그리워질 때도 있지만...
그것은 조각과 공부에 대한 미련이지, 결코 '캠퍼스'라는 조직 공동체로 다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장이라는 간판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침대에 길게 드러눕는 주혁..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갑을 꺼내는 그의 귀에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주혁은 침대 밑바닥에 놓여진 핸드폰을 집어든다.
"여보세요.."
"오빠 나 세란데, 지금 집에 있지??"
다짜고짜 치고 들어오는 세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척 다급한 어조다..
"어, 그런데...왜그래, 무슨 일있어?"
"오빠 지금 나올 수 있어?! 할 얘기 있어서 그래.. 이건 진짜 엄청난..! 아, 아무튼 전화로는 얘기 못하니까 지금 만나자, 응??"
"지금? 11시도 넘었는데... 내일 얘기하면 안돼?"
"안돼!! 나 복장 터져 죽는 꼴 보고싶어?! 별일 없으면 나와!!"
핸드폰의 몸체가 부서질 듯, 세차게 진동하며 주혁의 고막을 때리는 세라의 음성..
주혁은 반사적으로 이마를 찡그리며 잠깐동안 전화기를 귀에서 떨어트려 놓았다가,
세라의 악다구니가 수그러들자 다시 조심스레 갖다대며 평소 그의 말투대로 차분하고 건조하게 말한다..
"알았어.. 지금 나갈테니까 '야간비행'에서 보자.."
핸드폰의 플립을 닫아 주머니에 넣고, 주혁은 세라와 자주 들리는 까페 '야간비행'으로 가기 위해 옷장에서 점퍼를 꺼내 걸친다..
15분쯤 차를 달려 도착하니, 늘 앉던 그 자리에 세라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늦은 시각에 급하게 나오느라 화장을 전혀 안한 맨얼굴의 그녀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못 알아볼 정도로 차이가 나는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상당히 이질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주혁은 속으로 화장을 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이 더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세라에게로 걸어가서 맞은편에 앉는다..
"무슨 일이길래 오밤중에 사람을 불러내고 난리야?"
"어, 왔구나.. 일단 주문하고 나서 얘기하자.."
때마침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종업원..
세라와 주혁 둘다 메뉴판도 보지 않은채 커피를 시키고...
종업원이 사라지자, 세라가 주혁 쪽으로 상체를 바싹 기울이며 그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광복의 소식을 전하는 독립투사처럼 자못 감격적인 음성으로 입을 연다.
"세상에~~ 나 진짜 믿을수가 없는거 알아? 와아~~정말 이건 진짜..."
"참나....뭔데 그래? -_-;;"
답답해진 주혁은 양미간을 모으며 약간 짜증조로 되묻는다.
세라가 이렇게 감탄해 마지않을 정도라면 대단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을텐데...짐작가는 바가 없다.
"있잖아, 우리 언니가 뉴욕에서 공부한다고 저번에 얘기했었지??"
"어어...들었어.."
"방금전에 언니한테서 전화 왔는데, 놀라지 마..
글쎄 우리 언니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혁수오빠도 같이 일한데!! 둘이 꽤 친해졌고, 집도 가까운 데라고 하더라!
나 이 얘기 듣고 완전 넘어가는 줄 알았다니까!!
혹시 동명이인이 아닌가 해서 자세히 물어 봤는데 틀림없는 혁수오빠야!"
주혁의 눈동자가 극히 짧은 순간동안 확대되었다가 이내 제모양을 찾는다.
힘겹게 평형감각을 유지해 내고 있는 주혁의 검푸른 심연...
아우성치는 목마름은 깊숙이 침전시켜 버린다..
익숙해지자.. 무디어 지자..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소경이 되어서 살아가자...
주혁은 부지런히 자신의 뇌 속에 위와 같은 문장들을 주입시킨다..
스펀지에 물기가 스며들 듯, 접시물에 떨어트린 잉크방울이 고르게 퍼져나가듯, 깔끔하게 흡수되면 좋으련만...
쉴새없이 뇌까리는 문장들을 테니스 공처럼 주혁의 감정의 벽에 부딪쳤다가 탄성에 의해 도로 퉁겨져 나온다.
세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한층 가라앉기만 하는 주혁 주위의 기류를 감지하며..머쓱해져서는 제풀에 입을 다문다.
그리고는 난처해진 표정으로 시무룩하니 커피잔만 빙글빙글 돌려댄다..
"세라야..."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침묵을 깨고, 특유의 중저음을 내는 주혁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는 세라..
시들해졌던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이는 생기를 되찾고 주혁을 주시한다.
"앞으로 내 앞에서...그 애 얘기하지마...부탁이다.."
"오빠...무슨 뜻이야, 그게...?"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며 심각한 자세로 돌변하는 세라..
하이톤으로 쨍쨍거리더너 그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지고..
자신의 물음에 무응답으로 고수하는 주혁에게 예의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입을 연다.
"그거..내가 듣기에는 안혁수 포기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내가 맞게 얘기한거야...?"
"그래...맞아...이제 나도 지쳤어...이딴짓 그만두고 싶어... 진절머리 나...."
점점 거칠어지는 주혁의 말투...
그에 따라 황폐해지는 그의 눈동자..
삭막하게 메말라가는 주혁의 영혼...
이제 더 이상 소생의 여지를 잃어버리고, 현실의 거대한 매너리즘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비굴하게 꺾여진 주혁의 외 사랑...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멈추어야 했던...
결국은....사막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지고 만...
주혁의....첫사랑.....
"진심이야? 진짜로 깨끗이 잊을 자신 있어?? 난 오빠 못 믿겠는데..."
채근한다기 보다, 주혁이 상처입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세라의 확인질문이다..
계속해서 폐허와도 같은 절망과 올가미 같은 그리움에 매여 사느니..
차라리 주혁이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세라도 간절히 바란다..
세라에게는...혁수보다 주혁이 더 소중하다..
"이러다가도 혁수오빠 돌아오면 전부 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 아냐? 그럴거면 아예..."
"아니, 그 녀석 안 돌아와...
그리고 돌아온다 해도...절대로..내 사람은 되주지 않아...
이제서야....그걸 알았어....
훗....나 참...병신이지...?"
- 대걸레 자루를 손에 쥐고 레스토랑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는 혁수..
그의 등언저리를 누군가가 툭 친다.
흘깃 뒤돌아보니 지민이 유니폼 차림으로 씩 웃고 서있다.
어두운 분홍색 원피스에 빨간 앞치마가 달린 레스토랑 유니폼은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린다..
적어도 후줄근한 청바지에 티셔츠보단 훨씬 단정하고 기품있는 모습이다..
"일찍 왔네? 내가 제일 먼저일줄 알았는데.."
혁수는 대답대신 엷게 미소지어 보인다..
"야, 나 어제 내 동생이랑 통화했는데.. 내 동생이 너 알더라??
네 형이랑 내 동생이랑 친구래... 혁수 넌 몰랐어? 걔는 아주 놀라 자빠지더만..."
걸레질을 하느라 바쁘게 놀려지던 혁수의 손과, 그에 따라 찰랑거리던 와인빛 단발머리가 움직임을 멈추고...
마우스의 버튼을 클릭하면 바로 떠오르는 컴퓨터 파일처럼 혁수의 시야를 장악하는 주혁의 얼굴...
눈꺼풀을 깜박여 그 하얀 이미지의 잔해를 제거하려 애쓰는 혁수..
한참만에 입술을 떼어 껄끄러운 목소리로 느리게 대꾸한다..
"어어...그래..? 난 몰랐는데...."
"암튼 어쩌다가 네 얘기가 나왔는데, 네 이름 얘기하니까 애가 난리를 치면서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보는거야..
그래서 얘기해 줬더니 지멋대로 확 끊어버리는거 있지?? 야, 안혁수.. 너 보기보다 사연이 많은 놈인 것 같다~~ 응??"
장난기가 감도는 농담조로 슬쩍 운을 떼보면서도 은연중에 핵심을 내포하고 있는 지민의 말에..
혁수는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객쩍은 웃음으로 무마해 버린다.
"치이...사연은 무슨....^^;;"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혁수의 작은 얼굴에 봄비처럼 녹아드는 미소가 하도 천진스러워 보여 지민은 그쯤에서 대충 넘어가 주기로 한다..
"야야, 근데 너랑 나랑 진짜 뭔가 인연이 있는 것 같지 않냐??
한국에 있는 네 형이랑 내 동생이 친구라니~~그리고 여기에서 또 우리 둘이 이렇게 만나고...정말 신기하잖아~~"
"쿡...누나 왜 자꾸 얘기를 그런 쪽으로 몰고 가? 혹시 누나 나한테 딴맘먹고 있는거 아냐? 난 연상은 싫으니까 헛수고하지 마셔...^^;;"
자신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 더 이야기가 깊어질까봐 일부러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에서인지..
아니면 이런 농을 서슴없이 던져댈 정도로 지민에게 친밀감을 느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혁수의 어색하게나마 웃는 모습이 지민의 망막에 포근한 정경을 그려넣어준다..
지민은 기가 차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코믹한 억양으로 혁수의 말을 맞받아친다..
"푸하하하~~~ 안혁수 이제 보니까 왕자구만!?
야, 내 나이가 스물넷이다.. 너같은 어린애는 눈에 차지도 않어..-_-;;
그리고 나 애인 있어, 왜 이래~~~!!"
"정말? 애인 있다는 소린 처음 듣는데..."
"당연하지, 내가 얘기 안했으니까...이 바보야...-_-++"
"쳇...-_-;; 한국사람이야? 같은 학교??"
"응.. 나랑 동갑이구 사귄지 2년 넘었어..
참! 내일 우리 애인이랑 센트럴 파크에서 자전거 타기로 했는데..
토요일이잖아~~ 너도 같이 갈래? 아직 센트럴 파크 안가봤지??"
"어어...근데 내가 가면 괜히 방해만 되는거 아냐? 애인이 싫어하면 어떡해.."
"아니야~~ 걔도 나랑 비슷해서 사람 사귀는거 되게 좋아해..같이 가자, 별일 없으면..."
"그럼...그러지, 뭐..."
잠깐 망설이다가 적극적으로 잡아끄는 지민의 설득에 그녀의 제의를 수락하는 혁수..
화창한 토요일 오후, 음침한 오피스텔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백번 낫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되도록...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야 한다..
누군가와 같이 있어야만 안정감과 정서적인 휴식상태에 놓이는 혁수..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꽤 오래된 증상이다.
밀폐된 공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면 자기도 모르게 호흡이 가쁘고 현기증이 빙빙 나며..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듯한 착각에 휩싸이곤 한다..
정신과 의사는 이해하기 힘든 의학적 용어를 곁들여서 혁수에게 '심리적 공황증'이라는 진단을 내려 주었다.
하지만 혁수는 아직까지 그 병명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증세는 그다지 호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항상 무언가에 고도로 집중해야만 하는 혁수..
대부분은 작업에 몰두한다..
새하얀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손에 쥐고 있는 시간은..
현실의 고통과 번민을 망각하게 해주는 최고의 효능을 가진 마취제다..
자아를 잊어버릴 정도로 푹 파묻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나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 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또 하나의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 주니까...
이런 저런 상념과 회상에 빠져 혁수는 살짝 침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낯빛으로 일을 시작한다.
(42)
사랑에만 빠지면 왜 그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중-
12시에 가까워지는 시간..
간만에 귀가가 늦어지는 재준을 기다리며 강태는 건성으로 손에 들린 책을 읽어 나간다..
똑같은 구절을 네 번쯤 반복해서 읽다가 그만 책을 덮어버리는 강태..
시간을 확인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다시 벽에 걸린 시계로 옮겨가는 눈길을 제어하지 못한다..
며칠동안 재준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며, 강태는 기억도 할수 없을만큼 많은 얘기를 했다..
대부분은 영화에 대한 자신의 포부와 주관적인 생각에 대해 두서없이 떠들어댔는데,
재준은 그런 강태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수사를 펼쳐 보이지는 않았다.
강태가 무언가를 질문해 오면 요점만 간략히 설명해주고 이내 입을 닫아 버리는 재준..
하지만 실로 근사하고 오붓한 두 사람만의 만찬이었고, 이어서 벌어지는 정사의 향연 역시 강태에게 쏠쏠한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조촐한 파티가 생략되어서인지, 까닭 없이 시무룩해지는 강태이다..
이런걸 정이라고 하나....강태는 얼핏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다.
어서 재준의 손가락이 초인종을 눌러, 그를 반겨 맞아주고 싶다.
고되게 일하느라 피곤에 절어있을 그에게서 옷가지를 받아들고, 재준이 샤워하는 동안 그의 침대에 앉아 다소곳이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싶다.
샤워를 끝마치고, 암흑가의 조직 보스에서 청초한 미소년으로 돌변한 재준의 품에 안겨..
언제나처럼 골이 띠잉~하게 울려올 정도로 아찔하나 쾌감을 맛보고 그의 욕망을 해소시켜 주고 싶다..
그리고 그가 잠들때까지 옆에 누워, 자신의 오늘 하루 일과를 소곤거리며 들려주고 싶다..
이재준....그는 좋은 사람이다..
사업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닌, 사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형성된 관계에 서투를 뿐이다..
기질이 사납고 화를 잘 내기는 하지만 본성이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다..
나름대로 생활의 기준이 뚜렷하게 정립되어 있으며,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할 줄 아는 정명함도 갖추었다..
차갑고 무뚝뚝하지만 그것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충의회'의 보스로서 교육받고 성장한 내력 탓이다..
몸에 배인 타고난 카리스마와 위압감도 그의 철벽같은 인상에 한 몫 하는 요인일 것이다...
제법 심도있게 재준을 분석하고 있던 강태의 귓가에..
목빠지게 기다린 초인종 벨소리가 닿아오고..
강태는 후다닥 의자에서 일어나 현관을 향해 뛰어나간다.
어쩔 수 없이 비져나오는 환한 미소를 자제할 생각도 하지 못한채 얼른 대문을 열어 젖히는 강태...
그러나 그의 시야에 비춰지는 사람은 난데없이 출현한 태현이다..
실망할 틈도 없이 강태의 머릿속에 의문부호가 둥둥 떠오르고...
술에 취한 듯, 비칠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태현에게 얼떨떨한 음성으로 말을 거는 강태...
"태현형....이 시간에 웬일이야...??"
태현과 가까이 서자, 강태의 코를 찌르는 역한 술냄새...
강태는 눈살을 찌푸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온몸을 이리저리 휘청이는 태현을 부축한다..
끙끙대며 그를 거실의 쇼파까지 끌고 와 눕히는 강태..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땀에 흥건히 젖어있는 태현의 체크무늬 남방을 벗겨주고, 그의 하얀 얼굴에 얼룩처럼 맺혀있는 땀방울을 티슈로 닦아낸다.
"술도 약하면서 어디서 이렇게 마신거야? 태현형...! 정신 좀 차려봐! 응??"
커다란 눈을 반쯤 감은 채, 축 늘어져서는 미동도 하지 않던 태현은..
강태의 비음 섞인 목소리에 천천히 눈꺼풀을 치켜올리고...
꼼지락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삐딱하게 기대어 앉는다..
적당히 다리를 벌리고 헝클어진 초록색 머리칼 사이에서 충혈된 눈동자를 강태를 응시하는 태현...
언뜻 보면 굉장히 불량스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민망스러우리만치 강태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어쩐지 슬퍼보이기에... 강태는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형....뭐 안 좋은일 있어...? 웬 술을 이렇게 마시고..."
"이재준 집에 없어?..."
걱정스런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여는 강태의 말허리를 싹둑 잘라내며 평소와는 정반대로 무겁게.. 용의자를 취조하는 형사같은 어투로 묻는 태현...
강태는 단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태현의 충격적인, 판이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다가..
몸의 중심부를 관통해 들어오는 듯한 태현의 눈초리에 떠듬떠듬 대답한다..
"어어...아직 안들어 오셨어....오늘 좀 늦으시네..."
"풋...이재준....그 말 진짠가 보네...? 하긴...충의회 보스가 한입으로 두말하면 안되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지껄이는 태현을 대하며 멀뚱해지는 강태..
예쁜 눈동자를 크고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게...
완구용 총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예닐곱살 꼬마와 흡사하다..
순진한 표정을 지으면...반대로 태현에게는 강태가 더욱 요염하고 자극적으로 보인다..
이런 느낌을 받는 것도 일종의 새디즘적인 변태성욕이라고 해야 하는가..?
뭐...아무래도 좋다...
지금만큼은 그따위 도덕적인 사회관념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그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이재준....그 자식은 매일 밤마다 저 탐스러운 육체를 마음껏 맛보는데...
저 아이의 육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그의 영혼까지도- 이토록 사무치게 원하는 내가 왜 이런 자책감에 시달려야 한단 말인가?
재준에게는 힘이 있고 돈이 있지만, 나는 음악을 전공하는 한낱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쳇....그게 무슨 상관이람....
나도 이렇게 그를 원하는데...이렇게 그를 사랑하는데....
태현의 가슴속에서 억눌린 오기와 빗나간 정열이 고개를 쳐든다.
강태를 알게 된 후부터 태현의 심장을 갑갑하게 짓누르던 열등감과 좌절감,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그 자리를 넓혀만가는 낭패감이 한계수위에 다다른 것이다..
어떻게든 표출하지 않고 이대로 안에 담아두었다가는..
얼마 못 가서 태현은 자신이 고꾸라져 즉사하거나 정신 이상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소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 한 '카타르시스'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그런 학술적 용어는 뭐가 되도 좋겠지....
강태의 도발적인 빨간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가느다란 한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다시 다물어졌다.
극히 세밀하고 어슴푸레한 그 동작 하나에...
태현의 갈망이 봇물처럼 터져서 흘러내리고..
그의 몸이 발작적으로 퉁겨지며 강태에게로 덮쳐온다.
강태가 거부의 몸짓을 취할 틈도 주지 않고 그를 바닥에 쓰러트리는 태현..
육중한 힘으로 강태의 농익은 육체를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하며, 술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격노에 이성을 빼앗긴 음성으로 입을 연다..
"강태....내가 왜 왔는지 얘기해 줄까...? 나 있잖아....너랑 섹스 하려고 왔어...."
".....!!!!!!!!"
"오늘 아침에 재준이 만났는데...그 새끼가 그러더라..?
그렇게 강태랑 자보고 싶으면 하룻밤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고...그래서 내친 김에 당장 달려왔지....킥...."
강태는 자신의 청각을 의심한다.
방금 전까지, 재준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에 대해 품었던 긍정적인 결론을 상기하려 노력하는 강태...
한동안 순조롭게 풀려 나가던 재준과의 매듭이 다시금 복잡다단하게 얽혀서 강태의 속을 썩게 만든다..
더더군다나 강태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동안 강태는 재준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부단히 준비하고 신경을 기울인 강태였다.
그런데....그런데...그는 내게 이딴식으로 보상을 한단 말인가??
그의 정부로써 손색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처럼 애쓰고 있는 나에게...?!
"이재준이 널 이딴식으로 다루고 있어.. 알기나 해, 강태?!
네가 어떤 존재로 취급당하는지...너 제대로 알기나 하는거야?!?
너랑 자 보고 싶으면 하룻밤 빌려주겠댄다...어떻게 네가 그런 대상으로 여겨질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강태 네가 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하필이면 내가 사랑하는 네가....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건데....도대체 왜.....우욱....."
종반에 가서는 억울한 흐느낌을 뱉어내며 두 팔 가득 강태를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태현..
강태의 얇은 티셔츠 자락에 배어드는 태현의 미지근한 눈물이 그대로 강태에게 전달되어 오고...
그제서야 강태는 태현의 주정과 몸부림의 의미를 이해한다..
그리고...남루한 어깨죽지를 눅눅하게 적셔오는 서러움과 가여움에..
강태의 매끄러운 구릿빛 뺨 위에도 주르르 눈물 자국이 진다..
불쌍하다.....
잠자리에서 가지고 노는, 예쁘장하고 성능 좋은 장난감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도 불쌍하고..
그런 나를 사랑하게 된, 바보처럼 순수하고 어리석은 태현도 불쌍하다..
'이재준'이라는 한 남자의 말 몇 마디에 이토록 비참해져 버리는 나와 태현...
이것이 정녕 나의 선택인가...
활발하게 약동하는 나의 자아를 찾은 삶이 바로 이런 모습인가...
엄청나게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근본적으로 나의 실제는....그대로이다...
며칠동안 재준과 함께 있으면서 느꼈던 따스함과 친밀감은 허무맹랑한 장미빛 환상에 불과했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이고...재준 역시 마찬가지로 원래의 자리에 머물러있다..
한참을 더 격렬한 울음을 쏟아내던 태현은 서서히 소리를 줄이며 혼곤히 잠에 골아 떨어진다..
강태는 태현의 들쳐업고 재준의 침실로 데려다가 흰 시트 위에 잠든 그를 내려놓는다..
양말을 벗기고, 이불을 끌어올려 꼼꼼히 덮어준 다음..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온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강태의 시세포에 박히는 재준의 모습...
휘몰아치듯 일에 매달려 있다가 와서 그런지 여느 때보다 초췌한 얼굴이다.
아침에 나갈 때는 반질반질하던 하얀 살결이, 어루만져 주고 싶을 만큼 꺼칠해져 있다..
그는 나쁜 사람이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나의 재잘대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희미한 미소를 띄우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나의 가슴에 난치의 생채기를 내는... 고약하고 지독한 남자....
어젯밤까지만 해도 뜨겁게 나를 안아주며 나의 목덜미에 짜릿한 숨결을 뿜어주더니..
그 정사의 여운이 채 식기도 전에 나의 존재를 시궁창으로 곤두박질 치게 만드는...
잔인하고 무정한 남자.....이.재.원...
그렇지만....강태의 눈에 비친 재준은...
준수하고, 찬란하고, 매혹적이기도 하다..
그것이 강태가 헤어나올 수 없는, 늪처럼 깊고 모순으로 둘러싸인...
협소한 딜레마인 것이다..
(43)
자신을 해방하고 상대를 풍요롭게 해주며
솔직하고 충실하며 사회적인 책임을 수반하고
삶을 즐겁게 한 데 기여하는 것이라면
어떤 형태도 도덕적인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 <여성이여, 느껴라 탐험하라> 중 -
맨하탄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뉴욕의 명소, 센트럴 파크를 향해 달리고 있는 혁수의 푸른색 포카리..
조수석의 지민은 연신 수다를 멈추지 않았고 혁수는 운전을 하는 간간이 그녀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고 있다.
센트럴 파크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시키고, 그녀의 애인과 만나기로 했다는 동물원 입구까지 걸어가면서도
2000년 7월 5일 지민의 입방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지민과 보조를 맞추어 약간 느린 걸음걸이로 다리를 움직이며 혁수는 갈색 눈동자를 굴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떨치고 있는 센트럴 파크의 정경을 주의 깊게 둘러본다.
5월이라 그런지 한층 짙고 선연하게 위세를 뽐내는 녹음과..
도시 한 가운데의 공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상쾌한 공기,
그리고 나른하면서도 포근하게 내리 쪼이는 밝은 햇살이 한데 어우러져 과연 장관을 이루고 있다..
조깅을 하는 사람, 개를 산책 시키는 사람, 잔디에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의 뉴요커들이 한가롭게 여가 시간을 만끽하고...
흑인과 동양인은 물론이요, 중남미인이나 중동 사람까지..
세계 각국의 고유한 인종과 언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있는 곳...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유토피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 벌써 와 있네? 자기야~~!!!"
잠시동안 입운동을 그쳤던 지민이 얼굴에 뽀얀 미소를 피우며 촐싹 맞다 싶을 정도로 생기발랄하게 앞쪽으로 뛰어 나간다.
혁수의 눈길이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이동하고..
곧 이어 지민이 나풀거리며 달려가 포옹을 나누는 사람의 형체가 확인되자, 혁수는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린다.
여자였다.
키는 지민보다 5cm정도 작아 보이고, 살이 많이 찐 뚱뚱한 체구이다.
게다가 살구색 플레어 스커트에 노란빛 블라우스 차림을 해서 더욱 몸이 팽창되어 보이는 것이..
이렇게 말하면 당사자에게 큰 실례라는 건 알지만, 꼭 프로야구 경기를 할 때 경기장 공중에 띄워놓은 애드벌룬 같다.. (-_-;;)
얼굴은 그저 수더분하게 생겼는데, 화장을 전혀 안 했음에도 깨끗한 피부만큼은 곱다.
두 여자는 한동안 끌어 안은채 서로의 안부를 전하다가 경악과 당황으로 인해 그 자리에 못박혀 버린 혁수를 보고는 얼른 오라며 손짓한다.
"혁수야! 거기 서서 뭐해? 우리 자기랑 인사 안 할거야??"
지민의 성화에 혁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짐짓 태연을 가장하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지민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금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민은 평상시에 정말 추호도 그런 내색을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언행 중 어디에서도 레즈비언틱한 구석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하기사, 지민과 친구가 된 지 고작 2주가 지났을 뿐인데...
그리고 동성애자라고 해서 일반인들과 전혀 다른, 비정상적인 생활리듬에 따라 살아가는 것도 아니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산되는 혁수의 뇌에 일절 아랑 곳 없이,
지민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자기 애인을 내려다보며 자부심에 빛나는 표정으로 혁수에게 그녀를 소개한다.
지민과 마찬가지로 스스럼없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혁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지민의 연인, '윤아'...
그녀들의 당당하고 떳떳한 태도에, 혁수는 잠깐이나마 그들에게 의혹과 가식의 마음을 가졌던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진다..
진정 미안하고 죄스러운 생각에 혁수는 자기 앞으로 선선히 뻗어 온 윤아의 손을 힘주어 마주 잡는다..
- 지민 그리고 윤아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센트럴 파크 곳곳을 누비며 구경한 다음..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잔디밭에 앉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근처의 피자 집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는 내내..
혁수는 초등학생으로 다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참으로 즐겁고 유쾌했으며, 늘 답답하게 혈관 한 줄기를 옥죄고 있던 무언가가 조금은 느슨해진 것 같았다.
싱그럽고 풋풋한 기분은 좀 더 유지하고 싶었던 혁수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지민을 초대한다.
윤아와 헤어진 뒤라 다소 빈자리가 적적하지만..
지민과 둘이서 공유하는 티타임도 그런대로 혁수에게 호젓한 느낌을 준다.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오늘....많이 놀랐지...? 우리 애인보고..."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아까는 볼 수 없었던 쑥스러운 웃음을 짓는 지민..
그녀는 확실히 타이밍을 잘못 맞추는 것 같다..
그런 웃음은 벌써 예전에 그림자를 거두었어야 했는데...
혁수는 단정하게 정리된 눈썹 주변을 검지 손톱으로 갉작이며, 찝찌름한 어투로 대꾸한다.
"응....사실 진짜 황당하더라....절대 그런 티가 안 났거든..."
"풋...그런걸 나서서 티내는 사람이 어딨냐? 뭐..그렇다고 감춰야 할 일이라는건 아니지만...
솔직히 너 데리고 가면서도 내심 불안했어..혹시 포비아면 어떡하나 하고... (포비아:동성애자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
근데... 네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줘서 너무 고마웠어.. 정말이야..."
혁수는 그저 가볍고 상투적인 미소로 답례를 대신한다..
차마 나도 같은 남자를 좋아하노라고는 말못하겠다..
그가 바로 나의 이복형이라는 소리는 더더욱 입밖에 꺼낼 수 없다.
겨우 잠재워 놓았던 누군가의 영상이 다시 활개를 치려하자, 혁수는 서둘러 입을 열어 아무 말이나 뱉어낸다.
그럼으로써 가슴속의, 기억 저편의 감각과 절규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
"언제 처음 자기가 그렇다는 걸 알았어? 같은 여자한테 매력을 느낀다는 거 말이야.."
성급하게 터져 나오는 질문은 혁수가 아까전부터 가장 물어보고 싶던 요점을 적나라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러자 지민은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두 팔로 무릎을 끌어당겨 안으며 사뭇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연다..
"아마 중3때였을거야... 시험 전날, 단짝친구랑 밤새면서 공부하겠다고 같이 잔 적이 있었어..
공부를 하다가 그애가 졸리다면서 내 침대에서 그냥 잠들어 버리는거야..
혼자 깨있으니까 좀 무섭기도 하고 왠지 싱숭생숭해져서 공부도 안되고 그러더라...
그래서 나도 에라 모르겠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공부하자- 그러면서 그애 옆에 누웠지..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어... 내 옆에서 잠든 그애 숨소리를 들으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야릇해지면서 심장이 쿵쿵거리는게...참을 수가 없더라구... 나도 모르게 그애한테 키스를 하고...
암튼 난 순간적으로 느끼는, 일시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그게 아니었어.....그 뒤로는, 인정하기로 했지..."
"쉽게 인정할 수 있었어? 그런 사실을...??"
혁수는 따지듯이 묻는다.
누군가에게 악에 받친 항의를 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식으로...
어쩌면 그건, 자신에게로 화살표를 돌리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제스춰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혁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괜히 억울해진다...
"물론 힘들었지...하루에도 수십번씩 남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생각밖에 안했어..
무서워서 주위 사람들한테 얘기도 못하고...혼자서만 죽을 맛이었지..
그러다가....사건이 터졌어..."
거기까지 얘기하고 지민은 열기가 오르는지 입고 있던 반팔 남방을 벗어 아무렇게나 놓아둔다..
속에 나시를 입어서 시원하게 드러난 팔뚝을 쓸쓸한 손길로 문지르며, 다시 말을 잇는 지민...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난 남자를 사귈려고 온갖 쇼를 다 부렸어..
나 자신을 바꿔보고 싶었던거지...정상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어찌됐든 그래서 같은 학교 선배 오빠를 사귀게 됐어..
그냥 평범한 남자였고, 나한테 꽤나 잘해줬어..
성격도 잘 맞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훗...빌어먹을, 당최 매력을 느낄수가 없는거야..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해도 전혀 감각이 안 오고...
심지어는 섹스를 할 때도 거기가 젖지를 않아서 아프기만 했어....정말 내 몸이지만 너무 혐오스럽더라...."
그때의 절망감이 재현되는 듯, 입맛까지 다시며 말끝을 흐리는 지민의 목소리에.. 혁수는 창피하게도 주혁과의 정사를 떠올린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와 섹스할때마다 극렬하게 부풀어 오르는 자신의 육체를 떠올린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남자의 손길에 아무런 흥분도,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이지민이라는 '여자'와..
온 몸 전체를 촉촉하고 나긋나긋하게 적시며 한 남자의 페니스와 애무를 갈구하는 안혁수라는 '남자'....
이 세상 사람들이여, 정상인들이여, 보통 사람들이여..
둘 중 누구에게 동정표를 또는 돌을 던지겠는가...?
"그렇게 그 남자를 1년을 사겼어.. 1년을 노력했지만...소용이 없더라...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으니까...
새학기가 되고, 신입생들이 들어왔어..
우리 과에는 여자가 별로 없는데, 새내기 중에 유난히 이쁜 여자애가 있었던 거야.. 당연히 남자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지..
그리고 나는....그애한테....첫눈에 반해 버렸어...진부한 표현이지만 말야..
기거서 나 혼자만의 가슴앓이로 끝났다면 괜찮았을텐데, 불행하게도 그애는...나와 똑같은 레즈비언이었어...
난 완전이 홰까닥 돌았지, 뭐... 그애랑 섹스하는게 내 인생의 낙이 되버린거야..
그러다가 어느날, 우리 둘이 내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걸 우리 엄마가 발견했어..
그리고 난.... 여기로 쫓겨났지...
쿡....내가 뉴욕에 오게 된 진짜 이유가 바로 이거야..
쪽팔리는 일이지....^^;;;"
혁수는 아연해진다..
주혁-세라-지민으로 연결된,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이어진 관계의 유사성이 믿을 수 없을만큼 긴밀하고 명백하다..
이런 우연도 있을 수 있는가...
이건 조물주의 조작이요, 농간이다..
신성하고 전능하신 절대자께서는 나를 어느 방향으로 몰고 가시는 건가...
내게서 얼마만큼의 인내와 능력을 요구하시는 걸까...
당신의 지엄하신 분부와 성스러운 율법을 지키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까지도,
알알이 저며드는 파장과 숨막히는 혼돈까지도 말없이 견뎌내고만 있는 나에게...
신은 진정 무슨 뜻을 품고 계시는가...
어떠한 계획을 준비하고 계시는가.....
흐물거리며 수채화 물감처럼 풀어지려 하는 혁수의 영혼을 일깨우듯,
좀전과는 이질적으로 홀가분한 어투를 한 채 지민은 낭랑하고 당차게 덧붙인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게 전혀 수치스럽지도 않고,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도 씩씩하게 맞서 싸울 수 있어..
무엇보다 내겐 윤아가 정말 소중해..그 애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이건 내가 자주 하는 얘긴데, 나는 라면 국물에 빵을 찍어 먹는 사람일 뿐이야..
대부분의 여자들은 성적으로 남자를 좋아하게끔 구조가 짜여져 있지만, 난 좀 특이하게 같은 여자를 원하는 거라구..
마치 라면 국물에는 밥을 말아 먹는게 보통이지만, 아주 특별한 사람은 빵을 찍어먹을 수도 있듯이...
그래, 난 그저 라면 국물에 빵을 찍어먹는 사람일 뿐이야..
나한테는 그게 더 맛있으니까....^^;"
(44)
냉기가 감도는 흑빛 눈동자로 서늘하게 재준을 쏘아보는 강태..
재준은 그런 그의 시선을 무신경하게 받아치며 지금 몇 시쯤 됐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표피적인 말투로 강태에게 질문한다..
"누구 왔어? ....누구야...?"
강태는 서양 사람들처럼 지방분이 적고 산뜻한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이더니,
이전보다 몇 배 더 살벌하고 뻣뻣한 목소리를 내어 재준에게 앙칼진 혀로 보복하기 시작한다..
"태현 형 왔어요.. 오늘 아침에 회장님이 태현 형한테 뭐라고 말씀 하셨는지도 들었구요....
그 말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나봐요, 태현형이...
술을 엄청나게 마셨더라구요.. 아시죠? 태현형이 저 좋아하는거...
근데 저에 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니까 속이 뒤집어 질만도 하죠..
한참동안 엉엉 울더니 지금은 잠들었어요.. 회장님 침대에서..."
이쯤되면 재준에게서 무슨 말이라도 쏟아져 나와야 하는거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던지, 그건 이런 뜻에서 한 말이었다고 시덥지 않은 변명이라도 몇 마디 주절대야 하는거다..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염치없게도 재준은 강태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보낸 사람처럼 무심하게 그를 지나쳐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떼려한다..
강태는 엉겁결에 팔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는다.
그리고 고개만 뒤로 돌려 다시 강태와 눈을 맞추는 재준에게..
지금까지 사수해 온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를 모두 걷어치운 채, 따발총처럼 쏘아댄다..
"뭐라고 설명이라도 해주셔야 하는거 아니에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이에요..
대체 태현형한테 그딴 소리를 한 이유가 뭐에요?? 하룻밤 정도는 빌려주겠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당신 눈에는 내가 사람으로 보이기나 하는거에요?!
도대체 내가 당신한테 뭐에요? 장식품처럼 달고 다니는 예쁜 남자에 불과한가요??
그냥 침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에요?!
아무리 당신이나를 고용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사람을 물건 취급할 수 있어요??!"
상처입은 자존심 앞에서 강태는 이성도, 두려움도 모조리 뒷전이다..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아의 정체감 회복에 집착하는 강태이기에..
지금의 행동이 무리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순간 강태를 분개의 격랑 속으로 몰아 넣는 것은 단순히 존엄성 훼손에 따른 굴욕감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배반당한 듯한 실망감과 편협하고 구차스러운 패배심리가 그것이다.
"나는 적어도 회장님이 날 아낀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제 보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네요... 회장님에게 있어서 나라는 인간은,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형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래! 네 말 틀린거 하나도 없어..
넌 그냥 내 심부름 잘 해주고, 파티 가서는 예쁜 장식품이 되고, 침대에서는 내 욕구를 충족 시켜주기만 하면 되는거야!
그만큼 난 너에게 대가를 지불하잖아?? 그러니까 이제 제발 귀찮게 좀 하지마!!
너는 내 섹스 파트너야.. 정부라고!! 네 의무는 날 편하게 해주는 거야! 알았어??!"
격분하며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대는 재준...
안 그래도 혼란스럽고 복잡해서 폭발할 것만 같은 머릿속을 뾰족한 쇠꼬챙이처럼 날카로운 말들로 들쑤셔 놓는 강태가 얄미워 보이기까지 한다..
너만 기분 나쁘고 열 뻗치는 줄 알아?? 나도 피곤해 미치겠다고!!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야, 모든게!!!
마지막 문장들은 입안으로 억지스레 씹어 삼키며..
사납게 출렁이는 핏줄과 레이싱 카처럼 급속도로 질주하는 맥박을 진정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재준...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하늘로부터 난데없는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둔탁해지는 강태의 표정에
서서히 흐트러지려는 이성의 잣대를 세우며 마음을 다잡는다..
세글자만 생각하는거다... 충/의/회/...
이재준에게 맡겨진 곳... 이재준이 이끌고 나가야 하는 그 곳...
"강태...넌 정말 예뻐.. 누구보다 매력적이고, 침대에서도 끝내 줘..
'섹스'로만 본다면 넌 최고야.. 그렇기 때문에 널 정말 좋아해..
나 나름대로는 잘해주려고 애쓰고 있고... 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니까..
그치만 넌, 까다로워!!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네가 해달라는 건 전부 다 해주고, 너희 집에도 넉넉하게 신경 써 주고 있잖아??
내가 너한테 상습적으로 손찌검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변태적인 섹스를 요구하는 적도 없어!
네가 몰라서 그렇지, 다른 정부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아??
매일 얻어터지면서 사는 여자도 수두룩해.. 진짜 더러워서 보지도 못할, 그런 걸 강요당하는 여자도 한 둘이 아니야!
그러면서도 다들 얼마나 고분고분한지 알아? 시키는 대로 정말 뭐든지 다해, 걔네들은!!
근데 넌, 이쁘다고 쓰다듬어 주니까... 툭하면 시비 걸고, 따지고, 대들고!
네가 아무리 내 맘에 쏙 들어도.. 참는데 한계가 있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너랑 나랑도 끝나는거라구!!"
재준의 입에서 '끝난다'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어이없게도 강태는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눈동자 밖으로 부끄러운 이슬방울이 넘쳐나려 하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되면,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만큼 초라해지고 우스워질 것 같다..
강태는 화급히 재준에게서 몸을 돌이켜 2층의 자기 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만의 공간에 안착하자,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바닥에 퍼져 앉아.. 큰 소리로 꺽꺽 흐느낀다...
- "리셉션 가야 되니까 한 시간 뒤에 준비하고 나와 있어.."
핸드폰의 송수화기를 통해 실려오는 재준의 억양없는 목소리...
강태는 기계적으로 짧게 대답한 후, 플립을 닫는다..
욕실로 들어가 말끔하게 세안을 하고 보송보송한 구릿빛 피부에 윤기를 주는 스킨로션을 발라 매끄러운 살결을 돋보이게 한다..
방에 돌아와 옷장을 열고 잠시동안 고민에 잠기는 강태..
그러다가 결국 진주빛 공단 정장으로 낙찰을 보고 서랍에서 흰색 포멀 셔츠와 타이를 꺼내 코디한다..
제대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거울에 투과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자, 묘하게 자학적인 나르시시즘이 강태의 머릿속에 스며들고...
핀잔 섞인 조소를 지으며 거울 앞에 다가가 검은 머리카락을 한올한올 세세하게 빗어 내린다..
마지막으로 머리칼과 목 언저리에 향수를 뿌리는 강태..
얄쌍하면서도 숙성된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난다..
외출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내려가 TV를 보며 시간을 때우던 강태는
시계바늘이 저녁 7시를 가리키자 재준의 명령대로 빌라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몇 분쯤 기다리자, 재준이 타고있는 승용차가 강태의 시야에 들어오고..
강태는 습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몸에 익은 동작으로 재준의 옆자리에 올라탄다..
연회장으로 가는 내내, 강태에게 한마디 말도 붙이지 않는 재준...
사업에 관련된 서류뭉치를 들여다보거나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강태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들을 나불대는 등... 일에만 몰두한다.
강태 역시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30분쯤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어느 대기업의 창립 50주년 기념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이벤트 홀이었다.
이젠 이런 종류의 대규모 리셉션에도 익숙하다 못해 싫증이 날 지경인 강태..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만개한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스크린 속에서 연기하는 영화배우처럼 금세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다..
물론 '정부'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작위적으로 연출된 가면의 표정일 뿐이다.
재준과 함께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누고..
뭇 사내들의 노골적인 경탄의 시선과, 그 남자들에게 딸려온 여자들의 질투 어린 눈빛을 적당히 즐기는 강태...
이럴때는 정말 여자가 된 것 같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들이 시샘에 찬 얼굴로 흘끔흘끔 자신을 쳐다보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저 인간들, 진짜 나를 여자로 착각하고 있는건가?
쳇...남자로 태어난 게 천만다행이군...
여자로 태어났으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풋...이런걸 왕자병 말기증상이라고 하나...?
아니, 왕자병이 아니라 공주병이라고 해야 하는건가...? -_-;;;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딴 생각을 굴려대면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를 짓고 있으려니 안면 근육이 당기고 아프다..
강태는 재준에게 양해를 구한 뒤, 파티 장의 중심부에서 빠져나와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후미진 구석자리로 향한다.
샴페인으로 목구멍을 축이며 날숨을 돌리는 강태...
예쁘고 매력적인 장식품 노릇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지루하고....따분하다..
권태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우울한 상념에 빠져있는 강태의 고막을 뚫고 들려오는 낯선 음성...
"여기서 혼자 뭐하시나, 강태 군~~??"
느물거리는 말투 때문에 저절로 찌푸려지는 눈을 들어 올려다보니, 자주 마주친 적이 있는 '연화회'의 보스, 조문환 이다..
잘은 모르지만 강태가 얼핏 듣기로는 현재 경기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조직이라고 했다.
조문환 과는 간단히 인사 정도만 주고받았었기에, 강태는 자신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는 그에게
가벼운 목례를 해 보이고 그 이상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끈덕지게 추파를 던지는 문환...
"참~~볼수록 이쁘게 생겼단 말야...
다른 기집애들처럼 질리지도 않고, 분위기가 야리야리~한게...네가 왜 남자로 태어났는지 정말 모르겠다..
하긴, 남자라서 오히려 더 먹음직스러운 건지도 모르지....쿡...."
강태는 당장이라도 위장을 게워내고 싶을만큼 비위가 상하는 것을 느끼며 짜증이 역력히 묻어나는 얼굴로 문환에게서 눈길을 돌려버린다..
그에 상관하지 않고 그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너저분한 잡소리를 지껄이는 문환...
"야, 너 나랑 언제 한번 하자... 돈은 원하는만큼 줄게..."
"난 우리 회장님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섹스 안해요.."
샴페인이 담긴 글라스에 눈동자를 박고, 도도하고 단호하게 입을 열어 문환의 제의를 묵살해 버리는 강태...
그런 강태의 발언을 듣자, 안 그래도 재준에게 고까운 열등감과 치사스런 경쟁심을 갖고 있던 문환은 단박에 심기가 불편해진다.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문환... 언성을 높여 비아냥거린다..
"씨발~~ 이재준 그 새끼가 그렇게 잘하냐??
야, 나도 테크닉 죽여 줘... 못 믿겠으면 네가 직접 경험해 보고 비교 분석하면 될 거 아냐~
괜히 튕기면서 비싸게 굴지 말고 대충 말 들어, 임마...엉??"
영락없는 시비조로 강태의 발부리를 툭툭 건드리며 추근대는 문환에게 강태는 더 이상 예의 바르게 굴지 않기로 한다..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그와 일직선으로 시선을 맞추는 강태..
"이봐, 나...충의회 이재준 회장님 모시고 있어..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찝적댄 거 말씀 드리면 당신 신상에 별로 좋을 거 없을텐데...?
나야 그러고 싶지 않지만 자꾸 이따위 짓 하면 나도 신경질 나서 못 참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리고, 똑똑히 말해 두는데... 나 비싼 놈이야..
당신 같은 양아치들하고는 상대 안 해...
그러니까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말고, 다치기 전에 꺼져....."
(45)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아 있습니다만
실상 남아있는 건 내 몸뚱어리뿐입니다.
내 영혼은 이미 그를 따라 나서소 있었습니다...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중 -
혁수가 미국으로 떠난 지도 한달이 넘었다.
어느새 숨통을 텁텁하게 메워오는 더위가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가운데 녹짝지근 배어난다.
촉촉하고 싱그럽게 감기는 물기가 아니라, 땀구멍 하나하나에까지 스물거리며 기어드는 불쾌한 습기가 조금 있으면 장마철이 시작된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주혁의 하얀 뺨에 질펀한 손길을 뻗치고, 주혁은 그 꺼림칙한 느낌을 없애려는 듯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린다.
식도를 타고 내장 깊숙이 흘러 들어오는 차가운 소주의 효능이 주혁의 꽉 막힌 호흡기를 희미하게나마 뚫어준다..
사실 술 마시는 것도 지겹다...
점점 늘어만 가는 주량 때문에 엔간히 잘 취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길바닥에 널부러질만한 엄청난 양의 술을 들이부어야 겨우 몽롱해 지는 의식상태...
게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숙취의 괴로움...
그래도....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이 끔찍한 불면의 시간을 잠재울 방도가 없기에...
주혁은 알콜의 힘을 빌어, 편안한 망각의 요람 속에 빠져보려 발악을 한다..
"저어...죄송한데요, 영업시간 끝났거든요?...이제 그만 문 닫아야 하는데..."
술집 종업원이 멋적에 웃어보이며 조심스러운 어투로 주혁의 퇴장을 독촉하고..
주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힘없이 몸을 일으킨다..
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정신은 말짱하기만 하다..
턱 밑까지 먹먹하게 차오르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주혁의 하얀 얼굴에서 핏기를 앗아간다..
주혁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종업원의 손에 쥐어 주고는,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서 가게문을 나선다.
새벽 2시를 향해 치달아 가는 시간...
휘형찬란하게 불을 밝히던 네온사인도 꺼져있고, 빵빵대며 경적을 울리던 자동차들도 자취를 감춘 도시의 거리...
황폐하고 척박하고 암울한 어두움만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주혁의 시야를 뒤덮는다..
주혁이 발을 옮길때마다 저벅저벅 새어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둔중하고 고즈넉하게 그의 귓전에 메아리 친다..
그 죽음 같은 고요 속에서 주혁은 자신을 가장 참담하게 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털끝만치도 미워지지 않는 한 남자의 환영을 그려본다..
그 와인빛 머리카락의 촉감은 여전할까....
동그란 갈색 눈망울은 변함없이 순하고 부드러울까...
그 눈과 입술이 만들어내는 미소는 아직도 그렇게 슬플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치 그를 못 본지 십수년은 족히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혁수가 떠난 뒤, 주혁은 오히려 더욱 또렷해진 시간관념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일각 일각 흘러가는 시계초침 소리는 거대한 공포가 되어 주혁의 사고회로를 얽어매고...
그것을 셈하느라, 모두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내일을 준비하는 때에도 주혁은 수면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언젠가 학교 강의시간에 들은 일화가 불현듯 생각난다..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파 화가 '고흐'가 정신이상으로 자살할 무렵, 탄식하듯 부르짖고 다닌 말이 있다고...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
허공을 떠도는 고흐의 망령이 주혁의 귓가에 음습한 목소리로 속살거리는 것 같다..
주혁은 번데기처럼 몸을 움츠린다.
그리고 두 손으로 힘껏 귀를 막아 저주스러운 환청을 차단하려 해 본다..
하지만....주혁의 외부에서가 아닌, 내부에서 핏줄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고흐의 목소리가 막아질 턱이 없다..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
......제발....나를 살려 줘....나를 구해 줘.....
이대로 내버려두지 마.....이 수렁 속에서 날 좀 건져 줘......
...배가 고파...목이 말라.....
사방이 깜깜하기만 해.....불을 켜 줘.....
숨을 쉴 수가 없어....창문을 열어 줘.....
....햇살을 보고 싶어....붉은 햇살을......
그 다사롭고 안온한 빛줄기에 흠뻑 젖고 싶어......
최대치에 다다른 주혁의 절망이 그의 발걸음을 조종한다..
주혁은 모든 의지와 결심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다시는 가지 말자며 자신을 타이르던 단죄의 장소로 위험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3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들어서자, 자욱한 담배연기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주혁을 반겨 맞이한다..
주혁은 아무 말 없이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20대 후반의 사내에게로 걸어가서, 체념으로 손상된 눈빛을 한 채...
소매 자락을 걷어올려 하얗고 가느다란 팔을 내민다..
"크큭....네가 인제 드디어 맛을 알았구나~~ 거봐, 끝내주는 거라고 했잖아....."
주혁은 사내의 말을 무시하고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것을 집어 가슴팍에 달린 포켓에 찔러 넣는 사내...
왼손으로는 주혁의 손목을 부여잡고, 오른손으로는 주혁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는다..
주사기 안의 모르핀이 혈관으로 투입되어 갈수록 초점을 잃어 가는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
힘이 빠지는 주혁의 근육과 사포처럼 메마르는 그의 우윳빛 살결...
육신의 붕괴와는 대조적으로 주혁의 심령은 가까스로 안식과 평온을 되찾는다..
그와 동시에 짧지만 황홀한 판타지 속으로 빨려드는 주혁...
역시 주인공은 '안혁수'다...
그 속에서 주혁은 혁수를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있다..
혁수의 독특한 살내음이 맡아지고, 혁수의 감미로운 음성이 들리고, 손을 뻗으면....눈물처럼 애틋한 감촉이 전해진다..
주혁은 아득한 행복감에 몸서리치며...간절히 기도한다..
제발 깨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이 순간이 영원하게 해달라고....
이 오르가즘의 판타지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그러나....주혁의 탄원은 단 한번도 상달되지 않는다..
찰나와도 같은 황홀경이 막바지에 이르고...
마취되었던 주혁의 신경세포들이 하나씩 움직임을 재개하자, 주혁은 살갗을 태우는 듯한 통증으로 인해 신음하기 시작한다.....
- 4시간째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태현...
믹싱보드 앞에 앉아 산발이 된 머리칼을 연달아 긁적이며
용을 쓰던 태현은 점차 시야가 흐릿해지고 뒷목이 뻐근해지자, 기지개를 쭉 펴며 시계를 본다..
벌써 2시가 지났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찌뿌둥한 어깨를 주먹으로 탁탁 두들기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주혁이 자식...뭐하다가 이제 오는건지....-_-;;'
걱정 반 의문 반의 말투를 곱씹으며 태현이 현관문을 열자, 그의 눈앞에 보이는 얼굴은 황당하게도 요란스레 화장을 뒤집어 쓴 세라였다.
태현의 눈썹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고, 세라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슴없이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얼떨결에 그녀를 들어오게 한 태현은 유난히 선정적인 세라의 옷차림에 더욱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저 주혁오빠 친구에요...^^;;"
생긋 미소를 머금으며 서글서글하게 말문을 트는 세라..
태현도 의심스런 낯빛을 한 겹 벗겨내며 입을 연다.
"아, 예...근데 주혁이 아직 안 들어왔는데..."
"아직도요?? 퇴근한지가 언젠데 여태 안 들어오고 뭐하는거지...? -_-;;"
금세 염려와 근심으로 얼룩지는 세라의 표정...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태현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 것 마냥 친근하고 거리낌없는 어투로 이야기한다..
"오늘 나이트 갔었거든요... 집에 가는 버스가 다 끊겨서....
택시 타기에는 돈이 모자라고....하룻밤만 신세 지려고 왔는데, 괜찮죠?? ^^;"
"하하....예에...그러세요... 이 근처 나이트에 가셨나 보네요..."
"네~~ 이 근처가 제일 물이 좋잖아요! 주혁오빠도 여기 나이트에서 만났어요~~^^*"
밝은 음색으로 떠들어대며 거실의 쇼파에 털썩 몸을 묻는 세라...
그녀가 입고 있는 짧은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 풍만한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나자..
괜히 민망스러워진 태현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저어....그럼 쉬세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저기요, 잠깐만요.."
다시 작업실로 향하는 태현에게 제동을 거는 세라..
장난기를 거둔 그녀의 눈동자에 고민과 궁금증이 출렁이며 넘쳐나는 것을 알아차린 태현은 잠자코 그 자리에 서서 세라의 다음 말을 기다려준다..
"...요즘에 주혁오빠...뭔가 이상하다고 못 느꼈어요? 하는 행동이라던가, 아니면 표정이라도...."
"글쎄요....솔직히 주혁이랑 같이 살면서도 얼굴 마주치기가 힘들어요..
저는 학교 다니고, 집에서는 거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주혁이도 나름대로 바쁜 것 같고....잘 모르겠네요, 저는...."
얘기하다 보니까 정말 명색이 같이 사는 친군데, 그동안 너무 주혁에게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태현 자신의 심리상태도 어지간히 복잡한 지경이라 남한테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식사 한번 제대로 함께 하지 않은 건 좀 심했다..
에효오~~ 대인관계에 그토록 충실하던 문태현이 어쩌다 이렇게 친구들을 소홀히 대하게 됐는지.....
뭐어....대답은 뻔하지만.....-_-;;;
"후우....그렇구나... 대체 뭐 때문이지...?.."
실망감이 은근슬쩍 묻어나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소곤거리는 세라...
마음 한켠을 께름칙하게 누르고 있는 불안감과 노파심에 답답하기만 하다.
이럴때는 차라리, 비정상적으로 예민하게 발달된 자신의 육감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냥 남들처럼 적당히 둔감해져서 강물 흘러가듯 설렁설렁 넘겨 버릴 수 있으면 좋을텐데....
왠지 모르게 짜증이 솟구친다..
세라는 신경질적으로 왼쪽 다리를 들어 꼬고, 기분전환을 할 요량으로 담배를 피워 물며 짐짓 명랑하게 목소리를 낸다..
"오빠는 이름이 뭐야?? 난 이세라야...주혁오빠한테 들었는데, 음악 전공한다며??"
화통하게 중간절차를 생략하고 반말을 쓰는 세라에게 흥미가 생기는 태현...
천성적으로 사람 사귀기를 즐기고, 붙임성이 뛰어난 그의 성격 탓일게다..
다른 사람 같으면 무례하고 건방지다고 생각할 법한 세라의 행동거지가 태현에게는 반대로, 관심을 쏟게 만드는 야릇한 매력 포인트로 다가온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직은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하다....
"어어....난 문태현.... 주혁이랑 같은 백화점에서 일한다 그랬지?"
"응....'문태현'이라.....오빠하고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아주 잘 어울려...."
사그라드는 세라의 말꼬리가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정취를 자아낸다..
천장을 바라보며 희뿌연 담배연기를 뿌리는 그녀의 모습은..
화려하고 멋들어진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텅 비어버린 변두리의 광장처럼 허허로운 느낌을 준다..
보라색 마스카라가 진하게 칠해진 속눈썹을 경련하듯 움찔거리며..
밍크 브라운의 립스틱이 두텁게 발린 입술을 떼어, 세라가 청승맞고 염세적인 음성으로 다시 말한다..
"태현오빠....오빠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
"......그 사람을 갖기 위해....그 사람을 뺀 나머지를 전부 버리는 거.. 그게 사랑이야......"
(46)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한 대형서점은 평일이나 주말이나 할 것 없이 늘 인파로 북적인다.
구입해야 할 서적의 목록을 체크하며 천천히 발을 옮기는 강태..
책값을 지불하고, 가방 속에 산 책들을 집어넣으며 서점의 커다란 유리문을 열어 제낀다..
회색 돌계단을 뚜벅뚜벅 걸어 내려가,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강태의 앞에 느닷없이 거구의 형체들이 나타난다.
반사적으로 눈을 들어 바라보니, 이제 제법 눈썰미가 생긴 강태는 단박에 이들이 재준과 비슷한 부류의 사내들이라는 것을 짐작한다.
"도련님, 회장님께서 급하게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같이 가시죠.."
"....회장님한테서 그런 전화 없었는데...?"
강태가 어리둥절해하며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자,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사내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돌변하며..
정중앙에 서 있는 남자가 모종의 눈짓을 하자 곁에 있던 자들이 강태에게 달려들어 우악스런 힘으로 그를 포위한다.
위기감을 느낀 강태가 몸을 뒤틀며 뿌리치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당신들 뭐야?! 이거 못 놔?!?"
다급한 외침을 터뜨리며 강태는 주위의 군중들을 둘러보지만, 다들 놀란 눈으로 관망하기만 할 뿐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다.
우락부락한 사내들 대여섯명을 상대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모험을 단행할 돈키호테가 있을리 만무하다..
무력하게 그들의 인도대로 끌려가는 강태...
그 순간, 강태의 뇌리에 사무치도록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은....재준이다..
신경중추를 마비시킬 정도로 날카로운 공포와 전율이 엄습하자, 강태는 자연적으로 재준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고 애타게 그의 도움을 갈구하게 된다..
주차장에 이르니 흰색 아카디아 안에 대기하고 있어야 할 운전사는 보이지 않고, 자동차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아마도 강태가 서점에서 책을 사고 있는 동안에 운전사를 처치한 것 같다..
새로운 떨림과 두려움이 덩굴처럼 강태의 온몸을 휘감고...
자꾸만 아득해지려는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며 강태는 스스로를 진정 시킨다..
강태를 자신들의 승용차에 태우고는 빠르게 핸들을 돌려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는, 정체 모를 사내들...
도로로 접어들자,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안도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강태는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바들바들 경련하는 입술을 열어, 옆에 앉은 험상궂은 사내에게 질문을 건넨다.
"대,대체...당신들 누구에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구요..!"
"가 보면 알아, 새끼야... 입다물고 조용히 있어.."
"어디로 데려가는지만 말해줘요.. 그 이상은 안 물을 테니까..."
예쁜 눈동자를 물빛으로 물들이며 애원조로 강태가 호소하자,
그의 미모에 마음이 동하는지 남자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로 강태에게 대답한다..
"으음...우리 '연화회' 회장님께서 널 좀 보자신다...너랑 네 주인이 하도 건방지게 굴어서 충고 몇 마디만 하시겠대..."
강태의 명석한 두뇌가 영민하게 추론과 분석을 시작하고..
요컨대, 지난 번 리셉션에서 내가 자기를 함부로 대했다고 거기에 앙심을 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네 주인' 어쩌고 들먹거리는 걸 보아서는 재준에게도 악감정이 많은 듯 하다..
아마 이전부터, 꼬투리를 잡아 재준을 건드릴 기회를 단단히 벼르고 있던 모양이다.
이 납치극을 시발점으로 연화회와 충의회 간의 대격전이 벌어질 것이고...
그 싸움의 시작에 강태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강태는 갑자기 무서워지면서 달아나 버리고 싶다는 마음밖에 생기지 않는다..
문짝에 앉았으면 차 밖으로 몸을 날리는 무모한 시도라도 감행해 보련만...
두 남자 사이에 끼여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니..
그만 목놓아 울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겨우 눌러 삼키는 강태이다..
자동차는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변두리로 들어서고..
얼마쯤 더 달리다가 4층짜리 빌딩의 정문 앞에 당도한다.
건물 안으로 붙들려 가는 강태...
좁다란 복도를 지나, 제일 끝에 자리한 방으로 그를 이끄는 사내들...
재준의 집무실과 유사하게 꾸며진 '연화회'의 회장, 조문환의 사무실이다..
쇼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읽고 있던 문환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야비한 인상이 풍길만큼 얇은 입술을 벌려 연기를 뿜어낸다.
"호오~~ 이제야 오셨구만- 그새 더 이뻐진 것 같애~~??"
만면에 퍼뜨리는 비릿한 웃음이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강태는 시선을 벽에 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들리지 않게 혼자서만 뇌까린다..
절대로....이 자에게 두려워하거나 주눅 든 모습을 보여서는 안돼...
그건 이 자의 흉물스런 자만심과 새디즘적인 욕망을 만족시켜 줄 뿐이야...
최대한 침착하게, 덤덤하게 행동하자...
강태, 넌 괜찮을거야.....정신만 똑바로 차려....
자기 자신에게 주술적인 문장들을 반복하며 냉정해지려고 애쓰는 강태를 대하자 문환은 좀이 쑤시는지 약간 고조된 어투로 채근한다.
"왜 말이 없을까~~? 널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도 않아??"
"이유야 뻔한거 아닌가요? 날 미끼로 충의회와 붙어 보려는 심산이겠죠..."
상대방을 시르죽게 하는 눈초리로 문환을 쏘아보며,
당돌하게 대꾸하는 강태의 기세에 흠칫 하던 문환은 곧 귀엽다는 듯이 강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잇는다..
"와아~~ 꽤 똘똘한데?? 생긴게 이쁘장~하길래 골은 텅텅 빈 줄 알았더니, 제법이네?
이재준이 미칠만도 하구만....한동안 너한테 빠져서 헤롱거리던만, 요새는 다시 정신 차린 것 같더라??
하기사...L호텔을 우리가 인수하는 거 보고 아차! 했겠지...쯧쯧.....그 새끼도 별 수 있나...."
주절대는 문환의 이야기가 강태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여러 방면으로 짜집기를 해보면, 재준이 강태 자신에게 정신이 팔려서 사업에 손해를 봤다는 얘긴데.... 그럴 리가.....
그렇게 철저하고 빈틈없는 사람이 설마....나같은거 하나 때문에....
납득이 가지 않는 사실이다..
"근데 말이지....이유가 한가지 더 있어..."
"..........???"
"저번에 얘기했던 것 같은데....너 한번 먹고 싶다고...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말을 들으니, 느끼하고 구역질 나는 문환의 음성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당장이라도 아구창을 갈겨 버리고 싶은 걸 초인적인 자제심으로 억누르며...
강태는 매서운 눈으로 문환을 흘겨보기만 한다..
저 짐승같은 작자가 무슨 짓을 요구해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응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충의회'와의 전면충돌까지 각오한 상태이니, 강태의 목숨쯤은 파리 잡듯 없애버릴 수도 있는 녀석이다..
강태는 굴종할 수밖에 없는 약자의 비참함과 쓰라린 치욕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한다고 되뇌인다..
여기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사치스러운 존엄성이나 주체성을 내세우기에는, '생존'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절박하게 강태의 동공으로 각인된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움직이기 위해서,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영위하기 위해서...
나는 내 몸을 팔았고 자존심을 팔았고 내 인생의 경로조차 전혀 생각 치 못했던 방향으로 수정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저.....어떠한 형태로든 생활하고 호흡하는 나의 자아를 존재하게 하고 싶었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막연하게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생의 열기가 강태의 눈시울을 뜨거워지게 한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이슬처럼 맺히는 하나의 잔상...
...또 한번....재준이다...........
그 하얀 이미지 때문에 볼을 타고 미끄러지려는 나약한 눈물을 되삼키며...강태는 소리 없이 운다....
- 아침에 환성으로부터 건네받은 매출액 보고서를 검토하는 재준에게 핸드폰 벨소리가 들린다..
왼손으로는 계속 보고서를 뒤적이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는 재준...
특유의 심드렁한 말투로 전화를 받는다.
"예, 이재준입니다..."
"회,회장님.....크..큰일..났습니다....."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운 음성의 주인공은 강태의 운전기사다..
재준의 안면근육이 사납게 굳혀지며 납덩이처럼 무겁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묻는다.
"무슨 일이야?!?"
"연화회 새끼들이...도..도련님을.....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저도 어쩔 수가....죄..죄송합니다...."
"이런 개새끼들!!!"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재준은 재빨리 사고회로를 돌려 전반적인 상황을 계산해 본다..
일단, '충의회' 조직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는 안된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표면적으로는 강태 한 사람에게 국한된 문제이므로 이건 어디까지나 재준의 사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충의회의 인력을 동원해서는 곤란하다..
나 혼자서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
홀홀단신으로 맞부딪친다는 게 무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다고 개인적인 사생활에 '충의회'의 구성원들을 이용한다는 것은 조직의 보스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임에 분명하다..
어렵더라도.....혼자 해치워야 한다...
"잘 들어.. 너도 많이 다친 것 같으니까 얼른 병원가서 치료받고,우리 애들한테는 절대로 얘기하지 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까 괜히 시끄럽게 일이 커지지 않도록 해..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운전기사의 대답을 다 듣지도 않은 채 핸드폰을 접어 주머니에다가 아무렇게나 찔러 넣은 다음,
재준은 책상 한 귀퉁이에 놓인 차 열쇠를 집어들고 사무실에서 뛰쳐나간다..
단숨에 자신의 검은색 XG가 세워진 곳으로 달려가 차에 올라타고 '연화회'의 사무실 쪽으로 출발하는 재준...
핸들을 잡은 그의 야윈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지게 불겨져 나온다..
피가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지만 아프다는 감각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한다..
정지 신호도 무시한 채 정신병자처럼 막무가내로 엑셀레이터를 밝아대는 재준을 향해 다른 운전자들이 크락션을 울리며 고함을 지르고 삿대질을 하지만...
재준의 망막에 새겨지는 건...강태의 겁에 질린 흑빛 눈동자뿐이다........
(47)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여..
머리 풀고 흐느끼는 내 영혼의 새여..
당신을 나의 이름으로 지명수배한다..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중 -
레스토랑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오피스텔을 구경시켜 달라며 졸라대는 지민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혁수는 그녀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집을 나서기 전까지 캔버스 앞에 앉아있던 혁수인지라
오피스텔은 퀴퀴한 유화 물감냄새와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그림도구들로 인해 엉망이었다.
창피해하는 혁수에게 특유의 장난기 감도는 - 세라와 아주 닮은 - 웃음을 보내며 입을 여는 지민..
"야아~ 안혁수 겉으로 보기에는 열라 깔끔해 보이는데, 실생활은 여~엉 딴판이구만? ^^;"
"그러게...내가 다음에 오자고 그랬잖아... 자기가 막무가내로 쳐들어 와놓구선...-_-;;;"
주섬주섬 주변에 널린 물건들을 치우며 볼멘 소리로 혁수가 투덜대자,
지민이 그의 청소를 거들며 친누나처럼 토닥이는 듯한 어투로 이야기한다.
"이건 내가 치울테니까 넌 커피나 끓여 줘..^^"
워낙 자질구레한 집안일 하는걸 싫어하는 혁수이기에..
지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부리나케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한다.
지민은 귀여운 그의 모습에 다시 한번 살풋이 미소를 띄우며 살가운 동작으로 혁수의 그림도구들을 정리해 주고,
잡동사니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혁수의 책상까지 깨끗하게 손본다.
그러다가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노트를 발견하자, 지민은 천성적으로 타고 난 지적 호기심이 발동한다..
아직 학교도 안 들어간 녀석이 웬 노트가 있지...?
꽤 오래되 보이는데...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미처 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은 하늘색 노트를 펼쳐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혁수의 일기장임을 알고 당혹스런 마음에 얼른 겉표지를 덮으려 하는데...
노트 중간에 끼워져 있던 무언가가 그녀의 발치 아래로 툭 떨어진다.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드는 지민...
혁수의 일기장 사이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던 것은 다름아닌 주혁과 혁수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혁수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고 말갛게 함박웃음을 짓는 남자..
선이 가느다라면서도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핸섬한 얼굴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혁수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지민의 입에서 '어머!'하는 감탄사가 터져나올 정도일까...
그녀 자신도 동성애자인 관계로 그동안 무수한 이반커플을 보아 왔지만, 같은 남자끼리 이렇게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게 경이롭다...
심지어 질투가 날 지경이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지민에게 다가와 커피잔을 내미는 혁수..
그녀의 손에 들린 사진을 보자마자, 혁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며 지민의 손에서 사진을 홱 낚아챈다.
"왜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고 그래?!?"
한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던 혁수가 발끈해서는 격양된 음성으로 따지자,
지민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어쩔줄을 몰라하며 허둥지둥 혁수에게 사과하기 시작한다.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어, 혁수야.....그냥 아무 생각없이 펴봤는데 사진이 나오길래....기분 상했다면 미안해...
정말 고의는 아니었어..."
마음이 여리고 천성이 착한 혁수는 그런 지민의 모습에 또 금세 분노를 사그러뜨리고...
사실은 그녀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민에게 자신의 비밀스런 치부를 들켜 버렸을까봐..
일종의 방어적인 제스츄어로 화를 낸 자기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며 심히 부끄러워진다...
도대체 넌 언제까지 비열한 은둔자로 살아갈거냐...?
왜 넌 그녀처럼 당당해지지 못하는 거냐...?
"근데 있잖아...그 사진속에 있는 남자, 누구야...?"
노기가 한꺼풀 지워지는 혁수의 낯빛에 어느정도 안심을 한 지민은
그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최대한 사려깊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 혁수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저변에는 대답을 다그치는 듯한 어투로 조심스레 몇마디 덧붙인다.
"너랑 너무 잘 어울려서 말이야... 딱 보는 순간, 네 글자가 떠올랐어.. 천/생/연/분/.."
혁수의 작은 얼굴에 황폐하고 씁쓰레한 조소가 썩은 물이 고여들 듯 처연하게 번져 나간다.
오른 손에 쥐어진 사진으로 시선을 움직이며 우습다는 듯 조롱어린 말투로 지민에게 되묻는다.
"정말....그렇게 잘 어울려...?"
고개를 끄덕이며 '응'이라고 대꾸하는 지민...
사진 속의 주혁의 하얀 얼굴에 고정된 혁수의 갈색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지고...
회색빛 가루가 희석되어 있는 듯한, 혼란과 갈등에 길들여진 눈망울 안에..
오래 전부터 텃세를 부리고 있는 그리움과 고독이 일렁인다..
"....우리...형이야... 생일이 한달 차이나는....형...."
한없이 저주스러운 단어...
죽는 날까지 나의 숨통을 조이고 나의 심장을 조각 낼 끔찍스런 호칭..... '형'.....
지겨워....지긋지긋해....이따위 절망감, 이런 암담함...
벗어나고 싶어..... 놓여나고 싶어....
".....많이....좋아했었구나...?.."
혁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지민의 입에서 한참만에 새어나오는 목소리...
나즈막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넉넉한 이해심과 따스한 애정이 진하게 섞여있다.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간파하는 지민을 향해, 찬사와 자조가 담긴 쓴웃음을 지으며 혁수가 입을 연다..
그리고 난생 처음...가슴속에만 숨겨두고 있던 그 말을..
이제껏 어느 누구에게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그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아니.....아주 많이.....사랑하고...있어...."
타인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나니, 까닭 모를 눈물이 울컥 치솟으며 커다란 흐느낌이 재채기처럼 와락 터져 나온다..
너무 오랜 세월동안 혼자서만 삭히고 감내해 오던 그 상처를 최초로 누군가와 공유하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조금이나마 기댈 어깨가 생겼기에 끝도 없이 약해지는 것인가....
마른 어깨를 격렬하게 들썩이며 한 맺힌 오열을 토해내는 혁수를 포근하게 품어주는 지민...
그의 눈동자 뒤로 언뜻 언뜻 엿보이는 슬픔이 이렇게 크고 벅찰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지민은 안쓰럽고 측은한 심정에 혁수와 같이 울어주며, 남자치고는 너무 가녀리고 연약한 혁수의 몸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는다..
"그래...실컷 울어라... 그동안 맘놓고 울지도 못했을 텐데...
누가 왜 우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도 없고...미칠 노릇이었겠지....불쌍한 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듯한 얼빠진 투로 속삭이는 지민의 음성에 소금기 짭짤한 눈물의 냄새가 진동한다.
혁수는 지민의 길고 숱 많은 머리칼에 조그마한 얼굴을 파묻고 갓난아기처럼 엉엉 운다..
복받치는 설움 때문에 딸꾹거리며 겨우겨우 비틀어 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혁수...
"누나....난....비겁하게 여기로 도망쳐 왔어...
주혁이 혼자 거기에 남겨두고....도망쳐 왔어...
주혁이가 그렇게 애원했는데....가지 말라고 붙잡았는데...
그런데도 난....매정하게 뿌리치고 떠났어...."
"알아....너도 무서웠잖아....두려워서 그런거잖아....혁수야..."
"아니야....난 나쁜놈이야... 난 끝까지 내 생각밖에 안했어...
주혁이한테 상처만 주고 아프게만 했어...
난 정말....주혁이 사랑할 자격도 없어....우욱...."
"그러는 너 역시 이렇게 아파하고 있잖아...
주혁이도 다 알고 있을거야.. 혁수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던 네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게 아픈지...
주혁이도 다 알고 있을거야.... 그애도 널 사랑하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아프다....
그런 역설적인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니...
사랑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설레임과 낭만으로 가득 차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찌하여 나에겐, 그리고 그에겐 눈물뿐인가...
어찌하여 한숨과 비탄으로 얼룩져 있는가....
원인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나'에게 연유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용기 없는 안혁수, 이기적인 안혁수, 세상의 기준과 타협해서 안전한 은신처로 피해있는 나약한 안혁수...
그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혁수야... 내가 무슨 얘길 해 봤자, 같잖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한가지만 충고하고 싶다..
<상실의 시대>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적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나도 같은 처지에 있어서 잘 알지만, 동성을 사랑한다는 거...
더더군다나 이복형제를 사랑한다는 거...사회에서 가만두지 않아.. 손가락질하고, 비방하고, 아웃사이더로 만들어 버리지...
더욱이 우리 나라 같은 곳에선 그 정도가 훨씬 심하고... 아예 사람취급을 안 해주는 데도 있어..
그런데 혁수야, 진짜 중요한 문제가 뭔지 아니?
세상으로부터 핍박받는 건 사실 큰 문제가 아니야..
너를 제일 괴롭히는 건...바로 너 자신이야..
주혁이에 대한 감정을 네 속에서 가둬두는 것...
그게 너와 주혁이를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야..
내말...이해하지...?"
마치 혁수의 뇌 속에 들어가서 모든 데이터를 읽고 나온 사람처럼 구구절절이 혁수의 정수리에 꽂히는 이야기를 연발하는 지민...
그녀와 나를 만나게 한 건, 신의 계획일까...?
아니면...나를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소행인가..?
전자라면 나와 주혁의 관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거지만..
후자라면...나는....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대로 영원히 고뇌와 허울에 가리워져 잊혀지게 되는건가...?!
"네가...주혁이를 향한 너의 그 진실한 마음을 풀어주면...그래서 지금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면...
세상 따위는 태연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란 나란히 서면, 힘이 생기거든...
그 사람을 외면하고 부정하면서 혼자 일때는 무섭고 두렵지만, 그 사람과 손을 잡으면....당당해 질 수 있어..
혁수 너도 그럴거야... 내가 보장할게.. 내가 직접 체험한 사실이니까...^^"
혁수의 얼굴에 불확실하고 미미한 희망의 빛이 어리운다..
사진 속 주혁의 환한 미소도 서글퍼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던 어두운 동굴...
마침내 실낱같은 빛줄기가 두꺼운 바위 덩어리를 뚫고 무한의 암흑을 밝히기 시작한다..
그 빛줄기가 나를 또 다른 멸망의 터널로 데려간다 하여도...
나는 따라가 보고 싶다...
거짓된 평화와 무책임한 보호 속에 안주하기보다는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최전방으로 용감하게 나서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이...없다.....
(48)
나는 당신을 지켜낸 것이 기쁠 따름입니다.
당신이 다치면 내 영혼도 다치니까요...
- <천년의 사랑> 중 -
"다들 나가서 각자 일 보고, 내가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문환의 명령에 사무실 안에 있던 사내들은 자기들끼리 음탕한 웃음을 키들거리며 대강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문을 닫고 사라진다.
강태는 손바닥에 축축한 식은땀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까마득하게 몰려오는 어지럼증을 이겨내려 신속하게 눈꺼풀을 깜박인다.
욕정으로 번뜩이는 문환의 눈동자가 징그럽게 강태의 전신을 훑어내린다.
제기랄....저 자의 몸 밑에 깔려 버둥대는 건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쳐 진다..
일대 일로 한번 맞붙어 볼까 생각도 해보지만, 아무리 같은 남자라고 해도...
주먹질을 전문으로 삼는 조직 보스와 평범한 싸움 실력을 가진 강태의 대결은 무모한 시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괜히 상대의 포악한 성질을 돋구어 내는 결과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현명한 강태는 일단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도를 마련하기 위해, 우선 이 작자의 경계심이 해이해 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어쩌면 '충의회'에 연락이 닿을지도 모르고..
재준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는 적어도 조직원들을 보내어 나를 이 상황에서 구출해 주기는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재산 중 일부이고,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권리의식은 지나칠 정도로 확고한 사람이니까...
구태여 쓸데없는 만용으로 내 몸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이 두 조직간의 전쟁에서 얼마만큼 다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느냐 하는 것도 나의 능력이다..
강태.... 고상한 가치관 따위에 연연하기엔, 너는 너무 가난하고 보잘것없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하얀 치아로 빨간 입술을 잘근거리는 강태의 모습에 색정이 발하는지,
문환은 성급하게 몸을 일으켜 강태가 앉아있는 쇼파로 오더니 그와 바싹 몸을 밀착시켜 앉고...
막무가내로 강태의 페니스에 손을 갖다대며 쑥덕댄다..
"야...나 진짜 미치겠다....너, 사람 좆나 병신 만든다, 응...?"
그러자 강태는 귀찮다는 듯한 손짓으로 문환의 손을 쳐내며,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입을 연다..
"...남자랑은 처음 해보죠..??"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고서, 새내기 신입사원을 지도하는 듯한 말투로 질문하는 강태의 음성에 머쓱해지는 문환...
그러한 기색을 감추려고 오히려 더욱 거칠게 강태의 허리벨트를 풀어내려 한다..
네가 남자라고 해 봤자, 여자랑 섹스하는 것과 뭐 그리 다르겠냐는 식이다.
강태는 무식하게 밀고 들어오는 문환의 손길을 완강히 뿌리치며, 짜증과 혐오감이 묻어나는 어투로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아~ 진짜!! 천천히 좀 해요, 천천히! 시키는 대로 할테니까!!"
강태의 마지막 발언에 어느정도 마음이 놓이는 지, 문환은 강태에게 퍼붓던 난폭한 공격을 잠시 멈추고 그에게서 조금 물러난다.
강태는 잠깐동안 문환의 얼굴을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윽고 몸을 움직여 쇼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갑자기 저자세로 돌변하는 강태를 보며 가학적인 쾌감에 젖어드는 문환...
아름다운 남자 위에 군림하고 있는 듯한 착각 그 자체에서부터 기막힌 희열을 느끼는 그였다..
문환에게 있어 지금 강태와의 섹스는 자신의 공격성 해소의 수단이요, 남성성의 발휘, 그리고 지배력의 표현이다..
강태 역시 그런 문환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기에 이와같은 방법으로 그를 다루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강태의 패러다임은 대단한 신축성과 유연성을 떨친다..
강태는 목구멍 너머로 차오르는 뜨듯미지근한 덩어리를 힘겹게 삼키며, 손을 뻗어 문환의 허리벨트를 풀고 지퍼를 끌어내린다..
꼿꼿이 솟아오른 그의 페니스가 지랄 맞게도 흉측해 보인다..
재준의 그것을 보면서는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이것과 똑같은 모양의 구조물이 자신의 신체에도 달려 있다고 생각하자 안면근육이 일그러질 만큼 더러운 기분이다..
말할수 없이 참담한 굴욕감과 명치끝이 콕콕 쑤셔올 정도로 역하게 일어나는 구토증세와 가슴 뻐근한 자기 보호의 감정으로 범벅이 된 채...
강태는 천장을 향해 우뚝 솟은 사내의 남근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간다..
그리고 강태가 입을 벌려 문환의 성기를 그 안으로 집어넣으려 하는 순간,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온다..
남자들의 고함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둔탁한 마찰음...
삽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 지며, 강태도 문환도 둘 다 긴장한다..
얼마간 이어지던 소란 끝에 사무실 문이 벌컥 젖혀지고...
강태의 시야에 잡히는 건, 귀신처럼 등장한 재준의 하얀 얼굴뿐이다..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연화회'의 조직원들은..
몇 십초가 지나서야 제대로 인식하는 강태...
다행히 숫자가 그다지 많지는 않다..
문환은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재준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자, 어리둥절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살기를 잔뜩 매달고 섬뜩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재준의 검은 눈동자에 위기감을 느끼는지, 엉거주춤 바지 자락을 끌어올리며 외친다..
"이 새끼들아, 뭐하고 있어!? 얼른 족치란 말이야, 이재준 새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재준에게 덤벼드는 사내들...
문환 역시 재준이 나타타자, 강태의 존재는 뒷전으로 밀어낸 채 재준의 동작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주시한다..
멍하니 재준이 하는 양만 지켜보고 있던 강태가 화들짝 현재의 상황을 깨닫고..
그에 따라 세차게 강태의 귓전을 후려치는 재준의 목소리...
"이 병신아! 도망 안 치고 뭐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주먹세례와 발길질을 맞아내고 막아내고 맞받아 치며..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처럼 포효하듯 소리치는 재준..
그가 이제까지 강태에게 내린 명령 중 가장 이행하기 힘들고 곤혹스러운 명령이다.
동시에 재준으로서는,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하고 엄중한 지시사항임에 틀림없다..
철판에 붙은 자석조각 마냥 떼어지지 않는 발바닥 때문에 못박혀 있는 강태의 손목을 게걸스럽게 비틀어 잡는 문환...
순간, 근원조차 알 수 없는 맹목적인 힘이 강태의 몸 안에서 솟구치며
반사적으로 나머지 한 쪽 주먹으로 문환의 턱을 갈기고 강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뛰기 시작한다..
오직 한 가지 일념밖에, 다른 것은 강태의 뇌를 작동시키지 못한다..
빠져 나가야 한다........
좁다란 복도를 지나 정문 쪽으로 내달리는 강태...
뒤에서 추격해 오는 사내들의 구둣발 소리에 퉁겨져 나올 듯 발작하는 심장을 부여담고,
안쓰럽게 팽창 된 선홍빛 폐를 간신히 어르고 달래며 '연화회'의 아지트에서 탈출한다..
아까전의 기억을 더듬어 차도가 있는 쪽으로 계속해서 뜀박질을 재촉하고..
멀리서 달려오는 택시 앞을 급히 막아서는 강태..
느닷없이 튀어나온 강태로 인해 놀란 운전사가 뭐라고 입을열기도 전에, 뒷좌석의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올라탄다..
"아저씨, 종로로 가요, 빨리!! 급해요, 정말!!!"
긴박하게 부르짖는 강태의 음성에 운전사는 떨떠름한 얼굴로 기아를 조정하며 차를 출발시키고...
강태는 아직까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환성의 전화번호를 찾아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환성 씨, 나 강태에요!!"
"예, 도련님.. 저 환성입니다.. 왜 그러세요??"
"길게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나중에 얘기하고, 우선 '연화회' 쪽으로 빨리 사람들 좀 보내요! 지금 회장님 혼자 거기서 싸우고 계시단 말예요!!"
"예~~에?!? 아니, 회장님께서 왜 그 새끼들이랑..."
"아무튼 빨리 내 말대로 해요!! 내가 지금 사무실로 가고 있는 중이니까 가서 자세하게 얘기할게요.."
"아,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플립을 닫아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 속에 넣은 후, 강태는 탈진 상태가 되어 자동차 시트에 털썩 몸을 기댄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 나타난거야??
아무리 싸움질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적군의 진영에 소총 한 자루 달랑 메고 단신으로 침투하는 병사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평생 지하세계에서 굴러먹은 사람이 그렇게 어리석고 맹랑한 발상을 하다니....
강태는 무릎 위에서 차갑고 메마른 손바닥을 맞잡으며, 혼란스럽게 뒤엉키는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다가 또 다시 밀물처럼 거대하게 휘몰아쳐 오는 초조함과 불안함에 못이겨 안타까운 탄식 소리를 뱉어내는 강태...
자기 때문에 재준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이르렀다는 데에까지 생각의 순환고리가 미치자,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다..
부디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자칫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비약까지 서슴지 않는 강태...
자꾸만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리는 자신의 상상력을 힐책하며, 재준은 무사할 거라고 억지스레 자기 자신을 다독인다..
-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을 백지장처럼 비운 상태로 몸에 익은 감각과 본능적인 움직임을 쫓아 '연화회'의 사내들을 상대하던 재준...
서서히 눈앞이 가물가물 해지고, 통증이 느껴지는 빈도 수가 잦아지자..정신을 다잡으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재준의 동작이 둔해지는 것을 눈치 챈 문환은 시니컬한 조소를 머금으며 부하들을 제지시킨다..
"됐어.. 이제 그만 멈춰라..."
재준의 공격에 군데군데 멍이 들고 피가 엉겨붙은, 흉악한 몰골의 남자들이 씨근덕거리며 분하다는 표정으로 떨어져 나간다..
땀과 피와 먼지로 뒤덮인 재준의 얼굴이, 그 검은 눈동자만은 더 매섭게 번뜩이며 문환을 노려보고...
살아 꿈틀거리는 재준의 광선 같은 눈빛에 어쩐지 압도당하는 듯한 열등의식을 느끼며 문환은 재준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씨발.....난 네 놈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특히 이 눈빛, 좆나 재수없어.. 이재준....
솜털도 아직 다 안 뽑힌 새끼가 잘났다고 설쳐대고 꼬라지 거슬려서 못 봐주겠어..
야, 이새끼야... 네가 주먹이 세면 얼마나 세냐??
이제 겨우 스무살 밖에 안된 놈이 정부까지 꿰차고 건방지게...
이 바닥이 어떻게 되려고 이따위로 좆같이 돌아가냐, 씨발....엉...?!?"
이빨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쇳조각을 씹어 넘기는 듯 말꼬리를 흐리며... 재준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넣는 문환...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티고 서 있던 재준의 긴 몸이 단말마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반으로 꺾인다..
단단한 시멘트 바닥이 재준의 하얀 뺨과 밀착되는 순간,
재준의 귓가에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충의회'의 조직원들이 들이닥치는 발자국 소리였다..
(49)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중 -
또 시작이다.
모르핀의 섬듯한 효능에서 깨어난지 18시간...
금단증상이 하루에 한 차례씩 되풀이되는 고문처럼 주혁의 뒷통수를 치고 들어온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다행스럽게도 퇴근시간이 다 되어간다..
주혁은 등줄기를 소름 끼치도록 쓸어내리며 낙하하는 땀방울의 께름칙한 느낌 때문에 비명이라도 한바탕 지르고 싶은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아낸다.
그러나 뒤이어 밀려드는.. 극심한 두통을 동반한 멀미증세에 푸르딩딩한 빛으로 변해가는 주혁이 살결...
검푸른 눈동자는 수축되고, 와들와들 경련하는 팔과 다리를 억제하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주혁아, 이제 그만 들어가자!!"
동료직원이 매장 안에 진열된 상품 위에 덮개를 씌우며 명랑한 음색으로 지절대자,
주혁은 일상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그래'라고 대꾸한다..
정리가 끝난 뒤, 이마에서부터 턱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싸늘하고 핏기 없는 손으로 닦으며 기우뚱거리는 몸을 탈의실 쪽으로 돌리는데..
남색 투피스의 유니폼 차림으로 주혁에게 포르르 달려오는 세라..
주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호들갑스러운 음성으로 속사포 같이 말을 쏟아낸다.
"세상에~~ 오빠 왜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거야!?"
"아,아니야.. 됐어... 별거 아니니까 집에 가서 쉬면 괜찮아질 거야.."
"언제부터 아팠어, 응??"
"좀전부터.... 신경 쓰지 말고 너도 얼른 집에 가서 쉬어라.."
"오빠 괜찮겠어?? 병원 가봐야 하는거 아니야?"
"됐다니까... 나 먼저 갈게.. 내일 보자..."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일 여력조차 없는지, 주혁은 창백한 낯빛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 듯 세라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지금 그의 눈앞에 그려지는 건..
예리한 주사바늘과 그 안의 모르핀을 자양분처럼 흡수하는 자신의 파란 혈관... 그 두 가지 말고는 없다..
주혁은 넋 나간 사람처럼 차를 몰아 타락과 자멸의 파라다이스로 직진한다.
위험수위에 다다른 자신의 인생도,
멸망의 비탈길을 아무 제동 없이 휩쓸려 하강하는 자신의 영혼도,
일말의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것들은 전부... 주인을 잃어버린 분실물..
혹은 주인이 내다버린 폐휴지나 마찬가지인 걸...
여기저기 구멍 난 비닐봉지처럼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허접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데...
....상관없어.....
잠시나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런 것쯤은 문제가 안돼....그런 것 따위는....
- '서양음악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에서 부과된 리포트 때문에 별 흥미 없는 클래식 관련 서적을 건성으로 읽어 나가던 태현..
뚱한 표정으로 몇 장 넘기다가 지겨워서 못 참겠는지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두꺼운 책을 저만치 던져 놓는다.
귀찮아서 저녁식사를 건너뛰었더니 위장에서 영양분을 공급해 달라고 난리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오른손으로 슬슬 문지르며 부엌으로 향하는 태현의 귓가에 초인종 소리가 닿아오고...
태현은 당연히 주혁이겠거니~하면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자물쇠를 딴다..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생소한 얼굴의 여자다..
태현은 안 그래도 커다란 눈동자를 더 확대시키며 자신을 쳐다보고 생글거리는 여자에게 따지듯 묻는다.
"누,누구세요!!? O.O"
"에~이... 아무리 화장을 안 했기로서니, 그렇다고 사람을 몰라보냐? 쪽팔리게..... -//-;;;"
순식간에 새초롬히 표정을 바꾸며 태현을 민망 어린 시선으로 흘겨보는 그녀의 음성을 듣자, 태현은 그제서야 그녀가 세라임을 알아차린다..
"어어~ 너구나... 화장 지우니까 완전 딴사람 같다.."
"우쒸...그래, 나 원래 좆나 화장발이었다! -_-++"
"아니, 그게 아니라~ 화장 안 한 게 훨씬 난데?
화장했을 때는 너무 야하게 보였는데, 맨 얼굴 보니까 꽤 지적으로 생겼다..."
태현의 낯간지러운 칭찬에 쑥스러워진 세라는
괜스레 퉁명스런 말투로 태현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며 화제를 다른 쪽으로 전환한다.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한 년이 웬 지적? -_-;;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하고, 주혁오빤 방에 있어?"
"주혁이? 아직 집에 안 들어왔는데..."
"뭐~~어?!? 아직 안 들어왔다구??"
가지고 온 쇼핑백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추궁하는 눈길로 태현을 바라보는 세라..
장난기와 가벼움이 대글대글 서려있던 그녀의 얼굴이 가면을 쓴 것처럼 심각하고 숙연하게 변하며 태현으로 하여금 세라에게 몰입하도록 만든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아파서 쩔쩔매던 놈이 어디 가서 뭐하고 쏘다니는 거냐고!!
아아~~ 진짜 미치겠네.. 내가 장주혁 때문에 맘 편할 날이 없어!!"
"주혁이가 아프다구? 아침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퇴근할 때 보니까 얼굴이 아예 종이짝처럼 질려가지고 바들바들 떨던데, 뭐... 병원 가자고 그래도 됐다고만 하고...
휭하니 가버리길래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어서 그러나 보다, 했는데...
어휴~~~ 내가 못 살어, 못 살어!! -O-!! 대체 지금 어디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걱정과 푸념이 반반씩 섞이니 세라의 음성이 제풀에 지쳐 웅얼웅얼 오므라들고...
세라는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쇼파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많이 아픈 거 같아서 먹을 것 좀 해 가지고 왔더니...하여튼 정이 안 가, 장주혁... 툭하면 심장 졸이게 만들고...-_-++"
그녀가 가지고 온 쇼핑백에는, 아마도 제때 식사를 챙겨줄 사람이 없는 주혁을 위한 요리가 담겨 있는 모양이다..
태현은 세라를 보며.. 주혁의 엄마로 태어났어야 할 그녀가
조물주의 실수로 주혁과 같은 나이 또래의 소녀로 태어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난 말이지... 이 세상에서 장주혁이 제일 불쌍해...."
넋두리처럼 허공 중에 쓸쓸히 흩어지는 세라의 착잡한 음성...
고양이를 닮은 파릇하고 요염한 그녀의 눈매가, 지금만큼은 퇴락한 시골 술집 작부 같이 을씨년스럽고 핍절하다..
"장주혁....겉으로 보기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도...
아니야.. 그건 정말 단순히 겉모습에 불과해...
속에서는....망가지고 있어...표시가 안 날 뿐이지, 엉망진창이라구..
장주혁 인생은...안혁수 미국으로 간 다음부터 사는게 사는게 아니야...
근데 있잖아.. 차라리 아파 죽겠다고, 힘들어 죽겠다고 소리라도 지르면 더 나을텐데... 장주혁 이 새끼는 저 혼자만 앓는거야..
지가 입으로 아무리 괜찮다, 신경쓰지 마라 그래도 내가 지 속을 모를거 같애??
분명히 뭔가 잘못되고 있는데 말을 안 하니까 미칠 지경이다, 이거야...
후우~~~ 아무튼 뭔가 이상해... 내 느낌은 정확하다구...."
종래에 가서는 불안감을 삭힐 수가 없는지 이맛살을 찡그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세라...
태현 역시 시선을 바닥에만 고정시키고 가느다란 한숨만 간간이 뱉어낸다.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하게 깔리는 침묵...
그러나 세라와 태현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 주변의 정적과 어색한 기류 따위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다 잠시 후...
덜컹하는 문소리와 함께 모습을 나타내는 주혁..
세라가 태현 보다 먼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더니 현관으로 달려간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들어오는 주혁의 안색은 아까보다 몇 배 더 형편없다..
눈자위가 검게 그을려 움푹 패이고, 붉은 입술은 허옇게 변색되어 척박하게 말라 있다..
온 몸에서 배어나는 담배냄새는 같은 흡연자인 세라가 맡아보아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지독하다..
"그 몸으로 도대체 어딜 갔다 온거야!!? 걱정 돼 죽는줄 알았잖아!!"
야속한 마음에 다짜고짜 고함부터 터뜨리며 주혁의 휘청이는 몸을 부축하는 세라...
태현 역시 그녀를 거들어 주혁을 이끌고 그의 방으로 데려간다.
불규칙적으로 거칠게 토해내는 주혁의 숨결 속에 혼합되어 있는 알콜 성분...
이 자식....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연청색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축 늘어져 덜렁거리는 주혁을 뉘이고..
세라는 벼르고 별렀다는 듯 잔소리를 퍼부으며 그의 옷가지들을 벗겨준다.
"이걸 친구라고 두고 있는 내가 불쌍한 년이지~~ 진짜 아프지만 않았어도 죽어라 패 버렸을텐데...-_-+++
다 죽어가는 놈이 술은 왜 마셔?? 곱게 처박혀서 잠이나 디비 잘 일이지....-_-+++"
이 와중에도 세라의 말투나 억양이 개그프로에서 쓰이는 대사처럼 코믹하다는 생각에 태현은 세라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웃음 짓는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여자다..
"어....어...? 이게 뭐야...? 여기 왜 이래...?..."
주혁의 머리 아래에 푹신한 배게를 받쳐주고,
이불자락을 끌어올려 덮어주던 세라가 양미간을 좁히며 주혁의 야윈 팔뚝에 선명히 남아있는 주사자국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그러다가 입을 쩍 벌리며 무언가에 홀린 사람 마냥 허겁지겁 주혁의 바지 주머니를 뒤진다..
세라의 손에 잡혀 나오는 것은....
두,세개의 주사기와 봉지에 포장된 백색 결정의 모르핀...
태현의 눈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부릅 뜨이며 한 손으로 벌어진 입을 틀어막아 외마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차단한다..
경악하는 세라와 태현에 대해서는 매몰차게 눈을 감고, 수면 속에만 취해있는 주혁...
한참동안 비닐에 싸인 하얀 가루만 닮아 없어져라 주시하던 세라가, 주먹을 꽉 쥐고 비틀비틀 일어서더니...
눈물 방울을 뚝뚝 떨구며 잠든 주혁에게로 다가가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그녀의 허리가 무참하게 꺾이고.. 주혁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리는 세라..
두 팔로 그의 몸을 부둥켜안고 서럽게, 막막한 안타까움으로 절규한다..
"....장주혁...! 너 왜 이렇게 됐어.....너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망가진거야!!
....이러지 마....제발 날 봐서라도 이러지 마....!
네가 이러면....내 가슴은 더 찢어져, 나쁜 새끼야...!!
....흐윽.....내가 안혁수 다시 데려다 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혁수 다시 네 옆으로 돌려 줄테니까....
너....장주혁 너어....제발 정신 좀 차려....흐윽.....제에...바아알.....!!!"
(50)
발가락에 불침을 맞은 강아지 마냥 집무실 안을 뱅뱅 돌아다니는 강태는 보다 못한 환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입을 연다.
"애들 보냈으니까 걱정 마세요, 도련님.. 많이 안 다치셨을 겁니다.."
"아우~~ 어떡해... 나 정말 돌아 버리겠네..."
엄지손톱을 물어뜯다가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지 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강태는 안절부절 야단이다..
환성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재준의 판단과 재기를 신뢰하는 그이기에 방정맞은 상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새끼 보니까, 회장님한테 쌓인 감정이 장난 아니던데...회장님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도련님!!! -_-++"
웃음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던 환성의 얼굴이 삽시간에 엄격하게 돌변하며,
정색을 하고서 그게 무슨 망발이냐는 투로 나무라 듯 강태의 말을 제지시킨다.
"도련님께서는 아직도 우리 회장님을 그렇게 모르십니까?
회장님께서 저렇게 젊은 나이에도 충의회 보스가 되셨다는 건, 그만큼 능력이 있으시다는 겁니다..
아무리 전대 보스가 후계자로 지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보스가 될만한 소양이 없는 사람을 호락호락 놔두는 데가 아닙니다, 이 바닥은...
그 능력 속에는 당연히 주먹의 세기도 포함되는 거에요..
'충의회' 보스가 그렇게 쉽게 쓰러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진정하시고, 연락 올때까지 기다려 보..."
"그래도 회장님은 혼자란 말이에요!!
아무리 싸움을 잘 한다고 해도, 혼자서 그 많은 인간들을 어떻게 상대하냐구요!?! 우리 쪽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혹시라도..."
강태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 저런 언변을 늘어놓는 환성의 말허리를 앙칼지게 자르며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흑빛 눈동자 가득 물기를 담은 채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마는 강태...
꼭 깨문 아랫입술 밑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턱뼈가 그의 초조하고 두려워하는 심정을 대변한다..
그때, 환성의 핸드폰이 울리고.. 환성은 잽싼 동작으로 단말기를 귀에 가져다 댄다..
"여보세요!? ........그래, 어떻게 됐어??............어, 수고했다....
회장님은 어떠셔?...........뭐야?! 이런 좆같은 새끼들...!!..............어느 병원이야??.......
어어...알았어... 도련님 모시고 지금 갈 테니까 그동안 회장님 옆에서 대기하고 있어.."
"어떻게 됐어요!?! 병원이라뇨??!"
환성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강태는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처럼 동그랗게 크게 확대된 눈알에 핏발을 세우며 환성에게 묻는다..
환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회장님께서 좀 다치신 모양입니다.. 지금 병원에 계시다는데, 같이 가시죠.."
"어, 얼마나 다치셨대요?? 입원할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니에요??"
"칼에 찔리셨다고 하는데, 가서 봐야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칼'이라는 단어에 주먹을 불끈 쥐며 복부에 강펀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으로 아스라해지는 정신을 추스리려 호흡을 가다듬는 강태...
환성의 침착한 목소리와 범상한 얼굴에 그나마 위안을 얻으며...
강태는 그를 따라 집무실을 나선다..
- 재준이 입원한 병실은 한 사람이 사용하도록 꾸며진 특실이었다.
그의 직업 상, 어느 정도의 보안 유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환자들과 함께 일반 병실에서 치료를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병원이라면 제 집 드나들 듯이 자주 오락가락 하는 환성은 거리낌없는 태도로 발걸음을 옮기는 반면..
워낙 건강한 덕에 병원 근처에도 와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강태는 그렇지 않다고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쭈삣쭈삣 다리를 움직인다..
희한하게 생긴 기계장치를 조작하여 병실 문을 여는 환성...
자기 집 현관 자물쇠를 따는 것처럼 능숙한 솜씨다.
입원실 안으로 들어서자, 망막에 시리도록 박히는 재준의 모습....
등허리에 커다란 베개를 받치고, 하늘색 환자복 차림으로 단정하게 앉아있는 자태가 조금도 흐트러짐 없어 보이는 게....
강태는 순간적으로 급격하게 솟구치는 안도감을 심장 깊숙이 감싸 안으며..
여태까지 경황이 없어 차치해 두고 있었던 흐느낌이 한꺼번에 콸콸 터져 나온다..
허리 숙여 예를 갖추는 충의회 조직원들은 안중에도 없이, 엄마 품으로 달려드는 어린아이처럼 재준에게로 엎어지는 강태..
재준의 목을 부여안고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벼대며..
몇 십년간 헤어져 살았던 가족과 상봉한 듯 자못 애절하게 흑흑거린다.
어색한 건 둘째치고, 무엇보다 주위의 시선이 객쩍어 견딜 수가 없는 재준은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을 자제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서투른 손길로 강태의 등을 쓰다듬으며 달랜다..
"야아....누가 죽었냐...? 궁상맞게 울긴 왜 울어....? -//-;;"
"흐윽....저 때문에.....죄송해요....흐윽.....윽......"
"그게 왜 너때문이냐... 연화회 그 새끼들 원래부터 나 별로 맘에 안들어 했어..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데 많이 놀랐겠다..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미안하다...."
재준과 강태를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던, 환성을 비롯한 조직원들의 얼굴에 경탄의 빛이 감돈다..
자신들의 보스가 정부를 아낀다는 사실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평소 재준의 얼음장 같이 냉혹하고 기계처럼 무뚝뚝한 면만을 접해 온 그들에게는,
이처럼 다정하게 강태를 토닥이며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하는 재준이 쇼킹할 뿐이다..
칠칠맞게 그런 놈들한테 끌려가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냐고 질타하는..
재준의 돌풍 같은 노여움의 채찍을 달게 받기로 작정하고 온 강태...
그런데, 오히려 이제껏 단 한번도 들려준 적 없는..
최고로 부드러운 온화한 목소리를 내며 자신을 품어주는 재준.....
놀라움과 감사를 넘어서.. 하나의 사무치는 감동으로 강태의 가슴속을 충만하게 채워온다..
강태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벅차 오르는 감정의 덩어리를 삭힐 수가 없어서..
재준의 하얀 뺨을 감싸쥐고는 그의 입술에 깊이 입맞춤한다..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헛기침만 날리는 재준의 부하들은 이미 강태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 밤새 옆에서 재준을 간호하겠다며 바득바득 고집을 피우는 강태를 반 강제로 집에 돌려보낸 후...
병실 안에는 재준과 환성, 둘만 남았다.
오늘 벌어졌던 싸움의 결과에 대해 재준에게 보고하는 환성...
재준은 진지하게 경청하고 나서, 예의 억양 없는 밋밋한 음색으로 입을 연다.
"그 새끼들...한마디로 우리를 얕잡아 본 거야..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강태를 미끼로 해서 시비를 건 거지...
L호텔 계약할 때부터 눈치채긴 했는데, 이렇게 병신 같은 짓거리까지 할 줄은 몰랐다..
하여튼 이 바닥에도 또라이들이 널렸다니까...."
"회장님께서 젊으시고 하니까, 괜히 고까워서 안달하는 새끼들이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확실히 본때를 보여 주시는게 좋겠습니다.. 다른 녀석들이 허튼 생각 못하도록 말입니다.."
"뭐, 네 얘기 들으니까 우리 애들이 어느 정도 경고는 준 것 같으니까 되도록 더 이상 시끄러워지지 않도록 해라..
연화회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
지금은 우리가 한 발 앞서 있지만, 언제 판도가 역전될 지 모른다고..
괜히 소모적인 싸움 벌이지 마라..."
"알겠습니다.. 애들한테 철저히 주의시키겠습니다.."
깍듯하게 뒤를 잇는 환성의 대답에 재준은 고개를 주억이며, 자세를 조금 낮추어 침대 속으로 파고든다..
칼에 찔린 상처가 따금거리는 통에 상쾌한 숙면은 어려울 듯 하다..
밤이 되니까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이 영 짜증스럽다..
재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피로감이 짙게 배어나는 말투로 환성에게 담배를 가져 오라 시킨다.
재준이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자, 바로 불을 붙여주는 환성...
재준은 첫 모금을 천천히, 길게 내뿜으며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환성에게 한 마디 던진다..
"너도 그만 들어가 봐... 오늘 신경 많이 썼을텐데..."
"예... 내일 뵙겠습니다, 회장님.."
재준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올리고 몸을 돌려 몇 걸음 내딛던 환성이 멈칫하며 다시 재준을 돌아본다.
그리고는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으며 방금 전과는 다르게 풋풋한 미소를 담은 얼굴로 약간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 재준에게 묻는다.
"저어, 회장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몇 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뜬금 없는 환성의 질문에 재준은 의구심을 느끼며, 그가 무슨 얘기를 할 지 가늠해 보다가...
도무지 가닥이 잡히지 않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의 청을 응낙한다..
"얘기해 봐..."
"저어....나쁜 쪽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바램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절대 다른 뜻은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요..."
"...알았으니까 말해..."
"오늘 일을 통해서 더 분명히 느낀 건데...제가 보기엔 회장님께서 도련님을 단순한 정부 이상으로 마음에 두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아니라고 부정하실 지 몰라도, 지금까지 제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바로는....회장님의 감정의 남 다르시다고 판단됩니다.."
재준의 표정이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게 경직되며, 환성의 발언에 선뜻 무어라 반박하지도 수긍하지도 못한다..
그의 혼란과 망설임을 건너다보며, 환성은 핵심적인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회장님께서 좀 더 솔직해 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자신에게도, 또 도련님께도.....그리고....두 분의 관계가 새롭게 변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금보다 좀 더 아름답고...행복하게 말이죠...^^"
(51)
"혁수야, 지금 바쁘니? 집에 가서 뭐 할 일 있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오피스텔로 돌아가려는 혁수에게 일상적인 어투로 물어오는 지민...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기에 혁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니라고 대꾸한다..
"그럼 지금 나랑 같이 우리집 가자..네가 꼭 받아야 될 전화가 있어서 그래.."
"...전화..? 누가 거는건데....?"
"그건 미리 말해줄 수 없고.. 일단 가서 받아보면 알 거 아냐.."
이럴 때의 지민은 세라와 영락없이 닮았다.
상대방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만 밀고 나가는 태도나, 집요하게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끈기까지..
수더분하고 마음 약한 혁수는 매번 이런 지민의 행동방식에 넘어가기 마련이다.
미심쩍은 표정을 떨치지 못하며 지민과 함께 그녀의 아파트로 향하는 혁수..
10분남짓 걸어가는 사이에도 지민은 쉴새 없이 종알거린다.
그녀의 습관적인 수다에도 익숙해진 혁수는 언제나처럼 가끔씩 그녀의 이야기에 적당한 반응을 보이며,
속으로는 전화를 걸 사람이 누구일지 부지런히 추측해 본다..
한편으로는, 지민의 말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른 한 사람의 이름이 바다 위의 플랑크톤처럼 혁수의 뇌 한 부분에서 부유한다..
결말이 보이는 반투명한 불안감...
그에 수반되는 아슬아슬한 긴장과, 부끄럽게도 상당한 자리를 찬탈하고 있는 기대감...
이제는 아무런 불편이나 서먹함을 느끼지 못하는 지민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지민은 이제까지 딴청을 피운 건 모두 새빨간 연기였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부리나케 전화기 쪽으로 달려간다.
성급한 손길로 버튼을 누르고는 신호가 갈 때까지 기다리면서 혁수를 향해 가벼운 미소를 띄운다..
얼떨결에 마주 웃어보이는 혁수...
두 사람 다, 다른쪽에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미소'를 택한다...
이윽고, 달싹이던 지민의 입술 사이로 들뜬 음성이 흘러나온다..
"어, 나야- 혁수 지금 옆에 있어.. 뭐얼~~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인데...
그래, 혁수 바꿔줄게 잠깐만 기다려..."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낸 지민이 혁수를 안심시키려는 듯, 과장되게 활짝 미소를 지으며 혁수에게 수화기를 들이민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서 지민의 손에 쥐어진 수화기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혁수..
갑자기 왜 이렇게 겁이 나는건지....
혁수는 선뜻 통화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받아 봐.. 안 받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사뭇 위협적인 어조로 협박에 가까운 권면을 하는 지민..
대단한 설득력을 지닌 그녀의 눈빛이 당당하게 반짝이며 혁수를 독려하고, 혁수는 그런 지민의 눈빛에 고무되어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기어드는 목소리로 글자 하나하나를 씹어 삼키듯 우물거리는 혁수...
그러다가 곧이어 들려오는 하이톤의 음성, 그 주인공의 얼굴이 내면의 시야에 펼쳐지자..
혁수의 작은 얼굴이 잔잔한 낯색을 잃어버리고..
모호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던 예상이 맞아 들어감에 놀라워한다..
"혁수오빠, 나 세라야...."
"........!!!!!!!!"
"제발 끊지말고 내 말 좀 들어줘.. 제발 끊지마...!"
혁수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세라는 그가 전화를 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급절하게 외치며 혁수에게 애원한다..
그런 세라의 음성을 듣자 혁수는 더더욱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인다..
견딜 수 없을만치 가슴을 옥죄어 오고, 사고기능을 비정상적인 페시미즘으로 몰고가는 불안감...
그래서 아무리 큰 불행과 고난이 도사리고 있다 하여도,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지나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불안...
외면하고 덮어버릴 수 없기에, 진정 압도적인 위력을 휘두르는 운명적 진실...
이제 더 이상은 피해 갈 수 없다.
혁수는 그것과 맞닥뜨려야 하고 그것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오랜만이네..."
기적처럼 전화기 줄의 피복선을 타고 세라의 고막까지 당도하는 혁수의 나직한 음성...
세라는 황당하게도 눈물이 다 나려한다.
하지만 아직은 눈물을 흘리기에 너무 이르다..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내가 지금 하는 얘기, 전부 다 사실이니까 그렇게 알고 들어줘...
후우....있잖아....저어..... 주혁이 오빠..모르핀 중독이야..."
혁수의 두 다리에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는다..
가사 상태로 빨려 들어가려 하는 혁수의 의식을 간신히 사수하고 있는 것은 '주혁'이라는 두 글자,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마술이다..
"내가 아무리 말려도....소용이 없어..
미친놈처럼 저녁때마다 뛰쳐나가는데....정말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내 말은 안 들어..
아니, 다른 누구 말도 효과가 없어....
오빠 부모님은 오빠 자식 취급도 안 하잖아....
제발 그러지 말라고, 치료센터 들어가서 치료받고 나오자고 해도...들은 척도 안 해....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아? 아니, 몸만 망가진게 아니라..장주혁 인생 자체가 완전 피박살이야, 진짜...!!"
끝까지 묻어두려 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등장하는 '이오카스테'처럼...
진실과 맞서지 않은 채, 거짓된 망각 속에서 안주하려 했다..
그러한 혁수의 비겁함이 초래한 결과는.....참혹하다..
그렇다면...닥쳐올 괴로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오카스테'와 마찬가지로,
혁수 역시 자발적인 종말의 터널로의 행진을 시작해야 하는가...?
하지만, 안혁수에게는 간과하기 아까운 희망이 있고, 약소한 가능성이나마 함유한..'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있다..
오늘밤이 혁수에게, 상처의 치유와 회복의 첫 날이 될 수도 있고,
죽음보다 더 고약한 가식과 썩어빠진 허울에 영원히 잠식되는 재앙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은 전적으로 혁수의 어깨에 달린 것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줄만한..
울먹이며 간원하는 세라의 음성이 이어진다.
"혁수오빠...내가 이렇게 부탁할게...주혁오빠한테 딱 한 마디만 해줘..
약물 같은 거 하지 말라구...혁수오빠가 얘기하면 될 거야...
이 방법밖에는 주혁오빠를 잡아 줄 수 가 없어...!
제발....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그냥 주혁오빠 약물 안하게 그 말만 해줘.....응....??"
혁수의 결심이 움직인다.
그의 교활한 이성이 꼬리를 내리고 닳아빠진 이기심도 마모되어 버린다..
선택은 완료되었다.
아니, 선택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어디로 전화해야 되는 지 가르쳐 줘.. 내일 이 시간에 내가 전화 걸게.."
자책감이 스며있지 않은 홀가분한 어조로 세라에게 말하며 먼 곳으로 시선을 밀어내는 혁수...
기억 속의 영사막에 투영되는 '누군가'의 이미지를 지우려고 애쓰지 않는다...
- 굵은 장대비가 구성지게 유리창을 두드려댄다..
불쾌한 습기를 잔뜩 머금은 장마철 오후의 찌뿌둥한 공기...
하지만 주혁의 피부조직이 몽땅 감각을 상실한 듯..
땀방울 하나도 흘리지 않으며, 박제된 생물처럼 쇼파에 앉아있다..
검푸른 눈동자는 아련하게 일렁이며 미미한 동요가 섞인, 어리숙한 정적으로 포장되어 있다..
믿음과 의심의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는 주혁의 영혼...
설레임과 두려움이 무차별적으로 뒤범벅되어서 주혁을 감정의 림보로 끌고 간다..
맥없이 유괴 당하는 주혁의 쇠약한 영혼을 구제해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순식간에 주혁의 기대감과 엑스터시가 최고로 치솟으며, 그로 하여금 수화기를 집어들게 만든다..
"여보세요...?!"
".....나 혁수야..... 잘 있었어...?..."
주혁은 순간적으로, 혹시 자신이 지금 모르핀의 환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본다..
그러나 분명히 아니다.
지금 주혁의 혈관을 통과해 흐르고 있는 피 속에는 모르핀의 몽롱한 기운과 독성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건 현실이다..
주사기와 백색 결정을 동원하여 그럴 듯 하게 꾸며낸 '가짜'가 아닌 것이다..
주혁은 꽉 막혀오는 목구멍을 틔워, 무지근하게 굳어가는 성대를 풀어 목소리를 내려 한다..
그런데 겨우 혓바닥을 움직일 수 있기 되자, 이번에는 머리가 따라주질 않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혁아....."
이럴수가.....
내 이름을 불렀다.. 틀림없는 그의 음성이다..
내가 착각할 리가 없다.. 그다......바로 그다....!!!
그가 지금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모르핀의 효능이 없이도 이런 환희와 희열이 내게 다가오다니!
어느새 주혁의 검푸른 동공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창 밖에서 지면을 때리며 흩뿌려지는 빗방울처럼..
아니, 그보다 더 조용하면서도 막대한 내적 힘을 응축하여 담고 있는 물줄기가 주혁의 하얀 뺨에 주룩주룩 자국을 남긴다..
"주혁이 너어....네 몸 상하는 짓은 하지 마라..그건 정말 싫다...."
아아....그는 알고 있구나...그는 생각하고 있구나...
나의 고통을, 나의 방황을, 나의 어둠을, 그리고 또 '나'를...
나는 오해했다. 어리석게 그를 믿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에 대한 불신과 한탄이, 나를 이 지경까지 오도록 하였구나....
장주혁, 너는 우매하고 아둔한 방랑자였다..
이제는 혼란과 절망의 그림자 앞에 굴복하고 엎드러지지 않으리라..
미련한 조급증으로 인해 스스로 나의 심장을 쥐어뜯고 내 영혼을 고문하지 않으리라...
"그래.....그렇게 할게....그렇게 할게...."
전적으로 혁수에게 설복하며, 주혁은 예전과 전혀 다름없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난날 그 모습 그대로 혁수와 마주본다..
어떤 것에 의해서도 변할 수 없는, 혁수를 향한 주혁의 모든 것...
"혁수야....나는.....아직도 너 밖에 안 보여...."
여전히 안혁수는 장주혁의 인생의 중심이고, 최우선이고, 그 전부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이지, 안혁수에게 있어 장주혁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은 차후의 과제일 뿐이다.
안혁수는 그저...'장주혁'을 가슴 한 구석에 간직해 두고 있으면 되는 거다.... 그러면 그만이다...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수화기 건너편의 그가, 가늘게...위태롭게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더니...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술을 열어 마지막 한 마디를 토해낸다..
".....주혁아.........미안해....."
(52)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차창 밖을 응시하는 재준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며 망설이는 빛을 띈다..
퇴원을 하자마자, 집무실로 직행하여 그동안 밀린 일거리들을 신속하게 해치워 나가는 재준을 보고,
환성은 호들갑을 떨며 극구 귀가하기를 강권했지만...
재준은 묵묵히 업무에 몰두했고, 계획한 분량의 일을 끝마칠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았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재준..
일 때문에 늦을거라고 얘기하자 시무룩한 목소리로 '예..'라고 대꾸하던 강태가 그려지며, 그의 하얀 얼굴에 칙칙한 그늘이 내려앉는다..
자꾸만 뒷걸음질치는 결심, 숨어 버리려하는 마음...
하찮은 자존심이, 어울리지 않는 우유부단함이 재준을 갈등하게 만든다.
결국에 가서는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미련을 불식시키는 재준..
어렵사리 내린 결정대로 주저 없이 이행하자며 생각을 굳힌다..
"회장님, 다 왔습니다.."
벌써 도착한 모양이다.
차에서 내려 야무지게 인사를 올리는 환성에게 몇 마디 상투적인 멘트를 건네고 빌라 입구를 향해 걷는 재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때마다 묘하게 빨라지는 심장의 고동이 재준을 내리 누르는 감정의 무게에 중량을 더해주고...
초인종을 누를 때, 재준은 입가에 미세한 경련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림과 동시에, 함박웃음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강태의 얼굴이 재준의 시야를 장악한다..
제길....저렇게 활짝 웃으면서 맞아 주다니....
정말 잔인한 녀석이다..
"오셨어요...? ^^"
"어어....그래...."
"저녁은 드셨어요...?"
"응....먹었어..."
재준에게서 자켓을 받아들며 나긋나긋하게 물어오는 강태...
안 그래도 비음이 섞인 살가운 음성인데, 교교한 미소까지 띄우며 이야기하니 더욱 다정다감하고 야릇한 느낌이 든다..
재준은 곧바로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한다..
전신을 따뜻하게 감싸는 물의 감촉이 서글픈 기분을 많이 거두어 주고...
재준은 한결 덤덤하게 정리된 마음으로 욕실에서 나와 가운을 걸쳐 입는다..
노란색 머리카락의 물기를 제거하고 침실로 들어서니, 강태가 침대에 앉아 등허리에 베개를 받치고 TV를 시청 중이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꽃이 만개해서는 TV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다가 재준의 기척이 나자,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고는 반색을 표하며 입을 연다..
"저, 잠깐만요, 맥주 가지고 올게요.."
부랴부랴 주방으로 달려가 쟁반에 맥주와 안주거리를 가지고 오는 강태..
맥주병의 뚜껑을 따서 재준에게 내밀며, 약간 수줍음이 배어나는 투로 곰살 맞게 속삭인다..
"....퇴원 축하드려요....그리고....늦었지만, 정말....감사합니다..."
재준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연거푸 술만 들이킨다..
그렇게라도 해서, 당장이라도 강태의 몸을 취하고 싶어 안달하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해 보려 한다..
이제는 강태 앞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마구잡이로 분출해 내지 못하는 재준...
허허로이 씁쓸한 조소를 입가에 매달며 슬쩍 곁눈질로 강태를 훔쳐본다.
강태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야트막하게 기대앉아서는, TV프로그램이 무척이나 우스운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큰 소리로 웃어댄다..
흑연가루처럼 곱게 바스라지는 눈매와 조각처럼 빚어놓은 듯한 옆선...
예쁘다....지나치게 예쁘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올만큼, 그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미(美)가 벅차다...
놓치고 싶지 않다....영원히 내 것으로 하고 싶다...
싫증이 날 리가 없다....절대로...
재준의 집요하고 끈질긴 시선을 느낀 강태는 민망스러워하며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재준을 마주본다.
재준의 눈빛이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강태는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가 굉장히 맑고 천진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지금의 재준은...'충의회'의 보스가 아니라, 섬세하고 청아한 모습의 미소년으로 회귀한 상태이다..
강태의 흑색 눈동자가 치밀하게 재준의 얼굴을 뜯어본다.
그의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하얗다...
쌍커풀이 없는 단아한 눈매가 오히려 강하고 위압적인 인상을 풍기는 건 재준 특유의 카리스마 때문일거다..
콧날은 길고 뚜렷하며, 입술은 작고 앙증맞다..
재준은 입술이 정말 예쁘다...
도톰하면서도 뾰족한 선을 그리며 빛깔도 탐스러운 선홍색을 띄고 있다.
......입술이.....가장 예쁘다....
강태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재준의 입술을 살며시 쓸어본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다..
손끝으로만 느끼기엔 너무 아까운 감촉이다.
강태의 입술이 재준의 입술과 맞닿는다.
재준의 팔이 자제심을 망각하고 강태의 허리를 휘어 감아 자신에게 밀착시킨다..
강태의 입이 벌어지고, 그 안으로 돌진하는 재준의 혀...
능숙하게 강태의 혀를 찾아 감싸며 입술로는 강태의 탄력 있는 아랫입술을 깊이 빨아들인다..
진하게 접촉해오는 강태는 미끈미끈한 구강점막이 극도로 자극적인 색정을 유발함으로써 재준의 번민과 낯선 감정의 중압감도 모조리 사라진다..
재준은 강태의 귓불로 입술을 옮기며 손가락으로는 그의 잠옷단추를 끌러내기 시작한다..
할짝이며 귓뿌리를 적시는 재준의 혓바닥에 저절로 눈이 감기는 강태...
축제가 벌어지려 하고 있다.....
강태의 매끈한 상반신이 알몸으로 드러나고, 강태는 흠 잡을 데 없는 자신의 육체를 뽐내려는 듯 침대 시트위로 몸을 눕히며..
재준으로 하여금 자신의 반라를 감상하게 한다..
한동안 강태의 벗은 어깨와 목덜미, 가슴과 배와 허리 등을 찬찬히 훑어 내리던 재준의 눈동자가..
돌연 탁하게 음영을 드리우며 젖어 들어간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강태와 몸을 겹치며, 아주 저음으로 가라앉아 쉰 소리까지 나는 음색으로 탄식하듯 부르짖는다.
"......넌 정말......완벽하구나.....강태....."
별다른 미사여구가 동원되지 않은, 어찌 보면 흔하디 흔한 찬사일 수도 있는 그 말이...
왜 이리도 가슴 뭉클하게 와 닿는 것인지...
아마도, 재준의 진심이 그 언어 한 자락마다 절절하게 묻어나기 때문이리라...
강태는 찡하게 울려오는 코끝을 누르며 재준의 목에 팔을 감아 다시 그의 입술에 키스한다..
혀끝으로 그의 입술 둘레를 문질러 보기도 하고, 재준의 입 속으로 자신의 혀를 들여보내기도 한다..
재준은 몇 배 더 짜릿한 키스로 강태에게 화답하며 강태의 나머지 옷들을 하나씩 벗겨낸다..
그에 따라 강태도 재준의 가운에 달린 허리끈을 풀고, 재준을 알몸으로 만든다..
형광등 불빛 아래 눈부신 자태를 펼치는 재준의 나체가 강태의 망막에 신선한 감동과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유연한 선으로 이루어진 상아빛 어깨와 가슴이 가녀리고 청초한 느낌을 자아낸다면,
잘록한 허리와 마르고 긴 다리는 외설적이고 관능적이다..
강태의 입술이 재준의 나신을 숭배한다..
구석구석 빠트리지 않고 입맞추며 핥아주고 빨아준다..
그 다음엔, 강태가 사랑 받을 차례이다..
그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고맙게도 재준이 먼저 강태에게 손을 뻗친다.
강태의 까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완전하게 드러나는 얼굴윤곽을 따라 입을 맞춰 내려가는 재준...
연이어 목줄기와 쇄골을 지나 판판한 가슴에도, 편평한 배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재준의 키스와 애무...
더 아래로....더 아래로....강태의 페니스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다시 위쪽으로 올라오는 재준...
여느때와는 다르게,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강태의 흑색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강태의 허벅지를 쓸어 올린다..
반사적으로 긴장하며 근육을 이완시키는 강태...
그 터질 듯한 흥분감을 해소시켜주며 재준이 강태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약하게 신음 소리를 내지르며 강태의 허리가 요동치고, 재준은 강인한 손으로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고정해주며 느릿느릿 율동한다.
강태의 허벅지가 재준의 허리를 꼭 붙들고 재준의 등에 감겨진 팔에는 힘을 더 한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강태의 비틀린 육체에 점점 크레센도를 높여가는 재준의 움직임...
절묘한 리듬과 템포로 서로의 육체에 박자를 맞추며 하나의 비등점을 향해 달음박질한다..
제기랄.....
강태는 욕설이 튀어나올 정도로 온 몸이 팽창되는 걸 느낀다..
부끄러움이고 내숭이고 다 때려치운다..
재준 역시 신경세포 하나 하나가 저릿해 올만큼 뻐근한 절실함에...기교나 테크닉을 부리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신다..
아아....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
환상의 터널, 그 입구가 보인다..
드디어 머리가 어질어질하기 시작하고, 감겨진 눈앞이 빙글빙글 회전한다..
아득히 먼 곳에서 거대한 파도소리가 들리고,
바위 덩어리가 연못 속으로 낙하해서 일어나는 물보라의 흔적 같은 아련함이 강태의 뇌 속에 자리한 신경중추들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마침내.....재준의 육체가 강태 안에서 폭발한다..
정수리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스며드는 재준의 체취...
희미하게 꿈틀거리며 사랑스러운 액체를 뿜어내는 그의 페니스...
아쉬운 여운을 남기며 재준은 강태에게서 몸을 뺀다..
강태는 조절해 왔던 긴 호흡을 뱉어내며, 재준이 채워준 쾌감과 열락 속에 진탕 취해본다..
그러면서 오늘밤의 정사를 되새긴다..
무언가....달라졌다..
이전과는 차원이 변화된,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섹스였다..
오늘밤의 재준은 사정을 참아가며 여러 번 삽입함으로써 강태를 오랫동안 힘들게 하지도 않았고,
이렇게 저렇게 체위를 바꿔가며 자신의 현란한 기술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강태의 몸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을 때, 그 손길에는 작위적이고 기계적인 요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밤 재준은 마치.. 자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보다는, 강태에게 기쁨과 만족을 선물하려고 섹스를 하는 사람 같았다.
혼자만의 엉뚱한 착각일까...?
그렇다고 단순히 치부해 버리기엔, 재준의 표정과 눈빛이 나타내는 의미심장한 변화가 너무도 확연하다..
강태는 어떻게든 실마리를 잡으려고 고개를 돌려 옆에 누운 재준에게 시선을 맞춘다..
생각에 잠긴 듯, 왠지 모르게 우울한 눈망울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재준..
이상하게도,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는 재준의 모습에 강태는 다시 한번 그를 자신의 몸 안에 담아주고 싶어진다..
대담하게 재준의 팔을 끌어당기며, 재준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눕는 강태..
그 아찔한 유혹에 재준은 본능적으로 울컥 치솟으며 또 다시 강태의 육체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불일 듯 일어나지만...
단호하게 강태의 어깨를 잡아 돌리고 이야기한다..
"너한테 할 얘기 있어.. 중요한 거니까 2층의 바에 가서 얘기하자.."
(53)
맨 처음 너를 알았을 때 나는 알지 못할 희열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막막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내가 사랑하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은 항상 내 곁을 떠나갔으므로..
하지만 나는 너에게 간다.
이렇게 가다보면 너에게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렇다.
내 마음이 환희로 가득 차 오르는 건 너에게 가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이었다.
마침내 너에게 닿아서가 아니라 너를 생각하며
걸어가는 그 자체가 나에겐 더 없이 환희로운 것이다...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
-혁수에게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보기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학교 그만두고 나서부터는 책상하고 담쌓고 살았으니까..
지금은 밤 11시가 다 되었고, 1시간 있으면 소등이야..
너한테 편지 쓰는 건 처음이구나, 그러고 보니까..
여기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약물중독 치료센터야.
3일전부터 여기서 지내는데, 물론 세라가 데리고 와 줬어.
세라한테는 늘 빚만 지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 뿐이야.
나 때문에 속 많이 상한 녀석인데..
하여튼 고맙고 미안하고...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곳의 생활은 워낙 엄격해서 처음에는 약간 힘에 부치기도 했는데, 차차 적응하게 되겠지..
오자마자 검사를 받았어. 다행히도 초기 중독이라서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쉽게 치료할 수 있대..
참 희한한게 뭔지 아니?
인간은 정말 몸하고 마음이 따로 논다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모르핀 같은 거 다시는 보기도 싫은데, 우습게도 몸은 시간만 되면 그걸 찾으니 말이야..
금단증상은 하루에 한번 꼴로 있는데, 그럴 때는 보통 진정제를 맞고 잠을 푹 자야 해.
자고 일어나면 씻은듯이 멀쩡하거든..
아직 들어온지 얼마 안되서 그렇겠지만 많이 낯설고
갑자기 규칙적인 스케쥴에 따라서 생활하려니 좀 갑갑하기도 하지만 마음은 아주 편해..
이런 평화를 느껴보기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함께 치료받는 사람들도 다 제각각이야.
중년 아저씨도 있고, 어린 중학생도 있고..
그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마약에 손을 댔을까?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
오늘 산책 시간에 사귀게 된 형이 하나 있어.
나이는 나보다 두 살 더 많고, 그 형은 치료가 중간 정도까지 된 상태래..
그 형이 나한테 물어봤어. 넌 왜 여기 오게 됐냐고..
뭐가 그렇게 고통스러웠냐고...
난 선뜻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웃어 넘겼어.
그리고 이 편지를 쓸 때까지 계속 곰곰이 생각해 봤어..
너도 나한테 가장 묻고 싶은 말이 그거일테니까..
왜 마약까지 하게 됐냐고...
얼마나 힘들었길래 그런 짓까지 했냐고...
너의 그 질문에 가장 정직한 대답을 해 주기 위해서 하루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그런데 해답을 얻고 나니까, 너무 부끄러워졌어..
혼자 있는데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웠어..
왜냐면, 그 원인이 바로 나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야..
네가 미국으로 떠나고 나서, 말 그대로 내 인생은 엉망이 됐어.
난 살아 있지만 죽은 것만 못했고 직장을 다니는 것도 생계유지를 위한 명목에 불과했어.
그렇게 살면서 난, 모든 책임을 너에게로 떠넘긴 거야..
내가 이렇게 된 건 안혁수 탓이다,
안혁수가 내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
안혁수는 내 인생의 전부인데 그가 날 버렸으니 나도 나 자신을 버리겠다..
그런 생각으로 아무렇게나 내 몸, 내 영혼을 방치한 거야..
그래...힘들었어.. 고통스러웠고...
하루하루가 눈뜨고 싶지 않은 아침으로 시작해서 영원히 그대로 눈감은 채 숨을 멈추고 싶은 밤으로 끝나는 날들의 연속이었어..
네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 널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그리고 네가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그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렸지...
모르핀을 맞으면, 네 모습을 볼 수 있었어..
널 만질 수도 있었고 네가 내 사람이 되주기도 했어..
널 느끼고 소유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 짧은 시간이 비록 환상이라고 해도 난 너무 행복했어..
그래서...도저히 그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행복은 잠시 뒤엔 몇 배 더 커다란 고통으로 되돌아오지...
그걸 뻔히 체험하면서도 잠시나마 맛보는 환상의 세계가 너무 감미롭게 때문에 떨쳐 버릴 수 없는게 '마약'이라는 거니까...나중엔 중독이 되 버리는 거고...
그런데 혁수야, 그게 아니었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였어..
중요한 건 네가 내 곁에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여부가 아니야..
그건 부차적인 문제거든...?
이제서야 깨달았어.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널 기다리는 자세라는 걸...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생활하며 너를 기다리는 지에 따라서 네가 돌아올 수도 있고, 영영 내게서 떠나버린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혁수야...
난 너의 영혼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준비하고 있을게...
서둘러 오지 않아도 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니까...
혁수야...
한가지만 부탁할게..
하루에 단 한번이라도, 나를 떠올려 주라...
태평양 건너 한국이라는 나라에, 너 '안혁수'를 이토록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하루에 한번이라도 기억해 줘..
이제 좀 있으면 불이 꺼질 것 같다..
잘 지내고....건강해라...
- 1999년 7월 3일 P.M11:50 주혁 -
- 1999년 7월 10일 '첫번째 편지가 오다'
지민이 누나로부터 편지 하나를 전해 받았다.
연청색 봉투를 보는 순간, 주혁이 일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주혁이는 연청색이다.
하얀 피부와 검푸른 눈동자가 한데 뒤섞여 그런 빛깔을 만들어 낸다.
어떻게 보면 신비롭고 마력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연약하고 청순한 느낌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느 쪽의 장주혁을 사랑하는 걸까...
아마 둘 다 라고 해야 옳겠지..?
편지를 읽고 많이 울었다.
나중에는 눈물이 나오지를 않아서 소리만 엉엉 질러댄 것 같다.
주혁인 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이기적이라고 비난을 퍼붓지도,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래주었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 나 자신을 저주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주혁인 모두 자기 탓이라고 했다.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했다..
기다리겠다고...했다...
그리고 하루에 단 한번이라도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장주혁은 정말 바보다.
어떻게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있는가?
하루종일 내 머릿속 한 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의 영상이 얼마나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절대 그런 부탁은 할 수가 없는거다..
바보 같은 자식....세상에 저런 멍청이가 또 있을까...?
장주혁...장주혁...장주혁....
미워하고 싶은데..잊어버리고 싶은데..내 인생 속에서 꺼내고 싶은데..
사랑할 수밖에 없고, 기억할 수밖에 없고,
내 인생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 장주혁......장주혁...장주혁...
이제는 꼬여버린 우리의 인연에 대해 서러워하는 것도 지쳤다.
원망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다만,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다..
끝끝내 이곳까지 도망쳐 와서도 그를 향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약한 나의 의지를 용서해 달라고...
이성과 감정의 변방에서 서성거리기만 하는 나의 우유부단함을 불쌍히 여겨 주십사, 하나님께 빌고 싶다..
그리고 딱 한가지만 더 호소하자면..
나도 너무 힘들다고...죽을 만큼 혼란스럽고 암담하다고...
뿌연 안개 속에 싸여 있는 것처럼 무엇 하나 확실하게 잡히는 게 없다..
이대로 나 자신마저 와해되어 습한 공기분자 속에 묻혀 버릴 것 같아 두렵다..
어떻게 해야 할지...무섭기만 하다..
아무튼 나는 결정해야 한다.
이 상태로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달콤한 지옥에서 그와 새롭게 출발하던지, 아니면 지금의 혼돈과 주저함을 모두 깨끗이 걷어 버리고 안온한 천국에서 시체 같은 삶을 영위할 것인지...
사랑이 있는 지옥과 사랑이 없는 천국, 나는 둘 중에 택일해야 한다...최대한 빨리...
(54)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그만큼 맑고 깨끗하게 당신을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혹시 그 눈길에 때가 묻어 있는 것은 아닌지,
소유욕으로 그대를 얼룩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
2층의 바에 들어서자마자, 재준은 아무 말 없이 스탠드로 가서 글라스와 얼음, 셰이커와 스퀴저 등을 꺼내더니 칵테일을 만드는 데만 열중한다.
강태는 멀뚱히 앉아서는 머릿속으로 재준이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짐작해 보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한다..
한참동안 진짜 바텐더처럼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던 재준이 연한 분홍색 액체가 담긴 유리잔을 강태에게 내밀고..
강태는 받아서 살짝 맛을 보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톡 쏘는 탄산에, 시큼털털한 것이 꽤나 독특하다..
재준에게로 다시 눈길을 돌리니, 그는 크리스털 술병의 마개를 따 브랜디를 찰찰 넘치도록 따르고 있다.
팽팽한 침묵 가운데 술이 글라스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만 신경질적으로 고막에 부딪쳐 온다..
이런 갑갑증을 견디지 못하는 강태인지라, 재준이 브랜디를 길게 들이키고 강태에게 시선을 주기가 무섭게 입술을 뗀다..
"무슨 일...있어요...?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요모조모 재준의 군데군데를 살펴보며 걱정 반 호기심 반의 어투로 말문을 트기 시작하는 강태..
재준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는다.
슬슬 강태의 가슴에 쌓여 가는 불안함..
좋지 않은 소식이라면 더 빨리 듣고 싶은 게 사람의 아이러니컬한 심리이듯, 강태 역시 어서 재준의 입에서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초조하게 술잔의 입대는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는 강태... 눈으로는 여전히 재준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얘기, 농담 아니니까 잘 들어.. 아주...중요한 얘기야...."
드디어 재준의 입술 사이로 묵직하고 침울한 음성이 쏟아져 나온다.
아니, 어떻게 들으면 유약하고 여린 음성 같기도 하다..
하여튼, 강태는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이며 수긍의 뜻을 표한다..
"우리 계약....이만 여기서 끝내자..."
강태의 얼굴이 비대칭적으로 일그러진다.
자신의 청각을 의심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극히 정상이다.
강태의 확대된 눈동자가 재준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다.
재준은 며칠동안 어떻게 말을 풀어 나가야 할지 고심하고 또 심사숙고했던 그 문제에 대한 첫머리를 끄집어낸다.
"다시 얘기하자면, 우리가 만나기 전 그때로 돌아가자는 뜻이야..
계약이 끝난 거지... 넌 더 이상 내 정부도, 종도 아니야..
이제 어떤 식으로든 넌 내게 매이지 않았어.."
거기까지 얘기하고 숨이 차는 듯 급한 손길로 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는 재준...
그러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의미전달을 했는 지의 여부를 되새김질 해 본다..
강태 역시 뒤죽박죽 엉켜버리려 하는 사고회로를 차분하게 정비하며 재준이 이야기에 담긴 뜻을 파악하려 애쓴다..
요컨대...이 시간부터 그와 나의 관계는 끝이라는 말인가..?
강태는 더 이상 이재준의 섹스파트너가 아니고, 그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다..
충의회 보스의 정부, 그 타이틀이 강태에게서 없어진 것이다..
분명히 강태가 꿈꾸고 바라고 기다려오던 일임에 틀림없다.
기뻐하자, 강태...
저 남자의 악세사리 역할도 오늘로서 안녕 이다!!
침대에서 발가벗겨진 채, 저 남자의 기호대로 주물러지는 장난감이 될 필요도 없는 거야!
환호성 지르면서 춤이라도 춰야하지 않겠어??
제기랄....근데 왜 기분이 이따위로 더러운 거야...
왜 이렇게 가슴 한 구석이 따끔거리는 거냐고....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뭐 에요...?"
자존심이 상한 듯한 눈빛을 한 강태가 또랑또랑하게 도전적인 말투로 질문을 던지지만,
재준은 묵묵히 긴 손가락으로 유리 글라스만 뱅글뱅글 돌려댄다..
"하기사, 4개월이면 싫증이 날만도 하죠..."
대충 알겠다는 것처럼 잔뜩 비아냥거리며 흠집이 난 껄끄러운 음색을 부자연스럽게 토해내는 강태..
그의 말을 듣자, 아래로 떨구어졌던 재준의 얼굴이 번쩍 들리며 강태를 일직선으로 마주 보고는 사뭇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허겁지겁 반박하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구! 너한테 싫증이 나서가 아니라...다른 이유 때문에 그래...."
"그러니까 그 진짜 이유가 뭐냐구요!!?"
이번에는 발화점에 다다른 수소기체가 마침내 펑 소리를 내며 연소하듯, 악을 쓰며 성질을 내는 강태...
재준은 의외로 강태의 성격이 상당히 급하다는 생각과 함께 풀죽은 낯빛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깐다..
아니, 좀 슬퍼 보이는 눈망울이다..
강태는 순간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그를 독촉한 것을 후회한다.
"진짜 이유를 말하면....믿어주기나 할거냐...?"
뚱딴지같은 재준의 물음에 강태의 눈동자에는 더 짙은 의혹과 근심이 드리운다..
대체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 것이 길래...
강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치밀어 오르는 조급증도 목구멍 너머로 보낸다..
"그거야 듣고 나서 결정할 문제 아닌가요?
어쨌든, 전 이유를 들을 권리가 있어요...전 회장님의 정부라구요.."
"쳇....그놈의 권리가 뭐 길래 넌 툭하면 거기가 목매다는 거냐?
걸핏하면 권리가 어쩌구 위치가 어쩌구...나같이 무식한 새끼는 알아먹을 수가 있나..."
이젠 자기비하까지...
브랜디를 한번에 쭉 들이키고, 담배를 빼어 무는 재준의 동작을 바라보며
강태는 자신이 그에게 아주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찝찝해진다..
공허한 한숨과 함께 매캐한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재준은 입술을 달싹인다..
무언가 얘기하기 곤란한 때에 자동적으로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그러다가 몹시 한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하는 투로 고백한다..
".....아무래도....내가..널.....좋아하는 것..같다...."
그리고는 약간의 기대와 무거운 열등감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강태의 얼굴에 눈길을 준다..
잘생긴 그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찡그려져 있다..
단박에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재준...
그러나 좀 더 노력해 보자고 자신을 다독인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잘 이해를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오랫동안 많이 혼란스러웠는데...정확한 원인을 알 수가 없었어.
막연하게 너 때문이라는 것밖에는...
그냥...모르겠어, 처음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널 대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해 지는거야...
일하다가도 불쑥불쑥 네 생각나고.. 지금 뭐하고 있을지 궁금해지고...
제일 웃기는 건, 태현형이 너한테 빠졌다는 거 알고 나서부터...
내가 태현형을 서먹하게 대하게 되더라구...
너도 대충 눈치 챘겠지만 지금 나랑 태현형 사이 엉망이잖아...
내가 왜 그러는지, 왜 이렇게 너한테 집착을 하게 되는건지 나조차도 납득이 안 가니까 화만 나고, 너한테 쓸데없이 성질이나 부리고...
근데, 네가 '연화회' 새끼들한테 끌려갔다는 소리 들으니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게, 빨리 가서 구해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거야...
그리고 네가 그 새끼 앞에서 무릎 꿇고 그런....더러운 짓거리를 당하고 있는 걸 보니까 눈이 확 뒤집히는 게...
후우~~ 아무튼........."
잠시 말을 멈춘 재준이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인다..
강태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은제 라이터...
돌이켜 회상해 보니, 어쩌면 이 라이터를 기점으로 재준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기도 하다..
"그저....네가 워낙 예쁘고 특별하다 보니까 내가 너한테 지나치게 빠져있는 거라고 여기기도 했었어...
나 스스로 균형을 잘 잡으면 괜찮을 거라고 단순하게 넘겨 버렸지... 그런데...마음대로 안 되더라...
점점 더 꼬이기만 하고, 머릿속만 복잡해지고...
그러다가 이번 일 터지고 나서, 입원했던 날...
너 가고 난 다음에 환성이가 그러더라..
내 감정에 솔직해 지라구...자기가 보기엔 너를 향한 내 감정이 뭔가 다른 것 같다는 말을 했어..
풋....속으로 뜨끔했지..."
마지막에 가서 재준의 입가에 물리는 조소는,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감정을 겨냥하는 자학성이 흥건하다..
불현듯 재준은 심한 갈증을 느낀다..
얼른 잔에다 술을 채우고 목마름을 해결한 후, 꽁초로 변해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송글송글 맺힌 이마의 땀방울들을 훔쳐낸다..
강태는 재준의 이야기에 완전히 파묻혀 더위 따위는 일말도 느끼지 못한다..
"....많이 생각해 봤어.. 정말 솔직하게 내 속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고...그리고 나서...어렵게 결론을 내린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인데 어쩌겠어...
이런 말하는 나도 기막혀...
매일 같이 침대에서 뒹굴고 할 짓 다 하던 놈한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하지만, 성욕이랑..마음으로 좋아하는 거랑은 다른 거잖아...?"
"그래서, 한 마디로 회장님이나를...사랑하게 됐다, 그 얘기에요??"
강태의 '사랑'이라는 발언에 돌연 후끈 달아오르며 얼굴빛이 붉어지는 재준...
무엇보다도 불신에 찬 강태의 반문이 재준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외로워진다...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하더라, 사람들은...
그래....널 내 섹스파트너로만 보는 건 아니야...
물론 널 보면 안고 싶고, 만지고도 싶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거든...? 그것뿐이라면, 내가 지금 너한테 이런 얘기하지도 않을 거고...
너더러 계약 끝내자는 말도 안 하겠지...
난....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
네가 언젠가 나한테 물어본 적 있지..? 꿈이 뭐냐고...
솔직히 그때 얘기한 것처럼 난 꿈이라는 게 없어..
그치만 넌 나와 다르잖아? 하고 싶은 일도 있고...
또...가족도 있고....그런 너를...더 이상 나한테 묶어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곁에 있고 싶어하지 않으니까...보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구....."
이건 단 한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돌발상황이다..
강태는 어지러워진다..
재준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 달라고 청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강태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고 단정한 채, 저토록 침통한 눈동자를 적시며 그만 물러나겠노라고 포기 선언을 하고 있다..
저 사람이 정말 이재준 인가....
나를 자기 멋대로 조종하고 휘두르던 충의회의 보스가 바로 저 섬약한 소년이라니....
그에 따라 연이어 강태의 뇌리에 날아드는 질문은, 너는 어떠냐는 것이다..
이재준은 강태 너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건 진심이다.
이제는 너의 입장을 밝힐 차례가 되었는데...
강태, 무어라 대답할 거야?
너는 당당한 개체로 환원했고, 선택은 너에게 달렸다...
그 때부터, 강태의 내부에 잠재한 두 가지 영역의 절대적 본성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한다..
강태의 이성은, 판단과 사고는 그를 상식적인 방향으로 이끌려 한다..
정말 잘 된 일이 아니냐고...
지난 4개월간의 악몽을 전부 잊어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고...
자유롭게 네가 꿈꾸던 일들을 열어 나가고, 너 자신이 진정한 '주체'가 되어서 너만의 인생을 개척하라고...
또 한편에 존재하는 강태의 감성과 열정은 그를 부조리한 본능의 세계로 부추긴다..
이재준을 향한 너의 마음은 어때?
너에게 있어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이고, '이재준' 이라는 남자는 너에게 어떤 의미이지?
있는 그대로, 네 안에 머물고 있는 그 형체 그대로 이야기 해봐...
그러나, 강태는 두 번째 소리에 귀를 막아 버린다..
그 외침에 따른다는 것은, 강태에게 도무지 타당한 명분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결국....싸움은 전자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강태는 예쁜 흑색 눈동자를 건조하게 냉각시키며,
이기적인 자아로만 가득 찬 차가운 음성으로 재준의 갓 태어난 애틋함에 잔인한 비수를 찔러 넣는다..
"회장님께서 그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셨다니 저로서는 행운이네요...
아무튼...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내일 당장, 누나한테로 돌아가도 되겠죠..?"
(55)
나의 사랑은 나의 자존심보다 더 강하다..
-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 중 -
- 혁수에게
여기 온 지도 일주일이 넘었구나.
근데 굉장히 오랫동안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친숙한 느낌이야.
내 성격 자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하는 편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정말로 난 이곳이 마음에 들어.
특히 내 방은 전망이 아주 좋아서 노을이 질 때는 내 방으로 경치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야.
일주일 사이에 친해진 사람도 많아.
이곳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렇게 차갑고 다가가기 힘든 인상은 아닌가봐.
학교 다닐 때는 애들이나를 참 어려워하고 그랬었는데,
여기서는 너무 자연스럽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꼭 내가 성격이 개방적으로 바뀐 것 같기도 해..
너도 알겠지만, 나는 내 폐쇄적인 성격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아.
차가워 보이는 첫 인상도 싫고...
겉으론 냉정하고 강해 보이는 사람일 수록 안에는 더 많은 상처와 연약함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난 정말로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강하고 튼튼한 사람...
그래야만 너를 잘 지킬 수 있을테니까...
세상의 손가락질과 싸워 이길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야...
오늘은 심리치료를 오랫동안 받았어.
'상담 전문의'라는 사람이랑 얘기를 했는데, 그런대로 말이 통해서 지루하지는 않았어.
고정된 틀 속에 매여 있는 사람은 아니더라구...
모처럼 홀가분하게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죄다 늘어놨지..
대부분은 물론 너에 대한 이야기였어.
어떻게 만났고, 함께 있을 때는 어떻게 지냈고,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리고 내 심적 상태가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 정말 세세하고 담백하게 얘기했어..
의사 선생님도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게 뭔지 알아? 바로 이거였어..
"떠나버린 혁수씨가 밉지 않아요?
어떻든 주혁씨가 마약에 손을 댄 가장 큰 이유는 혁수씨에게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혁수씨를 기다리겠다니, 주혁씨는 자존심도 없어요??"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어.
내 속을 떠보려는 심산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궁금증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 대답이니까..
나는 그냥 웃어 보이면서 말했어.
자존심 같은 게 남아 있었다면, 여기 들어오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니까 의사도 따라 웃더라.. 내 대답을 이해해서 웃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자존심'이라는 건, 자기가 자기를 다스릴 수 있을 때 사용되는 낱말이야..
하지만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 자신을 다스릴 만한 능력을 잃어버렸어..
내 모든 것의 주인이 네가 된 거야..
그건 네가 원했던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가 원해서 이루어진 거야..
나 스스로 네 앞에 엎드러졌고, 너에게 복종하고, 내가 가진 힘을 몽땅 안혁수 너에게 양도한 것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그래....넌 이해할거야....
내 영혼도 너에게 속해 있으니까.....
심리치료를 마치고 저녁에는 우산을 쓰고서 빗속을 걸어다녔어.
요즘 우리 나라는 장마철이라 거의 매일 비가 내려.
뉴욕은 어떤 날씨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넌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낼까?
세라한테 듣기로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한다면서?
아직 학교가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죽일 네가 아니지...
그림은 꾸준히 그리고 있니? 난 조각에서 손 뗀지 오래 됐어..
이젠 감각도 다 없어졌을 거야..
학교를 그만 두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이 부분이었어.
내 손에서 나이프를 놓아야 한다는 것...
지금도 딱 한 가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그거야..
그렇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니까, 생각하지 않는 게 낫겠지?
결론적으로 '조각'은 내게 절대적 지향점이 되지 못했어..
그랬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곳에 들어온 것이고, 너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새로 사귄 친구들한테 네 사진 보여줬더니 나랑 너무 잘 어울린대..
그런 말 처음 듣는데, 기분 진짜 좋더라...
좀 쑥스럽긴 했지만...
너도 혹시 내 사진 가지고 있니? 아마 안 갖고 있겠지?
네 사진 볼 때마다, 바보 같이 나...걱정한다..
네가 내 얼굴 잊어버리면 어떡하나-하고...
그렇게 생각해 놓고 나서 스스로 비웃는다니까...
아무튼 난 왜 이렇게 안혁수한테 미쳐 있는 걸까...
도대체 왜.....왜....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면 꼭 울게 돼..
그냥 어이없게 눈물이 나와....혼자 있을 때만...
혁수야......보고 싶다.....
이런 얘기하면 부담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정말 이 말을 안 하고는 못 배기겠어..
혁수야....혁수야.....
네가 미치게 그립다.....그리워서 미칠 것 같다.....그리워서.....
이따위 너절하고 상투적인 멘트들은 남루하고 구차스럽지만 원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이라는 게 전부 다 그 모양이니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 또한 본질임에 분명해. 허위와 가식은 없어...
울고 나면 영혼이 정화되는 듯 해서 개운해..
이곳이 좋은 점 중에 하나가, 마음놓고 실컷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다는 거야..
태연스레 무위를 가장하거나, 어두움과 후미진 구석에서 소리를 죽이며 비참하게 흐느끼지 않아도 돼..
그렇게 이곳에서 나는 '드러내는' 방법을 배우고 있어..
떳떳하고 담대하게 '나 자신'을 세상 가운데 던질 수 있는 용기...
난 그걸 배우는 중이야....그리고 더욱 노력할 거야..
안혁수, 너를 위해.....
- 1999년 7월 7일 P.M 10:45 주혁 -
- 1999년 7월 14일 '두 번째 편지가 오다'
지민누나, 윤아누나와 셋이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의 나는 듣는 쪽이었지만, 전혀 따분하지 않았다.
두 사람과 얘기하면서, 내내 주혁이 생각을 했다.
그것도 주혁이와의 섹스를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이전처럼 죄책감이 느껴지거나 나 자신이 지저분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냥 아주 순수하게, 그 행위의 절차와 요소, 느낌과 분위기들을 자세하게 떠올리고 되살리면서 나는 미묘한 오르가즘을 맛보았다.
주혁이와 격렬하게 정사를 치르고 난 뒤의 뜨거운 기분은 아니지만,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충족감이 실로 오랜만에 나를 나른한 상태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주혁이에게서 온 두 번째 편지를 읽었을 때.... 또 다시 울었다...
하지만 저번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오열하지는 않았다.
대신....조용히 눈동자에서 물이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둔 것뿐이다.
슬프지도 않았고, 가슴이 찢어질 듯 서럽지도 않았다.
다만....그리웠다....그가 그리웠다....
아니, 그립다....장주혁이 그립다....죽을 것처럼 그립다....
그의 깊고 검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싶고,
그의 하얀 피부를 쓰다듬고 싶고,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고, 그의 알몸을 보고 싶고, 그의 육체를 내 몸 안에 집어넣고 싶다..
목소리도 듣고 싶고, 같이 밥도 먹고 싶고, 매일 얼굴을 보고 싶다...
시원하다.
가슴속에 겹겹이 쌓아두었던 이야기들을 이렇게나마 털어 버리니 정말 시원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옹졸하고 치사하고 비열하다..
여기는 나 혼자만 존재하는 비밀영역 아닌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어도 용납되고 받아들여지는 곳이 여기다..
활자로서만 나타나는 나의 감정, 나의 생각들...
누구도 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지지 않는다..
문제는 바깥이다. 세상이다.
자아의 세계가 아닌, 연계된 조직 공동체 내에서의 '안혁수'...
아니, 말을 잘못했다.
중심선상에 놓이는 인물은 '안혁수' 혼자가 아닌 것이다..
'우리'이다... 안혁수 그리고 장주혁...
하나가 아닌 둘이다..
예전에는 '둘'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힘들어하고 무너져 내렸다.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아픔이라면 기꺼이 선택하였겠지만 결코 그와의 관계에서 배제될 수 없었기에...
나는 등 돌려야했다. 외면해야 했다.
모른 척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려버리면서...
조금씩 주혁에게서 위함과 파멸의 그림자가 거두어 지기를 기도했다..
나는 죽을 것 같았지만, 주혁이를 생각하면 고통을 지나쳐서 기쁨을 향해 달려갈 수는 없었다.
서서히 식어가리라 생각했다..
나 하나만 입을 다물고 가면을 쓰면, 다 끝나는 거라고 말이다..
그런게 그게 아닌가 보다.
나의 페르조나도 이제 더 이상의 효력을 상실한 것 같다..
어찌 보면 그 페르조나는 애초에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의 감정을 멈추게 하려고, 그 거침없는 다가옴을 막아내려고 나는 미국까지 도망쳐 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혁의 감정은, 분별력 없는 몰지각성과 무책임한 맹목성을 뛰어넘어 초월적이고 한 차원 높아진 어딘가의 위치에 다다랐다.
이러한 감정의 상하관계는 주식 시세표처럼 시각화·수량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이게 정답이다..
내가 왜 헤메이는지, 나의 영혼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도는 건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수 있겠다..
나의 영혼의 거처로 정해진 곳 자체가 혼미하고 흐릿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명료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임을 또한 확실히 깨닫고 있다..
그래서....그래서 또 다시 망설여진다....
두려워진다.......
(56)
운전대를 잡고 있는 태현의 손등에 어릿하게 비치는 파란 힘줄이 유난스럽게 두드러져 보인다..
평소보다 반박자 빠르게 진행되는 맥박의 리듬 또한 그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거의 한 달여 만에 강태를 만나러 가는 태현..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에서 조금의 어색함이나 거리낌도 없던 강태의 청량한 음색을 떠올리며, 어느 정도 자신을 안심시킨다.
약속장소인 대학로의 한 까페에 도착하자, 일부러 걸음걸이를 적절하게 제어하며 문을 열어 젖히고
커다란 눈동자를 굴려 강태가 와 있는지 확인해 본다..
가장 구석자리에 놓은 쇼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생각에 잠긴 듯 흑색 눈동자를 축소시켜 아래쪽으로 낮춘 채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강태..
까페 안의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도 확 튀어 보일 만큼 출중한 외모의 그이기에, 후미진 곳에 처박혀 있어도 금세 눈에 뜨인다..
태현은 오른손을 올려 하늘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는 시늉을 하며 강태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의식하는 티가 역력히 배어날 만큼 서먹한 말투로 입을 연다..
"오랜만이다... 잘 있었어..?"
어설프게 안부를 묻는 태현의 음성에, 흠칫 자신만의 상념 속에서 빠져 나오는 강태..
태현을 보더니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한, 뽀얀 미소를 피우며 특유의 달착지근한 목소리를 낸다..
"와아~~ 머리색 바꼈네? 이쁘다아~~^^*"
하얗게 부서지는 강태의 웃음에, 잠시나마 뜨악해 하던 태현의 심기가 사르르 녹아들고...
어쩔수 없이 따사로운 눈빛을 만들어 보이며 강태에게로 몸을 기울인다..
"야, 근데 너 왜 이렇게 홀쭉해졌냐? 옛날엔 몸이 좀 있더니..."
"몰라..잘 먹는데도 빠지네...형도 좀 마른 것 같애.. 피부도 꺼칠해지고..."
"작업한다구 잠을 제대로 안 자서 그래..방학한 다음부터는 밤낮이 뒤바껴서 산다니까..."
변죽만 울리는 밍밍한 이야기가 몇 차례 더 오고간 후..
종업원이 주문한 음료를 날라오자 강태는 길다란 유리잔에 꽂힌 스트로우를 가지고 아이스티를 휘휘 저으며 버릇처럼 빨간 입술을 옹송거린다..
저 예쁜 입술 사이로 또 무슨 말들이 튀어나올까...
태현은 기대되고 설레이면서도 여전히 한편으로는 무서워진다..
"있잖아, 나아...회장님이랑...헤어졌어.."
태현의 입안에서 서서히 맛을 우러 내던 레모네이드가 갑작스럽게 그의 식도를 훑으며 위장으로 쓸려 내려가 버린다..
그 때문에 급절한 기침을 터뜨리며 주먹으로 제 가슴을 콩콩 때리는 태현...
냉수를 들이키고 나서야 겨우 쿨럭 소리를 가라앉힌다..
"너, 너어...그게 정말이야..?!"
"그럼 내가 거짓말하겠어..?"
뚱한 표정으로 면박을 주듯 반문하는 강태..
워낙 성격이 급한 탓에 태현이 되물어 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고쳐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얼마나 웃기는 줄 알아? 실컷 침대에서 굴린 다음에, 바에 가서 한다는 소리가 계약을 끝내자는 거야...
그래서 나한테 싫증이 났냐고 물어봤더니, 그 인간이 뭐라 그랬게?"
옴팡지게 치켜 뜨는 강태의 쌍꺼풀 진 눈매가 제법 다부지고 매서운 인상을 풍긴다..
미움과 조소가 듬뿍 첨가된 그의 말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강태가 지나치게 단연해 보이는 태현이다..
"쳇...날 좋아한단다~~ 자기도 처음에는 많이 혼란스러워서 나한테 성질을 부린거라나??
하여간 지 맘대로 갖다 붙이면 그만이라니까? 끝까지 자기 멋대로야....재수 없게...."
"정말 재준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좋아한다구??"
여간해서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적어도 태현이 알고 있는, 충의회의 보스, '이재준' 이라는 남자에게서 그런 어휘들이 뱉어져 나오리라고는...
태현은 노골적인 의혹과 엉터리로 뭉쳐있는 궁금증을 만면에 드러내며 거듭 강태에게 재확인 해 본다..
강태는 스펙트럼처럼 빛을 분산시키는 심지 깊은 태현의 눈빛에 알 수 없는 마음의 찔림을 받으며 어눌하게 입을 연다..
"그런 말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야.. 그 사람이랑은 애초부터 '계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뭐....
이제 족쇄를 풀어 줬으니 나야 기쁜거고.. 어떻게 생각하면 그 사람한테 고맙기도 하지..."
"네가 자유로워 졌다니 물론 나도 좋지만, 그래도...재준이가 그렇게 얘기했다는 건...."
"모르겠어..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 진심이라는 건 알겠는데, 솔직히 나는...받아들여 지지기 않아..
형이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그렇게 되지가 않는다이 말이야..
꼭 나한테 고백하는 게 아닌 것 같았어..
딴 사람 얘기하는 것 같고....
하여튼, 어차피 말도 안되는 일이야..
그 인간이 날 얼마나 비참하게 했는데...
이제 와서 '사랑' 이 어쩌느니...웃기지도 않어...
....난....다 잊어버릴 거야...그 사람하고 관련된 건 전부 다...."
흑색 눈동자의 너비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고개까지 설레설레 젓는 강태의 동작이 서투른 오버액션 같다..
분명하게 끝을 맺지 못하고 흐물대는 어투가 껄끄럽고,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조화롭지 못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강태는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자괴감을 매몰차게 걷어차 버린다...
- 강태와 함께 식사를 하고 대학로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볼거리들을 구경하고.. 그를 데려다 준 다음 집으로 향하던 태현..
손으로는 운전을 하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는 것을 한눈에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대뇌의 신경중추와 '손'이라는 기관이 따로 노는 현상을 얼마간 유지하던 태현은 무언가 결심이 섰는지 별안간 핸들을 돌려 차를 U턴시킨다..
그리고 간간이 시계를 쳐다보며 재준의 빌라 쪽으로 내달린다..
도착해서 대문 앞에 서자, 초인종을 누르기가 망설여지는 태현..
다시는 얼굴도 안 볼 것처럼 쌩 하니 돌아설 때는 언제고,
강태와 그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찾아온 자신이 치졸하고 궁색해 보일까봐 걱정스럽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그냥 발걸음을 돌이킨다는 것은 더 한심하게 생각된다..
태현은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팔을 움직여 벨을 누른다..
굉장히 방정맞게 느껴지는 멜로디가 이어지고, 잠시 후 열리는 대문 사이로 재준의 하얀 얼굴이 나타난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굉장히 낯설다..
재준은 태현을 보고 의아해 하거나 냉랭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그저 늘 그랬듯이, 똑같은 태도로 그를 맞는다.
"얼굴 잊어버리겠다.. 연락도 안 하고 뭐했냐??"
심드렁한 재준의 말투에 맥이 탁 풀려 버리는 태현..
정확히 표현하자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한꺼번에 탄력성을 빼앗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무게를 잡아 보려던 태현도 어느새 예전과 다름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재준과 시선을 맞춘다..
"맨날 작업하느라 정신없었지, 뭐... 뭐하고 있었냐?"
"잠이 안 와서 술 한 잔 하고 있었어..마침 잘 왔다..혼자 마시기 싫었는데...."
태현과 재준은 약속이나 한 듯 2층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바의 테이블에 자리하자 태현에게 한 잔을 따라주는 재준..
태현은 몇 모금을 홀짝이다가 농담처럼 빠르게 본론의 말머리를 던져 놓는다..
"나..강태 만나고 오는 길이다..."
재준의 고개가 살짝 들리더니 태현에게 예의 무심한 눈길을 한 번 보내고는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하지만, 뒤이어 그의 작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음성은 미약한 떨림을 동반하고 있다..
"어어...그래..? 강태한테서 얘기 들었겠네, 그럼..."
"너 정말이야? 진짜 강태한테 그런 얘기했어??"
"강태가 형한테 거짓말하는 거겠냐...?"
태현은 아까 전의 강태와 똑같은 억양과 음색으로 반문하는 재준이 기막히기도 하고,
강태에 대한 그의 마음이 당최 흔쾌히 납득이 가지가 않아서 그만 픽 하고 실소를 흘린다..
태현의 웃음에 재준은 무안함을 느꼈는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토라진 듯 투덜거린다..
"참나...자기도 같은 처지면서 웃기는 왜 웃냐..? 쪽팔리게..."
"와아~~이재준...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냐?? 난 진짜 조금도 눈치 못 챘어..."
"나도 내 감정이 어떤지 이제야 알았는데 형이 어떻게 눈치를 채..."
퉁명스레 중얼거리며 담배를 피워 무는 재준..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태현이 씁쓸하고 남루해 보이는 웃음을 입가에 매달며 특유의 놀리는 투로 묻는다..
"그래, 생전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한테 채인 기분이 어떠냐??"
"형도 경험해 봤잖아.. 그것도 똑같은 사람한테...그러면서 뭘 물어 봐..."
"훗...천하의 이재준도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보네..내 머리색깔 바뀐 것도 모를 만큼 정신이 멍한거 보면..."
"아아...어쩐지 뭔가 달라졌다 했더니..."
손을 뻗어 태현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이없게도 강태의 까만 머리결의 촉감을 상기하는 재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눈가에 고이는 이슬방울들을 되삼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재준은 시큰둥한 목소리를 연출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강태는....잘 있어..? ...뭐하고 지낸대...?"
"일자리 구하려고 생각 중이더라..
이젠 전처럼 누가 벌어 먹여 살려주지 않으니까...2학기 때부터 학교 다니려면 지가 벌어야지, 뭐..."
"여태껏 공부밖에 안한 놈이 뭘 해서 돈을 벌어..?"
"그래서 지두 막막한가봐... 아르바이트 같은 건 해봤자 한달에 기껏해야 5,60인데..
요새 일자리 구하는 게 쉽지도 않고...프휴~~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능력이 안되니까 답답하다...."
"병신....그렇게 어려우면 나한테라도 와 보지...일자리 정도야 해줄수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또 다시 담배에 불을 당기고, 은제 라이터를 손가락으로 까불거리며 실망스런 어조로 혼잣말처럼 웅얼웅얼 이야기하는 재준..
(57)
백화점의 휴관일을 맞아, 태현을 부추겨 주혁이 치료를 받고 있는 강원도 원주의 재활센터로 그를 만나러 간 세라..
태현은 다짜고짜 같이 가자며 졸라대는 세라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녀를 따라 나섰다.
궁상스러운 환자복에 링겔 바늘을 꽂고 시체처럼 누워있는 주혁의 모습을 상상하며 내심 불안해하던 세라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살이 오르고 탄탄해진 주혁의 몸집을 마주하자 활짝 웃어젖히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태현도 건강해진 주혁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띄운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그것도 둘이 같이 오구..^^"
"오늘 백화점 쉬는 날이라, 내가 태현오빠 꼬셔서 데리고 왔지~"
"오홀~~문태현...언제 얘한테 코 낀거냐..? ^^;"
"무, 무슨 헛소리야, 임마..! 새끼가 정말....-_-;;;"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며 강한 부정의 뜻을 표명하는 태현..
덕분에 옆에 앉은 세라만 머쓱해 진다..
뾰루퉁하게 입을 삐죽거리며 뭐라고 궁시렁 대는 세라..
주혁은 얼핏 두 사람이 퍽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혼자서 빙긋이 넉넉한 웃음을 머금어 본다.
세라는 주혁을 위해 사온 음악 CD들과 먹거리, 잡다한 물품들을 꺼내 보이며 꼼꼼하게 그의 신변을 살펴주고..
늘 그렇듯이 주혁은 되갚아 줄 수 없는 고마움에 심장 한 구석이 푸근하게 데워진다..
면회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오래도록 머물지 못하는 세라와 태현..
끝내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를 뜨는 라는 문을 닫고 주혁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까지 염려로 인한 잔소리를 그치지 않는다..
옆에서 그런 세라의 모양새를 쭉 지켜보던 태현...
그녀와 함께 차에 오르자, 세라의 열성에 탄복하듯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이야아~~이세라... 정말 지극 정성이다..아무리 친구가 쟤 하나 밖에 없어도 그렇지..."
"우쒸!! 나 친구 많어, 왜 이래~~!! 별걸 갖고 다 지랄이야..-_-++"
"누가 뭐래?! 대단하다는 거지...얘는 칭찬해 줘도 생난리를 피워...-_-+"
서로에게 또 한번 곱지 않은 시선을 날린 후, 태현은 운전에 몰두하고 세라는 차창 밖의 풍경으로 눈을 돌린다..
짙푸르게 무성한 한여름의 녹음이 시원하게 눈동자 구석구석을 메워주고..
세라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정을 찾은 주혁의 생활에 새삼 감사를 느끼며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이 그렇게 울며불며 애원할 때에는 꿈쩍도 안 하더니, 혁수의 전화 한 통에 대뜸 새 사람으로 변모하는 주혁이 한편으로는 몹시 야속하고 섭섭했지만...
그래도 주혁이 마약의 덫에서 빠져 나와 온건해진 것이 기쁘기만 한 세라이다..
장주혁에게 있어서, '안혁수' 와 자신의 가치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뇌까리는 세라..
그것은 자신의 우정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사람의 사랑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그녀 나름의 의식적 노력인 셈이다..
이런 저런 상념에 파묻혀 있던 세라의 귀에 다급히 닿아오는 태현의 음성..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하며 더듬거린다..
"어....어...?? 이,이거 왜 이래...? 어...어어...엇...!!"
아무리 엑셀레이터를 밟아도 가속도가 붙지 않는 태현의 자동차..
끝에 가서는 피시싯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멈춰 버린다..
이어서 진동하는, 엔진이 타는 냄새가 태현과 세라의 후각을 들쑤셔 놓고.. 두 사람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동시에 차문을 열고 도로로 내려선다.
"어떻게 된거야? 갑자기 차가 왜 이래??"
"모르겠어...잠깐만, 좀 보고..."
태현은 차 앞쪽으로 가서 보네트를 열어 올린다.
그러자 먹구름처럼 뭉게뭉게 허공 중으로 흩어지는 연기 때문에 켁켁거리는 태현..
팔을 휘저으며 스틱을 끄집어내어 보네트를 받치고, 카 센타 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각한 낯색으로 엔진과 그 밖의 부속장치들을 들여다본다..
고등학교 기술 시간에 배웠던, 자동차에 관한 기초상식을 기억해 내려 애쓰며 요리조리 해결책을 강구하던 태현은
결국 울상을 지으며 세라를 향해 볼멘 소리를 지절인다..
"어떡하지...? 엔진이 타 버려서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데...아아~~ 미치겠네..-_-;;"
"뭐야~~!! 이 첩첩산중에서 그럼 어떡하라구!! 시내까지는 한참 멀었잖아??"
"그러니까....아이 씨....여기 핸드폰 안 터져서 전화도 못하는 데...렌트 카 부를 수도 없고...."
"오오~~~ 신이시여....난 몰라...ㅠ_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아스팔트 위에 철퍼덕 주저앉아 버리는 세라..
그래도 차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산골짜기의 한산한 국도라, 다른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게 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을 것 같다..
태현은 객쩍은 손길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는 주위를 서성인다..
그러면서 무언가 묘안을 생각해 내려 하지만 신통한 방책이 생성되어 나올리 만무하다..
한참을 더 머리 싸매고 고민하던 세라와 태현은, 하는 수 없이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시내에 도착한 뒤, 보험회사에 연락을 취해서 도움을 요청하자는 게 그들이 합의한 계획 내용이다.
본래 낯을 가린다거나 내성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먼 두 사람이기에 히치하이킹을 하는 데에도 머뭇거림이나 부끄러움 따위는 발끝조차 들이밀지 못한다..
그러나 워낙 차량의 행적이 뜸한, 외진 지역이기에 차를 얻어 타기도 엔간히 힘들다..
세라와 태현은 자그마치 3시간이 넘도록 기다린 끝에, 겨우 중년의 부부가 운전하는 승용차에 합승하게 된다..
자동차 시트에 몸을 기대면서, 운도 더럽게 나쁜 날이라고 푸념을 내뱉기보다는..
지금이라도 히치하이킹에 성공하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낙천적인 두 남녀였다..
- 원주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잽싸게 보험회사에 전화를 건 태현..
그러나 회사측으로부터 아무리 빨라도 오늘 내에는 당도할 수 없다는 말을 듣자, 그만 애꿎은 직원에게 성질을 내고 만다..
아직 원주에는 그 회사의 지점이 파견되지 않은 상태이고, 현재 태현의 자동차가 세워져 있는 도로는 지리적으로 잘 파악이 되어 있지 않은 곳이므로..
적어도 내일 아침에야 렌트 카를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 직원의 설명이었다.
태현은 참담한 심정으로 전화를 끊고, 세라에게 전반 상황을 이야기한다..
"프휴~~ 그럼 할 수 없지, 뭐...오늘밤에는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렌트 카 불러서 가야지..."
악다구니를 벌이며 짜증을 낼 줄 알았던 세라가 의외로 차분하게 불미스런 소식을 받아넘기자,
태현은 전화통에 대고 빽빽 고함을 질러대며 신경질을 부린 자신의 행동이 오히려 민구스럽게 느껴진다..
어느새 사방이 깜깜해졌고, 다소 촌스러운 태가 나는 네온사인들이 휘영하게 불빛을 밝히고 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세라와 태현은 그나마 제일 깔끔해 보이는 여관으로 숙소를 정하고,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끈다..
척 보기에도 도시 사람의 세련됨이 물씬 풍기는 태현과 세라가 나타나자 희색이 만면해서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둘을 맞이하는 여관 주인 사내..
세라는 너무도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방 하나만 체크인 한다.
벙찐 표정을 짓는 태현에게 뭐가 잘못 됐냐는 식의 눈빛을 보내고는 앞서서 사내가 일러준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세라..
주인 사내가 음탕한 웃음을 잔뜩 흘리며 태현을 부러움이 묻어나는 눈초리로 슬쩍 건너다본다..
태현은 그런 사내의 비린내 나는 웃음에 쫓기듯이 세라가 들어간 방으로 향한다..
방안에 들어서니 세라가 더블침대 위에 편하게 널부러져서는 TV를 멀거니 쳐다보고 있다..
태현의 기척을 느꼈는지, 눈은 그대로 화면에 고정시킨 채 입을 연다..
"둘이 방 따로 잡으면 오빠만 병신 되니까 하나만 달라고 한 거야..기분 나빴으면 오해하지 말라고..."
아무런 사심 없이 단촐하게, 간략하게 해명하는 세라..
태현은 괜스리 숫기가 없어져서는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숨기려고 홀랑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왕 들어온 거 씻고나 나가자-하는 생각에 세수를 하고, 손과 발을 닦는 태현..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다시 욕실 밖으로 나오니, 세라는 여전히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는 TV화면에 열중해 있다..
무언가 해서 흘깃 눈길을 주자, 태현의 망막에 맺히는 영상은 보통 여관에서 틀어주는 그렇고 그런 포르노 비디오의 한 장면이다..
삽시간에 하얀 피부를 불그스레 물들이며 눈동자 둘 곳을 정하지 못해 고생하는 태현..
세라는 마치 수능 강좌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수험생 같이 학구적이고 관찰하는 듯한 태도로 한참동안 포르노를 감상하다가,
불현듯 고개를 돌려 태현에게 시선을 던지며 가벼운 어투로 질문한다..
"오빠, 여자랑 자 봤지?"
당연한 걸 물어서 미안하다는 듯한 세라의 말투에 태현은 얼떨떨해 진다..
들추어내기 곤란한 비밀을 공개하는 사람처럼 난색을 표하며 우물쭈물 대꾸하는 태현..
"아..아니....안 해봤어..."
"그래?? 의외네~~ 오빠 인기 많지 않어? 여자들이 가만 안 놔둘 것 같은데..."
"치이...여자들이 전부 다 너처럼 적극적인 줄 아냐? 은근히 내숭떠는 애들이 훨씬 많지..."
"오빠도 그런 여자가 좋아? 얌전하고, 여자답고, 청순하고..."
"꼭 그런 여자가 좋은 건 아니야.. 그냥....느낌이 중요하지...."
"느낌이라......."
고양이를 닮은 파르스름한 눈매를 깜짝거리며 태현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하여 곱씹는 세라..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소에는 깐죽거리며 설쳐대는 세라이기에.. 그녀가 진지한 면모를 보일 때는 한층 고도로 그녀에게 몰입하게 된다.
태현은 어느새 좀전까지의 계면쩍음을 모두 잊은 채, 세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난....요즘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사랑'이라는 말을, 다들 너무 쉽게, 함부로 쓰는게 말이야..."
"............."
"내가 아는 장주혁 이라는 남자는...'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못해서 저렇게 비참해져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어떤 줄 알아??
백화점 진열장에서 상품 고르듯이 이거 재고, 저거 따지고..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가지고 독점하면서 스스로 '사랑'이라고 말해..
그러다가 시들해지면 신상품을 구입하는 거야.. 당연히 구제품은 버려지는 거지..
그따위 짓을 하면서 '사랑'이라는 고귀한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게 정말 화가 나고 혐오스러워....
구역질 나는 인간들......"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처럼 인상을 구기며 입맛까지 다시는 세라가 묘연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그래, 난 여러 남자랑 자 봤어.. 난 섹스하는 거 좋아해..
그런데, 이런 날 보고 세상 사람들은 수군거리더라?
이세라 저 년 걸레다, 쓰레기다...그렇게 손가락질 하더구만..
남자랑 많이 자 본 여자가 걸레라면..좋아, 난 걸레 같은 년이고 더럽다고 쳐...
그래도 난, 그 인간들처럼 역겨운 짓거리는 안 해..
나는 적어도 내가 섹스하는 남자한테 '사랑' 운운하면서 그 남자를, 또 나 자신을 기만하지는 않아..
난 솔직히 섹스 자체가 좋을 뿐이야..
그렇게 당당하게 밝히고 있어..
그 인간들처럼 가증스럽게 고상한 척, 깨끗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더 추잡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이말이야..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그 지독한 욕심을.. 마치 순수한 사랑인 것처럼 행세하는 그런 위선자는 아니라구!
정말 밥맛이야, 좆같은 년놈들... 그런것들 보면, 장주혁이랑 안혁수 불쌍해서 미치겠다니까...
쳇....진짜 '사랑'이라고 말할 만한 자격이 있는 건 오빠들인데...왜 세상에서는 오빠들이 외면 당하는 거지..?!
개같은 수작이나 부리는 년놈들은 잘만 사는데....
씨발.....아무리 생각해도 개판이야...."
(58)
저무는 황혼으로 내 사랑을 죄다 보여주겠다.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
"들어가십시오, 회장님.."
차문을 열고 아스팔트 위에 발바닥을 딛고 서는 재준에게 절도 있는 모양새로 허리 숙여 인사하는 환성..
재준은 귀찮다는 듯한 손짓으로 차문을 밀어 닫으며 환성에게 시선을 준다.
환성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재준이 입을 열기를 기다린다.
"안 바쁘면 나랑 술이나 한 잔 하자.."
예상을 깨고 튀어나오는 재준의 권유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환성은 이내 털털한 웃음을 흩뿌리며 넉살 좋게 재준의 옆으로 따라 붙는다.
"하하...그럼 오늘 하룻밤 신세 지고 가겠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재준과 같은 집에서 생활했던 환성인지라, 재준의 빌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제법 정겹고 편안하다.
집에 들어서서, 재준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직행하고 환성은 2층의 바에 가서 스카치를 홀짝이며 재준이 오기까지 시간을 보낸다.
30분쯤 지나자, 수수한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을 한 재준이 들어서고, 환성은 그에게 술잔을 건넨다.
"....오늘은 정말 혼자 있기가 싫어서...."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한 대 빼어 물며 변명조로 이야기하는 재준..
환성은 대답 대신 예의 선량한 미소를 만면에 퍼뜨리며 재준에게 불을 붙여준다.
그러다 안주머니에 넣어놓은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대자 화들짝 놀라며 열적은 손으로 품속을 뒤진다.
괜찮으니까 받아 보라는 뜻으로 작게 턱짓을 하는 재준..
환성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귀로 가져간다..
"여보세요?"
환성의 입에서 '여보세요'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재준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따갑게 쏟아지는 여자의 목소리...
하이톤으로 앵앵거리는 것이 꽤나 거슬린다.
환성은 귀가 다 멍멍해져서는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귀에서 잠시 떼어놓았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통화를 계속한다.
"아아~~오늘 못 들어간다니까.......이 기집애가 진짜?!?...........알았어, 알았어....내일은 꼭 들어갈게.....
지금 옆에 회장님 계신단 말야!!......알았으니까 끊어!!"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성급하게 통화를 끝내는 환성..
핸드폰의 전원을 눌러 꺼버리고는 송구하다는 듯이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말한다.
"죄..죄송합니다, 회장님....기집애가 성질이 영 아니라서...-_-;;"
"너어..데리고 사는 여자도 있어?"
재준은 환성의 궁색한 사과 따위에 개의치 않고 특유의 심드렁하고 스쳐가는 듯한 어조로 묻는다.
"아, 예에...혼자 사는 건 정말 못 하겠더라구요...그래서 평소에 맘에 두고 있던 여자랑..."
"그래...? 빨리 들어오라고 닦달까지 하는거 보니까 사귄지 오래 됐나보네?"
"한 7.8개월 됐습니다.. 우리가 관리하는 가게에서 일하던 앤데, 워낙 예뻐서요...^^;;"
좀전의 어쩔 줄 몰라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걷어치우고, 얼굴에 말간 미소를 띄우며 환성은 지갑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 재준에게 보여준다.
자신의 정부의 미모를 자랑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모양이다.
재준은 위스키를 한 모금 길게 들이키며 환성이 내민 사진 속의 여자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유흥가에서 굴러먹던 여자 같지 않게 청순하고 싱그러운 매력을 풍기는 게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을만 하다.
"예쁘다...네가 이런 스타일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하하....^^; 그래두 강태 도련님에 비하면 떨어지죠...도련님은 진짜...."
재준의 눈동자가 일상의 빛을 잃어버리고 낡게 흐려지는 것을 감지한 환성은,
아무 생각 없이 '강태'라는 이름을 입밖에 낸 자신의 부주의에 속으로 가슴을 친다.
이때다 싶게 와락 하고 스며드는 어색하고 불쾌한 정적..
그 고요함을 깨뜨리고 침묵을 가른 것은, 재준의 입술 사이로 뱉어져 나온 실소이다..
"훗...그 자식.....정말 예쁘지....처음 봤을 때,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으니까...."
공허와 회오가 가득 서린 재준의 을씨년스러운 음성에,
환성은 자책감으로 자신을 꾸짖던 이성을 경악과 놀라움으로 바꾸느라 정신이 없다.
"예쁘고 똑똑하고....또...순진하고 착하고....역시....나같은 놈한테는 과분해,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보내줬잖아...그 녀석이 원하는 대로.."
그나마 희미하게 걸려있던 쓴웃음마저 자취를 감추는 재준의 하얀 얼굴...
환성은 비어진 재준의 술잔에 스카치 위스키를 따르며, 그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한 말투로 서슴없이 입을 연다.
"많이...보고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금방..잊어버릴 줄 알았는데....잘 안 된다...."
탄식하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는 재준..
환성은 설마 그가 울먹이는 것은 아닐거라고, 목이 메어서가 아니라 피로 때문에 목소리가 약간 갈라지는 것일 뿐이라고 되뇌인다..
그게 당연하다.
나의 보스는 강하고 완벽한 사람이다.
절대 약한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는 남자다.
"솔직히....후회하고 있어.. 그 애한테 사실대로 얘기한 거...
좋은 결과를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막상 이렇게 되니까....생각했던 것보다 훨씬.....훨씬 더....."
마지막 말을 차마 소리내어 발음하지 못하고 안으로 삭혀버리는 재준..
그는 '충의회'의 보스이고, 지금 그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재준의 직속부하이기 때문이다.
이건 어쩌면 최후의, 그리고 최선의 노력일지도 모른다.
재준에게 부과된 막중한 책임감은 그로 하여금, 꼴사나운 은닉자가 되게 한다..
"......도련님께서 다시 오신다면....어떻게 하실 겁니까...?"
짐짓 사려깊은 어투로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환성..
그저, 한번 더 재준의 진심을 확연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그의 노파심이하고 봐줘야 할 것 같다..
"그럴리가 없지.....강태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그래.."
"만약에 말입니다.. 도련님께서 돌아오시면,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채, 주제넘게도 재준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환성..
이번에도 재준의 내면의 진실성을 입증 받고자 혼신을 다하는 환성의 간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그런다면....정말 그렇게 된다면 말이지.....나는 그때부터.....그 애의 종이 될거야....."
그렇게 재준은 '충의회'의 보스, 그것에 수반되는 위신과 권위를 내팽개친다..
그의 직속 부하 앞에서....
- 일자리를 알아보러 하루 종일 여기 저기 돌아 다녔던 강태..
모두들 연락을 해주겠다는 말만 할 뿐, 이렇다 할 확답은 받지 못했다.
실망감과 좌절감으로 점철되어 터덜터덜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강태..
아파트 현관을 통과해 지나가려 하는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온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더운 날씨에도 검은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서, 깍듯이 예를 갖추는 환성을 발견하자..강태의 눈이 커진다.
"여긴 웬일이에요?"
기분이 상할만큼 냉랭하고 딱딱한 강태의 목소리에도, 환성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레 대꾸한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얘긴데요?"
"짧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강경한 태도로 나오는 환성에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멈칫 하는 강태..
잠깐 주저하다가 몸을 돌려 엘레베이터 쪽으로 발을 내딛으며 큰 선심이나 베푸는 것처럼 환성의 방문을 허락한다.
"들어가죠.."
재준의 빌라와 비교해서 너무 옹색하게 느껴지는 강태와 연이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환성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노곤하게 풀어 볼 요량으로 강태에게 묻는다.
"누님은 아직 안 들어오신 모양이죠..??"
"아르바이트하느라고 매일 새벽 2시나 되야 와요..맥주 한잔 할래요??"
"아닙니다.. 또 일하러 가야 하거든요..^^"
강태는 부엌에서 물 한잔을 마시고, 거실에서 멀뚱히 서서 대기하고 있는 환성에게 앉으라 이야기하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가볍게 입을 연다.
"할 얘기가 뭔데요?"
"도련님도 참....너무 하십니다...어떻게 회장님 안부는 물어 보지도 않으십니까??"
어쩜 그리도 매정하냐는 듯 질책의 눈길을 보내는 환성에게 발끈하기보다는 마음 한 편이 뜨끔하는 강태..
멋적게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몇 번 날리다가, 겸연쩍어 하며 묻는다..
".....회장님은....잘..계세요...?"
"아니요, 잘 못 지내고 계십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투시력 강한 환성의 눈빛을 피해 시선을 아이보리색 벽지에다 고정시키고 있던 강태가
고개를 돌려 의문과 걱정이 숨김없이 비치는 흑색 눈동자로 그의 다음 말을 재촉한다.
약간의 장난기가 담겨있던 환성의 눈빛도 그 경망함을 깨끗이 배제시킨 후, 조용하게 정리된 기류를 형성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저는 아시다시피 무식한 놈이라 어려운 말 들먹이면서 설득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이유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물론 알고 있다.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빈자리로 인해 그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믿을 수 없을 뿐이다...
그리고 내 속에 내재된 감정의 목소리가 여전히 얄팍한 이성을 이기지 못하는 것뿐이다..
"전.....도련님께서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만든 틀 속에 갇혀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잘 모르겠어요...
혹시, 잊어버리신 거라면 제가 기억을 상기시켜 드리죠..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도련님께서 '연화회'에 끌려 가셨을 때, 혼자서 도련님 구하러 달려가신 회장님을...
그때 그분의 행동이, 쇼맨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섹스파트너 때문에 목숨을 거는 병신 같은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저랑 같이 회장님께서 입원하신 병실에 가셨을 때, 도련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그 모습은...전부 연기였습니까??
이런 제 질문이 기분 나쁘게 들리신다면, 제게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그게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59)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결코 죄가 되지 말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대 가슴에 더러운 발자국 찍히게 하지 마소서...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중 -
일요일 저녁 혁수는 지민, 그리고 윤아와 함께 술잔을 주고받으며 오랜만에 단란한 분위기를 만끽한다.
오늘부터 한 집에서 동거를 시작하게 된 지민과 윤아..
새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두 사람은 자신들의 둥지로 혁수를 초대했고,혁수 역시 기꺼이 응했다.
지민과 윤아 둘 다 말수가 많은지라 혁수는 두 여자의 그칠줄 모르는 입담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게다가 지민은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서는 격양된 음색으로 거침없이 이 얘기 저 얘기를 늘어놓는다.
술이 약한 혁수는 간간이 몇 모금만 살짝 입에 대며 그녀의 수다에 적당히 신경을 기울인다..
"야, 안혁수.. 우리 윤아 이쁘지?? 그치??어이구~~우리 자기는 볼 수록 이뻐져요~~~"
술에 취하니까 오버액션이 나오는 지민..
과장된 몸짓으로 옆에 앉은 윤아를 보듬어 안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겠다고 덤벼든다..
윤아는 판단력이 제대로 깨어 있는지라, 합석한 혁수의 존재를 의식하고 지민의 입술을 피해 몸을 빼며 밉지 않은 타박을 준다..
"아이, 진짜~~ 혁수 보는 앞에서 왜 이래~ 창피하게...-//-;;"
"뭐 어때~~?? 어차피 다 아는 사인데...
야, 솔직히 이 자식 지금 속으로는 엄청 부러워하고 있을걸?
우리가 이렇게 같이 사는 거 말이야...그치, 안혁수?? 부러워 죽겠지??"
술기운 때문에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우스꽝스러운 음성으로 신랄한 공격을 개시하는 지민...
혁수의 입가에 매달려 있던 잔잔한 미소가 슬금슬금 종적을 감추고...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깐다.
"다 알어, 임마~ 그러니까 제발 병신같이 굴지 말고 너도 나처럼 확 일을 저질러 버리란 말야!!
너도 나처럼 살면 되잖아?! 나도 했는데 네가 왜 못해!? 진짜 답답해 죽겠어, 안혁수..."
금새라도 버럭 소리를 지를 듯이 횡경막을 팽창시켜 몸 속의 공기까지 모조리 밖으로 쏟아내는 지민..
아주 미세한 이물질 하나라도 신체 안에 담아두고 있는 걸 견딜 수가 없다는 듯...
고조된 숨소리를 통해 탁한 이산화탄소를 연신 방출하며 계속해서 독설을 퍼붓는다.
"이제 비겁하게 도망치지 좀 마!! 그렇게 용기가 안 나?? 지금처럼 평생 안일하게, 꼭두각시처럼 살거야?!
그러기 싫으면 결단을 내라고! 안혁수 너만 두려운 줄 알아? 나도 두려워!!
겉으로는 자신만만하게 큰소리 떵떵 치면서 얘기하지만 사실은 나도 무서워 죽겠어!!
나랑 윤아는 뭐 편하게 사는줄 알아?
우리도 힘들어...정말 가슴 아프고 지치고 피곤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게 도대체 왜 죄가 되냐고, 나도 세상 사람들한테 따지고 싶어!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고 전염병 환자처럼 취급받기도 하지만...그래도 난 선택했잖아?? 그건 용기야!!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
나는 나의 진실을 똑바로 바라봤어..
그리고 진실을 선택한거야...
그런데 누가, 어느 누가 나한테 돌팔매질을 할 권리가 있어?! 안 그래??!?"
혁수를 향해 가차없이 쏘아대던 지민의 비난과 다그침은 어느새 그녀 자신의 넋두리와 하소연으로 변한다.
지민은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무너지며 깊숙이 묵혀둔 흐느낌을 끄집어낸다..
"씨발...안혁수 넌 죄수야....너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있어..바보같은 놈....아주 한심해 죽겠어, 정말...
너 같은 새끼 좋다고 마약이나 하고 다니는 장주혁이 제일 불쌍하지...
그래....네가 힘들다는 것도 알고, 두렵다는 것도 이해해...
나도 같은 처진데 왜 모르겠어...
하지만, 그래도 난 네가 답답해.. 옆에서 보니까 심장이 터져 죽겠어!!
에이 씨...진짜 얼른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오매불망 네 생각만 하는 장주혁한테로 가란 말이야!!"
"지민아, 너 왜 이래...너 많이 취했어..들어가서 자자.. 응?? ..일어나...."
혁수에게 삿대질까지 해 가며 울음 반 빈정거림 반의 음성으로 그의 가슴에 예리한 단도를 쑤셔박던 지민을
황망한 손길로 일으키며 그녀의 독설을 제지하는 윤아..
엉망으로 취해 비틀거리는 지민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 눕혀놓은 다음, 돌덩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채 굳어버린 혁수가 있는 거실로 다시 나온다..
낮은 곳에 위치한 소실점으로 시선을 모으고, 지켜오고 있던 무언가가 크게 훼손되어 버린듯한 모습으로 하나의 그림처럼 앉은 혁수...
혼돈스러운 현실보다는 안락한 그림 속의 배경이 되고 싶은 걸까, 그는...?
윤아는 한동안 연민과 동질감이 묻어나는 눈길로 혁수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혁수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위로한다.
"후우~~지민이가 너 안쓰러워하는 마음에 그런거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는 마라...
평소에 너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나봐...
근데 술이 들어가니까 저렇게 터져 나오는 것 같아..
화났으면 풀어라...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니야.....다 맞는 말인데, 뭐....."
두 손으로 작은 얼굴을 힘없이 쓸어 내리며 독백처럼 나직이 내뱉는 혁수의 목소리가,
어쩐지 콧날이 시큰해지도록 윤아의 가슴 한 구석에 사무쳐 닿는다.
윤아는 혁수에게서, 예전의 방황하던 자신의 일부를 목격한다..
아마 좀전의 지민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 때문에 절규하듯 혁수의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을 질책하고 규탄했던 것일게다..
아니, 혁수가 아니라 그 안에 투영된 자신의 일부에게...지민은 폭언을 가한 것이다..
- 윤아의 강권에 반강제로 그녀와 지민의 보금자리에서 하룻밤을 지낸 혁수..
지민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영 민망스러운 혁수는 서둘러 귀가하려고 발길을 재촉한다..
그런데 거실로 나오니, 지민은 사뭇 멀쩡한 모습으로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토스터에서 식빵을 꺼내 접시에 담아 식탁으로 나르던 지민은 머쓱하게 서 있는 혁수를 보더니, 예의 친근한 미소와 함께 아침인사를 보낸다.
"잘 잤어? 아침 먹고 가~ 집에 가 봤자 차려 줄 사람도 없잖아.."
"아, 아니야...그냥 지금 갈게.. 가서 할 일도 있고..."
"야아~~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삐진거야? 에이~~ 내가 정말 네가 미워서 그랬겠냐??
무슨 뜻으로 그런 말했는지 다 알면서 왜 그래..."
"그게 아니고 정말 집에 가고 싶어서 그래..둘이 오붓하게 밥 먹는데 방해하기도 싫고...^^;;
그리고 나 진짜 화 안 났으니까 신경 쓰지 마..누나가 그러니까 내가 더 미안해진다..."
순하게 생긴 눈매를 둥글게 말며 다사로운 웃음을 보여주는 혁수를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지민...
또 다시 무거워지려 하는, 납덩이처럼 침잠하려 하는 심리상태를 애써 추스리며 방으로 들어가 편지 하나를 가지고 나온다..
어김 없이 '연청색' 이다..
혁수의 심장이 삐그덕거리며 절름발이의 걸음을 흉내내기 시작한다.
지민은 혁수에게 편지를 내밀고, 혁수는 자연적인 인력에 끌려가듯이 팔을 뻗어 편지를 받아든다..
그와 동시에, 선전포고처럼 이어지는 지민의 이야기..
"나 이제 더 이상 너한테 이 편지 전해주고 싶지 않다..
이런 우체부 역할이 필요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얘기야..
무슨 말인지 알지...?"
마지막까지 혁수를 왜소하게 만드는 지민의 언질..
혁수는 그녀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경황없이 인사를 하고 도둑질이라도 한 것 마냥 지민과 윤아의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이미 신경은 온통 오른손에 들려진 '연청색' 편지에 집중된 상태이다.
오피스텔에 당도하자마자 가방을 팽개치듯 한쪽 구석에다 던져놓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편지봉투의 모서리를 찢는다.
곧이어 혁수의 다갈색 눈동자 안으로 낯익게 흡수되어 오는 주혁의 시원시원한 글씨체..
- 혁수에게..
이제 장마도 다 끝나고 매일 날씨가 화창하다..
물론 더 더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선선해..
오늘은 교회에 갔다 왔어..
이곳을 운영하는 데가 서울의 무슨 큰 교회라서 일요일마다 예배가 있거든..
참석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환영이고,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강요하지 않아..
예전부터 한번 가볼까 생각했었는데 막상 새로운 집단에 소속된다니까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 관두곤 했지..
네가 일요일에 교회 가는거 볼때마다 같이 다니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난 솔직히 한편으로는 네가 추종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증오하기도 했어..
그 종교의 교리와 율법이 너를 속박하고, 너로 하여금 내게서 등 돌리도록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살아 있다는 건 믿었지만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야) '신'을 사랑하고 섬기지는 않았어..
오히려 그를 원망하고 저주했지...
너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장본인이라고만 느껴졌어..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정말 너무 아름다운 거야...
파란 하늘이랑 환한 태양...나무와 숲과 맑은 공기까지...
그렇게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각 사물마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색깔로, 형태로 존재하게 할 수 있다니...
이 세상의 어떤 예술가도 '자연'만큼 완전한 미(美)를 창조할 수는 없을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새삼 이 세상의 만물을 창조했다는 조물주를 만나고 싶어졌어..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만드신 분이라면, '신'은 관대하고 인자하실 거라고...
그래서 나같이 미천한 사람도 소중하게 여기고 만나줄 거라고...
나 역시 그가 창조한 피조물 중 하나일 테니까..
지금은, 글쎄...내가 정말 하나님을 만난 건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분과 화해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 같아..
그분이 정하고 명령한 계명이 조금은 받아 들여져...
혁수야...
오늘, 그분에게 이렇게 기도했어..
나 때문에 혁수가 당신의 율법에 어긋나는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이 당신의 분노를 불러일으킬지라도...
부디 용서해 달라고...불쌍하게 생각해 달라고 말이야..
당신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니까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다 아실 것 아니겠냐..
우리의 진실한 감정이, 혁수를 향한 나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한지...당신은 모두 보실 수 있지 않느냐...
그리고 또 한가지 얘기한 건...
만약 징벌을 내리시려거든, 너의 몫까지 나에게 내려 달라고 간구했어..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새로운 삶이.. '시작'에만 그치고 행복한 끝을 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이 때리시는 채찍으로 인해 함께 가는 그 길이 눈물로 얼룩진다 하여도...절대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시작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넘치게 감사하고 감격해 할거라고....
혁수야... 나의 기도가 이루어질까...?
'신'께서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실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아니, 그렇다고 믿을거다..
그 믿음 하나로 살아 숨쉬는 나니까....
- 1999년 7월 18일 P.M 11:15
연청색 편지지가 하얀 주혁의 영상으로 화하여 혁수의 시야를 점령한다..
혁수는 눈꺼풀을 움직여 그 영상을 분해하지도 않고, 또 외면하지도 않는다..
이젠....선택하기 위해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혁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전화기가 걸린 벽 쪽으로 몸을 돌린다..
....선택은....완료되었다.....
"I'd like to book a flight to Seoul..."
(서울행 티켓 한 장을 예약하고 싶습니다)
(60)
사랑이여, 조금만 기다려다오.
조금만 더 단단히 옷깃을 여미고 너의 추운 몸을 가지고 있어다오.
오직 단 하나의 사랑을 만나기 위해 여기 한 사내가 눈물과 함께, 가슴 저미는 그리움과 함께 달려가노라...
- <사랑을 위해 죽다> 중 -
신발 밑창에 와서 감기는 땅의 감촉이 무척 연약하고 보송보송한 느낌이다.
마치 갓난아기의 피부처럼, 여인의 매끈한 속살처럼...
한국의 흙내음은 굉장히 원시적이고 기묘한 향기를 풍기며 혁수의 후각을 자극하고 그를 신비스런 정취에 젖도록 해준다.
유치한 말을 쓰자면 '마법에 걸린 것' 같은 기분...?
어김없이 혁수의 전신을 휩싸며 그의 귀국을 먼저 환영해 준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독특한 한국의 흙내음이다.
그리고 곁가지처럼 딸려오는 습한 더위...
혁수는 입고 있던 체크무늬 남방을 벗어 한쪽 팔에 걸쳐놓고 약하게 심호흡을 하며 공항 건물 쪽으로 걷는다.
짐을 찾아 가지고 출구로 향하면서, 혁수의 표정은 꼭 북한에서 이제 막 귀순한 사람마냥 떨떠름하게 굳어있다.
하기사, 지금의 안혁수와 북한 귀순자 사이에 유사성이 하나 있기는 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
이제까지의 인생과는 전혀 다른, 새롭게 태어난 '나 자신'을 부여받아 살아가게 된다는 것...
예전의 안혁수는 죽고, 무엇에 비길 수 없는 고결한 가치를 소유한 안혁수가 남은 인생의 시간을 채워나갈 것이다..
설레이고 떨린다. 뿌듯하고 행복하다.
출구의 자동 유리문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게이트를 지나쳐 통과하자 정면으로 보이는 세라의 얼굴...
파스텔 색조의 연두빛 원피스 원피스를 입어 멀리서 보기에도 화사한 모양새가 눈에 띄인다..
혁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세라는 입을 점점 크게 벌리더니 해괴망측한 고성을 질러대며 주위 사람들의 이목에 전연 신경쓰지 않은 채 혁수에게로 달려든다.
"우와아아아~~~ 안혁수!!! 너 진짜 왔구나~~!!!"
혁수의 목을 꽉 끌어안고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흥분 때문에 몸서리까지 치던 세라는,
함께 온 태현이 오히려 민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만류하자 그제서야 목소리 톤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입만은 어쩌지 못하고 눈가에 명명한 웃음을 넘치게 퍼담으며 계속 떠들어댄다..
"와아~~ 이게 진짜 얼마만이지? 응?? 한 10년은 된 것 같아..
안혁수...정말 왜 이제야 왔냐?! 아냐, 아냐.. 지금이라도 온 게 어디야.. 그것만도 감지덕지지, 정말로~~~"
추호도 빈정거리는 냉소가 아니라 깊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세라의 거리낌없는 음성과 미소에
혁수도 살풋이 웃음을 눈 주위에 매달며 그녀의 환영에 답한다..
"나와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직장 결근해서 어떡해?"
"지금 백화점이 문제야? 안혁수가 귀국을 한다는데~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걸고 나와야지...^^"
"야, 이세라.. 나 언제까지 멍청히 세워두기만 할거냐!?"
옆에서 세라와 혁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태현이 볼 멘 소리로 세라에게 불평을 터뜨린다..
"어? 아아~ 미안, 미안.. 혁수오빠, 인사해.. 저기...."
"나 문태현이야.. 너 가고 난 다음부터 주혁이랑 같이 살았어..^^"
세라가 소개를 시켜줄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말을 가르며 호쾌하게 악수를 청하는 태현...
혁수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나누다가 문득 뇌리를 훑고 지나가는 생각에 입을 연다.
"어어, 너어....우리 H대 다니지 않니?"
"아네? 실용음악과 2학년이야.."
"그래...너 작년 축제 때 날렸었잖아.. 기억 난다.."
"헤헤...^^; 네 얼굴 되게 궁금했었어.. 난 네 이름만 알고 있었거든...근데 너, 상상했던 거랑 다르게 진짜 귀엽게 생겼다~~! ^O^"
태현이 신기하다는 듯한 음성으로 탄복하며, 현미경을 가지고 미생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혁수의 얼굴과 몸 전체를 구석구석 살펴보자 혁수는 눈동자를 어디에 정착시켜야 할 지 몰라서 황망해 하기만 한다..
그러면서도 뺨에는 복사빛 홍조가 피어올랐고 입술은 연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채이다..
"난 운전사 노릇하려고 왔어.. 장주혁을 생등신으로 만든 안혁수가 어떤 놈인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야아~~정말 왜 이렇게 늦게 왔냐? 사람 애간장을 태워도 정도껏 해야지..."
가벼운 책망조로 혁수에게 장난스런 타박을 주는 태현의 옆구리를 오른쪽 팔꿈치로 쿡 찌르며,
혁수가 조금이나마 기분이 상하거나 자책감을 느낄 것을 염려한 세라는 과장되게 명랑한 목소리를 높이며 혁수와 태현의 손목을 잡아끈다.
"자,자!! 안그래도 주혁오빠 기다리겠다! 원주까지 가려면 또 한참 걸리잖아~ 얼른 가자~!!"
- 4시간 가까이 꼬불꼬불한 국도를 내달려 주혁이 치료받고 있는 그곳에 도착했을 때,
혁수의 갈색 눈망울에 비로소 투명한 이슬이 아롱지기 시작한다..
아직 주혁의 아슴푸레한 실루엣조차 보지 못했는데도 혁수의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호흡하며 그의 영혼 마디마디를 옥죄어온다..
"가서 만나고 와.. 오빠 나올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너희는..같이 안 들어가려구...?"
"으이구~~ 우리가 바보냐?? 얼마만의 재횐데 거기 끼여들겠어? 눈치없이..."
이번에는 태현이 백미러를 통해 혁수를 건너다보면서 핀잔조로 한마디 던진다.
혁수는 선뜻 차문을 열고 내리지 못한 채, 한꺼번에 사고회로의 각 부분을 차지하고서 부상하는 무수한 상념들을 추스리느라 분주하다.
갑작스런 혼란과 공포가 혁수의 입안을 바싹 마르게 한다..
그런 혁수의 심적 아노미 상태를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세라는 자못 진지하고 무게있는 음색으로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혁수를 고무하고 격려한다..
"혁수오빠...."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세라의 얼굴을 바라보는 혁수..
순박해 뵈는 눈동자가 어지럽게 떠돌며 종착점에 도달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다.
혁수가 지향하는 삶의 최고치는 이제 그리 멀지 않았다.
"있잖아... 만약...주혁오빠 얼굴을 딱 봤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
"....그냥....웃어 줘... 아주 살짝만 웃어도 괜찮아...
단, 반드시 주혁오빠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 해..절대로 주혁오빠 눈을 피하지 마.. 그러지만 않으면....되는 거야..... 알았지...?"
세라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주혁이 진정으로 갈망하던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이제는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이렇게 조금씩 알아나가면 되는 거겠지...그와 함께....
"...고마워, 세라야....."
"치이~~ 알기는 아는구만? 나중에 둘 다 전부 울궈 먹을테니까 각오해~~ -_-++"
혁수는 짧게 소리내어 웃고는 차에서 내린다.
혁수가 몸을 돌이켜 치료센터 건물을 향해 한발짝 내딛으려는 찰나, 다시 혁수를 부르는 세라의 음성이 그를 뒤돌아보게 한다.
왜 그러냐고 눈으로 묻는 혁수에게 세라의 우정어린 한마디가 닿아온다.
"......돌아와 줘서...오히려 내가 고마워...^^"
그 순간만큼은 도저히 웃어지지가 않아서 혁수는 그대로 다시 뒤돌아 선다.
그리고 지금 쏟아져 내리기에는 때 이른 눈물줄기를 눈물샘 안으로 거두어들이며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가기 위해 발을 움직인다..
치료센터 앞에 수려하게 펼쳐진 잔디밭에는 여러 환자들이 각자의 일에 골몰해 있다.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거나...
다들 평화로운 휴식을 만끽하는 모습이다.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서 치료센터 건물의 정문까지 당도한 혁수는 쭈삣거리며 안으로 들어선다..
크림색으로 칠해진 벽면 때문인지 실내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밝다..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혁수를 맞아주는 중년여인에게 혁수는 자신이 온 목적을 설명하고,
여자는 주혁에게 이미 얘기를 들었다면서 혁수를 엘레비이터로 안내한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승강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는 혁수...
그녀는 복도 중간쯤에 위치한 목재문 앞에 멈춰 선다.
"이 방이에요.. 면회 시간은 2시간이니까 기억해 주시구요..들어가 보세요, 기다리고 계시던데...^^"
그렇게 말하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멀어져 가는 여자..
혁수는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줄곧 그녀의 뒷모습을 쫓다가,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연녹색 페인트가 발린 목재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 문을 열면, 연녹색 페인트 대신 하얀 주혁의 실제가 혁수의 망막을 충만하게 채울 터였다.
혁수는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 가물가물해지려는 의식의 끈을 단단히 조이고, 드디어 문고리에 손을 가져간다..
노크를 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에티켓마저도 잊어버리고 무작정 자신의 영혼에 용기를 북돋아 주기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손아귀에 힘을 주어 문을 열어 젖히자...
예상보다 훨씬 더 벅차게 혁수의 영혼의 시세포를 마비시키는 주혁의 자태..
연청색 힙합바지에 흰색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그의 뒷모습...
혁수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회전시켜 문쪽을 바라보고...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원이 된다..
혁수는 세라의 조언대로 희미하게나마,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짓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당겨 보지만..
신경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혁수는 용수철처럼 발작적으로 퉁겨져 오르는 응어리를 눈물로 승화시켜 와르르 쏟아 부어 버린다.
물방울 때문에 흐릿하게 번지는 시야를 가지고서도 혁수는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을 고스란히 받아내려고 노력한다..
이번에도 역시, 혁수에게로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주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혁수가 물러서지 않는다는 거다..
혁수는 그 자리에 못 박혀서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주혁과 시선을 떼지 않으려고 힘을 준다..
끝까지 주혁의 깊은 눈동자를 응시한다..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다. 원하고 바래왔던 일이라 그런가 보다.
주혁은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혁수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려, 모르핀의 환타지 속에 존재하는 안혁수가 아닌, 현실 속에 살아서 눈앞에 서 있는 혁수를 품에 안는다..
모르핀 성분이 '환각'을 통해 전달해 주던 그때의 황홀감과는 차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주혁의 알싸한 체취가 온몸을 정복해 오자, 혁수는 여지없이 그의 가슴팍으로 무너져 내린다..
주혁의 어깨에 두 팔을 둘러 감고, 그에게 자신의 몸을 부서져라 밀착시키며 혁수는 마구잡이로 분출되는 울음 사이에 아주 조그만한 틈새를 내어..
준비해 온 한마디를 겨우 꺼내 보인다...
".......사랑..해.....혁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말도 아니다..
그런 말은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구차스런 빈약함을 드러낼 뿐이다.
혁수는 현명하다. 정직해 졌기 때문이다.
주혁은 당장이라도 파열될 것 같은 성대를 어르고 달래느라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대신, 간절하게 떨리는 하얀 손으로 혁수의 얼굴을 감싸 쥔다..
촉각세포에 생생히 부딪쳐오는 혁수의 살결...
그 감촉에 진저리를 치며.... 주혁은 혁수의 입술을 머금는다...
(61)
혁수가 주혁을 만나러 들어가고, 차안에는 태현과 세라 두 사람만 남아있다.
태현은 다시 차를 운전하여 적당한 자리에 주차시키고
세라는 4시간 가량 달려오는 바람에 안 그래도 갑갑증이 턱 밑까지 치솟아 있는 터라 후다닥 문을 열고 내린다.
서울의 공기와는 그 입자의 성분부터 다른, 산으로 둘러싸인 미개발 지역의 청명한 공기를 한껏 흡입하는 세라..
단순히 맑은 공기 때문만이 아닌, 그동안 그녀의 마음 한켠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고민과 걱정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사실 덕분에
세라는 개운하고 상쾌한 미소를 띄운다..
그녀의 옆에 선 태현은 운전을 하느라 찌뿌둥 해진 몸을 쭉 늘리며 기지개를 핀다.
"아아~~ 진짜 쌓였던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게, 이제야 발뻗고 편히 잘 것 같다~~~^O^"
가볍게 불어오는 미풍에 흐트러지는 긴 머리를 한 손으로 가다듬으며,
세라가 담백한 어투로 혼잣말처럼 말하자 태현이 픽 웃으며 농담조로 그녀의 말을 받는다..
"쿡....야, 볼때마다 느끼는 건데, 넌 주혁이 엄마로 태어났어야 했어.."
"어이구~~?! 끔찍한 소리하지도 마라! 내 자식이 저러면 속이 남아나겠냐?!? -_-;;"
"풋...하긴....어쨌든, 주혁이 자식 부럽다!! 결국은 사랑의 결실을 맺는구나~~"
태현의 목소리에서 통통거리는 장난기가 서서히 걷히고, 조크를 가장한 마음속의 바램과 안타까움이 살며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세라는 고개를 돌려 태현의 옆모습에 시선을 준다.
길게 내려온 하늘색 머리카락에 가려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앞머리 몇 가닥이 약하게 건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태현이 한숨을 토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세라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화장품 케이스를 꺼내 손거울을 들고 화장을 고치면서 슬쩍 지나가는 투로 태현에게 물음을 던져본다.
"오빠, 짝사랑하는 사람 있구나?"
치료센터 건물 앞에 깔린 잔디밭에만 눈을 고정시키고 있던 태현이 흠칫 놀라며 세라를 돌아보고..
세라는 여전히 손거울을 들여다보는 채, 입술에 오렌지빛 립스틱을 덧칠하면서 질문을 이어나간다..
"남자야, 여자야?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 말야..내 생각엔 남자일 것 같은데...맞아??"
"쳇....너 점쟁이냐? 무서워서 같이 못 다니겠네...-_-;;"
"헤헤...내가 이 방면에는 훤하잖어..^^;
그나저나, 어떤 남자길래 오빠를 안 받아줘? 무슨 심각한 사연 있는거야??"
화장품 케이스를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으며, 세라가 본격적인 태세로 태현에게 질문공세를 편다.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아니라, 상담을 위한 일종의 전략적 테크닉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워낙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트는 세라의 언술 때문에, 태현은 별다른 망설임이나 부담감 없이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의 선천적인 붙임성도 거기에 한 몫 한다.
재준에 대해, 또 강태에 대해.. 두 사람과 태현 사이에 얽힌 짜증스러운 관계의 실타래...
처음부터 끝까지 태현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얘기들을 모두 듣고 난 세라의 표정은 예상외로 덤덤하다.
잠깐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세라는 마스카라가 칠해진 속눈썹을 새끼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불쑥 내뱉는다.
"참~~나... 한마디로, 친구의 정부를 사랑했네~ 이 얘기구만??"
"야아...나 지금 심각해... -_-+++"
"아, 알았어.. 미안...-_-;;"
태현은 뾰루퉁하게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곁눈으로 세라를 흘겨보고
세라는 어설프게 얼굴색을 단속하며 분위기를 진중하게 변모시키려 한다.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터덜터덜 걷기 시작하는 태현..
세라는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연다.
"오빠 친구가 강태를 좋아하는 건 확실한 것 같애.."
"그런거 가지고 거짓말 할 놈은 아니야..아직도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기는 하지만...
휴유~~ 모르겠어.. 이젠 내 감정에도 확신이 안 서..."
"강태를 예전만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말이야??"
"글쎄... 처음처럼 맹목적이지는 않아..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진짜 강태 생각밖에 없었는데...
솔직히 얘기하자면, 재준이가 강태를 좋아한다는 걸 알기 전에는 어떤 자신감 같은 게 있었거든?
이재준은 강태를 섹스파트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그보다 더 순수하고 높은 차원으로 강태를 사랑한다..
뭐 이런 자신감 말이야...
한마디로 재준이의 태도와 내 감정을 비교하면서 일종의 우월감을 느꼈던 거지...
나는 적어도 강태를 그렇게 지저분한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다, 뭐 그런 거..."
"으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이재준의 진짜 마음을 알고 나니까 혼란스럽다, 이 얘기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재준이가 강태를 생각하는 마음이...나보다 더 큰 것 같다는 불안감이라고 할까??
그때 재준이랑 얘기하면서 순간적으로 섬뜩했거든...인간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 건지..
정말....단순히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아니, 그것보다도...강태가 옆에 없으니까 사람이 완전 빈껍데기 같은 게...
괜히 내가 다 죄책감이 드는거야... 기가 막혀서..."
"그건 이재준이 감당해야 할 문제고, 오빠한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오빠의 현재 감정상태가 어떠냐는 거잖아..
말해 봐, 오빠는 지금 어때? 강태에 대한 마음이..."
"그야....좋아하는 건 변함없지... 다만,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재준이 때문이야..."
태현은 거기서 말을 멈추고 얕은 한숨소리를 흘리며 담배를 한 대 빼어문다.
세라가 익숙한 동작으로 라이터를 가져다가 그에게 불을 붙여주고, 세라 자신도 담배갑에서 한 개피를 꺼낸다.
매큼한 니코틴 성분을 폐 속 깊이 들이마시며 다시 말을 잇는 태현..
"재준이 그 녀석...나한테 정말 소중한 친구야..
한동안 내가 강태한테 미쳐서 재준이랑 위태위태해지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때도 후회 많이 했었어...
강태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재준이는 다른 차원에서 나한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야..
그런데...재준이가 강태를 그렇게 많이 생각한다면...나아....강태 계속 좋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더 깊숙이 고개를 떨구며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는 태현...
세라는 꽁초로 변하자 담배를 땅바닥에 떨어트리고 샌들 뒷축으로 비벼 끈 다음, 명쾌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자아~~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우정을 저버릴 수는 없다-??"
태현은 대답 없이 묵묵히 담배 연기만 빨아들인다.
세라는 그의 무언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이미 알고 있기에 거침없이 그녀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오래 고민할 거 없어.. 오빠가 지금 그렇게 망설이고 있다면, 얼른 강태에 대한 마음 정리하고 이재준이랑 강태 이어 줘..."
무성의하다고 느껴질만큼 너무나 쉽게, 단정적으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세라에게 황당하다는 듯 못미더운 눈길을 보내는 태현...
그러나 세라는 오히려 더욱 단연하게 눈동자를 빛내며 흔들림 없는 확고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내가 언젠가 얘기했지? 사랑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 나머지 전부를 버리는 거라고...
그렇지 않다면 감히 사랑이라는 고귀한 단어를 붙여서는 안된다고 말이야.. 기억나지??"
"..................."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야.. 하지만 맞는 말 아니야??
사랑은, 언제나 그 사람을 1순위에 두고 있어야 하는 거야..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이 존재하는 거지..
만약에 다른 것이 더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건 본질적인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야.. 단순한 애정이지..
그 애정의 깊이가 워낙 깊어서 '사랑'이라고 착각을 할 소지가 많은데,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머지 전부를 버릴 수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절대로...."
"내가 강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니?"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래..
강태라는 사람이 워낙 특출나게 이쁘고 분위기가 특별하니까 오빠가 한 순간 혼을 뺏긴거라고 봐야 될것 같아..
나도 나이트에서 주혁오빠 처음 봤을 때, 정신이 멍~할 정도였거든...
근데 오빠는 순진하고 착해서 그 감정에서 나처럼 빨리 빠져 나오지를 못한 거야..
게다가 강태가 이재준한테 그런 식으로 대우를 받으니까 오빠는 동정심도 일었겠지?
강태를 구해줘야 한다는 기사도 정신도 발휘 됐을거고...
아무튼 이런 저런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되어서 오빠가 '사랑'이라고 느꼈던 것 같은데, 그건 일시적인 감정이야..
꽤 오래 지속되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끝나버릴 감정이라구...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빠는 지금 자신감을 잃고 있잖아? 강태에 대한 마음을 계속해서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그건, 오빠가 강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야..
즉, 강태보다는 이재준과의 우정이 오빠에게 있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얘기지.. 안 그래??"
태현의 얼굴에 을씨년스러운 조소가 스쳐 지나간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불균형적으로 좁혀지며, 선홍빛 입술 사이로 맥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훗....허무하다... 몇 달동안 혼자서 애태운 결과가 이거라니..."
"...원래 인간이란 게 다 그렇지 뭐....
근데, 오빠 생각보다 엄청 순진하다~~ 그런 귀여운 감정에 푹 빠져서는....쿠쿡.... 사춘기 소년도 아니구....^^;;"
"칫....그래, 나 정신연령 모자란다.. -_-++
그러는 너는 나보다 나이도 어린게 이런 쪽으로만 지식이 해박해 가지구... 좆나 찌들었어, 이세라...-_-;;"
"뭐?! 입 아프게 떠들면서 충고해 줬더니 고작 하는 소리가 그거냐?? 하여튼 열라 재수없어, 문태현.... -_-++"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태현을 세모눈으로 노려보는 세라에게,
태현은 쓸쓸함이 어렴풋이 묻어나는 미소를 건네며 한 쪽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콩 친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어조로 덧붙인다..
"이세라.... 너 정말 멋있는 여자야...제대로 가르쳐 줘서 고맙다.. ^^"
(62)
구부정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한참동안 책을 읽던 강태는
뻐근한 어깨와 목 부위를 손으로 주무르며 밀려오는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시러 부엌으로 향한다..
가스렌지 위에 물을 올려놓고 끓기까지 기다리면서 연신 하품을 해대는 강태..
흘깃 눈을 돌려 시계를 보니, 바늘이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다.
연이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다..
강태는 머그컵에 뜨겁고 진한 커피를 따라 들고, 연이가 오는지 확인하려고 베란다로 나간다.
커피를 한모금 삼키며 창밖을 내다보자, 새벽에만 느낄수 있는 완벽한 정적과 섬찟하리만치 정결한 고요함이 어둠을 둘러 진치고 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그나마 빈틈없는 암흑에 약간의 여유로움과 온기를 제공한다..
물끄러미 바깥의 풍경을 응시하던 강태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한 곳으로 모아지며 크게 확대된다.
낯익은 물체가 시야에 잡혀왔기 때문이다.
강태는 양미간을 좁히며 가로등 불빛에 비친 자동차의 번호판을 정확히 읽어내려 애쓴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재준의 차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강태의 얼굴에는 말도 안된다는 듯한 실소와 함께 극심한 충격에 사로잡힌 듯 벙벙한 표정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그렇게 오래도록 재준의 검은색 XG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강태는 한꺼번에 막무가내로 튀어 오르는 생각의 파편들을
도저히 수습하기가 곤란해지자 황급히 몸을 돌려 안전한 자기 방으로 피신한다..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강태는 버릇대로 엄지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불침 맞은 강아지 마냥 방안을 왔다갔다한다.
그러면서 천천히...불거져 나오는 자신의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린다..
객관적인 입장에 서서 언제나 중립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게 가장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태도이다.
그러나...늘 생각뿐이다.
머리로는 골백번도 넘게 다짐하고 되뇌이고 자신을 교육하지만,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은 또 다른 교훈을 가르쳐 준다..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로운 훈계의 목소리이다..
아주 부드럽게, 철부지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음성으로 나직이 속삭이는 가슴속의 심장은, 강태의 심장은 살아있다.
건강하게 살아 박동한다..
재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계속하는 강태..
자신을 때리고, 짓밟고, 유린하고 눈물짓게 했던 재준의 행동과 말,
그리고 무뚝뚝하고 냉혈한, 거칠고 제멋대로인 재준의 성격을 상기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증오심에 불을 붙여본다..
하지만 불씨는 이내 꺼져버리고 이전보다 한층 위력이 강화된, 비밀스럽게 내재된 재준의 이미지가 강태의 눈앞에 또렷이 재생된다..
그것은 충의회의 보스, 이재준이 아니라 스무살의 미소년 '이재준'을 주인공으로 하여 제작된 한편의 영상 파노라마이다..
그 안에 등장한 '이재준'은 수줍어하고, 쑥스러워하고, 강태를 구하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미련하게 적진으로 뛰어든다..
손상된 검은 눈동자를 우울하게 반짝이며 더듬더듬 강태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 속의 재준은 수려하고 청아하고 주술적 매력으로 강태의 감춰진 섹슈얼리티를 자극한다.
강태는 이끌려 가고 싶다.
그에게서 벗어나면 자율로와 질거라고 꿈꿨었지만, 역설적으로 강태는 보이지 않는 더 단단한 족쇄에 얽매여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족쇄의 열쇠는 강태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그래서 강태는 어리석은 것이다..
- 환성에게 전해들은 강태의 아파트로 핸들을 꺾으며 신경질적으로 노란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재준...
짜증이 난다.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하루하루 정도를 더해가는 자신의 초라함 때문에 점점 아래로 곤두박질 치기만 하는 자존심과 이성의 프라이드..
결국은 참지 못하고 아사 직전의 사람처럼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아니,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그의 아슬아슬한 윤곽이라도 동공 안에 담아두고 싶어서
늦은 밤의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너무 화가 난다.
그러면서도 재준의 발바닥은 엑셀레이터에 압력을 가하며 달음박질을 재촉한다.
베란다 창문이 올려다 보이는 아파트 화단 앞에 차를 세우고, 재준은 검은 눈동자를 들어 8층이 어디인지 찾아본다.
맨 가장자리에 위치한 방에만 불이 들어와 있다.
강태가 있는 방이겠지....
안 자고 뭐하는 걸까? 아니면 불을 켜 놓고 자는 건가...?
아마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있겠지...
재준과 함께 살 때에도 강태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부지런한 천성을 타고 태어난 녀석 같았다.
침대에 나란히 누우면 잠이 들 때까지 하는 얘기도
대부분 영화에 관련된 것이거나, 책을 읽고 자신이 느꼈던 생각이나 감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래도 재준은 그의 얘기들이 꽤나 흥미로웠다.
자잘한 기억의 조각들이 재준의 촉수를 예리하게, 아프게 찔러댄다.
이제는 서글퍼진다... 더 비참하다...
재준은 눈동자에 습기를 머금는 자신의 영혼을 호되게 나무란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집 앞까지 찾아와서 병신같이 베란다 창문만 쳐다보고 있는 것도 한심해 죽겠는데...
거기다 눈물까지 흘리려고...??
이재준....정말 가관이다.....못 봐주겠어...
그렇게 자신을 저주하며 허둥대는 듯한 손길로 담배갑을 꺼내어 한 개피를 피워 무는데,
기적처럼 강태의 집 베란다의 불이 켜지며, 강태가 그 특유의 고혹적인 실루엣을 그리며 재준의 검은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재준은 무의식적으로 강태의 표정을 읽기 위해 눈동자에 힘을 주며 정신과 영혼의 모든 감각을 최대한 집중시킨다..
강태의 예쁜 얼굴은 짧은 시간에도 수많은 색깔로 바뀌며 재준을 바보로 만든다..
세상에 둘도 없는 천치가 되었음에도 그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실 자체에 피폐한 갈증과 메마른 가슴을 치유 받던 재준..
그러나 야멸찬 강태는 어느새 몸을 돌이켜 재준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다..
재준은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위해 신속히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 희뿌연 연기를 차양막처럼 분사해낸다..
- "태현형!!"
까페의 푹신한 쇼파에 야트막히 걸터앉아서는 팔짱을 낀 자세로 줄곧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만 바라보는 태현에게 강태의 낭랑한 비음이 들려온다.
태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방긋이 웃고 서 있는 강태에게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준다.
강태가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가까이 오고.. 두 사람 다 오렌지 쥬스를 주문한다.
종업원이 멀찍이 물러나고 비로소 태현과 강태, 둘만의 영역이 확보되자 강태는 태현의 암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며 일상적인 어투로 묻는다.
"할 말 있다면서? 무슨 얘기야??"
그러나 태현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쉽사리 말문을 트지 않는다.
신중하게 고려하고 거듭 생각하기를 반복한 끝에 가까스로 입을 여는 그...
강태는 어리둥절한 낯빛을 보이며 태현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돌려서 얘기할 거 없어..그냥 편하게 설명해 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강태도 정색을 하며 딱 부러지게 우회적 표현의 여지를 일축해 버린다.
태현은 그런 강태의 우선적인 반응에 소소한 안도감을 느끼며 목소리에 좀 더 무게를 싣는다.
"그래...쓸데없는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하나만 물어볼게.. 강태 너, 재준이 좋아하니? 특별한 의미로서 말이야.."
극비의 치명적인 약점이 탄로 난 듯 겁먹은 눈으로 태현의 단정한 시선을 힘겹게 받아내는 강태...
강태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푸는 키워드가 질의의 형태로 태현의 입을 빌어 강태 앞에 던져진 것이다..
어찌 대답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어, 강태는 빨간 입술을 쫑깃거리기만 한다..
입안에서는 수 백 개의 단어들이 서로 먼저 튀어 나가겠다고 싸우는 중이다.
"물어보는 이유가 뭐야..?"
결국 이렇게 어설프고 서툰 반문을 날리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울 뿐이다.
"그냥....너 만날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들었어..
뭐랄까....겉으로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항상 어떤 한가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네가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도 말이야..
그 어떤 한가지가....내가 보기엔, 재준이 같아서...."
"형이 무슨 의도로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되는데 까지는 자신의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강태..
곧 이어 허망하게 그 가치관과 기준을 무너뜨리게 될 것을 짐작하면서도 어줍짢은 반항으로 시간을 끈다..
태현은 조금 답답하다는 듯 엷게 한숨을 내쉬며 강태를 지그시 건너다본다.
사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태현 역시도 그다지 마음이 가뿐한 건 아닌데...
강태까지 까탈스러운 태도를 보이니 여간 난감하지 않다..
그래도 세라에게 들었던 충고를 되새김질하며 다시 한번 입술을 벌리는 태현이다..
"강태야, 너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 .....재준이....좋아하니...?"
태현의 목소리에 약간 강압적인 어투가 담겨 있다.
더 이상 시간낭비 하지 말자는 뜻일 게다..
강태는 우물쭈물 하며 손가락 장난에만 열중한다..
곤란한 딜레마에 빠진 것을 나타내는 동작이다..
그러다가 인정하고 싶지 않는 자신의 감정에 짜증이 솟구치는지 한 손으로 거칠게 검은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며 쇼파의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댄다..
그리고 하얀 치아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눈을 밑으로 내리 깔고는 쇳조각을 씹어 뱉어내는 듯한 느낌으로 대꾸한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찔려서 못 그러겠어..."
이걸로 모든게 확실해졌다.
태현은 오히려 안정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찝찌름하게 가슴 한 구석을 불편하게 하던 앙금이 깔끔하게 씻겨 내려간 듯한 시원함에 숨통이 활짝 트이는 것 같다.
하지만 뒤이어서 슬그머니 틈새를 비집고 낯짝을 내미는 섭섭함 역시 간과하기에는 커다랗다..
그러나 일단, 섭섭함은 차치해 두고 얼른 다음 단계로 진행해 나가야 한다.
시간이 촉박하니까...
"나아....너 정말 좋아했어.. 뭐, 지금까지 여자도 여럿 사귀어 봤었지만 너같은 느낌은 처음이었거든...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완전히 사람을 홰까닥 돌게 만드는 그런거 있잖아... 그게 너한테 있어..
그래서 나도 한동안 너한테 빠졌었고...재준이도 그런 매력 때문에 널 정부로 택했던 걸거야..
근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재준이는....널 정말로 필요해 하고 있다는 거...
내가 널 좋아했던 감정이랑 지금 재준이가 너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차원이 다르다는 거.....그거야.."
강태의 목으로 침이 넘어가는 게 드러난다.
흑빛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띠며 잠겨든다..
재준과의 마지막 섹스를 떠올린다..
그때의 키스와 애무와 그의 목구멍에서부터 흘러나온 신음소리 하나 하나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려 애쓰는 강태..
그가 어떤 손길로 자신을 어루만졌고, 그의 숨결이 어떠한 느낌으로 자신의 육체를 적셨는지...
그걸 생각해보면, 거추장스럽게 뒷덜미를 잡고 있는 의혹과 미움의 갈고리를 말끔히 잘라낼 수 있을 것 같다..
"유치한 얘기로 들릴 지는 모르겠지만, 나....너 포기하기로 했다..
아니, 똑바로 말하자면 재준이한테 양보하기로 했어..
그러지 않으면 내가 재준이한테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께름칙한 상태로 널 계속 좋아하게 될 것 같지도 않고...
아무튼....한가지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재준이 한테는....강태 네가...진짜로 필요하다는 거...."
(63)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갈망했었는지,
당신에게로 가는 이 가없는 사랑을 어떻게 참아내고 있었는지는 당신에게도 다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지금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충만해 있습니다.
- <천년의 사랑> 중 -
자기 방에 딸린 욕실의 커다란 거울 앞에서 몸맵시를 가다듬는 주혁..
검은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빗어 내리고 이젠 제법 윤기를 되찾은 하얀 피부를 문질러 보기도 하고..
푸른색 티셔츠와 흰색 힙합바지를 훑어보며 다른 걸로 갈아입을까-
몇 번이고 생각하다 그만두면서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거울에 비친 남자의 검푸른 눈동자 속에 출렁이는 기대감과 설레임이 주혁을 멋 적게 만든다.
발그레하게 홍조를 띄우며 주혁은 그 남자에게 질문한다.
...............행복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잇는 남자의 대답..
.....아니......그 이상이야....
혁수가 지금 나한테 오고 있거든..
그 애가 오면, 난 드디어 이곳을 떠나게 되거든...
이곳은 평화롭고 안락한 휴식처이지만...나는....
그 애와 함께 전쟁터로 나설 거야...
그리고 손을 꼭 붙잡고 싸울 거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할 세상...
그 모든 것들과 한판 붙어볼 작정이야..
그 애가 내 옆에 있으니까.....난 두려울 것이 없어...
그렇게 사기가 충천한 주혁의 귓가에 목 빠지게 기다리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닿는다..
주혁은 누구냐고 물어 보지도 않고서 성큼성큼 걸어 가 문을 열어 제낀다.
혁수다. 정말 혁수다...
혁수가 웃는다..
아주 예쁘게...슬퍼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꿈만 같다..
주혁은 엉겁결에 혁수를 확 끌어안는다.
갑작스런 주혁의 세찬 포옹에 생경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혁을 마주 안아주는 혁수..
어깨 죽지로 주혁의 따스한 눈물이 촉촉하게 배어드는 것을 느끼자, 조심스럽게 그와 몸을 떼고 두 손으로 주혁의 눈가를 씻어주며 묻는다.
"......왜...울어...?..."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혁수의 말간 눈동자가 약하게 일렁이며..
늘 밑바닥에 깔아두고 있는 서글픔의 그림자가 언뜻 언뜻 정체를 드러낸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그 그림자를 완전히 거두어 줄 수는 없다..
심지어는 주혁 조차도...
재차 생각해 보면 주혁으로 인하여 자리잡게 된 그림자이니...
아니다, 그게 아니다..
주혁의 탓이 아니다..
둘은 서로를 원하는 것뿐이다... 그게 전부다...
주혁은 울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나 자신을 위하여 울어서는 안 된다.
장주혁은 오직....안혁수가 흘릴 눈물을 대신 흘리기만 해야 한다..
그 외의 눈물은....죄악이다..
"그냥....안혁수 네가 너무 예쁘니까...질투 나서 울었어.."
혁수의 도톰한 입술이 작게 벌어지며 픽 하는 웃음이 새어나온다.
고운 눈망울로 귀엽게 주혁을 흘겨보며 특유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내가 예쁘긴 뭐가 예쁘냐...너야말로 뽀샤시한게 여자보다 더 여자 같다..."
"야아...여자 같다는 말 싫어하는 거 알면서...-_-++"
"쿡....알았어.. 짐 다 싼거야..?
태현이랑 세라가 너 퇴원 축하파티 해야 된다고 빨리 데리고 오랬어.. 걔네 둘이 지금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파티는 무슨....뭐 좋은데 갔다 왔다고 그런 걸 하냐? -_-;; 하여튼 이세라, 문태현...극성이라니까..."
괜시리 툴툴거리며 침대에 놓인 가방을 들고 혁수와 방을 빠져나가는 주혁..
그래도 한 달동안 정이 든 장소인지라 완전히 발길을 떼기 전, 다시 뒤돌아 병실 안을 휘 둘러본다..
이 안에서 지내는 동안...얼마나 많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었는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고, 수 차례의 고통에 찬 신음으로 새하얀 벽지를 얼룩지게 했었는지...
그러나 이곳 또한, 거의 대부분을 혁수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절실함으로 채색했던 주혁...
이곳에서의 모든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주혁은 손바닥 가득히 닿아오는 혁수의 어깨를 느끼며 영혼 깊숙이 절감한다..
그리고 무조건 감사하기만 하다..
숨쉬고 있는 것, 움직이고 있는 것, 생각하고 있는 것...이 모두가...
또 한번 주책 맞게 괴이는 눈물을 억누르며 주혁은 한 팔로 혁수의 어깨를 두른 채 병실에서 멀어진다.
짐을 들고 혁수와 나란히 잔디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는 주혁의 모습에 무수한 시선들이 날아와 꽂힌다.
부러움과 경이로움이 반반씩 뒤섞인 눈빛들이다..
오늘만큼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 탐탁하게 느껴지는 주혁은 혁수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더하며 우쭐한 미소를 만면에 퍼뜨린다.
주차장 한 가운데에 세워진 자동차에 이르러 트렁크에 짐을 넣고..
혁수는 운전석에, 주혁은 조수석에 앉는다.
안전벨트를 메고 시동을 건 뒤, 기아를 조정하는 혁수를 주의 깊게 응시하던 주혁...
그의 유난한 눈길을 의식한 혁수가 주혁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동그란 갈색 눈망울이 순하게 반짝이며 주혁을 잡아끈다.
주혁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입술을 가져가고..
혁수는 얼떨결에 주혁의 키스를 받아들인다.
길고 부드럽고 신중한 입맞춤이 이어지고...
한참만에 혁수에게서 입술을 거둔 주혁이 시원스레 웃으며 말한다.
".........출발하자....^^"
- 한달여 만에 태현과 함께 살던 그 아파트로 되돌아 온 주혁..
세라와 태현은 온 집안을 풍선과 색종이 등으로 장식해 놓고, 폭죽까지 터뜨리며 주혁을 반겨 맞았다.
주혁과 혁수가 여독을 풀 틈도 없이, 네 사람은 진수성찬이 그득하게 차려진 식탁을 가운데 두고 모여 앉는다.
술잔이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가뜩이나 말수가 많은 태현과 세라는 경쟁이라도 하듯 입 운동에 여념이 없다.
주혁과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추어내며 신이 난 세라...
"하여간 그래서 내가 딱 브래지어랑 팬티만 입고 섹쉬~하게 쫘-악 걸어 나왔어..
근데 이 인간이 나 보고 뭐라 그랬는 줄 알아??
캬캬캬~~~ 지금 기억도 제대로 안 나는데, 뭐라드라....
아! 얼굴에 떡칠 하면 다냐고...그러면서 나더러 가슴에다 실리콘 집어 넣었다나~~ 크하하하~~~^O^"
"우와~~~진짜야?? 푸하하하하~~ 장주혁 진짜 죽음이다---"
포복절도를 하며 나자빠지는 세라와 태현을 앞에 두고, 주혁은 민망함에 얼굴이 벌개져서는 와락 역정을 낸다..
"아, 그만 좀 해!! 그때 네가 워낙 황당하게 구니까 그랬지-!!!"
"캬캬~~ 야, 장주혁... 내가 이제 와서 확실히 말하는 건데, 나 이 가슴 자연산 이야~~ 실리콘 같은 거 안 집어넣었어...크크~~^^;;"
태현이 '어얼~~'하는 소리를 내며 세라에게 맞장구를 치고, 또 한번 웃겨 죽겠다고 데굴데굴 거실 바닥을 구르는 세라와 태현..
주혁은 원망이 담뿍 담긴 눈길로 두 사람을 째려보다가 난처한 시선을 돌려 슬쩍 혁수의 표정을 살핀다..
당황스럽게도 혁수 역시 배를 잡고 깔깔대는 중이다.. (-_-;;)
도대체 그 얘기가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건지....-_-;;;
주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맥주를 들이킨다..
잠시 후, 거실 안을 꽉 메웠던 웃음소리가 가신 다음..
어느 정도 차분하게 수습된 분위기에서, 세라가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일어나 부엌에서 큼지막한 쇼핑백 하나를 들고 온다.
그리고 혁수와 주혁에게 불쑥 들이민다.
의아한 눈동자를 치켜 뜨며 세라에게 설명을 청하는 주혁..
세라와 태현은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쇼핑백을 열어 그 안에 든 네모난 물체를 꺼내 포장지를 뜯는 주혁..
혁수 역시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내용물이 개봉되기를 기다린다..
금색 포장지에 곱게 싸여 있던 것은, 주혁과 혁수의 얼굴을 합성하여 만든 커다란 사진 액자이다..
"니네 방 벽에다가 걸어 놓으라고 만든거야.. 신혼부부들 방에 보면 결혼사진 있잖아...^^;;"
어색하게 바뀌려는 분위기를 막으려고 태현이 장난스런 어조로 한 마디 던진다.
주혁과 혁수는 쑥스러운 감동에 젖어서 고맙다는 의례적인 멘트조차 해주지 못한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응원으로만 일관해 주는 태현과 세라를 마주하며, 처음에 가졌던 반쯤의 두려움마저 엷어지는 주혁 그리고 혁수...
아까보다 훨씬 담대하고 자신에 찬 음성으로 정상적인 세상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게 된 두 사람이다..
- 태현과 세라가 드라이브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켜주자, 거실의 전등을 끄고 이제 둘이서 같이 살게 된 방으로 들어 온 주혁과 혁수..
서로 네가 먼저 씻으라느니, 짐 정리는 자기가 하겠다느니 얼빵하게 부산을 떨며 세안을 하고,
옷가지와 그 밖의 일상용품들을 정리해 놓던 둘은..
할 일이 끝나고 침묵이 스며들자, 떨떠름한 시선을 각자 딴 곳에 둔 채 시계초침 소리만 셈한다..
불편하게 이어지는 적막을 깨뜨리며 목소리를 낸 사람은 터프한 장주혁이 아니라, 얌전한 안혁수다.. (-_-;;)
"피곤한데...그만 자자.."
".....어어...그, 그래...."
침대에 앉아 있던 주혁은 쭈삣쭈삣 움직여 몸을 뉘이고,
혁수는 스위치를 눌러 형광등의 불빛을 없애고는 사락사락 발소리를 내며 걸어 와 주혁의 옆에 살포시 앉는다..
주혁은 순간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오만가지 생각 때문에 속으로 버둥거린다.
'잘 자~~'라고 한 마디 밤 인사를 나눈 다음에 자야 하나?
자연스럽게 팔 베개를 해 줄까?
아니면 가벼운 굿나잇 키스라도...?
생체 실험실에 끌려 와 묶여 있는 마루타처럼 얼어서 천장만 곧추 바라보는 주혁...
그렇게 바보 같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주혁에게, 그의 정신을 번쩍 깨우는 혁수의 손길이 새털처럼 다가온다..
한 팔로 주혁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그의 가슴으로 작은 얼굴을 파고드는 혁수..
주혁의 심장 박동이 빠르게 그 속도를 증가시키고, 그의 살결이 본능적으로 뜨거워짐을 느끼자...
혁수는 상체를 일으켜 주혁의 입술에 키스한다..
주혁의 두 팔이 무서운 힘으로 혁수를 끌어당기며 조여온다..
몸을 회전시켜 혁수 위로 올라 온 주혁..
혁수의 입술을 열고 들어가 매끈한 혀를 찾아 단단히 휘어 감는다..
혁수의 아랫입술이 탄력 있게 접촉해 오고, 두 팔은 주혁의 등을 끈끈하게 결박하고 있다..
오래도록 혁수의 분홍빛 입술을 탐닉하던 주혁이 엄청난 자제력을 동원하여 입술을 떼어내자, 혁수가 손을 옮겨 주혁의 셔츠를 머리 위로 벗겨낸다..
연이어 어둠 가운데...빛처럼 환하게 시야를 장악하는 주혁의 어깨와 가슴, 허리..
그 위에 무더기로 내려앉는 혁수의 입맞춤...
조금씩...조금씩....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서로의 옷가지들을 제거해 나간다..
마침내 눈부시고 황홀하게 펼쳐지는 연인의 나신이 무한한 감격과 경탄으로 영혼의 깊은 곳을 터져 나갈 만큼 부풀게 하고...
이제 혁수와 주혁 사이에는 아주 작은 빈 공간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혁은 혁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육체를, 육체를 통해 만나지는 혁수의 영혼을 숭배하고 싶은 간절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혁수의 입술이 벌어지며 끓어오르는 신음성을 주혁의 귓가에 뿌린다..
그 애원의 표시에 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혁수의 몸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주혁에게 완전히 소유된 혁수는 환희로운 복종의 쾌감을 맛보며 일시적인 마조히스트가 된다..
반면에 주혁은 이미 혁수에게 종속된 혁수의 노예다..
나의 남자여...나를 짓밟아 다오, 나를 지배해 다오...
나는 평생동안 너의 장난감으로, 남창으로, 종으로 살고 싶다...
안혁수에게, 또 장주혁에게...
서로에게 서로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그건...최후의, 최종의 순수다.....
(64)
주혁과 혁수를 위해 생각나는 대로 둘러댄 핑계이긴 했지만, 태현과 세라의 드라이브는 그런대로 호젓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두 사람에게 안겨주었다.
1시간이 좀 넘게 차를 달려 한강변에 도착한 둘은 습한 물기를 머금고 뺨에 감겨오는 여름밤의 강바람을 타며 천천히 걸어 다녔다.
꽤 늦은 시각인데도 날씨가 무더운 탓인지 많은 그룹의 사람들이 나와서 한가로운 밤 시간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까와는 대조적으로 한 마디 말도 없이 발을 옮기는 데에만 부지런한 태현과 세라..
그러다가, 세라가 먼저 걸음을 멈추더니 계단식으로 지어진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철퍼덕 앉아 버린다.
태현도 잠시 그녀를 내려다 보다가 세라의 옆에 따라 자리한다.
한동안 발 밑에서 찰랑대는 물을 신발 앞부리로 찰싹 찰싹 건드리며 장난을 치던 태현이 고개를 들어 하늘에 시선을 던지며 혼잣말처럼 이야기한다..
"강태랑도 여기 한번 같이 왔었는데...."
세라는 힐끔 눈을 돌려 태현의 옆모습을 쳐다보고는 다리를 끌어올려 무릎을 두 팔로 안으며 입을 연다.
"강태랑은 어떻게 됐어...??"
".....포기한다고 말했지....그리고, 재준이의 감정에 대해서 얘기했고..."
"포기한다.....그건 잘못된 표현이야..그냥....일찍 끝냈다고 말해.."
"풋....그래....일찍 끝냈어..."
"....잘 했어..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래....그럴 것 같다...^^"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얼마나 오래전 일인지...
아니, 단 한번이라도 타인과 지금 같은 상호 교통의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는지...
세라는 태현과, 태현은 세라와 동일한 감성의 유전자 구조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그건 '친밀감'이라는 간단한 단어로는 설명이 불충분한, '우정'이라는 통속적인 관계로도 이야기하기에 부족한,
아주 특별한 일치와 합일의 상태이다..
하지만, '사랑' 이라고 일컫기에는 많은 부분들이 모자란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과 우정 사이' 라는 유치한 문구를 들먹여서 태현과 세라가 공유하고 있는 영혼의 영역을 오염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키스해도 되지..?.."
태현이 약간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세라에게 묻는다.
세라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얼굴을 쳐들고 눈을 감아 준다.
태현은 서서히 세라의 입술로 접근하여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입을 벌려 혀를 섞거나 타액을 교환하는 행위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저 입술을 마주댄 채 가만히...'키스'라는 흔한 애정표현을 빌려, 설명하기 힘든 태현과 세라 두 사람의 교감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두 사람이 완벽하게 닮았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하나의 작업에 불과하다..
태현이 먼저 입술을 떼어낸다.
가슴속에 작은 시내가 생겨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억수같은 비가 퍼붓고 난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은 몇 배 더 정하고 온화한 법이다..
".....세라 넌....짝사랑 해 본적 있냐..?"
어쩐지 상처가 노출되는 듯한 태현의 물음에 세라가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린다.
절대로 비웃는 건 아니다.
"글쎄...그 사람이나를 사랑한 건 아니니까...짝사랑이었다고 해야겠지...?"
세라의 목소리에 담긴 처연함은, 이미 낡아버린 추억이 갖고 있는 퀴퀴한 냄새를 풍긴다..
그래도 태현은 세라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동일한 감성의 유전자 구조를 지닌, 유일한 타인에 대한 예의이다.
"음....시간적 배경은 1996년 3월이야..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때지...
가장 예민하고, 또 가장 순수하고....그리고...가장 우울했던 나의 1996년 봄에 있었던....."
"풋....얘기 한 번 거창하네~~ ^^;"
"뭐....별로 거창한 얘기는 아니야..난 항상 과장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거든..."
"좋아....계속해.."
세라는 다시 입을 열기 전, 길게 한숨을 흩뿌린다.
영혼의 상처를 공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되고 부담스러운 노동이지만, 가끔은 그것이 의무가 될 때도 있다.
"1996년 3월 4일... 고등학생이 된 만큼 공부 좀 열심히 해보겠다고 학원에 등록했어.. 그게 시작이었지...
저녁 7시 40분, 학원 강사가 교실로 들어왔어..
나이는 나보다 22살이 많았고, 수학 선생이었는데...
한 마디로...난 그 남자한테 눈이 멀어 버렸지...아주 지독하게...."
세라가 너무 힘들어 보이기에 태현은 담배갑을 꺼내 한 개피를 권한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세라가 담배를 받아 입에 물고, 태현이 불을 붙여주자 고맙다는 인사 대신 고개를 한번 까딱한다.
탁한 연기 한 웅큼과 함께 새어나오는 그녀의 음성은 다행스럽게도 많이 진정되어 있다..
"쿡....오빠도 내 성격 알지? 무조건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그 사람 쫓아다니기 시작한 거야.. 정말 지금 생각해도 심할 정도였어..
덕분에 그 사람하고 꽤 친해졌지... 날....많이 귀여워 해 줬어...
밥도 같이 먹고...놀러도 다니고....그 사람 부인이 프랑스에 유학 가 있었거든...
그 사람...아들도 둘 있었는데, 착한 애들이었어... 날 잘 따랐고...그 애들이랑 놀아줄 때는...항상 이런 생각을 했지..
내가 얘네들 엄마라면 얼마나 좋을까...
'누나'라는 말 대신, '엄마'라고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얘기하며 세라는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부끄러워한다.
태현은 그런 세라의 모습이 퍽 낯설다..
"그러다가....그 사람이랑 섹스를 했어..
어떻게 해서 섹스를 하게 됐는지...그건 물어보지 마...
그것까지 자세히 얘기하다가는...울어버릴 것 같아서 얘기하기 싫어.."
그러면서도 벌써 울먹이고 있는 세라를 태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잠자코 침묵을 지킨다.
그리고 그녀가 수치스러워 할만한 눈물방울을 떨어뜨리지 않도로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 후로는 습관처럼 만나면 섹스를 했어..물론 개인적인 만남을 얘기하는 거야..
학원에서는-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우리는 영락없는 선생과 제자였어..
신기할 정도로 티가 안 났다는 소리야..
그 사람은...나랑 섹스를 하면서도 많이 갈등하는 눈치였어..
당연히 그랬겠지.... 날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근데도 나랑 섹스하면서 맛보는 쾌감을 뿌리칠 수가 없었나 봐..
평생 모범적으로만 살아 온 사람이 일탈의 쾌감을 알게 되면 벗어나기 더 힘든 법이잖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깊게 빠져드는 거.... 그런 거였을 거야, 아마...."
아래로 향했던 눈동자를 치켜 올리며 힘없이 담배꽁초를 강물로 던지는 세라..
그 동작이 절망적으로 보인 것은 태현만의 착각일까..?
아무튼 이세라는 생각보다 훨씬 강한 여자이다..
"훗....태현오빠....내가 그때 얼마나 순진했었는지 말해 줄게..
난 그 사람한테 아주 당당히 제안했어.. 결혼하자고...
선생님을 위해 모두 버리겠다.. 학교도 중퇴하고, 부모님이 반대하실 게 분명하니까 집에서도 나오겠다...
난 확실히 믿었던 거야...그 사람이 날 사랑한다고...
쿠쿡....정말 나는 너무 몰랐었어... '남자'라는 족속에 대해서..."
세라는 소름이 돋는지 손바닥으로 양 팔을 문지르며 몸을 옹송거린다.
비릿하게 번지는 그녀의 자조성 짙은 냉소가 태현의 암갈색 눈동자에 따끔거리는 통증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세라 앞에서 찡그린 표정을 짓는다는 건 오만한 행동이다..
적어도 지금 이순간 만큼은....
"그 사람은 말도 안된다면서 펄쩍 뛰었지...
어정쩡하게 지속되는 관계가 짜증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어..
난 정말....미치도록 사랑했으니까.....
근데...꼬리가 길면 밟히는 거잖아... 들켰지, 뭐...
그 사람 마누라는 이혼하자고 악악거리고, 학원에서는 해고당하고...
나도 마찬가지였지.... 소문 때문에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정도였어..
그래도 난....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아니었어.... 며칠 뒤에....자살을 했거든...."
결국은 차가운 눈물줄기가 세라의 뺨 위로 서투른 자국을 남긴다.
그녀의 속눈썹에 짙게 발려져 있던 보라색 마스카라가 보기 흉하게 번지고, 간신히 억제하고 있던 어깨의 진동은 연약한 흔들림으로 변해 나타난다..
그럼에도 세라는 허리를 꼿꼿이 편 자세로 독하게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 사람이 죽고 나서야...깨달은 거야..
그 사람이 사랑한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는 걸...
그랬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일 수 있었다는 것도...그때서야 알았어..."
그렇게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 나서, 세라는 버티고 있던 고개를 푹 꺾으며 몸을 공처럼 둥글게 웅크리고는 격렬한 흐느낌을 토해낸다.
그래도 이세라는...참 강한 여자임에 틀림 없다..
태현은 그녀를 위해.. 보잘 것 없지만 세라에게 필요할 듯한 자신의 가슴을 빌려주기로 한다..
그리고 팔을 내밀어 가엾게 떨고 있는 세라의 몸을 품어준다..
세라의 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울음의 파고가 잦아드는 그녀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태현...
그녀에게 또 다른 이야기가 남아 있다면, 좀 더 아파하는 심정으로 귀를 열고 기다려 주련다...
얼마 후, 태현의 품에서 물러나 앉은 세라가 홀가분해 보이면서도 허탈한 표정을 한 채 다시 입을 연다.
"사실....오빠 처음 봤을 때...엄청 놀랐다..."
".....왜애..?..."
"오빠랑 그 사람이랑....너무 닮았거든...
키도 비슷하고, 눈 큰 거랑...피부 하얀 것도...
그 사람이 더 마르긴 했지만, 정말 똑같이 생겼어..."
".....그렇구나...."
"솔직히....오빠를 통해서 그 사람을 볼 때마다...오빠한테 사귀자고 말하고 싶은데....하지만 그건 옳지 않아..
오빠 안에서 그 사람을 보는 건....나쁜 짓이야...내가 오빠한테 그런 짓을 한다면 정말 싸가지 없는 년이지..."
세라는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너무 어려운 것들을 간파하고 있다..
그것도 체험적인 사실을 통해서 말이다.
태현은 그 언젠가 강태를 보며 떠올린 적이 있는 문장을 씁쓸하게 되새긴다..
'가끔은...신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신은 결코 잔인한 분이 아니실 거라고...
단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가 터무니 없이 좁기 때문에,
그래서 빚어지는 오해일 뿐이라고...
"내가 오빠를 문태현 그 자체로만 바라볼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지우고 문태현 그 자체만을 생각할 수 있을 때... 그때 오빠한테 얘기할 거야...
.....내 남자가 되어 줄 수 있겠냐고....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그때...오빠가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꼬리를 흐리며 수줍게 웃어 보이는 세라...
여전히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이지만, 생떽쥐베리가 말했듯이, 중요한 본질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보이는 현상은 허구....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 때로는 더 진실하고 아름답다.
태현은 자신과 동일한 감성의 유전자 구조를 지닌 이 여자가, 어쩌면 자신의 전부가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또 한번 세라에게 따뜻한 입맞춤을 보낸다...
(65)
나는 이제 한쪽 눈만 뜨고 한쪽 귀만 열고
한쪽 심장으로만 숨쉴 것이네...
내 안에 있는 당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아, 다른 한쪽은 모두 당신 것이다...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중 -
혼자 마시는 술은 사람을 정말로 울적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
얼얼하게 차오르는 취기는 상승작용을 일으키기보다는 심적 컨디션을 저기압을 끌어내린다.
지구 전체에서 오로지 자신만 홀로 외지에 고립되어 있는 듯한 얼토당토않은 착각이 점점 자라나,
나중에는 '외롭다' 는 세 글자를 떠올리며 한없이 천박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뿐인 시간과 공간을 술로나마 달래지 않으면..
가슴속으로 휭하니 지나가는 바람소리 때문에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 같다..
재준은 느릿한 걸음걸이 미끄러지듯 바의 테이블에 가까이 간다..
선반에 놓인 스카치 위스키 병을 꺼내 뚜껑을 열며, 목구멍 너머로 스물거리며 기어오르는 응어리들을 꿀꺽 삼켜 넘긴다..
우습게도 날짜가 가면 갈수록 낯설어지기만 하는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재준의 시야를 흐려 놓는다..
권태롭기만 했던 일상이 언제부터 신선하고 위력적인 고독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는지....
물론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재준은 더욱 허전해진다..
애초에 가치를 부여하지 말았어야 했던 빈 자리였는데...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주워 담기엔..추스리기엔 버거운 감정의 조각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박혀있다..
그것들은 가시처럼 돋아 나 재준의 민감하고 여린 영혼의 일부분을 사납게 쑤셔댄다.
곳곳으로부터 가해지는 까끌까끌한 통증을 덜어내려고...
선이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술잔을 비우는 재준..
한창 화끈거리는 작열감을 음미하고 있는데, 유난히 궁상스러운 멜로디를 동반한 초인종 소리가 재준의 얇은 고막을 때린다..
재준은 의문스런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1층으로 내려간다.
인터폰이 부착된 액정화면에 나타난 사람은, 믿을 수 없게도 강태이다..
재준은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며 제대로 가누어지지 않는 기다란 몸을 가까스로 버티고 선다.
띵-하게 울려오는 관자놀이를 검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엇갈리는 박자로 현관을 향해 발을 내딛는 재준..
문을 열기 전, 허파가 찢어져라 잔뜩 숨을 들이 마셨다가 다시 내쉰다..
이럴수가....진짜 강태다...
무표정한 얼굴로, 감흥 없는 시선으로 물끄러미 재준을 마주보는 남자는...
아무리 눈을 감았다 뜨고 보아도 틀림없는 강태이다..
"....나 계속 여기 이렇게 서 있어야 돼..?"
새침한 목소리로 톡 쏘듯이 물어오는 강태의 억양이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듣고 보니 반말을 쓰고 있다..
존댓말 속에 서려있던 공손함과 뻣뻣함 대신,
적당히 분방하고 애교스러운 말투가 무척 생소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이다..
재준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 강태가 들어올 만큼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강태는 훌훌 신발을 벗고 나무가 깔린 마루 위로 올라선다.
주객이 전도된 듯한 상황....
재준은 멍청해진 얼굴로 강태의 뒤를 따라 들어오고..
그런 재준에게 무심한 음색으로 묻는 강태..
"뭐하고 있었어..??"
"....어어...저어...수, 술 마시고 있었어..."
미묘하게 떨려 나오는 저음은 재준의 낯빛을 달아오르게 하기 충분하다.
아이큐 140을 넘는 우수함을 자랑하던 그의 두뇌는 백치의 그것으로 둔갑하여 고유의 기능을 멈추었다..
"매일밤 술에 쩔어 있다더니... 진짜였구나?.."
피식 가벼운 웃음을 날리는 강태의 빨간 입술과, 그에 박자를 맞추어 살그머니 바스라지는 흑색 눈매가 재준의 연약한 심장을 잔인하게 고문한다..
이건....정말 견디기 힘들다..
바로 눈앞에 두고서도 손가락 하나 뻗치지 못하는 초라함...
그리고 이어지는 영혼의 미어짐...
그럼에도 보내주고 싶지 않는 모순된 자아의 열망...
이런 게....흔히 떠들어대는 '사랑' 인가...?
그렇다면 '사랑' 이란...참 무서운 거군...
아주 무시무시해... 대단한 파괴력을 가졌어...
"나도 한잔 줘.."
그렇게 한 마디를 던지고 2층을 향해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는 강태..
바에 당도하자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와 막 뚜껑을 연 듯 보이는 스카치 병,
그리고 빈 유리 글라스를 살짝 찡그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털썩 의자에 주저 앉는다..
재준은 어물쩡 거리다가 흠칫 몸을 움직여 카운터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선반에 진열된 유리잔들을 훑어보며 과장되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입을 연다..
"뭘로 줄까...? ....맥주..??.."
"아니...네가 나한테 잘 만들어 주던거 있잖아.."
재준은 선선히 스퀴저와 셰이커를 꺼내고, 조그만 냉장고에서 필요한 과일들을 가져다가 익숙한 솜씨를 발휘한다.
한쪽 손으로 턱을 받친 느긋한 자세로 재준이 하는 양을 주시하는 강태...
그의 집요한 시선에 혹시라도 세미하게 비치는 세포의 경련을 들키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재준은 칵테일 '데이지'를 완성시키고, 강태에게 선사한다..
한 모금 맛을 본 다음에 손가락으로 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리며 옅은 레몬색 빛깔의 액체를 탐구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옆에 앉은 재준에게로 불현듯 눈길을 옮기는 강태..
자기도 모르게 줄곧 강태의 옆얼굴에 시선을 머물고 있던 재준은, 강태와 똑바로 눈동자가 마주치자 뭔가에 데인 사람처럼 움찔한다.
그리고 후다닥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운다..
강태는 그런 재준의 우스꽝스러운 제스츄어에는 관심도 없는지, 여전히 도도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왜 왔는지 물어보지도 않아?"
강태는 약간 기가 차다는 식으로 건들거리며 질문을 내뱉는다.
재준의 서투름을 놀려대는 것 같기도 하고, 재준을 사로잡은 자신의 독점적인 매력을 뽐내는 것 같기도 하다..
재준은 슬슬 구석자리로 몰리고 있다는 느낌에 입안이 바짝바짝 타 들어간다..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나.....계약하러 왔어..."
".....????"
재준은 다시 강태의 예쁜 얼굴로 눈동자를 모으지만 이번에는 강태가 그의 시선을 피한다..
그리고 일부러 지극히 메마르고 사무적인 어조로 가장하기 위해 긴 앞 머리카락으로 시야를 차단한 채,
직장 상사에게 보고를 하는 부하 직원처럼 딱딱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계약으로 시작했다가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 관계도 끝났었잖아..
그러니까 관계를 다시 시작하려면 새로 계약을 맺어야 하는 거 아냐??"
강태의 이야기의 요지가 전달되어 오자, 재준은 하마터면 벌떡 퉁겨져 일어날 뻔 하는 것을 불굴의 인내력으로 소멸시킨다..
그러면서 짐짓 이해가 안 가는 척...되묻는다..
".....계..약...?.."
"응, 계약.. 조건은 간단해.. 한 마디로 네가 내 애인이 되는 거야..
나도 네 애인이 되는 거고.. 계약 기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무제한..!
" ....어때? 조건에 동의 해..??"
고려해 볼 필요조차 없는 제안이지만 재준은 선뜻 입술이 열리지 않는다.
대신 목구멍 전체가 무지근하게 경직되는 것이...
냉정하게 외면하고 있었던 감정의 자락들이 한꺼번에 밀려나오는 듯 하다..
그저 눈빛으로만 절대적인 찬성을 표명하는 재준을 보며..끝끝내 강태는 호탕한 파안대소를 분출하고 만다.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입을 가리며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힌 채 큰 소리로 웃어 제끼는 강태...
재준은 무슨 말이라도 얼른 해야겠다는 생각에, 굳어버린 성대를 열적은 헛기침 몇 번으로 풀어보려 한다..
그러나 연달아 재준보다 선수를 치며 더욱 그를 벙찌게 만드는 발언을 서슴없이 뱉어내는 강태..
"하하하~~!!! 이재준, 지금 보니까 정말 귀엽다~~^O^"
"...뭐, 뭐라구..??..."
"아냐, 아냐... 또 얘기하면 너 화낼 것 같다..^^; 오랜만인데...화내는 얼굴 보고싶지 않아..."
싸늘하게 얼어있던 강태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들고..
재준은 또 자동적으로 그 해빙의 마법에 홀려 정신이 멍해짐을 느낀다.
재준에게 숨을 돌릴 기회도 주지 않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재준의 무릎을 새로운 의자로 선택하는 강태..
재준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그의 검은 눈망울을 안쪽까지 깊이 들여다보며, 특유의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마술을 부린다..
"......보고싶었어...."
"......나도....."
텁텁하게 갈라지며 허공을 휘젓는 재준의 음성..
자신의 내부에 위치한 감정의 실체를 숨김없이 담아 나타내고 있는,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투명한 재준의 까만 심연...
그는....스무살의 청초한 미소년이다...
강태와 동갑내기 스무살 청년, '이재준'...
강태로서는...그 정도면 만족이다..
재준의 팔과 가슴이 강태의 몸을 완강하게 붙들며 진저리를 친다..
밀착된 가슴과 가슴을 통해 전해지는 불규칙적인 맥박 소리는 기묘한 그들만의 언어가 되어 서로에게 같은 말을 속삭인다.
완전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두 사람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좀 더 은밀하고 친숙한 공간으로 이동한다..
솔직히 그들은 급하다..
이제껏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껍데기 같은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느라 가둬 두어야만 했던
갈망과 열정을 마음껏 표현하기엔, 한시가 절박하고 안타까운 지경이다..
허겁지겁 침대 위로 함께 쓰러진 둘은 달구어진 손놀림으로 인의 찬란한 육체를 가리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천조각들을 빠르게 떨구어낸다..
강태의 나신이 영혼의 눈을 아득히 밝히자, 재준은 육신의 시력을 상실하게 될 것 같은 위기감에 북받쳐..
강태의 귓전에 간절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매일 매일...네 생각만 했어...너 안고 싶은 생각 때문에....미치는 줄 알았어...."
강태는 재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는 것으로 무언의 대답을 대신한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의 조종사처럼...
목숨을 위협하는 갈증 앞에서 몇 방울의 생수에 발악적으로 매달리듯...
재준의 입술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강태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구를 다 준다해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예뻐서...
재준은 그 순간, 자기 자신에게 약속을 한다..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강태의 영혼에 생채기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기필코 자신의 손에 그 자의 피를 묻히고 말겠다고...
그리고...쾌감과 고통의 교차점에 널브러져서 가냘픈 허리를 한껏 지탱하며 재준의 단단해진 육체를 받아들이는 강태에게...
재준은 목구멍 아래에 꽉 잠겨서 쉰 듯한 소리를 내는 성대를 울려...
무시무시한 한 마디를 읊조린다..
".....강태야.....사랑..해...."
자신의 몸 안을 충만하게 채우는 재준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간직해 두며...
강태의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은 좌절이나 불행이 아닌, 그것의 반대급부였다...
오르가즘-66 -
아, 이처럼 넘치는 사랑을 내게 주려고 삶은 그토록 인색했던 것이었을까...
이제까지의 시련은 그를 내게 보내려는 신의 단련이었을까...
- <천년의 사랑> 중 -
맨살에 소복이 닿아오는 시트의 서늘한 감촉이 강태로 하여금 좀 더 달콤한 수면을 즐기라 손짓하지만,
가늘게 뜬 실눈 사이로 살풋이 새어드는 환한 햇살 때문에 반강제로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강태..
시야를 틔우자마자 강태의 동공이 재준의 하얀 얼굴로 꽉 메워진다.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는 노란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올리니, 단정한 선을 이루는 재준의 이마가 드러나고..
그 작은 손길에도 퍼뜩 잠에서 깨어나는 재준...
몸에 배인 습성은 어쩔 수 없나보다..
눈을 뜨고 강태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재준의 입술이 방싯 벌어지며 청아한 미소를 짓는다.
시트 안에서 팔을 뻗어 강태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전례없이 다정한 음성으로 묻는 재준..
"...잘 잤어..?"
강태는 손으로 재준의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주억인다..
그리고는 재준의 앙증맞은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긴다.
그렇게 살짝 간지럼만 태우고 그만 두도록 가만 놔 둘 재준이 물론 아니다..
재준은 힘있게 강태의 허리에 두른 팔을 자신의 복부 쪽으로 가져오고,
나머지 한쪽 팔까지 사용하여 강태를 녹여 버릴 듯이 품으며 그의 입술을 공략한다..
한참동안 홀린 사람처럼 서로의 입술을 빨아대던 재준과 강태..
그들만의 순결한 성역의 출입문을 함부로 벌컥 열어제끼는 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은 놀라서 맞대고 있던 입술을 분리시키고,
서로를 옭아매고 있던 팔도 느슨하게 풀며 반갑지 않은 불청객에게 시선을 모은다..
침실 입구에서 강태와 재준보다 훨씬 더 아연한 표정을 한 채 서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환성이다..
매일 아침 9시만 되면 칼같이 빌라의 현관에서 걸어 나오는 재준인지라...
30분이 넘도록 모습을 비치기는커녕 늦는다는 연락도 없자 혹시라도 재준이 타 조직에게 습격을 받은 것은 아닐까-
급박해진 심정으로 달려 온 환성..
그런데, 자신의 불길한 예상이 적중된 것만큼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버렸다.
침대 시트로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알몸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만한 두 사람이..
마치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달라 붙어서는 게걸스럽다 할 정도로 서로의 입안을 탐색하는 그 광경은...
오히려 목격자인 환성을 더욱 민망스럽게 만들만큼 노골적이고 자유스럽다..
"죄..죄송합니다, 회장님..하도 안 나오시길래 전 또 당하신 줄 알고.."
재준은 아차 하며 시계가 9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강태의 보드랍고 살가운 손길에 취해 늑장을 부리던 자신이 무안하게 느껴진 재준은 황급히 매무시를 추스리며 상체를 세운다..
대조적으로 강태는 여전히 생글생글한 미소를 띄운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천연덕스레 환성에게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이네요, 환성씨...^^"
"예..도련님..."
외출준비를 하려고 욕실로 들어가는 재준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며 조심스럽게 일의 전모를 짚어보는 환성..
재준은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는다고 부산을 떤다.
그런 재준에게 입고 나갈 정장을 챙겨 주려고 침대에서 일어서는 강태..
흰색 시트로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 몸을 둘둘 말아 감고는 옷방으로 가서 연회색 세미 정장을 골라 가지고 온다..
재준이 옷을 입는 동안 강태도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외양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재준과 같이 거실로 나온다.
거실에서 기다리던 환성이 언제나처럼 짜여진 자세를 취하며 재준의 곁에 따라 붙는다..
재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강태에게 물어본다.
"오늘 어디 갔다 올거야..?"
"집에 가서 물건들 갖고 와야지..^^"
"혼자 할 수 있겠어? 애들 보낼까..?"
"아니야, 됐어.. 태현형이랑 같이 옮기기로 했어.."
"그래? 그럼 이따 저녁 때 태현형이랑 사무실로 와..밥이나 같이 먹게..."
"와아~~진짜? ^^ 알았어.. 출발하기 전에 전화할게.."
함박웃음을 그득하게 퍼담으며 귀염성이 물씬 배어나는 목소리로 지절대는 강태에게 가벼운 베이비 키스라도 해 주고 싶지만,
직속부하가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재준은 자신의 타이틀을 생각하여 자제하기로 한다..
'갔다 올게..'라는 한 마디를 던지고 문을 향해 몸을 돌리려 하는 재준의 인내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끌며 재준의 하얀 뺨에 입술 자국을 새기는 강태..
애써 참으려고 노력하지만 틈을 막지 못해 터져 나오는 환성의 웃음소리와 함께 집을 나서는 재준의 새로운 아침은...
처음으로 그의 마음속에 숨겨진 악기를 연주할만한 여유와 생기를 재준에게 안겨준다..
들릴 듯 말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경쾌한 발자국 소리를 내는 재준을 바라보며..
환성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를 자신에게 제시한 강태의 능력과 결단에 갈채를 보낸다..
- 재준의 사무실로 향하는 차안에서, 강태는 문득 말쑥한 정장이 아닌
편안한 캐주얼 복장 차림으로 재준을 만나러 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연한 미소를 그려내는 강태에게 태현은 핀잔 섞인 눈길로 타박을 준다.
"어이그~~ 저 피식피식 웃는 것 좀 보게??
어젯밤 내내 같이 있었으면서 꼭 몇 년만에 만나러 가는 사람 같이 그러냐? -_-+"
"내가 뭘~~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괜히 시비야..."
"쳇...이럴거면서 튕기기는 왜 튕겼담?? 하여튼 넌 아무리 봐도 여자같은 속성이 다분해.."
"형!!! -_-+++"
강태가 제법 날카롭게 눈꼬리를 찢으며 태현을 흘겨보고 꽥 소리를 지르자, 태현은 운전대를 잡은 채 키들거리며 조금 더 강태를 놀려준다..
그러다가 다시 잠잠해 지자, 이번에는 암갈색 커다란 눈동자를 호기 있게 빛내며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식으로 어깨를 움찟거리며 입을 연다.
"야, 근데 너도 이번에 바캉스 못 갔다 왔지?"
"바캉스..? 못 갔지....그럴 틈이 있었나, 뭐..."
"그러니까 우리...재준이한테 여행 가자고 조르자!!"
"여행...??"
"응.. 재준이 동해안 쪽에 호텔 하나 갖고 있잖아..
작년에도 나 친구들이랑 여름에 거기 가서 놀았었거든..가자~~ 네가 조르면 재준이도 같이 갈 거 아냐~~"
여행이라.... 귀가 솔직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강태 역시 생기 있는 눈빛으로, 기대감이 서린 표정을 내비치며 반음정도 고조된 음색으로 태현에게 질문한다.
"그럼 형이랑 나랑 재준이, 셋이서 가자구?"
"미쳤냐~~~!! 나만 왕따 되게...-_-;; 내 친구들이랑 같이 가자! 사람 많아야 재밌지~~"
새로운 사람들과의 사귐과 어우러짐...
분명 강태의 구미에 당기고도 남을만한 이벤트이며,
무엇보다도 재준과 함께 아기자기한 추억들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강태는 더 망설이지 않고 결정을 해 버린다.
그러고 나니, 태현이 데리고 온다는- 앞으로 새 친구가 될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진다..
"그럼 재준이한테 얘기해 보자..근데, 형 친구들 몇 명이나 올 건데..?"
"어어~~ 3명.. 두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여자.."
"뭐 하는 사람들 인데? 학교 친구??"
"남자애 둘은 나랑 같은 학교 다녔었는데, 사연이 좀 있어서 지금은 학교 안 다녀.. 여자애는 직장 다니고...
뭐어...얘기할려면 복잡해.. 나중에 만나면 다 알게 될텐데 뭘 그렇게 궁금해하냐??"
"그냥...워낙 평범한 내 또래 애들을 안 대하고 사니까 혹시 잘 어울리지 못하면 어쩌나 해서..."
"쿡...그런 걱정은 하덜 마라.. 걔네들도 평범하다고는 절대 말 할 수 없으니까...^^;;"
태현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뚜렷하게 잡혀오지는 않지만..
왠지 새로 만나게 될 그들은 무척 특별한 느낌으로 각인될 것 같다는 오묘한 예감에 강태는 마음이 설렌다..
충의회의 본거지인 종로에 위치한 재준의 사무실 건물에 도착하자,
강태를 알아 본 충의회의 조직원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강태의 등장에 의아해 한다..
강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이고는 성큼성큼 재준의 사무실이 위치한 6층으로 올라간다..
전화를 받고 있떤 비서 역시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태현이 장난스레 '우리 얼굴 처음 봐요?' 하고 묻자
인터폰을 눌러 재준에게 강태와 태현의 방문을 알린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재준은 누군가와 심각하게 통화를 하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강태를 향해 눈웃음을 쳐 보이고, 함께 온 태현에게도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강태는 사무실 중앙에 배치된 쇼파로 가서 앉으며 재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애들 24시간 대기시키고, 기집애들 입단속 똑바로 해..
괜히 말 새어 나가서 시끄러워지면 골치 아프니까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지어.. ...그래, 수고했다.."
언뜻 듣기에는 살벌한 내용의 이야기인지라, 강태나 태현 둘 다 머쓱한 얼굴로 재준을 빤히 응시하고..
통화를 끝낸 재준이 방금 전의 냉랭한 음성과는 사뭇 다르게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강태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입을 연다..
"물건은 잘 옮겼어?"
부드럽고 나지막한 재준의 음성에 강태가 환하게 웃으며 '응' 이라고 대꾸하고, 다시 맞은편에 있는 태현과 시선을 맞춘다.
태현이 눈으로 신호를 하자, 강태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는 재준의 팔에 엉겨붙으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_-;)
"재준아~~ 있잖아....나 부탁이 있는데....들어 줄 수 있어..??"
흑빛 눈동자를 영롱하게 반짝이며, 탐스러운 입술을 귀엽게 쫑긋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강태...
재준은 눈알이 뒤집힐 것만 같은 느낌에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뭐든지 말해 보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서 지켜보는 태현은 강태의 여우 짓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_-;) 흥미로운 기색으로 주의 깊게 관전한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강태의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몸짓...
"저기~~ 나아~~~ 바닷가 놀러가고 싶어! 지금 휴가 시즌도 끝나서 사람도 별로 없을텐데...
그러니까 재준아~~~ 우리 바닷가 놀러가자~~ 응??
태현형이 다른 친구들도 데리고 온다니까 다같이 가면 재밌을거야~~ 응??"
태현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강태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재준은 강태의 살인적인 미소와 교교한 눈짓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판단능력을 상실한다.. (-_-;;)
너무나 수월하게 재준의 응낙을 얻어내자, 자신에 대한 재준의 애정에 자부심을 두둑이 느끼며 우쭐해지는 강태였다..
(67)
'만남의 광장'으로 차를 진입시키며 재준과 강태가 타고 올 흰색 아카디아가 있는지 찾아보는 태현..
옆에 앉은 세라가 안전벨트를 풀고 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태현에게 질문한다.
"아직 안 왔어?"
"응, 차가 안 보이네... 곧 오겠지, 뭐.."
주차요원이 지시하는대로 차를 세우고 내려서 기지개를 한번 쫙 펴는 태현..
세라는 타박타박 통굽샌들 소리를 내면서, 태현과 세라의 뒤를 따라
적당한 곳에 주차시키고 차밖으로 나오는 주혁과 혁수 쪽으로 폴짝거리며 뛰어간다..
"재준이랑 강태는 아직 안 왔대.. 걔네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지??"
"좀 있으면 직접 보겠네...^^"
혁수가 천진한 미소를 빛내며 세라의 말을 받아주고
어느새 세 사람 곁으로 다가 온 태현은 괜히 주혁의 몸을 툭툭 건드리면서 장난을 걸다가
멀리서 달려오는 흰색 아카디아를 발견하고 반색을 표하며 외친다.
"어, 저기 온다!! 헤이~~~!! 여기야, 여기!!"
휙휙 팔을 뻗어 휘저으며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태현을 - 그 옆의 세 사람도 물론 포함하여 - 향해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재준의 자동차..
짙게 썬팅이 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태현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시하는 가운데, 거의 동시에 차문이 열리면서 재준과 강태가 모습을 드러낸다.
두 사람과 가까이 마주서자, 강태를 올려다 본 채로 대뜸 탄성부터 내지르는 세라..
"우와~~~ 얘 진짜 이쁘다!! 장난 아닌데?! 야, 네가 강태지??"
"어어...반갑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강태도 워낙 스스럼없이 생경한 분위기를 허무는 세라의 태도에 멋 적은 웃음을 띄우며 경계심을 거두고,
태현은 신이 나서 재준과 강태, 그리고 주혁과 혁수, 세라에게 서로를 소개하느라 한바탕 입담을 자랑한다.
그러더니 불현듯,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포착한 것처럼 얼굴 가득 장난기가 다분한 웃음을 뒤집어쓰며 명랑한 음색으로 조잘댄다..
"야아~~ 가만히 보니까, 이재준이랑 장주혁이랑 닮았다!!
오오~~ 피부 허연 거랑 눈매도 비슷하고, 코도 똑같이 생겼어. 푸하하할~~"
"어머, 진짜 그렇네?? 형제 같다, 둘이--^^;"
주혁과 재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신기해 죽겠다는 듯 눈동자를 파릇하게 반짝이는 세라와,
되도록 웃음소리를 죽이려고 고개를 딴 데로 돌린 채 쿡쿡거리는 혁수와 강태..
그리고, 쑥스러워하는 주혁과 재준을 골려주는 게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큰 소리로 폭소하는 태현...
재준은 가뜩이나 어색하기만 한 사적인 만남의 자리에서 스타일을 구기는 듯한 생각이 들자, 일부러 무뚝뚝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배고프니까 밥부터 먹자, 태현형...-_-++"
- 식사 분위기는 의외로 굉장히 화기애애했다..
천성적으로 사교성이 발달한 태현과 세라는 종횡무진 식탁 위의 대화를 주도했고,
웃음이 많은 혁수와 강태는 연신 듣기 좋은 웃음소리와 적절한 반응을 보임으로 자칫하면 썰렁해진 뻔한 무드도 활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
주혁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태현이나 세라가 짖궂은 농담으로 공격해 올 때마다 재치 있게 받아 쳤고,
재준은 거의 침묵을 지키는 편이었지만 어쩌다 한번 날리는 멘트가 좌중을 완전 뒤집어지게 했다.. (-_-;)
식사를 마치고 재준을 앞장 세워 다시 동해안을 항해 출발하려는 여섯 사람..
각기 차에 타기 위해 발을 옮기는 데, 태현이 몸을 배배 꼬며 어린애처럼 징징댄다..
"아우~~ 밥 먹었더니 잠 와 죽겠다-!! 이재준! 네가 내 차 운전해. 나 자야겠어.."
"....-_-++ 그럼 내 차는 어쩌라구? 강태 운전 못 하잖아.."
태현은 커다란 눈동자가 반쯤 감긴 상태로 허리를 비틀며 졸음 운전은 위험하다느니 어쩌느니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기 시작하고..
보다 못한 혁수가 입을 열며 나선다.
"알았어, 문태현.. 내가 재준이 차 운전할테니까 넌 주혁이랑 같이 타.."
이렇게 해서 주혁은 태현과 함께, 혁수는 강태와 함께, 그리고 재준과 세라가 한 차에 몸을 싣고 '만남의 광장'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세라는 재준이 운전석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수다를 쏟아낸다..
"야야.. 너 진짜 보스 같이 안 생겼어..
난 조직보스라고 하길래 TV에 나오는 것처럼 덩치 이따만하고 깍두기 머리에 뒷목 접히고 이럴 줄 알았거든??
근데 너는...맞고 다닐 것 같애.."
"...그래..? 그런 애들도 있긴 있어.."
"그리고 강태 말이야, 정말 환상이다~~ 남자가 어쩜 그렇게 이쁘냐?? 아니, 예쁜 걸 떠나서 진짜 섹시하더라~~
너나 태현오빠나 뻑 갈만도 하지...
아아~~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게 한심스러워진 건 오늘이 처음이야.. -_-;;"
격양된 어조로 과장스런 몸짓까지 동원하며 강태의 미모에 대해 감탄사를 늘어놓는 세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재준은 슬그머니 입 꼬리가 귀 쪽으로 말려 올라가는 것을 점잖게 제어하고.. 짐짓 태연한 기색을 유지한다..
그리고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해 준다는 것이 못내 어설픈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얼버무리는 듯한 어조로 질문을 던진다..
"너도 예쁘게 생겼는데 왜 애인이 없냐?"
생각지도 못한 재준의 발언에 세라는 눈망울을 큼지막하게 뜨더니, 곧이어 푸훗-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실소를 터뜨린다.
"야, 나 이거 다 화장발이야.. 벗겨내면 전혀 이쁜 얼굴이 아니지..
그리고 너 몰라? 나 태현오빠 좋아하잖아.."
재준은 자기가 나서서 스스로를 '화장발'이라고 폭로(?)하는 세라가 재미있어서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근데 태현형은 너 여자로 생각 안 한대?"
"아니, 아직 사귀자고 말 안 했어."
"네 성격 보니까 그런 얘길 망설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의외다??"
"쳇...-_-++ 이래 뵈도 긴 사연이 숨어 있으니까 더 이상 물어 보지 마.. 그렇게 독촉 안 해도 단단히 결심하고 왔으니까.."
샐쭉하니 눈매를 가늘게 좁히는 세라를 보며 넉넉한 웃음을 띄우는 재준..
그의 해사한 얼굴을 곰곰이 관찰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지하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라였다..
- 어느 정도 친해지기 전까지는 상대방에게 먼저 핀치를 건네는 성격이 못 되는 강태는 곁눈질로 옆에서 운전을 하는 혁수를 힐끔거리고...
혁수 또한 내성적인 품성의 소유자이기에 그런 강태의 시선을 얼마간 묵묵히 받아 내기만 한다.
그러다가 서먹한 공기를 맡아내기 답답한 지 강태가 입술을 떼려 하는데, 혁수가 선수를 친다.
"태현이한테 네 애기 많이 들었어. 태현이가 말한 것 보다 실제로 보니까 훨씬 잘 생겼다.."
"쿡...잘 생겼다고 표현해 줘서 고마워..예쁘다는 말은....들으면 기분이 별로야..-_-;;"
"근데 정말 여잔 줄 알았어, 딱 보고...남자애가 너처럼 부드러운 선을 갖기도 힘든데.."
"아아~~ 형 미술 전공한다고 했지??"
"으응....그랬었지...."
말꼬리를 우물우물 흐리며 과거형의 시제를 사용하는 혁수..
강태는 무언가 혁수의 개인적인 부분을 자신이 건드렸다는 사실을 재빨리 눈치 채고 서둘러 말을 뱉어낸다.
"나는 내가 굉장히 남성적으로 생겼다고 자부하는데 말이야...남들 눈에는 왜 그렇게 보이는 지 모르겠어.."
"글쎄...내가 봤을 땐, 네 골격이 곡선적이어서 그런 것 같아..
우리 혁이도 선이 가늘긴 하지만 형태가 직선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강한 인상을 주는데, 넌 반대야..그래서 되게 여려 보여..."
"오오~~그렇구나...근데 혁수 형, 원래 주혁이 형을 '혁이'라고 불러?? ^^;"
유별나게 애정이 묻어나는 호칭을 자신의 연인에게 붙이는 혁수의 언동에 강태가 싱글거리며 묻자,
혁수는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우리 혁이'라는 말을 내뱉은 자신에게 당혹감을 느끼며 조그만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인다..
강태는 잠깐동안 깔깔대더니,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가라앉히며 진심 어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둘이 정말 잘 어울려.. 그리고 두 사람 다...많이 힘들었던 것 같구...
솔직히 난 잘 모르지만...형 눈빛을 봤을 때....괜히 마음이 아팠어..."
혁수는 뭐라고 응답해 주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앞 유리를 통해 펼쳐져 보이는 풍경에만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
자신의 눈이 슬퍼 보인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그 눈동자를 보고 가슴 아파하는 새 친구에게 자신이 위로를 해 주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인가 따져본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다사로운 미소로 갈색 심연의 표면에 아스라이 비치는 그림자를 가리며 가벼운 어조로 말한다.
"난 네 눈을 보면서 꼭 아이 같다고 생각했는데...뭐랄까....아무 걱정 없이 뛰어 놀기만 하는 어린애들 있잖아..."
"풋...전혀 아닌데, 그건? 어떻게 걱정이 없을 수가 있겠어... 재준이랑 이렇게 같이 있는데...."
강태가 자동차 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움직이고, 한숨 쉬듯 중얼거린다..
혁수는 그런 강태를 한번 바라보고 나서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연다.
"그래...나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아프지만은 않아..
어떻게 항상 고통스럽기만 하겠어... 나도....주혁이랑 이렇게 함께 있는데..."
시무룩하게 그늘을 드리웠던 강태의 얼굴에 평화로운 햇살이 스며들 듯 천연의 빛과 생기를 되찾고..
강태는 좀 전의 산뜻하고 청량한 목소리 그대로 혁수에게 이야기한다.
"형이랑 나...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거의 똑같다고 볼 수도 있지.."
"형이 나보다 먼저 시작했으니까...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아니...네가 나보다 더 강하고 현명하니까..네가 날 가르쳐 줘야 돼..."
"형은 너무 겸손한 것 같은데? 솔직히 나는 좀 거만하거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비겁하게 겸손한 것보다는 거만한 용기가 더 값져..."
"......그래.....형 말이 맞아...."
(68)
재준을 태운 흰색 아카디아가 호텔의 정문 로비 앞에 멈춰 서고,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지배인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여 재준에게 예를 갖춘다.
이런 광경에도 무디어진 강태는 자신에게도 깍듯이 인사를 올리는 그들에게 가벼운 고개짓을 해 주고,
태현 역시 낯익은 상황인터라 별다른 감흥 없이 호텔의 정문을 지나 들어선다.
그러나 세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멍청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주혁과 혁수는 어리둥절해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평소에는 잘 와보지 않던 사업채에 도착하니, 어쩔 수 없는 직업정신이 발휘되는 재준..
나머지 다섯명이 모두 방으로 올라간 뒤에도 혼자 남아 지배인을 붙잡고 이것 저것을 묻느라 바쁘다..
그런 재준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강태가 불만스런 목소리로 투덜댄다.
"이재준 가만히 보면 워커홀릭이야..이런데 놀러 와서까지 사업 얘기를 해야 하나.. -_-++"
"어이구~?! 다 너 먹여 살리려고 저러는 건데 네가 그런 소리 하면 되냐??"
태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태에게 장난스런 타박을 주자, 주혁도 이에 질세라 태현을 거든다.
"맞어, 맞어~ 우리 혁수 좀 본받아라--
바가지를 한번 긁나, 쓸데없이 야시시하게 생겨 가지고 사람 불안하게 하지도 않구.. 재준이가 너한테는 한참 아까워.."
태현을 거든다기 보다는 숫제 혁수 자랑이다.. (-_-;)
강태와 태현, 세라는 짜증나 죽겠다느니 닭살스럽다느니 지껄이며 주혁을 무차별로 구박하고..
혁수는 내심 날아갈 것 같으면서도 차마 주혁의 편을 들지는 못한다..
각자 방으로 짐을 풀러 들어가고 둘만의 공간이 확보되자 혁수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운 주혁을 향해 밉지 않은 말투로 핀잔을 날린다.
"장주혁... 너 왜 안 하던 짓하고 그래, 쪽팔리게..? 아까 민망해 죽는 줄 알았잖아.."
"치이- 속으로는 좋았으면서 딴 소리 하는 것 좀 봐..야, 안혁수.. 너도 강태만큼 여시 같다..? ^^;"
"여..여시....-_-;;;"
"크큭...그래도 강태보다 네가 훠어~~얼씬 더 예뻐..^^*"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시원하게 드러내며 군더더기 없는 웃음으로 혁수를 마주보는 주혁..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귀엽게 속살거리며 혁수를 뒤에서 끌어당겨 껴안는다.
쾌적하고 나른한 주혁의 체취가 혁수의 피부조직으로 하여금 짜릿한 환성을 지르게 만들고..
혁수는 목을 뒤로 젖혀 서서히 내려앉는 주혁의 입술을 소중하게 받아 들인다..
어느새 몸을 완전히 돌려 자신에게 가느다란 몸을 바싹 기대어 오는 혁수를 힘있게 자신의 팔 안에 가두는 주혁..
계속해서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고집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는 두 사람의 귀에
쾅쾅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부딪쳐 오는 태현의 걸걸한 음성...
"닭스런 짓거리 그만하고 짐 정리 끝났으면 빨리 나와! -_-+"
- 저녁 식사 후, 세라의 적극적인 부추김에 의해 클럽으로 몰려 간 그들..
특실로 모시려 하는 웨이터에게 재준은 됐다는 의미로 손짓을 해 보이며 만류한다.
스테이지가 가까운 곳에서 다른 평범한 군중들과 섞여 마시고 떠들기를 원하는 친구들의 심정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잔이 돌아가고 점점 흥이 오르는 가운데, 세라가 주혁을 가리키며 그 '기가 막힌' 춤 솜씨를 보여달라 청하고..
주혁은 몇 번 사양하다가 못 이기는 체하고 스테이지로 향한다.
처음에는 대충 리듬을 타면서 건성으로 몸을 흔들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음악과 하나가 되어 또 다른 음악으로 화한다..
춤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내세우던 태현마저도 입을 떡 벌리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주혁은 클럽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온다.
태현 역시 질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명 아래에서 화려한 쇼를 펼치기 시작하고,
태현의 춤이 끝나갈 때 쯤 재준은 강태에게 클럽의 지배인을 만나고 오겠다고 귀뜸을 한 후 잠시 자리를 비우려 한다.
또 일이냐는 듯이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는 강태에게 이해를 구하는 듯, 모두가 태현의 춤에 집중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강태에게 키스하는 재준..
강태의 얼굴에 자동적으로 번지는 미소를 확인하고서야 지배인이 대기하고 있는 특실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런 재준의 등을 탁 치며 어딜 가냐고 물어보는 세라..
"지배인이랑 얘기 좀 하고 오려고.. 근데 넌 어디 가냐?"
"나? 화장실...^^;; 넌 와 가지고 계속 일만 하는 것 같다~사람이 놀 때는 화끈하게 놀아야지...짜아-식...^^;"
제법 어른스러운 말투로 훈계하듯이 읊조리고는 발을 내딛는 세라..
호텔의 화장실답게 청결하고 위생적인 그곳 안에 들어가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고 있는데, (-_-;;)
먼저 일을 보고 나온 두 여자가 수선스럽게 주고받는 말소리가 세라의 귓가에 똑똑히 려온다.
"얘, 남자애들 여럿이랑 같이 온 그 여자 봤지? 청반바지에 분홍색 나시티 입은...."
"그래, 그래.. 봤어.. 기집애가 좆나 떡칠한 주제에 남자들은 어디서 주렁주렁 매달고 와 서는...
어우~~ 진짜 밥맛이더라... 지가 무슨 공주도 아니고..."
"그러게 말이야- 척 보니까 걸레 티가 팍팍 나는게..."
세라는 더 듣지도 않고 거칠게 문고리를 잡아 제친다.
쾅 하는 소음과 동시에 화들짝 놀라 세라를 돌아보는 두 여자..
자신들이 씹어대던 청반바지에 분홍색 나시티의 여자가 당돌하고 노기가 묻어나는 눈빛으로 무장한 채 서 있자, 당황한 기색을 수습하지 못해 허둥댄다.
"야아...너네가 나랑 자 봤어? 내가 걸렌지 아닌지 너네가 어떻게 알아? 엉??"
자존심이 상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가치관에 크게 어긋나는 현상을 목도했을 때의 분노 같은 것이 세라의 마음을 뒤흔든다.
성질 같아서는 머리털이라도 쥐어 뜯고 싶지만, 그런 몰상식한 행동으로 즐거운 분위기를 망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참기로 한다.
"그냥 남자들이랑 같이 온게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그딴 식으로 비아냥 거리는 게 더 불쌍해 보이니까...
그리고, 너네야말로 화장 지우면 배신감 느낄 얼굴이야..-_-+"
가차없이 쏟아지는 그녀의 독설에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얼어버린 두 여자를 유유히 지나치는 세라..
신경질적이니 표정으로 궁시렁대며 다시 주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여자 화장실 입구에서 세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 둘이 그녀의 손목을 휘어챈다.
"휘~~유.. 아가씨... 사내새끼들한테 둘러 싸여서 재미가 좋으시겠어..??"
"이야아~~ 몸매 죽이는데? 우리랑도 좀 놀아 주지 그래? 우리도 남잔데..."
능글맞게 히히덕거리며 세라의 허리를 감아 오는 남자의 팔을 완강하게 뿌리치며,
안 그래도 화장실 안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세라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 버린다.
"야!! 내가 남자들 다섯이랑 오든 열명이랑 오든 너네가 무슨 상관이야?!
씨발, 좆나 짜증나 죽겠네!! 비켜, 새끼들아.. 기분 더 더러워지기 전에..."
"이 기집애가 어따 대고 욕을 해!?
야! 너 같은 년들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는데 재수 없게 콧대는 세우고 지랄이야~!! 이리 안 와??"
남자가 왁살스럽게 세라의 손목과 허리를 움켜쥐고 끌어당기자,
아픔보다는 치밀어 오르는 홧증 때문에 세라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겨를도 없이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며 비명소리를 클럽 전체에 울려 퍼지게끔 토해낸다.
삽시간에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모이고, 태현과 주혁은 퉁겨져 오르듯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 간다.
짜여진 각본처럼 주혁과 태현, 그리고 앞서 얘기한 두 남자 사이에 시비가 붙고..
한 사내가 주혁에게 주먹질을 하자 언성을 높이기만 하던 논쟁은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는 싸움판으로 돌변한다.
그러나 제대로 한번 뒤엉켜 싸워보기도 전에, 누군가의 서릿발 같은 호령소리가 그것을 저지한다.
"이 새끼들아, 지금 뭐하는 짓들이야!?"
세라에게 깐죽대며 수작을 부리던 두 사내가 지금까지의 기세와는 정반대로 머리를 조아리며 선다..
이 난장판을 일시에 평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클럽의 지배인이다.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방금 전까지 지배인과 사업 전반에 관해 논의했던 충의회의 보스, 이재준 이다.
재준의 얼굴을 마주한 두 사내는, 이제껏 말로만 듣던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직접 대면하게 되자...
직무를 태만히 하고 손님에게 수작이나 걸다가 싸움까지 벌인 자기들의 행동이 어떤 처벌을 받게 될 지...
물 속처럼 들여다보이는 듯 하다..
"회장님 친구분들한테 무슨 짓거리야, 새끼들아!!"
아무 말 없이 불안한 침묵을 지키는 재준 때문에 오히려 사색이 된 클럽의 지배인이 발까지 동동 구르며 엄중한 질책을 계속하고..
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두 사내의 전신을 훑어보다가, 입을 연다..
"........너희가 동네 양아치냐...?"
온몸의 신경 세포가 감각의 기능을 잃어버릴 만큼 지독하게 음산하고 냉혹한 재준의 음성에,
그의 까만 눈동자에서 발하여 지는 영묘한 카리스마에 너무나 간단히 짓눌려 버리는 두 사내..
"충의회 소속이라는 놈들이 동네 양아치들이나 따라하고 있으니...
애들 관리를 이 모양으로 하니까 클럽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죄송합니다, 회장님... 앞으로는 확실히 교육...."
"됐어.. 여긴 다른 애한테 맡길 거니까 넌 내일 당장 서울로 올라 가.."
변명이나 간원 따위는 자신의 보스에게 절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주지하고 있는 지배인은
그저 침통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이며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두 녀석은........제명해 버려.."
'충의회' 밖으로 내치라는 재준의 명령에 지배인과 당사자들 모두 대경실색하며 재준을 올려다보고,
재준은 억울한 호소 같은 건 추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매섭게 등을 돌린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클럽을 나가기 위해 걸음을 떼는 재준...
강태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황급히 재준의 뒤를 따르고..
주혁과 혁수, 세라와 태현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그곳에서 빠져 나온다..
(69)
남자의 눈은 말한다.
얼마든지, 무엇이라도 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이런 사랑도 훼손되는가..
세상의 무엇이라도 다 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이런 사랑도 나중에는 더럽혀지고 변질되는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치고 상처 입는가..
이 사랑도 나중에 흉기가 되어 나를 찌를 것인가...
- <천년의 사랑> 중 -
특유의 이성적이고 절제된 노여움을 발산하며 호텔 방문을 여는 재준..
잠시 후 강태가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오느라 힘에 부쳤던지 가쁜 숨을 내쉬며 방안으로 들어선다..
강태는 문을 밀어 닫고, 창가에 서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재준에게 다가간다.
재준의 표정은 아까보다 조금 더 복잡해져 있다.
고유한 바운더리(boundary)에 안착하니 속에 있는 감정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일 게다.
"재준아...."
강태는 재준의 안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짚으며 이름을 불러본다..
이제는 강태의 목소리로 발성되는 자신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재준..
벌써....이렇게 멀리 온 걸까....
"뭐 잘못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제명까지 하다니..."
벌을 받아 마땅한 행동이었지만 내치기까지 한 건 심했다.
지하세계의 생리에도 제법 통달하게 된 강태인지라 의문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재준은 바깥에 둔 시선을 떼지 않고, 새어나오려 하는 한숨을 목구멍 너머로 삼킨다.
그렇다고 해서 눈치를 못 챌 강태도 아니지만 말이다.
"왜 그래, 재준아...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 봐..."
재준의 손을 잡고 흔들며 염려가 배어 있는 음성으로 끈덕지게 그를 달래는 강태..
재준은 어두운 낯빛으로 주저하다가, 강태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입을 연다.
"....요즘...돌아가는 게 뭔가 이상해.. 딱 집어서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움직이는 느낌이 심상치가 않아..
충의회 내부적으로는 괜찮은 것 같은데 밖에서 돌아가는 상황이...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럴 때일수록 애들 관리는 철저하게 해야 돼..
아까 같은 썩어빠진 새끼들은 있어 봤자 나중에 골치만 아파.."
진지하게 재준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강태는 종래에 시무룩하니 눈동자에 그림자를 칠한다..
잡고 있던 재준의 손을 슬그머니 놓으며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는 강태..
표정만큼이나 저하된 음성으로 속삭인다.
"......너어....불안해 보여...."
그 말을 듣자, 창 밖에만 머물러 있던 재준의 까만 눈동자가 강태의 얼굴 쪽으로 향하고, 강태는 창틀 턱에 살짝 걸터앉으며 우울한 톤으로 말을 잇는다.
"충의회가 너한테 소중하다는 거 잘 알지만....가끔씩은...네가 내 생각만 해 줬으면 좋겠어..."
과도한 욕심 때문에 재준과 똑바로 눈을 맞추지 못하는 강태..
이런 얘기를 지껄이고 있는 자신의 입술이 한없이 뻔뻔하게 느껴지지만...
이미 영혼의 눈이 가리워진 강태이기에, 두 볼을 붉으스레 상기시키는 것만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이 정도의 투정쯤이야 너그럽게 감싸 줄 재준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강태를 응석받이로 만든다..
"네가 나에게 있어서 그렇듯이....나도....너한테 유일해졌으면 좋겠어...
이런 생각...웃기지도 않는다는 거 인정은 하는데.... 그래도 난...."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 뻗쳐오는 재준의 팔과 그만의 비누냄새에 멈칫 입을 다무는 강태..
강태의 머리카락에 뺨을 부빗거리며 그의 향내를 흠뻑 들이마시는 재준..
기묘한 정적이 둘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목이 메인 듯한 재준의 낮은 보이스가 흘러나온다..
"......나는 네 생각밖에 안 해.... 그리고....나에게 유일한 존재는 강태 하나 뿐이야..."
정말 부끄럽게도, 재준의 셔츠 자락에 강태의 눈물이 망울 자국을 남긴다..
재준의 입술이 내보내는 글자 하나 하나에 억지스러울 정도로 막중한 의미를 부여하는 강태..
그게 아니라면 그의 눈동자가 흥건히 젖어 들리는 없는 것이다.
'말'이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충의회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나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충의회 그 자체를 위해서도 아니야..."
엄밀하게 따져 이야기하자면, 재준은 보스로서의 기본적인 책임감과 소양을 팽개쳐 버렸다..
위의 발언이 그것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바이다..
그러나...'인연'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재준의 선택에 비난의 화살을 던질 자격이 있는 자격이 있는 자는...
오직 '신' 뿐이다..
"충의회가 있어야....너를 더 아름답게 사랑해 줄 수 있고...
또....너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고...
결정적으로 너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도...
내가 가진 건 충의회가 전부니까....
하지만 너도 알잖아...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건 충의회가 아니야..."
강태는 격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재준의 등에 팔을 감고 매달리다시피 그에게 몸을 맡긴다..
그런 강태를 토닥이다가 자신의 어깨에 묻힌 강태의 얼굴을 떼어내고, 재준은 그의 모카빛 뺨에 얼룩져 있는 이슬방울을 긴 손가락으로 씻어낸다..
그러면서 강태에게만 감상을 허락하는 수줍은 미소를 빚어내며, 다시 성대를 울린다..
".....기억 나..? 예전에 레스토랑에서 같이 밥 먹으면서...네가 나한테 물어 봤었지? 내 꿈이 뭐냐고...
그때 내가 꿈 같은 거 없다고 대답했잖아..."
물론 기억하고 있다. 강태는 긍정의 표시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나....이제 꿈이 생겼어.. 다시 한번 물어봐 줄래..?"
".......뭔데.....?.."
울어서 약간 쉬어버린 음성으로 강태가 묻자, 재준은 씨익- 웃으며 당당하게 발표한다..
".........너랑 결혼하는 거.. ^^*"
- 클럽의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세라는 기분이 많이 저조해진 탓인지
웬만해서는 잘 내비치지 않던 경직된 얼굴로 주혁과 혁수, 태현에게 대충 인사를 한 다음 발걸음을 옮긴다.
태현은 그런 세라에게 몇 마디 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따라 엘레베이터 쪽으로 향한다..
졸지에 단 둘이서 남겨진 주혁과 혁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다가 혁수가 먼저 입을 연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꼬였네... 세라 많이 속상한가부다..."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쟤는 하룻밤 지나면 다 풀리니까 괜찮은데, 재준이랑 강태는 싸우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분위기 깨뜨렸다고 강태가 재준이한테 뭐라 그러는 거 아냐??"
"강태도 뭔가 알고 있겠지.. 재준이가 왜 그랬는지...."
주혁은 수긍하는 낯빛으로 고개를 위 아래로 몇 번 흔들며 주위를 한번 휘 둘러본다.
호텔 로비에는 몇 명의 직원들만 각자의 업무에 골몰하고 있을 뿐, 다른 손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방에 돌아가기가 싫은 주혁은, 혁수의 허리에 오른쪽 팔을 두르며 애교스럽게 제안한다.
"혁수야, 우리 바닷가 걸을까? ^^"
"지금??"
"뭐 어때~~ 시원하고 좋잖아.. 가자, 가자!! ^^"
혁수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무작정 걸음을 재촉하는 주혁..
혁수는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와 함께 호텔의 유리문을 나선다.
호텔 바로 앞에 장관을 이루며 웅장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바다...
혁수가 그림의 소재로 즐겨 택하는 자연의 생명체이다.
그러나 새파랗게 살아서 싱싱한 파도소리를 연주하는 바다보다는,
거무죽죽한 암흑의 빛깔을 띠고 모든 생물들을 사장시켜 버릴 듯한 절망의 바다만을 수놓던 혁수..
이제는....금빛 모래사장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찬란하게 내리 쬐는 햇빛을 그려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본다..
지금의 바다는, 서쪽 하늘에 걸린 초승달의 기운으로 인해 적자색으로 물들어 있다..
발 밑에 밟히는 자잘한 모래알들의 서걱거리는 느낌이 어쩐지 포근하고 편안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주혁의 음성이 귓전을 어루만지자, 혁수가 살풋이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한다..
"그냥....옛날에 바다 그림 그리던 거..."
혁수는 별 뜻 없이 한 소리인데, 주혁은 민감해 진다.
'그림'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다.
혁수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옅은 한숨을 내쉬는 주혁..
혁수는 돌연한 주혁의 태도 변화에 영문을 알 수가 없어 갈색 눈을 동그랗게 뜨기만 한다.
"그림 공부.....다시....하고 싶어..?"
손톱만큼의 자신감도 찾아볼 수 없는, 주눅 든 주혁의 음성에 혁수는 심장 한 부분이 저며온다..
너마저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떡하니...
난 너 하나밖에 볼 수 없는데...
앙탈을 부리고 싶은 어리숙한 감정 따위는 이제 삭힐 줄도 알아야겠지...
하지만.....조금만 더 잊고 있으면 안 될까..?
우리...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거리낌없이 서로의 영혼을 소유할 수 있게 된지는 겨우 몇 백 시간이 지났을 뿐이니까....
"장주혁....그렇게 자신이 없어..??"
비약적으로 목청을 돋구는 혁수가 귀엽게 보이는 동시에, 아련한 자태 그대로 주혁의 검푸른 망막에 투명한 무늬를 아로새긴다..
그래도 분명한 건...장주혁을 지배하고 있는 연약한 독재자, 안혁수라는 사실이다..
어차피 그 사실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 항목이다..
"나 여기 네 옆에 있어... 보이기도 하고 , 만질 수도 있고, 내 목소리도 들리잖아... 그런데 바보 같이 왜 그런 걸 물어보냐...?"
"치이....날 바보로 만든 게 누군데...."
볼 멘 소리로 중얼대는 주혁의 말에 혁수는 또 한번 작게 미소하며 그를 쳐다보고, 농담조가 섞인 말투와는 다르게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침잠한 낯빛을 연출해 내는 주혁 때문에 울컥 치솟아 오르는 응어리를 분해시키려 다급하게 그의 품안으로 파고든다..
이렇게 가슴 전체가 폭발할 것처럼 뻐근해지면...자칫하다가는 헤어 나오기 힘든 막막함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것을 거부하듯 혁수는 몸서리를 치며 주혁의 입술을 찾고, 주혁은 팔뚝에 불거져 나온 핏줄이 끊어져 나갈 정도로 힘 주어 혁수를 포옹한다..
맞닿는 입술 사이로 오가는 숨결이 미어지도록 서러운 것은,
단지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이 좁은 땅 위에서조차 심령의 깊은 곳에 맺힌 한 마디 말을 큰 소리로 외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버려야만 하는 가혹한 현실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지는 경고의 메세지가 선명해 질 수록 더욱 절실해지기만 하는 두 남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목으로 접어든 두 남자...
그들의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꾸며져 있을지...
주혁과 혁수는 짐작하고 있다..
(70)
나는 지금 너와 성교하고 있다. 나는 네 몸 속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아무래도 무관한 일이다.
다만 이건 육체의 뒤섞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린 서로의 불완전한 육체를 맞대는 것으로밖에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다만 서로의 불완전함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거다.
- <상실의 시대> 중 -
어젯밤에 있었던 언짢은 사건을 뇌리 속에서 깨끗이 지운 마냥
다음날 아침 다시 모인 여섯 남녀들의 얼굴을 처음 출발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빈둥거리며 늦잠을 즐기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난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몰려 가 식사를 하고,
바닷가를 누비기 위해 또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
어김없이 장난기가 발동한 태현과 주혁은 세라부터 타겟으로 삼아 바다에 던져 넣기 시작한다..
노란색 비키니에 스커트 수영복 차림으로 육감적인 몸매를 과시하던 세라는 코로 짠물을 들이키더니 켁켁거리느라 정신을 못 차린다.
뒤이어 한 사람씩 전부 물맛을 보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지 소동을 잠재우는 그들..
강태는 수영을 못하는 혁수에게 수영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서 정말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법석을 떨고,
세라와 주혁은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튜브에 태우고 밀어주기 게임을 하고 있다.. (-_-;)
태현은 재준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수영 방법을 보여 주겠다며 쉴새없이 재준의 배꼽을 잡게 만든다.
석양이 붉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방이 어둑어둑해 질때까지 백사장과 바닷물 사이를 들락날락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그들은,
노는 데에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거나하게 벌였던 놀이판을 거두어 들인다..
바닷물의 소금기와 모래알들이 더덕 더덕 붙은 몸을 개운하게 씻고 난 후, 근처에 있는 횟집으로 가서 이번에는 술자리의 막을 올린다.
술에는 별로 입을 대지 않은 채 타고난 수사학을 펼치면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태현과,
그 맞은편에 앉아 신나게 소주잔을 비워대며 걸걸한 목소리로 떠드는 도중 담배까지 뻐끔거리는 세라..
홍일점으로서 튀기보다는 외려 똑같은 남자처럼 보인다..
주혁과 재준에게 과음하지 말라며 잔소리를 잊지 않는 혁수와 강태가 차라리 더 여성스럽다.. (-_-;)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여섯 남녀들..
제일 돈을 잘 번다는 이유로 술값 및 식사비용은 모조리 재준이 부담한다..
방으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술기운 때문에 기분이 상승된 모양인지
주혁은 어울리지 않게 헤픈 웃음을 실실 흘리며 자꾸 혁수에게 낯간지러운 말들을 되풀이 하고..
혁수를 제외한 네 사람은 그러한 주혁의 주정이 너무 재밌어서 킬킬대고 놀리느라 열심이다..
혁수는 헤롱거리는 주혁을 데리고 내빼듯이 둘만의 방으로 숨어 버리고..
재준과 강태도 '잘 자~' 라는 인사와 함께 문 안으로 사라진다..
텅 빈 복도에는 태현과 세라, 두 사람 뿐이다..
갑자기 어색해지는 기류가 당황스러운 태현...
멋 적에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세라의 당돌한 질문이 날아온다.
"나 혼자 있기 싫은데...오빠 방에서 자면 안 돼?"
태현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흔쾌히 세라를 자신의 방안으로 초대한다.
성별의 차이를 구실 삼아 논란의 여지를 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두 사람 사이에서는 같잖은 일 아닌가..?
태현은 욕실에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잘 준비를 마친 모습으로 나온다.
어느새 남색 반바지와 헐렁한 회색 티셔츠 차림으로 화장까지 깔끔하게 지운 세라가 침대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TV를 시청하고 있다..
태현은 스스럼없이 그녀의 옆에 자리하며 비난 조로 입을 연다.
"또 술이냐..? 작작 좀 마셔라... 내일 아침에 속병 나겠다.."
"헤헤...^^; 이건 숙취 제거를 위한 술이니까 괜찮아.."
"쳇...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_-++"
핀잔을 주는 태현에게 여느 때처럼 한 단계 높은 언변으로 맞받아 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미소로 응수하는 세라...
덕분에 머쓱해진 태현은 얘가 왜 이러나~ 하는 눈빛으로 세라를 주시하고,
세라는 오버액션이 걷힌 담백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태현에게 이야기한다..
"어제.....정말 고마웠어... 위로해 준 거..."
어젯밤의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 울분을 토로하는 자신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준 태현의 배려에 대한 고마움인 것 같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수롭지 않게 세라의 말을 흘려 넘기고 TV 화면에 눈길을 박는 태현...
세라는 침대 옆에 놓인 탁자 위에 맥주캔을 올려놓고 시트 자락을 끌어 올려 목까지 덮으며,
조금도 취기가 서려 있지 않는 또랑또랑한 음성을 들려준다..
"오늘....그 사람 죽은 지 딱 3년째 되는 날이야...."
야속하리만치 유유하게 흐르던 강물을 앞에 두고,
힘겹게 까발려 보여주던 비밀스런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는 세라의 이야기에 태현은 긴장한다..
"그 사람은 오늘....또 한번 죽었어.."
언뜻 들으면 굉장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세라의 단언에 태현은 더욱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그녀에게 몰입한다.
다시 한번 죽었다....
아주 절묘한 진리가 숨겨져 있을 것 같은 문장이다..
"내 마음 속에서 살아 있던 그 사람을....오늘...내 손으로 죽여 버렸거든..."
그제서야 태현은 세라의 마음 속에서 텃세를 부리며 케케묵은 미련 따위로 그녀를 얽어매던 '그'의 망령이 쫓겨 나가고..
그녀의 닳아빠진 기억들 마저도 모조리 청소되었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날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날 너무 오랫동안...아프게 했거든...."
수십명의 남자를 갈아치우며 그들과 몸을 섞어도, 일시적인 쾌감과 찰나적 망각의 황홀감에서 그칠 뿐..
단 한번도 세라의 영혼을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던 17살 봄날의 잔인한 기억이 더 이상은 그녀를 짓누르지 못하도록...
그 기억이 치워지고 남은 빈 공간에 의미 있는 '타인'이 새로운 둥지를 틀어야 할 것이다..
세라는 이와 같은 작업을 완료하기 위해 뒷걸음질 치려하는 결단을 채찍질하며, 태현의 커다란 눈동자를 직시한다..
태현은 잠자코 세라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절대 먼저 입을 열어서 그녀의 망설임에 무게를 더하지 않도록...
'이세라' 라는 여자에 대해 자신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태현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다.
세라는 태현의 사려 깊고 성숙한 태도에 감격한다..
문태현은 진짜 남자다.....
3년 전, 무책임하게 그녀를 방치해 두고 이 세상에서 도피해 버린 '그 사람' 과 태현을 비교한다는 것은
태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세라는 도무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깜깜하기만 하다..
가장 정확하고 온전한 표현이 무엇인지...
궁리하고 고심해 보지만 아무래도 잡히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세라는 고개를 푹 숙이며 죄지은 사람처럼 겨우 입술을 뗀다..
"저어.....나 말이지.....오빠의 여자가 ..될 수 있을까...?"
태현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숨소리 하나까지도 흐트러짐 없이 일정하게 유지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명백한 느낌과 확실한 다짐을 동반한 태현의 팔이 세라에게로 내밀어 진다..
세라는 아무 저항 없이 그의 가슴팍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태현의 입술이 세라의 입술을 내리 누르고, 그의 혀가 세라의 입술을 두드린다.
세라는 입을 벌려 태현의 혀를 맞아들이고, 태현은 탐스럽게 무르익은 세라의 입술이 팽팽한 탄력을 가짐과 동시에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밀착해 오는 것을 느낀다..
잠시 태현의 품에서 벗어난 세라...
몸을 움직여 입고 있던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어 낸다..
등뒤로 팔을 돌려 브래지어도 끄른다..
그리고 손을 뻗어 태현의 잠옷에 달린 단추들을 총총히 풀어 나간다.
태현의 몸은 생각보다 말랐지만 선이 굵은 골격들이 남성적인 체형을 이루고 있다..
서로의 옷을 하나씩 떨구어내는 동작 하나 하나가 야릇한 애무의 율동처럼 아찔한 흥분을 불러일으키고...
알몸이 된 세라가 거칠어지는 호흡을 찬찬히 고르며 하얀 시트 위로 눕는다.
그 위로 역시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태현의 매끄러운 육체가 겹쳐진다..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의 세라는 순박한 사춘기 소녀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반대로 그녀의 몸은 무척 외설적이고 유혹적인 자태를 자랑한다..
그러나 언젠가 이야기 했듯이...눈으로 보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본질은 항상 마음을 통하여 만날 수 있는 것...
지금 태현과 세라가 육체의 합일을 시도하는 것 또한, 영혼의 완전한 일치를 도모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편일 따름이다..
거기에 세상의 인위적인 잣대나 틀에 박힌 관념이 개입된다면...
그것은 기득권자들의 횡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우월적 권한을 차지하고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지만,
아마도 절망을 간직할 영혼조차 삭막하게 증발 되어버린 '잘난' 사람들일 것이다..
두 사람은 얼마동안 가만히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탐색해 본다..
태현의 속살은 침대 시트와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하얗다..
꽤 다부진 어깨와 가슴근육이 남자다운 인상을 심어주고..
그 '수컷'의 이미지는 '페니스'라고 불리는 상징에 와서 총체적으로 결집된다.
꼿꼿이 솟아오른 남자의 페니스는 굉장히 강인하고 멋지다..
그래서, 평소에는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을 치고 넘겨버리던 프로이드의 '남근 선망'에 잠깐이나마 젖게 된다..
그러나, 세라에게는 자궁과 질이 있다.
남자의 정액을 받아들이고, 탄탄한 근육의 수축으로 남자의 욕망을 재량 껏 지배할 수 있는 자궁과 질이 있다..
빗소리가 들린다.....
지면을 때리는 빗소리...
그 청각적 효과가 세라와 태현의 미숙한 감정에 불을 지른다..
비.... '섹스'와 아주 잘 어울리는 현상이다..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영화의 정사신에서 억수같은 비가 퍼붓는 사례만 보더라도
둘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오늘밤에는 정말......미친 듯이 춤을 추고 싶다..
세라는 성의껏 태현의 키스에 답하고, 그의 손길에 적절히 몸을 비틀며 저만치 우뚝 솟은 비등점으로 태현을 인도한다..
그녀는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고, 더 기다리다가는 산산조각 나 버릴 지경이다..
태현이 세라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그녀의 몸 속으로 자신의 육체를 삽입한다.
그리고 태현의 동작이 빨라진다..
세라는 그의 등에 깊숙이 손톱을 박으며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꼭 붙든다..
어이 없게도 눈물이 난다...
아아.... 이 남자느 왜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걸까...
나는 왜 이제서야 문태현 이라는 남자를 내 안에 채울 수 있게 된 걸까...
그의 페니스를 질 속에 집어넣은 채 엉덩이를 움직이는 세라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더러운 창녀나 추저분한 포르노 영화의 여주인공쯤으로 비춰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마음대로 생각해라.
너희 인간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에게는 내 남자가 전부다..
나의 남자가 원한다면 매춘부가 되겠다..
나의 남자가 원한다면 포르노 영화의 여주인공이 되어 그에게 유린당하고 농락 당하고 강간당하겠다..
희미하게 꿈틀거리며 뿜어내는 태현의 뜨거운 액체를 감사하게 담아두며...
세라는 자신만을 안아주는 태현의 은혜에 몇 배로 보답할 수 있는 여자가 되리라 다짐한다..
(71)
달콤한 숙면에 취해 녹짝지근한 게으름 속에서 뒹굴거리던 세라의 귓가에 방문을 탕탕 두들기는 소리가 부딪쳐 온다.
억지스레 눈꺼풀을 들어서 시야를 틔우니, 약하게 숨소리를 내며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태현의 모습이 망막에 비춰진다.
저절로 안면근육을 환하게 이완시키며 함박웃음을 짓는 세라에게 다시 한번 밉살스런 노크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나와 알몸 위에 태현의 잠옷 상의 하나만 걸친다.
겨우 엉덩이만 간신히 가리는 면직 남방의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고 성큼 성큼 문으로 걸어 나가서 손잡이를 세게 잡아당기는 세라..
열리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약간 짜증이 서린 주혁이다..
"문태현, 지금 몇 신데 안 일어......에~~엥?!?"
다짜고짜 신경질부터 부리던 주혁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세라라는 것과
아슬아슬한 그녀의 매무시를 인식하고는 괴이한 음성으로 황당함을 표시한다..
마침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태현이 사각팬티 한 장만 달랑 걸쳐 입고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난다.
"아~~우.. 잘 자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하품을 씹으며 투덜거리던 태현은 주혁과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세라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주혁은 서서히 짖궂은 웃음으로 하얀 얼굴을 장식해 나가더니, 느물거리는 말투로 입을 연다.
"어~~얼~~ 어젯밤에 역사가 벌어졌군...문태현- 세라한테 자꾸 술 먹으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이 새끼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그런 놈으로 보여?? 우린 어디까지나..."
"하하... 알았어, 알았어.. 축하해, 문태현~~ ^^*"
싱글거리며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혁수와 재준, 강태에게 뉴스를 전하려고 뛰어가는 주혁..
태현은 발끈 하다가 포르르 사라져 버리는 주혁의 뒷모습에 대고 눈을 부라리기만 한다.
다시 세라를 쳐다보니, 그런 태현이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다..
"....나 먼저 씻을게..-_-;;"
과민반응을 보인 자신의 행동이 유치하게 느껴지자, 태현은 창피한 생각에 세라의 눈동자를 피하며 욕실로 숨어 들어간다.
세라는 태현이 시야에서 벗어나고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그가 더 부끄러워하기 전에 자리를 비켜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 새롭게 커플로 탄생한 태현과 세라에게 축하와 찬사, 그리고 덤으로 야유(-_-;)까지 듬뿍 얹어준 네 사람..
하루종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지의 이국적 정취와 해방감을 만끽한 그들은,
술자리는 생략하기로 합의한 끝에 저녁식사를 마친 후 호텔로 귀환한다..
자연스럽게 한 방으로 들어가는 태현과 세라에게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냐며 빈정대는 것을 잊지 않는 나머지 네 사람..
그러나 세라는 당당한 눈빛으로 천연덕스레 일축한다.
"어~허!! 지금부터 우린 중요하게 할 일이 있으니까, 용건 있어도 부르지 마. 알았지??"
'아아~ 색녀..-_-;' 라고 세라에게 면박을 날리는 재준을 잡아끌어 말리며, 웃음소리를 남긴 채 자기들의 보금자리로 사라져주는 강태..
혁수 또한, 태현의 코앞에다가 얼굴을 들이밀며 '뭐 할건데??' 하고 뻔한 질문을 퍼붓는 주혁에게 슬쩍 제동을 가하며..
태현과 세라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주혁과 함께 둘만의 공간으로 회귀한다.
"장주혁... 나 이번에 여기 같이 오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 못했었는데, 너 되게 까분다?"
"...까,까불어...?? 이 자식이 하늘 같은 서방님한테...-_-+"
"서방은 무슨 얼어죽을...-_-;; 하여간 옛날의 네 이미지가 날이 갈수록 깨지고 있어.."
"그럴수가.... 이미지 쇄신을 해야겠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비장하게 한 마디를 내뱉은 주혁이 과장되게 눈에다가 힘을 주어 강렬한 시선으로 혁수를 바라보자,
혁수는 그런 주혁의 모습이 너무 코믹하게 여겨져서 목을 움츠리며 키들거린다.
70년대의 흑백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오버액션이 잔뜩 발린 몸짓과 낯색으로 혁수에게 다가와 그의 허리를 확 낚아채는 주혁..
혁수는 여전히 우습다고 킥킥댄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만한(-_-;) 장면을 연출하던 두 사람의 간지러운 놀이를 중지시킨 것은
재준은 손가락과 나무판이 마찰해서 생긴 노크소리이다..
주혁의 양미간이 탁 풀어지며 김 샌다는 투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혁수가 작게 웃으며 허리에 둘린 주혁의 팔을 떼어내고는 방문을 연다.
"어, 재준아.. 웬일이야?"
"주혁이 형 안에 있지..?"
"나 왜??"
혁수의 어깨너머로 빼꼼이 얼굴을 내밀며 자신을 찾는 목적이 무언지 묻는 주혁..
"형한테 할 얘기 있는데...잠깐만 나와라.."
주혁은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혁수에게 '갔다 올게..'라고 이야기한 후 재준을 따라 나선다.
호텔의 복도 끝에 마련된 알코브에 도착해서 난간에 기대어 서는 재준..
담배를 피워 물며 주혁에게도 한 개피 권한다.
주혁은 받아서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담배 연기와 함께 약간 상기된 중저음을 내뱉는다.
"무슨 얘긴데..?"
그러나 재준은 곧바로 응답하지 않고 고개를 떨군 채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뜸을 들인다.
주혁은 차분하게 그의 입술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잠시 적막 가운데 담배만 꽁초로 만들어 가다가...
재준이 마른기침을 밭으며 말을 시작한다..
".....형...나랑 같이 일해 볼 생각 없어..?"
평소에는 잊어버리고 있던 재준의 직업적 위치와 타이틀을 떠올리며 검푸른 눈동자를 확대시키는 주혁..
"사실 그저께 클럽에서 형 주먹 쓰는 거 보고 놀랐어.. 진짜 빠르더라...
주먹으로 먹고사는 놈들 데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형처럼 빠른 애는 한번도 못 봤어..."
주혁은 그냥 허허로이 웃어넘긴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주혁에게 재준은 좀 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연장시켜 나간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한테는 형 같은 사람이 필요해.. 주먹과 머리, 둘 다를 갖춘 사람 말이야..
이 바닥에서 굴러먹는 새끼들...뭐, 나도 마찬가지지만 다들 무식해..
고등학교 제대로 졸업한 놈도 드물어.. 나만해도 2학년 때 때려 쳤으니까..
실제적인 사업이야 경험으로 배워서 잘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지..."
"야, 나도 무식해.."
주혁이 열적게 자조적인 실소를 퍼뜨리며 휙 던지듯이 한마디 응수하자,
재준은 엷게 미소를 지으며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손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어떤 학력을 의미하는 게 아냐.. 내가 말하는 건, 똑똑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지..
상황판단도 정확하고, 기본적인 상식도 있고 그러면서 주먹에서도 앞서는 사람...
그런 사람 찾기는 정말 어려운데, 놓치고 싶지 않아서 얘기하는 거야..
으음...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있다면 할 수 없지만...."
"그런 건 없어. 단지...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능력이 없으니까..."
"아냐. 나....지금까지 계속 조직 안에서만 살았어..나한테도 볼 줄 아는 눈 정도는 있다구..."
확신에 찬 재준의 단언에 주혁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대신 그의 제안을 되새겨 본다..
지하세계에서의 활동이라...
영화에서처럼 화려하고 멋들어진 곳이 아니라는 것쯤은 주지하고 있지만
실상 그 질서 속에 편입하게 된다면 만만치 않은 장애물들이 주혁의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암흑가의 일원으로 소속된다는 것에 대해 혁수가 어떤 태도를 나타낼 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지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가능하다면 혁수 형도 날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혁수??"
"어어... 홍콩이랑 거래하는 데,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일본어는 되는데 이상하게 영어는 정말 못 하겠더라구...
그래서 지금은 통역을 데리고 다니거든?
근데...우리 조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보안상에 믿음이 안 가서 말이야... 혁수 형 영어 잘 하잖아..
홍콩 쪽이랑 접선하는 일만이라도 같이 해 줬으면 하는데..."
".....혁수한테는.....그런 일 시키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못을 박는 주혁의 한 마디에 재준은 멈칫 입을 다물고.
그것이 재준의 사업을 나쁘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얼마간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주혁을 설득한다.
"그래... 혁수 형한테 힘든 일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겠어...
그러니까 혁수 형은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일단 형은...생각해 봐 줘...
위험하지 않다고는 마라 못하겠지만, 그만큼 형들을 믿기 때문에 같이 일하자고 하는 거니까... 좋은 쪽으로 생각해 주라.."
주혁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고 그의 심정까지 헤아리려 노력하는 재준에게 주혁은 고마움을 담은 웃음을 건네고..
재준은 가볍게 주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친밀감을 표시한다..
그러면서 못 말리겠다는 듯 장난스럽게 주혁을 흘기며 농담을 던진다.
"아무튼~ 형이 그렇게 혁수 형 끔찍하게 챙기니까 내가 비교되잖아-
강태가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 줄 알어?? 제발 티 좀 내지 마라..-_-++"
"푸하하~!! 야, 넌 내가 봐도 너무 목석 같애.. 애정표현은 자주 해 줘야 하는 거야...
너처럼 뻣뻣하게 굴어서야 어디 강태 같이 예쁜 애 감당하겠냐?? 그러다 강태 뺏기면 어쩔려구~~"
"아이, 씨~~ 닭살스러워서 못 하겠는데 그럼 어떡하냐?? -_-;;"
"에~이, 짜샤... 자꾸 해 버릇해야지 안 그러면........"
어느새 '사업'에 관한 의논을 접어 버리고 더욱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토론을 시작한 두 사람이었다.. (-_-;;)
(72)
재준과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주혁은 문을 열어 준 혁수가 뒤돌아 서자마자
잠시라도 떨어져 있었던 게 애가 타는 듯, 허겁지겁 혁수의 허리에 팔을 두른다.
가느다란 몸이 쏙 들어오고, 따뜻한 혁수의 등이 가슴에 닿자 주혁은 맥박의 리듬이 빨라진다.
이 녀석은 이렇게 작은 접촉 하나만으로도 이토록이나 나를 흥분시키는 무서운 힘의 소유자이다..
그러니 내가 안혁수의 노예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언제나 나를 무릎 꿇게 한다..
하지만 끝없이 비굴해지더라도 모욕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건,
그의 앞에 엎드리는 '굴복'이야말로 주혁에게 최고의 열락과 성취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안혁수는... 은혜가 한량없는 독재자다..
혁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술로 자근자근 혁수의 살갗을 자극하는 주혁..
혁수는 괜한 부끄러움에 몸을 사리며 주혁의 팔을 벗어나려 한다..
"장주혁.. 간지러워... 하지 마.. 들어오자마자 왜 이래..."
그러나 주혁은 혁수의 앙탈을 무시하고, 허리에 둘렀던 손을 올려 혁수의 티셔츠 안으로 집어넣는다.
민감한 손끝에 감겨오는 맨살의 촉감이 주혁의 이성을 혼미하게 만들고...
모르겠다...
가끔씩 지금처럼 견딜 수 없이 그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
이유 따위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차피 우리가 속한 세상이라는 건 불가사의한 일들로 꽉 차 있으니까... 별반 이상스러울 것도 없다..
혁수를 놓칠 것 같다는 불안감은 아니다..
다만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심장을, 혁수의 모든 것을 갈구하며 날뛰는 이 망할 놈의 심장을 외면했다가는,
영락없는 정신병자가 될 것 같아서....
숨이 턱까지 차 오르고, 뼈와 근육이 가루가 될 때까지 그의 육체를 탐하고 싶은 마음밖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혁수와 하나로 합쳐진 '오르가즘'의 경지에서 영원히 눈을 감아버리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무책임한 발상을 한 적도 얼마나 많았던가...
아니, 그와 정사의 향연을 벌일 때마다 주혁은 그런 바램을 가진다..
그러나... 혁수와 함께 눈뜨는 아침은 내일의 암담함까지도 저만치 몰아내는 위력이 있기에
주혁은 비참한 낭패감 대신 포근한 위안감 속에서 잠드는 것이다..
혁수의 가슴과 배를 어루만지는 주혁의 거친 손길이 혁수를 달아오르게 한다.
주혁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혁수의 귓볼로 옮겨간다..
약한 신음을 흘리는 혁수의 목소리가 허스키하고 끈끈하다..
젠장... 더 이상 자제하라는 건 잔악한 형벌이다..
주혁은 세차게 혁수의 몸을 돌려 자신과 마주보게 하고 그의 입술을 점령한다..
부풀어오르는 혁수가 느껴진다.. 그도 날 원하고 있다...
하지만 엔간히 자신의 감정과 열망을 표현하지 않는 혁수다..
오늘만큼은 내게로 향하는 그 애의 음성을 듣고 싶다..
주혁은 혁수의 등줄기를 한 손으로 쓸어 내리며 애원 반 조롱 반의 어투로 묻는다.
"나와의 섹스....죄악이라고 생각해...?"
혁수는 귀가 먼 사람처럼 아무런 대꾸 없이, 자신의 등을 쓰다듬는 주혁의 애무를 음미하기만 한다..
장주혁은 정말....낯뜨거울 정도로 혁수의 섹슈얼리티를 꿰뚫고 있다..
그러면서 저 따위 질문을 하다니...
한심하고 답답한 녀석이다, 장주혁...
혁수는 주혁이 입은 흰색 남방의 단추를 풀어헤치며 꽤나 불량스럽고 퇴폐적인 어조로 반문한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내가 뭐라고 해 줬으면 좋겠어..?"
새되게 쏘아 부치면서도 화사하게 드러난 주혁의 어깨와 가슴을 사근사근하나 손길로 매만지는 혁수..
간혹 가다 혁수는 주혁 앞에서, 어지러울 정도로 도발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주 미칠 지경이다....
"그냥....네가 느끼는 그대로...얘기해 줘...."
혁수의 티셔츠를 벗겨내며 나른하게 속삭이는 주혁은 이제 거의 호소하는 듯한 말투이다..
혁수는 주혁의 허리띠를 붙잡고 그를 침대로 이끌며 닫았던 입술을 뗀다..
"그건....말로 이야기할 수 없어... 너도 알잖아..?? .....대신....보여줄게......"
주혁의 벨트를 풀고 바지 버클을 끌러 내리는 혁수의 손이 세미한 떨림을 전달해 오고..
주혁은 언어적 대화를 포기함과 동시에 신체적 대화에 사활을 걸기 시작한다.
인간이 지닌 문자의 조합은 늘 그 한계를 여실히 노출하니까...
혁수의 선택이 현명한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남김 없이, 전부 다 보여주겠다..
서로의 어리석은 의심과 두려움이 그 싹을 틔우지 못하도록..
오늘밤의 기억 하나만으로도 영겁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을 만치..
'육체'라는 도구는 얼마나 하찮은 수단에 불과한 것인지..
너와 내가 벌거벗은 몸을 비벼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우리가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인가..?
그 표면적 행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우리의 목적은...그러한 표피성에 존재하지 않아...
"하아....아아....혀..혁아.....혁..아.....아아..."
저 소리가 들려..?
끊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요동하는 저 목소리가 들리냐구..??
내 몸 아래에서 뒤틀려진 내 연인의 모습이 보여?
나를 느끼고 싶어서 불꽃같은 고통까지도 아득한 희열과 쾌감으로 승화시키는 내 연인의 안타까움을...볼 수 있냔 말이야......
주혁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또 한번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멍자국을 찍는다...
-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내일 아침에는 일찌감치 귀경길에 올라야 한다.
다시금 반복되는 일상과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소소하고 일정한 생활리듬이 그리워지기도 하던 참이었다.
역시 인간이란, 정해진 싸이클 안에서 작동하는, 체계 속에 길들여진 동물인가 보다..
짐을 다 챙긴 태현은 빠진 물건이 없는지 호텔 방안을 쭉 훑어본다.
그리고 난 다음 침대에 몸을 던지며 리모콘을 사용하여 TV의 전원을 켠다.
욕실에서 나온 세라가 젖은 머리칼을 빗어 내리며 입을 연다.
"내일 몇 시쯤 출발한대?"
"10시 전에는 떠나자고 그러더라.. 일찍 도착해서 쉬어야 편하지..."
"아유~ 모레부터 또 백화점 나갈 생각하니까 끔찍하다.. -_-;"
태현의 옆에 걸터앉으며 푸념을 내뱉는 세라..
태현은 다정스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넌지시 물어본다.
"일 하는 거 많이 힘든가부다? 네가 엄살도 떨고..^^;"
"힘들다기 보다는 지루해.. 맨날 똑같은 말만 해대고 그러니까...
오빠, 나 빨리 오빠한테 시집가서 살림하고 살래..^^ 난 어렸을 때부터 현모양처가 꿈이었어.."
애교를 부리며 태현에게 찰싹 달라붙는 세라를 골려 주려는 듯 정색을 한 채 말하는 태현..
"야, 누가 너랑 결혼한대? 혼자 앞서가고 있어..-_-;;"
금새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보는 세라가 귀엽기만 하다..
태현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고, 세라는 속없게도 이내 뾰루퉁한 표정이 풀어져서는 태현의 목을 부여잡고 늘어진다..
"이세라...."
"응??"
진중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태현의 음성이 부드럽게 고막을 통과하여 청세포를 건드리자,
세라는 어쩐지 콧날이 시큰해져서 꽉 막힌 목소리로 짧게 대꾸한다.
연이어서 허공을 수놓는 그의 보이스는 화음이 완벽하게 조화된 합창단의 노래처럼 음악적이다..
".......사랑한다...."
그는 언제나...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감동으로 세라를 벅차게 한다..
그게 문태현이다..
세라의 뺨 위로 투명한 구슬들이 하나 둘 씩 미끄럼틀을 탄다..
문태현은 이세라가 편하게 눈물을 공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토록 고결하고, 그토록 신성한 글자가 자신에게도 쓰여졌다는 사실이 영광스럽기만 하다..
이같은 축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건만은...
세라는 태현의 품에 안겨있는 자신의 몸뚱어리가 너무도 천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감히 입술을 열어 고백하려 한다..
"나도....오빠.....정말 사랑해.....정말....."
세라의 음성 속에 배어나는 흐느낌이 짙어지자, 태현은 그녀의 눈물을 수습하기 위해 얼른 분위기를 바꾸려 애쓴다.
세라가 우는 건... 보고 싶지 않다..
세라의 영혼은 태현과 합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빠져나간 수분의 성분은, 태현에게도 똑같은 손실을 가져다준다..
"야! 그만 울고, 사랑도 좋지만 배고파서 미치겠다~ 먹을 거 없어??"
세라는 피식 웃으며 눈가의 물기를 제거하고,
진짜 허기진 시늉을 하며 배를 움켜잡는 태현의 제스츄어에 간식거리를 사러 일어선다.
"밑에 가서 뭐 좀 사올게.. 뭐 먹고 싶어?"
"어어....샌드위치!! ^^"
"알았어.. 씻고 기다리고 있어.."
"으응~~ 빨리 갔다 와~ ^^*"
태현은 몸을 돌리려는 세라의 손목을 잡고 당겨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세라는 태현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고는 발랄한 걸음걸이로 방을 나선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주혁과 혁수가 투숙한 방 문 앞에 멈춰서는 세라...
음흉스런 미소를 띄우며 문으로 다가서더니 첩보영화에 등장하는 비밀요원 같은 자세로 문에다가 귀를 바짝 갖다댄다..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혁수의 신음소리와, 그에 박자를 맞추는 주혁의 거친 숨소리가 닿아오자..
쿡쿡 터지는 웃음을 억제하느라 기를 쓰며 엘레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세라..
엘레베이터에 올라타서는 싱글거리며 혼잣말을 중얼댄다.
"으이구~ 안혁수... 하여튼 안 밝힐 것 같은 놈들이 더 하다니까~?? 킥...^^;;"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혁수와 주혁이 정사를 나누는 광경을 떠올리며 불경스런 상상에 젖어보는 세라에게,
땡 하는 전자음이 들리더니 엘레베이터의 문이 양쪽으로 열린다..
보통 체격을 가진 남자 둘이 그녀와 함께 탑승하고..
그들에게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샌드위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하나씩 체크하고 있는 세라에게 덮쳐오는 사내들의 손아귀...
세라는 순식간에 전신을 결박당하고, 엘레베이터는 지하 2층의 주차장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73)
밀폐된 사각공간 안은 어두 침침하고 좁다.
눈동자를 굴려봐도 희끄무레한 윤곽만 어릿하게 잡힐 뿐 뭐가 뭔지 똑바로 구분조차 할 수 없다.
코밑으로 훅 끼쳐오는 냄새는 습하고 끈적거린다.
살갗에 와 닿는 공기의 분자들은 80%가 구정물로 채워진 것처럼 눅눅한 게 소름 끼친다.
지금은 분명 한 여름인데도, 이곳의 기후는 냉대림이 분포하는 고위도 지방 같다..
세라는 달달 떨리는 턱뼈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공포로 얼룩진 눈을 들어 자기 앞에서 어정거리는 사내들을 올려다본다.
간간이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 중 어느 것 한가지도 세라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무지'에서 기인하는 공포는 실로 엄청나다..
그때, 뼈 속의 골수가 몽땅 말라버릴 것 같은 정적을 걷어내며 누군가가 나타난다..
어느 정도 어둠에 적응이 된 세라의 동공은 그 남자의 얼굴을 급속히 입력시킨다..
하지만,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인물이다..
다시 한번 가중되는 '무지'에의 공포...
세라의 호흡이 가빠진다.
"형님 오셨습니까"
세라를 감시하고 있던 세 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다.
그 광경을 목도하자마자, 세라의 머릿속에는 재준의 얼굴이 부상한다..
그리고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줄기가 쥐어진다..
"실수 없이 잘 데리고 온 거지?"
"물론입니다"
새로이 등장한 남자는 부하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이며 세라에게로 가까이 다가선다..
그러다, 겁에 질려 창백해진 세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외마디 고함을 지른다..
"야! 이게 뭐야?? 이 여자 누구야?!?"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의 표정에는 단박에 위기감과 의아함이 번지고,
남자는 그들에게로 획 돌아서며 격양된 음성으로 악다구니를 쳐 대기 시작한다..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이재준 정부를 데리고 오랬더니, 어디서 이상한 기집애를 끌고 왔어??"
"아,아니.. 저 여자가 이재준의 정부 아닙니까..?"
"어유~ 씨발, 나 진짜 돌아 버리겠네!!
야 이 병신들아, 너희는 조직에 있다는 것들이 충의회 보스 정부가 누군 지도 모르면서 이 일을 맡았어??
이재준 정부가 남잔 거 몰라?! 대체 저 기집애는 왜 끌고 온 거야!?"
"저희는 '정부'라고 하길래 당연히 여잔 줄 알고...
이재준이랑 같이 다니던 녀석들 중에 여자는 쟤 하나 뿐이었거든요.."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일이 전부 다 엉망이 됐잖아!!"
"죄송합니다, 형님..."
서릿발같은 사내의 호통에 부하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며 무조건 저자세로 머리를 조아린다..
조직의 수뇌부가 아닌 이상, 각 조직의 보스가 곁에 두고 있는 정부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아래 사람들에게만 분풀이를 하던 남자는, 한동안 성질을 이기지 못해 씩씩대다가 겨우 노를 가라앉히고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입을 연다..
"애시당초 세웠던 계획이 틀어졌으니까 할 수 없지..
이재준 그 새끼가 약삭빨라서, 벌써 지 정부는 어딘가에 숨겼을 거야..
이렇게 되면 연화회 회장하고 다시 상의해서 일을 수정할 수밖에는 없겠어..
정윤이 너는 얼른 연화회에 연락해서 소식 말씀 드리고 죄송하다고 백배 사죄해..
니들이 제대로만 했어도 이럴 필요 없었어, 새끼들아.."
정윤이라고 불린 사내는 주눅든 음성으로 '예'라고 대답한 뒤 잰걸음으로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 옆에 있던 다른 부하가 주저하는 말투로 어렵사리 질문을 한다..
"저어....형님... 그럼 저 여자는 어떻게...."
"저 기집애도 이재준이랑 붙어 다녔어..?"
"예...."
"둘이 같은 방에 묵었는 지, 그런 것도 알아보지 않고서 일을 처리하나?!
철저하게 조사한 다음에 실행했으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거 아니야!!
여기서 3년을 굴러먹었다는 새끼들이 어떻게 이 모양인지...
이 따위로 계속하면 이재준한테 우리 전부 다 박살나는 건 시간문제야!!
충의회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로 보여?? 이 일에 우리 전체의 목숨이 달렸어!
실패하면, 우리 '민성회' 랑 '연화회' 둘 다 없어진다는 거,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형님..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됐어! 그딴 소리 듣기 싫으니까 닥치고, 한번만 더 실수하면 그땐 정말 내칠 줄 알아.."
"명심하겠습니다.."
사색이 되어서는 굽신거리는 두 사내는 억울한 꾸지람과 경고를 듣고 있으면서도 일말의 불만조차 내비치지 않는다..
세라는 자꾸만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의 자락을 더욱 단단히 여며쥐며,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온갖 추리력과 예지력을 동원한다..
대강의 줄거리가 그녀의 사고회로에 단계적으로 쌓여서 한편의 시놉시스를 그녀에게 읽어준다..
요컨대, 세라는 현재 잘못 포획된 사냥감이다..
그들의 총부리는 강태를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재준에게 겨누어진 화살이라고 해야겠다.
어찌됐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세라는 멍멍해지는 귓구멍을 뚫으려 침을 꼴깍 삼키면서 남자의 다음 말을 청종한다..
남자는 옆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미간을 찌푸린 채,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담배에 불을 당긴다..
그리고 세라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더니, 여전히 쫄아 붙어 있는 부하에게 말한다..
"잘 들어... 이 여잔, 충의회 하고 관련이 없으니까 문제가 시끄러워질 위험이 많아..
이재준이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할 지도 모르는 거고..."
남자가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는 도중, 문이 열리며 방금 전에 나갔던 정윤이라는 사내가 들어온다..
그는 손에 들린 핸드폰을 공손하게 건네며 입을 연다.
"연화회 회장님이십니다.."
안색을 굳히며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대는 남자의 눈에는 상당한 짜증이 엿보인다..
"아, 조회장님..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 애들이 실수를 하는 바람에..."
"아니오, 일이 더 재미있게 돌아갈 것 같은데요..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기대감이 충만하게 담긴 문환의 목소리에 '민성회'의 회장, 박형욱은 어리둥절해 하고..
"우리....이재준의 능력을 한번 시험해 볼까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처음부터 우리의 정체를 까발리는 건 너무 쉽게 점수를 내주는 것 아닐까요?
이재준은 머리가 비상한 놈입니다.. 조금 애를 먹이는 것도 우리 측의 전략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만..."
형욱의 표정이 제자리를 찾으며 본래의 냉정과 무감각을 회복한다.
그들의 통화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그저 상상으로밖에 짐작할 수 없는 세라는 급기야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생존을 간구한다..
일각이 흐를 때마다 무한정으로 확대되기만 하는 두려움은 그녀의 심장을 반으로 쪼갠다..
"지금 회장님께서 데리고 있는 그 여자....애들 시켜서 없애십시오.."
이런 섬뜩한 발언에도 숙달된 형욱은 태연스레 담배를 뿜어내며 되묻는다.
"그리고요? 그 다음엔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그리고 나서... 적당한 곳에 갖다 놓으면 경찰이 발견할 겁니다..
경찰에는 제가 모시고 있는 분들도 여럿 계시니까 손을 써서 수사는 빨리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희생양이 한 명 필요하겠지만 그건 우리 쪽에서 부담하도록 하죠..
이재준이 정말 똑똑한 놈이라면, 가만히 수사결과에 동의하지는 않겠지요.."
"으음....게임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로군요.."
음산한 조소를 매달며 오싹하게 중얼거리는 형욱..
느릿한 손길로 담배를 비벼 끄더니, 핸드폰을 반대 쪽 손으로 고쳐 잡으며 힘주어 마지막 말을 남긴다..
"알겠습니다, 끝나고 나서 다시 연락 드리죠.."
통화를 마친 후 핸드폰을 부하에게 돌려주고, 쿡쿡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세라에게 시선을 던지는 형욱..
혹독한 그의 눈길을 받아 쳐내며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여력이 점점 사그라드는 세라...
반으로 쪼개진 심장에서는 이미.. 분수처럼 콸콸 쏟아져 내리는 피로 인해 텅 비어버린 심방과 심실이 삭막한 최후를 준비하는 듯 하다..
"얘들아..."
"예, 형님.."
"저 여자...조용히 처리하고 결과 보고해라.."
굳이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다.
살인이란 그들에게 있어, 반복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주행사 정도일 뿐이니까...
형욱은 지시를 내린 후, 급하게 몸을 돌려 사라지고.. 부하들은 그 뒤에 대고 예를 갖춘다.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하달된 명령은 확실하게 마무리 짓겠다는 각오로, 그들은 눈을 빛내며 세라를 바라본다.
무고한 스무살 짜리 소녀를 죽인다는 도덕적 관념보다는, 보스로부터 주어진 임무가 더 막중한 책임감으로 그들을 짓누른다.
세라는 목이 부러져라 도리질을 치면서, 마수를 뻗쳐오는 죽음의 갈고리를 피하려고 버둥거린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짤막한 비명조차 튀어나오지 못하고,
다만 가까스로 끄집어내는 목소리가 허망한 메아리처럼 윙윙거리며 어둠 속을 방황한다..
"....아..안돼....나,난 죽을 수 없어....나..나는....나는...싫어.....죽고 싶지 않아....."
나는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은 남자가 있고, 그리고....그리고....나는 꿈이 있어....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의 곁에 서는 꿈....
그의 아이를 안고 그와 함께 공원을 걷는 꿈...
아침마다 그의 셔츠를 다림질하는 꿈....
....그건.....욕심이었을까.....?..
세라의 물음에 명확한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차가운 금속성의 뾰족한 물체가 내장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지독한 아픔이다..
서서히 암흑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영혼을 서러워하며..
세라는 허탈하게 뇌까린다..
문태현.....역시 너는.....꿈이었어.....
(74)
맑은 물 샘솟던 애초의 그곳으로 돌이킬 수 없이 우리의 사랑도 이처럼 저물어야만 하는가...
긴 시름 끝에 마지막 인사를 끝내 준비해야만 하는가...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중 -
"그래.. 너 혼자서만 조용히 와.."
말을 맺으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재준의 속눈썹이 약하게 진동한다.
그의 사무실 안에 모여있는 강태, 태현, 그리고 혁수와 주혁..
세라가 종적을 감춘 지 26시간...
태현은 아예 빈사상태에 빠져 있다.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고...
어느 누구 한 사람도 그런 태현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그의 침묵은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손댈 수가 없다..
주혁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며 날뛰다가 제풀에 지쳐서는 아까부터 줄담배만 피워댄다..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쳐보지만, 덧없이 밀려드는 공허함은 주혁을 더욱 광분하게 만든다.
혁수는 벽에 기대서서 쉴새없이 기도만을 되풀이한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신께 간원한다..
재준은 팔짱을 끼고 먼 곳을 응시하며 두뇌를 회전시켜 본다.
해답은 금방 나온다. 이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다.
배후에 숨겨진 속임수를 파헤쳐서 뿌리 뽑으려면, 좀 더 치밀하게 과학적으로 전후 상황을 따져야 한다.
가장 의문시되는 점은 물론, 왜 충의회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세라를 제물로 택했느냐는 것이다.
허나, 그 문제를 차치 하고서라도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충의회 인 것만은 확정적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엔 어떤 중간 절차가 삽입될 것인지...
재준은 한발 앞서서 전망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최대의 위험부담을 짊어진 자신의 '정부' - 외견상에 불과한 -의 안전을 보유하고 그를 튼튼하게 수호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환성에게 강태를 부탁하여 얼마간 재준의 아버지 때부터 소유하고 있는 경기도의 별장에 강태를 묵게 하려고 마음먹은 재준..
강태는 같이 있겠다고 생떼를 쓰다가, 재준의 간곡한 설명에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말았다.
당최 현실적으로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갑작스레 맞닥뜨린 이 사태 앞에서,
중심선 상에 놓은 재준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모두가 아연하기만 하다..
"회장님, 김 실장님 오셨습니다."
"들여보내요"
육중한 목재 문이 열리면서 석고상 같은 표정을 한 환성이 들어와 재준과 강태에게 문안을 올린다.
강태는 고개를 번쩍 들어 재준을 바라보고, 재준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토해내며 강태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킨다..
이제 갈 시간이라는 무언의 재촉이다..
강태는 속절없게도 재준이 야속해진다..
재준은 묵묵히 강태를 이끌고 환성의 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강태와 동행한다.
강태는 또 한번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려보고 싶지만,
재준의 하얀 얼굴이 금방이라도 숨을 멈출 것처럼 질려 보이기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침울하게 땅만 내려다본다..
차 앞에 도착해서, 환성은 운전석에 자리하고..
재준은 그제 서야 힘겹게 강태와 눈을 맞춘다.
제기랄.... 참으려고 했는데, 그의 눈을 보니 참을 수가 없어진다..
그를 만지면 더 갈급해 질텐데....
강태에게로 뻗어 가는 재준의 손이 꼭 대리석으로 빚어놓은 조각 같다.
그만큼 생명력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그래도... 강태의 뺨을 어루만지는 재준의 손가락을 섬세하고 곱다.
강태는 자제하지 못하고 성급히 재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견고히 닫힌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댄다..
그러자, 지금까지의 철두철미한 단속이 무색하게도,
강태의 몸을 난폭하게 품으며 입술을 벌려 그의 혀를 빨아들이는 재준..
강태는 점점 힘이 빠지며 흐물흐물 녹아드는 육체를 추스리느라 제 정신이 아니다..
차라리 이대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한다면 제법 괜찮은 최후를 맞이하는 것 아닌가-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 속에서 재준은 겨우 입술을 거두어 낸다.
강태는 좀 전의 망설임 따위 깡그리 치워버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속삭인다.
"같이 있을래....가기 싫어..."
"안된다고 했잖아.. 같이 있으면....더 위험해..."
"네 옆에 있는데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내 옆에 있으니까!! 세라도 내 주위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된 거잖아?
세라가 충의회 하고 눈꼽만치라도 관계되어 있니?? 전혀 아니라구!
자세한 꿍꿍이야 좀 더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그거 하나야..
세라는...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했어.."
울분에 찬 음성으로 한탄하듯 소리치는 재준의 모습이 강태의 시야를 아릿하게 흐트러 놓는다..
이재준....지금 자책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달라진 거야, 네가...??
강태는 눈 한번 깜박거리지도 않고 둥근 뺨에 눈물 자국을 새기며, 재준의 소매깃을 만지작거리다가 풀죽은 어투로 이야기한다..
"알았어... 갈게...."
그리고 뒤돌아 차 문을 열기 전, 등뒤로 한마디 덧붙인다.
"이번 한번만이야... 떨어져 있는 거..."
- 강태를 보내고 돌아온 재준에게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가가는 혁수..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으며 친근해 보이는 눈망울로 재준을 위로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쩌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일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건...네가 의도해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넌 아무 잘못 없어.."
재준은 무지근하게 고체화되는 성대를 복구할 틈이 없어서 그냥 작게 미소를 지어준다..
그러나 혁수의 말대로 낙관적인 예감을 가지기엔, 재준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회장님, 전화입니다."
인터폰을 통해 울려나오는 비서의 목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재준은 나꿔채듯 수화기를 귀에 붙이고..
혁수와 주혁, 태현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재준을 주시한다.
"저 성현입니다, 회장님"
"어떻게 됐어??"
피복선을 타고 들려오는 부하의 목소리가 음울하고 저조하다..
거기서부터 재준의 불안은 극대화된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부하의 태도가 재준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무슨 일이야?! 왜 말이 없어!!"
"아, 저 그게....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세라라는 분....돌아 가셨습니다..."
빌어먹을.....결국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 나가는 군...
재준은 숨을 들이마시며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이러한 비극적인 돌발상황 앞에서 이성을 잃지 않고 책임을 완수할 사람은 재준뿐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비통해 할 자격조차 부여하지 않는다.
감히 내가 어떻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세라의 시신 앞에서 내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저주스런 액체이다..
"자세하게 얘기해 봐.."
"예.. 시체가 발견 된지는 1시간쯤 지났습니다.
지금 경찰이 와서 조사하고 있는 중이고.. 복부에 칼을 맞은 것 빼고는, 다른 사망 원인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재준은 무서울 만치 건조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그곳의 위치를 묻고, 설명을 들은 뒤 기계적인 동작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혁수와 주혁, 태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이제 말해 주어야 하는데....
태현의 축축해진 암갈색 눈동자가 너무 아프게 명치께를 후벼파서..
그만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나지막히 선고한다.
"......세라.....죽었대...."
억눌린 비명소리가 활화산처럼 터지려 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틀어막는 혁수..
주혁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가 처연한 직선을 그리며 낙하하고..
인형처럼 정지해 있던 태현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강한 의심이 역력한 표정으로 눈자위에 핏발을 세우며 말한다.
"가 봐야겠어.. 가서 내 눈으로 봐야겠어..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다구..."
그리고는 재준에게 성큼성큼 걸어 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세라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 청한다..
재준은 끝내 태현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통스런 발자국을 옮긴다.
그들이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유흥업소가 밀집한 환락가의 뒷편을 우회하고 있는 으슥한 골목이다..
경찰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고, 새벽 3시가 넘은 시각이라 구경꾼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한쪽 구석에 세라가 누워있다..
흰 모포를 머리끝까지 둘러쓰고 물건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다..
태현보다 주혁이 먼저 달려가 모포를 걷어내고, 얼굴을 확인한다.
세라가 맞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분출한다..
싸늘해진 세라의 몸을 붙잡고 악을 쓰며 오열하는 주혁...
혁수는 그런 주혁을 부둥켜안으며 그의 포효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주혁을 세라에게서 물러나게 한다..
무엇보다 세라를 마지막으로 품어야 할 사람은 주혁이 아닌 다른 이이기 때문이다..
태현은 비틀거리며 한 발짝씩 세라와 가까워진다..
털썩 무릎을 땅에 대고 앉더니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럼 내려다본다..
손을 내밀어, 윤기를 잃어버린 세라의 살결을 매만지면서...
넋 나간 어조로 백치처럼 중얼거린다..
".......진짜네....이세라....."
벌떡 일어나서 전부 다 장난이라고 깔깔 웃을 것 같았는데...
.......정말....이구나......
앙앙대면서 조르고, 깐죽거리면서 수선을 피우던 이세라가...
왜 이렇게 얌전해졌어....
나는...있는 그대로의 널 사랑했는데..
너한테 변화 같은 거 바란 적 없는데...
왜 이렇게 많이 변한 거야...
태현은 가슴을 열어 차디찬 세라의 몸을 담아본다..
하지만 그건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
이 안에서 살아 숨쉬던 네 영혼은 어디쯤을 맴돌고 있을까...
세라야....
행여 라도...네 꿈 하나 제대로 이루어주지 못한 내 옆을 서성거리지는 마라...
그럴려 거든 차라리 내 영혼까지도 너와 함께 생매장 해 주기를...
태현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세라의 감겨진 눈 위를 수없이 적셔도...
그녀의 눈꺼풀을 움찔거리지 조차 않는다..
(75)
드라마나 영화의 장례식 장면에서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
검은 상복을 추려하게 차려입은 유가족과 친구들이 역시나 검정색 우산을 받쳐들고,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줄기와 경쟁이라도 하듯 눈물을 뽑아낸다.
하지만 영화와 현실은 엄연한 괴리가 존재한다.
아주 사소한 것들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 차이는 현격하거나 아니면 미묘하게나마 드러난다.
세라의 주검이 안치된 관 위로 흩뿌려지는 햇살이 너무 찬란하고 눈부셔서 쓴웃음이 난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파여진 구덩이 안으로 천천히 내리는 네모난 관을 무색하게 할만큼 하늘은 청명하다.
주위의 수풀과 들꽃도 한창 제 빛깔을 뽐내느라 얄미울 정도로 싱싱하고 아름답다.
검붉은 흙이 조금씩 고동색 관의 형체를 가리우기 시작하자, 세라의 어머니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을 터뜨린다..
옆에 서 있던 지민도 참아왔던 울음을 토해낸다.
태현은 울 수가 없다. 아니, 울어지지 않는다.
세라의 죽음을 이토록 빨리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의 이성이 원망스럽다..
나는 가슴으로만 그녀를 사랑했던 걸까...?
하기사,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녀는 저렇게 자잘한 돌멩이 속으로, 겹겹한 나무뿌리 속으로, 알을 까고 있는 유충들과 버무려져 썩어갈텐데...
세라가 간직하고 있던 상처까지도 함께 썩어 문드러질텐데...
그것 하나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보다..
세라의 부재(不在) 가운데에도 시간은 변함없이 물리적 회전을 계속한다.
그에 따라, 장례식에 수반되는 형식상의 절차도 끝이 나고..
이제 감상적인 추모와 애도의 감정에서 벗어나, 냉랭한 현실의 땅바닥으로 발을 디뎌야한다.
그래야만 망자의 원통함을 이승에 남은 자들의 손으로 풀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 "회장님, 장주혁 씨 오셨습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재준의 사무실 안으로 주혁이 들어선다.
창 밖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던 재준은 문 쪽으로 돌아서며 주혁을 반긴다.
"이제 와? 장례식은 잘 끝났고..?"
"응..."
주혁은 간략하게 응대하며 가죽 정장 쇼파에 앉고, 재준 역시 그 맞은편에 자리한다.
지친 주혁의 표정 때문에 그의 얼굴을 핏기가 가셔 보인다..
재준의 행색 또한 초췌하기는 마찬가지다.
습관처럼 노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재준은 의미심장한 음성으로 화두를 연다.
"....경찰이 범인을 잡았어... 지금 조사중이래..."
"정말이야!??"
재준은 고개만 끄덕인다.
범인을 찾았다는 게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는 뜻이다.
반대로, 문제의 시작일 따름이다..
주혁은 시큰둥한 재준의 태도가 이상스러워서 눈살을 살짝 찡그린다..
그리고 어렴풋하게 감이 짚이는 대로 섣부른 자신의 의견을 넌지시 들이밀어 본다.
"그럼 너는, 그 범인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대하고 있던 바이지만, 주혁의 두뇌적 감각은 탁월하다.
이런 순간에도 그에 대한 흡족함을 느끼는 재준은 별 수 없는 암흑가의 일원이고 한 조직을 이끄는 우두머리다..
"범인은 우발적인 행동이었다고 얘기하고 있어..
원래는 돈만 뺏으려고 했는데 여자가 너무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엉겁결에 칼로 찌른 거라고..
그런 경우에는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되잖아.."
"누구한테 사주를 받은 거겠지..?"
"그래, 맞아.. 경찰도 거기 같이 놀아나고 있어.. 벌써 수사도 마무리 됐고..."
"경찰 쪽에도 손을 쓴 거 보면, 너도 알 만한 새끼들 아니야?"
"짐작 가는데가 있기는 한데...확실한 증거가 없으니까 일단은 가만히 두고 볼 수밖에..."
주혁은 무릎 위에 두 팔을 올려놓고 상체를 재준 쪽으로 기울이며 결연한 눈빛으로 재준과 시선을 합친다.
급박하게 일렁대는 주혁의 눈동자와 달리, 재준의 검은 심연은 평정을 잃지 않은 상태이다.
주혁의 중량감 묵직한 음성이 낮게 울려 퍼진다..
"이대로 넘어 간다는 건 말이 안 돼.. 세라가 죽었어, 세라가 죽었다구.."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게 아냐. 여긴 지하세계고, 법 같은 건 통하지 않아."
"세라는 여기랑 아무 상관이 없는 애였어! 그 애까지 이쪽 틀에 맞추려고 하지 마!!"
분을 이기지 못하고 격하게 내지르는 주혁의 고함소리가 매섭게 재준의 귓전을 후려갈긴다..
재준은 가까스로 억제하고 있던 응어리들이 한꺼번에 튀어 오르며, 주혁보다 더 큰 크레센도로 맞선다.
"형이야말로 억지 부리지 마!! 나는 뭐 세라가 죽은 게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아??
나도 마음 아프고 미안해! 미안해서, 오늘 마지막으로 세라 얼굴 보러 가지도 못했어!!
하지만 어떡해...난 충의회 보스야.. 폭력 조직 보스라고!! 내가 가진 것도 그게 다야!!"
숨을 몰아 쉬면서 주혁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는 재준..
막무가내로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하는 게걸스런 욕설들은 목구멍 안으로 씹어 삼킨다..
폭풍이 휩쓸고 간 폐허와 흡사한 을씨년스러운 정적이 재준과 주혁 사이의 공간을 잠식하고,
얼마간 설익은 공기분자의 팍팍함 속에서 자학적인 고요함을 즐기던 주혁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를 발한다.
"....미안하다.. 그냥 그 새끼들 족쳐버리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어...
그래서... 네 생각을 못했다.. 알고 보면, 네가 제일 골치 아플텐데..."
"나 그런 말 들을 자격 없어.. 전부 내 책임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인데.."
"그렇지 않아. 지금 누구 잘잘못을 따질 형편이니?
네 말대로 이쪽 세계 안에서 끝장을 보려면 한 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돼..
어차피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철저하게 여기 방식대로 밀고 나가야지..."
"그 새끼들도 알고 일을 벌이는 거니까...
세라는....한 마디로 미끼였던 거야.. 얼른 우리가 자기들이 누군지 눈치 채주길 바라고 있어.."
"짐작 가는 데가 있다고 그랬지? 그게 누구야?"
"연화회라고... 저번에도 그 새끼들이 강태 한번 건드린 적 있거든..."
주혁은 담배 가까이 라이터를 가져가며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고갯짓을 해 보인다.
그는 벌써 충의회에 소속된 일원과 다를 바 없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재준은 그런 주혁의 눈동자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며,다짐을 얻어내려는 듯 단호하게 질문한다.
"형...나 도와주는 거지..?"
주혁은 순간적으로 혁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혁수의 이해심을 신뢰해 보자며 자신을 다독인다.
혁수도 이번만큼은, 동의의 팻말을 들어주리라 믿는다..
"바깥 세상이 거들떠 봐주지도 않으니...충의회를 빌릴 수밖에 없지..."
- "윤아누나는 잘 있어??"
한달여만에 만난 지민과 혁수는 한동안 마주앉아 서로의 외양을 살피는 데에만 열중했다.
혁수는 지민에게서 '무위' 속에 날아든 '불행'을 보았고, 지민은 혁수에게서 '변화' 속에 접하게 된 '파장'을 관찰해 내고 있었다.
혁수의 안부 질문에 지민은 곧추 세웠던 신경 조직들을 수그리며 서글서글한 눈매로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별로 웃는 것 같지가 않다..
"잘 있지.. 윤아가 너 많이 보고싶어 해..."
"나도 누나 보고 싶다.. 개학 얼마 안 남았잖아, 이제?"
"응.. 과제 논문 준비하느라 바빠.. 넌...좋아 보인다..??"
"....좋긴.....숨어사는 처진데...."
황폐한 웃음을 드리우는 혁수의 작은 얼굴이 무척 피곤에 절은 듯 하다..
실제는 예상보다 훨씬 더 버겁고 막막한 담장을 뛰어 넘으라 요구하는데, 혁수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21살 남자로 묶여 있다.
"어머니는 아직 네가 미국에 있는 줄 아시는 거야?"
"한국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지금쯤이야 아셨겠지.. 내가 몰래 떠나 왔다는 거..."
"그럼 찾고 계시겠구나.."
"훗.... 나 완전 지명 수배범이라니까? 현상금 걸려 있을지도 몰라.."
가볍게 내뱉듯이 주절대면서도 입꼬리만 말아 올려 웃는 형상을 만들 뿐,
갈색 눈동자는 오한이 날 정도로 처참하게 절망 속으로 빠뜨려 버리는 혁수...
운명에 의해 패대기쳐지는 오이디푸스와 너무 닮았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비극적 예언을 비켜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거역할 수 없는 신탁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는 능동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모습 또한 혁수와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혁수는, 위와 같은 오이디푸스의 성정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단지 혁수의 선택은 '장주혁'이라는 한 남자만을 그 내용의 전부로 하고 있다는 것...
혁수의 선택이 죄인가..?
지민은 혼자서만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난...세라한테 진 빚이 많아.. 주혁이도 그렇고...."
지민의 상념을 뚫고 침투해오는 혁수의 이야기는,그의 어려운 결심과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세라한테...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라는 생각을 했어..
절대로...다시 예전처럼 비겁한 모습 보이지 않는 거...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도망치지 않는 거...그거 하나 뿐이라는..."
"그래....세라가 어디선가...지켜보고 있을 거야..."
"꼭 그래줬으면 좋겠어.. 내가 다시는 뒷걸음질치지 않도록...세라가 잘 감시해 줬으면 좋겠다...."
지민은 혁수의 눈망울 안에서 '아픔' 속에 반짝이는 '진실'을 발견한다..
안일한 거짓 가운데 영혼으로만 신음하던 혁수는, 아니, 혁수와 주혁의 영혼은 치유 받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났지만..
그들이 함께 붙드는 '진실'은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지...
그들이 쟁취한 '진실'은 승리하게 될 것인지...
지민은 까마득하게 미궁으로 빠져드는 미래를 바라본다..
(76)
일주일만에 대면한 재준의 얼굴은 전혀 딴 사람 같다.
더 야위고 성숙해진 모습이 꼭 화난 사람처럼 보이고, 강태는 그런 그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리감을 느끼는 중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재준이다.
변함없이 수려하고 준수한 강태의 남자인 것이다..
씻고난 후, 술부터 찾은 재준은 별장의 거실 한 귀퉁이에 놓인 장식장에서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침실로 들어온다..
그의 동작을 가만히 주시하던 강태..
창틀에 술잔을 올려놓고 담배불을 당기는 재준에게 서투른 주저함으로 묻는다.
"세라...장례식은 잘 치뤘대...?"
"어어... 형들만 갔다 왔어.."
"그랬구나...."
데면데면한 이야기가 오가는 밍밍한 분위기가 더 싫어진 강태는 서둘러 입을 다물고 만다..
재준은 굳건한 침묵으로 일관한 채, 강태의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에는 그다지 배려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강태는 자꾸만 그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게 되는 자신이 한심스럽고 유치하다.
그래도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어린애 마냥 징징대면서 재준의 팔에 매달려 실컷 앙탈을 부리고 싶다..
유아기적 퇴행 현상을 나타내는 자신의 정신세계가 황당할 따름이다..
"강태 너...앞으로 당분간 계속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다.."
느닷없이 강태의 귓가에 달려드는 재준의 건조한 음색이 강태의 신경 돌기를 바짝 긴장시킨다.
내일 아침에 그와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될 거라 당연히 생각했던 강태로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일이 복잡해졌어.. 너도 알다시피, 세라는 경찰이 얘기하는 것처럼 강도를 당한 게 아니야.
세라를 죽인 놈들은 따로 있고 그 놈들이 목표하는 건 충의회야..."
이런 얘기를 할 때 강태를 바라보는 재준의 눈빛은 자를 대고 그은 직선을 닮았다.
검은 눈동자는 공장에서 인공적으로 대량생산해낸 모조품 같다.
강태는 금새 이마를 찡그린다.
"여긴 나랑 몇몇 우리 애들 밖에 아무도 위치를 모르니까 그래도 제일 안전해..
해외로 잠깐 보낼까 생각도 해 봤는데 너무 멀리 있어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싫어.. 너랑 같이 있을래."
재준의 친절한 설명 따위 듣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냉랭하게 잘라 일단락 짓는 강태..
이번에는 절대로 양보하지 못한다는 고집으로 똘똘 뭉쳐있다.
재준은 맥이 탁 풀려 버리는 것을 억지로 붙들어 매며 지친 말투로 다시 입을 연다.
"그러지 말고 내 말대로 해. 알아들을 만큼 설명했잖아..."
"싫어. 그때 분명히 얘기했어. 떨어져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만사가 그렇게 네 뜻대로 되는 줄 알아? 고집 부릴 게 따로 있지.."
"하여간 싫어. 난 너랑 같이 있을 거야. 혼자 안 있어.."
강경한 태도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강태..
가뜩이나 여러 가지 심란한 상념의 파편들로 인해 머리가 뻐개질듯한 재준은, 자신의 초조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몰라주는 강태가 얄미워진다..
결국은 언성을 높이며 날카롭게 곤두 선 심리를 폭발시켜 버리는 재준..
"너 정말 왜 이래?!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말 좀 들어!!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한 두 가진 줄 알아??!"
"생각은 무슨 생각이야!! 그렇게 내가 부담스러우면 차라리 헤어져!!!"
앙칼지게 쏘아 부치는 강태의 고함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재준의 손바닥이 강태의 뺨을 후려친다.
손바닥과 뺨이 맞부딪쳐서 생기는 마찰음이 둔탁하게 파장을 일으키고..
강태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재준의 두 눈을 올려다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돌풍 같은 격노로 뒤덮여 있다..
"강태 너 그렇게 잘났어?! 네 입으로 어떻게 그 말을 지금처럼 쉽게 할 수가 있어??
네가 어떻게 내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냐구!!?"
하얗게 질렸던 강태의 얼굴이 차츰 제 빛깔을 회복하며, 대신 일그러진 눈망울에 상심 어린 물기가 차 오른다..
방금 내뱉은 실언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이 급속하게 밀려오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본심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재준에게 섭섭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말...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옹졸하고 치사한 감정이다..
"나는 뭐 너랑 떨어져 있고 싶은 줄 알아?? 나도 미쳐버리겠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나는 너 잃어버리면.....너 잃어버리게 되면....널 잃으면......"
끝까지 말을 맺지 못하고 흐리멍텅한 여운을 남기며 고개를 떨구는 재준..
강태의 부어오른 왼쪽 뺨 위로 또르르 굴러 내리는 눈물방울이 재준의 손등에 점점이 묻어난다.
재준은 고개를 들어 울고 있는 강태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 손자국이 선명한 그의 뺨을 매만지며, 사뭇 달라진 목소리로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손찌검 한 거...정말 미안하다....네 말마따나, 막 굴러먹고 산 습관을 못 버려서..."
"....아,아니야.....내가 맞을 말했는데, 뭐...."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거리는 코맹맹이 소리로 중얼중얼 대꾸하는 강태가 불현듯 넘치게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재준은 무조건반사적으로 미소를 띄운다..
그런 재준의 웃음을 보지 못한 강태는 그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는 목적인지,
아니면 자신의 진솔한 속내를 토론하려는 심산인지 계속해서 칭얼거리는 투로 말을 잇는다.
"네가 옆에 없으면.....나...불안해... 불안해서 살수가 없단 말이야...
혹시라도 네가 나한테 싫증난 건 아닐까, 내가 싫어져서 여기 이렇게 처박아 두고 연락도 제대로 안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 들면 불안하고 무섭고...흐윽....그래서 못 참겠다구...."
재준은 하도 기가 막혀서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서럽게 눈물 콧물을 찍어내면서 한다는 소리가....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애련한 강태의 마음이 와 닿는 것 같아서 코끝이 찡하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이재준의 남자다.
지구가 반대쪽으로 자전하는 한이 있더라도, 강태는 이재준의 사람이다.
재준은 벅차게 도약하며 심장의 박동 수를 증가시키는 영혼의 감각세포들을 제어하면서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강태의 몸을 포근하게 품어준다.
가슴과 가슴의 밀착.... 서먹한 공간은 수월하게 파기된다.
"야아....강태 너 진짜....내가 아주....허! 참 나...."
하나의 완성된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짧은 실소만 반복적으로 뱉어내던 재준은,
별안간 표정을 진지하게 정돈하며 강태의 몸을 좀 더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무어라 얘기하는 대신, 그의 머리카락에 살며시 입을 맞춘다..
재준은 말재간이 없다. 그러나 강태를 사랑하고 있다.
그걸 강태에게 충분히 인지시켜 주어야 한다..
강태는 잠시나마 그의 감정을 의심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한다..
"재준아....안아 줘...."
그를 만족시켜 주고 싶다..
힘들어하고 지쳐있는 그에게 최상의 위로를 선물하고 싶다..
그래야 이 같잖은 불안함과 염치없는 갈망의 무게가 일말이나마 감량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몸이 부서지고 망가지고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상관없다.
재준은 강태의 옷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그를 침대로 이끈다.
급하게 재준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강태의 손길이 절박하게 느껴졌다면, 단지 재준의 기분 탓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두 사람 다 지독한 갈증으로 피폐해진 상태이다..
일각을 다투는 목마름이 그들의 육체를 극렬하게 팽창시킨다..
허공을 달구는 강태의 숨소리가 재준의 청각세포를 거쳐 그의 가장 민감한 부분까지 자극한다.
재준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아득히 멀어져 가는 이성의 발자취를 배웅하며, 강태는 낮게 속삭인다..
"오늘밤에는....내 생각만 해 줘...."
"항상 네 생각만 하고 있어...."
"...아니....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온 몸으로...내 생각만 해 줘...오늘밤엔....."
"그래....알았어.....알았어, 강태야....."
포개어지는 두 입술이, 서로를 옭아매는 팔과 다리가,
세차게 펌프질을 하며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두 심장이,
그리고 모든 지상의 것들을 초월하여 만나는 상처 입은 두 영혼이...여기 있다.
그들은 존재한다. 존재하고 있기에 서로를 원하는 것이다.
'운명'이라는 진부한 단어는 배제하도록 하자..
그런 너절하고 상투적인 어휘가 끼여들기엔 너무 특별한 그들을 존중해 주자..
"놔주기 싫어......재준아....나 너 놔주기 싫어....."
재준의 육체를 담은 채, 허리를 비틀며 신음하는 가운데...
주문을 외우듯 뇌까리는 강태의 음성에는,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강태는 순결하다. 틀림없이 순결하다..
"....죽여 줘....그냥 이대로 죽여 줘.....재준아....이대로...제발...."
애원하는 그의 목소리가, 꺼져버릴 듯 다시 타오르는 그 목소리가..
섬뜩한 절실함으로 재준의 영혼을 무너뜨린다..
진심으로 강태를 죽이고 싶어진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손으로 강태를 죽여주고 싶다..
그러나 비굴한 도피를 택하지는 않겠다.
패배하더라도 싸움을 벌여 보는 거다..
참혹하게 나가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한판 거창하게 붙어볼 작정이다..
때문에 재준은 강태의 목을 조르는 대신, 그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부둥켜안으며 더욱 격렬하게 강태의 육체를 메꾸어 나간다.
짙어지는 강태의 신음성을 즐기며 자신과 강태를 노려보는 무자비한 '세상'에게 시니컬한 비웃음을 날려보내는 재준...
어디 한번 해보자구....이 아름다운 피조물을 내 품에서 빼앗을 수 있을지...
하지만 승부를 짓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게 있어..
난....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금 내 아래에서 욕망의 환타지 속을 헤엄치는 이 남자를 이 남자를 지켜 내겠다..
필요하다면 반칙도 서슴지 않을 거야..
이 경기에 정해진 규칙 같은 건 없어...
가장 비열해지고 악랄해 져서라도, 난 이기고 말 거다..
만약 내가 진다면, 그래서 내 남자를 나에게서 분리시키게 된다면...
그때는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내가, 이재준을 용서하지 않겠다..
충의회의 2대 회장 이재준... 반드시 기억해라....
(77)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원하는 것이
왜 죄가 되어야 하는가...
- <실락원> 중 -
주혁과 재준이 함께 일하기로 결정한 후,
재준은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주혁과 혁수로 하여금 자신의 빌라로 이사할 것을 권했고, 두 사람은 재준의 말대로 이행하자 합의를 보았다.
태현과 셋이서 동거하던 아파트에 물건들을 가지러 온 혁수..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던 태현은 수척해진 핍절한 모습으로 혁수를 맞아들인다.
선명하던 그의 하늘색 머리가 색이 바랬다고 느끼는 건, 혁수의 눈이 착시현상을 일으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태현의 암갈색 눈동자 속에 대글대글 서려있던 장난기가 종적을 감추었으니...
혁수는 한참만에야 어렵사리 태현의 얼굴을 마주본다.
"며칠동안 연락도 안 되고... 계속 집에 있었던 거야..?"
태현의 눈치를 살피며 꺼내놓는 혁수의 음성에 포함된 걱정과 약간의 질책이 태현의 아픔을 움직이는 지,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응...작업 하느라구...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
꽉 잠긴 허스키 보이스는 태현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 완벽한 오산이었다.
음산하다고 느껴질 만큼 낮게 깔린 중저음이 태현의 목구멍을 거쳐 새어나오자, 혁수는 순간적으로 전율감을 맛본다..
'체념'처럼 쓰라리고 모욕적인 슬픔이 또 있을까...?
"세라 얘기...들었지..? 주혁이랑 재준이가 밝혀내려고 애쓰는 중이야.."
"어떤 쪽이든 간에...어차피 그 애는 죽었어..."
단호한 말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청승맞은 흐느낌이 배어나는 한탄조도 아니다.
국어 책을 그대로 낭독하듯, 감정이나 주관을 몽땅 끄집어내고 철저한 객관성을 유지할 뿐이다..
섣불리 인간의 감정 따위를 편승시켜서 자명한 진리를 오염시킬 수는 없기에...
태현은 주책 없이 쏟아지려 하는 눈물을 모질게 삭히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진실이라는 건...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죽은 사람에겐...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아..."
"하지만, 태현아..."
"세라는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느니, 그딴 소리는 제발 하지 마..
그런 웃기지도 않은 얘기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아..
세라는 죽은 거라구, 죽었어!"
"하지만 넌 아직도 세라를 사랑하잖아..."
"그래서?? 안을 수도 없고 키스할 수도 없어..
꼴 같지도 않은 '플라토닉러브' 따위는 집어 치라 그래!
정신적 사랑? 영혼의 교감??
좋지... 물론 그게 본질이야.. 그게 없으면 추해지지...
그치만, 난 사람이야. 난 한 남자로서 '이세라'라는 한 여자를 사랑했어..
나는 피가 뛰고 숨을 쉬는 인간이라구!
벌써 흙으로 변해서 썩어가고 있는 애인을 생각하면서 행복에 겨운 미소라도 지으라는 거야 뭐야?!
진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데? 누굴 위한 건데??!"
감정 따위는 배제하자며 자신을 엄하게 경고하던 태현은
어릿광대처럼 스스로의 언술에 빠져들며 애꿎은 혁수를 대상으로 삼아 공중을 맴도는 격렬한 노여움을 터뜨려 버린다..
"결국은...남아있는 우리들을 위한 거잖아...
우리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우리가 좀 더 떳떳해지기 위해...
진실을 밝히려 하는 것 뿐이야..
'세라를 위해서' 라는 거창한 명제 같은 건 달지 마..
그냥 솔직해 지자구... 나 또한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어..
왜냐면 그래야 내 속이 후련해 질테니까..! 세라를 위해서는 아냐. 나 자신을 위해서지..."
"그만해, 문태현.. 이런 식으로 우리 전체를 괴롭혀 봤자 돌아오는 건 마찬가지야..."
과장된 비극성을 여실히 드러내며 자학적인 신랄함에 한껏 젖어 떠들어대는 태현의 말을 막으며,
혁수는 사춘기 소년의 치기 어린 웅변을 나무라는 노 선생님처럼 위협적으로 그를 제어한다..
혁수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압적인 어투에, 마구잡이로 불쑥불쑥 뻗어 나오던 분노와 절망의 첨탑이 태현의 입술 안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얼마간 기묘하고 아리송한 정적이 둘 사이를 채운다.
"나 이번 주말에 제주도 내려간다..."
고요한 공기의 흐름을 뚫고 혁수의 고막에 닿아온 태현의 음성은 전보다 한결 본색을 되찾았다.
그러나 저변에 유유히 도사리고 있는 우울과 상실감은 여전히 고집스레 또아리를 틀고 있다.
"며칠동안 쉬다 오려고... 부모님도 찾아뵌 지 오래 됐고..여기 있으면 더 버티기 힘들 것 같아서..."
"그래.... 잘 생각했다.."
"애들한테 네가 대신 얘기해 주라.. 다시 올라오면 전화할게.."
"알았어.. 가서...다 잊어버리고 왔으면 좋겠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잊어버린다...... 훗, 그야 언젠가는 잊겠지... 내가 사람인 이상...못 잊지는 않겠지..."
다시금 비릿하고 스물거리는 냉소가 번지는 태현의 하얀 얼굴에 혁수의 눈가가 따끔거린다..
'문태현' 하면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던 필살의 오버액션과 수다는 대체 어디로 증발한 건지...
그를 변하게 한 건.....사랑..일까...?
"혁수야... 이세라가 어떤 여자 였는지 알아...?"
물론 혁수는 모른다.
정답이 존재할 수 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함부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다.
때로는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고 욕될 때가 있다.
"이세라는...강하면서 약하고, 밝으면서 어둡고, 당당하면서도 언제나...두려워했어..
음탕한 창녀 같으면서 또 숫처녀 같기도 하고.. 엄마 같으면서, 한편으로는 철부지 막내 동생 같을 때도 있고...
그리고....심지어는....남자 같으면서 엄청 여자다웠지..."
"쿡....이세라는 야누스 였네...?"
"하하....그랬네...야누스......그 야누스의 꿈이 뭐였는지 알아...?"
"..............."
"...현모양처였어.. 참 나... 너무 소박한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다른 여자들이 들으면 18세기 형 여성이라고 막 뭐라 그랬을 거야..
여성권의 실추가 어쩌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세라는...남자에 기대서 편하게 살려는 한심한 여자는 아니었어..
그 애는 단지....아주 작은 행복까지도...꿈꾸기 두려워 한 것 뿐이야..
무슨 얘긴지...이해 해..??"
혁수는 고개만 끄덕여 준다.
그리고 손을 뻗어 태현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주려 하는데, 태현이 매몰찬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혁수의 손길을 피한다.
그렇지만 혁수는 기분이 상하기보다는 더욱 그가 가여워 지기만 한다..
이 때엔 동정심마저 죄악이라고 이름 붙여야 하는 건가..?
"나...그런 꿈 정도는 이루어 줄 능력 있었는데...
매일 아침마다 나 깨우고.. 내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시장도 같이 보러 다니고...그렇게 해 줄 능력 정도는 있었는데...
꼭....그렇게 해 주고 싶었는데...
빌어먹을..... 기회도 안 주는 건 좀 심하지 않냐...?"
누구를 탓하는 걸까..?
그는 지금 누구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 걸까..?
파르르 떨리는 태현의 숱많은 속눈썹이 그의 원망스러움을 대변하는 듯 하다..
그의 손등에 비치는 파란 핏줄이 그대로 피부를 뚫고 나와, 제멋대로 팔딱거리며 새빨간 선혈을 이리 저리 뿌려댈 것만 같다..
그럼에도 태현의 고통은 너무도 흔한 세 글자의 단어로 압축될 수 있다.
그/리/움....
시시껄렁한 유행가 가사에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유치한 세 글자...
인간의 언어는 이처럼 짜증스런 한계를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언제나 허구다..
약간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해도, 거대한 허구의 무게에 짓눌려 삽시간에 소멸되고 만다..
인간 세상의 '진실'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이다지도 가볍고 하찮기만 하다..
혁수는 이 세상의 진실만큼이나 작아 보이는 태현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는 것으로 참담한 심정을 무마시키려 해 본다..
- 재준과 일에 관련된 의논을 마치고 취침인사를 나눈 뒤,주혁은 2층으로 향한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창가에 기대어 선 혁수가 바깥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혁의 기척을 듣고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항상 주혁의 눈을 외면하고 절대로 먼저 주혁의 눈을 바라보지 않던 예전과 비교해 볼 때,
혁수의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도 주혁에게는 은혜로운 축복이요 감격스런 감사의 제목이 된다..
"재준이랑 얘기 다 끝났어?"
"응.. 혼자서 심심했지..?"
다정스레 물어오며 습관처럼 혁수의 허리를 감아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기는 주혁..
혁수는 가만히 주혁의 품안으로 이끌려 가며 그늘진 갈색 눈으로 다시 창 밖을 응시한다..
".....태현이...이번 주말에 제주도 내려간대.. 많이...힘든가 봐..."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에서 번져나는 후광이 희미하게 깜박거린다..
높은 수압의 해저와도 같이 갑갑한 심층의 연못이 그의 망막 안에 아로새겨진다..
혁수는 소용돌이치는 주혁의 눈동자 속에 과감히 자신의 모습을 담으며 그의 하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입을 연다..
"누굴 사랑한다는 건...그렇게 무서운 거야..."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어.."
"쿡....자신 있나 보네, 장주혁...?"
"당연하지... 너 지금 나한테 안겨 있잖아..."
호쾌하게 혁수의 귓전을 두드리는 주혁의 목소리가 유약한 떨림조차 내비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지...
혁수는 잠시나마 겁을 내고 몸을 사렸던 자신이 죄스럽기만 하다..
속죄와 사과의 의미로, 주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는 혁수..
주혁은 그의 입맞춤에 담긴 혁수의 속내를 알아채지는 못 하지만,
이런 달콤함 속에 감춰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자제력을 잃어버린 주혁의 손가락이 혁수의 티셔츠를 벗기고...
이제는 수치심이나 망설임이 끼여들 틈새조차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자신의 욕망이 부끄럽기보다는 처량하게 느껴진다..
연인과의 섹스가 나를 파멸시키는가...
나와 연인의 결합은 신성한 창조의 질서에 위배되는 것임에 틀림없다면...
우리고 그 잘난 '플라토닉러브'에 만족하며 멀찍이 물러서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지만....장주혁은 한 남자로서 '안혁수' 라는 또 다른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둘 다 살아 있다...
(78)
"회장님, 강연이 씨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책상 앞에 앉아있던 재준은 서둘러 담배를 비벼 끄고 옷 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킨다.
육중한 나무문이 빼꼼이 열리더니, 약간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도도하고 오만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가 재준의 사무실 안으로 발을 디딘다.
강태의 누나, 연이이다..
강태와 무척 닮았지만 그가 가진 색기나 요염함은 갖추지 못한 그녀..
대신 청초하고 단아한 여성미가 연이의 기품 있어 보이는 몸맵시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듯 하다..
재준은 최대한 정중하게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그녀는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으며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여 보인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갑자기 모셔와서 죄송합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재준의 태도에 바짝 긴장하며 엉거주춤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는 연이..
그녀의 눈망울이 정착할 수 없는 공포와 증오로 뒤범벅되어 어지럽게 이동한다.
무슨 말부터 먼저 꺼내야 할 지 고심하고 있는 재준의 귀에 또랑또랑한 연이의 목소리가 날아든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강태는 어디 있는 거에요??"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진 타인을 지금껏 무수하게 대면해 온 재준이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상대방은 강태의 하나뿐인 혈육이다.
재준에게는 '핏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것이지만,
강태가 그것 때문에 그 자신을 단번에 내던졌던 사실을 기억할 때에.. 그녀는 재준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연이가 내걸고 있는 적의는 재준은 난감하게 만들고, 초조함 속에 안달하도록 그를 몰고 간다..
"강태는 제 별장에 있습니다. 거기가 제일 안전하기 때문에...지금 상황이....위험합니다.."
"전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에요. 강태가 어째서 당신 일에 연루되어 있는 거죠?
당신 조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을 한다고 들었는데...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강태가 사실대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초지종을 자기 입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게 막막하기만 한 재준...
어디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할 지 종잡을 수 없다.
한동안 입술을 쫑긋거리기만 하며 말문을 트지 못하는 재준이 더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연이..
차마 그를 독촉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오들오들 떨리는 가슴을 지그시 억누르며 태연을 가장한다..
한쪽 관자놀이가 윙~하고 울려오며 현기증이 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무시해 본다.
"강태와 저는....어어....그러니까.....좀 특별하 사입니다..."
연이의 표정이 비대칭적으로 균형을 잃어버리며 우스꽝스럽게 구겨진다.
언뜻 이해가 안 가는 게 당연할만큼 재준의 말이 애매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게...무슨 뜻이에요....?....특별한 사이라는 건...."
".....저어.....강태를....좋아..합니다...."
쩍 벌어지는 입을 작은 손으로 틀어막는 연이의 팔 동작이 하도 극적이어서 재준은 그녀가 스크린 속의 배우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실없는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경악스레 자신을 응시하는 확대된 연이의 동공을 당당하게 마주하기가 도저히 불가능 할 것 같아서이다..
"자세하게 말씀 드리면 더 복잡해지실 테니까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전...강태를 아끼고 있습니다.. 아주....많이요....
그래서 다른 조직에서 저를 위협할만한 수단으로 강태를 이용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이 수습될 때까지는 안전한 장소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연이씨를 모셔 온 건...."
"잠깐만요, 정리 좀 해봐야겠어요.."
이어지는 재준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다급한 음성으로 잠깐의 여유를 청하는 연이..
재준은 즉시 입을 다물고 그녀에게 물리적 시간의 형태를 띤 사고의 재정비 기간을 마련해준다..
그리고 연이가 자신의 따귀를 갈긴다 하더라도 고스란히 막아낼 각오를 하면서 마음을 다부지게 먹는다..
하지만 연이는 재준의 뺨을 후려치지도, 얼굴에 열꽃을 피우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지도 않는다.
반대로 잠시나마 어이 없어하던 불신의 표정을 거두고 평정을 되찾아 차갑고 빈틈없이 사수된 눈동자를 빛내며 입을 연다..
"강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짐작 못 했어요..
다시 당신 밑으로 들어가서 일하게 됐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가 보이긴 했는데....그런 거였군요...."
침착한 연이의 반응에 재준이 오히려 당황스러워진다..
악다구니를 쳐대며 내 동생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우는 게 차라리 덜 무안할 것 같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은 서먹한 벽의 두께를 차츰 견고하게 쌓아올린다..
"강태가....당신의 정부인가요...? 아니면 정말로 강태를 '연인'으로서 좋아하는 건가요..?"
".....후자 쪽입니다.."
"하긴, 둘 다 똑같은 얘기니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죠..."
"제 진심을 알아 주셨으면 해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믿어 보도록 하죠..."
연이는 처음 만났을 때와 무척 달라져 있다..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공포에 휩싸여 동생의 무모한 희생까지도 방관하고만 있던 그녀가,
자신의 부모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남자 앞에서 당돌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뱉어낸다.
더 이상 추락할 곳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맹목성일까, 아니면 험난한 세상과 맞닥뜨리면서 습득하게 된 뻔뻔함일까..?
순간적으로 재준은, 그녀를 이렇게 변화시킨 일차적 원인이 자신에게 연유한다는 생각이 들자 씁쓸한 자괴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강태와 당신이 어떤 사인지 그걸 털어놓으려고 날 부른 건가요?"
틈을 주지 않고 날카롭게 재준의 귓전을 후벼파는 연이의 음성이 섬찟한 절제를 담고 있다.
재준은 그녀가 눈치 챌 수 없도록 미세하게 진저리를 치며 침울한 목소리를 울려낸다..
"...혹시라도 연이씨까지 피해를 당하시진 않을까 걱정이 되서...당분간은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애들을 시켜서 살펴 드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됐어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연이의 어투가 재준의 눈동자를 탁하게 물들이고..
연이는 그에 아랑곳없이 그림자가 드리우는 재준은 검은 눈동자를 곧게 직시하며 말을 잇는다.
"저, 이번 달 말에 프랑스로 떠나요. 학교 교환학생으로 뽑혀서 일년동안 파리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하게 됐거든요..
출국 날짜가 코앞이니까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아, 예에....잘 됐네요...."
일직선으로 부딪쳐 오는 연이의 시선을 받아 쳐내기가 힘겨웠던지
재준은 눈을 내리깔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웅얼웅얼 글자들을 입 밖으로 내보낸다.
연이는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귀 뒤로 넘기며 야무진 모양새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얘기 끝난 것 같으니까 이만 가볼게요..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닙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는 재준에게 냉랭한 인사로 답하고,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또박또박 걸어가는 연이..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서 있는 재준에게 어깨너머로 마지막 당부를 던진다..
".....강태......잘 돌봐 주세요.... 부탁할게요...."
- 공항의 분위기는 독특하다.
생동감과 중후함이 혼재하고, 소란스러움과 적막감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가장 서민적이고 일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다르게 생각하면 고급스럽고 뚜렷한 귀족성을 지닌 곳이 공항이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언으로 떠들어대지만 그것이 외려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장소가 바로 공항이고,
그곳에서는 분명한 다양성이 우글거리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한 문장으로 축약하자면, 도드라지게 튀어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태현의 독보적인 하늘색 머리도 마치 원래부터 그런 머리색깔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수하게 느껴지고,
커다란 동화력을 내포한 혁수는 말할 것도 없다.
제주행 비행기의 탑승안내방송이 기계적으로 상냥한 여자의 음성으로 공항 내 전체에 울려 퍼지고
태현과 혁수는 아무 말 없이 탑승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착하면 전화해라.. 걱정시키지 말고..."
"그래...재준이랑 주혁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줘..전부 다 떠넘기고 가는 것 같아서 찝찝하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푹 쉬다 와...."
태현은 어설프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가방을 고쳐 메며 탑승구 안으로 사라져 들어간다..
태현의 하늘색 머리가 시야에 잡히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혁수는 고즈넉한 한숨을 가늘게 흘리며 돌아선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아래만 쳐다보며 걸음을 떼는 혁수...
그의 앞을 가로막는 두 사람의 형체가 혁수의 떨구어진 고개를 들게 하고,
낯선 두 남자의 얼굴에 혁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여는 사내..
"안혁수 씨 맞죠??"
".....예, 맞는데....누구...시죠....?"
"저희와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강압적인 그들의 요구에 황당하고 기가 막힌 혁수가 순한 눈망울을 앙칼지게 굳히며 따끔한 한 마디를 쏘아 주려고 하는데,
한층 더 무거워진 사내의 음성이 혁수의 일침을 사그러뜨린다..
"어머님께서 많이 찾고 계십니다. 혁수씨를 발견하면 강제로라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만, 그런 행동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 말대로 따라 주십시오.."
(79)
아이보리색 침대 시트에 아직도 재준 특유의 향내가 진하게 배어난다.
어떤 향수를 사용해도 풍길 수 없는 재준만의 교유한 체취가 천조각의 세밀한 구멍 하나 하나에 속속들이 묻어 있는 것 같다.
강태는 그 익숙한 내음에 흠뻑 젖어서 한가롭게 독서 중이다.
암흑가의 혈투로부터 피신해 온 사람치고는 너무 유유자적한 모습이 거슬려 보일 정도이다.
그만큼 재준의 별장이 위치한 곳은 철저한 비공개성을 고수하고 있다.
며칠 전에 재준이 '골치 아프게 뭐 이딴 책을 읽느냐' 고 핀잔을 주며 사다 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주의 깊게 정독하던 강태..
간간이 펜을 들고 책에다가 무언가를 메모하기도 한다.
아마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상이나 상념들의 편린을 기록해 두는 것일게다.
심오한 표정으로 활자들을 흡수하고 있는 강태에게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이곳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재준과 몇몇 충의회 일원들뿐이기에,
강태는 재준의 밋밋하지만 애정 어린 목소리를 기대하며 잰걸음으로 방문을 나선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마자 들뜬 음성을 뱉어내는 강태..
"이재준! 왜 이제야 전화해? 기다렸잖아~~"
그러나 건너편에서는 응답이 없다..
돌연한 침묵에 흠칫 몸을 사리며 강태는 마른침을 삼킨다.
"나야, 강태야.."
맙소사. 누나의 목소리다.
의식적으로 접어 두고서 생각을 회피했던 그녀의 갑작스런 전화..
강태는 이미 대충 전반적인 상황을 짚어볼 수 있지만,
허둥지둥 변명이라도 늘어놓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아서 객적은 입술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누나...나 지금 여기 있는 거..."
"알아. 이재준한테 얘기 다 들었어. 전부 다..."
연이의 음성 속에 차가운 경멸이 녹아있다고 느끼는 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숨기고 있었던 강태 자신의 비약적인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간과하기엔 눈감아 버릴 수 없는 갈등점이 강태와 연이 사이에는 수 없이 놓여있다..
"그랬구나....그럼...내가 굳이 설명 안 해도 되겠네..."
"그래. 더 이상 그 얘기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어찌 됐든 넌 내 동생인데...너에 대한 애정이 점점 식어 가는 거,나로서도 견디기 힘든 일이야.."
식도를 타고 거슬러 올라오는 미지근한 덩어리를 간신히 조각 내며 강태는 전화기의 동그란 버튼에만 시선을 고정시킨다.
눈동자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엄청난 양의 물줄기가 파열된 상수도 시설처럼 발작적으로 터져 나올 것 같다..
"누나 내일 프랑스로 출국해. 교환학생으로 1년동안 파리에서 공부하게 됐는데, 잘하면 아예 거기서 학위까지 할까 생각 중이야..
물론 그쪽 학교에서 인정을 해 줘야겠지만..."
"어어....정말 잘 됐다....유학 가고 싶다고 계속 그러더니..."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입술과 성대만 작동시켜 말하는 강태의 모습이 언뜻 굉장히 무관심해 보인다..
연이의 파리 행을 축하해 주는 멘트도 지극히 사무적이고 판에 박혀 있다.
그러나, 강태의 머릿속에는 명백한 하나의 문장이 스쳐 지나간다..
'혼자 남았다...'
"솔직히...강태 너한테 실망이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날 비참하게 만들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네가 선택한 거니까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겠어..
후회하게 된다고 해도 네 몫이니까...."
고개를 들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강태의 흑색 눈동자에서 낙하하는 물방울이 흥건하게 그의 얼굴을 뒤덮는다.
턱 끝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며 조그마한 원을 그리는 눈물 자국을 멀거니 내려다보며 강태는 벙어리처럼 연이의 잔인한 말을 귀담아 듣기만 한다..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부터가 끔찍하지만, 네 성적 취향에 대해서까지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건 편견에 치우친 발언이니까 삼가 하도록 할게..
하지만 이것만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너...기억하고 있기는 한 거야? 이재준이 누구인지...
이재준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너 잊어버렸니??
아니면 일부러 네 머리에서 지워 버린 거니??"
강태의 두 다리가 그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고 스르르 무너지며, 강태는 딱딱한 테이블의 모서리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버린다.
씩씩하게 그녀의 독설을 수용하고 논리적인 주장을 펼쳐 보이려 다짐했던 지난날의 결심은 흔적조차 남김 없이 바스라진다..
"그 사람은 우리 부모님을 죽였어. 그런 놈이랑 붙어서,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엄마 아버지한테 부끄럽지도 않니??!"
그만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지만, 이러한 고문을 고스란히 감당하는 것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이라고 생각하며
강태는 수화기를 잡은 왼쪽 손아귀에 힘을 준다..
이를 악물고 청세포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연속으로 자신을 난타하는 연이의 격노한 목소리에 영혼을 내던진다..
"네가 그 쪽 세계로 들어선 이상...너하고 나는 이제 완전히 가는 길이 다른 거야.
난 우리가 비슷한 길을 걸어갈 수 있길 바랬는데...
지금은 내가 너와 한 부모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워..!
넌....너 밖에 모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야..
네가 조금이라도 엄마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또 누나인 나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 인간하고 놀아날 수는 없어..
이재준은 정말로 너무 사랑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뭐 그런 말로 변명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천륜을 저버린 사랑이 얼마만큼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니??
세상에는 질서라는 게 있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라는 게 있다구!!
그런 걸 몽땅 무시해 버리고, 침대 속에서만 뒹구는 게 너희가 얘기하는 순수한 사랑이니??
웃기지 마. 넌 그저 그 인간과의 섹스에 미쳐 있는 것 뿐이야!
그 더러운 놈하고 비비적대는 재미에 빠져서, 부모고 형제고 안중에도 없는 거야!!"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으려 했던 연이의 전략도 물거품이 된 지 오래다.
어쩌면 강태의 입술에서 나온 '재준'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반가움과 열정이 듬뿍 담긴 강태의 목소리를 접하는 순간부터 연이는 내장이 뒤집히는 듯한 배신감에 이성이 마비되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가리지 않고 몸 전체를 헤집고 다니는 격분의 응집체가 기력을 탕진할 때까지, 강태에게 비수를 꽂아 넣던 연이..
한 단계 진정된 목소리로 하나 남은 칼날을 강태의 가슴팍에 쑤셔 박는다.
"앞으로 우리...연락하지 말자.. 그게 우리 둘 다에게 편할 것 같다.."
강태는 동의하지도, 반박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강태의 암묵적 수긍을 당연하게 여기며, 연이는 정말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남긴다..
"그럼...건강하게 잘 지내라.. ....끊을게..."
- 혁수의 어머니 정숙은 아들을 마주하자마자 대성통곡을 하며 일단 혁수가 무사하다는 것에 대해 연신 감사의 기도를 되풀이했다.
한 달 사이에 눈에 띄게 마르신 어머니를 뵈며 죄송스런 마음이 들면서도,
한 차례의 흐느낌이 지나간 후 어머니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질 이야기들을 예상하면 달아나고만 싶어지는 혁수..
주혁의 아버지, 인하의 다독거림이 길게 이어진 후에야
정숙은 눈물을 거두고 젖은 눈매가 마를 새도 없이 옴팡진 살기를 등등하게 세우며 혁수를 닦아댄다..
"그 놈이랑 같이 있는 거지?! 주혁이랑 같이 있는 거지, 너?!?"
"..........예....."
"그러면 그렇지!! 그 마귀 같은 놈이 기어이 우리 혁수를 망치려고!!아이고, 하나님...어쩌면 좋아....이걸 어떡하면 좋아...!!"
"그래,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는 거냐?"
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방정맞게 부르짖는 아내를 지그시 붙잡아 누르며
냉철한 검사답게 지적 판단능력을 유지한 채 혁수에게 질문하는 인하..
혁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버지..
주혁과도 전혀 닮지 않은 아버지...
그러나, 혁수와 주혁의 아버지, 장인하...
"같이 일하는 친구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주혁과 재준이 몸담고 있는 세계는, 표면적으로 봤을 때 인하가 관장하는 '법'의 세계와 대립되어 있다.
혁수 역시 재준의 사업 중 일부를 맡아서 도와주기로 했으니...
이래저래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려면 만만치 않은 노력과 고난이 필요할 듯 싶다.
단란한 유토피아의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 법이다.
혁수는 벌써부터 문제를 확대시키기 싫은 터라, 인하의 물음에 무응답으로 대꾸한다.
눈알을 부라리며 혁수를 다그치려는 정숙을 제지하고, 인하는 참을성 있게 혁수의 냉랭한 태도를 묵인해 주며 다시 입을 연다.
"네가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 더 묻지는 않으마..
대신 집으로 들어 오거라. 지금까지 일은 전부 없었던 걸로 치고, 다시 학교 다니면서 공부에 전념하렴..
어차피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거론한다고 달라지지도 않으니까..."
"어째서 주혁이에 대한 말씀은 없으신 겁니까? 그 애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사뭇 자애로운 음성으로 근엄하게 훈계를 늘어놓는 인하의 말 허리를 뎅겅 베어버리는 혁수의 어투에 선연한 공격성과 원망이 짙게 묻어난다.
"주혁이는 아버지 아들이 아닙니까?? 주혁이가 집에서 나와 어떻게 사는지, 알고 계시기나 해요?!
왜 모든 걸 주혁이에게 떠넘기시는 거죠? 일차적 책임은 저한테 있어요! 저도 주혁이를 사랑한다구요!!"
"혁수야!!!"
"집으로 다시 들어오라고 하셨죠? 저도 그러고 싶어요..다시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도 싶구요...
.....하지만.....그건 주혁이와 함께 있을 때 성립되는 얘기에요..
주혁이와 저를....인정해 주실 수 있으세요...?
형제가 아닌...장주혁과 안혁수를....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겠어요..?..."
(80)
당신이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향해 어떤 말을 하든 나는 전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 <천년의 사랑> 중 -
혁수의 당돌하고 움츠러듬 없는 눈빛에 정숙은 기어이 또 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낸다.
반면에 인하는 화강암처럼 딱딱하게 안면근육을 경직시키며 혁수를 묵연히 건너다 본다.
"혁수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됐니..? 네가 어떻게 엄마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어떻게 엄마 가슴에 이렇게 못을 박아..??"
벌렁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기 힘에 부친 듯 정숙은 주먹을 꽉 쥔 채 바들바들 경련하며 절규를 토해내고..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던 인하는 옆에 앉은 아내를 보듬으며 달랜다.
"당신은 방에 들어가서 진정하고 마음 가라 앉혀요..내가 혁수랑 얘기할테니까...
아주머니, 이 사람 좀 데리고 가서 눕혀주세요."
"예, 검사님.."
부엌 입구에서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상황을 관전하던 가정부가 재빠르게 인하의 지시를 수행하고..
정숙은 비칠거리며 가정부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가 차단되자,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언짢은 적막이 혁수와 인하 사이에 걸쳐진 공간을 수놓는다.
자꾸 귓전에 남아 윙윙거리는 어머니의 탄식 소리를 없애려고 살짝 머리를 흔드는 혁수..
인하는 여전히 차분하고 동요 없는 음색이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기나 하는 거냐?"
"솔직한 모습 그대로 말씀 드린 겁니다.
속이는 건 엄마 아버지를 기만하는 짓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최소한 엄마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해해 주시지 않는 점이 안타깝고...속상합니다.."
"부모를 존경한다는 녀석들이, 그것도 한 형제가 부모 앞에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니??
어쨌거나 너도 내 아들이야.. 주혁이랑 넌, 우리의 아들이고!"
"그걸 누구보다 저희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겁니다.
저희를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절대 원망 같은 건 안 해요..
어떨 땐 제 자신조차도 저를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예전처럼 저를 주혁이에게서 빼앗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느끼고 계시겠지만, 물리적 거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제가 한국에 돌아온 건...다시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하는 혁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그의 확고한 인텔리 의식에 흠집을 내는 발언은 인하에게 있어, 쓸모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
논리성. 이것이 인하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그러나 주혁과 혁수는 삼단논법이나 귀납추론법과 같은 구조적인 잣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게다가 윤리적·법률적 기준을 적용한다면 그들 자체는 '범죄'가 된다.
적어도 인하에게는, 비이성적인 것은 죄악이다.
"주혁이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집을 나갔을 때, 괘씸하기도 했지만 난 지켜보기로 했다..
학교도 그만 두고 아무렇게나 사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제 정신을 차릴 거라 생각하고 기다렸어..
그렇게 참아준 결과가 이것이냐??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 거야??"
혁수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버지는 딴 곳만을 쳐다보고 있는데, 우리를 봐 달라고 떼쓸 기운이 더 이상은 남아있지 않다.
아니, 결코 돌아봐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연히 주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혁수의 순박한 눈망울은 변함 없이 잔잔하고 평화롭다.
체념이라기보다는 배척이 태도까지도 너그럽게 감싸안는 포용과..
자신, 그리고 자신의 남자를 위한 부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저...가 볼게요.. 이런 식으로 엄마 아버지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저도 노력했다는 건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헛된 노력이었지만....저도 많이 힘들었어요.."
인하는 싸늘한 눈초리로 혁수를 꼿꼿이 바라보기만 한다.
침통한 표정을 짓지도 않고 분노에 날뛰지도 않는다.
그의 아내처럼 눈물을 짜내며 혁수에게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혁수는 인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현관 쪽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뒤통수에 정중앙으로 꽂히는 아버지의 시선이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혁수 자신의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고 세뇌시킨다..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여력은 없다.
혁수는 부모님의 침실 문에 갑갑한 눈길을 한번 던지고 이내 거두어버린다.
굳게 닫힌 방문이 어쩔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준다..
...우습다...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거냐, 안혁수...
비아냥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현관 문을 열어 젖히는 혁수의 눈가에
때늦은 물기가 어리우는 것이 유난스레 새파란 코발트의 하늘로 비쳐든다..
정말 재수없게 좋은 날씨다...
빌어먹을 세상은 언제나 자기 멋대로 돌아간다..
하찮은 하늘 색깔까지도 지친 인간을 조롱하다니....
아무리 유한한 존재라고 하지만, 한낱 보잘 것 없는 60억 인구 중의 티끌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안혁수와 장주혁은 유일한데...
각자 유일하기 때문에 서로를 놓을 수 없을 뿐인데...
결국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겁니까...?
그리고 역시 또 싸워야만 하는 건가요...?
부질 없는 물음표들이 혁수의 심장에 욱신거리는 통증을 유발하고..
혁수는 신음 같은 미소를 흘린다..
- 재준이 별장의 거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는 강태...
재준은 막무가내로 파고드는 강태의 허리를 끌어 안으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내비친다..
"야...왜 그래....갑자기 이러니까 무섭잖아..."
떨떠름한 실소를 퍼뜨리며 중얼거리는 재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강태는 애정결핍증 환자마냥 몸서리까지 치며 재준의 입술로 다가가 키스한다.
진하게 접촉해 오는 강태의 입술이 살풋한 광기로 물든 듯한 착각에 재준은 무의식적으로 긴장한다..
강태의 입술이 벌어지고 재준의 혀와 강태의 혀가 끈끈하게 엉킨다..
키스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점점 고온으로 달구어지는 두 사람의 육체가 먼발치에 우뚝 서 있는 하나의 도착점을 향해 비밀스런 여행을 시작한다..
침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급하게 벗어 던지는 옷가지들이 너저분하게 둘의 이동경로를 표시해 주고..
강태의 알몸 위로 재준의 몸이 겹쳐지며 또 한번의 긴 키스가 이어진다..
재준의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강태의 손이 예민한 활시위가 되어 재준의 욕망에 팽팽한 자극을 가한다..
부풀어오르는 육체만큼 묵직하게 쌓인 오만가지 감정의 중압감에서 탈피하고자 버둥거리는 영혼 또한 한계를 모르고 커지기만 한다..
섹스의 쾌감을 즐기기 위한 테크닉이나 절제하려는 요령 같은 건 끼어들 아주 작은 틈새조차 없다..
가파르게 경사지는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 허파와 폐를 확장시키는 것도 벅찰 지경이다..
재준이 강태 안으로 들어선다..
아프고 황홀하고 고통스럽고 날아갈 것 같다.
강태에게 '마조히스트'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갖다 붙인다면, 그것만큼 멍청하고 미련한 짓거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바보천치들이 수두룩하다..
그 바보천치들은 항상 자기들이 올바르다고 믿는다. 아주 자랑스럽게-
꼴 같지도 않은 틀 속에 갇혀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조차 못 하는 저능아 주제에,
너희들은 이래서 틀려 먹었다고 삿대질을 서슴지 않는 작자들...
대체 당신들이 떠받드는 가치관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당신들을 그토록 위대하다고 자만하게 만드는가?
당신들이 진정 심판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진정으로??
재준의 육체 아래에서 가장 자유롭게 해방되는 강태는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의 수치와 혐오의 대상이다.
물론 겉으로 나타나 보이기에만 그렇다..
은밀한 이면에는 소위 '정상적인' 사람들의 욕망과 추잡한 새디즘 또한 음흉하게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
이건 좀 심한 비약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손가락질 받고 외면 당하는- 아니, 멸시와 저주의 눈초리를 몽땅 넘겨받는 두 남자의 정사가 막바지로 치닫는다.
재준을 자신의 몸 안에서 분리시키고 싶지 않지만, 강태의 몸 안에서 빠져 나오고 싶지 않은 재준이지만..
아름다운 육체에도 '무한함'이라는 초월적 요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안정되고, 극도로 팽창했던 몸은 아이보리색 시트에 싸여 쾌적하면서도 약간 피곤한 상태로 변화한다.
"강태....이렇게 밝히는 줄 몰랐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맥빠진 농담조로 내뱉는 재준의 음성에 가려지지 않는 피폐함이 묻어난다.
강태는 조금도 웃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넋이 나간 흐물거리는 목소리를 끄집어 낸다.
"누나랑 통화했어... 나더러 너와의 섹스에 미쳐 있대.. 그래서 부모도 형제도 팽개친 거라고...
나더러...더럽대... 그리고 너도....우리 둘 다 더럽대...."
재준은 들릴락 말락 한숨을 뿌리며 몸을 일으켜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는다.
노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재준의 손동작이 측은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강태는 다시 입을 연다.
"재준아, 우리....섹스 없이도 사랑할 수 있을까...?"
이게 얼마나 무의미한 질문인지, 이런 얘기들이 하등의 중요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보는 강태는
단지 무력한 몸짓으로나마 서러운 포효를 대신하는 건가보다..
재준은 손을 뻗어 강태의 뺨을 매만진다..
그의 이마, 코, 입술, 턱...
하나하나 섬세하게 탐색하며 새로운 감동을 맛보고..
시각적으로, 촉각적으로 강태의 존재감을 깊게 흡수한다..
"나는...너를...사랑하고 있어.. 너는...내가 사랑하는 첫번째 사람이야..
내게 있어 첫 번째는....곧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거구...
그래서....강태 넌 이재준의 남자인 거야..."
그래.... 그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그의 앞에서는 언제나 어리석어지기만 하는 자신이 부끄럽지만, 강태는 이재준을 믿기 때문에... 100%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 칭얼거리는 것쯤은 용인될 수 있겠지..
그는 나보다 강한 사람이니까...
"네 몸도 너한테 속해 있는 거니까... 그래서 너를 갖는 거고...
또.... 널 안으면서 네가 내 것이라는 걸 확인하고..
그리고... 널 가장 완벽하게 느끼고 싶어...."
"알아.... 무슨 말하고 싶어하는 지 알겠어..."
어눌하게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재준에게 잠긴 목소리로 반복해서 일러주는 강태..
재준의 판판한 가슴에 촉촉해진 뺨을 밀착시키며..
그의 허리를 꼭 붙든 채 속삭인다..
"....내 남자.....이재준....."
(81)
"이것 좀 읽어 봐.."
재준의 빌라 2층에 있는 홈 바에 나란히 앉은 주혁과 재준...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는 재준 앞에 주혁은 끈으로 묶여진 종이뭉치를 던져 놓는다.
재준은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다음 종이뭉치를 들고 빠르게 훑어본다..
"이번 사건 조사 기록이랑 용의자 심문 조서야.."
억양 없는 주혁의 말투에 재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몇 번 끄덕이며 A4용지에 인쇄된 글자들에만 집중한다..
주혁은 그가 어느 정도 내용을 파악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준다.
"새끼들...완전 엉망이구만... 생각보다 경찰에 깔아둔 게 많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런 일을 벌였겠지..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그러면 병신들이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아무래도 정면 돌파는 안 되겠어.."
"바로 그거야.. 옆을 치는 수밖에 없어.."
모호하면서도 뼈가 있는 주혁의 제안에 재준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에게로 상체를 기울인다.
주혁은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연다.
"오늘 그 자식에 대해서 알아봤어.. 세라를 죽인 범인...신정윤 말이야.."
재준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게 수축하며 양미간에 자잘한 주름이 진다.
그가 극도로 무언가에 몰입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주혁은 좀 더 낮은 음색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의정부에 있는 무슨 건설회사 부장으로 직업이 돼 있는데, 주소는 서울이더라구.. 그래서 집에 찾아가 봤지..
가족은 없고, 정부 하나랑 같이 살고 있더만..."
"그 여자랑 얘기는 해 봤어..?"
"응.. 같이 산 지 1년쯤 됐고 신정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근데 그 자식, 예전에도 몇 번 들락날락 했다고 하더라.."
"한 마디로 그 새끼가 연화회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거군..하여튼 연화회 새끼들 지저분한 건 알아줘야 된다니까..."
"더 중요한 건, 신정윤이 그 여자한테 3년만 썩으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동안 외국에 나가 있던지 아니면 지방에 내려가서 조용히 지내라고 했대..
그래서 그 여자 다음 주에 일본으로 출국한다고 했어..
살인을 했는데 3년만에 나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아무리 과실치사라고 해도....이건 뒷거래가 있다는 얘기야.."
재준은 숨을 크게 내쉬며 손가락으로 입가를 문지른다.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가 특유의 후광을 발산하며 재준의 입술이 열리기를 재촉한다.
한동안 사고회로를 가동시키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재준이 단호하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못박는다.
"그 여자를 이용해야 돼... 신정윤의 정부..."
"그 여자를....?"
"그래... 연화회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야..
우린 아직 연화회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어..
이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쳐들어갔다가는 박살 날지도 몰라..
게다가 내 짐작으로는 이 일에 연화회 말고도 다른 놈들이 붙어 있는 것 같아..
만약 진짜로 다른 조직과 연화회가 연합을 했다면 우리로서도 역부족이야.. 섣불리 행동하면 안 돼..
형 말대로 옆구리를 치고 들어가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구..."
"어떻게 이용하자는 건데? 계획을 세워야 할 거 아냐.."
"약점을 찾아야지... 그 여자를 묶어둘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
형이 만나 봤으니까 조금은 알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때? 신정윤의 정부를 끌어 들일만한 뭔가가 없어??"
담배에 라이터를 가까이 가져가며 질문하는 재준은 충의회의 보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충의회 속에서 활동할 때 그는 심장을 몸에서 떼어낸 인간이 된다..
주혁은 재준과 비슷한 무표정에, 스쳐 지나가는 비웃음을 띄우며 재준의 물음에 답한다.
"물론 있지.. 그 여자, 엄청나게 색을 밝히던데..?
끈덕지게 달라붙으면서 꼬시는 걸 겨우 뿌리치고 나왔거든...
남자한테는 사족을 못 쓰는 것 같아.."
"잘 됐네.. 그런 여자라면 별로 어렵지 않으니까... 당장 일 시작해야겠어..
형, 애들 시켜서 그 여자가 자주 가는 클럽이나 술집이 어딘지 알아봐 줘.
이제 어떻게 해야할 지 감이 잡힌다.. 시간 없으니까 서둘러야 돼.."
"그래, 알았어."
주혁은 전화를 하기 위해 1층의 거실로 향하고, 혼자 남은 재준은
아까 전 주혁이 건네 준 종이뭉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매캐한 담배연기를 분사해낸다..
그리고 종이뭉치를 집어들어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으로 던져 처박아버린다..
- "내 말 듣고 있어..?"
주위에는 어느 누구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한 남자의 음영이 붉으스름한 석양빛을 받아 길쭉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 목소리를 귀담아 줄 또 하나의 형체는 - 즉, 청자는 그 곁에 없다.
바닷물이 발 밑에서 철썩이는 넓다란 바위 위에 걸터앉아 혼잣말을 읊조리는 태현이 실성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수평선과 맞닿은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분명하지만 광도가 너무 낮아서 부패한 느낌이다.
태현의 입술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가 메슥거리고 거북스러운 것은, 바닷바람의 소금기가 니코틴 성분과 혼합되어서 그러려니 해 두자..
"그냥....네가 내 옆에 있는 것 같아..
근데...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니까 답답해서 못 참겠어.. 어쩌면 그게 중요한 게 아닐수도 있는데 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아스라져가는 음성이 들려올리 만무하다는 걸 알면서도
귀기울이는 태현이 우스꽝스럽다는 듯 제법 선선해진 바람이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세차게 잡아당긴다.
태현은 다리를 끌어 올려 무릎 위에 두 팔을 겹쳐서 올려놓는다.
그리고 메아리 같은 말들을 계속한다.
"내가 가장 두렵고 싫은게 뭔지 아니?
내가 언젠가는 널 잊고 잘 살아갈 거라는 거야..
지금 이렇게 그리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도 고작해야 몇 개월, 길어봤자 몇 년 일거라는... 추악하지만 그게 현실인 걸 어쩌겠어??
난 살아있는 인간, 문태현 이라구...
그러니까 언젠가는 '이세라' 라는 여자 잊어버리고 또 다른 여자를 곁에 두겠지?
네 이름은 가끔씩 떠올리면서 애수에 젖는 옛 사랑으로 버릴테고..
다른 여자의 이름에 익숙해져서 '이세라' 라는 이름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엄청 생소하게 느껴지게 될 거야..
그렇게 너는 점점 내 기억 속에서 밀려나고...
또...나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갖가지의 의미와 심정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아노미 상태의 배설물을 입 밖으로 토해내는 태현..
자기 혐오와 미안함, 죄책감과 상실감, 그리고 야속하리만치 생생하게 달려드는 현실...
살아있는 인간 문태현이 발을 디디고 사는 이 세상, 그로부터 부여되는 생존자의 책임감...
태현은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로 저어본다..
"아니야....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 다만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상처를 갖고 있는 네가 불쌍해 보였을 뿐이야..
그리고 나랑 비슷한 성격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고... 훗...또 네 몸매가 장난 아니게 쌔끈하잖아..?
침대에서도 죽여주고....여러 모로 봤을 때 괜찮은 여자니까....
그래서.....그래서.........그것 때문에 사랑한 건....아니야...."
그의 얼굴에 번져 나가던 조소가 사그라들고, 비스듬히 기울어졌던 표정은 황량한 벌판으로 둔갑한다.
이제는 정말 다 말라버렸겠지 생각했던 눈물을 기막히게 빠른 속도로 재생산되어 태현이 척박한 두 볼 위를 따갑게 적신다.
그와 동시에 지극히 초라한 태현의 진실이 벌거숭이의 몸뚱어리를 내보인다.
"너는...곧 나였어.. 너랑 나는 완벽하게 일치했잖아.. 너도 동의하지?
난 세상에 너 같은 여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고마웠어..
내가 너한테 '사랑'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널 만난 후부터 '사랑'이라는 말을 똑바로 사용할 수 있었고... 네가 가르쳐 줬어..
넌 나에게서 뭘 배웠니?
내가 너한테 정말 가르쳐주고 싶었던 게 뭔지 알아?
꿈꾸는 방법이었어.. 기대하고 소망하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인생 말이야..
되는대로 사는 게 아니라 어떤 한 가지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거...
너의 그 한 가지가 되 주고 싶었던 얘기야... 이해할 수 있지?
세라야...오빠가 너한테 왜 미안해하고 있는 지, 지금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 지 이제 이해할 수 있겠지...?"
히스테리컬하게 파고가 높아지는 태현의 흐느낌에 박자를 맞추듯,
거세어지기만 하는 바람과 더불어 검은 차양막을 내리는 하늘이 흡사 정신병자와도 닮은꼴인 태현의 고통을 감추어준다.
아파할 수 있을 때 실컷 아파해라...
'시간'이라는 만병통치약에 길들여지면 아파해야 한다는 의무감조차 엷어질 테니...
문태현, 이세라가 죽는 순간까지 환상처럼 떠받들던 문태현 역시 망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정적 인간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자신을 모독하고 비하하는 가운데에서도 태현은, 아주 먼 곳에서 어렴풋이 전해져오는 망자(亡者)의 목소리를 듣는다..
육신의 귀는 세라의 영구한 침묵과 함께 닫혀 버렸지만, 태현의 영혼은 세라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아직 간절한 과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세라의 실존을 감지한다..
여기서 까뮈의 '실존'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기로 하겠다.
사랑은 철학이나 사상을 초월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세라의 실존은 죽음을 넘어선, 태현만이 소유한 유일무이의 생명줄이다.
그녀는 웃고 있다. 아니, 울고 있다.
아니, 좀 더 주의 깊게 들어보니 세라는 잠자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평안한 걸까...?
태현의 소원대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태현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짙게 둘러싸인 어둠 속에서 그의 암갈색 눈동자마저 빛을 잃어 버렸다.
그녀가 태현을 부른 것도 아니다.
그저 그는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뿐이다..
이대로 무덤덤해지는 자신의 영혼을 더 이상 내버려두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태현은 다리에 힘을 주고, 악마처럼 아가리를 벌린 채 손짓하는 절벽 아래로 절망의 낙하를 시작한다..
(82)
온갖 후회와 반성을 뿌리치고서라도 여전히 눈앞의 절박한 사랑에 온몸을 태워 버리고 싶다.
이제부터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이성도 지성도 아니고 몸 깊숙한 곳에 잠재해 있는
본능 그 자체가 눈을 떠서 난폭해 지기 시작한다.
- <실락원> 중 -
"그 여자 이름이랑 나이부터 시작해서 잘 다니는 술집이나 단골 가게까지 모조리 알아봐. 되는대로 전부 다.
최대한 빨리 행동하고 결과 나오는 대로 보고해. 그래, 수고해라.."
재준의 지시에 따라 주혁의 수하에서 일하게 된 부하에게 능숙한 솜씨로 명령을 내리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주혁..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혁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주혁이 흠칫 뒤를 돌아보더니 금새 반색을 하며 한 옥타브 올라간 음색으로 입을 연다.
"안혁수, 언제 왔어?? 왔으면 기척이라도 하지~~"
"지금 들어왔어.. 장주혁 아무리 봐도 이쪽 체질인 것 같다~? 주먹세계 말이야.."
"킥...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의 잠재능력이 발휘되는게 막 느껴져..^^;"
어처구니없다는 듯 밉지 않은 눈흘김을 보내는 혁수가 못 견디게 귀여운지라
주혁은 바보처럼 헤벌쭉 웃으면서 그를 한 팔로 감싸 안은 채 2층으로 향한다.
계단에서 내려오던 재준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둘만의 보금자리로 걸음을 옮기는 혁수와 주혁..
방에 들어서자마자 주혁은 피곤에 찌든 몸을 침대 위로 던지고, 혁수는 체크무늬 남방을 벗으며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한다.
"태현이 잘 갔어.. 도착하면 전화한다고 했는데...."
혁수의 움직임을 쫓던 주혁의 시선이 슬그머니 다른 소실점으로 전환되었다가 혁수의 다음 말을 듣자, 다시 혁수에게로 모아진다.
주혁의 목이 홱 돌려짐에 따라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은 해초 같은 느낌을 준다..
"오늘...집에 갔었어.. 엄마랑 아버지 뵙고 오는 길이야..."
손에 든 남방 자락을 꼬깃꼬깃 만지작거리며 거리끼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혁수는
주혁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의 표정을 고스란히 그려낼 수 있다.
"다시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어.. 학교도 계속 다니라고..."
"그, 그게 정말이야?? 정말 그렇게 말씀 하셨어..?!"
"그런데....함께 있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그래서....그냥 되돌아 나왔어...."
말을 맺으며 그제서야 혁수는 눈을 들어 주혁의 하얀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망막 안에 아프도록 뚜렷이 새겨지는 주혁의 모습이 왜 돌연 눈물로 화하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혁 앞에서 우는 건 창피하다..
혁수는 야무지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턱뼈에 힘을 준다.
그리고 대견스레 주혁으로부터 등을 돌려, 씻는다는 핑계로 욕실로 피신하려 한다.
욕실의 담황빛 백열등 아래에서 코흘리개 마냥 철없는 눈물을 쓱 닦아내고 있는 혁수의 뒤로 주혁이 따라 들어오자, 거울에 비친 그를 보고 뜨끔하는 혁수..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조작해내며 허술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야, 놀랬잖아~~ 나 샤워할거니까 나가.."
".....나 안 보이는데서 혼자 울지 마.. 네 옆에 있는 나는 뭐가 돼??"
"우,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나 샤워할거라니까??"
"너 거짓말까지 할래?!"
책망조가 역력한 어투로 일침을 가하는 주혁의 혀에, 어물쩡 둘러대며 넘어가려는 시도를 중단하는 혁수..
주혁은 단 한 순간이라 해도- 또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순간이라고 해도, 혁수가 허위의 가면을 쓰는 것을 묵인할 수는 없다.
혁수는 주혁에게 항상 진실해야 한다.
주혁이 관용을 베풀고 받아들일 수 없는 혁수의 단 한가지는, 그의 페르조나이다..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 주혁이 그리고 혁수가 헤맨 시간은 어떤 어휘로도 묘사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였다.
찢어지고 더렵혀지고 흉칙한 모습이라도 안혁수의 참된 영혼을 소유하고 싶다..
순수한 세 글자의 이름의 주인공...
반대쪽으로 고개를 경사지게 기울이는 혁수의 순박한 눈동자가 시무룩하게 가라앉고..
가뜩이나 갖가지 상념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머릿속을 더 무겁게 내리 누르는 주혁의 닦달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퍼질러앉아 발버둥이라도 치면서 엉엉 울어버리고 싶다..
"......내가 어떻게 해야 돼..?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편하겠니...?"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맥빠지고 축 늘어진 혁수의 목소리가 욕실 안을 웅웅거리며 떠다닌다.
시키는 대로 해 줄 테니까 귀찮게 좀 굴지 말라는 노예근성은 절대 아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의 투쟁을 신뢰해 달라는 당연한 부탁일 따름이다.
"난 지금 네 앞에 있고, 여기에 서기까지 난 정말 많이 힘들었어..
그리고 널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해..
그렇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을 거고, 돌아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돌아온 거야..
그게 다야... 그게 전부야.. 그게 장주혁 앞에 살아서 서 있는 안혁수야..
근데 넌 뭘 바라는 건데? 나의 어떤 모습을 원하는 거야??
내가 가진 건 이게 전부라고 했잖아.."
"그런 식으로 비꼬지 마. 너처럼 나도 두려운 것 뿐이야..!"
사면의 타일 벽을 쩌렁쩌렁 흔들 만큼 위압적인 주혁의 음성이 혁수의 귀 고막 뿐 아니라 여리고 훼손된 영혼까지 무자비하게 질타한다.
그러나 주혁은 가해자가 될 수 없다..
그는 더 심각한 상해를 당하는 똑같은 피해자다..
때문에 혁수는 아무도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게 불안정하고 어떻게 바뀔지 몰라..
너하고 나,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줄 알잖아??
우리가 공유하게 될 인생 자체가 그 모양이야!
늘 위험하고 숨죽여야 하고......그게 너하고 나야...."
억울함과 호소로 질펀하게 젖어있는 주혁의 중저음은 그르렁거리는 쇳소리를 동반한 채 위태로운 언줄을 이어간다..
가끔씩은 혁수보다 주혁이 훨씬 더 이성적이고, 잔혹한 현실 감각을 유감없이 펼친다..
그럴 때마다 혁수는 옹졸한 섭섭함에 시달리는 자신이 싫어진다.
그리고 낯간지러운 조급증을 부리며 결국에는 민망한 속내를 들키고 만다.
"장주혁 진짜 답답해...! 그냥 간단하게 딱 한마디만 하면 될 걸 가지고 왜 이렇게 핏대를 세우고 난리야??
꼭 사람 쪽팔리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지...."
혁수는 짐짓 토라진 것처럼 도톰한 입술을 삐죽이며 세면대에 풀썩 몸을 기대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 안에 찔러 넣는다.
안혁수는 이런 식으로 장주혁을 지배하는 것이다.
주혁은 아득해지는 정신이 자락을 구태여 붙잡아 매어 두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는다.
그래봤자 헛수고라는 것을 지난날의 숱한 경험을 통해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얼른 그에게 굴복하고 무너지는 게 현명하다..
"........혁수야....사랑해...."
기다리는 동안 안달이 났다는 듯 급절하게 주혁의 어깨에 팔을 휘감는 혁수..
왜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몰라서 애를 태우냐고..
내 마음과 네 마음이 한치의 오차 없이 같다는 걸 왜 의심하냐고 주혁을 힐책하는 혁수의 눈물이 또르르 방울져 흐른다..
안심이 되면서도 겁이 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확실한 거라곤 서로의 존재가 유일하다는 것 뿐...
겉으로 보이는 형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때로는 연인이 가진 외형적 아름다움으로 번민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다..
혁수의 눈물에 투과되어 비치는 주혁의 형상은 굳이 그 내면의 영혼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혁수를 중독 시킨다..
언젠가 어떤 소설에 쓰여진 글귀가 생각난다.
때로는 그리움이 정욕을 부른다고...
이제야 혁수는 그 문장의 의미를 깨닫는다.
아무리 매일 얼굴을 마주치고 살아도, 불현듯 상대가 까마득히 멀게 느껴질 때...
뼈마디와 관절을 비트는 듯한 갈증이 전신을 엄습한다..
산소부채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혁수는 주혁의 몸을 힘주어 끌어당기고,
주혁은 얽혀드는 혁수의 육체를 부여안고 성큼성큼 침대로 향한다.
혁수의 바지 벨트를 풀어내는 주혁의 손길이 절박하다 못해 처절해 보인다..
혁수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을 둘러싼 거대한 현실이 시시각각으로 원흉의 발톱을 번뜩이며 가까워지는 것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덮어두기엔 모자란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섹스가 도피는 아니다.
단지 용기를 내고 싶을 뿐...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원하니까.. 이만큼이나 서로에게 철저히 예속되어 있으니까..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결국에는 온전한 하나의 상태를 보전할 수 있을 거라고...
허망한 착각에 불과하다고 해도, 두 사람이 공감하는 있다면 의미 있으니...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어떤 말들을 사용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는..
몸짓으로 그 모든 걸 대시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하면서, 또 가장 정결하고 아름다운 행위...
그게 본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만 혁수와 주혁의 관계를 진실하고 확연하게 매듭지어 주는 매개체 또한 '행위'로 표상된다.
야청빛 침대 시트를 배경으로 걸작을 이루어내는 혁수의 나신을 시세포 하나만 가지고서 담아두기에는 벅차다..
그래, 그는 주혁과 똑같은 형체를 지니고 있다.
편평한 가슴과 도드라진 목울대와 은밀한 부위까지...
주혁과 동일한 신체구조로 짜여진 혁수의 몸이다.
그래서, 대체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혁수가 봉긋한 유방에 풍만한 엉덩이, 비너스의 질과 자궁을 가진 여자가 아니라는 게 그렇게도 부각되어 도마 위에 올라야 할 논란거리인가??
지금 주혁의 부푼 육체를 받으며 주혁의 영혼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똑똑히 듣기 위해 자신을 활짝 열어제친 '남자'는 안혁수일 뿐이다.
처음 맞닥뜨린 순간부터 주혁을 송두리째 노예로 삼아버린 장본인은 여자가 아닌 남자였고,
법적 혈연관계로 맺어진 '이복동생'이었을 따름이다..
그들이 범죄자인가? 변태 성욕자인가??
그저 지독한 인연의 굴레에 덜미를 잡힌 가난한 연인들이다..
잘못이 있다면, 무수한 대중 가운데 끼여 있는 극소수라는 사실...?
섹스를 하면서도 현실을 계산하는 자신의 머리통을 총으로 쏘아 부셔버리고 싶은 충동에 주혁의 움직임이 더 거칠어진다..
그에 따라 고조되는 혁수의 신음성에 취해 홀린 사람처럼 혁수를 채워나가는 주혁이 그를 울게 한다..
삽입에 수반되는 통증 때문이 아니라, 치유할 방도조차 마련할 수 없는 주혁의 영혼에 험악하게 파여진 상처가 혁수에게는 미어지는 슬픔이다..
그의 상처가 생긴 데에는 혁수도 일부 책임이 있다.
어쨌든 주혁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하찮은 나의 눈물 따위, 감추는 게 도리이다.
혁수는 일부러 몸을 돌려 주혁에게 등을 보이고 눕는다.
익숙해진 통증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주혁을 소중하게 감싸는 혁수의 눈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흐르고..
푹신한 베개 안에 작은 얼굴을 묻으며 흐느낌 때문에 떨리는 어깨죽지를 섹스의 쾌감과 희열로 인한 것처럼 위장하는 혁수를 주혁 또한 알고 있다..
(83)
욕실의 커다란 거울에 비치는 강태의 얼굴이 발그레한 홍조를 띄우며 방싯 미소를 짓는다.
샤워를 하고 난 직후라 뿌옇게 서린 수증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하면서도,
강태는 촉촉하게 물이 오른 자신의 매끄러운 피부며 결이 고운 머리카락 등에 흡족해 져서는 조금은 남사스러운 웃음을 흘린다.
그가 이렇듯 외모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물론 한 사람 때문이다.
재준이 운전하는 승용차가 어디쯤 왔을까 추측해보며 강태는 방으로 들어와 옷을 차려 입는다.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는 강태에게 반가이 닿아오는 전화벨 소리..
강태는 빠른 걸음으로 나가 수화기를 집어든다.
"재준이야?"
"어, 나야..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얼마나 걸리는데? 빨리 와~~"
"10분이면 도착할거야.."
"알았어~~"
벌써부터 그의 일정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일주일, 혹은 그보다 좀 더 긴 시간만에 마주하는 재준의 하얀 얼굴에서 짙은 피로감과 고단함이 배어나는 게 염려스럽기 하지만..
회색 아스팔트 위에서 정서적 교류와는 상관없이 실리적 이해에 따라 낯익은,
또는 낯선 사람들과 연계해서 생활하고 있는 이른바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어느새 배제된 강태는 점점 현실의 평형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두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 따위는,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에 너무도 쉽게 묻혀버린다..
덜커덩하는 문소리가 나고 강태는 후다닥 현관으로 발을 옮긴다.
까만 정장차림에 쇼핑백을 한 손에 든 재준이 강태와 눈을 맞추며 살짝 웃어 보인다.
그리고 강태에게 쇼핑백을 건네준다.
"이게 뭐야?"
"네가 보고 싶다고 했던 영화 테이프.. 그- 네가 좋아하는 감독 거야.."
"아아~ 토드 헤인즈? 어디서 났어? 구하기 힘든 건데~"
"환성이가 주더라.. 저번에 홍콩 나갔다가 얻었다고..."
"우와~~ 진짜 보고 싶었는데..."
구릿빛 피부를 환하게 피우며 함박웃음을 머금고 비디오 테이프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강태..
아주 사소한 것이나마 연인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만큼 충만한 만족감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재준은 콧등으로 꽉 밀려드는 노곤함을 잊은 채, 느긋한 이완상태가 되어 거실의 쇼파에 비스듬히 반쯤 누운 자세로 몸을 맡긴다.
습관적인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재준에게 또 역시 습관적, 반복적인 잔소리를 빼놓지 않는 강태..
"담배 좀 줄이라니까~? 피부 더 상한 것 같아.."
"피곤해서 그런 거야.. 요새는 진짜 많이 안 피운다..."
"일은 어떻게 잘 되 가고 있는 거야..? 뉴스 보니까 보도도 제대로 안 하더라..."
"가닥이 웬만큼 잡혀서 이제 본격적으로 붙어 보려고..
주혁이 형이 생각보다 너무 일 처리를 잘 해서 든든해.. 진작부터 여기서 있었어야 할 사람인데..."
"어떤 식으로 해결할 생각인데..?"
"신정윤 정부랑 접촉이 됐거든.. 그 여자가 색을 그렇게 밝힌다니까 그걸 이용해서 연화회에 접근해 가는 수밖에..."
"오호~~ 그러니까 한 마디로 '미남계'를 쓰겠다?"
장난스런 미소가 감도는 강태의 얼굴이 유독 천진난만해 보이자,
재준은 무의식적으로 비져 나오는 웃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강태는 갑자기 새침한 눈매로 옴팡지게 재준을 치켜다 보며 잔뜩 경계 어린 태도를 취한다..
돌변하는 강태의 행동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재준이 뚱한 표정을 짓자 강태는 제법 단호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재준에게 경고한다.
"너어~~설마 네가 직접 그 여자한테 추근 거리는 건 아니겠지? 그러기만 해봐~~!!"
"........???"
이런 쪽에는 매우 둔감한 재준..
여전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그 여자 꼬시려면 같이 자고 그러기도 해야 되는 거잖아-
막 선물도 사 주고, 데이트도 하고 그래야 될 거 아냐-
너, 충의회에서 네가 제일 잘 생겼다고 네가 직접 그 여자랑 만나서 그러면 안 돼!! 네 밑에 있는 다른 사람 시켜! 넌 절대 안돼!!"
강태의 말뜻을 파악한 재준은 검은 눈동자가 휘둥그래해 지며 벙찌고 만다.
강태는 무색케 하는 재준의 반응에 부끄러워진 그는 하릴없이 방황하는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켜야 할 지 난감해하며 괜스레 헛기침만 몇 번 날려댄다..
재준의 눈매가 둥글게 말리며 수줍어하는 강태를 살가운 눈빛으로 응시하다가 호통한 파안대소와 함께 그에게로 팔을 뻗는다.
강태는 의례적인 몸짓으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저항을 해보다가 못 이기는 척 재준의 품안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하하하!! 야, 네가 보기엔 충의회에서 내가 제일 잘 생겼나 보지?
강태가 날 좋아하긴 하나보다~~ 강짜도 다 부리고...크큭...."
"뭐, 뭐, 강짜?? 이게 누굴 여자로 아나...-_-++"
재준의 등 언저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강태의 손길도 간지럽게만 느껴지는 재준..
연신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속수무책으로 방기하며 강태의 보송보송한 머리칼의 촉감에 한껏 취해본다..
계속해서 앙증맞게 투닥거리는 강태의 주먹질에 일부러 몹시 아픈 것처럼 면상을 찡그려 보이며
그의 팔목을 한 손으로 잡아채는 재준에게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 이재준입니다.."
".....저어........"
상대편에서는 선뜻 말머리를 트지 못하고 서투른 말 줄임표만을 나열하고 있다.
재준은 방금 전의 여유를 남김없이 몰아내며 억양 없는 건조하고 삭막한 음성을 되찾는다.
"누구 신데 말씀이 없으시죠?"
"....저기....재준군....맞나요..?"
"예, 제가 이재준 입니다만...누구십니까?"
"......저....나...태현이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
- 하늘색 환자복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면 까닭 모를 짜증이 솟구친다.
지나치게 하얀 병실의 벽면도 마찬가지다.
창 밖으로 보이는 테니스 코트에서 라켓을 휘둘러대는 사람들의 움직임 또한 금방 진력이 나는 구경거리다.
태현은 의도한 죽음 대신, 한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힘겹게 닫힌 눈꺼풀을 열었을 때 숨이 턱 하고 막히도록 눈부신 백열등 불빛을 감지하며 새로운 좌절감에 휩싸인 그였다.
태현의 손을 붙들고 도대체 왜 그랬냐며 억수 같은 울음을 그치지 못하시는 어머니께 침묵만을 내세워야 하는 건 제일 쓰라린 고역이다.
새벽녘마다 욱신거리는 극심한 두통 때문에 잠을 설치는 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태현은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은 하늘색 환자복을 가리려고 시트를 턱 밑에까지 덮어쓰며 모로 눕는다.
그리고 낮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초가을의 햇살이 선잠을 방해하려고 하자, 태현은 다시 상체를 일으켜 리모콘을 사용해 블라인드를 친다.
유리창을 덮으며 내려오는 블라인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태현에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비치는 사람은 혁수다.
밝은 색 청바지에 회색 반 팔 티셔츠 차림의 혁수는 평소처럼 잔잔하고 고요한 눈빛이다.
태현은 어떻게 할까 잠시 속으로 궁리하다가 미소 같지 않은 미소를 멋 적게 건넨다.
"웬일이냐~~ 벌써 서울까지 소문이 돈 거야? 내가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네~~"
시덥지 않은 농담으로 혁수를 반기는 태현이 너무 얄밉고 야속해서 혁수는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쌀쌀맞게 변한다..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여는 혁수..
"재준이랑 주혁이도 같이 오고 싶어했는데, 일 때문에 제주도까지 왔다 갔다 하기는 무리인 가봐..
알다시피 강태는 바깥 출입이 아예 안 되고...어쩔 수 없이 나만 온 거니까 이해해 주라.."
혁수의 차가운 말투 속에 깔린 안타까움이, 모래 같은 음성 저변에 흐르는 따스한 위무가 전해지자..
태현이 더 이상 가식적으로 깐죽대며 혁수를 대할 수가 없다..
고개를 푹 숙이며 긴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남루한 모습을 감추려는 태현에게 한결 격양된 혁수의 목소리가 닿아온다..
다그치는 것보다 속이 상해 부르짖는 듯한 답답함이다.
"너희 어머니가 재준이한테 전화하셔서 안 거야..네 수첩에서 보고 전화하신 것 같더라...
재준이한테 태현이가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거냐고 물어보셨대..
얼마나 기가 막혔는 줄 알아?
우리가 너희 어머니께 그런 전화를 받아야 할만큼 너하고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니??
재준이랑 주혁이가 저렇게 목숨 걸고 뛰어 다니는 게 너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누구보다 네가 아프다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리에게도 세라는 소중한 친구였어!"
혁수가 무엇 때문에 격분하고 있는 건지, 태현에게 왜 화를 내고 있는 건지 태현은 알 수 있지만 무어라고 이야기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때문에 입을 다물고 혁수의 독설이 자신의 상처를 파헤치기만을 기다린다..
"이런 말해서는 안 되지만, 너....정말 바보 같아..
문태현, 이렇게 약해빠진 놈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든 네 방식으로 버티고 일어 설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고 너한테 혼자 있을 시간을 줬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옆에 꽁꽁 묶어 놓고 있었을 거야!!
재준이가 얼마나 상심한 줄 알아?
넌 왜 그렇게 네 생각밖에 못해?! 너만 힘드니?? 너만 가슴 아프고 막막한 거야?? 우리 전부 다..."
"........그만해, 혁수야..."
실핏줄처럼 서럽게 소스라치는 태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혁수의 난폭하고 장황한 말들을 멈추게 한다..
(84)
예리한 바늘의 끝 부분이 촉수에 와 닿는 듯한 섬뜩함에 혁수는 멈칫 신랄한 공격을 거두어들이고..
태현의 커다란 눈동자는 암울한 보랏빛으로 반짝이며 애달픈 물기를 퍼 올린다.
밑바닥까지 잠긴 목소리가 위태롭기만 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이제 그만해 줘, 혁수야..."
혁수의 어깨가 축 처지며 불거졌던 얼굴도 맥이 탁 풀려버리는 게 연연히 드러난다.
태현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기가 두려워서 끝내 혁수는 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리고 좀 전과는 사뭇 이질적인, 나지막하고 조용한 음성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난....너를 잘 몰라... '문태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난 아직 절반도 다 알지 못해..
넌 나를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정말 좋은 친구이지만, '너'라는 사람에 대해 내가 과연 몇 퍼센트나 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20%? 30%??"
"......................"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문태현은, 적어도 이렇게 나약하고 비겁한 남자는 아니야..
상처를 감추려고 일부러 웃는 게 아니라, 정말로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래서 아무리 큰 고통이 닥쳐도 씩씩하게 맞서면서 앞으로 달려나가는 사람...
내가 아는 문태현은 그래..
그리고 그게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예전의 내가 그랬던 건, 웃음을 잃어버릴 만한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야..
지금은....어떤지 잘 모르겠지만....어차피 시들어가는 것도 내가 아니라 '기억'일 뿐이니까...."
"세라가 없니? 세라가 네 옆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네가 믿는 기독교 논리를 들어서 설명하려고 하지는 마..
세라는 하늘나라에서 날 지켜보고 있다- 뭐 그딴 얘기...
한편으로는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가증스러워..!"
매섭게 냉각되는 태현의 눈초리가 적자색 파도를 부여 담고 거세게 일렁인다.
혁수를 향한 격노라기보다는, 지극히 통속적으로 하잘것없이 초라해지는 자신과,
그가 사랑했던 여자의 존재가 억울하고 한이 맺혀서 외치는 고함이다..
"눈에 보이는 것, 형체, 손끝으로 만져지는 것... 그게 무의미하다는 이론도 어느 정도 인정해..
그렇지만 내가 발바닥을 대고 사는 곳은 딱딱한 현실이야!
이론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건
세라가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 애를 너무 빠른 속도로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야!
나는 그런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내 주변의 환경까지도...."
울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커다랗게 치켜 뜨는 태현의 모습에서 혁수는 수치스럽게 비춰지는 자신의 일부를 본다..
그가 변할까봐 두려워지는 혁수...
'문태현'에게 내재된 본래의 속성이 부디 변질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태현에게 염치없는 부탁을 해보기로 마음먹는다.
"내 말이 거슬렸다면 미안하다.. 단지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니까 단정적으로 결론 짓지는 마..
너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얘기한 거지 다른 뜻은 절대 없어..
난 네가....같은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바래.. 물론 무리한 요구라는 거 알아.
하지만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나는 문태현이 정말 용기 있고 강한 사람이라고 믿으니까....
얼른 버티고 일어서 주기를 바라는 거야.."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슬픔이 혁수의 유유한 음성 사이로 살짝 그 정체를 내보이는 탓에
― 어쩌면 돌연히 다정스러워진 혁수의 어조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
태현은 하얀 뺨 위로 좁다란 도로를 그리며 굴러 내리는 이슬방울을 무력하게 방치해 둔다..
솔직히 우는 것도 이젠 지겹다. 혁수의 말 대로 어떤 방식으로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도 자기 자신이 파렴치하게만 느껴지는 태현이다..
"태현아....우리는 말이지....나랑 주혁이 뿐만 아니라 강태랑 재준이까지 전부 다, 우리는.....네가 필요해.... 그것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무슨 뜻인지...너...이해하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행복해 지기가 너무 힘들잖아...
너 밖에 우리를 도와줄 사람....없어.. 아니, 너만큼 우리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세상에는 없어...
세라는 하늘로 갔고, 이제 남아있는 건....태현이 너잖아....
우리는.....네가 필요해... 네가 이대로 주저앉아서 너 자신을 포기해 버리면...
우리까지도 모두 포기되어 버리는 거야...
그래, 범위를 좁혀서 나하고 주혁이만 가지고 얘기할게.. 그게 더 정확할 테니까...
나하고 주혁이는.....지금....많이 무서워...
혹시라도 우리가 서로를 놓치게 될까봐....세상 속에서 굴복하고 서로를 외면하게 될까봐....
그래서...누군가 우리를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어..
결국에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응원해 줄 사람이 필요하단 말이야..
나더러 뻔뻔하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지만....태현아, 넌 우리를 알잖아...? 응...?"
마지막에 가서는 연약하게 떨리며 사그라드는 혁수의 목소리가 태현의 고막을 구슬프게 두드리고..
태현은 북받치는 감정을 삭히지 못하고 가냘퍼 보이는 혁수의 어깨를 부둥켜 안는다..
그것이 태현이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화해의식' 이자, 어긋났던 자아의 재결합이었다..
- 자욱하게 실내를 메우는 담배연기 사이로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스펙트럼을 분사시키고,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는 재즈 음악이 느릿하게 퍼져 나온다..
옹기종기 그룹을 지어, 또는 단 둘이서, 그것도 아니면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채워진 바에 들어서자
환성은 눅눅한 습기 때문에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이내 안색을 바로 잡고 수려하게 차려입은 까만 정장을 가다듬으며 목표로 하고 온 한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본다.
두리번거리던 환성의 망막에 포착되는 그녀는 눈에 잘 뜨이는 일자형 테이블에 자리하고 있다..
환성은 묘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가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인다.
그리고 바텐더에게 그녀가 마시고 있는 술과 똑같은 것을 주문한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환성에게 시선을 던지는 그녀에게 보일 듯 말듯 야릇한 웃음을 보내는 환성...
가까이에서 확인한 그녀는 신정윤의 정부, 민윤희가 틀림없다.
화려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 간 그녀의 눈썹이 움찔거리고 환성은 그런 윤희의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아무 말 없이 술만 홀짝이는 환성을 요모조모 살펴보던 윤희는 먼저 말을 걸지 않는 그가 못내 답답하다는 듯 좀이 쑤시는 얼굴로 입을 연다.
"이봐요, 여기 자주 와요?"
역시 짐작했던 대로 윤희의 목소리를 코맹맹이 소리가 섞인 전형적인 소프라노다.
앵앵거리는 그녀의 음색과 은근한 재즈의 선율이 마구잡이로 뒤범벅되어 환성의 귓전에 신경질적으로 부딪쳐 온다.
환성은 그 특유의 대담한 눈초리로 여자의 몸을 훑어보면서 내뱉듯이 대꾸한다.
"자주 오지는 않아요.. 가끔 우울할 때 오는 편이죠.."
"오늘은 무슨 일 때문에 우울한데요?"
꼬치꼬치 캐묻는 여자는 질색인데.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이니까....
환성은 능숙하게, 여자로 하여금 이끌려 오게 하는 자세로 삐딱하니 상체를 기대며 당돌하고 결정적인 물음을 날려본다.
"제가 마음에 드시나 보죠?"
윤희는 잠깐동안 어이가 없다는 듯 얼빠진 눈동자로 환성을 쳐다보다가 곧 얼굴빛을 추스르며 여유 있는 태도를 되찾는다.
일직선으로 그녀를 마주보는 환성의 눈빛에 어쩐지 주눅이 들고 빨려 드는 자신을 희한하게 여기면서 윤희는 순순히 속내를 털어놓는다.
"눈치가 빨라서 좋네요.. 우리 집에 가서 한 잔 더 할래요?"
요염하게 허리를 비틀며 간드러진 어조로 제안하는 그녀에게, 환성의 대답은 여부가 있을 리 없다..
윤희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비밀스런 회심의 미소를 선홍빛 조명 아래 감추며 흔쾌히 그녀의 초청에 응하는 환성...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바에서 빠져 나온다..
환성은 세워두었던 승용차로 윤희를 안내하고, 차에 오르자마자 거침없는 반말로 말투를 바꾼 그녀가
담배 한 개피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환성에게 질문한다..
"꽤 어려 보이는데 정장을 다 입었네.. 몇 살이야?"
"나 스물 두 살... 누나는??"
윤희에게 담배 불을 깍듯이 붙여주며 친근하고 응석 어린 투로 되묻는 환성..
윤희는 '누나'라는 호칭에 기분이 좋아져서는 들뜬 음성으로 이야기한다.
"난 나이 많아.. 내년이면 서른이거든..."
"정말?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난 나보다 한 두살 많은 줄 알았어.."
"어머, 진짜~?? 웬일이야, 너무 기분 좋다~~~"
몇 번 여자를 꼬드겨 본 경험이 있는 남자라면 누구나,
어떤 여자에게나 빼놓지 않는 상투적인 멘트에도 정신을 못 차리며 넘어가는 여자가 한심하다 못해 아예 측은해 보일 지경이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미소를 가장한 채, 계속해서 숙달된 솜씨를 발휘하여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며 윤희의 아파트로 운전해 가는 환성...
엘레베이터라는 밀폐된 공간에 두 사람만 있게 되자,
그새 거리감 같은 건 집어 치웠는지 노골적으로 환성에게 엉겨 붙으며 달아오른 피부를 밀착시키는 윤희가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
욕정에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윤희를 힘있게 보듬어 주며,
환성은 그녀와 함께 윤희의 ― 정확히 표현하자면 신정윤의 ― 집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때부터 환성의 오감은 날카롭게 곤두서서 집안 구석구석을 면밀히 머릿속에 저장시키고 상세하게 나름대로의 분석을 시작한다.
그리고 윤희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환성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신중한 손길로 버튼을 누른다.
신호가 가고, 이제는 귀에 익은 주혁의 음성이 수화기 저쪽으로부터 들려오자 환성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낮게 속살거린다..
"예, 저 환성입니다. 지금 신정윤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네, 나중에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85)
".......좋았어..?"
급절한 욕정에 들떠 버둥거리는 윤희의 육체를 부드러운 애무와 능숙한 손길로 달래고,
지쳐 뻗어버릴 때까지 그녀의 욕망을 채워준 후..
사춘기 미소년처럼 어리숙한 표정을 지으며 환성은 달착지근한 음성으로 윤희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직도 질펀한 쾌락의 도가니에서 허우적대는 온몸을 가누지 못해 멍하지 풀린 동공으로 환성을 바라보며 여자는 대꾸한다.
"......진짜....이렇게 끝내줬던 적은 처음이야.. 후우....."
이미 환성의 지배하에 놓였음을 전적으로 시인하는 그녀의 대답에 환성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우고,
몸을 일으켜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티슈를 몇 장 뽑아 그녀의 다리 사이에 묻은 끈적끈적한 체액을 닦아준다.
이쪽 부류의 여자들은, 언제나 자기 욕구만 챙기느라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남자들에게 진력이 나 버린 터라
이 같은 아주 사소한행동 하나에도 엄청나게 감격하는 법이다.
게다가 젊고 수려한 외모에 로맨틱한 몇 마디만 곁들여도 여자는 쉽게 그 남자의 영역 안에 갇혀버린다.
"자기 정말 대단해... 나 완전히 자기한테 반했어.. 이제 어떡할 거야?"
벌써부터 호칭이 '자기'로 바뀜과 동시에 환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책임지라 들러붙는 윤희는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환성은 시니컬하게 비져 나오는 냉소를 따스하고 다정한 미소로 탈바꿈시키며 윤희의 벗은 몸을 한 팔로 보듬어준다.
"어떡하긴....매일 이렇게 같이 있으면 되지.."
"그럴 수가 없으니까 문제지.. 아까 얘기했잖아, 나 이번 주말에 일본 간다고..."
"그게 왜 문제야? 나도 데려가면 되잖아.."
뾰루퉁하게 부풀은 윤희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애교 있게 이야기하는 환성..
스스로 생각해봐도 탄복할 만큼 뛰어난 자신의 연기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계획대로 대화가 진행되어 나감을 흡족히 여긴다.
윤희와의 섹스도, 간지럽게 속삭이는 달콤한 사랑의 말도 모두 사업에 불과하다..
아니, 재준으로부터 하달된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 진심이야? 나랑 같이 일본 가겠다는 거? 어쩌면 꽤 오래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누나만 괜찮다면....같이 가자..."
진지한 눈빛을 가장하느라 과장되게 힘이 들어간 환성의 눈매가 윤희에게는 한없이 깊고 자상하게만 보인다.
그의 망설임 없는 결정에 다시 한번 감동하며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져서는 환성에게 매달리는 윤희..
어리석게도 자신을 향한 환성의 눈동자에 그 흔해 빠진 '사랑' 따위가 담겨 있다고 섣불리 믿어버리는 그녀..
그래, 당신은 멍청하지만 불쌍한 여자야...
당신을 이용해 먹고 있는 나라는 사내가 오히려 지저분한 놈이지...
하지만 내가 충의회 이재준 회장님의 직속부하라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항목이기 때문에...
섹스와 사랑 모두 이처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형되어 쓰여질 수 있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다.
그 단점을 철저하게 이용한 재준의 계획은 첫 단추부터 아주 수월하게 끼워지고 있었다.
- ".......그래.. 회장님께 말씀 드리고 나서 다시 얘기해 줄 테니까 기다려..
조심해서 행동하고...... 그래, 수고해라..."
환성의 보고를 끝까지 경청한 후, 주혁은 옅은 한숨을 흩뿌리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일이 빠른 속도로 풀려 나가는 것이 안정감과 위태로움을 한꺼번에 가져다준다.
명치께를 뻐근하게 긴장시키는 팽팽한 전율감에 작게 진저리를 치며 주혁은 2층의 홈 바로 발걸음을 옮긴다.
바의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생각에 잠긴 재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주혁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옆에 자리한다.
"....환성이 전화야..?"
주혁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음울하게 침잠한 검은 눈동자를 빨간 담배 불에다 고정시킨 그대로 입술만 열어 묻는 재준..
주혁은 헛기침을 해서 무지근해지는 성대를 풀고, 중저음의 보이스를 끄집어낸다.
"....여자가 이번 주말에 일본으로 출국한대.. 환성이는 며칠 뒤에 따라 가기로 했고..
네 말대로 쉬운 여자였어. 근데 문제는...연화회가 이제 슬슬 움직일 모양이야.."
"자세하게 설명해 봐.."
"연화회 새끼들이 그 여자한테 되도록 빨리 출국하라고 그랬대..
중요한 일이 있을 거니까 여기 있으면 복잡해 진다구...
신정윤도 그 여자한테 신신당부를 했다는 거야. 얼른 조용한 데로 피해 있으라고...
그 여자도 눈치를 채고 있더라구.. 조만간 크게 한판 벌어질 것 같다고 얘기하더래.."
"그 새끼들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설치는 거지? 분명 누군 가와 연합을 했을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다른 조직이랑 합쳤을 가능성이 제일 높지 않아?"
"그렇기는 한데.....아무튼 조심해야겠어.. 언제 터뜨릴 지 모르니까..."
"그래.. 그리고 강태 말인데...별장에 있은 지도 너무 오래 되지 않았어?
알려지지 않은 장소라고는 하지만 서울 근교에 있는 한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어..
제일 위험한 게 강태니까, 위치를 이동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왕이면 외국으로...."
주혁은 결코 쉽게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연인들의 안타까움을 충분히 고려해 보았으나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있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에..
조심스레 재준을 종용해 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의 하찮음과 절대성을 이미 뼈저리게 체험한 주혁이라는 것을 재준 또한 알고 있기에 희미하게 고개를 주억이고 그의 의견에 수긍한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단호한 자신의 이성을 힐난하는 강태의 새초롬한 눈초리가 떠오르는 탓에 야속하고 갑갑한 마음을 금할 수는 없다.
재준은 주혁이 듣지 못하도록 소리 없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물론 담배 연기로 위장해서 말이다..
"그럼....대충 수습될 때까지 강태 홍콩에 있게 해야겠다..
제일 믿을만한 데가 거기니까...."
"알았어.. 내일 당장 출국 준비 시작할게.."
씁쓸한 재준의 심정을 어루만져 주듯 깍듯하고 사근사근하게 뒤를 잇는 주혁의 말이 고마우면서도, 뜻밖의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위안 섞인 눈빛을 보내야 한다는 게 가끔은 비참한 기분이다..
재준은 그토록 견고하게 빗장을 걸어두었던 '자제심'이라는 철문을 무기력하게 열어제치며,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혼잣말을 뱉어낸다.
"...........힘들다........"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라이터를 꺼내던 주혁의 동작이 일순간에 정지하고,
기묘하게 일그러진 검푸른 눈동자가 재준의 패색 짙은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본다.
위험하게 흔들리는 재준의 검은 심연이 설마 울음을 참고 있기 때문은 아닐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주혁은 비어 있는 재준의 술잔에 알콜 성분이 과도한 호박색 액체를 꽉꽉 눌러 담아준다.
그러나 재준은 여전히 우두망찰 한 곳만을 응시할 뿐, 미세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그의 침묵에 주혁이 슬슬 울분과 비통함을 느끼기 시작할 때, 재준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린다.
그리고 주혁은 재준 대신 글라스에 가득찬 술을 단숨에 목구멍 너머로 삼킨다..
- 자그마한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서울의 도시 풍경이,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는 생각에 혁수는 의미를 분간하기 힘든 웃음으로 귀여운 얼굴을 장식한다.
잠시 후 비행기가 착륙한다며 주의를 요하는 안내방송이 기내에 울려 퍼지고
복도를 지나다니던 스튜어디스가 혁수에게 안전벨트를 착용해 달라고 이르자, 혁수는 흘깃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 나온다.
몸이 기우뚱하고 하강하는 느낌과 함께 기체의 바퀴가 활주로에 가까워지고,
승무원의 지도에 따라 사람들은 부산스레 열을 지어 출입문 쪽으로 향한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스튜어디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해 보이고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가는 혁수..
아래쪽에 펼쳐진 암회색 아스팔트를 바라보며 어김없이 그 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고작해야 두 달 남짓 지난 일인데, 왜 이토록 아득하게 느껴지는 걸까...
안혁수, 밀어내려고 애쓰지 마.
그 날, 그에게로 돌아오던 그 날...네가 어떤 마음으로 저 땅바닥 위를 딛고 섰는지....벌써 잊어버린 거야..?
그게 시작이었어... 그게 겨우 시작이었다구...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
안혁수..... 바보 같아..
내면 속의 또 다른 자아가 책망 조로 투덜거리며 혁수를 향해 눈을 흘긴다.
혁수는 멋 적은 웃음으로 그것을 무마해 버리고 내면의 소리를 잠재운다.
그리고 핑계처럼 한 마디 덧붙인다..
'난 지금 피곤해.... 그만 하자구...'
주차장에 세워진 포카리의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거머쥐는데, 왼쪽 포켓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나온다.
"네.."
"혁수야, 나야~~ 도착했어??"
부르릉거리는 차 소리와 섞여서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연청색 장주혁이다.
아마 차안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건가 보다.
그는 가끔씩 혁수보다 세심한 구석을 보인다. 어울리지 않게도―
"어, 방금 도착했어.. 너 어디 있어?"
"지금 차안이야.. 집으로 갈 거지? 최대한 일찍 들어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그래, 알았어.. 이따 저녁에 봐~~"
핸드폰을 접어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고 운전석에 오르는 혁수의 입술이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자잘한 미소를 만들어 낸다.
기어를 조정하고 차를 출발시키는 혁수..
좀 전까지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복잡한 생각들이 저만치 물러나고 며칠동안 보지 못했던 연인의 얼굴이 시야를 환하게 밝혀온다.
그래서인지 혁수는, 공항 입구를 나설 때부터 자신을 미행하는 누군 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86)
그 밤, 어둠에 가려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걸어오던 길이 길이 아니었음을...
지나고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그어둔 금을 넘어 우리가 걷고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 걷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가도 가도 어둠뿐인 이 길을....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중 -
별장에서 생활하는 동안 강태가 사용했던 물건들을 모두 트렁크에다 옮겨 놓은 후 탕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 재준...
강태는 긴 앞머리로 옆얼굴 전체를 가린 채 발부리로 흙바닥을 툭툭 걷어차고 있다.
팔짱을 끼고 있다는 건 무언가 불만족스럽거나 속이 상하다는 표시이다.
재준은 잠시동안 강태의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무표정한 얼굴에 조금이라도 생기를 담으려 노력하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래도 강태는 재준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쓸데없는 발장난에만 열중한다.
차라리 예전처럼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뻐팅기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무안하리 만치 순순하게 홍콩으로의 도피행을 받아들이고 이행하는 강태의 태도가 아이러니하게도 재준을 훨씬 더 곤혹스럽게 만든다.
"......가자..."
두 사람 사이의 메마르고 부실한 정적을 파기하며 재준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그 내용은 얄미울 정도로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나 길어질 지 모르는 이별의 시간이 닥쳐오는 것 또한 전혀 증오스럽거나 두렵지 않은 듯 하다..
두 시간 전, 사막처럼 건조하고 또 무덤덤한 음성으로..
태연자약한 표정을 조금도 찡그리지 않으며 재준의 강태에게 홍콩 행을 이야기했을 때부터..
강태는 가슴 밑바닥에서 조용하게, 그러나 굵고 선명하게 새겨지는 그에 대한 미움과 서운함에 시달리는 중이다.
내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라고, 그를 의심하는 거라고 머릿속으로는 인식하지만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감정이란 완벽한 일치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강태가 바라는 건 지금 같은 이재준이 아니다.
이 따위 지리멸렬한 위장술은 넌더리가 난다.
대체 언제까지 내 앞에서마저 강한 척 할 셈이야..?
이재준, 말해 봐.. 내가 언제까지 참아줘야 해..?!
차마 입 밖으로 소리내지 못하고 원망 어린 눈길을 들어 재준을 따갑게 쏘아주고는,
강태는 눈에 뜨이게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조수석의 문을 열고 탑승한다.
차가 국도로 접어들 때까지, 재준도 강태도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색한 침묵을 먼저 치우려고 하지 않는다.
껄끄럽게 지속되는 고요함 속에 어느덧 서울에 당도하고 차량의 수가 증가하면서 속도가 점점 느려지자,
둘 사이의 싸늘한 적막이 거대한 무게로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결국 재준은 뻣뻣한 어조로 멍청한 질문을 던져본다.
"......화났어...?"
창 밖의 풍경에만 줄곧 눈동자를 붙박고 있던 강태가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재준의 얼굴을 일직선으로 쳐다보고, 충동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빠르게 대꾸한다.
"그래."
".......상황이 어쩔 수가 없어... 이해해라.."
"아니, 그게 아니라 난 너한테 화가 나.. 이재준 이라는 남자한테 화가 난 다구.."
이런 말하면 안 되는 거 알고 있다.
그렇지만 확인하지 않고서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나의 부족한 인내심을 탓해 다오..
그만큼 날 중독 시키고 망가뜨리는 장본인이 바로 너, 이재준 이니까...
이번에도 종래에 가서는 너에게 용서를 빌게 되겠지..?
잘 알면서도 후회할 일을 되풀이하는 건, 내 속에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감정이 나를 반미치광이로 몰아가기 때문일 거라 생각해 줘...
그렇게 라도 합리화하지 않으면 정말 너무 수치스러워서 너에게 안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강태의 가시 돋힌 말을 듣고서도 묵묵히 앞만 응시하며 운전을 하던 재준은
불현듯 핸들을 돌려 도로에서 이탈하더니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 쪽으로 차를 붙인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강태는 흑색 눈동자를 원 모양으로 치켜 뜨며 어깨를 움찔거린다..
유려하게 뻗어 내린 재준의 옆선이 가느다란 목과 연결되어서 상당히 예술적인 감각을 풍긴다..
그에게 화를 내고 있으면서도 그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초라하고 볼 품 없다..
"......왜 그러는 건지 말해 봐.. 이유를 알아야 변명이라도 할 거 아냐.."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듯 매끄럽지 못한 음성으로 강태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재준..
그러나 강태는 입을 다문 채 자신의 시선을 붙잡고 있던 재준의 하얀 얼굴에서 억지로 눈길을 떼어낸 후, 차창 밖을 건너다본다..
과일과 야채를 파는 노점상들이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는 길거리가 문득 섬찟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지는 강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또한 전혀 이질적인 세계 속에 동떨어져 존재하는 듯 하다..
언제부터 이런 격리감을 갖게 된 건지.....
한꺼번에 와르르 밀려드는 정신적 위화감 때문에 약간 허탈한 표정으로,
강태는 30미터쯤 앞에 보이는 지하철 역 입구에 공허한 눈동자를 안착시킨다.
그러더니 표정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지하철 타자.."
생뚱맞게 지하철을 타자고 이야기하는 강태를 선뜻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재준은 의뭉스런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기만 한다.
강태는 그제서야 재준과 눈을 맞추며 환각에서 깨어난 듯 또랑또랑해진 어조로 말을 잇는다.
"너 지하철 한번도 안 타봤지? 타 보면...아주 재미있고...유익해.."
입술만 말려 올라가는 작위적인 미소를 짓고 재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차 문을 열어 제끼는 강태..
재준은 그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재차 짚어보다가 더 생각해 보기도 귀찮다는 듯 강태를 따라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주황색 표시가 솟아있는 지하철역으로 발을 옮긴다.
또 다시 침묵을 지키는 강태.. 그래도 아까 같이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날카로움은 아니다.
퇴근시간이라 역 안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인파들로 북적거린다.
노선의 제일 끝에 있는 종착역의 이름을 대고 표를 구입하는 강태..
재준은 잠자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준다.
플랫폼에 서서 5분쯤 기다리니,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열차가 도착하고,
강태와 재준은 그들 틈에 섞여 구석진 자리에 마주보고 선다.
열차의 맨 마지막 칸이라 그런지 다른 곳보다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노란 머리카락에 진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재준은 아무리 봐도 가장 서민적인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과는 영 매치가 안 된다.
게다가 재준과 함께 서 있는 강태의 유달리 출중한 외모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계속해서 힐끔힐끔 강태와 재준을 곁눈질한다.
끊이지 않고 날아와 꽂히는 시선에 부담을 느낀 재준이 입을 연다.
"왜 자꾸 우리 쳐다보는 거야..? .....나 뭐 이상하냐...?"
".....너랑 내가 너무 잘 생겨서 그래.."
웃음기 하나 없이 사뭇 진지하게 얘기하는 강태를 보며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 황당해 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던 재준..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을 닫는다.
".......사람들이 정말 많지...?"
물기에 젖어 애잔하게 귓가를 건드리는 강태의 목소리가 재준의 청세포 하나하나를 힘겹게 일으켜 세우고,
재준은 동의의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하필이면 너와 내가 만난 거야..."
"......어째서 '하필' 이야...?"
단 한번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인 어휘를 쓰지 않았던 강태이다.
그런데 지금, 저 예쁜 입술로...저렇게 유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하필' 이라는 회의적인 단어를 쏟아내는 강태가 재준을 초조하게 한다.
"어째서 '하필' 이냐구...? 훗.... 가르쳐 줄까..?"
"..................."
냉랭하게 조소하는 강태의 흑색 눈동자가 차가운 쇳덩이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의 도발적인 빨간 입술이 재준에게 다가온다.
깜짝 놀라며 뿌리치기도 전에 강태는 재준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진한 키스를 퍼붓는다.
강하게 재준의 입술을 열고 침입하는 강태의 혀가 서러운 미각을 전달해 주고..
연이어 재준의 고막을 쑤시고 들어오는 소리는 두 남자의 입맞춤을 보고 경악하는 사람들의 야유와 수군거림이다..
아예 노골적으로 나서서 욕을 해대는 사람들도 있다.
재준은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황급히 강태를 데리고 열차에서 내려버린다.
허둥지둥 하는 재준과는 대조적으로 강태는 차분하기만 하다..
다행히도 두 사람이 하차한 역에는 인적이 보이지 않는다.
"강태 너 진짜....!"
"이제 알았지? 왜 우리가 '하필이면' 만난 건지......"
도무지 정상인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강태의 행동에 기막혀하며 언성을 높이려던 재준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는 강태의 음성..
비웃는 듯한 공격성도, 눈물을 떨구는 슬픔이나 절망도 아닌 그저 비릿하게 번지는 체념 어린 황량함...
이젠 그만 쉬고 싶다는 나약한 아우성이다..
"이재준... 넌 네가 똑똑한 줄 아는데...가만히 보면 너 정말 바보야..
넌 충의회 속에서만 살아서, 그 밖의 세상이 어떤지 아무 것도 겪어보지 못했어..
이렇게 너랑 내가 같이 있는 거...네가 사는 그 세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 주니까 넌 그저 쉽게만 생각하는데,
사실 너랑 나는 이런 식으로 취급받는 관계라구... 무슨 말인지 알아..?
우리는 키스를 해도 안 되고, 사랑한다는 말도 하면 안 되고, 더더군다나 섹스는......."
그 뒤에 이어지는 얘기는 안으로 삭히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듯 싶다.
그것까지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면 돌이킬 수 없이 처연해 질 테니까...
언제나 일부분은 감추어 두는 게 현명하다..
"......그러면.....우리....헤어..질까....?..."
반대편 플랫폼에 불빛을 밝히며 들어오는 전동차를 망연히 바라보며,
재준은 고작 이 따위 형편없는 물음으로 강태의 불안정한 영혼의 파도를 울컥 솟구치게 한다.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해일로 변하여 강태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흥건한 물난리를 발생시키는 그 빌어먹을 놈의 감정...
이재준, 이렇게까지 날 병신으로 만들어야겠냐.....
".....집에 가자.. 내일 아침 일찍 공항 가야 된다며....."
모카빛 두 볼을 적시는 눈물줄기를 들키지 않으려고 뒤돌아 서며 귀가를 재촉하는 강태..
걸음을 떼기 전,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정말.....너 사랑하기 싫다, 이재준....."
(87)
그대여, 무덤덤하게 그대 이름을 불러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인지,
그런 날이 과연 오긴 올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대 이름 두 글자만 떠올려도 금새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오는 건
아마도 우리 사랑엔 기쁨보다 슬픔이 많은 탓이겠지요.
세상엔 기쁘고 환한 사랑도 많더라마는 왜 이리 우리 사랑은 눈물만 앞서는 것인지....
언제쯤이면 그대 이름을 눈물 없는 환한 얼굴로 불러 볼 수 있을지.
그런 날이 아마 내가 살아있는 동안엔 오지 않을 것 같아
우리 사랑은 슬픔 그 자체였습니다.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중 -
카 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댄스음악에 맞춰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혁수의 손가락이 경쾌하게 움직인다.
빨간 정지 신호가 꺼지고 신호등에 초록색 불이 들어오자, 혁수는 엑셀레이터를 밟으며 차를 전진시킨다..
빌라의 단지 입구로 진입하기 위해 핸들을 꺾는데, 갑자기 뒤에 따라오던 차가 거북살스러운 마찰음을 내며 혁수의 포카리 앞을 막아선다.
충돌을 예상한 혁수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급하게 브레이크를 누르고..
어리벙벙해진 얼굴을 들어 난폭한 끼어 들기의 주인공을 확인한다.
문을 열고 내리는 사내는 검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혁수는 노기가 묻어나는 동작으로 거칠게 차에서 내려 격양된 음성으로 사내에게 따진다.
"아니, 그렇게 갑자기 끼어 들면 어떡합니까? 하마터면 사고 날 뻔했잖아요!"
그러나 사내는 입술을 다문 채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혁수에게로 가까이 다가오기만 한다.
우람하고 훤칠한 사내의 몸집에 은근한 위축감을 느끼며 혁수는 그의 얼굴을 살펴본다.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자, 혁수의 입술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벌어지며 무언가를 인식한 듯 흠칫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그는 바로 얼마 전 공항에서 혁수를 부모님께로 데리고 갔던 그 남자였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 온 시커먼 불길함에 혁수의 동그란 눈망울이 휘청이기 시작한다.
"어머니께서 부르십니다. 같이 가시죠.."
"......무슨 일로 찾으시는 건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빨리 모셔오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다고 미행까지 붙이고 다니는 건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실없는 생각의 파편들 때문에 불균형한 냉소를 머금으며 혁수의 작은 얼굴이 침침한 어둠으로 사그라든다.
이제는 겁이 난 다기 보다 짜증스럽다.
제발 좀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알았어요. 차 좀 집어넣고 가죠.."
퉁명스레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 차에 올라 주차장을 향해 이동하며,
징그럽게 따라붙는 사내의 자동차가 백미러에 비치자 들릴 듯 말 듯 욕설을 내뱉는 혁수..
사실 욕을 먹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게걸스러운 응어리를 제어하기가 힘들다.
지하 주차장의 한 곳에 차를 세우고 나서 사내의 승용차로 옮겨 탄 혁수는,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옛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느새 생경하게 시야를 장악하는 2층 짜리 목조주택의 현관문을 바라보며 까닭 모를 답답함에 혁수는 벌써부터 긴 한숨을 내쉰다.
아직은 너무 이르다는 생각만 드는 것은 왜 일까....?
혁수의 어머니 정숙은 집안으로 들어서는 혁수에게 안부인사 대신 실망과 염려가 가득한 눈빛을 보낸다.
인하는 언제나처럼 동요 없는 표정으로 근엄하게 앉아서 대기 중이다.
혁수는 거추장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일렁임을 위장 아래로 삼키며 꽉 잠긴 듯한 음성으로 문안을 여쭌다.
"......저 왔어요...."
"....그래, 앉아라.."
역시나 중후하게 깔리는 안정된 인하의 목소리와 여유 있는 말투..
결코 혁수와 주혁을 이해할 수 없는 철두철미한 이성의 신봉자이자, 정제된 논리만을 지향하는 노련한 사회 과학자...
그에게는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은 그에게 힘을 가져다준다.
그를 이렇게 당당하고 안전하게 만들어 주는 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미행까지 붙이신 것 보니까 중요한 일 인가 본데..."
우회적으로 인하와 정숙의 의중을 찌르는 혁수의 말에, 정숙은 냉담한 혁수의 태도가 노엽다는 듯 얇은 입술을 약하게 진동하고..
인하는 그런 혁수가 못 마땅하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한층 권위적인 어투로 말한다.
"네 엄마하고 신중하게 얘기를 해 봤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무래도, 지금 혁수 네가 뭔 가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비단 주혁이 때문만이 아니라 네 자신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사고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것 같아..
그러지 않고서야 저번에 했던 그런 얘기들을 도저히 입밖에 낼 수는 없는 거고..."
표면적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혁수의 갈색 눈동자가 기묘하게 뒤틀리며 회전하고,
숙여졌던 고개가 번쩍 들리며 어이가 없다는 낯빛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쏘아본다.
그리고 들쑥날쑥 급속도로 펌프질하는 심장을 어르며 분노와 증오가 주렁주렁 매달린 음성을 퉁겨낸다.
"그러니까....내가 미쳤다는 거에요?! 내가 정신병 환자라구요??"
"그렇게 극단적인 용어는 쓰지 말거라.. 단지 네가 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런 식으로 둘러대지 마세요! 어려운 말 갖다 붙여 봤자 결국은 똑같은 소리 아닙니까?!"
"엄마 아버지 앞에서 이게 무슨 말버릇이니?? 함부로 얘기하지 마!"
느긋한 자세를 고수하는 인하와 달리 정숙은 쨍 하고 갈라지는 듯한 고음을 쏘아 올리며
혁수에게 가장 손쉽고 편리한 '인륜도덕' 의 개념과 '예의'를 들먹인다.
하지만 혁수는 더 이상 그 빌어먹을 기준 따위에 제약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대체 누가 정한 잣대이기에 이토록 되먹지 못하고 제멋대로 인가??
그 따위 규칙.....신경 쓰고 싶지 않다..
"어물쩡 넘어가려고 하지 마시고 똑똑히 들으세요. 저, 완벽하게 정상입니다.
판단능력도 사고능력도, 보통의 스물 한 살 남자와 똑같아요. 절대로! 미치지 않았다구요..."
"정상?? 같은 남자한테, 그것도 한 집에서 지내던 형제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정상이란 말이냐?!
자기 형하고 침대에서 껴안고 뒹구는 게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니?!?"
"그럼 도대체 그 '정상' 이라는 게 뭔 데요?? 어떤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거죠?!
네, 맞아요. 저 주혁이 사랑해요.. 저랑 똑같은 남자고 제 이복형제지만 그런 거 상관없이 장주혁을 사랑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처음 봤을 때부터...!!"
"그만해!!!!"
도저히 더는 들을 수 없다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신음에 가까운 비명을 토해내는 정숙...
정수리를 후벼파는 혁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뇌리에 알알이 박히면서 수용할 수 없는 배신감과 막막함으로 난치의 흔적을 남긴다.
정숙은 끝내 눈물을 내비치고 만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죄책감을 느끼기에는 혁수 또한 너무 지쳐버렸다.
아니, 이제 더 이상은 어머니를 위해 할애할 자책과 회오의 공간이 남아있지 않다.
혁수에게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주혁이랑 네가 어떻게 사는 지 알아 봤다.."
몸 속의 수분을 서서히 증발시키는 듯한 끔찍스러운 정적이 한동안 이어진 후,
비밀리에 준비해 둔 무기를 꺼내 보이듯 본론을 이야기하는 인하..
"이재준이랑 같이 지내고 있더구나.. 주혁이는 아예 그 놈 밑에서 일하고 있고...너도 일부분은 도와주고 있는 것 같던데..."
"......!!!!"
"규모가 크기는 해도 별 문제가 없는 조직이라서 그다지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걸리적거릴 줄이야 생각도 못 했지...."
잠시 잊고 있었다. 주혁의 아버지에게 부여된 타이틀과 그에 따른 권한을.
그가 어떤 일들을 나서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개시하려고 하는 지 혁수는 순차적으로 짐작해낸다.
주혁의 아버지는 서울 검찰청의 검사이고, 이재준과 장주혁은 지하 폭력조직의 일원이다.
뚜렷하게 양분되는 그들의 세계가, 어느 한 쪽은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가르쳐 준다..
"게다가 조사를 해 보니까 주혁이가 한 때 모르핀 중독이었더구나...
모르핀은 의약품이라 일반인이 취급했을 경우는 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거든...? 그 녀석이 아주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어..."
우리 나라 형사처벌 원칙에 있었던 것 같은데...'형벌 불소급의 원칙' 이라고...
교과서에 쓰여진 말들은 전부 번지르르한 거짓말인가...?
손등에 파란 힘줄이 후득 후득 돋아나올 정도로 주먹을 오그라뜨리며, 혁수는 발작적으로 솟구쳐 오르려하는 몸뚱어리를 가까스로 짓누른다.
앞에 앉은 인하의 얼굴이 점점 확대되더니 악랄한 협박의 문구를 줄줄이 뱉어내는 그의 포악한 입 모양만 거대하게 혁수의 시야를 잠식한다.
시계 태엽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주위의 사물들이 타원으로, 다시 정사각형으로, 형체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도형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휘몰아치는 혼돈 속에서 혁수는, 비굴해져야 한다..
"그래서....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세요..?"
이런 식으로밖에 그를 지킬 수 없음이 저주스럽다.
"뭐 특별한 게 아니라, 네가 나아질 때까지 치료를 받으면서 푹 쉴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
제길....또 헤어져 있어야 하는 건가...?
"아버지가 괜찮은 곳을 알아 놨다..
금촌에 요양소가 하나 있는데, 시설도 좋고 무엇보다 담당의사가 아버지랑 동창이라서 잘 돌봐줄 거다..
네 짐은 사람 시켜서 가져오고, 넌 지금 바로 아버지랑 같이 떠나도록 하자..
오늘 저녁까지는 도착한다고 전화해 놓았으니까 서둘러야 돼.."
"지금이요?!?"
"아버지 말씀대로 해라. 지체할 수록 안 좋아..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렴.."
앙칼지게 쐐기를 박는 정숙의 목소리가 예리한 창이 되어 혁수의 뱃가죽을 관통하는 듯,
혁수는 아래쪽에서부터 강렬하게 피어오르는 고통을 참느라 눈알이 벌겋게 충혈 되고 피부가 창백해진다.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떨어뜨리지는 말자.
내가 아닌, 그를 위해.....
독하게 자기 자신을 다그치며 울음을 무화 시키는 혁수를 내버려두고,
인하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외출준비를 하러 정숙과 안방으로 들어간다.
잠시동안 혼자가 되자, 북받치는 서러움을 견디지 못한 물기가 혁수의 눈꼬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고..
그것들을 낙하시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혁수는 미세하게 경련하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의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신호는 가지 않고,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가 얄궂게 혁수의 고막을 희롱한다.
기계적이면서도 친절하기 그지없는 수화기 저편의 녹음된 여자 때문에 혁수는 갈색 뺨 위로 강줄기를 만들고 만다.
메세지를 남기라는 안내멘트가 나오고 한참이 지난 후..
처참하게 일그러진 혁수의 보이스가 피복선을 타고 흐른다..
"........주혁아....... 보고 싶어......"
(88)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비극은 사랑이 없는 곳에만 존재한다.
- 데스카 -
"아까 그 말....무슨 뜻이었어...?"
내일 아침,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짐 정리를 끝마친 강태가 피로한 몸을 침대에 뉘이자,
베개를 허리에 받친 자세로 뉴스를 시청하고 있던 재준이 아까 전의 일을 들추어낸다.
"나 사랑하기 싫다고 한 거 말이야....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너 사랑하기 싫다고..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설핏 귀에 와 닿는 강태의 음성은 빈틈없는 무미건조함과 단단함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주의 깊게 들어보면 감지할 수 있다.
반어적으로 치장한 그의 절실함이 얼마나 무한하고 서글픈지...
건방지게 부려대는 투정조차 너그러이 용납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관용..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타협할 줄 모르는 자아가 성장하고 불어난다.
어쩌면 시들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식으로 안심시켰는데...
나 혼자만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운 거야.
이재준 너는 조금도 변함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내 이상형이 어떤 여자였는 줄 알아?"
뚱딴지같은 강태의 물음에 재준은 하루종일 자신을 괴롭히던 초조함과 무색함 속에서 갈팡질팡 한다.
머리 뒤쪽으로 팔을 올리며 편안한 모션을 취하는 강태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재준은 무언으로 그를 부추긴다.
"으음~ 일단 나는 눈이 예쁜 여자가 좋았어..
왜 그런 눈 있잖아, 무언가 호소하는 것처럼 슬퍼 보이면서도 굉장히 신비로운 눈동자.. 그런 눈을 가진 여자 말이야.
그리고~ 성격은 활달한 것보다는 좀 내성적이고 얌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여성스러우면서도 똑똑하게 자기 일 잘 하고 그런 여자...
무엇보다, 나를 존경해주고 또 나도 그 여자를 존경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어.."
처음에 얘기를 시작할 때에는 아슴푸레한 장난기가 배어있던 강태의 얼굴이
마지막에 가서는 진중하다 못해 인공적으로 느껴질 만큼 딱딱하게 굳는다.
마치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과 크게 어긋나는 현상을 목도한 정의로운 사상가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격분이 강태의 예쁜 눈동자를 와해시킨다.
그러나 재준은, 그가 누구에게 이토록 광포한 노여움을 발산하고 있는지 가려낼 수가 없다.
그 당사자가 혹시라도 자기 자신이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있는 너를 보니까 너무 기가 막혀서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야. 알아?
네 눈은 절대 슬퍼 보이지도 않고 ― 아니, 오히려 무섭게 번뜩이는 쪽에 가깝지.
얌전하다는 말은 갖다 붙이기조차 민망스러울 정도고 말이야.
게다가 네가 나를 존경해 주고 있냐 하면 어림 반 푼 어치도 안 되는 소리지.
처음부터 네가 내게 요구한 건 복종이었잖아? 그렇게 시작된 게 우리 관계였어.
그리고 모든 걸 제쳐두고라도, 넌.... 남/자/야.."
강태가 지니고 있는 무수한 매력 포인트 가운데에는 '도도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흠 없이 아름답고 완성된 형태를 하고서, 아무나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영묘함과 초월성을 내포한 강태..
그러나 지금 재준의 시야에 휘형찬란한 수를 놓는 강태의 몸가짐과 낯빛과 음색은,
일정 수준의 '도도함'을 뛰어넘어 파르스름한 노기와 제어하기 벅찬 번뇌로 굴절되어 있다.
재준은 강태가 자신을 조롱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하지만, 강태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또 노력을 과소평가 한다면 진정 섭섭하고 미운 마음이 들 거라고 내심 인정해 버린다.
"......난 내 자신이 한심해 죽겠어.. 정말 꼴도 보기 싫어..
거울을 쳐다보고 있으면, 화가 나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때도 있다구..!!
나는, 너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내가 너무 싫어!
너 같은 인간을, 이재준 이라는 남자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바보 같아서 미치겠어!!"
뒤로 갈수록 크레센도가 증가하는 강태의 음성에 재준의 검은 눈동자는 더 짙은 어둠으로 채색되고..
그가 듣고자 하는 말이 과연 무엇일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재준은 온통 그 생각뿐이다.
그러면서 입안에서만 맴도는, 부질없는 하소연을 목젖 너머로 삼킨다.
이 봐...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너를 위해서 아니, 우리를 위해서...
그것만 알아주면 안 돼...?
" 너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됐는 줄 알아? 설마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너랑 네 그 빌어먹을 충의회 때문에 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어.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누나를 위해서 네 섹스 파트너가 됐고, 솔직히 그 때부터 나는 남자로서 가져야 할 성 정체성을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지..
매일 같이 네 몸을 받으면서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날이 갈수록 생소하게 느껴졌으니까...
파티장에 갈 때마다 날 보는 그 시선들... 난 남자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여자였어.
뭐, 지금도 여전히 그럴지도 모르는 거고.. 그래,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어.
거기까지만 해도 되돌릴 수 있었어..
근데...근데 말이지... 내가 널 사랑하고 나니까...그래서 네 곁에 있는 게 행복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니까..
하나뿐인 누나는 날 짐승 취급하면서 의절을 선언했고 새로 사귀게 된 친구 하나가 죽더니
난 지금처럼 이리 저리 도망이나 다니는 신세가 되 버렸어.."
강태.... 원래 이렇게 잔인했나..?
....하, 맞아... 그랬어..
넌 아무리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어도 네가 할 말을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지...
그래서 내가 널 미치게 좋아하고 있는 거였지...
너... 그거 알아...?
나한테 대드는 사람...네가 처음이었어..
그리고....네가 나에게 처음인 게 또 하나 있어..
그건....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니, 말하지 않아야 할 것 같네..
.............적어도, 지금은....
재준은 하얀 얼굴에 그의 피부보다 조금 더 탁한, 희부연한 안개 빛깔의 웃음이 드리워진다.
"내가 또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지 말해줄까..?
나 있지, 오늘 아침에 네 전화 받을 때만 해도 희희낙낙해서는 너 기다리면서 몸단장하고 있었어.
더 이쁘게 보이고 싶어서, 너한테 더 사랑 받고 싶어서 온갖 난리를 부려댔지.
그런데 네가 와서 그러는 거야. 내일 홍콩으로 가야겠다구...
그 말을 들으니까, 아차! 하면서 한순간에 환상에서 깨어났어.
그리고 냉정한 현실로 돌아왔지.
나....진짜 병신 같았어.. 너무 병신같이 말이야...잊어버리고 있었다구..
우리가 처한 상황, 더 넓게 얘기하자면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
파라다이스 같은 네 별장에 갇혀서 몽땅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냥....널 만나는 것만 기다리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고민도 하지 않고 그렇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만 들어앉아 있었던 거야..
근데, 오늘 다시 세상으로 나와 보니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세상의 것들을 겪고 나니까...
내 자신이 한심해 죽겠어.. 어쩜 이렇게 바보 같았는지...
그리고 네가 미워. 세상과 나를 끊어놓은 네가...정말 미워...."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겠냐고, 어떻게 해야 너의 지독한 자기혐오를 차라리 내게로 라도 돌릴 수 있겠냐고...
재준은 강태에게 묻고 싶지만, 간청하면 탄원이라도 해 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지금의 강태가 너무 차갑고 오만하고 아주 약간은 야멸차게 느껴진다.
그래도, 그의 매정함까지 재준은 눈부시기만 하다..
자조성이 흥건한, 수척해 보이는 웃음 ― 아니, 웃음과 찡그림의 중간 정도라고 표현해야
가장 알맞을 듯한 표정을 깨물며 재준은 연이어 들려오는 강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오늘밤에는... 너한테 안기지 않을래... 내 모습이 너무 천박해서 창피해.."
냉회와도 같은 단검을 기호학적 관습에 의거한 '언어'의 형상으로 탈바꿈 시켜
재준은 심장 가운데에 또 한번 찔러 넣고, 강태는 침대시트를 덮어쓴 채 재준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눕는다.
그리고 도저히 수면의 혜택을 누릴 자신이 없는 재준이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빠져
나와 당장이라도 지하 깊은 곳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영혼을 지탱하기 위한 방법으로 술을 택했을 때,
2층의 홈 바로 향하려는 재준에게 실낱같이 아스라한 진동을 울리며 벽 쪽으로 돌아누운 강태가 작게 속삭인다.
"너....나 버리면.....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 홈 바로 걸어가던 재준의 발걸음이 주혁과 혁수의 방문 앞에서 멈칫하고, 몸을 회전시켜 회갈색 목재 문을 노크한다.
그러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고 재준은 마른기침을 두 어번 뱉으며 살짝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열려지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깔끔하게 정돈된 연보라색 시트의 침대와 벽에 달린 커다란 창문뿐이다.
생각보다 귀가가 늦어지는 주혁과 혁수에게 의아함을 가지면서
두 사람이 밖에서 만나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이라도 보내려나보다 편하게 생각해 버리는 재준..
홈 바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며 즐겨 마시는 위스키 병의 마개를 따고,
얼음이 채워진 글라스에 암갈색 액체를 따른 다음 요새 들어 부쩍 잦아진 한숨소리를 흘리며 핸드폰을 꺼내든다.
삐리릭 하는 신호음이 울린 후, 상대편에서 응답해 오자 재준은 편평하고 음울한 그 특유의 음색으로 입술을 뗀다.
"나 이재준이다."
"아, 회장님! 저 준태입니다.."
"그래, 얘기한 대로 준비해 놨어? 내일 아침 7시 30분 비행기다."
"예, 알고 있습니다. 명령하신 대로 전부 갖추어 놓았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곰(경찰)들이 냄새 못 맡도록 철저하게 보안 유지해. 절대로 비밀리에 보내는 거야.
강태가 홍콩에 가는 건, 너와 나 밖에 모르는 사실이다. 알겠나?"
"물론입니다, 회장님. 밑에 애들한테도 입 조심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강태 불편해 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라.
예민한 아이니까 거기서 지내는 동안 네가 많이 신경 써야 될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통화하고, 일정은 전과 같이 진행해라. 끊는다."
"예, 들어가십시오."
경계선을 분명하게 단락 짓는 재준의 강건한 목소리라 뚜우- 하는 전자음으로 바뀌기까지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놓는 준태..
홍콩 쪽과의 협상을 통해 교환한 사업채와 지분들을 관리하고 있는, 충의회의 유력한 중간 보스 중 하나이다.
해외의 자금줄을 모두 맡아서 꾸려나가고 있는 만큼 충의회 내에서의 영향력도 누구 못지 않은 사내이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몸을 사리지 않는 스타일의 호걸형인데다가 두뇌 또한 제법 영리한 지라 재준도 은근슬쩍 눈여겨보고 있던 차였다.
재준과의 통화를 끝낸 준태가 바지 뒷 주머니에서 또 다른 핸드폰을 꺼낸다.
그리고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며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발신음이 끊기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오자,
준태는 한층 아래쪽으로 쏠린 보이스 컬러를 조심스럽게 근처의 허공으로 퍼뜨린다.
"예, 회장님.. 저 최준탭니다. 방금 이재준과 통화했습니다...."
준태의 입술이 지칭하는 '회장님' 이란, 민성회의 우두머리 박형욱 이었다.
(89)
"회장님께서는 도렴님을 데리러 가셨습니다. 곧장 귀가하신다고 하셨으니까
이따 밤에 제가 회장님과 의논해 보고 다시 연락 드리죠."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무릎 위에 서류 몇 가지를 올려놓고 훑어보면서, 주혁은 충의회의 고문 변호사와 통화 중이다.
공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철저하게 '회장님', '도련님' 이라는 존칭을 사용하는 주혁..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 시각을 확인하며 말을 잇는다.
"도련님께서는 내일 새벽에 출발하실 겁니다. 아침 7시 30분 비행기라서요..
회장님께서 직접 배웅하실 것 같은데요.. 저도 물론 동행합니다.
............아, 그러시겠어요? 좋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공항에서 뵙도록 하죠."
군더더기 없는 시원하고 깨끗한 말투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핸드폰을 접는 주혁..
동시에 삐릭-하는 신호음이 울리며 음성 메세지의 도착을 표시하는 빨간 불빛이 깜박거린다.
주혁은 대수롭지 않은 손길로 다시 핸드폰을 열어 버튼을 누른다.
잠시 대기하자, 녹음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주혁의 고막에 부딪치는 수화기 건너편의 돌연한 침묵에 주혁은 순간적으로 체모가 융기하는 듯한 쭈뼛함에 세미한 진저리를 친다.
[ ............주혁아....... 보고 싶어............ ]
앙 다물고 있던 주혁의 입술이 무력하게 벌어지며 검푸른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부릅뜨인다.
그다지 주혁과 어울리는 모양새는 아니다.
당황하는 제스츄어와 얼굴색은 그와 전혀 매치되지 않는 장식품이다.
그러나 수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혁수의 음성 속에 역력히 배어나는 흐느낌과 떨림이 주혁의 조화롭지 못한 표정을 강화시킨다.
헉 하고 짧은 숨을 들이키며 허둥지둥 혁수에게 전화를 거는 주혁..
운전석에 앉아 있던 부하가 그런 그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질문을 던진다.
"이사님, 왜 그러십니까?"
"아냐, 됐어. 신경 쓰지 말고 운전해.."
간단하게 일축해 버리고 초조한 기색으로 안절부절 못 하며 발신음 소리만 듣고 있는 주혁..
'.....제발......혁수야....!...'
뒤통수가 알싸하게 당길 정도로 박동횟수를 급증시키는 심장 때문에 고르지 못한 호흡을 잔잔하게 재우려고 애쓰며
주혁은 혁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튀어나와 주길 간구한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촌각이 지나고, 마침내 짜증스런 발신음이 중단되며 그의 목소리가 닿는다.
".....네....."
"혁수야?! 너 지금 어디 있어??!? 응??"
".....혁아....."
"그래, 나야!! 무슨 일이야, 대체?! 너 괜찮아?!?"
"혁아, 지금 시간 없으니까 내 얘기 잘 들어야 돼. 묻지 말고 일단 들어줘.."
"알았어, 얘기해 봐.."
주혁은 일차적으로 혁수가 자신과 통화를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에도 부분적으로나마 안도감을 맛보며
혁수의 지시대로, 속사포처럼 글자를 뱉어내려는 입술을 끈끈하게 봉한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혁수의 음성에는 조급함이나 절박함 따위는 별반 엿보이지 않는다.
"나...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할게..
하여간 미안하고, 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지..?"
"그게 무슨 소리야, 집에 못 들어온다니?! 너 지금 어디 있냐니까~?!?"
"...............정말 미안해, 혁아...... 끊을게...."
"혁수야, 끊지 마! 야, 안혁수!!!"
주혁의 뇌성 같은 고함소리에 화답하는 것은,
소름끼치게 인공적이고 전자화 된 기계음이 마치 유한한 인간의 제약성을 조롱하 듯 시끄럽게 빽빽대는 소리뿐이다.
의문과 놀라움에 젖어 부푼 주혁의 검푸른 심연이 색깔을 바꾸어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얼룩진 그의 눈동자에는 정형화 된 사물들이 똑바로 잡히지 않는다.
무릎 위에 펼쳐놓았던 서류들이 자동차 좌석 밑바닥으로 깔려 들어가는 것에 전연 아랑 곳 없이,
주혁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휩쓸려 꺾어질 것만 같은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우며 핸들을 잡은 부하에게 명령한다.
"지금 당장 일산으로 차 돌려!"
"예? 일산이요..??"
"그래, 빨리 돌려!! 그리고 밟을 수 있는데까지 밟아, 급해!!!"
"알겠습니다, 이사님.."
영문을 알 수 없는 부하는 난데 없이 일산으로 향하라는 주혁의 요구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러면서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은채 차를 U턴 시켜서 방향을 전환한다.
주혁은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차체 때문에, 가뜩이나 원활한 기능을 정지해버린 속내가
무작위로 뒤틀림을 느끼며 치미는 구토증을 쓴 물과 함께 목구멍 너머로 삼켜낸다.
퇴근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도로를 그득하게 메운 차량의 행렬을 보고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동시에,
한편으로 주혁은 겸허하게.. 그리고 가장 신실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며 기도의 문구를 중얼거린다..
'자신의 연인이 믿기 때문에' 그 또한 신뢰하고 섬기는 하나님을 올려다 보며..
연인의 안전과, 둘의 사랑이 지켜지기를 간원하는 주혁..
그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 "어서 나와라. 서둘러도 약속한 시간에는 못 도착할 것 같으니까..."
인하의 다그침에, 윙윙거리며 귓가를 맴도는 주혁의 포효를 저만치 떼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혁수..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와의 단란한 저녁시간을 그려보며 살금살금 미소를 걸어나가던 참이었는데...
참담하게 그어진 눈물자국을 손등으로 쓱 문질러 지워내고, 혁수는 절제된 숨소리를 꾸며낸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 끝까지 가 보겠다는 혁수의 의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비록 이렇게 그의 곁을 떠나 있는 것이 최선이지만..
마지막에 승전보를 쥐게 될 사람은 누구일지, 오직 '신'만이 아시므로...
그래, 버틸 수 있는데까지는 굽히지 말자.
다짐하고 격려하면서도 걸음을 옮기는 다리에 마비증세가 온 것처럼
감각을 느낄 수가 없는 혁수는 역시 스물 한 살 남자고, 장주혁에게 속한 '유일한' 남자다..
인하와 혁수가 차에 올라 타자 배웅을 나온 정숙이 인하에게 잘 다녀오라는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혁수에게로 눈을 돌린다.
고개를 숙인 채 와인빛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시선을 차단하는 혁수..
지금 정숙의 얼굴을 마주하면, 아들 된 도리로서 가져서는 안 될 증오와 살의가 피부 조직을 곤두서게 할 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뺨을 타고 굴러내리는 눈물까지도 간교하게만 보일 것이다..
"당신은 이만 들어가요.. 정박사랑 얘기 끝나는 대로 바로 올 테니까 염려 말고..."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그럼.."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걸지 않는 정숙이 오히려 고마운 혁수..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는, 간신히 붙잡고 있는 통곡의 자락을 놓쳐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꽉 깨문 어금니 사이로 벌써 눅눅한 물기가 배어나오려 한다.
혁수는 반사적으로 눈동자를 경직시키며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와 큰 도로로 접어드는 자동차의 규칙적인 흔들림에 몸을 내맡긴다.
차창 밖의 풍경이 오밀조밀한 건물만 즐비한 도시에서 이제 막 겉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나무들로 화려한 장관을 이루는 외곽지역으로 변화하고..
'요양소'라는 간판과 알맞게, 샛노란 은행나무 가로수가 평화롭고 다사로운 배경을 연출하는 포장도로를 지나가며 혁수는 쓴 웃음을 짓는다.
정신병자가 처박혀 있는 곳 치고는 너무 예쁘잖아...?
하긴....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데가 아니면 날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이 안락하고 호화로운 감옥에 날 가둬두고 서서히 죽이겠다는 거지...?
'내 안에' 살아있는 그를....없애버리겠다는 거겠지....
잘 한 일일까...?
혁수는 또 한 번 되물어 본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떠나오는 게 더 나았을까...?
공연한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닌지...
어차피 울부짖고 가슴을 찢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잠시동안 유예의 시간을 두는 게 더 좋았던 걸까...?
아냐, 그 유예의 시간이 휴식 아닌 고통으로 채워진다면 이로울 게 없지...
주혁아, 우리 얼른 끝내버리자..
조금 벅차고 힘에 부칠지는 몰라도, 빨리 이 끔찍한 시험관문을 통과하자..
우리에게는.....시간이 부족해... 너도 알지...?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육신의 청각이 막혀 있다면 영혼의 귀를 깨워서라도
주혁은 내 얘기를 듣고 있을 거라고 혁수는 스스로에게 암시를 해 준다.
아이보리색 페인트가 칠해 진 5층짜리 요양소 건물 앞에 멈춰 선 자동차에서 내려
인하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서며 혁수는 다시 한 번 쓰게, 냉랭하게 조소한다.
주혁과 공유한 자신의 숭고하고 순수한 감정과 기억들이 정신병자의 히스테리적 증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에 대해
모멸감을 뛰어넘은 절망을 실감하며 입꼬리를 말아올리는 혁수..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임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걸고...
..........출발한다, 본격적인 전쟁터로, 연청색 '그'를 위해.
- "언제부터 혁수가 정신과에 드나 들었는지, 자네 알고 있나?"
"글쎄.... 우리 집사람 말로는 올해 초부터라고 하던데..."
"아닐세. 작년 봄부터 꾸준히 다녔더군. 그러다가 이번 여름에 한국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발길을 끊었어.
주혁이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다음 부터지..."
"그럼 자네 말은, 작년부터 둘이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건가?"
"바로 그걸세. 혁수가 그만큼 심각한 상태라는 거야.. 여러가지 증상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나고 있어..
어쩌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르네.."
"그건 괘념치 말고 부디 잘 좀 돌봐 주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집사람한테 자식이라고는 혁수 하나뿐이지 않나...
이대로 망가지게 내버려 둘 수 는 없지..날 봐서라도 신경 좀 써주게나.. 시간은 얼마나 걸려도 좋아..
혁수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90)
"지금 같이 라면 두렵지 않아."
"저도 당신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요."
- <실락원> 중 -
바의 테이블에 앉아 유리잔에 술을 따르는 재준 앞에는 이미 수북히 쌓인 담배꽁초를 담은 재떨이와 두 개의 비어버린 위스키 병이 놓여있다.
새로 뚜껑을 딴 병 역시 반쯤은 투명한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채 재준의 손에 의해 조금씩 그 양을 줄여가고 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되돌려 곱씹어봐도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첨가되어 재준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강태의 이야기...
따가운 독설이라고 하기엔 그 밑바닥에 흐르는 강태의 힘겨움과 슬픔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재준은 더 막중한 번민 때문에 저절로 찌푸려지는 눈살을 어쩌지 못한다.
매캐한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느라 야윈 그의 뺨에 움푹한 골이 패이고
이어서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희끄무레한 기체성분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재준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정돈해 준다.
꽁초로 변한 필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잠시를 못 견디겠다는 듯
다시 한 개피를 뽑아 무는 재준에게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 그리고 좀 더 고요해진 강태의 음성이 들려온다.
"핸드폰 왔어.. 태현 형이야.."
기척도 없이 나타난 강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입술이 만들어 낸 '태현' 이라는 이름을 듣자
눈동자를 크게 뜨며 낚아채 듯 강태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드는 재준..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자마자 쌀쌀맞게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리는
강태의 매정한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재준은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를 낸다.
"태현 형이야??"
"그래, 새끼야.. 나다!"
"몸은 좀 어때? 목소리 들으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내일 모레 퇴원이야..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 죽겠어~ 진짜 지겹다니까..."
"그래도 다 나을 때까지 치료를 잘 받아야 나중에 후유증이 없지~ 그래서, 지금 병실 안이야?"
"응, 잠도 잘 안 오고... 오랜만에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해 봤다..잘 지내냐~? 바쁘다며??"
"뭐...그럭저럭... 되는 데까지 최대한 뛰어다니고 있는데...모르겠어..."
"이재준, 생각보다 많이 힘든가 보네~? 목소리가 축 처지는 게... 너 답지 않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됐어, 임마~ 네가 언제 너 죽는단 소리 한 번이라도 한 적 있냐? 하여간 정을 주고 싶어도 안 된다니까, 너는-?!
쳇... 나중에 서울 올라가서 날 잡고 얘기 좀 하자. 나 너한테 쌓인 거 엄청 많으니까. 알았지??"
"쿡... 그래, 알았어.. 몸조리 잘 해라.."
"응, 너도 잘 지내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 그리고, 강태 잘 챙기고..."
태현의 마지막 당부에 재준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실소를 깨문다.
강태를 잊지 않는 태현의 마음 씀씀이가 우스워서가 아니라,
단지 태현으로부터 그런 충고를 받기에는 너무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자기 자신이 하도 같잖아서...
그래서 터져 나오는 허허로운 웃음일 따름이다.
".......어어.....그럼 끊을게... 나중에 또 연락하자.. 그래, 잘 자..."
어영부영 인사를 끝내고 플립을 닫아 테이블 한 쪽에 아무렇게나 핸드폰을 놓아두는 재준..
세라의 죽음을 중심으로 연결된 태현과 자신 사이의 엉켜버린 실타래가
태현의 전화 한 통으로 인해 말끔히 해소되는 것을 고마워하며 재준은 길다란 날숨을 돌린다.
사실 내심으로는 많이 걱정하고 있던 중이었다.
태현의 돌이킬 수 없는 변화와 그에 수반되는 결과로,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던 '우정'이라는 3년 두께의 관계가 파국의 형상을 보일까 봐..
암갈색 커다란 눈동자에 대글거리며 서려있던 장난기가 조금도 바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자신에게 천진스런 함박웃음을 지어줄 수 있는 태현이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한 가지 짐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자,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재준은 고민과 잡념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홈 바에서 나와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끄고 침실로 향한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오면서 이번에는 맨 처음의 갈등지점으로 회귀하는 재준..
그의 정신적 표류의 끝자락에는 늘 그렇듯이 강태가 존재한다.
지금 재준의 발걸음이 내딛고 있는 친숙한 공간에서 잠, 혹은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을 바로 그 남자가 말이다.
아주 작은 틈새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갑갑한 현실의 상황들에게 소용없는 넋두리를 중얼거리는 재준..
....제발 나 좀 쉬게 해 줘....
이젠 정말.... 지쳤어....
터덜터덜 다리를 움직여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고 불분명한 윤곽만을 드리운 채
잠이 든 강태가 시야에 들어오고, 재준은 침실 안 쪽에 딸린 욕실로 직행하여 간단한 세안을 마친다.
침대로 돌아와서 피로에 찌든 몸을 눕히는 재준..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숙면을 취하고 싶은 심정이다.
지저분하게 뒤섞인 머릿속을 백지화시키며 눈을 감는데, 재준은 예민한 청각이 어렴풋한 진동과 가냘픈 숨소리를 감지한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은 강태에게서 발생되는 음향효과다.
".......어?.....너 아직 안 잤어...? 잠든 줄 알았더니..."
그러나 대답 대신 재준의 귓가에 흘러드는 것은 기묘하게 손상된 강태의 울음소리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스라하지만, 특수한 생활환경 탓에 자연적으로 청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재준에게는 또렷하게 잡혀온다.
또한 강태를 향해 뻗어있는 재준의 모든 신경세포들이 그를 무뎌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다만 재준은,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 뿐이다..
"야, 너 울어? 강태야...!"
상체를 벌떡 일으켜 둥그스름한 실루엣을 내비치는 강태의 어깨를 몇 번 흔들다가 팔을 돌려 형광등 스위치를 켜려고 재준이 벽을 더듬자,
섬뜩한 정적이 어린 단호한 음성으로 강태가 짧게 한 마디를 던진다.
"..........불 켜지 마....."
스위치를 누르려던 재준의 손가락이 멈칫 하고, 강태는 말을 계속한다.
"눈 팅팅 부어서 얼굴 진짜 이상할 거야.. 그러니까 불 켜지 마.. 쪽팔려..."
"........너 왜 그래.... 왜 울었어...?.."
"왜 울었냐니? 아까 얘기했잖아.. 그렇게 길게 얘기했는데, 넌 뭘 들은 거야..?"
"그러니까 묻는 거 아냐... 할 말 다 해 놓고 네가 왜 우냐고...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이런 식으로 그를 몰아세우려던 건 절대 아니었다.
아무래도 강태에게 느낀 섭섭함과 야속함이 도를 지나친 듯 하다.
자기 자신이 조잡하고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딱딱한 어투를 고수하는 재준..
여느 때처럼 신랄한 공격으로 맞설 강태를 예상하며, 사소한 상처에 아파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재준의 예상을 뒤엎으며 적막을 가르는 강태의 목소리는 위태롭다.
그리고 간절하다.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재준아... 분명히 내가 너한테 상처주는 말을 했는데...
근데 왜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 지 모르겠어.... 그래서 울었어.....재준아.....흐윽...."
재준의 팔이 강태에게로 뻗어 가 그의 어깨를 잡고 자신과 마주보게 한다.
강태는 짭짤한 눈물줄기로 재준의 옷을 적시며 그에게로 안겨든다.
방금 전의 단언 같은 건 기억나지도 않는가 보다.
"내가 한 말...다 잊어버려, 재준아.. 그냥 홧김에 지껄인 거라고 생각하고 다 잊어...
나,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너 만나고 네 옆에 있게 된 거...진짜 한 번도...."
"......됐어.... 얘기 안 해도 돼... 나 아무렇지도 않아.."
물론 거짓말이다.
강태의 혹독한 일장 연설을 경청하며 골치가 지끈거리고 숨통이 턱 막히는 느낌에 어지러웠고,
그래서 강태가 입을 다물자마자 바로 올라가 술을 퍼 마시고 줄담배를 피워댄 재준이었다.
그렇지만, 서로의 자잘한 생채기들을 치유하는 데에는 가끔씩 '거짓말' 이라는 필요악도 적절한 기능을 발휘하는 법이다.
"......재준아.....그냥.....나.....안아주면 안 돼...?.."
바보천치 같은 녀석.
얼마나 널 갖고 싶어하는 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
널 송두리째 내 것으로, 정말 완전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을 거다.
".....무서워서 그래....무서워서.....재준아....무서워...."
어깨죽지에 묻힌 강태의 얼굴을 떼어내고 재준의 입술이 강태의 입술을 결박한다.
성급하게 강태의 입안으로 돌진하는 재준의 혀가 지극한 쾌감으로 강태의 두려움을 삭힐 듯이 격하게 움직이고,
강태는 그의 등에 둘러 감았던 팔을 풀어 재준의 셔츠 단추를 빠르게 끌러낸다.
죄를 짓고 있다는, 세상이 그어둔 선을 넘어서 어딘지도 모를 종착점으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에 슬핏 몸서리를 쳐보기도 하지만,
암흑 속에서 환하게, 새하얗게 펼쳐지는 재준의 나신이 그런 상념들을 모조리 앗아가 버린다.
집중하자....
내 앞의 그에게만....집중하자..
자기최면을 걸며 자신의 바지를 벗겨내는 재준의 손길에 모든 감각을 맡겨두고,
다시 가까워지는 재준의 입술을 깊게 받아들이며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이슬방울을 되 삼키는 강태..
손끝에 남아 감도는 강태의 살결 감촉이 도사리고 있던 재준의 욕망을 일깨우고 잠재해있던 감정의 폭풍우를 불러일으킨다.
거칠어지는 재준의 움직임에 강태의 목구멍에서 의미를 구분하기 힘든 신음성이 아슬아슬하게 솟아나고..
그 신음성 때문에 재준의 애무와 입맞춤은 더 광폭해 진다.
- 너도 두려운 거야...? .....아니지...?..
- 그래.. 나도 두려워... 감추고 있을 뿐, 나도 두렵고 겁이 나..
- 그렇구나... 너도 나와 똑같구나....
맞닿은 입술 사이로, 밀착된 육체를 통해 나누는 무언의 신체적 대화가 결정적으로 강태와 재준을 하나의 고리 안에 묶어주고..
그와 동시에 재준의 부푼 몸이 강태 안으로 들어서면서 물리적으로도 둘은 합쳐진다.
그렇게 세상의 기준을 쳐부수고 합일의 상태를 이루어내는 강태와 재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 까마득히 멀리서 비쳐드는 불빛밖에 가진 것이 없는 어둠이다..
(91)
이제 나는 알았습니다.
내가 싸워야 할 상대는 그가 아니라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임을..
내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그대의 현실,
그것과 나는 이제 한판 싸움을 벌일 것입니다.
누가 나가떨어지든간에 한판 거창하게 붙어 볼 것입니다.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중 -
주혁의 말과 손가락이 가리키는대로 휘몰아치듯 핸들을 돌리던 부하가
2층짜리 목조주택 앞에 은색 자동차를 세우고, 뒷좌석의 문이 제껴지면서 주혁이 튀어나온다.
거의 5개월만에 다시 찾은 집이지만, 그리고 혁수와 처음 만난 애틋한 추억이 서린 장소이지만,
또 혁수를 잃고 나서 가장 극심한 고통이 어떤 것인지 절절하게 체험한 곳이기도 하건만...
대문 앞에 서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볼 겨를도 없이 주혁의 돌출된 검은 눈동자는 다급한 달음박질을 재촉한다.
난폭한 손길로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대문을 열어제치고 자그마한 정원을 건너뛰어 현관문을 쾅쾅 두들기는 주혁..
혁수의 자동차가 집 앞에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다음부터 그의 불안은 수 십배로 팽창하는 중이다.
문 안쪽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앞치마를 두른 가정부가 모습을 나타낸다.
주혁과 눈을 마주치자 '어머!'하는 짤막한 부르짖음과 함께 뒷걸음질을 치더니 곧이어 혁수의 어머니를 불러댄다.
혁수를 요양소로 보내고 나서 한 시름 놓인 심정으로 오랜만에 편안한 휴식을 즐기던 정숙은 호들갑을 떨며
'사모님'을 외치는 가정부의 목소리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거실로 나온다.
그러다가 새까만 머리카락 밑으로 사나운 눈빛을 번뜩이며 우뚝 서 있는 주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의 등장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너,너는...."
"혁수 여기 있습니까?"
안부인사 따위는 일절 생략하고, 문제의 중심으로 돌입하는 주혁의 기세에 정숙은 멈칫하지만,
그녀 내부에 들끓고 있는 적의와 반목의 감정이 그녀로 하여금 평정을 유지하게 해준다.
"혁수는 여기 없다.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 주렴.."
"그럼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께서는 아시겠죠??"
"어머니..? .....허! 기가 막히는구나!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뭐라고 생각하시든 상관 없습니다. 혁수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 알려주십시오."
"그럴 순 없다.."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처럼, 주혁의 간절함과 안타까움을 싹둑 절단하는 정숙의 한 마디가 집안의 공기를 오싹하게 냉각시키고..
주혁은 어금니를 깨물며 욱 하고 솟구치는 덩어리를 짓누른다.
"난 너에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너의 친엄마가 네게 해 주지 못한 것들을 채워주려고 내 나름대로는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몰라..
혁수와 너를 똑같이 대해 주려고 애썼고, 행여라도 네가 섭섭해 하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었다..
날 선선히 받아들여준 너에게 정말 엄마 노릇 잘 하면서 보답하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먼저 배신한 건 바로 너야! 네가 어떤 식으로 혁수를 망가 뜨렸는지 한 번 생각해 보라구!!"
고르게 분배되던 그녀의 호흡이 한 쪽으로 치우치면서 이제서야 여태까지 그녀를 괴롭힌 갖가지 노여움과 실망의 쓰라림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위태위태하게 막아내고 있던 이성의 사슬이 툭 하고 끊어져 나가며 아들에 대한 '모성애'라는
지극히 인륜적이고 도덕적인 본성을 앞세운 정숙의 격노가 거추장스러운 겉껍질을 벗어던진다.
"우리 혁수...지금까지 단 한번도 엄마 말을 거역해 본 적이 없는 애였어!
얼마나 순종적이고 착한 아인데...네 녀석이 우리 혁수를...혁수를 망쳐놨어!
도대체 무슨 원수가 져서 가만히 있는 애를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았냐구?!?
네가 뭔데 우리 혁수 인생에 끼여들어서 전부 엉망으로 헤집어 놓냐 이 말이야!!"
그런 게 아니라고,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당당하게 자신있게 큰 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러나 주혁은 가슴 깊숙이 고개를 떨구고 만다.
눈물을 보이는 것조차 역겹게 느껴진다.
왜 이리 초라해 질 수밖에 없는가...
장주혁, 그는 너의 남자라고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그녀 앞에서 입을 열지 못하는 거야...
왜 이렇게 숨고만 싶어지는 거냐구... 제기랄....
그녀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일면적 타당성이 너무 강렬하게 심장의 정중앙을 꿰뚫어서...?
차라리 주저 앉아 울 수라도 있으면 나을텐데...
경련하며 힘이 빠지는 두 다리를 감출 수는 있을텐데...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나도, 너희 아버지도 그때 이후로 너를 자식으로 생각한 적 없으니까 앞으로는 여기 발도 들여놓을 생각하지 마라!
맘 같아서는 진짜 네 놈을 어떻게 해 버리고 싶지만, 젊은 네 앞날이 불쌍해서 참는 거니까 이 쯤에서 제발 우리 서로 끝내자.
지금부터라도 네가 혁수와의 만남을 끊어준다면 지난 날은 없었던 걸로 해 주마..
그리고 넌 네가 속한 그 곳에서, 우리는 우리 대로 살아가자.. 알겠니?"
내가 혁수를 망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 것 같다..
나로 인해, 나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혁수가 무너져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결국....파멸을 향해 점점 가속도를 늘리며 질주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는 내 입술이 추하고 더럽다.
"......그럴 순 없습니다.."
- 네모난 책상과 네모난 싱글침대, 네모난 옷장과 창문, 벽에 걸린 풍경화 한 점, 작은 욕실 하나...
병실 안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크림색 벽지가 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리창을 뚫고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실내를 환하게 비추며 딱 적당한 일조량을 공급해 주고, 연청색 침대 시트는 서늘하고 찹찹하게 피부에 감겨온다.
정말 좋은 방이다.
아늑하고 쾌적하고 뛰어난 시설설비를 자랑하는 병실이다.
그 때문일까?
이같은 특별대우가 너무 감격스러워서일까...
혁수는 병실까지 안내해 준 간호원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마자,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연청색 시트를 움켜쥐고 한 바탕 구성진 울음을 토해낸다.
빌어먹을, 시트가 하필이면 또 '연청색' 일게 뭐람....
발기발기 찢어버렸다가는 증세가 더 심각해졌다는 진단 밖에 돌아올 것이 없음을 알기에,
그저 짜증나도록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연청색을 붙들고 오열하기만 하는 혁수..
혼자 남겨져서야 마음 편히 눈물을 뽑아낼 수 있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서러운 일이다..
그나마 그 서러운 시간조차도 찰나에 지나가버리고, 다시 혁수의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혁수는 얼굴에 흥건한 물기를 재빨리 제거하고, 절제된 동작으로 문을 연다.
하얀 가운을 입고 안경을 낀 보통 체구의 중년 남자가 틀에 박힌 미소를 지으며 혁수에게 악수를 청한다.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이 사람이 아버지가 얘기한 그 동창이라는 것을 직감하는 혁수..
"자, 어때? 방은 마음에 드니? 특별히 신경 쓴 건데..."
"아주 좋네요.. 감사합니다.."
"좋다니 다행이구나... 앞으로 생활하면서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처음에는 생소하고 힘들겠지만 차차 적응하게 될 거야.. 너무 부담갖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렴.."
"..........예..."
"그래, 조금 있다가 상담을 할 거거든? 그 전에 주의사항 몇 가지만 알려주고 싶어서.."
"예, 말씀하세요."
"먼저 제일 중요한 건, 외부와의 연락은 절대 금지라는 거야.
그 부분에 있어서는 철저한 통제가 있을 테니까 잘 좀 협조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면회는 30분 이상은 허용이 안 된다.
부모님이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야.
또, 요양소 측에서 판단했을 때,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면 면회를 신청해도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안혁수가 만나서는 안 될 사람... 한 남자 밖에 더 있을까...?
그가 남자이기 때문에, 생일이 한 달 차이나는 안혁수의 이복형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안혁수를 원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눈가를 메운 물방울들이 점점이 묻어날까봐 조심스러워하며 혁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상담이 끝나고 나서 일과표를 받게 될 거야.. 거기에 짜여진 스케쥴 대로만 따라준다면 별 문제는 없을 거다.
부모님께서 많이 상심해 하고 계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예전처럼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꾸나.."
'예전처럼' 살라고...?
그럴 수 있을까요...?
안혁수가 정말,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요...?
'예전처럼'....다시 그를 외면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이 뻔뻔스럽도록 확실하고 명백해서 혁수는 가슴이 아프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희미하다고 해도 버텨볼텐데 그것조차
여의치 않은 자신의 지향성이 ― 도착점은 언제나 하나로 집결된다 ― 시리게 무겁다.
"그럼 좀 쉬어라.. 잠시 후에 다른 선생님이 오셔서 상담을 해 주실 거야..이따가 또 들리마, 혁수야.."
".........예..."
나약하게 수그러지는 혁수의 목뼈가, 곧게 펴지며 들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정지한다.
연청색 침대시트를 쓰다듬으며 손끝에 닿는 감촉을 통해 그의 하얀 살결과 진저리 처지도록 생생한 매끄러움을 떠올린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이 상태에서 그의 이름까지 불러보면 제어할 수 없게 될 것 같은데....
그가 듣고 있지 않다는 아니, 그가 들을 수 없다는 차가운 현실 때문에 또 한번 고꾸라지고 싶을 것 같은데...
안혁수, 참자.
항상 변치않는 생각처럼, 모든 게....너의 선택이잖아..
책임을 지고 있는 것 뿐이다.
어차피 감당하리라 결심했던 나의 몫이 아닌가?
슬퍼할 것 없다.
특별한 선택을 한만큼 대가를 치루는 건 당연하지.
억울해 할 것도 절대 아니다.
".............주혁아......"
혁수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가느다란 음파의 진동이 끝내 혁수를 왜소하게 추락시킨다.
나만 눈 감으면 되는 거지..
나 하나만 귀를 막고 꼭두각시가 되면 모든 게 안정될 거야.. 그렇지?
모른 척 하고, 바라보지 않고, 멀찍이 물러서면 다시 '예전처럼' 생활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그게 안 돼... 불가능 해...
.....주혁아, 넌 이해할 수 있지..?
손톱만치도 타협해 주지 않는 현실 앞에서 차마 두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고 혁수는 자신의 내부로만 시선을 떨어뜨린다.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단 하나의 존재에게 도움을 청해 보지만, 그의 형상 또한 연약해서 금새 바스라진다.
역시....눈에 비치는 모든 가시적 현상들은 허구다.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그리고 강할수록 이 명제는 더욱 진실하게 성립한다.
(92)
홍콩으로 출국한 강태를 배웅하고 난 뒤, 아침부터 줄곧 업무에만 파묻혀 있는 재준..
무언가에 홀린 사람마냥 잠시도 쉬지 않고, 여기 저기 구석구석 빠트리지 않고
체크하는 재준 때문에 애꿎은 수하의 조직원들만 정신없이 일에 매달려야 했다.
다른 조직의 보스들 같지 않게 워낙 사업 전반을 두루두루 직접 나서서 관리하는 그이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휘몰아치 듯 자신을 닦아세우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바로 옆에서 그를 수행하는 준상 역시 내심 의아하고 염려스러워진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꼭 짜여진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룸싸롱 안으로 들어서는 재준에게
그곳을 맡아 운영하고 있는 충의회의 간부 하나가 깍듯이 예를 갖춘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재준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어지럽게 떠다니는 실내를 한 번 휘 둘러본다.
짙은 화장에 선정적인 옷차림을 한 여자들이 종종 걸음을 치며 왔다갔다 하느라 분주하고,
까만 정장을 번듯하게 차려입고 서빙을 하는 웨이터들이 재준을 알아보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하룻 밤 술값이 몇 백만원에 육박하는 가게임에도 매일 같이 손님이 득시글대는 것을 보면,
푼돈이 없어서 점심을 굶는 결식아동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례여야 옳다.
"한병규 검사가 여기 단골이라고 하던데, 맞나?"
"예, 그렇습니다. 어제도 왔었습니다."
"잘 됐군. 그 새끼가 자주 찾는 여자가 누구지?"
"민지라고...한번 같이 2차 갔다 온 다음부터는 계속 그 아이만 부르더라구요.."
"걔 좀 불러 와. 룸에 들어갔으면 다른 애로 바꿔서라도 데리고 와."
"예, 알겠습니다."
재준은 발길을 옮겨 맨 끝에 위치한 방으로 향하고 뒤따르려하는 준상에게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제제를 가한다.
담배를 피우며 5분 쯤 기다리니, 짝 달라붙는 다홍색 원피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의 여자가 주춤거리며 재준 앞에 모습을 보이고..
재준은 턱짓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 명령한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재준의 눈치를 살피며 그와 거리를 좁히는 민지..
재떨이에 피다 만 담배를 눌러 끄며 재준이 입술을 뗀다.
"....민지라고 했나?"
"....네..."
"나이는?"
"...스물 하나요.."
"여기 나온 지는 얼마나 됐어?"
"한 3개월 쯤..."
재준은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담배 한 대에 불을 당긴다.
스쳐 지나가면서 간간이 쳐다보기만 했던 '이재준 회장'을 혼자서 대면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무서움증이 솟으며 주눅이 든다.
한낱 호스테스에 불과한 자신을 이렇듯 은밀하게 호출한다는 건,
그 목적이 단순히 섹스에 있다고 하기에는 전후의 분위기가 사뭇 심상치 않기에..
민지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한다.
"지금부터 묻는 질문에는 솔직하게 대답해. 사실이 아닌 게 밝혀지면 각오해야 할 거야.."
위압적이고 음산한 재준의 목소리에 민지는 약간 겁에 질린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병규 검사, 올 때마다 널 찾는다고 하던데...주로 어디에서 관계를 하나?"
"삼성동에 있는 C호텔이요.. 다른 데는 간 적 없어요.."
"보통 몇 시쯤 가게에서 나서지?"
"새벽 1,2시 정도에 나와서 호텔에 도착하면 30분 쯤 후가 되요.."
"그 새끼, 일주일에 몇 번 와?"
"보통 주말마다 오시고, 자주 오실 땐 한 두번 더 들리시기도 해요.."
삼성동의 C 호텔이라면 충의회가 관할하는 구역 밖의 장소이다.
타 조직에게 일부분 협조를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재준은 민지 앞에 본격적인 화두를 던져 놓는다.
"너, 여기서 한 달에 받는 수입이 얼마야? 팁 빼고 가게에서 주는 것만..."
"으음~ 팁 빼면 한 장 정도 밖에 안 되요.. 2차 뛰어서 버는 게 거의 다죠.."
"그럼 앞으로 200 받게 해 주지.. 네가 이 가게를 그만 둘 때까지."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뭔데요..?"
머리가 꽤 민첩하게 돌아가는 여자였다.
답답하고 맹하게 굴지 않는 여자라는 것에 한편으로 안도하며, 재준은 민지의 눈동자를 직시한 채 말을 잇는다.
"쉽게 설명하자면, 네가 낚시의 미끼 역할을 하면 돼..
물론 어부는 나고, 내가 놓은 낚시대에 걸릴 물고기는 한병규 검사야..
넌 평소랑 똑같이 그 새끼 술시중 들고 C 호텔에 가서 그 새끼 물건만 박아주면 되는 거야.. 어려울 거 없지?"
"....저한테 다른 위험부담 같은 건 없겠죠?"
"당연하지. 그 점은 내가 책임진다. 넌 딴 거 신경쓰지 말고, 다음에 한병규가 오거든 내가 그 새끼를 잘 낚을 수 있게 도와만 주면 돼. 알겠어?"
"....해 보죠. 그 대신, 약속은 꼭 지키시는 거에요?"
그녀의 확인 질문에 재준의 고개가 상하로 움직이고, 간단한 협의를 끝낸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민지는 재준에게 목례를 해 보인 후 다시 룸으로 들어가고, 재준은 준상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가게의 영업부장에게 다가가 지시한다.
"한병규가 오면 나한테 즉시 연락해. 준상이한테 내 핸드폰 번호 받았지?"
"예, 회장님"
"그리고 보안 철저히 해. 함부로 나불대고 다니지 마. 그 정도 눈치는 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해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으며 출입구 쪽으로 발을 내딛는 재준의 뒤로 준상이 따라붙고,
룸싸롱의 영업부장과 주변에 있던 웨이터들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인다.
항상 그렇듯이 또 자기 손으로 차문을 열고 올라 타는 재준의 행동에 아직까지도 송구함을 느끼며, 준상은 멋적은 손을 거두어 들이고 조수석에 자리한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의 정적이 흐른 뒤, 닫혔던 재준의 입술 사이로 육중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준상이 너, 내일 출국이라고?"
"예, 오전 11시 비행깁니다."
"얼마나 있다 올 건데?"
"열흘 정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보고는 매일 드리겠습니다."
"....조심해라.. 연화회 새끼들도 몇 명 따라갔을 게 분명하니까 들키지 않게 신경 써.."
"걱정마십시오, 회장님.."
호기있게 터지는 준상의 대답에 재준은 피식 옅은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 금새 다시 딱딱한 표정이 되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어른거리는 가로등 불빛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겹쳐져 보이며, 재준의 까만 눈동자가 흐릿하게 물들어 간다..
그리고 바보처럼, 하루종일 수 십번도 넘게 되뇌었던 강태와의 짤막한 통화내용을 상기시킨다.
'나야, 잘 도착했어. ...... 응..지금 뭐 해? ..... 그렇구나.......
알았어, 내 걱정 말고 너나 잘 해. ..... 아니, 그게 아니라...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그런 말 듣기 싫어, 끊을게..'
- '비행기 타는 거 지루했지? ...... 일하고 있지, 뭐.. ..... 몸조심 하고 혼자서는 절대 돌아다니지 마. 애들이랑 꼭 같이 행동해야 돼. .......
근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어디 아파? ...... 미안하다, 그렇게 멀리까지 보내서........'
병신 같은 놈. 고작 '미안하다'는 소리 들으려고 일부러 네 마음 괴롭게 한 줄 알아?
하여튼 이재준... 사람 초라하게 만드는 건 아주 타고 났다니까...
강태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거칠게 입고 있던 남방을 벗어 방 한 귀퉁이에 처박아 버린다.
아무리 반복해서 재생시켜 보아도 야속하기만한 재준의 이야기들이 강태를 영락 없는 떼쟁이로 바꾸어 놓는다.
그가 미운 것이 아니다.
한 순간이라도 그가 미워질리 없다는 걸 강태 자신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저 투정을 부리는 거다.
사실은 고마워해야 하는데, 자신의 안전과 두 사람의 오랜 동행을 위해서 현실을 조정해 나가는 재준의 노력에 감사해야 할 강태인데...
오늘 아침 공항에서 탑승구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강태에게 일말의 서운함도 내비치지 않던,
그래서 강태로 하여금 터무니없이 쏟아지려 하는 눈물을 억지로 되삼키게 강요하던 재준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앙탈을 내는 것 뿐이다..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심리에 격렬한 비난을 서슴지 않으며 강태는 기분을 전환하려는 요량으로 책을 펼쳐든다.
산만하게 흐트러진 정신의 매무시를 다잡으며 인쇄된 활자들에 집중하려 애쓰는 강태에게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예, 들어오세요.."
열리는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사람은 강태를 수행하게 된 재준의 부하 준태였다.
강태는 책에서 눈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고, 그가 묻기 전에 준태가 먼저 말문을 튼다.
"죄송하지만 도련님, 숙소를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여기는 저희 집인만큼 정보가 새어나갔을 때 제일 먼저 기습의 위험이 있기도 하고,
노출 될 소지도 많기 때문에 좀 더 외곽지역으로 옮기시는 게 좋겠는데요.."
"후우~ 지금 말이에요?"
"죄송합니다, 번거로우시게 해서... 그렇지만 제 성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조금은 신경질이 묻어나는 손길로 긴 앞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태..
준태가 안내하는 대로 지하주차장에 세워진 승용차에 몸을 싣는다.
간헐적인 시동음과 함께 바퀴가 지면 위에서 회전을 시작하는 순간에도 강태는 아무런 의심 없이 편안하게 뒷 좌석의 시트에 등을 기댄다..
(93)
우리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자.
정념을 모두 불 살라 그 대가로 지옥에 떨어지리라..
- <실락원> 중 -
휘잉-하는 바람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불꽃 하나가 긴 포물선을 그리며 수직으로 낙하한다.
망연히 그 불꽃의 행로를 쫓아가는 주혁의 눈동자가 어릿한 흔들림을 보이며 어둠 속에서 낡은 빛을 반사시킨다.
자동차에 기대어 선 그의 몸이 희끄무레한 실루엣을 드리운 채 묘한 공간을 형성하고..
주혁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가 붉으스름한 불빛으로 주술적 분위기를 강화시킨다.
멀찍이서 그런 주혁과 그 주변의 양상을 파악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태현..
학교의 과실에서 작업을 하다 나와서 인지 약간 초췌하고 까슬까슬한 모습이다.
거의 두 달만에 마주하는 주혁에게 전과 다름 없이 명명한 미소를 지어주는 태현의 얼굴이 코끝이 시큰하도록 반갑고 고맙기에..
주혁은 전신을 꽉 메우고 있던 '그'에 대한 염려와 목마름조차 잠시동안 한 켠으로 밀어놓는다.
"어얼~ 장주혁, 제법 뒷골목 티가 나는데?? ^^;"
발랄하고 탱탱한 그의 음색 역시 예전과 그대로이다.
커다란 눈동자 전체를 물들이는 장난기 또한 과거와 한치의 오차도 없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근데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작업이야?"
"11월 초에 학술제가 있는데 우리 과에서 신곡 발표회 하거든. 그거 도와주느라 좀 바빠. 내가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 학기 휴학한 김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그러냐, 마음도 정리할 겸..."
"...여행은 무슨, 마음 정리 벌써 오래 전에 다 했으니까 걱정 마.."
"치이~ 잘났다, 새꺄.. -_-++"
담배꽁초를 신발 뒷 축으로 비벼 끄며 자신에게 타박을 날리는 주혁을 보고 다시 한 번 시원한 웃음을 짓더니 걸음을 떼는 태현..
주혁도 그와 발을 맞추어 걷기 시작한다.
방금 전과 달리, 까불거리는 농담 조가 걷힌 태현의 잔잔한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 입자를 타고 주혁의 고막에 흘러든다.
"오랜만에 학교 오니까 어때? 기분 희한하지 않아?"
"....쿡..그냥...옛날 생각 많이 난다.."
"옛날은 무슨...그래봤자 몇 달 전인데..."
"근데 왜 이렇게 오래 된 것처럼 느껴지냐? 실감도 잘 안 나고..."
바로 몇 달 전, 이 교정의 나무들의 가지에 단풍잎과 은행잎 대신
벚꽃과 목련이 그득하게 매달려 있을 그 때만 하더라도 주혁은 그리고 혁수는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
주혁은 진흙반죽과 나이프를 조물락 거리며 대부분의 저녁시간을 보냈고
혁수는 색색의 물감이 덕지덕지 발린 에이프런을 두른 채 화구를 옆 구리에 끼고 동분서주 하곤 했었다.
모르겠다.
두 가지의 행복을 다 갖기 바란다는 것은 무리한 욕심이겠지만,
진실을 선택한만큼 포기해야만 했던 일상의 평화가 값진 것도 사실이니까...
서양화과 98학번 안혁수와 조소과 98학전 장주혁,
그 모습인 채로 함께 묶여질 수는 없었던 걸까...?
전부 버릴 수 있노라고 장담했던 지난 날이었지만, 그래서 정말로 모든 것을 내던진 그와 자신이었지만..
파괴된 부분을 채울만한 시간과 안식, 기쁨이 과연 허락될 수 있을지...모르겠다.
"....어제 재준이랑 통화했는데, 혁수에 대한 얘기 들었어. 자세하게 말해 줄 수 있니..?"
잔디밭 가장자리를 호위하듯 빙 둘러친 벤치들 중 하나에 엉덩이를 붙이며 담배연기와 함께 태현의 목구멍에서 가라앉은 음성이 울려나온다.
주혁은 두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깍진 낀 손가락 위로 이마를 파묻으며 지리한 한숨을 뿌려댄다.
"...혁수 일주일 째 안 들어 온다면서... 대체 무슨 일이야..?"
어처구니 없게도 빌어먹을 눈물이 급속도로 주혁의 눈망울에 차오르자,
뭔 가에 데인 것처럼 그의 머리가 번쩍 들리며 하늘을 향해 욕설이라도 퍼부어댈 마냥 부릅 뜨여진 눈동자로 상공을 응시한다.
그러다가 제풀에 진이 빠지는 듯 등받이에 마른 몸을 털썩 기대며,
수치스러운 얼룩을 남기는 짭짤한 수분 한 방울을 맥없이 방치한 주혁의 메마른 입술이 달싹인다.
"...태현아, 나 말이지...진짜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어디로 간 건지, 어디에서 뭘 하면서 있는 건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
밑에 있는 애들까지 동원해서 미친듯이 뒤져봐도 흔적조차 안 보이는데...
그 애가....안 보이는데...."
태현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가늘어지고, 주혁의 고개가 천천히 다시금 떨구어지며 반듯한 정장 속에 감춰진 나약한 어깨가 서글픈 떨림으로 오열한다.
안혁수의 부재 속에서 주혁은 별 수 없이 적나라한 한계를 엿보이고, 무력하게 붕괴하는 모습을 공개하고 만다.
"...아무리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어.. 그렇게 빌었는데, 제발 어디 있는지만 가르쳐 달라고 빌고 또 빌었는데...
가서 혁수 잘 지내고 있는지 딱 한 번만 보고 오겠다고 그렇게 사정했는데... 그것도 안 된다는 거야, 그것마저도...."
비굴해지는 것 따위는 오히려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다.
짐승처럼 흙바닥을 기고 핥아야 한다고 해도 황송한 마음으로 그 형벌을 달게 받을 작정이었다.
그만큼 절박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필수불가결한 생존의 문제를 위하여 주혁은 남김없이 곤두박질 치는 심정으로 태현의 하얀 손을 붙들며..
최소한의 가능성조차 따져보지 않은채 생명을 구걸한다.
여유 있게 심사숙고 할 수 있는 복수의 차원이 아닌, 단 하나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주혁은 지하 깊은 곳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꺼져들어간다.
"태현아, 나 좀 도와줘.. 제발 어떤 방법으로든 좋으니까 나 좀 살려줘, 태현아..!!
너 알잖아... 혁수가 나 원하고 나랑 같이 있고 싶어하는 거 너는 알잖아..
혁수가 내 옆에서 얼마나 예쁘게 웃었는지 너는 두 눈으로 똑똑이 봤잖아, 그것도 매일..!
태현아, 나 도와 줄 거지..? 너 밖에 없어...도와줄 사람 너 밖에 없어, 태현아...
....제발....이대로 있다간 나 죽어... 이대로 계속 시간이 지나서 혹시라도 혁수가 후회하게 되면...
그래서 다시 예전처럼 살게 되면...그땐 나 진짜 죽어...!!
안돼, 예전처럼은 못 살아... 나 다신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 수 없어..!!
차라리 시작조차 안 했던 게 낫지, 이제와서 또 예전처럼 산 다는 건...아니, 난 절대 못 해.. 생각도 하기 싫어!!
....나 이제 다 알아버렸단 말이야.. 혁수를 내 사람으로 두고 사는 게 어떤지... 그게 어떤 느낌인지 다 알아버렸다구!!
근데 내가 어떻게 예전처럼 살 수 있겠어... 응...??
태현아, 그럼 나 죽어... 나 진짜 죽어......."
- 창가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팔에 턱을 괴인 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는 혁수..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건물 외벽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은 사내아이에게서 오래도록 눈길을 떼지 않는다.
예닐곱살 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들고 땅바닥에 자신만의 언어로 무언가를 끄적거리느라 여념이 없다.
가끔씩 꽃봉오리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으로 보아 혼잣말을 웅얼이는 듯도 하다.
가만히 지켜보니, 짐작으로는 자폐증 환자인 것 같았다.
자기 혼자만의 성벽을 쌓고 그곳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영혼...
그를 '자아'만으로 이루어진 좁은 세계에 가둔 장본인은 누구일까..?
아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아니면 외부의 환경 때문에...?
그렇다면 비슷한 공식을 적용해서, 안혁수를 '연청색 장주혁' 한 사람이 다스리는 유일무이의 국가 안에 갇히도록 만든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안혁수 자신에게 연유하나, 그게 아니라면 안혁수를 지배하는 수려한 독재자 장주혁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인가..?
....쳇.. 여기 들어앉아 있으니 진짜로 점점 미쳐가는 것 같군...
"안혁수 씨, 상담치료 시간입니다."
목재문을 두 번 두들기는 노크소리에 이어져 문이 열리고, 간호원이 들어와 상투적이 미소를 머금은 채 혁수에게 일어서기를 종용한다.
혁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 의사가 기다리고 있을 치료실로 향한다.
환한 웃음으로 자신을 맞아주는 의사에게는 적당한 미소로 반응해 준다.
"자아~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혁수 씨, 기분은 어때요??"
활기에 넘치는 그의 목소리와 동작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졸렬한 박탈감에 명치께가 싸아-하니 쓰려오는 혁수..
이곳에 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담백한 웃음을 생산해 낸 적이 없는 그에게,
단정하고 말쑥한 외모의 '의사'가 가진 자신감과 당당함은 절대로 동화될 수 업는 이질감만을 안겨준다.
"왜요, 기분이 영 아니에요?"
"...그냥 그래요.."
"음~ 우리 저번에는 어린 시절 얘기 했었죠? 오늘은 좀 더 심각한 얘기를 해 보죠. 바로 '성(性)'이에요.
영어로는 sex라고 하죠. 혁수 씨의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구요.."
"....성 정체성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물론 그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더 중요한 건 성적 기호(sex-orientation)이지만..."
"그래서 지금 내가 성전환자(Trans-sexual)라도 된다 이겁니까?"
"글쎄요, 아직은 딱히 단정 짓기에는 이르죠.. 좀 더 차근차근 얘기해 봅시다."
날카롭게 곤두 선 혁수의 가시들을 누그러뜨리며 그쯤에서 대화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차분한 손놀림으로 화일을 뒤적이며 본격적인 상담을 준비하는 의사에게 냉랭한 어투로 혁수는 묻는다.
그를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고문하는 것 같기도 한 혁수의 질문이 서툰 침묵을 깨뜨린다.
"선생님께서는...남자랑 한 번도 섹스해 본 적 없으시겠죠..?"
혁수의 관찰 기록을 훑어내리던 의사의 시선이 흠칫 꺾여지며 혁수의 조소 어린 눈동자와 건조한 낯빛을 맞받는다.
그러나 혁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이..
"물론 그러니까 거기 앉아서 날 연구분석하고 계시겠지만, 선생님은 남자랑 섹스하고 나면 정말 손톱만큼도 쾌감을 못 느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끔찍하기만 할 것 같은가요?
....훗, 아니요. 절대 아닐 걸요. 머리로는 도리질 칠 지 모르지만 몸은 분명히 느낄 거에요.. 선생님도 인간이고 남자니까.
세상에 완벽한 이성애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세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의 가치기준은 대체 누가 정한 겁니까??
전지전능한 신께서? 만약 신께서 그 기준을 정하신 거라면 내게 채찍을 드실 분도 그 분 하나에요. 그 분이 내리시는 징벌은 각오해야겠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 지 알겠어요?
당신네 인간들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얘기에요.."
(94 - 1)
공항까지 준상을 마중나온 윤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근교의 호텔로 향하는 두 사람..
윤희는 화색이 돋은 얼굴에 해사한 웃음을 흠뻑 퍼담으며 들뜬 목소리로 재잘댄다.
"그럼 여기에 며칠이나 있을 거야?"
"별로 오래는 못 있고 열흘 정도... 어쩌면 더 빨리 갈 수도 있고.."
"애개, 겨우~?? 치이- 너무한다.. 난 여기서 한 달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있을동안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면 되지 왜 호텔에 묵겠다는 거야?"
"에이~ 내가 여기 놀러온 것도 아니고, 누나랑 같은 집에 있으면 제대로 일 못할까봐 그러는 거니까 좀 봐 주라, 응? ^^"
귀엽게 코끝을 찡긋거리며 살가운 애교를 부리는 준상에게 녹아드는 미소로 100%의 긍정만을 내보이는 윤희..
호텔의 직원에게 주차를 맡기고 준상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프론트 데스크로 걸어간다.
체크인 하고 열쇠를 건네받는 동안에도 내내 준상의 옆 모습을 줄기차게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에,
제어할 줄 모르는 갈증과 난생 처음 경험하는 로맨스에의 환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낮 12시의 환한 햇살이 부끄럽지도 않은 듯 저돌적으로 휘감겨 오는 윤희의 육체가 준상을 몰아부치고..
준상은 여독을 해소할 틈도 없이 달구어진 여자의 비너스를 섬세한 손길로 연주해야만 했다.
몇 차례의 광풍 같은 유희가 두 남녀의 몸을 휩쓸고 지나간 다음, 고조된 숨결을 들리며 실내에 꽉 들어찬 열기를 식히는 도중..
기운이 빠져 맹맹한 목소리로 윤희가 묻는다.
".....준상씨, 나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뭔데..?"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담배를 한 대 빼어무는 준상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반문을 했음에도 그녀는 선뜻 요지의 질문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준상이 의뭉스런 눈빛으로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기울이며 은근한 재촉을 보내자, 한결 진지해진 표정으로 입을 연다.
"있잖아...사람들한테 들은 건데, 자기가 충의회 소속이라는 거...사실이야..?"
매캐한 니코틴 성분을 흡수하던 준상의 기관지가 중간에 갑작스런 마찰을 일으키며 탁한 기체가 불규칙하게 준상의 코와 입으로 쏟아져 나오고..
윤희는 그런 준상을 예의 주시한다.
"...알고 있었구나?"
"준상씨가 우리 집에 몇 번 들락거리는 걸 밑의 애들이 봤나 봐.
나한테 조심하라고 그러더라.. 준상씨, 이재준 회장 직속이라며?"
땀에 젖은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준상이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인다.
시무룩하게 잠기는 그의 낯빛에 윤희는 괜시리 애가 달아서 허둥지둥 장황한 멘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준상씨, 난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다른 뜻은 없어..
준상씨가 충의회 소속이라는 게 우리 관계에 무슨 상관이야, 안 그래?
난 준상씨 그 자체를 좋아하는 거지 딴 이유는 조금도 없어.. 준상씨도 마찬가지잖아.. 응?? 우리만 조심하면 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밑의 애들이 벌써 눈치를 챘다면, 누나 남편 귀에 들어가는 것도 금방일 거고 본의 아니게 문제가 확대될 수도 있어.."
"그래, 나도 알아.. 연화회랑 민성회랑 연합으로 충의회 건드리려고 하는 거..
나도 이 쪽에서 굴러먹은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 정도 돌아가는 상황은 대충 파악할 수 있다구..."
"연화회랑 손 잡은 부대가, 민성회..??"
윤희는 지금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한 건지 깨닫지도 못한 채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응'이라 대꾸한다.
준상은 뜻밖의 수확에 내심 흡족해하며, 당장이라도 재준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하고 싶은 욕구를 어렵사리 억누른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와 그에 맞춘 자신의 행동양식을 다시 한 번 의식하며 윤희를 매어두기 위한 계획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누나..."
"어, 그래.. 말해봐.."
"....내가 누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감미로운 음성과 다정한 눈빛, '사랑'이라는 흔한 두 글자...
여자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가장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몇 가지 요소..
거기다 잘생긴 얼굴에 세련된 매너까지 갖췄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지.
인간은 이렇게 가끔씩 형편없이 멍청해 질 때가 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말이다.
인간을 바보천치로 만드는, 그래서 한 순간에 너무 많은 것을 탈취해 가는 최대의 이름은 '사랑'이다.
영원과 불변을 노래하며 유한하고 가변적인 인간이라는 존재를 한없이 미화시키는 달콤한 독약, '사랑'..
그 덫에 걸리지 않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내가 충의회 소속이라는 것 때문에 어쩌면 누나...힘들어 질 수도 있어..
그래도 우리가 계속 지금처럼 같이 있으려면 누나가 날 도와줘야 해..이해할 수 있지..? 나....누나가 필요해.."
"......알았어.. 걱정하지 마, 내가 필요하다면 뭐든지 얘기 해.."
- "....그래, 수고했다. 몸조심 하고...내일 다시 통화하자."
수화기를 내려놓는 재준의 손등에 파란 핏줄이 도드라지게 불거져 있다.
팔짱을 끼고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엉덩이를 걸친 자세로 준상에게 받은 보고를 하나씩 되짚어 나간다.
연화회와의 연합세력이 '민성회'라는 것, 예상 외였다.
'민성회'라면 아직 그 규모가 열등하게 작은 조직이고, 충의회와 이마를 마주대고 있는 구역도 전혀 없는데...
아마 조문환이 겉만 번드르르한 협상안을 내놓고 민성회의 박형욱을꼬드긴 모양인 듯 했다.
이해관계에 따라 얽혀있다면 두 조직 사이의 결속력을 해체시키는 건 그다지 어려운 걸림돌은 아니다.
그런데, 준상의 신분이 노출되었다는 건 중요한 사항이었다.
벌써 연화회 쪽에서 눈치를 챘다면 조만간 준상과 윤희의 사귐을 빌미로 시비를 걸어올 것이 뻔한데...
성급히 전면전을 벌이는 것을 무척 꺼려하는 재준인지라 양미간에 깊은 굴곡을 새기며 문환과의 대면에서 어떤 식으로 맞받아쳐야 할 지 궁리해 본다.
그러던 중,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이 익숙한 벨소리를 울려대고 재준의 입술 사이로 억양 없는 밋밋한 음색이 허공 중에 분사된다.
"예, 이재준입니다."
"회장님, 저 서부장입니다."
한병규 검사가 단골로 있다는 룸싸롱의 영업부장이다.
재준의 검은 눈동자가 살벌한 생기를 띄우며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치듯 확인질문을 던진다.
"그 새끼, 왔어??"
"예, 지금 민지랑 같이 룸으로 들어갔습니다."
"혼자 왔나, 아니면 다른 놈들도 같이?"
"몇 번 들린 적이 있는 놈들 같은데... 아무튼 3명과 동행입니다."
"알았어, 지금 애들 보낼테니까 잘 지켜보고 있어."
(94 - 2)
조수석에 앉은 주혁이 자켓의 윗 단추를 느슨하게 풀어헤치며 시간을 확인한다.
민지와 한병규가 호텔 안으로 들어간 지 30분이 지난 것을 인식하자 주혁은 운전석의 부하에게 눈짓을 해 보이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려 호텔 정문을 거쳐 프론트로 향한다.
민지가 일러준 대로, 그녀와 한병규 검사가 투숙한 406호실의 옆 방에 체크인 하고 엘레베이터에 오르는 주혁과 그의 부하..
주혁은 406호실의 문 앞에서 짧은 심호흡을 하고 세차게 문고리를 걷어찬다.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던 남자가 벙찐 표정으로 문 쪽을 돌아본다.
하나로 합쳐져 있던 두 몸뚱어리가 순식간에 분리되고, 주혁의 부하가 재빠르게 달려들어 병규의 목에 칼을 겨눈다.
주혁은 침대에서 내려와 겁에 질린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민지에게 나가보라고 턱짓을 하고,
민지는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채 방문 밖으로 사라져버린다.
병규에게로 시선을 돌린 주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이재준 회장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가시죠.."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챙겨입은 병규가 주혁의 뒤를 따르고
칼끝은 여전히 그의 옆구리에서 병규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운데 세 사람이 승용차에 오른다.
재준의 사무실이 있는 충의회 아지트 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주혁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다.
"회장님, 저 주혁입니다. 지금 데리고 가는 중입니다.
.....아니오, 생각보다 수월했습니다. ....예, 그럼 거기로 가겠습니다."
충의회 소속 조직원이 곁에서 듣고 있으므로 깍듯이 존칭을 사용하는 주혁..
아지트 건물 앞에 당도하자 재준의 지시대로 병규를 지하의 창고로 끌고 내려간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재준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는 주혁과 그의 부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재준을 올려다보는 병규에게 차분하고 냉혹한 재준의 눈동자가 날아가 꽂힌다.
"제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나,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아, 뭐 별 거 아닙니다. 아주 기본적인 충고를 해드리고 싶어서 부득이하게 모셔온 겁니다.
.....한병규 검사님, 분명 진/짜/ 검사님이시겠죠..?"
"....대체 뭐, 뭘 원하는 건지...!.."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해야할 일이 뭡니까?
죄 지은 사람 잡아들이고,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것...그거 아닙니까?
그런데 한 검사님께서는 푼돈 몊 푼을 받아 처먹고 그 직무를 태만히 하셨더군요..
범죄자를 잡아들여야 할 사람이 범죄자와 놀아나고 있다니, 이거 아무리 돈이 전부가 된 세상이라지만 너무 심한 것 같은데요??"
"이거 보시오, 난 그저...."
무언가 구질구질한 몇 마디를 지껄이려 입을 벌리는 병규에게 오른손을 들어보이며 그를 제지하는 재준..
조금 더 옥타브가 상승된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검사님은 발언권이 없으시니까 닥치고 제 얘기만 들으십시오.
솔직히 당신하고 마주보고 있는 거, 별로 기분 좋지 않습니다.
부디 내가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쓸데없는 폭력을 쓰지 않도록 협조 좀 해 주십시오."
아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봉하는 병규에게 추호도 변화가 없는 무덤덤한 눈길을 실어 보내며, 잠깐 말을 멈추었던 재준의 입이 다시 열린다.
"검사님께서 직무를 소홀히 하신 가장 명백한 증거가 있죠..
'이세라'라는 여자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저의 절친한 친구였죠.
제가 친형처럼 생각하는 선배의 여자이기도 했구요.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그 여자의 죽음을 강도상해사건 정도로만 적당히 무마해 주고 어마어마한 돈을 챙기셨으니까요... 그렇죠?"
흔들림을 보이지 않던 재준의 검은 심연이 미세한 진동의 파장을 만들어내며
동시에 섬뜩한 살기와 묵직한 위압감이 재준의 주변 공간에 바리케이트처럼 둘러 처진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이성을 단속하는 병규에게 그의 질식감을 가중시키는 재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제가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무식한 깡패지만, 고의적인 살인과 과실치사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저와 제 조직이 연루된 사건인데...제가 바본 줄 아십니까??
아직 충의회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군요..."
"............"
"잘 들으십시오. 얼마 후에 '이세라'라는 여자의 죽음에 대해 기존의 판결을 뒤집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겁니다.
그때 또 다시 저를 바보취급 하신다면,
저도 다른 검사님께 짭짤한 봉투 몇 개 갖다드리고 한 검사님의 죽음을 간단한 과실치사 정도로 위장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연화회 조문환이 하는 일을 저라고 못 하겠습니까?
규모로 따지마 자금력으로 따지나, 연화회 보다는 우리 충의회가 한 수 위인데요.."
무릎에 박히는 꺼칠꺼칠한 콘크리트 바닥의 통증도 잊은 채,
기계적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뱉어내는 재준의 작은 입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병규에게
끝까지 깔아뭉개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재준은 마지막 경고를 남긴다.
"오늘은 이만 보내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에 당신 말고도 검사가 쌔고 쌨다는 거...기억하십시오."
(95)
가슴이 아팠다.
아픈 건 온전히 나 혼자였으면.
내가 아픈 건 견뎌낼 수 있었지만 그 애가 아픈 것은 견딜 수 없었다.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중 -
예배의 모든 순서를 마무리 짓는 목사님의 축복기도가 경건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강단 아래에 모여 앉은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눈을 감은 채 숙연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그 속에 포함된 혁수 역시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자 입을 열어 조그마한 소리로 '아멘'이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피아노의 선율을 들으며 잠시동안 위태로운 심정으로 또 한 번의 간구를 올린다.
워망하지 않는 넉넉함과 인내할 수 있는 믿음과 부딪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욕심이 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게 도와 주십사..
행여나 자신의 기도가 이기심에 찌든 정욕으로 비추어지지는 않을까 근심하며 조심스럽게 간원한다.
눈을 뜨자 고여있는 물방울 때문에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혁수를 까닭없이 서글프게 만들고, 그는 무언 가에 쫓기듯이 휘적휘적 교회 밖으로 빠져 나온다.
여유롭게 내리쬐는 햇살이 혁수의 와인빛 머리카락 위에 반짝이를 뿌려놓고,
적갈색으로 포장된 길바닥이 그의 신발 밑창에 밟히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온다.
자신의 병실이 위치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낯익은 간호원 하나가 혁수에게 접근하더니 낭랑한 음색으로 빠르게 이야기한다.
"안혁수씨, 친구분께서 찾아 오셨거든요? 이쪽으로 오세요.."
"....친구요..?"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혁수에게 쾌활한 미소와 함께 '예'라고 대답하며 몸을 돌려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
혁수는 길게 호흡을 들이마시며 기습적인 방문객이 누구일지 여러 갈래로 생각의 가지를 뻗쳐본다.
단조로운 응접실처럼 꾸며진 방 안에서 혁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여전히 독보적으로 빛나는 하늘색 머리칼의 태현이다.
"....태현아!!"
와락 쏟아져나오는 혁수의 외침에 선뜻 목청을 돋구어내지 못하는 태현..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 일렁이던 초조와 불길함이 수용하기 힘든 연민과 절망으로 바뀌어져서 암갈색 망막 안으로 사그라든다.
표면으로 나타나기엔 너무 잔혹하고 처참한 영혼의 통증은, 혁수의 가슴에서 태현의 가슴으로 이동하고 다듬어진다.
혁수의 얼굴을 보면 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의 순한 갈색 눈망울을 마주보니 눈물보다는 분노가 솟구친다.
저렇게 무력하고 보잘 것 없는 그와, 그런 혁수를 제대로 소유하지 못하는 장주혁이라는 사내가 참을 수 없이 싫어진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엉뚱하게 전이된 분노와 증오일 뿐, 태현도 알고 있다.
혁수가 왜 저런 모습으로 여기 있을 수밖에 없는지..
경련을 일으키는 세포 하나하나에다가 힘을 주며 태현의 손이 혁수의 팔을 꽉 움켜 잡는다.
혁수가 아프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뒤채이자 마지 못한 듯 손아귀의 힘을 풀어주는 태현..
얼얼한 팔뚝을 주무르며 특유의 선량하고 친근한 미소를 동반한 혁수의 음성이 와닿는다.
"어떻게 알고 왔어..? 서울에는 언제 올라온 거고...?"
"....너희 집에 찾아 갔었어. 어머니가 가르쳐 주시더라. 저번 주에 올라왔거든.."
"그랬구나... 네가 우리 엄마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 여기 있는 거 국가기밀인데..."
억지스러운 장난기를 실어보려 애쓰는 혁수의 수고에도 아랑곳 없이 혁수에게 맞부딪쳐오는 태현의 눈빛은
혁수가 느껴야 할 분량의 고통을 전부 담아놓은 마냥 서럽게 소용돌이 친다.
그리고 혁수의 분홍빛 입술이 그려내지 못해 스스로를 학대하고만 있는
연청색 사내의 이름이 결국은 겁없는 태현의 입을 통해 발음되어져 나온다..
"...주혁이가 얼마나 찾고 있는 줄 아니..? ...그애가...지금 어떻게 지내는 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
오죽하면, 오죽하면 아무 능력도 없는 나한테까지 울면서 애원을 하겠냐... 내가 정말 기가 막혀서....허! 너네 진짜 이게...이게....."
참담히 고개를 떨구며 혁수의 눈을 외면하고 마는 태현에게 조용한 시선만을 넘겨주던 그가
어느 순간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오한이 발하는 듯 가냘프게 떨리는 성대를 작동시킨다.
성경책의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신의 율법을 위반한 삶을 선택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것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노라 효과 없는 주문을 되풀이하며 혁수는 말한다.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겠어.. 용서는...다시 만나서 내가 직접 비는 게 낫겠어..
그냥....너도 보다시피 나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거 얘기해 줘..
그 이상 욕심내면 더 많이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는 거,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주혁이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우린 항상 그랬어.. 조금 더 가까이 느끼고 싶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면, 잠시동안은 완벽한 하나를 느끼지만...
그 뒤엔...그 잠깐의 행복 때문에 훨씬 더 오래 울어야 하고 죽어 있어야 하고...
태현이 네가 보기엔 진짜 기가 막힐 수도 있겠지.. 그래...그럴거야....."
"너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혁수야.."
침울하게 미소 지으며 아리송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혁수가 곡선으로 휘어져서 흘러드는 태현의 눈길에 초점을 모으지 못하고 동작으로만 그를 안심시켜 준다.
손바닥으로 작은 얼굴을 감싸 덮으며 혼잣말처럼 태현에게 재차 당부한다.
"주혁이한테 꼭 기억시켜 줘.. 욕심내면 안 된다고... 우리 둘 다, 기다려야 해.."
- 재준의 빌라 거실 안을 채우는 어색하고 불안정한 정적..
삐뚤빼뚤 제멋대로 나열된 차가운 공기 입자들이 주혁과 재준, 그리고 태현을 꼭지점으로 삼아 뾰족한 삼각형을 쌓아올린다.
세 개의 꼭지점에 자리한 각각의 표정도 모두 판이하다.
아니, 어찌보면 엇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아마도 세 사람의 심중에
물결치는 여러 가지 감정과 상념들 중 공통적인 한 두가지가 섞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담당의사를 만나봤는데 전문적인 의학용어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해석해 보면,
혁수를 성 정체성이 똑바로 서 있지 않은 뭐 그런 쪽으로 몰아부쳐서 얘기를 하던데...
한 마디로 남자로서 자연스럽게 가져야 할 성적인 욕구가 비정상적이라는 거지..."
"그럼 혁수 형이 여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 소리야??"
순간적으로 튀어오르는 반발심에 재준은 애꿎은 태현에게 따지듯이 물어보고,
태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우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모르겠어. 삽입 당하는 쪽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계속 주절거리는데 역겨워서 더 듣지도 않았어.
한 가지 분명한 건, 의사들이나 주혁이 부모님들이나 다들 육체적인 부분 외에는 생각을 안 한다는 거야..
안혁수랑 장주혁이 서로 좋아해서 죽을 지경이다,
그거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섹스 ―둘이 섹스를 했다는 데에만 스포트 라이트를 비추고 있어.."
"참나~ 애인끼리 섹스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누가 들으면 주혁이 형이 혁수 형 강간이라도 한 줄 알겠네..
뭐가 먼저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왜 잘났다고 나서서 난리야?!"
"....재준아, 그만해..."
여지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주혁의 붉은 입술이 희미하게 벌어지며,
아슴푸레한 움직임만큼이나 가느다란 음성으로 재준의 거침 없는 격노의 언사를 억제한다.
그리고 쇼파에서 몸을 일으켜 재준과 태현을 내려다 본채 다시 입을 연다.
"나 먼저 들어갈게.. 피곤해서 자야겠다.. 내일 아침에 보자..."
돌아선 주혁의 잔등에 새겨지는 그림자가 암담한 비린내를 풍기는 것 같아,
재준은 치밀어 오르는 답답증에 못 이겨 쇼파의 등받이에 벌렁 상체를 던져 파 묻고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피워문다.
하나 둘 숫자를 셈하며 발자국을 떼려하는 주혁에게 어깨 너머로 전달되어 오는 태현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기듯 삐그덕거리는 적막 속에 울려 퍼진다..
"....혁수가 꼭 너한테 기억시켜 주랬어..
절대로...기다려야 한다고.. 욕심내면 안 된다고...
난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너야 알고 있겠지..?"
(96)
색색으로 번쩍거리며 거리의 취객에게 손짓하는 네온사인 간판 앞에 재준의 검은색 XG가 멈춰선다.
곧이어 뭔 좌석의 문이 열리고 길다란 재준의 몸이 땅바닥을 딛고 모습을 나타낸다.
나이트 클럽의 입구에 서 있던 웨이터가 재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재준은 지나가는 듯한 투로 말한다.
"신이사한테 충의회에서 왔다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홀 안으로 들어서자 갖가지 종류의 술냄새와 담배연기가 혼탁한 공기가 재준의 코 밑으로 훅 끼쳐오고,
익숙해지다 못해 무감각해져 버린 클럽내의 공기와 소음에 재준은 표정 없는 얼굴로 다리를 움직인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스테이지로 눈을 돌리니 탱탱한 몸매의 스트립걸이 브래지어 끈을 퉁기며 남자 손님들을 한껏 자극하고 있는 중이다.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며 감흥 없는 시선으로 여자의 나체쇼를 감상하던 재준에게 거구의 사내가 다가온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조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꽁초로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누르고 몸을 일으켜 사내의 뒤를 따르는 재준..
좁다란 복도를 거쳐 비밀스런 공간에 마련된 VIP실로 안내되어진다.
연화회의 우두머리 조문환은 옆구리에 토플리스 차림의 여자를 끼고 앉아 히히덕거리며 음탕한 희롱질을 계속하다가,
재준의 등장에 거나하던 얼굴색을 단속하며 데리고 놀던 여자를 밖으로 내보낸다.
호화롭고 고급스럽게 장식된 실내에 재준과 문환, 두 사람이 남고 주머니에 양 손을 찌른 채
우두망찰 서 있는 재준에게 문환이 입술로만 웃음을 지으며 앉기를 권한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앉으시죠.."
재준은 아무 말 없이 문환의 맞은 편 의자에 자리하고 문환은 재준에게 술 한 잔을 건네며 가벼운 이야기로 화두를 풀어보려 시도한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3,4개월은 넘은 것 같은데..."
"예, 회장님께서 우리 강태를 건드리신 이후로는 처음 뵙는 것 같군요.."
노골적으로 상대의 의표를 적중시키는 재준의 발언에 문환은 발끈하려는 심사를 지그시 타이르며 도리어 한결 너그러운, 소탈한 웃음으로 응수한다.
그러나 재준은 여유를 두지 않고 대화의 ―다시 말하면 협상의 흐름을 빠르게 진행시킨다.
"시덥지 않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진짜 얘기를 하도록 하죠. 피차 바쁜 사람들 아닙니까?"
예리한 금속성의 눈초리로 문환의 시선에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재준..
문환 역시 간간이 내비치던 능글능글한 장난기를 거두고 냉혈한 기류를 철옹성처럼 쌓아올린다.
험악하게 돌변하는 상대의 기세에 재준이 선수를 치려고 입을 떼었지만 문환이 더 빨랐다.
굴곡이 커다란 파장을 타고 거세게 재준의 귓구멍 안을 후벼파는 문환의 목소리에 재준은 반사적으로 경계태세를 취하며 맞공격을 준비한다.
"좋습니다. 빙빙 돌리지 않고 편하게 얘기하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요즘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회장 직속부하가 우리 애 여자를 데리고 다닌다던데...
그것도 징역 살고 있는 녀석의 여자를 말입니다.
그 새끼 이름이 김준상이라고 합디다.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지요.
....어쨌든 내가 묻고 싶은 건, 대체 지금 이회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그겁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두 사람끼리 좋아서 같이 다니는 걸 왜 저와 연관 지으시는 겁니까?
난 우리 애들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습니다."
"이러지 마시오. 모른 척 한다고 해서 덮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김준상과 민윤희가 사귀는 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이회장을 여기까지 불러 만나자고 한 줄 아는 거요?!"
"이해가 안 가는데요. 준상이와 그 여자가 어떤 관계인지 난 알 바 아닙니다.
내가 밑의 애들 여자관계까지 일일이 체크하고 다닐만큼 한가하게 보이시나 본데, 오해하셨습니다.
자꾸 이러시니까 저야말로 되묻고 싶어지네요.
당신 부하 마누라가 우리 준상이한테 빠져서 바람 피우고 다니는 걸, 당신이 왜 이렇게 과민반응 하는 건지...
조회장님이야 말로 무언가 찝찝한 부분이 생긴 거 아닙니까?
우리 충의회에 절대로 정보가 새어나가서는 안 될 뭐 그런 계획이라도 짜고 계시는 건지...?"
재준과 문환을 매듭으로 삼아 조금은 느슨하게 드리워져 있던 긴장감이 끊어져 나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진다.
술잔을 쥔 문환의 손이 찰나적으로 경련하고 재준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급박해지는 호흡을 고르며 신경돌기 하나하나를 곧추세운다.
이런 식으로 정곡을 파고들면 나오는 반응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시치미를 떼며 태연을 가장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길길이 날뛰면서 어디서 연유한 지도 모르는 엉뚱한 구실을 갖다붙이며 싸움을 시작하는 경우다.
의지할 수 있는 안전판이나 상대를 위협할만한 볼모가 있다면 자연히 전자 쪽일 것이고, 목적이 싸움 그 자체에 있다면 후자일 터였다.
재준은 두말할 것 없이, 문환 그가 원하는 것은 충의회와 연화회의 전면전이자 그것을 통해 재준을 자기 발 아래 굴복시키는 거라 생각하고 있다.
단지 그 뿐일 거라고 편하게 단정지어 버리고 있다.
세라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여기까지 내려온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히 한 조직의 구역확장을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해 버리고 있다.
그만큼 재준이 인지하는 세계는 좁다.
그가 형성해 온 사고체계 또한 터무니 없이 특수하고 한정적이다.
후자의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했던 문환에게서 동요하는 기색이 얼씬거리지도 않자, 재준은 순간적을 뇌리를 스치는 삐걱 하는 소리에 어금니를 꽉 깨문다.
그리고 협상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다음에 이어져야 할 말들을 쏟아낸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다 까놓고 얘기합시다.
조회장님께서 고용한 그 검사에게서도 확인한 사실이지만, 우리 충의회 앞에서 먼저 깔짝댄 건 조회장님이신 것 같은데요...
아마 강태를 납치한 그 때부터가 시작이라고 해야겠죠?"
"훗...깔짝댄다... 거 표현이 영 마음에 안 듭니다.."
"죄송하지만 무식한 놈이라 이렇게 밖에 말할 줄 모릅니다. 그래도 꽤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싶은데...
어쨌든 이번 여름에 있었던 살인 사건까지, 제가 보기엔 몽땅 조회장님의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는 않겠죠? 한병규 검사의 증언까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얘기가 뭡니까?"
"간단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모든 게 똑바로 정리되는 겁니다.
살인은 분명한 살인으로 밝혀지고, 진짜 감방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들어가고, 억울하게 죽은 제 친구는 저승에서나마 편안히 잠드는 것.
연화회의 구역이나 지분을 넘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잘못 굴러가고 있는 걸 바로잡고 싶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내가 감방에 들어가서 교수형을 당해야 속이 시원하겠다??"
"글쎄요... 감방에서 생을 마감하실지, 아니면 오랫동안 그 안에서 썩다가 다시 나오실 지 그건 법원이 결정할 문제겠지요..
그것까지 관여할 능력은 저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 말대로 순순히 따를 것 같은가?"
"별로 그러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아무 이유도 없는 밑의 애들까지 동원해서 강제로라도 제 말에 따르도록 하는 수 밖에...
하지만 웬만해서 저는 아랫 것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찾아온 거 아니겠습니까?
조용하게 마무리 짓자는 거죠..."
위험천만한 곡예를 부리듯 숨막히게 이어지는 혀의 격전 때문에
무겁게, 싸늘하게 짓눌리기만 하는 두 사람 주위의 허공이 잠시동안 위태로운 정적으로 변모한다.
살을 에일 듯한 두 사내의 음성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서로를 직시하는 혹한의 눈빛이 방 안을 가득 메운다.
계속되는 침묵, 팽창하고 부풀어오르고 다시 찢어질 듯 확대되어서
마침내는 소화해내지 못해 폭발한 냉기가 재준과 문환의 살갗에 자잘한 소름을 돋히게 할 것 같다.
"....시간을 좀 주시오. 평생을 감방에서 처박혀서 보낼 수도 있는 문젠데,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민을 해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시겠죠. 좋습니다, 얼마 후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너무 길게 끌지는 말아주십시오.."
문환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재준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일직선으로 물끄러미 쏘아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다시 몸을 돌려 입술을 뗀다.
"한가지 잊은 게 있군요. 예전에 회장님께서 강태를 납치한 것 말입니다...
솔직히 아직도 저, 그 일만은 깊이 담아두고 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강태는 정부 이상으로 제가 아끼는 아입니다.
그렇지만 회장님께서 이번에 제 말을 따라주신다면, 그것까지도 눈 감아 드리겠습니다.
그 밖의 다른 갚아야 할 빚까지도 전부 다 없던 걸로 해 드리죠..
그러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대가리 하나 때문에 여러 수족들이 떼죽음 당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일 아닙니까..?"
- [예, 최준탭니다.]
- [나 박형욱이다. 강태는 거기 그대로 두고 있는 거지?]
[예, 회장님. 저번에 말씀드린 거깁니다.]
- [며칠 뒤에 한국으로 다시 들여올 거니까 그 때까지 장소 이동하지 말고 대기 시켜. 오늘 이재준한테서 연락 있었나?]
[예, 매일 전화를 합니다. 아까 오후에도 강태와 통화를 했는데 별다른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태를 다시 한국으로 들이실 생각이십니까?]
- [이재준 그 새끼가 의외로 쉽게 걸려들었더구만...이번 일에는 준태 네 역할이 컸다. 조회장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일이 잘 풀렸다니 다행이네요.]
- [아무튼 장소 이동하지 말고, 지금부터 이재준과의 연락은 모두 차단해. 강태하고 이재준 사이도 물론이고...]
[예, 알겠습니다..]
(97)
'내가 얘기했잖아.. 가도 혁수 만날 수 없다고.. 괜히 갔다가 마음 상해서 오지 말고 혁수 말대로 좀 기다려 보자, 주혁아..'
'안, 그래도 가 볼래. 어디 있는지 알면서 가만히 있는 건 정말 못 하겠어..'
'그러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자꾸 고집 피우는 거야?!'
'지금에서 더 나빠질 게 어딨어?? 갈 거야.. 최소한 그 근처라도 가 봐야겠어..'
신호등의 빨간 불빛에 시선을 두고 왼쪽 팔을 창틀 위에 걸쳐놓은 채, 주혁은 아침에 있었던 태현과의 실갱이를 상기한다.
혁수가 있는 요양원의 위치를 가르쳐 달라고 전화를 걸어 온 주혁에게 몇 차례의 거절과 설득을 뒤풀이 하던 태현이,
주혁의 강경한 태도에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을 내쉬며 알려 준 그곳을 향해 속도를 내는 은색 승용차..
초행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차창 밖의 풍경으로부터
약간이나마 위안을 얻으며 엑셀레이터 위에 올려진 오른 발에다가 더 무거운 체중을 싣는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요양원 건물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하고 아늑하게 보이지만,
그 안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단절감이 주혁에게는 더 사무치게 각인되고..
결정적으로 그 붉은 벽돌을 가운데에 두고 그와 자신이 분리되어 있따는 사실 때문에 건물 외벽의 온화한 빛깔도 증오스럽게만 비춰지는 주혁이다.
표시된 화살표에 따라 손님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급한 발걸음을 움직여 누렇게 변색되어가는 잔디밭을 가로지른다.
허락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유리문을 밀고 금지된 ―적어도 그에게는 ―장소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주혁..
연분홍색 유니폼을 착용한 간호원이 불쑥 튀어나오며 또랑또랑하고 야무진 목소리로 질문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답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안 된다는 말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엎드려서 사정이라도 해 볼까?
그렇게까지 비참해져서라도 그를 볼 수 있다면 기꺼이 자기 자신을 구겨버릴 용의가 있다.
"누굴 찾아오셨죠? 확인절차를 거치셔야 하거든요.."
이런 곳에 있다니.
너의 얼굴을 보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순서를 밟아야 하는, 이런 삭막하고 메마른 곳에 네가 있다니.. 너, 정말로 쉴 수 있을까..?
내가 인정되지 않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나'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그의 다른 부분까지 훼손시키는 건 부당한 일이다.
전부 버려야한다고 스스로에게 항상 되뇌어 왔으면서도 이런 바램을 품게 되는 건, 비웃음을 자아내기만 하는 허무맹랑한 감정의 유희일지도 모른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사치'라고도 할 수 있는, 그래서 부분적으로 '죄'의 속성을 내포한..
"아니오.. 됐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힘겹게 돌아선다.
굳이 또 한번 그와의 단절감을 맛보고 싶지 않아서이다.
'안 돼'라는 그 지긋지긋한 소리...
예전에는 혁수의 입술에서부터 나왔기에 주혁을 고통의 극한으로 몰아넣던 그 두 글자가 이제는 다른 이의 혀끝으로 발음되어,
주혁뿐 아니라 그를 선택한 혁수에게도 비슷한 -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 이다 ―
절망을 안겨준다.
다시 잔디밭으로 나온 주혁은 고개를 들어 요양원 병동 건물을 치어다본다.
그리 많지 않은 창문들 중에는 혁수의 모습을 투시해 보일 창문도 있을 터였다.
그럴 터였다.
티끌만한 희망의 언저리가 게슴츠레 불빛을 틔우자,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에는 환한 생기가 감돌고..
허파가 산산조각 날 것처럼 본래의 리듬감각을 상실한 호흡과 맥박은 회복의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지 않고 부서져 버린다.
주혁의 동공이 엄청난 빠르기로 회전하며 혁수의 자취를 더듬는다.
아주 어렴풋한 흔적이라도 나타나기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촌각의 순간이나마 감지할 수 있기를...
제발, 하나님, 까마득하게 어른거리는 그의 실루엣만이라도 볼 수 있게...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겠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
낮아질 수 있는 데까지 낮아지고, 초라해 질 수 있는 최저의 바닥까지 자신을 짓뭉개면서 주혁은 간구하고 맹세한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다.
가난한 믿음만이 주혁의, 아니 주혁과 혁수의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장주혁씨."
뻣뻣하게 얼어붙은 누군 가의 음성이 주혁의 절실한 기도의식을 흐트러뜨리자
딱히 한 가지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할 수 없는 그의 눈동자가 뚝 하고 정지하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본다.
주혁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흰 가운 차림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혁수의 담당 의사인 듯 싶다.
아마도 방금 전에 주혁과 마주쳤던 간호원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장주혁씨는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혐오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의사의 말투에서 배어져나오는 뾰족함과 견고함이 주혁의 상처를 더 지독하게 들쑤신다.
하지만 그 쯤이야 수월하게 견뎌낼 수 있다.
그까짓 손가락질과 비판, 멸시와 공격 따위는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아주 당연하게, 초연하게 맞닥뜨릴 수 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알면서도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손 내민 주혁이기에..
".....알아요.. 혁수를 만날 수 없다는 것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지 않을 거에요..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냥...그냥 여기 잠깐만 있다 갈게요. 여기 잠깐만 서 있다가 갈게요..
....그것도 안 되나요..? ...저에겐, 그것도 허락되지 않는 겁니까..?"
주혁의 눈동자가 다시 건물에 달린 창문들에 가서 고정되며 의사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채 입술만 달싹여서 애걸해본다.
설마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심정으로 탄원하지만 부정의 대답이 날아들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열등감이 주혁을 넝마조각처럼 남루해지게 한다.
의사의 낯빛에 당황스럽고 난처하다는 기색이 서리며 얼른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주혁의 옆모습을 멀거니 응시하기만 한다.
주혁은 그에 신경쓰지 않고 좀 전에 중단되었던 정결한 의식을 조심스럽게 이어 붙인다.
더 뜨겁게, 더 안타깝게, 더 서러운 영혼의 외침을 뻗쳐올리는 주혁의 눈가에 숨겨두려 애쓰던 물기가 고일 때 쯤..
어지럽게 방황하던 그의 검푸른 구슬이 한 지점에서 멈춘다.
그와 동시에 서서히 하강하던 눈꺼풀이 삽시간에 번쩍 치겨떠지며, 쌍커풀 없는 단아한 눈매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돌변한다.
그리 높지 않은 층에 일렬로 매달려 있던 유리창 중의 하나가 침침하게 드리워진 커튼 자락을 살며시 벗어내며 혁수의 형상을 공개해준다.
희미한 윤곽만이라도 눈 속에 담아두기를 기원하던 주혁에게,
또렷한 혁수의 외양 그 자체가 고스란히 다가오자 주혁은 신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와 은총에 감격한다.
그리고, 와인빛 머리카락과 슬픔이 깔린 차분한 갈색 눈망울과 단정하고 깔끔한 몸맵시까지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혁수를 보며, 안도감과 함께 철저한 별리를 실감하는 주혁..
괜찮은 거야..? 내가 곁에 없는데도, 너...견딜만 한 거야...?
아니,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지..? 그렇지..?
내가 터무니 없는 떼를 쓰고 있는 거지..?
얼토당토 않은 착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수 십개의 물음표를 부여담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며 넘실대는 주혁의 눈동자가 결국은 혁수와 맞닿는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혁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갑자기 주혁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간신히 주혁의 가벼운 체중을 지탱하고 있던 두 다리가 꺾이며 주혁은 또 다시, 무릎을 꿇는다..
- 팔레트에 만들어진 물감의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눈살을 찡그리며 흰 색을 조금 더 섞어보는 혁수..
몇 번 더 여러가지 색의 물감을 배합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붓을 캔버스로 가져간다.
수 백개의 노오란 불빛들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모여드는 듯한
언뜻 보기에는 의미를 읽어내기가 상당히 모호한 그림을 신중하게 완성시켜 나가는 혁수..
섬세한 손길로 붓끝을 놀리다가 아무래도 빛이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간다.
팔을 뻗어 두껍게 내리쳐진 커튼 자락을 좌우로 젖히자, 화사한 빛 줄기가 투명한 유리를 통과하여 병실 안으로 사뿐히 낙하하고,
혁수는 눈이 부신 듯 한 손을 이마에 대고 햇살을 차단하며 멀리 보이는 근교촌의 풍경을 잠시동안 감상한다.
그러다 작업 중이었던 그림을 떠올리고 몸을 돌이키려 하는데,
주차장 한 귀퉁이에서 태양빛을 반사시키는 은색 승용차가 시야에 잡혀오자 혁수는 무지근하게 굳어버린다.
뇌의 중추에서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시세포라는 감각기관은 자기 멋대로 급절하게 이동하며 아래 쪽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서 있다.
'연청색' 그가 바로 그 자리에 서서 혁수에게 묻고 있다.
너무 한 꺼번에 여러 가지를 물어와서, 혁수는 무엇부터 먼저 대답해서 그를 안심시켜 주어야 할 지 갈팡질팡하기만 한다.
아니, 대답하는 게 급선무가 아니다.
이번에도 대뇌의 신경중추가 하달하는 명령과 관계 없이 혁수의 두 발이 바닥을 박차고 문 쪽으로 내달린다.
뛰어서 5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그를 두고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주혁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서 있던 건지,
그 옆에서 주혁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냉랭하고 경직된 표정을 짓는담당의사도 혁수의 사정거리 밖에 존재하는 부차적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병실 문은 닫히는 순간 밖으로 잠겨지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라는 것 또한 새까맣게 잊어버린 혁수..
꿈쩍도 하지 않는 육중한 목재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씨름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가차 없이 메다꽂는 그의 입에서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분출한다.
"문 열어!! 제발, 제발 한 번만 나가게 해 줘..!! ...나가게 해 줘..!!!"
그러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간호원을 비롯한 보안을 맡고 있는 사내들이
―혁수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명분이 이곳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버둥거리는 혁수의 사지를 틀어잡고 단단하게 결박한다.
간호원은 잽싸게 창가로 달려가 커튼을 치고, 진정제 성분을 주사기 안에다가 채 워넣는다.
"이거 놔!! ...그애가 왔어, 저 아래에 그 애가 있단 말이야!!
....제발 나 좀 놔 줘요...제발 이번 한 번만 허락해 주세요...
그 애가 찾아왔잖아요, 네?? ...가 버리면 어떡해...그냥 저렇게 가게 놔 둘 수는 없어..!!
그럴 수는 없어.... 혁아....그럴 수는...."
발악적으로 저항과 몸부림을 거듭하던 혁수가 터져나오는 흐느낌과 더불어 최후의 수단으로 애원과 간청을 서슴지 않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혼곤한 가사상태로 빨려드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숨가쁜 아우성에 파묻히는 참담함 뿐이었다..
(98)
욕실 안의 허공을 그득하게 메우는 수증기 분자들로 인해 하얗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슥슥 닦아내는 강태..
이윽고 동공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자신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거울에 한 쪽 손을 짚은 자세로 오랫동안 서 있는다.
오똑하게 솟아오른 콧마루를 만지작거리다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쇄골을 문질러보기도 하고..
그렇게 한참을 실없는 장난질에 열중하던 그가 자꾸만 들러붙는 상념들로부터 탈출하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흰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욕실 밖으로 나온다.
벌써 친숙하게 느껴지는 호텔 방의 풍경이 강태의 눈앞에 성큼 다가서고 터덜터덜 발을 움직여 냉장고 쪽으로 향하는 강태..
맥주 한 병을 들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준태가 이르는 대로 이곳 호텔에 머문 지도 일주일이 넘어간다.
재준과는 이틀 전부터 연락이 끊긴 상태이다.
준태는 회장님께서 결정하신 일이라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아마 재준이 자신의 안전을 염려해서 잠시동안 연락을 두절하기로 한 모양이라 스스로 짐작하며 자신을 안심시키는 강태였다.
단지 그는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그렇게 세뇌시키면서 편안한 마음 - 물론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 을 가지려고 애써본다.
재준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잠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버거운 허전함을 퍼부어 주므로,
되도록 술에 취하고자 제대로 받지도 않는 알콜 성분을 내장 속에 들이붓는 강태..
쓰게만 느껴지는 액체를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미묘한 고통과 희열을 함께 맛본다.
마치 재준과의 섹스가 그렇듯이, 술을 마시는 행위도 두 가지의 모순된 쾌감을 안겨준다.
비좁은 자신의 공간으로 재준의 단단한 육체를 받아들일 때, 그 고통을 극치의 희열감으로 승화시키는 역설적 행위..
보편적인 기준으로 따지면 더럽고 추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예술이다.
서서히 술기운이 감도는 탓에 몽롱하게 이완되는 강태의 동공이 그를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표정으로 바꾸어가고,
정말 흐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깊숙이 고개를 떨구는 그의 귓가에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강태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탈진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대답한다.
"Yes, come in"
발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준태였다.
강태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창 밖의 야경에 시선을 던지며 심드렁한 말투로 묻는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나 이제 잘 거니까 그만 들어가셔도 돼요.."
"아, 그게 아니구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도련님.."
"예, 말씀해 보세요."
"딴 게 아니고 회장님께서 내일 당장 도련님을 귀국시키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갑자기 명령을 내리셔서 저도 당황스러운데 그래도 회장님께서 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그래서 내일 저녁 비행기로 떠나시게 될 겁니다. 그걸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내일 귀국한다는 거?!"
"예, 그렇습니다. 제가 모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준태씨가요? 준태씨는 홍콩에서만 일하시는 거 아닙니까?"
"회장님께서 저도 함께 들어오라고 하셔서요.. 아무래도 큰 일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짐 챙겨 놓고 준비하도록 하죠.."
"예, 도련님.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준태가 문을 닫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동작을 눈으로 쫓던 강태가 맥주병을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무언가 초조하거나 들뜨는 일이 생겼을 때의 버릇대로 방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한다.
그러면서 집약적인 몇 개의 단어들을 상기한다.
내일, 떠난다, 그에게로.
이상스레 한켠을 비집고 기어나오는 불안심리는 소심한 조급증 때문이려니 무시해 버리고,
어김없이 꽉꽉 들어차는 환희와 열정에 흠뻑 젖어보는 강태..
소식을 듣기 전까지 쟂빛으로 채색되어있던 주위의 사물들이
어느새 해사한 봄날의 색깔을 입고 활기차게 피어나는 광경을 조금은 쑥스럽게 지켜보며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한 남자의 결정에 따라 울고 웃는 자신이 주체성을 잃어버린 한심한 인간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와 계약을 맺은 처음 순간부터 시작된 일이기에..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자발적으로 존재의 절대성을 그에게 헌납한 강태이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다만, 찾고 싶은 거다.
자기 자신 속에서 내쳐버린 절대성을 그에게서 찾고 싶은 거다.
하얗고 투명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비춰보일 수 있을 거라 믿는 그에게서 말이다.
- "차를 저 쪽에 세워놓았습니다, 도련님."
준태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틀며 걸음을 옮기는 강태..
까만 선글라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눈동자 때문에 그의 심적 상태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입술을 다문 채 걷던 강태가 자동차 좌석에 올라타자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술을 뗀다.
"준상씨는 안 나왔어요?"
강태를 수행하는 일에는 언제나 준상을 보내던 재준이기에, 낯설은 얼굴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의아해하며 질문하는 강태..
"김실장님께서는 지금 일본에 계십니다.."
"귀국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안 돌아왔나...? ...사무실로 가는 거에요?"
"아니요. 회장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 쪽으로 모셔오라고 하셔서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강태는 시트에 상체를 맡기고 목을 뒤로 약간 젖힌다.
경미하게 느껴지는 현기증을 떨쳐내려고 몸에 힘을 풀며 잠을 청하는 강태..
그러나 '수면'이라는 휴식 대신 무방비 상태의 생각의 고랑 속으로 빠르게 묻혀든다.
부르릉거리며 작동하는 엔진소리가 그치고 건들거리는 차체의 리듬이 안정되자 강태는 감았던 눈을 뜬다.
생소한 바깥 풍경에 어리둥절해하며 유리창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데, 옆에 동행해 온 수행원 중 하나가 문을 열어주며 내리기를 재촉한다.
"내리시죠.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태의 말에 의구심을 접으며 그가 인도하는대로 따라나서는 강태..
처음 보는 아담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제일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방문 앞에 멈춰선 준태는 문을 열어제치며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한다.
"이 안에 계십니다."
활짝 웃어야 할지, 심통이 난 듯 뾰루퉁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하찮은 고민거리를 가지고
그 짧은 시간에도 수십번씩 생각을 고치고 있는 강태에게 재준의 말간 얼굴 대신, 생면부지의 사내가 환영인사를 건넨다.
"이제야 오셨군, 강태군.."
섬찟한 냉기가 진저리를 치며 척추를 타고 발꿈치까지 휩쓸려 내려가는 끔찍함에 강태의 전신이 빳빳한 경기를 일으킨다.
확대된 망막 안에 새겨지는 사내의 낯을 아무리 곱씹어 확인해 보아도 강태의 기억 속에는 그 자의 신원이 입력되어 있지 않다.
"...이,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불안정하게 균형감각을 깨뜨리는 강태의 눈동자가 뒤에 서 있는 준태에게로 돌려지며
돌발적인 상황에 대해 따지듯 설명을 요구하지만, 슬쩍 고래를 기울여 강태의 시선을 외면하는 준태..
거기서부터 영리한 강태의 두뇌는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파악해낸다.
자신이 속았다는 것. 아니, 재준이 속았다는 것을.
삽시간에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쳐 오는 공포와 긴장이 아직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않은 재앙의 한 가운데에 강태를 꽁꽁 묶어놓는다.
진짜로 자신을 결박하기 위해 다가오는 민성회의 조직원들을 무력하게 쳐다만 보며.. 강태는 정해진 순서대로 자신의 주인을 떠올린다.
- "주혁이는 아직 안 들어온거야..?"
턱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돈하며 부담 없는 관심이 배어나는 음성으로 묻는 태현..
맞은 편 쇼파에 비스듬히 몸을 묻은 재준이 담배에 라이터를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첫 모금을 뿜으며 서툰 염려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근심을 수반한 말투로 입을 연다.
"....혁수형 있는데 들렸다 오잖아, 매일.. 진짜 하루도 안 빠지고 가는데, 나 이제 포기했어.. 저렇게 고집센 인간도 강태 이후로 처음이다.."
"풋... 강태는 고집이 세기보다는 자존심이 강한 거 아니냐?"
"그런가? ...에이 씨, 하여간 형들이나 우리나 하나 같이 지랄 같은 꼬라지야.. 씨발..."
담배 피우기도 귀찮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필터를 쑤셔박고 눈살을 찌푸린 채 시선을 저만치 앞 쪽으로 밀어내는 재준..
태현은 옅게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빙글빙글 돌려댄다.
어색하지는 않지만, 제 3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다지 유쾌하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정적 사이로 찝찌름한 내음새를 풍기며 흘러드는 우울과 피곤이 태현과 재준을 지치게 한다.
그 무기력한 상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생각인지,
태현이 의식적으로 표정을 생기 있게 바꾸며 무언가 유머러스한 몇 마디를 지껄이려고 하는데,
재준의 주머니 안 쪽에 들어있는 핸드폰에서 울리는 벨소리가 그의 입술보다 더 빨랐다.
"예, 이재준입니다."
"회장님, 저 준상입니다!"
핸드폰을 박살낼 것처럼 난폭하게 전파를 타고 귓전을 때리는 준상의 목소리가
유달리 다급하면서도 흥분되어있다는 것을 감지하자 재준 역시 신경의 끈을 바짝 조이며 묻는다.
"무슨 일이야??"
"방금 홍콩에 있는 애들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도련님께서 연화회 쪽으로 끌려가신 것 같습니다."
"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최준태 이 새끼가 연화회에 붙은 모양입니다. 회장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도련님과 함께 귀국했다고 하는데..."
발바닥과 마주댄 지면이 기우뚱하고 한 쪽 방향으로 쏠리는 듯한 착각에 덩달아 평정을 놓치려 하는 정신을 그러잡으며,
재준은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지금 당장 연화회 조문환 위치 파악해. 보고는 30분 후에 받겠다."
(99)
당신의 고통을 어쩌지 못하는 나의 괴로움이 얼마나 큰 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 <천년의 사랑> 중 -
역시, 오늘도 닫혀 있다.
철두철미하게 가리워져 주혁의 시야로부터 차단된 그의 공간..
아니, 그가 현재 잠시 머물러 있는 공간은 오늘도 어제와 다르지 않게 폐쇄되어 있다.
안혁수는 장주혁이라는 한 남자와의 접촉을 금지당하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도 격리당하는 중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을까..?
장주혁? 아니면 '사회'라고 이름 붙은 어엿한 공동체로부터의 소외?
부질없는 질문이다.
후자쪽이라면, 혁수는 언제라도 병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이렇게 외치면 된다.
장주혁, 그와 난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러기만 한다면 모든 상황이 해결될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편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처음 이곳에 찾아왔을 때, 조촐한 투명함으로나마 혁수와 주혁을 연결시켜 주던 유리창이 열리지 않는 철제문으로 대체되고 난 후에도..
그래서 혁수의 와인빛 머리카락 한 올조차 얼씬거리지 않는 그 야백색 건물 어귀에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주혁..
알고 있다. 절대로 볼 수 없다는 것.
혁수와 시선을 맞출 수 있던 지난 번 베풀어 주신 신의 은총은
가련한 그의 영혼이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혁에게 내려진 과분한 선물이었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같이 막힌 창문만을 올려다보며,
혹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병동의 정문을 응시하다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단 한번도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는 주혁이다.
다만, 탓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능력함과 혁수를 곁에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뿐이다.
그렇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로 겨누며 수그러지지 않는 고개를 어쩌지 못한 채 야속하리만치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 주혁..
예전에도 몇 번 대면한 적이 있는 간호원 하나가 사무적인 표정 속에 짙은 짜증을 감추고 그에게 다가온다.
"죄송하지만 장주혁씨, 이만 나가주세요."
형식적으로 몸에 밴 상냥함까지 아무 소용 없는 모양이다.
부탁이 아닌 냉랭한 명령 조의 말투가 껄끄럽게 그녀의 입술 사이로 비져나온다.
"가족과의 면회도 이곳에서는 30분을 넘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 저 안에, 혁수가 있나요..?"
거침 없이 쏟아지며 주혁의 고막을 후려치고 그보다 훨씬 아프게 주혁의 심장을 쥐어뜯던
- 혁수와의 불가능성을 더욱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므로 - 그녀의 말에 개의치 않고 질문을 던지는 주혁..
간호원은 순간 멍해진 얼굴로 주혁의 옆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
".... 저기, 막아놓은 저 창문 안에...혁수가 있기는 한 건가요..?.."
"예, 거기가 안혁수씨의 병실입니다."
풀어졌던 표정을 다시 꼼꼼하게 여미며 차분한 음성으로 대꾸하는 간호원에게로 하늘에 꽂혀있던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가 이동한다.
차라리 몇 점의 물기가 어려 있어야 더 나을 듯한 그의 메마른 눈시울이 붉게, 꺼칠하게 물들며 상대방의 무심함과 충돌을 일으킨다.
주혁의 시선을 거북스럽게 받아 쳐내던 간호원이 측면에서 새어드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돌리려 하자,
묵직한 침묵을 쪼개며 주혁의 입술이 비로소 열린다.
"....그 쪽은 혁수를 매일 만나나요..?"
"...뭐, 거의 매일 뵙고 있죠. 제가 돌보는 환자니까요.."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이질적인 질문이 날아들자 흠칫 평형감각을 한 박자 빠뜨리며 어설프게 포장된 견고함을 계속적으로 내세우는 그녀..
잠시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신경질과 경계심이 주혁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여실히 나타나고,
하지만 늘 그렇듯이 주혁은 혁수를 제외한 그 어떤 사물이나 존재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탄식하듯 중얼거린다.
"....그랬어요.. 나도 예전에는 그런 축복을 잠시 가졌었어요......정말로....행복했는데...."
"......."
"부럽네요.. 어떤 식으로든 혁수와 매일 만날 수 있다니.."
"장주혁씨, 전 그런 하소연이나 듣고 있을만큼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그리고, 벌써 몇 번째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제 좀 나가주세요."
주혁의 눈동자가 묘연하게 일그러지며 황폐한 헛웃음을 만들어낸다.
그의 몸이 당장이라도 독한 염산에 녹아 액체로 변하여 아스팔트 위에 께름칙한 흔적을 남길 것 같다.
모르핀 중독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릴 때 맛보았던 근본적인 절망과 한계가 더 강하고 굵은 밧줄이 되어 주혁의 옥죄어온다.
동정심조차 그에게는 받아선 안 될 허영이고 욕심이다.
"....그거 아세요..?"
또 한번 혁수의 병실 창문에 장착된 철제 블라인드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을 던져보는 주혁..
그의 짐작대로 간호원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혁수가 날 봐 주지 않을 때는...난 매일 혁수를 제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어요..
보고만 있어야 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죠..
...그런데 혁수가 날, 나만을 봐 주니까...이제는...나는, 나 하나만은 혁수를 볼 수가 없는 거에요.. 훗...웃기지 않아요..?"
- "바쁠텐데 뭐 하러 이렇게 자주 오냐.."
"자주는 무슨... 며칠동안 작업하느라 오지도 못했구만.."
염려와 감사가 절반씩 뒤섞인 눈빛으로 슬쩍 가벼운 핀잔을 주는 혁수에게 시원스러운 미소를 보내며 대꾸하는 태현..
지난번보다 눈에 띄게 여윈 혁수의 행색에 속으로 의미 있는 한숨을 토해내고 청명한 웃음을 금새 사그라뜨리며 그늘진 낯빛으로 입을 연다.
"...주혁이가 매일 여기 오는 거, 알고 있니..?"
혁수의 어깨가 짧게 진동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은 따끔한 충격을 받았을 때처럼 반사적으로 움찔거린다.
눈가로 다량의 수분이 몰리는 비과학적 현상을 제어하지 못한 혁수의 입술에서 무지근하게 메워진 목소리가 가냘프게 울려 나온다.
"그 때 이후로...매일 온다고..? ...주혁이가..??.."
"....그래. 매일 와서 병신처럼 네 방 창문만 보다가 쫓겨난다더라..
하여간 별 거지 같은 짓거리는 혼자 다 해요. 재준이랑 나도 포기했어, 걔 말리는 거..."
'금연'이라는 표시가 또렷하게 붙어 있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막 나가는 사람처럼 태현은 담배에 불을 갖다대고
혁수는 팔꿈치로 체중을 지탱하며 두 손바닥에 이마를 파묻는다.
거친 호흡을 허파 안으로만 삭히며, 오열하기를 원하는 심장을 힘겹게 짓누르며 치밀어 오르는 응어리를 되 삼키고 분해시키는 혁수..
막아볼 틈도 없이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지고 테이블 위에 여러 가지 크기의 원을 그리며 흐느끼고 만다.
"참지 말고 그냥 울어라. 내 앞에서까지 감추다가는 너 진짜 미친다.."
태현의 말이 기폭제가 되기라도 한 듯 혁수의 울음의 파고가 상승하며 그의 몸짓도, 신음 같은 울먹임도 잦아지고 격해진다.
뜨겁고 씁쓸한 혁수의 눈물 갈래 사이로 겨우 조금씩 흉터를 내보이는 내면의 소리가 태현의 고운 가슴에 함부로 엉겨붙는다.
"....태현아... 내가....내가 제일 가슴 아픈 게 뭔 지 알아..?"
"..............."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미국에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주혁인 혼자서만 날 바라봐야 했어..
그리고 그 애 곁으로 돌아오면서 난 약속을 했었어..
절대로, 주혁이 혼자서 날 바라보게 하지 않을 거라고..
다시는 그 고통 속에 그 애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그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또 이렇게 주혁이를 외롭게 만드는 게....너무...너무 가슴이 아퍼, 태현아..."
"주혁일 볼 수 없어서 힘들어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안혁수.."
시각적 단절, 단순히 그 한가지 때문에 이토록 비참해지는 혁수와 주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본다'라는 물리적, 감각적 행위의 상실이 서로에 대한 감정의 무디어짐보다는
훨씬 커다란 갈망과 목마름을 불러온다는 것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고개를 내젓기만 할 일이다.
"미안해서 어떡해.. 태현아, 나 미안해서 어떡해...
그 약속 하나 못 지키고, 또 이렇게 주혁이 아프게 하는 거 정말 미안해서 어떡하냐구...응..??.."
"....주혁이잖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장주혁이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아니야, 그렇지가 않아.. 그 애가 얼마나 약한 줄 알아?
너무 약해서 이렇게 바닥까지 추락하면서도 나한테서 등을 못 돌리는 애가 주혁이야..
...차라리 날 포기해 줬으면 좋겠는데...그러면 평생 나 혼자서 주혁이 바라보고 혼자서 울다가 죽어버리면 될텐데...
그럼 지금처럼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텐데..."
기어이 태현의 눈망울에도 수치스러운 물방울들이 어리며 암갈색 연못을 이루고, 그의 하얀 뺨을 타고 구르는 자잘한 구슬이 턱 아래로 떨어진다.
"태현아, 네가 주혁이 좀 설득해 주라.. 제발 나 포기하라고 네가 설득 좀 해 줘..
내가 먼저 그 애 외면하는 건 죽어도 못 하니까... 옛날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애더러 날 밀어내라고 해..
그럼 우리 둘 다 공평해 질 거고, 또 편해 질 거야..
그러니까 주혁이한테 나 버리라고 해.. 나 같이 거추장스러운 놈 버리고 편하게 살라고 설득 좀 해 봐, 태현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주혁이가 그 얘길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 같니??
....난 주혁이한테 거짓말 할 거야. 안혁수 그 자식 아주 대견하게 잘 버티고 있더라고 그럴 거야..
그래야 네가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주혁이가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알아 들었으면 이제 제발 너 스스로를 학대하지 마!!"
거칠게 눈가의 물기를 훔쳐내고 벌떡 일어서며 숨을 몰아쉬는 태현..
위 아래로 들썩이는 혁수의 어깨를 울분에 찬 시선으로 내려다 본다.
마침 문이 열리며 간호원이 들어와 면회시간이 끝났음을 일러주고,
울음을 쏟아내고 있는 혁수의 모습에 당황한 그녀가 담당의사를 부르러 달려가자 태현은 발걸음을 떼기 전 속삭이듯 혁수에게 이야기한다.
"....기억 해..? 내가 세라 따라가려고 했을 때, 네가 나한테 와서 그랬지..
너희를 붙잡아 달라고, 살아서 너와 주혁이를 도와주고 너희를 위해 울어달라고..
....만약 너희 둘 중 하나라도 포기해 버린다면.. 그래서 서로를 놓치게 된다면..
난...다시 숨쉬기로 한 이유가 사라지는 거야.."
(100)
"안 됩니다, 회장님."
옷걸이에 걸린 자켓을 가져다가 소매에 팔을 끼워넣는 재준에게 준상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며 제법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저지한다.
그러나 재준은 청각이 마비된 사람처럼 무반응인 채로 자켓의 단추를 채우고 옷 매무시를 정돈하는데 열중한다.
"혼자 가시다니요, 대체 어쩔 작정이십니까!?"
자신의 간곡한 염려와 노파심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재준에게 섭섭한 마음보다는,
적진의 소굴에 혼자서 아무 무기도 소지하지 않고 떠나려하는 그의 무모함이 기가 차기만 하다.
쌓이는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준상은 대들 듯이 재준에게 항의에 가까운 물음을 날리고
그제서야 침착한 표면 안 쪽에 미묘한 긴장을 감춘 재준은 눈동자가 준상을 마주본다.
"분명 연화회에서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회장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아니, 그게 아니야. 강태는 그 새끼들이 데리고 있어. 단신으로 가지 않으면 약속 불이행으로 강태가 다칠 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도 회장님 혼자서는 절대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그 악랄한 새끼들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압니까?! 저만이라도 수행하게 해 주십시오!"
강경하게 버티고 서서 재준의 앞을 가로막는 준상의 눈자위에 불긋불긋한 핏발이 서리고, 재준은 짧고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술을 연다.
"이건 서툰 장난질이 아니야.
담보로 잡혀 있는 건 강태의 목숨이고, 저 쪽이 노리는 게 충의회인지, 아니면 다른 건지 그것도 파악할 수 없는 상태라구.
억지 부리면서 뻗딩겼다가는 부러지는 수가 있어. 굽힐 때는 굽히는 게 현명한 거야."
"하지만 그러다가 혹시라도...!?"
방정맞게 끄트머리를 장식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갑자기 오그라드는 자신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결국은 미완성의 의문을 던지는 준상..
속수무책으로 대기 중일 때 비명처럼 날아들 재준의 부재(不在)를 상상하니 본능적으로 몸서리가 처진다.
재준은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는 듯 다리를 움직여 빠른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고
준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급격하게 차오르는 호흡곤란 증세를 완화시키려 부자연스러운 한숨을 뱉어낸다.
자동차 열쇠를 손에 주고 직접 운전석에 오르는 재준을 지켜보며 내장이 뻐근한 송구함과 자책감을 느끼는 준상..
재준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너무 지나친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시동을 걸고 엑셀레이터에 무게를 가하려하는 재준에게 준상은 마지막으로 매달려본다.
"회장님, 그럼 근처까지 만이라도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됐어. 위험부담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해.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무실에서 대기해..
내가 연락할 때까지는 주혁이 형 외에 아무한테도 이 사실 알리지 말고.. 알았지?"
"...........예.. 회장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보스의 명령인지라 마지 못해 긍정의 대답을 올리는 준상..
그의 날카롭고 가느다란 눈매가 둥글게 휘어지며 어리숙한 소스라침을 내비치고
재준은 그런 준상에게 깊은 시선을 한동안 머물게 한 후 왼손을 들어 준상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준다.
재준의 유별난 격려표시에 황송해진 준상은 얼른 허리를 숙이고 재준은 고개를 돌려 앞 쪽을 바라보며 신경조직과 근육돌기 하나하나에 힘을 준다.
그리고, 차를 출발시킨다.
- 손목에 차여진 수갑에서 전달되어 오는 싸늘한 촉감에 오돌오돌 돋아있는 소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강태..
그를 감시하기 위해 붙어있는 민성회의 조직원 두 사람은
경비병 노릇이 꽤나 따분하고 심심하다는 듯 하품을 쩍쩍 해대며 시덥지 않은 잡담을 주고 받는다.
음담패설을 주절거리며 허리가 휘어지도록 웃다가 그 얘기도 동이 났는지 이제는 멍청한 침묵을 지키고 앉아있다.
강태는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추리하고 예측하는 것에 온 기력을 쏟아 부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는 뇌의 소모전에 정신이 탈진해 버렸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가장 선명히 남은 결론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되어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 또 거기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철저한 존재감 박탈이다.
그것도 자의적이 아닌, 타의에 의하여.
"아아~ 지겨워 죽겠네.. 야,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는 거냐?"
"몰라, 형님이 또 명령을 주시겠지, 뭐.."
라이터를 가지고 불을 켰다 껐다 하며 해까운 장난을 계속하던 남자가 진력이 난다는 표정으로 라이터를 탁자에 팽개치며 묻자,
맞은편에 자리한 동료가 밀려오는 졸음을 쫓으려는 듯 기지개를 쭉 펴며 웅얼웅얼 대꾸한다.
"근데...이재준이 호모였어? 전혀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쳇, 알게 뭐냐.. 그런가 보지. 너 이재준 얼굴이나 본 적 있어?"
"응. 강남에 있는 무슨 룸살롱에서 본 적 있어..
소문대로 딱 보기에는 삐쩍 마른 게 한 대 치면 픽 쓰러질 것 같이 생겼어. 근데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더라구..."
"하긴 그 나이에 충의회 회장이 됐으니, 주먹이 얼마나 엄청나겠냐.."
"주먹 세면 뭐하냐? 이렇게 약점 하나 잡히니까 꼼짝 못 하잖아.."
강태의 목구멍으로 침덩어리가 넘어가며 귓가를 윙윙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가 볼륨을 높인다.
자신의 재준에게 하나의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한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부정하기 위해 입술을 떼려하지만,
그 명료한 타당성에 간단히 꺾여버리는 자존심과 당당함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강태는 더욱 굳게 혀를 고정시킨다.
울고 싶지만, 그 눈물의 이유가 무서움이 아닌 서러움과 그리움에 닿아 있기에 흥건히 젖으려 하는 흑빛 눈동자도 독하게 말려버린다.
"야, 그래도 이재준이 저 새끼한테 푹 빠진 게 이해가 간다. 내 평생 저렇게 예쁜 남자는 처음 본다, 진짜...
색기가 아주 좔좔 흐르는 게... 이재준이 녹을만도 하지.."
"연화회 회장도 쟤한테 완전 미쳤다며??"
"그래~ 이번 일도 그런 속셈에서 벌인 건지도 모르지..."
"우와~ 저 새끼 하나 때문에 조직의 사활을 건단 말이야?"
"사람 눈깔이 뒤집히면 뭔 짓을 못해... 야,야.. 근데 저 새끼 진짜 죽인다..야! 너 이름이 강태라고??"
음탕한 감탄의 눈빛으로 강태의 몸을 훑어 내리며 질문하는 사내에게 강태는 무응답을 내세우고,
남자는 그런 그의 태도가 재미있다는 듯 고조된 음색으로 다시 묻는다.
"어려 보이는데...나이가 몇이냐? 스물은 넘었냐??"
".............반말 하지 마. 당신이 나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떨구고 있던 고개를 스르르 들어 퀭한 빛을 발산하는 동공으로 정확하게 사내의 얼굴을 직시하며 쏘아 붙이는 강태..
형편없이 망가져버린 자신의 프라이드에 대한 책임을 모두 그들에게 떠넘기는 것처럼
적의와 증오가 팽만한 그의 음성에 그러나 사내는 오히려 웃음을 짓는다.
"쿡... 역시 미모만큼이나 도도한데? 남자한테 몸 팔아서 먹고사는 주제에 콧대 세우기는...
그래봤자 네 까짓 게 침대 아니면 어디에 쓸모가 있겠어..?"
"......................."
"....뭐....그게 이재준의 침대든 조문환의 침대든... 그건 별 상관 없겠지..?.."
- 재준의 자동차가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룸살롱 입구 앞에 정지한다.
차 열쇠를 웨이터에게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서자, 노닥거리고 있던 호스테스들이 직업적이 교태로운 미소를 띄우며 재준을 맞아 들인다.
그런 그녀들을 제지하며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가 재준에게 다가오고,
재준의 전신을 더듬어 무기를 지니지 않았는지 수색한 후 짐짓 매서운 말투로 확인질문을 날린다.
"혼자 오신 게 분명합니까?"
"보시다시피."
"이 쪽으로 오십시오."
앞장 서는 사내의 뒷통수를 응시하며 의식적으로 재준은 경직되는 신체기관들을 부드럽게 풀어주려 애쓴다.
상대에게 겁먹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조문환이 기다리고 있는 밀실로 들어가기 전, 재준은 포켓 속의 주먹을 움켜쥐며 빨라지는 맥박을 지그시 단속한다.
그리고 또렷하게 시야를 틔워놓는다.
"충의회 이재준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남자의 손짓에 재준은 밀실 안으로 발을 옮기고 흔들림 없는 단단한 눈동자로 문환을 바라본다.
문환의 옆에 앉아 술시중을 들던 여자가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문환은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은 채 재준을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연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의 인사 속에 굵다란 줄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눈치 챈 재준..
두뇌를 신속하게 회전시키며 대신 성급히 튀어나오려 하는 말들은 일단 진중하게 눌러 삼킨다.
"앉으십시오, 이회장. 협상을 시작해 봅시다.."
(101)
주차장으로 향하는 태현의 발걸음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밀착되었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이상하게도 그의 커다란 눈망울이 조금씩 더 축축해진다.
사실 혁수 앞에서는 모질게 억누르고 있던 눈물줄기가 혁수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는 든든한 안도감 때문에 스물스물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길다란 앞 머리카락으로 행여나 민망한 읍소를 들킬세라 가리개를 드리우고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자신의 하얀색 승용차로 걸어가는 태현..
어깨 부근에 느껴지는 누군가의 손길에 흠칫 얼룩진 눈가를 씻어내며 뒤를 돌아본다.
생소한 얼굴의 사내가 부산스레 눈물 자국을 지우느라 바쁜 태현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인지 멋쩍은 웃음을 보낸다.
태현은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남자에게 자신을 부른 목적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태현의 눈빛을 읽은 남자가 두 어번 마른기침을 뱉어내고 입술을 열어 생김새와 어울릴 법한 투박스런 음성을 들려준다.
"저어.... 안혁수 학생 만나고 가는 길이지..?"
"아, 예.. 그런데요.."
"저기, 그러면 매일 같이 여기에 찾아오는 그 곱상하니 잘생긴 청년이 있는데, 그 친구하고도 아는 사인가..??"
"혹시....주혁이 말씀하시는 거에요..?"
"아, 맞아! 그 청년 이름이 주혁이라고 하더만. 그 사람 하고도 아는 사인가 보지?"
"예, 제 친굽니다. 근데 무슨 일로 물어보시는 건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반말을 쓰는 태도가 무례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친근하고 정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 꽤나 흥미로운 사내였다.
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사내와의 대화에 휩쓸려 들어가며 의구심과 기대가 적당히 버무려진 암갈색 눈동자를 상대방에게 붙박는다.
"으음~ 저기 말이지, 지금 시간 있으면 나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난 여기 보안 담당원인데... 뭐, 쉽게 말하자면 경비원이나 마찬가지지..어쨌든, 여기서는 곤란하고 저 쪽에 조용한 데서..."
".....뭐, 그러죠..."
미미한 의혹보다는 강렬하게 솟구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태현이
별다른 망설임 없이 사내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둘은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후미진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어색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보려는 계산에서 남자는 태현에게 담배를 권하고 태현 또한 비슷한 의도에서 그가 내민 담배를 선선히 입에 문다.
얼마간의 정적이 이어진 후, 선뜻 화두를 꺼내지 못하는 남자의 주저함을 없애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태현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저기~ 엄청 중요한 얘기인 것 같은데.... 말씀해 보세요, 어려워하시지 말고.."
따뜻한 미소와 함께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로 은근한 재촉을 들이미는 태현에게 아까처럼 쑥스럽게 웃어 보이는 사내..
"어어~ 우리, 통성명이나 하지.. 난 전상현이라고 하는데, 학생은 이름이 어떻게 되나?"
"저는 문태현이라고 합니다."
"나이도 나보다 한참 어린 것 같으니까 그냥 태현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예,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응, 거 참 사람이 시원시원하니 성격이 좋구만...!"
"하하... ^^; 근데 하실 말씀이..."
"아, 참! 본론을 얘기해야지.."
담배를 흙바닥에 떨구어 신발 밑창으로 비벼 끈 후, 검지 손가락으로 눈썹 언저리를 긁적이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요모조모로 생각해보던 상현은 혓바닥으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좀 전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현의 고막을 두드린다.
태현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딱 절반의 분량으로 나눌 수 있는 궁금증과 기대심리의 혼재 속에서 상현의 말을 기다린다.
"그~ 사실 말이지... 맨 처음에 혁수 학생 여기 들어왔을 때, 얘기 듣고는 정말 뭐 그런 미친놈들이 다 있나 - 이런 생각만 했었거든??
뭐, 지금도 이해는 안 가. 아무리 어머니가 다르다고 하지만 한 형제끼리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수 십번도 넘게 들어왔던 이야기여서 그런지 태현은 별다른 감정의 내색 없이 묵묵하고 초연하게 상현의 말을 받아넘긴다.
일렁임이 보이지 않는 단정한 눈빛을 유지하는 태현에게 약간 무안해하는 듯한 기색을 드러내며 상현은 다시 입술을 벌린다.
"솔직히 까놓고 얘기하자면 나도 같은 남자끼리 그러는 건 밥맛 없어.
지저분하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남자끼리 껴안고 뒹구는 건 진짜 역겹지만...
으음~~ 뭐라고 얘기해야 되나... 그래, 그러니까 혁수 학생이랑 주혁이라고 하는 그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이거지..."
침울하게 저하되어 있던 태현의 낯빛이 두꺼운 차양막을 한 꺼풀 벗겨내고 한결 생기가 감도는 눈망울로 상현을 올려다본다.
그러자 훨씬 자신 있는 어투로 목소리를 돋구어내는 상현..
"아니~ 그냥 매일 같이 찾아와서 창문만 쳐다보고, 한숨 쉬고 눈물 뚝뚝 흘리고...
그러다가 쫓겨나고 하는 걸 보니까 별 상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마음이 영 아프더라구...
같은 남자한테 그렇게 목매달고 안달복달하는 게 이해는 안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애가 타면 저럴가 불쌍하기만 하고 말이야...
나같은 놈이 둘 사이에 끼여든다는 것 자체가 우습기는 한데, 그래도 도와줘야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아..
뭘 바라고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니까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는 말고.."
"저어.... 어떤 식으로 도와주시겠다는 건지..."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예의도 무시한 채 성급히 달려드는 태현을 너그럽게 포용해주며,
상현은 조금도 불쾌해 하거나 짜증스러워하지 않고 친절히 대답한다.
"다른 게 아니라, 잠깐이라도 두 사람...만나게 해 주고 싶어서..."
"저, 정말이요?! 그게 가능한가요??"
순식간에 크기를 확대시키는 태현의 눈동자가 사뭇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팽팽한 긴장과 충만한 바램으로 뭉친 그에게 실례가 될까봐 번져나오려 하는 웃음을 지그시 삼키며 상현은 말한다.
"여기 보안 담당원들이 한 사람 씩 돌아가면서 야간당직을 서 거든..
새벽 1시쯤 되면 간호원 몇 명이랑 의사 한 두 명 빼고는 전부 잠들거나 퇴근한 상태니까 잠깐동안 여기서 나가게 해 줄 수 있어..
물론 아침까지 돌아와야 하지만, 그래도 매일 닫힌 창문만 멀거니 쳐다보다가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계속 이러다가는 혁수 학생이나 주혁이라는 그 사람이나 둘 다 병나겠어..
특히 혁수는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진짜 무슨 일 생길 것 같아..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데.. 겪어본 사람은 다 알지만..."
"정말,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둘이 만날 수 있는 거에요!?"
"그래봤자 일주일에 한 번이고 오래 같이 있지도 못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둘이 만난다는 게 중요하죠~!!"
어깨를 뒤채이기까지 하면서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는 태현의 모습에 상현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한다.
가능성조차 점쳐지지 않았던, 그래서 놀랍고 갑작스럽기만 한 뜻밖의 행운이 가까운 미래에 반짝이고 있었음을 알게 되자
비로소 태현은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절대적 존재의 손길에 겸허해진다.
그리고 그 절대자의 대리인으로 등장한 듯한 상현에게 그제야 고마움을 표시한다.
"고마워요, 정말...! 그렇게 도와주시다가 상부에서 알게 되면 피해를 입으실 텐데..."
"에~이, 괜찮아.. 뭐, 짤리기 밖에 더 하겠어? 쳇, 내가 이 나이에 여기 말고 일 할 데 없겠냐..?
보수가 좋아서 몇 개월동안 소개 받고 있었는데, 살벌해서 일 할 맛도 안 나고...
요양소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요양소냐? 완전히 정신병원이구만..."
쌓였던 불만들을 토로하며 동시에 태현의 께름칙한 부담과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상현에게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속으로는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한 천행의 초대를 곱씹는 태현..
설레임과 두근거림으로 한껏 상기된 그에게 많이 차분해진 상현의 음성이 들려오고,
태현은 번갈아 아른거리는 혁수와 주혁의 잔상에서 깨어나며 상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나도... 한때 지독하게 좋아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참,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 모르지~~ 아주 피를 말리는 게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더라구...
이 빌어먹을 정신병원 안에서는 그런 것도 몽땅 정신병으로 취급되니까 소용없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게 진실이라는 걸 모른 척 하고 눈감고 있기에는 갑갑해서 주책 맞게 나서는 거야..
아무튼 주혁인가 하는 사람한테 전해 줘.. 정확한 날짜랑 시간은 전화로 알려줄 테니까 네 연락처 하나 적어주고..."
태현은 그의 입술이 다물어지기도 전에 재빨리 가방에서 펜과 메모지를 꺼내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기재하고 야무진 동작으로 상현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예전보다 선명하고 확연하게 그려지는 혁수와 주혁, 마지막에 남겨지는 세라의 얼굴을 차례로 응시하며 이번만큼은 홀가분한 미소를 띄운다.
- [다음주 화요일 새벽 1시에, 요양소 정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해. 20분 정도 일찍 나와있는 게 좋을거야, 아마..]
- "예, 알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상현이 형.."
[ 그 소리 좀 그만 해라, 지겨워 죽겠다..
그리고 아침 6시까지는 혁수가 돌아와야 하니까 요양소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102)
"며칠 새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 지셨습니다. 안 그래도 마르신 분이..."
이번에도 저변에 흐르는 조소 어린 말투가 문환의 입술 밖으로 뱉어져 나온다.
재준은 아무 대꾸 없이 황량하고 메마른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기만 한다.
타인 앞에서의 감정의 절제, 그것은 재준이 잉태되었을 때부터 지니기 시작한 천연의 고유한 속성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러한 배아적 본능 때문에 청년의 한 때를, 아니 남은 인생 전부를 회오와 고독으로 점철하게 될 수도 있는 위험요소가 그의 안에 존재한다.
재준 역시 그것을 들여다 보고 있음에도 저토록 냉정한 표정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다.
시작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졌던 환경, 그리고 100%의 홀로서기를 강요하던 그의 유년과 사춘기에서 연유한다 해도 옳을 것이다.
적어도 이 정도는 이야기해 두어야 이재준이라는 남자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으리라.
여하튼 이제는 재준이 입을 열 차례다.
그의 작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진다.
"당신이 지금 가둬두고 있는 사람이 누군 지 알기나 해..?"
말끝이 구부러지면서 동시에 재준의 까만 눈매가 뾰족한 날을 세우며 문환에게 달려든다.
존댓말 따위 집어치우고 격노의 불꽃을 피우는 재준의 태도에 오히려 흡족한 냉소를 머금는 문환의 얼굴이 섬뜩하고 치욕적인 불안감을 재준에게 선사한다.
"알고 있어. 네가 끔찍하게 애지중지하는 네 정부잖아.."
"당신이 보기에는 그렇겠지.."
"그럼 뭐, 낯간지럽게 '애인'이라는 말이라도 써 줘야 되겠나?"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조잡한 수준에서 끝나는 사이는 아니란 말이야.."
"쳇, 미친놈... 그래봤자 너나 나나 똑같은 깡패새끼고, 강태 그 자식은 기껏해야 남자한테 몸 파는 남창 밖에 더 되겠어..?"
"한번만 더 그딴 소리 입에 올리면 혓바닥을 뽑아버릴 거야."
"호오~ 내 혓바닥이 뽑히고 나면, 그 다음에는 강태 심장에 구멍이 뚫릴걸?"
강태가 현재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결정적 사실으르 재준에게 주지시키는 문환..
수치를 높여가며 끓어오르던 혈기를 식히며 경솔하게 빗나가려 하는 분노의 덩어리들에 제동을 거는 재준..
두 사람 사이를 또 한번 꽉꽉 메우는 정적이 원인불명의 중압감으로 재준의 관자놀이를 압박해오자,
재준은 기분 나쁜 통증을 방지하려는 듯 서둘러 침묵을 깨뜨린다.
"짜증나는 말다툼은 관두고, 협상이나 하지. 간단하게 마무리지었으면 좋겠어. 난 뒤끝이 찝찝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거 반가운 소리네. 나도 마찬가지야. 깔끔하게 쇼브 치고 끝내자구.."
느물거리는 말투로 중얼대며 문환은 양주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재준의 잔에도 반투명한 갈색 액체가 채워진다.
갑자기 밀려드는 갈증에 당장이라도 단숨에 술을 들이키고 싶지만 힘들어하는 모습을 내비칠 수는 없기에
그 대신 재준은 자꾸만 뒤처지는 대화의 흐름을 빨리하려고 바로 중심으로 돌입한다.
"뭐 때문에 강태를 잡고 있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충의회를 원한다면 전부 주겠어.
덤으로 내가 이 쪽 세계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지.
그럼 서울·경기 지역에서 연화회에 대항할 만한 조직은 없을 거야.
어때? 아주 만족할 만한 조건 아닌가??"
".......아니, 전혀."
기계적으로 튀어나오는 문환의 대답에 재준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 창백하게 질린다.
무력하게 허물어지는 그의 낯색에 문환은 즐겁다는 듯이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워낸다.
"하하하!! 이재준 표정 변하는 거 정말 재밌는데?
이렇게 스릴 넘치는 구경은 처음이야.. 하긴 내 대답이 상당히 충격적이지?
그럴 거야.. 너야말로 머리 돌아가는 수준이 거기거 거기 밖에 안 되니까...
넌 네가 아주 대단한 놈인 줄 알고 있는데, 파헤쳐 보니까 별 거 아니더구만..
겁대가리 없이 설치는 거 빼고는 이 바닥에 널린 또라이 같은 놈들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어..
그런데도 잘났다고 깐죽대는 꼴이라니..."
뇌 속에 분포한 혈관들이 한꺼번에 마비증세를 일으키려 하는 것을
억지로 두들겨 깨워내며 재준은 딱딱한 치아로 섬세한 혀에 지속적인 공격을 가한다.
여기서 휘청거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쳐 보지만
이미 경고의 표등을 접수한 재준의 이성적 시스템은 그에게 '패배'라는 낯선 단어를 속삭여 준다.
그래도 아직 도리질 치며 주먹에 쥔 힘을 풀지 않는 재준이다.
"너한테 잘 된 일인지 안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충의회가 가진 구역이나 지분 같은 거, 그다지 욕심 나지 않아.
뭐... 네 말마따나 제법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긴 하지만 의외로 난 물욕이 없는 사람이라서... 돈벌이는 지금 정도로 만족해.
더 벌면 골치만 아프고 돈 쓸데도 없거든..
넌 나하고는 달라서 그렇게 악착같이 구역 넓히느라 매달렸던 거겠지만...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제각각이지. 안 그래?"
"쓸데없는 얘기 그만 지껄이고,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쿡... 생각보다 성질이 급하시군. 좋아, 우선 네가 충의회를 이렇게 쉽게 내놓을 줄은 몰랐는데..
놀라워, 강태가 그 정도로 너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걸 실감하니까 더욱 더 즐거워지는데?
지금처럼 기분 좋은 적도 없었던 것 같아.."
정말 신명이 난 듯 반 옥타브 정도 고조된 문환의 음색이 재준의 귓구멍을 거쳐 그의 영혼 전체를 유린하고,
재준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결박상태가 되어 문환의 추악한 희롱질에 놀아난다.
그러나 자신의 비참한 몰골보다는 강태의 연약함과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시야가 잠식된 재준은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술을 열 수도 없다.
"이쯤에서 슬슬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도록 하지. 말장난을 오래 하는 것도 경박한 짓이니까...
으음~ 어쨌든 일이 이렇게 수월하게 풀려나간다니, 너무 기뻐서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야.
이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 지 알겠나?
그래, 맞았어.. 난 네가 지금처럼 내 앞에서 허둥지둥 정신 못 차리는 꼬라지를 보고 싶었어.
다시 말하면, 네 까짓 것도 별 수 없다는 걸 너한테 확인시켜 주고 싶었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날 밟고 싶다면 다른 방식을 택하는 건 어때?
밑의 애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그렇게 해 주겠어. 네 틀어진 심사가 풀릴 때까지 날 패도 좋아.
그치만, 그 애만큼은 돌려줘. 벌써 난 네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비굴해졌잖아?"
재준의 입에서 급박한 속도로 쏟아져 나오는 글자들은 분명 굴복과 붕괴를 시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축되어 보이거나 남루하게 쓰러지지 않는, 단아한 본래의 모양새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득한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문환..
그 치졸한 결핍을 제거하기 위해 막다른 감금의 장소에까지 재준은 몰아넣고 유일한 그의 빛을 차단시킨다.
"병신새끼... 아직도 모르겠나? 난 확실하게 알아버렸단 말이야.
이재준은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는 수단은 하나 뿐이라는 거,
평생을 목매달고 사수하던 충의회를 단번에 팽개칠만큼 이재준이 지키고 싶어하는 그 하나, 강태를 빼앗아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
그걸 알아버렸다구..."
"................"
"그리고...이재준 아니면 안 된다고 죽어라 뻗딩기던 그 녀석을 내 침대에 들이고 싶은 마음도 크고...
쿡... 이재준 말고는 아무하고도 안 한다고??
....쳇, 과연 이재준의 정부다워.. 그래도 생긴 거 하나는 끝내주니까..."
비스듬한 냉소를 물며 두 번째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넣는 문환에게 정체를 구분할 수 없는 감정과 생각들로 뒤범벅이 된 재준의 눈동자가 머무른다.
절망도 아니고, 후회라고 할 수도 없는..
극치의 상실감이라는 말로도 서툴기만 한 그의 망막에 뚜렷이 비춰져보이는 한 가지는 우습게도 지리리 흔한 그 말,'사랑'이다.
허탈해 진다. 현실이라는 차가움이 촉수를 강하게 후벼팔수록 침착해지고 생생해지는 자기 자신이 증오스럽다.
그렇게 강인하고 튼튼한 자기 자신을 부셔버리고 싶다.
그래서 재준의 입가에는 웃음이 그려진다.
소름 끼치게 선명한 웃음이 떠오른다.
"후훗... 만약 내가...당신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강태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강태를 감시하고 있는 똘마니 두 명이서
내 전화를 받고 난 다음에 명령대로 강태의 이마에 총알 하나를 박아주겠지..
그 예쁜 얼굴이 산산조각 날 거야. 정말 아까울 텐데...
그러지 말고 우리 타협을 하자구.
네가 강태를 나한테 넘긴다면, 아까 얘기한대로 충의회가 소유한 구역이랑 지분에는 손끝도 대지 않겠어.
그러니까 넌 네 수하에 있는 애들한테 계속해서 당당한 보스로 남게 되는 거야.
조직을 위해 자신의 정부를 깨끗이 포기한, 자기 개인보다는 조직을 더 생각하는 훌륭한 보스로 존경받게 되겠지...
난, 원하던 대로 강태를 갖고...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각할 거야. 네가 데리고 놀던 장난감, 싫증나서 버린 걸 내가 주워다가 가진 걸로 이해하겠지..
따지고 보면 강태는 어차피 침대에서 쓰는 비싼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잖아?
정부니 애인이니 번드르르한 이름 갖다붙여봤자 까놓고 얘기하면...."
"입 닥쳐. 네가 짜놓은대로 연기해 줄테니까 역겨운 소리 그만해.
강태를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마.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애를 소중히 다뤄. 그 전제 하에 네 조건에 동의하는 거다.
계약위반 시에는...강태를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널 죽일 거다."
이재준... 넌 이미 강태를 잃어버렸어.. 그걸 부정하는 건가..?
시니컬하게 비웃으며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재준의 내부에서 울려나온다.
그리고 빈틈없는 연극을 연출하기 위한 문환의 준비된 각본이 연이어 재준의 찢겨진 영혼을 헤집어 놓는다.
"강태한테는 이렇게 설명하면 되겠지..? 이재준이 충의회를 지키기 위해 널 나한테 팔았다고...
그럼 강태도 납득할 거야.. 충의회가 이재준에게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그 녀석도 웬만큼은 알고 있을 테니까..."
(103)
나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
우리가 헤어져 있어야만 하는 미쳐버린 시간들이 저주스러웠다.
우리가 끔찍이도 서로를 사랑하는 게 도대체 왜 죄가 되는 건지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 <사랑을 위해 죽다> 중 -
숨 쉴 구멍도 주지 않고 들어찬 어둠이 이처럼 반가울 수도 있을까..
모든 것을 말끔하게 가려줄 암흑의 장막이 고맙고 사랑스럽기만 한 혁수..
시계초침 소리를 헤아리다가 천문학적 숫자에 가까워지는 횟수를 도중에 망각하고,
그 다음부터는 마땅한 소일거리 하나 찾지 못한 채 어수선한 마음을 방치해둔다.
소등이 되기 한 시간 전부터 욕실의 거울 앞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외양을 살피던 혁수였다.
정수리 부분에 밉살스런 자리를 차지하고 자라난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짜증을 내고,
전보다 핼쓱하게 야윈 두 뺨이 못마땅해서 투덜거리고 그러면서도 '나는 안혁수니까.. 장주혁의 안혁수니까..' 하는 자부심 한 가지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웃었던 것 같다.
이제는 무디어져 버렸을만큼 일상적인 고요를 깨고 삐거덕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혁수의 병실 문이 살짝 틈을 벌린다.
이어서 생경하기도 하고 낯익기도 한 얼굴의 남자가 혁수를 마주보며 얼른 나오라고 손짓한다.
그의 눈동자가 보이지는 않지만 절제되지 못하고 삐죽빼죽 뻗쳐나오는 동작이 상현의 초조해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상현의 손짓에 따라 발을 옮기는 혁수의 움직임 가운데 배인 간절함은 그런 조바심 정도로 간주하기에는 더 방대하고 힘겹다.
한 걸음 씩 뗄 때마다 가슴 속에 핏자국을 남기는 발자국이 못내 서러워서 또 다시 비칠거리며 기어나오는 눈물을 아직은 이르다는
말로 나무라며 되삼키는 혁수..
지금부터 울기 시작했다가는 새벽 동이 터올 무렵이면 수분부족으로 사망할 지도 모를 일이다.
병동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니 상현은 조금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혁수에게 싱긋 미소를 건넨다.
80m 쯤 전방에 위치한 정문을 가리키며 입을 여는 상현..
"저기에 있어. 혹시라도 사람들이 눈치 챌 까봐 헤드라이트 완전히 끄고 있으라고 했거든.. 같이 가 줄까? 어두워서 잘 못 걷겠으면..."
"아, 아니에요. 창문으로 자주 봐서 눈에 익었어요. 혼자 갈게요.."
"어어.. 그럼 됐고.. 얼른 가 봐, 기다리고 있을텐데..."
".....예..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런 소리말고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시간 아껴서 재밌게 놀다 와.. 6시까지 들어오는 거 잊지 말고.."
".......예.."
상현을 등지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혁수의 심장이 정상속도를 이탈해 광폭한 질주를 시작한다.
희끗희끗한 영상으로 시세포를 두드리는 나무들 사이로 걸음을 내딛으며 턱 밑까지 솟구쳐 오르는 흥분과 긴장의 줄기를 고르고 다듬는다.
찰나에도 수 십번씩 바꾸어 교차하는 기억과 생각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둘리는 혁수의 감정은
정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팽창하고 가열되어서 혁수를 어지럽힌다.
겨우 한 달인데, 그를 만나지 못하고 흘려보낸 시간은 고작해야 한 달인데
혁수의 영혼을 병들게 한 고통은 물리적 개념의 시간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막대해서..
혁수는 그에게 투정을 부려야겠다고 결심해 본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주혁 뿐이기도 하거니와
청승맞은 흐느낌을 들려주느니 차라리 짜증스런 원망과 불평으로 두 사람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기 위해서다.
철저하게 밀폐된 어둠 속을 미약하게 차지하고 서 있는 은빛 금속성의 물체가 혁수의 망막에 새겨지자 그의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그리고 반딧불처럼 한 점의 공간을 밝히는 담배 불빛을 확연히 감지한 혁수가 반으로 꺾이려 하는 허리에 의식적으로 중력을 가한다.
휘청이는 두 다리가 버겁게 느껴질 무렵, 드디어 분명하게 혁수의 눈을 채우는 주혁의 검푸른 구슬과 새하얀 살결..
그것이 한데 어우러져서 급속히 빨려들어오는 그의 연청색.
틀림 없는 장주혁이다.
빳빳이 곤두서며 작열하는 혁수의 온 몸이 그의 존재를 증명해준다.
혁수는 바보 같이 그만 눈을 감아버린다.
".....혁수야...!"
좀벌레처럼 혁수의 모든 것을 갉아먹던 고독 서린 적막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주혁의 굵직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귓전을 어루만지자
감겨진 혁수의 눈꺼풀 사이로 끝내는 차가운 눈물이 새어나온다.
이어서 주혁의 가슴과 두 팔이 다가오자 혁수는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리는 몸뚱어리를 그에게 내맡기고,
기특하게 부여잡고 있던 정신마저 허공으로 날려보낸다.
- 가느다란 주혁의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혁수의 머리카락 주위에서 맴돈다.
그러다가 아주 과감한 행동이라도 하는 양 다부진 표정으로 그의 와인색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는다.
울컥 치미는 응어리들을 눌러 삼키고 고개를 들어 아직 깨어나지 않은 혁수에게 무언 가를 이야기하는 듯 결연한 시선을 떼지 않는 주혁..
가파르게 떨리는 길다란 한숨을 토해내며 주혁의 혁수의 손을 잡자,
혁수가 마치 자동장치가 부착된 인형처럼 눈꺼풀을 반짝 치켜올리더니 갈색 눈동자가 좌우로 이동하며 주혁의 모습을 찾는다.
주혁은 혁수에게 편안하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려고 입꼬리를 끌어당겨 보지만, 우스꽝스러운 표정만 만들어 보일 뿐이다.
그것이 또한 민망하고 무안해서 주혁은 황급히 입을 열어 씁쓸한 정적을 파기시킨다.
"근처에 있는 모텔이야.. 멀리 나가면 안된다고 해서.."
"....지금 몇 시쯤 됐어..?"
"으음... 2시 반 정도.."
"나 깨우지 왜 가만있었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고 화가 나서 혁수는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주혁에게 애매한 앙탈을 내고,
아무 소리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맞받는다.
그래, 시간이 모자라지.. 나지막히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평범한 연인들의 심야 데이트처럼 자연스럽고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던 시도를 포기하는 혁수..
체념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갖고 있는 감정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보기 원하는 용기일 뿐이다.
모른 척 하는 건 편하지만 가슴 아프고, 서로를 인정하는 건 감당하기 벅찬 불행과 기쁨을 한꺼번에 안겨준다.
진실은 승리와 패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너...많이 말랐어. 거기서 밥 굶기나 봐..?"
거두어들였던 손을 다시 혁수의 뺨으로 뻗치며 겨우겨우 어설픈 미소를 쥐어짜내는 주혁..
그러나 혁수의 살결이 전해주는 생생한 감촉에 금새 억지스런 웃음을 허물어뜨리며 왈칵 터져나오는 울음을 거친 호흡으로 바꾸어 뱉어낸다.
그럼에도 혁수의 티셔츠 자락에 주혁의 눈물이 촉촉이 묻어나고 혁수의 허리를 감싼 그의 팔이 자잘한 파장을 일으킨다.
혁수는 어깨죽지에 밀착된 주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보듬어 자신을 마주보게 한다.
흐려진 검푸른 눈동자가 맑은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엄지손가락으로 눈가의 물기를 씻어내고
그 안에 담긴 자신의 형상이 지울 수 없는 영원으로 붙박혀 있음에 안도하며.. 주혁의 입술에 키스한다.
그러자 주혁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갈증이 맹렬하게 폭발하며 혁수를 점령해 버린다.
자제력을 상실한 주혁의 두 팔에 우악스러운 힘이 실리며 혁수의 몸을 겹겹이 옭아매고 붉은 입술로는 혁수의 입술을 머금고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로에게 감금당한 채 나뒹구는 두 남자의 육체가..
더럽고 순결한, 화려하고 초라한,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추악한 그러나 선악의 개념으로 심판하기에는
세상의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한 두 남자의 영혼이 육체를 통과해서 하나로 합쳐지려 한다.
주혁의 아이보리색 셔츠 단추를 풀어내리며, 혁수의 머릿속에 이제껏 담당의사에게서 들은 수많은 의학적 견해와 진단이 필름처럼 재생된다.
성적 기호, 성 전환자, 프로이드의 성 심리에 의하면...
삽입성교 시 쾌감을 느끼는 감각기관의 비정상적 발달... 등등의 헛소리들.
사랑한단 말이야, 이 남자를 사랑해서 같이 자고 싶다는 거야.
난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남자와 육체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것 뿐이야..
입 밖으로 크게 소리쳐 울부짖고 싶은 욕구를 주혁의 난폭한 입맞춤과 포옹으로 대리만족하며,
그래도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지난 한 달간의 그리움이 응축되어 혁수의 눈꼬리를 타고 흐른다.
찬란한 섬광을 반사시키며 드러나는 주혁의 나신이 욕망을 뛰어넘은 감동과 경이로움으로 혁수를 눈 멀게 하자,
어쩔 수 없이 죄악된 열정에 넘어지고 마는 자신을 애통해 하면서도 혁수는 주혁의 어깨에 감긴 두 팔에 더 굳건한 힘을 싣는다.
아무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심지어는 그와 공유했던 '행복'이라는 이름의 추억까지도 전부 뒷전으로 밀어두고..
나중에 닥쳐올 징벌과 목마름까지 눈에 뜨이지 않는 한 귀퉁이에 처박아놓고..
그를 느끼는 것에만, 그를 온전히 담아두는 데에만 자신의 모든 육신과 영혼을 소비하리라 다짐하는 혁수..
신체의 한 부분을 통해서 연결되는 두 사람이 일치된 오르가즘의 순간을 나눠 가지고,
짧을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길기도 한 그 극한의 차원 내부에서 혁수와 주혁은 똑같은 크기의 절망과 슬픔을 줄여나간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한다.
혁수의 몸 안으로 들어서며 주혁은 처음으로 내장 전체가 먹먹한 자괴감에 사로 잡힌다.
끈끈하게 자신을 조여오며 매달리는 혁수의 육체와 리듬을 맞추어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감각적인 짜릿함은 전혀 맛 볼 수가 없다.
귓불에 뿌려지는 혁수의 뜨거운 숨결이 주혁의 관능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물샘을 건드려서, 주혁을 난처하게 만든다.
이렇게 사랑하고, 사랑하고, 그를 이렇게 사랑하는데도...
그의 몸 안에 남겨줄 수 있는 게 고작 몇 방울의 정액 뿐이라니...
좌절감으로 인해 이미 훼손된 두 사람의 섹스가 막바지로 치달아 갈 때 쯤, 주혁은 생명력을 빼앗긴 자신의 액체를 신랄하게 저주한다.
(104)
가슴 벅차게 뛰어가던 사랑이라는 길.
나는 그 길을 언제나 그대와 함께 가고 싶었다.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중 -
"....마,말도 안 돼! 헛소리 하지 마!! 당신 지금....지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강태가 반사적인 동작처럼 주먹을 불끈 쥐며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터뜨린다.
문환의 입에서 줄줄이 쏟아져나오는 글자들이 뚜렷한 현실감을 전달해 주는 것을
일부러 거부하며 의혹과 불신으로만 자신의 이성을 포장하는 강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 동사를 하나씩 상기해본다.
'재준이, 나를, 팔았다.'
중간에 어떤 부사나 형용사, 혹은 삽입절이 추가된다고 하여도
이미 그 세 가지의 성분만으로 강태는 이 문장의 사실정 여부조차 따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 따위 거짓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도대체 재준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똑바로 말 해!!"
여차하면 머리통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으면서도
강태는 오히려 우월한 공격자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듯 거의 협박 조로 문환을 다그친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씨뻘건 열꽃을 피우며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강태에게
여전히 동요가 없는 시선을 실어보내며 문환은 대답한다.
"정확히, 사실대로 얘기한 거야.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잠시 후에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테니까 굳이 더 설명하지는 않겠어.
미리 일러두고 싶었던 것뿐이다. 아무 예고도 없이 맞닥뜨리면 충격이 심할 것 같아서..."
"....뭐?!....확인....?"
확대되었던 강태의 흑색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좁혀지며
기우뚱하고 가파른 경사가 지는 그의 표정 속에 외면하려고 했던 두려움이 흉한 모습을 드러낸다.
왜 갑자기 재준의 얼굴을 떠올리기가 망설여지는 것인지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강태는 주책맞게 빨라지는 맥박의 속도를 다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가슴 속에, 눈동자 깊숙이,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재준의 약속과 고백을 되새기며
후들후들 소스라치는 뼈마디를 점잖게 타이른다.
"자, 그럼 가 보실까? 내 말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알아보러..
그리고 이재준하고 작별인사도 나눠야지.. 그래도 꽤 오랫동안 같이 지냈잖아?"
아득하게 꺼져들어가는 자신감을 힘겹게 잡아당겨 올리며
문환의 마지막 발언을 부정하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강태에게
좀전까지 그를 감시하던 연화회의 조직원 두 명이 다가와 강태의 양 팔을 붙든다.
강태는 몸을 흔들어 그들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승리감에 도취된 문환의 눈을 곧게 쏘아보며 입을 연다.
"내 발로 걸어갈테니까 이거 놓으라고 해."
문환은 부하들에게 손짓을 해 보이며,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의미를 가리기 모호한 낯빛 뒤에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리는 불길함을 감추고 문환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차를 타고 20분쯤 달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내내
문환은 이따금씩 강태에게 야릇한 미소가 담긴 눈초리를 던지며 강태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강태는 아예 사고기능을 정지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로 극심한 절박감에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문환의 자동차가 멈춘 곳은 도시 외곽의 한적한 장소에 지어진 거대한 기와집 앞이다.
소담스러운 미모와 청초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들이 고운 한복차림으로 정중히 예를 갖추며 손님을 맞아들이는 것을 보니,
상류층 인사들만 드나드는 고급 술집인 게 분명했다.
조선시대의 이름 난 기생집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강태는 잠깐동안 어리둥절해 진다.
"충의회 이회장님과 약속을 해 두었는데..."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조신하고 단정한 몸가짐으로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앞장서서 발을 떼는 여자의 안내에 따라
강태와 문환, 그리고 문환의 부하 몇 명이 걸음을 옮기고..
여자의 손에 의해 열려진 문틈 사이로 보여지는 건 충의회와 연화회의 주요 간부들이 모여 앉아 신경질적인 고요함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광경이다.
드르륵 하는 미닫이 문소리에 여러 개의 눈동자가 강태와 문환의 등장을 주시하고,
강태는 다른 것을 차치할 겨를도 없이 절실하게 흡수되어오는 재준의 고유한 비누향기와 유백색 피부에 억눌린 탄식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재준아...!!.."
그러자 재준의 까만 심연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투명한 빛을 발산하며 강태는 바라보고,
그의 입술이 기적처럼 포근한 곡선을 그리며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펼쳐낸다.
하지만 고개가 문환 쪽으로 돌려짐과 동시에 그 보석 같던 함박웃음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시체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을법한 싸늘함이 재준의 창백한 얼굴 전체를 뒤덮는다.
그런 재준으로부터 스크린 속의 배우와 객석의 관객,
혹은 유명인사와 평범한 소시민 사이의 까마득한 단절과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 강태는 죽음의 공포 앞에 홀로 마주선다.
"먼저 와 기다려 주시다니 이거 영광입니다, 이회장님.."
과장된 문환의 인사치레에 재준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그가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기계적으로 입술을 떼며 건조한 음성을 뽑아낸다.
"피차 바쁜 사람들인 만큼 간단하게 마무리지읍시다.
전 말주변이 별로 없으니까 조회장님께서 말씀 시작하십시오."
"뭐, 좋습니다. 그동안 우리 연화회와 충의회 간에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많이 있었고, 그로 인해 서로 관계가 편치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로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은 전부 없었던 걸로 치고 연화회와 충의회 양 쪽 다 앞으로는 서로에게 피해가 가는 행동은 하지 않기로 합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에 양 쪽이 모두 동의를 해야겠지요.."
문환의 왼쪽에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강태의 모습이 재준의 시야에서 뿌옇게 와해되고
흐물거리는 파편으로 녹아 형체를 복원할 수 없는 상태로 변모한다.
이미 남의 소유가 되어버린 그가 조금도 다름없이 완전한 미(美)를 뿜어낸다면 버티지 못할 만큼 처참해질 자신을 알기에..
재준은 강태의 예쁜 얼굴이, 눈물이 고여있을지도 모를 눈동자가 제대로 시세포에 각인되지 않음을 오히려 감사한다.
강태는 손가락질을 하며 허리가 휘어져라 웃어대는, 그러나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잡을 수도 없는
가혹한 인연에게 조롱당하는 자신의 영혼을 무기력하게 쳐다만 보고 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제 옆에 있는 이 아이죠..
얼마 전까지는 이회장님의 총애를 받던 녀석이었는데...
강태를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회장님?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정확하게 밝혀주십시오.."
제발 입 열지 마.. 제발, 저런 웃기지도 않는 소리엔 대답할 필요도 없잖아..
그냥 원래 네가 하던 방식대로 코웃음치면서 무시해버리던가
아니면 가운데에 놓은 술상이라도 뒤집어엎어서 방금 같은 개소리를 일축해버리던지 그렇게 해..
입은 열지 마. 대답하지 마, 재준아...
이런 기도를 되풀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강태는 어이가 없어서 공허한 실소를 뱉어내지만
그 소리가 워낙 작은 탓에 아무도 그의 파국을 돌아봐주지 않는다.
아니, 재준은 그것을 느끼고 있음에도 차마 겁이 나서 눈동자를 움직이지 못하고 강태를 외면한 채 그대로..
그의 간구를 짓밟으면서 문환이 내민 조건에 동의의 답신을 던진다.
"연화회에서 앞으로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아끼던 정부쯤이야 양보할 수 있지요..
조회장님께서도 이 자리에서 확실히 약속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충의회가 소유한 모든 구역과 지분, 그리고 충의회의 사업활동 전반에 대해 일절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러실 수 있습니까??"
".....약속드리겠습니다. 전, 제가 원하는 걸 모두 얻은 것 같으니까요.."
의미심장한 말로 애매한 여운을 흘려놓으며 만족스러운 듯 치아를 드러낸 채 씩 웃는 문환..
호쾌하게 술잔을 들며 가벼운 흥분과 성취감에 휩싸인 목청을 돋군다.
"자아~~ 그럼 화해협정이 순조롭게 맺어진 건가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
정교한 무늬가 수놓아진 술잔을 입에 대고 안에 채워진 정종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으려던 문환이
다시 잔을 내려놓으며 의뭉스런 눈빛을 재준에게 고정시킨다.
재준은 시간이 갈수록 무감각해지는 자신의 심장에서 그래도 아직까지 일정한 고동소리가 울려나옴을 신기하게 여기며
더욱 태연하고 덤덤한 척 그 특유의 밋밋한 음색을 들려준다.
"......최준태, 제게 넘겨주십시오."
문환의 입술에서 푸훗- 하는 샐팍한 소리가 새어나오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는다.
그리고 냉소와 경탄이 반반씩 뒤섞인 낯빛으로 그야 어렵지 않다는 듯 흔쾌하게 대꾸한다.
"그렇게 하시죠.. 다 사용한 물건을 손수 처리해 주시겠다니 고맙습니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오만이 팽만한 문환의 혓바닥이 지저분한 주절거림을 멈추자,
재준은 불에 데인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떠나버리고..
강태는 등진 재준의 뒷모습에 대고 보이지 않게 솟구쳐 올라와 터지는 토혈을 막지 못한다..
(105)
한 차례의 정사가 끝난 후, 매끈한 등판을 드러낸 채 엎드려 누운 혁수와 그 옆에 야트막히 기대앉은 주혁은 한동안 멍한 침묵을 지킨다.
작은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고 있던 혁수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주혁의 손길에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마주보고 묘연한 미소를 짓는다.
서글퍼 보이기도, 초연해 보이기도 하는 혁수의 눈빛에 주혁은 또 다시 자신으로 그를 채우고 싶어지는 자기 자신이 수치스럽기만 하다.
".....혁아..."
혁수만이 사용하는 이 호칭에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애틋함과 따스함이 묻어난다.
코끝이 찡하게 울리며 닿아오는 혁수의 부름에 주혁은 소스라침을 감추지 못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응..?"
"우리...도망쳐 버릴까..?"
작위적으로 가벼운 장난기를 실어보려 애쓰는 혁수가 부자연스러운 명랑함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조금은 수줍다는 듯 홍조를 피우며 묻는다.
주혁은 또 다시 유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킬까 걱정스러워 입술을 열지 않는다.
"...푸훗...진짜 유치하겠다, '사랑의 도피'...웬 60년대 3류 영화냐..."
".........."
"그래도....그런 유치한 짓거리라도 해 볼까..? 그러면...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마침내, 싸매두었던 서러움과 건강을 위장하던 병든 영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하고
혁수는 과장되게 커다란 동작으로 몸을 회전시켜 천장을 바라본 채 똑바로 눕는다.
혁수의 성대로부터 목구멍을 거쳐 나오는 음성 밑둥에 더욱 짙게 갈린 흐느낌의 흔적이 주혁을 불안하게 한다.
그를 잃게 될까봐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원점으로의 회귀, 그것을 선고받을 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이 주혁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다.
혁수가 진정 이야기하고 싶은 게 무언지 확인하려고 주혁은 몸을 낮추어 한 팔로 체중을 지탱하고 혁수의 갈색 눈망울에 가까이 다가간다.
금새 물빛이 어리는 그 지나친 정결함이 한편으로는 주혁을 무척 부담스럽게 하지만, 감히, 주혁은 시선을 맞추고 입을 연다.
"....왜 그런 말을 해...? ....너 같지가 않아..."
"나 같은 건 뭔 데? 가슴이 터져 뭉개져도 아무 소리 안 하고 고개만 흔드는 거..?
....쿡.. 장주혁, 나 변했어.. 아직도 몰라..? 내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데..."
"아니, 넌 똑같아. 처음 내가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너는...한 가지 모습이었어.."
"....이해 못하겠어.. 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같이 있는다는 건 불가능 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노력하고, 또 네가 노력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함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자신이 없어져..
난 말이야...처음부터 우리가 서로를 원했다고 믿어.
단지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고, 그리고 우리의 의지나 노력은 아주 하찮은 요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의지나 노력 같은 건...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그러면 너한테 '사랑'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잖아.."
주혁의 눈동자를 곧게 응시하지 못하고 눈꺼풀을 살짝 내리깐 채 미세한 떨림만을 전달하던 혁수가
결국 또 한번 격한 울음을 쏟아 붓고 주혁의 하얀 어깨에 점점이 물방울들을 찍어낸다.
이런 식으로나마 안도 받을 수 있는 피난처 역시 연인의 품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그래서 어리석고 빈궁한 자신의 실체를 홀가분하게 맡길 수 있는 축복에 혁수는 만족하기로 한다.
아주 당연한 기쁨과 행복을 박탈당했다는 억울함에 분노하고 한탄하기엔
감은 눈앞에 또렷이 비치는 그의 형상과 그 내부에서 일렁이는 그의 영혼이 너무 소중하다.
이토록 절대적으로 서로를 원하는 것 또한 죄가 될 수도 있겠지...
가장 우선순위에 놓여져야 할 신의 영역을 침범하다 못해 아예 내몰아버린 그리움과 열망이 죄라면 충분히 '죄'일테니...
"...벗어나고 싶은 거야, 혁아..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혁아, 너 알잖아.. 나 겁쟁인 거 너 알잖아..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탈출하고 싶어..
차라리 네가 지겨워질 때까지 네 얼굴만 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널 무시할 수 있으면 그 때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어..
이제....이제 정말...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어..
이대로 끝나버릴 까봐,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흘러서...끝나버릴 까봐..."
"혁수야...나는...괜찮은데.... 이렇게 끝나버린다고 해도 난 괜찮거든..?
내가 썼던 편지, 기억 나? 거기서 내가 이런 얘기 했었지..?
행복한 끝을 보지 못해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넘치게 감사할 거라고...
그래...정말이야... 시작했던 것만으로도,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감사해..
아직 끝까지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난 더 가 볼수 있어..
혁수야, 제발...다시 되돌아가지 말자..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또 서로를 죽이지 말자..
어차피 진실은, 진실이라는 건...변할 수가 없는 거잖아......사랑한다는 그 의미는....."
문제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사랑한다'는 그 의미가 혁수와 주혁에게, 외부에서 두 사람을 관망하는 제 3자들에게,
그리고 혁수와 주혁을 둘러싼 세계에 각각 판이한 본질을 가지고 전해진다는 것.
두 남자의 감정이 영혼의 차원에 속하는 '순수'를 지니고 있어도 그것이 섹스라는 껍질을 입고 밖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 숭고한 감정은 싸구려 에로티시즘이나 심심풀이 땅콩 같은 화젯거리 따위로 추락하는 바로 거기서부터 혁수와 주혁의 절망이 탄생한다.
무엇이 변해야 하는가.
둘은 수없이 반복했던 그 질문을 새삼스레 던져본다.
그리고 확신에 찬 손길로 맞닿은 연인의 육체를 더욱 단단히, 힘있게 부둥켜 안는다.
- 핸들을 돌려 차체의 방향을 회전시키며 태현은 어제 저녁 전화를 통해 지민이 알려주었던 까페의 간판을 찾아본다.
갑작스럽게 걸려 온 그녀의 전화에 반가운 마음보다는 당황스럽고 의아한 태현이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일상 속에 묻어둔 남루한 기억들이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쳐들고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세라의 장례식이 끝난 후 간단한 인사만을 나눈 채 헤어진 지민을 다시 대면하는 건 붙임성이 뛰어난 태현에게도 그다지 편안한 일은 아니다.
태현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흘깃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운전석에서 내려선다.
어색하고 떨떠름한 기분이 들 때 그의 버릇대로 손가락을 빗 삼아 긴 앞머리를 훑어 내리며 까페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태현..
창가 쪽에 앉아있는 지민을 발견하자 움직임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진다.
태현과 눈이 마주친 지민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예의표시를 한다.
"일찍 오셨네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 아니에요. 방금 전에 도착했어요.."
조금은 형식적으로 보이는 대화가 오고가는 가운데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
그가 몸을 돌려 멀찍이 물러나고 난 다음에서야 태현은 데면데면한 분위기가 못내 껄끄러운 듯 일부러 밝게 미소지으며 이야기한다.
"비자문제 때문에 오신거면 잠깐 있다가 금방 들어가시겠네요?"
"예, 그래야죠.. 이번에 들어가면 오랫동안 못 나올 것 같아요. 그래서 가기 전에 만나자고 했어요.
으음...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또 전해줄 것도 있어서..."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주억이며 '예..'라고 짧게 대꾸하는 태현에게 그녀 특유의 친근하고 정감 있는 눈빛을 고정시키며
지민은 한결 뻣뻣함이 가신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이젠 아예 그 쪽에 자리잡을 생각이거든요..
집안에서도 제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고, 저도 거기서 생활하는 게 더 편하니까요..
아시다시피 부모님하고도 관계가 너무 불편하고, 여기 사람들과는 거의 대부분 그런 상태니까...
아마 또 한국에 들어올 일은 없을 것 같네요.."
"후우~~ 그럴 줄 알았으면 저번에 제대로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는 건데..."
"그 때는 태현씨나 저나 제 정신이 아니었잖아요.. 무슨 경황이 있었겠어요.."
넉넉하고 깊은 웃음을 짓는 지민을 따라 태현도 흉내를 내는 것처럼 안면근육을 당겨보지만
오히려 쓸쓸하고 고즈넉한 실소가 그의 하얀 얼굴에 번지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태연한 분위기가 일순간 버려진 황무지로 탈바꿈한다.
지민은 가식적인 여유를 팽개치고 솔직하게,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과 가슴 저린 회한을 호소하는 눈망울 안에 태현의 모습을 투과시킨다.
탁한 위장술이 걷힌 그녀의 홍채가 맑게 반짝인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이거 때문에..."
핸드백을 열고 지민은 작은 크기의 수첩을 하나 꺼내어 태현 앞으로 내민다.
태현은 그것을 펼쳐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망연히 표정으로만 그녀에게, 이것을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며칠 전에 세라 물건, 정리했거든요..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아직도 그대로 두셨더라구요..
그래도 정리해야할 건 빨리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제가 치웠는데...
이건...태현씨가 갖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세라도...그러길 바랄 거에요.."
문득, 지독히 생소한 느낌으로 부딪쳐오는 그 이름에 태현은 진저리를 친다.
혼자임을 실감할 때마다 무연스레 되뇌이는 이름인데도, 타인의 입술을 통해 발하여지는 그 이름이..
낯설다. 그리고 차갑다.
"아직은...가끔씩 세라 생각하죠..? 벌써....없애버린 건 아니죠...?"
이렇게 물어봐주는 지민의 배려심에 태현은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얼싸안으며,
또한 매몰차게도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는 자신의 망막에 대고 자학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최소한 눈물 몇 방울 정도는 흘려줄 수 있는 거잖아..
나쁜 새끼, 그 애는 지금도 널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왜 그렇게 잊고 사는 거지?
문태현, 그 애한테 용서나 빌어.
"...그래요.. 아직은 아니죠..
근데...모르겠어요.. 끝까지 간직해 둘 수 있을지...
어쩌면 세라는...기대하고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그 애는 저를 잘 아니까요.."
(106)
튀어오르듯 몸을 세워 미닫이 문을 열고 방을 나서는 재준의 뒤에 따라 붙으며
준상은 다른 충의회 식구들에게 나올 것 없다는 식으로 손을 들어 보인다.
그래도 간부들 중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준상과 함께 밖으로 나오려 하자 준상은 그들을 제지하며 말한다.
"아, 형님들 모처럼 다 모이셨는데 더 계시다가 오십시오. 연화회 놈들이랑 마주하기 거북하시면 자리를 옮기시던지요."
"아니, 회장님께서 저렇게 언짢아하시는데...우리가 모시고 몇 말씀이라도 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
"에이~ 회장님께서 그런 거 싫어하시는 거 다 아시면서 뭘 그러세요..
회장님은 제가 모실테니까, 형님들은 걱정 마시고 오랜만에 회포나 푸십시오."
워낙 서글서글하고 넉살 좋은 성격인지라 준상은 자신만만한 어투로 동료들을 안심시키고,
재준이 오래 기다릴까봐 얼른 인사를 한 후 주차장으로 달려간다.
마침 차에 타려 하던 재준은 긴 머리카락이 펄럭이도록 뛰어와 고개를 숙이는 준상에게 짙은 피로감이 물씬 배어나는 음성으로 질문을 던진다.
"더 놀다오지 뭐하러 나왔어..? 오늘은 나 혼자 들어갈테니까 애들이랑 더 놀다가 와라.."
"아닙니다, 어서 타십시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그러자 재준은 더 권유하기도 귀찮은 듯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 갑을 꺼낸다.
한 개피를 뽑아 물고 불을 붙이려 라이터를 켜는 순간, 그 익숙한 은빛 금속성의 물체가 바꾸어질 수 없는 습관처럼 한 사람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그 존재에 대한, 없었던 것으로 해야 할 감정과 이젠 '추억'이라는 낡은 파편으로 바래버린 그와 연관된 모든 상념...
그리고 마지막에 가장 선명히 각인되는 것은 그를 지나쳐버린, 그를 내동댕이친 자신의 무능력함이다.
재준은 얼마간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녹이 슬 정도로 끈덕지게 은제 라이터를 응시한다.
이것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난생 처음 '생일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이걸 받아들었을 때,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전신으로 옥죄어오던 그 설레임에서부터 그칠 줄 모르고 불어나기만 하던 정체불명의 감정들...
그 결과가 오늘의 참담한 현실로 재준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거기쯤에서 멈추었어야 했는데...
단 한번도 어겨본 적이 없는 매뉴얼을 빗겨 간 대가가 이렇게 혹독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후회와 자책감에 떠밀려 재준은 창 밖으로 은제 라이터를 던져버린다.
시끄러운 자동차 엔진 소음에 묻혀, 초라한 라이터가 바퀴에 깔려 부서지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어쨌든, 끝났다, 완전히.
가물가물거리며 잡힐 듯 말 듯 부유하던, 가끔씩 터무니없이 무거운 중량으로 자신을 압박하던 답답함과 두려움이
오늘에 대한 예고였었나보다 라고 스스로에게 읊조리며 재준은 눈물 대신 더 고약한 웃음으로 내면의 고통을 감춘다.
"저어...회장님.."
조수석에 앉은 준상이 창 밖에마나 줄곧 눈길을 머무는 재준의 기색을 신중히 살펴보다가 무척 주저하는 태도로 머뭇머뭇 그를 부르자,
재준은 극히 표피적인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백미러에 비친 준상과 시선을 맞춘다.
"...정말로...왜 그러신 건지...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재준은 검은 눈동자가 견고하게 굳으며 날카롭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눈빛만큼이나 냉랭하고 인공적인 메마름이 실린 음성으로 짧게 대꾸한다.
".....아니, 안 돼."
간단한 대답 속에 이제 다시는 그를 떠올리게 하지도,
그리워하게 하지도 말라는 재준의 절대적인 의지가 함축되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준상은 상상하지 못한, 그러지 않을 거라 믿었던 재준의 가혹함과 무자비함에 조금은 질리고 만다.
아니, 질리다기 보다는 뭐가 뭔 지 얼떨떨하다.
"그냥...네가 지켜본 그대로가 사실이라고 생각해라.. 그게 편할 거다.."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묘한 재준의 말에 준상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희한하게도 지금, 자신의 보스가 너무 약해 보인다는 생각에 순박한 그의 충성심은 노골적인 긴장과 경계심으로 무장하고
어서 빨리 자기가 보스를 위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를 기다린다.
무엇이든지 재준으로부터 명령을 하달 받으면 불편하게 신경돌기를 콕콕 쪼아대는 조바심으로 놓여날 수 있을 것 같다.
"....준상아.."
"예,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오늘밤에는...여자를 안고 싶은데.. 괜찮은 애 있으면 하나 불러올래..?"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댁으로 보내라 하겠습니다."
입맛이 씁쓸하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준상의 대답을 귓등으로 흘리며 재준은 담배의 첫 모금을 폐 속 깊이 빨아들인다.
그리고 중요한 사항 한 가지를 덧붙여 일러둔다.
".....강태랑 닮은 여자는...안 돼.. 그런 여자가 있을 리도 없겠지만...."
- 포근하게 전신의 피부를 적시는 따뜻한 물줄기에 환각제 성분이라도 스며있는 모양이다.
재준은 점차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자꾸만 과거로, 더 과거의 시간으로 역행하는 자신의 기억구조를 깨닫는다.
까르륵거리는 강태의 웃음소리가 청량하게, 하지만 흐리멍텅한 거리감을 둔 채 욕실 벽면을 두드려댄다.
지난 여름 어느 날 재준과 함께 샤워를 하면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이기 부끄럽다고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오히려 재준을 미칠 듯이 자극하던 그가 화면 속의 장면처럼 스르르 재준의 시야에 부상하고,
벌써부터 강태의 빈자리를 까무러치게 실감하며 허전해하는 자기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재준은 서둘러 스위치를 조절해 수돗물을 잠그고 허둥대는 몸짓으로 알몸 위에 가운을 걸친다.
침실로 들어서니 몇 차례 잠자리를 같이 해서 낯이 익은 여자가 침대에 걸터앉아 허리를 숙여 스타킹을 벗어내고 있는 중이다.
재준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빼꼼이 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직업적으로 장식된 교태로운 미소를 띄우며 그를 놀려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연다.
"문도 안 잠그고 있으면 어떡해? 그러다 습격이라도 당해서 칼 맞으면 어쩌려구..."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군.
재준은 그렇게 내뱉으려다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가려 하던 그 말을 짓뭉개며 씹어 삼킨다.
'죽고 싶다'는 심각한 발언은 아무 앞에서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동안 그 예쁜 남자하고 살림 차려놓고 재미가 쏠쏠한가보던데, 둘이 싸웠어? 아니면 정리한 거야, 그 남자??"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며 담배를 빼어 무는 재준에게,
그의 무응답을 후자의 물음에 대한 긍정의 뜻으로 해석한 여자가 사근사근한 손길로 라이터를 가까이 대주며 다시 조잘거린다.
"하긴, 오빠가 원래 호모는 아니잖아. 그냥 그 남자가 하도 이뻐서 데리고 논거니까 이제 싫증날 때도 됐지, 뭐..
사람들이 오빠가 남자한테 푹 빠졌다고 수군거리길래 아예 취향이 바뀐 줄 알았더니만 그것도 아닌가봐?
아휴, 잘 생각했어~ 아무리 그래도 남자끼리는 좀 심해..
솔직히 처음에 오빠가 남자랑 그런다는 얘기 들었을 때, 끔찍하더라..
이제 그런 짓 하지 마~ 오빠 정도면 몸 대주겠다는 여자가 줄을 설텐데 뭐하러 그런 이상한 짓을 해? 지저분하게끔..."
"돈만 주면 무조건 다리부터 벌리는 년들이랑 뒹구는 건 당연한 일이고, 좋아하는 남자랑 섹스하는 건 지저분한 짓이냐?
사람들은...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응?...무슨 말이야??.."
워낙 빠르게 뱉어낸 재준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지만
재준은 신경질적으로 담배꽁초를 비벼끈 후, 매몰차게 그녀의 궁금증을 무시한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 나불대고 옷이나 벗어."
살벌한 그의 음성에 여자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이다가
이내 눈가에 파르족족한 색기를 피우며 원피스의 자크를 끌러내리고 나체가 되어 침대시트 위로 몸을 눕힌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이미 전희의 기대감에 부풀어 촉촉하게 젖어들기 시작하는 여체를 품에 안으며
재준은 주문을 외우듯, 최면을 걸 듯, 자신을 세뇌시키는 것처럼 자신의 몸 아래에 누워있는 이가 강태 아닌 다른 '여자'임을 차근차근 확인해 나간다.
곱슬곱슬한 웨이브가 진 풍성한 적갈색 머리카락, 강태가 아니다.
마스카라가 진하게 칠해진 속눈썹에 약간 처진 커다란 눈망울, 강태가 아니다.
아담하고 조금은 뭉툭한 코와 산호색 립스틱이 발린 작은 입술, 강태가 아니다.
노르스름한 살결도 풍겨 나오는 담배냄새도 강태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봉긋한 유방과 말랑말랑한 허벅지도 강태가 전해주는 느낌이 아니다.
미끈하고 부드럽게 재준의 페니스를 감싸는 비너스와 그 은밀한 통로 역시 강태가 소유하지 못한 신체적 기관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아니다.
절대로, 강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재준의 육체는 잠들어 있던 본능을 일깨워 달음박질을 재촉하고
이름조차 알고 싶지 않은 여자의 애무와 기교에 따라 재준의 몸 안에는 흥분과 자극이 쌓여간다.
여자가 질러대는 교성과 신음소리에 재준의 감각이 곤두서고 적절하게 반응한다.
강태가 아닌데도, 수줍게 두 볼을 물들이며 손으로 시트를 꼭 움켜쥐던 그가 아닌 타인과도 이처럼 선선히 얽히는 나의 육체...
나는 섹스파트너를 잃어버린 게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이 여자의 몸 속에 나의 페니스를 찔러넣고 허리를 움직여 정액을 방출하는 행위란 불가능할테니까...
'어쩌면...'이라는 실핏줄 같은 희망으로 시작한 섹스의 끝자락에 다다라서,
맥없이 축 늘어지는 여자의 나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재준은 실신할만큼 역하게 밀려드는 구토감에 엎드러지고 만다.
꾸여꾸역 치받쳐 올라오는 토악질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는 어지럼증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썩은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고체화되는 온 몸의 신경세포들을 무책임하게 방치한 채,
더욱 실제적·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또 한 번 결론짓듯 되새긴다.
나는 섹스파트너를 잃어버린 게 아니다.
다만 나는.... 첫 사랑을, 잃었다.
(107)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자 들어서며 전등을 켜는 것이 이따금씩 으스스한 한기가 감돌 정도로 외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애완동물이라도 한마리 길러볼까..'라던지,
아니면 독거하는 생활을 접고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스치지만
대부분 심각하게 고려해 볼 여유를 망각한 채 묻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정말 혼자만의 공간에 타인을 맞아들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고 태현은 다짐한다.
불이 켜진 집으로, 생소하더라도 반갑게만 들릴 다른 이의 음성이 존재하는 곳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오늘따라 간절히 소망하는 이유는
실상 아주 지겹게, 오랫동안 태현을 따라다니던 고독과 공허감이다.
거실을 지나 작업실로 곧장 들어간 태현은 아무도 곁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가 듣지 못하도록 희미한 한숨을 내쉰다.
깜박거리던 형광등이 팟 하고 환한 빛줄기를 뿜어내자 작업실 안의 여러가지 악기와 수백장에 이르는 CD,
한 쪽에 놓인 책장을 가득 메우는 관련서적, 그리고 컴퓨터 한 대가 태현은 눈동자를 다독이듯 어루만진다.
그것들을 새삼스레 하나 하나 둘러보며 '꿈'이라는 황홀한 단어를 속삭이는 태현..
그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버팀목, 그가 진정 살아 숨쉬고 있음을 체험하게 해주는 유토피아 그 자체..
버릇처럼 쓸쓸한 웃음을 피워내며 태현은 지민에게서 받은 세라의 수첩을 집어든다.
왠지 함부로 열어보아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에 손 댄 것처럼 알싸하고 이중적인 긴장과 흥분이 그를 섬찟하게 한다.
약하게 일렁이는 호흡을 엄한 손길로 누르며 태현은 수첩의 첫 장을 넘긴다.
어떤 가식이나 이성적인 검열을 배제시킨 솔직하고 담백한 필체가 적혀져 있다.
'1999년 1월 1일: 또 다른 시작 앞에 느껴지는 건 부담스러운 책임감이다.'
'1999년 1월 2일: 언니와의 통화.. 불쌍하다. 그리고 답답하다. 울고 싶다.'
그녀의 일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날 그날의 감상과 생각들을 길게 서술하지 않고 짤막한 한 두 문장이나 혹은 몇 개의 단어만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찡하게 콧등을 아려오는 이상스런 기운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며 태현은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수첩에 기록된 활자들에 몰입한다.
'1999년 3월 25일: 장주혁, 아주 특별한 남자. 재미있다. 가까이 가 봐야겠다.'
주혁을 처음 만난 날인가보다.
그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눈물까지 대롱대롱 매달고 웃어제끼던 세라의 모습이 어렴풋한 잔상을 만들어내고,
태현은 또 한번 피식 황폐한 실소를 머금는다.
그 뒤로도 꾸준히 이어지는 주혁과 혁수에 관한 이야기..
'1999년 3월 26일: 장주혁은 언니와 비슷한 사람이다. 역시 내 예감은 정확하다.'
'1999년 4월 1일: 안혁수&장주혁.. 측은해서 못 봐 주겠다. 둘 다 하나 같이 병신이다.'
'1999년 4월 5일: 주혁오빠에게 아무 힘도 못 되어주는 게 제일 속상하다.'
'1999년 4월 27일: 안혁수, 결국 그렇게 도망쳐버리다니... 비겁한 이기주의자!'
아마 혁수가 미국으로 출국한 날인 듯 싶다.
계속해서 혁수의 부재로 인해 방황하는 주혁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마음과 떠나버린 혁수에 대한 원망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유난이 크고 또박또박한 글씨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발견하자 태현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1999년 5월 10일: 문태현... 3년 전의 그가 다시 살아난 줄 알았다. 아직도 정신이 멍하다.'
'1999년 5월 11일: 하루종일 그 사람만 생각했다. <그>가 문태현인지 유진석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유진석... 처음 접하는 그 이름을 태현은 입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세라의 영혼을 그토록 끈질기게 갉아먹던 케케묵은 추억의 주인공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
태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와 세라가 결국은 또 같은 테두리 안에 묶인 것만 같은 생각에 메스꺼운 구역질이 치민다.
자기 손으로 파멸을 택한 유진석이라는 그 남자가 힘겹게 행복을 꿈꾸기 시작하던 세라를 시기해서
피묻은 손으로 그녀를 데려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유치하고 터무니 없는 상상까지 끄집어내다가,
태현은 그런 자신에게 경멸어린 눈길을 쏘아보내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1999년 7월 30일: 사랑하고 싶다. 정말로 <문태현>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길...'
'1999년 8월 3일: 더러운 나를 맡기기엔 그가 너무 순수하다. 그래서 두렵다.'
'1999년 8월 6일: 어쩌면 내게도...꿈의 현실화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1999년 8월 11일: 문태현의 여자가 되는 것, 역시....내게는 과분하지?'
그렇게 당당하던 모습, 아무 것도 거리끼지 않던 그녀만의 떳떳함은 전부 가짜였을까...?
형편없이 위축되어있고, 아주 당연한 것조차 황송해하는 이 태도는 대체 뭐야..
너답지 않아, 이세라. 내가 잘못 알았던 거야?
너라는 여자.... 사랑했던 거야, 내가..??
아냐, 알고 있었어.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어..
그래, 그랬어.... 널 사랑했어..
'1999년 8월 17일: 그가 나를 안았다. 내 영혼을 가졌다. 내 꿈이 이루어질 것 같다.'
마지막 문장이다.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말로 끝을 맺고 있다. 견딜 수가 없어진다.
음악작업으로도 불식시킬 수 없을 것 같다.
태현은 눈물로 범벅이 된 뺨을 훔치며 수화기를 든다.
- 가냘프게 피복선을 타고 흘러나오던 태현의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을 상기하며,
주혁은 다급한 마음에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소나락이 자꾸만 헛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브레이크를 밟아 대충 차를 주차시키고 타닥타닥 리드미컬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지하에 자리잡은 술집으로 향한다.
후미진 곳에 앉아 술병을 기울이고 있는 태현을 보자마자 단박에 양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주혁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간다.
"어....왔냐? 앉아라, 뭐 마실래??"
반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끄면서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는 태현..
주혁은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맥주를 시키고 일단 아무말 없이 태현을 살펴보기부터 한다.
"어제 새벽에 혁수랑 잘 만났어?"
자꾸 늘어나는 침묵이 짜증스러웠던지 태현은 약간 조급증이 서린 어투로 주혁에게 묻는다.
"응.. 근데....무슨 일이야? 네가 술을 다 마시자 그러구.."
"그냥.....가끔 넌 그럴 때 없냐?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잠깐동안 추태 부리고 싶은...
내가 지금 딱 그래. 오늘 너한테 엄청 꼬장 부릴거니까 넌 많이 마시지 마. 알았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한 주혁의 표정이 점차 차분한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고
그와는 반대로 태현의 얼굴에 칠해지는 우울과 서글픔은 짙어져간다.
"........오늘 지민이 누나 만났다.."
"세라 언니...?"
"씨발.... 잊을만 하면 흔들어놓고, 마음 좀 잡았다 싶으면 또 생각나게 하고...
진짜 이제는 지쳐서 못 살겠다.. 음악 하나에만 몰두하는 것도 힘들어 미치겠는데..."
벌써 커다란 눈동자에 불그스름한 핏발이 섰는데도 아랑곳 없이
연거푸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태현을 주혁도 말리지 않은 채 묵묵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좀 전에 태현이 당부하던 말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듯 주혁은 술에 손을 대지 않고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담배에만 불을 당긴다.
"미치겠다구....장주혁, 너도 엔간히 괴롭겠지만 나도 너만큼 인생 살기 벅차다 이거야..
혁수랑 너, 재준이랑 강태...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정말 불쌍하지..
사랑하는 사인데 얼굴도 못 보고 맘껏 만나지도 못하고 같이 있을 수도 없고...차암~~ 가여워서 마음 아파..
......근데, 근데 있잖아....나쁜 놈이라고 해도 할 말 없지만, 솔직히....
어떨 땐 너희들이 진짜 미워..
우리 세라는.....우리 세라는 죽었는데,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서 서로 어떻게든 같이 있으려고 발버둥 치는 게....
차라리 부러워보일 때도 있다면 믿을 수 있겠냐? 응??"
"........................."
"장주혁, 넌 세라 생각 얼마나 해? 일주일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그래도 이세라하고 장주혁 베스트 프렌드였잖아..
수첩 보니까 절반은 너랑 혁수 얘기던데... 넌 세라 죽고나서 그 애 생각 얼만큼 하니..??"
그 따위가 여기 나겨진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고,
이런 식으로 주책스럽게 겨우 멀찍이 떨어뜨려놓은 자책감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어디 있냐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지만
주혁 안에 내재된 또 하나의 그가 주혁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음을 일깨워준다.
주혁은 끝내 다문 입술을 열지 못하고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니, 그렇게 죄책감 느낄 거 없어..
사실 나도 이제 세라에 대한 기억 거의 잊어버리고 있는 중이니까...
그리고 넌, 혁수 하나만으로도 벅찬 상태잖아.. 재준이랑 강태는 말 할 것도 없고....
훗....괜찮아, 주혁아.. 잊어버리고 사는 게 당연한 거야.. 인간이니까....너도 나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이기적으로 자기 생각만 하면서 살게 되는 거지..
나 하나 추스리기도 벅차 죽겠는데 죽은 사람까지 어떻게 챙기겠어, 안 그래..??"
신랄하고 흉물스런 언어의 공격이 주혁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태현 자신을 학대하기 위함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혁수에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우격다짐 식으로 몰아부치던 그가
이렇듯 허약한 비틀림을 보이는 이유는 '카타르시스'라는 감정의 정화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태현의 암갈색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들고 한 방울의 결정이 그의 뺨에 청승맞은 곡선을 그리자
주혁은 그가 창피해 할지도 모를 눈물을 외면해주기 위해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시야를 흐려놓는다.
"주혁아... 한 가지 충고할게..
너 있지....혁수랑 사랑하는 거 너무 힘들면.....그냥 그만 둬.
너무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으면 그냥...없었던 일로 해..
당장은 혁수 없이 죽을 것 같고 세상이 다 무너질 것 같겠지만..
아니야~ 그런 것도 잠깐이야.. 잠깐만 지나면 어느새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되 있어..
인간이 원래 다 그런 거야. 뭐, 얘 아니면 안 된다... 그 딴 거 다 개소리야..
이 사람이랑 안 되면 잠깐동안 괴로워하다가 언젠가는 잊고 또 다른 사람이랑 시작하게 마련이고, 아니면 지 혼자서라도 꿋꿋이 살게 돼..
정말 그렇다니까...?
.....날 봐.. 이렇게 멀쩡하니 잘만 살잖아??
내 인생의 목표는 최고의 뮤지션이니 어쩌니 하면서..."
어디선가 지독스레 썩은 악취가 풍기는 듯한 느낌에 주혁은 순간적으로 오그라드는 기관지와 폐를 애써 팽창시키며
담배연기가 걷힌 맑은 시야를 통해 비춰지는 태현에게 초점을 모은다.
그리고 야멸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딱딱하고 건조한 음성을 내며 나지막히 이야기한다.
"........나더러 죽일 놈이라고, 네가 그러고도 세라 친구냐고 욕해도 좋아.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어. .......네가 얘기한 대로, 세라는 죽었어.
그건 네 잘못도 아니고 재준이 잘못도 아니야.
그건...인간의 능력 밖의 문제야. 아무도 개입할 수 없는 부분이고, 누구의 탓으로 돌려서도 안 돼.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젠 너도 제발 그 사실만큼은 인정해!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건...세라는 죽었지만, 혁수랑 나는 살아있어.
살아있기 때문에 서로를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어!
살아서 움직이고 세상을 보면서 생활하는 동안은, 우린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어..
또....모든 게 우리의 선택이니까 그에 따른 고통도 감수하는 것 뿐이야.
세라와 너, 나와 혁수를 똑같은 선에 놓고 얘기하지 마.
우리는 둘 다 살아있어.. 영혼도 육체도 살아있다구... 무슨 소린 지 알아..??"
(108)
아까부터 심장 부근의 빈 공간 속을 뱅글뱅글 회전하듯 돌아다니며
휭 바람소리를 일으키는, 정체 모를 무언가 때문에 강태의 눈빛이 갈수록 어두워진다.
꺼져들어가는 의식 가운데 제발 이것이 죽음이었으면 하고 바라던 그의 염원을 배신하고
그를 안락한 병원 침대 위에서 깨어나게 한 장본인을 재준이라고 해야할지, 문환이라고 해야할지,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잔악한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게 가장 마음 편한 일인지...
눈꺼풀을 들어올리자마자 아득히 밀려오던 새하얀 병실의 벽면이 어쩌면 재준의 우윳빛 피부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찰나적인 희망을 품었던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는 강태였다.
너그럽고 친절한 인상의 담당의사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황당한 병명을 일러주었을 때 강태는 그저 허술한 웃음을 지어보였을 뿐이다.
아프리카 어린이들 절반이 넘는 숫자가 앓고 있다는 영양실조, 그것이 강태가 병원에 실려와서 받은 첫 번째 진단이었다.
'배고픔'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생존욕구마저 결핍해 버린 것이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저 어떤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밖에 나가서 기다려."
까칠까칠하게 고막을 때리는, 이젠 어느 정도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오자 강태는 힐끗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본다.
회색 양복차림의 문환이 부하들을 물리고 나서 침대에 앉은 강태에게로 주의를 기울인다.
얼마동안 서툰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찝찝하게 훼방놓는다.
"....몸은 좀 어때..? 병원에서는 며칠동안 조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던데..."
"괜찮아요.. 집에 가서 쉬어도 되니까 내일 퇴원할래요."
"그럼 좋을 대로 해. 네가 괜찮다면 상관없지.."
지극한 무위를 간판처럼 내걸고 입력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듯 입술을 움직여 이야기하는 강태에게 묘한 갑갑증을 느끼는 문환..
소소한 잡음 하나까지 또렷하게 잡혀오는 극단적인 고요가 적개심으로 잔뜩 무장하고 있을
강태를 상상하며 이곳에 온 문환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준다.
강압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복종을 요구할 수도, 지배적인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며 고약한 모멸감으로 그를 조롱하기도 멋쩍은 진공상태..
이런 심각한 분위기를 오래 놔 둘 문환이 아니다.
"난 또....혹시라도 이재준 없으면 죽는다고 동맥이라도 끊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이렇게 덤덤한 모습으로 얌전히 있다니, 의외야??"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문환의 어조에는 빈정거림이 섞여있다.
강태의 얼굴에 쓰라린 조소가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이어서 허공 중에 분사되는 그의 핍절한 목소리가 문환을 주눅들게 한다.
"....훗... 죽긴 내가 왜 죽어요...? 결국....버려진 건 사실인데..."
소름이 돋을 만큼 아래로 아래로 침전된 강태의 흑빛 눈동자가 그 어떤 감정도 담아내지 않은 채 멀쩡히 주위의 사물들을 비춰보인다.
망막에 상을 맺는 모든 피사체들이 그 형태만으로 인식되는 건,
영혼의 차원에서 뛰놀던 일련의 감각기관이 이젠 전부 다 마비되었음을 강태에게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신호인지도 모른다.
'생존'의 의미보다 한 단계 앞선 '삶'이라는 것이 정지되었음을, 강태 자신도 선선히 받아들인다..
"....그렇네요, 정말.... 자꾸자꾸 생각해봐도...사실이네요..
그래도 한번만 더 물어보고 싶어요. 내가 정말....버려졌나요..? 그런 거에요..??"
"이재준은 충의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놈이야. 그렇게 오랫동안 이재준과 같이 지냈으면서 그 정도도 짐작 못했나?
이봐, 이쪽 세계에서 믿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급속도로 치밀어 오르는 흐느낌을 능숙하게 억눌러 되 삼키며 강태는 둔탁한 통증에 질끈 눈을 감는다.
격해지는 숨소리가 행여 문환의 귓가에 감지될까봐 조심하면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의 이성을 채찍질한다.
그리고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할 수 있는 날카로움을 그 손에 쥐어주려 애쓴다.
지금부터 나는 진실로 강해져야 한다.
기댈 어깨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이제 난 당신과 같이 있게 되는 건가요..?
이재준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나를...정부로 삼을 생각이에요?"
"그래, 맞아. 역시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군.."
별로 부드럽지 않은 문환의 칭찬에 강태의 빨간 입술이 어울리지 않는 냉소를 그려낸다.
메마르고, 을씨년스럽고 절망이 어린 차가운 눈빛.
그럼에도 아직, 자포자기의 상태에 이른 것 같지는 않다.
무엇을 기대하며 붙잡고 있는 건지, 끈덕지게 매달려 있는 그의 사선이 어디인지 문환은 그 실마리조차 찾을 수가 없다.
강태를 손아귀에 넣었다는 충족감은 상상했던 것보다 미미한 수준이다.
"...쿡...내가 예쁘긴 예쁜가 보네요. 다들 날 못 가져서 안달이니...
그래봤자 침대에서 갖고 노는 장난감이 얼마나 대접을 받겠어요?
기껏해야 비싼 옷 입혀서 지겨운 파티에나 데리고 다니는 게 전부겠죠..
난 당신 옆에 붙어서 싸구려 웃음이랑 추파를 팔 거고.."
"그래도 편한 생활 아닌가? 순전히 몸뚱어리 하나 덕분에 호사를 누리는 거잖아??"
"뭐...그 말도 맞는 것 같네요. 어쨌든 난 내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니까...당신도 주어진 역할만 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 이하로 못 미치는 것도 골치 아프지만 정해진 한도 이상으로 설치지 말아달라는 얘기에요.
'누구처럼', 사랑이니 영원이니 떠들면서 사람 갖고 놀지 말라구요..
한번만 더 그런 식으로 속았다가는....그땐 진짜, 내가 날 죽일 거에요.."
"....이제야 이 쪽 세계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군.. 지금부터는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관건인데...?"
"걱정 마세요, 그 문제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맨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난... 수월했으니까.."
그쯤에서 문환과의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듯 그로부터 눈길을 거두어들이며 강태는 다시 밀랍인형처럼 싸늘한 무표정을 내비친다.
문환은 그런 강태의 제스츄어에 준비해 온 말들을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탐탁지 않은 기분을 싸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선다.
강태는 문환의 움직임을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를 배웅해야겠다 거나 최소한 인사라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창 밖의 풍경에만 눈동자를 고정한다.
"....이만 가봐야겠어. 애들한테 퇴원 준비하라고 얘기할게. 알아서 잘 할거야.."
"네, 그러세요."
"그리고 네 물건들은 오늘 옮겨다 놓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그럼, 내일 집에서 보도록 하지.."
"....그러죠, 내일 뵈요."
기계적으로 입술만을 작동시켜 뱉어내는 글자들이 껄끄럽게 귓구멍 안으로 흘러드는 게 꽤나 불쾌하지만,
문환은 넓은 아량을 베푸는 마음으로 그런 건방진 강태의 태도를 묵인해준다.
그것은 강태가 자신의 소유물로 확실히 등록 되어있다는 자신감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문환이 병실 문을 닫고 나가자, 여태까지 견고하게 지켜오던 강태의 태연함과 침범하지 못할 것 같던 차분함
―실상 이 모든 게 연기일 따름이지만 ―이 스며드는 바닷물에 모래성이 허물어져 내리듯 천천히 무너진다.
참혹하게 꺾이는 그의 목과 허리가 내면적 현상을 외적으로 표출하고,
결코 등장시키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눈물 또한 야속하게도 강태의 피폐한 두 볼 위에 혐오스러운 얼룩을 남긴다.
울다니.... 눈물을 흘리다니... 젠장, 남자한테 버림받고 질질 짜고 있는 신세라니...
70년대 흑백영화 여주인공의 궁색함과 한심스러움을 완벽하게 갖춘 자신의 모양새가 하도 억울해서,
서럽고 기가 막혀서 강태는 쏟아지는 눈물 사이로 또 한 번 조소한다.
그리고 다부지게, 최종적인 결론을 내린다.
이재준.. 절대로 이렇게 널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
이젠 내가, 널 도와주겠어.
(109)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차트에 무언 가를 끄적거리며 담당의사는 상냥하게 미소짓는다.
3시간이 넘게 계속되는 상담치료를 마친 혁수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권태가 역력히 배어난다.
의사에게 목례를 해 보이고 치료실을 나서는 혁수..
자제하고 있던 숨소리를 흐트러뜨리며 듣는 사람까지도 진이 다 빠져버릴 만큼 길게 한숨을 쏟아낸다.
5층에 있는 병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데, 정문 입구의 데스크에 앉은 간호원이 혁수를 불러 세운다.
"안혁수씨!"
흠칫 뒤를 돌아보고 의뭉스런 눈빛을 보내는 혁수에게 가까이 걸어오며 그녀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말한다.
"친구 분이 찾아오셨어요. 이지민 씨라고 하던데..."
"지민이 누나가요??"
"예, 한 10분전쯤에 오셨어요."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혁수의 걸음걸이가 빨라진다.
면회실의 문을 열어제치자,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책상에 비스듬히 몸을 걸치고 있던 지민이 고개를 들고 혁수와 시선을 마주 댄다.
"누나! 언제 들어온 거야?"
방금 전의 침울한 색채를 몽땅 파스텔 톤으로 밝히며 환하게 웃는 혁수를 그녀 특유의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지민도 온기 가득한 미소를 띄운다.
그리고 정말 친누나처럼 혁수의 옷깃을 매만지며 입을 연다.
"며칠 됐어. 비자 새로 받는 것 때문에 잠깐 온 거야."
"그렇구나~~ 누나 예뻐진 것 같아.. ^^"
"짜식... 그러는 너는 나이도 창창한 게 몰골이 왜 이러냐?"
"내가 뭘~~~ "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이잖아! 그동안 어떻게 지냈길래 애가 이 모양이 된 거야?!"
가벼운 농담으로 출발했던 대화가 어느새 원망할 대상도 없는 초라한 격노의 불씨를 지민의 가슴속에 지피우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와락 고함을 쳐버린다.
막을 틈새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넘쳐흐르는 말간 눈물방울이 어깨를 들썩이며 혁수의 손을 잡는 지민의 손등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안 그래도 옆에서 챙겨주지 못해서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네가 이런데 붙잡혀있는 걸 보니까 정말 돌겠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게 말이나 되니!?! 애를 정신병원에다가 처박아놓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자는 거야?!"
"에이, 누나.... 오랜만에 얼굴 보면서 왜 울고 그래.. 나 괜찮으니까 그만 울어..."
"뭐? 괜찮다고?? 야, 안혁수.. 너 지금 그 소리가 나오니? 네가 그런 말이 나와?!
이런 쓰레기하치장 같은 데에 갇혀서 무슨 실험대상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게 괜찮다는 거야!?
정신병원에 몇 달 있더니 혁수 너 진짜로 미쳤나보다, 응?!?"
발작적으로 몸까지 흔들어대며 울부짖는 지민을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혁수는,
절대 그를 질책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닌 그녀의 혹독한 물음들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오랜만에 마주한 지민과 즐겁고 유쾌한 담소를 나누려했던 기대가 순식간에 부서지는 것을 못내 섭섭해하며
혁수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그녀의 안타까움을 지켜보기만 한다.
한바탕 쌓였던 울분을 토해내고 난 지민은 서서히 성난 파도를 잔잔하게 가라앉히며
간간이 훌쩍거리는 눈물의 흔적들을 떨구어내고,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 공기가 잠시 멍청한 침묵을 이룬다.
".....태현이한테 얘기 듣고 나서, 많이 생각해 봤는데...너 여기 이런 식으로 계속 있게 할 수는 없어.."
무척 단호하고 확고한 지민의 목소리에 혁수는 갑자기 따끔한 전율을 느낀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이 무엇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강하게 흡수되는 느낌에 신경의 고삐 한 가닥이 팽팽해진다.
빨갛게 충혈된, 그래서 더 의지가 굳어 보이는 눈으로 지민은 혁수를 직시한다.
"너 여기 이렇게 놔두고 나 미국 못 가.. 이대로 그냥 가면 나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할거야...!"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어쩔 수 없다고? 그런 소리만 하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그따위 약해빠진 소리만 되풀이하면서, 주혁이랑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걸로 만족하고 살래?!? 그럴 작정이냐구!!??"
"........."
"너네, 얼마나 더 이 상태로 버틸 수 있을 것 같니?
하루하루 흘려보내는 건 별 거 아닐지 몰라도, 이대로 계속 가다간 너희 둘 다 지쳐. 지쳐서 쓰러지거나 포기하게 된다구!
너희 둘...너무 자신만만해 하는 거 아냐?? 지금처럼 바보같이 앉아 있으면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
"그럼 어떻게 하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데 어쩌라는 말이야?!"
떨구었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유순한 갈색 눈동자를 아프게 구부리며 혁수 역시 지민과 비슷한 세기로 과격한 외침을 터뜨린다.
의식하기 힘든 구석으로 치워놓은 채 겨우겨우 은폐하고 있던 좌절감과 한계성, 무능력함을 고집스레 파고드는 그녀가 밉기도 하지만..
회복의 단서조차 얼씬거리지 않는 까마득한 현실을 새삼스레 확인하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섬뜩하다.
궁지에 몰린 토끼 마냥 겁에 질려 빽빽 소리를 쳐대는 자신이 궁상스럽고 처량하다는 생각에 혁수는 괜스레 혼자 창피해한다.
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의 황량한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아 지민과 혁수를 에워싼다.
그 짧은 순간동안 두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감정의 회오리를 잠재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지민이 다시 입술을 떼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정갈하게 씻겨져 있다.
"....미안해, 다그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너무 답답해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그 하찮은 물리적 거리 때문에
그를, 그리고 그의 연인을 여태껏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분노와 패배감과 절박함이 뒤범벅 된 감정상태는 이성적인 판단력보다 훨씬 큰 힘을 갖고 있음을 이미 깨달은 혁수도 지민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심에는 나와 그가 위치한다.
"혁수야, 난... 너보다 더 먼저 이 길을 택했기 때문에 잘 알아.
이런 식으로 계속 생활하다간 너희들 정말 지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고, 끝내는...서로 놓쳐버릴 지도 몰라.
세상이 너희를 언젠간 받아줄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오산이야!
너희 부모님께서도 언젠가는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하니?
너희의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걸 입증하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걸 보여주면...
세상 사람들이 박수치면서 감탄하고 축복해줄 것 같아??
천만에, 오히려 그 반대야!! 그러면 그럴수록 더 지독하게 파괴시키려고 하는 게 세상이야!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 되면 어느 한 쪽을, 아니 둘 다 죽여서라도 망쳐버리려고 한단 말이야..
진실하고 강한 사랑이라는 걸 증명할수록 더 잔인하게 고문해서 결국은 파멸시키는 게 이 잘난 세상이야..!
시간이 흐르면 함께 할 수 있겠지...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너희는 질 수밖에 없어.
이건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엎드려서 기다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불행하게도, 상황은 너희가 참고 기다린다고 해서 바뀌지 않아.."
그랬던 건가, 인내하고 억제하고 소망을 잡은 손아귀를 풀지 않는 것으로는 무엇도 달라지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일어설 수 없나?
정성 들여 가꾸어가야 할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혁수는 흐릿해진 눈동자로 지민에게, 그리고 이 자리에 없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실재하는 그에게 질문한다.
대답할 책임은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에게 있을 터였다.
"....벗어나야 해. 이 지옥 같은 정신병원에서도 나와야 하고, 너희를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이제 그만 탈출해야 돼.
참고 견디는 게 만능열쇠는 아냐. 절대 아냐."
"그래, 알아.. 하지만...방법이 없기 때문에 여기 있는 거잖아.."
"방법을 찾아봐서 없으면 만들어내야지. 어떻게 해서든 방법이 있게 해야지."
"왜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얘기하는 거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 누나도 알면서..!"
"아니, 들어봐. 방법이 있어. 너희가 만들 생각도 안 하고 넋 놓고 있길래 내가 만들었어.
이 방법을 이용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너희의 선택이지만."
혁수의 표정이 기묘하게 평형감각을 잃고 무게중심이 한 쪽으로 쏠린다.
언뜻 납득할 수 없다는 의혹에 찬 갈색 눈동자가 밑바닥의 심연에서부터 느린 속도로 희끄무레한 빛을 틔운다.
혁수의 성대가 가파르게 진동하며 우스꽝스레 고조된 목소리를 울려낸다.
"......뭐...? 무슨 소리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겠다고.
세상이 너희를 억압하고 찢어발기려고 하면, 너희는 그보다 한 발 앞서서 세상을 속이면 되는 거야.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땐 가끔씩 사기 극을 벌이는 것도 괜찮은 생존방식이지. 목숨이 달린 문젠데, 불가피한 일이잖아?"
"누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정확히 뭘 어쩌자는 건지..."
"사기꾼이 되라는 거야. 주혁이와 네가 평생 자유롭게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세상을 등쳐먹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라구.
그리고 완전히 손 씻고 새로 출발하는 거야, 맨 처음부터!"
과장되게 생기발랄한 음색을 돋구며 활발한 몸짓까지 동원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지민..
조금은 코믹하고 장난스러운, 그러면서도 반어적인 비애가 물씬 풍기는 그녀의 모습이 불현듯 진지하고 신중하게 돌변한다.
지민은 혁수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간곡히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연다.
"혁수야... 주혁이랑 같이 미국으로 와..
너야 영주권이 있으니까 쉽게 들어올 수 있을 거고, 주혁이랑 같이 미국에서 다시 시작해. 누나가 있는 힘껏, 뭐든지 도와 줄게..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너희 그 부모 같지도 않은 부모 있는 데서 계속 이런 상태로 살다간 너희 결국 망가져..
너희도 꿈꾸던 인생을 살아야 될 거 아냐. 이렇게 비참하게 무너져버릴 수는 없잖아, 응??
서로 사랑하는 그 죄 하나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시들어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난 인정 못 해. 왜 너희가 이렇게 살아야 돼??
왜 너희는 행복하면 안 되는 건데? 왜 같이 예쁘게, 아기자기하게 살면 안 되는데?!
아니, 내가 가만히 두고 못 봐. 나도, 너희가 이렇게 사는 거 허락 못 해!!
......주혁이랑 혁수 너, 이제 편하게 쉴 때도 됐어..."
(110)
그가 내게 사랑을 해 줄 때면, 나는 그냥 무기력해졌지.
나약해진 건 아니었어. 그런 느낌과는 거리가 멀어.
그냥, 글쎄, 그의 강렬한 감정과 육체적인 힘에 압도되었다고 할까..
-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 -
무방비상태의 나체를 번연히 풀어헤친 채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여자는 기운 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아아~ 일어나기 싫어... 그냥 이대로 잤으면 좋겠다.."
격렬한 정사 후의 나른함과 몽롱한 반쯤의 마취상태에서 몸을 추스르기가 꽤나 귀찮은 모양이다.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잠자코 옷가지들을 걸쳐 입던 재준이 섹스 도중 여자의 손가락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 내리고 눈빛으로만 그녀의 퇴장을 채근한다.
"어유~~ 알았어! 오빠가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갈 거니까 걱정 마! 으휴~~ 쌀쌀맞기는.... "
거칠게 몸을 일으켜 바닥에 널린 속옷을 주워 입는 그녀를 뒤로하고 재준은 주방의 냉장고로 가서 맥주를 꺼내든다.
무표정한 얼굴로 거실의 쇼파에 앉아 리모콘으로 TV의 전원을 켜는 그가 마치 종이인형 같은 건,
그의 행동이 너무 습관적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라 대부분 정규채널은 방송을 중단했기에
유선방송으로 채널을 바꾸기 위하여 버튼을 누르는 재준에게 의아한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방문객은 재준이 짐작한 대로 태현이었다.
약한 술냄새를 풍기는 그에게 재준은 심드렁한 말투로 묻는다.
"술 마시고 왔어?"
"어어.. 주혁이랑 같이...
나쁜 새끼, 오늘은 정말 취하고 싶었는데 도리어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거 있지?
술맛 다 떨어지고 기분만 잡치길래 그 새끼 내버려두고 나왔어.. 근데...혼자 집에 있기가 너무 싫어서..."
재준이 앉았던 자리에 자신을 팽개치듯 몸을 기대고 지나친 슬픔이나 고단함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적당한 익살을 빠뜨리지 않으며 태현은 이야기한다.
"왜? 주혁이 형이 뭐라고 그랬는데?"
"몰라, 얘기하기 싫어. 무슨 뜻인지 생각하기도 싫고.아무튼 오늘은 전부 다 제껴놓고 술만 퍼먹고 싶었는데...
주혁이 이 자식, 자냐??"
"아니, 아직 안 들어왔어. 사업장 몇 군데 둘러보고 온 댔으니까 많이 늦을거야.."
"쳇, 망할 자식. 남의 속 뒤집어놓고 일이 손에 잡힌다냐?
무심한 놈.. 하여간 장주혁 어떨 때 보면 진짜 미워죽겠다니까??
지가 그딴 식으로 지껄이면 자기나 나나 똑같이 불쌍해지기 밖에 더 해?
내가 그런 소리 듣자고 지를 불러냈겠어?!"
암상스러운 심술과 까탈스런 투덜거림으로 교묘하게 위장한 태현의 상처가 장황하고 떠들썩하게 이어지는 도중,
재준의 침실 방문이 삐그덕 마찰음을 내며 벌어지고 옷차림과 화장까지 깔끔하게 다듬은 여자가 거실로 걸어나온다.
부지런히 놀리던 입을 순간 멈칫하며 태현은 멍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그녀는 그런 태현의 시선에 상관없이 재준에게로 다가와 그의 지갑을 건넨다.
재준은 10만원짜리 수표 5장을 그녀에게 내밀고 불만스레 토라져있던 여자의 얼굴이 환해지며 종알댄다.
"이야~~! 역시 오빠는 시원시원해서 좋다니까! 고마워, 오빠.. 앞으로 자주자주 불러.
오빠가 부르면 딴 손님들 다 취소하고 바로 올 테니까. 알았지?"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으응~ 나 갈게.. ^^"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에게 일그러진 눈동자를 붙박는 태현에게도 살짝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고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팔랑거리며 경쾌하게 발걸음을 뗀다.
끼이익 하는 소음과 함께 여자를 내보낸 문이 닫히자마자 태현은 못내 경악한 낯빛으로 재준에게 호통을 치듯 격한 어조로 질문한다.
"야! 저,저 여자 뭐야??"
"보면 몰라? 콜걸이잖아.."
"누가 그걸 물어봤어!? 저 여자가 왜 여기 왔다 가는 거냐고??"
"콜걸이 오는 이유가 섹스 밖에 더 있어?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
"뭐야?! 이재준 너 미쳤니? 너야말로 왜 이래~~!!?"
".....후우.....나, 강태랑 깨졌어. 이제 됐냐?"
아무렇지 않게 평이한 음색으로 무덤덤히 대꾸하던 재준은
끝내 역겨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오물덩어리를 뱉어내는 것처럼 냉랭하게 '사실'을 실토하고 자학적인 확인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겁쟁이와 같이, 안이한 도피처를 찾아 성큼성큼 발자국을 내딛는다.
물론 그에게 합당한 행동양식은 아니다.
어설프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재준의 모습에 태현은 거북스러운 불안감이 밀려들며,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아간다.
2층의 홈 바에 당도한 재준은 신경질적으로 가빠오는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대충 엉덩이를 걸치고
진정제를 갈구하는 환자 마냥 급하게 위스키 병의 마개를 딴다.
그러나 뒤따라 온 태현의 목소리가 그를 잠시도 편안한 망각 속에 빠질 수 없도록 방해하자, 재준은 난생 처음으로 끔찍한 낭패감에 사로잡힌다.
"이재준! 피하려고 하지 말고 자세히 얘기 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계속 견고히 입술을 잠근 채 유리잔에 술을 따르고, 미세하게 경련하는 손으로 잔을 들어 비우는 재준..
방황하는 그의 까만 눈동자가 차분히 정착하지 못하는 가운데 재준의 심장은 점점 가중되는 고통을 호소한다.
내 잘못이 아냐, 난 정말 힘들게 결정했어.
나를 비난하지 마. 나 역시 누구보다 더 괴로우니까...
이번만큼은 나도, 나를 가엾게 생각하니까..
"너 정말 이럴래? 나한테도 말 안 할 거야!?"
"그래, 얘기 안 한 거야!! 얘기하면, 형이 뭘 해줄 수 있는데? 응??
내가 구구절절이 늘어놓고 나면 형이 도대체 뭘 해줄 건데?!
형이 강태를 다시 데려올 수 있어? 그 많은 오해를 형이 전부 풀어줄 수 있냐구!?
.....없어, 아무것도 없어! 형도 나도 아무런 능력이 없어..
하소연하고 넋두리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결국 남는 건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놈이구나, 이렇게 같잖은 인간이구나 하는 비참한 기분 뿐이야!
근데 왜 자꾸 나더러 얘기하래?? 왜 자꾸 말하라고 해!?
꼭 그렇게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야겠어? 그래야 직성이 풀리겠냐구, 씨발!!"
처음이었다. 태현이 재준과 '우정'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쌓아나가는 3년 동안, 재준은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처럼 나약하고 자제력을 상실한, 내부에서 끓어 넘치는 비통한 감정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겨버린 무책임한 재준의 울부짖음을 마주 대하며 태현은 아찔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리고 최초로, 재준의 하얀 뺨에 무색의 결정이 굴러 내리는 것을 목격하자 태현의 공포는 먹먹한 슬픔과 익숙한 안타까움으로 변한다.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가느다란 양팔로 부러질 것 같은 고개를 지탱하며 재준은 억제하고 단속하기를 포기한 눈물을 실컷 부어버린다.
태현에게 약하고 궁핍한 자신을 공개하는 데에서 오는 수치심이나 거부감을 느끼기엔 이미 모든 기력을 소진한 재준이다.
알콜의 힘을 빌어 주정을 부리고 싶어도, 취하지 않는 자신의 저주받은 육체가 지금처럼 증오스러운 적은 없었다.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애가 숨쉬기를 바랬던 것 뿐이야.. 그게 다라구...
아니, 그래..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좋아.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해도 좋아.
그치만 형, 형은 알고 있어야 돼.. 태현형은 알아줘야 돼...응..?
......내가 지금 얼마나 죽고 싶은지...강태를 내 인생 속에 끌어들인 걸 얼마나 후회하는지 형은 알아줘야 돼...."
절규하고 애원하고 오열하는 재준을 품에 당겨 안으며,
오래전부터 잊고 있었던, 재준의 몸이 가냘프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태현은 외려 허탈한 실소를 흘린다.
이렇게 비실비실한 주제에... 왜 악착 같이 똑바로 서서 걸어가는 거냐..
가끔씩 넘어지기도 하면 얼른 달려가서 손 내밀어 주었을텐데...
이재준, 너도 참 대단한 머저리구나... 존경스럽다.
흐느낌을 주체하지 못하는 재준의 어깨 위에 서늘해진 이마를 파묻으며 태현은 속으로만 뇌까린다.
- 문환의 침실은 호화롭고 고급스러웠다.
크림색 벽지와 연한 갈색 목재로 이루어진 바닥의 조화도 훌륭하고
야청빛으로 실내를 밝히는 조명 또한 중세시대 귀족의 저택에나 있을법한 방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구겨진 부분 하나 없이 빳빳하게 깔린 감귤색 침대시트는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포근해 보인다.
하지만 낯설다. 낯설고 어지럽다.
휘휘 저어지는 두 다리에 힘을 가하며 강태는 앙칼지게 자신을 몰아 부친다.
엄살 부리지 말라고, 사치스럽게 굴지도 말라고.
문이 열리고, 술잔을 손에 든 문환이 침실 안으로 들어선다.
감출 필요가 없는 기대심리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정확히 강태에게 꽂히고,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문환은 남은 술을 마저 끝까지 들이킨다.
그리고 글라스를 선반 위에 올려놓은 후 침대에 앉아 강태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한다.
시기에 맞지 않는 치욕감으로 얼굴을 붉히며 강태는 문환의 옆에 자리한다.
난처하게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어금니를 꽉 깨문채 강태는 애써 태연한 동작으로 옷을 벗는다.
서서히 노출되는 자신의 알몸이 문환의 눈에 최대한 흉측하고 추물스럽게 보이기를 빌며
천장에 수놓아진 무늬들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려는 강태에게 문환의 거친 숨결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강태는 '이재준'을 떠올리고 만다.
그가 내뿜는 호흡은 이렇게 게걸스럽지 않았다.
아주 미묘하게 절제된 숨소리만이 그의 입술을 통해 밖으로 나오곤 했었다.
문환의 혀가 난폭하게 강태의 입술을 벌리게 하고 침범한다.
강태는 본능적으로 구강점막을 이용해 그의 혀를 빨아들이며, 부드럽게 감질나게 자신을 흥분시키던 재준의 혀의 감촉을 기억해 본다.
키스가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달아오른 문환이 열에 들떠 강태의 몸을 애무해 오고 강태는 그런 문환에게 반응해주기 위해서 또 다시 재준의 손길을 더듬어 간다.
절대 서두르지 않는 느긋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끓어오르는 긴박함이 담겨있고
무엇보다 애틋하게 전신을 휘감는 간절함과 소중함, 콧날을 시큰하게 만들던 한 마디의 절실한 고백.
재준이 애무를 퍼부으면서 강태에게 선물해 주었던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생각나고..
강태는 마침내 팔을 들어 이슬이 맺힌 두 눈을 가리고 만다.
때 맞춰 문환이 강태를 돌아눕게 하고 어깨를 부둥켜안는다.
그리고 막무가내다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서툴게 강태의 몸 안으로 침입한다.
후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이중적인 쾌감이 강태를 잠식하고 이젠 재준의 얼굴을, 그의 존재 자체를 그려볼 수가 없다.
그것이 아직도 강태 안에 살아있는 재준을 향한 원초적인 마음이고 강태가 붙잡고 있는 재준에 관한 계획이다.
이재준, 나 지금...다른 놈이랑 섹스하고 있는 중이야.
강간당하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옷을 벗었어.
그러니까 너도 남자든 여자든, 다른 사람이랑 마음껏 즐겨..
그래야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널 떳떳하게 마주보고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 자책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되겠지...?
(111)
"우리 둘은 우리가 '우리'라고 새로 만들어낸 다른 존재의 안에 있다고 생각해.
물론 우리는 그 존재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 우리가 바로 그 존재니까.
우리 둘 다 스스로를 잃고 다른 존재를,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얽혀들어 하나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창조해낸 거요."
-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 -
"혼인신고...?"
주혁의 상체가 조금 더 앞으로 기울어지며 반문한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하얀 손이 가지런하게 깍지를 끼며 테이블 위에 놓여진다.
두 사람의 미국행에 대한 혁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주혁..
혁수는 까페 전체를 가득 메우며 넘실거리는 전등 불빛에 시선을 둔 채 느릿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어찌 들으면 약간 망설이는 투가 엿비치는 것도 같다.
"네가 미국 시민권을 가진 여자랑 결혼을 하면 너도 자연히 시민권을 갖게 되는 거잖아. 그러면...준비는 끝나는 거고."
"그러니까 어떻게..."
"윤아누나, 시민권 갖고 있어. 8살 때 입양 됐거든.."
주혁은 깍지 낀 손을 들어 턱을 받친다.
잠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고 차근차근히 혁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자신과 혁수의 미국행. 빈틈없이 짜여진 시나리오.
유치한 사랑의 도피라고 하기엔 제법 대담하고 위험천만한 시도라는 생각에 주혁은 가벼운 전율을 느낀다.
"...좀 모험적인데...?"
"그래, 상당히. 그렇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건 아냐. 오히려 꽤 높은 편이지.."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느냐에 따라 확률은 달라질 거고.."
"맞아, 어차피 연기해 보이는 건 내 몫이지만..."
"하긴... 난 지금처럼 눈 앞에 안 나타나기만 하면 되는 거겠네.."
비아냥거리듯 말끝을 흐리는 주혁을 바라보며 혁수는 희미하게 웃음을 띄우다가 금세 진지하고 숙연한 표정을 되찾으며 가장 중요한 물음을 꺼내놓는다.
"넌...어떻게 하고 싶어..?"
".....혁수 너는?"
".....내가 얘기하는 이유가 뭐겠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으면 애초에 한 귀로 흘려버렸지..."
'가고 싶다'는 뜻을 담은 혁수의 우회적인 대답에 주혁은 순간적으로 그가 귀여워 보여 살풋이 미소를 깨문다.
눈꺼풀을 야트막하게 내리깐 채 투정을 부리듯 명확하지 않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혁수의 도톰한 입술이
그대로 보기엔 골치가 아플 만큼 유혹적이지만, 주혁은 이곳이 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이 아님을 상기한다.
그리고 애써 미소를 거두어들인 신중한 낯빛으로 말한다.
"....그래.. 누나가 얘기한대로, 가자... 방법이 있다면 움직여야지."
너무 간단하게 떨어지는 주혁의 동의에 되려 혁수가 어리둥절해진다.
엉뚱하게도 갑자기 드세게 불거지며 달겨드는 찝찝한 예감 때문에 혁수는 서둘러 입술을 뗀다.
"당장 대답해 달라는 게 아니라...
네 입장에서도 한번 잘 생각해보고, 같이 의논해서 결정하자는 뜻에서 얘기한 거지 무조건 지민이 누나 말대로 하자는 게 아냐.
난 미국생활에 익숙하지만, 너는 이렇게 무작정 떠났다가 많이 힘들텐데...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고..."
"아니, 괜찮아. 더 오래 생각하고 고민하면 불안해 질 것 같아.
길게 끌고 깊이 들어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질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난, 네가 하루라도 빨리 거기서 나왔으면 좋겠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중요한 건 우리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나갈 수 있느냐 하는 거야.
만약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느낌 하나만 믿고 출발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지도 몰라.
그 때는 돌이킬 수 없어. 이건 심각한 결정이야, 너도 알잖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선택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냐?
그래... 여기서 지금까지 해 온대로 이해해 줄 때까지, 받아들여 줄 때까지, 아니, 우리를 가만히 놔 둘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가피한 선택이었어.
지민이 누나가 한 말도 일리가 있어. 그동안 우리가 멍청했던 건지도 몰라.
돌파구를 찾지 않은 건 우리가 힘이 없고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린, 겁이 나서 움츠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실패해서 쓰러지는 게 두려웠던 거야. 우린 이미 충분히 다쳤다고 우리 스스로 생각하면서 몸을 사렸어.
굴복하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도 되는 듯이.
......그래,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어. 우린 싸우고 있었던 게 아냐.
이젠 진짜 시작해야 돼.."
"글쎄....? 우리가 싸움을 시작하는 걸까?
지민이 누나는 이렇게 표현하던데... 우리가 세상을 등쳐먹고 사라져버리는 거라고.
화끈하게 사기 한 탕 치고 손 씻은 다음에 깨끗하게 새 출발하는 거래."
"먼저 배신한 건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야.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런 죄의식도 못 느껴."
써늘한 냉풍을 불러일으키며 주변의 공기입자들을 얼리는 주혁의 음성에 혁수는 물기 서린 아련한 눈동자를 그에게로 향한다.
그가 세상을 버리고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나를 선택했기에 그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라는...
그런데 내가 그와의 영원을 도모한다는 것은 너무 뻔뻔스러운 일일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 의식하지 못하게끔 주혁을 벼랑으로 몰아가는 감정들이 늘 가슴 한켠에 잔존하는 불안심리와 더불어 작용하여,
주혁은 굳세게 혁수를 자신의 팔 안에 가둔다.
혁수 역시 저항하지 않고 소리 없이 머리를 기울여 주혁의 가슴에 기댄다.
곧이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을 잇는 주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혁수는 그 잔잔함과 부드러움에 안도하며 스르르 눈을 감아본다.
"....미안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가끔은 못 견딜 정도로 화가 나, 슬프고..."
따스한 뺨을 바싹 밀착해오는 혁수를 힘주어 끌어당기며 주혁은 그가 자신의 말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래서 나른하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온화한 적막 속에 떠다니는 다정스러운 상념에만 취해 혁수의 체온과 엷은 숨소리를 향유한다.
마치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두텁고 강력한 보호막이 두 사람의 둘레에 쳐진 것 같은 달콤한 망상에 빠져 주혁은 감히, 장밋빛 플랜을 설계한다.
그것도 아주 섬세하게, 치밀하게.
".....주혁아.."
"...응?.."
"저어....있잖아...."
"...뭐..?"
주혁의 가슴에 묻고 있던 머리를 들어 동그란 갈색 눈동자로 그의 검푸른 두 개의 구슬을 올려다보는 혁수..
다시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리며 무언 가에 주눅이 든 듯한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아버지 말이야..... 원망하니..?.."
지속적으로 혁수의 팔을 쓸어내리던 주혁의 손이 멈칫하고, 혁수의 정수리 위에 턱을 괴고 있던 그가 얼마간의 간격을 둔다.
그러더니 품에 안긴 혁수를 약간 떼어놓으며 비스듬한 자세를 바로 고쳐 앉는다.
혁수 또한 괜한 질문을 했다는 자책감에 주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식어버린 커피가 담긴 연두빛 머그컵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증오해, 그 사람."
최대한 내면의 적개심을 제거하고 되도록 일상적인 어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주혁은 자르듯이 짤막하게 대꾸한다.
그의 말에 왜 심장이 덜커덕 한 박자를 빠뜨리고 고동치는지 의아해하며
혁수는 자기도 모르게 주혁의 체취가 진하게 맡아질 수 있을 만큼 그에게 다가간다.
그럼에도 주혁의 팔이 내밀어지지 않자, 혁수는 편집증 환자 마냥 광기 어린 위기감에 추격 당한다.
"그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냐. 단지... 전에는 내 어머니의 남편이었고 이제는 네 어머니의 남편일 뿐이야.
난 전 부인이 떨궈놓고 간 거추장스러운 짐이고, 넌 나 대신 새로 역할을 맡은 아들인 거지..
그 사람한테는 아내가 필요해. 나 같은 아들은 없어도 되지만...
게다가 자기가 그토록 필요로 하는 아내의 아들을 망쳐놨으니, 한마디로 난 피해만 주는 인물이야.
뭐...내가 일류대학 학생이고 모두가 칭찬할만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면 얘기가 좀 달라졌겠지.
훌륭한 장식품 용도로 그 사람 옆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을테니까...
하지만 난 예전부터 그 사람 기대에 어긋났었어.
내가 조각을 하겠다고 했을 때, 겉으로는 인자하게 웃으면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했지만 벌써 마음 속으로는 날 밀어내 버린 거야.
고집 세고, 제멋대로에다 출세할 가능성이 없는 아들을..."
"그건 너의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어. 그렇지 않아?"
"어쨌거나 상관없어. 그 사람이 날 티끌만큼이라도 아들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 상태까지 왔으리라고 생각해??
너의 어머니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 아버지였던 그 작자는, 한 가지만은 분명해.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너는.....아버지를 사랑했었어..?.."
용기를 내어 혁수는 주혁의 눈을 바라본다.
고통스럽게 젖어드는 암청색 눈동자가 혁수의 투명한 눈빛을 어렵사리 피해낸다.
흉하게 곪아터진 상처를 들추어내 치료하는 것은 좀 더 한가로운 여유가 있을 때 해도 괜찮을 텐데-
주혁은 내심 중얼거리며 마지못해 입을 연다.
"후우....그래, 그랬었지...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마...그랬던 것 같아.."
"....나를 만나기 전 까지...?"
"응... 널 만난 후부터는... '아버지'라는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었어.."
".....어째서..?"
피가 철철 쏟아져 나오는 환부를 움켜쥐고 신음하듯, 주혁은 급격하게 호흡을 들이킨다.
그리고 켜켜이 등줄기를 저며오는, 극심한 통증에서 벗어나려 정신 없이 혁수를 향해 손을 뻗친다.
그의 자그마한 얼굴과 그 안에 오목조목 자리잡은 눈, 코, 입술 등을 찬찬히 훑어보며
비정상적으로 날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다 잡아맨 주혁이 거의 속삭이듯 작은 음성으로 대답하자,
혁수는 비로소 주혁의 분노를 온전히 공유할 수 있다.
"네가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불러야했기 때문에....그 때부터... 그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어.."
".......나도..... 네가 우리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를 때마다....죽고 싶었어.."
혁수의 말을 듣고, 주혁은 눈부실 정도로 화사하게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이 흐느낌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단 몇 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
(112)
영업을 시작하기 전, 웨이터들은 청소를 하느라 부산스레 돌아다니고
러시아 무희들이 리허설을 한답시고 무대 위에서 설쳐대는 나이트클럽의 풍경을 둘러보던 준상..
맞은편에 앉아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부하에게 흘깃 눈길을 던지며 책망 조가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연다.
"그러길래~ 현규 너, 내가 성질 좀 죽이라고 했잖아..
쓸데없이 전쟁 벌이는 거 회장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면서 왜 그랬냐?? 그것도 하필이면 연화회 애들이랑...
걔네 하고 겨우겨우 평화협정 맺은 거 몰라? 그 쪽 애들을 건드리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형님.."
"연화회랑 관련된 일은 만들지 말라고 했잖아..
이번 일 때문에 너 지방으로 내려가서 짱 박혀 있어야 될 지도 몰라. 내가 최대한 잘 말씀드려보긴 하겠지만..."
며칠 전에 이 클럽에서 있었던 연화회 몇몇 조직원들과의 싸움 때문에 소동이 벌어졌고,
준상은 이런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문제로 재준의 심기가 불편해질까봐 염려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연화회이고 재준이 별로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하나의 이름을 새삼스레 불러낼 수도 있기에 준상은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양미간에 자잘한 주름을 세우며 담배 갑을 찾으러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준상은 담배 한 개피를 꺼내며 핸드폰을 귀에 갖다댄다.
"네.."
"실장님, 저 남웁니다.."
"어, 무슨 일이야?"
"회장님께서 식구들 모두 종로로 집합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모이라고 하시는데요.. 최준태 그 자식, 식구들 다 모인 자리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그 새끼 잡혔어??"
"예, 데리고 온 지 1시간쯤 됐습니다."
"알았어, 지금 갈게."
빠른 손놀림으로 플립을 닫고 입에 물었던 담배를 도로 집어넣으며 준상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현규에게 단호한 말투로 이야기한다.
"회장님께서 지금 집합하라고 하시니까 너도 가게 밑의 애들한테 맡기고 같이 가야겠다.
최준태가 잡혔대. 오늘 전부 모인 자리에서 마무리지을 작정이신 가봐.."
"정말입니까!? 그 죽일 놈의 새끼, 아주 그냥 요절을 내버려야....!"
또 발끈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현규에게 준상이 엄중히 꾸짖는 시선을 들이대자 뜨끔하다는 듯 어깨를 오므리며 그는 머리를 조아린다.
자기보다 15살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나무라는 눈길을 보내야하는 자기 자신이 순간적으로 우습게 느껴져서
준상은 살벌하게 굳혔던 안면근육을 풀어헤치며 피식 실소한다.
그러자 현규도 안도하는 기색으로, 돌아서 걸음을 옮기는 준상을 뒤따른다.
1시간쯤 차를 들려 충의회 본 건물 앞에 당도하자 준상은 달려와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는 부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지하에 있는 널찍한 창고 같은 방으로 향한다. 안으로 들어서니 아직 재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부분의 간부들이 담배를 피워대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경이 시야에 비친다.
"어어~ 준상이 왔냐?"
"예,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거.."
"글세 말이다~ 요새 너는 일이 더 많다며? 회장님 수행도 남우랑 번갈아 가면서 하고.."
"뭐, 그렇게 됐어요. 근데 최준태 이 새끼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 어디 구석에 처박아놨겠지.. 회장님 오시면 불러올 건가봐.."
가볍게 대화가 오고가는 도중 삽시간에 주위가 잠잠해지며
군데군데 무리 지어 흩어져있던 충의회 간부들과 조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갖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조용히 등장한 재준에게 공손히 문안인사를 올린다.
재준이 짙은 회색 양복 자켓을 벗어 옆의 부하에게 건네주고 미리 마련된 의자에 앉자, 정렬한 부하들은 열중 쉬어 자세를 취한다.
방금 전까지 넓은 공간을 꽉 채우던 소란스러움은 자취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철두철미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문소리가 나며 최준태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 사내에게 붙들린 채 끌려온다.
폭이 두꺼운 접착 테이프로 칭칭 휘감겨 사지가 결박된 그가 재준과 마주보고 무릎을 꿇는다.
기이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공포로 인해 확대된 눈동자가 연민을 자아내기보다는 비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경멸스럽게 보인다.
수많은 눈동자가 지금 준태에게 몰려있고 하나같이 섬뜩한 증오와 살기 등등한 저주를 품고 있지만,
이 순간 준태가 막다른 두려움과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대상은 재준의 검은 심연에서 곧게 뻗어 나오는 차갑고 절제된 분노뿐이다.
"준상이만 빼고 다 나가있어. 부를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
냉혹하고 스산한 재준의 음성이 시린 금속성의 파장음처럼 허공을 가르자 모두 그의 명령대로 방에서 잠시 퇴장하고,
재준의 눈빛과 목소리가 형성하는 위압감이 공기 속에 스며드는 듯 준태는 당장이라도 종이 짝처럼 납작해질 것 같아 반사적으로 거칠게 숨을 들이마신다.
재준은 준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준상에게 강한 힘이 실린 어조로 묻는다.
"준상아, 너 무기 가지고 있지?"
"네, 회장님.."
"혹시 모르니까 제대로 장전해서 잘 들고 있어라. 이 새끼가 좀 간덩이가 부었어야지..
내가 무기를 손에 잡았다가는 못 참고 그냥 날려버릴 것 같아서 너한테 시키는 거야."
"네, 잘 알겠습니다."
재준의 말뜻을 이해한 준상은 일부러 과장되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허리춤에 착용한 권총을 빼어들며 비릿하게 시니컬한 웃음을 띄운다.
총을 보자 눈에 띄게 경직되며 전신의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준태에게 의자에서 일어난 재준이 서서히 다가가고,
그에 따라 준태의 입술마저 발그레하던 핏기를 잃고 허옇게 색이 바랜다.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겨 자신을 쳐다보게 하고
재준은 헉 하고 신음을 내지르는 그에게 오락 프로그램의 퀴즈를 내는 것처럼 질문을 던진다.
"최준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 있나?"
"회장님.. 자,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웬 동문서답이야..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 있냐고 물었어."
"사, 살려만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다시는 이 바닥에..."
"자꾸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까 모르는 모양이군. 그럼 내가 가르쳐 주지.
우선, 네 놈 때문에... 너 때문에 난, 충의회를 잃어버릴 뻔했어.
내가 평생동안 몸담고 살아온 충의회를...
그것도 아주 큰 잘못 중 하나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지.
하지만, 네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바로... 네가 내 인생을 죽인 거야.."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격노와 살의와 적개심을 제어하는 듯 재준은 말을 멈추고 들쑥날쑥 경사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돈한다.
종말을 목전에 맞이한 절망이라고 해도 남김 없이 발가벗겨 내어놓기에는 수치스럽기에
재준은 그래도 가능한 한 침착하고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쓴다.
"네 그 알량한 욕심 때문에, 그 썩어빠진 계획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나??
......내 인생이 죽었어. 그럴 뻔한 게 아니라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거야.
숨쉬고, 심장이 뛰고, 살아있다는 느낌... 그런 게 몽땅 죽어버렸어.
네가 연화회에 빌붙어서 개 같은 수작을 부리는 바람에, 난... 나는....
.....전부 다 제자리로 돌아왔어.. 그 애가.... 그 애가 오기 전으로.......그.... 강......."
그 이름이 튀어나오기 전, 재준은 필사적으로 성대를 마비시키며 아랫입술을 잘라낼 것처럼 악스럽게 깨문다.
손톱이 손바닥의 연한 살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오그라뜨리며 눈을 질끈 내리 감은 재준이 홱 돌아서며 낮게 부르짖듯 지시한다.
"애들한테 들어오라고 해."
재준의 말이 떨어진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충의회 일원들이 아까 같은 형태로 열을 맞추어 선다.
뒤늦게 도착한 주혁이 두 손을 정중하게 앞으로 모은 채 재준에게로 나서려 하자,
재준은 다시 의자에 자리하며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주혁을 제지한다.
주혁은 재준에게 목례를 해 보이고 자기 위치로 돌아가 준상과 간단히 눈인사를 교환한 후 재준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완전한 냉정과 차분함을 되찾은 재준은 원래의 밋밋하고 건조한 음색으로 말한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분명히 얘기해줬어.
내가 어떤 처벌을 내리던지 간에 넌 받아들이는 게 당연한 거야.
억울하게 생각할 이유, 전혀 없다. 억울한 건 오히려 내 쪽이니까..."
오묘한 여운을 늘어뜨리며 입을 다문 재준이 여전히 준태의 동공에 드리워진 어두컴컴한 그늘을 일직선을 쏘아보며
양옆으로 줄을 이루고 있는 조직원들에게 일종의 확인 질문을 던진다.
"전대 회장님 때부터 지금까지, 쥐새끼를 처리하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그 방법을 쓰는 것에 이의 있는 사람은 얘기해라."
물론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준태 역시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익히 알고 있기에 아득히 멀어지는 이성을 배웅하며,
기도가 차단되어 비명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공황상태에서 허우적거린다.
재준은 준태와 제일 가까이에 위치한 부하 둘에게 모종의 눈짓을 보내고,
그의 신호를 받은 두 사람은 서슴없이 준태에게로 다가가 그를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단말마적으로 터지는 준태의 울부짖음은 묵살된다.
이윽고 한 사람 씩 직경 5cm 정도의 각목을 가지고 사정없이 준태의 몸을 후려갈기기 시작하자,
이런 잔인한 처벌행위에를 처음 접하는 주혁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재준을 돌아본다.
그러나 재준은 동요가 없는 무덤덤한 눈동자 아래 돌풍처럼 휘몰아치는 격분과 노여움,
그리고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자신을 짓누르는 고통과 그리움을 숨긴 채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자세로
준태가 피투성이로 변해 가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문드러지는 둔탁한 마찰음이 오랫동안 울려 퍼진 후,
마지막으로 주혁까지 조직의 불문율에 못 이겨 몽둥이질을 끝내자 재준은 기계적으로 준태에게 걸어 가 그의 입에 총구를 쑤셔 넣는다.
더 이상 커지지 않을 만큼 부릅 뜨여진 준태의 망막에 선명히 투영된 자신을 직시하며, 재준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113)
"발렌틴, 난 지쳤어. 고통 받고 참는 게 이젠 지겨워 죽겠어.내 몸 안이 모두 아픈 걸 넌 모를 거야."
"어디가 아픈데?"
"가슴, 그리고 목 안 쪽이... 왜 슬픔은 항상 그 부분에서 느껴지는 것일까?"
- <거미여인의 키스> 중 -
닫힌 상태에서 움찔거리던 눈꺼풀이 번쩍 치켜 떠지며 그와 동시에 태현은 상체를 벌떡 일으킨다.
급하게 몰아쉬는 자신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귓전을 울리고 뜨뜻미지근한 땀방울들이 끈적하게 온몸을 적시고 있다.
축축한 습기가 스민 어둠 속에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는 태현에게 연이어 들이닥치는 초인종 소리는,
실상 잠들어 있던 태현을 깨운 것이었다.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두 다리에 힘을 주며 태현은 현관으로 향하고, 야심한 시각의 손님이 누구인지 확인한다.
"누구세요?"
"나야, 주혁이.."
문을 열자 검은색 정장을 수려하게 갖춰 입은 주혁이 태현의 시야에 들어차고
스스럼없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올라서는 그에게 태현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묻는다.
"일 끝나고 곧장 온 거냐? 지금 몇 시야, 벌써 2시 다 되가네.."
"재준이가 전체 다 집합 시켰거든.. 자고 있던 중이었어?"
"어어..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봐.."
"야, 근데 너 웬 땀을 그렇게 흘려?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니야.. 그냥...좀 이상한 꿈을 꿔서 그래.."
대강 얼버무리며 주혁의 걱정 어린 눈동자를 피하고 태현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제친다.
그리고 맥주 캔을 꺼내 거실 소파에 앉은 주혁에게 던져준다.
갈증이 나는 듯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키는 태현을 가만히 쳐다보던 주혁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입을 연다.
".....무슨 꿈이었는데..?"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넘어갈 줄 알았던 주혁이,
의외로 말꼬리를 흐리는 태현의 어물쩡한 태도를 집요하게 파고들자 태현은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시선을 낮춘다.
주혁은 태현에게서 눈길을 거두는 대신 담배에 불을 붙이며 가볍고 평이한 어조로 재차 묻는다.
"세라 꿈 꾼 거야..?"
태현의 표정이 난감하게 돌변했다가 억지스럽게 겸연쩍은 미소를 담아낸다.
자조적이라고 하기엔 훨씬 담백하고 개운하다.
암갈색 눈동자가 투명하고 청아하게 반짝인다.
"....몰라, 한동안 안 그랬는데... 요새 들어서 생각을 많이 했더니 그런가 봐.."
"....좋지 않은 꿈이었어..?"
"잘 모르겠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나쁘다고 해야 하는 건지..기분이....혼란스러워.."
"........."
"사막이었어. 사람이라곤 흔적도 없는 아주 광활한 사막..
햇빛은 살을 태울 만큼 따갑게 내리쬐고, 근처에 물은 한 방울도 구할 수가 없었어.
뜨거운 모래 위를 나하고 세라가 같이 걸어가는데 세라가 너무 힘들다면서 조그만 쉬었다 가자고 했어.
근데 난 안 된다고, 시간이 없다고 그러면서 막 세라를 다그쳤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무언가 불안감에 쫓기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계속 걸어가는데 오아시스가 나타난 거야.
세라가 엄청 기뻐하면서 오아시스로 달려가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세라를 붙잡으면서 가면 안 된다고, 계속 걸어가자고 그랬어.
세라는 목마르고 지쳐서 더 이상은 못 걷겠다고 자꾸 오아시스로 가려 하는데 나는 너무 절박한 마음이 들어서 그 애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거든?
그래도 세라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옷을 벗고 오아시스 안으로 들어갔어.
너무 행복하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점점 물 속으로 가라앉는 거야..
그리고.... 아무리 불러도, 다시 나오지 않았어.."
꺼림칙한 결말로 막을 내리는 태현의 꿈 이야기가 끝난 후, 두 사람 다 각자의 생각에 골몰하며 쉽사리 작은 공간 속의 고요를 허물지 못한다.
그러다 주혁이 또 한 개피의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의식적으로 얼굴색을 밝게 고치며 태현은 장난기 있는 음색으로 투덜거린다.
"에이~ 괜히 얘기했네.. 분위기 좆나 구질구질해지잖아? 쪽팔리게..."
소리 없이 빠르게 자리를 차지하는 우울함과 서글픔을 무마해 보려고 코믹한 억양을 섞는 태현에게
주혁은 단지 눈 꼬리와 입술을 움직여 웃는 모양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이내 복잡하고 컴컴한 표정으로 되돌아오며, 무뚝뚝하지만 추호의 가식도 엿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 날, 미안했다..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어. 네 생각은 안 하고..."
"됐어. 그런 소리하지 마. 나도 잘못한 거야, 어떤 면에 있어서는..."
더 이상 그 얘기를 상기하지 말라고 일축하듯 단단하게 주혁의 말을 잡아매는 태현은 오히려 천연덕스럽기만 하다.
커다란 눈망울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활달한 제스춰를 취하는 그가 을씨년스러운 감상을 자아내는 거실의 풍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런 자기 자신을 애써 무시하면서 태현은 역시, 부자연스럽게 명랑한 목소리를 퍼뜨린다.
"그래, 할 얘기가 뭐냐..?"
"......??"
"미안하다는 그 소리하려고 이 야밤에 불쑥 찾아온 건 아닐 거 아냐~~"
태현은 주혁의 담배 갑에서 한 개피를 꺼내며 그를 채근하고,
주혁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다음에도 손바닥을 맞댄 채 선뜻 화두를 풀지 못한다.
째각거리는 시계초침 소리가 촉수를 건드리며 미미한 갑갑증을 불러일으킬 즈음, 주혁은 어눌한 투로 둔중한 침묵을 파기한다.
"어젯밤에 혁수 만났거든... 혁수가 지민이 누나랑 얘기를 했는데, 누나가...미국으로 오는 게 어떠냐고 그러더래..
이런 상태로 계속 여기 있으면 결국엔 아무것도 안 된다고...
사실 나도 뭔 가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막상 눈앞은 깜깜하기만 해서 손놓고 있었어.
일하느라 분주하기도 하고, 막연하게 이래서는 안 되는데...그렇게만 생각했지.."
태현의 암갈색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수축되며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내비친다.
주혁은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길게 호흡을 정리하고 다시 말을 잇는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게 될 것 같아. 어제 만나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어.
그리고 혁수는 아마...조만간 그 요양소에서 나오게 될 거야.."
"자, 잠깐만.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 하겠어.
그러니까, 너희 둘이 미국으로 날라버리겠다는 얘긴데...
혁수야 원래 미국에서 살았던 애니까 그렇다 쳐도, 넌? 너는 미국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이야?
아무나 그 나라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비자도 나와야 하고 또 나온다고 해도 거기서..."
"어, 그건.... 윤아 누나 알지? 지민이 누나랑 같이 사는.
...
윤아 누나가 시민권이 있대. 혼인신고 하면 나도 자연히 시민권을 갖게 되는 거지.
그러면...문제 될 게 없고.."
"뭐야, 그럼... 계약결혼을 한단 말이야?"
"....그런 단어는 쓰지 말자. 누나가 우리 생각해서 도와주는 건데... 그런 말, 왠지 께름칙해.."
살짝 이마를 찡그리며 옅은 한숨을 내쉬는 주혁의 어깨가 보일 듯 말 듯 약하게 진동한다.
태현은 주혁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되짚어보며 잠시동안 말문을 닫아건다.
무언가 어색하고 불명확한 느낌이 들 때의 버릇대로 두 뺨을 문지르며 입술을 떼는 주혁..
"혁수도 나도 솔직히 너무 지쳤고...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자신도 점점 없어져..
인간이란 게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참고 기다려도 실마리가 안 보이니 불안하기만 하고...
무엇보다 내가 두려운 건... 혁수가 쓰러져 버릴까봐...그게 무서워.."
"그래...너희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어떻게 되는 거야? 자세하게 설명해 줘."
"난...방금 얘기한 대로, 비자 나오면 미국 가서 얼른 혼인신고하고 시민권 딴 다음에...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야지.
이런 식으로 떠나는 거라 처음에는 많이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으면 어느 정도 기반도 마련될 거구..."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릴 거니?"
"후우- 말씀드릴 필요 없어..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떤 취급받는지...
나 같은 놈, 다시는 안 나타나기만 바라는 분들이셔.
혁수가 미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하면, 나야 어떻게 되던 신경 안 쓰실 거 뻔해.."
"주혁아.."
"아니, 더 얘기할 거 없어. 그 분들이 어떤지 너도 알만큼 알면서 왜 설득하려는 거야? 위험해 보여서??
....그래, 위험하지 않다고는 말 할 수 없지.
누군가를 속인다는 건, 아무리 그 명분이 타당하다고 해도 떳떳해질 수 없는 행동이니까...
그렇지만, 이제 우리도...좀 편해지면 안 되는 거니..?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어. 혁수도 나도...정말 단 한 번도 쉬지 못했어.."
어느새 목구멍이 잠겨오며 눈언저리가 붉어지는 통에 주혁은
신파적인 센티멘탈함에 젖어드는 자신을 일깨우려고 세차게 도리질을 치며 물컹물컹한 덩어리를 식도 아래로 넘긴다.
빨갛게 타 들어가는 담뱃불을 바라보며 주혁의 말을 듣기만 하던 태현이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뿜어낸다.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 내 입장은 똑같아. 다만 걱정이 되는 것 뿐이야.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일이 어긋나서 너희 둘 다 힘들어지면...
솔직히 난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또 그런 무력감 겪고 싶지도 않고, 뭐...언제나 그런 느낌은 가지고 살지만 그래도 그게 확연하게 드러날 때마다 내 자신을 너무 감당하기가 벅차..
....요즘에는 그냥....나도 쉬고 싶다.."
고개를 뒤로 젖혀 등받이에 깊숙이 뒷머리를 파묻으며 태현은 넋두리하듯 웅얼거리고
주혁은 정갈하게 다듬어진 연 분홍빛 손톱만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태현에 대한 미안함을 속으로 삭힌다.
그런 마음을 표현했다간 또 분명히 화를 내며 주혁을 민망하게 할 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해..?"
어렵게 눈을 들어 태현의 옆모습을 응시하며 주혁은 망설임이 역력한,
그리고 듣고 싶은 대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건넨다.
천장의 격자무늬에 망연스레 시선을 붙박고 긴 속눈썹을 간간이 팔락이던 태현이 풋- 하는 샐팍한 웃음소리를 뱉으면서 빈정거리듯 대꾸한다.
"쳇...! 그게 어떻게 도망치는 거냐? 견디다 못해서 내쫓기는 거지.."
"쿡... 지민이 누나는 우리가 사기 치고 사라져버리는 거라던데..."
"참나~ 너희 같은 바보들이 사기를 쳐?? 야, 사기는 뭐 아무나 치는 줄 아냐?
....너희 같은 머저리, 천치들은...절대 그런 거 못해..
너희는 너무 병신 같이 순수해서, 절대 못 그래..."
(114)
내 몸은, 몸에 남아있는 그의 손가락의 감촉은,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 유미리, <남자> 중 -
벌써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서서히 잊혀져 갈 듯도 싶었다.
어쩌면 그러기를 바라며 하루하루 시간의 자락을 놓아보낸 건지도 몰랐다.
아득히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순백의 그, 그리고 그와 연계된 모든 것들로부터 차단된 생활을 이어나가는 동안, 그만큼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진 강태..
이제는 감귤색 침대시트가 강태의 체온에 꼭 맞게 감겨오고 문환이 애완용으로 기르는 강아지가 그를 반겨하며 뛰어올 정도로
새 남자의 정부 노릇에 길들여진 상태다.
이따금씩 그런 자기 자신의 변화가 가증스럽고 역겹다.
그건, 아직도 강태의 내부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확실한 감정 하나가
무뎌지고 둔감해지는 그의 생활과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이었다.
재준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그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셈하면서 가슴에 싸한 통증을 느끼고, 때로는 곤죽이 될 때까지 술을 퍼마시기도 하고..
어떤 날엔 정신병자처럼 고함을 지르며 방안을 온통 아수라장으로 뒤엎어버리기도 하는...
일련의 파괴적 행동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함 없는 사실은 한 달 내내, 강태가 단 한 번도 미소를 지은 적이 없다는 거다.
아주 희미한, 아스라한 미소의 기미조차 보일 수가 없었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던 강태는 새삼스레 그 사실을 떠올린다.
너무 오랫동안 웃지 않았다는 것.
좀 웃어보고 싶다. 억지로라도-
강태는 입 주위의 근육을 당겨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본다.
안 어울린다. 이내 피워냈던 웃음을 거두어들이고 만다.
서글픈 기분이다.
진절머리나는 비애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뇌 속의 조직액을 빨아먹는 공허, 맨 끝에 남겨지는 건...
강태를 가장 참담하게 하는 흔하디 흔한 '사랑'이라는 감정.
'미련'이라는 단어는 절대 쓰고 싶지 않다.
강태의 자존심이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사납게 으르렁댄다.
밑바닥을 기어다니며 근근히 연명하는 인생을 살게 되더라도 본질적 자아의 프라이드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강태..
'사랑'이라는, 여전히 낯설기 만한 그 감정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그러한 강태의 원칙은 불변하는 사항이다.
"강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이재준을 기다리고 있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연기하는 배우가 독백하듯 나지막히 물음을 던져본다.
반짝거리는 흑빛 눈동자가 어떤 대답을 반사시킬지 유심히 주시하지만 정작 대꾸를 하는 건 아래쪽에 자리잡은 그의 입술이다.
너무 도발적인 붉은 빛이라서 더욱 자신을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것 같은 빨간 입술.
"쳇... 기다리긴 누굴 기다린다는 거야..? 아무렇게나 굴러먹는 남창 주제에..."
몇 번쯤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그 얘기를 똑같이 되풀이하는, 달콤하고 유혹적인 새빨간 입술.
"아냐, 아냐... 나는 천박하지 않아. 날 팔아 넘긴 건 내가 아니라 그 자식이잖아..."
이번에는 고개를 설레설레 좌우로 흔들며 앙칼진 목소리와 독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외양을 찬찬히 뜯어본다.
얼마 전까지 턱 선에서 찰랑이던 단발머리를 짧게 자르고
세련된 스타일을 뽐내는 검은 머리카락에는 오묘한 보랏빛이 은근하게 묻어난다.
매끄러운 머릿결까지 덧붙여져 항상 촉촉이 젖은 느낌을 주는 머리카락, 자극적이다.
까무잡잡하고 보드라운 살결, 남자들의 색정을 불러일으킬 만 하다.
파르족족한 색기를 머금고 맵시 있게 모양 진 흑빛 눈동자는 순진함과 음탕함을 둘 다 담고 있다.
동양인의 것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조밀하고 오똑하게 솟은 코는 날카로운 긴장감을 유발하며 헤프게 풀어질 법한 욕정에 팽팽한 흥분을 첨가시켜 준다.
도톰하게 물이 올라 탐스러운 입술은 살짝만 벌려도 엄청나게 위력적인 정염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도록 만든다.
정말 예쁘다. 아니, 단순히 예쁘다고 하기엔 특별한 무언 가가 있다.
다른 누구도 지니지 못한 독특하고 고유한 그의 매력은 그러나, 그다지 심오하거나 고결한 가치가 전혀 아니다.
다만 강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만치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고, 그 외모에서 풍기는 요염한 기운과 섹슈얼한 분위기가 가히 압도적이라는 것뿐이다.
그래서 어는 남자든 적어도 한 번쯤은, 그를 안아보고 싶다는 욕망에 달아오르게끔 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소유욕망의 대상이다.
그런 것인가...?
정말...너도 그런 건가?
너 역시 나를 소유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던 건가..?
이렇게 예쁘고, 이렇게 섹시해서...나를 갖고 싶었나..?
'사랑'이라는, 그 따위 쓰레기 같은 말을 들먹여서 나를 속여가면서까지
...그렇게 철저히 나를 네 소유로 묶어놓고 싶었나..??
모든 남자들이 섹스 파트너로 곁에 두고자 원하는 나를,
오랫동안 손아귀에 쥐고 즐기면서 누렸던 만족감이 너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그 끔찍한 말을 속삭이도록 시킨 건가?!
....내가 믿었던...내가 의지했던 네가 진정..... 이재준이었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언어화되어 뇌리 속에 박힐 때마다 팽창하던 울분과 슬픔이 눈물로 새어나오려 하자,
강태는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움켜쥔 주먹을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해 내리꽂으려 한다.
그러나 주먹이 거울 유리에 닿기 전, 강태의 귓가에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그의 격한 동작을 누그러뜨린다.
이윽고 문환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강태는 감쪽같이 태연한 표정을 한 채
방금 전의 내면의 폭풍우와는 손톱만큼도 닮지 않은 차분한 음성으로 문환에게 인사한다.
"오셨어요..? 늦으신다더니 일찍 들어오셨네요.."
"어어, 피곤해서..."
"저녁 준비하라고 할까요?"
"아냐, 먹었어."
틀에 박힌, 반복적인 일상 대화가 몇 마디 더 오고간 후,
문환은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고 강태는 거실에 있는 장식장으로 가서 문환이 즐겨 마시는 화이트 호스를 얼음과 함께 준비해 놓는다.
샤워를 마친 문환이 수건으로 하체를 가린 채 다시 침실로 들어오고 강태가 대령한 화이트 호스를 음미하듯 천천히 들이킨다.
강태는 커튼을 제치고 내려다보이는 바깥의 풍경에 초점을 모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어간다.
"이리 와서 등 좀 주물러 봐. 이거 영~ 뻐근한 게..."
아무데나 술잔을 올려놓고 침대에 엎드려 누우면서 문환이 약간 신경질적인 투로 내뱉자
강태는 말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문환의 곁에 앉아 팔을 뻗어 군데군데 뭉쳐 있는 근육들을 풀어준다.
이젠 제법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는 강태의 살가운 손놀림을 한동안 독점하던 문환은 문득 지금에서야 생각났다는 듯 머리를 살짝 치켜들며 말한다.
"이번 주 금요일에 병원 가야 하는 거 알고 있지?"
"정기검진 같은 거 안 받아도 괜찮다니까요.. 저 아픈 데 없어요."
냉담하게 응대하는 강태에게 문환도 그와 흡사한, 강압적인 어조로 못박는다.
"아무리 그래도 넌 남자야. 남자의 몸으로 같은 남잘 상대하면서, 정기검진도 안 받는다는 게 말이 돼??
너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한테까지 위험부담을 주는 거야, 그건..."
제기랄... 성병 걸리는 게 그렇게 무서우면, 나랑 섹스 안 하면 될 거 아냐..
귀찮게 굴고 지랄이야...
목구멍을 간질이는 게걸스런 육두문자를 꿀꺽 삼키고 강태는 맥빠진 음성으로 수긍하는 듯한 대답을 들려준다.
짜증과 불만이 섞인 강태의 손길에 더 억센 힘이 주어진다.
"아, 그리고.. 내일이 내 생일이거든..."
예상 밖의 문환의 말에 안마를 하던 강태의 움직임이 멈칫 하고,
다시 느릿하게 손동작을 이어 붙이는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문환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그래서 오랜만에 애들도 풀어줄 겸, 주위 사람들한테 술이나 대접하려고..그러니까 내일은 신경 써서 준비하고 나와. 옷도 하나 새로 맞추고..
5시쯤에 애들이 데리러 올 거야. 내가 대충 어떻게 하라고 일러뒀어.
뭐, 사소한 부분은 네가 직접 알아서 하겠지만."
젠장.. 또 나사 풀린 계집애처럼 방긋방긋 웃고 있어야겠군..
주렁주렁 매달린 악세사리처럼 이 새끼 옆에 붙어 다니면서...
"참, 그리고... 충의회 이회장도 초대했는데...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군.."
- 오전에는 투자한 중소기업의 주주총회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자기 소유의 호텔과 카지노 사업장들을 둘러보느라 정신 없이 돌아다닌 재준..
지끈거리며 한 쪽 관자놀이를 후벼파는 두통 때문에 이마를 찌푸리며 '회장실'이라는 간판이 붙은 육중한 황갈색 문을 한 손으로 밀어제낀다.
업무를 보다가 재준의 기척을 듣자 곧바로 일어서서 허리를 굽히는 비서에게,
분명히 경어를 쓰고 있음에도 별로 정중하게 와 닿지 않는 어조로 재준은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한다.
"들어와서 나머지 스케줄 보고하고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지수 씨.."
"네, 회장님."
야무지게 대꾸하며 파일을 챙기는 그녀를 뒤로하고 재준과 그를 수행하던 준상은 사무실 안으로 발을 디딘다.
셔츠의 맨 윗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조정하는 재준을 바라보며, 준상은 불경스럽게도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에 자신을 호되게 나무란다.
재준이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자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깔끔한 아이보리색 수트 차림의 지수가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재준 앞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포트에서 갓 뽑은 커피를 그에게 내밀며 이야기한다.
"오늘 저녁 7시, 연화회 조문환 회장님의 생신축하파티에 초청을 받은 걸 제외하면 다른 스케줄은 없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에서 고개를 들어올리려던 재준의 눈동자가 일순간 규칙적인 깜박임을 멈춘다.
갑자기 휘청거리며 흐트러지는 단단하고 무덤덤한 태도가 위태롭게 느껴져서
재준은, 본능적으로 곤두서는 신경을 달래며 편평하고 메마른 목소리를 유지한다.
"알았어요, 그만 나가보세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 걸음을 옮기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재준은 블라인드를 올리고 도심지의 탁한 회색빛 정경을 멀뚱히 응시하며 잠시 침묵을 지킨다.
재준이 눈치챌 수 없도록 집요하지 않은 시선으로 그의 옆얼굴을 관찰하던 준상.. 짧은 헛기침을 뱉으며 입을 연다.
"가실 생각이십니까?"
"........"
"불편하시면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회장님."
"....저녁 7시라고...했나..?"
"예, 그렇습니다."
".....차 대기 시켜. 지금 출발해야겠네.."
(115)
정차할 역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안내방송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혁수는 지하철 문 앞으로 가서 선다.
징-하고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걸음을 내딛는 그의 입가에 포근하고 따스한 미소가 감돈다.
[ 너 아르바이트 끝났겠다. 집에 조심해서 들어가. 이따 전화할게..^^]
주혁이 목소리가 작게 들리는 듯한 착각에 뿌듯한 기쁨을 만끽하며 혁수는 열심히 버튼을 두들겨서 주혁에게 답신을 보내고,
자꾸만 싱글거리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머쓱히 표정을 단속하며 종종걸음을 친다.
요양소에서 나오게 된 지 어느덧 한 달이고, 주혁과의 로맨스는 비밀스럽게 지켜나가는 중이다.
그와의 관계는 모두 정리하기로 했고, 그에 대한 감정 또한 철없는 한때의 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다시 미국에 가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혁수의 거짓 연기에 인하와 정숙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해 했다.
의사들이 혁수에게서 유도해내려고 애쓰던 말들이 무엇인지 예전부터 이미 간파하고 있던 혁수였기에,
그들의 의학적 질문에 '바라는 대로' 답변하는 것은 더욱 간단했다.
몇 가지 검사와 형식적인 마무리 치료 끝에 혁수는 이른바 '퇴원'해도 좋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인하는 자신의 동창인 요양소 원장에게 거듭 감사인사를 되풀이했다.
거짓말을 하고 태연을 가장하며 또 다른 자기의 모습을 연출하는 건 희한하게도 별로 어렵지 않다.
마치 두 개의 분리된 자아가 있어서 그 둘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심령술사처럼
혁수는 질릴 정도로 완벽하게 일종의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부모님 앞에서는 '예전의' 안혁수로, 그렇지만 '변화된' 안혁수를 밑바탕 깊숙이 깔아놓은 채―
이런 저런 잡다한 상념들에 파묻혀 걷다보니 어느덧 집에 당도하고, 문을 열어주는 가정부에게 연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는 혁수..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는 그에게 가정부가 알려준다.
"검사님하고 사모님께서 오늘 못 들어오신다고 하셨어요.
검사님의 숙부님께서 돌아 가셨다고... 아까 저녁에 연락 받고 급하게 내려 가셨거든요. 내일 점심때나 되야 오신다고 하시던데..."
"아아.. 그래요..? ...예, 알았어요. 아줌마도 이제 들어가서 좀 쉬세요, 피곤하실텐데..."
"예에~ 그럼 도련님, 들어가세요.."
친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여 보이고 혁수는 2층을 향해 터벅터벅 계단을 오른다.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흰 면 티셔츠만 달랑 남긴 채 웃옷을 모두 벗어제친 후 씻으려고 다시 방을 나서는데 핸드폰이 또 요란하게 발작을 해 댄다.
"여보세요.."
"나야, 혁수야.."
아까 전부터 흐릿하게 귓전을 맴돌던 주혁의 굵은 음성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또렷이 들려온다.
혁수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어~ 나 방금 집에 들어왔어. 어디야? 일하고 있어??"
"아니,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창문으로 내다봐 봐. 나 보일걸?"
혁수의 갈색 눈동자가 커지며 후다닥 창가로 달려가 블라인드를 들춰 올린다.
그러자 사선으로 아래 방향에 은색 승용차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서성이는 주혁의 오렌지빛 머리카락이 시야에 잡히고,
혁수는 황당하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그를 나무란다.
"너 미쳤어? 집 앞까지 오면 어떡해~! 그러다 눈에 뜨이면 어쩌려구...!"
"그럼 어떡해- 보고 싶어서 눈앞이 다 가물가물한데... 참다참다 일하다 말고 도망쳐 온 거란 말야..
몰라! 너 지금 당장 안 나오면 나 여기서 계속 기다릴 거야."
심통스런 음색으로, 막무가내로 어리광(?)을 부리며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주혁..
혁수는 벙찐 얼굴을 한 채, 잠깐동안 주혁이 고집스럽게 뻗딩기는 폼으로 차에 기대어 팔짱까지 척 끼고
대문 쪽을 주시하는 모양새를 바라보다가 흠칫 정신을 추스르고 서둘러 웃옷을 걸친다.
다행히도 가정부가 자러 들어갔는지, 불이 모두 꺼진 캄캄한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며 혁수는 안도한다.
가슴을 졸이며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집에서 빠져나온 혁수는,
대문을 나서자마자 짐짓 엄한 표정으로 저만치 앞쪽에 서 있는 주혁에게 그를 힐책하는 듯한 발자국 소리를 쿵쿵 울리며 다가간다.
"장주혁, 너 진짜.....야!! 왜, 왜 이래~~!!?"
눈꼬리를 날카롭게 세우면서 주혁에게 비난을 퍼부으려던 혁수..
갑자기 공중으로 번쩍 들려지는 느낌에 놀라서 허둥거리며, 자신을 안아 올려 어깨에 들쳐 메고 발을 떼는 주혁에게 소리를 질러댄다.
주혁은 아무 말 없이 혁수를 짊어지고(ㅡ_ㅡ;) 조수석으로 가서 그를 자동차 시트에 앉힌 다음, 재빨리 차를 출발시킨다.
그리고 자동차가 골목을 벗어나서 큰 도로로 접어들자, 그제서야 옆에 앉은 혁수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간 미소를 짓는다.
"헤헤.. 성공이다...^^;"
검푸른 눈동자에 영롱한 생기를 소복이 쌓아올리며 헤프다 싶을 정도로 순박하게 웃는 주혁에게
혁수는 몇 마디 볼멘 소리를 던져주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와 흡사한 미소를 머금고 만다.
"영업부장들한테 업무보고를 받는데, 내용은 하나도 안 들어오고 네 얼굴만 아른아른~하잖아..
더 참다간 심장이 터져 죽을까봐 무서워서 못 있겠는 거 있지? 그래서 바로 튀어왔어~!"
"그렇다고 일하다 그냥 휙 가버리면, 밑의 애들이 널 어떻게 보겠냐?"
"뭐어~~ 이번이 처음인데.. 그리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
"쳇.. 그게 왜 나 때문이냐? 말도 안 돼.."
진분홍빛 입술을 삐죽거리며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 혁수가 무척 귀엽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자신에게 타박을 주는 것이 조금 서운해진 주혁은 핸들을 꺾어서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멈춰 세운다.
예고 없는 그의 행동에 혁수가 움찔 몸을 사리며 의아하다는 듯 천진한 눈동자로 주혁을 응시하며 입을 연다.
"야아... 아까부터 왜 그래..?? 누가 뭐 화나게 했어..?"
"................"
"야, 너 또 삐진 거야?"
"안혁수 진짜 너무하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너한테서도 '보고싶었다'라는 소리가 나와야 되는 거 아냐?!"
단아하고 정갈한 눈매를 세모꼴로 찢으며 목청을 돋구는 주혁의 투정을 듣자,
혁수는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또 한 번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버린다.
어쩌면 그렇게 날이 갈수록 유치해지냐고(ㅡ_ㅡ;) 핀잔을 날리는 대신,
혁수는 퉁명스러워진 주혁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동그란 눈망울 안에 연청색 그의 영상을 담아낸다.
"에이~~ 우리 혁이, 그래서 화난 거야? 응??"
"......알아서 해."
"풋... ^^; 그래, 그래.. 내가 사과하는 의미로 오늘 밤새 같이 있어줄게!"
아주 대단한 선물이라도 안겨주는 것처럼(ㅡ_ㅡ;) 자랑스러워하며 이야기하는 혁수에게
주혁은 딱딱하게 굳혔던 안면근육을 순간적으로 흐트러뜨리며 그와 눈을 마주치고 묻는다.
"정말? 그럴 수 있어?"
"응.. 오늘 엄마 아버지, 지방 내려 가셔서 내일 오신데..아버지 숙부님이 돌아 가셨다나 봐..."
"아아...그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 추상명사와 연관된 얘기로 대화가 번져나가자,
불현듯 아무 이유도 없이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혁수는 괜한 말을 꺼냈나 싶은 생각에 슬그머니 풀죽은 음성으로 사족을 달 듯 변변찮은 질문을 덧붙인다.
"너도...그런 자리 가야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장남인데..."
"치- 바보야, 나 내놓은 자식이잖아~~ 장남은 무슨... 난, 그 집 아들 아냐.."
농담 비슷하게 해까운 어조로 내뱉고 있지만 주혁의 망막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씁쓸함과 서글픔의 흔적이 혁수의 예민한 신경에 포착되지 않을 리가 없다.
평소에는 후미진 구석에 처박아두고 외면하기만 하던 복잡한 상념들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자 혁수는 자동적으로 희미한 한숨을 내쉰다.
어색하고 불쾌하게 이어지는 침묵을 몇 번씩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나지막한 목소리를 끌어올리는 혁수..
".....네가 그렇게 말하면...난...너한테 정말 미안해져..."
"....미안하다니.. 왜...?"
금새 걱정과 불안으로 회색 빛이 물든 그의 눈동자,
그 투명한 표면에 어린 그의 연약함과 지친 영혼이 솔직하게 혁수를 부르고..
청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주혁의 간절한 부름에 혁수는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기만 한다.
나 같은 존재가 감히 그의 잃어버린 인생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을까...?
"넌... 나 때문에 뺏긴 게 너무 많잖아.."
".....그래서..?"
반문하는 주혁의 묵직한 보이스는 여전히 온화하고 차분하다.
혁수는 그의 노여움을 겁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용기를 발휘하여 늘상 자신을 짓누르는 미묘한 열등감을 털어놓는다.
"네가 후회하게 될까봐... 내 잘못 때문에, 내가 제대로 못해서 너 후회하게 만들까봐...
난 어려울 게 별로 없지만, 주혁이 넌... 생각보다 훨씬 고달플 텐데..."
"....그런데..? 내가 너랑 같이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한 건 네가 강요한 게 아니잖아?
어차피 선택은 각자의 몫이야. 예전에 네가 날 거부한 것도,
그런 너에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린 것도 나와 나 각자가 선택해서 이루어진 결과일 뿐이야.
어느 누구도 우리의 선택에 개입할 수는 없어.
일정 부분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주체가 되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야."
"알아. 그런데...가끔씩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어..
그렇게 떠나는 것으로 모든 게 달라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쓸데없이 주책 맞게 허튼 생각을 하는 건지..."
제자리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혁수의 눈동자가 안쓰럽게 느껴지자
주혁은 울컥 솟구치는 애틋함에 미세한 진저리를 치며 그를 가슴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항변하듯 거친 어조로 대꾸한다.
"안혁수.. 넌 지나치게 착한 거냐, 아니면 바보인 거냐!?
내가 말했잖아.. 그런 행운 받을 만큼, 우린 그 정도로 눈물 흘렸다고...
아무도 우리에게 더 많이 울어야 한다고 얘기할 자격은 없어.."
(116)
시계바늘이 7시를 가리키고 있는 걸 확인하자 강태는 특별히 새로 맞춘 옷으로 갈아입고 외출준비를 시작한다.
조금 후면 문환이 보낸 부하들이 강태를 데리고 갈 것이고,
문환의 생일축하연 장소인 강남의 한 호텔 뷔페에 도착했을 때
어쩌면 제일 먼저 재준과 눈이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태를 묘하게 자극한다.
최고로 예쁘게 보여야한다.
그가 나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신선함과 풋풋함, 그 때보다 훨씬 더 독보적이고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재준을 사로잡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그로 하여금, 나를 되찾아야겠다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나를 자신의 곁에 두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잘 것 없는 나의 외모 따위를 이용해서라도, 내 존재의 절대적 필요성을 재준에게 환기시켜야 한다.
고집스러운 독기가 오른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다가 강태는 생전 처음으로 손도 대지 않던 화장품까지 발라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윤기가 더해지며 새틴 같은 살결을 돋보이게 해 준다.
이래서 여자들이 그렇게 죽어라 화장품을 처바르는 거군~ 하는 생각에
강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조성 짙은 눈빛으로 자신의 매무새를 관찰한다.
단추가 하나 뿐인 정장 자켓이 강태의 신체 곡선을 강조해주고, 안 그래도 잘록한 허리가 더 가늘어 보인다.
나를....예쁘다고 생각할까...?
그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는지, 어떤 향수를 좋아하는지...
강태는 그걸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초라해서 미칠 지경이다.
정말로 그와는 처음부터 분리된 사람이었던 것 같은 불길한 느낌 때문에 자꾸 보채면서 울고만 싶다.
암상스럽게 입술을 깨물며 강태는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몇 초간 노려보다가,
아주 흉측한 광경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쌩 하니 냉풍을 일으키며 돌아선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 대기하고 있던 사내에게 말한다.
"준비 다 됐어요. 출발하죠.."
- 호텔의 정문 앞에서부터 낯익은 얼굴들이 재준의 시야에 비춰진다.
어지간한 지하계의 인사들은 대부분 초청한 모양이다.
재준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 차에서 내린다. 뒤에는 물론 준상이 그를 수행하고 있다.
재준이 나타나자 안면이 있던 몇 몇 사람들은 반색을 하며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
재준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적당한 예의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위압감을 가지고 그들과 인사를 나눈다.
생일 축하연이 벌어지고 있는 뷔페 안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다가와 재준의 코트를 받아주고,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과 갖가지 산해진미에서 풍겨 나오는 맛깔스러운 냄새에 재준은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든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와서는 안 될 금단의 장소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긴장과 스릴이 알싸하게 전신을 휩싼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게 고막에 느껴질 만큼, 날뛰며 약동하는 내부의 무언 가가 본격적으로 냉담한 재준의 영혼을 들쑤신다.
이 곳에 오면 강태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한 그 때부터, 그래서 이 곳에 오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재준은 어리석은 속임수 놀이에 열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중적인 자신의 이성과 감정 - 이기적인 면과 합리적인 또 다른 자아 사이의 갈등은 실상 우스운 소모전에 불과한 것인지도...
어쨌든 이 곳에 온 이상, 강태를 보고 싶다는 그 단순한 갈망 하나 쯤은 채워줘도 괜찮지 않겠냐며 재준은 스스로를 달랜다.
"조회장님은 저 쪽에 계십니다."
눈동자 머물 곳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 하는 재준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 마냥 준상이 부드럽고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재준에게 일러준다.
재준은 흠칫 어깨를 약하게 들썩이며 준상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움직인다.
그리고, 비로소 강태의 모습을 검은 망막 안에 그려 넣는다.
많이 변해 있다.
한 달이라는 짤막한 시간동안 그는 참 많이 변한 모습으로 반짝이고 있다.
턱까지 내려오던 단발머리를 앞머리만 길게 남긴 채 깔끔하게 자르고, 꼭 맞는 정장 차림을 해서 드러난 몸매는 전보다 몹시 여위었다.
가녀린 굴곡을 이루는 선들이 강태를 여려 보이게 한다.
그의 연약함이 너무 청초하고 순결한 느낌을 자아내서 재준은 가슴이 덜컥 무너지는 위기감을 맛본다.
스물거리며 기어오르는 절망을 꾸역꾸역 삼키고 문환과 함께 서 있는 강태에게로 다가가는 재준..
거리가 좁혀질수록 강태가 일부러 자신을 외면하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아, 이 회장님..! 바쁘셔서 못 오실 줄 알았는데... 이거 영광입니다, 정말.."
"생신 축하드립니다. 댁으로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라고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회장님이 주시는 건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워낙 이런 자리에는 잘 참석을 안 하시는 스타일이시라 다른 분들과는 오랜만에 뵙는 거 겠네요.."
"예.. 그래서 다른 분들과 안부도 나눌 겸 왔습니다."
"아아~ 그러시군요.. 아무튼 즐겁게 놀다 가십시오. 참, 우리 강태하고도 오랜만에 보시죠..?"
우리 강태..
친근한 소유격이 붙여진 그의 이름이 재준의 귓구멍을 후비고 찌른다.
등줄기로 써늘하게 낙하하는 땀방울의 감촉에 재준은 바지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쥔다.
문환과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계속 재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강태의 흑빛 눈동자와 재준의 까만 심연이, 드디어 힘겹게 맞닿는다.
그리고 재준의 눈망울 대신 심장에서 검붉은 피가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재준 자신도 뚜렷하게 감지한다.
"......안녕하세요..?.."
죽고 싶다.
그 예쁜 입술이 벌어지면서 새어나온 강태의 목소리가, 감미로운 비음이 섞인 나긋나긋한 그 음성이 재준을 자살충동으로 몰고 간다.
".....예..."
황급히 성대를 울려 강태의 인사에 응답한 재준은 문환에게 시시껄렁한 몇 마디를 더 읊조린 후 도망치듯 강태의 눈길을 피해 떠난다.
오기 전까지는 강태를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 뿐이었는데 막상 그를 바라보는 건, 상상할 수 없었던 고통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렇게 아파 본 적은 없다.
그의 사랑스런 눈동자가 손만 뻗으면 닿을 자리에서 빛나고,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려오고,
그의 청량한 체취가 후각을 마비시킬 만큼 가까이에서 진하게 맡아진다.
그런데.... 가만히 있어야 한다.
가만히 마주보고 서서 어이없는 그의 존댓말에 재준 역시 존댓말로 대꾸해야 하는 것이다.
괜히 왔어, 오지 말았어야 했어.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병신 같이 감정대로 행동한 건지....
재준은 호되게 자신을 질책하며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거린다.
화장실 안으로 피신해서, 뒤죽박죽 엉켜버린 마음을 다잡고 정리하려는 듯 재준은 차가운 수돗물로 창백한 얼굴을 씻어낸다.
억누르고 단속하던 긴 호흡을 탄식처럼 뱉어내며 여유로운 무표정을 덧씌운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적어도 그렇게 보여야 한다.
혈관을 비틀어 짜는 듯한 괴로움 따위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자신을 세뇌시키고 강인하게 지탱하며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서려 하는 재준에게
준상이 결연한 눈빛으로 다가와 그에게만 들리도록 조그맣게 이야기한다.
"도련님께서 좀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회장님과 단 둘이서만..."
도련님. 준상은 아직도 강태를 '도련님'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소소한 문제에까지 생각의 가지를 펼치는 자신의 이성이 치졸하고 역겹다.
"705호실에서 기다리시겠답니다. 안 오시면....사람들 있는 연회장에서라도 얘기하시겠다고...
서로 위험해지고 싶지 않으면 오시는 게 좋을 거라고 하시던데요.."
황당하게도 웃음이 비져 나온다.
이젠 협박까지 하는군-
그 말을 옴팡지게 종알거린 그 입술이 얼마나 탐스러웠을까...
얼마나 귀여웠을까, 그 자태가...
씨발, 나도 확실히 미친놈이 다 된 것 같다.
"전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걱정말고 가 보십시오, 회장님."
가야 할까..? 가도 될까...? 가서 그 애를 만나도 괜찮을까..?
그 애에게...거짓말을 잘 할 수 있을까..??
참지 못하고 그 애를 안으면 어떡하지.. 그 애에게 키스하면 어떡하지..
내가...참지 못하고 강태를 가져 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안으면, 강태는 더 깊이 내 품을 파고들텐데..
내가 키스하면, 그 부드러운 입술을 열어서 나를 받아줄텐데..
내가 그 애의 옷을 벗기고 그 애를 만지면... 그 애는... 강태는...
나한테 매달리면서 꿈결처럼 속삭일텐데...
'사랑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네 글자, 그 두려운 속삭임으로 나를 지배할텐데...
조금만 이기적으로 생각해보자고 재준은 자기 자신을 부추긴다.
아주 조금만, 강태의 안전보다는 자신의 열망과 그리움을 앞세우자고..
그렇게 솔직해져서 최소한의 목숨을 부지해나가는 것도 그다지 파렴치한 짓은 아닐 거라고 다독여본다.
사실대로 강태에게 이야기하는 거다.
이젠 널 내 사람으로 곁에 둘 능력은 없지만 여전히 너를 원한다,
그러니까 너도 변치 않았다면 우리 관계는 달라진 게 없는 거라고...
널 다른 남자에게 팔아 넘기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 숨쉬는 네 존재를 의식하고 싶었던 나를 용서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털어놓는다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대로 줄줄이 토해낸다면,
홀가분해지기는커녕 서로에게 더 거대한 고통만을 가중시키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깨달은 재준이기 때문에..
그의 환상은 허공에서 분해되어 버리고 만다.
강태를 편하게 해 주자.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의 증오와 분노는 시간으로 치료할 수 있어도,
잡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결국 흉터로 남아서 강태의 아름다움에 흠집을 낼 테니...
서서히 식어 가는 감정 속에서 나를 등지고 돌아서게 될 그 애를 지켜보는 것도 절대 자신 없다.
잠깐동안 힘들어하고 울겠지. 나의 변심을 원망하고 날 저주하겠지.
그리고 강한 녀석인 만큼 금방 추스르고 새로운 길을 찾아낼 거다.
그렇다면.... 나도 강태를 떨구어 낼 수 있다. 내팽개칠 수 있다.
굳건하게 다짐하고 수 십 번 되새김질하며 불현듯 뜨겁게 달구어지는 눈가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는 재준..
당장이라도 내장 안에 들어찬 음식물과 위장 액을 몽땅 게워내고 싶은 메스꺼움에 허파 가득히 공기를 흡입하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7층에 당도하여 강태가 있을 방문 앞에 서자, 재준의 손가락 끝이 저려온다.
숨을 멈추고 노크를 한 뒤, 눈을 감고 점점 선명하게 부딪쳐오는 강태의 발자국 소리에 귀기울인다.
문이 열리는 기척과 동시에 눈꺼풀을 들어올린 재준에게 강태의 흔들리는 영혼이 달려든다.
그 영혼을 매몰차게 떼어낼 각오를 단단히 다지며...
재준은 망설여지는 걸음을 방안으로 디딘다.
(117)
그와의 섹스는 단순히 몸과 몸의 접촉에 의한 쾌락이 아니었다.
설령 그것이 육체적인 동작이라 하더라도, 그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눈이나 손가락이나 페니스가 내 몸을 통해 감정을 뒤흔들고,
나의 움직임이 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차츰 움직임과 움직임, 감정과 감정이 풀려서
다시 한 번 합쳐지고 뒤엉켜 하나가 되는 정신적인 쾌감이었다.
- 유미리, <남자> 중 -
젖은 머리를 탈탈 수건으로 털어 내며 혁수는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열리는 문 틈 사이로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전화통화를 하는 주혁의 모습이 보인다.
통화를 하다가 혁수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주혁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미소가 섞인 눈짓을 보낸다.
"알았어. 내일 아침 11시까지 본사로 와. 그 때 대충 정해놓던지 하자.. 그래, 들어가라."
사무적인 말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핸드폰을 전원을 꺼 버리는 주혁에게 혁수가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전화 왜 꺼 놔? 중요한 연락 오면 어떡하려구..?"
"몰라, 방해받기 싫어. 야, 네 전화도 이리 줘.."
"왜??"
"네 거도 꺼 놔. 얼마 만에 단 둘이 밤을 보내는 건데~~ 절대 방해받을 수 없어!!"
과장되게 센 억양이 실린 목소리로 떠들어대며 호들갑스럽게 혁수의 핸드폰까지 꺼 버리는 주혁..
혁수는 밉지 않은 눈길로 주혁을 흘겨보며 나무라는 표정으로 넌지시 핀잔을 준다.
"너 때문에 충의회도 많이 망가졌겠다~~ '이사'라는 놈이 일 처리를 그런 식으로 하니, 조직이 어떻겠냐..?"
"허어~ 우리 혁수가 아까부터 왜 이렇게 틱틱거릴까? 갑자기 부끄러워서 그러나~?"
"참나~~ 내가 왜 부끄러워 해?? 이상한 쪽으로 끌고가고 있어.."
"내가 뭘~~~ 야, 어디 가~! 안혁수, 이리 좀 와 봐.."
괜스레 뚱한 표정을 지으며 짐짓 토라진 척 주혁의 곁에서 달아나려 하는 혁수를 완강히 붙들어 이끄는 주혁은
강경한 어조와 다르게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싱글거리는 주혁의 얼굴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혁수도
상쾌하게 콧등을 메워오는 그의 향취에 꺾여 원래의 다정한 갈색 눈동자로 그의 실루엣을 훑어 내린다.
자신 앞에서만은 한없이 포근하고 넉넉해지는 그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오버액션으로 자신을 웃기려 노력하는 그가,
천진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솔직하게.. 감정 그대로 행동하는 장주혁에게 진정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렇게 오랜 시간 기다리게 했음에도, 그렇게 무수한 상처를 주었는데도, 음습하고 악취만 진동하는 늪 속에 그를 빠뜨렸었는데도...
'사랑한다'는 허약한 고백 하나에 그 모든 걸 바로 용서해버린 주혁에게 이제는 자신이 보답할 차례라고, 그런 생각도 한편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알고 있다. 앞으로도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받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혁수로 인해 그가 더 무거운 짐을 지고 남은 인생을 걸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절대로 주혁 혼자서 그 길을 감당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수없이 되풀이한, 한 번도 지킨 적 없는 맹세를 혁수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다시 새롭게 다져본다.
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뻔한 희망이라도 품고 싶다.
"안혁수 버릇 또 나온다.. 혼자서 멍~하니 명상하기, 우리 혁수 주특기지?"
"뭐야~~! 괜히 구박하고 그래.. 네 생각했단 말이야, 바보야.. --+"
귀엽게 투덜거리며 자신의 허리에 둘린 주혁의 팔을 떼어내려고 몸을 뒤척이는 혁수를 더 세게 감싸안으며 주혁은 기쁨에 겨운 미소를 터뜨린다.
혁수의 체리빛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이자, 마치 그가 은근하고도 깜찍한 장난기를 동반해서 유혹해오는 듯한 망상에 주혁은 몸이 붕 뜨는 것 같다.
가까이에서 전해지는 그의 옅은 숨소리와 체온이 감동스러울 정도로 경이롭고 소중해서 점차로 정신을 차리고 있기가 힘들어진다.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혁수의 조심스러움과 수줍음이 언제나 주혁을 달구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처음부터 그래 왔었다.
주혁이 서서히 입술을 접근시키자 다갈색 두 뺨이 발그레해지며 혁수가 침을 삼키는 게 목울대에서 드러난다.
웃음이 나오기는커녕 주혁은 광폭하게 끓어오르는 열망에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한다.
심장박동이 멈춰버린 것처럼 왼쪽 가슴에 싸한 중압감이 밀려오면서 혁수는 부드럽게 와 닿는 주혁의 입술에 눈을 내리 감는다.
자신의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마주 댄 주혁의 가슴에서 뜨거운 피를 뿜어내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가 혁수에게 무슨 말을 해주는 것만 같아서 혁수는 주혁의 입맞춤에 따라 격렬해지는 자신의 호흡을 간신히 억제한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말 따위로 전부 다 표현할 수 있다면 포옹과 키스, 그 이상의 행위도 하등의 필요성을 상실하게 될 테니...
살과 살을 통해, 몸과 몸을 비비며 나눌 수밖에 없는 진실 때문에...
우리가 단죄 받는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므로.
살며시 입술을 벌리자 신속하게 침범해오는 주혁의 혀가 혁수의 입천장을 애무하고 그 아래에 자리잡은 혀를 건드린다.
느릿하게 반응하는 것 또한 혁수만의 특징이다.
혁수가 촉촉한 혀를 내밀어 주혁의 아랫입술을 핥고 그의 입안을 탐색하자,
혁수를 안은 주혁의 팔이 움찔 경련하며 짙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혁수는 주혁의 등에 둘러 감았던 팔을 풀고 약간 망설이다가 그의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간다.
어서 빨리 안기고 싶다는 욕망이 절실해질수록 혁수는 대담해진다.
단추를 다 끌른 다음, 격해지는 호흡을 절제하며 셔츠 자락을 양쪽으로 젖히자, 새하얀 주혁의 속살이 찬란하게 빛을 반사한다.
섬세하면서도 남성적인 몸매가 시야를 장악하고, 그런 그의 몸을 오직 자신만이..
'안혁수'라는 남자만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가슴 뭉클한 축복임에 틀림없었다.
상아색 침대 시트 위로 혁수를 눕히며 주혁은 급하게 그의 티셔츠를 벗겨내고,
뒤통수에 받쳐지는 푹신한 베개의 감촉에 혁수는 더욱 아스라한 미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두렵거나 혼란스럽지는 않다.
자기 자신 안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인 주혁을 향한 감정이, 그와 함께 꿈꾸는 계획된 미래가 확실한 청사진을 그려준다.
이제는 눈동자에 고일 눈물까지도 겁나지 않는다.
'이별'이라는 단어는 생각하지도 않으련다.
그런 최악을 시나리오는 불가능하다고, 주혁과 혁수 둘 다 자위한다.
-주혁의 손이 혁수의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기자
혁수는 그가 편하도록 엉덩이를 조금 들어올려 주고, 그의 앞에서 나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혁수는 형광등 불빛이 눈부시다고 느낀다.
"혁수야....혁수야.....혁수..야....승..호....야...."
혁수의 나신을 내려다보던 주혁이 급격하고 거친 숨결을 토해내며 무언 가에 홀린 사람처럼 혁수의 이름만을 반복해서 부른다.
혁수의 갈색 눈망울과 일직선으로 초점을 맞추고 그의 체리빛 머리카락을 쉴 새 없이 쓰다듬으며...
총알 하나가 이마를 관통한 듯한 충격을, 주혁은 혁수의 나신을 대할 때마다 매번 그와 같은 충격에 비틀거린다.
혁수의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부위까지 적나라하게 노출되자, 주혁의 몸은 본격적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혁수의 육체는 완벽했다. 주혁의 차원에서 그것은 진리였다.
그러나 육체를 통과해서 만나지는 그의 영혼은 주혁이 숭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완전하고 정결하다.
주저하는 손길로 천천히 주혁의 옷가지들을 떨구어낸 혁수가 진저리를 치며 그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그런 식으로 소극적인 몸짓을 동원하여, 주혁을 원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표출하는 혁수가 미치게 사랑스러워서
하마터면 울컥 눈물이 솟구치려 하는 것을 힘주어 억누르는 주혁..
도드라지게 불거져 나온 팔뚝의 핏줄이 피부를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주혁은 강하게 혁수를 옭아매며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는다.
혁수의 다리가 주혁의 허리에 휘감기고, 주혁의 입술은 자제력 따위를 내팽개쳐 버린 채 거침없이 아래로 이어진다.
계속해서 혁수에게 짜릿한 쾌감을 헌납하는 주혁의 키스에 혁수의 몸이 이리 저리 꿈틀대며, 상아색 침대 시트에 여러 개의 자잘한 주름을 만든다.
자꾸 팽창하기만 하는 두 사람의 욕망에 짓눌려 주위의 모든 사물은 암흑 속으로 꺼져든다.
혁수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다.
몸을 제대로 가눌 만한 힘마저도 잃어버린 그는 허물어지듯 주혁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그리고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호칭으로 그에게 애원한다.
"혁아....혁아....안아 줘, 빨리...안아 줘...."
혁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성을 듣자 주혁은 정신이 아득해진다.
생생하게 각인되는 그의 보드라운 살결과 안타까운 떨림이
백 마디 말보다 훨씬 간절하게 주혁을 밀어붙이고, 그의 영혼을 채우고 끌어올린다.
삽입에 수반되는 통증을 느낄 혁수에게 미안함을 가질 여유조차 없이 주혁은 혁수의 좁은 구멍을 비집고 그의 내부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활 모양으로 구부러지는 혁수의 등과 반원 형태로 휘어지는 가냘픈 허리는
주혁의 몸을 더 깊숙이 담아두려고 발작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주혁은 차라리 서글퍼진다.
규칙적인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주혁의 오렌지빛 머리카락을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하체에 지속적으로 가해지던 통증이 황홀한 망각의 쾌락과 지극한 희열로 탈바꿈할 때..
혁수는 욕설이 뱉어질 정도로 전신의 감각이 부풀어오르는 걸 주체하지 못한다.
이대로 주혁과 정사를 나누다가 죽고 싶다.
주혁의 페니스가 자신의 내장을 뚫고 목구멍까지 침입하여 기도를 막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주혁의 온 몸을 자신 안에 집어넣고 폭발해 버리고 싶다.
수소기체가 가득 차 뻥하고 터지는 풍선처럼 자기 자신도 주혁의 정액과 땀과 남근으로 꽉꽉 차서
하나도 남김 없이 조각조각 부서져 버리고 싶다.
정말 그렇다. 그렇게 사랑한다. 그를 사랑한다. 이 남자를 사랑한다.
혁수의 손가락이 주혁의 어깨 죽지를 파고든다.
잠시 혁수에게서 몸을 뺀 주혁이 왠지 모르게 서툰 손길로 혁수의 허리를 감아 고정시키고 다시 허리를 놀리다가
절정으로 치달아 가는 듯 약하게 신음소리를 내지른다.
주혁의 목을 껴안고 있던 팔을 풀어 혁수는 눈가를 가린다.
따갑게 내리비추는 형광등 불빛과 거대하게 덮쳐 오는 아찔함과 가장 강렬하게 퍼부어지는 주혁의 숨소리, 속삭임, 그의 육체...
그 모두를 견뎌내지 못하고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 가운데 혁수가 매달리는 유일한 존재는 그를 범하고 있는 주혁이다.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는 공범자에게서 구원을 찾는, 가해자의 품에 안겨 위로 받고 싶은 불합리하고 아이러니한 관계...
그게 너와 나일까....
주혁과의 섹스가 조금이라도 지겨워지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그가 키스해도 아무런 설레임이 다가오지 않고 그의 벗은 몸을 마주 대해도 전혀 흥분되지 않고,
주혁과 함께 침대에 들어도 그에게 안길 마음이 추호도 생기지 않게 되기를 얼마나 소원했는지...
그렇게 되려고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다그쳤는지...
그런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얄팍한 비웃음을 날리며,
혁수는 막바지로 치닫는 향연에서 아껴둔 마지막 한 잔의 술을 들이키듯 주혁의 목을 끌어당겨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혁수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주혁의 그의 안에 사정한다.
주혁의 정액을 받아 흡수하지 못하고 도로 쏟아내 버리는 자신의 육체가 너무 저주스러워서 혁수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만다.
이 따위 참담한 기분은 질색이다.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사랑하는 주혁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비난하면서도 빗나간 흐느낌을 잡아매지 못하는 혁수..
그리고 그의 눈물이 어떤 의미를 담고 흐르는 것인지 투명하게 볼 수 있는 주혁은 그냥 씁쓸하게 웃고 만다.
똑같은 구조로 형성된 ―심지어 체형까지도 흡사한 서로의 알몸뚱이를 상아색 시트 아래로 감추며,
주혁은 덮여진 시트 자락 밑에서 처연하게 떨리는 몸으로 혁수를 보듬는다.
그러나 마르고 단단한 주혁의 허벅지에 혁수의 페니스가 닿는 순간,
주혁은 북받치는 서러움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다시 혁수를 머금어야 한다..
(118)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죽지 못하는 가장 큰 고통이요, 보은이다.
애인은 이별보다 애인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까닭이다.
사랑은 붉은 촛불이나 푸른 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 마음을 서로 비치는 무형에도 있는 까닭이다.
- 한용운, <이별> 중 -
철컥하고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드러지게, 둔탁하게 귓가를 맴돈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안으로 잠겨지도록 장착된 시스템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은근한 안도감에 젖는 자신이 몹시 우스워지는 재준..
힘주어 초점을 모은 망막에 강태가 들어온다.
침대에 앉아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머릿속이 무지근하다.
점점 둘 사이의 간격을 잠식하며 재준을 압박해오는 강태의 눈동자는 검고, 영롱하고, 그야말로 텅 비어 있다.
깨끗이 비워져 있다.
재준은 서둘러 입을 연다.
"뭐 때문에 부른 겁니까..?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거, 조회장님이 싫어하실 텐데요.."
강태의 고운 눈매가 앙증맞은 주름살을 그리며 살짝 찌푸려진다.
그러나 금새 내비쳤던 불안감을 수습하고 해사한 웃음을 피우는 그의 예쁜 얼굴에 재준은 차라리 화를 내고 싶기만 하다.
"야아.. 둘이 있는데 무슨 존댓말이야.. 여기 지금 우리 둘밖에 없어.."
어떠한 긴장감이나 어색함 없이 그저 살갑기만한 강태의 목소리와 나긋한 말투 때문에
재준은 용건이 뭐냐고 재차 물으려던 것을 자기도 모르게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켜 버린다.
20cm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강태는 팔을 뻗어 재준의 옷깃을 만지작거린다.
잠시동안 그렇게 두 사람을 둘러싼 정적이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두던 그가 사뭇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정말...오랜만이다, 우리.. 단둘이 이렇게 마주보는 거...너무 오래 기다린 것 같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런 얘기들이 나를 잔인하게 고문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재준은 번잡스럽게 엇갈리는 상념들 사이에서 계속 냉랭한 침묵을 고수한다.
그러나, 짙은 샴푸향기와 함께 강태의 체온이 따스하게 접촉해오자
재준은 건조하게 굳히고 있던 까만 심연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수가 없다.
생생하게 감겨오는 그의 매끄러운 육체의 곡선과 몇 겹의 옷을 사이에 두고도
마치 맨살의 감촉처럼 부딪쳐오는 그의 달콤함이 재준의 지친 가슴팍을 파고든다.
당장이라도 모든 판단력과 사고능력을 제쳐둔 채 아무 생각 없이 강태를 끌어안고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그의 몸 속을 채우고 싶다.
몸뚱어리가 두 동강이 날 때까지, 미친 듯이, 그를 자신의 육체로 메우고 싶다.
저주스런 가면도, 거추장스러운 옷도 전부 벗어 던지고 그와 알몸으로 엮이고 싶다.
가장 야만스럽게, 간절하게.
"....재..재준아...!?.."
매몰차게 강태의 팔을 떼어내며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는 재준을 겁에 질린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강태..
당황한 음색으로 더듬거리며 그의 이름을 입술에 담아보지만,
경악스러울 정도로 껄끄럽게 겉도는 그의 이름에 오히려 더욱 소름이 돋는다.
"왜 그래...? 뭐 잘못 됐어..??"
불규칙한 파장을 일으키는 강태의 목소리는 이미 예전과 같은 확신을 잃어버리고 초라하게, 어정쩡한 상태를 보여준다.
재준은 어쩌면 강태 역시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지독히 싸늘한 냉소를 매단다.
너나 나나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
지겹다.. 얼른 끝내버리자, 우리...
"그건 내가 해야될 질문 같은데..? 너야말로 왜 이러는 거야? .....이런 행동, 더 이상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안 된다니...? 아니, 어째서? 왜 안 되는데..??"
수긍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마치 울음기처럼 묻어나는 강태의 음성은 거의 분노 조로 치달아간다.
두껍고 견고하기만 한 재준의 무심한 눈동자를 무너뜨리려고
발악에 가까운 노력을 하면서도 전혀 억울하지 않은 건,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임을 무의식중에 예감한 탓일까...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는 듯한 템포로 강태의 눈망울에 아롱지는 물기가 부담스러운 투명함을 빛낸다.
하지만 재준은 그의 눈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다.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를 관통하는 아픔 정도야 가뿐히 참아낸다.
"이재준.. 우리 사랑하는 사이잖아.. 이재준 너, 내 애인이잖아.
우리 애인 사이고...애인끼리 껴안고 키스하고 그러는 게 잘못된 거야?
너... 나 보고싶지 않았어? 난 매일매일 네 생각만 했어.
너랑 밥 먹던 거, 같이 여행간 거, 다른 친구들도 어울려서 다같이 놀았던 거...
그리고... 너랑 키스하는 생각하고...네가 나 안아주던 거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이재준 너도 그랬잖아, 응?? 너도 매일 내 생각하면서 다시 만나기만 기다리지 않았어?
우리...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 이렇게 단 둘이 있게 됐고,
그리고.. 그리고 또... 어어....그러니까...."
유창한 말솜씨를 자랑하던 그가 도무지 앞뒤의 연결이 이어지지 않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뱉어지는 대로 늘어놓는다.
가득 고인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자꾸만 눈을 크게 치켜 뜨며
더듬더듬 이야기를 짜내는 강태를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물끄러미 응시하는 재준..
야멸 차게, 매정하게 침묵을 지킨다.
재준에게서 어떠한 대답도 나오지 않자 강태의 위기의식은 폭발 직전에 다다르고,
결국, 태연한 척 소탈함을 가장하기로 했던 최초의 결심은 얼마 가지 못해 허물어진다.
고인 눈물이 흘러 넘쳐 둥근 뺨 위로 가느다란 자국을 새기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온 몸의 신경세포들은 뇌에서 전달해주는 명령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해 허둥거린다.
무거운 껍질을 끝까지 받쳐내지 못하고 연약한 본래의 실상을 드러내는 강태에 비해 재준은 너무 강인하다.
어이가 없을 만큼.
"....그래, 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나도 알아..
왜 갑자기 어느 순간에 모든 게 바뀌어버렸는지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어.
왜 내가 그 남자의 정부로 넘겨져야 했는지, 네가 날 그렇게 보내버린 이유가 뭔 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난 몰라..
그치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우리 관계만 변함 없으면 되는 거 아냐??
네가 사정이 안 좋아져서, 그래서 날 조문환에게 줄 수밖에 없었다면...
나 괜찮아, 참을 수 있어.
그 사람 정부가 돼서 같이 살고 섹스 상대 해 주고..그거 별로 어렵지 않아.
너 알잖아, 나 무슨 일이든지 견뎌내는 체질인 거..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을 때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갈 방법부터 찾던 나야.
내가 힘들까봐 걱정해서 이러는 거라면 제발 그만 둬.
난... 나는... 한 가지만 확인 받으면 다 덮어둘 수 있어.
네 감정은 그대로라는 거, 상황이 안 돼서 함께 있지 못할 뿐이지 달라진 게 없다는 거...
그거 한 가지만 확인 받으면 다른 건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그러니까 재준아...."
불가능한 관계의 지속은 쓸모 없는 시간 낭비다.
세월이 지날수록 무뎌져 갈 서로의 모습을 준비하지 말자.
배신의 상처는 아물지만, 그리움 때문에 생긴 멍울은 훗날 암 덩어리가 되어 강태를 죽일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적 배웠던 시 구절 중에 이런 것도 있었지...
이별은 죽음보다 위대하다고...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큰 희생이라는 씁쓸한 진리...
재준은 다시 한 번 조롱하고 경멸하는 듯한 비틀린 냉소로 창백한 얼굴을 흠뻑 적신다.
강태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마침표를 찍는 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재준아....키스해 줘...."
키스 대신... 너에게 날카로운 칼을 던져줄게.
그걸로 네가 부여잡고 있던, 나와 연결된 고리를 끊도록 해.
그리고 나에겐 증오의 감정조차 품어선 안 돼.
너의 무관심만이 나에게 가장 합당한 형벌이니까...
"참...웃겨. 역시 너답구나.. 지나치게 낙관적인 거...
넌 절대 나쁜 쪽으로 생각 안 하지.
내 감정까지 너 혼자서 원하는 방향으로 단정짓고 편하게 믿어버리고... 나중에 확인만 받으면 그만이다..?
그런 네 초 낙천주의 사고방식은 아직도 납득이 안 가."
"납득이 안 가는 건 너야! 대체, 대체 뭐야??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네 바짓가랑이라도 붙들면서 눈물 흘리고 애원이라도 해야 하는 거니!??
내가 왜 아무 것도 모르고 이렇게 바보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하는지...!
....그래, 다 까놓고 얘기하자.
네가 곤란할까봐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네 말하는 걸 들으니까 그럴 수가 없겠어.
정말로...정말로 왜 그런 거야?? 뭐 때문에 나를 그렇게 내던진 거야!?
진짜 이유가 뭔 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나도 알아야겠어!!"
맑고 잔잔하게 일렁거리기만 하던 강태의 눈동자가 일순간에 탁한 빛으로 물들며
각종 오염물질이 뒤섞인 호수처럼 어둑어둑한 소용돌이를 만든다.
강태의 망막 안에서 반짝이던 자신의 영상이 무참하게 지워지자
재준은 가슴이 아린 것도 모른 척 하며 더 큰 자신감을 갖는다.
"너야말로 답답하게 좀 굴지 마.
다 알고 느끼고 있으면서 애써 부정하는 거...너 자신한테도 손해고 상대방도 피곤하게 만들어.
....맞아, 인정해. 나 너 정말 좋아했어. 사랑이니 결혼이니 유치한 말까지 들먹이면서 너랑 노닥거리고,
그러다가 충의회가 위태로워질 만큼 그 정도로 너한테 푹 빠졌었지.
어쩌면 다행이었던 건지도 몰라.
충의회가 그 지경이 되니까... 내가 겨우 정신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여태껏 너한테 매여서 한심한 연애질이나 하고 있었을 지도..."
"....연애질...?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넌 지금 그렇게 부르고 있는 거니..??"
"네가 날, 나란 인간을 변화시켰다고 믿었어?
그렇다면, 안 됐지만 아니라고 대답해 줘야겠어.
너도 알잖아.. 난 충의회 회장이야. 충의회가 사라지면 내 인생도 끝장이고.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뭐... 마침 슬슬 너한테 싫증이 나기도 했었지만..."
"나한테 사랑한다고 얘기했어. 너에게 유일한 건 나뿐이라고 네 입으로 고백했어.
나랑 결혼하는 게 네 꿈이라고 분명히 말했어..!
네가...이재준 네가 나한테 얼마나 많은 약속을 했는지 알아!??
.....헛소리 그만해. 아까 전에 네가 날 보던 눈빛은 그렇지 않았어. 이런 말들을 담고 있지 않았어.
이런 식으로 우리 둘 다를 괴롭히지 마, 재준아.이건 날 위하는 길이 아니야!!"
"..............."
"충의회가 사라지는 게 두렵다면, 그래서 날 버린 거라면...
그러면 내가 이렇게 빌게. 그러니까 제발 충의회 대신 날 선택해 줘..
네 평생을 몸담고 바쳤던 그 조직 대신 나를, 나 강태를 선택해 줘..
충의회를 잃어버린 것 후회하지 않게, 내가 잘 할게.
그러니까 내 부탁 들어 줘.. 충의회 버리고 날 선택해 줘...
내가 잘 할게.. 진짜 후회하지 않도록 할게, 내가... 재준아....믿어 줘...."
재준의 옷깃을 꽉 쥐고 흐느끼며 간원하는,
그러다 온 몸을 뒤흔드는 안타까움에 굴복해서 무릎을 꿇는 강태의 모습이 바로 목전에서 실재하고 있음에도
재준은 마치 영화의 한 토막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이 아니기를 소원하는 바램이 너무 절실한 탓일까,
혐오스러울 만치 정확하고 냉철한 재준의 이성과 시선을 마취제를 맞은 듯 평소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서 빨리 강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의 울먹임 흥건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도피해야겠다는 생각만이 재준을 지배한다.
그러지 않았다 가는, 몇 초만 더 비참하게 뭉개어진 강태의 울부짖음을 마주하다 가는,
언제나 끊임없이 자신을 부추기는 자살충동을 실행에 옮기게 될 것이다.
눈시울조차 붉히지 않는 나의 영혼은 강태의 손에 의해 종말을 맞이하는 것마저 가당치 않을 만큼 더럽고, 썩었다.
악마여, 나 이재준의 파멸은 너의 몫이다..
(119)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느끼지도 않고.
대신, 당신을 발견한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소.
우리는 우주의 먼지 두 조각처럼 서로에게 빛을 던졌던 것 같소.
- 로버트 제임스 윌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 -
빈 술잔을 채우려고 손을 들어 섬세하게 세공 된 사기 주전자 모양의 술병을 들어올리려고 하자,
주혁의 옆에서 술시중을 들던 여자가 날쌘 손놀림으로 그의 잔에 술을 따른다.
그와 마주보고 앉아 시답지 않은 자기 자랑만 2시간 째 주절대고 있는 중년 남자에게
자신의 지루해하는 기색이 표시 나지 않도록 주혁은 간간이 웃음을 띄우기도 하고 적당히 맞장구도 쳐준다.
세금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를 부탁하기 위해 - 말하자면 매달 엄청나게 부과되는 세금을
'비교적' 합법적으로 감면 받기 위해 주혁이 오늘 저녁 만난 이 사내는주혁이 관리하는 구역의 세무서장이다.
그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렇듯이
이 사내 역시 꽤나 거들먹거리기 좋아하고 제 자랑하는 맛에 사는, 너저분한 속물이었지만
그가 소유한 파워를 빌릴 수밖에 없는 폭력조직 세계의 수장들도 참 불쌍하다는 생각에 주혁은 설핏 조소를 흘린다.
웬만한 서민층 가정의 한 달 생활비에 필적할만한 식사비용을 들여 저녁을 대접하고,
정치자금을 빙자한 뇌물까지 바쳐 올리고, 몇 시간동안 짜증나는 수다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자신의 신세도 처량하다.
옆구리에 여자를 끼고 커다랗게 팔 동작을 해 보이며 열을 올려 떠드는 세무서장의 이야기는 허공에서만 빙빙 맴돌고..
어젯밤 내내 만끽하던 혁수의 체취와 그의 진분홍빛 입술과 부드러운 살결만이 주혁을 갈증나게 한다.
사랑스러운 체리빛 머리카락이 맨 가슴을 간질일 때의 짜릿함,
부끄러움으로 겹겹이 싸 매인 채 안아달라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
슬퍼 보이지만 어둡지 않은 갈색 눈동자와 그 속에서 늘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혁수의 진실..
그립다, 보고 싶다. 그와 떨어져 있은 지 24시간도 채 못 되어서―
기분이 축 처지는 게 영 울적하다.
웬만하면 그쯤에서 입 좀 다물고 일어 서줬으면 하는 주혁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앞자리의 사내가 파장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1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번쩍거리는 고급 승용차에 몸을 싣는 그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그제야 속으로 날숨을 돌리는 주혁..
승용차의 뒤꽁무니가 멀어지는 것을 잠시동안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미간에 골을 새기며 담배 한 개피를 물고 불을 붙인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주혁은 피로 때문에 꺼칠해진 뺨을 한 손으로 문지르며 곁에 선 부하에게 느릿하고 억양 없는 음색으로 이야기한다.
"난 내 차로 갈 테니까 너도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네."
"참, 회장님한테서 연락 없었고? 준상이도 전화 안 했어??"
"네, 아무 연락 없었습니다."
"알았어, 그럼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 들어간다.."
"편히 쉬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이사님."
부하의 깍듯한 인사를 가벼운 목례로 받아주고 주혁은 터덜터덜 자신의 은색 승용차가 세워진 지하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운전석에 앉자, 분주한 하루 일과가 막을 내렸다는 생각에 편안한 이완감이 밀려들면서 한편으로는 약간 허탈해진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도시의 야경이 화려하고 현란한 네온사인으로 장식되어 있음에도, 주혁의 눈에는 고즈넉하게만 보인다.
.....혁수한테 가면 안 될까..?
아까 전부터 얄밉게 솟아오르는, 긍정의 대답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주혁을 물고늘어지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도리질을 친다.
.....그럼...집 근처까지 만이라도 가면 안 될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그 애의 얼굴을 보고 오는 것도 안 될까...?
구차스런 두 번째 질문에 기막혀하며 호된 질책의 눈초리를 보내는 자신의 이성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는 주혁..
더 이상 숙고해보지도 않고 급하게 핸들을 돌리며,
방금 전의 침울함과 극단에 서 있는 따뜻한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는 그의 마음이 바보 같다고 하기엔 너무 진지하고 진실하다.
이런 나를 비웃어도 상관없다고, 이렇게 애타는 갈급함을 평생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본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되겠냐고..
주혁은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길게 늘어나는 것만 같은 시간을 달려,
혁수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주홍빛 불빛이 시야에 채워지자 주혁은 차를 멈춰 세운다.
혁수를 품에 안았을 때 전해지는 것과 비슷한 안락함이 주혁의 눈동자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얼마동안 그 다사로운 불빛의 기운에 취해 있던 주혁은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결심이 선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낸다.
"네.."
주홍색 불빛의 주인공이 그리 멀지 않은 감으로 목소리를 보내온다.
익숙하지만, 처음과 변함 없는 설렘으로 닿아오는 혁수의 음성에 주혁은 자동적으로 긴 호흡을 들이마시며 감기려고 하는 눈꺼풀에 힘을 준다.
"나야.."
"어어~ 어디야? 아직도 일하고 있어??"
"나...지금 너희 집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있어, 편의점 앞에.."
"정말이야??"
"잠깐만 나오면 안 돼? ....보고 싶어."
"야아.. 오늘은 안 된다고 했잖아. 피곤할 텐데 얼른 집에 가서 쉬지 뭐 하러..."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죽겠어.. 바로 집 앞이니까 잠깐만 나와~ 진짜 얼굴만 보고 갈게.."
이것저것을 따져보며 난처해하는 혁수의 망설임이 수화기 너머로 감지된다.
주혁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 짐짓 엄하게 나무라는 투로 혁수가 말한다.
"알았어. 지금 나갈 테니까 기다려, 이 떼쟁아.."
핸드폰을 접으며 주혁은 자연스레 벌어지는 입을 닫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금새 전신을 급속도로 장악하는 기대감과 행복에 빠져든다.
속으로 유치한 카운트다운까지 해 가며 연인을 기다리는 유쾌한 긴장과
기꺼운 초조함이 절정에 다다를 때쯤, 어김없이 완벽한 타이밍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혁수..
다정스런 눈망울로는 주혁을 흘겨보면서도 터지는 미소를 참느라 입가가 움찔거린다.
"와아~~ 안혁수다~!~ 내 안혁수~~ 내 보물~~ ^O^"
검푸른 눈동자에 파닥거리는 생기를 담고 새하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함박웃음으로 혁수를 맞이하는 주혁..
어린아이처럼 우스꽝스러운 목소리와 말투로 오버액션을 빠트리지 않으며 낯간지러운 수사를 외쳐댄다.
자신의 허리를 감아 품속으로 끌어당기는 주혁의 팔을 못 이기는 척 내버려두며 혁수는 그를 책망한다.
"너 정말 막무가내로 왜 이러냐~!? 이러다가 엄마 아버지한테 의심 사면 어쩌려고 그래~"
"몰라, 몰라~~ 난 그런 거 아무것도 모르고, 난 안혁수 밖에 몰라요~!"
과장된 제스춰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대며 계속 비약적인 목청을 돋구는 주혁은 분명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혁수는 어쩐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사소한 부분까지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이 오히려 더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전화를 걸어 보고 싶어서 죽겠다고 매달리던 주혁의 목소리는 연인 사이에 흔히 오가는 투정 정도로 치부하기엔 많이 아련했다.
그리고 슬펐다.
"네 생각 밖에 안 나는데 미쳐 버리겠는 거야~~ 넌 그럴 때 한 번도 없어??
뭘 해도 네 얼굴만 아른거리고, 제대로 집중되는 건 하나도 없고..
당장 안 보면 숨이 넘어갈 것 같고...
아아~ 안 그럴 때도 됐는데 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내가 전생에 너한테 죄를 많이 졌나 봐.."
한 팔로는 혁수의 허리를 두르고 한 손은 혁수의 머리카락이며
이마, 콧잔등을 고루고루 쓰다듬으면서 가벼운 어조로, 재밌게 본 영화 줄거리를 이야기하듯이 조잘대는 주혁은 연신 미소를 짓는다.
붉은 입술이 그려내는 곡선은 절대 처연하거나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지 않지만 엉뚱하게도 혁수는 명치께가 콕콕 쑤셔온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건 정말 원치 않는다. 안 그래도 서둘러 돌아서야 하는데...
"치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집에 가서 쉬기나 해. 하루종일 일하는 놈이 기운도 좋다.."
"벌써 들어가려구??"
"나 그림 그리다가 화실에서 몰래 나온 거란 말이야. 진짜 들어가야 돼..
이번 주말에 또 볼 수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 장주혁.."
"아, 참... 토요일에 윤아 누나 도착한다고 했지..."
혼인신고에 필요한 몇 가지 절차를 위해 잠시 귀국하는 윤아를 떠올리며 주혁은 작게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다.
다음주 월요일에 같이 미국 대사관에 가서 관계자와 인터뷰를 하기로 되어있다.
불현듯 무척 현실감 강하게 다가오는 혁수와의 미국 행이 잘 믿겨지지 않아서 주혁은 기묘한 표정을 어색한 미소로 감춘다.
그러나 예민한 혁수가 그의 기울어진 감정을 포착하지 못할 리 없다.
"...왜..? 윤아 누나 귀국하는 게 이상해..?"
"에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냐.. 그냥...정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걱정 돼..? 잘 안 될까봐..??"
"걱정은 무슨... 계획한 대로만 하면 되는 건데 걱정할 게 뭐 있어..
토요일에 윤아 누나 오면 같이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면 되잖아. 걱정할 거 전혀 없어.."
어설프고 인공적인 명랑함보다 훨씬 더 그에게 어울리는 무게감이 주혁의 중저음과 맞물리며 혁수에게 한결 안정감을 준다.
조금이라도 덜 미안한 마음으로 그를 돌려보내고 싶은 혁수..
주혁의 코트 자락을 꼼꼼하게 여며주면서 토닥이는 듯 조용히 입술을 뗀다.
"그래. 걱정하지 말자, 우리.. 다 잘 될 거야...나쁜 쪽은 생각할 필요 없어.."
주혁은 군더더기 없는 청명한 미소로 혁수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보내고, 거두어지지 않는 눈길을 혁수의 갈색 눈망울에서 떼어낸다.
뒤를 돌아 차 문에 손을 가져가는 주혁의 등과 자신 사이에 놓인 허공으로,
거북스런 소리를 동반한 채 나부끼는 찬바람이 유난히 매섭게 혁수의 옷 속으로 파고든다.
운전석에 오른 주혁이 창문을 내리고 혁수를 올려다보며 아쉬운 눈빛으로 입을 연다.
"집에 도착해서 전화할게. 안 자고 화실에 계속 있을 거지?"
"응.. 운전 조심하고, 피곤하면 전화하지 말고 그냥 자.."
"싫어, 전화할 거야."
"하여튼 고집은...."
"헤헤.. ^^; 자아~~ 마지막 작별의 키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톡톡 치며 어리광을 부리는 주혁에게 퉁명스런 핀잔을 주려다가,
혁수는 단속할 새도 없이 번져나는 웃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주혁의 입술에 짧은 베이비키스를 남긴다.
순식간에 주혁의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가 혁수에게 머무르고..
발걸음을 추슬러 다시 집으로 향하며 혁수는 자꾸만 튼튼하게 이어지고 있는 평화와 자유가 생명의 끝 날까지 연장되기를 간구한다.
그들이 노력하는 대로... 그리고 그들이 거쳐온 절망의 깊이만큼.
(120)
지금은 기다리지 않는다. 잊은 건 아니다, 잊을 수는 없다.
이 방에 남아있는 것은 그에게서 버림받은 나뿐이다.
- 유미리, <남자> 중 -
"가지 마."
질척한 흐느낌으로 흥건히 젖어있던 강태의 목소리가 감쪽같이 메마르며 빈 공간을 가로지른다.
떠도는 공기입자를 트고 재준의 청세포에 도달하기까지의 그 촌각의 시간동안
격노의 화염을 지피는 강태의 흑빛 눈동자가 무모하게 타오른다.
강태에게 견고한 뒷모습을 보이며 방을 나서려던 재준은,
절박한 음성으로 애걸이 아닌 명령을 하는 강태를 듣자 얕은 숨을 내쉬며 멈칫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돼, 이재준. 이대로 널 가게 놔 둘 수는 없어."
강태의 뼈마디 하나 하나가 소스라치며 경직되어 가는 것이 몇 미터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재준에게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영혼의 중앙부에서는 쓰라린 통증이 쉬지 않고 부딪혀 들어오는데, 재준의 육체는 약간의 피로감 외에 별다른 증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수많은 유행가 가사에서 고전적인 테마로 쓰이는 주제인 '이별'이라는 걸 체험하고 있는 이 순간,
어떠한 희망도 모두 절망으로 연결되는 이 곳에서..
재준은 '이별'의 본질이 노래에서 읊어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임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우습게도, 조잡한 말장난 같은 유행가 가사가 이별의 심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역시 실감하는 재준..
이처럼 소모적으로 사고의 고리를 확대시켜 잡념 속으로 자신을 파묻으려 애쓰며 재준은 천천히 몸을 회전시킨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겨우 다시 강태에게 시선을 두자,
재준의 시야를 제일 먼저 잠식해 버리는 건 야청빛으로 살기 어린 광선을 발하는 한 자루의 총이다..
강태의 손아귀에 들려서 불안하게 장전된, 부자연스럽게만 보이는 총이 재준을 겨누고 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감각은 공포가 아니라, 차라리 슬픔의 최대치라 해야 옳을 것이다.
정말...너무 비참하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곤두박질 칠 수 있는 것인가, 우리의 관계가...
도대체 얼마나 참혹한 저주를 받은 인연이 길래 그와 내가 이렇게 마주보게 된 것인지..
재준은 비로소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신(神)이라는 존재에까지 생각의 범위를 넓히게 된다.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는 조물주가 진정 살아있다면, 부디 이 저주의 끈을 풀어주시기를...
그래서 조금만 더 편하고 아름다운 헤어짐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재준은 난생 처음 기도라는 것을 해 본다.
"그거 이리 줘. 써 본 적도 없으면서 함부로 다루면 위험해."
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강태를 설득하는 재준의 동요 없는 눈빛이 강태가 붙잡고 있던 한 줄기의 실오라기를 싹둑 잘라버린다.
최악의 수렁으로 자신을 침몰시키는 강태..
눈물이나 한숨, 좌절이나 비탄 따위도 이제 그에겐 구역질나는 사치품으로 보일 뿐이다.
"괜히 한 번 객기 부려보는 거 아니니까 그런 말로 달랠 생각하지 마."
아직 눈물 자국이 또렷하게 남아있는 얼굴로, 까만 눈동자를 위협적으로 빛내며 강태는 재준에게 경고하고..
소름끼치는 파열음과 동시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둘 사이의 갈등과 마찰은 팽팽하게 불어나기만 한다.
그런 탓인지, 재준은 서서히 기도가 짓눌리는 것 같은 갑갑증에 머리가 무거워지고 등줄기엔 서늘한 땀방울이 미끄럼틀을 탄다.
".....기억나..? 홍콩으로 출국하기 전날 밤, 내가 너한테 했던 말...
이재준 너 나 버리면 내 손으로 널 죽여버릴 거라고.. 기억하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무슨 뜻을 담고 있었던 건지, 그 말을 중얼거리던 강태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그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기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잊어야 한다..
"그거...거짓말 아니었어. 홧김에, 감정에 치우쳐서 내뱉은 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정말이야. 그때 얘기한 것처럼, 너 지금 이대로 나 내버려두고 나가면...
나...너 쏠 거야.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정신병자 취급해도 상관 안 해. 내 목적은 한 가지야.. 그게 뭔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너를 되찾기 위해서 난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아.. 그게 내 방식이야.
정말로, 정말로 방아쇠 당길 거야.. 너한테서 들어야 할 말을 끝내 네가 해 주지 않는다면...
널 쏠 거야, 죽여버릴 거야, 이재준."
".........."
"....이게 마지막 방법이야.. 전부 다 해 봤어, 난...
네 결정을 믿고 아무 말 없이 참으면서 기다려도 봤고,
미친 듯이 술 퍼마시고 개판 치면서 널 잊으려고도 해 봤어.
네가 정말 바라는 일이라면 그렇게 해 줘야 한다고 스스로 달래보기도 했어.
....그래도 안 되잖아..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안 되는 걸 어떡하란 말이야..!
나도 노력했어, 재준아. 나도 너만큼 힘들게 노력했지만 안 됐어.
넌 어떨지 몰라도 내가 이대로는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무릎 꿇고 애원까지 했잖아, 지금..
그런데도 소용없다면 네 목숨이라도 담보로 잡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거 아냐?? 내 말 이해하겠어..?"
아직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같다, 그는...
매일 같이 역겨운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은 내 몸부림을 안다면 저런 얘기를 하지는 않을텐데...
재준은 자기도 모르게 비릿한 조소를 깨물며 여전히 덤덤한 시선으로 강태와 눈을 맞춘다.
뜨거운 피를 뿜어내는 심장의 규칙적인 고동소리가 처절한 통곡처럼 들려오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고요 속에서 울려 퍼지는 재준의 목소리는 강태의 손에 쥐어진 총보다 비할 수 없이 파괴적이다.
"그렇게 도도하게 콧대 세우던 천하의 강태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꼴이라니...
다른 남자들한테 얘기하면 아마 한 사람도 안 믿을 거야.
그래도 이 쪽에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배웠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황당하다..
이렇게 순진한 척 하기엔 너도 많이 물든 상태 아닌가?..."
"이재준...!"
"하나 얘기해 줄까..?
너 말이지... 네 가치를 오랫동안 지키고 싶다면, 비싸게 굴도록 해.
아무에게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그 분위기...
그게 널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거든. 물론 네 외모도 대단하지만..
어쨌든 지금 내 앞에서 이러는 것처럼 싸게 놀았다 간, 다른 사람들도 금방 너한테 등 돌리고 말아.
그럼 네가 갈 데는 고작해야 남창 클럽 아니면 게이바 밖에 없어진다구...
처신을 잘 해.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어."
잔인한 글자들을 서슴없이 입 밖으로 내보내면서도 부지런히 강태의 모습을 영혼의 상자 안에 담아두는 재준..
신비로운 보랏빛으로 물결치는 검은 머리카락과, 부릅 뜨여진 채 경련하고 있음에도 고유한 물빛을 유지하는 눈동자..
수없이 많은 고백과 속삭임으로 자신을 가르쳐주던 유혹적인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까지 모조리 깊게, 온전하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난 후, 메스껍게 넘어오는 구토를 삼키며 재준은 돌아선다.
당황스럽게도 벌써부터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철저하게 은폐된 혼자만의 공간 속에 안착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제어할 수 있는 한계선을 미처 늘리지 못했나보다.
한 발짝 씩 걸음을 내딛는다.
휘청거리는 다리는 자기 몸의 일부가 아닌 것 같다.
다시 한 발자국 옮겨놓는다.
방문의 문고리가 손에 닿을만한, 그 지점까지의 거리는 채 3m도 되지 않을텐데 끔찍이 멀어 보인다.
난쟁이가 된 기분이다.
입술을 조금이라도 벌리면 그 틈새로 울음이 터져 나올 까봐 숨을 멈춘 채 재준은 또 대견스러운 발걸음을 잇는데,
갑자기 낯익은 총성이 고막을 헤집는다.
동시에 오른쪽 어깨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듯 격렬한 아픔이 신경중추를 마비시킨다.
강태의 손가락이 당겨지며 발사된 총알이 재준의 어깨에 박혀 뼈를 후벼파고, 살을 찢고 근육 조직을 망가뜨린다.
우습게도 그 순간, 재준의 영혼이 오르가즘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치의 희열감과 함께 고통이 아닌 환희가 되어 밀어닥치는, 그래서 재준에게 황홀경을 가져다주는 강태와의 이별..
그 증거로 재준의 어깨에 피와 상처가 흘러내린다.
진회색 자켓을 얼룩지게 하는 피가 하염없이 몸밖으로 빠져나오기를...
그래서 강태와의 이별에서 얻은 이 상처가 자신을 순조롭게 죽음으로 인도해주기를 갈망하며
재준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카페트가 깔린 바닥 위에 쓰러진다.
쓰러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비로소 무표정한 얼굴을 내거는,
강태의 황량하게 비워진 눈동자만큼은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 포근하게 덮인 이불자락을 걷어내며 강태는 뾰족한 것에 등 언저리를 찔린 사람 마냥 황급히 몸을 일으킨다.
사각팬티 한 장이 강태가 걸치고 있는 옷의 전부다.
삽시간에 피부를 옥죄는 쌀쌀한 기운에 슬며시 몸서리치며 주위를 둘러본다.
친근한 풍경으로 강태의 시야에 들어차는 침실 안에는 혼자 뿐이다.
강태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다 해소되지 못한 피로감과 숙취를 털어 내려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침실 바닥에 발을 딛고 선다.
한꺼번에 몰려오는 어지럼증에도 제법 이골이 난 터라 이맛살만 살짝 찡그릴 뿐, 강태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거울 앞에 다가간다.
붉게 충혈된 눈자위와 헝클어진 머리,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행색..
비틀린 자학으로 점철된 웃음이 강태의 입가에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어젯밤, 그 손으로 재준의 냉랭한 뒷모습을 향해 총을 쏘았던 그 때의 두려움과 아득함과 분노가 씁쓸하게 입안을 돌아다니는 것 같다.
그토록 강하고 단단해 보이던 재준의 긴 몸이 유약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무감각하게 응시하던 어제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호텔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준상이 난리를 피우며 재준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부산스러운 광경을, 마치 제 3자처럼 물끄러미 지켜보던 강태는..
그 어제의 강태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또 다른 강태... 아니, 내 안에서 새로 만들어낸 강태다.
재준이 죽기를 바랬다.
진심으로 그가 죽기를 바라며 그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빗나간 총알이 재준에게 부상을 입히기만 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그를 쏜 것이 후회되기는커녕 그를 죽이지 못한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점점 악화되며 꼬여 가는 재준과의 인연을 깨끗이 제거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함에 또 한 번 강태는 증오의 칼을 던졌다.
그리고 재준이 살아있기에 죽지 못하는, 자신의 사그라들지 않는 감정을 원망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겠다는 의무감조차 상실했다.
내일이나 미래 같은 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것도 오늘 부로 그만이다.
'다시 시작한다'는 고상한 표어도,
자아의 절대성을 사수하려는 본능적 의지도 강태의 뇌리에서 고스란히 발려져 도망치듯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그래, 내 몸이 날 이끄는 대로 사는 거다.
술을 원하면 술을 마시고, 음식을 달라하면 식사를 하고..
섹스를 하고 싶어서 내 육체의 욕망이 치솟으면 남자든 여자든 그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과 몸을 섞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간단히 강태는 자신의 삶과 생활을 결정한다.
그 귀결이 어떠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도달점을 찾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워하지 않고, 울지 않고,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눈물과 탄식 속에서 가끔이나마 발견할 수 있었던 숭고한 사랑에 대해선 모든 기억을 지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주인공, '이재준'이라는 세 글자는 간직해두자.
재회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나의 파국에 대한 책임 소재를 훗날 명확히 하기 위해.
(121)
추억을 절제하는 것,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 로버트 제임스 윌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 -
풋풋하게 주혁의 입술을 적시고, 몇 초 되지도 않는 짧은 순간에
주혁을 최고로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주던 혁수의 입맞춤이 오래도록 그 여운을 꺼트리지 않는다.
한 쪽만 쌍커풀이 진 짝짝이 눈과 아담하고 귀여운 코와 도톰한 입술을 하나씩 상기하며,
그 모두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던 자신의 축복 받은 손가락을 응시하자 문득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감격적이다.
혹시나 혁수의 체향이 남아있을까 해서 슬며시 손가락을 코밑으로 가져가던 주혁은
그런 자기 자신이 민망해져서 얼른 동작을 멈추고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다.
집으로 향하는 도로로 접어들자,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애꿎은 담배꽁초만 수북히 쌓아올릴 자기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재준은 아마 일 때문에 귀가가 늦어지거나, 들어 왔다고 해도 침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게 뻔하고..
이래저래 귀가하는 주혁의 발걸음을 붙잡는 이유들이 그로 하여금 핸들을 돌리게 만든다.
이 늦은 시각에 찾아가서 넋두리를 주고 받을만한 사람은 물론 한 사람 뿐이다.
태현의 집으로 차바퀴를 회전시키며 주혁은 아까부터 짜증스럽게 신경을 건드리던
달갑지 않은 정적을 흐트러뜨리려고 카 스테레오의 전원을 켠다.
상냥한 목소리의 여자 앵커가 전해주는 뉴스를 듣다보니 어느새 태현이 독거하는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서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태현의 집 초인종을 거리낌없는 손길로 누르는 주혁..
잠시 후, 누구냐는 확인 질문도 하지 않은 채 태현이 대문을 벌컥 열어제치며 모습을 보인다.
"아아~ 하여튼 이 새끼는 툭 하면 야밤에 쳐들어오고 지랄이야.. --+"
"우쒸-! 추워 죽겠어~ 들어가게 좀 비켜 봐!"
태현의 타박에도 아랑곳없이 그를 밀치고 집안에 들어서는 주혁..
휘적휘적 거실로 걸어가서 검은색 하프코트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소파에 반쯤 드러눕듯이 편하게 사지를 뻗는다.
그리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피워 무는데,
태현의 작업실에서 처음 보는 여학생 하나가 얌전한 걸음걸이로 나타나자 주혁의 눈에 노골적인 궁금증이 서린다.
"선생님.. 저어...그럼 다음 주에 올게요."
태현을 쳐다보고 말갛게 홍조 띈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여학생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소녀답고 곱다.
무엇보다 그녀의 얼굴 생김새를 명확하게 인식한 주혁의 눈동자는 놀라움과 의문으로 버무려져 불균형하게 기울어진다.
"어, 그래..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옷 따뜻하게 잘 입고...목 관리 철저하게 하는 거 잊지 마라.
아! 그리고 오늘 숙제 내준 거, 하다가 모르겠으면 전화해서 물어보고.."
"네.. 안녕히 계세요.."
주혁에게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조심성 있는 태도로 대문을 닫으며 그녀가 사라지자
자물쇠를 잠그고 돌아서는 태현에게 주혁은 따지듯이 흥분된 음성으로 묻는다.
"야!! 쟤...누구야? 여기서 너랑 뭐하다 가는 거야??"
"저번 주부터 나한테 과외 받는 애야.. 우리 과에 오고 싶어해서...실기지도 해 주는 거지."
"너한테 노래 배우는 애라고..?"
"노래도 배우고, 뭐...청음이나 작곡, 미디음악 전부 다 기본적인 건 가르쳐야지..근데 왜?"
"내가 지금 안 궁금하게 생겼냐?? 나 걔 얼굴 똑똑히 봤어.."
"아아... 난 또..."
리모콘을 들어 이리저리 TV의 채널을 바꾸면서 태현은 어물쩡 넘기려는 듯 심드렁하게 주혁의 말을 받아준다.
그러나 주혁은 태현의 입술이 다시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그를 주시한다.
옆얼굴에 느껴지는 주혁의 집요한 시선을 얼마간 무시하던 태현이
내가졌다는 듯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은폐하고 있던 범죄사실을 시인하는 것처럼 중얼거린다.
"그래.. 처음 만났을 때, 나도 세라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 야.."
"정말 똑같이 생겼어. 완전 빼다 박았던데..?"
"우연 치고는 진짜 기막히지 않냐? 며칠동안은 무섭기도 했는데...지금은, 모르겠어."
"............"
"이세라 그게 아무래도 불안한 가봐..
그래서 자기랑 똑같이 생긴 애를 보내 가지고 절대 자기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이러는 건가..?
그 기집애, 원래 그렇게 강짜가 심하냐?"
이제는 버릴 수 없는 습관처럼 태현의 청아한 음성에 녹아있는 장난기가 가끔은 주혁을 답답하게 한다.
그렇지만 눈빛과 입술이 따로 노는 현상이 어쩌면 그 나름대로 태현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고 위안하며,
주혁은 힐난조의 몇 마디를 식도 너머로 꿀꺽 삼켜버린다.
대신에, 좀 더 그가 솔직해질 수 있도록 치밀한 유도 질문(?) 준비한다.
"쿡... 그런가 보지.. 평생 자기만 생각하면서 질질 짜고 혼자 살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하다 못해 자기랑 닮은 여자하고라도 재밌게 살아봐라~ 뭐 그런 거 아니겠어? 그게 이세라 답지..."
"아이고~ 아주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 이세라 배려심이 그렇게 넓은 줄 몰랐는데?"
"걔 원래 화끈하잖아.. 네가 제대로 느껴볼 시간이 없어서 그랬지..."
".....맞아, 그랬을 거야. 정말 그랬어..."
아련한 시선을 먼 곳으로 밀어내며 숨죽이듯 잦아드는 태현의 음성이 가냘프게 허공을 휘젓는다.
혼잣말을 지껄이듯 을씨년스럽게 그림자가 드리운 그의 암갈색 동공이 희뿌연한 습기로 뒤덮인다.
"시간이 너무...너무 짧았어.
함께 있었던 시간은 짧지 않았을지 몰라도, 세라를 제대로 느끼기에는...너무 짧은 시간 밖에...
그래서 후회가 돼. 좀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외로움에 중독되어 손 내미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망설이던 그녀의 실체를 좀 더 빨리 알아볼 수 있었더라면...
사춘기의 봄날부터 세라를 얽매이고 있던 페시미즘에서 그녀를 더 빨리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예쁘고 순수하게, 고귀하고 영롱하게 가꾸어 나갈 자신이 있었는데...
'행복'이라는 두 글자가 더 이상 세라에게 낯선 의미로 다가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는데...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문장으로 되살아나 태현을 안타깝게 하는,
하지만 그만큼 부질없기 만한 상념들이 어느 샌가 무척 낡고, 바래졌다.
"아까 본 그 여자애...이름이 연수라고...고등학교 1학년이야. 세라도 고 1때 그 사람 만났는데..."
"그 사람이라니...? 누구??"
다 피운 담배를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로 가져가며 주혁이 고개를 들고 태현의 눈을 직시한 채 물음을 던진다.
태현은 길게 한숨을 뿌리며 조금은 작위적인 미소와 함께 대꾸한다.
"있어, 그런 게... 나중에 천천히 얘기해 줄게. 지금 말하면 분위기가 수습이 불가능할 거 같다.."
"쳇.. 별 희한한 핑계를 다 대고 있네..
됐어, 임마.. 너희 둘 사이의 비밀 같은 것도 좀 남겨둬라. 그런 것까지 다 까발리고, 도대체 신비성이 없어.."
"미친 새끼, 자기가 먼저 물어봐 놓고선... --+"
가벼운 툭탁거림과 욕설로 간단하게 와해된 공기를 형성해내면서도 주혁이나 태현이나 그다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새가 역력하다.
이쯤해서 화제를 일상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무슨 얘기를 화두로 꺼내놓을지 누구 하나 선뜻 목청을 내지 않는다.
째깍째깍 초침소리를 퍼뜨리며 시계바늘이 태현과 주혁의 귀와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해괴망측한 조바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진짜로 솔직하게, 느끼는 그대로 대답해 줄래?"
결국 또 묵직한 보이스를 우울한 말투에 실어보내며 주혁은 평소처럼 약간 어눌하게 입술을 움직이고,
태현은 떨구고 있던 눈길을 치켜올리면서 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연수라는 그 애... 네가 그 애를... 사랑하게 될까..?"
세라와 일치하는 부분이 단지 겉모습만 이라고 해도,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어리석음을 항상 매달고 살아가는 게 인간이니까...
이렇게 물어본다고 해서 그를 모독하는 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를 비난할 거냐?"
"....내가 그럴 자격이 어디 있냐.. 단지 지금의 네 생각을 말해달라는 거야."
부담스럽게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신뢰감을 상대방에게 심어주는 주혁의 이야기가 한결 태현의 자괴감을 감소시킨다.
그래도 간과하기엔 벅찬 혼돈의 소용돌이를 망연히 바라다보며 태현은 또 한 번 습관처럼, 어설픈 장난기가 섞인 쓴웃음을 짓는다.
"장주혁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 내가... 연수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아..??"
되려 주혁에게 반문하는 태현..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떨어뜨릴 때, 그의 얼굴은 쓴웃음마저 가신 무표정이다.
주혁은 순간적으로 손가락 끝을 차갑게 스치는 섬뜩함에 헛기침을 뱉어낸다.
"....그럴지도 모르지.. 감정이라는 건 예측할 수 없으니까."
감정.. 예측.. 불확실.. 불가능..일련의 어휘들이 사고회로를 부유하도록 가만히 방치한 채 침묵을 지키는 태현..
효과 없는 위장술을 사용하는 것도 팽개치고 이젠 아예 석고상처럼 딱딱한 얼굴을 번연히 노출시킨다.
그리고 자신을 희롱하는 것 같은 괘씸한 운명을 향해 원한에 사무친 복수를 다짐하듯,
그의 은은하고 투명한 목소리와 전혀 조화가 안 되는 말을 쏟아낸다.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세라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지금 연수를 통해 세라를 보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이런 상태를 극복하고 내가 서연수라는 여자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모르겠어. 그게 가능할까..? 내 시야에서 이세라를 완전히 걷어낼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망각한 채 사는 건 가능해도, 내 밑바닥에서부터 모조리 세라를 제거한다는 건... 아니, 무엇보다도 그렇게 된다면...
우선 내가 나 자신을 더 미워하게 될 거야. 지금보다 더.."
"그래도 네가 다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으면 좋겠어.
너한테 섭섭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넌 세라가 죽음 다음부터 그 애를 진짜 사랑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건...너무 무모하고 불공평한 일이잖아. 네가 네 자신을 돌봤으면 해.."
"훗...그래.. 생산성에 있어서는 빵 점 짜리 사랑이지...
사실 그 점에서 따지자면 장주혁 너도 할 말 없는 거 아닌가?
무모하고 불공평한 건...나보다 너희가 더 해, 병신아.."
묘연한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태현의 음색에 주혁이 대항하듯 입을 열고 목소리를 끄집어내려는데,
심각한 기류와 우스꽝스러운 마찰을 일으키며 주혁의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려댄다.
주혁은 약간 허둥대는 몸짓을 핸드폰을 꺼내 받는다.
'예..'하는 짤막한 응답이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곧고 남성적인 직선을 갖춘 주혁이 콧날이 비틀린 곡선으로 찡그려진다.
"뭐야?!.....준상이는 옆에 없었대?? ....아, 알았어. 회장님은 어느 정도이신 거야?
......그래, 내일 다들 모인 자리에서 얘기하자. 들어가라.."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내고 플립을 닫으며 주혁은 의뭉스런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태현에게 독백처럼 나직이 소식을 알려준다.
"재준이가 다쳤대.. 총에 맞았다나 봐. 강태가 쏜 총에..."
(122 )
내 사랑이여, 비록 우리가 두 번 다시 함께 잊지 못하고
항상 헤어져 있더라도... 맹세컨대 내 영혼은 모두 당신의 것이고,
내 생각과 삶도 당신의 것입니다. 마치 이 고통처럼...
-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중 -
설핏 잠에서 깨어난다.
재준의 동공이 빠르게 회전하며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작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예민한 재준의 청각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재준은 결코 깊게 잠들지 못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어, 미안해.. 깼구나..?"
어쩐지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이 휘감겨오는 태현의 걱정 어린목소리가 따스한 반가움으로 밀려든다.
재준이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서는 그의 동작이 액정 화면 속의 영상처럼 보이는 탓에 재준은 눈꺼풀을 몇 번 크게 깜박인다.
그래도 시야가 깨끗하게 트이지는 않는다.
"어젯밤에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태현은 서늘함과 원망이 묻어나는 어조로 목청을 돋군다.
혼자서 추측하고 어림짐작하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난다는 표정이다.
재준은 이유 없이 허허로운 실소가 터지려는 것을 제어하며, 일부러 더 밋밋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반문한다.
"주혁이 형한테 얘기 들었다며..?"
"누가 그걸 알고 싶대? 말 돌리려고 하지말고 얘기 좀 해 봐.
우리 사이에도 벽을 쌓아야 겠냐?? 나한테도 말해 줄 수 없는 거야, 정말?"
"..............."
"너랑 강태, 강태랑 이재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총알까지 왔다갔다하게 된 거냐구!?"
"오는데 차 안 밀렸어? 참, 학교는 어쩌고 이 시간에 온 거야??"
"아, 씨발-! 너 한 번만 더 말 돌리면 죽여버린다!!"
커다란 눈동자를 확대시키며 살벌한 낯색으로 고함을 질려대는 태현이 갑자기 귀엽다는 생각이 들자
재준은 그가 화를 낼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쿡쿡 억눌린 웃음을 뱉고 만다.
역시나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태현..
가늘게 눈꼬리를 찢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웃고 있는 재준을 한껏 노려본다.
늘상 잔재하던 장난기가 완연히 빠진, 진지한 태현의 눈빛이 가슴 안으로 파고든다.
재준은 서서히 표정을 원래대로 정돈하고 주저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간절하게 솟구치는 담배 생각에 미미한 짜증을 느끼며 태현은 다시 입을 연다.
"그래, 알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널 괴롭히는 고통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그거라도 알려주면 안 되니?
네가 얼마나 힘든지...나도 대충은 가늠해봐야 함께 아파하기라도 할 수 있을 거 아냐...
너 혼자 몽땅 싸 짊어지고 있으면 옆에 있는 나는 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슬퍼.
.....이재준, 너 나 믿잖아.. 안 그래? 너, 나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얘기해 줘. 내가 널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심한 갈증이 난다.
재준은 따갑게 타 들어가는 목을 축이려고 황급히 탁자에 있는 컵에 냉수를 따라 단번에 비워낸다.
그런 재준을 끈기 있게 바라보는 태현의 참을성이 점점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던 중,
어느 한 쪽으로 지나치게 무게가 쏠린 듯한 재준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이 책, 읽어봤어? 강태가 좋아하는 시집인데..."
침대 한 귀퉁이에 처박혀있던 책을 집어들어 태현에게 내미는 재준..
<악의 꽃>, 보들레르의 시집이다.
신입생 때 교양과목으로 수강한 '문예사조사'에서 들은 기억이 난다.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이라고 했던가...
태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재준에게서 시집을 받아들고 건성으로 몇 장 넘기며 훑어본다.
"아니, 나 책 읽는 거 싫어하잖아.."
조급증이 배어있는 태현의 대답에 재준은 건조하게 피식 웃어 보이고
자세를 낮추어 비스듬히 당을 기댄 채 창가 쪽으로 눈길을 움직인다.
눈부시게 부서져 내리는 햇살 가루가 얄밉기도 하고,
그 찬란한 빛줄기에 누군가를 자꾸 연상시키는 바람에 요즘은 유난히 낮이 길게 느껴지는 재준이다.
"이 시인 말이야...여기 쓴 시(詩) 중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는 시가 많다고 하더라.. 진짜 자기 애인한테..."
"...그래..?"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예술적인 재능, 열정을 전부 끌어내서 애인을 위해 시를 쓰고 그 시를 보내줬다고 했어.
오직 그 여자 하나만을 위해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너무 감동적이지 않느냐고...
강태가 그랬던 게 기억이 나.."
"쳇... 그 낭만적인 로맨티스트가 어쩌다 너를 총으로 쏘기까지 했다냐??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시 나부랭이 같은 건 집어치우고, 내가 듣고 싶어하는 얘길 해 달란 말이야...!"
"바로 이 시야.. 이 시에 모든 얘기가 담겨 있다구...
보들레르의 시와 강태, 그리고 나."
신경질을 부릴 기력도 소진했다는 듯 암담한 얼굴로 한숨을 길게 내쉬던 태현이
수수께끼 같은 재준의 말에 한 쪽 눈썹을 찡그리며 그에게로 상체를 기울인다.
재준은 여전히 유리창 너머의 풍경에 시선을 둔 채 먼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체념이 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강태는 그런 관계를 원했던 거야. 모두를 접어두고 서로만을 생각하는 거...
자기 인생의 최대 목표인 시(詩)까지도 사랑하는 여자를 기쁘게 해 주기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린 보들레르..
강태는 나에게 보들레를 같은 애인이었어. 하지만 나는...그렇지 못했어.
이게 다야. 주절주절 늘어놓는다고 해서 이것보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
"결론적으로 네 잘못이라는 거야? 강태를 외면한 게 전적으로 네 의지란 말야??"
"그래, 내 의지였어. 내가 결정하고 스스로 실행했어.
주변상황 때문에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긴 있지만 내 의지였고, 형 말대로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말도 안 돼, 납득이 안 가. 순식간에 네 감정이 돌변했다는 거,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내 의지였지만... 내 감정대로 행동한 건 아냐. 알겠어?
감정은....내 감정은.... 달랐어."
불신으로 팽창된 태현의 다급한 음성이 재준의 고막을 신속하게 두드리는 것을 차단하며
재준의 말이, 정말 하고 싶어한 그 말이 허공 중에 흩어진다.
태현은 놀려대던 혀를 굳히고 눈동자의 빛깔을 교체하며 재준의 까만 두 개의 심연에 초점을 맞춘다.
상대에게 지배당하는 듯한 위압감을 심어주는 그 특유의 싸늘함이 무기력하게 녹아든 모습,
그가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 자신의 본질.
한 번 솔직해지기 위해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는 재준은 어떻게 보면 별로 강한 남자가 아니다.
"아직도...아직도 너무 예뻐, 그 애가.. 그 눈을 보면 막 속이 울렁거리고 골치도 띵하고... 그런 걸 뭐라고 표현하더라..?
아무튼, 정말 예쁘고 안고 싶고...곁에 두고 싶은데... 그게 내 감정인데..."
"그럼 강태한테 사실대로 말해. 네 감정 그대로 얘기하면 강태는 그 이상 요구하지 않을 거 아냐??"
"말했잖아! 나는 보들레르 같은 애인이 될 수 없어! 형한테는 그게 쉬워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불가능해..!
....난 가진 게 많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도 많아.
아니, 그 전부를 다 희생한다고 치더라도...내가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게...'충의회'니..? 네가 가진 그 조직을 가리키는 거야?"
"......아니.. 강태의 인생."
자신의 인생은 아무렇게나 망쳐버릴 수 있어도, 아니, 어쩌면 이미 실패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지만...
그의 인생만큼은 지켜야했다. 그의 삶이 황폐해지는 걸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재준의 새로운 원칙이고 유일하게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매뉴얼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강태가 서 있고, 새롭고 유일한 이 매뉴얼은 재준에게 엄청난 인내를 주문한다.
"이제 이해가 가..? 나 때문에 강태가 죽어 가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어.
이미 나로 인해서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는데, 그 애의 인생까지 죽이게 된다면...
그건 옳은 게 아냐. 강태를 위해서도, 또 나를 위해서도..
감정은 옳고 그른 걸 따지지 않는다지만, 내가 바라는 건 강태의 인생이...
그리고 우리 관계가 아름다워지는 것, 그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헤어지는 게 최선이야."
"하지만 넌 강태에게 거짓을 보여주고 있어.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강태가 무너질 지도 몰라."
"일시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그 애도 힘들어하겠지..
많이...아주 심하게 상처받았으니까...회복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해.
어쨌든 강태는...결국엔 다시 일어설 거야, 분명히..
그 애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니까, 자기 자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애니까...
걱정 안 해. 금방 털고 일어서서 제 갈 길 찾는 애야.
그걸 알기 때문에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시간이 지나면...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돌아보면 알게 될 거야.
제자리에 왔다는 거.. 그러면 진짜 완전히 정리된 거고, 내가 강태를 파괴할 까봐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후회할 거야, 이재준. 이런 식으로 강태 보낸 거, 후회할거야. 확실해."
사랑이라는 건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사람의 잠재된 본질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바꿔 놓는다.
철저하고 지독하게, 그리고 가끔씩은 이상적인 모습으로도.
그러나 후자의 귀결을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적어도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는 말이다.
"널 칭찬해 줄 수 없어.
네 사랑의 방식이 존경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내가 너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같이 온 이상...끝까지 갔을 거야.
내가 죽고, 강태가 죽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그래도 함께 있었을 거야.
이만큼 와 버렸는데 다시 돌이킨다는 건 동반자살행위나 다를 게 없으니까.."
(123)
공항은 혁수에게 익숙한 장소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의 여자 목소리가 친근하게 닿아올 만큼 혁수는 공항의 모든 풍경이 자연스럽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윤아가 탑승한 비행기의 도착시간까지는 30분 남짓 남아있다.
의자에 앉아 시사 주간지를 손에 들고 그다지 신경을 집중하지 않은 채 활자들을 띄엄띄엄 훑어 내리는 혁수..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다는 느낌에 고개를 들고 안내판을 쳐다보니 도착시간까지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혁수는 옷매무시를 고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뗀다.
잠시 후,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과 기장, 부기장이 고급스러운 자기들만의 분위기를 풍기며 지나쳐가고, 승객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한다.
혁수는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고, 베이지색 코트 차림의 윤아를 발견한다.
몇 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눈과 혁수의 시선이 마주치자
윤아는 밝은 미소를 담뿍 머금으며 활기찬 걸음걸이로 혁수에게 다가온다.
"여어~~ 안혁수!! 진짜 몰라보겠다, 엄청 예뻐졌는데~??"
"누나야말로 못 알아보겠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5달쯤 됐나??"
"그렇게 오래 됐어? 참...뉴욕에서 매일 골골거리고 살 때는 아주 못 봐주겠더니...
애인이랑 알콩달콩 재미가 좋나보다? 얼굴이 확 피었네~~"
"치이~ ^^; 피곤하지? 주혁이랑 오늘은 잠깐 인사만 하고 얼른 쉬는 게 좋겠다.."
"아냐, 괜찮아. 그래도 얼마 만에 보는 건데 한 잔 해야지~~"
예전의 여성스럽고 다소곳한 면모가 많이 없어진 대신 무척 괄괄하고 털털하게 변한 윤아를 대하며
혁수는 그녀가 지민과 닮아간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이런 윤아를 마주하고 있으니, 지민도 물론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어진다.
그래서 굳이 지민의 안부를 물어야 할 필요성을 없는 듯 하다.
미국에서 자란 혁수답게, 몸에 배인 에티켓대로 윤아의 짐을 대신 든 채 혁수는 그녀를 자신의 승용차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인도한다.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윤아의 수다 역시 여전하다.
차를 타고 주혁과 미리 약속해놓은 장소로 이동하면서 윤아는 계속 자신의 신변에 관해 떠들고,
혁수는 그녀의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만으로도 말을 엄청 많이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제대로 적응이 되지 않는 윤아의 입담에 정신 없이 팽팽 돌아가는 머리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혁수는 아기자기한 까페처럼 꾸며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선다.
윤아와의 첫 대면을 할 곳으로 너무 격식 있는 딱딱한 분위기 보다는
편안하고 단란한 무드를 형성시켜주는 음식점을 고른 주혁의 선택은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다.
카운터의 직원에게 주혁의 이름을 대자, 상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종업원이 혁수와 윤아를 2층으로 이끈다.
계단을 올라가니 아래층보다는 훨씬 적은 수의 손님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그 가운데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한 주혁의 모습이 시야를 메운다.
깔끔한 암회색 정장을 갖춰 입은 주혁이 혁수와 윤아를 보고 흠칫 자세를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킨다.
처음 만나는 윤아의 얼굴이 궁금할 터인데도 주혁은 먼저 혁수의 갈색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영상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윤아에게 눈길을 머문다.
혁수가 보여준 사진 속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은 윤아의 외양이 한결 친근하고 익숙하다.
"어어~~ 얘가 주혁이야? 사진이랑 좀 다르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뜻 호쾌하게 다가서는 성격이 못 되는 주혁을 잘 알고 있기에,
분위기가 어정쩡해지기 전에 서둘러 서로를 소개해주려고 혁수가 입을 여는데 윤아가 선수를 친다.
약간 과장된 억양이 배어나지만 발랄하고 구김살 없는 윤아의 목소리는 확실히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상승시켜 준다.
의도한 바가 아님에도 줄곧 내비치고 있던 주혁의 차가운 인상이 부드럽게 녹아 내리며
그의 붉은 입술이 어색하게나마 조용한 미소를 그려 보인다.
그리고 윤아에게 자리를 권한다.
"앉으세요.. 어디로 할까 고민 많이 했는데... 여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뭐 어차피 얻어먹는 건데 아무데면 어때.. 사 주시는 대로 먹어야지.. ^^
야! 근데 너희 둘 만나면 원래 이러니? 어떻게 애인끼리 얼굴보고 그렇게 멀뚱멀뚱 하냐??
안혁수, 이 남자 네 애인 맞아? 너한테 아는 척도 안 하는데..??"
유별나게 '애인'이라는 두 글자를 강조하면서 반쯤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반쯤은 장난기를 실어서 혁수와 주혁을 민망하게 만드는 윤아..
주혁은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워 하며 하얀 살결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혁수는 괜히 메뉴를 뒤적거리며 퉁명스레 핀잔을 날린다.
"뭐, 뭐가... 우리가 누나들처럼 유치하게 노는 줄 알아?
만날 때마다 몇 십 년 만에 얼굴 보는 것처럼 법석을 떠는 누나들이 이상한 거지, 우린 정상이야.. --;"
혁수의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발음되는 '우리', 그 안에 혁수와 하나로 묶여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시리도록 벅찬 주혁이다.
그런 혁수와 자신을 오직 축복과 응원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윤아가 바로 옆에서,
가깝게 느껴지는 것 또한 새롭게 체험하는 안식과 행복이다.
비로소 쉴 수 있게 된 건가...
아직도 이 행운을 실감하며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자신의 영혼이 초라해 보이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상처의 흔적까지 말끔히 씻어내야겠다.
- 주혁에게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식사 후의 술자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혁수와 윤아는 집으로 향한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엑셀레이터를 밟으며 차를 출발시키는 혁수에게 윤아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주혁이는 되게 바쁜 가 보다...? 이 시간까지 일을 하고... 무슨 일...하는 거야..?"
"혁이? 여러 가지 직업을 갖고 있지..
나이트 클럽 영업상무, 호텔 관리실장, 또... 어디 지방에 있는 건설회사도 주혁이가 맡아서 운영한다고 했고...
솔직히 얘기하자면, '충의회'라는 조직 간부야. 한 마디로 건달이지, 뭐.. ^^;"
엷은 미소를 띄운 채 피식거리며 가벼운 어조로 말을 늘어놓는 혁수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그의 얘기를 듣는 윤아의 낯빛은 점점 가라앉는다.
어쩐지 물어서는 안 될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서 찜찜하고 미안해진다.
입을 다물고 앞 유리창에만 시선을 붙박고 있는 윤아를 힐끗 돌아본 혁수가
그녀의 자책감을 덜어주려는 듯 사근사근하고 해사한 음성을 퍼뜨린다.
"거기 회장이 우리 친구거든... 난 잘 모르지만 꽤 사업채가 큰 가봐..
건달들은 매일 싸움질이나 하고 놀고 먹는 줄 알았는데 옆에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
아침부터 밤까지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영화에 나오는 건 전부 다 거짓말이야."
".....학교 다니던 애가 그런 험한 일하려면 정말 힘들겠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에~이, 장주혁 적성에 딱 맞던데? 걔는 진짜 뒷골목 스타일이라니까...
그리고 거기 회장인 우리 친구는 우리보다 한 살 더 어려.누나보다 어린 애들도 얼마나 많은데..."
".....미국 오면 주혁이도 일할 생각말고 학교 다니라고 그래..
주혁이 하고 싶어하는 거 있잖아. 조각한다고 했었지..?
미국에서...다시 공부 시작하라고 해라.. 너희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거야..
주혁이랑 네가 미국으로 떠나려는 이유가 뭔 데... 지금처럼 살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잖아?
누나는, 너희가 단순히 같이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윤아는 진정 마음이 많이 상한 말투다.
순조롭게 이어지던 유쾌한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
그녀의 자못 심각한 염려와 걱정까지도 대충 흩어버리려고 했던 혁수는
강경하게 귓전을 파고드는 윤아의 목소리에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조금은 작위적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만 화제를 바꾸었으면 하고 바라는 혁수의 심정을 눈치채지 못하는 건지,
뒤를 잇는 윤아의 질문은 더 야속하게 혁수를 들쑤셔 놓는다.
"부모님께서는 전혀 변화가 없으신 거야?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래서 떠나기로 결정한 거잖아.."
"훗... 그래, 맞아. 내가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우울하고 무거운 공기분자들이 거슬리는 소음을 일으키며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에
혁수는 자기도 모르게 살며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본다.
갑자기 숨이 막히도록 주혁이 보고싶다.
이럴 땐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어야 하는데...
아직도 혼자 서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이 부끄럽기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진다.
절대로 혼자 설 수는 없다.
혼자가 되면 죽는다.
그도, 나도.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당당해진다는 건 스스로 자유를 찾는 행동이야.환경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어.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따가운 햇빛을 정면으로 쳐다볼 각오가 돼 있어야 해."
영어식 발음이 약하게 묻어있는 윤아의 음성이 혁수를 달래는 듯포근하게 그의 영혼을 감싸 안는다.
혁수도 알고 있다.
혁수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윤아에게는 뿌리뽑을 수 없는 천성처럼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그래도 언젠가는, 자신도 그녀와 같은 여유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서 좀 더 울어야 한다면 그 과정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혁수는 다시 한 번 애써서 깨끗한 미소를 만들어 낸다.
왠지 주혁도 지금쯤 동일한 무언의 기도를 읊조리고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124 )
사람들의 마음 위에 집을 지음은 어리석은 짓 사랑도 아름다움도 모두 휘청거린다.
'망각'이 채롱 속에 그것들을 집어 던져
'영원'에게 되돌려 줄 때까지!
- 보들레르, <고백> 중 -
"도,도련님! 여기는...."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현란하고 환각적인 불빛을 번쩍이는 네온사인 간판.
그 아래에 위치한 목재 문 앞으로 성큼 다가서는 강태를 제지하는 사내..
강태를 수행하는 - 달리 말하자면 감시하는 문환의 부하 중 하나이다.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그에게 강태는 특유의 도전적인 눈빛과 냉랭한 목소리를 꽂아준다.
"술 한 잔 하겠다는데 왜 이래? 자꾸 귀찮게 굴 거야, 아까부터?!"
자기보다 서너살 많은 사람에게 신경질적으로 건방진 반말지거리를 휙휙 날려대는 강태는 확실히 변했다.
단정하고 예의 바르던,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어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최소한의 기본은 잃지 않았던 그가
불과 며칠 새에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며, 그를 수행하는 연화회의 조직원들과 문환 또한 어리둥절해 했다.
재준을 총으로 쏜 것에 대해서 강태는 일절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문환도 그런 강태를 추궁하지 않은 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덮어두고 있다.
강태의 주변은 달라진 게 없다. 모든 게 그대로다.
어김없이 예전과 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강태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리고...
서늘한 침대시트에 휘감겨 쫓기듯이 눈을 뜨는 아침도, 그 순간 밀려드는 고통의 정도도 늘 일정하다.
무감각해지지도 않고 예민해지는 것도 아니다.
진절머리나는 권태, 고독 ―외로움 따위는 어쩌면 사치스런 유희일지도 모른다.
희한하게도,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할까봐 두려웠던 재준의 부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중독인가...? 웬만한 아픔에는 까딱하지 않는 내성이라도 길러진 건가..?
아니, 이젠 생각하기도 귀찮다.
"그럼 다른 곳에서 하시죠. 여기는...."
"여기는 뭐? 여기가 어때서 그래??"
"도련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는 저....그런 놈들이..."
"게이들이 들락거리는 데라구? 그게 뭐가 문젠데? 나도 게이잖아."
"아니, 도련님...!"
사내의 만류를 원천적으로 일축해 버리고 클럽의 문을 밀어 제치는 강태에게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자, 사내는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클럽 안으로 들어선다.
붉고 푸른 조명이 시야를 채우고 음악소리와 함께 남자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음이 섞여서 강태의 고막을 울려온다.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자 둘씩, 혹은 여럿이서 무리 지어 앉은 남자들이 가득하다.
나란히 붙어 앉아 자기들만의 밀어를 속살거리는 커플들이 물론 대부분이다.
우스운 소외감에 휩싸여 강태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고, 그를 본 몇몇 남자들은 야릇한 호기심을 가지고 강태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바에 앉아 종업원에게 버본을 주문하고 느릿하게 담배를 피워 무는 강태..
호흡기를 타고 내려가 폐 속 깊은 곳까지 퍼지는 쌉싸름한 니코틴 성분은 사람을 적당히 퇴폐적으로 이완시켜 준다.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고 아직은 조금 서툴게 담배연기를 내뱉는 강태는,
청순한 사춘기 소녀가 이제 막 부풀기 시작한 몸을 가지고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자극적인 냄새를 풍긴다.
강태의 뒤를 따라온 수행원은 그와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서 경계의 눈초리로 강태를 지켜보고 있다.
"에~이, 씹... 짜증나게 끝까지 따라붙네...? 개새끼..."
"우와~ 예쁘게 생겨서 입은 왜 그렇게 험악해?"
난데없이 귓전을 때리는 걸쭉한 음성에 흠칫 강태는 고개를 돌려 옆을 응시한다.
생면부지의 사내가 빙글거리는 웃음을 매단 채 바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이런 식으로 추근대는 남자들에게도 신물이 난 강태..
감흥 없는 얼굴로 다시 시선을 앞쪽에 두며 글라스를 들어 한 모금 들이킨다.
강태의 무심함에 더욱 흥미가 발동한 남자는 톤이 올라간 음색으로 말을 잇는다.
"처음 보는데... 전에 여기 온 적 없어?"
"............"
"술 마시러 온 거야?"
"술집에 술 마시러 오지 뭐 하러 와.."
상대방의 계산된, 의식적인 자신감을 깔아뭉개는 듯한 조소가
찰나적으로 강태의 입가에 번지며 예의 유혹적인 입술 사이로 말투와 전혀 매치가 안 되는 달착지근한 비음이 흐른다.
오만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고, 요염하지만 천박하지 않은 그의 자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파헤칠 수 없는 장소에 그가 숨겨놓은 절망과 상처 때문에 가장 신비롭고 오묘한 마력을 발산한다.
"아니, 내 말은...술말고도 다른 걸 원해서 온 게 아니냐 그 뜻이야.."
"다른 거..? 아아~ 섹스... 글쎄, 그것도 괜찮지만 당신하고는 싫어."
"왜, 내가 네 취향이 아닌가 보지?"
"전혀 아니지. 아주 거리가 멀어."
"어떤 부분이 네 마음에 안 드는 건데?"
툭툭 내던지는 강태의 대답이 재미있는지 남자는 연신 웃음을 띄우며 집요하게 강태의 틈새를 공략하려고 시도한다.
대각선으로 오른쪽에 위치한 커플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강태가
무신경한 손길로 담배를 재떨이에 처박은 뒤, 의미심장한 눈빛을 남자에게 쏘아보낸다.
갑자기 정면으로 부딪혀오는 강태의 새까만 눈동자에 스치는 섬짓한 냉기가그를 당황하게 한다.
"우선, 당신은 키가 크지 않아. 게다가 덩치도 너무 크고...근육질이야. 난 근육질은 정말 역겹단 말이야..
눈에 쌍커풀 있는 건 질색이고, 지저분하게 늘어뜨려서 염색한 머리 꼴은 못 봐주겠구만...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손가락인데, 당신은 손가락이 두껍고 뭉툭해.
섹스하고 싶은 생각이 천리만리 달아나 버리게 만드는 손가락이지..
한 가지 덧붙인다면, 입술이 별로 예쁘게 생기지 않았어."
"호오~~ 엄청 까다로우신데..? 역시 얼굴값 한다니까..."
"그럼, 당연하지. 나, 비싸게 생겼잖아? 난 침대에서도 장난 아니거든.."
"그래, 어떻게 하면 너랑 한 번 해 볼 수 있지? 방법이 없나??"
"....방법...? 방법....이라구...?? 허..! .....씨발, 짜증나..."
음산하고 시니컬한 실소를 불규칙적으로 뱉어내던 강태가
순식간에 표정을 삭막하게 증발시키며 역시나 그와 조화하지 못하는 육두문자를 가볍게, 생각 없이 중얼거린다.
일직선으로 강렬하게 꽂히는 강태의 시선 속에 방향이 어긋난 적개심과 증오가 흥건하다.
억울한 분풀이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 강태에게 집적대던 남자는 얼빵하게 겁먹은 얼굴이다.
"당신 때문에 기분 더러워졌어. 몇 대 패주고 싶은데 내가 손대기는 싫고...야! 이리 와 봐..!"
물러나 있는 수행원에게 손짓을 하자 잽싼 동작으로 달려온다.
강태는 유들유들하게 웃음을 피우며 또 한 개피의 담배를 입에 문 채 부정확한 발음으로 명령한다.
"이 새끼 조져버려. 재수 없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강태의 수행원은 다리를 들어 남자의 복부를 걷어차고,
나동그라진 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기계적으로 그의 머리와 가슴에 발길질을 해댄다.
단말마적 신음을 토해내며 남자가 구타당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강태가 서서히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가까이 걸어간다.
강태의 기척을 감지하고 남자에게 가하던 폭력행위를 멈추는 수행원..
자궁 안의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벌벌 떠는 남자에게 다가간 강태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오른 손에 쥐고 있던 술잔에 담긴 버본 위스키를 남자의 얼굴 위에 쏟아 붓는다.
이미 얼굴 위에 범벅이 되어 있던 코피와 갈색 버본 위스키가 섞여서 메스껍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색깔의 액체를 만들어낸다.
끈적끈적하고 붉으죽죽한 액체.
독한 술과 혼합된 피.
아니, 피에 희석된 농도 짙은 알콜.
뭐가 진짜일까...?
본질이 무엇일까, 어디에 진실이 놓여있는 것일까..?
방법.... 정말 방법이 없나..??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까지 ― 결국은 다 똑같은 얘기다.
아무 것도 없는 허망한 귀결...?
아닐텐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씨발!! 이 새끼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발작을 일으키듯 버럭 고함을 지르며 거칠게 술잔을 집어던지는 강태의 눈망울엔 물기가 어려있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지는 유리 글라스가 기어이 고인 눈물을 뽑아낸다.
왜 우는지, 그건 나도 모른다고 강태는 다부지게 자위한다.
머릿속이 터져 버릴 지경으로 솟구치는 신경질을 못 이겨서 이러는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아프다. 아파서 죽어버릴 것 같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휘청이는 두 다리에 힘을 줘서 무게를 지탱하고 한 발짝씩 내딛어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롱에 찬 비웃음이 되어 얇은 고막을 수월하게 뚫고 들어온다.
강태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손바닥으로 귀를 꽉 막아버린다.
그랬더니 이제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미쳐버릴 것 같은 흐느낌, 사악한 저주...
"아냐, 아냐... 이건 내가 선택한 게 아냐. 절대로 내 선택이 아냐!!"
비칠거리며 문을 향해 걷는 강태의 입에서 성대가 갈라지는 듯한 둔탁한 비명이 분출한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절규하는 강태는, 사실상 살아있는 존재가 못 된다.
그래도 대견스럽게 지면을 딛고 서 있던 그의 다리가 결국은 반으로 꺾이고,
먼지로 뒤덮인 시멘트 바닥에 가차없이 자신을 쓰러뜨리며..
강태는 의식의 끈을 놓치기 직전, 누구에게 고백하듯 간절히 속삭인다.
"다시 처음일 수 있다면....내가 없어져도 좋아..."
(125 )
인생은 길어. 행복을 함께 한다면 고생도 함께 해.
나와 함께 인생을 걸어주지 않겠어? 안 될까..?
- <뉴욕·뉴욕> 중 -
두 뺨을 훑고 지나가는 찬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혁수는 걸음을 좀 더 빨리 한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미술학원에서 고등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은 생각보다 혁수의 적성에 맞았다.
다정하고 온화한 혁수의 성격도 배우는 아이들에게 친밀감을 줄 뿐 아니라
가르치는 방식도 일정한 틀에 끼우기보다는 최대한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쪽으로 향해 있기에 학생들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다.
기껏해야 3,4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아이들인데도 그들이 그저 어리게만 보이는 자신도
이제 늙었다는 생각을 하며 혁수는 괜스레 피식 실소를 흘린다.
[Rrrrrr~~~]
주머니 속에서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에 혁수는 깜박 상념의 꼬리를 놓으면서 단말기를 귀에 가져간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만한 사람은 물론 한 사람이다.
습관처럼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나 지금 어디 있게? 맞춰 봐!"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를 애교를 피우는 주혁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혁수는 눈 꼬리를 둥글게 휘어 뜨리며 웃음기가 담뿍 배어나는 어조로 일부러 장난스런 타박을 던진다.
"네가 어디 있는지 알게 뭐야.."
"쳇.. 나 지금 너 보고 있다. 안혁수 하얀 파카에다 청바지 입었지?"
"어?? 너 어디야?!"
자신의 옷차림을 그대로 읊어대는 주혁에게 놀란 혁수가 그를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앞쪽에 세워진 은색 자동차를 발견하고는 핸드폰의 플립을 닫는다.
운전석의 문이 열리고 주혁의 모습이 시야를 잠식하자 자동적으로 심장을 포근하게 감싸는 안정감이 혁수의 미소를 자아낸다.
오렌지빛 머리카락과 짙은 회색 정장 차림의 수려한 주혁은 아직까지도 혁수에게 설렘과 두근거림을 유발하는 남자다.
"웬일이야? 나 이 길로 오는 거 어떻게 알았어?"
"너 여기로 다니는 거 옛날부터 좋아했잖아. 그냥 기다려 봤어.."
놀이터를 끼고 삥 둘러쳐지면서 구불구불하게 연결되는 외진 길은 인적이 드물어서 혁수가 즐겨 이용하는 통행로다.
이런 대화를 나눌 때마다 혁수는, 다른 사람들은 인정해주지 않지만 주혁이 대단히 섬세하고 감성적인 면을 갖고 있음을 실감한다.
혁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주혁의 눈동자가 기분 좋은 일렁임으로 반짝인다.
혁수는 영묘한 힘에 이끌리듯 천천히 주혁의 품안으로 몸을 맡긴다.
"대사관 인터뷰는 잘 했어? 별로 어렵지 않았지?"
후각으로는 주혁의 상쾌한 폴로 향수 내음을 들이마시며 걱정스럽다기 보다는
확인하는 듯한 투로 묻는 혁수에게 주혁 또한 가볍게 대꾸한다.
"어어~ 아무래도 윤아 누나가 시민권이 있으니까... 다음 주에 한 번 더 오라고 하더라. 금방 끝나던데?"
"다행이다..."
주혁의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그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대며 전신을 바싹 밀착해오는 혁수는,
방금 전 전화 상에서 퉁명스레 톡톡 쏘아대던 것과는 판이하다.
슬그머니 웃음 지으며 차가운 뺨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 촉감을 음미하던 주혁에게 웅얼이는 듯한 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다행이야.. 혹시라도 문제 생길까봐 불안했는데... 너무 고마워.."
"....누구한테..?"
"그냥...전부 다.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윤아 누나랑 지민이 누나한테도 고맙고, 또 너한테도..."
"그래... 나도 그래.."
"나 정말...보답하면서 살 거야.. 이렇게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까 꼭 보답하면서 살 거야.."
혁수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오랜 시간 방황하고 그리워하고, 그러다가 더 추락할 수 없는 곳까지 무너져 내렸던 지난날이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다.
과거의 눈물은 아무 가치 없이 뽑아낸 쓸모 없는 액체가 아니었다.
질식의 공포를 아우르며 덮쳐오던 고통의 해일이 이젠 잔잔한 물결로 변해 부드러운 손길로 두 사람의 심장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흉포하고 잔인한 세상의 시선을 잊어버릴 만큼.
주혁은 뻐근하게 아려오는 목구멍 너머로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혁수의 얼굴을 보듬는다.
맞닿은 시선이 수줍다고 느껴지기 전,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가 점점 확대되어 가까워지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며 혁수는 눈을 감아본다.
약간 건조하지만 따뜻한 그의 입술이 접촉해오고 마치 첫 키스처럼 주저하다가 달콤한 혀를 내미는 주혁..
혁수는 살짝 입을 벌려 그의 혀를 받아들인다.
주혁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혁수의 체리빛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며 더 깊게 입맞춤한다.
혁수는 빨려 들어가듯 혼곤히 흐트러지는 팔을 들어 주혁의 등과 허리를 휘감는다.
다른 때보다 은근하고 정적인 키스에 까닭 없이 서글픈 감정이 치민다.
입술을 떼고 다시 서로를 바라보는 혁수와 주혁의 눈망울에는 욕망과는 전혀 이질적인 뜨거움과 절실함이 고여 있다.
주혁은 버릇처럼 혁수의 눈썹이며 콧잔등, 턱선 등을 쓰다듬는다.
잠시동안 그의 애무에 취해보다가 돌연 정색을 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혁수..
"주혁아.."
"응...?"
혁수의 목소리가 떨려서 나오는 게 단지 추위 때문인 것 같지만은 않아서, 주혁은 은연중에 한층 가라앉은 음색을 발한다.
주혁의 응대에도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혁수가 이리저리 분산시키던 시선을 하나로 모아 주혁의 눈을 곧게 응시한다.
그리고 힘겹게, 장애물을 건너뛰는 듯한 어투로 내뱉는다.
"나랑....결혼해 줄래..??"
순간 주혁의 눈빛이 멍해진다.
혁수의 뺨을 매만지던 손이 정지하고 당황으로 얼룩진 눈동자가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이는 혁수의 모습을 그 안에 담아낸다.
"뭐...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장주혁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나랑 결혼해 줄 수 없냐고 묻는 거야.."
발갛게 홍조가 핀 얼굴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일할 때의 주혁과도 비슷하게 무뚝뚝한 음성을 끌어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혁수가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주혁.. 벙찐 채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혁의 침묵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혁수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인정받지도 못하는 결혼이지만 그래도 했으면 좋겠어.
'의식'이라는 게 사람을 많이 안심시키잖아.
그리고... 난 평생 너한테 매여 살고 싶거든..? 널 죽을 때까지 잡아놓고 싶기도 하고.."
제법 위협조에 가까운 부연 설명을 덧붙이며 객쩍은 기분을 무마하려고 말갛게 미소를 띄우는 혁수..
여전히 주혁과 눈길을 맞추지 못한 채 옷자락만 닳아 없어져라 내려다보며 어물어물 묻는다.
"...나하고...결혼해 줄래...?.."
쿡 하는 웃음소리가 주혁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다.
비웃는 것이 아니라 혁수의 행동이 너무 귀여워서 억누르지 못한 웃음인 것 같다.
그럼에도 혁수는 흠칫 놀라며 순진하게 겁먹은 눈동자로 주혁을 바라본다.
주혁은 눈으로 웃고 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러다가 촌각의 정적을 내쫓으며 분명한 음성으로 혁수의 청혼을 맞이한다.
"뭘 물어보냐, 그걸... 나 네 남자잖아, 몰라..?"
아랫배까지 급속도로 쓸려 내려가는 복잡한 고민과 상념의 덩어리를 솜씨 좋게 감추며, 혁수는 애써 동요 없는 얼굴을 위장한다.
그 때문에 더욱 머쓱해진 분위기 속에서 또 한 번 주혁의 의사를 확인하는 혁수..
"그럼...승낙한 거지..? 나 장난하는 거 절대 아니니까 잘 생각해."
야무지게 다짐까지 받아두는 그가, 가만히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소중하고 애틋하다.
주혁은 말없이 강하게 머리를 위 아래로 끄덕이고 혁수를 품에 안으려 팔을 뻗치는데, 혁수가 그런 주혁의 소매를 잡아끌며 입을 연다.
"이리 와 봐.... 아, 저기 있다.."
"어, 어디 가는 거야..??"
"너 마음 변하면 안 되니까 지금 당장 하려고. 기회가 왔을 때 발목 잡아야 하지 않겠어..?"
농담을 전혀 농담 같지 않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혁수가 향하는 곳은 푸르스름한 십자가 불빛을 밝히고 있는 교회다.
지하에 자리잡은 작은 교회의 문을 열자,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난로도 켜지 않은 채 몸을 옹송거리며 성경을 읽는 중이다.
초라한 양복 차림의 목사는 혁수와 주혁이 들어서는 기척을 듣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윽고 환한 웃음을 퍼뜨린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반갑게 악수를 청하고 자리를 권하는 목사에게 인사를 하고 둘은 그의 맞은 편에 앉는다.
난로를 켠다고 부산을 떨며 목사는 떠들어댄다.
"추우시죠? 혼자 있을 땐 연료비 아끼려고 추워도 그냥 참는 편이에요.
이제 곧 따뜻해 질 겁니다. 아,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죠?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주혁은 입술을 달싹이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겸연쩍은 미소만 엷게 머금고 있다.
혁수는 시선을 낮춘 채 과연 자기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줄 것인지 생각에 잠긴다.
"괜찮습니다. 어려워하지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실은... 증인이 되어주셨으면 해서요..
....저희....서로 사랑합니다.."
느리고 어눌하게, 그렇지만 가장 적절히 표현하려고 심사숙고하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만들어내는 주혁..
혁수는 목사의 반응이 어떠한지 살피기 위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두려움을 제치고 초점을 그에게 집중시킨다.
주혁의 말을 이해한 목사의 낯빛에 잠깐 황당해하는 기색이 서리지만 곧바로 그것을 수습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되찾는다.
그 속에 가식이나 위선이 엿보이지 않아서 둘은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그러시군요.. 저도 가난한 목사라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함께 예배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먼저...같이 기도하실 까요..?"
혁수와 주혁은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무엇보다 경건하게, 정결하게,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자.
내 옆의 연인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무력한 사랑에 대하여 참회하자.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내 영혼이 결코 거짓은 아님을,
주의 도우심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126 )
하지만, 나도 결국 사람이오. 그리고 아무리 철학적인 이성을 끌어대고,
매일, 매 순간, 당신을 원하는 마음까지 막을 수는 없소.
자비심도 없이,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없는 시간의 통곡소리가
내 머리 속 깊은 곳으로 흘러들고 있소.
- 로버트 제임스 윌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 -
여자의 숨소리가 급격하게 높아진다.
폐 속의 이산화탄소를 바쁘게 뱉어내고 질퍽질퍽한 숨결을 허공에 흠뻑 뿌려놓는다.
재준은 여성 상위의 체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여자가 하는 대로 그녀가 이끄는 리듬에 몸을 맡긴다.
벌써 열 번 가까이 정사를 나눈 여자이기에 그녀와의 섹스는 익숙하다.
천장을 향해 한껏 젖혀진 여자의 얼굴, 적갈색의 풍성한 퍼머 머리가 요동치며 출렁인다.
재준의 허리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길게 기른 손톱이 그의 유백색 피부에 불그스름한 자국을 남긴다.
어딘지도 확실치 않은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재준이 고개를 살짝 움직여 여자를 바라본다.
자극적으로 흔들리는 젖가슴을 망연히 응시하다가 포도 알처럼 검고 탐스러운 여자의 유두가 너무 낯설어서 재준은 손을 뻗어 그것을 만지작거린다.
재준의 손길에 여자의 신음성이 더 격해지고, 그 신음성이 흡사 비명처럼 변하자 재준은 아무 생각 없이
―실은 바보처럼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 여자의 자궁 안에 정액을 쏟아 붓는다.
사정의 쾌감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암컷과 교미를 하면 본능적으로 종족 번식을 위해 생산적 체액을 뿜어내는 수컷과
자신은 겉껍데기와 생활방식을 제외하면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생각 뿐.
"아아... 하아......"
마지막 정사의 여운을 음미하며, 재준의 몸 위에 엎드려 버린 여자는 가늘게 교성을 발한다.
보통 때 같았으면 사정이 끝나자마자 여자를 밀쳤을 텐데,
한참동안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채 질 속에 집어넣은 그의 페니스를 계속 품고 있는 여자를 내버려둔다.
건조하게 흐르는 정적 속에서 재준의 혀끝에 묻어나는 씁쓸한, 그리고 비릿한 염증.
난 뭐에 이토록 질린 것일까...
섹스에 질린 건가?
외로움에 진력이 나버린 건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외로움을 쫓아내려고 섹스에 탐닉하는 내 자신에게 질린 거겠지...
싸구려 에로 영화의 단골소재로 전락해버린 나 자신이 지겨운 거겠지, 아마도.
"오빠 오늘 뭔가 좀 이상해. 오빠 같지가 않아."
재준에게서 떨어져서 옆의 탁자에 놓인 티슈를 몇 장 뽑으며 여자가 몽롱한 목소리로 말한다.
"뭐가..?"
"으음~ 그러니까... 오빠가 원래 좀 거칠고 사납잖아.
여자를 꼼짝 못하게 누르는 스타일인데...근데 오늘은 완전히 반대였어. 진짜 부드러웠다구, 터치도 디테일하고..."
"아주 섹스의 달인이 됐구만..."
"내가? 쿡... 그래도 오빠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 오빠는 정말...최고야."
"그래..??"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기대앉고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재준은 건성으로 그녀의 야릇한 칭찬에 답한다.
생각은 자꾸만 다른 쪽으로 곁가지를 치는데, 여자가 주절거리는 화제는 재준의 관심 밖으로 저만치 벗어나 있다.
그래도 이젠 친근하게 고막을 쓰다듬는 그녀의 음성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말이지... 혼자 있는 건 구역질이 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썰렁한 옆자리를 보고 소스라치는 그런 궁상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
"피하고 여기서 자고 가라. 밖에 날씨도 추운데..."
불쑥 던져진 재준의 말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엉거주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다.
신기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재준에게 묻는 여자..
"진짜야?? 진짜 그래도 돼??"
"자고 가라는데 뭐 그렇게 놀라. 자고 갈 거면 얼른 씻어. 나도 빨리 샤워하고 싶으니까."
일부러 여자의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내리깔고 담뱃재를 터는 재준..
여자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뭉스런 얼굴로 욕실 안으로 들어간다.
재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녀는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던 옷가지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하늘색 팬티에 재준의 박스 티만 걸친 채 느긋하게 퍼져있다.
그러다가 그의 말끔한 모습을 보더니 푼수처럼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연다.
"헤에~~ 오빠 씻고 나니까 더 뽀얗다.. ^^; 나 잠옷이 없어서 오빠 옷 입었어. 괜찮지?"
재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드라이기에 대충 말린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면서 침대에 든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눕히는 재준은 한 팔로 감싸 안으며 여자는 다시 침묵을 깨뜨린다.
"그거 알아..? 오빠는 만나면 만날수록 너무 괜찮은 거 있지.
다른 사내새끼들하고는 질적으로 틀려.
에휴우~~ 오빠랑 결혼하는 여자 누군 지는 몰라도 정말 부럽다~
제길, 내가 조금만 몸 사리면서 덜 굴러먹었으면 미친 척 내숭 떨고 오빠 잡았을 텐데..."
"나 같은 놈이 무슨 좋은 신랑감이라고..."
"아냐~~!! 정말이라니까!? 까놓고 얘기해서 잘 생겼지, 키도 훤칠하지,
게다가 돈도 많고 성격도 그만하면 여자가 기댈 수 있고.. 이 정도면 일등 신랑감이지~!"
제법 목청을 돋구며 열성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성토하는 여자에게
불현듯 작달막하나 정감이 느껴져서 재준은 희미하게나마 따뜻한 미소를 지어본다.
그리고 늘 배어있던 밋밋함과 냉기를 한결 걷어낸 음색으로 나즈막히 여자에게 묻는다.
"너... 스물 두 살이라고 했지.. 이름이 뭐냐..? 진짜 이름말이야."
예상 밖의 질문에 그녀의 눈동자가 커진다.
반복해서 재준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길도 멈춘다.
선뜻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 자기만의 상념에 휘말린 듯 멍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기도에 이물질이 걸린 것처럼 거북스런 기침을 두어번 뱉더니, 첫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 마냥 수줍게 속삭인다.
"진짜 이름은...혜련이야. 유혜련."
그녀 자신조차도 자기의 원래 이름 세 글자가 못내 생경하기만 한지, 혜련의 입술에서 발음되는 글자들이 영 껄끄럽게 들린다.
산만하게 헝클어진 고요를 그라고 재준의 목소리가 흐른다.
"혜련아.."
".....어..어..?.."
"나랑 결혼하는 여자가 부럽다고 한 말, 진심이냐?"
"....응..? ...아아, 그럼~~ 난 빈말하면서 사람 비행기 태우고 그러지 않아~"
진지하게 낮춰졌던 음성을 의식적으로 명랑하게 끌어올리며 혜련이 호들갑스럽게 대꾸하자
얼기설기 얽혀있던 뜨악한 분위기가 금새 해소되고, 재준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그럼....네가 나한테 시집올래? 그게 부담스러우면 같이 사는 건 어때?"
".....!!!"
왼쪽 뺨을 재준의 팔에다 밀착시키고 있던 혜련은
따가운 바늘에 급소가 찔린 것처럼 화들짝 머리를 쳐들고 무표정한 재준을 심각하게 건너다본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뀐 듯 짧게 실소하며 핀잔 조로 중얼거린다.
"그런 농담을 하냐, 사람 가슴 떨리게... 나 이래 뵈도 순진한 구석이 있단 말야~~"
"농담으로 하는 소리 아냐. 너랑 같이 살고 싶어, 가능하다면 당장 내일부터. 잘 생각해 봐."
"오빠.. 자꾸 이러면 나 진짜라고 믿어버린다..? 그만해.."
"거짓말 아니라니까? ...왜? 내가 너하고 같이 살고 싶어하는 게 그렇게 못 믿을 일이야?"
"아니, 오빠가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년을 집안에 들이려고 해?
그리고, 오빠 누구랑 같이 살잖아. 오빠 밑에 있는 사람이라며, 같이 사는 그 남자.
그 사람 나갔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잘 생각해 봐.
너도 몸 파는 일 신물나지 않아? 그거 관두고 얌전히 살림하면서 사는 게 너한테도 훨씬 낫지 않겠어?
혹시 빚이 많이 남아있으면 내가 해결해 줄게."
특유의 건방지고 오만한 어투로 빠르게 말을 쏟아내고 혜련에게 등을 보이며 모로 돌아눕는 재준..
전혀 잠이 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눈꺼풀을 닫으며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안정시킨다.
바로 곁에 있는 혜련의 존재감에 귀를 기울여 보지만,
그녀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은 만큼 혜련에게 애정을 가지려면 훨씬 극진한 그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방식이, 이런 관계가 정상인 건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쪽이 안전하고 가볍고 감당하기 쉬운 것만은 사실이다.
"오빠..."
아까보다 선명히 드러나는 진동과 함께 실려오는 혜련의 목소리와 재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는 그녀의 보드라운 손.
그리고 망설이다가 말을 잇는 그녀의 얼떨떨한 기대감.
"오빠.. 나한테 같이 살자고 하는 거...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뭐라고 이야기해야 그녀가 상처받지 않을까, 또 나 자신이 최대한 정직해 질 수 있어야 하는데...
재준은 속으로 고심하다가 길고 분명하게 한숨을 내쉬며 혜련과 마주본다.
스탠드 불빛이 어른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녀가 살아온 삶의 모습과는 별개로 순박하게만 보인다.
그래, 난 편안해 지고 싶다.
"네가 날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하듯이 나도 널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해.
서로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너처럼 자주 만났던 여자도 없어.
그리고 같이 살게 되면...자연히 정이 들겠지.."
호흡까지 조절해가며 재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혜련..
그의 심중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아리송하긴 하지만 기분이 붕 뜨는 비과학적 현상은 혜련을 설레게 하고, 그녀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의 키를 돌린다.
갑자기 날아든 재준의 제안이 대뜸 수용하기엔 불안할 정도로 획기적이어서 아직 확답은 내릴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런 솔직한 고백쯤은 내보일 수 있다.
자신이 초라하게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오빠, 모르지..? 여태까지 내가 상대한 남자들 중에서...오빠 같은 남자는 한 명도 없었어.."
".........."
"처음에는 절대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오빠한테서 사람 냄새가 나."
"....처음에는 어떤 냄새가 났지..?"
"으음.... 담배, 화장품, 그리고....자동차 냄새."
(127 )
신은 모든 사람이 몸을 갖고 있는 동안 결코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아신다.
- 2000년 6월 12일 <조선일보> 21면 칼럼 중 -
교회 안에 다른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강대상 위에 달린 십자가는 투박한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이어서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싸구려 티가 팍팍 나는 가짜 금장식조차 박혀있지 않았기에 수수하고 소박하기만 한 고동색 십자가는 오히려 신성해 보인다.
2000년 전 예수가 등에 지고 언덕을 올라간 그 십자가는 아마 저것보다 더 울퉁불퉁하고 볼품이 없었을 것이라 주혁은 무연스레 추측해 본다.
처음 들어섰을 땐 써늘하던 교회 안의 공기가 난로 덕분인지 제법 훈훈해졌다.
피아노 반주도 없이 세 사람이 함께 부르는 찬송가는 썰렁하고 맥 빠지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차분하게 억눌린 감정을 가라앉혀 준다.
주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 달라는 노래 가사는 어쩐지 지금의 조촐한 결혼식과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드는 의혹도 불경한 것이라 단정하며 주혁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혁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게 머릿속으로 가만히 물음표를 띄우던 주혁은 기도하자는 목사의 말에 서둘러 손을 모은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부족한 종에게 예배를 인도하게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이 예배를 통해, 주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죄인들에게는 사유와 회복이 충만한 은혜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소서.
특별히 주님 앞에 머리 숙인 두 형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간절히 원하여 나왔사오니,
자비가 한량없으신 주께서 외면하지 마시고 그들이 함께 걸어갈 앞길에 등불이 되어 주소서.
세상은 악하고 험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며,
죄 많은 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젠장, 쪽팔리게 눈물이 난다.
왜 이토록 안타까운 건지, 왜 이토록 매달리고 싶은지 답답하기만 하다.
기도가 끝나고 감았던 눈을 뜨자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장 정직해지리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이 눈물에는 '정결'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여도 될까.
그렇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께 의지해야겠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과연 어디까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연약합니다.
발버둥치며 헤쳐나가는 데에는 의지와 노력뿐만 아니라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제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세상의 만물을 다 창조하신 후에, 가장 정성을 들여서 인간을 만드셨죠.
맨 처음 남자를, 그리고 그에게 동반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여자를 만드셨구요.
하나님은 인간들끼리 서로 관계를 맺지 않고 살 수 없도록 창조하신 겁니다."
세 사람 가운데 수놓아진 공기분자들의 빈칸을 채우며 조용하게 울리는 목사의 음성은 엄격하기보다는
지난날을 회고하듯 얼마쯤은 고즈넉하고, 그러면서도 은근하게 교훈 조의 어투가 스며 있다.
주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길을 떨군 채 서서히 잦아드는 눈가의 수분에 안도한다.
쉼 없이 주혁의 머리를 간질이는 것은 역시 혁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의 눈빛이 어떤 빛깔일까 하는 궁금증인데 아무래도 그건 지금 당장 알아봐서는 안 될 문제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결코 로봇이나 노예처럼 만드신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죠.
인간을 진정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떤 것이 옳고 바른 삶이고, 어떤 것이 불행과 멸망을 자초하는 삶인지... 바로 주님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참 힘든 일이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멍청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을 가린 채 겉으로는 으스대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로 깨끗하고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죄 없고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주님 뜻에 맞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숨김없이 내놓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위로해 주시고 예전보다 훨씬 값진 기쁨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저는 두 분께서 이와 같은 주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 분을 비난하고 멸시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정작 자기들 속에 가득한 죄를 못 보고 있어요.
세상의 시선에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서만 두 분을 판단하십니다.
그 분께 참회하세요. 주님은 상처 입은 심령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치료해 주실 겁니다. 그 방법은 저도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길지 않은 설교를 마친 목사가 다시 눈을 감고 기도하자,
주혁은 깍지 낀 두 손에 억척스런 힘을 가하며 정수리를 관통하는 격렬한 떨림을 참아낸다.
꽉 깨문 어금니 사이로 신물이 배어나도록 뒤엉킨 감정의 절실함을 안으로만 삭히던 주혁..
혁수와 목사가 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주기도문을 암송하는데,
함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불거진 눈시울에만 온 신경을 몰아넣는다.
억양의 변화 없이 단조롭게 이어지는 목사의 암송 소리와 대조적으로
혁수의 음성은 육중한 무게에 짓눌리는 사람처럼 조금씩, 아주 서서히 사위어간다.
그러다 어느 한 대목에 이르자, 혁수의 음성은 흐느낌이 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사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우리의...죄를....우리의 죄를...사해...사하여...주시고....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재처럼 부서져 내리는 혁수의 목소리는 울먹임을 그 잔해로 남긴 채,
뜨겁고 투명한 눈물이 그의 목소리를 대체한다.
눈알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떨어뜨리는 눈물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가냘픈 소리로 우는 혁수에게 주혁은 더 이상 태연한 자신을 보여줄 수 없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혁수의 손을 주혁 역시 떨리는 손으로 힘주어 잡는다.
마주댄 손바닥과 손등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가 서로를 진정시켜 준 탓인지 무섭게 두 사람을 공격하던 온 몸의 흔들림은 사라진다.
아담한 어깨를 들썩이며 혁수가 고개를 든다.
혁수의 얼굴을, 그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게 겁난다.
하지만 이제 그는 나의 반려자가 되었으니...
주께서 우리 두 사람을, 우리의 순수함을 받아주셨다고 믿으므로 겁을 내서는 안 될 것이다.
믿는다면 행동하자. 간절히 기도했던 것처럼 용기를 내야한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 목에 힘 빼고, 등허리를 쭉 펴 봐. 자세가 똑바로 되어야 소리가 나오지..!"
태현이 이야기하는 대로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내기 위해 얼굴이 벌개지도록 안간힘을 쓰는 연수..
태현은 그녀의 배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면서 짐짓 엄한 어투로 연수를 닦아댄다.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좀 전보다는 나아진 연수의 목소리에 이제 한숨 쉬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태현은 휴식을 제안한다.
"그래, 아까보다는 많이 트였어. 잠깐 쉬었다 하자."
"...예.."
꽤나 숨이 찰 텐데 날숨을 내뱉는 것조차 조신하게 단속하며 대답하는 그녀는,
기성세대가 보기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활달하기 그지없는 제 또래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다.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얌전하고 다소곳한 그녀의 성격에 태현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외형적으로는 거의 동일하다시피 흡사한 세라는 연수와 정반대의 면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셔, 목 좀 가라앉혀라.."
유자와 살구를 다려서 만든 뜨끈한 차를 연수에게 건네며 피곤이 묻어나는 음색으로 말하는 태현..
연수는 예의 수줍어하는 미소와 함께 공손히 두 손으로 찻잔을 받아든다.
살며시 입김을 불어 차를 식히고 천천히 한 모금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그녀를 태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끄러미 응시한다.
태현의 시선을 의식한 연수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무언가 켕기는 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요..? 저, 뭐 이상해요...?"
"아냐, 먹는 게 참 여자다워서. 친구들 앞에서도 그래?"
"예..??"
"친구들하고 같이 있을 때도 이렇게 얌전하냐고."
"아아..."
살풋 은은한 미소가 번지는 그녀의 얼굴이 생소하다.
세라는 저런 식으로 웃음 적이 없는데...
연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이세라'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해지는 태현이다.
얼마 전까지는 그것이 미안한 줄도 몰랐다.
그저 지루하게 가슴을 들쑤시는 퀴퀴한 추억의 편린에 시달려,
현재의 자기 자신과 과거에 붙박힌 세라의 관계를 어떻게든 구차하지 않게 하려는 것에만 골몰했다.
그런데 이제는 눈앞에 실재하는 연수의 존재가 부담스럽지만은 않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순수한 사제간의 애정으로만 일관된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발칙한 거짓말이 될 것이다.
뭐, 애초부터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주장해도 믿을 만한 이야기가 못 되겠지만.
"....저 때문에 답답하시죠, 선생님..?.."
어슴푸레하게 서렸던 미소가 걷히고 태현보다 더 우울하고 어두운 낯빛을 비치며 혼잣말처럼 갑작스런 질문을 던지는 연수에게,
당황한 태현은 얼른 상념의 심연에서 빠져나와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는다.
"연수야, 나는 그런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니고 그냥 네가 워낙 요즘 네 또래 애들하고 다르니까...
그런 뜻에서 물은 거지 나쁜 쪽으로 오해하지 마.."
"알아요, 저도 그냥 해 본 소리였어요.. 선생님한테 오해 같은 거 안 해요, 저..."
"............"
"사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어요.
저 혼자만 이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께서 언제나 저한테 거리를 두시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저도 먼저 다가서는 스타일이 못 돼서 그런지 많이 불편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따라가려 노력하고 있기는 한데..."
거기서 입술을 닫은 연수는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듯한 죄의식.
"선생님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때문에...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요.."
(128)
진실과 기쁨은 별개의 것인가?
그 그리움이 달콤하던가?
- <아가멤논> 중 -
시트자락에 스친 검지 손가락이 따끔거린다.
술잔을 집어던질 때 사방으로 튄 유리 파편이 남긴 작은 상처가 강태의 흐릿한 시야에 잡혀온다.
짜증스럽게 양미간을 찡그리고 부스스 상체를 일으킨다.
주위가 깜깜한 것을 보니 밤인 듯 하다.
강태는 엿가락처럼 자꾸 늘어지는 몸을 추슬러 침대에서 내려선다.
바에서 자신에게 깔짝대던 남자를 향해 엉뚱한 분풀이를 퍼부은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서 엄청나게 마셔댄 건가...?
숙취가 밀려오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가자, 간이 연습장치를 펴놓고 문환이 골프를 치는 중이다.
신중하게 공을 노려보며 각도를 가늠하던 그는 강태의 기척에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어, 일어났네... 하루종일 자더군. 그냥 놔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웠어."
"어떻게 된 거 에요? 술 많이 마신 것 같지는 않은데..."
"됐어, 어쨌든 별 일 없었으니까..."
분명하게 대답을 거부하는 문환에게는 더 물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강태는 순순히 입을 다물고 이내 신경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며 습관적인 동작으로 TV 리모콘의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술집에 드나들지 마. 밑의 애들 보기 민망하지도 않아?"
강압적이고 모욕을 주는 듯한 문환의 말투에도 달관을 했는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강태는 그보다 더 기계적이고 냉담한 목소리를 함부로 뱉어낸다.
"술 한 잔 하러 가는 것도 잘못이에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알면서 왜 그래? 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요즘 이상해졌어, 너..."
"이상해진 거 하나도 없어요. 나 원래 이런 놈이에요."
시시껄렁한 오락 쇼 프로그램을 감흥 없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무례하게 톡톡 쏘아 부치는 강태..
발끈 역정이 난 문환이 골프 공에서 눈길을 떼고 화를 내려다가,강태가 연출하고 있는 무미건조한 모양새에 흐지부지 수그러들고 만다.
생각을 고쳐 먹으며,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TV 화면에만 눈동자를 붙박고 있는 강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제법 다정스런 포즈로 강태를 품안에 끌어당긴다.
희한하게도 꾸미고 치장한 모습보다 지금처럼 헝클어지고 풀어진 강태가 훨씬 섹시하다.
아직 잠 기운이 남아있는 몽롱한 흑빛 눈동자와 약간 허스키하게 깔린 음성이 부드러운 살결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요염한 강태의 매력에 흡족해진 문환은 그에 대한 힐책의 감정을 금새 치워두고,
성급하게 그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강태를 달랜다.
"하여튼 성깔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그래, 뭐가 또 불만인 거야? 말해 봐, 뭐 때문인지..."
"불만 같은 거 없어요. 그리고, 나 성질 더러운 거 이제 알았어요?"
허벅지를 지나 가운의 끈을 풀고 가슴 근처를 더듬는 손길에도
여전히 TV 프로그램에만 주의를 두는 강태가 문환은 외려 귀엽게 느껴진다.
키득키득 새어나오는 웃음을 노골적으로 퍼뜨리며 강태를 조롱하는 듯한 어투로 다시 입을 열어 지껄여댄다.
"대단해. 이런 기술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이런 식으로 남자를 꼼짝 못하게 잡아두는 거 말이야.
이재준이 너 때문에 망가졌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니까..."
느슨하게 와해되어 있던 강태의 동공에 부자연스러운 힘이 들어간다.
더욱 싸늘하게 굳은 낯은 아예 모조품의 냄새를 풍기고, 강태는 줄기차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TV를 미련 없이 꺼 버린다.
갑자기 와락 눈물이 솟구치기라도 하면 그 때의 낭패감은 차마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계속 그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부유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강태는 전혀 다른 자기 자신을 끄집어내려 한다.
정말 천박하고 꼴사나운 '강태', 그는 생각할 줄도 모르고 인간적인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단순한 생물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강태'가 되어 있을 때는 지긋지긋한 자괴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그 가운데에서조차 끈덕지게 달라붙는 과거의 원칙들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 남자를 기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구차해지지 말자.
고통은 내 안에서 마무리짓는 거다. 실체는 내 속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저 샤워할 건데... 같이 하실래요..?"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귀 뒤로 넘기면서 강태는 사뭇 달라진 태도로 문환에게 제의한다.
180도로 돌변하여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귓전을 간질이는 강태에게 흠뻑 빠져든 듯한 눈빛을 보이며
문환은 한 쪽 팔을 강태의 허리에 감은 채 욕실로 향한다.
발로 디디는 바닥이 급하게 경사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은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자서 일어나는 신체적 증상일까...
아니면 피사체를 투과시키는 시세포가 굴절된 걸까...?
천장에서 쏟아지는 환한 백열등 조명 아래 드러나는 알몸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강태..
거울에 비치는 자극적인 몸매의 곡선들이 그렇다고 자랑스러운 건 절대 아니다.
저건 그냥 한 남자의 벌거벗은 육체일 뿐이다.
거기에다가 추악하다느니 지저분하다느니, 그따위 형용사를 갖다 붙이는 것도 웃기는 짓거리라고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이제 죄의식 같은 것도 없어졌다. 원망하는 감정 또한 불필요하다.
눈을 감자.
그 앞에 나타나는 영상, 그 영상의 주인공을 완전히 부셔버리자.
나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시간이 나를 죽이던 그대로 놓아두던, 상관하고 싶지 않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물줄기가 혀끝에 닿으면 지독하게 서러운 미각을 전달할 것 같아서,
강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물을 맞으며 뿌옇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멍하니 응시한다.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유백색 육체는 늘 그렇듯이 환영으로만 머무른다.
피부에 흡수되는 축축한 습기가 미끌미끌하다.
자존심에 흠집이 날 수도 있겠지만, 상처받은 얼굴을 들키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서 강태는 자기가 먼저 문환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그런 강태를 벽 쪽에 기대 세우며 그의 목덜미에 게걸스럽게 입을 맞추는 문환은 상당히 조급해 한다.
어긋나기만 하는 서로의 감정과 리듬은 차라리 편할 정도다.
상대방과의 완벽한 합일을 맛 볼 수 있었던 섹스는, 그 때의 황홀감은 도려내어진지 오래다.
"......아앗...."
꽤 매끄럽게 삽입됨에도 워낙 막무가내로 밀려드는 문환의 육체에 강태는 자동적으로 신음 소리를 터뜨린다.
샤워 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돗물 소리와 문환의 거친 숨결,
거실에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TV의 소음이 전부 한 덩어리로 뒤엉켜서 강태의 고막을 찢을 듯이 두들긴다.
귀가 멀어버릴 것 같다.
아래쪽에 가해지는 미묘한 쾌감과 이중적인 통증은
강태의 몸을 격하게 헤집어 놓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영혼은 매맞고 쓰러지고 갇힌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달아나고 싶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그만해....아파....아아.....그만해....."
자신의 욕망을 다 채울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문환의 어깨를 밀어내 보는 강태..
섹스라는 행위 자체가 힘들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다만, 숨이 막혀온다. 두 다리로 체중을 지탱하기가 버겁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남자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시도한 행위가 도리어 더 큰 갈증을 가져온다.
길고 강인하고 섬세한 유백색의 육체가 섹스를 통하여 속삭여주던 고백.
허무하게 공중에서 흩어져버리는 말 따위와 견줄 수도 없을 만큼 절절하게, 진실하게, 생생히 스며들던 하얀 손길과 키스.
아픔을 환희로, 수치심을 용기로, 격렬한 분노를 맹목적인 사랑으로 바꾸던 마술.
이 모든 걸 내게 안겨주던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이 바로 내 남자였어...
그런데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어?
나를 구원했던 내 남자가 나를 버렸다고 해서, 그를 증오하게 될 것 같아?
증오스러운 건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야.
아무리 그럴 듯한 거짓말을 꾸며대도 어차피 남는 건 똑같은 현실인데...
난 쉬고 싶어, 그를 만나고 싶어, 내 남자를 되찾고 싶어...
정사는 막바지로 치닫고 겹쳐진 두 몸뚱어리의 움직임은 빨라진다.
강태의 영혼이 허우적거리며 익사의 위협을 느끼는 소용돌이의 격량도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결국 강태는, 혼잣말 중에라도 내뱉어서는 안 될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고 만다.
".....이재준, 너... 계약 위반이야.."
-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명령한 재준이 조수석의 준상에게 범상한 말투로 이야기한다.
준상은 내심 궁금하지만 감히 따져 물을 수는 없기에 묵묵히 차에서 내려, 룸살롱 안으로 들어가는 재준에게 머리를 숙인다.
꽤나 이름 있는 상류층 인사들이 드나드는 이 곳은 재준의 구역 내에 자리한 가게이고, 혜련이 일하는 곳이기도 하다.
예고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재준을 마주하자 당황한 가게의 영업부장은 허둥대며 문안인사를 올린다.
"회, 회장님 오셨습니까...! 오신다고 연락 못 받았는데..."
"일 때문에 온 거 아니니까 신경 쓸 거 없고, 여기 '연지'(혜련의 예명)라고 있지? 걔 좀 불러와."
"예, 알겠습니다."
깍듯이 뒤를 잇는 부하의 대답에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재준은 충의회 조직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가게 내의 밀실로 발걸음을 돌린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피를 다 피우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가슴이 깊게 패인 니트에 짧은 반바지 차림의 혜련이 밀실 안으로 들어선다.
벌써 술을 많이 마셨는지 발그레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이다.
왠지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싱긋 지으며 입을 연다.
"오빠 왔어? 가게 둘러보러 온 거야?"
"아니, 너 만나러 왔어."
"나? 아, 저기~ 나 지금 중요한 손님 받고 있거든. 오늘은 좀... 내일 가면 안 돼?"
"그런 게 아니라, 물어보려고 온 거야. 생각 좀 해 봤어? 내가 전에 얘기했던 거."
혜련의 눈동자가 복잡한 빛깔을 띠면서 그녀의 얼굴빛이 무척 진지해진다.
술기운 때문에 상기된 두 볼이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로.
그러다 한참을 머뭇거리며 주저하던 입술을 떼고 마치 아주 어려운 일을 부탁하는 것처럼 재준에게 반문한다.
"정말로...같이 살자고 그러는 거 괜히 해 보는 소리 아니지..? 믿어도 되는 거지?"
"괜히 해 본 소리였으면 지금 너 만나러 여기 오지도 않았어."
명료하게 떨어지는 재준의 대답에 혜련은 한편으로 안심이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더욱 짙은 의구심에 휩싸인다.
하지만 두 번째의 불안한 마음보다 월등히 앞서는 기대감에 가산점을 부여하며 시원스러운 웃음을 그려 보인다.
"좋아. 그렇담 나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언제 들어가면 돼?"
(129)
나는 당신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 한용운, <쾌락> 중 -
암갈색 눈동자가 보일 듯 말 듯 간격을 좁히며 태현의 시야를 제한한다.
멀리 있는 사물들은 정확하게 자리 잡히지 못하고 시세포 주변을 둥둥 떠다니며 배회한다.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아 보인다는 연수의 말이 잰걸음으로 달려와 태현의 뇌리 깊숙이 당도한다.
얼마간 침묵을 지키는 그에게 연수는 불안한 시선을 연달아 이어보내며 중대한 각오를 다지는 사람처럼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문다.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와 살짝 내리 깔린 짙고 풍성한 속눈썹이 또 한 번 세라를 연상시킨다.
연수에게 화장을 시켜 놓으면 완벽하게 세라와 똑같아 질 거라는 생각을 한 편으로 떠올리면서
태현은 자기 자신에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냉소를 퉁기고, 길쭉한 날숨을 뿜어낸다.
그리고 한참 어설픈 정적이 그리 넓지 않은 실내에 미어 터질 듯
가득 차도록 내버려두다가 분위기에 적절하지 못한 울음을 천천히 매달아 건다.
"연수야.."
"...예..?"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태현의 음성에 비틀린 자학성이 흥건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알아챈 연수는
자동적으로 오그라드는 어깨를 약하게 뒤채이며 미묘하게 떨려나오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태현은 기분이 아주 나쁘면서도 일부러 명랑하고 유쾌하게 까불거리는 사람처럼 공허한 냄새가 풍긴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으로부터 위압감보다는 슬픔을 자아내는 그만의 독특한 카리스마가 연수를 사로잡는다.
"너 말이야... 나 좋아하니..?"
"....예??"
"나 좋아하냐구... 날 남자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냐 그거야."
"............."
반대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눈길을 떨구는 연수..
그러나 태현의 질문에 화가 나거나 일종의 모멸감 같은 걸 느껴서가 아닌,
그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그녀의 성격 상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선뜻 '아니오'라는 대답을 던지기가 미안해서 머뭇거리는 그녀의 착함 때문인 듯도 하다.
"무슨 뜻으로 물어보시는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디미는 대답이 그거였다.
모호한 의미를 지닌 그녀의 말속엔 아무래도 긍정의 측면이 더 많이 엿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녀는 나이가 어린 만큼, 아니, 착하고 어리숙한 만큼 본심을 숨기는데 아직 능숙하지 못하다.
그런 연수의 모습이 신선함으로 다가오다가도 어느 순간 올가미가 되어 태현을 옥죄는 것이 희한한 미스테리이긴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갑갑함의 두께는 얇아지고 있다.
얇아지는 두께와 태현의 얽히고 설킨 추억의 두께가 감소하는 양이 비례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참 곱다.
수줍게 홍조가 피어오른 복사 빛 볼도, 조용조용 속삭이듯 목소리를 새어보내는 입술도,
살며시 아래를 향한 채 음영을 드리운 눈동자까지 전부 청초하고 풋풋하다.
세라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토록 정반대의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다니, 어이가 없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민망하다 싶을 만치 긴 시간동안 연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태현..
불현듯 몸을 일으켜 작업실 한 귀퉁이에 놓인 수납장으로 걸어간다.
그러더니 세라의 수첩 안에 끼워져 있던 사진 한 장을 연수에게 건네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바닥만한 사이즈의 사진에 시선을 주는 그녀..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작열하는 태양 빛을 스포트라이트 조명으로
천진하고 해맑은 미소를 띈 태현과 세라의 '과거'가 네모진 프레임으로 변하여 연수의 손에 들려있다.
지난 여름, 여섯 명이 다같이 바캉스를 떠났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햇살보다 더 선명한 노란색 비키니 수영복 차림으로
함박웃음을 만면에 퍼뜨린 세라가 자신과 기막히게 흡사한 외모를 지녔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연수가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바로 사진 속의 태현 때문이다.
세라와 커플 룩을 맞춰 입은 마냥 노란색 티셔츠를 걸치고 세라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연수가 단 한 번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
정말 단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그리고 불길한 예감일지 몰라도...
앞으로도 그에게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기쁨과 안식의 표정.
".....내가 사랑하는 여자야. 지금은 곁에 없지만, 솔직히...아직도 사랑하고 있어."
"그러신 것 같아요. 근데....신기하네요, 정말..."
"그래... 모든 게 다 신기해. 전부 누군가 조종하고 있는 것 같고."
"....이것 때문이었어요..? 제가 그런 느낌을 받은 이유가 여기 있었던 거 에요...?"
"아마...그렇겠지.. 너한테 얘기해줘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
난 너를...순수하게 내 학생으로서만 바라보지는 못하거든.
가끔, 아니, 자주 네 속에서 세라를 봐. 그래서 널 여자로 느끼기도 해."
세라... 연수는 태현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입 속으로 뇌까린다.
굉장히 이국적으로 닿아오는 그 이름에 연수는 난데없이 극심한 피로가 밀려와서 미미하게 코끝을 찡그린다.
불명확하게 주변을 맴도는 한 존재와 강하게,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일치감은
따스한 든든함이 아닌 걱정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그 무언가로 연수의 심장을 압박한다.
17살의 겨울, 어쩌면 삶의 경로가 아주 크게 수정될 수도 있으리라는 예감은 유치하다는 푸념이 터져 나올 만큼 적나라하다.
- 추운 날씨 탓에 얼얼해지는 두 손을 코트 주머니 속에 넣고 장난스레 입김을 호호 불면서 주혁을 기다리는 윤아..
주혁의 입국에 대한 확정적인 대답을 듣기 위해 대사관에 가는 날이다.
몇 분쯤 그녀가 시답지 않은 장난에 열중하고 있는데, 가벼운 경적 소리가 들리더니 은색 승용차가 윤아 앞에 멈춰 선다.
윤아는 싱긋 웃으며 조수석에 올라탄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회의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그랬구나. 밥은 먹었어?"
"어, 대충 때웠어."
어느새 스스럼없이 반말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주혁과 윤아..
누가 보면 정말 결혼을 앞둔 연인 사이 같은 모습이다.
대사관이 위치한 곳으로 방향을 틀며 나지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주혁에게 윤아가 궁금증 어린 미소와 함께 넌지시 묻는다.
"장주혁 오늘 상태가 상당히 좋아 보인다? 어제 혁수랑 만나서 뭔 일 있었냐?"
"아니~ 어제 혁수 만나지도 못했는데, 뭐..."
"근데 왜 그렇게 들떴어?"
"몰라~! 그냥 해피하다~!!^^"
몸을 들썩이기까지 하면서 발랄하게 고조된 음색을 발하는 주혁이
너무 연약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탓에 윤아는 괜히 스스로 무안해진다.
그런 윤아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혁은 혼자만의 천국에 푹 빠져있는 듯한 격양된 어조를 이어 붙인다.
"누나! 사실은 한 가지 얘기할 게 있는데..."
"....??"
"....혁수랑 나랑, 저번 주 금요일에 결혼했어."
"뭐어..?!"
한 쪽 눈썹을 기우뚱하게 일그러뜨리며 반문하는 윤아의 반응이 못내 서운했던지, 금새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주혁..
도로 표지판에 쓰여진 대로 차를 운전해가며 볼멘 소리로 투덜거린다.
"뭐야, 그 표정이... ㅡㅡ; 혁수랑 나랑 결혼했다고. 혁수네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만 교회에서 했어."
"아아... 그래? 오홀~~ 일단, 축하하는데... 근데, 둘이 결혼하면서 날 부르지도 않았단 말이야??"
"그게~~ 갑자기 혁수가 청혼을 해서 그렇게 된 거야. 사실 그 날 의도했던 건 아니었구..."
"안혁수가 먼저 청혼했다구?? 우와~ 진짜야, 그게? 믿을 수가 없군..."
"쳇... 맨 날 나만 혁수한테 목매다는 줄 알아? 몰라서 그렇지 안혁수 한 터프 해.. ^^;"
"푸하하하~~!! 안혁수가 터프 해?! 너 지금 개그하냐?? 하하하~~!!"
발작적으로 파안대소를 폭발시키는 윤아를 못마땅하다는 눈길로 흘겨보는 주혁..
손뼉까지 피면서 웃어 제치던 그녀가 가까스로 입을 다물자,
주혁은 언제 뾰로통해 있었냐는 듯 일순간에 얼굴빛을 바꾸며 다시 종알거린다.
"그리고 우리~ 뉴욕에 가서 어느 정도 자리 잡히면, 아이도 하나 입양하기로 했다!"
"정말??"
"응!^^ 혁수가 애들을 엄청 좋아하잖아.
난 아들이 더 좋은데, 혁수가 딸을 원해서 여자애로 입양하기로 했어.
물론 다른 부모들하고 달라서 어려운 부분도 많이 있고 또 뛰어넘어야 할 벽도 많겠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잘 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엄마 있는 애들보다 더 예쁘게 키울 거야..
아! 그리고 돈이 좀 모이면 플로리다로 이사를 가기로 계획했어.
혁수는 어렸을 때부터 플로리다에서 사는 게 꿈이었대.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가서, 바다 가까운데 있는 작은 집을 장만하는 거야.
거기서 나랑 혁수랑 우리 딸이랑 셋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거지! 어때? 죽이지??
나...진짜 열심히 살아서 꼭 그렇게 만들어 줄 거야, 혁수한테..."
새하얀 두 뺨을 복숭아 빛으로 물들인 채 붉은 입술을 부지런히 움직여
가슴 가득 뻐근히 들어찬 단 한 가지 소망을 꺼내놓는 주혁을 지켜보며, 윤아는 주책 맞게 눈시울이 젖어든다.
울컷 치솟는 덩어리는 주혁과 혁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녀의 내부에 자리하던 '동질감'은 아니다.
그런 자기 연민이나 자기 위안의 수준을 초월하여, 단지 주혁이 이야기한 그대로,
그가 소원하는 소박한 미래의 시간들이 순조롭게 펼쳐지기를 절실히 바랄 뿐이다.
모두가 고개를 가로젓는 바램이라 하여도 주혁과 혁수가 쏟은 눈물,
그들이 선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고통을 상기하며 이해를 구하고 싶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겠느냐고...
어차피 공짜가 없는 세상이라면 이렇게 라도 흥정할 수밖에.
- 나란히 앉은 윤아와 주혁의 맞은 편에 조금은 딱딱한 인상의 남자가 형식적으로 서류를 들춰보고 있는 중이다.
주혁은 직원이 하는 모양새를 별 다른 생각 없이 바라본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대사관 직원이 주혁과 똑바로 눈을 맞춘다.
"유감스럽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래도 입국이 불가능 할 것 같은데요."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가 차분함을 잃고 급박하게 꺾여든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정작 무어라 말을 뱉지도 못하는 주혁 대신
윤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이유를 묻자, 직원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로 가르쳐준다.
"장주혁 씨, 모르핀 중독으로 치료를 받으신 사례가 있으시더군요.
아시다시피... 마약 혐의가 있는 사람은 입국이 곤란합니다."
(130 )
주차를 시키려고 후진을 하며 뒤를 돌아 공간을 살피면서 천천히 엑셀레이터를 밟는 태현의 동작이 눈에 띄게 허둥거린다.
억지로 우겨 넣듯이 노란색 직사각형 라인 안에 차를 세우고 허겁지겁 운전석에서 내리는 태현..
세차게 차 문을 밀어 닿고 열쇠로 잠그는 둥 마는 둥 한 후에 휘황찬란하게 깜박이는 네온사인이 달린 술집으로 발을 옮긴다.
들어서자마자 왁자지껄한 소음과 따갑게 귓전을 후려치는 테크노 풍의 음악이 몰려오고, 태현은 황망히 두리번거리며 강태의 얼굴을 찾는다.
어젯밤 늦게 걸려온 그의 전화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태현의 조급증은 더욱 무게를 늘려 가는 듯 하다.
창가 쪽 후미진 자리에 태현의 시선이 미치고 그제 서야 강태의 앉아있는 모습이 각인되어 박혀든다.
태현은 뛰어가다시피 다리를 움직인다.
"강태야!!"
자기도 모르게 난잡한 소음을 꿰뚫어버릴 만큼 커다란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태현에게
피곤과 권태가 짙게 발린 강태의 까만 눈동자가 와서 멎는다.
그러더니 감정이 상할 정도로 연출된 웃음을 피워 올린다.
"태현형... 왔구나, 정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네 전화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나저나 왜 연락이 안 된 거야?? 핸드폰도 먹통이고..."
"아아~ 핸드폰 바꿨거든... 그렇게 됐어, 미안해."
"미안한 걸 아는 놈이 이제야 나타나? 너 진짜 나쁜 놈이다, 응??"
"훗... 알아, 나 나쁜 놈인 거..."
느릿느릿 번져나가는 강태의 조소가 섬뜩하게 가슴 한 부분을 내리치는 것 같아서 태현은 일부러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주시한다.
태현의 유난스런 시선에도 전혀 민망해하지 않고 비스듬히 눈동자를 떨어뜨린 채 주머니에서 담배 갑과 라이터를 꺼내는 강태..
태현은 의뭉스럽다는 표정으로 돌변하여 강태에게 묻는다.
"너 담배 피워??"
그러자 또 다시 피식 웃으며 대꾸하는 강태의 말은 섣불리 받아넘기기에는 너무 두드러진 의미심장함으로 포장되어 있다.
"어어... 그냥...가만히 있으면 속이 메스꺼워서..."
뒤를 잇는 정적이 숨막히도록 부담스럽게 느껴지자,
태현은 서둘러 입을 열려고 하지만 여러 가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만 아웅다웅할 뿐 막상 목소리가 되어 나와주지는 않는다.
그러던 중 이상하게 생경히 꽂혀드는 강태의 비음 섞인 음성이 후덥지근한 실내의 공기를 흐트러뜨린다.
"사실...형 많이 만나고 싶었어..."
".............."
"근데....용기가 안 났어.."
"야, 네가 날 만나는데 무슨 용기가 필요해?! 우린 친구야!!"
"형을 만나면...내가 형을 이용하게 될 것 같아서..."
강태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태현은 격하게 치미는 속내를 지그시 눌러 앉히고 잠시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이내 그 시도를 접어버리고 조금도 장난스럽게 들리지 않는 어조로 화를 내듯 소리친다.
"백 번 천 번 이용해 먹어도 괜찮으니까 제발 이런 식으로 사람 심장 떨리게 좀 하지 마! 지겨워 죽겠어, 아주..."
"그래...지겹지..? ....그럴 거야. 나도 이렇게 지겨운데 형은 오죽 하겠냐..."
들릴락 말락 한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내뱉는 강태의 입술이 바싹 메말라 있는 듯한 느낌에 태현은 괜히 혀로 자기 입술을 축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핀잔 조로 던진 자신의 말에 극단적으로 민감한 대응을 해 오는 강태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흘겨본다.
"어휴~~ 관두자, 내가 말을 말아야지..."
원망과 염려가 서린 눈망울로 투덜대는 태현에게 강태는 형식적으로나마 살짝 웃어준다.
주문을 받고 갔던 웨이터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내려놓자,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술병의 마개를 따는 강태..
길게 늘어뜨린 앞머리가 한 쪽 눈을 가린 모습이 오늘따라 씁쓸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
"....이런 말하면 네가 싫어할지도 모르겠는데...
강태 너, 재준이가 궁금해서 나 만나자고 한 거야..?
그래서 방금 전에 날 이용할 것 같다느니 어쩌니 그런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드는 태현의 질문에 강태의 눈동자가 얼어붙었다가 또 순식간에 풀어헤쳐진다.
술잔을 든 손이 약하게 떨리고 정직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태현의 눈을 외면한다. 아니, 회피한다.
그건 'Yes'라는 뜻일 거다.
"뭐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해? 어차피 그게 내 역할 아니었어?
난 재준이 친구고 또 네 친구이기도 해. 이용한다느니 그런 말, 우리 사이에는 쓰지 않는 거야."
"고마워, 형..."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마음이 담긴 위로의 목소리가 그리웠었던 걸까, 태연한 척 가면을 쓰고 사는데 지쳤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재준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사를 가로지르는 고통이 조금이나마 치유되는 걸까...
한 번도 그의 존재를 지워본 적이 없다.
의식적으로 망각의 수렁에 자신을 빠뜨리지 않는 한, 그는 여전히 강태를 지배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겨진 몸임에도, 강태의 주인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이 말은 정말, 나도 하고 싶은 말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해 줘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네가 편해질 거고 어쩌면 재준이도...내가 너한테 이 말 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 지도 몰라.."
불안하다. 분명히 또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이런 예감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이재준, 그가 바라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강태에게 눈물을 안겨주는 때가 많다.
그 자체가 사랑의 반대쪽 본질일 수도 있겠지만.
"강태야, 너 말이지...내가 정말 충고하는데...재준이 그 자식, 잊어라."
희망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다만 아직도 울부짖으며 내 안을 돌아다니는 서툰 감정을 달래주고 싶었다.
혼자 남겨졌다는 아픔을 그래도 좀 덜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가닥 미련을 만들고 싶었다.
"너도 알잖아. 이재준은 모든 걸 자기 혼자 결정해. 사적인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구.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도 전부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지 다른 사람 말 같은 거 아무런 영향도 못 끼쳐.
걘 원래 그래,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고쳐질 수 없는 거야.
재준이가 널 먼저 놓아 버렸다면 그걸로 끝이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해.
내가 누구보다 이재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얘기하는 거야.
그리고...재준이 만큼 너도 나한테 소중하니까..."
"그게...진심일까..? 날 버린 게...그 애가 원하는, 진짜 마음일까..?"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강태는 묘하게 꺾어진 음성으로 가냘픈 물음을 흘려본다.
그 의문부호의 색상이 워낙 흐릿하고 탁해서 누구도 정확한 답변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도 무시한 채, 강태는 막무가내로 대답을 요구한다.
알고 싶다. 눈앞에 보여지는 현실이 아닌 그 너머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싶다.
그걸 알면, 아니, 강태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까지도 인정하기 힘든 ―
진실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면, 눈앞의 현실쯤은 너끈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함께 할 수 없는 고통도 그 종류가 여러 가지인 모양이다.
"그냥...그렇다고 생각해라. 그렇다고 편하게 생각하고 얼른 체념해, 강태야.
이재준 그 새끼 잊고 이제 걔한테서 벗어나. 제발, 네가 너 자신을 찾는 게 재준이를 도와주는 거야. 알겠어, 내 말...?"
- "도련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회장님께서 아시면 몹시 노하실 텐데...게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 씨발! 내가 가겠다는데 왜 지랄이야!? 나랑 회장님은 동격인 거 몰라?? 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
"도련님 많이 취하셨습니다. 집으로 가서 쉬시죠. 여긴 도련님께서 오시면 안 되는 곳입니다."
"뭐? 안 된다구?? 야, 안 되긴 뭐가 안 돼...? 나 여기 사는 남자 좋아해.
좋아하는 남자 얼굴 좀 보겠다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비켜! 씹... 기다리기 귀찮으면 먼저 가 버리던지 맘대로 해!!"
곱고 가느다란 미성으로 악다구니를 쳐 대는 강태..
극구 만류하는 수행원을 밀치고 엉성한 걸음걸이로 익숙하기 그지없는 빌라의 입구 안으로 들어선다.
몇 개월만에 오는 것인데도 유리문을 여는데 필요한 비밀번호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땅과 맞닿는 것 같지 않고 붕 떠서 휘적휘적 다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계단을 올라
3층에 다다른 강태는 거침없는 손길로 초인종으로 누른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리고, 빼꼼이 문이 열리자 그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잠옷 차림의 혜련이다.
"어어...?? 여기...."
낯이 익으면서도 생소한 그녀의 등장에 충혈 된 눈동자를 구기며 의혹에 찬 시선을 쏘아보내는 강태..
혜련은 만취한 강태를 얼마간 난처하다는 눈빛으로 응시하며 머뭇거리다 어색하게 말한다.
"저어...재준 씨 찾아 보셨나보죠...? 어어~~ 아무튼, 일단 들어오세요."
- "누구야?? 태현 형 왔어?"
불쑥 등뒤에서 날아오는 재준의 밋밋하고 물기 없는 음색에 혜련은 흠칫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본다.
그녀보다 더 먼저 재준을 감지한 강태는 어지럽게 몸 속을 휘젓는 취기와
가슴속의 심연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억제되어 있던 응어리가 한꺼번에 뒤섞여, 입술이 굳어버리고 만다.
강태를 발견한 재준은 하마터면 휘청 앞으로 고꾸라질 뻔 하는 몸을 현관문을 붙잡고 겨우 추슬러낸다.
한동안 재준과 혜련을 번갈아 관찰하던 강태가 실성한 사람처럼 간헐적인 웃음을 토해내며 입을 연다.
"...하하..! ....그래, 나 당신 본 적 있어. 어디서 낯이 익다 했더니, 당신 그 때 우리 집 왔잖아.
재준이랑 나랑 싸웠을 때...재준이가 데리고 왔었지..? 내가 그 때 얼마나 화가 났었는데...
당신한테 그 침대를 뺏겼다는 걸 참을 수가 없더라구...
그 침대는 항상 내 차지였는데 말이야..."
재준은 계속 마네킹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손마디가 새파랗게 질릴 정도로 현관문을 부여잡고 있다.
건조하고 냉랭한 검은 눈동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가지 상반된 자아를 남김 없이 노출시킨다.
"결국...당신이 이겼군. 난 내가 영원한 승자인 줄 알았는데, 결국 당신이 이겼어.
아, 그러고 보니까 당신은 여자네...쿡..! 그럼 내가 더 쫄아 붙게 되잖아.
씨발... 나 이제 어떻게 하지? 이재준 저 새끼 멀쩡한 것 좀 봐.
완전히 그대로잖아..? 여자까지 들어 앉히고 멀쩡하게 잘 사는 것 좀 보라구..!!"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포효와 비슷한 외침이 강태의 눈가를 적시고 그 물줄기가 얼굴 전체를 뒤덮을 때까지 재준은 처음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가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지, 자신도 깨닫지 못한다.
"....태현형 말이 맞았어. 계약이고 뭐고...이젠 정말, 잊어야겠어.."
(131 )
이 기적이란 당신들이 서로의 육체를 쳐다보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마치 장님처럼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게 한 것이오.
-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중 -
극도의 무표정을 고수한 채 핸들 위에 손을 올려놓고 앞 유리를 통해 비춰지는 도심지의 풍경에만 시선을 주고 있는 주혁..
그 옆에 자리한 혁수는 두려움과 서글픔이 반반씩 묻어나는 눈빛으로 주혁을 조용히 바라본다.
어제 윤아에게서 주혁의 입국 금지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훨씬 암담하고 걱정스럽다.
평정을 가장하려고 애쓰지만 선연히 그 떨림을 노출하는 주혁의 검푸른 구슬이 운전을 해 가는 내내
단 한 번도 혁수의 얼굴에 머무르지 않음이 이토록 불안하고 초조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혁수는 쉽사리 그의 이름을 부르며 주혁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딱히 꼬집어서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니지만,
그리고 어쩌면 코웃음을 치며 실언으로 치부해버릴 지도 모르지만 그건 일종의 자책감이다.
아주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비롯되는 억지스런 자책감.
혁수를 오랜 시간에 걸쳐 괴롭혀 온 부조리한 감정.
재준과 주혁이 함께 사는 빌라에 도착해서 둘만의 비밀스런 시간이
보장되는 주혁의 방에 다다를 때까지 줄곧 주혁과 혁수는 침묵을 깨뜨리지 않는다.
불이 꺼져 있는 어두컴컴한 거실을 지나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면서 혁수는 처음으로 주혁의 등이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연인으로서 가당치 않은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솔직한 느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
"재준이는 아직 안 들어 왔나봐..?"
자동차 열쇠를 아무데나 던져두고 코트를 벗는 주혁에게 혁수가 어물쩡한 말투로 물어오자
주혁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어깨 너머로 묵직한 목소리를 넘겨준다.
"자기 침실에 있을 거야. 며칠 전부터 어떤 여자랑 같이 살거든."
"여자..??"
"나도 잘 모르겠는데, 재준이가 같이 살자고 했대. 나중에 얘기해주겠지..."
억양 없는 주혁의 음색이 갑자기 가슴팍 정중앙을 쑤시고 들어오는 것 같아서
혁수는 살풋이 이마를 찡그리고 아까보다 더 지치고 허탈해 보이는 그의 등을 계속 보고 있기가 어려워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긴장된 걸음걸이로 주혁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는다.
주혁의 차가운 뺨과 밀착되자 자동적으로 소스라치려는 자신의 몸을 단단히 붙잡아 매는 혁수..
주혁은 따뜻하게 닿아오는 혁수의 가슴에 이제껏 쉬지 않고 태워 올리기만 하던 분노의 화염을 한 꺼풀 누그러뜨린다.
혁수의 체온 안에서 주혁은 거칠어질 수가 없다.
"주혁아..."
"..............."
"....혁아, 내 얼굴 좀 봐.. 왜 자꾸 날 안 보려고 해...?"
"............"
"네가 나 안 봐주면 나 무서워서 참기 힘들어. 그러니까 내 얼굴 좀 쳐다 봐 줘, 혁아..."
"............."
"....혁아, 너...나 원망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지금...?"
울먹임이 곁가지처럼 딸린 혁수의 목소리가 주혁의 분노 중 일정 부분을 슬픔으로 환원시킨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에도 슬픔을 느낀다는 건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일 지도 모르겠다며 주혁은 속으로 혹독하게 자신을 질책한다.
별 다른 해답이 돌아오지 않는 몸짓이라고 해도 이렇게나마 육중한 죄의식을,
그리고 뻔뻔스러운 자기 합리화의 욕구를 제어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듯 하다.
주혁은 천천히 몸을 회전시켜 혁수와 시선을 맞춘다.
영롱한 빛살가루를 흩뿌리는 갈색 눈동자를 맨 아래까지 세심하게 관찰하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혁수의 손이 주혁의 오렌지빛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고 주혁의 두 손은 혁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보듬는다.
가슴속에서 휘몰아치는 광풍 같은 감정과는 반대로 차분하게 혁수의 입술을 열고 안으로 침투하는 주혁의 혀는 부드럽기만 하다.
예민한 혁수의 감각이 한 올 한 올 곤두서는 것을 혀끝으로 어루만지며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길로 그의 옷을 하나씩 떨구어내는 주혁..
미미하게 저항하는 듯한 시늉을 보이는 혁수를 달래듯이 더욱 깊게 그의 입술을 파고든다.
알몸으로 침대 시트에 파묻힌 혁수를 내려다보는 주혁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떠오른다.
저 어깨와 가슴과 배가, 저 다리와 팔과 손가락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
그의 육체가 날 파멸시키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어느새 나 자신조차도 우리의 섹스를 육체에 국한시키고 있는 것인가...
나도 세뇌 당한 건가...
우리는 금기를 깬 사람들이 되고자 한 게 아니다.
그 따위 역사적, 사회적인 흔적에 포함되고자 의도한 건 전혀 아니다.
그런데 왜 그런 쪽으로 해석하는 걸까?
우리 두 사람, 두 남자의 관계를 왜 공론화하고 싶어할까?
서로를 원하는 두 남자의 욕망과 섹스를 어째서 함부로 도마 위에 올려놓는 걸까?
"....혁아, 왜 그래...?"
자신을 빤히 응시하기만 하는 주혁이 의아해서 혁수가 조금 쉰 듯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지자
주혁은 또 한 번 웃음 같지도 않은 미소를 매달고, 혁수의 가슴을 간질이듯 쓰다듬으며 입을 연다.
"내가 너를 왜 원망해... 너 미워하려고 할 짓 못 할 짓 다 해 봤어도 아무 소용없었던 나야..."
"그래도 나는.... 네가 모르핀에 손 댄 건 결국..."
"아냐, 내 책임이야. 내가 편지에도 썼잖아. 네가 부담 느껴야 할 부분은 아무 것도 없어, 혁수야..
내가 틀리게 생각한 거고 내 잘못이야. 날 거기까지 끌고 내려간 건 바로 내 자신이야."
"난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 그렇게 안 돼.
몇 번을 다시 되풀이해서 생각해도 난...너한테 사랑 받는다는 것 자체가 죄스럽고 미안해.
그런데...그런데도 널 빼앗길 수는 없어. 절대로,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야..."
뜨겁게 달아오르진 않았지만 달콤한 체온을 간직한 혁수의 몸이주혁의 품안으로 안겨온다.
연청색 시트 아래 벌거벗은 채로 얽힌 두 남자의 육체는 섹슈얼하고 에로틱하기는커녕
원시시대의 천연의 상태로 회귀한 사람들처럼 순박하고 천진하다.
새하얀 목련빛 살갗의 몸뚱어리는 허약한 지렛대로 두 사람 뿐 아니라 세상의 무게까지 짊어지고 있기에 무척 고단해 보이고,
연갈색 살구빛 살갗의 몸뚱어리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아픔 따위 잊은 채
연인의 고단한 영혼을 위해 무엇 하나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래, 갈 거야... 어떻게 해서든 꼭 가고 말 거야. 절대로, 절대로 가고 말 거야."
결연한 눈빛을 반짝이며 입술을 짓씹는 듯 음산하다시피 낮게 깔린 목소리로 반복해서 말하는 주혁..
혁수는 잠자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주혁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우리가 같이 세웠던 계획을 생각해 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잖아...
가만히 있다가도 그것만 상상하면 얼마나 행복한데...
우리 뉴욕 가면 작은 아파트 빌려서 너 그림 공부 계속하고, 나도 직장 생활 열심히 해서 착실하게 돈 모으고...
그래서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한 플로리다에 자리잡고, 예쁜 딸도 입양해서 키우고...
그리고 또...지민이 누나, 윤아 누나랑 자주 만나서 놀러 다니고 그러면서...
우리 결혼 기념일에는 단 둘이 여행도 가고...우리 딸 데리고 놀이동산도 놀러가고,
그래... 나 정말 잘 해 줄 거야, 우리 딸한테...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 줄 자신은 없지만 정말 좋은 아빠가 되어줄 거라구...
혁수 네가 날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도록 나 정말 잘 할 거란 말이야.
평생 너랑 우리 딸이랑 셋이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나는 그것만 위해서 진짜 열심히 살 작정이라구...
근데, 근데 어떻게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아? 이대로 포기할 수가 있어??
갈 거야, 가고 말 거야. 가서, 미국에 가서 이렇게 계획한 대로 꼭 이루어 줄 거야.
우리가 꿈꾸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인생을 만들 거야. 난 그럴 자신 있어.
왜 안 되는데? 대체 왜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씨발, 누가 도와 달래?! 내 힘으로 그렇게 만들 자신 있다잖아.
누가 자기들한테 피해 준 댔어? 곱게 사라져주겠다는데, 우리 힘으로 좀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데 왜 그러냐구...!
우리도 이제 그만 울고 싶어. 숨죽여서 눈물 흘리고 같이 못 있어서 가슴 아파하고 그런 거 이제 질렸어...
정말...이젠....제발...혁수한테 예쁘고 좋은 것만 선물해 주고 싶단 말이야..."
앙 다문 혁수의 이빨 사이로 배어나오는 흐느낌이 주혁의 상앗빛 어깨를 물들이고,
주혁의 푸르스름한 눈물이 혁수의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이별 따위는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으련다.
눈물로 서로의 고통을 세례 하는 두 사람에게,
아니, 두 남자에게 축복이 과분한 것이라면 그건 분명 각박하고 잔인한 형벌이다.
혁수는 격한 오열을 쏟아내는 주혁을 포박하듯 강하게 껴안으며 궁색하기 그지없는 기도를 뱉어내고 만다.
- 서울지방검찰청 가운데 한 자리를 번듯이 차지하고 있는 인하의 집무실은 은은하면서도 호화롭고 귀족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수수하게 장식해 놓은 것 같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둘러보면 실내를 채우고 있는 가구들과 물품들
모두 구입 전에는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액수가 찍힌 가격표를 달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직사광선으로 내리쬐는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신문을 읽고 있는 인하에게 인터폰의 전자음이 들린다.
그리고 사무적이나 상냥한 비서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검사님, 송실장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읽던 신문을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인사하는 게 보이고, 인하는 심상한 말투와 표정으로 그를 맞이한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됐습니까?"
"예상하신 대로 입국이 금지되었습니다. 위쪽에서 손을 쓰지 않는 한, 어렵겠더군요.
혹시라도 밀입국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서 알아보는 중입니다."
인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모양으로.
송실장이라 불린 남자는 힐끗 인하의 반응을 살피더니 갖고 들어온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으로 꺼내 보고를 계속한다.
"그리고 어젯밤 혁수군은 역시 주혁군과 함께 있었습니다.
새벽 2시경에 주혁군의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새벽 5시쯤 둘이 함께 집에서 나왔고, 주혁군이 혁수군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혁수군은 새벽 5시 30분 경에 귀가했고 주혁군은 곧바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수고했어요. 아, 그리고 주혁이하고 결혼한답시고 온 그 여잔 언제 미국으로 출국한다고 그랬죠?"
"이번주 금요일 오후 1시 비행기입니다."
"맞아, 그랬었지... 알았어요, 일단 주혁이 쪽을 좀 더 신경 써서 지켜보도록 하십시오."
(132 )
연속적으로 헛웃음을 뱉어내는 강태의 입술이 다물어지고
몽롱하게 풀어진 그의 까만 눈동자가 두 줄기의 눈물자국을 새기는 게 뚜렷이 보이면서도 재준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하늘이 무너져버릴 것 같다는 진부한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거구나...
그렇게 실없는 상념으로 시간을 낭비하고만 있을 뿐,
예쁜 얼굴을 돌려 축 처진 뒷모습으로 매서운 이별을 고하는 강태에게 그의 이름 한 마디 불러주지 못하는 재준..
오히려 그 옆에 있던 혜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강태를 붙잡는다.
"아니, 저기요!! 들어와서 얘기를...!"
두어 발자국 강태를 따라 나서다가 목석처럼 제자리에 못 박혀 있는 재준을 의식하고
머쓱하게 다시 걸음을 돌이켜 현관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리고 약간 겁이 서린 눈망울로 재준을 올려다본다.
유백색의 피부가 시체의 푸르딩딩한 빛깔을 띠는 듯 해서 혜련은 자기도 모르게 경계심을 갖고 어깨를 움츠린다.
"저 남자...오빠랑 같이 살던 걔 아냐?? ....맞지?"
재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까봐 주저하며 묻는 혜련에게 재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처음 강태를 눈 안에 담았을 때, 그 때의 정지상태에서 조금도 미동 없이 서 있다.
강태를 다시 마주하면 그동안 눌러왔던 무수한 생각들이 다투어 부상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의 얼굴이, 그 실체가 바로 정면에 자리잡자
너무 절절한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와서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를 안고 싶다는, 그를 다시 내 것으로 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극단적인 절박감, 그리고 이어지는 자살충동.
끝없이 무책임해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느끼는 구토.
불현듯 진짜로 머리가 핑그르르 돌며, 위장이 뒤틀리며 욱하는 토악질이 치밀어 오르자
재준은 다급하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달려간다.
놀라서 뒤쫓아온 혜련이 등을 두들겨주고,
입 밖으로 아무것도 쏟아져 나오지 않는데도 과음을 하거나 체한 사람처럼 오랫동안 구역질을 해대는 재준..
한참만에 가까스로 고개를 쳐들고 식은땀이 흥건한 얼굴을 천장으로 향한다.
상당히 질린 듯한 표정으로 혜련이 재준의 두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가
싸늘하고 꺼칠꺼칠한 느낌에 움찔 손을 거두어들인다.
"오빠...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욕실 벽면에 부딪혀 웅웅 울리는 혜련의 목소리에 재준이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까맣다 못해 질식할 것처럼 답답하고 어두운 칠흙의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한다.
다행스럽게, 강태의 얼굴이 겹쳐져 보이지는 않는다.
"오빠, 얼굴이 너무 안 좋다. 지금 약국 다 문 닫았을 텐데...어떡하지?"
".....됐어, 약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음성만큼은 건조하고 무덤덤한 평상시 그대로를 유지하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는 재준..
부축해 주려는 혜련을 마다하고 땀에 젖어 늘어진 노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2층에 위치한 홈 바로 발을 옮긴다.
주저앉듯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급하게 술병을 끌어당겨 진한 농도의 술을 한 잔 가득 들이킨 후,
재준은 겨우 규칙적으로 안정되는 숨소리를 고르며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몸 전체를 압박하던 역겨움이 어느 정도 감소하고 빙글빙글 제멋대로 춤추던 시야는 서서히 하나의 소실 점을 찾아 고정된다.
"오빠...안 잘 거야..?"
버릇처럼 한 쪽 어깨를 벽에 기대고 서서 재준의 모습을 살피며 묻는 혜련..
재준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또 한 잔 넘치도록 술을 채우고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먼저 자라. 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혜련은 잠깐 열 적은 표정을 짓더니 무안한 기색을 감추며 뒤돌아 선다.
그러다가 다시 재준을 쳐다보고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갈등하는 모양새가 역력한 걸음걸이를 내딛어 재준의 옆자리에 앉는다.
"나하고 얘기하면 안 되는 거야? 방금 전의 그 남자 때문인 것 같은데...응?"
"............."
"나...괜찮아. 어차피 오빠가 날 특별하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나도.
그리고 부담 갖지 마. 나랑 같이 살자고 한 거, 후회되면 언제든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내가 오빠한테...."
"그런 게 아냐, 혜련아. 이건....내 문제야."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뭐, 오빠가 싫다면 할 수 없지만 난 오빠의 사적인 문제까지도 들어줄 수 있다...그 말을 하고 싶었어.
그래도 이제 같이 사는 사람이잖아. 그게 도리 아니겠어...?"
그녀의 착한 호의에 그대로 부응해주기엔 지금의 재준이 준비되지 못했다.
어쩌면 아직 준비를 시작할 마음가짐조차 다져놓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섣부르지만 '사랑'이라는 거창한 라벨을 달고 마무리지은 관계가 자신의 뜻대로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 때문에 그는 도리어 안타까워한다.
그 안타까움조차 자기 자신이 아닌 강태를 위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하기엔,
뻔히 들여다보이는 가슴속의 고통이 재준을 위선자로 만들어 놓는다.
"근데 있잖아....그 남자가 한 말,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그 말을 들으니까 괜히 죄 지은 느낌이었어.
내가 이겼다고...결국은 내가 이겼다고...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내가 잘못한 거 같아.
솔직히 말해봐, 오빠... 나...나쁜 짓하고 있는 거야..?"
- 백화점의 의류 매장 안을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돌아다니며 옷을 고르는 강태의 뒤에,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그를 수행하는 연화회 소속의 조직원이 지속적인 경계 태세를 풀지 않고 따라 붙는다.
그런 것쯤은 이미 익숙해진 강태는 마치 그가 없는 사람인 양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어젯밤 재준을 찾아가서 한바탕 부어 버리던 흐느낌과 절규와는 사뭇 판이한,
특유의 도도하고 영묘한 자태를 뽐내며 쇼핑을 하는 강태..
벌써 대 여섯 개의 쇼핑백을 손에 들고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듯 하다.
몇 시간 전부터 옷이며 신발, 악세사리 등을 닥치는 대로 좀 마음에 든다 싶으면 왕창 사들이는 강태를 지켜보며,
수행원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쇼핑을 끝낸 강태는 미용실에 들러서 헤어스타일을 손질하고 다시 차에 오른다.
좌석 등받이에 털썩 상체를 기대며 담배를 피워 무는데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나온다.
"네.."
"강태니? 나야, 태현이..."
"어어, 형이구나..."
"지금 바빠? 형이랑 영화 보러 갈래?"
"....미안한데, 나 지금 집에 들어가야 돼. 다음에 만나자, 형."
"그래...? 네가 웬일이냐, 영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놈이..."
"회장님 일찍 들어오신 댔거든... 내가 먼저 가 있어야 돼. 나중에 연락하자."
"아아...그럼 할 수 없지. 그래, 다음에 보자~"
플립을 접는 강태의 손이 보일 듯 말 듯 약하게 경련하고,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입으려 가져가며 스쳐 지나가는 살풋한 미소가 그의 눈매를 침울하게 바스러뜨린다.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창 밖으로 집어던지고 자세를 야트막하게 낮춘 채 고즈넉한 멜로디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강태..
리드미컬한 차체의 흔들림에 몸을 내맡긴 기분은 제법 센치하고 울적하다.
나는 어디로 가는 중일까.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 결론적으로 나는 왜 사는 걸까.
"야!"
갑작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강태의 목소리에 운전을 하던 수행원이 눈길을 들어 백미러를 통해 강태를 본다.
"너 말이야...너는...너는 왜 살아..?"
"예??"
"넌 왜 사냐구. 뭐 때문에 인생을 사느냔 말야."
"그거야 뭐...나름대로 꿈이 있으니까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꿈...? 꿈이라... 그거 좋지. 정말 황홀한 단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아, 예...그렇죠. 누구나 공평하게 꿈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공평하다고...? 글쎄...거기엔 동의할 수 없어. 그건 아닌 것 같아."
형식적으로나마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강태와 말을 주고받던 수행원의 낯빛에 의아함이 떠오르고,
강태는 차창에 투과되는 수많은 점등불빛 사이로 간간이 엿보이는 건물의 윤곽을 더듬으며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흘려보낸다.
"내 꿈이 뭐였는지 알아? 영화감독이었어.
연극영화과에 합격도 했었고. 입학하기도 전에 휴학했지만...
내가 처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한 게 초등학교 6학년 때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때 느낀 감동이 얼마나 굉장했는지, 그 이후로 나한테 중요한 건 영화 외에는 없었어.
공부도 영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으니까.
정말....완전히 미쳐서 살았어. 학창시절 내내..."
"영화와 관련된 물건들을 많이 갖고 계시 길래 짐작은 했었습니다.
다음 학기부터 복학하셔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시는 게 좋겠네요.
회장님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훗...그게 끝이 아니야. 거기서부터 시작이거든...?
진짜 웃기는 얘기지. 내 얘기지만 내가 생각해도 진짜 웃기고 황당해.
내 소중한 꿈을...영화에 대한 내 꿈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멈춰버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 사람이 이재준이야.
우리 부모를 죽이고 내 인생을 엄청나게 수정해버린 인간이 이재준이라구...
난 아무 보장도 없이 그냥 꿈을 접어뒀어.
다시 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쉽게 할 수 없었는데...그렇게 해야만 했어.
근데 말이야...정말 더 웃기고 황당한 게 뭔 지 아니??
내 꿈을 접게 했던 그 '이재준'이라는 남자가 나의 새로운 꿈이 됐다는 거야.
그러면서 난, 옛날의 꿈을 깡그리 잊어버렸어. 그리고 새로운 꿈에만 충실했지.
그 새로운 꿈만은...그걸 놓치면 정말 나한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게 사실이었구... 난....노력했어...
그런데도...그랬는데도...나는 또 꿈을 놓쳤어.
아니, 이번에는 꿈이 나를 배반했어. 날 버렸어."
".............."
"내가 왜 사는지 말해줄까..?
내가 사는 건...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아..."
(133)
소복소복 내리는 눈송이가 포근하게 머리와 어깨를 덮는 것을 손끝으로 가만히 만져보며
연수는 태현의 아파트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벽면에 부착된 거울에 자신의 모양새를 비춰보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후,
신발에 묻은 눈을 털면서 태현의 집 대문 앞으로 다가선다.
초인종을 누르려고 팔을 쳐들자 버튼이 테이프로 봉해져 있는 게 눈에 띈다.
초인종을 못 누르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연수의 표정이 의뭉스럽게 돌변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손가락으로 철제문을 노크해 보지만 안 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난감해지는 연수.. 아랫입술을 이빨로 잘근거리며 고민하다가 망설이는 동작으로 천천히 대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스르르 쉽게 돌아가고 잠겨있지 않은 문이 선뜻 실내의 광경을 연수에게 공개해준다.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리에 배치된 사물들이 친숙하게 연수의 시야에 머무르고,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두꺼운 적막이 내려앉아 있는 집안을 둘러보며
연수는 역시 주저하는 듯한 걸음으로 태현과 함께 공부하는 그의 작업실 쪽으로 이동한다.
작업실 안은 바로 얼마 전까지 태현이 있었다는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흩어진 CD와 서적, 잡지들 그리고 컴퓨터로 출력한 악보들...
보기만 해도 정신이 산만해질 만큼 어질러진 작업실을 빠져나와 다시 두리번거리며 태현을 찾던 연수의 눈이 그의 침실에 붙박인다.
결혼식 전까지는 절대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던 고대의 신부처럼 침실 안의 태현이 베일에 싸여진 신비하고 순결한 존재처럼 느껴져서
연수는 자신의 얼토당토않은 감정에 약간의 동정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강하게 이끌리는 발걸음 그대로 닫힌 태현의 침실 문을 열기 위해 움직인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수의 동공을 채우는
눅눅한 어둠과 희끗희끗한 물체의 실루엣, 귓가를 적시는 태현의 일정한 숨소리...
베이지색 시트에 푹 파묻혀 세상 모르고 곤히 잠든 태현을 발견하자 연수의 얼굴에 뽀얀 미소가 피어난다.
어떠한 이성적인 계산도 없이 무작정 터지는 해사한 웃음.
침대 옆의 테이블에 굵은 매직으로 글씨가 쓰여진 큼지막한 종이 한 장이 놓여있다.
'작업하느라 3일 밤 꼬박 샜음. 진짜 뻥 안 까고 한숨도 못 잤음.
오늘과 내일의 모든 약속은 당분간 연기하겠음.
날 깨우는 사람은 나와 절교할 생각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 테니 알아서 하기 바람.
특히 장주혁, 나 깨우면 죽여버린다. 또 야밤에 쳐들어 왔다면 조용히 돌아가도록.'
원래 엉뚱한 구석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푼수 같을 정도로 돌발적인 행동을 터뜨리는 태현은 처음이기에
연수는 그가 수업을 펑크냈다는 사실이 못마땅하기는커녕 되려 그가 귀여워 보인다.
또 얼마나 피곤했으면 오늘 수업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연락을 줄 생각도 못했을까하는 안쓰러움에 연수의 가슴 한 구석이 따스하게 데워진다.
젖혀진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과 가로등 불빛에 어슴푸레 드러난 태현의 얼굴을 한 눈에도 무척 지쳐 보인다.
맑고 커다란 암갈색 눈망울을 감춘 채 하늘색 머리는 산발이 된 부스스한 모습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약하게 뱉어내는 숨결은 정갈하고 깨끗하다.
연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가 누운 침대의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다.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본다.
눈으로 보기에도 결이 고왔는데, 손끝에 전해지는 그 매끄러움은 상상 이상이다.
순식간에 세포 전체로 퍼져나가는 전율감에 소스라치며 연수는 급하게 태현에게서 손을 거두어들인다.
하지만 여전히 욕심이 생긴다.
여자로서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남자를 향한 욕망이 연수에게는 굉장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건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차원을 넘어서, 아직은 감당하기에 벅찬 인연의 울타리에 점점 갇혀 가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녀는 이제 겨우, 열 일곱이다.
태현이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리고 태현이 계속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진 채로 있기를 바라는 마음.
둘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작게 벌어진 태현의 입술을 응시하던 연수..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뺨을 모른 척 하면서 그의 입술로 접근한다.
쿵쾅대며 박동하는 심장, 촉촉하게 젖어오는 은밀한 부위가 창피하다고 느껴지기엔
갓 태어난 연수의 여성을 불러일으키는 태현의 아름다움이 훨씬 압도적이다.
아니, 미숙하고 불확실한 설레임과 분명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간절한 사무침이 모두 그를 향해 뻗어있는 것만은 자신의 영혼을 걸고서라도 단언할 수 있다.
순간적인 감상이라고 치부해버린다 해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신을 통해 '세라'라는 과거의 여자 아니, 이건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의 곁에, 그와 같은 시공간에 실재할 수 없는 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싶어한다면 자신의 몸을 빌려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을 완전히 '서연수'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태현의 여자가 되고 싶다.
이후의 책임을 그에게 떠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살며시 마주댄 태현의 입술은 척박하고 거칠다.
까끌까끌한 그 감촉이 태현의 상처를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아서 명치 께가 욱신거린다.
지금의 자신은 어떤 신통한 능력에 조종당하고 있는 듯, 자기 자신이 누군지 기억할 수가 없다.
자신을 대표하는 기호들은 무의미해 보이고,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자신의 본질은 낯설기만 하다.
태현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이제부터는 그 하나만 생각하며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사춘기에 누구나 한번쯤 거치는 열병 정도로 취급할지 모르지만,
관계에 얽힌 운명은 그렇게 가벼이 스쳐 버릴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다.
문태현에게서 이세라를 지우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문태현을 위해서.
- 홈 바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오디오에서 고즈넉한 겨울밤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발랄한 템포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랩과 멜로디가 번갈아 이어지는 펑키한 사운드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며 술잔을 기울이는 재준과 주혁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도록 만든다.
흐리멍텅한 조명과 뿌옇게 솟아오르는 담배연기와 비스듬히 기대앉은 두 남자는 넷 모두 닮은꼴이다.
"잊어버리고 있었어, 나도... 사실 제대로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질 않았으니까..."
상체를 조금 뒤로 젖히며 침묵을 깨뜨리는 재준의 말은 다분히 불분명하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도록 이야기하는 게 그의 버릇이기도 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할 땐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어쨌든... 정당한 방법으로 입국하는 건 힘들겠네..."
"그럴 것 같아."
고개를 주억이며 나지막히 대꾸하는 주혁의 목소리에 피곤이 잔뜩 배어난다.
말을 꺼낸 사람이 미안해질 만큼.
또 다시 지루하게 꼬리를 무는 고요함 가운데,
힙합에서 재즈로 바뀐 음악의 멜로디가 제법 그럴싸하게 차가운 공간을 메우고 분위기는 이제 좀 균형적으로 정돈되어 간다.
"하지만... 그래도 난 포기 못 해."
흥건하게 묻어나던 피로함 대신 날카로운 결의와 다짐으로
무거운 음성을 장식하며 던지는 주혁의 한 마디에 재준이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댄다.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가 어떤 빛깔로 반짝이고 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희한하게도 그의 눈빛은 동요 없이 차분하다.
"우린 가야 해. 유일한 방법이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포기하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거야."
"그래... 그렇겠지..."
"그렇게 되면 난 죽을 거야. 버티다 못해서 죽게 될 거야.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겠다. 형이니까..."
두 가지 길이 있다.
한 쪽을 아직 그 문을 열지 않아서 볼 수 없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길이고
다른 한 쪽은 지옥의 아가리를 활짝 버린 채 도사리고 있는 길이다.
그렇다면 열리지 않은 쪽을 선택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
최소한 그 문을 열었을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길을 걷는 사람은 우리들이다.
고통을 당하고 기쁨을 맛보고 형벌과 상급을 받는 당사자 역시 우리들이다.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강요하지 못한다, 그 지옥을 택하라고.
우리의 몸부림을 이해해 달라고 애원할 필요조차 느낄 수 없다.
느끼지 않을 거다. 이젠 그러지 않겠다.
"도와줘, 재준아."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조에 가까운 주혁의 말투가 더 처절하고 측은하게 들리는 건 재준이 많은 것을 소유했고 오만하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주혁을 통해 그보다 못나고 망가진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일지도.
유려한 선을 그리며 뻗어 내린 주혁의 옆모습에 재준의 까만 눈동자가 오래도록 멎어 있다.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있게 마련이야, 그렇지? 네가 좀 도와줘, 재준아..."
".....맞아, 갈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힌 건 아니지.
형 말대로 어떻게든 갈 수는 있어. 근데...위험부담이 커. 실패할 확률도 높고."
"알아. 그러니까 도와달라는 거잖아. 할 수 있는데까지만..."
잠깐 대화가 끊어진 사이로 득달 같이 달려드는 정적이 둔중한 갱스터 음악과 어우러져 어색한 불협화음을 울려낸다.
재준은 리모콘의 버튼을 눌러 오디오를 꺼 버린다.
그리고 반투명한 갈색 액체가 반쯤 남아 있는 술잔을 깔끔하게 비운 뒤, 고개를 가슴 쪽으로 더 깊이 숙이며 입을 연다.
"미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보통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쿠바를 거쳐서 배를 이용하는 거고, 또 하나는 멕시코에서 차로 국경을 넘는 거야.
비용은 비슷하게 드는데, 그나마 두 번째가 더 쉬워. 단속도 덜 하고..."
"나한테도 가능하겠지...?"
"물론이야. 하지만 밀입국을 하면...거기서 생활이 고달파져. 정말 힘들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야. 거기 도착한 다음에 고민할 사항이라구..."
"신중하게 생각해, 형. 여길 떠난다고 만사가 풀리는 건 아니잖아."
"불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내 현실이야. 안 그러면 나에겐 삶 자체가 성립이 안 돼."
울분에 찬 음성에 노기까지 곁들여지자 재준은 더 이상 주혁에게 다른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짧은 한숨으로 그것을 대신한다.
솔직히, 이렇게 맹목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주혁이 부럽다.
그에 비해 역겨울 정도로 계산적인 자신을 태연한 냉정과 '충의회'라는 타이틀로 포장하며 무표정을 고수하는 재준..
주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주혁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용서하기는 힘들다.
"좋아, 그 쪽에 있는 사람과 연결시켜 줄게. 우리 애들 중에도 몇 명 나간 애들 있으니까."
".....고마워, 재준아..."
혁수와 함께 조목조목 세웠던 우리 두 사람의 청사진을 기억하자.
그게 내 남은 인생의 전체를 틀어쥐고 있는, 내가 쫓아가야 할 마지막 사표라는 것.
우리는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 볼 권리가 있다.
(134)
그는 내게 인생을, 우주를 주었고 조각난 내 부분들을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 주었어.
나는 한 순간도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춘 적이 없단다.
그가 내 의식 속에 있지 않을 때도, 나는 어디선가 그를 느낄 수 있었고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
- 로버트 제임스 윌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 -
퀴퀴한 먼지 냄새가 폴폴 나는 창고 안에 처박아두고 있던 물건들을 거실로 가지고 나오는 강태..
영화와 관련된 서적이나 VTR 테입, 포스터 따위가 대부분이다.
예전에는 볼 때마다 새로운 감동에 가슴 설레게 하던 것들이 이제는 그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한 채, 강태의 씁쓸한 눈초리를 받고 있다.
성의 없는 손길로 두꺼운 책 몇 권을 들춰보고 배우들의 사진첩이나 테입들을 뒤적거리던 강태가
문득, 아무 라벨로 부착되어 있지 않은 공테이프 하나를 집어든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기억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표정이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슬퍼하는 듯도 한 강태의 얼굴을 핼쓱하고 핏기가 가셔 보인다.
아주 심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 같다.
약간 허둥거리는 동작으로 VTR에 테이프를 삽입하고 화면을 주의 깊게 응시하는 강태..
직사각형 모양의 액정을 꽉 채우는 영상은 아이보리색 정장 차림으로 현관에 들어서는, 재준이 귀가하는 모습이다.
[ 와아~ 드디어 재준이가 일을 끝내고 집에 왔습니다!
강태가 하루 종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시죠~?
자- 재준씨, 12시간만에 집으로 돌아오신 소감부터 말씀해 주세요~ ]
쑥스럽게 피식 피식 웃으며 카메라를 피하는 재준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으며 재잘대는 자신의 목소리가 눈물이 왈칵 솟구칠 만큼 청명하고 화사하다.
그리고 도망치듯 카메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강태에게 그만하라고
타박을 주는 재준의 웃는 낯빛이, 보고 있는 도중에도 그리워진다.
그를 정말 사랑하나보다...
[ 오예~ 재준이가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고 있습니다. 몸매가 예술이죠? 특히 재준이의 허리는 애인인 제가 봐도 기가 막힙니다!
오올~ 저 하얀 피부, 정말 죽이지 않습니까?? 이야~~ 환상입니다, 환상~! ]
- [ 야! 카메라 안 치울래?! 쪽팔리게 옷 벗는 건 왜 찍어? 너 자꾸 그러면 홀딱 벗겨서 침대에 묶어놓고 찍는다- ]
[ 푸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난 이 테이프 충의회 애들한테 쫙 돌려버려야지~~]
상반신을 알몸으로 노출한 채 반쯤은 웃으며 반쯤은 불만스런 기색으로 강태에게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을 하는 재준과,
그런 그를 놀려대며 계속 장난치기에 열중하는 강태..
아직도 익숙하기만 한, 두 사람만의 향연의 장소이자 단란한 보금자리였던 침실의 풍경이 기어이 강태의 눈물샘을 터뜨려 버린다.
그를 정말 사랑했었다...
[ 지금은 새벽 1시구요, 재준이가 음악을 들으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죠?
이 노랜 태현이 형이 만든 곡이래요~ 재준이가 듣고 평가를 해 준다나요?
재준이는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조금씩 공부했었는데, 충의회를 맡고 나서부터는 전혀 못하고 있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준이는 엄청 바쁘거든요~ ]
- [ 강태야, 조용히 해. 음악 소리가 흐트러지잖아... ]
[ 으휴~ 하여간 싸가지 없게 말하는 건 알아줘야 돼... ]
컴퓨터 앞에 앉아 편안한 티 셔츠에 청바지를 걸치고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는 재준이 종알거리는 강태에게 한 마디 하자
금새 입술을 삐죽이고 궁시렁대는 자신의 모습이 화면에 비치지는 않다고 뇌리에 선한 강태였다.
'강태야'하고 그의 입에서 발음되는 자신의 이름이 심장을 쥐어뜯는 것 같다.
그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
[ 자기야~ 아-해봐! 이거 내가 연구해서 개발한 요리란 말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새우야! ]
- [ 네가 만든 거라고? 진짜?? 아아~ ]
[ 맛 있지, 맛있지?? 세 시간 걸렸어, 이거 하느라...]
여러 개의 그릇을 벌려놓고 나란히 앉아서 저녁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을 필름에 담는 카메라..
강태는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며 수선스럽게 이것 저것을 재준에게 먹여주고,
재준은 단조롭지만 냉랭하지 않은 얼굴로 강태의 물음에 다정스레 대꾸하며
그가 입안에 넣어주는 음식을 받아 먹기도 하고 가끔씩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재준의 미소가 눈알을 뽑아내는 듯한 고통으로 강태를 엄습한다.
그를 사랑한다...
[ 이재준 눈은 강태 꺼니까 다른 사람한테 눈길 주면 안 되고,
이재준 코도 강태 꺼니까 다른 사람 향기에 홀리면 안 되고,
이재준 입도 강태 꺼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이랑 키스하면 안 돼.
그리고 이재준 팔은 또 역시나 강태 꺼니까 다른 사람 안아주면 안 되고.... ]
- [ 야, 어디까지 할래? 새겨 들었으니까 그쯤 해 둬라. ]
[ 여자들이 너만 보면 눈에 불을 켜니까 그렇지. 돈 많고 쌔끈하니까 다들 몸이 달아서... ]
- [ 너야말로 조심해. 넌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난리 잖아. ]
[ 그러게 누가 나처럼 이쁜 애인 옆에 두래? ^^; ]
- [ 내가 뭐 너 이쁜 거 보고 좋아하는 거냐...? 그거 그만 찍고 이리 좀 와 봐... ]
침대에 두 다리를 뻗고 느슨하게 누운 자세로 TV를 보다가 강태에게서 카메라를 뺏는 재준..
화면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선명한 파란색으로 바뀌어 정지상태를 나타내고,
강태는 여전히 브라운관에 시선을 둔 채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오열한다.
눈물만 가지고서는 감당이 되지 않아 입밖으로까지 쏟아져나오는 흐느낌은 투명하지도 않고 조용하지도 않지만,
게걸스럽게 토해내는 그의 울부짖음과 두 뺨을 뒤덮은 물줄기 속에 진짜 강태가 숨어 있다.
꿈을 버릴 수 없는 강태,
새로운 꿈으로 대체할 수 없는 자신의 최고의 영화 '이재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강태,
이재준의 침실과 침대를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강태.
"나 다시 갈래.. 다시 가고 싶어... 너한테 가고 싶어, 재준아..."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그 손으로 가슴을 탕탕 두들기며 겨우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는 강태..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재생되는 그와의 시간들이, 그 추억들이 그렇게 또 한 번 강태를 되돌려 놓는다.
단념하라고 했던, 잊으려고 했던 모든 행동과 결심과 생각들을 수포로 만든다.
화면 속의 모습만 보고도 이토록 주체할 수가 없는데...
당장이라도 그가 눈앞에 있다면 엎드려서 간원할 게 뻔한데...
"재준아...재준아....흐윽...재준아....이러지 말자, 우리... 제발 이렇게 살지 말자..."
바닥에 한 팔을 짚고 그걸로 체중을 지탱하며 무참하게 꺾인 목과 어깨를 들썩이던 강태는
최면술이라고 홀린 것처럼 불현듯 벌떡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는 걸음을 내딛어 전화기가 놓인 곳으로 향한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면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강태..
"말 할 거야... 재준이한테 말해야겠어... 이러지 말자고 얘기해야겠어.
그래, 그러자... 그러면 될 거야. 그렇게 얘기하면 될 거야, 재준이한테..."
생명력을 상실한 물체처럼 쇼파에 덩그러니 앉아 수화기를 귀에 붙이고 공허한 눈동자를 묘한 광기로 물들인 채
재준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는 강태는 완벽하게 실성한 사람도 아니고, 편집증 환자는 더욱이 아니다.
그의 흐느낌을, 그의 목마름을, 그리고 그의 무모함을 보통 사람들을 '집착'이라고 일컬을 지 모르지만.
그는 이재준을 사랑하는 것 같고, 사랑했었고, 진실로 사랑하고 있고, 그리고 또한 이재준을 사랑한다.
흔하고 세속적이니 단어일지라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여보세요?"
허스키하면서도 어딘가 간드러지는 교태가 섞인 여자의 음성이 고막에 부딪혀오자, 강태의 표정이 텅 비어 버린다.
까만 눈동자를 어지럽히던 광풍은 칙칙한 그림자로 둔갑하여 그의 시야를 꺼뜨린다.
- "여보세요? 말씀 하세요~"
이건....승자의 목소리군.
이재준이 아무런 부담 없이 곁에 둘 수 있는 평범한 여자의 살가운 음색.
이재준이 현재, 지금 현재 필요로 하는 '괜찮은' 여자의 밝은 음성.
강태의 얼굴에 천천히 서늘한 실소가 퍼져 나간다.
눈물이 대롱대롱 맺힌 눈매가 아스라이 휘어지고 귓가에 밀착시켰던 수화기가 힘없이 제자리에 안착한다.
소리 없이 시작된 강태의 웃음이 방금 전의 흐느낌처럼 입밖으로 터져나오자,
내장이 온통 밖으로 빠져나와 몸 속이 횡덩그레 비워진 느낌이다.
아무 것도 남겨진 것 없이 살아온 건 꽤 오래전부터인데....
"씨발... 하필 이 여자가 받을 게 뭐야..."
손바닥으로 눈가를 쓱 닦아내며 푸념처럼 가볍게 뱉어내는 자신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머릿속을 떠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신에게 더 할 수 없이 웃음이 난다.
이별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빛이 바래는 듯 하다.
이별마저 빛바랜 관계가 소생의 싹을 지니고 있을 리는 없겠지...
결국 마찬가지다. 나는.... 기다린다.
- "저기... 아까 집으로 전화가 왔었는데..."
재준의 코트오 웃옷을 받아주며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꺼내는 혜련에게 그는 계속 말하라느 눈빛을 보낸다.
혜련은 잠시 무언가 생각해 보다가 재준의 눈동자게 시선을 맞춘 후 다시 입술을 뗀다.
"말 안 하고 그냥 끊어버리는 전화였거든..? 근데...강태인 것 같았어, 내 느낌에..."
반사적으로 확대되는 재준의 까만 동공이 조금은 당황스러워서 혜련은 침을 꼴깍 삼키고 일부러 그의 얼굴을 외면한다.
그리고 재준이 벗어놓은 빨래 거리들을 챙겨 들면서 말을 잇는다.
"숨소리가...울고 있는 것 같았어.
무슨 사연이 둘 사이에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빠가 그 사람 너무 힘들게 하는 거 아니야?
저번에 집에 찾아왔을 때도 그렇게 보내더니..."
"네가 참견할 일 아냐. 게다가 걔랑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까 들춰낼 거 없어."
"오빠한테는 지나간 일일지 몰라도, 그 사람 생각도 해 줘야지.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나 피곤해. 그 얘기 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일단락 짓는 재준에게 한 번 더 화두를 내놓을 자신은 없어서 혜련은 아예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재준을 공략하기로 한다.
좀 더 솔직하고 꾸밈 없는 말을 가지고.
"난 뭐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 나도 오빠한테 이런 얘기 하는 거 자존심 상한다구.
그래도 불편해 죽겠는데 어쩌란 말이야?
아무리 내가 오빠한테 특별한 감정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서로 상처는 주지 말아야 되는 거 아냐?!
같이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 벌써부터 부담스러워...!"
"대체 뭐거 어떻다는 거야?! 도대체 뭘 바라는 건데??
내가 너한테 내 속을 일일이 다 까발려서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왜 그런 식으로 서로 피곤해 지려고 하냔 말이야!!"
"누가 그런 걸 바란다고 했어? 난 단지 꿩 대신 닭이라는 식으로 들어 앉혀져 있는 게 짜증난다는 거야!
그래도 나는 오빠한테...오빠한테 정 붙이고 있는데...
....그거 알아..? 오빠가 잠들기 직전에 항상 누구를 부르는지...?
자는 도중에도 나를 쓰다듬으면서 오빠가 하는 말이 뭔 지...알기나 해..?"
(135 )
붓을 들고 유심히 캔버스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혁수는
문득 손가락 끝에 따끔거리는 한기가 느껴지자 팔레트와 붓을 내려놓고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호호 김을 불어본다.
으스스하게 옷깃을 파고드는 추위가 제법 매서워서 자꾸만 몸을 옹송거리느라 그림에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흘깃 눈길을 돌려 벽시계를 보니 12시가 훨씬 지나버린 후였다.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
아무도 없는 학원에 혼자 남아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 혁수인지라 새벽 2,3시가 되어서야 귀가하는 게 보통이었다.
또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는 주혁이 곧잘 들러서 둘만의 밀회의 장소로도 이곳이 자주 쓰여지곤 한다.
[Rrrrrr~~~]
주머니 안에서 울려나오는 벨소리, 주혁일 게 뻔했다.
아마 혁수를 만나러 이 쪽으로 올 모양이다.
"여보세요.."
- "혁수야? 너 아직 학원에 있지?"
"어~ 올려구??"
- "응, 거의 다 도착했어. 배 안 고파? 뭐 사 갖고 갈까??"
"어, 빵 사 와라. 배고파~~"
- "알았어~ 지금 갈게~~"
전화를 끊고 살며시 엷은 웃음을 띄는 혁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에 붙어있는 전신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어쩐지 조화가 맞지 않는 듯한 옷차림새에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런 자신에게 실소가 배어나온다.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인데,
마주 대할 때마다 새삼스럽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지고 수선을 피우는 자기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
주혁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그의 검푸른 눈동자 속에서 뿜어져나와 혁수를 옥죄던 그 두려움은 지금의 설렘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한참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며 피부에 돋아난 조그만 뾰루지에 신경질을 내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 때문에 한숨을 내쉬면서 혁수가 혼자서 소동을 부리고 있을 때,
학원의 유리문이 젖혀지며 말쑥한 정장 차림의 주혁이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맞닿는 두 사람의 시선 사이로 청아한 미소가 스며든다.
"왔어? 밖에 엄청 춥지~?"
"야아~ 장난 아니다, 오늘... 올 겨울 들어서 오늘이 제일 추운 것 같아."
손바닥을 뺨에 갖다대며 어깨를 움찔거리는 주혁에게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가서는 혁수..
주혁은 장난기 다분한 웃음을 퍼뜨리며 일부러 세게 혁수를 끌어안아 그의 볼에 자신의 볼을 마구 비벼댄다.
차가워 죽겠다고 혁수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채이자
그게 더 재밌다는 듯이 얼음장 같은 손바닥을 혁수의 옷 속으로 집어넣어 얼마간 그를 더 괴롭히던 주혁..
그를 떼어놓으려고 버둥거리던 혁수가 항복하는 듯한 몸짓으로 품 속에 안겨오자
씨익- 시원스런 미소를 그리며 부드럽게 혁수를 보듬는다.
"으휴~ 어째 나날이 어린애가 되가냐, 장주혁..."
"좋으면서 괜히 그래, 안혁수..."
"하나도 안 좋아. 빵이나 내 놔, 배고파 죽겠어."
"밥을 제때 먹어야지... 이렇게 맨날 늦게 군것질하니까 너 요즘에 살 쪘잖아.."
"..............안 먹어."
"쿡... 알았어, 알았어... 야, 넌 살 쪄도 이뻐. 그럼~ 이쁘고 말고~ 누구 마누란데..."
"씨이... 괜히 결혼했나 봐. 결혼한 다음부터는 맨날 구박이야..."
도톰한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혁수에게
가벼운 베이비키스를 해 주고 봉투에서 여러 종류의 빵을 꺼내 내미는 주혁..
혁수는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은 후 빵 대신 음료수부터 집어든다.
꼴깍꼴깍 움직이는 혁수의 목울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혁의 얼굴이 좀전의 장난기를 몰아내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약간은 음울하게 가라앉는다.
입 속에 빵 조각을 넣고 우물거리는 혁수의 옆 모습이 주혁의 검푸른 동공에 판화처럼 찍히고,
그와 동시에 주혁의 입술은 밝다고만은 할 수 없는 미소를 피워낸다.
그에게 걱정을 끼치게 될 이야기를 해야하는 사실이 짜증스럽다.
"혁수야."
반사적으로 주혁을 돌아보는 그의 눈길이 부담스러울 만큼 천진해 보여서 주혁은 순간 호흡이 불안정해진다.
동그랗고 순박한 갈색 눈동자가 흐려지는 걸 고스란히 지켜보는 것처럼 답답하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너한테 먼저 얘기했어야 하는 건데... 이제서야 말해서 미안하지만..."
".....뭔데 그래...?"
어쩌면 혁수도 적응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는 숱한 장애들에 익숙해져 있을 지도 모르겠다.
주혁이 그렇듯이 혁수 역시 그런 것쯤은 넉넉하게 받아넘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를 안심시켜 보는데,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이 더 같잖다.
"나...모르핀 전과 때문에...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미국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다.."
자신을 떠났던 그를 환상 가운데에서라도 느끼기 위해 몸부림 쳤던 과거가 둘의 미래를 훼방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해진다.
"그래서... 재준이한테 도움 받아서... 멕시코로 통해서 가려구..."
".....혁이 너...설마 밀입국을 하겠다는 거야...?!"
구토가 치밀어오를 만큼 메스껍고 끔찍한 광경을 목도한 사람 마냥 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주혁에게 반문하는 혁수..
갑자기 그의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진 것 같은 서글픔에 주혁의 고개가 저절로 떨구어진다.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주혁의 의미를 알 수 있기에, 혁수의 눈망울에는 금새 어릿어릿한 물기가 고이기 시작한다.
"아니, 그, 그게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안 돼, 절대 안 돼!!"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장주혁! 너도 알잖아. 밀입국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너 몰라??
학교는 커녕 제대로 된 일자리 얻기도 힘들어. 그야말로 막노동이나 하면서 살아야 된단 말이야!
그러면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래, 알아. 하지만 방법이 그것 밖에 없어. 취사선택할 문제가 아니라구..."
흥분해서 고함을 쳐대는 혁수와는 대조적으로 주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신 더 묵직하고 평이하다.
그만큼 한치의 흔들림도 없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확고한 의지로 뭉쳐 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피하려고 했다면 애시당초 혁수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나머지 전부를 버리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처음부터 막혀있었어, 우리는...
처음부터 금지되어 있었고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았어.
그게 깨지기까지 숨죽였고 그게 부숴질 때를 기다렸어.
하지만 우린 벌써 알았잖아. 우리가 먼저 나서서 깨뜨리고 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결코 누가 해주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또...저절로 변화되는 그런 일은 더더욱 있을 수가 없다는 거 우린 정말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잖아?
쉽게 생각했던 거라면 이제부터 생각을 바꿔야 해. 쉽지 않은 게 당연한 거야.
그리고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난 할 거야. 난 우리가 꿈 꾸고 계획한 대로 이루고 말 거야.
포기 안 해. 널 포기하지 않았듯이 우리의 미래도 포기하지 않아, 나는..."
주혁의 음성이 계속 밑으로 낙하하여 발 아래로 흐르는 듯한 느낌,
주혁의 눈동자 속에 촛불이 약하게 일렁이는 듯한 느낌,
주혁의 붉은 입술이 엄마의 자장가처럼 포근하고 다사로운 노래를 흥얼이는 듯한 느낌,
그리고 가장 강하게 혁수를 얽매는... 주혁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
혁수의 심장이 토해낸 뜨거운 피가 혈관을 질주하는 게 주혁에게도 느껴지고,
혁수의 가냘픈 어깨가 바르르 소스라치는 게 두툼한 점퍼 아래에 있어도 주혁에게는 보이고,
혁수의 뺨을 타고 구르는 이슬방울이 투명하기보다는 붉은 빛으로 보이고,
또한 무엇보다 주혁을 안타깝게 하는 맹세는...
이번이 꼭 혁수의 마지막 눈물이 되게끔 하리라, 이전에도 무수히 되새겼던 다짐.
"처음부터...운명은 우리 편이 아니었어.
운명이 우리 편이었다면 너와 내가 같은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을 거고, 한 형제로 묶이지도 않았을 거야.
더럽게 꼬였어. 정말 더럽게 꼬일대로 꼬여서 도저히 풀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어.
그래도 여기까지, 이만큼 왔잖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울었는지 생각해 봐...
매달렸던 나도, 거부하면서 도망치던 너도 똑같이 아팠잖아. 나도 그거 안단 말이야...
나만 힘들었었다면 그래도 포기할지 몰라. 그치만 너도 아팠어. 너도 울었어.
난 그것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어. 네가 흘렸던 눈물이 허투로 돌아가는 걸 참을 수가 없어.
내가 꼭 보상해 주고 싶어. 네 눈물...네 고통...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니까 나만이라도 보상해 주고 싶단 말이야,
혁수야... 난 정말 꼭 그러고 싶어. 아니, 그래야만 해."
"......난 네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랬기 때문에 미국에 가고 싶었던 것 뿐이야, 혁아.."
"이 바보야! 내가 원하는 삶이 뭔 지 아직도 모르냐? 안혁수 진짜 바보 아냐??
내가 왜 사는데... 내가 뭐하러 그런 식으로까지 미국에 가려고 하는지 몰라?
혁수야, 네가 1순위야. 항상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절대불변의 진리라구..."
주혁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혁수야.. 나 믿고...같이 가 주는 거지...?"
주혁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혁수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걸 그는 알까...
그걸 알지 못하면서도 저렇게 말하는 주혁은, 진실로 내게만 주어진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조차도 교만이 된다면 신께는 기도로 속죄하고, 목숨 같은 연인 주혁에게는 지금의 입맞춤으로 속죄해서 사유를 받고 싶다.
조용하고 신중하게 이어지던 키스가 끝나고 혁수와 주혁의 눈길이 다시 맞닿았을 때,
그 사이로 스며드는 건 아까와 같은 미소가 아닌 서러운 흐느낌이다.
(136 )
"무슨 소리야...?!"
고운 미간에 어울리지 않는 주름을 세우며 잔뜩 찡그린 낯빛으로 반문하는 재준이
이상하게 가엾다고 느껴져서 혜련은 화르륵 타올랐던 분노의 화염을 지그시 억누른다.
핼쓱하게 드리워진 음영 때문에 더욱 초췌해 보이는 재준의 모습이 낯설다.
항상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자의 오만하고 당당한 자태로만 비춰지던 그가
이렇게 휘청거리는 모습은 신선하기는 커녕 오히려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그 남자 이름이 강태라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 뒷조사라도 하고 다녔을 줄 알아??"
"그게 대체...."
"아직도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내치는 거야? 날 끌어당긴 이유는 또 뭐고??"
".................."
"나한테도 자존심 있어, 오빠. 곁가지처럼 따라붙어 있는 거 질색이야.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면 최소한 내 자존심 건드리는 건 삼가해 줘.
오빠는 내가 술집이나 다니던 년이라고 무시하고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옴팡지게 쏘아부치고 꺾임 없는 눈빛으로 재준의 옆모습을 직시하던 혜련이 짧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망연한 눈동자로 술잔만 바라보던 재준은 풀썩 고개를 떨구며 테이블 위에 엎드려 버린다.
가느다란 팔을 겹쳐 놓고 그 위에 얼굴을 묻으며 귓가에서 자꾸 윙윙거리는 정체불명의 소리들을 차단하려고 이를 꽉 깨물어 본다.
그애를 다시 데려올까... 다시 내 곁에 둘까... 여러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해 버릴까...
그애를 가까이 느끼며 살까, 그러다가 같이 죽어버릴까, 이대로 그만 두는 게 현명하겠지...
그가 전화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급소에 강펀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또 한 번 둔탁하게 온 신경을 감싸고
아득하게 깊은 곳에서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상념들이 목구멍을 막아올 때,
죽는 게 제일 편할 것 같다는 바보 같은 생각으로 빠져들어 갈 때,
차마 울지 못하는 나 대신 강태가 울까... 강태가 아파할까...?
"........진짜 보고싶다..."
허공 중에 흩어지는 침잠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저주스럽다.
수 백 번쯤은 되뇌었던 혼잣말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렇게 변해가는 중이다.
혹시 끝낼 수 없는 건 아닐까, 헛수고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이런 기대 마저도 위선이라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될까...?
".......진짜로 나 못 잊고 있나 봐..."
희뿌연 눈물을 듬뿍 머금고 급박하게 일렁이던 까만 눈동자가 틀림없는 강태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하던 향내음이 강태가 아닐리가 없었다.
스스로를 안일하게 내버려두던 의심을 단번에 깨뜨리는 그 고백은 강태에게서부터 나왔다.
강태의 예쁜 얼굴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던 투명한 망막은 바로 재준의 것이었다.
그 때 제자리를 이탈해서 온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심장도 재준의 것이 분명했다.
절망하는 방법조차 망각한 채 고꾸라지던 영혼은 강태와 재준이었다.
"....또 다시 돌아오면...그 땐 정말 자신없어..."
- 관절이 시큰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몸을 웅크리고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은 그 자세로 몇 시간 째 가만히 앉아있었던 것 같다.
창밖에는 벌써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아서 눈꺼풀을 들고 시야를 틔우는 것을 몇 시간 째 미루고 있는 강태..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청세포를 마비시킨 채 조각처럼 고정되어 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피부로 느껴지는 감촉까지 무시해 버려도
머릿속을 떠도는 수만가지 생각들은 어떠한 의지적 노력으로도 분해할 수가 없다.
가슴을 휘젓는 감정들에도 이젠 좀 무뎌지고 싶은데...
"뭐하고 있어..?"
서글프게도 재준의 것보다 더 익숙하게 닿아오는 문환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이어지던 정적을 가르자 강태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들리며 문환과 눈을 맞춘다.
분명한 초점을 내던져버린 강태의 눈동자가 갑자기 섬뜩하게 느껴져서
문환은 약간 질린 듯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어 들인다.
그리고 파란 정지상태 그대로 켜져 있는 TV 화면과 바닥에 널린 테잎들을 힐긋 바라보며 심드렁한 어투로 묻는다.
"한동안 영화 안 보더니...공부 다시 하기로 한 거야?"
강태는 짧게 '아뇨'라고만 대꾸하고 생기 없는 무의식적은 동작으로 스르륵 일어서서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테잎들을 정리하고 버튼을 눌러 TV를 끈다.
부자연스러운 하얀빛으로 표백된 듯한 강태의 얼굴이 못내 찝찝해서
문환은 침실로 향하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한결 다정스러운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연다.
"얼굴이 안 좋아보이는데... 어디 아픈 거야? 오늘은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면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기분이 좀 안 좋아서 그래요."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아무 일 없었어요. 얼른 씻으세요.."
문환이 건넨 겉옷을 받아 옷장에 걸며 녹음된 멘트를 반복재생하는 라디오처럼 건조하게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강태..
적보랏빛 그늘이 드리워진 새까만 눈동자와 풍성한 속눈썹 사이로
도무지 빛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강태의 모습이 짜증스러운 죄의식을 불러 일으키자
문환은 조금은 강압적인 어조로 말을 뱉는다.
"같이 하지.."
거절할 줄 알았던 강태가 의외로 선선히 문환의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선다.
의아해진 그는 잠시간 옷을 벗어내리는 강태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윽고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작게 흔들며 욕조 안에 채워진 물에 몸을 담근다.
공중으로 퍼져나가는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아스라이 보이는 강태의 육체의 곡선들이 더 자극적으로 시신경을 주무르자,
문환은 이끌리듯 팔을 내밀어 그를 욕조 안으로 끌어 당긴다.
지친 몸짓으로 문환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허리를 휘감는 그의 팔 위에 손을 올려 놓은 채 또 눈을 감아보는 강태..
더 이상 유백색의 청초한 느낌이 아닌 다른 이의 숨결에 길들어 가는 자신을 방치할 수 없다.
돌아가자.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가 보는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을 죽여버리자.
나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결심했던 것은 결국 한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렇게 의도하고 있었던 것일 게다.
"......부탁이 있어요.."
승자가 될 수 없다면, 끝끝내 물러나야 한다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혼자 시들어가는 비참한 몰골로는 단 1초도 더 살아갈 마음이 없다.
완전히 매듭 짓자. 기대하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자.
부딪히자.
"보내주세요, 그 애한테. 댓가가 필요하다면 치르겠습니다. 제발, 이제 절 놓아주세요."
"......무슨 소리야..."
강태의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돌려 앉혀 똑바로 바라보며 살벌한 음색을 발하는 문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강태의 눈동자를 온통 뒤덮었던 적보랏빛 구름이 어느새 말끔히 걷혔다.
흐릿한 기체입자 틈새로 선명하게 반짝이는 그의 까만 심연이 은근한 공포로 문환을 얽어 맨다.
"아시잖아요. 회장님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재준이랑 제가 어떻게 엮여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놓아달라구요. 이젠 만족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 때와 지금은 달라."
"아무 것도 모른다구요?? 당신이야말로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단정짓지 말아요!
달라졌다구요?? 대체 뭐가 달라졌다는 거에요?!
난 그 때처럼 여전히 죽을 것 같기만 한데...!! 숨 쉬는 것 하나도 힘들다구요!!!"
첨벙 튀어오르는 물방울 속에 강태의 눈물이 섞이고,
여린 미성으로 고함을 쳐대는 그의 입술은 평소의 요염하고 도발적인 매력을 휘발시킨 채 너무 빠르게,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그 광경이 소름끼치도록 따갑게 박혀 들어서 문환은 불에 데인 듯 벌떡 일어나 몸에 묻은 물기를 닦지도 않고 대충 가운을 걸친다.
그런 문환은 젖은 눈으로 망연히 올려다보던 강태..
문득 아주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그의 뒤를 쫓아 침실로 발을 내딛는다.
두 사람이 이동한 경로를 따라 물방울이 점점이 뿌려진다.
"대답해 주세요. 제 얘기 아직 안 끝났어요."
위스키 병의 마개를 돌리며 강태의 시선을 외면하는 문환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그를 재촉하는 강태..
새하얀 나이트 가운에 폭 안기듯 감싸인 강태가,
보송보송한 살결과 매끄러운 머리카락과 유려하고 관능적인 그의 목선이 침범해서는 안 될 성역 같은,
보호해주어야 할 연약한 생명체 같은 생각이 들자 문환은 또 한번 정수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에 화가 나 버린다.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확 집어던지며 크림색 벽지를 갈색으로 물들이는 문환..
그의 난폭한 행동에도 강태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꼿꼿이 서서 아까보다 훨씬 단연한 눈빛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알아요, 당신도 불쌍한 사람이라는 거...
당신을 미워해서가 아니에요. 단지...내 꿈을 버릴 수 없어서 그래요..."
(137)
열쇠가 부드럽게 구멍 안으로 맞춰 들어가며 육중한 철문의 틈새를 벌려 놓는다.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희끄무레한 달빛마저 차단되어
암흑만이 짙게 깔린 실내의 풍경이 불현듯 낯설게 주혁의 시야를 장악한다.
바닥에 떨군 눈길을 그대로 놔둔 채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주혁은
2층에서 내려오던 혜련과 마주치자 그녀보다 더 어색한 웃음으로 하얀 피부를 물들이며 멋쩍게 입술을 연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재준이는 방에 있어요...?"
"아아.. 아뇨.. 오빠 2층에서 술 마셔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예에..."
억지스레 떠올렸던 웃음기마저 금새 거두어들이고 도망치듯 주혁을 지나치는 혜련..
얼핏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듯한 느낌에 주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 다급한 걸음걸이로 재준에게로 향한다.
홈 바의 테이블에 두 팔을 겹쳐 올려놓고 그 위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엎드려 있는 재준을 발견하자 주혁의 미간이 단박에 흐트러진다.
"재준아.."
어쩐지 나무라는 듯한 훈계조의 어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주혁의 목소리에
재준이 아주 충격적인 말을 들은 사람처럼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핀다.
분명, 무언가 착각한 모양이다.
"피곤하면 내려가서 쉬지...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어어...형 왔구나... 혁수형 만나고 온 거야..?"
"응.. 밀입국하는 거...얘기했어. 네가 도와준다는 것도..."
회색 하프코트를 느릿한 동작으로 벗어 아무렇게나 걸쳐놓고 재준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그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 짧게 한 모금 들이키는 주혁..
이어서 담배 한 개피를 건네는 재준에게 눈짓으로 고맙다는 표시를 하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묻는다.
"혜련 씨 얼굴 안 좋아 보이던데... 둘이 싸웠어?"
"............"
"....강태 때문에...?"
빨아들이던 담배 연기를 폐까지 내려보내지 못하고 어설프게 분사해내며
재준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찡그리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을 비춘다.
상대방을 굉장히 미안하게 만드는 그런 표정을.
"강태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지. 혜련이가 화내는 것도 이해해. 난 항상 이 모양이라니까..."
또르륵 소리를 내려 글라스 안으로 떨어지는 위스키의 색깔이 문득 신경질 나게 답답해 보인다.
주혁은 단숨에 한 잔을 깨끗이 비워내고 씁쓸하게 입안을 돌아다니는 술의 뒷맛을 일부러 꼼꼼히 음미해본다.
누군가를 흠씬 두들겨 주고 싶은 것은 불안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벌써부터 혁수가 보고 싶어서일까...?
미련한 자책으로 자신을 우습게 전락시키는 재준의 모습이 인정하기 싫은 동질감을 유발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혁수형이 뭐래..? 밀입국하는 거 말이야..."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음이 선연히 드러나는 재준의 어투에
주혁은 속으로만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고 시선을 저만치 앞쪽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버릇처럼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그다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을 쏟아 놓는다.
"그냥...울더라..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 잘못도 아닌데 매일 미안하다고 해.. 난 혁수한테 고맙기만 한데 말이야.
안혁수...정말 너무 착해. 가끔씩 부담스럽다고 느낄 만큼."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는 재준은 주혁의 이야기를 고막으로 통과시키면서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영혼의 한 자락을 맞닿게 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의지를 떠나, 어쩔 수 없는 본능을 가지고.
그런 재준을 또렷하게 엿 볼 수 있으면서도 오히려 가슴 아프게 미소지을 줄 아는 주혁은 더 많은 상처와 연단을 거친 사람일지도 모른다.
고통의 무게와 정도를 가늠하는 것은 실상 부질없는 짓이지만.
"출국 날짜는 언제쯤으로 잡을까? 혁수형보다 형이 먼저 들어가 있어야 하잖아."
"응.. 혁수는 2월 초쯤에 출국할 예정이던데..."
"그럼 여기 상황도 정리하고 그래야 하니까 내달 25일 전후로 잡는 게 좋겠다.
밑의 애들하고 인사도 나눠야지... 정도 많이 들었을 텐데..."
"너한테도 그렇고, 애들한테도 면목이 없다. 사실, 이렇게 떠나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됐어. 어차피 형은 이 바닥에 오래 있을 사람 아니라는 거 애들도 다 알고 있는데, 뭐... 그동안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형한테 미안한 거 참 많다. 정말 고맙고..."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아냐. 형이 나 많이 도와줘서 충의회에 얼마나 보탬이 됐는데..."
자신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 조직의 이름이
갑자기 못 견디게 우스꽝스럽게 들리자 재준은 반사적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며 급하게 술잔을 가져간다.
그리고 서늘하게 척추 한 가운데를 후벼파는 주혁의 말을, 더욱 확실해지는 의식 속에서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그래...이젠, 재준아...이젠...다른 사람보다 너 자신을 도와 줘.
네가, 네 자신을 도왔으면 좋겠다."
- "어휴~ 눈이 엄청나게 오네... 지금 나가면 걷기 힘들겠다. 눈 좀 그치면 가."
베란다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연수에게 나지막히 일러주는 태현..
수업을 마치고 가방을 챙기던 연수가 태현의 말에 약간 주저하는 눈빛을 보이다가 홍조 띈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다.
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가볍고 과장된 어조로 다시 입을 연다.
"아아~~ 배고프다! 연수야, 배 안 고파? 라면 먹을래??"
"아, 아니요. 괜찮아요."
"왜? 살 찔까봐?? 야, 너 정도면 딱 보기 좋아. 그냥 먹어, 임마~"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는 연수가 아직까지도 생소해서 태현은 이내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고 돌아선다.
그의 뒷모습에서 자신이 지우고자 결심한 한 여자의 영상이 머무는 것을 감지하자, 연수는 풀이 죽고 만다.
역시, 힘들다. 태현에게 묻고 싶다. 지금 당신은 나와 있는 게 편안하냐고.
"에이씨~ 라면이 없잖아? 배고파 죽겠는데 냉장고는 텅텅 비었고...
진짜, 빨리 장가를 가던지 해야지 궁상맞아서 못 살겠네~~"
불만스럽게 비죽 튀어나온 입술로 연신 투덜거리며 냉장고, 찬장 등을 구석구석 뒤져보지만 애꿎은 먼지만 듬뿍 뒤집어쓰는 태현..
결국 야참 거리를 찾던 시도를 포기하고 거실로 나와 쇼파에 털썩 몸을 기대며 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연수는 늘 그렇듯 다소곳이 앉아서 태현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물론 그의 신경이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을 때에만.
이리저리 채널을 바꾸다가 요즘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룹의 뮤직 비디오가 나오자 태현은 손가락을 멈추고 주의 깊게 화면과 음악에 몰입한다.
색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 남자들이 차례로 화면을 채우며 노래를 하고 랩을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을 현란한 댄스음악이 시끄럽게 장식하는 동안
아무 말이 없던 태현이, 고개를 홱 돌려 연수를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생뚱 맞은 질문을 던진다.
"연수 넌...왜 음악을 하려고 하니?"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기에 연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옷자락만 조물락거리다가
어렵사리 태현과 눈동자를 맞추고 작은 목소리로 띄엄띄엄 한 글자씩 새어보낸다.
"글쎄요... 음악이 좋으니까요. 평생 음악하면서 살면 행복할 것 같아요."
"....음악 하나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지금은 그래요. 음악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끼거든요."
"너에겐...음악이 인생의 첫 번째인가 보구나..."
암갈색 눈동자를 연수의 얼굴에서 TV의 화면으로 이동시키며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리는 태현이 손닿을 수 없는 곳에 격리된 사람처럼 느껴져서, 연수는 서둘러 말을 잇는다.
그렇게 다시 태현을 붙잡아 주려 한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잘라 말 할 수는 없어요.
전...제가 갖고 있는 것들에 순위를 매기지는 않아요.
그저 저에게 있는 것들을 둘러보고 받은 것들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난 행복하구나...' 이렇게 내 자신한테 얘기해주는 거죠.
그러면 적어도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잖아요."
"쿡... 연수, 철 들었다? 무슨 애가 인생 다 산 사람 같이... 네가 나보다 낫다, 야..."
정확한 의미를 집어내기 어려운 웃음을 매달며,
벗어버리는 방법조차 아예 잊어버린 장난기를 동반한 채 농담을 가장한 진심을 이야기하는 태현..
그러나 연수는 형식적으로도 웃어 보일 수가 없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그를 마주보고 있는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강렬하게 흔들리는지 그에게 알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어려서 자신을 위장하는 기술 따위는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저...한 가지 여쭤봐도 되요...? 꼭...대답을 듣고 싶어요."
"........??"
"선생님께...그 사람은 첫 번째였나요?
선생님의 인생에서 제일 첫 번째에 자리잡고 있었나요?"
그녀를 향한 사랑의 깊이가, 그녀를 버리지 못하는 추억의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그걸 따져 묻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들어갈 자리가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인지,
아니, 태현이 예전의 그 함박웃음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인지 그걸 알고 싶을 뿐이라고....
이것도 가증스러운 말장난에 불과한 걸까.
"모르겠어. 그런 걸 느끼고 생각하기도 전에 세라를 빼앗겼으니까...
사랑을 나눈 시간보다 사랑을 확인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훨씬, 훨씬 더 길었다고 하면 말이 되려나...?"
"'사랑'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쓰시네요..."
"그럼... 세라가 가르쳐준 건데... 세라한테 배웠는데..."
너무 지쳐서 이젠 눈물을 퍼 올리지도 못하는 태현의 눈망울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연수는 가슴속으로 태현의 영혼을 지배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메아리처럼 퉁겨져 나와 둥둥 떠돌아다니는 목소리는 자신의 것인지 세라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나는 이세라가 아니다. 나는 서연수다.
아니, 나는 이세라가 되고 싶다.
아니, 나는 문태현의 서연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그를 자유롭게 해 주고 싶다.
"선생님.."
얽매여 있는 한, 그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사랑'이라는 고귀한 명찰을 달고 있다 하여도.
"세라 언니가 묻혀 있는 곳에 가 보고 싶어요. 데려가 주실래요..?"
(138 )
"또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는군. 이젠 아주 진절머리가 나!"
문환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강태의 이야기가 그의 울화통을 터뜨린다.
험악한 그의 고함소리에도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는 강태의 침착함과 냉정이 문환을 더욱 분노하게 한다.
이제는 어떤 수단으로도 강태에게 '감정'이라는 것을 불러일으키고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서, 가장 치명적으로 자신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는 발언을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 강태에게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낀다.
마치 모든 사건의 발단이 그에게로부터 연유하는 것처럼.
"대체 이유가 뭐지? 내가 그 새끼보다 너한테 못 해주는 게 뭐가 있어??
네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줄 수 있다구!! 학교도 계속 보내줄 수 있고, 갖고 싶은 건 뭐든지 아끼지 않고 사 줄 마음도 있어.
네가 비싸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고 그런 계집애들하고는 다르게 대하려고 애썼고!
도대체 뭐야? 뭐가 부족한 거냐구!? 이재준 그 새끼는 뭘 어떻게 해 줬는데!?!"
"모르겠어요, 나도!! 나도 모르겠다구요...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 이유를...
시간 앞에서는 모든 게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하루 보내면서 기다려봐도 달라지는 게 없어요.
아무 것도...전부 그대로 에요. 하나도 변하는 거 없이 그대로...
나는 점점 힘이 빠지는데...나는 점점 망가져 가는데...
이젠 참고만 있을 수가 없다구요, 정말..."
냉담하고 오만하게 굳어있던 눈동자를 허물어뜨리며 급기야 구성진 이슬방울을 떨구는 강태..
가만히 있어도 호소하는 것처럼 지극한 애원의 빛을 띤 그의 까만 심연이 푸르스름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진하고 탁하게 꺼져 들어간다.
그 속에 표류하는 조각배는 추스르기 곤란할 만큼 잘게 부서진 강태의 영혼의 기호다.
"이재준이 뭘 어떻게 해 주는지...그걸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아니, 그 애가 내게 뭔 가를 해 주기 때문에 그 애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말했잖아요, 내 꿈을 버릴 수가 없다고... 이재준은 제 꿈이에요.
저한테 다가온 꿈이고,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아요.
정말, 정말 그럴 수는 없어요... 난...죽고 싶지 않아요...."
용기그릇의 형태에 따라 변형되는 액체처럼 바닥으로 쓰러져 내린 강태가
꺾일 것 같지도 않던 무릎을 꿇고 갸름한 얼굴을 눈물로 반죽한 채 문환을 올려다본다.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한다.
죽고 싶지 않다고... 그건, 곧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뜻일 게다.
"그래요. 미친놈처럼 보이겠죠.
제 부모를 죽이고, 자기 인생을 하루아침에 엉망으로 망쳐놓은 남자한테...
그것도 같은 남자한테 이렇게 목매다는 제 모습이 미친놈처럼 보이는 게 당연해요.
아주 불효 막심한 인간에다가 지저분한 게이니까 손가락질 당해도 싸죠.
그래요, 나도 알아요.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잘 알지만...
너무 늦었어요. 잊어버리기엔 너무 멀리 왔어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애걸복걸하는 강태를 뻥 뚫린 듯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문환..
구부러진 목뼈에 갑작스러운 통증이 날아들자 인상을 찌푸리며 불규칙한 숨을 내쉰다.
손가락 끝에 싸늘한 냉기가 전해지는 것은, 강태를 보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 나쁜 경고 때문일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그따위 시시껍절한 감정 따위는 믿지도 않았으니까."
"..............."
긴박하게 박동의 횟수를 늘려가던 맥박을 타일러 가라앉히고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문환의 음성이 강태의 전신에서 힘을 앗아가고,
강태는 탈진한 상태가 되어 숨을 크게 몰아쉬며 침대 모서리에 등을 기댄다.
굵직하게 흐르는 문환의 목소리 속에는 듬성듬성한 자조성과 친숙한 허탈함이 깔려 있다.
"난...꽤 험하게 살았어.
열 일곱 살에 칼 한 자루 달랑 들고 이 바닥에 뛰어들어서...
10년 넘게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다시 돌이켜 봐도 처참해. 처참하고 지독해.
정말 더러웠지... 개, 돼지새끼처럼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
잘난 놈들 사이에서 내 자리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피를 쏟아 버렸는지 알아?
때리고 협박하고 죽이고...그렇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어.
이제 날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무도...
이재준 그 새끼도 마찬가지야."
"....왜 그렇게 재준이를 미워하는 거죠? 난...당신의 그 분노를 이해하기 어려워요."
"당연히 그렇겠지.
넌 가난해 본 적도, 시궁창 같은 곳에서 기면서 살아본 적도 없으니까.
돈 없고 힘없어서 철저하게 짓밟히는 그 심정을 네가 알 턱이 없지.
이재준도 물론 그럴 거고..."
"그렇지 않아요! 돈이 아니어도, 우리 둘 다 충분히 불행해 본 적이 있는..."
"개소리 하지 마!! 불행? 네 까짓 것들이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어!?!
....난 너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이재준을 지켜봐 왔어.
9년 전이었던가... 그 새끼를 처음 본 게... 열 살을 갓 넘은 사내아이였지.
그때 난, 같이 일하던 동료가 배신을 하는 바람에 혼자 몸으로 충의회 본사에 끌려갔었어.
열 살짜리가 정장 차림을 하고 제 아버지 옆에 딱 서 있더군. 지금처럼 그렇게 무덤덤한 눈빛으로...
짐승처럼 두들겨 맞는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네가 알아??
마치, 공부하는 학생이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어.
조금이라도 동정하는 눈빛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거야.
지울 수 없는 모멸감을 안겨주는 그 눈빛...
그것 때문에 난 그 열 살짜리를 죽도록 증오하기 시작했어. 나중에 알아보니 충의회의 후계자라고 하더군.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화가 났어. 아직도 그 화가 풀리지 않고 있는 거야.
그 이후로, 이재준은 점점 더 나를 화나게 했거든..."
술병의 목 부분을 쥐고 심하게 갈증이 나는지 벌컥벌컥 몇 모금을 들이키는 문환은, 강태는 흐릿한 시선으로 줄기차게 응시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강태의 머릿속에는 문환이 말해주는 과거의 사건들이 필름처럼 현상되어 한 장면 씩 떠오른다.
"내가 이용당하고 배신당하면서 쓰레기처럼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나갈 때,
이재준은 '도련님' 소리 들으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어.
구역 관리하고 밑의 애들 단속하고 다른 조직과 관계 맺는 일 등등...
난 전부 다 내 힘으로 터득하고 나 혼자 배워서 여기까지 올라왔어.
날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늘 혼자였지.
개처럼 바닥을 기고 핥으면서...죽을 고비를 수 십 번 넘기면서 여기까지 올라온 게 나야.
그런데, 그런데...그동안 이재준은 어땠는 줄 알아?
그 새끼가 배고파서 울어본 적이 있을 것 같나?
이용당하고, 가진 걸 모두 빼앗기고 치를 떨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을 것 같아??
그 새끼는 태어날 때부터 전부 갖고 있었어. 보스의 자리도, 돈도, 주먹과 힘까지!
그 새끼는 피 한 방울 눈물 한 버너 안 흘리고 전부 공짜로 얻었다구.
그러면서 항상 내 위에 있다고 건방 떠는 그 꼬라지가... 너 같으면 죽이고 싶지 않겠어?!
절대로 잃어버릴 염려 따위는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날 더 미치게 한다 이거야..!"
".....당신은....재준이가 두려운 거죠..? ...그렇죠...?"
티슈 한 장 사용하지 않고도 그 눈망울의 물기를 말끔히 제거한 강태가 순식간에 평소의 아릿한 칠흙의 빛깔을 덧 씌운 채 나직히 물어온다.
문환으로 하여금 당황하게 하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도록 유도하는 그만의 낭랑하고 그윽한 비음으로.
강태를 등지고 창밖에 눈길을 두고 있던 문환의 고개가 휙 돌려진다.
얼마간 연결될 듯 하면서 자꾸만 어긋나는 두 사람의 시선이 신경에 거슬리는 마찰음을 낸다.
"내가 왜 널 특별하게 생각했는지 아나..?"
".............."
"네가...이재준의 모든 걸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이재준이 자기 입으로 시인하더군..."
"그걸 알면서도...날 빼앗아야 했나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난 정말로 속았다구요.."
"널 내 손안에 넣으면 이재준에게 고통이란 걸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덕분에 나도, 아주 생생하게 체험했어요. 이전보다 더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
"돌아갈 거에요, 재준이한테. 당신이 어떻게 하던지, 이젠 두렵지 않아요."
- 주혁이 제 방으로 사라지고 난 후에도 재준은 어스름한 새벽의 미명이 터 올 때까지 홈 바의 테이블을 지키고 앉아 있다.
수북히 산을 이룬 담배꽁초와 깨끗이 비워진 양주 두 병, 반 이상 남아 있는 안주,
그리고 또 한 개피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비스듬히 고개를 떨군 재준..
담배연기를 빨아 들이느라 움푹 골이 패이는 그의 홀쭉한 볼이
안 그래도 핍절한 그를 더 안쓰러워 보이게 하는데 한 몫 하는 중이다.
'네 자신을 도와라'는 주혁의 당부가 무얼 뜻하는지, 재준은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기에 되려 망설여진다.
여전히 자신을 정신병자로 몰고 가는 감정 그대로 행동하기엔,
강태가 한없이 소중하고 그를 위해 자기 자신과 맺은 약속이 견고한 성처럼 우뚝 서 있다.
적어도 이기적인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비난은 면해야 할 것 아닌가.
비겁한 자가 될지언정 무책임해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강태를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그를 가장 아름답게 지켜줄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았으면서도,
어떻게 그 길을 모른 척 할 수가 있었겠느냐고 재준은 듣고 있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항변한다.
하지만 이제는 지쳐간다고...
가끔씩 들려오는 그의 소식에 또 다시 걷잡을 수 없을 만치 터져 나오는 서글픔과 먹먹함을 가누기 힘들어진다고...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었기를 솔직히 바라고 있다고...
뒤를 잇는 재준의 고백은 뿌연 눈물로 덮였어도 더욱 청명하고 굳세고 또, 순전하다.
꺼칠꺼칠한 뺨을 타고 천천히 굴러 내리는 눈물이 지금만큼은 부끄럽지 않다.
그래서 재준은 손으로 눈가를 가리지도, 얼굴을 탁자 위에 파묻지도 않는다.
턱에서 아롱져 손등 위에 동글동글 망울을 그리는 눈물.
속눈썹을 적시고 콧잔등을 타 내려와 입안으로 흘러드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뜨거운 눈물이 재준을 위로해준다.
아직은 이렇게 살아 있다고, 너무 늦지 않았다고, 그렇게 멀리 와 버린 것은 아니라고.
(139)
어떠한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 서정윤, <의미> 중 -
"마지막은 항상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찾아오기 마련이죠"
뜬금없이 내뱉는 연수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태현은 초점이 지나치게 또렷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본다.
단정한 모양새로 앉아 줄곧 시선을 앞 유리창에서 떼지 않는 연수의 옆모습 위로, 퇴색한 느낌을 주는 겨울의 햇살이 잘게 부서져내린다.
뺨 위에 내려앉는 빛가루를 털어내듯 희미하게 도리질을 치며 연수의 시선이 태현에게로 옮겨간다.
"그냥...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변명처럼 우물거리며 어울리지 않게 털털한 웃음을 흘리는 연수가 못내 불편해진 태현은 잠자코 운전에만 몰두한다.
침묵을 지키는 태현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지, 연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어느새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는 차 안에서, 숫기 없는 정적을 머리 위에 이고 나란히 앉은 태현과 연수..
태현은 조금씩 짜증이 치밀기 시작한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세라한테 가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뜸 들이며 주저하던 질문을 의외로 충동적으로 내던지는 태현..
가장하기 힘든 감정이 섞인 목소리가 평소와는 정반대로 날카롭고 방어적이다.
입술을 다문 채 고개만 더 깊이 떨구는 연수에게 태현은 대답을 독촉하듯 덧붙인다.
"그 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그런 건 상관없잖아요. 세라 언니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없어요."
쏘아붙이듯 강경한 어조로 대꾸하는 연수에게 여전히 탐탁치 않은 눈길을 보내는 태현이다.
실상 그녀에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만한 배짱이 생기지 않는
자신의 안일함에 화가 나는 것임을 알면서도 끝내 연수가 미워진다.
솔직히, 저돌적이지는 않지만 끈기 있게 자신을 파고드는 연수의 어린 감정이 부담스럽고 못미덥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움직이고 다가서는 사람은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절 언니가 묻혀 있는 곳에 데려가시는 게 껄끄러우시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죄송하구요.
하지만... 저도 어렵게 부탁한 거에요. 그것만 이해해 주세요."
"................"
"그리고 전... 세라 언니와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아무 노력 안 하셔도 괜찮아요.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좋아요.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두셔도 괜찮아요.."
담배를 끼우고 있는 태현의 왼손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산만하게 까딱거리며 그의 복잡한 심기를 드러낸다.
결국 피우다 만 담배를 창 밖으로 팽개친 후, 또 불안한 손놀림으로 뒷 머리를 만지작 거린다.
"왜 세라 언니한테 가려고 하냐구요..?"
"............."
"그거야... 선생님이 사랑했던 여자니까요. 한번쯤 찾아가는 게...당연한 거 아닌가요..?"
"자기 감정에 대한 확신이 대단하구나.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은데요."
연수의 말투가 점점 세라의 당돌함과 직설화법을 모방해내자 엉뚱하게 누출되던 태현의 분노가 서서히 그 부스러기들을 주워 담는다.
묘하게 침체되는 분위기 속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연수의 격양된 숨소리가 어렴풋하게 떠다닌다.
한적한 국도로 접어들자 태현은 엑셀레이터에 놓인 오른발에 억센 힘을 가하고,
연수는 춥지도 않은지 창문을 남김 없이 열고 세차게 불어 쳐대는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아낸다.
그 바람소리를 무슨 음악처럼 듣고 있던 연수가 차 문에 달린 버튼을 눌러 유리창을 올리며 항의하듯 태현에게 묻는다.
"제가 어리다고 생각하세요?"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태현은 예의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살핀다.
왠지 그녀가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넌 어리지.. 아직은..."
간단하게 떨어지는 태현의 대답.
연수의 눈동자에 푸르스름하기도 하고 투명한 초록빛마저 띠고 있는 물기가 맺히자 태현은 서둘러 더 중요한 본심을 이야기한다.
"난 너에게 상처가 될 만한 기억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간직하게 되지 않길 바래.
우린 더 바람직한 관계로 남을 수 있잖니... 서로 힘들어지지 말자, 연수야."
세라가 묻혀 있는 산의 봉우리가 어릿하게 시야에 잡혀오자 태현은 부자연스러운 힘이 들어간 떨리는 음성으로, 더 차갑게 말을 뱉는다.
마치 알콜 중독자가 난 이대로 사는 게 편하니 부디 날 좀 내버려두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 그의 말에 연수는 맥없이 눈을 감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잠수를 하다 이제 막 물 속에서 빠져나온 사람 마냥 급격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한다.
"전 인연을 믿어요. 거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구요.."
- 지난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인지,
주혁은 아침 나절부터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까페의 쇼파 등받이에 더 깊이 몸을 맡긴다.
통유리가 난 창으로 퍼붓듯 쏟아져 들어오는 정오의 햇살이 너무 환해서 오히려 우울하게 느껴진다.
기묘한 순간에 발동이 걸리는 주혁의 감성성, 그것을 무마해 버리려는 듯 그의 하얀 얼굴에 황급한 실소가 걸렸다가 또 그만큼 빠르게 스러진다.
까페 입구에서 딸랑 하는 종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주혁의 눈에 혁수가 비친다.
추위 때문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실내를 두리번거리다가 창가 자리에 앉은 주혁을 보고 특유의 수줍음이 연하게 밴 미소를 떠올린다.
그는 어쩌면 저렇게도 늘 한결 같을까... 문득 그런 생각에 가슴께가 싸하니 아려오자 주혁은 일부러 큼지막한 미소로 그를 맞는다.
"왔어? 날씨 춥지?"
"응. 근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바쁘지 않아?"
"이따 저녁부터는 진짜 바쁠 것 같아서. 할 말 있거든..."
"무슨...얘긴데..?"
대답 대신 주혁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무언 가를 꺼내 혁수에게 내민다.
메뉴판과 물을 갖고 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혁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혁의 손에서 하얀 봉투를 받아든다.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 혁수의 눈동자가 더 짙은 궁금증으로 물든다.
"이거...비행기 티켓이잖아?"
"그래, 맞아. 출국 날짜는 23일이고 홍콩행이지."
태연스레 이야기하며 담배에 불을 갖다대는 주혁을 빤히 바라보는 혁수..
몸에 배인 습관처럼 테이블 구석에 놓인 재떨이를 주혁 앞으로 대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담배를 좀 줄여야 하는데...라고 생각한다.
".....선물이야."
"선물..??"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잖아~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생각해보니까 우리 단둘이서 여행간 적이 한번도 없더라구.
마침 일 때문에 홍콩에 가게 됐거든.
간단한 일이니까 마무리 지은 다음에 같이 여행이나 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
"혁아..."
"아, 그리고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그것도 겸해서 갔다오자구.^^"
쑥스러우면 항상 나오는 버릇대로 고른 치아가 시원하게 드러나도록 씩 웃으면서
농담조로 재잘대는 주혁에게 무언가 말하려던 혁수는 커피를 갖고 온 종업원 때문에 멈칫 입을 다물었다가
그녀가 사라지자 다시 머뭇거리며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혁아.. 나는...선물 생각도 못했는데..."
"칫, 진짜야? 그래도 우리 둘이 처음으로 같이 보내는 크리스마슨데... 너무한다, 안혁수."
"그러니까 왜 맨날 먼저 준비해서 사람 미안하게 만드냐..? --;"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끌어다가 핑계를 삼으며 도톰한 분홍빛 입술로 툴툴거리는 혁수가
역시 사랑스럽기만한 주혁은 금새 토라졌던 심사를 풀고 따스한 눈길로 그를 응시한다.
주혁의 검푸른 심연을 가득 채우는 자신의 익숙한 형상에 또 한번 새로운 설렘을 체험하는 혁수..
이런 순간 만큼은, 지상에서 축복 받은 유일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다.
"혁수야.."
낮게 새어나오는 주혁의 음성이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 사방을 둘러 감싸는 것처럼
포근하게 혁수의 이름과 청각과 영혼까지 어루만진다.
그래, 난 진정으로 축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리...아직은 불안정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난 움츠린 모습으로 지내고 싶지 않아.
둘이서만 한 결혼이라도 우린 부부잖아. 부부이기 이전에 연인이고, 한 몸이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이제 그만 죄 지은 사람들처럼 움츠리고 있지 말고, 우리도 다른 부부들처럼...다른 연인들처럼 그렇게 지내자.
아직 미국에서 새출발을 시작한 건 아니지만, 또 조심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지명수배자처럼 사는 게 더 웃기잖아?
우리도...다른 사람들처럼 여행도 가고 특별한 날이나 기념일 같은 것도 챙기고...
너, 우리 결혼기념일이 언젠지 기억이나 해? 못하지??"
"아냐.. 알고 있어. 11월 24일이잖아.."
추위가 가셨는데도 두 뺨에 붉으스레한 홍조를 피우며 혁수는 속삭이듯 조용히 대꾸한다.
그리고 주혁의 기쁨에 찬 시선을 맞받기가 멋적은지, 얼른 커피잔을 들어 조그마한 얼굴을 가려버린다.
"....혁수 네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어.
내가... 내가 지금부터 전부 없애줄 거야. 이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연습을 하게 해 줄게.
혁수야, 나...믿지..?"
(140)
자잘한 거품들을 맛깔스럽게 솟아내며 보글보글 끓는 콩나물국을 수저로 떠서 맛을 보는 혜련..
보통 사람보다 약간 싱겁게 먹는 재준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혜련은 물을 조금 더 붓고 뚜껑을 덮는다.
어젯밤에 있었던 말다툼이 마음에 걸린 그녀는 자칫하면 서먹하게 냉각될 수도 있는
둘 사이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풀 심산으로, 평소보다 훨씬 정성들여 재준의 출근 준비를 거든다.
가스렌지 앞에서 국의 간이 맞춰지기를 기다리다가 얼핏 시계를 보고 서둘러 침실로 향하는 혜련..
재준을 깨워야 할 시간이다.
벽 쪽으로 돌아누워 규칙적인 숨소리를 얕게 흘려보내던 재준이 혜련이 들어서는 기척에 깜박 눈꺼풀을 치켜뜬다.
그리고 그녀가 일어나라느 소리를 하기도 전에 팔로 상체를 지탱하고 몸을 곧추세운다.
그런 재준의 행동에 갑자기 머쓱해진 혜련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떠듬거리 듯 입을 연다.
"어, 일어났어..? 어제 술 먹어서 속 안 좋지? 내가 해장국 끓였으니까 씻고 아침 먹고 나가."
"...어... 근데 주혁이 형은 아직 집에 있나..?"
"아니, 새벽에 나갔나 봐. 방에 가니까 없던데..?"
"그래.. 아, 나 입고 나갈 옷 좀 챙겨 놔. 오늘 리셉션 있으니까 신경써서 골라."
"응, 알았어~"
다소 강압적이고 명령조인 재준의 어투가 민망스럽게 들릴 정도로 사근사근하게, 깍듯이 그의 말에 응대하는 혜련..
여느때와 다름 없이 자신을 대하는 재준을 마주하자 그가 모르게 내심 안도의 날숨을 돌린다.
드레스룸으로 가서 리셉션 참석에 적당할 옷으로 무엇이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재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탁한 아이보리색 세미정장과 진한 고동색 타이를 골라 침실에 가져다 놓고,
혜련은 다시 주방을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조리가 다 된 국의 불을 끄고 이것 저것 반찬을 담아 식탁으로 나르고..
얼마간 식사준비에 열중하던 그녀의 귀에 재준의 심드렁한 음색이 닿아온다.
"네 화장대 위에 카드 놔 뒀어. 그걸로 오늘 옷 하나 해 입어."
"옷...? 괜찮아, 나 옷 많이 있어. 안 사줘도 돼~"
"그럼, 너 평소에 입는 그런 옷차림으로 리셉션 갈 생각이야? 오늘 너도 같이 참석해야 한단 말이야."
"나도? ....난 그런데 한번도 가본 적 없는데..."
"이따 5시 쯤에 준상이가 데리러 올 거야. 가르쳐주는 대로만 따라하면 돼.
앞으로 이런 자리 자주 나가게 될 텐데 미리미리 배워둬야지..."
그렇게 말을 마치고, 재준은 불현듯 순식간에 뇌수의 끝을 찌르고 달아나는 기억 하나에 미약한 몸서리를 친다.
냉랭하게 목소리를 굳히던 자신과 하얀 정장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의 흑연 같은 눈매가
아주 잠깐동안 재준의 시야에 정지했다가 곧 그 자취를 감춘다.
완벽이라는 찬사가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무수한 경탄과 부러움의 시선을 만끽하던 그 날 밤...
그때 내가 느낀 건...행복이었을까...?
확실히 그 땐.. 살아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순간이 지나서야 더 생생히 실감하게 되다니... 허무하다.
기계적으로 수저를 사용해 음식을 입 안에 집어넣고 턱을 움직여 그것들을 위장으로 내려보내면서도,
마치 고무 덩어리를 씹어대는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재준이 꼭 화가 난 사람처럼 보여서
혜련은 더욱 애교스럽고 살가운 음성으로 그를 부른다.
"저기~ 자기야..."
무미건조하게 가라앉아 있던 재준의 낯색이 히뜩 기울어지며 혜련을 바라본다.
물론 그녀가 쓴 호칭 때문이다.
혜련은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총각 선생님께 연정을 고백하는 여고생 같은 모양새로 이야기한다.
"아아~ 저어~ 사실 내가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데... 그리고 이젠 사적인 관계니까...
'오빠'라고 하면 꼭 손님이랑 같이 있는 기분이거든. 왜? 이렇게 부르는 거 싫어?"
"....상관없는데, 공적인 자리에서는 정식호칭 써야되는 거 알지?"
"그럼, 그거야 그렇겠지. 알았어, 조심할게.."
"근데, 왜 부른 거야?"
재준의 물음에 선뜻 그 이유를 얘기하지 못하고 혜련은 연신 딴청을 피우며 뜸을 들인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하고 앞치마에 달린 꽃무늬 십자수를 꼼꼼이 들여다보고..
젓가락을 들어 반찬 한 두가지를 깨작거리다가 재준이 식사를 멈춘 채 무언의 재촉을 하고 있음을 느끼고는 쭈뼛대며 입술을 뗀다.
"있잖아.. 저기...우리...아이 하나만 가지면 안 될까..?"
어렵게 화두를 던져놓고 초조하게 재준의 기색을 살피는 그녀에게,
당혹한 빛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재준의 까만 눈동자가 간간이 흔들림을 보이며 당도한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평정을 잃지 않고 덤덤히 반문하는 재준..
"아아라니..? 임신을 하겠다는 거야..??"
"....그러고 싶어, 자기만 좋다면."
재준의 귀에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자신 없이 대답하는 혜련은,
그러면서도 은근히 그녀 나름의 단호한 판단과 주관이 있어 보인다.
재준은 혜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잠시 중단했던 수저질을 계속하며 얼마간의 침묵을 두었다가 입을 연다.
"나랑 결혼할 마음이 있다는 뜻이야, 그건?"
"아니, 그것보다는...."
"............"
"아이를 가지면...우리 둘 사이에 연결 되는 뭔 가가 더 강해지잖아.
그리고 아무래도 아이가 있으면 자기가 마음을 잡는 데도 좋을 거 아냐.
우선, 자기가 흔들리지 않고 정착하는 게 제일 급하니까...
그러기 전에는, 결혼은 오히려 독이 될 것 같아."
저 여자의 자궁 안에 나의 씨앗으로 만들어진 아이가 자리를 잡으면...
떠돌아 다니는 내 감정도 제자리를 찾게 될까...?
"나도 생각 많이 해 봤어. 왜 자기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했는지...
자기 정도면 괜찮은 여자가 줄을 설텐데... 왜 하필 나처럼 함부로 굴러먹던 여자를 들어 앉히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거든.
근데, 이제 대충은 알 것 같기도 해.."
나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를 마주하게 되면...
그 예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
그럴 수 있다면,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게라도 무뎌질 수 있다면...
하도 오래 씹어서 달착지근한 맛이 배어나오는 밥알을 식도 아래로 삼키고,
재준은 때 맞지 않게 치솟는 갈증 때문에 혜련이 따라놓은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인다.
"어차피 강태가 아니라면 다른 누가 되던 다 마찬가지니까...
그나마 제일 자주 만났던 내가 제일 마음 편하고 그랬다는 거, 그래서 날 불러들인 것도 알고 있어.
자기가 그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것도 알구..
나라고 뭐 연애 한번 못해봤겠어? 나도...목숨 바쳐 사랑한 남자가 있었단 말이야~
같은 남자를 그렇게 죽도록 좋아한다는 게 솔직히 좀 이해가 안 가기도 하지만...
어쨌든 좋아하는 마음이야 똑같을 테니까.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네가 내 마음을 안다고..? 날 이해할 수 있다고..?
...........거짓말이겠지. 아니면 제대로 모르고 있거나.
그의 존재를 떠올리기만 해도..
순식간에 달려드는 무시무시한 공포와 암담함 때문에 도저히, 도저히 포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을, 그 절망을, 과연 너와 내가 공유할 수 있을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얘기지...
"그리고 나도 기댈 곳이 필요해. 까놓고 말해서 자기에게 내 전부를 걸 수는 없어.
남자를 완전히 믿기엔...나도 너무 많이 찌든 년이야.
아이를 가지면...나중에 자기랑 깨진다고 해도 나.. 다시 몸 파는 짓은 안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다시 고생하면서 구질구질하게 살게 되도 잘 참을 수 있을 거 같아."
혜련을 곁에 둔 것이 또 다른 실수의 시작은 아닐까...
슬금슬금 저변으로 밀려드는 의심과 후회를 애써 냉정하게 잘라내며, 재준은 밥을 몇 숟갈 남기고 수저를 내려놓는다.
식사를 끝내고 나면 항상 담배를 피우는 그의 습관을 알고 있는 혜련이 잰 걸음으로 담배갑과 라이터, 재떨이를 가져와 재준에게 대령한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한 개비를 피워 문 재준은 희뿌연 연기를 약하게 뱉어내며 여전히 밋밋한 음색을 퍼뜨린다.
"네가 그러고 싶다면 좋을 대로 해.
너도 짐작했겠지만...난 이 여자 저 여자 옮겨 다니면서 비벼대는 건 별 취미 없어.
그리고 너랑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구..
네가 만약 정말로 내 아이를 낳는다면, 난 내가 해야 할 의무는 다 할 거야.
또 너한테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젠, 내가 거론하고 싶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묻어 두었으면 좋겠어.
나도 너에게 쓸데없는 간섭 같은 거, 절대 안 할 거야. 알았어?"
".......그래..?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나야 할 말이 없지.."
애매모호한 말꼬리를 흘리며 입을 다문 혜련이
허둥대는 듯한 제스추어로 자리에서 일어나 설겆이 할 그릇들을 챙긴다고 부산을 떤다.
남은 반찬을 정리해 담고 행주를 빨아 식탁을 말끔히 닦는 등 뒷 처리에 여념이 없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준은
길다란 한숨을 안으로 삭히며 침실 쪽으로 발을 돌린다.
십 수분이 지난 후, 설겆이를 마치고 앞치마를 벗던 혜련에게 '갔다올게'라는 짤막한 인사를 던지고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하는 재준..
그저 형식적인 미소만을 살짝 지어주는 혜련의 얼굴 위로,
매혹적인 눈웃음을 치며 바로 옆에 있는 준상의 존재에도 아랑곳 없이
재준의 뺨에 진한 입술자국을 새기던 그의 영상이 오버랩 된다.
지금 나... 잘 해 나가고 있는 거지..?
그 영상의 주인공에게 물어본다.
너를 위해서 선택한 길... 나, 대견하게 버티고 있는 거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재준의 가슴 속에서 흘러 나온다.
아니, 강태가 만들어 준 오른쪽 어깨의 총상에서 그 닳아빠진 질문들이 스물거리며 기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따금씩 저릿한 통증에 시달리는 오른쪽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걸음을 옮기는 재준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올리는 준상이 보인다.
자신을 뒷좌석에 태우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가는 차 속에서, 재준은 늘 봐 왔던 바깥의 풍경을 새삼스레 유심히 관찰한다.
그리고 백미러를 통해 의뭉스럽다는 눈길을 건네는 준상에게 황량향 웃음을 동반한 채 힘없이 말한다.
"이제 보니까....눈이 왔네.. 참...도대체 무슨 정신인 건지..."
폭신한 담요처럼 천지를 뒤덮은 새하얀 눈을,
재준은 마치 옛 연인의 사진을 추억하는 듯한 눈동자로 아프게 바라본다.
"첫눈이 오면...우리...결혼하기로 약속했는데..."
(141)
서두르지 않아도 사랑은 내게로 올 것이다.
- <사랑을 위해 죽다> 중 -
방문을 똑똑 두들기는 소리에 혁수의 눈꺼풀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킨다.
그 안에 숨어있던 갈색 눈동자가 살며시 맑은 표면을 드러내며 방안의 풍경들을 새겨 넣는다.
철컥 하고 문이 열리는 기척과 동시에 앞치마를 두른 가정부가 문 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한다.
"혁수 학생, 씻고 식사해요."
"아, 예.. 금방 나갈게요."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몽롱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대답한 후, 혁수는 침대에서 내려와 한쪽 벽에 붙은 거울로 다가간다.
우스꽝스럽게 뻗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빗으며 피식 실소를 흘리고 서둘러 욕실을 향해 발을 옮기는 혁수..
잠시 후, 말끔히 세면하고 옷도 그런 대로 단정하게 갖춰 입은 혁수는 충전기에 꽂혀있던 핸드폰을 들고 주방으로 내려간다.
가는 도중, 주혁으로부터 전송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해 답신을 보내는 혁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가 가라앉는다.
이미 식사를 하고 계신 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올리고 늘 앉는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는 혁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오고 가던 대화가 끊기기를 기다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저...아버지.."
매일 같이 사용하는 호칭인데도 도무지 자연스레 혀에 감기지 않는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럴 땐 꼭 자신이 첩의 아들이라도 된 듯이 찜찜한 기분이다.
왜 그러느냐 묻는 인하의 목소리에 혁수는 잠시 곁길로 새나갔던 생각을 붙잡아 맨다.
"저...한 일주일 정도 여행 좀 갔다오려고 하는데요.."
"여행? 혼자서 말이냐??"
"아,아니요. 태현이랑 또 다른 친구들도 같이요."
"그래?"
"예. 모레 출발하려구요.."
"어디로 다녀올 생각이니?"
인하와 혁수 사이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정숙이 끼어 들며 묻는다.
"태현이 고향이 제주도잖아요. 그래서 그쪽으로..."
"어~ 그렇구나. 그래, 미국 가기 전에 친구들과 여행 한 번 다녀오는 것도 좋지. 그렇게 하려무나."
"네, 크리스마스 같이 못 보내게 되어서 죄송해요."
"뭐...날짜가 그렇게 잡혔다니 할 수 없지. 네 어머니와 둘이서 오붓하게 보내야겠다~ "
호인다운 말투로 이야기하며 빙그레 웃음 짓는 인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젠 너무도 당연하게 가족 구성원에서 제외되어 있는 주혁의 빈자리가 더욱 확대되어 혁수의 시야에 박힌다.
무지근하게 차 오르는 텁텁한 응어리들을 꿀꺽 삼키면서,
그저 쓴웃음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인 미소를 매달고 있는 자신이 참 가소롭게 느껴진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다는 사소한 가책 따위는 솜씨 좋게 불식시켜 버리고,
혁수의 가슴은 어느새 이틀 앞으로 다가온 주혁과의 밀월여행에 들뜨기 시작한다.
그와의 사랑은 벌써 이만큼 중독성이 강해졌다.
태현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대충 말을 맞춰달라는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혁수는 영양가 없이 비워낸 밥그릇 옆에 수저를 내려놓고 식탁 의자에서 일어선다.
- "검사님, 송실장님이십니다."
인터폰의 전자음과 함께 귓가를 울리는 비서의 음성.
인하는 수북히 쌓인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건성으로 그에 응한다.
30대 후반의 사내가 사무실 안으로 인하에게 문안을 여쭙자,
그제야 인하는 고개를 들고 반색을 표하며 그를 중앙에 위치한 쇼파로 안내한다.
"어서 오게. 안 그래도 부를 참이었어."
"뭐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 거 아니고, 오늘 아침에 혁수가 친구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간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내 생각엔 주혁이하고 둘이서 같이 가는 것 같던데... 확인 좀 해 주게.
아마 홍콩으로 갈 듯 싶어. 충의회 거래처가 대부분 거기 있지 않은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즉시 확인하도록 하죠."
"고맙네, 송실장."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느긋하게 담배를 입에 무는 인하..
라이터를 가져다 불을 붙여주는 옆자리의 사내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한동안 침묵을 고수한다.
그가 무언가 중요한 생각에 빠져 있으면 말이 없어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사내는 잠자코 인하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담배 하나를 다 피우고 난 다음, 약간의 가학성이 묻어나는 동작으로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끄며 인하는 육중한 목소리를 꺼내놓는다.
"그리고 말이야, 오늘...이재준을 좀 만나고 싶은데.."
"예? 충의회 이재준 회장 말씀이십니까?"
"맞아. 오늘 한번 연락을 취해보게. 가능하면 빨리 만나고 싶어."
"그런데 어째서 이재준을..."
"앞으로 종종 만나볼 생각이야. 그 새끼가 주혁이를 데리고 있기도 하고..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높으신 분들과 안면 트고 지내는데...보통이 아닌 것 같아. 아주...대단하단 말이야..
내가 보니까, 그거...제 아비보다 더하겠어...?"
- 산 중턱에 올라오자 고도가 높아진 탓에 급격히 하강하는 온도로 몸 구석구석에 시린 냉기가 스며든다.
자동적으로 부르르 떨리는 몸을 최대한 오므리면서 연수는 야무지게 한 발자국씩 떼어놓는다.
앞서 걸어가는 태현의 뒷모습이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단해 보여서, 그녀는 작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쓸쓸한 웃음을 새어보낸다.
연수의 가쁜 숨소리를 감지했는지...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태현이 불현듯 뒤돌아 그녀에게 시선을 준다.
"조금만 참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네.. 괜찮아요."
마구 흐트러져서 쏟아지는 호흡을 가까스로 정돈하고 다소곳이 대꾸하는 연수..
태현은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등지고 발을 내딛는다.
둘이 나란히 걷기엔 너무 좁은 통로 때문에 부득이하게 앞뒤로 열을 이루듯 서서
산을 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어떤 각도에서 보기엔 상당히 조화롭지 못한 광경을 연출한다.
태현도 그걸 계속 느끼고 있었던지, 길이 넓어지자 얼른 연수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자신의 옆에 자리하게 한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연수와 태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즈음,
두 사람의 눈동자에 봉분을 쌓아올린 무덤 몇 개가 나타난다.
세라도 여기 어딘가에 있겠지 하는 마음에 연수는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정지해있던 태현이 히뜩 상념에서 깨어난 듯 오른쪽 방향으로 엇박자와 정박자가 섞인 걸음을 이끌어 간다.
연수의 생각과는 달리 태현이 걸음을 멈춘 곳은, 땅을 파느라 삽질을 한 흔적만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평평한 평지이다.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소리 없이 태현에게 가까이 간 연수의 얼굴로 그의 커다란 암갈색 눈동자가 겹쳐진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구성진 눈물방울을 폭포수처럼 터뜨릴 듯한 그의 눈동자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연수는,
꿈결처럼 아득하게 고막을 간질이는 태현의 목소리에 몸서리를 친다.
"여기야.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죄인이라고 해서 봉분을 쌓지 않는대."
"아아.. 저도 들었어요."
"원래 대부분은 화장을 하는데, 세라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셔서 이렇게 한 거래."
"네에..."
바보처럼 밍숭밍숭한 대답만을 읊어대는 자기 자신에게 속이 상한 연수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와락 솟구치는 격한 떨림을 독하게 견뎌낸다.
그런 연수는 안중에도 없는지 태현은 여전히 넋을 찾아볼 수 없는 음성이다.
"나 여기 오면 되게 추해져.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세라하고만 얘기하거든..."
"............"
"난 지금...네 선생님이 아니라 그냥 문태현이야. 그렇게 생각해 줘."
"벌써...여기 오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그러고 있었어요."
천천히,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발음하는 연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입술이 닫히자마자 태현의 큰 눈이 감기며 그의 하얀 볼을 타고 몇 줄기의 눈물이 굴러 내린다.
낙하하는 눈물처럼 스르륵 자신을 무너뜨리며 차갑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연약한 피부를 내맡기는 태현..
연수는 그의 옆에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세라야, 나 왔어. 오랜만이지? 그 동안 좀 바빴어..
으음~ 다른 애들도 잘 있어. 주혁이랑 혁수는 다음주에 홍콩으로 여행 간다고 그러더라.
혁수 이 자식이 또 엄마 아버지한테 거짓말하면서 나 팔았나 봐.
아직 미국 간 것도 아니면서 벌써부터 팔자가 늘어졌다니까, 그것들은...
그리고, 재준이도 잘 지내. 강태고 그렇겠지, 뭐...
강태랑은 연락을 거의 못하고 지내거든. 둘 사이는 여전히 그대로야.
재준이가 정말로 마음을 굳혔나 봐. 그렇게 끝나버릴 애들은 아닌데...
모르겠어, 나도. 어차피...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비오는 날의 구멍 뚫린 천장처럼 얼굴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으면서도 작은 흐느낌조차 내비치지 않는 태현..
견고하게 평형을 유지하는 그의 어깨를 내려다보며 연수의 어깨는 자꾸만 와들와들 소스라친다.
날카로운 효과음을 퍼뜨리며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옷자락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이미지로 연수의 뇌리 속에 흡수된다.
자세히 기억할 순 없지만 항상 마주쳐 왔던 누군가를 예상치 못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시 만나듯, 연수는 비로소 세라와 시선을 교환한다.
아주 신중하게, 따스히.
"세라언니.."
다정하고 담백하게, 묵직하게, 여리고 희미한 위압감이 서린 연수의 목소리가 허공을 꿰뚫고 태현의 심장을 찌른다.
폐 속 깊이 얼음 같은 공기를 잔뜩 들이마시고, 서늘하게 냉각되는 머릿속과는 반대로 점점 뜨거워지는 가슴이 연수를 강력히 주장한다.
"그 사진...봤어요. 언니랑 태현오빠가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요.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웃는 오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물론...언니가 만들어준 거겠죠? 태현오빠의 그런 웃음은..."
물기를 걷어낸 태현의 눈망울이 연수에게 닿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직은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늑장을 부리는 태현에 연연하지 않고 연수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간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시간은 없다.
"제가...대신해도 될까요, 언니..? 나쁘게 말하자면, 언니의 자리를 태현오빠에게서 지우고 싶어요.
왜냐면 저는...언니가 만들어줬던 그런 웃음을...태현오빠가 다시 그런 웃음을 짓게 할 자신이 있거든요.
미안하지만 세라언니, 언니는...태현오빠의 여자가 아니었어요."
(142)
제발 내 마음 '거짓'에 취해
아름다운 꿈결에서처럼 그대 고운 눈 속에 파묻혀
그대 속눈썹 그늘 아래 오래오래 잠들게 하여 주오.
- 보들레르, <항상 이대로> 중 -
빠르게, 하지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라지는 문환의 조소를 놓치지 않는 강태..
서투른 몸짓으로나마 절실함을 토로하던 자신을 순식간에 어릿광대로 만들어버리는 그 싸늘한 웃음에 강태의 얼굴이 경직된다.
그건 두려움보다는 분노에 가깝다.
그칠 줄 모르고 미궁 속으로만 얽혀 들어가는 머릿속을 다잡지 못한 채,
수 백가지 단어들을 입안에서 증발시키는 강태를 똑바로 쳐다보며 문환은 방금 전보다 더 악에 받친 목소리를 서슴없이 뱉어낸다.
"내가 한 말 기억하나?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는... 그게 무슨 뜻인지, 혹시 알고 있어?"
"............"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는 강태의 눈동자가 서서히 아래로 내리 깔리고,
당연히 문환은 그의 무응답을 부정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또 한번 메마른 조소가 물리는 문환의 얇은 입술이 벌어진다.
"내가 널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이야.."
"....뭐라구요..?"
가지런한 미간에 뚜렷한 주름을 세우며 괴상하게 구부러진 음성으로 묻는 강태의 얼굴은 아직 핏기가 가신 그대로다.
"네가 얘기하는 그런 감정은 아니지만, 어쨌든...널 빼앗길 순 없어.
아주 오랫동안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거든.
그러니까.. 보내달라는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어."
"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숨가쁘게 뒤를 잇는 강태의 외침이 굉장한 속도로 공기를 뚫고 벽에 부딪친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가운에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나는 듯한 착각.
문환은 섬뜩하게 아려오는 폐부를 부여잡으며 태연한 기색을 가장하느라 두 눈에 잔뜩 힘을 준다.
"돌아가겠어요. 당신이 무슨 짓으로 우릴 괴롭히든, 또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마음대로 해 봐요.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뭐든지..!
그래도 이젠,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에요. "
"이재준이 널 다시 받아줄 것 같나? 그 새끼는 자기 스스로 널 내쳤어!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도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한 거라구! 아직도 그걸 모르겠어??"
"뻔뻔스럽네요. 누구의 강요도 아니었다구요?
허! 그래요. 당신의 협박이 아니었다면 그 애의 이성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거겠죠.
하지만 그까짓 이성적인 판단으로 간단히 끝나버릴 수 없다는 거, 나도 알고.. 재준이도 알고 있어요.
재준이에게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나서야죠.
내가 그 애를 도와야죠. 재준이가 두려워하지 않게..."
골대 안으로 통과하지 못하고 링 주위만 뱅글뱅글 맴돌다가 튕겨나오는 공..
재준의 이름이 마치 그처럼 강태의 음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험하게 발려져 둥둥 떠다닌다.
손아귀에 잡아챌 수 없는 아지랑이를 멀거니 쳐다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피워내 듯,
강태의 눈빛은 입술이 닫히는 그 순간부터 휘청이기 시작한다.
다시 재준에게 돌아간다는 사실보다는, 또 그 때문에 겪게 될 지도 모를 고난보다는,
재준이 여전히 자신을 갈구하고 있을 거라는 그 확신에 겁이 난다.
정말 부조리한 현상이다..
"당신이 보내주던 말던, 난 재준이한테 갈 거에요. 재준이한테 갈 거라구요..!"
강태는 크레센도를 높이며 더욱 발작적으로, 문환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그 이름을 반복해서 외쳐댄다.
그의 목소리만큼 까만 눈동자도 서럽게 포효하고 탐스러운 피부 아래 감춰진
혈관 속의 피도 더 급하게 뛰어다니며 강태의 갈증을, 망가져가는 이성을 재촉한다.
이젠 진정으로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보다 더한 분노를 가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강태는 그렇게 스스로를 고무한다. 그리고 영혼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연인의 영상에 입맞춤하며,
끝끝내 자신을 안주하도록 끌어앉히려는 이성과 현실 따위를 발로 차 버린다.
앙칼진 음성을 여기저기 함부로 뿌려대며 한 남자의 이름을 떼어내지 않는 강태를 말없이 응시하는 문환..
건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회오리 같은 격노로 뒤덮인 어지러움도 아니다.
심층의 어딘가에서 꿈틀거리는 하나의 감정이 너무도 뚜렷한데 그것을 교묘히 가리고 있는 대단한 위장술..
확실히 문환은 상대방을 초조하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문환의 대답 따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말하지만,
강태의 낯에는 자신의 결단에 대해 문환에게 확인받고 싶어하는 불안심리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만다.
또, 문환은 그런 강태의 어설픔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강태가 어떤 영혼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그것만은 문환도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영혼의 지배력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너를 내 품에 넣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이 애썼는 줄 알아?
그렇게 가진 너를...내가 쉽게 보낼 거라고 생각해?
내가 보내주던 말던 널 갈 거라고 고집을 부리는데...
이봐, 잘 들어.. 난 바보가 아냐. 이재준 같은 바보가 아니란 말이야.
네가 나에게서 도망치도록 내가 내버려 둘 것 같나?
넌 내 소유야. 내가 가진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큰 만족을 주는 게 바로 너라구..
육체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 같구..
널 대신할 만한 무언가가 내 수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널 내가 갖고 있어야만 해.
그러니까 허튼 생각 마. 편하게 지내고 싶으면..."
살벌한 무게를 싣고 날카로운 직선을 따라 뻗쳐오는 문환의 말들이 갈고리가 되어 강태의 알몸 군데군데에 걸리는 느낌..
그러나 강태는 고문을 당할수록 더 악착 같아지는 독립투사처럼,
최대한 상대를 깔보고 조롱하는 어투로 씹던 껌을 쓰레기통에 뱉어내듯 중얼거린다.
"병신 같은 새끼.. 네가 아무리 개처럼 기어봤자, 넌 절대 내 주인이 될 수 없어."
강태의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문환의 거친 발소리가 이어지고, 그와 연속하여 문환의 손바닥이 강태의 뺨을 후려친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몇 차례 정신 없이 따귀를 얻어맞은 강태는 아연실색한 얼굴이 아닌, 오히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침착한 표정이다.
벌건 손자국이 찍혀 그새 부풀어 오른 뺨이 얼얼하지도 않은지..
심장 한 가운데가 서늘해지도록 여유로운 조소를 만면에 적시며 다시 입을 연다.
"역시...너도 깡패야, 이 새끼야.. 네가 이재준보다 우월해졌다고 생각해?
날 가졌으니까 이젠 네가 이재준을 지배하고 있다고 여기나본데...
쳇.. 이거 진짜 형편없는 새끼 아냐..?
야, 이재준도 너랑 똑같은 깡패지만 너 같은 새끼들이랑은 차원이 틀려. 무슨 말인지 알아? 알리가 없겠지, 물론...
야, 조문환.. 연화회 조 회장님... 너 같은 새낀 말야, 여자로 치면 창녀나 마찬가지야.
그것도 남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그 남편 하나로 만족을 못해서 돈 몇 푼 받고 아무 남자하고나 뒹구는...
그런 저질 중에 최악으로 질 나쁜 창녀란 말이야.
생계 때문에 몸을 파는 게 아니라,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려고 아무 남자 앞에서나 다리 벌리는 그런 년이라구.. 알아들어?!"
강태를 때리고 싶다는 욕구도, 강태의 말을 멈추게 해야겠다는 다급함도 문환의 뇌를 작동시키지 못한다.
단 한 번의 굴곡도 없이, 그러나 수도 없이 많은 파장을 동반한 채 문환의 귓가를 유린하는 강태의 비음..
울긋불긋한 핏발이 서 있던 강태의 눈동자가 맑게 씻기는 것은 그가 회복한 당당함 때문일지도..
"잠시나마 널 불쌍하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한심해. 넌 동정받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야.
재준이가 진작에 널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재준이가 하지 않겠다면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
"때리고 싶으면 분 풀릴 때까지 맘껏 때려. 얌전히 맞아줄 테니까..
그게 내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야.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그 땐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할 거야..
그리고 아마 그건...네가 될 것 같은데...?"
극히 미세한 각도로도 꺾이지 않는 강태의 시선을 가까스로 받아쳐내던 문환의 눈동자가 결국 제 빛깔을 잃어버린다.
그의 몸 속에서 격동하던 경련이 요란하게 바깥으로 터져나오고,
그것을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되자 문환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한 걸음걸이로 강태의 시야에서 달아난다.
침실에 혼자 남겨진 강태는 문환의 잔상이 완전히 분해되고 나서야 전신의 힘을 빼며 탈진해 버린다.
- 재준의 검은색 XG가 충의회 본사 건물 앞에 당도한다.
부랴부랴 차문을 열고 내리는 준상.. 그러나 재준의 동작은 언제나 그보다 빨라서 준상을 송구스럽게 한다.
커다랗고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전혀 보스답지 않은 걸음을 옮기는 재준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며 준상은 그를 따라 부지런히 발을 놀리고,
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재준은 발딱 일어나 인사를 올리는 비서에게 대충 목례를 해 보인다.
넉살 좋은 준상은 비서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가벼운 농담을 건넨다.
"지수씨, 오늘 화장이 너무 섹시한데..? 남자 만나나 봐?"
"실장님은... 저 애인 없다니까요.."
"에이~ 거짓말을 해도 믿을만한 걸 해야지~ 지수씨가 애인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안 그렇습니까, 회장님??"
- "들어와서 오늘 스케쥴 보고해요, 지수씨."
준상의 농담을 일절 묵살하며(-_-;) 기계적으로 명령하는 재준 때문에
비서인 지수는 말할 것도 없고 준상마저 무안해져서는 뻣뻣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에 발을 디딘다.
블라인드를 걷어올리고 창밖으로 펼쳐진 도심지의 풍경을 감흥 없이 내려다보며 지수에게서 파일 몇 개를 받아드는 재준..
잠자코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나올 때까지 기다려준다.
"오전 11시에 우향건설 채권단 회의에 참석하시기로 되어 있구요,
오후 1시에 정의원님과 점심식사 약속하셨습니다.
3시 30분에는 지금 신축 중인 T호텔 카지노 공사 현장을 방문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7시에 홍콩에서 오신 손님들과 저녁식사를 겸해서 간단한 협의가 있습니다.
공식적인 일정은 이상입니다."
"홍콩에서 손님이 오신다구요? 몇 시 비행기로 도착하십니까?"
"오후 6시 도착입니다. 장이사님께서 모시러 나가신다고 합니다."
"아.. 알았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
보일듯 말듯 고개를 주억이며 재준이 지수를 물리자 그녀는 몸을 돌려 다리를 움직이는 대신 다시 입을 연다.
"저.. 방금 전 9시 쯤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장인하 검사님이라고 하시던데요.."
"누,누구라구요??"
"장인하 검사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만나뵙고 싶다고... 어떻게 할까요?"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좀처럼 보이지 않는 재준인지라 눈을 크게 뜨고
격양된 목소리를 터뜨리는 그에게 와락 겁을 집어먹은 지수는 어깨와 뒷목을 어정쩡하게 움츠린다.
"........지금 바로 연결시켜요."
(143)
그는 사랑했고 그 결과 자기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잃으려고 사랑하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
새로 맡은 사건에 대한 잡다한 기록들을 훑어보고 있던 인하는
점점 눈가로 몰리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다.
예상보다 복잡하게 꼬여 들어가는 게, 만만히 다룰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는 이마에 굵은 주름을 새겨 넣는다.
[검사님, 충의회 이재준 회장님이십니다.]
약간 거슬리는 전자음과 함께 인터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비서의 음성.
숙여졌던 인하의 고개가 흠칫 들리며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는 듯 대꾸한다.
"연결해."
느슨하게 풀어놓았던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수화기를 집어들어 귀에 가져다 대는 인하..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과 대조적으로 부드럽게, 지극히 예의 바른 어조로 재준의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검사님. 이재준입니다."
"아이구, 이거.. 빨리 전화 주셨군요. 전 좀 기다릴 생각으로 있었는데..."
- "예, 전화 주셨다는 얘기 듣고 바로 연락 드리는 겁니다. 절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 가능하겠습니까?"
- "죄송하지만 오늘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내일 어떠십니까? 제가 저녁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아, 좋지요~~ 언제쯤 만날까요? 7시 정도가 좋을 것 같은데..."
- "알겠습니다. 내일 저녁 7시에 저희 애들더러 모시러 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래 주시면 제가 편하겠군요. 자, 그럼 내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 "예, 안녕히 계십시오."
간헐적인 호흡조차 능란하게 조절하며 무뚝뚝한 목소리를 늘어놓는 재준이 결코 수월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하는 인하..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손길에 긴장이 배어있다.
통화를 나누는 동안 꽁초로 변해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쑤셔 박고 인하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흘깃 시선을 돌려 달력을 바라보고,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한 장 밖에 남지 않은 1999년의 달력. 그나마 며칠 후면 쓰레기통에 처박힐 낡은 달력.
인하의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감돈다.
그의 눈동자가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 액자에 다다랐을 때, 그 웃음은 색깔을 달리하며 더욱 짙어진다.
단란한 모양새를 자아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정숙, 혁수, 그리고 주혁.
인하는 느닷없이 손을 뻗어 거칠게 액자를 넘어뜨린다.
그리고 어느새 평온한 얼굴을 되찾아 재준과 통화를 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수북히 쌓인 종이더미와 씨름을 시작한다.
- 23일 아침,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 출국 또는 입국하는 사람들 탓에 공항은 다른 때보다 훨씬 소란스럽다.
북적대는 인파의 틈새에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혁수..
짐을 다 부친 주혁이 혁수 쪽으로 걸어오다가, 자신과 부딪힌 사람이 미안하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휙 지나쳐 버리자
자못 험악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무어라 궁시렁거린다.
입술 모양을 보아하니 '씨발..'이라는 육두문자를 내뱉는 듯 하다.
그런 주혁을 가만히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혁수..
주혁과 가까워지자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장난스레 그를 나무란다.
"좋은 날 왜 욕을 하고 그래.. 사람 많으니까 부딪힐 수도 있지.. ^^;"
"헤헤.. 다 보고 있었어? 싸가지 없는 새끼..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잖아. -_-;"
"하여튼 성질은... 누가 깡패 아니랄까봐.."
"어허~! 깡패라니..! 난 엄연히 충의회 이사야, 이사.."
"그게 깡패지 뭐야.. -_-;"
"안혁수.. 자꾸 갈구면 여기서 키스해 버린다..?"
"쳇, 해라! 못 할 거 뭐 있어??"
"진짜지? 너, 후회하지 마."
태연하게 배짱을 튕기며 팔짱을 턱 끼는 혁수에게 농담 반 진담 반의 다짐을 받아두고
정말 키스를 하려는 심산인지 그를 난간으로 밀어붙이는 주혁..
계속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민 채 주혁을 무시하던 혁수는
그의 입술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화들짝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막아낸다.
"미쳤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뭐 어때? 못 할 거 없다면서..?"
"아, 알았어! 이제 깡패라고 안 그럴게.. 야야, 좀 떨어져!!"
"아냐, 나 깡패 맞아. 깡패니까 이런 미친 짓을 하지.."
당황해서 버둥거리는 혁수를 무릎으로 제압하고 그만의 알싸한 체취를 확 풍기며
주혁은 천천히 혁수의 이마에, 콧잔등 위에, 두 뺨에 입맞추고..
벌써 두 사람을 가리키며 웅성거리는 주위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받아 쳐내며 혁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저항을 망각한 혁수가 몸에 힘을 빼고 기대오자 두 팔로 그를 감싸안으며 단단하고 미끈한 혀를 이용해 혁수의 입술을 여는 주혁..
고르게 자리를 잡고 있는 치열을 살며시 매만지고 약하게 떨며 도사리고 있는 민감한 구강점막 전체를 꼼꼼히 탐색한다.
마침내 둘의 혀가 얽히고 입맞춤이 깊어지자 사람들의 손가락질, 야유,
수군거림은 더 노골적으로 주혁과 혁수의 귓가에 달라붙는다.
처음이었다.
군중 앞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
일반적인 이성커플에게도 그다지 좋게만 용납되지 않는 드러냄.
무례하고 분별 없는, 한심한 객기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 행동.
혁수의 목구멍에서 주혁만 들을 수 있는 희미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혁수를 품었던 팔을 느슨하게 풀며, 주혁은 키스를 시작할 때와 비슷한 속도로 붉은 입술을 거두어들인다.
잠시동안 눈꺼풀 아래 감춰졌던 혁수의 갈색 심연이 오롯이 솟아오르고 연이어 그 투명한 표면에 복잡한 표정의 주혁이 비친다.
차마 주위를 둘러볼 수 없어서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만 외곬으로 쳐다보고 있는 혁수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기에
주혁은 황급히 다시 팔을 내밀어 혁수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온다.
일말의 저항도 보이지 않고 순순히 이끌려오는 혁수..
갑자기 실어증에라도 걸린 사람 마냥 입을 꾹 다문 채 주혁의 손길에만 자신을 맡긴다.
이젠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정지된 흑백필름처럼 바스라져간다.
역겹다는 표정을 짓고 옆 사람과 귓속말을 나누는 아주머니,
아주 신기한 장면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는 10대 여학생,
흉측하게 감염된 전염병 환자를 바라보는 눈초리로 혁수와 주혁을 향해 저주의 몇 마디를 퍼붓는 중년의 사내,
그리고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킥킥대며 둘을 힐끔거리는 아이들까지...
구태여 눈을 감지 않아도 혁수를 품에 안은 주혁에게는,
주혁의 품안에 묻힌 혁수에게는 그저 불분명하게 어그러진 무채색의 형체로만 각인될 뿐이다.
서로를 포옹한 채 오랫동안 마네킹처럼 움직이지 않는 혁수와 주혁에게 차츰 흥미를 잃고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반원 형태의 무리들이 거의 다 흩어졌을 때..
아직도 주혁의 팔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던 혁수가 애써 범상한 목소리를 내어 묻는다.
"....왜 그랬냐고...물어봐도 돼..?"
그러자 주혁은 대답 대신 핼쓱한 실소부터 내보낸다.
명랑함을 덮어씌우려다 실패한, 오히려 황량하기 그지없는 웃음 탓에 주혁 자신도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이유가 뭐야..?"
"그냥... 생각해 보니까, 우리한테는 예쁜 추억이 너무 없더라구. 이런 미친 짓...나중엔 추억으로 남잖아."
가볍게, 군더더기 없는 어조로 이야기하는 주혁..
혁수를 품에서 떼어놓으며 시원하고 깔끔한 미소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혁수는 그런 주혁의 거짓을 단번에 외면해 버리고 너무 순박해 보여서
보통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까지 하는 동그란 눈망울을 어느새 축축한 습기로 치장한다.
예쁜 추억...?
그런 게 우리에게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문장을 억지로 씹어 삼키는 혁수..
입 밖으로 뱉어내면 그 질문과 동시에 서러움과 원망 가득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또 주혁과 혁수 자신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덧대게 될 것 같아서 꾹 참기로 한다.
"담배 피우고 싶어.. 저리로 가자."
어쩐지 어색함이 엿보이는 동작으로 호기롭게 혁수의 허리를 오른팔로 감싸 당기며
대각선 방향에 위치한 흡연실로 발걸음을 돌리는 주혁..
묵묵히 그를 따라 걷는 혁수를, 그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반복적으로 혁수의 허리께를 쓰다듬는다.
몇몇 사내들이 군데군데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흡연실 안으로 들어서서
주혁이 첫 모금을 빨아들일 때까지 침묵을 거두지 않던 혁수가
문득 과장되게 말간 미소를 띄우며 백치미가 서린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방금 전에 말이야.. 우리 둘 중 한 명이 여자였더라도 똑같이 욕먹었을 거야. 그치?"
"........."
"미국에서는 연인끼리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하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인데...우리나라는 왜 이런지 모르겠어."
주혁은 작위적으로 입술을 끌어올려 혁수에게 웃음을 보내주는 것으로 이미 훼손되어버린 눈동자의 탁한 빛깔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그리고 혁수 역시, 이번에는 주혁의 효력 없는 위장술을 모른 척 너그럽게 껴안아 준다.
혁수의 자그마한 얼굴이, 노란 머리카락과 새까만 속눈썹이 매캐한 담배연기 사이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느낌에
주혁은 그런 착시현상을 없애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뜬다.
어지럽다. 담배를 피운 지 5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마치 처음 니코틴 성분을 맛보는 것처럼.
익숙해질 만한 기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언제나 새롭기만 한 혁수와의 섹스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의 삐걱거림은 아무리 자주 들어도 항상 소름끼치듯이.
"우리 단 둘이서는 처음 가는 여행이다. 그치?"
"응.."
"여행은...꼭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거지..?"
"....그렇겠지."
"근데 주혁아, 난 있잖아... 난 말이지..."
".........."
"이 여행에서...다시 돌아오고 싶지가 않을 것 같아. 어떡하지...?"
(144)
맥없이 뻗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다.
묵직한 잠의 여운을 세차게 털어 내며 매트리스에 뉘인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강태..
환하게 침실 안을 밝히는 겨울 햇살이 바깥 날씨의 매서움을 교묘히 속이려는 듯 소담스럽게 내려앉는다.
언제나 그렇듯 사방은 고요하기만 하다.
어젯밤의 소동과 갈등은 새벽빛에 의해 몰려난 어둠과 함께 자취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주섬주섬 방안의 사물들을 둘러보던 강태는 불현듯 시트를 걷어내고 바닥에 발을 디딘다.
거실로 나가니, 문환의 부하 두 명이 평화로워야 할 집안 공기와 불협화음을 내며 경계태세로 앉아 있다.
강태는 그 낯익은 얼굴들을 향해 조바심이 배인 말투로, 이제는 전혀 거리낌없이 사용하게 된 반말을 던진다.
"회장님 나가셨어?"
"아,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회장님께서는 아침 일찍 출근하셨습니다."
"근데, 너희들은 여기 왜 있는 거야?"
"저, 그게..."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을 꾸물거리는 그에게 강태는 앙칼진 음성으로 채근한다.
"여기 왜 있는 거냐고 물었잖아?!"
낭랑하고 사근사근한 강태의 비음이 천장을 찌를 듯 신경질적으로 높아지며
그의 까만 눈동자에 불그스름한 노기가 감돌자, 주저하던 사내는 찔끔 놀라서 황급히 입술을 벌린다.
"그게... 회장님께서 도련님의 외출을 금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뭐, 뭐라구?!"
"죄송합니다. 어디까지나 저희는 명령을 따를 수밖에..."
"그래서, 날 감시하려고 여기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이해해주십시오.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씨발, 이 개새끼가 진짜...!"
자기들의 보스를 두고 '개새끼'라는 욕설을 서슴없이 뱉어내는 강태의 표독한 목소리에
사내들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본다.
그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강태는 도저히 그대로 삭힐 수 없는 격노를 마구잡이로 분출하며
옆에 놓인 탁자의 전화기와 화분, 리모콘 등을 있는 대로 집어던진다.
정신병자처럼 찢어져라 고함까지 질러대는 강태 때문에
문환의 부하들은 물론, 주방에서 강태의 식사를 준비하던 파출부까지 아연한 낯으로 감히 그를 말릴 생각조차 못하고 멍청히 서 있다.
"지랄하고 있네!! 날 가둬?! 날 가둬 놓겠다구?!! 재준이한테 못 가게 가둬 놓겠다구!?"
"도련님, 왜 이러십니까! 진정하십시오..!"
"이거 놔!! 조문환 그 새끼는 악마야! 살 가치가 없어.. 죽어서 없애버려야 할 악마라고!!
그 새끼 밑에 빌붙어서 깡패 짓 하는 너희들도 전부 다 개 같은 새끼들이야!!!"
"야! 아까 회장님이 말씀하신 거, 그거 빨리 갖고 와!"
광증을 넘어선 발악을 해대는 강태를 힘껏 붙잡아매며 끙끙거리던 두 사내 중 하나가,
오들오들 떨며 그 난장판을 지켜만 보던 파출부에게 다급히 지시한다.
후다닥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그녀는 몸부림치는 강태를 제압하느라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히기 시작하는 사내에게 무색 액체로 채워진 주사기를 건네준다.
어렵사리 강태의 흰 가운을 걷어올리고, 드러난 맨 팔뚝의 핏줄을 찾아 주사기 속의 약물을 투여하는 사내..
몇 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강태의 아우성은 씻은 듯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축 늘어진 그의 육체가 또 다시 혼곤한 잠의 무의식 속으로 꺼져 들어간다.
소파 위에 널브러진 강태를 불만에 찬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그에게 주사를 놓은 남자가 짜증스럽다는 듯 투덜거린다.
"씨발.. 한동안 얌전하게 있더니 왜 또 갑자기 지랄이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누가 아니래냐.. 하여튼 완전히 맛이 갔다니까..? 살다살다 이런 놈은 처음이다, 정말.."
"근데.. 이재준이랑 둘이 뭔 가 있긴 있었나 봐.
헤어진지도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이재준, 이재준 노래를 불러대는 거 보면, 둘이 좋아했다는 게 사실인 것 같지 않아?"
"무슨... 저 새끼는 이재준을 좋아했을지 몰라도, 그럼 뭐하냐?
이재준이 어떤 새낀데... 데리고 놀다가 싫증 나니까 차 버린 거지, 뭐..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얼음 같은 인간이 누굴 좋아한다는 건 말도 안 돼."
"아냐~ 항간에 떠돌던 소문으로는, 이재준이 우리 회장님한테 최준태를 넘겨달라고 한 게 강태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었어.
솔직히 강태가 우리 회장님 손에 들어온 데에는 최준태 역할이 컸잖아.
이재준이 그 새끼를 얼마나 끔찍하게 죽였는지 너 들었어?"
"어떻게 죽였다는데?"
"거꾸로 매달아서 충의회 애들 전부 다 돌아가면서 후려 패고, 그래도 안 죽으니까 머리통을 완전 박살냈단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는 거야.
강태를 뺏긴 것에 대한, 뭐 그런 거 말야.."
"히야~ 지독한 새끼.. 거 봐, 이재준은 그런 놈이라니까~ 그렇게 잔인한 놈이 감정이란 걸 갖고 있을 것 같냐?
최준태가 쥐새끼 짓을 했으니까 자기애들 보는 앞에서 개작살 낸 거지..
쥐새끼 짓을 하는 놈은 이 꼴이 된다, 그걸 보여 주려는 거야.
이야.. 진짜 생각할수록 소름 끼치는 새끼야.."
"그런가..? 하긴.. 나이도 몇 살 안 처먹은 게 장난 아니라니까..
그러고 보면 혼자 아직까지 생쇼 부리는 이 새끼도 불쌍하다~
뭐 그런 놈한테 맛이 가서는... 쯧쯧..."
"알 게 뭐냐, 제 팔자지. 야, 얘 방에다 갖다놓자. 7시에 리셉션 내보내야 된다고 했는데 그 전에 깨어나려나..?"
강태를 들춰 업어다가 침대 위에 내려놓고 다시 거실로 나와
VTR에 비디오 테입을 집어넣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는 두 사내..
정오의 꼭대기로 치달아 가는 햇살을 정면으로 맞받으며 강태는 꿈조차 허락되지 않는 혼자만의 암흑 속에 깊숙이 빠져있다.
- 몸 전체가 사슬에 결박된 듯 부자유스럽다.
머릿속에서 뱀들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구역질이 날 만큼 어지럽고,
너무 긴 시간동안 공복상태에 머물러 있던 탓인지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다.
닫힌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지만 목과 어깨, 허리에 힘을 줄 수가 없다.
강태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정신을 찾으려 애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흐물거리는 척추를 고정시키며 상체를 일으킨다.
뿌연 시야를 명확하게 틔우려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선다.
조심스럽게 한 발짝 씩 떼어 거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강태..
푹 꺼져 그늘을 만들고 있는 눈자위가 그를 몹시 아픈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건조하게 부르튼 입술, 혈색이 가신 창백한 살결, 홀쭉해진 볼과 청승맞은 곡선을 그리는 머리카락.
그래, 이게 좀 낫군. 적어도 진절머리나는 그 천박함은 덜 해 보이니까..
차라리 아주 흉측하게 일그러져 버렸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난, 재준이한테 돌아갈 자신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냉방된 조소를 한껏 뿜어내던 강태의 귓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묘한 표정을 한 채 강태와 눈을 맞추는 문환.. 강태의 조소가 훨씬 더 싸늘해진다.
"가둬놓는 걸로도 모자라서 주사까지 맞혀? 쳇.. 그래, 내 꼴이 어때? 이제 만족해?"
"....리셉션 갈 준비해. 그만 나불대고..."
"리셉션? 이런 꼴로 리셉션에 데려가면 너만 바보 될텐데..?"
"걱정 마. 좀 아파 보이긴 해도 다른 골빈 여자들에 비하면 넌 다이아몬드니까.."
"호오~~ 눈물나게 감동적이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그래요, 같이 가죠. 내 의무는 다 해야 당신한테 떳떳해 질 수 있을 테니까.."
독살스럽게 쏘아 부치고 몸을 홱 돌려 욕실로 향하는 강태..
한 시간이 못 되어, 단정하게 손질한 진보랏빛 머리카락과 연회색 정장 차림으로 문환의 시야에 재등장한다.
짙고 풍성한 속눈썹을 마스카라로 반짝 치켜올린 데다가 쌍커풀이 진 부분에 초록색 아이섀도우까지 발라서 요염한 눈매가 더욱 돋보인다.
립스틱과 립글로스가 칠해진 입술은 아찔할 만큼 도발적인 냄새를 풍긴다.
몸에 꼭 맞는 자켓 위에 코트를 덧입으며 강태는 이죽거리듯 말을 뱉는다.
"당신 정부로서는 마지막으로 참석하는 건데, 신경 좀 써야되지 않겠어요?"
"여전히 고집이군. 오늘 그렇게 겪었는데도 생각을 고쳐먹지 않았다니, 한심한데..?"
"한심하다고..?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똑똑히 알아 둬.
네가 날 소유했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오늘밤이 마지막일 테니까."
옴팡지게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문환에게 쐐기를 박고 먼저 현관을 나서는 강태..
문환은 잠시동안 그가 서 있던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눈동자에 일렁이는 불안과 초조를 적당한 느긋함으로 가린 채 강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뒷좌석의 푹신한 시트에 등을 기대며 강태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하는데
옆자리에 올라탄 문환이 강태의 입에 물린 담배를 낚아 채 창 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순간적으로 강태의 예쁜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짜증을 묵살하듯, 문환은 특유의 강압적인 어조로 입을 연다.
"담배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 싸가지 없어 보여.."
"나 싸가지 없는 거 이 바닥 사람들 다 아는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바꿔야지. 네 이미지는 곧 나하고 연결되니까."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며 노골적인 비웃음을 입가에 매다는 강태..
어디를 가도 비슷비슷한 도심지의 풍경을 권태로운 눈빛으로 내다보며 화제를 전환할 겸 무심한 음성으로 질문한다.
"어디서 하는 건데요? 회사에요, 아니면 정당?"
"W건설이라고, 들어봤지? 거기 회장 생일이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관계를 잘 다져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건설주 중에서는 제일 전도 유망한 회사지.."
그 뒤로도 얼마간 계속 이어지는 문환의 설명을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대충 고개만 끄덕이는 강태에게,
그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 시킬만한 이름이 닿아오자 평평하게 와해되어 있던 강태의 동공이 급속히 수축한다.
그리고 청각이 아닌 영혼과 가슴으로 문환의 이야기를 담아둔다.
"벌써부터 지루해하는 것 같은데...너무 그러지 말라구.
내 생각엔 아마...이재준도 참석할걸..? 충의회가 이 회사 지분을 상당히 갖고 있거든.."
(145)
진정한 연인은 특정한 사람에 대한 그의 사랑 안에서 전 세계를 사랑한다.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중 -
"여기 있는 음악 들어보고 가사 한 번 붙여와 봐. 다음 시간까지.."
"가사요..? 저 글 잘 못 쓰는데..."
"나도 글 못 써. 무슨 작가처럼 멋있는 말을 지으라는 게 아냐.
곡에 제일 맞는 게 무엇인지 그것만 파악하고 리듬감 살려서 써 오면 돼. 할 수 있겠지..?"
"...네.."
자신 없는 표정을 거두지 않으며 마지못해 대답하는 연수를 보고 태현은 소탈할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다독이듯 덧붙인다.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하지 마, 임마~ 내가 미안해지잖아.."
그제야 눈 꼬리를 구부리며 마주 미소짓는 연수.. 의자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는 태현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금새 큼지막한 눈을 기우뚱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연수의 미소는 더 활짝 피어난다.
태현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이 점점 짙어지고, 또 점점 맑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도 이제 가끔씩 실감하곤 한다.
"으윽-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진짜 내 자신이 불쌍하다~!"
코믹한 억양을 과장되게 끌어올리며 우는 시늉을 하는 태현..
연수는 가볍게 소리내어 웃다가 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움직인다.
발소리마저 그녀는 세라와 다르게 조용하고 느릿하다.
"할 수 없지. 연수야, 나가자! 내가 저녁 사 줄게.."
"아니에요. 그냥 집에 가서 먹을게요.."
"야아~ 그럼 청승맞게 나 혼자 먹으라고?? 너무한다, 내가 사 준다니까~~"
"하하.. ^^; 알았어요.."
"그래, 그래.. 가자! 뭐 먹고 싶어? 난 햄/버/거/가 먹고 싶은데.." (-_-;)
"풋.. 그래요, 그거 먹으러 가요.. ^^"
현관 모서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워커의 끈을 조여 매며 연신 재잘대는 태현을 가만히 응시하는 연수..
그녀 혼자만의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함께 세라가 묻힌 곳에 다녀온 후로 부쩍 두 사람의 관계가 스스럼없어진 것 같아서 연수는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태현을 대하고 있다.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심하게 곪아터져 있는 상처를 꺼내 보인 태현이
예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조금 더 열린 시선으로 연수를 바라보기 때문일지도...
확실히 사람은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쏟을 때, 그 사람에 대해 갖고 있던 불신과 경계심까지 몽땅 눈물과 섞어 씻어내는 듯 하다.
그날, 태현이 간직하고 지내온 사랑, 추억, 상처, 그리고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그리움을 확연히 알게 되자..
연수는 우습게도 그 모든 것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어쩌면 '문태현'이라는 남자로 인해 '서연수' 자신의 존재가 비로소 뚜렷하게 규정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어떤 의미를 품고 태현 곁에 머물러야 하는지, 그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버릇없이, 건방지게, 세라를 향해 말 할 수 있었다.
당신은 문태현의 여자가 아니었다고...
그 말을 하는 연수의 가슴도 두려움으로 떨렸지만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허상인지 태현에게 가르쳐줄 의무가 그녀를 독하게 만들었다.
세라에게서 사랑을 배웠다면, 난 그가 사랑으로 인해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아 주겠다.
그 사랑으로 인해 훼손된 문태현을 회복시키겠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스스로를 최면하듯 되뇌었던 다짐..
연수와 보폭을 맞춰 나란히 걸음을 떼며 며칠 전 출시된
새 음반에 대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대는 태현의 목소리를 메아리처럼 들으면서, 그녀는 손님이 꽤 채워진 패스트푸드점 안으로 들어선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잠깐 바깥을 내다보고 있으니 어느새 태현이 맞은 편에 앉으며 음식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는다.
종이껍질을 벗겨내며 태현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입을 연다.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븐데.. 무슨 계획 있어?"
"뭐 별다른 건 없어요. 친구들이 밤새서 놀자고 하는데... 별로 가고 싶지가 않아서요."
"왜? 친구들이 구박해?"
"아, 아니요.. 그냥 그면 재미가 없어요. 답답하고.. 선생님은 특별한 계획 있으세요?"
"나라고 뭐 있겠냐~ 친구들이랑 술 먹고 노는 거지, 뭐..
에휴.. 다들 여자친구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올텐데, 나만 이게 뭐냐..
그것들 닭털 날리고 쇼하는 거 혼자 어떻게 보고 있을지..."
어울리지 않을 법한 푸념을 늘어놓는 태현에게 작은 웃음을 보내 그의 말을 받아주고,
곧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는 연수..
계속 이어지는 태현의 말이 끊어지기를 기다리다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뱉어내고 최대한 망설임을 희석시킨 어조로 제의한다.
"저.. 거기 저도 같이 가면 안 되요..?"
"어? 거기라니? 어디?"
"선생님 친구분들하고 술자리요.."
"거길... 같이 가고 싶다구..?"
"부담스러우시면 할 수 없지만... 내일 하루만 제가 선생님 여자친구 하면 되잖아요.."
큰 맘 먹고 얘기하는 게 너무 지나칠 정도로 티가 나는 연수의 모습에 태현은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지려는 걸 엄격하게 단속하며 의문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를 중얼중얼 끄집어낸다.
"나야 괜찮은데 네가 워낙 얌전하니까.. 그런데 적응하기 힘들고 재미도 없을텐데..."
"아니요, 정말 가고 싶어요. 선생님이 괜찮으시다면...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듯 돌연한 적극성을 보이는 연수가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 태현이다.
머릿속에서 슬금슬금 솟아오르는 복잡한 상념의 덩어리들을 꾹 눌러 가라앉히며,
태현은 흔쾌한 얼굴로 연수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또 한 번, 그녀의 다가옴을 암묵적으로 허락한다.
- 홍콩에 도착해서 정해진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충의회 거래처의 사업장들을 둘러보고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닌 혁수와 주혁..
주혁과 함께 일해본 경험이 몇 번 있는 혁수지만, 그럴 때마다 혁수는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한 치의 오차도 묵과하지 않으려는 주혁의 모습에 기가 질리곤 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혁수는 불현듯 쿡 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해 주혁의 궁금증에 찬 눈동자를 맞받는다.
"진짜 아무리 봐도 놀랍다니까~? 나 장주혁이랑 같이 일한 거 맞아?"
"뭐가~! 또 무슨 말로 구박하려고..."
"하긴, 내 앞에서 그러는 것처럼 헬렐레거렸다간 뒤통수 맞는 거 시간문제겠지.."
"야, 내가 네 앞에서 언제 헬렐레거렸어? 참나~~"
"알았어, 알았어.. 너 일할 때 멋있다는 소리다, 됐냐?"
"쓰읍.. 그런 뜻이었어..? 헤헤.. ^^; 내가 좀 카리스마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환하게 들뜬 표정으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그를
'뭐 이런 게 다 있어' 라는 눈빛으로 멀뚱히 쳐다보는 혁수에게 괜스레 기대며 무안한 듯 실실거리는 주혁.. (-_-;)
혁수 역시 피식 웃음을 흘리며 슬며시 주혁 쪽으로 다가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혁수의 허리를 감싸는 주혁의 팔이 이 때처럼 강하고 든든하게 닿아오는 것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여기 오니까 좋지? 마음 편하고.."
"정말 그래.. 얽어매는 게 없는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 평생 그런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거야. 아무 눈치 볼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고마워..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어서..."
"됐어. 그런 말 또 하면 나 화낸다. 알았어?"
제법 진중한 음색으로 경고하는 주혁의 붉은 입술에 이해를 구하는 듯 짧게 키스하는 혁수..
주혁은 더욱 견고히 혁수를 보듬으며, 호텔에 당도하자 잽싸게 달려와 문을 열어주는 직원에게 간단히 고개를 숙이고 커다란 유리문을 밀어 제친다.
바싹 밀착된 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그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한결 같이 선명한 호기심과 모호한 혐오감이 뒤섞여 있지만 혁수와 주혁의 눈동자는 이미 그 테두리를 벗어나 있다.
주혁은 전혀 거리낌없는 동작으로 혁수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둘만의 밀어를 속삭이고
그것을 듣는 혁수 또한 주변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팔꿈치로 주혁의 복부를 살짝 찌르며 해사한 미소를 펼쳐 보인다.
엘리베이터 안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존재하게 되자 예고 없이 무작정 혁수에게 달려드는 주혁..
자꾸 킥킥대며 익살스런 곡선을 그리는 그의 입술을 점령하려고 급하게 혁수의 손목을 휘어잡고 그를 가슴 안에 가둔다.
깊은 입맞춤을 나눈 뒤에도 여전히 혁수의 얼굴에 남아있는 웃음기를 확인하자 주혁은 약간 짓궂은 마음이 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혁의 품에서 빠져 나와 놀리는,
혹은 재는 듯한 걸음걸이로 발을 옮기는 혁수를 부리나케 뒤쫓아 방에 들어서자마자 주혁은 다시 냉큼 그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쉴 새 없이 목구멍을 간질이는 웃음을 불규칙적으로 내뱉으며 마지못해 주혁의 손에 끌려오는 혁수..
주혁은 일부러 혁수의 성감대인 등 언저리를 쓸어 내리며
검푸른 후광이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오는 눈동자를 그의 갈색 표면에 들이대고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울려낸다.
"이게... 얼마 전까지는 손만 대도 긴장하면서 얼굴 빨개지더니.. 이젠 아주 낄낄거리네..?
야, 안혁수.. 너 많이 발전했다..?"
"...그럴 만도 하지 않아? 솔직히 우리, 사귀기 전부터 했잖아. 이제 여유 부릴 때도 됐지.."
"여유..? 난 그런 거 절대 안 생기던데... 넌 되나봐..?"
"아직은 잘 안 돼.. 근데...노력 중이야.."
"그 따위 노력, 할 필요 없어."
"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자며?"
"이것만은 예외야. 그래야 네가 평생 나만 보고 살 거 아냐.."
"그건 억지야, 장주혁.. 그냥 솔직히 말해. 내가 수줍어하는 게 더 자극적이라구..."
어쩌다가 한 번, 그것도 오직 주혁에게만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데카당한 미소가 혁수의 입가에 번진다.
주혁은 하복부를 격렬하게 헤집어놓는 듯한 충동을 가까스로 제어하며 신음소리를 토해내듯 빠르게 대꾸한다.
"맞았어, 바로 그거야.."
(146)
"씨발~ 얘네 둘이 결혼을 하던 말던 나랑 뭔 상관이야? 이 딴 걸 기사라고..."
건성으로 들춰보던 스포츠 신문을 와락 구기면서 신경질을 내는 사내에게 힐끗 건조한 시선을 던지며, 준상은 또 한 개비의 담배를 입에 문다.
익숙하게 불을 붙이고 다시 고개를 돌려 검찰청 정문을 바라보는 그에게 불만 가득한 동료의 음성이 들려온다.
"저는 발이 없어, 차가 없어? 개새끼.. 꼭 이렇게 데리러 와야 되냐? 겨우 짬나서 사우나 가려고 했더니.."
"형은 나이가 몇 인데 벌써부터 사우나를 다니냐? 제발 쓸데없는 겉 멋 좀 부리지 마라.."
"사우나 가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씹새야.. 좋으면 가는 거지. -_-; 그나저나 이 새끼 왜 안 나와?"
"어, 저기 나오네."
묵직해 보이는 서류가방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걸어오는 인하를 발견하자,
준상은 얼른 파우던 담배를 끄고 차에서 내려 자세를 가다듬는다.
어느 정도 둘 사이의 간격이 좁혀지자 정중히 허리를 굽히는 준상과 동료.
인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인사를 나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습니다. 이거 괜히 귀찮게 해드린 건 아닌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께서 잘 모시라고 각별히 당부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갈까요? 자칫하면 이회장님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아, 예.. 타시죠."
깍듯하게 차 문을 열어주는 준상..
뒷좌석에 올라탄 인하는 편안한 자세로 시트에 등을 기대고 차 내부를 둘러본다.
재준과의 약속 장소로 가는 도중, 준상의 동료는 묵묵히 운전에만 몰두한 가운데 조수석에 앉은 준상과
인하는 그다지 무겁지 않은 화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차를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사동의 한 일식 집에 당도하고, 인하는 준상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에 위치한 밀실로 발을 옮긴다. 예상대로 재준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아이구~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회장님."
"아니요, 저도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앉으시죠."
"아, 그러십니까? 다행이군요.."
인하와 재준의 마주보고 자리하자 소리도 없이 뒤따라 들어온 여자 둘이 정갈한 자태를 뽐내며 인사를 올리고,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청아한 인상의 여자는 재준의 옆에,
그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또 한 여자는 인하의 옆에 엉덩이를 붙인다.
이어서 재준이 미리 주문해둔 음식들이 차례로 식탁 위에 놓이고
길고 가느다란 손을 들어 술병을 잡으며 재준은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제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검사님."
인하는 빙그레 웃음을 띄우며 재준이 따라준 잔을 비우고
재준은 예의를 지키느라 고개를 뒤로 돌려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술을 들이킨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몇 차례 술잔이 더 오고간 후, 분위기가 제법 느슨해지자 재준은
숨겨두었던 히든카드를 꺼내 보이듯 사뭇 달라진 억양으로 묻는다.
"그런데... 절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은근한 의도를 첨가시킨 재준의 말에도 인하는 그저 처음 그대로의 표정을 고수한 채 그를 건너다본다.
그리고 교묘하게 스치는 조소를 순식간에 무마하며 황송하다는 듯 눈을 크게 치켜 뜬다.
"아닙니다~ 잘못이라뇨, 그럴 리가 있나요. 그냥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성함은 많이 들어오던 중이었는데 한 번도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어서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충의회를 맡은 지 꽤 오래 되었는데, 그동안 장 검사님에 대해 자주 들으면서도 한 번 찾아 뵙지 못한 것, 죄송스러웠던 참입니다."
"이 회장님이야 워낙 바쁘시지 않습니까.
저야말로 내놓은 자식이지만 아들 놈을 맡겨두고 있으면서 더 일찍 인사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주혁이 때문에 회장님께서 공연히 피해를 입으시는 건 아닌지..."
'주혁'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재준은 입으로 가져가던 젓가락을 멈칫 하고 인하와 눈을 맞춘다.
역시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의 얼굴.. 재준 또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는 마찬가지다.
조심스럽게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인하의 이야기에 대한 답변을 잠시 미룬 채
잔에 담긴 말간 액체를 응시하던 재준이 불현듯 심하게 색채를 달리한 눈동자를 빛내며 말한다.
"사실은, 주혁 형에 대해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시죠."
"형이 충의회에 들어오게 된 건 전적으로 저의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부탁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군요.
그 때 제게는 주혁 형 같은 사람이 필요했고 형은 그런 저를 도와주기로 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형은 이 쪽 세계에 오래 있을 마음도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벌써 나름대로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구요.
그러니... 주혁이 형이 충의회에 들어오게 된 것에 대해 엉뚱한 오해 같은 건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래요? 주혁이가 준비하고 있다는 그 새로운 길이 어떤 길인지 무척 궁금해지는군요.
그리고 또,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이 회장님?"
'회장님'이라는 존칭에 과장된 엑센트가 실려있음을 알면서도 어물쩡 넘겨버리는 재준..
인하의 눈동자에 서린 침착한 냉기를 외면하지는 않되, 깨끗이 무시하려고 노력하면서 반 음 정도 낮아진 음색을 떨어뜨린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
"주혁이 형은 우리 충의회의 이사이기 이전에 평범한 스물 한 살 남자입니다.
그리고 제게 있어서는 조직의 부하이기 이전에 제 친구이자 친형과도 같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주혁이 형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든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겁니다.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도울 거구요.
그 말은 곧, 주혁 형이 새 출발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해 줄 의사도 충분히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 있어선,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말입니다.
제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아주 잘 알아들었습니다, 이 회장님. 제 아들을 그렇게까지 아껴주시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아들이라구요..? 검사님께서 주혁 형을 그렇게 부르시는 게 굉장히 생소하게 들리는군요."
직설적으로 한 마디를 쏘아 부치는 재준과 삭막한 눈빛을 교환하던 인하..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넉넉한 웃음을 되찾은 얼굴로 재준에게 또 한 잔의 술을 권한다.
그러나 재준은 술잔에 손을 대지 않고 옆자리의 여자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시킨 뒤,
인하의 눈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죄송하지만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중요한 리셉션이 있어서...
검사님께서는 천천히 식사를 즐기다 나오시죠.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하와 인사를 주고받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남기고 재준은 자리를 뜬다.
무례한 그의 태도에 술시중을 들던 여자들마저 당황한 표정인데 정작 인하는 태연하다.
피식 새오나오는 실소를 한켠으로 몰아놓으며 그는 조여 맨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맨 위에 달린 단추를 끄른다.
그리고 조그만 술잔에 수놓인 자잘한 그림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역시 이재준...충의회 2대회장답구만... 보통이 아니야.."
- 연회장의 중앙에 놓인 얼음 조각이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되어 또 다른 조명효과를 연출한다.
기분 좋게 후각을 자극하는 음식냄새가 여자들이 뿌린 향수와 뒤섞여 함부로 허공을 휘젓는다.
문환은 맞은 편에 앉은 사내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고 강태는 그 옆에서 자리를 지킨 채 조용히 눈만 내리깔고 있다.
그러나 얼굴에 비친 생기 없는 표정과는 달리 그의 머릿속은 얌전히 정돈되어 있지 못하고 야단스런 움직임을 거듭한다.
리셉션이 시작된 지 1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재준에 대한 궁금증과 기다림,
그리고 그를 마주하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말을 먼저 할까, 어떻게 해서든, 어떻게 해서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샴페인 잔에 손을 뻗치며 끝날 줄 모르고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다잡아 매는 강태..
별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마치 샴페인의 그윽한 향취를 깊게 음미하듯 한 모금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떨구었던 시선을 들어 출입문 쪽을 바라본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용건 때문에 들락날락하느라 누군가의 새로운 등장이 그다지 눈에 뜨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령처럼 갑자기, 무표정한 유백색의 얼굴을 한 채 연회장 안으로들어서는 재준을 보자
강태는 샴페인 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나가 새하얀 테이블보 위에 지저분한 얼룩을 남기고 만다.
재빠르게 달려와 강태가 엎지른 샴페인을 닦아내고 컵을 치우는 웨이터에게 미안하다는 인사조차 망각하고,
강태의 동공은 걸어서 3분도 안 되는 거리에 서 있는 재준의 모습을 급속하게 빨아들인다.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서 작은 얼굴이 더 야위어 보인다.
아니, 정말로 예전보다 더 마른 그의 모습에 강태는 오히려 안심이 된다.
여전히 아무런 일렁임도 갖지 못한 까만 눈동자.
아무 것도 담아두지 못해 텅 빈 상태로 썰렁한 공기만 회전시키는
그의 칠흙 같은 심연이 사무치도록 익숙하고 포근하게 강태의 망막을 어루만진다.
두 쌍의 까만 눈동자가 맞닿은 것이다.
"아, 충의회 회장님께서 오셨군요. 잠깐 인사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맞은 편의 사내에게 양해를 구한 뒤, 문환이 의자에서 몸을 떼며 강태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그의 시선과 끈끈하게 얽혀있는 재준의 눈동자를 모른 척하며 강태의 팔꿈치를 잡아 일으킨다.
"여긴 공적인 자리야. 소동 피우려거든 일찌감치 포기해."
귓가에 대고 나즈막히 속삭이는 문환의 음성은 강태의 청 세포에 도달하기 전 그의 귓불 근처에서 아스라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그렇게 조금씩 재준과 가까워지며 강태의 심장이 몸밖으로 퉁겨져 나가고
강태를 지탱하던 중력의 축이 무너지고 그가, 이재준이, 이재준의 겉모습 뿐 아니라
알몸까지도 확연하게 강태의 시야에 되살아난다.
그는 참고 있다. 강태 역시 참고 있다.
감정을, 욕망을, 어떤 도구를 사용해도 배제할 수 없는 서로를 향한 진실을 참고 있다.
그의 눈이 떨리고 있다. 그가 강태를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그는 또 한 번 강태 앞에서 자기 자신을 허물어뜨린다.
스스로를 고문하고 자책하며 겨우겨우, 억지로 쌓아올린 자신의 가짜를 단숨에 어이없이 부셔버린다.
물론 그것은 재준의 의지가 아니다.
"이 회장님, 늦으시기에 안 오실 줄 알았더니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습니다."
귓속에 물이 찬 것처럼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분명하게 들려오는 문환의 음성.
재준은 희미하게나마 웃어보려고 입 꼬리를 끌어당기려다가 그만둔다.
아무래도 너무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나올 것 같다.
"근데.. 여기 옆에 계신 이 미인은 누구십니까? 처음 뵙는 분 같은데요..."
(147)
질퍽하고 뜨거운 숨결과 함께 뿌려지는 주혁의 목소리가 담배연기를 닮았다.
혁수는 흡연자가 아니지만, 마치 교태로운 요부가 긴 속눈썹을 드리우고 니코틴 성분을 빨아들이듯 주혁의 목소리를 들이마신다.
슬금슬금 주혁의 팔을 더듬어 올라간 혁수의 손이 그의 어깨를 지나고 목을 감싸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손가락 끝에서 전달되는 뾰족한 느낌이 팔목에서부터 가슴과 아랫배, 발바닥까지 퍼져나가자
주혁은 영악하게 사수해오던 자제력을 한 꺼풀 팽개치고 혁수의 허리를 휘감으며 침대 쪽으로 급한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허겁지겁 침대 위에 혁수를 쓰러뜨리고 간헐적인 틈새까지 철저하게 봉쇄하며
그의 위로 몸을 겹치는 주혁에게 여전히 차분하지만 한층 텁텁하게 비틀린 혁수의 음성이 와 닿는다.
"좀 천천히 해.. 누가 도망이라도 갈 까봐..?"
"너.. 무슨 약 먹었냐? 나 지금 안혁수랑 같이 있는 거 맞아?"
"우리 신혼여행 온 거 아냐..? 그럼 오늘이 첫날밤이 되는 건데.. 뭔가 기억에 남는 섹스를 해야 하지 않겠어..?"
"첫날밤이라... 그렇게 되는 건가..?"
무게가 전혀 없는 웃음이지만 결코 차갑지 않은 미소가 주혁의 하얀 얼굴을 물들인다.
붉은 입술이 만들어내는 선의 형태가 묘하게 선정적으로 보여서 혁수는 기습적인 키스를 그의 입술에 퍼붓는다.
홱 당겨지는 목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혁수의 입술과 촉촉한 혀를 정신없이 탐하던 주혁..
깊은 입맞춤이 끝난 후에도 계속적으로 그의 입술과 뺨과 콧잔등 위에 경쾌한 마찰음을 남기며
혁수의 목 언저리를 갑갑하게 조이고 있는 넥타이를 풀어낸다.
줄을 이루며 달린 단추들을 하나씩 열고 옅은 아이보리색 셔츠와 검은색 자켓을 함께 벗겨내자 살구빛의 맨 살결이 드러나고,
맵시 있게 굴곡 진 상반신이 주혁의 눈으로 클로즈 업 된다.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황급히 억누르며 열에 들뜬 손길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동작의 템포를 늦추는 주혁에게 혁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 번 지어주더니, 갑작스레 몸을 돌려 주혁의 배 위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약간의 거친 손길로 그의 옷가지들을 제거해나간다.
거침없이 벨트를 풀고 바지버클을 끌러내는 혁수의 행동에 쾌감보다는 의구심이 앞서지만
주혁은 잠자코 자신의 옷을 벗기는데 여념이 없는 혁수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혼자만의 추측에 만족하기로 한다.
왠지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신성한 정적이 두껍게 두 사람을 진치고 있는 듯 하다.
잠깐 사이에 주혁을 알몸으로 만들고 자신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된 혁수가
기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혁을 향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줄곧 매달고 있던 데카당한 웃음을 덧칠한 채 속삭인다.
"역시 장주혁... 내가 첫눈에 반할 만 해.."
자연스럽게 귀 쪽으로 말려 올라가는 입술을 노골적으로 방치하며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고 혁수보다 조금 높은 자세를 취하는 주혁..
길쭉한 손가락으로 혁수의 뺨 위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쉰 듯한 음성을 던진다.
"나한테 첫눈에 반했어? 정말이야, 그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혁수..
여태까지 대견하게 유지해오던 당돌하고 대범한 태도가 무색하리 만치
순식간에 발그레한 홍조를 피우며 입 속에서 우물거리는 말을 선뜻 뱉어내지 못한다.
확 돌변하는 혁수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불끈 치솟는 욕망을 어렵사리 달래며 주혁은 눈빛으로만 그를 재촉한다.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내가... 무슨 생각한 줄 알아..?"
"쿡.. 설마 나랑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아니, 맞아.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예전에는 어느 누구를 보고도 그런 욕구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아, 물론 사춘기 때야 성적인 호기심이 많으니까 섹시한 여자를 보면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
근데 너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어. 그런 단순한 호기심이나 배설의 욕구가 아니라...
널 처음 봤을 때 느낀 욕망은...아주 특별했어."
말을 하는 도중, 일자로 뻗은 주혁의 쇄골을 애무하듯 부드럽게 매만지며 눈동자로는 쉴 새 없이 주혁의 전신을 훑어 내리는 혁수..
잠시 다물었던 입술을 벌리며 어지럽게 이동하던 눈동자를 주혁의 검푸른 심연에 고정시킨다.
"널 만나기 전까지, 나는 단 한번도 남자를 성적인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어.
미국은 개방적인 사회라서 동성애가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난 그저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지..
난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널 딱 보자마자 무슨 생각이 든 지 알아?
너랑 키스하는 느낌은 어떨까.. 네 알몸과 내 알몸이 닿는 감촉은 얼마나 황홀할까..
심지어는, 차라리 네가 날 강간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 적 있어."
"........믿기 지가 않는데."
얼이 빠진 멍한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는 주혁..
강렬하게 부딪쳐오는 혁수의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앞으로 쏟아 내린다.
그런 주혁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살포시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혁수는 말을 잇는다.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던 건... 어쩌면 그런 거 아닐까? 정말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바램 말이야.
나를 망가뜨리고 해체시켜서라도 너와 끝까지 가 보고 싶다는...
그 마지막이 비극이라고 해도, 너와 하나가 되어서 걸어가는 과정 자체가 나한테는 최고의 행복이 될 것 같았어.
섹스에 빗대서 표현하자면, 내가 추구하는 오르가즘이 바로 너라는 얘기지..
기를 쓰고 도달하려 몸부림치는 오르가즘 말이야.."
"................."
"항상 네가 그리웠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네 방과 내 방이 마주보고 있었는데도...
방문을 열고 내가 들어가기만 하면 밤새도록 날 안아줄 네가 가장 가까이 있을 때에도..
언제나 그리웠어, 네가..."
"난 처음부터 네 남자였어.. 너도 알잖아?"
"그래, 맞아. 그랬지... 근데 난 왜 그렇게 오랫동안 두려워했는지 모르겠어.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돼.."
"아냐, 난 지금이라도 너랑 이런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나한테는 과분해."
떼어냈던 시선을 서둘러 혁수의 갈색 눈동자에 맞추며 과거의 상처가 눈물로 번지지 않도록 힘주어 고백하는 주혁을 향해,
마치 그를 안심시키는 듯 잔잔하게 아른거리는 슬픔을 몽땅 가린 채 혁수는 환하고 천진한 미소를 내비친다.
그리고 아까 전과는 사뭇 다르게 개구쟁이 꼬마소년처럼 장난기 다분한 표정으로
주혁의 어깨를 찍어누르며 다시 그의 몸 위에 올라탄다.
주혁의 코앞에 바싹 얼굴을 들이대고 한동안 그를 주시하던 혁수가 더욱 작고 가라앉은 음색으로 투덜거리듯 이야기한다.
"장주혁... 정말 예뻐. 완벽해.."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야단치는 엄마처럼, 숙연한 혁수의 말투에 주혁은 어쩐지 그의 칭찬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에게 혁수의 달착지근한 중저음이 흘러든다.
"너에 비하면 난 너무 못생겼어. 너무 평범하잖아..너는 이렇게 잘생겼는데...
나.. 진짜로 너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내가 널 받아들이기 전부터 넌 나와의 섹스에 거의 중독이 되다시피 했잖아..
난 예쁘지도 않고 섹시하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내 몸을 갖고 싶어한 거야?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니까 몸이라도 갖겠다...그런 유치한 속셈은 아니었을 테고... 이유가 뭐였어..?"
어느새 장난기를 말끔히 거두고 진지하게 묻는 혁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주혁..
그의 검푸른 구슬이 애잔한 물기로 꺼져 들어가다가 이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각한 마냥 그 물기를 털어 버린다.
지나친 센티멘탈리즘에 빠지는 건 두 사람의 관계를 자칫 싸구려 멜로 영화로 만들게 될 테니...
어디까지나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현실이다.
혁수와 주혁이 맨 살을 맞대고 나른한 환각 속에 영혼을 담그듯,
비밀스런 열락의 행위에 몰입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역시 허망한 공상이 아닌 단단한 현실이다.
그건 곧, 살아있다는 뜻일 것이다.
"혁수야.."
미세한 떨림으로 장식된 주혁의 목소리가 예민한 혁수의 청각을 두드린다.
그 목소리에 일제히 깨어나는 것은 혁수의 청각뿐만 아니라 혁수의 육신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감각과 의식이다.
"넌 예쁘고 완벽하고...무엇보다, 유일해.
이 세상에 안혁수라는 존재는 딱 너 한 사람 뿐이고, 장주혁이라는 남자도 나 하나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단 한 번 밖에 살 수 없어.
한 번이라도 다시 태어나서 두 번째 인생을 살 수 있었다면...난 널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
내 전부를 포기하면서 너를 놓지 않았던 건..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없는 건 바로 이것 때문이야.
너도, 나도,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인생도.. 딱 한 번뿐이기 때문이야..
넌 유일하기 때문에 제일 아름답고 완벽해. 네가 어떻게 생겼든, 그건 상관없는 문제야."
자신의 벗은 몸을 깊게 흡수하듯 망막 안에 새겨 넣는 주혁의 눈길이 희한하게도 전혀 혁수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천장에 달린 백열등은 따뜻한 봄날의 햇살처럼 담황빛 빛줄기를 두 사람의 고운 알몸 위에 덮어주고,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는 혁수와 주혁에게 평온하고 행복한 미래만을 약속하듯 포근하고 안정적이다.
세상의 잔인한 눈초리와 손가락질을 막아주는 커튼과 그 흉포한 공격으로부터 둘을 보호해주는,
방안으로 굳게 잠긴 문까지... 혁수의 말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
"너와의 섹스에 탐닉한 건... 어떻게 보면 너무 단순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는데... 널 원해서 그랬어.
안혁수라는 남자 그 자체를 원했기 때문에, 정말 미치도록 원해서 죽을 것 같았거든..?
형제로 맺어진 우리 인연을 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남자와 남자, 형과 동생... 그걸 무너뜨리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이었지..
하지만 한 번 경험하고 나니까... 내가 점점 더 미쳐가더라..?
네가 주는 그 느낌을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더라구..
그래, 네 표현대로 난 '안혁수'라는 오르가즘에 중독 된 거야. 그리고 그 오르가즘과 내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한 거지.."
"그 오르가즘에 싫증이 나면 어떻게 할거야..?"
"그럴 가능성이 0.1%라도 보였으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어.
여기까지 와 놓고 그런 질문을 하다니... 안혁수, 넌 자신감을 좀 길러야 해. 아직 한참 멀었어."
그렇게 타박을 주면서도 혁수의 눈 꼬리에 묻어나는 물방울을 다정한 입맞춤으로 씻어내는 주혁..
약하게 소스라치는 그의 속눈썹을 혀끝으로 어루만지고 아담하게 솟아오른 코와 분홍빛 입술에도 차례로 입술 도장을 찍어나간다.
혁수의 귓불에, 목과 어깨 근처에 끊일 줄 모르고 이어지는 주혁의 키스가 계속 아래로 향하다가 하복부에 다다르자,
혁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쳐드는 수줍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제지한다.
그러나 주혁은 혁수의 손길을 모른 척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두 손으로 그의 페니스를 조심스럽게 감싸쥔다.
뚜렷하게 곧추서있는 혁수의 '남성'에도 소중한 키스를 아끼지 않는 주혁의 행동이
말초적인 쾌감과 자극을 위한 것만은 아님을 이해한 혁수는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의 긴장을 풀고 서서히 주혁의 '남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페니스를 거쳐 허벅지 안 쪽의 민감한 부분을 공략하던 주혁의 손과 입술을 만끽하던 혁수가 그를 잡아당기자,
주혁은 교미를 하던 수컷이 네 다리를 사용하여 암컷과 본격적이 결합을 시도할 때와 흡사한 동작으로 늘씬한 몸을 끌어올려 혁수와 시선을 섞는다.
쾌락과 희열로 어두운 빛깔을 띈 혁수의 눈동자 속에 어떤 방법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결단과 맹세가 견고히 박혀 있는 게 보인다.
죄의식, 자책감, 혼돈과 수치심 따위로 더럽혀졌던 둘만의 은밀한 의식이 비로소 순결한 숫처녀의 모습을 입는다.
섹스라는 육체적 행위로 인해, 다쳤던 관계의 조각들이 온전해진다.
빈 마음, 빈 영혼으로 혁수는 자신의 몸을 열어제친다.
이제부터 혁수에게 있어, 주혁과의 섹스는 더 이상 파괴가 아닌 회복이다.
(148)
강태의 눈동자 가운데 비치는 자신의 형상에 모든 시야를 잠식당한 채,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던 재준의 귓가를 건드리는 문환의 음성..
각기 다른 빛깔을 내건 세 남자의 시선이 재준 옆에 자리한 혜련에게로 모아진다.
상아색 투피스로 몸을 감싼 그녀는 못 알아볼 만큼 세련되고 우아한 모양새를 자랑하며 강태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 자리에 서 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여섯 개의 눈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어색했던 그녀의 미소가 또 한 번 균형을 상실한다.
"아, 안녕하세요..? 유혜련입니다."
재준이 소개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입을 여는 혜련..
문환은 위태롭게 이어지던 침묵이 꽤나 불편했던지 유난스레 반색을 표하며 그녀의 인사에 답한다.
"아, 예~ 반갑습니다. 조문환이라고 합니다. 참, 이 쪽은 강태라고.. 혹시 아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물론 강태 씨도요."
아까 전부터 의도적으로 강태와 눈을 마주치지 않던 혜련은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하는 도중에도 줄기차게 강태의 눈길을 외면한다.
실상 그녀에게 있어, 처음 참석하게 된 리셉션보다 강태와의 대면이 훨씬 부담스럽다.
무 경험자치고는 제법 능숙하게 문환과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혜련에게서 시선을 뗀 재준은
자신의 얼굴로 부딪쳐오는 강태의 까만 심연을 맞받지 못하고 서성거린다.
이 때다 싶게 저릿한 통증으로 재준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오른쪽 어깨,
재준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며 깊은 숨을 들이킨다.
"역시 이 회장님께서는 눈이 높으십니다. 미인이 아니면 곁에 두지 않으시니..."
칭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애매한 어투로 슬쩍 농담을 던지는 문환에게 재준은 건조한 웃음으로 응하고 그 정도에서 인사를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아무래도, 강태를 똑바로 쳐다보게 될 것 같다.
리셉션을 주최한 W건설의 대표이사에게 다가가 상투적인 축하인사를 건네고 안면이 있는 여러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며 혜련을 소개시키는 재준..
탁한 아이보리색 정장 차림의 그와 조화를 맞추기 위해 상아색 투피스를 고른 혜련의 센스 덕분에
두 사람은 마치 신혼부부처럼 단란하고 근사한 어우러짐을 과시한다.
그런 재준과 혜련의 일거수 일투족을 쫓아 움직이는 자신의 눈동자를 당장이라도 파내고 싶은 충동에 강태의 목구멍에서 신물이 차 오른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내장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 응어리가 결국 어이없는 눈물로 변하려 하자,
강태는 흉기에 찔린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문환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은 채 연회장을 빠져나간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자동적으로 힘을 가하는 자신의 신경근육이 확 끊어지기를,
그래서 재준이 있는 이 자리에서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버리기를 갈구하면서도 강태는 어느 때보다 빠른 걸음걸이로 재준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널찍한 호텔 로비의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는 비상계단 쪽으로 향하며 어느새 뺨 전체를 축축하게 적신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는 강태..
엉망으로 망가질 화장 따위는 걱정도 하지 않는다.
검은 마스카라가 함께 묻어 나온 탓에 눈물의 색깔은 투명하지 않고 지저분하다.
갑자기 뛰쳐나가는 강태를 보고 따라온 수행원이 의아한 음성으로 무어라 연신 물어대는 것을 깡그리 무시하며
강태는 그에게 꺼지라는 한 마디를 하고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잠궈 버린다.
녹색 형광등 하나만 희미하게 어둠을 잡아먹고 있는 좁은 공간 안에 온전히 혼자로 남겨지자
강태는 듬성듬성 윤곽을 드러낸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아 격한 흐느낌을 토해낸다.
유치하고 치졸하고 짜증스럽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칼 한 자루라도 갖고 있다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심장에 그 칼을 꽂았을 텐데..
그러나 강태의 두 손은 비어 있고, 그의 심장은 본래의 용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고통과 갈증을 담고 있다.
억울하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피해자다. 이재준도 피해자다.
나의 심장도, 이재준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그것도, 서로 마주보는 순간 교통하던 그리움에게도 일말이나마 책임은 없다.
그것들은 모두 피해자다.
우리는 사이코드라마에서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정신병자나 마찬가지다.
아니, 우리는 우리가 미쳤다는 걸 감추고 정상인을 흉내내며 살고 있는 바보들이다.
거기까지 생각의 고리를 늘어뜨리던 강태는 무릎에 파묻은 얼굴을 번쩍 들며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깊은 호흡을 뱉어낸다.
흐느낌을 멈췄는데도 바르르 떨려 나오는 숨결은 섬뜩한 살의보다 더 붉고 푸른 강태의 의지 때문이다.
아직도 흥건하게 맺힌 눈가의 물기를 지우고 차가운 돌계단에서 일어난 강태..
방금 전과는 이질적인 차분함을 부여안고 잔잔히 일렁이는 눈동자를 빛내며 비상계단의 철문을 연다.
멀뚱한 표정으로 대기하던 수행원이 그의 뒤를 바싹 좇으며 질문한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됐어. 너 먼저 들어가 봐. 난 화장실 가서 얼굴 좀 정리하고 올게."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됐다니까?! 여기서 날 납치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회장님이나 모셔."
신경질적으로 목소리의 톤을 높이며 소리를 지르는 강태 탓에,
수행원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연회장 쪽으로 발을 돌린다.
강태는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기고,
화장실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그 곳으로 들어가려는 강태와 반대쪽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던 혜련이 마주치자..
난처한 그늘을 드리우는 건 혜련 혼자 뿐이다.
강태는 아무런 흔들림도 보이지 않고 덤덤하게 그녀와 시선을 겹친다.
그리고 이내 눈동자를 거두며 남자 화장실 안으로 사라진다.
예상과는 다른 강태의 태도에 조금 벙 찐 기색을 표하던 혜련..
무슨 심산인지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화장실 입구에 서서 강태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린다.
한편, 강태는 세면대 앞으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형편없이 번진 화장을 말끔히 씻어낸다.
거무죽죽한 눈물의 흔적까지 몽땅 제거한 다음, 한 쪽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으며 담배를 피워 문다.
하얗게 부서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서서히 안정감을 되찾는 그의 심장에 강태는 한결 평온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다그치는 결심과 열망이 식은 것은 아니다.
느긋하게 한 개비를 다 피우고 밖으로 나온 강태의 눈에 좀 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는 혜련이 다가온다.
"저... 얘기 좀 해요, 강태 씨.."
최대한 예의 바르게, 공손히 부탁하는 그녀의 말투가 강태에게는 전혀 호의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녀에 대한 적대감마저 스스로 인정하고 수긍하는 그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냉랭하고 딱딱하게, 강태는 절교를 선언하는 사람처럼 대꾸한다.
"귀 뚫렸으니까 할 말 있으면 해요."
"짧게 할 수 없는 얘긴데... 여기서는 좀..."
"그럼, 저 안에 들어가서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얘기하잔 거에요?"
턱짓으로 연회장을 가리키며 오만하게 반문하는 강태에게 불쑥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혜련은 애써 그런 마음을 가다듬으며 계속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좋아요, 여기서 얘기할게요. 다른 게 아니고.. 강태 씨도 짐작하겠지만 재준 씨 얘기에요."
"재준이가 뭐요?"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재준 씨 아직도 많이 흔들려요, 강태 씨 때문에.."
"와아~ 정말이요? 아주 기뻐서 눈물이 다 나네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저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과장된 강태의 조소에 화를 누그러뜨리지 못한 혜련이 매섭게 낯을 굳히며 경고한다.
그러자 강태도 빙글거리는 웃음기를 단박에 떨쳐내고 싸늘한 냉기를 눈동자 가득 퍼올리며 음울한 비음을 흘려 보낸다.
"나도 진지한 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그래서 댁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재준이가 나를 못 잊고 있다.. 그걸 얘기해 주고 싶은 거에요?
그거야 당연하죠. 이재준이 날 어떻게 잊겠어요? 걘, 절대 날 못 잊어요!
무슨 짓을 해도,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나도 그 애는 절대, 절대 나를 잊을 수 없어요!!"
"그렇게 자신하지 말아요. 재준 씨는 노력하고 있는 중이니까...
강태 씨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재준 씨를 더 힘들게 하는 거에요.
강태 씨가 재준 씨의 노력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 안 해 봤어요?"
답답하다는 듯 부르짖는 혜련의 말에 강태의 까만 심연은 완전한 얼음으로 변모했다가 금새 그 차가움을 덮고 붉디붉은 화염을 지핀다.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성역의 문을 함부로 열어 제낀 사람에게 징벌을 내리 듯,
강태는 이 순간까지 자신을 갉아먹던 증오스러운 찌꺼기들을 전부 끄집어내어 혜련에게 퍼붓는다.
"야, 네가 뭘 알아!? 응?? 술 팔고 몸 팔던 년이 우리에 대해서 뭘 아냐구..!
재준이와 나에 대해서 너 같은 년이 뭐 하나라도 이해할 수 있어?
재준이 옆에 있다고 네가 달라진 줄 알아? 착각하지 마, 제발... 그래봤자 넌 몸 팔던 창녀 아냐??
돈 몇 푼 받고 몸 팔던 년이 뭘 안다고 나서? 넌 아무 것도 몰라..
재준이에 대해서도, 우리 관계에 대해서도, 우리가 같이 있었던 시간도 넌 전혀 모르잖아!!"
강태가 점점 피치를 상승시키며 고함을 쳐대는 가운데 혜련의 얼굴은 건강한 혈색을 잃어버리고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치부를 들쑤시는 강태의 말 때문에 상처 입은 자존심이 기어이 그녀를 폭발시킨다.
"뭐가 어째?! 허..! 이거 진짜 형편없는 새끼 아냐??
씨발, 그래! 나 몸 팔던 년이다.. 그래서? 그러는 너는 뭐가 달라??
너도 남자한테 몸 팔아서 사는 남창 밖에 더 돼? 넌 좀 비싸게 팔린다 이거냐?
그리고, 내가 모르긴 뭘 모른다는 거야.. 매일 재준 씨랑 얼굴 맞대고 사는 사람은 나야!
근데 내가 왜 몰라, 응? 너랑 재준 씨랑 어떤 관계였는지... 내가 그 까짓 거 눈치 못 챌 만큼 멍청한 줄 알아??"
"............."
"병신 같은 새끼.. 너희들만 사랑해 봤냐? 죽고 못 살 정도로 보고 싶은 그런 사람 하나쯤 안 가져본 사람이 어딨겠어, 이 나이에...
넌 이 세상에 힘든 사람 너 밖에 없는 것처럼 생색내는데, 지랄 좀 하지 마.
좆같은, 그 사람이라는 거 나도 너보다 훨씬 오래 전에, 훨씬 더 많이 겪었던 년이니까!"
순하고 착해 보이는 그녀의 눈망울에 독한 아픔이 서리는 것을 감지한 강태는 자신이 큰 실수를 범했음을 깨닫는다.
파렴치한 이기심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눈 먼 고통에 저주를 서슴지 않으며 고개를 떨구는 강태..
혜련에게 사과를 해야 할 텐데, 우습게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민망해서라기보다는 지쳐서 그러한 것 같다.
"그래.. 네 말처럼 재준 씨 너 잊으려면 많이 힘들 것 같아.
여전히 자면서 네 이름만 부르고, 집 전화가 오면 깜짝 깜짝 놀라고... 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재준 씨 노력하고 있어.
두 사람이 뭐 때문에 헤어지게 됐는지, 그건 나도 몰라.]
그래도 내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헤어지는 게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을 것 같다는 거야.
이런 말 지금 듣는다고 해서 이해가 가지도 않겠지만, 솔직히 사랑이라는 거...오래 안 가.
더군다나 재준 씨와 너처럼 이렇게 지독한 감정은 상처만 더 많이 남기고 끝나는 법이야.
그럴 거면 어차피 헤어진 거 미련 버리고 깨끗이 갈라서는 게 서로에게 좋다구..
재준 씨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계속 널 거부하는 걸 거야."
".............."
"이젠...재준 씨가 마음 잡을 수 있게 너도 도와줬으면 좋겠어.
네가 정말 재준 씨를 위한다면, 그렇게 해 줘야 돼. 재준 씨한테 돌아오려고 하지 마. 그리고 너도 나름대로 새 길을 찾아.
그게 재준 씨가 너한테 바라는 걸 테니까..."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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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라앉지 않은 감정을 억지로 삭히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으로 혜련은 입을 다문다.
그리고 이물질이 낀 선풍기 날개처럼 경련하는 강태의 눈동자를 똑바로 쏘아보다가 허둥지둥 몸을 돌린다.
또각 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에 신경을 기울이며 걷던 그녀가 맞은 편에 서 있던 준상과 맞닥뜨리고,
보일 듯 말 듯 형식적인 미소를 짓더니 급하게 사라진다.
혜련을 수행하려고 쫓아 나온 준상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 강태에게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대리석 벽에 등을 대고 한 쪽 손으로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부여잡고 있는
강태는 그 몸의 떨림을 배제하고라도 충분히 위태로워 보인다.
무참히 꺾인 목덜미의 살갗 위로 반투명하게 비치는 핏줄이 유독 처연한 느낌으로 준상의 시야를 메꾼다.
한참을 그런 자세로 버텨내던 강태가 후다닥 고개를 쳐들더니 아주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황급히 화장실로 숨어든다.
갑자기 몸을 회전시킨 강태 때문에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이 철컥대는 소음을 내며 흔들린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준상은 깊게 생각할 겨를도 두지 않고 강태의 뒤를 따라 움직인다.
화장실 안에 휴식용으로 비치된 쇼파에 주저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세워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은 채 흐느끼는 강태..
불규칙적으로 소스라치는 어깨가 하도 가냘퍼 보여서 준상은 와락 치밀어 오르는 동정심을 누그러뜨리고,
화장실의 출입문을 잠근 뒤 조심스럽게 강태에게로 다가간다.
준상의 기척을 듣지 못했는지 그는 이마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강태의 턱 끝에서 방울진 눈물이 아무런 효과음도 내지 않고 그의 바지에 비슷한 크기의 얼룩들을 찍어낸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눈빛을 가다듬는 준상..
감정이 방만하게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며 진지한 목소리를 꺼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들리는 강태의 눈동자 속에 기묘한 표정의 준상이 들어오자,
의문과 반가움이 뒤섞인 그의 까만 동공이 탁한 빛으로 와해된다.
준상의 얼굴 때문에 더욱 사무치게, 선명히 재준의 존재가 강태의 의식세계의 가장 바깥쪽으로 부상한다.
겨우 몇 십 발자국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두꺼워진 고통으로 강태를 후벼판다.
제멋대로 요동치는 턱뼈를 고집스레 묶어두려 애쓰며 강태는 울음기가 가시지 않아 맹맹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오랜만인데 추한 꼴을 보이네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깍듯하게 뒤를 잇는 준상의 대답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듯,
강태는 변화 없는 표정으로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세면대로 가서 뺨에 새겨진 눈물자국을 지워낸다.
종이수건을 뽑아 물기를 닦으려는 강태에게 준상이 손수건을 내밀고, 강태는 상투적인 어조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그것을 받아든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강태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옷매무시를 추스르느라 바쁜데, 준상은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그러다 어정쩡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강태였다.
"......어쩜 그렇게 편해 보일 수가 있는지...정말 지독한 놈이야.."
비난과 원망보다는 그리움이 더 많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이 스며 있는 강태의 음성에 준상은 희한한 안도감을 느낀다.
하고자 결심한 일에 대한 책임감과 이유가 보다 분명해져서 그런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그 애가 알까요?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짐작이라고 할 것 같아요?"
"물론 알고 계시겠죠. 그렇기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난...준상 씨, 난... 그 여자 말 인정할 수 없어요.
언젠가는 시들어버릴 감정에 목 맬 필요 없다는 말... 그거...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회장님과 도련님께 그런 말을 적용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겠죠."
준상과 맞대고 있던 시선을 아래쪽으로 떨어뜨리며 강태는 엷게 웃음을 띄운다.
허탈한 미소도 아니고 씁쓸한 냉소도 아니다.
의미를 규명하기 어려운 웃음을 계속 머금은 채 강태의 입술이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를 내보낸다.
"준상 씨, 미안하지만 나 돈 좀 빌려줘요. 지갑을 안 갖고 나왔어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뜬금 없는 강태의 말에 준상이 어리둥절해서는 '네??'라고 되묻는다.
그러나 강태는 천연덕스럽게, 아주 가벼운 말투로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나 돈 좀 빌려달라구요. 택시비가 없어서 그래요. 양수리까지 갈 돈만 있으면 돼요."
"양수리요..?"
"나 지금 양수리 별장으로 갈 거에요. 재준이 별장 말이에요.
맘 같아서는 준상 씨한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그러면 내 말을 전해줄 사람이 없어서요.."
"도련님, 제 생각에는...."
엄밀히 말하자면 도망을 치겠다는 강태의 이야기에 준상은 그에 따를 파장을 건너다보며 조급한 음성으로 강태를 말리려 한다.
강태의 행동이 너무 무모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아뇨,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구요.. 준상 씨는 재준이한테 내 말만 전해줘요. 그렇게 해 줄 수 있겠어요..?"
"......예, 말씀하십시오."
준상의 만류에 일절 아랑곳없이 단호하게 말을 잇는 강태..
그의 기세에 눌린 준상은 더 이상 나서지 못하고 순순히 강태의 물음에 긍정의 답변을 들려준다.
"난 지금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거에요.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망가져 가고 있어요.
내가 정말 살아있기를 바란다면, 정말 내 인생을 지키고 싶다면 돌아오라고 해요.
그리고... 나는, 나는 정말...정말로 나는....죽고 싶지 않다고.... 정말 죽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얘기해 줘요, 준상 씨."
- 반짝이는 불빛과 겹쳐져 차창에 어리는 재준의 얼굴을 역력한 피로 때문에 수척해 보인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밤 거리의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며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백미러로 훔쳐보는 준상..
그 찰나적인 눈길까지도 놓치지 않은 재준이 시선은 그대로 창밖에 둔 채 건조한 목소리로 묻는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 아닙니다. 그냥 많이 피곤해 보이시길래..."
평소 같으면 습관적으로나마 괜찮다는 말을 해 줬을 그가 오늘은 입을 굳게 봉하고 다시 혼자만의 상념 속으로 빠져든다.
혜련 역시 재준과의 눈 마주침을 일부러 회피하 듯 반대쪽 창문에만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있다.
1시간 넘게 차를 달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재준이나 혜련이 담배를 피우려고 라이터를 찰칵대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차안을 꽉 채운 적막은 끈질기게 불편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빌라 입구에 차가 멈춰서고, 준상은 서둘러 혜련이 앉은 뒷좌석의 문을 열어준다.
고맙다는 표시도 없이 화강암처럼 딱딱한 얼굴로 바닥에 발을 딛는 혜련..
흰색 핸드백을 어깨에 둘러매는 모습이 마치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처럼 힘겨워 보인다.
"저...회장님!"
수고했다는, 잘 들어가라는 일상적 멘트를 남기고 집으로 향하는 재준을 다급하게 부르는 준상..
몸을 돌리며 눈짓으로 이유를 묻는 재준에게 넉살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한다.
"피곤하시겠지만...제가 술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드릴 말씀도 있구요."
"그래..? 그럼 같이 들어가자."
"아뇨. 댁에서보다는 좀 더 편한 곳에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댁으로 가면 얘기가 쉽게 나오지않을 것 같아서요.."
잠시 의아해하던 재준은 고민을 거듭한 흔적이 짙게 묻어나는 준상의 눈빛을 대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요청을 수락한다.
혜련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 보이고 준상과 함께 걸음을 떼는 재준.. 준상은 근처에 있는 단골술집으로 재준을 안내한다.
지극히 서민적인 실내 포장마차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주인 여자가 반색을 하며 준상과 재준을 맞아들이고,
준상이 간단한 안부를 물으며 재준에 대해 소개하자
여자는 자못 환영한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이라는 등 다소 과장된 말들을 늘어놓는다.
후미진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소주와 곱창을 주문한 뒤, 준상은 송구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연다.
"누추한 곳으로 모셔온 것,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해야 그나마 제대로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신경쓰지 마. 사적인 자린데, 뭐..."
준상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선선히 대꾸하는 재준..
준상은 얼굴을 뒤로 돌려 공손히 잔을 비우고 두 손으로 술병을 들어 재준에게 한 잔을 올린다.
얼마동안 영양가 없는, 변죽만 울리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비우다가
조금씩 취기가 몸 전체를 감싸오자 준상은 정색을 하고 재준의 눈동자를 정확히 응시한다.
늘 짊어지고 사는 피곤과 우울이 창백한 그의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게 보이자, 준상은 마침내 또렷한 목소리를 울려낸다.
"오늘...강태 도련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리셉션에 참석했잖아. 나도 인사했어."
억양의 굴곡 없이 심드렁한 재준의 어조는 서툴기 짝이 없다.
스스로도 자신의 그런 대답이 민망한지 재준은 쫓기듯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 털어 넣는다.
그리고 부산한 동작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다.
"그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도련님과 저, 단 둘이 말입니다."
"..............."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실 겁니까..?"
추궁하기보다는 확인하려는 듯한 의도가 담긴 준상의 질문에 재준은 아주 황량하게, 빈 껍데기 같은 웃음을 흘린다.
그의 작은 입술이 만들어내는 모양새가 준상의 심장 박동을 어긋나게 할 정도로, 충격적인 상실감을 구체적 형상으로 환원한다.
그 속에서도, 아직 한 가지를 포기하지 못한 재준의 진실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무슨 얘길 했는데? 아니, 네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이 질문을 드렸었는데...그 때 회장님께서는 대답을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꼭 대답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래 주셔야 합니다."
당돌하게 부딪혀오는 준상의 눈빛이 어떤 계산이나 욕심도 한 점 용납하지 않을 진솔함으로 맑게 개어 있다.
그 안에 오롯이 솟아 있는 자신의 얼굴이 불현듯 부끄러워져서 재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강요에 가까운 준상의 부탁을 묵묵히 허락한다.
망설였다가는 영영 말을 꺼낼 수 없기라도 하듯이, 준상은 미세한 떨림을 제거하고 팽팽하게 긴장된 음성을 재준 앞에 던져 놓는다.
"도련님과 헤어지신 이유가 무엇인지, 왜 도련님을 연화회에 넘기신 건지...회장님의 진심을 알고 싶습니다."
(151)
"오빠한테 키스해도 되요? 어떤 의미인지는 묻지 마시구요."
연수의 목소리는 조금도 무겁거나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지 않다.
다만 가벼운 명랑함으로 덮으려 했던 수줍음과 망설임이 그녀의 어설픈 연기 실력 탓에 번연히 드러나 보일 뿐이다.
무질서하게 달음박질하는 심장을 싸안고 태현의 기울어진 눈동자를 어렵사리 받아내던 연수..
점점 각도가 둔탁해지며 스산한 공간을 넓혀 가는 태현의 암갈색 눈망울이 못내 서글픈 감정을 불러일으키자
그녀는 오히려 더 밝아진 미소와 함께 변명처럼 말을 잇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간직해 온 꿈이 하나 있는데요..
눈 내린 겨울 밤 집 앞에서 첫 사랑과 첫 키스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오늘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되요?"
연수의 부탁 그 자체보다도 태현은 그녀가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하는데 더 당황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지난 번 세라의 무덤에 갔을 때에도 연수가 이런 호칭을 사용했음에도,
아니, 그 사실을 떠나 단순히 호칭 하나가 달라졌을 뿐인데도 연수와 자신 사이에 널찍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거리감이 한꺼번에 증발하는 느낌이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익숙함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처럼 은근히,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태현을 휘감는다.
그리 멀지 않은 기억 속에서 현재의 시간으로 되살아 나온 그 힘은 태현이 인지하지 못하는 새 그의 허리춤을 붙잡고 매달려 있다.
"연수야.. 왜 그러냐..."
"오빠 그거 아세요..?"
태현의 목소리는 아예 듣지도 못한 듯 불쑥 질문을 던지는 연수가 하도 생소해서 태현은 이어 붙이려던 말을 입안에서 분해시키고 만다.
부드럽고 나지막하게 겨울 공기 사이로 퍼져나가던 연수의 음성은 별안간 두 사람을 둘러싼 매서운 추위만큼 냉랭해져 있다.
거절당한 모멸감이 아니라 좀 더 자연스럽게, 차근차근 태현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변화시키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오빠가 그렇게 장난 식으로 웃으면서 제 마음 모른 척 하실 때마다.. 오빠가 꼭 죽을병에 걸린 사람 같다는 거..."
"........."
"차라리...차라리 화라도 내시면 제가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을 거에요."
"연수야, 너랑 이런 얘기하고 싶지 않아. 아니, 우린 이런 얘길 나눌 사이가 아냐."
"아뇨. 제 얼굴을 한 번 똑바로 보세요. 제가 누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오빠가 저를 통해서 바라보는 그 사람은 오빠가 사랑하는 여자잖아요..? 전 제 3자가 아니에요. 저도 당사자라구요."
"세라와 나 사이에 끼여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게 아무리 과거라 해도..!"
연수의 간곡한 애원에 즉각적인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태현의 음색이 급격하게 높아진다.
자기도 모르게 연수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기도를 거스르고 치받쳐 올라오는 호흡을 가까스로 단속한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투과되어 보이는 태현의 눈동자가 활시위가 되어 연수의 심장을 과녁 삼아 날카로운 화살을 쏘아댄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시리도록 생생하게 와 닿는다.
벌써 이만큼이나 그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 연수를 훨씬 더 초라하게, 왜소하게 만든다.
"이제 그만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마, 연수야. 너무 부담스러워서 참아낼 수 없게 될지도 몰라."
"알아요, 부담스러우시다는 거...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래, 그걸 안다면 더 이상은 우리 사이에 세라 얘기가 오고가는 일은 없도록 해 줘."
"그걸 알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저에 대해서는, 한 번이라도 깊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저... 이제 겨우 열 일곱 살이에요. 오빠를 만날 거라고는 그 전에 아주 희미한 예감조차도 받지 못했구요.
갑자기 여기까지 끌려와 버린 제가 어떨지... 오빠는 정말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보셨어요..? 네??"
".........."
"그래요. 저도 오빠랑 세라 언니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이젠 오빠와 저,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정말 간절히,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제가 세라 언니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람은 바로 태현오빠잖아요.
태현오빠가 아직 저한테 그걸 강요하고 계시잖아요.."
세라와 똑같이 닮은, 고양이 같은 화려한 연수의 눈매가 쓸쓸한 그늘을 드리우며 스르르 허물어지더니
어둠 속, 보이지 않는 공간에 그녀의 눈물이 조용한 흔적을 남긴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뽀얗게 빛나는 이마가 문득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자아내자
태현은 연수의 눈물에 당황할 틈도 없이 얼른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만다.
외면하려고 했던 그녀에 대한 책임감이 때를 놓칠세라 맹렬하게 태현을 들쑤시기 시작한다.
무너졌던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흩어져 떠도는 추억들을 다독이고, 미련하게 날뛰는 못 다한 사랑을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걸로 모두 끝난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던 태현..
세라의 부재에 길들여져 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가끔씩 씁쓸하게 미소를 짓기만 하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던 그 앞에 울고 있는 연수가 보인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둥근 어깨에 눈길이 머물자, 방금 전 키스를 해 달라고 한 연수의 부탁을 대충 넘겨버리려 했던 것이 너무도 비겁하게 느껴진다.
문태현, 왜 그렇게 겁을 내는 거지? 무엇이 널 두렵게 하지?
어째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거야. 왜 그토록 안일한 정체 속에서 웅크리고만 있는 거야.
닳아빠진 너 자신을 봐, 문태현.
혹독한 질책으로 자신을 후려쳐 보지만 태현의 걸음은 천천히 뒤돌아서고 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는 연수를 그대로 놔두고, 결국 그녀를 등진다.
그리고 돌아설 때만큼 태연하게 반대 방향으로 발자국을 찍어 나간다.
- 사각거리는 듣기 좋은 마찰음이 귓가를 스치자 감겨 있던 주혁의 눈꺼풀이 약하게 흔들리다가 검푸른 눈동자를 공개한다.
제일 먼저 망막 안으로 스며드는 환한 빛줄기 때문에 잠시 미간을 찡그리는 주혁..
그의 시세포가 햇살의 명도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주혁은 침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의자를 두고 앉아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는 혁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몸 위에 덮여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트는 온데간데없이, 자신의 알몸 전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만다.
별로 부끄러움은 타지 않는 성격인 주혁이지만,
번듯하고 깔끔하게 옷을 갖춰 입은 혁수 앞에 가장 비밀스러운 치부까지 몽땅 노출된 몸뚱어리를 내놓고 태연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침대 밑바닥에 떨어진 시트를 주워 어색한 동작으로 하반신을 가리는 주혁..
그가 깨어난 줄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혁수에게 몇 마디 핀잔을 준다.
"안혁수, 이불 좀 덮어주고 그러면 어디가 덧 나냐? 너, 일부러 그냥 놔두고 구경한 거지?"
"치.. 내가 너냐? 그런 짓 하게... 조금만 기다려 봐. 거의 다 됐으니까."
주혁에게 대수롭지 않은 시선을 한 번 던진 후 이내 스케치북으로 눈을 돌린 혁수가 세심한 손길로 연필을 놀리며 말한다.
주혁은 궁금증으로 동그래진 눈망울을 깜박이며 허리에 시트 자락을 두른 채 느릿느릿 혁수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주혁의 눈동자가 그림에 닿기 전, 혁수는 황급히 스케치북을 가슴에 껴안으며 도리질을 친다.
"안 돼, 아직 보지 마! 가서 씻고 옷 입은 다음에 나오면 완성되었을 테니까 그 때 봐.."
"참나~ 오늘따라 웬 극성이야.. 아이고, 어젯밤에 힘썼더니 배고프네..." (-_-;)
새벽녘까지 이어졌던 몇 차례의 정사를 두고 이르는 주혁의 말에
혁수는 밉지 않은 눈흘김으로 그의 움직임을 쫓다가 하얀 얼굴을 해사하게 피우며 미소짓는 주혁의 넉살에 이기지 못하고 피식 따라서 웃어버린다.
혁수의 미소를 확인한 주혁은 느긋하고 편안하게 담배를 입에 문 채 욕실로 들어간다.
얼마 후, 사각팬티 한 장만 달랑 걸친 차림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탈탈 털어 내며 욕실 밖으로 나오는 주혁..
평소에 즐겨듣는 음악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머리를 빗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여전히 스케치북을 붙들고 있는 혁수에게 진지한 낯빛으로 묻는다.
"혁수야, 너 너무 말라서 보기 싫지?"
"보기 싫진 않아. 살이 좀 더 찌면 좋겠지만."
"에이 씨~~ 넌 말랐어도 보기 좋고 예쁜데, 난 왜 이렇게 병자 같은 거지? 너무 하얘서 그런가..?"
"쿡... 네가 나보다 백 배는 잘 생겼으니까 불평 그만하고 이리와 봐.."
못마땅한 눈초리로 자신의 몸을 살펴보는 주혁에게 다정하고 온화한 웃음을 그를 부르는 혁수..
고막을 간질이는 그의 목소리에 주혁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싹 걷어내고 싱글거리며 발을 옮긴다.
"자, 크리스마스 선물.."
가슴팍에 딱 밀착시키고 있던 스케치북을 주혁에게 내밀며 혁수는 쑥스럽다는 듯 혁수는 홍조를 띄운다.
호기심과 기대감에 휩싸여, 주혁은 혁수가 수선을 피우며 완성되기까지 보여주기를 거부한 그림으로 눈동자를 떨어뜨린다.
"아, 안혁수... 이거 정말..."
"급하게 그려서 좀 이상할 거야. 그래도 좋게 봐 줘, 정성 들여 그렸으니까..."
5절지 크기의 하얀 종이 위를 수놓고 있는 그림, 그 주인공은 바로 주혁이다.
그림에 사용된 도구라고는 연필 하나 뿐인데, 삭막한 느낌이 들기보다는 외려 오묘하고 풍성한 이미지를 자아낸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혁수의 감각도 탁월하지만,
무엇보다 주혁을 감동시킨 것은 모체의 자궁 속 태아처럼 완벽하게 평화로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다.
"혁수야, 난 이런 건... 상상도 못 했어.."
"내년에는 훨씬 좋은 거 해 줄게. 근데...아무리 봐도 좀 야한 것 같다.. ^^;"
천진스런 장난기가 담뿍 배어나는 눈빛으로 혁수는 스케치북과 주혁을 번갈아 쳐다본다.
곧게 뻗은 가슴선, 아슬아슬하게 깎이는 허리곡선, 편평한 배와 그 아래의 페니스까지,
신체의 어느 한 부위도 빼놓지 않고 정교하게 담아낸 혁수의 손놀림 덕분에 그림은 꽤나 적나라한 누드화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주혁에게는 그것이 전혀 외설적이거나 퇴폐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혁수의 그림은 실체보다 더 진솔한 주혁 그 자체로, 혁수의 손길에 의해 빚어진 주혁의 형상은 그 자신에게조차 터질 듯한 자부심을 안겨준다.
내가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아니, 너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그럴 따름이겠지.
네 눈 속에 뿌리박힌 진실이 나를 더 고귀하게 꾸며줄 테니까...
너의 진실을 통해 바라보는 난, 가장 온전하고 순결한 존재일 수 있을 거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나왔던 장면 생각나?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이렇게 그려주잖아.
그거 보면서...나도 언젠가 꼭 널 그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 이거, 잘 간직해야 돼?"
울음 반 웃음 반으로 기묘해진 표정의 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혁수를 품으로 끌어당긴다.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서로의 체취를 흡수하다가 불현듯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주혁은 혁수의 등에 두른 팔을 풀며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테이블로 들고 가서 펜을 손에 쥐고 도화지 한 귀퉁이의 여백에 몇 글자를 적어 넣는다.
잔잔한 미소와 함께 다시 그림을 혁수에게 건네는 주혁..
혁수의 눈동자와 뇌리와 영혼 속으로, 주혁이 써놓은 하나의 문장이 걷잡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빨려 들어온다.
[ 신께서 내 팔을 부러뜨리신다면 내 심장으로 당신을 잡겠습니다. ]
(152)
"왜 네가 그걸 꼭 알아야 하는 거지..?"
고개를 깊숙이 떨군 채 신발 앞 부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음울하게 잠긴 목소리를 흘려보내는 재준..
준상은 주저함이 한 꺼풀 벗겨진 말투로, 재준과 눈을 마주치려 애쓰며 그의 질문에 답한다.
"그걸 알아야만 제가 이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준상의 대답에 재준이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댄다.
어긋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포개어지는 두 쌍의 눈동자 사이로 명백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친밀감 짙은 기류가 형성된다.
잠시 준상을 똑바로 바라보던 재준.. 불현듯 딱딱하게 경직된 안면근육을 풀어헤치며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기계적인 냄새가 묻어나는 손길로 준상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준다.
소주병을 자신의 잔으로 가져와 한 잔 가득 따르고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후, 그제야 허탈한 웃음을 거두는 재준..
말없이 한 잔의 술을 털어 넣고 작위성이 모조리 빠져나간 담백한 표정과 음성으로 준상에게 가장 정직한 대답을 내보인다.
"왜 강태랑 헤어졌냐고..? 글쎄...웃기는 대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애를...좋아하기 때문이야."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나도 알아, 짜증나게 유치하다는 거.. 사랑하기 때문에 보냈다... 완전히 3류 드라마잖아?"
"다시 한 번 여쭤 보겠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 진심이십니까? 믿어도 되겠습니까?"
다그치듯 반복해서 확인 질문을 날리는 준상을 묵묵히 건너다보다가, 재준은 다시 좀 전보다 피폐한 상실감으로 채색된 웃음을 뱉어낸다.
웃음 짓는 선홍빛 입술과 상처 입은 까만 눈동자의 대비가 너무 섬뜩하게 시야를 장악해서,
준상은 차라리 그가 엎드려 펑펑 우는 게 훨씬 덜 당황스러울 것 같다.
우십시오, 마음놓고 통곡이라도 하십시오.
왜 그렇게 웃으시는 겁니까. 어째서 그런 눈빛을 하고도 웃음을 보이려 하십니까.
나는 당신의 부하입니다. 당신께 충성을 맹세한 부하란 말입니다!
가슴속에서 발작적으로 끓어오르는 외침들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법석을 떨지만,
준상은 쓰디쓴 소주를 연거푸 들이키는 것으로 그 아우성을 잠재우고 더욱 단연해진 눈동자로 재준을 응시한다.
흐려진 초점으로 먼 위치의 소실점에 시선을 걸치고 있는 재준..
그의 검고 투명한 망막에 번져나가는 고통의 빛깔이 점점 진해지는 것을 실감하자 준상은 서둘러 다시 입을 연다.
"혜련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말씀 나누시는 걸 들었습니다.
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듣고 싶지 않았다면 듣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도 전... 그 자리에 서서 전부 다 똑똑히 듣고 기억해두었습니다."
"................"
"혜련 아가씨께서 이제 그만 회장님을 힘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도련님께 부탁하시더군요.
회장님께서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니까...
나름대로 새로운 길을 찾아서 회장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주는 게 회장님을 위해 도련님께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다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차피 사랑이라는 감정, 오래가지도 않을 텐데 나중에 더 큰 후회를 남기느니 이쯤에서 깨끗하게 끝내는 것이 좋다고도 하셨구요."
"훗...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닌데? 강태...또 한바탕 뒤집어엎었겠구만..?"
"아뇨, 아무 말씀도 못 하시던데요."
쐐기를 박는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준상에게 경사가 급격해진 재준의 눈동자가 머문다.
연속적으로 입가에 매달던 헛웃음은 종적조차 감춘 채, 재준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때를 맞추어 깨어나 활개 치는 오른쪽 어깨의 통증이 그에게 한 남자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맹렬하게, 재준을 세뇌시키고 말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멍하니 계시다가...혼자 우셨습니다.
그렇게 서럽게 우시는 건 정말 처음뵈었고...그래서 모른 척 돌아 나올 수 없었습니다.
제가 먼저 도련님께 다가간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 보면 도련님께서 절 부르신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울었다고..? ...강태가...아직도 운단 말이야..? 나 때문에..??"
"우시는 모습이...뭐라고 할까...세수하고 밥 먹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보여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일상적이라고..? 강태가 우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고, 네 눈에..?"
"제가 느낀 대로 솔직하게 말씀 드리고 있는 겁니다."
손목의 힘이 탁 풀리며 탁자 위에 술을 쏟는 재준..
피로 때문에 창백하던 얼굴은 회칠을 해 놓은 마냥 부자연스러운 흰빛으로 꺼져든다.
그런 재준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준상이 이제까지의 덤덤하고 냉정한 태도를 집어치우고 간곡한 표정이 되어 재준에게로 더 가까이 상체를 기울인다.
상대가 자신의 보스만 아니라면 두 손이라도 꼭 붙잡고 흔들어가며,
속에서 격동하는 말을 몽땅 토해내며, 예의고 격식이고 상관하지 않은 채 떠들 수 있을 텐데...
준상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자꾸 폭발하려는 인내심을 애써 달래며 말을 잇는다.
"도련님께서 그러셨습니다. 혜련 아가씨 말씀, 인정할 수 없다구요. 저 역시 같은 입장입니다.
도련님과 회장님께 그런 얘기를 갖다 붙이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회장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혜련이가 틀린 말한 건 아냐. 빨리 끝내는 게...후회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일 거야."
"회장님!! 정말 왜 계속 자기 자신을 속이시는 겁니까!? 왜 그렇게 진실을 외면하려고만 하시냐구요?!!"
결국 고함을 지르고 마는 준상..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책망과 애틋함으로 일렁이는 눈동자를 엉뚱한 곳에 박아놓는다.
놀라움 때문에 크기가 확대된 재준의 검은 심연을 회피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흥분을 가라앉히던 준상은
다시 재준을 마주보며 나지막하지만 더 단단해진 음성을 울려낸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절 건방지다고 내치셔도 좋습니다. 쫓겨날 각오하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 어느 누구의 말을 대신 전해 드리는 게 절대 아니라는 것, 알아주십시오."
"준상아... 얘기하지 마. 듣고 싶지 않다."
"안 됩니다, 절대로 들으셔야 합니다!!
회장님께서 강태 도련님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명령불복종으로 회장님 손에 죽는 한이 있어도 해야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회장님도 알고 계시겠죠. 저도 들리는 바가 있어서 대강은 압니다.
우선 겉모습부터 보십시오, 어떻게 변하셨는지..!
제가 알기로는, 회장님 곁에 계실 때 도련님께서는 한 번도 화장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지금보다 몇 백, 몇 천 배 아름다우셨죠..
술이나 담배는 보통 여자들보다도 꺼려하시던 분이 이제는 알콜 중독에 빠질 위험을 안고 매일 매일을 버티고 계십니다.
심지어,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기분 내키면 잠자리를 같이 하신다는 소문까지 들립니다! 모르십니까, 회장님??"
"......그만해, 제발... 준상아... 제발 그만 얘기해라..."
민주화 운동을 하다 경찰에 잡혀 고문 받는 학생처럼,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에 질려 애원을 되풀이하는 재준..
죽음을 넘어서는 절망과 싸우며 여기까지 자신을 끌고 온 시간 모두가 수포로 돌아갈 것 같은 희망적인(?) 예감이 그를 혼돈의 중심으로 밀어 넣는다.
점점 목이 졸리는 이성, 그 반대편에는...무덤 속에 갇혀 있던,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은 감정.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심장에서 뿜어내는 피가 질주하며 온 몸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아, 살아있는 건가. 내가 살아있는 건가. 다시 숨쉬는 건가, 이재준...
왜 거부하고 있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만하라구요? 회장님께서야말로 이제 제발 이 따위 연극은 그만하십시오!!
이게 정말 뭐 하는 짓거리입니까? 네??
...회장님, 제가 충의회에 처음 들어온 16살 때부터 지금까지 회장님은 언제나 저의 영웅이고 우상이셨습니다.
후계자 수업을 받으실 때도, 보스의 자리에 오르셨을 때도, 항상 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회장님을 모셨습니다.
회장님을 모신 지난 4년 동안 저는 한 번도 회장님의 명령을 거역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회장님께서도 인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회장님의 판단과 결정은 무조건 옳다고 믿고 뭐든지 그대로 따랐습니다.
비록 깡패라고 손가락질 당하면서 음지에서 살아도... 전 건달이 되려고 충의회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회장님을 제 사표로 삼았습니다.
저 분과 같이 되어야겠다, 그런 마음 하나 가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 마음은 절대 변치 않을 겁니다.."
속사포처럼 혀를 움직이던 준상이 거기서 말을 끊고 고조된 숨결을 고르며 조금 전보다는 한결 정갈해진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을 덧씌운다.
을씨년스러운 모양새로 자빠져 있는 술잔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봉한 채 미동 없이 앉은 재준..
준상은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빠르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축이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도련님에 대한 회장님의 결정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모르십니까..?
도련님을 향한 회장님 자신의 마음을... 또, 도련님의 사랑을... 왜 그렇게 과소평가 하십니까?
무식한 저도 이렇게 잘 알겠는데, 왜 회장님께서는...!
아니, 아니겠죠. 모르시는 게 아니라 모른 척 하시는 거겠죠.."
".....맞아, 나도 알고 있어. 근데...아직도 자신이 안 생겨, 준상아..나는... 강태를 생각하면,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 위로 낙하하는 한 방울의 눈물이 재준의 뒷말을 대신한다.
직속부하 앞에서 훌쩍이며 눈물을 짜다니...
뇌리 한 쪽을 스치는 상념이 재준을 수치스럽게 하지만,
그런 수치심이야 강태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는 미안함에 비하면 진정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금방 제자리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 죽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면 된다고,
저물어 가는 내 사랑의 절규 따위야 무시해 버리면 그만 이라고...
......내가, 틀렸나 보다.
"도련님께서 양수리의 별장으로 가셨습니다. 아무리 길이 막혔어도 지금쯤이면 도착하셨을 겁니다."
힐끗 손목시계에 눈길을 던지며 차분함을 되찾은 목소리로 일러주는 준상..
재준은 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린다.
주르르 미끄럼틀을 타는 두 줄기의 이슬방울이 재준을 위로하듯 그의 얼굴 곡선을 쓰다듬다가 탁자 위로 굴러 떨어진다.
"도련님께서...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회장님께 꼭 전해 드리라고..."
".......준상아, 듣고 싶지 않아..."
"도련님께서 이러시더군요.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고...
내가 살아 숨쉬는 걸 보고 싶다면, 다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다리고 계실 테구요."
감겨진 눈꺼풀을 열지 않은 채 재준은 내부에서 갈등하는 두 가지 세력 중 어느 한 쪽도 편들지 못하고 멍청히 서 있다.
그러나 우습게도, 재준은 어느 쪽이 승자가 될지 너무도 확연하게 내다보고 있는 자신을 이미 깨달아 버렸다.
주사위를 던지고 난 후에야 그건 주사위가 아닌 단순한 정육면체에 불과했음을 알아차린 꼴이다.
"이번에도 결정하실 분은 회장님 한 분이십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게 전부입니다.
이번만큼은 회장님께서... 자신과 도련님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정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도...제가 존경할 수 있는 분이 되어주십시오, 회장님."
- 준상이 먼저 자리를 뜬 다음에도 오랫동안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쌓아가며 일어서지 않는 재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천천히 몸을 곧추세운다.
묘연한 카리스마로 본래의 색깔을 회복한 그의 얼굴에 부스러기처럼 잔재해 있는 망설임과 혼란을 떼어버리지 못하고 재준은 빌라 입구로 들어선다.
그리고, 집 쪽이 아닌 지하 주차장으로 발을 내딛는다.
운전석에 올라타 양수리에 당도할 만큼 충분한 양의 기름이 있는지 살펴보고, 재준은 주차장 출구를 향해 핸들을 꺾는다.
(153)
과연 사랑이 운명을 제어하느냐 운명이 사랑을 제어하느냐
이는 아직도 미해결의 인생 문제요.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중 -
"릴케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야. 아차! 이름을 빼먹었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글귀에 대해 설명하던 주혁은 부리나케 또 펜을 들고 와 글귀 아래쪽에 '장.우.혁.'이라는 세 글자 또박또박 써넣는다.
그와 대각선 방향으로 마주보고 있는 혁수의 싸인이 꽤 그럴듯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어우러진다.
'장주혁' 세 글자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보는 혁수..
웃음과 눈물이 빠르게 교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주혁을 돌아보며
스케치북에 쓰여진 글자를 어루만질 때보다 더 신중하고 예민한 손길로 그의 허리를 끌어당긴다.
그러자 주혁은 혁수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한 쪽으로 치우고 그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다.
혁수의 동그란 갈색 눈과 아담한 코와 연분홍빛 입술, 귀밑까지 내려오는 노란 머리카락 한 올까지 마치 처음 접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혁수는 한참 주혁의 소극적인 애무를 만끽하다가 살며시 그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감싸쥐며 지문이 새겨진 부분에 입술을 갖다댄다.
그리고 말쑥하게 면도를 해서 찹찹한 느낌으로 밀착되는 주혁의 턱 선을 따라 입맞춤을 이어나간다.
입술이 귓불 근처까지 다다르자 일급 비밀을 털어놓듯 은근하게 속살거리는 혁수..
"....내 선물...마음에 들어..?"
덥고 촉촉한 입김이 귓가에 뿌려지자 혁수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주혁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어떤 행동을 취할까 조금은 유치한 고민이 빠져있는 주혁에게 혁수는 더 야릇하게 꺾인 음성을 흘려 넣는다.
".....혁아, 키스해 줘..."
우악스럽게 혁수를 품속에 가둔 주혁이 정신 나간 사람 마냥 허둥대며 그에게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망설일 틈도 주지 않고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는 뜨거운 혀가 혁수의 입천장을 간질이고,
주혁의 구강점막이 도톰한 아랫입술을 오래도록 깊게 빨아들이자 혁수는 고개를 좀 더 기울여 그의 키스를 한껏 진하게 음미한다.
맥이 빠질 만큼 끈질기게 서로의 입술을 탐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물러서는 혁수와 주혁..
슬금슬금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려 하는 서먹함을 못 본 척 하며 각자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둔다.
호텔 방의 방음시설이 워낙 잘 되어 있는 탓인지, 아주 미미한 소음조차도 견고한 적막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키스해 달라는 한 마디에 해까닥 절제력을 내팽개치고
게걸스런 입맞춤을 퍼부어 댄 것이 쑥스러워진 주혁은 잠자코 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작은 두 뺨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이며 키스의 여운을 채 씻어내지 못한 혁수는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겸연쩍은 표정으로 배를 문지르며 한 마디 내뱉는 주혁..
"....배고파 죽겠네. 밥 먹으러 가자, 혁수야.." (-_-;)
- 태현이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 시간은 6시.
시계바늘이 현재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5시..
마치 남의 집에 놀러온 손님처럼 침대 한 귀퉁이에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있던 연수는
아주 큰 일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 심호흡을 크게 하고 벌떡 일어선다.
부모님께서는 부부동반으로 모임에 참석하시기 위해 조금 전 외출하셨고
대학에 다니는 언니는 친구들과 올나이트 파티를 한답시고 일찌감치 나선 탓에 집안에는 연수 혼자 뿐이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언니의 방으로 건너간 그녀는 화려한 더블 침대 맞은 편에 놓인 화장대로 다가간다.
잘 정돈되어 있는 가지각색의 화장품들을 차례로 꺼내들고 난생 처음 화장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는 연수..
책장에 꽂힌 미용잡지를 펼쳐놓고 거기에 쓰인 설명대로, 서투른 솜씨지만 정성 들여 눈, 코, 입 하나 하나를 치장해 나간다.
언젠가 태현이 보여주었던 사진 속의 세라가 어떤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는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며,
또 TV에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쁘게 손을 놀린다.
화장을 끝내고 들여다본 거울 속의 자신은 낯설기도 하고, 외려 더욱 친숙해 보이기도 하다.
한참동안 그런 자기 자신을 주시하던 연수가 흐려지는 눈동자를 돌려 옷장으로 향한다.
옷장 문을 열고, 저마다 독특한 디자인과 빛깔을 자랑하며 늘어선 옷가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몇 벌을 골라 집어들고 침대 위에 올려놓는다.
망설임을 떨쳐내지 못해 느릿한 동작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 연수는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키며 거울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예기치 않게 터져 나오는 쓴웃음을 황급히 눌러 삼키며 시계를 보자, 태현과 약속한 시간까지는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어깨까지 내려오는 까만 머리를 절반정도 틀어 올려 핀으로 묶어주고
마스카라를 짙게 바른 탓에 평소와는 달리 갑갑하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깜박이며 전체적인 매무시를 관찰한다.
[Rrrrr~~]
비틀린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던 그녀를 일깨우는 핸드폰 벨소리.
연수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던 상념의 한 자락을 끊고 자기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무겁게 침잠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는 연수의 귓가에 닿아오는 태현의 목소리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어~ 선생님인데, 준비 다 했어? 지금 집 앞에 왔는데..."
"예, 지금 나갈게요."
"그래, 알았어-"
언니의 방에서 가져온 어른스러운 핸드백을 둘러메고 열쇠로 대문을 잠근 다음,
연수는 태현의 차가 세워진 아파트 입구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처음 신어 본 하이힐은 생각보다 훨씬 불편해서 그녀는 위태로운 걸음을 잇고
태현의 흰색 승용차가 시야에 들어오자 자신의 걸음걸이가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더욱 노심 초사하며 다리를 움직인다.
운전석에 앉아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박자를 맞추던 태현은 무심코 아파트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연수를 발견한다.
경쾌한 리듬에 따라 까딱이던 그의 손이 일순간 정지한다.
범상한 물결을 유지하고 있던 암갈색 눈동자가 푹 꺼져 들어가며 동시에 태현은 헉 하고 낮은 신음을 토해낸다.
갈비뼈와 목구멍에 뻐근한 압박감이 전해져오며 그의 호흡이 연속적인 포물선으로 출렁거린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 허리와 둔부를 약하게 흔들며 걷는 연수..
까만 머리카락 사이의 얼굴을 진한 화장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풍긴다.
아니, 좀 더 솔직한 표현으로 묘사하자면 화장을 해 놓은 덕에 완전히 세라와 동일하다.
머리카락과 대조를 이루는 새하얀 털 코트,
안에 받쳐입은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는 가슴이 깊게 패여 유방의 계곡을 노출하고
타이트한 적보랏빛 스커트는 무릎 위로 20cm 쯤 올라가서 연수의 미끈한 다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꼭 허공에 붕 뜬 상태로 스르르 이동하는 듯한 착각이 태현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교란시킨다.
헛것을 본 사람 마냥 눈을 감았다 뜨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그에게 조수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연수가 자동차 시트에 등을 묻으며 방금 전에 전화를 받을 때와 흡사한 음성으로 인사 치레의 질문을 던진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 아니..."
그녀의 전신을 훑어 내리며 민망함도 잊은 채 노골적인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태현..
예상했던 바지만 이렇듯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그의 눈동자를 고스란히 혼자 받아내기가 연수에게는 무척 힘이 부친다.
그가 지금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할 여자도 없을 만큼 확연하게 알아차리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씁쓸함은 뒷전으로 미루고
그녀는 약간 맹해 보이는 웃음으로 자신의 의도를 포장한다.
"고등학생이라고 어려 보이는 건 싫어요. 오늘 하루동안은 제가 오빠 여자친구잖아요."
"어어... 그러니까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 놀랐다, 야.."
겨우 적당한 말을 쥐어 짜내 그녀에게 응대해주는 태현..
엑셀레이터를 밟고 핸들을 꺾으면서도 눈빛과 표정은 점점 몽롱하게 잠겨든다.
의식적으로 연수를 외면한 채 엉성한 초보 운전자처럼 앞 유리만 뚫어져라 응시하며 가다가,
슬핏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망막 안에 담은 후부터는 심장이 덜컹 제자리를 이탈하는 듯한 충격에 지속적으로 시달린다.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귓바퀴를 감싸며 부드럽게 드리워진 머리카락이, 동그스름한 턱의 윤곽과 불룩하게 솟아오른 젖무덤까지...
V자로 파여진 블라우스 틈 사이로 살짝 엿보이는 풍만한 유방의 곡선,
말려 올라간 치마 밑으로 뻗은 허벅지와 종아리, 손가락의 반지, 정수리에 매달린 핀.
그녀의 겉모습, 그녀의 옷차림, 그녀의 육체다... 세라의 몸이다...!
아득하게 이성의 중추를 마비시키는 환각 속에서 벗어나려고 태현은 절박하게 도리질 친다.
그리고 얼른 연수에게서 눈을 떼어낸다.
마땅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황망해하는 태현의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근처에서 맴도는 게 느껴지자,
연수는 엉뚱하게 스며드는 안도감에 자신을 맡긴다.
오늘이라는 이 시간, 태현과 함께 있는 이 작은 공간, 그 속에 포함된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오래 전부터 계획되고 준비된 '출발'일 것이다.
우리의 인연 가운데 살아 숨쉬는 믿음을 저버리지 말자.
나조차 모른 척 한다면, 나마저도 두려움과 상처를 겁낸다면 그는 다시 웃을 수 없을 것이다.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서연수, 문태현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네 자신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라.
그와의 출발을 위해, '서연수'의 절대성을 포기하자.
- "오늘...별로 재미없었지? 괜히 데려간 것 같다.."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멋쩍은 웃음을 띄우며 미안한 마음을 표하는 태현에게 연수는 가식이 없어 보이는 담백한 말투로 대답한다.
어떤 자리든 모임에서는 항상 분위기를 주도하는 역할을 도맡아하던 태현이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형식적인 반응으로만 일관하자 그의 친구들은 의아스럽다는 듯 계속 그를 충동질했다.
그래도 태현이 원래의 면모를 되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게다가 동행한 연수마저 요란한 차림새와는 달리 함부로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거리감이 느껴진 탓에
태현과 연수는 어느덧 모르는 사이에 그 술자리의 이방인이 되어갔다.
두 사람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들끼리 흥을 돋구느라 열이 오른 그들에게 태현은 건성으로 인사를 남긴 뒤 자리를 떴다.
친구들은 예의 상 왜 벌써 가느냐고 붙잡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지'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와 연수에게 잘 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줄곧 침묵을 지키던 태현이 입을 열고 꺼낸 첫 마디가 바로 위의 질문이었다.
끝에 덧붙인 '괜히 데려간 것 같다'는 말이 마치 오늘 너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연수의 가슴을 파고든다.
왜 벌써부터 후회를 하느냐고 따지려다가 그녀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그 한 문장을 고집스레 삼켜버린다.
태현은 또 다시 완강한 침묵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빈틈없는 무표정으로 두 겹의 빗장을 걸어놓는다.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리라는 의지는, 어쩌면 당장이라도 자물쇠를 부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의 반어적 표출일지도 모르겠다.
거세게 머리를 흔들고 손을 내젓다가도 금새 엄마의 품에 안겨 울어대는 아이에게 위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라며
연수는 잠시나마 자신에게 겨누었던 힐책의 눈초리를 거둔다.
이건 상처 입은 남자를 보듬어주고 싶어하는 모성본능이 아니다.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해 눈물짓는 로맨티스트에 대한 동경도 아니다.
단지, 나는 단지... 나와 그 사이에 이어진 인연의 실오라기를 똑똑히 볼 수 있는 것뿐이다.
서연수, 시작하자.
바로 오늘. 지금. 내가 먼저.
(154)
당신 몸이 내 몸 같아, 그가 중얼거렸다.
익숙한 체위. 춥고 불안했던 마음이 그의 체취로 인해 가라앉고 있었다.
- 신경숙,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중 -
집에 들어선 혜련은 깜깜한 어둠으로 가득 찬 거실과 주방을 지나쳐 곧장 침실로 향한다.
걷잡을 수 없는 피곤이 우르르 몰려와 그녀의 몸을 붙잡고 늘어지는 탓에 오직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처음 참석한 공식적인 리셉션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를 지치게 하는 건 정신적인 피로다.
엉망으로 뒤엉켜 버린 생각의 꼬리들이 혜련을 진지한 고민 속으로 이끌자,
아직도 이런 복잡한 문제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와락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좀처럼 억누르기가 힘겹다.
귀찮은 동작으로 예쁜 상아색 투피스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뒤,
곱게 단장한 머리를 한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리며 옷장 한 구석에 걸린 잠옷을 꺼내 입는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 앉아 신경질적인 손길로 클린싱 크림을 얼굴에 펴 바르며 길게 한숨을 내쉰다.
거칠던 그녀의 동작이 서서히 차분해지고 표독스럽게 불거졌던 눈빛도 사그라들자,
대신 이번에는 침울하고 을씨년스러운 그늘이 혜련의 얼굴 전체를 뒤덮는다.
티슈를 사용해 크림을 닦아내고 욕실로 가서 꼼꼼하게 세안을 하고 나온 후에도 그녀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여전히 곁에 달라붙어 있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하나로 동여 묶은 다음 다시 화장대에 걸터앉아
습관적으로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 등을 찍어 바르는 혜련은 손과 머리가 따로 노는 기색이 역력하다.
오늘만큼은 정말로 재준과의 마주침을 피하고 싶은 터라 그가 오기 전 잠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전등을 끄고 침대에 눕는 혜련..
부드럽게 눈동자를 매만지는 암흑과 정적 속에서 본격적으로 긴장을 풀어헤치며 그녀는 한결 개인 마음으로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본다.
술집 호스테스 생활을 했던 그녀의 과거를 들추어내며 네가 대체 뭘 아느냐고 소리지르던 강태에게 필요 이상으로 과민한 분노를 터뜨린 자신에 대해,
냉정한 시각에서 그 속내를 관찰해보고자 혜련은 꺼림칙한 느낌을 떨치고 강태와의 대화를 상기한다.
화류계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그런 식의 경멸이나 무시 정도는 숱하게 들어왔고 또 그런 말쯤은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면역이 되어 있는데...
강태의 그 한 마디에 왜 그리 길길이 날뛰었던 것일까.
쌓였던 열등감이 폭발한 걸까.
아니면 강태에게 재준을 도로 뺏길 것 같다는 치졸한 불안감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혜련은 몸을 일으켜 상체를 침대 등받이에 기대고 옆에 서 있는 스탠드를 켠다.
그리고 팔을 뻗어 탁자에 놓인 담배를 가져다가 한 개피를 피워 문다.
뿌연 담배연기와 함께 뻗어 나오는 상념들이 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휘젓는다.
지금처럼 재준의 곁에 있고 싶은, 좀 더 솔직한 욕심으로는 그의 아내가 되고 싶은 자신의 바램을 혜련은 스스로 인정한다.
그러나, 자신의 바램과 마찬가지로 재준과 함께 존재하기를 갈구하는 강태의 그리움 또한 무의미하다고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강태를 망가뜨리는 그 갈망의 강도가 자신의 소박한 바램보다 어마어마하게 깊고 절절하다는 것 역시 혜련은 부정할 수 없다.
재준과 강태,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바람직한 길은 한시라도 빨리 서로의 남은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라며 그럴듯한 충고를 했지만,
그것이 진정 두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단언하기엔 부끄러워지는 그녀였다.
번지르르한 말로 강태의 입술을 다물게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놓았다는 후련함보다는
또 한 번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중압감이 줄곧 혜련을 내리누르고 있다.
혜련은 마지막 한 모금을 천천히 새어보내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뒤, 침대에서 내려선다.
얇은 잠옷 위에 두툼한 모직 숄을 걸치고 거실로 나간다.
불을 켜는 대신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윤곽으로 듬성듬성 위치를 알려주는 사물들을 주의 깊게 둘러보고
복도를 지나 재준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인 그의 서재에 발길을 디민다.
제일 먼저 시야를 잠식하는 육중한 책상과 컴퓨터, 한 쪽에 자리잡은 커다란 오디오 세트가 왠지 그녀를 주눅들게 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책상으로 다가가 잡다하게 널린 물건들을 하나하나 손에 쥐어본다.
커피 자국이 말라붙어 있는 컵, 그 옆에 널린 CD 몇 장, 재떨이,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재준이 책을 읽는 광경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그녀이기에 혜련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시집을 요모조모 살펴보다가 겉 표지를 넘긴다.
하얀 백지 위에 뚜렷이 새겨진 까만 글자가 그녀의 시선을 붙든다.
[ 즐거움과 슬픔의 하룻밤이 지나고, 내 넋은 모조리 당신의 것입니다 - 강태·이재준 ]
검은색 펜을 사용하여 손으로 직접 쓴 글씨는 재준의 필적인 듯 하다.
혜련의 눈동자가 오랫동안 그 위에 머문다.
조금씩, 조금씩 희미해지는 초점 때문에 마치 눈물이 고이는 것처럼 바스라지는 동그란 망막이
백지 위의 까만 글자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내린다.
'강태·이재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단순한 점 하나만으로 연결된 두 개의 이름이 결국은 그녀를 테두리 바깥으로 밀어낸다.
실상 처음부터 발끝조차 들이밀지 못했던 것인 지도 모른다.
운 좋게 잠시 누릴 수 있었던 주인공의 자리를 영영 자기가 차지한 양 착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끈질기게 부인하고 간과해버리던 죄책감이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아무리 소박하고 알뜰한 소망이라 해도 누군 가의 서러움과 아픔을 우려낼 만한 정당성은 없는 것일 테니...
'두 사람을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닳아빠진 이기심을 합리화시켜서는 안 되겠지.
육체 뿐 아니라 어느새 마음과 의식까지 걸레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혜련은 자조적인 웃음으로 불쑥 솟구치는 흐느낌을 막아낸다.
그리고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환기시키기 위해 급한 손길로 책장을 주르륵 넘겨보는데,
어느 한 페이지가 홱 젖혀지며 재준이 책갈피 삼아 끼워둔 종이가 눈에 뜨인다.
접힌 종이를 펴서 재준의 필체로 기록된 내용을 읽어 내리던 그녀는,
메마른 웃음과 차가운 읍소의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쓰라린 이질감으로 그녀의 전신을 찌르는 재준의 서재로부터 도망쳐 나오고 만다.
'머지않아 그대와 헤어지게 될 거요.. 슬프겠지만, 그립겠지만, 부디 노여워 마오..
가난한 마음이야 위안을 바라지만 우리 인연의 끈이 다하니 어찌할 수 없나 보오..
못된, 못된 나를 잊어주기를... 모두, 모두 남김없이 모두...
제발, 제발 눈물로 앓지 말기를... 어서, 어서 나아지길 비오'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 없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강태는 다른 무엇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로 가서 아이보리색 시트에 몸을 던졌다.
얼토당토않은 착각일지 몰라도 시트에서는 아직까지 재준의 고유한 비누향기가 풍겼다.
먹먹하게 그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흐물흐물 녹아 내리는 듯한 편안함 때문인지,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양의 눈물을 쏟아서 정신적으로 지친 탓인지 강태는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허겁지겁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별장 안에는 은빛 감도는 어둠과 먼 곳으로부터 어렴풋이 들려오는 강물 흐르는 소리만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세운 강태는 자켓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액정 화면에의 전자시계가 새벽 3시에 가까워지는 현재 시각을 가르쳐준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의 전원을 아예 꺼 버리고 침대에서 일어서는 강태..
불현듯 싸늘하게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한기를 느끼자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오자마자 쓰러져 자느라고 난방을 하지 않은 탓에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침실 안을 휘 둘러본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 백열 전등의 스위치를 켜고, 꽤 오랜만인데도 제법 숙달된 솜씨로 페치카에 불을 붙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따사롭게 타오르는 불꽃을 망연히 응시하면서 강태는 움직임을 잊은 채 미동 없이 서 있다.
눈만 깜박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인형처럼, 벽난로 앞에 누군 가가 장식품으로 세워둔 조각처럼,
함부로 모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생명력을 잃은 모습으로.
그러나 닫힌 입술 대신 빈 마음으로, 멈춰진 육체 대신 투명하게 씻긴 영혼으로 강태는 그에게 기원한다.
온전히 깨어있는 상태, 한결 같은 기다림의 자세를 잠시나마 풀어놓은 채
잠이 들었던 자신의 연약함을 속죄하고 그를 향한 갈망과 염원에 한 치의 거짓도 용납할 수 없음을 부지런히 되뇌인다.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도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나를...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내게 구원의 빛을 던져준 그를 유일한 신앙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나를...
이재준, 그를 만난 후부터 단 한 시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내가 그를 위해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우리, 살아가자.
할딱할딱 숨만 쉴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사랑하자, 우리...
타닥타닥 페치카의 불길이 타 들어가는 기분 좋은 소음이 장엄한 찬송가 곡조라도 되는 듯 절실한 간구를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는 강태..
피어오르는 불꽃을 한참 바라보고 있어서 그런지 싸아 하게 콧등이 아려오며 눈시울이 울컥 뜨거워지자
손등으로 두 눈 사이를 꾹 누르며 페치카를 등지고 뒤돌아 선다.
그리고, 아무 기척도 없이 나타난 재준의 얼굴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며 꼬이려 하는 다리에 막무가내로 힘을 주고 몸을 지탱하는 강태..
아래로 툭 떨어진 손을 내밀어 강태가 다시 재준의 옷자락을 잡기까지 두 사람은 마주 댄 시선으로만 서로의 존재를 깊이 빨아들인다.
노란 머리카락, 유백색 살결, 너무 까매서 구멍이 뚫린 것 같이 보이는 눈동자가 위태롭게 휘몰아친다.
하고 싶었던 말의 첫 머리를 놓쳐버렸는지,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것인지 벌어질 듯 하면서도 굳게 다물어진 재준의 선홍빛 입술에 강태의 눈길이 닿는다.
동시에 강태의 손가락이 재준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망치로 후려친 벽돌담처럼 와르르 그의 품으로 무너진다.
욱하고 터지는 흐느낌을 거리낌없이 뿜어내며 안겨드는 강태가, 그의 체온이, 그의 숨결이, 한없는 회오의 구렁 속으로 재준을 데려다 놓는다.
그를 울게 하다니, 그를 아프게 하다니... 이렇게 돌아오고 말았는데...
".....나쁜 새끼야...너...이재준, 너...!...너 정말 나빴어...정말 나쁜 놈이야..!!"
"미안해...미안해, 강태야.. 내가 나빴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강태야.. 미안하다..."
"결국 이렇게 다시 올 거면서 왜 그랬어! 미안한 줄 알면서 왜 그랬어, 왜!!"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로 꺽꺽 울음을 토해내며 성대가 갈라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큼 소리를 질러대는 강태..
그런 그의 투정과 원망, 비난을 기꺼이 끌어안으며 재준은 처음으로 강태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흥건히 젖은 뺨 위로 재준의 눈물이 섞여드는 것을 감지한 강태는 폭풍 같은 거센 외침을 한 풀 잠재우고 떨리는 손을 들어 재준의 눈가를 씻어낸다.
"...너도...너도 고통스러웠지..? 너도 나 없으니까 죽을 것 같았지..?
난...난 어땠는지 아니? 응?? 내가..내가...나 자신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알아?
너한테 버림받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어.. 어쩌면 영원히, 다시는 너와 함께 있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어..
무슨 말인지 알아? 내 말, 이해할 수 있어..?
이재준... 너 아냐구... 알고 있냐구... 내 사랑이 어느 정돈지...이제 알겠냐구..!"
"...널 사랑하기 때문에 내린 선택이었어, 강태야... 그것만 알아 줘, 그것만..."
"날 위해서 헤어지는 게 최선이었다? 그 딴 얘기, 입 밖에 꺼내지도 마!!
그게 우리한테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해?! 그게 우리한테 해당되는 얘기야??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백년을 살면 뭐해!
멀찍이 떨어져서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면 뭐하냐구!!
그게 살아있는 거야? 그게 날 위하고 우리를 위하는 길이야!??"
긴 시간 누적되어 온 고통의 응어리를 몽땅 폭발시키며 강태는 재준의 고막을 찢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 마냥 미친 듯이 고함을 쳐 댄다.
그와 대조적으로 재준은 강태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인 채 그를 감싸 안은 두 팔에 더 강한 힘을 실을 뿐,
더 이상 어떤 말도 재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지 못한다.
"이재준..! 뭐가 두려운 건데? 뭐가 그렇게 겁나는데??
난 너 때문에 부셔져도 좋아! 너 때문에 전부 다 뺏겨도 상관없어..!
아니, 이미 내가 가진 거 전부 너한테 줬어.. 너한테 전부 다 줘 버렸어!
근데 네가 떠나면 어떡해... 네가 가 버리면 남은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이재준.. 네가 내 꿈이야.. 내가 가진 유일한 꿈이야... 이재준... 사랑한단 말이야, 이재준..."
(155 )
"천구백팔십삼년 이월 이십오일 이후로 내 꿈이 뭐였는 줄 아니?
선명이와 이렇게 마주앉아 밥을 먹고 그 애에게 비누를 아껴 써라, 넥타이는 이렇게 매라,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잔소리를 하면서 사는 거였어.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을까?"
- 하성란, <샷뽀로 여인숙> 중 -
자동차 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주혁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담배부터 꺼내 문다.
신형 모델의 총 몇 자루를 구입하는 것 때문에 거래 차 만난 홍콩 타 조직의 일원들과 구입 가격을 놓고 신경전을 벌여 심사가 날카로워진 탓이다.
짜증이 묻어나는 동작으로 라이터를 담배 끝에 갖다대는 주혁의 옆자리에 앉으며 혁수는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핀다.
오른쪽 뺨에 와 닿는 혁수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혁은 차를 출발시키고, 뒤틀린 어조로 투덜댄다.
"씨발새끼들... 물건 좀 갖고 있다고 좆나 튕기네.. 아무래도 세게 나가야겠어."
단순히 통역의 역할만을 담당한 혁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머쓱한 눈빛으로 주혁을 건너다보기만 한다.
일할 때의 주혁이 여전히 낯설기만 한 혁수다.
그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골똘히 자기 생각에만 잠겨 있던 주혁은
복잡하게 얽혀드는 머릿속을 비워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운전석에 자리한 부하에게 말을 건다.
"윤재야."
"예, 이사님."
"출국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봐야 할 것 같으니까 약속 잡아 놔.
회장님께는 내가 직접 보고드릴 거야. 그렇게 알고...
내일 크리스마슨데, 그동안 고생한 것도 달래줄 겸 애들 하루 풀어줘라. 너도 좀 쉬고."
"네, 알겠습니다."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시트에 편안히 몸을 기대며,
차에 탈 때부터 줄곧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혁수의 눈동자를 묵인하던 주혁이 픽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뱉어낸다.
그리고 험악하게 가라앉았던 표정을 장난스러운 미소로 갈아치운 후 혁수와 눈을 맞춘다.
"그러다 얼굴 뚫어지겠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예뻐 보이는 건 알겠는데, 다 닳아 없어지기 전에 그만하세요~~"
예전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혁수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유치원생을 달래는 듯한 목소리를 울려내는 주혁..
운전석에 앉은 그의 부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곁눈질하는 게 보이자
혁수는 주혁과 자신이 연출하고 있는 광경이 민망스러워져서 얼른 그의 손을 잡아뗀다.
"왜 이래, 창피하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소리 쫙 깔면서 찬 바람 씽씽 불게 하더니...
하여튼 장주혁, 진짜 별난 인간이야. 예측 불가능해."
"아, 그 새끼들이 싸가지 없게 구니까 그런 거고, 우리 혁수는 언제 봐도 사랑스러우니까~
안 그래, 윤재야? 너도 네 애인은 언제 봐도 기분 좋지? 다 그런 거 아냐?"
"예?? 아, 예.. 무,물론입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죠..."
"거 봐~ 내가 별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잖아~"
짐짓 주혁과 혁수를 보지 않는 척하다가 갑자기 날아드는 주혁의 질문에 뜨끔한 기색을 추스르며 부하는 과장된 말투로 그에게 맞장구를 쳐준다.
혁수는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주혁의 기분이 쉽게 풀린 것에 안도하고 못 이기는 척 자신을 끌어당기는 그의 팔에 몸을 맡긴다.
버릇처럼 혁수의 허리 곡선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차분한 중저음으로 되돌아 온 주혁이 부드럽게 묻는다.
"어디로 갈까..? 우리 혁수, 사람 많은 건 싫어하니까 조용한 데로 가야할텐데...어디 가고 싶어?"
- 혁수가 선택한 곳은 주혁이 예상했던 바와 달리 호텔의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홍콩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특별한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집도 아니었고 그냥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식당이었는데,
눈에 뜨일 만한 점이라고는 클래식 밴드가 생음악을 연주하고 맨 꼭대기에 있어서 홍콩의 야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메뉴를 고른 후,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돌아설 때까지도 혁수는 턱을 괸 채 창 밖에만 눈동자를 붙박고 있다.
주혁은 성급히 벌어지려는 입술을 점잖게 제어하고 검푸른 심연 한 가운데 혁수를 새겨놓는 것에만 열중한다.
"....이런 분위기가 좋아. 아늑하고 따뜻하고...뭐랄까, 안정적이야."
갈색 망막 위에 점점이 박힌 불빛들을 예쁘게 반사시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혁수..
주혁은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로 말을 대신한다.
저런 목소리로 혁수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꼭 나를 울게 만들던데...
그렇게 마음 한 구석으로는 초조와 염려를 곁눈질하며 혁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홍콩의 야경은 정말 세계 최고야. 그렇게 생각 안 해?
저 불빛들 좀 봐. 빌딩이랑 자동차들도... 저렇게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저렇게 고전적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화려하지만 쓸쓸해. 번쩍번쩍 빛이 나지만 너무 공허해.
사랑하는 남자를 놔두고 어쩔 수 없이 이웃나라 왕자한테 시집가는 공주 같아."
"그럼 결론적으로 홍콩은 불행한 도시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홍콩은 절대 저 아름다운 야경을 버리지 못할 거야.
푸른 잔디가 깔린 목장이나 농촌처럼 평화롭고 소박한 모습은 홍콩이라는 도시와 어울리지 않거든."
"불행을 알면서도 선택했단 말이야?"
".....그래, 아름다운 야경을 버릴 수 없으니까. 안혁수가 장주혁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주혁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 혁수가 아주 획기적인 발견이라도 해 낸 사람처럼 자랑스러운 목소리를 들려준다.
목울대가 시큰거리고 가슴께가 뻑뻑해지는 것을 묵묵히 삭혀내며, 주혁은 색깔을 정하지 못한 서툰 웃음으로 혁수의 다음 말을 재촉한다.
그리고 혁수는 더욱 정갈하게 다듬어진 음성으로 주혁을 안심시킨다.
"여기 데려와줘서 고마워. 널 더 꼭 붙잡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이제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겁나지 않아."
- 간간이 주고받던 형식적인 대화마저도 끊기고 각자의 상념 속에서 헤엄치는 태현과 연수..
태현은 함께 있는 시간 내내 되도록 연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고,
연수는 태현이 그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침전하는 두 사람 사이의 기류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지는 않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태현의 옆모습이 용기에 따라 형체를 바꾸는 액체처럼 연수의 눈동자 안으로 스며든다.
청아한 느낌을 자아낼 만큼 새하얀 귀뿌리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싶은 충동을 허둥지둥 수습하며
연수는 산만하게 깜박거리는 그의 속눈썹으로 눈길을 이동시킨다.
태현의 속눈썹은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속눈썹과 매우 닮았다.
슬퍼 보인다.
길고 풍성하고 수려한 곡선을 뽐내며 하늘을 향해 반짝 치켜 올라갔지만끝간데 없이 슬퍼 보이는 까만 속눈썹.
그는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을 것이다.
"저기...오빠 집에 잠깐 들렀다 가면 안 되요?"
얌전하고 조신한 평소의 말투를 띠고 있지만 연수의 목소리에는 거부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강경함이 묻어난다.
태현은 무언가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목격한 사람 마냥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한다.
"우리 집에..?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집에서 걱정하실 거 아냐."
"괜찮아요. 부모님은 지방으로 여행 가셨고 언니는 내일 아침에나 들어온다고 했거든요."
천연덕스럽게 튀어나오는 거짓말을 들으며 연수는 스스로를 향해 비릿한 조소를 던진다.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져버릴 듯 창백하게 질린 살결과 위태롭게 소용돌이치는 암갈색 심연으로는 그녀를 오래 마주볼 수 없는 태현..
때마침 신호가 바뀌는 덕택에 얼른 다시 앞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웅얼웅얼 입술을 움직인다.
"그래..? 그래도 너무 늦었잖아. 근데 우리 집에 왜 들리려고 하는 건데..?"
"어제 내주신 숙제 있잖아요...그거 해 왔거든요..? 가사 붙이고 나서 제가 노래도 불렀어요.
CD 구워서 왔는데...지금 들어봐 주시면 안 되요..?"
"어어... 벌써 그렇게까지 했어..? 열심히 해준 건 고마운데 오늘은 너무 늦었다. 내일 모레 봐 줄게.."
"오늘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부탁이에요, 선생님."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막무가내로 그녀를 몰아쳐서일까,
연수는 태현의 팔꿈치를 잡으러 뻗어나가는 손을 뒤늦게나마 도로 거두어들이지만 간절하게 소스라치는 눈동자만은 떨구지 못한다.
태현의 망설임을 헤쳐놓으려는 그녀의 집요한 의지가 그를 붙들고 매달린다.
이런 줄다리기가 지극히 소모적이라는 것쯤은 태현도 인정하는 바다.
태현의 실제적인 경험, 그 한 단면만을 보더라도 승자와 패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간과 인연에 의해 엮어지는 관계 자체에 승패라는 경쟁적인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것조차 우스워지자,
태현은 연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스치는 듯한 비웃음으로 번잡스런 상념을 자른다.
"뭐, 그럼 그렇게 하던지..."
최대한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억양과 어조로 대꾸하며 자신의 아파트 쪽으로 핸들을 꺾는 태현..
지하 주차장의 출구와 가까운 자리에 차를 세우고, 뚜벅뚜벅 일정하게 귓전을 때리는 발자국 소리에 유난히 신경을 곤두세우며 걸음을 뗀다.
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보며 태현과 보폭을 맞춘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탑승한 중년 남자가 두드러지게 과감한 옷차림새와 육감적인 몸매의 연수를 욕정 어린 눈으로 힐끔거리자,
태현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자기 자신을 납득하지 못하고 어둑한 복도를 걸으며 결국, 아까부터 억누르고 있던 말을 내뱉고 만다.
"앞으로는 그런 차림 안 했으면 좋겠다. 고등학생한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야."
연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발을 내딛기만 한다.
태현이 저처럼 차가운 목소리를 휘갈기는 것은, 저토록 냉랭한 뒷모습을 보이는 까닭은
그의 사고방식이 '학생다움'이라는 애매한 기준을 고집할 만큼 고루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그건 다만... 그렇다, 흔해 빠진 표현으로 그건 다름 아닌... 태현의 아픈 기억 탓이리라.
지금의 내 모습이 오빠를 혼란스럽게 하죠?
불쑥불쑥 성대를 치받고 올라오는 질문을 잠시 보류한 채, 연수는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선다.
작업실 내부는 언제나 그렇듯 엉망으로 어질러진 상태다.
태현은 운전의 피로도 잊었는지 가벼운 여담을 일절 생략해버리고, 연수에게 가져온 CD를 달라고 청한다.
배고프다는 투정 한 번, 잠이 모자라서 피곤해 죽겠다는 엄살 한 번 부리지 않고 꼭 필요할 때 외에는 입을 열지 않는 태현은 영 딴 사람 같다.
너무 생소하게, 그러면서도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절대적인 힘을 빌려 그녀를 꿰뚫는 태현에게, 연수는 확신을 두기로 결정한지 오래다.
그리고 그 결정은 지금에서야 본격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핸드백에서 CD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는 연수..
태현은 무의식적인 조급증이 감도는 동작으로 프로그램을 작동시킨다.
살얼음처럼 서려 있는 정적을 가로지르며 태현과 연수를 휘감는 얕은 선율이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온다.
[ 알아 이제는 오지 않겠죠. 그 동안 너무 행복했어요
가끔 내게 전해준 세상 얘기와 아름답던 꽃 고마웠어요
이제야 내 마음이 놓여요…. 감사한 걸요. 그대 가슴에 다시 핀 사랑에.
하지만 그댄 모를 거예요… 그게 나란 걸…
보이지 않게 지켜주고 싶죠… 나 그댈 이렇게 라도….
아마 낯설지 않았었겠죠… 그에게서 날 느꼈었나요…
그댈 보면 반가워 뛰기만 했죠…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인데…
이제야 내 마음이 놓여요… 감사한 걸요.. 그대 가슴에 다시 핀 사랑에.
하지만 그댄 모를 거예요… 그게 나란 걸…
보이지 않게 지켜주고 싶죠.. 나 그댈 이렇게 라도…
눈물이 나도 축복해드릴게요.. 날 지우고.. 이제는 그대의 길을 가세요.
부디… 괜찮아요 난 워워~~
난 축복 받은 삶이죠… 이렇게 라도 사랑한 그대 곁에 머물도록….
영원히 헤어지면 안돼요 …. 그와는 제발…
그럼 나와도 이별일 테니까…..
꼭 영원하길 바래요…. 나 두 번 떠나지 않게…. ]
거짓말처럼 폭발하려는 흐느낌이 당황스러워져서,
태현은 가뜩이나 커다란 눈동자에 핏발이 설만큼 억척스런 힘을 가하고 기하학적 곡선을 그리는 음역 그래프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이건 내가 만든 노래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내 손으로, 내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음악이다.
그렇게 되뇌이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다독이는 태현..
모질게 마음먹고 뒤쪽을 바라본 그를 여지없이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는 세라의 육체.
방금 전의 노래를 이어서 부르듯 호소력 짙은 연수의 목소리는, 그리고 그녀의 물음은 태현의 상처에 거대한 칼을 들이댄다.
"......내가 누구예요, 태현오빠..?"
(156)
재준의 어깨 죽지가 흥건한 얼룩으로 젖어들 만큼 눈물을 쏟아내던 강태가 진정을 되찾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으로 재준의 등을 쳐 대며 급기야는 딸꾹질까지 하던 강태..
이제는 울기도 지친 듯 넋이 빠진 얼굴로 간간이 옅은 한숨을 뱉으며 재준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다.
재준은 그런 강태를 부여잡은 채 어지럼증과 싸우며 두 다리를 꺾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강태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향기가 아득히 먼 곳으로 달아나는 이성을 배웅하고 자신만만하게 재준의 심장 속으로 파고든다.
튼튼한 밧줄에 결박당한 것처럼 단 한 개의 근육도 움직이지 않던 재준이 아주 느린 속도로 강태에게서 몸을 떼어낸다.
그리고 희미하게 가리워 지는 시야를 걷어내며 강태의 까만 눈동자를 응시한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메말라 있지만 여전히 도발적인 입술, 수려하게 떨어져 내리는 턱선 등을 꼼꼼하게 뜯어보다가
눈물줄기가 말라붙은 뺨을 어루만지며, 너무 오랫동안 닫아 놓았던 입술을 열고
강태가 그토록 듣고 싶어한 그 특유의 음색을 강태의 귓가에 불어넣는다.
"....난 겁이 났어.. 내가 널 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겁이 났어.. 첫 만남부터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날 망가뜨리는 건 네가 아니라 네가 없는 내 인생이야."
"그렇게... 그렇게 힘들었어? 다른 사람들은 그럭저럭 잊어버리고 대충 살아가던데...왜 그러지 못했어..? 왜..??"
"....너도 힘들었잖아, 나만큼. 너도 날 잊지 못했잖아..
근데 나한테 왜 물어, 이재준?
너도 다 알면서...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면서 왜 자꾸 의심해?
이재준, 마음 좀 독하게 먹어. 우리 사랑, 세상에서 쉽게 말하는 것처럼 흐지부지 사라지지 않아.
난 강태고, 넌 이재준이야. 그거면 된 거 아냐?
내가 남자든 여자든, 우리 주변의 환경이 어떻든... 그런 건 내 관심 밖이야."
"..........."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던지, 내 주인은 너 하나야.
날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너일 수밖에 없단 말야. 알아들어?"
".........."
"....아직도 불안하니..? 정말, 확신이 생기지 않는 거야?
똑바로 대답해 봐. 어물쩡거리면서 피했다가 또 다시 네 멋대로 날 패대기치면... 난... 나 자신을 절대 용서 못 할 거야.
그렇게 되면 강태는 강태의 의해서 죽게 돼. 넌 그 살인의 암묵적인 공범이 되는 거고.
진짜 파멸이란 바로 그런 거야, 이재준."
한시도 재준과 맞닿은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며 거침없이, 테러리스트가 경찰을 협박하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강태..
방금 전 토해 낸 흐느낌이 일종의 정화작용을 했는지 섬뜩할 정도로 차분하고 반듯한 목소리가 그의 둘레에 신비롭고 오묘한 기운을 만들어준다.
붉고 예쁜 입술로 재준을 '주인'이라 칭하지만 그는 노예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게 당당하고 기품 있고, 청신한 빛을 발산한다.
재준으로 하여금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그를 압도하는 강태의 카리스마는, 재준이 가진 그것과는 전혀 딴 판이지만 훨씬 중독성이 강하다.
강태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재준은 그가 입술을 다물자,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다는 듯 해사한 순백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듬성듬성 끼여드는 불빛의 방해를 받던 새벽의 어둠이 그 미소 때문에 히뜩 자취를 감춘다.
강태는 걷잡을 수 없이 맹렬하게 가슴을 후벼파는 통증 탓인지,
아니면 한꺼번에 밀려드는 안도감 탓인지 스르륵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 휘청거린다.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강태를 단단히 붙잡아 자신의 품에 기대게 한 재준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유혹적인 입술 가까이 접근한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채 수동적으로 재준의 키스를 받아들이던 강태가 어느 순간 갑자기 진저리를 치며 재준에게 밀착한다.
얽혀드는 혀와 섞이는 타액에서 핏물이 배어나는 듯한 착각에 재준은 그 섬찟한 느낌을 지우고자 미친 사람처럼 강태의 입술을 빨아들인다.
혈관이 몽땅 터져 나갈 것 같은 위험한 희열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드는 두 사람의 입맞춤이
서먹하게 분리되어 있던 공간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서로를 향한 갈구의 목적을 비로소 분명히 밝혀준다.
귀가 멀어버릴 만큼 육중하게 들려오는 심장의 고동소리, 살아있다는 생생한 증거,
혼자 있을 땐 느껴지지 않던 체온...
아아, 내 사람이구나. 내 남자가 틀림없구나.
우린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아니, 절대로 변할 수 없겠구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거두어낸 재준이 다급한 몸짓으로 강태를 번쩍 안아 올린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그의 목덜미에 간질이듯 키스를 이어나가며 강태는 느릿느릿한 손길로 그의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총총히 끌러낸다.
침대 위에 강태를 내려놓고 자켓을 벗어 던진 후, 재준은 굶주림에 지친 야생동물처럼 번뜩이는 눈빛으로 강태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재준의 새까만 눈동자 가득 넘쳐나는 일렁임과 포효가 절실한 무언의 고백을 끊임없이 강태에게 속삭여준다.
허공 중에 흩어져버리는 말 따위에 집착할 생각은 강태 역시 추호도 품지 않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그 유난한 떨림으로부터 남김 없이 전달되어 오는 재준의 감정은 빛 바랜 두 음절의 단어로 밖에 설명이 불가능하다.
첩첩 둘러쳐진 어둠 때문에 재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자, 강태는 팔을 뻗어 침대 옆에 세워진 스탠드를 켠다.
얼굴을 반쯤 가리며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재준의 아이보리색 셔츠를 벗겨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격정을 몰고 강태를 향해 달려드는 그의 어깨와 가슴, 팔과 허리가 좁은 시야를 온통 장악해버린다.
다부진 체형도 아니고 건장한 남성미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냘픈 굴곡을 이루며 섬세하게 미끄러진 선의 형태와 적당한 살집이 잡히지 않아 깡마른 몸이 섬약해 보이기만 하다.
노란 스탠드 불빛을 그대로 반사시키는 우윳빛 피부가 소녀 같은 느낌마저 자아낸다.
무채색 정장과 건조한 눈동자, 싸늘한 표정으로 위장하고 있던 재준의 본질은 단순히 그것들을 제거한다고 해서 드러나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빠져선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있다.
이재준을 폭력조직 충의회의 보스에서 스무 살의 청초한 미소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다.
"....나만 볼 수 있어.. 나한테만 보여주는 거지..? 이재준, 그렇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재준..
한 번 더 울 것 같은 눈동자를 구부러뜨리며 짧게 미소한다.
웃는 방법을 잊어버렸다가 겨우 기억해 낸 사람처럼 어색한 그의 미소가 안타까워서
강태는 깊게 숨을 들이키고 재준과 입술을 포갠 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에게 자신의 숨결을 흘려 보낸다.
하늘이 지금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면, 천지간의 모든 만물들이 지금 우리 두 사람만을 주시하고 있다면... 소리 높여 따지고 싶다.
왜 그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느냐고.
어째서 잠시나마 자포자기의 죽음 같은 삶을 옳은 길이라 생각하게 했냐고.
와서 봐라, 나와 내 남자가 하나 되는 광경을...
세상 사람들이 전부 몰려와서 구경한다고 해도 나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합쳐지는 가장 은밀한 장면까지 자랑스럽게 공개할 수 있다.
이 합일의 경지에서만큼은 어떤 가치관이나 제도, 기준과 규범도 무의미한 궤변으로 전락시킬 자신이 있다.
무엇이 우리를 막던지 이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세상보다 내 남자가 더 고귀하고 소중하므로.
생명의 구원자에게 평생을 헌신하고자 기꺼이 무릎 꿇는 나를 두고 도덕성의 잣대를 운운한다면,
나와 내 남자를 재단하는 그 허울 좋은 잣대를 불태워 버리겠다.
맹세코, 반드시, 이전처럼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내 남자를 파멸 직전까지 치닫게 했던 이 세상을 죽어서도 저주하리라.
"강태야..."
쇳덩이가 갈라지듯 탁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재준에게 강태는 눈빛으로 응답한다.
잠시동안 다시 침묵을 지키며 강태의 팔과 어깨를 쓰다듬던 재준이 나지막한 숨결을 퍼뜨리며 입을 연다.
"이제... 무언가가 우리를 위협하면...내가 나서서 싸울게. 그러니까 너는 내 등뒤에 숨어 있어.
내 등뒤에 숨어서 싸움이 끝날 때까지 편하게, 아무 것도 보지 말고 또 듣지도 말고..
그렇게 자고 있으면 싸움이 끝난 다음에 내가 깨워줄게.
그럼 그 때부터는 다칠까봐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아, 이 멍청한 자식아.
강태의 목구멍을 타고 기어오르던 그 말이 무지근하게 굳어버린 그의 성대 때문에 주춤거리다 흐물흐물 녹아 없어진다.
기회는 이 때다 싶게 폭발하는 눈물이 낙하하여 베갯잇을 적신다.
재준의 말을 더 들었다가는 그의 맨 가슴이 자신의 눈물로 질펀하게 절여질까봐 강태는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린다.
그런 강태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재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주억이고 부드럽게 강태의 손을 치워낸 후, 관자놀이에서부터 정성스런 입맞춤을 시작한다.
귓불을 살짝 깨물고 턱을 지나쳐 목과 가슴으로, 끊이지 않는 그의 키스에 강태의 영혼과 육체는 온전한 일치를 위한 달음박질을 서두른다.
육신의 눈이 감긴 대신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고 이성의 감각이 휘발되는 동시에
지극히 미미한 세포 하나까지 솔직한 본능의 일깨움에 화답하며 곤두선다.
손길이 닿는 구석구석마다 입맞춤을 빠뜨리지 않으며 강태의 옷가지들을 떨구어낸 재준이 알몸의 강태를 새삼스런 눈으로 내려다본다.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연속해서 퍼부어질 키스를 기다리며
말간 눈망울을 수줍게 감춰놓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강태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려는 듯,
재준의 검은 심연에 절박한 물결이 아우성 친다.
은은하게 코끝을 누르는 담배 냄새가 낯설기만 한데...
윤기와 탄력을 잃어 거칠어진 살결이 생소하기만 한데...
해쓱하게 핏기가 가신 두 뺨이 꼭 다른 사람인 것 같은데...
쓰라린 후회로 물드는 재준의 표정을 마주하자 눈치 빠른 강태는 군데군데 상흔이 박힌 몸을 부끄러워하며 말한다.
"나... 많이 미워졌지..? 예전보다 안 예쁘지..?"
목소리.
가느다란 비음이 섞인 여린 미성.
나긋나긋하게 전신의 긴장을 풀어주고 날카롭게 쳐들었던 독설의 칼날 마저 햇빛 아래의 물처럼 변화시키는 그의 음성.
재준의 청각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강태의 목소리가 이미 오래 전 그것에 길들여진 청 세포를 두드리자,
우물쭈물 망설이던 그의 영혼이 반색을 하며 후다닥 뛰쳐나온다.
그리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순결한 모습으로 강태가 내민 손을 마주잡는다.
"강태야.. 넌 완벽해.. 아름답다는 말은 부족하고 특별하다는 말은 너무 당연한 표현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널 욕망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수 있었을까.
널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은 날 이기적인 불안감에 휘둘리게 했고,
널 지키고 싶다는 바램은 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으니...
그래, 이젠...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는 가장 진실한 열망을 선택해도 괜찮겠지...?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는 재준.. 이내 도리질을 치며 일련의 논리적 사고를 중단한다.
도대체 설명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나 자신을 납득시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강태가 내 품에 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어느 누구의 시선도 배제된 둘만의 성역 안에서 입을 맞추고
서로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시며 함께...함께 있다...!
벅찬 황홀감에 떠밀려 아스라이 저물려하는 정신의 끈을 다잡으며, 재준은 약하게 떨리는 팔로 강태의 허리를 휘감는다.
정사는 이제 막 절정으로 접어드는데 벌써부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재준의 어깨에 매달리는 강태..
깃털 같은 손길과는 다르게 억센 힘으로, 그러나 절제를 망각하지 않고 들어서는 강인한 재준의 육체를 담아두느라
아찔한 통증에 저절로 터져나오는 신음을 무력하게 방기한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숱한 사람들과 단지 일시적인 고통의 분출을 위해 가졌던 행위 '섹스'와 동일한 명칭을 달고 있지만...
이렇게 다를 수도 있는가.
이토록 신성하고 정결한 교감을 완성시킬 수 있는가.
오늘 이 새벽, 너를 떠나 존재했던 강태와 나를 외면한 채 서러운 침묵을 감내했던 이재준은...
신마저도 포기해버린 지옥의 끝에 던져버리자.
다시는 두려움 따위가 우리 둘을 죽음으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157)
기다림의 끝에
그대 눈부시게 있다면
다시 한 번 맑은 웃음 지으며
일어설 수 있을 텐데
- 홍건, <기다림의 끝> 중 -
세라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친숙한 음성, 어찌 들으면 기억 저편으로 저물어 가는 세라의 목소리보다
한결 포근한 무게를 달고 안기는 그 음성이 태현을 위태롭게 잡아 흔든다.
정면으로 날아드는 시선이 하도 곧아서 차마 피할 수조차 없다
연수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자신의 눈동자가 숨막히게 저주스러워진다.
태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환각 속으로 말려드는 이성을 붙잡으려 허둥거린다.
"오빠 눈에 비친 여잔...누구의 모습이에요? 제가, 제가 누구예요?"
"........."
"난 여기 있어요. 오빠 앞에 서 있어요, 바로 지금. 근데 어딜 보는 거예요? 어딜 보시냐구요?!"
야릇한 눈매를 적시는 눈물과 함께 격양되는 연수의 울먹임이 태현의 입술을 열고 만다.
가까스로 토해내는 짧은 한 마디는 도무지 태현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칠고 무례하고 냉담하다.
"....나가."
"태현 오빠!"
"씨발, 나가라는 소리 안 들려?! 널 계속 보고 있다간 내가 널 강간해 버릴 지도 몰라.
그 꼴 당하기 싫으면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야, 얼른!!"
"맘대로 하세요! 내가 오빠한테 강간당해서,
그리고 나서 혼란스러워 하는 오빠 마음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 까짓 거 골백번 당해도 상관없어요!
제가 무서운 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왜 모르세요..? 눈으로 보여지는 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오빠가 혼란스러워 하는 이유는, 단지 제가 세라 언니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왜 그걸 모르세요? 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의 담황빛 불빛이 태현의 눈알을 후벼파고 들어온다.
관자놀이까지 전달되는 뻐근한 중압감이 메스꺼운 어지럼증을 유발하자,
그제야 태현은 꼿꼿이 세웠던 목 줄기를 꺾고 의자 등받이에 벌렁 자빠진다.
거역하려는 몸부림의 중단일까.
이도 저도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자포자기일까.
연수는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짓지 못한 상태에서, 무의식에 가까운 힘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 발짝 씩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더 심해지는 몸의 떨림을 감추려고 어금니를 야무지게 깨문다.
그리고 태현의 숨결이 코끝에 닿을 정도로 둘 사이의 간격이 메워 졌을 때,
연수는 고개를 떨군 태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기 위해 방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는다.
축 늘어져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하얀 손을 잡고 상체를 기울여 태현의 암갈색 눈망울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그가 시선을 마주 대올 때까지.
망설이던 태현이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수의 눈길을 흡수하자
그녀는 지금이 아니면 다신 기회를 얻지 못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목소리로 숱한 밤을 지새우며 다듬어 온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
"....사랑해요, 태현 오빠. 오빠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결국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가.
와르르 붕괴되는 체념의 철옹성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태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추억'이라는 그럴듯한 이름표를 달고 태현의 전부를 통제하던 상실감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혼돈과 설렘으로 바뀌어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용서할 수 없었던 거다.
서연수의 육체를 통해 이세라를 갈구한 자기 자신을.
그러는 와중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서연수의 육체에 길들여져
이세라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내기 시작하는 자신의 현실감각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똑같은 얼굴, 동일한 몸이지만 호탕한 파안대소와 걸쭉한 육두문자가 섞인 말투,
수선스럽게 깐죽대던 행동과 촌각을 다투며 색깔을 바꾸는 풍부한 표정...
이세라가 갖고 있던 그 모두와 정반대 되는 서연수 그 자체가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자기 자신이 괘씸하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추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으면서도 짐짓 그렇지 않은 척 슬픔을 가장한 채 주저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역겹다.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지 말아요, 태현 오빠..
세라 언니는 그런 오빠를 보면서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오빠가 언니를 기억 한 구석에 묻어두면...물론 언니는 서운하겠죠.
서운하겠지만...기뻐하는 마음이 훨씬 클 거예요.
세라 언니 역시...태현오빠가 편안해지기를 무엇보다 바랄 테니까요.."
잠자코 연수의 말을 듣기만 하던 태현..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다가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빼 내 눈물자국이 촉촉하게 남아있는 연수의 뺨을 살짝 어루만진다.
보송보송한 촉감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는 이성과 감정의 외줄 타기와는 분리된, 심연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욕망을 부채질한다.
곧 침몰할 배에 타고 있으면서도 다이아몬드 반지를 누가 훔쳐갈까 싶어 금고의 문을 더욱 견고하게 잠그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순 덩어리.
그래, 그게 바로 나고 그게 바로 너다.
영원? 그 딴 거 개한테나 던져주라지.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쳇, 난 처음부터 그런 말 따윈 내뱉지도 않았어.
뻔뻔스러운 거짓말이라는 걸 나도 아니까...
그렇지만... 그 새빨간 거짓말을 진실로 성립시킨 최초의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사실이야..
세라야... 널 희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 이 고통을 죽을 때까지 만끽하려고 했는데...
"왜...왜 나한테 널 보냈을까..? 왜 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
난 아직도 이렇게 네 속에서 세라를 찾는데...
이렇게 널 만지면서, 네가 이세라가 아닌 서연수라는 걸 알면서도 널 안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내 몸이랑 머리가 따로 놀고 있어. 머리로는 널 서연수로 인지하는데 내 몸은, 지금 널 만지고 있는 내 손가락은,
이세라의 몸을 기억하면서 널 반긴단 말야.. 알아들어?"
연수의 뺨에 머물렀던 태현의 손이 서서히 아래쪽으로 이동하며
그녀의 턱과 목덜미를 거치고 깊게 패인 블라우스 탓에 노출된 쇄골 언저리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는다.
격하게 고조되는 호흡에 맞춰 태현의 짙은 눈동자가 거센 일렁임으로 휘몰아치고
작게나마 자리를 지키던 그 특유의 반짝임이 암흑의 물결 속에 묻혀버리자,
연수는 숨길 겨를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소스라침을 어쩌지 못하고 패닉 상태에서 굳어 있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수한 말들이 그녀를 부추기지만 입술이 떼어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얼굴에 흠뻑 끼얹어지는 태현의 숨결이 너무 뜨거워서 순간적으로 화상을 입을 듯한 공포에 연수의 세포 마디가 전율한다.
"오늘 너랑 같이 있는 동안 내가 계속 무슨 생각을 한지 알아?
널 만지고 싶다, 키스하고 싶다, 옷을 벗기고 당장이라도 네 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내내 그 생각뿐이었어.
더 웃기는 건 뭔지 알아?
내 머리는 나한테 계속 이렇게 말하는 거야.
얘는 서연수다, 네가 가르치는 학생이다, 얘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서연수다...
근데 내 몸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거 있지?
네 옆에 세라가 있지 않으냐, 바로 옆에 앉아 있다. 봐라, 저 눈, 코, 입술, 가슴이랑 다리까지 전부 다...
이세라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 넌 운전만 하고 있을 거냐.
속눈썹 하나까지 이세라가 틀림없는데... 난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야. 차라리 완전히 미쳐버린다면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도 없겠지.."
속사포처럼 말을 잇던 태현이 잠시 입을 다물고, 바닥에 무릎을 댄 채 앉아 있는 연수의 손목을 잡아당겨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어 작업실의 대각선 방향에 위치한 침실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간다.
약간의 저항도 보이지 않으며 비틀거리는 모양새로 태현에게 이끌려 온 연수..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거침없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태현을 향해,
마음대로 작동되지 않는 혀와 성대를 겨우 다독여 미미한 음성을 새어 보낸다.
"오빠가 절 알아주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단지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은 거예요, 맨 처음부터.."
자신의 의도를 올바르게 납득시키려는 그녀의 절실함에도 태현의 눈동자는 누그러지지 않는다.
건조하고 미지근한 조소가 그의 하얀 얼굴을 잠식하더니 끝내 좀 전보다 몇 배 싸늘해진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다.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뭐, 별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무려면 어때. 결론은 어차피 한 가지야.
이러쿵저러쿵 감상적인 얘길 갖다 붙여 봤자 인간이란 존재가 뻔하지...
내 말이 틀려? 난 한낱 평범한 스물 한 살 짜리 남자에 불과하다구.."
".........."
"....서연수, 날 사랑한다고 했지? 내 여자가 되고 싶다고...그거 진심이야? 그냥 해 본 소리 아냐?"
해쓱하게 핏기가 가셨던 그녀의 낯이 붉게 달아오른다.
치욕감 때문은 아니다.
어이없게 밀려드는 수줍음과 두근거림이 그녀를 당황하게 한다.
어둑하고 고요한 공간 속, 태현의 눈동자와 숨소리를 홀로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구잡이로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신경조직이 연수의 사고를 정지시킨다.
"날 사랑한다면 말이야, 서연수.. 날 위해 이용 당해줄 수도 있겠지?
방금 말했듯이 난, 머리를 따라가야 할지 몸을 따라가야 할지 어지러워 죽겠다구.
근데 쭉 생각해보니까...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몸이 시키는대로 하는 게 제일 편할 것 같은데...
내가 편안해질 수 있다면, 네 처녀성쯤이야 허락해 줄 수 있겠지?
널 통해 세라를 만나려 한다고 생각하진 마. 난 그저 세라의 몸을 밤새도록 탐하고 싶을 뿐이니까.
영혼은 멀리 있던 가까이 있던 항상 똑같은 갈증을 주지만, 육체는 다르거든..
눈에 보여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훗, 과연 그럴까? 지금 날 폭발 직전으로 몰고 가는 건 네가 가진 세라의 겉모습이야!"
태현은 손닿을 수 없는 끄트머리에 서 있다.
연수는 그의 음성과 망막에 비친 '끝'을 발견한다.
시작을 원하는 그녀와 달리 태현은 끝맺음을 생각하고 있다.
망설이지도, 고뇌하지도 않고 자책하지도 않는다.
쥐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놓아버렸다.
연수는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감겨져 내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 뜬다.
태현의 얼굴을 외면하는 비겁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똑바로 쳐다보리라. 이젠, 모든 걸 인연에 맡길 수밖에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우리에겐 없다.
뒤통수에 받쳐지는 푹신한 베개의 느낌에 심장 한 부분이 철렁 떨어져 나가는 듯, 가슴이 쓰라려 온다.
그러나 그보다 더 에일 듯한 통증으로 연수를 휘젓는 것은 태현의 냉각된 목소리다.
"난 죄책감 따위 갖지 않을 거야. 날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서연수 너니까...네가 말 한대로 해 주겠어.."
그의 입술이 닫힘과 동시에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내리는 손길이 연수의 여린 속살을 스친다.
길게 내려온 태현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이마와 콧잔등을 간질이고
이어서 입술을 비집고 침입하는 그의 혀가 난생 처음 맛보는 아찔함 속으로 그녀를 몰아 넣는다.
블라우스 자락을 젖히고 브래지어를 끌어내려 드러난 젖가슴을 문지르는 태현의 동작도 서툴고,
연수 역시 마네킹처럼 딱딱한 몸으로 그의 입맞춤과 애무를 받아들인다.
급속도로 교차하는 상념들과 첫 경험으로부터 비롯한 일말의 공포 때문에 긴장을 풀지 못하던 연수..
상체를 다 벗겨낸 태현이 그녀의 치마 단추에 손을 가져가자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츠리며 거부의 몸짓을 보인다.
태현은 웃는 듯 마는 듯 기묘한 표정을 띄우고는 구부렸던 등을 펴고 서슴없이 옷가지들을 벗어 던진다.
흐릿한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쫓던 연수가, 태현의 손이 바지 벨트에 닿자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감은 두 눈앞에 나타나는 영상은 태현과 세라가 바닷가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 속의 단란한 광경이다.
온몸으로 뻗치는 섬뜩함에 번쩍 시야를 틔우고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태현이 있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 가운데 떠오른 자신의 얼굴...
연수는 어느새 그녀를 알몸으로 만들고 그녀의 어깨를 부둥켜안는 태현의 가슴으로 조심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158)
밤을 여행하던 두 눈이
사랑에 빠졌어라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볼 수도 없이
- 마크 빅터·잭 캔필드,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중 -
강태의 몸 안으로 들어서자 속도를 조절하듯 재준의 동작이 더뎌진다.
하체의 힘을 느슨하게 풀고 손을 뻗어 강태의 얼굴을 가리며 흐트러져 있는 검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가늘게 경련하던 눈꺼풀이 열리며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재준을 올려다본다.
투명하게, 그의 얼굴을 고스란히 반사시킨다.
그러다 긴 속눈썹을 펄럭이며 깜박, 재준의 얼굴을 감춘다.
오래 보여주기엔 아깝다는 듯.
강태의 지극히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기억구조 속에 찍어두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에 매달리며
한동안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재준에게 강태는 은근한 투정이 섞인 음성으로 속삭인다.
"나...사랑 받고 싶어.. 재준아... 응..?"
단속할 겨를도 없이 번지고 마는 미소를 강태에게 선사하는 재준..
이런 식으로 재준을 유혹하는 사람은, 그래서 재준으로부터 순백의 웃음을 도로 파헤쳐 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강태 하나 뿐인데...
격렬하게 심장을 헤집는 회오와 자책의 소용돌이를 긴 탄식으로 토하며 재준은 성급히 강태의 입술에 입술을 묻는다.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 그 누구의 손길도 미치지 못하는 혼자만의 공간에 숨겨놓고
서러운 흐느낌과 함께 조심히 꺼내보던 재준의 미소가 가시적인 형태로 펼쳐지자,
강태 역시 영영 놓쳐버린 줄 알았던 새로운 꿈의 부활에 감격하여 더욱 강한 완력으로 그를 끌어당긴다.
재준의 야윈 등에 감긴 강태의 팔이 지속적인 떨림을 거두지 못하고,
그런 강태에게 '이제 괜찮다'라고 되뇌이듯 재준은 자신의 허리를 두른 그의 다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리고 잠시 중단했던 움직임을 다시 시작한다.
뱃속에서부터 울려나와 목구멍을 통과해 재준의 귓가를 물들이는 강태의 신음소리가
비로소 재준의 진실한 마음을 가둬놓았던 빗장을 허물어뜨린다.
"...얼마나...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강태야, 강태야... 얼마나 널...그리워하면서 그렇게...하루하루 버티면서...
강태야... 하아... 얼마나 죽고 싶어했는지... 강태야... 내 강태야..."
"그래..그래.. 알아, 재준아.. 나도 알아, 재준아..
우리 재준이...얼마나 많이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강태도 알아..
강태도 그랬으니까...강태도 똑같았으니까...
재준아... 재준아..."
태어난 그 순간부터 숱한 사람들에게 불려진 '이름'이라는 그 호칭이,
서로를 품고 있는 둘에게만큼은 그들에게만 국한되고 그들끼리만 공유하는 기호가 되어 서로를 치료하고 위로한다.
잊자, 잊어버리자. 너를 잃고 호흡을 소멸 당한 채 건너온 식물인간의 시간을 우리 인생에서 빼 버리자.
지우자, 흔적도 남김없이 모두 게워내자.
우리의 헤어짐이 상처가 아닌, 절망도 아닌 죽음 그 자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자.
육체적 본능의 영역을 초월한 정사가 최고조에 이르고
능란하게 강태의 몸을 연주하던 재준의 손길이 일정한 템포를 무너뜨리면서 철저하게, 단단히 두 남자의 전부가 엮인다.
마침내 재준이 강태 안으로 떨어지고 강태가 이재준이라는 남자로 가득 찼을 때, 그때야 쉴 틈 없이 달음박질하던 그들은 휴식의 순간을 맞이한다.
변함없는 본래의 모습으로 강태와 재준을 덮어주는 정적,
한계를 모르고 달아오르기만 하던 그들의 열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당한 온기를 유지하는 불빛,
축복과 새 출발의 징조라 믿고 싶은 아득한 강물 흐르는 소리,
평화롭게 제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사물들에게까지 새삼스러운 고마움이 솟아난다.
바로 이거였는데... 그렇지?
마주 댄 가슴을 빌려 재준은 강태에게 묻는다.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강태는 나른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자신의 몸 위에 엎드려 누운 채 간헐적인 숨소리를 뱉어내는 재준의 머리카락을 다정스레 빗어주며 낮게 잠긴 목소리로 또 한 번 고백한다.
".....내 남자, 이재준...."
- 찰칵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담배의 끄트머리를 사르는 라이터 불꽃을 가만히 응시하던 문환..
차분한 동작으로 주머니 속에 라이터를 집어넣고 차창 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린다.
조수석에 자리한 그의 부하는 백 미러로 문환의 기색을 살피며 안절부절 이다.
줄곧 침묵을 지키던 문환이 담배가 중간쯤 타들어 갔을 때, 한 모금의 연기를 뿜으며 무겁고 둔중한 음성을 발한다.
"이재준이랑 같이 나간 건 확실히 아니란 말이지?"
"예. 이재준은 같이 온 여자와 10시가 넘어서 연회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문환의 질문에 일각의 주저함도 없이 딱 부러진 말투로 대꾸하는 사내는 강태가 종적을 감춘 것이 마치 자기 탓인 양 죄스러워하는 눈빛이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활보의 권리가 주어져있을 듯 번화한 도심지의 부속물들을 감흥 없는 눈길로 훑어보던 문환은
필터 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시 말을 아끼다가, 의미 모를 실소를 허공 중에 띄운다.
사치와 과소비의 표상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
스위치 하나만 내리면 끽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암흑 속에 파묻힐 껍데기만 화려한 불빛들이 묘한 동질감으로 문환의 시선을 붙잡는다.
다이아몬드.
그랬다.
강태에게 했던 그 말은 분명하고 솔직한 그의 마음이었다.
강태는 문환에게 있어 다이아몬드 같은 존재다.
그를 돋보이게 해 주고 뭇 타인들의 부러움 서린 눈초리를 한 몸에 받을 수 있게끔 문환의 외적 가치를 상승시켜주는 최고의 보석.
누구나 소유하기를 원하고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유일무이한 진품.
그러나,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생존을 결정짓는 사항은 아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하는데는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한낱 장식품에 불과할 뿐이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통곡에 버금 가는 오열을 쏟으며 핏물을 쥐어 짜내 듯 고통을 호소하던 강태를 상기한다.
죽고 싶지 않다던 그 말이, 그 때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던 그 말이 어렴풋하게나마 가닥을 드러낸다.
"저...회장님..."
불안정한 자세로 고개만 뒤로 돌려 문환을 바라보며 조수석의 부하가 주눅 든 음성으로 그를 부르자,
유리창에 고정되어있던 그의 눈동자가 정면을 응시한다.
여전히 혼자만의 생각 속에 가라앉아 있는 표정이지만 범상한 눈빛을 덧씌우며 부하에게 말 잇기를 재촉한다.
"어떻게...하실 생각이십니까? 도련님 말입니다.."
"....어떻게 하다니?"
"당장이라도 도련님이 계실 만한 곳을 찾아볼까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뭐하러 그런 시간낭비를 하나? 어디 있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누구랑 같이 있냐, 그게 문제지."
"네?"
"근데 그건...알아보지 않아도 뻔해. 지금 강태를 찾는 건 아무 소용없어. 찾아내서 끌고 와 봤자 뭐가 달라져..?"
수수께끼 같은 문환의 이야기에 부하는 멀뚱한 낯으로 그를 건너다보기만 한다.
문환의 얼굴에 떠돌던 살풋한 웃음이 서서히 걷히고,
꼼꼼하게 매듭 지어진 분노와 교묘히 실체를 가리운 패배감이 그의 얇은 입술을 굳게 밀봉한다.
날카로운 눈매를 어둡게 색칠하는 그림자가 그를 둘러싼 공기입자들을 탁하게 오염시킨다.
맹렬히 가슴을 두들기는 복수심, 빼앗기고 울었던 만큼 빼앗고 꺾어놓겠다는 비틀린 보상심리가 또 한 번 문환을 쓰러뜨린다.
이재준, 내 다이아몬드를 훔쳐간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다.
그것이 너에겐 다 하나 뿐인 생명줄이라 해도, 네가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내 다이아몬드를 낚아채 갔다고 해도,
그 따위 이유로 내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어.
내 다이아몬드를 되찾아올 수 없다면 차라리 그걸 부셔 뜨려 가루로 만들어버리겠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돌가루로... 그렇게 해서라도 강태가 널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 거야.
그리고 그 때 가서... 내 다이아몬드가 다시 날 주인으로 모시고 싶다 애원해도...
난, 코웃음 치면서 따귀나 한 대 갈겨주겠어.
"너희들은 강태 신경 쓸 것 없어. 살겠다고 제 발로 나간 놈인데, 잡아 와 봤자 짜증만 나게 할거야."
"아,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신, 이재준이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좀 더 주의 깊게 관찰해. 충의회 근처에 애들 잘 심어놓고."
"예, 확실히 하겠습니다."
강태를 철두철미하게 감시하지 못한 불찰을 호되게 나무랄 줄 알았던 자신의 보스가
의외로 침착하고 덤덤한 태도를 보이자 부하는 일단 한숨 돌렸다는 듯 안도한다.
시원스럽게 귓가를 울리는 부하의 응답을 듣는 둥 마는 둥
문환은 양미간에 굵직한 주름을 새기며 어긋난 미소로 뒤엉키는 속내를 뭉뚱그려 놓는다.
- 방 안 곳곳을 차지한 사물들이 희끄무레한 윤곽을 나타내며 완연한 새벽의 미명을 빨아들인다.
여유로운 손길로 창문을 두드리는 살빛 채광이 강태와 재준에게 애정 어린 질투를 보내는 듯, 더 이상 두 사람을 어둠 속에 숨겨주지 않는다.
뿌옇게 동이 터 오는 창가를 바라보며 재준은 아쉬움 깃 든 음성으로 입을 연다.
"벌써 날이 밝나 봐.. 강태 너, 잠 못 잤지..?"
"아냐. 난 너 오기 전에 몇 시간 잤어."
"그래?"
"응.. 이 침대에 딱 누우니까...너한테서 풍기던 냄새가 나더라구..
그러니까 왠지 편안해지더라..?
...그래, 이렇게 자고 있으면 재준이가 와서 깨워줄 거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재준이가 예쁘게 웃으면서 '잘 잤어?' 하고 물어봐 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잠들었어. 그러다 눈을 떴는데, 아직도 네가 오지 않은 거야.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지.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갑자기 너무 추워서 난로에 불 지피고 미친 듯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돌아서니까 네가 보였어. 이재준 네가..."
재준의 가슴 위에 머리를 얹어놓고 규칙적인 심장의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꿈결을 헤엄치듯 강태는 몽환적인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재준..
입을 다물고 더 깊숙이 그의 품을 파고드는 강태를 긴 팔로 옭아매며
평소의 메마르고 핍진한 음성이 무색할 정도로 달콤한 보이스를 끄집어낸다.
"며칠동안은 다른 복잡한 거 다 잊어버리고 푹 쉬자.
여긴...그래도 제일 안전하고...또 그동안 우리 둘 다 너무 지쳐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 이젠 정말...다시는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을 거야.
기억 나? 네가 나 총으로 쏘던 그 날.. 네가 나한테 그랬어.
개판 치면서 잊어보려고도 했고, 울면서 애원도 했고, 온갖 방법을 다 썼는데도 안 된다면 이렇게 해서라도 날 곁에 두겠다고.
근데 강태야..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별별 방법 다 시도해봤어.
너 잊으려고, 너 없이도 잘 살아보려고, 네가 날 완전히 지우게 하려고 나 별 짓 다 했어.
심지어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랑 결혼까지 하려고 했어.
그래도 결국...나 지금 이렇게 네 옆에 있잖아. 그리고 지금이...너무 행복하고...
내가 정말 잘못 생각했었어. 내가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건 네 인생이 아니라 바로 우리야.
병신 같이...멍청하게 난 너랑 나를 따로 떼 놓고 생각했어.
떼 놓는다는 것부터, 그 자체부터 불행인데 말야..
강태야... 미안하다, 너무 늦게 깨달아서... 널 너무 오랫동안 아프게 해서...정말 미안하다..."
다시 작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강태의 마른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재준은 그를 일으켜 상체를 곧게 세운다.
그리고 그새 물기가 흥건해진 까만 눈동자를 향해 간청한다.
"......우리, 결혼하자."
[소설] 오르가즘 - 159-1 - By 쵸티지기 (조회 : 326) 2001-07-11 오후 5:29
사랑해요. 지금까진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그저 걷고만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부턴 그 쪽을 향해 걸을래요.
- 신경숙, <새야 새야> 중 -
뭉클하게 와 닿는 유방의 감촉이 짜릿한 전류가 되어 태현의 뼈마디를 훑고 지나간다.
목과 어깨에 감기는 두 팔,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는 어색한 손동작,
팽팽한 긴장으로 뭉친 불규칙한 숨결..
비열한 이기심으로 어질러진 태현의 마음이 독살스러운 심지를 녹이고
애틋한 환각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서연수, 이세라, 서연수, 이세라, 서연수, 이세라...
양쪽 관자놀이를 번갈아 후려쳐 대며 태현을 들볶는 두 여자의 이름으로부터
아주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다는 욕망이 사납게 그를 몰아 세운다.
밀착된 뺨을 떼고 연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태현..
커다란 눈동자에서 내뿜는 열기가 부담스러운지 연수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뽀얗게 빛을 발하는 귀뿌리가 태현의 시선을 잡아끌고, 이윽고 귓불을 깨무는 그의 입술에
연수는 미처 삭힐 겨를도 없이 헉 하고 신음을 내지른다.
탄식 같기도 하고 원망 같기도 한 그녀의 신음소리가 그의 자제심을 격하게 뒤흔들어 놓자,
순간적으로 세라의 이름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을 억누르고
태현은 다시 한 번 연수의 얼굴을 보기 위해 벽 쪽으로 향한 그녀의 얼굴을 잡아
그녀와 똑바로 눈을 맞춘다.
억센 그의 손아귀를 풀지 못하고 버거운 일렁임을 오롯이 투과시킨 채 태현과 마주보는
연수..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지만 그것을 막아버리는 태현의 키스 때문에 이내 또 다시
떨구었던 손을 들어 그의 두 뺨을 감싼다.
그리고 섬세한 입 안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우는 태현의 혀를 서툴게 빨아들이며
영혼의 한 자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허공으로 새어나갈까
슬금슬금 고이는 눈물까지 얼른 되 삼킨다.
알아요, 오빠가 왜 날 안으려 하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오빠가 의도하는 대로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내가 꼭, 오빠를 행복하게 만들 거예요.
단 한 번도, 난 그 믿음을 외면한 적이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믿음은 살아 있는데...
내 심장이 이렇게 건강히 시작을 향해 뛰고 있는데...
날 이용하겠다구요? ....아뇨, 우린 첫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얼굴 근처에서만 맴돌던 태현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가슴을 감싸쥔다.
수줍게 솟아오른 유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허리를 구부려 입 속에 머금는다.
급속도로 정수리를 꿰뚫는 쾌감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연수의 몸이
바르르 진저리를 치고, 입술로는 계속 젖가슴을 애무하며 그녀의 허리와 골반의
곡선을 어루만지던 태현의 손이 오므려진 다리 사이를 가르자,
연수는 질펀하게 젖은 은밀한 부위가 부끄러워 반사적으로 두 무릎을 꼭 붙인다.
"이러지 마... 나 태현오빠야, 문태현이라구..."
왜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걸까. 왜 저렇게 울기 직전의 사람처럼 말하는 걸까.
이제 그만 힘들어해요.
나예요, 서연수에요.. 이제 장님처럼 헤매지 말고 오빠 품에 안긴 날 봐요.
나예요, 서연수.
입안에서만 이리저리 부딪히며 돌아다니는 부르짖음에 휩쓸려 연수는 태현의
손을 허락한다.
망설임을 온전히 걷어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다리의 힘을 풀자
그녀의 젖무덤에 묻혀 있던 태현의 입술이 위로 이동하여 방금 전의 광폭함과는
사뭇 다른, 느긋하고 부드러운 키스로 연수의 떨림을 조금이나마 덜어준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합쳐지는 시선,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한결 투명하게 개어 있다.
이쯤에서 어떤 말이라도 들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연수는 애써 목구멍을
움직여 보지만 여전히 소리가 튀어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긴, 딱히 해야 할 말이 떠올라 주는 것도 아니다.
아주 찰나적인 끊김도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태현..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지만 초보의 솜씨를 감추지 못한 화장으로 덮인
얼굴이 한편으로는 세라와의 동일성을 부각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연수'의 절대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다.
티끌만큼의 가식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말갛기만 한 황갈색 눈동자도,
지속적으로 두려움을 안겨주는 의혹과 맞서느라 굳어진 입술도 마찬가지다.
이세라의 육체 하나만을 목적으로 연수의 옷을 벗겼지만 어쩌면 이 순간,
서연수의 육체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태현을 강태한다.
이 때다 싶게 상념의 골을 파려 하는 자신의 이성을 호되게 나무라며
태현은 고개를 젓는다.
무엇을 더 생각한단 말인가. 이미 그녀를 품었는데, 어차피 누구보다 비겁해지기로
마음먹었는데...
끝, 혹은 시작. 둘 다 아니라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치졸한 자기합리화 일지라도 난, 내게 지워질 그 어떤 책임도 거부하겠다.
이 모든 관계의 발단 역시 썩을 놈의 인연 탓으로 돌리면 그만일 테니.
불안정한 자세로 누워 태현을 바라보고만 있는 연수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낸 태현..
눈을 감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간다.
그리고 어설프게 벌어져 있는 연수의 다리를 한 손으로 들어올려 허리에 휘감는다.
태현의 어깨를 두른 양팔에 더 많은 체중을 실으며 연수가 그에게 바싹 매달리자,
그런 그녀의 행동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 태현은 천천히 묵직한 호흡을 토해내며
연수의 몸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최초로 경험하는 열락과 희열의 세계에 진탕 빠져있던 연수는,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아랫배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하체 전부가 거대한 바위 밑에 깔린 듯
뻐근한 통증이 그녀의 사고회로를 차단한다.
17년 간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던 그녀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
낯선 육체가 들어서자, 그녀의 전신이 아픔을 호소하며 심하게 경련한다.
숨어버렸던 눈물이 연수의 마비된 이성을 조롱하며 관자놀이를 타고 미끄러져 흐른다.
단순히 처녀막의 파손으로 인한 통증 때문이 아니라, 태현을 만났을 때부터
줄곧 쉬지 않고 그녀를 괴롭히던 온갖 감정과 생각의 덩어리가 한꺼번에 분출하여
연수의 눈가를 얼룩지게 한다.
태현이 일정한 속도로 허리를 움직이면서 점점 통증에도 적응이 되어 가지만,
잠시 제 기능을 빼앗겼던 이성이 원래의 상태를 회복함에 따라 연수의 눈동자 속에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상처가 심긴다.
오직 한 남자에게만 치료의 능력이 주어진 상처 하나가 조용히 자리 잡는다.
대체 왜 우는 거지, 서연수? 넌 눈물을 보일 자격이 없어!
앙칼지게 자신을 향해 고함을 쳐보지만 한 쪽 귀를 울리는 가냘픈 숨소리는
태현에게 눈치 채이지 않기 위해 싸매고 또 싸매고 겹겹이 포장한 흐느낌이다.
피가 배어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고 우악스럽게 태현을 부여잡는 연수..
태현은 머릿속에 들어찬 기관들이 몽땅 달아난 것처럼 텅 빈, 황량한 느낌에
몸서리치며 그녀의 자궁 안에 정액을 쏟아낸다.
과음을 했을 때와 같은 얼얼한 취기가 온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갈 무렵,
연수는 닫았던 시야를 틔우고 태현의 눈동자를 찾는다.
그러나 연수의 망막을 장악하는 것은 섬뜩하리 만치 환한 전등뿐이다.
군중들이 밀집한 광장 한 가운데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듯한 수치심이
연수의 심장을 먹먹하게 짓누르기 시작한다.
그녀에게서 몸을 뺀 태현은 진이 다 빠져버린 모습으로 시트 위에 널브러진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침묵, 함부로 깨뜨렸다간 화를 자초하게 될 것 같은
불길한 고요함이 태현과 연수를 두텁게 동여맨다.
다시 한 번 태현의 암갈색 심연에 스며든 자신의 형상으로 용기를 얻고 싶지만,
혹시라도 그의 낯에 서린 후회와 자괴의 감정을 알아차리게 될까봐
그 작은 움직임조차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다.
멍하니 천장에 그려진 무늬만을 올려다보고 있던 연수는 끈적끈적하게 아랫도리를 적시는
무언가를 느끼고 흠칫 매무시를 추스르며 상체를 세운다.
조금 옆으로 비켜 앉자, 베이지색 시트를 물들인 붉은 핏자국이 눈에 뜨인다.
순식간에 그녀의 두 볼이 복숭아빛으로 불거져 오른다.
흐릿한 시선으로 연수를 응시하던 태현도 시트에 번진 핏자국을 발견하자마자,
긴 시간 노닐던 환각의 울타리 밖으로 자신을 내동댕이친다.
고개를 깊이 떨군 채 검은 머리카락을 휘장처럼 드리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연수..
그런 그녀와 시트 위의 핏자국을 재차 확인한 태현이 기묘한 표정으로,
일그러진 입술로, 금속성의 물체가 기분 나쁜 소음을 울리듯 차가운 실소를 터뜨린다.
[소설] 오르가즘 - 159-2 - By 쵸티지기 (조회 : 332) 2001-07-11 오후 5:30
"허..! 기가 막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쳤어... 너, 나, 우리 둘 다 아주 미쳐 버렸어..!!"
목까지 끌어올려 손에 쥐고 있는 시트를 와락 구기며 연수는 턱 끝에서
낙하하는 눈물 줄기를 동글동글한 멍울로 만들어 손등에 찍어낸다.
미처 억제하지 못한 울음소리가 흑 하고 터져 나오자, 그녀의 흐느낌에
태현의 머리와 가슴은 더욱 시니컬한 비웃음을 지으며 알몸의 그를
지독한 자학의 구렁텅이로 끌고 간다.
미약한 가능성을 부지하고 있던 너그러운 관용의 마음이 한 톨의 동정까지
남김없이 뽑아낸 잔인한 칼날이 되어 태현을, 그리고 연수를 난도질한다.
"....우린, 끝났어. 다신 나 볼 생각하지 마. 여기까지 올 줄 알았으면
애초에 아예 잘라버렸을 텐데...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됐어..
나한텐 책임이 없어. 누구도 내 인내심이 너무 적었다고 말하진 못할 거야."
흔들리던 연수의 잔등이 움찔 그 진동을 멈추고, 연수의 눈동자가 태현에게 닿는다.
냉랭한 표정으로 보란 듯이 연수를 외면하는 태현..
하지만 떨리는 속눈썹 탓에 무질서한 머릿속과 혼란스러운 마음 한켠을 들키고 만다.
"....끝이요? 지금...끝내자고 하셨어요..?"
말도 안 되요, 끝이라니요.
갈라진 성대 때문에 식도 아래로 사그라드는 그 말을 씁쓸히 삼키며
청각을 모조리 곤두세워야 들릴 만한 목소리로 묻는 연수..
아직 다 씻어내지 못한 물방울이 맺혀 희미하게 다가오는 태현의 옆모습이
딱딱한 유리로 빚은 조각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밀어 그의 뺨을
매만지려 하는데, 태현은 슬쩍 어깨와 목을 뒤로 젖히며 그녀의 손길을 피해 버린다.
"말했잖아. 넌 나한테 이용당한 거라구. 널 통해서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졌으니까
이제 그만 꺼져달라 이 말이야.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줄까? 이젠, 널 통해서도 세라를 볼 수가 없어.
그래, 맞아. 넌 서연수잖아. 서연수일 뿐이지 그 누구의 대신도 될 수 없어.
널 안으면서...조금이라도 세라의 몸을 느껴보려고 했는데 절대 그렇게 안 되더라구..?
숨소리 하나, 몸짓 하나, 전부 다 그냥 서연수일 뿐이야.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몸이 아니었어. 아무 간절함도 느낄 수 없고...
그저... 내 자신이 더 싫어졌을 뿐이야..."
"단지...욕구 때문에 절 안으신 건 아니잖아요. 제가 바라는 건..."
"됐어. 네가 뭘 바라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단지 욕구 때문만은 아니라고? 아니,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편하겠는데?
네가 나에 대해 갖고 있는 그 확신이 제발 좀 깨졌으면 좋겠다고!!
그래, 서연수... 그냥 그렇게 생각해라. 넌 어리고 예쁘고 내가 좋아했던 여자랑
똑같이 생긴데다가, 오늘 네 옷차림이 워낙 유혹적이어서 말이지...
나도 남잔데, 그것도 피가 펄펄 끓는 스물 한 살 남잔데 이 밤에 너 같은 여잘
집에 데려와서 곱게 돌려보낼 리는 없잖아? 내가 무슨 수도하는 성인군자도 아니고...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라구. 넌 너무 순진해서, 선생이랍시고 믿고 따라왔다가
얼떨결에 먹힌 거야. 뭐, 유치하게 순결 어쩌고 하면서 내 발목 잡을 심산은 아니겠지?"
심술궂게 놀려대던 입술을 다물면서, 태현은 연수가 따귀라도 한 대 올려붙이리라 하는
생각에 경멸 어린 비난과 험악한 말들을 상상하며 그녀를 쏘아본다.
형편없이 흐트러진 화장 때문에 고장난 인형 같은 모습으로 잠자코 앉아 있는 연수..
슬픔이나 체념이라는 평범한 추상명사로 이야기하기엔 불충분한 무엇인가를
눈 안 가득 채워 담고 휘청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가해 바닥을 디딘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답답해 죽겠다고 할만큼 느린 동작으로 침대 부근에
널린 옷가지들을 하나씩 주워 입는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돈하고 나서 연수는 태현을 등지고 뒤돌아 선다.
침실 방문을 열고 걸음을 내딛기 전, 구멍이 뚫린 듯 깜박임조차 잊은 채
그녀의 뒷모습을 아로새기는 태현에게 연수는 최종적인 의문을 던진다.
"....세라언니가 날 오빠에게 보냈다고 생각해요?
근데 왜 오빠는... 저한테 죄책감을 느끼는 거죠..?"
[소설] 오르가즘-160 - By 쵸티지기 (조회 : 333) 2001-07-17 오후 7:56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내 영혼에 파멸이 와도 좋다.
- 셰익스피어, <오델로> 중 -
화장대 거울 앞에서 허리를 수그린 자세로 넥타이를 매는 준상..
방문이 열리고, 하늘거리는 실크 소재의 잠옷차림을 한 여자가 한약이 담긴 그릇을
쟁반에 받쳐든 채 그에게 다가온다.
넥타이의 매듭을 가다듬으며 그녀가 건네주는 한약 사발을 입으로 가져가는 준상에게,
여자가 불만에 찬 음성으로 이야기한다.
"제발 술 좀 작작 마셔. 그리고, 집이 무슨 여관이야? 허구헌날 잠만 퍼질러 자고..."
자기, 나랑 같이 저녁 먹은 게 언젠지 기억이나 해?
아, 내가 이 나이에 독수공방하게 생겼냐고~!!"
"또 그 놈의 잔소리! 씨발, 연말에는 바쁜 거 몰라?
기집애가 아침부터 정신 사납게 땍땍거릴래?"
"오늘도 늦게 들어오기만 해 봐~ 딴 남자 불러다 놀아날 줄 알아."
"마음대로 하셔~ 누군 뭐 여자가 없냐?"
싱글거리는 웃음으로 능청을 떨며 매무시를 살피던 준상이 외투를 한 쪽 팔에
걸치고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놓는다.
얄미워 죽겠다는 듯 눈을 흘기면서도 현관까지 그를 따라나오는 여자..
일찍 들어오지 않으면 가만 안 있겠다며 또 한 번 엄포를 놓는 그녀를 뒤로하고
준상은 쌀쌀한 겨울 공기 속으로 나선다.
차를 세워놓은 채 대기하고 있던 부하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주고
뒷좌석에 올라타자, 주머니 안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어댄다.
평상시보다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색깔을 바꾸며
황급한 동작으로 핸드폰을 귀에 붙인다.
"예, 김준상입니다."
- [ 어, 준상이냐? 나다.]
"회장님!!"
- [ 그래, 출근했어? ]
"네. 지금 막 출발했습니다. 9시전에 댁에 도착할 겁니다."
- [ 아냐, 아냐. 우리 집으로 올 필요 없어. 나 지금...양수리 별장이다.]
"예?? 양수리에 계시다면..."
- [ 쿡.. 그래, 임마. 강태랑 같이 있어. 여기서 며칠 지내다 올라갈 거야.
뭐, 오래 있진 않을 거지만 나 없는 동안 네가 수고 좀 해야겠다.
애들한테는 아직 얘기하지 마. 내가 올라가서 직접 설명할 테니까. 알았지? ]
"물론입니다, 그럼요! 회장님...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여기 일은 싹 잊으시고 며칠동안은 마음 편히 몸 편이 푹 쉬시다 오십시오.
참, 도련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 [ 그럼, 괜찮지.. 옆에 있는데 바꿔줄까? 할 얘기 있으면 해.]
"아, 아닙니다. 그냥 한 번 여쭈어 본 건데요.. 아무튼 회장님, 정말...감사합니다.
이젠 진짜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 [ 새끼...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그리고...다신 너 실망시키는 일, 없을 거다.]
"회장님... 전 충의회 이재준 회장님의 직속부하 김준상입니다.
그런 말씀들을 자격은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니까요."
- [ .....그래...앞으로도 부탁할 일이 생길지 모르겠구나..]
"전부 잊으시고 좋은 시간만 보내다 오십시오. 다시 연락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 [ 그래, 서울 올라가면 술 한 잔 하면서 얘기하자. 끊는다..]
"예, 들어가십시오."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고 빙그레 미소를 띄우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준상..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이 한 순간에 녹아 내리며 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흐뭇한 기분에 빠져 있던 준상이 흠칫 고개를 움직여 운전석의 부하에게 지시한다.
"야, 종로 본사로 가. 회장님 양수리에 계시대. 며칠 안 나오실 거야."
"예. 그런데...회장님께서 양수리 별장에 왜 갑자기...?"
"그럴 일이 있어. 회장님 오시면 직접 말씀해주실 거야."
"아, 예..."
더 묻지 말라는 강요 투의 대답을 던지며 준상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옆에 있는 신문을 펼쳐든다. 굵직한 제목의 기사들을 하나씩 훑어 내리며
담배만 태우다가, 불현듯 무엇이 생각났는지 번쩍 고개를 쳐들고
백미러에 비친 부하의 눈을 직시하며 준상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한다.
"오늘부터 연화회 쪽 움직임이 어떤지 더 신중하게 살펴 봐. 조금이라도 낌새가 수상하면
바로 보고하고 특히, 쥐새끼 짓 하는 놈 없는지 철저하게 감시해.
조만간... 연화회하고 또 한 판 벌이게 될 것 같으니까..."
- 준상과 통화를 끝낸 재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왠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다.
단아한 눈매에 옅은 그늘을 드리운 모습이 강태에게 걱정과 궁금증을 가져다준다.
소파에 앉아 두 팔을 무릎 위에 세우고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생각에 잠긴
재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심스런 목소리를 내는 강태..
"뭘 그렇게 생각해? 무슨 문제 있어..?"
천진한 눈망울과 새초롬한 입술이 시야를 차지하자 재준은 곤두세웠던 신경을
누그러뜨리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는 듯 억센 손으로
강태의 허리를 잡아당겨 그를 무릎 위에 앉힌다.
걱정과 궁금증으로 짙어졌던 강태의 눈동자가 수줍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둥글게 휘어지며 환한 웃음을 피워낸다.
재준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셔츠 칼라를 만지작거리는 강태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재준은 중저음의 목소리를 강태의 귓가에 흘려보낸다.
"딴 게 아니라...혜련이한테 전화해야 될 것 같아서...
근데 생각해보니까 먼저 전화하는 것도 좀 그럴 것 같고... 모르겠다."
"혜련이..? 네가 데리고 산 그 여자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대답을 표하는 재준..
강태는 재준에게 느슨히 기대고 있던 몸을 꼿꼿이 세우고 금새 샐쭉하니
눈동자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거린다.
그래도 재준의 목을 두른 팔은 풀지 않은 채 제법 쌀쌀맞은 어투로 종알댄다.
"칫! 난 그 여자 싫어. 딱 처음 봤을 때부터 맘에 안 들었다고~
지가 뭔데 나서서 우리 둘 사이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참견이야?
아무 것도 모르면서 건방이나 떨고... 그 여자 때문에 내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알아? 아니, 지가 뭔데 나더러 널 포기하라고 그런 얘길 하냔 말야~
정말 웃기는 여자야. 근데 재준이 너, 그 여자랑 결혼하려고 했었다는 거 정말이야?"
짓궂게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질투심을 누르지 못하고 발끈해서는 상기된 낯으로
옴팡진 말들을 뱉어내는 강태를 가만히 바라보던 재준은, 갑자기 날아드는 그의
질문에 비져 나오는 웃음을 억제하고 짐짓 무표정하게 고개를 주억인다.
그러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는 강태..
"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이재준, 너 바보니?"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내가 봐도 정말 바보 같았어..."
삐뚤어진 심사를 그대로 노출하며 어색한 포즈로 자신의 무릎에 앉아 있는
강태를 힘주어 가까이 끌어당기며 재준이 잔잔하게 흐르는 시내 같은
음성을 퍼뜨리자, 강태는 여전히 새침한 태도를 고집하면서도 슬쩍 그의 가슴에
몸을 맡긴다.
재준에게서만 풍기는 은은한 비누 향기가 강태의 후각을 간지럽히고
투정을 부리던 앳된 심술까지 솔직한 애정으로 둔갑시킨다.
방금 전의 앙탈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해사한 웃음을 흠뻑 빨아들이며
강태는 최초로 보물섬을 발견한 어린 아이 마냥 환희에 도취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그래봤자, 이제 넌 내 남편이 될 거니까! 그 여자한테 들었던 말, 무시해 버릴 거야."
"풋.. ^^; 너 그런 말하니까 진짜 여자 같다? 결혼식 때 웨딩드레스 입혀야겠는걸?"
"어휴~ 이재준, 하여튼... 난 어디까지나 네 성 정체성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남편'이라고 불러준 것 뿐이야."
"오호, 그래? 그럼 내 성 정체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웨딩드레스 정도야
입어줄 수 있겠네?"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며 농담조로 묻는 재준에게 못 말리겠다는 눈빛을
쏘아보내다가 피식 그를 따라 웃어버린 강태..
무의식적으로,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리 듯 재준의 선홍빛 입술에 키스하고,
그의 뺨에 뺨을 마주 댄 채 천천히 따뜻한 체온을 교환한다.
얼마간 평화로운 정적을 음미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술을 뗀 쪽은
발갛게 얼굴을 붉힌 강태였다.
"근데 정말...충의회 사람들 전부 보는 앞에서 결혼식 할 생각이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처리해. 넌 그런 거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말했잖아. 애들 앞에서 약속을 하고 싶다고...
내가 평생 책임져야 할 그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부탁을 하는 거야.
내가 널 잘 지킬 수 있게 도와달라고, 또...나에게 충성을 다 하는 것만큼
강태 너를 힘껏 보호해 달라고 말이야.
충의회의 중심이 회장인 나, 이재준이라면... 이재준의 중심은 바로 강태라는 걸
조직원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거야.
충의회에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만큼...그렇게 해야 절대로 다시 되돌아서는 일은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난 여자가 아니잖아. 결혼식 자체가 이상하게 비춰질 지도 몰라."
"강태야, 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그렇지만, 충의회 사람들 전부가 우리를 이해하고
축복해 주지는 않을 거야.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아주 적을 지도 몰라.
너에게 충성하는 마음이야 똑같겠지만... 그 사람들 역시 일반적인 기준에 길들여진
사람들인데... 난 네가 실망하게 될까봐, 그게 겁나.."
"내가 처음 널 정부로 들였을 때도, 네가 남자라는 이유로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어."
"재준아, 이건 달라. 우린 결혼을 하는 거라고! 국가에서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문서상으로 기록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평생 함께 하겠다는 신성한 계약이야.
그리고 그건...우리 관계가 비밀스럽게 묻혀 있을 수만은 없다는 뜻이야.
즉, 공론화가 된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 관계가 공식적으로 알려지는 게 두려운 거야?"
"....모르겠니? 공식적으로 알려지기엔 우린...그다지 정상적인 관계는 아냐.
네가 날 정부로 둔다는 건 섹스 파트너로 단순히 내 몸을 즐기겠다는 것뿐이고,
성생활은 남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니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 관계를 그렇게 공식적으로 밝히고 나면... 널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어. 내가 걱정하는 건 그거야."
".............."
"지하 세계라고 해서 세상의 법칙이 몽땅 거꾸로 적용되는 건 아닐 거 아냐..
널 만나긴 전 20년 동안 난 너무 평범하게 살아서...네가 실감하지 못하는
벽을 벌써부터 예측할 수 있다고, 이재준..."
[소설] 오르가즘 - 161 - By 쵸티지기 (조회 : 314) 2001-07-21 오후 1:57
식사를 마친 후, 혁수는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하는 주혁 대신 서비스를 담당한
웨이터에게 적당한 팁을 건네고 먼저 레스토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그 옆에 벽면에 부착된 거울을 들여다보며 매무시를 정돈하는
혁수의 허리를 감싸는 주혁..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 한 올을 세심하게 털어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다.
"피곤하지..? 하루종일 차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나야 뭐 영어로 말만 전해주면 되는데... 네가 신경 쓰느라 골치 아프지."
"맨날 하던 일이니까... 재준이랑 얘기 좀 해봐야겠어."
경쾌한 기계음과 동시에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주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혁수는 보일 듯 말 듯 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다시 정지하고 문이 양쪽으로 벌어지자,
말쑥한 양복 차림의 서양인이 손에 서류가방을 든 채 서 있다.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포즈로 혁수를 반쯤 껴안고 있는
주혁과 눈이 마주치자, 백인 남자는 당황한 듯 주춤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다.
주혁은 마치 그 더러 들으라는 듯 분명한 목소리로, 묘한 장난기를 뿌리며 투덜댄다.
"에이~ 둘만 있으면 키스하려고 그랬는데..."
혁수는 후다닥 뒤를 돌아보며 주혁에게 나무라는 눈길을 쏘아보내고,
투숙한 방이 위치한 층에 이르자 서둘러 승강기에서 내려 발걸음을 빨리 한다.
그런 혁수와 대조적으로 주혁은 손가락으로 방 열쇠를 빙빙 돌리며 느긋하게 걸음을 뗀다.
앞서 걸으면서 어김없이 주혁에게 타박을 주는 혁수..
"장주혁, 너 남 앞에서 이런 짓 하는데 완전히 재미 들렸지? 하여간 취미도 희한해..."
"맞아. 재밌는 걸 어쩌라고~~ 쳐다보는 표정들이 하나 같이 똑같은 게 너무 웃기잖아."
"넌 재밌을지 몰라도 난 낯뜨거워 죽겠단 말야! 제발 그러지 좀 마라.."
"아, 알았어... 왜 화는 내고 그래..."
삐질삐질 새어나오는 삼키며 주혁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깔끔하게
손질된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눕는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더니 목청을 높여
커다란 음성으로 혁수를 부른다.
"안혁수~~ 이리와 봐! 이제 우리 둘밖에 없는데~~!"
식탁이 놓인 바깥 쪽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하던 혁수는
과장된 주혁의 목소리에 피식 미소를 터뜨리며 짐짓 뾰루퉁하게 대꾸한다.
"됐어, 나 샤워할 거야. 아, 그리고! 이번에도 불쑥 들어올 생각하지 마!
문 꼭 걸어 잠글거야."
김이 샌다는 듯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고 벌떡 상체를 일으키는 주혁..
침실 밖으로 나가 물소리가 시원스레 들려오는 욕실 쪽을 바라보고 다시 장난 칠
궁리를 하다가 그런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가벼운 실소를 깨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마음을 고쳐먹고 식탁 의자에 앉아 자켓 안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낸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신호음을 들으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다.
달칵 하는 소리와 동시에 신호음이 끊기고 대신,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위압감을 실은
재준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러든다.
- [ 예, 이재준입니다.]
"어, 재준아. 나야, 주혁이."
- [ 어, 형이구나.. 벌써 일 다 마무리 된 거야? ]
"아니, 그게 아니고 사실은...이 쪽 새끼들이 비싸게 굴어서 말이야.
최고 조건을 제시했는데도 계속 콧대를 세우더라고? 물건에 자신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 [ 그래..? 최고 조건까지 거절했다면 곤란한데... 너무 센 가격에 거래를 하면
다른 조직들이 괜히 의심할 지도 모르고... 일단 한 번 더 설득해 봐. 가격 올리느라
튕겨 본 걸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나서 다시 통화하자.
그나저나, 혁수 형이랑 같이 여행가서 일만 하다 오게 생겼다? ]
"그래도 일은 확실히 끝내야지. 어차피 내일까지는 크리스마스고 해서 쉬기로 했어.
너도 웬만하면 내일 하루는 쉬지 그래? 밑의 애들도 좀 풀어주고."
- [ 응, 그럴 생각이야. 나 지금...양수리에 있거든.]
"별장에? 언제 갔어? 너 혼자 있는 거야?"
- [ 아니, 혼자 있는 건 아니고... 오늘 새벽에 왔어.]
"그럼 누구랑 같이 있는데? 아아... 혜련 씨..?"
- [ 아니... 나 지금...강태랑 같이 있어, 형..]
부끄러워하면서도 설렘과 기쁨을 자랑스레 드러내는 음성.
담뱃재를 떨구던 주혁이 멈칫하며 재준의 말을 또 한 번 되새긴다.
불현듯 생경하게 다가오는 '강태'라는 이름에 한동안 기억을 더듬는 주혁..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선명하게 전달되는 재준의 감정이
주혁을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재준이 너 그럼...강태랑 다시 만난 거야..?"
- [ 응.. 자세한 얘긴 만나서 하자. 아, 그리고 혁수 형한테도 안부 전해 줘.]
".....그래, 알았어. 아무튼 한 번 더 접촉해 본 다음에 다시 전화할게."
- [ 응, 신경 좀 써 줘. 부탁해.]
".....재준아..."
- [ 어, 왜? ]
"...너...강태랑 같이 있다고 했잖아.. 그거...잘 된 거지..?"
- [ ......그럼,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데... 형도 이 느낌 알잖아.]
"그래, 다행이다.. 나중에 전화할게. 참,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라~"
- [ 응, 고마워. 형도 크리스마스 잘 보내..]
잔잔한 미소를 띄운 채 핸드폰을 접으면서도, 주혁은 평소 알고 있던 재준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착각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의 입술에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서슴없이 튀어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재준에 대한 주혁의 새삼스런 낯설음이 그 부피를 늘려간다.
또 한 개비의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발을 옮기는 주혁..
이제는 어느 정도 친근함 마저 느껴지는 홍콩의 화려한 야경에 눈동자를 고정시킨다.
"재준이랑 통화했어?"
강태와 재준의 재회에 대한 생각 속으로 말려 들어가던 그의 귓가를 두드리는 혁수의
목소리에 주혁은 흠칫 욕실이 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주혁이 선물해 준 커플 잠옷을 입고 노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며
동그란 갈색 눈망울을 빛내는 모습이 자석처럼 주혁을 끌어당긴다.
허둥대는 듯한 손길로 담배를 끄고 혁수에게 다가간 주혁은 덥썩 그의 허리를
부여안으며 샴푸 향기가 풍겨 나오는 목덜미에 코와 입술을 묻는다.
그리고 샴푸 향기보다 더 강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혁수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신다.
미동 없이 주혁의 품에 안겨 있던 혁수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암청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한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호위하듯 둘러싼 정적에 흠집을 낸다.
"재준이...강태랑 같이 있대..? 둘이...다시 만난 거야..?"
"....응, 그런가 봐.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주겠대."
"그래? 잘 됐다... 재준이,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얼마나 힘들었겠어."
"응.. 근데 정말 신기해. 재준이 말야,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는지...
난 사실 재준이가 진짜로 강태를 잊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여자까지 새로 들이는 거 보고 더 그랬고."
"맞아, 나도 그랬어. 난 재준이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때, 여름에 같이 바닷가
놀러갔을 때.. 재준이랑 강태 보면서 전혀 처음 만난 애들처럼 느껴지지 않았거든.
그게...비슷한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어. 재준이랑 강태가 헤어졌다는
얘기 들었을 때도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보다는 둘 다 정말 많이 아프겠구나...
그런 마음부터 들었고."
"이재준... 특별한 놈이지. 강태 말고는 걔 감당할 사람, 아무도 없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긴~ 이재준 그 자식은 강태 앞에선 인간이 180도 달라질 거라 그 얘기지..
내가 안혁수 앞에서 그렇게 되는 것처럼."
넉살 좋게 싱긋 웃음 짓는 주혁에게 곱게 눈을 흘기며 피이~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뱉어내는 혁수.. 무덤덤한 표정을 비치려 애쓰다가 청명한 그의 미소에 여지없이
허물어져서는,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깔며 주혁의 입술로 접근한다.
찹찹한 감촉과 함께 포개어지는 입술 사이로 은밀히 오가는 숨결과 그 속에 감춰진
속삭임이 서로의 영혼을 일깨우고 잠든 육체를 소성 시킨다.
왁살스런 힘으로 혁수를 가슴 안에 가둔 주혁이 더 깊게, 더 진하게 혁수의 입술을
파고들자 혁수는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주혁의 야윈 등에 가느다란 두 팔을 휘감는다.
쿵쿵대는 심장이 똑같은 언어를 토해냈을 때, 식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던 혁수가
주혁을 끌어안은 채 몸을 누인다.
ㄱ 자 형태로 꺾인 자세가 힘에 부칠까봐 주혁은 왼 팔로 단단히 혁수의 허리를 받치고
잠시 입술을 떼어낸 다음 그의 잠옷 단추에 손을 뻗친다.
정사가 시작되기 전의 야릇한 열기에 취한 듯 혁수는 주혁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며
예의 데카당한 눈빛과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혁아.. 우리...미국 가서 자리잡히면 아이 입양하기로 했잖아..?"
"응.. 예쁜 딸 키우기로 했지.. 근데 왜..?"
"저기... 우리 딸 이름 뭐로 할 지 생각해 봤어..?"
"풋.. 그걸 벌써부터 생각해? 우리 혁수, 얼른 딸 생겼으면 좋겠구나..?"
단추를 다 풀고 벌어진 셔츠 자락 사이로 드러난 주혁의 도드라진 쇄골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혁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주혁은 버릇처럼 혁수의 눈과 코, 입술, 턱선 등을 골고루 탐색하며 말을 잇는다.
"미국 가서 빨리 돈 벌어야겠다~ 양육비가 충분히 있어야 애를 제대로 키우지."
"우리 딸 이름... 내가 생각해 둔 거 있는데..."
쇄골과 어깨 근처에서 맴돌던 손을 올려 주혁의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혁수는 사뭇 진지한 눈동자로 주혁을 바라본다.
이윽고, 오랫동안 혼자서만 간직해 온 비밀을 토로하듯 기억 한 구석에 덮어두고
있던 하나의 이름을 발음해낸다.
"....세라로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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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온 톤혁이군요. ^^;
사악톤혁방 감상주신 분들 보시죠. ^^
별사탕혀니님, 현숙이, itere님(서울여대 다니세요? 오호.. 신기하군요.), sunhyuk19님,
ANIC님, 저는 일산에 산답니다. 아무래도 연락처를 쪽지로 주시는 게 좋겠군요.
지혜(오늘은 톤혁이라 다행이다. -_-;), juni1983님(호야님 얼굴 보내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보도록 하죠^^; 근데 말이죠.. 전 톤혁, 원타 둘 다 정성스런 맘으로 쓰는데. -_-;),
글구 수처니.. 내가 한 그 말이 글케 부담이 되었다니 미안하구만. 아무튼 감상은 역시
베리 굿이었어. 쿄쿄^^*
[소설] 오르가즘-162-1 - By 쵸티지기 (조회 : 325) 2001-07-30 오후 6:51
세상에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
그건 내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결정하는 일이다.
- 이정하, <선택> 중 -
"....그런 것쯤은 나도 각오하고 있어. 이미 겪을 만큼 겪기도 했고."
무릎 위에 앉혔던 강태를 안아 올려 옆으로 옮긴 재준이 탁자 위에 놓인 담배 갑을 집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포근하고 평화롭던 분위기가 갑자기 냉기류로 전환되는 것 같아서
강태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재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따가운 침묵을 덜어내려는 듯, 강태가 헛기침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담배 한 개비를
빼 물자, 재준은 잠시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피식 웃고 만다.
"......왜 웃어, 이재준."
능숙하게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내보내며 또 다시 샐쭉한 눈흘김을 던지는 강태..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재준은 웃음기가 가득 서린 말투로
중얼댄다.
"나더러 담배 좀 피우지 말라고 잔소리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내가 그래야 되는 건가?"
"내가 담배에 손 댄 건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
"쿡.. 누가 뭐래? 야, 근데 너... 담배 피우니까 더 섹시하다..?"
"몰랐어? 난 뭘 해도 섹시하잖아."
은근한 교태가 묻어나는 목소리와 상대방을 놀리는 듯 대담한 미소가
희뿌연 연기를 피워 올리는 담배와 어우러져 제법 근사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반쯤 내리깐 속눈썹이 부채처럼 음영을 드리우고, 둥근 곡선을 그리며 미끄러진
턱의 윤곽과 오만하게 솟아오른 콧마루가 강태만의 도도하고 유혹적인 매력을
노골적으로 과시한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까, 자신조차도 수용하기 멋쩍은 애틋한 감정이
불쑥 솟구쳐 오르자 재준은 짐짓 얼굴빛을 추스르며 상체를 기울여 재떨이 담배를 비벼 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색한 억양으로 구부러진 음성을 뱉어낸다.
"배고파 죽겠다. 밥 먹으러 가자."
아주 비밀스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서둘러 침실 안으로 몸을 숨기는 재준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강태.. 꽁초로 변한 담배를 재떨이에 떨구어놓고 재준과는 대조적인,
느긋한 속도로 발을 움직인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자못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했었는데...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온기를 회복하는 두 사람 사이의 기류가 신기하기도 하고,
미묘한 만족감마저 안겨준다.
그래,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그 따위 문제들을 제쳐놓자.
...그래도... 괜찮을 거야...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강태는 한결 산뜻해진 웃음을 매달고 재준에게 다가선다.
옷을 다 챙겨 입은 재준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는 강태의 코트를 집어들어
그에게 입혀주고, 강태는 패션쇼를 하는 모양새로 재준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애교를 부린다.
재준의 무표정한 얼굴을 순식간에 파스텔 톤으로 밝히는 미소가 강태에게 다시 한 번,
놓을 수 없는 끈끈한 생의 열기를 불러일으킨다.
너구나... 나를 사랑하는 너 맞구나...
내 호흡 한 가닥 한 가닥이 허파를 찢어버릴 것처럼 날뛰는 걸 보니, 정말 너구나..
네 살 냄새에 내 세포들이 진저리를 치고 있어.
너, 재준이 맞구나. 정말이었어.
"나...살아 있어. 내 숨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 살아 있다는 거야.. 그렇지.?"
재준의 허리에 두 팔을 감고 그의 뺨에 뺨을 마주 대며, 또렷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려주는 강태.. 그런 그를 힘주어 품으며 재준은 엉뚱하게도 결혼식에 관해 그가 했던
이야기들을 상기시킨다.
세상의 기준, 타협, 싸움, 비정상적 관계로 인한 마찰.
숱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재준을 고민하고 갈등하게 했던 말들이건만.
폭력조직의 우두머리라고 해서 어찌 그 모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재준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을씨년스러운 웃음으로 입 언저리를 장식한다.
꽤 오랜 시간 가슴과 가슴을 포갠 채 두 사람 주위를 배회하는 친숙한 정적을
무언의 구경꾼으로 허락하다가, 재준은 조금씩 호흡이 잦아드는 강태의 눈을 바라보며
무겁게 닫아걸었던 입술을 뗀다.
"오늘 새벽, 너한테 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 난 돌아가고 있다, 강태한테 다시
돌아가는 중이다.. 널 버린 건 난데, 아주 매정하게 뿌리친 건 난데...
웃기게도,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너무 불안했어.
혹시라도 네가 없으면 어떡하나, 네가 기다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어. 얼마나...얼마나 간절하게 빌었는지 몰라.
제발 준상이 말대로 거기 있어줬으면, 정말 날 기다리고 있다면...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주겠다고 맹세하면서...그러면서 왔어.
그 생각만 하면서..."
선정적이면서도 화려한 눈매를 자랑하지만 검은 망막 한 가운데 잠겨 흔들리는 슬픔을
완벽하게 가려두지 못한 강태가 규칙적인 깜박임을 잊은 채 재준의 목소리를
귀 뿐 아닌 눈 속에도 담아둔다.
영리하고 눈치 빠른 본래의 성격이 무색할 정도로 이 순간만큼은 재준의 입에서
흘러나올 다음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강태..
감정의 찌꺼기가 말끔히 씻겨진 눈동자를 가지고 말없이 재준을 재촉한다.
고개를 숙여 강태의 눈꺼풀 위에 키스한 후, 재준은 그의 손을 잡아 쥐며
부끄러운 듯, 그러나 영혼의 심장에서 퍼 올린 가장 뜨겁고 정결한 음성을 깊게 새겨놓는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전부 빠짐 없이, 똑같이 느끼게 해 줄 거야.
그리고 평범한 연인들이나 부부들이 느끼지 못하는 행복까지도 평생 느끼게 해 주고 싶어.
내 옆에 있어서...더 행복할 수 있게...이젠 나만 보지 말고, 네가 너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살게 해 주고 싶어.
그게... 내가 찾은 새로운 꿈이거든.."
===========================================================간만에 짤리네. -_-+
[소설] 오르가즘-162-2 - By 쵸티지기 (조회 : 313) 2001-07-30 오후 6:52
-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아침나절부터 줄곧 그녀의 머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무지근함에
혜련은 습관처럼 양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러댄다.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차 문을 열어주는 사내에게 몸에 익은 듯 세련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까페 문을 밀어젖힌다.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다 창가 쪽에 자리한 친구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많이 기다렸지? 차가 밀려서 좀 늦었다. 미안.."
지나치게 푹신해서 외려 불편한 느낌을 주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입을 여는 혜련에게
맞은 편 여자의 눈길이 와 닿는다.
단정하게 동여 묶은 머리와 은테 안경, 수수하고 털털한 옷차림이 척 보기에도
대학생 티가 물씬 난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자매처럼 가깝게 지내온 사이지만 설핏 보면 두 사람의 사회적 신분은
친구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을 낸다.
여대생과 암흑가 보스의 정부.
젊은 지성을 대표하는 계층과 환락, 방탕의 도가니 속의 주요 일원인 술집 접대부.
기묘하고 야릇한 이질감은 혜련에게 불쾌한 질투심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일종의 신선한 자극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어두운 음지의 세계에서 생활함으로 자연히 차단될 수밖에 없는
'바깥 쪽'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단순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아냐, 나도 방금 전에 왔어. 나 계절학기 괜히 신청했나 봐~ 리포트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혜련이 건네주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여자는 피곤에 절은 목소리로 투덜댄다.
혜련은 건성으로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이며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키고,
핸드백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친구에게 내민다.
"이거...보들레르 시집이잖아? 너 요새 시에 취미 붙였니?"
"네 전공이 프랑스 문학 맞지? 이 사람에 대해서도 배웠어?"
"그럼~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인데... 근데 갑자기 왜? 이거 네 책이야?"
"아니, 내 책은 아니고...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너한테 물어보려고."
엉덩이를 움직여 탁자 가까이 바싹 다가앉은 혜련이 책의 겉장을 펴서 여백에 쓰여진
한 문장과 그 뒤에 딸린 두 이름을 친구에게 보여준다.
[ 즐거움과 슬픔의 하룻밤이 지나고, 내 넋은 모조리 당신의 것입니다. - 강태·이재준 ]
"이 말... 시 속에 나오는 말이야..?"
멀뚱한 표정으로 혜련과 책 속의 문장을 번갈아 보는 친구에게 혜련은 진지하게 묻는다.
그녀의 친구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을 시작한다.
"아니... 그건 아니고, 지금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보들레르가 사랑하는 여자한테
보낸 시에 붙어 있는 말일걸? 편지로 치면 추신처럼 한 마디 덧붙이는 식으로...
그 시 제목이 아마...<영적 여명>인가 그럴 거야. 보들레르가 어떤 귀족 부인을 사랑했는데,
그 여자하고 같이 있지 못하니까 자주 시를 보내서 사랑을 구하고 그랬대. 이 책, 읽어봤어?"
"조금...읽었는데...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머릿속 한 쪽이 텅 비어버린 듯 멍청한 눈빛을 창 밖으로 이동시키며 혜련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그녀의 친구는 그런 혜련의 범상치 않은 기색에
주의 깊게 그녀를 살피다가 무엇인가 또 떠올랐는지 다시 입을 놀린다.
"아, 그 <영적 여명>이라는 시 말이야.. 대충 이런 내용이야. 사랑하는 그 귀족 부인이랑
함께 있지 못하는 슬픔 때문에 보들레르가 하룻밤을 창녀랑 같이 지냈대.
그리고 나서 깨달았다는 거야. 일부러 그런 타락에 젖어봐도 자기의 영혼이 언제나
그 귀족 부인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 때의 느낌을 표현한 시라고 하더라..?
근데 이 책이 누구 거라고?"
친구의 입에서 '창녀'라는 두 글자가 튀어 나왔을 때, 혜련은 막을 새도 없이 왈칵
차 오르는 웃음을 얼굴 전체로 퍼뜨리고 만다.
너무 갑작스런 그녀의 표정 변화에 당황한 친구가 동그래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본다.
"누구 거냐니까?...야, 유혜련!!"
"......재준 씨 거야. 거기 써 있는 이름 보면 모르겠어?"
조급한 궁금증이 가신 메마르고 싸늘한 음성이 허공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혜련의 입에서 뻗어 나온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애써 기어올라간 산꼭대기에서 다시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듯한
허탈감이 흥건하다. 그러면서도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할 줄 모르는 습관화 된 자기 비하,
너무 빠르고 쉬운 포기, 어이가 없을 만큼 간단한 감정의 정리.
"이재준이면... 너랑 같이 사는 그 남자 아냐? 아니 근데, 강태는 또 뭐야?"
"....뭐긴 뭐야, 딱 보면 모르냐? 이재준이 사랑하는 사람이지.."
"강태는...남자 이름인데..? ....설마 그럼, 그 남자가...?!?"
"씨발.. 나 진짜 남자 복은 지지리도 없지 않냐? 술집 생활 5년만에 이제 좀 괜찮은 남자
만나서 자리 잡나 했더니... 에휴~ 완전 좆 됐다, 유혜련... 이런 새끼 발목 잡을 수도 없고.."
"말도 안 돼..! 그럼 이 시에 대해서 알려고 했던 것도..."
"그래~ 네가 설명해주는 거 들으니까 감이 딱 잡히는데, 뭐..
보들레르는 이재준이고, 그 보들레르가 좋아했다는 귀족 부인은 강태일 거고...
함께 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잊으려고 하룻밤 즐긴 창녀는 바로 나, 유혜련 아니겠어?
쳇... 내가 아무리 중학교도 못 나왔다고 하지만, 그 정도 머리도 없을 것 같냐..?"
"혜련아, 너..."
"됐어. 설명은 그 정도로 충분해. 결론이 벌써 났으니까.
이제 슬슬 나도... 제자리로 돌아가야겠지..?"
#######################################################################################
저희 집이 있는 빌라 단지에는 DJ DOC의 창렬이가 산답니다.
오늘 약속시간에 맞춰 집에서 나왔는데, 단지 입구에 창렬이랑 재용이가(이름 맞나.? -_-;)
서 있더군요. 그 전에도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는데
갑자기 창렬이가 "저기요!" 하고 저를 부르더군요.
그 때 제가 들고 있는 플라스틱 파일에는 재준이의 뽀샤시한 사진이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죠.
그걸 보더니 창렬이가 하는 말. "재준이는 잘 있나 모르겠네..." -_-;
그러더니 옆에 있던 재용이가 씩 웃으면서 이럽디다.
"근데요, 스타킹 나갔거든요? 아주 고속도로가 쫙 뚫렸네... 매니큐어도 없고 어떡하나..."
...............-_-;;;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쪽팔림을 이기지 못하고 스타킹을 살펴보지도 않은 채 모기 만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한 마디를 한 다음, 얼른 바로 앞에 있는 슈퍼로 뛰어들어갔죠.
그러고 나서 다리를 살펴봤더니... 스타킹은 아주 온전한 상태였습니다. -_-;
이것들이 연예인이라고 사람을 가지고 노나... -_-+
그 때, 쪽팔림 따위 무시하고 부탁했어야 하는 건데..
"우리 재준이랑 통화 한 번만 하게 해 주실 순 없을까요..?" -_-;;
다음에 만나면 꼭 부탁해 볼게요. 들어줄 지는 모르겠지만. -_-*
사악톤혁방 감상 주신 분덜~!
호야띠익님, 현숙이(100일이구나. 파이팅이닷!^^), 아해님, 천재랩퍼다흰님,
별사탕혀니님(제 나이 재준이랑 동갑이에요.^^;), ppassia님(답변 들으셨죠?),
지혜, 유선이(너도 강퇴당했어? 장난 아니네.-_-;), juni1983님(제 멜주소는
[email protected]에요)
taya4827님(오랜만이네요. ^^) 모두 감상 감사드리구요~~
ANIC님, 죄송하지만 연락처 한 번만 더 쪽지로 보내주세요. 잃어버렸어요. ㅠㅠ;
글구 헤라 시삽 지혜! 앞으로 노력하겠다는 말 밖에는 변명할 게 없구나.. -_-;;
마지막으로 수처니! 내가 미국에 사는 친구한테 들었는데..; 혼자 사는 사람한테도 입양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고 하더구나. 예를 들면, 조금 문제가 있는 아이라던가..;
특히 미국국적을 갖지 못한 외국 아이 같은 경우는 혼자 사는 사람한테도 가능하대.
소설을 더 읽어보면...아마 알 수 있을 거예요. ^^;
[소설] 오르가즘 - 163-1 - By 쵸티지기 (조회 : 317) 2001-08-11 오후 8:27
그대 앞에서
사랑이란 말은 또한
얼마나 허세인가
내 가슴 떨림에 비한다면
얼마나 보 잘 것 없는가
- 이정하, <먼 하늘> 중 -
나른한 혁수의 손길에 취해 풀어져 있던 주혁의 눈동자가 한 순간
본래의 빛깔을 되찾는다.
혁수의 등줄기를 쓸어 내리던 농염한 손동작도 정지한다.
가슴을 졸이며 뱉어낸 이름인 만큼 그에 대한 주혁의 반응 역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피는 혁수..
세라가 죽고 난 후부터 두 사람 사이에 그녀를 언급하지 않게 된 것은
어느 누가 먼저 정하지도, 명백히 못박아두지도 않았던 그저 자연스레
싹 튼 불문율이었다.
혁수는 지금 그 불문율을,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자연스럽게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컬컬한 욕망의 그림자가 자취를 거두고, 주혁의 하얀 얼굴엔 육중한 슬픔의
차양이 내려앉는다. 목련 빛으로 드러난 반라의 육체가 부끄러워지도록
주혁을 왜소하게 만드는 거대한 감정, 그 무게에 짓눌려 찌그러진 욕망은
얄팍한 깊이를 노출하고 만다.
주혁은 혁수의 허리를 받친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똑바로 일으키고
한 발짝 그에게서 물러난다.
겨우 3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주혁과의 거리가 과민하게 아득히 느껴지자
혁수는 삽시간에 몰려드는 황량한 기분을 떨쳐내려 어깨를 작게 오므린다.
"....그렇게 하고 싶어..?"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약한 떨림을 부여담은 채 나즉이 묻는 주혁이
조금은 낯설어서, 혁수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그를 빤히 건너다보기만 한다.
그런 혁수를 보며 그가 자신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혁은 다시 한 번 차분히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우리 딸 이름... 정말 세라로 하고 싶냐고..."
주혁의 음성만큼 조용하고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혁수..
주혁이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하고, 그러나 가장 예민한
부분을 끄집어낸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신중히 입술을 뗀다.
"사실.... 난 너처럼 세라랑 많은 얘길 해 보지도 못했고 그 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너만큼 나도 세라한테 항상 고마운 마음 갖고 있어.
우리 때문에 같이 마음 아파해주고 같이 울어주고.. 또 항상 우리 편에 서 줬잖아.
나 다시 한국 들어왔을 때... 공항에 마중 나왔던 그 애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날 보자마자 내 이름 부르면서 막 달려오는데... 정말 내가 왜 진작 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더라구..."
옅게 번지는 미소가 혁수의 자그마한 얼굴을 화사하게 꾸며주고,
급속히 침잠했던 분위기를 아련하고 그윽하게 전환시킨다.
주혁의 붉은 입술도 가느다란 곡선을 그리며 어렴풋이 웃음을 지어보인다.
"태현이가 매일 입버릇처럼 하던 말 기억 나? 세라는 네 엄마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그 말, 들을 때마다 나... 정말 웃기는 생각인 거 알면서도 진짜 세라가 네 엄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그럼 우리...별로 힘들어할 일도 없을 텐데, 그러면서 말야.
나, 너무 한심했지..?"
수줍음이 섞인 서툰 쓴웃음이 묘한 자책감을 매달고 혁수의 입가에 휘감긴다.
그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명치께가 뻑뻑하게 아려와서 주혁은 허둥지둥 애매한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없이 고개만 가로젓는다. 열린 셔츠 깃을 한 손으로 여미며, 혁수는
몸 동작처럼 조심성이 흥건한 목소리를 꺼내 놓는다.
"세라 죽었다는 얘기 들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알아?
다리가 하나 뿐인 사람이 나머지 한 쪽 다리까지 잃어버린다면 그 느낌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들었어.
정말이야. 온갖 고생을 다 해서 모은 돈을 한꺼번에 어이없이 빼앗겼을 때...
바로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허전했어. 이기적인 감정인 건 알지만...솔직히 정말 상실감이 컸어.
난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는데...네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져도 되겠지..?"
대꾸할 필요조차 없을 만치 당연하다는 듯 주혁은 묵묵히, 꺾어짐 없는 눈빛으로
혁수를 바라보며 다음에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려준다.
주혁의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며 혁수는 한결 단단해진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근데 참 희한해. 세라를 잃고 난 다음에, 그렇게 상실감이 컸는데도...오히려 마음은
더 대담해졌어. 독해졌다고 해야 하나..? 정말 잘 버텨야겠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우리를 괴롭혀도 절대 도망치지 말고 싸워야겠다.. 싸워서 보란 듯이 이겨야겠다..
그런 마음이 강해지더라..?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다짐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의지가 생기고..
결심도 굳어지고... 세라에게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제일 앞서기는 했지만 말야.
내가 다시 너에게 돌아오기까지 나한테 가장 많은 얘길 해 준 건 지민이 누난데...
지민이 누나도 세라를 떼놓고 생각하면 왠지 멀게 느껴져.
놀라워.. 세라의 자리가 이렇게 컸다는 게... 그러면서도 세상은 달라진 거 없이 돌아가고...
그 속에 있는 우리도...마찬가지고..."
"미국에 있는 지민이 누나보다 세라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지금도 여전한데..?"
"그래, 맞아. 지민이 누나는 우리랑 같은 이반인데도 나조차 지민이 누나보다 세라한테
더 많은 동질감을 느껴. 지금은 완전히 갈라진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리 딸 이름...왜 세라로 하고 싶은 건데...?"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질문을 불쑥 던지는 주혁에게 혁수는 잠시
정갈한 시선을 모아 보내고, 그런 동안 그들 사이에 잔재하고 있던
세밀한 간격은 분쇄된다.
"우리에게 딸이 생길 때쯤이면 지금보다 훨씬 안정되고 풍족해져 있을 거야.
우리 둘의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을 정도니까...
우리가 힘들게 가꾸어온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 우리 둘과 같은 영역에
속해서 살아갈 사람한테 가장 알맞은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라 밖에 없는 것 같아.."
================================================================담에 이어짐돠^^
[소설] 오르가즘 - 163-2 - By 쵸티지기 (조회 : 299) 2001-08-11 오후 8:27
- 다시 한 번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는 연수의 손가락이 불안정한 움직임을 거듭한다.
입술을 바짝 말려가며 기다리던 규칙적인 신호음 대신, 얄미울 정도로 상냥한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자 연수는 튜브에서 바람이 빠지듯 샐팍한 한숨을 토해낸다.
하얗게 김이 서린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닦아내고 눈 쌓인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아침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는 연수..
어제까지만 해도 칙칙한 회색 구름이 빽빽이 들어차 있던 하늘은 맑다 못해
투명한 빛깔을 뽐내며 흰 눈으로 뒤덮인 땅 위에 황금빛 햇살을 뿌려준다.
목소리를 듣고 나면 일단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 한 마디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투정 어린 생각에 젖어보던 연수는 금세 눈빛을 고치며 해이해지려 하는 자기 자신을
엄중히 꾸짖는다.
어젯밤은 시작이었을 뿐, 아픔도 눈물도 그 모두를 인내하는 시간 또한 어제부터 시작되었을 뿐.
이미 나를 버린 이상,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자존심? 그건, 어젯밤 태현과의 섹스 때문에 파열된 처녀막보다 더 하찮은 부속품에 불과하다.
질 입구에 덮어져 있던 얇은 종이짝 하나가 찢어진 것쯤이야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닌가.
가볍고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 무책임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의 수준에 이르는
상념의 응어리들 때문에 연수는 비릿한 웃음을 얼굴 전체에 문지르며
창가를 떠나 욕실로 향한다.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본 자신의 모습을 오랫동안 망막 뒤에
새겨 넣다가 차가운 수돗물을 손 안 가득 움켜쥐어 본다.
손가락 사이로 주르르 미끄러져 나가는 물의 감촉이 어젯밤 느꼈던 태현의 손길과
몸서리쳐질 만큼 닮았다는 생각에 황급히 배어나는 눈물을 씻어낸다.
울어서는 안 된다. 아주 약간이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대로라는 것, 변함없다는 것, 그와의 인연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내 의지가 그를 쉬게 하도록..
같은 의미의 말들을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주입시키며 외출 준비를 마친 연수는
주저함 없는 발걸음을 태현의 아파트 쪽으로 떼어놓는다.
수시로 오고가는 거리의 친근한 풍경이 싸늘한 바람과는 대조적으로 따뜻하게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를 보듬어 주기 위해 열린 내 가슴은 조금도 식지 않았는데...
그에게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잠시도 더뎌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끝이라고..?
그 따위 흔한 단어가 날 지치게 할 수는 없어.
내가 단념한 건 그가 아니라 나 자신, 서연수일 뿐인데...
어제, 난 그의 뒷모습에서 이세라를 찾지 못했어.
이젠 그 빈자리에 나를 심어놓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희미하게 떠오르는 미소를 자각하며 연수의 자신감은 무서운 줄 모르고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난다.
아파트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컴컴한 어둠에 싸여 있던
복도를 따라 걸으며 빨라지는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인다.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50%의 설렘과 50%의 떨림과 100%라는 한정된 숫자로 담아낼 수 없는 사무친 간절함이
그녀를 움직이게 한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익살스럽게 붙여놓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누구에게 인지 분명치 않은 기도를 올리는 연수..
잠시동안 감았던 눈을 뜨고 초인종을 누른다.
공기의 흐름 외에는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는, 을씨년스러운 주위의 정적 탓일까.
발랄한 벨소리가 청승맞고 구슬픈 음조를 띠며 연수의 귓가에 감겨온다.
멀게, 아득하게 전해지는 태현의 기척에 그녀는 긴장한다.
"누구세요..?"
어떤 기대감도, 반가움도 집어낼 수 없는 음색이 두꺼운 철문을 간신히 뚫고 울려나온다.
갑작스레 뒤통수를 휘젓는 둔탁한 충격에 움찔 다물어졌던 연수의 입술은
어젯밤의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 하나만을 붙잡고, 위험한 목소리를 떨어뜨린다.
"저예요, 연수..."
폭발할 듯 깨질 듯, 불안하고 연약한 침묵이 태현과 연수 사이의 틈새를 크게 확대시킨다.
철컥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는 연수의 뇌 속에 자리잡은 사고회로의 연결고리를
무지근하게 끊어놓는다.
젖혀지는 문틈으로 태현의 하늘색 머리카락과 암갈색 눈동자와 선홍빛 입술이 나타난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풀어헤쳐진 눈과 자책의 흔적이 역력한 메마른 입술이
연수의 중심을 찌르고 들어온다.
자기도 모르게, 흐느낌이 터져 나올까봐 손바닥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두 주먹을 그러쥔 그녀를 응시하며 태현이 먼저 높낮이 없는 음성을 뱉어낸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돌아가."
"......이러지 말아요, 오빠.. 저랑 얘기 좀 해요."
"난 너 같은 애 만난 적 없어.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너 감당 못해."
"아직 할 말이 많아요, 저는... 어제 드렸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들어야 하구요."
"그만 둬. 우린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야."
"태현오빠!!"
집을 잘못 찾아온 사람에게 여기가 아니라는 한 마디를 내뱉듯,
매몰차다 못해 귀찮아 보이기까지 하는 동작으로 문을 닫아버리고 모습을 감추는 태현..
연수의 외침이 철제문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로 쪼개어진다.
과도한 힘이 들어가 있던 주먹을 느슨하게 늘어뜨리고 흐물흐물 녹아 내리듯
주저앉은 연수는, 와해된 몸뚱어리와 정반대 되는 강경한 목소리를
태현의 청 세포 가운데 단단히 박아놓는다.
"오빠가 문 열어주실 때까지 절대 여기서 일어나지 않아요.
여기 있을 거예요, 저는... 바로 여기..."
########################################################################################
너무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_-;;;
사악톤혁방 여러분들 보시죠~!
호야띠익님, stom0207님, ANIC님, xkdighdi님, juni1983님(저 안 이뻐요.-_-;) 별사탕혀니님
모두 감상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글구 허리야.. 네 아이디 진짜 딱이야. ^^; 과분한 감상, 고마워~
마지막으로 수처니.. 설마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건 아니겠지.? -_-;; 퇴원 축하한다! ^O^
[소설] 오르가즘-164-1 - By 쵸티지기 (조회 : 269) 2001-08-20 오후 10:05
이렇게까지 행복한 것은 틀림없이 불법이라고 생각해.
- 시드니 셀던, <여자는 두 번 울지 않는다> 중 -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는 의무감이나 무언가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지 모른다는
급박한 마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신체적 리듬에 따라 잠들었던 육체가 깨어나 듯
재준은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방 안 가득 환하게 내려앉은 햇살이 낯설어 그의 표정이 멀뚱해진다.
이렇게 밝은 빛줄기에도 깨어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자신이
신기하면서도 어쩐지 민망스럽다.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지만 강태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바쁘게 긴 다리를 움직여 거실로 향하는 재준..
주황색 불꽃을 날름거리며 타닥 타닥 경쾌한 소리를 내는 페치카를 보자,
차분한 안도감이 재준을 감싸안는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오른쪽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재준의 눈동자에
어젯밤 입었던 진회색 정장 대신 편안한 면바지에 스웨터 차림의 강태가 비친다.
요리에 열중해 있는 탓에 재준의 기척 마저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재준은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코와 입술을 묻는다.
화들짝 놀라는 그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뭐야~ 일어났으면 기척이라도 하던가... 하마터면 손 베일 뻔했잖아~"
"으음... 냄새 좋다..."
강태에게만 허락된 재준의 다정하고 애교스럽기까지 한 목소리에 강태는 금세
뾰로통했던 표정을 흐트러뜨리며 부엌칼을 내려놓고 그와 마주보기 위해 몸을 돌린다.
한 쪽 팔을 재준의 목에 감고 한 손으로는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나긋나긋한 음성을 퍼뜨리는 강태..
"아침에 시장 갔다 왔어. 맛있는 거 하고 있으니까 배고파도 조금만 참아."
"혼자서? 나 깨우지 그랬냐..."
"깨우긴... 너 그렇게 깊이 자는 건 진짜 처음 봤어.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번쩍 번쩍 눈뜨던 놈이 아주 세상 모르고 자는데... 숨소리까지 안 내더라."
장난스러운 강태와 대조적으로 재준은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변명 조로 웅얼거린다.
"내가 그랬나... 지금 몇 시나 됐는데?"
"벌써 1시 다 됐어. 얼른 씻고 와. 밥 차려 놓을게."
"어휴~ 진짜 많이 잤네... 어쩐지 눈이 좀 부은 느낌이더라..."
뒷머리를 긁적이며 천진하게 눈살을 찡그리는 재준은, 수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폭력조직의 우두머리가 갖고 있는 냉혹함과 카리스마를 몽땅 걷어낸 말갛기만 한 얼굴이다.
욕실로 발길을 돌리기 전, 입맞춤을 빠뜨리지 않는 그의 세심함과 자상함도 강태에게
독점적인 기쁨을 선사한다. 다시 싱크대 쪽으로 돌아서서 재준을 위한 식사 준비에
정성을 쏟는 강태..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옷차림까지 깨끗하게 정돈한 재준이
주방으로 발을 디밀고, 강태가 벌여놓은 풍성한 식탁을 경탄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탄성을 토해낸다.
"이야~~ 역시 신부 감으로는 최고라니까..."
"뭐야?? 너 정말 어제부터 자꾸 그런 쪽으로 몰고 가는데, 이재준..."
"알았어, 임마..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러냐, 농담도 못하겠네..."
"밥이나 먹어, 식기 전에..."
흑 진주처럼 동그란 눈동자가 샐쭉하니 가늘어지며 고운 눈흘김을 보내는 강태에게
재준은 순백의 함박웃음으로 고마움을 대신하고, 의자에 앉아 수저를 든다.
강태도 그와 마주보고 앉은 채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데
그런 강태를 따뜻한 눈길로 응시하는 재준을 의식하고 무슨 영문이냐는 듯
요염한 눈매가 어린아이처럼 똘망하게 빛을 낸다.
사랑스러운 감정과 함께 불쑥 고개를 쳐드는 본능적인 욕정을 조용히
나무라면서 재준은 그에게 묻는다.
"오늘 크리스마스잖아... 뭐하고 싶어?"
"으음~ 드라이브하면서 경치 구경도 하고.. 라이브 까페에서 음악 들으면서
차도 마시고, 또...근사한 데에서 저녁도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그러고 보면 우리 단 둘이서 하루종일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 적도 별로 없다.
충의회 이 회장님께서 좀 바쁘셔야지..."
"그래, 오늘은 정말 재밌게 지내자.."
"정말이지? 그럼, 네 핸드폰 줘 봐."
"핸드폰은 왜?"
"아, 하여튼 줘 봐."
졸라대는 듯, 반쯤은 강압적인 강태의 요구에 재준은 못이기는 척 침실에 놓아둔
핸드폰을 갖고 와 그에게 내민다.
허리를 꺾은 채 접혀 있는 핸드폰을 일자가 되도록 열어 젖힌 후, 빨간 표시가 있는
버튼을 꾹 눌러 전원을 꺼 버리자, 재준의 표정이 의뭉스럽게 기울어진다.
"여기 있는 동안은 다 잊어버리는 거야. 통로까지 막아 버리자구.
아무도 우릴 찾을 수 없게... 충의회, 연화회, 우리 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끼여들지 못하게 하자.."
당분간은, 어떤 이유 때문일지라도 그와의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아주 잠깐이라 해도, 당분간은...양보할 수 없을 것 같다.
난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결국 그의 포기를 무효로 되돌리는데 성공했으므로.
우리 두 사람의 발목을 한꺼번에 휘감아 끌어당기던 늪 속의 질긴 수초 줄기를 ]
끊어버린 것은 바로 내 손이었으니까.
이젠 그 손으로 이재준을 얽어맬 것이다. 자랑스러운 낙인을 찍 듯.
================================================================아쒸! 또 짤려! -_-+
[소설] 오르가즘-164-2 - By 쵸티지기 (조회 : 351) 2001-08-20 오후 10:05
- "어우~~ 재준아~~ 나 네 노래 정말 듣고 싶단 말야~~ 제발~ 응? 제발~~"
콧속에 이물질이 잔뜩 낀 것처럼 맹맹한 비음을 굴려대는 강태는
벌써 얼근하게 취기가 올라 있다.
발그레 상기된 볼과 약간 충혈 된 눈, 적당히 풀어진 자태가 그의 매력이 지닌
위험천만한 속성을 한층 강화시키고, 재준은 난처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애써 강태에게서 시선을 떼어낸다.
"야, 나 진짜 노래 못 해. 너 술도 많이 마셨으니까 얼른 별장으로 가자."
"싫어! 죽어도 네 노래, 들을 거야. 그 전엔 절대 안 가! 절대!!"
"미치겠네, 얘..."
붉고 푸른 네온사인이 번갈아 깜박이는 노래방 입구에서 몇 분 째 실랑이 중인 두 사람..
기어코 재준의 노래를 듣고야 말겠다는 강태의 고집에 재준은 연신 도리질을 치며
귀가를 서두르려 한다.
살가운 콧소리와 애교를 동원해 재준을 설득하던 강태가 정말 화가 난 것처럼
시무룩하게 낯을 굳히며 재준의 팔을 잡아끌던 손길을 미련 없이 거두자,
재준은 조심스럽게 강태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은 당해낼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알았다, 알았어... 대신, 딱 한 곡만이야!"
"와아~! 신난다~~ 빨리 들어가자~~"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잰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강태의 뒷모습에
또 막을 새 없이 터지는 미소를 속수무책으로 방기하고, 재준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생전 처음 와 보는, 노래방이라는 생소한 장소에 재준은 조금 얼떨떨해진다.
밀폐된 방안으로 들어서자, 노래 목록이 적힌 책을 재준에게 건네는 강태..
"자, 여기.."
"아아...저어...너 먼저 해라, 야.."
"으휴~~ 진짜! 더럽게 비싸게 구네... 알았어!"
어울리지 않는 넉살까지 피우며 미적거리는 재준에게 한 마디 쏘아 부치고,
야무진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마이크를 쥐는 강태..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오자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제법 그럴듯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평소 즐겨듣던 발라드를 무난하게 소화해내는 강태를 지켜보며,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도 독특한 음영을 만드는 속눈썹과 박자에 맞춰 달싹이는
입술을 처음 대면하는 사람처럼 주의 깊게 감상하며 달착지근한 황홀경에 빠져 있던 재준..
노래를 끝낸 강태가 멋쩍은 기분을 무마하려는 듯 단호한 눈빛으로 마이크를 넘기자,
아쉬움과 망설임을 동시에 매단 재준의 미간이 귀엽게 찌푸려진다.
그런 그의 제스추어에도 강태는 이번만큼은 더 이상 봐 줄 수 없다며
억척스레 재준을 채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간 더 뜸을 들이며
강태를 감질 나게 하던 재준이 노래 책자를 뒤적여 부를 노래의 코드를 찾자,
강태는 그제야 안심이 된 모양새로 얌전히 재준의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리기를 기다려준다.
그가 선택한 곡의 전주가 흐르고 기계 화면에는 노래의 제목이 떠오른다.
이승환의 '세 가지 소원'.
"사실은...예전부터 너한테 들려주고 싶었던 건데...내가 직접 부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얀 얼굴을 물들이는 수줍은 미소, 부끄러움이 서린 까만 심연.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때 이른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맹수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가까스로 달래며 강태는 청각을 비롯한 전신의 감각을 극렬히 곤두세운다.
이윽고, 그리 크진 않지만 아주 분명하고 확연한 음성이 재준의 입술을 비집는다.
"나, 어쩌면 천사와 손잡았나 봐요. 그대의 마음이 날마다 날 유리처럼...
빛나게... 투명하게... 그대의 손길이 내 여린 맘을 스쳐 지나갈 때...
나는 느끼죠.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대를 위해 기도하죠, 이루어 주소서..
첫 번째 내 소원은 나 없는 곳에서 아프지 말아요. 언제라도 그대 지켜줄게요..
건강해요, 나의 사랑... 오, 내 모든 것 모두 주어도 아쉬운 마음 그대는 알까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대를 위해 기도하죠, 이루어 주소서...
두 번째 내 소원은 우리 힘들어도 속이지 말아요. 혹시라도 우리 어쩔 수 없을 땐...
착한 거짓말만 해요.. 마지막으로 빌어요.. 지금 잡은 두 손, 놓지 않을 게요..
먼 훗날 우리 눈감게 되는 날.. 꼭 한 날 한 시 되기를....."
과장된 긴장으로 흔들리는 목소리는 위태하게 이어지고, 음정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그의 성대 때문에 노래 자체는 어설프고 서툴기 짝이 없다.
아무 상관도 없는 누군가가 듣는다면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할 재준의 노래에
강태의 파르스름한 눈매가 제 빛깔을 무너뜨리며 바스라진다.
물기가 고인 채 넉넉한 곡선을 그리는 눈매를 맞받다가, 면구스러운 표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재준.. 노래를 부르면서 내내 무던히도 떨었던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피식 피식 실소가 흩어진다.
".....재준아.."
".........??"
술기운이 완벽하게 가신, 의미심장하게 가라앉은 강태의 음성에 재준은 흠칫
그를 돌아본다. 어느새 재준의 두 뺨도 강태와 마찬가지로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다.
문득, 자신과 그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습게도.
"우리...가자."
"가자니..?"
"별장으로...돌아가자고.."
"벌써?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
"상관없어. 가자, 얼른.. 나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야."
"왜? 왜 그러는데..??"
순간적으로 급습하는 엉뚱한 걱정에 불안감을 제치지 못한 재준과는 너무 판이한 강태..
무방비 상태로 헤집어진 자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느릿하게, 대담하게 속삭인다.
"빨리 가서... 너한테 안길래... 무슨 뜻인지, 알지...?"
#####################################################################################
여행 갔다오느라 좀 많이 늦었습니다. 이젠 익숙하시죠..? -_-;;
강태 이뻐졌더군요. ^^; 노래도 좋고, 춤도 야시시한 것이 아주 멋집니다. *-_-*
근데 그 놈의 방송은 강태 울리는 게 취미인가, 울면서 나왔다가 울면서 들어가데요. -_-;;
사악톤혁방 열분덜 보시죠!
지혜야, 감상 고맙고. 감기는 다 나아서 멀쩡하단다. 근데 '석고대죄' 아닌가? -_-;
현숙아, 내가 네 이름 빠뜨렸어? 분명히 쓴 거 같은데..; 미안해.. -_-;;
별사탕혀니님, 타야미모, juni1983님(저 진짜 안 이쁩니다. -_-;),
ANIC님, 연락처 주신다면서 어째 말씀이 없으신가요..? 놀러는 잘 다녀오셨는지?
수처나.. 아직도 화 난 거야? 그럼 안 되는데..; 근데... 왜 화가 난 거야..? -_-;;
(아무래도 더욱 부아가 치밀 것 같군.. -_-;;;)
[소설] 오르가즘-165-1 - By 쵸티지기 (조회 : 265) 2001-09-06 오후 2:16
저 만치서 붉게 불 밝힌 교회 첨탑의 십자가가 원래의 형태를 명확히 보존하지 못한
모습으로 연수의 눈동자 안 쪽에 스며든다.
혹독한 추위와 싸우는 것도 진력이 났는지, 그녀의 살갗과 뼈마디는
무방비 하게 벌어진 구멍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냉기를 멀거니 쳐다만 본다.
이미 얼어버린 감각은 가끔씩 깨어나 발작하듯 진저리 치는 세포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폐기물처럼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하루종일 음식이라고는 물 한 모금조차 공급받지 못한 위장은 마라톤을 완주한
운동선수처럼 탈진해서 축 늘어져 있다.
초점이 흐려지는 시야를 틔우려 연수는 세차게 도리질을 쳐보고 민감한 피부에
앙칼진 손톱자국을 내보기도 한다.
듬성듬성 이어지던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겨버린 것을 보니 제법 시간이 늦은 듯 하다.
무서운 기세로 그녀를 휘두르던 졸음은 끈질기게 뻗대는 연수를 끝내 굴복시키려는 듯
더 우악스럽게 달려든다.
육중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리 눌리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연수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비둘기색 철문에 시선을 붙박는다.
문 안 쪽으로부터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음악소리가 연수의 귓전으로 기어 들어온다.
사방이 너무 고요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태현이 음악을 너무 크게 틀어놓아서 그런 것일까.
실없는 궁금증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던 그녀의 얼굴에 미지근한 조소가 번진다.
끝내 닫히는 눈꺼풀을 막지 못한 그녀가 시야를 차단한 채 청각으로만 태현의 기척이
닿아오기를 기다린 지 얼마가 지난 후, 감질나게 고막을 간질이던 어렴풋한 음악소리가
뚝 끊기자 연수의 감겼던 눈이 섬광을 맞은 듯 번쩍 뜨인다.
마지못해 박동을 이어가던 심장이 불쑥 밀려드는 강한 예감 때문에 놀라 그 속도로 증가시킨다.
갈증으로 인해 따가운 고통을 호소하던 목구멍이 무지근해졌을 때, 그토록 완강한 태도로
냉기만을 뿜어내던 철문이 선명한 마찰음을 그녀에게 들려주며 태현의 모습을 뱉어낸다.
손질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하늘색 머리와 차가운 흰 살결이 점점 그녀와 가까워지고,
자기도 모르게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연수는 갑자기 한 쪽으로 기우뚱 쏠리는 느낌에
한 번 더 당황한다.
"오빠...!!"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그녀의 외침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연수의 손목을 잡아끄는 태현..
주저 없이 걸음을 떼는 그에게서, 그녀가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솟아난다.
저항할 틈을 엿볼 새도 없이 물건처럼 질질 끌려가는 연수의 온몸이 남루한 종이처럼
떨리는 건 비단 추위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지 말고 제 말 좀 들어봐요, 오빠.. 이, 이러지 말아요..!"
"입 다물어! 자꾸 고집 피우면 짐짝처럼 들고 가서 너희 부모님 앞에 던져버리고 올 테니까!"
청아하고 맑은 본래의 음성이 민망하리 만치, 태현의 목소리는 성대를 심하게
다친 사람처럼 게걸스럽다.
"안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이렇게는..."
"입 다물라고 했어!!"
울음 조를 띤 연수의 음성을 단번에 묵살하듯, 태현은 더욱 거칠고 사납게 그녀를
몰아붙이며 소리지른다. 하나씩 숫자를 줄여가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당도하고,
연수는 무자비하게 그녀를 떠미는 태현에 의해 지하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겨놓는다.
조수석에 그녀를 밀어 넣고 운전대를 잡은 태현이 난폭하게 엑셀레이터를 밟으며
차를 출발시키자, 다급해진 연수는 저항을 포기하고 간곡히 애원하기 시작한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오빠.. 제발 제 얘기 들어주세요. 네?"
"입 다물라고 세 번째 얘기하는 거야, 서연수."
"태현오빠..."
"한 번만 더 입 열면 널 때릴지도 몰라. 난 지금 네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으니까."
곁눈질이라도 흘깃 돌아봐 주었으면 하는 연수의 기대를 깡그리 짓밟으며 태현은
앞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억양 없는 음성을 퉁겨낸다.
그가 쌓아올린, 태현과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두꺼운 벽에 부딪혀 나가 떨어진
연수는 급속도로 탈진한 기력을 회복하려는 듯 잠시 침묵을 고수한다.
차안의 작은 공간 곳곳에 틀어박힌 얼음장같은 혼돈과 축축한 고뇌의 파편들이
두 사람을 조롱하듯 부유한다.
포기하기를 포기한 채 마지막 한 조각의 자존심까지 털어 버린 그녀와, 그런 그녀를
모질게 내치는 태현.. 인연의 실타래를 가운데 두고 한 가닥 실오라기를 놓지 않으리라
도리질치는 그녀와 단념을 강요하는 태현..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없기에 승패 또한 결정지어지지 않을 지극히 소모적인 싸움에
먼저 지쳐 가는 쪽은 연수의 손아귀를 풀고자 안간힘을 쓰는 태현이다.
"....내려. 내 손으로 끌어내기 전에."
연수의 아파트 현관 앞에 차를 세우자마자 태현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한 마디에도
그녀는 미동 없이 앉아만 있다.
잠시 간격을 두었던 그가 단호한 동작으로 땅에 발을 딛으려 할 때, 울먹임 섞인
간청보다 훨씬 가슴 저미는 침묵을 묵묵히 견뎌내던 그녀의 입술이 다시 벌어진다.
"....내일 다시 찾아갈 거예요, 오늘처럼.. 똑같은 상황이 백 번 천 번 되풀이된다고 해도.."
"생각 고쳐먹어. 나 역시 네가 백 번 천 번을 찾아와도 똑같은 대답 밖에 해 줄 수 없어."
"그래요..? 잘 모르겠지만...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죠. 어쩌면...
생각보다 아주 빨리 끝나게 될 수도 있을 거구요."
"어떻게 되든, 넌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어."
"글쎄요.. 하지만 오빤 정작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계시는 거 아닌가요?
오빠가 싸우고 있는 상대는 제가 아니에요.
세라 언니를 잊고 싶어하는 오빠 자신과 싸우고 있는 거죠.."
==================================================================제길. -_-+
[소설] 오르가즘-165-2 - By 쵸티지기 (조회 : 348) 2001-09-06 오후 2:16
- "세라랑 나랑 처음 만났을 때 얘기 너도 들었지?"
섹스를 의도하고 달구어지던 방안의 공기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소형 냉장고에서 캔 맥주 2개를 꺼낸 주혁이 혁수에게 하나를 건네며
조금은 고즈넉한 말투로 묻는다.
그의 손에서 맥주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이는 혁수.. 주혁과 비슷한 어조로 입을 연다.
"세라가 그 얘기할 때 너 되게 쑥스러워했잖아. 나랑 태현이는 웃겨서 뒤집어졌는데..."
"응.. 그러고 나서 다음날 세라가 학교로 찾아왔었거든?
강의 끝나고 나가니까 네가 이소빈이랑 얘기하고 있는 게 딱 보이는 거야.
진짜 말 그대로 속에서는 불이 나는데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미치겠더라구...
근데 갑자기 주위가 웅성웅성 하길래 그 쪽을 돌아봤더니 세라가 있었어."
"쿡.. 그래, 나도 생각 나. 그 때 세라 옷차림이 워낙 유별나서 완전히 시선 집중이었잖아."
혁수의 말에 공감하듯 주혁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밴다.
무수한 학생들의 눈초리에 일절 아랑곳하지 않고 그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세라를 떠올리며 주혁은 말을 잇는다.
"그 때... 내가 널 가리키면서 저 남자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니까...
세라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 하고 받아쳤었어.
그러면서 너랑 나랑 이어주겠다고 그러는 거야..
솔직히 지금 와서야 느끼는 거지만... 그 때 벌써 딱 예감했던 것 같아.
이세라가 우리한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람이 될 거라는 것..."
조용히 입술을 움직이는 주혁의 모습이, 어둡지는 않지만 육중한 무게를 짊어진
그의 음성이 어쩐지 평소의 주혁 답지 않다는 느낌에 혁수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추스른다.
"문태현 이 새끼...걱정돼 죽겠어. 애가 너무 달라졌어. 껍데기만 뒤집어쓰고 사는 것 같아."
바닥을 드러낸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며 제법 답답함이 짙게 묻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주혁..
발자국을 떼어 선반 위의 담배를 집어든다. 한 모금을 빨아들이며 눈으로는 재떨이를 찾는
그에게, 혁수는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한 동작으로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아 촉촉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한다.
"태현이를 믿어봐야지... 이젠 예전처럼 그렇게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후우... 그 새끼만큼은 우리처럼 힘들게 사랑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정말.. 좆 같다.."
걸쭉한 상소리를 뱉어내면서도 금방 허물어질 것 같은 눈빛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주혁을 지켜보며 혁수는 안타까운 한숨을 목구멍 너머로 삼킨 다음,
천천히 그와의 거리를 좁혀 나간다.
고개를 떨군 채 담배의 길이만 줄여 나가던 주혁은 한 뼘 정도의 공간을 남겨두고
멈춰서서 자신을 곧게 응시하는 혁수와 쉽사리 눈을 맞추지 못한다.
느릿하게 손을 뻗어 주혁의 하얀 뺨을 어루만지는 혁수..
검푸른 눈동자 가득 차오른 여러 가지 감정들이 혁수의 유순한 갈색 심연과
마주치자 순식간에 단순한 하나의 갈망으로 융합된다.
분명 주혁은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그가 들려주는 단 한 마디의 속삭임이
정확하게, 충만하게 혁수의 영혼을 채운다.
".....주혁아..."
".........."
"....힘드니..? 나 사랑해서...?"
".....조금.. 아주 조금... 많이는 아냐. 그냥...아주 조금은...그래.."
처음인 것 같다. 혁수를 향한 감정 자체로부터 느껴지는 힘겨운을 주혁 스스로 토로하는 것은.
그가 약해졌다는 증거는 아닐 것이다.
다만, 마땅히 버려야 할 그 생각이, 억울하다는 그 마음이 아직 주혁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며칠 후면 끝나게 될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것에
대한 투정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난 주혁이 옆에 있을 건데... 어떡하지..?"
황망히 풀어지려 하는 흐느낌을 억지스런 웃음으로 단속하듯 기묘하게 비뚤어진 표정의
혁수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아무 대꾸 없이, 깜박거리는 혁수의 속눈썹을 내려다보던 주혁이 늘어뜨렸던 팔을 내밀어
혁수를 끌어당긴다.
가볍게 밀착되는 몸과 몸 사이로 따뜻한 체온이 오고 간다.
서로가 아니면 감지할 수 없는 비밀스런 향기가 둘을 에워싼다.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포개어지는 입술은 언제나 그랬듯 딱 적당한 떨림과 설렘,
그리고 잴 수 없는 사무침에 사로잡혀 율동한다.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들을 팽개치며 연인의 나신이 황홀한 자태를 공개하기까지 기다리던
길고 긴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혁수와 주혁은 아무 것도 가리지 않은 온전한 알몸뚱이 마주선다.
얄팍하고 허술한 말 따위가 감히 자신의 절실함을 표현하겠다며 설쳐대지 못하도록
두 사람 모두 입을 굳게 봉한다.
벽에 걸린 시계는 거룩한 성탄절의 새벽이 밝았음을 자축하며 일정한 초침소리를 울려낸다.
몇 시간 후 어김없이 찬란한 빛줄기를 대동하고 당당히 하늘 꼭대기에 올라 설
태양이 원망스러워진다.
철두철미하게 두 사람을 보호해주는 밤의 장막이 조금이라도 더 늦게 걷히기를 갈구하며
주혁은, 그리고 혁수는 기도한다.
가장 비천한 곳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여,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죽으러 오신 그리스도여,
천대받고 멸시 당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려고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여,
도와주소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세상의 모든 고통과 눈물도 성스러운 축복과 환한 소망 가운데 녹아 내리는 오늘,
이 성탄절의 새벽... 당신의 계명을 어기고 죄를 범하는 우리의 나약함까지도
한없는 자비로 씻어주소서.
그리고, 부디, 힘을 주소서. 숨죽인 채 사랑하는 우리에게.
#######################################################################################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 못 드리겠습니다, 차마.. -_-;
사악톤혁방 꼬랑쥡니다~!
지혜, 현숙, ANIC님(쪽지 받았어요. 연락 드릴게요.^^), 별사탕혀니님, 유선이(너 짤렸구나. -_-;)
재준변기통님, 엽기적라고 한 게 상처가 되셨다면 죄송해요.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_-;
글구 전원일기 O.S.T는 생각보다 별로 안 웃기던데... -_-;; (또 상처받으시려나..? ^^;)
마지막으로 수처나.. 물론 사랑의 반대편에는 증오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순간에는 그 증오가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 (무식한 거 티 난다. -_-;)
[소설] 오르가즘-166 - By 쵸티지기 (조회 : 358) 2001-10-06 오후 9:52
타이머를 맞춰놓고 나간 덕분에 별장 안은 따뜻한 온기로 데워져 있다.
코트와 자켓을 벗어 소파 위에 던져놓고 페치카를 살펴보는 재준..
귓가를 간저럽히는 촉촉한 숨결과 허리를 감아오는 따스한 촉감에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재준의 어깨에 코를 부빗거리며 그의 비누냄새를 폐 속 깊이 들이마시는 강태..
그리 진하지도 않은 향기 하나에 일제히 깨어나는 자신의 육체가 조금 부끄러워져서
선뜻 재준의 어깨에 묻은 얼굴을 들지 못한다.
강태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풀어낸 재준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자
강태는 아주 오랜만에 드러내는 수줍음으로 재준을 흥분시킨다.
손가락으로 강태의 매끄러운 턱을 받쳐 올리며 입술을 가져오는 재준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감돌고 있음을 알아차린 강태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그의 키스를 받아들인다.
강태의 뺨과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재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등줄기를 훑고
억센 힘으로 허리를 끌어당기자, 열릴 듯 말 듯 재준을 감질나게 하던 강태의
입술이 짧은 탄성과 함께 무방비상태로 벌어진다.
게걸스럽고 난폭하게 입안을 휘젓는 재준의 혀에, 뒤통수를 압박해오는 찡한 쾌감에,
강태는 자동적으로 두 팔에 체중을 실으며 그의 목에 매달린다.
벌써부터 우뚝 치솟아 있는 재준의 남성이 아랫배를 지긋이 눌러오자 가속도적으로
달구어지던 강태의 욕망은 여유를 되찾고 은근해진다.
수동적으로 재준의 손길에 순응하기만 하던 그는 묘하게 흐트러진 웃음을 머금으며
자신의 엉덩이를 감싸쥐는 재준의 손을 제법 단호하게 떼어낸다.
".....왜 그래?"
멈칫한 재준이 끈적하게 엉킨 타액으로 반질반질해진 입술을 거두며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가느다랗게 좁아진 검은 눈동자가 불거져 오른 욕망으로 채색되어 자줏빛을 띤다.
그러면서도 그의 살결은 여전히 본래의 차가운 흰 색을 유지하고 있다.
저 두 뺨에 홍조가 돌면 정말 섹시할 텐데, 조금은 음탕한 상상을 하면서
강태는 평소의 재준과 비슷하게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한다.
"갑자기 궁금해졌어."
"....뭐가?"
"내가 하는 느낌은 어떨까?"
"뭐??"
혼곤하게 풀려 있던 재준의 눈동자가 바짝 조여들며 동그란 제 모양을 확실히 회복한다.
강태의 허리께에 머물던 손은 움찔 긴장하며 그의 몸으로부터 얼마간의 간격을 벌려놓는다.
당황하는 재준의 표정이 강태에겐 색다른 즐거움을 가져다주고 강태는 그 즐거움을
이리저리 곱씹어보면서 더욱 천연덕스럽게 말을 잇는다.
"여자랑 잘 때는 물론 내가 하는 입장이었지만... 남자랑 잘 땐 받아들이는 역할 밖에
안 해 봤거든? 넌 궁금하지 않아? 남자 몸에 안기는 느낌이 어떨지...
솔직히 난 궁금해. 남자를 안는 건 어떤 느낌일지 말야."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야? 그동안 겪었던 섹스 경험담이라도 늘어놓겠다는 거냐?"
강태와 밀착되어 있던 몸을 미련 없이 반대방향으로 회전시키며 재준은
질척한 욕망의 냄새가 깡그리 제거된 딱딱한 음성으로 빈정거린다.
그리고 소파 위에 던져놓은 코트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한 개비를 피워 문다. 허공 중에서 자취를 감추는 연기 한 움큼에 못 박힌 그이 눈길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격을 받은 자존심이 민망스런 속살을 들켜 버린다.
강태는 잠시 벙 찐 얼굴로 재준을 바라보다가,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엷게 미소를 지으며
재준 옆에 자리한다.
"너 지금 화내는 거야, 이재준..? 내가 너 말고 딴 사람이랑 자서..?"
묵묵부답을 고수한 채 담배 연기만 거푸 빨아들이는 그의 옆모습이 문득 어울리지 않게
귀여워 보인 나머지, 강태는 와르르 밀려나오는 웃음을 삼키지 못하고 재준의 귓가에
낭랑한 웃음소리를 흘려버리고 만다.
수선스럽게 웃어대는 강태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지켜보던 재준..
내장을 쿡쿡 찌르며 얄밉게 기어올라오는 화증을 억누르던, 겨우 밑바닥 밖에 남지 않은
자존심 한 덩어리가 방정맞은 소음을 내며 조각조각 부셔진다.
"내가 지금 그것 때문에 화내는 줄 알아? 왜 양아치 새끼처럼 네 몸을 함부로 굴려?!
그러니까 이상한 소문이나 돌고...!"
"무슨 소문? 아아~ 내가 아무하고나 돈만 주면 잔다고?
진짜 그런 소문이 있었나 보네..? 너까지 들었을 정도면..."
괜한 말을 입밖에 뱉었다는 생각에 마구잡이로 놀리던 혀를 후다닥 단속하는
재준과 대조적으로 강태는 아주 태연하게, 덤덤히 재준의 이야기를 받아넘긴다.
공연히 들출 필요 없는 과거의 일을 끄집어낸 것에 대해 재준이 미안해할 틈도
주지 않고 강태는 마치 어제 저녁에 시청한 TV 프로그램을 설명하듯 아무 감정도
얹히지 않은 목소리를 줄줄이 엮어나간다.
"아무하고나 잤던 건 아냐. 조금이라도 널 연상시킬 수 있을 만한 사람만 골랐으니까.
물론 돈 같은 거 왔다갔다한 적도 절대 없었고. 단지 그렇게 해서라도 생존해야 했을
뿐이야. 숨까지 끊어져버리면 전부 끝나는 거잖아? 그런 내가 섹스에 미친 지저분한
남창으로 보이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
꽁초로 변한 담배를 재떨이에 쑤셔 박고 새로 한 개비에 불을 붙이려던 재준의 동작이
더뎌지며, 강태를 외면하던 눈동자가 슬그머니 위로 움직여 그의 예쁜 얼굴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가 읊조린 몇 개의 단어들을 되새겨본다.
생존, 숨, 끝.
정도를 넘어서 버린 사랑은 '자기애'라는 인간의 본능적인 속성마저 황폐하게
무너뜨리는 모양이다. 한 사람을 온전히 곁에 두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도
이기적인 욕심이 될까.
입에 물었던 담배를 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재준은 새어 나가려는 한숨을
심장 한 가운데 우겨 넣은 채 먹먹해진 가슴 안으로 강태를 데려온다.
새털 같은 가벼움도, 바위 같은 묵직함도 아닌 그저 '강태'라는 두 글자가 갖고 있는
딱 그만큼의 무게. 그 쾌적하고 안락한 중량감이 재준의 몸을 내리누른다.
그와 동시에 강태는 아무 말 없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음을 알려준다.
강태만의 독자적인 방식, 자신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의 마술적인 지배력에
재준은 기꺼운 항복을 청한다.
강태의 코트와 자켓을 벗기는 재준의 손길이 좀 전의 광포한 열정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방만하게 난무하는 색정보다는 정화되고 절제된 뜨거움이
훨씬 재준을 돋보이게 한다.
널찍한 소파에 길게 몸을 누이는 강태를 내려다보는 그의 까만 심연도 헤설피 들뜬
상태보다는 지금처럼 과묵하게 가라앉은 편이 더 매혹적이다.
나른하게 이완되는 세포들을 추스를 생각도 없이 강태는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소극적인 몸짓으로 재준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편안하다. 낯설지만 거북스럽지 않은 편안함이다.
제자리. 그래, 이거 같아. 이 느낌 같아. 강태는 속으로 그 말을 되풀이한다.
셔츠를 벗겨낼 때 스치는 손가락의 감촉, 바지 벨트를 풀 때 전신을 관통하는
야릇한 기대감, 망막을 풍성히 채우는 단단한 그의 나신, 그리고, 결합.
목덜미를 적시는 습기 찬 숨결과 바로 눈앞에서 흔들리는 노란 머리카락과
팔 전체에 감겨오는 여윈 등줄기의 느낌.
".....으음.....좋아...."
아주 맛있는 음식을 막 입안에 넣은 사람처럼 강태는 무의식적으로, 어린 아이 같이
웅얼댄다. 따뜻한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 안에 몸을 담그듯, 어머니의 나지막한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 듯, 강태는 어떤 통증이나 격한 쾌감
따위와는 상관없이 재준의 육체를 끌어안는다.
온몸이 폭발하는 희열감은 아니지만 그에 비할 수 없는 완전한 기쁨과 만족이
뿌리를 잃고 배회하던 강태의 절망에 종지부를 찍어준다.
다른 누구에게서도, 그 무엇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는 가장 순결한 오르가즘의
맨 꼭대기에서 드디어 두 사람은 정착할 보금자리를 발견한다.
- 수화기를 손에 든 채 혜련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한참 머뭇거린다.
그러다 결심을 한 듯 다부진 동작으로 숫자 하나 하나를 머릿속에 새기며
재준의 핸드폰 번호를 찍어누른다. 전화가 걸리는 신호음 대신 고개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멘트가 귓전을 파고들자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가벼운 한숨이 퍼지고,
혜련은 어울리지 않게 열쩍은 표정으로 음성 메시지를 녹음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몇 초간의 불편한 침묵에 돌연 당황한 듯, 서둘러 준비되지 못한 첫 글자를 뱉는 혜련..
"어어...나야, 재준씨.. 전화기 꺼져 있네? 저기...준상씨한테 들었어.
강태랑 같이 있다며..? 며칠 있다 올 거라고 하던데...음...그냥....크리스마슨데
인사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해 본 거야. 어어...오늘 어떻게 잘 지냈는지
모르겠다.. 난 그냥...이제 친구 만나러 나가려고.. 음...아무튼 크리스마스 끝까지
잘 보내고.. 돌아오면 얘기하자.. 그럼, 끊을게. 아, 참! 강태한테도 안부 전해 줘."
경험한 사람들 대부분이 느끼는 바지만,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미세한 전파를
혼자만의 목소리로 뚫어가며 할 말을 전달한다는 건 꽤나 궁상맞은 기분이다.
비단 현재 자신이 처한 입장을 되새겨보지 않더라도 지금의 혜련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울적해지려는 기분을 떨쳐내듯 그녀는 괜히 의미 없는 미소를 머금어본다.
그리고 부산스럽게 핸드백을 챙겨들고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는 약속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쫓기듯이 집을 나선다.
- "야, 청담동 쪽으로 차 돌려."
차체가 미끄러지는 동시에 양분되는 바람소리만 어렴풋이 들려오는 가운데
완고한 적막을 유지하던 공기의 흐름을 깨뜨리며 문환의 냉랭한 음성이 울려난다.
운전에만 몰두하던 사내가 '예'라고 짤막히 대답하며 왼쪽 깜박이를 켜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사내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질문한다.
"형님, 청담동에는 뭐 때문에..??"
"이재준 집으로 가자고."
"이재준이요? 그 새끼 아직 안 돌아왔는데요? 며칠 째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이재준 말고 걔랑 같이 사는 여잘 좀 만나봐야겠어."
"그 여잔 왜...?"
"사무실로 데리고 와서 할 일이 있어."
"예..? 하지만 충의회 똘마니들이 지키고 있어서 만나기 쉽지 않을 텐데요.."
"괜찮을 거야. 저번에 W건설 회장 생일 때 안면은 어느 정도 텄으니까...
무턱대고 의심부터 할만큼 이 세계를 잘 알고 있는 여잔 아냐."
나름대로의 계산과 요령을 이미 세워놓은 듯한 문환을 보며 조수석의 사내는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지만 미심쩍은 낯을 거두지 못한 채 입을 다문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당기며 다시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침전하는 문환..
버튼을 눌러 창문을 내리고 담황색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어둠 속으로
뿌연 연기를 흐트러뜨리며 미묘한 기대심리가 섞인, 사뭇 들뜬 목소리를 퉁겨낸다.
"무기는 제대로 장전돼 있는지 살펴 봐. 좀 있다 쓸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죽여주세요.. ㅠ_ㅠ;
변명 따윈 하지 않겠습니다. 바빴다는 말도 안 하렵니다. -_-;
앞으로는 자주 올리겠다는 말도 못 하겠습니다.
그냥 돌과 사시미를 한꺼번에 던져주세요. 닥치고 몽땅 맞아드리겠습니다. -_-;
사악톤혁방 여러부운~~!
현숙아, 감상 고맙고 수능 정말 한 달밖에 안 남았구나. 파이팅이닷! ^O^
ANIC님(운전면허 취득축하해요^^), 유선이(올해 안에 완결 낼 거야. 반드시! -_-+)
수처나. 나 역시 네가 이겨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고맙다, 날 믿어줘서. ^^*
[소설] 오르가즘-167-1 - By 쵸티지기 (조회 : 156) 2001-12-10 오전 11:49
두텁게 내리쳐진 커튼 사이 자잘한 틈새를 비집고 쏟아지는 햇살이 연수의 눈자위를
두드리며 깨어나기를 재촉한다. 따스하고 푹신한 솜이불 아래 깔려 있는 그녀의 몸은
격렬한 스포츠를 이제 막 끝낸 사람처럼 땀으로 뒤범벅이다.
조급증을 부리는 햇살의 손길을 치워내기 위해서라도 반짝 눈을 뜨고 싶은데,
누군가 속눈썹을 풀로 붙여놓은 듯 그게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복부를 중심으로 손가락과 발가락 끝까지 퍼져나가는 저릿한 통증,
멍하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불규칙하게 새어나오는 눅눅한 숨결까지 그녀의 전신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찍어누른다.
이마에서 끓어오르는 신열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몽땅 태워버릴 기세로 급속하게
그 위력을 더 해 가는 중이다. 때맞춰 달려드는 우악스런 수면욕구가 그녀의 정신마저
어두컴컴한 무의식의 세계로 빠뜨리려 하자 연수는 척추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픔을
딛고 침대 시트에 달라붙은 몸뚱이를 일으켜 세운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 방안의 사물들이 연수의 다리를 휘청이게
만들고 평소보다 훨씬 많은 걸음을 옮겨놓은 후에야 다가서게 된 거울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위해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뽀얗던 살결이 붉으죽죽한 열꽃으로 뒤덮여 불거져 오른 까닭에 당혹감을 표시하던
그녀는, 하룻밤 사이 퀭하게 빛 바랜 눈동자와 움푹 꺼져 들어간 두 볼 때문에
한 번 더 황망해진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그녀를 재촉한 햇살의 역성을 들어주기라도 하는 듯 작달막한 시침이 숫자 1과
맞닿아 있다.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자 갑자기 다급해지는 연수. 까맣게 잊고 있었던 중요한 약속이
생각난 것처럼 허둥지둥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태현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수는, 마치 그가 아주 급박하고
긴절한 메모를 남겨놓은 양 더욱 안절부절하며 서성이다가 서둘러 방문을 열고
욕실로 내달린다.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있던 연수의 어머니는 덤벙거리는 그녀의 기척에 청각을
곧추세우며 물소리가 나는 욕실 쪽으로 종종걸음을 친다. 그리고 자신이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렸다는 것도 감지하지 못한 채 얼굴에 돋아난 열꽃을 식히려 냅다
찬물을 끼얹는 딸의 이름을 부른다.
"연수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갑자기 세수는 왜 해, 가만히 누워 있어."
"엄마, 나 나가야 돼. 꼭 가야할 데가 있어."
"얘가~!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러니? 안 돼, 그러다 너 진짜 큰일 난다!"
"아냐. 나 진짜 가야 돼.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만류하는 어머니에게 무신경한 대답을 던지며
연수는 무언가에 넋이 홀린 사람처럼 부산스레 머리를 빗고 옷을 챙겨 입는다.
바쁘게 발걸음을 닦아세우는 그녀의 귀에 염려와 의문이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진다.
"얘, 도대체 어딜 간다는 거야? 연수야,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그렇지?"
"나 괜찮다니까... 무슨 일이 있긴, 아무 일도 없어요. 다녀올게요, 엄마."
"연수야! 연수야!"
어머니의 음성을 뒤로 밀쳐놓고 대문을 나선 연수는 몸살 기운 때문에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묵직한 두 다리를 원망하며 힘겹게 걸음을 잇다가
결국은 택시를 잡아타고 태현의 아파트로 향한다.
히터가 뿜어내는 온기 덕분에 훈훈하게 데워진 택시 안의 공기가 추위에
소스라치던 그녀의 몸을 이완시키고, 그녀는 다시 부리나케 활개를 치는
수면욕구에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거스름돈을 돌려 받는 것도 잊어버린 채 택시에서 내린 연수. 이마의 신열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팔딱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뭉개버릴 듯 두 손으로 꾹 누르며 비틀비틀 계단을 오르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그리고 어제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신물이 나도록 마주보고 앉아 있던 비둘기색
철문 앞에 당도하자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그녀를 휘감는다.
초인종을 누르면서 그녀는 태현에게 했던 약속을 지켜냈다는 뿌듯함에
흐릿한 미소를 떠올린다.
".....누구세요..?"
물음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는 태현의 말투에
연수는 흠칫 균형을 놓치려 하는 믿음을 또 한 번 추스르며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는 목소리를 띄워 보낸다.
"오빠, 저 연수예요."
고집스럽고 냉랭한 대꾸를 각오하는 그녀의 귓가에 그보다 더 매정한, 몇 곱절
잔인한 침묵이 날아든다.
이젠 돌아가라는 말조차 하기 지친 걸까. 얼굴조차도 감추어버리려고 하는 걸까.
그렇게도 나의 목마름이 가당찮은 것인가.
육신적 피로와 정신적 고갈, 시간이 지날수록 소진되는 그녀의 영혼이 한데
뭉뚱그려져서 무시무시한 마수를 그녀에게로 뻗쳐온다.
앙칼지게 눈을 부릅뜨고 어떻게든 살기 등등한 그 손길을 꺾어버리려 발버둥을
치다가 나중엔 미친 듯이 줄달음질 치며 도망치려고도 하지만, 계속되는 태현의
침묵은 여지없이 연수를 자빠뜨린다. 무너져 내리는 눈꺼풀과 함께 연수의 몸이
싸늘한 시멘트 바닥 위로 곤두박질 친다.
더불어 간신히 제자리를 사수하고 있던 그녀의 의식까지 깜깜한 망각의 격류에
휩쓸려 든다. 눈이 감기고 모든 사물이 어둠 저편으로 가라앉을 때, 연수는
그녀의 무모한 확신이 만들어낸 태현의 허상을 본다.
작열하는 태양 빛을 혼자 삼켜버린 것처럼 눈물 나는 함박웃음으로 피어난
사진 속 그의 얼굴이, 연수가 꿈꾸고 있는 바로 그 미소가 시야 전체로 확대된다.
그리고 뺨에 밀착된 시멘트 바닥의 감촉이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찰나,
완강히 자물쇠를 풀지 않던 비둘기색 철문이 주저 어린 마찰음을 내며
태현의 모습을 토해낸다.
====================================================================짤렸다.-_-+
[소설] 오르가즘-167-2 - By 쵸티지기 (조회 : 161) 2001-12-10 오전 11:50
- 소장하고 있는 음반을 전부 꺼내 걸신이라도 들린 듯 죽자고 음악만 틀어대며
밤을 꼬박 새운 태현이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은 새벽 6시가 조금 지난 뒤였다.
작업실 한 귀퉁이에 마련해 놓은 간이침대에 누워 골아 떨어진 그를 깨운 건 사뭇 명랑한
멜로디를 노래하는 초인종 소리였다. 부스스 눈을 뜨고 껄끄러운 잠의 여운을 떨쳐 내자마자
태현은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 맞추는 자신의 직감에 쫓겨
퍼뜩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래도 어쩌면...'이라는 기대 섞인 의혹이 그의 발걸음을 현관 쪽으로 끌어내고
태현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제법 권태로운, 건조한 음성을 철문 건너편에 던져준다.
".....누구세요..?"
"오빠, 저 연수예요."
그것 보란 듯이 명치를 찌르고 달아나는 무지근함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긴 호흡을
들이마시던 태현은 메마른 기침 소리를 목구멍 너머로 삭히며 다시 입을 연다.
그러나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조금은 지리한 시간을 시계초침 속에 흘려보내던 그가 불확실한 말 대신
행동을 택하고 천천히 발을 움직여 문 쪽으로 다가간다.
잠금 장치를 풀고 손에 힘을 주어 철문을 밀어젖히는데 무언가 둔탁하게 걸리는
느낌이 그의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연수야!!"
그렇게도 입밖에 내기를 거부했던 그녀의 이름이 긴박한 파고를 타고 허공 중에 흩어진다.
혼절한 상태에서도 육신은 여전히 추위와 맞서고 있는지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몸 가까이 다가앉으며 팔을 뻗어 연수를 보듬는 태현..
두툼한 점퍼자락에 싸여 있으면서도 겨울 공기보다 더 시린 냉기를 뿜는 몸뚱어리와
대조적으로 빨갛게 열이 오른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내다가, 문득 이게 아니다
싶은지 그녀를 잠시 놓아두고 집안에 들어가 지갑과 자동차 열쇠를 챙겨 나온다.
들쳐업은 연수의 체중을 느낄 겨를도 없이 지하 주차장으로 뛰어 내려가 그녀를
뒷좌석에 눕히고 운전석에 오른 태현은 가장 근접한 거리에 위치한 병원을 떠올리며
차의 속도를 높인다.
태현의 등위에서도 진동을 그치지 않는 그녀가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진 그는
실성한 사람 마냥 고함을 질러대며 의사를 찾고, 의사와 간호원들이 연수를
이동침대에 눕혀 진료실로 데리고 들어갈 때에야 겨우 한 가닥의 이성을 붙잡는다.
이리저리 연수를 살펴보던 의사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며
옆에 선 태현에게 연수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준다.
"크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심한 감기몸살에 과로가 겹쳐서 잠시 기절한 거니까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겁니다. 특별한 치료는 필요 없을 것 같고, 며칠동안 외출을
삼가고 푹 쉬면 금방 괜찮아집니다. 영양에도 신경 써 주시구요.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지 빨리 털고 일어나는 법이니까요."
"아, 예... 감사합니다, 선생님."
"네, 깨어나면 주사 한 대만 맞고 가시면 됩니다. 약 받아 가시구요."
"예, 수고하셨습니다."
기계적으로 입술을 달싹여 할 말을 끝낸 의사가 다른 환자 곁으로 걸음을 옮기고,
태현은 급작스런 안도감으로부터 피어오르는 긴 한숨을 토해낸다.
좀 전보다 한결 평온해진 모습으로 무의식 가운데 헤엄치고 있는 연수를 바라보다,
허둥지둥 뛰어 다녔던 그의 다리와 심장이 피곤을 호소하는 탓에 태현은 슬며시
한 손으로 가슴 근처를 쓸어 내리며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반쯤 감긴 시야를 통해 들어오는 그녀의 붉으레한 얼굴이 정해진 수순처럼
그의 기억 내부에서 또 한 여자의 존재를 끄집어낸다.
쓰러진 연수를 발견하자마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맹렬하게 용솟음치던
불안과 두려움은, 어쩌면 세라를 이승에서 떠나보낸 그 때 자신을 옥죄이던
막막함과 절망감의 재현이었을지도...
여지없이 서연수와 이세라를 연결짓고 마는 자신의 사고구조가 어떤 병이라도 좋으니
아주 끔찍한 병으로 인해 몽땅 파괴되었으면 하는 자학적인 욕망에 또 한참을
휘둘리던 태현.. 시트자락이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의식의 표면으로
깨어나는 몸을 뒤척거리는 연수를 조심스럽게 흔들며 그는 얼마간 쉬어야겠다고,
가장 안일한 결정을 마음속에 새겨둔다.
- "당분간 바깥 출입하지 말고 푹 쉬라고 했으니까, 밥 잘 챙겨먹고 몸조리 잘 해."
"....저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풀 먹인 옷감처럼 뻣뻣한 태현의 목소리에 맞대응이라도 하듯, 연수의 음성 또한
둔탁하게 그의 귓전을 스쳐 지나간다.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한없이 늘려나가던 침묵이 두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태현은 얼른 다시 입을 뗀다.
"계속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게 될 것 같으니까 일단 너한테 얘기는 해 둘게.
네가 뭘 그렇게 맹목적으로 확신해서 우리 사이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온 건지,
솔직히 아직도 난 잘 모르겠어. 처음엔 네가 너무 어리니까 그렇겠지,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러기에는 네가 사용하는 방법이나 또 나한테 하는 말들이
너무 교묘하고 계산적이야. 어쩌면 너의 그런 면들이 날 더 혼란스럽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제 행동들이 오빠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글세... 내가 지금 마음을 다쳐서 있는 걸까? 엄밀한 의미로,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그 얘기에 내가 수긍을 해 버린다면 난 진짜 비겁한 놈이 될 거야.
적어도 그러고 싶지는 않거든. 지금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은...
난 너무 지쳤다는 거야. 정말이지...쉬고 싶어. 지긋지긋하다구, 이 모든 게...
도망치지 말자고 수 백 번 넘게 다짐을 했지만 이젠 더는 못하겠다..
그래, 내가 나약하다는 거 인정해. 자존심을 꺾어서라도 이젠 정말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생각 밖에 없어."
".....네...."
"그래서...얼마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을 생각이야. 언제 올 지는 몰라.
괜찮아지면...나 자신을 완전히 추스른 다음에 돌아와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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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이죠? ^^;
한 달도 넘게 잠수한 이 작가를 아직 기억하실까. -_-;
너무 오랫동안 사라져있었던 거, 사죄 말씀 드립니다.
'오르가즘'을 기다려주신 분들 모두 감사하구요-.
힘내서 다시 열심히 달려봐야겠습니다.
원랑, 화이팅! (네, 저 바보 맞아요. -_-;)
사악톤혁방 감상주신 분덜.
현숙아, 수능 끝난 거 축하한다. 결과는 만족스러운지.. 아무튼 폭탄을 못 날려줘서
미안하구나. -_-;
IamPooh님(지금쯤 절 증오하고 계실지도.-_-;), juni1983님(수능 잘 보셨는지?),
유선아, 그동안 잘 지냈어? 오랜만에 올리는 소설인데 영 허접해서 미안하구나.;
ANIC님, 연락 드려야하는데..-_-; 아무튼 반갑습니다.^^;
itere님, 바롬관 생활은 잘 마치셨는지요. 저도 이번에 실택에 들어갔다 왔는데.^^;
지혜('오르막길'...-_-;), 제이원님, apuahot님, 터냐최고님 감사하구요~
ryuni님, 친한 친구분이랑 제 소설 때문에 다투신 거 같아서 괜히 죄송하네요.-_-;
팬픽에 대한 견해는 모두가 천차만별이지만, 그 친구분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굳이 그 생각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팬픽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다 타당한 자기 의견이 있는 법이니까요. 문제는 어디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느냐
하는 것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이미지와 이름을 빌려서 글을 쓰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에 전 더 많은 가치를 두는 거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물론 거기서부터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니까, 팬픽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 ^^; 어쨌든,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일이니까 좋아하는 이상 즐기는 것일 뿐이죠. 그게 윤리적으로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팬픽이 싫은 사람은 안 보면 되는 거고, 뭐, 누가 보라고 강요하지도 않잖습니까. -_-;
글구 마지막으로 수처니~! 내 생일축하소설 너무너무 잘 읽었단다.
정말 고맙고, 오랜만에 감상을 빙자한 너의 친목글을 읽으니 감개무량이구나. -_-*
오르가즘 168
성탄절 저녁, 거리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새벽녘까지 잔뜩 취해
흥청거리던 사람들로 넘실대던 번화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차 안에서
혜련은 멀거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다. 다정히 서로를 감싸 안고 종종걸음 치는
연인들의 모습에 까닭 모를 신경질이 솟구치자 그녀는 얼른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인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재준에 대한 생각 탓에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그녀의 호흡이 거칠다.
“저기, 저 파란 간판 있는데 세워줘요.”
묵묵히 운전에만 몰두하던 수행원에게 정차할 곳을 일러주고 혜련은 차에서
내려 바(bar) 안으로 들어선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그녀는 대뜸 한 마디 던진다.
“술부터 시키자.”
혜련의 제안에 맞은 편 친구는 뜻밖이라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반문한다.
“웬일이야? 그렇게 술 먹자고 해도 지겹다면서 안 먹던 애가?”
“그 때야 술 먹는 게 일이었으니까 그랬고 요즘엔 술이란 거 입에도 안 댄지 오래야.
간만에 좀 취해 보려고. 너 요새 방학이라 학교 안 가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자기 할 말만 쏟아낸 혜련은 손짓으로 종업원을 불러
잭 다니엘 한 병과 과일 안주를 주문한다.
“야,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돈 많은 남자 하나 물었으니까 이젠 아예
펑펑 써 대기로 작정했냐?“
비난이라기보다 장난에 가까운 친구의 말투에 혜련은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는
웃음을 뱉는다. 전혀 그녀답지 않은 시니컬함에 친구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지만 혜련은 별 다른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점점 초조해지는 분위기,
서먹한 기류를 견디다 못해 친구는 혜련에게 담배 한 개비를 권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왜 그러는데? 그만 겁주고 실토해 봐. 너 이러는 거 안 어울려.”
“풋.. 넌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싸가지가 없어지냐. 그리고 내가 뭐? 뭐가 안 어울려?”
“실연 당한 여자 연기하는 거 너랑 안 어울린다고~ 너 재준인지 뭔지, 같이 살던
그 놈 때문에 이러는 거 나도 아는데, 네가 뭐 그 새끼를 사랑하기라도 했냐?
웬 지지리 궁상이야~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네가 손해 본 게 뭐 있냐? 그 남자가 네 빚도 다 갚아줬고
같이 사는 동안에도 잘해줬잖아. 넌 지금 꼭 무슨 버림받은 여자처럼 죽상하고
앉았는데, 내가 봐도 그건 웃긴다.“
제법 날카로운 장광설을 늘어놓은 후, 혜련의 친구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혜련의 표정 변화를 주시한다. 쉴 새 없이 귓전을 때리던 친구의 목소리가
수그러든 후에도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는 혜련.. 그녀의 친구는 또 참을성 없이
먼저 입술을 뗀다.
“유혜련, 화났냐?”
농담을 가장한 친구의 질문에 혜련은 엷은 미소를 보이며 나지막이 대꾸한다.
“아냐, 맞는 말인데 뭐… 난 이래서 네가 좋아. 친구를 위해서라고 해도
절대 거짓말은 안 하잖아. 네가 하는 말은 다 믿을 수가 있거든. 진심이라는 거.”
“이게 한 잔 마시고 벌써 취했나. 너 진짜 오늘 왜 이래? 이제 슬슬 무섭다?”
“그럼 어쩌라고― 네 머리채라도 잡아야 되는 거냐?”
“유혜련, 솔직히 말해봐. 너 진짜 그 남자 좋아했던 거야? 응?”
거듭 거듭 자신의 의도와 예상을 뒤집어버리는 혜련의 반응에 친구는
정색을 하고 묻는다. 삽시간에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두 사람 사이의 기류.
혜련의 낯빛은 더 어두워질 수 없을만큼 이슥한 밤의 빛깔을 입고 있다.
“나도 몰라. 그냥… 강태가 미워. 그 애가 재준씨를 뺏어 갔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너무 너무 얄미워. 재준씨는 내가 잡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그렇잖아? 나도 다른 여자들처럼, 너처럼, 그렇게 살 수 있는 기회였는데…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고 평범하게 살 수 있었는데 그걸 강태가 뺏어간 거잖아.
걔만 아니었으면 재준씨는 나랑 계속 같이 살았을 거야. 재준씨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었으니까. 애기 갖고 싶다 그랬을 때도 좋다고 했어. 강태만 없었으면…
강태만 재준씨 눈앞에 안 나타났으면 나는 재준씨랑 잘 살았을 거야!
너도 알지? 방금 전에 너도 얘기했잖아. 재준씨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니?
다른 남자들처럼 나 술집 다니던 년이라고 막대한 적 한번 없고, 너무 잘해줬어.
강태만 아니었으면 우린 행복하게 잘 살았을 거야! 내가 재준씨 애라도 하나 낳았어 봐.
그럼 재준씨도 마음잡고 나한테 정 붙이고 살았을 텐데… 이게 뭐야…
차라리 애초부터 희망이나 주지 말던가, 사람 비행기 태워서 둥둥 띄워놓더니
이렇게 패대기쳐도 되는 거야? 이딴 식으로 사람 갖고 놀아도 되는 거냐고?“
고즈넉하게 흐르던 혜련의 음성은 결국 억제하지 못한 분노와 눈물로 오염된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의 모습에 마주앉은 친구는
잠시 망설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의 냅킨을 혜련 쪽으로 밀어준다.
위태롭고 엉성하게 얽힌 공기 입자들이 두 여자 사이의 공간을 채워나가는 동안
혜련의 흐느낌은 차츰 사위어 든다. 약하게 일렁이는 촛불의 빛이 유독 처연하게
느껴지자 혜련의 친구는 더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급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네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건지도 몰라. 유혜련 너 아직 젊어.
앞길이 창창한데 그깟 남자 하나 잃었다고 이렇게 절망할 것까진 없어.
얼마든지 더 잘난 놈 만날 수 있고, 그래서 보란 듯이 잘 살 수도 있어.
이재준 그 남자가 네 구세주라도 되냐?”
“됐어. 그딴 소리 이젠 지겨워. 일요일에 아무 교회나 가면 목사들한테서
귓구멍에 말뚝 박히도록 듣는 소리야, 그건.”
상투적이지만 가장 적절해 보이는 위로의 말로 혜련을 달래던 친구는 멈칫 입을
다물고, 이어지는 혜련의 독설에 민망해 할 뿐 더 이상의 항변은 포기한다.
또 한 잔의 술을 따르고 또 한 개비의 담배를 피워 무는 혜련.. 아주 천천히
술 한 모금을 들이키고 담배 연기를 내뿜다가 창 밖에 고정시키고 있던 눈동자를
돌려 친구의 얼굴을 직시한다. 그리고 한결 개운해진 목소리로 친구를 안심시킬만한
몇 마디를 읊조린다.
“어쩜 네 말이 맞을 지도 몰라. 그래, 내가 손해 본 건 없지. 지긋지긋한 빚도
청산했고, 잠깐 동안이지만 재미나게 살아봤으니까. 더 욕심 부리면 네 말대로 궁상이겠지.”
혜련의 이야기에 친구는 환한 표정으로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기 시작한다.
더불어 거창한 격려의 말 또한 빼놓지 않는다.
“그럼, 그럼~ 그렇고 말고~ 유혜련, 역시 쿨하다니까! 멋져, 멋져~
너 진짜 멋있는 년이야~ 내 친구지만 넌 진짜 인간이 됐다니까! 잘 생각한 거야~
얼마나 쿨하고 깔끔하냐? 그깟 놈, 남자가 좋으면 남자한테 가서 살라고 해~
네가 뭐가 모자라서 그런 호모 새끼를 붙잡아두려고 해? 안 그래? 너처럼 쿨하고
멋있는 여자가…”
“응… 근데… 아직도 좀 슬프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친구의 눈망울을 슬그머니 피하며 고개를 돌린
혜련은 또 다시 무거워진 음성으로 중얼댄다. 격렬한 분노와 억울한 눈물이
한 차례 휘몰아친 후 남은, 껄끄러운 감정의 찌꺼기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부유한다.
“정말 그랬나 봐…”
“뭐가 그래?”
“내가 재준씨를 좋아했었나 봐, 정말로…”
“야, 유혜련…”
“이렇게 자꾸 미련이 생기는 거 보니까… 정말 그랬었나 봐… 좋아했었던 거야…”
― 혼자서 양주 한 병을 몽땅 비운 혜련은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스레 가누며
차에서 내려선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수행원이 재빠른 동작으로 그녀를 부축하자
혜련은 그의 팔을 물리치며 제법 윗사람다운 태도로 이야기한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크리스마스인데 쉬지도 못하고. 오늘은 들어가서 쉬세요.
재준씨도 집에 없는데 굳이 밤새서 지킬 필요 있어요? 이럴 때 좀 쉬고 그래야지.”
“그래도 회장님께서 잘 모시라…”
“괜찮아요. 얼른 들어가요. 오늘 같은 날 애인도 만나고 그래야지.”
넉살 좋게 웃으며 농담까지 곁들이는 혜련. 완강한 그녀의 권유에도 수행원은
많이 주저하는 눈치다. 오랜만에 자유 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덥석 혜련의 말대로 수행을 소홀히 했다가 행여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에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의 의중을 모를 리 없는 혜련은
다시 한번 너그러이 몇 시간 동안의 휴가를 그에게 권한다.
“겨우 하룻밤인데 뭘 그렇게 고민해요? 혹시 뭐 좀 이상하거나 그러면
바로 연락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었다 와요.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애인 얼굴이라도 봐야할 거 아니에요?“
이번에도 혜련은 가벼운 농담을 섞어 그의 망설임을 확실히 단축시켜준다.
거듭 되는 그녀의 강권에 수행원은 비로소 시원스런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올린 후, 언제 고민했었냐는 듯 바람처럼 쌩 하니 혜련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혜련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고 걸음을 돌려 빌라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딛는다.
이곳에 살게 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생소하기만 한 건 무엇 때문일까.
역시 나는 처음부터 이 자리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운명일까.
처량 맞은 상념 탓에 축 늘어지는 몸뚱이를 가까스로 추스르고, 혜련은 깜깜한
냉기만 가득 찬 집 안으로 들어선다. 새 하얀 시트가 정갈하게 깔린 침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혜련..
술과 담배 냄새에 푹 절은 몸을 매트리스 위로 무너뜨린다. 혼곤히 잠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그녀의 귓가에 별안간 날아와 꽂히는 초인종 소리. 혜련은 바윗덩어리
같은 눈꺼풀을 게슴츠레 들어올리며 휘청 휘청 현관으로 향한다. 이 시각에
재준의 집을 찾아 올 사람은 준상 외에 없을 거란 짐작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확인 질문을 던져본다.
“준상 씨에요?”
“…저 연화회 조문환입니다. 급한 일 때문에 그러는데, 실례지만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오르가즘 169
이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를 비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큰 병동은 이미 닥쳐왔다. 우리는 폐허의 한 가운데 있으며,
조그만 거주지를 준비하여 사소한 새 희망을 가슴에 품고자 하고 있다.
그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이젠 미래로 향하는 순탄한 길이라곤 하나도 없다.
허나, 우리는 돌아서 가든 장애물을 넘어 기어오르든, 그 어떠한 재난이라도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D.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중 -
토닥토닥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태현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게으름을 피워본다. 흐린 날씨 탓에 아침임에도 방 안은 아직 어둑신하다.
서늘한 냉기가 코끝을 간질이자 태현은 이미 달아나버린 잠을 포기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는다. 닫힌 방문 밖에선 그릇 씻는 소리가 달그락거리고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도 희미하게 들려온다. 시간을 확인하니 그의 예상대로 시계
바늘은 10시를 향해 느릿느릿 이동하는 중이다. 태현은 버릇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거실로 나선다. 곧 있으면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 될
여동생이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TV를 보다가 태현에게 시선을 돌리며
명랑한 음색으로 지절댄다.
“오빠, 이따가 점심 먹고 영화 보러 가자! 재밌는 거 많이 개봉했던데.”
태현은 설거지를 하고 계신 어머니께 아침 인사부터 드린 후 동생의 제안에
건조한 말투로 거절을 답변을 보낸다.
“오빠 오늘 가야될 데가 있어서 안 돼. 친구들이랑 보러 갔다 와.”
“어디 가는데? 내려오고 나서 매일 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더니 이제 슬슬 행동 개시야?”
장난기 가득한 동생의 목소리에도 태현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다시 입을 연다.
“뭐 그런 것보다... 암튼 미안해. 오빠가 다음에 영화 보여줄게.”
예전 같았으면 내가 너랑 왜 영화를 보러 가냐는 둥, 그런데 시간 낭비할 생각
없다는 둥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껄여가며 싸움을 걸어왔을 태현이건만 이젠
꼭 필요한 순간 외에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태현을 바라보며, 그의 가족들은
아직도 지난여름의 악몽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있다. 시무룩하게 꺼져드는
동생의 얼굴을 애써 외면하는 태현.. 욕실로 들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오래도록 응시한다.
커다란 암갈색 망막을 투과하여 비치는 한 남자의 얼굴은 역시 슬퍼 보인다.
하얀 피부 전체에 드리운 깊은 그림자와 말하는 것보단 한숨쉬는데 훨씬 더
자주 사용되는 붉은 입술이 껄끄러운 조화를 이뤄낸다. 그 남자의 얼굴이 너무
낯설어서, 도무지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어서 태현은 홀린 사람처럼
거울 속 그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다가 손톱 밑을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에
흠칫 굳어버린다. 절대로 좁혀질 것 같지 않은 괴리감 때문에, 되돌아 갈 수 없는
길을 떠나온 막막함 때문에 그는 울컥 퉁겨져 오르는 흐느낌을 미처 단속하지
못하고 질펀한 눈물을 쏟아낸다. 한번 터져버린 눈물은 이 때다 싶게 막무가내로
태현의 두 뺨을 유린한다. 욕실 안에서 새어나오는 그의 울음소리에 어머니와
여동생은 덜컥 한 박자를 빠뜨린 심장을 움켜쥐고 득달 같이 달려온다.
“태현아! 태현아, 왜 그래? 무슨 일이니? 문 좀 열어봐라, 태현아!”
“오빠! 왜 그래?? 문 열어봐! 왜 그러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을 안심시키려면 이쯤에서 재빨리 흐느낌의 흔적들을 수습하고
적당한 변명 거리를 급조해내야 하지만, 태현은 두 손으로 욕실 문손잡이를
완강히 붙들며 그녀들의 애원과 외침을 무시해 버린다. 고향 집에 내려온 이후
며칠동안 대견스레 무위를 가장하던 태현의 인내심은 그렇게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거울 속 자기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생경하게 보인 그 때 재채기처럼 터져 나온
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을 싸안고 흘러 태현을 질식 직전의 공포로
몰아간다. 허파가 찢어질 듯한 통증 속에 겨우 겨우 숨을 몰아쉬며 태현은 한 가지
생각만을 되풀이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지난여름 세라와 함께 바닷가를 누비던 그 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지옥 불에 던지겠노라고.
그리고 절대, 다시는 그처럼 무력하게 그녀를 잃지는 않으리라. 차라리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로 혼자 남겨지지는 않으리라. 지금의 이 고통과 두려움,
눈물이 내 인생 속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리라.
“세라야, 도와줘... 오빠 좀 도와주라... 정말 미칠 것 같다... 미칠 것 같아...”
널 잊을 수 있게 도와다오. 널 버릴 수 있게, 너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줄 순 없겠니...
너의 죽음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사랑은 다 배운 것 같으니 이젠 추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다오, 부디... 너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부터 놓여나게 해 주고,
나의 아내가 되어 살고 싶다던 너의 소박한 꿈 하나 이루어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움도
더 이상 나를 울게 하지 못하도록 해 다오.
“미안하다, 세라야.. 미안해, 정말... 정말로 나 용서하지 마라..
절대 용서하지 마, 세라야..”
잊고 싶다고, 지우고 싶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되뇌던 태현이 결국엔
완성하지 못한 사랑을 또 미안해하며 고개 숙인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할 지도 모른다. 세라를 만나기 전 그 때로
회복된다는 것은 그녀와의 사랑처럼 끝내 미완의 숙제로 남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태현을 절망하게 하는 본질이다.
몸서리 쳐지는 그 절망감에 사로잡히자 태현은 몇 달 전 스스로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메다꽂았던 까마득한 절벽, 바로 그곳을 떠올린다.
해답은 역시 그 길 뿐인가. 그것이야말로 모든 혼돈과 방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더 이상 눈물방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얼어붙은 태현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일렁인다. 그가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표시다. 태현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애초에 세안을 하러 욕실에 들어왔다는
사실마저 망각한 채 벌컥 문을 열어젖힌다. 문 밖에서 염려와 불안에 휩싸여
발을 구르던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태현.. 겉옷과 지갑을
챙겨 가지고 귀신처럼 소리 없이 집을 나선다.
영원히 미완의 숙제로 자신의 인생에 뿌리박힐지 모르는 세라의 죽음과 일 대 일로
맞붙기 위하여.
― 착륙을 앞두고 안전벨트 착용을 당부하는 승무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기내에
울려 퍼진다. 아무 말 없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만 심취해있던 혁수가
옆 자리에 잠든 주혁을 흔들어 깨운다.
“벌써 도착했어?”
비행기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골아떨어진 주혁은 4시간 남짓 혁수를 혼자
무료하게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이 미안해서 겸연쩍은 미소를 띄운다.
그런 주혁에게 혁수는 다정하지만 장난기가 듬뿍 배인 음색을 들려준다.
“너 많이 피곤했나 봐. 진짜 잘 자더라. 침까지 줄줄 흘려가면서...”
혁수의 마지막 한 마디에 주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샐쭉한 눈 흘김으로 바뀐다.
“웃기지 마! 내가 행여나 그랬을까. 내가 얼마나 예쁘게 자는데.”
“쳇, 그건 네 생각이지. 너 자는 모습을 네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내가
확실히 말해주겠는데, 너 되게 지저분하게 자. 그러니까 앞으로는 웬만하면
공공장소에서 자지 마라. 사람들이 너 쳐다보느라 할 일들을 못하잖아. 알았지?”
“안혁수, 웃겨~ 저랑 안 놀아줘서 삐졌으면 그렇다고 할 것이지, 괜히 심통이야. 쫌생이.”
“뭐라고?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순박하고 선한 빛으로 반짝이던 눈동자를 세모꼴로 구부러뜨리며 혁수는
제법 앙칼진 목소리를 쏘아댄다. 주혁은 그런 그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잠깐
킬킬거리다가 경망스런 웃음을 차분한 미소로 둔갑시키며 혁수의 손을 힘주어 잡는다.
“신혼여행까지 갔다 왔으니까... 우리 이제 진짜 부부다. 그렇지?”
나지막한 음성이지만 주혁의 말을 엿들은 옆 좌석의 사내가 황당하다는 듯
주혁과 혁수를 번갈아 쳐다본다. 늘 그렇듯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주혁과 달리,
혁수는 아직 사람들의 시선에 위축되는 자신을 잘 가누지 못한다. 양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혁에게 힐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혁수.. 주혁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혁수의 귓가에 속삭인다.
“우리 조금만 더 참자. 이제 나 출국 날짜도 한 달 밖에 안 남았고, 두 달만
지나면 우린... 새로 시작하는 거야. 맨 처음부터. 난 그게 너무 기대된다.
새로 시작한다는 게...“
투명하고 결연한 주혁의 눈빛, 마주잡은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그리고
한없이 감미로운 중저음의 보이스. 죽는 날까지 혁수를 굳게 붙들어 줄 그 모든
것들이 혁수의 영혼에 또 한 번 환한 햇살을 비춰준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건강히 박동하는 심장의 울림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변하지 못한다. 살아있는 한, 그리고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새로 시작한다는 거, 물론 힘들겠지.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쌓아올려야
할 테니까. 그래도 나는 이상하게 하나도 무섭지가 않아. 걱정되지도 않고.”
“......정말..?”
주혁의 사랑을 의심하는 건 결코 아니다. 어떻게 그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나를 얻기 위해 수 백 번, 수 천 번 자신을 내팽개쳤던 사람인데.
가지고 있던 모든 걸 일각의 망설임도 없이 놓아버린 사람인데.
단지 의아할 따름이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이처럼 맹목적인 용기를 불러
일으킨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주혁의 용기를 닮지 못한 자기
자신이 혁수는 끝내 부끄러워지고 만다.
“이제 두 달만 지나면 안혁수랑 나는 평생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잖아.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그 생각을 하면 겁나는 게 하나도 없어. 뭐든지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비행기는 어느덧 착륙을 완료하여 넓은 활주로를 달리는 중이고 탑승객들은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기느라 부산한데, 혁수와 주혁은 마치 두 사람만의
비밀스런 공간 속에 따로 존재하는 듯 하다.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 따윈 지금 두 사람을 둘러싼 견고하고 튼튼한 바리케이트를
부수지 못한다.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만 응시하는 혁수.. 잠시 머물고 있던
서툰 침묵을 몰아내며 혁수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음성은 애잔한 음악의 선율 같다.
“......나는 너를 믿어, 장주혁.”
― 그다지 긴 여행이 아니었던 터라 혁수와 주혁의 손에는 중간 크기의 여행 가방
하나씩만 들려 있다. 혁수의 짐을 들어 주겠다 고집을 피우는 주혁의 닭살 돋는
신사도에 혁수는 재차 도리질을 치며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해사한 웃음을
피워낸다.
게이트를 빠져나와 공항 출입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일단 재준의 집에서 함께 하룻밤을 더 묵기로 결정한 후, 보도 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택시 쪽으로 다가선다. 재준의 집이 위치한 방배동까지 얼마의 가격에
택시를 이용할 것인지, 주혁은 기사와 흥정을 시작하고 혁수는 겨울 날씨답지
않게 따가운 햇볕을 피하려 선글라스를 꺼내 쓴다. 요금에 합의를 본 기사는
다시 운전석에 자리하고 주혁은 혁수가 먼저 탈 수 있게 깍듯이 차 문을 열어준다.
경쾌한 엔진 음과 함께 두 사람을 태운 택시가 출발하자 맞은 편 도로 변에
주차되어 있던 검은색 승용차도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orgasm/원랑] 오르가즘 170 - By 쵸티지기 (조회 : 284) 2005-05-06 오전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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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을 수 없는 틈, 말할 수 없는 불화
- D.H. 로렌스, <채털리부인의 사랑> 중 -
저만치 멀리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연인들 사이에 주고받는 밀어처럼 은근하고 부드러운 물소리가 귓가를 두드리자, 재준은 불쑥 술 생각이 간절해진다. 곤히 잠든 강태를 깨우지 않으려고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다. 찬장 앞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J&B 한 병을 꺼내들고 부엌으로 향하는 재준.. 유리잔 가득 술을 따르며 익숙한 동작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한 탓일까, 불명확한 초조감이 재준의 마음 한 구석을 자꾸 불편케 한다. 며칠 간 외부와의 모든 통로를 차단하고 강태와의 시간에만 몰입해있던 그인지라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야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 재준이 느끼는 초조함은 단순한 궁금증 정도로 치부하기엔 꺼림칙한, 비극적인 예감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게 재준을 잠들지 못하게 한다. 어쨌거나 그는 대규모 폭력 조직을 이끄는 우두머리고 보스의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본능과도 같은 선견지명이 그에게도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재준은 약간 주저하는 듯하나 동작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한다. 금새 또 한 개비의 담배를 입에 물고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를 바라보며 고민에 잠긴다. 새벽녘으로 치달아가는 시각이지만 준상은 잠기 없는 씩씩한 음성으로 그의 전화를 받을 게 분명했다. 재준이 망설이는 것은 여전히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초조함 탓이다. 결국 재준은 수화기로 뻗어나가던 손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주방으로 발길을 돌리려 하는데, 기척도 없이 나타난 강태가 말간 눈동자를 깜박이며 서 있는 모습이 재준의 망막을 채운다.
“나 때문에 깼구나? 미안해.”
“아냐. 나 이제 습관이 들어서 오래 못 자. 두 세 번씩은 꼭 자다가 깨고 그래.”
재준은 짐짓 심상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슴 깊이 피어오르는 안쓰러움과 염려 때문에, 강태가 듣지 못하도록 가느다란 한숨을 뱉는다. 그런 좋지 않은 수면 습관까지 날 닮아갈 필요는 없는데. 재준의 표정에 쓰인 말이 너무 쉽게 읽혀지자 강태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실소한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재준의 손을 잡아끌어 맞은 편 소파에 앉힌다.
“너 걱정 많은 거 나도 알아.”
아직도 꿈결처럼 들리는 비음 섞인 미성. 재준은 단박에 온 몸 세포들을 두들겨 깨우며 강태에게 집중한다.
“여기 있는 동안엔 무책임해져 보자고 얘기했지만, 넌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란 것도 잘 알아.”
달착지근하게 흐르던 강태의 음성은 서서히 단단하고 또랑또랑해진다. 이럴 때 강태가 내뿜는 카리스마는 위압적이진 않지만 신비롭고 주술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내가 널 왜 모르겠어, 이재준. 넌 그런 사람이 못 돼. 단 한 순간도 무책임해질 수 없는 인간이 바로 너, 이재준이야. 그건 너도 어쩔 수 없는 거야.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넌 언제나 그렇게만 살아왔으니까. 그 테두리 안에서만 살았으니까. 이재준은 충의회를 절대 버릴 수 없겠지. 그렇지?”
재준만의 열등감 섞인 착각일지는 몰라도 강태의 어조가 빈정대는 것처럼 들리자 재준은 양 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강태에게서 시선을 떼어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이재준. 내가 너한테 상처준 것 같잖아.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상처 받는 건 늘 내 쪽이었다고. 처음 시작할 때부터.”
영문은 물을 새도 없이 급작스레 칼날처럼 변한 강태의 언사에 재준은 노골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비친다. 워낙 자기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스스럼없이 다 끄집어내 보이는 강태인지라 어느 정도까지는 재준도 그의 독설을 감수하는 편이지만, 재회의 감격이 채 식기도 전에 이런 말들은 쏟아놓는 강태의 매정함이 자못 서운하다.
“이재준, 화났어?”
고개를 기울여 재준의 눈동자를 살피면서 애교 있는 음색으로 묻는 강태.. 어느 때보다 귀엽고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재준은 엄하게 자신을 타이르며 오히려 딱딱한 목소리를 울려낸다.
“가끔 넌 감당 못할 정도로 직설적이야. 네가 그럴 땐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긴… 내가 이럴 때마다 넌 고작 미안하단 말만 반복하거나 아니면 죽어라 술만 퍼마셨지. 줄담배 뭉게뭉게 피워대면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양을 흉내 내는 강태.. 그의 음성에 좀 전과는 사뭇 다른, 명랑한 장난기가 배어나자 재준은 더욱 어리둥절해진다. 헤어져있던 사이, 강태의 감정 기복은 훨씬 심해진 것 같다. 불현듯 밀려드는 죄책감에 재준의 낯빛이 탁해진다.
“이젠 말이야… 이재준 너한테서 미안하다는 말 듣기 싫어. 다시는 나한테 그런 말할 필요 없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어쩌면 조만간 넌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지도 몰라. 그 때 네가 자신 있게 충의회를 버릴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이재준. 내 말 뜻… 알겠지?”
- “…저 연화회 조문환입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실례지만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육중한 철제 문 건너편에서 뜻밖의 생소한 목소리가 날아들자 혜련은 자물쇠 쪽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칫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홀몸 상태임을 자각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아, 예… 안녕하세요? 근데 지금 회장님이 안 계셔서… 뵙기가 좀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문 밖에 서 있는 문환에게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고자 목청을 돋우는 혜련..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환은 정중하면서도 은근히 상대에게 압박감을 주는 무거운 음성을 이어 붙인다.
“혜련 씨께서 저어하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일이라서요. 실은 그게… 이 회장님과 관련된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강태도 관련되어 있고요. 대충 짐작은 가시죠?”
이재준과 강태.
지난 며칠 간, 아니 재준과 동거를 시작한 이래 줄곧 그녀를 고뇌하게 한 두 남자의 이름.
그리고 현재 ‘형식 상’ 강태를 소유하고 있는 남자, 조문환 회장.
아직까지는 ‘형식 상’ 이재준의 정부인 나, 유혜련.
지금 재준은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강태와 재회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조문환이 나를 찾아와 만나기를 청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강태라니. 혜련은 허허로운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순간 제어하며 잠금장치를 풀고 슬며시 문을 열어젖힌다. 자신의 정부가 재준과 함께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생판 남과 다를 바 없는 그녀에게 달려온 문환의 처지가 혜련의 마음을 움직인 첫 째 요인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서 깜박거리는 위험 신호에 겁을 내며 망설이던 혜련.. 기묘하게 얽혀든 동병상련의 감정이 순식간에 그 위험 신호를 무력화시키고 그녀를 무방비상태로 노출시킨다.
철제 문 너머 가려져 있던 문환의 얼굴이 혜련의 시야에 들어온다. 동시에 그녀의 복부 한 가운데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가 와 닿는다. 제법 두툼한 스웨터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총구가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목구멍에 큼직한 돌덩이라도 박혀버린 듯 외마디 소리조차 나와지지 않는다. 죽음의 목전에 맞닥뜨린 공포는 이제껏 상상했던,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접 체험했던 그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만큼 실제적이고 거대하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절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은 그 순간 혜련의 행동 양식을 통제하는 유일한 지침으로 둔갑한다.
“조용히 저랑 같이 좀 가 주실까요, 유혜련 양? 일 크게 만들지 맙시다, 우리.”
냉정하다 못해 아예 무표정한 얼굴과 아무런 억양도 실리지 않은 건조한 음색, 흐릿한 담황빛 조명보다 훨씬 강렬한 광선을 뿜어내는 문환의 눈동자가 혜련을 찍어 누른다. 그녀는 후들후들 떨리는 두 다리를 움직여 문환을 따라 걷기 시작하고, 약간의 이성을 되찾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지만, 주위엔 싸늘한 겨울 냉기뿐이다.
빌라 입구에 세워진 승용차 앞에 당도하자 문환은 저항할 겨를도 없이 혜련을 뒷좌석에 밀어 넣고 그녀 옆에 자리한다. 운전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문환의 부하가 차를 출발시키며 묻는다.
“회장님, 본사로 갈까요?”
문환은 혜련의 복부 한 가운데 겨누고 있던 총을 그녀의 관자놀이로 옮기며 덤덤한 말투로 대꾸한다.
“아니, 의정부로 가. 거기서 애들 대기하고 있는 중이야.”
제2의 아지트 행을 명령하는 보스의 계획이 무엇인지 의아했지만 부하는 군소리 없이 핸들을 돌려 방향을 바꾼다. 혜련은 여차하면 총알이 자신의 머리통을 박살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고만 있다.
“유혜련 씨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제3자한테 피해 주는 방법은 웬만하면 안 쓰려고 했는데… 이재준 쪽에서 먼저 시작한 거라, 저로서도 별 도리가 없네요. 이재준 같은 거물이랑 관계되어 있다는 게 혜련 씨 잘못이라면 잘못이겠고… 그냥, 미친개한테 물린 셈 치십시오.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시는 게 그나마 편할 겁니다.”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혜련을 위로하며 사과의 말을 건네면서도 그녀의 관자놀이 더 깊숙이 총을 찔러 넣는 문환.. 그 후, 세 사람을 태운 자동차가 5층짜리 석조 건물 앞에 멈춰설 때까지 문환은 철저한 침묵을 고수하고 덕분에 헤련을 짓누르는 공포와 떨림은 급속도로 증대되어 간다. 비틀거리는 그녀의 팔을 양 쪽에서 꽉 붙들어 잡는 두 사내.. 그들의 완력에 이끌려 혜련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자 그녀의 귓가에 윙 하는 소리가 울린다. 점점 크레셴도로 높아지는 그 정체불명의 소리와 섞여 문환의 한 마디가 혜련의 고막을 후벼 파고 들어온다.
“아가씨, 벌써부터 기절하려고 하면 안 되죠. 그럼 우리 애들이 재미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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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작품... 개판이네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시간 지나면 쬐끔씩 나아지겠죠..
너그러이 봐주시길 부탁드려요.. 훌쩍. ㅠ_ㅠ;;
감상주신 분들.. 아이싯데루님, 표지와 음악 선물 정말 감사합니다. ㅠ_ㅠ
제 회사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깔아놓겠어요. 캬캬캬. -_-*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비판 부탁드릴게요. ^^
vkdorkspti님, 감상 잘 받았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완결까지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orgasm/원랑] 오르가즘 171 - By 쵸티지기 (조회 : 315) 2005-05-10 오후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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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 무렵, 이동하는 차량들로 혼잡한 도로 한 가운데 인하를 태운 검정색 승용차가 느릿느릿 굴러간다. 정면만 응시하며 상념에 젖은 그의 귓가에 휴대폰 벨 소리가 닿아온다. 인하는 라디오의 볼륨을 낮추고 한 쪽 귀에 이어폰을 끼운 후 묵직한 음성을 뱉어낸다.
“네, 장인합니다.”
“검사님, 송실장입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지만 꽤 익숙하고 친근하게 들린다.
“어, 그래. 확인해봤나?”
“예. 예정대로 오늘 오전 중에 귀국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이재준의 집에서 함께 묵을 모양입니다.”
“공항에서 곧장 그리로 가던가?”
“예. 아무도 만나지 않고 들르는 데도 없었습니다.”
“알았네. 수고 많았네.”
“다른 지시 사항은 없으십니까?”
“아니, 조만간 내가 다시 연락하지.”
전화가 끊기고, 귓구멍에서 이어폰을 빼내는 인하의 표정이 한층 더 경직된다. 아주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갈등하는 사람의 낯빛이다. 충의회의 무기 구입을 위해 홍콩에 다녀온 주혁, 그리고 그와 동행한 혁수.
이미 혁수도 충의회의 일원이 된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여행을 겸하여 주혁과 행보를 같이 한 것인가?
인하의 사고 회로가 수 십 개의 가지를 쳐 나가며 질문을 던지고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가정해본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우월적 위치에 새삼스런 안도감이 차오르자, 뻣뻣하게 굳어있던 그의 안면 근육이 삽시간에 이완된다.
나는 법의 표면에 서 있다. 튼튼한 사회 규범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다. 일탈의 장본인은 내가 아닌 상대편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겐 100퍼센트 승산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이토록 팽팽한 긴장 상태에 사로잡히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인하의 얼굴에 제법 여유로운 미소가 떠오른다. 천천히 핸들을 돌려 왼편에 위치한 대형 일식집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인하.. 잽싸게 뛰어나온 직원에게 자동차 열쇠를 넘겨주고 일식집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어서오십시오. 예약하셨습니까?”
“검사장님과 8시에 예약을 했는데… 장인하라고 합니다.”
잠시 예약 명부를 뒤적이던 여직원은 옆에 선 다른 직원에게 그를 특실로 안내하라 이른다.
“검사장님께서는 이미 도착해 계십니다.”
앞서 가던 직원이 식당 가장 안 쪽 방의 출입문 앞에 발을 멈추며 친절히 일러주자 인하는 서둘러 신을 벗고 밀실 안으로 들어간다.
“아이고, 이거~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 차가 좀 막혀야지요~”
수선스럽게 넉살을 피우며 등장한 인하에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내는 소탈한 웃음으로 악수를 청한다.
“서울 시내 도로 사정이 늘 그렇지 뭐. 내가 좀 일찍 나서기도 했고, 괘념치 말게.”
“그래도 이런 결례를 범해서야, 원… 많이 시장하시죠?”
반쯤 열린 미닫이 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직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하는 인하.. 그녀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널찍한 밀실 안의 공기는 비밀스럽고 음험한 기류를 형성하며 두 중년 사내를 휩싸고 돈다. 한 차례 술잔을 주고받으며 의례적인 안부 인사가 오고 간 후 분위기가 진중히 가라앉았을 때, 인하는 자세를 가다듬으며 본론을 꺼내놓는다.
“오늘 뵙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선배님.”
미리 예상하고 있던 터라 검사장은 별다른 동요의 기색 없이 인하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출국 금지 명령을 내려야 할 사람이 하나 있어서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오, 그래?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그거야 어렵지 않지. 사유만 충분하다면. 그런데 누구 말인가?”
“그게 저… 부끄럽지만, 제 아들놈입니다.”
도무지 수긍할 수 없는 인하의 답변에 검사장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다.
“아들이라니, 혁수 말인가? 혁수는 조만간 다시 유학 간다고 하지 않았어?”
“혁수가 아니고 주혁이 말씀입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구먼. 멀쩡히 학교 잘 다니고 있는 애한테 갑자기 출국 금지라니,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게로군?”
검사장의 물음에 인하는 대답하기를 잠시 미루고 짐짓 어두운 표정으로 또 한잔 술을 들이킨다. 심상치 않은 그의 태도에 검사장은 담배를 권하며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차분히 침묵을 지킨다. 담배가 절반 정도 타들어갔을 즈음, 닫혀 있던 인하의 입술이 벌어지며 가느다란 한숨이 뽀얀 연기와 뒤섞여 새어나온다.
“사실은 우리 주혁이… 학교 그만둔 지 오래 됐습니다. 게다가 집에서도 나갔구요.”
“뭐라고?! 아니, 근데 어떻게 그동안 나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쓸데없는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선배님. 집안일이기도 하고…. 자식 간수 제대로 못한 게 뭐 자랑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곧 마음잡고 돌아오겠거니 믿으면서 참고 기다렸습니다. 누가 뭐래도 제 자식인 걸 어떡합니까. 헌데…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만 가니, 원… 오죽하면 제가 집안일로 선배님께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이거 참… 그 녀석이 사춘기 때도 그렇게 듬직하고 착실하게 지내더니, 다 자라서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이야. 그래서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기는 아는가?”
“예. 헌데 기가 막혀서, 원…. 선배님, 제가 아주 그 놈 생각만 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글쎄 우리 주혁이가 이재준 밑에서 일하고 있더라구요. 처음엔 정말 믿기지가 않아서 몇 번을 확인해 봤습니다, 제가….”
“이재준?! 아니, 그럼 주혁이가 충의회에 들어갔단 말인가? 깡패 짓을 하고 다닌다고??”
“예, 선배님. 제가 자식 간수를 잘못 해도 아주 형편없이 한 거지요. 선배님 뵐 면목도 없습니다, 정말….”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 속이는 인하의 얼굴이 짙은 회오와 근심으로 얼룩져 있다. 침잠한 표정과 반대로 그의 머릿속은 기민하게 회전하며, 검사장으로부터 좀 더 빨리 그가 원하는 대답을 취하기 위한 다음 행동을 궁리한다.
“장 검사, 자네 상심이 크겠구먼. 친자식이라곤 주혁이 그 녀석 하나뿐인데…. 자네가 혁수를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디 주혁이만 하겠나? 핏줄이라는 거, 결국은 그게 진짜더라고. 천륜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자네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가네.”
검사장은 윗사람다운 위엄 있는 태도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황급히 벽 쪽으로 얼굴을 돌려 시선을 피하는 인하의 눈시울이 왈칵 붉어진 것을 목격하자, 검사장은 더욱 위력적으로 솟아나는 안타까움과 동정심에 떠밀려 인하가 듣고 싶어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장 검사,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젊은 나이에 잠깐 방황할 수도 있는 거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편안히 먹게나. 자네까지 흐트러지면 어떡해. 나도 무슨 일이든 성심껏 도와줄 테니 어려워하지 말고 부탁하게. 우리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 있겠나. 또 자네가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깍듯이 대해줬어~ 나도 빚지고는 못사는 사람이니까 내 힘이 필요하면 뭐든 얘기하라고.”
“…정말 고맙습니다, 선배님.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주혁이를 출국 금지 시키려는 건가? 그냥 재깍 잡아다가 혼쭐을 내지 않고서….”
“아이고 선배님, 제가 왜 안 그랬겠습니까! 야단치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고, 심지어 빌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걸요. 오히려 보란 듯이 점점 막돼먹은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데… 이 놈이 어줍지 않은 똘마니 짓만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군요.”
갈수록 흥미를 더해가는 인하의 이야기에 검사장은 청각을 곧추세우며 그의 눈동자를 주시한다. 인하는 목이 타는 듯 글라스에 담긴 생수를 말끔히 비워낸 뒤 이전보다 훨씬 육중해진 음성을 입 밖으로 퍼뜨린다.
“주혁이가 충의회 무기 구입 차 홍콩에 다녀온 게 확인됐습니다. 단순한 행동대원이 아니라는 거죠. 이재준과 어떻게 해서 알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꽤 친분이 두터운 듯 합니다. 이건 제가 이재준한테서 직접 들은 얘기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럼 주혁이가 충의회 간부라도 된다는 소린가?”
“이사라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이재준의 직속 부하입니다. 충의회 내부에서는 제2서열에 속하죠.”
“그럴 수가… 이재준이 주혁이 아버지가 자네란 걸 알고 의도적으로 손을 뻗친 거 아닌가? 그러지 않고서야, 주혁이 같은 평범한 대학생이 어떻게….”
납득하기 힘든 인하의 이야기에 검사장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놀라움을 진정시키려는 듯 얼른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인다. 한동안 묵묵히 끽연에 열중하던 그가 여전히 흥분 섞인 어조로 확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자네가 주혁이를 출국 금지 시키려는 게 단순히 자네 집안일이라고만 할 순 없는 거로구먼?”
“……일종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충의회에 보내는.”
“이재준이 주혁이를 쉽게 보내려고 들까? 한번 자기 사람으로 삼으면 목숨 걸고 지키는 놈인데. 그래서 아랫것들이 그렇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거고. 아무튼, 어린놈이지만 대단해.”
“그럼요. 제 아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랄 놈은 절대 아니죠. 우리 쪽에서도 아직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상댑니다.”
“그래도 현직 부장 검사의 아들을 직속 부하로 데리고 있다니… 이재준 그 놈도 자신감이 지나친 것 같군.”
꽁초로 변한 담배를 재떨이에 처박으며 검사장은 경멸 어린 말투로 중얼거린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인하의 말이 ‘현직’ 검사장인 그의 비위를 건드린 듯 하다. 인하는 슬그머니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철저하게 단속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일단 주혁이를 출국 금지 시켜놓으면 홍콩과 무기 거래하는데 차질이 많을 겁니다. 거래 당사자가 갑자기 바뀌면 홍콩의 무기 거래상들에게 충의회 신인도가 대폭 깎이게 되니까요. 주혁이가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올 생각이 없다면 충의회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수밖에 없지요. 그래도 이재준이 주혁이를 끝까지 붙잡아 둔다면… 그 땐, 전면전을 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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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이번에도 허접하군요.. 죄송합니다.. -_-;;;
감상주신 분들.. 아래를 계속 읽어주셔요. ^^
님프요정님, 감상 잘 봤습니다. 감사드려요. ^^* 저도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강태예요~
공부하느라 고생 많으실 텐데 제 소설이 미약하나마 청량제 역할을 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힘내시고, 파이팅하세요! ^^
글고 시나님,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 부족한 글이지만 꾸준히 읽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완결까지 기필코... 건필하겠습니다. ^^
[orgasm/원랑] 오르가즘 172 - By 쵸티지기 (조회 : 161) 2005-06-06 오후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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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있게 충의회를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니. 그리고 조만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강태가 내뱉은 말들이 명료하게 머릿속에 정리되자마자 재준의 얼굴에 떠오른 어두운 그림자가 히뜩 자취를 감춘다. 동시에 그의 눈빛은 단호하고 냉정하게 가라앉는다.
“너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재준의 발언에 이번에는 강태의 표정이 균형을 잃는다. 옴팡지게 자기 할 말을 쏘아대는 강태 앞에서 오히려 그보다 더 매정하고 쌀쌀맞게 돌변하는 재준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강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내가 널 조문환한테 넘겨준 이유가 충의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충의회가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잖아?”
재준에게로 향했던 흑연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미련 없이 거두어들이며 강태는 의식적으로 차가운 목소리를 뱉어낸다. 그와 분리되어 있던 시간,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자신을 파괴해 나갔던 쓰디 쓴 과거가 강태의 기억 저편을 재빨리 훑고 지나간다. 그 과거의 시간 속에서 강태를 제멋대로 휘두르던 절망감과 고통까지 함께 되살아난다.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억울해.”
껄끄럽게 내려앉은 적막을 헤치며 강태의 귓전을 울리는 음성은 고즈넉하고 쓸쓸하다. 또 금방 강태를 후회하게 만드는 자괴감 때문에 그는 일부러 더욱 싸늘한 가면을 한 겹 덧댄 채, 태연스레 담배를 피워 문다. 그리고 담뱃불을 붙이는 동작만큼이나 심상한 어조로 재준에게 묻는다.
“억울하다니?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강태의 반문에 재준은 다시 뜸을 들이며 섣부른 대답을 주저한다. 급한 성격 탓에 곧 재촉을 해올 줄 알았던 강태가 짐짓 침묵만을 지키고 있자, 재준은 출처를 가늠하기 힘든 불안에 쫓겨 더듬더듬 입술을 떼어놓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네가…. 난 그래도 너 하나만은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말이 안 돼. 그 날 호텔에서,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었는지 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 때 네가 얼마나 끔찍하게 날 대했었는지도 난 하나도 안 잊었어. 만약 지금 네가 얘기하는 대로 나만은 널 믿어줄 거라 생각했다면, 넌 그 날 절대 그런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결국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란 뜻이지.”
그다지 길지 않은 반론을 쏟아놓은 다음 강태는 감쪽같은 무표정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뽀얀 담배연기를 퍼뜨린다. 재준은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한숨을 흘려보내며 헝클어지려는 머릿속을 정돈하느라 한동안 멍청히 자기 손만 내려다본다.
이런 대화가 굳이 필요한 걸까?
재준은 갑작스레 치밀어 오르는 의구심을 쉽사리 묻어두지 못하고 마땅한 답변을 궁리한다. 덕분에 두 남자 사이를 메운 어색한 정적의 두께가 점점 두꺼워진다.
“결국 난 너한테 돌아왔어. 지금 우린 같이 있고. 그것만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는 건가?”
짤막하고 단순한 어투, 자조와 체념이 반쯤 섞인 듯한 목소리, 그와 선연히 대조되는 재준의 낯빛이 강태의 눈을 붙든다. 깊고 까만 두 개의 심연 아득한 곳에서부터 강태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은, 과거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강태를 버렸던, 외면했던 시간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 또한 아니다.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몽땅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앞으로 달콤한 행복과 아낌없는 사랑만을 선사하겠노라 약속하고 있지도 않다.
이 순간 재준이 외쳐대고 있는 건, 부질없이 허공중에 흩어지는 말 대신 온 몸으로, 온 영혼으로 소리치는 것은, ‘생존 본능’이다.
열흘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이 한 모금의 물을 갈구하는 처절함이다.
평생 소경으로 살아온 사람이 단 하루라도, 한 시간만이라도 세상을 눈 안에 담아보고자 소원하는 마음이다.
이걸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까.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이렇듯 섬뜩하고 피 비린내 풍기는 감정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이겠지. 사랑일 수밖에 없겠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해, 이재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고, 이재준. 사랑해…”
강태는 무릎을 꿇고 재준의 다리 위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낀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로 한 가지 고백만을 되풀이한다. 재준은 그런 강태를 끌어올려 자신의 무르팍에 앉히고 약하게 들썩이는 강태의 몸을 포옹한다. 밀착된 전신을 통과하여 한 쌍의 정결한 영혼이 재회를 시도하고, 그 순간 재준은 깨닫는다. 완전한 결합을 이루기 위해 세상의 어떤 의식이나 관습도 필요치 않음을. 두 영혼의 온전한 하나 됨이 때로는 상식적 가치 기준에 대한 모반으로 치부된다는 것을. 그런 만큼 파멸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눈물에 젖어 레몬색 불빛을 퉁겨내는 강태의 빨간 입술이 자석처럼 재준을 끌어당긴다. 그 입술 사이로 자신의 혀를 들여보내며 재준은 두 번째 선전포고를 한다. 형체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히 버티고 서 있는 적들을 향해 다시 한번 으르렁대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보인다. 야수와도 같은 생존 본능에 따라, 단 하나 뿐인 생명 줄을 사수하기 위한 재준의 공격성은 어느 때보다 잔인하고 흉포해질 준비를 한다.
기다려라, 이제부터다. 잠시나마 나의 생명 줄을 앗아갔던 너에게 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기대해 봐라. 그리고 즐겨라, 나의 복수를.
- “아가씨, 벌써부터 기절하려고 하면 안 되죠. 그럼 우리 애들이 재미가 없잖아요?”
엘리베이터 문이 양 쪽으로 벌어지며 헤련의 눈앞에 생전 처음 마주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짙은 색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들 수 십 명이 이열 종대 형태로 대기 중이다. 혜련의 왼쪽에 붙어 그녀를 감시해 온 사내가 서열 가장자리에 합류하고, 문환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사내들 한 가운데 혜련을 팽개친다. 맥없이 나가떨어진 그녀는 아직 자신의 의식 상태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원망하며 겁에 질린 눈망울로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기만 한다. 살벌하게 지속되는 침묵이 그녀의 살갗을 찌르고 도려내는 것 같다. 경련하는 팔과 다리는 이미 뇌에서 하달하는 명령을 수행할만한 기능을 상실했다. 차라리 문환의 말마따나 기절이라도 했으면, 애걸하는 혜련에게 문환의 음성은 더욱 생생히 닿아온다.
“강태가 없어진지 오늘로 만 사흘째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재준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지.”
거기까지 이야기한 후 문환은 잠시 입을 다물고 바닥에 주저앉아 와들와들 떨고 있는 혜련에게 시선을 던진다. 그의 표정은 철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것도 추측해낼 수 없는 그의 얼굴과 눈동자 때문에 헤련은 가중된 공포 아래 짓눌린다.
“내가 얼마나 강태를 아끼는지, 누구보다 너희들이 가장 잘 알 거다. 강태를 얻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그것 또한 너희들이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석 달 전, 우리는 충의회와 공식적인 협상을 맺었다. 협상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충의회의 사업에 일절 관여하지 않기로 했고, 그 조건으로 나는 강태를 얻었다. 그 밖에도 우리 연화회는 충의회에 유리한 여러 조건들을 쾌히 응낙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두 조직 간의 화해와 연합에 협력했다.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우리 식구들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함부로 충의회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기 때문에, 나는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서 결정을 내렸었다. 그리고 모두가 만족할만한 협상 조건을 제시했고 충의회 이재준 역시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혜련은 어떻게든 문환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애를 써 보지만 그녀의 의식은 조각조각 잘게 부서지며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정체불명의 소음이 그녀의 귓전을 떠나지 않고 맴돈다. 숨을 몰아쉬는 것조차 조금씩 힘에 부친다. 그 가운데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존의 욕구가 혜련을 깨어있게 한다.
“그런데 이재준은 보란 듯이 그 협상을 자기 손으로 파기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강태를 데려가서 지금까지 두문불출이다. 이 사실은, 이재준이 계속해서 강태를 다시 데려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단 뜻이다. 충동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다는 건 충의회 회장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한마디로, 명백히 고의적인 협상 위반인 동시에… 전면전이다.”
문환의 마지막 발언에 잠잠하던 사내들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얼마간 자기들끼리 속닥이며 귀엣말을 주고받는 도중, 가장 윗자리에 서 있던 사내가 동료들을 진정시키고는 문환에게 정중히 질문한다.
“형님, 정말 충의회와 전면전에 돌입할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좀 더 지켜보셨다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조심스러운 부하의 간언은 싹둑 잘라내며 문환은 격양된 목소리로 생뚱맞은 한 마디를 뱉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부하들의 눈동자를 하나씩 점검하던 그가 느릿느릿 다시 말을 잇는다.
“아주 합리적이고 간단명료하면서도 공정한 법이지. 쓸데없이 복잡하지도 않고,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일도 없고 말이야. 이재준이 내 정부를 데려다가 제 맘대로 주무르면서 며칠씩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있으니, 나도 이만하면 오랫동안 참아준 거 아닌가?”
영리하고 눈치 빠른 문환의 직속 부하는 보스의 심중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살풋이 미소를 깨물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부하의 사인(sign)에 문환은 냉담한 포커페이스를 한 꺼풀 벗겨내고 좀 더 느긋해진 얼굴로 몇 발짝 물러난다. 그의 직속 부하는 몸을 돌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메다 꽂힌 혜련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저벅저벅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발자국 소리가 혜련에게 가해질 고문의 서막을 알리는 전주곡처럼 그녀의 신경을 옥죄어온다.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 다리를 들어올려 헤련의 머리통을 걷어찬다. 사내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혜련은 깡통처럼 데굴데굴 구르고, 흐트러짐 없이 대열을 갖추고 있던 수 십 명의 사내들까지 차례로 그녀에게 달려든다. 이를 악물로 뺨을 맞아 입가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데, 혜련은 그저 두 눈을 질끈 감고 일각이라도 속히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며 견뎌보자고 마음먹는다.
죽지는 않을 거다. 내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계속 참다 보면, 그러다 보면 살아서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만을 곱씹으며 혜련은 명치끝에 날아와 박히는 구둣발이나 머리카락을 뽑아 당기는 게걸스런 손길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낸다. 그러다 마침내, 저항할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두 사내가 짐짝처럼 주워들고 문환 앞에 갖다 놓는다. 문환은 아무 말 없이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한다. 도무지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보스의 태도에 그의 직속 부하를 위시한 여러 사내들은 순간 주춤한다. 폭력과 학대의 열기로 습하게 달아오른 공기를 가르며 문환은 소름끼치도록 사무적인 어조로 명령한다.
“이 여자… 먹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도 좋아. 하지만 절대 죽여선 안 돼. 실컷 데리고 놀았으면 충의회 본사 앞에 떨어뜨려 놔. 잘~ 보이는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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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너무너무너무너무 죄송합니다... ㅠ_ㅠ
제가 장기간 출장을 다녀오는 바람에... 설을 늦게 올리게 되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ㅠ_ㅠ
이번 편 역시 급하게 허겁지겁 쓰는 바람에 엉망진창이군요. 큭. ㅠ_ㅠ
날카로운 비판, 기다리겠습니다. ^^;;
글고 감상주신 분들.. 아소카님, jwony48님, 님프요정님, 거하님, 시나님, jinju0117님,
vkdorkspti님, 그 밖에도 모든 독자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
[orgasm/원랑] 오르가즘 173 - By 쵸티지기 (조회 : 137) 2005-06-16 오후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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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 인해 내가 사라지던 날 이후, 나는 늘 배가 고팠고, 나는 늘 먹을 것이 없었고, 그리고 나는 누구와도 말할 사람이 없었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나는 이렇게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내 몸은 어디에 갔니? 내 정신은 여기에 놓아둔 채, 내 몸이 홀로 나를 빠져나가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니. 나는 몸이 되고 싶어. 나는 몸이 되고 싶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아닌 몸이 되고 싶다.
- 김인숙, <개교기념일> 중 -
귀국 후 하룻밤을 함께 지낸 혁수가 부모님과 함께 기거하는 일산의 집으로 돌아간 뒤, 주혁은 넓은 빌라 안에 호젓이 혼자 남겨진다. 재준은 아직 양수리 별장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혜련 역시 어젯밤부터 줄곧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혜련도 그녀 나름대로 바쁘겠거니, 이내 생각의 골을 접으며 주혁은 습관적인 동작으로 담배를 빼어 문다. 얼마간 허공중에서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광경을 우두망찰 응시하던 그는 불현듯 생각에 어딘가에 미친 듯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낸다. 버튼 하나를 꾹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 갖다댄 채 상대편의 음성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리지만 신호가 걸리는 대신 전화가 꺼져있다는 안내 멘트가 곧바로 이어진다. 주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번에는 태현의 집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려 애쓴다. 좀처럼 생각나지 않자 휴대폰에 저장된 목록을 뒤져보지만 역시 허사다.
“뭐야, 이 새끼… 전화는 왜 꺼놨어?”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귓전으로 되돌아오는 자신의 음성이 까닭 없이 처량 맞게 들리자, 주혁은 허둥대는 몸짓으로 일어선다. 황망히 코트와 자동차 열쇠를 챙겨 집을 나서는 그의 코 밑으로 시큰한 겨울바람이 우악스럽게 밀려든다. 막상 운전석에 앉으니 주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행선지는 딱히 한 군데 뿐이다. 그 사실이 또한 민망스러워서 주혁은 사이드 미러에 투영된 자신의 말쑥한 얼굴에서 얼른 시선을 거두고 가속기를 밟는다.
퇴근 시간이 지난 후라 도로는 제법 한산하다. 반시간쯤 걸려 도착한 태현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혁은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걸음을 재촉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기다란 복도로 접어드는 그의 시야에 저만치서 어릿어릿 물체가 잡혀온다. 여기 사는 주민들 중 하나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주혁은, 그러나 그 사람이 태현의 집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음을 보고는 의아함에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진다. 상대방도 주혁의 기척을 감지하고 그를 돌아보며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다. 사위가 어두침침한 탓에 주혁은 천천히 의문의 상대에게로 다가가 얼굴을 확인한다.
“아니, 너는… 태현이한테 과외 받는 애, 맞지?”
그녀가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주혁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반말이 터져 나온다. 초면에 실례를 범했다는 생각은 말을 뱉고 난 다음이다. 의도하지 않은 무례를 저지른 것이 겸연쩍어 주혁은 생급스럽게 씩 웃어 보인다. 그의 청량한 미소에 상대방은 안도가 되는지 목례를 해 보이고 차분한 목소리를 꺼내 놓는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잠깐 뵀죠?”
“아, 예….”
부담스러울 정도로 공손하게 닿아오는 그녀의 존댓말에 주혁은 괜스레 주눅이 들어 어설픈 신사 흉내를 내 본다. 그런 그의 모양새가 재미있어서인지 그녀는 살짝 엷은 웃음을 띠웠다가 이내 침착한 낯빛을 되찾는다.
“말 놓으세요. 태현오빠 친구 분이시잖아요.”
그냥 간과하기엔 왠지 꺼림칙한 그녀의 호칭에 주혁은 무언가 한 마디 하고 싶지만, 그녀의 태도가 워낙 예의 바르고 얌전해서 그 역시 함부로 캐물을 수가 없다.
“태현오빠 만나러 오셨나본데, 지금 오빠 집에 안 계세요.”
“없어? 전화도 꺼져있던데, 작업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 있길래…”
“오빠 고향에 내려가셨어요. 그저께요.”
“아아… 근데 넌 여기 왜 온 거야? 태현이 없는 거 알면서.”
말도 없이 제주도로 귀향해버린 태현에 대한 궁금증보다, 태현이 이 곳에 부재함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의 집 대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연수에 대한 호기심이 훨씬 강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뜨악한 주혁의 표정에 연수는 와락 자기 자신이 창피해진다. 발갛게 물든 얼굴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음을 다행스러워하며 연수는 목소리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주의한다.
“혹시나 해서요. 혹시 태현오빠가 돌아 오셨나 해서 와 봤어요.”
“오면 어련히 알아서 연락해주겠지. 뭐하러 직접 와?”
주혁은 이제, 연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연민을 가짐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녀를 아주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 그녀는 점점 부끄러움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입을 연다.
“사실은 태현오빠… 저 때문에 내려가신 거거든요.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저 때문인 것만은 확실해요. 그래서 많이 걱정이 돼요. 걱정이 돼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게 힘들어요. 이렇게라도 해야 제 몫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예요.”
잔잔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주혁은 연수의 눈망울이 위태로워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마쳐지고 다시 마주한 연수의 눈, 세라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두 눈은 아무런 동요가 없다. 열일곱 살 소녀가 지니기엔 너무 무거운 눈빛이 아닌가 싶어서 주혁은 실소한다. 찰나적인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연수는 이제 그만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주책스럽게 수다를 떨어댄 것 같다. 잠자코 아래만 내려다보는 연수에게 주혁은 사뭇 다정스런 어조로 제안한다.
“한 겨울에 바깥에서 무슨 고생이냐, 이게…. 그러지 말고 어디 가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자.”
주혁의 호의가 매우 뜻밖이라 연수는 선뜻 긍정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고수하며 예의를 차린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거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주혁은 또 한번 싱긋 웃음 짓고 돌아서서 먼저 걸음을 뗀다. 연수는 몇 초간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주혁의 뒤를 따라 나선다.
아파트 단지 입구의 상가에 자리 잡은 아담한 찻집으로 들어서자 훈훈한 온기와 담배 냄새가 두 사람을 에워싼다. 그 냄새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주혁은 소파에 걸터앉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수는 조신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창밖에만 시선을 고정시킨다.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아가고 주문한 차가 나올 때까지 어색하게 지속되는 정적은 연수를 점점 오그라들게 만드는 것 같다. 두 개비의 담배를 연달아 피워댄 주혁이 연수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묻는다.
“이름이 어떻게 돼?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
“서연수예요.”
서연수.
‘이세라’와는 전연 이질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름이다. 연수에게서 배어나오는 분위기 또한 이세라와는 판이하다. 가시적으로 유사한 생김새 하나가 이토록 사무치게 세라를 연상시키다니. 밝은 백열등 불빛 아래 서연수와 마주보고 있는 주혁은 그제야 태현의 몸부림을 어렴풋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공유할 수 있다.
“내 이름은 장주혁이야. 태현이랑 같은 학교 다녔었어.”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주혁이 한결 친근함이 묻어나는 야청빛 두 눈을 창밖 먼 곳으로 밀어 보낸다. 말을 끊었다가 좀체 다시 입을 열지 않는 그 때문에 연수는 앉은 자리가 더욱 불편해진다.
“세라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였어. 나도 너 처음 딱 봤을 때, 세라가 살아 온 줄 알았다. 볼수록 빼다 박은 것 같아.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끼리 이렇게 똑같을 수도 있는 건가, 신기해.”
“솔직히 저는… 그 점이 너무 원망스러워요. 제가 만약 세라언니랑 닮지 않았다면 태현오빠가 덜 힘들어하셨을 것 같거든요.”
“아냐. 그런 게 아냐. 태현인 너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아냐. 말도 안 되는 자책감, 버려라.”
돌연 강압적으로 바뀌는 주혁의 어조에 연수는 찔끔 어깨를 움츠린다. 주혁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방만하게 튀어나가려는 감정을 지그시 단속한다.
“내가 전에 너 처음 보고 나서 태현이한테 물어봤었어. 시간이 좀 지나면 네가 연수를 사랑하게 될 것 같으냐고. 그 때 태현이가 그러더라. 만약 너를 사랑하게 된다면, 도저히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무슨 소린지 알겠어? 태현이가 힘들어하는 건 너 때문에 아니라, 아직 걔가 자기 자신이랑 화해를 못해서 그런 거야. 넌 아직 어려서 이해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때가 가끔 있어. 내가 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저도 알아요. 알고 있는데… 제가 궁금한 건, 태현오빠가 자기를 용서한 다음엔 저를 봐 줄까 하는 거죠. 확신을 갖고는 있지만 막상 오빠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약해져요.”
연수의 이야기가 주혁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차원의 것이기에 그는 순간 자신의 청각을 의심한다.
알고 있었다니. 그리고 확신을 갖고 있다니.
그녀에게 내재된 견고한 믿음의 성벽을 발견하자 주혁은 야릇한 질투심에 휩싸인다.
나는 그만한 믿음의 분량을 얻기 위하여 지옥 같은 고통을 뚫고 나와야 했는데….
너는 어쩌면 그리도 자연스럽게, 순탄하게 그 믿음의 분량을 획득할 수 있었는가, 라는
억울함이다.
“저는 자책 같은 거 안 해요. 그런 단계는 이미 지났어요. 다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다는 게 어려워서 그래요. 제 몫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고요. 제가 만약 지금도 자책감을 느낀다면 머지않아 태현오빠를 포기하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절대로요.”
“너더러 어리다고 한 말, 취소해야겠다.”
노골적인 경탄의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주혁은 항복을 선언하는 병사처럼 한 마디 던진다. 연수는 복숭아 빛 뺨에 볼우물이 패이도록 활짝 미소한다. 청아하고 해사하고 한 점 의혹조차 없다. 저렇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자라면, 저토록 강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라면, 세라는 고마워할 것이다.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을 것이다.
주혁은 내일 당장 제주도로 태현을 만나러 가리라 결정을 내린다.
- 택시에서 내린 태현은 가늘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펼쳐진 절벽 쪽에 시선을 준다. 홀로 세라의 죽음과 담판을 지으러 달려온 그의 기대와 달리, 듬성듬성한 바위틈에 허름한 차림새의 사내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두커니 서서 행방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태현을 향해 그 사내는 바다에만 눈길을 붙박은 채로 혼잣말처럼 속삭인다.
“아주 호되게 실연이라도 당하신 모양입니다. 제주도 토박이들도 여길 찾아오는 경우는 드문데.”
독심술사라도 되는 양 천연덕스럽게 내밀한 속내를 짚어내는 사내의 말에 태현은 히뜩 얼굴이 굳어진다. 슬금슬금 사내의 곁으로 거리를 좁혀가며 태현은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단단히 다져먹은 암상스런 심사가 흐트러지기 시작함을 느낀다. 가까워지는 태현의 기척을 감지한 듯 사내는 그제야 태현과 눈을 맞추며 소탈한 웃음을 띠운다.
“한 사람을 가슴에 묻는 것만큼 억장 무너지는 일도 없지요. 기실, 죽는 건 오히려 편한 노릇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저어…혹시 예전에 저랑 만난 적이….”
“젊은 청년, 생을 버리러 여기 오신 거라면 오늘은 운이 없는 날이네요.”
####################################################################
감상주신 vkdorkspti님, 아이싯데루님, 감사합니다. ^^
[orgasm/원랑] 오르가즘 174 - By 쵸티지기 (조회 : 105) 2005-06-24 오후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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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일찍 귀가하여 동거하는 애인과 오붓한 시간을 나누고 준상은 모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노곤한 잠 속에 묻혀 무의식의 격랑 사이를 노닐던 그의
귓가에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오자, 준상은 번쩍 눈을 뜨면서도 솟구치는 짜증을
삭히지 못해 욕설을 내뱉는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는 새벽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각에 전화벨이 울린다는 건 분명 무언가 사단이 벌어졌다는
의미이기에 준상은 무겁게 들러붙어 있던 잠기운을 단박에 쫓아버리며 휴대폰을
집어 든다.
「김준상입니다.」
「실장님, 큰일 났습니다!」
준상이 채 입을 다물기도 전에 고막 안으로 쏟아지는 다급한 음성은 충의회 본사를
지키고 있던 부하의 것이다. 준상은 평정을 잃지 않으려 정신을 가다듬는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께서 연화회 새끼들한테 당하신 것 같습니다. 본사 앞에 쓰러져 계신 걸
보고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인데 상태가 안 좋으십니다.」
준상의 심장이 덜컥 한 박자를 놓치고 세찬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잇따라 새어나오는
한숨을 묵묵히 우겨넣으며 준상은 침착하게 병원의 위치를 묻는다. 몇 가지 지시사항을
하달한다. 냉철하고 기민한 그의 태도에 수화기 건너편의 부하 역시 흥분이 가라앉는 듯
또렷한 말투로 대답한 후 전화를 끊는다. 준상은 눈 깜짝할 사이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은 다음, 아까부터 계속 왜 그러느냐고 물어대는 애인에게 그저 다녀오겠다는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집을 나선다. 부하가 일러준 병원으로 운전해가면서 준상은
어질러진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간다.
혜련에게 분명 수행원을 붙여놓았음에도 공격을 당했다는 것이 의아하지만 기실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수행원이 경계를 소홀히 했을 수도 있고 아예 혜련이 공격당한
그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다.
물론 가해자는 한 사람 뿐이다. 강태가 재준의 별장으로 도주한 그 날부터 연화회 쪽
움직임에 세심히 신경을 기울이라 지시했지만 부하들로부터 별달리 의심스런 정보를
듣지 못한 그였다. 연화회가 어떤 식으로든 도발해올 것이란 예상은 했지만 그들이
혜련을 건드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허를 찔린 기분이다.
「개새끼들…!」
준상의 입에서 와락 욕설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의 주먹이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내리친다. 아무 상관도 없는 혜련에게 이 따위 짓을 하다니, 의협심 강한 성격의
그로서는 당장이라도 연화회에 쳐들어가 박살을 내버리고 싶지만 감정만을 앞세우면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차창을 열어 차가운
겨울 공기를 길게 들이마신다. 맵싸한 기운이 폐 속 깊이 스미며 격하게 불거져 올랐던
그의 호흡도 차츰 안정을 되찾는다. 병원 응급실에 당도하자 일련의 생각을 멈추고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며 부하의 모습을 찾아 헤매는 준상에게 익숙한 호칭이 들린다.
「실장님 오셨습니까.」
휙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방금 전 통화를 했던 부하가 침통한 낯빛으로 서 있다.
준상은 거두절미하고 혜련의 용태에 관해 묻는다.
「아가씨는 어떠셔? 어느 정도인 거야?」
「지금 치료 중이라 정확한 건 아직…」
「의식이 없으신 거야?」
「예. 혹시라도 뇌를 다치셨을 수 있기 때문에 몇 가지 검사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정성일 이 새끼는 대체 뭐 한거야,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
혜련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부하에게 새삼스런 격노가 치밀자, 준상은
이제까지 힘겹게 고수해온 범상한 태도를 순식간에 걷어치우며 벽력같은
고함을 지른다. 평소에는 무척 서글서글하고 호탕하고 친근하면서도 한번 화가
났을 때엔 상대방이 오금을 저릴 만큼 서슬이 시퍼런 준상이다. 그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부하는 고개를 더 깊숙이 떨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입을 연다.
「그게 저, 연락이 안 되서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회장님 자리 비우신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런 일을 만들어?
환장하겠다, 정말…」
「……죄송합니다, 실장님.」
실상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준상 앞에 선 부하는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이 자신에게 결부된 듯 죄송하다는 말만 거듭한다.
문득 흡연 욕구가 간절해진 준상이 응급실 밖으로 나가고자 발길을 돌리는데,
혜련의 치료를 맡았던 의사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질문을 건넨다.
「유혜련씨 보호자 되시죠?」
은테 안경에 하얀 가운 차림의 의사는 이제 겨우 스물 대여섯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다. 기껏해야 인턴이거나 혹은 학부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탐탁치 않은 기분을 애써 억누르고 준상은 얼른 대꾸한다.
「예, 그렇습니다. 대체 얼마나 다친 겁니까?」
「구타를 심하게 당하긴 했지만 치명상은 없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깨뼈가 탈골되었기 때문에 깨어나면 통증이 아주 심할
겁니다. 그리고…」
유창한 언변을 자랑하던 의사가 준상의 눈치를 살피며 선뜻 다음 말을
꺼내놓지 못하자 성격 급한 준상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의사를 다그친다.
「그리고 뭐요?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저, 그게… 환자 분께서 아무래도 윤간을 당하신 모양인데… 나중에
가해자를 고소하려면 증거로 필요하실 테니까 질 분비물을 샘플로
채취해 놓았습니다.」
혜련이 강간을 당했으리란 짐작은 소식을 접한 그 때부터 갖고 있었기에
준상은 짧게 한숨을 내쉴 뿐 그다지 경악하지는 않는다. 뜨뜻미지근한 그의
반응이 워낙 의외라서 의사는 괜히 혼자만 머쓱해진다.
「예,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밖에 다른 이상은 없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치명적인 부상은 없습니다. 다행히 뱃속 아기도 무사하구요.」
「뭐,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스쳐지나가는 말투로 대수롭지 않게 흘린 의사의 말에 준상은 얼굴을 온통
구기며 믿기지 않는 듯 반문한다. 준상과 혜련이 부부사이일 거라 무연스레
추측했던 의사는 준상에게 오히려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니, 모르고 계셨어요? 부부사이이신 줄 알았는데.」
「아, 아닙니다. 환자는 저희 형수님 되십니다. 근데 정말 임신을…」
「아아~ 그러셨군요. 전 당연히 부부사이이실 거라 생각했죠. 벌써 임신
7주 되셨어요. 지금이 제일 예민하고 중요한 때라 저 정도 충격을 받은
경우엔 십중팔구 유산하기 십상인데, 환자 분께서 아주 건강체질이신 것
같네요.」
임신 7주. 의사의 진단을 듣자마자 준상은 재준과 혜련이 동거를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 반추의 행위 자체가 혜련의 뱃속에
자리 잡은 아기를 재준과 연결짓지 않기 위한, 치사스런 행동으로 느껴지면서도
준상은 마치 자동장치처럼 회전하는 머릿속을 어쩌지 못한다.
혜련에 대한 모독을 감행하면서까지 뱃속 아이가 재준의 혈육이 아님을
입증하려던 그의 시도는, 애매모호한 죄책감만을 남긴 채 아무 성과 없이
일단락된다.
「그럼 환자 분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일반 병실로 옮기도록 하죠.
최소한 4주 정도는 입원해 계셔야하니까 그렇게 아시고 준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시고요?」
「아, 예. 잘 알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용무를 마친 의사가 잰 걸음으로 자리를 뜬 뒤 준상은 병원 바깥에 위치한
로비로 나서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생각의 가지에서 빠져나와 다시 한번
정신을 추스른다. 줄곧 곁에 서 있던 부하가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담배 한 개비를 권하며 넌지시 물어온다.
「실장님, 커피 한 잔 갖다드릴까요?」
「어, 그래. 커피 한 잔 해야겠다.」
알싸한 니코틴 성분을 음미하듯 천천히 흡입하던 준상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온 부하에게 기계적인 어조로 명령을 내린다.
「일단, 오늘 일은 절대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마라. 절대 함구해.
회장님 올라오실 때까지 이 일은 너랑 나만 알고 있는 거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성일 그 새끼, 연락 되는대로 본사에 붙잡아놓고 즉시 보고해.」
「네. 그런데… 회장님께는 보고를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연화회에서 우리랑 전쟁하겠다는 뜻인데, 회장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대책을 세우셔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입 조심이나 똑바로 해.」
위압적으로 깔리는 준상의 목소리에 부하는 황급히 입을 다물고 머리를 조아린다.
혜련이 의식을 회복할지도 모르니 그만 들어가 그녀의 옆을 지키라며 준상은
부하의 퇴장을 독촉한다. 비로소 혼자 남겨지자 그는 부하의 말대로 이 일을
재준에게 알려야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시간을 둬도 괜찮을지 고민한다.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진 재준과 강태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지배적이지만, 재준의 직속부하로서 이처럼 중대한 사고를 임의대로 방치해
두어선 안 된다는 의무감 또한 결코 모른 척 할 순 없다.
그렇다고 이제 막 다시 사랑을 이어나가려는 재준의 결단에 벌써부터
험난한 장애물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불청객도 되고 싶지 않다.
그래. 아주 잠시만, 단 며칠만 더 시간을 드리자.
충의회 따위는 깨끗이 잊고 그토록 그리워하셨던 연인과의 재회에만
충실하실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도와드리자.
사랑에 있어서도 존경할 수 있는 보스가 되어 달라 부탁한 나의 청을
결국 그는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잠시만 더, 그를 자유롭게 해주자고 준상은 그렇게 자신의 결심을
합리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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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kdorkspti님, 가늘다가 호되게 내리는 빗줄기라... 기막힌 표현이네요. ^^
husico님, 연수를 긍정적으로 바라봐주셔서 감사합니다. -_-; 연수 캐릭터를 대부분
별로 안 좋아하시더라구요. 난 얘가 너무 좋은데. ㅠ_ㅠ;
그리고 주혁이가 왠지 차가운 느낌으로 다가오셨다고 했는데, 아마 그럴 거예요.
이 작품에서 주혁 캐릭터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겐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거든요. ㅋ
아이싯데루님, 새롭게 나타난 남자의 정체는...곧 밝혀집니다. 캬캬캬. -_-;
(사실 뭐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예요. -_-;;)
윗분들.. 감상 너무 감사히 잘 받았구요, 그밖에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늘 감사합니다. 다음편도 더 빨리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V
[orgasm/원랑] 오르가즘 175 - By 쵸티지기 (조회 : 113) 2005-06-29 오후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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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신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의 소통이 아니라, 그저 살과 피와 호흡만으로
존재하는 몸.
- 김인숙, <개교기념일> 중 -
「젊은 청년, 생을 버리러 여기 오신 거라면 오늘은 운이 없는 날이시군요.」
여전히 시선은 바다에 고정시킨 채 낮은 음성으로 낯선 사내는 태현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태현의 눈동자가 크게 팽창하며 소스라치고,
한동안 말문이 막혀 있던 그는 가까스로 생각을 다잡으며 묻는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그저 어림짐작했을 뿐입니다. 그리 서 계시지 말고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바람이 좀 덜할 겁니다.」
바람이 부는 것 따위야 느끼고 있지도 못했지만 태현은 상대에게 최면이라도 걸린 마냥
순순히 사내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인다. 가까이 다가서자 이제껏 알아보지 못했던
사내의 행색과 차림새가 시야에 들어오고, 태현은 그가 불가(佛家)에 몸담고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지금이야 절에 발길을 끊은 지도 오래 되었고 딱히 신자라 할 수도
없지만, 불교에 대한 외경심만은 그의 마음 밑바닥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이어서
태현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합장하며 인사를 올린다.
「경황이 없어서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스님.」
「아, 불제자셨군요.」
허둥대는 태현과 상반되게 너무나 절제된 동작으로 마주 합장하며 사내는 태현의
인사에 답한다. 모든 풍파와 시련을 겪어내고 정갈하게 씻긴 듯한 그의 눈빛이
자신을 후벼 파는 것 같아 태현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하늘이 땅 쪽으로 내려앉아 있는 게, 곧 비가 올 듯 합니다.」
속속들이 자신의 심중을 파헤쳐내는 신기(?)에 어안이 벙벙해져 어떻게든 그의
정체를 밝히고자 태현은 안절부절 못하는데, 사내는 그에 아랑곳없이 시답지 않은
날씨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답답하지만 함부로 채근할 수 없는 상대인지라
태현은 입술을 깨물며 조급증을 삭힌다. 그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려 할 즈음
그 타이밍마저 정확하게 넘겨다보고 있었다는 듯 사내의 음성이 바닷바람을 뚫고
전해져온다.
「뭘 그리 궁금해 안달하십니까. 그저 어림짐작을 했을 뿐이라고 말씀 드렸는데요.
소승의 나이 정도 먹게 되면 그만한 혜안이 열릴 때도 더러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혹시 스님께서 저와 예전에 만나신 적이…」
「아뇨. 소승의 기억으로는 없습니다, 보살님.」
칼 같이 말을 자르며 대꾸하는 사내의 기세에 태현은 흠칫 움츠러들며 다시 한 번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황망해진다. 갑작스레 예기치 못한 피로가 몰려오면서
으슬으슬 추위가 느껴지자 태현은 옷깃을 여미며 그 사이로 얼굴을 묻는다.
백지화된 머릿속에 어떤 말이든 사내로부터 흡족할만한 대답을 끌어낼 수 있는
무언가를 떠올려보려 애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결국 태현은 다시 상대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린다.
「보살님, 주제넘지만 소승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조차 망각하려는 찰나,
한결 굵직해진 목소리가 태현의 귀에 꽂힌다. 태현은 번쩍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춘다. 커다란 암갈색 망막에 가득 서린 회오와 두려움, 비탄과 격노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 무겁게 쏟아져나오지만, 그 속에서도 사내는 아직 전혀 녹슬지 않은
한 가지를 발견한다.
「보살님께서는 자신을 비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언뜻 듣기엔 아무 개연성도 없는 질문처럼 들리지만 태현에게는 그것이
가슴 한 복판을 찌르고 들어오는 섬광 같다. 사람의 눈동자가 저토록 크게
떠질 수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사내는 실례를 무릅쓰고 실소한다.
그러나 금방 웃음의 흔적을 거두고 얼굴색을 진중히 끌어내린다.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을 두고,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스님, 저는 단지…」
「보살님.」
기막히게도 눈물이 터지려하자 태현은 아무 말이나 내뱉어서 그 부끄러운 흐느낌을
차단하려 한다. 그러나 사뭇 엄격한 어조로 그를 가로막는 사내 때문에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태현의 뺨 위를 굴러간다. 미세하게 요동치는 어깨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울음을 억제하고 있는지 말하고 있다. 자신을 직시하는 사내의 눈동자를
태현은 도저히 마주볼 수가 없다.
「이제 그만… 그분…놓아주시지요. 열쇠를 쥐고 있는 쪽은 그분이 아닌…
보살님이십니다.」
알고 있었지만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사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죽는 한이 있어도 인정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사실이 명백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화하여 태현을 칭칭 휘감는다. 허리를 꺾으며 무너져 내리는 태현과
키를 맞추어 사내 또한 울퉁불퉁한 바위에 무릎을 댄다. 그리고 핏기 잃은
태현의 손을 따뜻이 그러쥔다. 겹쳐진 손등 위로 뜨거운 눈물이 비처럼 낙하한다.
「계획했던 대로 생을 버리면 그 굴레에서 벗어나실 수 있으시겠죠. 하지만 그건
죄악입니다. 가슴 속에 묻어야했던 그분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겁니다.
다음 생을 기약하라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꼭 기억하십시오.
보살님께서 그분을 가슴에 묻으신 그 때부터, 보살님의 생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계속 불행하시도록 놔두실 작정이십니까?」
-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후 텅 빈 학원에 혼자 남아 혁수는 유화 작업에 여념이 없다.
책상에 커다란 화첩을 펼쳐놓고 고흐의 그림 <해바라기>를 그대로 모방하는 중이다.
붉은색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하다가 문득 이게 아니다 싶은지 레몬색 불감을 팔레트 위에
덜어놓고 새 붓 하나를 꺼내든다. 어떤 식으로 색을 배합해 나가야 할지 잠시 고민에
잠긴 그의 귀에 인기척이 들리자 혁수는 고개를 돌려 출입문 쪽을 바라본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추위 탓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주혁이다.
「어휴, 추워! 겨울 지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추운 게 지겨워지네.」
마치 제 집에 들어온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운 주혁의 모습에 혁수는 피식 실소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 곳에 있다는 걸 얘기하지 않았음에도 약속이나 했었던 양
나타난 그가 신기하고 궁금하다.
「웬일이야?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웬일은. 안혁수 행동반경은 다 내 시야 안에 들어와 있어. 말 안 한다고 모르냐?」
「아이고~ 무섭네, 장주혁….」
「그러니까 바람피울 생각은 애시당초 하지를 말아. 너 그러다 걸리면 너 건드린
그 새끼는 내 손에 작살이니까. 알았어?」
「장주혁, 너 나 겁주려고 이 밤에 갑자기 쳐들어온 거야? 그리고 난데없이 바람피우는
얘기가 왜 나와??」
워낙 온순하고 수더분한 성격의 혁수는 주혁이 거친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항상
마뜩찮아 한다. 눈살을 찌푸리며 힐난조로 돌아서는 혁수의 언사에 주혁은 단단히
토라진 표정으로 하루 종일 쌓였던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왜긴 왜야! 안혁수가 나한테 애정이 식었으니까 그러지! 신혼여행 갔다 오고 나니까
이제 내가 다 잡은 고기처럼 느껴지나 본데, 너 그러는 거 아냐~ 오늘만 해도,
너 나한테 전화 한 번도 안 했어. 전부 다 내가 했지. 예전엔 이런 적 없었는데.
충격이야, 안혁수!」
속사포같이 귓전을 때리고 지나가는 주혁의 말이 끝나자 혁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크게 한 번 호흡을 들이키더니 의혹 어린 눈초리로 주혁을
훑어보며 한 마디 던진다.
「술 안 마셨는데…?」
자신이 분명 취했을 거라 짐작한 혁수에게 더 할 수 없이 서운하고 얄미운 감정이
솟구친 주혁은 정말 화가 난 사람처럼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려버린다. 주혁을 골려
주는 건 이 정도로 하고 이젠 뾰로통하게 틀어진 그의 심사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혁수는 낭랑한 웃음소리를 퍼뜨리며 주혁에게로 찰싹 붙어 앉는다.
「에이~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내가 아무렴 혁이한테 애정이 식었을까.
오늘 좀 바빴어, 나도. 그리고 너 일하는데 전화하기도 좀 그랬고. 출장 다녀온
직후였으니까 이것저것 챙기느라 너도 바쁠 것 같았어. 응? 그러니까 화 풀어~
하루 종일 보고 싶었는데 오자마자 화부터 내기야?」
담갈색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혁수만의 향기에, 목덜미를 적시는 촉촉한 숨결에,
‘보고 싶었다’는 결정적 한 마디에 주혁은 이번에도 어이없이 쉽게 항복을 청한다.
덥석 혁수의 허리를 끌어안아 품 안으로 가져오며 허겁지겁 연분홍빛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그가 당황스러우면서도 귓불을 핥는
그의 혀에 혁수는 터져 나오는 탄성을 고스란히 방치해둔다. 우악스런 힘으로
혁수를 안아 올린 주혁이 널찍한 책상 위에 그를 눕히려는 순간, 주혁의 어깨를
슬며시 밀어내며 혁수는 욕정이 채 가시지 않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여기서…?」
「왜… 싫어…?」
혹시라도 너무 자기 페이스대로만 밀어붙인 게 아닐까 걱정이 된 주혁이
조심스레 묻자, 혁수는 괜찮다는 말을 하기가 못내 쑥스러워서 아무 대꾸 없이
고개만 가로젓는다. 두 눈을 내리깔고 발갛게 홍조가 피어오른 채 누워 있는
그 모습이 주혁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어쩌면 저렇게 손 하나 까딱 않고 사람을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주혁은 몸 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듯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다시 혁수의 입술을
머금는다. 단추를 풀어 내리는 주혁의 손길은 긴박하고 다급하지만 결코 게걸스럽지
않다. 주혁은 어떤 순간이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배설의 욕구 때문에 혁수를 안지는
않는다. 그와 함께해 온 지난 시간 언제라도 그런 일은 없었다.
때로는 담아둘 수 없는 사랑에 겨워, 때로는 영원히 혁수를 가질 수 없으리란
절망에 치여, 때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혁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집념에
불타올라 혁수를 안았다. 주혁에게 있어 혁수와의 섹스는 단순히 본능에 이끌려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이다.
유일한 자신의 연인, 유일하기 때문에 완전할 수밖에 없는 연인을 숭배하는 의식이다.
「혁아, 사랑해… 사랑해, 혁아… 혁아…」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듯 부드럽고 유연하던 혁수의 움직임이 아주 격렬해진다.
주혁은 그와 박자를 맞추며 혁수가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받쳐 올린다. 혁수의 몸이 부러질 것처럼 팽팽하게 반원 형태로 휘어지고, 주혁은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의 안에 사정한다. 행여 혁수가 힘들어 할까봐
버릇처럼 재빨리 그에게서 내려오려던 주혁은 완강히 자신을 붙드는 혁수의 팔에
빙긋이 미소 지으며 다시 그와 가슴을 맞댄다. 땀에 젖은 주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혁수는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린다.
「나는…너를 믿어, 장주혁. 너만…믿을 거야…」
####################################################################
얼마만에 써 보는 삐리리신인가. 크하핫. -_-V 이하는 감상 주신 분들께 드리는 꼬랑쥐.
아이싯데루님, 만난지 얼마 안 되는 애들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_-;
그리고 태현 앞에 나타난 남자의 정체. 별 거 아니죠? -_-;;;
늘 꼬박꼬박 남겨주시는 감상,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힘이 되요. ^^
vkdorkspti님, 제 작품에도 ‘폐인’이 있다니. 감동이예요. ㅠ_ㅠ 감상 정말 감사하구요,
작품이 클라이막스로(님의 표현을 빌자면 ‘장마’^^) 치달아가고 있으니...
앞으로도 기대해주세요. ^^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orgasm/원랑] 오르가즘 176 - By 쵸티지기 (조회 : 97) 2005-07-04 오전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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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갓 짐승이었다. 땀에 젖어 산비탈에 엎드린, 누더기 같은 한겹 가죽만 남은
병약한 짐승이었다. 그 가죽 안에서 악취 나는 거품처럼 부글거리고 있는 것은
오래 묵은 분노와 후회와 증오, 억울함과 자책과 부끄러움이었다. 그것들이 내 살을
속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부식시켜 왔다.
- 한강, <아기부처> 중에서 -
저만치 앞에 서울로 진입하는 톨게이트가 바라보이자 재준은 눈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오전 11시도 되지 않았다. 예상보다 빠른 도착에 재준은 먼저
집에 들러 혜련을 만나볼 것인지 아니면 곧장 본사로 갈 것인지 고민에 잠긴다.
아무래도 혜련을 대면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엔 생각이 덜 정리된 것 같고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별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 핑계를 앞세우며 재준은
본사 쪽으로 향한다. 일단 결정을 하고 나니 이번엔 별장에 홀로 두고 온 강태
생각이 금세 재준의 머릿속 전체를 잠식하고 들어온다. 무모한 도피를 감행한 만큼
어느 때보다 더욱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기에, 강태를 가장 안전히 은신시킬 수 있는
곳은 양수리의 별장뿐이다. 강태 또한 상황이 이러한 만큼 아무 군소리 없이 재준의
말에 따라 주었다. 그러면서도 오늘 아침, 별장을 나서는 자신에게 왜 벌서 가야
하느냐고 툴툴거리던 강태가 떠오르자 재준은 가슴 한 구석이 찡하게 아려온다.
여전히 낯설기만 한 감정, 조금도 바래지지 않은 싱싱한 그 느낌이 그를 민망하게 한다.
그 쑥스러운 감정에 쫓기듯 재준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별장의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댄다.
신호음이 한번 울리자마자 곧바로 튀어나오는 강태의 목소리에 재준은 껄껄 웃음을
터뜨린다.
「뭐야, 진짜~ 전화해선 냅다 웃기만 하고. 근데 어디야? 서울 도착했어?」
「그렇게 전화 기다렸어? 벨소리 나자마자 재깍 받네?」
「아냐! 마침 전화기 옆으로 지나가던 중이었는데 네가 전화한 거야! 내가 뭐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인 줄 알아? 나도 바빠~!」
「쿡, 알았어. 왜 화를 내냐, 그렇다고.」
쀼루퉁하게 부어올랐을 예쁜 얼굴이 눈에 밟혀 재준은 미소를 거두지 못한다.
헤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견딜 수 없이 그가 보고 싶다.
몇 개월 동안 어떻게, 무슨 배짱으로 이 괴로움을 겪어냈던 걸까.
재준은 새삼 자기 자신이 대견스럽다.
「서울 도착했어. 지금 사무실로 가는 중이야.」
「지금? 집에 안 들르고?」
「응. 며칠 자리 비웠으니까 얼른 가서 체크해 봐야지.」
「아무튼 이재준 진짜 워커홀릭이야. 조심 안 하면 그거 심한 병 된다?」
혼자 남겨진 서운함과 허전함에 축 처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재준은 발랄하고 애교스런 강태의 음색에 적잖이 안도한다.
한편으로는 강태에게 너무 고마워진다.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지? …미안해. 절대로 오래 두진 않을 거야.」
「무슨 소리야~ 나도 바쁘다니까? 그런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잘해. 내가 어린애냐?」
「그래. 고마워, 강태야…. 진짜 고맙다.」
「또 쓸데없는 소리! 그딴 말하려거든 끊어. 나 바쁘니까.」
옴팡지게 쏘아붙이는 강태를 뒤로 하고 툭 전화가 끊긴다. 재준의 입가에 살풋이
실소가 걸렸다가 이내 스러진다. 혹시나 강태의 명랑함이 슬픔과 불안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몸짓은 아닐까, 혹시라도 그가 지금 울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것을 털어내려는 듯 재준은 얼른 담배에 불을 붙인다.
몇 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동안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에만 집중한다. 충의회 본사 건물 앞에 당도하자 재준의 차를 알아본
조직원 몇이 총알 같이 달려 나와 허리를 굽힌다. 재준은 그들 중 한 명에게
자동차 열쇠를 넘겨주며 심드렁히 묻는다.
「준상이 안에 있어?」
「예. 안에 계십니다.」
깍듯이 대답을 올리는 부하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고 재준은 성큼성큼 6층의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회장실’이란 명패가 부착된 황갈색 문을 열어젖히자
한가롭게 인터넷 게임을 즐기고 있던 여비서는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선다.
「회장님! 오늘 오신다고 연락 못 받았…」
「괜찮아요. 아무한테도 연락 안 하고 왔으니까. 준상이 올라오라고 하고,
커피 한 잔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허둥지둥 전화기 버튼을 누르기 시작하고 재준은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 위에 놓인 우편물들을 하나씩 훑어본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리고
말쑥한 차림새의 준상이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나타난다.
「회장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정중히 문안을 올린 준상은 넉살 좋게 웃음을 피우며 재준의 서두른 귀가에 대해
묻지만 재준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하고 싶은 아니, 해야 할 질문부터 꺼낸다.
「별 일 없어? 연화회 쪽은 어때?」
당연히 재준의 입으로부터 나와야 할 질문임에도 준상은 마치 상상조차 못했던
흉한 소식을 들은 것처럼 심장이 내려앉는다. 보고를 하고 난 뒤 불같이 노여워 할
재준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행여 이 일로 인해 그가 그 자신을 자책하게 될까봐,
행여 감정대로 행동한 것을 후회하게 될까봐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듯 재준은 차마 입술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준상에게 추상같은
호령을 내린다.
「무슨 일이야? 빨리 보고해.」
「다른 게 아니고… 혜련 아가씨께서…」
「혜련이? 연화회에서 혜련일 건드린 거야?」
그토록 말하기를 주저했던 사건의 핵심이 재준에게서 먼저 뱉어져 나오자 준상은
다시 한 번 놀란다. 재준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가. 일이 이렇게 꼬여나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부터 점쳐두고 있었단 뜻인가. 이번에도 준상은 재준의 속내를
털끝만치나마 들여다보지 못한다.
「예. 아가씨께서는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큰 부상은 당하지 않으셨지만 워낙
충격이 심하셔서 당분간 입원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윤간까지 당하신 바람에….」
「그랬겠지. 어느 병원이야?」
언제 고함을 질렀었냐는 듯 침착하게 가라앉은 말투로 재준은 간단히 대꾸하고,
질문한다. 혜련이 입원해 있는 병원 이름을 듣자마자 사무실을 나서려는 그에게
황급히 자신을 부르는 준상의 목소리가 들리고, 재준은 몸을 돌려 준상을 내려다본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게 더 있습니다.」
「뭔데?」
「저기… 아가씨께서… 임신 7주 상태십니다.」
- 출구가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진 통로 양 쪽에 검은색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쭉 늘어서 있다. 그들 한 가운데 생포된 포로처럼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춰진다. 어이없게도 완전히 발가벗은 모습이다. 필사적으로 몸을 가리며
자신을 방어하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점점 자신에게로 조여드는 거구의 사내들로부터
도망칠 방도는 어디에도 없다. 버둥거리는 사지를 결박당하고 옴짝달싹 못하게 된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문환이다. 그가 씩 웃음을 지으며 날카로운 칼을
옆구리에 찔러 넣을 때, 혜련은 나지막한 비명 소리와 함께 저주스런 악몽에서 놓여난다.
눈물인지 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액체가 그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혜련은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선반 위에 놓인 컵으로
손을 뻗는다. 차가운 냉수 한 잔을 몽땅 비우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다.
넓고 호화로운 특실 안에 오랜 시간 혼자 있다보니 늘어나는 건 잠 뿐인 듯 하다.
멍하니 창밖의 풍경만 응시하던 혜련에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텁텁하게 갈라진 음성을 입 밖으로 내보낸다.
「네, 들어오세요.」
「아가씨, 회장님 오셨습니다.」
준상과 함께 병실로 들어서는 재준을 확인하자 혜련의 얼굴이 삽시간에 황량하고
싸늘해진다. 의례적인 안부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고 물끄러미 재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가늠할 수 없는 원망과 증오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서,
재준은 자신이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냉랭하다 못해 살벌한 그녀의
태도에 준상마저 머쓱해진다.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침묵을 깨뜨리며 재준은
진중한 음색으로 입을 연다.
「얘기 듣자마자 바로 온 거야. 크게 안 다쳐서 천만다행이다.」
「아, 그래? 아주 감동적이네. 눈물이 다 난다.」
몸서리 처지도록 신랄한 그녀의 빈정거림에 재준은 멈칫 입을 다물고 준상의
표정은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혜련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재준은 창피하고
객쩍기보다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 책무가 자신에게 있음은 명백하기 때문에 그는 애써 다시 말을 잇는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정말… 미안하고…
너한테 면목이 없다.」
「뭐가 그렇게 미안하고 면목 없는데? 날 이 꼴로 만들어서? 아니면, 먼저
결혼하자, 같이 살자 꼬셔놓고 남자 새끼랑 바람나서? 하긴… 둘 다겠지, 뭐.」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그리고… 너 임신했단 얘기도 들었어.
내 애… 맞아…?」
「네 애가 맞냐고? 허, 나 참…!」
혜련의 검은 눈동자 깊숙이 똬리 틀고 있던 분노가 파르르 화염을 지피며
불거져 오른다. 당장 재준의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일 듯한 그녀의 기세에
재준은 정리해두었던 말을 순간 망각하고, 혜련은 얼음 같이 다부진 말투와
행동을 모조리 벗어던지며 악에 받친 소리로 가슴 속의 응어리를 토해낸다.
「야, 이 깡패 새끼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씨부렁대냐? 그래! 네 애다, 어쩔래?!
몇 달 동안 너 하나하고만 잤고, 내가 피임 안 하고 잔 남자도 너 밖에 없고,
시기도 딱 맞아 떨어지니까 네 애 맞아. 왜, 유전자 검사라도 해 봐야 속이
시원하겠니? 이 치사한 새끼…!!」
「아가씨!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아무리 명목상으로 아직 재준의 정부이고 그렇기에 자신이 모시는 윗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보스를 향해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는 혜련의 행동은 준상을 발끈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혜련은 엄격히 제동을 거는 준상에게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에게도 따끔한 일격을 가한다.
「넌 끼어들지 마! 이게 충의회 일이야? 이건 내 일이고 내 문제야.
네가 당한 일이야, 이게? 죽도록 얻어터지고 강간당한 게 너냐고!
아니잖아. 그러니까 닥치고 있으라고!」
「그래, 준상아. 넌 밖에 나가서 기다려라.」
################################################################
감상주신 분들.. ^^
님프요정님, 오랜만에 뵈니까 반가워요.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은
그래도 예전보다 글을 빨리 빨리 올리는 것 같지 않나요? -_-V(뻔뻔함. -_-;)
vkdorkspti님, 님께서도 건강 유의하시길. ^^ 저는 워낙 건강 체질이라. ㅋ
언제나 정성스레 남겨주시는 감상, 제게 많은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싯데루님, 행복해 보이는 우리 혁수와 주혁이를 앞으로 제가 어떻게 괴롭힐지,
기대 많이 해주셔요. (진짜 뻔뻔함. -_-;;) 감상 감사드리고, 늘 더 좋은 글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밖에도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분들. 장마철이고 날씨도 너무 더운데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감사하구요. ^^*
[orgasm/원랑] 오르가즘 177 - By 쵸티지기 (조회 : 109) 2005-07-08 오전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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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 -
시커먼 먹장구름이 수평선과 맞닿을 듯 낮게 내려앉아 있더니 기어코 굵은
빗방울을 뿌려대기 시작한다. 한바탕 대성통곡을 쏟아놓고 맥없이 탈진해
있던 태현은 흠칫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지나가는 소나기 같긴
해도 이대로 있다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게 뻔하다. 비를 피할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황망해하는 그에게, 긴 시간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정중히 제안해온다.
「불편하시겠지만 소승의 차에서 비를 피하시지요. 여름 소나기도 잘못
들면 감기를 부른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사내는 단정한 몸가짐만큼이나 점잖은 걸음걸이로 태현을 자신의 승용차까지
안내한다. 10년은 족히 타고 다닌 듯 무척 낡은 소형차가 두 남자의 무게
때문에 푹 꺼져드는 느낌이다. 사내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비 내리는
바다의 풍경에만 심취해 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뒷자리로
옮겨두었던 가방을 가져다 열고 그 안에서 길쭉한 알루미늄 보온병과
종이컵을 꺼낸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한 가득 따라 내미는
사내에게, 태현은 감사의 인사 대신 목례를 해 보이며 조심스레 컵을 받아든다.
태현이 먼저 말문을 트기 전까진 한 마디도 하지 않으리라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옆 자리의 사내가 고수하는 적막은 두껍고 견고하다. 순간 태현은 담배 생각이
간절해져서 주머니 속에 있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린다.
「담배 태우셔도 괜찮습니다. 소승은 개의치 마십시오.」
정말 이 사람은 무슨 심령술사라도 되는 것인가. 주머니 속을 더듬는 작은 행동
하나에 이토록 정확히 상대의 의중을 읽어 내다니. 커다랗게 홉떠진 눈으로
태현은 사내를 바라보지만 그는 태연히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킬 뿐이다.
역시 또 태현 혼자서만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난감해한다.
우선 허락을 받은 대로 담배부터 한 대 입에 문 그는 간간이 따뜻한 커피를
홀짝거리며 어수선한 마음을 여며 나간다.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태현이
오랜 망설임 끝에 입술을 떼자, 사내는 앉은 자세를 바로 고치며 그에게
귀 기울이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제가 사랑했던 여자는… 야누스였어요.」
고백의 첫 머리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지 그리도 고심했건만 태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자기 자신에게도 엉뚱하게만 들린다. 귓전을 훑고 허공중에
분해 되는 목소리가 우스꽝스럽다. 사내는 잠자코 태현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막상 세라에 대해, 연수에 대해, 케케묵은 추억과 그것을 몰살해버릴지도 모를
새로운 흔들림에 대해, 과연 자신이 이 모든 것들을 털어놓을 수 있기나 할 것인지
태현은 두려워진다. 하지만 이젠, 이제야말로 대답을 듣고 싶다.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가장 깨끗하게 준비된 육신과 의식을 가지고 세라를 버리고자 한다.
그리고 벗어나는 거다. 인연의 굴레에서.
「그러니까 그 여자는… 두 사람 같았어요. 완전히 상극인 두 사람 말이에요.
닮은 점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는 두 사람이 한 몸 안에 있는 것 같았죠.
근데 희한한 건, 저는 그게 너무 이해가 잘 됐어요. 그러니까, 이 여자는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여자는 왜 이럴까, 한번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어요. 함께 지낸 시간은 정말 짧았는데… 아직도
그 여자가 저를 지배해요. 죽을 때까지 그렇겠죠. 인연의 굴레라는 게…
원래 이렇게 지독한 건가 봐요?」
응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사내에게서 아무런 말을 듣지 못하자
태현은 가슴 언저리에 저릿한 통증을 느낀다. 자신이 초라하다 못해 추해
보이는 것 같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어린 애처럼 엉엉 울어댔으니
구질구질하게 체면 차릴 것도 없다고, 태현은 아예 속 편한 체념을 택한다.
「그 애가 죽고 나서… 자살 시도를 했었어요. 바로 저 절벽에서, 지난여름에요.
어디 한 군데 망가지지도 않고 결국 멀쩡히 살아남았지만요.」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 의식을 찾았을 때, 눈알을 후벼 파고
들어오던 하얀 빛, 코를 찌르던 병원 특유의 역한 냄새,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아득히 덮쳐오던 낭패감. 떨쳐낼 수 없는 그 기억들은 비린내가
풍길 정도로 사실적이고 선명하다.
「그러다가… 겨우 타협을 했어요. 용서한 건 아니에요, 제 자신을. 말 그대로
타협한 거죠. 세상에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 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도 남겨진 거다. 그러니 나는 계속 살아야 한다.
그 대신… 죽을 때까지 이 그리움을 만끽하면서 살자, 절대 행복해하지 말자,
그런 식으로 약속을 하고 타협을 했어요. 그런데…」
태현이 우려했던 것과 반대로 이야기는 막힘없이 술술 풀려나간다. 이젠 연수에
대하여 말할 차례다. 그녀를 얘기하면서 어떤 마음을 품게 될지, 어느 방향으로
돌아서게 될지 태현은 섣부른 기대와 낙망을 양 손에 그러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스님… 저… 그 약속…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뇨, 사실은… 지키고 싶지가 않아요. 다른 사람이 왔거든요.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사람인데 그 약속 때문에 놓칠 것 같아서 불안해요. 한편으로는
용서가 안 돼요. 1년도 안 지났는데 벌써 다시 시작해보려는 제가 너무 혐오스러워요.
제 손으로 죽이고 싶을 만큼…!」
또렷한 이성을 가지고는 감당하기 벅찬 자기혐오 때문에 태현은 암갈색 눈망울 가득
푸르스름한 광기를 띄운다. 부르르 떨리는 그의 주먹이 당장이라도 유리창을 박살낼 듯
위태로워 보인다. 태현을 휘두르는 분노는 아마도 슬픔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슬프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인지도.
「다시 시작이라니요. 왜 그런 단어를 쓰십니까.」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사내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말투가 은근히
책망 조로 들려서 태현은 히뜩 기울어지는 표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 그에게로
눈동자를 모은다.
「그럼 보살님께서는, 지난 사랑이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스님…」
「그 분을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하셨던 보살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는지, 소승의 짧은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모순인 듯, 싶습니다.」
「하지만 스님, 저는 그 애를 지키지 못했어요! 그 애의 꿈이 뭐였는지 아세요?
현모양처였어요, 현모양처! 그걸 꿈이라고 소중히 간직하고 살던 애였어요.
그것조차 자기한테는 과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살던 애였다고요! 그런 애를…
그냥 보내버렸어요…. 아무도 지켜봐주지 않는데서 죽도로 내버려뒀단 말예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실패가 아닐 수 있어요? 그게 실패가 아니라면 대체 뭐죠??」
교묘히 자취를 감추었던 눈물이 태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 작은 방울로 맺힌다.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그를 뒤흔들던 분노 대신,
그보다 더 흉하고 어리석은 회한의 감정이 태현의 심장을 짓이긴다.
가슴이 아프다. 벌써 수천 번, 수만 번 찢어져 너덜거리는 가슴인데 고통만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보살님.」
태현을 부르는 사내의 음성은 애틋하고 다정하다. 동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기 보단
그저 여유를 품고 그를 달래는 듯 하다. 태현의 흐느낌은 잦아들 기미도 없이
이어지는데 사내는 일절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한다.
「인생에는…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 절대 어쩔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있는 법입니다.
거기까지 손을 뻗을 수 없다고 이토록 자학하시는 것은… 서운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욕심입니다.」
그런 것인가.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가. 그게 죄인가. 그녀를 버리고자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그녀를 극복하지 않으려고, 주저앉은 채 살기로 한 다짐이 죄란 말인가.
「왜 그것이 욕심인가, 의문스러우시겠지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세상의 어느 누구든,
살다가 한 사람쯤은 잊어내야 하는 겁니다. 부모든 형제든, 친구든 연인이든,
살아서 이별했던지 아니면 죽음 때문에 갈라졌던지 누구나 적어도 한번은… 마음을
찢고 그 속에 한 사람을 묻어야 하지요.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생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한 아픔입니다. 보살님께서 지난여름 죽음을 선택하셨던 것도,
그 분을 잊어내는 것보다 죽는 게 차라리 쉽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비겁해요. 그 분과의 사랑을… 끝내 실패작으로 만드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래요. 보이지 않고, 떨어져 있다고 해서 끝나버리는 게 어찌 사랑입니까?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다면 사랑했다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마세요. 듣기 민망하고
부끄러우니까요. 내 사랑은 진짜였다고 반박하려 하시나요? 그렇다면 오늘까지만
울어요. 그리고 그 분을 기억 속에서 놓아주세요. 절실하게, 순수하게 사랑했으니까
그 분은 보살님 마음속에 묻힐 자격이 있는 거 아닙니까? 보살님의 욕심 때문에,
잊어내는 그 아픔 겪는 게 무서워서 피하느라 그 분을 기억 속에 매어두고 계시면…
그 분은 계속 불행하셔야 할 겁니다. 보살님의 그 비겁함 때문에.」
- 정사의 향연이 끝나고, 흐트러졌던 차림새를 정돈한 주혁은 느긋하게 몸을 뒤로
젖히며 담배를 피워 문다. 손가락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던 혁수는 그를
보더니 이내 샐쭉한 표정으로 투덜거린다.
「사랑하고 나서 바로 담배 피우는 거 진짜 싫어.」
혁수는 ‘섹스’라는 단어보다 ‘사랑’이란 표현을 즐겨 쓴다. 아직도 뭐가 그리 수줍고
부끄러움을 타는 건지, 꽤 낯 뜨거운 표현도 서슴지 않는 주혁으로선 그런 그가
마냥 귀여울 뿐이다. 혁수를 조금 놀려줄 심산으로 주혁은 천연덕스럽게 받아친다.
「왜~?? smoking after sex! 얼마나 맛이 죽이는데. 너도 담배 배워서 한번
시도해 봐. 색다른 오르가즘을 느끼게 될 걸?」
화끈거리는 얼굴이 더 빨개지기 전에 혁수는 주혁으로부터 홱 등을 돌리며
‘담배 따위에서 그걸 느낀다니, 기가 막혀, 정말’, 주혁에게도 똑똑히 들리게끔
중얼댄다. 그대로 놔두었다간 혁수가 아주 심각하게 토라질 것 같아서 주혁은
애교가 듬뿍 담긴 음성으로, 코맹맹이 소리까지 곁들여 그의 이름을 거듭 불러제낀다.
「혁수야~ 혁수야~ 내 안혁수~ 왜 그래, 안혁수~!」
뒤에서 혁수를 끌어안고 귀뿌리와 매끈한 볼에 키스를 퍼붓는 주혁. 혁수는 몇 번 몸을
뒤채이다가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해 이미 풀어진 마음을 들켜버린다.
「아아… 집에 가기 싫다… 안혁수 옆에서 잠들고 눈뜨는 그 날이 속히 와야 할 텐데.
나 조울증 걸리기 전에. 안혁수랑 있을 땐 꽃밭인데,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그 때부터
우울해진단 말이야.」
장난기가 말끔히 걷힌 중저음의 목소리로 나긋이 속삭이며 혁수를 힘주어 보듬는
주혁에게 휴대폰 벨소리가 닿아온다. 혹시 태현이나 재준이 아닐까 하여 황급히
수화기를 귀에 밀착시키지만, 상대는 예상 밖의 인물이다.
「주혁이니?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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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kdorkspti님, 감사는요~ 제가 감사하죠, 항상. ^^ 혜련과 재준, 강태의 삼각관계!!
아니, 문환까지 하면 사각관계구나. (-_-;;) 빨리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orgasm/원랑] 오르가즘 178 - By 쵸티지기 (조회 : 142) 2005-07-14 오후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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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준상아. 넌 밖에 나가서 기다려라.」
서릿발 같은 재준의 명령에 재준은 울컥 치미는 화증을 눌러 삼킨다.
잠시 혜련과 싸늘한 시선을 교환하던 그가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사라지고
위태위태한 적막 속에 혜련과 재준 둘만이 남겨진다. 맞은편 벽에 금연 표지판이
붙어있음에도 재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담배에 라이터를 가져간다. 혜련 역시
그를 말리기는커녕 손을 내밀어 한 개비 청한다. 이틀 만에 피워 문 담배의 맛은
달콤할 정도다. 혜련은 연기를 폐 속 깊이 들여보내며 엷게 실소한다.
「알다시피 난 말 잘 못해. 그러니까 본론만 얘기할게.」
힘겹게 먼저 입을 연 재준은 미안한 표정이라기 보단 도리어 피곤하고 지쳐 보인다.
그것마저 혜련에게는 괘씸하고 가증스런 배신의 일면일 뿐, 재준 또한 힘들어하고
있다는 생각 따윈 구역질나는 위선이다.
「난 너한테 아무것도 강요할 생각 없어. 아이를 낳고 싶으면 낳고, 지운다고 해도
말리지 않아. 네 애니까 네가 판단해서 결정해. 난 네 결정에 따라줄 테니까.」
「아, 예~ 다시 한번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회장님.」
「그딴 식으로 비꼬지 마, 유혜련!」
우악스럽게 귀청을 흔드는 재준의 고함 소리에도 혜련은 아무런 동요가 없다.
재준은 이제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처음 동거를 제안했을 때 ―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청혼을 했을 때 ― 사춘기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며 곱게 눈을 흘기던 그녀의 모습이
오버랩 되자, 재준은 기하급수적으로 무게가 늘어난 죄책감에 짓눌린다.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화 낼 입장이 아닌데.」
조심스럽게 건네는 사과의 말에도 혜련은 묵묵부답이다. 재준은 다시 한 개비의 담배를
입에 물며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은 어정쩡한 침묵 상태를 견뎌보려 한다.
「미안하다는 말로 보상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혜련이 뱉어낸 말에 재준의 고개가 번쩍 들리며 그녀를 마주본다. 그러나 표독스럽게
불거져 오른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이내 시선을 떨군다.
「어떻게든 네가 마음 편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해 줄게.」
혜련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재준은 거듭 고민하다가, 가까스로 제일 무난하고
적합하게 들릴 법한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 그래도 그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재준은 정체불명의 위기감에 떠밀려 황급히 말을 잇는다.
「너한테 피해 줄 생각, 절대 없었어. 내가 미리 대비하지 못해서 너, 이런 일 당하게
했지만 그건 나도 정말 미안하고 면목 없다. 근데 혜련아, 나는… 나는 그 애 없이는
안 될 것 같다.」
재준의 마지막 발언에 지금껏 견고한 철옹성을 유지해오던 혜련의 낯빛이 와르르
허물어진다. 그리도 신경을 기울이며 주의했건만 재준은 결국 또 한번 그녀의 마음속에
시퍼런 멍 자국을 찍고 만다.
「조금이라도 내 잘못 갚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게.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봐.
예전에 하던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 네가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내가 뭐든
도와줄게. 그렇게라도 보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취직자리를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네가 할 수 있는 가게를 하나 내 줄 수도 있고. 어떤 업종이든지. 만약 공부를 다시
해 보고 싶다면 학비랑 생활비를 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선…」
「그러니까, 돈 먹고 떨어져라??」
열성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며 그녀를 설득하는 재준에게, 냉혹하고 스산한
혜련의 목소리가 부딪혀온다. 큼지막한 덩어리가 식도를 타고 휩쓸려가듯,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이 재준의 척추를 훑어 내린다. 창백하게 질려버린 그의 표정에 혜련은
비릿한 조소를 깨물며 거침없는 말투로 그를 겨냥한 공격을 재개한다.
「돈으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깟 돈 몇 푼만 받고
떨어질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 나도. 그리고 나, 취직 같은 거 안 해. 장사 따위도
취미 없어. 공부는 더더욱 싫고. 그런 게 뭐 필요 있어? 애가지 생긴 마당에,
그저 옛날에 네가 한 말마따나 조신하게 들어앉아 살림이나 하면 되지.」
혜련이 늘어놓은 이야기가 선뜻 이해되지 않자 재준은 양미간에 자잘한 주름을 새기며
그녀의 의중을 간파하려고 애쓴다. 혜련은 시니컬한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사뭇
쾌활하기까지 한 목소리를 분사해낸다.
「왜, 이해가 안 가? 머리 좋은 사람이 뭐 그래. 취직자리, 가게, 공부, 그 딴 거
다 필요 없어. 너 하나만 손에 넣으면 간단한걸. 뭣 하러 내가 그렇게 손해 보는
거래를 하겠어?」
「너 도대체 무슨…」
「무슨 소리냐니? 이봐요, 이회장님. 나 당신 애 가졌어. 당신, 이 아이 아버지야.
그럼 아버지로서 도리는 해야지.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미성년자는 아닌데.
그리고 당신, 능력 좋잖아? 그런데도 도리를 안 하겠다면…」
「그렇지 않아. 방금 전에 얘기했잖아. 예전에 그랬듯이, 난 애한테 경제적으로 모든
책임 다 할 거야.」
「야, 이 새끼야! 너는 그 빌어먹을 돈 얘기 밖에 할 줄 모르니?! 내가 너한테 돈 뜯어
내려고 이 지랄을 떠는 줄 알아?? 돈만 대 주면 네 할 일 끝이라 이거야?」
「씨발, 그럼 뭘 더 바래?! 미안하다고 했잖아! 보상한다고 약속도 했잖아! 근데 나더러
뭘 더 어떻게 하라고!!」
진득하니 억눌려 있던 온갖 감정의 응어리들이 마침내 폭발하며 재준의 까만 심연은
회색으로 흐려진다. 그가 내지르는 고함이 자신을 통째로 삼켜버릴 듯, 혜련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절대로 울면 안 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그녀는 손톱이 파래지도록 주먹을 꽉 쥔다.
두 사람을 둘러싼 정적은 이제 살기마저 띠고 있다. 그 사이를 가르며 흩어지는 혜련의
음성엔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이 충만하다.
「이회장님. 못 알아들은 척 그만 하시죠? 내가 뭘 원하는지 아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대답을 미룬다고 내 맘이 바뀔 것 같아? 아냐, 절대 아냐. 똑똑히 들어. 난 네 애를
가졌고 이 애는 아버지를 가질 권리가 있어. 그러니까 난 너랑 결혼할 거야.
뭐? 강태 없이는 못 살겠다고? 그럼 애초에 날 여기까지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술집에서 몸 팔던 년이니까 대충 데리고 놀다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네가 꼴리는 대로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근데 어쩌나? 난 그렇게 말랑말랑한 년이
아닌데.」
불안한 마음에도 내심 ‘설마’라며 그녀에 대한 의심을 희석시켰던 재준. ‘설마’라고
치부해버린 가정이 혜련의 혀끝에서 생생하게 발음되어 나오자, 기가 막힐 따름이다.
더 이상 그녀와 마주앉아 있다가는 차오르는 성질을 제압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손찌검이라도 하게 될까봐 재준은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무시하려거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재준, 이건 기억해. 당신, 큰 실수했어.」
제법 앙칼진 어조로 쏘아붙이지만 미세한 떨림을 숨기지 못한 혜련의 음성에도
재준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삭막하고 건조하다. 이윽고 재준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그토록 암상스럽게 단속했던 한 방울 눈물이 그녀의 뺨 위로 굴러 내린다.
「몸조리 잘해라. 다음에 다시 들를게.」
여느 때처럼 범상하고 밋밋하게 재준은 인사를 남기고 병실을 나서려 발을 뗀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 그가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등 뒤로부터 들려오는 혜련의
목소리는 울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침착하면서도 음산하다. 재준은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에게 귀를 기울인다.
「홧김에 억울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 공갈치는 건 더욱 아니고.
이재준, 넌 나랑 결혼해야 돼. 그게 네가 나한테 보상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방법이야.
내가… 살게 해 줄게. 강태 없이도 너 잘 살 수 있게… 내가 그렇게 해줄 테니까…
기대해, 이재준 회장님.」
―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재준은 초조히 대기하고 있던 준상에게 지금 당장 모든 조직원을
집합시키라 지시한다. 은행 몇 군데를 돌며 급하게 처리해야 할 것들을 손 본 후, 다시
본사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전 조직원이 모여 있는 상태였다. 불미스런 사건이 일어난 뒤라
분위기는 어둡고 침통하다. 건장한 사내들을 정렬시키고 상석에 떡 버티고 선 재준의
카리스마가 실내를 빈틈없이 채운다. 한참동안 재준은 아무 말이 없다. 뒷짐을 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부하들을 찬찬히 둘러볼 뿐이다.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둔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김준상, 정성일. 앞으로 나와.」
혜련의 수행을 담당했던 부하는 눈에 띄게 낯이 굳어지며 쭈뼛쭈뼛 움직이는 반면,
준상은 잽싼 동작으로 재준 앞에 무릎을 꿇는다.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만 보던
재준이 갑자기 발을 들어 두 사내의 가슴을 한 대씩 세게 걷어찬다. 불의의 일격에
준상과 성일은 벌렁 나자빠지고, 재빨리 본래의 자세를 회복하는 준상과 달리
성일의 눈동자는 거대한 공포로 얼룩져 있다. 성일 앞에 선 재준은 부들부들 경련하는
그의 머리를 발끝으로 살짝 건드리며 입을 연다.
「등신 같은 새끼야. 내가 너한테 혜련이 하나 제대로 지키라고 했지, 뭐 다른 일 시킨 거
있어? 시키는 일 하나 똑바로 못해? 너 같은 놈을 계속 내 밑에 둬야 하는 건가.」
「자, 잘못 했습니다…! 하, 한번만, 한번만 용서해주시면 다신…」
제명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성일은 재준의 바짓단을 움켜잡고 매달린다.
그러나 재준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쳐내며 일말의 동정이나 흔들림 따위 엿보이지
않는 음성으로 명령한다.
「네 문제는 간부들이랑 상의해서 결정할 테니까 자중하고 기다려. 들어가.」
재준의 고갯짓에 성일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비척거리며 늘어선 대열에
합류한다. 준상은 변함없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준상을 보자 재준은 어쩐지 이 모든 체벌과 경고의 절차가 가소롭게만 느껴져서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 한다. 감상적인 기분에서 빠져나오려 재준은 얼른 의도한
바를 행동으로 옮긴다. 준상을 엎드리게 하고는 굵직한 각목으로 사정없이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내리친다. 무척 고통스러울 게 분명함에도 준상은 신음 한번 내지 않는다.
얼굴 한번 일그러뜨리지도 않는다. 아픔을 참느라 이마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힐 뿐,
아주 약간의 떨림조차 비치지 않는다. 그렇게 재준의 매를 고스란히, 달게 맞아낸
준상은 재준이 각목을 저만치 던져버린 후에도 미동 없이 엎드려 있다. 거친 호흡과
함께 재준은 그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김준상, 충의회 회장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나나?」
#################################################################
재준이 무섭다. ㅋ
감상주신 vkdorkspti님, 아이싯데루님,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나 님들 생각하면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쓸게요~ ^O^
[orgasm/원랑] 오르가즘 179 - By 쵸티지기 (조회 : 148) 2005-07-27 오후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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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위, 곧 나의 생명을 다른 한 사람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여야 한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 -
콧구멍 안을 비집고 들이닥치는 칼바람에 태현은 빨갛게 얼어터진 손으로나마
코언저리를 감싸 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그에 비례하여
태현의 정신은 또렷해져 간다. 군데군데 눈이 쌓이고 살얼음이 얼어 길은 험하지만
그는 별로 지친 기색이 아니다. 호흡은 가빠도 규칙적이고 일정하다.
암갈색 눈망울은 말갛게 개어있다. 오랫동안 늘러 붙어 있던 어지러운 일렁임이
완전히 사라진 그 자리엔, 어리숙해 보이지만 결연한 다짐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걸음을 재촉하던 그가 아무래도 힘에 부친 지 야트막한 바위에 기대 앉아
날숨을 돌린다. 제법 익숙하게 망막을 어루만지는 산세와 풍경을 감상하던 태현은
몸이 더 늘어지기 전에 서둘러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길을 나선다.
누렇게 탈색된 잔디로 뒤덮인 몇 개의 봉분 사이로, 이젠 파헤쳤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평평한 땅 바닥 위에 세워진 비석 하나가 나타난다.
그리고 지금껏 태현을 지배해 온 한 여자의 이름이 태현의 눈동자에 각인된다.
태현은 앉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멀뚱히 서 있기만 한다. 바람이 무서운 기세로
그의 몸뚱이를 후려쳐대는 소리만 맴돌 뿐 사위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허연 입김과 함께 울려 퍼지는 그의 음성은 희미하고 유약하다.
「세라야, 잘 있었어?」
금방이라도 흐느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위기감에 태현은 얼른 입을 다물고 주먹을
움켜쥔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턱은 망설임 때문이다. 결코 절망이나 죄책감
때문은 아니다. 이제부턴 그런 감정들에 무뎌지기로 단단히 각오를 해둔 터라,
태현은 벌써부터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며 자신을 매섭게 몰아세운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세라야. 오빠 제주도 내려갔다 오는 길이야. 서울 가기 전에 너한테 들렀어.
할 얘기가 있어서.」
마치 당사자를 바로 앞에 두고, 혹은 상대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처럼 태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나… 거기에 다시 갔었어. 그 절벽 말이야.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갔었어. 죽을 때까지 널 이겨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근데… 거기서 어떤
사람을 만났어. 스님이셨는데, 내가 입도 뻥긋하기 전에 이미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더라. 끝까지 자기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왜 또 쓸데없는
인연 하나를 더 맺으려고 그러느냐… 뭐 그런 말씀을 하시 길래… 더 캐묻지
못하겠더라고…」
또랑또랑하게 이야기를 엮어나가던 태현의 목소리가 ‘인연의 굴레’라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잠에 골아 떨어지는 사람마냥 흐지부지 사위어든다.
그건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라기 보단 또 한 번의 망설임 때문이다.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말… 서운하니, 세라야?」
기어코 그의 음성이 울음기로 물든다. 호되게 자신을 질책하던 좀 전까지의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태현은 꼿꼿이 세우고 있던 몸을 무참히 꺾으며 세라 앞에 엎드러진다.
어떻게든 눈물을 되삼키려 안간힘을 써보다가 욱신거리는 가슴의 통증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극렬해지자, 태현은 억 하는 외마디 소리를 토해낸다. 그와 동시에 안으로
삭히려 했던 흐느낌까지 우르르 뱉어버린다. 희부윰한 겨울 햇살을 홀로 내리받으며
구성진 울음을 질펀하게 펼쳐놓는 그의 모습은 심지어 연극적이기까지 하다.
「아니라는 거 알아, 세라야. 서운해 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기 때문에… 내가 지금
우는 거야. 미안해서 우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 이제 너한테 미안해하는 거
그만하기로 했거든. 그리고 앞으로는 더 이상 죄책감 같은 것도 느끼지 않을 거거든.
한 마디로 세라야, 오빠는 이제 다시는… 네 생각하면서 울지 않을 거야.
오늘이… 마지막이야, 세라야… 마지막이야, 정말… 앞으로 다신 나… 여기 오지
않을 거니까… 오늘이 정말 마지막인 거야, 세라야…」
이별인 거야, 세라야.
차마 그 두 음절의 단어를 입 밖에 낼 수 없어 그는 속으로만 뇌까린다.
이젠 너를 버리겠다는 말보다, 다신 오지 않겠다는 말보다, 너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보다 아니,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자백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무자비한 낱말.
「널 놓을게. 내 기억 속에 사는 널 놓을게. 여태까지 내 인생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널 놓을게. 그러니까 세라야, 사랑했으니까… 너도 날 사랑했었으니까… 아니, 네가
날 정말 사랑해줬으니까… 나도 나를 용서하려고 해. 다시 날 돌봐주려고 해.
내가 나를 학대하면서 지낸지 벌써 너무 오래됐어.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을래.
예전에는 그게 널 추억하는 방법인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었어. 나는 그냥 나 자신을
벌주고 있었을 뿐이야. 그럴 필요 없는데도… 그렇게 했던 건 그게 널 사랑하는
방법인 줄 알았어.」
언젠가 너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그 애가 이런 말을 했었지. 내가 하는 사랑은
너무 무모하고 불공평하다고. 그 땐 코웃음 치며 흘려들었지만 지금은 인정해.
무모하고 불공평한 사랑이 나 뿐 아니라 너마저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어.
아직 모르겠어. 우리 사랑이 실패작인지 성공작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런 것 따위는 가려내고 싶지 않아.
다만 한 가지, 꼭 한 가지 알고 싶은 건… 내 마음 속에 묻힌 네가 편안한지…
이미 나 같은 놈 잊어버렸는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웃을게. 누구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활짝 웃을 거야.
네가 곁에 있는 것처럼, 너와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웃어볼 거야.
그리고 널 내 속에서 또 한 번… 죽일게.
― 「엄마,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행선지를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쳐내며 연수는 허둥지둥 대문 밖으로
나선다. 조금 전 태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고수하고 있던 그녀 특유의 차분함이
전화를 끊는 순간 공중분해 되어버린 탓에 연수는 벌떡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태현이 기다리고 있을 카페를 향해 부리나케 발을 놀리면서 그녀는
부정적인 예감을 털어내려 애쓴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연수는 얼마간 우두커니 서서
들쑥날쑥한 숨소리가 다 잡힐 때까지 한 가지 상념에만 골몰한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 그것은 어느 쪽이던지 간에 혼란스러웠던 그의 마음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의미일 게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자며 연수는 조급해지는
자신을 달랜다. 그리고 카페의 유리문을 열어젖힌다.
창가 쪽에 자리한 태현은 약간 피곤해보일 뿐 떠날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연수에게는 오히려 기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천천히, 발자국 하나하나를 셈하며 그에게로 가까워지는 연수. 태현은 슬핏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춘다. 앉으라는 말 한 마디 없이, 잘 다녀왔냐는 안부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줄기차게 서로를 응시하기만 한다.
「… 몸은 좀 괜찮아?」
갑갑한 침묵에 쫓겨 연수가 맞은편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태현은 오래도록
간직해 온 질문을 꺼내보이듯 그렇게 묻는다. 청아하고 은은하게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음성, 연수는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아 일부러 헤벌쭉 과장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놓이는지 태현은 두어 번 고개를 주억인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여전히 조신하고 얌전한 그녀의 말투에 태현은 희한하게도 안도감을 느낀다.
「오늘. 집에 가기 전에 들른 거야. 빨리 얘기 안 하면 내가 또 겁낼 것 같아서.」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연수의 눈동자가 의혹과 기대에 버무려져 태현을 직시한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그녀는 양손을 꽉 모아잡고 있다. 팔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딱 그만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앉은 연수의 실재가 태현의 눈을, 가슴을, 머릿속을
충만히 채워온다.
두렵지 않다. 부담스럽지도 않다. 태현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용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정체는 설렘이다. 그리고 편안함이다.
「오늘 이세라는 또 한 번 죽었어.」
가까스로 평정을 가장하던 연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청각 뿐 아니라 온 몸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그녀는 태현에게 몰입한다.
「내 기억 속에 살면서 날 흔들던 그 애를 오늘 내 손으로 죽여 버렸거든.」
그제야 연수는 깨닫는다. 비로소 태현이 혼자가 되었음을. 그의 옆에 드디어 빈 공간이
생겼음을. 스물하나, 아직은 어린 그의 발목을 얽어매고 그의 영혼을 휘두르던 추억의
찌꺼기들이 청소되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연수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어정쩡한 낯빛으로
태현을 건너다본다.
「근데 별로 슬프진 않아. 너무 오래 미뤄왔던 일이라 그런가봐. 울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일, 이젠 넌더리나서 못하겠어. 안 할래.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뭐하느라 바보 같이 이렇게 돌아온 거예요?
당신도 나만큼이나 미련퉁이에다 고집불통이야. 이렇듯 단칼에 베어낼 수도
있었는데 뭐 때문에… 날 이토록 조마조마하게 한 거예요?
이건 원망이 아냐. 당신 탓하는 것도 아냐.
단지, 부끄러워서 그래요. 우리의 인연을 믿는 내 자신이 문득 초라해 보이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 때문에. 내가 가진 건 그것뿐이거든요. 그게 전부에요.
「… 무슨 말이든 좀 해봐. 나 슬슬 민망해지려고 해.」
입을 여는 대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태현의 옆으로
다가앉는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쫓던 태현은 훅 끼쳐오는
풋풋한 향기에 흠칫 긴장하며 경직된다. 연수의 희고 자그마한 손이 그의 손등
위로 포개어진다. 보드랍고 따스한 느낌이 태현의 세포 구석구석 스며들고,
그의 암갈색 눈동자가 연수의 형상을 오롯이 담아낸다. 아주 투명하고 정밀하게.
「키스…해도 되요?」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두 뺨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낮고 조용하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절대 대담무쌍해질 수 없는 여자다.
태현은 아슴푸레한 미소를 띠운 채 연수의 어깨를 보듬어 안는다. 유연하게 밀착되어
오는 몸을 더 깊이 품으며 주저 없이 그녀에게 입 맞춘다. 입맞춤을 통해 그녀에게
속죄한다. 자신의 혼돈과 고통에 눈멀어 연수에게 상처 주었던 지난날을 참회한다.
순결하고 굳건한 그녀의 사랑과 믿음을 비웃었던 자신의 무지함을 뉘우친다.
서툴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짭짤한 물기가 묻어나자 태현은 연수가 울고 있음을
감지한다. 동그란 어깨가 그의 품 안에서 가냘프게 소스라친다. 입술을 떼어내는
대신 그는 더 깊숙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고백한다.
「연수야. 우리 이제… 행복하게 사랑하자. 나 정말 그러고 싶어, 이젠…」
연수는 혹시라도 그가 불안해 할까봐 세차게 머리를 끄덕인다.
그가 내게로 왔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를 쉬게 해 주어야지. 웃게 해 주어야지.
무엇보다, 사랑할 수 있도록,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아야지.
그녀는 팔을 들어 태현의 허리를 휘감는다. 그리고 문태현의 인생에서 이세라를
제거해낸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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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죄송죄송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ㅠ_ㅠ;;;
회사를 때려치우던가 해야지, 젠장!!! (지가 늦어놓고 괜히 성질. -_-;;)
그나저나, 제가 내일부터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또 며칠 늦어질 것 같은데.
어쩌지요...? ㅠ_ㅠ;; 죄송죄송죄송....;;;;
휴가 가서 그냥 글만 쓸까요...? -_-ㅋㅋ(그럼 남편이 날 죽이려고 할텐데. 쓰읍.;;)
이하는 감상주신 이뿐분들을 위한 꼬랑쥐. ^^;;
(글도 못쓰는 주제에 감상은 졀라 좋아함. -_-;)
아이싯데루님, 반전을 기대하신다면... 죄송해지잖아요... ㅠ_ㅠ;;
저는 준상 캐릭터를 너무너무 좋아하다 못해 '편애'하기 때문에,
준상이 나쁜놈 못 만들어요~ -O-! 아무튼, 감상 고맙습니다. 늘 힘이 되요. ^^
vkdorkspti님! 감상 감사합니다. 혜련이 무섭지요. ㅋ 여자가 한을 품으면 정말
오뉴월에도 서리가... -_-ㅋㅋ 언제나 열심히 읽어주시는 것, 감사해요. ^^
존나♡님, (아뒤가 멋져요 -O-) 감상 감사드리구요, 저 역시 반갑습니당. ^O^
기대하고 읽어주시는 만큼 좋은 글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진짜..? -_-;)
seru85님. 우선 감상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 써주셨던 말씀 한 글자, 한 글자
가슴 속에 새겨놓았습니다. 일단 너무 길었던 공백기간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르가즘>을
찾아주셔서 감사드리구요- 밤을 새면서까지 제 글을 읽으셨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절대! 절대로 주제넘다느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셔요.
님께서는 제 작품의 독자이시고, 작가는 독자 앞에선 결코 낮아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독자분이건, 독자분이 해주시는 말씀은 무조건 옳은 거니까요. 조심스레 짚어주셨던
여러가지 문제점들, 저 역시 알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고치지 못하고 있네요. 죄송합니다. -_-
하지만 지켜봐주세요. 조금씩 나아지는 글, 보여드릴게요. ^^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badboy1204님. 정성스럽게 남겨주신 감상,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제 소설이 <올가>로도 불려지는군요. ㅋ 우리 남편은 제목이 너무 민망하다며
<오르막길>이라고 부르는뎁.; ㅋㅋ 암튼. -_-;
근데 너무 연수 미워하지 마셔요. ㅠ_ㅠ; (지가 캐릭터 묘사 제대로 못해놓고 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_-*)
그리고 제 문장이 깔끔해졌다니, 대략 감동입니다. -O-! 사실 몇년간 공부하느라 습작을
제대로 하지 못했었는데. 그저 앞으로 더 잘하라고 해주시는 칭찬으로 받겠습니다.
또 분위기와 흐름에 글이 압도당한다는 말씀은 아주 새로운 지적이었습니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은 누구한테서도 들어본적 없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독자분들이 가장 정확한 심판자이고 비평가이심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네요.
지적해주신 여러 부분들, 고쳐나갈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지켜봐주시길 부탁드릴게요. ^^
으아~ 길고 길었던 꼬랑쥐를 마치며 그럼 원랑은 이만 물러갑니다.
더운 날씨에 독자 여러분 모두 건강 유의하세요. ^^*
:: 여기까지입니다.
180편부터는 리얼 베스트방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원랑] 오르가즘 180
「김준상, 충의회 회장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나나?」
언감생심 입에 담지도 못할,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올 만한 질문에 준상의
머리가 번쩍 들린다. 흐트러짐 없이 대열을 갖추고 서 있던 조직원들의 얼굴에도
경악의 빛이 드리운다. 보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는 자체가 준상으로선
돌이킬 수 없는 불명예이자 가장 지독한 형벌인 셈이다. 그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재준과의 거리를 좁힌다. 그리고 재준의 구두코에 이마를 갖다대며, 취하고 있는 저자세와
사뭇 대조되는 목소리를 퍼뜨린다.
「죽여주십시오. 회장님께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용서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혹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소릴 들어야하는가, 준상은
일언반구 묻지 않는다. 재준을 향한 그의 충심과 복종은 절대적이다. 재준은 한동안
물끄러미 준상의 뒤통수를 내려다본다. 그의 말마따나 재준이 진정 그에게 죽음을
명령한다면, 준상은 태연히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눌 것이다. 재준 또한 그의 충심과
복종이 명백하고 무결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불쑥, 자신이 사람 하나를 아주 못 쓰게
망쳐놓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재준은 헛헛한 실소를 뱉어낸다. 그리고 여전히 신발
앞부리에 코를 처박고 있는 준상에게 똑바로 앉으라, 명한다.
「죽여 달라고 말하는 걸 보니까 네 잘못이 뭔지 확실히 알고 있단 뜻인데, 그런가?」
「회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이 같은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것부터 저의 불찰입니다.」
「내가 지금 그것 때문에 이러는 줄 아나. 혜련이가 당한 건 네 책임이 아냐. 그건 저 새끼
잘못이고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니까 좀 더 상의한 후에 결정하겠단 거야.」
재준은 말하는 도중 턱짓으로 한 쪽 구석에 찌그러져있던 혜련의 수행원을 가리켜 보인다.
수 십 개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이동했다가 다시 우르르 재준과 준상에게 몰려든다.
「내가 궁금한 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사실을 나한테 함구하고 며칠을 그냥
흘려보냈는지, 그거야. 네가 충의회 회장이야? 혜련이가 네 여자야? 왜 네 멋대로 일을
처리해.」
「잘못했습니다.」
「며칠 나 없는 사이에 애들 거느리고 이것저것 네 맘대로 주무르는 재미가 쏠쏠했나보지?
혜련이가 다친 건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대충 제쳐놓고, 보스 노릇이나 며칠 더 즐길
작정이었나. 아니면 그새 연화회랑 붙어먹기로 합의가 된 건가.」
「회장님!!」
「조문환 그 새끼가 철석 같이 약속이라도 해준 모양이지. 계집애 제끼고 연달아
이재준까지 제낀 다음에 충의회 회장 자리는 너한테 넘기겠다고 말이야.
하긴, 누구보다 네가 협상 대상으로는 0순위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재준의 이야기에 준상은 말문이 막혀 외마디 소리조차 내비치지
못하고 그저 파열할 듯 번뜩이는 눈으로만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다 무참히 목을 꺾으며
길게 내려온 머리칼 사이로 한 방울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재준은, 상투적인 항변 한 마디 쏘아 올리지 못하는 미련스런 준상의
충성심에 까닭 모를 부아가 치민다.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은 섬뜩한 분노가 재준의
자제심과 이성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고, 재준은 자신의 발치에 엎드린 준상을 무지막지한
발길로 걷어차 버린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 듯 맥없이 나동그라진 그에게 다가가
주먹을 휘두르려하는 재준의 팔을 누군가 억세게 잡아챈다. 재준은 핏발 선 진회색
눈동자를 돌려 뒤를 응시한다. 그를 저지하고 나선 용감무쌍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주혁이다. 혼탁하게 소용돌이치는 재준의 눈망울과 달리 주혁의 검푸른 두 눈은
차분하고 정갈하다. 그 야청빛 한 쌍의 구슬에서 뻗어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재준에게도
전해진 듯, 재준은 가눌 길 없이 마구잡이로 발산해내던 노여움을 슬며시 누그러뜨린다.
두 남자 사이를 메우는 정적은 몹시 생경하고 불안정하다. 얼마간 재준의 팔꿈치를
꽉 움켜잡고만 있던 주혁이 그 특유의 낮고 음울한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회장님, 왜 이러십니까. 회장님답지 않으십니다.」
그 순간 둘러서 있던 조직원 모두는 한결 같이 예상한다. 이제 곧 재준이 준상에게
퍼부어대던 폭언과 구타가 고스란히 주혁에게로 옮겨갈 것이라고.
지금껏 재준의 언행을 중간에서 막아서거나 그를 만류하고 비난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뿐더러, 있었다고 해도 그 자의 결말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맞아서 병신이 되거나,
운 좋게 멀쩡히 살아남는다 해도 조직에서 제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재준의 행동은 그들의 추측을 보란 듯이 뒤집는다. 척박하게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음성은 피로와 자학에 절어 있다.
「… 그래, 내가 너무 흥분했다. 쓸데없이.」
슬그머니 주혁의 손에서 팔을 빼내며 재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조직원들의 낯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의혹과 경탄이 번져나간다. 자신들의 보스에게 분명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으나 그 본질을 파악해낼 순 없다.
주혁은 평소보다 훨씬 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다짐하듯 몇 마디 덧붙인다.
「아가씨께 이런 불상사가 생긴 것은 저희 모두가 긴장을 늦추고 태만했기 때문입니다.
준상이가 곧바로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지 않은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준상이가 회장님 자리를 노리고 연화회와 손을 잡았단 말씀은 터무니없는 오해십니다.
그러니 벌을 내리시려면 저희 전체에게 내려주십시오. 준상이 혼자만 모든 걸 뒤집어
쓴다는 건 너무 부당합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주혁은 재준 앞에 단정히 무릎을 꿇는다. 재준은 뭉클 솟구쳐 오르는
큼지막한 감정의 덩어리를 목구멍 너머로 되삼키며 고개 돌려 준상을 바라본다. 아까처럼
미동 없는 자세로 재준의 영이 떨어지기만을 묵묵히 기다리는 그의 모습에, 재준은 이제
아예 목 놓아 울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 있게 충의회를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겠노라, 앙칼진 어조로 호언장담하던 강태가 준상의 어깨 위로 오버랩 되어 보이자,
재준은 가느다란 한숨을 잇새로 분출시키며 눈을 감는다.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저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있을까.
그 애를 위해 그래야만 한다 해도… 과연 내가 충의회 없이 살 수 있을까.
아니, 충의회 없이도 그 애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그 애를 지켜낸 후에도… 내가 그 애 곁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감겨진 눈꺼풀 사이로 약간의 물기나마 비치진 않을까 걱정이 된 재준은 황급히
시야를 틔우고 헝클어진 낯빛을 수습한다. 어느새 그는 격노에 사로잡힌 성 마른 청년이
아닌 냉정하고 위엄 있는, 암흑가의 우두머리로 돌아와 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젠 연화회와 전면전 돌입이다. 여태까지처럼 얼레벌레 있다간
언제 칼 맞아 뒤질지 모른단 얘기다. 정신 바짝 차려라. 오늘부터 구역 별로 애들 24시간
배치시키고 간부들은 매일 오전마다 동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입을 모아 대답하는 조직원들의 음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재준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휘 훑어본 뒤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향한다. 꿇어 앉아있던 주혁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준상은 다람쥐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재준을 쫓아 나간다.
골수에 사무칠 만큼 모욕적인 죄벌을 받았음에도, 보스를 수행하는 자신의 임무를 한 치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일념이다. 그림자처럼 바싹 따라붙는 준상의 기척에 재준은 흘깃
그의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입술은 터지고 긴 머리카락이 봉두난발 되어 그의 몰골은
흉악하기 그지없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지그시 억누르며 재준은 그에게 건조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우리 집에 가서 한잔 하자.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
「예, 회장님.」
망설임 없이 시원스럽게 딸려오는 준상의 대답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재준의 심기를
미미하게나마 가라앉혀준다. 재준은 또 한번 풀기 없는 한숨을 뽑아내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차에 오른다.
― 피와 흙으로 얼룩진 얼굴을 말끔히 씻어낸 준상은 서둘러 2층의 홈 바로 걸음을
내딛는다.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재준은 약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준상을 기다리고 있다. 희고 기다란 손가락 끝에 연고를 묻혀 준상의 얼굴로 접근하는
그를, 준상은 허겁지겁 만류한다.
「괘, 괜찮습니다, 회장님!」
「가만있어. 약 안 바르고 그냥 두면 흉터 남아.」
준상의 팔을 가볍게 쳐낸 재준이 강압적인 명령조로 이야기하자 준상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길에 상처를 내맡긴다. 얼마간 치료에 열중하던 재준은 마지막으로 준상의
이마에 반창고를 붙여준 뒤 약 상자를 정리해 닫는다. 그리고 바 안 쪽으로 들어가
아래 찬장에서 고급 양주를 꺼낸다. 재준 자신도 여간 해서는 입에 대지 않을 만큼
아끼는 술이다. 준상 역시 그 사실을 익히 주지하고 있기에 그를 말리려 입술을 떼지만
재준이 얼른 선수를 친다.
「뭘 그렇게 안달복달해. 벌 받을 만큼 받았으니까 어깨 펴. 내가 너한테 한 말,
진심 아니란 거 알잖아.」
압니다. 알지만… 그래도 서운했다면… 그 또한 불충이겠지요.
혀끝을 맴도는 그 말을 간신히 삭이며 준상은 짐짓 범상한 말투로 ‘예’라고만 대꾸한다.
「그래도 섭섭했지?」
준상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재준은 물으나마나 한 확인 질문을 던진다.
준상은 차마 아니라고 도리질 치지 못하고 굴곡 없이 곧기만 한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다. 재준은 잠시 말을 끊고 유리잔에 얼음을 채운 뒤 술을 붓는 작업에만
골몰한다. 목구멍이 화끈거릴 정도로 독한 호박색 액체를 한 모금 진하게 들이킨 후
담배에 불을 댕기며 재준은 다시 입을 연다.
「내가 왜 너한테 그런 말했는지, 알겠어?」
「…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절 의심하지 않으신다는 건 압니다.
저를 믿지 않으신다면 지금까지 제가 회장님 곁에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던지 간에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마치 컴퓨터가 입력된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듯 유유하게 펼쳐지는 준상의 언변에
재준은 결국 웃고 만다. 그 언변 덕택에 몇 시간 전 준상에게 내리꽂았던 비수 같은
말들의 진의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성이 일시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준상은 확실히 그 누구보다, 재준을 편하게 해주는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늦었지만 정식으로 축하드립니다. 도련님과 다시 합치신 것 말입니다.」
이젠 여유 있게 장난스런 음색까지 곁들이며 강태와의 재결합에 대해 언급하는 준상.
그러나 재준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어두워진 눈빛을 저만치
밀어내자, 준상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재준의 빈 잔에 술을 따른다. 자기 앞에 있는
잔도 한 가득 채워놓은 다음 결연한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잇는다.
「연화회 그 새끼들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서든 막겠습니다. 절 죽이기
전에는 그 새끼들, 도련님께 손 끝 하나 못 댑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땐 정말 회장님 손으로 저를…」
「김준상.」
엄중한 재준의 음성이 파르스름한 독기로 달아오른 준상의 말허리를 싹둑 잘라낸다.
준상은 멈칫 입을 다물었다가, 연이어 들려오는 재준의 선언에 고꾸라질 듯 기겁하고 만다.
「충의회 3대 회장은 김준상, 바로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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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톤혁 여러분~! 처음으로 인사 올립니다. ^^;
15호 동인지에 참가하게 된 인연으로 이렇게 연재까지 사작하게 됐네요.
모쪼록 재밌게 읽어주시고 많은 비판과 격려 부탁드리겠씁니다.
연재 시작하기까지 너무 많이 애써주신 시삽님(혁이빨래님) 감사합니다. ^O^
[원랑] 오르가즘 181
죄악이란 내면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며, 뜨거운 애무만큼이나 두 사람을 서로에게
묶어놓는 것이라고.
-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중에서 -
「주혁이냐? 아버지다.」
생전 처음 접하는 것처럼 낯설고 까칠까칠한 목소리에 주혁은 흠칫 긴장한다.
노곤하게 풀어져있던 검푸른 눈동자가 또렷한 구(球) 형태를 회복하고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실린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예, 아버지. 저예요.」
말씨는 공손하고 부드럽지만 음색은 그와 딴판이다. 언제라도 감춰둔 칼을 꺼내
겨누겠다는 듯 살벌하게 날을 세운 주혁의 음색에 질린 것인지, 인하는 좀처럼 다시
말문을 트지 않는다. 신경질적인 침묵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은 비단 주혁과 인하뿐만이
아니다. 주혁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버지' 세 글자를 듣자마자 혁수는 초콜릿빛 피부를
하얗게 표백시키며 그를 돌아본다. 다갈색 눈망울 표면에서 부유하던 끈적한 정사의
여운과 다사로운 행복감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휘발된다.
「그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한참 만에 수화기를 통하여 흘러나온 인하의 음성은 조금 더 근엄하고 진중해져 있다.
언뜻 들으면 자애롭고 너그러운, '바람직한' 아버지 상에 절대적으로 부합할 만한
목소리다. 주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시니컬한 조소로 하얀 얼굴을 물들인다.
주혁의 표정 변화에 혁수는 심장 한 쪽이 철렁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
「… 예. 아버지도 건강하시죠?」
「그래. 오늘 전화한 건… 너도 알겠지만 정월 초하룻날이 할아버지 제사 아니냐. 누가
뭐래도 넌 우리 집 장손인데 제사에 빠진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그 날은 네가
집에 좀 와 있어야겠다.」
순간 주혁은 급속도로 치받쳐 오르는 실소를 차단하느라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행여 그 웃음소리가 아버지 귀에 포착되기라도 한다면 주혁은 천지사방 다시
없을 불효막심하고 막돼먹은 인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겨운 비웃음과 황당무계함은 쉽사리 눌러지지가 않아서,
그는 계속 가쁜 호흡만 간헐적으로 뱉어낸다. 알쏭달쏭한 주혁의 반응에도
인하는 개의치 않고 자기 할 말만 이어 붙인다.
「잊지 말고 그 날 저녁에 꼭 집으로 와라. 혁수 엄마한테도 일러두었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그럼, 끊는다.」
달까닥하는 기계음이 고막에 부딪혀오자마자 주혁은 휴대폰이 불에 달구어진
쇳덩이라도 되는 양, 서둘러 은회색 단말기를 귀에서 떼어낸다. 혐오감 어린 그의
낯빛에 혁수는 여전히 안절부절 못한다. 주혁은 흘깃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한 손 안에 쏙 들어올 듯 자그마한 얼굴이 가녀린 인상을 자아낸다. 이따금 주혁은
당장이라도 형체조차 없이 사라져버릴 비눗방울을 지켜보듯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혁수와 시선을 맞대곤 한다. 혁수에겐 그런 주혁의 눈빛이 어떤 불길한 징조보다도
더욱 사위스럽다.
「아버지야. 내일 모레 할아버지 제사라고 잠깐 들어오라고 하시네. 내가 없으면
친척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체면 차리는데 목숨 거는 양반이니까
걱정될 만도 하지.」
애써 심드렁한 어조를 가장하여 지껄이지만 주혁의 음성엔 결코 감추어지지 않는
적대감과 증오가 팽배해 있다. 천륜의 끈으로 맺어진 상대에게 이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주혁에겐 감당하기 벅찬 짐이라고, 혁수는 주제넘은 연민의
눈빛으로 그를 건너다본다. 그리고 그와 흡사한, 불안과 동요를 솜씨 좋게 불식
시킨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렇구나…. 깜박 잊고 있었네. 며칠 전에 엄마가 말씀하셨는데.」
「우리 할아버지 제사지 뭐, 너희 할아버지 제사도 아니잖아.」
단호히 혁수를 가족 테두리 바깥으로 밀어내는 주혁의 발언에 혁수의 표정은
몇 배 더 짙은 암흑의 빛깔을 입는다. 완벽한 자유와 안전을 약속 받는 그 날까지,
장밋빛 미래의 꿈을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철저히 외면하기로 한
둘 사이의 불문율이 갑작스런 전화 한 통에 소리 없이 깨어진다. 그 자체가
혁수에겐 전신에 포개지는 채찍 같은 공포로 다가온다. 쓴 입맛을 다시듯
꺼림칙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주혁 또한 불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짐짓 가벼운 낯빛을 덧씌우며 주혁은 변명하듯 지절댄다.
「너무 신경 쓸 것 없어. 넌 그냥 가만히 평소대로만 있으면 돼.
무슨 일이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지?」
혁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쩐지 그 얼굴에 불신의 기색이 감도는 것
같아 주혁은 혁수의 눈동자 안 쪽 내밀한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읽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집요하고 강렬한 주혁의 눈빛을 피하느라 혁수의 머리는
가슴 쪽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겨진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때보다 열정적이고 전폭적인 어조로 주혁을 향해 들이부었던
'너만을 믿는다.'는 고백이 이토록 나약하고 허술한 것인가. 혁수는 주혁의 손이 닿아올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미동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주혁의 하얀 손이 혁수의 턱을
받쳐 들었을 때 주혁은 차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어수룩한 혁수의 미소와 마주친다.
힘겹게 끌어올린 연 분홍빛 입술이 슬퍼서, 슬프고 안타까워서, 주혁은 허겁지겁
혁수를 자신의 품안으로 데려온다.
― 멋스러운 2층짜리 양옥집 울타리 앞에 차를 세우고 주혁은 얕은 한숨과 함께
담배를 빼어 문다. 몇 달 전까지 먹고 자고 생활했던, ‘익숙해야 할’ 장소가 주혁에겐
추호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감옥처럼 보인다. 아무리 마음을 다부지게 고쳐
먹어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자, 주혁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내고
최대한 냉정해지려 노력한다. 심호흡과 동시에 차문을 열고 내려선 그는 망설임 없이
초인종에 손을 가져간다. 삐 하는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주혁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혁수의 어머니 정숙이다. 제사 일을 도맡아 관장해야 할 종부(宗婦)
답지 않게 꽤나 격식을 차린 옷차림에 화장에도 세심한 공을 들인 모양새가
우스꽝스럽다. 주혁은 잠시 멀뚱한 침묵을 지키다가 싸늘하고 건조한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안녕하셨어요?」
그의 인사 한 마디가 예리한 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숙은 찔끔 몸을 사리며 뒤로
물러설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삼엄한 경계의 눈초리로 주혁을 쏘아보던 그녀는
고개만 까닥해 보인 후 남편에게 주혁의 도착을 알리려 종종걸음 친다.
주혁은 신발을 벗고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선다. 거실 안에는 이미 많은 친척들이
삼삼오오 모여 북적거린다. 그 번잡스런 광경 속에서도 주혁의 눈동자는 혁수의
존재를 가장 먼저 찾아낸다. ‘법률 상’ 사촌동생인 또래 여학생과 담소를 나누는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다. 그 모습이 너무 평화롭고 범상해 보여서
주혁은 때에 맞지 않는 소외감과 시기심을 느낀다. 아무런 일렁임 없이 차분하던
혁수의 눈동자가 우두커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주혁에게 가 닿자마자 히뜩
평형감각을 잃는다. 급작스런 혁수의 표정 변화에 같이 대화하던 사촌 여동생이
주혁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반색을 나타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주혁오빠! 진짜 오랜만이다~ 뭐가 그렇게 바빠서 모임 때마다 안 나와?」
「어, 그래… 잘 지냈어?」
주혁은 억지로 웃음을 피워 올리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넘긴다. 혁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주혁은 그런 혁수의 행동이 매일 한 집에서 마주치는
‘형’을 대하는 동생의 태도로써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리란 생각에 씁쓸한 실소를 깨문다.
거의 1년 만에 만난 친척들은 예전보다 조금 야윈 주혁의 건강을 염려해주기도 하고,
그의 연회색 머리카락을 만져보며 감탄을 늘어놓기도 하는 등 수선을 떤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고 주혁은 여러 어른들, 사촌들과 더불어 정갈하게 차려진 제사상 앞에 선다.
인하가 맏종손으로서 맨 오른쪽에 위치하고 그 옆에 나란히 주혁과 혁수가 자리한다.
동일한 키에 동일한 체격, 양복 색깔까지 똑같은 두 남자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의좋은
형제지간이다. 불경하고 망측한 상상이나 의혹 따위가 끼어들 만한 한 치의 틈새도
엿보이지 않는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향이 피워지고 술이 올라간 다음 절할 차례가
되자, 주혁은 몸을 구부리려 하는 혁수의 팔을 휙 잡아챈다. 당황하는 혁수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무뚝뚝하게 공표한다.
「혁수랑 저는 교회에 나가니까 절은 못하고, 묵념만 올리겠습니다.」
인하의 낯빛이 험악하게 돌변하고 멀찍이 떨어져 제사를 지켜보고 있던 정숙도
기가 차다는 듯 표정이 굳는다. 정숙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아직 유교적
전통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는 집안, 그것도 종갓집 맏며느리 역할 수행에 충실하기
위하여 지성껏 제사를 봉양하는 중인 터에 주혁의 돌출 행동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아니, 무엇보다도 정숙은 주혁의 입술에서 자신의 외아들 혁수의 이름이 발음되어
불려진단 자체가 혐오스럽고 징그럽다. 히스테릭하게 곤두서는 신경을 누르지 못한
그녀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황급히 주방으로 피신한다. 인하는
잠자코 주혁을 쏘아보다가 여러 친지들의 눈길이 의식됐는지 짐짓 근엄하고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주혁과 혁수를 제외한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일제히 엎드려 절을
하는 가운데 혁수는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도대체 왜?
커다란 의문부호가 혁수의 머릿속을 일순간 잠식해 들어온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주혁은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없다. 둘만의 결혼식을 교회에서 올리긴 했지만
일요일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에서 추종하는 신에 대한 외경심이나
믿음도 전무하다. 그런 그가 새삼스럽게 신자의 도리를 내세워 제사의 가장 주요한
의식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혁수는 가려내기 힘들다. 아버지 인하를 겨냥한
일종의 시위인가. 아니면 ‘진짜’ 기독교 신자인 혁수가 확고한 가내(家內) 전통에
짓눌려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막아서는 것인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길지 않은 제사 절차가 마무리되고 입이 떡 벌이질 만큼 푸짐한 저녁상이 날라져 오자,
남자와 여자, 어린 아이들로 나눠진 세 그룹이 저마다 한 상씩 차지하고 앉는다.
혁수는 일부러 주혁과 멀리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인다. 인하는 맏종손답게 형제 및
조카들을 두루 챙기느라 바쁘고, 주혁은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질문 공세에 적당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간결하게 대답해준다. 물론 주혁이 내뱉는 말의 대부분은 거짓이다.
「방학이라 한가하겠네, 주혁이는? 요즘 뭐하니?」
「예, 뭐… 그냥 친구랑 아르바이트 하고 있어요.」
「여자친구는 있어?」
「아뇨.」
「왜? 이렇게 잘생겼는데~ 눈이 높은가봐?」
「좀 그런 편이죠.」
기계적으로 대꾸하는 주혁에 반해 맞은편의 사내는 아주 유쾌한 듯 껄걸 너털웃음까지
터뜨린다. 한동안 그들은 가벼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 기실 청문회와
흡사한 양상을 띠었지만 ―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주혁의 작은 아버지 중 한 명이 혁수를
곁눈질하며 주혁에게 넌지시 묻는다.
「그나저나 혁수 유학 가고 나면 주혁이가 많이 서운하겠어? 정 많이 들었을 텐데….」
묵묵히 수저질에만 열중하던 혁수의 손이 우뚝 정지하고 희미한 떨림을 동반한 채
불안정한 움직임을 이어나간다. 애써 주혁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태연자약한 모습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는 혁수가 주혁을 성나게 한다. 지나친 슬픔은 종종 그렇게,
분노를 불러일으키곤 하는 모양이다. 주혁은 사디즘적인 욕망에 젖어 얼음장 같은 음성을
줄줄 쏟아낸다.
「……서운하긴요. 같이 산지 몇 년이나 됐다고 정이 들어요? 저희 둘, 그런 거 절대
없어요. 전 아직도 쟤가 형이라고 부르면 소름이 끼치는데요, 뭐. 사실, 생일이 한 달
차이 나는 동생… 웃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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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일일이 이름 불러드리지 못해 죄송하구요. -_-;
설이 너무 늦어졌죠? 죄송...ㅠ_ㅠ;;; 다음부터는 빨랑빨랑 올릴게요..(말만...;;;;)
[원랑] 오르가즘 182
「충의회 3대 회장은 김준상, 바로 너다.」
매섭게 번뜩이는 눈동자로 확고한 결의를 표명하던 준상은 순간 얼떨떨해진다.
도무지 말문을 트지 못하는 그와 경쟁이라도 하듯 재준 역시 침묵을 고수한다.
한 쪽 구석에 놓인 오디오에선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경쾌한 힙합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준상은 예의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와락 치미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벌떡 일어나 오디오의 전원을 꺼 버린다. 재준은 여전히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애꿎은 술잔만 내려다본다.
「회장님. 저를 정말 내치려 하십니까.」
한참만에 준상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질문은 재준을 의뭉스럽게 만든다.
천천히 눈을 들어 바라본 준상의 눈빛은 무척 화가 난 사람 같다.
놀라고 경악할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듯 격분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않았기에
재준은 조금 당황한다. 그 이유를 따져 물으려 입술을 떼는 찰나 급격히
고조된 준상의 음성이 그를 가로막는다.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차라리 지금 당장
죽여달란 말입니다!!」
「준상아.」
「회장님 연세가 이제 겨우 스물입니다. 또, 어디 하나 편찮으신 데 없이 건강하십니다.
보스로서의 능력도 누구보다 뛰어나십니다. 그런데…!」
호흡을 멈춘 채 속사포처럼 말을 뱉던 준상은 갑자기 목구멍에 이물질이라도 걸린 양
목소리를 내지 못하다가, 치받쳐 오르는 울음을 가까스로 되삼키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난데없이 후계자 얘기를 꺼내신다는 건, 회장님께서 충의회를…
버릴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뜻 아닙니까.」
부들부들 경련하는 준상의 주먹이 자신의 턱을 갈겨주었으면,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죄책감이 일말이나마 덜어질 수 있다면, 재준은 얼토당토 않은 바람을 품어본다.
절대로 그게 아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충의회를 놓지 않을 것이다, 충의회는
내 인생의 전부이고 이재준 그 자체다, 이런 말들로 그를 안심시켜 줄 수 없는
자기 자신이 가슴 찢어지도록 미안해서 재준은 준상의 눈길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제가 버릇없이 멋대로 오해한 거라고 혼을 내셔야지요!」
끝내 발작적인 외침을 터뜨리며 준상은 그의 표현대로 '버릇없이', 꽉 움켜쥔
주먹을 테이블 위에 내리꽂는다. 그 바람에 유리잔이 기우뚱 넘어져 안에 담겨
있던 호박색 액체가 지저분한 얼룩을 남긴다. 평소 같았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막무가내식 행동에도 재준은 죄인처럼 구부정히 앉아만 있다. 그러다 머뭇머뭇
준상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도저히 재준의 것이라 믿을 수 없는
애잔한 음성으로 속삭인다.
「나는 곧… 죽을 지도 몰라, 준상아.」
차마 귀에 담지도 못할 더러운 말을 들었다는 듯 준상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겹쳐져 있던 재준의 손을 탁 쳐낸다. 이만큼 방자하고 무례한 행동에도 아무런
질타나 호령을 내리지 않는 재준이 한없이 원망스러운 준상이다.
「사실 우리 같은 놈들 목숨 날아가는 거야 순식간이지. 더군다나 지금 내 상황이…
너도 알잖냐, 준상아.」
「지금 상황이 뭐가 어떻단 말씀이십니까! 다른 조직이랑 전쟁하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연화회가 상대하기 힘들 만큼 강한 조직도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
쪽에 승산이 더 많습니다. 어느 쪽으로 봐도 저희가 연화회보다는…」
「강태를 다시 데려왔잖아. 그게 내 아킬레스건이야.」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던 준상이 단호하고 명료한 재준의 한 마디에 꿀먹은
벙어리로 둔갑한다.
아킬레스건이라니. 나의 보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생겼다니.
준상으로선 천지가 뒤집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다.
「네 말대로 어쩌면 내가 내 손으로 충의회를 버릴지 몰라. 둘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한다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러기 전에, 나는 싸울 거다. 누가 뭐래도 아직은
내가 충의회 회장이야. 모든 결정은 내가 해. 나 스스로 충의회를 떠났을 때,
그 때부턴 네가 충의회 회장이니까 날 죽이던지 병신을 만들던지 맘대로 해.
그 전까진 명령에 토 달지 마라.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넌 명령대로
따르면 그만이야.」
말을 시작할 무렵엔 고즈넉하고 잔약하던 재준의 목소리가 점점 냉철하고 엄혹해진다.
어떠한 말대꾸나 반문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준상은 싸하게 아려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정말 하고 싶지 않은 확인 질문을 건넨다.
「결국… 혼자서 다 뒤집어쓰시겠단 말씀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충의회를, 또 저를 버리시겠다고요.
당신께서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으셨을 땐 그리도 기쁘고 뿌듯하더니,
오늘에 와서야 깨닫습니다. 그 때, 당신의 음성이 왜 그토록 부끄럽고
애처롭게 들렸던 것인지를. 이미 당신을 결심하고 계셨군요.
당신의 인생 전부와 강태 도련님을 맞바꾸시기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야.」
재준의 어조는 다시 녹녹하고 따스해진다. 심통 난 막내 동생을 달래는 장성한
큰형 같은 말투다. 준상은 더 이상 재준에게 배신감 운운하며 어리광을 피울 수도,
이럴 수가 있냐며 분개할 수도 없음을 절감한다. 그 대신 그는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에 연관된 상상 한 조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꼈던 계획을 일각의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 먹는다.
「……절대 그러실 순 없습니다.」
「김준상!」
「저도 충의회를 버리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떠나시는 그 순간, 저도 함께 떠납니다.
혼자 책임지실 생각, 일찌감치 접으십시오.」
― 지난밤 격렬한 통증으로 인해 숙면을 이루지 못한 혜련은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난다.
커튼을 젖히자마자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그녀는 살짝 이마를 찡그린다.
흘깃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달력을 응시한 그녀는 오늘이 바로 1월 1일, 새해 첫 날임을
자각하고 휑한 기분이 된다. 묵은해가 가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 깊은 시간,
텅 빈 병실에 홀로 누워 온몸을 뒤흔드는 통증에 이리저리 뒹굴던 자신이 스스로도
딱하고 처량하다. 멋 적은 손길로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친구로부터 전송된 문자 메시지
한 통만 깜박이고 있다. 답신을 보내려 버튼을 꾹꾹 눌러대는 혜련의 귓가에 문 열리는
기척이 닿아온다. 예고 없이 등장한 주인공은 기막히게도 문환이다. 건장한 사내 한 명을
대동하고 나타난 그를 발견하자마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공포와 전율이 혜련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휘어 감는다. 순간 손에 힘이 빠져나가 그녀는 쥐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벌렁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느라 정신이 없는
혜련에게 문환은 한 발짝씩 다가선다. 혜련은 궁색한 보호 본능에 이끌려 뒷걸음질
치지만, 문환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줍고 친절하게도 먼지까지
싹싹 털어 그녀에게 건넨다. 그러나 받아들기는커녕 겁에 질린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보기만 하는 혜련 탓에 머쓱한 얼굴이 되어 휴대폰을 침대 옆 테이블 위헤 놓아둔다.
삐쭉삐쭉 가시처럼 돋아난 적막이 그들 사이를 꽉 메우고 들어찬다. 삼엄한 고요를
깨뜨린 것은 굵직하면서도 정중한 문환의 음성이다.
「많이 회복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가. 죽기 일보직전까지 두들겨 팰 때는 언제고 저토록 태연한
얼굴로 쾌유를 빌다니. 혜련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채
석고상처럼 굳어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불편해하실 것 없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혜련씨께 아무
악감정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처한 상황 때문에 피해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혜련씨께서는 피해자십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게 전부 이재준 때문이라는 사실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제 말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이재준 그 새끼도 죽일 놈이지만 날 이 꼴로
만든 당사자는 너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올무에 걸린 토끼처럼 와들와들 떨어대던 혜련은 어디서
그런 대담함이 솟아났는지 제법 앙칼지게 쏘아붙인다. 상대방을 시르죽게 할 만한
그녀의 눈빛에도 문환은 오히려 눈동자가 깊고 은근해진다. 당신의 고통과 분노를
십분 공감한다는 듯 너그럽고 온화한 낯이다.
「그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혜련씨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이 쪽 세계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남한테 피해를 줄 때가 있는 법이지요. 제 맘도 편치 않습니다, 지금…
저도 사람인데, 어떻게 발 뻗고 편히 자겠습니까.」
문환의 말투가 이젠 노골적인 애원조로 치우친다. 자신의 이득과 영달을 위해 감행한
범죄가 아니었음을, 그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또 자신의 위치에 부여되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회피할 수 없었던 의무였음을 부디 알아달라는 간청이다.
독살스럽던 혜련의 눈빛이 한결 말랑말랑해진다. 그녀는 한동안 침묵만 내세우다가
주저하며 입술을 뗀다.
「그 말하려고 오셨나요?」
경계심과 노기가 걷힌 그녀의 목소리를 접하자 문환의 눈에 생기가 감돈다.
그는 꼿꼿이 서 있는 혜련에게 침대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하고 그녀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후 조심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잇댄다.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은 혜련씨께 진 빚을 갚아드리러 왔습니다.」
「빚이요?」
「이재준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막심한 피해를 드렸으니, 당연히 보상을 해 드려야지요.」
「돈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 새끼는 자기 전 재산이라도 다 줄 것처럼 얘기하지만.」
「돈이라니요, 그렇게 하찮은 걸로 보상이 되나요. 전 이재준처럼 양심 없는 놈은
아닙니다.」
황당해할 것으로 짐작했던 문환이 의외의 반응으로 맞받아 쳐 오자 혜련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를 주시한다. 얽히는 시선을 통해 두 사람 사이엔 비밀스럽고 음모적인
유대감이 형성된다. 혜련은 살짝 웃음을 띠우며 문환에게 담배를 청하고, 그는 스스럼
없이 한 개비를 꺼내 불까지 붙여준다. 뽀얀 연기를 기다랗게 분사해내며 혜련은
문환에게 묻는다.
「그럼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상을 해주시겠다, 이 얘긴가요?」
「물론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요.」
「진심이세요?」
「정초부터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희미하게 서려 있던 웃음이 활짝 피어나며 혜련의 얼굴 전체로 번져나간다.
문환도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와 모종의 눈짓을 주고받는다.
이로써 두 사람 사이의 거래는 간단하고 깔끔하게 성사된다.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예요. 재준씨랑 결혼하는 거. 마침 제가 재준씨 아이도
가졌거든요.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무리한 요구도 아니죠. 근데 그 새끼는…
강태 없인 못 살겠다 하네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조회장님?」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한 가지 뿐이군요.」
「……??」
「진짜로, 강태를 없애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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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핫. 무려 3일만에 올린 놀라운 원랑! -_-V
(혼자서만 뿌듯해서 어쩔줄 모르고 있음. -_-;)
이하는 감상주신 분들께 날리는 꼬랑지!
준타열희님: 반갑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
쵸티우유님: 톤혁이 이 난관을 어찌 헤쳐나갈지, 계속 지켜봐주세요. 감상 고맙습니다^^
babo0822님: 저도 얘네들 계속 붙어있게 해놓고 싶지만... 큭. ㅠ_ㅠ...^^;;;
cy2id님: 제 소설을 글케 열독(?)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오래 기다리시지 않도록
빨리빨리 올릴게요. (과연...? -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원랑] 오르가즘 - 183
누군가를 겨냥해 빈정대듯 지껄이는 주혁을 보며 둘러앉아 있던 가족들의 얼굴엔
제각각 여러 가지 표정이 떠오른다. 얼이 빠져 멍해진 사람, 뭐 저런 애가 다 있냐는 듯
기막혀하는 사람, 어색한 분위기를 곧이 견디지 못해 괜스레 시선을 분산시키는 사람.
정작 주혁은 당당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수저질을 계속한다. 혁수는 격하게
고동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어느 누구
하나 싸늘한 분위기를 수습하러 나서지 못하고 불쾌한 정적만 떠다니는 가운데,
주혁은 슬쩍 곁눈질하여 인하의 기색을 살핀다. 더 이상 가식적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없을 만큼 노기충천한 그는 눈자위가 확 불거져 오른 채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다.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주절대는 주혁을 준열히 꾸짖어
자신의 권위를 세워야 할지, 아니면 이복형제 사이에 저토록 우애가 부족한 것은
전부 내 책임이라며 침통한 낯으로 고개를 숙여야 할지, 인하는 갈팡질팡한다.
그러다 결국 넉살 좋은 웃음으로 어긋난 기류를 쓸어 모으며 화제를 다른 쪽으로
전환시킨다. 인하의 수완 덕택에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함을 되찾았지만
혁수는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마저 버거워 가급적이면 어느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쓴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한 두 사람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혁수는 별다른 끔찍한(?) 사건 없이 고비를 잘 넘겼단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이제 그만 주혁도 갈 채비를 하겠거니 예상하며 그를 돌아본다.
그러나 주혁은 너무나 편안하고 무신경한 태도로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 중이다.
무슨 이유일까, 현재 여기 거주하고 있는 혁수보다 오랜만에 귀가한 주혁이
이 곳과 훨씬 더 안정된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혁수는 아직까지도 이 집의
모든 것이 생경하기만 한데, 주혁은 그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주혁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TV 화면에만 눈길을 붙박고 있다가 격양된 어조로 자신을 부르는 인하의 음성에
고개를 돌린다. 인하는 쿵쿵 발자국 소리를 울려대며 주혁의 옆자리에 앉고
현관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혁수에게 이야기한다.
「혁수야, 어머니께 차 좀 내오시라 그러고 넌 이만 방으로 올라가거라.
네 형하고 할 얘기가 있으니까.」
「예.」
성대가 굳어버린 듯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혁수는 짧게
대답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주방 쪽으로 옮겨놓는다. 주혁은 여전히
시끌벅적한 신년 특집 프로그램에만 골몰하고 있다. 날카로워진 신경 탓에
무척 피로해 보이는 정숙이 차와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나자,
그제야 주혁은 리모컨을 들어 TV 전원을 끄고 인하와 마주본다.
「그래, 아직도 이재준 밑에서 깡패 노릇하고 다니는 거냐?」
기습적인 인하의 질문이 주혁의 청세포를 찌르고 날아든다. 그럼에도 주혁의
눈빛엔 일말의 동요가 비치지 않는다. 마치 아주 흔해 빠진 안부 인사를
전해들은 것처럼 그는 무표정하게 인하의 질문을 받아넘긴다. 그리고 표정
만큼이나 냉랭하고 밋밋한 음색을 공기 중에 실어 보낸다.
「잘 아시면서 왜 물으세요?」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작정이냐. 명색이 검사 아들이라는 게 깡패 밑에서 똘마니
짓이나 하고 다니고, 창피하지도 않으냐? 대체 언제까지 참아줘야 하는 거야.」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자나 깨나 제 걱정만 하고 계시는
것처럼 들려서 좀 거북하네요.」
「아니, 이 자식이…!!」
불쑥 뻗어나가려 하는 주먹을 초인적인 의지로 단속하며 인하는 몇 곱절 팽창된
눈동자를 주혁에게 들이댄다. 그러나 주혁은 흠칫 몸을 사리지도 않고 티끌
만큼이나마 송구스러워하는 기색조차 없다. 그런 주혁의 태도에 인하는 간담이
서늘해진다. 자신의 씨로 잉태되어 자신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유일한' 혈육에게 이토록 극렬한 적개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섬뜩하다.
「제가 아버지께 한 마디 상의 없이 집 나갔을 때도 전혀 신경 안 쓰셨잖아요.
어딜 가서 뒤졌는지 말았는지 관심도 없으시던 분이 갑자기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하시려고 그러니까, 제가 거북할 만도 하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관심이 없어? 내가 너한테 관심이 없어서 널 그냥
내버려 둔줄 아는 거냐?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한테 무관심할 수
있겠어! 이제 와서 하는 소리지만 네가 혁수한테… 참, 부끄러워서
말도 못할 그런 짓을 했을 때도 나는 너를 용서했다. 그러고 나서
네가 또 혁수를 한국으로 불러들여서 데리고 있을 때도, 나는 널
용서해줬어. 그런데…!」
「용서라니요? 그런 말이 입 밖에 나오세요?? 용서를 구해야 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 아닌가요?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혁수를 변두리 정신병원에 가둬놓았던 것만으로도 저는 절대
아버질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뇌성 같은 고함을 질러놓고 순간 주혁은 명치끝에 뾰족한 바늘이 와 닿은 듯
가파른 호흡을 들이키며 입을 다문다. 혁수를 향한 '진실한' 마음을 털끝만치도
노출시켜선 안 되는데, 끓어오른 분기와 서러움에 떠밀려 깜박 조심성을
잃어버린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삽시간에 주혁과 인하 사이의
공기는 퀴퀴한 의심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주혁은 급작스럽고 강렬한
흡연 욕구에 사로잡히고, 인하는 그런 주혁의 심중을 꿰뚫기라도 한 듯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며 가늘게 치뜬 눈으로 오래도록 그를 응시한다.
그리고 또 한번 기습적인 공격 조의 질문을 던진다.
「주혁이는 아직도… 혁수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구나…?」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가 휘청 평형감각을 상실하며 비대칭적으로 일그러진다.
그 짧은 찰나의 움직임까지 인하는 놓치지 않고 포착해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이맛살을 찡그리며 주혁은 황급히 대꾸한다.
「혁수 말대로 한 때의 불장난이었을 뿐입니다, 저랑 혁수 관계는….
저 역시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고요. 단지 자기 아들을 정신병원에
처박아놓으셨던 아버지의 처사를 용서하기 힘들다,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1년 가까이 전혀 모르는 남남처럼 지내다가 이제 와서 저에
대해 걱정해주시는 것 자체가 납득이 잘 안 가네요. 그냥 지금까지처럼
서로 신경 끊고 사는 게 편하지 않을까요? 제가 깡패 짓을 하든지 말든지,
누구 밑에서 일을 하던지, 아버지한테 피해 가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또 아버지가 호출하시기 전에 제가 먼저 아버지,
어머니나 혁수 앞에 나타나는 일도 없을 테니까 안심하시고요.」
따발총처럼 쏟아져 나온 주혁의 장광설이 끝난 후에도 인하는 묵묵히 그를 건너다
볼뿐이다. 대견스레 제어해오던 분노를 펑 터뜨려 버릴 줄 알았던 인하가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주혁은 기하급수적으로 무게를 늘려 자신을 짓이기는 초조감에 다시 입을 연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는 인하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벌떡 일어선다. 거실을 벗어나 현관문 앞에
다다른 그가 팔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살얼음 같은 침묵을 지키던 인하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한 마디 묻는다.
「……혁수한테는 인사 안 하고 가니?」
멈칫 주저하던 주혁은 인하의 말을 듣지 못한 척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 주혁의
귓가에 시니컬한 인하의 음성이 한 번 더 날아와 박힌다.
「사랑해서 죽겠다 울고불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이젠 얼굴도 안 보려고 하네?
참… 요즘 애들은 큰일이야. 너무 감정적이란 말이야. 쓸데없는 환상에만 들떠
가지고… 그러고 꼭 나중에 가서 후회를 해요. 언감생심 꿈 꿀 게 따로 있지.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어.」
―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한 걸음걸이로 집을 나선 주혁은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담배부터 꺼내 피운다. 매캐한 니코틴 성분이 기관지를 훑고 내려가는 느낌에
그는 긴 날숨을 뱉으며 이마의 식은땀을 씻어낸다.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임에도
주혁의 등 언저리는 땀으로 푹 젖어있다. 담배 한 개비를 눈 깜짝할 사이 꽁초로
만든 그가 연달아 또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질척한 상념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팽팽하고 첨예한 대립 속에서 오고간 대화를 거듭 상기해보지만 뚜렷한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주혁의 장래와 신변에 관하여 근심 어린 충고를 늘어놓다가도
그것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엔 곧바로 협박과 저주를 퍼부어댈 것이라,
인하의 행동 패턴을 나름대로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여지없이 빗나가버린 예측 탓에 주혁은 줄담배를 피우며 안절부절못한다.
아까부터 무지근하게 매달려 있는 불안감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의심과 추측만을 계속하다간 운전할 기력조차 소진해버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주혁은 정신없이 휩쓸려 들어갔던 상념의 격랑 속에서 후다닥 탈출한다.
그리고 인하와 어떤 부분에서든 연관되어있지 않은 사람을 떠올린다.
제일 먼저 주혁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들어서는 사람은 문태현이다.
주혁은 일각의 망설임도 없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다. 정월 초하룻날의
밤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텅 빈 정도다. 평소보다 훨씬 빨리 태현의 아파트 앞에
당도한 주혁은 초인종을 누르는 '기본적인' 에티켓마저 깡그리 무시한 채
비둘기 색 철제문 중앙에 달린 손잡이를 홱 잡아당긴다. 예상대로 문은 쉽게
열리고, 제 집인 양 스스럼없이 마루 위로 올라서는 주혁에게 태현은 언제나
그랬듯 고함부터 쳐댄다.
「아~ 진짜 이 새끼, 툭하면 야밤에 쳐들어오고 지랄이야! 전화 한 통 미리
하고 오면 어디가 덧 나냐? 나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 사생활이~!!
매너라고는 어디 가서 다 팔아 먹었나…」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채 고향으로 잠적해버렸던 태현과, 홍콩으로 출장 겸
신혼여행을 다녀온 주혁은 꽤 오랜만에 상봉(?)하는 터이건만, 어제도 만나서
흉허물 없이 찧고 까불었던 마냥 두 사람 모두 편하게 서로를 마주 대한다.
태현의 악다구니를 대충 흘려들으며 아담한 거실 안으로 발을 딛는 주혁의 눈에
연수의 모습이 비친다. 주혁은 우뚝 멈춰서고 소파에 앉아있던 연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수줍은 미소를 건넨다. 태현은 쑥스러움과 염려와 궁금증이
뒤범벅된 눈빛으로 주혁의 하얀 얼굴을 주시한다.
「어, 미안… 이 시간에 손님 있을지 몰랐다.」
얼마간 서먹한 적막이 흐른 후 주혁은 어울리지 않게 주눅 든 음성으로 떠듬떠듬
상투적인 사과 멘트를 읊조린다. 그런 주혁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해서 태현의 낯엔 희미한 웃음이 번진다.
「아니에요, 제가 뭐 손님인가요. 그리고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낮부터 계속
여기 있었거든요. 너무 오래 눌러앉아 있어서….」
약간의 민망함이 서려 있긴 해도 연수의 얼굴에 띄워진 미소는 환하고 깨끗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불과 며칠 전 카페에서 들었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어서,
주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현과 연수를 번갈아 본다. 그러다 문득, 연수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이세라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단번에
수용하기 힘든 사실을 깨닫자 주혁은 고개를 돌려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태현의 고동색 눈동자를 세밀히 관찰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인지한다. 이제야, 드디어, 비로소, 태현과 세라가 헤어졌다는 것.
주혁의 눈동자가 다시 연수에게로 이동한다. 이제 막 18살이 된 소녀의 얼굴은
그가 시기하고 선망할 수밖에 없는 확신과 결의로 찬연히 빛난다. 부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주혁은 연수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말 고맙다, 연수야.」
「예…?」
「세라를 대신해서 얘기하는 거야. 태현이… 다시 웃게 해 줘서 너무 고맙다.」
############################################################################
이번편은 정말 다 쓰고 나서 머리가 한 움큼은 빠진 것 같네요.;;
그런 만큼 글이라도 잘 나왔으면 괜찮을텐데.. 오히려 더 엉망이니..;;
시간에 쫓겨 미흡한 글 보여드리는 것 같아 죄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ㅠ_ㅠ*
그나저나.. 솔로컴백한 장주혁 아저씨... 진짜 너무 멋져지지 않았습니까?! -O-!!
내가 미쳐... 진짜 왜 결혼을 했을까... ㅠ_ㅠ*(또 혼자 쌩쑈..;; -_-^)
암튼. 3일만에 설 올렸다고 자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늦었습니다. -_-;
죄송하단 말씀 안 드릴게요. 지겨우실테니까. -_-;;
이하는 감상주신 분들께 날리는 꼬랑지. ㅋ
준타열희님: 감사는요, 제가 감사하죠.^^* 글구 원타를 괴롭히는 장본인은
바로 저예요. -_-;(죄송합니다.;;)
cy2id님: 보고싶으셨던 톤혁이 드뎌 등장했는데.. 내용이 영~ 그렇죠? -_-;;
아가혁수7님: 일단, 아뒤가 넘 귀여워요^^;(28살 먹은 아저씨한테 아가라니..크하핫^^;)
글구 넘 두려워마셔요. 이제 시작인데.;;(잔인하고 뻔뻔한...-_-+)
감상 고맙습니다~ ^^*
혁이빨래님: 항상 클럽을 위해 애써주시는 것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바쁘실텐데
감상까지 남겨주시고.. 고마워요. ^^*
gpdud2727님: 네네, 꼭 저렇게 해야 직성이 풀린답니다, 저는. ^^;;;
글이 종반으로 치달아가고 있어서인지 많은 분들이 불안과 초조에 떨고
계시는 듯하네요. -_-;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babo0822님: '철 들기 싫어하는' <- 딱 맞는 표현이네요.; 특히 재준이 앞에서 강태는
어리광 심하고 더욱 제멋대로가 되죠.-_-; 강태 캐릭터를 이렇게 묘사해서
인지 강태팬들은 <오르가즘>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기도 해요.;;
초반에도 강태를 너무 괴롭혔던터라..킁. -_-^ 암튼, 감상 고맙습니다^^
JOAHAE님: 재연재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원타를 편애하는 것에 있어선 제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부하고 있습니다마는..ㅋㅋ
기대하시는 것만큼 좋은 글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너무나 감사드리고요..
모두모두 마음 편안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O^
[원랑] 오르가즘 - 184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 된다.
- 공지영, <봉순이 언니> 중 -
당돌하다 못해 무엄한 어투로 준상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지를 표명한다.
절대 재준으로 하여금 모든 불행과 고통을 혼자 떠안게 하지는 않겠다는
굳건한 집념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난 재준의 눈동자에 어릿어릿 물기가 차오른다.
충성심을 넘어서 무모한 자기 헌신으로 치닫는 준상의 집념이 도리어 재준을
나약하게 만든다. 천하무적의 지원군을 얻은 것처럼 든든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준은 자꾸만 울고 싶어진다. 직속 부하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 자각하기도 전에, 투명한 물방울은 재준의 손등 위로 툭 떨어져
내린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입술을 보고 나서야 준상은 재준이 정말로, 자기
앞에서 눈물을 비쳤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머릿속이 폭발할 것 같아서,
누군가 불에 달군 송곳으로 온몸 구석구석을 찔러대는 것만 같아서 준상은
외마디 신음과 함께 구성진 흐느낌을 토해낸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입니까. 회장님이 제 앞에서 우시다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차라리 아까처럼 개 패듯이 때리십시오! 이런 모습을 뵙느니 회장님 손에 맞아죽는
게 낫겠습니다!」
준상은 철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꺽꺽거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재준은 미세한 진동까지
올올이 우겨 넣으며 눈물을 침묵으로 가장한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되직한 흐느낌이
잦아든 뒤, 준상은 해끔해진 얼굴로 재준을 곧게 바라본다. 실팍해 보이는 눈동자가
파르족족한 빛으로 번쩍이자 재준은 그 눈을 맞받아내기 힘겨워 이내 고개를 수그린다.
이어서 흘러나온 준상은 목소리는 개운하면서도 어쩐지 데면데면하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4년 전 그 날 말입니다.」
잠시 말을 중단한 준상이 손을 움직여 엎어진 글라스를 바로 세우고 그 안에 가득
술을 붓는다. 재준의 잔에는 호박색 액체가 그 양을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담겨 있다. 재준은 얼핏 미소를 띠우는 듯 하며 준상에게 담뱃갑을 내민다.
찰칵 라이터 켜는 소리와 동시에 준상은 끊었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룸살롱에서 웨이터 할 때였는데, 손님이랑 시비 붙어서 싸우는 바람에
엄청 깨지던 중이었죠.」
「그래, 나도 기억난다. 그 때 네 눈빛, 잊혀지지가 않아.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삐딱하게 올려다보는 게 얼마나 섬뜩하던지….」
고즈넉하게 아래로 깔리는 준상의 음성을 잘라먹으며 재준은 웃음기 어린 말투로
맞장구를 친다. 핼쑥하게 꺼져 있던 준상의 낯에도 희미하지만 다사로운 미소가
스며든다.
「그 때 회장님께서 저한테 뭐라고 하셨는지, 그것도 기억하십니까?」
「내가 뭐라고 그랬는데?」
「제 눈빛이 꼭 시한폭탄 같다고 하시면서… 마음먹은 일은 뭐든지 목숨 걸고
해 낼 거라고, 그리고는 절 밑에 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랬었나? 별 걸 다 기억하네.」
「……그럼 이건 아십니까?」
뚱딴지같은 준상의 반문에 재준은 진회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확대시키며 대답을
채근한다. 준상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로 쑥스러워하다가 천천히 입술을 뗀다.
「누군가에게 칭찬 듣고 인정받은 건…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냥 제 눈빛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을 뿐인데, 그 한 마디가 저한테는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 나를 가까이 두려는
사람이 있구나. 회장님은 제게 그런 분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고아원에 있을
때도, 학교 다닐 때도 언제나 저는 문제아 취급만 받았고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그런 사람이었는데… 정말 남은 거라곤 악 밖에 없었을 때… 그 때
회장님이 저를 데려가 주신 겁니다. 너 같은 놈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 같은 놈이 필요하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어딜 가시든, 뭘 하시든 간에 회장님만 따라다니기로
말입니다. 사람을 죽이라면 죽이고, 목숨 걸고 싸우라면 대가리가 빠개지는
한이 있어도 싸우겠다고…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저번에도 잠깐 말씀 드렸다시피, 회장님을 모시는 게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저는 충의회 이재준 회장님이 아니라, 4년 전 저 '김준상'이란 놈을 처음으로
알아봐 주신 그 분께 충성을 맹세한 겁니다. 회장님께서 충의회를 버리신다면
저도 버립니다. 저는 충의회 회장 자리 따위, 억 만금을 준대도 관심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버리신 곳을 제가 왜 지킵니까? 그럴 이유가 저한테는 없습니다.
회장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해서라면 저, 충의회 뿐 아니라 나라를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저한테도 부모라는 게 있었다면 부모마저도 배신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끝까지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회장님.」
결국 준상은 허리를 꺾으며 무너져 내리고 또 한 번 재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용감무쌍하게 죽음을 청하던 몇 시간 전과 사뭇 이질적인 모습이다.
목숨보다 더 귀중한 신앙을 사수하고자 발악하는 독실한 신자처럼, 준상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간원하고 애걸한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길게 흐트러져
내려와 그의 얼굴을 뒤덮는 바람에 재준은 그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준상이 울고 있어나, 적어도 울음을 참고 있는
중이란 사실을.
재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준상과 키를 맞추어 몸을 굽힌다. 비록 한 쪽 뿐이라고는
하나 재준이 무릎을 땅에 댔다는 것만으로도 준상은 졸도할 듯 소스라친다.
재준의 낯빛은 준상을 능가할 정도로 처절하고 애잔하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평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묵직함과 차가움을 자랑한다.
「김준상.」
「………」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 진심이냐?」
갑자기 귀머거리가 되셨습니까. 아니면 백치가 되신 겁니까.
준상은 도무지 목소리가 나와 주지 않아서 가슴 속으로만 절규한다.
그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 본 것처럼 재준은 무겁게 고개를 주억인 다음,
다시 입을 연다.
「그렇다면 나를 이어서 충의회 회장 자리에 올라. 그리고 나대신… 강태를
지켜. 내가 없어진 다음에도 그 애가 꿈을 이룰 수 있게…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않게 도와줘, 준상아. 그 일을 해 줄 사람은 너 밖에 없다.」
간신히 망막 한 가운데 붙잡아놓고 있던 눈물이 홍수처럼 터져 나오며 준상의
두 뺨을 흠씬 적신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너무하십니다, 회장님….
그 한 마디조차 언어로 변환시켜 발음해낼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진 자신의
성대를 저주하며, 준상은 게걸스런 흐느낌만 연속적으로 뱉어낸다. 그런 그의
두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면서, 재준은 대견스레 고수하던 심상한 음색을
단박에 걷어차 버리고 설움에 북받친 목소리를 쥐어 짜낸다.
「나도… 준상아, 나도… 강태랑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런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 만큼 강할까…? 아닐 거야, 아닌 것 같아. 기적처럼 행운이
따라서 해피엔딩이 된다면 너무 고맙겠지만, 그건 힘들잖아….
그래서 부탁하는 거다. 너 아니면 아무도 못해. 그러니까 거절하지 마라,
준상아. 이 빚은… 내가 죽은 다음에 지옥 가서 전부 다 벌 받을 테니까…
아니, 지옥이라는 게 없다면 다음 세상에 내가 네 개로 태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꼭… 반드시 갚을 테니까… 준상아, 제발… 내가 없어도 강태
죽지 않게… 날 잊을 수 있게… 도와줘. 그래야 내가 이 세상에 왔다 간
의미가 있게 되는 거잖아. 무슨 말인지… 넌 이해하지, 준상아…?」
네, 이해합니다. 골수에 사무치도록 절절히 이해가 되어서 괴롭습니다.
당신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서, 도리질 칠 수 없어서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습니다.
이럴 수도 있는 겁니까.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비운다는 것.
정말 그럴 수도 있는 거로군요. 당신은 끝내, 강태 도련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려 하시는군요. 이제껏 당신 하나만을
유일한 지침으로 떠받들며 여기까지 쫓아온 저마저도.
「……약속하겠습니다.」
너무 울어댄 탓에 꽉 잠겨버린 음성을 돋우어 준상은 재준에게 다짐해준다.
그것은 일종의 체념이고 항복이다. 재준의 사랑이 이성의 영역에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절대적 차원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도련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마십시오.
회장님 없이 도련님께서 얼마나 오래 버티실지, 그건 저도 어쩔 수 없는
문제니까요.」
― '진짜로 강태를 없애야죠.'
억양의 굴곡 없이 일직선으로 흘러나오던 문환의 목소리가 혜련의 귓전을 맴돈다.
죄책감이나 망설임 따위는 일절 찾아볼 수 없던 그 음성이 되살아나 묘하게
혜련을 자극한다. 그녀는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어제 저녁
문환과의 만남을 회상한다. 유령처럼 불쑥 들이닥친 문환은 혜련에게 이런 짓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다가 교묘히 안색을 바꿔 그녀로 하여금
재준을 향해 더욱 거대한 분노와 앙심을 품도록 부추겼다. 혜련 역시 그러한
문환의 속셈을 간파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문환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그녀를 이용하려 하는 것을 그녀 또한 명확히 알지만, 혜련은 화가 나기보단
구미가 당겼다. 강태를 없애겠다는, 그럼으로써 혜련이 원하는바 재준과의
결혼을 성사시켜 주겠다는 문환의 제안이 썩 만족스럽기도 했다. 흥미를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문환은 재차 열성적으로 혜련을 설득했고, 혜련은 주저하는 듯
하다가 협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둘 사이엔 공범자들끼리
나누어 갖는 음험하고 끈적끈적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문환은 미더운 얼굴로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병실을 나섰고, 혜련은 그가 돌아간 뒤에도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며 뒤척였다. 그녀의 가슴 한 구석에 마지막 잔재해 있던
양심의 조각이 그녀의 결심을 무효화시키려고 야단법석이었기 때문이다.
선잠을 자고 깬 아침에도 혜련은 여태껏 마지막 양심의 소리를 차단해내지
못하여 갈등하고 있다.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 그것이 모욕당하고 상처 입은 내가 진정 보상받는 길인가.
잔인하고 치밀한 복수가 완성되고 나면 내 마음은 과연 후련해질 것인가.
마구잡이로 튀어 오르는 상념들이 혜련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그녀는 초조한
기색으로 두리번거리며 담배를 찾지만 있을 리 없다. 순간 짜증이 솟구쳐 무릎
위에 가지런히 덮여 있던 담요를 확 팽개쳐 버린다. 답답한 가슴을 그대로 견디지
못한 혜련은 찬바람을 들이킬 요량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한 겨울 칼바람에
그녀의 뺨이 얼얼해질 때 즈음, 병실 문이 열리며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새의 준상이
등장한다. 혜련은 흠칫 긴장하면서도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며 초연하게 그를
맞이한다. 준상 역시 그녀에게 수가 틀려 있는 중이지만 어디까지나 아랫사람으로서
깍듯한 예의를 잊지 않는다.
「밤새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아가씨. 회장님께서는 간부들과 회의가 있으셔서
저 혼자 뵈러 왔습니다.」
「네, 알았어요.」
혜련은 짤막한 대꾸로 준상의 인사를 받아준 뒤 기다렸다는 듯 담배를 청한다.
준상은 군소리 없이 그녀에게 한 개비를 건네고 불을 붙여준다. 그녀가 담배의
길이를 줄여나가는 동안 준상은 넉살 좋게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만, 혜련은
그저 뚱한 표정이다. 머쓱해진 그는 괜스레 헛기침을 뱉으며 어색한 정적을
몰아내려 애쓰다가, 조심스레 혜련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아가씨, 외람되지만 몇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재준 씨랑 강태 얘기라면 그만 둬요. 어제도 말했지만 이건 준상 씨가 나설
일 아니에요. 내 문제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무 소리 말아요.
주제넘게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라고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대화의 물꼬를 막아버리는 그녀가
준상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든다. 득달같이 밀어닥치는 불쾌한 침묵 상태가
그녀와 준상을 멀찍이 갈라놓는다. 어떻게 다시 말을 붙여야 할까, 요모조모
궁리해보는 준상의 귀에 차분하면서도 한결 소탈해진 혜련의 목소리가 닿아온다.
「준상 씨, 나 잠깐 휴대폰 좀 빌려줄래요? 내 건 배터리가 나가서요.」
「아, 예. 여기 있습니다.」
퍼뜩 혼자만의 생각에서 헤어 나온 준상은 재빠른 동작으로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준다. 혜련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한 가지 더 그에게 청한다.
「그리고 정말 미안한데, 나 담배 몇 갑만 사다줄래요? 어제도 하루 종일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 내가 지금 돈 가진 게 없어서 그러니까 부탁 좀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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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하루 앞둔 토요일 오후. 댄스배틀인지 뭐시깽인지 하는 것에 우리의
장주혁 아자씨가 나온다는 급보를 받고(-_-;) 일찌감치 TV 앞을 점령했습니다.
남편이 <웃찾사 베스트>를 보겠다며 지랄지랄했지만.. 간단하게 씹어버린 뒤,
유유자적하게 강냉이를 오기작거리며 TV 앞을 지켰지요. 푸핫-_-V
투덜투덜하던 남편, 곧 얌전해지더니 노트북을 켜고 무언가를 하더군요.
신경 안 쓰고 이제나저제나 장주혁아저씨가 나오려나- 쓰잘데기없이 나와서
설쳐대는 여가수들에게 간간이 짜증을 내가면서-_-;;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꽃미남 그룹, 동방신기가 나오더군요. 하핫^^;
관심 가득한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열심히 감상하고 있는 저에게, 느닷없이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
"자기야, 쇼타콤이 뭐야?? O_o?"
이게 또 팬픽 읽는다고 여기저기 돌아댕기다 그 단어를 봤구나 싶었습니다.
(제 남편은 팬픽 졀라 좋아합니다. 정작 저는 팬픽 거의 안 읽습니다;;)
"쇼타콤? 어리고 예쁜 남자 밝히는, 뭐 그런 걸껄? 나도 정확히는 몰라."
동방신기 춤 감상하느라 정신없어서 대충 대답했습니다.-_-;;
사실 아직도 '쇼타콤'의 정확한 뜻이 뭔지 잘 모릅니다. ㅋ
"아아~ 너 같은 사람 말이지? 나이 먹어서 영계 밝히는 거."
......................-_-++++++++++++++++++++
지 마누라더러 쇼타콤이라는 넘은 지구상에 이넘밖에 없을 겁니다.-_-+
그담날(추석당일) 저희 친정에 가서 같이 밥먹는데 제 여동생한테 이러더군요.
"처제야!(<- 이렇게 부르면 지가 귀여워보이는줄 아나봅니다.-_-+)
언니의 쇼타콤 증세가 언제쯤이면 좋아질까? 처제는 벌써 정신차리고
철들었는데... 언니란 사람은 어째 철들 생각을 안 해~ 그치 않아??"
그러면서 쇼타콤이 뭔지 모르는 저희 식구들에게 아주 자세히~ 설명을
해주더이다. 제 동생들은 웃겨서 뒤집어지고, 저희 부모님...쪽팔리셔서(-_-*)
사위 앞에서 고개를 못드시더이다. -_-;;;
찌질한 시키!!! 이런식으로 복수를 해?! ....두고보자...! -_ㅠ;;;
하핫..^^; 모두들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 저처럼 쪽팔리는 불상사가 없으셨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연휴 후유증 없이 힘차게 하루하루 보내셨음 좋겠네요.^^*
이하는 감상주신 분들만 읽어주심 되겠습니당. ^^
ㅁ 스말킬러님: 처음 뵙는듯 하네요^^ 제 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O^
ㅁ cy2id님: 님께서도 메리추석 보내셨는지..? ^^
ㅁ 준타열희님: 행복한 오르가즘.. 저도 글케 만들고 싶지만.. 킁-_-^
ㅁ gpdud2727님: 몰입까지 할정도로 열심히 읽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ㅁ 쵸티우유님: 인하 캐릭터 음울하죠-_-; 저도 이 캐릭터 쓸때는 왠지 음흉해지는
그런 느낌이 마구마구..-_-ㅋ 님께서도 추석 잘 보내셨나요~? ^^;
ㅁ 아가혁수7님: 아아- 혁수가 22살 때면.. 한창 이쁠 때니까 '아가'라는 단어도
그다지 이상스럽지는 않았겠군요. 캬캬;; 그러나 이젠 제법 아자씨 태가 나는..^^;;
암튼, 님께서도 추석 잘 보내셨길 바라구요- 담편도 빨리 올리겠습니다^^(진짜??-_-;)
ㅁ babo0822님: '아자씨'란 호칭이 너무하다굽쇼?-_-ㅋ 게다가 제가 결혼했다고
심술부리는 거라굽쇼?? 크하핫-_-;(사실은 맞습니다.. -_ㅠ;;)
많은 독자분들이 세라 캐릭터를 그리워하시는 것 같네요. 세라 죽였을 때 받았던
무수한 협박 메일과 쪽지들이 되살아는듯한..-_ㅠ; 그래두 연수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안 어울리는 애교.. 킁-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원랑] 오르가즘 - 185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용감하게 사랑해야 하오. 도둑이나 앞날의 계획, 천상과 지상의 어떤 율법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랑해야 하오.
- 산도르 마라이, <유언> 중에서 -
주혁의 감사 인사를 들은 연수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든다. 이제 겨우 세 번째 마주치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들키기가 못내 면구스러운 그녀는 일부러 화사한 함박웃음을
퍼 담는다. 세라는 저렇게 웃지 않는데, 주혁은 뒤늦게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세라의 기억에 바보처럼 미안해진다. 기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마뜩찮은지,
태현은 팔팔하고 쾌활한 음성을 돋우어낸다.
「아~ 이 새끼는… 연수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 게 무게 잡고 지랄이야.
연수가 민망해하잖아~」
「아, 아니에요….」
연수는 손을 들어 태현을 제지하고 여전히 부끄러움 타는 낯으로 주혁의 안색을
살핀다. 그녀의 시선에 주혁은 갑자기 헤벌쭉 웃어 보이고, 갑작스런 그의 표정
변화가 당황스러워서 연수는 어리둥절 한다. 그런 연수가 어릴 적부터 꼭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여동생처럼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지자, 주혁의 미소는
더욱 산뜻해진다.
「그렇게 어려워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자. 저번에 통성명도 하고 차도 같이
마셨잖아?」
「어, 뭐야? 둘이 전에 만났었어?」
태현은 고동색 눈동자를 커다랗게 치켜뜨며 놀라움을 표시하고, 주혁은 거의
탁구공과 흡사한 크기로 확대되는 그의 눈이 신기해서 피식 실소한다.
「그래. 너 제주도에 짱 박혀서 꼬장 피우고 있을 때 내가 너 만나러 왔었거든.
그 때 얘가 대문 앞에서 오매불망 너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더라. 엄동설한에
벌벌 떨면서. 넌 애새끼가 왜 그렇게 못 돼 먹었냐? 순진한 소녀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고. 연수야! 이 새끼가 너 고생시킨 거 두고두고 울궈먹어라,
알았지?」
주혁의 말투엔 장난기가 다분하지만, 태현은 연수가 그와 같은 행동을 했다는데
경악하고 연수는 태현에게 결코 공개하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치부가 까발려진
것 같아 황망해 할 뿐이다. 주혁은 두 사람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고 싱글벙글
재밌어 죽겠다는 낯이다. 원망스레 자신을 흘겨보는 연수의 눈길에도 그는
말려 올라간 입 꼬리를 그대로 방치한 채 반 옥타브 고조된 음성으로 재잘댄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그만큼 애간장 태웠으면 공주 대접 받아야지.
게다가 풋풋한 여고생이 늙다리 대딩을 사겨주는데. 안 그래?
문태현 이 새끼가 철은 없어도 착하긴 하니까 앞으로 잘해줄 거야.」
「야, 늙긴 뭐가 늙어! 아직 꺾어지지도 않았구만. 괜히 나만 나쁜 놈 만들고 있어!」
「지랄하네. 너 잘못하면 원조교제로 신고 들어간다? 가뜩이나 요즘 대딩들 사이에서
여중고생들 하고 원조교제하는 게 유행이라던데. 연수야, 이 새끼 말 안 들으면
오빠한테 바로 연락해라. 곧장 신고 들어가마.」
「이 새끼가 진짜 못하는 말이 없어!!」
'원조교제'라는 단어가 풍기는 찝찌름한 느낌에 태현은 불리해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지른다. 주혁은 배가 근질거려 못 참겠다는 듯 킬킬거리고, 연수는
수줍은 홍조를 띠우면서 배시시 웃는다. 시시껄렁한 농담 몇 마디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는 태현이 천진난만해 보여서다. 이제 그만 자리를 비켜주어야겠단
심산에 연수는 소파 한 쪽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둘러메고 체크무늬 목도리를
칭칭 휘둘러 감는다.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현관 쪽으로 향하는 그녀를
쭐레쭐레 따라 나간 태현이 다정스런 손길로 목도리를 고쳐 매주자, 연수는
말갛게 미소한다. 그녀를 배웅하고 다시 거실로 들어서는 태현에게 주혁은
익살기가 완연히 가신, 둔중하고 진지한 음색을 들려준다.
「이제 좀 편하냐, 문태현?」
태현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심하다가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미세한 일렁임조차 없이 똑바로 자신을 향해 뻗어있는
주혁의 눈빛에 태현은 멋쩍기만 하다. 어째서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인지, 무슨 결심을 가지고 연수에게 돌아온 것인지 주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런 것 따위는 하등의 의미나 영향력도 없다고, 단지 네 마음이
편안해졌다면 그걸로 끝이라며, 주혁은 검푸른 눈동자를 통해 이야기한다.
그래도 무슨 말이든 들려주어서 주혁을 안심시켜야겠단 생뚱맞은 배려심에
태현은 도톰한 입술을 떼어놓는다.
「난 앞으로… 연수 더 많이 사랑할 거야. 다시 열심히 배우려고 해.
사랑이라는 거 말이야. 세라한테 전부 다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래서 돌아왔어. 다시 처음부터 배우려고. 연수랑 같이.」
「그래. 이제 네 앞에서 세라 얘기 편하게 할게, 나도.」
이젠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네 가슴이 욱신거리지 않을 테니까.
나도 아무런 통증 없이 그 이름을 가끔씩 꺼내 보일 수 있겠구나.
그리고 이쯤 해서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네가 우는 모습을
차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미련스레 미뤄두고 있었던 말을.
「미안해, 같이 울어주지 못해서. 너 혼자서 이겨내도록 내버려뒀던 것…
정말 미안하다, 태현아.」
주혁으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태현의 표정이 기우뚱 일그러진다.
고동색 둥그런 눈망울이 적확한 대답을 찾지 못해 바쁘게 동요하고, 붉은
입술 안 쪽에선 여러 가지 어휘들이 제각각 굴러다니다 마침내 포근한
미솔 그 모두를 싸안아 버린다. 그리고 어릿한 슬픔이 감도는 서먹한
기류가 단숨에 맥을 못 출 정도로 명랑한 음색을 퍼뜨린다.
「그건 됐고, 재준이는 좀 어때? 그 여자랑은 계속 같이 사는 거야?」
제법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시키는 태현 덕택에 주혁도 묵직한 얼굴빛을
한 꺼풀 벗겨내며 대꾸한다.
「아니, 그게… 요즘 재준이가 일이 좀 꼬였어. 사실 강태랑 둘이 다시 만났거든.」
「진짜? 언제부터?」
「크리스마스 때쯤부턴 것 같은데 자세한 내막은 나도 잘 몰라. 근데 너도
알겠지만, 강태가 지금 공식적으로는 다른 조직 회장의 정부잖아.」
「정부는 개뿔… 난 그 소리 들으면 역겹더라. 지들이 무슨 중세 유럽
귀족이야? 재수 없게 정부 어쩌고… 하여간 그래서?」
「그래서 그 조직 회장이 재준이랑 같이 살던 여잘 건드렸어. 다행히 많이
다치진 않았는데, 중요한 건 이제 대놓고 붙게 된다는 거지. 재준이가
먼저 어떤 행동을 하진 않을 것 같은데… 만약 그 쪽에서 싸움을 걸어
온다면 피할 명분이 없어. 게다가 재준이가 먼저 강태를 데리고 왔으니,
다른 조직에 협조를 구할 수도 없는 실정이야. 따지고 보면 공조 계약을
위반한 건 재준이란 말이야. 그런 와중에 선뜻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
조직은 없어. 또 이 쪽 세계에서 재준이 평판이 썩 좋은 것도 아니고.」
「야, 평판 같은 게 주먹세계에서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거긴 돈 놓고
돈 먹는 곳인데. 내가 평범한 대학생이긴 해도 고등학교 때부터 재준이랑
친해서 알만큼은 알아. 충의회는 현재 수도권에서 제일 큰 조직이야.
판검사들도 새로 부임했다 하면 줄줄이 재준이 불러다가 인사 나누고 안면
트고, 뭐 그런다고. 붙게 된다는 그 조직이 어느 정돈지 몰라도, 재준이한테
안 돼. 장주혁 넌 충의회 이사란 새끼가 어떻게 나보다 더 상황 파악이 안 되냐?」
「네 말도 일리는 있는데, 상황이 예전하고 다르니까 하는 소리지.」
「다르다니, 뭐가?」
「일단 강태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잖아. 걔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만 해도 우린
많은 힘을 써야 해. 반면에 상대는 그럴 필요가 없지. 십중팔구 사생결단으로
덤벼들 테고, 독이 오를 대로 올랐어. 근데 우리는…」
주혁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허리를 끊자 태현은 양미간에 굵은 주름을 새겨 넣으며
그에게로 바싹 다가앉는다. 주혁은 느릿느릿 담배에 불을 붙여 태현에게 건네고
제 입에도 한 대 빼어 문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충의회 내부 분위기가 험악해.」
「뭔 소리야~ 전면전이 코앞인데 분위기 살벌한 게 당연한 거 아냐?」
「그게 아니라… 충의회 조직원들 사이에서 재준이한테 불만이 많은 것 같아.
준상이한테도 그렇고. 어젠가 그저껜가, 재준이가 애들 전부 집합시켜서
몇 마디 했거든. 그러고 나서 간부들끼리 잠깐 모여서 얘기를 했는데…
나서서 이런저런 불만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뭔가 쌓인 게
많은 느낌이었어. 분위기가 굉장히 찜찜했어.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거든.」
「재준이한테 이런 얘기해봤어?」
「아니, 아직. 조만간 하려고. 만약 내 느낌이 맞는다면…」
「그러면?」
「이 싸움에서 재준이는 못 이겨. 절대로.」
― 책상 앞에 앉아 화첩을 들여다보고 있던 혁수는 자꾸만 휴대폰 쪽으로
이동하는 눈길을 제어하지 못한다. 주혁이 돌아간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단 사실이 혁수를 영락없는
어리광쟁이로 몰아간다. 한편으로는 걱정스럽다. 주혁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서 혼자 그 분노를 삭이기 위해
어리석은 자학에 절어있는 것은 아닐까.
답답해진 혁수는 휴대폰을 들고 주혁에게 문자메시지를 띄운다. 그리고
다시 화첩 속 그림들에 집중하려 애쓰지만, 갈라진 마음은 좀처럼
합쳐지지 않는다. 결국 그는 두툼한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지하에 있는 작업실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던 혁수의 시야에,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독서 중인 정숙의 모습이 잡힌다. 그녀 또한 혁수의
기척을 감지했는지 평소보다 낮게 침전된 목소리를 끄집어내 그를 부른다.
「혁수야, 잠깐 이리 와서 앉아 볼래?」
혁수는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그녀와 마주보고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다. 정숙의 얼굴은 무척 피로하고 우울해 보인다. 은테 안경 너머에서
혁수의 것과 똑같은 빛깔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축 늘어진 느낌이다.
항상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젊음과 아름다움을 과시하던 그녀가 지금 만큼은
쇠약한 초로의 노파 같다.
「피곤하지? 제사 지내느라.」
「저야, 뭐… 엄마가 피곤하시죠, 손님 치르시느라.」
깍듯하고 순종적인 혁수의 어조에 정숙은 흐뭇한 듯 다사로운 웃음을 피워낸다.
희고 보드라운 손을 내밀어 혁수의 손을 꼭 감싸 쥔 그녀는 돌연 끓어오르는
모정을 억누를 수 없는지, 애처로운 음성으로 부르짖는다.
「그래, 착한 우리 아들… 엄마한테는 혁수뿐이야. 엄마는 혁수 하나만 보고
사는 거야. 네 친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엄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도
너 하나 보면서 이 악물고 견뎠어. 지금 네 아버지랑 재혼할 때도 여기저기서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렸지만, 엄만 너 하나만 생각하면서 그런 거 다 무시했어.
엄마 혼자서는 널 풍족하게 키울 수 없으니까… 귀하게 자란 내 아들, 어떻게
고생 시키겠니… 우리 혁수, 원하는 대로 공부 시켜주고 필요한대로 뭐든 다
해주고 싶어서… 정말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엄만 사람들이 뭐라 하건
신경 안 썼어. 혁수야, 엄마 마음 알지?」
미지근한 덩어리가 목구멍 너머로 뭉클 치받쳐 오르자 혁수는 입술을 앙 다문 채
필사적으로 그것을 되삼킨다. 입을 벌릴 수 없어 머리만 위 아래로 까닥거리는
그의 귓가에 정숙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한 때 혁수가 엄마 가슴에 상처 주기도 했지만, 엄만 벌써 다 잊었어.
우리 혁수, 이제 유학 가면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학위도 따고, 큰 화랑도
하나 열고, 그럴 테니까. 그러다 나중엔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혁수 앞길은 이제 탄탄대로야, 그렇지? 우리 혁수, 열심히 할 거지?」
「……네, 엄마.」
「그럼, 그래야지~ 열심히 해서, 아버지 실망시켜 드리지 말아야 해.
이제 이 집 아들은 누가 뭐래도 혁수 너니까….」
##################################################################################
벌써 9월의 마지막 주이군요~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잘 갑니다. -_-*
모두들 한 달 마무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건강 조심하시구요~ ^^*
이하는 감상주신 분들만 읽어주세요. ^^;
ㅁcy2id님: 어머님이 무척 터프하신듯^^;; 저도 자주 뵈어서 너무너무 좋네요~ ^O^
ㅁ혁이빨래님: 고생 많으신 우리 시삽님! 감상 고맙습니다- 제 남편, 그간 받아본
리얼소장본들.. 저보다 훨씬 빨리 독파했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한다는 소리가,
"자기야~ 자기가 쓰는 것보다 훨씬 재밌다~~ 이거 또 언제 나와??"...-_-+++
보면서 울고불고 지랄 난리도 아닙니다. 참내. -_-;;
ㅁ준타열희님: <오르가즘>...오래됐지요.-_-; 제가 잠수했던 기간만해도 5년 가까이
되니까 말입니다.;; (자랑이다..-_-+) 일케 오래됐는데도 변함없이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할 따름이죠. 글구 제 남편 같은 사람.. 같이 사는 저도 희한합니다.-_-+
ㅁbabo0822님: 우리가 귀엽다굽쇼?-_-;;; (<- 사실은 속으로 좋아하는중;;;)
아~ 저도 나이 어릴 땐 어른을 좋아라 했었지요. 근데 어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어리고 이쁜 남자를 밝히게 되는건지-_-;; 저도 강태를 고~이 재준군 품으로 돌려보내고
싶지만서두;;; (톤혁은...이번편 읽으시고 충격이 쬐끔..있으실듯..;;;)
ㅁskyara님: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O^ 짧게나마 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리구요-
결혼한 게 뭐가 부러우십니까.-_-;; 저는 아가씨들이 넘넘넘 부러운데~~ㅠOㅠ;;
ㅁJOAHAE님: 경험자라면...크하핫^^;; 뭐, 나름대로 경험자..라면 할수도 있는..;;
장면연출이 애절하고 리얼하다니, 감격입니다. -O-! (장면연출에 컴플렉스가;;;)
ㅁ아가혁수7님: 찢어진 가슴은 다 회복되셨는지..? ^^;;;(완전 뻔뻔;;)
크흣^^; 제가 뭐..재밌게 살려고 노력은 하지요. -_-ㅋ 글고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본 결과, 저는 쇼타콤 맞는 것 같습니다.-_-;;;
(남편이 지 핸펀에다가 저를 '쇼타콤'이라고 저장시켜놓고, 제가 전화할 때마다
낄낄거리면서 받습니다.-_ㅠ;; 빨리 복수해야 되는데, 젠장! -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186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사랑은 분명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아 가는 과정이고,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피나게 투쟁하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아가 확장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일이었다.
- 김형경,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중에서 -
혜련의 입술이 닫히기가 무섭게 퉁겨져 오르듯 몸을 일으킨 준상은 잰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간다.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혜련은 떨리는 손으로
준상의 휴대폰을 열고 통화 목록을 뒤지기 시작한다. 대부분 ○○○ 이사, △△△
부장 등, 사람 이름으로 저장된 목록 가운데 유독 경기도 지역번호를 앞머리로
달고 있는 번호가 눈에 뜨인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재준의 비밀 별장 전화번호임을
알아챈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 바쁘게 버튼을 눌러댄다. 그리고 긴장된 호흡을
가다듬으며 수화기에서 울려나오는 신호음에 귀 기울인다.
[여보세요~]
달착지근하면서도 야무지게 들리는 그윽한 미성. 혜련의 기억력은 이것이 강태의
목소리가 틀림없다고 주저 없이 확인 도장을 찍는다. 그녀가 한 일자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동안 수화기 저 쪽에서는 의아해하는 강태의 음성이 계속 전해져온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강태의 어조가 신경질적으로 돌변하는 찰나, 혜련은 전화를 끊는다. 배터리가 모두
소진되었다는 거짓말이 혹여 탄로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놓은 다음,
짐짓 태연한 얼굴로 준상의 휴대폰을 사용하여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며칠 전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와 통화를 하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친구는 경악하고 흥분하면서 지금 당장 혜련을 방문하러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린다. 혜련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코발트색 담요자락만
내려다보다가 문이 열리는 기척에 흠칫 고개를 돌린다. 준상이 묵직해 보이는
비닐봉투를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선다. 냉장고에 음료수와 과일을 채워 넣은 후
그녀에게 다가와 담배 몇 갑을 내미는 그에게 혜련은 기계적인 미소와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들려준다. 준상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라고 응수한다. 추호도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아니지만,
혜련은 그의 철두철미한 공손함이 못내 불쾌하기만 하다.
「이제 그만 가 보세요. 재준씨가 바쁘면 준상씨도 바쁠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혼자 계시려면 적적하실 텐데 말동무라도 해 드리고 싶습니다.」
냉랭하고 건조한 그녀의 음성에도 준상은 개의치 않으며 여유 있게 넉살을 피운다.
이렇게 둥글둥글한 성격 덕분에 까탈스럽고 예민한 재준을 4년 넘도록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수 있었던 걸까. 혜련은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슬며시 실소한다.
그리고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준상의 퇴장을 재촉한다.
「아니에요. 마음은 고마운데, 좀 있으면 친구가 올 거라서.」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맘때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요, 내일 봐요.」
「뭐 필요하신 게 있거나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네, 알았어요.」
준상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후 뒤돌아선다. 혜련은 범상한 낯빛 뒤에
초조함과 불안감을 숨긴 채 그의 뒷모습을 주시한다. 문이 닫히고 호화로운 병실
안에 홀로 남겨지자 그녀는 안도의 날숨을 돌리며 탁자 위에 팽개쳐 둔 휴대폰을
가져다 켠다. 통화 목록에 저장되어 있는 재준의 별장 전화번호를 종이에 메모한
뒤, 혜련은 문환의 휴대폰 번호를 찾아 초록색 통화 버튼을 누른다.
[조문환입니다.]
「……저 유혜련인데요.」
그새 가라앉은 목청을 틔우느라 헛기침을 뱉으며 혜련은 띄엄띄엄 자신의 이름을
발음해낸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색을
표하며 안부부터 물어온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혜련씨!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전화 주셨네요.]
「조금 전에 준상씨 왔다 갔어요. 별장 전화번호 땄는데, 지금 불러 드릴까요?」
[그랬군요~ 네, 불러주십시오!]
혜련은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잠시 호흡을 고르다가 별장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꽉 움켜잡으며 하나씩, 숫자들을 입 밖으로 새어 보낸다. 그 짧은 촌각의 시간이
영원처럼 길고 아득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돌연 울음이 터질 것 같다. 정체불명의
무섬증에 쫓겨 혜련은 쥐고 있던 메모지를 와락 구겨서 휴지통에 처박아 버린다.
그런 그녀와 대조적으로 수화기 건너편의 문환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냉철한 태도를
견지한다.
[강태 목소리가 확실히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확실해요. 분명히 걔 목소리 맞았어요.」
[알겠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일단 두고 봐야겠지요. 김준상 그 놈이 뭔가 미심쩍어하거나 그렇진 않았습니까?]
「아뇨, 전혀 눈치는 못 챈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조만간, 혜련씨께서 반가워하실만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 준상의 등 뒤로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부드럽게 눙쳐져 있던 그의
표정이 첨예한 칼날로 뒤바뀐다. 뚜벅뚜벅 절제된 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휴대폰의
통화 내역을 확인한다. 그리고 가장 상단에 찍혀 있는 양수리 별장의 전화번호를
발견하자 준상의 입술 사이로 게걸스런 욕지거리가 흘러나온다. 인적이 없는
비상계단에 걸터앉아 천천히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후, 그는 재준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까칠까칠한 재준의 음성이 준상의 고막을
두드린다. 준상은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그에게 보고한다.
「회장님, 김준상입니다. 지금 아가씨를 만나 뵙고 나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아가씨께서 제 휴대폰으로 양수리 별장에 전화를 하셨습니다. 제가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그러신 것 같은데,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지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혜련이가 그런 게 확실해?]
「네, 그렇습니다. 통화 시간이 길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순히 번호 확인 차
전화를 건 것 같습니다. 아마 어딘가에 강태 도련님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어디라니, 연화회 밖에 더 있어? 조문환 이 새끼가 그새 왔다 갔군.]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다시 들어가서 추궁을 해 볼까요? 그 편이
가장 빠르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럴 거 없어. 대신 집에 가서 내 차 갖고 사무실로 와. 내가 직접
양수리로 갈 테니까.]
명확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재준의 말에 준상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긍정의 대답을 올린다. 그리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민첩하게 몸을 움직인다.
― '나야. 지금 데리러 갈 테니까 짐 챙겨놓고 기다리고 있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식을 듣게 되자 강태는 어리둥절하고 마음 한 구석이
뒤숭숭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재준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에 모든 염려와 불안을 덮어버린다. 아무리 철옹성 같은 안전을 약속해주는
곳이라 해도, 재준과 떨어져 혼자 있어야 한다면 티끌만한 안정감도 맛 볼 수 없다.
상시 죽음의 위협이 깔려 있는 전장(戰場)에서 그와 함께 두려워하는 편이 낫다.
이김을 확신하진 않지만 패배감에 사로잡혀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절망도 억울함도, 슬픔과 원망까지 이젠 오래 전 꿈처럼 머나먼 과거의 감정이
되어버린 터, 강태에게 남은 것은 맹목적인 사랑, 오로지 그 뿐이다. 그것이
강태를 조종하는 유일무이한 원동력이다.
한동안 분주히 짐을 싸고 주변을 정돈하던 그는 욕실로 직행하여 다시 얼굴을
씻는다. 뽀얗게 물 오른 살결이 내심 흡족해서 방긋 미소를 짓다가 검보랏빛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세심하게 빗어 내린다. 간단하지만 정성 들여 단장을
끝마친 강태가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기척도 없이 나타난 재준의 모습이
그의 눈동자에 잡혀 온다. 밭은 숨을 들이마시며 강태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침대에 앉아 있던 재준은 순백의 웃음으로 그를 반긴다.
「보고 싶었어. 혼자 심심했지?」
입을 열자마자 대뜸 튀어나오는 첫 마디에 강태는 잠시나마 투정을 부리려했던
자신이 볼썽사나워진다. 고작 이틀 만인데, 온몸이 저릿하도록 밀어닥치는
행복감이 강태로 하여금 선뜻 아무 말이나 꺼낼 수 없게 만든다. 격하게
요동치는 새까만 눈망울로 망연히 자신을 바라만 보는 강태를 향해 재준은
스스럼없이 두 팔을 뻗친다. 재준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비누향기, 뺨과 뺨이
맞닿을 때의 찹찹한 감촉과 허리를 조여 오는 은근하고도 강인한 힘이 강태의
목구멍 깊숙이 들러붙어 있던 탄성을 바깥으로 밀어 올린다. 강태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재준의 어깨를 부둥켜안는다. 밀착된 뺨이 분리됨과 동시에
두 입술이 포개지고, 재준은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것인지 모두 잊어버린 채 강태를 침대 위로 쓰러트린다.
맹렬한 기세로 강태의 옷을 벗겨나가는 재준과 반대로, 강태는 다분히 소극적이다.
삽시간에 강태를 발가벗긴 재준이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셔츠 단추를 끌러내기
시작하자, 강태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홍조까지 띠며 얼굴을 벽 쪽으로
돌려버린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재준의 욕망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 욕망을
부채질하는 방법까지도.
길고 유연한 몸을 사용해 재준은 강태를 덮쳐누른다. 옴짝달싹 못하게 재준의
품안에 갇힌 강태는 그가 별다른 애무나 전희의 과정 없이 곧바로 페니스를
삽입하려 하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준을 올려다본다. 섹스에
있어선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던 그가 숫총각처럼 허둥지둥 달려드는 게
믿기지 않는단 눈빛이다. 그러나 재준은 강태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강하게 하체를 밀어붙인다. 예고 없는 충격에 강태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고,
재준 역시 통증을 느끼는 듯 이맛살을 살짝 찌푸린다. 요란스런 기교나 야릇한
율동이 완전히 제거된 섹스는 원시적이고 야만스럽다. 그리고 간절하다.
「재준아, 그만… 그만해…」
허리가 두 동강 날 듯 극렬한 아픔이 전신을 관통하자 강태는 숨을 헐떡이며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 재준에게 애원한다. 얼마간 더욱 거칠게 강태를
헤집어놓던 재준이 순간 모든 동작을 정지시키며 그에게 깊이 키스한다.
달콤한 미각으로 휘감겨오는 재준의 혀 때문에 강태의 몸을 꿰뚫던 극심한
고통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달아난다. 그 대신 폭포수처럼 시원하고
청량한 쾌감이 강태를 날아오르게 한다. 그의 귀뿌리를 적시는 재준의 숨결은
어느새 말끔히 정제되어 있다.
「……사랑해.」
어디선가 출처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솟구쳐 강태의 두 눈 가득 흥건히 고인다.
정말 너무도 흔한 말인데, 이전에도 숱하게 들어온 고백인데, 이젠 습관처럼
상투적으로 내뱉을 수 있는 어휘인 것 같은데, 왜 이토록 가슴이 아픈 걸까.
심장이 갈기갈기 조각나는 듯한 이 서러움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아직도 세상을 향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음인가. 사망의 공포로부터 여태껏
자유로워지지 못했단 뜻인가, 강태…?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너와 같이 있어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생사를 가로지르는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서 평생 아등바등 살아가야 한다 해도,
내 곁에 살아 있는 너의 존재가 사무치도록 소중하고 감사하다고… 소리 내어 재준에게
들려주고 싶지만 강태는 도저히 입술을 뗄 수가 없다. 견고한 침묵과 가냘픈 진동으로
흐느낌을 위장하는 강태에게, 재준은 약속한다. 충의회 2대 회장이 아닌 강태의 남자,
이재준으로서.
「널 아프게 한 사람, 아니 그러려고 시도했던 사람까지 전부 다… 죽여 버릴 거야.
내 손으로, 내 손에 그 피를 묻히고 말 거야. 죄책감 같은 거 안 가져. 왜냐하면…
널 위해서니까.」
##################################################################################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
이하는 감상주신 분들께 남깁니다-.
ㅁbabo0822님: 너무 절절하게 재준이 살려달라고 부탁을 하셔서;; 제 맘이 아프네요.-_ㅠ;;
꼬박꼬박 남겨주시는 감상, 정말 고맙습니다. 이번편도 재밌게 읽으셨음 좋겠어요~ ^^
ㅁcy2id님: 오호홋-_-* 주혁씨같은 오빠야 누구나 바라는 바 아니겠습니까. -_-^
감상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
ㅁ아가혁수7님: [행복을 만들어 과는 과정에서도 울지 말고 웃었으면 좋겠어요] <- 가슴이
확 꽂히는 멘트군요. -_ㅠ;; 글구 폭소를 터뜨리시다니요. 너무하십니다. 주륵-_ㅠ;;
ㅁ준타열희님: 저도 이리저리 꼬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_-;;;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작가의 양심상 어쩔 수 없는 것을요.. 부디 이해해주시고.. 너그러이 읽어주시기만을..-_ㅠ;;
ㅁgpdud2727님: 대대대~~장편이 되어서는 안될텐데;; 저도 걱정중입니다. -_-;;
과연 분량조절에 성공할 수 있을지.; 구성짜는 것 다음으로 분량조절이 젤 힘들더군요.;;
암튼, 노력해야겠지요-. 꾸준히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원랑] 오르가즘 - 187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인간은 ― 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 ―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점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 -
「이제 이 집 아들은 누가 뭐래도 혁수 너니까.」
마지막 그 문장을 뱉어내는 정숙의 낯이 싸늘하고 사위스럽다. 혁수는 비대칭적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 얼른 턱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다.
아리송한 혁수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정숙은 다정다감하면서도 준엄한 목소리를
계속해서 이어 붙인다.
「혁수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주혁이에 대한 아버지의 배신감은 상상
이상이야. 전 부인이 유일하게 남긴 자식이라 애착이 크셨던 만큼 배신감도
크신 거지. 하나밖에 없는 친자식이 아버지께 도움은 못 드릴망정 아버지
앞길에 걸림돌이 될 짓만 하고 다니니, 참고 기다리시는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잖아. 아무튼 아버진 이미 주혁이한테 마음 떠나셨어.」
그랬던가. 나의 양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던가. 당신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천륜의 고리까지 무참히 끊어버리는 무서운 사람이던가. 그런 사람과 맞서서
과연 우리가 끝까지 서로를 붙들고 있을 수 있을까.
그래, 미칠 노릇이었겠지. 자신의 양아들과 친아들이 한 침대 위에서 발가벗고
뒤얽힌 광경을 목도했을 때, 어떻게든 둘 중 한 명에겐 저주의 화살을
퍼부어야 했을 테지. 그 과녁이 내가 아니라 장주혁이 된 것이고, 그를 제거하는
편이 아버지 당신의 인생에 훨씬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란 계산이
밑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혁수가 더 잘해야 돼. 아주 사소한 거라도 절대 아버지
말씀 거역하지 말고, 아버지께 인정받는 아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
호적에도 오르고 성도 물려받고, 명실상부한 진짜 아들이 되어야 해…!
엄마는 아직까지도 네가 안씨 성을 갖고 사는 게 너무 한스러워.
아버지 호적에 올라서 장씨 성만 물려받으면, 그 땐 정말 완전히 이 집안의
대(代)를 우리 혁수가 잇는 거야. 우리 혁수가 이 집안의 모든 걸 물려받게
되는 거야. 그 생각만 하면 엄마는 그동안 손가락질 당하고 그랬던 것
한 순간에 다 잊어버릴 수 있어. 엄마 마음, 알겠지?」
엄마, 전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아버지 호적에 오르고 싶지도 않고, 장씨 성 따위
물려받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어요. 아니요, 오히려 전 이 집 아들이 아니었으면
해요. 장인하 씨의 양자로 들어오기 전, 장주혁의 이복동생으로 들어오기 전,
그 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불구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리할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까지 엄마가 쌓아 올려온 공든 탑을, 온갖 굴욕과 질시를 참으며
일구어 오신 저의 앞날을 저 스스로 망쳐버릴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장주혁과 함께.
피멍 든 가슴으로 부르짖으며 혁수는 끝내 감은 눈을 뜨지 않는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는 생각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다. 정숙은 혁수의 두 손을 더욱 세게
모아 잡으며 그에게 대답을 종용하지만, 혁수는 굳게 입술을 봉한 채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메마른 음성을 새어 보낸다.
「엄마 말씀, 무슨 뜻인지 잘 알았어요. 다신 엄마 마음 아프게 해 드리는 일
없을 거예요.」
반지르르하고 맹랑한 거짓 약속을 정숙의 가슴속에 심어놓은 뒤, 혁수는 안녕히
주무시라는 밤 인사를 덧붙이고 자기 방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혼자만의
공간에 안착하고 나서야 그의 입에서 억눌렸던 신음이 쏟아져 나온다.
더불어 그의 다갈색 눈망울 가득 차오른 물기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초콜릿 빛
살결 위에 강줄기를 이룬다. 한참 동안 가슴 언저리를 부여잡고 꺽꺽 울음만
토해내던 혁수가 힘겹게 입술을 움직여 중얼거린다.
「죄송해요, 엄마… 정말로 죄송해요…」
감히 용서해달라고, 심지어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씀조차 들려드릴 수 없지만,
저 역시 두려워요. 어머니를 배반하고 움켜쥔 그와의 사랑이 훗날 섬뜩한
칼날이 되어 우리의 목을 겨눌까봐 겁이 나요.
그렇지만 저에겐 선택권이 없어요. 장주혁은 유일하니까요, 또 안혁수는
이 세상에 딱 저 하나 뿐이라서… 그리고 우리는 오직 한 번의 일생을
사는 것이어서…
엄마, 제가 죽을 수는 없잖아요. 시체의 삶을 이어나갈 순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 저를 포기해주세요. 제발.
― 주혁의 은색 승용차가 충의회 본사 정문 앞에 멈춰 서자 근방에 있던 조직원들이
허리 숙여 예를 갖춘다. 주혁은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그의 귓가에 이젠 제법 익숙해진 호칭이 닿아오자
주혁은 뒤를 돌아본다.
「이사님, 나오셨습니까!」
씩씩하고 활기찬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준상이다. 여느 때처럼 구김살 없는 모습에
주혁은 빙그레 미소 짓는다. 한 걸음 더 가까이 주혁에게 다가선 준상은 쾌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말투로 묻는다.
「이사님,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몇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뭐, 중요한 얘기야?」
「네, 그렇습니다.」
「그럼 내 방으로 올라가자.」
때맞춰 짧은 기계음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양쪽으로 벌어지고, 두 남자가
함께 탑승한다. 재준의 집무실과 대각선으로 배치된 주혁의 일터는 그의 성격대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커피 한 잔을 권하는 주혁에게 정중한 사양의 뜻을
비치며 준상은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가죽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다. 손수 커피를
타 들고 오는 주혁을 바라보며 준상은 괜스레 면구스러워져 생뚱맞은 흰소리를
건넨다.
「이사님께서도 비서를 하나 두시지 그러십니까. 이것저것 잔심부름만 시켜도
훨씬 편해지실 겁니다.」
「커피 타고 서류 정리하고 전화 받고, 그런 거 나 혼자서도 충분히 다 해.
뭣 하러 쓸데없이 사람 쓰냐.」
별소리 다 듣겠다는 듯 퉁명스런 대답에 준상은 또 혼자 머쓱해져서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다가, 무슨 이야기인지 얼른 털어놓으라는 주혁의 재촉에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다름이 아니라… 장인하 검사님께서 부친 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버지의 이름을 듣자마자 주혁의 암청색 눈동자에 탁한 그늘이 내려앉는다.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며 그는 무심한 척 고개만 까딱해 보인다.
「이사님께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부친께서 이번에 승진을 하셨더군요.」
「그래? 내가 집이랑 좀 소원한 편이라… 며칠 전에 갔을 땐 그런 말씀
못 들었는데.」
「저도 방금 전에 들은 사실입니다. 서울지검 강력계 차장으로 옮기신다 합니다.」
주혁의 머리가 번쩍 들리며 준상과 시선을 맞댄다. 동요 없이 가라앉아 있는 준상의
눈에 푸릇푸릇한 의혹이 서려있는 것 같아서 주혁은 이내 그로부터 눈길을 거둔다.
그리고 짐짓 심상한 목소리를 꾸며낸다.
「서울지검이면 우리 구역 총괄이잖아.」
「그렇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진 않았지만 검찰 내부에서는 이미
확정된 인사이동이라 합니다. 아마 수삼일 내로 정식 공고가 날 겁니다.
정말 모르고 계셨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준상의 질문에도 주혁은 얼굴을 붉히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는다.
그런 의혹을 가지는 게 너로서는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인정하며 수긍하는
주혁의 태도에 미안해진 쪽은 준상이다. 철두철미하게 신뢰해왔던, 앞으로도
쭉 신뢰해야 할 상대에게 의심을 품는 것처럼 고약하고 꺼림칙한 일은 많지 않다.
「몰랐어. 아버지한테서 아무 얘기도 못 들었으니까. 아마 혁수도 아직
모르고 있을 거야. 알았다면 나한테 바로 얘기해줬겠지. 아버지가 식구 중
누구한테도 말씀을 안 하신 것 같은데.」
「부친께서는 물론 알고 계시겠죠? 이사님께서 충의회 소속이시란 걸 말입니다.」
「모르실 리가 없지.」
간단히 떨어지는 주혁의 대꾸에 준상은 야트막한 한숨을 새어 보낸다.
진정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게 버겁고 짐스러워
짜증이 솟구친다. 하필이면 왜 이런 식으로 꼬여 가는 걸까.
「회장님께서도 어제 양수리에 가셨기 때문에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다.
오늘 돌아오셔서 보고를 받으시면…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차갑고 건조한 준상의 음성이 주혁의 귓전을 찌르고 들어온다. 내면의 혼란과 번민을
가리기 위해 그만큼 준상은 냉혹하고 스산한 음색을 돋우어내려 애쓴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민한 주혁은 재빠르게 짚어내면서도,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침묵만 고수한다. 찝찌름한 정적의 한 가운데를 가르며
준상은 굴곡 없는 어조로 말을 잇는다.
「이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 충의회는 비상시국에 처해 있습니다.
연화회와의 전면전이 목전에 닥친 데다, 이젠 강태 도련님의 신변까지
위험해졌습니다. 유혜련 그 여자가 조문환에게 별장 위치를 넘겨준 바람에,
어제 회장님께서 부랴부랴 양수리로 내려가셨습니다.」
바닥을 향해 있던 주혁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준상에게 꽂힌다. 혜련이 저지른
일에 대해 처음 듣는지라 주혁은 당혹스러우면서도 일면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그가 지켜봐 온 바로는, 혜련은 그저 운 좋게 재준의 집 안방을 차지하게
된, 그렇고 그런 전직 술집 접대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하세계의 생리에
통달한 수준도 아닐뿐더러 별반 똑똑해 보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당하면 당하는 대로,
뺏기면 뺏기는 대로 자기 것 하나 야무지게 못 챙기는 흐리터분한 사람이라 여기며
주혁은 그녀에게 아무런 신경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조문환과 손을
잡고 재준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다니,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담력이 크다고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수 십 가지 생각의 곁가지를 쳐 나가는 주혁의 귀에
침울하고 둔중한 준상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만약 이 와중에 검찰 쪽과 마찰이 생긴다면 엎친 데 덮친 격이 됩니다.
막말로 거기서 작정하고 덤비며 우린 속수무책 아닙니까. 가뜩이나 내부 분위기도
싱숭생숭한데 외부에서까지 압력이 들어오면 조용히 넘어가진 못할 겁니다.
모든 결정이야 회장님께서 하시겠지만, 하찮은 문제 거리라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은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사님께서 먼저 움직여 주셔야겠죠.」
「한 마디로, 나더러 아버지를 만나봐라?」
「예, 그렇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가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해 주실지, 그건 미지수야. 아니, 오히려 더 철저하게
속일지도 몰라. 너도 대충은 짐작하겠지만, 그 사람한테 난… 아들이라고 할 수 없어.」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손놓고 지켜보기만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회장님께서도
인사 차 장검사님을 방문하시겠지만, 그 전에 이사님께서 분위기를 살피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재차 인하와의 만남을 권유하는 준상의 눈빛이 단호하고 침착하다. 더 이상 거절할
구실이나 핑계가 떠오르지 않자 주혁은 탐탁지 않지만 응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검사라면 누구나 최정예 수사통의 산실인 서울지검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터,
인하의 승진에 또 다른 이유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주혁이다.
미국으로의 밀입국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가능한 한 인하와의 마주침 없이
평탄하게 준비를 해 나갔으면 바래왔건만, 음습한 불운의 조짐이 엿보이는 것 같아
주혁은 답답해진다. 그 기분을 털어 내려는 듯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마음을
가다듬은 후, 할 말을 모두 끝냈으면 이만 나가보라며 준상을 내보낸다.
그리고 망설이려는 자신에게 호통을 치는 것처럼 우악스런 손길로 전화기를 집어 든다.
신호가 가는 사이, 주혁은 또 한 개비의 담배를 피워 문다.
[네, 장인합니다.]
「아버지, 저 주혁이에요.」
[무슨 일이냐,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승진하셨다면서요? 그것도 서울지검으로 옮기신다 하던데, 왜 미리 말씀 안 하셨어요?
아버지 승진 소식을 딴 사람 통해서 듣다니,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너무 티 나게
그러시니까 섭섭하네요. 여하튼 축하 인사나 드리러 갈까 하는데,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떠세요?」
###################################################################
우선 사죄의 말씀부터 올립니다. -_ㅠ;;
186편에 혜련이가 양수리 별장 전화번호를 따는 부분에서;;
자신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거는 것처럼 묘사가 되어버렸는데;;
제가 급하게 쓰느라고 실수를 했네요.(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큰.. -_ㅠ;;)
준상이 휴대폰으로 먼저 걸고, 자기 휴대폰에 번호 옮기는 걸 묘사한다는 게,
조급하게 쓰느라고 중간 과정을 생략해버린. -_-^
읽으시면서 "뭐야, 이거.. 뭐 이래..?" <- 이러셨던 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_-;;;
아아- 재연재 시작한지도 꽤 됐는데 아직까지 이런 지랄을... -_-+
다시 한번 사죄 말씀 올립니다.;; 흑-! ㅠ_ㅠ!!!
앞으로는 소설 읽으시는데 지장이 없도록, 세심한 부분까지 더욱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너그러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ㅠ;;;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하는 감상 주신 분들께 남깁니다. 감상주신 천사분들 읽어주시길. -_-ㅋ
ㅁbabo0822님: 님께선 역시 예리하게 짚어내셨군요! -_ㅠ;; 지적하신 부분에 대한 답변은
위에 소설 끝나자마자 사죄 말씀 올렸구요..;; (다시 한번 죄송;;) 중간고사 부디 좋은
결과 얻으셨길 바라겠습니다- (시험이 이미 끝나셨겠죠?;;) 감상 고맙습니다~^^*
ㅁvkdorkspti님: 앗, 이곳에서 다시 뵐 줄이야-_-ㅋ 반갑습니다~^O^ 현재 혜련이의 심경은
님 말씀대로 엄청 복잡하죠.-_-; 자기 욕심이었음을 인정하면서 돌아서려 한 순간에
갑자기 너무 큰 린치를 당하게 되니까;; 꾹꾹 눌러담았던 재준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이
한꺼번에 와락 터져나와 이런 식으로 표출이 되는 거라 할까요;; 아아- 소설에서 충분히,
제대로 묘사를 못하니까 이렇게 변명만 느는군요-_ㅠ;; 아무튼 계속 지켜봐주시길~ -_-ㅋ
감상 정말 감사드리구요, 님께서도 감기 조심하시길.. ^^*
ㅁ준타열희님: "엔터키를 너무 아끼지 마세요" <-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한참 고민한;;-_-+
제가 좀 엔터키를 아끼는 편이죠.; 고치려고 노력하는데 의외로 쉽지 않네요; 죄송합니다-_ㅠ
그래도 예전에 비해선 많이 좋아진 편이에요(변명..;;) 감상 고맙습니다~! ^^*
ㅁJOAHAE님: '사랑해', 단순하고 흔한 말이지만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참 달라지죠? ^^;
진실이 내포되어 있을 때 그 말은 어떤 무기보다 강력해지는 것 같아요. ^^*
ㅁcy2id님: 강태는 강하고 똘똘하니까.. 너무 안타까워하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_-ㅋ
(이젠 처절한 작품합리화를..;;) 울부짖으셨던 톤혁이 그다지 이쁘고 사랑스럽지 않아서
죄송하네요;; 님께서도 부디 감기 조심하세요~ 저처럼 고생하지 마시구요-_ㅠ;;
ㅁ아가혁수7님: 새색시라~ 므흣한 표현이군요-_-* 캬캬;; 기다리시던 톤혁이 별반
기대에 못미칠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맘이네요^^;
감상 감사드리구요, 건강 유의하세요~ ^^*
ㅁgpdud2727님: 아아- 혜련이 너무 나쁜년 만든 것 같네요-_-;; 저는 어느정도 독자분들의
연민을 자아내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지가 제대로 못써놓고 독자에게 책임전가까지-_-+)
글구 재미없는 소설, 뭐하러 재탕까지 하십니까. -_-ㅋ 그저 한번 쓰윽~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넘치게 고맙습니다! ^^* 다음편도 기대해주셔요~ (이러면서 잘 쓰지도 못하지, 또-_ㅠ;;)
[원랑] 오르가즘 - 188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의 상태라고 말하지만, 아니에요. 사랑은 지식이고 무한히 생동하는
방법이고 영혼의 상상력을 삶 속에서 서로에게 실현하는 변태죠. 구체적으로 알지 않으면
사랑할 수도 없어요.
- 전경린, <열정의 습관> 중에서 -
짧고 강렬했던 정사가 끝난 뒤 재준은 풀코스를 완주한 마라톤 선수처럼 탈진하여
축 늘어진다. 독살스럽게 못 박아두던 방금 전의 단언과 사뭇 대조되는 모양새에
강태는 혼란스런 눈동자로 재준의 옆얼굴을 응시한다. 핍절하게 꺼져든 낯빛이
안쓰러워 천천히 팔을 뻗는데, 재준의 희고 긴 손이 먼저 강태의 손을 낚아챈다.
그리고 확 잡아당겨 강태를 자신의 품으로 엎어지게 만든다. 갑작스레 밀착되는
재준의 가슴이 불에 달궈진 듯 뜨거워 강태는 흠칫 소스라친다. 곧이어 흘러나오는
재준의 음성은 몹시 메마르고 녹이 슨 느낌이다.
「이젠 화가 나. 널 사랑하면서 이렇게 화가 났던 적은 없었어.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말이야.」
진심이다. 아무리 거대한 고통의 해일이 덮쳐오더라도 재준은 이제껏 단 한번도,
타인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수 백 번 수 천 번 스스로를 고문하고
난타했을 뿐, 모든 저주와 비난과 경멸의 총알 세례를 자신의 몫으로 끌어안았을 뿐,
눈알을 후벼 파내고도 남을 만한 살기조차 자신을 과녁 삼아 삭혀내던 그였다.
하지만 이젠 진정으로, 온몸 구석구석에 들어찬 격노를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 정확히 지칭하여 자신과 강태를 분리시키려 하는 그들에게 퍼붓고 싶다.
아주 세밀한 찌꺼기조차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가장 잔악무도한 방법을
사용하여, 하등의 리얼리티도 고려하지 않은 채.
「너… 억울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일 생긴 거지, 그렇지?」
꾸밈없는 어조로 솔직히 물어오는 강태에게 재준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휘어짐 없이 곧기만 한 재준의 시선이 조금 못 마땅해서 강태는 살짝
이맛살을 찡그린다. 그런 강태의 제스처에도 재준은 기분이 상할 만큼 사무적인
목소리를 꺼내놓는다.
「연화회 놈들이 혜련이를 건드렸어. 많이 다친 건 아닌데 충격이 심했나 봐.
게다가 임신까지 했어. 물론 내 아이고.」
「뭐, 임신?!」
한 쪽 팔로 체중을 지탱한 채 비스듬히 누워 있던 강태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비약적으로 목청을 돋운다.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던 까만 눈동자는 요란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부자연스럽게 불거져 오른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애 가졌으니까 제대로 한번 들러붙어 보겠다,
이런 심산이래?!」
「아니, 그 이상이야. 술집에서만 뒹굴던 맹한 년인 줄 알았더니, 이게 조문환이랑
붙어먹었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억지스레 부릅뜨여진 강태의 눈동자 표면에 딱딱하게 굳은 자신의 얼굴이 비치자
재준은 허허로운 실소를 깨문다. 줄곧 부정해 왔지만 척 보기에도 지금 그는
긴장하고 있다. 아니, 그건 부적당한 표현이다. 지금 그는 목 놓아 울어대고 싶은
마음을 조각내느라 천연덕스런 연기를 펼쳐 보이는 중이다.
「그 년이 여기 위치를 알아내서 조문환한테 찔러 줬어. 다행히 준상이가 빨리
눈치 까고 보고해서, 얘기 듣자마자 달려온 거야. 조문환도 섣불리 행동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지.」
잠시 이야기를 중단한 재준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켓을 주워들고 주머니를 뒤적인다.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인 뒤 강태에게 건네자, 강태는 거절의 뜻으로 도리질 치며
성급하게 입을 연다.
「조회장이 그 여잘 건드릴 거라는 건, 너도 예상하지 않았어?」
「그랬지. 근데 상황이 더 복잡하게 꼬였잖아.」
「아니, 넌 그 여자랑 살림까지 차리고 같이 살았으면서, 그 정도도 파악이 안 됐어?
충의회 회장이 뭐 그래? 이쪽 세계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 기본 상식 아냐?」
강태는 정말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격양된 음성을 흩뿌려놓고, 재준은 침울한 표정으로
묵묵히 담배 연기만 분사해낸다. 서먹한 침묵이 이 때다 싶게 허공을 메우려 하자 강태는
한결 가라앉은 음색을 발한다.
「널 탓하는 건 아냐. 단지 이해가 좀 안 가서 그래. 내가 봐 온 충의회 이재준 회장은
일 처리 하난 완벽했단 말이야. 감탄할 정도로. 근데 그걸 예상 못했다는 게 안 믿겨.」
「글쎄… 누구 말대로 약점 하나 잡히니까 꼼짝 못하는 건가보지.」
재준의 입술 사이로 '약점'이라는 두 음절이 튀어나오자마자 강태의 예쁜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그러다 이내 표독스러운 기운을 꺼뜨리며 그의 눈매가 조용히
무너져 내린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가가 젖어들자 강태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재준을 등진다. 어쩐지 지금 만큼은 그의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기가
못 견디게 수치스럽다. 도대체 나는 언제까지 그를 힘들게 해야만 하는 걸까.
언제까지 그에게 모질어져야 하는 걸까.
「……이재준.」
자신을 부르는 강태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냉엄하고 단연해서 재준은
더럭 겁을 집어먹는다. 누가 뭐래도 재준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안겨주는
장본인은 바로 강태다. 재준의 인생을 당장에 끝장낼 수도 있고 영원불사의
낙원으로 인도할 수도 있는 유일무이한 잣대, 강태.
「나는 너, 다시는 안 놓쳐. 아니, 안 놔줘. 전에는 어이없게 실패했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진짜로 널 죽여 버릴 거야. 또 날 버리면… 그 땐 네 대갈통에 대고
총을 쏴 버릴 거야. 알았어?」
그러니까 무서워할 것 없어. 불안해 할 이유도 없어.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널 죽여줄 테니까.
「……그래, 강태야. 꼭 그렇게 해 줘. 내가 널 떠나기 전에… 네가 먼저 날 없애라.」
재준의 입술이 닫히자마자 뒤돌아 앉은 강태의 눈이 스르르 감기며 그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한 줄기 자국을 남긴다. 바르르 떨리는 어깨 죽지가 그의 서러움과 원망을
고스란히 읽어내고, 재준은 심장 전체에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을 감소시키려 강태를
가까이 끌어당긴다. 그리고 앙 다문 어금니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흐느낌을 입안에
가둬두며 속으로만 간곡히 애원한다.
내가 널 포기하지 못하도록, 내 목숨을 가차 없이 거두어들이라고.
―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 불길이 재준의 시야를 뿌옇게
흐려놓는다. 지난 밤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머리가 무지근하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피워 무는 그의 귓가에 나지막한 강태의 음성이 와 닿는다. 편안한
청바지에 검은 니트 차림으로 오른손에 짐 가방을 든 강태가 서 있다. 재준은 말없이
그에게로 다가가 트렁크를 받아들고 앞장서서 걸음을 옮긴다. 강태 역시 잠자코
재준의 뒤를 따른다. 두 남자를 태운 자동차가 별장 마당을 벗어나 한적한 대로로
접어들 때까지 어느 누구도 견고한 정적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결국 먼저 입술을
뗀 쪽은 성미 급한 강태다.
「서울로 올라가서 뭘 어떻게 할 작정인데? 같이 있으면 더 위험하다 그럴 땐 언제고.」
비난조의 질문에도 재준의 낯은 심상하다. 잠시 대답을 유보하던 그가 자조성 짙은
웃음을 흘리며 농담처럼 말한다.
「같이 있어야 네가 날 죽이던 살리던 할 거 아냐. 여기 있다간 너 혼자 뒤져.」
거칠고 야박한 재준의 말투에 강태는 반사적으로 양미간을 찌푸린다. 그리고 울컥
치미는 화증을 누르지 못해 고조된 목소리를 막무가내로 쏟아낸다.
「넌 지금 농담이 나와? 남은 걱정돼 죽겠는데! 조회장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예상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냐! 너 혹시 연화회 정도면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내심 자만하는 거 아냐? 설마 그건 아니겠지.」
「걱정 마. 아무리 허접한 상대라 해도, 그렇게 넋 놓고 있다 내 무덤 판 적은 없어.」
순식간에 장난기를 증발시켜 버린 재준 때문에 강태는 파르스름하게 곤두세웠던
눈동자를 슬며시 누그러뜨린다. 차창 밖의 수려한 풍경으로 시선을 이동시키는
강태에게 재준은 연달아 기계적인 음성을 들려준다.
「일단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까진 태현 형 집에 있어. 현재로선 그게 제일
안전해. 태현 형이 충의회에 발길 끊은 지도 꽤 됐으니까, 저 쪽에서 눈치 챌
가능성은 거의 없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조금만 참자.」
「100년 걸려도 기다릴 테니까 확실히 끝내. 이젠 도망 다니는 거 진짜 신물 나.」
옴팡지게 쏘아붙이면서도 가느다란 진동을 미처 제거하지 못한 강태가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재준의 얼굴에 큼지막한 미소가 번진다. 팔을 내밀자 형식적인
몸짓으로 저항하는 시늉을 보이다 못 이기는 척 어깨에 기대오는, 그 작은
동작 하나도 새삼 감격적이다.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이 빛나는
기쁨을, 이 황홀을, 세상 그 누가 나로 하여금 알게 할 수 있는가.
재준의 어깨에 뺨을 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태는 피로를 가눌 수 없는지
새록새록 잠 속으로 빠져든다. 재준은 그가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교정해주고
다시 운전에 몰두한다. 1시간 넘게 차를 달려 태현의 아파트 주차장에 당도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강태가 반짝 눈을 치켜뜬다.
「귀신이네. 도착하자마자 깨고.」
「그러게. 나도 가끔 내가 무서워.」
무표정한 얼굴로 제법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강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준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선다. 강태의 허리를 한 팔로 싸안은 채 발을
내딛는데, 저만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고막에 부딪혀온다.
「이재준!!」
통통 튕기는 듯한 음색의 주인공은 양손에 묵직한 짐 꾸러미를 들고 선 태현이다.
팔랑팔랑 잘도 뛰어오는 그가 귀엽고 우스꽝스러워서 재준과 강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다 태현의 뒤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는 앳된 소녀를 발견하곤 멈칫한다.
「강태!! 너 진짜, 이게 얼마 만이냐? 근데 둘이 어떻게…」
사무치는 반가움에 못 이겨 방방 호들갑을 떨던 태현은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서둘러 걸음을 떼다가, 약간 거리를 둔 채 물러나 있던 연수를 의식하고 재차
입을 놀린다.
「아, 참! 인사들 해. 서연수라고, 내 여자친구야.」
연수는 맑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지만 재준과 강태는 이미 세상에 없는 세라와
너무 흡사한 그녀의 외양 때문에 멍해진 상태다. 미지근한 그들의 반응이
무엇 때문인지 연수와 태현 모두 익히 짐작하는 터라, 자칫 객쩍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허물기 위해 태현은 부산스레 움직인다. 연수가 부지런히 청소를
해 주는 덕택에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해진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자, 태현은 시장 봐 온 것들을 주방에 가져다놓은 후 허겁지겁 다시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재준과 강태에게 숨 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속사포처럼 수다를 쏟아낸다.
「야, 너희들 진짜 뭐냐? 자꾸 이런 식으로 옆 사람들 병신 만들래??
어떻게 말 한 마디 없이…!!」
「우린 그렇다 치고, 형이야말로 심한 거 아냐?」
날카롭게 태현의 말허리를 자르는 강태의 목소리가 작지만 준열하고 빳빳하다.
태현이 미처 되묻기도 전에 강태는 주방에서 무언가 골몰하고 있는 연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 붙인다.
「형이 아직도 힘들어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이건 좀 아니다.」
「나도 네가 무슨 뜻으로 얘기하는지 알겠는데, 나 이제 하나도 안 힘들거든?」
빙글빙글 장난기 다분한 웃음을 만면에 퍼뜨리며 태현은 강태의 말투를 그대로
모방한다. 강태보다 더 딱 부러지고 야무진 태현의 어조에 강태는 입을 꾹
다물고, 재준은 여전히 침묵만 지키고 앉아 있다.
「그리고 너희들, 나한테 미안해하는 거 이제 그만 해라. 나랑 계속 친구하고 싶으면.」
####################################################################
젠장. -_-* 더 이상 개판일 순 없군요. -_ㅠ;; 죄송합니다, 여러분... -_-;;;
오랜만에 달랑 한편. 그것도 개판 오분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ㅠ_ㅠ!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ㅁ변태사슴님: 조회수 0이라 기쁘신건 이해합니다만, 담엔 감상도 같이 주세요. -_-ㅋ
농담이구요, 허접한 소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_ㅠ; 추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세요. ^^*
ㅁbabo0822님: "주혁님은 재준님보다 더 냉정하고 차가울 수 있는 캐릭터인 듯 싶어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_-* 재준이는 실상 굉장히 감정적인 성격을 가졌어요.
충의회와 관련된 일에 있어선 예외지만;; 감정을 부정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사실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면이 강하죠;; 아, 그리고 소설 시작하기 전에 매편 마다 첨부하는
구절은.. 제가 책을 읽으면서 틈틈이 메모를 해 두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힘들 것은
없어요. -_-ㅋ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하는 게 아쉽죠. -_-* 감상 고맙습니다! ^O^*
ㅁcy2id님: 리플 안 주셔도 님께서 언제나 열심히 읽어주시는 것, 늘 감사합니다. ^^;;
더 좋은 소설 보여드리야 하는데 맘처럼 안 되서, 죄송스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네요.-_ㅠ
날씨 추워지는데 건강 유의하세요. ^^
ㅁ준타열희님: <오르가즘>에 이토록 애착을 가져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
저도 독자님들 기쁘시도록 해피한 모습을 많이 그리고 싶으나. -_ㅠ;; 아무튼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격려, 비판 많이 해주세요. 요즘 또 게으름병이 도져서.. -_-;;;
ㅁgpdud2727님: 으하하^^;; 야식은 우리 여성들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적이지요! -_-+
부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시길 빌겠습니다. ^^;;
ㅁ아가혁수7님: 여행 다녀오셨군요! 미치도록 부럽네요. -O-!! 직장에 매인 몸이다보니,
여행 다니시는 분들이 제일루 부럽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여행인데;;
그리고 소설에 별 진척이 없다는 말씀, 저도 뼈저리게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188편은 완전 최악-_ㅠ;; 아무래도 슬럼프에 빠진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_-+
암튼 너무 죄송하구요, 빨리 페이스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ㅠ;;
[원랑] 오르가즘 - 189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결재를 요청하며 올라온 서류 더미 사이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업무에 열중하던
인하는, 피로를 몰아내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담배에 불을 댕긴다. 흘깃 시계로
눈길을 돌리니 이미 퇴근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렸다. 검토 중이던 것들만 마무리
짓자며 다시 깨알 같은 글씨들로 집중하는 그의 귓가에 인터폰 소리가 들린다.
연이어 나긋나긋한 비서의 목소리가 울려나온다.
「한병규 검사님 오셨습니다.」
「예, 알았어요.」
버튼을 눌러 비서의 말에 응대해준 뒤 인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때맞춰 문이 열리며 고급스런 슈트 차림의 한병규 검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인하는 여느 때처럼 시원스레 반색을 표하며 그를 맞이한다.
「어서 와. 안 그래도 한번 찾아갈 참이었는데 마침 잘 와줬구먼.」
「승진 축하해. 소식 듣고 바로 온 거야. 드디어 자네가 서울지검에 입성하는군.」
친밀감 두터운 악수를 나누며 두 남자는 환담을 주고받는다. 비서가 녹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인하는 병규에게 담배 한 개비를 권하고 느긋하게 상체를 소파 등받이에 기댄다.
분명 서로에게 거리낌 없이 반말을 쓰고 있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가늠했을 때 인하는
마치 병규보다 한참 윗사람인 듯 보인다.
「고맙네. 그나저나 자넬 두고 떠나려니까 영 찜찜해. 골치 아픈 사건 남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나 때문에 괜히 자네만 더 고생할 것 같아. 미안하게 됐어.
내 언제 한번 술 한 잔 거하게 사지.」
「미안하기는, 별 소리를 다 하네. 그건 그렇고, 자네도 소식 들었지?」
「소식이라니, 무슨?」
「이 친구, 이거… 이래 가지고 서울 깡패들 제대로 때려잡겠나. 충의회랑 연화회
말이야, 조만간 크게 한번 붙을 모양이던데. 이재준 그 새끼가 눈깔이 돌았더구먼.
하여간 어린것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충의회'라는 세 글자가 귓전을 건드리자 인하는 편안하게 풀어헤쳤던 자세를
올곧게 고쳐 잡는다. 순간 오전 중에 있었던 주혁과의 통화가 떠오르고, 그는
주혁이 오늘 저녁 자신을 방문하고자 한 목적이 무엇인지 대강 가닥이
잡히는 듯 하여 야릇한 웃음을 띤다. 그의 표정 변화에 병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옛날 은명회 알지? 강진혁이가 오야붕이었고 인천 쪽 잡고 있던 조직 말이야.」
「아, 강진혁? 거기 충의회가 먹었잖아. 작년 3월이었던가,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 강진혁. 그 새끼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강태라고, 이재준이 은명회 접수하면서
강태를 애인 삼았던 모양이야. 꽤 오랫동안 데리고 살았다더군.」
「뭐, 애인??」
가느다랗게 휘어져있던 인하의 눈동자가 번쩍 치켜떠지며 병규에게 달려든다.
그런 인하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말을 덧댄다.
「응. 나도 처음 들었을 때 의외였어. 그 바닥에도 물론 남자 밝히는 새끼들 더러
있지만, 이재준은 전혀 그렇게 안 보였거든? 더 웃기는 건, 강태란 그 놈 수완이
좋은 건지 단순히 워낙 예뻐서 그런 건지, 그 바닥에서 난다 긴다 하는 놈들
사이에서 강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는 거야. 이재준도 걔를 끔찍이 예뻐해서
어딜 가든 꼭 데리고 다녔대. 그러다가 무슨 일인지, 이재준이 강태를 조문환한테
넘겨줬어. 조회장 말로는 이재준이 싫증나서 갖다 버린 걸 자기가 운 좋게
주워온 것뿐이라고 그러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또 그게 아니란 말이야.」
묵묵히 병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인하의 얼굴엔 줄곧 비스듬한 실소가 걸려 있다.
기우뚱하게 한 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는 배가 근질거리게 재미있다는 낯으로 묻는다.
「그게 아니라면, 충의회와 연화회 사이에 강태를 두고 마찰이 있었단 뜻인가?」
「바로 그거야. 며칠 전에 이재준이 강태를 데리고 어디론가 잠적을 해 버렸거든.
그것 때문에 조회장은 야마가 돌아서 이재준이 데리고 살던 여잘 망가뜨려 놨고.
이쯤 되면 조만간 전쟁이 벌어진다는 건 뻔하지 않은가.」
「잠깐만, 정리를 좀 해 보자고. 그러니까 자네 말인즉슨, 이재준이랑 강진혁 아들이
죽고 못 살 만큼 진한 사이였는데 중간에 조문환이 끼어들었고, 무슨 이윤지 모르지만
이재준은 애지중지하던 애인을 내어줬다. 그리고 여자까지 들어앉히고 조용히
살다가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옛날 애인을 데리고 종적을 감췄다.
그 때문에 조문환은 이재준이 데리고 살던 여잘 걸레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곧 있으면 두 조직 사이에 칼부림이 날 것이다?」
청산유수 같은 인하의 언변에 병규는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머리를 끄덕인다.
그리고 무언가 자기 의견을 덧붙이려 하는데, 평소보다 반 옥타브 정도 고조된
인하의 음성이 그를 가로막는다.
「한 마디로 강태란 그 놈을 차지하기 위해서 조문환과 이재준이 조직의 사활을
걸고 싸울 거란 얘기지 않나.」
「뭐, 압축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자네 생각은 어때? 어느 쪽이 이길까?」
「글쎄, 현재 상황으로 따져보자면 충의회가 한수 위겠지.」
「내 생각도 그래. 하여간 눈엣가시 같은 놈이야. 내가 그 새끼한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아직도…」
「수모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급작스레 북받친 감정을 되삼키지 못하고 쏟아낸 병규는 흠칫 입을 다물지만
인하는 그를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병규는 주저하다가 그윽하면서도 주술적인
인하의 눈빛에 휘말린 듯 떠듬떠듬 입술을 떼어놓는다.
「그게 아마… 지난 9월인가… 이재준 밑에 있는 놈들이 날 충의회에 끌고 갔었어.
그 전에, 조회장이 나한테 부탁한 게 있었거든. 자기 똘마니가 여잘 하나 죽였는데,
초범이고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니까 선처 좀 해 달라고. 대충 조사해 보니까
조회장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적당히 처리했지. 그런데 죽은 그 여자가 이재준하고
깊은 사이였던 모양이야. 재수사하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텐데, 그 땐 어물쩍
넘어가지 말라고 협박을 하더군. 결국은 재수사 없이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어.
이상하긴 했지만 내 입장에선 잘 된 일이니까, 또 이 후로 그에 관련된 아무 사건도
없었고.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까 정말 이상하네? 이재준이 왜 그렇게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던 걸까? 검사 불러다 협박까지 할 정도로 기세등등하던 놈이.」
「아까 자네 입으로 얘기하지 않았나? 이재준 눈깔이 돌았다고. 요즘 젊은것들,
하나 같이 마찬가지야. 자기감정 하나 컨트롤 못해서 구만리 같은 앞길을
제 손으로 망쳐버리지. 전부 다 똑같아. 한심해.」
묘한 여운을 늘어뜨리는 인하의 대답이 언뜻 이해되지 않아서 병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얼마간 각자의 상념에 잠겨 있느라 두 중년 사내 사이의 공기는 휑한 정적으로 메워진다.
그 침묵 상태를 흐트러뜨린 것은 좀 전보다 한결 단단하고 강경해진 인하의 목소리다.
「이재준, 생각보다 훨씬 버릇이 없구먼. 사실 나도 예전에 그 놈한테서 상당히 기분
안 좋은 대접을 받았었거든. 제 까짓 놈이 아무리 잘 나간다 해도 고작해야 깡패에
불과해. 현직 검사를 끌어다 협박하는 건 젊은 놈 패기이려니, 웃고 넘길 일이 아닐세.
좋게 봐 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디서 주제넘게…!!」
「거야 자네 말이 백 번 옳지만, 이재준을 함부로 건드릴 순 없잖나. 충의회가 줄 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분들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 테고.」
「이재준이 높으신 분들과 안면 트고 지내는 건 알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졌어.
그 새끼가 앞뒤 분간 못하고 설쳐대는 건 우리가 그 만큼 눈 감아줬기 때문이야.
우리가 원칙대로 밀어붙이면 이재준이 어디에 줄을 대고 있던 상관없어.」
「원칙대로?」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인하의 표현에 병규는 의혹 어린 반문을 던진다. 그러나 인하는
그에 대한 답변을 피한 채 다른 쪽으로 화제를 전환시킨다.
「자네, 연화회 조회장과는 막역한 사이지?」
「음, 그 쪽에서 내 신세를 많이 지곤 있지. 그런데 왜?」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조회장과 자리 한번 만들어주게.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조회장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으니.」
― 차창을 뚫고 퍼부어 내리는 햇살이 눈을 찌르자 주혁은 카스테레오 근처에
놓아두었던 색안경을 집어 든다. 확 트인 도로를 질주하는 은색 승용차 안엔
갑갑한 침묵만 떠돌아다닌다. 조수석에 앉은 혁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아슬아슬한 낯으로 창 밖 풍경만 건너다본다. 곁눈질로 그런 혁수의
표정을 포착해 낸 주혁이 들릴락 말락 한숨을 지으며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그리고 어제 저녁 있었던 아버지 인하와의 만남을 상기한다.
예민하게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던 주혁과 대조적으로 인하는 무척 편안해 보였다.
심지어 유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판에 박힌 잔소리 한 마디 쏘아 보내지 않았고
불과 며칠 전 집에서 그랬듯이 무지막지한 경멸감과 배신감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마치 부자(父子) 사이엔 아무런 감정의 앙금도, 티끌만한 갈등의 불씨조차 없는
것처럼 인자하고 너그럽게 주혁을 대하는 인하였다. 주혁은 서슬 푸른 공격의
발톱을 가다듬으며 요모조모 캐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부 주혁이 예측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 그야말로 '정석'과 일치하는 것뿐이라 그는 아직까지도
짜증스런 위기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대체 무엇이 인하를 그토록 수더분하게
만들어놓은 걸까. 이건 틀림없는 폭풍 전의 고요다. 그런데 나는 닥쳐올 폭풍에
대해 어떤 대비책도 마련해둔 것이 없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패배의 예감.
우리가 설계한 장밋빛 플랜은 결국 터무니없는 백일몽으로 끝나게 되는가.
지난 날 우리가 헤쳐 나온 고통의 터널도, 자신을 저주하고 부정하며 피처럼
토해낸 눈물도, 한낱 무가치한 감정의 유희로 곤두박질치게 되는가.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사랑은 범죄로 낙인찍히는 것인가.
폭발할 것 같은 심장을 견딜 수가 없어서 주혁은 얕게 신음을 뱉으며 운전대를
꽉 부여잡는다. 손마디가 새하얘지는 그를 발견하자 혁수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운전할까? 너 많이 피곤해 보여.」
「아냐. 다 왔는데, 뭐.」
주혁은 심상한 어조를 꾸며내 대꾸하고 자동차는 좁다란 길목으로 접어든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세라가 묻혀 있는 작은 산이다. 지난여름 장례식 이후
한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던 두 사람이 함께 발걸음 하게 된 것은 혁수의 제안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혁수는 뜬금없이 세라의 산소에 가고 싶다 청했고, 주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한 달음에 이 곳으로 혁수를 데려 왔다. 더 이상 차가 올라가지 못할
지점에 이르러 주혁은 적당한 자리에 주차를 한 뒤, 혁수의 손을 잡고 세라가 묻힌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워낙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주혁 덕분에 두 사람은
몇 십분 후 자그마한 비석 앞에 당도한다. 1년도 지나지 않았건만 네모진 회색
돌은 벌써부터 퀴퀴한 퇴락의 냄새를 풍긴다.
정말 이 아래 세라의 육신이 있는가. 이미 모두 썩어 그 형체를 잃었겠지.
「세라야…」
잠꼬대를 하듯 혼곤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주혁은 차가운 흙바닥 위에 털썩
무릎을 꿇는다. 혁수의 다갈색 눈망울에서는 아까부터 억지로 가둬둔 눈물이
한 방울씩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그 탓에 혁수는 입술을 떼지 못한다.
「네가 너무 보고 싶다, 세라야. 네가 미울 정도로.」
그렇게 일찍 너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걸 보면, 신은 우리 편이 아닌가 봐.
아니면 우리의 사랑이 신의 섭리와 율법에 위배되는 죄악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징벌을 받고 있는 거니? 너의 죽음, 너의 부재를 통해서.
「제발 얘기 좀 해 줘, 세라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말이나 좀 해 봐.
포기하라고, 어차피 안 되는 싸움이라고, 너만은 그렇게 얘기 안 할 거 아냐.
다른 사람들 다 안 된다 그래도 너만은, 세라 너만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나랑 혁수도 행복해야 된다고, 너 하나만은 그렇게
말해줄 거 아냐. 도와줘야지. 네가 도와줘야지, 세라야. 처음부터 그랬잖아…」
##############################################################################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하는 감상주신 분들께 날립니다~!! ^O^
ㅁbabo0822님: 집착적인 사랑이라;; 참 얄딱구리하면서도 자극적인 표현이네요. -_-ㅋ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 축제준비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신 모양이네요-
열심히 하셔서 멋진 축제, 잘 치르시길 바랄게요. (벌써 다 치르신건 아닌지;;)
글고 응원의 한말씀, 고맙습니다-_ㅠ;; 님 말씀대로 힘낼게요~ ^^*
ㅁ준타열희님: 188편뿐만 아니라 <오르가즘>은 모든 편이 다 짧습니다-_ㅠ;; (자랑이냐;;-_-+)
글고 존경스럽다니요- 그런 말씀하시면 저 쪽팔립니다-_ㅠ* 기다려주신다는 말씀, 감동-_ㅠ;;
그치만 오래 기다리시지 않도록, 빨리빨리 보여드릴수 있도록 할게요- (맨날 말로만;;-_-^)
ㅁ아가혁수7님: 31일까지 시험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좋은 결과를 얻으셨는지? ^^;;
공부하시느라 고생 많으셨구요- 설혹 결과가 안 좋으셨다하더라도, <오르가즘>이 일말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 날씨 추워졌는데, 건강 유의하세요~! ^O^
ㅁcy2id님: 리플보고 너무 반가웠습니다~ 앞으로 못뵙겠구나, 하면서 내심 섭섭했는데-_-ㅋ
설령 앞으로 님의 리플을 못 보게 된다 하더라도, 항상 읽어주신다는 거 기억할게요. ^^;;
(이 말씀 드리면 부담스러워서 계속 읽어주실거야. >ㅁ<;; 냐하하하~;; <- 나이값못함-_-)
ㅁJOAHAE님: 짤막하지만 강렬한 리플. 감사합니다. -_-ㅋ 화가 많이 나신듯하군요;;;
저도 개인적인 맘같아서는 조씨아자씨를 댕겅 잘라버리고 싶지만;; 소설 진행상 아직은;;;
항상 남겨주시는 글, 너무 감사합니다. ^^*
[원랑] 오르가즘 - 190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친구란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그리고 너희들, 나한테 미안해하는 거 이제 그만 해라. 나랑 계속 친구하고 싶으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태현의 말투에 감돌던 익살스러움이 온데 간데 없어지고 분위기는
진중하게 침잠된다. 강태는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서둘러 입술을 떼지만 연이어 튀어나오는
태현의 음성에 멈칫한다.
「특히 이재준 너, 계속 그렇게 죽여줍쇼~ 하는 얼굴로 있을 거면 나 너랑 친구 안 할래.」
일직선으로 부딪혀오는 태현의 눈빛이 재준의 고개를 떨어뜨린다. 강태 역시 뱉어내려 했던
말들을 식도 아래로 꿀꺽 삼키며 하릴없이 시선을 분산시킨다. 어색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가른 사람은 쟁반에 다과를 받쳐 들고 나타난 연수다. 조신한 동작으로 테이블 위에
음료수와 과일을 내려놓은 후, 연수는 따뜻한 미소를 피워내며 태현을 비롯한 세 남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저…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말씀들 나누세요.」
「아, 아냐! 있다가 저녁 먹고 가지?」
태현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만류하고, 옆자리의 강태도 '그러세요'라며 태현을
거든다. 그러나 연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정중히 사양의 뜻을 비치고 걸음을 옮긴다.
그녀를 배웅한 뒤 거실로 돌아온 태현에게 강태는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빛내며
넌지시 묻는다.
「생김새는 세라랑 똑같은데 성격은 영 달라 보이네? 쟤 몇 살이야?」
「고등학교 1학년. 이번에 2학년 올라가.」
「정말?」
똘망하게 반짝이던 강태의 눈동자가 히뜩 균형을 상실하고, 재준의 입가에는 작달막한
웃음이 걸린다. 두 사람의 표정 변화가 무슨 의미인지, 선뜻 알아차리지 못한 태현은
새침한 낯으로 재준과 강태를 건너다본다. 이윽고 강태가 뱉어낸 한 마디에 데면데면하게
이어지던 분위기가 와르르 부자연스런 서먹함을 허물어뜨린다.
「하여튼 문태현, 능력 있어. 은근히 후리는 재주가 특출 나단 말이야.」
「내가 또 비디오가 좀 되잖니. 게다가 성격 좋지, 유머감각 풍부하지,
아~ 난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났어.」
뻔뻔스러울 정도로 생글생글 미소를 띠며 재잘대는 태현에게 강태는 못 말리겠다는
듯 밉지 않은 눈 흘김을 던지는데, 재준은 살포시 내비쳤던 웃음마저 거둬들인 채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범벅된 복잡한 눈동자로 망연스레 그를 응시하기만 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농담을 지껄여대는 그가
눈물나게 감사하고 믿음직스러워서 코끝이 싸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형? 나 때문에… 생전 처음 눈알 돌아갈 정도로 좋아했던 사람을
포기하고, 또 나 때문에… 형의 목숨을 가차 없이 내던질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를
잃었잖아. 그런데도 나는… 형이 원망 한 마디, 불평 한 마디하지 않고 강태를 내게
보내줬을 때, 고맙다는 상투적인 인사 한번 하지 않았어. 형이 자기 목숨을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메다꽂았을 때조차 형 얼굴 한번 보러 가지 못했어.
그 후 형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시답지 않은 장난과
농담으로 나를 대하는 형을 마주했을 때, 그게 형 마음의 전부라고 믿어버린
멍청한 나였어.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일언반구 변명조차 듣지 않고선 나를 이토록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거야. 어쩜 그렇게 편안하고 가식 없는 미소로 나를 향해 웃을 수 있는 거야.
……형은 아주 나빠. 나를 천하의 죽일 놈으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이재준, 왜 또 그런 눈으로 쳐다봐? 겨우 분위기 살려놨더니.」
큼지막한 고동색 눈망울을 찡긋거리며 태현이 가볍게 타박을 주자, 재준은
가슴속에서 부유하는 모든 이야기를 한데 뭉쳐 후미진 구석에 쑤셔 박아놓느라
닫힌 입술을 떼지 않는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어색한 정적을 몰아내려 태현은
서둘러 화제를 전환시킨다.
「나랑 연수 얘긴 그만하고, 너희들 얘기 좀 들어보자.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너희 둘이 다시 합친 건 반갑고 기쁜데, 대책은 제대로 잡혀 있는 거야?
주혁이 얘기 들어보니까 이재준 너, 일이 한 두 가지 꼬인 게 아니던데.」
둥글게 휘어져있던 강태의 눈동자가 본래의 모양을 회복하는 동시에 까만 망막 위로
어둑어둑한 그늘이 내려앉는다. 재준은 천천히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태현에게도
한 대를 권한다.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희뿌연 연기만이 허공을 채우는 가운데
낮고 음울한 재준의 음성이 강태와 태현의 고막에 부딪혀온다.
「상황이 만만하지 않은 건 사실이야. 아주 위험해. 나도 그렇고, 강태는 말할 것도
없고. 주혁이 형이 걱정할 정도니까, 아주 심각하다고 보면 돼. 대책은… 특별한 건
없어. 특별한 대책을 세울 만한 여력이 있는 것도 아냐.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 대책이 없다니. 그럼 이대로 앉아서 당할 거란 얘기야?」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양미간을 찌푸리며 태현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되묻고,
강태는 둥그스름한 어깨를 웅크리며 약하게 한숨을 내쉰다.
「내 말은…」
태현에게 자신의 진의를 설명하려던 재준은 옆에 있는 강태를 의식하고 멈칫 입을 다문다.
강태의 옆얼굴에 머물렀다가 이내 아래쪽으로 꺾어지는 그의 눈길에 눈치 빠른 태현은,
강태 앞에서 초라하고 빈약한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재준의 마음을 알아챈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염려와 근심을 힘겹게 외면하는 대신, 태현은 고작 이런 질문 밖에
들이밀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탓한다.
「내가 도와줄 건 없어? 아주 사소한 거라도.」
이번에도 어김없이 먼저 손을 내미는 태현에게 재준은 어쩐지 선뜻 무언가를 부탁하기가
내키지 않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준을 내리누르는 죄책감과 미안함. 재준은 매캐한
담배 연기를 분사해내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며, 일부러 딱딱한 목소리를 돋우어낸다.
「당분간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 강태, 형 집에서 같이 지냈으면 좋겠다.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줘.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어떤 결말이 나던지….」
― 목재 책상 앞에 앉아 진득하니 신문을 탐독하던 문환은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사무실 안으로 발을 디딘 그의 직속 부하는 헛기침을
뱉으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문환에게 다가선다.
「형님, 서초동까지 가시려면 지금 출발하셔야 할 텐데요.
금요일이라 차가 많이 막힐 겁니다.」
문환은 흘깃 눈길을 돌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들고 있던 신문을 반으로 접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선다. 곁에 서 있던 부하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외투를 문환에게
입혀주고 공손히 한 발짝 물러선다. 대기 중이던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문환은 아무 말 없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러다 불현듯 갑갑한 침묵을
흐트러뜨리며 조수석의 부하에게 엄중히 지시를 내린다.
「나 서초동에 내려주고, 양수리 이재준 별장에 가서 강태 데리고 와.
자정까지는 서울로 돌아올 수 있게 빨리 움직여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형님, 진짜 이재준이 눈치를 못 챘을까요?
그렇게 희미한 놈은 아닌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 생각엔…」
「이재준이 눈치를 챘든 못 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자칫 길어질 법한 부하의 이야기를 단칼에 잘라내며 문환은 이견의 소지를 일축한다.
머쓱해진 부하는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차안에는 다시 썰렁한 냉기만이 떠돌아다닌다.
단아한 기와집을 본떠 지어진 한정식 전문 식당에 당도하자 문환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차에서 내려선다. 깍듯이 인사를 올리는 부하에게 재차 신속, 정확한
일 처리를 당부하고 식당 유리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직원의 안내대로 정갈히
꾸며진 밀실 안에 자리를 잡은 그는, 만나기로 한 상대방이 나타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며 조용히 기다린다. 잠시 후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두 중년 사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문환은 용수철처럼 발딱 퉁겨져 오르며 요란스레 반색을 표한다.
「어서 오십시오, 검사님!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인데 고생은 뭘. 조 회장이야말로 멀리까지 걸음 했구먼.」
「아유, 별말씀을…. 앉으시지요.」
세 남자는 각각 푹신한 방석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종업원이 주문을 받아간 후
어느 정도 정돈된 분위기에서 한병규 검사는 문환과 인하를 서로 소개시켜 준다.
「조 회장, 인사 드려요. 이번에 서울지검 강력계 차장 검사로 승진하신
장인하 검사님이세요.」
「아,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문환은 황송하다는 듯 과장된 저자세로, 악수를 청해 오는 인하의 손을 붙든다.
인하는 그런 문환의 태도가 적잖이 맘에 드는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무게 있는 음성을 발한다.
「반갑습니다. 장인하라고 합니다.」
적당히 안부 인사가 오고 간 다음,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휘황찬란하게 차려진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세 남자는 한동안 거나하게 술잔을 주고받는다. 차츰 분위기가
노곤히 풀어지자 인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한결 건조하고 묵직해진 목소리를
틔워낸다.
「제가 조 회장님을 뵙고자 한 이유는, 굳이 설명 안 드려도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만…
한 검사 통해서 듣자 하니, 요즘 충의회와 연화회 사이가 일촉즉발인 듯 합니다.」
은근하게 운을 띄워보는 인하의 제스처에 문환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얇은 입술을 장식한다. 병규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둘의 대화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나름대로 추측해 본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쪽 사정을 훤히 아시니. 이러니 제가
뭐 하나라도 검사님들 없이 추진해 나갈 수가 있나요.」
「허, 그렇습니까. 우리야 하는 일이 그렇다보니 알고 싶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주워듣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지요.」
「아, 물론 그러신 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정보가 너무 빨리 도는 것 같아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어차피 다 알고 계신 것 같으니, 숨김없이 터놓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들으신 대로 충의회 이 회장이 제가 곁에 두고 있던 아이를
자기 별장으로 빼 돌린 바람에, 이대로 묵과했다간 제 꼴이 아주 우스워지게
생겼습니다. 일단 이재준 별장 위치를 파악해서 밑의 애들에게 강태를 다시
데려오라고 일러두긴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내일이 되어봐야 확실히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전면전은 불가피한 상태입니다.」
「이재준이 그대로 강태를 다시 뺏길까요? 벌써 눈치 채고 딴 데로 피신시켰을 겁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충의회를 도발할 생각이십니까? 설마 무작정 쳐들어가겠단 건
아니겠지요. 동네 조무래기들 싸움도 아니고, 뭔가 다른 계획이 있으실 것 아닙니까.」
「도발이라니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충의회가 먼저 저희를 도발한 것이지,
저희 쪽에서 협약을 위반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어떤 식으로
경고를 해 주어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도 짜여진 상태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저희 조직의 사활이 걸린 부분이라 알려드릴 수 없는 점, 양해해 주십시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들려주면서도 자신의 이익에 흠집을 낼만한
정보를 결코 누출시키지 않는, 교묘한 문환의 언변에 인하는 속으로 감탄한다.
치밀하고 계산적이고 논리적이다. 사적인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듯 보이지만,
실상 자신의 감정적 이득까지 면밀하게 고려해서 설계하는 견고한 플랜.
살아남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터득하고 있는 자의 신중하고 다부진 행보.
이 자를 도와준다면, 이재준처럼 나에게 싹수없는 짓거리를 자행하진 못할 것이다.
생존의 법칙을 몸소 체득한 사람이니까, 파멸의 길로 줄달음질치진 않을 테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조 회장님.」
뜬금없는 인하의 말에 문환의 눈동자가 샐쭉하니 가늘어지고 병규의 낯에도
의혹이 서린다. 인하는 상체를 문환 쪽으로 가까이 기울이며 조금 더 고조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어떤 계획이든 마음 푹 놓고 추진하십시오. 귀찮은 일이나 미처 손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힘닿는 데까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
네, 저는 미친X입니다-_-; 날짜를 보니 무려 20여일만에 소설을 올리는군요;;
이러고도 미치지 않았다면 돌 맞아야겠죠-_-+ 준비해 두신 돌들을 마음껏
날려주십시오-_ㅠ; 다음편 쓸 수 있을 때까지만 맞다가 도망가겠습니다-_ㅠ;;;
.................죄송합니다, 여러분. -_ㅠㅠㅠㅠㅠ;;;
ㅁ준타열희님: 생각보다 빨리 나온다고 좋아하시기가 무섭게!! 20여일동안 잠적해버린
작가를 용서하십시오-_ㅠ;; 죄송하고, 변함없는 열독-_-! 감사합니다~ ^O^
ㅁskyara님: 반갑습니다~^O^ 감상 주셔서 너무 감사하구요- 횡설수설이라뇨^^;;
님께서 화이팅해주시는 만큼, 앞으로는 잠적 안 하고 제대로 올리겠습니다.(과연-_-?)
ㅁ아가혁수7님: 엄청 위로가 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감기군과는 헤어지셨는지-_-?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하구요, 세상의 수많은 적들을 헤쳐나가는 톤혁의
활약상을(-_-?)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소설이나 빨리 올리라구요? -_ㅠ;;)
ㅁJOAHAE님: 적당한 시련과 끝없는 애정. 크하하-_-* 저 또한 그렇게 하고 싶지만;;
소설은 또 소설이기 때문에;; 저도 눈물을 머금고 이들을 괴롭히는 중입니다-_-
변함없이 늘 읽어주시고 감상주시는 것,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아무말없이
잠적하는 뻘짓(?)을 안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
ㅁbabo0822님: 짧지만 강렬한 감상, 고맙습니다^^; 님의 응원을 듣고 재준이가 힘을 내더라도;;
작가인 제가 이들을 괴롭히는 중이라;;
ㅁcy2id님: 끝편까지 님의 리플을 보게 된다니, 기쁩니다^O^ 한마디, 한마디가 저에게는
정말 큰 힘이 되니까요;;(왠지 가식적인 말투야-_-) 암튼 고맙습니다~! 님두 파이팅이에요>ㅁ<
ㅁsiggili2님: 반갑습니다~^O^ 일케 감상 주셔서 넘넘 감사하구요-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작품을 기억해주시고 다시 찾아주시니 더욱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건독(?) 부탁드리구요-
너무 오래 기다리시지 않게, 담편을 빨리빨리 올려주는 센스-_-!를 갖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원랑] 오르가즘 - 191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맞닿은 입술 사이로 오가는 숨결이 미어지도록 서러운 것은,
단지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이 좁은 땅 위에서조차 심령의 깊은 곳에 맺힌
한 마디 말을 큰 소리로 외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버려야만 하는 가혹한 현실 때문에.
- 원랑, <오르가즘 #69> 중에서 -
삑 하는 기계음과 동시에 굳게 잠겨 있던 철문이 덜컥 열리고, 혁수와 주혁은 나란히
집안으로 들어선다. 널찍한 공간 속에는 적막과 어둠뿐이다. 거실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이르자 앞서 걸어가던 주혁이 걸음을 멈추고 혁수를 돌아본다.
세라의 산소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무척 말을 아끼던 주혁이었다. 평소 성격이 과묵하긴
하지만 혁수 앞에서만큼은 재잘대기 좋아하고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피워대느라 바쁜 그인데, 오늘 주혁은 꼭 필요한 말 외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슬퍼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당장이라도 심장이 파열할 듯 화가 난 걸까.
혁수는 궁금증에 휩싸인 눈동자를 움직여 서서히 주혁과 시선을 맞댄다. 한 쌍의 검푸른
구슬은 아무런 일렁임 없이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다.
「…왜?」
무지근해진 성대를 비집고 튀어나온 혁수의 음성은 가냘프고 미약하다. 울기 직전의
사람 같다. 주혁은 미지의 힘에 이끌려가듯 팔을 내밀어 혁수의 몸을 감싸 안는다.
다갈색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이고 거기서 풍기는 은은한 사향의 체취가 코밑으로
밀려들자, 주혁은 급작스럽게 치미는 욕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두 팔에 강한 힘을
실어 으스러져라 혁수를 품안에 가둔다. 연분홍 빛 입술 사이로 짧은 탄성을
토해내며 혁수의 팔이 자동적으로 주혁의 어깨에 감긴다. 게걸스런 키스를 이어나가던
두 남자는 침실에 당도하자마자 문을 걸어 잠가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서로의 옷가지들을 벗겨내느라 분주하다. 알몸뚱이의 혁수를 침대 위로 쓰러트리며
주혁은 다시 허겁지겁 그의 입술을 머금는다. 끈끈하게 접촉해오는 주혁의 붉은
입술 때문에 새어 보내려던 신음을 도로 삼키며, 대신 혁수는 야윈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칭칭 동여맨다. 바싹 밀착된 주혁의 몸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겁다.
반면에 혁수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은 아주 느릿느릿하고 리드미컬하다.
간헐적으로 뿜어내는 촉촉한 숨결은 혁수의 온몸 구석구석을 비집고 침투하여
저만치 솟은 비등점으로 혁수를 인도한다. 그렇게 한참동안 허겁지겁 혁수의 육체를
탐하던 주혁이 불현듯 움직임을 멈추고 한 팔을 곧추세워 체중을 지탱한다.
그리고 자줏빛으로 불거져 오른 그의 눈동자가 혁수의 나신을 오롯이 담아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서부터 올망졸망한 발가락까지, 세심하고 꼼꼼하게 훑어 내린다.
단정하게 정리된 눈썹과 오묘한 색채를 띤 갈색 눈망울, 제법 다부진 어깨선과
여자처럼 가느다란 허리, 초콜릿 빛 매끄러운 살결 전체에 물든 복사 빛 홍조.
나의 남자는 아름답다. 아니, 순전(純全)하다.
그래서일까.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시기하고 음해하는 걸까.
이토록 정결하고 무구한 사람을 감히 독차지하려는 나의 몸부림 때문에,
나 뿐 아니라 나의 남자까지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결국엔 내가 그를…….
신이여, 안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든, 당신께서 어떤 전지전능한 권한으로 우리를 휘두르시든,
그와 나를 분리시킬 순 없습니다. 그것만은, 그 하나 만큼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그를 향한 나의 사랑이 당신의 능력보다 더욱 강건한 불가항력임을 증명하겠습니다.
지금 이토록 세차게 뛰고 있는 내 심장으로, 차마 함부로 흘릴 수조차 없어 모질게
말려 버린 내 눈물로, 그 모두를 동원해도 안 된다면 피비린내 진동하는 나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우리의 기도가 그저 허공중에 흩어지는 무기력한 몇 마디
중얼거림에 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겨울의 첫 무렵 당신께 통곡하며 드렸던 기도를
지금 이 순간 철회합니다.
분명 우리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절대자를 향한 건방진 협박을 서슴지 않으며 주혁은 혁수의 몸속으로 자신을 삽입한다.
와락 쏟아져 나오는 혁수의 신음소리가 주혁의 율동에 박차를 가하고, 두 남자는 급속도로
서로에게 녹아 들어간다. 둘의 심장 박동이 하나로 합쳐지고 번들거리며 온 몸을 적시는
땀은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달콤하게 흩뿌려지는 더운 숨결은 욕정을
배가시키는 강력한 최음제가 되어 혁수와 주혁을 몰아의 경지로 치닫게 한다.
바들바들 떨리는 혁수의 손가락이 주혁의 잔 등을 할퀴듯 파고들자, 주혁의 몸놀림이
빨라진다. 그리고 외마디 탄성과 함께 혁수의 몸속에 사정한다.
「……죽는 게 나아.」
혁수에게서 몸을 빼지 않은 채 주혁은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고승(高僧)처럼 초연한
음색으로 중얼거린다. 격한 정사의 여운에 취해 맥이 풀린 혁수는 그런 주혁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몰이해에서 기인하는 두려움은 꽤 위력적이다.
「혁아, 왜 그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혁수는 주혁을 채근하지만, 그는 핏발 선 검푸른 심연을
번뜩이며 혁수를 직시할 뿐이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주혁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핍진하고 둔탁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다시 예전처럼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너랑 내 인생,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내 인생을 포기하겠단 뜻이야.」
누구도 내게 너 없는 삶을 살아내라고 강요할 순 없어. 설령 그 사람이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아버지라고 해도, 난 기꺼이 그를 배신하겠어.
죄책감 따윈 느끼지 않아. 시체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느냐고, 그렇게
따져 묻는다면 어느 누구도 날 수긍시킬 만한 대답을 할 수 없을 테니까.
「……왜 그런 소리를 해.」
혁수의 목소리는 몹시 화가 난 사람 같다. 주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마주본다.
순하고 동글동글하던 눈망울이 옴팡진 날을 세운 채 똬리 져 있다.
「왜 둘 중에 하날 선택해야 해? 그러지 않으려고 떠나는 거잖아. 근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맘 약한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냥 널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하는 나의 기우일 뿐이라고,
그런 상투적인 말들로 혁수를 안심시켜줄 수도 있건만, 주혁은 끝내 그에게 거짓된
가면을 보여주지 못한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아서 주혁의
낯엔 아슴푸레한 미소만 내 걸린다. 그 웃음에 혁수는 철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왈칵
눈물이 터질 것 같다. 왜 이토록 서러울까, 그의 미소가.
「혁아.」
오직 혁수만이 사용하는 호칭. 주혁은 조금 더 환해진 웃음으로 그의 부름에 응대한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혁수의 간원에 주혁의 미소는 순식간에 눈물로 변환된다.
「약속해 줘. 절대 나 안 버리겠다고….」
― 크리스털 술병의 마개를 딴 재준이 세 잔의 글라스에 차례로 술을 채운다.
주혁은 심한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단숨에 쭉 들이켜고, 주량이 약한 혁수는
간신히 한 모금을 넘긴 후 독한 기운에 살짝 얼굴을 찡그린다.
밤늦은 시각에 귀가한 재준은 혁수와 주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마침
잘 됐다면서 둘을 2층의 바(bar)로 불러냈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는 듯
술잔을 주고받은 후에도 얼마간 뜸을 들이던 그가 마른기침을 뱉으며 특유의
굴곡 없이 밋밋한 음성을 퍼뜨린다.
「아까 준상이한테 보고 들었어. 주혁이 형 아버지, 서울지검으로 오신다며?」
속으로만 한숨을 삭히며 주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이런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혁수는 눈동자가 커지면서 주혁을 홱 돌아본다. 혁수의 반응에 재준도
선뜻 납득이 가질 않는지, 뚱해진 표정으로 묻는다.
「혁수 형은 모르고 있었던 거야?」
「아버지가 아직 식구들한테는 말씀을 안 하셨나봐. 혁수 어머니도 모르고 계실 거야.」
간단하게 떨어지는 주혁의 대답을 듣자 재준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낯이 풀어지는데,
혁수만은 아직도 어리벙벙한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주혁으로부터 추가적인 설명이
이어져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주혁은 답변을 회피한 채 아래쪽으로 떨어뜨린
시선을 들지 않는다. 주혁 대신 재준이 혁수를 달래려는 듯, 좀 전보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기로 하고, 지금 형들 보자고 한 건… 사실 약간
이른 감이 없지 않은데, 그래도 준비됐을 때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선반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낸 재준이 하얀 봉투를
주혁과 혁수 앞으로 들이민다. 얼른 열어보라고 눈짓으로 두 사람을 재촉하면서
재준은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쑥스러워 한다. 주혁의 손에 의해 끌려나온 것은
빳빳한 자기앞수표 5장이다. 수표 앞면에 쓰인 금액 '1억원'을 읽어낸 주혁과
혁수의 눈이 더 확대될 수 없을 만큼 홉떠진다.
「재준아!!!」
혁수는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힌 상태고 주혁은 한참 동안 입을 떼지 못하다가
단말마적으로 재준의 이름을 불러 젖힌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쏟아내기 전,
재준은 재빠르게 먼저 선수를 친다.
「뭘 그렇게 넘어가. 형들이 나한테 해 준 거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데. 그러니까
딴 소리하지 말고 그냥 받아 줘. 주혁 형 밀입국도 얼마 안 남았고,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할 거 아냐. 돈 들어가는데 많을 거니까 요긴하게 써 줘.」
「재준아, 이건 말도 안 된다. 우리가 이걸 어떻게…」
「그런 소리하지 말라니까? 형들이 나한테 해 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래.
난 가진 게 돈이랑 주먹 밖에 없어서,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다. 이것 밖에…
형들한테 도움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면목 없는데… 그래도 내 진심이야.」
「아니, 재준아…」
「형들은 미국 가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돼. 강태랑 내 몫까지…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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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컁컁-_-!! 무려 이틀만에-_-V 저 잘했죠? 그쵸?? (나이를 어디로 먹었냐;;-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ㅁbabo0822님: 오매불망 외치시던 톤혁, 이번편 등장입니다. 허접하지만 응응;;씬도-_-ㅋ
글고 목빠지게 기다리시게 한 것,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번엔 빨리 올렸어요-ㅁ-
ㅁcy2id님: 아뉘, 님께서도 한달만에-_-ㅋ 다행입니다(-_-?) 오래 기다리시게 한 불상사는
없었으니 말이죠;; (아닌가-_ㅠ) 님께서도 추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세요~ ^^*
ㅁviexn03님: 으하하;; 첨 뵙는 분 같아요~ 반갑습니다^O^ 으흠;; 주혁이 아빠, 친아빠 맞아요;;
많은 독자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시지만;; 분.명.히. 친아빠 맞습니다. -_-ㅋ
감상 감사드리구요- 앞으로 자주자주 뵈어요^^;;
ㅁ준타열희님: 으하하-_-* 난지도에 갔다버리면 안되요, 저 소설 계속 써야해요-_ㅠㅋ
20여일 간의 잠수를 애교로 봐주신다니, 왠지 말씀 속에 뼈가 느껴집니다. -_-ㅋㅋㅋ
이번에는 2일만에 올렸으니까 진짜로 봐주세요-_ㅠ
ㅁ아가혁수7님: 아니, 이런-_-!! 어디가 아프십니까-ㅁ-? 혹시 감기에 걸리신 건지??
지금은 좀 나아지셨는가 모르겠네요- 얼른 쾌유하시길 빌겠습니다-ㅁ-
호올;; 근데 캐나다에 거주중이셨군요-ㅁ- 글케 멀리서도 열심히 읽어주시니, 새삼 감사합니다;;
타국에서 힘드실텐데, 저의 허접한 기운이나마 불어넣어드립니다. 아자-ㅁ-!
ㅁJOAHAE님: '바둥거리는 변태' <- 회사에서 혼자 웃음 참느라 죽는줄 알았어요-ㅁ-
으하하;; 단지 바둥거리는 변태라면 문제가 간단하지만, 문환은 아주 복잡한 인물이죠;;
열등감도 심하고, 애정결핍증세도 심각한;; 정신적으로 많이 훼손된 인간이랄까요-_-;
ㅁlove35s207님: 저 역시 넘넘 반갑습니다-ㅁ- 제 팬클럽 회원이셨군요~ 더욱 반갑습니다;;
(주제에 팬클럽도 있었다는게 저 자신조차도 웃기지만요-_-ㅋ) 암튼 다시 <오르가즘>을
찾아주셔서 너무 감사하구요- 앞으로 자주자주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원랑] 오르가즘 - 192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사고 기능을 비정상적인 페시미즘으로 몰고 가는 불안감,
그래서 아무리 큰 불행과 고난이 도사리고 있다 하여도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지나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불안.
외면하고 덮어버릴 수 없기에, 진정 압도적인 위력을 휘두르는 운명적 진실.
- 원랑, <오르가즘 #51> 중에서 -
「형들은 미국 가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돼. 강태랑 내 몫까지… 알았지?」
점점 낮게 사위어드는 재준의 목소리가 불안정한 비애감을 싣고 주혁과 혁수의 귀에
흘러 들어온다. 꺼림칙한 느낌을 없애려는 듯 주혁은 서둘러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인다.
혁수는 버릇처럼 재떨이를 주혁과 가까운 쪽으로 끌어당겨 놓아주고, 자상한 혁수의
행동에 재준은 부러움이 묻어나는 듯 슬쩍 미소를 내비친다. 그런 그의 표정 변화에
주혁은 기가 차는지 헛하는 실소를 뱉으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드라마 찍냐?」
의도하지 않았지만 주혁의 말투엔 뾰족한 가시가 돋친다. 희부윰한 담배 연기 사이에
휩싸인 주혁의 얼굴은 냉소적이고 오달져 보인다. 반대로 재준의 낯은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촛불 같다. 그의 눈동자 위로 언뜻 스치는 미소가 꾹꾹 눌러놓았던 주혁의
분노를 촉발시키고, 주혁은 신경질적으로 재준이 건넨 봉투를 집어던지며 소리 지른다.
「죽을 날짜 받아놓은 사람처럼 왜 그러냐고, 짜증나게!」
「혁아…」
보다 못한 혁수가 손을 뻗어 주혁을 만류하지만, 그의 낯에도 미심쩍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재준은 돌연 느긋하고 태연자약하게, 자신이 마치 주혁의
큰 형뻘이라도 되는 양 가벼운 타박까지 날린다.
「돈 집어던지는 거 아냐. 그래도 남의 성의인데.」
「성의고 나발이고 간에 우린 이 돈 못 받아.」
주혁의 어조는 여전히 게걸스럽고 냉랭하다. 행여 재준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스러워진
혁수는 그에게로 바싹 다가앉으며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울려낸다.
「재준아, 네 마음은 형들도 아는데 이건 좀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설명은 해 줘야지.」
「설명 같은 거 필요 없고, 그냥 이게 내 진심이라는 것만 알면 돼.」
「재준아, 그건 아는데…」
「지금 형들 앞에서 내 입으로,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얘기하게 만들지 마. 부탁이야.」
단칼에 말허리를 자르며 튀어나온 재준의 발언에 혁수와 주혁의 표정이 아연해진다.
재준은 그런 둘에게 아랑곳없이 여유 있는 동작으로 술 한 모금을 들이켠 후, 단연한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잇는다.
「나 솔직히 힘들어. 형들 앞에서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 싫단 말이야.
그럴 힘도 안 남았어.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말고 받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지겹고, 그냥 형들은… 나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주는 거나 받아 챙긴 다음에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나. 형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누굴 신경 써?」
속사포처럼 한바탕 쏟아 부은 재준의 얼굴은 독살스럽고 험상궂다. 사적인 자리에서
충의회 보스의 면모를 드러내는 그가 낯설어, 주혁은 급속히 재개하려던 혀의 공격을
슬그머니 거두어들인다. 무엇보다, 비아냥거리듯 뱉어낸 재준의 마지막 질문이 그를
얼어붙게 만든다. 지금 느끼는 이 위태로움은 순전히 혼자만의 방정맞은 비관주의라고,
애써 자위하던 주혁의 여린 믿음에 생채기가 나는 순간이다.
「주혁 형 아버지 서울지검으로 오신 거, 형들한테 좋은 소식 절대 아냐. 떠날 날짜
코앞인데 이런 말하는 거 좀 미안하지만, 어쩌면 벌써 눈치 채였을지도 몰라.
내가 보기엔… 주혁 형은 대충 감 잡고 있으면서 혁수 형한테 일부러 말 안 하는 것
같고, 혁수 형은 정말 상황 파악 안 되는 것 같아서 답답해.」
혁수는 두려움에 물든 눈동자로 주혁을 돌아본다. 그러나 주혁은 역시 묵묵부답인
채로 애꿎은 담배 필터만 잘근잘근 씹어댄다. 재준의 이야기에 무어라 시원스레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짜증스럽다. 혁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점점 바보가 되는 느낌이다. 주혁과 재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목석처럼 앉아있던 그는, 침묵을 가르는 주혁의 음성에 대경실색하며
만지작거리던 술잔을 놓치고 만다.
「그래, 그렇다면 고맙게 잘 받을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주혁의 대꾸에 재준은 그제야 구겨져 있던 인상을 풀고 천천히
입 꼬리를 끌어당긴다. 바 테이블 한 귀퉁이에 처박혔던 봉투를 다시 집어 올리며
주혁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주혁을 바라보며
혁수는 식도 한 가운데 큼지막한 얼음 조각이 걸린 것처럼 숨통을 틔우기 버겁다.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은 공기입자 사이로 너무 낮게 깔려 음산하게 들리는 주혁의
목소리가 퍼져 나간다.
「너희를 걱정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최소한 걱정하고 있단 티는 안 낼 테니까…
넌 강태나 잘 지켜라. 저번처럼 바보 같이 손놓지 말고. 안 그럼 지금 이 돈, 너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알았어?」
― 인하, 병규와 저녁 식사를 겸한 밀실 회의를 끝내고 문환은 피로에 절은 몸을
푹신한 시트 깊숙이 파묻는다. 야트막한 한숨을 흘려보내며 담배에 불을 댕기는
그에게 익숙한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고, 문환은 느릿한 농작으로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댄다.
「조문환입니다.」
「회장님, 접니다!」
강태를 데리러 재준의 양수리 별장으로 향했던 부하의 음성이 고막에 부딪혀오자,
문환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버튼을 눌러 차창을 내린다.
「역시 이재준이 벌써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별장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다 뒤져봤는데, 옷가지까지 싹 챙겨 가지고 간 걸 보면 어디론가 벌써…」
「알았으니까 흥분하지 말고, 빨리 본사로 복귀해.」
열에 들떠 떠들어대는 부하를 엄중히 제어하며, 문환은 간단한 지시를 하달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운전석의 부하에게 명령한다.
「차 돌려서 S병원으로 가자.」
보스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부하는 갑작스런 행선지 변경에도 무어라 토를 달지
않은 채 '예'라고만 대꾸한 뒤 왼쪽 깜빡이를 켠다. 문환의 말과 행동은 모든 기능이
자동으로 설정된 프로그램처럼 정확하고 민첩하다. 병원 정문 앞에 당도하자마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문환은 제법 신사연한 제스처로 혜련의 병실 문을 노크한다.
「네, 들어오세요.」
열리는 문틈으로 나타나는 혜련의 얼굴은 며칠 사이 무척 수척해져 있다.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녀는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흠칫 놀란다.
문환은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인 다음,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힌다.
「며칠 못 뵌 사이에 많이 마르셨습니다. 아직도 통증이 심하신 모양이지요.」
안쓰럽고 미안해 견딜 수가 없다는 듯, 과장된 문환의 표정에 슬쩍 비위가 상하지만
혜련은 형식적으로나마 웃음을 띠우면서 그의 말을 받아준다.
「아뇨, 이젠 많이 나아졌어요.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퇴원하고 싶어요.」
「그러십니까? 마침 잘 됐네요.」
생뚱맞은 문환의 대답에 혜련은 고개를 갸우듬히 기울이며 그를 응시한다.
문환은 그녀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후 결연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다시 입을 연다.
「이재준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쪽도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문환의 첫 마디를 장식한 세 글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혜련의 눈동자는 짧지만 격한
흔들림을 내비친다. 하루 종일 그녀의 머릿속을, 그녀의 마음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그 이름. 어쩌면 그녀를 평생 결박시킬 수도 있는 그 이름의 주인공.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이 남자를 믿어도 될까, 하는 것은 이미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 혼자 힘으로 이재준을
내게 종속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0.1%, 그 정도 확률이면 나를 걸기엔 충분해.
「일단 지금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혜련은 잠시 무언가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이내 매무시를 추스르며 한 쪽 벽에 세워진
장롱 앞으로 걸어간다. 몇 개 되지 않는 옷가지들을 가방 안에 정리해 넣은 그녀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자, 문환은 그녀 대신 퇴원 수속을 하러 병원 프런트
데스크로 향한다. 편안한 청바지와 두툼한 점퍼 차림의 혜련은 간호사가 내민 서류에
서명을 한 다음 문환의 뒤를 따라 발을 뗀다. 불과 며칠 전, 경악과 공포에 질린 몸을
이끈 채 타야 했던 검은 세단 승용차가 시야를 잠식하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한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뻔뻔스럽게 물어오는 문환에게 혜련은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이고,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뒷좌석에 올라탄다. 이동해 가는 내내 문환은 오돌토돌
소름이 돋을 만큼 친절한 목소리로 그녀의 용태에 대해 질문하지만, 그녀는
단답형으로 짤막하게 응대할 뿐 말을 아낀다. 대신 머릿속으로는 수천 갈래
상념의 골을 파 들어간다. 궁극적으로 이재준을 내 손에 넣기까지 나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묻고 싶다.
이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냐고. 내가 후회하게 되겠냐고.
……후회? 우습다. 그 딴 건 너무 많이 해봐서 신물이 날 정도잖아.
당연히 후회하겠지. 하지만 그 후회에 대한 보상이 이재준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또 한번 자신을 안심시켜주는 혜련의 귓가에 부드러우면서도 위압감 서린
문환의 음성이 닿아온다. 혜련은 흠칫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지요.」
깍듯이 문을 열어주는 호텔 직원에게 문환은 잊지 않고 후한 팁을 건넨다.
황송해하며 허리를 숙이는 직원을 뒤로하고 혜련은 꺼림칙한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문환이 체크인을 하는 동안 그녀는 호텔 로비를 서성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아직도 한쪽 귀퉁이에서 요란스레 램프를 깜박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실내를 가득
메운 샹들리에 불빛, 우스꽝스러울 만큼 빳빳한 부동자세로 서서 출입구를 지키는 도어맨.
어울리지 않는다, 나와는. 삐걱거리며 어긋나는 기류, 불길한 징조.
「가시죠, 혜련 씨. 이쪽입니다.」
빙긋이 웃음을 머금은 채 손짓하는 문환 쪽으로 한 발짝씩 다가서며 혜련은 기하급수적으로
부피를 늘려 가는 상서롭지 못한 기운에 짓눌린다. 점점 가빠오는 숨을 고르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하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호텔 직원이 안내하는 방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향내가 코밑으로 밀려든다. 아이보리 톤 색조로 꾸며진 객실은 청결하고 단아하게
정돈되어 있다.
「방은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음성. 혜련은 보일 듯 말 듯 양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꾸한다.
「덕분에 제가 호강하네요. 이렇게 돈 쓰실 필요는 없는데.」
「무슨 말씀을요. 조금이라도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 전화 주십시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이재준을 혜련 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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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 모두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셨나요? >ㅁ<;;
크리스마스 전에 올려서 인사를 들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_ㅠ;;
새해가 오기 전에 꼭 한편은 더 올릴게요. -_-ㅋ (잘났어;;-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ㅁlove35s207님: 첫번째 감상 감사합니다^^;; 주혁이아버지 델꾸가서 어쩌시려고요?
죽이시려고요? -_-ㅋ 제가 알아서 할게요. -_-V(또 어설픈 궁금증 유발;;)
ㅁcy2id님: 으하하;; 저도 재준이한테 봉투 받고 싶어요~! >ㅁ< (작가 맞어? -_-+)
감사는요, 제가 감사하지요-_ㅠ; 너무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_-;;
ㅁ준타열희님: 협박이 먹혀든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잠수해버린 작가를 용서하세요-_ㅠ
원타의 행복, 님께서 닉네임을 <원타열희>로 바꿔주신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_-ㅋ
이 와중에도 준타팬을 원타로 개종시키려하는 처절한 저의 몸부림입니다-_-;;
하하하;; 감상 고맙습니다~ ^O^;;
ㅁ아가혁수7님: 근데 정말 뭐가 좋으신지;;-_-?(저 엄청 형광등이에요;;-_-ㅋ)
그넘의 감기가 아예 도망가서 오지 말아야할텐데; 좀 괜찮아지셨는지요? ^^;
ㅁJOAHAE님: '적당한 시련 & 해피엔딩'<- 이게 참 힘든거거든요-_-;
저만 힘든건가요? -_ㅠ; 암튼 님 말씀마따나 절정으로 치달아가면서 더욱
심혈을 기울여 써야하는데, 큰일입니다;; (능력부족을 처절히 느끼고 있어요-ㅁ-)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ㅠ;
ㅁbabo0822님: 아하하하^^;; 소장본 소식 들으셨군요-ㅁ- 사주신다니 감격입니다-_ㅠ
사실 소장본 진행하자고 들었을 땐 내심, "그걸 누가 살까-_-?" 그랬었는데 >ㅁ<
민망한 제목은-_-;; 영어로 표기될거라니까 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것 같은데;;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은 귀신같이 딱 알아보지요-_-ㅋ)
암튼 감사하구요-. 근데 인하는 주혁이 친부 맞아요;; 독자분들이 그 질문 엄청
많이하시는데;; 친부 맞습니다-_-^
[원랑] 오르가즘 -193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너희를 걱정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최소한 걱정하고 있단 티는 안 낼 테니까…
넌 강태나 잘 지켜라. 저번처럼 바보 같이 손놓지 말고. 안 그럼 지금 이 돈, 너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알았어?」
상스러운 욕설을 씹어뱉듯 으르렁거리며 이야기하는 주혁의 입술이 닫히자, 재준의
깡마른 얼굴에 아리송한 미소가 번져 나간다. 그 미소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풋 하는 실소가 터진다.
「못 들어주겠네, 정말. 이젠 막 맘이 아프려고 그런다. 형들이나 살 생각해!
도대체 형은 무슨 생각으로 혁수 형한테 암말도 안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보기엔, 손놓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형들이야. 왜 멍하니 가만있어?!」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환장하겠네, 진짜… 그게 지금 형 입에서…!!」
녹녹하게 풀어졌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흉흉한 칼날을 세우고 세 남자를 둘러 진 친다.
이유도 불분명한 재준과 주혁 사이의 언쟁을 중단시킨 것은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혁수의 음성이다.
「둘 다 그만해. 재준이 네가 안타까워하는 건 알겠는데,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해.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가 먼저 서슴없이 너한테 도와달라 그럴 거니까 괜히 앞서서
불안해하진 마. 우리한테도 그건 전혀 도움이 안 돼. 그리고 주혁이 너도 분명 잘못 했어.
아버지가 서울지검으로 옮기시는 건, 내가 들어도 안 좋은 소식이야. 일이 틀어질 소지가
분명 있는데, 왜 그걸 나한테 숨겨? 네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심산이야? 그럼 나는 뭔데?
나는 머리 빈 인형처럼 네가 해주는 것만 받아먹고 뒤에서 얌전하게 숨어있으라고?
너 혼자 얻어터지던 피투성이가 되던 상관하지 말고, 눈 가리고 귀 막고 숨어있을까?」
「혁수야, 나는 단지…」
「알아, 네가 나 생각해서 그런 거 나도 알아. 왜 모르겠어, 내가 네 마음을.
그래도 이건 아냐, 혁아.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건 옳지 않아.
오히려 나중에 내가 더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리 있게 한 마디 한 마디 이어나가는 혁수를 보며,
재준과 주혁 모두 급격히 끌어 올렸던 감정들을 순하게 누그러뜨린다. 할 말을
끝낸 혁수가 언제 장광설을 늘어놓았냐는 듯 조용히 입을 다물어 버리자, 살벌하게
굳어 있었던 공기 입자들은 서먹서먹한 침묵으로 둔갑한다. 멋쩍은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는 재준이 먼저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주혁도 따라서 한 대를
피워 물며 슬쩍 혁수를 곁눈질한다. 우울한 다갈색 눈망울을 아래로 내리 깔고
동그마니 앉아 있는 모습이 때에 맞지 않는 연민을 불러일으키자, 주혁은 그 비릿한
치받침을 되삼키려 양주 한 잔을 단숨에 비운다. 그런 주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준이 희미한 한숨을 새어 보내며 어렵사리 입술을 뗀다.
「주혁 형이 도저히 말 못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대신 설명할게. 사실 장 검사님이
서울지검으로 오시는 건, 나한테도 타격이 커. 뭐, 그건 충의회하고 관련된 문제니까
여기선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 혁수 형 말대로 일이 틀어질 소지가 많아졌어.
그래서 내 생각엔, 주혁 형 출국을 앞당기는 게 좋을 것 같아. 다음주 정도로.」
바닥에만 붙박여 있던 혁수와 주혁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길이의 직선을 그리며
재준에게로 가 닿는다. 재준은 기다란 두 손을 깍지 껴 모으며 상체를 좀 더 두 사람
쪽으로 기울인 채 말을 잇는다.
「이럴 때일수록 빨리 움직여야 해. 어영부영 시간 보내다간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몰라.
준상이한테 서두르라고 지시해놓았으니까 이번 주 중으로 준비 다 끝내고 다음주 초엔
비행기 탈 수 있도록 해.」
주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혁수는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 아무런 대꾸가 없다.
나란히 앉은 두 남자 사이로 음울한 재준의 목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장 검사님은 내가 내일 당장 만나 볼 거야. 승진 축하 인사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를 거니까 뭐, 너무 긴장할 건 없고. 그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 「검사님, 이재준 회장님 오셨습니다.」
수북한 서류 더미에 코를 박고 있던 인하는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오는 비서의 음성을
감지하자 화들짝 고개를 쳐든다. 아무런 예고 없이 들이닥친 재준의 등장에
그의 머리가 바쁘게 회전하고, 인하는 삼엄한 긴장 태세를 갖추며 인터폰을 누른다.
「안으로 모셔요, 신비서.」
인하의 입술이 닫히기가 무섭게 회갈색 목재 문이 벌컥 열리며, 무표정한 재준과
그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준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하는 의식적으로 입 꼬리를
말아 당기며 재준에게 손을 내민다.
「이게 웬일이십니까, 이 회장님! 미리 연락이라도 해 주시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승진하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검사님.」
상대방을 면구스럽게 할 만큼 재준의 태도는 예의 바르고 깍듯하다. 준상과도 호쾌하게
악수를 나눈 인하가 두 남자를 중앙의 소파 쪽으로 안내하고, 깔끔한 치마 정장 차림의
여비서가 차를 내려놓고 사라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글서글하게 풀어져 있던
인하의 눈은 순식간에 삭막한 얼음 꼬챙이로 돌변하여 재준과 준상을 직시한다.
재준은 까칠한 목구멍 너머로 마른침을 삼키며 인하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 쳐낸다.
「그나저나, 이 회장님께선 요즘 정신없이 바쁘시겠습니다.」
인하의 얼굴에 은근한 조소가 걸렸다가 재준이 알아채기 전, 흔적 없이 스러진다.
재준은 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담배를 피워도 되겠느냐 청하고, 인하는 여부가 있겠냐는
듯 친히 양복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재준과 준상에게 한 대씩 권한다.
끽연을 핑계 삼아 본격적인 대화의 물꼬를 트지 않는 재준에게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인하는 다시 군더더기 없는 음색을 발한다.
「풍문으로 들은 것뿐이지만, 이번엔 이 회장님께서 실수를 하신 것 같더군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야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이러쿵저러쿵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조 회장이
아주 화가 많이 나 있던데요. 제가 달래느라 진땀 좀 뺐습니다.」
문환과의 만남이 벌써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인하의 발언에 곁에서 듣고 있던
준상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러나 재준은 아무런 동요 없이 담배 연기만
규칙적으로 뿜어낸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접하듯 무심하고 평온해 보이는
재준을 대하며 인하는 잠잠하게 꺼트려놓았던 분노의 불씨를 서서히 지피기 시작한다.
「저 같은 샌님이 건달들 세계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남의 여잘 건드리는 건
추접스러운 짓이지요. 이 회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리라 믿었습니다만, 의외입니다.」
「여자라뇨, 강태가 여잡니까?」
「그럼, 남자 옆에서 첩 노릇하면서 밥 먹고 사는 게 남자가 하는 짓입니까?」
「첩이라니요. 이젠 웃음이 다 나오려고 합니다. 말씀 삼가십시오.」
한 치의 양보 없이 첨예하게 꼬리를 물며 거듭되는 설전. 삭막하게 메말라 있던 재준의
진회색 눈동자가 푸릇푸릇하게 번뜩인다. 옆자리의 준상은 당장이라도 인하의 목 줄기를
따 버릴 기세에 거칠어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느라 애쓴다.
「겁 없는 새끼. 말을 삼가야 하는 건 너야.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긴요. 돈 냄새만 맡으면 오줌 질질 싸대는 쓰레기들 집합소죠.」
비스듬한 조소를 깨물며 노랫가락을 읊어대듯 이죽거리는 재준에게 인하는 더 참지
못하고 움켜쥔 주먹을 꽂아 넣는다. 재준의 턱이 한 쪽으로 홱 돌아가는 찰나에
준상의 손이 인하의 멱살을 틀어쥔다. 그러나 서릿발 같은 재준의 고함 소리에
그는 뻗으려던 주먹을 멈칫 정지시키고, 씨근덕거리며 인하에게서 물러난다.
재준은 얼얼하게 아려오는 뺨을 어루만지며 단정한 모양새로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다. 인하는 순간적으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취해 버린 자신에게 놀라 멍하니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
「샌님 어쩌고 겸손하게 말씀하시더니 예상 밖입니다, 검사님.」
빙긋 웃음까지 띄우며 이야기하는 재준을 인하는 정면으로 쏘아보기만 한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인하의 온몸 구석구석을 들쑤셔 놓자,
그는 우악스럽게 달려드는 어지럼증에 휘청거린다. 그런 인하의 모습을 즐기는 듯
입가의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재준은 말을 잇는다.
「고정하십시오, 검사님. 연세도 만만찮으신데 혈압 걱정하셔야지요.」
인하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몸을 맡기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달래려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알싸한 니코틴 성분이 기관지를 타고 흘러내리자, 인하의 맥박 수는 그와 반비례하여
감소한다. 세 남자 주위의 기류는 제법 빠른 시간 내에 안정된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는 그러나, 물리적 온도로 측정이 불가능할 만큼 싸늘하다.
「건방진 놈. 어린놈의 새끼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다간 개죽음 당하는 수가
있어. 돈 좀 있고 밑에 깡패들 여럿 데리고 있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딴 건 몰라도 눈에 뵈는 게 없는 건 맞습니다. 제가 그럴 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
「헛소리 집어치우고 똑똑히 들어둬. 난 깡패 때려잡으러 서울지검으로 온 거지, 깡패들
똥구멍 핥아주려고 온 게 아냐. 돈으로 날 매수할 생각이었다면 잘못 짚었어.
그깟 돈 몇 푼에 내가 너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 움직여 줄 것 같아? 네가 줄 대고 있는
높으신 분들이 누군지,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 줄을 이용할 생각도 안 하는 게 좋아.
여긴 서울지검이고, 난 대한민국 검사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깡패 새끼 농간에
놀아날 만큼 병신은 아니란 말이지. 알아듣겠나? 더구나 너 같이 예의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새끼랑 상부상조하면서 살 생각은 없어. 난 원칙을 목숨 같이 여기는 사람이라.」
「허, 그것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원칙을 목숨처럼 여기신다는 분께서 어떻게
자기 자식을 그 따위로 팽개칠 수가 있습니까?」
「너 같은 망나니 새끼가 뭘 알겠냐. 남의 가정사 상관하지 말고 네 목숨이나 챙기지?」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라 목숨 걱정은 오래 전에 접었습니다.
그리고 검사님께서야말로 남의 연애사에 신경 끄시고 나쁜 놈들이나 제대로 잡으십시오.」
「연애사? 나 참… 유유상종이라더니 옛 말 틀린 게 하나 없구먼.」
「왜요, 아드님과 제 성적 취향이 비슷한 게 그렇게 기막힌 일입니까?」
재준은 눈꺼풀 한번 움찔거리지 않고 태연스레 반문한다. 인하는 식도를 거슬러
오르는 욕지거리들을 분해 시키느라 선뜻 입을 열어 맞받아치지 못한다.
박빙처럼 아슬아슬한 정적 속에서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던 두 남자 중 먼저
입술을 뗀 쪽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 재준이다.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도 더 이상,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 또 연화회
조 회장을 만나시거든 전해주십시오. 잠깐이나마 내 숨을 끊어놓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고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부디 몸 성히 계십시오.」
##################################################################
새해가 오기 전 한편 더 올리겠다 뻥쳤던 거 죄송합니다. -_-;;
앞으로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냥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세요;;
암튼. 독자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성취 하십셔~! >ㅁ<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cy2id님: 새해가 오기 전에 못보여드려 죄송합니다-_ㅠ; 연말은 잘 마무리하셨는지?
항상 열심히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계획하신 일 모두 이루시길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ㅁ준타열희님: 개종은 역시 무리군요-_-ㅋ 그래도 불멸원타를 추종하는 제 소설을
일케 열심히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올해 안에 결국 한편 더 못보여드린 것
용서하시고-_-;; 님께서도 새해복 마니 받으시고 몸과 마음 모두 부자되세요~^^*
ㅁskyara님: 왜 쭈삣쭈삣하세요^^;; 톤혁은 정말 실제로 지금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들 같다는 얘기, 종종 듣곤 해요^^;; 아무래도 실제 동성커플을 모델로 써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ㅋ 암튼 열독 감사하구요, 님께서도 새해복 왕창 받으세요^^*
ㅁlove35s207님: 이번에도 늦어서 죄송합니다-_ㅠ; 연말이고 해서 쓸데없이 바빴네요;;
글구 저 못된 사람들을 제가 어떻게 처치할지, 기대 바랍니다. -_-ㅋ
(이 말 역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심 됩니다-_-;;) 새해복 마니 받으세요^^*
ㅁbabo0822님: 식칼은 너무 고전적인 방법인데요? 증거도 쉽게 남고 -_-ㅋㅋ
글구 저 믿으심 안된다니까요;; 한귀로 듣고 한귀로 샤샤삭-_-! 일케 해주세요;;
암튼 새해 멋지게 출발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늘 건강하시고 소원 성취하세요^^
ㅁJOAHAE님: 오오오.-_-ㅋ 이제 시작인건 맞는데;; 작가의 능력부족으로 소설 진도가
영 시원찮습니다-_ㅠ; 그래도 열독해주셔서 늘 감사해요^^* 님께서도 새해복 마니
받으시고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세요~ ^^
ㅁforte96님: 반갑습니다~^O^ 리플 시간 보고 놀랬어요-ㅁ-;; 밤새서 읽으셨나봐요-
저 또 감동먹습니다-ㅁㅠ!! 게다가 <오르가즘>이 첫 팬픽이셨다니 ^^;;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기억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구요-. 앞으로도 계속
열독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글구 <오르가즘> 소장본은 엔티카 클럽 <클래식>에서
발행한답니다^^;;(내 입으로 말하려니 쑥스럽네;;) 아마 1월 중순부터 가예약을
받을 것 같다네요.(자기 소설 소장본 진행상황동 제대로 모르는 작갑니다-_ㅠ)
암튼,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앞으로 자주자주 뵈어요~ ^^*
[원랑] 오르가즘 - 194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이재준을 혜련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자신감 충만하던 문환의 목소리를 되새기며 혜련은 낮게 침전된 한숨을 새어 보낸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 때문에 불안정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는 문환이 추진하려
세워둔 계획이 어떤 것인지 물었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이 말만을 남겼다.
「조만간 강태가 제 발로 절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게임은 끝이에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혜련은 흠칫 놀라는 자신을 문환에게 들키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문환의 발언이 상상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놀라움 너머 도사리고
있는 불투명한 공포의 대상이 살기등등한 마수를 그녀에게로 뻗쳐오는 것 같았다.
혜련은 애써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환을 돌려보냈지만, 넓고 안락한 침대에
누워서도 새벽 늦도록 이리저리 뒤척여야 했다.
희끄무레하게 동이 터 올 무렵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던 그녀는 침대 왼 편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퍼뜩 깨어난다. 느릿느릿 팔을 뻗어 수화기를 귀에 갖다대자
과장된 친절이 듬뿍 배인 프런트 직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프런트인데요, 손님이 한 분 찾아오셨네요. 남수경 씨라고,
친구 분 맞으십니까?」
「아, 네. 맞아요.」
혜련은 막 잠에서 깨어나 잘 틔워지지 않는 목소리를 돋우고, 간밤엔 편히 주무셨냐는 둥
불편한 점은 없었냐는 둥 의례적인 질문들을 날려대는 직원에게 그저 '네'라는 대답으로만
일관하다가 전화를 끊는다. 잠시 멍한 상태로 앉아 있던 곧이어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뻐근한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한다.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죽어!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지랄이야?!」
문을 열자마자 막무가내로 퍼부어지는 친구의 잔소리에 혜련은 어설픈 미소만을
지어 보인다. 땅이 꺼져라 한숨만을 푹푹 내쉬던 친구는 며칠 새에 왜 이리
몰골이 흉악해졌냐며 좀 씻고 오라고, 욕실로 혜련의 등을 떠민다. 대충 세안을
마친 혜련은 친구와 마주보고 앉자마자 담배부터 꺼내 피운다.
「여긴 왜 있는 거야? 멀쩡한 집 놔두고.」
「내가 집이 어디 있냐. 이재준이 나 쫓아낸 거 몰라?」
「이재준이 널 쫓아낸 게 아니라 그 새끼가 제 발로 걸어 나간 거지.」
「그 거나 그 거나. 거기가 내 돈 주고 산 집이냐?」
「아이고! 쓸데없는데 자존심 세우지 말고, 제발 챙길 거 챙기고 물러나.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야? 쿨하게 떨쳐버린다 그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이래?」
「왜 이러냐고? 이제 와서 왜 이러냐고? 너 여자 맞니? 아니, 내 친구 맞아?」
독살스럽게 움직여대는 혜련의 입술 사이로 매캐한 담배 연기와 함께 원망과 격노로
일그러진 음성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 당황하는 친구에게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속사포처럼 쌓아둔 울분을 표출한다.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네가 몰라서 나한테 이런 소리하니? 내가 이재준 때문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네가 몰라서 이래?! 죽기 일보 직전까지 두들겨 맞을 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새끼들한테 돌림빵 당할 때, 그 때
내 기분을 네가 알아?! 다 이해하는 척 말하지 마! 곱게 틀어박혀서 평생 공부만
한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넌 죽어도 날 이해 못해!!」
숨 가쁘게 혀를 놀리던 혜련은 마지막 한 문장을 짓씹듯 뱉어낸 뒤 아차 싶은 마음에
입을 다문다.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을 분에 못 이겨 망각해 버린 실수다. 혜련을
바라보는 친구 수경의 얼굴에 어두침침한 그늘이 내려앉는다. 친구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혜련은 심장 한 가운데를 예리한 바늘로 찌르는 듯한 느낌에 몸을 움츠린다.
「그래, 미안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입으로만 나불거려서.」
「미안해. 내가 말이 너무 심했다.」
「네 말이 틀린 건 아냐. 다만 나는… 슬퍼서 그래. 네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내가 알던 유혜련은 이런 여자 아니었는데, 그 놈이랑 같이 살기
시작한 다음부터 너, 너무 많이 변했어. 그게 가슴 아파.」
두 여자 사이의 공간을 메우는 수경의 음성은 고즈넉하고 을씨년스럽다. 불현듯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혜련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친구의 시선을 피한다. 그러나 수경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를 가져와 혜련 앞에 놓아준 후 말을 잇는다.
「그 놈이랑 같이 살기 전에 넌,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았어. 다른 년들처럼 돈에
환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떻게든 남자 하나 잘 잡아서 신세 고쳐보려는 골빈 년도
아니었어. 비록 몸 팔고 술 따르는 직업이지만 난 너를 프로라고 생각했어. 막말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건 진리 아냐? 세상에 땀 흘리지 않고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은
수두룩해. 그런 새끼들에 비하면 넌 네가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거라고…」
「그만해, 남수경. 난 그런 얘기 들으면 토할 것 같아.」
조용하게 무너져 내렸던 혜련의 눈매가 다시 살벌하게 치켜떠지며 차디찬 목소리로
친구의 말을 중간에 잘라 먹는다.
「그래서 네가 얘기하는 게 도대체 뭐야? 나더러 예전처럼 살라, 이 거야?
옛날처럼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목숨 부지하면서 살라고?
난 그래야 하는 거니? 왜? 왜 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넌 그렇게 살고 있니?
아니잖아! 근데 왜 나한테만 그렇게 살라고 해?!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어.
그게 그렇게 큰 죄야? 그게 그렇게 죽을죄니, 수경아??」
「누가 그렇대?! 이 답답한 년아, 그게 아니라 넌 지금 남의 걸 뺏으려고 하는 거잖아!」
「남의 거라니? 이재준이 왜 남의 거야? 걔는 내 남자야. 그 새끼가 먼저 나한테
같이 살자 그랬고, 결혼까지 하자 그랬어! 강탄지 뭔지, 그 호로 새끼만 다시
안 나타났어도 지금쯤 나는 그 집 안방 차지하고 앉아있었을…!」
「환장하겠다, 유혜련!! 너 원래 이렇게 한심한 년이었니? 뭐, 안방 차지?
지금이 이조시대냐? 역겨워서 못 듣겠다, 진짜. 그리고 아무리 내가 네 친구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재준이 널 정말 좋아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니?
넌 술집 여자였어. 이재준은 깡패 두목이었고! 누가 봐도 이건 견적이 딱 나오잖아.
몇 개월이든 몇 년이든, 어차피 넌 언젠가 버려질…」
수경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혜련의 매서운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후려친다. 둔탁한
마찰음과 알알한 통증이 이어진 후, 수경의 망막에 새겨진 혜련의 얼굴은 질척한 물기로
젖어 있다. 아슬아슬하게 두 여자 사이에 걸쳐진 침묵은 얇지만 깨지지 않을 듯 보인다.
「그래,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해봤자 지금 너한텐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으니까.
하지만 친구로서, 5살 때부터 널 알아온 도리로서 이 얘기만 할게. 지금도 늦지 않았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 둬. 난 네가 걱정 돼. 이러다가 너만 다칠 것 같아서 걱정 돼 죽겠어.
병신 같이 이용만 당하고 다칠 짓은 하지 마라. 나중에 후회해도… 난 널 도와줄 수가
없잖아. 그럼 내 마음 찢어지니까… 친구 가슴에 대못 박지 말고 이쯤에서 관둬.
난 분명히 얘기했다? 나중에 나더러 왜 그 때 안 말렸냐고 원망이나 하지 마.」
울음을 삼키려 어깨를 들썩이는 혜련은 친구의 장광설을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암상스럽게 불거져 오른 황갈색 눈망울은
시샘과 원한, 복수의 집념으로 퀭한 빛을 발산한다. 먹먹하게 들어차는 안타까움 탓에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며 수경은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갈게'라는 짤막한
인사를 남긴 채 혜련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텅 빈 호텔 방안에 홀로 남겨지자, 헤련은
거대한 해일처럼 덮쳐오는 공포와 서러움에 단속할 겨를도 없이 무지막지한 흐느낌을
토해낸다. 구성진 울음바다 속에서 그녀는 또 한번 다짐한다. 이 원통한 눈물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받아내겠노라고. 그녀조차 단정 지을 수 없는, 불분명한 혐의를 지닌
가해자 이재준과 강태로부터.
― 재준과 준상이 자취를 감춘 후에도 인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오래도록 미동 없이
앉아 있다.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눈썹이 그의 심리 상태를 대변해주고, 연거푸 피워
올리는 담배 연기가 차츰 그의 뒤틀린 속내를 가라앉혀 준다. 유리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그는 손을 뻗어 전화기를 집어 든다.
「아, 조 회장. 장인하 검삽니다.」
[예, 검사님! 손수 전화를 다 주시고, 영광입니다.]
역시나 간지러울 만큼 과도한 인사치레에 인하는 내심 흡족해진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아첨과 아양에 길들여지는 동물이다.
「다른 게 아니라 방금 이재준이 왔다 갔습니다. 부하 한 명과 같이 왔더군요.
이 놈이 이제 정말 막 나가기로 맘을 먹었는지, 무례하기가 아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런, 그 무식한 새끼가 정신이 빠져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군요.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남의 여잘 제 맘대로 건드리는 넋 나간 짓을 하겠습니까. 그래도 심한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셔서 천만다행입니다, 검사님.]
「제깟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검사 몸에 손을 대겠습니까. 그래도 몹시 불쾌하군요.
비슷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조 회장은 이렇게 예의 바르고 점잖은데… 역시 어린
놈들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나저나 조 회장, 정말 말씀을 안 해 주실 겁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순진한 척 떠듬떠듬 반문하는 문환을 향해 희미한 실소를 깨물며 인하는 말을 잇는다.
「이 정도면 이재준 쪽에서도 한번 붙어보자는 얘기 아닙니까. 자기 입으로도 그렇게
말했고요. 본격적으로 행동 개시할 때 같은데, 이젠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일 건지
나한테 얘기할 수 있는 거 아니요?」
[글쎄요.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며칠 내로 직접 보시게 될 텐데.]
어눌하게 말끝을 흐리던 좀 전의 어조와는 사뭇 다른, 냉철하고 단연한 문환의 말투에
인하는 늦추었던 긴장의 끈을 다시 조인다. 더 이상 캐묻는다고 해서 순순히 대답할
자는 아니라는 판단에 인하는 이쯤에서 통화를 마무리한다.
「아, 그렇습니까. 무척 기대 되는군요. 그럼 조 회장의 활약을 학수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요청하시오. 이번엔 내가 발 벗고 나설 줄 테니.」
또 한 개비의 담배를 입에 물며 인하는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동시에 인터폰이 울리며
여비서가 인하의 측근인 송 실장의 도착을 알리고, 그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 버튼을
누른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기척도 없이 조심스럽게 등장한 30대 후반의 사내는 허리 숙여 인하에게 절을 한 다음
그의 맞은편에 자리 잡는다. 인하는 판에 박힌 멘트로 말문을 튼다.
「어, 수고가 많네. 뭐 보고할 일이라도 있나?」
「예. 아드님의 출국금지 요청이 승인되었습니다.」
「……언제 승인이 완료됐지?」
「오늘입니다. 내일부터는 어떤 방법으로든 나라 밖을 못 벗어나지요. 벌써 비행기 표를
사 놓았을 테니까, 각 항공사별 리스트를 확인해 볼까요?」
「그럴 것 없네. 당연히 멕시코를 통해서 들어갈 심산이겠지. 당분간 잠자코 지켜만
보게. 연화회 쪽에서 곧 움직일 것 같으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cy2id님: 혁수 내공 장난 아니지요^^;; 원래 조용한 사람이 더 무서운 법;;
소장본 발행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나올지가 문제지만. -_ㅠ;(저 때문에;;)
ㅁbabo0822님: 뭐라고 하시는건지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울지 마세요^^;;
글구 저런 인간 때문에 감방에 들어가 썩으면 되나요;; ㅋ
ㅁ준타열희님: 속 뒤집히게 자꾸 장인하 등장시켜서 죄송하네요;; 그래도 주축이
되는 악역인지라 어쩔수가 없어요-_ㅠ; 이번에는 빨리 올렸죠? ^^;;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ㅁㅠ!!)
ㅁJOAHAE님: 역시 충의회 이재준 회장 캐릭터가 <오르가즘> 최고 인기 캐릭터인 것
같아요. 크하하하^O^;; (또 혼자 좋아하고 있음-_-^)
ㅁ아가혁수7님: 으하하;; 재준이가 그들을 쳐부수는 그 날이 과연 올까요? -_-;;
(죄송;; 또 시작된 어줍잖은 궁금증 유발입니다;;)
ㅁinmylove님: 앗, 낯선 아뒤다-ㅁ-!! 감상 감사하구요-. 새해복 마니 받으세요~^^
(갑자기 뜬금없는 복타령;; -_-) 앞으로 기대 많이 해주시고요^^;;
ㅁlove35s207님: 극중인물이라-. 늦었지만 성함을 알려주시면 잠깐이라도 등장을;;
소장본 발행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주제에 소장본이라니, 참 감개무량해요-ㅁ-
아, 글구 강태가 재준이를 내치는 순간, 재준이는 제껍니다. -_-+ 으하하하;;;
[원랑] 오르가즘 - 195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그리고 네가 미워. 세상과 나를 끊어놓은 네가 정말 미워.」
- 원랑, <오르가즘 #88> 중에서 -
주혁, 재준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혁수는 추락해버린 기분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기분 전환을 위해 틀어놓은 경쾌한 음악 소리는 그의 고막에 닿지 못하고 귓등에서만
빙빙 맴돈다. 어느 순간 그 소리가 거추장스러워진 혁수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카 스테레오의 전원을 꺼 버린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몇 잔 들이켰더니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 온다. 얼른 혼자만의 공간에 안착하여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두통과 싸우며 가까스로 집 대문 앞에 도착한 그는
발걸음을 빨리 하고,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반색을 하며 달려 나온 정숙과 맞닥뜨린다.
「혁수, 늦었네? 어서 와라. 안 그래도 기다리던 참이었어.」
「무슨 일 있어요?」
혁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정숙은 만면에 퍼뜨린 화사한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그를 재촉하여 거실로 향한다. 거실 테이블 위엔 소담스러운 과일 접시와 막 마개를
딴 듯 보이는 고급 양주 한 병이 놓여 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상석에 자리한 인하는
넉넉한 웃음을 머금으며 혁수에게 말을 건넨다.
「어서 와라, 우리 아들. 안 피곤하면 아빠랑 한 잔 할까?」
「아유, 여보. 우리 혁수는 술 못해요. 아시잖아요.」
「그래도 오늘 같은 날 한 잔 해야지. 조금만 마셔라, 혁수야.」
평소보다 훨씬 들떠 보이는 인하의 모습에 혁수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소파에 앉는다.
두 손으로 잔을 내밀며 그는 넌지시 여쭙는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봐요? 집에선 술 잘 안 드시잖아요.」
「너희 아버지께서 서울지검 차장검사로 승진하셨단다, 혁수야. 그동안 고생만
하셨는데 이제 좀 편해지시려나 싶어서 너무 다행스럽지 뭐니.」
「이 사람, 편해지기는. 더 바빠져야지 편해져서야 되나요.」
부드러운 어조로 아내에게 밉지 않은 타박을 던지는 인하는 연신 싱글벙글하다.
그러나 혁수에게는 그 미소가 껄끄럽고 부자연스럽게만 비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연기에 몰두하는 배우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혁수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아버지가 따라 준 술을 목구멍 너머로 흘려보낸다. 그리고 여전히 차분하게
내려앉은 음성을 틔워낸다.
「축하드려요, 아버지.」
「그래, 고맙다. 혁수 유학 가기 전에 이런 일이 생겨서 기쁘구나. 좋은 징조인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제 정말 날짜가 얼마 안 남았지? 한 달 후인가?」
「네.」
「이번에 가거들랑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할 생각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렴. 벌써 다른
애들보다 1년 늦어진 것 아니냐, 너는. 그 공백기를 메우려면 배로 열심히 해야지.
주혁이가 널 그렇게 괴롭히는 줄 진작 알아챘더라면 너한테 그 고생을 시키지는
않았을 텐데, 미안하구나.」
주혁의 이름이 인하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자 정숙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찡그리고,
혁수는 움찔 경련하는 몸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흔들리는 눈동자마저
감추려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혁수에게 인하는 진정 안쓰러워하는 투로 말을 잇는다.
「아빠가 더 일찍 너한테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너를 요양원에 보냈던 것 말이다.
그 땐 정말… 그 방법밖엔 다른 수가 없었다, 혁수야. 이해할 수 있겠니? 아빠도 널
거기 보내면서 얼마나 속으로 울었는지 몰라. 그래도 결국 우리 혁수, 아빠 기대대로
잘 이겨내고 회복되어줘서 너무 고마워. 그동안 아빠 원망 많이 했지?」
원망이라뇨. 어떻게 제가 감히, 아버지를 원망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을 증오합니다. 나와 그를 영원히 격리시키기 위해 온갖 힘을
총동원하면서도 지금 내 앞에서 철두철미한 가면을 쓰고 주절대는 당신이,
달착지근한 회유의 말과 너그러운 미소 뒤에 흉흉한 칼날을 숨겨 놓고 있는
당신이, 생전 처음 죽이고 싶을 만치 증오스럽습니다, 아버지.
「원망이라뇨. 그런 적 없어요. 그보다 제가 속상한 건, 저 때문에 형이 집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게…」
「따돌림이라니? 이게 어떻게 따돌림이니? 주혁이는 제 발로 집에서 나간 거야!
엄마 아빠가 주혁이더러 나가라고 했니? 걔가 제 맘대로 나가서 깡패 짓하고
돌아다니는 게 우리 잘못이니?」
금속성의 물체가 쨍 하고 갈라지는 듯한 마찰음을 내며 천장을 울리는 정숙의 목소리에
혁수는 찔끔 몸을 사린다. 인하의 낯은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으며 아내를 진정시키려는
듯 정숙의 손을 힘주어 감싸 쥔다. 혁수는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어쨌든 저로선 마음이 편치 않아요. 저랑 형이 엄마 아버지께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저를 용서하셨다면 형도 용서해주실 수 있는 거잖아요. 네?」
침착했던 혁수의 목소리가 완연한 호소 투로 뒤바뀌고, 애처로이 간원하는 아들의 태도에
날카롭게 이어지던 정숙의 질책은 흐지부지 수그러든다. 긴 한숨을 토해내며 담배 한 대를
피워 문 인하는 바닥을 드러낸 유리잔에 술을 채우며 대답한다.
「물론이야. 주혁이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왜 우리가 용서하지 않겠니.
엄마 아빠도 그러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어. 정말로, 주혁이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냐.」
「모든 게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잖아요, 아버지. 그런데 왜 형을 저렇게 내버려두시는
거예요? 옛날 그 일도 형 혼자 잘못한 일이 아닌데, 왜 형만 저렇게…」
「그만해! 엄만 그 얘기만 나오면 기절할 것 같으니까 제발…!」
가쁜 숨을 헐떡이며 정숙은 긴박하게 부르짖는다. 그녀의 상체가 휘청 앞으로 쏠리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자, 인하는 주방에서 설거지 중이던 가정부를 불러 정숙을
침실로 데려가라 이른다. 과도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어머니를 대하며 혁수는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죄송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붉어진다. 새치름하게 속눈썹을
내리깔고 얼굴 전체에 그늘을 드리운 혁수를 바라보며, 인하는 야단치듯 말한다.
「아빠는 절대 주혁이를 내버려둔 적 없어. 몇 번씩이나 맘 고쳐먹고 돌아오라 일렀지.
거부한 쪽은 네 형이야. 아빠도 언제까지 참을 수만은 없다는 걸 그 녀석이 알았으면
좋겠구나.」
― 「응, 오빠 지금 출발하니까 10분 있다 나와.」
생글생글 미소를 띠운 채 발랄한 음색으로 재잘대는 태현을 향하여, 강태는 부러움과
질투가 적당히 묻어나는 시선을 실어 보낸다. 그런 강태의 눈빛을 의식한 듯 태현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에게 묻는다.
「강태야, 너도 같이 갈래? 연수랑 영화 보러 갈 건데. 너 극장간지도 꽤 됐을 거 아냐.
몸이 막 근질근질하겠다.」
순진하게 반짝이는 암갈색 눈동자가 이제 막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청년답게 부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강태는 씁쓸한 실소를 뱉으며 나지막이 대꾸한다.
「아냐. 나 함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안 돼. 알잖아.」
순간 바보 같은 실수를 해버렸단 자각에 태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강태는 그의 미안함을 덜어주려는 듯 밝게 웃어 보이며 거듭 그를 채근한다.
「난 괜찮으니까 가서 재밌게 놀아. 열쇠 놓고 가고.」
태현은 팔랑팔랑 손을 휘저으며 대문 밖으로 사라지고, 조그마한 아파트 안에 홀로
남겨진 강태는 재준에게 전화를 해 볼까 하는 마음에 수화기를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곧 생각을 고쳐먹고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겉옷을 걸친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비디오 대여점에 다녀올 심산이다. 차가운 바람이 코밑으로 밀려들자
축 늘어져 있던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기분이다.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셔
냉기를 흡입하던 강태는 어깨를 옹송거리며 잰걸음을 내딛는다. 생각해두었던
영화 테이프를 골라 빌린 다음, 강태는 다시 휘적휘적 발을 뗀다. 땅만 보며 걷던
그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로 발음된 자신의 이름이 부딪혀오자, 강태는 화들짝
눈을 들어 사방을 살핀다. 그리고 오른 편에서 자신을 향해 허겁지겁 뛰어오는
남자를 발견하곤 그의 입이 딱 벌어진다.
「진규야!」
후다닥 달려와 강태의 팔을 붙드는 남자는 고교시절 단짝친구였던 동창생이다.
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많이 변한 듯한 친구의 모습에 강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사만 연발한다.
「와~ 너 정말 몰라보겠다. 어쩜 애가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냐?」
「야, 그것보다도 너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연락도 안 되고, 무슨 일 있었어?
애들한테 일일이 다 물어봤는데 전부 다 너랑 연락 끊겼다고 걱정하더라.」
「아, 그게…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미안해, 먼저 연락 못해서.」
「야, 우리 이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자. 시간 괜찮지?」
「그, 그래….」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강태는 긍정의 뜻을 표하고, 친구는 씩씩하게 그를 근처
호프집으로 안내한다. 초저녁이라 가게에 손님이라곤 강태와 진규 한 테이블뿐이다.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진규는 흥분을 잠재우지 못하며 호들갑스럽게
질문 보따리를 펼쳐놓는다.
「하여간 너무 반갑다! 1년만인가? 부모님이랑 누나도 잘 계시고?」
「어, 저 그게…」
절대로, 다시는 상기하지 않으리라 꼭꼭 싸매 두었던 상처를 꺼내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에 강태는 쉽사리 말문을 트지 못한다. 가슴 한 가운데가 쩍 갈라지는 것
같은 통증을 삭혀내며 그는 희미하게 떨리는 음성을 끄집어 올린다.
「부모님은 작년에 돌아가셨어. 누나는 지금 프랑스에 유학 가 있고.」
날벼락 같은 강태의 발언에 맞은편의 진규는 창에 찔린 듯 경악하며 자지러진다.
커다랗게 홉떠진 눈으로 강태를 바라보며 얼마간 말을 잇지 못하던 진규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멍한 눈동자를 한 채 겨우겨우 몇 개의 문장들을 나열한다.
「어, 어떻게 그런… 강태야, 난 정말 생각도… 어떻게 이럴 수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인 진규와 대조적으로, 정작 강태는 남의 가정사를
전해주는 사람처럼 침착하고 덤덤하다. 섬뜩할 만큼 건조한 어조로 부모님의 죽음과
학교를 휴학하게 된 사연 등을 비롯해 자신이 현재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강태는
간략하게 설명한다. 물론 적당한 거짓말을 버무려. 강태의 입술이 닫히고 나서도 진규는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찝찌름하게 둘 사이를 수놓는 침묵을 깨트린 것은
강태의 주머니 속에서 울려나온 휴대폰 벨소리다. 자신에게 전화를 걸 사람은 딱 한 명
뿐이기에 강태는 액정화면을 확인하지도 않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간다.
「어, 나야.」
[어디야? 집 아닌 것 같은데?]
「응. 우연히 친구를 만나서, 잠깐 술 한 잔하는 중이야. 금방 들어갈 거야.」
[친구? 누군데?]
「누구라고 하면 네가 알아? 금방 들어갈 거라니까. 신경 쓰지 마.」
묘하게 가시가 돋친 강태의 말투에 재준은 양미간을 좁힌다. 자연히 재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목소리도 냉랭한 힐책 조가 된다.
[위험한데 왜 혼자 돌아다녀? 그리고 당분간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은 만나지 말랬잖아.
내가 지금 바로 그리로 갈 테니까 기다려. 알았어?]
「친구 만나는 중이라니까? 이따 집에 들어가서 내가 전화할게. 그때 와.」
앙칼지게 목청을 높이며 자기 의사를 표명하는 강태에게 재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던진 후 전화를 끊어버린다.
[안 돼. 지금 갈 테니까 거기 있어. 그 친군지 뭔지 하는 새끼 잡아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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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준이 의처증 끝장인데? -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ㅁinmylove님: 기대하시는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집니다-_-ㅋㅋ 감사해요~ ^^*
ㅁcy2id님: 이번에도 꽤 빨리 왔죠? ^^;; (혼자 자랑스러워하는 중입니다-_-v)
ㅁ준타열희님: 회를 거듭할수록 긴장된다는 그 말씀이 부디 진심이시기만을
바라옵니다-_ㅠ; 저는 회를 거듭할수록 저의 글쓰는 실력에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늘 열심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ㅁbabo0822님: 혜련이를 좋아하셨다구요? 이거이거 정말 의외인데요~ >ㅁ<
혜련이 좋아하는 분 드물던데;; ㅋ 글구 저도 아직 세라를 못 잊었는걸요 -_ㅠ;
제가 죽였지만;; 죽이고 나서도 "내가 미친년이지~" <-이러면서 가슴 친 적이
한두번 아닙니다-_-^ 태현이랑 연수랑 이어주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지금도 그 부분은 써놓고도 후회막심입니다. 다시 쓰고 싶을 정도로-_ㅠ;;
ㅁ아가혁수7님: 그런 애들 물어버리시면 입 버리십니다. -_-ㅋ 제가 처리한다니까요 ㅋㅋ
글구 이번편에서의 재준씨는 그닥 땡기지(?) 않으실듯;; 제 의도와는 다르게, 약간
정신병자처럼 묘사가 된 듯하여;; 이런 젠장, 다시 쓸걸. -_-+
ㅁlove35s207님: 자꾸 뵈니까 정드네요^^;; 팬픽에서 여성캐릭터에게 글케 매력을
느껴본적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니-ㅁ-!! 이 말 듣고 완전 감동했습니다 >ㅁ<
아, 글구 친구분 중에 혜련이가 있으시군요;; 그분께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고의는 아니었다고요-_-; 글구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지아비고 뭣이고 간에;;
재준이는 양보 못합니다. 혁수라면 또 모를까. -_-ㅋ(으하하하;; 뻘쭘-_-*)
ㅁvkdorkspti님: 오옷-_-!! 오랜만에 뵙습니다~ 근데 여기서 뵈었던 게 아닌듯한데;;
제 기억력이 잘못된 건가요;;(워낙 붕어기억력이라-_-ㅋ) 아무튼 님의 사무치는
절규,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_-;; (새겨두면 뭘해. 소설은 지맘대로 쓰면서;;)
[원랑] 오르가즘 - 196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재준아.. 분명히 내가 너한테 상처주는 말을 했는데...
근데 왜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어. 그래서 울었어, 재준아.."
- 원랑, <오르가즘#89> 중에서 -
제 멋대로 달깍 전화를 끊어버린 재준의 행동에 강태의 고운 얼굴이 우거지상으로
구겨진다. 험악하게 돌변하는 강태의 제스처에 진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다.
「여자친구야?」
「아, 아니…」
강태는 애써 진규의 시선을 피하며 대강 얼버무린 다음, 화제를 다른 쪽으로 전환시킨다.
「야, 이제 네 얘기 좀 해 봐. 네가 어느 대학 붙었었더라?」
더욱 짙은 의구심에 휩싸였던 진규의 낯이 말랑말랑하게 풀어지며 신나게 자기
이야기를 떠벌리기 시작한다.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강태의 불행에 대해 들으며
눈물 글썽이던 좀 전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얼굴엔 화색이 만연하다.
「H대 갔잖아. 집에서 학교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게 귀찮아서 여름방학 때부터
여기서 자취해. 친구 둘이랑 같이.」
「아~ 정말? 나랑 친한 형도 거기 다니는데. 신기하다.」
「어, 진짜? 이름이 뭔데? 무슨 과?」
「무슨 과라고 했더라… 아, 실용음악과랬나? 이름은 문태현. 학교에서
꽤 유명하다고 자기 입으로 그러던데.」
「문태현, 알지~! 우리 학교에서 그 선배 모르면 간첩이야. 글쎄, 작년 봄인가는
갑자기 어떤 남자한테 반해 가지고 친구들 다 있는 자리에 제가 좋아하는 남자라고
막 데려오기까지 했대. 그러다가 또 시들해지고. 하여간 화제를 몰고 다닌다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 학교처럼 명물 많은 학교도 드물어.」
엷은 미소를 입에 걸고 친구와 얘기를 주고받던 강태의 낯빛이 순간 한 쪽으로
기우뚱 쏠린다. 그러나 수다에 심취한 진규는 강태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입을 놀리느라 분주하다.
「나는 경영학과라 인문대거든? 인문대 쪽은 애들이 전체적으로 얌전한 편인데,
예체능 쪽 애들은 진짜 특이한 애들 많아. 우리 학교가 또 예체능 쪽으로
알아주잖아. 그래서 그런지, 학교 분위기가 항상 들떠 있다고 해야 하나?
암튼 작년 내내 노느라 정신없었지, 뭐. 학고(학사경고) 맞아서 그거 메꾸느라
지금 계절학기 다니거든. 그래서 집에도 못 가고 이 고생이다.」
하소연 비슷하게 주절주절 늘어놓으면서도 진규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킥킥거린다.
입가에 황량한 쓴웃음을 내 걸며 강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불현듯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는 목구멍 너머로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붓는다. 한갓 평범한 대학생의
학교생활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이렇게 가슴이 싸한 걸까. 지루하고 재미없는 얘긴데.
「재밌게 지내네. 부럽다….」
푸석푸석하게 메마른 미소를 지으며 강태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대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서먹서먹해진다. 진규는 열이 올라 떠들어댔던 게 멋쩍어서
맥주만 홀짝거린다. 얼기설기 자리 잡은 정적 가운데 딸랑 하는 종소리가 울리자
강태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응시한다. 연이어, 유령처럼 핼쑥한 얼굴로
등장한 재준이 강태의 망막을 채운다. 순간 강태는 냉랭하게 낯을 굳히며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려버린다. 강태가 안전하게 있다는 것을 확인한 재준은 뜨악한 눈빛으로
진규를 쏘아본다. 생면부지의 사내로부터 갑작스런 경계의 대상이 된 진규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재준에게서 풍기는 힘이 워낙 압도적이라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한다.
「나가자.」
재준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다. 서늘하게 귓전을 휘감는 그의 음성에도 강태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창 밖 풍경만을 내다볼 뿐이다. 재준의 입술이 한일자로
꽉 다물어지며 거칠게 강태의 팔을 낚아챈다. 강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매섭게
뿌리쳐 보지만 재준의 완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나 아직 친구랑 얘기 안 끝났어, 이거 놔!」
악에 받친 강태가 어린애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뻗대지만, 재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호프집 밖으로 끌어낸다. 혼자 남겨진 진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재준과 강태가 연출하는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한다. 눈 깜짝할 사이 강태를 차안에 가둬놓고 다시 호프집 안으로 들어온 재준은
홀린 사람처럼 붙박여 있는 진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리고 정중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사과 겸 요청의 멘트를 읊어댄다.
「험한 꼴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반가우시겠지만, 지금 강태는
한가하게 친구 만나고 돌아다닐 만한 상황이 못 됩니다. 앞으로 강태랑 마주치시더라도
이렇게 따로 만나자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할 말을 끝낸 재준은 진규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긴다.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텁텁한 담배 냄새가 그의 코끝으로 밀려든다. 뭉실뭉실
피어오른 희뿌연 연기 속에 파묻힌 강태는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다.
판판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워서, 재준은 강태의 화가
폭발할 것을 알면서도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역시나 예상대로 강태는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차창 밖으로 집어던지며 버럭 고함을 친다.
「너 미친 새끼지?! 이젠 친구도 내 맘대로 못 만나? 네가 뭔데 내 친구 앞에서 날
이런 꼴로 만들어?! 내가 얼마나 쪽팔릴지 생각 안 해봤어?」
「쪽팔린 게 문제야, 지금?」
「그럼 뭐가 문젠데? 대체 뭐가 위험하단 건데?? 쟤는 내 친구야. 내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태현 형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라고!」
「그걸 어떻게 믿어. 겉으론 그렇게 보이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지금 심각한 과대망상인 거 알아? 세상사람 전부 다
날 못 죽여서 안달 난 것처럼 왜 그래? 세상엔 너 같은 깡패들만 사는 게 아냐!」
온화하게 녹아있던 재준의 눈동자가 또렷한 진회색 구슬로 둔갑하고, 희미하게
서려 있던 미소는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강태는 잔인한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고 해도, 솔직히 그게 나 때문이야? 내 잘못이냐고!
막말로 이게 전부 다 누구 때문인데! 왜 내가 너 때문에 친구 하나 마음대로
못 만나야 돼? 어디 나갈 때마다 혹시라도 무슨 일 당하면 어쩌나 가슴 졸여야
되고, 영화 한 편 맘대로 보러 못 나가고! 왜 이래야 하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돼? 지겨워 죽겠어, 정말…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뭐, 나 때문? 이게 전부 나 때문이라고?!」
「그럼 나 때문이야? 말을 해봐!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내가 잘못을 했다면…
널 만난 거, 그거 하나밖에 없어. 너 같은 놈 만나서 좋아한 게 내 유일한 잘못이야!」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재준에게조차 공개하지 않았던, 가슴 속 은밀한 곳에 썩은 물처럼
고여 있던 아픔이 마구잡이로 솟구쳐 오른다. 제어할 수 없는 그 치받침이 심장을
좀먹는 듯 고통스러워서 강태의 까만 눈에는 기어코 해묵은 눈물이 맺힌다.
흐느낌을 되삼키려 끅끅거리는 강태와 달리 재준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그가 고수하고 있는 고요함은 너무 철두철미해서 바늘 끝만한 틈도 찾을 수 없다.
해선 안 될 말을 뱉어버렸다는 후회 때문에 강태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다.
「그래서… 이제 후회 되냐?」
그게 아니라고 변명부터 해야 할지, 아니면 미안하다고 용서부터 빌어야 할지, 강태는
결정하지 못한다. 망설이는 강태의 귓가에 싸늘한 재준의 음성이 이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매달리지 말고 끝낼걸, 그런 생각 들지?」
「이재준!」
「그러게 놔줄 때 곱게 갈 것이지 왜 잡았어. 너 이럴까봐 보낸 거였는데.」
강태의 눈가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이슬방울이 더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동시에 강태는 손을 뻗어 재준의 코트 자락을 움켜쥔다. 후들후들 떨리는 그의 손등 위로,
따스하고 커다란 재준의 손바닥이 겹쳐진다. 재준은 정면만 응시한 채 그 어느 때보다
다부진 어조로 선언한다.
「이제 기회는 없어졌어.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다신 너 안 보낼 거야.」
잠시나마 너를 외면했던 지난날이 나의 가장 치욕적인 과거니까.
너로 하여금 네 자신을 망가뜨리게 했던 그 시간이 나의 유일한 잘못이야.
무자비하게 너의 부모를 죽인 것도, 너를 성욕 분출의 도구로만 바라본 처음 시작도
나는 부끄럽지 않아. 오직 한 가지, 너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던 그 날이 가장 수치스러워.
「언제까지일지는 나도 몰라.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난 너 못 놔줘.
네가 아무리 가고 싶다 애원해도 안 돼. 거짓말인 거 아니까.」
목뼈가 부러진 사람처럼 머리를 가슴 깊이 처박은 채, 강태는 막을 겨를도 없이 벌컥벌컥
쏟아져 나오는 흐느낌을 아무렇게나 방치해둔다. 핏줄 한 가닥 한 가닥을 가위로 끊어내는
것 같은 통증이 전신을 엄습해온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상처를 받아야 할 쪽은 분명
재준인 듯한데, 정작 재준의 얼굴을 평화롭고 안온하다. 가해자인 강태만이 주체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아이러니, 그 사이에
살얼음처럼 걸쳐져 있는 것이 사랑일까. 그래서 내 사랑은 아슬아슬한 모험일까.
「재준아.」
울음기 흥건한 강태의 부름이 힘겹게 공기의 파장을 뚫고 재준의 귀에 전해진다.
격렬히 소스라치는 목소리가 가슴을 짓뭉개는 것 같아서 재준은 저절로 눈이 감긴다.
「우리 그냥 도망쳐 버리자. 아무도 찾을 수 없게, 멀리 멀리 도망가자. 응?」
너와 나를 뺀 나머지 것들은 전부 우리 인생에서 빼 버리자. 그리고 온전히 서로만
보다가 죽는 거야. 어차피 승리가 확정되지 않은 싸움이라면, 그냥 피하는 거야.
비겁하게 도망치는 거야. 그래도 우릴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 외엔 없잖아.
「그럴 순 없어. 아니, 그러기 싫어.」
뾰족하고 뻣뻣한 재준의 음성이 흡사 사형 선고처럼 육중한 중량감을 가지고 강태에게
달려든다. 재준의 코트 자락을 붙잡은 강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고, 재준은 서서히
내리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말을 잇는다.
「난 충의회 회장이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책임을 져야 돼. 그리고,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부터 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만약 그런다면 난 정말 할 말이 없어져.」
「그딴 건 다 웃기는 말장난이야!! 모르겠어?! 난 지쳤다고. 지겨워 죽겠다고!!
싸우고 자시고 이딴 거 다 지겨워졌어! 넌 그깟 알량한 자존심 지키느라 지금도
짜증나는 헛소리만 해대는데, 난 이제 그 따위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살고 싶단 말이야!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아니, 왜 우리는 이래야 해? 네가 충의회 회장이든 뭐든
나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 충의회가 그렇게 중요하면 왜 나한테 다시 돌아왔어?
너야말로 왜 그 때 날 끝까지 외면하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으면 나한테만 충실해!
내가 싫다잖아. 내가 싸우기 싫다잖아! 근데 왜 싸워보자는 건데? 싫어, 나는 싫다고!!」
「너야말로 웃기는 소리하지 마! 뭐? 아무도 못 찾는데 멀리 도망가자고? 너 어린애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멀리 도망가면, 이 모든 게 끝날 것 같아? 그 새끼들이
우릴 못 찾을 것 같아? 아~ 어디 멀리 가 버렸나보다, 이러면서 가만 놔둘 것 같아?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 와, 그 새끼들. 너랑 나,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 게 이 싸움이야! 그러니까 너야말로 뜬구름 잡는 개소리 그만해!!」
'너랑 나,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
그 짧은 문장이 흉측한 짐승의 형상처럼 강태의 머릿속에 박제된다. 까무잡잡한 그의
살결이 허옇게 질리며 확대된 눈동자로 재준을 직시한다. 그러나 재준은 고집스레
시선을 앞 유리창에서 떼지 않으며 기계적으로 입술을 움직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죽는 쪽은 절대 네가 아니니까.」
「하지 마. 그런 말하지 마, 이재준.」
「네가 어떻게 죽어. 너처럼 살려고 발버둥치는 애를 어떻게 죽게 놔둬.」
「하지 말라고!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제발 그런 말하지 말란 말이야!」
「절대 너 죽게 안 놔둬. 내가 죽고 말지… 내가 이렇게 널 사랑하는데.」
############################################################################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ㅁreally11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님! ^^;;
ㅁbabo0822님: 취향 정말 독특하시군요-_-; 전 집착적인 남자는 짜증나던데;;
(근데 울남편이 약간 그런 스타일이에요-_-+) 아, 글구 문체에 대한 지적, 감사합니다-
이번편은 어떻게, 좀 나아졌을지 모르겠네요-_ㅠ;;
ㅁcy2id님: 으하하하; 음주운전, 안되죠-_-ㅋ 근데 저는 희안하게 혁수가 주혁이를
형이라고 부르는게 왤케 좋죠? 변태인가-_-;;
ㅁ준타열희님: 오호호-_-* 진심이라는 한마디에 또 기분up입니다.(단순의극치;;)
글구 별일 안 났으니까 걱정 한시름 놓으시고요^^;(소설을 이따위로 써놓고 걱정말라는
소리가 나오냐 반문하신다면 할말은 없습니다만-_-;;)
ㅁlove35s207님: 네, 혁수 가지세요~ ㅋㅋ(혁수가 마치 지꺼인양-_-;;) 으하하;;
의외로 전편의 재준이 모습이 많은 분들께 지지를 받고 있군요. -_-ㅋ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앞으로도 주고받는 리플 속에 정을 쌓아나가요~ ^ㅁ^;;
ㅁ아가혁수7님: 저 역시 어떤 모습의 재준이라도 감개무량하지요~ >ㅁ 혁수의 맘고생이 이쯤에서 막을 내릴지는...앞으로 지켜봐주시고요-_-;;; 하하핫;;;
ㅁinmylove님: 톤혁은 벌써 이어져있어요. -_-;; 다만 옆에서 괴롭히는게 문제죠 ㅋㅋ
(웃음이 나오냐고요? .....죄송;; -_ㅠ;;)
ㅁJOAHAE님: 이런거라면 어떤걸 말씀하시는지? -_-ㅋㅋ 터프한 남잘 좋아하시는군요 ^^;;
[원랑] 오르가즘 - 197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피로에 절은 몸을 이끌고 방안에 들어선 주혁은 가느다란 한숨을 흘리며 양복 재킷의
단추를 총총히 끌러낸다. 활동하기 편한 면바지에 티셔츠를 꺼내 입던 그에게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주혁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인터폰 액정 화면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음을 머금은 준상 뒤에 무표정한
혁수가 다소곳이 서 있다. 문이 열리자마자 준상은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올린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주혁은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준상은 뒤에 있던 혁수가 먼저 들어설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선다. 혁수는 천천히 발을 떼며 주혁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슬쩍 타박을 던진다.
「왜 김 실장님 귀찮게 하고 그래. 나 혼자 오면 되는데.」
「괜찮습니다. 덕분에 안 이사님 일하시는 것도 구경하고, 멋지시던데요?」
「우리 혁수야 멋지기보단 예쁘지. 안 그래?」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서슴없이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는 주혁 때문에 준상은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젖히고, 혁수는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며 곱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나무란다. 재준은 아무리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해도 절대 주혁처럼
소위 '닭살 돋는' 행각을 벌이지 않는데, 옆 사람이 누구이건 전혀 신경 안 쓰고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주혁이 재미있기만 한 준상이다. 2층의 홈 바로 자리를
옮긴 세 남자는 일단 술부터 한 잔씩 따라놓은 다음 나란히 앉는다. 들고 온 봉투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끄집어낸 준상은 주혁 앞으로 비행기 티켓 한 장과 서류묶음을 들이민다.
「준비 작업은 모두 끝났습니다. 출국 날짜는 다음주 화요일입니다.」
주혁은 망설이는 듯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준상이 내민 것들을 받아든다. 비행기 티켓
하단에 또렷이 찍힌 날짜가 강력한 흡입력으로 주혁을 휘감아 온다. 으슬으슬 소름이
돋는 기분에 그는 일부러 척추를 꼿꼿이 세운다. 혁수는 훌쩍 목을 늘려 주혁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들을 건너다본다. 준상은 사뭇 진중해진 음성으로 계속 입을 놀린다.
「필요한 경비는 이미 회장님께서 주셨다고 하시길래 따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잘했어.」
「공항 게이트에서 여기 사진 속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오래 전부터 저희 쪽에
있어서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회장님께서도 많이 아끼시고요. 그 사람이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해드릴 거고, 매일 주기적으로 그 사람을 통해서 연락을 주고받게 될 겁니다.」
주혁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준상이 가리킨 사진 속의 남자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날카로운 눈매에 다부진 인상이다. 언뜻 준상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에 주혁은 피식
실소하며 농담조로 묻는다.
「야, 너랑 닮았는데? 혹시 형 아냐?」
별반 우습지도 않은 조크에 폭삭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는다.
준상은 자신에겐 여동생 하나뿐이라며 너스레를 떨고 주혁은 차차 자세히 검토해보자는
심산에 종이뭉치들을 한 쪽으로 치워놓는다. 그리고 호기심에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들어
준상과 시선을 맞댄다.
「근데 혁수는 왜 같이 보자고 했어? 나중에 내가 얘기해도 되는데.」
마침 궁금하던 차에 잘 물어봤다는 듯 혁수 역시 상체를 주혁 쪽으로 기울이며 준상의
대답을 기다린다. 준상은 객쩍은 얼굴로 양해를 구한 다음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다.
「그냥… 안 이사님과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 장 이사님 출국하시고 나면
더 이상 뵙기 힘들 것 같아서요.」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김 실장님.」
'이사'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운 혁수는 살짝 이마를 찡그리며 볼멘소리를 내고,
그런 혁수의 행동이 어린애 투정처럼 귀여워서 주혁은 입가에 그려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준상 또한 빙그레 웃음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뵙자고 청했습니다. 두 분 같이
모시고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애당초 의도한 본심을 털어놓은 준상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후 빈 유리잔에 차례로
술을 채운다. 화끈거리는 작열감을 음미하며 주혁은 한 모금을 목구멍 너머로 삼킨다.
혁수는 정갈히 두 손을 들어 술을 받기만 할 뿐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는다. 몇 초간의
적막이 이어진 후 새어나온 준상의 목소리는, 유일한 의지처를 잃어버린 노인처럼
쇠약하고 쓸쓸하게 들린다.
「저는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편견이 심하지는 않습니다. 남자가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 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흔한 말로, 사랑에 국경이나 나이가 상관이
없다면 남자, 여자 그런 것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거든요.」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화제가 짐작했던 바와 영 딴판이라, 주혁과 혁수는 흠칫
몸을 사린다. 두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는 언제나, 절대로 긴장의 끈을 느슨히 할 수
없는 시한폭탄과도 같기 때문이다.
「회장님께서 남자를 정부로 들이셨을 때에도 저는 의외라고만 생각했지, 정말 추호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기뻤습니다. 회장님께서 마음 붙일 사람을 만나셨다면, 그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생각했으니까요. 그거 아십니까? 강태 도련님을 만나시기 전까지…
회장님께서 웃으시는 모습,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소슬바람처럼 을씨년스러웠던 준상의 음성은 어느덧 애잔한 회상 조로 치닫는다.
한 잔 두 잔 목구멍 너머로 넘긴 술 때문에 얼근히 올라오는 취기가 길쭉한 그의
눈매를 붉게 물들여 놓는다.
「정말 기뻤습니다. 회장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 뵈면서, 제가 더 기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히 지금은…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쯤에서 말을 끊고 준상은 냉수를 들이켜듯 독한 양주 한 잔을 말끔히 비워낸다.
주혁은 담배에 불을 붙여 그의 입에 물려주고, 혁수는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준상의 다음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회장님과 도련님이 헤어지셨을 때, 제가 도련님을 찾아갔었습니다. 회장님 혼자
너무 힘들어하시는 게 마음 아파서, 주제넘게 제가 도련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올렸습니다. 회장님의 진심을 좀 알아주십사 하고요. 그런데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그 때 그냥… 서로 잊으실 수 있도록 가만히 있을걸… 후회가 되요.」
「준상아.」
어릿어릿 물기가 배어드는 준상의 목소리를 잘라내며 굵직한 주혁의 음성이 허공을 가른다.
「후회할 필요 없어. 네가 아니라도 어차피 둘은 여기까지 왔을 거야.」
「아닙니다! 이사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선 이미 한번, 도련님을 버리셨습니다.
그 때도 저는 바보같이… 회장님께 눈물 짜내면서 도련님을 다시 모시고 오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바보같이…!! 그 때 제가 아무 말 없이 회장님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겁니다. 그 때 그냥 닥치고 있었어야 했는데
왜 병신처럼 주둥이를 나불거렸는지… 그러지만 않았어도 지금 회장님께서 저를
버리시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자그마한 시냇물 소리처럼 잔약하게 흐르던 준상의 목소리는 갑자기 파고가 높아지며
성난 바다로 돌변했다가 다시금 웅얼웅얼 잦아든다.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려 하는 탓이다.
「너무 불안합니다. 회장님께서 정말 저를 버리실 까봐… 이제껏 회장님 한 분만을 보고
살아왔는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회장님께서 떠나셔도 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약속을 드렸지만, 그 약속을 지키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여쭤보고 싶은 건 말입니다,
정말 어떤 사람을 죽도록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겁니까? 어떻게 한 사람 때문에…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온 인생 전부를 쓰레기 취급할 수가 있습니까? 한 번 망설이지도
않으시고 회장님께서는 충의회와 저를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실언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믿기지가
않습니다. 정말 그러실까요? 이사님, 정말 회장님께서 도련님 한 분 때문에 충의회를
나 몰라라 하실까요? 이사님들께서는 그런 회장님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원망스럽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독이 된다면, 그것도 사랑입니까. 그것 또한 사랑의 본질입니까.
「이해할 수 있지.」
간단명료하게 딱 떨어지는 주혁의 대답. 혁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준상을 주시할 뿐
입을 열지는 않는다. 그는 천성적으로 '지나치게' 말을 아끼는 타입이다.
「내 생각엔 너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단지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으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느끼는 거야. 안 그래?」
거침없이 귓가를 유린하는 주혁의 이야기가 쉽사리 납득되지 않아서, 준상은 기우뚱하게
일그러진 낯으로 무언의 반문을 날린다. 주혁은 피식 새어나오려는 실소를 엄격히
단속한 뒤, 그 때문에 더욱 건조하고 딱딱해진 어조로 말을 잇댄다.
「너도 재준이 하나만 보면서 살았다며. 감정의 종류가 다를 뿐이지, 너도 재준이 외에는
네 인생의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냐? 재준이도 마찬가지야. 강태를
빼면 재준이 인생은 사는 게 아닌 거야. 충의회고 나발이고 간에,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
할 거 아냐. 보스 자리에 백년 앉아 있으면 뭐할 거야. 밑에 똘마니들 백명 천명 데리고
있으면서 돈이나 펑펑 써대고, 이 여자 저 여자 후리고 다니고… 그런 인생이 어떤 사람들
보기엔 환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런 인생 마다하고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걸
버린다는 게, 보통 사람들한텐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거야.」
주혁의 장광설이 이어지는 내내 준상의 표정은 시시각각 그 빛깔을 달리하며 어지럽게
떠돈다.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던 주혁의 말은 준상의 머릿속에
새롭게 각인되며 힘없이 그의 목을 꺾어놓는다.
「그래도 네가 배신감 느끼는 건 수긍할 만 해. 내가 너라도 그랬을 것 같거든.」
배신감. 준상을 괴롭히고 울부짖게 하던 감정의 정체가 간결한 세 글자의 단어로
주혁의 입을 통해 발음되어 나온다. 우르르 준상의 기도를 거슬러 오르는 허탈한
웃음소리가 갑갑한 침묵을 와해시키고, 그는 끝내 볼을 타고 굴러 내리는 눈물방울을
거칠게 훔쳐내며 꽉 채워진 술잔을 순식간에 비운다. 주혁은 그런 준상을 저지하는 대신
애꿎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혁수는 왜 이 순간 갑자기 어머니 정숙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황망해진다. 세 남자를 꼭짓점으로 하여 쌓아올려진 공기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침체되어 버린다. 어떤 무기로도 뚫을 수 없을 것처럼 견고한
적막을 무너뜨린 것은, 누군가 저벅저벅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다.
「어, 재준아…」
혁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불현듯 등장한 재준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모습을
나타낸 강태를 감지한다. 재준과 강태 역시 옹기종기 모여 있던 주혁과 혁수, 준상을 보고
의아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웬일이야, 셋이 다 모여서?」
몇 달 만에 상봉한 사람답지 않게 강태는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생글생글 미소까지 띄우며
묻는다. 회백색으로 꺼져든 재준의 얼굴은 침울해 보이는데, 옆에 있는 강태는 과장된
명랑함으로 한 꺼풀 덮여진 듯 하다. 며칠 간 술 생각이 간절했던 알코올중독자 마냥,
재준은 허겁지겁 크리스털 술병의 마개를 따고 아껴두었던 고급 양주를 마치 물마시듯
들이켠다. 예상치 못했던 강태의 등장에 혁수와 주혁은 반색을 표하면서도 딱히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지 종잡을 수 없어 멍청한 침묵만 지키고 있다. 준상은 잘 훈련된
병사처럼 재준이 들어서는 순간 발딱 일어나 문안 인사를 올린 뒤, 주저하듯 조심스럽게
강태에게로 눈길을 옮겨 박는다. 그의 동공에서 광선처럼 쏘아 보내는 눈빛이 휘몰아치는
폭풍우가 되어 강태에게 달려든다. 강태가 움찔 어깨를 웅크리며 준상과 시선을 맞대는
찰나, 돌덩이 같이 딴딴한 그의 주먹이 강태의 복부를 가격한다. 단말마적인 신음과 함께
강태의 허리가 반으로 접히고, 나머지 세 남자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재준은 불에 달구어진
소금처럼 후닥닥 튀어 올라 강태를 감싸고, 주혁은 대경실색해서 준상을 강태에게서 떼어
놓는다.
「김준상! 너 왜 이래?!」
그러나 준상은 대꾸하지 않는다. 짧은 시간 동안 꽤 짙은 농도의 술을 마셔댄 사람 같지
않게 그는 숙연하고 차갑다. 불콰했던 눈자위도 어느새 말끔히 정돈되어 있다. 얼마간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준상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주혁의 팔을 치워낸 다음
강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꺾으며 콧마루를 강태의 발등 위에
가져다댄다. 강태는 머릿속이 진공 상태가 되어 발을 뺄 생각도,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요함 가운데 심연에서 퍼 올린 듯한 준상의 음성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다.
「용서하십시오, 도련님. 저도 도련님을 용서해드렸으니까요.」
######################################################################################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아가혁수7님: 주책바가지라뇨-. 재준이 주혁이 혁수같은 남자를 눈앞에 두고 어떤
여자가 주책바가지 안될수 있겠습니까 -ㅁ-;; 으하핫-_-*
ㅁlove35s207님: 매력적인 생명체<- 웃겨 죽습니다^^;;; 안타깝고 애절하지만, 그만큼
빛나고 큰 사랑. 감동입니다-_ㅠ; 어쩜 저보다 글을 더 잘 쓰십니까 -ㅁ-!!
ㅁbabo0822님: 톤혁;; 이번편에 나오긴했는데;; 딱히 톤혁이라고 할수 없는;; 죄송-_ㅠ;
ㅁinmylove님; 이번 편에서 또 재준이의 인기가 급상승하는군요 ㅋㅋ 역시 저는 주혁팬을
빙자한 재워니팬이 분명합니다. -_-^
ㅁcy2id님: 한편의 영화라뇨-_-* 그렇게 칭찬하시면 또 저 우쭐해요 ^^;;
기대하신 톤혁의 러브모드, 못보여드려서 죄송하구요-_ㅠ; 조만간 대령하겠습니다. 캬캬;;
ㅁ준타열희님: 아아 >ㅁ< 저도 해피모드를 좀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_-;;
하도 구질구질, 칙칙한 내용만 쓰다보니, 이젠 소설을 쓸라치면 기분이 다운되어버리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작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터인데-_-;;
ㅁJOAHAE님: 마음의 준비는;; 글쎄요;; 너무하다고 절규하시니까 제 맘이 껄쩍지근-_-;;
이러다가 정말 재준이 죽여버리면 독자분들한테 단체로 테러당할 것 같네요 ^^;;
(설마 진짜로 준비 중이신 건 아니겠지요...? -_-;;;)
ㅁforte96님: 아하하-_-* 고맙습니다-. 괜히 제가 잠 설치게 해드린 건가요? ^^;;
재밌게 읽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구요~ 앞으로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원랑] 오르가즘 - 198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용서하십시오, 도련님. 저도 도련님을 용서해드렸으니까요.」
준상의 목소리는 육중한 무게를 싣고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가 퉁겨져 오른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지극히 이성적이기 만한 음색에 강태는 머리칼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다. 그것은 무언가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고 난 뒤 엄습해오는 공포와 비슷하다.
저릿하게 복부를 내리누르는 통증은 감쪽같이 이어오던 강태의 연기를 일순간
공중으로 휘발시켜 버린다. 일그러지는 입술을 감추느라 그의 미간에 자잘한 주름이
팬다. 강태의 처분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 준상은 야무지게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재준을 향해 꼿꼿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말한다.
「다른 지시사항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쌩하니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딛는 준상을 누구 하나 막아서지 못하고 어정쩡한 침묵만
떠도는 가운데, 배를 움켜쥐고 있던 강태가 재준의 팔을 걷어내며 성큼성큼 그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뒤돌아선 준상의 손목을 완강히 낚아챈 다음, 흑연 같이 새까만 눈동자를
삼엄하게 번뜩이며 명령한다.
「김준상, 너도 나한테 사과해.」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았던 준상의 낯빛이 또 한번 균형을 잃는다. 이제껏 단 한번도
자신에게 반말을 지껄인 적이 없던 강태였기 때문이다. 당황하는 준상에게 강태는
'친절하게도', 부연 설명까지 덧붙여준다.
「네가 나더러 이재준한테 다시 돌아오라고 난리 쳤으니까 사과해. 그 때 네가 나한테
찾아와서 주절대지 않았으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럼 내 인생은
지금보다 훨씬 편했을 거야. 그러니까 넌 나한테…」
「훨씬 편했을지 몰라도, 지금보다 훨씬 불행하셨겠죠.」
앙칼진 강태의 독설을 싹둑 잘라먹으며 준상은 싸늘하고 매정스러운 음성을 툭 던져놓는다.
문득 그가 자신을 진짜로 증오하는 듯 보여서 강태는 오싹한 느낌에 슬며시 몸서리친다.
「자기가 선택한 인생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 책임을 남한테 떠넘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설령 그 사람이 운명을 같이할 동반자라고 해도 말입니다. 도련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아니십니다. 칭얼대는 건 그만하십시오. 누가 들으면 회장님과 제가
도련님을 보쌈이라도 해 온 줄 알겠습니다.」
지금처럼 웃음기가 완전히 배제된 준상의 얼굴은 처음이라, 강태를 비롯한 주혁과 혁수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굳어 있다. 특히 강태는 좀 전까지 견지하던 옴팡진 태도를
일시에 무너뜨린 채 민망해해야 할지,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준상은 짧게 목례를 해 보이고 유유히 네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유령처럼 아무 기척도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던 재준은, 준상의 뒷모습이 계단 아래로 없어짐과 동시에 실성한
사람 마냥 껄껄 웃어젖힌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그의 파안대소에 나머지 세 남자는
점점 바보가 되어 가는 기분이다.
「하여간 김준상… 내가 강태 너만 안 만났으면 평생 저 새끼 데리고 살았을 거야.」
한참동안 허리가 휘어져라 박장대소하던 재준이 겨우 잦아드는 웃음 사이로 의미심장한
한 문장을 발음해낸다.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엉덩이를 붙이며, 그는 준상이 주혁에게
건네주었던 서류 뭉치로 시선을 돌린다. 방금 전 벌어졌던 해프닝과 자신은 전혀 연관이
없다는 듯, 얄미울 정도로 무신경해 보이는 재준의 태도에 강태는 야속함을 넘어서
짜증이 날 지경이다. 뾰족하고 가늘게 변모하는 강태의 눈동자를 확인하자, 혁수는 이만
자리를 비켜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주혁의 팔을 잡아끈다. 혁수의 뜻을 눈치 챈
주혁은 마른기침을 뱉으며 입을 연다.
「어, 나 혁수랑 나갔다가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둘이 얘기해. 출국 문제는 이따 들어와서
자세히 얘기하자, 재준아.」
「어, 그래. 갔다 와.」
「강태야, 또 보자.」
다정히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혁수에게 강태는 무뚝뚝한 고갯짓으로만 응대한다.
계면쩍은 듯 손가락으로 눈썹 가장자리를 긁적이는 혁수를 데리고, 주혁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1층까지 이어진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잔뜩 독기를 품은 강태의
고함소리가 두 사람의 귀청을 때린다. 현관에 당도하여 신발을 챙겨 신으면서 혁수는
의아함이 가시지 않은 어조로 이야기한다.
「못 본 사이에 강태,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아. 그렇지?」
「그러게.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짤막한 주혁의 대꾸에 혁수는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무겁게 잠긴 분위기가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이 마뜩찮았던 주혁은 고르고 하얀 치아가 몽땅 드러나도록 환히
웃음 지으며 혁수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어차피 사랑싸움은 칼로 물 베기 아니냐. 신경 끄고, 우리 뭐 먹으러 갈까?」
「그러고 보니까 저녁 먹을 때 다 됐네. 근데 너 일해야 되는 거 아냐?」
「아냐~ 출국 준비 완료된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저녁 먹고 영화 볼까?」
「치, 기념할 것도 많다.」
엷게 실소하며 면박을 주는 혁수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주혁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집을 나선다. 오늘밤만큼은 모든 걸 의식 바깥으로 제쳐두고 사랑스런 연인과 아기자기한
시간을 꾸미는데 골몰할 작정이다. 혁수를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꼼꼼히 매어준
주혁은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차를 출발시킨다. 겹겹이 쌓인 시름에 숨쉬기가 곤란해질
때에는 잠깐이나마 백치가 되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운전해 가는 내내 저녁 식사
메뉴를 놓고 옥신각신하던 주혁과 혁수는 결국, 요새 한창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잡은 후, 메뉴를 들여다
보면서도 주혁은 입술을 삐쭉 내민 채 계속해서 툴툴거린다.
「여긴 느끼하고 맛없는데. 매일 자기 맘대로야, 안혁수.」
「뭐가 느끼해, 양식이 다 그렇지! 가만 보면 입맛이 완전 70대 노인이야.」
「어차피 미국 가면 평생 이런 것만 먹고살아야 되는데, 벌써부터 이래야 돼?」
「그러니까 미리 연습해 놓으면 좋잖아.」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혁수를 보며 주혁은 못 말리겠다는 듯 설레설레
머리를 흔든다. 혁수는 어느새 주혁보다 훨씬 명랑해져서는 그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직원을 불러다가 이것저것 주문한다. 주혁은 피식 헛웃음을 뱉으며 혁수가
하는 양대로 그저 내버려둔다. 종업원이 날라 온 음료수를 빨대로 쭉 들이마시며,
혁수는 순박하고 동그란 눈망울을 반짝 치켜뜬다. 다갈색 동공을 충만하게 채우며
들어서는 하얀 얼굴. 주혁은 자동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는다.
「아, 진짜… 공공장소에서 이러지 좀 말랬잖아!」
혁수는 잽싸게 주혁의 손을 치워내며 낮은 음성으로 속살거린다. 항상 이런 식으로 혁수를
골려주길 즐기는 주혁이다. 그걸 번연히 알면서도 혁수가 대응하는 방식 또한 언제나 같다.
주혁은 혁수의 말투를 흉내내며 재밌어 죽겠다는 듯 킬킬대고, 혁수는 잠시 뾰로통한
표정을 짓다가, 종업원이 음식을 내오자 어깨까지 들썩이며 함박웃음을 머금는다.
그리고 방금 전 토라졌던 사실마저 잊은 채 씩씩하게 포크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주혁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혁수가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그의 빈 잔에 물을
따라 놓거나 먹기 편하도록 고기를 썰어 놓느라 바쁘다. 혁수가 기분이 좋을 때에는
어마어마한 대식가가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주혁이다.
「왜 안 먹고 그러고 있어? 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지?」
애교스러운 눈웃음을 치면서 입안 가득 담긴 음식 때문에 부정확한 발음으로 혁수는
주혁에게 묻는다. 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를 좀 더 그와 가까운 쪽으로 밀어준다.
「우리, 마이애미에 가면 말이야…」
한동안 식사에 열중하던 혁수는 일부러 시선을 테이블 위에 고정시키고 스쳐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운을 뗀다. 주혁의 눈동자는 정갈하게 빗겨진 그의 머리카락 위로 이동한다.
「조그만 배를 하나 사자. 우리 딸이랑 셋이서 시간 날 때마다 타는 거야. 멋있겠지?」
「이야~ 나 돈 진짜 많이 벌어야겠다. 근데 왜 하필 배야? 차도 아니고.」
「바다가 좋아서. 특히 마이애미의 바다. TV로 밖에 못 봤지만 거긴 내 영원한
로망이랄까? 햇볕 내리쪼이는 마이애미 바닷가에서 배 타고 그림 그리는 것.」
「하긴, 네 그림 중에 바다를 소재로 한 게 제일 많지. 특히 난 그 그림이 제일
좋더라. 초승달 하나만 딱 걸려 있는 밤바다 그림.」
「아~ 그 그림에 사연이 좀 있지.」
엷게 번져나가는 혁수의 미소에 주혁은 의구심 서린 눈망울을 빛낸다. 혁수는 얼마간
망설이며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입을 연다.
「네가 세라랑 처음 만났던 날, 그 때 둘이 모텔 들어가는 거 내가 봤잖아? 얼마나 화가
나는지 주체를 못하겠는 거야. 질투보다도, 질투를 느끼는 내 자신한테 화가 났었어.
그런 상태에서 막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려놓고 나서 나도 은근히 만족스러웠거든.
웃기지? 원래 예술가는 의도하지 않았을 때 최고의 걸작을 뽑는다며?」
「질투? 네가 그 때 질투를 했단 말이야?」
「뭘 그렇게 놀라? 그 얘기는 저번에도 했는데.」
혁수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려버리며, 짐짓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린다.
주혁은 싱글벙글 벌어지는 입술을 억제하지 못하고 또 다시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되어 혁수와 눈을 맞대기 위해 하얀 얼굴을 그의 코앞으로 들이민다. 혁수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주혁을 밀어젖힌다. 잠깐이나마 서툴게 두 남자 사이를 가로막았던
침묵은 곧바로 흘러나온 주혁의 중저음 때문에 스르르 허물어진다.
「놀랍지. 옛날 얘기하면 놀랍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
그 시절의 절망과 그 시절의 고통, 치열했던 자기학대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누군가의
꿈 속 일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는데… 어느 누가 놀라워하지 않겠어, 이 극적인 변화를.
「그럼, 기대해도 좋겠네. 앞으로 지금보다 더 놀라운 일이 생길 테니까.」
주혁이 입을 다문 후에도 줄곧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 불빛만 바라보고 있던 혁수가
갑자기 눈길을 옮겨 주혁의 검푸른 구슬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리고 그에게 물을 틈조차
주지 않은 채 특유의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음성을 잇댄다.
「우린 행복할 거야.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난 그렇게 확신해.」
―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불빛이 혁수와 주혁의 눈을 찌르고 스며든다. 오랜만에 찾아 온
백화점 내부는 마치 난생 처음 접하는 별천지 같다. 혁수는 어리둥절한 낯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며 주춤주춤 발을 내딛는다. 주혁은 그런 혁수를 보며 미소를 거두지 못하다가
문득 무언가 찾던 곳이 눈에 뜨였는지, 서둘러 혁수의 손을 잡아끈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각양각색의 보석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귀금속점 진열대 앞이다.
주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꼼꼼하게 들여다보다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는
혁수를 향해 질문한다.
「뭐가 제일 예쁜 것 같아? 난 저기 구석에 있는 게 괜찮아 보인다.」
혁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멀뚱히 눈알만 굴리는 중이다.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혁수의 제스처에 주혁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채근한다.
「빨리 골라봐~! 우리 결혼반지 맞추려고 그러니까.」
진열대 안 쪽에서 혁수와 주혁을 상대하던 점원은 '결혼반지'라는 네 글자를 듣자마자,
튼실하게 무장해둔 표피적인 친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다. 혁수 역시 소스라치게
당황하여 하마터면 손을 내밀어 주혁의 입을 막을 뻔 한다. 그러나 주혁은 두 사람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말을 잇는다.
「더 일찍 줬어야 했는데 늦어서 미안해. 이런 거,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말했지? 우린 부부니까… 다른 부부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너한테 다 해줄 거라고. 」
세상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우린 소수의 사람들이지. 소수이기 때문에, 희귀하게 때문에,
혹은 세상이 용납하는 잣대를 넘어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숨죽여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돼.
우린 다 가질 거야. 그리고 누릴 거야. 세상 다른 모든 이들이 애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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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하하하하-_-;; 죽다가 살아오느라고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_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지만;; <오르가즘> 소장본 홍보 좀 하겠습니다-_-;;
1월 하순부터 엔티카 클럽 ‘클래식’에서 제 소설 <오르가즘> 소장본을 가예약 받고
있답니다~^^* 미흡하고 부족한 글이지만 이렇게 소장본이 나오게 되니 감개무량하고
뿌듯하네요. 한편으로는 민망하고 부끄럽지만요;; 아무튼 혹시라도(-_-;;) 소장본
구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아래 주소로 가시면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으하하하-_-* (너무 뻘쭘해서 견딜수가 없네요;)
★<오르가즘> 소장본 가예약처: http://club.entica.com/@bookjj
ㅁ준타열희님: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게다가 이번편도 어김없니 짧네요-_ㅠ;
ㅁcy2id님: 기다리셨던 톤혁의 러브모드-_-!! 어설프지만 이번 편에 등장시켰습니다;;
ㅁinmylove님: 담편 기대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모양이라 죄송합니다. -_ㅠ;
ㅁ혁이빨래님: 시삽님, 오랜만입니다~ >ㅁ<;;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책 만드시느라
많이 바쁘시죠? 항상 수고하시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성실히 연재하는 것으로라도
보답을 해야할텐데 맨날 이 모냥이라 죄송하기만 하네요-_ㅠ;;
ㅁ아가혁수7님: <한발만 담그고서 한발은 언제고 내 세상으로 달아날 준비를 하는 사람>
이 말이 참 와닿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익숙해져 있고, 또 이런 걸 사랑이라
착각하며 살아가죠. 저도 어쩌면 그런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자책을 잠깐이나마;;
해봤습니다. 늘 열독해주시는 것 감사드려요~ ^^*
ㅁJOAHAE님: '폭풍전야' -_-;; 그래도 이번편은 와방샤방 이쁘게 써보려고 했는데;;
여지없이 실패를 한듯한 느낌-_ㅠ;;
ㅁlove35s207님: 이번편은 너무 늦게 올렸네요-_-;; 정말 죄송합니다;;
<원랑님의 글은 정말 현실적이예요.. 현실적인데 이 분들이 하는 사랑은 아직은 저에게
현실적이지 않은가봅니다> 이 말씀이 인상 깊네요. 맞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 작품 속 그들이 하는 사랑은 비이성적으로 보이겠지요. 그러면서도 누구나 한번쯤
이런 사랑에 흠뻑 빠져보고자 하는 바램을 갖게 되는 것 아닐까 싶네요^^;;
님께서도 설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늦었지만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
[원랑] 오르가즘 - 199
by 원랑 in club 리얼톤혁
나는 그 애와 함께 전쟁터로 나설 거야. 그리고 손을 꼭 붙잡고 싸울 거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할 세상, 그 모든 것들과 한판
붙어볼 작정이야. 그 애가 내 옆에 있으니까, 난 두려울 것이 없어.
- 원랑, <오르가즘 #63> -
운전을 하는 내내 주혁은 왼쪽 약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몇 번씩 들여다본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자그만 다이아몬드는 고유의 영롱한 빛을 발산한다. 빌라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여 마땅한 자리에 차를 세운 뒤, 그는 잔뜩 상승된 기분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집으로 발을 재촉한다.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거실엔 불이 꺼져 있다.
위층에서도 사람의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계단을 오르기 전, 주혁은 재준의 침실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방금 전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조심스러운 걸음을 이어간다. 그러다 아직까지 홈 바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재준을 발견하곤 눈동자가 동그래진다.
「어? 아직 안 잤어?」
「응, 늦었네. 혁수 형 잘 갔어?」
「그럼. 강태는? 태현이네 집으로 돌려보낸 거야?」
「아니, 내 방에 있어. 오늘은 여기서 재우려고. 태현 형도 늦게 들어온다길래.
근데 태현 형 애인 생겼다며? 형이 보기엔 어때?」
「아~ 연수? 세라랑 똑같이 생겼어. 근데 희한하게 성격은 완전히 틀려. 천상 여자다운
스타일이야. 어쨌든 잘 된 거지, 뭐. 태현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어했냐.」
재준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며 동감의 표시로 머리를 끄덕인다. 말을 하는 도중
주혁은 재준 옆에 앉아 이미 절반 정도 밖에 남지 않은 독한 양주를 한 잔 가득 부어
놓는다. 그리고 재준이 혼자 쌓아올리고 있던 침울한 분위기를 무너뜨리려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돋우어낸다.
「애인 데려와 놓고 왜 여기서 혼자 청승이야~ 아까 심하게 싸웠어?」
「싸운 게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당한 거지. 우린 원래 그래. 서로 맞부딪치기보단
항상 한 쪽이 악악거리거나 내치거나, 둘 중 하나야.」
「흠, 그건 별로 안 좋은 건데.」
「상황이 이런데 뭐 하나 좋을 수가 있나. 어쩔 수 없지.」
듣는 사람의 기분마저 울적해질 정도로 재준의 말투는 염세적이다. 저절로 찌푸려지는
눈살을 어쩌지 못하며 주혁은 그런 재준을 나무라려는 듯 상체를 그 쪽으로 기울인다.
「너희 둘 다 힘든 거, 내가 몰라서 하는 소린 아니지만 그 때 그 말은 심했어.」
「아직도 그 생각이야? 형도 은근히 뒤끝이 지저분한 성격이야.」
서늘하게 정지되어 있던 재준의 얼굴이 얄팍한 실소를 그려낸다. 동시에 그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독설은 주혁을 기분 상하게 하기보단 도리어 서글프게 만든다.
거무스름한 그늘이 드리우는 그의 낯을 대하자 재준의 가슴은 또 한번 묵직한 바윗덩이에
짓눌린다. 미안한 마음은 곧바로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재준을 난도질한다.
「형들이 잘 됐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형들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것 같아. 그래서 한 말이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잊어버려.」
「왜 그렇게 비관적이야? 상황이 열악한 건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억지로라도…」
「그런 얘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이 책으로나 주절대는 얘기야. 형이 왜 그런
소리를 하냐? 비슷한 입장이면서. 솔직히 말해봐. 형은 알잖아? 내가 지금 얼마나
코너에 몰려있는 상태인지. 난 형 친구이기 이전에 충의회 회장이야.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고 안 한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순간 주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재준은 메마른 조소를 입가에 매단 채
다시 담배에 불을 댕긴다. 연기를 빨아들일 때마다 움푹 패는 볼 때문에 그는
몇 배 더 수척하고 피폐해 보인다. 서걱서걱 거슬리는 소음을 내며 두 남자 사이를
가로지르던 정적은 음산하게 퍼지는 재준의 목소리 때문에 후닥닥 자취를 감춘다.
「요즘 내부적으로 불만세력이 많아졌다는 거, 나도 잘 알아. 강태를 다시 데려왔다는 것
자체부터 이해 안 갈 거고, 더군다나 내가 요새 강태 신경 쓰느라고 조직 일에
등한시하는 건 사실이잖아. 영업장들 둘러본지도 오래 됐어. 요즘 매출은 어떤지, 새로운
사업 동향은 어떤지, 아무것도 손 못 대고 있어. 그런 하나하나가 애들한테 불안감을
심어주는 요소겠지. 어떻게 생각할지 뻔하잖아. 여자도 아니고, 남자 새끼한테 홀려서
나사가 몽땅 빠졌다고 생각할 거 아냐. 이쪽 세계 논리로 따지자면, 나한테는 정당성이
없어. 그래서 이길 확률도 적어.」
「그래서 겁나?」
「겁나지. 이젠 죽는 게 무서워졌거든. 사는 게 재밌어진 다음부터 죽는 게 겁나더라.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럼 싸워.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닥치는 대로 뭐든지 다 해 봐. 그래도 너한테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어. 그건 정당방위야. 우린 절대로 죄를 짓는 게 아니란 말이야.」
「나도 형처럼 홀가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선 형이 부러워. 내가 만약
형이었다면, 지금쯤 죄책감 때문에 자살이라도 하고 싶을 거야.」
막무가내로 도리질 치며 거부해왔던, 가슴 속 심연 깊숙이 처박아둔 채 외면했던 진실이
재준의 혀를 통해 언어의 형상으로 탈바꿈하여 주혁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 아니 평생 동안 치유될 수 없는 상처 가운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싶었다. 모른 체 하고 싶었다. 천륜으로 맺어진 혈육을 배신하고 거머쥔
그와의 사랑이 어째서 죄가 되느냐고? 우스운 질문이다. 그것이 어째서 죄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진짜로 형이 존경스러워. 혁수 형 하나만 곁에 있으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자세. 난 도저히 그렇게 되지가 않거든.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어떨 때는
후회가 될 때도 있어.」
「강태를 사랑하게 된 걸 후회해? 정말로?」
「아니, 충의회 회장이 된 것. 강태를 만날 줄 미리 알았다면…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충의회 회장이 안 됐었다면 강태를 만나지도 못했겠지. 오히려 죽은 아버지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날 후계자로 키워줘서 고맙다고.」
미세한 굴곡 하나 없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던 재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그는
황급히 팔을 들어 눈가에 어리는 물기를 훔친다. 그리고 치미는 울음을 삭히느라
맹맹해진 성대를 틔워 지친 어조로 한 마디 중얼거린다.
「싸움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형. 쉬고 싶어.」
― 식도를 거슬러 넘어오는 위장 속 찌꺼기 때문에 숨쉬기가 버겁다. 단단히 채워져 있던
빗장이 부러지듯 격렬한 통증 후에 한바탕 구토를 한 혜련은, 그제야 긴 날숨을 뱉으며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줄기를 닦아낸다. 어제 아침부터 시작된 구역질은 몇 시간
간격으로 도지며 계속 혜련을 괴롭히는 중이다. 물 한 모금 제대로 삼킬 수 없어 뱃속은
오래도록 공복 상태임에도 무언가 먹고 싶다는 욕망이 일지 않는다. 급격하게 쇠잔해진
기력 탓에 몸을 일으키는 단순한 동작 하나도 무척 힘에 부친다. 가까스로 벽을 잡고
일어선 그녀는 난데없이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에 깜짝 놀란다. 주춤주춤 침대 옆
테이블로 다가가 휴대폰 액정 화면에 찍힌 발신자의 전화번호를 확인한다. '김준상'이라는
세 글자가 혜련의 눈동자에 또렷이 찍히고, 그녀는 초조할 때의 버릇대로 손톱을 깨물며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에 잠긴다. 절친한 친구나 가족 외에 걸려오는 모든 전화는
절대로 받아선 안 된다며 신신당부하던 문한이 떠오르지만, 소란스레 귓가를 어지럽히는
벨 소리가 자꾸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결국 그녀는 우악스럽게 종료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은 다시 앵앵거리며 발작을
해 대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혜련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휴대폰을 집어 던진다.
다행스럽게도(?) 침대 위로 낙하한 휴대폰은 그 형체를 고스란히 보존한 채 혜련을
조롱하듯 한동안 더 극성스럽게 울어대다가 제 풀에 조용해진다. 벽에 등을 딱 붙이고
서서 거친 호흡을 몰아쉬던 그녀는 호텔 방에 비치된 유선 전화기를 사용하여 문환과
통화를 시도한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문환 특유의 '소름 끼칠 정도로 예의 바른'
음성이 들려오자 혜련은 구세주라도 만난 양 안도의 한숨을 흘린다.
[네, 조문환입니다.]
「저 유혜련인데요.」
[아, 혜련씨! 웬일이세요? 뭐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방금 전에 준상씨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병원에 갔다가, 제가
없어진 걸 보고 전화한 것 같은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직접 전화까지 주시고. 근데 목소리가 많이 안 좋네요.
어디 아프신가요? 이따 들릴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사 가지고
가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입덧이 심해서 기운이 좀 없네요.」
[아이고, 저런…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겠네요. 특별히 드시고 싶은 건 없으세요?
홀몸도 아닌데 잘 드셔야지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혜련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릴 뻔 한다. 누구보다 흉포하고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하려 이를 갈고 있으면서,
판에 박힌 접대용 멘트 몇 마디에 질질 짜다니. 유혜련, 심장을 얼려버리자고 다짐했잖아.
「아니에요. 그보다 다음주엔 병원에 한번 갔다 와야 하는데, 혼자 외출하면 안 되겠죠?」
[예, 아무래도 그건 위험하죠. 저랑 함께 가시죠. 다음주 화요일 정도가 어떨까요?]
「바쁘신데 저 때문에 시간 쓰실 것 없어요. 그냥 친구랑 같이…」
[아니요, 괜찮습니다. 몇 시간 걸리는 일도 아니고 잠깐인데요.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죠.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 과도한 호의가 부담스러운 듯 사양의 뜻을 표하는 혜련에게 문환은 우격다짐 식으로
이야기한 뒤 통화를 끝낸다. 운행 중인 자동차 차체의 리드미컬한 율동에 몸을 내맡기며
그는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다. 그리고 혼잣말을 지껄이듯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김준상이 눈치를 늦게 챘어. 며칠동안 뭐하느라 병원에 코빼기도
안 비쳤던 걸까?」
「김준상이 병실에 왔답니까?」
조수석에서 묵묵히 차창 밖을 응시하고만 있던 부하가 고개를 뒤로 돌려 문환의 말을
받는다. 문환은 폐 속 깊이 니코틴 성분을 흡입하며 천천히 머리를 끄덕인다.
「좀 있으면 이재준도 알게 되겠군요. 어떻게 나올까요?」
「글쎄, 그걸 예상할 수 있다면 이 게임은 별로 재미없는 게임이지. 뭔 지랄을 하던
상관없어. 히든카드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안 그래?」
「그거야 맞는 말씀입니다만…」
껄끄러운 말줄임표를 나열하며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는 부하와 달리, 문환의 태도는
여유작작하다. 부하는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연다.
「정말 강태 위치 파악은 안 하실 생각이십니까? 최소한 어디 있는지 그거라도 알아둬야
마음이 편하실 거 아닙니까. 솔직히 저는… 회장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손놓고
계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유혜련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였다고는 하지만, 그 여자가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지 그것도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막말로 술집에서 뒹굴던 년
아닙니까. 그런 년들은 언제 안면 까고 쥐새끼 노릇할지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출신 성분 따져서 사람 썼냐?」
「그게 아니라 회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런데서 뒹굴던 년들은 겉으론 맹해 보여도
속으로는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기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회장님께서 너무 그 여자를
철석같이 믿으시는 것 같아서… 」
「믿다니? 내가? 그 여자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문환은 박장대소하다가, 영문을 알 수 없어 멀뚱멀뚱 눈알만 굴리고
있는 부하에게 물정 모르는 철부지를 달래듯 나긋나긋한 음성을 들려준다.
「승용아, 네가 그러니까 아직도 보스 자질을 갖추려면 멀었다는 거야. 히든카드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 너 도박 안 해봤어? 카드라는 건 말이야, 손에 틀어쥐고 있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야. 적당한 때에 적당한 걸 골라 버릴 줄 아는 거, 그게 카드게임의 묘미야.」
「그 말씀은…」
「눈 똑바로 뜨고 잘 지켜봐라. 이번 일로 너도 중요한 걸 배우게 될 거다. 사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버리는 건지, 이번 기회에 잘 배워둬.」
― 벌렁거리는 심장을 지그시 단속하며 준상은 질기게 이어지는 신호음을 듣고만 있다.
끝내 상대편의 응답 없이 녹음된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자 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며
휴대폰을 접어 닫는다. 병원 내 흡연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준상은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휴대폰의 단축키를 꾹 누른다.
[이재준입니다.]
「회장님, 준상입니다. 지금 유혜련을 만나러 병원에 왔는데, 그 여자가 없어졌습니다.」
[뭐?!]
「직원한테 물어보니까 사흘 전에 퇴원했다고 합니다. 서류는 확인하지 못했고 웬 남자가
와서 데려갔다고 하는데, 조문환인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위치 파악해 볼까요?」
[그래. 조문환이 자기 집으로 데려가진 않았을 거고, 분명 자기 구역 내 호텔에
숨겨놓았을 거야. 거기서부터 시작해 봐.]
「예, 알겠습니다. 다른 지시 사항은 없으십니까?」
[위치 파악되면 바로 방배동으로 와. 애들 부르기 전에 너랑 먼저 얘기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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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inmylove님: 제 글솜씨야, 형편없지요-_ㅠ;;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님께서 가슴에 와닿는 문장이 하나라도 있으셨다면 다행이구요 ^^;; 님의 화이팅을 받아!!
완결까지 열심히 달리렵니다~ ^O^;;
ㅁ준타열희님: 맞습니다. 잠수를 너무 오래했더니 심신이 말이 아닙니다-_ㅠ;;
다시 한번 죄송하구요- 이넘의 폭풍전야를 빨리 끝내고 뭔가 터뜨려야하는데;;
저의 미흡한 글솜씨로 인해 자꾸만 소설이 늘어지고 있네요;; 죄송-_ㅠ;;
ㅁskyara님: 언제나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님께서도 건독해주시길 부탁드려요~
ㅁ아가혁수7님: 준상이야 원래 당돌하지요 ㅋㅋ 원래 100% 충성스런 부하인 만큼
자기 할말 똑바로 다 하는 캐릭터라고나 할까요;; 원래 글 제대로 못 쓰는 작가들이
캐릭터에 대해서 쓸데없는 부연설명만 많지요-_ㅠ;; 암튼 이번편은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으셨죠? ㅋㅋ 이 페이스를 제발, 제발, 제발 유지하고 싶습니다, 저도-_ㅠ;;
ㅁbabo0822님: 아~ 저 아무 생각 없어요 ㅋㅋ -_-;; 강태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그만큼
강태가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게 또 강태에게는
스트레스가 되어 그를 괴롭히는 중이구요;; 아시다시피, 강태는 굉장히 주체적인 성격의
소유자인데, 자신이 나설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죠-_-;;
역시, 이젠 육체적으로도 모잘라 정신적으로 애들을 괴롭히는 작가랍니다 -ㅁ-;;
글구 <오르가즘>이 발랄한 모드였던 적은 물론-_-!! 가뭄에 콩나듯 한번씩 밖에 없지요;;
작가인 저조차도 가끔씩 쓰면서 우울해지는-_-;;
ㅁJOAHAE님: 크하하;; 강태가 재준이한테 바락바락 화풀이하는 모습을 묘사하려고 했으나-
그건 저번 편에 나온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곱게 잠 재워버렸습니다 ㅋㅋ
절대 귀찮아서 안 쓴 건 아니에요 >ㅁ<;; (일케 얘기하면 더 의심스러움-_-+)
[원랑] 오르가즘 - 200
준상과의 통화를 끝낸 뒤 재준은 오른쪽 재떨이에 수북히 쌓인 담배꽁초 더미를 곁눈질하며
또 한 개비에 라이터를 가져간다. 희뿌연 연기가 꼬불꼬불 곡선을 그리며 피어오르고,
재준의 턱은 가슴 쪽으로 더 끌어당겨진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측정이 불가능할 만큼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유혜련이 조문환의 권유에 따라 잠적을 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지만 그 시기가 재준의 계산보다 너무 일러서 조금은 당황스럽다.
무엇보다 재준을 난감하게 만드는 건 혜련이 있는 곳을 찾아낸다고 해도,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를 다시 붙잡아 온다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볼 수는 없다. 조문환은 대체
혜련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그녀를 방편으로 삼아 도모하고자 하는
책략이 무엇일까. 단순히 자신의 정부를 채 간 것에 대한 유치한 복수일 따름인가?
물론 그건 아닐 테지. 그가 그렇게 단세포적인 인물이라면 내가 불안해할 하등의 이유도
없겠지. 이젠 이런 꿉꿉하고 질척하고 막연한 불안감은 넌덜머리가 난다. 다급하게
빨아들인 다량의 알코올 성분과 담배연기 때문에 골치가 지끈거려오자, 재준은 차가운
손바닥으로 이마를 식히며 아래층으로 향한다. 언제라도 준상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다시 일에 몰두해야 하지만, 그 때까지 만이라도 누워 휴식을 취하자는 생각이다.
혹여 강태가 잠에서 깰까봐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침실의 문고리를 돌린다.
그러나 재준의 예상과는 달리, 강태는 TV를 틀어놓은 채 꼿꼿한 자세로 침대 위에
앉아 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화면에만 고정된 눈동자는 오히려 그가 TV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재준이 들어서는 기척에도 강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안 잤네. 안 피곤해?」
괜스레 머쓱해진 재준은 뻔한 질문으로 그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강태는 묵묵히
고개만 가로 저을 뿐 입을 열지 않는다. 일단 자신의 기분부터 바꿔보고자 재준은
강태를 닦달하는 대신 욕실로 직행하여 뜨거운 물줄기에 몸을 내맡긴다. 샤워를 마친 후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며 재준은 범상한 어조로 다시 강태에게 말을 건넨다.
「염색 다시 해야 되는데 시간이 없네. 보기 흉하지?」
재준은 허리를 숙여 정수리 부분에 자리하고 난 검은색 머리카락들을 보여준다.
그런 그의 행동이 때맞지 않게 귀여워 보였는지, 강태는 스치는 듯한 미소를
깨물며 억양 없이 편평한 음색을 던져놓는다.
「하려면 검은색으로 해. 노란 머리 보기 싫어.」
「왜? 이번엔 빨간색으로 할까 생각 중인데.」
「꼭 그렇게 양아치 티를 내야겠니? 제발 자중 좀 해라.」
옴팡지게 쏘아붙이는 강태가 기어코 재준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오게 한다.
배를 움켜잡고 허리가 휘어져라 웃어젖히는 재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잇는다.
「참, 웃기기도 하겠다. 제 욕하는 줄도 모르고. 양아치 소리 들으니까 좋아?」
「아니. 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또 있다는 게 신기해서 그래.」
간신히 웃음기를 가라앉힌 재준은 성큼 강태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을 끌어당긴다.
안기지 않으려 버둥거리던 강태는 재준의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풀썩 그의 품으로
쓰러진다. 재준이 아니면 누구에게서도 맡을 수 없는 고유한 비누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들자, 강태는 저항을 멈추고 온순해진다. 등줄기를 쓸어내리던 재준의 희고 긴 손이
강태의 뒤통수를 잡아 비스듬히 고정시킨 후 다홍빛 입술로 접근한다. 찹찹하게 맞닿아
오는 감촉에 재준은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강태는 두 팔을 들어 그를 단단히 옭아맨다.
방금 전 격렬한 불꽃을 튀기며 벌였던 다툼은 아득한 과거의 일인 양, 서로를 향해 뻗은
눈길엔 세찬 갈망 뿐 다른 무엇도 엿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무슨 이유로 서로의 지친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가. 우리에게 닥친 시련이 혹심해서? 그럴수록 사랑은 더 강해진다는
통속적인 진리도 배부른 자들이 떠들어대는 흰소리에 불과한 걸까.
「미안해.」
느릿느릿 강태의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으며 간간이 입술 도장을 찍어나가던 재준은
불현듯 강태의 눈동자를 또렷이 직시하며 아껴두었던 한 마디를 속삭인다. 그러자
새까만 그의 눈망울이 단박에 가늘어지며 의구심 서린 표정으로 재준을 건너다본다.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다.
「놔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근데 네가 없으면 내가 죽어.」
네가 그랬잖아. 할딱할딱 숨만 쉴 게 아니라 먹고, 마시고, 노래하면서 살아가자고.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진심으로 그러고 싶어. 진심으로… 살고 싶다, 강태야.
「병신 같은 새끼. 널 잡은 건 나야. 짜증 좀 냈다고 죽을 죄 지은 사람처럼 미안해하면
난 뭐가 되냐?」
게걸스럽고 냉랭한 말투를 위장하려 애쓰지만 강태의 음성엔 울음기가 흥건하다. 몇 초도
버티지 못한 채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하얀 베갯잇에 얼룩을 남긴다. 잠깐이나마
그를 마음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다. 우리가 질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우리가
완성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공할 파괴력으로 우리를 좀 먹고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녹슬지 않던 불굴의 낙천주의는 어디로 증발해 버린 걸까.
죽음 따위야 언제든 덤덤히 맞닥뜨릴 수 있는 인생의 관문이라며 콧방귀 뀌던 오만함은,
사랑을 모를 때만 견지할 수 있었던 자긍심이었나.
「죽으면 안 돼, 이재준. 절대 다시 날 혼자 두면 안 돼. 알았어?」
눈자위에 불그스름한 핏발을 세우며 부르짖는 강태에게 재준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결코 허언(虛言)을 들려주지 못하는 그의 순수함이다.
「내가 부모형제 버리고, 내 꿈도 전부 버리고 너한테 온 것처럼 너도 나 하나만 잡아.
맹세해, 그렇게 하겠다고. 응?」
… 왜 알지 못하는 거야. 너 하나 잡기 위해서 어쩌면 나를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너와 나, 둘 중에 하나만 택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그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일각의 망설임도 없이 날 포기해 버릴 거라는 걸.
그렇게 얘기했는데… 네 앞에서 차마 울지도 못하고 혀까지 깨물어가면서 얘기했는데.
「너한테 돌아오던 그 날, 벌써 난 너 밖에 가진 게 없는 사람이야. 맹세할 필요도 없어.」
가슴속에서 들끓는 아우성들을 솜씨 좋게 불식시켜버린 재준은 그저 말갛게 웃으며
강태를 안심시킨다. 그제야 강태의 눈가에 습기가 없어지며 어둑한 방안을 파스텔 톤으로
밝힐 만큼 찬란한 미소를 그려 보인다. 그 미소에 심장이 발기발기 찢기는 것 같아서
재준은 통증을 희석시키려 황급히 강태의 입술을 머금는다. 그리고 강태가 눈치 챌 수
없도록 흐느낌 대신 신음을 토한다. 지금 나누는 달콤한 키스가 교묘히 포장된 거짓
위안임을 속죄하며.
― 살짝 벌어진 옷깃 사이로 우악스레 밀려드는 겨울바람에 혁수는 몸을 웅크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대여섯 시간 동안 줄곧 캔버스만 들여다보고 있었던지라 피로감이 온통 눈가로
쏠리는 느낌이다. 주머니 속에서 벨 소리가 울려나오자 혁수는 천천히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간다. '여보세요'라는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주혁의 목소리가 날아 들어온다.
「나 어디 있게?」
장난스럽게 묻는 걸 보니 분명 또 근방에서 혁수를 훔쳐보고(?) 있는 모양이다.
빙그레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혁수는 아들을 달래는 어머니처럼 자상한 음색을 발한다.
「아이고, 그새 못 참고 또 보러 왔어? 찾기 귀찮으니까 얼른 알아서 나와 봐~」
멀찍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내 멀끔한 정장 차림의 주혁이 혁수의
눈앞에 나타난다. 추위 때문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해사하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구쟁이 꼬마 소년 같다. 오래된 습관처럼 스스럼없이 주혁의 품으로 안기며 혁수는
그에게 묻는다.
「얼마나 기다린 거야? 추운데 차안에 있지.」
「얼마 안 기다렸어. 그리고 일부러 밖에 있었어. 찬바람 좀 쐬려고.」
「며칠 있으면 출국인데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조심해야지.」
「요새 같은 기분이면 감기쯤이야 가뿐하게 박살낼 수 있어. 걱정 마.」
「하여튼 장주혁, 별종이야. 나 같으면 혼자 떠날 생각에 불안할 텐데.」
「그래서, 넌 지금 불안해?」
생글생글 웃음기가 가시지 않던 주혁의 낯이 히뜩 굳어진다. 이럴 때마다 혁수는 그가
은근히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그냥… 잠깐이지만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싫어.」
간단한 애정 표현조차 혁수는 돌려서 말하기를 즐긴다. 혁수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주혁은 금세 안면근육을 풀어헤치며 혁수를 안은 팔에 힘을 더한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쪽을 살피다가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을 연다.
「혁수야, 우리 같이 갈 데가 있어.」
「지금? 어딘데?」
주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희미하게 파란 불빛을 밝힌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혁수와 주혁이 결혼식을 올렸던 작은 교회의 첨탑이다.
「출국하기 전에 한번은 꼭 들러야지 생각했었어. 목사님이 계셔야 할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미 혁수의 손목을 잡아끌며 주혁은 발걸음을 뗀다. 혁수 역시
더 이상 군소리하지 않고 그를 따라 나선다. 교회 앞에 도착하니 다행히도 불이 켜져
있다. 주혁은 씩씩하게 문을 열어 제치며 안으로 들어선다.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던
그 날처럼, 깡마른 체구의 목사는 여전히 난로도 켜지 않은 냉골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성경을 읽는 중이다. 혁수와 주혁의 기척을 감지한 그가 문 쪽을 돌아본다. 그리고 한동안
기억을 더듬는 듯 표정이 심각해졌다가 이내 반가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된다.
「이야~ 주혁 씨랑 혁수 씨, 맞죠?」
「예. 기억하시네요. 안녕하셨어요?」
악수를 청하는 목사의 손을 맞잡아 흔들며 주혁은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건넨다. 곁에
있던 혁수도 정중히 머리를 숙인다. 목사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한 다음 서둘러 난로에
불을 피우고 커피를 끓여 내오느라 수선을 피운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한 잔씩 앞에 두고 나서야 분위기는 조용하게 정돈된다.
「너무 반가워요, 두 분 다. 이렇게 잊지 않고 다시 찾아주시고, 고맙습니다.」
뭐가 그리 기쁘고 좋은지, 목사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마냥 싱글벙글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그런 그의 얼굴이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 정결해 보여서 주혁과 혁수는 자기도
모르게 몸가짐을 가다듬는다. 신으로부터 할당받은 성스런 사명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친 사람. 그는 분명 행복해 보인다. 그의 행복 역시 누군가 상처받고 눈물 짜낸
대가일까. 신의 영역이든 인간의 영역이든,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그렇게 제로섬의
법칙을 고수하고 있는 걸까.
「아닙니다. 더 일찍,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죄송해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무튼 이렇게 두 분 다 건강하신 모습 보니까 너무 좋네요.
잘 지내셨죠? 근데 혁수 씨는 여전히 말이 없으시네~ 제가 그렇게 어려워요?」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가볍게 농담처럼 묻는 목사에게 혁수는 장황한 설명을 들려주려다가 멈칫 입을 다문다.
이 곳에 오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작아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난감해져서다. 어렸을 때부터 뿌리 박혀 있는 종교적 습성 때문만은 아니다.
신께서 명하신 계율을 위반하기로 작정했으면서 신의 축복과 보호를 갈구하는 자신의
뻔뻔한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목사님. 사실은 저희, 미국에 가서 살게 됐습니다.」
불분명하게 말끝을 흐리는 혁수의 뒤를 이어, 주혁은 재빨리 본론을 꺼내 놓는다.
그리고 목사가 무어라 물어오기 전에 재차 말을 덧댄다.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말씀 못 드렸지만, 미국 이민은 혁수랑 제가 쭉
계획해 왔던 일이에요. 다음 주 화요일에 저 먼저 출국하게 되어서, 가기 전에
목사님 한번 뵈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잘 됐네요! 근데 한편으로는 서운하네요. 이번에 미국 들어가시면
한동안 못 뵐 것 아닙니까.」
「아무래도 자리 잡을 때까지 귀국은 힘들겠죠.」
주혁의 대꾸에 목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감을 표하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허름한 양복 주머니를 뒤적인다. 그리고 하도 오랫동안 쓰지 않아 테두리가 누렇게
변색된 명함 한 장을 내민다.
「달라 그러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명색이 목사라고 명함 파서 갖고 다녀요.」
명함을 갖고 다니는 것이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인 양 목사는 자못 민망해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인다. 한 점의 가식도 꾸밈도, 겉치레도 없는 갓난아이 같은 사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신에게 헌납한 사람은 다 저런가. 저렇게 청결한가.
「미국 가서도 꼭 연락해요. 내가 실질적으로 별 도움은 못 되겠지만, 힘들 땐 언제든지
전화해요. 같이 기도하게요.」
「네. 고맙습니다, 목사님.」
「에이, 제가 뭘 해줬다고 자꾸 고맙다 그러세요? 주혁 씨도 참, 싱거우시네.」
「아닙니다. 그 날 저희 결혼식 올려주신 것,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의 선대(善待)가 값싼 일시적 동정이 아님을 알기에 진정 감사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 올려준 기도가 거창한 신의 이름을 필두로 내세운 허례허식이
아님을 알기에 진정 감사합니다. 춥고 허기지고 미천한 곳에서 낮은 자들을 섬기며
사는 당신, 그런 당신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우리를 용맹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할 세상과 맞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당신이 지닌 그 순연함이겠지요.
이기심에서 비롯된 욕망, 과거의 자책, 썩은 세상을 향한 증오와 회한을 초월해서
우리가 올곧게 서로의 영혼을 투영시킬 수 있다면. 그렇다면 패배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우리가 이길 수 있게, 자유로워질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
으하하하하하-_-;;;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바빠서 정신 놓아버렸습니다. -_ㅠ;;
암튼, 벌써 200편이라니- 믿을 수가 없네요;; 어쩌다 이렇게 질질 끌었는지 -_-;;
200편 올 때가지 성원해주신 모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앞으로 빨리 올리고, 빨리 완결 내서 이쁨 받는 작가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ㅁinmylove님: 사람의 가치관이 모두 천편일률적인 잣대에 맞춰져 있다면 고뇌가
왜 생기겠으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이야기도 나올수 없겠지요 ^^;; 재준이의 고뇌를
십분 이해해주시길 작가로서 "감히" 부탁드립니다;; (글 못 쓰는 작가의 주특기;;)
다음편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역시 이넘의 고질병, 어쩔 수가 없군요-_ㅠ;
ㅁ준타열희님: 이젠 은근한 독촉조차 통하지 않는 모양입니다-_-;; 이젠 대놓고
마구마구 독촉을 해주셔야겠어요 ㅋㅋ 거의 한달만에 올리나요? -_-;;
조씨가 말한 히든카드의 정체를 이젠 정말 드러내야 하는데-_-^
왜 이렇게 질질 끌면서 글을 쓰는지, 당사자인 저조차 납득이 안갑니다 -ㅁ-;;
ㅁvkdorkspti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가워요^^;; 이젠 정말 달려야지요. 암요. -_-*
ㅁmiaow_gato님: 오옷, 생소한 아이디-_-!! 반갑습니다~ ^O^;; 반겨주셔서 너무
감사하구요, 앞으로도 열독 부탁드립니다-.
ㅁcy2id님: 2편을 연달아 읽으신 기억이 워낙 없으시기 때문 아닐까요? -_ㅠ;;
제 소원 역시 한 5편쯤 폭탄으로 올려보는게 소원 중 소원입니다. -ㅁ-;;
그러려면 아무래도 대략 석달쯤 잠적을 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자랑이다-_-+)
ㅁJOAHAE님: 긴장감을 느끼신다니- 정말이십니까? 하도 질질 엿가락처럼 늘여써서
긴장감은 빵점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며 울부짖는 작가에게;; 한 줄기 희망을.. ^^;;
ㅁlove35s207님: 감상이 워낙 칭찬일색이라 굉장히 민망합니다.^^;; 감사하구요-
사실 재준이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을 현실적으로 그리려 엄청 노력하지요.
물론 노력만큼 성과가 나오진 않지만-_ㅠ;; 어쨌든 제 의도를 읽어주시니 감개무량입니다.
재미없는 글 읽어주시는 님께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님께서도 항상 행복하세요^^*
ㅁ아가혁수7님: <보기만해도 안타까운데... > 이 말이 가슴에 꽂히네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 모든 <일반인>들이,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단지 동성애자라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혁수7님처럼 생각할 수는 없을까..
안타깝다고, 가슴 아프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수함을 조금이라도 가질 순 없을까..
그럼 내가 이런 글을 쓸 이유도 없어질텐데.. 뭐, 그런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
잠깐동안 했더랬습니다;; 감상 고맙습니다. 님께서도 열독해주시길 부탁드려요-
by 원랑 in '리얼톤혁'
by 쵸티지기
[원랑] 오르가즘 - 201
by 원랑 in '리얼톤혁'
그녀는 웃고 있다. 아니, 울고 있다.
아니, 좀 더 주의 깊게 들어보니 세라는 잠자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평안한 걸까? 태현의 소원대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 원랑, <오르가즘 #81> 중에서 -
「서연수, 너 정말 어쩌려고 그러냐. 이래 가지고 어떻게 실음과를 가겠다는 거야?」
연수가 만들어 온 음악을 다 듣고 난 태현이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서슴없이 그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곁에 앉은 연수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깊이
떨어뜨린다. 아무리 여자친구라 해도 과외를 할 땐 철저한 선생의 도리를 고수하는,
'의외로' 고지식한 태현이다.
「네가 하려고 하는 건 대중음악이야. 너 밖에 아무도 못 알아들을 음악 만들 거면
늦기 전에 지금 빨리 진로 바꿔.」
「…죄송해요.」
「죄송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너 정말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돼. 시작한지 몇 달 안 됐다고
해도, 솔직히 이건 노력해서 될 그런 게 아니야.」
뾰족한 가시처럼 연수의 고막을 찔러대던 태현의 목소리가 고집스런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나긋해진다. 그리고 팔을 뻗어 가지런히 한 곳에 모아진 연수의 손을 잡는다.
연수는 어렵사리 눈을 들어 태현과 시선을 맞춘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그녀의
행동거지가 귀여워서 태현은 단호하게 굳혔던 표정을 풀어버린다.
「그렇게 죄 지은 사람처럼 있지 말고 냉정하게 생각하자. 이게 네 길이 아니라면
하루라도 빨리 접어야지. 꼭 작곡가가 되어야만 음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분야는 작곡 이외에도 얼마든지 많아. 중요한 문제인 만큼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내 말 알겠지?」
연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본의는 아니지만 그녀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는 찜찜함에 태현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을 해 대자 액정 화면에 찍힌 발신번호를 확인한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충의회 이 회장님 아니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탁구공만한 눈알을 커다랗게 확대시키며 태현은 쾌활한 음색으로
재잘거린다. 연수는 여자친구답게(?)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그의 통화
내용에 귀 기울인다.
「아니, 어쩐 일로 손수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형 지금 어디야?]
느물거리며 장난을 거두지 않는 태현에게 수화기 건너편의 재준은 간략한 안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그의 위치부터 묻는다. 태현은 김샌다는 표정을 지으며 뾰로통해진
목소리로 대꾸한다.
「집이다, 왜?」
[작업 중이었어?]
「아니. 과외하고 있었는데. 왜?」
[그럼 여자친구랑 같이 있겠네?]
「응. 근데 왜 그러냐니까!」
[지금 여자친구 데리고 나와라. 주혁이 형 다음 주에 미국 가는데, 다같이 술 한잔해야지.]
「뭐, 다음 주?!」
구체적인 주혁의 출국 날짜에 대해 일언반구 들은 적이 없던 터라, 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황당해하는 태현에게 재준은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그를 달래고
모임 장소를 설명한 뒤 전화를 끊는다. 통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우두커니 허공만
쳐다보는 태현에게, 연수는 걱정 어린 눈빛을 실어 보낸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어? 아, 아니… 주혁이가 다음 주에 출국한대. 난 처음 듣는 얘기라서.」
「아, 네…」
「연수야, 너 약속 없지? 재준이가 너 데리고 지금 오란다. 다 모여 있대.」
「저도 같이요?」
「응. 얼른 가자. 장주혁 이 새끼, 어떻게 나한테 말 한 마디 안 하고…」
미심쩍어하는 연수의 반문에 아랑곳없이 태현은 주혁의 무심한 처사(?)를 괘씸해하며
외출 준비에 몰두한다. 건넌방으로 옮겨 가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옷이나 걸쳐 입은
다음 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연수는 무릎에 놓아두었던 목도리를 두르며
여전히 주저하는 눈초리로 태현에게 질문한다.
「근데 제가 껴도 되는 거예요? 정말 저도 같이 오라고 하셨어요?」
「그렇다니까? 뭘 그렇게 졸아, 다 오빠 친구들인데. 그리고 저번에 다 얼굴 한번씩
보지 않았어? 아, 혁수는 처음 보겠구나.」
군더더기 없이 명랑하기만 한 태현의 음색을 확인하자 연수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다. 차를 운전해 가는 내내 태현은 주혁과 혁수, 재준과
강태에 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따발총 같은 그의 수다에도 어느새
익숙해진 연수는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 외에는
조용히 침묵을 지킨다. 도착한 약속 장소는 재준의 관할 구역 내에 있는 대규모
룸살롱이다. 당황한 연수는 얼굴을 붉히며 걸음을 떼길 주저하는데, 태현은 주차 담당
직원에게 던지듯 자동차 열쇠를 건네주고 황급히 발을 놀린다. 쉽사리 뒤따르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연수와 달리 그는 제집 안방 드나들 듯 태연하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건장한 체구의 사내와 눈인사까지 주고받는다. 안으로 들어서자 시끌벅적한 소음이
귓전을 메우는 가운데 각양각색 한껏 차려 입은 젊은 여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수려한 양복 차림의 웨이터들은 이것저것 나르느라 분주하다.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태현에게 몇 마디 묻더니 곧 군말하지 않고 그와 연수를 가장 안 쪽에 자리한 VIP실로
안내한다. 좁다란 복도를 걸어가는 잠깐 동안에도 연수는, 자신을 곁눈질 해 대는
접대부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머리를 꺾은 채 태현의 뒷모습만 쫓아간다.
「어, 왔어?」
태현과 연수의 등장에 재준은 짤막한 인사로 그들을 반긴다. 그러나 태현은 재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후닥닥 주혁에게로 달려가 눈알을 부라리며 그를 닦달하기 시작한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 한 마디 얘기도 없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송별회?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나쁜 새끼야!」
「미안해. 어떻게 하다 보니까 갑자기 날짜가 당겨져서 말할 시간이 없었어. 설마
내가 일부러 그랬겠냐?」
「그래도 그렇지! 아까 전화 받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지랄 그만하고 여자친구나 소개해 봐.」
분에 못 이겨 주먹까지 휘휘 저어대는 태현을 잡아 말리며 주혁은 은근슬쩍 화제를 돌린다.
그제야 태현은 잠시 망각하고 있던 연수의 존재를 떠올리곤 언제 역정을 냈었냐는 듯
얼굴이 해사하게 밝아진다. 그리고 출입문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멀뚱히 서 있기만 하던
연수를 자신의 옆에 데려와 앉힌다.
「여기는 내 여자친구. 이름은 서연수고, 고등학교 2학년이고, 보다시피 예쁘고.
연수야, 저기 내가 방금 죽이려고 했던 저 새끼랑은 구면이지? 그럼 됐고, 걔 옆에 있는
얼굴 조막만한 새끼는 처음 보지?」
「이게 누구더러 욕을 해! 너 똑바로 소개 안 해?」
혁수를 가리켜 '새끼' 운운하는 태현에게 주혁은 살벌하게 안면 근육을 굳히며 엄포를
놓고, 혁수는 그런 주혁을 저지하며 태현에게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눈짓을 보낸다.
「아무튼 얘가 주혁이 애인이야. 그나마 제일 얌전하고 착한 놈이지.」
'그나마'라는 단어에 주혁은 또 눈썹을 찡그리고, 강태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태현의
너스레가 재미있어 죽겠는지 정신 나간 사람 마냥 연신 킥킥거린다.
「얘들도 저번에 봤었지? 여기 인상 더러운 얘가 충의회 이 회장님이시고 그 옆에
겁나 예쁘게 생긴 애는 회장님 애인이야. 참고로 쟤, 여자 아냐.」
유난히 강조해서 내뱉은 태현의 마지막 발언에 잠잠하던 실내가 왁자한 웃음소리로
뒤덮이고, 강태는 산뜻한 눈매를 세모꼴로 찢으며 태현을 노려본다.
「내가 어딜 봐서 여자냐? 진짜 이해가 안 가! 머리를 스포츠로 자르던가 해야지, 정말」
자못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강태는 볼멘소리로 중얼대고 그 와중에도 재준은 정색을
하며 '진짜 스포츠로 자르기만 해 봐'라고 그를 협박(?)한다.
「강태는 워낙 잘생겨서 어떻게 해도 다 어울릴 것 같은데, 뭐.」
순진하게, 그러나 사뭇 진지하게 강태의 역성을 들어주는 혁수. 이럴 때마다 착한 척하는
게 재수 없어 미치겠다고, 혁수를 타박하는 태현. 그러는 너야말로 재수 없다면서 태현에게
으르렁대는 주혁. 낯선 장소에서 아직은 생소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잔뜩
졸아붙어 있던 연수는, 누가 누구에게 할 것도 없이 툭탁거리는 다섯 남자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서서히 긴장 태세를 풀어 헤친다.
「숙녀 분 모셔놓고 뭐하는 짓들이야. 조용히 좀 해 봐.」
무겁진 않지만 낮게 울려 퍼지는 재준의 목소리에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차분히 정돈된다.
찔끔 입을 다물면서도 '아이고, 무서워라'라며 장난을 잊지 않는 태현 덕분에 웃음이 헤픈
강태는 쿡 새어나가는 실소를 차단하지 못한다. 연수는 개의치 말라며 재준을 비롯한
모두에게 도리질을 쳐 보인다. 이제야 관심이 그녀에게로 쏠린 그들은 차례로 질문 공세를
쏟아 붓는다.
「이렇게 예쁜데 왜 저런 늙수그레한 놈을 만나? 네가 훨씬 아깝다.」
「그러게. 저 새끼 어디가 좋아? 아무리 봐도 저 새끼 말발에 네가 넘어간 것 같은데.」
「연수 씨도 노래 잘해요? 왠지 그럴 것 같아.」
「얘는 재수 없게 또 혼자 착한 척이야. 왜 혼자 존댓말 쓰고 그래?」
「이 새끼가 자꾸 우리 혁수한테…! 너 진짜 맞아야 정신 차릴래?」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운 친오빠들처럼 세심하게 이것저것 물으며 그녀를 챙기다가도 금세
다시 격투 모드(?)로 돌입하는 그들 때문에 연수는 기어코 폭소를 터뜨린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를 보며 정작 바보가 되는 쪽은 다섯 남자들이다. 한참 동안
서로 술을 권하며 담배를 피워대고 쉴 새 없이 입 운동에 열중하던 그들은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오히려 과묵해진다. 언제나 그렇듯 꼭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입을 닫고
있던 재준이 비스듬하게 기울였던 몸을 곧추세우며 주요한 화두를 던져놓는다.
「주혁이 형 떠나는 건 섭섭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다같이 모이니까 좋다. 작년 여름
이후로 처음이지, 아마?」
몇몇이 동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 연수는 불현듯 세라와 태현이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바닷가의 사진과 그 속에서 찬연하게 빛나던 태현의 미소가 생각나 마음 한 구석이
더워진다. 그 때 그녀도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겠지. 태현의 여자로서.
「저번에 이 말 했다가 형한테 혼났지만, 어쨌든 잘 살아. 우리 몫까지.」
「재준아.」
「그만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단 뜻이야. 또 언성 높일 거 없어. 그리고 혁수 형
걱정하지 마. 한 달 동안 내가 잘 보살피다가 보낼 테니까, 형은 가서 제대로 자리
잡을 생각만 해. 한동안은 많이 힘들 거야. 각오 단단히 하고, 이 악물고 살아.」
재준은 잽싸게 말을 덧붙여 주혁이 반박할 틈새를 봉쇄하고 당부의 말을 끝낸 뒤 깊은
신뢰가 담긴 눈동자로 그를 응시한다. 주혁은 무슨 말로 화답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시원스런 미소만으로 재준의 눈빛을 받아넘긴다.
「형한테, 아니 형이랑 혁수 형한테 나는… 너무 많은 걸 배워서 정말 고맙게 생각해.
형들을 만나게 해준 태현 형한테도 고마워.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재준이 웃옷 안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놓는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네모난 상자에 모두의 눈길이 가 닿고, 재준은 그것을 연수에게로 내민다.
의아함에 휘청 기울어진 눈동자로 연수는 재준을 올려다본다.
「별 거 아니지만 내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 줘.」
재준의 행동이 워낙 뜻밖이라 넉살 좋은 태현도 선뜻 무어라 이야기하지 못하고, 연수는
이 선물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여 어리둥절해 한다.
「얼른 풀어 봐. 나중에 가서 맘에 안 든다고 욕하지 말고.」
묵묵히 앉아 있던 강태가 어수룩한 장난기를 첨가시켜 특유의 낭랑한 음색으로 연수를
재촉한다. 주혁 또한 마치 제가 받은 선물인 양 깝죽대며 궁금하니 빨리 풀어보라고
성화를 부리자 연수는 망설임을 떨쳐내지 못한 동작으로 상자 위의 리본을 끄른다.
고급스런 녹색 벨벳 케이스 안에 담긴 것은 풍성한 빛줄기를 퍼뜨리는 반지 한 쌍이다.
「우와, 커플링이다!」
「너무 예쁘다~ 비싸 보이는데?」
주혁과 혁수는 동시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태현과 연수는 거듭 놀라서 말문이 막혀 버린다.
「태현 형은 나한테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난 형이 힘들 때 아무 것도 못 해줬어.
이렇게라도 갚고 싶으니까 거절하지 말고 받아 줘. 그리고 연수야.」
「네?」
「너는 절대로… 태현 형 아프게 하지 마라. 내가 이런 말할 자격은 없지만,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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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상콤하게 쓰고 싶었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승혁프리님: 반갑습니다^^ 아뒤 앞글자가 제 친구 이름이라 살짝 놀랐어요 ㅋ
첫 댓글 감사드리구요- 님 말씀대로 건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ㅁcy2id님: 아하하;; 폭탄포기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O^;; (좋다고 웃는다-_-;;)
ㅁwhitewhyuk님: 첫 댓글, 반갑고 감사합니다^^* 매일매일 한편씩!! 절대 뻔뻔한 요구가
아니죠;; 다만 그걸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는 제가 정신 나간 작가인 거겠죠 ㅠㅠ;;
저 역시 그런 날이 조속히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랍니다. -_-* 암튼 감사하구요-
앞으로 자주자주 뵐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ㅁ준타열희님: 네, 대놓고 하세요-_-ㅋ 그게 저도 맘이 편합니다;; 200편 축하, 감사하구요-
오래 쓰는 만큼 끝날 때 역시 잘 읽었다~ 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도록 써야할텐데;;ㅠㅠ
ㅁ아가혁수7님: 쓰러지셨군요-_-ㅋㅋ 재준이 대사가 이정도로 호응이 좋을줄은.. ^^;;
역시 난 느끼한 대사에 일가견이 있나봐요. 오호호홋-_-* (주책;;)
ㅁinmylove님: 열독에 감사드립니다-. 미약하게나마 님께 무언가 느낄 '꺼리'를 드렸다는데
엄청난 자부심을 가져봅니다. ^^;; 댓글 하나씩 남겨주실 때마다 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시죠? (모른다고 하심 저 삐집니다-_-ㅋ)
[원랑] 오르가즘 - 202
by 원랑 in '리얼톤혁'
육체라는 도구는 얼마나 하찮은 수단에 불과한 것인지.
너와 내가 벌거벗은 몸을 비벼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우리가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인가? 그 표면적 행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우리의 목적은 그러한 표피성에 존재하지 않아.
- 원랑, <오르가즘 #72> 중에서 -
거나하게 먹고 마시며 떠들던 술자리가 파한 후 태현은 집으로 향하기 위하여 운전석에
오른다. 안전벨트를 착용하며 연수는 걱정 어린 말투로 그에게 묻는다.
「술 드셨는데 운전 괜찮으시겠어요?」
「나 술 한 잔도 안 먹었어, 수다 떠느라. 먹는 척하면서 안혁수한테 다 먹였지.」
연수는 쿡 하는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늘을 찌를 듯 들떠 있던 방금 전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태현은 어느새 찬찬히 가라앉아 있다. 갑자기 너무 조용해진 그가
불안해서 연수는 의도적으로 그에게 말을 시키려한다.
「오빤 진짜 의외예요. 술 정말 잘 드시고 좋아하실 것 같은데.」
「좋아하고는 싶은데 몸이 안 받더라고. 집안 내력인가 봐.」
평소 같았으면 간단한 질문에도 이러쿵저러쿵 안 해도 될 말까지 갖다 붙여 한참 입을
놀려댔을 텐데, 단답형으로 일관하는 태현은 분명 기분이 저조해 보인다. 연수 혼자서만
전전긍긍해하며 찝찌름한 적막을 견뎌내는데, 그녀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 생각했는지
태현은 의식적으로 목소리에 활기를 불어넣으려 애쓰며 입을 연다.
「아~ 막상 진짜 주혁이랑 혁수 떠나보내려니까 왜 이렇게 맘이 싱숭생숭하냐?
사실 걔들은 재준이처럼 오래된 친구도 아니고, 만난 지 이제 1년도 안 됐거든.
근데 하도 엮인 게 많아서 그런가, 오랫동안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씨발, 눈물이
나려고 하잖아. 짜증나게.」
괜스레 게걸스런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농담처럼 말을 이어가던 태현은 정말로 급작스레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질끈 입술을 깨물며 불그스름해진 눈동자로 정면만을 직시한다.
그러다 더 버티지 못한 눈물방울이 주르륵 뺨을 타고 굴러 내리자 서둘러 핸들을 꺾어
한갓진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 부끄러움이나 체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긴 시간 꾹꾹 억눌러왔던 울음을 구성지게 토해낸다. 격하게 소스라치는 그의
어깨가 연수의 팔을 끌어당기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흐느끼는 태현을 자신의 품으로
데려온다. 검고 긴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샴푸 향기가 후각을 자극하자 태현은 봉긋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 젖힌다. 연수는 한 손으로
그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그가 생각보다 눈물이 훨씬 많은 남자임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리고 문태현은 자신이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상상 이상으로
착한 남자임을 새롭게 발견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수는 그가 흘리는 눈물 때문에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뱃가죽이 근질근질 당기게끔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삭이지 못한다.
「열 뻗쳐 죽겠다, 정말. 왜 쟤들 저렇게 보내야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왜, 왜 안 돼?
서로 좋다 하잖아! 피가 섞인 형제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남남인데, 왜 안 된다는 거야?
왜 자꾸 못 떨어뜨려서 안달이냐고! 억울해, 내가 다 억울한데 쟤들은 어떻겠어?
그러면서도 뭐가 좋다고 기대에 잔뜩 부풀어서 희희낙락… 가면 고생길이 훤하게 뚫렸는데
아까도 뭐가 그렇게 좋다고 계속 실실 쪼갠대? 장주혁, 병신 같은 새끼… 억울하지도
않나? 나 같으면 저렇게 안 떠나. 밀입국 같은 걸 쟤가 왜 해야 하는데?! 여기서 혁수랑
둘이 잘 살면 되는데 왜 쫓아 보내? 남의 나라까지 왜 쫓아 보내야 하는데?!」
연수의 품에서 고개를 빼 낸 태현은 마치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연수에게 결부된 양
애꿎은 그녀에게 악다구니를 쳐 댄다. 그럼에도 연수는 그의 손을 놓지 않는다.
조금의 일렁임도 없이 고요하기만 한 그녀의 눈동자가 태현의 모습을 고스란히
투영해 보이고, 차츰 그는 난잡하게 분출해내던 분노를 거두어들인다. 폭풍 같은
흐느낌 뒤 맥이 빠진 그는 잠시 멍청한 침묵만 내세울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세라가 이런 말한 적 있어. 왜 세상에서는 혁수랑 주혁이 같은 애들이 외면당하는지
모르겠다고. 진짜 사랑이라고 말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걔들인데. 솔직히 나,
그 땐 그 얘기 들으면서 수긍이 잘 안 갔었어. 그 때만 해도 난 혁수랑 주혁이 같은
애들이 차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세상 이치란 남자랑 여자가 사랑하도록
되어 있는 법인데, 그걸 어겼으니 차별 받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자기들이
일반인들과 다른 만큼 부당한 대우도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었어.」
태현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연수는 그의 입에서 '세라'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그에게 빨려 들어간다.
태현을 갖기 전엔 그녀 자신이 먼저 세라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그에게
온갖 앙탈과 생떼를 부렸었건만. 이젠 그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레 발음해내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얼간이처럼 불안감에 휘둘리다니.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란
이처럼 아이러니컬한 것일까.
「그런데 지금은 이해가 가. 세라가 왜 그 때 눈물까지 뚝뚝 흘려가면서 열변을 토한 건지.
그래, 쟤들은 달라. 남자끼리 좋아하니까 딴 사람들 하고는 분명 틀려. 근데, 그래서?
씨발,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그것 때문에 자기들이 무슨 피해 본다니? 아, 그래 좋아!
피해를 볼 수도 있겠지. 예를 들어서 뭐, 꼴 보기 싫다든가 그런 하찮은 민폐를 끼칠
수도 있겠지, 쟤들이. 그럼 자기들 눈깔을 빼 버리던가! 꼴 보기 싫고 역겨우면 지들이
안 보이는 데로 꺼지던가! 왜 쟤들을 못 살게 굴어, 무슨 권리로?!」
간신히 누그러졌던 태현의 분노는 다시 그의 전신을 부들부들 떨리게 하며 끓어오른다.
연수는 그가 스무 살 넘은 장정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해괴망측하게 울어댈
때에도, 또 주먹질까지 해 가며 버럭버럭 성을 낼 때에도 귀가 먹은 사람처럼 미동조차
없다. 다만 평상시보다 몇 배 더 정갈하고 평화로운 한 쌍의 황갈색 심연으로, 세라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그 눈동자로 태현을 담아낼 뿐이다. 온화하고 투명한
그녀의 시선에 거칠 것 없이 솟아올랐던 태현의 분노는 또 한번 기세가 꺾인다.
「젠장, 내일부터는 절에 가서 백일 공양을 드리던가 해야지. 저 잡것들 보내고 나면
불안해서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 그나마 혁수도 같이 떠나는 거면 덜할 텐데, 장주혁
혼자 보내려니까 심장 떨려 미치겠어. 아, 씨발. 잠깐 동안인데도 둘이 떼어놓으려니까
왜 내가 더 미치겠지? 연수야, 나 왜 이러는 거냐?」
가눌 길 없이 원통한 사연을 호소하듯 태현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연수에게 무언가
자신을 납득시킬만한 대답을 요구한다. 그런 것을 바라기엔 그녀가 아직 너무 어리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오빠 말씀대로, 오빠 친구 분들은 일반적인 딴 사람들과 분명 틀리죠. 단순히
같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차이점이 있잖아요.」
단아하고 곧은 시선을 창 밖 먼 곳으로 밀어 보내며 연수는 옛 추억을 회상하듯
얼마쯤 고즈넉한 목소리를 엮어나간다.
「계산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 말예요. 대부분 사람들은 안 그런데.」
씩씩거리며 방만하게 새어나오던 태현의 숨소리가 순간 뚝 정지한다. 주저리주저리
너저분한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 않고도 연수는 수 천 갈래의 고랑을 파 나가던
태현의 머릿속을 깔끔히 정리해 준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고통 받을 이유도 없잖아요. 아니라는 거짓말 한 마디면 전부 다
해결되는데. 궁극적인 문제는 거기 있는 거 아닌가요?」
― 엉덩이를 앞으로 쭉 빼고 반쯤 누운 자세로 혁수는 조수석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동요 가락을 열심히 허밍으로 노래하는 혁수를, 주혁은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돌아본다. 형편없이 약한 주량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권하는 술이란
술은 몽땅 입안으로 털어 넣는 혁수였다. 맥주 한두 잔에도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혁수가
재준이 따라주는 양주를 거푸 들이켰으니, 이 만큼이나마 얌전히 있다는 건 그에게 주사가
전혀 없다는 증거다. 술기운 때문에 열이 오르는지 혁수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둔다. 반사적으로 주혁은 히터의 온도를 높임과 동시에
차창 유리문을 열어 찬바람이 들어오게끔 한다. 그러자 혁수는 새색시처럼(?) 배시시
미소를 띠우며 애교 있는 음색으로 말한다.
「역시 장주혁이야. 말 안 해도 척척.」
「그럼! 나 같은 남편이 어디 있어.」
「남편? 네가 내 남편이야?」
「왜 이러셔, 신혼여행까지 갔다 와 놓고.」
혀가 꼬이는 바람에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 마냥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혁수가
너무 귀여워서, 주혁의 얼굴엔 자동적으로 환한 미소가 걸린다.
「당신이 남편이면 나는 뭐예요?」
이젠 완전히 유아기적 퇴행 현상을 보이는 혁수가 기어코 주혁의 입에서 파안대소를
터뜨린다. 한참동안 껄껄 웃어젖히던 주혁은 팔을 벌려 혁수를 꽉 끌어안는다.
그리고 혁수 특유의 달착지근한 향내를 깊이 들이마시며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답한다.
「너도 내 남편이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장주혁 남편 안혁수.」
세상에 꼭 하나 뿐이라 절대 놓을 수 없는 내 남편이지. 이 세상 유일한 내 남편, 안혁수.
「아~ 그렇구나~ 남편아! 나 꼭 가고 싶은 데가 있어. 데리고 가 줄 거지?」
「그럼~ 어딘데, 말만 해!」
「우리 같이 다니던 학교.」
예상치 못했던 혁수의 대답에 주혁의 표정이 한 쪽으로 쏠린다. 그러나 웃음기가 완연히
가신 혁수의 낯을 확인하곤 말없이 차를 출발시킨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생소하게 느껴지는 길을 더듬어 달린 그의 은색 승용차가 학교 정문을 통과하자, 혁수는
차창 밖으로 목을 길게 빼고 교내의 풍경을 둘러본다. 그리 넓지 않은 캠퍼스는 그나마
인적이 끊긴 상태라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주혁은 핸들을 꺾어 미대 쪽으로 방향을
튼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뒤 둘은 나란히 미대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둘이 자주
함께 강의를 듣던 대형 강의실 앞에 서자, 혁수는 팔을 뻗어 문손잡이를 당겨본다. 의외로
스르르 쉽게 끌려오는 목재 문을 열고 불 꺼진 강의실 안으로 발을 디디자 시큼한 먼지
냄새가 주혁과 혁수를 휩싼다. 터덜터덜 어디론가 향하던 혁수는 빽빽하게 들어찬 의자와
책상 가운데 하나를 골라 앉으며 감회에 젖은 목소리를 울려낸다.
「여기였어, 내 지정석. 너는 내 뒷줄이었지, 아마?」
「응. 가나다 이름순으로 정했으니까 그랬을걸. 별걸 다 기억하네, 안혁수.」
「오랜만에 오니까 참… 느낌이 새롭다. 나 이 학교 참 좋았는데.」
「미대 지망생들이 한번씩은 다 꿈꿔보는 학교 아니겠냐.」
「여기… 다시 돌아올 수는 없겠지?」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 혁수는 애틋한 손길로 때 묻은 책상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몇 초 뒤,
그의 볼을 미끄러져 내려온 눈물방울이 책상 위에 자그마한 동그라미를 그린다. 주혁은
먹먹하게 치받쳐 오르는 응어리를 분해 시키려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문다.
혁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은밀히 자리 잡고 있는 슬픔은 때때로 이렇듯 왁살스런 기세를
떨치며 그를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곤 한다.
「계속 학교에 남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 많이 했어. 같이 강의도 듣고,
가끔 서로 대출도 해 주고, 학교 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고, 또 작업도 같이 하고…
다른 캠퍼스 커플들처럼 말이야. 나 너랑 꼭 그런 거 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
짙은 어둠 속에서 주혁이 빨아들이는 담배가 불그스름한 빛을 발하고, 그 사이로 울음이
섞여 눅눅해진 혁수의 목소리가 지나간다. 혁수는 재빠른 동작으로 눈가의 물기를 훔치며
조금은 밝게 개인 음성을 잇댄다.
「너 조각하는 모습, 정말 멋있었는데. 사실 그것 때문에 너한테 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까만 에이프런 딱 두르고, 얼굴에 진흙 묻히고 손에는 나이프 딱 쥐고.」
「거기다 담배 한 대까지 딱 꼬나물면 다 넘어가지.」
「어라? 그럼 그게 의도된 연출이었단 말이지~」
바닥까지 추락했던 분위기는 태연하게 덧붙인 주혁의 한 마디 덕분에 와락 상승세를 탄다.
깔깔거리는 혁수의 웃음소리가 텅 빈 강의실 벽에 부딪혀 울리고, 주혁은 안도의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인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입술을 가져간다.
살짝 턱을 치켜들어 주혁과 입술을 맞댄 혁수는 가느다란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는다.
혀가 얽히고 타액이 섞이고 호흡이 곤란할 때까지 서로의 입술을 빨아대던 두 남자는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키스의 여운을 음미한다.
「미국 가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뜬금없이 튀어나온 주혁의 말에 혁수는 갸우듬히 머리를 기울이며 그에게로 시선을
모은다. 맑고 결연하게 빛나는 주혁의 검푸른 구슬이 자신을 꿰뚫는 것 같다.
「우리 혁수,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화랑 하나 열어줄 거야. 평생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면서 살 수 있게.」
「왜 매일 내 얘기만 해. 그럼 너는? 넌 하고 싶은 것도 없어?」
「나야 안혁수의 영원한 스폰서지. 그게 내 꿈이고, 난 벌써 꿈을 이룬 거나 다름없어.」
###################################################################################
여러분, 봄이네요 ^^;; 입춘대길 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사옵니다~ ^O^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cy2id님: 저도 쓰면서 저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잠시 했더랬습니다 캬캬;;
근데 꽃달고 웃으면서 물어보시니까 더 맘이 무겁네요 ㅠㅠ;; 리플 감사합니다~ ^^;;
ㅁ준타열희님: 오랜만의 해피모드에 잠깐이나마 좋으셨다면 대만족입니다. ^O^;;
화이팅해주시는 만큼 힘내서 계속 달려야죠. 지금보다 더 스피디하게~! ㅋㅋ
ㅁwhitewhyuk님: 매일매일 올리고 싶은 건 저 역시 마찬가지랍니다ㅠㅠ;; 그래도 완결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빨리 쓰려고 노력중이에요- (그래서 글의 질이 더 떨어지는 것 같지만;;)
내일은 힘들어도;; 너무 오래 기다리도록 하진 않겠습니다. 꼭! -_-^
ㅁJOAHAE님: 아하하;; 제가 생각해도 전 재준이를 너무 과장되게 멋진 모습으로 그리지
않나 싶어요. ^^;; 이래서 주혁팬을 빙자한 재준팬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크하하-_-*
ㅁ아가혁수7님: 그렇게 시원스런 미소까지 지으면서 내일 보자고 하시면;;
저의 양심이 콕콕 쑤시잖습니까. -ㅁ-!! 아하하.. ^^;; 그래도 너무 늦진 않았죠? -_-;
ㅁinmylove님: 모두들 하루에 한편을 원츄하시는군요-_-;; 기대에 부응해드리지 못해서
죄송스러울 뿐입니다ㅠㅠ;; 암튼 리플 감사하구요~ 저두 알랴뷰♡;;(뻘쭘-_-^)
ㅁforte96님: 아, 잘라서 죄송합니다;; 글케 생각하실줄은.. 예상밖의 반응인데요? ^^;;
아~ 이번편까지만 질질 끌고;; 다음편부터는 정말!! 스피디한 전개!! 불끈-_-+
완결을 향해 미친듯이 치달아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맨날 말만 이러지ㅠㅠ*)
[원랑] 오르가즘 - 203
by 원랑 in '리얼톤혁'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새로운 삶이 '시작'에만 그치고 행복한 끝을 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이 때리시는 채찍으로 인해 함께 가는 그 길이 눈물로 얼룩진다 하여도,
절대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시작하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넘치게 감사하고
감격해 할 거라고. 혁수야, 나의 기도가 이루어질까?
신께서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실까?
- 원랑, <오르가즘 #59> 중에서 -
감긴 눈 사이를 비집고 침투해오는 따가운 겨울 햇살에 혁수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베개에서 머리를 떼자마자 우악스레 밀려드는 어지럼증에
그는 반사적으로 침대 모서리를 부여잡는다. 곧이어 이마가 부서질 듯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후벼 판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지독한 숙취 때문에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늘 이 모양이다.
간신히 방바닥을 딛고 선 혁수는 빙빙 돌아가는 시야를 다잡으려 여러 번 눈을 깜박거린다.
그리고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겨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본다. 얼마나 눈이 심하게
부었는지, 그나마 한쪽에 있던 쌍꺼풀마저 없어진 상태고 푸석푸석하게 거칠어진 피부는
까무잡잡하다 못해 거무튀튀하다. 하룻밤 사이에 병색이 완연해진 자신의 모습에 혁수는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짓다가 꿉꿉한 느낌을 없애려 서둘러 욕실로 향한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난 뒤 방으로 돌아와 머리를 말리는 그에게 노크 소리가 들린다.
「네.」
방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민 사람은 집에서 숙식을 함께 하는 가정부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린 후 그녀는 종종걸음 치며 혁수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깔끔하게
옷까지 갈아입고 주방으로 들어서자, 아버지 인하는 벌써 출근한 듯 보이지 않고
정숙이 평소와는 다른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한다.
「잘 받지도 않는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 엄마가 혁수 취한 모습 싫어하는 거
알잖아. 다음부터는 먹더라도 적당히 조절하면서 마셔라. 알았지?」
「네, 죄송해요.」
깍듯하게 뒤를 잇는 혁수의 대답에 정숙은 마음이 풀어진 듯 이내 포근한 미소를
띄우며 혁수의 손에 수저를 쥐어준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혁수에게 기분 좋게 들뜬 그녀의
음성이 닿아온다.
「혁수야, 기쁜 소식이 있어.」
혁수는 움직임을 멈춘 채 동그래진 눈으로 궁금증을 표시하지만 정숙은 그녀답지 않게
뜸을 들이며 머뭇거린다. 무슨 대 사건이 벌어졌기에 어머니가 저토록 설레 하는지,
혁수는 잠깐 동안 부지런히 추측해 본다.
「아버지께서 널 호적에 올리시겠대, 혁수야. 드디어 네가 장씨 성을 갖게 되는 거야!」
맹렬한 이성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혁수는 쥐고 있던 수저를 툭 떨어트리고 만다.
그런 혁수의 반응이 너무 기뻐서,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정숙은 화사하게
만개한 낯으로 수선스레 입을 놀린다.
「이제 누가 뭐래도 너는 어엿한 장인하 검사의 친아들, 장혁수야. 호적에 올랐고
법률상으로 친자인데, 누가 감히 씨가 어쩌고 하면서 뭐라 그럴 거야? 이젠 너도 주혁이랑
똑같이 대우받을 수 있어. 성을 물려받았으니 당당한 인동 장씨 종가 후손이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주먹을 불끈 움켜쥔 채 정숙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혁수는
그런 어머니에게 맞장구를 쳐주지도, 그게 무슨 소리냐며 상투적인 반문 한 마디 날리지
못한다. 다만 세차게 요동치는 눈동자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직시할 뿐이다.
「혁수야!」
그의 무반응이 너무 길다고 느껴졌는지 정숙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실낱같은 이성을 붙잡고 상념에서 깨어난 혁수가 홀린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한참 만에 정숙과 시선을 맞춘다.
「엄마.」
「오냐. 얘기해 봐, 혁수야.」
「그게 진짜예요? 아버지가 진짜로 절 친자로 입적시키시겠대요?」
「얘는, 그럼 엄마가 이런 걸 가지고 거짓말하겠니?」
안 돼요, 그건. 그건 저를 세상에서 제일 불효막심하고 파렴치한 인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저는 떠날 사람이에요, 엄마. 아버지를 배반하고 아버지의 '진짜' 아들과 함께 떠날
사람이란 말예요.
「……싫어요.」
아슬아슬하게 깔린 정적을 가르며 흘러나온 세 글자, 단호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의 의지
표명에 정숙은 입이 떡 벌어진다. 분명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겠거니, 그녀는 도리질을
치며 그에게 되묻는다.
「뭐라고? 혁수야, 너 지금 뭐라고 한 거니?」
「아버지 친자로 입적되기 싫다고요. 그리고 제가 왜 장씨예요? 저는 안혁수예요, 엄마.」
「말도 안 돼! 싫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이렇게 되기만을 엄마가 얼마나
기도했는데, 이게 얼마나 천금같은 기회인데, 싫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억지 그만 부리세요, 엄마! 누가 뭐래도 이 집 친아들은 주혁이잖아요! 호적에 오른다고
친아들이 되는 거예요? 피가 다르고 생김새가 틀린데, 법률상으로 절 호적에 우겨
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대체 뭐예요?! 저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안혁수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성씨 하나 바뀐다고 해서 사람들 인식까지 바뀌는 줄 아세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윈 상관없어!」
히스테릭하게 파고가 높아지는 정숙의 음성에 혁수는 멈칫 입을 다문다. 서툴고 불편한
정적이 잠시 두 사람 사이를 수놓았다가 흩어진다.
「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아버지가 널 친자로 입적시키지 않는 한
너는 주혁이한테 모두 뺏길 수밖에 없어. 막말로 유산 한 푼 못 받고 맨 몸으로 쫓겨날
수도 있단 얘기야! 그 때 가서 쓸데없는 고집 피웠던 거 후회할래? 그럴 거야?」
「주혁이가 왜 제 걸 뺏어요? 주혁이가 아버지 유산이나 지위에 집착하는 애라면,
지금처럼 밖으로 나돌겠어요? 엄마야말로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마시고, 제발 저 좀
맘 편히 미국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해! 주혁이는 그런 애가 아니라고? 넌 걔한테 그런 일까지
당했으면서, 어떻게 걔를 싸고돌 수가 있니? 그 놈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처음에는 착하고 순한 척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따르더니 너한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게다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애를 데려다가 부모까지 속이면서…!
그런 천하의 악마 같은 놈을 대체 왜 싸고도는 거야? 널 망치려고 작정한 놈을!」
가느다란 목에 힘줄이 솟아나도록 버럭버럭 악을 쓰던 정숙은 순간 현기증이 도는지,
휘청 고꾸라지는 상체를 가까스로 지탱한다. 혁수는 얼른 팔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하지만 정숙은 매섭게 그를 노려보며 그의 손을 뿌리친다.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차가운 목소리를 돋우어낸다.
「더 이상 주혁이 얘기는 그만 하자꾸나. 엄마는 그 이름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그리고 넌 무조건 아버지 호적에 올라야 해. 하찮은 그 체면 때문에 네 앞길 망칠 수는
없어. 난 네 엄마니까.」
「싫어요. 전 절대 동의 못해요.」
「혁수야!」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씀해주세요. 잘 먹었습니다.」
두둑한 봉분을 이룬 흰쌀밥엔 숟가락 한번 대지 않은 채 혁수는 주저 없이 의자에서
일어난다. 평소엔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줄 것처럼 온순하고 서글서글해 보이지만,
한번 마음을 굳힌 일에는 상대방이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완고하고 양보가 없는 그다.
계속되는 정숙의 부르짖음을 철저히 외면하고 혁수는 2층의 자기 방을 향해 돌아선다.
방문이 닫히고 난 뒤 그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허둥지둥 휴대폰을
집어 든다. 그리고 단축 다이얼 1번을 길게 누른다. 잠시 후 굵직하면서도 곰살궂은
주혁의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전해져온다.
「오, 자기야~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혁아, 우리 잠깐 만나야겠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버지가 날 호적에 올리시겠대. 일단 엄마한테 싫다고 말하긴 했는데,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혁아, 어떡하지?」
「지금 학원으로 데리러 갈게. 1시간 후에 거기서 보자.」
― 째깍째깍 규칙적으로 귓전을 때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마치 총 쏘는 소리 같다.
혜련은 예민해진 신경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벌떡 허리를 곧추세운다. 몇 주 째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확연히 수척해져 있다.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의 탁상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제 겨우 11시를 지나는 중이다. 혼자 지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한참을 자고 깨어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새벽녘일 때가 일쑤다.
문득 갈증이 생기자 혜련은 침대에서 내려와 맞은편에 비치된 미니 냉장고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작달막한 양주 병 하나를 골라 꺼낸다. 흑갈색 액체가 찰랑찰랑 경쾌한 마찰음을
내며 유리잔 가득 채워지고, 혜련은 독한 양주를 냉수처럼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켠다.
그러다 성대에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는 작열감을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구부린 채
발작적인 기침을 토해낸다. 기침이 멎은 후 담배 한 대를 빼어 무는 그녀에게 갑작스런
인터폰 소리가 들리자 혜련은 흠칫 긴장하며 수화기를 집어 든다.
「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여기 프런트인데요, 조문환 씨라고 손님이 찾아오셨네요.」
「아, 네. 올라오시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뭐 필요하신 건 없으시고요?」
「네, 괜찮아요.」
몸이 근질근질해질 만큼 상냥한 여직원과 정반대로, 혜련은 높낮이가 전혀 없이
무뚝뚝한 음색을 나열한다. 그리고 잠시 후, 문환의 손이 방문을 노크했을 때 그녀는
스스럼없이 자물쇠를 딴다. 여자 혼자 있는 곳에 드나들기엔 늦은 시각임에도 문환 역시
조금도 민망해하거나 꺼려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비밀스런 음모와 치밀한 복수로
연결된 두 사람 사이는 제법 끈끈해져 있다.
「이런, 며칠 사이 더 마르셨습니다. 입덧 때문에 통 드시질 못하시죠?」
혜련을 딱 보자마자 문환은 연민 어린 눈빛으로 그럴듯한 안부 인사를 건넨다.
'괜찮다'는 상투적인 대꾸를 뱉으며 혜련은 그에게 술을 권하고 문환은 정중히 그녀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 입으로 가져간다. 자신의 유리잔에도 양주를 가득 따라 홀짝이는
혜련을, 문환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만류한다.
「혜련 씨, 술을 드시다니요! 임신은 초기에 제일 조심해야 한다고 하던데.」
「괜찮아요. 한두 잔 마시는 건데요, 뭐.」
「그래도 그러다 혹시 애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조 회장님 부하들한테 뒤질 때까지 얻어터졌을 때도 멀쩡히
살아남은 앤데. 걱정 마세요. 나만큼 내 뱃속 애도 생명력 하나는 끈질기니까.」
상대를 시르죽게 하고도 남을 만큼 당돌하고 날카롭게 쏘아부친 혜련은, 문환을 조롱하듯
단번에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얼근한 취기가 온몸을 휘감고 돌며 뾰족하게 솟아
올랐던 그녀의 신경을 누글누글하게 눙친다. 그녀는 자세를 편안히 풀어 헤치며
야심한 시각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유가 무엇인지, 문환에게 묻는다.
「근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강태가 죽기라도 했나요?」
「그 소식은 조만간 전해 드려야겠죠. 오늘은 그것보다…」
문환은 말꼬리를 흐리며 혜련의 빈 잔에 술부터 채워 놓는다. 그런 다음 그녀가 세 번째
술잔을 말끔히 비워내고 나서야 망설이듯 신중하게 입술을 뗀다.
「김준상이 서울 시내 호텔이나 모텔, 하여튼 숙박업소 전부를 이 잡듯 뒤지고 다닌답니다. 아마 지금쯤 혜련 씨께서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그럼 저 쪽에서도 본격적으로 싸움을 걸어오겠군요.」
「글쎄요, 오히려 더 신중히 몸을 낮출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재준 그 놈은 워낙
눈치가 빠르고 교활해서… 무턱대고 뭔가 벌이거나 그러진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어떻게든 둘이 부딪혀야 어느 쪽이 물러나든, 승부가
나질 않겠어요?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질질 끌 수는 없는 거잖아요.」
「물론입니다. 그건 혜련 씨께도 못할 노릇이고 저 역시 답답해서 못 견딥니다.」
거기서 말을 끊은 뒤 문환은 별안간 양복 안 주머니를 뒤적인다. 그저 그가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라고 범상히 여긴 혜련은 다시 네 번째 술잔으로 손을 뻗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사방의 벽면이 자신을 향해 조여드는 듯 갑갑증이 치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신들린 사람처럼 또 한 잔의 술을 목구멍 너머로 넘긴다.
입안 전체로 퍼져나가는 쓴맛에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혜련은 고개를 든다. 그리고
파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총부리와 맞닥뜨린다. 얼마 전 섬뜩하도록 차디찬 감촉으로
내장까지 후벼 팔 듯 옆구리를 찌르던 총구의 느낌이 그녀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현된다.
외마디 소리조차 지를 수 없어 그대로 굳어버린 혜련에게 냉혹한 문환의 목소리가
일직선으로 와 닿는다.
「이재준… 보통 놈이 아닌 건 확실하더군요. 난 댁 말대로, 유혜련 씨를 뒤지게 두들겨
패서 충의회 앞에 던져놓으면 이재준이 먼저 싸움을 걸어올 줄 알았어요. 물론 어디까지나
이재준이 먼저 강태를 낚아채 갔기 때문에 나한테는 근본적인 책임이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먼저 발끈해서 충의회를 건드리면, 그것도 위신이 안 선단 말이지요. 나도 엄연한
피해자인데, 굳이 손가락질 받을 이유가 뭐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유창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문환은 엄지손가락을 사용하여 들고 있는 권총을
장전시킨다. 딸각 하는 소음이 사라지기 무섭게 그의 입술이 다시 열린다.
「더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져야겠단 거지.」
길지 않은 한 문장을 전부 발음해내자마자 문환은 손가락을 당겨 총을 발사한다.
소음기가 장착된 탓에 발사음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총알은 정확히 혜련의
왼쪽 가슴에 박히고, 풀썩 앞으로 고꾸라진 그녀는 그 자세로 미동 없이 정지해
버린다. 이미 육신의 귀를 잃은 그녀에게, 문환은 차분히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유혜련 씨.」
#############################################################################
아하하하.. ^^;; 사람 하나 또 죽였다~~ -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whitewhyuk님: 글케 오래 기다리시진 않았죠? ^^;; 근데 내용이 영-_-;;;
ㅁsunha39님: 반갑습니다~^O^ 일케 제 소설 잊지 않고 다시 읽어주시니 너무 감사해요-
중2때 읽으셨다면 정신세계가 상당히 성숙하신듯^^;; 과분한 칭찬만 해주셔서 쑥스럽네요;;
앞으로도 열독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ㅁ준타열희님: '권선징악' <- 이 말이 전 왤케 웃기죠-_-? 암튼 해피모드 된지 얼마나
됐다고 다음편에 바로 호러모드가 되어버렸습니다-_-;; 그래도 재밌게 읽으셨음
좋겠네요- 님 말씀대로 스피디하게- 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ㅁinmylove님: 그럼요, 약속 지켜야죠- 이젠 정말 스피디해지지 않으면 안되겠어요 >ㅁ<;;
그래서 스피디하게 혜련이를 죽여버린..-_-;; (뻘쭘;;)
ㅁ아가혁수7님: 멋지죠. 계산없이 사랑하는 사람들- 그런 만큼 고난도 큰 것 아닐까, 잠시
허접한 생각을 저도 해봅니다^^;; 님께서도 열독해주시길 부탁드려요~
ㅁcy2id님: 미친듯이(?) 달리기 위해 혜련이 죽였어요-_-ㅋ (그걸 지금 말이라고-_-;;)
이제 정말 질질 끄는 건 그만하고!! 빨리빨리 치달아가 보려구요- 근데 생각하는 것처럼
글이 잘 나와야할텐데, 걱정입니다ㅠㅠ;; 그래도 님의 응원을 힘입어 건필할게요^^
ㅁskyara님: 정말입니까? 전 아무리 그래도 옥동자는 싫어요 -_-; (정종철씨께는 갠적으로
심심한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만;;) 저는야 꽃미남중독자- >ㅁ<;;
by 쵸티지기
[원랑] 오르가즘 - 204
by 원랑 in '리얼톤혁'
「선생님, 안 들어가세요?」
단발머리를 억지로 모아 올려 우스꽝스럽게 동여맨 여고생이 그림도구와 가방을
챙겨들며 발랄한 음색으로 혁수에게 묻는다. 이젤 앞에 앉아 멍하니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그는 퍼뜩 뒤를 돌아보며 인공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어, 선생님은 조금 더 있다 갈게.」
「네, 그럼 저 먼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폴짝폴짝 뛰어나가는 여학생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혁수는
이내 어둑어둑한 낯빛이 된다. 아버지가 자신을 친자로 호적에 등재시키려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주혁은,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일단 아버지와 일 대 일로
부닥쳐 보라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입을 거치지 말고, 아버지가 직접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보는 게 우선일 듯, 싶다며 주혁은 차근차근 일의 순서를 짚어 주었다.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한 혁수는 그렇게 하겠노라 고개를 끄덕였고, 출국 준비를
마무리 짓기 위해 바쁜 주혁과 헤어져 학원으로 향했다. 복잡다단한 머릿속을 정돈하고자
평소보다 더 열성적으로 작업에 매달렸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애꿎은 팔레트만 여러 번
다시 씻어야 했고 갈아 치운 캔버스만 해도 벌써 3개째다. 산란한 마음을 다잡으려
심호흡을 길게 하고 혁수는 짙은 녹색 물감을 팔레트 위에 짜 놓는다. 그리고 정성스레
아름드리나무를 그려나가다가 아무래도 마음에 차지 않는 듯, 짜증 섞인 한숨을
뱉으며 들고 있던 붓과 팔레트를 팽개쳐 버린다. 구석진 곳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막 밤 10시를 향해 치달아 가는 중이다. 혁수는 생각을 고쳐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둔 점퍼 소매에 팔을 끼운다. 매일 오가는 오솔길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던 그는 익숙한 벨소리에 발신자를 확인한 후 휴대폰을 귀로 가져간다.
「응, 나야.」
[집에 가는 중이야? 춥지?]
「괜찮아, 따뜻하게 입어서. 일 끝났어?」
[아니, 아직. 오늘 하루 종일 전화도 못하고 미안해.]
「별 게 다 미안하네. 저녁은 먹었어?」
[어, 대충. 너는?]
「왜 대충 먹어, 일하려면 힘들 텐데. 주혁아, 나 집에 다 왔거든? 아버지랑 얘기
끝내고 다시 전화할게.」
저녁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혁수는 밥을 먹었느냐는 주혁의 질문을
은근슬쩍 넘겨 버리고, 무언가 석연치 않아 하는 듯한 주혁을 남겨둔 채 얼른 휴대폰을
접는다. 이렇게 계속 자신을 걱정하는 주혁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또 쓸데없이 그에게
투정을 부릴 것 같다. 마치 남의 집 주변을 배회하는 이방인처럼 대문 앞에 서서 망설이던
혁수는, 자꾸 도망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나무라며 초인종을 누른다. 아담한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니 늦은 밤임에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자태의 정숙이 그를 맞이한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집에 계세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신다. 손만 씻고 얼른 들어가 봐.」
간단하게 세면을 마친 혁수의 손가락이 인하의 서재 문을 두드린다. 안쪽에서 '네'라는
응대가 들려오자 혁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제친다.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독서
중이던 인하는 혁수의 기척에 미소 지으며 그를 반긴다.
「우리 아들 왔구나. 안색이 별로 안 좋네? 어디 아픈 건 아니니?」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출국 날짜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 아르바이트는 그만해도 되지 않겠니?
친구들도 좀 만나고 이것저것 정리도 좀 하고 그러려면 시간이 빠듯할 텐데.」
「돈 때문이 아니라,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출국하려면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요, 뭐. 제가 알아서 잘 정리할게요. 걱정 마세요.」
깍듯하게 뒤를 잇는 혁수의 대답에 인하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노크 소리와
함께 정숙이 쟁반에 담긴 차와 과일을 들고 나타난다. 조신한 동작으로 인하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그녀는 한숨부터 푹 내쉬며 입을 연다.
「혁수 네가 어디 아버지께 직접 말씀 드려 보렴. 나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도대체
네가 왜 반대를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구나.」
「그래, 혁수야. 솔직히 아버지는 약간 서운하다. 이번 법 개정이 통과되자마자
아버지는 널 호적에 올릴 생각부터 했는데. 또 당연히 너도 기뻐할 거라 생각했고.
그런데 반대를 하다니 의외야. 엄마 아빠가 모르는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니?」
「그런 건 없어요. 단지… 그런 불필요한 일을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요.」
「불필요하다니? 세상에 이것처럼 중차대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무겁게 분포된 공기분자들을 찢으며 울려 퍼지는 정숙의 목소리에도 혁수는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제가 이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첫 날부터, 아버지께서는 절 주혁이와 똑같은 아들로
대해 주셨어요. 단 한번도 차별대우 받는다는 생각 든 적 없었고 오히려 주혁이보다
저한테 더 잘해주셨죠. 제가 잠깐 동안이나마 아버지께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절 내치시기는커녕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아낌없이 도와 주셨고요.」
심지어 당신의 친아들을 의절하다시피 내어버리면서도 당신은 나를 아들로 택했잖아.
돌아가신 장주혁의 친어머니를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아마 지금쯤 저 세상에서
통곡을 하고 계실걸.
「아버지가 저를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감사하고요. 하지만 아버지 호적에 오르는 일은,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아요. 아버지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전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혁수야, 넌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어! 아버지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모든 게…!」
정숙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간절히 혁수의 손을 붙들며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인하는 그런 아내의 행동을 엄중히 제지시키며 혁수에게 계속
이야기하라는 눈짓을 보낸다. 남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부득불 입을 다문 정숙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망울 가득 물기가 어린다. 혁수는 애써 어머니의 시선을 피한 채
다시 입술을 뗀다.
「우리 집이 어떤 집인지, 제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인동 장씨 족보에 오르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할 어른들도 많으실 거예요. 물론 아버지께선 이미 그런 반발을
예상하시면서 이런 결정을 하신 거겠지만… 저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워 지는 건 원치
않아요. 게다가 어차피 한 달 있으면 유학 갈 텐데, 분란 일으키고 떠날 마음은 더더욱
없고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혁수의 장광설이 끝난 뒤 서재 안은 서먹하고 둔중한 침묵으로 꽉 메워진다. 혁수는 선처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머리를 조아린 채 인하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인하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흘리더니 천천히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인다. 정숙은 신경질적으로 목에
걸린 다이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아들과 남편을 번갈아 쳐다본다.
「혁수가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구나. 아빠가 생각이 짧았다.」
너무 순순히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인하가 못 미더워서 혁수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팬다.
정숙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사태가 당황스러워 안면근육이 일그러진다.
「아빠는 단지, 네 엄마가 오랫동안 기도해 온 일을 하루라도 빨리 이뤄주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어. 네가 반대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는데 우리 혁수가 생각이 깊구나.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이번 일은 일단 보류하도록 하자.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얘기해. 알았지?」
「네, 아버지.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 피곤할 텐데 들어가 쉬어라.」
인하는 친근하고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혁수를 물리고 혁수는 안녕히 주무시라는
밤 인사를 남기고 서재를 나선다. 천금같은 기회를 허투루 날려버린 그를 향한
원망으로 이글거리는 정숙의 눈동자가 혁수의 등에 꽂힌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혁수는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상상 이상으로 수월하고 원만하게
일이 매듭지어지자 약간의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혁수는 이제
말 그대로 '코앞에' 닥쳐온 주혁의 출국 날짜를 떠올리며 사위스러운 생각들을
떨쳐내 버린다.
― 밤 11시를 지난 시각, 호텔 로비 안에는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뿐이다. 프런트 데스크엔
무료한 표정의 직원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드문드문 오가던 인적마저
끊기고 싸한 정적만이 감도는 가운데, 황급히 유리문을 박차고 뛰어드는 사내의 기척에
직원은 깜짝 놀라 엉거주춤 일어선다. 그리고 판에 박힌 인사말을 읊조린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기 유혜련이라고, 투숙객 명단에 있는지 확인 좀 해주십시오. 급한 일입니다.」
요란스레 등장한 사내는 다름 아닌 준상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하루 종일 여기저기
휘젓고 돌아다닌 그의 얼굴을 무척 까칠해져 있다.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도 않은 채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그가 의심스러운지, 직원은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묻는다.
「실례지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러자 준상의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지며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 거친
동작으로 허리띠에 차고 있던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직원의 눈앞에 태극 문양과
무궁화 꽃이 새겨진 흉장을 들이민다. 얼마 전부터 경찰들에게 새로 지급되어 신분증
대신 사용할 수 있는 표식이다.
「이제 됐습니까? 조사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협조 좀 해주십시오.」
뜨악했던 직원의 표정이 스르르 허물어지며 자신이 근무하는 시간 중에 혹여 무슨
사단이 벌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워 하는 태가 역력하다.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투숙객 명단을 조회하던 그가 몇 초 후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유혜련 씨라는 분은 안 계신데요.」
「그럼 조문환은요? 조문환으로 찾아봐요.」
직원은 다시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고, 모니터 상에 뜬 이름은 준상이 발음해 낸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네, 있습니다. 조문환 씨… 21일 9시경 807호실에 체크인 하셨네요. 근데 제 기억으론
여기 투숙한 분은 여자 분 혼자거든요?」
「어떤 남자랑 같이 오지 않았어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체크인을 제가 처리한 게 아니라서…」
「지금 전화 한번 해봐요, 누가 받는지. 그리고 손님이 왔다고 얘기해 보세요.」
준상의 지시에 따라 직원은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전화가 걸리는 신호음만
줄기차게 울릴 뿐 남자든 여자든 응답하는 사람이 없다. 말쑥한 차림새의 직원은 얼굴이
벌개져서 마치 자기가 큰 실수라도 저지른 마냥 떠듬떠듬 이야기한다.
「안 받는데요.」
「안 받아요? 오늘 나가는 거 봤어요?」
「아뇨, 못 봤습니다.」
「그 방 열쇠 있죠?」
「네?」
「아, 열쇠 달라고요, 열쇠! 이 사람이 진짜 말귀 못 알아듣네. 빨리 내놔 봐요!」
준상은 역정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친다. 직원은 찔끔 몸을 사리며 허둥지둥
807이라 쓰인 열쇠를 찾아 건네고, 낚아채다시피 그것을 받아든 준상은 쏜살같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간다. 8층까지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조차 견뎌내기 버거워
준상은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른다. 문이 양쪽으로 벌어지자마자 총알처럼 튀어나간
그는, 807호실 앞에 이르자 두근대는 심장을 달래며 방문을 노크한다. 역시 방금 전처럼
아무 대꾸가 없다. 준상은 더 망설이지 않고 열쇠를 문고리 구멍 안에 꽂아 넣는다.
덜그럭 자물쇠가 열리고,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선 준상이 제일 먼저 감지한 것은
희미하게 풍기는 피 냄새다. 이어서 참혹하게 엎드러진 혜련의 시체가 준상의 망막을
잠식한다. 자동적으로 새어나오는 탄식을 틀어막으며 준상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코밑에 손을 대어 보지만 이미 호흡은 끊어진지 오래인 듯 하다. 혜련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가 베이지색 카펫 위에 검붉은 얼룩으로 찍혀 있다. 테이블 위엔 절반 이상
줄어든 양주 병 하나와 깨끗하게 비워진 유리컵 하나 뿐, 누군가 함께 있던 흔적은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하다. 혜련에게 총을 겨눌 사람은 딱 하나뿐이다.
「조문환 이 개 같은 새끼…!」
앙 다문 그의 잇새로 게걸스런 욕설이 터져 나온다. 거세게 고동치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파열할 것 같다. 준상은 손마디가 새하얘지도록 주먹을 그러쥐며 휴대폰을 꺼내 든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묵직한 재준의 음성이 그의 귓전에 도달한다.
[이재준입니다.]
「회장님, 준상입니다. 유혜련 위치 파악했습니다.」
[그래? 어디야, 지금 갈게.]
「아뇨, 오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여자… 죽었습니다.」
[뭐? 죽어?]
재준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기막혀하며 되묻는다. 준상은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어조로 대답한다.
「조문환이 그새 여잘 처리한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움직이시는 건 위험합니다.
제가 지금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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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준타열희님: 님의 닉넴을 볼때마다 <원타열희>로 교정해드리고 싶은 충동이 불끈!
치밉니다^^;; (또다시 시작된 원타추종자의 개종설득-_-;;) 암튼 더 속력 내서 달려야죠-
화이팅하여 건필하겠습니다-! ^ㅁ^;;
ㅁcy2id님: 미친듯이 웃으셨다니 기쁩니다 -_-ㅋ 장혁수는 일단 어감부터가 아니죠^^;;
(혹시 아는 분 중에 장혁수란 이름 가진 분이 계시다면 대략 죄송-_-;;)
ㅁwhitewhyuk님: 이번에는 더 빨리 왔죠? ^^;; 그 다음 사람들은 죽이지 말라는 말씀...
가슴에 박히는군요. -_-;; 조문환을 죽이는 건 별 반대 없으시겠죠? ㅋㅋ
ㅁinmylove님: 앞으로도 계속 쭈욱- 스피디할 작정입니다;; (말 그대로 작정일뿐ㅠㅠ;;)
기대하시는 만큼 좋은 글 보여드릴 수 있었음 좋겠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ㅁ아가혁수7님: 이리저리 배배 꼬고 싶어도 머리가 딸려서 안됩니다ㅠㅠ;;
그래도 한편 한편 재밌게 읽으실 수 있도록 잘 써야하는데;; 요즘 들어 능력부족을
절감하고 있는 작가!! 크흑ㅠㅁㅠ!!
[원랑] 오르가즘 - 205
by 원랑 in '리얼톤혁'
홈 바에 들어서자마자 재준은 한 쪽 구석에 설치된 오디오 쪽으로 향한다. 주저 없이
음반 한 장을 골라잡아 넣은 후 버튼을 누르자 애절한 음색의 여자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 곡이 부드럽게 전파를 타고 흐른다. 바 안 쪽으로 들어가 즐겨 마시는 위스키
병의 마개를 따고 한 잔 쭉 들이켠 다음, 재준은 입안에 감도는 비릿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한다. 그리고 습관적인 동작으로 담배에 불을 갖다댄다. 꼬불꼬불 곡선을 그리며
피어오르는 희뿌연 연기 속에 헝클어진 생각의 가닥을 일말이나마 날려버리고 싶지만,
뜻대로 될 리 없다. 가슴팍이 육중한 바윗덩이에 눌린 듯 숨을 쉬기 갑갑하다.
무지막지하게 덮쳐오는 흡연 욕구에 재준은 걸신이라도 들린 듯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낸다.
목구멍이 칼칼하게 아려오자 그제야 재준은 발작적인 기침을 토하며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재떨이에 처박는다. 그리고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한잔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긴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휴대폰 벨소리와
동시에 방정맞은 초인종 멜로디가 들려온다. 필시 준상일 것이다. 재준은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가며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한다.
「이재준입니다.」
[전화 오면 발신자 확인 안 해? 내 전화인 거 뻔히 알면서 왜 매일 그렇게 무뚝뚝하게
받아? 재수 없게.」
비음 섞인 목소리로 강태는 다짜고짜 투정부터 부려댄다. 며칠 동안 예전처럼 함께
생활하다가 오늘 아침 갑자기 태현의 아파트로 자신을 다시 보내버린(?) 재준에 대한
섭섭함이 단단히 묻어난다. 그러나 재준은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수화기 너머로 텁텁한 침묵만이 전해져오자 강태 또한 위기감을 감지했는지 앵앵거리던
말투를 바꿔 심각하게 묻는다.
「무슨 일 있지?」
「내가 이따 전화할게. 지금 준상이 왔거든. 끊자.」
강태는 더 이상 보채지 않고 알았다는 한 마디만 남긴 채 먼저 전화를 끊는다.
재준은 인터폰 액정 화면에 비친 준상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현관문의 자물쇠를
푼다.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를 한 준상이 고개를 들자마자 재준은 그가 다치지
않았는지 주의 깊게 살핀다. 전화상으로 이미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경을 기울이는 재준의 세심함이다. 상투적인 안부 인사 따위
일절 생략한 채 두 남자는 2층의 홈 바로 걸음을 옮긴다. 묵직하고 비밀스러운 공기가
순식간에 그들을 에워싸고 들어찬다.
「자세하게 얘기해 봐. 어떻게 된 건지.」
재준은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준상에게 내밀며 설명을 요구한다. 준상은 그가
건넨 담배를 몇 모금 빨지도 않고 비벼 끈 뒤 조심스럽게 낮은 음성을 새어 보낸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큰 호텔에 숨겨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자잘한 데만
뒤지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까 S호텔에 있었습니다. 조문환이 자기 이름으로 체크인
했고, 유혜련은 며칠 동안 쭉 거기 혼자 있던 모양입니다. 호텔 직원한테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씨발, 대놓고 붙어 보자는 거였잖아.」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직하게 웅얼대는 재준의 혼잣말을 알아듣지 못한 준상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에게 되묻는다. 그러나 재준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야기를 계속하라 손짓한다.
「제가 도착하기 바로 얼마 전에 처리한 게 분명합니다. 카펫에 흐른 피가 아직 완전히
굳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도 누군가 같이 있었던 흔적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걸 보면 조문환 이 새끼, 뒤처리 하난 완벽하더군요.」
「사람 죽이는 게 직업인데, 그 정도야 기본이겠지.」
재준은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는 듯 짧게 응수한다. 준상은 공손히 모아 잡고 있던
손을 풀어 테이블 위의 술잔을 만지작거린다. 무언가 염려되는 일이 있거나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재준의 그런 준상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그래서, 넌 그냥 빠져나와서 곧장 여기로 온 거야? 다른 보고 사항은 없고?」
뒤가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던 준상은 재준의 추궁을 듣자 차라리 잘됐다는 듯
속 시원하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상황이 좀 애매하게 됐습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제가 좀 더 신중하게 행동했어야
하는 건데…」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얘기해.」
싸늘하게 번뜩이는 재준의 눈빛이 섬광처럼 준상의 눈알을 찌르고 스며든다. 준상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손바닥에 송알송알 맺힌 식은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는다.
「아시다시피 큰 호텔일 경우 투숙한 사람을 만나러 들어가기가 까다롭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급한 마음에 이걸 좀 사용했습니다.」
준상은 머뭇머뭇 웃옷 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경찰 흉장을 꺼내 보인다. 재준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별반 동요하지 않지만, 대신 땅이 꺼져라 푸지게 한숨을 쏟아낸다.
그의 한숨이 무엇을 뜻하는지 익히 알고 있는 준상은 침통한 낯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다.
푸석푸석한 재준의 음성이 살얼음 같은 침묵을 수월히 깨뜨리며 준상의 고막에 와 닿는다.
「너답지 않게 너무 경솔했다. 일하는데 자기감정 개입시키니까 그런 거 아냐.」
「죄송합니다, 회장님.」
「어차피 벌어진 일인 걸 어쩌겠냐. 내일 아침이면 경찰에 신고 들어갈 거고, 직원이
불면 네가 경찰 사칭한 거 금방 들통 날 텐데.」
불벼락이 떨어질 줄 알았건만, 재준의 태도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범상하고 초연하다.
덕분에 그를 향한 준상의 송구스러움과 죄책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무게를 불려 나간다.
준상은 목뼈가 부러진 듯 머리를 가슴 쪽으로 깊이 끌어당긴 채 미동 없이 입술만을
달싹여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호된 꾸지람을 내리기라도 했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재준은 그저 또
한 개비의 담배를 입에 물고 혼자만의 생각 속에 빠져 있다. 조급증에 못 이겨
함부로 경찰 흉장을 들이댄 준상의 행동은, 확실히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형국이다.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아 갈 것이다. 어떻게든 이번 살인 사건과 충의회는 엮이지
않으려야 그럴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준상은 경찰의 소환을 받을 것이 자명하고
분명,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될 것이다. 문환 또한 용의자 선상에 오르겠지만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교묘하고 철저하게 뚫어놓았을 게 뻔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문환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가
쳐놓은 미끼를 파악하고 낚싯줄을 끊어버릴 수 있을까.
「회장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침묵을 견디다 못한 준상이 주눅 든 목소리로 재준의 의사를
묻는다. 재준은 뻐근하게 저려오는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천천히 입을 연다.
「생각 같아서는 네가 잠깐 홍콩에 가 있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은데…」
「그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회장님께서 몽땅 덮어쓰실 수도 있습니다.」
죽을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준상이 재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삽시간에
표정을 갈아 치우며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무례하게도 보스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허겁지겁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제가 저지른 실수니까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경찰에 가서 조사 받는 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뒤집어쓰더라도 제가 뒤집어써야지, 회장님께서는
절대 나서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좋아라 할 사람은 조문환 뿐입니다.」
「그 새끼가 노리는 건 결국 나 아니냐. 어차피 넌 중간 절차에 불과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애초부터 내가 나서서 정면으로 붙는 게 나을지도 몰라. 화살은 결국 나한테
돌아온다고. 괜히 너까지 다칠 필요 없잖아.」
「아닙니다. 제 실수 때문에 일이 이렇게 틀어졌는데 외국으로 홀랑 날라버린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누가 들어도 납득이 안 가는 얘깁니다. 회장님께서는 그냥 모른 척
하십시오. 저 혼자 설레발치다가 재수 없게 끌려든 걸로 밀고 나가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절대 나서시면 안 됩니다.」
「너야말로 납득이 될 만한 소리를 해라. 경찰에서 그 말을 믿겠어? 너 혼자 설레발
치다가 재수 없게 살인 사건에 연루된 거다, 그 말을 걔들이 믿을 것 같아?
준상아, 우린 깡패야. 난 깡패 두목이야. 현실을 똑바로 봐.」
「그러는 조문환은 깡패가 아닙니까? 그건 우리나 그 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정은 어쩔 수 없는지 준상은 눈자위가 붉어져서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만다. 그리고 이내 보스 앞에서 결례를 범했다는 자각에 움찔 입을 다문다.
재준은 피식 실소를 깨물며 한창 딱딱함이 가신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준상아. 항상 뭐든지 넓게 봐야 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어. 보스란 말이야, 어떤 일이든 닥쳤을 때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돼 있어. 항상 넓게 생각하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야.」
이건 또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준상의 표정이 기우뚱 일그러진다.
이처럼 심각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한가롭게 보스의 소양을 운운하다니.
그러나 재준은 뜨악한 준상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간다.
「먼저 내가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빼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해. 네 말대로 모든 걸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건 좋지 않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위험한 건, 반대로 현실을 너무 부풀려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러다가는 뒤통수 제대로 맞게 돼 있어. 매사를 너한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거, 고쳐야 돼.」
재준의 훈계가 끝난 후에도 준상은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완강한 침묵만을 고수한다.
그러다 심한 갈증이 도는 듯 유리잔 가득 얼음을 채워 그 안에 물을 붓는다.
재준은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 입술을 떼는데, 메마르고 갈라진 준상의 음성이 그를
가로막는다.
「보스가 되려면 어떤 걸 갖춰야 하는지, 그 딴 거 전 알 필요 없습니다.」
빈틈없이 무장된 그 목소리에 재준은 말문이 막혀 버린다. 준상은 일부러 그와
시선을 맞대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입술을 움직인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수습하겠다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 무슨 얘기가 더 필요합니까?」
비스듬히 쏘아 올려지는 준상의 눈빛은 삭막하고 차갑다. 그러나 재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곧게 응시한다. 희미하지만 따스한 미소가 서려 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엄격히 경직된 상태다. 작고 붉은 입술 사이로 퍼지는 음성 또한 준상의
눈빛을 제압하고도 남을 만큼 무겁고 낮고, 냉랭하다.
「네가 경솔하게 경찰을 사칭한 건 분명 잘못한 일이야.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의
책임을 네가 다 지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거야말로 날 바보 만드는 거야. 벌써부터
날 껍데기뿐인 보스로 만들려고 하지 마라.」
「회장님!」
「알아, 네가 그런 의도로 얘기한 게 아닌 거.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지금은 누가
뭐래도 내가 충의회 회장이야. 그리고 넌 내 직속부하다. 심지어 네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그 책임은 내가 져. 그러니까 나한테 나서지 말라는 소리하지
마라. 네가 나한테 그런 말할 입장은 아직 아니니까.」
흥건한 물기로 촉촉해진 준상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심장이 욱신거린다.
불에 달군 쇳덩어리 하나가 몸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것 같다.
몽땅 토해내고 싶다. 답답함, 억울함, 울분이 한데 뭉쳐 만들어진 이 응어리를.
「정말 해도 너무하십니다, 회장님.」
흐느낌을 삭이느라 맹맹한 콧소리가 섞인 음성으로 준상은 심중 은밀한 곳에
꾹꾹 눌러두고 있던 한 마디를 꺼내놓는다. 재준은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 원망과 탄식의 깊이까지도.
그러나 더 이상 그를 어루만지고 달래주기엔 남은 시간이 촉박하다. 용서를 빌고
후일을 부탁하는 것이야 죽기 직전에 해도 늦지 않겠지.
「잘 들어, 김준상. 이번 일은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까 그냥 넘어가지만,
또 한번 네 맘대로 경거망동하면 그건 날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알아들었어?」
준상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재준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며 그에게 지시 사항을 하달한 후, 빠른 걸음으로 홈 바를 빠져나간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간부들 전부 본사로 집합 시켜.」
##################################################################################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cy2id님: 그러게 말입니다- 실제로 저런 아버지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죠 -_-;;
ㅁ준타열희님: 태현님이 여자랑 엮어지는게 두려우시다뇨-ㅁ-; 그럼 제 소설 읽으면서
굉장히 불편하셨겠군요-_-;;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랑 엮어버렸는데 ㅋㅋ
뭐, 정 그러하시다니 원타에 대한 미련은... 못 버려요!!!! >ㅁ<;;
ㅁ아가혁수7님: 아하하^^;; 인하 부분 쓰면서 저도 닭살이 약간;; 너무 자상한척하는게
제가 쓴 거지만 좀 토나오죠? -_-ㅋ
ㅁinmylove님: 오옷;; 예리하십니다- 혁수를 아들로 대하는 것 같지 않다니 -ㅁ-
그런 부분을 또 집어내시는군요 >ㅁ< 멋집니다 *_*;;
ㅁwhitewhyuk님: "나쁜놈은 죽어" ← 웃겨요 ^^;; (남의 신조를 가지고 웃다니 -_-;;)
앞으로도 빨리빨리 올려서 님의 마음을 업시켜드려야겠군요 ^^;;
ㅁJOAHAE님: 으하하; 그렇습니다 -ㅁ- 양쪽에서 동시에 일이 벌어지는 덕분에
머리 나쁜 이 작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썼어도 마무리가 안되면
그 소설 망치는 건데 ㅠㅠ;; 부디 응원을...!! >ㅁ<
by 쵸티지기
[원랑] 오르가즘 - 206
by 원랑 in '리얼톤혁'
"만약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말이지… 나는 그 때부터 그 애의 종이 될 거야."
- 원랑, <오르가즘 #58> 중에서 -
간헐적으로 부르릉거리던 엔진 소리가 완전히 멎으며, 재준을 실은 검은색 세단 자동차가
충의회 본사 정문 앞에 멈춰 선다. 조수석 문이 열리기 무섭게 준상은 총알 같이 뛰쳐나와
뒷좌석으로 손을 뻗지만, 재준의 동작은 어김없이 그보다 빠르다. 손수 문을 열고
내려서는 재준을 향해, 정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조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갖춰
인사를 올린다. 재준은 미세한 고갯짓조차 보이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 곁에 준상이 그림자처럼 바싹 따라붙는다. 둘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6층에 위치한 재준의 집무실로 향한다. 황갈색 목재 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피를
홀짝이며 인터넷 서핑 중이던 여비서가 뭐에 찔리기라도 한 듯 발딱 몸을 일으킨다.
거의 구십 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그녀를, 재준은 굳은 표정으로 무심히 지나치는
반면 준상은 바쁜 틈에도 시원스러운 미소와 애교 섞인 윙크를 잊지 않고 날려준다.
집무실 안에는 충의회 주요 간부들이 제각각 소파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재준과 준상의 기척에 간부들이 일제히 일어나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정자세를
취한다. 재준은 주혁과 잠깐 눈인사를 교환한 다음 상석에 자리한다. 방안에는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만이 그득 들어차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탁자 위에
던져놓으며 재준은 무겁게 잠긴 목소리를 틔워낸다.
「아직 기사는 안 났지만 어젯밤 혜련이가 죽었어. 누구 짓인지는 말 안 해도 다들
알겠지.」
재준의 입술이 닫히기도 전에 간부들은 옆 사람과 쑥덕거리기 시작하고, 주혁의 하얀
얼굴이 기묘하게 찡그려진다. 한동안 술렁대는 소요를 지켜보기만 하던 재준이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연다.
「어젯밤 준상이가 혜련이 위치를 파악해서 갔다가 시체를 발견했다. 조만간 기사도
뜰 거고, 경찰에서는 이미 수사에 들어갔을 거야. 너희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몸 사리면서 일들 해라. 이 판국에 일이 더 꼬이면 정말 수습
못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보고하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몸을 사리라니요?」
재준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사내가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하며 노골적인
불만이 배어나는 음색을 내뱉는다.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공기 입자는 급속도로
냉각된다. 재준은 즉각적인 대답 대신 눈빛만으로,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는다.
재준의 시선을 고스란히 퉁겨낸 부하는 구부정하게 수그렸던 허리를 곧게 펴며 말한다.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몸을 사립니까. 혜련 아가씨를 저희가 죽였습니까?
아니면, 저희가 연화회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한 게 있습니까?」
「형님,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회장님 앞에서…!」
준상의 노기 어린 음성이 제법 당돌하게 나서서 따지고 들던 사내를 저지한다. 그러나
사내는 아니꼽다는 듯 의미심장한 조소를 깨물며 다시 말을 잇는다.
「저희는 회장님 지시하신 대로 조용하게 자기 맡은 구역 관리에만 충실했습니다.
그밖에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아가씨께서 돌아가신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솔직히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저희 잘못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회장님께서도 인정하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난 너희한테 뭐 잘못했다고 한 적 없다. 단지, 상황이 위험한 만큼 괜히 설치다가
일 만들지 말라는 얘기야. 몸 사리라는 것도 그 뜻이고.」
부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재준은 높낮이가 전혀 없는, 밋밋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옆자리의 준상은 재준에게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사내가 못내 괘씸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다. 주혁은 우려했던 사태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모두 쉬쉬하며 감춰두었던, 그러나
해소되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온 불만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
「솔직히 저희는 요즘, 회장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차분하게 타이르면 그쯤에서 수긍하며 입을 다물 줄 알았던 부하가, 오히려 더욱
가시 돋친 음성을 돋우어내자 재준의 낯이 히뜩 균형을 잃는다. 주혁은 당장이라도
그런 사내를 말리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맨 처음에 혜련 아가씨가 연화회에 끌려가셔서 만신창이가 되어 가지고 오셨을 때,
저희는 당연히 회장님께서 무언가 지시를 내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준상이랑 성일이한테만 책임을 물으시고 아무런 지시가 없으셨습니다.
그걸 저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연화회에서 무슨 짓을 하든, 저희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입니까? 이러다가 나중에 그 새끼들이 우리 구역에서 활개 치고
돌아다녀도, 회장님께서는 제대로 관리 못했다고 우리 애들만 혼내실 작정이십니까?」
점점 강도가 세어지는 사내의 언사에 준상은 노여움을 삭이지 못해 붉으락푸르락 얼굴
가득 열꽃이 핀다. 듣다 못한 주혁은 준상의 등을 두드리며 그에게 진정하라고
당부한 뒤, 열변을 토하던 사내에게 조심스런 어조로 제안한다.
「부장님, 일단 진정하시고요… 그 얘기는 회의 끝난 다음에 회장님과 두 분께서 조용히
말씀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회장님께서 다들 모이라고 하신 건 앞으로의 상황을
어떻게 대비해 나갈지, 의논하기 위해서이지 않습니까.」
「장 이사님이 저한테 그런 말씀하실 계제는 못 되지요. 며칠 있으면 충의회 소속도
아닌데, 여기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마시고 출국 준비나 잘 하십시오.」
사내는 뻔뻔스럽다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주혁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가차 없이
쏘아붙인다. 서글서글한 태도로 상대의 뒤틀린 심사를 가라앉히려 했던 주혁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재준 역시 양미간에 굵은 주름을 새기며 느긋하게
피워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준열한 음색을 발한다.
「박창욱,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내가 내치지 않는 한, 한번 충의회 소속이었던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내 사람이야. 네가 뭔데 소속이 어쩌고, 그런 말을 지껄여?」
땡땡하게 부풀어 오른 재준과 창욱 사이의 정적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불쾌한 파열음을
동반하며 깨어진다. 창욱의 비틀린 입술 사이로 픽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주혁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달아 가는 이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회장님. 장 이사나 다른 애들이나, 우린 전부 다 같은 회장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차별대우하실 수 있는 겁니까?」
재준의 눈동자에 거센 일렁임이 불거지며 그 빛깔이 전보다 훨씬 탁해진다.
무력화시키려 했던 분노를 잠재우지 못한 탓이다. 창욱은 그의 표정 변화에
아랑곳없이 태연자약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까놓고 말해서, 장 이사가 미국 들어가는 게 일 때문입니까?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더 이상 한국에서 살 수 없으니까 회장님께서 자비까지 들이셔 가지고 미국 보내주시는
거 아닙니까. 거기까진 회장님 직권으로 하신 일이니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하지만,
한번 충의회에 발을 들여놓았으면 죽거나 병신이 되지 않고서는 제 발로 나갈 수
없다는 거, 그건 누구나 다 인정하는 불문율입니다. 그런데 장 이사한테만큼은
그 불문율이 적용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처음 충의회에 들어올 때도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사랍시고 떡 하니 자리 차지하는 게 어이없었지만,
회장님께서 하신 일이니까 납득이 안 가도 우리 모두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습니다.
그렇게까지 우리는 회장님을 믿고 따라왔는데, 회장님께서는 대체 저희에게 뭘
해주셨습니까. 고작 다른 조직 눈치나 보면서, 말도 안 되는 차별대우 받아가면서,
그렇게 살려고 저희가 지금까지 회장님을 모신 겁니까?」
「야, 이 개새끼야! 너 그 입 안 닥쳐?!」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악문 채 가까스로 분노를 누르던 준상이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벽력같은 고함 소리가 창욱의 귀청을 찢을 듯 뒤흔든다. 주혁은 낮지만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다. 재준의 하얀 눈자위에 핏발이 서며 꽉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작위적으로나마 격식과 예의를 고수하던 창욱 또한 준상의 욕설을 듣자 더 이상 신사답게
나갈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는 듯, 거칠게 의자를 뒤로 젖히며 몸을 일으킨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어린놈의 새끼가 겁 대가리 없이…!」
「네가 뭔데 감히 회장님 앞에서 그 따위로…」
「회장? 회장이면 회장답게 행동하라 그래! 보스답게 행동했으면 왜 우리가 이 지랄을
떨겠어? 솔직히 내가 총대를 매긴 했지만, 너랑 장 이사 빼고 우리 전부 다 같은
생각이야. 보스가 제정신 못 차리고 헤롱거리는데 그걸 보고만 있어? 그런 게 충성인가?」
「뭐? 너 말 다 했어?」
벌겋게 달아올랐던 준상의 얼굴은 아예 핏기가 싹 가신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굵직하고 음산한 목소리로 반문하는 그에게, 창욱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여유를 되찾아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보스라면 당연히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자기감정 하나
컨트롤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보스로 모셔? 연화회랑 협약을 맺었으면
그대로 지키는 게 원칙이지, 제 맘대로 남의 걸 왜 뺏어와? 아니, 그것까지는
좋다고 치자. 뺏어오려면 적어도 밑의 애들한테 피해는 주지 말고 뺏어오던가!
제가 무슨 영화 주인공이라도 되나? 별 지랄을 다 떨면서… 이래서 어린애랑 같이
일하면 안 된다니까. 시국이 어느 땐데 꼴 같지 않은 사랑 타령이야! 그것도
여기저기 몸 팔고 다니던 남창 새끼한테 홀려서, 쪽 팔리게…!」
온갖 수치스런 비난과 모멸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던 재준은 창욱이 휘갈긴 마지막
한 문장을 듣자마자 용수철처럼 벌떡 퉁겨져 오른다. 그리고 힘줄이 불끈 솟아 나온
맨 주먹을 그의 뺨으로 냅다 올려붙인다.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창욱의 머리가 옆으로
홱 돌아가며 충격을 버텨내지 못한 그의 몸이 차가운 바닥에 함부로 내팽개쳐진다.
남의 일을 구경이라도 하는 양 묵묵히 상황을 관전하기만 하던 나머지 간부들도 흠칫
긴장하고, 집무실 안의 공기는 삽시간에 파열할 듯 뜨겁다. 어찌할 바를 몰라 황망히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던 주혁은 전광석화처럼 뻗어나간 재준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며
허둥지둥 그를 만류한다.
「회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씩씩거리는 재준의 숨소리가 두꺼운 적막을 힘겹게 가르는 사이, 중간쯤에 앉아 있던
서른 중반의 사내가 뚜벅뚜벅 쓰러져 있는 창욱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를 다독여
일으켜 세운 다음, 격노로 뒤덮인 재준의 눈망울을 곧게 직시하며 입을 연다.
「박 부장 말이 맞습니다. 저희 모두 이번 일로 인해서 회장님께 많이 실망했고,
박 부장 말대로 이건 저희 모두의 뜻입니다. 저희는 그래도 회장님께 차근차근
말씀 올리면 회장님께서 무언가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네요.」
최대한 이성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애쓰지만, 사내의 말투엔 숨길 수 없는 경멸감이
묻어난다. 재준은 여전히 게걸스런 호흡을 안정시키지 못한 채 털썩 가죽 소파에
주저앉는다. 사방의 벽면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자신을 향해 모서리를 좁혀오는 듯
재준은 역한 어지럼증에 이마를 감싸 쥔다.
「사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데에는 회장님 책임이 100%라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회장님께서 강태를 다시 빼돌리지만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벌어질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지금이라도 회장님께서 강태를 다시 연화회에 넘겨주시기만 한다면, 상황은 깔끔하게
마무리 될 겁니다. 물론 회장님은 아직 젊으시고, 또 강태를 아끼는 마음이 남다르셨기
때문에 감정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회장님, 회장님께선 회장님 자신만
생각하실 수 없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저희를 형제처럼 돌봐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가 지금까지 회장님께 충성해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강태 하나 때문에 회장님께서 저희를 외면하신다면… 저희 모두는 절대로,
그 배신감을 그냥 잊어버리진 않을 겁니다.」
결국…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나는 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선택의 기로에 기어코 서게
된 것인가. 이렇게 나의 마지막이 가까워오는 것인가.
재준은 감은 눈을 뜨지 않는다. 짤막한 한 마디도 발음해내지 못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내장 속의 찌꺼기들이 우르르 식도를 거슬러 오를 것 같아서 망부석처럼 앉은자리에
못 박혀 있을 뿐이다. 유창하게 자기 할 말을 쏟아놓은 사내가 턱짓을 해 보이자
간부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열을 지어 하나씩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재준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창욱은 퇴장하기 전 다시 그를 돌아보며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뱉어낸다.
「똑똑히 알아두십시오. 우리 애들 전부, 회장님 그 연애질에 장단 맞추느라 희생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발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셔서 옳은 결정 내리시길
바라겠습니다. 쓸데없는 전쟁하느라 피 같은 애들 목숨을 헐값에 넘길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이 정도 애들 자존심에 금가게 하셨으면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보스답게
책임을 지십시오. 똑바로 지시 내리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
충의회 이재준 회장님의 26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감축드리옵니다~! -ㅁ-
언제나 건강하시고 하시는 사업 번창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사랑해 재준아~~ >ㅁ< (-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혁이빨래: 드라마각본 같다는 말씀은 종종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봐요 ㅋㅋ
사실 제가 시나리오 쪽으로 공부를 좀 해서, 아무래도 그 영향이 있는듯 ^^;;
제 소설 때문에 원타를 이뻐하게 되셨다니, 반드시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_-!!
ㅁ준타열희님: 허허허;; 저의 개종설득은 끈질기게 이어질겁니다 -_-ㅋㅋ
글구 태현이를 죽이는 불상사를 일으킨다면, 전 정말 대책없는 작가겠죠. -_-;;
ㅁwhitewhyuk님: 님께서 왜 나쁜넘이셔요 -ㅁ- 제 소설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은
무조건 다 천사라 굳게 믿습니다 ㅋㅋ 근데 저번편이 슬펐나요? -_-ㅋ
ㅁ아가혁수7님: 아;; 이번편에서는 재준이가 완전;; 다운됐네요;; 죄송 -_-^
그래도 소설의 진행을 위해서는 어쩔수가 없어요~ -ㅁ-
ㅁcy2id님: 아하하^^;; 저도 제가 만든 캐릭터지만;; 준상이 부분 쓸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원랑] 오르가즘 - 207
by 원랑 in '리얼톤혁'
오르가즘은 현실적인 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 갖는 인간의 감정은 착각이다.
- 콜린 윌슨, <살인의 철학> 중에서 -
말쑥한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줄지어 우르르 빠져나간 뒤, 집무실 안에는 재준과 준상,
주혁 세 사람만이 남아 있다. 준상은 격분의 감정을 넘어서 아예 넋이 나간 상태고
재준은 침통하게 꺼져든 낯빛으로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문다. 재준을 위로하려는 듯
주혁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치고 돌아다니는 사이, 주혁은 마른기침을 뱉으며
특유의 중저음을 조심스럽게 새어 보낸다.
「아무래도 내가 출국 날짜를 미루는 게 좋겠어.」
재준의 옆얼굴에만 박혀 있던 준상의 눈동자가 스르르 주혁에게로 이동한다.
두 볼이 움푹 패도록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재준은 느릿느릿 입술을 뗀다.
「그건 안 돼. 형은 예정대로 떠나. 날짜 연기되면 계획에 차질이 많아.」
「그래도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 혼자…」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야.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고. 형은 신경 쓸 거 없어.」
주혁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재준은 단칼에 그의 제의를 거절한다. 주혁은 머쓱하게
입을 다물고 준상은 독불장군처럼 이 모든 사태를 혼자 덮어쓰려는 재준의 결심이
불 보듯 빤히 보여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한바탕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느라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다.
「형은 알잖아. 애들이 다 나한테 등 돌린다고 해도, 난 강태 포기 못해.
나도 곧 있으면 여기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될 테니까, 형이 출국 날짜 미룰
필요는 없어.」
「회장님!」
악에 받친 준상의 고함 소리가 무겁게 침전된 허공을 갈기갈기 조각내며 울려 퍼진다.
당장이라도 실성할 사람처럼 그는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부들거린다. 그러나 재준은
그런 준상에게 철저한 무관심만을 나타내며 그와 시선을 마주 대지 않는다. 주혁은
재준의 작심한 바가 무엇인지,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어서
심장 한 쪽이 철렁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혁수 형한테도 괜한 얘기하지 말고 조용히 떠나. 그리고 오늘 창욱이가 한 얘기는
신경 쓰지 마. 내가 내 식대로 사람 부리겠다는데 웬 말들이 많아. 그 딴 거 신경 쓸
거였으면 애초에 형 부르지도 않았어. 제발, 조용히 예정대로 떠나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나 힘들게 좀 하지 마. 안 그래도 죽겠으니까.」
이제 주혁은 선뜻 다시 입을 열 수 없어진다. 갑갑하고 초조한 마음에 그는 애꿎은
담배 필터 끝만 잘근잘근 씹어댄다. 그러나 준상은 주혁처럼 신중하고 진득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재준의 입술이 닫히기 무섭게, 그는 갈그랑거리는 쇳소리를 끄집어
낸다.
「저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회장님! 도대체 왜 계속 약해 빠진 소리만 하십니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여기랑 상관없는 사람이 되실 거라고요?! 그게 지금 직속부하
앞에서 하실 말씀입니까?」
「씨발, 그럼 어쩌라는 거야! 나더러 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왜 약해 빠진 소리만
나불대냐고? 그럼 어떡할까. 부하들한테 신임이란 신임은 몽땅 잃었고, 서울지검
차장 검사는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날 밟으려는 새끼는 검찰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한데! 내가 어떡해야 할까, 응?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김준상?」
격렬한 폭풍처럼 터져 나온 재준의 포효는 음습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주혁과 준상의
고막을 마구잡이로 유린한다. 주혁은 '서울지검 차장 검사'라는 한 마디에 흠칫
몸을 옹송그린다. 물론 준상은 어떤 말로도 재준에게 맞받아치지 못한다.
「제발, 형이랑 너만은 날 이해해 주라. 알잖아, 내가 한번 강태 포기했었던 거.
그러고 나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도 다 봤잖아. 내가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거… 그럴 바엔 죽는 게 낫다는 거… 형, 주혁이 형, 형은 누구보다
제일 잘 알지 않아? 그러니까 나 좀 내버려 둬. 그리고 김준상, 넌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나한테 등 돌리려면 네 마음대로 해. 충분히 이해하니까.」
재준의 목소리는 완연한 애원조로 치우쳤다가 금세 특유의 단연함을 되찾는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에 그렁그렁 이슬방울이 달린 채로 재준을 바라보던 준상은, 재준의 마지막
발언을 접하자 독하게 그 물기를 말려버린다. 그리고 구부정하게 꺾었던 허리를 꼿꼿이
편다. 모든 감정이 걷혀진 그의 망막은 꺼칠꺼칠하고 어둡다. 실망감도 배신감도,
슬픔과 원망까지 모두 초월한 듯한 그의 눈동자에 주혁은 더럭 겁이 난다.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짤막하고 판에 박힌 인사 한 마디만 남긴 채 준상은 미련 없이 뒤돌아 사라진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준은 흐느낌처럼 처연한 한숨을 뽑아낸다.
주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검푸른 눈동자만 멀뚱멀뚱 굴리고 있다.
「형, 나 혼자 있고 싶다. 자리 좀 비켜 줘.」
「어? 어, 그래. 이따 집에서 보자.」
「응.」
주혁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나선다. 혼자 남은 재준은
자꾸만 제멋대로 진동하는 손가락들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담배에 불을 댕긴다.
꼬불꼬불 피어오르는 희뿌연 연기를 망연히 응시하던 그는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끈 다음, 책상으로 다가가 인터폰의 버튼을 누른다. 상냥한 여비서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재준은 침착한 태도로 그녀에게 지시한다.
「지수 씨, 연화회 조 회장 연결해요.」
― 현란한 네온사인을 밝힌 고급 룸살롱 입구 앞에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선다.
연이어 재준의 긴 몸이 땅을 딛고 모습을 드러낸다. 뒤따라 내린 준상은 걱정으로
얼룩진 눈동자를 번연히 노출시킨 채, 재준을 향해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을 던진다.
「정말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회장님.」
「걱정 마. 저 새낀 나 못 죽여. 날 죽일 생각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어.」
재준은 간단명료하면서도 확실한 대답을 들려주며, 준상으로 하여금 더 이상 무어라
토를 달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다부진 발걸음을 내딛는다.
혹여 흉기를 소지하지는 않았는지 재준의 몸을 샅샅이 훑은 후, 연화회의 조직원은
문환이 있는 구석진 밀실로 재준을 안내한다. 누군가와 휴대폰으로 통화 중이던
문환은 재준의 등장에 낯빛이 한층 진중하게 가라앉으며 전화를 끊는다.
「오랜만입니다, 이 회장님. 아마 회장님께서 우리 강태를 납치해 가신 이후로 처음이죠?」
공손한 말투와 부드러운 음성으로 당의(糖衣)를 입혔지만 정곡을 찌르는 문환의 인사에
재준은 그저 간단히 목례를 해 보일 뿐이다. 어깨를 으쓱하며 문환은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두 남자는 첨예한 칼날을 세운 공기 입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마주보게 된다.
문환은 역시나 '예의 바르게' 두 손을 들어 재준의 유리잔에 술을 따른다. 한 잔씩
주고받은 두 사람은 얼마간 불필요한 탐색전을 치르느라 말없이 서로를 곁눈질하기만
한다. 먼저 침묵의 균형을 깨뜨린 쪽은 문환이다.
「이 회장님, 정말 의외입니다. 이런 식으로 약속을 개떡 같이 여기실 분이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말이지요. 실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한참 만에 재준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말은 문환의 예상 밖이다. 의뭉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그에게, 여태껏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재준이 별안간
머리를 쳐들며 문환의 눈을 꿰뚫을 듯 직시한다. 그리고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강태를 다시 데려온 게 죄송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드렸던 것,
그걸 사과드리는 겁니다.」
흥미롭다는 듯 문환은 야릇한 미소를 띠우며 재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술잔을
입가로 가져간다. 한 모금을 삼킨 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그러니까 지금 이 회장님께서는, 협약을 위반한 것에 대해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
이런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제 실망감은 배가 되겠네요.」
「그것보단 애초에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 실수였다는 걸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협약 위반에 대해서는 저 역시 나름대로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되는데요. 혜련이를 그렇게 죽여 버렸으니, 조 회장님도 분풀이를 웬만큼 하신 것
아닙니까.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 사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잡아떼기부터 하는 버릇은 여전하시군요. 별로 좋은 버릇 아닙니다, 그거. 웬만하면
얼른 고치시죠. 사업할 때 악영향이 많으실 텐데.」
재준은 한 쪽 입 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리며 마치 가벼운 농담을 건네 듯 뼈 있는
충고를 날려준다. 아슴푸레한 웃음기가 감돌던 문환의 낯은 강철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이윽고 가면을 벗어 던진 문환의 싸늘한 목소리가 재준의 청각을 급습한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강태만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놔. 그럼 다 끝나. 그 정도 객기
부렸으면 제정신 차려야지. 밑의 애들도 생각해야 할 거 아냐? 안 그래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충의회 분위기 험악하다던데. 민심부터 수습하는 게 우선이지.」
「민심? 내가 무슨 왕이라도 되나, 민심 어쩌고 하게.」
「밑의 애들이 널 왕처럼 떠받들어 왔던 건 사실이잖아. 보스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부하들. 이게 충의회의 트레이드마크 아니었나?」
문환의 말이 재준의 가슴 속 심연을 관통하여 들어온다. 호흡이 가빠올 만큼 먹먹하게
차오르는 중압감 때문에 재준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오그린다.
멈칫 하는 재준의 모습을 보면서 문환의 얼굴엔 다시 은근한 조소가 드리운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데 뭘 고민하고 그러시나. 강태만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그럼 상황 끝이라니까? 한번 버린 거, 두 번은 못 버려? 그 땐 뒤도 안 돌아보고
쓰레기처럼 내팽개치더니만, 왜 이제 와서 죽고 못 사는 것처럼 지랄이야, 지랄이.」
「……네가 뭘 알아, 개새끼야.」
성대에 빗장이 걸린 듯 틔워지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끌어올려, 재준은 나지막하지만
문환의 귀가 명확히 식별할 수 있도록 중얼거린다. 한 문장, 한 문장 덧대어질수록
그의 음성은 높아지고 삼엄해진다.
「내가 강태를 버렸다고 말하지 마.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할 자격이 있나?
그래, 네 말대로 난 잠깐 동안 그 애를 놓쳤었어. 그리고 다시 그 애를 찾을 때까지
시체처럼 살았어. 아니, 산 게 아니라 그냥 숨만 붙어 있었던 거야. 그런 내 고통을
네가 알아? 넌 죽을 때까지 그게 어떤 건지 몰라. 절대 몰라, 너 같은 새끼는!」
흡사 단말마적인 비명처럼 변해 가는 재준의 목소리가 천장을 뚫고 나갈 듯 거세다.
꽉 움켜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재준은 문환의 멱살을 잡아 그를 짐짝처럼
가뿐히 들어올린다. 문환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가공할 그의 힘에 얼이 빠져 멍하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이내 패대기쳐 버릴 듯 문환을 노려보던 재준은 갑자기
초능력을 상실한 영화 속 주인공 마냥 스르르 팔목의 힘을 풀고, 그에 따라 문환의
몸도 푹신한 소파 위에 안착한다. 뻐근한 목 언저리를 더듬어보는 문환 앞에, 재준은
기꺼이 항복을 청하는 패잔병처럼 털썩 무릎을 꿇는다. 우악스레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억지로 우겨 넣으며 그는 간절히 호소한다.
「제발… 이렇게 빈다. 이렇게 무릎 꿇고 빌 테니까 제발… 강태 좀 놔 주라. 부탁이다.」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오는 고요 속에 재준의 애끓는 음성만이 바스러질 듯 위태롭게
이어진다. 재준의 전화를 받은 그 순간부터 그가 미친놈처럼 길길이 날뛰며 어디 한번
결판을 내보자고 악다구니를 칠 것이라 짐작했던 문환은 일단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넌 강태 사랑하지 않잖아. 나는 사랑한단 말이야. 걔 없으면 죽는다고! 다시는, 다신
걔 없이 살 자신 없어. 도저히 그렇게는 못 살아. 그러니까 나 좀 봐 주라. 내가 가진 거,
다른 거 다 가져 가. 충의회 회장 자리든, 돈이든, 내 밑의 애들이든 네가 다 가져.
그리고 강태 놔 주라. 걔 하나만 포기해 줘. 걔 하나만 나한테서 빼앗지 마. 응?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내가 아무리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불쌍하게 생각해 주라.
거지한테 적선하는 셈 치고 강태 놔 줘. 제발… 이렇게 사정한다. 나 좀 살게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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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whitewhyuk님: 반란이지요, 네-_-;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리는
행동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멍청하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질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번편도 재밌게(-_-?) 읽으셨음 좋겠어요~ ^^;;
ㅁ준타열희님: 이해 못합니다 -_-^ ㅋㅋ 농담이구요- 그래도 저의 개종설득은 계속됩니다!!
(이건 농담 아닙니다 ㅋ) 재준이 생일인데 재준이를 완전 코너로 몰아버려서 죄송;;
게다가 이번편은 완전 비굴모드 -_-;;
ㅁ아가혁수7님: 아니, 저런 험한 조폭들을 상대로 어떻게 하시려고요? ㅋㅋ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맡겨드리겠습니다. ^^;;
[원랑] 오르가즘 - 208
by 원랑 in '리얼톤혁'
「검사님, 한병규 검사님 오셨습니다.」
블라인드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겨울 햇살을 차단하려 창가 쪽으로 향하던 인하는
비서의 알림에 발길을 돌린다. 인터폰 버튼을 눌러 그를 들여보내라 대꾸한 뒤
블라인드를 닫으려다가, 이내 생각이 바뀐 듯 아예 활짝 열어 젖혀버린다. 눈부신
빛줄기가 제 세상을 만난 양 화려한 율동을 시작하고 인하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병규의 들어서는 기척에 퍼뜩 뒤를 돌아본다.
「어서 와. 안 그래도 보러 갈까 하던 참이었는데.」
「자네, 보고 받았지?」
인하의 인사에는 전연 아랑곳없이 병규는 다짜고짜 확인 질문부터 날린다. 여느 때와
다르게 급박한 그의 태도가 의뭉스러워서 인하는 표정을 굳힌 채 그와 마주보고 앉는다.
그리고 뜨악한 얼굴로 반문한다.
「보고라니, 무슨 소리야?」
「아직 못 들었어? 이재준이랑 같이 살았던 그 여자 말이야, 이틀 전에 죽었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일찍 닥쳐 온 사건에 인하의 낯은 야릇하게 찡그려진다.
곧 있으면 직접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문환의 말이 그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고, 인하는 스멀스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솜씨 좋게 불식시키며
짐짓 태연한 어조로 병규의 말을 받는다.
「그래? 그 술집 여자 말이지?」
「응. 총에 맞아서 즉사했어. 호텔 청소부가 발견해서 신고했고.」
「수사 윤곽은 좀 잡혔대?」
「아니. 눈 씻고 뒤져봐도 단서라고는 전혀 찾을 수가 없나 봐. 누군지 몰라도
전문 킬러를 고용해서 해치운 것 같다 하더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이재준
짓일까?」
「이 사람… 그걸 이재준 짓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네 검찰 밥 헛먹었네.」
역력한 조롱 투로 대꾸하는 인하에게 병규는 백치처럼 멀뚱멀뚱한 눈빛만을 건넬
뿐이다. 인하는 그의 궁금증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려 작정이라도 한 듯 느긋하게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역시나 신사연한 태도로 병규에게도 한 대
권한다. 병규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기 무섭게 인하를 채근한다.
「그럼 자네는? 자네는 누굴 생각하는 건데?」
「자네는 조 회장이랑 몇 년을 만나왔다면서,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콘크리트 벽에 부딪힌 탁구공처럼 탁 튕겨 나오는 인하의 반문에, 병규는 계속
멍청이가 된 기분이다. 몇 초간 어정쩡한 침묵이 흐른 뒤 병규는 양미간을 좁히며
인하에게로 바싹 상체를 기울인다.
「그럼 자네는 조 회장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인하는 굳이 입을 열어 대꾸하지 않고 오묘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로 무언의 긍정을
대신한다. 병규의 낯에도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어린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왠지 모르게 인하를 시험하는 듯한 어조로 묻는다.
「조 회장이 왜 그랬을까? 그 여잘 좀 더 오래 써먹을 줄 알았는데.」
「그 여잔 오래 써먹을 만한 가치가 없어. 멍청해도 웬만큼 되어야 이용을 해 먹던지
할 거 아냐?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다니, 신기할 정도야.」
신랄하게 번지는 조소를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시키며 인하는 한 쪽 다리를 겹쳐
올린 후 느릿느릿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지른다. 병규는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문득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동자를 반짝 치켜뜬다.
「자네 말대로 조 회장이 그 여잘 죽였다면 말이야, 제 손으로 제 무덤 파는 격은
아닐까? 그걸 이재준한테 덤터기 씌울 수도 없을 거고. 솔직히 이재준이 그렇게
허술한 상대는 아니잖아? 괜히 제 밑의 똘마니 하나만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조 회장을 도와줘야지.」
수수께끼 같은 인하의 대답에 병규는 고개를 갸웃이 기울인다. 그러나 인하는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저 좀 전과는 대조적으로 까만 눈동자를
살벌하게 번뜩이며 그에게 모호한 몇 마디만을 들려준다.
「자네는 좋은 구경하는 셈치고 가만히 지켜보게. 내가 오늘 저녁에 조 회장을
만날 테니까, 조만간 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야.」
― 문환을 태운 검은색 세단 승용차가 널찍한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적당한 자리로 그를 안내한다. 깍듯이 문을 열어주는
사내에게 예의 바른 인사를 잊지 않으며, 문환은 성큼성큼 정문으로 향한다. 카운터에
서 있던 여직원에게 인하의 이름을 대자 그녀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그를 구석진 밀실로
이끈다. 뚜벅뚜벅 울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흘려들으며 문환은 세심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열리는 미닫이 문 사이로 인하의 얼굴이 그의 시야를 채우고, 문환은
호방하고 넉살좋은 웃음을 만면에 퍼뜨리며 입을 연다.
「아이고, 검사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나도 이제 막 왔어요.」
인하는 맨송맨송했던 표정을 확 풀어헤치며 그에게 반가운 악수를 청한다.
두 남자가 다시 푹신한 방석 위로 엉덩이를 대자마자 곁에 있던 직원은 들고 온
쟁반에서 냉수가 담긴 병과 컵, 물수건 등을 진열해 놓는다. 주문을 받은 그녀가
신속히 자리를 뜨고, 조용한 밀실엔 인하와 문환만이 남는다.
「큰소리 떵떵 치시더니 그럴 법도 하셨습니다, 조 회장.」
인하의 입가를 물들이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전염성이라도 가진 양 문환에게로 옮아간다.
문환은 컵을 들어 입술을 축인 다음 어깨를 빳빳하게 펴며 뻔뻔스러울 정도로 차분하게
되묻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순간 인하의 얇은 입술이 비틀린 조소로 장식되었다가 상대방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얼른 평정을 되찾는다. 잠시 후 재차 문환을 떠보려 말을 꺼내던 그는 술과 간단한
애피타이저를 들고 나타난 종업원 때문에 멈칫 입을 다문다. 점잖게 술 한 잔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한동안 애매한 침묵을 지킨다. 그러다 역시 먼저 말을 건넨 쪽은,
훨씬 연장자임에도 문환보다 참을성이 부족한 인하다.
「오늘 아침에 한 검사한테 얘기 들었어요. 이름이 유혜련이었나… 맞나요?」
아예 노골적으로 혜련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인하에게, 문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그의 빈
술잔에 말간 액체를 꽉 눌러 담아준 후, 기쁜 소식을 일부러 감추고 있던 사람처럼
설렘에 들뜬 목소리를 뱉어낸다.
「벌써 그 여자 신원까지 파악됐습니까? 역시 서울지검답습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요.」
「그래요? 난 조 회장이 그렇게 놀라워하는 게 오히려 더 놀라운데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 회장님처럼 철저하신 분께서 그걸 모르셨을 리가 있나요. 계산이 딱 서 있으셨을
게 분명한데, 그게 아니라면 제가 조 회장님을 잘못 본 거겠지요.」
인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환의 입에서 발작적인 파안대소가 터져 나온다. 온몸을
요란스레 들썩거리며 한참동안 껄껄 웃어젖히던 그는, 항복을 청하는 병사처럼
짐짓 애처로운 표정을 가장하며 이야기한다.
「검사님 앞에서 아무리 점잔 빼 봤자 별 소용없네요. 툭 까놓고 얘기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피차 바쁜데 질질 시간만 끌 필요 없지요.」
교묘히 감추고 있지만 첨예한 날을 세운 대화가 오고가는 도중 먹음직스럽고 풍성한
음식이 식탁을 가득 메우지만, 두 남자는 젓가락에 손도 대지 않는다. 어느새 얼굴빛이
진중해진 문환은 단정히 앞섶을 여미며 먼저 입술을 뗀다.
「표적수사라는 말이 있지요.」
인하는 말없이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고개만 끄덕인다. 촉각을 곤두세워 듣고
있으니 얼른 본론을 꺼내놓으라는 무언의 독촉이다.
「그걸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누굴 겨냥한 것인지는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겠죠.」
「구미가 당기는군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 주면 되겠습니까?」
「김준상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알지요. 이재준 옆에 항상 따라다니는 그 놈 아닙니까. 저번에 둘이 같이 제 사무실에
온 적도 있습니다.」
「일단 걔를 좀 만나주셔야 하겠습니다. 자세한 건 식사 들면서 천천히 말씀드리죠.」
―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혁수는 바 안 쪽에서 칵테일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 주혁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제법 숙달된 솜씨로 재료를 다듬고
병을 흔들어 그 안의 액체를 따라내자, 투명한 붉은 빛을 발산하는 음료가 주르륵
경쾌한 마찰음을 내며 유리잔을 채운다. 혁수는 자기도 모르게 와 하는 탄성을 지르며
경탄의 눈빛으로 주혁을 올려다본다.
「장주혁 제법이야~ 이런 건 또 언제 배웠어?」
「재준이가 이거 전문이잖아. 틈틈이 배워뒀지. 그래도 명색이 애주가인데, 제일
좋아하는 칵테일 정도는 만들 줄 알아야하지 않겠어?」
싱글벙글 함박웃음을 거두지 못하는 주혁은 즐겁게 재잘대며 간단한 안주 거리가
담긴 접시를 혁수 앞으로 밀어준다. 그리고 바 안 쪽에서 돌아 나와 혁수의 곁에
나란히 자리한다. 팔을 어긋나게 겹쳐 서로를 안은 자세로 술을 마시는, 일명
러브샷을 하자며 졸라대는 주혁에게, 혁수는 새침데기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며 가볍게 잔만 부딪힌 후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주혁은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짓다가 귀엽게 코를 찡긋거리는 혁수의 얼굴에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진저리까지 치며 그를 끌어당긴다. 혁수는 자동적으로 주혁의 알싸한 체취를 폐 속
깊이 흡입한다. 왠지 눈자위가 시큰해지는 느낌이다.
「떨리지 않아? 내일이 진짜 출국인데. 너 너무 태연해 보여서 오히려 걱정된다.」
주혁의 품에서 머리를 빼 낸 혁수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는 투로 묻자, 주혁은 그런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고른 치아가 모두 드러나도록 환한 미소부터 내건다. 그리고
혁수를 더 강하게 힘주어 보듬으며 일말의 불안정함도 느껴지지 않는, 견고하고
튼튼한 중저음을 그의 귓가에 흩뿌려놓는다.
「떨리거나 불안한 건 전혀 없는데, 딱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있지.」
「뭔데?」
「우리 혁수를 한 달씩이나 못 보잖아.」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처럼 뱉어내는 주혁만의 기술. 혁수의 얼굴이
불그스름한 꽃을 피우며 달아오른다. 비단 주혁이 뱉은 말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요상하게도 그의 목소리에서 풍기는 에로틱한 기운이 혁수를 수줍게 만든다.
그래서 혁수는 대답 없이 머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배시시 웃기만 한다.
연갈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앞으로 쏠리며 혁수의 옆모습을 가리자, 주혁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그마한 얼굴을 두 손에 담는다.
그 손길에 혁수의 몸이 흠칫 긴장하며 경직되고 주혁은 웃음기가 완연히 가신 얼굴을
그의 입술 가까이 가져가며 들리듯 말 듯 낮은 소리로 속삭인다.
「나 없는 동안엔 딴 놈이랑 눈빛도 주고받지 마. 알았어?」
새색시처럼 부끄러워하며 그의 키스를 고대하던(?) 혁수는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실소를 터뜨리고 만다.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 채 킬킬대는 혁수가 순진한
개구쟁이 같이 귀여워서, 주혁은 난감하게도 불끈 욕정이 치민다. 다짜고짜 혁수를
덥석 안아 올린 주혁은 포대자루 마냥 그를 어깨에 들쳐 메고 부리나케 침실로 향한다.
눈 깜짝할 사이 침대 위로 나동그라진 혁수는 안 그래도 통통한 볼을 잔뜩 부풀리며
불만 섞인 음색으로 투덜댄다.
「너 너무 날 여자처럼 다룬다는 생각 안 해? 은근히 자존심 상한다, 그거?」
「에이~ 자기도 즐기고 있으면서 안 그런 척 하기는. 안혁수, 불여우.」
묘하고 야릇한 장난기가 대글대글 서린 눈동자를 반짝이며 주혁은 천연덕스레 혁수를
한 번 더 놀려준 뒤, 그가 반박할 틈도 없이 온 몸으로 그를 덮쳐누른다. 육중한
무게감이 하복부를 지그시 압박하고 끈끈한 혀가 입 속으로 침투하자, 혁수는 새된
목소리로 쏘아붙이려던 몇 마디 대신 얕은 신음만을 흘린다. 혁수의 신음 소리를
듣자 급박하게 몰아붙이던 주혁은 도리어 여유를 되찾는다. 게걸스럽던 손길도
느릿느릿 리드미컬하게 돌변한다. 단정히 잠겨져 있던 혁수의 셔츠 단추를 총총히
끌러내고, 드러난 보드라운 살결을 정성스레 쓰다듬던 주혁의 흰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허리띠의 버클을 풀어 헤친다. 혁수는 그가 바지를 벗기기 쉽도록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려준 다음 망설이는 듯한 동작으로 주혁이 입고 있던 코발트색 스웨터를
벗겨낸다. 잠시 후 달궈진 듯 뜨거운 살결과 살결이 절대로 분리되지 않을 것처럼
촘촘히 밀착되자, 주혁은 그리 길지 않았던 전희를 마무리 지으며 혁수의 몸 안으로
깊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리고 어느 때보다 '경건하게' 자신을 들여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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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209
by 원랑 in '리얼톤혁'
좁고 누추한 식당 안에는 몇몇 사람들만이 식사와 담소에 골몰하고 있을 뿐 여느 때보다
한산하다. 즐겨 앉는 구석진 자리에서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던 준상의 어깨에 따뜻한
손길이 와 닿는다. 준상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그가 이모라고 부르며
친어머니처럼 허물없이 대하는 식당 주인이 근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서 있다.
준상은 억지로라도 입 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보여주고자 애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인 여자는 한층 더 염려의 기색이 짙어져 준상의 맞은편에 앉는다.
「웬 청승이야, 생전 안 그러던 놈이? 뭔 일 있어?」
「아니야, 이모. 그냥 술 한잔하려고 왔어.」
「근데 왜 이렇게 죽을상이야?」
「에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좀 피곤해서 그래.」
다른 일 같았으면 그녀를 붙들고 구구절절 하소연을 늘어놓았을 준상이지만, 오늘만큼은
말할 기력조차 소진한 듯 계속해서 도리질만 쳐댄다. 주인 여자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별 수 없이 물러서지만 오래도록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준상은 이미 수북하게
산을 이룬 꽁초더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개비의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의 가슴속은 언제라도 용암과 화염을 내뿜을 준비가 되어있는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 격분과 답답함과 고뇌를 술로 흐트러뜨리려는 듯 준상은 빈속에
거푸 소주를 들이붓는다. 하지만 취기는 조금도 오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말짱하게 깨어서 괴로움을 심화시키는 중이다.
오늘 충의회의 모든 간부들 앞에서 궁지에 몰리는 재준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며,
준상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울분과 비통함은 나중엔 경고의 사이렌이 되어 그를
각성시켰다. 그건 명백한 위기감이었다. 재준이 저들에게 버림받고 혼자가 되면
그는 분명 죽을 것이라는, 비극적이고도 뚜렷한 예감이었다. 그리고 재준이 죽게
된다면, 자신 역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거대한 공포가 연이어 준상을 에워쌌다.
그것은 형장으로 향하는 사형수가 곧 자신의 목에 걸려질 굵은 밧줄을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지독하고 현실적인 상상이었다. 정말로 숨통이 조여드는 듯한 그 느낌은
지금까지도 질기게 준상에게 들러붙어 있다. 떨쳐내고자 아무리 발악을 해도 평생
그 꺼림칙하고 끈적끈적한 기분을 벗어버릴 수 없을 것 같다. 목구멍에 돌덩이가
콱 박힌 듯 정말로 호흡이 곤란해진다. 준상은 급작스런 기침을 토해내며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내던져버린다. 눈가에 눈물이 송알송알
맺힐 정도로 오랫동안 기침은 멎지 않는다. 한참 만에 벌떡이던 가슴을 겨우 가라앉힌
준상의 귓가에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취기 때문이 아니라 분노와 두려움
때문에 흐릿해진 눈동자를 게워내려 애쓰며 휴대폰을 꺼내든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생전 처음 접하는 전화번호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음울한 목소리로 미지(未知)의
부름에 응대한다.
「김준상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 장인하 검삽니다.]
상대가 전혀 짐작치 못했던 인물인지라 어지럽혀졌던 준상의 눈동자는 단숨에 본래의
빛깔을 회복한다. 불편한 침묵이 와르르 두 사람 사이를 잠식하고 들어섰다가 곧이어
흘러나오는 인하의 음성 덕택에 금방 자취를 감춘다.
[설마 기억을 못하시는 건 아니겠죠? 제 멱살까지 틀어쥐셨던 분께서.]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단지 좀 의외라서요. 어쩐 일이십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난 당신하고 할 말 없습니다. 그만 끊겠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김 실장님. 실장님이라도 정신 차리고 계셔야 이 회장님이 최대한
피해를 덜 볼 거 아닙니까. 그렇게 보스한테 충성을 다 바치시던 분께서 이러시면
안 되지요. 아니면, 그새 신발 바꿔 신기로 작정하신 겁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마시오. 나 지금 눈에 뵈는 거 없으니까 검사고 나발이고 신경
안 씁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회장을 도우려고 이런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그래서 만나자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요? 당신이 우리 회장님 못 밟아서 안달이 났다는 건
이 바닥 처음 들어온 새끼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겉으로 보이는 게 다인 줄 아십니까? 난 검사이기 이전에 한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주혁이가 내 친아들이라는 건 김 실장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머릿속 한 귀퉁이로 밀려나 있던 주혁의 존재가 불현듯 준상의 사고회로 전면으로
부상한다. 준상은 살기등등하게 곧추세웠던 공격 태세를 스르르 허물어뜨리며
맹한 침묵만을 인하 앞에 들이민다. 그러나 그 짧은 침묵은 준상의 갈등하는 내면을
어떤 말보다 명쾌하게 표현해준다. 인하는 준상이 드러낸 실오라기만한 틈새조차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김 실장님 말씀대로 이 회장에 대한 제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러는 건 주혁이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주혁이가 다칠까봐 노심초사하는
제 마음을 이해 못하시겠습니까, 김 실장님?]
준상은 여전히 견고한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지만 갈팡질팡하는 그의 속내는 인하의
눈에 불 보 듯 훤히 들여다보인다. 인하는 참을성 있게 그의 답변을 기다린다.
주저하던 준상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입술을 뗀다.
「좋습니다. 제가 지금 그 쪽으로 가겠습니다.」
― 지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던 강태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무지근한 머리를 몇 번 흔들어 본 다음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한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TV를 시청 중이던 태현은 강태의 기척에 목을 삐죽
내밀어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매일 한 집에서 얼굴 마주치는 식구답게 심드렁한
투로 아침 인사를 건넨다. 강태는 습관대로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신 다음 커피를
마시기 위하여 물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는다. 몇 분 뒤 머그잔을 손에
들고 거실로 나온 강태는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태현이 대충
훑어보다 내팽개친 신문을 가져다 읽기 시작한다. 태현은 리모콘을 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는지 강태의 어깨를 툭툭 친다.
태현의 손길에 강태는 아래로 떨어뜨렸던 고개를 들어 그가 가리키는 TV 화면으로
눈을 돌린다.
「야, 쟤 좀 봐. 너랑 진짜 닮지 않았냐?」
액정 화면 속에서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열창 중인 가수는 태현이 말한 대로 강태와
매우 흡사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요염하게 색기가 도는 눈매와 붉고 도톰한 입술,
빚어놓은 듯 오뚝하게 솟은 콧마루까지. 강태는 피식 실소를 한번 흘릴 뿐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태현은 계속 킬킬거리며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강태의
주의를 끌어보려 하다가, 별 반응 없는 강태 때문에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대며
애꿎은 리모컨 버튼에 대고 화풀이를 한다. 강태는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사회면에 실린 사건·사고 소식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간다. 덤덤하게
정지되어 있던 강태의 흑색 눈동자는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박스 기사를 접하자마자
심하게 요동치며 팽창한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는 짤막한 기사의 내용이 조목조목
정리되어 박힌다. 국내의 손꼽히는 최고급 호텔 방에서 투숙객 피살. 피해자는 20대
초반의 여성 유모씨. 유가족은 확인된 바 없음. 단서가 될만한 증거는 전무함.
숙련된 솜씨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전문 킬러의 소행으로 짐작. 경찰은 현재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대상으로 용의자 파악에 주력 중.
육중한 무기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둔탁한 충격이 강태를 들쑤신다.
굳이 누군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서라도 기사에서 말하는 사건의 피해자는 분명
혜련이다. 두근대는 심장 박동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맹렬한 속도로 휘몰아치자
강태는 반사적으로 헉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가슴을 부여잡는다. 뚱한 얼굴로
가요 프로그램에만 열중하던 태현은 급작스레 터져 나온 강태의 신음 소리에 놀라
그를 돌아본다.
「야, 왜 그래?」
강태는 도무지 혀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앉은 자세 그대로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다. 심상치 않은 그의 기색에 태현의 커다란 눈망울엔 염려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역시 성질 급한 그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아무런 대꾸 없는 강태를 채근한다.
「야, 무슨 일이냐니까!」
답답함에 언성을 높이는 태현에게, 강태는 말없이 신문부터 들이민다. 그의 손가락이
짚은 데로 눈길을 이동시킨 태현은 다닥다닥 찍힌 활자들을 속독해 나간다. 그가 미처
기사를 다 읽기도 전에 두려움으로 꽉 잠긴 강태의 음성이 태현의 고막을 두드린다.
「그 여자 맞는 거 같지? 재준이가 데리고 살던 그 여자 말이야. 맞지, 응?」
태현은 강태에게 잠깐만 대기하라는 손짓을 하고 기사를 꼼꼼히 한 번 더 읽는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대로 태현의 미간엔 굵은 주름이 그어진다.
그가 입을 다물고 기사를 재차 정독하는 내내, 강태는 초조함을 가눌 길이 없어
손톱만 잘근잘근 씹어댄다. 기사의 내용을 통째로 외울 수 있을 만큼 숙지한 태현은,
신문에 처박았던 얼굴을 들며 땅이 꺼져라 한숨부터 뽑아낸다. 강태는 발가락에 불침을
맞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태현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든 무언가 뱉어져 나오기만을
갈망한다.
「…맞는 것 같다, 그 여자.」
태현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으며 짧게 실토한다.
그러다 도저히 감정을 다스릴 수 없는지, 별안간 벌떡 몸을 솟구쳐 세운다.
「이재준 이 새끼, 제정신이야? 신문에 날 정도면 제가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너한테 한 마디도 안 했대?」
마땅히 화를 내야 할 장본인은 강태이건만, 막상 그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다. 충격과 공포의 한 가운데에서 좀처럼 판단력을 추스르지 못하는 그 대신,
태현은 계속 해서 맹렬하게 재준을 성토한다.
「진짜 미친놈 아냐? 사건 터졌을 때 바로 전화해서 뭐라 얘기를 했어야지! 도대체,
네가 이 일을 신문 기사 보고 처음 안다는 게 말이 되냐? 말이 되냐고, 이게!」
「형, 어떡해? 우리 어떡하지?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응?」
점점 이성을 마비시키는 분노에 꺼져 들어가던 태현은 절망감 흥건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묻는 강태 때문에 흠칫 얼어붙는다. 그의 물음에, 그 절박한 호소에
아무 대답도 들려줄 수 없어서이다. 태현은 또 한번 막막한 무력감 속으로 떨어진다.
「재준이가 죽인 건 아니겠지, 형? 그렇겠지?」
「병신아, 걔가 바보냐? 이 상황에서 제가 그 여잘 죽이면 아예 망하려고 작정한 거지!
너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할래? 정신 차리고 이재준한테 전화나 해 봐. 뭐라고 하는지.」
습기 찬 재앙의 악취를 풍기며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행의 기운에, 태현은 쫓기듯 다급히
소리 지른다. 강태는 퍼뜩 한탄과 좌절의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고 서둘러 전화기가
놓인 테이블로 다가앉는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구 떨리는 손가락 탓에 여러 번
버튼을 고쳐 누른 뒤에야 강태는 수화기 건너편에서 전해져오는 재준의 목소리와
맞닥뜨린다.
[이재준입니다.]
「재준아…!」
평소와 한 치의 오차 없이 고요하고 묵직한 재준의 음성이 귓전을 어루만지자, 강태는
어린아이처럼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간신히 울음을 억제하고 말을 이으려는데,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태현이 강태의 손에서 수화기를 홱 낚아채 간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적을 대하는 맹수처럼 사납게 으르렁댄다.
「미친 새끼야! 너 돌았지? 언제 얘기하려고 한 거야, 도대체? 내가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노래나 만들고 있으니까 아주 병신으로 보이나 본데, 나 네 친구야!
너만큼 나도 알 거 다 안다고! 아, 그래. 나한테는 그렇다 쳐. 근데 강태는?
이 새끼 충격 먹을 건 생각 못하냐? 너 이제 어떻게 할래. 아주 제대로 걸렸는데
이제 어쩔 거냐고, 병신아!」
숨 쉴 겨를도 없이 따발총처럼 재준을 다그치던 태현은, 결국 호흡이 가빠오자
씩씩거리며 퍼붓던 공세를 중단한다. 강태는 '제대로 걸렸다'는 태현의 한 마디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견스레 참아오던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한동안 게걸스런
태현의 콧바람 소리만 묵묵히 듣고 있던 재준은 가파른 침묵을 와해시키며, 길길이
날뛰던 태현이 무색하도록 차분한 음성을 발한다.
[지금 갈 테니까 강태한테 짐 챙겨놓고 기다리라고 해. 2시간 정도 걸릴 거야.]
― 각양각색의 인파로 북적이는 공항 라운지에서 주혁은 깃털처럼 떠다니는 마음을
붙잡아 앉히지 못한다. 손에 들린 비행기 티켓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보고
수차례 흡연실을 들락거리며 담배를 피워대도, 지금의 설렘과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
주혁이 올라 탈 멕시코시티 행 비행기의 탑승은 이제 겨우 30분 남짓의 시간을
앞두고 있다.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갈 듯이 세차게 펌프질하고 손바닥에는 축축한
땀이 밴다. 일생의 어느 순간에도 이처럼 벅차고 긴장된 적은 없었다.
연인과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짜릿하고
감격적이다. 그러면서 또한 주혁은 그 어느 때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제 손으로
자신을 쳐서 엎드리게 하는 절대적인 간원의 심정으로 신께 부르짖는다.
도와주십시오. 부디 우리를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아니 이 순간부터야말로 당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부디 우리가 이 땅을 떠나, 우리의 사랑을 저주하는 이 땅을 떠나 지긋지긋하게
이어졌던 싸움을 끝낼 수 있도록… 당신마저 우리에게 비겁한 도망자의 굴레를
씌우시진 않겠지요.
믿겠습니다, 당신을. 제 연인이 신뢰하고 섬기는 당신을 이제 나도 믿겠습니다.
나의 막 태어난 이 믿음을 봐서라도 제발… 패배하지 않도록,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통곡보다 더 처절한 침묵으로 기도하던 주혁의 귓가에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닿아온다. 주혁은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고 눈꺼풀을 여는 동작보다 더 느린 속도로,
그러나 망설이는 기색 없이 단호하게 의자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걸음을 내딛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주혁의 기도는 깊어지고 그의 마음은 공중으로
붕 날아오른다.
싸움은 끝났다. 이제 '완전한' 시작이다. 이 세상 유일한 내 남자, 안혁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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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준타열희님: 그래요, 알았어요. 대신 다음생에는 원타를 추종하셔야 합니다. -_-^
ㅋㅋㅋ 완결을 앞두고 이 작가는 요즘 거의 폐인모드랍니다 ㅠㅠ;; 그래도 감상 먹고
힘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O^
ㅁwhitewhyuk님: 글쎄요, 이번편을 보면 출국을 하긴 하는 것 같지만 또... ^^;;;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았죠? (아닌가? -_-;;)
ㅁcy2id님: 짜증나는 인간의 모음집 <- 오랜만에 킬킬 웃었습니다 ^^;;
ㅁinmylove님: 시험 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마시고 푹 쉬시길 ^^;;
ㅁ아가혁수7님: 진짜 검찰이 완전 조폭과 별 차이점이 없어보이죠 -_-;; 이러다가 검찰에서
저 고소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명예훼손으로 -_-;; 하하;; 님께서도 열독해주시길~ ^^*
ㅁorange걸님: 오오오 +_+;;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ㅁ-!!! 진짜 보고싶어요!!!!!
그리고 남편 얘기는 요담편에 ㅋㅋㅋ
ㅁ혁이빨래님: 화이팅 감사합니다- ^^ 여러가지로 수고가 너무 많으신데, 항상 감사하구요
이번 17호, 저 역시 기대만발입니다~ >ㅁ<
[원랑] 오르가즘 - 210
by 원랑 in '리얼톤혁'
고풍스럽고 화려한 한옥집 안으로 들어서자 요정의 마담인 듯 보이는 중년 여자가 나와
준상을 맞이한다. 머리카락을 한 올도 남김없이 단정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준상에게
동행이 누구인지 묻고, 그가 인하의 이름을 대자 한층 반색을 드러내며 그를 준비된
밀실로 안내한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을 옮기니 널따란 방안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긴 인하의 모습이 보인다. 준상은 작게 헛기침을 해서 자신의 도착을 그에게 알리고,
준상의 기척을 감지한 인하는 히뜩 고개를 돌리더니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김 실장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뵙자고 해서…」
「앉아서 얘기합시다. 우리가 서로 안부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공손하게 악수를 청하는 인하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준상은 털썩 방석 위에 엉덩이를
붙인다. 인하의 얼굴에 잠깐 노기가 서렸다가 이내 가장된 예절과 웃음 뒤로 숨어 버린다.
무안하다는 듯 허허 넉살좋게 실소하며 인하가 다시 자리에 앉고, 미닫이문이 열리며
단아한 한복 차림새의 여자 둘이 모습을 나타낸다. 인하는 '친절하게도' 더 젊고 예뻐
보이는 여자에게 준상의 시중을 들도록 지시하지만 준상은 그녀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기도 전에 차갑고 건조한 음성을 툭 던져놓는다.
「여자들은 들이지 마시죠. 한가하게 여자 끼고 댁이랑 술 먹으러 여기 온 거 아닙니다.」
술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여자들은 당황스런 빛을 수습하지 못한 채 눈만 끔벅거리는데,
정작 인하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선선히 여자들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한다.
그녀들이 문을 닫고 사라진 후 어느새 득달같이 깔린 음침하고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준상은 얄미울 정도로 편안해 보이는 인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한다.
「그래, 어떻게 우리 회장님을 돕겠단 겁니까?」
「아이고, 우리 김 실장님 성격이 여간 급한 게 아니시군요. 우선 제 술부터 한잔
받으시고 천천히 얘기 나누십시다.」
인하는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은근슬쩍 대화의 끈을 늦추고 섬세하게 디자인된 술병으로
손을 뻗는다. 그러나 준상은 미동조차 없이 날카롭고 삼엄한 눈으로 그를 쏘아볼 뿐이다.
잘 단련된 검처럼 자신을 겨누고 있는 준상의 눈빛을 발견하자 인하 역시 느긋하게
이완시켰던 안면근육을 팽팽히 굳힌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그렇게 일단 준상의 조급증을 약간이나마 해소시켜준 인하는 쉽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황망한 듯 담배부터 한 대 빼어 문다. 매캐한 연기가 후각을 자극해오자 준상도
밀물처럼 달려드는 흡연 욕구에 떠밀려 얼른 담뱃갑에 손을 가져간다.
「유혜련을 누가 죽였는지, 나도 대강 짐작은 갑니다. 검사질한지 수 십 년인데
그 정도도 감이 안 온다면 어디 가서 검사라 말하기도 창피한 거지요.」
「설마 우리 회장님께서 그러셨다고 생각하진 않겠죠.」
「허, 그럴 리가 있나요. 김 실장님께서 저를 너무 과소평가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검사님은 누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김 실장님 생각이랑 같을 겁니다.」
오묘한 여운을 남기는 인하의 대답이 못 미더워서 준상은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그를
건너다보기만 한다. 인하는 꽁초로 변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술병을 집어 들어
준상 앞에 놓인 잔을 알맞게 채운다. 완강히 인하의 술을 받기를 거절하던 준상은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드는 머릿속 때문에 그저 인하가 하는 양대로 멀거니 내버려둔다.
그러나 산란해진 정신을 다잡으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다시 묻는다.
「그러니까 검사님도 범인이 조 회장이라고 생각하신다, 이 겁니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이지요. 진범이야 조사하면 다르게 나올 수도 있는 거고.」
역시 이번에도 인하는 확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준상으로 하여금 만족감과
솔깃함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하다. 삽시간에 준상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목격한
인하는 뿌듯하게 들어차는 자신감에 슬며시 미소 짓는다. 의외로 아주 수월한 게임이
될 듯싶다.
「그래서 수사 방향은 그 쪽으로 잡힌 겁니까? 조문환 쪽으로요?」
이제 준상은 완전히 억제력을 상실하고 노골적인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한다.
인하는 점점 재미없게 돌아가는 상황에 맥이 풀릴 정도다. 이재준의 오른팔이
이 정도로 허술할 것이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그렇게 내심 의아해하던 인하는
결국, 역시 혈기방장하고 성 마른 어린 나이의 남자가 별 수 있겠느냐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피식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준상은 찰나적으로 나타났다 자취를
감추는 한숨 소리에 흠칫 경계 태세를 추스르려 하지만 이미 헛된 몸짓에 불과하다.
「수사 방향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확실하게 잡히진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신고가
접수된 지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까요. 현재는 피해자 주변 사람 대상으로
용의자를 골라내고 있는 정도입니다. 물론, 이 회장이 유력한 용의자 선상에 올라갈
거란 것은 당연한 얘기죠. 사실 따져보자면 조 회장보단 이 회장 쪽이 훨씬 더 많은
혐의점을 갖고 있으니까요. 조만간 소환장이 발부될 겁니다.」
언제 한숨을 쉬고 웃음을 지었냐는 듯 인하의 낯은 삭막하고 냉랭하다.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까만 눈동자가 마치 대량으로 제조된 인공품 같다. 준상은 섬뜩하고
막다른 불안감에 내몰리는 자신을 속수무책으로 방기할 따름이다. 유창한 인하의 언변은
쉴 틈 없이 준상을 밀어붙인다.
「게다가 이 회장이 검찰 내부에서 평판이 썩 좋지 않은 건 실장님도 아실 겁니다.
국회에 계신 몇몇 분들과 안면 좀 트고 지낸다 해서 그동안 얼마나 저희를 깔보고
업신여겼는지, 실장님이야말로 제일 가까이에서 봐 오셨지 않습니까? 솔직히 이번 사건,
저희 쪽에서는 아주 쾌재를 부르고 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걸렸구나, 뭐 이런 심보죠.
치사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거기서 거기지요. 아무튼 이참에 잘됐다 싶은 거예요, 우리는. 그동안 이 회장 밟을
거리만 눈에 불을 켜고 뒤졌는데, 사안이 워낙 경미하다 보니까 아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살인이라면… 그것도 남자를 사이에 둔 치정 살인이라면
얘기가 확 달라지죠. 일단 엮을 거리가 많아요. 더구나 매스컴의 주목도 엄청나게
받을 테고, 동성애 문제가 중간에 끼었으니… 여론은 당연히 우리 편일 테고.」
「동성애라뇨? 아니, 여기서 도련님까지 결부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까지 확대
수사를 해서…!」
「이봐요, 김 실장님. 지금까지 내 얘기 어디로 들었어요? 내가 말했잖아요. 어떻게든
이 회장 밟을 거리만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고. 언제 한번 제대로 걸릴 때 없나, 내내
그 기회만 노려왔는데 이런 천금같은 기회를 우리 쪽에서 그냥 흐지부지 넘길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엮어 넣을 수 있는 건 죄다 엮으려고 들 겁니다. 살인은 물론이고
폭행, 공갈·협박, 매춘, 불법도박, 외화유출, 범죄단체 조직, 사기, 갈취… 이 회장한테
씌울 수 있는 죄목이 몇 개나 될 것 같아요? 거기다 남자랑 그렇고 그렇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금상첨화지요. 하물며 이 회장이 길거리 지나가다 침 한번 뱉은 것도
죄목에 추가시킬 태세인데, 만약 동성애자라는 게 밝혀진다? 그걸 별 거 아니네 하면서
그냥 넘길 것 같습니까.」
「나 참 기가 막혀서… 같은 남잘 좋아하는 게 죕니까? 그게 어떻게…!」
「법에 명시된 죄는 아니지만 반사회적 행위인 것만은 분명하죠.」
간신히 붙들고 있던 마지막 한 조각의 이성마저 날려 보내며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준상은, 지체 없이 명료하게 떨어지는 인하의 대꾸에 혀가 경직된다. 두려움, 초조함,
분노, 그리고 원망과 근심. 그 모든 감정이 단단하게 응축되어 준상의 가슴 한 가운데를
꽉 메운다. 머릿속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폭탄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더 이상은,
정말 더 이상은 이 상태를 참아낼 수도, 관전하고 있을 수만도 없다. 무언가 해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적과 손을 잡아서라도 무언가 시도해봐야 한다. 이대로 멍청히 주저앉아
그가 죽게 내버려둘 순 없는 일이다. 그건 수년을 한결 같이 그에게 충성해 온 직속
부하로서 감내할 수 없는 수치다.
「그러니까 검사님 말씀은, 우리 회장님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이번 사건에서 빠질 수
없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이번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높으신 분들도 이번엔 힘 써주시기가 녹록치
않으실 겁니다. 검찰에서 작정하고 덤벼드는데 그 분들인들 어쩌겠습니까. 위아래가
전부 떼로 뭉쳐서 덤비면, 그거 아주 곤란하거든요.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쪽이
원래 한번 뭉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막상 마음먹고 단합이 딱 되면 그게 아주
무섭습니다. 청와대 계신 분도 그럴 땐 속수무책이에요, 허허…」
안전한 우월적 위치를 점유하고 앉아 그것을 만끽하듯 인하는 너털웃음을 흩뿌린다.
그것은 누가 듣더라도 명백한 위협과 으름장이지만 준상은 그에 대해 어떤 반박도
내놓지 못한다. 백치처럼 고분고분 그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릴 따름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할 기력조차 그에겐 남아있지 않다.
단지 어서 빨리 그럴 듯한 해결책을 듣고 그것을 시행해보고 싶다. 결과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한 터럭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서슴없이, 준상은 인하의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원점으로 돌아가서, 아까 말씀하신 건
무슨 뜻입니까? 분명히 우리 회장님을 돕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여기
나온 것이고요.」
「아, 그럼요.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이 회장님을 도와드릴 겁니다. 그리고 실장님께서
제게 협조만 잘 해주신다면 이 회장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벌어져 있던 인하의 어깨가 기력이 쇠잔한 노인처럼 굽어지며,
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애련한 슬픔이 감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한 손에 틀어 쥔
권력자에서 인하는 갑자기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행려병자의 모습으로 둔갑한다.
「이 회장님이 경찰 조사를 받기 시작하면 김 실장님은 물론이고 충의회의 주요 간부들은
하나씩 전부 불려오게 될 겁니다. 그럼 우리 주혁이도 소환을 받겠지요.」
자신의 아들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심문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인하에게, 준상은
순간적으로 당신 아들은 이미 멕시코 행 비행기에 올랐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실토해 버릴 뻔 한다. 가까스로 부주의한 입술을 단속한 준상은 허둥대는 동작으로
또 한 대의 담배에 불을 댕긴다. 그러나 자꾸만 엇나가는 손가락 때문에 라이터의
불꽃은 쉬이 올라오지 않고, 인하는 차분하게 그 대신 담뱃불을 붙여준다.
「검사님이 저와 상부상조하자는 뜻이 무엇인지, 저도 웬만큼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끌지 말고 본론을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우리 회장님을 도와주실 겁니까?」
인하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다. 대화의 물꼬를 어떤 식으로 잇대야 할지 한동안
고심하다가 조심스럽게 상체를 수그리며 주위를 살핀 다음 신중하고 낮은 음성을
새어 보낸다.
「아까 저녁에 조 회장을 만났습니다. 시치미를 딱 떼고 있지만 그 여잘 죽인 게
조 회장 짓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죠. 그런데 문제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지문은커녕 사건 현장에 피해자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흔적도 찾기 힘들어요.
이런 상황에서 수사는 점점 이 회장님께 불리하게 진행될 거고, 방금 전에
얘기했다시피 이 회장님과 관련된 사람들은 몽땅 줄줄이 불려갈 겁니다. 우리
주혁이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럼 조만간 주혁이가 충의회 간부라는 게 밝혀질 텐데,
그렇게 되면 내 체면도 말이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차장 검사랍시고 서울지검에서
얼굴 들고 다니겠습니까.」
점점 설득력을 배가시키며 준상의 귀와 심중에 꽂히는 인하의 이야기. 그는 자기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판단력을 상실한 꼭두각시로 전락해가는 중이다.
평소에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민감하게 작동하던 경고의 사이렌도 깨진 전등처럼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인하의 말은 막힘없이 술술 이어진다.
「이 회장님이 이 사건의 중심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수사를 종결시킬 수 있는 진범이 나타나는 거죠. 누군가 그건 내 짓이라고, 이러이러해서
그 여잘 죽였다고 자수만 한다면 이 사건은 금방 묻혀질 겁니다. 유가족도 없는 술집
접대부 하나가 죽은 것뿐이지 않습니까. 피해자에겐 안 된 일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
이치가 다 거기서 거기죠.」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인하는 이제 너도 공감하지 않느냐는 듯 은밀한
공모자의 웃음을 띤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준상 또한, 인하가 단언한 그 명제를
선뜻 부정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찝찌름한 죄의식을 떨쳐내기 위해 대화의 흐름을
황급히 재촉한다.
「그야 당연한 얘긴데, 문제는 자수를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조문환 그 새끼가
자기 짓이라고 얘기할 턱이 없지 않습니까?」
「아, 그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하지만 조 회장이… 희생양을 제공할 생각은 있어
보입디다. 물론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말이지요.」
― 기다랗게 열을 지어 늘어선 행렬의 틈바구니 가운데, 주혁은 자꾸만 텁텁하게 말라오는
입술을 축이며 자기 차례가 오길 기다린다. 이윽고 출국 심사대 앞에 서자 최고치에 다다른
긴장 때문에 그는 빙글빙글 현기증마저 돌 지경이다. 그에 비해 주혁과 마주선 법무부의
공무원은 너무나 예사로운 표정으로 주혁이 내민 여권과 비행기 티켓, 출입국 신고서를
받아든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무언가 조회해 보던 그는 별안간 이마를 찌푸리며
주혁이 마치 흉악무도한 범죄자라도 되는 것 마냥 의혹 가득한 눈초리를 쏘아 보낸다.
「장주혁 씨, 조회 결과 출국 금지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십니다. 잠깐 이 쪽으로
비켜 서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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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211
by 원랑 in '리얼톤혁'
「아, 그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하지만 조 회장이… 희생양을 제공할 생각은 있어
보입디다. 물론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말이지요.」
준상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꽁초가 힘없이 식탁 위로 떨어져 내린다.
그의 얼굴빛은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리고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인하는 실소가
터지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무마시키느라 어금니를 꽉 깨문다. 넋 나간 사람처럼 어눌하게
울려나오는 준상의 목소리가 인하의 귓전을 두드린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조문환이 희생양을 내주겠다고 했다니요?」
「글세, 그게 나도 솔직히 처음엔 잘 이해가 안 갔어요. 조 회장이 왜 그런 제안을
하는지. 난 조 회장이 이번 일을 계기로 충의회랑 이 회장님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려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희한해요. 정작 조 회장이 의도하는 건 아주
엉뚱하더군요.」
「그게 뭡니까? 그 새끼가 요구하는 게.」
「조 회장이 그러더군요. 자기는 충의회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고요. 이 회장님께서
지금 데리고 있는 그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강태 도련님 말입니까? 그 새끼가 그래요? 도련님만 돌려보내면 물러나겠다고?!」
「난 들은 그대로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김 실장님.」
눈자위에 새빨간 실핏줄을 세우고 실성한 듯 악다구니를 쳐 대는 준상과, 조근조근
한 글자씩 정확하게 발음해내는 인하는 무척 대조적이다. 두 사람은 마치 열대지방과
한대지방에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채 좋은 중년의 사내는 수도승처럼
침착하고 그의 아들 뻘 밖에 되지 않는 어린 청년은 가장 귀중한 보배를 약탈 당한
졸부 같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도련님을 팔아 넘기라는 얘기요? 회장님을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으니까?」
「팔아 넘기다니요, 왜 그런 극단적인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단지,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의 방법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세상사가 전부 실장님
성격대로 도 아니면 모,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아요.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그 길로
가야할 때가 훨씬 더 많지요.」
「그 따위 설교는 집어치우시오. 도련님을 그 새끼한테 보내면 어떻게 될지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검사님이 말하는 차선의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협상의 결렬을 선언하며 매몰차게, 기계적으로 작별 인사까지 쏟아낸 준상은 오랫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아 얼얼하게 저려오는 다리에 힘을 준다. 그러다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는 인하의 엄중한 음성에 우뚝 멈춰선다.
「지금 이렇게 배짱 튕길 타이밍이 아닌 줄로 압니다만, 김 실장님. 실장님 혼자 아무리
옴치고 뛰어도 이 회장을 이 난국에서 구해낼 순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객기 부리고
나가면 조만간 이 회장이 법정에서 사형 선고받는 꼴을 볼 수밖에 없을 거요. 보스를
사지로 내모는 게 실장님 식 충성이요? 그래서 그 충성의 대가가 뭐란 말이요?
이 회장이 죽고 나면 실장님은 어쩌실 생각이신데요?」
「그만해!」
다신 뒤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등을 돌렸던 준상이 단말마적인 비명을 토해내며 빙글
몸을 회전시킨다. 인하의 시선과 맞닿은 그의 눈동자는 질펀한 눈물로 불거져 있다.
이것은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조문환과 이 자가 의기투합하여 교묘하게 설치해
놓은 덫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닐 수도 있다. 이 자가 말한 대로, 그 역시
아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나름의 절박한 속셈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 자가 도모하려는
술책이 나의 보스를 위기에서 탈출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준상은 번민의 소용돌이에서 이리저리 치이기만 한다. 인하는 돌연 인자하고
믿음직스러운 음성을 발하며, 따뜻하고 든든한 손길을 준상의 어깨 위에 얹으며
흔들리던 그의 결심을 자신 쪽으로 기우뚱 쏠리게 만든다.
「김 실장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충의회가 다치면 우리 주혁이도 다쳐요.
주혁이를 빼내기 전에는 나도 충의회가 난도질당하는 걸 구경만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까놓고 얘기해서, 지금 충의회 조직원들도 실장님과 주혁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이 회장님한테서 등 돌린 상태 아닙니까. 이 상황에서 전면전을
고집하는 건 바보짓이에요. 설령 이 회장님은 그럴 생각이 있더라도 실장님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서 최악의 사태를 막으셔야지요.」
「하지만… 도련님의 목숨을 담보로 충의회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저는 회장님께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겁니다.」
어떤 위해나 고문이 가해진다 하여도 자신의 신념과 기세를 꺾지 않을 듯 완고하던
준상은, 어느덧 후일의 보복을 겁내는 치졸한 반역자의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냉혈한
이성이 마비된 그에겐 그 악취가 맡아지지 않는다. 죄인처럼 고개를 떨어뜨린 준상에게
이마를 좀 더 가까이 가져가며 인하는 변함 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한다.
「김 실장님, 정말 아까부터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만 생각하세요? 실장님이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 절대 죽지 않습니다. 만약 조 회장이 그 남자를 죽이면 그건 자기가
제 무덤 파는 격이라는 걸 조 회장도 잘 알고 있어요. 일이 엄청나게 시끄러워질 게
뻔하거든요. 그 때야말로 조직간에 칼부림이 일어날 테니까요. 조 회장이 원하는 건
단지, 강태란 그 남자를 볼모로 잡아두려는 거예요. 충의회가 함부로 나대지 못하도록
일종의 방어막을 쳐두고 싶은 거죠. 그 남자가 이 회장한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조 회장도 잘 아는 만큼 그 남잘 오랫동안 이용할 생각인 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바닥으로만 향해 있던 준상의 시선이 느릿느릿 위쪽으로 이동하여 인하의 낯을 정면으로
담아낸다. 이상하게도 주혁과 전혀 닮지 않은 그 얼굴 위에 재준의 낯이 스쳐 지나가고
강태의 환영이 그 뒤를 따른다.
기억하건대 분명, 나의 보스는 연인을 잃은 뒤 자신의 목숨을 저주하며 하루 하루를
허망하게 흘려보냈다. 그런 보스를 지켜보면서 가슴이 미어지고 심장이 조여들 만큼
안타까웠지만… 지금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일분 일초, 매 순간이 이처럼 불안하지도
않았고 그 때에도 나의 보스는 예전과 다름없이 완벽하고 강건한 충의회의 주인이었다.
사랑에 있어서도 존경할 수 있는 분이 되어 달라며 주제넘게 그를 떠나 버린 연인에게로
인도했지만, 실상 그것은 나의 공허한 공명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바라는 것은, 모든 걸 희생시켜서라도 되찾고 싶은 단 한 가지는,
충의회의 회장 자리에 늠름히 선 나의 보스일 뿐이니.
죽을 때까지 나의 충성을 받아 줄 그가 내게는 절실하다. 나는 그와의 약속을 절대
지킬 수 없다. 그의 죽음을 방치해두라는 그 명령을 절대로 이행할 수 없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떡하면 검사님 말대로 회장님께서 이 살인 사건과
엮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입가를 지나쳐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느라 인하는 뱃가죽이
근질근질하다. 하얗게 핏기가 가시도록 아랫입술을 깨문 채 준상은 구체적인
행동 계획에 대하여 묻는다. 그리고 연이어 또박또박 공중을 수놓는 인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잠깐동안만, 정말로 아주 잠깐동안만 강태를 조 회장 손에 쥐어주면 됩니다.
그럼 조 회장 쪽에서 희생양을 한 명 보내줄 겁니다. 그 다음에 수사 마무리되고
판결 내려지는 형량까지, 그건 제가 알아서 적절하게 처리할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되고요. 거기까지만 완료되면 충의회는 일단 안전 거리를 확보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고 난 다음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도련님을 그대로 그 새끼
손에 둬야하는 거 아닙니까?」
「허, 글쎄요. 그야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김 실장님,
자고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좇으면 안 된다는 말씀 들어보셨지요? 지금 그렇게 한가한
때가 아닙니다. 이 회장을 살리려면 우선 강탄지 도련님인지, 그 남자는 2순위로
제쳐놓으세요. 이 회장 죽고 난 다음에, 그래도 도련님은 살렸다고 혼자 좋아할
생각입니까?」
'혼자'라는 짤막한 두 음절의 단어는 고압 전류가 흐르는 전깃줄이 되어 준상의 목을
옥죄인다. 급작스레 온 몸을 휘감는 호흡곤란 증세. 가파른 숨을 고르며 준상은
둔중해진 성대를 틔워낸다.
「조 회장한테 전해주십시오. 정확한 날짜랑 시간은 따로 정해서 통보해 주겠다고요.
그 때… 제가 직접 도련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만약 약속 이행이 3일 내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 검사님과 조 회장 둘 다 죽일 겁니다. 내가 지금
목숨 내놓고 이 짓 하는 거, 두 분이 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조 회장이 이 얘길 들으면 꽤나 좋아하겠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얘기한 대로 약속 이행이 안 되면 나는 당신들 죽입니다.
목숨 내놓고 쥐새끼 짓까지 하는데 아무 성과가 없으면, 나 그 땐 진짜 눈깔 돌아버릴
거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염려 놓으시고 빠른 시일 내에 연락만 주십시오.」
불꽃 튀기던 설전이 한바탕 막을 내린 후 을씨년스러운 침묵 가운데 두 남자는 한동안
깊고 무거운 눈빛을 교환한다. 준상의 눈동자엔 이미 씻을 수 없는 공범자의 낙인이
찍혀 있다. 그것을 확인한 인하의 눈은 흡족한 승리의 조소를 머금는다. 꺼림칙한
범죄의 현장에서 도피하듯 준상은 서둘러 미닫이문을 열고 인사도 잊은 채 뛰쳐나온다.
그리고 얼른 자동차에 올라 타 혼자만의 공간으로 몸을 숨긴다. 허둥지둥 기어를
조정하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그는 소리 없이 뇌까린다.
용서하십시오, 회장님. 제가 방금… 당신을 살리고자 당신의 인생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용서하십시오. 저는 다만… 그렇게 라도 당신이 제 곁에 존재하길 바랄 뿐입니다.
― 「장주혁 씨, 조회 결과 출국 금지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십니다. 잠깐 이 쪽으로
나와주시죠.」
야멸 차고 쌀쌀맞게 자기 할말만 끝낸 직원이 단호한 눈빛으로 주혁에게 출국심사
대기열에서 비켜날 것을 요구한다. 주혁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도무지 납득할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아서 어안이 벙벙한 채 망부석처럼 멍하니 서 있다.
「장주혁 씨! 다른 분들이 기다리시잖아요. 이 쪽으로 와 주십시오, 빨리.」
이젠 제법 앙칼지기까지 한 목소리를 돋우어 직원은 주혁을 채근하고, 주혁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헛발까지 디디며 걸음을 옮겨놓는다. 허옇게 표백된 그의 머릿속엔
'출국금지'라는 네 글자만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는 중이다. 무중력 상태에 붕 떠있는 것
마냥 몸을 제대로 가누기 버겁다. 주혁은 캄캄하게 흐려지는 시야를 틔우려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뜬다. 그러나 눈앞의 사물들은 여전히 제멋대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어지럽게 회전한다. 메스껍다.
「추, 출국금지라니요… 그게 무슨… 제가 왜…」
역겹게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도로 집어삼키며 주혁은 완성되지 못한 문장의 서두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사시나무 떨듯 진동하는 손가락은 겨우 주머니 속으로 감춘다.
얼마간 유심히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던 직원은 전보다 훨씬 더 두꺼운 경계심으로
무장한 채 주혁을 마주본다.
「본인의 사생활 보호 측면도 있으니 상세하게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만, 일단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는 범죄단체 가입 및 마약류 불법 소지·복용 전과가 올라와 있습니다.
외화 유출과 불법 밀매품 수송의 우려가 있어 올 1월 10일 출국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청산유수와 같이 줄줄 흘러나오는 직원의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새겨들으며
주혁의 뇌리엔 자동적으로 아버지 인하의 얼굴이 떠오른다. 주머니 안에서 움켜쥔
그의 주먹은 당장이라도 힘줄이 뜯겨져 나갈 것 같다. 격노와 절망을 넘어선 순도
백 퍼센트의 증오가 주혁을 순식간에 포로로 사로잡아 버린다. 그리고 그 증오의
화살이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너무도 명백하고 뚜렷하다.
「일단 돌아가셔서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시죠. 어쨌든 현재 출국은 불가합니다.」
주혁의 검푸른 눈동자에 어리는 격한 살의를 읽어내자, 엄격한 태도를 고수하던 직원은
슬며시 기가 죽어 한결 녹녹해진 음성으로 말한다. 주혁은 잠시 허공만 쏘아보고 있다가
'알겠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남긴 채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선다. 그리고 황급히
뭇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재준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알리고 싶지만, 사용하던 휴대폰은 이미 해지시켜 사무실 서랍장에
놓아두고 나온 터라 그럴 수도 없다. 더욱 불 같이 일어나는 막막함과 격분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의 입술 사이로 거친 욕지거리가 뱉어져 나온다. 출국장에서 공항 로비로
빠져나온 주혁은 멀찌감치 구석진 벽면에 부착된 공중전화 박스로 발길을 재촉한다.
손바닥 가득 배인 식은땀 때문에 자꾸만 미끄러지는 동전을 주입구에 집어넣은 후
재준의 휴대폰 번호를 누른다. 두 세 번 신호음이 울리고 나지막한 재준의 목소리가
닿아오자, 주혁은 자신도 모르게 울먹이며 입을 연다.
「재준아, 어떡해? 방금 출국 심사 받고 나왔는데, 내가 금지자 명단에 올라 있어.
아버지가 미리 손을 써둔 것 같아. 어떡하지, 이제? 응?」
비록 상당한 물리적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수화기 건너편의 재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주혁은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황당해하는 것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할 재준에게, 그러나 주혁은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계속 징징대며 그를 다그친다.
「재준아, 뭐라고 얘기 좀 해 봐! 우리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야? 혁수랑 나랑,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 일단 진정하고 사무실로 돌아 와. 만나서 얘기부터 듣고 생각해 보자.]
놀랍도록 평정을 잃지 않은 어조로 재준은 패닉 상태의 주혁을 달랜 다음 전화를
끊는다. 별 수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주혁은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서둘러
공항 출입문 바깥에 세워져 있는 택시들 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위탁시켰던
수하물을 도로 찾아와야 한다는 사실마저 망각한 채, 종로의 충의회 본사 사무실을
향해 출발한다.
#################################################################################
사랑하는 장주혁 아자씨. -_-;;
생신을 무한 감축드리옵니다~!!!!!!!!
언제나 몸과 마음이 건강하시길 바라고 하시는 모든 일마다 순조롭게
대성하시길 바라마지 않사옵니다. 덤으로 가끔씩 톤혁모드에 목마른 저에게
약간의 단비를 내려주시기를 감히 청하옵니다. ㅠ_ㅠ;
장주혁, 만세~!!!!! (미안하다, 남편아 -_-;)
오늘은 장주혁 아자씨 생신 특집으로 2편 폭탄 연재. 크하하하하 -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sherry0430님: 반갑습니다~^O^ 앞으로 자주자주 뵈어요- 그리고 잘 써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셨건만, 그 부탁을 이리도 무참히 외면하게 되어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ㅁwhitewhyuk님: 하하^^;; 결국 비행기를 못탔습니다, 우리 주혁이;; (뻔뻔하게 웃고있죠-_-)
연휴동안 정말 폭탄다운 폭탄을 올려보려 했건만;; 겨우 주혁씨 생일에 맞췄습니다 -_-;
ㅁcy2id님: 그러게요. 제가 만든 인물이지만 나이를 어디로 잡수셨을까요 -_-? 이번 2편
쓰면서도 제가 진짜 너무 악독한 인물을 창조해낸 것 같아서 혼자 섬찟했다는 ㅋㅋ
ㅁskyara님: 이 이상 더 괴롭히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건 제 전공이니 걱정마십시오 -_-ㅋ
ㅁ아가혁수7님: '얍삽하다' <- 아주 딱 맞는 표현인 것 같아서 혼자 잠깐 웃었습니다. ^^;;
인하 같은 악역을 중심축으로 쓸 땐 왠지 저도 나쁜년 되는 기분이 들어서;;
괜히 글 올려놓고 나서도 죄송스럽지만;; 그래두 재밌게 읽으시길 바랄게요-
ㅁinmylove님: 저를 믿으시다니요-. 그런 무모한 선택은 권해드리지 않는 바입니다.-_-;;
근데 정말 결말을 예상하기 힘드신가요? 전 대부분 눈치채실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한가-_-?
ㅁorange걸님: 헉. 저는 싸이 안하는데-_-ㅋ 그런 신세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답니다 -_-ㅋ
그래도 아이디는 있으니까- 메일주소 쪽지로 알려주시면 일촌신청하지요 ㅋㅋ
(일촌이라는 단어조차 쓰면서 낯설답니다 -_-;; 이래서 늙다리 소리를 듣나? -_-^)
ㅁ준타열희님: 17호 참여 축하, 감사합니다^^;; 능력도 없는 작가 주제에 뻔질나게 얼굴
비치는 것 같아서 약간 뻘쭘;; -_-ㅋ 저 역시 오르가즘 완결 내고 나면 거의 패닉 상태가
될 것 같아요. 무려 7년간 이 소설을 놓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고보니까 정말
궁금해지네요. 완결내고 나면 제 기분이 어떨지.. 그래도 얼른 내야죠. 이제 슬슬 저조차도
지겨워지려고 하는데 -_-;;;
by 쵸티지기
[원랑] 오르가즘 - 212
by 원랑 in '리얼톤혁'
운전대를 붙잡은 혁수의 손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꼼지락거린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공항으로 향하던 주혁과 짧지만 긴절한 통화를
끝낸 다음, 학원으로 출근하여 학생들을 지도하는 내내 똑같은 기도만
되풀이하던 그였다. 모쪼록 주혁이 무사히 이 땅을 떠날 수 있도록, 어떤
방해 세력도 그의 길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오직 그것 하나만을 염원하고
간청하던 그였다. 그러나 그의 간구는 시작한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재준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의해 무참히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아무렇게나 뒤엉킨 마음을 한 자락도 정리하지 못한 채
부랴부랴 충의회 본사로 달음박질치는 중이다. 절절하게 이어졌던 기도
역시 못 쓰게 된 파지처럼 구겨져 벼렸다. 눈물이 나오이겐 현재의 이 사태가
너무 크고 벅차서 혁수는 그저 반쯤 정신이 나가 있다. 강풍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제멋대로 펄럭거리는 심장을 어르고 달래며, 그는 평소와 다르게
차를 대강 세워놓은 뒤 건물 안으로 향한다. 그러는 도중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한산해진 입구의 풍경이 그의 시선을 잡아맨다. 여러 명의 조직원들이
짜임새 있는 구도로 단정하게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야 할 터인데,
본사 건물 앞에는 두 어명의 사내들이 긴장감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펑퍼짐한 자세로 노닥거리는 중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낯선 얼굴의
혁수가 출입문을 통과하려 하는데도 제지는커녕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그에게 흘깃 눈길 한번을 던질 뿐이다. 그 쯤 되자 혁수의 심리 상태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오늘 따라 더디게 작동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다다른 혁수는 서둘러 재준의 집무실로 걸음을
뗀다. 육중한 황갈색 목재 문을 열어 제치자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던 여비서가 흠칫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무언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 발딱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안 이사님 오셨습니까.」
혁수는 의식적으로나마 희미한 미소를 띠우며 그녀의 인사에 답하고, 비서는
인터폰의 버튼을 눌러 재준에게 혁수의 도착을 알린다. 재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혁수의 손은 이미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있다. 역시 혁수의 망막에 가장 먼저
새겨지는 것은 핼쑥한 주혁의 낯이다. 목소리가 변성이 될 정도로 줄담배를
피워대던 주혁은 혁수의 등장에 눈동자 색깔이 더 탁해진다. 혁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마치 빚쟁이와 맞닥뜨린 채무자들처럼 애써 자신의
눈을 회피하는 주혁과 재준 앞에 더듬더듬 한 글자, 한 글자 나열한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말 좀 해 봐.」
혁수가 오기 전까지 열에 들떠 쉬지 않고 혀를 놀리던 주혁은 막상 혁수의
질문이 날아들자 입술 사이에 풀칠이라도 해 놓은 듯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재준은 그런 주혁이 안쓰러워 무슨 말이든 먼저 꺼내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순서가 아닌 듯 하다. 주혁은 한참 동안 벙어리 흉내를
고수하다가 굳게 잠겨 있던 입을 열어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한 마디 반문이나 대꾸도 없이 그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뒤, 혁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분노가 아닌 슬픔과 낙담이다.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전에 그의 다갈색 눈망울 가득 눈물이 고인다.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미끄럼을 타는 눈물방울이 동그란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낙하한다. 미동 없이 눈물만 흘리던 혁수는 결국
가녀린 어깨를 세차게 들썩이며 격한 흐느낌을 쏟아 붓는다. 가슴뼈가 쩍
벌어지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놓아줄 기미가 없다.
「어떡해… 우리 어떡해, 이제… 어떡해야 돼…?」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도저히 삭혀지지 않는 울음을 각혈처럼 토해내면서,
혁수는 꺼져 들어가는 음성으로 그 한 가지 물음만 반복한다. 주혁은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쥐어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새삼 저주스러워서 급박하게
밀어닥치는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다. 보다 못한 재준이 길고 깡마른 팔을
내밀어 혁수를 보듬는다.
「형, 제발 진정 좀 해. 이렇게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이럴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그만 울고 같이 얘기해보자.」
「무슨 얘기를 해? 이걸 어떻게 해결해? 방법이 없어, 더 이상… 방법이…」
참혹하게 꺽인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혁수는 도리질 치며 재준의 제안을
묵살해 버린다. 그토록 절박하고 지성스럽게, 온몸의 골수를 짜내는 심정으로
올렸던 기도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그 순간부터, 혁수는 오래도록 주혁과
튼실히 붙잡고 있던 희망의 끈을 놓쳐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방법이 없다니. 방법이 없으면 찾아야지. 형은 당사자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겨우 이 정도 갖고 이렇게 징징거리면, 나중에 미국
들어가선 어떻게 살 생각이었어? 그런 각오도 없이 시작했던 거야?」
나약한 소리만 거듭하는 혁수가 답답해서 재준은 언성을 높여 준열히 그를
나무란다. 그러자 묵묵히 혁수와 재준이 연출하는 광경을 바라만 보던 주혁이
깊숙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둘 사이에 끼어든다.
「재준아. 우린 못 가. 모르겠어? 아버지가 날 출국금지 시켰어. 이게 무슨
뜻이겠어? 다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다 알면서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고, 치밀하게 만들어놓은 함정이야. 우린 거기 빠진 거라고!」
「그래서? 거기 그냥 빠져 죽겠단 거야, 그럼?!」
갑갑함을 이기지 못한 재준의 고함 소리가 멀찍이 떨어진 사방의 벽면에까지
부딪혀 울린다. 좌절과 고뇌로 점철된 대화는 어느덧 의미를 상실한 언쟁으로
변질되어 있다. 세 사람을 연결점으로 하여 이어진 침묵은 메스껍고 미지근하고
위태롭다.
「미안해. 형들한테 화내는 게 아니라, 나 자신한테 화가 나. 난 여태까지 내가
이렇게 멍청한지 모르고 살았거든.」
자학성 짙은 재준의 사과에 주혁은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주혁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는 듯 재준은 개의치 않으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방법은 있어. 형들이 미국이든 어디든, 이 나라 떠나서 아무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아예 끊어진 건 절대 아냐. 아직
방법은 남아 있다고.」
자못 확신에 찬 재준의 단언이 설익은 공기 입자를 뚫고 퍼져나가자, 죽은 사람
마냥 고꾸라져 있던 혁수가 천천히 머리를 들고 그와 눈을 맞춘다. 주혁 역시
또 한 개비의 담배를 뽑아 물려다가 슬며시 라이터를 내려놓는다.
「일단 주혁 형은 오늘 저녁에 장 검사님부터 만나 봐. 그리고 혁수 형은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지내. 어차피 서로 다 아는데,
아닌 척 연기하는 게 더 웃기잖아.」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어떤 방법을 쓸지는, 형이 장 검사님이랑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듣고 나서 결정할게.」
―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주혁이 자리를 뜬 후, 혁수는 초점을 잃은 눈동자를
크림색 벽지 위에 고정시킨 그대로 망연자실 앉아 있다. 재준은 그런 혁수를
그저 내버려둔 채 자신만의 생각에 골몰한다. 어쩌면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인하가 모든 것을 미리 가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단순한 추측을 어째서
논외의 가능성으로 쳤던 것일까. 어쩌다가 이토록 판단력이 흐려졌을까.
「재준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네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뭔데?」
가냘프고 유약한 혁수의 음성이 재준을 상념의 골짜기에서 건져낸다.
재준은 창 밖 풍경으로 향했던 시선을 돌려 혁수를 바라본다. 가뜩이나 작고
동그란 얼굴이 두려움과 의혹에 젖어 영락없는 아이 같다. 비록 주혁과 동갑이고
자신 역시 그를 형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만, 재준은 늘 혁수가 자신의 동생 같은
기분이 든다. 억지로라도 입 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지으며 그는 혁수에게 한결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걱정하지 마. 계획이 틀어진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너무 겁먹지 말고
차분하게 풀어나가자.」
「주혁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이번엔 정말 나한테 사소한 거라도 숨길
생각하지 마. 난 정말… 더 이상 이렇게 충격받기 싫어.」
「형, 이건 나도 주혁 형도 전혀 예상 못한 일이야.」
「알아. 그래도… 너나 주혁이나 너무 나한테 여러 가지 숨겼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바보처럼 뒤통수 맞은 것 같아서 난 더 황당해.」
「주혁이 형이 혁수 형 신경쓸까봐 일부러 사소한 몇 가지는 얘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뒤통수 맞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깡그리 무시하고 덮쳐온 해일 같은 불행 앞에 혁수는
미련한 어리광쟁이로 둔갑하고 재준은 그런 혁수가 슬슬 짜증스러워진다.
차가워진 그의 목소리가 혁수의 귓전을 망설임 없이 훑고 지나가자, 혁수는
선생님께 호된 야단을 맞은 학생처럼 낯이 어두워진다. 그의 표정 변화에
재준은 금방 또 마음이 약해져서 얼른 말을 덧댄다.
「그만 얘기하자. 이러다 괜히 우리가 싸우겠다.」
우르르 눈가로 몰려드는 피로감 때문에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재준은 혁수에게 대화의 중단을 요청한다. 혁수는 탐탁치 않지만 입 속에
떠도는 말들을 식도 아래로 꿀꺽 삼키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 때 재준의 웃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의 진동음이 들려오고 혁수는 혹시
또 무슨 사단이 발생한 것은 아닌가, 혹여 아버지가 먼저 재준에게 전화를
건 것은 아닐까 하는 억측(?)에 청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은
왜 아직도 자신을 데리러오지 않느냐며 재준에게 성화를 부리는 강태다.
「어, 미안. 일이 좀 생겨서 내가 직접 못가고 준상이 보내야겠다. 지금 바로
가라 그럴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전화를 끊자마자 재준은 비서에게 준상을 불러오라 이르고, 5분도 지나지 않아
검은색 공단 정장 차림의 준상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허리를 구십 도로
접으며 문안을 올리는 그에게 재준은 자동차 열쇠를 건네며 지시한다.
「장 이사 입국하는데 문제가 생겨서 내가 좀 바쁠 것 같으니까, 네가 대신 안 이사랑
강태, 우리 집에 데려다주고 거기 같이 있어. 난 이따 주혁 형이랑 같이 들어갈게.」
「도련님도 함께 모셔가라고 하셨습니까?」
「응. 강태 우리 집으로 옮겨 놓으려고.」
「위험하지 않을까요, 회장님. 댁은 이미 그 쪽한테 다 노출이 되어 있어서…」
「나 없을 땐 네가 계속 같이 있으면 되잖아. 그럼 그 새끼들이 감히 접근하겠어?」
「아, 예…」
준상의 얼굴에 좀처럼 보기 드문 그늘이 내려앉자 재준은 이상하다는 듯
궁금증 서린 눈빛으로 그를 주시한다. 광선처럼 일직선으로 뻗어오는 재준의
암회색 눈동자가 내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아서, 준상은 끝내 그 시선을 맞받지
못한다. 재준은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멀거니 지켜보던 혁수에게 이야기한다.
「형, 준상이랑 같이 가서 우리 집에 있어. 마음 가라앉히고.」
혁수는 마뜩찮은 기색을 거두지 못하지만 별 수 없이 준상을 따라 나선다.
준상은 재준에게서 열쇠를 받아든 다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공손히 절을
하고 혁수보다 앞장서서 걷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혁수는 땅이 꺼져라 푸지게 한숨을 토해낸다. 준상은 예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만면에 퍼뜨리며 혁수를 위로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사님. 회장님께서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겁니다.」
신념으로 똘똘 뭉친 그의 힘 있는 목소리가 한편으로는 부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어서, 혁수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딱딱한 말투로 대꾸한다.
「글쎄요, 이번엔 재준이도 손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암담하네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 주실 겁니다.」
「준상 씨는 재준이를 정말 신처럼 떠받드는 것 같네요.」
「회장님은 저에게 신 이상이시죠. 아시잖습니까. 제 인생엔 회장님 밖에 없는 거.」
「그래요, 정말. 준상 씨 볼 때마다 재준이가 부러워요. 얼마나 든든할지.」
바위처럼 굳세고 심지어 맹목적이기까지 한 준상의 충성이 진심으로 감탄스러워서
혁수는 번잡스런 근심과 모진 불운의 한 가운데서도 그에게 따스한 미소를 선사한다.
준상 또한 넉살스러운 웃음으로 혁수를 한 번 더 안심시켜준 뒤, 햇빛을 반사시키는
검은색 세단 승용차 쪽으로 호기 있게 발을 옮긴다. 깍듯이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어
혁수를 탑승시킨 준상은 잠깐 전화 한 통만 걸고 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적절한
세기로 문을 밀어 닫는다. 워낙 철저하게 방음 시설이 완비된 고급 차라서, 안에
탄 사람에게는 바깥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준상은 트렁크 쪽으로 이동하여
주위를 면밀히 살핀 후 휴대폰 버튼을 길게 누르면서 담배에 불을 댕긴다. 한 모금
빨아들인 연기를 다시 뱉기도 전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준상의 고막에 와 닿는다.
[네, 장인합니다.]
「김준상입니다.」
[아, 예! 안녕하셨습니까, 실장님.]
과장되게 반색을 표하는 인하의 음성에 준상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담배 연기를 깊이 흡입하는 것으로 불만을 소화시키며 건조한 목소리를 돋운다.
「장 이사님을 출국 금지 시키셨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지금 안 이사님이랑 같이 있는데, 아주 사색이 다 되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드님들한테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 싶네요.」
[남의 가정사야 실장님께서 신경 쓰실 것 없지요.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고, 그나저나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제가 조 회장에게 뭐 전해줄
말이라도 있나요?]
준상은 꽁초로 변한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겨 끄고 다시 한 대를 피워 물며 잠시
뜸을 들인다. 수화기 건너편의 인하는 비교적 참을성을 가지고 그가 다시 입술을
떼기까지 조용히 대기한다. 새로운 담배가 절반 쯤 타들어 갔을 때 비로소 준상은
망설임을 떨쳐내고 이야기한다.
「내일 저녁 9시에 제가 M호텔로 찾아뵙겠다고 말씀 전해주십시오. 강태 도련님도
동행하실 겁니다.」
####################################################################
여러분, 완결이 늦어져서 너무 죄송합니다. 특히 소장본 기다리시는 분들 ㅠㅠ;;
제가 진짜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죄송합니다. ㅠㅠ;;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혁이빨래님: 시삽님- 고생 많으시죠? 늘 신경 많이 써주셔서 감사해요 ^^*
ㅁwhitewhyuk님: 그래도 재준이보다는 주혁이 고생이 덜하잖아요;; 아닌가?? -_-;
(편협한 변명;;) 주말에는 컴퓨터를 못하시는군요- 오늘 주말인데 -_-^
ㅁ준타열희님: 아프셨어요? 에구- 지금은 괜찮아지셨는지 모르겠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ㅁcy2id님: 빨리 왔어야하는데;;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ㅁorange걸님: 에고;; 기다리시는 남편 얘기가 자꾸 늦어지네요;; 사실 요즘 남편이랑
얼굴 보기도 힘들어서-_-;; 별다른 사건이 없답니다 ㅋㅋ 뭐, 여전히 자주 싸우지만;;
글구 요즘 제가 정신이 없어서 아직 싸이에 들어가보지도 못했네요;; 죄송;;
ㅁ아가혁수7님: 토막;;; 무서워요 -ㅁ- 이번편에서 혁수는 님 아이디처럼 진짜 아가같네요;;
ㅁinmylove님: 저도 좀더 소설의 흐름을 빨리 해서 얼른 완결을 지으려고 발악중입니다 -ㅁ-
ㅁbluebelly님: 감사합니다 ^O^ 글 쓰는 건 힘들지만 그만큼 행복한 작업이죠 ^^;;
부족한 글을 이렇게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완결까지 계속 힘차게 달릴게요~
[원랑] 오르가즘 - 213
by 원랑 in '리얼톤혁'
어스름히 해가 기울어 가는 오후의 늦은 시각, 인하는 널찍한 사무실에 홀로 앉아
향긋한 녹차 한잔을 즐기고 있다. 저무는 겨울 햇살이 투명하고도 처연한 빛을
발산하며 블라인드 틈 사이를 통과한다. 책상 가득 산적한 서류 더미 사이에서도
인하는 자못 여유 있어 보인다. 뜨거운 차 한 모금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그는
가슴 언저리가 뜨뜻하게 데워지는 그 느낌을 몸 속 깊이 흡입한다. 느릿느릿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찰나 문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익숙한 비서의
음성이 인터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검사님, 자제 분께서 오셨습니다.」
몇 시간 전에 주혁의 전화를 받았던 터라 인하는 주저하지 않고 그를 들여보내라
이른다. 잠시 후 문짝이 부서져라 세차게 열리며 진노한 주혁의 낯이 인하의 동공으로
빠져든다. 이제 막 시합을 끝마친 경주마처럼 콧김을 씩씩 내뿜는 아들의 모양새가
어쩐지 익살스럽게 보인다.
「주혁이 왔구나. 커피 마실래?」
치가 떨릴 만큼 뻔뻔스럽고 태연자약한 인하의 태도를 대하자, 주혁은 머리 위에
숯불을 이고 있는 것 같다. 이러다간 얘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복장이 터져 비명횡사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하도 기가 차고 천불이 나서 게걸스런 숨소리만 무작위로 뱉어내는
주혁에게, 인하는 여전히 여유작작한 얼굴로 어떻게 지냈냐는 둥 감기는 걸리지
않았냐는 둥 새삼스런 안부를 물어온다. 주혁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갈 듯
급격히 치받치는 살의와 격노를 억누른 채 간신히 성대를 작동시킨다.
「아버지가 이렇게 무서운 분이신지 미처 몰랐습니다. 아니,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주혁의 말투는 누가 듣더라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역력한 빈정거림이지만,
인하의 낯빛은 흔들리지 않는다. 입을 열어 한 마디 변명이나 반박조차 디밀지
않고 그저 덤덤히 주혁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다.
「무슨 말씀이든 해 보십시오. 뒷구멍으로 할 짓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하면
그게 덮어집니까?」
「말이 너무 심하구나. 누가 뭐래도 난 네 아버지야. 서로 예의를 지키면서
대화하도록 하자.」
인하는 사뭇 준절히 주혁을 꾸짖으며 마구잡이로 치닫는 그의 언사를 중도에
끊어낸다. 그러자 회백색으로 가라앉은 주혁의 얼굴에 섬뜩한 조소가 서리며
붉은 입술이 전보다 더 독살스런 음색을 씹어 뱉는다.
「이 와중에도 예의, 교양을 차리시다니… 정말 역겹습니다. 아버지가 저한테
그런 말씀하실 처지는 못 되실 텐데요. 아버지야말로 천재적인 연기자세요.
어쩌면 이렇게 감쪽같이 속이실 수가 있습니까?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네요.」
이쯤 되면 본색을 드러내며 주먹이라도 휘두를 줄 알았건만, 인하는 무서울 만치
일절 동요가 없다. 대신 보일 듯 말 듯 희끄무레한 비웃음이 그의 얇은 입술 언저리에
걸렸다가 재빨리 자취를 감춘다.
「한 가지만 분명히 해 두자. 예의 도덕을 저버린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아무리 친형제가 아니라고 해도, 같은 부모 밑에 있는 형제끼리 그런 추잡한
관계를 맺는다는 게… 그게 비도덕적인 일이 아니라면 대체 뭐냐? 그 하나만으로도
너희는 용서의 여지가 없어! 그런데 감히 네가 나한테 도덕 운운한단 말이냐?
거참, 너희들 그 뻔뻔함에 나도 이제 구토가 날 지경이다! 너 같은 놈이 내 아들이란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줄 알아? 내가 미친놈이지… 너 같은 걸 20년 넘게 먹이고
입히고 공부 시켰으니. 내 눈을 내가 찌른 거지, 뭐냐. 이 꼴을 당하려고 그 고생을
해서 널 키웠나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정말이지…!」
차분하고 점잖게 시작된 인하의 장광설은 결국 켜켜이 쌓인 회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그의 이야기대로라면 주혁은 가슴이 저리도록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만, 이미 그는 죄의식을 느낄 만한 감각 기관을 오래 전에 상실한 터이다.
오직 혁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심지어 신 앞에서도 당당해질 수 있는
주혁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란 기도는 벌써 자신의 손으로 무효화 시키지 않았던가.
우리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우리의 사랑이 죄라고 하여도, 그렇다면
단죄의 채찍을 들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신뿐이다. 세상의 어떤 기준도,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자격은 없다.
「아버지 마음 아프게 해 드린 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우린 충분히 치렀어요. 안 그렇습니까? 저는 공식적으로
장씨 집안에서 추방되었고, 하고 싶던 공부도 때려 쳐야 했고, 생각지도 않았던
깡패 짓까지 하고 다녔으니까요. 혁수야 두말할 것 없죠. 훌륭한 아버지 덕분에
정신병원에 감금까지 당했지 않습니까? 그 안에서 혁수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아버지는 짐작도 못하시겠죠. 본인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갇혀 지낸다는 게
어떤 건지, 아버지는 절대 모르실 겁니다. 그럼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잡아
처넣는 일만 해 오셨으니까.」
「얘기를 하려면 똑바로 해라. 난 한번도 널 내쫓은 적 없어! 네가 제 발로 뛰쳐나가
놓고 이제 와서 나한테 덤터기를 씌우는데, 도대체 내가 언제 널 내쫓았단 거냐?」
「허! 아, 네~ 그럼요! 아버지 입으로 저더라 나가라 말씀하신 적은 물론 한번도
없지요. 혁수가 어머니 아버지 뜻 거역 못하고 억지로 미국 간 다음에, 제가
제 발로 걸어 나간 거죠. 그 때 제가 왜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혁수도
저 싫다고 떠난 상태에서 제가 왜 집을 나갔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설마 반항심
때문에 그랬을까요? 저 그렇게 철없는 어린애 아니에요, 아버지.」
자신 앞에서는 항상 과묵하기만 하던 주혁이 이렇듯 폭포수처럼 포효를 쏟아내자,
인하는 질린 듯 멍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거리를 하지 못한다. 어느새 주혁의
눈동자엔 물기가 담뿍 배어있다.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한 쌍의 검푸른 심연이
얼음 같은 인하의 심장을 움직이려 무던히도 애쓰지만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주혁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롭고 신랄한 힐난조로 줄달음질 쳐간다.
「미칠 것 같았어요. 아니, 죽을 것 같았어요. 혁수가 떠났을 때… 정말 살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절박했다고요! 그래서 나갔어요. 나는 안혁수 없이는
못 사니까, 그 애 없으면 이렇게 막 살아 버리니까, 내가 안혁수 없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한번 보시라고… 그랬던 제 심정을 아버진 짐작이나 하셨어요?
저는 그래도 아버지가 저를 찾을 줄 알았어요. 왜 그러냐, 얘기를 해보자,
한번이라도 물어봐 주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냥 내버려두시더군요. 나중엔
제가 막 살다 못해서 마약까지 했는데, 아버진 그걸 가슴 아파하시기는커녕 오히려
혁수가 정신병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혁수를 협박할 수단으로 쓰셨지요.
혁수는 혹시라도 제가 그 마약 전과 때문에 어떻게 될까 무서워서 순순히
정신병원에 끌려갔고요.」
입을 다물며 주혁은 일말이나마 인하의 얼굴에 미안해하는 기색이 서리지 않을까
주밀하게 살핀다. 그토록 많은 배반과 모략을 당하고도, 아직도 그에게 기대를
갖다니. 천륜의 끈이란 이처럼 질긴 것인가. 주혁은 한심스러운 생각에 쓸쓸히
자조한다.
「그래. 네 말대로 난 너희들 앞에서 감쪽같이 연기해온 게 사실이다. 다 알고 있었어.
너희들의 생활, 계획, 어디서 만나고 만나서 뭘 하는지 까지. 너희들은 나를 너무
호락호락하게 봤어. 아니, 아주 병신 취급을 했지. 특히 혁수는 더더욱 그랬고.
매일 같이 얼굴 맞대고 살면서.」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다 알고 있으니까 허튼 수작 관두라고. 그랬다면
훨씬 빨리 결판났을 거 아닙니까. 서로 시간 낭비하는 일 없이.」
「왜냐면 난 애초부터 너희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거든.」
일각도 지체치 않고 주혁의 고막을 꿰뚫는 인하의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거추장스러운
수식어가 몽땅 배제된 그 한 문장이 그동안 이어져 온 인하의 행보를 한 순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기회 따위 줄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지, 어째서 우리가 서로를 놓을 수 없는지, 절대로
이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귀 기울여 보기조차 거부한 것이다.
잠시나마 애잔하게 녹아들었던 주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대화를 지속시킬
의미가 완전히 증발된 이 시점에서 주혁은 마침내 결정한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자신의 인생에서 깨끗이 제거해버리기로. 또한 아버지를 향해 겨누고 있던 증오의
화살, 그 활시위를 당긴 채 머뭇거리던 손가락을 풀어버리기로.
「아버지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저한테는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대로 저는 아버지 아들이니까요. 하지만 이제부턴 그 고통이
저의 에너지가 되어줄 것 같네요. 아버지를 증오하는 그 힘으로 한번 미친 듯이
싸워보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지지 않을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 집안으로 들어서는 재준과 주혁의 몸은 피로와 근심으로 인해 녹초가 되어 있다.
평소와 다르게 거실은 환한 불빛으로 가득하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준상은
재준과 주혁의 기척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녀오셨습니까.」
상투적인 인사로 자신을 맞는 준상에게 재준은 심드렁한 어조로 강태와 혁수의
행방을 묻는다.
「강태랑 혁수 형은?」
「위층에 같이 계십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그만 들어가 봐.」
귀가하는 대로 자신을 함께 불러다가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 의논할
것이라, 당연히 예상했던 준상은 이제 그만 들어가 보라는 보스의 지시에 당황하여
눈빛이 흐려진다. 재준은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담백한 음성으로, 미적거리는
준상을 다시 채근한다.
「뭐해? 들어가라니까.」
「…저한테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아니. 그런 거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 봐. 피곤할 텐데.」
「지금 제가 피곤한 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준상의 말에 돋친 뾰족한 가시가 비로소 확연히 감지되자 재준은 계단 쪽으로
내딛으려던 걸음을 멈칫하며 그를 주의 깊게 응시한다. 그리고 이내 그가
무엇 때문에 서운해 하는 것인지 짚어내고는 얼굴빛을 부드럽게 바꿔 준상을
설득한다.
「주혁 형이랑 혁수 형 문제 갖고 너까지 끼여서 얘기하면 형들이 불편해 할 것
같아서 그래. 네가 딱히 해야 할 일도 없고. 얘기 들어봤자 네 속만 더
심란해질 거야. 그러니까 이번엔 빠져줘라, 준상아.」
더 이상 보스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게 되자 준상은 눈동자를 가늘게 좁히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꾸벅 허리 굽혀 절한 다음, 소파에 놓아둔 코트를 집어 들고
재준과 주혁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두꺼운 철제문이 유난스레 큰 소리를 내며
닫히고,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기는 재준의 발부리엔 찜찜한 감정의 앙금들이
차인다. 2층의 홈 바로 올라가자 강태는 벌써 얼근히 술에 취한 상태고 혁수는
신경 쇠약으로 막 실신할 듯 파리해져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큼지막한
암갈색 눈망울을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고 초조하게 두 사람을 기다리던 태현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한동안 씨근덕거리며 재준을 노려보다가 꾹꾹 눌러둔
역정을 한꺼번에 폭발시킨다.
「야, 이 새끼야! 어디 갔다 이제 와?! 너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도록 아무것도
안 하고…!」
「바쁜데 뭐 하러 왔어. 여자친구랑 놀지.」
악머구리 끓듯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대는 태현이 무색하도록, 재준의 음성은
심상하고 초연하다. 어처구니가 없고 맥이 탁 풀려서 태현은 분연히 일으켰던 몸을
허탈하게 의자 위로 찌그러뜨린다. 옴팡지게 도사리고 앉아 무슨 말로 다시
악다구니를 쳐댈까 고심하던 그는 불현듯 위압적으로 돌변한 재준의 목소리에
풀기를 잃으며 반쯤 벌렸던 입술을 도로 닫는다.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 그만해, 제발. 나도 이제 그런 거 받아주는데 질렸으니까.
막말로 당사자는 나야. 당할 사람도 나야. 내가 이 모든 일을 다 저지른 것처럼
몰아세우면 어쩌라는 거야? 내가 이렇게 되라고 빌었어? 나도 내 책임 인정하고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지랄 좀 그만해, 다들. 특히 태현 형, 서운한 건 알겠는데
지금 자기감정 내세울 때 아니잖아. 날 돕고 싶으면 가만히 좀 닥치고 있어.」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건 재준이 쓸모없는 언쟁에 기력을 낭비할 의사가 절대 없다는
뜻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 애초에 그럴 만한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재준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강태가 마시던 양주병을 가져다가
유리잔이 넘치도록 그득히 채워놓는다. 매캐한 담배 연기를 진하게 뿜어내며 그는
송장처럼 제자리만 지키고 있는 주혁에게 아버지와의 만남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라
재촉한다. 재준을 비롯한 네 사람 모두가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으로 주혁을
주시하지만, 그는 쉽사리 말문을 트지 못한다. 한참 만에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첫 마디는 별로 희망적이지 않다.
「아버지 태도는 확고해. 밀입국이고 뭐고, 무기한 보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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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준타열희님: 그러게요. 제가 왜 준상이를 이렇게 만들어놓았을까요 -_-;;
ㅁskyara님: 아- 인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신 독자분은 처음인듯 ^^;;
게다가 친절하게도 '아버님'이라고 불러주시다니 -ㅁ- 다들 나쁜놈 운운 하시던데 ㅋㅋ
ㅁwhitewhyuk님: 저한테 하시는 질문이라면... 노코멘트입니다 ^^;;;
ㅁ아가혁수7님: 사람이 코너에 몰리면 똑똑했던 사람도 멍청해지곤 하는 법이지요 -_-;;
ㅁorange걸님: 헉-_-;; 섬뜩;; 이래뵈도 저 이번달이 결혼 2주년이에요~ ^^;;
[원랑] 오르가즘 - 214
by 원랑 in '리얼톤혁'
「아버지 태도는 확고해. 밀입국이고 뭐고, 무기한 보류야.」
거센 비바람 앞의 촛불 같던 혁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고 태현의 눈동자는 크게
홉떠진다. 재준의 넉넉히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라 당혹해하진 않지만 침통하게
수그러드는 고개만은 어쩌지 못한다. 강태는 주혁의 청천벽력 같은 말보다도
힘없이 꺾이는 재준의 목 줄기 때문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사위스럽게
침잠하는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고자 재준은 황급히 입술을 뗀다.
「그러시겠지. 미리 출국 금지까지 내려놓은 걸 보면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그것도
빠삭하게 알고 있을 거야.」
「글쎄,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그러고도 남을걸. 밀입국 계획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그동안 장 검사님이 혁수 형한테 미행을 붙여놓았을 거야. 주혁 형, 전혀 눈치
못 챘어?」
「눈치 챘으면 내가 그냥 있었겠어?」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되돌아오는 주혁의 반문에 재준은 순간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혁수는 다시 극성스럽게 활개 치는 울음을 짓뭉개려고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문다. 태현과 강태는 재준의 머릿속에 지금 어떤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지, 그가 최종적으로 어떤 방법을 선택하여 결정을
내릴지 추측하고 넘겨다보느라 분주하다. 주혁과 혁수, 강태와 태현의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엔 전혀 아랑곳없이 오랜 시간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던 재준은 마침내
입을 연다. 귓가에 와 닿는 그의 음성은 뜻밖에도 무척 개운하고 산뜻하다.
「아무 걱정하지 마. 형들 굳이 이 나라 떠나서 고생할 필요 없이, 예전처럼
여기서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더 참아. 며칠 안에 그렇게 될 거니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음색으로 단언한 뒤, 재준은 무언가 아주 수고로운 노동을
끝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하게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켠다.
「너… 그게 무슨 뜻이야? 갑자기 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해?」
의혹에 차 퀭한 빛을 발산하는 태현의 눈동자가 가차 없이 재준을 후벼 판다.
주혁과 혁수는 이제 재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가, 의심스럽고 얼떨떨하다.
숨죽인 채 자신의 답변을 학수고대하는 네 남자에게 재준은 오히려 납득이
안 간다는 투로 면박을 준다.
「왜, 내 말 못 믿겠어? 그럼 믿지 말던가. 얘기했잖아. 분명히 방법 있다고.」
「그러니까 네가 쓰려는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뭐냐고!」
대견스레 급한 성질을 붙들어 매어두고 있던 강태는 이제야말로 한계점에
다다른 듯 앙칼진 고함 소리를 돋우어낸다. 태현은 제 속이 다 시원한지
강태의 역성을 들며 집요하게 재준을 추궁하지만, 그는 계속 묵묵부답이다.
결국 태현은 질펀한 욕지거리를 한 바가지 토해내며 난폭하게 의자를 뒤로
밀어젖힌다.
「나도 몰라, 이제! 이재준 너, 좆나 잘난 새끼니까 어디 한번 네 혼자 힘으로
잘 해결해 봐! 씨발, 무슨 얘길해야 도와주던지 같이 울던지 할 거 아냐?
입 닥치고 있으면 내가 제 속을 어떻게 아느냐고! 씨발, 그렇게 자신 있으면
혼자 알아서 해. 나도 신경 안 쓸 테니까. 네 말마따나 여자친구하고나 놀지, 뭐.」
속사포처럼 따따부따 쏘아낸 태현은 냉풍이 일도록 단호하게 재준을 등지고 돌아선다.
마음 약한 강태가 울먹울먹 그의 이름을 부르며 붙잡자, 태현은 잔뜩 추켜세웠던
어깨를 슬그머니 늘어뜨린다. 그리고 울음기 흥건한 음성을 어깨 너머 재준에게로
던져준 뒤 부리나케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몸조심하고 수시로 전화해. 작업 중에도 휴대폰 켜 놓을 테니까.」
태현의 발소리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마자 재준은 꼿꼿이 펴고 있던 허리를
구부정하게 접으며 테이블 위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더는 대범한 자세를 견지할
수 없었던지라 일순간 그는 유약하게 허물어진다. 주혁은 이제 그만 그를 쉬게
해 주어야겠단 심산에 혁수더러 일어나자는 손짓을 해 보인다.
「강태야, 재준이 데리고 내려가서 자라.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다음에 다시
모이던지, 그렇게 하자.」
제법 어른스럽게 주혁은 강태를 달래고 강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로를 가누지 못해
흐느적거리는 재준의 긴 몸을 부축한다. 두 사람마저 자기들만의 비밀스런 공간으로
이동해 간 후, 홈 바 안에는 혁수와 주혁 단 둘이 남겨진다. 주혁은 얼마간 황망히
서 있다가 정신을 추스르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술병과
재떨이 등을 치우기 시작한다. 혁수는 영 마음처럼 몸이 움직여주지 않아서 대강
치우는 시늉만 하고 주혁을 따라 침실로 향한다. 침실 한 쪽 벽면에는 세라와
태현이 그들의 재결합과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선물해 준,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다. 이토록 복잡다단한 심사(心思)에도 그 사진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처음 봤을 땐 정말 자신과 주혁이 함께 찍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는데, 찬찬히
살펴보니 합성한 솜씨도 서툴고 약간 우스꽝스럽다.
「왜 웃어?」
아슴푸레하게 번지는 혁수의 미소에 주혁은 정색을 하고 묻는다. 혁수는 사진에
붙박여 있던 눈길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그냥. 이 사진 다시 보니까 웃겨서. 되게 조잡해.」
「조잡하다니? 예쁘기만 한데, 뭐. 난 너 이 머리 스타일 했을 때가 좋았어.」
「지금은 맘에 안 들어?」
「아니, 그렇진 않은데… 넌 와인색이 진짜 잘 어울리거든.」
바로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목전에 닥친 날벼락 같은 불행을 곱씹으며 전전긍긍했건만,
이렇듯 일상적이고 소소한 대화를 엮어나가는 자신들이 기막혀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헛웃음을 뱉는다. 우리는 불행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그건 분명 유쾌한
징후는 아니다.
「재준이가 한 말, 어떻게 생각해?」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펼쳐 보이는 혁수의 질문에 주혁은 잠깐 낯이 어두워진다.
그러나 금새 원래의 빛깔을 되찾으며 안정감 있는 묵직한 중저음으로 대꾸한다.
「재준이를 믿어야지. 실없는 소리할 애는 아니잖아.」
「그래도… 구체적인 얘기를 안 하는 게 왠지 불안해. 못 믿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몸 신경 안 쓰고 막 나가버릴 것 같아서 무서워. 진짜 무슨 일 저지를 것
같다고. 다 포기한 사람처럼 편해 보이는 게…」
「설마 그러진 않겠지. 재준이가 얼마나 이성적인 앤데. 무모한 짓은 안 할 거야.
그리고 재준이한테는 강태가 있잖아. 강태 두고 제 몸 함부로 굴리겠어?」
「그건 그런데… 왠지 마음이 무거워. 그 말을 듣고도 맘이 가벼워지지가 않아.」
꺼림칙한 마음만큼은 주혁도 그와 동일하기에, 선뜻 자신 있게 그를 위로하고 두둔하지
못한다. 정말 재준이 품고 있는 계획이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이기에 그가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는 걸까.
「우리말이야…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흐느끼듯 가냘프게 떨리는 혁수의 음성은 주혁의 고막을 거쳐 아래로 뻗어 내려가
그의 심장 한 가운데 움푹 박힌다. 혁수가 저렇게 울기 직전의 사람처럼 말하는
까닭이 그를 짓누르는 열망의 무게에 있음을, 주혁은 알고 있다.
「재준이가 약속한 대로 말이야, 도망가지 않고 여기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정말 그런 행운이 우리한테 올까, 주혁아?」
나도 모르겠어. 아버지를 배반한 나, 어머니를 외면한 너. 우리에게 그런 행운이
주어진다면, 그 때야말로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통속적 진리가 극명하게 입증되는
순간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는 다시 묻고 싶어. 수 천, 수 만 번을 이가 갈리도록
되새김질한 물음인데 아직도 해답을 얻지 못했어.
우리의 사랑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 어째서?
― 강태는 엄청나게 과음을 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재준을 떠받치며 겨우 침실까지
당도한다. 그가 팔의 힘을 빼자마자 재준은 스르륵 침대 위로 엎어져 버린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마취에서 덜 깨어난 수술 환자 같이 정신을 못 차리는
그가 강태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강태는 다시 낑낑대며 재준을 똑바로
눕혀놓은 후 그의 이마에 손바닥을 갖다댄다. 그저 너무 피곤하기 때문이려니,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심한 고열이 느껴지자 강태는 불에 덴 듯 소스라친다.
「얘 열나는 것 좀 봐! 야, 안 되겠다. 병원 가야겠어.」
겁에 질린 얼굴로 재준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보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강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동안 발만 동동 구르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허겁지겁
주혁의 방을 향해 종종걸음 친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에 이어 나지막한
혁수의 음성이 들려오고, 열리는 문 틈 사이로 의뭉스러워하는 주혁과 혁수의
낯이 비친다.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럽게 묻는 주혁의 입술이 다물어지기도 전에 강태는 엄마 잃은 어린애처럼
울먹이며 이야기한다.
「재준이가 열이 너무 많이 나. 병원에 데려 가야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준상 씨 불러야하나?」
「재준이가 아파? 방금 전까지 멀쩡했잖아. 갑자기 왜 그러지?」
「몰라! 미친놈, 또 미련하게 참고 있었나보지. 하여튼 어떡해? 준상 씨 불러?」
「뭐 하러 그래. 그냥 내가 데리고 갔다 올게. 별 일 아닐 거야.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나도 같이 가! 답답해서 어떻게 기다려?」
「안 돼, 위험해. 혁수랑 같이 집에 있어.」
군소리를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주혁의 대답에 강태는 불만스럽지만 눈빛으로
밖에 항변하지 못한다. 주혁은 혁수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뻗어 가쁜 숨을 쌕쌕 뱉어내는 재준은,
강태의 말대로 지독한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는 듯 하다. 주혁은 잽싸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빌라 입구 앞에 대놓고, 그 사이 혁수와 강태는 재준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운다. 뒷좌석의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은색 승용차는 굉음을
울리며 단지 밖으로 벗어난다. 교통 신호를 거의 다 무시하면서 병원에 도착한
주혁은 버들가지처럼 휘청대는 재준을 끌고 응급실로 들어선다. 며칠 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기색이 역력한 젊은 레지던트가 지극히 일상적인 태도로 재준을
진료한 뒤,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하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주혁은 아는 대로
성실하게, 그리고 최대한 자세하게 답변하려 애쓰지만 의사는 그런 그의 노력
따위엔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폐렴이네요. 요 며칠 사이에 환자가 무척 힘들어했을 텐데. 기침도 심했을 거고요.
모르셨나요?」
새파랗게 젊은 청년 의사가 반말을 섞어가며 오만한 말투로 지껄이는데도, 주혁은
'폐렴'이란 병명에서 풍기는 흉측한 예감에 몸서리치며 바보처럼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는 매일 오랫동안 같이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럼 어떻게, 입원을 해야 하나요?」
「며칠만 일찍 왔어도 금방 완치가 되었을 텐데 지금은 경과가 많이 나빠진
상태예요. 최소한 2주 정도는 입원하셔야 하겠습니다. 차후에 치료되는 걸
봐서 더 빨리 퇴원할 수도 있고요.」
「아, 예. 알겠습니다.」
주혁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하자 의사는 목례만 까딱해보이고는 쌩하니 몸을 돌려
다른 환자에게로 향한다. 곧바로 간호사가 다가와 재준의 여윈 손목에 링거 바늘을
꽂고, 여러 가지 간단한 치료 작업을 수행한다. 어느새 불그스름한 열꽃으로
뒤덮인 재준의 얼굴이 안쓰러워서, 주혁은 긴 한숨과 동시에 휴대폰을 꺼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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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215
by 원랑 in '리얼톤혁'
발가락에 불침을 맞은 강아지 마냥 거실을 서성거리던 강태는 전화벨일 울리자마자
번개 같은 속도로 수화기를 귀에 붙인다.
「여보세요? 주혁이 형?」
「어, 나야. 별 일 없지?」
「재준이 어때? 병원에서 뭐라고 해?」
「폐렴이래.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방치해둬서 병이 더 커졌나 봐. 2주 정도는
입원해야 한다니까 수속 밟고, 내일 아침에 특실로 옮기려고.」
차근차근 침착하게 이어진 주혁의 설명에도 강태는 갑자기 혀가 굳어버린 듯 말문이
막혀 있다. 주혁은 재차 염려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지만, 강태의 침묵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에 더 육중하고 두꺼워진다.
그가 아프다는 사실 자체에 쇼크를 받은 것이 아니다. 강태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것은, 재준이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음을 털끝만치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무감함이다. 그는 이렇게 고단한 육체를 채찍질하며
간악하고 모진 현실과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이는 중인데… 그가 울지 않는다고
해서, 강해 보인다고 해서, 어쩌면 이리도 무관심해질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말은 숱하게 잘도 지껄이면서, 어쩌면 이토록 그를 외롭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제 겨우, 나와 동갑내기 스무 살 소년일 뿐인데.
「강태야, 주혁이가 뭐래? 재준이 많이 아프대?」
수더분하고 진득한 성격의 혁수지만 강태의 침묵이 워낙 길어지자 궁금증을 누르지
못하고 그를 채근한다. 귓전을 어루만지는 온화한 혁수의 목소리에 강태는 그저
주혁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 재생한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려 넋을 빼앗긴
사람처럼 부스스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로 사라진다. 텅 빈 공간에 혼자 남은
혁수는 주혁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고 피곤한
몸을 누이러 계단을 오른다. 어두컴컴한 침실 안에 안착하자, 강태는 아까부터
꾸역꾸역 우겨 넣었던 눈물을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초여름 홍수처럼 쏟아낸다.
처음으로, 진정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원망스럽다. 그에게 짐이 되는 자신의
존재가 밉고 그를 이 지경까지 몰아간 자신의 사랑이 혹여 이기적인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난다. 그에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는데. 절대 미안한
마음은 품지 않으려고 했는데.
「미안해, 재준아… 정말 미안해… 용서해 줘, 재준아…」
지금은 네가 듣지 못하니까,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곳이니까, 그러니까 마음 놓고
실컷 얘기하는 거야. 미안하다고. 내일 아침에 다시 널 만나면 절대 이러지 않을 거야.
앙탈 피우고 짜증 부리고, 왜 미리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냐며 구박할 거야.
지금처럼 중차대한 시기에 네가 병나서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매정하게
바가지도 긁어댈 거야. 나약하게 우는 모습은 그만 보여줄래.
나만큼 네가 더 독해지도록, 억울하고 분해서라도 날 뺏기지 않겠다는 집착이
네 가슴속에 뿌리박히도록, 그래서 네가 다시는 날 버릴 수 없도록.
―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재준은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흐릿한 시야가
느릿느릿 개이면서 근심에 잠긴 준상의 얼굴이 제일 먼저 망막을 채운다.
호된 꾸지람을 듣고 있는 사람처럼 부동자세로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어쭙잖게도 동정심에 가득 차 있어서, 재준은 아픈 와중에도 실소가 비어져 나온다.
「좀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강태는?」
눈을 뜨자마자 재준은 강태의 안위부터 살핀다. 준상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야무지게 대답한다.
「장 이사님께서 모시러 가셨습니다. 지금 이리 오고 계시는 중일 겁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재준은 팔꿈치를 딛고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준상에게 냉수 한 컵을 청한다. 그러나 준상은 차가운 물이 좋지 않을 거라며
미지근한 물을 가져오고, 재준은 탐탁지 않지만 그의 배려를 생각하여 군말 없이
받아든다. 습관처럼 재준이 담배 한 대를 빼어 물자, 준상은 예의 바르지만
단호한 손길로 그가 집으려던 라이터를 채 간다.
「박사님께서 회복되실 때까진 무조건 금연하라고 하셨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참으시지요.」
이쯤 되면 영락없이 얄미운 시어머니 꼴이다. 재준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은근히
짜증 섞인 어조로 묻는다.
「나 어디가 고장 났대?」
「폐렴이시랍니다. 며칠 동안 많이 힘드셨을 텐데,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폐렴? 그거 꼬마 애들이나 걸리는 병 아냐?」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하셨습니다. 당분간은 푹 쉬시면서 건강에만
신경 쓰십시오, 회장님.」
절절한 표정으로 간언하는 준상이 충심으로 고뇌하는 우국지사처럼 보여서, 야릇한
장난기를 머금고 있던 재준의 눈동자도 돌연 숙연하게 가라앉는다. 가시지 않는
흡연 욕구 때문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내가 지금 그럴 처지가 되냐. 지금 바로 퇴원할 거니까 박사님께 그렇게 말씀드려.」
전담 주치의에게 퇴원 의사를 밝히고 오라는 재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준상은
주저하지 않고 세찬 도리질을 치며 딱 잘라서 이야기한다.
「안 됩니다. 회장님께서는 쉬셔야 합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쉴 처지가 되냐고! 내가 괜찮다는데 웬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박사님한테 지금 당장 퇴원하겠다고 말씀 드려!」
어떤 일에도 좀처럼 흥분을 하지 않던 재준이 자제심을 잃고 히스테릭하게 언성을
높이자 준상은 아연실색하고, 둘 사이의 분위기는 뜨악해진다. 재준은 곧바로 자신이
불필요하게 신경질을 부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만, 예전처럼 시원스레 사과를 건네진
않는다. 오히려 준상은 평소 성격과 달리 조용하고 의연한 음색을 끌어낸다.
「회장님, 그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신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 정말 회장님 몸 상태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이 되시면,
그 땐 사태가 심각해집니다. 우선 며칠 동안은 몸 챙기시고 그 다음에 천천히
하나씩 해결해 나가셔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회장님 쉬실 동안엔 제가 급한
것들만 몇 가지 처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의젓하고 초연한 준상의 목소리는 뒤틀린 재준의 심기를 단박에 어루만져 놓는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에 대한 재준의 믿음은 측정이 불가능할 만큼
돈독해져 있다. 갑자기 치솟는 객쩍고 미안한 마음에 재준은 일부러 준상의 맑은
눈을 피한다.
「네 말이 맞는데… 너한테는 당분간 강태 하나만 맡기려고 그랬거든. 믿을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도련님 걱정은 마십시오. 겨우 며칠동안일 뿐이고, 제가 바쁠 땐 장 이사님께서
도련님과 함께 계셔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장 이사님께서도 흔쾌히 그렇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 먼저 건강하셔야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주혁이 형도 지금 그럴 만한 정신이 없을 텐데…」
「그래도 이 상황을 풀 수 있는 사람은 회장님 밖에 없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서
다시 건강해지시는 게 급선무입니다.」
불현듯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이 마약중독자가 느끼는 금단증상처럼 무지막지하게
재준을 휘감는다. 컴컴해지는 그의 눈빛에 준상은 독심 술사처럼 재준의 속내를
읽어낸다. 이건 아닌데,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그는 하는 수 없이 담뱃갑과
라이터를 재준에게 돌려준다. 한껏 담배연기를 빨아들인 재준은 끽연을
음미한지 얼마 못 가서 격렬한 기침을 터뜨린다. 준상은 잽싸게 물을 떠다 바친다.
한참 만에 안정을 되찾은 재준은 귀를 쫑긋 세워야 들릴 법한 작은 소리로 말한다.
「알았어. 그럼 네 말대로 하자.」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제야 준상의 얼굴에 특유의 호방하고 서글서글한 웃음이 번진다. 그 미소를 확인하자
재준은 괜스레 푹 안심이 된다. 야트막하게 몸을 낮추어 베개 위로 등을 기대며, 그는
직속 부하에게 가장 긴급한 지시 사항을 하달한다.
「일단 본사로 가서 애들한테 나 여기 있다는 거 알려주고, 장 검사 만나서 얘기 좀
해 봐.」
「협상을 해야 합니까?」
「협상? 그건 아니지. 우리도 그 쪽도,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잖아.」
「그럼 우리 입장만 정확히 전달하고 오면 되는 겁니까?」
「응. 그리고 조문환이랑 얘기가 어디까지 됐는지, 그것도 파악해 봐. 할 수 있겠지?」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몸조리 잘 하십시오.」
「그래, 갔다 바로 와서 보고해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정중히 예를 갖춘 뒤 성큼성큼 병실 문을 나서는 준상의 뒷모습이 어느 때보다 듬직하고
미덥다. 5년 동안을 동고동락 해왔음에도 그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지금처럼 다행스러운 적은 없었던 듯 하다. 재준은 또 한번 안도감과 미안한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흩뿌리며 침대 깊숙이 몸을 묻는다.
― '제가 점심 대접하겠습니다. 맛있게 잘하는 집을 하나 아는데, 실장님께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오셔서 연락 주십시오.'
공손하다 못해 간사스럽게까지 들리던 인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전을 맴돈다.
준상은 운전대를 잡은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도록 힘을 주며 긴장 태세를 풀지
않은 채 차를 몰아간다. 인하가 일러준 대로 골목길을 꼬불꼬불 찾아 들어가니,
크지는 않지만 꽤 고급스럽고 수려한 한정식 전문 식당 하나가 그를 맞이한다.
꼼꼼한 성격답게 인하는 미리 예약을 해 둔 상태다. 밀실로 인도된 준상은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인하의 손을 대충 잡아준 뒤 앉으란 말을 하기도 전에 털썩 바닥에
궁둥이를 붙인다.
「실장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돌이켜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조 회장도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몰라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하는데, 아시다시피 보는 눈들이 있어서…」
「웃기는 놈이네요. 나한테 왜 인사를 하겠답니까? 헛소리 집어치우고 약속이나
똑바로 지키라고 전해주십시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약속 이행이 안 되면
검사님이나 그 새끼나 똑같이 개죽음 당할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김 실장님. 우린 이제 한 배를 탔는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난 댁들이랑 한 배 탄 적 없습니다. 내가 검사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어디까지나 회장님을 도와드리기 위해서이지, 댁들이랑 내 뜻이
똑같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기분 더러우니까.」
「아, 알지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푸십시오. 제가 무슨 뜻으로
말씀드린 건지 실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간드러지게 비위를 맞추는 인하가 기막히기도 하고 어쩐지
거부반응을 일으켜서, 준상은 마뜩찮은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썰렁해지는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인하는 서둘러 직원을 불러다 식사를 주문한다. 잠시 후 갖가지 맛깔스런
음식들이 푸짐하게 식탁 위를 수놓고, 인하는 너스레를 떨며 준상에게 어서 수저를
들라 권한다. 고가(高價)인 만큼 여간해선 맛 볼 수 없는 음식들이 번갈아 입안으로
들어오지만, 준상은 흡사 서걱거리는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신다. 인하는 왜 그렇게 식사를 못 하시냐는 둥,
어디가 편찮으신 건 아니냐는 둥 염려를 마지않다가 갑자기 말허리를 자르는
준상 때문에 멈칫 입을 다문다.
「계획을 약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중한 준상의 목소리에 인하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저희 회장님께서 어젯밤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병원에 더 계셔야할 것 같습니다.」
「아이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기야 이 회장님께서 몸이 축나실 만도 하지요.」
「장 이사님 출국 금지는 언제 내려진 겁니까?」
뜬금없이 주혁과 혁수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 준상의 질문에 인하는 잠깐 움찔하더니
이내 여유 있고 넉넉한 웃음을 되찾으며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대꾸한다.
「아, 그거 말씀입니까? 한 달 전인가요… 하하, 저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요새는 정말 하루하루 기억력이 틀려진다니까요. 왜요, 그것 때문에 이 회장님
걱정이 크신 모양이죠?」
「병원에 입원까지 하신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이런, 본의 아니게 짐을 얹어 드려서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실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야 검사님 가정사이니까 제가 관여할 부분은 아닙니다만, 저희 회장님께서
워낙 신경을 쓰고 계셔서 말입니다. 협상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겁니까?」
「협상이라뇨? 이 회장님이 협상을 하겠다고 하셨습니까?」
「아니오, 그건 아닙니다. 단지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는지, 여쭤보는 것뿐입니다.」
「방금 말씀하셨듯이 그 부분은 제 사적인 문제입니다. 실장님과 그 얘긴 더 이상
주고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계획을 어떻게 수정하실 건지, 그거나 말씀해 보시죠.」
인자한 웃음기가 감돌던 인하의 낯이 별안간 돌덩이처럼 딱딱해지면서, 준상으로
하여금 주혁과 혁수의 밀입국 문제를 더는 거론치 못하도록 봉쇄해 버린다.
준상 역시 모든 관심은 그들이 아닌 오직 재준에게만 향해 있는 탓에, 선선히
인하의 말을 수락한다.
「오늘 저녁에 제가 회장님께 보고를 올릴 겁니다. 도련님을 회장님 자택에 계시도록
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말씀드리면, 아마 보안이 철저한 큰 호텔로 옮기라고
지시를 하실 겁니다.」
「그럼 만날 장소만 변경되는 겁니까?」
「네. 시간은 전과 동일합니다. 내일 밤 9시. 장소는 오늘밤에 제가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조 회장한테 내일 아침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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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whitewhyuk님: 으하하;; 쫌있으면 결혼 2주년이라니까요- 왜 애 안 낳느냐고 시댁과
친정의 등쌀이 이만저만 아닙니다ㅠㅠ;;
ㅁhyukabbo님: 반갑습니다~^O^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니, 마음 찔려하시지
마세요 ^^;; 그래도 일케 감상 남겨주시니까 더욱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주 뵈어요^^*
ㅁcy2id님: 하하하;;(님의 웃음 따라쟁이-_-^) 흥분 가라앉히시고;; 저도 우리 아버지가
저러지 않으신다는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ㅋㅋ (웃음이 나오냐고요? ㅠㅠ;;)
ㅁ준타열희님: 넵. 곧 결판이 납니다^^;; 글구 재차 말씀드리지만 인하는 주혁이 친아버지
맞아요;; 때론 친부모가 생판 남보다 더 못할 때도 있거든요;; 누구 말대로 차라리 남이면
뭘하든 신경 안쓰고 괴롭히진 않으니까요;;
ㅁ아가혁수7님: 하하^^;; 감사합니다, 결혼기념일 축하해주셔셔;; 정말 님께서 소설 속으로
들어가실 수 있다면야, 인하는 뼈도 못 추리겠죠. ㅋㅋ
ㅁinmylove님: 인하씨 바보멍게해삼말미잘 =ㅅ=.. 치질이나걸려라 ㅠㅠ <- 아니, 이렇게
심한 욕을...-_-;; 치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데;;(글타구 제가 걸려봤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오해마십시오.-_-^)
[원랑] 오르가즘 - 216
by 원랑 in '리얼톤혁'
똑똑 문 너머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재준은 당연히 준상이겠거니 생각하며 아무
응대를 하지 않는다. 철커덕 문이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의
예상대로 암회색 정장 차림의 준상이 꾸벅 인사를 한다.
「어, 그래. 수고 많았다.」
「아닙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 장 검사가 뭐라고 해? 주혁이 형 출국 금지된 얘기 꺼내봤어?」
「예. 말은 해봤는데 전혀 협상할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얘기 나오자마자 자기
가정사에 신경 끊으라면서 안색을 싹 바꾸더라고요.」
「출국 금지가 언제 내려졌대?」
「그것도 확실히 말을 안 해줍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라 얘기를 끌어내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더 캐물으면 안 좋을 것 같아서 대충 마무리하고 일찍
나왔습니다. 역시 회장님께서 직접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뚜렷한 성과물을 내어 보일 수 없어 준상은 자못 송구스러워 하지만, 재준은 이렇다
할 질책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얘기를 듣고만 있다. 설익은 침묵을 방치해두기
민망해서 준상은 얼른 다시 입술을 뗀다.
「도련님께서는 오셨다 가셨습니까?」
「응. 지금 네가 이러고 있을 때냐고 얼마나 악악거리는지. 당장 퇴원하자는 걸
네 생각해서 겨우 말렸다.」
악악거리다니. 당장 퇴원하라고 성화를 부렸다니. 준상은 강태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섭섭함을 넘어선 미움의 감정을 느낀다. 누구 때문에 나의 보스가 이토록 곤경에
빠졌는데, 누구 때문에 보스가 내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거론할 정도로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나 있는데… 병상에 쓰러져 있는 그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사랑? 이제 내 눈엔 그게 사랑으로 보이지 않아. 철모르고 배만 부른 애송이의
눈 먼 욕심으로 밖에 보이질 않아. 보스의 인생엔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많은데.
「도련님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싸늘하게 냉각되는 낯빛을 미처 위장하지 못한 채 준상은 뻣뻣한 음성을 여과 없이
쏟아 놓는다. 재준은 무언의 응낙으로 준상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아까는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아무리 며칠 동안이라지만
제가 도련님을 보좌하기엔 시간도 그렇고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장 이사님께서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막상 이사님께서도 회장님을
도와 일을 처리하시려면 바쁘실 거고 또 출국 문제도 어떻게 꼬일지 알 수 없으시니…
그렇다고 해서 도련님을 혼자 계시게 하기엔 회장님 자택은 저 쪽에 너무 많이 노출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차라리 도련님을 회장님 퇴원하시기 전까지만
안전한 호텔에 계시도록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호텔? 넌 혜련이가 그렇게 당한 걸 보고도 호텔 얘기가 나오냐?」
재준은 단박에 양미간을 구기며 의혹에 찬 반문을 날리지만 준상의 표정은 균형을
잃지 않는다. 그는 자세를 더욱 반듯하게 고쳐 앉으며 다시 신중하게 혀를 놀린다.
「그 여자야 조문환 그 새끼가 죽이려고 아예 작정하고 데려간 건데 어쩔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희가 미리 예상을 못했다는 게 문제였지요. 보안만 철저하게
한다면 큰 호텔처럼 안전한 장소도 없습니다. 일단 출입 절차가 굉장히 까다롭기
때문에 함부로 아무나 드나들 수가 없을뿐더러, 그 쪽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
이름으로 투숙하면 눈치 채일 확률은 제로입니다. 저와 회장님 외엔 모르는
사람 이름으로 체크인하면 저희 내부에서 정보가 샐 일도 없지 않습니까.」
마지막 문장을 숨 돌릴 틈도 없이 후닥닥 뱉어내면서, 준상은 섬뜩하게 등줄기를
훑고 내려가는 땀방울의 찝찌름한 감촉에 슬쩍 진저리를 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배신자의 오명을 자진하여 뒤집어쓰고 있다. '보스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목 하에.
재준은 준상의 충정을 0.01%조차 의심하지 않는다. 그 무구하고 열렬하던 충성심에도
금이 갈 수 있으리란 상상은, 청명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치부하는 듯 하다.
「조문환이나 장 검사가 전혀 눈치 챌 수 없는 사람?」
「네. 그리고 저희 일에 누구보다 협조적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겠지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내 주변엔 죄다 깡패들뿐인데. 너도 알겠지만 밑의 애들이
이런 일에 나설 리도 없고. 다들 강태가 없어지길 바라고들 있잖아.」
「태현 형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붙임성 강하고 활달한 성격이 서로 꼭 닮은꼴이었기에, 태현과 준상은 처음 대면한
그 순간부터 호형호제하며 스스럼없이 어울려 온 사이다. 재준의 낯이 히뜩 기울어지며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표정으로 준상을 돌아본다.
「태현 형님이라면 저 쪽에서 눈치 챌 수 없을 겁니다. 회장님께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기 때문에 얼마 동안 도련님을 형님 댁에 계시게 한 것 아니십니까.」
「형이야 당연히 자기 일처럼 나서주겠지만, 자칫하다 형까지 피해를 보면…」
「형님께선 맨 처음에 도련님을 데리고 같이 투숙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바로 호텔에서 나오시면 되고요. 그럼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태현
형님께선 알리바이가 확실하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를 입진 않으십니다.」
만약의 가능성까지 꼼꼼하게 점쳐둔 준상의 계획에, 재준은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무릎을 치며 탄복한다. 충성스럽기만 할 뿐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한 부하를 두었다는
든든함에 재준은 새삼 으쓱해진다.
「그럼 내일 밤에 바로 이동시킬래? 호텔은 어디로 할지 생각해뒀어?」
「예. 아무래도 H 호텔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본사에서도 제일 가깝고요.」
「알았어, 그렇게 해. 태현 형이랑 강태한테는 내가 얘기해 둘게.」
「네. 그럼 저는 본사로 가서 간부들이랑 잠깐 미팅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아냐, 다시 올 거 없어. 그냥 전화로 보고하고 들어가 쉬어.」
「아닙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자신은 편안히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데 불철주야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그가 안쓰럽고
대견해서, 재준은 얼른 귀가하여 휴식을 취하라 권하지만 준상은 완강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씩씩하게 병실을 나선다. 어느덧 밤은 이슥하게 깊어져 있다.
슬슬 열이 오르며 지끈지끈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재준은 길쭉한 손가락으로 휴대폰의 단축다이얼을 누른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짱짱한 태현의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뚫고 침입한다.
「어, 나야! 어떻게 됐어?!」
다짜고짜 생뚱맞게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오는 태현이 우스워서 재준은 픽 실소를
흘린다. 누구보다 예민한 청각을 지닌 태현이 그 웃음소리를 그냥 간과할 리가 없다.
「웃어? 웃음이 나오냐? 하여튼 강심장이야.」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나 입원했다. 어쩔래?」
「뭐, 입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음색까지 곁들여서 이야기하는 재준과 대조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익살꾼 태현은 경기를 일으킬 태세다. 계속 농담처럼 받아쳤다가는
또 흐드러지게 욕을 퍼부어 댈 것이 뻔하므로, 재준은 그쯤에서 목소리를 원래대로
바꾼다.
「쪽팔리게 폐렴이란다. 담배도 못 피우고, 병신처럼 가만히 누워 있어야 돼.
그것도 일주일씩이나.」
「하여튼 내가 너 때문에 진짜…!」
태현은 기가 차서 무언가 잔소리를 쏘아대려고 잔뜩 숨을 들이마시는데, 신비한 약처럼
그의 입을 꽉 막아버리는 재준의 묵직한 음성이 한 박자 빨랐다.
「형이 무슨 말하려고 하는지 다 아니까 관두고, 부탁할 게 하나 있어.」
웬만해서는 재준이 자신에게 '부탁'이란 단어를 쓰지 않기에, 태현은 자동적으로
긴장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쫑긋 재준의 말에 귀 기울인다.
「내가 입원하는 바람에 준상이가 강태한테만 붙어있을 수가 없어. 주혁이 형도
지금 제정신 아니고. 그래서 당분간 나 퇴원할 때까진 강태를 좀 더 안전한데
데려다놓으려고. 우리 집은 저 쪽에 노출이 다 되어있는 상태라서.」
「그러게 우리 집에 계속 두라니까! 그럼 다시 나랑 같이 있으면 되겠네.」
「아냐. 형 집은 본사에서 왔다 갔다 하기 너무 애매한 위치야. 준상이가 수시로
들락거려야 하는데 불편해. 사람들 눈도 있고. 차라리 완전히 개방된 장소가
오히려 안전하거든. 그래서 H 호텔에 있게 하려고.」
「내가 뭘 해주면 되는데?」
한 마디 질문이나 반대 의견 없이 너무도 간단하고 쉽게 딸려 나오는 태현의 승낙에,
도리어 무색해지는 쪽은 재준이다. 재준은 뜻도 모르는 두툼한 전문서적을 글자
그대로 낭독하기만 하는 것처럼, 맹맹한 음색으로 태현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설명한다.
재준의 말을 다 듣고 난 태현은 겨우 그런 부탁이었냐는 듯 김빠진 투로 대꾸한다.
「난 또 무슨 대단한 일이나 시키는 줄 알았네. 내일 시간 비워놓을 테니까 확실하게
약속 정해지면 다시 전화해.」
― 재준의 문병을 다녀온 뒤 강태는 오후 내내 몇 달 동안숙면을 취하지 못한 사람처럼
줄곧 잠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는 스트레스를 잠으로 푸는 좋지 못한 버릇이 있다.
게슴츠레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벌써 사방이 깜깜하다.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니 7시가 훌쩍 지나 버렸다. 겹겹이 쌓인 시름 가운데에도 배고픔을 느끼는
신경 중추만은 멀쩡한지, 위장에서 영양분을 공급해달라는 아우성에 강태는 피식
헛웃음을 웃는다. 거실에는 여느 때처럼 단정한 모습의 혁수가 TV를 틀어놓은 채
창 밖 풍경에만 눈길을 두고 있다. 강태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 버리자, 혁수는
그제야 강태의 기척을 감지하곤 맥쩍게 생긋 웃어 보인다.
「일어났네. 배 안 고파?」
언제 들어도 다정하고 자상한 음성이다. 그 역시 고민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 그늘져
있지만 따스하고 포근한 미소를 보내는 혁수 덕분에 강태는 무거웠던 머리가 조금은
가뿐해지는 듯 하다.
「배고파. 근데 주혁이 형은?」
「간부들끼리 회의 있다고 김 실장님이랑 같이 나갔어.」
「그래? 근데 형은 왜 안 갔어?」
「내가 거길 왜 가. 그리고 너 집에 혼자 두기도 뭐해서.」
「그렇구나. 형도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응. 우리 나가서 뭐 맛있는 거 먹을까? 이럴 때일수록 잘 먹고 기운 내야지.」
애써 명랑하게 지절대는 혁수에게, 그러나 강태는 시무룩이 꺼져든 낯을 들이밀 수
밖에 없다.
「나 충의회 사람 없이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 알잖아.」
혁수는 그새 그의 처지를 망각해버린 자신의 부주의함에 속으로 가슴을 친다.
무슨 말로 강태를 위로해야 할지 황망해하는 그에게 강태는 고즈넉한 미소에다가
어설픈 장난기를 첨가시켜 대답한다.
「그래도 뭐, 형이 날 지켜줄 자신이 있다면 용감하게 나가도록 하지.」
별반 우습지도 않은 농담이지만 이 기회를 빌려 실성한 사람 마냥 미친 듯이
웃어보고 싶은데, 도저히 처진 입 꼬리를 끌어올릴 수가 없다. 웃는 것조차
이젠 힘에 부친다. 덕분에 둘 사이의 분위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을씨년스런 적막으로 가득 메워진다. 다행스럽게도 그 순간 요란스레
전화벨이 울려대며 견고한 침묵을 수월히 와해시켜주자, 혁수는 잰걸음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고 강태를 바꿔달라는 재준의 요청에 수화기를 그에게로 넘긴다.
「여보세요.」
「나야. 내일 밤에 숙소를 옮길 거니까 미리 짐 싸놓고 있어. 준상이랑 얘기해봤는데,
아무래도 너 거기 두기엔 불안해. 나 퇴원할 때까지만 H 호텔에서 지내라.」
「……알았어.」
왜 또 번거롭게 그래야 하나, 위험해도 상관없으니 너랑 같이 집에 있을 거다,
바락바락 우겨대며 고집을 피울 줄 알았던 강태가 의외로 너무 순순히 OK 사인을
던져주자, 재준은 다음에 무슨 말을 이어대야 할지 난감해진다. 그래서 결국
잘 자라는 판에 박힌 밤 인사만을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린다. 강태 또한 태연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지만, 모카빛 뺨 위로 굴러 내리는 눈물만은 멀찍이 떨어져 선
혁수에게조차 숨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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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cy2id님: 6명이라면...저도 끼워주시는 겁니까? ^^;;;;(또 주책모드 발동-_-^)
ㅁwhitewhyuk님: 아하하^^;; 저는 이거 완결내면 진짜 울거 같은데 ㅠㅠ;; 그래도 빨리
완결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ㅁ<;;
ㅁ준타열희님: 무식한 고집쟁이^^;; 표현력 독특하십니다 ^^;; 글구 준상씨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세요ㅠㅠ 걔도 얼마나 막다른 골목에 밀렸으면 저러겠어요ㅠㅠ
(작가가 나서서 등장인물을 두둔하고 있음 -_-;;)
ㅁinmylove님: 단언코, 절대로, 없습니다 >ㅁ (왠지 지나치게 변명을 하는 태도가 더욱 수상쩍다고요? -_-;; 진짜 아닌데 -ㅁ-)
ㅁ아가혁수7님: 원래 학교란 놀러가는 곳이지요 ㅋㅋ 어쩌다 한번 공부해주면 되는 것을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남에게도 강요하는-_-;;)
ㅁorange걸님: 겨울의 눈속 신부, 좋지요 >ㅁ< 근데 저도 따뜻한 봄날에 한건 아니어요 ㅋ
더운 나라 가서 결혼식을 하고 왔기 땜시롱;; 에어콘 빵빵 틀어놓고 했지요 ^^;;
님께서 히터 빵빵 틀어놓고 결혼하실 때 저도 불러주십시오. 캬캬캬;;
글구 남편 얘기는 조만간 꼭 ㅠㅠ;;
[원랑] 오르가즘 - 217
by 원랑 in '리얼톤혁'
차량들로 북적대는 도로에 갇혀 정숙을 태운 택시는 지지부진 속도를 내지 못한다.
지금 같은 정신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다간 십중팔구 사고를 낼 것 같아서, 멀쩡한
자동차를 집 차고에 얌전히 모셔두고 택시를 잡아탄 그녀였다. 기사는 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길이 막히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며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지만, 정숙의
귓가엔 한 글자도 제대로 와 닿지 않는다. 공들여 다듬은 손톱 끝이 여린 살갗에
생채기를 낼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앉아 있다. 평소엔 그렇게도 심했던 차멀미 증세가 이 순간은 거짓말처럼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를 메스껍고 구역질나게 하는 것은 바늘 귀 만큼도
의심치 않았던 아들의 배신이다. 더없이 순종적이고 천사 같았던 아들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깜찍하게 자신의 속여 왔다는 사실. 끔찍해서 차마 현실로 받아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증거를 갖다 붙여도 그녀는
이 사실을 인정할 마음이 없다. 혁수의 입을 통해 듣기 전까진 절대 아무 것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거듭 도리질을 치지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은
여전하다. 혁수와 연락이 두절된 지 이틀째가 되자, 정숙은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맡기고 기다려라 당부하던 남편을 끈질기게 졸라대어 결국 재준의 집 위치를 알아냈다.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 벌떡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 머리를 싸매고
침대에 누워만 있던 그녀는, 겨우 몸을 추슬러 집을 나섰다. 이젠 식구처럼 가까워진
가정부가 극구 정숙을 만류했지만 남편이 모든 사태를 해결해 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기엔 아들을 향한 그녀의 집착이 너무 강했다. 어디든 찾아가서
아들을 제 손으로 다시 데려와야 했다.
「손님, 다 왔습니다.」
기사의 알림에 정숙은 화들짝 놀라 차창 밖을 내다본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야트막한
단층 건물들 여러 개가 밀집해 있는 빌라 단지 입구에 택시가 멈춰서 있다. 한 눈에
척 보아도 부촌(富村)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정숙은 요금을 지불한 다음 천천히
차에서 내려선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가하며 한 발짝씩 떼어놓는다.
두 뺨을 후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차갑기만 한데 정숙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서 손수건을 꺼내든다. 종이쪽지에 적어둔 주소를 찾아 걸음을 옮긴 그녀는
커다란 유리문 앞에 당도한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통과할 수 있는 보안 시스템이
왼쪽에 장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정숙은 잠시 고민에 잠긴다. 혁수에게 다시
전화를 해볼까. 그러나 꺼져 있을 게 분명하다. 난감해하던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손을 뻗어 유리문을 슬쩍 밀어본다. 의외로 문은 쉽사리 틈을 벌려주고,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듯 황망히 안으로 들어선다. 쪽지에 적힌 호수대로라면
재준의 집은 3층이다. 계단을 오르는 구두 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자
정숙의 불안과 긴장감은 한층 배가된다. 회백색 철문 앞에 서서도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초인종을 누른다. 몇 초 뒤, 스피커를 통하여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생소한 목소리다.
「누구십니까.」
「……나 혁수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 우리 혁수 여기 있죠?」
경계심과 방어 태세로 무장한 목소리는 한동안 아무런 답신이 없다. 정숙의 입술이
바싹 말라 뻣뻣해졌을 때 즈음, 자물쇠 따는 소리가 들리더니 굳건히 닫혀 있던
철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그리고 겨우 이틀 사이에 눈에 띄게 여윈 혁수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 뒤에는 혁수 또래로 보이는 매서운 인상의 남자가 서 있다.
「혁수야!」
단말마적으로 아들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정숙은 더 주저하지 않고 그를 와락
끌어안는다. 끈끈하게 자신을 결박한 어머니의 손아귀를 풀어내며 혁수는 그녀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곁에 서 있던 준상은 정중히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올리지만, 정숙은 본체만체 한다. 혁수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부랴부랴 살핀
다음, 그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주혁의 모습을 찾는다.
「그 놈 어디 있어? 그 놈 어디 있냐고?!」
「엄마, 제발 진정하고 제 말부터 들어보세요.」
「긴 말 들을 거 없어! 그 놈 오라고 해. 당장 나오라고 해!」
「엄마…」
형편없이 수척해져 버린 아들의 얼굴을 대하자, 그녀는 세상 그 무엇도 거칠 것이 없는 듯
용기백배하여 서슬이 퍼렇게 고함을 질러댄다. 사랑하는 아들을 망치려는 자, 인생의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려는 자, 모든 책임을 그녀는 장주혁에게 결부시킨다.
혁수는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던 어머니와의 대면이 너무 일찍 닥쳐와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엄마’두 글자만 연속적으로 뱉어낸다. 침실에 홀로 있던 강태도 바깥에서
전해져오는 소란스러운 기척에 의아하여 거실로 나왔다가, 정숙을 발견하곤 당황하는
표정이 된다. 일일이 캐묻지 않아도 이건 딱 짐작이 가는 상황이다.
「혁수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우리 혁수가 왜 여기 있어? 얼른 가자! 엄마랑 같이
얼른 집에 가자. 이제 엄마 왔으니까 됐어. 걱정하지 말고 엄마랑 가자, 응?」
이젠 아예 노골적으로 예닐곱 살 된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하며 정숙은 혁수의 뺨을
쓰다듬는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부지런히 뇌까린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들이
그럴 리가. 내 아들이 내 등에 칼을 꽂을 리가. 모든 것은 나와 내 아들을 망가뜨리려
작심한 그 자의 소행이다. 순진하고 물정 모르는 내 아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휘둘리고 있는 거다.
「혁수야, 가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엄마랑 가면 돼, 지금. 얼른!」
정숙은 다급하게, 막무가내로 아들의 손목을 잡아끌지만 혁수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호하게 어머니의 손에 잡힌 팔목을 빼낸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눈물 글썽이던
그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갈하고 잔잔하다. 또 다시 우악스레 밀려드는
흉한 느낌에 정숙의 낯은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혁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리며
애써 차갑고 건조한 음성을 꾸며낸다.
「엄마, 전 안 가요.」
자신의 청각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며 정숙은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엄하게 나무란다. 그러나 혁수는 공고하게 정지된 눈동자를 내세워 무자비하게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맞아요, 그동안 엄마 아버지 속여 왔어요. 엄마가 들으면 기함을 하실 정도로
감쪽같이 속여 왔어요. 제가 그랬어요.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협박에
못 이겨 그런 것도 아니고, 제가 제 스스로 그랬어요.」
「혁수야, 왜 그러는 거야… 왜 자꾸 엄마한테 거짓말하는 거야… 응?」
「거짓말 아니에요. 저는 엄마랑 같이 안 가요. 엄마 아빠께서 저희를 받아들이실
수 없다면, 저도 주혁이랑 같이 여기 있을 거예요.」
「혁수야!」
「…죄송해요, 엄마.」
애끓는 어머니의 부름에도 혁수는 고개를 숙인 채‘죄송하다’는 말만 덧붙인다.
더 이상 설득을 당할 마음도, 재고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다는 확고한 의사 표현이다.
곱게 화장을 덧씌운 정숙의 얼굴은 핏기를 잃으며 새파랗게 질린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백이 툭 바닥으로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그녀는 철퍼덕 주저앉고 만다.
묵묵히 상황을 관전하기만 하던 준상과 강태가 흠칫 놀라며 그녀를 부액하려 하지만
정숙은 완강히 그들의 손길을 뿌리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킨 그녀는
갑자기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아들의 어깨에 매달린다.
「네가 어떻게… 혁수 네가 어떻게 나한테…! 어떻게 네가 엄마한테…」
한 문장도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며 정숙은 패악에
가까운 흐느낌을 토해낸다. 혁수의 몸도 그녀를 따라 거세게 요동친다. 제 가슴을
치던 주먹으로 이젠 혁수를 두들기며 정숙은 정성스레 단장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채 포학을 부린다.
「네가 엄마한테 이럴 수가 있어? 엄마가 너 하나만 보고 사는 거 알면서! 너 하나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내가 그 멸시를 당하면서…! 그 손가락질을 다 참아가면서
나이 사십 넘어서 재혼까지 하고…! 정 하나 없는 남편 비위 맞춰가면서도 엄마는
너 하나만 생각하고 지금까지 싫은 내색 한번 안 했어! 근데 어쩜 혁수 네가 그런
말을… 뭐? 주혁이랑 같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당하고도 그 놈 이름이 네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거야?! 그 놈 때문에 요양소까지 갔다 왔으면서 아직도…!」
「주혁이 때문이요? 그게 어떻게 주혁이 때문이에요? 주혁이가 저를 거기 집어넣었어요?
아니면, 제가 주혁이 잊고 치료받으려고 제 발로 거기 기어들어간 거예요?!」
왁살스런 어머니의 행패를 저항하는 시늉조차 없이 몽땅 감내하고만 있던 혁수가 돌연
목청을 돋우며 그녀를 밀쳐낸다. 정숙은 힘 한번 못 쓰고 그에게서 떨려나온다.
「제가 그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엄마는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엄마 얼굴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그 때 엄마가 흘리시는 눈물까지도 전부 더럽게만
보였다고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신에게 이토록 극단적인 언사를 사용한 적이 없던 혁수인지라,
정숙의 충격과 공포는 최고조에 이른다. 성대가 마음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그녀는
심각한 언어 장애를 앓는 사람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외마디 신음만 새어 보낸다.
혁수 역시 감정에 치받쳐 함부로 뱉어낸 자신의 말에 경악하여 멈칫 입을 다문다.
준상과 강태는 도저히 끼어들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어서 멍하니 두 모자를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가시 돋친 침묵이 휑한 거실 안을 맴돌다가 애원조로 돌변한 혁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저만치 후미진 구석으로 처박힌다.
「엄마가 얼마나 절 사랑하시는지, 잘 알아요. 저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오셨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래서 너무 죄송스러워요. 엄마 가슴에 이렇게 대못 박고 있는 제 자신이
저도 너무 밉고…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아들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엄마 실망시켜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이를 악물고 사수해오던 혁수의 눈물샘이 결국 빈약한 실체를 노출하며 허물어져
내린다. 뚝뚝 응어리져 낙하하는 이슬방울과 함께 그의 무릎이 단단한 바닥과
맞닿는다. 쇠약한 노파처럼 허리를 구부정히 기울인 채 위태롭게 서 있는 어머니
앞에서, 혁수는 어느 때보다 겸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부복한다.
「하지만 엄마,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제가 일평생 불행하게 살 순 없는
거잖아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제 인생을 포기할 순 없잖아요.
주혁이가 없으면 저는… 주혁이가 없으면 저는… 그럼 저는 죽어요, 엄마.」
혁수의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피가 배어나도록 아랫입술을 짓씹은 채 구겨져 있던
정숙의 얼굴이 표정을 상실한다. 황량하게 비워졌던 눈망울엔 슬픔과 탄식 대신
애증과 집념이 자리 잡는다. 표독스럽게 불거져 오르는 어머니의 낯을 대하자
혁수는 비로소 절감한다. 이것이 그녀와의 끝일지도 모르겠다고.
「엄마, 제발 제가 엄마랑 주혁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만들지 말아주세요.
저는 주혁이 없으면 죽으니까… 제발 이번 한번만 엄마가 저희 좀 봐주세요.
제발 저희 용서해주시고 아빠 좀 설득시켜 주세요. 용서가 안 되시겠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엄마 아들이 이렇게 빌잖아요. 제발 아빠 좀 설득시켜 주시고
주혁이랑 저, 받아주세요. 저희가 엄마 아빠 속이고 도망치려 했던 거, 정말로
잘못했어요. 받아주실 때까지 빌고 또 빌었어야 했는데, 비겁하게 속이고 도망가려
했던 거 정말 죄송해요. 엄마 아버지가 저희 받아만 주신다면 정말 잘 할 거예요.
정말로 엄마 아버지가 원하시는 좋은 아들들이 되도록 노력할 거예요. 다른 변명
안 할게요. 저희 받아만 주세요, 엄마…」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봐 주겠지, 이렇게까지 처절한 간청을 설마 단칼에 자르지는
못하시겠지, 혁수는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을 악착스럽게 움켜쥔다. 그러나 그의
귓전을 파고드는 정숙의 음색은 냉혹하고 야멸치다.
「선택해. 엄마랑 주혁이, 둘 중에 선택해. 엄마는 너랑 주혁이 둘 다 받아들일 순
없어. 네가 주혁이를 버리고 엄마한테 오던가, 아니면 엄말 버리고 그 놈한테 가던가.
너 지금 엄마랑 같이 안 가면, 엄만 다시 네 얼굴 안 봐. 나도 이젠 지쳤어.」
「엄마!」
「선택해, 지금 당장. 엄마랑 같이 갈 거야, 아님 여기서 주혁이랑 있을 거야?」
하늘의 뜻이 아니면 끊어지지 않는다는 천륜의 끈이 이리도 허술하단 말인가.
온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고통 속에 낳아 기른 자신의 분신을, 어쩌면 이렇게
쉽사리…. 우습다, 안혁수. 배신을 칼을 먼저 겨눈 쪽은 바로 너야. 그녀가
너를 버린다고 말하지 마. 너는 배반의 칼로 천륜의 끈을 끊고 장주혁의 품에
안긴 거야. 죽을 때까지 너는 죄인이야.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아야. 그 지독한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장주혁 품에서 행복하게 웃겠지. 넌 그에게 미친 정신병자니까.
「……죄송해요. 엄마가 저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이해해요. 엄마 말씀대로라면,
전 지금 엄마를 버리고 있는 거니까요.」
혁수의 음성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조용히 울려 퍼지자, 정숙의 낯은 핼쑥하게 무너져
내리고 강태는 몇 달 전 누나와 마지막 전화 통화를 하며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았던
자신이 생각나 쓸쓸히 고개를 떨어뜨린다. 준상은 어이가 없고 기가 차다는 듯 비뚜름히
찌그러진 눈으로 혁수를 응시한다. 아무리 사랑에 환장을 했다지만, 어머니의 비통한
부르짖음을 저토록 매정하게 외면하다니…. 황당해하는 준상에 아랑곳없이 혁수의
목소리는 더욱 싸늘해져 있다.
「조심해서 가세요, 엄마. 그리고… 건강하세요.」
― 자잘한 소음까지 완벽하게 차단된 고요한 병실 안에서 재준과 주혁은 각자
딴 곳을 바라본 채 마주앉아 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까만 밤하늘에 고정시키고
있던 시선을 주혁에게로 옮겨 박으며, 재준은 특유의 밋밋한 음성을 울려낸다.
「막막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감도 안 잡히고. 형 마음 알아.」
주혁은 쓸쓸하게 미소 짓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가 없다. 하기야, 이미 자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 이야기하는 상대에게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근데 내가 저번에 한 말, 괜히 해본 소리 아냐. 진짜 걱정할 것 없어. 며칠만
기다리면 돼. 그럼 형이 꿈꾸던 대로, 그렇게 살 수 있어.」
안연히 보장된 미래를 거듭 강조하는 재준의 단언에 주혁은 아픈 그를 괴롭히지
않으려 잠시 구석으로 제쳐두었던 질문을 꺼내고야 만다.
「재준아, 난 솔직히 그 말…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불안해.」
「무슨 뜻인지 왜 몰라? 말 그대로야. 내가 뭐 어려운 말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한테도 말해줄 수 없어?」
주혁은 머리를 갸웃이 기울이며 부드럽고 은근하게 재준의 심중을 떠 본다.
그러나 재준은 의미 모를 웃음으로 무응답을 고수한 채 엉뚱한 반문을 날린다.
「형, 아버지가 밉지 않아? 나 같으면 죽이고 싶을 것 같아.」
저의를 가늠하기 힘든 재준의 물음에 주혁은 이번에도 청맹과니처럼 눈동자만
굴리고 있다. 재준의 얼굴에 걸린 오묘한 웃음은 그 색깔이 더 짙어진다.
「내가 만약 형이라면 아버지고 뭐고, 다 싹 쓸어버렸을 거야. 그런 다음에 가뿐한
마음으로 새 출발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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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218
by 원랑 in '리얼톤혁'
아침 이른 시각임에도 호텔 앞은 여러 대의 고급 차들이 들락날락하느라 분주하다.
문환과 그의 부하 둘을 태운 검은 세단이 출입문 앞에 멈춰서고,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직원이 달려 나와 예의 바르게 문을 열어준다. 문환은 잊지 않고 두둑한
팁을 건넨 다음,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를 올리는 그를 지나쳐 부하들을 꽁무니에
달고 프런트로 향한다. 마네킹처럼 꼿꼿이 서 있던 여직원은 친절한 미소로 그를
반긴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예. 하루만 묵었다 가려고 하는데요. 조용한 방으로 한 군데 골라주시죠.」
「아,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컴퓨터를 두들겨보던 여직원은 뒤쪽 벽면에 무수히 꽂혀 있던 열쇠 대용 카드
중 하나를 문환에게 내민다. 카드엔 큼지막하게 813 이라고 쓰여 있다. 번거로운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쳐 체크인을 완료한 후, 문환은 훤칠하게 키가 큰 호텔 보이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복도에는 갖가지 인종의 외국인들이 제각각 자기
나라말로 떠들며 지나다닌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문환은 안내해 준 보이에게도
지폐 몇 장을 찔러주고, 직원은 꾸벅 절을 한 다음 편히 쉬시라는 한 마디를
남긴 채 뒤돌아 나간다. 문환의 부하들은 그가 앉으라는 허락을 내리지 않았기에
목석처럼 멀뚱히 서 있다. 문환은 그들에게 편안히 있으라는 손짓을 해 보이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안녕하십니까, 검사님. 조문환입니다.」
[아, 조 회장! 안 그래도 전화 기다리던 참이었어요. 어떻게, 체크인은 하셨습니까?」
더없이 반가워하는 인하의 음성이다. 문환은 야릇한 조소를 깨물며 대답한다.
「그럼요. 지금 막 방에 들어왔습니다. 김 실장님께 813호실이라고 전해주십시오.」
[역시 조 회장님, 일 처리 하나는 깔끔하십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전하지요.」
「별 말씀을요. 검사님께서 중간에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 신세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신세라니요, 조 회장이 날 도와주고 있는 건데 그런 말씀 마세요. 아무튼 기대가
큽니다. 오늘 중으로 결판이 난다니, 정말 기대가 되요. 그런데 조 회장,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말씀하십시오.」
[강태라는 그 놈 말입니다, 데려다가 어떻게 쓸 생각이십니까? 그 놈을 볼모로 해서
충의회를 넘겨받을 생각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조 회장도 그 놈한테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까?]
진지하게 물어오는 인하가 민망스러워 할 정도로, 문환은 호탕한 파안대소를 터뜨린다.
귀청을 뒤흔드는 웃음소리에 인하는 불현듯 멍청이가 된 느낌이다. 한참을 더
깔깔거리던 문환은 웃음의 흔적을 수습한 뒤에도 여전히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검사님께서 저를 그렇게 머리 빈 놈으로 생각하셨다면 이거 섭섭합니다. 마음이
있다니요? 저는 이재준 같은 풋내기가 아닙니다. 한 때 제가 강태를 귀여워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연애질에 시간낭비를 합니까? 제 목적은 검사님과
같습니다. 제가 검사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목적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는군요. 만에 하나, 강태가 다치거나 잘못 되면 일이 틀어집니다.
이재준은 어리고 단순해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돌아버릴지 모릅니다. 회장님의
개인적인 감정은 개입시키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프로답게 행동해주십시오.]
「이재준이 단순하다고요? 글쎄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검사님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강태는 이용가치가 높습니다. 이재준을
깔끔하게 처리하려면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어야 할 카드지요. 검사님께서 이 일로
인해 피해를 보시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염려 마시고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의혹과 근심을 접어두기 위해 발악하는 인하의 작태가 우스워서 문환의 입가엔
비틀린 조소가 떠나지 않는다. 낯빛과는 다르게 철석같이 굳고 미더운 말로
공범자를 안심시켜준 뒤, 문환은 여유 있게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며 시간을 확인한다. 작달막한 바늘이 숫자 8과 맞닿아 있다.
앞으로 13시간 후면 잃었던 다이아몬드가 다시 내 손에 들어온다. 괘씸하게
나를 조롱하며 달아나 버린 다이아몬드가 제 발로 나에게 돌아온다. 날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유혹적인 입술로 무슨 말을 지껄일까. 살려달라고
애원을 할까, 아님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앙칼지게 덤벼들까. 어느 쪽이든
배가 근질거리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지.
문환은 충만하게 들어차는 기대감에 몸을 솟구치며 13시간 후 펼쳐질 반전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간다. 주인공은 물론 자신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언제나 승리자다.
이재준, 잘 들어. 이젠 내가 즐길 차례야.
― 병원은 강태에게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장소다. 워낙 건강 체질이라 병원에
잘 와보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는 병원 특유의 쾨쾨한 악취를 병적으로 혐오한다.
코를 후벼 파는 포르말린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강태는 걸음을 빨리 한다.
그의 곁에는 단출한 짐을 들고 그를 호위하며 준상이 함께 걷고 있다. 잠금 장치를
풀고 병실 안으로 발을 디디자, 아직도 병색이 완연한 재준의 얼굴이 시야를 채운다.
강태는 눈으로만 그의 용태를 살핀 후 말을 아끼고, 준상은 입버릇처럼 몸은 좀
어떠시냐고 묻는다. 재준은 괜찮다는 흔한 대답 대신 묻고 싶은 말부터 뱉어낸다.
「지금 가는 거야? 태현 형은?」
「형님께서는 이미 호텔에 가 계십니다. 우르르 몰려가서 투숙하는 것보단
나중에 방문하는 형식으로 들어가는 게 의심을 덜 살 것 같아서 오늘 아침에
먼저 체크인 해놓으시라 전화 드렸습니다. 미리 보고 못 드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일리 있는 준상의 설명에 재준은 사과할 필요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잠시 바깥에 나가 있으라며 그를 물린다. 무뚝뚝한 재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강태의 손목을 잡아당긴다. 강태는 그와 마주보고 앉으면서도
일부러 재준의 눈동자를 피한다. 재준은 부드럽지만 강한 손길로 강태의 얼굴을
들어올린다. 흑연 같이 새까만 눈동자가 촉촉한 물기를 머금어 하얀 형광등 불빛을
퉁겨낸다. 유치한 표현 그대로, 별 같다. 그가 소유한 미(美)는 때론 감당하기
벅찰 만큼 찬연하다. 예쁘다는 수식어는 한참 모자라고, 아름답다는 표현조차
갖다 붙이기엔 초라한 어휘다. 완전함, 아니 지상에는 존재할 수 없을 듯한…
무슨 말을 써야 할까. 인간의 언어란 그 한계가 너무 여실해서, 너를 담아낼 만한
말이 없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이 진실을 형상화시킬 수 있는 도구가 아무것도
없어. 나의 죽음 밖에는.
「……사랑해.」
그럼에도 말해야겠어. 말하지 않으면 네가 전혀 모를 거 아냐.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이라도 알게 하려면 말해야지. 지금 말해줘야지. 너를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넌 나를 만난 게 후회된다고 했지만 난 그렇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건 딱 하나야.
잠깐 동안 너를 혼자 뒀던 거. 다시 돌아왔을 때, 말은 안 했지만 나 다짐했었어.
다신 내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내 꿈이 뭔지 알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는 말했었다. 너와의 결혼, 그것이 나에게 새로 생긴 꿈이야―
그리고 우리는 약속했었다. 첫 눈이 내리는 날, 그 꿈을 성사시키기로.
첫 눈은 벌써 몇 달 전에 온 세상을 뒤덮었지만 우리의 꿈은 아직 미완성이다.
혹독해지는 시련 속에서 우리의 꿈은 점점 남루해져 가고 있다.
「강태야, 나는 진짜…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할 줄은 몰랐거든? 나란 놈이 누군가를
이 정도로 좋아하게 될 줄은 진짜 몰랐거든? 너를 버리려고 그렇게 애써봤는데,
내가 죽겠더라.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네 빈자리 때문에 죽을 것 같더라. 그래서
그 자리에 딴 사람도 들여 봤는데, 내 입에선 계속 네 이름만 나오더라. 난 진짜…
강태야, 너 이거 알아야 된다? 내 이런 마음, 너 조금이라도 알아야 돼. 응?」
치솟는 흐느낌을 불식시키느라 재준의 음성은 우스꽝스럽게 굴곡 진다. 마론 인형처럼
뚱한 표정만을 내걸고 있던 강태는 구성진 눈물을 쏟아 부으며 재준의 품으로 무너진다.
그의 앞에서 절대 울지 않겠다고, 표독스럽게 신경질을 부려서 그 역시 자신과 같은
독기를 품게 하겠다던 결심은 봄 햇살 아래 눈발처럼 녹아 없어지고 만다.
재준의 가슴에 파묻혀 가녀린 팔로 그의 목을 칭칭 휘감은 채, 강태는 발음조차
정확히 되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달싹인다.
「가기 싫어, 재준아. 안 갈래, 나… 위험해도 네 집에 있을래. 나 혼자 있기
싫어, 정말. 안 가면 안 돼? 재준아, 나 안 가면 안돼?」
결국 한심하게 어리광을 부려대고 말았다. 사랑한다는 말, 그 성능 좋은 환각제가
강태를 대책 없는 떼쟁이로 바꿔놓는다. 재준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문다. ‘그냥 같이 죽어버릴까’라는 무책임하고 졸렬한 발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재준은 얼굴이 새빨개질 만큼 안간힘을 쓰며 강태를 보듬은
두 팔에 더 세찬 힘을 싣는다.
「조금만 참아, 강태야. 조금만… 조금만 견뎌 봐. 곧 괜찮아질 거야. 진짜로
곧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아주 조금만 더 견뎌보자, 강태야.」
목숨을 구걸하는 비천한 노예처럼 재준은 간곡히 애걸한다. 그로부터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는 쪽은 언제나 강태였는데, 이 순간 재준은 신파 영화에 등장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 콧물 짜내며 강태에게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통사정한다.
「그렇게 해 줄 거지, 강태야? 약속해. 그렇게 하겠다고.」
어리고 철없는 막내 동생 마냥 조르기까지 하는 재준이 납득되지 않아서 강태는
샐쭉하니 눈동자의 너비를 좁힌 채 물끄러미 그를 주시한다. 왜 오랫동안
못 볼 사람처럼 안달복달하는 걸까. 분명 퇴원할 때까지만 떨어져 있자고
얘기했는데.
「퇴원할 때까지만 혼자 있는 거지? 확실하지? 그 다음부턴 다시 같이 지내는 거야.」
강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이별의 유효기간을 재확인하려 든다.
그제야 재준은 얼굴색을 환히 밝히며 실로 오랜만에 투명한 함박웃음을 퍼뜨린다.
그리고 명랑하다 못해 촐싹촐싹 수선을 피워대며 강태의 마음에 드리운 의심의
안개를 걷어낸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조금만, 진짜 조금만 참자.
그렇게 할 거지? 약속하는 거다?」
「알았어. 대신 밥 잘 먹고 치료 착하게 잘 받아서 얼른 퇴원해야 돼. 너도 약속해.」
「그래, 약속할게. 최대한 빨리 데리러 갈게.」
강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후 육중한 추라도 매달린 듯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이킨다. 비상계단이 위치한 어두운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던 준상은 강태의 부름에 잰걸음으로 들어와 다시 재준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은다. 재준은 방금 전과는 사뭇 달리 직속 부하를 대하는 엄격한 보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조심, 또 조심해라. 특히 태현이 형한테 아무 피해 안 가도록 신경 써.」
「네, 걱정 마십시오. 다녀오겠습니다.」
재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강태에게로 눈길을 이동시킨다.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는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세포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다. 재준은 혀를 움직이는 대신
뜨거운 체온으로, 서툴지만 절실한 몸짓으로, 강태에게 고백한다. 사랑한다고.
― 리드미컬한 차체의 움직임에 몸을 내맡기고 강태는 우울한 상념에 젖어 있다.
낯선 곳으로의 도피,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강태에겐 이골이 난
일이기도 하다. 고층 빌딩의 위용을 자랑하는 특급 호텔 앞에 도착하자, 강태는
마뜩찮은 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과연 여기는 안전한 곳일까. 준상은 강태보다
앞장서 프런트로 다가가 상냥한 미소를 보내는 여직원에게 이야기한다.
「813호실 손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김준상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고객님. 확인해 보겠습니다.」
직원은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그녀가 준상의 이름을 대자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선선히 그의 출입을 승인해 준다. 계획대로 무사통과된 준상과
강태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한다. 호텔 보이가 짐을 들기 위해 그들에게로
다가오지만, 준상은 필요 없다는 표시로 고개를 내젓는다. 그런 준상의 행동을
강태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을 기울이기엔
그는 오만가지 생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이미 너무 지쳐 있다. 다만, 평소
같으면 이러쿵저러쿵 시답지 않은 얘깃거리를 동원하여 수다를 떨어댔을 준상이
오늘은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을 잠깐 할 뿐이다. 813이라 쓰여 진 팻말이 부착된
회갈색 문 앞에 이르자 준상은 정신을 가다듬고 손을 들어 노크를 한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물론 사전에 문환과 약속이 된 사항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주저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동시에 강태의
옷자락을 당겨 그를 방안으로 들어오게끔 한다. 강태의 눈에 비친 것은 친숙한
태현의 얼굴이 아닌, 문환과 그의 부하들이 버티고 서 있는 살풍경이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강태는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어서 휘청 넘어질 뻔 하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한다.
「이게 얼마만이야, 강태 군? 감개무량하구먼.」
꿈이 아니다. 허무맹랑한 환영도 아니다. 귀를 찌르고 침투하는 목소리는 지우고
싶은 기억 속의 그가 확실하다. 나를 재준과 분리시켜놓았던 장본인, 그가 분명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실장님. 이 은혜는 제가 나중에 톡톡히 갚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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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썼지만... 아무리 봐도 재준이 너무 멋있는 것 같애;;;(자아도취중-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cy2id님: 백수라뇨? *_*;; 그렇다면 자유인이 되셨다는 말씀? -_-;;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음주독서가 묘한 기분인 것만은 저도 잘 알죠 ^^;;
ㅁ준타열희님: 안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ㅠㅠ;; 저는 요즘
완결에 대한 압박감이 도를 넘어서고 있는지라;; 차라리 얼른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쬐끔 더 커졌어요 ㅋㅋ
ㅁinmylove님: 아니, 이분이 정말!!! -ㅁ- 안 걸려봤다니까요!! >ㅁ< 이번편에는 일케
강태를 적들의 수중에 넘겨버렸으니;; 정말 소문내시면 안되요 ㅠㅠ;;
ㅁwhitewhyuk님: 네, 끝까지 힘내야죠~ ^O^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 감사합니다^^
끝날 때가 되니까 대충대충 보던 저희 남편도 궁금하기는 한가봐요 ㅋㅋ 자꾸 어떻게
끝낼 거냐고 물어보길래 씹었습니다 -_-ㅋ
ㅁskyara님: 오늘은 별로 행복하지 못한 내용이라 죄송합니다-_-;; 완결에 대한 압박으로
요즘 무리해서 올리는 중이랍니다 ㅋㅋ 그래도 독자분들께서 좋아하시니까 저도 기쁘네요;
진작 이렇게 좀 올릴걸 ㅠㅠ;;
ㅁ아가혁수7님: 제 소설이 님의 항우울제 역할을 한다면야 영광이지요 ^____^
무슨 짜증나는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기분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근데 다빈치코드, 재밌으셨나요? 저는 별로 재미없던데;; -_-ㅋ
[원랑] 오르가즘 - 219
by 원랑 in '리얼톤혁'
「수고 많으셨습니다, 실장님. 이 신세는 제가 나중에 톡톡히 갚지요.」
깍듯이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하는 문환에게 준상은 침묵만을 내보인다.
강태는 그들의 공모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허겁지겁 몸을 돌려보지만, 결연한
눈빛의 준상이 그를 가로막는다. 눈동자가 자지러지며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강태에게, 준상은 차분한 음성으로 용서를 구한다.
「용서하십시오, 도련님. 회장님께서 영원히 충의회의 보스로 남아 계시려면
도련님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제가 당연히
회자님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문환의 얼굴을 마주 본 그 순간부터,
이미 강태의 이성은 작동을 멈춘 상태다. 순식간에 백지처럼 휑하니 비워진
그의 머릿속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로 꽉 차 버린다.
정말 준상이 재준을 속인 것인가. 혼신의 힘을 다하며 이제껏 쌓아올린 충심의
탑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고, 그토록 태연하게, 교활하고 약삭빠르게 주군을
기만한 것인가. 그러면서 주군을 위해 나를 버리겠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도련님을 팔아서 회장님을 구할 수 있다면 제가 망설일 이유는 없지요.
도련님께서 사랑 때문에 회장님을 놓지 못하신 것처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회장님 하나만 보면서 살아온 제 인생, 그리고 앞으로도 그 분만을
모시고 살아야 할 제 인생 때문에 저도 그 분을 놓을 수 없습니다.」
준상과 강태를 바라보는 문환의 입가에 흡족한 웃음이 번진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고 수준 높은 시나리오가 만들어질 듯한 기쁜 예감 때문이다.
문환을 비롯한 다른 부하들도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번뜩이며 상황을
예의주시한다. 강태는 마구잡이로 경련하는 몸을 제어하지 못하며 간신히
입을 연다.
「왜, 왜 이래요, 준상 씨. 준상 씨 이런 사람 아니잖아. 준상 씨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겁에 질렸다기보다는 탈선의 길로 빠져드는 자식을 타이르는 부모처럼 안타까운
호소다. 그러나 준상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히려 더욱 엄준한 목소리를
강태에게 던져준다.
「저이기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제가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제가 나선 겁니다. 회장님께서 잘못된 길로 가시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바로잡아드려야죠.」
「준상 씨, 이러지 말아요. 준상 씨까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왜 이러는 거야…」
마침내 강태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그의 뺨 위로 쪼르륵 미끄럼틀을 탄다.
무지근하게 가슴 한 쪽을 저미는 죄책감이 마음을 약해지게 하고 순간 돌이켜
버릴까 겁이 나서, 준상은 황급히 강태를 등진다. 그가 돌아서자마자 문환의
부하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강태에게 달려들어 그를 침대로 끌고 간다.
그리고 수갑을 사용하여 단단히 결박해 놓는다. 이제 강태는 자신의 두 손목을
자르기 전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게 되어버린다. 날카롭고 써늘한 금속성의
기운이 살갗을 파고들자, 강태는 비로소 생생하게 닥쳐온 위협과 공포에 짓눌려
떠나려는 준상의 이름을 숨넘어가도록 불러 젖힌다.
「준상 씨! 가지 마요, 제발! 이대로 나만 두고 가면 어떡해! 제발 준상 씨,
이러지 마요. 가지 마요…」
문고리를 움켜쥔 준상의 손이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소스라친다. 그는 최종적으로
갈등한다. 정말 이게 옳은 선택일까. 이 문을 나선 후에도 나는 당당할 수 있을까.
보스를 향한 나의 충성을 자랑스럽게 세상에 펼쳐 보일 수 있을까.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다. 곤경에 처한 보스를 돕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백하다.
「이 모든 일은 도련님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겁니다. 도련님께서 자초하신 거죠.
뒤처리는 제가 다 해드렸으니까 이제 도련님께서 책임을 지십시오.」
강태로서는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채, 준상은
지체 없이 문을 연다. 그리고 걸음을 내딛기 전, 문환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도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조 회장님. 저희 회장님께서 금방 다시 찾으러
오실 테니까 그 때까지 고이 모셔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조 회장님 신상에
별로 안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잘 알겠습니다. 성심성의껏 보살펴드릴 테니 염려 마십시오.」
회갈색 목재 문이 굳게 닫히며 준상의 뒷모습도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가 나가기 전
얼핏 흘린 ‘금방 찾으러 오실 것이다’라는 한 마디에 강태는 거대한 두려움과 혼돈
속에서도 모래알만한 희망 한 톨을 발견해낸다. 그러나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탁월한 그의 낙천성은 고막을 급습하는 문환의 음성에 여지없이 산산조각 난다.
「나가서 밥들 먹고 와라.」
제법 자상하고 다정한 어조로 문환은 부하들에게 식사를 하고 오라며 그들을 바깥으로
내보낸다. 건장한 장정들이 꾸벅 인사를 한 다음 부랴부랴 호텔 방을 나서고, 은밀한
공간 안에는 문환과 강태 단 둘 뿐이다. 강태는 온 몸의 신경 세포들을 곤두세우며
도사리고, 문환은 시니컬한 웃음을 흠뻑 머금은 채 강태에게로 천천히 다가간다.
간교하게 치켜 올라간 그의 입술이 가까워지자 강태는 퍼렇게 날이 선 작두에 자신의
몸이 반으로 썰리는 것 같다. 문환은 팔을 내밀어 천천히 강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검보랏빛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감촉은 때에 맞지 않게 야릇하고 선정적이다.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강태의 뺨을 어루만진다. 아끼는 보석을 세정하듯 조심스럽고
정성스런 손길이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예뻐졌네? 이재준한테 사랑을 아주 듬뿍 받은 모양이야.」
강태는 신랄한 혀의 공격으로 그의 즐거움에 흠집을 내고 싶지만 마음처럼 입술이
움직여주지 않는다. 두려움과 증오가 뒤범벅된 눈동자로 자신을 쏘아보기만 하는
강태에게 문환은 여전히 나긋나긋한 음성을 건넨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나는 너 많이 보고 싶었는데. 나도 몰랐는데 말이야, 내가
널 꽤 좋아했었나봐. 네가 없어지고 나니까 굉장히 허전하더라고.」
「죽기 전에 빨리 이거 풀어.」
복수의 쾌감에 한껏 상기된 문환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분해 되기도 전에, 강태는
겹겹이 둘러친 공포의 장막을 뚫고 앙칼지게 명령한다.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진
않을 것 같군. 문환은 피식 실소를 깨물며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그 성깔은 여전하구먼. 하여튼 대단해. 이재준보단 네가 인물이야. 이재준은 나한테
제발 봐 달라고 무릎 꿇고 빌던데.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상황에서도 우리 강태 군은
절대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마음에 들어. 내가 좋아할만 해.」
재준이 그에게 구차히 자신의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실을 듣자, 애써 독하게 말려버렸던
강태의 먹물 빛 눈동자는 다시 대량으로 눈물방울을 생산해낸다. 발작적으로 치솟는
흐느낌 때문에 강태는 울먹이며 묻는다.
「그 애를 만났어? 그 애가 너한테 빌던? 나 살려달라고 너한테 무릎 꿇고 빌어?」
「그러던데? 뭘 그렇게 놀라. 난 충분히 예상했던 일인데.」
짜릿한 앙갚음의 순간을 마음껏 음미하듯 문환은 키득거리면서 대꾸한다. 강태는
누군가가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심장을 들어내는 듯한 통증에 짐승 같은 신음을
토해낸다. 흡사 오장육부가 온통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재준으로부터
자신을 탈취해 온 문환의 잔인함과 악랄함이 강태의 격노에 불을 지핀다. 고통과 분노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마지막 남은 그의 이성 한 조각마저 무참히 부서뜨린다.
「너 이 새끼, 죽여 버릴 거야! 정말이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 버릴 거라고!
내가 말했지? 우리가 다시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거라고. 그게 너야, 이 새끼야!
이 개만도 못한 새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두 팔이 수갑에 묶여 버둥거리면서도 강태는 옴팡지게 협박과 포효를 서슴지 않는다.
문환은 그런 그의 꼬락서니가 볼만하다는 듯 박장대소한다. 사방 벽면으로 뻗어나가는
그 웃음소리에 강태는 기가 질려 말문이 막힌다.
「아~ 역시 대단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어. 어쩌면 이렇게 용감할까?
침대에서는 계집애보다 더 야들야들하면서, 이럴 땐 전사가 따로 없다니까.」
침대 운운하며 자신의 약점을 들추는 문환의 치졸함에 강태의 격분은 더 끓어 올릴 수
없을 만큼 팽만하게 부풀어 오른다. 또 다시 사지를 뒤채이며 온갖 욕설과 저주의
말들을 쏟아내던 강태는, 불현듯 섬뜩한 빛을 반사시키며 나타난 총 한 자루에
무력한 벙어리로 둔갑한다. 자신을 겨눈 총구가 금방이라도 불을 내뿜을 것 같아서
그의 전신은 뻣뻣하게 경직된다. 문환은 엄지손가락을 사용해 총알을 장전시키며
치밀하게 짜두었던 자신의 시나리오를 강태에게 공개하기 시작한다.
「한 편의 영화가 따로 없어, 그렇지? 너랑 이재준 말이야. 남자 놈들끼리 그런다는 게
솔직히 역겹긴 하지만, 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니까 인정해주겠어. 눈물나는
러브스토리야. 영화로 만들어보라고 영화사에 제보나 할까? 다들 구미가 당길걸.」
거기까지 얘기한 후 문환은 잠깐 입을 다물고 강태에게 다가가 '친절하게도‘ 그의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준다. 그런 다음 얼마간 꼼꼼히 강태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본다. 아무리 고쳐보아도 천하절색이다. 그는 피식 실소한다. 강태에게 키스를
하고픈 충동을 느낀 자기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어서이다. 아쉬운 듯 강태에게서
물러난 그는 다시 입을 연다.
「정말 대단한 미모야. 하마터면 너한테 입 맞출 뻔 했어, 지금. 요 예쁜 얼굴로 천하의
이재준을 병신으로 만든 거지. 그 잘 나가던 충의회 이재준 회장을 말이야. 게다가
예쁘기만 해? 남자를 갖고 놀 줄 알만큼 똑똑하기도 하지. 또 그렇기만 해? 침대에선
또 어떻고. 완전히 혼을 쏙 빼놓잖아. 난 정말 지금도 네가 남자라는 게 믿기질 않아.」
「그만해! 그만하라고!」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는 강태에게 문환은 승리감에 도취된
묘한 웃음만을 들이밀 뿐이다.
「너는 확실히 보석으로 치면 다이아몬드야. 그것도 최고급이지. 너도 알지? 이 바닥에
있는 놈들이 전부 널 갖고 싶어서 안달했던 거. 이재준이 널 옆에 달고 나타날 때마다
부러워 죽을 뻔 하던 거, 너도 봤지? 나도 알지, 그 기분. 정말 죽이더라고. 꼭 내가
왕이 된 기분이었다니까. 잘은 몰라도 아마 너 때문에 여자들 자존심 좀 상했을 거야.
다들 집에 가서 널 들먹이면서 너랑 자기 여자들 비교했을 거 아냐.」
강태는 치욕감에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얼굴을 돌려 버리지만, 그의 뇌리엔 자신을
힐끔거리며 질투와 시기에 가득 찬 눈초리를 쏘아 보내던 여자들의 모습이 필름처럼
스쳐 간다.
「그 귀한 다이아몬드를 하루아침에 뺏겨버린 내 심정이 어땠을까? 상상이 가?
처음엔 허망했어. 그 다음엔 화가 났고, 그 다음엔 체념을 하게 되더군.
그래, 어차피 내가 갖지 못할 다이아몬드라면 아예 부셔버리자. 부셔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가루로 만들어 버리자. 뭐 그렇게 포기를 하게
되더라고. 인생살이가 참 희한해, 그렇지 않아?」
바닥으로 향했던 강태의 머리가 번쩍 치켜지며 크게 부릅떠진 눈으로 문환을
응시한다. 싱글거리던 그의 표정은 어느새 무덤덤하게 표백되어 있다.
「이재준한테도 생각이 바뀌었어. 널 내가 갖고 나서 오랫동안 그 새끼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고 싶었는데, 사실 따지고 보니까 그렇게 헛수고할
필요가 없더라고. 널 죽여 버리면 어차피 그 새낀 평생 괴로워하면서 살 텐데,
뭐 하러 널 옆에 두고 생고생을 해? 넌 데리고 있기 힘든 놈이잖아. 앙탈도
심하고 성깔도 만만찮고. 옆에 두고 있으면 힘들어. 고분고분한 계집애들이
질리기는 해도 옆에 두긴 괜찮지. 질렸을 땐 갈아 치우면 그만이니까.」
「이봐, 내 말 좀 들어봐. 당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데…」
코앞까지 들이닥친 죽음의 위협 앞에서 강태는 그 마수를 피하기 위해 허둥지둥
입술을 뗀다. 그러나 문환은 총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더하며 소용없다는 식으로
설레설레 도리질을 친다.
「아냐, 그렇지 않아. 잘못 생각하는 거 하나도 없어. 널 죽이는 게 제일 빠르고
쉬운 방법이야. 널 죽인 다음에 이재준이 미쳐 돌아가는 꼴만 기분 좋게 감상하면
그만이야. 그것도 평생 동안.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지. 아니, 오히려
아주 남는 장사지. 왜 이걸 모르고 여태까지 시간낭비를 했을까? 그런 거 보면
내가 널 좋아했던 게 확실해. 하여튼 넌 정말 대단한 놈이라니까.」
「이, 이건 말도 안 돼!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왜, 억울해? 죽는 게 억울한가 보지? 그러게 누가 이재준 같은 놈이랑
어울리래? 유혜련인가 그 멍청한 술집 년도 쓸데없이 이재준한테 붙어 있다가
그 꼴 난 거 아냐.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이재준하고 갈라설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 왜 그걸 마다했어. 이제 기회는 없어. 잘 가, 강태 군.」
다급하게 벌어지는 강태의 입술이 한 글자를 발음해내기도 전에, 소리 없이 발사된
총알이 그의 이마를 관통한다. 길게 빼내고 있던 그의 목이 부러지듯 꺾이고 거칠게
휘몰아치던 호흡은 정지한다. 동시에 맹렬한 속도로 고동치던 심장은 화석처럼
굳어버린다. 그렇게 간단히, 그렇게 빨리, 강태는 숨을 거둔다.
축 늘어진 강태의 주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환은 무섭게 침착하고 절제된
동작으로 총을 품속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참혹한 살인의 현장에서 유유히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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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큰 사고 쳤습니다. 맞을 준비 됐으니 다들 달려오십시오. -_-;;
<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준타열희님: 제 소설이 유명합니까 -ㅁ-;; ㅋㅋㅋ 암튼 완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하긴
하지만;; 일케 남겨주시는 감상 하나하나가 힘이 된다니다^^ 감사하구요- 이번편에서
드디어 강태를 보내버렸습니다;; 준상이를 죽이시기보단 저를 죽이세요. 제가 나쁜년이에요;;
ㅁinmylove님: 으하하;; 정숙이<- 제 친구 이름이랑도 똑같아요;; 그래서 그 친구는
이 소설 안 읽겠다고 땡깡피우면서 아직도 안 읽고 있는중 ㅋㅋ
ㅁhyukabbo님: 제가 감사하지요. 미흡한 글을 이렇게 사랑해주시니- 어쨌거나 이렇게 또
한 분을 보내고 나니 기분이 묘하네요;; 얼마나 많은 돌이 날라올지 겁도 나고 ㅋㅋ
하여튼 감사합니다. 완결까지 건독 부탁드릴게요 ^^*
ㅁwhitewhyuk님: 아하하^^;; 네, 남편도 알지요. 재미없다고 안 읽으려 하지만 -_-;;
하여튼 준상이가 사고쳤습니다, 결국;; 다들 준상이에 대한 배신감(?)이 너무 크신 것
같아서 약간 죄송스러운 감이-_-;; 감상 고맙습니다- ^O^
[원랑] 오르가즘 - 220
by 원랑 in '리얼톤혁'
불이 꺼진 교회 안은 어두컴컴하고 춥다. 서늘한 적막 가운데 한 남자가 홀로
오도카니 앉아 있다. 눈물을 흘리다, 흘리다 못해서 아예 횡덩그레해진 눈동자의
주인공은 바로 혁수다. 그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은 희미한 불빛 사이에
휩싸인 투박한 고동색 나무 십자가다. 볼품 없고 초라한 그 십자가를 혁수는
진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줄기차게 응시한다. 십자가 위로 고난 당하는
예수의 환영이 오롯이 떠오른다. 극단의 고통을 가로질러 성자(聖子)의 경지에
도달한 그 얼굴이 망막 안에 새겨지자, 혁수는 잠시 중단했던 울음 가락을
또 다시 끄집어내며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닫힌 시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형상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보인다. 자그마한 어깨가 부서져라 들썩이며
혁수는 원망과 한탄과 통곡의 기도를 환영 속 예수의 발아래 풀어놓는다.
정녕 우리를 단죄하셔야 하겠습니까. 기어코 우리를 벌하셔야만 하겠습니까.
지엄한 당신의 율법을 거슬려 감히 영원을 시도한 우리가 형벌을 당하는 것은,
그것이 전능하신 당신의 섭리입니까. 당신은 공의로우신 분이라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실 순 없는 겁니까.
주여, 부모를 속였을지언정 당신을 속이지는 않았습니다. 부모를 기만하고
배반했을지언정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능멸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당신 앞에 엎드렸습니다. 낮아질 수 있는 최저의 심연에까지
우리 자신을 끌어내리고 당신께 간구했습니다. 당신의 용서와 자비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응답입니까. 결국, 우리는 당신께 거부당한 것입니까.
통절하게 이어지는 혁수의 울부짖음에도 신의 음성을 들려오지 않는다.
차라리 당돌하게 목을 꼿꼿이 세우고 신을 대적할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까.
그렇게 마지막 하나 남은 생명 줄까지 싹둑 끊어버리고 그와 함께 파멸해 버릴까.
그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 버릴까. 그리고 영겁의 불꽃 속에서 우리의 죄가
소멸될 때까지 불살라지고 나면, 그 땐 신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실까.
가슴이 뻑뻑하게 아려오고 호흡이 곤란해지자 혁수의 흐느낌은 겨우 잦아든다.
고뇌의 수렁에 갇혀 혼미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그에게, 누군가 교회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닿아오자 혁수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주혁이다. 먼지 한 올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차려 입은 새까만 정장이
핏기가 가신 하얀 얼굴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검푸른 두 눈동자. 그 속에 너무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담겨 있어서
혁수는 혼란스럽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혼자 왜 이러고 있어. 밥은 먹었어?」
억지로 낭랑한 음색을 발하는 그가 도리어 혁수의 슬픔을 자극한다. 혁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달려간다. 무서운 기세로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혁수가
당황스러워서 주혁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려 입을 여는데, 그보다 먼저 거세게
요동치는 혁수의 음성이 주혁의 귓가를 적신다.
「아냐, 그럴 수 없어. 절대로 그럴 수 없어. 왜 그래야 하는데?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는데?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주혁아, 난 못 받아들이겠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누구에게 항의하고 있는 걸까. 주혁은 저릿하게 메어오는
가슴 대신 품에 안긴 혁수의 잔 등을 쓸어 내리며 치솟는 궁금증을 삭인다.
혁수가 알알이 맺힌 울분을 전부 질펀하게 쏟아낼 때까지, 주혁은 참을성을
가지고 묵묵히 기다리기로 마음먹는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니? 주혁아, 우리가 꾸는 꿈이 그렇게 큰 욕심이냐고?
둘이 같이 살게 해 달라는 거, 그게 그렇게 못 들어줄 소원이야? 이해를
못하겠어. 하나님이고 부모님이고, 난 이해를 못하겠어. 왜 그렇게 다들
잔인한지… 얼마나 간절히 빌었는데, 우리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봐…」
흥건히 흘러내린 혁수의 눈물에 주혁의 와이셔츠가 축축이 젖어든다. 그는 밀착된 혁수의
얼굴을 떼어내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쥔다. 그리고 다갈색 동그란 눈망울을 그윽하게
응시하며 속삭인다.
「혁수야,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계획했던 일이 약간 틀어졌을 뿐이야.
그리고 그런 일은 예전에도 비일비재했잖아. 근데 왜 다 끝난 것처럼 얘기해.
하나님이 우리 버리시겠대? 그런 말씀이라도 들었어?」
나지막하게 농담까지 섞어 가며 이야기하는 주혁에게, 그러나 혁수는 어렴풋한
미소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불운의 예감은 이 때다 싶게 득달같이 주혁을 사로잡는다.
때맞춰 새어 나오는 혁수의 음성은 너무 오래 울어댄 탓에 탁하고 음울하다.
「아까 낮에 엄마가 왔다 가셨어.」
주혁의 낯빛이 기우뚱 한 쪽으로 쏠리면서 검푸른 한 쌍의 구슬에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는다. 혁수는 뺨에 덮여있던 그의 손을 슬며시 치워낸 후 다시 말을 잇는다.
「나 아무래도 엄마랑 의절한 것 같아. 내가 너랑 여기 있을 거라고 했더니, 다신
내 얼굴 안 보시겠대. 그럼 의절한 것 맞지?」
밀물처럼 들어차는 낭패감에 주혁은 고개를 떨어뜨린다. 담배 생각이 불쑥 간절해지지만
교회 안이라 차마 그럴 수도 없어서 그는 긴 한숨으로 흡연 욕구를 분산시킨다.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빌었어. 제발 봐 달라고. 근데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시더라.
너무 잔인했어. 엄마는 내가 엄마 가슴에 대못 박았다고 말씀하셨지만, 내 가슴도
오늘 찢어졌어. 이젠 아프지도 않아. 넌 매일 나한테 아직 멀었다고 그랬지?
근데 아닌 것 같아. 이젠 나도 엄청 독해졌어. 그런 것 같지?」
머리를 끄덕여주어야 할까, 아니면 바보처럼 웃으면서 도리질 쳐주어야 할까.
주혁은 양단 간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 반지만
내려다보고 있다. 울음기가 완전히 제거된 혁수의 목소리는 외려 더욱 사위스럽다.
「난 한번도 원망해본 적 없어.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넌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랬어. 부모님께도 죄송했고 하나님 앞에서도 언제나 고개를 들 수 없었어.
죄를 지으면서도 도와달라고 떼쓰는 내 자신이 얼마나 파렴치하게 느껴졌는지 몰라.
그래서 만약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 억울해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난 기도할 자격조차 사실은 없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근데 막상 길이 막히니까… 억울해. 원망스러워. 막다른 데까지 밀려나니까,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어. 이제야 독해지는 것 같아. 웃기지?」
「그래서 이젠 기도하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게?」
주혁은 어조는 얼마쯤은 시니컬하고 얼마쯤은 을씨년스럽다. 신랄하고 자학적인 그의
질문에 혁수는 피식 헛웃음을 뱉는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비속어와 함께 지칭하여
망설임 없이 그 신성(神性)을 격하시키는 주혁의 대담함이 부러워서다.
그는 여전히 나 하나만을 생각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허섭스레기로 치부해 버린다.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 심오하고 강력하다.
나도 하나님을 저버릴까. 그리고 그에게 온전히 귀의할까. 그래도 우린 죽지 않을까.
그렇게 대담무쌍하고 위험천만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면서도, 혁수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대답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할 거야. 더 발악하고 떼쓰고 난동을 피워서라도… 하나님이
지쳐서 내 기도 들어줄 때까지 계속할 거야. 그러고 난 다음에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후회는 안 해. 그래도 넌 내 옆에 있을 테니까.」
― 감겨진 눈꺼풀 사이를 고집스레 비집고 들어오는 빛 줄기가 재준의 깊은 잠을
깨운다. 평소에는 서너 시간 밖에 수면을 취하지 않는 재준이지만, 입원을 한 뒤로는
매일 저녁 수면제를 처방 받는 탓에 식사를 하자마자 혼곤히 잠에 골아 떨어지곤 한다.
녹짝지근하게 침대에 눌어붙으려는 몸을 호되게 추슬러 재준은 상체를 일으킨다.
충전기에 꽂혀 있던 휴대폰을 가져다가 전화를 걸기 전 시각을 확인한다. 7시 30분.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강태는 분명 후다닥 잠 기운을 떨쳐내고 왜 이제야
전화를 했냐며 투정부터 부려댈 것이다. 아스라이 미소를 띠며 재준은 단축
다이얼을 누른다. 그러나 끈질기게 울려대는 신호음에도 상대방은 아무런 답신이
없다. 역시 너무 일찍 전화를 한 건가. 거처가 바뀐 탓에 느지막이 잠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재준은 생각을 고쳐 먹고 이번엔 태현에게 전화를 건다.
「
[여보세요.]
이 쪽도 여태껏 잠에 취해 목소리가 비몽사몽이다. 둘이서 술이라도 한잔 걸친
모양인가, 재준은 엷게 실소하며 그답지 않게(?) 사뭇 다정한 아침 인사를 건넨다.
「잘 잤어, 형? 어제 강태랑 한 잔 했나 봐? 목소리가 걸걸하네.」
[뭐? 누구랑 술을 먹어? 아침부터 뭔 헛소리야.」
소름 끼치는 파열음을 동반하며 순식간에 재준을 천치로 만들어버리는 불길함.
목 뒤의 신경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고이고
눈앞은 침침해진다. 좋지 않은 징조다. 아니, 최악의 점괘다.
「형, 술이 덜 깼구나. 잘 먹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마셔대. 강태 아직 자고 있지?
깨워서 좀 바꿔 줘 봐.」
제발, 부디, 왜 이제야 전화했느냐고 징징거리는 강태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려오기를 재준은 갈구한다. 그러나 그의 귓가에 와 닿는 것은 의문에 찬 태현의
음성뿐이다.
「너 미쳤어? 강태가 왜 나랑 같이 있어. 준상이한테 전화해 보던가.」
끝내 재준의 간청은 돌풍 앞의 모래알처럼 우수수 흩어져 버린다. 비극적인 예감은
이번에도 놀라운 적중률을 과시하며 그를 조롱한다. 이제껏 느꼈던 두려움은 지금의
이 공포에 빗대면 한낱 감정의 유희에 불과하다.
「……형 지금 어디야?」
제발, 부디, 장난이었다고 말해주었으면. 실컷 깔깔대고 폭소한 다음, 이제 그만
강태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를. 그래도 고맙다고 할 거야. 장난이어서, 농담이어서
고맙다고. 절대 화 같은 건 내지 않을게, 형.
[어디긴, 집이지. 너 진짜 왜 그래?]
「……형이 왜 지금 집에 있어? 강태는?」
[아, 이 새끼 진짜 왜 이래. 그럼 이 시간에 내가 집에 있지 어디 있어! 그리고 강태를
왜 나한테서 찾아. 네가 준상이더러 별장에 데려다 주라고 그랬다면서. 호텔은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하다고.]
재준의 손아귀에 힘이 풀리며 휴대폰이 껄끄러운 소음과 함께 바닥으로 처박힌다.
태현은 계속 다급하게 재준의 이름을 불러대지만 재준은 석고상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못한다. 주위의 사물들이 빙글빙글 빠르게 회전하며 자신을 향해
뾰족한 모서리를 겨누고 달려드는 듯 하다. 어지럽다. 메스껍다. 토할 것 같다.
재준은 허파가 찢어져라 숨을 들이쉬며 와들와들 소스라치는 손으로 휴대폰을
줍는다. 그리고 음산하리 만치 낮게 깔린 음성을 발한다.
「준상이한테 무슨 얘길 들었는지, 하나도 빼먹지 마고 자세히 말해봐.」
[야, 도대체 왜 그래? 네가 지시한 거 아냐?]
「빨리 말해!」
벽력같은 고함 소리가 귀청을 뒤흔들자, 태현은 움찔 몸을 사리며 불안에 잠긴
목소리를 우물쭈물 꺼내 놓는다.
[어제 준상이가 전화했더라고. 아무래도 호텔은 위험할 것 같다고, 또 괜히 나까지
이 일에 연루시키기 싫다고 네가 그랬다면서… 강태는 양수리 별장에 두는 게
제일 안전할 것 같으니까 네가 부탁한 건 신경 쓰지 말고 있으랬어. 사실 나도 좀
긴가민가했었거든. 넌 웬만해서는 네 조직 일에 제3자 끼우는 거 질색하잖아.
근데 어젯밤에 전화가 왔길래 그럼 그렇지, 생각했지. 왜? 뭐가 잘못 됐어?]
꿈에도 의심하지 않았던 충성스런 부하의 기막힌 배신. 이건 최악을 넘어선
회복 불능의 재앙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종말이다.
「형, 1시간 후에 H 호텔 로비에서 만나. 아무도 없으니까 형이라도 같이
가줘야겠어.」
[뭐? 무슨 소리야. 너 그 몸을 해 갖고 어딜…]
「설명할 시간 없어. 지금 당장 나와.」
재준은 태현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휴대폰을 접어버린다. 팔목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뽑아 내자 핑 하고 현기증이 돈다.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간 그는
씻는 둥 마는 둥 세안을 한 뒤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태현과의
약속 장소를 향해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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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221
by 원랑 in '리얼톤혁'
운 나쁘게도 출근 시간과 맞물려 혼잡하기 그지없는 도로 사정에 태현은 연신 욕설을
퍼붓는다. 마음 같아서는 폭탄이라도 터뜨려서 앞의 차들을 싹 쓸어버린 뒤 목적지를
향해 쾌속 질주하고 싶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안절부절못하던 태현은 H 호텔의
주차장 입구 표시 간판에 눈에 들어오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초췌한 행색으로 로비를 서성이던 재준은 태현의 등장에 반색을 표하며 그와 함께
프런트 데스크로 향한다. 아까부터 미심쩍은 눈초리로 재준을 주시하던 여직원은
막상 그가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어서 오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여기 김준상이라고, 어젯밤에 체크인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 좀 해주십시오.」
다짜고짜 요구사항부터 들이미는 재준이 역시나 의심스럽고 찜찜해서 직원은 선뜻
행동을 취하지 않고 주저주저한다. 그러다 살기등등한 재준의 눈빛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컴퓨터 자판을 두들긴다.
「손님 중에 김준상이라는 분은 안 계신데요.」
「다시 한번 찾아보시오. 어젯밤 9시쯤 체크인 했을 겁니다.」
노골적이고 무례한 명령조에 직원의 양미간이 와락 찌푸려진다. 그러나 직업적으로
몸에 배인 서비스 정신 덕택에 금방 평정을 되찾고 재준의 말대로 한번 더 투숙객
리스트를 살펴본다. 김준상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직원은 의기양양하여 거 참
고소하다는 듯 또랑또랑한 음색을 자신 있게 울려낸다.
「그런 분은 안 계십니다. 도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조문환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봐 주십시오. 역시 어젯밤에 체크인 했을 거요.」
포기하고 돌아설 줄 알았던 그가 재차 또 다른 일거리를 던져주자, 직원의 낯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불만의 표시로 잔 기침을 뱉으며 그녀는 짜증 섞인
손길로 탁탁 키보드를 내려친다. 이번에도 헛다리를 짚었으려니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조문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어젯밤에 체크인한 투숙객 명단에서 발견되자,
그녀의 눈동자가 빛깔을 바꾸며 재준의 얼굴로 이동한다.
「조문환 씨라는 분은 계시네요. 어젯밤에 체크인 하신 게 맞고요.」
「몇 호실입니까?!」
재준은 여직원의 어깨라도 붙잡아 흔들 기세로 방 호수를 추궁하고,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심정으로 곁에 서 있던 태현은 기함을 할 지경이다. 상황이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직원은 경계 태세를 한층 강화시키며 재준에게 되묻는다.
「실례지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건 당신이 알 거 없고, 빨리 몇 호실인지 말해요. 빨리!」
아무리 손님이지만 무례함이 정도를 지나쳤다고 생각한 직원은 불현듯 차갑게
낯을 얼리며 쌀쌀맞게 대꾸한다.
「죄송하지만 손님, 확실환 용건이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분께는 투숙하신 분에
대한 정보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맹랑하게 지껄여대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당장 총구를 들이대고 싶지만, 재준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그 충동을 억누른다. 격한 호흡을 들이켜는 재준 대신
태현이 나서서 직원을 설득해 본다.
「그럼 전화라도 좀 걸어주세요. 정말 급한 일이라서 그럽니다. 부탁 드려요.」
공손하고 깍듯한 말투와 서글서글한 태현의 인상이 후한 점수를 딴 모양인지, 직원은
더 이상 군말 없이 바로 그의 요청을 이행한다. 꽤 오래도록 수화기를 귀에 붙이고
있었건만 응답이 없자, 그녀 또한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듯 표정이 심각해진다.
한번 더 전화를 넣어보지만 응답이 없기는 매일반이다.
「손님께서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얼굴도 모르는 투숙객의 무응답이 자신의 귀책사유인 양 직원은 짐짓 송구스러운
눈빛이다. 재준은 겨드랑이 쪽에 손을 넣어 감춰둔 총을 점검한 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당황한 여직원은 로비에 대기하고 있던 호텔 보이에게
그를 저지하라고 소리 지른다.
「손님, 확인 절차 없이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재준만큼이나 키가 훌쩍 큰 사내는 제법 카리스마를 풍기며 재준과 태현을 막아선다.
그러나 재준의 뿜어내는 살벌하고 위압적인 기운에 금새 기가 죽는다. 재준은 벌컷
솟구치는 역정에 하마터면 그의 턱을 갈겨버릴 뻔하다가, 겨우 화증을 누르고 이야기한다.
「당신이 앞장서시오. 그럼 될 거 아닙니까.」
그의 손짓에 직원은 탐탁지 않지만 프런트 여직원에게서 비상용 카드 키를 받아들고
재준과 태현을 안내한다. 뚜벅뚜벅 울리는 발소리가 사형을 앞둔 죄수에게 가해지는
카운트다운처럼 재준을 옥죄어온다. 태현은 텁텁하게 말라오는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이면서 신중히 재준의 뒤를 따른다. 813호실 앞에 당도하자 재준은 짜개져버릴 듯
급속도로 펌프질하는 심장이 차라리 몸밖으로 튀어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동행한 직원이 열쇠 구멍에 카드를 찔러 넣는 순간, 재준은 양복저고리 밑에 덮인
권총을 단단히 그러쥔다. 삑 하는 기계음과 동시에 문이 열리자 세 남자의 코끝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끼쳐온다. 재준은 더 주저할 겨를도 없이 호텔 방안으로 뛰어든다.
강태가 누워 있다. 두 손이 수갑에 묶인 채 미동 없이 널브러져 있다. 곱고 정갈하던
이마에 시커먼 구멍이 뚫려 그의 뒤통수는 온통 피범벅이다. 젊디젊은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한스러웠는지, 별이 박힌 듯 반짝이던 눈동자는
맑은 생기를 잃어버린 채 퀭하니 홉떠져 있다. 요염한 미소를 그려내던 입술은
푸르죽죽하게 변색되어 척박하고 까칠하다. 촉촉하고 보드랍던 손은 나무토막 같다.
「강태야.」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고귀한 신앙으로 가슴속에 뿌리박힌 단 하나의 이름을, 재준은
화형대 위에 올라선 순교자의 심정으로 되뇐다. 지금 이 순간 재준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강태뿐이다. 강태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비음, 그리고 햇빛보다
화창한 강태의 미소, 오로지 그것뿐이다.
「……강태야.」
강건하게 버티고 서 있던 재준의 무릎이 처참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다. 기세 좋게
따라 들어온 호텔 보안 직원은 벌써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버렸고, 태현은 강태의 주검을
발견하자마자 두 다리에 힘을 잃고 풀썩 주저앉는다. 재준은 마비된 것처럼 일절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손을 내밀어 강태의 뺨을 보듬어본다.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싸늘하고 차디차다. 온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그 촉감에 비로소 재준은 강태의 죽음을
현실로 인식하고 절감한다.
「말도 안 돼… 아냐,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이건 말도 안 돼…」
울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재준의 유백색 두 뺨엔 눈물의 홍수가 터진다.
흥건하게 젖은 얼굴을 강태의 얼굴에 비벼대며, 얼음처럼 식어버린 그의 몸을 억센
팔로 옭아매며 재준은 절규한다.
「강태야, 안 돼! 눈 떠 봐! 너 이렇게 가면 절대 안 돼!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 수는 없어. 강태야, 제발… 부탁이다. 눈 떠 봐, 응?」
「재준아…」
넋이 빠진 상태에서 퍼더버리고 앉아만 있던 태현은, 가슴을 후벼 파 뒤집는 듯한
재준의 목소리에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아 부으며 안타까이 그의 이름을 읊조린다.
그러나 재준은 이미 귀머거리가 되어 있다. 망가진 인형처럼 방치된 강태의 주검
외에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생각하지도 못한다.
「강태야. 강태야? 눈 떠 봐. 나야, 강태야. 빨리…! 이러면 안 돼, 강태야. 강태야…」
바보천치처럼 '강태'라는 두 글자만 연속적으로 뱉어내던 재준의 입에서 끝내 게걸스런
울부짖음이 분출한다. 도저히 사람의 음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원시적이고
야만스런 흐느낌이다. 태현은 그를 위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와 함께 울어줄
뿐이다.
「아니라고 해 줘, 형. 제발 아니라고 말 좀 해 줘, 제발…」
내 인생이 끝나지 않았다고. 그 애가 죽지 않았다고.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그 말만 좀 해 줘. 숨이 끊어질 것 같아. 아니, 숨이 끊어지기를 이처럼
간절히 염원해보기는 처음이야. 그 애가 죽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곧 죽을 거라는 얘기라도 해 줘. 그 애가 없는 세상을 나도 조금 있으면
등지게 될 것이라고, 그 말이라도 들려줘. 제발, 아무라도 좋으니 제발.
「어떡하냐, 재준아. 어떡하냐, 너 이제… 재준아, 어떡하냐…」
태현은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잿더미처럼 내려앉은 재준의 어깨를
부둥켜안는다. 앙상하게 마른 어깨뼈의 진동이 너무 심해서 태현의 가슴팍에
따가운 통증이 전해져 온다. 재준의 침묵은 좀 전의 통곡과 절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무겁고 참혹하다. 촌각의 정적을 허물어뜨리며 재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음성은 뼈마디 마디의 골수를 비틀어 짜는 듯 고통의 정점에 다다라 있다.
「이게 정말이야? 정말 이게 사실이야? 네가 죽은 거야, 강태야? 네가 내 옆에서
영영 사라져버린 거야? 강태야, 강태야, 강태야… 내가 결국은 널 죽이고 만 거야?」
이렇게 될까 봐 널 외면했던 거였어. 이렇게 될까 봐 두려워서, 너무 겁이 나서,
내 손으로 널 내쳤던 거였어. 어떻게 해서든 네가 숨쉬기를, 존재하기만을, 오직
그 하나만을 소망했던 나였어. 내 그리움 따위야 추잡한 사치라고, 너를 향한
갈망도 잘라버려야 할 이기심이라고, 내 사랑이 너를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욕심이라면 당연히 접어야 한다고, 그토록 모질게 내 자신을 비웠는데…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영원히 나를 증오하도록 내버려뒀어야 했어.
내가 널 죽인 거야. 내 사랑이 널 되돌릴 수 없는 수렁으로 빠뜨린 거야.
강태와 이마를 맞댄 채 재준은 뒤늦은 고해성사를 이어나간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명확하게 깨닫는다. 강태를 사랑하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는지를.
그 사랑이 얼마나 끔찍하고 저주받아 마땅한 죄악인지를, 재준은 강태와의
완벽한 이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절절히 통감한다. 용서를 구하기엔 이미 너무
추해져 버린 자신의 입술을, 재준은 더 이상 강태 앞에서 놀리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처참하게 파헤쳐진 강태의 몸을 소중히 감싸안으며 그와 최후의 언약을 맺는다.
철두철미한 보복을 약속한다. 피비린내 낭자한 복수극을 펼쳐 보이리라, 맹세한다.
「저, 저기예요! 저 쪽이요!」
벌컥 방문이 젖혀지며 강태와 재준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던 바리케이드가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파괴된다. 속수무책으로 울고만 있던 태현은 갑자기 들이닥친 호텔 직원들과
경찰들 때문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재준은 흘깃 그들을 쳐다보기만 할 뿐,
흐트러진 강태의 옷깃을 여며주고 봉두난발 된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는 등 강태의 시신을
정돈하는 데에만 열중한다. 태현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데,
정작 당사자인 재준은 황당할 만치 태연자약하다.
「죄송하지만 비켜주십시오. 시체에 함부로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직업적 특성과 다르게 은테 안경을 낀 스마트한 인상의 형사가 구부정히 허리를 숙인
재준 곁에 우뚝 서서 이만 물러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재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상심이 크신 건 이해합니다만 수사를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형사는 또 한번 신사답게 정중히 청하고 태현은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겠단 심산에
재준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당긴다. 진정하고 그만 강태를 놓으라는 태현의
말에, 재준은 그가 벌렁 뒤로 나자빠지도록 세차게 그의 손을 뿌리친다. 태현은
아연실색하여 어질어질 일렁이는 눈동자로 재준을 건너다본다.
「놓으라니? 얘는 내 남자야. 죽었어도 얘는 여전히 내 남자야! 너희들이 뭔데 나더러
내 남자한테서 비키라고 지랄이야? 수사? 그 딴 거 필요 없으니까 다 나가. 내 남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들 꺼져!」
내 남자 운운하는 재준의 외침에 냉철한 자세를 견지하던 형사도 얼빠진 표정이 된다.
발광에 가까운 재준의 몸부림에도 굴하지 않고 태현은 악착같이 그에게 매달린다.
「재준아, 이러지 마. 이러면 우리만 더 힘들어져. 상황 더 나빠지게 하지 말자, 재준아.」
「더 힘들어져? 더 나빠진다고? 형, 여기서 더 힘들어질 게 어디 있어. 여기서 더
나빠질 게 뭐가 있어! 다 끝났어, 다… 강태가 죽었대… 다 끝났어, 이제…」
그렇지 않다고,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어떻게 그런 가증스러운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자기 인생의 종착점에 바야흐로 도달했음을 선언하며, 재준은 마침내 혼절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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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by 쵸티지기
[원랑] 오르가즘 - 222
by 원랑 in '리얼톤혁'
지독하고 고약한 악몽이다. 해맑게 미소짓던 강태의 이마에 별안간 총알이 날아와 박힌다.
검붉은 피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고 하얗게 질리다 못하여 푸르죽죽하게 변색된 그의
몸이 풀썩 앞으로 고꾸라진다. 자신은 두 손과 발이 족쇄에 결박되어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다. 성대가 발기발기 찢어질 정도로 격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재준은 번쩍 눈을
뜬다. 환한 형광등 불빛과 퀴퀴한 소독약 냄새가 부산스레 달려들며 그를 무의식의
수렁에서 끌어낸다. 그리고 시각과 후각만을 괴롭히는 그 따위 사소한 것들과 견줄 수
없는, 엄청난 절망감이 재준을 에워싼다. 그 애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나는 이렇듯
다시 깨어나 여전히 숨을 쉬고 살아있다는 사실.
「재준아!」
긴박하게 날아드는 주혁의 음성에도 재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꼭지를 돌리면
자동적으로 물이 나오는 수도처럼, 그의 눈 꼬리를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실어증에라도 걸린 듯 그는 울음 가락 사이로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만 연신 되풀이한다.
설핏 들으면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짐승의 소리 같다. 무턱대고 그의 이름을 불러 젖힌
주혁, 강태의 죽음을 도무지 납득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어서 재준과 함께 눈물만 죽죽
뽑아내는 혁수, 어떻게든 침착성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태현, 어느 누구 하나도
재준의 오열을 쓸어 담지 못한다. 한동안 미친 듯이 몸을 뒤채이며 통곡하던 재준은
갑자기 우뚝 정지하더니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링거 바늘을 빼 던져 버리며
누운 자리를 박차고 발을 내려딛는다.
「재준아, 왜 그래? 어디 가려고?」
다급하게 묻는 태현의 질문에도 재준은 묵묵부답인 채 코트 소매에 팔을 끼워 넣는다.
불현듯 외출 준비를 서두르는 재준의 터무니없는 행동에 세 남자는 한결같이 경악하지만,
재준에게만은 그들 모두가 투명인간인 모양이다.
「이재준, 너 미쳤어? 진짜 왜 그래?! 가만히 누워있어도 시원찮을 놈이… 야!!」
「재준아, 진정하고 잠깐 앉아서 얘기부터 해 보자. 응?」
태현과 주혁은 그를 제지할 수 있을 만한 말들을 앞다투어 쏟아내며, 서슴없이 병실 문밖을 나서려는 재준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진다. 동시에 혁수의 인내력 또한 바닥을 드러내며
그의 입술 사이로 질척한 흐느낌이 퉁겨져 나온다. 맹렬한 기세로 허공을 찢으며 울려
퍼진 그 통곡 소리는 마술처럼 재준을 주저앉힌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는 사실에 주혁과
태현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재준을 일으켜 침대로 데려간다.
「재준아, 서운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지금 막무가내로 미쳐 날뛰기만 하면
안 돼. 그러다 너까지 다치면 어떡하려고. 제발 진정하고 이성을 찾자. 슬퍼하는 건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잖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거대한 불행 앞에서, 태현은 평소 성격과는 판이하게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이성적인 모습이다. 이제껏 알고 지낸 그가 아닌 것 같다. 친형처럼 여기고
동고동락해 온 그가 낯설다. 아니, 모두가 낯설다. 강태의 존재가 사라지고 나니, 어째서
이 사람들이 이토록 생경하게 느껴질까.
「그래, 태현이 말이 맞아. 너하고 비교할 순 없겠지만, 우리도 지금 믿어지지가 않아.
강태가 죽었다는…」
「아니야! 절대 아니야, 절대!!」
호흡을 가다듬고 차근차근 말을 이어나가던 주혁은 천둥처럼 고막을 급습하여 뒤흔드는
재준의 고함 소리에 찔끔 입을 다문다. 병실 내부는 살얼음 같은 정적으로 뒤덮인다.
재준은 정말 미친 사람 같다. 실제로 이미 미쳐 있는지도 모른다.
「…강태 어디 있어?」
「재준아…」
「강태 어디다 데려다 놨어? 형, 말 해줘. 강태 어디 있어? 우리 강태, 많이 다쳤잖아.
그렇지? 많이 다친 거지? 내가 좀 전에 너무 더러운 꿈을 꿔서 잠깐 착각했나봐.
강태, 그냥 많이 다친 것뿐이지? 어디 있어? 강태 어디 있어, 형?」
그렇다고, 맞다고, 어디어디에 데려다 놓았다고, 그 대답만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내 목숨 내놓을게.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아무라도 괜찮아요. 내 생명이든 내 영혼이든
다 가져가요. 다 가져가시고 그 대답 하나만 해 주세요. 그 애가 살아있다고.
「아아… 형, 왜 대답 못 해? 주혁 형, 혁수 형, 형들도 왜 대답을 안 해? 응?
강태 죽었어? 진짜? 진짜 죽었어?」
원래의 모양새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 전체를 구기며, 재준은 정반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촉구한다. 두 가지 물음 중 어떤 것에도, 세 사람 모두
답변할 수 없다.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입을 통해 강태의 죽음을 재준에게
각인시키고 싶지 않아서, 태현과 주혁과 혁수는 그저 고개만 숙인다. 그러나
그 무언의 확답을, 재준은 알아차린다. 뼛속까지 알알이 박히도록 분명하고
또렷하게 흡수한다.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그칠 줄 모르고 새어 나오던
고통에 찬 신음도 거짓말처럼 뚝 끊긴다. 그는 냉정해진다. 극렬한 살의로
점철된 냉기가 잘 훈련받은 호위무사들처럼 그를 둘러 진 친다. 재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동작이 너무 엄숙하고 장엄해서 어느 누구도 섣불리
재준을 만류하지 못한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 그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재준의 망막을 채운 사람은 다름 아닌 준상이다. 비장한 표정의 준상은 아무
말 없이 보스 앞에 무릎부터 꿇는다. 나머지 세 남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이 기막혀서 입이 쩍 벌어진다.
「용서하십시오, 회장님. 제가 회장님을 속였습니다.」
재준의 전신이 중풍 걸린 환자처럼 심하게 경련을 일으킨다. 준상은 곧 있으면 자신에게
내려질 불벼락을 각오하며 그 모든 것을 달게 받겠다는 뜻으로 재준의 신발 앞 부리에
이마를 갖다댄다. 그러나 그가 예상한 재준의 격노는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궁금증 반, 두려움 반으로 준상이 고개를 쳐들자 어느새 재준의 얼굴은 코앞까지
근접해 있다. 그는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뒤로 젖히는데,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온
재준의 손이 준상의 멱살을 틀어잡고 들어올린다. 마주 댄 재준의 눈빛은 날 선 검이
되어 준상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한다.
「넌 날 속인 게 아냐. ……날 죽였어.」
최대한 침착하고 덤덤하고 조리 있게 자신의 행동과 그 너머 세워둔 계획을 설명하려던
준상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재준의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은 순간, 준상은
비겁할 뿐만 아니라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전형적인 배신자로 전락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장님.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마음을 먹겠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속인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제 말씀을 들으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고정하시고 제 말씀 좀 들어주십시오, 회장님.」
「네가 어떻게, 다른 놈도 아니고 네가 어떻게… 김준상, 네가 나한테 어떻게…!」
「아닙니다, 회장님!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냐? 강태를 죽인 게 네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대체 누가 그랬어!
네가 아니면 누가!」
「죽이다니요? 도련님을 그 쪽에 넘겨준 건 사실이지만, 죽이다니요? 도련님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그 쪽에서 그렇게 쉽게 도련님을 죽이진 못해요. 제가 설마
무작정 도련님을 그 쪽에 보냈겠습니까? 저한테 다 계획이 있습니다, 회장님.」
「……강태 죽었어, 김준상.」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귓전을 가격하는 태현의 목소리에 준상의 낯이 핼쑥해진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청각을 의심하는 준상에게, 태현은 잔인하게 또 한번
통보한다.
「강태 죽었다고, 김준상.」
백 번 천 번 고쳐 들어도 수용할 수 없는 현실이 이미 너덜너덜 해어진 영혼을
새롭게 고문하자, 재준은 손아귀의 힘이 풀려 스르르 준상의 멱살을 놓아 버린다.
재준의 가슴 속 음험하게 잔재해 있던 눈물은 때마침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 우르르
달려나온다. 그 참담한 포효에 준상은 비로소 자신이 강태를 사지로 내몰았음을
명명백백하게 인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내저으며
태현이 전한 비보를 완강히 부인한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그 쪽과 약속을…」
「너 바보냐? 그 새끼들이랑 네가 약속을 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정말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딴 놈이라면 또 몰라, 네가 어떻게 재준이한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이 때까지 신중하게 말을 아끼던 주혁은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지, 악다구니를
치며 준상에게로 달려든다. 이번만큼은 혁수 역시 그런 주혁을 말리지 않고 배신감과
혐오로 물든 눈동자를 준상에게 메다꽂는다. 준상은 태현과 재준, 주혁과 혁수를
번갈아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어떻게 감히 제가 회장님께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믿어주십시오, 회장님! 저는 회장님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회장님께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나서서 막지 않으면 정말 회장님께서 목숨을 버리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이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네가 그 새끼들이랑
손을 잡고 강태를 거기 넘겨줘?」
「아닙니다, 이사님! 오해십니다! 그 새끼들이랑 손을 잡다니요? 어떻게 제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저는 그 쪽을 이용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 쪽이 원하는 대로
잠깐 도련님을 보내준 다음에, 이번 살인 사건 용의자 선상에서 회장님이 빠져 나오기만
하시면 어떻게 해서든 다시 도련님을 모셔 오려고 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이번 사건과
엮이지 않으실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네가 뭔데 너 혼자 그런 결정을 내려? 네가 뭔데 네 맘대로 판단해서 행동해?!
그 새끼들을 이용하려 그랬다고? 꼴 좋네. 결국 이용당한 쪽은 너잖아.」
꽤나 유창하게 이어지던 준상의 해명은, 간단명료하고 무자비한 주혁의 선고 한 마디에
얼토당토않은 궤변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더 이상 아무 변명도 덧댈 수 없어서 준상은
말 대신 질펀한 흐느낌을 토해내다가, 망연히 벽에 기대어 선 재준에게로 엉금엉금
기어간다. 그리고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며 애원한다.
「죽여주십시오, 회장님. 죽여주십시오, 회장님. 저를 죽여주십시오…」
의도야 어찌 됐든 저는 당신의 등에 칼을 꽂았습니다. 언젠가 당신의 연인을
그들에게 넘겨준 후 짐승처럼 끌려온 배신자에게 당신은 말씀하셨지요.
네가 내 인생을 죽였다고. 저도 당신의 인생을 죽였으니, 당신의 삶을 산산조각
내버렸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죽여주십시오, 죽여주십시오.
「김준상.」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 가쁜 숨을 몰아쉬던 재준이 낮게 침전된 음성을 떨어뜨리자,
준상은 어서 그가 자신의 머리통에 총을 겨누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그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재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죽음보다 더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준상을
추락시킨다.
「오늘 부로 충의회에서 제명한다.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그 땐 넌 죽는다.」
「아, 안 됩니다, 회장님! 죽여주십시오. 회장님 손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살아 나갈 수는 없습니다. 제명을 하신다 해도 다시 회장님 앞에 나타날 테니,
차라리 지금 회장님 손으로 죽여주십시오!」
「나가. 내 손에 네 피 묻히기 싫으니까 나가.」
「안 됩니다! 회장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회장님께
제명 당하고 저 혼자 사느니 죽는 게 백 번 낫습니다! 왜 그렇게 모르십니까?」
「나도 알아. 그래서 너 안 죽여. 넌 죽일 가치도 없어. 나가.」
「회장님!」
「그렇게 죽고 싶으면 네 손으로 자살을 하던가. 내 손에 네 더러운 피 묻히게 하지 마.」
그를 향한 재준의 원한과 증오는 당사자인 준상 뿐 아니라 둘러 서 있던 주혁과 혁수,
태현까지도 몸서리가 날 만큼 깊고 거대하다. 준상은 온 몸에 맥이 풀려 끈덕지게 잡고
매달리던 재준의 바지 단을 놓쳐 버린다. 재준은 쌩 하니 그를 지나쳐 병실 밖으로 나서며
나머지 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
「나 퇴원할 거니까 막지 마. 태현 형 말이 맞아. 한가하게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할 일이 남았거든.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
「재준아, 내 말은…」
「몸부터 챙기라는 말도 하지 마. 난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근데 할 일은 하고
죽어야 할 거 아냐. 얼마 안 걸려. 금방 다시 누워서 나자빠져 있을 테니까 걱정 마.」
난센스 같은 말들만 속사포처럼 쏘아댄 후 재준은 뒤돌아서 발을 내딛는다. 주혁과 태현은
부리나케 그를 쫓아 움직이고, 혁수는 주혁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준상이 못내 마음에
걸려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휴지 조각처럼 찌그러진 준상의 뒷모습이 주먹만한 크기로
변했을 때 즈음,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그리고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쓰러진 그의
몸 아래로 새빨간 핏줄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연이어 천장까지 치솟는 간호사들의
비명 소리, 이곳 저곳 열리는 문 사이로 웬 소란인가 내다보는 환자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여 평온하던 병원은 한 순간 아수라장으로 뒤바뀐다. 태현과 주혁, 혁수는 덜컥
한 박자를 빠뜨린 채 엇갈려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준상에게 달려가지만, 재준은
한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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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223
by 원랑 in '리얼톤혁'
「검사님, 한병규 검사님 오셨습니다.」
공손하고 예의 바른 만큼 밋밋한 비서의 목소리에 인하는 기계적으로 인터폰을
눌러 병규를 들여보내라 허락한다. 호기 있게 들어서는 병규의 뒤에는 문환이
뒤따른다. 그는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굽실거리며 악수를 청하는 인하의 손을
맞잡는다. 짤막한 안부 인사가 오간 뒤 인하와 병규는 나란히 앉고 문환은 그
맞은편에 자리한다.
「조 회장, 아주 놀라다 못해서 기가 막힙니다. 보통 배포가 아니시던데요.」
인하는 문환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며 능글능글 농담처럼 운을 뗀다. 문환은
인하의 입술에 물린 담배 가까이 라이터를 가져가며 모호한 미소만을 짓는다.
뽀얀 연기를 분사해내며 인하는 재차 그의 의중을 찔러본다.
「조 회장 일 솜씨가 그렇게 과감한 줄 미처 몰라보다니, 미안하게 됐습니다.
큰 인물을 가까이에 두고 그 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두 분께서 안 계셨으면 제가 어디 그럴 엄두나 냈겠습니까.
다 장 검사님, 한 검사님 덕분입니다. 이 은혜는 제가 살면서 두고두고 갚아
나가겠습니다.」
「허허, 이 사람 참… 공치사도 제법이란 말이야. 당해낼 재간이 없구먼.」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경청하던 병규는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문환에게
칭찬인지 면박인지 모를 말을 건넨다. 문환은 얌전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비벼 끈 다음, 자세를 여미며 인하와 병규에게 곧은 시선을 쏘아 보낸다.
「솔직히 많이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미리 말씀 올리지 못한 점,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보안 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강태를 죽일 거라는 걸
검사님들 중 한 분이라도 미리 아셨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제가 두 분을 못 믿어서가 절대 아니라, 워낙 중대한 일이라서요. 죄송합니다.」
깍듯이 머리 숙여 양해를 구하는 문환에게, 인하는 그가 눈치 챌 수 없게끔 찰나적인
조소를 띄운다. 그의 말대로 강태의 사망 소식은 적잖이 충격적이었지만, 실상 그는
자기 목에 또 하나의 올가미를 덧씌운 꼴이다. 강태를 살해한 장본인이 자신임을
실토한 이상, 그는 계속 인하와 병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할 것이다.
감탄할 만큼 치밀하고 대담하고 계산적이지만 그도 역시 한낱 깡패에 불과하다.
「뭐 그리 거창하게 사과를 하십니까. 우리가 조 회장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안 그런가, 장 검사?」
병규는 사뭇 호인답게 관용 어린 태도를 취하고 인하는 간교한 속마음을 자애로운
미소로 위장하며 병규의 말을 받는다.
「그럼, 그렇고말고. 걱정하지 마세요, 조 회장. 내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뭐든 도와드릴 테니 마음껏 일을 추진해 보시라고요. 물론 조 회장의 계획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대범해서 놀랐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 가지고 우리가
조 회장한테 실망을 한다면 속이 좁은 거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두 분
검사님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저, 약소하지만 밑의 애들 시켜서 두 분 차 트렁크에
선물 하나씩 실어놓으라고 했습니다. 제 성의로 아시고 받아주십시오.」
「이 사람 진짜,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말을 안 듣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래도!」
어쭙잖은 청백리 흉내를 내며 펄쩍 뛰는 병규와 달리 인하는 슬며시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담백하게 대꾸한다.
「조 회장 성의를 거절해서야 되나요.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인하가 내거는 오묘한 웃음에 문환은 어쩐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작자다. 한병규처럼 단순하고 빤한 상대와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문환은 갑자기 불편해지는 심기를 다잡으려 녹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화제를 전환시킨다.
「어떻게, 살인 사건 수사는 진척이 좀 있나요?」
제법 날카로운 문환의 질문에 인하는 갸우뚱 머리를 기울이며 되묻는다.
「S 호텔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H 호텔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를테면 유혜련과 강태 중 어느 쪽을 얘기하는 것이냐, 하는 의미다. 문환은 피식
비어져 나오는 실소를 황급히 차단하며 말을 잇는다. 무례한 행동으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하루아침에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저자세를 취하는 것은 더욱 멍청한 짓이다.
「H 호텔 사건이야 제가 신경 쓸 이유가 없으니 여쭤볼 이유도 없지요. 대한민국에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 사건이 어디 한 두 건입니까.」
소름이 쪽 끼칠 만큼 뻔뻔한 문환의 반문에 병규는 은근슬쩍 무섬증이 든다.
반면 인하는 한바탕 크게 박장대소하고 싶은 욕구를 삼키느라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이 정도 되는 인물이니까 이재준을 쓰러뜨렸지, 하는 생각에 인하는
오래도록 그를 지척에 두고 자주 써먹으리라 마음먹는다.
「여하튼 조 회장, 정말 한 검사 말마따나 당해낼 재간이 없네요.」
「부끄럽습니다. 저 같은 놈이 두 분 검사님 아니면 어떻게 이 만큼 왔겠습니까.」
빼먹지 않고 덧붙이는 아첨의 언사가 인하를 썩 흡족하게 한다. 이런 자의 약점을 내가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니. 실로 가슴 뻐근한 천행이 아닐 수 없다. 인하는 뱃가죽이
근질근질 당겨오는 쾌감을 깊게 들이마시며 문환이 원하는 정보를 인심 쓰듯 흘려준다.
「어제 S 호텔 사건 참고인 조사가 마무리 됐어요. 피해자가 술집 작부라 마땅히
조사할 만한 사람도 주변에 별로 없더구먼. 유가족도 없고. 쓸 만한 사람이라곤
딱 한 사람 밖에 없었어요. 피해자 친군데 얘기 들어보니까 대 여섯 살 때부터
자매처럼 지낸 사이고, 그나마 이 여자 입에서 건질 만한 얘기가 좀 나왔죠.」
「그 여자가 이재준을 용의자로 지목했습니까?」
민첩한 두뇌 회전과 애매한 말속에 감춰진 진의를 파악해내는 탁월한 능력까지.
인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문환이 마음에 쏙 든다. 병규의 얼굴에도 감탄의 기색이
떠나질 않는다.
「맞아요. 아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더군요.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재준
외에는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길길이 뛰던데요.」
「당연히 그럴 만도 하죠. 유혜련은 이재준을 만나기 전까진 아주 평범한 유흥업소
종사자였을 뿐이니까요. 이재준을 만난 다음부터 그 여자 인생이 꼬인 거 아닙니까.」
「그 참고인도 똑같은 소리를 했어요. 이재준을 만난 후부터 자기 친구가 이상해졌다고요.
그것 때문에 심하게 싸운 적도 많았답디다. 아, 그리고 그 여자도 알고 있던데요?
이재준이 강태랑 애인 사이라는 것 말이에요. 이재준이 강태랑 다시 합치면서 자기
친구를 차 버렸는데, 유혜련은 이재준을 안 놔주려고 별 짓을 다 했대요. 그리고 또
이재준은 유혜련을 떼어내려고 온갖 지랄을 따 떨었답니다. 매달 생활비를 대 준다느니,
가게를 차려준다느니, 공부를 시켜준다느니 하면서. 근데 희한한 건 유혜련은 그걸 다
마다했다는 거예요. 보통 술집 작부들 같으면 그 정도 받아먹고 떨어지잖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뭐, 여자가 이재준한테 완전히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요. 여자들은
약간 그런 면이 있지 않습니까. 감정에 치우쳐서 사리분별 못하는.」
「지금으로선 그럴 공산이 커요. 참고인 진술에만 의거한다면 말이지요.」
「그럼 곧 이재준에게 소환장이 발부되는 겁니까?」
대화의 흐름을 빨리 하기 위해 문환은 단도직입으로 치고 들어간다. 문환의 질문이
너무 당돌하고 직설적이어서 인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다가 금새 여유 있는 표정을
회복하며 대꾸한다.
「네. 참고인 조사 끝나자마자 소환장 발부에 착수했어요. 근데 지금 이재준이 병원에
입원을 한 상태라 경찰에 불러오려면 며칠 더 기다려야할 것 같아요.」
「입원을 했다고요? 그럼 아직 강태가 죽은 걸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있나요. 이재준이 누군데. 벌써 강태가 죽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에 호텔로 찾아왔다더군요. 신고를 한 건 호텔 직원이지만 이재준이 자기
눈으로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했어요. 근데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해 버린 바람에
병원으로 다시 실려갔어요.」
문환의 입에서 막을 겨를도 없이 얄팍한 실소가 튀어나온다. 경망스런 웃음소리를
낮추느라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킬킬대던 그는, 의뭉스러운 낯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인하와 병규에게 정중히 사과부터 한다.
「아, 죄송합니다. 두 분 앞에서 예의가 아닌데…」
「뭐가 재밌다고 그렇게 웃나? 사람 참 싱겁기는.」
병규는 뚱한 표정으로 그에게 가벼운 타박을 날린다. 문환은 방정맞은 폭소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얼굴빛을 단속한다. 인하는 잠잠히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린다.
「알겠습니다. 이재준이 수갑 차고 호송차 탈 그 날만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아무쪼록 두 분, 얼마 동안은 몸조심 하셔야 합니다. 이재준이 눈깔 돌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제 밑의 애들 몇이라도 시켜서 살펴드리고 싶지만
남의 이목 때문에…」
「아이고,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괜히 애쓸 필요 없어요. 제 까짓 놈이 뭐라고
감히 검사한테 해코지를 하겠습니까. 대한민국 법치국가예요. 걱정할 것 없어요.」
인하의 목소리는 자신만만하고 우렁차다. 병규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문환은 일어서서 코가 배꼽에 닿도록 공손히 절한 후 재차 당부한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구석이
있거든 바로 연락 주십시오. 총알 같이 달려오겠습니다.」
「하하, 알았어요, 알았어. 배짱 두둑한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실까, 안 어울리게.
알았으니까 걱정말고 이재준이 법정에서 사형 선고받는 것 구경할 준비나 해 둬요.」
저절로 헤벌쭉 벌어지는 입술을 억제하지 못한 채 문환은 인하, 병규와 차례로
친밀감 두터운 악수를 나눈 뒤 자리를 뜬다. 두 중년 사내는 각각 또 한 대의
담배를 피워 물며 도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다.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인하는 쾌활한 음색으로 마주 앉은 동료에게 묻는다.
「할 일 많이 남았어? 자네한테 신세도 갚을 겸 한잔 사고 싶은데. 어때?」
「이 친구 무슨 소리하는 거야. 자네가 언제 나한테 신세를 졌어?」
「신세를 졌지. 암, 그렇고 말고. 자네 덕분에 조 회장 같은 인재를 만났잖아.
중매만 잘 서도 술 석 잔이 기본이라는데, 당연히 거하게 사야지. 안 그런가?」
「아, 그렇게 되나?」
두 남자는 호쾌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사이좋게 사무실을 나선다. 근래 들어 일찍
퇴근길에 오르는 인하 덕택에 여비서의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인하는 평소보다 더
밝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에게 이만 들어가 보라고 이야기한 뒤 날아갈 듯
거뜬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각, 인하의 검은색 승용차가 그의 집 대문 앞에
당도한다. 모처럼 거나하게 취한 인하는 차를 몰고 온 대리운전사에게 요금과 더불어
후한 팁을 건넨다. 운전사로부터 열쇠를 돌려 받은 그는 차 뒤쪽으로 가 트렁크를
열어제친다. 분홍빛 보자기에 싸여진 큼지막한 상자 하나가 눈에 뜨인다. 매듭을
풀어헤치고 뚜껑을 젖히자 고가의 건강 식품 세트가 소담스럽게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만원 권 지폐 뭉치가 셀 수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인하는
누가 볼 새라 잽싸게 뚜껑을 덮은 뒤 건강 식품으로 위장된(?) 돈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향한다. 온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주위를 면밀히 둘러보지만,
어두운 구석에 모습을 숨긴 그림자를 그는 발견하지 못한다. 짙은 색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인하를 주시하던 그림자는 담배 두 개비를 연달아 태운 후 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인다. 술기운 탓인지 인하는 대문을 잠그지 않은 채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 상태다. 뜻밖의 행운에 재준의 입가엔 비릿한 조소가 번진다.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마당까지 침입한 그는 구부러진 철사 조각 하나로 순조로이 현관문의 자물쇠를
딴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꾸며진 집안으로 발을 디딘다. 밑창이 두꺼운 운동화를 신은
탓에 발소리는 전혀 나지 않는다. 재준은 점퍼 안 쪽에 지니고 있던 칼을 꺼내 들고
살금살금 인하와 정숙의 침실을 향해 다가간다. 최대한으로 조심성을 발휘하여
문고리를 돌린 그의 눈에 두 부부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 희끄무레한 실루엣만으로
비쳐진다. 몇 시간 동안 축적된 알콜 성분 때문에 감각이 무뎌진 인하는 세상 모르고
무의식의 격랑 사이를 노닐지만, 예민한 정숙은 선잠이 들었었던지 퍼뜩 눈꺼풀을
치켜올린다.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난 재준을 보자 그녀는 째지는 하이 톤으로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댄다. 그제야 인하는 느릿느릿 눈을 뜨는데, 재준의 팔이
섬광처럼 불쑥 뻗어나오며 시퍼런 단도가 가차없이 그의 목을 긋는다. 길이가
짧은 칼임에도 재준의 힘이 워낙 엄청나서 그의 목은 순식간에 반 토막이 난다.
처참히 엎드러지는 그의 몸 위에 재준은 자신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힌 칼을
던져 놓는다. 그리고 목놓아 울부짖으며 남편을 불러대는 정숙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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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ㅁ아가혁수7님: 큰 사고야 제가 친 거죠-_-;; 준상씨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ㅁ-!!
이렇게 말하면서 준상이를 가뿐히 보내버린 저. 참 뻔뻔하죠? -_-;;
ㅁhistory07님: 머라구 답변을 해드려야하나;; 말문이 막히신듯 ^^;;;
ㅁwhitewhyuk님: 잘못 보신 건 아니십니다-_-;;; 근데 진짜 독자분들이 너무 놀라셔서
제가 더 놀라는 중입니다;; 저는 정말 다들 웬만큼 짐작을 하고 계실거라 생각했거든요;;
ㅁ준타열희님: 음주독서를 즐기셨군요^^;; 제가 원래 등장인물 허무하게 죽이는게
특기입니다-_-;; 죄송ㅠㅠ;;
ㅁcy2id님: 네, 달려오십시오. 기꺼이 맞겠습니다;; 이미 각오가 다 되어있어요 ㅠㅠ;;
ㅁinmylove님: 강태가 왜 죽었냐면, 제가 죽였거든요-_-;; 제가 나쁜년이에요 ㅠㅠ;;
ㅁ혁이빨래님: 시삽님, 죄송합니다ㅠㅠ 원고마감기한두 못지키구;; 오르가즘 완결
때문에 사실 지금 제가 제정신이 아니에요ㅠㅠ 너무 죄송하구요, 그래도 일케 잊지
않고 리플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면목이 없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ㅠㅠ
원고는 이번주말까지 꼭 제출할게요. 죄송해요ㅠㅠ;;
ㅁkuem83님: 느낌표에 깔려죽을 뻔 했습니다^^;;; 그래도 단 한 마디였지만 포스가
엄청나시군요;;
ㅁJOAHAE님: 님의 리플 포스 또한 대단하십니다-ㅁ-;; 아아, 이럴수밖에 없는 저를
용서하셔요, 제발 ㅠㅠ;;
ㅁhyukabbo님: 그렇죠;; 준상이는 재준이에 대한 집착, 그것 밖에 아무것도 안 보인거죠;;
제가 준상이를 저렇게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ㅠㅠ
ㅁskyara님: 감사합니다ㅠㅠ 물론 제가 작가이긴 하지만, 제가 생각해도 등장인물들을
너무 단숨에 보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아무튼 제 글이 여러가지 생각을 하도록
한다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 님의 홧팅을 받아 힘내서 완결까지 쭉 달릴게요-
ㅁorange걸님: 아, 결혼이요? 외국에서 했거든요^^;; (어딘지 맞춰보삼 ㅋㅋ <- 주책-_-;;)
덕분에 하객들은 매우 단출했지요;; 저희 식구들이랑 가까운 친척들, 그리고 제일 친한
친구들 두 세명만;;; 제 남편 쪽도 마찬가지였고요. ㅋ(썰렁했던 결혼식이랄까요 ^^;;;)
[원랑] 오르가즘 - 224
by 원랑 in '리얼톤혁'
장례 식장처럼 이율배반적인 장소는 드물다. 빈소에서는 슬픔과 시름에 잠긴 유가족들이
더러는 오열하며, 더러는 넋이 나간 채 조문객을 맞이하고, 불과 몇 발자국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화투놀이를 하고 술을 마시고 음식을 나르느라 시끌벅적하다.
조문객들은 침통한 낯으로 인하의 영정 사진 앞에 절을 하고 상주인 주혁과 혁수에게
지리멸렬한 위로의 몇 마디를 아낌없이 퍼준 뒤, 이제 할 일은 다 해치웠다는 듯
산뜻한 발걸음으로 지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종종걸음 친다. 정숙은 남편이
끔찍하게 살해되는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한 이래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자마자 황망히 달려 온
주혁에게, 그녀는 온갖 욕설과 저주와 패악을 서슴지 않으며 달려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지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몹시 의아해했지만 주혁과 혁수는
한결 같이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부친상을 당한 상주들에게 전후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라서 모두들 궁금증을 삭인 채
자기들끼리만 수군거린다. 조문객이 뜸해진 사이 주혁은 아버지의 영정 사진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묻는다.
억울해서 눈이나 제대로 감기십니까, 아버지. 당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시던
법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도 죽음을 피할 순 없으셨겠지요. 이렇게 허무할 것을,
이렇게 쓸쓸할 것을, 당신의 존재가 이리도 가볍고 허술하다는 것을, 진정 모르셨습니까.
왜 그리 아귀처럼 아무것도 놓질 못하셨습니까. 저 같이 못난 아들 없었던 셈 치시고
이재준이라는 깡패 하나쯤이야 제멋대로 날뛰든 말든 아무 상관도 하지 마시지.
무덤에 들어가도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서실 것처럼, 그래서 무서울 게 없는 양
큰소리를 떵떵 치시더니, 결국은 좁은 관 속에 덩그러니 담겨 계시는군요.
당신께 용서를 빌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애석해 하지도 않겠습니다.
불효자가 될 지언즉 추악한 위선자는 되지 않기 위해서.
주혁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선 혁수를 바라본다. 연갈색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감싸 돌며
내려와 혁수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다. 새까만 정장이 의외로 제법 근사하게 어울린다.
저 자그마한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차 있을까. 주혁은 불현듯 참을 수 없을
만큼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다갈색 순박한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단조롭고
나직한 그 특유의 음성에 흠뻑 취하고 싶다. 잠깐의 틈을 타 주혁은 혁수에게 속삭인다.
「피곤하지? 나 혼자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들어가서 눈 좀 붙여.」
그의 목소리 듣기를 열망하는 주혁에겐 아랑곳없이 혁수는 입을 꾹 다문 채
도리도리 고개만 가로젓는다. 딱히 더 할 말이 없어진 주혁은 그래도 혁수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허겁지겁 빈소 안으로 들어서는 태현과
눈이 마주친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태현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질려 있다.
그는 바쁘게 몸을 놀려 고인 앞에 절을 올린 다음 국화꽃 한 송이를 영정
앞에 놓아두고 주혁과 혁수에게 다가선다. 서로 맞절하는 세 남자
사이엔 아무런 위로나 감사의 인사도 오가지 않는다. 무척 부자연스러운 광경이다.
주혁은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촌 형에게 잠시만 상주 노릇을 대신해달라
부탁한 뒤, 태현과 혁수를 데리고 빈소 옆에 마련된 곁방으로 들어간다. 비밀스런
공간이 보장되자 태현은 억눌러 온 이야기를 봇물처럼 쏟아낸다.
「이게 웬일이냐. 이재준 이 새끼 결국 사고 쳤구먼. 진짜 어떡하냐, 이제?」
「재준이 짓이 확실해? 경찰에서 발표된 내용 있어?」
수선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태현이 무색하도록 주혁은 냉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퉁겨낸다. 혁수는 청각을 바짝 추켜세우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한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서울지검 차장 검사가 살해됐는데 경찰에서 미적미적 대충
수사하겠어? 이재준 짓 맞아. 칼에 지문이 떡하니 찍혀 있단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태현의 대답에 혁수는 와락 울음이 솟구쳐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주혁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며칠 전 재준이 병상에 누워 했던 얘기들이다. 형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지 않느냐고, 다 쓸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이 새끼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짓을 해? 완전히 돌았어. 일부러
칼에다 지문 찍어서 놔둔 게 분명해. 자기 짓이니까 엄한 놈 족치지 말고 잡으려면
한번 잡아봐라, 이런 거지. 그렇게 대책 없이 뒤집어써서 뭘 어쩌겠단 건지, 진짜
내가 돌아버리겠다니까?」
「재준이랑 연락 안 돼?」
「씨발, 연락 되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그 때 병원에서 나간 뒤로 잠적이야.
사무실에는 코빼기도 안 비친지 오래 됐다 그러고.」
주혁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온다. 혁수는 가슴 한 복판에 돌덩이가
콱 박힌 듯한 느낌에 입술을 움직이기 힘겹다. 껄끄러운 적막이 비좁고 누추한
방안을 가득 메운다. 주혁은 재준의 행방을 요모조모 추측해 보지만 아무래도
가닥이 잡히질 않는다.
「준상 씨는… 어느 병원에 안치했어?」
까마득한 침묵만을 나열하던 혁수가 조심스럽게 물어오자, 태현의 낯이 문득
혼탁한 밤의 빛깔을 입는다. 농담처럼 던진 재준의 한 마디에 정말로 자신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린 준상을, 절대로 용서할 순 없지만 마음 한 구석 가련히
여기는 주혁과 혁수, 그리고 태현이다.
「재준이 있던 거기에 했지, 뭐. 충의회 전담 병원이잖아.」
「준상 씨, 가족도 없다며. 장례는 누가 치러주고 있는 거야?」
「걔가 왜 가족이 없냐? 충의회 조직원이 몇 명인데. 아까 잠깐 갔다 왔는데
덩치 산만한 남자들이 득시글득시글하더라. 그 새끼가 성격이 좋아서
조직 안에서도 다들 걔 좋아했잖아. 미친놈들, 저들 보스는 사람 죽이고
어디 가서 뒤졌는지 말았는지 관심도 없어. 충성? 의리? 개도 그것들 보단
낫겠다. 지금까지 재준이 덕에 먹고 살았으면서…!」
잠시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있던 태현의 가슴 속 격노가 화르르 불을 지핀다.
그는 흥분에 들떠 더 크게 목청을 돋우어낸다.
「씨발새끼들이 날 딱 보자마자 뭐랬는줄 아냐? 나더러 여기 뭐 하러 왔냐고
그러더라. 개새끼들, 형님 형님 하면서 온갖 지랄을 다 떨 땐 언제고, 이젠
안면 딱 까고 나오는데 아주 내가 기겁을 했다. 아무리 재준이가 지들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했어도 보스는 보스야. 재준이가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그 박 부장인가 뭔가 하는 새끼는 벌써 제가 보스라도 된 것 마냥 설치더라?
재준이 얘기하면서 어떡할 거냐고 했더니 뭐라는 줄 알아? 자기들이 왜
그걸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대. 재준이가 저지른 일을 자기들이 수습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보라고 들이대는데, 아휴… 진짜 한 대 확 쳐 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태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혁은 얼굴은 조금 더 어두워질 뿐 별로 놀라거나
경악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혁수 역시 덤덤하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에, 분노가 치밀기보다는 씁쓸하다. 그리고 막막하다.
「제일 시급한 건, 일단 재준이를 찾아야 해. 나 정말 무서워 죽겠어. 이 새끼
어디 가서 혼자 약 처먹고 뒤질까봐 무서워 죽겠다고.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태현아, 말 함부로 하지 말자. 설마 재준이가…」
「설마라니? 넌 그 때 재준이 얼굴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그 때 걔 얼굴
못 봤어? 인생 다 포기한 사람 얼굴이 바로 그런 거라고! 내가 왜 이렇게
잘 아냐고? 나도 겪어봤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게 어떤 건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무시무시한 비관적 전망이 현실로 닥쳐올까 봐 혁수는 얼른 태현의 말을
가로막지만, 불안정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뎅겅 잘라먹으며 태현은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고함을 친다. 그의 말이 맞다. 그도 그랬었다.
무기력하게 세라를 이승으로 떠나보냈던 태현이다. 혁수는 순순히 입을
닫을 수밖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다.
「너희들은 몰라. 너희들도 헤어져 봤다고 얘기하고 싶겠지만, 그거랑 이건 완전히
틀려. 그래도 어느 하늘 아래 내 사람이 살아있다는 건… 행운이고 행복이야.
그게 아닐 땐… 무슨 수를 써도 살아있는 동안은 만날 수 없어졌을 때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 그게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니까. 어차피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에는 그 사람 다신 못 만나는
거잖아. 죽은 다음에 저승이라는 게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계속
사느니 0.1%의 가능성이라도 한번 가 보고 싶은 거야. 너희가 그런 걸 느껴봤어?
너희는 몰라. 발톱의 때만큼도 모른다고.」
「하지만 넌 이겨냈잖아. 재준이도 너처럼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막힘없이 술술 풀려나온 태현의 장광설에 주혁은 단호히 응수한다. 견고히 지어진
성벽처럼 늘 강인하고 굳세었던 재준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며, 주혁은 스스로를
안위한다. 혁수 또한 전적인 동감의 표시로 몇 차례나 반복하여 고개를 주억인다.
태현은 대꾸 없이 야트막한 한숨을 흘리며 벽에 부착된 금연 표지판을 무시하고
담배에 불을 댕긴다. 그런 그의 행동이 전염성을 가진 듯 주혁도 얼른 한 개비를
피워 문다. 길게 연기를 뿜어내며 태현은 슬며시 화제를 바꾼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기분이 어떠냐? 슬프냐?」
얼핏 들으면 기분이 몹시 상할 법도 한 태현의 말투에 주혁과 혁수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쓴웃음만 내건다. 태현은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을 덧댄다.
「아무리 봐도 슬퍼보이지는 않고, 설마 씨발 잘 됐다 이러면서 후련해 하는 건 아니지?」
「우리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니다. 그냥… 허탈해. 사람 목숨이 이렇게 쉬운 건가.」
「하긴, 며칠 사이에 여러 사람 골로 보냈다. 무슨 영화 찍고 있는 것 같아.」
영화라면 얼마나 좋겠어. 이 모든 게 한 편의 비극이라면. 그래서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허황된 기대지만.
혁수는 혀를 놀릴 기운조차 없어 속으로만 부르짖는다. 또 별안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그는 턱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다.
「강태는… 어떻게 됐어? 빈소엔 가 봤어?」
꽁초로 변한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며 주혁은 짐짓 심상한 어조를 가장해 묻는다.
태현의 커다란 눈동자엔 이전보다 훨씬 더 짙고 육중한 그늘이 내려앉는다.
「아니. 빈소가 아직 안 차려졌어. 아버지 쪽으로는 친척이 아예 없는 것 같고,
그나마 어머니 쪽에 이모가 한 분 계시는데 그 분도 장례를 맡아주기엔
사정이 여의치가 않으신 것 같아.」
「강태 누나는? 프랑스에 유학 가 있다 그러지 않았어? 아직도 소식이 안 전해졌나?」
「제일 먼저 전해졌지. 근데… 안 오겠다고 그랬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안 오겠다니?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죽었는데 안 온다고?」
「내 말이. 나도 듣고선 기가 막히더라. 그런 동생 없으니까,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했단다. 지독한 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에 사무쳐 태현은 한번도 대면한 적 없는 여자에게 험악한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는다. 주혁과 혁수는 망연자실하여 태현이 부연 설명을 해 주기만
기다린다.
「아무리 동생이랑 의절을 했다고 해도, 그게 사람으로서 할 도리냐? 그래도
하나 밖에 없는 자기 핏줄인데, 미운 정도 없나?」
「강태가 누나랑 의절했었어?」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재준이가 슬쩍 얘기해줘서 알았지. 아마 그랬나 봐.
줄줄이 얘기 안 해도 딱 감이 안 잡히냐? 너희도 재준이랑 강태가 어떻게
만났는지 알잖아. 까놓고 말해서 재준이는 강태 부모님을 죽인 철천지 원수야.
그런데 강태가 재준이랑 사귄다고 하니, 그 누나 심정이 어땠겠냐? 동생이
인간 말종으로 보였겠지. 게다가 강태는 남자 아니냐. 멀쩡했던 동생이 갑자기
동성애자가 된 것도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인데 그 상대가 부모를 죽인 그 놈이라니,
내가 그 여자 입장이었어도 동생 다시 안 보려고 했을 거야.」
태현의 말을 경청하던 주혁의 얼굴이 쓰디쓴 실소로 물든다. 한 배(腹)에서 태어난
누나와 의절을 하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연을 끊고, 이제껏 자신을 먹이고
입혀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왜 우리가 이토록
흉악한 죄와 태산 같은 업보(業報)를 뒤집어 써야 하는가. 우리는 그저 서로를
사랑하는 것뿐인데. 세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처럼 우리도 서로를 갈망하는
것뿐인데. 남자와 남자의 합일, 그것이 이토록 잔인무도한 형벌을 받아야 할 만큼
중죄인가. 혁수를 바라볼 때마다 떨리는 내 심장이 죄인가. 그 심장의 울림을
외면하고 짓밟아 버리지 못한 내가 죄인인가.
「그래서… 강태 지금 어디 있는데?」
「경찰 시체실에 그대로 있어. 내가 내일 장례 식장 잡고 빈소 차리려고. 그래봤자
올 사람도 몇 없겠지만, 그렇다고 쟤 저대로 보낼 순 없잖아. 재준이 위해서라도
격식 갖춰서 해야지.」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며칠만 기다려. 아버지 발인만 끝나면 내가 할게.」
자신의 힘으로 강태의 빈소를 마련하겠다는 태현의 말에, 주혁은 이맛살을 찡그리며
그를 만류한다. 그러나 태현은 완강히 머리를 내젓는다.
「아냐, 내가 할래. 강태 저 새끼… 불쌍해서 더 이상은 거기 못 놔두겠어.
그리고 너야말로 무슨 정신이 있어서 초상 치러주겠다는 거야? 넌 혁수랑
앞으로 살 궁리나 해. 어떻게 할 건지. 참, 혁수 어머니는?」
그러고 보니 당연히 빈소를 지키고 있어야 할 미망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서,
태현은 뒤늦게 정숙의 부재가 무엇 때문인지 질문한다. 고개를 푹 수그리며
아무 대답을 못하는 혁수 대신 주혁이 입을 연다.
「거동을 못하셔서 병실에 누워 계셔. 거기다가 날 보자마자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으시길래… 안 그래도 친척들이 전부 다 궁금해서 죽으려고 한다.」
건조하고 작위적인 주혁의 조소에 태현은 납득이 간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는다.
해야 할 이야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한시라도 빨리 재준의 행방을 파악해야
하기에, 태현은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주혁과 혁수도 함께 몸을 일으킨다.
「아무튼 강태 장례는 내가 알아서 치를 테니까, 너희는 나중에 발인할 때 잠깐
들르기만 해. 알았지?」
「태현아, 그러지 말고…」
「그거라도 해 주고 싶어서 그래, 내가…. 강태랑 재준이한테 그거라도 해 주고
싶어서 그래. 부탁이야. 더 이상 토 달지 마.」
태현의 태도는 강경하다. 주혁과 혁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청을 수락하고 만다.
빈소 밖으로 나가던 도중 태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인하의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리고 사진 속 인하에게 마지막 간청을 아뢴다.
저승에 가 보시니 어떠세요. 육신을 벗고 나니 차라리 홀가분하신가요?
후회되지는 않으세요? 그러지 말걸, 그렇게 살지 말걸, 안타깝진 않으신가요?
이제 아셨죠. 우리 삶이 일생(一生)이라는 것. 그래서 행복해야 하잖아요.
딱 한번 유일하게 선물 받은 삶인데 행복해야죠. 그렇지 않나요?
……행복하게 살도록 빌어주세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장주혁이랑 안혁수, 당신 아들들… 행복하게 살도록 이젠 좀 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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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225
by 원랑 in '리얼톤혁'
청명한 겨울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서편으로 사라지는 저녁 노을은 과연 장관이다.
빌딩 숲으로 빽빽이 들어찬 서울에서 그나마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는
순간은 하루 중 딱 이 때 뿐인 듯 하다. 뜨겁고 진한 커피 맛을 음미하며 한병규
검사는 창 밖 풍경에 심취해 있다. 불현듯 노크 소리가 들리자 그는 아쉬운 듯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며 문 밖의 누군가에게 들어오라고 응답한다. 매서운 인상의
중년 사내가 성큼성큼 병규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꾸벅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검사님. 어제 전화드렸던 충의회 박창욱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제 저녁 늦은 무렵 병규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자신을 충의회의 새 회장이라
소개한 상대방은 다짜고짜 병규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병규는 그의 청을 쾌히 수락했고
그는 정확한 시간에 병규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 것이다.
「아, 예~ 반갑습니다. 이 쪽으로 앉으시죠.」
병규는 호기롭게 악수를 청하며 창욱을 소파로 이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금테 안경을
쓴 하얀 얼굴이 조직 폭력배라기보단 제대로 교육 받은 지적인 엘리트 같은 인상이다.
창욱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부드럽지만 힘 있는 음색을 발한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충의회 회장, 박창욱이라고 합니다.」
「한병규라고 합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검사님. 저보다 한참 어른이신데…」
「아,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말씀 낮춰 하십시오.」
예절 바르고 깍듯한 창욱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병규는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망설임 없이 친근한 반말 투로 지껄인다.
「그래,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고?」
「서른 여덟입니다.」
「그렇구먼. 젊어 보이시네. 아무리 나이가 별 거 아닌 세상이 됐다고 해도, 모름지기
한 조직을 이끌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세상 경험도 있고, 웃 사람들 모실 줄도 알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겠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 쪽 전대회장은 영 꽝이었어. 박 회장은 나이도 자실 만큼
자셨으니, 그런 실수를 하진 않으시겠지만.」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전대 회장 일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자진하여 재준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병규에게, 창욱은 잘 됐다 싶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더욱 진중하게 가라앉는 그의 표정에 비해 병규는 엉성하게
내걸었던 경계 태세마저 거두어 들이며 아주 느긋해진다.
「전대 회장이 저지른 일과 저희 충의회는 절대로 무관하다는 걸, 한 검사님께서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충의회 조직원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저희는 더 이상
이재준을 보스로 인정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놈을 보스로 모시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나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사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 충의회는
그렇게 허술한 조직이 아닙니다. 이재준이 보스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하긴 그래. 충의회 초대 회장님께서도 참 조직을 잘 이끌어 나가셨는데,
후계자 관리를 제대로 못하신 것 같아.」
병규가 이야기하는 초대 회장이란 재준의 아버지를 일컬음이다. 창욱은 세차게 머리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그럼요! 저도 소싯적에 그 분을 모셨지만, 정말 존경할 만한 보스이셨죠.
그 분의 유지를 받들어 이재준을 2대 회장으로 올리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할 일입니다. 남자 새끼한테 홀려서 조직 팽개치고
돌아다니질 않나, 결혼식을 하겠다고 설치지를 않나, 게다가 자기가 데리고 살던
여자가 다른 조직한테 개죽음을 당했는데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창욱의 낯은 치밀어 오르는 노기로 점점 불그스름하게 변색되어 간다. 병규는 흥미로운
기색을 보이며 그를 달래려는 듯 친절히 담배 한 대를 권한다. 두 줄기 희뿌연 연기가
꼬불꼬불 허공으로 피어 오르는 가운데 침착하면서도 은근히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병규의 목소리가 퍼져 나간다.
「그렇게 미친 짓을 하고 다니다가 급기야 대형 사고를 친 거군.」
인하의 죽음을 거론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창욱은 침울하고 송구스러운 빛을 교묘히
꾸며내어 병규의 말을 받는다.
「장 검사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살아 계셨다면 큰 일을
많이 하셨을 분인데 말입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솔직한 심정으로, 내가 지금 이재준 그 놈을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네. 그렇게 청렴하고 대쪽 같은 사람을… 천하의 불한당 같으니라고!」
병규는 이가 갈린다는 듯 전신을 부르르 요동치며 불끈 움켜쥔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내려친다. 창욱은 꽤 그럴 듯한 그의 쇼맨십에 슬그머니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꿀꺽 식도 아래로 삼켜 버린다. 그리고 진심으로 애도해 마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뗀다.
「정말로… 저라도 대신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몇 분 전만해도 격렬하고 흉폭하게 재준을 성토하던 창욱은 갑자기 눈물이라도 뚝뚝
떨어뜨릴 모양새다. 그러한 그의 제스처가 병규의 우월감을 효과적으로 만족시켜 준다.
병규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를 안심시킨다.
「허, 박 회장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용서를 빕니까. 잘못이라면 보스를 잘못 만난 것
밖에 없지. 사실 박 회장이나 충의회나, 똑같은 피해자 아닌가. 이재준이 자기 조직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놨어.」
「감사합니다, 검사님. 이렇게 저희 사정을 알아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손금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손바닥을 비벼대며 창욱은 병규의 면상 앞에 거듭 절을 해
올린다. 병규는 이제 그만 됐다는 듯 창욱의 등을 툭툭 쳐 주고, 그제야 창욱은 어깨와
허리를 똑바로 편다.
「장 검사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물론 이재준의 소행이지만… 연화회 조 회장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다고 봅니다. 검사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비굴하고 처량하게 쥐어짜는 목소리로 읊조리던 창욱은 언제 그랬냐는 듯 건조하고
딱딱한 목소리를 울려낸다. 그가 문환을 거론하자 병규는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당황하는 병규에게 창욱은 차분히 설명을 보탠다.
「강태를 죽인 게 조 회장이라는 건 이 바닥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 이재준이 미쳐 날뛸 걸 몰랐겠습니까? 처음부터 검사님들 믿고 일을
벌였으면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해야지요. 자기 목적 달성했으니까 이젠
검사님들이 어떻게 되시던 말던, 신경도 안 쓴다 이겁니까.」
「그, 글쎄… 조 회장은 그래도 나랑 장 검사한테 며칠 간은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어. 장 검사가 긴장이 풀려서 술을 과하게 먹었던 게 실수라면 실수랄까.」
「검사님, 그건 말이 안 됩니다. 검사님들께서야 하루가 멀다 하고 업무 차, 또 접대 차
술자리를 가지십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 조 회장이 아무런 조치도 취해드리지 않았다는
건 괘씸한 짓입니다. 짐승도 은혜를 입으면 고맙게 여기고 갚을 줄 아는데, 검사님들께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 자기 목적만 달성하고 발을 뺐다는 게 얼마나 괘씸합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평생 동안 이 신세를 갚아 나가겠다는 둥 달착지근한 아양의
언사로 은글슬쩍 자신의 의무를 방기해버린 문환이, 병규는 새삼 얄밉고 못마땅하다.
보호해 드리고 싶지만 남의 이목이 거슬려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남의 이목을
신경 쓰는 놈이 사람을 둘 씩이나 눈 하나 깜짝 않고 죽이다니. 우습다.
수 십 가지 생각의 곁 가지를 쳐 나가는 문환의 귓가에 한층 더 강경해진 창욱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조문환은 음흉한 놈입니다. 그리고 버릇 없는 놈입니다. 장 검사님께서 자길
도와주시다 비명에 가셨는데, 장례 식장에 한번 찾아오지도 않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그럼요. 얼굴 한번 못 뵌 저도 소식 듣자마자 부랴부랴 달려가서 마지막으로
인사 드리고 왔는데, 그 놈은 코빼기도 안 비쳤답니다. 장 검사님 자제 분이
저희 쪽에 잠깐 계셨던 거 아시죠? 그 분한테 똑똑이 들은 얘깁니다.」
「그럴 수가… 조 회장 그 사람, 다시 봐야겠구먼!」
창욱이 전해준 정보가 사뭇 충격적인 듯 병규는 기가 차서 말을 잇대지 못한다.
창욱은 역시나 틈을 간과하지 않고 병규로부터 원하는 답변을 끌어내기 위하여
집요한 시도를 계속한다.
「생각해 보십시오, 검사님. 장 검사님께서 돌아가신 마당에, 이제 조 회장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 검사님 한 분 뿐이십니다. 지금은 그 놈이 몸을 바짝 낮추고
엎드려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난 후엔 어떻게 돌변할지 모릅니다. 지금이야 검사님
입 속의 혀처럼 간 쓸개 다 갖다 바칠 것 같이 굴지만, 언제 얼굴 바꿔서
검사님께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놈입니다.」
이 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람에게 항상 제거의 표적이 된다는 것도 뜻한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람은 족쇄에서 풀려나게 될 테니까.
「그래서, 박 회장 생각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창욱이 거래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을, 병규는 비로소 확연히 알아차린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 창욱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러나 은근한 위협을 동반한 채 또박또박
대꾸한다.
「검사님 몸에 누가 함부로 손을 대겠습니까마는, 장 검사님께서도 저렇게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라 하지
않습니까. 위험의 싹은 미리 잘라버리시는 게 속 편하시지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네. 그러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거야.」
「저희 충의회에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아예 탁 까놓고 맞붙으면 검사님께서
굳이 저희를 감싸주시려 애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 쪽에는 아직 팔팔한
청춘들이 수두룩하니까, 적당한 놈들로 골라서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책임지겠습니다.」
요컨대 연화회와 전면전을 벌여서 조 회장을 제거한 뒤, 살인과 폭동에 대한
처벌은 자기 밑의 똘마니 몇 명에게 담당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힘을 써서 너무 무거운 형량을 받지 않도록만 해달라는, 노골적인 거래 요청이다.
「자신 있나? 연화회도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텐데.」
병규는 보다 확실한 다짐을 받아두고자 의구심 서린 눈동자의 너비를 좁히며
날카롭게 질문한다. 창욱의 얼굴에 떠돌던 웃음기가 자취를 감추며 그의 눈빛이
엄숙하고 결연해진다.
「말씀만 하십시오. 죽일까요, 아니면 검사님께 넘겨드릴까요?」
그 자리에서 조문환의 목숨을 끊어놓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생포하여 당신의 손으로
끝을 낼 수 있게끔 해주길 바라는지, 창욱은 패기만만한 태도로 병규에게 선택권을
준다. 병규는 사무실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파안대소를 터뜨리더니 시니컬한
웃음의 잔재를 입가에 매달고 말한다.
「일단 내가 내일 당장 조문환 체포 영장을 발부하도록 하지. 수사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어서 그렇지, 몰아치기만 하면 용의자 선상에 1순위로 올릴 수 있어.
그 놈도 나를 너무 믿었거든. 아무리 검사 둘을 등에 업고 있어도 조심할 건
조심했어야지. 현장에 자기 이름을 남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조 회장이 그랬습니까? 이해가 안 가는군요. 일 처리 하나는 완벽한 놈인데요.」
「일이 너무 술술 풀리니까 방심을 한 모양이지. 아니면 내 말대로 나랑 장 검사를
철석같이 믿었던가. 자기 이름으로 호텔에 체크인을 했어.」
「저런… 그 놈이 검사님들을 완전 바보 취급한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말일세. 뭐, 제 놈도 이재준이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곤 상상 못했겠지.
이런 식으로 일이 꼬일 줄 알고도 그랬겠나.」
「예. 그럼 내일 부로 조 회장이 H호텔 살인 사건 용의자로 체포되는 겁니까?」
「H호텔 뿐만 아니라 S호텔 사건 용의자로도 불려 올 걸세. 이왕 처리하는 거,
두 가지 다 한꺼번에 마무리 지어야지.」
「너무 무리수를 두시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자네가 도와줘야지. 조 회장이 소환되고 나면 바로 연화회를 급습하게.
당한 만큼 실컷 되돌려 줘. 수족들 다 잘리고 나면 조 회장도 별 수 없지.」
대가리가 없어진 사이 팔 다리를 몽땅 찍어내 버려라. 창욱은 병규가 제안하는
작전이 썩 마음에 들어서 시원스럽게 방긋 웃는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모레, 일을 진행시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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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226
by 원랑 in '리얼톤혁'
「형님, 정말 안 가 보실 생각이십니까?」
느닷없는 부하의 질문에 문환은 정독하던 신문을 한 쪽으로 치워놓으며 그와 눈을
맞춘다. 부하의 얼굴은 근심과 불안감으로 얼룩져 있다. 그 께름칙한 기분이 돌연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사로잡는 것 같아서, 문환은 홱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리고 맨송맨송한 답변을 신문 너머로 던져준다.
「내가 거길 어떻게 가. 장 검사 아들이 날 죽이려고 들걸.」
「그래도 한번 얼굴은 비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 검사가 형님께서 장례 식장에
안 오셨다는 걸 알면 많이 언짢아할 텐데요.」
「그 새끼가? 그 새낀 멍청해서 그렇게까지 생각 못해. 아마 지금쯤, 좀 있으면
서울지검 차장 검사 될 생각에 희희낙락해서 제정신이 아닐 거다.」
적나라한 경멸감을 드러내며 문환은 침을 내뱉 듯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부하는
눈자위에 드리운 염려의 그늘을 한 치도 벗겨내지 못한 채 재차 문환을 설득한다.
「그래도 형님, 잠깐 다녀오시죠. 오늘이 발인이라는데, 아직은 장례가 다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평일이라 비행기 표도 남아 있을 거고요.」
「됐어. 그럴 거면 진작에 갔다 왔지. 참, 그것보다 강태 시체를 누가 가져갔다며?
누군지 알아봤어?」
반복된 부하의 설득을 문환은 간단히 구석으로 내동댕이 쳐 버린 다음,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린다. 부하는 찜찜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쩔 도리 없이
보스의 질문에 고분고분 대답한다.
「아, 네. 가족이나 친척은 아무도 안 나타났고 친구라는 놈이 혼자 와서
받아갔답니다. 이름은 문태현이라고 하던데요.」
문태현. 처음 듣는 이름이다. 강태와 짧은 동거 생활을 할 때에도 그가 거론한
친구 중에 문태현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 생소하게 닿아오는 세 글자의
이름 하나가 갑작스런 인하의 죽음보다 훨씬 더 사위스러운 예감을 문환에게
안겨준다. 그 예감을 불식시키려 문환은 얼른 담배에 불을 붙인다.
「문태현? 뭐하는 놈이래?」
「그냥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오래 전부터 강태랑 알고 지낸 사이 같던데요?」
「이재준이랑 연관된 건 아니고?」
「아니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재준 같은 놈이 그렇게 평범한 대학생이랑
알고 지낼 이유가 없지요.」
「경찰에서는 아직 이재준 행방을 모르는 거지?」
「그렇습니다. 지문도 확보됐고, 이제 잡기만 하면 되는데 도통 어디로 사라진 건지
오리무중이라 속을 태우는 모양입니다.」
문환의 얇은 입술에 안도의 미소가 걸린다. 경찰에서도 아직 단서조차 잡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이재준의 소재를, 자신은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놈이 갈 데라곤 한 군데 뿐이다.
「그럼 내가 또 나서야겠군. 한 검사한테 전화 해서 약속 잡아 놔. 오늘 중으로.」
「네? 형님, 뭔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장인하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부터 줄곧 자신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양
모르쇠로 일관하던 문환이었기에, 부하는 깜짝 놀라며 되묻는다. 몇 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그이지만 여전히 문환의 속을 짚어내기란 바닷가 모래알
속에서 바늘을 찾아 뒤지는 격이다.
「그럼, 알고 있지. 이 귀중한 정보를 얼마에 넘길까? 비싼 값으로 되받아야 할텐데.
그렇지? 경찰 아저씨들은 우리 없으면 어떡하나 몰라. 수사에 차질이 아주 심하실
거야. 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장 검사 죽은지가 며칠인데 아직까지도
이재준 소재 파악이 안 됐어? 지문까지 떠 놓고. 한심하구먼.」
아무래도 보스의 자신감이 도를 넘어선 것 같아서 부하의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된다.
그런 그의 불안감에 쐐기를 박는 듯 다급한 노크 소리가 귓전을 두들기고, 문환이
입을 열어 응답을 하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휘둥그레 확대된 눈동자로 홀연히 들이닥친 경찰들을
두리번거리던 문환은, 침착한 태도를 되찾으려 애쓰며 그들을 향해 묻는다.
「무슨 일입니까? 남의 사무실에 들어오려면 예의를 갖추시죠.」
「깡패 주제에 예의 따지기는…! 이거나 읽어보쇼.」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내가 험상궂은 얼굴로 비웃음을 날리며 문환의 책상에
종이 한 장을 떨어뜨린다. 형편 없이 구겨지는 자존심 때문에 울컥 치미는 화증을
억누르며, 문환은 하얀 종이 위에 쓰인 글자들을 읽어나간다. 그가 읽기를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형사는 그의 팔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우며, 기계적인 어조로 미란다의
원칙을 주절거린다.
「조문환 씨, 지난 1월 15일과 1월 29일 발생된 유혜련 씨와 강태 씨의 살인 용의자로
당신을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고 만일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을 경우, 국가의 관선 변호사가 당신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숨도 쉬지 않고 후다닥 원칙 고지를 해치운 형사가 귀찮게 굴지 말고 순순히
협조하라는 듯, 억센 힘으로 문환의 팔을 잡아끈다. 곁에 서 있던 부하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면서 바락바락 항거하지만, 그의 외침은 철저히
무시당한다. 문환은 양 팔에 들러붙는 형사들을 떨쳐내려고 버둥거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너희들 뭐야? 누군지 말해! 체포 영장 발부한 게 누군지 말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건 음모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문환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악하며 고함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누군지 말하라고! 이것들 가짜 아냐? 신분증 내놔 봐, 신분증!」
「아, 그 새끼 되게 시끄럽네. 자, 신분증 여깄다.」
앞장서서 바쁜 걸음을 내딛던 형사가 짜증스럽다는 듯 욕설을 뱉으며 목에 걸고
있던 신분증을 문환의 눈 앞에 갖다댄다. 서초 경찰서 강력1반 경위 최철호.
문환이 플라스틱 케이스 안 쪽에 인쇄된 활자들을 읽어내자마자 우락부락한
형사의 손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갈긴다.
「어디 또 한번 소리 질러봐, 이 깡패 새끼야. 검사들 똥구멍 핥아주는 척 하면서
이용해 먹을 땐 아주 재밌었지? 싸가지 없는 새끼, 누구더러 가짜래. 그리고 체포
영장 발부한 게 누군지 네가 알아서 뭐할래? 닥치고 따라와, 이 새끼야.」
「이거 놔! 이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된 거야. 이건 뭔가 잘못 됐다고!」
「아, 씨발! 그 새끼 좆나 말 많네. 야! 빨리 끌고 와. 시간 없어. 지검에서 빨리
데려오라고 난린데, 늦으면 또 무슨 개지랄을 할지 몰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형사는 질펀한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문환의 양 옆에 붙은
부하들을 닦달한다. 완강히 몸부림 치던 문환은 그들의 손에 의해 무력하게
끌려 나간다. 그의 시야를 캄캄하게 가로막는 것은 단순한 불행의 예감이 아닌,
생생하게 살갗을 후벼 파고 저미는 공포다.
― 화장터로 향하는 영구차의 차창 밖으로 진눈깨비가 휘날린다. 날씨는 매섭게
춥고 새벽 미명의 빛은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희미하다. 영구차 안은
온풍기를 틀어놓았음에도 썰렁하기만 하다. 차에 탄 사람이라곤 태현을 포함하여
겨우 일곱 뿐이다. 아버지의 발인을 마치자마자 강태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던 주혁과 혁수는 각자 생각에 잠긴 채 말없이 앉아 있다.
태현은 품에 안고 있던 강태의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정말 예쁜 얼굴이다.
애교 있게 바스러지는 눈웃음이 아직 그가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문득 눈물이 솟구친다. 강태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여전히 찾을 길 없는 재준의 행방이
안타까워서도 아니고, 그저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가슴 시리도록 그에게 미안하다.
이렇게 밖에 그를 떠나 보낼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이, 변변한 무덤 하나 만들어
주지 못하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그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미안하다.
이재준, 너 어디 있냐… 강태 이렇게 초라하게 보낼 거야? ……제발 전화 좀 해.
그럼 너 어디 있던지, 영구차 돌려서 너 데리러 갈 테니까.
태현은 재준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는 심정으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걸려온 전화가 없는지 확인한다. 그러나 수신 내역은 전혀 없다. 처연한
한숨을 되삼키는 태현에게 옆 자리의 연수가 따스한 손을 내민다.
「피곤하지? 도착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잠 좀 자.」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반말을 사용하는 그녀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결코
침울하지 않은 그녀 특유의 음성이 태현에게 미약하게나마 평온을 되찾아 준다.
연수는 태현이 들고 있던 영정 사진을 자신에게로 가져 온 다음 그가 잠깐이라도
편히 잘 수 있도록 세심하게 살핀다. 그녀는 확실히 모성애가 강한 타입이다.
40분쯤 후 그들을 태운 버스는 경기도 북부 외곽의 한적한 화장터에 당도한다.
태현과 연수, 주혁과 혁수, 그리고 강태의 친척 몇몇으로 구성된 짧은 운구 행렬은
다른 유가족들과 사뭇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누구 하나 서럽게 흐느껴 우는
사람도, 혼절할 듯 가슴을 쥐어뜯는 사람도 없다. 다만 피로와 슬픔에 젖은 발걸음을
조용히 옮겨놓을 뿐이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흘러 이윽고 강태의 시신이
무지막지한 불길 사이에 휩싸이자, 태현은 이제 정말 그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증발하고 그는 한 줌 재로 흩어져 버리게 되었다는 생각에 참아 왔던
울음을 토해낸다. 연수는 한 때 세라와의 영구한 별리를 겪어내야 했던 그가
또 다시 소중한 친구를 가슴 속에 묻어야 한다는 게 가엾고 마음 아파서, 그를
따라 운다. 주혁은 명치 끝이 욱신거리는 듯 거북해서, 강태가 먼지로 변해가는
광경을 황급히 등진다. 허둥지둥 납골당 출입구까지 빠져 나온 그는 근처의
가게로 가 담배 두 갑과 조간 신문을 산다. 한 갑은 태현을 위하여 주머니 속에
쟁여놓고 한 갑은 포장을 끌러 맛있게 한 대를 피워 문 후, 신문을 펼쳐 든다.
굵은 글씨로 타이핑 된 1면의 제목들을 쭉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기사가 없는지
주혁은 사회면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서울지검 장인하 차장검사의 살해 사건 수사는
별다른 진척 사항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다는 기사 아래, 얼마 전 보름 간격으로
연달아 벌어졌던 유명 호텔에서의 피습 사건 용의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주혁의
검푸른 망막을 잡아챈다. 용의자는 폭력 조직 연화회의 우두머리 조 모씨. 그는
범행을 끈질기게 부인하고 있으나 여러 정황 증거와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범인이 확실한 듯. 수사는 순조로이 진행 중.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가 어느새 꽁초로 변하여 주혁의 입술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그는 서둘러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기사를 찬찬히 한번 더 읽는다.
하지만 아무 것도 잘못 파악한 것은 없다. 주혁의 머리는 재빠르게 회전한다.
문환이 구속 기소 되었다? 수사가 순조로이 진행 중이라는 것은, 아직 발표된 내용이
없어서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곧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가 확정되리라는 의미일 터…
한병규가 문환을 배신한 것인가. 그렇다면 벌써, 박창욱이 재준의 자리를 꿰차고
약삭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군.
재준은 알고 있었을까.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내다보고 있었을까. 자신이 인하를
죽이고 나면 한병규가 문환을 버릴 것이란 걸 예상했을까. 그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물어야 한다. 내 아버지를 왜 죽였는지.
조급증에 치받치는 속을 달래려 연신 줄담배만 피워대던 주혁의 귓가에 반가운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온다. 구세주라도 만난 듯 얼굴빛이 활짝 펴지며 그는
번개 같은 속도로 전화기를 귀에 갖다 붙인다. 발신 번호가 태현도 혁수도 아닌
생경한 숫자의 나열이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재준이니?!」
[내 전화 엄청 기다렸나 보네. 고막 찢어지겠다.]
「너 어디야. 너 지금 어디야?!」
[양수리 별장이야. 위치 설명해 줄 테니까 잘 듣고, 이따 저녁 7시까지 혁수 형이랑
태현 형이랑 같이 이리로 와. 늦으면 안 돼. 늦으면 험한 꼴 본다.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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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227
by 원랑 in '리얼톤혁'
리드미컬하게 율동하는 차 속에서 세 남자는 입을 꾹 봉한 채 각각 다른 상념에
빠져 있다. 운전대를 잡은 주혁은 재준에게 던질 여러 가지 질문의 순서를 차곡차곡
정해두는 중이고, 뒷좌석의 태현은 재준을 보자마자 통쾌한 주먹 한 방을 날려주리라
다짐한다. 조수석의 혁수는 재준을 만나러 떠나오기 전 있었던 어머니와의 만남을
상기한다.
가냘프고 작달막한 체구를 모로 쓰러뜨린 채 가쁜 숨만 쌕쌕 뱉어내던 그녀는 혁수의
등장에 억수 같은 눈물부터 쏟아 부었다. 남편을 둘씩이나 잡아먹은,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토로하다가 간신히 잦아든 울음 사이로 정숙은 말했다. 함께 LA로 돌아가자고.
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이제 혁수 뿐이니 자신을 버리면 안 된다고, 정숙은 읍소하며
절절히 애원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간청을 받아들일 수 없음에 혁수는 마음을 찢으며
울었다. 그리고 죄송하다는, 용서해 달라는 판에 박힌 한 마디만 되풀이했다.
요지부동의 혁수를 보며 정숙의 표정은 다시 서늘해졌다. 자신과 함께 LA로 돌아가
예전처럼, 장인하의 아들이 되기 전처럼, 장주혁의 이복동생이 되기 전처럼 살자는
어머니의 강권. 그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발상이다. 확정된 불행의 길을 향하여
걸음을 내디딜 사람이 어디 있는가. 혁수는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뒤돌아 선 혁수를 정숙도 더 이상 붙들지 않았다. 극적으로
이어 붙이려던 천륜을 끈을, 이제야말로 남김없이 깨끗하게 끊어내었다는 듯
그녀의 낯빛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설마 오늘의 그 만남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은 아니겠지. 혁수는 애써 위안해 본다.
언젠가는 나의 선택을 어머니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내가 장주혁의 남자로 살기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유,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뒤에는 어머니도 알지 않을까.
설령 그렇지 않는다고 하여도, 오늘은 만남을 끝으로 영영히 그녀와의 통로가 차단된다고
하여도, 그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형벌이겠지. 그것조차 부당하다고 불평한다면 너는
정말 구제불능의 범죄자야, 안혁수.
호되게 자신을 향하여 일침을 날리는 혁수의 귓가에 주혁의 목소리가 닿아온다.
「혁수야, 다 왔어. 내리자.」
차 문을 열고 내려서니 맵싸한 겨울 공기가 왁살스럽게 코끝으로 밀려든다. 가까운
곳에 강이 위치하고 있는 탓인지, 도시에서보다 더 기승을 부리는 추위 때문에
세 사람 모두 옷깃을 여미며 몸을 옹송그린다. 아담하게 지어진 양옥집은 재준의
상세한 설명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찾을 수 없을 만큼 후미지고 은밀한 장소에
숨겨져 있다. 재준이 준상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그의 비밀
별장이다. 본의 아니게 문환에게도 그 위치가 노출되긴 하였지만.
태현은 강태의 뼛가루가 담긴 상자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앞장서 걸음을 뗀다.
주혁은 몰아치는 강풍으로부터 혁수를 보호하려 한 팔로 그를 감싼 채 태현의
뒤를 따른다. 창문을 통하여 세 사람의 도착을 보고 있었던지, 재준은 그들이
기척을 내기도 전에 벌컥 대문을 열어 젖힌다. 재준의 모습은 초췌하다 못해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 며칠 동안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입술은 허옇게 일어나고
유백색 피부엔 푸르스름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주혁과 혁수, 태현을 섬뜩하게
한다. 게다가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음성은 산 사람의 것이 아닌 듯 하다.
「시간 딱 맞춰서 왔네. 들어와.」
재준을 보자마자 통렬한 펀치부터 한 대 먹여줄 거라고 작심했던 태현은 흉악한
그의 몰골에 눈을 감아버리며 긴 탄식만을 토한다. 그는 역시 천성이 착하고 선한
사람이다. 주춤주춤 발을 옮기던 세 사람은 거실 탁자 위에 너저분히 늘어진
술병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족히 예닐곱 개는 넘을 듯한 독한 양주 병이
깨끗하게 비워진 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다. 주혁은 입을 쩍 벌리며 재준을 다그친다.
「이걸 너 혼자 다 마신 거야, 이재준?!」
재준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태연자약하게 세 사람 몫의 술잔을 준비하여
내놓는다. 주혁은 갑갑함에 못 이겨 한 잔을 말끔히 목구멍 너머로 털어놓고, 태현은
꽁꽁 싸매두었던 말 보따리를 신나게 풀어 헤친다. 물론 말이라기보단 욕이 대부분이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돌았지? 사고 치고 잠수 타면 다야? 그래?! 사고도 보통
사고를 쳤어, 네가? 어떡할 거야? 이제 어떡할 거냐고, 또라이 새끼야!」
재준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태현의 악다구니를 고스란히 받아낸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태현은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고, 사방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야 재준은 둔중한 음성을 끄집어낸다.
「주혁이 형, 내가 형 아버지 죽여서 화났어?」
일직선으로 날아와 꽂히는 재준의 질문에 주혁의 낯빛이 와르르 균형을 잃고 무너진다.
그러면서도 주혁은 범상하고 초연한 목소리를 만들어내고자 안간힘을 쓴다.
「화가 나는 것보다, 왜 그런 건지 궁금해. 내가 언제 너한테 우리 아버지 죽여 달라고
한 적 있어? 어쩌자고 이런 큰일을 저지른 건지 난 모르겠다.」
「의외네. 난 형이 아버지를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 네 말대로 난 아버지를 증오했어. 하지만 이런 걸 원하진 않았어. 이건
옳지 않은 방법이야, 재준아.」
「부모한테 사기 치고 미국으로 날라버리려 했으면서, 형이 옳지 않은 방법 어쩌고
하니까 되게 웃긴다.」
재준은 신랄하게 주혁의 말을 맞받아치고 주혁과 혁수는 당혹스러워 한다. 태현은
양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재준에게 다시 폭언을 퍼부으려다가, 킬킬거리며 귓전으로
스며드는 그의 웃음 소리에 멈칫 입을 닫는다.
「농담이야. 정색하기는… 형들이 왜 화 내는지 알아.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근데 그럴 거 없어.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주혁 형이랑 혁수 형은
얼떨결에 그 덕을 본 거지. 이런 건 뭐라고 하더라… 어부지리라고 했나?」
「그러니까 알아듣게 설명을 해 보라고, 미친 놈아!」
뜬구름만 잡는 재준의 이야기에 태현은 버럭 역정을 내며 고함 친다. 여차 하면
주먹까지 휘두를 듯한 태현의 기세에 성격이 유한 혁수는 자기가 더 안절부절하며
그를 붙잡아 말리느라 여념이 없다. 재준은 여유 있고 느긋하게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문 다음, 담뱃갑의 주둥이를 태현과 주혁 쪽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소파
한 귀퉁이에 놓인 네모난 물체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스치는 듯한 말투로 묻는다.
「……강태야?」
세 음절 밖에 안 되는 그 짧은 문장마저 재준은 똑바로 발음해내지 못한다. 그 사람의
이름을 입밖에 내는 순간부터 자신을 짓누르기 시작한 고통의 무게 때문이다.
믿을 수 없다고, 아닐지도 모른다고, 힘겹게 사수해오던 실낱보다 더 가느다란 희망이
온 지구의 중량만큼이나 무거운 절망으로 변해 재준을 조롱하기 때문이다.
참혹하게 꺾이는 재준의 목과 허리를 속수무책으로 방치하며, 태현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이번에도 재준이 듣기를 갈망하는 그 대답은 아무에게서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며칠 동안 술만 마셨어. 제발 좀 취해 보고 싶어서. 다들 아는지 모르겠는데,
난 태어나서 한번도 술에 취해 본 적이 없어. 안 믿기지? 근데 사실이야. 아마
술 깨는 장치가 몸 속에 따로 있나 봐.」
하나도 우습지 않는 농담에 재준은 실성한 듯 오랫동안 웃어댄다. 나머지 세 사람은
정체 모를 무섬증에 머리털이 삐쭉 곤두서는 것 같다. 허리가 휘어져라 웃던 재준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리자, 막연히 세 남자를 에워싸던 두려움은
뚜렷하고 현실적인 불운의 조짐으로 탈바꿈한다.
「제발 좀 취하고 싶었는데 안 되더라. 지금도 내 정신이 너무 멀쩡해서 미칠 것
같아. 어디 나사 하나가 빠져 버리던가 바보가 되던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어서 그 애 생각을 안 하고 싶어. 강태 생각 좀 안 하고 싶은데 자꾸
생각이 나. 보고 싶어서… 그 애가 자꾸 보고 싶어서… 너무 아프다, 형.」
마침내 태현과 혁수의 입에서 걸쭉한 흐느낌이 터져 나온다. 주혁은 울컥 치솟는
눈물을, 아랫입술이 새하얘지도록 안간힘을 쓰며 도로 삼켜낸다. 덕분에 그의
암청색 눈동자에 울긋불긋 실핏줄이 돋는다.
「태현 형, 형은 진짜 대단해. 이걸 어떻게 참았어? 이런 고통을, 인간이 참을 수
있기는 한 거야? 형, 사람 맞아? 사람이 어떻게… 이걸 참을 수가 있어, 응?」
「재준아, 조금만 견디면 돼, 조금만… 지금은 죽고 싶은 생각 밖에 안 들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져. 나도 그랬어, 재준아. 형 말, 믿지? 형도 다 겪었던 일이잖아.
형이 하는 말 믿고… 조금만 견디자, 재준아.」
「형, 나는 못할 것 같아. 난 진짜 못해… 난 괜찮아질 것 같지가 않아. 강태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나는 쟤랑 절대로 헤어질 수가 없어, 형…」
이미 그 애와 나는 다른 세상에 있다고 말하지 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별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다 거짓이야.
「웃는 법, 우는 법, 숨 쉬는 법이랑 노래 부르는 법… 다 그 애가 가르쳐줬어.
강태 없으면 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강태랑 다시 만나야 돼, 나는.
혁수 형, 진짜 그 말이 사실이야? 사람이 죽으면, 착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거 말이야… 그거 진짜야? 혁수 형, 나 그러면
안 되거든. 강태는 착했으니까 천국에 갔을 텐데, 나는 천국에 못 가잖아.
그럼 강태 다시 못 만나는 거잖아. 그럼 안 돼, 형… 난 꼭 강태랑 만나야 돼.」
「왜 그런 말을 해, 재준아. 네가 왜 천국에 못 가.」
어리석지만 진심 어린 혁수의 위로에 재준은 세찬 도리질을 친다. 그리고 대뜸 혁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눈물이 흥건한 얼굴을 쳐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당황한 혁수는
우악스럽게 자신에게 매달리며 호소하는 재준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다.
「혁수 형, 제발 좀 가르쳐주라.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어? 형은 교회 다니니까
알 거 아냐. 나 좀 가르쳐줘. 나 꼭 천국 가야 돼, 형. 나 진짜 꼭 천국 가야 된다고…」
재준의 별장 안은 돌연 영혼의 구원과 사후세계를 논하는 종교적인 자리로 변모한다.
재준은 이제 제 손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구구절절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며 참회하기
시작한다.
「나는 평생 사람 죽이고 때리고, 공갈 치고 협박하고, 사기 치고 돈 뺏으면서 살았어.
법적으로 따져도 나 같은 놈은 분명 사형이야. 내가 그래. 난 그렇게 죄가 많아서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형이 좀 방법을 가르쳐주라. 어떻게 하면
나 같은 놈도 천국에 갈 수 있어? 방법이 있기는 있어? 방법이 있으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 마다 교회로 몰려가는 거 아냐? 형, 제발 가르쳐줘.」
「이재준, 너 정말 왜 그래! 왜 죽을 생각만 하고 있어? 내 말 믿으라니까! 괜찮아진다고.
진짜 괜찮아져, 조금 있으면. 조금만 참아보라니까 왜 말을 들을 생각도 안 해?!」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슬픔과 분노에 이성이 마비된 태현은 성대가 결절될
정도로 격렬하게 소리치며 재준에게 달려든다. 재준의 멱살을 잡고 막무가내로 흔들어대는
태현을 떼어내느라 주혁은 한바탕 기운을 쓴다. 태현이 가한 힘의 반동으로 재준은 저만치
털썩 나가떨어지며 한가로운 푸념을 내뱉듯 중얼거린다.
「몇 번을 얘기해, 나는 못한다고. 형은 강한 사람이라 잘 해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못해. 이런 고통을… 이런 고통을 어떻게 평생 참으면서 살 수가 있어? 싸워 보라고?
싸워서 이겨내 보라고? 아니,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 형, 나는 싸울 상대를 전부 다
잃어버렸어. 아니, 나는 이미 졌어. 완전히 져 버렸어. 끝났어.」
재준은 모든 이론의 여지를 일축하며 그대로 탈진한다. 아무도 그에게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다. 전투를 계속하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그를 채찍질할 수 없다. 자신의 인생이
다 끝나버렸다는 그의 선언은 절대불변의 진리처럼 확고하다. 태현은 얼음처럼
차갑고 바위처럼 견고한 침묵만을 고수하다가, 불에 덴 듯 발딱 일어서며 재준의
뇌리에 마지막 경고를 박아 넣는다.
「잘났다, 이 개새끼야. 네 맘대로 해. 죽든지 말든지. 대신 이거 하나만 기억해 둬.
너 죽으면… 난 너 뿐 아니라 강태까지도 용서 안 해. 알았어?」
―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 온 듯 사방은 무섭게 고요하다. 바스락거리는 재준의 발소리가
그 빈틈없는 적막을 뚫고 울려 퍼진다. 껍데기만 씌워놓은 듯 퀭한 눈동자와 시체처럼
움직이는 재준의 몸이 희끄무레한 어둠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던 양주 한 병을 꺼내들고 부엌 의자 위에 자리한다. 식탁에는 3장의 종이와 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우선 한 잔 가득 술을 들이켠 재준은 상체를 웅크리고 무언가
적어 내려간다. 주혁과 혁수, 그리고 태현에게 보내는 짤막한 편지다.
첫 째로 태현에겐, 강태의 장례를 정성껏 치러주어 고맙다는 말과 절대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는 두 가지 말만 남긴다. 미안하다는 말은 차마 쓸 수 없다.
두 번째로 주혁에겐,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말라며 재차 당부하고 만약 그가 자신처럼
혁수를 지키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형을 저주할 것이란 경고를 남겨둔다. 미안하다는
말은 차마 쓸 수 없다.
마지막으로 혁수에겐, 행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그가 믿는 하나님께 빌어달라고 간원한 뒤, 부디 하나님을 믿는 만큼 주혁 또한
끝까지 믿어주라고 주제넘게 충고한다.
세 장의 편지를 고이 접어 한 쪽으로 모아둔 다음, 재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엿보이지
않는 동작으로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까마득한 암흑 속으로 의식이 꺼져 들어가는 찰나, 그는 강태에게 속삭인다.
……지금 데리러 갈게, 강태야. 빨리 지옥으로 내려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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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랑] 오르가즘 - Epilogue(완결)
by 원랑 in '리얼톤혁'
「혁수아빠, 언제 내려? 언제 다 와?」
까만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여자 아이가 혁수의 팔을 흔들며, 문법에도 맞지
않는 서툰 한국말로 응석을 부린다. 뉴욕 발(發) 서울 행 비행기 안에서 주혁은 혼곤히
잠에 빠져 있고 혁수는 오만가지 상념에 휘둘리느라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탓이다.
동화책을 읽다가,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군것질을 하다가, 그래도 지루함을 해소시킬
수가 없는지 아이는 결국 떼를 쓰며 칭얼댄다.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은 장성한
어른에게도 힘에 부치고 버거운 일이기는 하다. 혁수는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아이를
달랜다.
「우리 세라, 힘들어? 아빠가 딴 생각하느라 못 놀아줬네. 미안해.」
「주혁아빠 깨워! 주혁아빠 자니까 심심해!」
아이가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며 징징거리자 혁수는 부드러운 손길로 딸을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다. 그리고 눈가에 맺힌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준다.
「세라야, 주혁아빠 피곤하니까 주무시게 놔두자. 그리고 주혁아빠는 비행기 타면
몸이 이상해져서 막 우웩우웩 토한단 말이야. 그랬으면 좋겠어?」
협박 아닌 혁수의 협박(?)에 아이는 겁이 나는지 시무룩하게 낯빛을 꺼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혁수는 아이를 품 안으로 깊이 끌어당겨 안으며 궁둥이를 토닥인다.
「그래, 우리 세라 착하다. 아빠 말도 잘 듣고. 조금만 더 참다가 주혁아빠 일어나면
같이 재밌게 놀자, 응?」
「네.」
그래도 뾰로통한 기색을 걷어내지 못한 채 아이는 선심 쓰듯 존댓말로 대꾸한다.
몇 시간 후, 착륙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혁수는 ‘주혁아빠’를 기다리다
지쳐 잠들어버린 딸에게 꼼꼼히 안전벨트를 매어준다. 세상모르고 꿈나라를 견학
중이던 주혁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기장의 목소리와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음에 부스스 눈을 뜬다.
「어? 벌써 도착했어?」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는 그가 못내 얄미워서, 혁수는
새된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너 진짜 무슨 병 있는 거 아냐? 어떻게 비행기만 타면, 이래? 나 혼자 세라 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제법 앙칼진 혁수의 잔소리에도 주혁은 천연덕스럽게 씩 웃어 보인 후, 자신과 혁수
사이에 앉아 잠든 딸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쓰다듬는다. 혁수는 못 말리겠다는 듯
얄팍한 한숨을 내쉬며 짐을 챙기는데 몰두한다. 아이도 비행기가 땅에 내려닿는 기척을
감지했는지 반짝 눈꺼풀을 치켜 올리며 황급히 묻는다.
「다 왔어? 내릴 거야?」
그런 딸의 행동이 못 견디게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주혁은 진저리를 치며 아이를
가슴으로 데려온다. 부산스레 열을 지어 통로를 빠져나가는 승객들 틈에, 세라를
들쳐 안은 주혁과 단출한 짐 가방을 손에 든 혁수도 슬쩍 끼어든다. 입국 심사대를
거쳐 양쪽으로 벌어지는 자동문 사이를 통과하자, 그리 많지 않은 군중들 가운데
서 있던 태현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을 반긴다.
「장주혁! 안혁수! 여기야, 여기!」
주혁과 혁수의 얼굴에 해사한 웃음이 번지며 발걸음이 빨라진다. 세라는 낯선 사내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큼지막한 눈망울을 빛내며 달려드는 통에, 화들짝 놀라 주혁에게
바싹 달라붙는다.
「세라야, 인사해야지. 태현이 삼촌이야. 아빠가 전에 얘기했지?」
친절한 혁수의 설명에 아이는 그제야 경계심을 풀며 태현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인다.
태현은 ‘고작’ 10년 만에, 불투명했던 장밋빛 플랜을 조금도 틀림없이 현실화 시켜
돌아온 주혁과 혁수가 대견해서 눈가가 촉촉해진다. 주혁은 그런 태현의 감회에
아랑곳없이 궁금한 점부터 묻는다.
「연수는? 같이 나온다고 했잖아.」
「아,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안 되나봐. 결혼은 둘이 하는데 왜 걔만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어.」
「그래? 하긴, 여자 쪽이 준비할 게 훨씬 많다고 하더라.」
「암튼 와 줘서 고맙다. 시간 내기 힘들었을 텐데.」
「뭔 소리야, 당연히 와야지. 문태현과 서연수가 10년의 열애 끝에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데! 우리가 빠지면 되나.」
주혁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쳐 보이고 혁수는 은은한 미소로 그에게 동조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이야기들은 집에 가서 마저 나누기로 한 뒤, 그들은 잰 걸음으로
공항을 나선다.
―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꽤나 고급스럽게 지어진 추모관 건물 안으로 주혁과 혁수, 그들의
딸 세라, 그리고 태현과 연수가 발을 디딘다. 태현의 안내에 따라 발을 옮기니 재준과
강태의 유해가 안치된 전용 안치단이 나타난다. 숙연한 얼굴로 그들은 안치단 앞에 쭉
늘어선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세라는 생전 처음 접하는 낯선 광경에 얼이 빠져,
주혁과 혁수의 손을 놓칠세라 꽉 붙든다. 두터운 정적을 헤치며 새어 나온 태현의
음성은 의외로 무척 명랑하다.
「얘들아, 주혁이랑 혁수 왔어. 반갑지? 그리고 여기 이 꼬마 숙녀는 주혁이랑 혁수
딸이야. 예쁘지? 정말 대단하지 않아? 미국 간지 10년 만에 애 아빠들 되어서
돌아왔어. 내년이면 마이애미로 이사도 간대. 장주혁이 돈 버는 재주가 특출 난 가봐.
안혁수가 뉴욕에서도 알아주는 화랑의 큐레이터인 거 알지? 이사 가는 것 때문에
그만둔다고 하니까 연봉 올려줄 테니 가지 말라고 극구 말렸단다. 씨발, 나는 요즘
음반 시장 불황이라서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오빠! 재준 오빠랑 강태 오빠 앞에서 욕하지 말라고 했잖아.」
조신하게 태현의 말을 경청하던 연수는 그가 씹어뱉은 욕설에 세모꼴로 눈을 찢으며
그를 나무란다. 세라도 그게 욕인 줄은 아는지, 겁에 질린 눈망울을 들어 태현을
쳐다본다. 주혁과 혁수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터져 나오는 실소를 어쩌지 못한다.
「왜, 뭐가 어때서?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불만스레 입을 삐죽대는 태현에게, 주혁은 괜한 소리하지 말라는 듯 타박을 날린다.
「웃기지 마, 문태현. 너 잘 나가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재준아, 강태야, 이 새끼 말
다 구라야. 음반 시장이 아무리 불황이어도 이 새낀 끄떡없어.」
「장주혁, 세라 앞에서 욕하지 말랬지?」
이번에는 혁수가 단호히 얼굴색을 굳히며 주혁에게 일침을 가한다. 태현과 연수, 주혁은
동시에 후훗 바람 빠지는 소리를 터뜨린다. 웃음이 잦아들고 분위기가 다시 잠잠해지자
태현은 한결 진중하게 가라앉은 음색을 발한다.
「너희들, 같이 있는 거지? 올 때마다 묻는 거지만 계속 확인해 보고 싶다. 혹시라도
너희들… 지금 같이 있는 게 아니면 어떡하나, 걱정 돼. 아니지? 그래, 아닐 거야.
천국이든 지옥이든, 너희가 같이 있기만 한다면 그걸로 됐어.」
울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던 혁수는 결국 눈물을 비치고 만다. 행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던 재준의 마지막 부탁이 떠올라서이다.
그래도 주혁을 끝까지 믿어주라던 그의 경고만큼은 어기지 않았기에, 혁수는 구부렸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재준과 강태를 마주본다.
「편하니, 재준아? 강태야, 편하니? 우리는 행복한데… 너희는 어때? 그게 제일
궁금해. 뭘 믿어야 할지. 우리가 행복하니까 너희도 편안할 거라고, 그렇게 쉽게
믿어버려도 될까? 너희한테서 어떤 말이든 딱 한 마디라도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어. 아무 것도 못하고 너희를 그렇게 떠나보냈으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잊고 살아도 되는 거냐고… 너희한테 욕이라도 실컷 들었으면 속이 시원하겠어.」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잊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어. 너희는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야. 주혁이와 혁수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의 흔적이겠지. 너희의 죽음을 통해
이들은 그토록 갈망하던 미래의 꿈을 이루어냈고, 나는 너희의 죽음을 가슴 속 심연에
처박아둔 채 바쁜 척 살아가고 있으니까.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했지, 이재준? 넌 그 따위 말을 해서 끝까지 날
나쁜 놈으로 만들더라. 그 말은 내가 했어야지. 너야말로 저승에서도 날 절대
용서하지 마. 아니, 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마. 할 수만 있으면 귀신이 되어서
나타나든, 어떻게 해서든 우리한테 한풀이해라. 지금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으니까. 알았지?」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너희들이 우리의 행복과 안위를 질투해서 우리에게 끔찍한
벌을 내리기만 고대하고 있을게. 그러면서 그 때까지 행복하게 살게.
너희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삶은 일생(一生)이니까. 네가 삶을 버리고 강태를
움켜잡은 것처럼 주혁이는 혁수를, 나는 내 인생과 연수를 놓지 않은 것뿐이니까…
미안해하지 않을게. 재준아, 강태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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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을 사랑해 주신 모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