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7176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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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级 大众 无倾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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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12 21:01
-- 협박 --
채앵!
검끼리 부딪쳐 내는 맑은 소리가 퍼져나갔다. 천장의 반짝이는 크리스털 장식 아래, 기품 있어 보이는 남자 여럿이 레이피어를 들고 각자 대련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유력 정가의 가문 사람이나 작위 있는 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사교 소드 클럽이었다.
그 중 가장 주목을 받는 무리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바로 유망한 외교관인 하비 스터스 경의 대련이었다.
그는 친구인 반 로투스 경과 레이피어를 맞대고 솜씨를 빛내고 있었다. 문제는 오늘따라 하비 스터스 경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대련 상대인 반 로투스 경이 그날따라 기나긴 수다를 뽑아내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평소대로라면 기세에 몰리느라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이다. 팔을 휘두르며 반이 투덜댔다.
“이딴 간지러운 검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아무리 기사도가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챙!
불평과 함께 얇고 긴 검이 부딪쳐서 맑은 공명음을 냈다. 잘 세공된 레이피어였다. 구부러질 정도로 가는 검이었지만 끝은 뭉툭하고 둥글었다. 찔려도 죽지 않을 정도로 무뎠다. 하지만 검을 잡고 휘두르는 두 남자의 검술은 날카로웠다.
끼긱!
두 개의 검이 가까이 맞붙었다. 파들대며 떨리는 칼끝이 서로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두 남자는 각자의 약점을 찌를 기회를 노리며 빙빙 돌았다.
하비는 움직일 때마다 몹시 힘들어 보였지만 반은 땀을 잔뜩 흘리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고작 귀족들의 유행으로 소모되다니, 너무 아깝지 않나? 그 두껍던 검도 사교계 영애들처럼 호리호리해졌고 말야.”
하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씹을 뿐이었다.
끼기긱!
비등한 힘으로 부딪친 두 개의 길고 얇은 검이 맞붙은 채 원을 그리며 돌았다. 체격은 비슷했지만 숙련도는 하비 쪽이 좋았다. 게다가 힘을 비축했다가 필요할 때 뽑아내는 능력도 좋았다. 하비는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와 늘씬하면서도 균형 잡힌 허리, 팔에서 폭발적인 힘을 내곤 했다.
하비의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실력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검을 맞댄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반이 다시 그 가벼운 입을 놀렸다.
“어디 아픈가? 아까부터 이상한데. 아니, 오늘 여기 올때부터 이상했어.”
줄곧 침묵하던 하비가 열에 들뜬 얼굴로 낮게 일갈했다.
“시끄러워.”
까앙!
그가 힘을 주어 친구인 반을 떨쳐냈다. 기어이 기싸움에서 미끄러진 반의 검이 물러났다. 그런데 옆 무리에서 시끄러운 환호성이 들렸다.
“와아아!”
“역시, 빅터 바르뎀 경!”
“또 이겼나?!”
스터스 경 외에 사교 소드 클럽에서 주목받고 있는 자였다. 빅터 바르뎀. 돈으로 작위를 산 신흥 귀족이자 현 정계 의원이었다.
하비 스터스는 빅터 바르뎀의 이름을 듣자마자 지나치게 움찔했다. 하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그 쪽으로 던지고 말았다. 크나큰 실수였다.
그의 친구인 반 로투스가 야비하게 웃음 짓더니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허점을 발견하고 찌르듯 안 쪽을 파고들었다.
“어딜 보고 있나!”
깡!
하비가 재빨리 방어했지만 이미 늦었다. 반의 공격에 검이 튕겨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그대로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했다.
반은 숨을 몰아쉬며 씩씩 대면서도 넘어진 하비의 목에 검끝을 겨누었다. 오늘은 반 로투스 경의 승리였다.
하비는 목을 꾹 누르고 있는 차가운 검의 촉감에 비스듬하게 웃었다.
“경이 기사도를 논하니 웃기는걸,”
주변에서 숨 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귀족 청년들이 한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하비 스터스 경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몹시 실망스러웠다.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경기였기에 이들의 시선은 곧장 옆 무리인 빅터 바르뎀으로 향했다.
반도 그제야 옆 무리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빅터 바르뎀 의원에게 향해있다는 것을 안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겨누었던 검끝을 치워주었다.
“날 비난하는 건가? 허점을 보인 자네 잘못이지.”
반이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하비도 마주 웃으며 친구의 손을 꽉 잡고 볼썽 사납게 넘어진 몸을 일으켰다.
그때 하비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는 흠칫 떨었다. 근원지를 찾아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분명…….
‘빅터 바르뎀, 그 자식인가.’
금발 머리를 깔끔하게 자른 빅터는 주변의 칭찬과 찬사를 받으며 미소짓고 있었다. 화려한 웃음이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하비는 알고 있었다. 저 웃음이 얼마나 위험하고 음험한 것인지를.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예의 날카롭고 뱀같은 눈이 독을 품고 사람들을 주시하곤 했다.
‘가식적인 놈.’
패배자가 된 하비는 친구인 반의 손에 의지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켰다. 어젯밤의 여파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괴로웠다. 하얀 얼굴이 붉게 익어 터지기 직전이었다. 반이 그를 수상하게 보며 턱을 만지작댔다.
“근데 정말 이상하단 말야. 며칠 병치레로 외부 일정을 모두 취소하더니, 아직 안 나았어? 진찰이라도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검에 실린 힘도 형편없었단 말이지. 자네가 아프면 나라의 큰 손실이라고.”
건장한 신체와 명석한 두뇌, 젊고 잘생긴 외모로 능력있는 외교관으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하비 스터스 경은 검술마저 훌륭했다. 같은 또래들도 그를 인정하고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인사였으나 요즘은 새로 떠오른 인물 때문에 전보다는 인기가 다소 식었다.
“난 괜찮아.”
하비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친구를 안심시켰다.
“안그래도 자네 말대로 급한 일만 끝나면 쉴 생각이야. 난 이만 가보지.”
“부축이라도 해줘?”
“아니, 됐어.”
그때 반이 코끝을 찡그렸다. 무슨 냄새라도 맡은 듯 개처럼 그가 킁킁댔다. 알파인 사내들만 잔뜩 모인 이곳에 있어서는 안될, 처연하고도 아름답기까지 한 향이었다.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사교 소드 클럽은 알파반과 오메가반으로 나뉘었다.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라 억제제를 먹어도 종종 사고가 일어나서 취한 조치였다. (물론 이와 상관없는 베타는 아무 반에나 들어갈 수 있다.)
놀라운 얼굴로 반이 중얼거렸다. 몽롱한 눈빛이었다.
“이게 무슨 향이지? 엄청 좋은 냄새야. 옆 반에서 여기까지 건너온 건가?”
하비는 순간 눈을 크게 치켜떴지만, 얼른 기색을 숨기고 모른 척 했다. 억제제를 챙겨 먹었는데도 누군가가 눈치를 챘다. 빅터가 준 것이긴 하지만 아무리 교활한 그라도 가짜 억제제를 줬을 리는 없었다. 아무리 말도 안되는 행위일지라도 지금껏 하비는 충실하게 빅터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체모를 향이 난다는 반의 의문을 뒤로하고 하비가 비틀대면서 탈의실로 향했다.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생겨서였다. 이대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 같다.
‘개자식…! 이런 걸 넣고 생활하라고 하다니……’
오늘따라 유독 하비의 안색이 파리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안 쪽에 마련된 고급스러운 탈의실에 들어갔다. 다행히 빅터 바르뎀의 활약으로 청년들은 모두 밖에 있었다. 사람이 없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확인한 그가 옷을 모두 벗고는 단체 샤워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수증기가 장막처럼 하비의 주변을 둘러싸고, 그는 그때야 안심했다. 이것만 몸에서 빼내면 괜찮을 것이다. 하비는 온몸으로 물줄기를 맞았다.
갈색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뜨거운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어깨 위를 맞고 여기저기 튀어나갔다. 나머지 물줄기는 보기 좋게 발달된 복근으로 흘러내렸다. 더 아래로 흐르던 물이 잔뜩 발기한 그의 페니스를 따라 흐르다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가 괴로운 듯 신음을 뱉었다.
“하아, 하아….”
일부러 일정에 앞서 사교 소드 클럽에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외부 일정을 돌기에는 계속 단단히 선 페니스 때문에 힘들었다. 그나마 사교 소드 클럽에서 몸을 격하게 움직이면 흥분으로 서는 일이야 종종 있는 일이라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다음 외부 일정을 위해서는 ‘이것’을 빼야 한다. 심호흡을 한 하비가 천천히 손을 뒤로 향했다. 멈칫하긴 했지만 순조롭게 그의 긴 손가락이 뒷구멍으로 들어갔다.
“윽……”
하비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구멍으로 손가락이 들어갈수록 다리가 후들거리다 못해 꺾일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이것만 빼면 돼. 이제 괜찮겠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제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왔다. 하비는 이를 악물고 계속 감행했다. 이리저리 휘젓던 손가락이 구멍 안 쪽 어딘가에 걸렸다.
‘이건가.’
샤워실 벽에 기댄 하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집을 나선 순간부터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원흉이었다. 구멍 깊숙한 곳에 동그랗고 작은 구슬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긁어서 빼내기는 쉽지 않았다. 잘못 건드려서 하필 느끼는 곳을 눌러버려 더욱 고역이었다. 구슬이 구멍 안에서 애액 때문에 더 미끌대면서 파고들었다.
“아, 안돼…!”
하비가 눈을 홉뜨면서 절정을 맞았다. 머릿속이 끔찍한 쾌감으로 하얗게 비었다. 아슬아슬하게 터질 듯 말 듯 하던 성기가 맑은 정액을 흘렸다. 샤워기에서 뿜어내는 물과 섞여 그의 정액은 가랑이 아래로 섞여 내렸다.
“흐읏…!”
하비는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벽에 머리를 댄 채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가 멍한 눈으로 절정의 여운을 느꼈다. 참았던 만큼 오르가슴도 길어서 발가락이 휙 일제히 곱았다. 입도 반쯤 벌어졌고, 턱끝도 바들거렸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하비를 깨웠다.
“힘들어 보이는군.”
여운에 잠겨있던 하비는 샤워실에 길게 드리워진 사람의 그림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좋아하는 건가?”
그제야 깜짝 놀란 하비는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 미끄러졌다. 하지만 재빨리 다가온 누군가가 그의 팔을 꽉 잡아 주어서 바닥에 머리를 박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이쿠, 조심하셔야지.”
가벼운 휘파람 소리가 그의 예민해진 목 뒤로 직격했다. 하비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다가 멀어지던 정신을 가다듬고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잡아준 사람은 금색 머리의 체격 좋은 미남자였다. 빅터 바르뎀, 그다. 하비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차라리 넘어져서 뇌진탕이나 걸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비의 아우성치는 속마음과는 달리 빅터는 침착하고 친절하게 말했다.
“도와줄까?”
하비가 이를 갈았다.
“꺼져.”
빅터는 욕을 들으면서도 천사같은 미소를 지었다. 노란 눈썹에 환한 금발 머리 아래,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그는 대련하던 옷을 입고 들어온 데다 하비를 잡아주느라 옷이 다 젖어 있었다.
하지만 하비는 빅터에게 조금의 미안함도 느끼지 못 했다. 그가 이 지경이 되도록 궁지로 몰린 것도 빅터 바르뎀 때문이었으니까.
지금도 빅터는 하비를 일으켜 주는 척 하면서 그의 팔을 바짝 당겨 압박을 넣고 있었다.
“현직 시의원에게 꺼지라니. 어젯밤에도 좋다고 안겼으면서 너무한거 아닌가.“
하비는 입술을 거세게 물고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참아냈다. 며칠 동안 빅터에게 지독하게 시달린 탓에 심한 근육통이 팔에도 알알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빅터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이제 괜찮으니 팔을 좀 놓아줬으면 하는데.”
“걱정해서 기껏 여기까지 와줬더니.”
하비는 눈썹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걱정? 아무래도 빅터 바르뎀 경은 걱정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축객령이 분명한 날 선 하비의 시선에도 빅터는 나가지 않고 젖은 옷을 아예 훌훌 벗었다.
“다른 알파 놈들이 눈치챌 것 같아서. 그 가랑이 벌린 것 같은 향 좀 그만 흘리지 그래?”
“나한테 먹인 빌어먹을 약 때문이잖아. 난 원래 알파…라고.”
하비는 이제 말하는 것도 힘겨웠다. 빅터가 팔만 쥔 것이 아니라 제 허리춤을 은근히 구멍 쪽에 문질러서였다. 하비가 비비는 듯한 허릿짓에 헛숨을 들이키며 잘게 떨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격렬함이 그를 무력하게 했다.
하비의 반응에 차갑게 웃은 빅터가 속옷까지 빠른 기세로 벗어 샤워실 어딘가로 던졌다. 검술로 잘 정제된 하비의 날렵하고 세련된 체격에 비하면 빅터는 좀 더 날것으로 탄탄한 몸이었다. 젖어서 달라붙은 옷을 모두 던진 빅터가 주춤 뒤로 물러서는 하비를 뒤에서 붙들었다.
“그럼, 얼마나 잘 품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
하비의 등 뒤에 선 빅터가 그의 구멍에 손가락을 몇 개 집어넣었다. 느릿하게 휘저을 때마다 쿨쩍대는 음란한 소리가 났다.
차각차각!
구멍 안 구슬끼리 부딪쳐서 나는 소리도 섞여 들렸다. 벌써 안이 젖다 못 해 애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을 넣은 것만으로도 하비는 숨을 헐떡대며 자지러졌다. 탄탄하고 길게 뻗은 하비의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가 뻣뻣해졌다.
“흐학! 아…!, 응…,. 그만!”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빅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벌써 훌륭한 오메가가 되었어.”
하비는 고개를 숙이고 구멍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이겨내려 애썼다.
“임시로 몸이 착각해서 변하는 거지만, 효과는 충분하군. 여기, 미끌거리고 축축한데?”
뭐라 항의하려던 하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샤워기에서 내린 물 때문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샤워기 물이 닿기에 너무 깊은 곳이었다. 빅터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구슬은 빼줄까? 곧 외부 일정일텐데. 회담 테이블에 서야 하는 몸 아닌가?”
구멍 속 손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빅터는 다른 손으론 하비의 페니스를 꽉 쥐었다. 그리곤 제 품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늘씬하고 단단한 몸을 즐겼다.
“이걸 세우고 뒤로는 느끼면서 회담을 할 생각인가? 그럴 거면 계속 품고 있고.”
그때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비의 굳건하던 눈이 흔들렸다. 이런 현장을 들키기라도 하면, 그의 정치 인생은 끝이었다. 오랜 기간 쌓아온 스터스 가의 명성도 여기서 모조리 파도 맞은 모래성이 된다.
‘안 돼….’
인기척을 눈치 챈 빅터가 빠른 손놀림으로 샤워기의 수압을 높였다.
쏴아아아아!
더운 물안개가 짙어지고 물줄기 소리가 한층 강해졌다. 그럼에도 하비에게 빅터의 것은 또렷하게 닿았다. 소름이 돋도록 낮은 목소리였다.
“매달리고, 사정해서 내 마음을 돌려봐. 아님 예쁜 짓이라도 해보든가. 그럼 빼주지.”
하비는 급했다. 극도의 긴장으로 그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제 한 몸의 고루한 자존심보다는 눈 앞에 닥친 가문의 파멸을 막는 것이 먼저였다. 하비는 혼란스러웠다. 고작 돈으로 의원직을 산 비천한 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스터스 가를 더 욕보이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당장의 큰 부끄러움이 하비의 눈을 흐렸다.
빅터의 손을 쳐낸 하비가 뒤돌았다. 이윽고 고민 끝에 하비가 무릎을 꿇었다. 이 방법 밖에 없었다. 그리 자신을 억지로 납득시키며 그는 자존심을 버렸다.
“빨리, 뭐든 할 테니까 이것 좀 제발….”
빅터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엎드린 하비를 고고하게 내려보았다. 거세게 악문 하비의 입술에서 벌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빅터가 아무 말이 없자 샤워기 물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늘씬한 하비의 등근육이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갈대 줄기처럼 길게 늘어졌다.
“부탁합니다, 빅터 바르뎀 경.”
하비의 입술에서 터진 피가 뜨거운 물에 섞여 하수구로 흘러 들어갔다. 붉은 핏물이었다. 그걸 내려본 빅터가 삐딱하게 미소지었다.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도 뚜렷한 걸음걸이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빅터는 곧 웃음기를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바깥과 하비의 달아오른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내 그가 결정했다.
“어쩔 수 없나.”
혀를 찬 빅터가 하비를 일으켜 세웠다.
“뭐든 한다고 한 거, 잊지 마시길. 하비 스터스 경.”
마지막까지 이죽거린 빅터가 하비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리곤 빠르고 신속하게 하비의 뒷구멍에 손가락 몇 개를 깊게 밀어 넣었다.
딸각!
여러 개로 뭉쳐 다니던 구슬이 빅터의 손가락에 대번에 걸렸다. 하비는 수차례 시도해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들이었는데, 빅터는 빠른데다 너무 쉽게 했다.
“흐윽……!”
하비가 무너지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방금 손짓으로 또 갔다. 미칠 것 같은 드라이 오르가슴이 그를 벅차도록 덮쳤다. 애액이 터져서 그의 뒷구멍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하비는 제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신음이 자꾸만 새어나갔다.
“으응……!, 하윽!, 큭!”
빅터는 하비에게서 강렬하게 나는 오메가 특유의 페로몬 향에 미간을 구겼다. 언제 맡아도 자극적이었다. 당장이라도 박고 싶은 유혹적인 향이었다. 강렬하면서도 시원한, 그가 잘 아는 어떤 꽃의 향과도 몹시 닮았다.
‘이러다 다른 놈들이 다 알겠군.’
빅터는 자신의 페로몬을 방출해 하비의 것을 짓눌렀다. 둘다 알파이니만큼 평소라면 좀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하비가 많이 약해진 터라 쉬웠다. 지금 하비는 어설픈 오메가가 된 것이라 페로몬이 아주 미약했다. 임시방편이지만 잠시나마 다른 사람들의 후각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딸각딸각!
빅터의 손가락이 더 빨리 움직일수록 하비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흰자가 보였다. 너무 느껴서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잘 단련된 하비의 어깨와 허벅지가 속수무책으로 경련했다.
구슬을 빼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절정에 달하던 하비는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쯤 완전히 쓰러졌다. 빠진 구슬들이 빅터의 손에 온전히 들어간 순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샤워실에서 싸우고 있는 거 아냐? 페로몬을 이렇게나 뿌려대는데, 뭔가 이상하다니까.”
“그러게. 아니면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어?”
빅터는 하비를 살피는 척 하고 안을 가득 메운 샤워기 증기를 없애기 위해 샤워기를 껐다. 불쑥 들어온 청년이 둘의 상황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지금 쓰러진 게 하비 스터스 경인가?”
고개를 끄덕인 빅터가 구슬을 잡은 손을 꽉 쥐어 숨기고는 다른 자에게 부탁했다.
“탈의실에 있는 내 옷 좀 가져다 주겠나? 스터스 경이 갑자기 쓰러져서 부축해 주느라.”
하비는 도저히 서 있을 상황이 아니라 입을 반쯤 벌리고 벽에 허리를 기댄 채 넋이 나가 있었다. 그 사이 다른 자가 또 들어오고, 호들갑을 떨어 사람들이 더 몰렸다.
빅터가 다른 청년이 가져온 옷을 받아 입었다. 그리곤 옷 속에 미리 숨겨뒀던 약을 사람들 몰래 꺼내 정신 없이 떠는 하비의 입 속에 먹여주었다. 연속된 오르가슴에 거의 이성을 잃은 터라 하비는 슬쩍 입에 넣어준 약의 존재조차 모르는 듯 했다.
빅터는 사람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속으로 웃었다.
‘이럼 당분간은 괜찮겠지.’
그가 먹인 약은 하비를 오메가로 만든 약의 효과를 원래대로 돌리는 성분이었다.
신약은 알파를 오메가로 완전히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몸을 속이는 것이라 호르몬도 일시적으로 바뀌고, 오메가의 체형으로 서서히 변화시켰다. 방금 것으로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테니 오메가 페로몬을 들킬 염려는 없었다.
나중에 소식을 들온 반 로투스 경이 뛰쳐 들어와 하비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이, 이게 무슨! 이 친구 왜 이래?”
누군가는 의사를 부르러 뛰어 나갔고, 몇몇은 다가오지는 않고 멀찍이서 쓰러진 하비를 눈으로만 훑었다.
“며칠 아프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
“요즘 소야 회담에 힘쓰느라 무리했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래서 아까 대련도…?”
온갖 추측과 수군대는 소리가 그들을 수증기처럼 에워쌌다. 빅터가 반을 제치고 앞으로 다시 나선 뒤, 하비를 업으려 했다.
“불러오는 것보다 내가 업고 가는게 빠르겠어. 다들 비켜주게.”
하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비가 이를 발견하곤 빅터를 밀쳐냈다.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하비가 낮게 으르렁댔다.
“내 몸에 손대지마.”
밀쳐진 순간 빅터의 눈이 뱀처럼 늘어났지만 하비는 못 본 척 했다. 어쨌든 자존심을 팔아넘긴 결과 구슬은 정말 빼준 모양이었다. 잔여감이 남아 몸 안이 계속 뜨겁긴 해도, 견딜만 했다.
‘아까보다 훨씬 나은데.’
하비는 빅터가 입에 몰래 넣은 약이 다시 알파로 되돌리는 것임을 모른 채 걱정하는 반과 주변 사람들 둘러보았다. 천천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킨 그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괜찮아. 잠시 어지러워서 쉬고 있었던 거지. 다들 호들갑 떨지 말고 하던 일이나 해.”
하비는 어질거리는 이마를 짚고 균형을 잡느라 벽에 좀 더 기대어 있었다. 당장 병원에 가야한다는 반의 주장에도 하비는 회담 일정을 감행했다. 모두를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하비는 평소처럼 고고하게 사교 소드 클럽을 떠났다.
빅터 바르뎀은 힘들어 보이는 하비의 넓은 등을 말없이 보았다. 그러다 곧 몰려오는 주변 귀족 청년들의 격려에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이 자리에 없는 하비 스터스를 욕하며 빅터를 추켜세웠다.
“스터스 경이 평소에 그리 경을 비아냥댔는데도 그런 신사적인 태도라니, 정말 감명 받았다네.”
“아까 봤어? 도와줘도 화를 내던걸.”
자신들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주변인들이 더 열을 냈다.
“신경쓰지 말게. 우린 자네 출신이 어떻건 자네를 지지하니까. 고리타분한 스터스 가문 사람들이 뭘 알겠어.”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가 오늘따라 빅터의 목을 죄었다. 그는 답답한 듯 하얀 러플 블라우스 목단을 잡아 펄럭였다. 달아오른 열이 아직 식지 않았다. 그만 아는 하비 스터스 경의 달큰한 향이 코끝에 남아 있는 듯 했다.
빅터는 쓰레기통에 처박은 구슬을 고갯짓으로 흘끗 보았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구슬 여러 개가 오물로 젖은 채 빛났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집사가 그리 말리는데도 기어코 하비는 마차에 올라섰다. 집사는 샛노란 머리에 녹색 눈을 지닌 청년이었다. 스터스 가에서 오래 일하던 늙은 집사는 노환으로 죽어서 그의 아들이 집사 일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마부에게 마차를 천천히 몰라고 신신당부한 집사는 연거푸 하비를 말렸다.
“괜찮대도.”
걱정스러운 눈망울이 마음에 걸린 하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집사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찌르고 들어온 말이라 하비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바르뎀 경이 다녀가기만 하면 몸이 너무 안 좋아지시는데,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의사를 부르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막으시니 더 걱정이 됩니다.”
마음 속 동요를 포커페이스로 빠르게 감춘 하비가 입단속을 명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마. 바르뎀 경이 우리 집에 드나든다는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대외적으로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
“여기서 더 안 좋아질 게 있겠습니까만……. 알겠습니다.”
그러나 집사는 하비의 완강함을 이기지 못했다. 슬그머니 다가온 하비의 매서운 눈초리에 그는 입술을 삐죽댔다.
빅터가 오기만 하면 사용인을 전부 물리고 비밀스럽게 둘이서만 방에 틀어박히기만 하니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집사조차 물리고 절대로 오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집사는 이제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 분 눈빛도 영 마음에 안 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르뎀 경을 좋아하지만 저는 아니라구요.”
집사의 투덜거림을 조금 들어준 하비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부가 집사의 잔소리를 깊이 새겼는지 조심한답시고 너무 천천히 몰았다.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가 일정한 리듬처럼 들렸다. 하비는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시원하게 내달리는 느낌을 원했다.
‘그냥 말을 타고 갈 걸 그랬나.’
하지만 집사의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다. 몸도 안 좋은데 말을 타고 가면 어떡하냐는 잔소리가 몇 절로 이어질 것 같아 마차로 갈아탄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간다고는 하지만 길이 잘 닦이지 않은 곳은 어쩔 수 없었다.
덜컹!
하비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반나절 동안 민감함 곳에 구슬을 품고 긴장했더니 속이 너무 안 좋았다. 유들거리는 빅터의 얼굴이 떠오르자 구토감마저 일었다.
‘빌어먹을 놈.’
메슥거리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려 하며 하비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회담 자리까지 가는 길이 너무 길었다.
하비가 빅터 바르뎀을 알게 된 건 꽤 오래 전이었다.
당시 세간을 들썩이던 해적 납치극이 있었다. 임페르 해적단으로 국력이 강한 국가들조차 이들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던 악명 높은 해적들이었다. 임페르 해적단은 일부러 부자들이 타는 호화 여객선을 노려 그들의 가족, 특히 아이들을 유괴했다. 그리고 큰 돈을 요구했다.
임페르 해적단은 올란 시의 의원에게 선포했다. 가문을 이을 소중한 아이들의 목숨을 얻고 싶다면 한 아이당 천만 페르를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하비 스터스의 아버지이자 그 당시 올란 시의 재선 의원이던 라힌 스터스 경은 절대로 해적과 타협하지 않겠다 선포했다. 부자들이 반발했지만 라힌 스터스 경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폭력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지론이었다.
[국가의 돈을 이런 일에 내어줄 수 없소이다. 우리는 폭력 단체와 협상하지 않습니다. 원칙은 원칙. 하지만 최선을 다해 해적들을 설득해 보이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라힌 스터스 경의 연설은 바다 위의 해적단에게도 전해졌다. 해적들은 스터스 경을 비웃었다. 해적단의 이름이 ‘임페르’ 인 것도 일확천금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인도적인 방법이 통할 리 없었다.
결국 해적들은 인질들을 하나하나 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 그 다음에는 손가락, 발가락, 그런 식으로 협박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부자들끼리도 둘로 나뉘었다. 라힌 스터스 의원을 지지하는 쪽, 그렇지 않은 쪽으로.
그렇지 않은 몇몇 부자는 이미 은밀하게 돈을 보내 자신의 아이를 빼오기도 했다. 스터스 의원을 지지하는 쪽은 스터스 의원이 간절하게 해적 인질 사태를 해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사망자가 나왔을 때, 참지 못한 부자 하나가 라힌 스터스 의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돈을 건네주었다.
불안에 떨던 다른 부자들도 스터스 의원의 지지를 철회하고 너도나도 돈을 해적에게 내어주었다.
딱 하나, 빅터 바르뎀의 조부인 레토 바르뎀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는 지독한 구두쇠였고, 돈의 힘을 광적으로 믿는 자였다. 평민 출신이었지만 오로지 돈 하나로 작은 귀족 가문을 사들여 가문을 통째로 사들였다. 심지어 레토 바르뎀은 돈에 있어서는 가족도 없는 냉혈한이었다.
레토 바르뎀은 가문을 이을 손자는 여럿이라며 빅터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빅터의 부모가 아들을 살려야 한다며 반대했지만 워낙 레토 바르뎀의 입김이 강력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빅터는 가문에서 버림 받았고, 다들 그가 해적들의 손에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23세, 성인이 된 빅터가 거대 해양 상단을 꾸려 고국으로 되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덜컹덜컹!
마차에 실려 창백한 얼굴로 바깥을 보던 하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커피하우스가 보였다. 고급스러운 외관에서 돈을 바른 흔적이 여실했다.
‘저것도 그 자식이 들여온 거였지.’
하비 스터스는 그가 돌아온 직후 있었던 대소동을 똑똑히 기억했다.
빅터가 화려하게 귀환한 뒤 꽤 오랫동안 몇 개 없는 신문의 헤드라인은 모조리 그의 얼굴로 도배가 되었다.
-빅터 바르뎀 경, 생환!
-임페르 해적단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다!
-황금을 물고 온 남자!
-커피하우스 대성황!
한 가십거리 신문에서 논평에 빅터를 ‘골든 스네이크’ 에 비유했다. 황금만 보면 물고 절대 놓지 않는다는 전설의 뱀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빅터를 두고 그리 불렀다.
빅터는 거대 해양 상단을 이끄는 리더답게 돈이 될 만한 것은 귀신같이 알아보고 투자했으며 반드시 큰 수익을 냈다. 커피와 고급 향신료 같은 것들을 들여온 것도 빅터였다. 커피하우스 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정치, 예술 등을 논하는 귀족 청년들의 모임이 생겼다. 몇 년이 지나면서 커피하우스는 대중적으로 여러 계층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혁신이었다. 그런만큼 빅터는 돈을 끌어모았고 거부가 되었다.
하비가 탄 마차는 커피하우스를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하비의 머릿속에 끈덕지게 자리잡은 빅터는 도통 지나갈 생각을 않았다. 아예 또아리를 틀고 하비의 상념을 온통 차지했다.
‘갑자기 정계에 뛰어들길래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는 안다. 하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사람들 앞에서 적절하게 쇼를 하더니, 아예 의원직을 사버렸다. 정확히는 돈으로 관련자를 모조리 매수하고, 선거권이 있는 자들에게도 선의를 빙자한 거액의 기부를 해댔으며, 그들이 사는 곳에 부를 가져올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결국 빅터는 의원직을 돈으로 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비는 그리 생각했다. 게다가 빅터가 꿰찬 그 자리는 하비 스터스의 아버지가 있던 자리였고, 하비가 거절한 자리기도 했다.
처음엔 하비는 빅터가 왜 그렇게 올란 시의 의원 자리에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그러다 최근 빅터가 먼저 그에게 접촉해왔다. 첫 만남에서 하비는 빅터의 속내를 알게 되었다. 하비는 그제야 사람들이 빅터의 진면목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빅터 바르뎀, 그 자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복수’란 이름의 악마였다.
“거의 다 왔습니다.”
빅터에 대한 생각이 길어질 때쯤, 마부가 그에게 도착 전 미리 언질을 주었다. 드디어 마차가 멈추자 하비는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내렸다. 그것이 빅터가 먹인 약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준비된 장소로 향했다.
소야 회담은 중요한 자리였다. 중계 무역으로 먹고살던 하비의 모국을 둘러싼 강대국끼리의 어깨 싸움이었다. 여태까지는 암묵적인 합의 하에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했지만, 이곳에서만 나는 귀한 품종의 꽃 때문에 투기 광풍이 불었다.
주변 강대국들은 너도나도 그 꽃을 원했고, 그 과정에서 다툼이 일었다. 이쪽에는 얼마로 팔았는데 저쪽에는 더 높게 판다든지, 공급량에 차별을 둔다든지 하는 문제로 끊임없이 갈등이 생겼다. 이미 귀족 사회에서 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될 정도로 그 꽃은 움직이는 돈, 그 자체였다. 하비가 한심한 눈으로 바삐 움직이는 타지의 외교관들을 보았다.
‘그깟 꽃이 뭐라고.’
하지만 사태는 심각했다. 하비가 안 좋은 몸을 이끌고 가야할 만큼 전운의 기운이 감돌았다. 웃지 못할 분위기 속에서 하비는 회담장에 도착했다. 하비는 수석 외교관이었고, 먼저 도착한 외교관들이 그를 반겼다. 다들 왠지 난감한 얼굴이라 의아하던 차에 드디어 하비는 그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여기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하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입을 벙긋대다가 겨우 말했다.
“바르뎀 경이 왜 여기에…….”
빅터가 그 곳에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제 자리인 것처럼 편안하게 회담장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하비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빅터는 느긋하게 웃으며 깍지를 끼고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왜요. 제가 이 곳에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득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은 하비가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올란 시의 의원님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꼰 다리를 반대쪽으로 바꾸며 빅터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우리 시에서 열리는 회담이니까, 당연히 의원인 제가 신경써야 하지요.”
“지금쯤 더 중요한 일이 있으실텐데요? 오늘은 올란 시에서 가장 큰 고아원을 여는 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이들이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하비는 빅터가 가장 큰 고아원의 후원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 점을 지적하며 굳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여태 참아왔는데, 이미 사교 소드 클럽에서 있었던 일로 말이 번질 것이다. 더 조심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빅터는 역시 만만치 않은 자였다. 그가 진득하게 미소짓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그것보다 이쪽이 더 급해 보여서 말입니다.”
“더 급하다니, 그게 무슨 말…….”
하비의 의문은 곧 풀렸다. 수염이 희끗한 총괄 외교관이 들어오더니 빅터에게 크게 허리를 숙인 것이다. 얼결에 하비도 빅터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양쪽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는 하비를 뒤로 두고 총괄 외교관이 만면 가득 빅터를 향한 환영을 담았다.
“벌써 오셨습니까? 급히 부탁드린건데도 이리 달려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의원님.”
빅터는 총괄 외교관이 들어온 순간부터 공손하게 굴었다. 자세도 이미 바꿔서 어른을 향한 예를 갖추고 있었다.
“뭘요. 제가 나라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오히려 이런 기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없던 겸손까지 떠는 것을 보며 하비는 기가 막혀 했다. 입에 아주 기름을 칠한 것 같았다. 하지만 총괄 외교관은 빅터의 태도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벌써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하비는 이쯤되니 대체 저 철면피가 무슨 일로 온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총괄 외교관의 눈이 애정으로 반짝거리더니 빅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할 수 있으면 입이라도 맞출 것 같은 맹렬한 기세였다.
총괄 외교관에게 손을 잡힌 순간 빅터의 입매가 잠시 일그러졌지만 아무도 몰랐다. 뚫어지게 그를 보고 있던 하비만 잠깐의 변화를 눈치챘을 뿐이었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영원한 황제)의 소유권을 가진 게 의원님이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하비가 그제야 깜짝 놀라 여유롭게 웃고 있는 빅터를 보았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는 명품 품종 중 가장 상급으로 치는 꽃이었다.
투기 목적으로 거래되는 꽃이니만큼 가격이 천정부지였다. 꽃의 알뿌리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생기는 특이종이라 재배하기가 굉장히 까다롭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바이러스로 생기는 꽃이니만큼 공급도 제한되어 가격은 나날이 치솟고 있었다.
‘문제는 그걸 소유한 사람이 누구냐였는데. 여태 비밀로 하다가 왜 지금 와서?’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척에 널렸는데 직접 접촉할 소유주가 철저히 정체를 가리고 있어서 다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꽃의 농장주는 재배권을 가진 소유주가 허락하는 사람에게만 팔았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으니 소위 높은 사람들은 소유주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우위인 편한 거래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자신이 매달려야 하는 거래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니 총괄 외교관으로서는 빅터에게 키스를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를 미끼로 강대국들을 좌지우지할 최고의 패가 마련된 셈이니까.
“물론 우리 의원님께서 타국에 정식으로 파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말끝을 흐리며 그가 간절한 눈빛을 빅터에게 보냈다. 총괄 외교관이 너스레를 떨며 빅터의 환심을 사려 애쓰는 것을 하비는 떨떠름하게 보았다.
생각해 보면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빅터인데 큰 돈이 될 명품 품종에 미리 손을 써두었을 것이 뻔했다. 그가 괜히 골든 스네이크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셈페르 아우구스투스까지 손을 댔을 줄은.’
하비가 심란한 마음으로 보는 동안 빅터가 빙긋 웃었다.
“걱정 마시죠. 제가 괜히 그간 가렸던 얼굴까지 팔아가며 이 곳에 왔겠습니까. 국익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그의 확답에 총괄 외교관의 얼굴도 활짝 폈다. 명실상부 빅터 바르뎀 경은 이 회담의 주인공이었다. 걱정하던 다른 외교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하비만이 어두워진 얼굴로 회담장을 둘러보았다.
수석 외교관 하비 스터스 경의 얼굴에 드리워진 먹구름과는 별개로 회담은 빅터를 중심으로 굴러갔다. 빅터는 속속히 회담장에 도착하는 타국의 외교관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 중 몇 명이 빅터를 보더니 반색했다.
“오, 자네 왔는가!”
“소유주가 자네인 걸 알았으면 먼저 말할 것을 그랬어.”
그들은 질세라 서로 빅터에게 접근하며 호의를 보였다. 빅터를 아는 외교관이 있는 쪽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전혀 모르는 쪽은 패색이 짙었다.
이미 분위기는 빅터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그였다.
“하하! 그러실까봐 여태 숨긴 겁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니까요.”
하비는 대체 그의 돈과 인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졌다.
‘해상 무역을 주름 잡았으니 타국에 아는 자들이 없을 리도 없지만.’
회담은 시작도 하기 전인데, 빅터가 모두 끝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하비는 어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
회담은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평화적으로 끝이 났다. 빅터가 총괄 외교관에게 했던 호언장담대로 전쟁까지 불사하려던 강대국 쪽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빅터가 공평하게 차별 없이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를 주변국들에게 공급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귀한 품종이 안정적으로 수급되기만 한다면 피차 서로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중간에 낀 빅터의 모국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피해를 볼 나라였기에.
총괄 외교관이 흡족한 표정으로 빅터를 보더니 자랑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바르뎀 가는 엄청난 행운을 바다에 떠밀었던 것 같군요.”
빅터의 눈에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역시 능숙하게 이를 숨기며 화답했다.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저는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허헛? 이런 보물을 뒤늦게라도 알았으니 저 또한 행운이라 해야 겠군요.”
주거니 받거니 즐거이 덕담이 오갔다. 조용히 뒤따르던 하비를 돌아보며 총괄 외교관이 기분좋은 얼굴로 권했다.
“우리 수석 외교관도 고생했네. 역시 자네가 끼니 회담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군. 스터스 경의 사전 정보와 적절한 중재가 없었으면 조금 더 멀리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하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말 나온 김에 다같이 성공을 자축하러 가지 않을텐가? 의원님도 모시고 말이야.”
총괄 외교관이 주름을 가득 접으며 웃었다. 그를 따르던 다른 외교관들의 표정에 난색이 떠올랐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 번 잡히면 해가 뜰 때까지 붙들려 있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빅터가 먼저 선수를 쳤다. 가슴에 손날을 얹으며 그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일이 많아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함께 하죠.”
“아, 하긴. 바쁜 분을 잡으려 했군요. 어서 가보세요.”
하비는 그때까지만 해도 빅터가 자신을 데려갈 줄은 몰랐다. 꼼짝없이 총괄 외교관의 술주정을 들으며 밤을 샐 줄 알았는데 빅터가 지목했다.
“즐거울 자리에 중요한 분을 빼가서 죄송합니다만, 스터스 경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같이 가도 상관없겠지요?”
당황한 건 총괄 외교관 뿐만 아니라 다른 외교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비가 큰 체격만큼 술도 강했던지라 총괄 외교관의 술주정을 끝까지 수발해줄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들의 당혹스러움을 뻔히 알면서 빅터는 밀어붙였다.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내일 보세, 스터스 경.”
하비는 얼떨떨한 얼굴로 강제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결국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외교관들은 하비를 빅터에게 보내주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선 하비가 의심스럽게 빅터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구해준 건 고마운데, 이유가 뭐지? 또 뭘 하려고?”
어둑해진 거리에 하나둘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달이 뜨고, 그 아래 오로지 한 목적을 위해 사지에서 돌아온 악마가 눈을 떴다. 환한 낮 아래 빛나던 빅터의 금발 머리는 어둠 속에 잠겨 검게 물들었다.
빅터는 어둡게 눈을 빛내며 하비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휘어감았다. 하비는 마치 뱀에게 졸린 기분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하비를 즐겁게 바라보며 빅터가 그의 귓가에 가까이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내가 스터스 경에게 할 게 하나 밖에 더 있겠나?”
하비는 귓가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입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름끼치도록 가까웠다.
“이번엔 내 저택으로 가지. 그쪽 집사가 워낙 시끄럽게 굴어서 당신 집에선 피곤하더군.”
유독 그에게만 잔인한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비는 빅터의 저택에 함께 가자마자 그 끔찍한 약을 또 먹어야 했다.
빅터는 사용인들 앞에서 하비와 친한 척 연기했다. 그런 뒤 그대로 하비를 자신의 방으로 끌고 왔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고 지낼 거라며 사용인을 모두 물렸다. 모든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빅터가 하비를 침대로 거칠게 밀쳐 넘어뜨렸다.
“자, 이제 오늘치 일을 시작해야지.”
빅터는 재킷을 벗고 기품 있게 잠근 러플 블라우스의 소매를 하나하나 풀었다. 풀린 소매 안으로 핏줄 선 단단하고 굵은 손목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흉터도 많이 보였다.
침대 위로 밀쳐진 하비가 체념한 얼굴로 옷을 하나하나 벗어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금방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된 하비에게 빅터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턱을 움켜쥔 빅터가 입 속으로 그 약을 밀어 넣었다. 알파를 일시적으로 오메가로 바꾸는 호르몬 교란제였다.
“컥!”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목젖 안을 찌를 정도로 깊이 들어왔다. 약은 순식간에 하비의 목 뒤로 넘어갔고, 빅터는 뒤이어 준비해둔 물을 그의 입에 들이부었다. 하비의 입가로 물줄기가 흐르고, 목까지 흘러내렸다.
강제로 넘어간 물 때문에 하비가 컥컥댔지만 빅터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로지 그 길게 찢어진 눈에 증오만 가득했다.
약효과는 몹시 빨라서 먹자마자 바로 약기운이 돌았다. 약으로 뇌가 착란을 일으켜 잘못된 신호를 아래로 내려보냈고, 호르몬이 변하자 하비의 뒷구멍에 반응이 왔다.
알파가 오메가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몸 속의 내장 전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격통에 하비는 침대에 엎드려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있는대로 짓씹었다.
“흐으…….”
몸은 금방 바뀌지 않고 시간이 필요로 했다. 제일 힘든 시간이 바로 이 때였다. 빅터는 그가 체내의 변화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또다른 고통도 안겨주었다.
빅터가 준비된 물건을 몸서리치는 하비 앞으로 툭 던졌다. 침대 위로 흉물스럽게 큰 모조 성기가 굴러다녔다. 멀리 이역에서 구한 상아로 만든 귀한 것이었지만 빅터는 그 정도는 눈 감고도 구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하비에게 명령했다.
“원래 알파였던 구멍이라 그런지 너무 뻑뻑해. 넣기 전까지 충분히 넓혀둬.”
빅터의 잔인한 점은 일부러 하비의 명예를 짓밟고 그의 몸에 수치를 새긴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하비가 괴로워해도 사정 봐주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빅터는 배를 움켜잡고 힘들어하는 하비의 머리칼을 콱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키스할 것처럼 얼굴이 가까워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독하게 눈물조차 삼키는 하비에게 혹여나 잊지 않도록 덧붙였다.
“아, 당연히 내가 보는 앞에서.”
그는 절대 하비에게 키스하지 않았다. 대신 철저하게 성적으로 괴롭혔다. 잘 보이게 하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던진 빅터가 침대 맞은편의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
의자 아래에는 미리 준비된 긴 말채찍이 있었다. 특별히 고안되어 그냥 만질 땐 몹시 부드럽지만 맨살에 닿을 땐 꽤 타격감이 컸다.
사용인이 불을 붙여두고 간 긴 담뱃대를 입에 물며 빅터는 재밌는 연극을 감상하듯 하비가 자위를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머뭇대는 하비를 움직이게 한 건 나른한 목소리로 던져진 빅터의 목소리였다.
“뭐하고 있나? 시작해.”
하비는 빅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개처럼 엎드려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아로 만든 모조 성기를 쥐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듯 하비의 얼굴에 절망이 스쳐 지나갔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사교 소드 클럽의 샤워실에서 그랬듯이, 수치는 금방 지나갈 것이다.
빅터가 지루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직 멀었어?”
아직 하비는 모조 성기를 넣지 못하고 구멍 주변만 배회하고 있었다.
“헉…, 허억…….”
하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신체가 강제로 변하는 고통에 적응하랴, 빅터가 시키는대로 하랴 정신이 없었다. 몸이 너무 뜨거웠다. 하지만 빅터는 오늘도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여러 번 헛손질을 하는 하비를 독촉하며 그에게 초조함을 더했다.
“그렇게 머뭇대서 오늘 밤 안에 끝나겠나?”
식은땀 때문에 모조 성기가 자꾸만 하비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걸 알면서도 빅터는 더 잔인하게 굴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하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입에 담았다.
“더 끌면 라힌 스터스 의원 일을 모두에게 공개하겠어.”
하비의 너른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건 하비가 빅터에게 저항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이유기도 했다. 하비는 붉어진 눈으로 분노에 떨었다.
‘교활한 새끼.’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안되겠다 판단한 하비는 결국 이전처럼 모조 성기를 입에 물었다.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하비가 오메가의 몸으로 변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애액이 나오려면 멀었다. 더욱이 빅터는 모조 성기에 묻힐 어떠한 윤활제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입에 무는 수 밖에 없었다.
“흡…, 욱…….”
입 안에 넣고 천천히 넣었다 빼면서 하비의 타액이 모조 성기에 묻어났다. 목 안 쪽을 찌르는 감각에 구역질이 났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래도 빅터의 성기를 빠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직 빅터는 하비에게 그것까지 시키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비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춥! 추웁-!
음란한 소리가 빅터의 너른 방 안을 울렸다. 모조 성기가 하비의 입 속을 들락날락 하는 장면은 혼자 두고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미끈하게 잘 빠진 근육들로 가득 메워진 건장하고 우아한 몸이 남자의 것을 흉내낸 모조품을 물고 버거워하고 있는 장면이라니.
터질 것처럼 가득 채운 상아 모조 성기가 하비의 입을 불룩하게 점거했고, 그의 입가로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빅터는 진심으로 초상 화가라도 불러 지금의 음탕한 하비 스터스 경을 그림에 새겨넣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러 번 반복하는 사이 모조 성기가 충분히 젖었다. 지켜보는 빅터의 것도 흉흉하게 발기해 하의를 터질 듯 채웠다. 어느 새 하비에게서 은은하게 오메가의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빅터는 아래를 잠깐 내려보더니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을 길게 늘어뜨렸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약한 페로몬을 내보내는 가짜 오메가에게 이런 반응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언제 맡아도 사람 미치게 하는 페로몬이야.’
한편 하비는 빅터가 주시하고 있는 것에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오메가로 젖어가는 몸을 우성 알파가 한 점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그리 생각하니 하비는 점점 아래가 뜨거워졌다. 이 상황이 반복되자 몸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젖는 것 같았다.
‘드디어 미친 건가.’
머릿속 상념을 몰아낸 하비는 심호흡을 하고 준비된 모조 성기를 구멍에 밀어 넣었다. 더 지체하면 빅터가 정말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흐으으…!”
하비가 부들부들 떨며 상아 모조 성기의 절반 을 집어넣었다. 몇날 며칠 반복된 행위로 그의 구멍은 아주 녹진해졌다. 그래도 처음은 늘 힘들었다. 당연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니까.
빅터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신음도 참지 말고 내. 들을 사람도 없으니까.”
하비가 숨을 몰아쉬며 나머지 남은 모조 성기를 천천히 밀어넣었다. 구멍이 움찔움찔 떨며 반갑게 대용품을 받아들였다.
“네 놈이 듣고 있잖아.”
힘겹게 내뱉은 말에 빅터가 짧게 웃었다.
“나한텐 들려주기 싫은 건가? 그러니 더 듣고 싶어지는데.”
빅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가 긴 말채찍을 쥐었다. 온 정신을 뒤에 있는 모조 성기에 집중하느라 하비는 그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다 등과 엉덩이에 길게 닿는 익숙한 아픔에 이를 악물었다.
철썩!
말채찍이 길게 뻗어 하비의 단단한 등과 어깨를 할퀴고 내려갔다. 대번에 하비의 맨살에 붉은 줄이 생겼다.
정작 채찍을 휘두른 자는 여유롭게 한 손으로 담배 연기를 뿜고 있었다. 보기 좋게 튀어나오고 들어간 근육에 생긴 불그죽죽한 상처 위로 빅터가 다시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하비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독하게 소리를 삼켰다.
철썩! 철썩!
채찍이 떨어질 때마다 하비의 뒷구멍은 박혀 있는 모조 성기를 더욱 꽉 물었다. 채찍질이 끝나자 모조 성기가 스르륵 빠지고 하비는 침대로 털썩 엎어졌다.
그걸 지켜보던 빅터의 녹색 눈에 광기가 스며들었다.
“이 정도론 역시 성에 안 차지?”
빅터는 피우던 담뱃대를 장식용 가구 위에 올려두었다. 그가 하비의 엉덩이에 한 쪽 발을 올리더니 연한 노란빛이 도는 모조 성기를 집어들었다. 빅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번에 그것을 구멍에 밀어넣었다.
푹!
한껏 예민해진 구멍 안을 모조 성기가 헤집자 드디어 참았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흑…….”
하비는 이불을 쥐어뜯으며 낮은 울음을 토해냈다. 뾰족한 끝이 가장 쾌감에 취약한 곳을 사정없이 찔렀다. 순식간에 하비는 절정에 달해 이불을 정액으로 축축하게 적셨다.
빅터가 모조 성기를 쥐고 더 깊이 넣더니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목까지 붉어진 하비를 증오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다 끝날 때까지 물고 있어. 한 번이라도 뱉으면, 뭐 말 안해도 알고 있으리라 믿고.”
말을 마친 그가 채찍을 높이 들었다. 팽팽하게 집어당겨 채찍의 탄력을 확인한 빅터는 힘을 실어 능숙하게 채찍을 하비의 맨몸에 내리쳤다.
착! 차악!
아까완 다른 소리가 났다. 빅터는 채찍을 제대로 쓸 줄 알았고, 아무리 아프게 때려도 흉터가 남지 않을 정도로 때릴 수도 있었다. 아까까지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흡, 윽! 읏!”
채찍이 길게 닿을 때마다 억눌린 신음이 하비의 입술로 새어나갔다. 보통 사람이면 이미 기절했을 정도로 고통이 심할텐데 용케 버티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꿈틀대던 채찍이 하비를 휘감았다가 멀리 떠나갔다. 그럴 때마다 그의 뒷구멍이 품고 있는 모조 성기가 움찔댔다.
하비는 당장이라도 힘을 풀고 정신을 놓고 싶었지만 빅터가 보고 있었다. 절대로 지기 싫었다. 이깟 폭력에, 가문을 모욕하는 발길질에 고개 숙일 수는 없었다. 그런 각오로 여태껏 버텨왔는데 이제 힘에 부쳤다. 하비는 부드러운 이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삼켰다. 너무 아팠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비의 눈 앞이 아득해질 무렵, 빅터는 드디어 채찍질을 멈췄다. 그리 채찍을 휘둘렀는데도 빅터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빅터가 채찍을 내려두었다. 다 타들어간 담배를 흘끗 내려본 빅터는 혀를 찼다. 이 정도 시간이 흐를 때까지 굴복하지 않다니.
‘스터스 가문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핏줄이었나? 미처 몰랐군.’
정말 빅터가 말한대로 하비는 한 번도 모조 성기를 뱉지 않았다.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 눈 앞의 남자는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라힌 스터스 의원의 아들이다.
오랜 시간 빅터는 이런 상상만으로 버텼다. 해적들에게 말도 못할 온갖 고문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 날만을 고대했다.
자신은 이토록 잔악한 해적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는데, 뒷짐 지고 구경만 한 라힌 스터스 의원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정의를 대변하는 척하면서 제 잇속을 채운 그 더러운 정치가 말이다. 물론 고작 돈 얼마가 아까워 자신을 버린 바르뎀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둘 중에 누가 더 원망스럽고 밉냐고 자문하면, 이상하게도 빅터는 항상 라힌 스터스 의원의 아들인 하비 스터스를 떠올렸다. 지금쯤 편안히, 안락한 침대에서 꿈을 꾸고 있을 라힌 스터스의 하나뿐인 아들에게 같은 고통을, 아니 그보다 더한 지옥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적에게 납치당하기 전, 둘은 한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긴 대화는 없었지만 어린 빅터는 또렷하게 하비 스터스를 기억했다. 품위 있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명문 귀족가 도련님이었다. 밤색 머리에 밤색 눈이 잘 어울렸다.
‘그 놈은 지금쯤 좋은 이불 위를 뒹굴고 있겠지.’
어린 빅터는 억울했다. 왜 하필 자신인지, 이 불행이 자신에게만 온 것인지 원통했다.
돈을 주지 않는 부자의 아들을 해적이 어떻게 처리했을지는 불보듯 뻔했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건 최악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리던 돈이 오지 않자 해적들은 입을 더 늘릴 수 없다며 어린 빅터를 바로 죽이려 했다.
칼이 높이 허공에 반짝인 순간, 빅터는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살고 싶었다. 이대로 죽어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수라도 하려면 우선 살아야 했다. 어린 빅터는 그동안 눈치껏 봐온 해적 중에 가장 관대해 보이는 자를 골라 그의 다리에 매달린 것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아이다운 눈물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했다. 해적의 수뇌부로 지내면서 살려달라 우는 아이 정도는 수도 없이 보았다. 하지만 확실히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고민하던 그가 빅터에게 물었다.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지? 난 필요한 인간만 남겨둔다.]
치열하게 고민하던 어린 빅터가 외쳤다. 해적에게 필요한 인간?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들이 해적질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돈이요! 돈을 벌어 드릴게요. 어떤 것이 돈이 되는지, 뭘 해야 돈을 크게 벌 수 있는지 제가 잘 알아요! 할아버지가 돈 버는 방법을 유심히 지켜봤거든요.]
아이의 처절함을 본 해적은 결국 그를 살려주기로 했다. 빅터가 눈썰미 있게 붙든 그 자는 해적단 중에서도 선장 다음으로 결정권이 있는 높은 자였다.
빅터는 영리함을 무기로 그의 환심을 사고, 살기 위해 뭐든 했다. 성정 거친 해적들에게 맞는 건 예사였고, 심지어 외모가 반반했던 어린 빅터를 성적으로 이용하려던 해적도 있었다.
다행히 빅터를 마음에 들어 한 높은 자가 그를 구해준데다 쓸만한 놈으로 키울 생각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선포를 했다. 그럼에도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핑계로 이뤄지는 물리적 폭력에서까지 안전하지는 못 했다. 이러다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몰라, 매일 그런 불안감에 떨었다.
밤마다 더러운 침대 위를 기어다니며 이불에 피를 묻히고 마른 침을 뱉으며 어린 날의 빅터는 다짐했다.
살아 돌아가서 스터스 경의 아들인 하비 스터스에게 더한 악몽을 안겨줄 것이라고. 자신이 아팠던 것보다 더 끔찍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말이다.
성인이 된 빅터가 건너편에 보이는 거울을 보았다. 그곳에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몇 군데 났어도 매끈하고 잘생긴 금발의 미남자가 잔혹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모조 성기를 놓치지 않으려 굴욕적인 자세로 허벅지와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하비에게 그가 즐거운 듯 말했다.
“내가 매일 어떤 꿈을 꿨는지 알아?”
복수에 취한 몽롱한 얼굴로 빅터가 말했다.
“어떻게 해야 널 가장 효율적으로 밑바닥에 처박을 수 있을까, 방법은 수천, 아니 수만가지인데 그 중에 뭘 골라야 할지 고민했지.”
무덤 속의 라힌 스터스 의원이 알면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소중한 가문의, 하나뿐인 아들이 이 꼴을 당하고 있는 걸 알면 얼마나 원통할까. 빅터는 생각만 해도 등골이 아찔할 정도로 흥분되었다.
“그 순간에만 내가 살아있는 것 같더라고.”
하비를 오메가로 만든 약에 대한 아이디어도 그때 생각해 낸 발상이었다. 단순히 오메가로 만들어서 괴롭히는 것보다 빅터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고통을 주는 쪽이 훨씬 나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비가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이 변하는 끔찍함 속에서 생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던 하비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빌어먹을 감상은 여러 번 들었으니 됐고, 빨리 끝내.”
빅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하비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말채찍으로 턱을 그대로 찍어 올린 빅터가 강제로 들려진 하비의 얼굴에 대고 으르렁댔다.
“회담 자리에서는 그렇게 날고 기더니, 왜 자신이 처한 상황은 매번 최악으로 만드는 거지? 네 주특기잖아. 상대방이 원하는 걸 알아내서 협상하고 교섭하는 거.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나?”
턱을 들린 채로 하비가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모르긴 뭘 몰라. 네 천박한 욕구에 장단 맞춰주는 거겠지.”
“하, 아직도 그 소린가.”
빅터는 이쯤되면 그의 정신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려움 하나 없이 그저 곱게 자란 귀족 도련님일 줄 알았더니, 하비는 빅터의 예상보다 꽤 근성이 있었다. 지금도 약빨이 슬슬 돌아 뒷구멍에서 애액을 줄줄 흘리고 있는 주제에 입은 잘 돌아갔다.
빅터가 짜증스러운 듯 금발을 손으로 휙 넘겼다.
“그래. 빨리 끝내보지. 슬슬 귀찮아졌거든.”
관계를 시작하면 정신 못 차리고 품 안에서 울거면서 아직도 저 밤색 눈동자는 죽지 않았다. 빅터는 속이 뒤틀렸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아직 꺾이지 않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언제까지 버티는 지 두고 보자고, 스터스 경.”
저번에는 말채찍을 구멍에 꽂고 바닥을 기게 했는데도 무너지지 않았다. 심지어 개짖는 소리까지 시켰는데도 시키는대로 다했다. 굴욕적인 짓을 시킬 때면 곧장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행위가 모두 끝나면 그의 태도는 여전히 꼿꼿했다.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품위 있는 귀족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뭐, 시간은 많으니까.’
빅터는 초조함을 가라앉혔다. 아직 모든 수단을 다 쓴 것은 아니었기에. 그래도 공들인 시간은 헛되지 않아서 약간의 소득은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빅터가 구멍에 깊게 박힌 모조 성기를 빼내어 멀리 던진 뒤 제 것을 엉덩이 사이에 비볐다.
하비에게 이전과는 다른 떨림이 느껴졌다. 빅터는 여러 번 살을 맞대서 알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미소지으며 빅터가 눈을 길게 접었다.
“왜, 넣어줘? 박아줬으면 좋겠나?”
하비가 조금이나마 무너질 때는 이 때 뿐이었다.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미 오메가로 변한 하비의 몸은 알파의 페니스를 반겼다. 모조 성기 따위로는 충족이 안된다는 듯 하비의 구멍에서는 기대감에 멀건 애액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발기한 페니스를 주변에 비비기만 했을 뿐인데 물이 터져서 하비의 탄탄한 허벅지를 타고 이불까지 흥건하게 적셨다. 완전히 오메가로 변했다는 신호였다.
빅터가 완전히 발기한 페니스를 일부러 느릿하게 구멍의 주변부로 훑었다. 그러자 처음엔 미약하던 오메가의 페로몬이 강렬해졌다.
숨이 막힐만큼 매혹적인 꽃향이었다. 몸은 거부해도 본능은 숨길 수 없었다. 오메가는 알파를 끌어들인다. 꽃이 벌을 향으로 꾀어내듯이, 하비의 몸은 알파를 원하게 되었다.
“흡…….”
하비는 발가락을 전부 오므릴 정도로 격하게 반응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쯤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의 본능을 거부하고 있을 것이다. 빅터는 그가 맹렬하게 저항하지만 또 지고 말 것임도 잘 알고 있었다.
“감사히 생각해. 나 아니었으면 이렇게 예민한 몸인줄 평생 몰랐을 거 아닌가.”
빅터가 검은색 새틴 장갑을 끼더니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향수를 뿌렸다. 오메가 페로몬을 감출 용도였다. 일부러 독한 향을 뿌려서 그나마 강렬한 하비의 오메가 페로몬 향이 희석되었다. 하비는 그를 돌아보며 낮게 으르렁댔다.
“그만 지껄이고 얼른 끝……, 으윽!”
퍽!
빅터가 하비의 엉덩이를 잡더니 한번에 끝까지 박았다. 철퍽대는 소리와 함께 하비는 순식간에 절정에 달했다. 그의 밤색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지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해일같은 쾌감이 밀려들었다. 머릿속이 하얗다 못해 새까맣게 변할 정도로 극심한 오르가슴이었다.
“큭……!”
하비는 침대 위로 쓰러지면서 애액을 물처럼 쏟아냈다. 그의 허벅지 아래 아래쪽 침상이 온통 흥건하게 젖었고, 온 몸이 벌겋게 물들었다. 하비의 볼륨 좋게 솟은 어깨, 봉긋하게 솟은 엉덩이, 단단한 허벅지 등에 차례로 경련이 일었다.
빅터가 구멍을 박은 채로 채찍을 다시 집어들고 하비의 입술을 눌렀다. 짓씹어서 붉게 물든 입술이 꽃잎처럼 열리며 새빨간 혀가 드러났다. 하비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타액을 수습하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붉게 드러난 혀를 꾹꾹 누르면서 빅터는 안타까운 척 혀를 찼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아닌 척 하는 것도 이제 힘들 것 같은데.”
채찍 끄트머리를 입에서 꺼내자 하비가 기침을 연거푸 했다.
“쿨럭, 쿨럭!”
임무를 다한 말채찍을 빅터가 멀리 던졌고, 정신을 차린 하비가 고개를 아래로 하고 젖은 눈으로 빅터를 노려보았다. 쾌감으로 흐트러졌던 이지가 조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하비는 끝까지 요지부동이었다.
“닥치고 하던 거나 마저 해.”
빅터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깊게 박은 페니스를 조금씩 구멍에서 꺼냈다. 일부러 아주 천천히, 괴롭힐 목적으로 이러고 있는 것이었고 하비는 큰 체격이 무색하게 바들거렸다.
빅터의 페니스는 우성 알파답게 발기하면 구토감이 일 정도로 컸다. 그 큰 것을 살살 긁듯이 구멍에서 빼내니 감질맛이 났다. 근질거리는 기분에 하비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엉덩이를 꿈틀거렸다.
빅터가 그런 하비를 내려보며 차갑게 웃었다.
“닥치라니. 우리 스터스 경께서는 나같이 ‘돈으로 자리를 산’ 천박한 놈의 말투도 곧잘 흉내내신단 말이지.”
빅터는 하비가 평소에 자신을 두고 비꼬는 말을 인용했다. 완전히 만개한 오메가의 구멍이 빅터의 페니스를 따라가려는 듯 쫀쫀하게 표면에 들러붙었다. 구멍의 붉은 속살이 페니스와 함께 붙어 나올 것처럼 오물거렸다. 솔직한 하비의 몸은 끊임없이 애액을 내어 빅터의 페니스를 녹였다.
‘그만…, 제발, 그만.’
하비는 주먹을 터질 것처럼 쥐고 몸의 반응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이미 오메가가 된 몸은 목마른 듯 허겁지겁 알파의 것을 주워 담으려 했다.
지켜보던 빅터는 기가 막힌 듯 피식거렸다.
“하긴, 하는 짓도 남창이나 다름없어졌지만. 엉덩이를 스스로 흔들고 있잖아.”
구멍에서 반 이상 빠져나온 거대한 페니스에 핏줄이 흉흉하게 서 있었다. 애액으로 온통 번들거리는 것을 눈을 굴려 본 하비가 처음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다 약 때문이라고. 빨리, 이제 그만 끝내. 오늘은 평소보다 더 원없이 했잖나.”
확실히 신약을 거듭해서 먹을수록 하비의 몸뚱이는 더욱 민감해지고 쾌감에 약해졌다. 빅터의 녹색 눈이 길게 늘어났다. 신약을 제조한 의사의 말이 맞았다. 계속 반복해서 먹이면 부작용으로 정말 영영 오메가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적이 있었다.
하비의 감도가 좋아지고 있다는 건 빅터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구멍과 페니스가 연결된 부위에서 거품이 이는 것이 보였다.
더없이 뜨거운 광경이었지만 빅터는 냉랭한 얼굴로 거친 허릿짓을 시작했다.
”아윽…, 흐읏!, 흐……!, 크읏! 으응……!“
하비의 봉긋한 엉덩이와 빅터의 복부가 닿을 때마다 질퍽하게 애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철퍽! 퍽! 퍼억!
하비는 끝이 없는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몇 번이고 드라이 오르가슴에 취했다. 절정에 달하도록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망치가 한계 없이 그의 온 몸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하비의 밤색 눈동자가 천장으로 휙 올라가고 꽉 쥐었던 주먹에 힘이 풀렸다.
쿨쩍! 푸욱!
겨우 참았던 생리적인 눈물이 그 눈 가득 괴었다. 너무 느껴서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니면 슬픈 건지, 혹은 비참한 건지,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하비는 빅터가 새틴 장갑을 낀 손으로 엉덩이를 때리고 박아넣을 때마다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더, 더 넣어줬으면 좋겠다는 미친 생각마저 했다.
퍽! 푹!
빅터가 박을 때마다 하비의 단단한 등허리에 주름이 접혔다가 사라졌다. 등허리 능선을 거세게 움켜 쥐고 있는 커다란 빅터의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거칠었다. 그런만큼 남을 상처입히는 데 능했으며 실제로 그리 살아왔다. 빅터는 그랬기에 더더욱 꼿꼿한 하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상처받지 않는 거지? 널 지탱해주고 있는게 대체 뭐길래?’
하비는 거칠게 흔들리며 잔뜩 발기한 제 것도 함께 흔들었다. 애액으로 푹 젖은 이불을 쥐어뜯었음에도 입에서 제어 못할 쾌감의 흔적들이 마구 튀어나갔다.
”힛…!, 으윽!, 아…!, 아윽……!, 응…!“
흉터 많은 빅터의 굵은 팔에도 힘줄이 솟았고, 더욱 세게 하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재촉하듯 끌어당기는 구멍에 못 이겨서 중간부터는 빅터도 거의 이성을 잃고 박아댔다. 하비는 이제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열에 들뜬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빅터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허벅지를 벌리고 페니스를 뒤로 받고 있으면서도 하비는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빅터는 드디어 참았던 분노가 솟았다. 이렇게 무너졌으면서, 제 것을 달라고 조르고 있는 상황에서마저 기품있어 보이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정말이지, 이 남자를 통째로 부서뜨리고, 망가뜨리고 싶었다.
빅터는 속에서 터져나오는 증오를 담아 녹색 눈에 열기를 띄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잠궈두었던 뭔가가 터져나왔다. 드디어 빅터에게서 어릴 때부터 해적과 부대끼며 익힌 거친 욕설들이 가감없이 튀어나갔다. 평소에는 전혀 쓰지 않는 저열한 말들이었다. 빅터가 하비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 올려 증오 섞인 날선 말들을 던졌다.
”이 씨발, 창부같은 게…, 이렇게 박아줘도 아직 모자라나? 아직도? 더 채워주길 바라?”
뒤로는 쑤셔 넣으면서 음란한 말이 귓속에 퍼부어지는데 하비는 그런 데서도 느끼고 있었다. 어딘가 고장난 것 같았다.
하비가 구멍을 꽉 조이는 동시에 빅터에게서 낮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엄청난 양의 정액이 구멍 속에 들이 부어졌다. 각인도, 뭣도 하지 않은 채 감정 없이 부어지는 맹물에 불과했다. 그들의 관계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로지 과거의 그림자를 복수로 벗겨내려는 잔혹한 자와, 그의 그늘을 함께 뒤집어 쓰게 된 누군가가 있을 뿐이었다.
“흣……!”
순간, 하비의 페니스가 정액을 쏟아내고 뒷구멍에서도 애액이 터졌다. 앞뒤로 물을 뱉은 하비의 발가락이 일제히 오므라들었다. 얼굴은 터질 듯이 붉어지고, 하비는 또 한번 커다란 쾌감의 파도를 맞고 길게 떨었다. 뱃속 어딘가가 까맣게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퍼억-!
마지막으로 빅터의 페니스가 배 안 쪽을 강렬하게 때릴 때, 하비는 저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고 정신을 잃었다.
빅터는 생환해 돌아오자마자 집에 되돌아가 가문의 이름을 되찾았다. 이미 레토 바르뎀은 지병으로 사망한 뒤였고, 다들 그 날의 일로 빅터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잘 대해주었다.
빅터는 해적에게 잡혀 있던 나날들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한미한 바르뎀 가문을 열과 성을 다해 키웠다. 절대적 가주였던 레토 바르뎀의 사망 이후 기울어가던 가세는 빅터가 들어오면서 급격히 상승세를 보였다.
레토 다음으로 가주 자리를 이어받은 자는 빅터를 좋아했고, 급기야 내정자를 모두 제치고 빅터를 후계자로 지정했다.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신화적인 이야기에 귀족 청년들은 열광했다. 비록 인질로 잡혀서 집안에서 버림받았지만 거친 바다 위 해적들 사이에서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중간에 탈출해서 한 해양 상단에게 구출 받은 뒤, 자수성가해서 돌아왔다.
그걸로도 모자라 오로지 빛나는 실력과 능력으로 인정 받아 모두의 암묵적 지지 하에 가문의 후계자 자리까지 꿰찼다.
반면 빅터가 바다 위에서 목숨을 걸며 떠도는 동안 명문가인 스터스 가문도 서서히 기울었다. 해적 인질 사태를 자신의 책임이라 통감하며 라힌 스터스 경이 자진해서 사퇴했다.
자리를 버리고 내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들인 하비 스터스가 두각을 나타냈다. 모든 것이 동년배에 비해 뛰어났던 하비는 외교나 교섭에 능했고, 결국 외교관으로 나아갔다.
다만 하비는 아버지처럼 의원 선거에 나서지는 않았다. 정책을 결정짓는 자리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하비는 선거에 나가면 무조건 되도록 적극 도와주겠다던 주위의 도움도 모조리 거절했다.
하비는 아버지 라힌 스터스를 몹시 존경했지만 ‘그 날’의 강경한 조치는 다소 이해 가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조금만 더 유연하게 대처했어도 굳이 사망자가 나오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하비는 라힌 스터스 경이 죽음의 강을 건널 때까지도 그 날의 한 번도 묻지 않았다. 하비의 직감이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묻지 말고, 묻어 두라고.
그래서 하비는 돌아온 빅터 바르뎀 경이 몹시도 불편했다. 그 날의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빅터의 초대를 받았을 때 바로 거절했어야 했다. 하비는 지금까지 그 날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당신 아버지의 진실을 알고 싶으면, 내 저택으로 찾아와.]
사교 소드 클럽에서 만난 첫만남에서 빅터는 그리 말했다. 하비는 마음이 격하게 일렁였다. 심장이 쿵쿵대며 그의 불안을 알렸다. 잊고 싶었던 과거의 의혹이었는데, 그 중심에 서 있는 자가 멀쩡히 살아 돌아와 다시 하비의 심장을 두들기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싶은가? 정말로?
‘이제까지 잘 모른 척 해왔잖아.’
하비는 자신을 나무랐다. 끝까지 아버지를 믿고 빅터의 제안 따위는 듣지도 말았어야 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믿음이 부족했던 탓인 것 같아 하비는 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 여기면 빅터가 주는 온갖 고통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다 부족한 신념에서 비롯된 자신의 실책이며, 빅터는 이를 꾸짖는 아버지의 호된 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분명, 최근까지는 그리 생각했다. 아버지의 행적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주인님, 주인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집사의 목소리였다. 하비는 무거운 눈덩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겨우 뜰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소란을…….”
말을 꺼내자마자 목에서 찢어질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기침을 하며 눈을 완전히 뜨자 안경을 쓴 남자가 있었고, 그 옆으로 걱정스러워하는 집사가 차례대로 보였다.
하비가 이 정체 모를 안경 쓴 남자가 누군지를 의아해하자 집사가 눈치 빠르게 알아보고는 설명해 주었다.
“바르뎀 경께서 저택까지 손수 데려다 주셨습니다. 여기 계신 유능한 의사도 붙여 주셨고요. 그간의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졌다고 하시던데,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의사라는 자가 하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묘하게 하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람 보는 것이 빠른 하비는 의사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빅터가 붙인 사람이라고 하니 더욱 의심이 증폭되었다.
하비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이곳이 자신의 저택임을 알았다. 익숙하고 따뜻한 풍경이었다.
“바르뎀 경은 돌아갔나?”
“예, 주인님. 바쁜 일이 있다며 바로 가셨습니다.”
하비가 침대 위에서 힘없이 눈을 굴려 의사를 보았다.
“진찰할 때 내 몸을 본건가?”
하비가 넌지시 물었다. 의사는 눈을 굴리더니 재빨리 고개를 휘저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옷을 다 입고 계신 상태였고, 의원님이 절대 벗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한 가문의 가주이자 귀한 몸이니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하지만 하비는 의사의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계속 눈을 피하는 걸 보면 느낌이 왔다. 아마 진찰시킨 뒤 빅터가 미리 입막음을 했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빅터는 약속을 철저히 지켰으니까. 빅터의 어떤 요구도 잘 따르고 있는만큼 외부에 하비의 몸상태를 발설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왜 그 비열한 자식의 약속 따위를 믿고 있는 거지?’
하비는 빅터의 약속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손바닥 뒤집듯 언제든 약속을 깰 수도 있을 인간인데, 왜 자신과의 약속은 지킬 것이라 확신하는지.
그때 집사가 뭔가 생각난 듯 탁자에 놓여 있는 곱게 접힌 편지 한 장과 유리병을 가져왔다.
“바르뎀 경께서 주고 가셨습니다. 보시면 아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알겠네. 나중에 확인하지.”
하비는 빅터가 또 무슨 꿍꿍이로 이런 것을 두고 갔는지 벌써부터 두려웠다.
착잡한 얼굴의 하비에게 의사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그의 저택을 떠났다. 거대한 문을 나서자마자 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 빠른 분이신데, 무사히 빠져나왔네. 대체 의원님은 무슨 생각이신건지…….’
의사가 하비의 예상대로 의사는 그의 상태를 모두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의사는 약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으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맙소사. 이 약을 스터스 경에게 쓰고 있었다니. 드디어 그분도 미치신건가?’
의사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행여나 누구에게 들킬까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알파를 오메가로 만드는 약은 원래도 암암리에 존재했다. 항간에 알파끼리 맺어지는 것이 귀족가에서 유행처럼 떠돌고 있던 터라, 위험한 시술이나 독한 약을 무절제하게 써서 생긴 부작용도 심각했다. 국가적으로 금지해도 위험한 불장난에 눈이 먼 귀족 청년들이 불법적인 것까지 동원하던 때였다.
빅터에게 불려온 이 의사는 뒷골목에서 꽤 이름난 자였고, 빅터의 의뢰를 받아 신약을 제조했다. 하지만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빅터 바르뎀의 손에 들어갔다.
빅터는 신약의 유포권과 제작권까지 모두, 그리고 뒷골목 의사의 목숨까지 저당 잡았다. 애초에 몸을 속여 호르몬을 변형시킨 뒤, 바뀐 호르몬으로 체형까지 변형시킨다는 것은 빅터의 아이디어기도 했다. 그러니 의사도 큰 불만은 없었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기로 해서 딱히 목숨을 저당잡히지 않았어도 외부로 약을 풀거나 발설할 일도 없었다.
한편, 빅터는 하비의 저택 부근에 마차를 대기하고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가 금발 아래 번뜩이는 녹색 눈으로 도망치듯 떠나는 의사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제대로 잘 하고 왔는지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저리 겁내는 걸 보니 쓸데없는 소린 안 할 것 같고.’
빅터가 고급스러운 외벽으로 둘러싼 하비의 백색저택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저 자부심 강한 백색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들의 고귀한 알파 가주가 오메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까.
‘알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두긴 했지만. 웃기는군.’
빅터는 마차의 창문을 내리고 출발시켰다. 그가 뜻밖에 찾아온 기회에 계속 피식대며 미소지었다. 생각할수록 웃긴 일이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워낙 하비는 소위 약빨이 너무 잘 받았다. 신약을 개발한 의사의 말로는 경우에 따라 아기집까지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신약이 막 완성되었을 무렵 빅터는 의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했다.
[정말 아기집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건가? 원래 알파인 사람이, 이깟 장난같은 약 하나 때문에?]
[확실치는 않지만 신약의 임상실험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무슨 부작용이 생겨도 놀랍지 않지요.]
의사는 혹여나 정말 아기집이 생긴다면 몸을 속여 강제로 만든 것이니 금방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가능하더라도 임신은 절대로 권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느 분께 쓰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신중히 써주십시오. 돈에 눈 먼 제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잠깐 속이는 건 가능해도 사람의 몸이란 건 영악해서 금방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리 신신당부했던 의사가 하비의 상태를 보더니 기절초풍할 것처럼 놀랐더랬다. 일단 자신의 신약 실험 대상이 하비 스터스 경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조금 전의 촌극을 떠올리며 빅터가 웃었다.
‘신중히라.’
솔직히 놀랐다. 하비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는데, 기절한 상태에서도 절대 배에서 팔을 풀지 않으려 했다.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무의식이 작용한 것처럼.
빅터는 공범자인 의사를 불러 하비의 상태를 확인하게 했다. 그들은 처음의 우려대로 신약의 효과가 지나칠 정도로 하비에게 영향을 미쳐 아기집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히트가 발동하지 않아 임신한 것은 아니고,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지만 빅터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의사는 하비에게 원래대로 돌아오는 약을 다시 쓰면 알파로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아기집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빅터는 이를 보류했다. 원래라면 다시 되돌렸을 테지만 다른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였다.
‘일단 이걸 뿌리고 다니라고 해야겠어.’
빅터는 의사가 주고 간 오메가임을 숨기는 특별한 페로몬 향수 여분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알파인 수사슴의 침샘에서 추출한 것으로, 오메가임을 숨길 수 있었다.
하나는 짧은 편지와 함께 하비의 집사에게 주고 왔으니 하비가 알아서 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분간은 하비가 오메가가 된 것을 아무도 모른다.
빅터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기회로군.’
하비의 자존심은 스터스 가문의 명예, 그리고 전 의원이었던 아버지 라힌 스터스의 곧고 청렴한 업적, 뛰어난 알파 자질과 본인이 가진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아버지 라힌 스터스의 청렴결백한 업적은 무용지물에, 현재 하비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약점이 되고 말았다. 스터스 가문의 명예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폭로되면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남은 건 하비 본연이 가진 외교관으로서의 능력과 알파로서의 자존심 뿐이었다.
‘여기서 알파로서의 자존심까지 완전히 뭉개면 아주 완벽한 시나리오가 되겠지.’
하나하나씩 하비를 지탱하던 것들을 무너뜨리던 빅터는 이제 다음 계획을 시행하기로 했다.
펄럭!
그가 마차 안에 사용인이 미리 놓아둔 신문을 펼쳐 읽었다. 신문 헤드라인에 어제의 소야 회담성공을 기리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현 올란 시의 의원이자 빅터 바르뎀 경에 대한 찬사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글귀를 대충 눈으로 훑은 빅터는 그 현란한 칭찬에도 아무런 감흥 없이 냉정하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빅터 바르뎀이 관심 있는 건 오로지 하나 뿐이었으므로.
그런 빅터의 의중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하비는 심란한 얼굴로 그가 남긴 편지를 읽고 있었다.
-남기고 간 걸 시간 날 때마다 몸에 뿌려. 이왕이면 자주.
하비가 반듯한 이마를 찡그렸다. 별 것 아닌 편지 내용인데, 빅터의 강압적인 말투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언제 들어도 재수없는 목소리라니까.’
어쩌다가 첫 만남부터 꼬여서 꼼짝도 못하고 시키는대로 다 하는 빅터의 꼭두각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몹시 한심해진 하비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다.
파악!
빅터의 편지가 구겨진 채 테이블에 닿았다가 서서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비는 그게 꼭 자신의 처지인 것 같았다.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하비가 굴욕에 치를 떨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겁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라힌 스터스 경.’
명문가의 가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같은 알파에게 깔려서 허우적대는 것도 모자라 쾌감을 구하며 엉덩이를 흔들기까지 했다. 단순한 욕구를 못 이겨서 애걸하듯이 빌기도 했지 않은가. 빨리 끝내 달라는 말은, 빨리 넣어달라는 말과 같았다.
하비는 양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제 남은 눈물조차 없었기에 물기가 묻어 나오지는 않았다.
첫날, 처음으로 오메가가 되어 빅터에게 뒤를 뚫렸던 그 날 이후로 하비는 자발적으로 울지는 않았다. 생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쾌감의 눈물이라면 몰라도.
그러다 문득 하비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뱃속이 욱신욱신한 건 둘째치고, 깊숙한 곳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기절한 사이 그 놈이 다시 돌아오는 약을 먹인 게 아닌가? 몸이 왜 이러지.’
예민해진 하비의 몸은 평소와 다른 점을 민감하게 감지했다. 확실히 다르다. 뭐가 달라진 건지는 아직 잘은 몰라도, 하비는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알아낼 때까지는 조심해야겠어.’
구슬 같은 게 박힌 것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그보다 더한 것을 심어놨을지도 모른다. 빅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비 스터스를 무너뜨리고 스터스 가문을 밟고 싶어할 테니까 말이다.
하비는 우선 빅터가 시키는대로 제 몸에 알 수 없는 향수를 뿌리고 외출했다. 집에 박혀 있어봤자 더 좋은 생각도 나지 않고 가라앉는 기분이라 환기시킬 무엇이 필요했다.
“또 나가십니까?”
하비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집사가 쫓아나왔다. 그는 하비에게 좀 더 쉬라고 뜯어 말렸지만 하비가 집사의 말을 듣는 경우는 손에 꼽았다.
“주인님! 이번엔 어딜 가십니까! 주인님!”
뒤에서 시끄럽게 구는 집사를 떨쳐내고 하비는 새하얀 백마를 이끌어 천천히 산책하듯 걸었다. 답답한 마음에 주변을 걷고 싶은 심정도 있었다. 바로 말을 타고 달리기에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적당히 걸어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하비가 불쑥 뒤를 돌아보았다. 스터스 가의 상징인 하얀 저택이 보였다. 하비는 한참이나 새하얀 건물을 눈에 담았다. 비록 기울어가는 스터스 가이지만 자신은 가주로서 저것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었다.
해가 내려가고 있었고, 주홍빛 노을이 하얀 저택에 걸려 환상적인 광경을 자아냈다. 아름다웠다.
‘빌어먹을…….’
하비가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세게 쥐어서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렸다. 하비를 탐내는 가문이 꽤 있었고, 이곳저곳에서 좋은 혼처가 들어와 있던 차였다. 괜찮은 오메가 집안이 있으면 골라 결혼도 할 생각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이 하얀 저택을 물려주고, 그렇게 스터스 가는 영속을 이을 예정이었는데.
하비는 세게 쥐었던 주먹을 풀고 다시 뒤돌아 걸었다.
‘이 상황에서 가능할는지 모르겠지만.’
빅터 바르뎀. 그 자가 있는 한 절대 불가능할 꿈이 되고 말았다. 오메가와 알파를 오가는 이상한 몸이 된 지금, 하비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빅터와 어떻게든 결판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빅터의 입을 막으면 모든 게 끝날 일인데 부와 명예와 사람들의 지지까지 모두 등에 업은 그를 없애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암살자라도 고용해야 하나.’
그러나 누군가를 죽여 문제를 해결하는 건 하비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기에도 빅터의 존재는 너무 위험했다. 더 이상 그의 요구를 들어주며 질질 끌려갈 수도 없었다. 이제 한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하비도 직감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고민하며 걷던 하비가 푸르릉대며 머리를 비비는 백마의 존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 경이 몹시 아끼던 백마였다.
하비는 입김을 푸푸 내뿜으며 자신을 위로하는 백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스터스 가문은 다른 자의 피와 눈물로 세워진 저택이 아니었다. 명예를 아는 선조들이 세운 것을 제 손으로 더럽힐 수는 없었다. 하비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래.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먼저 해야지.”
빅터가 그를 협박하고 있는 것은 전 의원이었던 라힌 스터스 경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해적 인질 사태 때 단순히 자신의 신념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과오를 덮기 위해서였다는 폭로였다.
당시 시의원이었던 라힌 스터스는 불법 투기로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고, 몰래 올란 시의 재정에 손을 대고 있었다고 했다. 해적들에게 내어줄 금액도 없었을뿐더러, 시의 재정을 사적으로 끌어 쓴 것이 들킬 위험이 컸기에 폭력 단체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명목을 내세운 것이었다.
빅터가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증거는 확실했다. 당시 재정 담당 회계사가 작성했던 기록을 빅터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인지 직접 확인해 봐야 겠어.’
하비는 귀족가의 정보가 흐르는 중심인 곳을 잘 알았다. 로투스 가문이었다. 문득 그가 불쑥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 벌써 날이 그리 되었나.’
하비가 본 곳은 반이 있을 저택이었다. 스터스 가의 저택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로투스 가의 저택이 있었다.
곧 반 로투스 경의 생일이었다. 하비에게는 여러 친구가 있지만 반은 특별했다. 원래 스터스 가는 로투스 가문과도 절친했기에 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다시피 한 형제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의 선물만큼은 하비가 손수 마련하곤 했다.
‘반이 좋아하는 게 뭐였지.’
그러고 보니 하비는 요즘 반과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를 한지 꽤 되었다는 생각에 미쳤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변을 팽개치고 산지 오래되었다. 생각에 잠겨 몇 차례 백마의 갈기를 쓰다듬던 하비가 훌쩍 말 등에 올라탔다. 그대로 말을 달려 로투스 가의 으리으리한 저택까지 달렸다. 하비는 말이 뛸 때마다 엉덩이가 쪼개질 듯이 아팠지만 간신히 견뎌냈다. 그 아픔도 익숙해질 때쯤, 스터스 가의 저택보다 두세배는 커보이는 대저택이 나타났다. 정원의 크기도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이 창을 치우고 하비를 맞았다. 그 중 하나가 쪼르르 달려가 하비가 왔음을 알렸다.
‘여긴 여전하군.’
문지기들이 열어준 거대한 대문으로 들어간 하비가 정원에 도착하자 날렵하게 말에서 내렸다. 기품 있는 백마를 몰고 온 하비는 오늘도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사교 소드 클럽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니! 스터스 경 아니십니까!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소식을 들은 로투스 가의 사용인이 달려와 말을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계속 앞발을 들며 불안한 듯 도리질을 쳤다.
“워워.”
오늘따라 불편한 것처럼 투레질 하는 말을 손으로 두들겨 얌전하게 만든 하비는 간신히 말을 사용인에게 넘겼다.
뒤늦게 하비가 푸릇푸릇한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꽃이 많아 벌도 많았다. 그가 몰고 온 백마는 벌에 쏘인 적이 있어서 유난히 벌에 두려움이 많았다.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반 로투스 경이 놀라운 얼굴로 자신의 친구를 돌아보았다. 친구의 물음에 오히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달려온 사용인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서였다.
“웬일이라니. 종종 찾아오지 않았나. 새삼스럽기는.”
반이 앉아있는 테이블이 정중앙에 놓인 정원은 잘 손질된 꽃과 식물들로 가득했다. 정원사들이 종종 들락거리며 관리하고 있는 것도 보였다.
하비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며 정원을 구경했다. 로투스 경의 저택은 암암리에 정보를 취급하는 중심가 같은 곳이었다. 대대로 귀족 사교계나 가문끼리의 온갖 뒷정보를 처리하고, 그 대가로 돈과 안전을 얻었다.
귀족 사회에서 모두가 모르는 누군가의 사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건 큰 힘이었다. 일찍이 귀족들의 그런 검은 이면을 안 로투스 가문의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부를 쌓아 왔다. 그런만큼 그들이 소유한 정원도 규모가 방대했다. 황제 부럽지 않을 것이다.
문득 하비는 테이블에 온갖 종이가 널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눈길이 그 쪽으로 가자 반은 얼른 종이들을 낚아채 모은 뒤 하비가 보지 못하도록 뒤집었다.
하비는 눈을 좁히며 모른 척 물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반이 뜨끔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툴툴댔다.
“보면 모르나? 정보 취합. 우리 가문이 제일 잘하는 짓거리지.”
“무슨 자료가 그렇게 많아?”
사용인이 다가와 반의 담뱃대에 불을 붙여주었다. 반이 그걸 입에 물고 뻐끔댔다.
“알잖아. 요새 다들 투기에 미쳤거든. 어떤 품목이 좋을지 물어보는 놈들도 많고.”
하비 앞으로도 담뱃대가 주어졌지만 하비는 이를 거절했다. 무엇보다 아버지 일 때문에 ‘투기’ 라는 말에 민감해진 탓에 그의 도덕적인 결벽증은 한층 더 심해졌다. 당분간은 술이나 담배조차 입에 대고 싶지도 않았다.
하비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렇긴 하지. 나한테도 바르뎀 경과 친하면 다리를 놔달라는 둥 벌써 청탁이 들어오고 있어. 다 그 꽃을 얻을 목적이겠지.”
빅터 이야기만 나오면 몸 어딘가를 불로 달군 인두로 쑤시는 기분이 들었지만 하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다.
“바, 바르뎀 경?”
그런데 반이 빅터가 언급되자 이상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하비가 수상하게 쳐다보자 그는 헛기침을 했다.
“아아, 네가 참여한 그 소야 회담? 그건 이제 시작일 뿐이야. 이제 포도밭도 전쟁터가 될 거라고.”
“포도밭? 포도주 때문인가?”
반이 긴 담뱃대를 물고 연기를 뿜어냈다.
“맞아. 품종 좋은 포도밭을 서로 차지하려고 난리들이지.”
하비가 혀를 내둘렀다. 다들 미쳐가는 것 같다.
“종잇조각이 화폐가 된 이후로 점점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군.”
이런저런 요즘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하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세상의 흐름을 먼저 앞서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외교부에 돌아가면 과열된 투기 품목 위주로 한 번 알아봐야겠어. 이대로면 또 2차 소야 회담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반이 하비를 물끄러미 보다가 묘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반은 다 피운 담뱃대를 내려놓고 이번엔 고급 포도주에 손을 대었다.
“자넨 항상 앞질러가는군.”
“뭘?”
“시대를.”
반이 포도주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나를.”
그가 이미 많이 취한 듯 해서 하비는 반이 더 마시려는 것을 막았다. 하비가 걱정스럽게 그를 보며 물었다.
“요즘 너무 술독에 빠져사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나?”
“아니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것이 어딨어. 우리 로투스 가에서 반푼이 신세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감히 누가 반 로투스 경에게 그런 말을…….”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하비는 알 수 있었다. 반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비스듬하게 걸렸다.
“누구긴 누구야. 우리 아버지지.”
반의 아버지인 세반 로투스 경은 항상 자식에게 지나칠 정도로 엄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스터스 가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과 열등감도 엄청났다. 그건 어릴 때부터 하비도 잘 알고 있었다. 세반 로투스는 만나면 그에게도 잘 대해주었지만 언제나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내곤 했으니까.
반이 포도주를 목에 털어넣고는 씁쓸하게 말했다.
“우리 집안에서 2등은 필요없다고 늘 말씀하셨지. 자넨 늘 1등을 했고 말이지.”
반도 외교관이 되고 싶어했던 것은 하비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이미 반은 다른 길로 빠져 버렸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집안의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이었다. 하비를 한 번이라도 이긴다면 외교관의 길을 걷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끝까지 반은 하비를 꺾지 못 했다.
물론 하비는 반이 아버지와 그런 약속을 했는지 몰랐다. 나중에 알게 된 하비가 몹시 미안해 했지만 반은 그것마저 속이 뒤틀렸다. 하비는 아무 잘못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만약 하비가 일찍이 알았다면 모른 척 한 번쯤 져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더 비참했다. 반의 자존심을 두 번 밟는 일이었다.
반이 담뱃대를 물고 허공을 올려보았다.
“우리 아버진 항상 자네 가문을 이기고 싶어 하셨지.”
하비는 착잡한 눈으로 친구를 보았다.
“그건 윗세대 이야기야. 우린 다르잖아.”
“그래, 다르지. 아~~주 다르지. 넌 일등, 난 이등. 하하!”
반은 하비의 손을 뿌리치고 남은 포도주를 전부 들이마셨다. 딸꾹대며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것을 훔쳐내던 반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취한 얼굴로 그가 빈정대듯 말했다.
“그래서 우리 일등! 하비 스터스 경께서는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하비는 안타까움과 한심함이 섞인 표정으로 취한 친구를 말끄러미 보았다.
“물어볼 게 있어서 오긴 했는데.”
“물어볼 거? 뭔데. 우리 스터스 경께 드릴 수 있는 정보면 뭐든 줘야지! 암!”
하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지금은 안 될 것 같아서. 다음에 부탁하지.”
빅터와 관련해서 물어볼 것이 있기도 했지만 하비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너는 뭐든 잘해서 좋겠다고, 반이 농담으로 늘 하던 소리였다. 정말 마음에 맺혀있는 줄은 몰랐다. 언제나 가볍게 말해서 친구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 헤아리지 못 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면서 말이다.
하비는 진심으로 반에게 사과했다.
“미처 몰라서 미안했다.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내가 알았으면 아마…….”
하비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차마 널 위해 일부러 져줬을 거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비도 그 말이 오히려 반을 짓밟는 내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이 피식거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 됐어. 어차피 내일이 되면 다~ 잊고, 하비 스터스 경의 좋은 친구로 돌아갈텐데.”
반의 주정을 조금 더 들어주다가 하비가 조용히 일어났다. 배웅하려는 사용인을 물리고 하비는 반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반. 넌 좋은 친구야.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몸을 일으킨 하비가 조용히 반의 어깨를 짚었다.
“정원에 벌이 너무 많아. 꽃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군.”
나직하게 충고를 남긴 하비가 로투스 가의 너른 정원을 떠났다. 떠나는 큰 보폭의 발걸음마저 일정했다. 반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뭔지는 몰라도 잡음이 날 만한 것들은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미였다.
하비의 큰 그림자가 사라지자 반은 말없이 빈 술병을 정원에 던졌다.
쨍그랑!
병이 깨지며 유리조각이 흩어졌다. 깨진 조각들은 꽃 사이사이로 숨어 번뜩였다. 반이 머리칼을 움켜쥐며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찍었다.
쿵!
괴로워하며 반은 더욱 고개를 숙이다가 기어코 테이블로 이마를 쾅쾅 찧었다. 몇 번이나 이마를 박던 그가 아예 늘어지면서 중얼거렸다.
“왜 항상 사람을 나쁜 인간으로 만드냐고……. 왜……. 네가 제일 나쁜 녀석이면서.”
그가 어지러이 늘어놓은 자료에서 발신인이 바르뎀 가의 문장이 찍힌 것이 보였다.
친구는 많았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았다. 어두운 뒷골목으로 말을 몰고 들어가며 하비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반은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을 줄이야.’
하비는 반을 통해 로투스 가문을 이용했지만 그건 사실 양날의 검이었다. 로투스 가문에서 얻는 것들은 곧 그 가문의 방패가 되고 검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하비는 언제나 반이 자신의 검과 방패가 되어주니 괜찮을 것이라고 자만했다. 정작 그 친구가 얼마나 속앓이를 하고 있을 지는 알지도 못한 채.
‘이번 생일 때 정말 좋아할 만한 걸 찾아서 선물해야겠어.’
로투스 가문 이외에 날 것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었다. 지금 하비가 가고 있는 곳이 그런 장소 중 하나였다. 워낙 어릴 때부터 평민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던 그였기에 이런 곳이 그리 싫지 않았다. 뼛속까지 귀족인 아버지에게 늘상 혼나기는 했어도 말이다.
하비가 근처의 평범한 옷가게에서 얼굴을 가리는 후드를 하나 사서 푹 뒤집어쓰더니 익숙한 걸음으로 뒷골목에 들어섰다. 일부러 몰고 왔던 아끼던 백마는 믿을 만한 곳에 맡기고, 평범한 갈색 말을 사 왔다.
이윽고 한 허름한 여관에 도착한 하비가 마구간에 말을 매어놓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여급 하나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하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하비의 정체는 알 수 없어도 높은 신분의 사람일 것이라는 예상은 대충 했다. 허름하게 온 몸을 꽁꽁 가렸지만 감출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큰 키에 너른 어깨, 균형잡힌 체격, 살짝만 보이는 턱과 날렵하고 곧은 코에 강건한 기개가 보였다. 게다가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좋은 향기까지 났다. 알파인 여급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혼자 이신가요? 자리를 안내해 드릴까요?”
하비는 여급에게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내저었다.
여급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물러났다. 이 후드 쓴 남자에게서 아주 미약하지만 희미한 오메가의 페로몬 향이 났다. 하비가 반의 일에 몰두하느라 빅터가 준 향수를 깜박하고 뿌리지 않은 탓이었다. 어느새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뿌리라는 빅터의 당부를 까맣게 잊었다.
하비가 팔짱을 끼고 테이블 여럿을 눈으로 훑었다. 값싼 술을 들이키는 사내들, 떠들썩하게 혹은 게걸스럽게 접시에 코를 박고 늦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건 이 여관의 위장한 모습이었다. 진짜 모습은 따로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정보의 창구였다. 로투스 가문에서 취급하지 않는 하급 정보들이 주로 오갔지만 간혹 쓸만한 것들도 나왔기 때문에 하비가 종종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 중 하비는 조용히 카드를 치는 무리에게 접근해서 털썩 앉았다. 들고 있던 패 하나를 던지려던 사내가 움찔하며 후드 쓴 하비를 돌아보았다. 말끔한 하비의 외모에 비해 길이가 다른 수염이 여기저기 난 남자였다.
“누구지? 웬 놈이야.”
하비가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낮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매번 번거롭게 하는군.”
슬쩍 지폐 뭉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남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카드놀이에 다시 집중했다. 방금 말을 걸었던 수염 난 남자에게 하비가 조언했다.
“나라면 그 패는 끝까지 가지고 있겠어.”
“쳇. 건방지게 훈수 두지 말라고.”
구시렁대기는 했지만 남자는 하비의 조언에 따랐다. 결국 내려던 패 말고 다른 패를 슬그머니 내민 것이다. 남자의 수염이 마치 염소의 것 같아서 ‘염소 수염’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남자였다. 그는 하급 정보를 취급한다고 해도, 이쪽 방면에서는 가장 솜씨가 뛰어난 자였다.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던 하비가 순간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낯익은 페로몬 향이다.
“여기 바르뎀 경이 다녀간 적이 있나?”
“시의원님? 그 분이 왜 여길 오겠어. 이런 지저분한 곳에.”
하비가 다시 한 번 익숙한 페로몬 향을 들이켰다. 희미하지만 확실했다. 빅터의 것이다. 야생의 범과 같은, 두려우면서도 강한 페로몬. 풀숲에 숨어 있는 맹수처럼 항상 거친 풀향도 함께 났다. 느낌 탓인지 그 페로몬에는 압도적이고 은밀한 자신감마저 묻어났다.
하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하지마. 분명 페로몬이 남아 있는데.”
염소 수염이 검지로 이마를 긁었다.
“페로몬? 우린 그런 거 모르겠는데? 넌 어떻게 아냐? 알파, 오메가, 뭐 그런 건가?”
하비가 움찔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알 줄 알았는데 모른다는 반응이자 그는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들은 모두 베타였다. 페로몬 향을 맡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 그건….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나.”
하비는 이곳에 온 목적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염소 수염이 이번엔 지저분하게 수염이 난 턱 끝을 벅벅 긁었다.
”돈 될 만한 건 다른 나으리들이 싹 쓸어가서 말이지. 더 줄 만한 게 없소만?“
”내가 궁금한 건 아직 가져간 자가 없을텐데.“
”뭔데 그래? 말을 해야 알지.“
카드 하나를 홱 던지며 수염 남자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다 담담하게 나오는 하비의 다음 말에 그가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전 시의원인 라힌 스터스 경의 회계사. 올란 시의 재무를 담당했던 자. 그 자의 행방.”
사실 빅터에게 협박당하는 동안 하비도 손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먼저 아버지가 저지른 불법 투기라는 것부터 찾았고, 그러려면 당시 라힌 스터스 경의 명으로 재무를 담당하던 재무담당 회계사를 찾아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비는 빅터가 뭔가 오해를 했을 거라는 생각을 굳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이를 입증해줄 사람이 없었다. 라힌 스터스 경의 자진 사퇴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하비는 왜 여태까지 그걸 몰랐을까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부터 수습하면 된다, 그리 생각했지만 이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실오라기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그 뒤로 점점 하비에게도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닌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힌 스터스 경의 갑작스러운 자진 사퇴, 항상 불안해 보이던 아버지, 죽기 전까지 무언가에 쫓기듯 신경 쇠약에 시달리던 것도 지금에서야 수상하게 보였다.
‘빅터 바르뎀, 그 자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거짓으로 하는 단순 협박이 아니라 빅터는 정당한 응분을 그에게 쏟고 있는 것이다. 하비는 꼼짝 않고 얼어붙은 염소 수염을 수상한 눈길로 훑었다.
“분명 나보다 먼저 그 자를 찾던 사람이 있었을 텐데.”
한참 뒤에야 염소 수염이 다시 팔을 움직여 카드를 판에 던졌다.
“…나는 그런 사람 몰라.”
모른 척 하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이대로 물러설 하비가 아니었다.
“실종된 지 꽤 되었는데 가족들이 실종 신고조차 하지 않고 있어. 찾아가 보면 다들 뭔가를 숨기더군. 이상하지 않아?”
“집에서 내놓은 인간이겠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었어.”
하비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도와 성심성의껏 일했던 재무 회계사를 기억했다. 유약해 보이긴 했어도 실력 하나만큼은 알아줬다. 가정에도 몹시 충실한 다정한 가장이었다.
하비가 염소 수염을 달래듯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음성으로 회유했다.
“말해주기 껄끄러우면 나보다 앞서 찾았던 자의 인상착의라도 알려줘. 그럼 들은 걸로 퉁치지.”
결국 염소 수염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비는 그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꼭 알아야겠어?”
“알아야 돼. 중요한 일이거든.”
염소 수염이 제멋대로 난 수염을 고민스럽게 손으로 마구 훑었다. 불안해 보였다. 고민 끝에 염소 수염은 카드를 같이 치던 친구들에게 판을 빠지겠다고 선언했다.
“잠시 나갔다 오마. 너희들끼리 놀고 있어.”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대는 남자들을 뒤에 두고, 염소 수염은 하비를 끌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그가 마른 세수를 하더니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한테도 발설하지마. 그간 우리가 한 거래가 얼마야. 정을 봐서 특별히 말해주는 거라구. 알겠어?”
하비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염소 수염이 입을 벌렸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접근하지만 않으면 정말로 이야기해줄 생각이었다.
“히익!”
뭔가를 말하려던 염소 수염이 하비의 뒤쪽을 보고 기겁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나, 난 이만. 다음에 말해줄게! 도망쳐!”
하비와 염소 수염이 따로 나오는 것을 눈여겨 보던 건장한 사내 몇이 따라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알파였다. 게다가 음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는데, 그들은 술집에서부터 하비의 페로몬 향을 맡고 몸을 취하기 위해 작정했다.
“윽…!”
세 알파 전부 얼굴은 붉고 술 냄새가 지독히 났다. 역한 술냄새와 따갑게 찔러오는 페로몬 때문에 하비는 구역질이 났다. 생각해 보면 같은 알파인 자신이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눌리는 것이 이상한 일인데, 워낙 정신이 없어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하비는 우선 손으로 입을 틀어 막고 강압적으로 굴복시키려는 페로몬에 저항했다. 남자들은 감탄한 듯 자기들끼리 시선 교환을 했다. 그들 중 하나가 만족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호오. 알파 셋의 페로몬을 감당하는 오메가라니? 우성 오메가인가? 땡 잡았네.”
그제야 하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오메가라고? 내가?’
항상 거친 관계가 끝나고 나면 빅터는 다시 알파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일부러 더 괴롭게 하려는 수작임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평소에는 원래대로 생활할 수 있게 한 건 사실이었다.
하비는 빅터의 당부가 떠올랐다. 편지까지 두고 가서 꼭 시간 날때마다 자주 뿌리라던 것이 이제야 이해갔다.
‘설마, 향수를 뿌리라고 한 게 이런 이유였어?’
하비가 분한 듯 이를 뿌득 갈았다. 빅터는 아예 자신을 오메가로 만들 속셈이었다. 그 어떤 요구에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건 다르다.
‘어쩐지 계속 뱃속이 묘하게 욱신거리더니…….’
하비는 굳은 얼굴로 항시 가지고 다니는 브로드 소드를 꺼내들었다. 어쨌든 눈 앞의 것들부터 치워야 한다. 이번 일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하비가 쥔 것의 넓은 날이 밤길 속에서 작게 번뜩였다. 반대편 알파들도 단검을 꺼내드는 것이 보였다. 하비가 자세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면 자비는 베풀어 주마.”
사교 소드 클럽에서도 하비의 솜씨는 모두가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일반 휴대용 단검을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비가 검을 잘 다룬다고 해서 한 번도 함부로 휘두른 적은 없었다. 지금도 저 알파 무리가 조용히 지나간다면 굳이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이러한 하비의 배려에도 술 취한 알파들은 이미 호승심이 극에 달해서 그의 선처를 몰라주었다.
“하! 자비? 자비는 우리가 너한테 베풀어야 할 것 같은데?”
알파 하나가 비죽하게 웃더니 단검을 들고 덤벼들었다. 하비는 빠르게 허리를 옆으로 틀고 칼날을 피한 뒤 검을 든 손을 내리쳤다.
“악!”
외마디 소리와 함께 그 알파가 단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동시에 다른 알파가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하비는 꺼내든 브로드 소드를 쓰지 않고 그저 검손잡이로 남자의 배를 가격할 뿐이었다.
하비가 두 남자를 상대하고 있을 때 남은 알파 하나가 슬금슬금 하비의 뒤로 다가서고 있었다. 미처 못 본 하비가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그가 달려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하비의 뒤를 공격하려는 남자의 팔을 낚아챘다. 엄청난 힘인건지 그가 벗어나려 발버둥치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하비가 흠칫 놀라 모습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알파를 보았다. 익숙한 페로몬 향이었다. 세 알파를 한 번에 제압하는, 강렬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좀 지켜보려고 했더니, 재미없어서 안되겠어.”
“좀 지켜보려고 했더니, 재미없어서 안되겠어.”
어둠 속에서 나타난 빅터가 남자의 팔을 홱 던졌다.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남자는 벌써 빅터에게 잡힌 곳에 핏빛 멍울이 들어 있었다.
“으악! 악!”
빅터는 시끄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장검을 들어 남자의 가슴에 꽂아넣었다.
“컥!”
단 한 번의 칼질이었다. 남자의 가슴에서 피가 후두둑 사방으로 튀었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도 났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가 스르륵 감겼다.
빅터가 쉬지 않고 팔을 움직여 다른 알파의 목에 검을 꽂았다. 그의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더니 그대로 눈에서 생기를 잃었다. 빅터가 목에 박힌 검을 채 빼기도 전에 혼자 남은 알파가 반쯤 미쳐서 소리질렀다.
“흐, 흐으으…! 악마다! 악마야!”
빅터는 도망가는 자의 등에 단검을 던졌다. 마치 다트라도 맞추듯 여유로운 손목 스냅이었다.
푹!
정확하게 등 한가운데를 꽂힌 남자가 털퍽 쓰러졌다. 바닥에 엎어진 그의 얼굴에도 서서히 피웅덩이가 번졌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했다.
하비는 이 모든 과정을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빅터가 천천히 하비에게 다가왔다. 금발이 온통 피에 절어서 붉었다. 입술과 눈가까지 핏자국이 튀었다. 하비가 마른침을 삼켰다.
‘맙소사.’
마지막 알파의 단말마처럼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 같았다. 빅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등에 꽂힌 단검을 회수했다. 버리고 가도 되지만 괜히 현장에 증거를 남겨둬서 좋을 것은 없었다. 뭐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만 한창 인기를 얻어 좋을 때에 굳이 이미지를 깎을 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
빅터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이 평소와 다름 없이 말을 걸었다. 그리 격하게 움직였는데도 땀 한방울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뿌리라고 한 건 제대로 뿌린 건가? 벌써부터 벌레가 꼬이는 걸 보니 시킨대로 안 한 것 같은데.”
하비는 기가 막힌 얼굴로 응수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인 현장에서 말이다.
“경은 방금 사람을 죽였어.”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검에 묻은 피를 길게 털어냈다. 누군가를 죽인 것이 아니라 먹음직스러운 고기라도 썬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었다.
“정당 방위야. 죽이려고 덤비는데 가만히 서서 찔려주기라도 하란 건가?”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내 선에서 잘 처리할 수 있었어. 그냥 날 덮친 거였다고. 더욱이 경을 공격한 것도 아니지 않나.”
듣고 있던 빅터가 차갑게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냥 덮치려 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여서 오히려 하비가 어리둥절했다.
“스터스 경은 아무에게나 다리를 벌리는 걸 좋아하는 거였나?”
“입조심해. 듣는 귀가 있어.”
하비가 빅터의 천박한 말에 질색하면서도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런 곳에서 함부로 이름을 언급하면 곤란했다. 그러나 빅터는 그의 당황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그 몸을 건드릴라치면 검으로 배때기를 쑤시고 싶다는 얼굴을 하면서.”
빅터는 피 묻은 칼등으로 하비의 후드를 천천히 넘겼다.
푹 뒤집어쓴 모자 아래로 조금씩 하비의 얼굴이 드러났다. 높고 곧은 코 옆으로 이어지는 하얗고 마른 뺨, 그 위로 이어진 볼록한 귓볼이 보일락말락 할 때 빅터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다른 놈들은 ‘그냥 좀 덮치려 했다’는 선에서 끝나는 건가?”
하비가 얼른 빅터의 손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후드가 벗겨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빅터는 잡힌 손목을 눈을 내려 보더니 묘한 얼굴로 잡힌 손을 순순히 내렸다. 그리곤 아무 말없이 단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손을 놓아준 하비도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이상해진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아무튼 자세한 대화는 여기선 곤란해. 장소를 옮기지. 시체는…….”
난감해 하는 하비를 두고 빅터가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그러자 어두운 골목에서 남자 두 사람이 빠른 속도로, 아주 은밀하게 다가왔다.
그들이 접근한 건지도 몰랐던 하비가 움찔하며 뒤돌아 보았다. 건장한 체격의 알파 하나와 베타 하나였다. 앞머리를 길게 기른 음침한 분위기에 둘 다 생긴 것도 거의 비슷한 걸 보니 형제로 보였다.
빅터가 익숙한 듯 그들에게 명령했다.
“치워둬. 뒤처리는 확실히.”
두 남자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알겠습니다.”
“처리하겠습니다.”
생긴 것만큼 쌍둥이처럼 말한 두 남자가 신속하게 시체를 처리했다. 어둡고 더러운 뒷골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처럼 조용해졌다. 간혹 시끄러운 술주정 소리와 술병 깨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작은 비명 소리만 들렸다. 악취도 보통이 아니었다.
하비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악취를 피하려 손으로 코를 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러 번 와서 많이 익숙해졌다.
그런 하비를 빅터가 의외라는 눈길로 보았다.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빅터는 그에게 가볍게 말했다.
“명문가의 가주라는 사람이, 어떻게 혼자 다닐 수 있지? 이런 곳에서.”
빅터의 물음을 무시한 하비가 음침한 분위기의 두 남자가 사라진 곳을 흘끗 보더니 되물었다.
“날 쫓아오기라도 한 건가? 저들을 시켜서?”
가소롭다는 듯 빅터가 냉소했다.
“날 쫓아온 건 그 쪽 같은데. 내가 먼저 왔거든.”
하비는 눈썹을 구기고 저도 모르게 아직도 떠들썩한 여관을 뒤돌아 보였다. 빅터가 이런 곳을 드나들 줄은 몰랐다.
“여길? 무슨 볼 일로?”
“그럼 스터스 경은 무슨 볼 일로 어울리지도 않는 이 곳에 온 거지?”
어울리지 않는 곳. 빅터의 지적에 하비가 후드로 가린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피가 고인 바닥에 벌써 벌레와 쥐가 꼬이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여긴 언제 봐도 여전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가장 더러운 욕구가 이곳에서는 당연하다.
하지만 가장 추악한 장면들은 그토록 고결한 척하는 귀족 사회에서 나온다. 이를 알면서도 방관하고, 애써 귀족의 품위와 명예를 지키려는 자신을 자조적으로 비웃으며 하비가 말했다.
“여긴 자주 와본 곳이야. 그리고 내 볼 일을 바르뎀 경에게 일일이 보고할 의무는 없지.”
하비의 반박에 빅터의 입매에 조소가 어렸다.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되고. 아까도 과잉 진압한 거였어. 내가 처리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더 이야기하려던 하비는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기서 빅터와 왈가왈부해봐야 이제 의미가 없어진 일이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마침 장본인이 나타났으니 아주 잘 되었다.
“그런데, 날 영원히 오메가로 만들 셈인가?”
빅터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휘었다.
“음? 벌써 알아챘나.”
두 사람은 어둑한 뒷골목 밤거리를 걸었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걷던 하비에게 빅터가 즐거운 듯 말했다.
“스터스 가의 가주를 임신시킬 수 있다면 내게도 영광이지. 되면 좋고, 안되어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고.”
하비는 넉넉한 후드 모자 아래로 분함을 감추었다. 하지만 터질 것처럼 꽉 쥔 주먹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알파인 자신이 임신이라니. 끔찍한 소리였다. 그것도 빅터 바르뎀에게 다리를 벌리고 얻은 씨로?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하비는 스터스 가를 이을 방법을 걱정하긴 했지만 이런 추잡한 방법으로 얻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가문을 더럽히려는 자의 씨를 받아서 가문을 잇다니? 말도 안 된다.
참고, 또 참았던 것이 터지고 내부의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그토록 인내했던 것들이 지금와서는 부질 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부당한 대우를 왜 참아야 한단 말인가? 한 인간으로서, 귀족으로서 부당한 폭력에 무력히 휘둘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비는 울분을 담아 나직하게 말했다.
“나를 짓밟는 게 그렇게……. 그렇게 재미있는 건가.”
빅터가 하비의 떨리는 주먹을 흘끔 보았다. 뭔가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하비의 목소리도 억눌려 낮게 짓씹어져 나왔다.
“내가, 하나하나 무너지는 게 그리도 즐거운 거냐고.”
드디어, 하비 스터스의 철벽같은 방패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빅터는 잔인하게 웃었다. 역시 한 점 한 점 살을 발라내니 그의 고고한 자존심도 이제 황량하게 뼈만 남았다.
“그러려고 이 수고를 들이고 있는 건데. 지금 와서 억울해?”
하비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억울했다. 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고통받아야 하는지, 몸이 강제로 개조당하는 끔찍함마저 감내해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세뇌당하다시피 그의 뇌리에 박힌 사명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라힌 스터스는 죽는 그 날까지 스터스 가의 존속을 걱정하고, 또 염려했다.
그러니 라힌 스터스의 유지를 받은 하나뿐인 자식의 도리로서, 하비는 최대한 조용히, 빅터의 발치에 엎드려서 이 고난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지나가고 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비록 지금 힘들어도 다음이 오면, 모든 게 끝나기만 하면, 이 굴욕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틀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하비는 그토록 원하던 끝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함마저 들었다.
고민하던 하비는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했다. 온 몸이 부서질지라도 부딪쳐 하나라도 얻어내야 이 꽉 막힌 길목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질척대는 뒷골목 시궁창 위로 발을 디디며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물이 튀어 그의 발목까지 적셨다.
“그 사람은 어디 있지? 스터스 가의 부정을 기록된 증거를 가지고 있던 사람.”
빅터가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러나 시치미를 뚝 떼며 다시 걸었다.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군.”
빅터의 발도 더러운 웅덩이에서 떨어지면서 뚝뚝 물을 흘렸다. 그 흔적 위로 하비의 걸음이 새로 새겨졌다.
“모르는 척 하지마. 내 아버지가 시의원이시던 시절, 재무 담당 회계사가 있었잖아. 분명 그 자에게서 정보를 빼낸 걸테고. 그 사람, 지금 어디있지?”
그제야 이해간다는 듯 빅터가 한껏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우리 스터스 경께서는 그깟 놈을 찾으려고 이 더러운 곳까지 직접 행차하신 건가.”
“그 사람 어디 있냐고.”
하비는 빅터가 비아냥거리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제 할 말만 반복했다. 그러자 빅터도 진심으로 상대해 주기로 한 듯 웃음을 지웠다. 그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살벌한 말을 뱉었다.
“글쎄? 지금쯤 바다 아래 상어밥이 되어 있지 않을까.”
역시. 하비가 이를 갈았다. 빅터가 빼낸 자료는 그 자에게 있었고, 이미 손을 다 써두었다. 게다가 빅터가 그를 ‘처리’했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방금도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걸 봐서도 빅터의 방식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후환을 두느니 없애는 사람이라는 것을.
하비의 입술이 무겁게 달싹였다. 후드 아래 드러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죽였나?”
빅터는 금방 말을 꺼내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하비를 보고만 있었다. 그의 녹색 눈에 비스듬히 경멸이 스며 있었다. 하비는 의아했다. 무엇에 대한?
툭, 투둑.
먹구름이 껴도 원래 어두워 알아볼 수도 없었던 밤하늘에서 비가 한두 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비의 후드 위로도 빗방울이 떨어져 적시기 시작했다.
그 날도 같았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서 라힌 스터스의 엄숙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라힌 스터스는 백색의 아름다운 저택을 등지고 근처 커다란 성당 아래 지하묘지에 묻혔다. 성당이나 교회의 지하묘지는 성스럽거나 명예로운 자만 묻는 귀한 죽음의 공간이었다.
그 회계사는 라힌 스터스 경의 장례식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아들인 하비와도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하비는 그를 똑똑히 기억했다. 오랫동안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성당 앞에서, 시의원 아래에서 재정을 보좌하던 그는 하비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차가운 손으로 슬픔조차 표현 못하고 묵묵히 서 있는 젊은 가주의 손을 꼭 잡았다.
하비의 뒤에 서 있던 사용인이 제 키보다 큰 하비를 위해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가 들고 있는 크고 검은 우산이 하비를 가려주었다.
타다다닥!
비에 푹 젖어 우산 하나 제대로 쓰고 있지 않았던 그 자가 한 말은, 단 한 마디였다. 하비가 끼고 있는 검은 장갑 위로 그의 맨손이 포개졌다.
[죄송합니다.]
하비는 차마 뭐가 죄송한 거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완전히 잊었다.
쏴아아아!
어느 덧 비는 거세게 굵어졌다. 후드도 소용 없을 정도로 빗줄기는 세찼다. 빅터도, 후드를 쓴 하비도 그 비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빅터의 황금빛 머리칼도, 그가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도 전부 젖었다. 그들의 몸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 바닥의 더러운 웅덩이로 고여 한데 섞였다.
귀조차 따가운 빗줄기 속에서 빅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한 색채의 검이 되어 하비에게 박혔다.
“그 놈의 행방을 알고 싶나?”
그 색은 선명한 핏빛이었다. 하비의 밤색 눈이 증오로 일그러졌다. 이를 똑똑히 확인한 빅터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하비와 마찬가지로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빅터는 하비의 팔을 끌어당겨 그대로 골목의 어두운 길목으로 들어갔다.
쿵!
하비는 강제로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엄청난 힘이었다. 게다가 빅터가 나타날 때부터 온 몸이 저릿거릴 정도로 흥분하고 있어서 평소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강력한 알파의 페로몬 향에 저며진 하비의 페니스는 벌써 팽팽하게 발기했다.
빅터도 마찬가지였다. 하비를 본 이후부터 그에게서 나오는 오메가의 페로몬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흥분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에 이토록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적은 그다지 없었는데.
빅터의 아래를 내려 본 하비가 흠칫했다. 뚫을 것처럼 불룩한 빅터의 중심을 본 그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빅터의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빅터는 하비의 후드를 단번에 벗겼다. 드러난 하비의 얼굴은 두려움 대신 분노가 넘실대고 있었다. 덩치 큰 사자가 위협하듯 하비는 갈색 눈썹을 안으로 좁게 모은 채 빅터를 노려보았다.
두껍고 흉터 많은 큰 손이 떨리는 밤색 눈 주변을 어루만졌다. 빗줄기가 워낙 굵어 하비는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눈두덩이 위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알고 싶으면…….”
하비의 눈가에 고인 빗물을 닦아내려는 듯 어루만지던 빅터가 얼굴 째로 하비를 내리찍었다.
찰팍!
하비는 질척한 물웅덩이로 강제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바로 눈 앞에 빅터의 흥분한 페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축축한 물이 하비의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로 스며들었다. 빅터의 페로몬에 흥분해서 나온 애액이었다.
“내 걸 잘 빨아보든지.”
빅터가 냉막한 얼굴로 지루한 듯 말했다.
“그럼 어디에 시체를 버렸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 작은 전환점 --
“그럼 어디에 시체를 버렸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비는 무릎에 축축하게 젖어드는 빗물을 아랑곳 않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차가운 빗속에서 뺨에 닿는 빅터의 것은 바지 위일지라도 너무 뜨거웠다. 저절로 하비의 단정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여기서 이딴 걸 입에 물라고?”
비가 오고 있어서 그런지, 좁은 골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심지어 불결함까지 가미된 장소에서 적나라하게 얼굴을 드러낸 채로 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방금 덩치 큰 쥐 한 마리가 하비의 구두 위를 밟고 지나갔다.
하비는 자신이 이 곳을 들락거린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그다지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자의 행방이 내 처지와 맞바꿀 수 있나?’
외교관답게 하비는 머릿속으로 익숙한 저울재기를 했다. 빅터가 그를 정말로 죽였을 경우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경우,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쪽을 생각해도 역시 답은 하나였다.
빅터가 검지로 고민하는 하비의 반대편 뺨을 툭툭 쳤다.
“이를 세웠다간 여기서 박아달란 의미로 알겠어.”
“아직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하비가 단정짓지 말라며 이를 드러냈지만, 빅터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할 거잖아? 고결한 스터스 가의 사람이니까.”
“무슨 의미지?”
“시체의 행방이라도 알면 그 놈의 가족들에게 돌려줄 수 있잖아. 장례라도 제대로 치르게 할 수 있고. 스터스 가는 그런 물거품 같은 가치에 목을 매는 곳 아니었나.”
빈정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하비는 빅터의 의도를 알면서도 묘하게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하비는 빅터가 벗겨놓은 후드를 다시 뒤집어 썼다.
크게 심호흡을 한 하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단단히 발기한 빅터의 페니스를 꺼내들었다. 여기까지 하는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빅터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하비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끔찍한 것을 보듯 하던 하비의 시선은 후드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빅터가 하비의 결심을 끊임없이 뒤흔들었다.
“싫으면 하지마. 대신 네가 원하는 정보는 결코 얻을 수 없겠지만.”
빅터도 여태껏 이렇게까지 힘든 행위를 시킨 적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중심부를 빠는 짓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이건 귀족에게는 최악의 형벌이나 다름 없었다.
‘정말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비의 마음 속으로 수천가지 의문이 피었다가 졌다. 천근만근 무거운 손으로 하비는 머뭇대며 천천히 얼굴을 뜨겁고 거대한 페니스 가까이로 가져다 댔다.
빅터가 차가운 눈으로 이를 내려보며 혀를 찼다. 자꾸만 머릿속을 파고드는 따가운 빗줄기도 신경을 긁었다. 분명 원하던 상황인데, 이상하게 빅터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더럽게 느리네.”
흠칫하던 하비가 용기내어 혀를 내밀었다. 뜨거운 혀가 빅터의 거대한 페니스 위로 닿았다. 빗물이 페니스의 경사를 타고 흘려내려 하비의 입 속으로 함께 밀려들었다. 짭짤한 맛이었다.
끝부분만 들어갔을 뿐인데 벌써 버거웠다. 알파의 것을 물었다고 하비의 뒷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이 흥건하게 나왔다. 오메가 페로몬도 더욱 강렬해졌다.
“젠장…….”
못 참겠다는 듯 빅터가 하비의 후드 끝부분을 너른 손바닥으로 감쌌다. 하비는 꼼짝없이 그가 흥분한 상태로 페니스를 입 속에 처박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참해도 이렇게 비참해질 수는 없었다.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하비가 후드 안에서 눈동자를 올렸다. 그런데 빅터의 손이 하비의 머리를 거칠게 밀어냈다.
바지춤을 정리하며 옷매무새를 다듬은 빅터가 멍하게 보는 하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누가 오고 있어.”
갑자기? 하비가 깜짝 놀라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하비의 구두를 밟고 지나간 것 같은 커다란 쥐새끼 한 마리만 찍찍대며 뛰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빅터는 정말로 그 뒤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뒷골목을 빠져나갔다. 비를 맞으며 성큼성큼 걷는 빅터는 못마땅한 얼굴로 주먹을 터질 듯이 쥐고 있었다. 누군가 오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빅터는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더 모질게 못 한 거지? 노예보다 못한 처지라는 걸 똑똑하게 각인시켜줄 기회였는데. 빅터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하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옥같은 나날 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렸던 밤색 눈동자가, 그 단단하면서도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자신의 것을 잡고 애처롭게 떨리는 것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차라리 평소처럼 더 독하게 굴었으면 아무 생각이 안 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때였다. 말없이 걷던 하비의 얼굴에 희미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번쩍!
“윽…….”
섬광이 터지듯 백색 자연광이 하늘 전체로 넓게 퍼져나갔다. 번개가 치고 있었다. 하얀 나뭇가지가 펼쳐지듯 어두운 밤 하늘에 가닥가닥 하얀 선들이 생겨났다.
후드에 가려진 하비의 얼굴에도 하얗고 창백한 빛이 어렸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가 배를 움켜쥐었다. 뱃속이 뭔가 이상했다. 장기가 온통 타는 듯이 뜨겁고, 격렬한 통증이 올라왔다.
쿠르릉!
곧이어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천둥이 길게 울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빅터가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허리를 숙이고 배를 움켜쥔 하비를 보고는 뛰어갔다.
“무슨 일이지?”
억지로 참고 있지만 하비에게서 신음소리가 낮게 터져나왔다. 심상치 않아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증오스러운 존재지만 이렇게 빨리 이상이 생기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의사를 불러야겠군.’
어두워진 낯빛으로 의사를 부를 생각을 하던 빅터는 자신의 팔을 불쑥 잡는 손길에 아래를 보았다.
“……줘.”
웅얼거리며 하비가 강한 힘으로 그의 팔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악력이 엄청났다. 휘청대는 몸을 겨우 가누면서 하비는 끊어질 듯 말 듯 말했다. 후드 아래 얼굴이 귀신처럼 창백했다.
“이제 한계야……. 원래대로 되돌리는 그 약, 빨리 내놔. 한계라고, 제발….”
애원 하던 하비가 스르륵 머리를 아래로 떨구었다. 놀란 빅터는 큰 체구의 하비가 얼결에 붙들어 잡았다. 하비의 두 팔이 길게 늘어지고 시체처럼 덜렁댔다.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잠시 의식을 잃었다.
‘일이 귀찮게 되었어.’
빅터는 축 늘어진 하비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보았다. 어두운 골목 쪽에서 아까 그 두 남자가 나타났지만 빅터는 손을 휘저어 그들을 물리쳤다. 묘한 고집이 생겼다.
“내가 하지. 너흰 마차나 가져와.”
빅터는 장신에 체격 좋은 하비를 아무렇지 않게 등에 들쳐업고 도착한 마차 안으로 구겨넣었다. 마차는 성인 남자가 길게 누워도 충분한 공간이 있을 정도로 커서 하비를 눕혔다.
시체를 처리한 알파 쪽 남자가 마부 역할을 했는데, 그는 말을 모는 내내 콧잔등을 찡그렸다. 마차 안에서 전해오는 하비의 페로몬 향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참으려 했지만 너무 자극적이라 계속 발기 상태였다. 결국 그가 자신의 주인인 빅터에게 요청했다.
“주인님. 그 분에게 향수를 좀 뿌려 주십시오.”
“왜?”
“페로몬이 좀 독합니다.”
빅터가 피식 웃고는 알파 숫사슴의 페로몬으로 만든 향수를 기절한 하비에게 뿌려 주었다. 그제야 알파 마부는 안정된 채 말을 몰 수 있었다. 그 정도로 하비의 오메가 페로몬은 강렬했다. 아까 전 알파 세 놈들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죽은 듯 누워 있는 하비를 보았다. 너른 어깨, 굵은 목 위로 빗물에 잔뜩 젖은 밤색 머리카락이 짙게 하얀 얼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엉덩이 몇 번 내줬다고 벌써 이렇게 되다니.’
집으로 도착해 빗물과 더러운 뒷골목 웅덩이로 푹 절은 하비를 씻긴 것도 빅터였다. 사용인을 시켜도 됐는데 굳이 본인이 하겠다고 나섰다. 이유는 한가지였다. 그저 다른 사람이 하비를 만지는 것이 찜찜해서였다. 저 큰 덩치를 혼자 못 씻긴다며 사용인들이 잔소리를 했지만 빅터는 꿋꿋했다.
“내가 할테니 손도 까딱할 생각마.”
“아주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끼고 도시네요.”
“그래 보이나?”
“아무렴요. 성질 더러운 주인님이 이토록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만.”
애지중지라는 단어에 빅터가 미간을 구겼다. 말도 안 된다.
“헛소리.”
빅터가 비아냥대는 사용인 몇 명에게 코웃음을 쳤다. 이 집 사용인들은 빅터가 해상 무역을 휘어잡던 시절 이전부터 함께 해온 사람들이라 빅터와 크게 격의가 없었다. 그만큼 허물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빅터가 하비에게 가진 증오나 경멸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빅터의 행동을 더더욱 이해 못 했다. 그 스터스 가의 사람에게 얼마나 기만 당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측근들이었기에.
“뭐, 맘대로 하십쇼. 나중에 뭐라하진 마시고.”
빅터의 사용인들은 입을 삐죽대며 하비를 노려보고 떠났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높은 신분의 귀족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빅터의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의사는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하고 누워 있는 하비를 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자초지종을 들은 의사는 놀람을 금치 못하며 빅터에게 폭풍같은 잔소리를 했다.
“그런 불결하고 더러운 곳에서 일을 치시다니! 정말 큰일날 일입니다. 스터스 경 체내에 안좋은 균이라도 들어갔으면 어쩔 뻔 했겠냔 말입니다.”
고급스러운 목가풍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빅터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귀를 후볐다. 벌써 몇 번째 잔소리인지 모르겠다. 스터스 가에게 큰 선망과 호의를 가지고 있는 의사이기에 대충 이해는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죽을 선을 간당간당 하고 있는 꼴이 보기 좋지 않았다.
의사는 호들갑을 떨며 두어 번 같은 소리를 반복하다 느긋하게 떨어진 빅터의 말에 얼어붙었다.
“목청이 이리도 큰 줄 몰랐군. 이왕이면 스터스 경의 몸을 변하게 만든 신약을 만든 게 나라는 소리도 크게 떠들고 다니지 그래?”
빅터는 여유를 가장해서 말하고는 있지만 그 속에 날카로운 칼날이 있었다. 대번에 알아들은 의사는 목 뒤가 선뜩했다. 의사가 얼른 빅터의 앞에서 고개를 짧게 숙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더 깊이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빅터가 양 손에 깍지를 낀 채 앞으로 상체를 숙여 몸을 내밀었다. 위험스런 웃음을 얼굴에 걸고서 빅터는 의사를 아무렇지 않게 협박했다.
“번번이 잊고 있는 모양인데. 네 놈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게 나라고. 함부로 떠들지마.”
의사는 팽팽한 살기에 숨도 못 쉬고 빅터의 눈치만 살폈다. 영락없는 고풍스러운 귀족의 모습을 하고, 빅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더러운 수법도 곧잘 썼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의사가 침대에 길게 누워 있는 하비의 단정한 얼굴을 안타까운 듯 흘끗 눈을 굴려 보았다. 하필 저런 악질적인 남자에게 걸려서 스터스 가문의 하나뿐인 가주가 아주 고생이었다.
‘내가 만든 약 때문이긴 하지만.’
예의 그 신약 때문에 하비의 몸 상태가 오락가락 하는지라 요즘 그는 진찰 목적으로 자주 호출되고 있었다. 의사는 하비를 보지 않은 척 빅터를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사죄의 말을 올렸다.
“잘 알지요. 주제 넘게 말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이만 가봐.”
빅터는 귀찮은 얼굴로 깍지 낀 손을 풀고 허리를 뒤로 편하게 젖혔다. 황급히 사라지는 의사의 뒷모습을 본체만체 하고 그가 테이블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종이들을 한 손으로 휩쓸 듯이 잡았다.
걷어 올린 굵은 팔에 깊게 새겨진 흉터 몇 개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빅터는 한 손으로 귀를 받치고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종이에 적힌 내용들을 읽었다. 녹색 눈이 진중하게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나갔다. 투자 목록에 대한 보고이자 향후 정세에 대한 예측 보고이기도 했다. 정밀하게 짜여진 보고서는 한 눈으로 봐도 완벽에 가까웠다. 빅터가 보람찬 얼굴로 미소 지었다.
‘누가 키운 놈들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만족스럽게 종이들을 훑던 빅터는 이내 고개를 돌려 하비가 누워 있는 침상을 보았다. 누구보다 건장한 남자인데, 어째 재회한 이후로는 침대에 뻗어 있는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다. 모두 빅터가 시작한 일로 비롯된 것이었지만.
화려한 침대의 헤드에 이국적인 패턴이 여러 겹 겹쳐서 새겨져 있었다. 침대가 품고 있는 남자는 이질적인 풍경에서 더욱 기품 있어 보였다.
순간 빅터는 잊고 있던 것이 불쑥 떠올라 의사가 사라진 방향을 무심코 보았다.
‘신약의 부작용이 어디까지인지, 그걸 안 물어봤군.’
빅터가 의사를 다시 불러오려다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의사도 잘 모른다고 한 것이 생각나서였다. 여러 사람을 상대로 먼저 안전성 검사도 해봐야 하는데 검증되기도 전에 먹여 버렸으니, 어떤 부작용이 나와도 할 말이 없었다.
빅터는 곤히 눈을 감고 있는 하비의 정갈한 모습을 눈으로 훑어내렸다. 흐트러진 긴 밤색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서 이마를 덮고 있었다.
몸은 대충 닦았지만 머리칼까지는 전부 말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빅터가 워낙 힘이 좋은 편이라 체격이 180을 훌쩍 넘는 장신의 남자를 씻고 닦는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빅터는 사용인들의 불만이 떠올랐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했나 의문이 들긴 했다.
얇고 들러붙는 와인색 속옷 아래 야외 활동과 검으로 단련된 근육이 모양새를 드러냈다. 슬리스라는 재질로 만든 고급스러운 실내복이 아주 안성맞춤으로 꼭 맞았다. 저렇게 보니 창백한 얼굴은 둘째치고 건장하기 그지 없어서, 금방 죽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만약 죽더라도 그건 하비 스터스의 운명일 것이라 편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원래의 빅터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 하비의 죽음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빅터의 가슴에 묵직한 중압감과 묘한 거북함, 불쾌감이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그건 안되지. 하비 스터스는 꼭 살아있어야 해. 그래야 내 복수가 완성되니까.’
아직 하비 스터스는 밑바닥을 보지 못했다. 진정한 바닥이 무엇인지, 고귀한 도련님으로 평생 자라온 그가 알 리 없었다.
빅터는 하비를 처음 만났던 날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당연했다. 그 짧고 강렬한 과거의 조각은 빅터를 지금껏 지탱해준 집요한 끈이었으니까.
한 귀족이 연 자선 사업회에서 어린 하비는 몹시도 그 곳과 어울리는 정갈하고 우아한 차림새로 인형처럼 서 있었다. 빅터에겐 지금도 그의 모습을 하나 놓치지 않고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했다.
웃고 떠드는 귀족들의 하이톤의 목소리들이 유령처럼 연회장을 떠돌았다. 어린 빅터는 그 웃음소리들이 너무 싫었다. 가식적이고, 음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린 빅터에겐 저 인형처럼 아름다운 밤색 머리의 소년에게서 다른 것이 보였다. 예의 바르고 말끔했지만 묘하게 냉소적인 눈빛이 섞여 있었다.
‘저 녀석도 나랑 비슷한 놈인건가.’
어린 빅터는 직감했다. 저 우아한 귀족 소년도 자신과 다름없이 이 곳을 몹시나 지겨워하고 있다고.
‘하비 스터스라고 했던가.’
어린 빅터는 관심을 가지고 그 밤색 머리 소년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하비를 중심으로 꽃을 둔 꿀벌처럼 빙빙 돌았다. 물론 하비는 그런 빅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못마땅한 얼굴로 다가온 빅터의 할아버지, 레토 바르뎀이 다가와 어린 빅터의 팔을 잡고 질질 끌었다. 구석에 숨어 있던 빅터는 끌려가면서도 계속 힘을 주어 반항했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얼른 가서 높으신 어른들께 인사 드려야지.]
[시, 싫어요!]
[뭐라고?]
어린 빅터가 녹색 눈을 똑바로 치켜뜨며 제 할아버지에게 대들었다. 매번 강압적인 할아버지의 태도가 정말 지긋지긋했다.
[이딴 지루한 곳도 더 이상 끌려다니기 싫다구요. 절 좀 내버려 두세요!]
노한 레토 바르뎀이 반지 낀 손을 휘둘렀다. 맞을 것을 각오한 빅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다. 입이 좀 터지고 피가 나겠지만 차라리 그런 몰골로 연회장을 돌아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빅터가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토 바르뎀의 손을 휘어잡은 다른 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좋은 곳에서 뭐하고 있는 거요. 아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소.]
라힌 스터스 의원이었다. 하비와 똑같은 밤색 머리칼에 밤색 눈을 한 온화한 인상이었다.
레토 바르뎀은 깜짝 놀라 얼른 손을 거두었다. 늙은 몸으로 라힌 스터스 의원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런.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작고 무너진 한 허름한 귀족가를 돈으로 산 빅터의 할아버지는 명예에 집착했다.
언제나 고개가 꼿꼿하던 빅터의 할아버지는 언제나 귀족들에게는 저자세였다. 그 중에서도 스터스 가에게 대하는 태도는 더욱 그랬다. 어린 빅터조차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고개가 땅이 닿도록 숙이는 상대가 스터스 가임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스터스 가는 대대로 하나같이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배출했다. 특별한 교육법이 있는 건지, 유전자의 우월함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입모아 그런 스터스 가문을 칭송했다.
그 칭송이 헛되지 않은 것인지, 라힌 스터스 의원은 명성답게 기품 있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빅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참 착하게 생긴 아이구나. 우리 아들도 너처럼 해맑은 면이 있으면 좋으련만. 가서 맛있는 과자라도 먹고 오렴.]
어린 빅터가 라힌 스터스 의원을 향해 동경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귀족이다. 할아버지처럼 졸부가 된 자가 억지로 귀한 척 발버둥쳐봐야 진짜 귀족에게는 발끝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신이 난 빅터는 라힌 스터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레토 바르뎀이 눈을 부릅뜨고 잽싸게 도망가 버리는 어린 빅터를 노려보았지만 곧바로 그를 붙잡는 라힌 스터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자자. 인사는 충분히 받았지 않습니까.]
빅터의 할아버지, 레토 바르뎀을 말린 라힌 스터스 의원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을 뒤로 하고 어린 빅터는 과자를 한웅큼 집어 우물거리며 자선 회장을 배회했다. 여전히 하비 스터스를 중심에 둔 동선이었다.
빅터는 지루함을 교묘하게 감춘 저 인형같이 차가운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어린아이다운 치기였다.
그가 하비에게 작은 장난을 치기로 결심한 건, 그때였다.
“으음…….”
하비의 낮은 신음소리에 빅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침대를 보자 하비는 벌써 반쯤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 헤드에 허리를 기대고 있었다. 빅터가 눈가를 찌푸렸다.
‘왜 저러는 거지?’
하비는 비정상적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빅터를 멍하게 보고 있었다. 눈빛이 평소와 많이 달랐다. 풀려있는 밤색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뜨거워서 답답해…….”
중얼거린 하비가 이불을 들추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는 빅터가 앉아 있는 테이블까지 얇은 속옷만 입은 채 맨발로 비척비척 걸어왔다.
걸을 때마다 하비의 단단한 허벅지나 다리에 힘줄이 섰다. 오메가가 된 이후 나오는 특유의 페로몬이 방 안 가득 흘러넘쳤다. 그것은 빅터의 우성 알파 페로몬과 섞여서 기묘한 화합을 이루었다.
‘왜 이러지.’
물끄러미 쳐다보는 빅터의 눈빛에 하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지 보기만 했을 뿐인데 이상한 흥분과 고양감이 들었다. 심지어 뒷구멍에서 애액이 고여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몸이 꼬여들었다.
파악!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 하비가 널려있는 종이들을 거칠게 치웠다. 종이가 사방으로 팔랑대며 떨어졌다.
몸이 이상하다고 연신 중얼거린 하비가 테이블 위로 한 팔을 딛고 빅터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거대하고 견고한 탑이 무너지듯 하비의 몸이 빅터에게로 잔뜩 쏠리다가 우뚝 멈췄다.
“…….”
“…….”
고요한 녹색 눈을 하비가 마주보았다. 잔인한 시선이었다. 그게 보기 싫어서, 하비는 반대편 팔을 길게 뻗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이 알파에게는 원망만 가득했다.
이토록 괴로움을 받고 미움 사야 할 일 따윈, 한 적이 없는데.
투두둑!
빅터의 단정한 목 아래 셔츠가 하비의 우악스런 힘에 뜯겨져 나갔다. 하비가 손아귀 힘만으로 빅터의 셔츠를 뜯다 못해 그 위로 걸친 베스트를 잡아당겼다. 현재 그의 행동에는 이성이 한 점도 들어있지 않았다.
흐린 동공으로 바라보는 밤색 눈을 들여다 보면서, 빅터는 눈치 챘다. 하비가 뱉는 숨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설마, 히트가 온 건가.’
효과가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 하지만 빅터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 했다. 하비가 한 팔로 테이블을 짚은 채 그의 상체를 거세게 끌어당겼다. 놀란 빅터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하비의 원망 섞인 저음이 닥쳤다.
“내가 그렇게 미우면……. 그렇게 밉고 싫으면 차라리 죽이면 되잖아.”
빅터는 충분히 힘으로 하비를 떨구어 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건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하비의 밤색 눈이 물결처럼 일그러지고, 입술은 온 힘을 다해 꽉 물고 있었다.
구음을 강요할 때조차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이토록 직설적인 원망과 감정 표출은 하비 스터스와 맞지 않았다. 괜찮은 척 고풍스러운 가면 속에 가려야 그다웠다.
얇은 옷 속에 가려진 하비의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갔다. 묘한 얼굴로, 빅터는 멱살을 잡힌 채 묵묵히 이어지는 하비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 재무 회계사처럼.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게 너한테 제일 쉬운데. 나한텐 왜 안 하지?”
하비가 문득 일그러진 얼굴로 피식거렸다. 빅터가 한 말들이 생각나서였다.
“아아……. 그랬지. 나는 오래 두고 괴롭힐 생각이니까.”
지금의 하비는 취한 사람처럼 가감없이 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빅터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럼 이게 첫 히트가 되는 건가?’
보통 첫 히트가 오면 빠른 시간 안에 거의 이성을 잃기 마련인데, 하비는 정신력으로 가까스로 버티는 듯 했다.
생각을 끝낸 빅터가 괴로워 보이는 하비를 마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빅터의 녹색 눈이 말갛게 반들거렸다.
“말해두지만, 그 놈은 죽이지 않았어.”
놀란 듯 눈을 치켜뜬 하비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 없다. 빅터 바르뎀이 순순히 큰 증거가 될 사람을 남겨뒀을 리가 없다. 그는 몹시 철두철미한 성미니까. 하비는 생각한 루트를 이야기했다.
“그럼 먼 대륙에 노예로 팔아치웠나?”
“아니.”
“거짓말. 넌 항상 거짓말만 해. 분명 다른 수를 썼겠지.”
겨우 말을 마친 하비는 시야가 핑글핑글 돌았다. 온 몸을 차근차근 잡아먹는 뜨거운 열기가 머릿속까지 잠식했다.
곧 근질거리는 뒷구멍에 뭔가를 박아넣고 싶다는 욕구만이 온통 하비를 집어 삼켰다. 엉덩이가 꿈틀대면서 없는 것을 허전해하며 자꾸만 수축했다. 미끈거리는 액이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여기선 안 돼…….’
이성을 다잡아 보았지만 이미 틀렸다. 헉헉대던 하비의 눈에 초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면서 밑으로 떨어졌다. 하비는 아예 테이블 위로 길게 엎드려 괴로워했다. 뱃속에 뭔가가 생긴 것 같았다. 그 곳에 알파의 것을 쑤시고, 체액을 가득 붓고 싶었다.
“헉……. 허억…….”
하비는 그 생각이 미친 것 같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오로지 정념에만 매달렸다.
빅터는 테이블을 붙들고 괴로워하는 하비에게 상체를 숙였다. 귓가에 빅터의 입술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하비는 끊임없이 움찔거렸다. 발가락이 한꺼번에 곱아들고, 테이블 위를 긁고 있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부들거렸다.
하비의 온 몸에 땀이 나서 젖은 얇은 와인색 속옷이 야하게 보였다. 적당히 나온 전신 근육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빅터는 일부러 하비의 귓가를 입술로 배회하며 속삭였다.
“난 한 번도 경에게 거짓말 한 적 없어.”
익숙하게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빅터가 달아오른 하비의 귀를 살짝 물었다. 하비는 정신을 놓고 부르르 떨었다. 볼륨 있는 단단한 엉덩이 사이에 손가락을 몇 개 넣으니 벌써 홍수처럼 터진 액이 빅터를 반겼다.
“윽…!”
조금 만졌을 뿐인데 하비의 두터운 몸이 크게 떨렸다. 단풍처럼 울긋불긋 열기로 물든 붉은 몸이 점점 빅터를 향해 열렸다.
빅터는 정신 없어 보이는 하비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씁쓸해 보였다.
“만약 했다면 그건 너겠지.”
말과 동시에 두꺼운 손가락을 늘려 고리처럼 만든 빅터가 구멍 속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빅터는 정신 없어 보이는 하비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씁쓸해 보였다.
“만약 했다면 그건 너겠지.”
말과 동시에 두꺼운 손가락을 늘려 고리처럼 만든 빅터가 구멍 속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크읏! 으응……!”
테이블에 얼굴을 박은 하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벌린 입술로 신음을 쏟아냈다. 길게 경련을 일으키던 하비가 꿈틀대며 테이블 앞으로 본능적으로 기다시피 했다.
“어딜 가려고.”
꿈적대는 그 단단하고 긴 손을 빅터가 위에서 찍어누르듯 잡았다. 반대편 손으로는 구멍을 끊임없이 쑤시고 희롱했다. 그럴수록 활짝 열린 하비의 뒷구멍이 벌름거리며 빅터의 손을 물었다.
“흐으…….”
하비의 도톰한 입술 옆으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너무 느껴서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그의 허리에서는 경련이 일고, 두툼한 허벅지에 힘줄이 퍼렇게 돋았다.
쿨쩍! 쩌억!
하비의 구멍에서 나온 애액이 빅터의 손가락이 박힐 때마다 끈적대는 소리를 냈다. 미끌거리다 못해 손이 전부 젖을 정도로 나온 애액 사이로 하비의 페로몬이 진하게 흘러나왔다. 알파를 미치게 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을 빼낸 빅터가 흥분한 페니스를 그의 엉덩이 사이로 비비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누르듯 잡고 있는 손 아래로 하비의 손이 연신 꿈틀댔다.
‘나도 주체가 안 될 정도인데, 다른 놈들은 완전히 맛갔겠어.’
빅터는 만약을 대비해 알파인 사용인들은 전부 아예 집 밖으로 보냈다. 아니었으면 진작 정신줄을 놓은 놈들이 방까지 침범했을 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나마 우성 알파에 혹독한 첫 러트 신고식을 치른 빅터만이 이 엄청난 페로몬 홍수 속에서도 이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때보다야 나을지도.’
해적들 사이에서 잔인한 첫 러트를 치렀던 기억이 빅터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아직도 피비린내가 코끝에서 진동했다.
그 피냄새나는 고통을 잊으려는 듯 빅터가 하비의 안으로 페니스를 강하게 밀어 넣었다. 어서 넣어달라는 것처럼 떨리던 엉덩이 사이로 커질 대로 커진 빅터의 것이 박혀 들었다. 구멍 끝까지 처박혀 속에 있던 애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푹!
동시에 하비의 페니스가 테이블 위에서 왈칵 정액을 쏟아냈다. 한 번에 간 것이다.
“끕…….”
하비가 소리 없이 자지러지며 턱을 번쩍 치켜들었다. 차마 말도 못하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등근육에 힘이 쏠린 탓에 하비의 단단한 허리 위로 굵은 선 몇 개가 융기했다. 옷 위로 굴곡을 이루는 그것을 빅터가 흥분한 눈빛으로 쓸어보았다.
한계까지 몰려 경련을 일으키던 그가 길게 늘어지려 했지만 빅터는 사정 봐주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꽉 얽어매고 빅터가 등 뒤에서 낮게 말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뻗으면 어떡하나.”
녹색 눈동자를 접은 채 천천히 페니스를 뺀 빅터가 다시 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열이 오른 구멍 안으로 질량감도, 무게감도 큰 빅터의 페니스가 꽉꽉 메우듯 들어찼다.
퍽!
뱃가죽이 뚫릴 것 같은 숨막힘에 하비가 젖은 숨을 삼켰다. 뒤에서 시작된 어떤 끔찍한 감각이 온 몸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더 원하게 되는, 너무 느껴서 고통스럽기까지 한 쾌감이었다. 작은 열기가 자글자글 끓어서 거대한 용암이 되어 하비를 집어삼켰다. 사정한지 얼마 안되어 하비의 중심부는 다시 팽팽해졌다.
‘또…….’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드라이 오르가슴이 하비를 휘감았다. 그가 숨도 못 쉬고 두 번째 절정에 달하는 순간, 빅터는 금방 페니스를 뒤로 물렸다.
“흐으읏……!”
구멍 안을 긁으며 나가는 감각에 하비가 비명을 삼키며 빅터에게 잡힌 손을 밀었다. 하지만 빅터가 누르고 있는 힘이 더 강해서 꼼짝도 않았다.
하비의 뒷구멍이 알파의 페니스를 못 나가게 하려는 듯 서둘러 빅터의 것을 조였지만 이미 늦었다.
빅터는 꺼낸 페니스를 하비의 뒷구멍 주변부로 뭉근하게 비볐다.
“더 줬으면 좋겠어?”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하비가 움찔움찔 허리 아래를 떨었다. 빅터가 벗겨놔서 허벅지에 걸쳐진 얇은 속옷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워낙 하비의 허벅지가 부피가 있어서 속바지는 찢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빅터는 하비의 등에 턱을 가볍게 얹고 장난치듯 말했다.
“난 참을 수 있는데. 이걸로 끝낼까?”
아직 부족했다. 이걸로는 안 된다. 하비가 엎드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이성이 배제된 고갯짓이었다. 빅터도 알고 있었지만 더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자 하비는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안 돼. 더……. 부족해…….”
빅터가 하비의 뱉는 애원조의 말투에 미소지었다. 만족스러움을 입술 아래 감추고 빅터는 관대한 알파인 양 하비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좋아. 원하는대로 해주지.”
그 뒤론 말이 없었다. 빅터는 충실하게 몸이 달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오메가를 쑤셔 주었다. 양 손은 하비의 허리를 꽉 붙들고 구멍 안을 때리듯 박았다.
푸욱! 퍽!
하비는 테이블 위로 머리를 박고 미친 듯이 흔들렸다. 땀에 젖은 밤색 머리칼이 테이블에 쓸려 가닥가닥 흩어졌다. 뒤를 흉폭하게 파고드는 알파의 커다란 성기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가 낮은 신음소리를 뱉었다.
“힉! 으응…! 아!, 흣!”
테이블 하단에 하비의 굵은 허벅지가 연신 충돌해 엄청난 충격음을 냈다.
쿵! 쿵! 쾅!
나중에는 부술 것처럼 큰 소리가 났다. 하비의 눈밑으로 땀이 흘러내리고, 날렵하고 단단한 턱에 눈물처럼 맺혔다.
쩍! 쯔억!
봉긋하게 솟은 하비의 엉덩이는 온통 애액으로 번들거려서 빅터의 다리가 닿을 때마다 기묘한 화음을 냈다. 튼튼하고 굵은 다리와 하얀 엉덩이 사이로 하얀 액이 여러 가닥으로 길게 늘어났다가 붙었다.
“윽…!, 으앗……, 헉…!”
하비가 흔들리며 테이블 위를 머리로 마구 쓸었다. 그의 머리가 테이블에 닿은 채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흘러내린 땀이 어지러이 물 흔적을 남겼다. 하비는 이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어서 알파의 정액을 몸 안으로 쏟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본능 밖에 없었다.
“좋아, 더……, 더 해, 박아줘…….”
하비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뻗었다. 그 손을 빅터가 꽉 잡고 뒤로 휙 당겼다. 그 덕에 구멍 안 쪽으로 빅터의 것이 더 깊이 박혀서 하비는 짐승 같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윽!”
얼굴이 허공으로 반쯤 뜨고 하비의 단아한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드러난 얼굴은 붉게 물든데다 미친 듯이 색정적이었다. 밤색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를 비웃으며 빅터는 이제야 하비 스터스의 거짓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빅터는 헐떡이는 그를 침대 쪽으로 끌고 가 던졌다. 그리곤 테이블 아래 서랍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빛바랜 편지를 꺼내들어 왔다.
빅터는 침대에 쓰러져 힘들어 하는 하비를 담담하게 내려보며 답답한 손목의 커프스를 밀어 올렸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기억나?”
하비는 말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은 빅터가 낡은 편지를 둘둘 말아서 그 끝으로 꼿꼿하게 선 하비의 페니스를 긁어 내렸다.
“흐앗……!”
그것만으로도 하비는 허리를 높게 띄웠다. 동시에 그의 엉덩이에서 액이 터져 나오고, 핏줄 가득 선 허벅지에 간신히 걸려있던 바지도 기어이 찢어졌다.
빅터는 그에게서 나오는 엄청난 페로몬에 머리가 어질거릴 지경이었다. 첫 히트라서 더 할지도 모르지만.
‘제기랄…….’
원래 알파였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페로몬은 강렬했다. 알파 숫사슴의 페로몬을 뿌려봐도 별 소용 없을 정도였다. 빅터의 녹색 눈이 길게 늘어났다.
‘약의 부작용이 이런 건가.’
땀으로 너무 젖어서 찰싹 붙은 와인색 속옷 위에 하비의 유륜이 흥분한 채 바짝 솟아 있었다. 너무 자극적이었다.
빅터가 마른침을 삼키며 편지를 우선 이불 위에 올려두었다. 속옷을 뚫을 것처럼 솟아 있는 젖꼭지 위를 빅터가 혀로 핥자 하비가 높은 신음을 뱉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선명한 근육 덩어리로 이루어진 판판한 한 쪽 가슴을 빅터가 손으로 터질 듯 쥐었다.
“너무 야한데. 스터스 경은 이런 몸을 대체 어떻게 참아온 거지? 놀랍군.”
찢어진 속바지를 옆으로 집어던진 빅터가 참을 수 없어 하비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벌름거리는 그 붉은 속살 안으로 다시 제 것을 밀어넣었다.
하비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낮은 교성이 울려퍼졌다. 쉰 목소리까지 빈틈없이 야했다.
이번에도 한 번 깊게 쑤셨을 뿐인데 하비가 부르르 떨더니 사정했다. 빳빳한 그의 성기에서 묽어진 정액이 흐르고, 구멍과 이어진 빅터의 페니스 밑둥에는 애액이 밀려 나왔다.
빅터가 페니스를 더 깊이 쑤셔 넣으며 집어든 편지를 하비의 눈 앞에 펼쳐 보였다. 곳곳에 물에 번진 검은 글씨가 보였다. 수려하고 우아한 필체였다.
그 필체를 보자 쾌감에 절어 거의 정신을 놓은 것 같던 하비의 밤색 눈에 잠시 빛이 돌아왔다.
빅터가 편지를 더 가까이 들이대며 음산하게 말했다.
“이게 스터스 경의 거짓말이지.”
빅터는 다시 만나고 나서 하비에게 몇 번이고 묻고 싶었다. 이 편지는 대체 뭐냐고. 이 빌어먹을 거짓말은 대체 뭐였냐고.
몇 번이나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치명적인 거짓말을 그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그런데 하비가 생리적인 눈물을 눈에 가득 단 채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쓰지 않았어. 너한테 편지 같은 건 쓴 적도 없다고….”
빅터는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또 거짓말을 하는 건가. 분노마저 치밀었다.
“……뭐? 해적 인질 사태 때, 네가 사람들 손에 이런 걸 쥐어 보냈잖아. 우리더러 희망을 가지라고, 네 그 같잖은 한 치 혀로……!”
몇 번이나 다그쳤지만 하비는 쾌감에 떨 뿐 끝까지 그 편지는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일부러 성적으로 더 괴롭히면서 물어봤지만 아니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상하군.’
아무리 첫 히트로 이성이 없는 상태라고는 하나 자신의 필체를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저 상태를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순간 하비의 뒷구멍이 수축해서 빅터의 것을 꽉 쥐어짰다. 빅터가 녹색 눈동자를 찌푸렸다. 편지를 놓칠 정도로 강렬한 절정이었다.
“윽……!”
많이 참았던 만큼 사정은 길었다. 빅터의 손에서 떨어진 편지가 하비의 얼굴로 너울너울 떨어졌다.
“크읏!”
빅터는 하비의 뒷구멍 속으로 정액을 넘치듯 쏟아 부었다. 넓게 벌려진 하비의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지 하비가 편지 아래에서 중얼거렸다. 빅터가 협박으로 몇 번이나 말한 것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녀서였다. 지금 자신은 신약으로 오메가가 되었다고 했다. 이 상태에서 정액을 받으면 어찌될지는 하비도 잘 알고 있었다.
“임신하면……안 돼…….”
그런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고, 아직도 모자랐다.
이불을 움켜쥐면서 하비가 스스로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빅터가 내미는 편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이 고양감을 더 느끼고, 알파의 정액을 더 쥐어짜고 싶었다.
빅터는 물끄러미 그런 하비를 내려보았다. 긴 사정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하비의 히트는 건재했다. 편지가 제 얼굴을 덮은 줄도 모르고 헉헉대고 있는 꼴을 보니 스터스 가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빅터는 비틀어진 입술로 하비를 가린 편지를 주워 들었다.
‘시작은 분명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 날 자선 사업 연회장에서, 어린 빅터가 생각해 낸 장난은 바로 하비 스터스를 주의를 끄는 것이었다. 그 앞을 몇 번이나 지나쳐도 별 반응도 없는 것이 심술이 났다.
어떻게 해야 저 무표정하고 예쁜 인형의 얼굴에 틈이 생길까. 그렇게 생각해 낸 것이 아픈 척 엄살을 부리는 것이었다. 과연 저 귀족 도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놀라서 허둥지둥 거릴까, 아니면 무서워서 도망갈까.
[갑자기 배, 배가 아파……!]
빅터는 우스꽝스럽게 어설픈 흉내를 내며 하비 앞에서 쓰러졌다. 미친 척 광대처럼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린 빅터는 반쯤 발작하는 미치광이로 보였다.
그는 하비가 설마 이런 말도 안되는 연기에 속아 넘어가겠냐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이 어이없고, 어린 마음에 재밌기도 해서 속으로 계속 웃었다.
그 순간 어린 빅터는 보았다. 어떤 것에도 무감각해 보이던 하비가 사색이 되어 달려오는 것을.
어린 하비는 쓰러져 있는 빅터를 살피면서 크게 소리높였다. 인형처럼 예쁜 어린아이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단단한 목소리였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빨리 의사를 불러주세요!]
심지어 하비는 야무지게 작은 손으로 꼬물거리며 빅터를 안아들더니 제 이마를 빅터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빅터는 심장이 멎는다는 게 이런 것임을 그때 알았다.
하비의 이마가 제 것에 닿는 순간, 묘한 향이 느껴졌다. 아직 알파와 오메가, 베타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어린 나이임에도 하비는 특유의 향이 있었다. 귀족들이 뿌리는 향수 냄새인가 생각도 했다.
'기분 좋은 향...'
나름대로의 응급 처치를 끝낸건지 하비는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곤 차마 눈도 뜨지 못하고 꽉 감고 있는 빅터를 작은 두 팔로 감싸안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참아. 이렇게 있으면 체온이 올라갈 테니까.]
빅터는 하비의 순간적인 대처와 의연한 모습에 놀란 것도 있지만, 더 놀란 것이 있었다.
이 차가워 보이는 인형 소년의 가슴은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더군다나 하비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쿵쿵거리는 소릴 보니 자신도 놀랐으면서 쓰러진 빅터부터 챙긴 것이다.
‘이건 뭐지…….’
빅터가 제 가슴 속에도 같이 뛰는 것에 의아해 했다.
쿵, 쿵, 쿵.
힘차게 요동 치는 가슴 속의 무엇이 어린 빅터를 흥분케 했다. 맥박, 심장 박동, 숨소리, 적어도 이런 건 하비와 자신이 다를 바 없었다.
빅터가 움찔거릴수록 하비는 더욱 그를 꽉 껴안았다. 어린 하비는 철통같이 빅터의 곁을 지키며 의사가 올 때까지 절대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하비에게 다칠지도 모른다며 자신이 대신 봐주겠다는 한 귀족 어른의 손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전 괜찮아요. 의사가 오면 보여드릴 겁니다.]
빅터는 하비의 이런 행동들이 인상적이었다. 별 것 아닌데,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장난친 거라는 걸 알텐데 이렇게 진지하게 곁을 지켜주다니.
게다가 그는 스터스 가의 강력한 후계자 아닌가. 사업 몇 개로 졸부 귀족이 된 바르뎀 가와는 시작부터 달랐다. 그런데도 빅터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걸 무서워서 모른 척 하거나 멀찍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하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
하비의 외침을 듣고 달려온 의사는 꾀병인 것을 알고 솔직히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레토 바르뎀을 보고는 눈치 빠르게 어린 빅터를 쉬어야겠다며 내보내 주었다.
[바르뎀 어르신께 혼나기 전에 어서 가거라. 아프다고 해줄게.]
하비는 빅터가 장소를 떠나는 그때까지 걱정어린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 따뜻함이 봄날의 햇살처럼 뚜렷하게 빅터의 기억을 차지했다. 하비의 품 안은 넘치게 아늑하고, 자상했다.
그 이후로 연회장이나 파티 같은 곳에 끌려갈 때마다 하비 스터스는 꼭 보였다. 빅터는 언제부턴가 고약한 바르뎀 경의 나무람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파티에 가면 하비가 있으니까.
물론 하비는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졌기에 빅터는 상관없었다.
더욱이 부모님에게도 심하게 꾸지람을 받았고 다시는 스터스 가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신신당부로 하비에게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스터스 가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된 빅터는, 그래서 해적에게 잡혔을 때에도 굳게 믿었다. 스터스 가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여기서 나가면 그날 꾀병으로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어린 빅터는 거친 해적들이 우글거리는 이 지옥같은 곳에서 금방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자애로운 밤색 머리의 라힌 스터스 의원과 꾀병 부리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 준 소년, 하비 스터스가 해방시켜 줄 것이다.
해방된 인질을 데리러 온 자들이 몰래 쥐어준 하비 스터스의 편지를 받고는 더욱 빅터는 희망에 부풀었다. 간결하고 단정한 글씨체가 하비와 몹시 닮아 있었다. 그 편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간악한 해적들은 당신들의 숭고한 생명을 함부로 앗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고 신이 구해줄 겁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굳은 신념을 가지면 반드시 살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
당시 집에 돈이 없어 빅터와 함께 마지막까지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모두 스터스 가의 도련님을 칭송했다. 역시 스터스 가의 훌륭한 사람이라면서.
그래서 어린 빅터는 스터스 가가 자신을 구해줄 거라 확신했다. 라힌 스터스도 비록 국가의 돈을 해적 같은 테러 단체에게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몰래 사람들을 보내 도와줄 거라는 망상도 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그를 구해주지 않았다. 온전히 혼자 힘으로 해적들 틈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도, 과거의 악몽에서 살아남기 위한 복수를 실현 중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왜 더 엉망이 되는 건지.’
빅터는 여전히 페니스를 구멍에서 빼지 않은 채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자의로 벌린 다리를 한계까지 밀고, 하비의 뒷구멍을 쑤셔 박고, 원하는 대로 정액을 쏟았다.
관계에 여전히 키스는 없었다. 하비는 온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화염 속에 사로잡혀 빅터와 첫 히트 사이클을 보냈다.
모두에게 잔인한 밤이었다.
하비 스터스 경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괴소문이 퍼진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그의 휴가가 너무 길어졌다. 스터스 가에서는 하비가 최근 회담 준비로 인한 과로로 병이 나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요양에만 힘쓰기로 했다며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자 하비 스터스도 제 아버지를 따라 곧 갈 때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귀족 청년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돌았다.
스터스 가문의 사람들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비의 긴 요양으로 스터스 가문에서 뛰어난 인재들만 나온 것은 교차로의 악마와 거래를 한 것 때문이 아니냐는 소문도 다시금 회자되었다. 악마와의 거래로 가문 사람들이 재능을 얻은 대신 수명을 내준 것이라고 말이다. (*교차로의 악마 :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영혼을 가져간다는 악마)
“넌 그걸 믿니?”
“아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커피하우스에 남장을 하고 들어온 평민 여자애 둘이 수다를 떨었다. 귀족 신분인 여자들은 출입이 자유롭지만 평민에 한해서는 제한되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고 똑똑한 이 둘은 남장을 하고 커피하우스를 드나들며 세상 일을 접하곤 했다.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짜 콧수염을 만지면서 밝은 갈색 머리를 한 소녀가 재잘댔다.
“사람들이 그딴 헛소문을 믿는 것도 그럴 만하지. 스터스 가 사람들 수명이 정말로 짧잖아. 안 그래? 라힌 스터스 의원도 아직 창창한 나이에 시름시름 앓다가 금방 돌아가셨고.”
옆에서 자꾸만 떨어지는 가짜 턱수염을 보정하던 빨간 머리 소녀가 대꾸했다.
“얘! 너무 갔다. 그건 해적 사건 직후였잖아. 자진 사퇴까지 하실 정도로 괴로워 하신 일이었어. 분명 그 분 성격에 혼자 다 짊어지시다가 병을 얻으신 거겠지.”
둘의 옆에서 묵묵히 솟아 있던 신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지면 뒤로 금발에 녹색 눈의 이목구비 선명한 미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빅터의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빅터가 물끄러미 보고 있자 시선을 알아챈 빨간 머리 소녀가 흠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빅터의 정체를 알아 본 그녀가 새하얗게 질려 친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헉?”
“의원님이야.”
그들은 빅터가 자신들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 사이로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청년들과 청록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은 긴장한 채 빅터의 눈치를 살폈다. 커피하우스에 있어선 안 될 들켰으니 바로 쫓겨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당당했다. 붉은 머리 소녀가 콧수염을 더 단단히 붙였고, 밝은 갈색 머리 소녀는 샐쭉하게 빅터를 노려보았다.
“좀스럽게 고자질 할 건 아니죠?”
“남장한 게 죄도 아니고. 그럴 거면 애초에 우릴 들여 보내주든가요!”
조용하게 쏘아붙이는 당돌한 그들의 말에 빅터가 웃었다.
“설마. 그런 좀스러운 사내는 아닙니다만, 두 분의 말에 관심이 좀 생겨서 말입니다.”
빅터를 노려본 그녀가 자신의 붉은 머리 친구를 돌아보더니 안심하라며 수신호를 주었다.
“어떤 말이요? 스터스 가문 사람 관련이요?”
빅터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차로의 악마 부분은 별로 관심이 안 가지만, 스터스 가 사람들의 수명이 짧다는 부분에서 호기심이 가는군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모습에 두 소녀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빅터 바르뎀 경은 역시 라이벌인 하비 스터스 경에게 관심이 지대한 모양이었다.
“스터스 가 사람들 모두 일중독에 너무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교육 받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맞아요. 저흰 악마 같은 건 안 믿어요. 그딴 게 어딨어. 다 미신이지.”
똑 부러진 이성적인 대답에 빅터가 의외라는 듯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똑똑한 아가씨들이군. 내 밑으로 들이고 싶을 정돈데.”
“의원님 밑에 들어가면 뭔가 다른가요?”
빅터가 그들에게 더욱 흥미를 가진 순간이었다.좋은 기회라고 덥석 물지 않고 오히려 조건을 역으로 따진다는 건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니까.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빅터는 그런 것에 민감했다. 그의 투자에는 ‘좋은 인재를 보는 안목’도 속했으니까.
“직접 키운 정보꾼들이 좀 있는데, 그들과 함께 일하면 훨씬 많이 배울 겁니다. 다만 바다에서 자란 놈들이라 거칠어서, 그건 감안해야 하고.”
밝은 갈색 머리 소녀와 빨간 머리 소녀가 차례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안이 괜찮아 보이면 수락하고. 생각할 시간을 좀 더 주겠습니다.”
그들은 빅터가 고압적인 귀족 남자의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귀족 대 평민이 아닌 사람 대 사람, 동등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잠시 숙덕대던 두 사람은 빅터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둘도 없는 기회라고 여긴 듯 했다.
“그런 것 따위, 각오했어요.”
“우리 아빠 영업장에서도 날 이길 남자는 아무도 없다구요.”
갈색 머리 소녀의 제법 매서워 보이는 눈빛과 온 몸이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빨간 머리 소녀를 빅터가 유심히 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하우스를 들여온 건 나지만 문턱을 만든 건 이 사회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번 일만 해주면 특별히 허가증도 드리도록 하죠.”
빅터가 직접 만들어 주는 골드 카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과였다. 외국인들을 위해 빅터가 고안한 것으로, 어지간한 귀족조차 받기 힘든 카드였으므로 두 사람의 눈이 반짝거렸다.
“와!”
“그럼 저희야 감사하죠.”
눈에 띄게 좋아하는 둘을 빅터가 흐뭇하게 보았다.
그때 빨간 머리 소녀가 불쑥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서, 의원님은 왜 스터스 가 사람들의 수명에 관심을 갖는 거에요?”
빅터는 다정하게, 하지만 위험스레 녹색 눈을 휘었다. 하얀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빅터가 조용히 일렀다.
“좋은 정보꾼은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왠지 모를 한기가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위험한 냄새가 났다. 본능적으로 직감한 그녀가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빅터는 다시 부드럽게 표정을 바꾸어 달래듯 그녀에게 말했다.
“좀 더 숙고해보고 내일 같은 시각에 이 커피하우스로 오면 됩니다. 부모님께도 잘 말씀 드리고.”
고개를 끄덕인 빨간 머리 소녀가 친구를 데리고 조용히 커피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문을 나서기 전 뒤돌아 빅터를 마주보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밑으로 들어가 정보꾼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빅터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는 피식 웃었다.
“악마나 귀신을 믿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자질이지.”
해적선에서 신을 버린 그 순간부터, 빅터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합리적인 생각,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오고 있다. 신분과 성별은 중요치 않을 때가 언제고 올 것이다. 빅터는 그리 보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 말고, 사람의 생각과 이성의 힘을 믿었다. 그런 빅터라도 하비 스터스의 편지는 도무지 미스테리였다.
‘분명 하비 스터스의 필체였는데 그가 쓰지 않았다고? 그럼 누가 쓴 거지?’
워낙 정신과 경황이 없던 때에 다그쳤던 것이라 제대로 못 봤을 수도 있지만, 그 눈빛은 분명 제대로였다. 하비 스터스는 필체를 정확히 인식했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고, 진솔했다.
잠깐 생각하던 빅터는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교육 받는다던 스터스 가의 특별한 가풍이 생각났다. 수명이 줄어들 정도로 지독한 교육은 대체 어느 정도일지 그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혹독한 교육이라…….’
빅터의 긴 손가락이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그 사이 그를 조용히 보좌하던 음침한 두 쌍둥이 사내 중 하나가 소리없이 다가왔다. 베타인 쪽이었다.
“주인님. 슬슬 시간이 되었습니다.”
“벌써 그리 되었나? 알았다.”
빅터가 오른쪽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복잡한 기계 속에서 두 개의 바늘이 시간을 알리려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숨가쁘게 일정에 쫓기는 게 꼭 하비 스터스를 보는 기분이었다.
빅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기저기 심어놓은 연락책들로부터 들은 것들이 하나하나 떠올라서 였다.
‘고작 한 명이 몸져 누웠다고 징징대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동안 하비 스터스 경이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많은 책임을 져 왔는지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총괄 외교관은 계속 초조해 보이고, 밑에 보좌하던 사람들이 죽어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무능한 놈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시곗바늘을 빅터가 무심하게 보더니 다시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었다.
“시계 장인들과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겠지?”
“예.”
“좋은 조건으로 잘 붙들어놔. 괜찮은 거래처니까. 잠재력도 크고.”
“알겠습니다.”
돌아서려던 빅터가 반대편에 서 있는 또다른 사내에게 물었다. 알파이자 마부 역할을 곧잘 하는 자였다.
“스터스 경의 상태는?”
“아직 의사에게 연락이 없습니다.”
“그런가.”
빅터는 저들끼리 모여 떠들고 있는 한 무리의 귀족 청년들을 가만히 들여 보았다. 이쪽으로 오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빅터가 커피하우스로 들어온 직후 합석을 계속 사양해서 선뜻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빅터가 경멸스러운 눈길을 그들에게 던졌다. 귀족들이란 언제나 그에게 따분하고 하품을 유발하는 존재였다.
‘보고대로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어야 할텐데 말이지.’
하비 스터스만 제외하고 말이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그 남자는 빅터에게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것 외에는 뒤로 털 것도 없었다. 빈틈이 한 점도 없는 무서운 사내였다. 빅터가 부하들에게 경고했다.
“잘 감시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의사를 말하는지 스터스 경을 일컫는지 몰라 그가 어리둥절해 하며 되물었다. 하비라고 말하기엔 그는 지금 병중이었다.
“어느 쪽 말입니까?”
빅터가 당연하지 않냐는 듯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비 스터스.”
눈치껏 주인에게 담뱃불을 붙여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준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스터스 경은 꼼짝없이 누워지내고 있을텐데, 사고 칠 기력이나 있겠습니까?”
빅터는 긴 담뱃대를 잡고 연기를 내뿜었다. 녹색 눈이 길게 늘어지며 차갑게 웃었다.
“넌 스터스 경을 너무 얕잡아 봐. 그러다 큰 코 다칠걸.”
여태 하비로부터 제대로 된 반격 하나 없었는데 제 주인은 뭘 그리 경계하는지 모르겠다. 알파와 베타 쌍둥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그늘 속으로 숨어 들었다. 빅터의 사용인들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그들의 주인이 지나치게 하비를 높게 친다는 점이었다. 하비 스터스도 다른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자인데 말이다.
그러나 빅터의 생각은 여전히 사용인들과 다른 궤를 달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야.’
빅터는 하비가 완전히 의식을 놓기 전 기어이 전 의원의 재무 회계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낸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쾌감에 덜덜 떨면서도 하비는 집요했다. 처음 얼마간은 정말로 정신 못 차리고 오메가의 본능에 충실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그의 밤색 눈동자가 점차 뚜렷해졌다.
[그 사람, 어디 있냐고.]
[어디 있어……. 말해.]
그는 끝까지 재무회계사의 행방을 물었다. 그리고 알아냈다. 오죽하면 빅터가 두손두발 들었을 정도였다.
놀라운 정신력이었다. 하비 스터스가 그저 편하게 살아온 귀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건, 그때였다.
‘뭔가 있어.’
빅터는 찜찜한 마음을 담배로 달랬다. 그의 뚜렷한 입매가 일그러졌다. 입술 사이로 젖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괜히 말해줬나.’
이제와서 하비가 알아낸들 달라질 것은 전혀 없지만.
생각난 김에 빅터는 다른 곳에 들르기에 앞서 하비에게 먼저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시각, 하비의 집은 조용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하비가 최근 혹여 정체를 들킬까 베타인 사용인만 남겨두어서 현재 그의 저택에는 알파나 오메가 형질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알파인 사용인 하나가 그의 저택을 제 집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에 짧은 까만 머리, 파란 눈에 행동이 재빠른 알파 여자였다.
너른 저택 안을 들쑤시고 다니던 그녀는 코를 개처럼 킁킁댔다.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났다. 더욱이 사용인들의 식사 시간도 아니었다.
“이상하네. 방금 그 놈이 자고 있는 걸 확인하고…….”
생각하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입에서 험악한 욕설도 함께 튀어나왔다.
“이 음험한 쥐새끼!”
그녀는 파란 눈을 번뜩이더니 바로 뒤돌아 하비의 침실까지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걸어갔다. 스터스 가의 사용인 하나를 기절시키고 강제로 뺏은 옷을 입고 있어 들키지는 않았다. 손톱을 불안한 듯 깨물며 그녀가 신속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지? 누가 저택에 들어온 건가? 내가 언제 놓친 거지?”
음식 냄새도 하비의 방 근처에서 났다. 심지어 물밑 작업처럼 조용히 분주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이상한데.’
사용인이 몇 없어 돌아다니기는 수월했다. 실제 잠입해 보니, 스터스 가의 겉으로 보이는 으리으리한 모습은 허상이었다. 스터스 가에는 사용인이 몇 없었고, 재력이 형편없었다.
수상한 자가 돌아다니는 경황 중에도, 하비의 침대에는 체격 좋은 밤색 머리칼의 사내가 뒤를 등진 채 곤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건 진짜 하비 스터스가 아니었다.
하비의 침실에는 옆 방과 이어진 숨겨진 비밀 통로와 문이 있었다. 고대부터 귀족의 저택에는 숨겨진 방이나 탈출로들이 많았다.
안색이 많이 안 좋긴 했지만 하비는 멀쩡히 걸어다니고 있었다. 아늑한 비밀 방에서 그가 피곤한 듯 의자에 앉고는 생소한 얼굴의 사내에게 물었다.
“잘 모시고 왔나?”
베타인 사내가 하비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꾸했다.
“네. 분부대로 했습죠.”
“잘했군. 수고비는 나중에 집사가 돌아오면 원하는만큼 가져가. 이건 내 선금이고.”
오크로 만든 책상에 손을 댄 하비가 서랍에서 새끼손톱만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사내에게 던졌다. 솜씨 좋게 보석을 받아든 사내가 재빠르게 문 밖으로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지자마자 하비는 비틀대는 몸을 책상에 가누며 이마를 짚었다. 불같이 뜨거웠다. 빅터에게 하룻밤 내도록 괴롭힘 당했더니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후우…….”
하비는 아래를 내려보았다. 후들거리는 제 허벅지가 우스웠다. 굵고 단단해 보이는 영락없는 알파 사내의 것이었지만, 이것으로 정신이 나간 채 빅터의 허리를 감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짓거리였다.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뱉으며 손으로 열이 오른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쨌든 정보는 얻어 냈고, 시간은 벌었다.
‘바르뎀 경이 날 우습게 봐서 차라리 다행이야.’
하비는 일찍이 스터스 가의 저택에 빅터가 붙여둔 사람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들을 색출해 내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속이는 편이 더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눈을 피해 비슷한 체격에 같은 머리색을 지닌 자를 매수해 하비인 것처럼 눕혀둔 것이었다. 하비의 페로몬을 잔뜩 묻힌 옷을 입혀두어 헷갈릴 여지도 주었다.
앞으로 종종 그 가짜와 바꿔치기하며 빅터가 붙여둔 눈을 속일 작정이었다.
하비가 문득 피식 웃었다.
‘그 놈이 준 향수를 이럴 때 써먹다니.’
하비는 빅터가 준 알파 수사슴의 향수를 온 몸에 뿌린 채 비밀스러운 옆 방에 있었다.
그는 곧 슬픈 눈으로 간신히 되찾아 온 남자를 훑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조심스럽게 데려 온 남자가 구석 침대에 덜덜 떨며 앉아 있었다.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몹시 불안해 보였다.
하비가 보다 못해 힘든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여긴 안전합니다. 더 이상 고생하실 필요 없으시고요.”
하비의 다정한 말투에도 여전히 머리가 희끗희끗한 재무 회계사는 겁에 질린 얼굴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갑갑해 보이기도 해서 하비가 미안한 듯 서둘러 말을 붙였다. 비밀스러운 방이라 창문이 없는 것이 더 불안 요소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창문이 없는 방이라 죄송합니다. 상황이 좀 안 좋아서, 다 정리되면 좋은 방으로 드리겠습니다.”
그가 있던 곳은 한 낡은 시설이었다. 불온한 이교도 혹은 미치광이들을 수용하는,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 진 곳의 더러운 장소였다. 간간이 복지 개념으로 선심 쓴 귀족의 돈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건 대외 과시용이었고 늘 얼마 가지 못 했다. 그런 곳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을 지도 안 봐도 훤했다.
‘가엾은 사람.’
하비는 라힌 스터스의 재무회계사가 천천히 놀라지 않게 접근했다.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는 성호를 그어주었다. 이 가련한 남자에게 신의 가호를.
하비가 안타까운 얼굴로 그의 메마른 어깨를 내려보았다. 뼈 밖에 없는 앙상한 몰골이었다. 그가 빅터에게서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직 하나였다.
“시력도 잃고, 기억마저 잃어서 무사하셨던 거군요.”
빅터 측에서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한 건지 몸 전체가 끔찍한 흉터나 화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비는 입술을 짓씹고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잔인한 놈들.”
똑똑똑!
옆 방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비와 옆 방의 가짜 하비가 미리 짜둔 신호였다. 교대해야 한다는 긴급 신호였다.
하비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재무 회계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좀 쉬고 있으세요.”
얼른 돌아가 교체하자마자 하비의 방문에 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여자의 목소리, 게다가 단정적인 말투에 차라리 명령조에 가까웠다. 하비가 침대 속에 몸을 밀어넣으며 의아해 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집사는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막을 자가 없었다. 사용인도 예전처럼 많지 않고, 워낙 하비가 사적인 공간 노출에 예민해서 사용인들이 일정한 시각대가 아니면 그의 방 근처를 잘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이런 몰상식한 방문 방식은 있을 수가 없는 예였다.
하비가 눈살을 찌푸리고 기다리라고 할 찰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런데 두 사람이 동시에 그의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총괄 외교관과 그 뒤를 이어 처음 보는 얼굴의 짧은 흑발의 사용인이었다.
하비가 짧은 숨을 뱉었다. 그나마 총괄 외교관은 이때쯤 올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총괄 외교관도 높은 신분의 귀족이라 막아설 자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근데 저긴 누구지? 새로 들어온 고용인인가?’
하비의 눈길이 옆으로 이동했다. 큰 키에 푸른 눈, 짧고 검은 머리, 스터스 가 사용인들이 공통적으로 입는 하얀 메이드 복장을 입고 있었다. 하비가 속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시기가 너무 절묘했다. 집사가 들여왔다면 반드시 보고를 바로 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총괄 외교관의 왜소한 등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괄 외교관은 난감한 얼굴로 하비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그게 목적이 아닌 것이 분명했기에 대충 둘러댄 하비가 이유를 물었다.
“슬루인 제국과의 전쟁 배상금 문제 때문입니까? 황철석 채굴권이나 현금, 혹은 사람 수 맞추는 건 시민을 노예로 대체하여 배상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하비의 모국은 이미 전쟁을 치뤘고, 패전했다. 외교관들이 힘을 합쳐 소야 회담 때 기를 쓰고 전쟁에 끼지 않으려 했던 건 이 때문이었다. 이미 막대한 전쟁 배상금이 걸려 있었고, 또다른 전쟁을 시작할 여력도 없었다.
사용인 차림을 한 흑발 머리 여자가 총괄 외교관에게 냉수를 가져다 주었다. 받자마자 손에 든 것을 벌컥벌컥 들이킨 그가 답답한 듯 말했다.
“그것도 문제가 좀 있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겼어. 자네 머리를 좀 빌려야겠네.”
“무슨 문제 말입니까?”
하비가 들어온 다른 자에게 눈치를 주었다. 나가라는 암시였다. 그녀는 눈치 빠르게 하비의 눈짓을 알아듣고는 조용히 나갔다.
“듣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천천히…….”
총괄 외교관이 파리한 안색으로 대뜸 내뱉었다.
“젤가가 죽었어.”
듣고 있던 하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 젤가? 가장 능력 있었던 자 아닙니까.”
하비도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기세였다.
젤가는 주변국인 슬루인 제국에 심어놨던 첩자였다. 당시 외교관들이 다른 나라에 첩자를 심어두고 정보를 얻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젤가는 하비가 직접 골라낸 인재니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녔는데, 하필 발각된 것이다.
“게다가 젤가가 정보책으로 써먹었던 놈이 하필 황족이 꽁꽁 숨겨둔 애첩이었던 모양이야. 젤가가 간 무렵부터는 그 황족과 왕래하지 않아서 젤가도 전혀 몰랐다고 하더군.”
하비가 무거운 한숨을 지었다. 얼마나 철저히 숨겼으면 그 능력자가 몰랐을까. 안타까우면서도 등골이 선득했다. 제국의 황족에게까지 이야기가 흘러 들어갔다면 자칫 전쟁의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암암리에 첩자를 보내는 것과 보낸 것을 들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으므로.
하비가 어두워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 안하셔도 알 것 같군요. ”
“슬루인 제국 사람들은 고문에 능해. 젤가가 죽기 전에 다 불었을 거라고! 이 일을 어찌 해야 할지.”
총괄 외교관은 안절부절 못하며 하비가 누워 있는 침상을 왔다갔다 했다. 하비는 머릿속으로 차분하게 전체 그림을 그렸다. 아무리 봐도 지나친 걱정 같았다.
“아직 다른 자들에게는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젤가만 들통났을 뿐이지, 서둘러 풀어놓은 ‘비둘기’들에게 본국으로 돌아오라고 해야 겠습니다.”
비둘기는 첩자들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다른 첩자들의 안전을 걱정해 한시라도 빨리 귀환을 명해야 겠다는 하비의 말에 총괄 외교관이 펄쩍 뛰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미 다 들켰을 거라고. 내 말 못 들었나? 지금 불러와야 이중 첩자를 들이는 셈 밖에 더 되겠나! 어차피 젤가가 털어놔서 다들 잡혔을 거야. 지독한 고문으로 이미 이중 첩자 노릇을 하겠다는 다짐들을 다 받아놨겠고!”
흥분하는 그를 하비가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확인해 볼테니 걱정 마시고…….”
“아냐. 그냥 거기서 죽게 놔두게. 그게 제일 나아.”
하비의 입가에 예의바르게 떠 있던 미소가 일제히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눈으로 총괄 외교관을 보면서 하비가 그의 의중을 되짚었다. 목소리가 극도로 낮아졌다.
“비둘기들 꼬리를 전부 자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이중 첩자를 본국에 들일 수는 없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재고해 주십시오. 다른 방법을 꼭 찾아보겠습니다.”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세.”
두 사람은 서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팽팽하게 대립했다. 이럴 땐 언제나 하비가 한 수 물렸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타국으로 건너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을 비둘기들의 처분이 한꺼번에 결정될 것이니까.
“비둘기가 이중 첩자로 변질되었다면 제 선에서 반드시 처리할테니, 믿어 주십시오.”
“어허, 안된다니까!”
“부탁드립니다.”
하비가 몇 번이나 간곡하게 말하자 굳건한 의지로 밀어붙이던 총괄 외교관도 흔들렸다. 고민하던 그가 희끗하고 관리 잘 된 턱수염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야. 하여간 사람이 모질지 못하단 말이지. 할 땐 해야 하는데 말야.”
총괄 외교관은 스터스 가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가 마음이 약한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하비의 밤색 눈이 고요하게 일렁였다.
“그럼 다음 문제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총괄 외교관은 하비를 믿었다. 그의 믿음이 감사하면서도 하비는 마음이 못내 불편했다.
‘알고 있어.’
하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것을 총괄 외교관이 정면으로 찌른 것이다.
지나친 도덕적 결벽증.
스터스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지켜오던 명예이자 품위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간혹 발목을 잡을 때가 있었다. 책임지고 사퇴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굳이 자릴 내놓은 라힌 스터스 전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총괄 외교관의 말이 멀어졌다. 하비는 죽음의 냄새가 가장 가까웠던, 아버지의 마지막 날이 생생했다.
죽기 전 라힌 스터스는 하나뿐인 아들인 하비의 팔을 잡고 가래 끓는 소리로 말했다. 오래 병치레를 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게 강한 악력이었다. 하비의 팔에 멍이 들만큼.
[아들아. 넌 다음 가주야. 스터스 가는 거짓말하지 않아. 사람들의 신뢰를 저버리지도 않지. 넌 절대로! 깨끗해야 돼. 네 손은 언제나 이 스터스 가 저택처럼 하얗단다. 알겠느냐?]
당시 하비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아버지의 손을 보았다. 병으로 바짝 마르고 앙상한 손은 원래의 하얀 피부결을 잃고 갈색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하비에겐 이질적이고, 낯선 모습이었다.
‘그 날의 아버지는 누구였는지.’
심란한 마음을 감춘 하비와 얼마간 외교 관련 사안들을 이야기하던 총괄 외교관이 나가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낯선 흑발 머리 여자가 바로 들어왔다. 처음 문 앞에서 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비의 허락은 받지 않은 채였다.
하비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툴툴대며 입을 열었다.
“어휴! 쨍알쨍알. 하여간 시끄럽고 멍청한 귀족 놈들.”
귀를 터는 시늉을 하던 그녀가 곧 위험스레 웃더니 하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비가 반사적으로 이불 밑에서 작은 휴대용 단검을 꺼내 쥐었다.
“넌 누구지? 바르뎀 경의 끄나풀인가?”
사용인 복장 중 모자를 멀리 집어던지고는 그녀가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감탄의 의미였다.
“주인님 말대로 확실히 여타 귀족과는 좀 다르긴 해. 두뇌 회전도 빠르고, 반사 신경도 좋아. 그래봤자-.”
깡!
여자가 숨기고 있던 반대편 손에서 다른 단검이 날아와 하비의 검을 멀리 튕겨냈다. 두 개의 단검이 얽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람을 직접 썰면서 얻은 기술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비는 도망치지 않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만 했다. 그 무기질적인 눈빛에 그녀는 거북한 생각마저 들었다.
‘곧 죽어도 고매한 귀족이라 이건가? 재수 없게!’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가 칼끝을 하비의 목에 겨누었다. 금방이라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하비의 목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살려달라는 애원은 전혀 없었다.
‘뭐야, 이건.’
이쯤되자 그녀는 오기가 생겼다. 저 희멀겋고 뻣뻣한 얼굴이 목숨을 구걸하며 애원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 어떤 귀족도 이쯤 되면 눈물 한 방울 정도는 눈가에 달아줬는데.
‘어?’
그러다 그녀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하비의 페로몬에 흠칫했다. 알파 수사슴 향수의 효력이 다해 점점 오메가 페로몬이 강해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페로몬이었다.
‘어떻게 이런 향이 나지? 알파였던 놈이었는데?’
손가락이 부들거릴 정도로 맛있는 페로몬 향이었다. 알파지만 우성인 빅터에 비해 인내심이 적은 그녀였다. 하지만 주인의 명을 떠올리며 억지로 참았다.
“아무래도 주인님은 당신이 영악한 쥐새끼인 걸 다 알고 날 붙여둔 모양이야.”
하비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딱히 반항하려 하지도 않고, 턱을 치켜든 채로 되묻기까지 했다.
“아직 날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은 건가?”
“당연하지. 우리 주인님이 당신을 괴롭히는 걸 얼마나 기대했는데. 첫 히트는 주인님이 혼자 다 먹었지만 난 다음 걸 기다리고 있어. 혹시 알아? 우리한테도 돌려주실지.”
히트 사이클이란 말이 웃긴지 그녀가 계속 피식거렸다. 칼끝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갔고, 자연스럽게 하비의 턱도 위로 솟구쳤다. 높은 콧대 위로 밤색 눈동자가 향하는 시선도 천장으로 올라갔다.
칼을 천천히 목울대로 내리면서 그녀가 매혹적으로 말했다. 흥분한 알파의 생식기가 이것을 취하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굳이 알파인 날 붙여둔 건 알아서 취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더 몰아붙이라는 뜻?’
그녀가 빅터의 의도를 마음대로 해석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참아야 하는데, 알파의 페로몬이 날뛰었다. 하비가 이를 눈치채고 건조하게 대꾸했다.
“러트가 곧인 건가? 페로몬 갈무리도 안되는 걸 보니 아직 애송이군.”
그녀의 짙은 눈썹이 휙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한마디도 지지 않는 하비가 몹시 짜증났다. 칼 끝에 힘을 주자 하비의 하얗고 단단한 목에서 핏기가 보였다.
“갈무리 안되는 건 마찬가지 아냐? 오메가 페로몬을 질질 흘리는 천박한 새끼가. 억제제 없이 첫 러트를 온몸으로 맞은 새파란 알파한테 박혀 볼래?”
물론 하비가 현재 페로몬을 간수 못하고 있는 건 신약 때문인 걸 알지만, 그녀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빅터의 복수는 일부 빅터네 사용인들의 복수와도 겹쳤다. 빅터의 사용인 중에는 해적 인질 사태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다. 돈 없고, 뒷배경 없는 평민들은 유일한 희망이 당시 시의원이었다. 라힌 스터스, 그 사람만이 힘없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었다.
그녀가 푸른 눈을 어둡게 번뜩였다.
“첫 러트라니까 기억나는데. 당신은 우리 주인님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지도 못하지? 첫 러트 때 말야. 그 말도 안되는 걸 견뎌낸 분이야.”
빅터 바르뎀의 첫 러트? 하비가 눈을 굴려 그녀를 보았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나같으면, 아니 당신 같아도 미쳤을걸? 견딜 수 있을까, 그 생지옥을.”
하비의 목에서 뜨거운 피가 솟아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신 같은 건 아마 첫 오메가가 죽었을 때부터 바로 미…….”
“나스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엄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허리를 냉정히 잘랐다. 놀란 나스타가 뒤돌기도 전에 다가온 손이 더 빨랐다.
“헉?!”
어느 새 방으로 들어온 빅터가 하비의 목에 향한 검날을 손으로 밀었다. 나스타는 기겁해서 하비의 목을 찌르던 검을 치웠다.
“왜 그래! 다쳤잖아! 괜찮아, 주인님?”
날카로운 예기에 손을 베어서 피가 흘렀지만 빅터는 개의치도 않았다. 오히려 사나운 얼굴로 나스타를 다그칠 뿐이었다.
“지금 뭐하는 거지? 감시하라고 했지, 내가 언제 스터스 경의 목을 따라고 했나?”
나스타가 단검을 등 뒤로 숨기고 황급히 빅터에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당장 나가.”
나스타가 하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페로몬이 너무 자극적이라 박고 싶어 지던걸요, 주인님. 다음에 저도 끼워주세요.”
빅터가 흉폭해진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웬만한 그의 모습을 다 지켜본 나스타조차 흠칫거릴 정도의 살기였다.
“넌 일주일 간 근신이다.”
“흥. 그렇게 하시든지요. 틀어박혀서 레나랑 놀지, 뭐.”
나스타는 휙 뒤돌고는 고양이처럼 유연한 몸짓으로 훌쩍 떠났다. 그 전에 빅터에게 무언의 눈짓을 주는 것도 있지 않았다.
‘집 어딘가에 또다른 쥐새끼가 있는 것 같은데요?’
알아들은 빅터는 모른 척 하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창문 밖을 살핀 그는 스터스 가의 마차가 서 있는 것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마치 사용감을 숨기려고 한 것처럼 지나치게 반들거렸다.
'흐음.'
빅터의 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가주인 그가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마차를 사용했다니. 게다가 마차를 썼다는 걸 숨기려한 흔적까지 있는 건 분명 뭔가 있었다. 거기까진 간파했다.
하지만 설마 하비가 바로 행동력을 발휘해 라힌 스터스의 재무 회계사를 데려왔으리라는 건 빅터도 예상치 못했다. 하비 스터스가 그리 행동력이 좋은 사람인지는 그도 몰랐다.
그때 하비가 생각에 잠긴 빅터를 불렀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빅터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하비에게 헛기침을 했다. 그의 단정한 목에 부하인 나스타가 낸 칼자국이 확대되어 보였다. 괜히 신경쓰였다.
“잠시. 숨 좀 돌리고.”
빅터가 젖은 금빛 머리칼을 휙 넘기며 땀을 식혔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여전히 다른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
붉은 피가 그의 크고 거친 손에 맺혀 방울을 이루는 것을 하비가 물끄러미 보았다.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피가 심장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묘하게 심장이 뛰었다. 어지간해서는 지치지도 않는 빅터가 숨을 고르고 있다는 건, 멀리서부터 달렸다는 증거였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하비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그저 그의 힘든 과거를 보상받기 위한 노리개가 아니었던가. 혼란스러운 건 빅터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숨고르기는 끝났지만 아예 뒤돌아서서 제 이상 행동을 되짚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지?'
실제로 빅터는 하비의 페로몬에 나스타의 페로몬이 섞이는 것같은 이상함을 감지하고 서둘러 왔다. 도착했을 때, 나스타가 그의 목을 찌르고 있는 것을 본 순간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본능대로 달려 막았다. 맨손으로 잡은 것도 급해서였다. 아무리 물어도 이번에도 일을 친 몸뚱이는 제 주인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설마 정말 오메가로 인식하기라도 한 건가. 약만 바로 주면 알파로 되돌아갈 인간한테?'
오메가는 간혹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소중하고 귀하게 대해졌다. 빅터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이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빅터가 주머니 속의 되돌리는 약을 만지작대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몸은 좀 괜찮나?”
하비는 황당하다는 듯 오히려 되물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몸이...괜찮냐니?"
하비는 그의 언행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죽일 듯이 괴롭히고 있으면서 안부를 묻는 건 고단수의 놀림인건가? 달려오면서까지 그 알파 여자를 제지한 건 널 괴롭혀야 하는 건 나니까, 뭐 그런 유치한 발상인가? 하다못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빅터의 사람이 했던 말이 하비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상처 난 빅터의 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제는 피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끗한 카펫에 붉은 물을 들이고 있었다.
빅터가 첫 러트에서 겪었다는 생지옥이 과연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생각한순간 하비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내가 알 필요가 뭐 있어.’
빅터에 대해 궁금해 한 것을 깨닫자마자 하비는 자괴감에 빠졌다. 빅터는 하비가 말이 없자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이상한 듯 묘한 눈길로 보았다.
“묻고 싶은게 많은 얼굴인데, 한가하게 선문답할 시간 없어.”
하비는 아까부터 계속 가슴 어딘가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불쾌했다. 간질거리는 이상한 감각이 역겹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불편한 얼굴로 화답했다.
“한가하지 않다면서, 내 몸상태나 물어보자고 여기까지 들른건가?”
빅터가 주머니 속의 약을 꺼내서 보란듯 하비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스터스 경이 알파로 되돌리는 약을 달라고 애걸복걸 할 줄 알았거든. 그런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면 한달음에 달려올만 하지.”
하비가 지겹다는 표정을 짓더니 마른 세수를 했다. 긴 한숨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왔다.
“하다하다 이제 그 약으로 협상을 하자는 건가…….”
빅터가 팔짱을 끼고 비웃음을 지었다.
“뭐 어때. 스터스 경의 가장 자신있는 분야 아닌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거래는 오고가야지.”
“그 약을 당장 줄 게 아니면 사람을 불러서 쫓아보낼 생각이다.”
하비의 진심을 가득 담은 협박을 빅터는 여유로이 넘겼다.
“그것보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역시 본론은 이쪽인가 보다. 하비는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빅터의 말을 경청했다. 이해 못할 소리로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것보다야 정확한 용건이 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그 편지. 네가 쓰지 않았다고 했지.”
“무슨 편지?”
기억이 안난다는 듯 하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 못하는 척 하지마. 이럴까봐 챙겨 왔으니까.”
빅터가 친히 챙겨온 품 속의 편지를 그의 눈 앞에 다시 한 번 펼쳐서 보여주었다. 하비는 편지를 받아들고 찬찬히 읽었다. 그의 표정은 단조로웠지만 희미하게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빅터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하비가 무슨 말을 할지 내심 기대되었다.
만약 정말 하비 스터스가 쓴 것이 아니라면 빅터는 온전히 모든 일의 원흉인 라힌 스터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려버리고 그의 아들은 놓아줄 생각도 있었다. 하비는 원망의 굴레를 감내하며 제 목을 스스로 조인 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터스 가는 경제적으로도 철저히 몰락했다. 이제 편지 건만 마무리되면 스터스 가의 가주는 합당한 대가를 치렀으니 더 이상 하비에게 심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 결심도 했다.
그런데 다 읽은 편지를 묵묵히 접어서 건네주며 하비는 뜻밖의 말을 했다.
“이 편지는 당시 해적 인질 사태 때 내 손으로 직접 썼어.”
“…뭐?”
빅터는 번개에 맞은 것처럼 우두커니 하비의 고백을 들었다. 분명 전에는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그 때의 하비 스터스가 지금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진솔해 보였다.
냉정한 얼굴로 딱 잘라 본인이 쓴 것이라고 선을 긋는 현재의 하비 쪽이 오히려 더 거짓 같았다.
“정말 네가 쓴 편지라고? 그게?”
빅터가 황망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하비를 마주보았다.
생각을 조금 바꿔볼까 했던 건 그의 사용인 중 누군가가 빅터에게 끈질기게 설득을 해서였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주인님도, 나스타도, 바르뎀 가 사람들도! 스터스 경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다고 몰아붙여요? 그냥 원망할 대상을 찾고 싶은 거잖아요. 정신 좀 차리세요!]
그 말대로, 빅터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는 묵묵히 침묵하다가 결국 사실을 시인했다. 오랫동안 인정하기 싫었지만 빅터도 알고 있었다. 그릇된 복수라는 것을.
인정하는데는 굉장한 고통이 따랐다. 그래서 더 인정하기 싫었다. 이 고통조차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미 충분히 아팠는데, 왜 스터스 가 사람 때문에 또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하지만 빅터는 어릴 때부터 위선을 경멸했다. 어느 무엇보다 위선이 가장 싫었다. 그 시절 하비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위선 떠는 귀족이 아니라서였고, 정작 자신이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배에서 내릴 때, 나를 속이는 짓만은 하지 말자고 맹세해놓고선.’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오로지 스터스 가에게 복수할 생각으로만 버텼기에, 악만 남았다. 그것이 빅터의 눈을 가렸다.
빅터는 아직까지도 해적들이 그 편지를 뺏어서 인질들의 머리를 툭툭 치며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이 귀족 나으리가 너흴 살려줄 것 같아? 정말? 우리랑 내기할까?]
어린 빅터는 편지를 빼앗으려 몸사움까지 불사해가며 처절하게 외쳤다.
[살려줄 거야! 우릴 구해줄 거라고!]
해적들이 공처럼 구긴 편지를 어린 빅터의 키 높이 위로 휙 들어올리며 여기저기 놀이처럼 던졌고, 편지를 쫓아다니는 빅터를 허탕 치게 했다. 마지막엔 빅터의 다리를 걷어차서 넘어뜨리고는 일제히 낄낄 웃었다.
[지상에서 기도한다잖아. 안.전.한. 지상에서. 기도빨이 통할지 한 번 볼까? 누구부터 실험해 볼래?]
그때부터 인질들이 하나하나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목이 잘리고, 손과 팔이 바닥을 나뒹굴고, 피가 튀고, 시체는 갈매기 밥이 되었다. 몇 날 며칠 살육의 날이 이어졌고, 어느 덧 빅터의 차례가 되었다.
하비 스터스의 기도는 바다 위에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의 편지는 해적들 사이에서 한참이나 조롱거리로 돌아다녔다. 그걸 연시인 양 외워서 읊고 다니는 해적들도 있었다.
[간악한~ 해적들은~ 당신들의 숭고한 생명을 함부로 앗아가지 못합니다~. 크하핫! 우리가, 그리고 신이 구해줄 겁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누군가가 구성진 가락으로 곡까지 붙여 부르던 것이 빅터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젠장!’
참을 수 없어져서 빅터는 자리를 박차고 침대 위에 앉아있는 하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눈이 벌겋게 변한 빅터가 대뜸 하비의 뒷목을 한 손으로 콱 쥐었다.
목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자신 쪽으로 세게 끌어당기며 빅터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솔직히 말해. 빠짐없이 진실만 말하라고.”
피를 토하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내가 들어준다잖아. 마지막 기회야. 숨기는 게 있으면 다 말해. 이해할 순 없어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은 해볼테니까.”
이성적인 사고를 가장 중요시 해온만큼, 빅터는 조금 더 냉철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가장 큰 원수인 라힌 스터스의 아들로서, 하비는 충분히 벌을 받았다. 남은 인질들에게 거짓 희망을 주고 기만한 그 편지를, 자신이 쓴 편지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풀어줄 참이었는데 지금 와서 뭐라고?
뒷목을 조이던 손이 점점 앞으로 옮겨왔다. 하비는 숨이 막혀 얼굴이 붉어졌다.
“큽……!”
목을 조인 상태에서 하비가 빅터의 손등을 제 손으로 덮었다. 하지만 떼어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잡고 있을 뿐이었다.
하비는 호흡이 곤란한 가운데서도 담담하게 말을 쏟아냈다.
“무슨…진실? 이 편지에 쓰여진 필체가, 내 필체라는 건 바르뎀 경이 누구보다 잘 알텐데.”
헐떡이며 마지막 말이 떨어진 순간, 빅터는 표정을 완전히 지웠다. 분노도, 슬픔도, 미소도, 아무것도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아니 이미 확신한 얼굴로 하비에게 말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숱한 감정들이 빅터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빅터의 녹색 눈에 커다란 광기가 서렸다. 녹색 눈에 핏줄이 터지고, 붉게 물들었다.
“그 편지를 정말 네가 썼다고…….”
빅터는 목을 꽉 쥐었던 손을 천천히 풀고 부드럽게 쓸었다. 하비의 밀려난 손도 잡아주었다. 연인에게 하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하비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빅터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빅터가 그 손을 천천히 놓고는 양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작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야릇하게 피었다.
“하아….”
짜릿한 전류가 그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참을 수 없는 간질거림이 그의 뱃속에서 터져 나왔다. 거대한 웃음이었다.
“하하하!”
빅터의 뱃속에서 거대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을 수 없이 기쁘고, 큰 안도가 들었다.
아직 마음껏 미워해도 된다. 그럴만한 이유까지 하비가 가져가지 않았다.
빅터가 손을 내리자 하비는 입술을 깨물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불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빅터는 그것마저 사랑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군.”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차가운 증오만 남았다. 하비 스터스는 과연 대단한 사람이었다. 몸이 갈라 지는 아픔도 아직 견딜만 한가 보다고 여겼다.
빅터는 그가 심지 굳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분명 그 편지는 하비 스터스의 필체가 맞다. 하지만 첫 히트 때 하비가 말했던 것도 진실이었다. 정황은 다 알 수 없지만 모종의 뭔가가 존재했다.
‘그게 지금 와서 뭐가 소용 있지?’
중요한 것은 하비 스터스가 편지가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대단한 진실도 아니지만, 빅터에게는 중요했다.
그 편지 한 장이 하비 스터스가 당한 괴로움을 그나마 정당한 것으로 바꿔주었기 때문이었다.
빅터가 웃음기를 머금고 하비의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마치 기사처럼 정중하게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스터스 경의 의지를 받아들이지. 진실보다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 그리 거짓말을 하니. 아마 다 낡아빠진 스터스 가문 때문이겠지만.”
빅터가 고개를 당당하게 들었다. 어떤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 같은 하비 스터스가 그의 녹색 눈동자에 비쳤다. 하비가 무슨 생각을 하든 이제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주 감사히 생각해.”
덕분에 하비를 마음껏 진창으로 밀어도 될 것 같다. 그걸 본인이 돕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빅터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주머니 속을 뒤졌다. 익숙한 감각이 그의 손 끝에 걸렸다. 하비에게 그가 원하던 약을 줄 생각이었다.
“선물로 되돌리는 약을 주지. 받아.”
빅터가 하비의 품으로 꽁꽁 싸맨 종이조각을 떨어뜨렸다. 그걸 펼치면 알약으로 된 하얀 약이 나올 것이다.
얼결에 받은 하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빅터를 빤히 보았다.
“이건…….”
알파로 되돌리는 호르몬 교란제, 신약이었다. 하비는 약을 살피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빅터에게 확인했다.
“진짜 약인가?”
‘알파로 되돌리는’ 이라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지만 빅터는 바로 알아들었다.
“당연하지. 가짜 약을 줄거라고 생각했어? 진짜니까 바로 복용해.”
빅터는 친절하게 물을 따라서 가져왔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사라졌지만 하비는 조금 망설였다. 머뭇대던 그가 알약 몇 개를 동시에 물과 함께 삼켰다. 하비의 목에 도드라진 울대가 꿀렁이더니 알약은 대번에 사라졌다.
하비는 자신을 감시하듯이 지켜보고 있는 빅터의 시선을 피했다. 왠지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충 아무 말이나 던졌다.
“이제 그 구역질나는 향수는 안 뿌려도 되겠군.”
약이 잘 듣고 있는지 하비는 속에서 묘한 느낌이 났다.
‘이걸로 된건가.’
이제 임신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되돌리는 약을 먹었을 때는 오메가로 변하는 것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찜찜한 점은 꼭 일정 시간이 지난 뒤 하혈을 한다는 것이었지만.
빅터가 하비의 안도를 눈치챈 듯 비아냥대는 말투로 받아쳤다.
“얼마 뒤에 다시 오메가로 바뀔테니 너무 섭섭해 하진 마. 신약은 아주 많다고.”
하비는 진지하게 빅터가 소유하고 있는 약들을 털어볼까 생각했다. 약들을 모두 없애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워낙 빅터의 소유지가 많아 어디에 숨겼을지 상상도 안 되어서 금방 포기했다.
‘일일이 뒤졌다간 금방 눈치채서 다른 곳으로 옮기겠지.’
그때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 밖으로 쏠렸다.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아.”
문득 빅터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예정을 바꿔 봐야겠어. 스터스 경을 가장 확실하게 괴롭힐 방법이 생각났거든.”
빅터가 문 밖을 쳐다보았고, 동시에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비는 반사적으로 침대맡에 서 있는 빅터를 난감한 눈으로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누가 봤을 때 딱히 이상한 눈으로 볼 것도 아니었지만, 사이가 안 좋기로 소문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귀찮은 화젯거리가 될 것 같아서였다. 빅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하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
정중한 대답 뒤에 스터스 가의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한 무리의 귀족 청년들이 우루루 등장했다. 돌아온 집사가 사람들을 주렁주렁 달고온 것이다. 물론 큰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집사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주인님, 여기 손님들이 잔뜩……. 어, 바르뎀 경 아니십니까?”
문병 온 지인들이 꽃이나 선물을 들고 와 있었다. 거기엔 반 로투스 경도 포함되었다. 반은 빅터를 보자마자 흠칫 놀랐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어! 바르뎀 경이 와 있었나! 마침 같이 가자고 기별을 보냈는데, 허탕 쳤군 그래.”
“언제 선수친 거지? 하여간 빨라.”
그들은 본래 온 목적은 잊고 왁자지껄 서로 좋을 대로 떠들고 있었다. 스터스 가의 젊은 집사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고, 이를 발견한 빅터가 중재하듯 그들의 말을 끊었다.
“당연히 와야 할 병문안 아닌가.”
그제야 그들은 환자인 하비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해 했다.
스터스 가의 집사는 빅터를 향해 감사의 눈빛을 전했다. 그가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짓을 해서였다. 아마 빅터가 바로 다음에 던진 말이 아니었으면 더 감사한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하비가 아프다고 하는데, 당장 달려와야지.”
그 순간 하비를 포함한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
“…….”
“…….”
방금 저 바르뎀 경이 스터스 경을 두고 ‘하비’ 라 불렀다. 저리 부를 수 있는 건 가족, 혹은 아주 절친한 오랜 친구, 혹은…….
그나마 용감한 누군가가 어색한 얼굴로 얼어붙은 입을 떼었다.
“어어……. 이런 말 하기 좀 민망하고 예민할 수 있는 문제지만, 혹시 자네 둘…….”
빅터가 빙긋 웃더니 친한 척 하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알았나?”
하비는 빅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지?’
빅터의 손이 몸에 닿자 하비는 놀란 듯 움찔거렸지만 평소처럼 화내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건 너무 기가 막혀서 딱히 반응을 할 여력도 없어서였지만, 다른 귀족 청년들이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기에는 충분했다.
빅터도 여세를 몰아 귀족 청년들을 향해 넉살을 떨었다. 뜬소문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눈에 반짝임을 보아서였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엄청난 후폭풍과 소문이 사교계와 온갖 클럽에 떠돌 것이다. 상상만 해도 몹시 즐거운 빅터였다.
“몰랐나? 전에 소드 클럽에서도 보지 않았던가. 하비가 샤워실에 쓰러져 있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걱정 많이 했어.”
귀족 청년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이런 관계인 줄도 모르고 스터스 경을 헐뜯었던 것이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그때……?”
스터스 경을 욕했을 때 빅터의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 않았던 것을 상기하며 귀족 청년 하나가 손가락을 들어 하비를 짚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하비 스터스를 욕했다는 말이 나올까봐 옆자리에 서 있던 다른 청년이 그의 발을 콱 밟았다.
“주, 주인님? 어째서 그런…!”
집사가 황망한 얼굴로 하비와 빅터를 번갈아 보았다. 알파끼리 어울리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리 좋아보이는 형태가 아니었다. 하물며 국가차원에서 인구 감소를 걱정해 암묵적으로 금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빅터는 피식 웃으며 하비의 밤색 머리칼을 손에 올렸다. 가닥가닥 결 좋은 머리칼이 그의 손에서 흘러내렸다. 안색이 헬슥해지는 집사에게 보란 듯이 행동하며 빅터가 머리칼을 만지작 댔다.
“알파끼리 사귀면 안되는 법이라도 있나? 말해보게. 살면서 그런 법은 보질 못했거든.”
다른 귀족 청년들이 차마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방황하고, 반 로투스 경조차도 방관하고 싶은 얼굴로 다른 곳을 보았다.
헛기침과 외면이 난무한 가운데, 하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끼어들었다. 이 곳을 정리해줄 유일한 구원자였다. 하비는 빙글대고 있는 빅터를 노려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바르뎀 경이 농담하는 거니까, 다들 넘어가지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제야 귀족 청년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아까까지 눈도 못 마주치던 자들이 아닌 듯 했다.
“그, 그렇지?”
“역시! 스터스 경이 그럴 리가 없지.”
“그게 무슨 말이야? 바르뎀 경이야 말로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이지!”
여기서도 스터스 가와 바르뎀 가의 분파로 나뉜 모양이었다. 귀족 청년들이 둘로 나뉘어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집사가 몹시 불편한 눈으로 노려 보았다. 라힌 스터스가 건재할 때는 이런 모욕적인 일도 없었다.
더군다나 알파인 가주가 알파인 사람도 얽힌 것조차 불쾌했다. 그것도 모자라 빅터 바르뎀은 의원직과 귀족까지 모조리 돈으로 사들인 졸속 부자이자 우성 알파였다. 불쑥 어떤 사실에 생각이 미친 집사가 다시 한 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서, 설마, 주인님이?’
덩치도 비등하긴 했지만 빅터 쪽이 좀 더 우세했다. 몹시 불온한 생각이지만 어느 쪽으로 예상해봐도 주인인 하비가 깔릴 것 같다는 불길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 음흉한 눈길들이 하비에게 떨어졌다. 정작 당사자는 불쾌한 낯빛조차 보이지 않고 모두가 빨리 이 방에서 나가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 건만 해도 마음이 심란한데, 거짓말을 잘도 둘러대는 빅터를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하비는 속으로 한숨 지었다.
‘이런 게 재밌는 건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빅터가 생각하는 재미의 측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이 고리타분한 귀족이라 더더욱.
하비가 보기에 빅터는 귀족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앞선 자유분방한 선구자에 가까웠다.
‘시대를 앞선 자…….’
하비의 시선이 자연적으로 사람들 사이로 향했다. 빅터도 빅터지만 하비의 신경을 잡아끌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반 로투스 경, 그의 오랜 친구였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있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잊고 있던 문제가 부상했다.
[자넨 언제나 앞서가는군. 시대를, 그리고 나를.]
그 말은 가시처럼 돋아나 하비의 마음을 계속해서 찔렀다. 피 흘릴 만큼 큰 상처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불편한, 그런 정도의 작은 생채기였다.
이를 숨기려고 하비는 일부러 반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생일이 곧이지 않나?”
“그, 그랬던가.”
반이 어색해 하는 것이 보였다. 하비와 싸운 건 아니지만 당시 분위기가 묘했고, 자신의 열등감을 고백했다는 것이 생각나 껄끄러운 듯 했다.
빅터가 팔짱을 끼고 둘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빤히 보았다. 빅터의 뚫어질 것 같은 시선에 못이긴 반은 예전처럼 친근하게 말했다.
“어, 그랬지. 이번에도 신기한 걸 사주려고?”
하비가 선선히 미소지었다.
“그럴 생각이야. 몸이 많이 나았으니 산책 겸 나가서 보려고 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늘 열성이라니까. 고맙다.”
반이 밝게 대꾸했고, 빅터의 얼굴은 그에 반비례 하여 점점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기어이 빅터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유도된 기침으로 이목을 끌었다. 모두가 주목하자, 빅터가 과장스럽게 말했다.
“이런. 하비가 너무 쑥스러워하니 어쩔 수 없군.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니. 하비가 질린 얼굴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빅터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 따위는 그에겐 간지러움 그 이상도 아니었다.
빅터가 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무래도 직접 보여줘야겠어.”
말을 마친 빅터가 하비의 팔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거칠고 갈라진 하비의 입술 사이로 빅터의 혀가 거침없이 들어갔다.
마치 미리 짠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키스였다.
***
짝, 짝, 짝!
“주인님. 축하드립니다.”
기계적으로 건조한 음성이 막 집으로 돌아온 빅터를 맞았다. 빅터의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이자 오메가였다. 빛바랜 갈색 머리에 온화한 인상, 하얀 피부의 미남자였다. 하비 스터스에 대해 도 넘는 잔소리를 한 자이기도 했다. 집사는 빅터를 뜨끔하게 할 정도로 직설적인 조언도 서슴지 않았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주인님도, 나스타도, 바르뎀 가 사람들도! 스터스 경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다고 몰아붙여요? 그냥 원망할 대상을 찾고 싶은 거잖아요. 정신 좀 차리세요!]
얌전해 보이기만 하던 집사의 목소리가 그때만큼 진중하게 들린 적은 없었다. 아직도 선명했다.
집사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빅터의 눈길에 찔끔 했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빅터가 뒤돌아서서 대꾸했다.
“아니. 좀 재수 없어서.”
“제가 그런 적이 한두번인가요, 뭐.”
집사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고는 빅터의 겉옷을 받아서 제 팔에 걸쳤다. 그리고 잔소리의 서두를 열었다.
“사고를 아주 크게 치셨더군요. 귀가 따가울 지경이던데. 그리 괴롭히시더니, 이제 스터스 경과 정식으로 사귀기로 하신 건가요?”
빅터는 냉정한 모습으로 듣는 둥 마는 둥 성큼성큼 안으로 걸었다. 저택이 워낙 커서 그의 방까지 한참 가야 했다. 사교계와 귀족들이 걸쳐진 온갖 클럽에서 큰 화제였다.
빅터 바르뎀과 하비 스터스의 키스 사건 말이다. 공식적인 애인 선전 포고 겸 입술 박치기에 가까운 첫키스였다. 묘하게 달달한 맛이 났던 것이 생각나 빅터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는 금방 냉소적인 표정으로 변했다.
어차피 다 쇼이다.
남은 건 하비 스터스가 귀족 사회에서 같은 알파와의 스캔들로 곤란해 지고, 여전히 자신에게 약점을 잡힌 채 끌려다니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빅터에게는 귀족 사회의 평판은 그다지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상관없었다.
'곤란한 건 그 놈이 되겠지.'
망할 귀족의 명예밖에 모르는 딱딱한 남자니까. 빅터가 문득 집사를 돌아보면서 쯧, 혀를 찼다.
“넌 그것보다 나스타부터 챙겨. 감시하라고 보내놨더니 페로몬도 갈무리 못하고 일치고 있더군.”
대번에 집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는 나스타의 오메가였다. 하지만 나스타를 걱정하기 보다는 하비를 먼저 염려했다. 빅터의 사용인 중 가장 하비에게 우호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설마 나스타가 스터스 경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니겠죠?”
나스타는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완력이 셌다. 게다가 살인 기술은 가히 암살자 중에 최상이었다. 빅터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할 뻔 했지. 내가 안 막았으면, 거의.”
안색이 파리해진 집사가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맙소사……. 나스타 제발…….”
“걱정마. 끝까진 안 갔으니까.”
빅터가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고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집사는 얄미운 얼굴로 닫힌 방문을 노려보았다.
‘잔소리 좀 했다고 일부러 저러신다니까. 하여간 성격 참 안 좋으셔.’
빅터의 더러운 성격은 저택 사용인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했다. 이대로 쪼르르 달려가서 다른 사용인들과의 분노의 만담으로 풀 생각이었는데, 방문이 벌컥 다시 열렸다. 빅터가 얼굴을 내밀더니 덤덤하게 일렀다.
“아, 스터스 경을 우리집으로 챙겨와. 로투스 가의 놈팽이 생일 선물인가 뭔가를 사러 갔을텐데, 위치는 쌍둥이가 알거다. 물어봐.”
하비는 키스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비틀대며 저택을 나섰다. 반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가봐야겠다는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빅터의 집사는 주인의 명에 황당한 듯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집에서 노는 사용인도 많은데 왜 굳이 바쁜 자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요? 왜요?”
“다른 놈들은 못 믿겠어. 네가 가장 유순한 편이니까, 잘 하겠지.”
닫으려던 방문을 또 열곤 빅터가 덧붙였다.
“나스타는 절대 데려가지마. 발정날 때가 다 와가는데, 스터스 경 앞에서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겠지?”
빅터는 짓궂은 얼굴로 웃고는 가차없이 방문을 닫았다.
“주인님!”
집사가 닫힌 방문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잔소리에 대한 보복이 분명했다. 정말 성격 더러운 주인님이다.
그 시각, 하비는 빅터의 말대로 백마를 끌고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귀족들이 주로 다니는 명품가를 다니다가, 차츰 서민들의 거리로 빠졌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허름한 후드를 쓰게 되었다. 나중엔 습관이 되어버려서 아예 후드를 말 안장에 매어두고 다녔다.
하비는 예전부터 화려한 것들보다는 수수하면서 흔한 것들에 눈이 갔다.
‘흔하니까 값이 싼 거겠지만, 그것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니까.’
잘 찾아보면 숨은 보석들이 있었다. 흔해 보이는 것들 중에 가치 있는 무언가가. 하비는 말을 이끌다가 멈춰 세웠다.
“오!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제일 인기 상품인데!”
하비는 모조인 것이 분명한 큰 녹색 브로치에 눈길이 갔다. 황금색 장식 안에 녹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투박한 편이라 어느 옷에 달아놔도 다 어울릴 것 같긴 했다.
‘왠지 누가 떠오르는데.’
금발에 녹안을 가진 빅터 바르뎀이 뜬금없이 생각났다. 친구 생일 선물을 사러 와서 왜 그런 놈을 떠올리고 있는지, 당황스러웠다.
설상가상 사람들 앞에서 행한 그 무자비한 키스까지 꼬리를 물고 생각나 하비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 폭발적인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워서 정신없이 저택을 빠져나와 버렸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만지니 상처가 난 건지 따가웠다. 거친 입맞춤이었다. 하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심란하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상인이 얼쩡거리는 하비를 눈여겨 보더니 그가 끌고 있는 백마에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나 끌 수 없는 명마로 보이니, 분명 이 자도 보통 신분은 아닐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여성 분께 사드릴 거우?”
가려고 하다가 붙들린 하비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남자인데…….”
거기다 애인도 아니고, 친구다. 상인은 뭘로 착각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호객 행위를 시작했다.
“남녀 따질 게 뭐 있어. 이런 거 신사분들도 달면 멋지더라고.”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았다. 하비는 고민하다가 상인의 화술에 밀려 그 브로치를 사고야 말았다.
‘이게 아닌데.’
이미 사버린 브로치를 만지작대며 하비가 정처없이 민가를 걸었다.
“푸르릉!”
애교 부리듯 머리를 비비는 백마를 쓰다듬은 하비가 뚫어지게 황금색에 녹색 보석을 지닌 브로치를 내려보았다. 환영처럼 빅터가 겹쳐지고, 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내가 들어준다잖아. 마지막 기회야.]
어쩌면 빅터의 말대로 오해를 풀 마지막 여지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 라힌 스터스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사실 하비는 그 편지를 아버지가 쓴 것임을 바로 간파했다.
‘설마 스터스 가가 대대로 같은 필체라는 걸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같은 필체, 그건 스터스 가의 지독한 교육의 산물이자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스터스 가의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펜을 쥔 순간부터 선조와 같은 필체를 유지하도록 혹독한 교육을 받아 왔다.
필체 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이어받기를 강요 받았다. 생각, 겉모습, 관념, 사상, 외모까지 전부. 뭔가를 익힐 때까지는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았다. 이를 따르지 않는 아이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기도 했다.
실제 하비 위로 나이 터울이 큰 다른 아이가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하비는 그 아이를 보지도 못 했다. 하비 스터스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으니까.
정말 스터스 가에서 손을 써서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인은 과로로 인한 단명이었으니 말이다.
하비는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이 거대한 백색 저택의 모순을 알아차렸다. 살기 위해 하얀 저택의 율법을 온 몸으로 익히고, 습득했다.
자유로워 보이는 한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비는 자신이 이 저택의 방식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 했다. 하비는 바르뎀 가의 수많은 아이 중 빅터를 똑똑히 기억했다. 관심을 끌기 위해 아픈 척 하는 걸 알았지만 굳이 어울려 준 건, 하비도 그를 인식하고 있어서였다. 회장을 빙빙 돌며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심 언제 말을 걸까 속으로 점치기도 했던 하비였다.
빅터 바르뎀은 그 나이대 아이답고, 억지스럽지만 한편으론 매우 자유로운 바람의 향이 났다. 푸르고, 갑갑함 없는, 어쩌면 한계도 없어 보이는 자유로운 소년.
그게 빅터 바르뎀에 대한 하비의 첫 이미지였다.
나중에 그가 해적에게 붙들렸다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비는 황금색 브로치를 보이지 않게 꽉 쥐었다.
‘설마 내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셨을 줄이야……. 그렇게 싫다고 했건만.’
라힌 스터스는 어린 하비에게 편지를 쓸 것을 강요했다. 당연히 따를 줄 알았던 하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라힌 스터스를 설득하려 했다.
[지금 그 사람들한테 필요한 건 그런 공허한 마음 씀씀이가 아니라 돈입니다. 편지 같은 건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구요. 우리 스터스 가의 돈을 따로 떼어줘도 될텐데 왜 이런 쓸데 없는 짓을……! 윽!]
하비는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휘청거렸다. 손을 치켜든 라힌 스터스는 반들거리는 밤색 눈에 묘한 광기를 띄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넌 그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보는 거냐? 아직 멀었구나. 내가 널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데, 어떤 수모를 당했는데 이걸 쓸데없다고!]
[하지만!]
짝!
다시 한 번 손이 날아와 하비의 뺨을 때렸다. 이번에는 뒤로 넘어졌다. 라힌 스터스는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강압적으로 굴었다. 다른 사람 같았다.
[스터스 가의 돈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아! 명심해라. 그건 우리 가문의 것이야. 다시는 그런 말 하지마.]
그럼에도 하비는 여러 번 아버지에게 주장하고 대들었다. 처음으로 반항한 것이었지만, 매타작을 받고 감금 조치를 당했다. 그 자신조차 몰랐던 불같은 반발이 어린 하비의 속에서 들끓었다.
하비가 걱정스럽게 푸릉대는 말을 천천히 이끌면서 피식 웃었다. 공허한 미소였다.
‘그땐 아버지에게 반항했다는 것만으로도 전율하고 만족해 버렸지.’
하지만 해적들이 남은 인질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깨달았다. 무력한 정의감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한다.
해적 사태 같은 큰 사건을 위해서는 보다 실질적인 힘과 행동력,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
‘차라리 모금 운동이라도 할걸.’
하비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대드는 것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짜내야 했다. 스터스 가의 사람인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의 감정에 휘말려서 상황에 만족한 바람에 그러지 못했고,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말도 맞다. 계속해서 하비는 되뇌었다. 해적과 타협하지 않는 건 대응 방식의 정석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를 내놓으면 둘을 요구할 족속들이니까.
‘결국 내가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했더라면 조금 달라졌을까.’
그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빅터를 봤을 때 거북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이런 생각들이 한 몫 했다. 아버지의 생각에 동조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 막연한 가정 때문에.
하비는 스터스 가의 명예로운 일원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실용적인 생각 사이에서 분열되고 있었다.
적어도 편지를 보고 아버지의 위선을 깨닫기 전까지는.
첫 히트 사이클의 엄청난 열기 속에서, 어렴풋한 시야로도 하비는 편지가 자신이 쓴 내용이 아닌 것을 알았다. 두 번째로 빅터가 보여줬을 때는 확실히 알았다.
‘기어이 나를 속이고 직접 사칭해서 편지를 쓰셨구나.’
그건 사람들에게 하비가 청렴하고 고결한 의지를 지닌 스터스 가의 귀족이자 차기 가주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라힌 스터스의 광적인 집착이었고, 아들인 하비만은 깨끗하게 두기 위한 그만의 경건한 의식과도 같았다.
하비는 아버지의 그 종교에 가까운 신념에 진절머리가 났다. 끝까지 하비는 아버지에게 아들로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저 가문을 잇기 위한 장기말에 불과했다.
‘확인을 해봐야겠어.’
하비는 결심한 듯 진지한 얼굴로 다시 뒷골목의 남자를 찾아갔다. 끝까지 미뤄놨던 모종의 조사를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약 효과가 도는지 뱃속 어딘가가 뜨끈하긴 해도, 페로몬은 알파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번처럼 알파들에게 덮쳐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로 준비해 둔 말이 없어서 이번에는 백마를 끌고 그대로 뒷골목으로 갔다. 정보를 팔거나 직접 수집하기도 하는 ‘염소 수염’ 남자를 찾으러 가자, 저번처럼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똑같은 후드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 하비를 보더니 염소 수염이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어! 무사했어?”
하비가 묵묵히 대꾸했다.
“나만 두고 잘도 도망가더군.”
“그건 좀……. 걔들이 워낙 이쪽 바닥에서도 소문 더러운 애들이라. 어쩔 수 없었어. 미안.”
염소 수염은 정말 미안하긴 한지 차마 하비의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패를 하비에게 보이며 소곤거렸다.
“괜찮은 패가 있으면 귀띔해주라.”
다른 자들이 염소 수염을 째려봤지만 그는 모른 척 했고, 하비는 피식 웃었다. 하비가 판을 눈으로 대강 훑더니 염소 수염이 원하는대로 좋은 패를 짚어 주었다.
“이걸로 내.”
“좋았어.”
“야! 치사하게! 너 저번에도 저 놈한테 훈수 받아서 이겼잖아!”
옥신 간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하비가 대뜸 본론을 이야기했다.
“장기로 갈 만한 건을 넘길까 하는데. 시간 되나?”
“뭐, 어떤 거? 참, 저번 건은 다시 생각해 봤는데 알려주기 뭣해.”
재무 회계사의 행방을 입막음한 자가 누구냐는 이야기였는데, 하비는 선선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이제 상관없어.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안 봐도 빅터일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미 그 사람은 하비의 수중에 있었다. 필요 없는 정보가 되었다 말하자 염소 수염은 미안한 듯 멋쩍게 수염을 당겼다.
“그래서, 시간이 길어질 조사란 게 대체 뭔데?”
“어떤 가문의 재정 장부 내역을 조사해 줬으면 해. 하나도 빠짐 없이, 전부.”
하비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스터스 가의 재정 파탄 원인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할 생각이었다. 라힌 스터스가 죽고 나서 스터스 가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 건, 재산을 거의 탕진한 탓이었다.
하지만 하비는 의심하지 않았다. 적힌 것들은 다 어딘가에 기부했거나 누군가를 돕는데 썼다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내역을 딱히 확인한 적은 없었다. 여태까지 철썩같이 그것을 믿었기에.
‘이젠 아니지.’
너무 생뚱맞은 조사건이라 염소 수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그런 걸 왜? ……아니다. 어차피 그냥 하면 되니까. 돈이 중요하지. 얼마 쳐줄거야?”
“될 수 있으면, 많이.”
“그럼, 좋아. 장부는 다음에 직접 주든지, 아니면 누굴 통해서 주든지 하고.”
염소 수염이 용건이 끝난 것을 알고는 휙 뒤돌아 하비가 골라 준 패를 내밀었다. 얼마 뒤 염소 수염이 만세삼창을 했다.
“이겼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뒤로 하고 하비는 그곳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백마를 끌고 이제 돌아가려 마구간으로 갔다. 고단한 하루였다.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지없이 빅터가 강제로 저지른 키스가 생각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하비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한숨 지었다.
‘다 그 놈이 이상한 짓을 해서…….’
그런데, 낯선 사람이 그의 백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을 가리는 저 백마가 기분좋은 듯 푸릉대며 그 손길을 잘 받고 있었다.
“옳지, 옳지. 착하다.”
수상한 사람은 백마의 얼굴을 친근하게 만지며 어르기까지 했다. 하비처럼 후드를 푹 뒤집어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비가 반사적으로 검을 손에 쥐었다. 어쩐지 빅터와 얽힌 이후로 이럴 일이 많아진다. 비난의 화살이 바로 그에게로 향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남자였다.
“누구지?”
“아. 이제 나오셨군요! 저 기억 못하세요? 참, 후드를 벗어야지.”
미성인데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하비가 검을 거두고 그를 물끄러미 보자 수상한 사람은 허둥지둥 후드를 벗었다. 하비는 드러난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흔한 갈색 머리에 동그란 눈이 인상적인 오메가였다.
“바르뎀 경 저택의 집사?”
“기억하시는군요! 어, 그게……. 주인님이 스터스 경을 모셔오라고 하셔서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쫓아오게 되었네요. 죄송해요.”
“날 쫓아왔다고? 어떻게?”
하비의 의문은 곧장 풀렸다. 집사의 뒤로 익숙한 빅터의 쌍둥이 사용인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하비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 사이 또 감시를 붙였나 보군.”
하비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허둥지둥 머리를 푹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우리 주인님이 원래 좀 싸가지가 없어요. 죄송해요!”
자신의 주인을 깎아내리는 집사는 처음 봤다. 그것도 귀족 가문에서.
하비가 놀란 얼굴로 보자 쌍둥이 중 좀 더 온화한 인상의 베타 남자가 집사의 정수리에 손날을 꽂았다.
“레나. 그 말은 좀 심하지 않나.”
“아얏! 알았어요. 주인님한테 이르지나 마요.”
레나라. 남자인데 이름을 여성형으로 썼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하던 하비는 집사의 다음 말에 크게 어깨를 흠칫했다.
“그리고 어차피 공식 연인으로 선언하셨으니까. 제가 스터스 경과 함께 있다 한들, 누가 봐도 이상하지는 않잖아요? 이미 사교계에서는 소문이 파다하다구요.”
“어떤……소문?”
하비가 차마 알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하비의 문드러진 속을 모르는 집사 레나가 해맑은 얼굴로 답했다.
“두 분이 다른 귀족 분들이 보시는 앞에서 키스 하셨다면서요!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났다니까요? 벌써부터 두 분 중에 누가 아래인지……, 읍!”
참다 못한 쌍둥이 중 알파 쪽이 팔을 뻗어 집사의 입을 틀어막아 주었다.
“정신차려, 레나. 지금 스터스 경 앞이다.”
“…죄송합니다.”
하비는 클럽도 아니고 사교계에서, 그것도 귀족 영애들이 어째서 이런 심란한 화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족으로서 알파끼리의 두 남자가 사귄다는 건 입에 담지도 못할 추악한 짓거리 아닌가?
“우아한 귀족 영애들이 좋아할 만한 화젯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하비의 말에 빅터의 집사 레나가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모르는 말씀을 하시네요. 귀족 영애 분들이 그런 걸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알파 남자들끼리의 금단……읍읍!”
이번엔 쌍둥이 둘이 한꺼번에 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
빅터가 오라고 했다고 바로 갈 필요는 없었지만, 하비는 그의 집사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쌍둥이를 물리고 나서 하비는 레나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나가 주변을 살피더니 하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집의 불쌍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드릴게요.”
“무얼?”
“그냥. 여러 가지, 다요.”
그때 희미하게 나스타의 알파 페로몬이 섞여 느껴졌다. 하비가 반사적으로 경계하자 그가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혹시 나스타의 페로몬을 맡으셨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하비를 보며 레나는 쑥스러이 미소지었다. 전에 하비의 목에 검을 찍어눌렀던 그 알파 여자가 바로 레나의 연인이었다.
“제가 그 사고뭉치의 오메가랍니다. 좀 험악하긴 해도, 착한 아이에요.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여자가 알파, 남자가 오메가인 커플은 비교적 흔했다. 놀라워 할 것도 아니라 하비는 선선히 수긍했다.
하비는 해적 납치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마음 속 가책이 컸던 지라 하비는 해적 사태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꽤 많았다.
레나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 납치 사고로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미안한 일이군. 그때 더 적극적으로 구조 활동을 했어야 했는데. 우리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한다.”
귀족인 하비가 허심탄회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자 레나는 깜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저는 스터스 경에게 유감 없어요. 지켜보다 보면 알겠거든요. 저기 복수에 미친 인간들은 보이지 않겠지만…….”
레나는 보이지는 않지만 잘 따라오고 있을 쌍둥이를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주인님에게 당하면서도 끝까지 그 회계사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하셨다죠? 전 그걸로 충분해요.”
하비가 의외라는 눈길을 레나에게 던졌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레나는 떨어지는 해를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어머니는 누군가의 생명 앞에 제 비극을 삼킬 줄 아는 사람은 믿어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저는 스터스 경을 믿어요.”
누군가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도 되는 걸까. 믿음을 받아도 괜찮은 걸까. 하비는 알 수 없었다. 어두워지는 하비를 보며 레나가 밝게 웃었다.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소소한 것 정도는 알려드릴게요. 뭐가 궁금하신가요?”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만 말해줘. 혹여 기밀이라 위험해질 수 있는 문제는 말하지 말고.”
“이것 봐요. 친절하시다니까.”
미소 지은 그에게 하비가 물었다.
“바르뎀 경이 첫 러트 때 겪었던 게 대체 뭐였지?”
“바르뎀 경이 첫 러트 때 겪었던 게 대체 뭐였지?”
“아…….”
머뭇대는 레나를 보고 하비가 재차 말했다.
“곤란한 거면 다시 말하지만 말 안해도 돼.”
“그런 건 아니지만, 주인님이 가엾어서요.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방금 전까지 싸가지가 없다는 둥 헐뜯던 집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인님은 알파치고 오메가의 페로몬을 잘 견디시죠. 왜 그런 줄 아세요?”
“아니.”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니냐는 말도 쏙 들어갈 정도로 레나는 진지했다. 동정심이 그득한 얼굴로 그는 천천히 과거를 풀어놓았다.
당시 빅터는 19살이었다. 그리고 빅터를 아끼는 해적 수뇌부가 자리를 비웠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하필 그때 첫 러트가 오고야 말았다. 그걸 본 평소 빅터를 몹시 마음에 안 들어하던 일부 해적들이 아예 작당을 했다.
[꼴에 사내 자식이라고, 러트가 왔네.]
[좋은 생각이 하나 났는데. 이거 어때?]
그들은 흥분된 몸을 주체 못하는 빅터를 한참 이나 방치했다. 그 뒤 거의 반 미쳐가는 빅터를 방에 가둬놓고, 굶주린 맹수에게 주는 먹이처럼 오메가 인질들을 던져 주었다.
고립된 곳에 빅터와 오메가들을 차례차례 욱여넣은 뒤 그들은 서로 돈내기를 했다. 빅터가 어떤 오메가를 고르겠냐는 내기였다.
빅터가 본능적으로 고른 첫 오메가는 우성 알파의 강렬한 페로몬에 이끌린 듯 몽롱한 눈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 냄새나는 방에서 이성을 잃은 채 시작한 것이 빅터의 첫 관계였다. 질척한 소리와 젖은 음란함이 좁은 방 안에서 서서히 퍼져나갔다. 그 오메가는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몸이 가늘며 키가 컸다. 게다가 밤색 머리에 밤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었다.
내기에 진 해적들과 이긴 해적들 사이에서 희비가 갈렸다. 진 해적들은 돈을 잃었다는 분노를 빅터에게 돌렸다.
[저 새끼……! 가만 두지 않겠어.]
그들은 빅터와 관계를 막 끝낸 오메가를 끌어내려 했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빅터가 그 오메가를 지키려고 막아섰지만 수적으로 너무 열세라 오히려 얻어 맞았다.
[사, 살려주세요, 히익!]
그 오메가가 울면서 필사적으로 빅터의 발목을 잡았다. 눈 위가 터져서 흐르는 피 때문에 빅터는 시야가 붉었다. 그가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였다.
[그만해, 개새끼들아…….]
빅터는 맞아서 너덜너덜해진 채로도 그를 구해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푸욱!
해적들이 그가 보는 눈 앞에서 첫 관계를 가진 오메가를 검으로 찔러 죽였다. 갈비뼈가 우드득 부서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찌르고, 그 오메가가 경련을 일으키자 잔인한 얼굴로 한 번 더 찍었다.
빅터의 발목을 휘어잡았던 가느다란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마르고 하얀 가슴에서 엄청난 피분수가 솟았다. 이 작은 몸에서 이토록 많은 피가 흐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빅터는 멍한 눈으로 시체가 된 그를 내려보았다. 피에 젖은 머리칼이 붉게 변해 있었다.
[으악!]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제발……!]
구석에 숨은 오메가 인질들이 피비린내에 울부짖었다.
첫 러트라 이성이 거의 없는 가운데서도 빅터는 코끝을 스치는 피냄새를 맡고 반응했다. 그의 녹색 눈에 이채가 생겼다. 극도로 분노한 것이다.
[지금…누굴 죽인 거야?]
방금 관계를 가진 그 밤색 머리 청년이 죽은 것을 알고 빅터가 해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우락부락한 덩치 큰 해적에게 배를 차이고 피를 토했다.
[커헉!]
해적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 빅터를 노려보며 피 묻은 칼로 위협했다.
[네가 고른 오메가는 다 죽을 거야. 알겠어? 저 좁아 터진 방에서 러트가 끝날 때까지 한 번 잘 참아보라고.]
결국 그는 죽을 것 같이 힘든 가운데서도 성욕을 참으려 했다. 자신이 붙들면 그 오메가는 죽는다. 아는데도 아직 미숙한 때라 인내심에 한계가 있었다.
정상적인 첫 러트는 보통 일주일 지속되었다. 오메가들과 함께 갇힌 채 이틀이 넘어가자 빅터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오메가가 죽어나갔다.
빅터는 점점 미쳐갔다. 세 번째 오메가가 죽고 나서, 빅터는 선택했다.
아예 자신을 방 안에 묶어두기로.
옷을 찢어서 밧줄처럼 만든 빅터가 다른 오메가에게 부탁했다.
[날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줘.]
빅터는 남은 기간동안 좁고 어두운 방에서 러트를 버텼다. 오메가들의 강렬한 페로몬 폭풍 안에서.
더욱이 오메가들도 해적의 인질이라는 두려움에 점점 이성을 놓고 페로몬을 절제하기보다 방출 하고 있었다. 도저히 보통 알파가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버텼다.
겨우 풀려난 것은 돌아온 해적 수뇌부가 빅터를 발견했을 때였다. 반쯤 제정신이 아닌 빅터를 풀어준 그는 빅터를 이 지경으로 만든 해적들을 본보기로 처형했다.
일련의 소동 속에서, 빅터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첫 관계를 가진 오메가도 눈 앞에서 죽고, 그 끔찍한 걸 어떻게 버티셨는지 저는 상상도 안 가요.”
쓸쓸한 레나의 말을 마지막으로 빅터의 첫 러트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하비는 할 말을 잃고 그 참상을 조용히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해적들이 잔인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사람을 몰아넣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주머니 속에 불룩하게 들어 찬 황금 브로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아까보다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몰랐어…….”
모르는 것도 죄라고, 언젠가 그의 친구인 반 로투스 경이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몰랐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아버지가 했던 일들, 가장 친한 친구가 가졌던 열등감, 빅터가 겪어야 했던 일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지옥에서 죽어가야 했던 일들까지.
레나가 다시 목소리를 밝게 바꾸어 상냥하게 말했다.
“모르는 게 스터스 경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다구요. 신도 아니고.”
하비는 따뜻한 말에 피식 웃었다. 어쩐지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신이 아니니까. 인간이니까,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마음 속에서 스산한 느낌을 주는 어떤 찜찜한 덩어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모를 수도 있지만, 내가 알아야 했던 것들이 아닌가.’
복잡한 심경으로 하비는 문득 생각난 것을 레나에게 물었다.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지?”
레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떤 거요?”
“내가 끝까지 회계사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다는 거.”
그건 신약 때문에 히트를 맞은 시간대의 일이었다. 첫 히트 때 빅터가 분명 사용인들을 물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빅터의 성격에 주변에 떠벌리고 다녔을 리는 없다.
하비가 의심스럽게 그를 보자 레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꼬았다.
“저……, 그……, 제가 귀가 많이 밝은 편이라…….”
하비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다 들었다는 건가.”
“다는 아니에요! 아닙니다! 지극히 일부만…!”
이번에도 제 살을 깎아먹은 빅터의 집사는 차라리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버렸다. 하비가 걱정이 된 그가 빅터의 방 근처에서 알짱대며 소리를 주워들었다는 걸 알면….
‘경을 치겠지. 근신이 뭐야, 주인님한테 죽을 지도 몰라.’
더군다나 나스타도 한 소리 할 것이다. 왜 자꾸 쓸데없는 일이 끼어드냐고 말이다.
하비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내가 모르는 게 뭐가 더 있지?”
레나가 콧잔등을 손으로 훑었다.
“그건 스터스 경이 무얼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우문현답이었다. 하비는 장고 끝에 마지막으로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의문을 꺼내들었다.
“라힌 스터스 전의원이 해적과 사적으로 접촉한 적은 없나?”
지금와서 궁금해진 사안 중 하나였다. 빅터와 그의 사용인들이 이렇게까지 라힌 스터스를 증오하는데는 분명 다른 이유도 있을 거라 판단해서였다.
하비의 물음에 레나는 양 손을 허공에 빙빙 흔들며 격렬하게 부정했다.
“그, 그런 거 없었어요!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그, 그 분이 그, 그랬을 리는 없잖아요? 스터스 가의 명예로운 귀족이신데.”
자꾸만 혀가 꼬이는 자신이 원망스러운지 레나가 울상을 지었다. 격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하비는 의심스럽게 그를 보았다.
하지만 더 캐물으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라 하비는 포기했다. 알아내려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으니까.
‘이제부터 시작인 건가.’
하비는 불쑥 비밀의 방에 있을 재무 회계사가 떠올랐다. 정신없이 보낸지라 그에게 환기가 잘 되는 좋은 방을 내준다는 걸 잊었다.
“잠깐 집에 들렀다가 갈테니, 먼저 돌아가.”
“예? 아니,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저희가 모셔다 드릴게요.”
조용히 따라오고 있던 쌍둥이 사용인들이 그 소리에 한탄했다. 마부 역할을 자주 하는 쪽인 알파는 당돌한 집사의 말에 그를 지긋이 노려보기도 했다. 누구 마음대로 자기들까지 한데 묶어서 모셔다 드린다 만다 하는 건지.
“왜요. 제가 못할 말 했나요? 이제 우리 주인님의 엄연한 공식 연인이신데!”
레나도 지지 않고 그들을 마주 노려보았다. ‘공식 연인’ 이란 선포에 삐끗하긴 했지만, 지켜보던 하비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신경전에 웃었다. 그가 레나를 말리며 백마의 고삐를 살살 끌어당겼다.
“괜찮아. 말도 있고.”
하비가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다. 다른 귀족의 집사에게 할 짓은 아니라 얼른 손을 거두었지만. 하비는 동생이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그와 이야기를 하던 중 저도 모르게 후드도 벗을 정도로 몰입했다.
내 편이 없는 상황을 너무 오래 버텨서, 반가운 걸지도 모른다. 빅터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집착과 괴롭힘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진정한 편이 없었다. 스터스 가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동시에 고립된 외딴 성이었다.
그때 하비는 주변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휙 돌려 출처를 쫓자 시선들은 마치 불 맞은 바퀴벌레처럼 싸악 사라졌다.
대부분 여인들이었고, 귀해 보이는 드레스를 두른 것을 보니 귀족 영애들인 듯 했다. 저들끼리 수군거리던 그들은 하비와 눈이 마주치자 부리나케 호들갑을 떨었다.
아까 레나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모르는 말씀을 하시네요. 귀족 영애 분들이 그런 걸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알파 남자들끼리의 금단…….]
금단, 그 뒤로 이어질 말들이 뭐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 하비는 딱딱한 얼굴로 말을 타고 집으로 달렸다. 하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하비는 재무 회계사에게 괜찮은 방을 내주라는 명부터 내렸다. 그런데 씻으러 들어가려던 차에, 집사가 머뭇대며 말을 걸었다.
“저……, 주인님?”
“왜?”
말을 하고 나서도 한참 눈치를 보는 것이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하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짓은 바르뎀 경이 짓궂은 장난을 친거다. 신경쓰지마.”
정확히 짚은 모양이었다. 집사가 눈에 띄게 안도하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휴……. 그럼 그렇지. 정말 걱정했지 뭡니까. 그럼 헛소문이라고 어서 공표하시는 게 어떨까요?”
하비는 아무렇지 않게 뒤돌았다. 어차피 소문을 정정한다 한들, 이미 믿고 싶은 자들은 그리 믿을 것이다. 사람들은 2차 소문에는 크게 관심 없고, 전후를 따져가며 사실 여부를 파악하려는 자도 드물었다.
무엇보다 빅터가 가장 큰 변수였다. 그는 하비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명해도 마음 먹은 이상 끝까지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테니까. 그쪽으로는 도가 튼, 수완 좋은 남자였다.
“내버려둬. 마음대로 떠들라고 해.”
집사가 놀란 얼굴로 다급하게 하비를 붙들어 세웠다.
“주인님! 이상하시네요. 저들이 스터스 가의 명예를 더럽혔는데,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비는 집사에게 붙들린 팔을 천천히 떼어내며 냉소적으로 웃었다.
“이제 잘 모르겠군. 가문의 명예 라는 거.”
그리 잘나고 깨끗한 것이었는지, 이제 와선 더욱 알 수 없어졌다.
-- 붉은 왈츠 --
빅터는 하비를 기다리는 동안 업무를 보고 있었다. 시 자체에서 처리해야 할 서류에, 바르뎀 가의 차기 가주 명목으로 해야 할 일, 더불어 진행하고 있는 개인적인 투자 사업 등 할 일이 태산이었다.
의자에 앉아 기계적으로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던 빅터는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시간을 확인하니 이 상태로 벌써 내리 2시간을 한번도 안쉬고 있었다. 차가운 테이블에 뺨을 기대고 엎드리며 빅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아다니는 게 낫지, 이것도 못할 짓이네.’
며칠 째 잠도 거의 못자고 처리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빅터에게 차기 가주 자리를 배치해 준 현 바르뎀 가의 가주는 그 뒤부터 모든 일을 빅터에게 떠넘겨 버렸다. 그래놓고 본인은 전세계를 유랑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빅터가 이를 갈며 지금쯤 이국의 어느 미녀와 노닥거리고 있을 바르뎀 가의 가주이자 외삼촌을 떠올렸다.
‘조금만 참자. 곧 끝날 거니까.’
그가 복수할 대상은 스터스 가문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스터스 가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현 가주인 하비 스터스가 연상되었다.
‘정말 안 올 생각인가.’
사실 오라고 한다 해서 하비가 진짜로 올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집사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 문제였고, 하비에게 일말의 빌미를 주었다. 그에게 마음 속의 동요와 혼란, 균열을 보여 버린 것이다. 그 영악한 사람이 자신이 망설인 것을, 틈이 생긴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지옥을 버티게 해 준 것도 하비지만, 그 곳에 있게 한 건 그 사람의 아버지, 게다가 편지로 농락한 것들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빅터의 마음속을 휘감고 있었다.
‘그 망할 편지는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이미…….’
빅터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분명 그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 오랜 시간을 견뎌냈다. 그런데 돌아와서 막상 다시 만나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한 끗 차이로 증오 이상의 무언가가 빅터의 새까만 심장을 뒤덮고 있었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미약하게나마 회생했다.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하비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수록, 그 이상한 이물감은 크기를 더해갔다. 격렬한 증오 위로 얹어진 묘한 두근거림은 거북하기도 헸지만, 한편으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
‘기회를 주겠다는 말까지 한 번 꺼냈으니, 이제 라힌 스터스 일만으로는 무리일지도.’
빅터는 이제 협박만으로 하비를 묶어두는 건 큰 효용이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하비의 속에서도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공개적으로 연인 사이로 못박아 버렸다. 그러면 하비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쉽게 나타나지 못할 테고, 더 편하게 그를 속박할 수 있으니까.
‘그 자식을 가지고 노는 건 나 한정이라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빅터가 제 머리를 손으로 마구 흐트러뜨렸다. 금발이 그의 길고 굵은 손가락에 걸려 삐져 나왔다.
‘왜 돌아와서도 벗어날 수 없는 거지.’
빅터는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크게 다짐한 것이 있었다. 깔끔하게 복수 다운 복수만 하고 이제 하비 스터스를 털어버리겠다고. 새 삶을 살겠다며 희망찬 포부를 가졌는데, 아직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각하고 있는 게 이 모양이다. 그 반반한 얼굴을 보기만 해도 짜증나고 화가 나는 걸 보면 하비를 싫어하는 건 분명한데, 왜 이 꼴인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제길…….’
돌아버릴 것 같다. 빅터는 오락가락하는 제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사람을 증오하는데, 한편으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자꾸 생각이 나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빅터가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고풍스러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이게 다 수면 부족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 의사 놈이 여기저기 떠벌리지 말아야 할텐데.’
일이 바빠서 못 잔 것도 있지만 원래도 잠을 거의 못 잤다. 결국 빅터는 심각한 수면 장애로 그쪽 방면으로 저명한 의사도 찾아가 봤다.
그 중 한 의사의 말로 빅터가 어릴 때부터 겪은 생존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는 했다. 그 일들이 정신까지 영향을 미친 탓이라고 말이다.
빅터의 첫 러트가 19살 첫 발현으로 꽤 늦었던 것도 스트레스 때문이라던 의사의 말이 세트로 묶여 떠올랐다. 보통은 사람마다 차이는 있어도 15살이 되면 형질이 발현되곤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빅터가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아늑한 잠이 몰려왔다. 첫 러트 때 가장 먼저 골랐던 오메가가 누군가를 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들었다.
빅터는 눈을 감고 급격히 곯아떨어졌다. 며칠만에 간신히 드는 잠이었다.
잠들기 직전에 했던 생각 때문인지, 하필 그는 해적선에 있을 때를 꿈꾸었다. 다시는 떠올리기도 싫은 그 악몽이 빅터를 휘감았다.
오메가들의 비명소리와 강렬한 페로몬 폭풍 속에 놓여 있었다. 좁은 방에서, 빅터는 또다시 묶여 있었다. 양 손을 스스로 묶은 채 고통을 견디는 중이었다.
“헉……. 허억…….”
인내하느라 땀이 끊임없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이 너무 뜨거웠다. 가닥가닥 타서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누가 제발 이 지옥에서 꺼내 줬으면…!
사막에서 물 한 모금 안 먹은 채 뜨거운 태양 아래 헤매는 기분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갈증에 목이 타서 헐떡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천천히 빅터에게 다가왔다.
‘누구지?’
다른 오메가들은 빅터에게 붙들리면 해적에게 살해당할까봐 멀찍이서 다가오고 있지도 않았다. 19살의 앳된 빅터가 긴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를 올려보았다. 시원한 느낌의 페로몬을 지닌 남자였다. 게다가 어두운 안개 같은 것이 가면처럼 남자의 코까지 내려와 있어서 누군지 식별하기가 힘들었다.
남자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숨 막히고 뜨거운 페로몬 폭풍을 그 남자의 시원한 페로몬이 조금이나마 가로막아 주는 것 같았다.
그리운 향이었다. 갑자기 속에서 왈칵 뜨거운 것이 솟았다. 이 사람을 안고 싶다. 미친 듯이 안고 싶다.
빅터의 녹색 눈에 이채가 서리고, 흥분이 차올랐다. 묶인 팔을 떼내버리려는 것처럼 빅터가 악을 썼다.
덜컹덜컹!
잠들었던 다른 오메가들이 깨어날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 사람은 빅터에게 조용히 하라는 것처럼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얌전해진 빅터를 그가 빠른 손짓으로 풀어주었다.
풀려난 빅터는 그 사람을 짐승처럼 덮쳤다. 넘어진 남자 위로 올라탄 빅터가 그의 옷을 마구 찢었다. 단단한 육체였다. 찢긴 가슴 사이로 탄력 있는 가슴과 갈색 유륜이 드러났다. 노출이 어색한지 어깨를 움츠리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왜 이 몸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짧은 의문이 끼어들었지만 빅터는 개의치 않고 정신없이 그 탐스러운 몸을 취했다.
빅터가 혀로 유륜을 굴리자 그가 신음을 흘렸다.
“흐으…….”
그는 두꺼운 팔을 빅터의 등에 얹고는 다리를 벌렸다. 적극적이었다. 극도로 흥분한 빅터가 어느 새 나체가 된 남자의 구멍 안에 페니스를 들이밀었다.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가 언제 바뀐건지, 바지가 언제 사라진건지 몰라도 꿈이니까 가능하다고 여겼다.
‘꿈이니까?’
순간 빅터는 꿈인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깨고 싶지 않았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빨리 이 갈증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빅터는 결국 급하게 자신의 페니스를 남자의 뒷구멍으로 밀어넣었다. 전희 같은건 없었다. 어차피 꿈이니까, 괜찮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크흑…!”
넣는 순간 깔린 남자가 낮은 울음을 내었다. 넣기 전에도 미칠 것 같았는데, 막상 넣고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시원한 페로몬과는 달리 뜨겁고, 축축하고, 아늑했다. 이미 이 구멍에 여러 번 넣어본 것 같은 익숙함도 있었다.
‘너무 좋아….’
몽롱해진 빅터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더 깊이 쑤셔 넣었다. 더 듣고 싶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빅터를 안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찰팍, 찰팍!
남자의 허벅지가 흔들리고, 뒷구멍에서 애액이 넘치도록 흘렀다. 액이 구멍 속에서 미끈거리며 빅터의 페니스가 더욱 원활하게 출입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오메가였던가? 빅터는 허리를 밀어넣으면서도 의아해 했다. 페로몬이 오메가의 것이 아닌데, 어째서 오메가 같은 몸을 가진건지 알 수 없었다.
더 이상한 건 오메가의 페로몬이 아닌데 왜 이렇게 발정이 나서 박아대고 있는 자신이었다. ‘꿈이잖아. 뭘 생각하고 있어.’
빅터는 생각을 던져버렸다.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인내심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헉……!, 허억!”
남자는 이제 자지러지며 허리를 흔들고, 빅터의 것을 꽉꽉 물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는 참인지 제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빅터는 남자의 손을 떼어내고 허겁지겁 입술에 키스했다. 혀가 들어가자 멈칫하던 남자가 천천히 자신의 혀를 빅터의 것에 감았다. 처음인 것처럼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빅터가 속으로 웃었다. 이 덩치 큰 남자가 귀엽게 느껴지다니.
“으음…!, 으븝, 윽!, 흑!”
빅터의 입술 때문에 남자의 신음이 갈라져서 나왔다. 더 느끼는지 구멍에서 나오는 애액이 늘었다. 순간적으로 확 조이는 구멍에 빅터가 절정에 달해 남자의 뒷구멍에 사정했다. 쏟아질 정도로 많은 정액이었다.
빅터는 손을 내려 남자의 다리를 더 벌렸다. 위로는 키스하고, 아래로는 정신없이 박던 빅터가 순간 온 몸을 정지시켰다.
뻣뻣해진 빅터가 이상한지 남자가 보채듯 정액과 자신의 애액이 섞여 흐르는 야한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빅터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 안 돼….’
그제야 이 사람을 취하면 해적이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든 것이다.
최악의 가정을 떠올린 순간, 꿈이 빅터에게 형벌을 내렸다. 슬슬 마무리를 짓고 자신을 인식한 인간을 내쫓으려 할 때, 꿈은 가장 잔인해졌다.
벌컥!
좁은 방문이 열리더니 비정상적으로 큰 사내 두엇이 들어왔다. 그들은 강제로 빅터의 아래에 있는 남자를 끌어냈다.
“그러지마! 제발! 그 사람은 제발…!”
절박하게 외치며 해적들의 발치를 붙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꿈이니만큼 해적들은 거의 괴물이었다. 해적들은 압도적인 힘으로 앳된 빅터를 찍어누르더니, 그대로 빅터와 관계하던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그런데 집요할 정도로 배만 공격해댔고, 남자는 필사적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 남자가 결국 피를 토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왜 배만 저렇게…? 안 돼!’
남자는 지독하게 하혈을 하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 빅터의 페니스를 수월하게 먹던 그 뒷구멍에서, 벌건 핏물이 비쳤다.
“악!”
남자가 아픈 듯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뒷구멍에서 결국 꾸물거리는 빨간 핏덩어리를 왈칵 쏟아냈다. 마치 살아있었던 무엇처럼, 처절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미약한 움직임도 곧 멈췄다.
남자의 움직임도, 동시에 완전히 멎었다. 죽은 듯 했다.
빅터의 눈에 믿기지 않는다는 놀람이 맺혔다. 그것은 곧 어마어마한 분노로 바뀌었다. 용건이 끝나자 해적들은 죽은 남자를 발로 툭툭 차서 마지막 확인을 하더니 미련없이 뒤돌았다.
빅터가 온통 피가 어린 몸으로 그들에게 달려들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흠씬 두들겨맞고 나가떨어졌다. 그 직후 해적 잔당들은 해적 수뇌에게 처형당했던 그때처럼 목이 댕강 잘리더니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쓰러진 빅터가 죽은 남자와 그가 쏟아낸 핏덩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빅터는 울음을 삼키며 이미 사라진 해적들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이 개새끼들아….”
죽은 남자의 얼굴을 가리던 까만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물기 가득한 눈으로 빅터는 남자의 시체나마 제대로 보기 위해 홉떴다.
검은 가면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빅터는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이건…, 뭐…….’
남자의 정체는, 하비 스터스였다.
이제 빅터를 완전히 퇴출하려는 듯, 꿈이 그를 무의식에서 바깥으로 거세게 밀어냈다. 붉은 물안개가 온통 끼더니 그 날의 좁은 방도, 죽은 남자도, 핏덩이도 모두 사라졌다.
빅터는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도란도란 말소리도 들렸다.
“왜 이러지?”
“또 악몽을 꾸시나 봐요.”
“깨워줘야 하나?”
“제가 깨울게요.”
“내가 하지.”
하비의 목소리다. 놀란 빅터가 눈을 떴다. 바로 눈 앞에 와 있는 손이 하나 와 있었고, 그가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탁!
하비는 손을 가까이 내밀었다가 빅터에게 잡힌 채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그러다 굳이 잡혀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닫고 빅터의 손을 뿌리쳤다. 왠지 불쾌해진 빅터가 떨떠름한 얼굴로 시간을 물었다.
“지금…몇 시?”
빅터에게 잡혔던 손을 이리저리 돌린 하비가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9시. 저녁 시간도 훌쩍 넘겼어. 경의 집사가 걱정하던데. 식사도 안하고 일만 한다고.”
잠깐 잔다는 게 몇 시간을 자버렸다. 가물거리는 빅터의 시야로 하비의 진짜 얼굴이 보였다.
‘낭패군.’
점점 정신이 들자 빅터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꿈을 꾼 직후가 가장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곤하고, 힘들었다. 심신을 가다듬고 갈무리하는 시간이 늘 필요했는데 하필 가장 약해져 있을 때 하비가 나타난 것이다.
‘왜 지금 와선.’
빅터는 하비가 멀쩡한지 저도 모르게 다시 확인했다. 벌건 피나 고통스러운 기색 따윈 한 점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멀뚱멀뚱 빅터를 보던 하비가 이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보나?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정신 차려.”
빅터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비의 태도에 피식 웃었다. 개꿈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예전처럼 그를 짓누르는 악몽일 뿐이다.
‘봐. 짜증나잖아.’
현실의 하비는 보자마자 화가 치솟는 존재였다. 여전했다. 달라진 것은 없다. 관계는 여전하고, 빅터는 아직도 하비 스터스에게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빅터는 불안하게 쿵쾅대는 심장은 멎질 않았다. 그가 입으로 토해내던 그 벌건 피와, 뒷구멍으로 어쩔 수 없이 쏟아냈던 꾸물대는 핏덩어리가 머릿속에서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빅터는 이 더러운 기분이 진정될 때까지 하비를 멀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기분 나빠할 말을 일부러 툭툭 던졌다.
“오란다고 진짜 올 줄은 몰랐는걸. 이렇게 개처럼 얌전히 잘 따를 줄 알았으면 일찍부터 이래볼 걸 그랬어.”
하비가 대번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빅터는 밤색 눈동자가 경멸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바르뎀 경이 우리 가문의 치부를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는 꼴은 차마 못 보겠어서.”
역시 하비와는 이런 것이 어울렸다.
“바르뎀 경이 우리 가문의 치부를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는 꼴은 차마 못 보겠어서.”
역시 하비와는 이런 것이 어울렸다. 웃기지도 않는 악몽으로 걱정하는 것 보다는.
‘걱정?’
빅터는 방금 든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하비의 말대로 꿈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어 제정신이 아닌지도 모른다. 떨쳐버리려고 빅터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뚝뚝 꺾으면서 비아냥댔다.
“신약이 아주 잘 드나본데. 멀쩡히 잘 돌아다니고.”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하비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것 아니었나?”
이번엔 빅터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 스터스 경을 불렀을 때는 이유가 하나 밖에 더 있겠어? 알면서 온 건 아니겠지?”
하비는 길게 침묵했다. 빅터의 말이 맞다. 그런데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점점 스터스 가의 집착에 환멸이 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대가 공들여 쌓아온 하얀 저택을 제 손으로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빅터의 직감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알파와 사귀는 것쯤은 잠깐 화제가 되다 잊혀질지 몰라도 ,스터스 가를 지탱해 온 도덕적인 토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건 다른 이야기다. 하비는 스스로에게 당부했다. 다짐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니까 온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하비가 물끄러미 테이블 아래에 놓여 있을 빅터의 손을 보았다. 아까 잡혔던 손이 지나치게 뜨거웠다는 것 따위를 왜 신경쓰고 있냔 말이다.
그때, 옆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던 레나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눈치 빠른 집사가 고개를 숙이더니 방 밖으로 홀연히 빠져나갔다. 설마 밖에서 또 듣고 있지는 않겠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깥을 보던 하비는 담담한 빅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우리 집사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몰라도 아주 잘 길들였어. 방금도 경을 도와주고 나가지 않았나.”
“도와줘? 나를?”
빅터가 피식 웃더니 레나가 나간 쪽을 턱짓했다.
“눈치 못 챘어? 흐름을 끊고 가버렸잖아. 하여간 누가 주인인지. 덕분에 나도 정신 차렸지만.”
빅터의 턱짓대로 하비도 얼결에 문을 돌아보았다.
빅터는 하비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숨을 트고 생각다운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하비의 밤색 눈동자가 닿으니 아까 전 그 꿈에 계속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섞일 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는군.’
냉정하게 정리한 빅터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돌아온 하비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그는 하비의 알 수 없는 속을 헤집고 들쳐볼 생각이었다. 주제로는 하비 스터스가 썼던 그 편지가 적절했다. 열받아서 나중에 불태워버릴까 하다가 참은 것이 다행이었다. 언제든 다시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편지, 경이 쓴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거짓말한 거라는 것도.”
뜨끔한 하비는 공격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빅터가 자신의 집안을 들쑤시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 편지의 진실은 대대로 이어오던 잔혹한 전통과도 이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알아도 안되지만, 빅터 바르뎀은 더더욱 안된다. 자유로운 무역 상인이기도 한 빅터는 스터스 가의 광적인 집착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비웃기만 할 것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고리타분하고 비이성적인 가문이라고 모욕이나 안 했으면 다행이다. 고작 이런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몸도 기꺼이 팔았냐는 비아냥을 빅터에게 들을 바엔,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게 낫다.
비참한 심정을 숨기고 하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명백한 증거를 보고도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건 바르뎀 경의 버릇인가?”
기분 나쁠 수 있는 하비의 말에도 빅터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비는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자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네가 숨기고 있는 게 과연 뭘까.’
피식 웃은 빅터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직관. 이걸로 투자를 성공시켜 왔고, 덕분에 스터스 경을 내 집까지 불러올 수 있게 되었지.”
빅터가 벌떡 일어나서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마치 예전 어릴 때의 그 자선 파티처럼. 그리고 하비는 그때처럼 무덤덤한 눈길로 그를 보고 있었다.
‘또 그 눈이군.’
오기가 생겼다. 언제나 그랬다. 사람을 깔보는 것도 아닌, 아예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저 눈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속에서 부글부글 뜨거운 곳이 끓었다.
빅터가 접대용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있는 하비에게 다가가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하비의 시선이 따라왔고, 동시에 하비는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빅터는 그것을 보고 잠시 눈을 찡그렸지만 곧 평정을 찾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 말야.”
멀찍이 떨어진 거리를 빅터가 자리를 옮겨 가까이 당겼다. 하비가 불편해하며 다시 엉덩이를 떼려는 순간, 빅터는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짓눌렀다. 꼼짝달싹 못 하고 의자에 붙어버린 하비에게 빅터가 상체를 기울이고 가까이 속삭였다.
“기회를 주기도 했는데, 왜 굳이? 뭘 숨기고 싶어서?”
하비가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탔다. 혼자 감내하고 숨겨왔던 비밀들이 그의 속을 어지럽혔다. 가장 말하지 말아야 할 적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그는 식은땀이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다. 스터스 가의 유구한 전통과 명예에 대한 집요함을 혼자 짊어져 왔다. 온 몸을 짓누르는 그 무게가 무겁고 아파도 한 번도 앓는 소리 한 번 내본 적 없었다.
지금 와서 이해해 보겠다는 빅터의 말을 정말 믿고 싶은 건가.
‘말도 안되는 소리.’
자신을 이해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있을 리가 없었다. 신뢰할 수 없는 자를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알 수 없는 열기와 갈망으로 하비의 입이 달싹거렸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이 말이 하마터면 목 언저리에 걸려있다가 위로 튀어나올 뻔 했다. 하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눈 앞의 미남자는 언제든 수 틀리면 잡아먹을 수 있는 포식자다. 괜찮다고 하고 있지만 절대 그럴 리 없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하비는 빅터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편지를 내가 썼든, 아니든 경에게 중요하지도 않잖아. 그저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던 거 아닌가?”
빅터의 눈이 길게 늘어지며 잔인해졌다. 하필 하비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그 말은 빅터가 믿는 주변인은 해도 되지만, 스터스 가의 사람이 해서는 안 된다. 그를 지옥에 밀어 넣은 그 핏줄만큼은, 절대로.
빅터는 가장 화가 났을 때, 가장 냉정해졌다. 그게 그의 무서운 점이었다.
“아아, 그랬지.”
하비는 허벅지를 짚은 빅터의 손에 너무 큰 힘이 들어가 통증이 일었다. 다리를 부러뜨릴 것처럼 강한 누름이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빌미를 주는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스터스 경도 즐기고 있는 건가?”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면 무슨 짓을 당할지 뻔히 알면서 제 발로 오지는 않겠지.”
빅터는 극도로 흥분했지만 조용히 인내하고 억누르고 있었다.
‘엄청나군.’
하비는 그 기운에 짓눌려 숨쉬기도 힘들었다. 확실히 우성 알파는 다르다. 흔치 않은 경우라, 하비도 사실 직접 본 우성 알파는 거의 없었다. 빅터를 포함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지만, 여느 때처럼 버텨서 압박을 이겨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여태껏 참은 것도, 지금 온 것도, 전부 경이 우리 가문의 치부를 폭로하겠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 뿐이다.”
떨떠름한 얼굴로 하비가 답하자 빅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이제 라힌 스터스의 위상이 하늘같이 높은 분에서 치부로 조정된 건가? 그거 하난 속이 시원하군.”
“…….”
빅터에게 또 말려들었다. 하비는 어떻게든 스터스 가를 흠집내려고 안달난 남자에게 자꾸 내부의 흔들림을 비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빅터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꽉 누르고 있었다. 빅터의 손을 흘끗 내려온 하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경이 한 말대로 해. 하던 대로만 하라고.”
어차피 협박으로 유지되어 온 관계였다. 하비는 빅터가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사람 뒤흔드는 것을 경계했다.
“내가 하던 대로라…….”
하비는 생각에 잠긴 빅터를 보고 입술을 물었다. 빅터가 이쯤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벗어, 아니면 넣어. 약을 강제로 먹이고 나서 구멍을 넓히라며 뭔가를 던져주는 경우가 또 생각나서 하비가 수치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빅터는 전혀 예상 밖의 말을 던졌다.
“답답한 집 말고, 밖에서 늦은 저녁을 먹을까 하는데.”
하비의 허벅지 위로 손을 천천히 올리면서 빅터가 유혹하듯 말했다.
“혼자 가기 싫어서 말야. 동행해 주었으면 해.”
하비는 야릇한 손길에 흠칫 떨었다. 강압적인 말투도, 강제하는 행위도 전혀 없었다. 요약하면 나가서 식사나 한 끼 하자는 권유에 가까웠다.
갑자기 바뀐 태도에 하비가 어리둥절해 했다. 바깥에서나 보여주는 신사적인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기가 막힌 하비가 입을 열려다가 금방 닫았다.
“아, 토달지는 말고. 경에게 선택권은 없으니까.”
그럼 그렇지. 하비는 익숙한 대화에 쓰게 웃었다. 빅터와는 이런 식의 대화가 역시 편하다.
하나 묘한 것은 허벅지를 짚고 있는 빅터의 손이 아직도 뜨겁다는 것이었다.
***
한바탕 소란이 있은 뒤, 하비는 빅터와 함께 그의 저택에서 나왔다. 소란이란, 빅터의 사용인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은 같이 외출을 한다고 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놀란 듯 했다.
사용인 몇 명이 껄렁한 자세로 툭툭 내뱉었다.
[생각보다 빨리 나오셨네요?]
[주인님, 너무 앉아서 일만 하니까 아래 쪽도 일을 못하는 겁니다.]
마중을 하러 나온 집사 레나가 그들을 노려보았고, 같이 나온 나스타는 배를 잡고 웃었다.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지 못한 하비를 끌고 빅터가 한마디 남겼다.
[다녀올때까지 그 자식들 입 묶어놔.]
레나의 눈짓에 나스타가 신속히 움직였고,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다 뚝 끊겼다. 하비는 빅터의 저택 사용인들의 활력에 작게 웃었다. 예전에 그저 이 곳에 와서 바로 방에 틀어박혀 고문에 가까운 희롱을 받다보니 전혀 몰랐다. 죽어 있는 스터스 가에 비해 빅터의 저택은 늘 생활감과 정이 가득했다. 물론 하비가 들어온 순간 그런 분위기가 적대로 바뀌었지만.
“집사 성격이 참 좋더군.”
“레나? 우리 집 귀염둥이지. 말만 좀 건방지게 안 하면 좋겠는데, 그것도 직업병이라 어쩔 수 없을 거지만.”
하비가 의아하게 물었다.
“직업병?”
“몰랐나? 레나는 심리 상담사야. 공부도 꽤 열심히 했고. 물론 학비도 다 내가 지원했지.”
하비는 놀란 눈으로 빅터를 보았다.
“다들 멀쩡해 보여도 고장난 부분이 있어서, 삐뚤어진 놈들이 많아. 아까처럼 막말하는 놈들도 포함해서. 물론 능력은 인정하지만. 그런 놈들을 레나가 치료해 주는 거지.”
빅터에게서 들은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재능이나 능력이 있었다. 투덜대긴 해도 빅터는 그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고,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게 애정이 느껴지는 신뢰 주종관계라니.
하비는 자유분방한 빅터의 저택 분위기가 드디어 이해가 되었다. 스터스 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사용인들이 예전처럼 많아져도 빅터의 저택 같은 느낌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부럽군.”
빅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뭐?”
하비는 그 뒤로 입을 다물고 빅터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의 마음 속에서 진행되는 의문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었다.
하비 스터스는 여전히 구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세계는 크게 바뀌고 있지만, 그가 발을 담근 하얀 저택은 과거의 그늘 아래에서 오로지 옛것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스터스 가는 선한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독기를 내뿜으면서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서서히 말려왔다.
하비는 그런 방식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송두리째 바꿀 용기도 없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뼛속깊이 박제된 것들이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하비는 걸음을 옮기느라 흔들리는 빅터의 등을 지켜보았다. 오늘따라 그 등이 크고 단단해 보였다.
간단히 외출을 할 거라길래 말을 탈 줄 알았는데, 빅터는 굳이 마차를 이용했다. 당연히 쌍둥이도 따라붙었고, 그 중 알파 마부는 오늘따라 편안해 보였다. 하비가 다시 알파가 되어서 괴로울 정도로 강렬한 오메가 페로몬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는 거지?”
빅터는 대꾸 없이 너른 마차 구석에 있는 상자를 끄집어 냈다. 거기서 희안하게 생긴 가면 두 개를 꺼내 하나를 하비에게 던졌다. 얼결에 받은 하비가 두 눈이 뻥 뚫린 하얀 개 모양의 가면을 보았다.
“설마 이 밤에 가면무도회라도 가려고?”
“비슷한데, 더 좋은 곳이지.”
빅터가 가볍게 말하며 자신의 것을 썼다. 그의 가면은 검은색 표범이었다. 까만 범이 하비를 향해 홱 돌아보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바꿔줘?”
“아니. 됐어.”
한숨을 쉰 하비가 하얀 개 가면을 묵묵히 썼다. 어디까지 끌려갈지 이제 예상도 안 되었다. 단순히 외식을 하러 나가는 게 아니라 이건 본격적인 데이트에 가깝지 않은가. 빅터의 의중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알파 연인 선언을 하더니, 이제 그 콘셉트에 맞춰서 제대로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얼굴이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건 다행인가.’
밖에서는 연인 행세, 은밀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개보다 못한 취급. 차라리 똑같다면 적응하기 쉬울텐데, 태세를 바꾼 빅터가 더 어색했다.
하지만 어차피 이것도 효율적으로 궁지까지 몰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지금쯤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을 상처투성이 재무 회계사를 떠올리며 하비는 빅터가 저지른 잔인한 짓을 상기시켰다.
‘사람을 망가뜨리는데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놈이야.’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말이다. 하지만 사용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또 다정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 정확히는 스터스 가에게만 혹독했다. 적에게는 가차 없어 보이니까.
‘딱히 적이랄 게 있나. 나에게만 이겠지.’
하비는 무의식 중으로 빅터가 준 하얀 개 가면을 손으로 만졌다. 우둘투둘한 면 위로 긴 코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만져졌다. 하얀 개. 빅터의 수중에 떨어져 있는 하얀 저택의 개. 하비는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든 잊지 말라는 건가.’
창문 바깥을 보고 있는 검은 표범은 어떤 얼굴일지 알 수 없었다. 하비도 반대편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빅터가 돌아보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마차가 덜컹대며 튀자 앞을 보았다.
빅터가 말하는 가면무도회에 도착하자 이미 그의 마부는 비슷한 까만 개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다른 쌍둥이 쪽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가면이었다. 우아해 보이는 하비의 하얀 개와는 달리 음습해 보이는 까만 사냥개 가면이었다.
“이제 들어가 볼까.”
빅터가 하비의 팔을 정중하게 잡고 마치 연인처럼 입장했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던 하비는 그러지 못하도록 강하게 누르는 힘에 강제로 입구까지 끌려가다시피 했다.
입구를 지키는 노란 고양이 가면을 한 덩치 좋은 사내들이 그들에게 입장권을 요구했고, 빅터는 자연스럽게 품에서 황금빛 단추를 꺼내들었다. 그걸 표 대신 쓰는 듯 했다.
하비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동안 그들은 통과되었다.
무도회장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탁한 공기가 훅 끼쳐들어서 하비는 눈가를 구겼다.
‘무슨 냄새지?’
이를 눈치챈 빅터가 피식 웃고는 하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참아. 익숙해 질테니까.”
‘무슨 냄새지?’
이를 눈치챈 빅터가 피식 웃고는 하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참아. 익숙해 질테니까.”
그 알싸하면서도 눈가를 뿌옇게 저미는 공기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실내는 파란 고양이 가면을 쓴 사용인들이 와인과 온갖 음식을 가지고 나르고 있었고, 각양각색의 가면을 쓴 귀부인과 귀공자들이 가득 했다. 손에는 뿌연 공기의 정체인 듯한 기다란 장죽을 들고 끊임없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비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장죽을 물끄러미 보았다.
‘담배 향은 아닌데.’
웅성거림이 잠깐 멎었다. 여러 명의 시선이 대번에 빅터와 하비 일행에게 쏠렸다. 그들 중 가장 먼저 공작 가면을 한 영애가 다가와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하얀 팔목과 가느다란 어깨까지 드러낸 과감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 좋은 신참을 데려왔네? 오늘 밤에 함께 할 멤버야?”
빅터가 웃음기를 빼더니 하비를 붙든 팔에 힘을 주었다.
“여긴 외국인이라 이쪽 사정을 잘 몰라. 조심해 주었으면 하는데.”
공작이 눈을 반짝이며 하비를 아래부터 위까지 훑었다.
“어머, 그래? 마음에 들었는데. 네가 데려오는 외국인들은 ‘고객이니까’ 건드리면 안 되지. 아쉽네.”
뭐가 아쉽다는 건지 몰라도 공작 가면은 하비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하비는 훑었던 시선에 오싹함마저 느끼며 빅터에게 조용히 물었다.
“여긴 대체 뭘 하는 곳이지?”
“차차 알아갈테니 너무 조급해 하지마. 그리고 외국인 연기 잊지마. 외국어는 잘할테니 하나 설정해. 대충 장단 맞춰 줄테니까.”
하비는 한숨 쉬며 알았다는 고갯짓을 했다. 그 뒤로 붉은 오리, 까만 닭, 노란 물소 등 다양한 가면들이 그들에게 들렀다가 비슷한 질문을 하고 떠났다.
가면들이 하는 질문들을 종합해 추측한 하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이 곳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설마, 정보성 사교 클럽인가?”
“얼추 맞았어.”
빅터도 어느새 그 장죽을 입에 물고 있었다. 하지만 하비에게 권하지는 않았다. 하비도 딱히 그 기분 나쁜 연기를 직접 들이키고 싶지 않아서 먼저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구석에서 칩을 이용한 간단한 도박이나 큐대를 들고 하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비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갔다.
‘저기에 뭔가가 뜨나?’
높은 곳에 커다란 판이 붙어 있었는데, 2층 계단에서 사용인들이 끝이 넓적한 긴 장대를 이용해 빈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아직 예행 연습이나 준비만 하는 단계인 걸 보니 본격적인 것은 아닌 듯 했다.
귀족들이 몰래 모인 곳에서 어떤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라면, 가능성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하비가 언뜻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설마, 투기 목록?”
빅터가 연기를 내뿜으며 웃음지었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제야 정답이군.”
그렇다면 이곳에 반 로투스 경이 빠질 수가 없다. 귀족들의 정보를 취급하는 로투스 가에서 이런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가면을 써서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반이라면 목소리를 듣고 알 수도 있다. 더욱이 이런 장소에 거짓 연인 선언을 한 빅터가 함께 있는 것을 보이기 싫었다.
빅터가 두리번대는 하비를 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아니.”
얼버무리는 하비의 대답에 빅터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 변화를 모르는 하비는 또 다른 것을 신경쓰고 있었다. 아까부터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커다란 판 아래 있는 크고 빈 단상에도 눈길이 갔다.
“저기서 연극이라도 하는 건가.”
“글쎄. 그럴까.”
왠지 불퉁하고 불친절한 답변에 하비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곳을 계속 주시했다. 찜찜했다.
‘저 단상에 투기 목록들이 나오는 걸지도.’
예상 하면서도 이 떨떠름함은 마음 속에서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그때 회장 전체가 불이 꺼지고 어두워졌다. 자욱한 연기만이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고, 긴장한 하비가 주변을 경계했다. 어둠 속에서는 항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경계 하나 없이 여유롭게 자리를 지키며 하던 것을 하고 있었다. 뭔가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하비는 그의 긴장을 감지한 빅터가 작게 웃는 것을 듣고 기분 나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러다 빅터가 손을 잡는 것을 느끼고는 퍼뜩 아래를 보았다. 하비는 여느 때처럼 불쾌한 듯 말했다.
“뭐하는 거야.”
빅터는 손을 뿌리치려는 하비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리곤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심해. 이제부터 쇼는 시작이니까.”
하비는 대번에 예민한 귀가 간지러워져서 움츠렸다. 이런 하나하나에도 곧잘 반응하는 것이 하비 스터스 다우면서도, 의외였다. 빅터는 하비가 이곳에 온 뒤로 털을 곤두세운 개처럼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우습고…….
‘좀 귀엽긴 한가.’
이 덩치 큰 남자를 두고 한 생각이 이딴 것이라니.
빅터는 순간 자신이 미쳤나 했다. 그 생각은 곧 밝아진 무대와 쩌렁쩌렁한 사회자의 목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모두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기대 투자 품목을 소개하기 앞서, 깜짝 경매 이벤트를 준비했거든요! 기다려 주신 만큼 기쁘게 즐기실 수 있을거라 기대합니다. 그럼, 쇼를 시작합니다!”
사회자는 황금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요란한 복장을 하고, 흡사 광대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여겨 보면 값비싼 재질의 의복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비가 무대 위로 등장한 사회자를 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반?”
목소리만 듣고도 바로 알아차렸다. 나름대로 변조한 것 같지만 오랜 친구인 하비는 바로 눈치챘다. 이런 비밀 클럽에서 사회자를 맡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하긴, 로투스 가가 개입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예상 못한 바도 아니었다.
“이번에 저희가 준비한 이벤트는 바로 이것입니다!”
황금뱀 가면이 손을 쭉 내밀더니 무대 옆을 가리켰다. 불빛이 사회자인 반 로투스의 손길을 따라갔다. 그러자 검은 휘장으로 가려진 것이 나타났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때맞춰 사용인들이 2층에서 장대를 가지고 종이를 내리자 크고 까만 글자가 나타났다. 상품의 기본가가 숫자로 환산되어 뚜렷하게 보였다. 꽤 높은 수치라, 사람들의 기대치가 올라갔다.
“이번엔 노예인가?”
“기대되는 걸요?”
“전에는 놓쳤지만 이번엔 꼭 내가 가질 거야.”
하비의 주변에서 가면 쓴 귀족들이 수근댔다. 어떤 노예길래 이토록 가격이 높은 건지 궁금하던 찰나, 검은 휘장을 사용인들이 한번에 벗겨냈다.
까만 철로 된 새장 속에 한 남자가 갇혀 있었다.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하얀 피부에 녹색 눈, 화려한 금발을 지닌 귀한 티가 흐르는 앳된 사내였다. 가면 쓴 귀족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그 순간, 하비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앞으로 튀어나갈 뻔했다. 죽었다고 보고 받은 최고의 ‘비둘기’ 가 다름 아닌 그 곳에 구금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총괄 외교관이 그리 난리를 쳤던 그 자였다.
‘젤가?!’
어떻게 그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죽기 직전에 노예 상인의 눈에 띄어 물물교환되어 왔을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젤가는 누가 봐도 튀는 존재였으니까.
하비의 혼란에도 아랑곳 않고 회장 분위기는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아름다운 노예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귀족들이 많았다.
“자, 놀라기엔 이릅니다. 이번 상품은 최상급으로, 무려 슬루인 제국에서 간신히 빼온 것입니다. 외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재주가 아주 많은 노예입니다. 확인해본 결과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침대 생활도 포함입니다.”
가면을 쓴 귀족들이 여기저기서 웃었다. 지켜보던 하비가 으득 이를 갈았다. 재주가 많은 것은 당연했다. 그가 직접 고른 비둘기니까.
빅터는 하비의 옆에서 수상한 눈길을 보냈다. 대체 저 노예가 뭐길래 이리도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러지?”
하비는 대답하지 않고 숨 죽인 채 아무런 표정이 없는 젤가를 보았다.
‘네 정체를 밝히지도 않은 거냐.’
꼴을 보니 젤가는 자신이 본국 사람임을 밝히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첩자인 것이 밝혀지면 여러모로 곤란하니 끝까지 입을 다문 것이다.
"기본가는 다들 보셨으니, 이제 시작합니다!"
저 체념한 표정을 보니 이대로 두면 평생 노예로 살 생각인 것처럼 보여 하비가 나섰다.
“120기나.”
‘기나’ 는 지폐 중 최고 단위였다. 게다가 하비가 제시한 금액은 일반 서민들의 일 년 치 급여와 맞먹었다. 그의 가문에 돈줄이 마른 것을 감안하면 큰 마음 먹은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이 발 빠르게 제시하는 금액들이 더 높았고, 심지어 서서히 올라갔다. 하비도 질세라 금액을 높였지만 사실 그 이상 지불한 능력은 없었다. 파산을 감수하고 일단 불러서 젤가를 빼올 생각이었다.
하비의 손에 식은땀이 맺히고 관자놀이에도 땀이 흘렀다.
그런데 하비를 뚫어지게 지켜보던 빅터가 먼저 한 발 앞섰다.
“1500 기나.”
빅터는 대번에 모든 귀족들을 눌렀다. 그 정도 금액이면 시가지 중심의 작은 건물 하나를 살 수 있었다. 하비도 깜짝 놀라 빅터를 쳐다보았다. 빅터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지 알 수 없었다.
황금뱀 가면을 쓴 사회자, 반 로투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검은 표범이시군요. 더 높은 금액 있습니까?”
빅터가 초조해 보이는 하비의 옆모습을 힐끔 보더니 더욱 단호하게 못박았다.
“2500 기나.”
그러자 다들 숨죽이고 입을 닫았다.
황금뱀 가면을 쓴 사회자 반이 주변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가지고 싶은 듯 손을 올리다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탐이 나지만 파산하면서까지 가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현재 검은 표범 가면이 제시한 금액은 보통 귀족이 한 번에 지불하기에는 몹시 부담스러운 고가였다.
“모두 이의 없으십니까? 그럼 저기 검은 표범님이 1번을 낙찰했습니다!”
실망하는 귀족들에게 사회자인 반이 어르는 말을 던졌다.
“깜짝 이벤트가 하나 더 있으니 실망하지 마시고!”
다음에 공개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옥으로 만든 거북이였다. 먼 타국에서 가져온 귀한 것이라는 사회자의 감언이설에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하비는 그런 것보다 당장 젤가를 데리고 이 회장을 나가고 싶었다. 본 이벤트가 아님에도 역겨운 감정이 속에서 들끓었다.
그 소란 속에서 하비가 빅터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한테 넘겨.”
“누굴? 아까 그 노예?”
“어떻게든 값은 지불할테니까 넘겨줘.”
빅터는 팔짱을 끼고 기분 나쁜 듯 낮게 웃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마음에 들어서 산 건데, 경에게 넘겨줘야 할 의무도 없고.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군?”
할 말이 없어진 하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외교관으로서 키운 첩자라고 이 자리에서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빅터는 그런 하비를 보며 한 쪽 입매를 올렸다. 삐뚤어진 미소였다.
‘흐음.’
하비 스터스가 이토록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빅터의 속이 묘하게 뒤틀렸다.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보던 빅터가 냉정하게 말했다.
“일단 끝까지 봐. 난 중간에 나갈 생각 없으니까.”
잠깐의 경매 이벤트가 끝나고 나서 본격적인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회장 측에서 직접 선별한 향후 인기를 끌 예상 투기 품목들이 줄줄이 나왔다. 한때 올란 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꽃 중에 새로운 개량종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고, 어느 원시 국가가 배출한 왕가의 보물도 속해 있었다.
진행은 순조로웠고 귀족들의 환호 소리가 간간이 섞였다. 거의 끝나갈 무렵, 빅터는 말이 없는 하비를 향해 약올리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이런. 내일 또 은행에 불이 나겠어. 미리 줄 서놓으라고 말해놔야겠군.”
하비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모든 투기 품목 예상 시간이 끝나고, 성공적인 투자를 기원하는 시간이 있었다.
노예들이 가면을 쓰고 나와 춤을 추는데, 이 곳에 참여한 귀족들은 그 중 마음에 드는 노예를 골라 방에 데려가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아무나 골라 사적으로 가면을 벗겨 본 뒤 마음에 드는 노예이면 성공적인 투자가 된다는 개념이었다.
귀족들의 방탕한 게임 중 하나였다. 귀족들이 연신 피우고 있는 연기의 정체는 몸을 이완시키고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빅터가 사회자를 따로 불러 잔인한 주문을 했다.
“아까 내가 산 노예, 저 틈에 섞어.”
오히려 놀란 건 사회자와 하비였다.
“네? 낙찰된 사적인 소유물인데 그래도 됩니까?”
“섞어. 실컷 돌리고 나서 나중에 돌려주면 돼.”
사회자 가면을 쓴 반이 주먹을 꽉 쥐고 부들거리고 있는 하얀 개 가면을 물끄러미 보았다. 왠지 하얀 개 가면에게서 익숙한 페로몬이 나는 것 같다 생각하며 사라졌다.
참다 못한 하비가 빅터의 멱살을 잡았다. 으름장을 놓으며 그는 낮게 일갈했다.
“방금 말, 당장 취소해.”
빅터는 까만 표범 가면 아래에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내 소유물이니 내 마음이야.”
“취소하라고.”
“못하겠는데.”
바로 쌍둥이가 개입하여 하비를 뜯어 놓았다. 주변에서는 두 사람의 몸싸움 정도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수상하고 나른한 연기를 헤치고 벌써 방으로 사라져 자기들끼리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도 많았다.
머리가 아플 지경인 연기 속에서 하비가 뚜렷한 밤색 눈동자로 빅터의 까만 표범 가면을 가득 담았다. 협상을 하려면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하비는 나지막하게, 처절함을 담아 물었다. 여태껏 빅터가 요구한 것은 단 한가지였다.
“몸이라도 내주면 내 말을 들어줄 건가? 그 약을 먹고 변하면 되나?”
빅터가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피식댔다. 이 고상한 남자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추락했을지, 본인이 만든 것이지만 씁쓸했다. 하지만 마음을 숨기고 빅터가 일부러 더 고집스럽게 말했다.
“꼭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경의 몸을 취할 수 있는데 내가 왜.”
빈정대는 빅터의 말투에 하비가 이글대는 눈빛을 도전적으로 던졌다. 금방이라도 또 멱살 다짐이 벌어질 것 같아 베타와 알파 쌍둥이가 뒤에서 긴장한 채 대기했다.
빅터는 방금 전 붙들렸던 가슴팍을 툭툭 쳐서 깔끔하게 폈다.
“경의 치부를 쥐고 있는 게 한두가진인 줄 알아? 내가 하는 짓들이 싫다면 방법은 간단해.”
검은 표범이 잡아먹을 것처럼 하얀 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위협적으로 낮게 읊조렸다.
“그 빌어먹을 스터스 가를 포기해. 그럼 모든 게 해결돼.”
하비의 눈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스터스 가를 포기하라고? 지금 당장?
빅터의 목소리가 악마의 유혹처럼 감미롭게 들려왔다. 그가 하비의 주변을 천천히 맴돌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게 약점 잡혀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고, 저 노예도 풀어줄 수 있지.”
하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나 한 켠의 빚처럼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는 하얀 저택과 그를 믿고 따르는 몇 남지 않은 사용인들, 그리고 라힌 스터스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이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빅터에게 시달려 온 것들이 얼마이고, 버린 것들이 얼마인데 지금 와서 전부 내려놓으란 말인가.
결국 하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까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절대 할 수 없었다.
“…난 못 해.”
걸음을 멈춘 빅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돌아서려는 빅터의 팔을 하비가 세게 움켜쥐었다. 부들거리면서 하비가 목소리를 억누르고 그에게 제안했다.
마지막 묘수가 있었다. 자신을 어떻게든 밟고 싶어하는 빅터에게 먹힐 지도 모르는, 최후의 방법이.
“내가 저 속에 들어가면 되나?”
검은 표범 가면 속에서 녹색 눈이 크게 일그러졌다.
“뭐?”
하비는 가면 쓴 노예들이 나와 춤출 예정인 빈 무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무대 끝에 이미 준비된 노예들이 모여 있었다.
“저 틈에 내가 그 노예 대신 섞이겠어.”
“저 틈에 내가 그 노예 대신 섞이겠어.”
하비는 귀족 사회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돌려지다가 망가지면 그만이다. 노예는 곧 돈이다. 돈은 돈으로 갚으면 된다. 그러니 함부로 다루고 심지어 죽여도 상관없었다.
아름다운 노예일수록 더욱 가혹하게 다루어졌다. 귀족들의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그것이 귀한 상품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특권이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빅터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은 그의 ‘생명권’을 박탈한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돌려주면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하비는 그것이 진심이 아님을 알았다.
서서히 빅터의 눈빛에 희미하게 분노가 스몄다. 믿기지 않는 듯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지금 무슨 이야길 하는 지 스스로 알고는 있는 거야?”
하비가 담담하게 답했다.
“알고 있어.”
지금으로선 이 방법 밖에 없으니까. 무엇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자가 택할 수 있는 건 그 자신을 불구덩이로 던지는 길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비는 오히려 머릿속이 말끔하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빅터의 말대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비둘기를 저대로 내버려 두어도 어쩌면 운 좋게 죽지 않고 살 수도 있다. 평생동안 안고 가야할 상처는 얻겠지만, 어찌됐든 이 잔인한 곳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해서? 이제 그것조차도 희미해졌는데 무얼 그리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빅터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하비를 말렸다. 그가 이렇게 나올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잠깐. 다시 생각해봐. 아무리 봐도 경은 무슨 상황에 처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
하비는 담백하게 말했다. 하얀 개 가면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빅터를 보았다.
“그래. 모르겠어. 아무것도, 이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하비는 내부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가 이미 망가진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어디로 가든 상관없을 것 같은, 선로가 붕괴된 기차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듯 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빅터에게 하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통보했다.
“그럼 내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어.”
잡았던 팔을 놓고 하비는 사회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가지 못하게 덥석 붙드는 빅터의 손에 강제로 멈춰야 했다.
검은 표범이 한껏 낮게 으르렁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저 노예가 그렇게 소중해? 지금 제정신인가?”
하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체념이 깃든 미소였다. 그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빅터의 손을 억지로 떼내었다.
“아무래도 이 어지러운 연기 때문인 것 같군.”
걸음걸이마저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빅터는 그를 차마 더 잡지 못 했다.
손끝이 떨리고 있는데도, 하비는 끝까지 노예들과 사회자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쌍둥이는 하비가 떠나간 뒤 구석의 테이블에 혼자 자리잡고 앉아 술을 퍼마시는 빅터를 불안한 눈으로 보았다. 오는 사람도 다 쳐내고 혼자만 고급 와인을 까고 또 까고 있었다.
곧 터질 활화산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 했다. 불안해진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보며 눈치를 살폈다.
팍!
빅터가 술이 남은 잔을 테이블 위로 거세게 내려놓았다. 남은 술이 빅터의 얼굴까지 크게 튀어올랐다. 마치 붉은 피처럼 보였다. 빅터의 얼굴이 악귀처럼 잔인해졌다.
빅터는 힐끔힐끔 제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쌍둥이를 가까이 불렀다. 빅터가 드디어 명을 내렸다. 먼저 알파 쪽에게 말했다.
“넌 가서 그 빌어먹을 노예 새끼 데리고 와. 손끝 하나 대지 말고.”
그런 뒤 베타 쪽을 향해 빅터가 명했다.
“그리고 넌 스터스 경을 감시하다가 누가, 그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나한테 바로 알려.”
빅터는 와인잔 밑동을 잡고 원을 그리듯 흔들었다. 드러난 굵은 팔뚝에 핏줄이 서고, 핏물처럼 붉은 액체가 잘게 흔들렸다.
“혹시라도 그를 고르는 귀족 놈이 있다면 끌고가서 죽이고.”
쌍둥이 중 베타가 깜짝 놀라서 반발했다.
“예? 귀족을 죽이라고요? 뒷수습이 너무 힘들어지는데요.”
하지만 빅터의 단호한 명령이 재차 떨어졌다.
“죽여. 가장 고통스럽게. 네 전공이잖아.”
흔든 와인을 한 번에 털어넣으며 빅터가 덧붙였다.
“아니, 차라리 그 귀족 놈을 내 앞으로 데려와. 내가 직접 하는 게 낫겠군.”
쌍둥이는 다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는 각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다 못한 알파 쪽이 빅터에게 고했다.
“주인님. 빈 속에 술을 너무 드신 거 아닙니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 아니겠지요?”
빅터가 새로운 와인병을 따서 잔에 채워 넣었다. 그는 피식거리면서 대꾸했다.
“내가 이 정도로 취하는 거 봤어? 멀쩡해. 아주 제정신이야. 아까 스터스 경이 말하는 거 너도 봤잖아. 차라리 그 사람이 취했다고 하는 게 나을 지경이다.”
쌍둥이도 가면을 쓴 노예 무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환기를 한 번 시켜서 뿌연 연기가 일부 사라졌지만 아직도 이 곳에 자욱했다. 저기에 하비가 있다. 그 긍지 높은 귀족이.
“…그렇긴 했지만 말입니다.”
오죽하면 그들조차 하비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보통 귀족도 아닌, 뼈 있는 가문이었다.
스터스 가가 이름을 날린 것은 로열 가드로서 본국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다만 최근 있었던 전쟁에서는 라힌 스터스가 병중이었고, 하비는 하나뿐인 가주라 가문을 이을자가 없어 제외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대대로 본국을 수호하던 가문 중 하나였다. 문무를 모두 겸비한 완벽한 귀족 그 자체로 군림했던 것이다. 기사 제도가 사라진 뒤에도 그 역사를 알고 있는 자들이 칭송해 왔고 말이다. 스터스 가문은 약자를 수호하고, 신뢰하는 자들을 끝까지 이끌고 가는 정의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런 가문이니만큼, 해적 인질 사태의 전모를 아는 일부 유가족들이 스터스 가에게 이를 가는 것은 배신감이 더 커서였다.
어쨌거나 하비의 행동이 몹시 인상적이었는지 은근히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쌍둥이들도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하비가 보여준 행동들은 여태껏 일관적이었다. 자신을 믿어주고 아껴준 사람들을 절대 배신하지 않았고 등 돌리지 않았다. 무엇 하나 스터스 가의 본래 명성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노예들 틈에 섞여 있는 하비를 주시했다.
‘우리가 정말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집사 레나가 하는 소리들은 그저 그가 하는 공부의 일환이라 여겨 사실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쌍둥이의 혼란은 빅터에게도 여지없이 공평하게 전염되었다. 빅터는 와인 한 병을 더 마신 뒤에도 불안한 듯 장죽을 입에 물고 연기를 끊임없이 뱉고 있었다. 이쯤되니 삼키는 건지 뱉고 있는 건지조차 헷갈렸다.
“자, 시간이 됐습니다. 노래 나갑니다!”
준비된 관현악단이 제각기 악기를 연주해 기묘한 화합을 이루었다. 음의 선율 속에서 하비를 알아보지 못한 반이 빅터가 동의한 것으로 알고 그 노예와 하비를 바꾸어 주었다.
젤가가 자신을 구해준 자가 누구인지 보다가 경악했다. 무대 뒤쪽 가림막 안에서 가면을 바꿔치기 하다가 하비의 얼굴을 본 것이다. 금발의 미소년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스터…!”
채 말을 다 하기 전에 하비가 조용히 하라며 제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젤가는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까스로 손을 내린 젤가가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아니, 왜 저와 바꾸시는 겁니까? 어째서요? 저는 다 각오를 했는데…….”
옷도 바꿔입으며 하비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며 대충 둘러댔다.
“설명은 다음에. 그리고 넌 여기 있으면 죽어. 이쪽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텐데. 적어도 난 죽지는 않을 테니까.”
젤가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하비가 손에 든 가면을 보았다. 그러자 하비가 손수 하얀 개 가면을 씌워주었다. 젤가가 송구스러운 듯 자꾸만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하비는 걱정말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어떻게든 잘 빠져나갈 테니까 젤가 넌 뒷문으로 먼저 나가.”
젤가는 하비의 행색을 살폈다. 여전히 고위 귀족 치고는 검소해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들리는 바로 스터스 가의 재정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 들었다. 자신을 놓치게 한 대가로 그 거액을 지불할 능력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비의 굳건한 의지에 자신이 뭐라 입을 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나오실 수 있는 거지요?”
하비는 말없이 노예 가면인 검은 쥐 가면을 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젤가가 울컥한 얼굴로 하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제가 꼭 찾아가겠습니다.”
하비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달랬다.
“그래. 들키지 말고.”
하비는 빅터의 가면과 쌍둥이 사용인들의 가면 인상을 알려주며 특히 주의하라 일러주었다. 젤가는 복잡한 눈으로 노예들 틈에 섞이러 나가는 하비를 보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먼 타국에서도 하비가 신경써준 덕에 비둘기들은 큰 생활고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여러모로 생명의 은인인데 그런 사람을 두고 가도 되나.
수없이 고민하던 젤가는 하비를 위해 움직였다. 그가 해준만큼 다음에 갚으면 된다. 살아야 은혜도 갚을 것 아닌가.
젤가는 무대 뒤로 재빨리 빠져나가면서도 여유로워 보이도록 걸었다. 들어오면서 내부 구조는 눈썰미로 다 파악했기에 알 수 있었다. 좀 걷다 보니 단단한 철문이 보였다. 저것이 뒷문이었다. 모두 노예들의 춤을 구경하러 간건지 다행히 주변에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 이대로 탈출한다.’
두리번거리던 젤가가 철문을 꽉 쥔 순간, 뒤에서 다가온 인기척에 휙 뒤돌아 반격했다. 주먹을 날린 순간, 바로 잡혔다.
‘스터스 경이 조심하라고 한 그 가면…!’
바로 검은 사냥개 가면을 한 사내였다. 큰 손으로 우악스럽게 잡은 검은 사냥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곱상한 외모치곤 주먹이 꽤 맵네.”
검은 사냥개가 바로 그의 목 아래 늘어난 옷을 끌어당기더니 목 뒤를 쳐서 기절시켰다.
축 늘어진 젤가는 가물거리는 시야로 하비를 걱정했다. 곧 그의 의식이 깜깜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그 시각, 하비는 노예들 틈에 섞여서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들이 추는 춤은 하나도 모르는 데다가, 너무 흐느적거렸다. 격식 있고 절제된 귀족적인 춤이 몸에 배인 하비는 아예 뒤로 몸을 빼고 합류하지도 않았다.
그가 마음에 안든다는 눈으로 검은 쥐 가면을 쓰고 춤추는 노예들을 보았다.
‘도대체 이런 춤이 뭐가 좋다고 몰려와서 보는 거지?’
하비가 그나마 막연히 믿었던 건 귀족들이 통상적으로 좋아하는 몸이 안기 좋은 호리호리한 몸매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모인 귀족들의 페로몬은 대다수가 알파였다. 알파들이 이런 리스크가 크지만 한 방이 있는 투기를 좋아했고, 오메가들은 안전하고 오래가는 투자 방식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하비처럼 어깨가 넓고 큰 키에, 근육으로 단단한 몸을 가진, 게다가 알파의 페로몬을 뿜는 노예는 같은 알파에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주었다.
‘요즘처럼 이상한 유행을 좋아하는 변태라면 다르겠지만.’
문득 빅터가 떠올랐지만 하비는 빠르게 머릿속에서 그를 지웠다.
적당한 때를 봐서 하비도 슬금슬금 노예들의 대열에서 이탈해 잘 보이지 않는 구석자리로 이동했다. 하나둘씩 노예를 데려가는 귀족들이 나타나서 위험하다고 느껴서였다.
젤가와 자신을 교환하는 조건이었고, 빅터가 지켜보고 있는만큼 완전히 몸을 뺄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 귀족에게 걸려 모르는 사람과 밤을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운이 좋지 않았다. 제일 처음에 그에게 관심을 보였던 공작 가면이 눈을 빛내며 다가온 것이다.
“몸 좋은 노예가 내 취향인 건 어떻게 알고 주최측에서 준비 했지?”
하필 이런 때.
하비가 거부를 할까말까 고민 하던 차에, 공작이 우아한 손길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공작 가면 사이로 빠른 손길이 다가와 쳐냈다. 검은 사냥개 가면이었다. 하비가 놀라 움찔하자 검은 사냥개가 작은 신호를 보냈다. 협조해 달라는 몸 사인이었다.
검은 사냥개가 공작 가면에게 정중히 요청했다.
“실례하지만 제가 먼저 잡았습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 내가 먼저 발견했는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검은 사냥개 가면이 슬쩍 금화 몇 개를 공작 가면의 손에 쥐어주었다. 공작 가면은 금화를 확인하더니 미련없이 뒤돌아섰다. 이 정도 돈이면 밖에서 더 좋은 노예를 살 수도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공작 가면은 검은 사냥개에게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문 근처 방이 제일 아늑하고 좋더군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공작 가면이 장죽을 들고 웃음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하비는 묵묵히 서 있는 검은 사냥개를 보더니 가면 아래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려는 거지?”
물물교환으로 젤가와 바꾼 것으로 알텐데, 이제와 개입하는 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은 사냥개 가면이 하비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물론 이미 사회자에게도 돈을 쥐여 주어 무마시킨 상태였다. 사회자인 반 로투스 경은 하얀 개 가면을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실랑이가 일자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차마 귀족을 죽일 수는 없어서…….”
하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귀족을…죽여?”
검은 사냥개는 베타 쪽이었다. 그가 골치아픈 듯 뒷머리를 마구 긁으며 토로했다.
“그런 게 있습니다. 주인님이 더 큰 사고를 내기 전에 얌전히 따라 오십시오.”
빅터는 가면을 벗고 서문에서 가장 좋은 방에 앉아 있었다. 붉은색 비단으로 된 휘장이 길게 드리워져 있는 호화로운 침대가 그의 앞에 놓였다.
방 구석에는 3명으로 구성된 작은 악단이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붉은 침대 휘장만큼이나 사람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노래였다. 물론 귀족들의 사생활을 보지 못하도록 그 사이를 검은 커튼이 가리고 있었다. 소규모 악단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도 한 상태였다.
까드득!
그의 손가락이 소파 위를 뚫을 것처럼 움켜쥐었다.
빅터는 침대를 놔두고 굳이 털짐승의 가죽을 깐 너른 소파 위에 등을 기댄 채, 방문만 뚫어지게 보았다.
‘왜 안 오지.’
벌써 다른 귀족이 채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예상치도 못한 일을 하비가 벌여놔서 막지도 못하고 흘려보낸 것이 지금와서 후회가 되었다. 협박을 빌미삼아 끌려다니다 사람이 변한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하비 스터스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넌 길들인다고 길들여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빅터가 이마를 짚고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그깟 노예가 뭐라고, 대체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구한단 말인가.
‘기분 나빠져서 돌린다는 소릴 하긴 했지만……. 분명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으면 그 놈은 지금쯤 죽었겠지.’
하비의 혜안이 맞았다. 빅터도 사실 그 노예를 반쯤 죽이려고 한 소리였고, 하비가 이를 알아챈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복잡하던 문득 빅터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다곤 해도 너무…….’
그가 서른 여섯 번째 소파를 뜯고 있을 때쯤 문이 벌컥 열렸다. 까만 사냥개 가면이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노예들이 쓰는 쥐 가면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쌍둥이 중 베타가 정중하게 하비를 데려왔다.
“모셔 왔습니다.”
앉아 있던 빅터가 벌떡 일어나려다가 제자리를 지켰다.
“…잘됐군.”
만약 그 망할 노예가 먼저 들어오면 벽에 기대 있는 장검부터 손에 들었을 것이다. 하비가 온 것이 다행이었다. 적어도 그가 보는 앞에서 노예를 죽일 생각은 사라졌으니까.
빅터의 베타 사용인이 아무 말 없는 하비를 흘끗 보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모를 남자다. 그가 빅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너무 요란하셨습니다. 로투스 경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관심 끄라고 해. 그 애송이가 어딜 넘봐. 그 자릴 준것도 난데.”
사실 이 회장 자체도 빅터가 주관한 것이었고, 앞으로 유행할 투자 목록을 정리해 매주 선보인다는 아이디어도 그가 낸 것이었다.
빅터가 돌아오면서 시작한 것은 올란 시 전체를 먹는 것이었다. 이곳을 지배하고, 장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양지 뿐만 아니라 귀족가의 음지까지 모두 섭렵하기 위해서는 로투스 가의 협력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이곳의 사회 및 이벤트 진행과 명목상의 운영을 맡겼다. 빅터와 로투스 가는 현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빅터가 귀찮은 얼굴로 명했다.
“놈이 더 관심 가지지 못하도록 알아서 조치해. 스터스 경이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빅터가 하비를 자신의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발치에 무릎 꿇렸다. 굴욕적인 자세였지만 하비는 말 한 마디 없이 따랐다.
하비의 숙인 머리 아래 두텁지만 하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알파 특유의 페로몬이 후각을 자극했지만 빅터는 불쾌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다른 의미로 놀라는 중이었다.
‘꿈과 정말 똑같군.’
하비의 알파 페로몬은 평소에도 지겹도록 맡았는데, 왜 꿈에서는 바로 인지하지 못했는지가 더 이상했다.
빅터는 상체를 숙여 하비와 거리를 좁혔다. 이 거리조차 불편한 듯 자꾸만 멀어지려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하비의 처지를 알려주는 말을 독사처럼 뱉었다.
“조건, 기억하지?”
진탕으로 스스로 걸어가겠다고 말한 사람은 다름아닌 하비 스터스였다.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자발성이 빅터의 기분을 더 추락시켰다.
“아직 노예의 춤이 끝나지 않았으니, 경은 그 노예 놈이 나타날 때까지 그 노예 대신이야.”
하비는 까만 쥐 가면을 쓴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순종적인 척 하는 걸 보니 빅터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꽉 조였다. 저게 다 그 노예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면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날뛰는 제 감정을 조절했다.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고.’
빅터는 하비가 편지로 거짓을 말한 뒤부터 계획을 수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모든 걸 감수할 정도로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를 하비 스스로 망가뜨리게 할 것이다. 남이 하는 것보다는 그가 제 의지로 깨부수는 것이 훨씬 의미 있었다.
무조건 약점을 쥐고 뒤흔드는 것보다는 서서히 시간을 두고 온몸을 조여서 이것이 파멸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게 하는 것이다.
빅터가 까만 사냥개 가면을 쓴 베타 사용인을 손짓으로 불렀다.
“음악 바꿔. 적당한 걸로.”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그가 예를 갖추고는 검은 커튼이 쳐진 곳으로 갔다. 빅터가 피식 웃더니 하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밖은 괴이한 놀이가 끝날 때까지 계속 시끄러울테니, 우리도 즐겨보자고.”
빅터는 무릎 꿇고 있는 하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무얼 하려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그의 팔뚝을 움켜쥐고 빅터가 말했다.
“아까 같은 저열한 노래는 경의 고상한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으니, 익숙한 노래로 바꿔주지.”
이윽고 유혹적으로 끈적대던 음악이 기품 있는 왈츠로 바뀌었다. 현악기의 음이 더욱 풍성해지고 무게가 생겼다. 군인들이 이 노래를 배경으로 전쟁 전 추기도 하는, 군무가 섞인 절제 있는 왈츠였다.
빅터는 하비를 데려온 베타 사용인까지 내보냈다.
“넌 나가서 다른 사람이 못 들어오게 막아.”
“알겠습니다.”
열렸던 문이 다시 단단히 닫혔다. 이제 이 방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검은 천 뒤에 기거하고 있는 음악인들, 왈츠밖에 없었다. 이 방을 점거하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은 빅터 바르뎀 경가 하비 스터스 경. 두 귀족 뿐이었다.
빅터가 가면 뒤로 얼굴과 감정을 숨긴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 남자에게 왜 이토록 집착하는 것인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모르니 마음가는대로 할 뿐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빅터는 춤을 신청하듯 손날을 가슴에 대었다가 그어 내려 춤을 신청했다. 무도회에서나 차리는 예였다.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금빛 머리칼을 뒤로 묶은 빅터가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녹안을 매력적으로 빛냈다.
‘이런 곳에서 단 둘이 춤을?’
하비가 빅터에게 황당한 눈길을 보냈다. 정말로 그는 연인 선언대로 하려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키도 크고 체격 좋은, 아름다운 미남자긴 했다. 귀족 영애들이 이 청을 받았으면 얼굴을 붉히며 바로 그 손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숙적처럼 알려진 하비 스터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근에 이상한 선언을 하긴 했지만.’
속은 어떻든 하비는 이의제기는 하지 않았다. 빅터의 말대로 그는 젤가와 자신을 맞교환했으니까. 어떤 의미였든, 약속은 약속이다. 밖에서 누군지도 모를 귀족에게 걸려 능욕당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생각한 순간 하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귀족보다 바르뎀 경이 더 낫다는 건 무슨 발상인 건지.’
긴 한숨으로 상황을 받아들인 하비가 맞인사를 했다. 빅터의 즉흥적인 행동에 어울려 주기로 한 것이다.
3박자로 떨어지는 고풍스러운 음악이 이어지고, 빅터가 먼저 발을 떼었다. 미끄러지듯 뻗어나가는 걸음에 하비의 것이 섞여들었다.
시작 전에 빅터가 여자역을 먼저 자처해서 춤은 순조로웠다.
빅터는 맨 얼굴로, 하비는 여전히 까만 쥐 가면을 쓴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아하면서도 선 굵은 위엄이 어려 있는 군무식 빅터의 춤과 절제되면서도 정중한 하비의 스텝이 맞물렸다. 분명 역할이 나뉜 춤이었지만, 각자의 스텝을 고수하며 추는 두 사람의 왈츠는 야성미마저 보였다.
두 사람의 단단한 몸이 때때로 부딪치면서 타격음을 내는 것조차도 춤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왈츠가 아니라 군무의 확장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하비가 가면 속에서 눈을 굴려 빅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꽤 즐거워 보였다. 정말 알 수 없는 악취미였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런 게 재밌는 건가.’
하비는 원을 그리듯이 돌면서 빅터의 단단한 허리를 안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움찔하며 최대한 크게 닿지 않도록 범위를 좁혔다. 몸이 닿는 순간 빅터의 익숙한 페로몬이 하비에게 닿았다.
‘이상하군.’
같은 알파, 게다가 알파인 그를 짓누르는 우성 알파의 것인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하비는 빅터와 자주 몸을 섞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여겼다. 불쾌한 추측이었다.
‘아니면 이것도 약의 부작용인가.’
마침 빅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피 흘리며 쓰러진 꿈 속의 하비가 번뜩 머릿속을 스쳤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하마터면 스텝이 꼬일 뻔 했다.
‘그 개같은 꿈은 왜 또 여기서 떠오르는 건지.’
검은 장막 뒤에서 웅장한 왈츠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어느덧 소리가 사라졌다.
무음의 세계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빅터는 지금의 상황이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서로를 파괴하듯이 말로, 혹은 몸으로 치고받던 것들이 없었던 일처럼 음악 속에 묻혀 사라졌다.
빅터는 지금 이 순간, 하비 스터스의 내면을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같은 고양감에 취했다.
하비가 가면을 굳이 벗지 않는 것은 그만의 시위이자 고집인 것도 잘 알았다. 이토록 그의 속마음과 행동 양식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뜻 모를 우월감이 솟았다. 가면 쓴 남자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면서 스치는 살결에 흥분이 일었다.
언뜻 가면 뒤로 보이는 귀마저 길고 모양이 정갈했다. 하비 스터스의 외양은 모든 것이 자로 잰 듯이 반듯하고 단정했다. 심지어 남들이 잘 모르는 그 속내까지도.
‘나만이 알지.’
그는 해적선에서 억류된 오랜 기간동안, 그리고 대륙에 안전히 상륙한 뒤로도 집요하게 하비만을 그렸다.
비록 상상 속에서 하비 스터스를 몇 번이나 찢어 죽이기도 하고, 그리 좋지 않은 감정으로 쫓긴 했지만, 그만큼 하비를 생각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빅터였다.
‘몸도 포함해서.’
천하의 하비 스터스가 오메가의 몸으로 발정이 나서 박히는 모습을 볼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그리 생각하니 빅터는 조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하비가 다시 가까워졌을 때 빅터는 마음 먹은 것을 시행했다.
“하나 충고하는데, 이제 그만둬.”
말없이 춤에만 몰두하던 까만 쥐 가면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온 몸 바쳐서 가문의 결백을 증명하려 드는 거.”
“하나 충고하는데, 이제 그만둬.”
말없이 춤에만 몰두하던 까만 쥐 가면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온 몸 바쳐서 가문의 결백을 증명하려 드는 거.”
하비가 가면 아래에서 동요하는 것이 떨림으로 전해져 왔다. 빅터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한 치 혀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은 그의 전공이었다. 스텝을 밟는 빅터의 발이 직선으로 미끄러지며 교묘하게 하비의 것을 피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딱!
빅터의 발이 절도 있게 바닥을 찍으며 큰 소리를 냈다.
“나도 제정신 아닌 놈인건 인정하지만, 아무리 봐도 스터스 경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거든. 너무 과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동자를 들여다 보며 빅터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과하다고.”
빅터는 계속해서 하비의 현실을 냉정하게 꼬집었다.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나. 그렇게 낄곳 안낄곳 구분 못하면서 귀족이, 그것도 로열 가드 가문의 귀족이 부나방처럼 몸을 던져대는 게 정상인 것 같아?”
하비의 마음에 돌을 던지는 것이 성공인 것 같았다. 그의 눈이 미친 듯이 일렁였다. 빅터가 한 번 더 하비를 내려찍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깨끗해지고 싶어? 뭘 위해서?”
빅터의 빈정거림은 제대로 하비의 약한 곳을 찔렀다.
하비는 결국 자신도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나 하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그 부분을 너무 정확하게 짚었다. 마치 속내 정도는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라힌 스터스, 그 겁쟁이 놈과 다르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빅터가 던진 돌에 하비의 마음을 둘러친 불투명한 유리창이 깨졌다. 산산이 부서져서 조각이 하비를 찌르고 있었다. 너무 아팠다. 듣다 못한 하비가 낮게 일갈했다.
“한 번만 더 내 아버지를 모욕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어떻게 가만두지 않을 건지 궁금한데.”
가면 아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적어도 저 밤색 눈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빅터는 즐거이 상상했다. 그리고 그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비는 누군가가 이토록 자신의 속을 헤집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업무상으로 외교를 논할 때와는 달랐다. 각자의 입장을 전달하고, 조율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성공적인 협상은 모두가 만족해야 하지만 그건 이론에 불과했다.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는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할 각오로 임해야 하는데, 빅터와의 관계에서는 도무지 그 접점이 보이질 않았다.
그에게는 살을 내주면 뼈까지 잃었다. 바로 지금처럼, 여태까지 고수했던 입장을 뒤집어 가면서 사람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그래서 뭔가를 예측하고 얻을 수가 없었다.
현악기 소리가 높아졌다. 하비의 판판하고 돌같은 가슴과 빅터의 무기같은 어깨가 세게 부딪쳤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멀어졌다.
격식 있는 왈츠가 점점 격렬해졌다.
이 정도로 춤으로는 숨이 차지도 않았지만, 하비는 다른 것으로 숨이 막혔다.
“정말 이상한 말만 하는군. 여태껏 그걸로 내 발목을 잡았으면서, 이제와서 놓으라니.”
돌이켜보면 빅터의 태도 변화는 편지 사건을 계기로 시작해서 알파 연인을 공식적으로 알리면서 절정을 맞았다. 스터스 가를 버리라는 둥, 마치 스터스 가로부터 그를 따로 떼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비가 흠칫했다.
‘설마, 다른 목적이 있나?’
하비는 그렇게 함으로써 빅터가 얻는 이익이 있나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목적이 복수나 분풀이에 가까웠던 지난 날과는 방향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나를 흔들어서 무슨 이득이 있어서? 스터스 가를 의심하게 하고, 실망시켜서 뭘 얻으려고.’
하비는 퍼뜩 스치는 생각에 경악했다. 즉각 춤이 멎었다. 하비가 멈춰 서서 빅터를 노려보았다. 노래는 여전히 끊기지 않았다.
하비는 생각한 것을 입으로 옮겼다.
“혹시 의원직도 모자라 스터스 가문도 돈으로 사고 싶은 건가? 그게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과 연관이 있나?”
그게 사실이라면 하비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빅터 바르뎀은 누구보다 뛰어난 수완가이자 사업가다. 남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뺏는 것에 능했다. 사람의 심리까지 이용해서 말이다.
“뭐라고?”
빅터의 표정이 시시각각 이상하게 바뀌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하비는 딱딱한 목소리로 못 박았다. 사람을 뒤흔들어놓고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빼갈 속셈이었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건 절대로 안 돼. 내가 먼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문을 팔 생각은 추호도 없어. 경의 가문처럼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빅터의 가문인 바르뎀 가는 한미했던 귀족가를 그의 조부가 사들인 것이었고, 이를 지적하는 말이었다.
빅터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피식피식 웃었다.
“내 가문처럼, 이라.”
딱히 비꼬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마지막 말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하비는 짧게 사과했다.
“방금 말은 너무 갔군.”
가문을 산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귀족에게 이런 말은 금물이었다. 정면으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성질이기에.
빅터는 할 말이 몹시 많았지만 가까스로 입을 닫고 있었다. 이 고요한 밤색 눈을 지닌 남자는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에게도 자존심을 상처 입힌 것에 사과한다. 하비의 그런 정직함과 고지식함이 싫지 않지만, 가끔은 짜증나게 거슬렸다.
‘성격 나쁜 나는 그런 걸 부수는 데서 희열을 느끼지만.’
어떻게 하면 저 견고한 것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빅터는 골몰했다. 끊긴 춤은 다시 이어지지 않았지만, 빅터는 춤을 출 때보다 더한 즐거움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이 넘치도록 즐거웠다.
그가 하비의 목을 조를 것처럼 가볍게 쥐었다. 이것은 놀이다. 누군가를 부수고 나면 끝난다. 오랫동안 열망해 왔던 길고 긴 놀이였다.
하지만 빅터는 이 놀이에 너무 몰입했다는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도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어느 것이 게임이고, 진짜는 무엇인지조차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하면 그런 결론이 나는 거지?”
그는 하비의 굵은 목을 위협적으로 쓰다듬었다.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어. 일부는 맞는 말이야. 물론 스터스 가는 줘도 받지 않을 거지만…….”
웃음기를 없앤 빅터가 하비의 목을 잡고 그대로 벽에 밀었다. .
퍽!
그가 하비를 몰아붙였다. 까슬한 벽 재질이 하비의 등을 찔렀다.
“쿨럭!”
등과 목에서 오는 아픔에 눈가를 찌푸리는 하비에게 빅터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경은 받고 싶거든. 살 수 있으면 노예처럼 돈으로 사고 싶을 정도로. 경의 말대로 의원직도, 가문도 전부 돈으로 사는데 못 살 게 뭐가 있겠어?”
현재 빅터의 재산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긁어모은 돈만 해도 시 전체 예산을 훌쩍 넘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부를 과시할 생각은 없었다. 돈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은 알아서 찾아오니까.
동시에 빅터는 길바닥에 돈을 뿌려도 하비는 줍지 않을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고하게 모른 척 하며 그 망할 하얀 저택으로 돌아가겠지.
하비는 차갑게 일갈했다. 빅터가 몰아 붙일수록, 기개는 더욱 되살아났다.
“나를 사서 뭐에 쓰려고? 쓸만한 노리개를 찾는 거라면 다른 놈을 찾아.”
이 높은 목을 꺾으려면, 다른 것이 필요했다. 하비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게 무엇일까.
빅터는 순간 이 곳으로 오기 직전 마차에서 하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럽군.]
빅터의 사용인들 이야기를 하던 때였다. 그 유대관계를 부러워하는 듯 했다. 스쳐 지나간 말이라 깊이 생각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다. 하비의 그 말이 다르게 치환되어 들렸다.
외로워.
알 수 없는 알싸한 감정이 가슴을 치고 지나갔지만, 빅터는 이를 무시했다.
빅터는 감이 좋았고, 생각난 것을 즉시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조금의 연기가 필요했다. 강하게 나가면 더욱 세게 나오니, 부드러운 우회를 하는 편이 나았다.
빅터가 키스할 것처럼 가까이 얼굴을 대고 하비의 목을 어루만졌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며 처연해졌다.
“단순히 노리개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하비의 눈에 큰 진동이 찾아왔다. 지금껏 빅터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해일처럼 지나갔다. 놀리려고 연인 선언같은 것을 했던 것 아니었나. 혼란이 왔다.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면, 반 로투스 경과 대화하고 있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보던 빅터가 느닷없이 선언을 했다. 마치 질투를 하는 사람처럼.
하비는 말도 안 된다 여겼다. 태도가 그리 한순간에 뒤바뀌다니.
짧은 시각에 빅터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증오가 분노로, 분노가 분풀이로, 분풀이가 후회로, 그 후회가 일그러진 애정으로 발전했다는 그런 이야기인가.
아니, 애초에 빅터 바르뎀에게 그런 인간적인 후회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생각을 하던 하비는 그 저택의 사용이들이 하나하나 눈에 밟혔다. 빅터가 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에게는 따뜻했다.
‘왜 지금 와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지?’
하비는 여태 가슴 속에 새까맣게 구멍난 곳을 애써 위장하고 덮어왔다. 그걸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이 헤치고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안 돼.’
본능적으로 온 신경이 쭈뼛 섰다. 이걸 두려움이라고 하는 걸테다. 느릿하게 뛰던 심장이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빅터가 그의 동요를 눈치채고 더욱 밀어붙였다. 하비의 몸 여기저기를 지분대면서 예민한 곳을 스쳤다. 빅터는 움찔대는 하비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지금까지 고작 노리개로 하려고 경을 이렇게 괴롭게 하겠냐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잘 생각해 봐.”
하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하비가 빅터의 가슴을 강하게 밀어냈다.
하비가 헐떡이며 가까스로 마지막을 선고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간다. 약속된 노예에서 다시 귀족으로 돌아갈 때였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노예들의 춤은 다 끝났을 것 같은데.”
밀려난 빅터는 어떤 충동이 강렬하게 들었다. 가까웠다 생각했던 하비는 금방 또 멀어졌다.
음악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빅터가 손을 내밀어 하비의 가면을 천천히 벗겼다. 하비도 거부하지 않았다. 약속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거부하지도 않는 것임을 빅터는 또 너무 잘 알았다.
“그거 알아?”
살아온 시간의 절반 이상을 온통 하비 스터스에 대해 할애하며 살았다. 빅터는 충분히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든 아니든, 너를 가장 잘 알고 인정하는 건 나일걸.”
하비도 그것을 확실히 느꼈다. 빅터와 어떤 형태로든 부대끼면서 어느새 보이고 싶지 않았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는 것을.
‘듣기 싫어.’
빈틈을 교활하게 파고드는 빅터에게 거부감이 생기는 동시에, 하비는 그곳이 채워졌으면 하는 아이러니도 느꼈다.
빅터가 집요하게 하비의 곁을 머물며 정말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듯이 다정하게 말했다.
“가장 잘 이해할 사람도 나야.”
아주 드물지만,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사람만이 온전히 날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
빅터가 그 착각에 쐐기를 박았다.
“정말 단 한번도 등에 얹힌 짐을 모른 척 하고 싶던 적이 없나? 다 없던 일로 해버리고 싶지 않아? 혼자서 힘들지 않냐고.”
하얀 뺨과 강건해 보이는 턱이 절반 보였다. 두려움에 턱끝이 떨리고 있었다. 빅터는 맹수를 달래듯 반쯤 드러난 하비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한 번이야. 한번만 내려놓으면 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장담하지. 그 케케묵은 옛일들, 전부 없던 일로 덮어주겠어. 앞으로 더 이상 그 일로 경을 괴롭히지 않을 거라 약속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주지.”
빅터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혼자 잘 견디고 버텼다는 것도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밤색 눈이 끊임없이 일렁였다. 하비는 이 감정이 진짜일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외로웠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큰 적이라 생각했던 자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그의 빈 곳을 알고 있다. 이건 위험했다. 하비가 마른침을 삼키고, 목울대가 크게 굴곡 쳤다.
‘넘어가지마.’
빅터는 하비의 가면을 서서히, 급하지 않게 벗겨냈다. 거의 끝이 보였다.
“한 번만 스터스 가를, 라힌 스터스를 부정해. 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협박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야. 편지도 그렇고, 더러운 짓은 전부 네 아버지가 한 거니까. 솔직히 억울하잖아? 안 그래?”
아마 땅 속에 묻힌 라힌 스터스가 지금 살아난다면 빅터의 말대로 하라고 강요했을 것이다. 하비 스스로 그 일과 연루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현 스터스 가의 가주는 결점 없이 깨끗하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공표해주기를. 그러려고 편지까지 조작한 것 아닌가.
그러니 용서해 줄 것이다.
하비의 눈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갈라졌다.
그 순간, 가면이 완전히 벗겨졌다.
툭.
노예를 상징하는 까만 쥐 가면이 빅터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완전히 드러난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덤덤할 거라 생각했던 빅터가 놀랄 정도로, 열기로 가득찼다. 반듯한 밤색 눈과 눈썹, 그 사이로 흐르듯 내린 높은 코,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이 차례차례 보였다.
그의 혼란스러운 눈빛과 마주친 순간, 빅터는 그를 속을 교란시키던 것도 잊었다. 강렬한 충동만 남았다. 그러려던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 다문 입술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치겠군.’
빅터는 하비의 목덜미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가면이 사라진 하비의 얼굴에 순조롭게 빅터의 입술이 닿았다. 격정적이고 황홀했다. 왜 진작 이 입술을 맛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너무 달았다.
당황한 하비가 입술을 파고드는 혀에 얼결에 침입을 허락했다. 그 뒤로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밀어낼 것처럼 막연하게 허공에 떠 있던 하비의 손이 빅터의 허리로 머뭇머뭇 감겼다. 빅터의 상의 주름이 하비의 큰 손에 가득 잡히고, 그는 입술을 벌리고 파고드는 뜨거운 것을 받아들였다. 혀가 길게 뒤엉키고 야릇한 소리를 냈다.
“하아…….”
혀가 섞이는 가운데 나오는 하비의 신음에 빅터는 머리 끝에 전율이 일었다.
춤을 그리 춰도 고르던 숨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서로의 알파 페로몬이 이 더위를 가라앉히는 시원한 안개처럼 느껴졌다.
음악이 더욱 강렬해지고, 선율이 빨라졌다.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빅터는 하비를 벽에 밀어붙이고 단단한 어깨에서 근육이 잡힌 가슴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하비가 입술 사이로 또다시 짧은 신음을 냈다. 민감한 유륜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흥분한 빅터가 저도 모르게 하비의 아래에 손을 댔다. 반쯤 서 있었고, 빅터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하비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들짝 놀란 하비가 빅터에게서 제 몸을 떼어냈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한순간의 감정에 휩싸여서 빅터 바르뎀과 키스했다. 하비는 자신이 그것에 동조한 것이 충격적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적이 흘렀다. 절정으로 치닫던 음악도 끝이 났다.
“…….”
“…….”
뜨거운 공기만 내부를 잔열처럼 떠돌아 다녔다. 아까의 뜻모를 흥분이 새로이 시작된 음악 속에 섞여 사라졌다.
하비의 뜨거운 머리가 천천히 식었다. 자신이 무모한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몸을 던지고 뛰어든다는 것도.
“경의 말이 옳아. 나는 계속 무모하게 행동했지.”
하비는 부르튼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고, 허리를 숙여 떨어진 까만 쥐 가면을 주웠다.
“근데, 바르뎀 경은…….”
몇 번 마른 기침을 뱉은 후에 하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키고 싶은 게 없나?”
“뭐?”
빅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좋았던 감정들이 하비의 단호함으로 뒤로 밀려나고, 평소와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내가 속한 곳을, 나고 자란 곳을 지키고 싶은 게 뭐가 이상하지?”
하비가 손에 들린 가면을 잠깐 내려보았다. 담백한 대답이 이어졌다.
“나와 연이 있었던 사람을 지키는 게 뭐가 잘못 되었고?”
빅터는 할 말을 잃고 하비의 진지한 생각을 듣고만 있었다.
“그 저택 사람들. 경은 그 사람들을 지키고 싶을 거 아닌가. 나도 마찬가지야.”
“…….”
“스터스 가의 한 일원으로서가 아닌, 그 사람을 알았던 한 사람으로서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
아까 전까지의 열정은 모두 사라진 정갈한 얼굴에 빅터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혀가 미끈한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더불어 하비의 말 속에는 진심이라는 알맹이마저 단단히 박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왔을 것이다.
빅터는 차가운 얼굴로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까지도.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까만 사냥개 가면을 한 빅터의 쌍둥이 사용인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축 늘어진 금발의 한 남자를 데리고서.
'젤가?!'
하비가 깜짝 놀라 젤가를 살폈다. 죽은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지만, 역시 나가기도 전에 잡혔다. 쌍둥이 중 알파 쪽이 보고했다.
“죄송합니다만, 이 녀석이 깨어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빅터는 그제야 두 사람의 옷이 바뀐 것을 알았다. 젤가는 하비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면 바꿔치기해서 탈출시키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눈이 어두워졌다.
“으음…….”
그때, 젤가가 몸을 뒤척이다 품에서 뭔가를 떨어뜨렸다.
딸깍!
황금빛을 띤 브로치였다. 빅터가 그 물건을 수상하게 보더니 명했다.
“그게 뭐지? 이쪽으로 가지고 와.”
하비가 초조한 눈으로 빅터가 주운 브로치를 보았다. 왜 하필 지금, 저 물건이 여기서 나타난단 말인가.
“이런 걸 품에 지니고 다녔단 말이지.”
빅터가 수상한 눈길로 브로치를 집어 허공에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특별한 것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길 가다가 간혹 볼 수 있는, 손이 많이 간 장식품 정도?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나고 있는 젤가를 향해 빅터가 무의식 중으로 브로치를 비춰보았다. 젤가가 눈을 떴고, 그 눈을 본 순간 빅터는 깨달았다.
‘하아?’
금색 브로치는 큰 녹색 보석을 안고 있었다. 젤가와 똑같았다.
빛나는 황금빛 머리칼에 녹색 눈을 한 미청년. 빅터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브로치와 젤가를 계속해서 비교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젤가와 브로치의 상관관계가 어떤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도 필사적이었군.’
노예를 대신해서 몸을 바치다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야 가능했다.
빅터는 브로치를 망가뜨릴 것처럼 꽉 쥐었다. 그의 얼굴에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침묵하고 있는 하비를 보며 나지막히 물었다.
“스터스 경. 이게 이유였나?”
이런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저 청년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니.
분노하는 것을 넘어, 음습한 검은 안개가 빅터의 심장을 거세게 조였다. 그것은 배신감에 가까웠다. 온 몸을 태울 만큼 강렬한 감정이었다.
빅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복잡한 얼굴로 젤가만을 보고 있는 하비가, 죽을 만큼 증오스러웟다.
“저 노예를 특별히 감싸고 했던 게?”
하비는 알아야 했다. 그를 옥죄고 있는 줄이 단순한 끈이 아니라, 맹독을 지닌 독사라는 것을. 그걸 알려줄 시간이 되었다.
빅터의 녹색 눈이 어둡게 점멸했다.
젤가가 완전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방 안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숨 막히는 긴장과 침묵, 새로 시작한 노래가 흐를 뿐이었다.
침묵을 깨고 빅터가 중얼거렸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느릿하기까지 한 낮은 목소리에 하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손에 움켜쥔 황금빛 브로치를 만지작대며 그는 젤가와 하비를 번갈아 가며 천천히 보았다.
가면을 쓴 쌍둥이는 서로의 눈을 보며 난감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빅터가 저런 목소리와 저런 태도로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를 냈다. 하나가 죽어 나가거나, 반신불구가 되었다. 게다가 빅터가 현재 내뿜는 페로몬이 너무 압도적이라 알파인 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결국 빅터의 사용인 알파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그나마 멀쩡한 얼굴로 서 있는 베타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좀 말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알파 쪽 쌍둥이는 힘겨워하며 베타 쪽을 떠밀었다. 그러나 페로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페로몬은 못 느껴도 살기는 느낀다고…….’
하비도 가면으로 입과 코 사이를 막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하고 폭력적인 페로몬 방출이었다.
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깬 것은 젤가의 목소리였다.
“스터스 경이 왜 여기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젤가가 두리번거리다 하비를 발견하고는 하얗게 질렸다.
“으윽!”
그러나 곧 젤가는 구토하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오메가였다. 우성 알파인 빅터가 작정하고 누군가를 누르려 내보내는 페로몬은 자극적인 것을 넘어서 지나친 독이었다. 젤가가 놀란 눈으로 그 중심에 서 있는 빅터를 보았다.
‘뭐야, 이 말도 안되는 건?’
그것은 젤가의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할퀴었다. 기분 좋은 페로몬이 아니라, 온 몸을 찢을 것처럼 날카롭고 칼끝처럼 예리했다. 이미 슬루인 제국에서 잡혔을 때 지독한 고문을 받았던 터라 그의 육체는 지나치게 야위었다. 이런 것조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결국 방 안에서 모든 사람의 눈길에 하비에게 쏠렸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어 보였다. 모두의 눈길을 받은 하비가 움찔하더니 빅터를 보았다.
그는 살벌한 얼굴로 브로치를 손 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망설이던 하비가 다가가 그의 팔목을 세게 잡았다.
“바르뎀 경.”
빅터의 시선에 닿은 것 만으로도 온 몸이 저릿거렸다. 하비가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좀 하지. 다들 힘들어 하고 있지 않나.”
빅터가 눈만 내려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하비의 손을 한 번 보고, 눈을 올려 하비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그제야 폭군 같던 페로몬이 잠잠해졌다.
“아아. 생각 좀 하느라.”
생각 두 번 하면 사람 잡겠다는 소리는 쏙 들어갈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여기저기서 작은 한숨 소리가 터져나왔다. 검은 커튼 뒤로도 한숨이 새어나오는 걸 보니 악단 중에도 알파나 오메가가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하비는 빅터가 터질 것처럼 쥔 브로치를 난감한 얼굴로 보았다. 시장을 걷다가 무심결에 산 것이고, 사실 왜 샀는지도 아직 모를 일이었다. 다분히 충동적인 구매였다. 빅터가 저걸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비는 이유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방 안의 사람들이 한숨 돌리고 있을 때, 하비가 애써 갈무리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는데, 그건 그저 내 물건이야. 저 노예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빅터가 이제껏 보여준 하비의 행동을 떠올리며 냉랭하게 웃었다. 브로치를 들고 하비의 눈앞에 흔들며 빅터가 말했다.
“그건 봐야 알겠지. 이제 하나하나 밝혀보자고. 저 노예 놈과 대체 어떻게 안 사이인지, 무슨 관계인지.”
눈이 휘둥그레진 젤가가 빅터와 하비를 번갈아 보며 어찌된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하비를 보고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챈 젤가가 넙죽 엎드려서 간청했다.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으며 외쳤다. 생명의 은인이 자신과 연루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끌려오다가 우연히 스터스 경과 잠깐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감히 주제도 모르고 풀어달라 청했습니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테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스터스 경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젤가의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데웠다. 빅터가 차갑게 웃었다.
“병자같은 몰골에 비해서 기운이 차고 넘치는데…. 상황 판단은 전혀 안되는군.”
빅터는 엎드려서 흠칫 떠는 젤가를 벌레보듯 보았다. 그의 냉정한 시선이 연이어 가면을 손에 들고 서 있는 하비를 핥듯이 훑었다.
하비는 그 사이 또 무언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속내를 읽히지 않으려는 전략적인 포커페이스일 것이다. 얼어붙은 얼굴에서 도무지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왠지 열받는데.’
하비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간신히 젤가에게로 돌아왔을 때 빅터의 음성은 전보다 더 낮고 음산하게 변했다.
“그 자리로 돌아가봐야 이미 다 끝나있을 건데, 뭘 어쩌려는 거지? 널 사느라 쓴 돈이 얼마인 줄은 알아?”
젤가는 그저 엎드린 채 온 몸을 가늘게 떨었다. 빅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등 위로 채찍처럼 떨어졌다. 온 몸이 따가울 정도로 아픈 살기였다.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듯 빅터가 구석에 세워둔 장검을 가지고 왔다. 길게 뽑아 든 장검에서 번쩍이는 빛이 젤가의 목으로 드리워졌다. 빅터는 바로 내려칠 것처럼 장검이 허공으로 높이 들었다. 일부러 하비가 끼어들 틈을 준 것이다.
빅터의 예상대로 참다 못한 하비가 결국 둘 사이로 뛰쳐 들었다.
양 팔을 벌리고 젤가를 지키듯이 서서 빅터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자비를 베풀게.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경의 말대로 이깟 노예가 뭐라고, 그리 피를 보고 방을 더럽힌단 말인가.”
빅터는 고요하게 하비를 마주보더니 장검을 다시 검집으로 밀어 넣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그가 장검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하비와 젤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빅터는 먹잇감을 몰 듯이 빠르게 자신의 이론을 펼쳐 덫을 놓았다.
“옷까지 바꿔 입을 정도로 탈출에 정성을 쏟는 것도 이상하고. 꼭 내보내고 나서 다시 만나려고 한 것 같이.”
확실히 하비 스터스의 평소 성정을 빼고 평범한 상황에서 비추어 보면, 이상했다. 귀족이 노예를 감싸들며 이렇게까지 몸을 아끼지 않는 건 이례적인 일이니까.
젤가 역시 녹색 눈이 의문을 담고 있었다. 빅터가 왜 이토록 하비에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는, 그런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누가 봐도 알파와 알파끼리의 관계였다. 그런데 빅터의 언행은 하비의 마음이 어디에 가있는지를 예민하게 따지고 있었다.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젤가의 의문을 눈치챈 빅터가 피식 웃으며 말해주었다.
“본국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노예라 그런지 잘 모르나본데.”
빅터가 그의 앞에 섰다. 긴 그림자가 젤가의 야윈 몸 위로 드리워졌다.
“스터스 경과 나는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다.”
젤가는 엎드린 채 놀라 눈을 크게 떴고, 하비가 즉각 반발하려다 빅터의 쏘아지는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말을 보태면 바로 젤가를 죽일 것 같아서였다.
빅터는 꼼짝도 않는 젤가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네 놈이 경과 과거에 어떤 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자리는 특별히 스터스 경을 초대한 자리야. 감히 분위기를 망친 대가를 치러야할 거다.”
귀족의 여흥을 망친 노예는 팔다리를 잘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를 알고 있는 하비도 분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젤가를 산 건 빅터였고, 하비는 더 이상 끼어들 자격이 없었다. 여태껏 한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관여했다.
빅터는 덜덜 떨고 있는 젤가를 내려보며 하나 제안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목을 치고 싶지만, 그리 하면 스터스 경이 슬퍼할 것 같아서 기회를 주겠어.”
“무, 무슨 기회를…?”
“정확한 신분을 이 자리에서 밝혀.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젤가가 하비의 눈치를 살폈다. 첩자라는 것은 죽음 이상으로 중요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본국이라도 함부로 외교관의 첩자라는 것을 밝힐 수 없었다. 타국으로 보낸 첩자라는 존재 자체가 발설되면 자칫 국제 문제로 결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젤가는 이미 슬루인 제국의 왕족과도 깊숙이 연관되었다가 겨우 사선을 넘어온 상태였다.
하비도 도와줄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젤가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땅에 머리를 연신 박았다.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스터스 경은 저와 아무런 연관이 없…!”
더 말하지 못하고 젤가는 컥, 숨을 들이켰다. 빅터가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들어올렸기 때문이었다. 목이 뒤로 꺾이는 고통에 그가 몸부림치는 동안 빅터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아무런 연관이 없다? 잘도 짖어대는군. 두 사람이 짠 듯이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는데, 연관도 없는 자를 구하려고 귀족이 노예 소굴로 뛰어드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여태까지 정황을 보면 누가 봐도 이건…….”
빅터의 눈이 어둡게, 그리고 반쯤은 광기를 담고 번뜩였다.
“설마, 날 두고 배신이라도 한 건가?”
동시에 쌍둥이 사용인에게서 작은 헛숨이 튀어나왔고, 하비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빅터는 흡사 상처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놀라운 연기를 펼쳤다. .
“이것 참, 내 사람이 노예에게 마음을 줬을 줄은! 상상도 못했군. 이건 바르뎀 가의 명예까지 더럽히는 일이다. 네 까짓게 귀족의 이름까지 먹칠하는 셈이지. 난 믿었던 연인이 배신한 증거를 이제야 본 거고.”
하비는 기가 막힌 얼굴로 빅터를 쏘아보았다. 저 사람이 언제부터 제 가문과 그 명예까지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뭐? 믿었던 연인이 배신을 해?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저런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과연 상술에 능한 시정잡배였다.
하지만 이건 하비의 순진한 생각이었고, 쌍둥이 사용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발동 걸리셨네.’
‘이번엔 얼마나 걸리려나.’
이건 빅터가 무언가를 집요하게 알아내려 할 때의 버릇으로, 맹수가 먹이를 바로 먹지 않고 한참 놀잇감으로 굴리다가 먹는 것과 비슷했다. 그럴 때의 빅터는 심리를 뒤흔들기 위한 거짓도 서슴지 않고 했다. 오래 시간을 두고 거짓과 진실을 섞어가며 사람을 완전히 바닥까지 몰아붙였다.
빅터가 브로치를 들어올려 샅샅이 살피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것까지 주고받는 사이인 걸 알았는데, 내가 어찌해야 할까?”
젤가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시 외쳤다.
“그건 정말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오해십니다! 절대 스터스 경과 그런 걸 나눈 적 없습니다!”
하지만 빅터는 믿지 않는다며 젤가의 말을 단박에 부정했다.
“이미 정을 나누던 사이인 것도 속였는데, 이런 것도 못 속일까.”
못 봐주겠다는 얼굴로 하비가 다시 나섰다.
“거짓이 아니야. 저건 내 물건이고, 젤가의 것도 아닐세.”
몰아붙인 끝에 드디어 하비의 입에서 정식으로 노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하비는 정신이 없어서 자신이 젤가의 이름을 말한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번에 알아들은 빅터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름도 친근하게 부르는군. 저 노예 놈 이름이 ‘젤가’인가. 오래 알았던 사이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이제 와서 뭘 숨기는 거지?”
실수인 걸 알아차렸지만 이미 빅터의 수에 넘어가 버렸다. 낭패라는 얼굴로 하비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누가 봐도 젤가와 자신이 알고 있는 관계라는 게 훤히 보이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굳어 버렸다.
반면 빅터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
심문은 끝났다. 저 노예의 정체가 드디어 가늠되었다. 빅터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하비 스터스와 저 의문스러운 남자, 젤가라는 자는 분명 과거에 연이 있었다. 하비가 몸을 던질 정도로 아끼던 자임도 분명했다. 그런데 관계를 밝히지 않는 건 하나 밖에 없어 보였다.
‘이름이 ’젤가‘라면. 역시 저건 스터스 경이 키웠다던 그 첩자인가. 슬루인 제국에서 왔다면 확실하겠어. 사형을 앞두고 노예상한테 거래되었겠고.’
사실 빅터는 알고 있었다. 외교관들이 첩자를 키워 타국으로 보내는 건 암암리에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최근에 정보를 입수한 바로, 총괄 외교관이 하비의 집에 찾아가 저 첩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이미 확인되었다.
문 밖에 서 있던 나스타가 솜씨좋게 엿듣고 빅터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 외에도 빅터에게 이런 정보들을 흘려줄 곳은 로투스 가를 포함해 많았다.
결론은, 빅터는 중간에 다 알아챘으면서 일부러 하비를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궁지에 몰린 하비의 반응을 보면서 다른 진위를 파악하려 했다.
갑자기 나타난 금빛 브로치만은 예외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진짜 하비의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빅터에겐 작은 깨달음이었다.
그에게 보고된 것은 객관적인 하비와 젤가의 관계일 뿐이지, 저 둘의 감정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돌연 나타난 저 물건이 빅터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하비가 마음을 준 상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미칠 듯한 반발심이 일었다. 찬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마저 들었다.
왜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을까. 하비 스터스에게도 마음을 나눈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왜 당연히 하비를 취하려는 자가 자신밖에 없으리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는지.
“경은 왜 매번 기회를 줘도 제 발로 차버리는건지.”
아끼는 첩자인 것까지는 알겠는데, 이토록 열성인 건 확실히 좀 의심스러웠다. 하비의 헌신이 도를 지나친 것 같아 속이 뒤집힐 정도로 거슬렸다.
빅터가 이를 가는 소리가 음산하게 번졌다.
“정말 알 수가 없어. 나에게 괴롭힘당하는 게 그리도 좋았나? 이쯤되니 그런 생각밖에 안 드는데.”
말을 마친 빅터가 손에서 뜨겁게 데워진 브로치를 쌍둥이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얼결에 브로치를 잡은 쌍둥이 중 베타는 빅터가 제 손목을 만지고 있는 것을 불안하게 보았다. 그는 하비가 저 물건을 살 때 몰래 미행하며 감시하던 중이었고, 그래서 알고 있었다. 하비가 무심코 산 물건이라는 것을.
빅터의 말대로 저 금발 머리에 녹색 눈을 한 어린 청년을 두고 한 소리라면, 조금 이상했다. 보석 색깔을 눈동자라고 치면 저 젤가라는 청년보다는 오히려….
‘이거, 주인님을 더 닮은 거 아닌가?’
보석은 진한 녹색이었고, 젤가의 눈은 푸른빛에 더 가까운 연한 녹빛이었다. 빅터의 눈동자 색이 브로치에 박힌 큰 녹색 보석과 매우 흡사했다.
그가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빅터의 시선이 닿은 곳에 비싼 튤립이 하얀 화병 속으로 잔뜩 꽂혀 있었다. 회담 때 화제가 되었던 꽃이 바로 튤립이었다. 이곳이 돈을 바른 곳이기에 가능했고, 개중에는 셈페르 아우구스투스까지 있었다.
“아, 마침 좋은 게 있군.”
눈짓으로 튤립이 꽂힌 화병을 가리키며 빅터가 짐짓 너그러운 척 입을 열었다.
하비는 불안함에 찌푸린 눈으로 빅터가 주시하고 있는 화병을 보았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저 꽃들로 무얼 하려고?
“마지막 기회를 주지.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거리낄게 뭐 있겠나? 어떤 관계인지 밝혀.”
하비와 젤가가 말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빅터는 잔인하게 말했다. 제 속에 들어찬 것이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스스로 지어낸 배신감인지 알지 못한 채, 그는 응어리를 토해냈다.
“아니면 나를 농락하고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테니.”
“아니면 나를 농락하고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테니.”
침묵을 가르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하비는 혼돈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도무지 의중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긴장한 하비의 목울대가 길게 일렁였다. 차라리 빅터가 전처럼 자신과 부친을 원망하며 연좌제의 형식으로 거칠게 밀어붙이는 쪽이 더 나았다. 그건 명확한 이유라도 있었으니까.
‘이것도 경이 하고 있는 복수의 일종인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젤가가 지켜보고 있었다. 빅터는 젤가에게 준비한 연인과의 시간을 망쳤기 때문에 벌을 주겠다고 했고, 더욱이 과거 관계를 밝히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밝힌 상태였다. 빅터가 깔아둔 레일에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장단을 맞춰줘야, 젤가가 죽지 않는다. 그래서 하비는 의문을 삼켰다.
‘정말 원하는 게 뭐지? 가문도 아니라면, 내게 남은 게 뭐가 있다고.’
복수란 것도 어차피 관계의 일부였다. 하비가 그나마 순순했던 것은 빅터의 응분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하비는 어릴 때부터 빅터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빅터는 그걸 교묘하게 이용했다. 하비도 알면서 당해주었고, 그걸로 자신의 죄책감을 일부 깎았다.
이를테면, 상부상조인 셈이었다. 암묵적인 동의 하에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져 왔다. 그런데 지금,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하비는 빅터의 의중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날 원하는 건가?’
빅터는 그에게서 합의되지 않은 다른 것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그건 부당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 반드시 있었고, 그 매개체가 ‘복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빅터가 연인이라는 새로운 관계, 즉 ‘애정’ 이라는 철로를 동의 없이 새로 깔아버렸다.
이건 하비가 허락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암묵적인 합의를 벗어나는 것이며, 하비는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분명 그럴 수 있었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고 있던 빅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며. 뭘 망설여.”
하비가 식은땀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목 뒤로도 긴장이 흘러 뻣뻣했다.
‘그런데 왜 못하고 있는 거지.’
하비는 키스에 응하며 빅터의 허리에 저절로 손을 올렸던 것을 떠올리니 아찔해졌다. 손가락을 통해 전해진 빅터의 단단한 몸과 코끝을 스치던 체향, 널 이해한다 말하는 그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함락당했다. 그 순간이, 너무도 생생했다.
하비는 빠르게 상념을 거두었다.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었고, 그를 재촉하는 선로의 불빛처럼 깜박였다.
‘이 방법 밖에 없는 건가.’
우선은 외교관으로서의 소명과 관계자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빅터와의 관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새로운 관계인 ‘연인’ 이라는 레일에 완전히 발을 들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하비는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경을, 믿어도 되나?”
허탈한 목소리였다. 반쯤 의심하면서도 하비는 빅터가 새로 깐 위험한 찻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돌연 예정되지 않은 열차가 와서 그를 치어도 할 말이 없었다. 오로지 하비의 선택이었으니까.
이에 대한 빅터의 답은 빨랐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어둡게 빛내며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말했잖아. 나 아니면 스터스 경을 이해할 자가 세상에 없을 거라고.”
빅터가 하비의 손에 들린 가면을 빼앗더니 찬찬히 물었다. 하비가 무슨 생각인지는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손에 넣고 조금씩 자신을 믿도록 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빅터는 좀 더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다른 자에게 뺏기지만 않으면 된다.
“자, 그럼 다시 묻지. 우리의 명예가 달린 문제니까 신중해야해.”
같은 질문이 새롭게 돌아왔다. 빅터의 안광이 녹빛으로 번들거렸다.
“저 노예와 무슨 관계였지?”
하비는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빅터가 고의로 깔아둔 오해대로 밀고 가는 게 낫다. 젤가를 필사적으로 빼내려고 한 데 이유가 필요했으니, 첩자 아닌 다른 정당성이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과거에 젤가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거짓이 가장 타당하긴 하지.’
공교롭게도 하비는 거짓말에 서툰 편이었다. 그가 차마 젤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빅터만을 뚫어지게 보았다.
“미안하게 됐어.”
말하는 내내 하비의 손이 꿈지럭댔다. 늘 잔잔하던 밤색눈은 연신 떨리고, 목소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젤가는 예전에 나와 사적으로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지.”
뻣뻣해진 태도로 하비는 겨우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노예로 팔리는 걸 막으려고 한 거고.”
진실 여부를 꿰뚫는 데 능하지 않더라도 이건 누가봐도 거짓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빅터는 속으로 웃었다.
‘너무 잘 보여서 투명한 물 위를 들여다 보는 기분이군.’
오히려 하비가 눈에 다 보이는 연기를 함으로써 젤가와 감정적인 관계가 아닌, 단순히 업무상으로 엮인 관계임이 명확해졌다.
‘그랬단 말이지.’
빅터는 가라앉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환해졌다. 하비가 저 노예와 마음을 나눈 것의 여부로 그의 기분은 시궁창과 천국을 오갔다. 빅터의 온 신경은 하비 스터스에게 쏠려 있었다. 하비가 자신과의 관계를 인정했고, 더군다나 저 노예와 감정적인 교류가 깊었던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다시 좋아진 기분으로 빅터가 능청맞게 되물었다.
“최근까지도?”
“유감이지만, 그렇다.”
간단한 거짓 대답만으로도 하비의 얼굴에 작은 금이 갔다. 빅터는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역시, 그런 거였나. 알겠어.”
빅터가 원하는 큰 그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손에 들린 하비의 쥐 가면을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렸다.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끼리는 가벼운 연애조차 서로의 명예를 저버리는 큰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하비는 노예와 정을 나누었다는 빅터의 말을 일부 인정했다. 현재 연인인 바르뎀 가의 차기 가주를 모욕한 셈이었다.
바르뎀 가의 차기 가주는 배신의 대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명예를 훼손한 대가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것처럼 빅터가 회전하던 손목을 멈추었다. 돌리던 가면을 멀리 던지면서 그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경과의 관계를 이대로 파투낼 생각은 없으니, 적절한 대가를 끝으로 이번 건은 이만 넘어가도록 하지. 두 가문 모두의 명예를 생각해 이번 일은 발설하지 않겠어.”
하비의 잔잔한 밤색 눈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대신, 이 장소에서는 내가 시키는 걸 다 소화해야 할거야. 끝나면 모두 없던 일로 해주지.”
빅터는 저 일그러진 표정을, 다른 곳, 다른 상황에서 좀 더 보고 싶었다.
‘물론 혼자만.’
그가 빙글 몸을 돌리더니 문 근처에 서 있는 쌍둥이 사용인을 향해 명령했다.
“모두 나가.”
걱정되는 얼굴로 하비를 흘끗대던 그들은 한숨 지으며 명대로 했다. 슬슬 저 단단하지만 위태로워 보이는 하비 스터스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집사 레나의 끊임없는 설파가 먹힌 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내보낸 빅터는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젤가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넌 여기 남아.”
“예? 제가요?”
젤가가 어린 새처럼 떨며 하비를 보았다. 무심결에 하비에게 향하는 시선을, 빅터가 어깨를 움직여 차단했다.
“당연하지. 넌 대가를 치러야 해.”
그가 가소롭다는 듯 선이 가느다랗고 비쩍 마른 젤가를 내려보았다. 빅터의 우성 알파 페로몬이 다시 스멀스멀 새어나와 젤가는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스터스 경과 약속한 게 있으니 죽이지는 않을거다. 그건 걱정 말고.”
빅터가 말없이 서 있는 하비의 팔을 잡았다. 성큼성큼 붉은 휘장으로 가려진 침대로 데려갔다. 곧이곧대로 하지 않겠다는 듯 하비의 팔에 힘이 실리긴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힘이 빠졌다.
하비는 젤가와의 관계를 거짓으로 인정한 뒤부터 빅터가 조금 어색해졌다. 마치 정말로 그를 기만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경은 이쪽으로.”
침대에 풀썩 앉은 빅터가 강제로 하비를 제 옆자리에 앉혔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그가 멀뚱하게 보고 있는 젤가에게는 턱짓했다. 귀한 꽃이 잔뜩 꽂힌 하얀 화병을 가리키고 있었다.
“넌 저 화병을 들고 와."
서둘러 화병을 잡고 오는 젤가에게 빅터가 날카로이 덧붙였다.
"혹시라도 깨면 꽃 하나당 손가락 하나를 잘라 줄테니 조심히 다뤄.”
놀란 젤가가 걸음 하나에도 힘을 실어 조심하며 가지고 왔다. 그가 무릎을 꿇고 양 팔을 길게 뻗어 가져온 화병을 빅터에게 바쳤다.
빅터는 일부러 바로 받지 않았다. 젤가의 뚝 부러질 것 같은 얇은 팔목에서 화병이 위태롭게 떨리는 것을 보기만 했다.
지켜보던 하비가 보다 못해 화병을 대신 받아주었다. 빅터는 마음에 안드는 듯 짙은 금빛 눈썹을 찌푸렸고, 그가 또 무슨 짓을 하기 전에 하비는 침착하게 물었다.
“이걸로 대체 뭘 하려고?”
하얀 화병의 차가운 기운이 하비의 드러난 팔에 닿았다. 빅터가 이를 가만히 보더니, 하비의 품 안에 든 화병으로 손을 뻗었다.
빅터의 손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하비가 어깨를 흠칫거렸지만, 빅터는 개의치 않고 화병에서 노란색 튤립 하나를 꺼내들었다. 엄지와 검지로 잡고 비비면서 빅터가 노란 꽃망울에서 나오는 향을 맡았다.
“이 꽃들 전부, 뒤에 꽂은 상태로 방 안을 한 바퀴 돌고와. 아, 물론 기어서.”
하비는 숨이 턱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젤가가 하비 대신 크게 소리 냈다.
“예?!”
하얀 화병 위로 솟은 꽃 때문에 하비의 얼굴이 가려졌지만 빅터는 알 수 있었다. 몹시 황당해 하고 있다는 것을.
하비는 별 것 아닐거라 생각하고 빅터의 말에 따라주었겠지만, 빅터는 늘 상상 이상의 것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하비를 생각하며 빅터가 노란 꽃을 얼굴에서 치우고 즐거운 듯 말했다.
“떨어뜨리면 이 노예의 신체 일부가 하나씩 사라진다 생각해. 어차피 한두번 해본 건 아니니까 잘 할 수 있겠지?”
개처럼 기게 한 적도 있었는데, 이깟 것이 대수냐는 빅터의 말이 뒤따랐다. 하비는 수치심에 저 입술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속삭이며 따라붙는 붉은 입술이 예민한 귀를 스치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빅터에게서 나오는 음험한 페로몬이 하비의 귀와 목덜미를 선뜩하게 눌렀다.
“이것만 지나가면 다 끝날 상황이야. 협조하는 건 경의 마음이고. 난 분명 약속했어. 이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참아주면 모두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매혹적인 저음이 다시 멀어졌다. 귓가를 달구던 뜨거운 숨도 사라지자 하비는 조금 제정신이 들었다. 볼록하고 하얀 하비의 귓등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숨막히게 조여오는 빅터의 페로몬과 시시각각 바뀌는 그의 태도, 현란한 말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중심을 잡기에 빅터는 너무 굴곡 심한 파도같았다.
빅터가 그런 하비를 눈에 담더니 젤가에게 명했다.
“구멍에 꽃을 꽂는 건 특별히 저 노예놈에게 시켜주지. 애틋한 사이였다면서.”
젤가가 경악해서 고개를 번쩍 들고 빅터에게 소리를 높였다.
“제가 어떻게 감히 스터스 경께……! 그런 짓을 할 순 없습니다!”
빅터는 말없이 잘 깎인 꽃줄기 단면을 제 손가락으로 눌렀다. 사용인들이 관리를 잘해 대부분 꽃줄기는 뭉툭하지만 그가 쥔 것은 날카로운 편이었다.
꾹꾹 들어가는 날선 단면이 그의 단단한 피부를 찢을 것처럼 짓눌렀다. 피가 맺혔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아, 그래? 그럼 이 자리에서 몸에 난 모든 것들을 하나씩 뽑힌 뒤 굶주린 쥐떼에 던져주는 걸로 할까?”
손톱, 발톱 예외없이 하나씩 잡아뜯어 신경을 자글자글 갉아먹는 고문을 줄줄이 읊자 젤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수록 빅터의 손에서 흐르는 핏줄기도 점점 거세어졌다. 그는 인식하지 못하는 듯 했다.
뭔가를 망가뜨리면서 흥분할수록 그의 속에서 흉측한 감상도 함께 솟았다.
‘피냄새…….’
언제나 그랬다. 피냄새만 나면 빅터는 어디선가 짙은 유황 냄새도 함께 나는 것 같았다. 썩은 계란 같은, 그 어둡고 눅눅한 냄새. 점점 지옥이 선명해졌다. 정신을 혼탁하게 하는 기이하고 속살대는 목소리들도 들려왔다.
그럴수록 빅터는 그곳에서 난 사람처럼 굴었다. 좀 더 악랄하게, 좀 더 잔인하게. 그래야 그 속에서 무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만해.”
보고 있던 하비가 이상한 듯 빅터의 손을 잡았다. 지나치게 찔러 피가 흐르는 노란 튤립도 치우고 빅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역겨운 유황 냄새도, 어디선가 속삭이는 것 같던 이상한 소리들도 밤색의 고요한 시선 속에서 한꺼번에 사라졌다. 마법 같았다.
빅터는 뜬 눈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것들이 한번에 사라지는 기현상을 목격했다. 마치 꿈 속에서 첫 러트의 기억으로 허덕일 때 나타나는 그 알파 남자 같았다. 남은 것은 또렷하고 나지막한 하비의 목소리 뿐이었다.
젤가를 위협하는 걸 그만두라는 건지, 자해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빅터는 즉시 멈추었다. 피가 더 흐르지는 않았다.
그걸 보며 하비가 힘주어 말했다.
“내가 한다고 했잖아.”
노란 튤립 끝에 맺힌 붉은 핏방울을 눈에 담은 하비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미 떨어져 고급 원단으로 만든 푸른 카펫을 적시고 있는 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하비는 핏줄 선 빅터의 짙은 녹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젤가의 낡은 노예복을 거칠게 위로 한 번에 벗으며 하비는 반쯤 걸린 옷 사이로 머리를 빼내었다. 단련된 어깨 근육이 불룩대며 나머지 옷도 맨살에서 튕겨냈다. 잔뜩 흐트러진 밤색 머리 아래 하비의 알 수 없는 시선이 빅터에게 닿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하고 압도적인 위치에 있는 자이면서, 빅터는 제일 불안정해 보였다. 하비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빅터와 엮인 이후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자신조차 그 선 없는 변덕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자해를 할 정도로 배신감을 느낀 거였나.'
하비는 빅터의 이상 현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오해했다. 알싸한 감정이 하비의 가슴을 강하게 치댔다. 공개적인 관계로 선언한 게 어쩌면 빅터의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태까지 자신을 괴롭혀 온 것까지 설명할 순 없었지만, 어차피 증오와 애정은 한 끗 차이다. 그의 속은 아무도 모르고, 들끓는 변덕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내게 하는 행동들이 정당화 되는 건 아니지만.'
하비는 피가 흐른 자국이 있는 빅터의 손가락을 보며 나머지 옷을 벗었다.
“어울리지 않는 짓도 하지마. 경에겐 배신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할테니까.”
탄탄한 다리를 감쌌던 너덜대는 노예복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속옷만 남은 하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빅터와 젤가를 번갈아 보았다. 젤가는 하비의 눈을 피했고, 빅터는 드러난 하비의 맨몸을 무심한 눈으로 훑어내렸다.
정교하게 갈라진 복근과 어깨부터 물 흐르듯 떨어지는 근육 붙은 팔, 허리의 정중선을 사이로 패인 등고랑, 허벅지에서 무릎, 발목까지 이어지는 잘 단련된 모양새가 언제나 보는 하비의 것과 같았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어야 할 자가, 가장 담담한 모습으로 닫힌 입술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지.”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입술을 한 번 물고 씹는 것으로 이 고난을 감내하면서.
젤가는 떨리는 앙상한 손가락으로 형형색색의 꽃을 한가득 쥐었다.
투둑!
심지어 손에서 꽃 두어 개가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고문을 많이 받은 손은 작고 야위어서 많이 잡지도 못 했다. 식은땀이 젤가의 등 뒤와 손바닥 안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정말 해야 돼?’
젤가가 난감한 듯 눈만 굴렸다. 눈길이 닿은 곳에 빅터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 않으면 정말 바로 죽일 것 같았다.
“히끅!”
딸꾹질을 한 젤가가 핼쑥한 안색으로 하비의 뒤에 섰다. 하비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성스러운 것을 만지듯 젤가는 간신히 중심부를 가린 잿빛 속옷으로 손을 뻗었다. 이를 빅터가 한치의 놓침 없이 지켜보았다. 그의 입매가 작게 일그러졌지만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는 손가락으로 젤가는 하비의 속옷을 슬쩍 잡아당겼다. 탄력 있는 등근육이 손끝으로도 적나라하게 전해져 왔다.
당긴 속옷 아래 볼륨 있는 엉덩이가 보였지만 젤가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속옷을 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차올랐다.
‘못하겠어…….’
지금 그는 생명의 은인에게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지르려 하는 중이었다. 배덕감이 젤가의 속을 후벼팠다.
결국 젤가는 꽃을 쥔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 머리를 쿵쿵 찧으며 그가 흐느꼈다.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제 손가락을 잘라 주십시오!”
하비는 한숨 쉬며 뒤돌아 섰다. 빅터의 살기 같은 시선에 온 몸이 저릿할 정도로 따가웠지만 무시했다.
하비가 맨몸으로 젤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작은 머리통에 손을 대고 더 이상 머리를 바닥에 찧지 못하도록 막았다.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하비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냥 해. 괜찮으니까. 그래야 네가 산다.”
나라를 위해 일한 게 전부인 사람이다.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하비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구해주려고 한 것이 잘못되어 이런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그래도 죽는 선택지만은 간신히 피했지만, 그의 마음까지 지켜주지는 못 했다.
하비의 목소리에 더 자극을 받은 듯 젤가는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통곡했다.
“죽여주세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젤가는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그의 눈물이 부드럽게 깔린 푸른 카펫을 점점이 적셨다. 하비의 손길은 더욱 부드러워졌고, 그걸 보던 빅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침대 위에 앉아서 느긋하게 지켜보던 것을 관두고 빅터가 몸을 일으켰다.
“못봐주겠군.”
빅터는 제왕처럼 군림하던 침대에서 내려와 울먹거리는 젤가의 손에서 꽃을 뺏어 들었다. 동시에 꽃을 갈취당한 젤가의 손은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 떨리고 있었다.
빅터는 젤가의 머리통을 쓸고 있는 하비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제기능도 못하는 약쟁이 같은 손으론 스터스 경의 귀한 몸에 흠집을 내겠어.”
사실 젤가가 하비의 속옷을 만진 순간, 빅터는 머릿속이 전부 뒤집힐 것처럼 부글부글 뜨겁게 끓었다. 당장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먼저 말한 것이 있으니 간신히 참고 있던 차였다.
빅터가 울고 있는 젤가에게 짜증스런 눈초리를 던졌다.
“아무것도 못하는 벌레같은 놈.”
저 노예가 보는 앞에서 하비는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감히 너 따위 것은 쳐다도 보지 못할 사람이라고. 그를 괴롭게 하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알량한 감정들이 빅터의 내면에서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들은 끓는 용암이 되어 넘치다 흘러내렸다. 모든 것을 태우고 짓밟으면서 한 지점을 향해 뻗어 나갔다.
빅터는 쥔 꽃들을 손에서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하는 수밖에.”
열망 같은 그 뜨거움이 날카로이 모여 빅터의 머릿속에서 이성을 잘게 끊어냈다. 그대로 하비의 한 손을 결박하듯 뒤로 붙들고 침대로 머리를 박게 했다.
코와 입술이 강제로 침대 위 자색 이불 위로 비벼진 하비가 짧은 신음을 뱉었다.
“윽!”
빅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젤가가 부들대며 감히 만지지도 못할 것처럼 다루었던 그 잿빛 속옷을 거칠게 끌어내렸다. 그러자 몇 번이고 박았던 붉은 구멍이 속살을 내비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비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탓에 아이러니하게도 구멍은 더욱 잘 벌려졌다.
금방 넣지 않고 뚫어져라 그 광경을 보기만 하자 하비 특유의 시원한 페로몬이 빅터의 코끝을 스쳤다. 그것만으로도 빅터는 흥분해서 성기를 세웠다.
빅터는 저것이 오메가였을 때 어떤 식으로 열리고, 어떻게 자신의 것을 삼켰는지 또렷하게 기억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물이 터져 줄줄 흐르고, 알파를 미치게 하는 강렬한 페로몬을 내곤 했다.
대부분의 알파는 견디지도 못할 정도로 자극적인 페로몬이지만 빅터만이 그걸 맡고도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사실조차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하비 스터스가 자신에게 맞춰진 몸인 것 같아서.
한기 때문에 미약하게 들썩이는 몸을 누르고 빅터는 손에 쥔 꽃 중에 붉은 것을 먼저 뒷구멍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울퉁불퉁한 꽃줄기가 매혹적인 페로몬이 나는 구멍으로 손쉽게 빨려 들어갔다. 꽃망울보다 붉은 속살이 움찔대면서 낯선 이물질을 받아들였다.
“으윽…….”
아까보다 더 큰 신음이 하비의 입술에서 맺혔다가 튀어나갔다. 까슬대는 꽃줄기가 내벽을 긁으면서 길을 트는 감각이 묘하게 아렸다.
빅터가 튕기듯 위로 솟는 허리를 한 손으로 제압해 짓눌렀다.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으면서 빅터는 꽃줄기 끝이 상처를 낼까봐 적당한 선을 유지했다. 특별히 단면이 날카롭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
계속 허벅지를 움찔대는 하비를 달래는 것처럼 빅터가 청동 조각 같은 굵은 목줄기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고작 하나 들어갔어. 잘못 움직이면 다치니까 얌전히 있으라고.”
곧이어 두 번째 꽃줄기가 구멍을 파고 들어갔다. 이번엔 주홍빛 꽃이었다. 아까 전 꽃보다 굵기가 더했지만 매끈했다. 다만 천천히 들어가면서 이미 들어간 꽃줄기를 건드리는 것이 문제였다.
예민한 내벽에 자꾸 자극이 가자 하비가 다시 꿈틀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하비의 두꺼운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으로 온 몸에 땀이 흘렀다. 꽃줄기를 품은 구멍에도 힘이 들어가 바짝 조였다. 빅터는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진정해. 아직 두 개니까.”
손에 달라붙는 눅눅한 땀을 윤활유 삼아 꽃에 바르고는 빅터는 세 번째 꽃을 넣었다. 점점 두꺼워지는 꽃줄기에 하비는 삼키고 있던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크읏…!”
이불 위를 쥐어뜯으면서 그가 열이 나는 이마를 부드러운 비단 위로 비볐다. 붉은 휘장조차 동양에서 공수해 온 것들이라 전체적인 방 분위기는 이국적이었다. 그 속에서 탄탄한 맨살을 비단에 부대끼는 하얀 피부의 남자는 동양화 속에서 들어간 이방인 같았다.
꽃줄기가 늘어날수록 하비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나중엔 빅터가 아무리 세게 눌러도 튀어 오르는 것을 막지 못할 지경이었다.
꽃줄기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하비의 구멍 속을 연신 찔러댔다.
너무 심한 자극이라 하비는 손톱이 떨어질 것처럼 이불 위에 박고 입술을 그 속에 파묻었다. 젤가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되도록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비가 당하는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젤가는 여전히 바닥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양 손으로 귀도 틀어막고 싶었지만 빅터가 그러지 못하게 해서 억지로 하비의 낮은 신음을 들어야 했다.
‘그만해주세요, 제발. 그만…!’
젤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고, 하비의 뜨거운 열은 높아져만 갔다. 더욱이 꽃줄기에 묻어 있던 물 때문에 뻑뻑했던 하비의 뒷구멍이 젖어들었다.
그 모습이 꼭 오메가로 화했을 때의 모습 같아서 빅터는 성적인 긴장으로 바짝 마른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돌겠네.’
당장 박고 싶었지만 더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의 저택 사람들이 빅터에게 성격 이 안 좋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빅터는 관심 있는 물건이나 사람일수록 그 한계를 시험하며 제 손에 둘 가치가 있나 없나를 따지는 것이 천성이었다. 물론 그 덕에 큰 거부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 든 모든 것들은 여지없이 강제로 성장통을 겪거나 제 한계를 맛봐야 했다.
드디어 빅터의 손에 들린 꽃들이 모두 하비의 뒷구멍에 꽂혔다. 마지막은 셈페르 아우구스투스가 장식했다. 크고 화려한 자줏빛 꽃망울이 인상적인, 꽃들의 왕이었다.
‘그래봤자 뒷구멍에 꽂힌 비싼 장식물이지만.’
빈 화병을 의미 없이 쳐다본 빅터가 정신을 못 차리고 신음하는 하비를 일으켜 세웠다.
움직이는 동안 꽃줄기들이 더 깊게 구멍 속으로 찔러 들어와 하비는 단박에 고꾸라질 뻔 했다.
빅터가 팔을 꽉 틀어쥐어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비는 비명도 못 지르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필 쾌락점을 찍어 눌러서 순식간에 절정에 달했다. 그의 어깨가 격하게 떨리고, 뻣뻣해진 성기에서 묽은 정액이 터져 나왔다. 발가락이 일시에 오므라들었다.
“끕…….”
하비는 입술에 피가 나도록 씹어서 간신히 터져나오는 신음을 도로 삼켰다.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음 절정이 찾아왔다.
하비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몽롱해진 눈으로 덜덜 떨었다. 목울대가 사정없이 일렁이고, 이윽고 팔다리에 경직이 찾아왔다. 그의 머릿속은 정으로 때리듯 강렬한 쾌감만이 가득했다. 이번엔 사정하지는 않았지만 뒤로만 갔다.
‘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지만 하비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어릴 때, 하비는 로열 가드란 것이 무엇인지 아버지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라힌 스터스에게서 이 나라를, 도시를 지키는 것이라는 답을 받았다. 가문을 수호하고, 나아가 사람들을 지키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로열 가드가 하는 일이라고.
아버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다음 가주인 자신이 짊어진다. 하비는 그게 로열 가드의 숙명이라 여겼다. 지금처럼 개처럼 기더라도, 꺾이지 않으면 된다. 아이러니였다. 오히려 바닥을 쓸고 다니면서 지켜지는 것이 존귀한 명예라니.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던 하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빅터의 녹색 눈이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빅터가 혀를 차며 부들거리는 하비의 너른 어깨를 잡았다.
“벌써부터 이러면 얼마 가지도 못해서 쓰러지겠는데.”
빅터가 친절한 손길로 힘이 빠진 하비의 턱을 들어 방구석 쪽으로 돌렸다. 희미하게 물기가 어린 밤색 눈에 초점이 없었다.
“저 끝에 갔다가 여기까지만 오면 돼. 보이지? 멀지는 않아. 조금만 애써봐.”
산책을 보내는 것처럼 가볍게 말한 빅터가 하비의 턱을 놓아주고 다시 침대로 물러났다. 손이 떨어지자 힘이 빠진 턱이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하비는 개처럼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무릎이 한 발 나아갈 때마다 구멍에 꽂힌 꽃들이 일시에 꺼떡거렸다. 땀이 비오듯이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턱에 맺히던 물방울이 이내 떨어졌다.
하비가 참지 못하고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허억….”
고작 한 걸음인데 충격이 너무 컸다. 하필 그가 느끼는 곳을 자꾸 찌르고 있어서 기절할 것 같았지만 하비는 끝끝내 참았다.
꽃들이 파르르 구멍 안에서 흔들렸다. 구멍이 꽃줄기들을 다발로 세게 조였고, 거칠한 표면이 내벽을 긁어 다음 쾌감이 성큼 다가왔다.
허벅지가 굵게 떨리고 자꾸만 꺾이려 했지만 하비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빅터가 마지막에 꽃줄기를 흔들었는데 일부러 그가 느끼는 쾌감점을 겨냥하여 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이렇게까지 괴로울 리가 없었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하비가 바닥에서 무릎을 떼어 놓고 손을 억지로 밀었다. 꽃 하나가 떨어지려고 해서 구멍에 힘을 준 바람에 다시 쾌락이 밀려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하비가 바닥을 쥐어 뜯었다.
‘안 돼…….’
드라이 오르가슴이 하비를 덮쳤다. 눈 앞이 캄캄해지고 그의 팔이 반쯤 꺾였다. 휘청대며 쓰러질 것 같던 하비를 보며 빅터가 벌떡 일어났다가 제자리에 앉았다.
하비가 곧장 균형을 잡은 것이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꽃들이 전부 제자리를 찾았다.
보고 있는 사람이 다 아슬아슬한 광경이었다. 시킨 사람조차 압도당할 만큼, 강렬한 의지였다.
그나마 젤가가 고개를 박고 전혀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빅터는 보지 않는 것은 눈감아 주고 있었다.
이를 갈면서, 하비는 주먹을 꽉 쥐고 자존심을 꾹꾹 눌렀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수치는 잠시 지나가면 그만이다. 누군가의 목숨은 되돌릴 수 없다.
“잘하고 있어. 계속 해.”
저 얄미운 목소리는 떠나질 않고 격려하는 것처럼 하비의 주위를 맴돌았다.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빅터의 존재는 마치 그의 곁에 서서 응원하는 양 몹시도 가까웠다.
빅터는 주문처럼 말했다. 그의 눈이 기분좋게 가느스름하게 늘어났다.
“이것만 끝나면 모든 게 좋아질거야.”
정말 모든 게 좋아질까. 속으로 의문을 표하면서도 하비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단단한 무릎에 생채기가 나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비가 앞으로 길수록 시원한 페로몬은 더욱 짙어지고, 빅터의 중심은 더욱 단단해졌다.
사실 하비 못지 않게 빅터도 인내하고 있었다. 하비가 자신의 안에서 굴욕을 겪고, 꺾였다가 다시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어서 참고는 있지만 견디기 힘들었다.
‘젠장….’
하비가 기다가 거의 끝으로 도달했을 무렵 빅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소악단의 음악은 정열적인 구간을 지나 잔잔한 선율로 진입했다. 하지만 빅터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뭉친 꽃줄기가 위태롭게 흔들릴 때마다 바람이 부는 것 마냥 빅터에게 자극적인 페로몬 향이 실려 왔다.
정작 오메가인 젤가는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페로몬이 그리 강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빅터는 그 미약한 페로몬에도 쉽게 반응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성질이었다.
쿵!
하비의 팔이 휘청대다가 탁자 다리에 부딪쳤을 때는 빅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탁자 위의 또다른 화병이 핑그르르 돌면서 하비의 머리를 위협할 것처럼 기울었다.
하비는 눈을 힐끔 들어 분명 떨어질 것 같은 꽃병을 보았지만 신경쓰지 않고 무릎을 앞으로 더 전진시키기만 했다. 꽃병이 제 머리 위로 떨어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에 빅터만 초조하게 이를 바라보았다.
타닥.
하비가 천천히 지나간 뒤로 화병이 똑바로 서자 그제야 빅터는 안심했다. 그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울렁거리고, 손가락이 연신 움찔거렸다. 몇 번이나 들썩거리면서 무릎에 힘을 세우던 빅터는 초유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제자리를 다시 지켰다. 목이 바싹 타고 입 안이 사막이 된 것 같이 건조했다.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빅터는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인내로 내리눌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저 아슬아슬한 남자를 벽에 몰아붙이고 박고 싶었다.
하지만 우성 알파 중에 빅터만한 인내심의 소유자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는 솟구치는 열망을 누르고, 또 눌렀다.
‘참아.’
스스로를 자제시킨 빅터는 참는 대신 하비가 움직이는 것을 하나 놓치지 않고 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오롯이 자신의 것이다. 저 음란한 몸뚱이와 정갈하고 곧은 마음까지 전부. 그의 속에서 뜨거운 정염이 쉴새없이 휘몰아쳤다.
빅터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이미 하비의 페로몬에 잠식되어 있었고, 이를 대하는 방식이 하나로 굳어졌다.
하비의 페로몬을 한가득 맡으며 저 탐스러운 구멍 속에 쑤셔 박는 것이었다.
턴하는 동안에도 하비의 허벅지는 몇 번이나 꺾이고 상처가 난 내벽에서는 피가 흘렀다. 조금씩 전진하던 무릎에는 카펫이 깔리지 않은 곳을 길 때 생채기가 하나둘씩 더 늘어났다.
하비가 거의 돌아왔을 때는 두 사람 다 안색이 평범치 않았다. 단 두 걸음을 남겨두고 하비가 마지막 심호흡을 할 때였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때 빅터가 벌떡 일어나 무릎 꿇은 하비를 일으켰다. 그의 한 팔을 불쑥 잡아 올리며 빅터는 달아오른 하비의 얼굴에 대고 으르렁대듯 말했다. 왜인지 시킨 사람이 더욱 힘들어 보여서 하비는 의아했다.
“그만하면 됐어. 저 노예로 인한 명예 훼손은 다 갚은 걸로 하지.”
하비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수습 못하면서도 남은 거리를 힐끔 보았다.
“아직 두 걸음 남았다.”
빅터는 질린 얼굴로 하비를 보았다. 그는 파리한 안색으로도 고집스럽게 핏기가 맺힌 입술을 물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해줘도……. 고지식하긴.”
마치 공작의 꼬리처럼 화려하게 하비의 뒷구멍에서 피어있던 튤립들을 빅터가 큰 손으로 한 번에 쥐었다. 그리곤 내벽을 긁어대던 꽃줄기를 단숨에 빼버렸다.
굵고 거친 단면들이 긁고 지나가는 감각에 하비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두터운 허리가 충격에 반으로 접혀들었다. 빅터가 팔로 단단히 지탱해 주지 않았더라면 넘어졌을 것이다.
“헉…!”
피와 꽃물이 섞여 하비의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고른다고 골랐는데도 꽃줄기가 내벽을 다치게 한 모양이었다.
빅터는 혀를 차더니 젤가에게 명령했다.
“젤가라고 했나. 넌 나가서 고약을 가져와. 상처에 잘 듣는 걸로.”
“예? 예, 예!”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젤가는 기쁜지 눈물을 그렁그렁 단 눈으로 잽싸게 빠져나갔다. 문 밖에 서 있던 쌍둥이 사용인의 도움을 받은 건지 꽤 빠른 시간 내로 고약을 가지고 왔다.
쌍둥이 고용인들도 문 안으로 고개를 기웃대며 상황을 보려다가 빅터의 명으로 바로 밖으로 쫓겨났다.
“괜찮나?”
하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부푼 어깨만 들썩였다. 그는 빅터의 부축으로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로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볼록하게 드러난 엉덩이 사이로 옅은 핏물 자국이 비쳤다. 아픔보다 상처 받은 자존심이 더 힘겨웠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큰 것은 빅터도 그걸 알았다.
‘귀족이 바닥을 기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없지.’
빅터가 이를 모두 알고 있으면서 시킨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하비 스터스가 다른 이에게 거짓으로라도 한순간이나마 귀속되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빅터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노예처럼 예속된 하비 스터스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마치 확인을 받고 싶은 것처럼.
그런 식으로 맛본 굴종은 달고도 썼다.
돌아온 젤가에게서 고약을 건네받으며 빅터가 냉정하게 말했다.
“스터스 경과의 약속대로 넌 자유다. 앞으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도록. 보이는 순간 각오해야 할거야.”
젤가는 침대 위로 늘어진 하비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그러다 싸늘해지는 빅터의 시선에 얼른 사라졌다.
빅터가 고개를 내저으며 고약을 손에 듬뿍 찍었다. 누런 고약이 빅터의 체온에 녹아 조금씩 흘러내렸다. 피는 멎었지만 아직 흉은 남아있을 것이다. 치료해줄 생각이었다. 병주고 약준다고 욕해도 기꺼이 들을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하비가 들썩대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팔로 무게를 지탱해서 일으키는 그를 빅터가 잡아주려 했으나 뿌리쳤다.
하비는 애써 아무 일이 없었다는 양 갈라진 목소리로 청했다. 피곤이 그의 강건한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너무 늦었군. 이만 돌아가겠어.”
빅터가 고약을 찍어바른 손가락을 멀거니 보더니 황망하게 말했다.
“지금? 이 몰골로?”
하비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잡으면서 비틀댔다.
“옷만 입으면 아무도 몰라. 돌아갈테니 마차나 불러줘.”
출혈과 고통 때문에 이제 질린 얼굴에 열이 올라 달아올랐으면서, 하비는 끝까지 돌아가겠노라 주장했다. 하비의 체온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이불이 금방 휑하게 식었다.
빅터가 허탈하게 웃더니 고약을 옆에 놓아두었다. 곧 웃음기를 싹 거둔 그는 중심을 못 잡고 비틀대는 하비를 잡고는 다시 이불 위로 밀어넣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야.”
무게 때문에 출렁대며 물결을 일으키는 비단 이불로 하비가 고통스럽게 이마를 대고 숨을 뱉었다. 상처가 난 구멍에서 급격하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압제자같은 모습으로 이를 보던 빅터가 다른 손으로 하비의 어깨를 단단히 내리 눌렀다. 하비가 고개를 옆으로 틀고 버둥거렸다.
“뭘 하려고…, 흡!”
말라가는 연고를 억지로 하비의 뒷구멍으로 쑤셔 넣으며 빅터가 담담하게 말했다.
“경은 언제나 상식 범주를 벗어나. 누구보다 상식적인 척하면서 말이지.”
빅터는 이물감에 꾸물대는 구멍 속으로 더욱 깊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비가 움찔하면서 엉덩이를 조이고 손으로 비단 이불을 세게 쥐었다. 얼굴은 이불에 파묻어서 어떤 표정인지 알 길이 없었다.
빅터가 손가락을 잠시 빼더니 손가락 여러개에 고약을 더 많이 찍어 발라 구멍 속으로 박았다. 녹아내린 고약이 구멍 속에서 애액처럼 작용했다. 일부러 손가락을 구부려 쾌감점을 꾹 누르자 하비가 작살맞은 고기처럼 퍼뜩 뛰었다.
하지만 다 떠오르지 못하고 빅터의 강한 힘에 짓눌려 이불 위로 가라앉아야 했다. 잔잔한 밤색눈에 어두운 빛이 번뜩였다.
“그만……!”
이불에 짓눌리던 하비의 성기가 단단하게 서기 시작했다. 쿨쩍대며 빅터의 손가락을 오물오물 먹는 뒷구멍을 탐스럽게 보며 그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시킨다고 정말 할 줄은 몰랐지만, 아니, 어느 정도는 알았지. 그래도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부릴 줄이야….”
하비에 관한 한 수많은 장면과 굴욕을 참는 모습들을 봐왔지만, 이제 빅터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비가 인간으로서나 쓸만한 인재라는 측면으로 봐서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는 안목이 뛰어난 빅터는 그럴수록 탐을 내고 욕심 내는 본능이 솟구쳤다.
그 꿈이 어떤 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견딜 수 없이 가득찬 오메가들의 뜨거운 페로몬 폭풍을 막아준 그 꿈 속의 남자, 그가 바로 하비 스터스 경이었다. 아니면 더 이전이었을 수도 있다. 집사 레나가 그러면 안된다고 말릴 때부터, 혹은 더 오래 전부터.
집사 레나가 종종 말한 적이 있었다. 단추는 잘못 끼우면 다시 채우면 되지만, 어긋난 감정은 어디서부터 다시 맞춰야 할지 몰라서 헤매는 경우가 많다고.
[제가 이 분야를 공부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어긋난 부분을 찾게 해주고 싶어서에요. 그러면 최소한 거기서부터 다시 더듬어 나가면서 뭐가 잘못된 건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빅터는 레나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비와 자신의 관계에는 어긋난 부분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틀어져 있었으니까.'
빅터가 하비의 등근육 위로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빅터의 두꺼운 손가락이 뒷구멍을 멋대로 들쑤시고 구멍 속에서 야릇하게 원을 그렸다. 자극으로 꿈틀대는 근육들을 감상하면서 빅터는 강권에 가까운 제안을 했다.
“가기 전에 제대로 치료는 하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상상으로만 십여 년을 마주하던 하비를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빅터를 삼켜버린 분노와 증오는 어느 덧 많이 희석되었다. 하비가 그의 원대로 진창에 굴리면서 채워진 음습한 만족감도, 이제는 다른 형태로 제 모습을 부풀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내 것이다.’
기이한 만족감이 빅터의 내부에서 커져 갔다. 비틀어진 소유욕이 발해 하비를 집어삼켰다. 다른 이가 제 것을 채간다면 이성을 잃고 다시 취하려 달려들 것이다.
빅터는 확신이 들었다. 아까 전만 해도 누군가가 하비의 마음을 가졌으리라 가정만으로 머릿속의 무언가가 짓 뜯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때 하비가 부들대면서도 엉덩이 쪽에 한 팔을 내려 빅터의 팔을 잡았다.
“이제 됐어. 나머지는 돌아가서 할테니, 이만 놔.”
하비가 힘을 못 쓰고 눌린 채 말했지만 빅터는 전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개수를 늘려 그를 더욱 괴롭게 할 뿐이었다.
찌걱, 찌걱-!
구멍 밖으로 녹은 연고가 밀려나와 미약한 거품을 일으켰다. 하비의 골격 잡힌 허리와 탄력 있는 엉덩이, 그 아래 자리잡고 있는 허벅지가 차례대로 덜덜 떨렸다. 참고 있던 하비의 입매가 틀어지더니 핏기 어린 입술 밖으로 신음을 뱉어냈다.
“흐으…, 으응……!”
뒤에서 전해지는 쾌감에 경련을 일으키는 길고 단단한 몸뚱이를 훑어본 빅터가 이윽고 손가락을 빼내었다. 들썩거리던 육체가 조금 잠잠해졌다. 빅터의 성기가 하의 안에서 터질 것처럼 크게 부풀었다.
그가 결국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변명 같은 말을 던졌다.
“이걸론 안되겠군. 더 큰 걸 넣어야겠어.”
“…뭐?”
빅터가 빠르게 탈의하더니 이번에는 고약을 제 성기에 치덕치덕 발랐다. 누런 고약이 잔뜩 발기해 꺼떡대는 거대한 성기 위에서 녹기 전에, 붉은 속살이 비치는 구멍 안으로 한 번에 박았다. 핏줄이 선 커다란 성기가 작은 뒷구멍을 찢을 것처럼 가득 채웠다.
퍼억!
하비는 뱃가죽이 뚫릴 것 같이 박아대는 삽입에 숨을 들이켰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억지로 들이삼킨 숨이 드디어 짧은 호흡으로 튀어나갔다.
“허억….”
하비가 눈을 부릅뜨며 부르르 떨었다. 상처 난 곳에 우성 알파의 거대한 성기가 비벼졌다. 연고가 발렸지만 그뿐, 배려와 인내심 따위는 없었다.
한계에 다다른 빅터는 흥분으로 달아오른 눈으로 제 아래에 짓눌린 다른 알파를 담았다. 정복감에 취한 녹안이 만족스럽게 늘어났다.
하비는 뱃속 가득 들어찬 성기가 꿈틀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윽!”
빅터가 말없이 엎드린 하비의 엉덩이를 잡아 위로 최대한 끌어올렸다. 위에서 더 깊게 박아 넣으면서 빅터는 땀으로 미끌대는 하비의 꼬리뼈 부근을 꽉 잡았다.
하비는 무릎으로 겨우 무게를 지탱하고 빅터가 성기를 박아서 밀어대는 압력을 버티고 있었다. 그의 이마로 맺힌 땀이 이불 위로 이슬처럼 적셔졌다.
“그만하라고…, 했잖…, 허윽!”
빅터의 것이 뿌리까지 박혀서 안쪽에 이미 바른 연고들을 일부 밀어냈다. 노란 연고가 하비의 허벅지와 회음부를 타고 뱀처럼 흘러내렸다.
끝까지 박은 성기를 천천히 뒤로 뽑아내면서 빅터가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제가 안되는데, 되도록 해보지.”
빅터는 하비의 단단한 엉덩이 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근육 사이로 주름이 잡혔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퍽! 퍼억-, 퍽!
하비의 높은 코가 자꾸만 이불에 긁히고, 앞뒤로 땀에 젖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허공에 붕 뜬 가슴팍에 유륜이 흥분으로 바짝 섰다.
그는 교묘하게 쾌감을 느끼는 지점을 꾹꾹 박아대서 미칠 지경이었다. 몸을 자주 맞추다보니 빅터는 이제 그의 몸에 대해서는 속속히 잘 알고 있었다.
어느 곳을 찌르면 너무 느껴서 경련을 일으키는지, 어디를 박아 주면 있는 힘껏 낮은 교성을 참으며 입술을 물어뜯는지 말이다.
“악, 윽, 읍!, 흣!”
침대에 쳐진 너르고 붉은 휘장이 빅터의 등에 닿아 너울너울 흔들렸다. 휘장은 느릿해진 현악기의 음률에 맞춰 춤추는 것처럼 붉게 물결쳤다.
빅터가 자꾸만 무너지는 허리를 바로잡아 위로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 하비의 어깨는 단단해서 근육으로 빼곡한 그 무거운 몸을 잘 지탱하고 있었다.
위에서 찌르듯 박으며 빅터는 하비가 싫어할 만한 말을 골라서 했다. 박을 때마다 그의 강철 같은 허벅지가 울룩불룩 힘이 들어갔다.
“꽃줄기도 잘 먹더니 내것도 고픈 듯이 먹는데.”
움찔대며 성기를 받던 하비가 등 뒤로 주먹을 휘들렀지만 이미 힘이 빠진 그의 것은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 했다. 막힌 주먹일지라도 하비의 눈빛은 죽지 않고 분노로 형형하게 빛났다. 동그랗게 뭉쳐진 주먹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곧 위에서 격렬하게 박아대는 허릿짓을 참아내지 못하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젤가도 없어져서 전보다는 마음이 풀어진 탓이었다.
“윽...!"
흥분으로 물든 녹안이 하비의 상처난 맨몸을 샅샅이 훑었다. 허리를 쥐고 앞뒤로 흔들면서 하비는 이불을 이로 물었다. 안 그러면 더 큰 신음을 낼 것 같아서였다.
빅터가 이를 보더니 웃음 지었다. 그의 날렵하고 단단한 턱에서 굴러떨어진 땀방울이 하비의 엉덩이 위로 떨어졌다. 둥글게 뭉쳐진 물방울은 흔들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하비의 뒷구멍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것도 버틸 수 있겠나?”
퍼억-!
힘껏 박아넣자 이미 꽃줄기로 여러 번 오르가슴에 다다른 하비가 예민해진 몸을 한껏 떨었다. 빅터가 정확히 쾌감점을 짓누른 것이다. 하비는 벌벌 떨면서 온 몸을 뒤틀었다. 어마어마한 쾌감이 해일처럼 일어 그의 뒷구멍에서부터 허리, 등줄기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갔다. 그의 하얀 육체는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갔다.
번뜩번뜩한 거대한 사정감이 닥쳤다.
하비가 참지 못하고 이불을 물었던 입을 벌렸다. 허벅지가 경련하고 엉덩이가 바짝 굳었다.
“흐억…!”
넓게 벌어진 뒷구멍이 절정으로 오므라들고, 빅터의 것을 거세게 물었다. 하비의 굳었던 성기에서 묽은 액이 터져나오고, 동시에 빅터도 사정감을 참지 못하고 정액을 뱉어냈다.
“크읏…….”
빅터가 금빛 눈썹을 찌푸리면서 신음을 뱉었다. 오래 참아서인지 그의 정액은 양도 많고 짙었다. 꿀렁대면서 뒷구멍 밖으로 고약과 섞여 흐르는 정액이 가관이었다.
피도 얼핏 보여서 빅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은 갈 것 같았다. 본인이 시킨 것이긴 했지만 하비의 고집도 한 몫 한 것이라 생각해버린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좀 거칠긴 했지만, 내 치료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말도 안되는 소리에 하비가 가물거리는 눈을 힘주어 떴다. 빅터에게 휘둘리면 튼튼한 몸도, 체력도, 정신력까지 모두 남김없이 갉아 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이 빅터는 이불을 끌어당겨 하비의 뒷구멍 근처를 닦아주는 친절을 발휘하고 있었다. 거치적대는 붉은 휘장을 휙 걷어내고 옷을 갈무리하던 빅터에게 하비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평범하게 치료하는 방법은 모르는 건가?”
손을 멈칫한 빅터가 그의 지친 음색에 픽 웃었다.
“평범? 그게 어떤 건데.”
“잘 모르지만 경 같은 인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겠어.”
“과찬이야.”
길고 나른한 여운이 하비를 뭉근하게 감쌌다. 늦은 시각이기도 했지만 너무 시달린 탓에 요즘 무리한 하비의 육체에도 쉽게 피로가 찾아왔다. 평소보다 좀 더 빨리 지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빅터 때문일거라 생각했다.
하비가 자꾸만 감기는 눈을 뜨려고 노력하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의 꼼꼼한 습관이었다.
“젤가는 이제 약속대로 정말 건드리지 않는 건가.”
기분 좋게 대화를 이어나가려던 빅터는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하비의 말에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날 뭘로 생각하는 거지. 상인 출신인 걸 잊었나? 신용이 최우선이야. 약속은 지킨다.”
빅터는 그에게 있어 상인보다 시정잡배 이미지가 더 강하다는 것은 몰래 삼켰다.
하비는 안도의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그럼 되었다. 이제 그가 신경써야 할 상황은 더 없는 것이다. 집에서 잘 돌보고 있는 늙은 회계사에게 좋은 방도 내주었고, 남은 건 빅터에게 약점 잡힌 라힌 스터스에 대한 일과 스터스 저택의 형편없는 재무 상황을 재조사하는 일 뿐이었다.
구멍 안이 지나치게 욱신거리고 열이 올랐지만 며칠이면 괜찮아 질 것이다.
'아니, 해결되지 않은 일이 하나 더 있군.'
하비는 말간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빅터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공식 연인으로 선포해 버린 탓에 이제 어딜 가도 그 소리가 빠지질 않는다.
방금도 '공식 연인' 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빅터가 제 약점을 쥐고 흔들었고, 그에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젤가를 과거 연인으로 둔갑시킨 것도 모자라 그에 따른 명예 훼손까지 몸으로 갚아야 했다.
'이제 정신 차려야지.'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틀대면서도 하비는 똑바로 걸으려 애썼다. 겨우 허리를 추슬러 곧게 선 하비가 빅터에게 내일 일정을 물었다.
“계속 청에서 일하나?”
“아니. 주로 집에서. 내일은 청에 나갈 예정이고,”
문 밖에 서 있는 쌍둥이 고용인에게 갈아입을 새 옷을 여러 벌 가져오라고 시킨 빅터가 뒤돌았다. 좋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건 왜?”
어쩐지 기대가 가득한 얼굴에 대고 하비는 조용히 말했다.
“일이 끝나면 저녁에 보지.”
“어디서?”
무서운 얼굴로 빅터를 노려본 하비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떨어진 제 옷을 주웠다.
“소드 클럽에서.”
'공식 연인' 이라는 입지를 이용할 수 있는 건 빅터만이 아니었다.
-- 공개 열애 --
하비는 자연스럽게 빅터가 부른 의사에게 몸을 맡겼다. 이미 사정을 다 알고 있는 듯하고 비밀을 엄수해서 그나마 마음이 편한 상대였다.
무엇보다 혼자 치료하기엔 상처가 덧날 수도 있고, 직접 고약을 바르는 느낌이 너무 별로여서였다. 그걸 바르면서 고통마저 쾌락으로 치환하여 느끼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하비를 집까지 무사히 태워주라는 명을 내린 빅터는 그 사이 또 무슨 볼일이 생긴건지 홀연히 떠나버렸다.
호출한 의사가 하비의 상태를 진찰한 뒤 해열제를 처방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그들은 마차에 동승했고, 쌍둥이 사용인 중 베타 쪽도 마차 안에 함께 올랐다. 여전히 마부는 알파 쪽이 했다.
덜컹대는 마차 안에서 의사가 분노를 터뜨렸다.
“도대체 그 분은 무슨 생각이신건지! 너무하십니다. 제가 바르뎀 경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빅터의 사용인이 뻔히 눈 뜨고 보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의사는 용감하게 하비 편을 들었다. 그의 상처를 떠올리며 의사가 씩씩댔다.
무릎도 다 까져있고,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나 널브러져있던 꽃줄기들, 내벽에 난 상처들을 되짚어 보면 빅터가 무슨 짓을 시켰을지 뻔히 보였다.
빅터의 쌍둥이 사용인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넌지시 이야기해준 것도 있었다.
귀족들의 변태적인 취미에 질릴 대로 질린 의사가 입에서 불을 뿜듯이 하자 하비가 마차의 창가에서 고개를 돌려 담담히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조용히 있어주면 좋겠군. 나도 그 상처들이 썩 영광스럽지는 않으니까.”
말은 그리해도 의사가 함부로 입을 놀리면 빅터에게 죽임당할 거라는 사실쯤은 뻔히 꿰뚫고 있는 하비의 걱정이었다. 베타 쪽이 하비의 염려를 흘리며 의사의 말에 즉각 동의했다.
“제가 생각해도 이번 일은 너무했습니다.”
여태까지 빅터가 한 모든 일들을 전부 눈감았으면서 그는 제 주인을 은근히 돌려 깠다.
“밖에서 듣는 소리만으로도 스터스 경의 고충이 과하다 싶을 정도였니까요.”
하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생각해 보니 젤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 밖에는 귀 밝은 그의 사용인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 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하비가 헛기침을 했다.
“이름이…?”
베타 사용인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제 소개를 했다.
“벤입니다. 마차를 몰고 있는 놈은 ‘진’ 이고요.”
“그랬나. 이름도 모르고 여태 지냈어. 앞으론 이름을 불러도 될까?”
정중한 하비의 말에 벤이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지요.”
덜컹덜컹!
하비의 얼굴에 희미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구멍 안이 너무 쓰라렸다. 아픔을 드러내지 않도록 애써 숨기면서 하비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곤란한 질문이면 꼭 대답하지 않아도 돼.”
빅터의 베타 사용인, 벤은 흔쾌히 승낙했다.
눈치 빠른 의사는 이야기를 못 들은 척 해주며 자는 시늉을 했다. 머리를 마차 벽에 기대더니 금방 코를 골았다.
하비가 그의 배려에 속으로 미소짓고는 물었다.
“임페르 해적단 납치 사고로 누굴 잃었지?”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벤은 아무 말 없이 빤히 하비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진지해 보이는 밤색 눈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다 상당한 무례였음을 깨닫고는 벤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동생을 잃었습니다.”
하비의 곧고 선명한 이목구비에 어둠이 깔렸다.
“…그런가. 그럼 그 나스타라는 여자는?”
알파이던 그 적개심 많고 칼날 같던 사용인을 떠올리며 묻자 벤이 천천히 대답해 주었다.
“나스타는 오빠를 잃었습니다.”
“바르뎀 경의 집사는?”
“레나는 어머니를 잃었고요.”
차례대로 이어지는 질문에 벤은 갈결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하비의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그의 안색을 하나하나 살폈다.
“묻는 의도가 무엇이십니까?”
하비가 무거워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알고 싶었어.”
새벽의 쌀쌀한 공기가 열어놓은 마차 창문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밖은 너무 늦은 시각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차의 불빛만 고요히 따랐다.
하비는 어둠 속에서 제 앞길만 밝히며 달리는 마차가 꼭 자신 같았다. 쓴 웃음이 입가에 배어나왔다.
“난 모르는 게 너무 많았거든. 알아야 할 것도, 귀 막고 눈 돌리면서 지나쳤지.”
죽은 사람들에게는 현실이 너무 팍팍했다는 변명조차 통하지 않을 것이다.
벤은 지독히도 후회가 가득한 하비의 음성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자신조차 모두의 복수에 동참했으면서, 이 처연해 보이는 남자에게 독한 말을 뱉을 자신이 없었다.
별 것 아닌 위로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줄 수 있다면 해주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왜 이리 변한 걸까. 무엇이 벤의 마음을 뒤흔든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벤이 힘주어 말했다.
“모르는 일에 대해서까지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고쳐 나가면 되는 거니까요.”
하비는 미소로 답변을 대신했다. 가장 그를 괴롭게 하는 건 빅터인데, 정작 빅터의 사용인들은 따뜻함을 주었다.
순간 마차가 돌부리를 지나치며 덜컹댔다. 칼날 같은 고통이 엉덩이 아래에서 다시 엄습했지만 하비는 익숙하게 입술을 물고 참아냈다.
“그나저나 네 주인은 이 야심한 밤에 어딜 간 거지?”
벤은 난감한 기색으로 하비의 눈을 피했다. 제법 잘 답변해주던 아까와는 다르게, 어딜 봐도 두루뭉술한 답변을 되돌렸다.
“주인님은 아주 바쁘십니다. 돌봐야 할 곳도 많고요.”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하비에게 벤이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오메가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니니 걱정마십시오.”
하비가 멍하게 눈을 깜박대다가 피식 웃었다. 달리 할 대꾸도 없는 엉뚱한 말이었다. 정식 관계라 못 박은 건 빅터였고, 그건 또 하나의 공개적인 족쇄일 뿐이었다.
하지만 딱히 벤의 오해를 고치지는 않은 채 하비는 침묵하기를 택했다. 때로는 침묵이 괜한 변명보다 낫다.
문득 하비가 자조했다.
‘이게 최선일 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를 풀고, 수정하는 일은 하비에게 길고 긴 고통만 안겨주었다. 오해가 아니라 진실임을 알게 되었을 때 받는 타격이 너무 컸다.
마치 빅터와 그의 사용인들이 가진 분노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하비는 열이 오른 얼굴을 덜컹대는 마차 벽에 대었다. 진실이 주는 거대한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덜컹덜컹!
마차가 흔들리고, 몸 태울 것처럼 맹렬한 열기가 뺨과 귀, 옆이마로 천천히 빠져나갔다. 차가운 기운이 열을 식혀주자 뜨거운 머릿속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그의 머리는 조금 살만하면 끊임없이 한 사람만을 고집했다. 빅터 바르뎀.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빅터는 타고난 수완꾼으로서, 하비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뒤흔들어 놓았다. 한 치 혀로 가장 아픈 곳을 농락하고, 찔렀다. 그러면서 피 흘리며 아파하는 그를 은근히 제 품에 구겨 넣으려 했다.
[착각이든 아니든, 너를 가장 잘 알고 인정하는 건 나일걸.]
[가장 잘 이해할 사람도 나야.]
[한 번이야. 한번만 내려놓으면 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장담하지.]
[혼자 잘 견디고 버텼다는 것도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차라리 그 말에 넘어가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매혹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한 순간, 빅터가 키스했고 자신은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허리를 손으로 감고 적극적으로 대했다. 하비가 머리를 흔들면서 상념을 떨쳐내려 했다.
‘어딘가 홀린 것 같군.’
자신을 사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빅터는 하비의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하비는 빅터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그는 기만과 사기에 능한 자다. 약속을 철석같이 지키는 상인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일과 돈이 걸리지 않은 약속까지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자가 걸어온 길이 라힌 스터스 때문에 얼마나 핏빛 가시밭길이었든, 아들인 자신에게 푸는 폭력이 정당하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비는 제 살을 깎고, 뼈를 내주어서 해묵은 원한을 풀고자 했다. 좀 풀리고 나면, 괜찮아 지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도 사실 했다.
‘이렇게 오래 올 줄은 몰랐지.’
그런데 빅터의 행태는 갈수록 도가 지나쳤다. 이제는 그의 영혼과 마음까지 앗으려 하고 있었다.
송두리째 뒤흔들어 하비를 그 백색 저택으로부터 강제로 떼어놓으려는 것처럼. 스터스 가가 이룩한 순결한 유산을 짓밟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스터스 가는 하비에게 지켜야 하는 존재인 동시에 발을 묶는 족쇄였다. 하비는 본능적으로 제가 가진 것을 부수려는 빅터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이끌렸다. 그게 문제였다.
어쩌면 백색 외딴 저택에서 숨죽여 지내면서 죽여 온 반항적인 기질이 되살아 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숨 막히는 곳에서 살기 위해 죽여야 했던 그의 저항 정신이, 빅터의 한계까지 모는 그 고통 속에서 씨앗을 틔우고 싹을 맺은 건 아닐까.
하비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때 의사가 기지개를 켜며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를 깨었다.
“이런, 깜박 졸았지 뭡니까. 원래 일찍 자는 사람이라.”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자 의사는 계면쩍게 웃으며 하나뿐인 환자를 붙들었다.
“스터스 경.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열이 심한 것 아닙니까?”
하비는 아무렇지 않게 마차 벽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한 숨 자고나면 좋아질거니 괜찮아.”
“괜찮기는요!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겪으시고 어떻게 금방 괜찮아지시겠….”
“그만.”
하비가 딱딱하게 안면을 굳히고 의사의 뒷말을 잘랐다. 무슨 말이 더 튀어나올지 몰라 빠르게 조치한 것이었다.
벤이 질린다는 얼굴로 의사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하비에게 말했다.
“안 좋으시면 참지 마시고 꼭 이야기 해주십시오. 참기만 하면 병드니까요.”
“알겠네.”
“근데 그 브로치 말입니다. 주인님이 화내시던 그...”
차마 말을 다 못하겠는지 벤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하비도 알아듣고 경직된 얼굴로 아는척 했다.
“아아.”
“얼마 전 시장에서 그걸 사시는 걸 제가 봤습니다. 젤가라는 노예에게 사준 것이 아니라요. 주인님이 설마 의미 없이 산 것에 그토록 화를 내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제대로 말씀드릴까요?”
벤과 진은 하비가 시장에서 그 브로치를 한참 만지작대다가 산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젤가보다 빅터의 이미지와 더 가깝다는 것도 눈치챘다. 정작 당사자인 하비 스터스와 그들의 주인인 빅터만 모르는 것 같아 답답했다.
하지만 하비는 단박에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아니, 괜찮아. 지금 와서 해명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나. 내버려둬.”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얼결에 다시 집어온 금빛 브로치를 하비가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그는 브로치의 매끄러운 면을 손으로 쓸면서 녹색의 큰 보석을 눈에 담았다. 깎인 녹색 단면은 거칠고 울퉁불퉁했다. 모든 걸 담을 것처럼 속이 비치는 것 같은데, 막상 가까이 들여다 보면 예상 외로 불투명했다.
하비는 딱 한 번,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빅터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막 깨어났을 때 보이던 혼탁함이었다.
“바르뎀 경이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인가?”
벤이 어두운 얼굴로 순순히 털어놓았다.
“예. 심할 때는 몽유병처럼 돌아다니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가.”
빅터가 악몽에 시달릴 때, 깨어나자마자 애타게 잡았던 그 손길이 생각나서 하비는 손목을 매만졌다.
‘그 느낌은 뭐였지.’
막 깨어난 빅터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불안정해 보이고, 눈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위험천만한 상황의 인간 같았다. 오만한 평소의 모습은 어딜가고 매달리는 한 사람만 오롯이 남았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타인을 깔아보듯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 차이가 낯설었다. 아프게 하면서 이해한다 말하고, 아끼는 것처럼 굴다가도 또 가차없이 상처를 준다. 정말이지 헷갈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비는 브로치를 도로 집어넣었다. 괜히 보고 있으니 마음만 심란해졌다. 다시 열이 오르고 호흡이 힘들어졌다. 기분 탓인지 상처가 났던 구멍도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의 굴욕이 다시 떠올라 화가 났지만 그의 기분을 삭히려는 것처럼 곧바로 빅터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따라 붙었다.
널 가지고 싶다고, 원한다고.
‘바르뎀 경이 그리 말한 적이 있었던가.’
하비가 곧장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혈맥이 불규칙적으로 뛰고 심장이 쾅쾅 울렸다. 열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분노가 지나쳐 몸이 이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빅터를 만난 이후로 그가 알던 모든 것들이 여지없이 뒤집어지고, 모습을 달리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의 마음조차도.
다음 날, 오랜만에 청에 돌아온 빅터에게 대리인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빅터가 자리를 비울 때를 대비해 세워둔 대리인은 핏기 없는 안색에 다크서클이 길게 늘어진 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그가 무너질 것 같은 서류더미를 양 팔로 가득 안고서 여유롭게 들어오는 빅터를 맞이했다. 빅터는 어느 때보다 생기있어 보였다. 파리한 안색의 대리인과 달리 혈색이 돋고 건강해 보이는 피부에서 윤이 났다.
“그간 쌓인 서류 다 제가 처리했습니다. 저한테 혹시 미안한 건 없으십니까?”
빅터가 귀찮은 얼굴로 책상에 놓인 서류더미를 한무더기 움켜쥐었다. 한 손으로는 청 앞에 서 있는 베이커리에서 산 갓 구운 빵을 들고 있었다.
“전혀. 그러려고 널 대리인으로 세운건데. 네 할 일 한 것 뿐이잖아.”
“제가 대리인인 건 맞는데요. 그렇다고 제가 전부 처리하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쉬지도 못하고 청에서 먹고자고 했단 말입니다.”
고소한 향이 일품인 빵을 한 입 베어물고 빅터가 서류로 눈을 돌렸다. 상단 일과 바르뎀 가의 현 가주가 떠넘기고 간 일들을 처리하는데만도 벅찬 빅터였다.
‘귀찮게.’
이런 징징대는 하이톤의 소리보단 다른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하비의 나지막한 저음을 떠올리던 빅터가 물고 있던 빵을 뱉어냈다. 미친 거 아닌가. 당혹스러움은 곧 짜증으로 바뀌었다.
“나도 일부는 집으로 챙겨가서 자택 근무로 해.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지. 지금 당장 넘겨줘?”
“의원님!”
빅터가 빵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털며 삐딱하게 대꾸했다.
“대리인 자리 때문에 네 아버지가 나한테 쏟아부은 술자리비도 아직 다 회수 못했을 텐데.”
억울한 얼굴로 뭔가 항의하려던 대리인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였다. 꼭 누군가를 닮은 것 같은.
빅터는 익숙한 페로몬을 맡았다. 시원하고도 청아한 기운마저 도는 깨끗한 페로몬이었다.
‘설마.’
안색이 휙 달라진 빅터가 들어오라 말하자 역시 그의 예상대로였다. 하비가 동그란 문 손잡이를 잡고 서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서 있었다.
“스터스 경?! 여긴 어쩐 일로…….”
오늘도 하비는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한 업무 차림이었다. 남색 겉옷에 금장 단추마저 정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고, 손목에는 빅터와 마찬가지로 풍성한 하얀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밤색 머리칼도 한 올 한 올 빗어 넘겨서 깔끔했다. 어젯밤의 굴욕과 수치는 전혀 보이지 않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리인이 당황스럽게 고개를 푹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복도에 지나가던 사용인들이나 청 관련자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사귄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를 하비가 몸소 인증한 것이다.
빅터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어지럽게 널린 서류더미를 가리듯 그 앞을 막아섰다. 완벽주의자인 하비에게 엉망인 집무실 현장을 보이는 것이 껄끄러웠다.
하비가 수군대는 사람들의 시선과 말소리를 못 들은 척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말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네.”
하비는 절대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선이라도 그어놓은 것처럼 뻣뻣하게 밖에 서서 말했다.
“지나가다가 들렀어. 혹시 잊었을까봐.”
빅터가 반쯤 벌린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아아. 저녁 약속?”
그걸 말해주려고 외교부에 가기 앞서 직접 이곳을 먼저 들렀다니. 하비가 다니는 외교부 건물은 빅터가 있는 청 건물보다 한참이나 더 가야 했다. 가는 도중에 기억하고 들러서 만남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었다.
빅터는 묘한 감정에 젖어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
빅터는 어제까지 하비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것도, 심지어 그걸 행한 사람이 본인이라는 것도 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근데 몸은? 좀 괜찮은 건가?”
빅터의 뻔뻔함에 하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알면서 묻는 건가. 의사가 처방해준 해열제가 잘 듣는 건지 어젯밤처럼 열이 나지는 않지만 여전히 구멍 안이 얼얼했다. 병 주고 약 주는 데는 아주 탁월했다.
‘열받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군.’
하비는 빅터의 물음을 일부러 묵살하고 용건만 말했다.
“일 끝나면 약속한대로 소드 클럽에서 곧 보지. 아.”
지체없이 뒤돌아섰던 하비가 고개만 뒤로 돌리고 말했다.
“저녁은 든든하게 먹고 와. 허기지면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 힘들테니까.”
문이 조용히 닫혔다. 하비의 성격처럼 문을 여는 것도, 닫는 것도 정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빅터가 힘을 빼고 막아섰던 책상 앞을 벗어나 제자리로 갔다. 의자에 앉자 조금 현실감이 들었다. 고요한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청의 대리인이 한심한 듯 그런 빅터를 보았다.
“의원님. 그렇게 좋으세요?”
“내가 뭘.”
“계속 웃고 있으시잖아요.”
빅터는 말도 안된다며 극구 부인했다.
“잘못 본거겠지.”
빅터의 업무 대리인은 이름이 ‘폰’ 일 정도로 스터스 가의 팬이었다. 로열 가드에게 대대로 수여되는 별칭 같은 것이었는데, 정작 하비는 쓰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터스 가의 무용을 칭송하는 자들 중에 자식의 이름을 일부러 그리 짓는 자들이 있었고, 대리인도 그러했다.
이미 빅터의 변명같은 대답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꿈꾸는 듯한 얼굴로 폰이 말했다.
“스터스 경은 여전하시네요. 넘치는 기품, 우아한 발걸음, 멋지세요….”
빅터는 노란 눈썹을 찌푸리며 대리인인 폰을 노려보았다. 순간적으로 폰의 형질이 무엇인지 따졌다. 생각해보니 베타였다. 그러니 원인 모를 경계심이 스르륵 사라졌다.
‘웃기는군.’
그 넘치는 기품과 우아한 발걸음을 지닌 자가 간밤에 맨몸으로 비싼 꽃들을 구멍에 꽂은 채 바닥을 기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빅터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할 하비 스터스의 치부 어린 모습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개운해졌다.
“해야 할 일 많으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이제 움직여.”
빅터는 늘어진 손목의 레이스를 다른 손으로 받치고 잉크병에 고풍스런 깃이 세워진 펜을 꽂았다. 종이에 찍으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빅터가 폰을 타박했다.
“잉크병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나.”
폰이 입을 삐죽대면서도 착실하게 새로운 잉크병을 내왔다. 빅터는 그 시간마저 몹시 느리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업무 시간이 몹시 긴 것 같았다.
탁.
현 의원의 집무실 문이 제대로 닫힌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하비는 긴 숨을 내쉬었다. 빅터 앞에만 서면 그에게 당했던 것들이 고스란히 떠올라서 긴장이 되었다. 어깨가 바짝 굳고 뒤가 자꾸만 욱신거렸다. 아직도 빅터의 것을 품고 있는 것마냥.
아닌 척 해도 몸이 기억하는 것들은 언제나 그의 이성을 앞섰다. 문 밖에서 새어나오는 빅터의 목소리에도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문고리를 꽉 쥐었을 정도였다. 야성적인 페로몬이 그의 온 몸 구석구석 거칠게 파고들어 난도질 하는 것 같았다.
하비는 어제의 굴욕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토록 힘들게 하면서 낯짝 두껍게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고작….
‘괜찮냐는 질문이나 태연하게 던지는 놈인데.’
복도를 빠르게 지나가며 그는 분기를 터뜨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대며 보다가 하비의 무서운 얼굴에 말도 걸지 못하고 지나쳤다.
“의원님과 싸우셨나?”
“그것땜에 오신거였어?”
“벌써 사랑 싸움인가.”
수군대는 주변의 목소리에 하비는 천천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감옥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일그러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펴면서 하비가 속으로 한숨 지었다.
‘다 그 놈 때문이지만.’
문을 열자마자 제일 처음 보인 것은 놀란 듯 하다가 물흐르듯 변하는 빅터의 표정이었다. 얼떨떨함에서 반가움으로 바뀌는 찰나에 던진 용건에 아예 기쁜 듯 은은하게 미소짓기까지 했다.
하비가 그를 굳이 몇 번이나 되새기게 하며 소드 클럽으로 불러내는 데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좋아하니 마음이 켕겼다.
하지만 하비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여태 빅터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하비다운 작은 복수였다. 그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소소한 앙갚음이 될 것이다.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데까지 몰린 건가.’
스스로가 한심해졌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빅터는 분명 선을 넘었다. 하비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긴 지 오래였다. 그걸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만큼.
빠르게 걷던 하비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더 나은 선택지를 위해 최대의 끈기를 가지는 것이 그의 성정이자 직업이었다. 혹독하기만 한 시련을 탈출구 모색 하나 없이 견디기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빅터에게는 끊임없이 휘둘리고 칼자루를 뺏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냐. 노력했다고.’
빅터에게 약점 잡힌 것들에 대해서도 그 사이 하나하나 알아왔고, 진실의 실체에 상당히 접근했다. 믿을 만한 자에게 맡겨 놓은 스터스 가의 재무 조사 여부도 곧 보고를 받을 예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협박만 당하는 것과 알고 당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그리 자위하면서도 하비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빅터가 쥔 것을 뺏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쥔 칼을 더욱 엄정하게 살피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비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등 뒤로 한기가 찾아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을 막고 맹렬히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지?’
여기까지만 해야지. 다음엔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결국 멈추지 못하고 지금의 상황까지 와버렸다. 빅터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단정해 버리고 체념했다.
그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를 얼얼하게 때리는 충격이었다.
“어?”
마침 청으로 들어오고 있던 반 로투스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하비가 이 곳에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바로 표정을 고치고는 반이 하비를 불러세웠다.
“스터스 경! 여기!”
앞만 보고 걸어가던 하비가 우뚝 멈춰섰다. 고개만 살짝 틀어 상대를 확인하던 하비는 반을 발견하고는 아예 몸을 휙 뒤로 틀었다.
“로투스 경?”
바깥에서는 친한 사이라도 예의를 갖추는 반이었기에 하비도 이름 대신 귀족가 성을 불렀다. 반이 다가와서 살갑게 말을 붙였다. 청 앞에서 하비를 보자마자 쭈뼛대던 모습은 어딜 가고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이틀 뒤에 내 생일 파티가 열리는 건 알지? 꼭 와. 작년보다 더 성대한 파티가 열릴 예정이니까.”
파티를 즐기고 싶은 심정은 전혀 아니었지만 하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근데 바르뎀 경과 함께 오는 건가? 그……. 아무래도 두 사람, 그런 관계니까.”
‘그런 관계’ 라고 말할 때 반의 표정이 아주 이상했다. 웃는 것도, 일그러뜨리는 것도 아닌 난감한 얼굴이었다. 하비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어지는 반의 말에 하비는 그가 왜 그리 난색을 표한 지 알 수 있었다.
“바르뎀 경도 생일 파티에 초대했거든. 당연한 거지만.”
보통 귀족끼리 연인관계일 경우에는 겹친 행사가 있을 때 동석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람들에게 밝혔을 때에는 끈끈한 사이임을 과시하며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화려하게 치장하고 오곤 했다.
그런데 반은 다른 이들보다 하비에 대해 잘 알았다. 하비는 진심으로 빅터를 싫어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모두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거대한 스캔들의 중심에 선 것이다. 아무런 내색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말이다. 만약 그토록 싫어하던 자와 연애가 진행되고 있었다면 하비의 성격상 티가 났을 것이다. 반은 그의 오랜 친구라서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이상하단 말야….’
반이 하비가 나온 건물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에서 나오는 걸 보면 바르뎀 경과 만나고 오는 길이겠지?”
하비는 반의 시선을 피했다.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사람을 통해서 전해도 될 것을 직접 왔다는 것은 굳이 하비도, 반도 지적하지 않았다. 동시에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인가? 바르뎀 경과 사귀는 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하비는 한숨으로 대신했다. 알아들은 반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험난해 보이는걸.”
“그랬지.”
지금도 그렇고. 하비는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삼켰다. 반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들겼다.
“힘든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뭐든 들어줄테니까.”
“신경써줘서 고맙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 관계로 돌아온 것 같아서 하비는 옅게 미소지었다. 그런데 반의 얼굴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상함을 감지한 하비가 물었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나?”
반이 한참 고민하다가 겨우내 물었다.
“혹시 말야. 어젯밤에…….”
즉각적으로 하비는 자신이 표정 관리를 잘했을까 걱정했다. 어젯밤 가면 투자회에 빅터와 함께 갔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당황한 하비가 입매를 만지며 경직된 것을 풀었다.
‘정신 없어서 눈치 못 챘을 줄 알았는데.’
물론 하비는 반의 목소리를 듣고 가면 투자회의 사회자가 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하비 자신은 되도록 반의 앞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들켜도 사실 별 일은 아니었지만 서쪽 방에서 빅터와 있었던 일련의 사건 때문에 밝히기가 찜찜했다. 하비 혼자 켕기는 것이었다.
다행히 반은 싱긋 웃더니 평소처럼 하비를 대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늦겠어. 얼른 가.”
“생일 파티 때 보지.”
그때 반이 하비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반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묘하게 서먹해져서 이런 식의 포옹은 그간 한번도 없었다.
하비가 어정쩡하게 거리를 두다가 곧 편안한 자세로 반의 등을 역시 가볍게 두들겼다. 반이 하비의 얼굴을 마주 보고 씨익 웃었다.
“얼굴 펴고! 바르뎀 경과 잘 지내길 바라. 힘들게 하면 꼭 나한테 이야기하고. 이틀 뒤에 봐.”
한 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한 반이 먼저 떠났다.
그 자리에 서 있던 하비는 작게 미소지었다. 누군가의 지지를 받는 기분은 언제든 좋은 것이다. 잃었던 뭔가를 되찾은 것 같아서 마음 한 구석이 기분 좋게 간질거렸다.
‘음?’
순간 하비가 따가운 시선에 휙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관심 없이 지나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뭐지?’
어리둥절하게 뒤를 더 살피던 하비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늘 가던 외교부로 걸음을 옮겼다. 반과 만나기 직전에 어떤 생각을 집요하게 했던 것 같은데 서먹했던 친우과의 심정적인 화해로 금방 휘발되었다.
빅터의 생각을 좀 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비는빅터가 있을 청 건물을 올려보았다. 따가운 햇살이 그의 눈을 가려 손날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회색빛 청건물에 빅터가 있을 집무실이 어렴풋이 보였다.
‘뭐, 상관없지.’
하지만 금방 그의 머릿속은 빅터를 밀어내고 업무적인 것들로 가득 채웠다. 마치 오래 생각하면 나오지 말아야 할 어떤 끔찍한 결론이 나오기라도 할 것 마냥, 그의 의식이 빠르게 빅터를 지웠다. 오늘도 중요한 일들이 잔뜩 쌓여 있을 것이다.
하비가 그 자리를 떠난 직후, 의원실의 청회색 커튼이 거칠게 닫혔다.
***
낮이 짧아지고, 계절은 선선하게 돌아서고 있었다. 빅터는 짧아진 해시간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지루한 업무 시간도 단축되었으니까.
소드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빅터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하비를 제일 먼저 발견했다. 일부러 찾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이 이동했다.
사람들 틈에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던 하비가 마찬가지로 빅터를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하비의 눈을 따라 빅터에게 향했다.
둘 사이에 뜻 모를 기류와 정적이 흘렀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졌다. 어느 덧 여기저기서 터지던 소음이 완전히 죽고, 침묵만이 남았다. 간간이 들리던 칼 부딪치는 소리조차 사라졌다.
빅터와 하비의 주변으로 몰려든 귀족 청년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둘 중에 하나가 말을 꺼내야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이 깨질 것 같았다. 아직도 그들이 사귄다는 것을 믿지 않는 파가 많았고, 자신들끼리 형성한 스터스 가를 따르는 자와 바르뎀 가를 따르는 자의 균형을 깨지 않고 있었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빅터가 여유롭게 웃더니 하비에게 다가갔다. 그는 군중 속을 헤치고 그 핵을 이루고 있는 하비의 손을 잡았다. 하비는 말없이 고요한 눈빛으로 빅터를 보았다.
빅터와 만난 이후로 항상 차갑던 손에 웬일인지 따뜻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굳은살이 많고 길쭉길쭉한 손을 끌어당긴 빅터가 하얗고 부드러운 뺨에 키스하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빨리 오려고 했는데 일이 늦어졌어.”
긴장한 채 서 있던 귀족 청년들이 한꺼번에 헛숨을 들이켰다.
당사자인 하비는 말없이 뺨을 손등으로 닦았다. 오전에 있었던 일도 어느 새 소문이 퍼져 있어서 대부분은 두 사람이 싸운 것으로 생각했다. 연인 관계임을 믿지 않던 귀족 청년들은 한탄했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애정 행각에 얼굴을 붉혔다.
하비는 내심 당황하긴 했지만 빅터의 이런 쇼가 놀랍지도 않았다.
“저녁은 든든히 먹고 왔나?”
하비는 확인하려는 것처럼 또 한 번 물었다. 사실 빨리 오기 위해서 대충 떼우고 왔지만 빅터는 그렇노라 답했다.
빅터의 대답에 하비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들고 있던 끝이 뭉툭한 얇은 레이피어를 어깨 위에 올렸다.
“오늘은 나와 대련을 하지. 어때?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귀족 청년들의 눈에 일제히 불빛이 반짝였다.
“워!”
“오오!”
이미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한 시점부터 알게 모르게 이쪽으로 쏠리던 시선이었다. 구석에서 연습하던 귀족 청년들이 환호하며 레이피어마저 던지며 달려왔다.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빼놓을 수 없었다. 하비 스터스 경은 항상 빅터 바르뎀 경과의 정면 대결을 피해왔다. 빅터가 가끔 도발한 적도 있지만 한 번도 넘어가지 않고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하비가 먼저 대결을 청한 것이다. 여태까지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빅터도 조금 놀란 듯 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그런 속셈으로 이곳으로 부른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알쏭달쏭했다.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하비답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빅터도 제 몫의 레이피어를 어깨에 올렸다. 냉랭한 눈으로 하비를 마주보며 빅터가 대꾸했다.
“싫다고 할 이유가 없지. 땀빼고 난 뒤가 기대되는군.”
의도적으로 하비와의 데이트를 은근히 흘린 빅터의 말에 다른 귀족 청년들이 대신 귀를 붉혔다.
역시 빅터의 말에 대꾸도 않은 하비가 곧장 그를 중앙으로 불러냈다.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긴장한 가운데, 대결이 시작되었다. 대결 전 복식을 갖추고 예의를 보인 뒤, 본격적인 검술이 펼쳐졌다.
그리고 빅터는 깨달았다. 하비가 왜 그리 저녁을 먹고 오라고 채근했는지.
까앙!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빅터는 얼얼한 손목에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막긴 했지만 자칫 가슴에 찔릴 뻔 했다.
끼기긱!
눈 깜짝할 사이 하비가 품을 파고들어 레이피어를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비는 조용히 일갈했다.
“검술을 머리로 하나? 정신 차려.”
하비는 무서운 기세로 그를 몰아쳤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폭풍같은 검술이었다. 여태까지 보여준 검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귀족 청년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숨죽여 대결을 지켜보았다.
그들도 슬슬 깨달았다.
“...스터스 경 맞지?”
“그런 것 같네만.”
“평소엔 적당히 하고 있었던 건가.”
대련할 때 하비가 제 실력을 전부 발휘한 것이아니라는 사실을.
힘은 빅터가 우위였지만 날렵함은 하비 쪽이 훨씬 위였다. 거기다 체중과 속도까지 완벽히 활용하는 검술이라 본래 가진 힘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까앙!!!
소드 클럽에서 대련할 때 이런 소리가 나는 건 처음이었다. 긴 레이피어가 유연하게 휘었다가 되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부딪친 검 사이에서 불꽃이 튈 정도였다.
하비의 밤색 눈이 조용히 빛났다.
대결하고 있던 빅터는 죽을 맛이었다.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몰아붙이는 것도 모자라 교묘하게 다른 것을 유도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하비는 심지어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호흡도 거의 일정했다.
까각...!
빅터의 팔에서 근육이 튀어나올 것처럼 퍼렇게솟았다. 검을 맞대고 있는 그만 알 수 있는 엄청난 기세였다. 이미 하비의 리듬에 휩쓸렸고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비는 일부러 빅터의 무게 중심을 계속 옮겨 다니게 하고 있었다. 위장 속에 있는 것들이 한데 뭉쳐다니며 빅터를 괴롭혔다. 하비의 검술을 쫓다보니 어지러이 이리저리 춤을 추듯 했다.
한마디로, 하비의 검술은 빅터에게 엄청난 멀미를 유발시켰다.
결국 참다 못한 빅터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굴욕적인 자세로 손을 들어 대결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고작 10분도 안되는 허무한 대결이었다.
막 몽둥이처럼 날아오던 하비의 레이피어가 그의 뺨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얇고 뭉툭한 끝이 빅터의 얼굴 근처에서 파르르 떨었다.
“잠깐.”
그가 파리한 안색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는 겨우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았다.
“…내가…졌어.”
빅터의 손에 쥔 레이피어가 힘없이 떨어졌다. 빅터가 누군가에게 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들 놀라 눈만 굴렸다.
둥글게 모여 구경하던 귀족 청년들을 헤치고 빅터가 빠르게 퇴장했다. 다행히 사람들 앞에서 엎드려 토하는 굴욕만은 면했지만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치욕적인 모습이었다.
하비도 곧이어 빅터를 뒤따라갔다. 다들 웅성대면서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논의했다. 빅터를 추종하던 무리는 불쾌한 듯 소드클럽을 나가는 자도 보였고, 하비를 따르던 자들은 통쾌하게 웃었다.
뒤에서 들리는 웃음 소리에 하비는 빅터가 조금 가엾다고 생각은 했지만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더 가혹하게 몰아붙일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정식으로 혹독하게 정규 훈련받아온 하비와 해적선에서 살상용으로만 배운 빅터의 검술은 당연히 차이가 났다. 더군다나 하비는 스터스 가 특수로 로열 가드 가문 대대로 쌓인 무가의 경험치를 그대로 전수받기까지 했다. 대결을 피해온 것은 괜히 빅터를 자극해서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빅터가 공개 열애로 그를 외부에서까지 정신적으로 괴롭힐 생각이라면, 하비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할 예정이었다.
“욱!”
빅터는 야외의 수도관 앞에서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말만큼 많이 먹은 것은 아닌지 토사물은 별로 없었다. 하비가 그의 곁에 천천히 다가갔다. 빅터가 틀어놓은 수도에서 투명한 물이 콸콸 쏟아지고 그는 입술을 연신 문질렀다. 옆에서 팔짱을 낀 하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든든하게 먹고 왔다더니, 내용물을 보니 먹은 것도 별로 없군.”
“시끄러워……. 우욱!”
다시 한 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빅터가 수도관 아래 멀건 위액을 쏟았다. 더 나오는 것도 없었다.
꿈틀대던 빅터가 하비를 대뜸 잡더니 휙 끌어당겼다. 당긴 그대로 빅터가 입술을 박고 혀를 밀어넣었다. 입술박치기에 가까운 키스였다.
하비의 눈이 커졌다가 곧 시큼한 위액맛이 나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빅터의 미끈한 혀가 더욱 깊게 밀려들어 하비의 입천장을 넓게 훑었다. 하비가 손가락을 움찔했다. 달려드는 그의 페로몬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몇 번 더 거칠게 달려들던 키스에 하비가 밀어내려 할 때쯤 빅터는 알아서 물러났다.
팔을 꽉 잡았던 빅터의 손에 힘이 들어가다가 떨어지더니 그를 놓아주었다.
번들거리는 입술로 빅터가 씨익 웃었다. 하비는 흔들리는 눈으로 방금 당한 것을 곱씹고 있었다. 입맛이 텁텁했다.
"방금 토한 사람과 키스한 소감이 어때?"
하비는 찜찜한 얼굴로 빅터의 옆에 서서 말없이 물을 틀었다. 열렬하게 입을 헹귄 하비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입술을 닦으며 내뱉듯 말했다.
"... 이나의 가게에서 파는 도리빵을 먹고 왔군."
"이나가 빵을 참 잘 굽지."
말없이 동의하던 하비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유치하게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려고 계획하고, 그걸 끝까지 이룬 자신도, 얄밉다고 악착같이 이런 식으로 갚은 빅터도 우스웠다.
이게 뭐하는 건지.
잠잠하게 웃고 있는 하비를 빅터가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멍하게 보느라 수도꼭지를 반대로 돌린 바람에 물이 수도관에서 콸콸 쏟아졌다. 수압이 너무 세서 물줄기가 튀어 옷도, 머리칼도 다 젖었다.
화들짝 물러난 두 사람은 젖은 꼴로 머쓱하게 각자 다른 곳을 보았다. 갑자기 밀려든 침묵이 어색했다. 이런 식의 고요함은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햇빛이 지나치게 따가웠다.
아직도 수도관은 폭발하듯 분수처럼 시원한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뭐하는 건가?”
“미안.”
얼결에 사과의 말을 전한 빅터가 반대로 돌려 수압을 낮추었다.
끼익
녹슨 수도관에서 긴 소리가 났다. 옆에서 젖은 생쥐꼴로 하비가 옷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대강 털어냈다. 머리까지 다 젖었다.
하비가 뚝뚝 물이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올렸다. 갑자기 튄 물보다, 예상치도 못하게 나온 빅터의 사과가 더 사고처럼 다가왔다.
“더한 짓을 해도 사과 한 번 못 받았는데, 이런 걸로 받을 줄이야.”
하비는 빅터가 코웃음 치며 뭐라고 받아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의 예상이 빗나갔다. 빅터는 얌전히 입을 닫았다.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일침을 놓은 하비는 말없이 옷이 젖은 것에 신경 쓰면서도 입 안을 계속 헹구었다. 빈말 하나 없는 빅터가 다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입술을 닦는 척 하던 빅터는 곁눈질로 하비를 보고만 있었다. 복잡한 시선이었다. 하비의 하얀 러플 블라우스가 물에 젖어 반쯤 투명하게 변해 탄탄한 가슴의 윤곽이 드러났다. 입술을 박박 닦고 있는 길고 곧은 손에도 물기가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도 수려한 얼굴은 잠잠하게 떨어지는 붉은 노을 안에서 빛이 났다.
빅터가 눈을 돌리려 했지만 누군가가 잡은 것처럼 턱이 움직이지 않았다.
‘뭘 계속 보고 있는 거냐.’
반짝대는 물방울 사이로 점점 떨어지는 붉은 석양이 걸려 석류알같이 보였다. 아름다운 붉은 물방울 사이에서 젖은 밤색 머리칼을 지닌 사내는 결벽증 환자처럼 이제 얼굴까지 씻고 있었다. 하비의 큰 손이 가득 물을 담아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지켜보던 빅터의 목울대가 길게 일렁였다.
하얗고 긴 목덜미에 이어 그 아래까지 눈길이 갔다. 단단한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눈이 더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빅터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런 사람이 발 아래에서 기어다니기도 하고, 온갖 능욕을 감내한다.
빅터는 그 사실을 떠올리곤 묘해졌다. 우쭐해지거나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쿵, 쿠웅-.
빅터의 심장이 우울한 것처럼 느리게 뛰었다. 하지만 빠르게 뛰는 것보다 더 생생했다. 내가 살아있노라고 주장하는 것마냥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당황해서 하비처럼 얼굴을 물로 크게 적셨다. 옆에서 하비가 이상한 듯 보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져 아래로 웅덩이를 만들 정도였지만 빅터의 느린 심장 박동은 그치질 않았다.
‘왜 이러지.’
하비 스터스를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있나? 과거의 일로 어떻게든 상처입히려고만 했지, 그를 면밀하게 살펴볼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알 생각도 없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빅터는 쓰게 자조했다. 무얼 가장 싫어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겠군.’
그게 그리 신경 쓸만한 일인가. 빅터는 왜 지금 와서 이딴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하비는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이상 빅터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수라고 해봤자 이런 소소한 것이다.
‘이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지.’
귀족들 앞에서 대결에서 져 굴욕을 보이는 것? 하비 본인에게는 몹시 큰 스트레스가 될 상황일 수도 있지만, 빅터는 조금 부끄러우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가 하비만큼 명예나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체면치레를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필요할 때 귀족다운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 뿐이다. 빅터가 속으로 웃음지었다.
‘이런 걸 복수랍시고 하다니.’
그에겐 얼굴 붉히는 것으로 끝날 일이긴 해도 어쨌든 기분이 상하기는 했다. 물론 이런 식의 앙갚음에 더 큰 것으로 되갚아 줄 수도 있었다.
하비는 이미 그에게 가지고 놀기 손쉬운, 거기다 분풀이도 할 수 있는 적당한 장난감으로 전락한 사람이다. 못할 게 어디 있나.
생각한 순간, 빅터의 상상 속에서 평온하던 저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뒤돌아 서서히 사라졌다.
거의 반사적이었다. 빅터는 매달리듯 저도 모르게 불쑥 잊어가던 것을 하비에게 상기시켰다.
“그 약 말인데.”
경쟁적으로 입을 헹구던 것을 멈추고 하비가 고개를 들었다. 물은 여전히 금빛 수도관 아래 청량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빅터가 말없이 물끄러미 하비를 보았다. 사심 없는 녹색 눈을 보자 하비는 빅터가 말하는 것이 무엇임을 알아차렸다. 입에 담기도 싫은, 체질을 강제로 변형시키는 신약일 것이다.
깨달은 순간, 미약하게 웃음기가 돌던 하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무표정해졌다. 싫어도 곧바로 어떤 결론으로 치달았다.
‘설마 이 일로 약을 쓰는 보복을 하겠다는 건가?’
얼마간 빅터가 하지 않아 잊고 있었다. 하비는 오메가로 변하는 과정에서 빅터가 하는 짓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게다가 완전히 오메가로 변한 뒤에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그조차 정신을 못 차릴만큼 강한 쾌감에 몸으로 매달린 적도 있었다. 그것이 가장 괴롭고, 힘들었다. 원하지 않는데 고작 생리적 욕구에 져서 쌓아올린 것들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비는 익숙하게 떠오른 두려움을 숨겼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그 빅터 바르뎀이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겪었는데 이대로 넘어갈 리가 없다.
그런데 빅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또다시 하비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선언하듯 천천히 말했다.
“앞으론 안 쓰겠다고.”
하비는 믿겨지지 않는 듯 입을 벌렸다. 지금 무슨 소릴 들은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호르몬 교란제인 신약을 언급한 순간 불안해지는 하비의 표정을 빅터도 읽었다.
빅터는 물이 떨어지는 수도관을 꽉 잠그고 스스럼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하비 앞에 있는 관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흘렀다. 빅터는 그 수도관도 하비 대신 잠가주었다. 끼익대는 소리는 말소리에 묻혔다.
빅터가 앞에 서자 하비의 큰 키를 가릴만큼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왜냐니.”
깨끗하다 못해 너무 물을 쏟아부어 파랗게 질린 입술을 보면서 빅터는 순간 다시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어울리지 않게 끼어든 감상을 스스로 묵살하며 빅터가 만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불어오고, 그들을 둘러싼 푸른 식물들이 바르르 떨었다.
불쑥 빅터의 길고 풍성한 눈썹 아래 눈이 다정한 척 휘었다.빅터가 하비의 차가운 손을 천천히 잡았다. 움찔대는 하비를 똑바로 마주보며 빅터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소.중.한.연.인.을 그리 다루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높은 콧대와 이어진 매력적인 입술이 하비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가 떠났다.
검을 오래 잡아 단단한 뼈가 드러나고 굳은살이 많은 하비의 손이 연신 꿈틀대고 얼굴은 석양이 내려앉은 것처럼 붉어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도 손등에 남아있는 듯 했다.
지나치게 강조된 ‘소중한 연인’ 발언에 하비가 오묘한 낯빛을 보였다. 요컨대 빅터 스스로 설정한 공개 연인 관계에 충실하겠다는 의미였다. 소소한 보복에 오히려 지독한 신약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도 했다.
하비는 늘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던 상대가 적극적으로 구애하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자가 누구보다 달콤한 말을 흘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마음을 홀리려 한다.
심장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가파르게 뛰었다. 그토록 자신과 가문을 더럽힌 자에게. 그것도 같은 알파한테.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건 무슨 심리인지 하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의심을 놓고 편해지고 싶었다. 긴장하며 매번 언제 당할 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보다 믿는 자로 두고 싶었다.
하비는 평소에도 정적이 많았다. 위에 선 자일수록 발치를 흔드는 바람이 요란한 법이다. 존경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교묘하게 적의와 질투를 감추고 접근하는 자들도 많았다. 가려내는 것도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다.
'정말 믿어도 되나.'
빅터가 고개를 든 순간 표정을 간신히 갈무리한 하비가 의무인 것처럼 되물었다.
“무슨 속셈이지?”
더욱 효율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역할극에 심취하다 보니 정말 빠져들기라도 한 건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하비의 물음을 무시하며 빅터가 어느새 저만치 먼저 걸어갔다.
“둘 다 젖었으니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가야 하지 않겠어? 새 옷은 내가 준비해 두겠어.”
하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친절한 빅터가 낯설었다. 이제 어스름하게 가라앉기 시작한 저녁 하늘이 붉은색에서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빅터의 금빛 머리칼이 하늘과 같은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었다.
문득 생각난 듯 빅터가 뒤돌아 덧붙였다. 녹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고 익살맞게 반짝였다.
“모두의 앞에서 내 무릎을 꿇린 건 아까 그걸로 갚았어.”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툭 친 빅터가 휘파람을 불며 소드 클럽으로 빨려가듯 들어가 버렸다. 몹시 즐거워 보였다.
하비는 인상을 쓰며 다짐했다. 절대 이번 한 번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빅터를 소드 클럽으로 불러낼 이유는 앞으로도 충분했다. 거짓이긴 해도 공인된 연인이니까. 거절 못하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혹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본인이 뱉은 말은 정말 지키려나 보군.’
그렇다면 더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하비는 주먹을 세게 다잡았다. 빅터에게 당했던 구멍 안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
빅터가 준비해 둔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 하비는 여느때처럼 늙은 회계사를 돌보았다. 말을 자주 시키는 게 좋다는 주치의의 조언으로 그에게 이야기도 자주 했다. 젤가가 보답으로 몰래 구해다준 주치의였다. 직접 만나지는 않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오늘도 잘 계셨습니까?"
하비는 그를 모셔둔 비밀 방에 들어오면서 말을 걸었다. 주로 일기 같은 내용들을 많이 했다. 오늘 있었던 일들, 업무상 생겼던 사건들이 었다. 빅터와의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껄끄럽기도 했지만 회계사가 들어서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퀭한 눈빛이 하비를 향했다. 희끗하고 적은 머리칼이 간신히 볼품없는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야기에 약간의 반응은 하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평소처럼 업무 이야기를 늘어놓던 하비가 머뭇대다 겨우 입을 열었다.
"자꾸 저를 흔드는 놈이 하나 생겼습니다만."
빈 동공이 조용히 하비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저를 진심으로 미워했던 사람입니다. 제게 맺힌 것이 많은 자라 수단 방법 안가리고 괴롭혀대던 놈인데."
하비가 다시 머뭇대다가 말했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갑자기 제가 좋다는군요."
"......"
"황당하시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말도 안되는데. 그런데..."
빅터를 떠올리자 하비는 가슴 속 어딘가가 찌릿한 둔통이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 빅터가 유일한 이해자 같았다. 오랜 시간을 오로지 하비 스터스와 그 가문만을 지독하게 생각하고 집착했던 남자다.
악연으로 엮였지만 어찌됐든 스터스 가문의 가장 내밀한 비밀과 하비의 속내에 접근한 유일무이한 남자이기도 했다.
하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믿어보고는 싶군요. 너무 오래 혼자였습니다."
외로움이 얕은 숨에도 묻어났다.
"어떻게 해야할지..."
그때 하비는 그가 자꾸만 작은 목소리로 어떤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잘 들리지 않아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예?"
"마음 가, 가는 대로..."
더듬대며 회계사가 쭈글쭈글한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하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가 원하던 말을 회계사가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하비는 크게 실망했다.
"의원님. 저는 그저 따르겠습니다."
하비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에게 하는 소리였다. 회계사는 아직도 과거에서 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동공이 머나먼 지난 시간을 비추고 있었다.
"악이든, 선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하는 것이 전부 옳습니다...자신을 믿으세요."
늙은 회계사가 중얼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비가 천천히 일어났다. 마음 속에서 뭉근하게 피어나던 감정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하비는 침대에 걸터앉아 썩은 나무등걸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그러고 보면 당신은 항상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었지. 내게든, 아버지에게든."
하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충신이야.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는 말이었다.
결국 현실로부터 눈돌리게 하는, 무서운 독같은 조언.
"아버지는 그런 독이라도 마시고 싶었겠지."
그리고 자신도.
빅터 바르뎀이라는 맹독을 말이다.
하비는 안부를 전하며 회계사의 손을 잡아주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늙은 회계사의 손가락이 움찔댔다.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무고한 시민들이 흘리는 피는 제가 다 마시겠습니다..."
넓은 유리창으로 별빛이 고요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위대한 자가 사후에 된 별이라던 기극성이 길게 꼬리를 물고 떨어져 내렸다.
다음 날.
다짐대로 하비는 그 날도 빅터를 소드 클럽으로 끌고 왔다. 빅터가 떨떠름하게 얇은 대련용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잡으면 숫제 하비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지켜보던 귀족 청년들이 질려서 차마 못 볼 정도였다.
“으……또야.”
“내가 토할 것 같다고.”
“동감일세.”
하비를 따르던 청년들조차 그의 지독함에 고개를 내저었다.
하비는 멀미를 유발하는 그 어지러운 검술로 빅터를 곤혹스럽게 했다. 이에 대응해 빅터도 아예 저녁을 먹고 오지 않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멀건 위액을 토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요란하게 기침을 뱉으며 오늘도 수돗가에서 입을 축이고 있는 빅터를 하비가 모른 척 다가가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나.”
먹이를 낚으려는 것처럼 빠른 손이 날아왔지만 하비는 이제 여유롭게 피했다. 저번에는 모르고 당했지만 사람은 경험으로 사는 동물이다.
빅터가 이를 갈면서 축축한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언제까지 이럴 거지?”
피식 웃던 하비는 진지하게 태도를 바꾸고 가지고 온 레이피어를 가죽끈으로 고정된 검집에 넣었다. 깔끔한 동작으로 구불거리는 힐트(검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하비가 말했다.
“이유를 알려주면 생각해 보고.”
“무슨 이유.”
“날 싫어했잖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던 거 아닌가?”
빅터는 말간 하늘을 향해 돌아서 수돗가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머릿속에 산소가 들어오자 하비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담담한 척 하지만 몹시 초조해 보였다.
‘어리석긴.’
결국 그는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 의심조차도 정직하게 부딪쳐온다. 하비 스터스다웠다.
속으로 웃은 빅터는 숨을 길게 내쉬더니 짧게 답했다.
“그랬지.”
하비가 눈을 치켜떴다.
“그랬지? 지금은 아니라는?”
빅터는 답답한 듯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해. 내가 아직도 경을 그토록 증오하고 저주한다면 부른다고 달려나와서 이 개고생을 하고 있겠어? 아직도 못 믿나?”
“경이 스터스 가 사람들을 믿지 않듯이, 나도 마찬가지야. 바르뎀 가 사람들은 신의를 지키지 않아.”
가문에 대한 애정이 눈곱만큼도 없는 빅터였지만 무시하는 것 같은 하비의 발언에 발끈했다. 경고성으로 날아오는 날카롭고도 묵직한 살기에도 하비는 끄떡 않았다.
“물론 신용과는 다른 문제지. 상인으로서의 신용은 철보다 더 단단히 지키지만, 아닌 것에는 언제든 돌아서는 걸 몇 번이나 봐왔어.”
입이 써진 빅터는 차가운 물을 다시 머금었다가 뱉어냈다.
“그럼 뭐에 대고 맹세하면 믿을 생각이지?”
“경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빅터가 미간을 은은하게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라…….”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빅터는 언제나 같은 것을 보고 그것만을 위한 맹목적인 삶을 살았다.
“그럼 나는 내가 여태껏 모은 돈에 대고 맹세하지.”
겨우 돈이라. 바르뎀 가 사람다운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하비는 허탈해졌다. 하비에게 돈은 단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게 목적이 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깟 돈이 뭐 그리 소중하나?”
빅터의 입매에 쓴웃음이 비스듬하게 걸렸다. 이 고상한 남자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않았다.
“그깟 돈 때문에 목숨을 여러 번 구했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거든.”
해적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빅터가 돈을 벌어다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투자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지니지 않았더라면, 좋은 물건을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험난한 살의 속에서 일찍이 어린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심지어 가족들마저도 돈 때문에 그를 죽음 앞에 내던졌다. 돈 때문에 죽을 뻔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돈 때문에 살아났다.
빅터의 입에 기이한 자조와 끈 떨어진 인형같은 미소가 맺혔다.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달려 있었다.
“돈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눈빛만은 진실하였다.
“그것만이 날 인간으로 있게 하고, 나를 살게 해."
하비로서는 정말 이해 가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빅터의 눈을 보고 있자니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진지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산 사람이다. 당연히 같을 리가 없었다. 모든 걸 이해할 수도 없고, 각자 지키려고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빅터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
하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참이나 고민하듯 넓게 패이던 하비의 미간이 서서히 펴졌다. 그는 마음을 정했다.
사실은 이미 끝난 문제일지도 몰랐다. 어디 한 번,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드디어 하비가 입을 열었다.
"...그래."
빅터가 대번에 반색했다.
“그럼 이 짓도 그만두는 건가?”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그만둔다고 하진 않았어.”
좌절하는 빅터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보던 하비가 덜컥 엄청난 발언을 했다.
"우리 관계의 진실성을 생명같은 돈에 맹세할 정도인데 말이지."
하비가 말갛게 웃음지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재산의 절반을 떼어서 줄 수도 있는 건가."
빅터가 깜짝 놀라 주춤 뒤로 물러섰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하비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네. 달라고 안해. 나한텐 필요도 없는 거니까."
회중 시계를 꺼내들더니 하비가 불쑥 내일 일정을 말했다.
“내일 반 로투스 경의 생일 파티에 같이 가는 건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하비는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가 놓았다. 스쳐 지나가면서 하비의 레이피어 힐트가 빅터의 허리춤에 닿았다.
“실망시키지 마.”
짧은 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준비를 잘 하고 와서 자신을 욕보이지 않게 해달라.
적어도 연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까.
네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다...
빅터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적어도 하비는 자신을 믿어보려 하고 있었다. 집요하게 틈을 파고든 결과였다.
그러나 빅터는 성공했다는 희열보다 착잡함이 앞섰다. 실망시키지 말라는 말이 이상하게 심장을 조였다. 하비의 얼굴을 떠오르면서 아릿하게 그의 가슴을 압박했다.
하비의 진심은 언제나 무거웠다.
하비의 진심은 언제나 무거웠다.
희미하게 달라붙는 막연한 죄책감을 떨쳐내던 빅터가 자신을 비웃었다.
죄책감? 그런 건 하비가 가져야 할 감정이다.
‘같이 어울리더니 나도 이상해지고 있는 건지.’
빅터는 머리를 흔들어 끈적하게 얽어매는 하비에 대한 생각을 마저 떨구어냈다.
오늘 저녁에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며칠 후에 있을 의회 회합에도 사전 준비를 해야 하고, 가장 큰 동직 조합 (길드)에서 일어난 분쟁을 조정해야 하며 도로세에 대한 불만이 많아 세율 조절도 고려해야 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중심은 ‘돈’ 이었다.
의원이 하는 가장 큰 일도 세금 관리와 돈 쓸 곳을 정하며, 제대로 된 쓰임새로 투입하는 것이다.
‘그 위선자는 못한 거지.’
라힌 스터스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빅터는 불쾌한 듯 미간을 구겼다. 공교롭게도 하비는 크면서 외양적으로는 어머니 쪽보다는 라힌 스터스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하비를 보면 그 양심 없는 작자가 생각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곤 해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막 하비를 따라 소드 클럽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빅터는 소리를 죽이고 나타난 인영에 걸음을 멈췄다.
“주인님.”
검은 머리에 알파 페로몬을 지닌 여자였다. 전에 하비를 덮칠 뻔도 했던.
빅터는 반사적으로 하비가 있을 건물을 힐끔 보았다. 그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날카롭게 물었다.
“나스타.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급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요.”
나스타가 고하는 내용에 빅터는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얼른 줄이긴 했지만 흥분까지 완전히 가라앉지는 못했다.
“회계사 놈이 사라져? 어디로?”
“그건 모르겠어요. 목격자도 없고, 철저하게 했나 본데요?”
“눈도 먼 사람이 감시를 뚫고 혼자 움직이기는 힘들테고 분명 누가 도와줬겠지.”
누가 그랬을지는 훤했다. 빅터는 차갑게 웃었다.
“스터스 경.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넘어오는 척 하면서 뒤로는 이런 여우짓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는 왠지 모를 배신감에 휩싸였다. 누가 누굴 배신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뒤통수를 강렬하게 때리는 행동이었다. 하비가 그에게서 더 얻어낼 것은 없겠지만, 회계사는 본인이 저지른 짓으로 여생을 힘들게 살아야 할 놈이었다.
조용히 분노하던 빅터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라힌 스터스의 일들은 전부 사실이다.
다만 하비가 모르는 마지막 진실 한조각이 남았을 뿐. 그 진실을 당시 라힌 스터스 의원의 재무 담당이었던 회계사가 확실히 알고 있다.
'그걸 제 손으로 거두어갔다니.'
이대로 영영 묻어버릴까 생각도 했었는데, 하비는 아무래도 운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제 가슴을 후벼팔 칼을 굳이 포장까지 곱게 해서 집으로 가져갔을 줄이야.
‘그건 내가 직접 알려줄 생각이었다고.’
하비 스터스의 육체를 희롱하고 휘젓는 것도, 그의 마음을 조각조각 찢는 것도 모두 자신이 해야 한다. 다른 자가 제멋대로 난입해서 알게 할 생각은 없었다.
곰곰이 고민하던 빅터가 나스타에게 명했다.
“은밀하게 찾아내.”
“찾아내면 어떻게 처리할까요?”
빅터의 눈이 냉정하게 빛났다.
“죽여.”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사고사로 위장해. 스터스 경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러다가 만약 스터스 경에게 걸리면? 그땐 뭐라고 하실 건데요.”
나스타가 까만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마치 걸리길 바란다는 듯한 물음이었다. 주인임에도 빅터가 워낙 사용인들과 워낙 막역한 사이다 보니 종종 놀리려는 행태를 보였다. 너무 풀어줬나 생각하며 빅터가 엄하게 말했다.
“안 걸리게 네가 일처리를 잘해야겠지. 그 정도 실력도 안 되는 줄 몰랐는데.”
“제대로 할 건데, 만약이 궁금해서….”
풀이 죽어서 목소리가 작아지던 나스타가 불쑥 불편함을 토로했다.
“근데 ‘그 새끼들’ 면상 좀 안 보면 안 되나요?”
또 이 소리다. 빅터는 피곤한 듯 한숨 쉬었다. 나스타가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 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빅터의 사용인들과 대립하는, 같은 상단에서 사이가 좋지 않은 무리가 있었다. 빅터도 그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정이 있어 공생하는 관계였다.
주인의 곤란을 못 본 척 한 그녀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볼 때마다 칼로 쑤시고 싶은 거 얼마나 참는데. 상단 일이라서 참는 거지. 아니었으면 그냥…!”
빅터는 나스타의 불만을 단칼에 잘랐다.
“여태까지 참은 만큼 계속 참아.”
그녀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나스타 뿐만 아니라 사용인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불만임을 빅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랠 수 밖에.
“그리고 이번 일까지만 처리하면 이제 분리하기로 했잖아. 앞으로 볼 일 없을 거야.”
나스타가 구시렁대면서 왔던 것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알겠다구요.”
마침 샤워실에서 간단히 씻고 야외로 나오고 있던 하비가 나스타를 발견하고는 흠칫 굳었다. 그녀는 빅터가 준 신약으로 오메가가 되었을 때 덮치려 했던 알파 사용인이었다. 벤이 해준 말이 연달아 떠올랐다.
‘아, 임페르 해적 사태로 오빠를 잃었다던 그…. 무슨 일이지?’
같이 나오면서 수다를 동반하던 귀족 청년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나스타라는 저 여자가 나타나는 일에는 항상 좋지 않은 일이 따라붙었다. 과한 걱정일지는 모르겠으나 하비의 직감은 꽤 잘 맞는 편이었다.
하비의 옆에 있던 귀족 청년들이 수돗가에 서 있는 빅터를 발견하곤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저기 바르뎀 경 아닌가? 아직도 안 가고 있나.”
“스터스 경을 기다린 건 아닌지.”
모두의 시선이 하비에게 향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이벌 관계로 얽혀 있던 남자가 갑자기 연인 선언을 하지 않았던가.
하비는 불편한 얼굴로 주변의 따가운 눈빛을 피했다. 그러다 되려 빅터와 눈이 맞아 버렸다.
큰 키에 품이 넉넉한 어깨, 균형이 잘 잡혀 탄탄한 상체 아래 긴 다리가 차례대로 보였다. 본의 아니게 훑어본 것처럼 되어 하비는 마주친 눈을 슬그머니 반대편으로 돌렸다.
하비가 시선을 피하자 이유를 모르는 빅터는 불쾌한 듯 그를 불러세웠다.
“어딜 가려고?”
빅터의 부름에 하비가 이야기하던 것을 멈추었다. 주변 청년들을 물리고는 그들에게 먼저 가라며 양해를 구했다.
“먼저 가보겠네.”
덜 마른 머리칼을 한 채 하비가 빅터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이미 빅터는 하비의 주변에 벌처럼 붙어 나불대는 몇몇 귀족 청년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비의 청량한 페로몬이 그들의 페로몬에 가려 빅터는 짜증이 치솟은 상태였다.
“어딜 가는 거냐니까.”
“곧 저녁 약속이 있어서.”
빅터의 짙은 금빛 눈썹이 불만스럽게 휘었다.
“누구와?”
하비가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걸 꼭 말해야 하나.”
빅터는 꼭 가는 곳을 일일이 고지하고 다녀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하비의 대답에 머리를 굴리던 빅터가 우선 조건을 물었다.
“내가 동석해도 되는 자린가?”
“뭐?”
당황한 하비가 대답을 꺼렸다. 빅터가 함께 가자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다.
외교관들끼리 뭉치는 자리긴 했지만, 빅터가 와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의원을 데려오면 더 좋아할 것이다. 총괄 외교관이 현재 빅터를 몹시 아끼고 있고, 다른 외교관들도 그와 안면을 트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까.
하비의 생각이 조금 더 나아가다가 의기양양한 빅터의 표정에서 멈추었다. 살면서 단 한번도 실패를 해봤을 것 같지 않은 자신 가득한 모습이었다.
쌓아온 제 실력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는 자들이 대개 이런 얼굴을 한다.
외교부에서도 무수히 보는 얼굴이었으나 빅터의 것은 달랐다. 권력욕에 찌든 음심이 아니라, 아직 격 높은 야망이 남아 있는 자의 순수함이 엿보였다.
하비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한 쪽으로 기울었다.
‘데려가도 이상한 관계는 아니게 되었으니….’
고민하던 하비는 빅터와 동행하기로 결심했다. 나쁠 건 없었다. 다만 기분이 좀 이상할 뿐이었다. 그 끔찍한 신약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부터 빅터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 우스꽝스러운 왈츠를 출 때부터였나.’
그때 이후로 아버지 라힌 스터스에 대한 일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다고 빅터가 한 일들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고통이 연장되지는 않고 있다.
하비의 머릿속은 마음대로 이 상황을 좋은 것으로 납득했다. 지속되던 아픔이 한순간에 사라진 자리에 부드러워진 애정이 쏟아진다. 혼란 속에서 거짓이라 의심해봐도 잠시 뿐이었다.
아직까지 빅터는 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한결 온화해진 눈빛도 하비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결국 하비는 홀린 듯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상관 없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빅터가 예의 그 자신 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하비는 마법에서 깬 것 같았다. 누군가가 뒷목에 찬물을 부은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내일 있을 반 로투스의 생일 파티는 그렇다쳐도, 업무 관계에서 만나는 동료들과의 자리에 빅터와 함께 가다니?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하비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빅터를 노려보았다. 또 당했다.
빅터가 싱글대면서 아까 전 하비가 한 것처럼 그의 어깨를 쥐었다.
“씻고 나올테니 기다려.”
손을 떼고 떠나던 빅터가 급히 뒤돌더니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혹여 먼저 가진 말고.”
왠지 말해두지 않으면 먼저 출발해버릴 것 같아서였다. 빅터의 예상대로 버리고 갈까 잠깐 생각했던 하비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흠칫했다.
물론 조금도 그런 생각 따윈 하지 않은 것처럼 하비는 태연하게 말했다.
“기다릴테니 천천히 나와.”
끝까지 못 미더워하던 빅터가 사라지고 난 뒤, 하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가자고 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아까 전 귀족 청년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뜨거운 관계인 것으로 한데 묶여 취급당하는 것이 아직 부담스러웠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이미 허락했으니 할 수 없지.’
어쨌든 빅터를 기다려 함께 마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이동한 하비는 기대했던 반응들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골목에 가스등이 은은하게 주홍빛 불빛을 내고 있었고, 격식 있는 벽돌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바삐 지나다녔다.
하비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은 다소 우울해 보였다. 오늘도 술고래인 총괄 외교관의 희생양이 되는 건가, 암울한 그림자로 가득하던 외교관들 분위기가 하비 일행이 오자 한 번에 되살아났다.
“이게 누군가!”
총괄 외교관이 제일 먼저 빅터를 발견하고 반색 했다. 뒤이어 다른 외교관들도 두 사람을 보고는 안색을 달리했다.
“의원님, 스터스 경, 안녕하십니까!”
“세상에, 두 분이 함께 오신 거에요?”
빅터가 쓰고 온 모자를 벗으며 호의적인 미소를 한껏 짓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갑자기 자리에 끼게 되어 죄송합니다. 미리 연락드릴 시간도 없어서….”
정말로 미안한 듯 빅터는 말끝을 흐리다가 슬쩍 본론을 던졌다.
“불편하신 게 아니면,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니면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빅터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고, 옆에서 듣고 있던 하비가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보았다. 저 가식은 여전하다.
하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다른 외교관들은 빅터가 정말로 가버릴까봐 잡는 데 급급했다.
“불편이라뇨!”
“시의원님이시라면 대환영이죠.”
“가시죠!”
펍이 많고 왁자지껄한 옆 건물에 비해 이곳은 와인과 포도주가 나오는 고급스럽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고위 공직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고, 열정적인 토론이 간간이 오가다가 끊기곤 했다.
그러나 하비와 빅터가 함께 들어오면서 내부는 묘하게 들떴다.
당연히 자리에 앉자마자 첫 화제는 두 사람의 관계였다. 하비가 불편해 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두 분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쩌다 알파인 분들이….”
대놓고 물어보는 한 어린 외교관의 질의에 하비는 난감한 얼굴로 그저 술만 부었다. 대답할 자는 자연스럽게 빅터에게 넘어갔고, 그는 쏠린 시선에 태평하게 어깨만 으쓱했다.
“대화를 좀 해보니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통하는 것도 있고, 귀족스럽지 않게 생각도 트였다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더군요.”
퍽이나. 하비는 그의 입에 발린 소리에 헛숨만 들이켰다. 공통점이 많다고? 통하는 게 있다고? 대체 뭐가? 되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하비는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나 빅터의 대답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외교관들은 알아서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테이블에 놓인 고기 한 점을 나이프로 자르며 한 외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의원님은 귀족의 특권 의식이 싫다고 자주 그러시긴 하셨지요.”
“스터스 경도 꽉 막힌 것 같지만 결정적인 데서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시니까요.”
“두 분이 잘 맞으시겠네요.”
자기들끼리 추측하며 주거니받거니 하는 사이 포도주가 금방 동났다. 하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더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다행이긴 한데.’
하비가 반대편에서 태연하게 다음 포도주를 따고 있는 빅터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시작은 고작 대화가 아니었다.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폭력이었다.
하비는 빅터가 진심이라고 완전히 믿지는 않으면서 왜 이런 자리에까지 데려왔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믿고 싶은 거겠지.’
자신이 이리도 나약했던가? 누군가의 진심에 매달릴 만큼? 하비가 조용히 자문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입으로 넘어가는 포도주가 썼다.
빅터는 외교관들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하비는 위화감을 느꼈다. 옆 사람과 이야기하며 기품 있게 웃는 빅터가 낯설기도 했다. 그와 함께하는 자리가 편안하면서도 아늑할 수 있다니.
‘정말 이상해….’
하비가 잔을 만지작대며 빅터의 옆모습을 흘끔댔다. 간간이 빅터가 그를 보며 은밀한 미소를 흘렸다. 시원한 눈꼬리가 올라가고 사람들 몰래 눈웃음을 보냈다.
하비는 속이 간질간질하게 조여들어서 어색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신약의 영향을 받아 오메가가 된 것도 아닌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빅터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우성 알파다운 강렬한 페로몬과 어우러져 매력적으로 보였다.
‘술이 오른 건가.’
너무 많이 마시긴 했다. 그러니 다 술 때문이다. 하비는 알딸딸한 기분으로 음식들엔 일절 손대지 않고 빈 속에 술만 부었다. 멀쩡한 정신으로 이런 기분을 느낄 리가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을 재밌는 듯 보고 있던 외교관 하나가 서두를 꺼내들었다.
“참, 예전에 외교부에서 스터스 경이 고백받았던 건 아십니까?”
“벌써 반 년이나 지난 일을 지금와서 왜 꺼내드나.”
하비가 불편한 얼굴로 대꾸했지만 이미 신이 나고 술기운과 흥이 오를대로 오른 그는 멈추지 않았다. 빅터는 그만두게 하려는 하비를 막고는 미소 지으며 그를 독려했다.
“계속 들려주시죠.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외교부에서 가장 인기 있던 신입 외교관이었는데 뭐, 지금은 결혼했지만요. 저번 달에요.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결국 스터스 경에게 고백하더군요.”
빅터가 턱을 괴고 눈을 어둡게 빛냈다.
“호오. 그래서요.”
“스터스 경이 거절하면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나는 일과 결혼했다, 뭐 그런 흔한 이야깁니까?”
점점 차가워지는 빅터의 표정을 못 보고 이야기를 과장스럽게 꾸며내려던 외교관은 하비의 저지에 입도 못 열었다. 하비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 버린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이니 나보다 더 좋은 사람과 만나라고 했어. 이제 됐으니 다른 이야기나 하지.”
“그때도 여전히 재미 없었군.”
빅터의 핀잔에 모두들 동의했다. 일에 치어 살다가 솔로 생활이 길어지고 있는 외교관들이라 연애는 늘 관심사였다. 그런데 담백하게 살며 아무와도 엮이지 않던 하비가 갑자기 공개 연애를 발표해 버려서 다들 질투 반, 부러움 반으로 짓궂게 굴었다.
점점 더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쯤, 능글맞은 총괄 외교관이 본심을 내비쳤다.
“의원님이 보시는 업무 중에 정책을 승인하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빅터는 그가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눈썹을 치켜올려 무언으로 되물었다.
“저희가 밀고 있는 것이 좀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빅터가 손깍지를 끼고 테이블 위에 경청하는 자세로 놓았다. 신뢰가 가는 낮은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며 빅터는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말씀해 보시죠.”
맞은편에서 빅터를 반짝이는 눈으로 보던 외교관이 거들었다.
“역시 우리 의원님은 듣는 것도 천부적이십니다.”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 빅터를 향한 아부에 하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과한 아부를 격이 떨어진다 생각하는 면모도 있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심지어 나이 지긋한 총괄 외교관은 빅터에게 필요 이상의 호감을 보이며 은근한 압박을 주기도 했다.
‘역시 괜히 데려온 건가.’
하비가 후회하는 동안 총괄 외교관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우리 아들이 의원님을 너무 좋아해서 초상화도 제 용돈 다 털어서 구입했는데, 언제 한 번….”
경청하던 태도로 일관하던 빅터가 손깍지를 풀고 딱 잘라 거절했다. 잠깐이지만 하비와 눈이 맞닿았다. 불쾌해 보이는 것을 확인한 빅터가 의미심장하게 한 쪽 입술을 휘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죄송합니다. 그건 들어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표정이었지만 말투는 몹시 단호했다. 말도 다 꺼내기 전에 거절당한 총괄 외교관이 당혹스러워하며 변명했다.
“아, 물론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따르는 아이의 마음을 봐서 잠깐만 지도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아비의 마음입니다. 허허! 설마 제가 그런 의미로 말했겠습니까. 스터스 경이 버젓이 여기 있는데요.”
얼결에 지목된 하비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그런 의미’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 누가 들어도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비는 그가 빅터의 투자 정보력을 탐내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고, 꿍꿍이가 있음도 알았다. 자식을 통해 빅터에게 정보를 우선적으로 받겠다는 심보 아닌가. 속 시원히 말하지도 않고 얼버무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총괄 외교관이 술만 들이키고 있는 하비를 곁눈질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마음 넓은 스터스 경이 설마 바르뎀 경이 고작 잘 따르는 아이에게 커피 사주는 정도로 기분 나빠 하겠습니까?”
드디어 과묵하게 입을 닫고 있던 하비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분위기를 보고 있던 빅터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모르셨나본데, 스터스 경이 보기보다 속이 많이 좁습니다.”
술잔을 들어올리며 빅터가 장난스럽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특히 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니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비가 마시던 술을 다 뱉을 정도로 심하게 기침을 했고, 다른 외교관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총괄 외교관은 당황을 감추고 실망스러움을 보였다. 그래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했다.
“이런. 스터스 경이 연애를 하더니 변했나 보군.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졸지에 속 좁은 사람이 된 하비는 대화에 끼기를 포기하고 남은 술을 거덜 내기 시작했다. 이럴 땐 빠른 포기가 답이다.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남는 게 없는 자리 같았다.
그나마 주량이 센 편이라 버티면서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테이블 한 켠을 가득 메울 때가 되자 생각지도 못한 의견 다툼이 벌어졌다.
바로 하비와 총괄 외교관의 대립이었다. 가장 영향력 강한 두 사람이 의견 대립을 보이자 다른 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눈치만 봤다.
총괄 외교관이 잔뜩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로 나이프를 책상에 땅땅 두들겼다.
“도대체 그 쓰레기 섬은 왜 매입하자고 하는 건가?! 귀한 보석이 채굴되는 곳도 아니고, 열악해서 사람 살기도 팍팍한 곳이잖아. 대체 왜?”
하비가 테이블을 지도처럼 쓰면서 전략적인 이점을 설명했다.
“그곳 바다, 즉 영해를 쓸 수 있잖습니까. 거점이 되면 훌륭한 상업적, 군사적 요충지로 쓰일 겁니다.”
“당장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요즘 가장 위험한 해적이 그 쪽 영해를 다니고 있는 걸 모르나?”
총괄 외교관의 반박에도 하비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취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또렷한 말투였다.
“해적은 소탕하면 됩니다.”
빅터가 흠칫하며 하비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하비는 주장을 펴기에 바빠 눈치채지 못 했다.
지금 제 아버지와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걸 본인은 아는 건가.
빅터는 턱을 쓸면서 흥미로운 주제에 몰입했고, 이미 혀가 꼬이기 시작하는 총괄 외교관이 주절주절 반박했다.
“그게 말처럼 쉬워? 쉬우면 일찍이 임페르 해적단도 소탕했겠지!”
임페르 해적단이 언급되자 그제야 하비가 빅터를 넌지시 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치고, 빅터는 자신은 신경쓰지 말라는 것처럼 어깨를 가볍게 으쓱 했다.
하비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해적 때문에 깊은 고통을 당했던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는 줄 잊고 있었다.
너무 무신경했나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도 든 것도 잠시, 여태 빅터가 했던 행동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그 미안함조차 사그라들게 했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게 버텼던가.
그 와중에도 총괄 외교관의 반발은 이어졌다.
“애초에 소탕할 군사는 어디 있으며, 군사 비용으로 투입할 세금은 썩어 돌아? 안그래도 전쟁에서 져서 배당금 때문에 속 시끄러운데 군사를 동원하면 주변국에서 무슨 빌미를 잡을지!”
하비는 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받아쳤다.
“그 섬을 매입할 기회가 지금 밖에 없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도미니크에서 헐값에 팔아넘기려 하고 있는데, 왜 이 기회를 잡지 않으려 하십니까? 1에이커당 고작 2기난 밖에 하지 않습니다. 우선 순위로 두지 않으면 슬루인 제국에서 먼저 채갈 겁니다. 국력은 해상 무역이 장악한 지 오래고, 반드시 영해를 넓혀야 합니다.”
수석 외교관인 하비 스터스와 총괄 외교관의 의견 대립이 요즘따라 잦았다. 그나마 굽혀 주던 하비가 최근 뭔가에 자극을 받기라도 했는지 몹시 의욕적이라서였다. 원래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렇게 밀어붙여서까지 제 뜻을 관철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총괄 외교관은 하비의 뜻에 동감하면서도 반발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윽고 하비는 화장실을 가겠다며 일어났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빅터가 양해를 구하고 뒤따라갔다. 막상 따라가니 하비는 화장실로 간 것이 아니라 벽돌 건물에 기대서서 달을 올려 보고 있었다. 답답한 모양이었다.
가스등 아래 늘어진 긴 그림자가 하비의 다리 아래 출렁였다. 키가 크고 늘씬하게 체격 좋은 몸이라 그림자조차 그에 걸맞았다.
빅터가 슬그머니 하비의 옆자리에 가서 나란히 섰다. 함께 타고 온 덩치 큰 마차가 두 사람을 넉넉하게 가려주었다. 눈치 빠른 벤과 진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오늘따라 달이 동그랗고 환한 빛을 뿜어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같이 달을 올려다 보며 빅터가 제안했다.
“내가 힘이 되어주지.”
산책나온 것처럼 한가한 목소리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비가 놀라 되물었다.
“뭐?”
따가운 시선이 빅터의 옆얼굴에 닿았다.
“안그래도 곧 의회에 나가야 하거든. 잘 밀어 붙이면 국왕께서도 알아주시겠지.”
하비가 미심쩍게 확인했다.
“설득할 방법이 있나?”
“방법이야 만들면 되는 거고.”
벽에 상체를 기댄 빅터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늙은 너구리는 모르는 것 같지만, 그건 단순한 쓰레기 섬이 아니야.”
“그러면?”
빅터는 순간 하비가 희망에 차서 바라보는 것이 귀엽게 느껴졌다. 순수한 열망이었다.
하지만 곧장 그리 생각한 자신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어차피 이 모든 것도 하비의 마음을 쥐기 위한 작업이자 수단이었다. 쥐고 나면 더 효율적으로 하비 스터스를 망가뜨릴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황철석이 나지. 그 외 다른 매장 자원도 꽤 된다고 알고 있고. 잠재 가치를 따지면 보석보다 훨씬 값질걸.”
빅터의 답변은 놀라웠다. 해상 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용한 보물섬이라는 말이었다.
하비가 의심스럽게 빅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씩 웃으며 대답을 회피한 빅터가 본론부터 말했다.
“도와줄테니 놓치기 전에 빨리 매입해. 눈독 들이는 하이에나들이 꽤 되거든.”
하비의 얼굴에 희비가 스쳐 지나갔다. 좋긴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총괄 외교관님 말씀대로 해적이 문제긴 하군.”
하지만 이마저도 빅터가 시원시원하게 해답을 내놓았다.
“올란 시에서 공식적으로 해적 소탕 작전에 승인하면 되는 거 아닌가. 모집할 군자금은 시 재정에서 끌어다 쓰지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붙이면 국왕의 군대를 쓸 수도 있고. 저번 의회 회합때도 해적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긴 했거든.”
하비는 물끄러미 빅터를 보았다. 누군가가 발 벗고 나서서 자신을 도와주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하비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많았지만 역으로 도움 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말없이 보기만 하자 빅터는 피식 웃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든든해서 감동 받았나?”
하비가 다른 곳을 보며 모른 척 했다. 은은하게 귀가 달아올라 있었다.
“감동은 무슨.”
“방금 감동 받은 얼굴이었는데.”
실랑이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쓸데없는 소모전이라는 생각에 동시에 피식 웃었다. 밤바람이 오늘따라 유독 선선하고 간지러웠다.
하룻밤의 꿈같은 잔잔한 분위기가 금방 사라지자 하비는 곰곰이 생각했다. 빅터가 말한 것들이 정말이라면 의미가 있었다. 그러려면 시의원인 그의 힘도 필요하다.
하지만 대가 없는 이득은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하비는 빅터가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는 것이 더 두려웠다. 더욱이 시 재정같은 공공 자산을 끌어들이면 실패시 빅터가 부담해야할 것들이 컸다. 빅터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무거운 책임인 것이다. 고작 자신의 의견 때문에 다른 자에게 그런 책임감까지 얹을 수는 없었다.
하비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은 고맙지만 개인적으로 제안한 것을 시 재정에서 뺄 순 없어.”
“그럼 개인적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면 되는 건가?”
“원래부터 계획된 정책도 아니잖아. 의회 승인이 날지도 모르고, 무리한 건 하지 않는 것이…….”
“며칠 전 험하게 대한 걸 사과하는 걸로 치지.”
몇 번을 반복해도 빅터는 빈틈이 전혀 없었다. 결국 하비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경이 아무 조건 없이 해준다는 건 믿을 수 없어.”
“왜?”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상인 집안 사람이니까.”
그들은 돈의 논리에 휘둘리며 누구보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람들이다. 하비의 이중 잣대였다.
아직 보수적인 기득권의 문명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하비에게 최근의 투자 과열 사태는 못마땅한 현상이었다. 기사도 정신 따위는 한 점 남아 있지도 않은 자들이 불명예스러운 짓도 서슴지 않고 한다. 오로지 한낱 거래의 수단인 것을 위해서 말이다.
빅터가 거리를 좁히면서 의뭉스럽게 물었다.
“흐음. 아직도 어엿한 정치인으로는 안 봐주는 건가. 돈으로 자리를 사서?”
하비는 예전에는 늘상 하던 말이었는데, 왠지 빅터의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상처입히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돈으로 샀다는 표현은 사실 틀렸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결국 실력이다.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빅터는 시대를 대변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도 샀다. 세상이 변했고, 그 세상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누구보다 빨리 터득했을 따름이었다.
하비도 잘 알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대비책도 마련하고 있었지만 빅터와 얽히면 생각이 항상 일관되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음이 약해져 하비는 자신이 했던 말을 조금 수정했다.
“…정치인이라면 더 하지. 판의 유리함을 따지면서 결정은 언제든 번복할 수 있잖아.”
“그건 할 말이 없군.”
피식 웃은 빅터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 뭐든 도와줄테니까.”
마치 나에게 기대라는 소리로 치환되어 들렸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우성 알파 특유의 압도적인 페로몬이 남실대면서 하비의 몸 속에 스며들었다. 같은 알파로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다가도 여러 번 받아들인 탓인지 금방 가라앉았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했다. 하비는 또 구멍 안이 욱신대는 것 같았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굴욕적인 자세로 약을 바르고 나왔던 오전이 생각나 하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일의 원흉인 빅터가 문득 말했다.
“한 번도 먼저 물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군.”
빅터의 전매특허인 뻔뻔함은 실종되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고, 장난스럽던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키스해도 될까?”
갑자기 불쑥 다가온 상황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뜨던 하비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애써 냉소적으로 말했다.
“나한테 거절할 권리가 있나?”
“싫다면 안하겠어.”
빅터는 진심인 듯 했다. 이 남자는 언제나 온도차가 확연했다. 그 간극에 하비는 마음이 얼었다가 녹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온몸으로 부딪쳐오는 것을 피할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항상 이런 식이지.’
이제 무엇이 진심인지를 가려내는 것도 지쳤다. 하비는 체념과 포기가 섞인 심정으로 한숨 지었다.
“마음대로 해.”
“싫지는 않다는 소리군.”
빅터의 낮은 웃음소리가 하비의 귓전을 맴돌았다. 어느 새 고개를 숙인 빅터는 벽과 팔 사이에 하비를 가두고 예민한 귓불을 잘근잘근 가볍게 물고 있었다. 움찔거리는 하비의 단단한 목에 고대 뱀파이어인 것 마냥 이를 세웠다. 매끈한 피부에 흠집이 나고, 좋은 향이 났다. 시원한 페로몬이 코끝을 스치자 기분이 좋아졌다. 빅터가 희열에 차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떻게 하면 경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널 마음대로 상처입힐 수 있는 거지? 빅터는 그리 묻고 있었다.
육체는 어찌할 수 있어도 그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건 결국 불가능했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었던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빅터가 고개를 들었다.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달빛이 순간 거대한 구름 더미에 가려지고, 가시거리를 좁혔다.
어두워지는 빅터의 얼굴을 보며 하비가 허탈하게 말했다.
“이미 마음대로 하고 있잖나.”
이미 상처 받았다. 수도 없이, 많이.
하비의 일렁이는 밤색 눈동자가 그리 말하는 듯 했다. 그러나 빅터는 그걸로는 부족했다. 목마른 자처럼 하비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그 피를 마시고 싶어 했다. 하비 스터스의 가장 은밀하고 숨기고 싶어 하는 깊은 곳까지 닿는 사람이 유일하게 자신이었으면 했다.
하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빅터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내가 정말 마음대로 하면 따라와줄건가?”
높게 선 콧대가 부딪치면서 빅터는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입술이 닿은 채로 그는 혀를 내밀어 하비의 입술을 열었다. 머뭇대다 벌린 입으로 길고 거칠대는 혀가 밀려 들어갔다.
하비는 숨 가쁘게 키스를 받았다.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로 열정적이고 격렬한 키스였다. 여린 점막이 빅터의 혀끝에서 놀아났다.
하비가 밀려오는 쾌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천장을 긁을 때는 벽에 몰린 하비의 손끝이 거칠한 벽돌을 긁기도 했다. 차마 앞으로 나가 빅터를 잡지는 못하고 손톱을 해하는 정도로 끝냈다.
음란하게 얽히던 혀가 간신히 떨어졌을 때 하비가 번들대는 입술을 열었다.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는 듯 했다.
“바르뎀 경은 본인이 가장 잘하는 걸 모르는 것 같은데.”
늘 차분하던 밤색 눈은 기묘한 열기로 젖었다.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도 경의 뜻대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발맞춰오지.”
믿어 보고 싶다. 여러 번 되뇐 그 말. 결국,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본심이었다.
하비는 씁쓸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나조차도.’
그러니 마음대로 해.
빅터는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생략한 뒷말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만족스럽게 웃음 지은 빅터가 마차 안으로 하비를 이끌었다.
사륜 마차에 튼튼한 검은 말이 두 마리 매어져 있었다. 마부 역할을 하던 진은 어딜 가고 없었다. 하비가 이를 지적하려던 찰나 빅터가 그의 입을 막았다.
“사소한 건 신경쓰지마.”
이미 눈치 빠른 진은 외교관들이 있는 술자리로 가서 두 분은 가셨다고 말을 전하고 있을 것이다. 빅터의 큰 체구를 고려해 개량한 사륜 마차는 보통 마차보다 확실히 넓었다.
쿵!
하비가 구석으로 몰려도 충분히 자리가 남을 만큼 말이다.
마차 안에서 하비를 몰아붙인 빅터는 상체를 굽혀 깊이 키스했다. 좀 전에 한 것으론 부족했다. 왜 진작 이 입술을 많이 맛보지 못했던가 후회가 들 정도로 달고 매혹적이었다.
하비의 입술 사이로 뜨겁고 긴 혀가 밀려들었다. 이번에도 하비는 밀어내지 않았다. 망설임이 많이 죽었다.
빅터는 같은 알파라면 역겨울 그 페로몬이 지나치게 시원하고 달다는 것을 의아해 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키스하면서 하비의 페로몬을 들이킨 순간 아래가 단단히 섰다.
의심하며 빅터가 하비의 체향을 들이켰다. 여전히 지나치게 좋았다.
기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더욱 파고드는 빅터의 페로몬에 하비도 머리가 아찔했다.
‘술 때문이야.’
하비는 포도주의 술기운과 페로몬이 섞여 흘러 들어와 몸 안 쪽이 간질간질거렸다. 당장 이 참을 수 없는 감각을 풀고 싶었다. 그러다 입을 떼며 뜬금없이 튀어나온 빅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오메가 페로몬 향수라도 뿌린 건가.”
알파 커플끼리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한 사람이 오메가 페로몬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하비는 듣자마자 불쾌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짓을 내가 할 것 같나.”
애초에 자신이 뭣하러 그런 걸 뿌리겠냐는 당당함에 빅터는 할 말을 잃었다. 피식 웃으며 그는 동의했다.
“그건 그렇지만.”
하비 스터스가 자발적으로 같은 알파인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오메가 페로몬을 몸에 뿌린다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잠깐 상상하던 빅터는 이내 고개를 흔들고 빠르게 재킷을 벗었다.
위 아래를 훌훌 벗어 건너편 마차칸에 놓는 빅터를 보면서도 하비는 손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옷을 벗어야 하는데, 아직 혼란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빅터의 벗은 육체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 우성 알파와 사내의 것이 중첩된 일렁이는 야성의 향이 코끝을 적셨다. 바
다에서 자라서인지 하비처럼 정교하고 날렵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거칠고 볼륨이 큰 근육들이 어깨와 등허리에 흉기처럼 박혀 있었다.
온전히 나신이 된 빅터가 문득 킁킁대며 피식 웃었다.
“포도주 냄새가 꽤 좋은걸.”
마차 안에도 하비가 마신 진한 포도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민망해진 하비가 변명하듯 말했다.
“많이 마셨으니까.”
“왜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마시고 싶어서다.”
그러니까 왜 마시고 싶었냐고 끈질기게 물어보는 빅터에게 하비가 실토했다.
“곤란한 이야기만 오가니까.”
하비는 박히듯 밀려있던 구석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강제로 눕혀졌다. 빅터가 하비의 위로 올라오더니 러플 블라우스 상의를 말아 올렸다.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하비를 내려 보았다.
“어떤?”
빅터가 한기에 몸을 움츠리는 하비의 가슴 돌기를 손가락으로 꽉 잡고 비볐다. 하비는 순간, 가슴에서 통증과 묘한 쾌감이 치받았다.
“헉….”
굵고 유연한 허리가 금세 튕겨 올라갔다. 밤의 찬 공기와 상반된 뜨거운 쾌감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을 홉뜨고 부들대는 하비에게 빅터가 맨몸을 바짝 붙였다. 근육덩어리가 미끈대며 달라붙어 야한 살냄새를 풍겼다. 빅터가 짓궂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어떤 곤란한 이야기?”
하비는 대답 없이 부르르 떨면서 빅터의 가슴팍을 한 손으로 밀었다. 판판하고 돌 같은 근육이 손바닥 아래 만져졌다.
하비가 헐떡이면서 달아오른 빅터의 녹색 눈을 보고 말했다. 깜박이는 녹색 눈 속에 열정이 가득했다. 너무 뜨거워서, 빨려들 것 같았다.
“너무 급해. 천천히.”
원래 같으면 이런 걸 요구할 관계도 아니었다. 빅터가 채찍을 들고 시키는 대로 하라며 반강제로 하비의 허리를 세웠을 것이다. 정말 많은 것들이 짧은 시간 동안 달라졌다.
그때 마차 안으로 강렬한 달빛이 들어와 하비의 탄력 있고 하얀 살결을 구석구석 비추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월광은 하비를 아름다운 무엇으로 바꾸어 주었다.
구석에 구겨진 가운데서도, 하비 스터스는 제 본모습을 잃지 않았다. 열기가 올라 흐트러진 것조차 원래 그랬던 것처럼 단정했다. 지켜보던 빅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젠장…. 사람 돌게 하는군.’
빅터는 그 꿈을 한 번 꾼 이후로 자주 반복해 꾸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하비가 당시 그를 지켜주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자꾸만 꿈 속의 그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헷갈리는 사내와 하비가 겹쳐졌다. 얼굴과 페로몬은 분명 그의 것이었다.
‘이제 그게 꿈인지 아닌지도 분간이 안가.’
빅터는 근육이 고루 발달해 탐스러워 보이는 하비의 가슴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돼.”
빅터는 꼬집어서 부풀어 오른 하비의 유륜을 입에 담았다. 갈색 유륜은 대번에 뾰족해지며 입 안에서 단단해졌다.
“흐으….”
하비가 신음을 흘리며 마차벽에 머리를 기댔다. 빅터의 혀가 돌아갈 때마다 아래에 찌릿거리는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물고 빨고 씹는 동안 하비의 목울대도 미친 듯이 파도쳤다.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마차 의자를 긁었다.
고작 가슴을 괴롭히고 있을 뿐인데 빅터에게 워낙 집요하게 당한 전적이 있어서인지 많이 예민해진 육체가 반응했다.
흘끗 하비의 중심을 내려본 빅터가 웃었다.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우성 알파의 것만큼은 아니지만 보통 알파의 성기보다는 확실히 컸다.
빅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 다른 오메가에게 넣은 적도 있지 않았을까. 예전의 그 젤가라는 놈이나, 혹은 외교부에서 고백했다던 어느 누군가가 하비의 것에 꿰뚫려 울부짖었을 모습을 상상했다.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도 빅터의 얼굴이 흉흉해졌다. 다 찢어발기고 조각내고 싶었다. 끝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어둡고 잔악한 성정이 억지로 덧씌운 미소에 가려졌다.
빅터는 잔인한 모습을 숨기듯 일부러 하비에게 무안을 주었다.
“벌써 커졌어.”
하비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시끄러워.”
“가슴 좀 빨아주는 정도로 이 정도면, 본 무대가 기대 되는군.”
하비가 미간을 구기며 그의 저질 농담에 대거리하려던 찰나, 헛숨을 뱉었다. 빅터가 하비의 하의를 벗기고 반 이상 발기한 것을 손으로 꽉 쥐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을 희롱할 때보다 더 큰 괴로움이 찾아들었다.
하비는 두터운 허벅지를 오므리면서 항의했다.
“뭐 하는 거야.”
흘려 들은 빅터는 하비의 허벅지를 밀어젖히고 능숙하게 성기를 붙들었다. 힘을 주어 위아래로 훑자 몰려오는 뻐근한 쾌감에 하비가 숨도 못 쉬고 부들거렸다. 그는 마차 벽에 손을 뻗어 간신히 지탱했다.
“아프지 않게 하려고.”
빅터가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선단 끝을 꾹꾹 누르기도 하고, 가볍게 훑기도 했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
하비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더 큰 신음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한지, 터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마저 들었다.
공포에 깃든 이율배반적인 쾌락으로 하비는 금방 절정에 다다랐다.
“으윽!”
하비의 얼굴과 허벅지가 경직되더니 커질대로 커진 성기 끝이 터졌다. 묽은 액이 줄줄 흘러내려 빅터의 손을 적셨다.
손을 올려 시큼한 정액을 핥은 빅터가 씨익 미소지었다. 그의 정액에서 페로몬과 비슷한 향이 났다.
“생각보단 묽은데. 자위라도 한건가?”
대번에 하비의 목이 후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사실 오전에 고약을 바를 때 발기하는 바람에 두어번 빼고 오긴 했다. 하비는 이를 숨기려 거칠게 내뱉었다.
“개소리 하지마.”
빅터는 경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존경 받는 스터스 경은 나와 엮이면 입이 험해지는군.”
노려보는 시선을 즐거이 받으며 빅터는 끈적대는 점성을 확인하더니 일부는 잔뜩 발기한 제 성기에 바르고, 나머지는 손가락에 골고루 묻혔다.
사정의 여운에 떨던 하비는 구멍을 쑤시는 손가락에 정신이 들었다.
어느 새 빅터가 하비의 다리 한 짝을 어깨에 올리고 손가락을 쑤시고 있었다. 굵은 손가락 두어개가 단숨에 들어왔다. 곧장 하비가 느끼는 지점을 건드리며 빅터가 말했다.
“지금은 오메가가 아니니 잘 넓혀둬야지.”
하비는 빅터의 손가락이 깊이 들어올 때마다 허공에 뜬 허리를 위로 추켜올렸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며 빅터의 어깨에 놓인 다리에도 바짝 힘줄이 섰다.
“그, 그만…….”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여지없이 쾌락점을 꾹 누르고 구멍을 충분히 넓혔다. 하비의 머릿속에 불이 붙는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이 번쩍거렸다.
마치 고문하고 자백을 받아내는 것처럼 빅터가 잇따르는 쾌감 뒤에 물었다.
“경의 첫 러트는 어땠지?”
“그런 걸 왜 지금…, 으읏…!”
되묻던 하비는 사정없이 눌러대는 손가락의 압력에 자지러졌다. 빅터가 그런 그를 내려보며 녹색 눈을 가득 휘었다. 그 속에 작은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방종한 첫 러트를 겪으면서 문득 궁금하더라고. 스터스 가의 도련님은 어떤 러트를 겪었을까.”
하비는 빅터의 집사인 레나에게 들었던 그의 첫 러트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해적선에서 감금당하다시피 겪은 지옥같은 첫 러트 말이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웠을까. 자신은 상상조차 못할 상황이었다. 편하게 약물 복용으로 첫 러트를 보냈고, 누군가와 억지로 관계를 맺어야 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밧줄로 몸을 묶고 페로몬 폭풍 속에서 홀로 견뎠을 그가 가엾었다. 도와달라 외쳤을 빅터가 상상 속에서 하비의 가슴을 두들겼다.
아무리 빅터가 그를 괴롭게 했더라도, 그가 당해야 했던 비인간적인 처사까지 당연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빅터를 악한으로 내몬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였다. 하비는 심장이 난도질 당한 것처럼 따끔거렸다.
이 와중에도 구멍을 휘젓는 빅터의 손을 하비가 잡았다. 열에 들뜬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하비는 진중하게 물었다.
“내가 원망스럽나?”
하비는 초조해 보였다. 이 자리에서 빅터가 저주를 퍼붓고 원망스럽다고 한다면, 전보다 조금 더 아플 것 같았다.
빅터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비가 두려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갈등하는 것도, 제 마음이 다쳤을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것도. 그것이 하비 스터스의 천성일 것이다.
하비의 턱에 입맞추며 빅터가 낮게 말했다.
“아니었다면 거짓이겠지만.”
하비 스터스가 이런 다정한 사람이라 참 다행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견고한 철벽을 뚫고 나면 말랑말랑한 심장이 남는다. 그런 참 쉬운 사람이라서, 빅터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비는 빈틈을 파고들기에 최적의 상대였다.
빅터가 부드러운 얼굴로 보다 정밀한 거짓말을 했다.
“오랫동안 한 사람만을 생각하다 보면 이 감정이 뭐가 뭔지도 헷갈리거든. 증오인지, 사랑인지.”
남김없이 부서지기에도, 최고의 상대였다. 빅터는 고백처럼 말하며 하비의 마지막 둑을 무너뜨렸다.
“아마 그동안은 내가 착각했나 보지.”
빅터는 울 듯 말 듯 일그러진 하비의 얼굴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떨리는 입술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라힌 스터스의 잘못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지. 경에게 묻지 말았어야 할 것까지 묻고 말았어.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하비의 뚜렷한 이목구비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미소가 걸렸다.
기쁨이었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적의로 가득했던 빅터의 손길에 애정이 깃들고, 그를 진정으로 용서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기다렸던 순간일지도 모른다.
빅터는 하비의 밤색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고했다. 힘없이 늘어진 손가락에 키스하며 빅터가 그를 흘끗 내려보았다.
“무지했던 나를 용서해 주겠나?”
드디어 빅터의 진심 아닌 고백이 그의 강철 심장을 부숴버렸다.
쿵, 쿵, 쿵.
여태껏 죽어있다 생각했던 심장은 단단한 껍질을 벗고, 알맹이만 남아 열렬히 제 존재를 과시했다. 몸 속이 대번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하비는 더듬대다 침묵했다. 유창하게 논리를 펼치는 건 잘했지만,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 그를 이해한다는 듯 빅터는 피식 웃으며 귓불을 만졌다.
“말 안해도 아니까, 이제 즐겨.”
빠르고 능수능란한 손놀림에 뭐가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때, 빅터는 이미 하비의 정액을 잔뜩 묻힌 성기를 밀어넣고 있었다. 너무 커서 넣을 때마다 버거웠던 기억에 하비는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다.
빅터가 웃음을 지운 얼굴로 경고했다.
“피하면 더 아플 거야.”
그런 뒤 그가 천천히 귀두를 밀어넣었다. 끝 부분이 들어가자 숨을 고르고 있는 하비를 내려보다 빅터는 끝까지 한번에 박아버렸다.
빅터가 웃음을 지운 얼굴로 경고했다.
“피하면 더 아플 거야.”
그런 뒤 그가 천천히 귀두를 밀어넣었다. 끝 부분이 들어가자 숨을 고르고 있는 하비를 내려보다 빅터는 끝까지 한번에 박아버렸다.
퍽!
마차가 크게 들썩이고 하비가 정수리를 좌석에 박았다. 정액으로 미끌대는 성기가 그의 안을 공격적으로 파고들었다. 정확히 느끼는 지점을 내리꽂아서 하비가 온 몸을 비틀도록.
하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빅터의 어깨를 걸치고 있던 그의 한 쪽 다리가 퍼뜩 허공을 찼다.
“큽….”
허를 찔린 맹수처럼 눈을 홉뜨던 하비는 간신히 터져나오는 신음을 참았다. 찡하게 구멍에서 와닿는 근질대는 감각이 폭죽처럼 머릿속에서 터졌다. 경련하는 하비의 한 쪽 다리를 내리면서 빅터가 입꼬리를 당겨올렸다.
여러 번의 섹스로 이미 하비가 느끼는 곳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하비가 잘 반응하는 지점은 생각보다 얕은 곳에 있고, 때문에 짓누르듯이 스쳐 지나가며 삽입하는 것에 가장 취약했다.
“돌아봐.”
빅터는 박기 좋게 하비를 뒤집었고, 그는 강제로 자세가 틀어지며 더욱 깊이 와닿는 성기의 감촉에 진저리쳤다.
퍼억!
살짝 허리를 뒤로 빼던 빅터가 다시 박았다. 한 번 더 하비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박힌 하얀 엉덩이 아래로 잔물결이 쳤다. 말라가던 정액이 뜨거운 체온에 녹아 구멍 안에서 질척댔다.
빅터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기분 좋아? 엄청 무는데.”
대답도 못할 정도로 하비는 충격에 휩싸였다. 끝까지 박힌 빅터의 성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안에서 크기를 더 키워나갔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커진다고?’
하비는 눈을 크게 뜨고 말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알파인 채로 빅터와 섹스를 하는 건 지금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 꽃을 구멍에 꽂고 기었을 땐 워낙 경황 없이 지나갔던 터라 빅터와 어떻게 섹스를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액이 나오지 않는 알파의 몸으로 우성 알파의 무식한 크기를 받아낸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건 빅터의 것이 파고든 채 조금 시간이 지나자 참을 만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고통에 많이 무디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별로 아프지 않다는 것에 2차 충격을 받은 하비는 고개를 숙여 가만히 복부를 내려보았다.
‘언제 적응한 거지?’
지나치게 큰 것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배꼽 아래까지 꽉꽉 들어찼다. 손으로 만지면 불룩 튀어나와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단단한 하복부를 실제로 만지려 손을 들다가 빅터가 그 손을 깍지 끼고 뒤로 젖혔다. 팔이 꺾일 것처럼 강하게 당겨지면서 구멍 안의 성기가 샅샅이 주름을 짓눌렀다.
단숨에 쾌감점도 함께 안에서 비벼지면서 하비가 부들거리다 씹어뱉듯 숨을 던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허억…!”
마른 오르가슴이 그를 덮쳤다. 저릿함이 온 몸을 감싸더니 질질 새어나오던 쿠퍼액에서 정액이 섞여 흘렀다. 머리끝까지 끔찍한 쾌감이 휩쓸었다.
이내 고개가 푹 떨어지는 하비를 빅터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빅터가 마차 좌석에 한 쪽 무릎을 딛고 하비의 나머지 팔도 뒤로 잡아당겼다.
“이런, 머리 조심.”
말과는 다르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빅터는 허리를 더욱 밀어 성기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두 팔을 뒤로 잡고 박는 통에 하비의 균형 잡힌 허리가 유연하게 뒤로 젖혀졌다. 견고한 활시위처럼 팽팽해진 등근육을 감상하면서 빅터는 박차를 가했다.
하비는 누가 들을까 염려해 입술에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입 안에서 터져나가던 신음이 도로 목구멍으로 튕겼지만 억눌린 짐승같은 소리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때 밖에서 사람들의 재잘대는 소리와 그림자가 언듯 스쳐 지나갔다. 가장 가까이에 남녀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불었다.
“윈스턴 경도 알파를 탐하는 것에 맛들렸다지요?”
“설마 윈스턴 경까지 그럴 줄은 몰랐지. 허허! 같은 알파끼리는 페로몬도 거북할텐데, 것 참. 알 수 없는 일이지.”
긴장으로 조여드는 구멍의 압력에 빅터가 반듯한 미간을 구겼다. 금방 갈 뻔 했다.
하비의 안이 너무 뜨겁고 조여서 사정감이 몰려왔지만 빅터는 참아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더 참았다가 극상의 쾌락을 맛보고 싶었다.
재잘대던 남녀가 사라지자 빅터는 잔뜩 긴장해서 바깥쪽을 보는 하비를 끌어당겼다. 들키면 어떨까 걱정하는 눈빛에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언제나 저 고고한 남자는 백색 저택의 안위부터 생각한다.
빅터는 바로 끝까지 성기를 욱여넣었다.
퍼드득 반응하며 하비가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마터면 소리가 나올 뻔 해서 황급히 입술을 물었다.
구불대는 내벽의 주름이 일제히 펴지며 큰 질량을 받아냈다. 살이 딸려 들어가는 기분에 하비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다시 쾌감점을 찍혔다. 머리가 어질거리는 쾌락의 아지랑이가 짙게 피어올랐다.
“으윽! 크흐…!”
결국 하비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자 빅터는 잘했다는 듯 그의 너른 등을 쓸었다.
무게를 지탱한 빅터의 한 쪽 무릎에 힘이 들어가고, 찢어질 것처럼 팽팽하던 하비의 구멍으로 성기가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쿵! 쿵!
마차가 흔들리자 말들이 작게 투레질을 하며 방황했다.
빅터는 삽입의 충격에 덜덜 떨고 있는 하비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큰소리 내거나 너무 움직이면 말이 놀라서 달릴 지도 몰라.”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하비가 밤색 눈동자를 불안한 듯 흔들었다. 빅터는 보지는 못해도 하비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불안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심술 가득한 입술이 모난 듯 움직였다.
“최대한 마차가 덜 움직이게 해보라고.”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당연한 듯 요구했다.
하비의 엉덩이와 빅터의 성기가 결합될 때마다 큰 진동이 울렸다. 하비는 되도록 마차 벽에 머리를 박지 않게 최선을 다했지만 빅터의 힘이 워낙 터무니 없었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밀려 났다.
하비는 우성 알파의 힘이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결국 하비는 빅터가 박을 때마다 온 몸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 사이로도 힘이 가해져 자연적으로 빅터의 것을 꽉 무는 셈이 되었다.
조여드는 압박에 빅터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제길…!”
홀린 듯 욕을 씹어뱉은 빅터는 드디어 절제를 잃었다. 조절하던 것을 놓고 속도를 올렸다. 처박을 때마다 잔뜩 힘을 주고 있던 하비의 구멍을 억지로 열었고, 그만큼 거센 반발에 성기가 잘릴 것 같았다. 연결되어 있는 부위에서 점성 연한 정액이 녹아 끈적거리고, 땀과 섞였다.
하비도 끝까지 들어와 끝끝내 쾌락점을 긁고 지나가는 거대한 압박감에 헐떡였다. 정을 내려찍듯 반복되는 삽입에 다시 뭉근하고 간지러운 감각이 되살아났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느껴지는 간격은 좁아지고, 하비는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머릿속에 뜬구름같은 이물감이 끼어들어 이지를 흩트려놓는 것 같았다.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또…….’
발기한 하비의 성기가 속도감 때문에 허벅지를 탁탁 쳤다. 한계치를 넘었다 생각한 순간, 하비는 또 한 번 사정했다. 마차 좌석으로 하비의 정액이 길게 튀었다. 더 묽어져 있었다.
“윽….”
때맞춰 빅터도 미간을 찌푸리고 부르르 떨더니 구멍 안으로 상당량의 정액을 쏟아냈다.
울컥대며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것에 하비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붉혔다. 알파의 몸이라 임신할 일은 없지만 같은 알파의 정액을 뒤로 받는 것이 여전히 낯설었다. 익숙해 지지 않는 일이었다.
빅터가 그 자신보다 제 몸을 더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딜 찍어누르면 미칠 것 같은지, 어디를 박으면 자지러지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빅터는 하비의 등을 가볍게 쓸었다.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괜찮았나?”
하비는 뒷모습을 보인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몸이 금방 풀어져 전신의 근육이 아팠다.
빅터는 하비의 팔을 놓고 그를 천천히 눕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엎드려 있던 하비가 등을 반듯하게 좌석에 대고 마차 천장을 보았다. 빅터가 사정한 것이 꾸물꾸물 뒤로 새었지만 상관없었다.
하비가 누운 채 빅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느 귀족이 몰래 이국에서 수집한 비너스의 조각상보다 퇴폐적이고, 반항기 가득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빅터에겐 무언가에 귀속되지 않은 자유분방함이 있어서인지 같은 나이인데도 그가 훨씬 어려 보였다.
드높은 자존심처럼 솟은 높은 콧대에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은 궁금해졌다. 그가 무슨 이상을 꿈꾸는지, 어떤 세상을 원하는지.
하비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듣는 것이 두려웠다. 그 입에서, 혹시라도 자신의 고백에 대한 답이 나올까봐서였다.
하비가 같은 말을 돌려주는 순간, 무력하게 구속당하고 묶여버릴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의아했지만 어쨌든 빅터는 직감을 따랐다. 키스로 하비의 입을 막았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하비는 말을 빼앗겼다.
“흐읍….”
심장까지 내어먹을 기세로 그의 입술을 훔치고, 얽히는 혀를 뿌리째 얽어매었다.
뱀이 교미를 하듯 붉고 탐스러운 혀가 끝없이 얽혔다. 넘쳐흐른 타액이 입가로 흘러내리고 하비가 단단한 턱끝을 치켜 올렸다. 불룩한 목울대까지 내려온 타액을 빅터는 성수를 마시듯 핥았다.
물러난 녹색 눈동자가 고요히 온통 자신이 만들어낸 열로 뜨거워진 사내를 지켜보았다. 제물을 확인하는 것처럼 집요한 눈길이었다.
내친 김에 빅터는 고개를 숙여 성기 아래 회음부와 망울까지 입술로 가볍게 눌렀다. 하비가 기겁하며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눌렀다. 낮은 목소리가 긴박함을 담았다.
“그만. 이런 것까지 하지마.”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다. 하비처럼 고지식한 고위 귀족들은 상대방의 아래를 핥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빅터는 피식 웃으며 하비의 염려를 흘려 넘겼다.
“뭐 어때.”
엉덩이 아래 구멍에도 혀를 갖다대고 심지어 쑤시기까지 했다. 얼굴을 박고 구멍 안을 성기로 쑤셔박듯 혀를 썼다.
하비는 움찔거리면서 입을 아예 제 손으로 틀어 막았다. 온 몸이 흐늘대며 녹는 기분이었다. 타인에게 처음 받는, 혹은 처음 허하는 집요한 애무였다.
질척하고 섹스같은 전희가 끝난 뒤 빅터는 하비의 허벅지를 끌어당겼다. 아직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 하려고?”
하비의 정색을 그는 아릿한 미소로 넘겼다. 허벅지를 잡아 옆으로 벌리면서 빅터가 제 성기에 토정한 정액을 발랐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하비가 기함하고 밀어낼 줄 알았는데, 그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하비는 반쯤은 포기했다. 어떻게 했는지 섹스를 아프지 않게 능란히 잘해서 기분이 좋기도 했다. 능욕이나 굴욕 주는 것 하나 없이 제대로 관계를 맺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빅터가 진심 어린 사과도 건넸고, 정식으로 교제하자고 몇 번이나 말한 것도 하비의 심중을 매섭게 뒤흔들었다.
“그럼, 넣지.”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빅터가 흉흉하게 커진 제 것을 하비의 열린 구멍 안으로 천천히 밀어넣었다. 크기가 보통이 아닌만큼 들어갈 때는 힘겹던 것이 반 이상을 넘어가자 조금 나았다. 구멍 안이 온통 액으로 미끈댔다. 그래도 하비는 버거워했다.
퍼억! 퍽!
쳐올릴 때 하비는 찡그린 얼굴로 감내했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열기가 드넓은 어깨로, 두터운 허리로, 허벅지로 내려가는 동안 하비는 시선 한 번 피하지 않고 빅터를 올려 보았다.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담으려고 하는 것처럼.
빅터의 턱 끝에 맺힌 땀이 얼굴에 떨어졌을 때도,
박으면서 노는 손으로 유륜을 문지를 때도,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 허리를 잡고 더욱 거세게 쑤실 때조차,
움찔하며 눈가를 일그러뜨리는 일은 있어도 단 한 번도 눈 돌리지 않았다. 정직하고 강한 눈빛이었다.
빅터는 그 올곧은 밤색 눈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충동을 이겨냈다. 순수한 것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응?'
그러다 빅터가 마차벽을 짚고 있는 하비의 손을 보았다.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내밀다가도 뒤로 빼곤 했다.
설마 만지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건가.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빅터는 주춤대는 손짓을 모르는 척, 방향을 알려주었다. 아래는 끝까지 박은 상태에서 빅터는 하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키득 웃었다. 하비의 머리칼에 흡수된 땀이 시원하게 빅터의 이마를 눌렀다.
“팔로 내 몸을 감아. 그래야 덜 밀려나니까.”
하비는 그제야 안심하고 빅터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제법 강한 힘이 빅터의 목과 어깨를 짓눌렀다. 하비 스터스가 처음으로 기댄 온전한 무게였다.
묘한 감동마저 느끼며 빅터는 그를 안았다. 하비 스터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단하지만 다정하고, 마음을 준 상대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돌려 주는 사람.
‘그래서 뭐.’
안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반발했지만, 빅터는 가슴 깊은 곳이 따끔거렸다.
열어서는 안 될 것을 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밤 속의 밤. 달빛이 약해진 어두운 밤 속에 마차의 그림자가 또 다른 밤을 만들어 냈다. 안전하고 아늑하지만, 기만이 가득한 그들의 밤이었다.
-- 완벽한 거짓 --
스터스 가의 대문 앞에 달린 가스등이 점멸했다.그대로 마차에 태워져 기절하다시피 자던 하비는 집으로 올 때쯤에 스스로 깨어났다.
따각대는 말발굽 소리가 일정하게 하비의 귓전을 울리고, 시선이 느껴졌다. 가물대는 눈을 치켜 뜨니 그를 지켜보던 빅터가 피식 웃었다.
“귀소 본능이라도 있는 건가. 정확하군.”
깨어난 하비가 눈을 깜박이며 빅터를 물끄러미 보았다. 다감한 목소리가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밤그늘이 내려앉은 빅터의 얼굴이 보자마자 하비는 습관처럼 주춤거렸다. 여태까지는 깨고 나면 차갑고 비정한 얼굴만 보였다. 차라리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같은, 그런 싸늘한 눈길을 주었다.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자는 것도 지켜본 모양이었다. 저런 애정 가득한 에메랄드빛 눈으로 말이다.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하비는 복잡한 속을 감추고 내색 않은 채 말했다. 술기운에 속이 거북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집 근처에선 잠이 깨더군.”
“좋은 습관이야.”
“좋은 습관?”
무심결에 되물은 하비에게 빅터가 웃음을 보였다. 하비는 왠지 뒷골이 서늘했다.
“술에 강한 걸 보니 앞으로 술자리는 걱정 안해도 되겠어.”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려다 하비는 마차가 멈춰서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밖을 보았다.
“주인님?!”
집사는 밖에서 잠도 안 자고 하비를 기다리고 있다가 인기척에 얼른 문 밖을 뛰쳐 나왔다.
“오셨군요!”
반색하던 집사의 얼굴에 점점 먹구름이 끼었다.
“주인님, 또 늦으셨네…요…? 바르뎀 경? 같이 오신 겁니까?”
당연한 듯 하비에게 붙어 있는 빅터를 그가 묘한 얼굴로 보았다. 빅터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같이 온 게 이상한가.”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여전히 빅터가 마음에 안 들던 집사는 ‘돌아가라’는 말로 인사 겸 축객령을 대신 했다. 빅터는 언짢아 하다가 이내 하비에게 마지막 밤인사를 남겼다.
“다른 외교관들에겐 잘 말해뒀으니까 걱정 말고. 그럼 내일 로투스 경의 저택에 가기 전에 만나기로 하지. 함.께. 가.야. 하니까.”
빅터는 유독 ‘함께 간다’ 는 것을 집사 앞에서 강조했다. 자연스레 집사의 미간이 구겨졌다. 막 깨어나서 두 사람의 신경전을 신경쓰지 못하고 있던 하비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빅터에게 맞인사를 했다.
“아아. 조심히 돌아가.”
이긴 것 같이 으스대는 얼굴로 집사를 노려본 빅터가 마차문을 닫도록 명했다.
“그러지.”
빅터가 돌아가는 것을 한참이나 말없이 지켜보는 하비에게 집사가 구시렁댔다.
“언제봐도 기분 나쁜 사람이라니까요. 괜찮으십니까? 또 안 좋은 소릴 들은 건 아니시겠지요?”
빅터를 만나고 오면 꼭 몸이 좋지 않거나 안색이 나빴던 것을 기억하고 집사가 캐물었다. 하비는 난감한 얼굴로 빅터를 두둔했다.
“괜찮아. 그리고 바르뎀 경은 자네 생각만큼 그리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 나무라지 말게.”
하비를 뒤따라가던 집사가 볼멘 소리로 말했다.
“설마, 지금 바르뎀 경 편을 드시는 겁니까? 예?”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당황한 하비가 대꾸했다. 목 아래까지 붉은 기운이 퍼져 있었다.
“그런 건 아니야. 단지 사람을 제대로 보란 말을 하고 싶을 뿐이지.”
“흐음…….”
의심스럽게 바라본 집사가 오늘도 늙은 회계사를 보러 가는 하비의 등을 향해 대놓고 한숨지었다. 군식구가 늘어서 식비나 각종 생활비가 늘었다. 심지어 아픈 그를 위해 하비가 주치의까지 가까이 두고 있어서 의료비로 나가는 비용도 보통이 아니었다.
말은 안하고 있지만 하비가 벌어오는 공무원의 월급으로는 이 큰 저택을 운영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하비는 남들이 다 하는 투자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고, 때문에 큰 수입거리가 없었다. 작은 우편 사업에 투자를 한 적은 있지만 그것도 소소했다. 하비의 투자 원칙은 공공 사업이 아닌 이상 투기성 강한 투자에 일부러 손을 대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그래서 큰 돈을 벌기가 힘들었다.
‘언젠가는 말씀을 드려야 할텐데.’
걱정하던 집사는 새하얗게 굳은 하비를 보고 우뚝 멈춰섰다.
하비는 이중으로 해둔 비밀 방문을 열어둔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집사가 조심스럽게 하비를 불렀다.
“주인님?”
“…당장 의사 불러.”
그제야 놀라서 집사가 방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늙은 회계사가 입가에 거품을 물고 축 늘어져 있었다.
당장 침대에 엎어져 있는 그를 뒤집어서 심장박동과 호흡을 확인한 집사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하비는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가 멍한 눈으로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죽은 회계사를 보았다. 이 가엾은 자를 고문했던 자와 희희낙락 밤을 즐기고 온 날, 하필….
죄책감으로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갑작스런 회계사의 사망. 이게 정말 우연일까. 설마, 빅터가 개입된 건 아닐까.
상상만으로도 하비의 심장이 불온하게 두근거렸다. 몰려드는 두려운 상상을 간신히 밀어내고 하비가 핏발 선 눈으로 크게 소리쳤다.
“의사 불러, 빨리!”
집사가 허겁지겁 근처 주치의를 데리러 나갔다. 시체 특유의 썩은 내가 가득한 방 안에서 하비는 벽에 기대었다가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늙은 회계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바짝 마른 육체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헛웃음이 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자에게 빅터에 대한 이야기를 은근히 했다.
하비는 주저 앉아 이마를 양 손으로 감싸며 괴로워했다.
사람을 제대로 보라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자를? 그런 남자에게 고백 받았다고 들떠선 고민했던 것이 뼈아픈 현실로 다가왔다.
이런 결과가 있을 줄 정말 몰랐나. 이성이 배제된 곳에 혼란의 폭풍이 찾아들고, 그 뒤로는 분노가 잘게 일었다. 사람 마음을 쥐고 흔들어서 정신 못 차리게 한 사이 이런 일을 벌이다니.
불현듯 하비는 머리를 털고 눈을 빛냈다. 이럴수록 더욱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빅터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그래야 한다.
'애초에 그럴 리 없어. 이성적으로 생각해. 조금 전까지 나와 함께 있었고, 굳이 이 분을 죽일 이유가 없잖아.'
몸이 안 좋은데다 내버려둬도 알아서 죽을텐데, 뭣 하러 하비의 저택까지 일부러 잠입해서 죽이는 수고를 할까. 말도 안 된다.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빅터가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그거면 됐어.'
그것만으로도 하비는 큰 위안을 얻었다. 비정상적으로 뜨겁게 부풀었던 가슴이 차차 가라앉았다.
아직 그를 미워할 이유가 하나밖에 없었다. 라힌 스터스의 일로 얽혔던 그 굴종의 시간들은 사과받았다.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여겼다.
다행이다. 하비가 시체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다른 것보다, 심지어 죽은 자보다 빅터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니.
하비는 한심함을 느끼며 자책했다. 이래서야 아버지와 똑같았다. 온갖 깨끗한 척은 다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다지도 이기적이다. 결국 자신의 감정이 우선인 것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자신을 부디 망자가 용서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다지 해준 것도 없이 보내야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이나마 좋은 시간을 보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비가 푸석한 모습으로 죽어 버린 늙은 회계사를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그 사이 집사가 허겁지겁 주치의를 데려왔다. 시체를 보고 놀란 주치의가 그를 살펴보는 동안, 하비가 신음을 뱉었다.
“윽…….”
느닷없이 손이 저릿하고 아파 와서 하비는 손목을 움켜쥐고 허리를 숙였다. 설상가상 숨도 쉬기가 힘들었다.
집사가 회계사의 시체를 두고 하비에게 다시 달려왔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난 괜찮으니 그 사람이나 살펴봐.”
죽은 걸 알면서도 하비는 주치의를 회계사에게 보냈다. 간단히 늙은 회계사의 상태를 살핀 의사는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죽었습니다. 경직 상태를 보니 2-3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사인은 노환과 상처로 인한 후유증으로 보입니다. 우선 산 사람부터 봅시다.”
역시 빅터가 한 짓이 아니었다. 망자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안도감이 섞여 한결 복잡해진 얼굴로 하비는 의사가 시키는대로 손을 내밀었다. 진지하게 하비의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의사가 진찰을 마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정밀하게 검사해 봐야 알겠지만,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걱정마세요.”
안심시키듯 말한 주치의가 무서운 얼굴로 돌변해 경고조로 덧붙였다.
“그래도 스터스 가 사람들 대대로 건강이 썩 좋지 않으니 조심하십시오. 라힌 스터스 의원님도 과도한 스트레스로 일찍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부디 몸조리 잘하십시오.”
사람들이 스터스 가가 교차로의 악마와 거래해서 인재는 많지만 수명이 짧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하비는 의사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또 다른 현실적인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누군가의 목숨이 하잘것없이 사그라든 밤, 빅터는 사용인들을 모두 떼어둔 후에야 어느 허름한 항구로 말을 타고 이동했다.
-실망시키지마.
언젠가 하비가 했던 말이 갈고리처럼 그의 목을 조였다. 처연한 하비의 목소리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때 그 얼굴과 목소리가 마치 애처롭게 매달리는 것처럼 빅터의 심장을 녹이려 하고 있었다.
그는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럴수록 하비의 목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여전히 강하긴 하지만, 하비 스터스는 나날이 여린 틈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라힌 스터스와 엮여 육체를 갈취하고 조롱하던 초창기가 더욱 단단했다. 자신의 밑에 깔려 그가 주는 쾌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비가 생각나자 빅터는 바로 아래가 묵직해졌다.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자조섞인 비웃음을 지은 빅터가 달리는 말을 더욱 재촉했다.
정박된 배들이 잔잔한 물결에 실려 삐걱대고 낡은 창고들이 곳곳에 보였다. 내일이면 출항할 큰 배도 있었는데, 얼기설기 돛대에 매달린 줄들이 달빛 아래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평화로운 새벽의 항구였다. 그 중 유독 큰 배에서 달을 구경하고 있던 한 남자가 빅터를 발견하곤 훌쩍 뛰어내렸다.
“늦었구나.”
빅터가 투레질 하는 말을 달래며 근처에 매어놓았다.
“일이 좀 있었어.”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사내는 하비와 비슷한 체격에 나이 들어 보이는 희끗희끗한 수염을 지닌 자였다. 드러난 굵은 팔뚝, 건장한 체격, 누가 봐도 뱃사람이었다.
중년의 사내가 씨익 웃으며 빅터를 반겼다.
“그 사이 잘 먹고 잘 지낸 것 같구나. 얼굴이 폈어.”
빅터가 냉소적으로 그의 말을 받아쳤다. 적개심이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영감보다야 오래 살아야지.”
빅터는 거대한 배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아무도 없는 항구였지만 주변을 경계했다. 중년 사내가 빅터의 대꾸에 한 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건방진 놈. 나 때문에 지금까지 목 붙이고 살아있는 주제에.”
중년 사내는 어린 날 그를 잡았던 임페르 해적단의 수뇌부이자 선장의 오른팔이었다. 어린 날의 빅터가 살려달라 애원하며 매달렸던 그 남자는 이제 반대로 빅터의 오른팔이 되어 거대한 해양 상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빅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건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그 망할 새끼들 일부러 처형할 구실 찾으려고 날 미끼로 삼은 것 빼고는.”
빅터에게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 첫 러트 사건을 일컫는 말이었다. 빅터는 노골적인 적의를 비쳤다. 그 사건은 중년 사내가 최종적으로 해적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남은 선장 파를 숙청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빅터는 당시 첫 러트를 희생해서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조건은 해적선에서의 완전 해방. 결과적으로 그 일은 돈을 벌어다 주는 똑똑한 인재로 해적선에서 활약하던 빅터가 온전히 구속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귀족 청년들이 알고 있는 빅터의 신화적인 이야기는 일부 조작되었다. 사실 그가 이끄는 상단은 소수의 임페르 해적들이 섞여 있었다.
현 상단의 대표적인 리더는 빅터지만 실무적인 부분은 중년 사내가 많은 부분 담당하고 있던 차였다.
임페르 해적단 사건의 피해자들인 빅터의 사용인들도 알고 있지만 실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그러다 보니 상단 일로 마주칠 때 저택의 사용인들과 임페르 해적 출신인 사람들과 시비가 붙는 일도 종종 있었다.
중년 사내가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뱃사나이는 작은 일로 구시렁대지 않는 법이지.”
빅터가 짧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그 날의 고통을 절대 잊지 않았다.
“그 일이 작은 일이라고? 영감이 직접 당해보지 그랬어.”
“내가 당하는 건 언제나 열외지.”
빅터는 느긋하게 말하는 중년 사내를 노려보았다. 비겁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근데 중요한 거라도 놔두고 왔나? 안절부절 못하는 게 너답지 않은데.”
빅터가 멈칫하다가 유연하게 받아쳤다.
“내가? 설마.”
“그래. 네놈한테 제일 중한 건 돈이지. 그것 말고 뭐가 있어. 누가 돈으로 사기라도 쳤냐? 어떤 간 큰 놈이?”
강한 달빛이 배 그림자에 숨은 빅터를 비추었고 화려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큰 키에 넓은 어깨에 달빛이 부서져 산산이 사라졌다. 높고 긴 코 아래 매력적인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
“그런 놈이 있었으면 애초에 산 채로 찢고 살조각 남기지 않고 갈아 버렸겠지.”
빅터의 금발이 달빛과 합쳐져 지옥에서 막 기어올라온 악마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매혹으로 낚아채놓고 그대로 씹어 삼킬 것 같은 잔혹함은 여전했다. 그에게선 언제나 피비린내가 났다.
중년 사내가 킬킬 음험하게 웃었다.
“그럼. 누가 키웠는데.”
“사기치지마. 나는 나 혼자 컸으니까.”
장난스럽던 태도를 바꾼 중년 사내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복수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 그렇게 소원이라더니.”
빅터는 동요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언제부터 내 일에 관심 뒀다고.”
“나도 늙으니 오지랖이 넓어졌거든. 말 돌리지 말고, 스터스 가 골통은 제대로 족치고 있는 거겠지? 공개 열애라는 황당한 선택지도 그 복수의 연장선이냐?”
역시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난 유명한 일이 되긴 했지만, 바다 위를 떠돌아 다니느라 바빴을 텐데도 어지간한 소식은 그의 수중에 있었다.
빅터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런 셈이지.”
“대답이 미적지근한 게, 수상한데.”
“혼자 소설 쓰는 걸 보니 영감도 갈 때가 다 되었나봐. 미리 명복을 빌어주지. 그간 정을 봐서 뒈지면 바다에 던져줄게.”
“오, 그것 참 감사한 이야기군.”
살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주거니받거니 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마라. 이도 저도 아닌게 젤 위험한 거, 네 놈이 제일 잘 알잖아.”
“돈줄 끊길까 봐 초조한 건 알겠지만, 어울리지 않는 충고하지마.”
빅터가 비아냥댔지만 그는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피에는 피바람, 칼침 한 방엔 칼난도질, 주먹엔 거기에 더해서 발길질. 잊지마.”
돈 단위가 페르에서 기난으로 바뀔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악명을 떨치던 전설적인 임페르 해적단도 어느샌가 사라졌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많이 지워졌다.
그런데도 빅터는 이 중년 사내를 보고 있자면 아직까지 임페르 해적단의 까만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해적질 그만둔지 오래됐으면서 그 망할 낡은 지침은 아직까지 건재한 건가?”
“당연하지. 우리 상단의 최우선 지침인데. 나는 상단의 최대 주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만 않으면 돼. 어릴 때나 지금이나 믿고 있는 건 돈냄새 잘맡는 네 코와 무자비할 정도로 냉정한 판단력이니까.”
빅터는 감정이 없는 눈으로 중년 남자를 마주보았다.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공생 관계로 지금껏 이어져 온, 악연이자 필연이었다.
“특이사항 없으면 이만.”
미련 없이 가려 하자 중년 사내가 다시 빅터를 붙들었다.
“참, 신생 해적단 하나가 설치고 다니던데. 멀리서 온 놈들 같고, 하는 짓이 우리보다 더해.”
“임페르 해적단보다 더한 해적단이 있을 수 있나? 방해될 정도면 대충 치워.”
중년 사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 깜냥은 안 되어 보여서 일단은 두고 보는 중.”
빅터는 순간 하비가 고민하던 것이 떠올랐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갔다.
“그 해적놈들, 확실히 처리 가능해?”
“왜. 앞으로 할 일에 방해가 되나?”
차마 하비에게 필요한 일이란 말은 나가지 않았다. 사실 빅터는 왜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에 나서는지 알 수 없었다. 더욱이 하비 스터스의 일 아닌가.
결국 핑계댈 것이 없던 그가 얼버무렸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가 친근한 손길로 빅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년일때와 확연히 다른 단단한 골격이 그의 손 아래 느껴졌다.
“뭐 아무튼. 복수도 칼날과 같아서 낡으면 무뎌지기도 하는 법이지. 예리하게 계속 갈지 않으면 자칫 쥐고 있으니 못한 게 된다고.”
그 손을 벌레 치우듯 툭 털어내며 빅터가 사납게 입가를 올렸다. 조금 자란 금발 아래 녹색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내 칼은 충분히 날카롭고, 심장에 박을 적시만 찾고 있었어. 곧 때가 올거야.”
빅터가 먼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하비가 자신을 믿고 있다. 점점 마음을 열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지금쯤 그는 늙은 회계사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진 채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하비가 자신을 침실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품이라 느낄 때 실행할 것이다.
빅터는 결의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스터스 경이 날 가장 믿을 때 꽂아줘야지.”
더 볼 일이 없는 듯 하자 빅터는 바로 항구를 떠났다. 타고 온 말 등에 훌쩍 올라타 떠나는 모습 뒤로 먼지가 작게 일었다.
그가 떠난 뒤 중년 사내는 피식 웃었다.
“어린 놈.”
빅터는 하비의 이름에 담을 때 자신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듯 했다.
다시 배 위로 올라간 중년 사내가 달빛을 보며 갑판에 길게 누웠다. 어설픈 고뇌와 낡아빠진 증오, 그보다 더 큰 애정이 스쳐 지나갔던 걸 왜 모를까.
문득 그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변명 한 번 요란하네.”
반 로투스 경의 생일에는 많은 귀족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하비와 빅터의 관계에 호기심을 보내는 귀족들도 많았다.
“그래서, 두 분이 어떻게 만났다구요?”
반짝이는 여러 쌍의 눈이 모였다. 기시감을 느끼며 하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외교관의 모임에서도 같은 상황을 겪었던 것 같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원흉인 빅터를 찾았지만 그는 인기인임을 반증하듯 한 자리에 있지를 못 했다.
물론 하비도 그 못지않은 관심을 받고 있었지만 모두의 화제가 한 곳에 귀결된 만큼 불편한 가시방석이었다. 그 사이 빅터는 요리조리 빠져 나가고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일부러 곤란한 표정을 띄운 하비가 귀족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관심을 끊어 냈다.
“사적인 질문은 다음에 해주십시오. 오늘은 로투스 경의 생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근데 오늘의 주인공도 어딜 갔는지 통 보이지 않습니다?”
“아까 전에 바르뎀 경과 함께 야외로 나가던걸요?”
어디선가 날아온 말에 하비가 지긋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함께 말입니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반은 전부터 빅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은밀하게 나누는 대화란 것이 좋을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그런데 하비의 표정을 뭐라 해석한건지 한 귀족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벌써 경계하시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바르뎀 경과 로투스 경은 썩 어울리지 않는 걸요.”
“설마 스터스 경을 두고 바르뎀 경이 바람이라도 피울까.”
“그 스터스 경이 질투를 다 하시고. 정말 사랑이란 건 놀랍다니까요?”
놀라운 건 그 말도 안되는 가정을 하는 당신 머리요.
이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하비는 초유의 인내심으로 내리눌렀다. 귀족들끼리 신이 나서 나누는 잡담에 하비의 얼굴은 반비례하여 찌그러졌다. 억측이 난무한 이 자리에서 한시라도 빨리 뜨고 싶었다.
‘둘이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하비가 모두의 관심을 온 몸으로 맞고 있는 동안 빅터는 이 파티의 주인공인 반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야밤의 풀벌레가 찌르륵 울음을 울며 뛰어다니고, 환히 설치된 등 아래 아름다운 조경 속 테이블에서 마주앉아 있었다.
반이 공손한 태도로 빅터에게 포도주를 올렸다. 같은 나이지만 이미 상하 구도가 확립된 모양새였다. 맑은 유리 부딪치는 소리가 정원 속에서 울렸다.
귀한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피워무는 빅터에게 반은 알게 모르게 노려보았다. 태도는 순순했지만 말투에는 순수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나에게 오랜 친구를 배신하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놓고, 이제 와서 교제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바르뎀 경.”
그 동안 반은 빅터의 명으로 하비와 관련된 것들을 빠짐없이 넘겼다. 그 동안 반은 빅터의 명으로 하비와 관련된 것들을 빠짐없이 넘겼다. 넘긴 후에는 늘 죄책감에 시달려 왔는데, 정작 일을 시킨 장본인은 뒤에서 하비와 몰래 관계를 하고 있었다.
반은 빅터가 하비를 진심으로 경멸하는 줄 알았다. 약간은 동조하는 마음으로 과하게 정보를 퍼나르는데 열을 올렸던 자신이 추잡하게 느껴졌다.
“흐음.”
빅터는 조용히 화를 내는 반을 물끄러미 보았다. 감정 하나 없는 소름 끼치는 눈빛이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반은 안절부절못하며 처음의 패기마저 잃어갔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은은하게 반을 쥐고 강압적으로 내리눌렀다. 드디어 빅터의 입술이 열렸다.
“지금 내게 따지는 건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면서도 반은 귀족의 자존감을 내세웠다.
“따지다니요.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내게 악역을 자처하게 해놓고 뒤에서 정작 스터스 경과 개인적인 교분을 가진 연유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나를 농락하기 위함입니까?”
절실하게 물은 것은 비웃음과 냉소와 함께 되돌아왔다. 흐릿한 담배 연기가 반을 휘감았다.
“로투스 경은 본인이 농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 생각하나?”
역으로 돌아온 질문에 반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잔인한 말이었다. 차마 반박하지도 못하고 반은 테이블 아래 주먹만 움켜쥐었다.
로투스 가는 이미 빅터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빅터가 귀국하자마자 손댄 것이 바로 로투스 가의 존망이었다. 귀족들의 정보가 모이는 중심가. 그걸 장악해야 온전히 올란 시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로투스 가는 빅터의 정보청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고, 반 로투스의 늙은 아버지는 이것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그 반동으로 더욱 스터스 가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죽은 라힌 스터스라면 이처럼 쉽게 그 새파란 자식에게 가문을 넘기지 않았을 테지! 그 놈의 아들인 하비 스터스 조차 빅터 그 놈에게 뻣뻣한 태도로 굴지 않느냐. 차라리 스터스 경처럼 몸으로 꼬여서 빅터 바르뎀 그 놈을 손에 쥐든지! 다 능력 없는 네놈 때문에…! 쿨럭, 쿨럭….]
몸도 좋지 않아 병상에 누워있는 그는 시종일관 분노하고, 아들인 반을 반푼이 취급했다. 어제도 아버지가 던진 물건에 머리를 맞았다. 반은 생각만 해도 맞은 부위가 아파 와서 아직도 부어 있는 관자놀이 쪽을 어루만졌다.
빅터는 테이블까지 뛰어 오른 작은 녹색 풀벌레를 가만히 보다 담뱃대로 치워 버렸다.
“여태까지 군말없이 동조해놓고 왜 징징대는 건지 모르겠군.”
반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빅터가 그의 속을 거칠게 후벼팠다. 조각처럼 빚은 듯한 얼굴이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솔직히 말해서 로투스 경도 스터스 경을 무너뜨리는 게 기분 좋지 않았나?”
“무슨 소린지.”
움찔했지만 반은 열성적으로 잡아뗐다. 뒤로 다시 물러난 빅터가 입에 머금은 연기를 그의 얼굴로 뿜었다. 미간을 구기면서도 담배 연기를 미처 피하지 못한 반에게 빅터는 쐐기를 박았다.
“이제와서 아닌 척 하기에는 내가 말하지 않은 정보까지 잘도 넘겨주던데. 나는 스터스 경의 저택과 그 측근까지 모두 살피라곤 하지 않았거든.”
나스타가 얻은 정보, 즉 늙은 회계사의 소식도 사실 로투스 가, 정확히는 반 로투스의 손에서 흘러나온 정보였다.
반이 더듬대며 빅터의 일침에 부들거리기만 했다. 할 말이 없었다.
“그, 그건……!”
빅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 로투스가 그나마 하비가 끝까지 믿고 있는 친구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의 친한 측근을 노려 접근한 것이긴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빅터는 입이 썼다.
아무것도 모르고 믿고 있을 하비에게 조금, 연민이 들었다. 하비는 반이 가진 어두운 감정이 이 정도일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반면 빅터는 반 로투스가 왜 이러는지, 얼마나 큰 오래 묵은 원망이 숨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찌보면 반이나 자신이나 크게 다를 것 없는 비슷한 처지라, 빅터는 누구보다 반의 심정을 이해했다. 물론 이해와 용납은 다른 문제다.
‘이런 열등감에 찌든 놈 생일이나 챙겨주겠다고 그리 애를 쓰더니.’
속으로 혀를 찬 빅터는 반이 따라준 포도주를 옆으로 버렸다. 아까 나가떨어진 풀벌레가 포도주를 맞아 붉은 강인 양 떠내려갔다. 하비에게는 벌레를 꼬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빈 잔에 새로운 포도주를 채우며 빅터가 비꼬았다.
“스터스 경이 가엾군 그래. 경을 친구랍시고 곁에 두고 있었다니.”
하비를 두둔하는 빅터의 태도에 위기 의식을 느낀 반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하비에게 알려질 것이 몹시 두려웠다. 그도 하비가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내가 했던 짓을 하비에게 알리면, 나도 알릴 겁니다. 바르뎀 경이 시켜서 한 거라고.”
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하비’ 라는 이름이 고까웠다. 이런 지경이 되어서도 ‘좋은 친구’ 라는 타이틀은 버리기 싫다는 속내였다. 빅터의 속이 차갑게 들끓었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옅은 살기를 흘렸다.
“로투스 가가 누가 시킨다고 할 자존심 없는 가문인지 미처 몰랐는데.”
반이 벌떡 일어나며 빅터의 손에 들려 있던 담뱃대 끝을 꽉 쥐었다. 핏발 선 눈으로 반이 경고했다.
“우리 가문을 함부로 모욕하면 아무리 경이라도 용서 못해.”
속내를 드러낸 개가 악취를 뿜었다. 로투스 경의 알파 페로몬은 생선 비린내가 났다. 바다에서 자라온 빅터조차 반갑지 않은 불쾌한 알파 냄새였다. 물론 오메가가 맡으면 바닷가의 쾌적한 향일지도 모른다.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반이 움켜쥔 담뱃대도 옆으로 휙 버렸다. 더럽다는 듯한 몸짓에 반은 굴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터스 경에 대한 뒷조사는 이제 중단해. 차후 로투스 가에서 계속 그 뒤를 쫓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 오면 두고 보지 않을 거야.”
저 멀리서 하비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도 하비 특유의 시원한 페로몬이 코끝을 스쳤다. 이에 빅터가 느긋하게 일어나더니 악귀 같은 얼굴인 반에게 충고했다.
“열등감은 그쯤하면 묻어두고 예전처럼 좋은 친구로 지내. 그게 자네 신상에 좋을 테니까.”
빅터는 분노하는 반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낮춰 속삭였다.
“아, 믿었던 친구의 배신감에 괴로워하는 걸 내가 위로해 주는 좋은 전개도 있겠군.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말은 그리해도 빅터는 하비가 다른 사람 때문에 마음 쓰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하비를 심란하게 하고 마음 한켠을 차지하는 건 빅터 바르뎀, 자신이다. 다른 자가 끼어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늙은 회계사든, 친구인 반 로투스 경이든, 심지어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일지라도.
하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넘실대며 부닥치는 알파끼리의 페로몬에 미간을 찌푸렸다.
로투스 가의 너른 정원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 처박혀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다. 혹시 사람들의 말대로 정말로 두 사람이…?
“여기서 뭐 하는 거…?!”
빅터가 도착한 하비를 휙 끌어당기더니 목덜미에서 나는 페로몬을 마음껏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반의 비린내나는 페로몬을 맡았더니 이런 청량한 향이 절실했다.
하비는 불쾌한 것 같은 친구의 눈치를 보며 쩔쩔맸다. 벗어나려 했지만 빅터의 팔 힘이 너무 완강했다.
“뭐하는 거야.”
빅터는 이제 팔꿈치로 찍으려는 하비의 공격을 피했다. 마지막으로 더욱 깊이 목덜미에 코를 박고 하비의 페로몬을 맡았다. 직후 정말 하비의 공격이 먹히기 전에 빅터는 뒤로 물러나며 어깨를 으쓱했다.
“친한 친구끼리 이야기하라고. 나는 빠져줄 테니.”
빅터가 화창하게 웃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동시에 반에게 눈짓을 주어 하비에게 허튼 소리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반은 붉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자존심을 차리려고 해도 빅터가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저 우성 알파의 것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엄청난 굴종이었고, 자괴감이 드는 열세였다.
막상 하비는 그것조차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반은 빅터의 비호를 받는 하비마저 곱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빅터는 하비를 진정으로 신경쓰고 간혹 그에게 약한 모습마저 보였다. 소드 클럽에서 일어난 일을, 반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비에게 꼼짝 못하던 빅터의 모습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말이 옳아.’
같은 알파지만 하비처럼 몸을 팔아서라도 걸어 다니는 황금이자 최고의 영향권자인 빅터 바르뎀을 수중에 넣었어야 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하비의 성격에 자발적으로 빅터를 꾀었을 리 없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반은 사실마저 보려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왱왱거리는 벌건 말벌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빅터에게 가장 깊고 내밀한 ‘열등감’ 이라는 독을 들켜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비는 말없이 포도주만 연신 들이키는 반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래?”
“아무것도 아닐세.”
“어떤 이야기를 했든, 신경 꺼. 바르뎀 경이 사람 속을 긁는 데는 도가 텄거든.”
하비는 그의 화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치고 빠지기의 고수이며, 교묘하게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들 줄 아는 남자였다.
빅터가 사라진 곳을 보며 이를 가는 반을 보니 또 무언가 안 좋은 소리를 쏴붙여댄 것이 분명했다. 적에겐 몹시도 잔인한 인간이니 무슨 말을 해도 놀랍지 않았다.
그때 반이 하비를 노려보며 매섭게 말했다.
“같은 알파로서 자존심 상하지도 않나?”
깜짝 놀란 하비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복기하며 짧게 되물었다.
“뭐?”
“저런 밑바닥 출신의 상스러운 놈에게 깔리다니. 고작 ‘우성’ 이라는 이유로 굴복하고 있는 거냐고.”
하비는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진 친구를 멍하게 보았다. 여태껏 봐온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친구, 반 로투스 경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그는 빅터에게 받은 것을 하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대체 바르뎀 경이 뭐라고 했길래….’
하비도 금세 언짢아졌지만, 티 내는 대신 차분하게 반을 이성을 되돌리려 했다.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해. 그리고 자넨 몇 가지 잘못 알고 있어.”
하비는 담담하게 사실만을 꼽아서 반에게 들려 주었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다.
“밑바닥 상인 출신은 그의 할아버지 레토 바르뎀이었고, 바르뎀 경은 엄연히 귀족 가에서 태어난 진짜 귀족이야. 더욱이 내가 그에게 단지 ‘우성’ 이라는 이유로 굴복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은 핏물같이 흘러내린 포도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으며 물었다. 하비가 하는 말이 다 옳았다. 그래서 그를 더 분노케 했다.
하비 스터스는 언제나 맞는 말만 한다. 그게 청량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적을 만들기도 했다.
“설마, 바르뎀 경에게 정말 마음을 준 건가?”
저번에도 물었던 질문이었다. 하비는 반이 왜 그렇게 빅터와 자신의 관계에 열을 올리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최대한 진실되게 답변하려 애썼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도 혼란스러워. 그래도 정말 싫다면 이런 자리까지 함께 나오지는 않았겠지.”
각종 핑계를 대서라도 빠졌을 것이다. 귀찮은 질문들에게 둘러싸일 것 알면서도 나온 것이 하비의 진심이었다. 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빈틈을 파고들려 했다.
“정말 바르뎀 경에게 협박당하거나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단 말이야?”
그 동안은 협박과 강압으로 점철된 관계였다. 하지만 하비는 집요하게 묻는 친구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끝내 아니라고 부정할 수 밖에.
“설마. 그랬다면 지금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겠어?”
의심스러운 반의 눈빛을 겨우 넘긴 하비는 그 뒤로도 그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오늘따라 반이 평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불편하고, 거북했다.
‘설마, 바르뎀 경의 욕을 해서?’
자신을 낮잡아서 후려친 것보다 그게 더 불편하다니. 머리가 갈수록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허탈한 숨을 뱉으며 하비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기껏 도망친 자리가 빅터가 있는 곳이었다. 회의감이 들었다.
빅터는 하비를 발견하자마자 사람들을 헤치고 그를 끌고 왔다. 여전히 사람이 많았지만 일부를 물리친 뒤 빅터가 귀에 거의 닿도록 속삭였다.
“이야기는 잘 하고 왔나?”
빅터의 입술 감촉에 흠칫하던 것도 잠시, 빅터의 듣기 좋은 저음이 하비를 뭉근하게 감쌌다.
“그럭저럭.”
표정을 빠르게 살핀 빅터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워? 로투스 경이 이상한 소릴 한 건 아니겠지?”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음산하게 속삭였다. 하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로 하비가 조용히 말했다.
“개인적인 일 때문이야.”
사실 늙은 회계사의 장례 문제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시체가 썩고 있는데도 최대한 냄새가 나지 않게 염을 하고 특수한 조치를 해둔 게 다였다.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러주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입관비, 관을 드는 인건비 등등. 심지어 좋은 묫자리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래도 마음 같아선 좋은 곳에 비싼 향유를 넣어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집사의 말도 일리는 있지.’
그럴 돈이 스터스 가에 이제 없다는 단호한 집사의 말에 하비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주인님, 대체 저 자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입니까? 전대에 수고를 한 사람은 맞지만 ‘그 일’에 일조한…!]
[그 일?]
하비의 물음에 집사가 깜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 보니 회계사가 종종 쓰던 서랍이 열려 있었다.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집사는 서랍 쪽을 몸으로 슬쩍 가리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주인님, 뭐든 완벽하신 건 좋지만 이런 일에까지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나친 도덕적 결벽증이 가끔 현실 감각마저 상실한다는 것을. 이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스터스 가의 지나친 결벽과 하비 스스로의 성정이 뒤섞여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었다.
어디 말할 곳도 없어 마음이 답답하던 차였다.
“갑갑해 보이는데, 둘이서만 산책이라도 할까?”
눈치 빠른 빅터가 먼저 제안했다. 그는 한 쪽 눈을 찡긋하며 하비를 꾀었다. 사람들 틈에서 질문 공세에 시달리던 하비는 신호를 보고는 재빨리 동의했다.
빅터가 하비의 손을 잡고 마지막 질문자를 등지더니 그대로 뛰었다.
손을 뻗어 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비는 그저 다리를 놀렸다. 처음으로 느끼는 해방감과 쾌감이 마음을 바람처럼 거세게 때렸다. 달리면서 닥쳐오는 선선한 바람이 그의 가슴에도 스며들었다.
자유로운 냄새였다. 빅터를 닮은, 그런 자유분방하고 얽매이지 않은 푸릇한 향 말이다. 어릴 때 그를 처음 봤을 때도 어쩌면 이런 것에 끌렸을지도 몰랐다. 하비는 자꾸만 황당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헉, 헉…. 그만 뛰어도 될 것 같은…, 헉.”
어쩌다 보니 도망 온 모양새가 되었다. 달리던 도중 빅터의 손은 이미 떨어졌지만 아직 뜨거운 체온이 남아있는 듯 했다.
하비가 숨을 몰아쉬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웃음은 점점 커졌다. 마치 철부지 아이처럼 자리를 피해온 것이 우습기만 했다.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이렇게 달려본 적도 없는 것 같다.
하비가 웃는 얼굴을 빅터가 한참이나 말없이 보기만 했다. 넋이 나간 것처럼 맑게 번져나가는 환한 미소와 낮은 웃음소리를 보고, 들었다. 하비의 잘 정돈된 하얀 이목구비에 달빛이 걸려 아른댔다. 뚜렷한 검은 음영이 그의 얼굴 곳곳을 환하게 밝혔다.
‘아…….’
어디선가 찬란한 이명이 날아와 박혔다. 빅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아프게 찌르는 듯 하다가도,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울던 풀벌레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하비의 심장, 그가 내쉬는 숨소리, 잦아지는 작은 웃음, 표정들에 모든 것이 집중되었다.
빅터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길게 일렁였다.
‘내가 미친 건가.’
따라오던 풀벌레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하비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빅터에게선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느낀 하비가 돌아보자 빅터는 찬물 맞은 사람처럼, 혹은 두려움에 질린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은 뭐지?”
헛기침을 한 빅터가 허둥지둥 말했다.
“체력이 왜 이렇게 부실해졌어. 그 건방진 집사 놈이 제대로 식사도 챙기지 않는 건가?”
“모자랄 것 없이 늘 잘 챙기지만 내가 식욕이 통 없어서 안 먹지. 미안할 따름이야.”
빅터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여간 제 사람이라고 철벽같이 방어해 주는군. 그 정성으로 나도 챙겨주지 그래.”
이 자리에서 반 로투스의 행각을 까발려도 아마 하비는 반을 옹호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확실한 물증을 보기 전에는 믿지 않는다 하겠지. 빅터는 씁쓸하게 웃었다. 쓴 미소와 섭섭하다는 듯 들리는 말투에 하비는 당황했다.
“아직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언제쯤 익숙해 질건가?”
하비에게 평소처럼 말을 걸 때마다 찌르르 가슴 속이 울렸다. 철저히 기만하기 위해 꾸며낸 말과 행동에도, 하비는 솔직하게 반응했다. 지금도 그랬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정말 미안한 표정을 하고서 빅터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제대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빅터는 하비가 진솔하게 맞받아칠수록 마음 한 구석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시간을 좀 줘. 그리고 오늘은 심란한 일이 생겨서 더 집중이 안되었어.”
“무슨 심란한 일? 아아. 개인적인 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하비는 정면으로 마주치기로 했다.
“고맙고 미안했던 분 하나가 간밤에 돌아가셨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빅터는 모른 척 했다. 사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불안하게 수런댔다.
“그게 누군데?”
“경도 아는 사람.”
하비가 돌려 말하거나 피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공법이었다.
빅터는 그 고요하고 직설적으로 맞부딪쳐 오는 밤색 눈에 놀랐다.
“라힌 스터스 전 의원의 회계사이자 재정 담당이었던 분. 알지?”
“라힌 스터스 전 의원의 회계사이자 재정 담당이었던 분. 알지?”
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빅터는 심란한 얼굴로 기만을 숨겼다.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이 기묘한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바싹 마른 입을 열어 빅터가 간신히 놀람을 꾸며냈다.
“알아. 그 사람이 죽었다고? 왜?”
하비는 침묵했다.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혹여나 그가 관계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조차 지우면, 조금 더 의심 없이 빅터의 진심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길 바란다는 얼굴로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멀리서 서늘한 밤바람이 길게 불어왔다.
“혹시, 경이 죽인 건 아니겠지.”
나뭇잎끼리 부딪쳐서 나는 어지러운 소리가 청량하게 빅터의 귓전을 울렸다.
빅터는 바라보는 하비의 시선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밤색 눈동자에 갇혀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묘한 죄책감으로 답답함마저 들었다.
‘왜 이런 거냐고.’
빅터는 바짝바짝 목이 타고 기도가 열기로 타들어 갔다. 하지만 그는 애써 평소처럼 위장했다.
땀이 나는 손바닥을 주먹을 쥐어 감추고 빅터가 서운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럴 이유가 없는 걸 가장 잘 알텐데. 왜 내가 했다고 생각하지?”
거짓을 고할수록 심장은 더욱 아프게 조여왔다. 아픔은 점점 실체가 되어 빅터를 짓눌렀다.
하비의 눈빛이 기쁨으로 빛날수록 빅터는 더 괴로웠다. 배신했을 때 예상되는 하비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졌다. 고요한 밤색 눈이 분노로 일그러지고, 환하게 웃던 입매가 파들거렸다.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빅터는 온 몸을 타고 흐르는 핏줄이 한 올 한 올 분쇄되는 것 같았다.
‘왜 이런 기분이어야 하냐고…….’
크고 날카로운 가시가 심장 속으로 천천히 파고드는 느낌마저 들었다. 짧지만 간헐적으로 고통이 찾아왔다.
지독한 고통에 빅터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마치 커다란 고리에 속박된 것처럼, 하비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신체가 반응했다. 드디어 빅터는 이것이 정상적인 범주가 아니라 판단했다.
‘뭔가 이상한데.’
하비 스터스를 아프게 하는, 혹은 아프게 할 거짓과 기만을 뱉을 때마다 역으로 돌아와 제 심장을 찔러댔다.
빅터의 변화를 알지 못한 채 하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빅터는 아니었다. 묵은 가시처럼 걸려있던 의심이 걷히자 하비의 입가에 미소마저 감돌았다.
“다행이군. 나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 괜찮나?”
그제야 그의 안색을 발견한 하비가 당황해서 빅터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일시적인 것이었던 듯 금방 멀쩡해졌다. 빅터는 곧 괜찮아졌지만 하비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너무 기분 좋았다. 조금 더 기대고 싶은 충동을 버리고 빅터가 즉시 몸을 떼어냈다.
의지하다니. 그것도 하비 스터스에게. 방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정말, 뭔가가 이상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빅터가 머리를 휘저었다.
“아, 잠깐 어지럼증이 생겨서.”
하비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 것도 있었나?”
“그러게 소드클럽에서 작작하라니까.”
빅터가 구시렁댔다. 그러나 하비는 의외로 이런 데서는 계산이 냉정했다.
“아직 멀었어.”
정말로 안색이 나빠진 빅터가 질색했다.
“…설마 계속 불러내서 그 어지러운 체험을 매일 시킬 셈인가?”
“얼마간은.”
“왜? 당한 게 화가 나서?”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다른 이유가 있어.”
앞으로도 계속 두들겨 맞을 것을 생각하며 핼쑥해진 빅터가 좋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뭔데.”
하비가 망설였다. 즉답은 나오지 않고 어설픈 침묵만 이어졌다. 왠지 들어선 안 될 것 같았지만 빅터는 홀린 듯이 하비의 대답을 기다렸다.
달빛이 그림자를 거둬내고 있었다.나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하비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반듯하고 굴곡이 선명한 하비의 얼굴이 절반 정도 밝아졌을 때, 그제야 쑥스러워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그런 식으로라도 조금씩 비워야 진심을 다 할 수 있으니까.”
쿵.
내내 빅터의 심장에 불안하게 매달렸던 묵직한 추가 떨어졌다. 그건 빅터의 내면에 있던 하비 스터스에 대한 케케묵은 이미지였다. 해적선에서 끊임없이 혼자 불안에 떨며 만들어냈던, 빅터 혼자만의 하비 스터스 말이다.
빅터가 오랜 세월 이를 갈며 그렸던 위선적인 하비 스터스와 지금의 그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빅터의 혼란과 함께 한꺼번에 풀벌레가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하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방금 한 말이 추상적이거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하비는 조금 더 말을 이어나갔다.
빅터가 어떤 표정인지 알지 못한 채 하비가 하늘의 장막에 걸린 노란 달을 올려 보았다.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제대로 된 관계를 이어나가기 힘들잖아.”
빅터는 할 말을 잃고 하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속에 쌓였던 빅터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모조리 덜고 나서 진심으로 애정을 받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만큼 성실하고 진지하게 관계를 생각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비 스터스의 계산법은 스터스 가 특유의 결벽과 맞물려 더욱 엄격했다. 빅터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못 말리겠군.’
빅터는 내심 감탄하면서도 심란해졌다. 혼란이 폭풍처럼 그를 휘감았다. 하비 스터스는 알면 알수록 빅터가 상상했던 것 이상을 보여주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듯 계속 새로운 파격을 선사했다.
빅터가 살기 위해 치열했던 그 곳은 폭력과 거짓이 난무했다. 그 이후로도 그랬고, 무사히 돌아온 후에 만난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랬기에 하비의 계산법이 너무나 생소했다.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제대로 된 관계를 이어나가기 힘들잖아.]
어떻게 이토록 맹목적이고 일관되게 진실될 수 있을까. 하비는 어릴 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놀려주려고 일부러 아픈 척 했는데 오히려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었던, 면식 없는 아픈 자를 온 몸을 다해 돌보고 지키려던 올곧음은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전율이 올랐다. 동시에 자신에 대한 뼛속 깊은 혐오가 울컥 치솟았다.
‘하….’
그간 발악하듯 하비의 이중적인 가면을 벗겨내겠다며 온갖 굴종을 주었다. 정당한 복수라 되뇌며 하비를 파괴하려 했다. 누군가에게 향하는 감정조차 이토록 소중히 생각하는 이런 사람을 상대로 말이다.
어쩌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까. 하비와의 첫 단추를 섣불리 끼워버린 건 아니었나.
잠깐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빅터는 즉시 밀려오는 회한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스터스 경이 어떤 사람이든,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 죽음을 넘나들며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빅터의 심장은 이제 짜부라질 것처럼 아프게 조여왔다.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는 것처럼.
‘왜 자꾸 이런 기분이…….’
하비는 그의 속도 모르고 여전히 귓등을 붉힌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시간 동안 경이 하는 행동을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고.”
이제 본격적으로, 빅터를 제대로 보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빅터의 꾸준한 거짓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기뻐야 하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기쁘지 않았다. 지금처럼 하비를 계속 속일 수 있을까. 빅터는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어두워진 빅터의 얼굴을 오해한 하비가 위로하듯 말했다.
“검술 실력이 늘면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을 거야.”
“그걸 말이라고…!”
반발하며 번쩍 고개를 든 빅터는 농담을 하고 나서 미소 짓고 있는 하비를 보고 다시 침묵했다.
정말 머리 어딘가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오늘따라 하비가 이상할 정도로 환해 보였다. 그 뿐이랴. 그가 거짓을 일삼는 자신을 보며 웃으면 심장을 쥐어뜯기는 듯 고통이 일었다.
내가 정말 하비 스터스를 미워하는 것인가. 그를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빅터는 처음으로 깊은 의문이 들었다. 반드시 재고해봐야 할,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하비를 속여 마음을 얻은 뒤 그 마음을 꺾어 복수하려던 것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 하비가 팔을 잡으며 얼굴을 가까이 하자 그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안색이 너무 이상한데.”
하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일부러 다정하게 굴던 것도 그만두고, 빅터는 얼결에 그의 팔을 떨쳐내었다. 하비의 얼굴이 이상해진 것을 보고 빅터가 서둘러 말을 꾸며냈다.
“이제 환기는 좀 되었지? 슬슬 돌아갈 때가 된 것 같거든.”
때맞춰 멀리서 귀부인들이 몇몇 목소리를 높이며 오고 있었다. 하비는 빅터가 쳐낸 손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반딧불이 작은 날갯소리를 내며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반딧불로 반짝대는 시야 속에서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손을 쳐낸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하비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하비는 속으로 웃었다. 왠지 처음으로 빅터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이제 돌아가지.”
돌아가는 길이 하나라서 어쩔 수 없이 걸어오고 있던 귀부인들과 마주쳤다. 하비는 표정이 굳었지만 빅터는 살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하비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손해만 볼 것 같았다.
반면 하비의 얼굴이 경직된 건 요즘 귀부인들에게 붙들리면 빅터에 대한 것을 시시콜콜 늘어놔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비에게서 빅터와의 관계에 대한 뭔가를 집요하게 알아내려는 것처럼 굴었다.
정원 길 위로 가스등 여러 개가 환하게 빛나서 밤이라도 밝은 편이었다. 그래서 귀부인들의 손에 들린 작은 책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은 하비와 빅터를 보자 서둘러 책자를 등 뒤로 숨겼다.
“어머! 벌써 돌아오시는 길인가요?”
“두 분이 손 잡고 나가시길래 어딜 가시나 했더니, 멀리 가진 않으셨네요.”
“저, 정말요. 호호!”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 중 한 명은 등 뒤로 숨긴 책자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경사진 곳이라 책이 하비와 빅터가 서 있는 곳으로 굴렀다.
“앗!”
그녀가 깜짝 놀라 굴러가는 책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하비가 주워 주려 했지만 빅터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가볍게 떨어진 책을 주웠다. 귀부인은 빅터가 책 제목을 훑어보자 귀까지 붉어졌다.
“저……. 주워주셔서 감사해요. 이만 주시겠어요?”
빅터는 머뭇대는 귀부인에게 책을 선뜻 건네주었다. 흙먼지도 털어서 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처음 보는 책이라 학구심이 불타서 그만.”
“그럴 책이 아니라서요. 조금 부끄럽네요.”
손바닥으로 한 쪽 볼을 감싸고 귀부인이 얼굴을 붉혔다. 빅터가 피식 웃고는 덕담을 건넸다.
“요즘 유행하는 사조의 문학이군요. 좋은 책일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말씀 감사합니다.”
귀부인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허둥지둥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귀부인들도 슬금슬금 달아나듯 자리를 피했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던 하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책이길래 못 볼 책을 들켰다는 것처럼 구는 거지?”
생각보다 정확한 하비의 진단에 빅터가 속으로 조금 놀라면서 대답해 주었다.
“정확히 봤군. 못 볼 책이라.”
“뭔데 그래?”
빅터는 웃음을 참으며 궁금해하는 하비에게 적당한 진실을 알려주려 했다.
하지만 말을 하려 벌어졌던 입이 천천히 오므라들면서 하비의 얼굴을 무심코 뚫어져라 보았다. 이 와중에 의문으로 하비의 밤색 눈이 동그랗게 변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저 알파에 체격있는 자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다니.
‘또…….’
생각한 순간 빅터는 자신을 욕하며 엉뚱한 상념들을 날려보냈다.
아직 기다리고 있는 하비를 보며 헛기침을 하곤 빅터가 끊겼던 말을 이었다.
“알파와 알파의 결합을 좋아하는 귀부인들의 소소한 문학적 취미. 이 정도로 해둘까.”
요즘 유행하는 알파 대 알파 연인을 두고 귀부인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야한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건 암암리에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다. 유명한 알파 연인일수록 인기를 증명하듯 관련 책자가 많았다.
빅터가 문득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우리 것도 있겠지?”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하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알아들을 말을 해.”
“아, 몰라도 돼. 알아도 경의 정신 건강에는 득될 것이 없으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가 반을 발견하곤 한 손을 치켜들었다. 생일 파티의 주인공답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생일 선물은 마음에 들어한 눈치였던가.'
하비가 반에게 준 생일 선물은 황금 거북이였다. 오랜 우정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금색의 거북이가 흑단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아까 전 반과 미묘했던 분위기도 마음에 걸렸던 지라 하비는 반과 선물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탁!
그런데 얼굴이 단단히 굳어버린 빅터가 하비의 팔을 잡았다. 하비가 돌아보며 왜 그러냐는 눈길을 던지자 빅터는 멈칫했다.
반에 대한 것을 하비에게 알려주려고? 이제 와서? 대체 왜? 로투스 경의 말대로 제일 처음 사주한 사람은 빅터, 그 자신이다.
언뜻언뜻 비치는 죄책감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빅터가 가쁘게 진실 하나를 토해냈다.
“반 로투스 경을 너무 믿지마.”
갑자기 반에 대한 묘한 이야기가 나오자 하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빅터가 진지하게 말하며 녹색 눈을 일렁였다.
“경을 위해서 하는 소리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뭔가 말하려던 빅터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반 로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면 자신이 관여했다는 사실까지 함께 끌려 나온다.
하비에게 알려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그래서 끝까지 침묵하기로 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도 못한 채로.
-- 거짓의 대가 --
빅터에게 불려온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열어젖힌 탄탄한 가슴팍에 청진기를 대어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의 심장은 평균적인 속도로 뛰었다. 동양에서 배워온 맥을 짚는 방식으로도 어떠한 문제점 하나 짚어낼 수가 없었다.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옷을 여며 입으며 빅터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아무 문제 없는 건가…….”
“어떤 증상이셨습니까?”
빅터에게 벌써 이 증상이 시작된 지는 오래되었다. 반 로투스 경의 생일 무렵부터 시작된 증상은 백방으로 원인을 알려 해도 알 수가 없었다. 하비에게는 알리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가끔 심장이 무리하게 뛰어. 수백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도 잠깐이지만 느끼고 있고.”
의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예? 의원님은 우성 알파 아니십니까. 웬만한 질병 하나 없는 분이……. 그런 이상한 증세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넬 부른 거다. 명의라 하더니, 별 것 아닌가보군.”
도발적인 빅터의 말에 의사는 발끈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 최근에 각인을 하셨습니까?”
놀란 빅터가 기가 막힌 얼굴로 의사를 보았다.
“뭐? 만나는 오메가도 없는데 무슨 각인을 해. 말도 안되는 소리.”
알파라면 하나 있긴 하지만. 하비의 얼굴이 불쑥 떠올라 빅터는 떨떠름하게 말을 묻었다.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서 하신 거 아닐까요? 자꾸 심장이 문제라고 하시니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만.”
“말해봐.”
쭈뼛쭈뼛 빅터의 눈치를 보던 의사가 허락되자 두서없이 말했다.
“각인 중에서도 ’심장의 각인‘ 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유 없이 심장이 아프거나 어딘가가 쑤시는 건 분명 그에 따른 효과로……. 심리적으로 묶이는 각인인데 물론 흔한 일은 아닙니다. 이상한 건 발현 조건이 오메가여야 가능한…….”
턱을 매만지며 온갖 가설을 뱉던 의사는 빅터의 압도적인 페로몬에 파랗게 질렸다. 그도 알파라 페로몬에 민감한 편이었다. 빅터가 살벌하게 대꾸했다.
“헛소릴 계속하는 걸 보니 돈 받기가 싫은 모양이지?”
아니라며 펄쩍 뛰는 명의에게 작은 보석 몇 개를 쥐어 보냈더니 금방 헤벌쭉하여 떠나갔다.
“돈값도 못하는 놈.”
짜증이 난 빅터가 조금 더 자란 금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밖을 보았다. 헛소리도 유분수지, 알파인 하비와 무슨 각인을 한다고. 생각만 해도 오한이 들었다. 심장의 각인이 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거부감이 드는 한편, 빅터는 심장이 느릿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또인가…….‘
이따금 따뜻한 기류가 가슴 언저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하비를 생각하면 늘 이랬다.
몸도 좀 풀 겸 잡념을 없애려 정원으로 나서니 사용인들이 빙 모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있었다. 빅터가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또 모여서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 건지.’
빅터가 다가갔음에도 그들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모르는 듯 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느 멍청한 인간이 언제 마음을 깨달을지에 대한 내기. 흐악!”
신나게 답해주던 나스타가 빅터임을 깨닫고 뒤로 화들짝 물러났다. 다른 이들도 머쓱하게 빅터를 맞았다.
“주인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무뚝뚝하게 대꾸한 빅터가 그늘을 드리우며 그들의 위로 팔짱을 꼈다. 진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얼른 돌렸다.
“의사가 뭐라고 합니까?”
빅터가 지금 생각해도 어이 없는 듯 헛웃음만 지었다.
“헛소리나 지껄이다가 갔다. 돈 날렸어.”
불편한 얼굴로 빅터가 검지로 팔뚝을 일정하게 찍었다. 당연히 있을 수 없는 헛소리라 생각했기에 사용인들에게도 이야기 했다.
“심장의 각인이니 어쩌니, 말도 안되는 소릴 해대더군.”
진과 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빅터에게 물었다.
“심장의 각인?”
“그게 뭡니까?”
듣고 있던 나스타가 깔깔 웃었다. 그녀는 심장의 각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말도 안 돼! 스터스 가의 그 돌덩어리와 주인님이? 푸핫! 무슨 그런 돌덩어리 아까운 소리를. 악!”
돌덩어리란 하비를 일컫는 말이었다. 돌처럼 답답한 사람이라며 나스타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나스타. 왜 주인인 내가 아니라 스터스 경이 아깝다는 건지 한번 들어볼까.”
빅터에게 귀를 잡혀 매운 눈물을 쏙 빼고 있는 나스타를 대신해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레나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돈이야 물론 좀 없으시지만 벌면 되는 거고, 인망이나 품성이나 검술 실력으로 보나 스터스 경이 역시……. 헉!”
‘검술’은 요즘 빅터에게 있어 최대의 예민한 화두였기에 레나는 본인이 말해놓고 놀라 입을 가렸다. 레나가 빅터의 눈치를 보자 역시 빅터의 눈썹이 힘차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간 내가 할 일을 너무 안 주었나 본데. 잘 알았으니 다들 일어나. 일 재분배를 해주겠다.”
모두의 안색이 일제히 핼쑥해졌다. 작은 불만이 쏟아졌지만 빅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강행했다.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용인들을 보며 빅터가 한가한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 안은 잘 관리되어 여전히 푸릇하지만 밖은 벌써 낙엽이 져 얼룩덜룩한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소드 클럽에서 빅터가 하비에게 두들겨 맞지 않게 되기까지는 3달하고도 정확히 2주일이 더 걸렸다. 그 뒤로 하비의 검을 되받아 튕겨내기까지는 한 달이 더 소요되었다.
그 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다.
빅터가 하비의 검을 받은 것도 모자라 허공으로 높이 튕겨낸 날, 하비의 검이 바닥에 처박히고 빅터는 하비를 온 몸으로 껴안았다. 땀범벅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하비에게서는 청량한 페로몬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 귀족들의 야유도, 휘파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온전히 하비 스터스를 얻게 되었다. 남은 의심 하나 없이 믿어줄 것이다. 그런 환희가 온통 그를 희열로 들뜨게 했다.
[그렇게 좋나?]
하비가 희미하게 웃더니 막무가내로 끌어안은 빅터를 밀어내지 않고 손으로 허리를 잡았다. 빅터는 그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기뻐 날뛰고 있었다. 그간 겪었던 육체적 고통과 인내가 빅터의 마음을 쓰리게 저몄다. 일상 같은 근육통도 이제 안녕이다.
[당연하지. 이 지긋지긋한 짓도 이제 그만이니까.]
하비는 체격 차로 거의 눌리듯 강제로 안겼지만 아픈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그를 격려해줄 뿐이었다.
[고생했어.]
짧은 한마디가 빅터의 마음을 찌르르 울렸다. 그간의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원래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것은 빅터에게 제일 쉬운 일이었다. 하비 스터스만큼 얻기 어렵고 까다로운 자는 없었다. 그런 만큼 각별히 공을 들였다. 자신마저 속일 만큼 완벽한 거짓까지 구사하면서.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찜찜함은 대체 무엇일지.
빅터가 하비를 놓아주며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좀 믿는 건가?]
주변의 귀족들은 승부가 나자 뿔뿔이 흩어지고, 둘은 탈의실로 함께 가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하비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사실은 그 전부터도 믿고 있었어.]
빅터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우뚝 멈춰섰다.
[뭐?]
보다 말끔해진 얼굴로 하비가 얼어붙은 빅터를 향해 말갛게 웃었다.
[날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경 밖에 없을 거라면서.]
그건 하비를 가장 크게 흔들었던 말이었다. 오랜 시간 증오했든, 복수할 거라 이를 갈았든, 어쨌든 오랜 시간 누구보다 강렬하게 하비 스터스를 생각했던 사람은 빅터 뿐이었다. 그건 사실이다.
라힌 스터스에 대한 원망으로 아들인 자신을 괴롭게 했지만, 그 마음이 이제 돌이켜 보니 애증이었다는 고백도 하비를 흔들었다.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빅터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
빅터는 저도 모르게 더듬대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비의 진솔한 눈빛이 제게 향하자 속마음을 모두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그, 그랬지.]
하비는 피식 웃으며 수건을 다시 들더니 목 언저리도 꼼꼼하게 닦았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그 뒤로 빅터는 이성을 좀 잃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으로 접근 금지를 암묵적으로 쳐놓고는 하비와 탈의실 욕실에서 뒹굴었다.
쓸데없이 페로몬을 왜 이렇게 꺼내드냐는 하비의 질타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젖은 밤색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잡아당겨 입술을 먹듯 키스했다. 끈적한 땀은 이미 씻겨 내려갔고, 서로의 단단한 근육만 손바닥 아래 가득 만져졌다.
뜨겁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따갑게 빅터의 등을 때렸다. 수증기가 하얗게 솟았다.
천천히 입술을 내리면서 빅터는 하비의 하얀 목덜미를 보았다. 물고 싶다. 인내심이 금방 바닥났다. 하비의 살내음에 취해서 빅터는 결국 충동적, 혹은 본능적으로 그가 목덜미를 세게 물었다.
격통에 하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읏.]
빅터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문 자국을 보았다. 선명한 잇자국이 나 있었다. 꼭 오메가에게 각인을 하려다 만 것 같은 이상한 잇자국이었다. 빅터가 변명하듯 말하려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나도 모르게…….정말 미쳐가나.'
하비가 물린 곳을 만지작대더니 침묵하는 빅터를 마주보았다. 이내 그가 빅터를 조용히 끌어당겼다. 낮은 목소리로 하비가 말했다.
[괜찮아.]
맞닿은 탄탄한 가슴에서 살갗 위로 뛰는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그게 너무 다정해서, 빅터는 또 정신없이 하비를 취했다.
그 뒤로 빅터는 하비의 뒤로 쇠구슬을 넣으며 농락했던 그 장소에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관계를 맺었다.
“하아…….”
요즘 따라 한숨이 부쩍 늘었다. 멍하게 정원의 푸릇함을 바라보던 빅터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하비의 마음을 오롯이 얻어냈으니 이제 어떤 식으로 그의 마음을 진창에 처박을지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리 하면 하비는 아마 두 번 다시 일어나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썩 내키지 않았다. 자꾸만 주저했다. 그런 생각을 잠깐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을 죄 뽑히는 듯한 아픔이 찾아왔다.
‘지금도 그래.’
미간을 찡그리며 고통을 참은 빅터가 금방 원상 복귀되는 몸에 의문을 가졌다. 멀리서 데려온 명의라는 자가 아무렇게나 떠들었던 소리가 떠올랐지만, 머리를 휘휘 저어 몰아냈다.
차라리 신약을 만들어 냈던 그 돌팔이 의사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요즘 신약으로 얽히지 않아서인지 그를 더 볼 일이 없었다. 더욱이 그 의사는 휴가를 떠나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 채 훌쩍 떠난 것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빅터가 이를 갈았다. 이 상황에서도 하비가 ‘고생했다’며 등을 쓸어주던 감각만 생생했다. 빅터는 묘한 얼굴이 되어 턱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뭔가 당한 기분인데.”
그 사이 하비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이상하게 집사가 큰 마음 먹고 몰래 손댄 투자들이 다들 대박을 터뜨렸다. 하비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중을 나온 집사가 밝은 얼굴로 고했다.
“주인님! 성공입니다, 성공이에요!”
집사가 시험 삼아 작은 투자 몇 개를 해보겠다고 이야기한게 있었는데, 생각보다 빠른 성공이었다. 함께 축하해주면서 하비는 은근슬쩍 물었다.
“근데, 불법 투기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 하비는 늘 그것을 집사에게 강조했다.
“그럼, 정보는 대체 어디서……?”
“커피하우스에 들락거리다보니 자연스럽게 들리던걸요.”
수상한 점이 바로 그 점이었다. 하비는 더욱 의심스럽게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집사를 추궁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흘리는 정보 치고는 너무 정확해. 소문이 돌텐데 그러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집사는 그제야 관자놀이를 긁으며 진실을 말했다.
“그게…. 제가 신문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하던걸요.”
하비의 밤색 눈동자가 찌그러졌다.
“자네에게만 들리도록?”
하지만 집사는 제 이야기와 성공에 취해서 하비의 표정을 보지 못 했다.
“그렇다니까요. 작게 이야기해서 안 들리겠지 싶었는지 자기들끼리 어찌나 신나게 수다를 떠는지. 하지만 제가 다 듣고 있었습죠.”
집사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하비는 의심을 지우지 않았지만 집사의 기분을 굳이 망치고 싶지 않았다.
“운이 좋은 모양이군. 개인적으로 번 건 자네 거야. 이건 확실히 해두지.”
하비가 그리 말해도 충직한 스터스 가의 집사는 탈탈 털어서 저택 운영비로 쓸 예정이었다. 그저 주인의 칭찬을 들어 좋은 집사가 빙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하비는 기뻐하는 집사를 뒤로 하고 한숨 지었다. 정보의 출처가 누구인지 왠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 날, 하비는 퇴근 직후 바로 빅터의 집무실로 향했다. 여전히 퇴근은 커녕 밤을 샐 것 같은 기세로 일하는 빅터가 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하비는 익숙해진 집무실 책상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내 집사를 너무 바보 취급은 하지 마. 이러다 틀린 정보도 신봉하면서 믿을 기세니까.”
서류에 증빙 사인을 하고 있던 빅터가 고개를 잠깐 들었다가 숙였다.
“무슨 소리지?”
“경이잖나. 커피하우스에서 일부러 내 집사에게 투자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게.”
“아, 벌써 들켰나?”
빅터는 뻔뻔하게 웃더니 손을 뻗어 다 식은 커피를 홀짝댔다.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무릎을 잡았던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리고는 하비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됐으니 여기까지만 해. 내 집사에게 더 수작 부리면 다음엔 두고만 보지는 않을 테니까.”
빅터의 미간이 슬그머니 좁아졌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선의로 시작한 일로 하비가 경고하는 것보다 집사를 두둔하며 감싸고 도는 것이 더 불쾌했다. 그러다 보니 절로 불퉁한 말이 튀어나갔다.
“왜? 안전성 보장된 투자 목록만 말해주고 있었는데? 내 실력을 못 믿어?”
빅터의 못마땅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하비는 하고 싶었던 말이 목 아래로 쏙 들어갔다. 칭찬받고자 한 일인데 왜 힐난하냐는 듯한 억울함마저 느껴졌다. 확실히 고마운 일이긴 하다. 그래서 하비는 직설적인 화법은 접어두고 부드럽게 우회했다.
“경의 실력을 못 믿는 게 아니라…….”
하지만 말하다 말고 눈치를 보니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납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하비는 한숨 쉬며 솔직하게 말했다.
“궁핍한 재정에 도움을 주고 싶은 건 알겠지만 이래선 내 마음이 불편해.”
빅터가 종이를 뒤적거렸다. 그 손에 하비의 시선이 향했다. 서류를 절반 이상 가릴 정도로 빅터의 손이 유독 길고 단단했다.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고 말면 그 쪽 집사 얼굴은 훨씬 펼텐데 말이지.”
최근에도 저 손이 행한 많은 것들이 떠올라서 하비의 목이 붉어졌다. 그러나 슬쩍 다른 것을 보며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내가 갚을 수 있는 도움만 받겠어. 그 이상은 내 능력으로 역부족이니 받지 않을 생각이고.”
“안 갚아도 돼.”
하지만 하비는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빅터가 좋은 생각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잉크병에 펜을 꽂아둔 빅터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 신경쓰이면 다른 걸로 갚으면 어때?”
또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비가 맞은편에서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빅터가 저런 빙글대는 얼굴로 말할 때는 반드시 뭔가가 있었다.
“스터스 경의 시간.”
“…내……시간?”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하비가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래도 빅터는 꿋꿋했다.
“요즘 너무 바쁘잖아. 만나려면 대기 번호표라도 받아 적어야 할 처지라고.”
하비는 아직 쓰레기 섬으로 물리던 이로비나 섬을 매입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 다른 국가와 영해가 얽힌 곳이기도 해서 까다로웠다. 빅터의 경고대로 그 섬을 매입하려던 다른 곳과도 경쟁이 붙었다. 게다가 그 해역을 지나다니는 신생 해적단을 신경 쓰느라 몇 배로 고려할 것들이 생겼다.
‘그건 그렇다치고.’
더 문제인 건 빅터와 공식 연인이 된 하비에게 잘 보여 투자 정보를 얻으려 하는 자들도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사실 하비는 그런 자들을 피해 여기로 도망왔다. 너무 집요해서 외무부에 있으면 온갖 핑계를 대서 어떻게든 찾아왔다.
’이 곳은 이 철면피가 워낙 철벽 방어를 해서 오지 않고는 있지만.‘
하비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빅터의 집무실을 휘 둘러보며 대꾸했다.
“대체 누구 이야길 하는 거지? 지금도 내가 먼저 퇴근해서 경의 집무실에 와 있는데.”
빅터도 하비의 지적이 사실이기에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최근 일이 많은 건 하비도 마찬가지지만, 여러 가지를 겸하고 있는 빅터의 일이 훨씬 많았다. 체력이 괴물같은 우성 알파라 버티는 것이지, 보통의 베타나 오메가였다면 진즉에 나가떨어져 침상 신세였을 것이다.
창가로 쌀쌀한 바람이 들어왔다. 빅터는 활짝 열린 투명한 창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내 쪽 사정은 집 나간 가주가 돌아오면 조금 나아질거야. 망할 색골 영감이 그 지역 오메가들을 모두 임신시키고 올 기세라. 요새는 병이 나서 골골대고 있다고 하니 돌아오겠지.”
빅터는 본인 가문의 가주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평판과 폭언을 쏟아부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며 이를 가는 빅터를 하비가 물끄러미 보았다.
오늘의 마지막 햇살이 빅터의 옆얼굴로 쏟아졌다. 붉은 빛으로 얼룩진 얼굴 옆으로 긴 그림자가 졌다. 녹색 눈에 비친 석양이 보석처럼 빛났다. 언제 봐도 음영이 뚜렷한, 사내다우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때도...'
빅터가 관계 중에 알파임을 알면서도 무의식 중에 목을 문다거나, 마킹 혹은 각인을 하려고 했던 것은 하비도 알았다. 그래 놓고 스스로 놀란 빅터가 새삼스러웠다. 정신줄 놓을 정도로 빠져들었다는 것에 하비는 충만함을 느끼면서도 마음이 쓰렸다.
최근 빅터는 무심결에 행동해놓고 당황스러워 하는 일이 잦았다. 본능을 거스르고 같은 형질과 관계를 가지려니 당연했다.
오메가와 사귀었다면 이런 일은 없을 텐데. 하비는 가슴 안이 뜨겁게 선뜩했다.
그 때마다 하비는 당황한 빅터를 말없이 끌어당겼다. 혼란스러워 하는 빅터에게 '괜찮다' 고 말해주었다.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끝끝내 놓지 않는 빅터는 지금 어떤 심정일지 입맛이 썼다.
멀쩡한 척 하지만 하비는 자신이 이미 어린 시절 극심한 스터스 가 특유의 교육으로 어딘가가 망가진 지 오래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첫 러트를 지옥 속에서 치뤄낸 빅터도 마찬가지. 어쩌면 빅터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비는 가끔 생각했다. 이 관계는 어느 한 사람이 비틀린 과거에서 제대로 벗어난 순간, 깨어질 얇은 얼음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지금은 즐거우니까.'
하비가 무거운 마음을 떨쳐냈다. 일부러 가볍게 빅터가 잊고 있는 사실을 짚어주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가주가 병환으로 돌아오는 거면 할 일이 전혀 줄어들 것 같지 않은데?”
하비가 냉정한 현실을 꼬집자 빅터가 뼈아픈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하긴, 더 시키고도 남을 인간이지.”
남은 사람도 별로 없고 가세가 기울어 버린 스터스 가에 비해 바르뎀 가는 사람이 넘쳐나는 만큼 처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였다.
하비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빅터를 위로하는 겸 쓸쓸한 소회를 담아 말했다.
“그만큼 할 일이 많다는 건 가문이 부흥했다는 증거기도 하지. 물길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지 않겠나.”
빅터는 가슴이 뜨끔하여 하비의 표정을 살폈다. 티를 내고 있지는 않지만 아픈 기색이 보였다. 스터스 가를 인질 잡아 하비를 위협했던 건 어느 새 잊고, 현재도 하비를 속이고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
빅터는 꽤 진심이 되어 하비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니 모른 척 이번만 눈 감고 나한테서 투자 정보를 뜯어내라고. 그럼 스터스 가도 예전처럼 금방 돌아갈테니.”
빅터에게서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귀족들이 지척에 널렸다. 그러나 하비는 빅터의 바로 옆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위치가 되었음에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비가 조금 이상했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평소와 달리 말했다.
“예전처럼……. 그렇게 될까.”
이미 스터스 가는 이정표를 잃었다. 본래 가졌던 가문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빛이 바래었다. 타락한 것이다.
염소 수염 사내가 스터스 가의 과거 재무 상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가지고 온 것이 일주일 전쯤이었다. 과거의 단면을 안 순간, 하비는 다시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참담해졌다.
[여긴 어떻게……?]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하비의 정체를 직감했는지, 혹은 따로 알아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명확한 건 염소 수염 사내가 하비의 집무실로 직접 찾아와 알아본 내역을 제출했다는 것이었다.
석상처럼 굳은 하비의 얼굴을 보며 염소 수염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 동안 몰라 뵙고 무례하게 대했지 뭡니까, 스터스 경. 이제야 제대로 인사 올립니다.]
처음 한 번만 귀족을 향한 예를 갖춘 그가 짧은 수염을 긴장한 듯 잡아당겼다. 그리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하비에게 고했다. 보고서를 공손하게 올린 손길에 비해 말투는 거칠었다.
[귀족으로서 의뢰한 게 아니니 평소대로 대할 거야. 모, 목을 칠 거면 치든가.]
말은 대담하게 하고 있지만 내심 떨고 있다는 것이 다 보였다. 하비가 피식 웃었다.
[그럴 생각 없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텐데.]
잔뜩 긴장했다가 몸가짐을 재정비한 염소 수염이 다시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모두 거짓이야. 내역 전부, 다 조작된 거라니까?]
역시 그런 거였나. 하비는 잔잔히 침묵했다.
말이 없는 하비를 향해 염소 수염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스터스 가의 당시 재산은 다 불법 투기로 날려먹었더라고? 하필 꽝인 품목에 올인했나보던데.]
여기까지는 하비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뒤는 아니었다.
[그걸 전부 사회 환원으로 베푼 양 꾸며놨더라니까?]
하비의 얼굴에 더욱 낮은 그림자가 깔리고, 염소 수염은 비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있는 것들은 다 똑같아. 스터스 가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실망 가득한 얼굴로 염소 수염이 떠난 뒤, 하비는 그가 작성한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마음을 후벼파는 소리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각오한 일이잖아.‘
사람들은 진실을 알면 실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스터스 가는 투명한 관리를 위해 대대로 저택의 모든 지출비와 수익을 내부에서 상세히 기록해 왔다. 가주 개인의 씀씀이까지도. 하비가 들고 있는 재무 관련 보고서는 현 집사의 아버지인 윗대 집사가 작성한 것으로, 당시 스터스 가의 모든 재무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뭉텅이로 돈이 나간 건 임페르 해적단 사건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투자를 잘못하여 상당수의 돈을 날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 돈은 어디서 들어온 거지? 설마.’
투자로 돈을 날린 직후에 갑자기 들어온 수익이 있었다. 해적단의 사건 직전에 또 하나, 알 수 없는 출처에서 큰 돈이 들어온 것이다.
하비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이 돈이 아마, 시재정에서 빼돌린 돈일 것이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내부인이자 가업을 물려 받은 집사가 알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그래서 하비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사를 추궁했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전부 솔직히 말해. 이 돈은 어디서 온 건지, 들은 게 있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집사에게 하비가 한숨 짓듯 말했다. 역시 집사는 아는 듯 했다.
[시 재정에서 몰래 빼돌린 거겠지.]
집사는 얼어붙은 얼굴로 귀신처럼 하비를 마주보았다. 그의 주인도 다 알고 있는지 그다지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들킬까봐 해적 인질 사태 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신 거고. 맞나?]
이미 빅터에게 다 들어서 처음부터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 대한 사후처리와 책임은 다하려 한 줄 알았다. 하비가 분노로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인님…….]
하비는 늙은 회계사를 장례 치러주려 했을 때, 집사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자네가 ‘그 일’ 에 연관된 자라며 장례 치러주는 것조차 꺼리던 것도 이런 이유였겠지.]
늙은 회계사는 임페르 해적 사건 이후로도 거짓된 장부 내역을 작성하는데 크게 일조했을 터였다.
심란한 얼굴인 집사에게는 더 캐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도 당시에는 어렸고, 알았더라도 흐름을 바꿀 힘이 없었을 것이다. 괜한 화풀이는 하기 싫어서 하비는 곧장 방에 틀어박혔다.
괴롭게 머리를 감싸며 하비가 아픈 숨을 뱉었다.
[그렇게 들키기 싫었으면 차라리 장부라도 철저히 조작하시지…….]
몰랐다면 좋았을텐데. 나가고 들어간 내역의 금액 자체는 너무 솔직하게 작성해 놨다. 출처만 거짓으로 작성한 것이다.
결국, 라힌 스터스는 끝까지 비겁했다. 속죄는 할 생각도 없었고, 죽기 직전까지도 그럴싸한 선한 명목으로 덮는 데만 골몰했다. 덮는다고 덮어질 것이 아닌데도.
하비는 그날 밤, 속을 달래려 혼자 독한 술을 몇 병이나 비웠다.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눈 앞에 닥친 확고한 진실이 썼다. 이미 하얀 저택은 어둡게 물든 지 오래였다. 그가 인식하기 훨씬 전부터 말이다.
본래의 의미를 잃은 곳에 미래가 있을 수 있나. 그저 돈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빅터는 그늘로 가득한 하비의 얼굴에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나?”
이게 문제였다. 짧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빅터에게 너무 의지하게 되었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걱정이나 염려를 담기만 해도 가슴 속의 고철 덩어리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쓸모없다 여겼던 심장이 제 모습을 찾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말없는 하비를 가만히 살피던 빅터가 점차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설마 알파의 긍지 따위를 입에 담은 놈이 또 있었어?”
“아니.”
정말로 달려가 있지도 않은 누군가를 족칠 기세라 하비가 얼른 대답했다. 전에 어떤 늙은 귀족 하나가 하비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적이 있었다. 알파로서의 긍지를 잃은 몰락한 가문이라 멸시를 주었지만 당시 하비는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빅터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말그대로 풍비박산을 냈다. 해당 가문을 탈탈 털어 온갖 비리를 폭로하고, 거짓 투자 정보로 가세를 기울게 했다.
다들 말은 안해도 빅터가 한 짓임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하비를 모욕한 늙은 귀족이 한밤중에 모르는 자에게 당해 사흘 밤낮을 사경을 헤매며 앓아누웠다는 것도, 사람들은 빅터가 한 것이라 여겼다.
하비도 그런 흉흉한 소문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정말 아니니까 혹시 엄한 사람 잡아서 인생 망치게 하진 마.”
썩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다. 빅터는 눈을 가늘게 접고 물었다.
“그럼 뭔데? 말하지 않으면 엄한 사람 잡아서 인생 망치게 할테니까.”
“그럼 뭔데? 말하지 않으면 엄한 사람 잡아서 인생 망치게 할테니까.”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하비는 적절한 말로 둘러대었다. 빨리 저 의혹을 풀어주지 않으면 정말 다른 사람을 잡을 기세였다.
“요즘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그제야 빅터는 수긍했다. 그 일이라면, 이해가 갔다.
“아아, 그 쓰레기섬 매입건? 일이 많긴 할테지. 국왕의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건 나도 유감이야.”
하비는 아쉬움 가득한 빅터의 표정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패전국의 상황이라 국왕은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것일지라도, 군을 움직이는 것에 몹시 민감했다. 그래서 빅터의 설득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건 됐어. 애써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
빅터가 여전히 아쉬움과 무언의 집착이 끈끈하게 남아있는 눈길을 하비에게 보냈다.
“내가 제대로 해냈다면 감사 인사 이상의 것을 받았겠지?”
빅터가 이내 일어나는 것을 본 하비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미리 말해두지만, 여긴 경의 집무실이야.”
“잠깐 상상했더니 아래가 불끈거려서 말이지.”
하비가 짧게 말했다.
“가라앉혀.”
바로 말허리를 잘린 빅터가 혀를 찼다.
“가차없군.”
“일하는 공간과 욕구를 푸는 공간 정도는 분리하는 게 어때.”
아쉬운 듯 말하는 빅터에게 하비가 일침을 가했다. 그럼에도 빅터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하긴 하비는 여태껏 빅터가 바로 포기하는 것을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빅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과 욕구를 풀 수 있는 공간이 합쳐진 게 가장 완벽한 공간 아니었나? 모든 알파가 꿈꾸는 이상이지.”
저번에도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남에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하비가 역시 딱딱하게 대꾸했다.
“난 아니니 그 이상 같지도 않은 이상에서 빼주길 바라네.”
한 치의 틈도 없는 하비의 공방에 빅터는 어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기 적절하게 문이 달칵 열리고, 빅터의 비서 겸 대리인인 폰이 돌아왔다.
하비는 빅터의 지분거림을 피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키스라도 하고 있었으면 어쩔 뻔 했는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심장 언저리가 묵직하게 달아올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피곤과 왠지 모를 한이 서린 얼굴로 들어오던 폰이 하비를 보고 활짝 반색했다.
“스터스 경! 또 오셨군요.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내어드릴까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손을 꼬는 그를 하비가 따뜻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래주면 고맙지. 매번 잘 마시고 있어.”
빅터가 불만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차는 커녕 물도 먼저 주지 않는 놈이.”
콧노래까지 부르며 등을 보이는 폰을 빅터가 힘껏 노려보았다.
하비는 익숙해진 작은 평화에 마음이 넉넉해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빅터의 뒷모습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제법 자란 빅터의 금발 머리칼이 이제 목 아래로 꽤 길게 뻗었다.
적으로 두면 피곤하고 위험한 자이지만, 제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철저히 지킨다. 그게 하비가 본 빅터 바르뎀의 진면목이었다.
빅터는 그 동안 착실하게 하비의 검술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제 자신을 갈고 닦아 하비의 검을, 그의 무게를 이겨냈다.
빅터의 진심을 보기 위한 관문이라고 해두었지만 사실 하비는 그가 중간에 때려치울 줄 알았다. 개인적으로 연습까지 해가며 철저하게 대비해 맞받아칠 줄은, 그 정도로 악과 오기를 부릴 줄은 몰랐다.
‘원래도 검술에 재능이 있었으니 가능했지만.’
하비는 고개를 내려 양 손을 보았다. 손에서 느껴지던 떨림과 뜨거움이 여전히 생생했다. 빅터의 검이 자신의 것을 쳐내고 온전히 제 무게를 실어 맞닿아온 순간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하비의 검을 빅터가 날려버린 순간, 홀가분함만 남았다.
그때 비로소 하비는 해방감을 느꼈다. 빅터에 대한 불편한 감상과 끝끝내 남아있던 해묵은 감정들도 하비의 검에 묶여 함께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 이런 날이 오기를 가장 바란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로, 하비는 기뻤다. 날 듯이 좋아하는 빅터보다 어쩌면 더.
빅터가 지겹도록 그를 감싸고 있는 견고한 벽을 부수고 가장 내밀한 곳까지 걸어 들어와 주길 바랐다. 가까이 있는 지금도,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이제 중증이었다. 폰이 없었다면, 이곳이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면, 그대로 모른 척 빅터의 유혹에 넘어갔을 것이다.
생각에 잠겼던 하비는 불퉁하게 이어지는 빅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2주일 정도, 길면 한 달을 상단 일 때문에 멀리 나가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나.”
갑자기 예정에 없던 일정을 말하자 하비가 혼란스러워했다. 2주일? 길면 한 달? 까마득한 숫자였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내색 않고 일부러 느긋하게 되물었다. 빅터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뭐가?”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하비의 말간 눈빛에 빅터는 이유 없이 울컥했다.
“경과 내가 그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하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안 돌아올 것도 아니고, 늦어도 한 달 뒤에는 돌아오잖아.”
빅터는 집무실 책상에 한 쪽 턱을 괴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아……. 그래. 뭐, 바라지도 않았지만.”
갑작스런 일정에 깜짝 놀라거나 서운하다는 시늉이라도 보고 싶었건만. 하비는 바늘 하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로 아주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드는 섭섭함에 빅터는 흠칫 놀랐다.
‘난 대체 뭘 원한거지?’
하비를 속이는 것에 너무 몰입한 건가. 요즘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를 걱정하는 말도, 좋아하는 척 기대는 말들도 이제 진심인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야겠어.’
빅터는 하비와 떨어져 멀리 가는 김에 머리를 식히고 이 오락가락하는 감정도 죄 정리하고 올 심산이었다. 집사 레나가 굳이 곁에서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제 하비에 대한 마음을 인정할 때가 오고있다는 것을. 그것이 무한한 애‘정’이든, 한 끗 차이인 애‘증’이든 그 단어 사이를 다리 놓고 있는 건 분명 하비에 대한 ‘호감’ 이었다.
오로지 빅터가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단 하나였다.
'여태 한 짓이 있는데...'
돌아와서 하비에게 했던 행동들이 빅터의 머릿속에서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떨쳐내려 해도, 신약을 먹여 형질을 바꾸면서까지 고통을 주던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오메가가 되는 과정에서 시키던 굴욕적인 것들도, 채찍을 휘두르던 감촉도 여전히 손 안에 남아 있었다. 저 단단한 남자가 맞으면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으려 애쓰던 것까지. 신약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하비를 억지로 안은 것도 수 번이다.
그런 하비를 보면서 즐거워 하고, 즐기기까지 했다. 심지어 지금도 그의 진심을 기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 마음을 인정해 버리면 빅터는 스스로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는 꼴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하비를 힘들게 했던 것을,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아냐. 아직은, 그저 내 연기에 내가 속아넘어간 것일 뿐이지.'
얼마나 거짓을 완벽하게 연기하면 스스로 헷갈릴 정도인지. 빅터는 자신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매번 혼란을 넘겼다. 감당못할 후환이 두려워서, 그는 계속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을 뒤로 미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후회 같은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처럼만, 하비와 지내고 싶었다.
때마침 돌아온 폰이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녹색 물이 가득한 차를 가져왔다. 폰은 둘 사이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빅터의 말에 부연설명을 굳이 덧붙였다.
“요약하자면 앞으로 한 달‘이나’ 떨어져 지내야 하는데 섭섭하거나 아쉽지 않냐고 묻는 거죠. 더 나아가면 나는 그리울 건데 너는 내가 그립지 않을 거냐는 함축이……. 히익!”
빅터의 살기가 무섭도록 꽂혀 들었다. 베타라 페로몬은 느끼지 못하지만 사람 여럿 죽일 것 같은 저 살벌한 기운만큼은 확실히 느꼈다.
“실컷 지껄였으면 꺼져.”
“퇴근하겠습니다!”
눈치를 보던 폰이 후다닥 사라졌다. 사라진 뒷모습을 지긋이 노려보는 빅터를 하비가 불렀다.
“언제 출발하는 거지?”
폰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 하비를 맞았다. 빅터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3일 뒤.”
“빠르군.”
3일이 빠르다는 건 하비도 섭섭하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 걸까. 그리 보기엔 하비는 너무 무덤덤해 보였다. 여전히 중요한 데서는 감정을 잘 숨겼다.
하비에게만 꽂혀 있던 빅터의 시선이 흔들렸다.
‘뭘 신경쓰고 있는 건지.’
빅터는 이런 것에 연연하는 자신이 더욱 알 수 없어졌다. 마음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틈이 생긴 곳을 하비는 종종 잘 아는 사람처럼 파고들곤 했다. 모르고 하는 것일 텐데도 가끔은 허를 찔렀다.
‘그게 저 남자의 무서운 점이지만.’
남은 서류들을 정리하며 빅터가 퇴근할 준비를 시작했다.
“3일이면 넉넉히 시간이 있는 편이야. 다음날 바로 출발해야 할 때도 있거든.”
하비는 여전히 어수선한 빅터의 집무 책상을 눈으로 훑었다. 끄트머리에 먼지도 좀 보였다. 늘 보는 풍경이지만, 정말이지 정리정돈이 안 된다. 하지만 안 본 척 아무렇지 않게 하비가 말했다.
“그런가.”
흠칫한 빅터가 새삼스럽게 책상에 붙은 먼지를 소매로 슬그머니 닦아내는 동안, 하비는 빅터의 일정들을 머릿속에 확실히 저장해 두었다. 빅터는 상단 일도 겸하다 보니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일도 생긴다고.
뜨거운 찻물을 조금씩 입 안으로 들어왔지만 금세 식었다. 하비는 벌써부터 쓸쓸한 기분이었다. 물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대로 속내를 드러내면 빅터가 오만하게 콧대를 높일 것 같아서였다.
잠시 생각하던 빅터가 식은 커피에 뜨거운 물을 추가하며 물었다.
“그 전에 하루 정도 온전히 시간을 낼 수 있겠어?”
하비는 제발 휴가라도 가라며 사정하던 다른 외무부 직원을 떠올렸다. 너무 쉬지 않는다며 건강을 걱정하던 다른 사람들도 연달아 생각났다.
“낼 수는 있을 것 같아. 근데 뭘 하려고?”
뭘 하려는지 물었지만 다른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도 제대로 못 먹나?”
하비의 식욕 부진이 벌써 3달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말라가는 하비의 몸을 걱정하는 추세였다. 워낙 체격이 있었던 지라 그래도 건장해 보이지만, 원래 모습보다는 많이 야위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갑자기 당기는 음식들도 생기고 있고.”
간밤에는 시큼한 과일이 당겼다. 금방 구할 수 없는 과일이라 참고 말았지만. 얼버무리는 하비에게 빅터가 눈을 빛냈다.
“그래? 뭐가 먹고 싶은데?”
하비는 제대로 된 용건이 나오지 않자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됐고. 고작 뭔가 먹기 위해서 하루를 비우는 건 비생산적이야.”
“먹는 것도 포함해서, 다른 것도 열심히 먹어야지.”
빅터가 빙글거리며 말하는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하비는 얼굴을 붉혔다. 말을 말자. 더 이상 말하면 휘말릴 것 같아서 차라리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포기를 모르는 빅터 바르뎀은 재차 물었다.
“그래서, 뭐가 먹고 싶다고?”
하루지만 긴 휴가가 될 것 같았다. 집사는 빅터와 함께 간다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진 듯 했지만 하비 앞에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집사가 입을 삐죽거리며 마중나온 빅터의 마차 앞에서 하비를 배웅했다.
“그래도 요즘은 좀 괜찮아지신 듯 하여 보내드리는 겁니다.”
이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다. 몇 달 전만해도 하비가 빅터와 만나고 온 날에는 항상 엉망진창이었다. 열이 오르기도 예사고, 사실 하비에게는 말을 않고 있었지만 신체에 크고 작은 멍을 본 적도 있었다.
뭔지는 잘 몰라도 빅터에게 지독한 짓을 당하고 왔음이 분명했다. 자존심 강한 하비가 말 한마디 못하는 걸 보면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그리 여겨 집사는 그간 침묵해 왔다.
그랬는데, 눈엣가시인 빅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하비를 연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하던 하비도 어느 덧 빅터의 변화에 익숙해지고, 이제는 제 울타리 안으로 완전히 들인 것이 집사의 눈에도 보였다.
‘이제 정말 괜찮으신 건가?’
울적하게 배웅하는 집사를 놀리듯 빅터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보내주는 만큼 당연히 즐겁게 지내고 올테니 걱정 말도록.”
방금 전까지 보내준다던 집사는 기분이 나빠진 얼굴로 하비에게 투덜댔다.
“…정말. 주인님, 꼭 가셔야 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처리해 주셔야 할 일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빅터와 하비의 집사,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물론 빅터가 훨씬 여유가 있었다.
하비는 한숨 쉬며 두 사람을 말렸다.
“경은 부디 적당히 놀려. 자네는 바르뎀 경의 말을 너무 귀담아 듣지 말고.”
“왜 저런 분과 사귀시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빅터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귀족에게 막말하는 집사는 왜 내치지 않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어차피 진짜 귀족도 아니면서. 차마 여기까지는 말 못한 채 집사는 하비를 배웅하며 눈물겨워 했다.
사실 하비의 집사가 빅터에게 이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스터스 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과 더불어 사용인에게 관대한 빅터의 성정 때문이긴 했다. 그래서 빅터에게 편하게 격의 없이 대하는 사용인들이 많았고, 하비도 그걸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하비는 별 말 없이 웃더니 불퉁하게 있는 빅터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마차가 덜컹거리고 출발할 때, 빅터가 하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아까부터 이러고 싶었다. 익숙한 페로몬이 빅터의 후각에 가득 잡혔다. 언제 맡아도 기분 좋은 청량한 향이었다.
“그것보다 다른 걸 걱정해야 하지 않겠어?”
언제부턴가 하비와 함께 있으면 자제가 안 되었다. 신약을 먹고 오메가가 된 것도 아닌데, 곁에 있을 때마다 그를 취하고 싶었다. 점점 중증이 었다.
빅터는 경계의 눈길을 보내는 하비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하비의 페로몬을 들이키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잠이 몰려들었다. 혹시 수면 방향제라도 섞은 건가 의심될 만큼 마음이 풀렸다.
“농담이고. 다른 짓 안할테니까…….”
움찔거리며 피하는 하비를 빅터가 강한 힘으로 잡아 눌렀다. 손아귀 힘과는 달리 빅터의 녹안은 힘없이 가물거렸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
아무리 체력이 강철이라도 한계를 초월한 업무량을 소화하고 왔다. 억지로 하비와 휴가를 하루 만들려고 잠을 아예 못 잤다. 빅터는 그 이전에도 계속 과한 업무에 시달렸고, 늘 잠이 부족했다. 피곤할 수 밖에 없었다.
하비의 어깨에 기댄 빅터는 금방 잠이 들었다. 팔짱을 끼고 앉은 채로 새근거리며 자버리는 빅터에게 하비가 황당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벌써?’
그것도 잠시, 하비의 밤색 눈이 작게 휘었다.
어깨를 누르고 있는 빅터의 머리가 마차의 진동에 슬슬 떨어지려 해서였다. 반사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준 하비가 아예 빅터를 조심스럽게 허벅지로 눕혔다.
빅터는 한 번도 깨지 않고 그대로 잘 잤다. 금발 머리가 하비의 허벅지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졌고, 높게 오른 코가 마차의 흐름에 따라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팔짱도 풀지 않고 그대로였다. 고른 숨소리와 평화로운 눈매에 평안이 섞여 있었다.
빅터의 사용인들이 알면 기함할 광경이었다. 빅터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 있는 앞에서 자지 않았다. 살기 위한 긴장 속에서 자란 시간들은 그를 강인하게도 만들었지만, 사람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었다.
하비는 눈을 감고 잠든 빅터를 내려보며 슬쩍 미소지었다. 정말 피곤했나 보다.
그는 빅터의 반듯한 이마로 어지러이 흩어진 금발을 손으로 쓸어서 넘겼다. 미움이 말라 희석되자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건 또 다른 감정이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정말 알파라도 괜찮은 건가.’
빅터를 겨우 믿을 수 있게 되자 다음에 찾아온 건 알파끼리의 교제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었다.
이 아슬아슬한 관계는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언젠가 빅터는 대를 이을 자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멀쩡한 알파가, 그것도 ‘우성’ 알파가 오메가를 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비가 낮게 실소했다.
‘난 이제 포기하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스터스 가를 잇겠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망해가는 가문에 오겠다는 오메가도 없을뿐더러, 만약 온다고 해도 2세에게 스터스 가의 극악한 교육 방침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영광이라 생각했던 스터스 가는 오욕으로 얼룩져 있었고, 이미 그 정신조차 무너진 지 오래였다.
사실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하비는 이제 다른 누군가를 들이는 것이 애초부터 망설여졌다. 허벅지에서 달게 자고 있는 이 사람 때문에.
하지만 자신과 빅터는 처지가 달랐다. 부흥하고 있는 바르뎀 가를 위해 빅터가 오메가를 구할 때가 되면 그를 막을 자신도, 구실도 없었다.
이별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하비의 마음 속에 불편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비는 시선을 들어 창을 보았다. 열어놓은 창가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씨다. 선선한 바람도 마차 안으로 시원하게 들어와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음…….”
그때 빅터가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 지 인상을 쓰고는 뒤척이며 하비의 단단한 복부에 이마를 묻었다. 무의식 중에 파고든 것 같았다. 하비는 무거운 생각을 금방 떨쳐냈다. 날도 좋은데, 좋은 생각만 하자.
너른 마차 안에서 기분 좋은 향이 났다. 빅터에게서 나오는 걸 보니 그의 페로몬인 모양이었다. 빅터의 페로몬은 거친 풀 향이 났다. 더없이 향긋하고, 의지가 되는 향이었다. 없으면 가끔 불안한 생각마저 드는….
순간 하비가 머리를 흔들었다. 알파가 같은 알파의 페로몬을 ‘좋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없으면 불안하기까지 하다니.
하비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게 과연 정상인 건지.’
조금 머리를 굴렸을 뿐인데 벌써 피곤이 몰려왔다. 휴가를 내려고 무리한 것은 하비도 마찬가지였다. 소화력도 떨어지고 가끔 위가 심하게 메슥대는 걸 봐서 스트레스성 위염일 것이다.
‘또 졸리는군.’
일정하게 흔들리는 마차의 리듬이 꼭 자장가 같이 느껴졌다. 하비는 요즘 따라 잠이 너무 늘었다. 앉아서도 졸고, 서서도 가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나마 빅터와 함께 있으면 좀 덜 했다.
‘안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잠깐 이래도 되나 생각했지만 하비는 까마득한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잘 자던 하비는 꿈 말미에 눈썹을 찌푸렸다.
빅터가 나왔다. 그는 몇 달 전에 하비를 힘들게 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비가 지독하게 내렸다. 하비는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었고, 빗줄기 아래 죽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듯한 붉은 핏물이 하비의 발을 붙잡듯이 발치에 질척하게 고였다.
하비는 꿈 속의 시간대가 어느 때인지 알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하비를 덮치던 알파들을 빅터가 모조리 죽였던 그 때였다.
빅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잔인한 얼굴로 비를 맞으며 서 있었고, 많이 낯설었다. 꿈 속에서 하비는 의지를 잃고 꿈이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빅터를 마주보며 하비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를 짓밟는 게 그렇게……. 그렇게 재미있는 건가.]
하비는 자신을 잃은 것 같았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비의 입술이 또 비통한 말들을 쏟아냈다. 잊고 있었던 끔찍한 감정들이 하비의 가슴을 채찍처럼 휘갈겼다.
[내가, 하나하나 무너지는 게 그리도 즐거운 거냐고.]
빅터가 비열하게 웃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하비에게 비수로 날아왔다.
[그러려고 이 수고를 들이고 있는 건데.]
어쩌면 다정한 말을 뱉던 저 입술이 저토록 잔악해 질 수 있는 건지. 하비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와서 억울해?]
하비는 눈을 번쩍 떴다. 꿈은 단순히 꿈이 아니라, 과거였다. 분명 몇 개월 전만해도 빅터가 실제로 던지던 말이었고, 지난 일 중 일부였다.
선득한 마음에 눈을 뜨자마자 빅터를 찾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혹시 꿈이 진실이고, 다정한 빅터는 없었던 환상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다행히 그는 아직도 하비의 허벅지 위에서 잘 자고 있었다. 보는 순간, 하비는 마음이 무너져내리듯 안심이 되었다.
꿈 속에서 몹시도 차가웠던 빅터가 아니었다. 평화로운 분위기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른 숨만 내쉬는 중이었다.
꿈인 걸 알지만, 하비는 괜히 가슴 안 쪽이 지끈거렸다. 널 괴롭히기 위해 수고를 들이고 있다고. 지금 와서 당한 것이 억울하냐고 반문하던 빅터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서, 등이 서늘했다.
빅터의 눈이 움찔하더니 꿈적꿈적 눈꺼풀이 움직였다.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녹색 눈이 제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아 눈빛이 흐릿했다.
상황 파악이 안되는 눈으로 빅터가 물끄러미 하비를 올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잔 건가?”
그것도 하비의 허벅지에서!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심지어 너무 편안하게 잤기에 할 말이 없었다.
하비는 아까 꾼 꿈 때문인지 어두운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표정을 본 빅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저러는 거지.
“설마.”
빅터는 진지하게 입을 열수록 하비는 더욱 긴장해서 그의 시선을 따랐다. 빅터의 눈이 하비의 허벅지로 향했는데, 마침 그 곳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물론 빅터가 자면서 악몽 때문에 흘린 식은땀이었다.
그걸 모르는 빅터가 아니길 바란다는 듯 암울하게 물었다.
“침 흘리고 잔 건 아니겠지?”
무슨 말을 하나 했다. 심각하게 말하는 빅터를 보니 하비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꿈의 여파로 저조했던 기분이 급격히 상승했다.
지금의 빅터는 진지한 사과와 고백 이후로 많이 달라졌다. 전과는 달리 진심으로 위해주고 있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꿈 따위는, 잊어야 할 것이다. 하비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한편, 웃음을 참느라 외면하는 하비를 보며 빅터는 확신했다.
‘제길…….’
아무래도 하비의 허벅지에 스며든 저 둥근 자국이 침일 것이라고.
***
뜨겁게 이글대는 햇빛이 환한 시야를 제공했다. 휴가에 걸맞는 맑고 쾌청한 오후였다.
빅터는 마차 안에서 오늘도 악몽을 꿨지만 하비의 페로몬 때문인지 금방 벗어났다. 덕분에 수면의 질도 훌륭했고, 몸이 아주 가뿐한 상태였다. 이렇게 기분도, 몸도, 정신까지 상쾌한 적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런 제 몸 상태를 설명하면서 밀어붙이는 빅터를, 하비가 한심하다는 말투로 타박 주었다.
“그래서. 고마움을 이렇게 갚는 건가?”
마차에서 내린 지 얼마 안 되어 바깥 구경을 좀 하나 했더니 어느 새 이 꼴이다. 하비는 포도밭 초입에 있는 커다란 돌담과 빅터의 큰 체격 사이에 갇혀 있었다. 묘한 꿈 때문에 식었던 하비의 등이 돌담의 열기로 금세 뜨끈해졌다.
빅터의 금발이 사락사락 하비의 뺨에 닿고, 예민한 귓가를 물기도 했다. 장난치듯 낮은 목소리로 빅터가 속삭였다.
“내 식으로 갚는 거지.”
무시한 하비가 눈짓으로 주변을 휘 둘러보자 푸릇한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최상급 포도가 재배되어 특등급 와인을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말은 안했어도 하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로방스 지역의 포도밭은 또 언제 사둔 건지.’
대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전쟁이라 알려진 어느 국가간 전쟁도, 알고 보면 질 좋은 포도밭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란 우스갯소리도 떠도는 판국이었다.
어쨌든 이런 곳에서 일을 치르게 할 수는 없었다. 어딜 보냐는 것처럼 빅터의 손이 하비의 턱을 당겼다. 강렬한 녹안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빅터가 여러 번의 키스로 조금 부어오른 하비의 입술을 보며 말했다.
“내키지 않는 것 같군.”
그 새 손을 내려 가슴을 지분대는 손길에 하비가 굳은 얼굴로 지적했다. 이 와중에도 하비의 몸은 충실히 빅터의 손길에 반응하여 뜨거워지고 있었다.
“당연하지. 여긴 야외니까. 다 트인 곳인데다 한낮이지.”
저 멀리 바다처럼 펼쳐진 거대한 강도 보였다. 대형 화물 마차를 위한 길도 포도밭 사이를 가로질렀다.
빅터가 하비의 턱에 입술을 미끄러뜨리듯 내리고는 턱끝을 잘근잘근 물듯이 핥았다. 하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향하고, 드러난 목젖이 일렁였다. 눈이 햇살에 노출되어 하비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밀어내면 끝인데, 신체는 이미 취한 것처럼 빅터의 애무에 흐늘거렸다. 눈을 감으니 조목조목 반박하는 빅터의 저음만 들렸다.
“야외고 다 트인 곳이지만 내 사유지야. 주변에 민가도 없고, 이곳에서 사는 사용인들은 다 물렸어. 한낮인 건 조금 문제가 되는군.”
잠시 고개를 뒤로 물린 빅터가 하비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더니, 정말로 곤란한 것처럼 눈가를 찡그렸다.
“너무 잘 보여서 곤란해.”
색욕 가득한 우성 알파의 목소리에 하비는 오늘 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을 예상했다.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색욕 가득한 우성 알파의 목소리에 하비는 오늘 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을 예상했다.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하비의 걱정은 점점 현실이 되었다. 아래에서 뜨겁게 찌르는 것이 커지고 있었다.
빅터가 중얼거리며 하비의 갈색 슬래시를 밀어올렸다. 슬래시 사이로 드러난 하얀 속옷을 탐스럽게 보았다.
“이런 날씨에 밖에서 뒹구는 것도 꽤 좋은걸.”
시원한 바람이 푸른 포도밭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더운 햇살도 바람에 밀려 날아가는 듯 했다.
바람에 섞인 하비의 아찔한 페로몬에 취해서 빅터는 몽롱한 눈으로 하얀 속옷 위로 빳빳하게 솟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희롱했다.
하비가 짜릿하게 밀려오는 쾌감에 이를 물었지만 신음이 새어나갔다.
“읏…….”
빅터는 은은하게 나는 하비의 살내음에 미칠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몰두하게 되는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나중에 하비를 추락시키고 난 후에는 이 느낌을 계속 그리워할 것 같았다.
‘그런 날이 정말 올까…….’
심란해 하는 빅터를 앞에 두고, 하비도 마찬가지였다. 오메가가 된 것도 아닌데, 자꾸만 빅터의 페로몬에 휩쓸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등 뒤를 받치고 있던 돌담으로 자꾸만 허리가 닿고, 그의 아래에도 뜨겁게 열기가 몰리기 시작했다.
키스할 것처럼 두 사람의 입술이 거의 맞닿았을 때, 멀리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크흠!”
놀란 하비는 빅터를 거세게 밀쳐냈다. 빅터의 손길에 위로 한껏 말려 올라갔던 하비의 슬래시가 커튼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실례합니다만.”
마차를 놓고 온 진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오늘의 유일한 사용인이었다. 진은 용건만 전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바로 뒤돌아섰다.
“점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아, 고맙네.”
못마땅해 하는 빅터를 내버려두고 하비는 진의 뒤를 쫓았다. 빠르게 걷는 하비의 얼굴 위로 민망함이 떠올라 있었다.
포도밭 옆에 질 좋은 포도밭에서 바로 숙성시킨 고급스러운 특급의 포도주와 칠면조, 해산물 요리, 바다를 건너온 이국적인 음식들이 즐비해 있었다.
하비의 시선이 난감하게 음식 몇 개를 지목했다.
“이건……. 못 먹겠는데.”
모든 음식을 다 잘 먹던 하비였다. 그런데 유독 비린내가 심한 것들을 손을 대지를 못 했다. 결국 해산물은 전부 테이블에서 치워졌다. 하비가 미안한 얼굴로 진에게 말했다.
“열심히 준비한 것일텐데, 미안하게 됐어.”
진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릇을 치웠다. 진의 뺨에 난 작은 흉터가 미소를 그리자 위로 치켜 올라갔다.
“상관 없습니다. 남은 건 제가 먹을테니까요. 참고로 전 해산물을 정말 좋아합니다.”
없어서 못 먹는다며 장난스럽게 덧붙인 진이 나가자 빅터가 심각하게 물었다. 은식기를 들어 올리며 빅터는 남은 해산물이 더 없나 뒤적거렸다.
“속이 계속 안 좋다더니, 아직도 그런가?”
“가끔. 이제 괜찮은 것 같으니 더 골라낼 필요 없어.”
괜찮다고 말리는데도 빅터는 아랑곳 않았다. 그는 팔까지 걷어붙이며 열정적으로 뒤적거렸다.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잖아.”
진심으로 걱정하며 남은 해산물마저 다 골라내는 빅터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하비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생각해 버렸다.
‘아마 이후에 맞을 오메가 부인에게도 잘할테지.’
생각한 순간 하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큰일났군.’
점점 좋아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어야 한다는 가정만으로도 이토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모르는 사이 마음이 이렇게까지 커져 버렸다. 알파에게는 오메가, 오메가에게는 알파. 이것이 세상의 정상적인 수순이다.
‘오메가라…….’
더는 비린내가 나지 않는데도 한숨만 나오고, 아예 음식 맛이 뚝 떨어졌다. 식욕이 사라져 버린 하비가 포도주로 입을 헹구는데, 건너편에서 보고 있던 빅터가 수저를 놓았다.
“또 입맛이 없나?”
“천천히 먹으려고. 먼저 들고 있어.”
하비의 속도 모르고 빅터는 진의 음식 솜씨가 전보다 줄었느니 하며 속상해 했다. 과장이 아니라, 빅터는 정말로 속상했다.
’왜 이렇게 못 먹는 거지?‘
누군가가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는 일로 화가 나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하비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자신을 억누르고 있지 않은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빅터를 눈치챈 하비가 한숨을 쉬며 그를 편하게 해주려 했다.
“음식은 훌륭해. 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라, 이해해줘.”
“의사라도 불러줘? 아, 아니다. 명의라고 불러놨더니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던데 도움도 안 되겠군.”
심장의 각인이라는 둥, 이상한 소리만 해대던 명의가 떠오르자 빅터는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반대로, 하비의 얼굴에는 환희가 떠올랐다. 그 방법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아예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상이 아니야.'
드디어 속 어딘가가 고장난 것은 아닌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어떤 발상'이 쉬이 떠나지 않았다.
고민하던 하비가 은근슬쩍 떠보듯 빅터에게 물었다.
“의사 하니까 떠오른 건데, 그 사람은 잘 지내나?”
“누구?”
“체질을 바꾸는 특이한 약을 개발했다던, 그 의사.”
“아…….”
빅터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이런 화제는 이제 더 이상 하비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 의사가 끼면 하비와의 불편한 과거가 당연한 듯 떠올랐다. 하비를 죽을 것처럼 괴롭히던 지난 일들이 빅터의 가슴을 찔렀다.
물론 지금은 더 큰 상처를 주기 위해 몇 달 동안 공을 들이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상하게 계속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안 되지. 안 돼.’
생각이 얼굴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얼른 표정을 고친 빅터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멀리 휴가라도 간 모양이던데. 나도 연락이 닿지 않아. 그런데 그 놈은 왜?”
하비는 입맛이 조금 돌아 칠면조 고기를 먹기 좋게 잘랐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별 뜻 없었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우울해 보이더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하비를 빅터가 수상한 듯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식사 이후에는 바다같이 너른 강에서 선선히 물놀이를 즐겼다. 배를 타고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푸른 물결이 잔잔한 강 위를 유랑했다.
진이 노를 저었고, 두 사람은 서서 반짝거리는 물결을 감상했다.
신기한 듯 수면 위로 비치는 거대한 물고기를 바라보던 하비는 웃음기 머금은 빅터의 경고에 고개를 뒤로 물렸다.
“악어가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조심하고. 코가 물릴 지도 몰라.”
그런 걸 왜 이제 말하냐는 눈빛을 보내며 하비가 배 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걱정마. 팔이나 다리를 잃더라도 반드시 구해줄테니까.”
빅터가 무심하게 말했다.
“상어와도 싸워봤는데, 악어 정도야.”
놀란 건 하비였다.
“상어?”
“해적 놈들이 상어 우리에 차서 집어넣은 적이 있었거든. 작살도 하나 주긴 했지만.”
도대체 빅터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건가. 하비는 상상만으로도 아득해졌다.
“…용케 살아남았군.”
“조금만 더 늦었어도 까딱 죽을 뻔 했지. 먼저 눈을 찌르고 안심했는데, 입을 꿰뚫기 직전에 놈이 발작을 해서.”
빅터가 팔을 보여주었다. 흉터가 전신으로 덮인 몸 중에 유독 길게 난 상처가 보였다. 상어에게 물렸던 흔적이었다. 다행히 깊게 물린 것이 아니라 스친 수준이었는데도 이 정도였다.
“신경이 끊어진 줄 알았는데 유능한 의사가 고쳐줬어.”
상어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먹잇감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눈 공격은 크게 소용이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며 빅터가 멋쩍게 덧붙였다. 그러다 이어지는 하비의 사과에 빅터는 멈칫했다.
“미안하다.”
하비가 씁쓸하게 말했다. 빅터처럼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지만, 정말로 상어밥이 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마음이 알싸하게 아파왔다.
하지만 빅터는 굳은 얼굴로 하비의 사과를 거절했다. 이러려고 과거 일을 끄집어 낸 것이 아니었다. 하비가 이런 일로 상심하는 걸 보는 것도 싫었다.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날 상어 우리로 밀어넣은 건 해적 놈들이지, 경이 아니야. 괜한 일로 사과하지마. 사과 받은 쪽도 찜찜해지니까.”
말해놓고 왜 이렇게까지 말해주는 건지 회의감이 들 무렵, 빅터는 밝게 웃는 하비의 얼굴을 보자 그 마음조차 싹 사라졌다. 풀어진 얼굴을 보니 빅터 자신도 괜히 들떴다. 역시, 말해주길 잘한 것 같다.
그때 커다란 물새 몇 마리가 날아와 빅터의 손에 달라붙었다. 물고기에게 주려고 쥐었던 먹이를 빼앗으려 달려든 것이다.
날카로운 부리로 손가락 사이를 쿡쿡 쑤시는 것에 빅터가 인상을 쓰면서 말 못하는 새들에게 타박을 주었다.
“이 녀석들이.”
혀를 차면서도 빅터는 물새들을 쫓아 보내지 않고 손을 펴서 먹이를 나누어 주었다. 구시렁대면서도 사용인에게 친근한 빅터의 평소의 모습과도 같았다.
첨벙!
커다란 주홍빛 물고기 한 마리가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배가 잔잔하게 흔들리고, 물 위로 반사되는 환한 빛이 빅터의 얼굴에 닿아 산산이 부서졌다. 금발과 한낮의 태양빛은 너무 잘 어울렸다.
또 심장이 널뛰었다. 하비는 물끄러미 빅터의 옆얼굴을 보았다. 어느 새 진이 함께 있다는 것도 잊었다. 수면이 흔들릴 때마다 하비의 시선도 흔들렸다.
마음이, 미약하게 고동치는 심장과 함께 수런수런 들떴다가 가라앉았다. 오롯이 눈 앞의 이 사람 때문에.
너무 빤히 보고 있었는지 먹이를 다 나누어주고 손을 탈탈 털던 빅터가 하비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새 부리에 쪼여 손에서 피도 조금 나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왜? 할 말 있나?”
“…아무것도 아니야.”
빅터가 피식 웃으며 피가 나오다가 만 손등을 소탈하게 옷에 문질렀다.
“싱겁긴.”
그런 뒤에도 하비의 눈은 한참이나 빅터에게 머물렀다. 아까 전 마차에서 꾸었던 과거의 잔인한 빅터를 지워내기라도 하듯이.
뱃놀이를 파한 뒤에는 두 사람은 진이 미리 준비해 둔 말로 실컷 포도밭 사이를 달리기도 하고, 저녁 거리를 위한 짐승 사냥도 했다.
빅터가 워낙 총을 잘 쏘아서 사슴 한 마리와 토끼 두어 마리, 큰 새 두 마리가 금방 잡혔다. 식사로는 충분한 양이라 두 사람은 금세 사냥을 중지했다.
따라온 진이 짐승들을 화물용 마차에 싣는 동안 하비가 감탄어린 말을 던졌다.
“검은 잘 못 쓰더니 사격 솜씨는 좋군.”
빅터가 으스대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당연하지. 내 전공은 검이 아니라 총이라고.”
“이제 검도 잘 쓰게 되었으니 둘 다 수준급이겠는걸.”
“아아. 누구 덕분에.”
원망도 얼핏 섞인 빅터의 말투에 하비가 웃었다. 그때 빅터의 흑마가 묘한 소리를 내더니 하비의 말에 가까이 붙었다. 빅터의 말은 애정 어린 고갯짓으로 하비의 말 갈기에 머리를 묻었다.
푸르릉!
하비의 말에게 행하는 친근한 애정 표시에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보았다. 그러더니 씨익 악동처럼 웃었다.
“말 따위에게 질 수 없지.”
말고삐를 한 손으로 당기더니 빅터가 반대편 손으로 하비의 상체를 잡아당겼다.
“뭐…….”
하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빅터의 입술이 맞닿았다.
말 위에서 갑자기 끌어당겨진 지라 키스는 반동으로 거칠었다. 처음에 조금 어긋났던 입술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더욱 질척하게 혀가 얽혀들었다.
히힝!
하비의 말도 수줍은 듯 소리를 내더니 빅터의 말에게 더욱 가까이 붙었다. 덕분에 빅터의 손은 하비의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은 더욱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빅터의 입술이 잡아먹을 것처럼 하비의 입술을 덮고 달려들었다.
늘 망설이기만 하던 하비도 적극적으로 빅터의 팔을 잡았다.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고는 적극적으로 입을 벌리고 혀를 얽었다. 놀란 듯 하던 빅터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틀었다. 코가 부딪치던 것도 빅터가 고개를 틀면서 부대낌이 줄었다.
입술이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키스는 진해졌다. 말고삐를 쥔 하비의 한 손에 힘이 들어가고, 둘은 돌담 앞에서 마저 다 하지 못했던 키스를 이어나갔다.
"허어."
멀리서 화물 마차에 짐승들을 단단히 고정시키던 진이 그 광경을 흘끗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래도 입술은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좋은 분위기가 계속 되길 바라면서.
***
저녁 식사는 하비가 꽤 잘 먹어서 흐뭇한 빅터의 미소와 함께 끝이 났다. 씻고 너른 침대에 누우려던 빅터는 생각을 바꾸어 하비와 함께 야외로 나갔다.
‘이 곳 야경이 끝내주니까.’
이대로 보내기엔 아까웠다. 해서, 어떻게든 하비를 꼬여 밖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해진 밤이었다. 낮에 불던 바람은 더욱 시원해져서 이제 한기마저 머금었다. 낮에 보던 풍광과는 사뭇 달랐다.
곳곳에 불이 켜진 포도밭에서 바람 때문에 서로 부딪쳐 나는 선선한 소리가 나고, 초승달이 뜬 밤하늘엔 은하수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별무리가 모여 근처의 바다같은 강처럼, 교교하게 흘러갔다.
눈을 굴려 전체적인 풍광을 담은 하비가 솔직한 소감을 말했다.
“생각한 것보단 괜찮은데.”
빅터는 김빠진 얼굴로 투덜댔다.
“이왕이면 그냥 좋다고 해줘.”
풀 위에 길게 깔아놓은 자리에 누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보기만 했다. 이토록 평화로운 적이 언제였는지, 바쁘기만 했던 일상에서 이럴 일은 극도로 드물었다.
하비는 머리를 자리에 댄 채 반듯하게 누웠고, 그에 반해 빅터는 대충 한량처럼 누워 한 팔로 머리를 받쳤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하비가 불쑥 말했다.
“경의 페로몬 말인데.”
“응?”
“지금은 잘 나지 않는군.”
빅터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지?”
“풀향과 닮았거든. 지금은 풀이 많아서인지 섞여서 잘 나지 않아.”
빅터는 어색하게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만졌다.
“그래? 난 내 페로몬에 대해 잘 몰라. 다른 사람한테 물어본 적도 없고.”
잠시 생각하던 빅터가 하비의 페로몬에 대해 답례처럼 이야기 해주었다.
“시원하고 청량한 물향.”
이번엔 하비가 빅터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뭐?”
“그게 경의 페로몬이라고.”
어쨌든 서로의 페로몬이 역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페로몬에 대한 감상을 주고받는 것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페로몬이 후각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불쾌한 페로몬일까봐 내심 걱정했던 것이다.
‘나는 아니었는데.’
‘난 아니었지만.’
동시에 생각하던 빅터와 하비는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각자 서로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말 해.”
빅터는 하비의 말간 얼굴을 뚫어질 듯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경부터.”
하비는 멋쩍으면서도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좋은 곳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이런 여유를 가져본 게 얼마 만인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빅터가 충고했다.
“그러니까 이젠 즐기고 살아. 일에 매어 살아 봐야 남는 게 뭐 있어.”
이번엔 하비가 빅터를 물끄러미 보았다. 각종 클럽에서도 활발하게 활약하는 빅터에 반해 하비는 적정선까지만 활동했다. 필요한 만큼한 해낼 뿐이었다. 그에 비해 대외 활동도 빠짐없이 소화하는 빅터를 떠올리며 하비가 혀를 내둘렀다.
“전부터 말했지만, 그게 나한테 할 소린가? 경이 더 심해.”
빅터는 피식 웃었다. 별들이 무수히 박힌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올바른 길을 나아간 지도자들이 오른다는 별의 전당. 이미 자신은 저 곳에 오르기는 글렀다. 옳지 않은 피를 너무 많이 묻혔고, 손은 이미 더럽혀졌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죽은 후의 일 따위, 어차피 알지도 못하니까.
빅터가 한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손바닥을 빤히 보았다. 피 대신 하비 때문에 잡았던 검으로 굳은살만 잔뜩 박혀 있었다.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고했다.
“난 너와 일하는 목적이 달라.”
하비 같은 성실한 목적이 아니다. 그에게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
꼬박꼬박 ‘경’ 이라는 호칭을 붙여 가며 대화하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너’ 에 하비는 움찔했다. 예전에 빅터에게 한창 괴롭힘 당할 때나 듣던 것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별말 않은 채 하비는 미간을 조이며 이상한 듯 중얼거렸다.
“일하는 목적?”
“그래. 따로 있지. 그걸 위해서 돌아왔으니까.”
얼결에 진심이 묻어나왔다. 빅터의 목소리에 희미한 경멸이 배어 나오고, 하비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뭘 위해서?”
빅터는 대답을 선뜻 하지 못 했다. 하비의 눈을 피해 다시 하늘을 보았고, 지켜보던 하비도 더 묻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짧게 흘렀다.
하비의 눈이 슬쩍 빅터에게 닿았다. 목에 붙은 셔츠를 붙잡아 펴는 빅터의 손이 답답해 보였다. 마치 이 좁은 곳은 그와 맞지 않아 보였다. 올란 시도, 어쩌면 이 남자에게는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 평생 이곳에 뼈를 묻을 생각만 해왔던 하비로서는 걸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하비는 빅터가 언제든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바람처럼 보였다. 싸한 밤바람이 포도밭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서로 부딪치는 포도 잎사귀 소리가 서늘했다.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목적이 끝나면…, 경은 어떻게 되는 거지?”
빅터가 눈을 감은 채 답했다.
“글쎄. 아직 생각 중이야.”
하비의 눈이 어두워졌다. 어떤 작은 불안이 그의 마음 속에서 술렁거렸다.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인가?”
빅터는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하비를 보았다. 속내를 정확히 짚였다. 하마터면 어떻게 알았냐고 반문할 뻔 했다. 모든 것을 끝내고 나면, 홀가분하게 이 도시를 버리고 상업적 기반을 쌓아둔 다른 나라에 갈 예정이었다. 최초의 계획은, 그랬다.
빅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하비는 보지 못할 밤바람만큼이나 서늘한 눈빛이 스쳤다. 손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엔 다정함만이 남았다.
“설마.”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빅터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올란시의 의원이고, 가주 대리야. 그리고 하는 일이 끝나더라도 또 다른 자리가 있지.”
그는 하비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살살 쓸었다. 이 반듯한 남자는 눈썹까지 가지런했다. 기분 좋은 얼굴로 빅터의 손길을 받던 하비가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자리? 하는 게 더 있었나?”
말 대신 지긋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어떤 의미인지, 하비는 금방 깨달았다. 턱끝부터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 했다.
하비가 말뜻을 알아차리자 맞닿아오던 녹색 눈동자가 휘었다.
“이제 알겠어? 떠날 이유가 없다고.”
이곳엔 네가 있으니까. 빅터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빅터의 등 뒤에 걸린 달이 너무 밝았다. 고작 초승달인데도.
하비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크게 부풀었다. 이것은 희망이다. 잘못 말하면 한계까지 부풀어버린 그것이 훌쩍 떠나가기라도 할까봐 하비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내가, 경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될 수 있는 건가.”
하비의 눈가에서 이마로 진출한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빅터의 가슴이 또 거세게 조여들었다. 그 순진한 물음에 이상할 정도로 온 몸이 저릿해졌다.
하비가 눈치채기 전에 빅터의 손가락은 다시 부드럽게 이마를 우회했다. 그 손길에 애틋함이 더해졌다. 빅터의 목소리가 더욱 은밀해지며 하비와 점점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게 아니면 왜 여기까지 와서 같은 알파를 붙들고 있겠어.”
빅터의 주변에 널린 것이 어떻게든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오메가 귀족들이다. 그들을 떠올리며 하비는 묘한 승리감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오메가를 상대로 질투를 하다니, 최악이군.’
이런 추잡한 생각을 할 수가. 하비는 믿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이 생겨났다. 그건 작은 악마처럼 가슴의 빈틈을 비집고 올라와 빅터를 혼자 차지하라고 외쳤다.
‘무엇으로?’
하비가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빅터의 코가 거의 닿을 정도로 근접했다.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닿았다. 얼굴을 만지던 손은 언제 떠나갔을까. 간질거리던 숨소리가 어느 순간 뜨거워졌다. 빅터의 녹색 안광이 흥분으로 번들댔다.
“지금도 안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
낮게 속삭이던 빅터는 다음 순간 밑으로 훅 떨어졌다.
빅터의 눈이 커졌다. 하비의 한 손이 그의 뺨을 잡아당긴 것이다. 이미 굳은살을 넘어 세월 속에서 딱딱해진 거친 하비의 손바닥이 빅터의 뺨을 쓸었다. 한치의 머뭇댐 없이 입술로 혀가 파고들었다. 뜨거움이 한데 얽혀서 야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체중이 기울어 빅터는 저도 모르게 한 팔로 땅을 짚었다. 귓가에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스쳐 지나가고, 초승달이 구름 뒤로 숨었다. 사위가 캄캄해졌다.
빅터의 머리에 경종이 울렸다. 처음으로 하비가 먼저 키스했다.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빅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 ‘그 때’ 다. 빅터는 늙은 해적에게 호언장담 했던 자신의 목소리가 선선히 떠올랐다.
[내 칼은 충분히 날카롭고, 심장에 박을 적시만 찾고 있었어. 곧 때가 올거야.]
[스터스 경이 날 가장 믿을 때 꽂아줘야지.]
서툴지만 꽤 직설적으로 쏟아지는 키스는 하비의 성품과도 닮았다. 입술을 비스듬히 맞대면서 빅터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 기나긴 키스가 끝나고 나면, 잔인하게 말하는 거다. 이 모든 건 다 쇼였고, 널 무너뜨리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그간 했던 달콤한 말들은 전부 기만이었고, 사실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충격으로 일그러질 밤색 눈이 선명했다.
쿵, 쿵, 쿵.
빅터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과거의 임페르 해적선에 갇혀 있던 작은 아이가 복수의 말을 뱉었다.
-오늘은 하비 스터스를 추락시키기에 최고의 날이야. 그는 끔찍한 라힌 스터스의 분신이잖아. 내가 아팠던 만큼 아프게 해줘. 내가 지옥에 있는 동안 혼자만 잘 살았던, 저 단단한 심장을 부숴버려.
오랫동안 곱씹어왔던 염원이었다. 그 오랜 한이 이끄는대로 빅터는 말하려 했다.
그때, 하비가 입을 떼고 빅터의 가슴팍을 조금 밀어냈다. 얼결에 떠밀린 빅터가 상기된 하비의 얼굴을 내려보자 하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빅터는 복잡해 보였다. 그걸 보자 하비는 반대로 조금 머리가 정리되었다.
스터스 가 사람들은 혹독한 교육으로 일찍이 욕망을 거세당한다. 그리하여 오로지 스터스에 알맞은 사람으로 남게 된다.
하비는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차라리 이런 건 영영 거세당한 채로 사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른다. 욕망은, 상대의 꿈까지 묶어 버리니까.
하비는 앉아서 잔열을 가라앉힌 뒤 빅터와 마주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목적한 걸 이루면, 하고 싶었던 걸 해.”
“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난 신경쓰지 말고.”
빅터는 허겁지겁 하비의 표정을 읽었다. 희미하게 별장에서 나오는 불빛을 붙들고 살피자 애써 말하는 흔적조차 없이 말끔했다.
설마, 속내를 알아차린건가. 그리 단언하기에는 석연찮았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하비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도 차분했다.
“대신 그전에는…. 나와 어울려 주겠어?”
하비는 그 말을 웃으면서 했다. 날카로운 것이 심장을 찢기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참았다.
“무슨 말을 하는…!”
말을 하다 말고 우연히 밑을 내려다본 빅터는 그제야 알았다. 하비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손톱이 바닥을 두껍게 깐 털러그를 꽉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인내하고 있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자신을 사랑한다. 빅터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구속 하지 않고 오롯이 상대가 바라는 대로 살도록 놓아준다.
“넌 어떻게…….”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빅터가 간신히 쥐어짜듯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없나? 그건 어떻게 되는 건데?”
분명 키스할 때까지만 해도 하비는 저와 같은 욕망에 들끓는 눈이었다. 옆에 있어 달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미련이 사라지고 선선함만 남았다. 하비가 답했다.
“내가 아는 건, 바람은 바람으로 둬야 한다는 거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희망도 여전히 제자리에 두었다. 다만 꺼내지 않았을 뿐.
하비는 아까 빅터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금빛 눈썹를, 이마를 덧그렸다.
하비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강인한 눈빛이었다.
“욕심내서 그걸 억지로 붙잡아두면, 그건 더 이상 바람이 아니게 되니까.”
빅터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로선 감당하기 벅찰만큼의 무한한 신뢰였다. 무거운 진심이 또 한 번 그를 옥죄었다. 이 정도의 신뢰와 애정을 어디서 받아보았을까.
'한 번도 없었지.'
가족도 그를 버렸다. 빅터의 부모님도 결국 할아버지인 레토 바르뎀에게 안락한 생활을 박탈당할까봐 자식을 포기했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성공하고 나서는 그의 재력과 힘, 혹은 잘생긴 몸을 갈망한 자들만 나방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하비는 아니었다. 선심으로 돈을 줘도 거부하고, 원하는 것도, 요구하는 것도 없었다.
빅터는 벼락같이 깨달았다.
하비 스터스가 사라지면, 자신은 혼자가 된다.
사심없이 그를 아껴주던 유일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싫든 좋든 고목처럼 얽힌 과거의 흔적도 모조리.
구름 뒤에 가렸던 초승달이 서서히 나왔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빛이 흩뿌려지고, 하비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났다.
빅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한기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심장이 다시 조이듯이 아파왔다.
방금 내가 뭘 하려고 했지. 이런 사람에게, 케케묵은 녹슨 칼을 꽂으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은 억누르고 상대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이런 다정한 사람에게 말이다. 그에게 온전한 애정을 쏟아주고 있는 사람에게. 뭘 그리 차곡차곡 그가 서 있는 발판을 없앨 궁리나 하고 있었는지.
자각하고 나니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급기야 입을 틀어막은 빅터에게 하비가 놀라 물었다.
“왜 그러지?”
“하一….”
입에서 손을 뗀 빅터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벌써 다 잊은 건가?”
방금 전까지도 널 배신하려 했다. 까딱하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갈 뻔 했다. 빅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지. 어떤 식으로 괴롭히고, 힘들게 했는지.”
그런 사람을 너는 어떻게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지?
흔들리는 눈으로 보는 빅터를, 하비는 말없이 끌어안았다. 움찔하는 것도 잠시, 빅터는 금세 얌전해졌다.
빅터는 해적에 납치되기 전, 하비 앞에서 쓰러지는 시늉을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도 어린 하비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꼭 안아주었다. 치기 어린 장난 따위에도 그토록 진지하게 성심을 보였다.
하비가 그를 끌어안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잊은 건 아니야. 가끔 생각하면 화가 날 때도 있고.”
“그런데 왜?”
“어쩌겠어."
하비의 고백이 쑥스러운 듯 천천히 이어졌다.
"이미 좋아하게 됐는데.”
하비의 단단한 팔에 열이 오르고, 불안해 보이는 빅터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빅터의 속에서 고집처럼 남아있던 마지막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임페르 해적단의 깃발도 꺾여서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스터스 가에 대한 적의로만 살던 그 독기 품은 어린 소년까지.
그 자리를 뜨겁게 메우는 건 다름 아닌 ‘후회’였다.
빅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코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최후의 마지노선에 닿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인정하기 싫었다. 자신이 저지른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뜨거운 것이 빅터의 가슴 속에서 왈칵 치솟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하비의 등을 마주 껴안았다. 왜 몰랐을까. 오히려 하비가 없으면 곤란해지는 건, 빅터 자신이었다.
하비가 빅터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그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래도 경이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서는 아직 미안하게 생각해. 이곳이 싫겠지. 다 끝날 때까지만, 조금만 참아."
하비는 빅터가 어떤 목적이 있어 돌아왔다는 걸 알았고, 그 일이 끝나면 원래 떠날 생각이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보내주기로 했다. 올란 시에는 빅터의 끔찍한 기억과 분노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한편, 빅터는 하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겪어야 했던 일…….’
거친 해적 안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하비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그건 단순히 증오가 아니었다. 언젠가 하비를 꾀면서 빅터 자신이 가볍게 뱉은 말처럼 애정에 기반한 것임을, 이제 알고 말았다.
너무 뒤늦은 이 날에.
빅터는 으득 이를 갈았다.
미칠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하비를 다시 만났던 그 첫 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의 미래와, 현재 뿐이었다.
빅터는 하비의 뺨에 키스하며 제 표정을 숨겼다.
“나중에, 제대로 되돌려 줄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줘.”
먼 출장을 다녀오는 시간동안 혼란스러움을 정리할 짬이 날 것이다. 빅터는 그리하기로 결정했다. 해적의 잔당과 모든 것을 청산하면서, 하비와 얽혔던 왜곡된 감정까지 정리하고 올 작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비에게 했던 짓으로 스스로 고통받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 눈이 어두워 저지른 본인의 탓이니까.
빅터는 하비의 품에서 벗어나와 그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잠긴 목소리로, 하지만 장난기를 가득 담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 전에, 나와 어울려 주겠어?”
하비의 밤색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맑게 웃음 지었다.
그 뒤로 언제 옷이 벗겨졌는지, 혹은 스스로 벗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길게 누워 한데 엉겨 키스하는 사이, 빅터는 자연스럽게 하비의 뒷구멍을 손가락으로 조금씩 쑤셨다. 잘 잡힌 근육 때문에 솟아있는 하비의 어깨가 봉긋하게 솟아있다 함께 떨렸다.
“흐으…….”
하비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움찔거렸다. 키스를 하던 중 소리를 내느라 잠깐 벌어진 틈에 성긴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반응을 즐기며 빅터가 다시 한 번 메마른 구멍 안을 들쑤시려 할 때였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었다. 빅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젖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예전처럼 비웃는 게 아닌, 순수하게 놀라워하는 목소리였다. 흥건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뻑뻑하지 않을 정도로 하비의 안은 이미 젖어 있었다. 그리 말하면서 빅터는 진이 미리 준비해둔 바구니 속을 훑었다. 저 안에 얼핏 향료도 보였는데 쓸 일이 없어졌다.
‘눈치 빠른 놈.’
잠깐 머리 좋은 자신의 사용인을 칭찬하던 빅터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넘겼다. 알파끼리라도 관계를 오래 지속하다 보면 몸이 적응을 해서 약간의 분비물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을 얼핏 들었기 때문이었다.
빅터가 집게처럼 만든 손으로 유륜을 비틀고 꼬집어 올릴 때마다 하비는 어쩔 줄 모르고 부르르 떨었다. 어릴 때부터 검으로 단련된 단단한 허벅지와 허리가 잘게 떨리면서도 차근차근 열이 올랐다.
빅터는 하비가 뱉는 신음에 아픔이 섞인 것은 없는 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눈으로 연신 하비의 얼굴을 살피기도 했다. 빅터의 긴 손가락이 뒤를 마음껏 유린했다. 벌써 음란하게 젖은 소리가 났다.
찌걱찌걱!
흥분한 하비의 눈도, 뒤도 충분히 젖은 것을 확인하자 빅터가 상체를 일으켰다. 편한 자세로 해줄 생각이었다. 한 쪽 허벅지를 들어올리면서 빅터는 짐승처럼 다리 안 쪽을 길게 핥았다. 기분좋은 체향이 났다. 녹색 눈이 가늘게 늘어나며 유혹하듯 휘었다.
하비의 얼굴에 대번에 화르륵 불길이 붙었다. 야외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하지만 부끄러운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잠깐.”
애무로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하비가 같이 몸을 일으켰다. 빅터는 얼결에 잡았던 하비의 허벅지를 놓아주었다.
“이번엔 오래 나가잖나.”
“그래서?”
얼떨떨하게 되묻는 빅터의 가슴팍을 하비가 밀었다. 맨살에 닿은 하비의 까슬한 손바닥에 오한이 들어 빅터는 시키는대로 순순히 누웠다. 오늘밤은 하비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해줄 생각이었는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밤 하늘 위 샛노란 초승달이 빅터의 눈에 담겼다.
붉게 타는 것 같은 귓볼을 보이면서 그는 빅터의 위로 올라갔다. 양 팔을 짚고 아래를 보면서 하비는 민망한 듯 했지만 꿋꿋하게 말했다.
"저번에 이런 자세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아서."
“저번에 이런 자세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아서.”
빅터가 물끄러미 하비를 올려보았다. 달빛의 역광이 그늘져 하비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심장 부근을 도려내는 것처럼 쓰라렸다.
[경과 내가 그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의원실에서 볼멘소리로 했던 그 작은 투덜거림을 여태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그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는데.’
하비는 빅터가 했던 말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고 있었다. 스쳐가듯 뱉은 말까지. 쌓은 시간동안 하비와 공유했던 것들이 빅터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제 슬슬 두렵기 시작했다. 이런 자를 속여왔던 것에 대한 대가는 얼마나 클지. 이제 와서 널 벼랑으로 밀 생각이었고, 달콤한 말들로 속여왔다는 걸 절대 말할 수가 없었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다.
말이 없는 빅터를 보며 하비가 슬쩍 무안한 얼굴을 했다.
‘역시 너무 갔나.’
언젠가 빅터와 격의 없이 나누었던 대화 중에 체위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하비는 질겁하며 입에 담기도 싫어했지만, 빅터가 그런 하비를 놀리듯 좋아하는 체위를 줄줄 읊은 것이다.
그게 생각나서 없는 용기도 짜내어서 행동해본 건데, 반응이 없으니 부끄러움이 두 배가 되었다. 아까 전부터 묘하게 말수가 적어지고 어두워진 빅터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는데, 안 하던 행동이라 역시.
“…싫은 건가?”
놀란 빅터가 황급히 일어나려는 하비를 붙들었다.
“아니. 너무 좋아서 그런 거였어.”
“혹시 무거울 것 같아서 그런 거면 안하는 걸로…….”
빅터는 냉큼 말허리를 잘랐다.
“전혀. 내 몸을 봐. 이 정돈 괜찮아.”
상처투성이지만 볼륨이 두껍고 하비보다 전체적으로 큰 체격이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났다. 곳곳에 어딘가에 찔린 상처나 날카로운 것에 벤 것 같은 흉터가 자잘하게 보였고, 하비는 저도 모르게 눈길을 빼앗겼다. 빅터가 눈치채고는 손으로 큰 흉터 부위를 가렸다.
“몸의 상처를 보라는 건 아니었고.”
겨우 눈을 떼어낸 하비가 말했다.
“정말이지?”
“하여간 의심 많다니까.”
빅터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비를 끌어당겨 배 위로 올렸다. 묵직한 근육 감이 느껴졌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빅터의 장담대로 그는 하비보다 체격이 좋았고, 우성 알파 특유의 강철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어지러움조차 느끼지 않는 몸이었으니까.
“됐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어.”
미심쩍게 보던 하비도 인정했다. 보통 체격 좋은 성인 남자가 배 위로 올라가면 짧게 헛숨이라도 내쉬어야 할텐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빅터가 자신의 배 위에서 발기한 하비의 성기를 보며 기분좋은 듯 말했다.
“벌써 흥분한 거야?”
하비는 빅터의 웃는 얼굴을 외면하며 뒤를 보았다. 엉덩이를 찌르는 존재감을 느끼며 조금 후회가 들었다.
‘괜한 짓을 한 건가.’
이건, 커도 너무 컸다. 바로 넣을 수 있을까. 지금 와서 돌이킬 수 없음을 알기에 하비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조용히 반박할 뿐이었다.
“그건 경도 마찬가지 같은데.”
피식 웃은 빅터가 흥분이 섞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넣어봐. 다치지 않게.”
이걸 직접 넣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다. 하비는 몽둥이같이 굵고 비현실적으로 큰 빅터의 성기를 손으로 잡았다. 한 손에 잡기 버거울 정도로 크고 굉장히 뜨거웠다. 손바닥에 맺힌 땀 때문에 자꾸만 미끌거렸지만 잘 벌려진 구멍 안으로 천천히 밀어넣었다.
하비의 눈 앞에 별이 번쩍였다. 참으려 해도 짧은 신음이 튀어나갔다.
“읏!”
저항하는 구멍 안 주름을 밀고 뭉툭하면서도 단단한 살덩어리가 열었다. 허공에 떠 있는 하비의 두꺼운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하비의 눈은 차마 아래를 보지 못하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곧게 파인 하비의 등줄기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빅터의 배 위로 떨어졌다.
지켜보던 빅터가 도와주려는 지 상체를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하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게 보이는데도 말이다.
결국 한숨 지으며 빅터가 도로 누웠다. 저 고집은 못 말린다.
“서두르지마. 시간은 많아.”
꾸역꾸역 절반쯤 넣었을까. 결국 다 넣지 못한 대신 하비는 조금 몸을 움직였다. 손으로 빅터의 단단한 복근을 짚고 위아래로 엉덩이를 움직이는 동안, 하비의 팔도 구멍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부들거렸다.
“으…….”
하비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자꾸만 깨물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목울대가 긴장으로 일렁였다.
그러자 다시 반쯤 상체를 일으킨 빅터가 다물린 하비의 입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열었다. 짭짤한 맛이 났다. 입 속을 휘젓는 빅터의 손가락도 구멍을 꿰뚫고 있는 그것처럼 굵고, 길고, 단단했다.
빅터가 눈웃음 지으며 하비의 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입술 물지도 말고.”
하비가 흔들거리는 눈으로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태까지 들었던 어떤 빅터의 목소리보다 진중하게 들리기도 했다. 뭔가가 그의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킨 걸까. 부디 좋은 방향이길 바라면서 하비는 다시 꿈틀거리는 빅터의 성기를 품었다.
“하아…, 윽, 큽…!”
하비가 허리를 조금씩 움직이자 말라가던 뒷물이 다시 새어나오고, 구멍을 적시더니 내부에 박힌 빅터의 것까지 함께 적셨다. 외설적인 소리가 포도밭의 바람 소리에 섞여 날아갔다.
찌걱, 찌걱!
입 속에 박힌 빅터의 손가락 때문에 신음과 버무려져 나온 타액이 길게 묻어나왔다. 하비의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조금 고였다. 뒤를 꿰뚫는 것이 절반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버거웠다.
푹! 푸욱!
하얗고 탄탄한 하비의 몸과 이어진 기둥으로 애액이 흘러내렸다. 하비가 하얗고 볼륨있는 엉덩이를 내릴 때마다 꽉 짜인 허벅지가 조였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시선은 빅터를 보고 있지 못 했다.
이를 지켜보던 빅터는 달아오른 녹색 눈으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하비가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이걸론 한참 부족했다.
‘돌아버리겠네.’
빅터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당장이라도 배를 쳐 올려 끝까지 박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에게 갚아나가야 할 마음의 짐이 있으니까.
욕구를 억누른 빅터가 하비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고는 가슴을 만졌다. 손이 가자 바로 갈색 유륜이 빳빳하게 날을 세웠다. 빅터는 묘하게 초조한 마음도 들었다.
‘왜 보지 않는 거야.’
수치 때문에 보지 않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빅터는 저 고집스러운 얼굴을 제대로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통통해진 그것을 꽉 잡아 늘리자 하비가 날카로운 쾌감에 놀라 허리를 숙였다. 그 바람에 빅터와 눈이 마주쳤다. 녹색 눈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스터스 경. 나를 봐 줘.”
당당하게 요구해도 될텐데, 왠지 그 목소리는 애처롭게 들렸다. 하비는 이상함에 그런 빅터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도, 찢어질 것 같은 구멍의 고통도 어느덧 잊었다.
사사삭--
그때 포도밭에서 작은 짐승 때문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하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빅터의 손이 더 빨랐다. 그가 하비의 목뒤를 잡고 끌어당기며 다시 한 번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마를 맞대고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쪽이야, 하비.”
하비의 눈 속에 잔잔한 파도가 쳤다. 빅터에게서 불린 이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갓 태어난 기분이었다. 더 듣고 싶었다. 친구인 반 로투스에게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로지 그에게 속한 듯한 즐거운 착각에 빠졌다.
이를 눈치챈 빅터가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하비.”
그는 하비의 가슴에 손바닥을 펴서 얹었다. 큰 진동이 단단한 근육 너머로 전해졌다. 고동치듯 하비의 심장이 힘차게 응답했다.
고작 이름 불러주는 정도로 이렇게 기뻐하는데. 빅터는 괴로웠다.
‘난 대체 무슨 생각을…….’
이 손으로 저 기쁜 얼굴을 없앨 궁리만 하고 있었다니. 하비가 사라지고 나면 가장 힘들 사람은 그 자신이면서, 견딜 자신도 없으면서 분풀이 같은 단편적인 복수에만 눈이 멀었다. 아니, 아예 눈 가리고 차마 제 마음을 돌아볼 용기도 내지 못 했다.
‘제기랄.’
심장이 박살난다는 게 이런 기분일 것이다. 왠지 계속 말하다가 무너질 것 같아서 빅터는 입술부터 밀어붙였다. 하비와 이마가 거의 닿은 채로 고개를 틀어 깊게 키스했다.
높게 솟은 콧날이 창과 방패처럼 서로 부딪쳤다. 중간에 조금씩 벌어지는 입 속으로 혀가 살아있는 것처럼 달려들었다. 입 사이로 틈이 생길 때 하비가 힘겹게 숨을 뱉었다. 너무 격렬했다.
“흐으…….”
힘들게 빅터의 성기를 품고 있던 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남은 기둥까지 수월하게 구멍으로 들어갔다. 하비는 그것도 모를 정도로 몰입했다. 하비의 턱 끝에 맺혔던 둥근 물방울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땀인지 생리적인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하비는 아까 전 빅터가 갑자기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을 때를 기억했다.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리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아팠다. 빅터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알고 싶지만 묻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입을 뗀 빅터가 하비의 팔을 잡고 미소지었다.
“잘 했어. 이제 움직여도 돼.”
그제야 하비는 빅터의 성기가 끝까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배꼽 안까지 묵직하게 차지한 성기에 하비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빅터는 하비의 허리를 꽉 잡았다. 힘이 들어가자 빅터의 두터운 팔에 힘줄이 생겼다.
“처음 한 번만 도와주지.”
날렵하면서도 알알이 근육이 박힌 허리가 강제로 들렸다가 사정없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퍽!
거세게 치고 들어오는 거대한 기둥이 끝까지 박혔다. 하비는 머릿속을 하얗게 메우는 쾌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온 몸이 벌겋게 단풍처럼 붉게 물들었다. 바닥을 짚은 무릎에도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진한 쾌락에 하비는 절로 고개를 숙어졌다.
“허억…!”
짙어지는 하비의 밤색 눈동자를 보며 빅터는 만족한 듯 웃었다.
“몇 번 움직이다 보면 적응될 거야.”
하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움직였다. 아까보다는 대범한 몸짓이었다.
퍼억! 푹! 퍽!
기둥을 품고 위로 솟구쳤다가 체중을 실어 떨어뜨렸다. 찔끔거리며 나오던 뒷물이 점점 양을 달리해 사방으로 튀었다. 하비의 머릿속에 쾌감을 직접 꽂아 넣는 것처럼 뜨거운 열이 번졌다.
그럴 때마다 빅터의 그림 같은 얼굴에도 일그러지며 열이 올랐다. 하비도 이를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저 위아래로 움직이는 단조로운 행동이었지만 빅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고양감이 만족으로 변해 하비는 달아오른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내 쾌감의 한계를 넘어 다시 눈가가 크게 일그러졌다.
“윽, 흐읏, 아…!”
빅터에게서 자신과 같은 흥분을 발견하자 참았던 신음이 막무가내로 터져나갔다. 하비는 오메가처럼 뒤를 뚫리며 울부짖고 뒷물을 흘렸다. 머리가 고장난 것 같았다. 온통 벌건 쾌감만이 차지했다.
하비의 얼굴을 살피던 빅터가 욕지거리를 뱉더니 하비를 뒤로 밀었다. 이성을 잃은 얼굴이었다. 그대로 등이 닿도록 눕힌 채 빅터는 본격적으로 구멍을 마음껏 처박았다.
퍽! 퍼억! 퍽!
젖은 소리가 요란하게 밤공기를 갈랐다. 아까와는 압도적으로 다른 소리였다. 하비의 큰 체격이 러그 위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격렬하게 흔들렸다. 등이 연신 쏠렸지만 푹신한 털 위라 상처를 내지는 않았다.
버겁게 밀고 들어오는 빅터의 성기는 난폭한 기세로 뱃 속을 꿰뚫었다. 그 와중에도 하비가 잘 느끼는 곳을 정확하게 파악해 찌르는 통에 하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헉, 아, 으윽... , 아!”
입을 모으고 벌릴 때마다 신음이 작아졌다가 커졌다. 이제 터져나오는 신음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하비는 휘몰아치는 쾌감에 덜덜 떨었다. 단단한 하비의 턱이 자연스럽게 들리고 그 위로 빅터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섹스보다 더 야한 혀놀림이 파고들었다.
“으응…, 읏, 윽, 으븝……!”
신음이 높아질수록 빅터는 하비의 길고 탄탄한 다리를 양 옆으로 더 찢었다. 그 사이로 잔뜩 발기해 흉흉한 성기를 거세게 밀어 넣었다. 무서운 기세로 나오던 애액이 바깥으로 마구 튀어나갔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하비는 한 손으로 짧은 러그 털을 쥐어뜯었다. 빅터에게 박히는 곳에서 불이 붙고, 그 불길이 몸으로, 머릿속으로 옮겨붙는 것 같았다. 머리가 뜨겁게 빙빙 돌았다.
하비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견디기 힘든 극한의 쾌락이었다.
“크흣, 아, 아윽!, 흐으……!”
번뜩번뜩 하비의 눈 앞에 벼락이 쳤다. 부풀어 오른 하비의 성기에서 정액이 흘렀다. 사정한 것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옆으로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가 허공에서 요동쳤다. 힘겨운 나머지 빅터의 등을 감자 삽입이 더 깊어졌다. 하비가 애원하듯 말했다.
“천천히…, 그만……!”
너무 격렬한 섹스에 하비의 손바닥이 밀어낼 것처럼 빅터의 가슴팍을 대었지만 그뿐이었다. 그 손은 곧 빅터의 너른 등으로 옮겨가 긴 손톱자국을 냈다. 단정하게 정리한 손톱이라 상처 말고 붉은 흔적만 남겼다.
박히던 가운데 갑자기 큰 한기가 찾아오더니 하비는 눈을 부릅 뜨고 부르르 떨었다. 한기는 몰아치듯이 그의 허리부터 빠르게 올라와 온 몸을 잠식했다. 밤색 눈이 눈물로 젖었다.
“큿……!”
감당하기 힘든 드라이 오르가슴이었다. 몸 전체가 벌벌 떨리고 자칫 기절할 것 같았다. 허벅지 와 허리 곳곳에도 붉은 열기가 오를 정도였다. 어느새 하비의 손에서 러그 털이 한 줌 뜯겨 나갔다.
빅터도 한차례 떨더니 붉어진 얼굴로 정액을 토해냈다. 많은 양의 묽은 정액이 하비의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퍼억!
빅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박고는 깊숙이 쑤셔 넣었다. 정액이 안으로 흡수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빅터가 하비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대면서 나른한 숨을 뱉었다. 만족감과 후회가 교차되었다.
“하아…….”
빅터는 정신을 놓았던 것이 내심 한탄스러웠다. 오늘은 정말 부드럽게 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만드니까.’
빅터는 괜히 하비 탓을 하며 열이 오른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하비의 뺨에 키스했다. 이제 이 사람을 놓아두고 얼마 후에 먼 곳을 가야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새삼 힘들었다.
‘어떻게 버티지.’
멀어지는 상상만 해도 심장이 크게 조여들었다. 빅터는 숨을 고르고 있는 하비의 옆에 털썩 누웠다. 멀리 팽개쳐진 담요를 가져와 하비의 몸 위로 덮어주며 빅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나?”
“…그래.”
간신히 대답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하비는 지쳐 있었다. 팔로 뜨거운 눈가를 누르고 있는 하비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뿌듯한 만족감이 있었다.
하비는 빅터에게 좋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럴 여유도, 체면도 없었다.
섹스로 누군가를 안정시켜 주고 위로해줄 수 있다니. 멋진 일이었다.
빅터는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지만 하비는 그의 심경이 어떤지 얼추 느끼고 있었다. 말없이 맞춰줄 뿐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갑자기 괴로워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빅터가 하비의 속내를 짚기라도 한 듯 먼저 물어왔다.
“좋았어?”
하비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토록 정신없이 휩쓸린 섹스는 오랜만이었다. 빅터는 안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나만 미친 줄 알았잖아.”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불이 붙었던 시간이 지나가자 그 사이를 점차 평온함이 메웠다. 그리고 생각과 사유가 흘러들었다.
무너져가는 백색 성을 바로잡으려 처절하게 발버둥치는, 그것을 위해 제 몸 하나 아끼지 않는 남자. 그리고 모든 걸 없애버리고 새로 짓기 위해 돌아온 남자.
잃지 않으려 하는 자와, 파괴하려 하는 자. 상반된 관계였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를 아니까.
원래는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빅터는 왜인지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원래 계획이 뭐였는지 알아?”
고요한 눈빛이 물었다. 빅터는 팔로 하비를 감싸안고 그의 반듯한 이마에 입맞춤했다. 입술이 머물다가 사라진 자리를 하비가 가만히 매만졌다. 가슴 속이 따스한 뭔가로 채워졌다.
옅은 미소가 그려지는 하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빅터가 말했다.
“바르뎀 가의 성을 이어받으면 가장 질 나쁜 방법으로 버릴 생각이었어. 가문의 명패를 진창에 패대기치고, 나만의 왕국을 따로 건설할 계획이었지.”
사실 그 위에 스터스가의 명패까지 덤으로 얹어 패대기칠 생각이었지만, 그 계획은 이제 접어야 할 것 같다. 빅터의 유년시절을 처참하게 유린했던 주범 라힌 스터스, 그의 아들은 이미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 대가를 치렀다.
마음을 일찍 깨달았다면 거기서 멈췄을 것이다. 곧 번뜩이는 직감이 맞이한 황금 같은 기회가 주어졌고, 하비에게 만회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도 알았다. 무려 3달이 넘도록.
하지만 멍청하게도 자신의 상태를 자각 못했다는 이유로 그 아까운 시간들을 날려 버렸다.
하비는 왜인지 다시 우울해지는 빅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피식 웃었다. 머리 뒤로 깔린 빅터의 단단하고 굵은 팔이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정말 경다운 발상이군.”
영광으로 듣겠다며 웃은 빅터가 다시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이제 와서 버리라고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무엇을 버리라는 것인지 하비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빅터에게는 하비가 새로 밀려올 조류에 금방이라도 쓸려가버릴 모래 방패처럼 보였다. 빅터의 짐작처럼 하비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버리지 못하니까 끌어안고 내 대에서 끊을 생각이다. 내가 죽고 나면 이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거야.”
하비는 언제나 가문의 풍속처럼 내려왔던 요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일찍 죽었다. 다 지나치게 혹독한, 사람의 수명까지 깎아 먹는 스터스가 전통의 교육방식 때문이었다.
더는 물려주기 싫었다. 자신의 삶조차 챙기지 못한 채 명예에만 기대어 사는 것이 끔찍했다. 여태 하비 자신조차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차마 가문을 버리지 못 했다.
지금도 버릴 자신은 없었다. 그러니 언제부턴가는 서서히, 스스로 가라앉도록 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하비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가문은 명맥을 잊지 못하도록.
가문의 현재는 지키되, 미래는 손을 놓는 쪽을 택한 것이다. 빅터와 부대끼면서 점점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하비의 상념을 깬 것은 화가 난 듯한 빅터의 목소리였다.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 경.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거 아닌가?”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하비는 아무 말 없이 잠잠하게 빅터의 말을 들었다. 빅터가 말하려는 게 이것이 다가 아님을 직감해서였다.
빅터가 낮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넌 인간이야. 빌어먹을 신이 아니라고. 그런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어. 더럽게도 살고, 때론 피도 묻히고 살아.”
현실적이면서도 다정한 조언이 이어졌다.
“고작 티끌 몇 개 때문에 무조건 끝내려고만 하지마. 처음부터 완벽한 과정이란 없으니까.”
빅터는 지금 순간, 그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스터스가에 묻은 티끌 정도는, 제대로 해명하면 다들 눈감아 줄거라고. 그동안 로열 가드가 한 일이 얼만데.”
지옥같은 임페르 해적선에서의 과거가 티끌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직접 겪은 본인의 입에서 말이다.
빅터는 진상 발표 후 사람들이 하비에게 던질 돌을 잠깐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조용히 묻을 사람도 있겠지만, 더 괘씸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도시를 수호하는 방패 가문으로서 기능하며 대대로 명문 기사를 배출해 온 스터스 가였다. 그만큼 그들의 위선을 가장 증오한 것이 빅터 본인이었다.
빅터에겐 스터스가에 대한 또 다른 의혹도 존재했다. 도덕적 결벽성을 위시하여 그들이 저질렀을 과오가 과연, 라힌 스터스 밖에 없을까? 선대를 뒤져보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빅터는 이를 철저히 함구했다. 오로지 하비를 위해서였다.
그런 의혹을 하비가 알았다간, 모든 믿음이 깨진 그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테니까.
“……그런가.”
하비가 허탈하게 웃었다. 빅터의 말에는 힘이 있고,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하비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빅터의 원동력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실제로 빅터의 말은 하비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빚은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 날이 반드시 온다. 그때 지금의 빅터의 말이 든든한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
하비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물새를 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고맙다.”
그런데 빅터는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하비의 옆모습을 보았다.
“앞으로 나한텐 고맙단 소린 금지야.”
“왜?”
빅터가 쓰린 얼굴로 하비의 손가락을 잡고 짧게 키스했다.
“미안할 일이 많아서. 고맙단 말을 들으면 내가 더 힘들어.”
또 알지 못할 소리를 한다. 고개를 갸웃하는 하비를 보며 빅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작게 빛나던 별이 길게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또 누군가의 생명이 져버린 걸까.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비가 말했다.
“무사히 다녀와. 정리하겠다는 것도 잘 마무리하고.”
빅터는 슬쩍 불안한 눈길을 던졌다. 이럴 땐 하비의 위치나 외모가 조금만 덜 했으면 하는 원망이 들었다. 그는 너무 잘났으니까. 빅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올테니 한눈 팔지말고 기다려. 지분대는 놈이 있으면 바로 벤이나 나스타에게 넘겨.”
진지한 걱정에 하비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쓸데없는 걱정 말라며 대꾸하려던 하비는 멈칫하더니 잠깐 생각했다. 그리곤 옷을 대충 걸치듯 입었다.
“어디 가?”
“가지고 올 것이 있어서.”
근처에 있는 별장으로 빠르게 걸어간 하비가 놓고 온 겉옷, 푸르지앙을 이잡듯 뒤졌다.
곧 주머니 속에서 녹색 보석을 간직한 황금 브로치가 튀어나왔다. 목 주변의 작은 프릴 칼라를 어색하게 쓰다듬던 하비는 그것을 들고 빅터에게 돌아갔다.
대체 뭘 들고 오려는지 기웃대던 빅터는 하비의 손에 들린 브로치를 보고 입을 벌렸다.
“이거, 설마…….”
진실을 말할 때가 되었다. 하비는 당시엔 자존심과 당혹감이 버무러진 가운데 빅터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중요한 친구의 생일 선물보다 우선해서 눈에 들어온 게 빅터와 꼭 닮은 이 브로치였노라고.
“사실은 우연찮게 시장에서 발견한 건데. 경이 생각나더군. 얼결에 산 거야. 젤가 때문에 산 게 아니었어.”
하비가 우연을 거듭 강조하며 솔직하게 말하자 빅터는 할 말을 잃고 건네 받은 브로치를 한참이나 보았다. 무척이나 심란해졌다.
뚫어질 것처럼 보던 빅터가 브로치를 꽉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모르고 하비에게 한 짓이 뭐였는지, 지금도 생생했다.
하비는 멋쩍게 한숨 짓는 빅터를 보았다. 돈이 넘쳐나는 빅터이니 고작 몇 푼짜리 브로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금방 얼굴이 뜨거워지고, 민망해졌다.
“마음에 안 드나? 하긴, 비싼 건 아니었으니까.”
빅터는 버려도 된다는 하비의 뒷말에 펄쩍 뛰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몇 번이나 말을 반복하던 빅터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어딘가로 점이 되어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미안하고, 허탈했다. 뭔가에 눈 멀었던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당시에 하비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그딴 유치한 투기를 부렸을 리가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 자신은 이미 하비를 마음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빅터는 그리 짐작했다. 그가 어느새 체온으로 따뜻해진 브로치를 가만히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모르는 것도 죄라고 했지.”
“뭐?”
“아무튼, 알았어. 이게 그 젤가라는 놈 때문에 산 게 아니란 말이지.”
괜히 준 건가. 하비는 조금 후회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자꾸 하길래 위안이 될까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준 것이다. 그런데 빅터는 위안이 되기는커녕 더욱 괴로워 보였다.
떨떠름했지만 하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 나 때문에……, 산 거였다고.”
말을 하다 말고 빅터는 다시 울컥 올라오는 신물에 브로치를 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칠 것 같았다.
하비에게 한 짓들이 곱절이 되어 돌아왔다. 이런 사람에게 굴욕을 주고, 그가 아끼는 사람 앞에서 그런 수모를 주었다. 몸 어딘가를 칼로 파내는 것처럼 쓰렸다.
빅터는 손으로 얼굴을 반 쪽 덮은 채 말했다. 음울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왜 몰랐을까. 받을 필요 없는 원망까지 전부 제 탓이라며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그땐 차마 몰랐다.
뒤늦은 후회가 그의 속을 찢을 것처럼 되돌아왔다. 마치 저주처럼 돌아온 죄책감은 빅터를 더욱 괴롭게 했다.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입가에는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사과받으려고 준 건 아니야.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까. 다만 오해는 풀고 싶었어.”
빅터는 깔끔하게 말하는 하비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참으로 변함없는 사람이다. 한결 같이 진실만 말하고, 정도를 걷고자 한다.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새까만 속내를 가지고 돌아온 자신이, 과연.
숨이 막혔다. 빅터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힘을 주어 말했다.
“처음 받은 선물이네.”
이 브로치를 볼 때마다 하비에게 한 짓을 떠올릴 것이다. 빅터는 하비가 자신을 떠올려 샀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그 사실 자체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내색 않고 웃었다. 지금 하비의 얼굴이 걱정스러워 보이니까. 저 말끔한 밤색 눈이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은 요동쳤다.
“잘 간직하겠어. 고마워.”
웃음을 되찾자 하비가 그제야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브로치에 대한 이야기를 괜히 한 건지, 속으로만 간직할 것을, 그리 자책하는 것도 다 보였다.
브로치를 높이 던졌다가 받으며 빅터가 씨익 웃었다. 아마 긴긴 출장 동안 마음이 많이 아플 것 같다. 그래도 웃었다.
“돌아올 때 나도 답례 선물을 가지고 오지.”
자신이 웃어야, 하비도 웃으니까.
-- 검은 종소리 --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뱉어낼 것처럼 우중충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며칠째 비를 내릴 시늉만 하고 있었다.
총괄 외교관이 출장을 가서, 외교관들이 모인 집무실에서는 수석 외교관인 하비 스터스와 몇몇 보좌 외교관들만이 있었다.
외무부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하비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문득 손을 넣다가 알았다. 언제나 한 켠을 차지하던 물건이 주머니에서 사라지고, 허전해진 것을.
빅터를 닮은 녹색 눈 보석이 박힌 황금 브로치. 그걸 건네주었다. 하비는 어느새 집중력을 잃고 빅터의 생각에 빠졌다.
‘그때 표정이 너무 안 좋았는데. 괜찮은가.’
브로치를 보았을 때 빅터의 얼굴은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 했다. 브로치의 진상을 이야기해주었을 때도, 그것을 건네줄 때도.
그저 걱정거리를 없애줄 요량으로 준 것이었는데, 빅터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았다.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속내를 감추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굳이 파헤치지 않았다.
‘잘 가고 있을까.’
지금쯤 망망대해 위에서 정리하고 온다는 일을 구상하고 있겠지.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지만, 인생의 큰 축을 바꾸고 오는 일이라고만 언급해 주었다.
하비는 빈 주머니를 만지작대다가 허전함을 그에 대한 생각으로 달랬다. 빅터가 이곳에 없어서인지 자꾸 옛날 생각이 났다.
스터스가에 잘보이려고 한 빅터의 할아버지, 레토 바르뎀은 어린 빅터를 비롯한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스터스가가 주최하는 조촐한 클럽에 데려오곤 했다. 눈도장을 찍으려는 수작이 훤히 보였지만, 그런 사람들이야 널렸으니 하비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이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빅터가 꾀병을 부리고, 괴팍한 장난을 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때도 빅터는 반항적인 녹색 눈에, 산만하기 그지 없는 소년이었다. 호기심도 많았다. 순수한 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악동에 가까웠다.
빅터는 하비의 주변을 집요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그 장난’ 이후로는 쉽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 했다.
라힌 스터스는 대외적인 웃음을 보이면서도 어린 하비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경고했다.
[저 천박한 상인놈의 손자와는 절대 가까이 하지 마라. 저런 것과 어울리면 스터스가의 격이 떨어지니까. 혹여 병이라도 옮으면 어떡하냔 말이다.]
빅터가 하비에게 거짓을 동반한 큰 장난을 친 후에는, 어린 빅터를 보는 라힌 스터스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클럽에 오는 귀족들의 자제를 눈으로 훑으면서 라힌 스터스가 말했다.
[쓸만한 미동이 없더구나. 너에게 도움이 되는 아이여야 할텐데, 그런 아이가 없어.]
왠지 빅터와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아서 넌지시 그의 이름을 말해본 적도 있었지만, 라힌 스터스는 어림도 없다며 바로 기각했다.
어린 하비는 크게 실망했다.
‘그럴 거면 왜 내게 의사를 물어보시는 건지.’
일찍이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다른 형제도 일찍 죽었다.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는 학대에 가까운 엄격한 교육을 강요했으며, 늙은 집사는 그런 라힌 스터스의 수족이었다.
이 너른 저택에서 하비가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터스가의 백색 저택에서 파티가 열렸다. 검소한 것으로 알려진 라힌 스터스였고, 성대한 파티는 아니지만 꽤 괜찮은 자리였다. 선대이자 하비의 할아버지인 바론 스터스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파티였다.
그때 하비는 온 사람들에게 인사만 하고 몸이 안 좋다며 따로 방에 들어가 있었다. 실제 검술 수련을 빙자한 정신 교육을 호되게 받은 다음 날이라 온 몸에 피멍이 들어 있기도 했다.
[나머지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면 밖으로 나올 생각은 말거라.]
라힌 스터스의 엄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하비는 욱신거리는 팔의 상처를 손으로 꾹 누르며 펜을 들었다. 그런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는 듯한, 바닥을 밟는 소리. 쥐는 아니었다.
끼익-, 끼이익--.
작은 발소리였지만 선명했다. 어린 하비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누구냐.]
문을 벌컥 열자 그 앞에는 금발 머리에 장난스러운 녹색 눈을 한 앳된 소년이 서 있었다. 빅터 바르뎀이었다.
[벌써 들켰네.]
이내 멋쩍게 뒷머리를 만지며 그는 변명투로 말했다.
[저택이 너무 넓어서 길을 잃었어.]
한 눈에 거짓말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넘어가 주었다. 하비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경고했다. 그나마 하비의 방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안 쪽에 위치해서 다행이었다.
[여기 있으면 안 돼. 어른들이 아시면 그냥 안 넘어갈거야.]
빅터는 듣는둥 마는둥하며 하비의 방 안을 기웃댔다. 서적이 잔뜩 쌓인 정갈한 방이었으며, 검술 교본서 같은 것도 상당수 보였다. 어린 아이의 방이라고 하기엔 너무 삭막했다.
[네가 재미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빅터는 그 방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하비의 일상을 짐작하는 것 같았다. 하비는 일찍부터 숨막히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어른들의 세계를 더듬대고 살았다.
어린 빅터가 가엾다는 눈길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나 동경 가득한 눈빛이었는데, 이질적인 것이 섞여들었다. 이상하게도, 하비는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사랑만 받는 귀족 도련님이면 뭐해. 이런 따분하고 재미없는 생활이라니. 나라면 진작에 나가떨어졌을 거야.]
한참 투덜댄 빅터는 고민없이 하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밖으로 나갈래? 여긴 너무 숨막혀. 파티도 재미 없고.]
작고 그을린, 상처투성이인 손이었다. 야외에서 신나게 놀다가 긁힌 것 같았다. 활기차고 건강해 보였다.
이 손을 잡아도 될까.
어린 하비가 고민하던 끝에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도련님?]
늙은 집사의 목소리였다. 하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빅터를 보내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하비는 잡으려던 손을 거두며 그가 늙은 집사를 향해 돌아보았다.
[곧 들어갈 거야. 이 아이는 길을 잃었으니 잘 안내해 줘.]
빅터는 눈만 동그랗게 뜨다가 아쉬운 듯 떠나는 하비의 하얀 손을 보았다. 잡을 수 있었는데.
[같이 나가기로 한 건?]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전엔 못 나가.]
발끈한 빅터가 항의하며 나섰다.
[그런 게 어딨……!]
늙은 집사의 사나운 눈초리가 쏘아졌다. 빅터는 그 기세에 눌려 떨떠름하게 말을 거두었다.
[……어. 아, 그래. 알았다고!]
그런데 얼핏 보이는 하비의 목 뒤로 시커먼 멍자국이 보였다. 놀란 빅터가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하비는 이미 방문을 닫은 후였다.
[잠깐. 확인 할 게 있어. 잠시만!]
닫은 방문 뒤로 빅터가 반항하는 소리가 들렸다. 늙은 집사는 빅터를 강제로 끌고 사라졌다.
문 바로 뒤에 선 하비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잠시지만, 자유를 맛보는 줄 알았다. 어린 하비가 피식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나하고 정말 안 어울려.]
그 뒤로 빅터가 해적에게 잡혀 죽었다는 소식만 전해졌다. 뜻모를 절망이 하비를 덮쳤다.
이제 자신을 이 저택에서 꺼내줄 자는 없을 것이다.
영원히.
그때였다.
하비는 밖에서 들리는 처연한 울음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디서?’
거리에서 여자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비가 고개를 들어 창가를 보았다. 아이를 찾는 어미의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 왔다.
며칠 동안 벌써 몇 번째 듣는 곡소리인지. 하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전염병인가?”
하비의 옆에 서서 이로비나 섬에 대한 자료를 넘겨 주던 남자가 대답해 주었다.
“그건 아닌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하비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자는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요즘 유행하는 소매가 짧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샘 바리스로, 하비를 오랫동안 가장 가까이서 보필했던 외교원이었다.
하비는 심각해진 얼굴로 사안을 짚었다.
“이렇게 사람이 모인 도시에서는 며칠이면 다 퍼져. 바르뎀 경이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많은 인구가 밀접한 큰 도시에 전염병이 한 번 돌고 나면 궤멸하는 일이 잦았다. 상층부에서 무엇보다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안이었다.
시의원의 부재 동안 생긴 일은 결과적으로 자리를 비운 의원의 책임이다. 전염병 같은 큰 일이 일어난다면 실각은 기본이고, 황제로부터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중죄를 받을 수도 있었다.
하비는 그걸 염려하고 있었다.
“어쨌든 걱정했던 일이 아니라니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하비에게 문득 샘이 빙긋 웃었다. 다음 자료를 넘겨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수석 외교관님은 많이 변하셨군요.”
하비가 서류에서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내가?”
늘 딱딱하기만 하던 모습에서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큰 시류에 의견을 맡기고 반대 의견이 있어도 삼키던 묵묵함도 깨어졌다.
원래 하비는 굵직한 사안에 대해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직언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온갖 반대와 상부의 강압적인 명령에 지치다 보니 서서히 제 목소리를 잃어갔다. 곧은 소리는 언제나 듣기에는 좋지 않으니까.
그런데 최근 들어 다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열정이 살아나 보였다. 게다가 유연성까지 덤으로 생겼다.
샘이 흐뭇하게 말했다.
“역시 바르뎀 경의 영향일까요?”
빅터의 이름에 결국 하비는 서류를 치워버리고 샘을 똑바로 올려보았다.
“무슨 소리야.”
“열정하면 바르뎀 경이죠. 이번 이로비나 섬 건도 바르뎀 경이 밀어줬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니까요.”
“그건…….”
하비가 이마를 짚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나.”
어쩐지. 이로비나 섬을 노리는 슬루인 제국의 외교관이 몸 로비가 어쩌고, 정정당당하게 어쩌고를 연신 흘리더랬다. 빅터가 밀어줬다는 것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직접 손댄 것은 없지만 정보를 준 건 사실이니까.
샘은 하비가 소문에 대해 자세히 물어볼까봐 서둘러 다음 안건을 이야기했다. 현재 이로비나 섬의 매입 성공이 코 앞이었다.
“이로비나 섬을 사이에 두고 슬루인 제국 측에서 바짝 독이 올라 있어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로비나 섬 주변을 배회하던 해적은 갑자기 자취를 감춰서 행적을 알 수가 없답니다. 묘한 녀석들이에요.”
“돈을 요구하는 건?”
“간혹 있긴 합니다만, 액수가 크지는 않습니다. 잔인하기로는 임페르 해적단 뺨친다던데, 막상 소문만 무성하지 목격자도 별로 없습니다.”
“그것도 이상하군.”
해적의 소지가 파악되어야 이로비나 섬을 성공적으로 매입하더라도 안전한 항로를 확보할 수 있다. 섬을 매입한들, 해적에게 방해받아 그곳에서 나오는 매장 자원을 본국으로 운반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하비가 문득 떠오르는 이름에 대해 물었다. 슬루인 제국이란 말을 들으니 생각이 났다.
“참, 젤가는?”
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녀석, 경께 엄청난 민폐를 끼쳤다며 얼굴도 비치지 않으려 하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난 날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고, 하비는 아찔해졌다.
‘다 지난 것이긴 하지만…….’
젤가는 첩자 교육을 혹독히 받은 사람답게 정신력이 강하지만 하비에 한해서는 마음이 한없이 여렸다. 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하비가 굴욕 당하는 것을 봐야 했다.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그 뒤로 따로 만나서 달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도 젤가는 죄송하다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빅터를 저주하며 증오하는 말도 간간이 뱉었다.
간간이 연락을 주고 받던 중, 젤가는 어느 순간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연락도 뚝 끊겼다. 그를 생각하자 또 위가 살살 아파왔다.
미간을 잔뜩 구기며 배를 만지는 하비를 샘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또 아프세요?”
“금방 괜찮아져. 신경쓰지마.”
말은 그리했지만 하비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갈수록 통증의 강도가 거세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이쑤시개로 쑤시는 정도였지만, 갈수록 칼로 후비는 것처럼 날카롭고 상당한 통증으로 변질되었다.
의사는 일에 신경을 너무 써서 위가 아픈 것이라 경고했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쓰고 살 수가 있는지.
결국 아플 때마다 하비는 처방받은 약을 한웅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진통제가 포함된 성분이었다.
약을 먹자 통증이 조금 가시는 듯 했지만 이번엔 아랫배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이건 대체 뭘까. 속이 지나치게 메스꺼웠다.
왠지 모를 찜찜함을 안고 하비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 날 밤, 내릴 듯 말 듯 하던 구름이 닫았던 수문을 열었다.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쿠르르릉!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일대를 모두 먹을 것처럼 휩쓸었다. 바람도 거세게 불어 창문을 부술 기세로 뒤흔들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스터스가의 거대한 하얀 저택으로 어두운 색의 우비를 입은 남자가 찾아들었다.
하비를 보필하는 젊은 집사가 그를 응접실로 데려왔다. 젖은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집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른 사용인에게 흔적을 닦도록 지시했다.
우비를 벗어서 사용인에게 넘긴 그는 금발 머리에 옅은 녹색 눈을 지닌 용모 단정한 청년이었다.
틀어박혀 자료를 보고 있던 하비가 소식을 듣고 응접실로 나오다 흠칫 놀랐다.
“젤가?”
확연히 깊어진 눈매에 마음 고생이 엿보였다. 거뭇한 것이 눈 밑으로 늘어져 있고, 무언가에 대한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려한 미청년이었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젤가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존의를 표한 뒤, 하비에게 고했다.
“스터스 경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스터스 경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둑한 눈매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하비가 우선 그를 응접실 테이블에 앉혔다. 따뜻한 차를 내오라 지시한 하비는 젤가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보다 그동안 어디서 지낸 거지? 연락 한 번 없더니.”
한기 때문에 하얗게 질렸던 젤가의 손끝과 부르튼 입술이 점점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하비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혈색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젤가는 머뭇대다가 겨우 답변했다.
“일이 많았습니다.”
말이 평소보다 짧았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비는 그가 제대로 운을 뗄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따뜻한 차가 한 잔 비워질 때쯤, 젤가가 본론을 말했다.
“입수한 정보가 좀 있는데, 알고 나니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무슨 정보?”
“앞뒤 가리지 않고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숨을 고른 젤가가 천천히 말했다.
“생각해 보니 하나는 경이 그다지 반길 만한 화제가 아니군요. 오히려 실망하실 수도 있고……. 듣는 것은 경께 맡기겠습니다. 듣고 싶지 않으시면, 안 들으셔도 됩니다.”
젤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하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들어야 할 것이라면, 들어야 한다는 것이 하비의 원칙이었다.
“급한 것부터 듣지.”
젤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론을 꺼내들었다.
“이로비나 섬은 시작일 뿐입니다.”
“무슨 말이지?”
“요즘 그 섬 근처에 출몰한다는 해적 말입니다. 슬루인 제국에서 고용한 해적입니다.”
하비가 쥔 찻잔이 흔들렸다. 그의 눈이 커진 채 젤가를 응시했다.
“그 해적들은 예전 임페르 해적단처럼 돈에 목숨걸지도 않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비도 알았다. 해적이 돈에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그건 다른 뚜렷한 목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슬루인 제국에서 탈출할 때쯤 제가 본 것도 있고……. 그 놈들은 영해를 넓히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괜찮은 다음 식민지도 물색하고 있었고요.”
하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가장 가까이 인접한 우리 나라가 거슬리겠어.”
“그겁니다. 그런데 우린 이미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여력이 없고, 군을 동원하기에도 마땅치 않죠. 우리 내부 사정도 훤히 알고 있으니, 해적으로 손 쓰려 하는 걸겁니다. 어차피 우리가 대대적인 해적 소탕 인력을 동원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을테니까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해적을 금전적으로 지원해주면 그들이 알아서 방해를 해준다. 얼마나 편리한 체계인지.
하지만 하비는 피식 웃으며 조금 식은 찻물을 다시 입에 머금었다. 이렇게 훼방을 놓을수록, 더욱 불타올랐다. 끝까지 갈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로비나 섬의 영해까지 빼앗기면, 하비의 나라는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로비나 섬은 중요한 거점이 될 것이다.
“들을수록 절대 포기할 수 없군.”
젤가는 예상한 듯 밝아진 얼굴로 헤헤 웃었다.
“역시, 그렇죠? 스터스 경 답다니까요.”
“해적과 슬루인 제국이 내통하는 물리적인 증거는 있나?”
“거기까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알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하비의 칭찬에 젤가는 쑥스러이 얼굴을 붉혔다. 젤가가 어릴 때부터 봐서인가, 여전히 아이같은 면이 있었다.
하비가 그를 보며 마주 웃더니 다음 건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다음 안건은?”
갑자기 젤가의 웃는 얼굴이 사라졌다. 그가 한참을 머뭇대더니 빤히 쳐다보는 하비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간신히 말했다.
“현 시의원이자 바르뎀 가의 차기 가주인 빅터 바르뎀 경에 관한 내용입니다.”
찻잔을 짚던 하비의 손이 멈칫거렸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하비를 피하듯 젤가는 다른 곳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현재 경의 연인이기도 하죠. 이건 제 사적인 감정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되도록 미루고 싶었습니다.”
빅터를 닮은, 아니 완전히 다른 녹색 눈동자가 고요히 하비를 보았다. 빅터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매서운 기운이 서려있는 데 반해, 젤가의 것은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눈색깔도 빅터가 훨씬 진했다.
하비는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나 다른데, 빅터는 어떻게 브로치가 젤가의 것이라고 단정 지은 건지.
짧은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소중한 듯 브로치를 손에서 놓지 않던 빅터가 떠올랐다.
[정말, 나 주는 거 맞지?]
몇 번이나 묻기도 했다. 첫 선물이 보잘 것 없어 민망했지만 빅터는 연신 웃으며 때가 탈까 차마 옷에 달지도 못 했다.
하비는 그때를 생각하며 뜻모를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괜찮을 것이다. 그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을 만반의 준비를 했다.
“……듣겠어.”
하비가 준비된 듯 하자 젤가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최대한 감정은 내려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만요. 바르뎀 경이 죽도록 밉지만, 저는 스터스 경이 상처받는 게 더 싫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도 서론이 긴지 모르겠다. 하비는 젤가가 시간을 끌수록 불안해졌다. 젤가는 망설임 끝에 천천히 말했다.
“혹시 최근 경의 저택에서 사람이 죽은 적이 있습니까.”
하비가 눈을 크게 치떴다. 가슴 속에 무거운 것이 쿵, 내려앉았다.
“그건…어떻게…?”
하비는 고독하게 죽어갔던 늙은 회계사가 바로 떠올랐다. 젤가는 누군지는 모르는 듯 했다.
“바르뎀 경이 지시내린 겁니다. 자연사로 위장하라는 명이었죠.”
하비가 이마를 짚으며 테이블만 하염없이 쏘아보았다. 아니라고 했다. 분명, 죽이지 않았다고.
[혹시, 경이 죽인 건 아니겠지.]
[그럴 이유가 없는 걸 가장 잘 알텐데. 왜 내가 했다고 생각하지?]
거짓말을 한 건가.
깨닫는 순간 하비는 위가 미친 듯이 당겼다. 단순한 아픔을 넘어 격통이 일었다. 하비가 이상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아픈 곳을 손으로 쥐어뜯었다. 식은땀이 후두둑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젤가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스터스 경? 괜찮으세요?”
멀리서 보던 집사가 급히 뛰어왔다. 그는 하비가 자주 먹는 약통과 물을 내밀었다.
“또 입니까?”
집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네는 알약을 하비는 떨리는 손으로 쥐었다. 물을 마시고 털어넣는 것이 익숙해 보여서, 젤가는 그가 자주 이런다는 것을 알았다.
아닌게 아니라, 통증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었다. 강도는 더 높게, 주기는 자주, 그 사이 시간은 짧게.
하비는 할아버지도 같은 증상으로 평생 고생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순간 마른 기침이 튀어나왔다.
“쿨럭!”
하비가 얼른 집사가 건넨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간혹 기침을 하긴 했지만, 뜨거운 것이 역류하는 것 같아서였다. 하얀 손수건에 붉은 것이 묻어나왔다.
‘피?’
양이 많진 않지만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다. 하비는 빠르게 입술을 마저 닦은 뒤 피가 붉게 묻은 부위는 손으로 쥐어 숨겼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약이 빨리 듣는군.”
아무렇지 않게 피가 묻지 않은 나머지 부분으로 식은땀을 닦아냈다. 각혈을 했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눈 앞에 있다.
‘정말 네가 그 분을 죽였다는 건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육체적인 통증은 점점 잦아들고 있었지만, 마음의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하…….”
이건 정말 아니길 바랐는데. 그 건만큼은 빅터가 아니었으면 했다. 믿고 있던 것들이, 그가 빅터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들이, 조금씩 어긋났다.
하지만 더 크게 흔들리기 전에 하비는 마음을 다잡았다. 실망하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납득가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그런 실마리조차 잡으려고 하는 자신이 비겁하고 한심해 보였지만 하비는 아직 빅터를 믿고 싶었다.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믿지 못한다면, 이제 믿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간신히 통증이 진정되자 하비는 대화를 재개했다. 젤가가 오늘은 이만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말렸다. 하지만 하비는 끝까지 듣겠다고 했다. 집사는 염려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시 멀찍이 떨어져 대기했다.
“왜 죽인 거지? 이유도 알고 있나?”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려던 젤가는 하비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털어놓았다.
“거기까진 잘 모르겠지만, 뭔가를 숨기려 했다는 건 확실합니다.”
“숨기려는 것?”
“증거 인멸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더 이상한 건 그걸 없앤 건….”
아까보단 조금 가까이에서 대기 중인 집사를 흘끗대더니 젤가가 갑자기 소리를 확 낮추었다. 하비에게만 들리도록 말이다.
“경의 집사입니다. 저 자가 어떤 종이를 태웠다고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튀어나오자 하비는 숨조차 멈추었다. 이젠 놀랄 힘도 없었다.
“…확실한가?”
“네. 믿을만한 정보통에서 얻은 것이니까요.”
하비는 눈만 돌려 집사를 흘끗 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등을 세우고 정자세로 서 있었다. 하비의 시선을 느끼자 멀리서도 고개를 돌리고 의향을 묻는 것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턱짓을 한 하비가 다시 젤가를 보았다. 젤가는 가까이 했던 얼굴을 뒤로 물리며 안타까워했다. 이런 소식을 전하고 싶던 것이 아닌데 말이다.
하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늙은 회계사를 죽인 건 빅터지만, 그가 남긴 의지를 불태운 건 집사라. 둘 사이에 연결된 고리가 있는 것 같은데, 하비는 그게 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뭘 숨기려고?’
하비 스터스가 알아선 안 되는 것. 하비는 두 사람의 목적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둘 다 하비가 믿고, 그 믿음을 돌려주려는 사람들이란 것까지 생각이 미쳤다.
진실의 은폐.
아마도 하비를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것…….’
그게 뭘까.
늙은 회계사가 남긴 것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집사가 태워버린 그 종이. 하비는 회계사가 죽은 직후 장례식에 관해 논할 때 집사가 보인 반응을 기억했다.
[주인님, 대체 저 자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입니까? 전대에 수고를 한 사람은 맞지만 ‘그 일’에 일조한…!]
[그 일?]
늙은 회계사가 있던 장소에서 서랍이 열려 있기도 했다. 거기서 꺼낸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겼던 하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남아있을지도 모를 것을 찾아 늙은 회계사가 죽었던 그 방으로 다시 가 볼 참이었다.
“좋은 정보 고맙다. 수고했어. 허기가 진다면 여기서 먹고 가도 좋고.”
“아뇨. 괜찮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경은 부디 건강을 잘 챙기세요.”
젤가가 부드럽게 거절하며 함께 일어났다. 뭔가 먹을 기분도 아니었고, 하비도 그래 보였다.
“저……, 스터스 경.”
젤가는 어두운 눈으로 하비를 보았다. 그가 하비의 안색을 살피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바르뎀 경을 너무 믿지 마세요.”
하비는 고개조차 끄덕일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것을 물을 뿐이었다.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지?”
이번에도 머뭇대던 젤가가 순순히 털어놓았다.
“반 로투스 경으로부터…였습니다.”
***
하비는 다음 날 아침, 외무부로 가기 전에 늙은 회계사를 묻은 곳에 먼저 들렀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하비의 손에 편지 한 장이 구겨진 채로 쥐어져 있었다.
오늘 아침에 하비에게 도착한 빅터의 편지였다. 하지만 도저히 지금 정신 상태로는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도 멀쩡할 수 있지.’
생각해 보면 빅터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죄없는 사람을 죽여도 아무 감정도 없는, 잔인한 남자였다. 해적에 붙들리더니, 이미 해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런 거짓말을 어떻게…….’
하비가 편지를 꾸깃 쥐었다. 다정한 말들에 취해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동안, 빅터는 저택에 있던 회계사를 죽였다. 참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하비는 잠 한 숨 이루지 못 했다. 정보의 출처가 친우인 반 로투스 경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모르는 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하비는 심각한 얼굴로 걷다가 발길을 우뚝 멈췄다. 목적지에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뭐야."
있어야 할 장소에 팻말이 없었다. 가장 저렴한 지대에 묻어야 했고, 이름을 적은 작은 팻말이나마 꽂아뒀는데 그것조차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한 하비가 관리인을 불렀다. 꾀죄죄한 몰골의 수염 난 남자가 하품을 하며 불려왔다. 하비를 발견하곤 재빨리 품행을 단정히 하긴 했지만, 술냄새도 풀풀 풍겼다.
“여기 묻혀있던 것은 이장했습니다.”
시체를 물건처럼 지칭하는 것에 불쾌해진 하비가 미간을 구겼다.
“어디로? 누가 한 거지?”
“시의원님이요. 저기로 옮겼을 겁니다.”
관리인이 손가락으로 가장 비싼 지대를 가리켰다.
죽여놓고, 그래도 일말의 죄책감은 들었나.
하비는 씁쓸하게 웃고는 이장했다는 장소로 걸어갔다. 꽤 걸어가야 했다. 일반 시민 치고는 부자들이나 묻히는 양지 바른 곳이었다.
비 온 뒤 쌀쌀한 날씨여서 사람은 적었다. 비석 앞에는 매일 관리하는 건지 물이 뿌려진 생생한 생화도 앞에 놓여 있었다. 작은 꽃잎으로 풍성한 노란 꽃이었다.
“여기 있었나. 모르는 사이 좋은 곳으로 옮겼어.”
하비는 그 앞에 앉아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듯 말을 건넸다. 비석도 질 좋은 암석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쌓인 먼지 하나 없지만 괜히 손으로 쓸어 보며 하비가 계속 말했다.
“용서해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봐주지 않겠어?”
용서해달라는 것이 자신을 지칭하는 건지, 빅터를 말하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여태 바쁘다는 핑계로 잘 들여다보지 않다가 무덤이 옮겨진 것도 모르고, 이제 와서 살인자를 용서해 달라니. 가당치도 않다.
물기 젖은 비석은 더없이 차가웠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비석을 더듬는 손길이 떨렸다. 하비는 알고 있었다. 이런 건 자기 위안이나 다름없었다.
살인자라도, 그래도, 같이 있고 싶은 것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비는 비석 앞에 조용히 앉았다. 지독한 갈등으로 속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답을 안다. 빅터를 미워하고 싶어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차곡차곡 함께 쌓았던 시간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쳤다.
그동안 부대꼈던 단단한 살결만큼, 그에 대한 마음도 더욱 견고하게 쌓였다.
[스터스 경. 나를 봐 줘.]
[이쪽이야, 하비.]
[넌 인간이야. 빌어먹을 신이 아니라고. 그런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어. 더럽게도 살고, 때론 피도 묻히고 살아.]
[고작 티끌 몇 개 때문에 무조건 끝내려고만 하지마. 처음부터 완벽한 과정이란 없으니까.]
[하비.]
정갈한 자세로 한참을 앉아있던 하비가 빅터의 편지를 펼쳤다. 읽지도 않았던 편지가 지금 와서 조금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이름 모를 항구에서 보낸 편지였다.
-하비에게.
내가 편지를 쓰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옆에서 나스타가 비웃고 있지만 근신 2주 정도면 조용해 질테니 괜찮아. 레나 녀석과 또 떨어져야 한다고 입이 나와있으니.
지금쯤 일을 하고 있겠지? 매입 관련 외교 법률이나 뭔가에 위배되는 게 없는지 샅샅이 살피고 있겠지만, 적당히 해. 요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니까. 걱정되서 하는 소리야.
가끔 기침하던 건 어때? 기침에는 배즙과 꿀물이 좋다더군. 준비시켜 놨으니까 곧 집무실로 갈 거야. 성실한 벤이 맡았으니 중간에 가로챌 일도 없을 테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벤에게 말해. 다 해결될 테니까. 너에 대한 일은 벤에게 모두 위임했어.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순조로워서 예상보다 빨리 끝날 것 같다. 그래야만 해. 꼭 그렇게 되도록 할 거야.
모든 게 끝나고 빨리 네 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벌써 보고 싶다.
건강히 잘 지내.
곧 보지.
방금 전까지 화가 나 있었는데, 그 분노가 눈녹듯이 사라졌다. 한때 스터스가에서 일했던 자를 죽인 남자다. 이래선 안되는 걸 알면서도, 편지를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왜 그랬어.’
편지에 대고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하비는 곱게 접어 가만히 이마에 대었다. 멀리서 빅터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날려오는 듯했다.
-벌써 보고 싶다.
이마에 오르던 열이 편지의 차가운 촉감에 시원해졌다. 그럴수록 하비는 메마른 눈가를 봉투에 비볐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뭔가를 내보내고 싶었다. 그의 속엔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이 부유했다.
누군가에게 마음껏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자유조차, 스터스가가 빼앗아 간 것 같았다. 하비의 눈가에 짙은 원망이 스몄다.
'대체 왜.'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익숙한 어지러움이 가실 때까지 하비는 비석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젤가가 떠날 때 마지막으로 던진 말도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젤가는 정말로 하비를 걱정하고 있었다.
[믿지 못할 자에게 경의 심장을 맡기지 마세요.]
젤가는 빅터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말로는 사적인 감정으로 그에 대해 파헤쳤다고는 하지만, 젤가가 감정적인 이유로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님을 하비는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젤가도, 나에게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건가.’
집사도, 젤가도, 빅터도 모두가 마지막까지 하비가 알지 않았으면 하는 것.
빅터가 떠나기 전에 의미심장하게 남긴 말이, 혹시 뭔가에 대한 전조는 아닐까.
[나중에, 제대로 되돌려 줄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줘.]
제대로 돌려준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비는 허전한 주머니 속을 습관처럼 쥐면서 혼란에 빠졌다. 바로 반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망설였다.
젤가가 빅터와 관련한 정보를 얻은 곳이 반 로투스다. 어쩌면 반 로투스가 고의적으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젤가가 뛰어난 첩자라 해도, 로투스가의 정보가 그리 쉽게 나올 리 없으니까.
‘반……. 무슨 생각인 거야.’
예상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반 로투스의 이름이 하비의 가슴을 불안하게 울렸다. 빅터의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그 이름이, 알 수 없는 연관성이 못내 찜찜했다.
언제 따로 자리를 만들어 단 둘이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하비는 두려움이 앞섰다.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벌써 5일이 지나버렸다. 일에 치인 것도 컸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렀고, 어느 날 외교부로 레나가 찾아왔다. 감색 모자를 쓰고 온 그는 모자를 벗고 하비에게 인사를 한 뒤 귀여운 얼굴을 드러냈다.
“스터스 경, 안녕하세요! 일은 다 끝나셨나요?”
언제 봐도 활기찬 사람이다. 지나칠 정도로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하비의 자리가 순간 밝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레나의 기운은 환했다. 남아서 잔업을 하고 있던 외교관들이 빙긋 웃었고, 하비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여긴 어쩐 일이지?”
헤헤거리며 웃던 레나는 곧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나스타가 없으니 심심해서……. 그 넓은 집에 혼자 계속 있는 것도 할 짓이 못되더라고요.”
빅터가 나스타를 장기 출장에 데려간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 중 하비에게 해를 가하려 한 것이 컸다. 어렴풋이 이유를 짐작하고 있던 하비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레나의 기분을 풀어 주기로 했다.
어차피 곧 퇴근할 예정이었고, 아직 총괄외교관이 복귀하지 않아 술자리도 없었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함께 가지.”
“그래도 될까요? 그치만… 바쁘실텐데…….”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도 순수한 기쁨이 뽀얀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웃음 지은 하비가 레나를 데리고 근처에서 이름 난 음식점에 데려갔다. 특이한 소스를 버무려서 숙성시킨 스테이크가 나오는 곳으로, 예약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물론 하비는 외교부 직원의 특권을 이용했지만. 그가 외교부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써 보는 혜택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자 대번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하비가 앳되어 보이는 외모에 귀여운 인상을 한 오메가 남자와 함께 들어오자 온갖 상상을 하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이를 눈치챈 레나가 불만스럽게 볼을 퉁퉁 부풀렸다.
“참 나, 저는 의원님의 집사라구요. 바르뎀 가의 어엿한…!”
화를 내려던 레나는 괜찮다는 의미의 눈짓을 주는 하비 때문에 간신히 추슬렀다. 하비는 섣부른 대응은 더 큰 화를 부른다는 것을 수 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비의 만류에도 레나는 수군대는 사람들을 일일이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얼굴 기억해 뒀다가 다 이를거야!’
툴툴대던 것도 잠시, 레나는 코스로 차려지는 음식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 뜨고 놀라워했다. 손을 슬쩍 올리다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있는 하비를 보고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
“스터스 경은 안 드세요?”
“난 입맛이 없어서. 괜찮으니 먼저 들어.”
계속 눈치를 보던 레나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테이크를 보며 침만 삼키다가 결국 먼저 손을 뻗었다. 한 두점 씩 조금씩 떼어먹던 레나는 나중에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제 몫의 스테이크를 금방 끝내버렸다.
지켜보던 하비는 흐뭇한 얼굴로 자신의 몫까지 덜어주었다. 안 먹어도 배부른 게 이런 기분이구나 했다.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 레나같은 관계로 지냈을 지도 모른다. 스터스 가의 그 혹독한 교육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 버렸지만.
금세 빵빵해진 배를 두들기며 식사를 마친 레나가 냉수를 입에 머금었다. 그는 이내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비가 많이 편해져서인 것도 있고, 요즘 스트레스가 극한에 다다른 탓도 있었다.
“하아……. 이렇게 멀리 떨어진 적은 없었는데, 너무 힘들어요. 벤도 요새 뭐하는지 계속 바쁘고, 진은 다른 일로 멀리 갔고. 다른 사람들도 요새 다들 바빠서 대화할 짬도 없다니까요? 물론 저도 많이 바쁘지만…….”
하비는 짝과 떨어진 오메가가 이런 것인가 잠시 생각했다.
‘알파인 나스타와 각인 상대라고 했던가.’
힘들 만도 했다. 빅터가 돌아오면 앞으론 괜찮으니 레나와 나스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주라고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포도주가 들어가기 시작하자 레나는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술에 약한 듯 하여 자제시켰지만 그 사이 벌써 취해버렸는지 레나가 딸꾹질을 했다.
“우리 주인님은 바보에요. 스터스 경이 안타까워요.”
주정 아닌 주정을 귀여운 듯 보던 하비가 가볍게 웃었다.
“어째서?”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주변 사람은 다 아는데! 아무리 이야기해줘도 들어먹지도 않고, 진짜 바보에요. 제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빅터에 대한 답답함을 성토하던 레나는 멈칫했다. 물끄러미 보고 있는 하비의 시선에 조금 정신을 차리고 묘한 말을 얼버무렸다.
“물론 우리 주인님도 살기 위해서 그랬겠지만…….”
하비가 빅터를 미워하는 것도, 레나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빅터를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남은 소스까지 삭삭 긁어먹은 레나가 어렵게 포크를 내려놓은 뒤 말했다.
“그런 거 있잖아요. 가장 큰 에너지는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에서 나온다고요.”
서두가 긴 것은 어려운 것을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비는 묵묵히 레나를 기다려 주었고, 이에 용기를 얻은 그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그 지옥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스터스경을 미워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야 힘든 현실을 버티기 더 좋을테니까.”
듣고 있던 하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빅터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애정을 증오로 착각했다고.
[오랫동안 한 사람만을 생각하다 보면 이 감정이 뭐가 뭔지도 헷갈리거든. 증오인지, 사랑인지.]
[아마 그동안은 내가 착각했나 보지.]
사실 일찍이 레나가 하비를 괴롭히던 빅터를 설득하기 위해 해준 말이었지만, 이후 빅터는 오히려 그걸 역이용했다. 하비의 마음을 얻은 뒤 절망으로 밀어버리기 위해, 레나의 말을 써먹은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하비는 레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빅터를 이해하려 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하비는 레나를 새삼스럽게 보며 알고 있는 것을 물었다. 레나는 심리 공부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바르뎀 경에게 아카데미 후원을 받고 있다고 했나?”
시간이 없어서 야간 수업만 잠깐 듣고 오는 것이 다지만, 그래도 레나한테는 큰 힘이었다. 아까까지 욕하던 것도 잊고, 레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빅터를 옹호했다.
“네. 주인님이 돈을 다 대주세요. 저는 열심히 집안일 하고, 공부만 하라고 하셨어요. 좋은 분이세요.”
부리는 아랫사람에게 이토록 신뢰를 받고 있는 자라면,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본인이 아끼는 자에 한해서지만.’
그가 죽였던 자가 자꾸 눈 앞을 아른거렸다. 다시 복잡해지는 하비의 심경을 모른 채 레나는 한동안 빅터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심각해진 표정을 보고 레나가 다시 슬슬 눈치를 보았다.
“스터스 경은 안 힘드세요?”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하비가 흠칫거렸다.
“음? 뭐가.”
“그게, 저……. 주인님과 떨어져 있는 게 안 힘드시냐구요. 저는 나스타와 하루만 떨어져도 정말, 많이, 무지하게 힘들거든요.”
힐끗 하비의 눈을 본 레나가 양 손을 내저었다.
“물론 두 분은 알파끼리시니 그런 본능적인 힘듦은 없겠지만요! 마음은 그러시지 않을까, 제맘대로 억측을 해봤어요.”
레나가 주절주절 말을 뱉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정신없이 바쁜 하비를 보니 그런 말도 사치인 듯 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하비의 입에서 떨어졌다.
“힘들어.”
“역시…, 어어? 네?”
한숨을 폭 쉬던 레나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복기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비는 온화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 속에 쓸쓸함도, 분명 엿보였다.
하비가 스테이크와 함께 나왔던 포도주로 마른 목을 축였다. 그리고 레나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듯 다시 말했다.
“나도, 힘들어.”
그런 사람 심란하게 하는 편지나 보내고, 빨리 오겠다는 말을 전한 것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가니까.
일로 온 정신을 다 옮김으로써 간신히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시시때때로 원래 브로치가 있었던 허전한 주머니를 확인하고, 그것이 빅터에게 갔다는 것을 상기했다. 물건이 제 주인을 찾아간 것을 안도하면서도, 그가 저지른 악행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런데도 보고 싶다니.’
하비의 마음은 솔직하게 빅터를 지목하고 있었다. 네가 가야 할 곳은 저기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곳만을 가리켰다.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으니 초조하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된 하비의 얼굴을 레나가 안쓰러운 듯 보았다. 묘한 동질감에 젖어 두 사람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나는 입술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냈다. 술기운이 조금 가신 얼굴이었다. 그가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공부를 시작한 건 저 스스로와 나스타를 치유하기 위함이 제일 컸지만요. 언젠가부턴 주인님도 낫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바르뎀 경을…? 어디가 안 좋은 건가?”
하비가 놀라 묻자 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육체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괜찮으세요. 주인님은 스터스 경을 만나고 나서부터 많이 좋아지셨어요. 원랜 불안정한 분이었거든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였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비는 숨을 죽이고 레나의 뒷말을 들었다.
“한참 심할 땐 환각도 보고, 환청도 듣고……. 불면증은 항상 있었고요. 물론 지금은 그런 증상도 말끔히 사라졌어요.”
걱정스럽게 찌푸려졌던 하비의 미간이 천천히 펴졌다.
“…다행이군.”
악몽을 자주 꾸는 것 같기는 했다. 짧은 휴가를 떠날 때도 마차 안에서 끙끙대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하비는 작게 한숨지었다. 하긴, 빅터가 겪은 것들은 조금 알았을 뿐인데 어떻게 버텼는 지 신기한 것들 투성이었다.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하비가 심란해 하는 동안 마지막 코스 요리가 나왔다. 입가심을 할 수 있는 산뜻한 과일 샤베트와 달달한 푸딩이었다.
하비는 제 몫을 레나에게 천천히 밀었다. 어차피 먹지 않는 것들이었다.
“감사합니다!”
한껏 좋아하던 레나가 하비를 눈짓하면서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경을 힘들게 한 걸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현재의 주인님을 봐주세요.”
주인님은 어쩔 수 없는 바보니까요. 그리 덧붙인 레나가 씨익 웃었다.
하비도 아까보다는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레나의 밝음이 옮겨온 것인지, 마음 속에서 불편하게 응어리졌던 것들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하던 것들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하비는 확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 노력해 보지.”
하지만 하비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가 ‘노력해 본다’ 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한 가득 물면서 레나가 행복하게 웃었다.
“저는 스터스 경이 정말로 좋아요!”
하비도 마주보며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빅터가 돌아오면 물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괜찮을 것 같았다.
평화로운 항구였다. 줄이 얼기설기 매인 배들이 잔잔한 파돗결에 출렁이고, 상선들이 범선과 섞여 있었다.
배에서 물건을 내리지 않고 배 위에서 물품을 파는 상인도 많았는데, 빅터는 그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빅터의 금발이 빛을 받아 연신 반짝였다. 편한 복장으로 입은 상의에 단추 대신 녹색 보석이 크게 달린 황금빛 브로치가 인상적이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으며 지치지도 않고 배 사이를 잘도 돌아다니는 빅터를, 나스타가 열심히 뒤쫓았다.
“호오. 다음 투자는 제약 상회 쪽인 건가요, 주인님?”
빅터는 잔뜩 집중한 얼굴로 한 매대에 늘어져 있는 이름 모를 것들을 보고 있었다. 동양에서 건너온 것이라 하는데, 흙이 아직도 뿌리 끝에 붙어 있었다. ‘삼’ 이라는 것이라 들었다.
“무슨 말이야.”
“여기 올 때부터 계속 약재만 들여다 보고 있잖아요.”
“동양 쪽에서 건너온 약재들이 효능이 좋대서. 그 이상한 명의도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의술을 배웠다고 했고.”
알 수 없는 소릴 중얼거린 빅터가 좋은 생각이라며 나스타를 휙 돌아보았다.
“네말대로 제약 상회도 나쁘지 않겠어. 아예 해상로를 뚫어놨으니 보급도 쉬울 테고. 아, 동인도 회사인지 뭔지를 만든다고 끼라고 하던데 지금이라도 이야길 해야 하나.”
안그래도 운영하는 것이 많아 귀찮아서 거절했는데, 동양국과 직통 라인이 만들어 지는 것이면 좋은 제안이다.
‘문제는 비율인데.’
빅터가 머릿속으로 돈을 굴리고 있는 사이 나스타가 출렁대는 갑판 위로 털썩 걸터 앉았다.
“아오, 정말!”
그러더니 나스타는 괴로워하며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찰랑대던 검은 머리는 금방 산발이 되었다. 벌개진 눈으로 그녀가 항의했다.
“그나저나 우리 언제 집으로 돌아가요! 미치겠네!”
레나를 보고 싶어서 저러는 것을 다 알기에 빅터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빅터가 대꾸도 않자 나스타는 음산하게 계속 중얼거렸다.
“바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제 해산물이라면 도로 바다로 던져버리고 싶다니까요. 흑흑, 레나가 해주는 산양 고기가 먹고 싶어…….”
나스타의 투덜거림을 자동으로 거르고 있던 빅터는 단어 하나에 꽂혀 멈칫했다.
짧은 휴가를 하루 다녀왔을 때, 하비가 해산물을 못 먹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뒤적거리다 식사를 끝냈을 때, 빅터는 온 몸의 핏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제대로 못 먹는 것이 이렇게 가슴 시린 일인지 그때야 알았다.
‘해산물이 역시 별로였나.’
끊임없이 약이 될 만한걸 찾는 것도, 스터스가의 짧은 수명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다. 본능에 가깝게 약재를 뒤지던 빅터는 순간 한숨을 크게 터뜨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서였다.
“하아…….”
맞은편에 있던 상인은 자신이 뭔가 실수한 줄 알고 움찔거렸지만, 빅터는 아예 신경쓰고 있지도 않았다.
이쯤되니 빅터는 정말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하비 스터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된 것일까.
아주 간단한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하비를 굴복시키려고 애쓰던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그가 정말로 사라졌을 때를 생각해 보았을 뿐이었다.
눈 앞에서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언제나 진심만을 돌려주려 하는 남자가 다신 벗어나지 못할 절망에 빠져 자신을 증오한다면.
그러다가 상심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그건 빅터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이 진중해졌다.
‘내가 바라는 건…….’
그때였다. 바다의 갈매기가 날아와 빅터의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날의 물새 같았다. 하비와 배 위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느꼈던 뭉근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해적에게 떠밀려 상어한테 죽을 뻔 한 것을 말하자 놀라면서도 미안해 하는 얼굴, 씁쓸한 표정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또렷하게 보였다.
하비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더 이상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앞장서서 하비를 짓밟았지만, 이제는 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가슴에 매달린 브로치가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요동치는 마음을, 믿어도 되는 건가.’
단순한 변덕은 아닐까. 변한 것을 믿어도 되나. 빅터가 고민하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빅터는 입을 열어 지시했다.
“여기 있는 약재들, 전부 사겠어.”
“예?! 엄청 비싼건데요. 이걸 전부?”
빅터는 두 번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주저앚아 있던 나스타가 벌떡 일어나더니 크고 묵직한 주머니를 상인에게 던졌다.
“자, 여기.”
허겁지겁 주머니를 열어 확인해 본 상인이 깜짝 놀라 나스타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보았다.
“헉! 이, 이게 다 금입니까?”
어쩐지 어젯밤 꿈에 비늘이 노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나타난다 했다. 나스타가 한 쪽 눈을 찡긋하고 떠났다.
“응. 깨물어봐, 진짜야.”
사파이어 같은 보석도 섞여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하던 상인은 횡재했다며 금을 세게 깨물어 보았다.
“악!”
진짜였다.
그런 식으로 근방의 약재를 쓸고 다니던 빅터는 부둣가에 있는 작고 초라한 집시의 점집을 보았다. 해적들이 워낙 이런 미신에 매달리다 보니 빅터도 그들과 함께 끌려가 강제로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딱히 믿은 적은 없었다. 늘 심드렁하기만 했다.
빅터는 늘 자신을 믿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신뢰하는 건 ‘돈의 힘’ 만이 유일했다.
그러나 그날따라 어떤 알 수 없는 인력에 끌리듯, 빅터는 스스럼없이 낡은 점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스타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대기했다.
바닥까지 끌리는 가닥가닥 잘린 천을 들고 들어가니 낡은 외곽만큼 늙은 집시 하나가 앉아 있었다.
달랑 테이블 하나와 의자, 은은하게 밝히는 등불이 전부인 곳이었다. 바닥도 깨끗하지 못했지만, 빅터는 개의치 않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무엇 때문에 오신 건지요, 잘생긴 손님?”
말없이 빅터가 허리에 찬 작은 주머니 하나를 테이블로 던졌다. 꽤 묵직한 것을 확인한 늙은 집시는 클클 웃으며 멋대로 카드를 꺼냈다. 때묻은 카드를 휙휙 섞어 펼치더니 늙은 집시가 알아서 해석했다.
“마음이 혼탁하시군요. 금전운을 물어보실 분은 아닌 것 같고…, 연애운은……, 이런. 최악이군요. 유감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점괘마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빅터가 골치아픈 듯 미간을 구겼다. 팔짱을 끼고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전혀 가망이 없나?”
“가망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 선생님 하시기 나름입니다.”
돈을 던져주기 전보다 호칭이 훨씬 격상했다. 하지만 빅터는 불만이었다. 이래서 점 보러 오지 않는 거다. 누가 해도 다 할 수 있는 말만 늘어놓고 있으니까.
뭔가에 잠시 홀린 게 분명했다. 주절주절 그 뒤로 빅터의 개인 신상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다 추상적인 것들이고 유추할 수 있는 내용 뿐이었다.
빅터는 찜찜한 마음을 안고 일어났다. 그런데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늙은 집시가 툭 내던지듯 말했다.
“살아있는 건 변하는 거지요. 진실한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이미 죽은 게 변할 리 있겠습니까?”
뒤돌아선 빅터가 벼락 맞은 듯 흠칫 멈춰섰다.
“선생님의 마음도 죽은 게 아니라 살아있어서 변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마음이 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겁니다. 너무 혼란스러워 할 것 없다, 이 말입니다.”
“뭐?”
놀란 빅터가 휙 돌아보자 늙은 집시는 이미 빅터는 안중에도 없고 받은 돈주머니만 희희낙락 살피고 있었다.
'살아 있는 마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빅터는 집시의 말을 곱씹으며 낡은 천막을 걸어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스타가 졸졸 따라가며 빅터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폈다.
“주인님, 좋은 말 들었나봐. 나도 저기 가봐도 돼요? 잘 보나?”
빅터는 피식대며 웃고 있었다. 뭔가를 내려놓은 듯, 몹시 홀가분해 보였다.
***
반은 초조하게 벽에 걸린 시계만 보았다. 병자의 기운이 가득한 방에서, 그의 아버지는 지금도 서서히 죽음의 늪에 발을 딛고 있었다.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하비를 떠올리며 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스터스 가가 도시의 방패이자 기사의 현신같은 존재라면, 로투스 가는 기사의 두뇌와 갑주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내 로투스 가 사람들은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로 만족하지 못 했다. 언제나 스터스가를 앞서길 바랐다.
‘그런데도 우린 한 번을 이길 수가 없었지.’
워낙 철저히 숨겨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스터스가 사람들은 하나같이 탈인간 범주의 뛰어난 자들만 배출되었으니까. 거기다가 도덕적인 흠 하나 보이지 않는 철두철미함도 겸비했다.
이 기이한 가문에 대해 반이 아는 건, 스터스가의 아이들이 어릴 때 원인 모르게 죽어나간다는 것이었다.
‘정말 악마와 계약이라도 한 거 아냐?’
수재 하나를 얻는 대가로 평범한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짓, 그 꺾일 줄 모르는 고개를 가진 스터스가 사람들이 완벽함을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쿨럭! 쿨럭! 켁!”
다 죽어가는 늙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반은 그제야 허리를 곧게 펴고 아버지를 살폈다. 하비 생각을 하느라 아버지의 침상 앞인 것을 잠시 잊었다.
곁에 있던 주치의가 서둘러 조치를 하고, 그의 병 든 아버지는 힘겹게 허리를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는 것 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발의 노인이 장성한 아들인 반을 보며 재촉하듯 물었다.
“아직 멀었느냐?”
반은 속으로 한숨 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아직 하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반은 하비의 연락을 신호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비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데,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일말의 미안함은 남아 있기에 되도록 ‘그 시간’을 미루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반을 호되게 질책하며 나무랄 뿐이었다.
“시간이 없어! 내가 언제 갈지 모르는데, 그 전에 선수를 쳐야지. 아비의 숙원도 이루어주지 않을 셈이냐.”
“곧입니다. 준비는 다 해놨고, 혹시 모를 변수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빅터 바르뎀 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알아본 바로는 일주일 정도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노인은 다행이라는 듯 마른 기침을 뱉었다.
“그래. 쓸데없이 훼방을 놓으면 안되니까. 바르뎀 경은 그 역겨운 관계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냐? 설마, 스터스 가의 그 애송이도?”
반은 빅터 이야기를 할 때 은은하게 달아오르던 하비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하비는 진심인 것 같지만, 바르뎀 경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거짓으로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반은 뒷말을 흐렸다. 하비를 보는 시선이 정말 연인을 보는 듯 해서 반은 헷갈렸다. 빅터의 진정한 마음이 어디쯤 있는 건지, 단순히 하비를 쥐고 흔들기 위해 ‘척’을 하는 건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처음 빅터가 한 말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로투스 경도 원하는 바였지? 그 고고한 스터스가의 핏줄을 무릎 꿇리는 거.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는 거 말야. 내가 도와주지.]
그런 의미에서 의기투합한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빅터의 수족이 되어 하비에 대한 정보를 넘기는 것이었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빅터는 이상해졌고, 아예 로투스가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도 그만두었다. 발길을 뚝 끊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하비에 대해서 그만 캐내라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은 언제나 냉담한 빅터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역할극에 빠져버린 건가. 멍청한 놈.’
그런 주제에 자신을, 로투스가를 지속적으로 모욕했다. 빅터는 로투스가를 완전히 장악하고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두진 않을 거야.’
우선 하비부터 꺾은 뒤, 그 잘난 척 하는 남자까지 차례로 부술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준비를 차곡차곡 해 왔다. 로투스 가의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말이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집사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손에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저…….”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했다.
“스터스 경으로부터의 서신입니다.”
고민이 길었는지 예상보다 하비의 반응이 늦었다.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아버지도 반색했다. 반이 스터스가의 인장이 박힌 편지 봉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드디어 왔나.”
이제 시작이다. 신호탄은 쏘아졌다.
***
반에게 결국 연락을 취한 하비는 자리를 정리했다. 오늘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책상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 하비가 샘을 돌아보며 물었다.
“참, 사전 조사 인원은 꾸렸나?”
이로비나 섬에 보낼 외교관 인력을 지칭했다. 섬에 대한 조사를 면밀히 하고, 매입 직전의 단계를 완수할 예정이었다. 슬루인 제국이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샘은 고개를 끄덕이며 완벽한 일정이 되었음을 알렸다.
“예. 해적이 사라졌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바로 보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용병도 붙였습니다.”
“잘했군.”
“아, 술자리는 시간이 되십니까?”
총괄 외교관이 출장에서 돌아왔고, 술고래인 그가 주관하는 술자리였다. 다른 외교관들은 하비가 참석해주길 간절히 바란다는 눈빛을 여기저기서 쏘아 보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비는 미안한 얼굴로 거절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 선약 상대가 바로 이 자였다.
하비는 눈 앞에서 술만 홀짝대는 오랜 친구를 물끄러미 보았다.
반 로투스 경.
그는 젤가에게 빅터에 관한 정보를 넘긴 사람이자, 귀족들의 정보 중심에 선 자이기도 했다. 반이 담배를 물다 말고 하비를 흘끗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하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앞자리에 놓인 포도주를 마셨다. 마신 순간, 하비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묘한 맛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반이 새로 깐 외국의 질 좋은 포도주라는 설명을 기억하고 납득했다. 타국의 포도주는 가끔 그의 입맛에 맞지 않았으니까.
하비가 의아해 하는 반을 보며 얼른 대답했다.
“아니. 단 둘이서 마시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장소는 반 로투스 경의 저택이었다. 하비가 먼저 연락을 취했지만, 반은 기다렸다는 듯 로투스 가의 저택으로 하비를 초대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하비는 섣불리 말이 나가질 않았다. 포도주로 바싹 타는 목을 축일 뿐, 생각조차 정리되지 않았다.
‘정말 반이 젤가에게 정보를 흘린 건가? 왜?’
오로지 그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데 비릿하게 웃던 반이 하비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선수를 쳤다.
“언제 연락하나 했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바르뎀 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온 거겠지?”
깜짝 놀란 하비가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천천히 포도주가 찰랑대는 유리잔을 내려놓는 하비를 보며 반이 또 입을 열었다.
“젤가라는 놈이 저택으로 찾아갔을 테니까. 분명 바르뎀 경에 대한 이야기도 했을 테고.”
반은 말없이 빤히 마주보는 하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반의 얼굴엔 더 이상 자조적인 웃음도, 씁쓸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묘한 승리감만 가득할 뿐이었다.
“이유를 알고 싶어? 내가 왜 그랬는지.”
젤가를 홀리는 건 쉬웠다. 빅터에 대한 악감정으로 그를 파헤치는 과정에, 미끼를 던져두면 알아서 물게 되어 있었다.
빅터에 대한 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비에게 달려갈 것이라 생각했다. 반은 이미 젤가에 대한 것도 모든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처음에는 빅터의 강압으로 하비의 뒤를 쫓으며 정보를 캤지만, 갈수록 그는 열과 성을 다해 집요하게 하비를 쫓았다.
언제부턴가 반은 진심으로 즐겼다. 하비가 무너질 만한 증거를 찾는 것이, 그 발판을 부술 것들이 찾을 수록 나타나는 것이, 못내 즐거웠다.
그게 어린날부터 지속되어 온 ‘열등감’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빅터의 비아냥이 아니라도, 이미….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반은 마음 속의 양심을 몰아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약속을 하나 받아냈다. 병중에 있는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스터스가가 무너지는 꼴을 보여드리면, 아들로 제대로 인정하겠다는 약조를 했다.
[이번엔 반드시 그 고개만 뻣뻣한 놈들이 꺾이는 꼴을 봐야겠다. 할 수 있겠지?]
[예, 아버지.]
반의 아버지도 라힌 스터스에게 짓눌린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대대로 라이벌 관계였지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지금의 하비와 그의 관계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하비의 얼굴을 보며 반은 통쾌함을 느꼈다. 일말의 남아있던 죄책감은 갈수록 증발하고, 하비에 대한 순수한 증오만 남았다.
'너만 없었다면, 너만 사라지면, 나는 나로 남을 수 있다. 인정을 받을 수 있어.'
젤가와 하비의 관계는 입 무거운 악사들에게서 간신히 얻어냈고, 당시 가면 투자회에서 그들이 벌인 행각을 낱낱이 알았다. 기가 막혔다.
하비가 그런 짓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정도라니. 빅터가 쥔 협박의 증거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리하여 알아낸 사실은 아주 놀라웠다. 반 로투스를 희열에 차오르게 할, 엄청난 증거를 빅터가 쥐고 있었다. 그걸 진작 알지 못한 것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반은 어두운 눈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하비를 가만히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비는 반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불안감에 흔들리는 눈빛을 보낼 뿐, 아직도 일말의 신뢰가 남아 있었다.
정말, 지독하게도 미련한 남자다.
그런 친구에 대한 예의로서, 반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난 네 오랜 친구야. 널 배신하지 않아."
하비의 눈이 매달리듯 그가 반에게 선물했던 황금 거북이를 보고 있었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 두었고, 하비는 그것을 보고 조금 안심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반은 그런 하비를 그냥 두지 않았다. 가장 적절한 때에 관계를 잘라내는 선고를 한 것이다. 반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목숨 귀한 줄은 알지.”
하비의 얼굴이 제법 볼 만했다. 그는 핏기가 모조리 사라져서 죽은 사람처럼 반문했다.
“그게 무슨…말이야.”
숨이 막혀서 말을 뱉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반은 고개를 내저으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무슨 말이긴. 바르뎀 경이 이제 연극은 끝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말이지.”
하비는 그제야 로투스가가 귀족 정보의 결집소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빅터가 그런 곳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다는 것도.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네 아버지에 대한 일도, 이제 더 이상 묻어둘 수 없어. 미안하다.”
아까 전부터 몸이 뜨겁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설상가상 배 안 쪽도 어딘가가 달아오르는 것처럼 쓰라렸다. 뭔가 이상했다.
하비가 의자 손잡이를 의지하듯 꽉 움켜쥐며 힘겹게 물었다.
“설마, 바르뎀 경이 널 협박했다는……, 그런 말인가? 내 뒤를 캐라고?”
반은 안타깝고 미안한 얼굴을 지어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바르뎀 경이 얼마나 협박에 능한지. 까딱하면 내 명줄이 날아갈 위기였다고. 널 팔아넘길 수 밖에 없었지.”
하비는 벌떡 일어났다. 반동에 그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산산조각난 유리가 도처에 널렸지만, 하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비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말도 안돼…….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잘못 알고 있다기엔 이런 지시까지 받았는걸.”
반은 준비된 물건을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종이에 곱게 싸인 것이었는데, 펼치니 그 안에서 익숙한 약이 튀어나왔다. 형질을 강제로 변화시키는 호르몬 교란제였다.
드디어 하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럴 리 없다. 절대로, 빅터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마음은 비명을 지르듯 외치고 있었지만, 냉철한 이성은 한 가지만을 지목하고 있었다.
빅터는 여태까지 널 속였어. 넌 속은 거야.
반은 하비의 불안에 쐐기를 박듯 선고했다.
“그럼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겠어?”
절망에 빠진 밤색눈에서 남아 있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해졌다
반은 하비의 반응을 확인하며 지금쯤 어딘가 시궁창에서 얼굴을 박고 다 죽어갈 한 의사를 떠올렸다. 빅터의 의뢰로 신약을 제조한 의사였다.
빅터나 하비는 그가 휴가를 간 줄 알았지만, 사실 반에게 붙들려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을 때까지, 의사는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반은 슬픈 눈빛으로 위장하며 하비에게 지어낸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전했다.
“멀리 출장을 떠나면 너에게 이걸 먹여서 효능을 확인해 보라고 했다고.”
하비는 떨어진 포도주를 황급히 살폈다. 어쩐지 익숙한 맛이 난다 했다. 빅터가 예전에 자주 먹였던 그 ‘신약’ 이었다. 입을 틀어막으며 하비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지금 그걸…내 잔에 넣은 건가?”
반이 본심을 숨기지 못 하고 잠깐 흐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움으로 표정을 가리고 물었다.
“그래. 아무렇지 않나? 괜찮아?”
평소같았다면 반의 수상함을 빨리 눈치챘을 것이다. 연이은 충격이 하비의 이성을 자꾸만 흐렸다.
'그럴 리 없어...'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가서? 이미 그 자는 이 곳에 없는데.
하비는 비틀대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반의 집사에게 맡겼던 겉옷은 포기했다. 이 방을 나가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헉…, 헉….”
벌써 아랫배에 이상한 신호가 꼬였다. 미칠 듯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뱃속의 장기 어딘가가 타는 것처럼 아팠다. 몸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비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털썩 주저 앉았다. 뜨거운 숨이 나오고, 반사적으로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너무 아파서 기절할 것 같았지만 간신히 이성을 차렸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그런데 몸은 이미 앞으로 기울어 바닥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퍽!
완전히 앞으로 쓰러진 하비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반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반은 망에 걸린 고기를 잡으러 가듯 천천히 걸어갔다. 쓰러진 하비에게 고개를 숙이고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 아직 내 말 다 안 끝났는데.”
반은 순간 크게 휘청거렸다. 하비에게서 폭발적으로 나오는 페로몬 때문이었다. 숨을 못 쉴 만큼 강렬한 오메가 페로몬이었다. 알파를 미치게 하는, 자극적인 페로몬.
“이건…, 분명 기억에 있는…….”
반은 정신 없는 와중에도 어디서 이 페로몬을 맡았는지 기억했다. 하비가 몸이 안 좋았던 날, 그날따라 몹시 이상했던 하비를 간신히 이겼던 그 날, 소드 클럽에서.
그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 반은 황당한 듯 웃었다.
“그때부터 이미 이 약을 쓰고 있었나. 하하! 대단해. 역시 바르뎀 경이야.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쓰러진 탓에 열린 하얀 튜닉 안으로 맨살이 비쳐 보였다. 반은 이성을 잃은 눈으로 하비를 잡아 뒤집었다.
그 덕에 목 주변을 장식한 섬세한 장신구가 후드득 떨어져 나가고, 하비의 탄탄한 상체가 더욱 훤하게 드러났다. 몸이 변하는 과정에서 예민해진 터라 판판한 근육이 잡힌 가슴 위로 유두가 서 있는 것도 보였다.
반은 헛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박고 싶은, 매혹적인 페로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더 큰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게 안 설 줄 알았는데.’
반은 흘끗 아래를 보았다. 벌써 끝까지 발기해 팽팽해진 것이 보였다.
하비도 그의 눈길을 눈치챘다.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믿기지 않지만, 지금 오랜 친우는 자신을 강간할 생각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신물이 올라와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하비는 몸이 변하는 과정에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배가 너무 아팠다. 한 손으로 배를 감싸안은 채 하비는 결국 맥없이 반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딸려갔다.
“오늘밤엔 더 큰 이벤트가 있어. 네 아버지, 라힌 스터스 전의원이 했던 그 비밀들이 석간 신문에 모두 유포됐거든. 지금쯤 커피하우스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을걸?”
머리를 쥐어 잡힌 채 머리만 간신히 바닥 위로 뜬 하비에게 반이 허리를 굽혔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알아? 라힌 스터스한테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는 거.”
하비의 이마와 뺨에서 식은땀이 계속 흘러내렸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안 순간, 하비는 직감했다. 지금 반이 말하고 있는 것이, 집사와 빅터, 젤가 등이 자신에게 끝까지 숨기려 했던 사실임을.
“임페르 해적이 인질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기 전날 새벽, 그 놈들은 따로 네 아버지에게 접촉했어. 시 운영비에서 일정 돈만 떼어 주면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말야.”
반이 즐거운 얼굴로 이어 말했다. 부들거리는 하비의 반응이 못내 짜릿했다.
“그런데 네 겁쟁이 아버지는 시 재정을 빼돌린 걸 들킬까봐 마지막까지 협상을 거부했지. 그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 아, 지금쯤 다 알고 있겠지만.”
언제나 도덕적이고 모두의 정의를 짊어진 것처럼 굴던 라힌 스터스가, 사실은 이러했다. 반은 목청 높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하비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사실 스터스가는 별 것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비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늙은 회계사가 허튼 소리를 못하도록 죽이고, 남긴 편지를 태운 마음들을 생각했다. 자신을 위해서 어떻게든 뼈아픈 진실을 숨기려고 했던 자들의 마음을.
그들은 잘못되지 않았다. 잘못된 건, 스터스가의 망령이다. 그리고 그 피를 이어받은 주제에, 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자신이다.
하비는 눈만 겨우 들어올려 파리해진 입술을 열었다.
“그것도……, 바르뎀 경이 시킨 일인가?”
하비는 그제야 본인의 생일 파티에서 분노하던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빅터와 대화 후 이상할 정도로 화를 내던 반은 하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바르뎀 경에게 협박당하거나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단 말이야?]
반 역시, 빅터에게 협박당하고 있었다. 하비의 눈에 깊은 절망이 깃들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명확한 정황이었다.
반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안타까운 듯 목소리를 꾸며냈다.
“맞아. 나도 너 못지 않게 꼼짝 못할 뭔가를 바르뎀 경에게 빚졌거든.”
말이 없는 하비를 보며 반은 신나게 떠들었다.
“요즘 너와 몸정이 들었는지 그것까진 차마 못 지켜보겠다고 하더라고. 멀리 나가 있는 사이 터뜨리라고 특별히 지시하더군.”
하비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 카펫을 적셨다. 심장이 괴로움에 터져나갈 것 같았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반은 고개를 내저으며 움켜쥔 하비의 머리칼을 더욱 잡아당겼다. 반쯤 상체가 강제로 일으켜지고, 한 쪽 무릎을 꿇은 반이 하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나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아.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다 살기 위한 거야.”
“바르뎀 경이…, 너한텐 어떤 협박을…, 했지?”
띄엄띄엄 하비의 말이 멀어졌다. 말을 하는 것조차 벅차 보였다. 귀찮았지만 반은 아무런 핑계나 갖다붙였다.
“병중에 있는 우리 아버지.”
“죽이겠다고…했나?”
“그래. 그러니 너무 원망 말아.”
도저히 못 참겠어서, 반은 벌개진 눈을 하고 한 손으로 하비를 누르고는 반쯤 너덜거리는 튜닉을 찢어버렸다.
찌익-!
금사 자수가 놓인 정갈한 튜닉이 갈갈이 찢기고, 드디어 하비의 어깨와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비가 여전히 한 손으로는 배를 누른 채 절박한 얼굴로 반의 팔을 잡았다.
“그만둬.”
하비의 뜨거운 숨소리가 더 자극적이었다. 반은 힘이 없는 하비의 팔을 가볍게 뿌리치고 튜닉을 더 열어젖혔다.
오랜 검 수련으로 꽉 짜인 단단한 근육이 나타나고, 반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미 반쯤 이성이 나간 상태라 마지막 기회라는 하비의 말도,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눈길을 아래로 두자 애액으로 젖어가는 하의만 적나라하게 보였다. 반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잔뜩 나오니까 풀어줄 필요는 없겠지?”
하비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에서 짓누른 채 반은 손을 뻗어 아래로 향했다.
하비는 이 모든 것들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한때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자가 뻗는 배신의 손길도, 깨진 유리잔에서 핏빛 포도주가 흘러내려 카펫을 붉게 적시는 것도.
그때 빅터의 목소리가 멀리서 날아와 하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비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다.
제발, 그만해.
[라힌 스터스의 잘못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지. 경에게 묻지 말았어야 할 것까지 묻고 말았어.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똑바로 마주대오던 그 아름다운 녹색 눈도,
[무지했던 나를 용서해 주겠나?]
손가락에 키스하며 내려보던 그 따뜻한 눈빛도,
모두 거짓이었다.
마음 속에서 뭔가가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잿더미처럼 길게 휘날려 갔다.
하비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손을 뻗었다. 반짝이는 뭔가를 손에 쥐기 위해서.
막 반의 손이 하비의 가슴에 닿으려 할 때였다.
“크윽!”
하비의 한 손이 빠르게 반의 목을 짓눌렀다. 그의 손에 어느 새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들어 있었다. 계속 말을 걸면서 시간을 번 것이다.
반이 놀라서 더듬댔다.
“어, 언제?”
유릿조각을 쥔 하비의 손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하비는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목표인 반의 목젖을 찌르면서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 로투스 경.”
반은 천둥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차갑게 분노하는 하비는 처음 봤다.
“경은 마지막 선을 넘었어.”
“헉.”
빅터가 눈을 번쩍 떴다. 잠깐 앉아있는다는 것이, 또 졸았다. 빨리 끝내려고 열을 올리다보니 또 잠이 부족해진 탓이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비면서 빅터는 목을 풀려고 헛기침을 했다.
“아, 기분 이상하네.”
빅터는 목을 이리저리 풀면서도 묘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류에 물품 목록을 적어내리고 있던 검은 머리의 나스타가 고개를 휙 들었다.
“왜요, 주인님? 뭐가 이상한데?”
“그런 게 있어.”
빅터는 대충 대답하며 떨어진 곳에서 작업 중인 늙은 해적을 불렀다.
“아무래도 더 빨리 진행해야겠어. 영감, 아직 인수인계 덜 끝났어? 빨리빨리 좀 해.”
늙은 해적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한 번만 더 재촉하면 네 목숨도 빨리빨리 보내주는 수가 있어.”
“별로 위협적이지도 않으니까 닥치고 빨리해.”
평소처럼 농담으로 받아치던 빅터가 아니었다. 그는 몹시 초조해 보였다. 눈치챈 늙은 해적이 혀를 찼다.
“왜 그렇게 안달이냐? 두고 온 놈이 걱정돼?”
또 그걸로 놀려먹을 것 같아서 빅터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비율은 왜 또 멋대로 바꾼 거야? 고정하기로 했잖아.”
“그 사이 시간이 흘렀잖냐. 시간이 곧 돈이지.”
“하! 제멋대로군.”
빅터가 하고 있는 일은 해적들과 완전히 결별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임페르 해적단을 차근차근 점령하고, 수뇌부를 일부 숙청한 두 사람은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물론 기반은 늙은 해적이 마련해 준 것이고, 빅터는 이를 재산으로 크게 불렸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하비와 얽힌 일도 있고, 해적에게 반감을 가지는 고용인들 덕에 슬슬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50%. 그 이상은 요구하지마. 절대 안 돼.”
단호한 빅터의 말에도 늙은 해적은 능글맞게 웃었다.
“세상에 ‘절대’ 라는 게 어딨어. 60%.”
“미쳤어? 여태까지 다 내가 번 건데, 그걸 60%나 가져가겠다고? 완전 날강도네.”
어이없어 하는 빅터를 두고 늙은 해적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요즘 들어 늙어서 귀가 잘 안 들린다는 핑계였다.
“융통성 없는 해적이라 그런다. 그래서, 60%로 하겠다고?”
“내가 언제…! 후우, 알았어. 60%로 하지.”
“좋아. 그럼 70%.”
“……이건 새로운 방식의 결투 신청인가?”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시간은 계속 지연되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국 빅터가 항복하고, 늙은 해적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해 주기로 하고서야 긴긴 협상이 끝이 났다.
이 결과엔 늙은 해적도 내심 놀랐다.
“웬일이냐. 평소 같으면 절대 먹히지 않았을 건데.”
“몰라. 난 지금 급해.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인내심이 떨어져가는 급한 눈길이 출렁대는 바다로 쏘아졌다. 빅터는 이 기묘한 불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는 건가?’
하비에게 현재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꿈에도 모른 채, 빅터는 초조한 마음으로 바다 위를 유랑했다.
그 뒤 일주일이 흘러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빅터는 보고를 받고 아연해졌다.
올란시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하비 스터스와 그 가문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어딜 가나 하비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였다는 둥, 라힌 스터스의 피를 이어받아 사람 속이는 데 도가 텄다는 둥, 온갖 괴소문이 떠돌았다.
의원실로 가장 먼저 돌아온 빅터가 싸늘한 눈으로 벤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업무 대리인인 폰조차 빅터의 눈치를 보더니, 밀린 일에 대한 언급 없이 자리를 비워주었다.
“우선 소문 뒷수습부터 해.”
“하고 있습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라앉혀. 헛소리 하는 놈들 혀를 죄 뽑든지, 자르든지 해.”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잔인한 주인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벤은 이를 알기에 숨을 삼키고, 지금도 하비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있을 사람들을 애도했다.
벤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빅터는 더 큰 일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하비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상세히 말해봐.”
벤은 난감한 얼굴로 하비에게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다. 반 로투스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아예 빅터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엄청난 살기였다.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내가 소문을 퍼뜨리라고 했다는 거지. 하비한테.”
“네.”
벤은 어두운 눈으로 긍정했다. 하비와 마지막으로 대화했을 때 단단히 오해한 것을 보면 확실했다. 빅터를 의심하고, 반 로투스 경을 그의 하수 정도로 여기는 듯 했으니까.
벤의 말이 이어질수록 빅터가 쥐고 있는 손잡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으스러질 듯 쥐고 있는 길고 거친 손 위로 핏줄이 솟아 있었다.
빅터의 분기가 하늘을 찔렀다.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느라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길게 자란 빅터의 금발 앞머리 사이에서 녹색 눈이 가늘게 늘어지며 흉포해졌다.
“그것도 모자라 그 망할 신약을 먹이고 강간하려고 했고.”
흐트러지고 찢겨졌던 하비의 하얀 튜닉을 떠올리며 벤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빅터의 아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벤이지만, 이토록 격렬한 분노를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럴 것 같아 페로몬에 예민한 알파인 진은 밖으로 내보냈는데도, 문 앞에서 힘겨워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베타인 벤은 잘은 몰라도 지금 우성 알파인 빅터가 내뿜는 페로몬에 분노가 더해진 것은 알았다.
이러다 큰 사단이 날 것 같아 벤은 얼른 사족을 붙였다.
“허나, 워낙 스터스경의 무용이 출중하여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하비의 실력을 강조하며 절대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빅터에게 알렸다. 그래도 빅터의 기세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페로몬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오싹한 한기가 그의 등줄기를 날카로이 스몄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아슬아슬한 격정이 빅터의 녹색 눈에 드러나 있었다. 핏발마저 섰다. 하지만 아직 터뜨리지는 않았다. 차곡차곡 모아 한 번에 폭발시키려는 것처럼 오히려 냉정해졌다.
빅터가 확인하듯 하나하나 벤에게서 사실 관계를 짚어나갔다.
“전부 내가 시켰다는 식으로 얼버무렸고.”
“네.”
“그 몸으로 저택에 돌아가는 바람에 사람들이 오메가라는 헛소리를 하는 거고.”
“……네.”
총체적 난국이었다. 빅터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빅터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물었다. 다음이 가장 중요한 확인이었다.
“그래서, 그 새낀 지금 어딨지? 벌써 도망간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멀쩡한 얼굴로 온갖 사교 클럽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하비는 진창에 박아두고, 저는 신나게 놀러다니고 있다라.
빅터가 쥐고 있던 의자 손잡이가 기어이 부서져 나갔다. 반은 하비 스터스가 빅터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 모르는 듯 했다. 그걸 알면 감히 그딴 짓을 저지르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빅터가 어두운 눈으로 말했다.
“로투스 경에게 딱 하나는 고맙군.”
스산하게 들리는 저음이었다.
“곱게 죽일까봐 걱정됐는데. 직접 손을 쓸 수 있게 해줘서.”
빅터는 반 로투스가 도망가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감시하라 일렀다. 우선은 하비가 무사한 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 길로 빅터는 스터스가 저택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집사가 난관이었다.
“절대 안됩니다. 주인님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빅터가 황당한 듯 웃더니 날카롭게 되물었다.
“내가 오면 안정이 안된다는 소린가, 지금?”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경이 의뢰해 만든 그 괴물 같은 신약 때문에….”
집사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빅터의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비의 집사가 그 약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이상한 예감에 빅터가 재촉했다.
“로투스 경이 하비에게 신약을 먹였다는 것 까진 알고 있어. 그 뒤로 어떻게 되었지?”
벤은 하비에 대한 소문을 수습하러 다니느라 스터스가 저택의 상황에 자세히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집사가 워낙 완고하게 외부인을 막아서 쉽게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그때 얼굴에 자잘한 상처가 많고 한 쪽 눈이 묘하게 번들대는 남자가 집사의 뒤에서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한 쪽 눈이 의안이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원님.”
빅터가 의뢰한 신약을 제조했던 의사였다. 반 로투스에게 끌려가 반죽음 당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기에, 빅터는 삐딱하게 말했다.
“아주 먼 휴가를 다녀왔나보군. 잘 지냈나. 눈이 아주 멋진데.”
빈말로도 걱정하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그 성정을 잘 알고 있기에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의사는 이어지는 빅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게 멋진 눈을 준 놈은 조만간 손봐줄 생각이다. 그리 알아.”
요컨대 대신 복수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의사가 설풋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더욱 감사드립니다.”
짧게 주고받은 뒤, 의사는 빅터를 안으로 들였다.
“여기서 할 이야긴 아닙니다. 들어가시죠.”
빅터는 초조한 얼굴로 하비가 있을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하비부터 봐야겠어. 멀쩡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
의사가 단호하게 빅터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스터스 경께서는 아주 무탈하시니까요.”
“아까부터 자꾸 왜 날 배제하는 거지?”
죽을 뻔 하더니, 없던 용기가 샘솟는 모양이었다. 전처럼 빅터를 두려워하던 것이 많이 줄었다.
‘아니, 그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인가.’
의사는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분노에 가려 두려움조차 잊은 모양새였다. 거기다 짙은 슬픔마저 보였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 빅터는 침묵했다. 의사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묵묵히 맞은편에 앉아있던 의사가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스터스가 저택으로 뛰쳐왔을 때, 정말 제가 헛것을 본 줄 알았습니다.”
올 것이 왔다. 빅터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물었다.
“뭘 봤는데.”
“제가 만든 그 무서운 약이…, 설마 스터스 경에게 쓰일 줄은 몰랐고, 그 부작용으로 그리 되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의사는 한참을 횡설수설 하더니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털어놓았다.
“정말로 알파가 오메가가 되어 임신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결코 하비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빅터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언제나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녹색 눈에 경악이 가득했다.
“방금 뭐라고…, 임신? 그게 가능해?”
“방금 뭐라고…, 임신? 그게 가능해?”
의사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빅터를 보았다.
“신약의 부작용은 가늠이 안된다고,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실제로 스터스 경은 그 약이 잘 받는 체질인지 히트 사이클까지 왔다구요. 예고된 재난이었습니다.”
임신도 믿기지 않는데, 의사가 뱉는 다음 말이 더 믿기지 않았다. 임신이라고 말해놓고, ‘재난’ 이라고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왜?
정답은 머지 않아 의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산아였습니다. 4개월 가까이 된 것 같더군요.”
빅터의 눈이 크게 휘청댔다.
“……뭐.”
빅터가 무너지듯이 자리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였다. 말도 안 된다. 하비가 임신한 것도 겨우 믿을까 말까인데, 거기다 쏟아지는 말들은 더 잔혹했다.
“유산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애초에 불안정한 아기집에 멀쩡한 아이가 생길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임신된 것만 해도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부작용 때문에 몸은 변했는데, 페로몬은 알파로 유지되고 있던 기형적인 상태였습니다.”
체내에 페로몬샘이라는 것이 있는데, 하비는 그 기능이 비정상이라고 했다. 몸의 상태에 따라 변해야 하는데 변한 호르몬에도 반응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빅터는 차마 말도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하비가 겪어야 했던 일들이, 상상을 넘어섰다. 속이 울렁대면서 역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것도 모르고 보고 싶다는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잘 있을 거라고 혼자 위안 삼았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빅터를 보며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충격이 더 큰 듯 했다. 그래도 그는 차분하게 말을 끝까지 매듭지었다.
“지금은 ‘알파’로 다시 되돌린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원래 체질과 다른 형질은 몸에 무리가 가니까….”
반 로투스가 약을 세게 쓰는 바람에 페로몬샘이 강제로 자극을 받아 기능을 하긴 했지만, 현재는 거의 망가진 상태였다.
다시 알파로 돌아왔다고 해도, 페로몬이 너무 미약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수준이었다. 의사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이제 한 번만 더 그 신약을 쓰면, 스터스 경은 정말 돌아가실 겁니다. 내장이 너무 상했어요.”
의사가 말하는 바는 이랬다. 이미 죽은 아이를 몸에 얼마간 품고 있었을 거라고. 아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그 되다만 인간 형체를 어설픈 아기집에 품고 있다가 외부 충격으로 인해 쏟아냈을 거라고 말이다.
“원인은 많습니다. 스터스 경이 자주 복용했다는 약 때문일 수도 있고, 억지로 드셔야 했던 그 신약 때문일 수도, 혹은 이번에 퍼진 스터스가에 얽힌 괴소문 때문일 수도 있죠. 심리적 충격과 물리적 충격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거기다 반 로투스 경의 배신도 한 몫했을 것이다. 떠오르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입을 가리고 듣기만 하던 빅터가 손을 떼어 냈다.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져 있었다.
“지금 원인을 따질 때인가? 하비는. 지금 어딨어. 괜찮은 건 맞아?”
“괜찮으시긴 합니다만…….”
의사는 슬쩍 빅터의 눈을 피했다. 그 행동에 빅터는 더 미칠 것 같았다. 결국 의사의 멱살을 잡아 끌고 음산하게 말했다.
“괜찮은지 아닌지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안내해.”
의사는 집사에게 눈짓을 했고, 한숨 지은 집사가 빅터를 안내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하비의 방 안에는 정말로 하비가 있었다. 그는 너른 침대 위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자는 중이었다. 몸에서 피를 많이 쏟은지라 혈색이 전에 비해 썩 좋지 않았다. 의사의 말대로 알파 페로몬도 너무 미약했다.
돌에 맞은 듯한 흔적도 얼굴 곳곳에 보였다. 그걸 보자 빅터는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사람들이 던진 돌일 것이다.
하비의 비밀을 지키지 못 했다. 다른 자의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내 잘못이야.’
터뜨린 건 반 로투스 경이지만, 애초에 증거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협박 삼아 그 아버지에 대한 타락의 증거를 쥐고 하비를 마음껏 뒤흔들었다. 괴로워하는 과정을 즐기기도 했다. 그랬던 과거가 지금 와서 빅터의 속을 까맣게 갉아먹었다.
그 모진 고통마저 다 참아내던 사람이었다. 고고한 자존심마저 굽히고, 매번 굴욕을 당하면서도 비밀이 지켜질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했다.
그런 하비가 이리 되었으면, 한계를 넘은 것이다.
빅터는 침대맡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삐걱 소리가 나는 것조차 거슬렸다. 하비가 오랜만에 맛보는 고요한 침묵을 깨는 것 같아서.
빅터가 한참 머뭇대다가 하비의 하얀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동안 만지고 싶은 것도 죽을 힘을 다해 참아왔는데, 돌아와서 만져 보는 피부가 너무 까슬했다. 속이 망가지는 기분이었다.
“돌아왔어. 빨리 오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얼굴이 너무 엉망진창이었다. 참혹한 광경에 감정이 격앙되었다. 이를 악물고 빅터가 마지막 막을 뱉었다.
“결국 늦었네.”
빅터의 손가락이 이마까지 침범하자 하비는 간지러움에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하비의 흐릿한 시야로 금발에 녹안을 한 미남자가 들어 왔다.
누군지는 알겠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머리가 사고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비가 갑자기 흠칫 놀라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허겁지겁 제 손 안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눈이 힘겨운 듯 파르르 떨렸다.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집사와 의사는 못 보겠다는 듯 하나같이 눈길을 돌려버렸다.
빅터가 이상한 듯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하비가 왜 이러는 거지?”
집사는 차마 말 못하겠다며 먼저 자리를 떠 버렸다. 남은 의사는 난감한 얼굴로 대답을 요구하는 빅터를 빤히 보았다.
의사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괴었다. 놀란 건 빅터였다.
“깨어나시고는 계속 저러십니다. 발견 당시에 손에 죽은 아기를 담고 있었는데, 너무 꽉 담고 있어서 펴기도 힘들었습니다. 의식도 없는 상태였는데도….”
밀려드는 어지러움에 빅터가 이마를 짚었다. 이건 너무 잔인했다.
“……찾고 있는 거군.”
눈을 보니 알겠다. 하비는 전과 확연히 달랐다. 인지는 하지만, 사고는 할 수 없다. 몸이 거듭된 충격으로부터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완전히 사고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의사는 총기가 사라진 눈으로 어딘 지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는 하비를 안타깝게 보았다.
“가끔 대화를 할 정도로 정신이 돌아오시지만, 짧습니다. 얼마 못 가요. 시간이 지나면 더 좋아지겠지만…….”
의사는 이제 모든 것은 하비의 의지에 달렸다고 전했다.
빅터가 침통해 하며 하비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비는 움찔대면서 손을 빼려는 행동을 했고, 빅터를 거부했다. 분명 눈에 초점이 없는데도, 빅터에게 닿지 않으려 했다.
내쳐진 손을 멍하게 보면서 빅터가 망연자실하게 하비를 보았다.
“왜……?”
마음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것인가.
하비는 한 번도, 그를 보지 않았다. 아예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가끔 의사나 집사를 의미 없는 것 같은 눈으로 보았지만, 빅터가 있는 쪽은 아예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다.
무의식으로도 그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참혹한 심정으로 하비의 방 밖으로 나오자 집사는 빅터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 할 일만 할 뿐이었다.
빅터가 결국 그를 붙들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것’의 처리는 어떻게 했지? 묻었나?”
하비가 낳은 사산아를 말했다. 알아들은 집사는 울컥한 얼굴로 따져들었다. 참았던 분노가 일시에 폭발했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고작 묻는 게 그런 겁니까?”
사실 불에 태워버렸다. 묻으면 하비가 정신이 든 나중에라도 파볼 것 같아 남겨두기가 두려웠다. 그 모습을 보면 집사는 자신이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지켜온 주인인데.
사용인들이 하나 둘 다 떠나도 그만은 끝까지 남아있던 것은, 하비의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힌 스터스와 한 몸이었던 늙은 집사가 현 집사의 아버지였고, 어린 하비가 당하던 것들을 알면서 모른 척 해왔다. 자신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라 여겼으니까.
집사 자리를 물려 받으면서 남에게 앓는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가엾은 주인을 평생 보필하는 걸로 그 죄책감을 메우려 했다.
그만큼 그에겐 하비의 행복이 최우선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디서 굴러온 지 모를 이 난봉꾼 귀족 하나가 다 망쳐버린 것이다.
집사가 말이 없는 빅터를 향해 이글거리는 시선을 던졌다.
“제겐 주인님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바르뎀 경이 과거에 주인님께 어떤 끔찍한 짓을 했든, 그래도 지금은 주인님이 마음을 주신 분이니 바로 쫓아내지는 않으려 노력했습니다만…. 도저히 못 참겠군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집사가 바깥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 주십시오.”
***
빅터는 씁쓸한 얼굴로 하얀 저택을 뒤돌아 보았다. 혹시 집사가 그 끔찍한 것을 묻기라도 했다면, 손수 불태울 작정으로 물은 것이었다. 하비가 아파할 만한 흔적 하나 남겨두기 싫었다.
‘분명 그 성격이면 끝까지 찾아서 확인하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갈갈이 찢겼다.
이제 겨우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왔는데, 만회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다니. 용서를 구할 상대는 이미 그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너무 늦은 것이다.
잠깐이나마 하비를 만졌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걸 내려보며 빅터는 깨달았다. 이건 본능적인 상실감이었다.
‘그래서였나…….’
임신한 것이 4개월 전이라면, 대충 짐작이 갔다. 그때 즈음부터 더욱 혼란스러워졌으니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오메가를 두고 배신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었다. 굳이 심장의 각인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가진 오메가를 아프게 하는 모든 행위는 해당 알파에게 고통을 주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조차 고통이었다. 온통 하비 생각으로만 점철되었던 지난 2주가 떠올랐다. 물만 마셔도 생각나고, 같이 먹었던 음식을 봐도, 작은 하나하나가 전부 하비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하비의 몸을 좋게 할 약재를 이잡듯이 뒤지고 다닌 것도 그 일환이었다.
빅터는 하비에게 일이 생겼을 시점부터 극도로 불안했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자신의 오메가가 아프면 알파 역시 불안을 느낀다는 사례도 학계에 보고된 적이 있었다.
또 심장이 쓰렸다. 가슴을 문지르며 빅터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심란해 하는 빅터에게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던 진이 다가와 물었다. 그의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다. 희미한 분노가 일렁였다.
“반 로투스 경은 어찌 처리할까요.”
빅터의 저택도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레나는 넋놓고 울고, 레나가 우는 걸 본 나스타는 당장 반 로투스를 족치러 가겠다며 이를 갈았으며, 뒤늦게 안 진은 이런 상태였다. 그 와중에 다들 하비의 집사가 오지 못하게 막아서 발만 구르고 있었다.
진은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제 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제가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빅터가 힘없이 웃었다.
“벤도 어제 와서 그러던데. 지원자가 너무 많군.”
벤의 상태가 제일 안 좋았다. 자신이 미리 막지 못했다며 괴로워했다. 그만큼 반 로투스에 대한 반감도 극에 달했다.
어느 새 자신의 사용인들이 하비의 일에 이렇게 열을 올리게 된 것일까. 빅터는 입맛이 썼다. 분명 몇몇은 초반엔 자신과 함께 하비를 증오하는 데 앞장섰을 텐데, 지금은 문병을 못 와서 단체로 앓고 있는 지경이었다.
‘유산까지 했다는 걸 알면 더 난리가 나겠지만.’
빅터가 허탈하게 하비가 있는 곳을 보았다. 유산이라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생각만 해도 돌아버릴 것 같았다. 빅터는 이제 그 일은 평생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다른 자가 알아서는 안 된다.
빅터는 까칠해진 얼굴을 마른 세수로 쓸어내렸다.
'미치겠네...'
잠깐 얼굴을 보고 오는 길인데도, 또 보고 싶었다. 그럴 수록 하비의 원래 모습이 더욱 그리웠다.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온 몸을 다해 진심으로 마음을 돌려주던 사람을. 저런 무기력한 모습은 하비와 어울리지 않았다.
빅터는 그가 금방 좋아질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리 믿고 싶었다. 거부당해도 좋으니, 그저 본래 모습만 되찾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비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어.”
“그럼 계속 감시만 합니까? 다음 타깃은 주인님인데도 말입니다.”
분한 얼굴로 묻는 진을 빅터가 달랬다. 그들은 반이 다음엔 빅터를 건드릴 것이라는 것을, 이미 따로 마련해 둔 정보망으로 다 알고 있었다.
로투스가는 어느 정도 이용할 가치로 생각했는데, 이제 더 이상 살려둘 의미가 없어졌다.
빅터는 로투스가가 있을 방향을 흘끗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실컷 즐기라고 해. 이승에서 벌이는 마지막 파티가 될 테니까.”
심상치 않은 빅터의 말에 진이 진지하게 물었다.
“방법은 생각해 놓으셨습니까?”
“물론.”
온갖 방법을 다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방안을 찾아 냈다.
“가장 즐거울 때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어.”
빅터가 손목을 이리저리 만지며 잔인하게 웃었다.
“감히 내 것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감히 내 것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빅터는 마차를 타고 커피하우스에 들렀다. 빅터만이 오롯이 소유한 가장 큰 커피하우스가 있는데, 그곳에 새로 꾸린 정보꾼과 인력들이 있었다.
그들이 반 로투스의 계획을 알아낸 일등 공신들이었다. 빅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빨간 머리 소녀가 고개를 홱 들며 그를 반겼다. 티나라는 아이였다.
“의원님! 오셨어요?”
친구의 말에 다정한 눈에 갈색 머리를 한 여자 아이, 로지가 반색했다.
“뭐? 의원님 오셨어?!”
여기저기서 바쁜 와중에도 고개를 내밀어 빅터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편한 복장에, 격식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빅터가 내부를 둘러보며 티나와 로지에게 물었다.
“일은 잘 진척되고 있나?”
티나가 씨익 웃었다.
“당연하죠. 지금쯤 그 멍청한 자식은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요.”
두 사람은 커피하우스에 몰래 남장을 하고 들어왔다가 빅터의 눈에 띠어 정보상 일을 하게 된 여자아이들이었다.
빅터의 눈썰미와 짐작대로 머리도, 배포도 좋았다. 조금만 가르쳐도 열을 알고, 잘 숙지하는 데다 성격도 좋아서 기존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갈색 머리의 로지가 싸늘하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우리가 깔아놓은 패인줄도 모르고, 바보같은 사람.”
게다가 입도 꽤 걸했다. 아닌 줄 알았던 온화한 로지조차. 맞장구치며 티나가 냉소했다.
“도대체 스터스 경은 그런 놈을 어떻게 친구로 뒀던 건지, 의문이라니까요.”
다들 자세한 것은 몰라도 반 로투스가 하비를 배신했다는 정황은 알고 있었다. 힐끔 빅터의 눈치를 본 로지가 조심스럽게 다른 것을 말했다. 빅터가 하비와 관련된 주제는 예민해 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의원님이 정말 해적과 일했다는 건 저희도 놀라웠지만…….”
하필 반이 빅터를 손보려고 했던 건은, 이번에 빅터가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온 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임페르 해적의 잔당과 손을 완전히 끊고, 작별하고 왔는데 설마 반 로투스가 그걸 꼬투리 잡아 신문에 퍼뜨릴 계획을 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반의 계획은 대충 이러했다.
-올란 시의 시의원, 빅터 바르뎀 경은 혼자 자수성가 한 것이 아니라, 해적과 손을 잡고 피묻은 돈을 벌어 왔다. 시민을 속이고, 황제를 농락했다. 해적질로 돈을 번 빅터 바르뎀 경은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로 몰고 갈 생각인 듯 했다.
티나가 깔깔 웃으며 반의 야심을 비웃었다.
“설마 해적들을 다 정리하고 오신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깨끗하게 손 씻고 전부 정리하고 온 마당에, 실질적인 증거는 없어졌다. 반 로투스는 빅터의 긴 출장이 해적과의 결별을 뜻하는 것인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유일한 증거는 이제 하나 뿐인데, 사실 그것마저 빅터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빅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놈은 내가 의원직에 별 관심 없다는 걸 모르니까. ”
심지어 그가 바르뎀 가를 쫄딱 망하게 해도 아무 생각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손 덜 가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판이다.
시의원도 빅터에겐 가진 돈의 위력을 확인할 수단, 좀 더 효율적으로 자금을 굴리기 위한 위치에 불과했다. 물론 뒤탈이 없도록 열과 성을 다해 일하긴 하지만, 빅터의 속내를 뼛속까지 귀족인 자들이 알 리도, 이해할 리도 없었다.
명예와 가진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한 자들이니까.
‘내가 하비처럼 그런 걸로 타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나. 어리석은 놈.’
빅터는 생각할수록 더욱 괘씸하고 화가 났다. 하비를 무너뜨리는 데 자신감을 얻어, 같은 방식으로 그 더러운 손을 뻗어오다니.
그때 웃고 있던 티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빅터에게 말했다.
“아, 맞다. 의원님. 스터스 경에 관한 일 말인데요.”
하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은근히 미소짓고 있던 빅터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금기어나 다름없는 화제에 당황한 로지가 티나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티나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벤 오빠 너무 혼내진 마시라구요. 그 오빠 진짜 열심히 했는데……, 하필 의원님 건이 같이 걸리는 바람에 스터스 경의 일까지 전부 신경쓰지 못했나 보더라고요.”
로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이야기 해주었다.
“심하게 자책하고 있던데 옆에서 보기 안타까워서…….”
빅터는 염려하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도 알아. 걱정하지마.”
빅터의 반응을 살피며 긴장했던 로지가 괜찮은 듯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스터스 경은 좀 어떤가요?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한 달 간 일도 못한다는 말이 있던데.”
외교부 측에서 하비의 공석은 한 달 정도라고 이야기를 낸 것 같은데, 빅터는 몹시 못마땅했다.
“고작 한 달? 평생 못하게 해야지.”
로지와 티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안그래도 평소에 총괄 외교관의 뒤치다꺼리나 다른 외교관이 친 사고에 대한 뒷수습, 그 외 많은 것들을 감당하느라 몸이 더 축나고 있었는데.
저번에도 몸이 안 좋은 하비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일거리를 자문하던 총괄외교관이 떠올라 빅터가 이를 갈았다.
물론 하비가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빅터는 더 이상 하비가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하비가 정신이 들고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 지면, 스터스 가의 빈곤한 재정 문제도 밀어붙여 대신 해결할 생각이었다. 아니면 세상 물정에 좀 어두운 것 같은 순진한 스터스가의 집사를 꼬드기든가.
“아무튼 다른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해.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으니 가보겠어.”
“네! 맡겨주세요!”
“조심히 가세요, 의원님! 스터스 경께 안부 전해주세요!”
여기저기서 하비의 안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편지처럼 날아왔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스터스 가의 어둠을 하비에게 대입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인만큼 하비가 어떤 사람인지 비교적 냉정하게 지켜봤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의 사태를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빅터가 하비에 대한 염려를 보내는 자신의 사람들을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하비가 알았으면 좋겠는데.’
돌 던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서서 대기하고 있던 진이 마차에 올라타는 빅터에게 물었다.
“스터스가 저택에서 말입니다. 아깐 쫓겨나신 겁니까?”
예상보다 스터스가 저택에서 빨리 나오는 것을 보고 짐작한 듯 했다. 빅터가 씁쓸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지은 죄가 많다 보니. 뒷말이 쓴 물과 함께 삼켜졌지만 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스터스 경의 집사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너무 완고해서 그 동안 주인님 외엔 아무도 못 들어갔습니다.”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 했다. 집사가 그리 필사적인 이유를 다들 알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주인에게 해가 갈 만한 모든 요인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빅터가 당연하지 않냐는 말투로 말했다.
“스터스가의 집사라 그렇겠지.”
완고하고 고집 세기로는 아주 수많은 가문들 중에 최고니까 말이다.
대번에 납득간다며 진이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군요.”
그토록 싫어했던 위선적인 이름인데, 이제와선 그 고집이 그리 싫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남들은 지키기 힘든 가치들을 고지식하게 지켜온 것이니까.
사람들의 신뢰가 무너진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스터스가의 정신을 인정하는 것은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인 빅터와 그의 사용인들이었다.
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빅터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스터스 경이 자주 갔던 맛집 아십니까?”
뜬금없는 소리에 빅터가 무슨 뜻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자 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레나가 스터스 경이 맛있는 걸 사주셨다고 자랑을 그리 했는데, 위치를 도통 알려주질 않아서 약이 오르던 참이었습니다.”
모른다며 고개를 내젓던 빅터가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약오르는데.”
같이 웃은 진이 차가워진 날씨에 하얀 입김을 불면서 스터스가 저택이 있을 곳을 돌아보았다.
“스터스 경이 빨리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가장 원하는 것이 빅터임을 알았다. 그래서 주인의 긴 침묵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바르뎀 가의 문양을 박은 마차가 천천히 길가를 흘러갔다.
그 뒤를 종소리가 뒤따르듯 따라붙었다. 죽은 아이를 찾는 부모의 울음소리가 광장에 퍼졌다. 서로 손을 맞잡은 부모의 손에 작고 검은 종 하나씩 들려 있었다.
(*검은 종 : 아기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제일 처음 흔드는 종. 아기를 안내하는 검은 천사가 따로 있고, 이를 부르는 종소리.)
***
모든 것이 흐릿했다. 기억을 못하는 건지, 하기 싫어서 안하는 건지조차 불투명했다.
하비는 의식이 몇 번 들었을 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의사에게 물었다. 하비의 상태를 고려한 것인지 자세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정황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기형적인 몸구조로 아이를 갖고, 사산아를 낳고, 유산 했다. 가까스로 다시 알파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제 다시는 오메가가 되어서도, 될 일도 없을거라는 소식이었다.
빅터가 신약을 전량 폐기하라 명했기 때문이었다. 빅터의 명이 없었어도 목숨 걸고 그 지긋지긋한 신약을 없애려고 했던 의사는 당장 제조법이 적힌 종이마저 모조리 파쇄했다.
마지막으로 빅터가 가져간 단 하나의 신약을 제외하고는, 페로몬 교란제 신약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런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하비를, 의사가 안타까이 보았다. 어차피 지금 말해줘도 하비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신을 놓고 멍해졌다. 그러다 잠깐 의식이 깨어나면 같은 것을 묻고, 현실을 인정하는 듯 하다가 또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그만의 방식으로 잔인한 현실을 이겨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의사는 뜨끈해지는 눈가를 문지르면서 하비에게 진심으로 조언했다.
“이제 나쁜 기억은 모두 잊으시고 좋은 것만 생각하세요.”
하비가 인형처럼 의사의 뒷말을 따라했다.
“좋은 것…….”
그런 게 이제 남아 있나. 내게 남아 있는 게 뭐가 있지?
물끄러미 텅 빈 제 손을 내려보고 있던 하비는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 밖에서 우뚝 멈춰섰던 커다란 기척은 서서히 속도를 붙여 하비에게 다가왔다. 의사가 하비에게 다가오는 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의원님, 오셨습니까.”
인사에 대한 대꾸 없이 홀린 듯 다가온 빅터가 하비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주 희미해진 하비의 페로몬이 코끝을 간질였다.
익숙한 밤색 머리칼 위로 얼굴을 대자 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기분 좋은 시원한 페로몬과 함께 하비 특유의 체향도 섞여 났다. 이 온기와 체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빅터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갖 물음이 그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정신 들었어? 좀 괜찮아? 이제 안 아파?
반 로투스에게 지시한 건 내가 아니야. 처음엔 내가 어리석어서 잠깐 나쁜 짓을 했는데, 이젠 아니야. 내가 비밀을 유포한 것도 아니고, 배신할 생각은…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정신 차렸어.
미안해. 정말…미안하다.
여러 번 청해 하비의 집사에게 허락을 받고 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이번에도 자는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의사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이성을 잃고 말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고, 오로지 저 사람을 안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지금 안고 있는데도 더 갈증이 났다.
“흠! 흠!”
지켜보던 의사가 헛기침으로 빅터를 일깨웠다. 환자라서 조심히 대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팔에 힘을 풀긴 했지만, 살이 많이 내린 하비의 몸에 온 신경이 쏠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안겨 있는 내내 하비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단단한 어깨에 진동이 오고, 몸 전체가 잘게 떨리는 것도 느껴졌다.
빅터는 그제야 팔을 완전히 풀고 하비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흉터는 많이 사라졌지만, 안색은 더 안 좋아 보였다.
그 와중에 많이 말라서 수척해진 얼굴에 속이 타들어갔다. 턱선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전보다 푹 꺼진 것 같은 밤색 눈에는…….
빅터가 아연한 얼굴로 반문했다.
“설마, 내가 무서운 거야?”
그간 하비에게서 잘 보지 못했던 감정이 잔뜩 도사리고 있었다. 그건 ‘두려움’ 이었다.
빅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둘만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줘.”
눈치 빠른 의사는 자리를 비워주었고, 빅터는 하비의 반응을 살피며 할 말을 잃고 있었다. 하비가 자신을 두려워한다.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영원히 닫혀 있을 것 같은 하비의 마른 입술에서 천천히 어떤 말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 들으려 더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자 하비는 흠칫 뒤로 물러났다. 피하는 것이 확실했다.
처음엔 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았지만, 기침 몇 번 이후로는 또렷해졌다. 물을 주려 하자 하비는 그 손길마저 거부했다.
하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바는 이러했다.
“내게서… 가져갈 것이 더 남았나?”
하비는 계속 되는 무의식 속에서 빅터가 예전에 했던 말들을 다시 들었다. 그가 했던 잔인한 말들, 전부 예정된 것이었는데 바보처럼 몰랐다. 당장 빅터가 뱉는 달콤한 말에 취해서 어느 덧 잊고 있었다.
[스터스 가의 가주를 임신시킬 수 있다면 내게도 영광이지. 되면 좋고, 안되어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고.]
분명 예전에 그리 말한 적도 있었다. 오메가가 된 것도 모른 채 임신한 것도, 죽은 아이를 낳게 된 것도, 빅터의 예정대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잃을 것도 없다. 하비가 쉰 목소리로 간신히 토해내듯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하면서 하비의 목소리에도, 손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두려움에 섞인 다른 감정도 보였다. 자조, 포기, 절망.
이불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리던 손이 벌컥 빅터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 힘조차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빅터는 말없이 당겨갔다.하비의 이어지는 말이 가슴을 후려쳐서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비는 절규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 끝없는 아득함에 변명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아직 더 남았어? 이번엔 뭘 가져갈 생각이지?”
눈을 더 이상 피하지는 않았지만, 빅터는 오히려 신랄한 말투 때문에 하비를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그가 뱉는 말 하나하나가 빅터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러다 하비가 자신의 몸을 가만히 내려보고 차갑게 뱉었다.
“아. 이 몸뚱이가 남았군.”
자조적으로 비틀린 하비의 입술에서 더욱 건조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필요없으니 가져가. 원하는 만큼 취한 뒤에 버려.”
하비가 경악으로 물든 빅터의 녹색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 별이 내리는 언덕 --
조금은 맥없이 움켜쥐었던 멱살이 풀어지면서 빅터의 브로치가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타닥!
하비는 소리가 나도 그 쪽을 보지 않았지만 빅터는 그 소리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등줄기에 한기가 들었다.
‘이건 위험해.’
하비는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끔찍한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계속 자신을 파괴하는 중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 특유의 진한 절망이 하비에게서 느껴졌다. 하비의 정갈하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어스름한 체념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입고 있는 하얀 튜닉의 흰 빛 때문인지 더욱 창백하고 섬뜩해 보였다.
빅터는 이 진득한 죽음의 맛을 누구보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해적선 안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유형을 보아 왔다.
제일 최악은 지금의 하비처럼 사람이 아예 달라진 것처럼 자포자기하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굳건하던 사람이 희망을 빼앗기고 지킬 것조차 전부 사라지면 가장 빨리 죽음으로 뛰어들었다.
말없이 브로치를 주워 들고 다시 매달면서, 빅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하비를 그 익숙한 어둠에 빼앗길까봐.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이 하나 있었다.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빅터가 하비의 뺨에 한 손을 올렸다. 두려운 것처럼 크게 움찔하는 것에 상처 받으면서도, 빅터는 손을 떼지 않았다.
“가져갈 생각 없어. 뭘 주고 싶은 생각은 있어도.”
전과 같은 말에도 하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빅터의 열렬한 시선을 피하며 냉정하게 말할 뿐이었다.
“…또 거짓만 늘어놓는군.”
짐작대로 하비는 이제 믿지 않았다. 빅터의 눈을 계속 피하면서도 차가운 불신의 눈빛이 어려있었다.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작은 경계와 두려움을 확인하고 빅터는 차라리 안심했다.
‘아직은 괜찮아.’
마음이 완전히 죽어버린 사람은 두려움마저 사라진다. 그래서 빅터는 하비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빅터는 하비의 어깨를 꽉 쥐면서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잘 들어.”
하비가 움찔거렸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세게 잡았다. 이제와서 놓칠 수 없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
빅터가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강한 말투로 선언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널 버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어깨를 아무리 거칠게 쥐어도, 하비는 끝까지 아프다는 소리 한 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미약하게 찡그린 것을 보니 아픔을 느끼고는 있지만, 고집스럽게 말하지 않았다.
힘들고 아프다는 말은 제 말을 받아줄 만한, 혹은 믿을 만한 자에게나 하는 투정이다. 하비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빅터를 흘끗 내려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재촉할 뿐이었다.
“뭘 하든, 빨리 끝내.”
그리 말하는 하비의 가슴팍이 불안정하게 오르내렸다. 하비는 빅터를 만지는 대신 이불을 있는 힘껏 잡았다. 뼈가 도드라진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빅터는 예전처럼 멋대로 자신을 주무르고 있었다. 상대의 어디가 약한지, 어느 곳이 아픈 지점인지 잘 아는 남자였다. 반 로투스가 품어 왔던 질투와 음심을 눈치채고, 그걸 이용할 만큼 영악한 사람이다.
하비는 씹어뱉듯 말했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평소처럼 원하는 대로 해.”
빅터는 허탈하게 웃었다. 서서 하비의 어깨를 꽉 쥔 채로 탄탄한 가슴팍에 머리를 대었다. 예전이라면 빅터가 이러고 있으면 안 그런 척 쑥스럽게 손을 올려 머리칼이라도 만져봤을 텐데, 지금은 그의 행동과 말,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하비의 오해를 빨리 풀어주고 싶었다. 빅터는 고개를 숙인 채로 진실을 고하려 했다.
“그렇게 못 미덥나? 이제 내가 하는 말은 아무 것도 안 들려? 반 로투스를 지시한 건 내가 아니라…!”
반의 이름이 나오자 하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널뛰었다. 가슴에 기대어 있는 빅터의 귓전에 들릴 만큼, 강렬하게. 그래서 빅터는 말하다가 입을 도로 다물어 버렸다. 아직 반의 배신이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그 이름을 말해봤자 하비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어떻게 해야…….’
이건 아무리 말해도, 전혀 닿지 않은 듯 했다.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것과 같았다. 빅터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
몇 번의 대화 끝에 빅터는 확실히 알았다. 이제는 말도 소용이 없다. 여태껏 혀를 놀려 하비를 꾀었으니, 어떠한 말도 하비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하비의 가슴에 머리를 박은 채로 빅터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불안하게 뛰는 하비의 심장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수많은 위협을 넘겨오면서 발달한 그 직감이 또 세차게 움직였다. 어릴 때부터 죽음의 위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최적화된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피하고 싶은 상황에서, 피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답이 나올 땐, 원망스러웠다.
빅터는 피하고 싶어도 그 답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당장 뒤돌아 이 방을 떠나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요구하는 대로 육체 관계를 맺은 후에도, 하비는 그를 거부할 것이다. 그 차가운 거절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두렵기까지 했다. 다시는 안 본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도 없잖아.’
자신 때문에 저리 된 것이면, 되돌릴 수 있는 것도 그였다.
우선 현실에서 붙들 것이 남아있어야 한다. 하비가 자신을 믿게 하는 것이,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하비를 살리는 것이 먼저다. 자신의 마음이나 거절에 대한 공포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단단히 마음 먹은 빅터가 고개를 들었다. 결심이 선 단호한 눈빛으로 그는 하비에게 천천히 말했다.
“널 여기서 안을 거야. 네 말처럼 하려는 건 아니고, 내가 널…….”
감정이 울컥 올라와서 빅터의 말이 끊겼다. 하비의 어깨를 쥔 손이 떨려 왔다. 진작 말하지 못한 게 한이 될 것 같다. 장식이 거의 없는 하얀 튜닉이 빅터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많이 좋아하니까, 네가 안 보이면 돌아버릴 것 만큼 생각하고 있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안으려는 거라고. 알겠나? 다른 이유는 없어.”
빅터의 절절한 말과 표정에 공허한 밤색 눈이 파르르 떨렸다. 밀려드는 빅터의 목소리에 반발하듯 하비가 고개를 옆으로 비꼈다. 예전 같으면 억지로 턱이라도 잡아서 자신을 보도록 할테지만, 빅터는 그러지 않았다. 계속 끈기 있게 제 목소리를 내기만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떠나있는 내내 네 생각만 했어.”
그래도 반응이 없다. 무감각한 하비의 눈동자를 보면서 빅터는 진심을 전하려 했다. 언제나 무거웠던 하비의 것에 비하면 그의 진심은 가볍기만 했다. 그토록 멍청했던 과거지만, 이젠 아니라는 걸 하비가 알아줬으면 했다. 티끌이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그 마음이 닿았으면 했다.
빅터는 떨림을 가라앉히고, 하비의 침대 아래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제법 안정된 낮은 목소리로 하비를 올려보았다.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
마치 기사 서임 같은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빅터가 힘주어 말했다.
“맹세해.”
거짓말. 하비의 입술이 창백하게 질려 빅터를 밀어내려 했다. 따뜻하던 밤색눈에는 거부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가 잘려나가는 것 같아도, 빅터는 꿋꿋하게 이어 말했다. 몸을 일으켜 세워 하비의 귓가에 대고 빅터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주는 것만 즐겨.”
한 손은 하비의 목 뒤를 넓게 잡고 빅터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았다. 한 손은 하비의 손을 깍지끼어 꽉 잡았다. 하비는 긴장으로 손끝까지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빅터는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는, 차가운 손에 체온을 전했다. 아무리 힘 주어도 손이 떨어지지 않자 하비는 헐떡이며 반문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래.”
아무 말 없이 빅터는 허락을 구하듯 한참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작은 숨소리만 평온하게 흘렀다.
어느덧 하비가 더 이상 손을 빼려 하지도, 몸을 뒤로 물리려 하지도 않자 빅터는 천천히 움직였다. 이전과는 다른 관계를 쌓을 생각이었다. 모든 신경을 하비에게만 집중했다. 그를 위해서, 어떤 말을 들어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빅터의 얼굴이 하비에게 다가갔다. 긴 속눈썹이 떨리고, 그 아래 먹구름처럼 흐려진 밤색눈이 자신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게 보고 싶어서 허벅지 꼬집어 가며 참았는데, 참담한 것만 남았다.
회한을 감추며 빅터가 고개를 틀어 반듯한 이마에 입 맞춘 뒤, 아래로 내려와 하비의 입술 위에 잠시 머물렀다.
‘아….’
빅터는 속으로 탄식했다. 키스도 거부하고 있었다. 입술이 좀처럼 열리지 않아서 포기하고 미끄러져 내려가 여린 목 안 쪽을 아프지 않게 빨았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하비의 눈이 작게 일그러졌다.
빅터는 하비의 반응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살폈다. 붉은 자욱에 사과하듯 혀를 느릿하게 굴리자 하비가 흠칫거리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목을 길게 늘리자 희미하게 나던 알파 페로몬이 조금이나마 진해졌다. 성적인 자극에 육체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하비는 작은 자극만으로도 힘겨워 했다. 몸이 여러번 변하면서 더욱 예민해졌다. 느끼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처럼 빅터의 배를 손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힘이 별로 들어가 있지 않았다.
하비의 허벅지를 길게 덮고 있던 이불을 치워버리고 빅터는 튜닉을 들췄다.
빅터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조인 복근에 얼굴을 묻고 하얀 살결 위로 이를 세우자 하비는 아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럼에도 낮은 신음이 새어나오는 것까지는 가리지 못 했다.
“흐으…….”
복근 주변을 서서히 배회하던 입술이 유두에 닿자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빅터가 그것을 입에 넣고 이로 가볍게 씹고, 혀로 굴렸다. 그의 입술이 떠나간 뒤 유두의 끝은 피가 맺힌 것처럼 핏기가 몽우리져 단단히 서 있었다.
붉은 자욱이 새겨진 하비의 하얀 목에 점점 열기가 오르고, 맞잡은 맞은편 손에서 식은땀이 미끌대며 나왔다. 그래도 빅터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유두를 집요하게 괴롭힌 뒤에 가슴팍 바로 아래 발달한 근육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혀를 밀어넣었다. 골처럼 파인 그곳을 질척하게 애무하자 하비는 허리를 연신 떨었다. 얼굴을 덮었던 손을 반사적으로 내리고 아래를 보았다.
“그만……. 헉….”
생소한 곳에 뜨겁고 축축한 것이 닿자 온 몸에 간지러움과 닮은 쾌감이 번져나갔다.
하비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작게 웃음소리를 낸 빅터가 힐끔 눈을 더 아래로 두었다. 하비의 속옷 아래 갇힌 성기가 조금씩 부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읏….”
그 웃음에서 오는 진동에도 간지러움을 느낄 만큼 하비는 쾌감에 약해졌다. 이번엔 빅터의 입술이 단단한 가슴팍에서 더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곳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거슬리는 속옷을 내리자 열기에 가득 찬 반쯤 발기한 성기가 드러났다. 하비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 지 깨닫고 땀과 체온으로 미끈거리는 빅터의 한 쪽 손을 있는 힘껏 억지로 떼어냈다. 평소와 달리 느릿하고 집요한 애무에 근질거리는 몸과 마음이 불편했다.
여전히 하비의 눈은 저 멀리 어딘가로 가 있고, 몸만 취하고 가라는 뜻이 확고해 보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뱉으며 하비가 부탁하듯 말했다.
“이제 됐어. 넣고 끝내.”
전희가 이토록 길었던 적이 없었다. 여지껏 해 온 섹스는 빅터의 욕망에 충실했다. 하비는 그가 하는대로 따라갔고, 묵묵히 그의 욕구에 휘둘려 주었다. 빅터가 워낙 잘해서 관계에서 늘 쾌감을 느끼긴 해도, 하비의 열망은 언제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허나 이제 뭐가 되었든, 빅터는 하비가 숨겨놨던 바람과 욕망을 속속히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세세하게 알아내어 이번엔 자신이 다 맞춰주고 싶었다.
완고한 거절에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빅터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끝낼 생각 없고, 널 버릴 생각도 없다고. 주는 것만 받으라는 거, 그새 잊었나?”
하비가 성기 주변을 만지는 빅터의 손길에 퍼드득 떨면서도 열기 오른 얼굴로 대꾸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이제 이런 지독한 관계는 끝내고 싶은데, 빅터는 전혀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비는 다 놓고 편해지고 싶었다. 스터스 가문이든, 반 로투스든, 언젠가 마음을 뜨겁게 달궈준다고 생각했던 이 남자든, 전부 잊고 어딘가로 가라앉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빅터를 마주할 때마다 이상하게 조여오는 심장에 죄책감이 얹어지는 것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만해…….’
죽을 것 같이 힘든 건 자신인데, 오히려 빅터가 상처받은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지금도 기만하려 들고 있으면서, 다정한 척, 일일이 신경써 주는 척, 가증스런 얼굴로 연인 놀음을 하고 있지 않나.
빅터는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주기는커녕, 믿었던 친구의 약한 마음을 이용해 타락시키고, 결국 배신하게 했다.
[요즘 너와 몸정이 들었는지 그것까진 차마 못 지켜보겠다고 하더라고. 멀리 나가 있는 사이 터뜨리라고 특별히 지시하더군.]
배신한 친구의 목소리에, 까마득히 어둠이 몰려들어 하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지러웠다. 그 때의 참혹했던 기억이 밀려들었지만 간신히 버텼다.
반의 말대로, 몸정인지도 모른다. 육체의 일부를 섞은 만큼 남은 양심의 찌꺼기로 이러고 있는 지도.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는 이성이 하비에게 경고했다.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내주었던 모든 것들을 그 손으로 팽개치고 왔으면서. 이제 와서?
그때 빅터가 손을 뻗어 하비의 눈가를 엄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흘러나오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그는 혼잡해 보이는 하비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믿든 말든 난 내 할 일을 해야겠어.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마. 즐겨.”
선언같이 말한 뒤, 빅터는 그대로 다른 손으로 발기한 하비의 기둥을 붙들고 허리를 숙였다. 뜨거운 용암에 삼켜지듯 하비의 성기가 빅터의 입 안에 파묻혀 사라졌다. 까슬한 음모까지 닿은 입술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들끓던 잡념이 일시에 날아가고, 그 자리엔 믿지 못할 쾌감만이 남았다. 하비가 고개를 젖히며 참았던 신음을 뱉었다.
“흐읏……!”
이불을 꽉 쥐는 하비의 길고 단단한 손에 핏줄이 솟았다. 그걸 눈짓으로 흘끗 본 빅터가 기둥을 잡은 손에 악력을 실었다. 흡입하듯 하비의 성기를 강렬히 머금다가 혀끝으로 선단 위를 누르기도, 혹은 기둥 겉을 핥기도 했다.
하비의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턱끝이 부들거리다 온 몸에 힘이 빠질 때까지-.
빅터의 눈과 귀는, 집요하게 하비만을 쫓았다.
빅터의 눈과 귀는, 집요하게 하비만을 쫓았다. 온 신경이 하비의 반응에 갔다. 잘 느끼고 있는 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척을 하는 건지.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비가 충분히 느끼고 자극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입술이 훑듯이 기둥을 지난 끝에 귀두를 물고 이로 살짝 긁었을 때 가장 큰 반응이 왔다. 열이 오른 얼굴로 하비가 빅터의 뒷머리를 쥐었다.
“적당히 하고…, 읏…, 그만…!”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하비의 상체가 크게 떨리고, 빅터가 물고 있는 성기가 요동쳤다. 빅터의 입이 그리 작은 편은 아닌데 뻐근할 만큼 하비의 성기는 꽤 컸다. 빅터 자신과 엮이지 않고 정상적으로 다른 오메가와 관계를 가진다면, 상대가 기뻐했을 만한 크기였다.
빅터는 생각하니 있지도 않은 상대에게 질투가 폭발했다. 이건 내 것이다. 화가 나는 만큼 하비의 성기를 더 정성스럽게 애무하는데 집중했다.
“허억..., 윽!”
하비가 허리를 비틀면서 갈비뼈에 자리잡힌 근육이 연신 꿈틀거렸다. 한 쪽 무릎을 세우고, 허벅지와 복부가 인내하느라 꽉 조였다.
반사적으로 하비가 아래를 보았다. 빅터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타액이 입질 속에서 질척한 소리를 내고 부드러운 윤활유 역할을 해서 더 외설스러웠다.
금발에 윤곽 뚜렷한 미남자가 정성스럽게 중심을 물고 빨 때마다 눈을 내리깔았다. 분명 보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되는 장면이었지만 하비는 혼란스러웠다. 빅터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먼저 저버린 건 그쪽이면서, 아쉬운 듯 구는 건 무슨 연유인지.
빅터의 입이 다시 한 번 성기를 집어삼키고 기둥 아래를 혀로 굴릴 때, 하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순간 하비가 빅터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끝까지 성기를 입에 담았다. 아래로 몰려있던 열기가 한순간에 위로 치솟았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하비의 강건한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빅터의 머리를 잡은 손에도 힘이 실렸다. 붉은 기운이 온 몸에 번지고, 하비는 경련이 오는 턱을 위로 휙 치켜들었다.
“헉…….”
뜨끈한 정액이 빅터의 입 속으로 쏟아졌다. 입천장을 긁듯이 튀어오른 성기에서 울컥대며 많은 양의 정액이 흘러내렸다.
오랜 애무와 전희로 사정감은 극락에 가까웠다. 경직된 몸이 위아래로 쾌감을 전달되면서 서서히 떨려 왔다. 저절로 한껏 오므라든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하비가 강렬한 고양감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빅터는 입 속의 정액을 망설임없이 그것을 삼켰다. 정말 미친건지 비릿한 내음조차 사랑스러웠다.
사정 직후 찾아온 나른함에 늘어지던 하비가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뭐하는 거야.”
그제야 빅터는 허리를 펴고 젖은 입술을 엄지로 눌렀다. 남은 정액까지 모두 삼켜 버린 빅터가 새삼 무엇이 놀랍냐는 듯 한가하게 물었다.
“좋았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하비는 말을 잃고 충격에 휩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든 걸 다 가진 남자다. 그런 자가 입으로 같은 알파의 성기를 물고, 애무하고, 심지어 극한의 쾌감을 이끌어 낸 뒤 정액을 먹기까지 했다.
‘뭘 위해서?’
전에도 구멍을 핥는 짓을 해서 노예나 하는 거라며 기겁했던 것이 간신히 기억의 끄트머리 위로 올라왔다.
하비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도 빅터는 자신에게서 뭔가 더 끌어낼 것이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멀쩡한 귀족이 자존심을 버리고 다른 자의 정액을 삼키는 미친 짓을 해가면서 얻을 만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하비는 불현 듯 떠오르는 가정에 창백해졌다. 빅터가 먼 출장을 떠나기 전에 각오처럼 말한 것이 생각났다.
[나중에, 제대로 되돌려 줄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줘.]
‘설마…….’
돌려준다는 것이, 복수였나.
그의 복수는 아직 끝이 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을 잘게잘게 부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통을 주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빅터는 제대로 성공했다.
왜 마음을 주어서는.
속삭이던 그 말들이 전부 진심인 줄 알고, 가장 믿지 말아야 할 자에게 약점을, 빈틈을 보였다.
어리석기는.
“날 어디까지 떨어뜨릴 셈이지.”
하비는 처참하게 구겨진 얼굴로 빅터를 보았다. 이렇게 또 여지를 남기고, 진심인 줄 착각할 만한 절절한 고백으로 사람을 흔들어 놓은 뒤 다시 절망으로 빠뜨릴 생각인 듯 했다. 몸에 남아있던 기분 좋은 잔열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은근한 미소가 피어 있던 금발 미남자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또 저런 얼굴이다. 사람 헷갈리게 하는, 상처 받은 것 같은 얼굴.
하비가 빅터의 진갈색 더블릿을 꽉 쥐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하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으면 이제 더는 그만…….”
힘겹게 이어지는 하비의 말을 자르고 빅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꿍꿍이 같은 거 없어. 떨어뜨릴 마음도 없고.”
제발 믿어주기를 바라지만, 고개를 드는 하비의 눈에는 더욱 강한 불신만 가득했다. 빅터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온 몸을 내던진 진심이 의심으로 되돌아올 때마다 끝없는 바닥으로 쓸려가는 것 같았다.
“정말, 없어.”
몇 번을 더 말하면 믿어줄까.
하비가 무너진 결정적인 원인이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빅터는 그게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 했다.
‘그러니 내가 해야 돼.’
몰려오는 지옥 같은 절망에, 빅터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자 드디어 결심이 겨우 섰다.
무거운 얼굴로 빅터는 입고 온 더블릿과 튜닉, 속옷을 차례차례 휙 벗어 던졌다. 돌처럼 단단한 체격 위로 수많은 흉터가 드러났다.
반사적으로 하비의 시선이 그 쪽으로 향했다. 특히 팔에 난 길죽한 흉터로.
상어에게 당했다던, 그 흉터다.
하비는 좋은 날이라 생각했던 짧은 휴가 때 빅터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생각했다. 빅터는 그때도 과거의 상처를 핥으며 복수할 생각만 다졌겠지.
하지만 하비는 도무지 저 흉터에서 눈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저걸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지끈거렸다. 기가 막혔다.
빅터도 하비의 눈길이 자신의 몸에 박혀있음을 깨달았다. 몸 전체에서 가장 크게 난 흉터 쪽이었다. 살이 찢겼다가 다시 붙은 듯한 흔적이었다. 빅터의 눈이 기대로 흔들렸다.
흉터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 날, 생각하나?
잠시 생겼던 희망도 잠시, 하비는 다시 눈길을 피했다. 빅터는 한숨을 내쉬고 한 쪽 눈 위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참 어려웠다.
‘역시 안 되나.’
빅터는 찢겨 나갈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단단히 결심을 다졌다.
‘이것 밖에 없어.’
말은 믿지 않고, 행동은 보질 않고, 마음도 닫혀 있다. 진심은 닿지도 않는다.
방법이 없었다. 그가 아는 남은 수단은 이것 뿐이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이제부터 모험을 걸 생각이었다. 잘 되면 최상의 시나리오지만, 안 되면 아마 빅터는 앞으로 자신이 제대로 살 수 없으리라 예상했다.
그래도 해야 했다. 하비를 위해서라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를 찍어누르고, 빅터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하비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잘 기억해둬. 기분 좋은 감각만 그 몸에 새겨넣어. 이제 네가 아프거나 힘들 일은 없을 거니까.”
주문처럼 말한 빅터는 한 올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하비의 몸 위로 올라왔다.
삐걱-
침대가 건장한 성인 남자 둘의 무게에 작은 비명을 질렀다. 수상한 소리가 나면 하비의 집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빅터는 그가 하비의 상태와 관련해 몹시 예민해져 있으니 멱살을 잡고 끌어내는 만행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여겼다. 하비의 집사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취하는 것처럼 보일테니까. 그럼에도 빅터는 감행했다.
침대 위로 체중을 싣고 메마른 하비의 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이 얼굴이 언제쯤 웃어줄까. 마음이 쓰렸지만, 빅터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도저히 못 믿겠으면 이렇게 해.”
숨막히는 긴장으로 목울대가 일렁였지만, 빅터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다음은 정말로 뱉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이대로 두면 하비는 계속해서 자신을 파괴하다가, 끝내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빅터의 녹색 눈이 뱀처럼 가늘게 늘어나고, 독해졌다.
“있는 힘껏 날 증오해.”
마주보고 있는 하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난 환자한테도 욕정하는 쓰레기 새끼니까, 그래도 돼.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고.”
사실은 당장이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지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다시 예전처럼 좋은 관계로 돌아가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안 될 것을 알고 있다. 어차피 하비에겐 닿지 않을 말들이다. 미련 갖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빅터는 불쑥불쑥 치미는 애원을 스스로 짓밟았다.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비의 정상화다. 현실로 머물게끔 붙들 만한 것이 없다면, 누군가를 미친 듯이 미워하는 힘이라도 필요하다.
빅터 자신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좋은 감정을 가졌던 하비를 오히려 미워하고 증오함으로써 끔찍한 시절을 버텼던 것처럼 말이다.
[애정보다 증오의 힘이 더 강하다고 하잖아요. 주인님도 그래서 스터스 경에 대한 마음을 헷갈리셨던 게 분명해요.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빨리 정신 차리세요, 제발.]
언젠가 잔소리처럼 쏘아대던 레나의 말이 힌트가 되었다. 그의 말이 맞다.
앞으로도 계속 온 몸으로 하비에게 진심을 전할 것이다. 끝까지 전해지지 않는다면, 격렬한 증오의 대상으로 남는 것이 하비를 위한 길이다.
빅터는 제 아픔을 삼키고 하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에 대었다. 맨 살갗을 뚫고 나올 듯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심장에 대고 맹세하듯, 빅터가 눈가를 구겼다.
흉폭해진 두 눈이 하비를 위한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
“그리고 널 아프게 한 새끼들은 다 죽여줄 테니까, 걱정마.”
비록 그 대상이 자신일 지라도. 하비가 정말로 원한다면 이 손에 칼을 쥐어줄 생각도 있었다. 지난 일을 후회하며 하비의 손에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결말 같았다.
굳어 버린 하비의 뺨에 짧게 키스를 한 빅터가 서서히 움직였다. 침대 헤드에 한 손을 짚고 하비와 성기를 위아래로 겹쳤다. 미끌거리는 식은땀으로 손이 몇 번 허탕을 쳤지만 결국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
차마 유산까지 한 몸에 대고 삽입까진 못 할 것 같아서 취한 차선이었다.
핏발 선 우성 알파의 성기가 비벼지자 하비는 엄청난 자극에 허우적댔다. 빅터의 것이 워낙 커서 위에서 누르는 것만으로도 열기 때문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누르고, 비비고, 거기다 빅터의 손이 더해져 옆면을 꽉 쥐어 힘을 보태자 이불을 쥔 하비의 손도 절박해졌다.
묵직한 성기가 짓누르며 일으키는 거친 마찰에, 결국 하비가 뜨거운 숨을 터뜨렸다.
“허윽……!”
사정한 것이 얼마 안 되었지만 중심이 금방 단단해졌다. 침대 위로 양 무릎을 꿇고 있는 빅터의 굵은 허벅지도 터질 것처럼 부풀고, 흔들리는 등근육이 팽팽해졌다. 빅터의 아래에 있는 하비의 단단한 몸이 처연하게 떨리고, 하얀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빅터는 그 와중에도 하비의 몸 이곳저곳에 키스했다. 어깨와 쇄골, 단단한 복부, 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게다가 하비가 정신없는 틈을 타서 고개를 틀어 입술을 먹기도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하비의 입술은 황홀했다. 많이 상하고 껍질이 갈라진 곳도 있었지만 빅터는 그 상처를 핥듯이 부대꼈다.
빅터가 주는 쾌감에 헐떡이면서 하비는 끊임없이 같은 것을 생각했다. 머리를 후려치는 충격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난 이 자를 미워해도 된다.
거부하는 것은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도 모자라 지금도 끝없이 거짓을 뱉는 이 끔찍한 거짓말쟁이에게, 원한과 증오를 퍼부어도 된다.
그런데 자꾸만 몸 속으로 파고드는 이 한기는 뭐란 말인가.
대체 무엇때문에?
생각을 거부하는 사이, 하비의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또다시 어둠이 깃들었다.
하비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사라졌지만 빅터는 행위에 집중하느라 미처 보지 못 했다. 빅터의 이마에서 땀이 후두둑 떨어져 하비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눈가에 맺혔다 내리는 그것은 눈물처럼 보였다. 의지를 잃은 밤색 눈은 본능적인 쾌감에 따라 맥없이 흔들렸다.
“헉… 허억…”
성기를 붙잡아 흔드는 빅터의 손길이 더 거세지고 빨라지자 하비는 밀려드는 사정감에 입을 벌렸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그 간격을 빅터의 입술이 메꾸었다. 혀가 난잡하게 얽히고 신음은 타액과 함께 자꾸만 옆으로 새었다.
찌걱찌걱!
두 성기가 부대끼며 나는 음란한 소리가 질척대며 퍼지고, 간혹 부딪치는 음낭이 쿠퍼액으로 젖어 희게 빛났다. 아래에 짓눌려 있던 하비의 성기가 푸르르 떨리더니 쿠퍼액을 조금씩 뱉어냈다. 사정 직전인 듯 하비의 반응이 더욱 격렬해지고, 온 몸의 근육이 일시에 굳었다.
빅터의 미간도 일그러지더니 짧게 신음을 뱉었다. 흉기 같은 빅터의 어깨가 성적인 긴장으로 꽉 조였다. 엄청난 절정이었다. 거의 동시에 사정했다.
“크윽……!”
하비의 복근 위로 두 사람 분의 정액이 길게 튀었다. 한 번 배출한 하비의 것은 많이 묽어져 있고, 빅터의 정액은 턱까지 튀기도 했다. 강제로 밀려올라간 절정은 잔떨림으로 남고, 이불을 쥔 하비의 손가락도 경직되었다.
빅터는 눈을 굴려 주변을 보았다. 어딘가 닦을 것이 있을 것이다. 의사가 두고 간 물통과 그 속에 담긴 물수건이 몇 개 있었다. 그가 침대 아래로 내려가 하나를 쥐어 먼저 하비의 배에 튄 정액들을 닦아냈다. 끊임없는 검술 훈련으로 쌓은 견고한 그 몸을 손수 구석구석 매만졌다. 그런 뒤 자신의 몸에 튄 잔여물도 닦았다.
물수건 하나를 더 쥐어 하비의 얼굴에 난 땀을 닦아주는데, 빅터는 이게 뭐라고 웃음이 났다. 누군가를 돌보는 느낌도 좋을 수 있다니. 귀찮고 힘겨운 것이 아니라 며칠, 아니 평생을 할애해도 모자람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빅터가 흘끗 눈을 들어 하비의 반응을 확인하니 아무런 거부가 없었다. 그래도 순순히 몸을 맡기는 걸 보면, 어쩌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없던 희망이 조금 솟았다.
그런데 열기가 점점 빠져나가는 하비의 얼굴이 다시 무감각해졌다.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형처럼.
놀란 빅터가 물수건을 잠시 떼어두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비?”
하비는 눈으로 차가운 경멸을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 부탁이나 애원이 아닌, 명백한 혐오였다. 빅터의 손에서 물수건이 삐끗 떨어질 뻔 했다. 간신히 놓치지 않고 잡은 빅터는 직감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건...'
빅터는 이 격렬한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자신은 하비를 억지로 취하고, 하비는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기세를 잃지 않고 반발했다. 그 시절보다 더 맹렬한 미움이 깃들어 있었다.
묵묵히 물수건을 내려둔 빅터는 그제야 알았다. 하비는 자신이 내민 패를 받아들였다. 온 몸을 내던져 지핀 불씨를 증오로 맞바꾸어, 살기 위한 연료로 삼고 있었다.
빅터는 쓸쓸함을 속으로 삼켰다. 다행이다. 이제 그는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입은 빅터는 물끄러미 하비가 준 브로치를 보았다. 그걸 떼어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이제 그는 이것을 달고 있을 자격이 없었다. 살점을 잘라 두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빅터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두고 간다. 나중에 돌려줘. 줄 생각이 생기면 그때.”
무언가 한계를 넘긴 듯, 잠시 열렸던 하비의 정신이 다시 닫혔다. 의식이 사라진 것 같은 저 무표정함에도 미련이 남아 마지막으로 돌아봤을 때, 하비는 여전히 증오로 일렁이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탁.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간 빅터는 문 앞에 서서 주르륵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식은땀으로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그가 쓸쓸하게 웃었다.
좋은 결말 따윈 없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 뿐이다. 하비는 이제 그에 대한 증오의 힘으로 이겨낼 것이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기뻐해야지. 원하던 거잖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빅터는 고장난 것처럼 팔을 늘어뜨렸다. 왜 잘 될 수도 있다는 헛된 기대를 한 건지.
"젠장..."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예전처럼 쑥스러이 웃어 주면 좋겠다. 그 웃음 가운데 들려주던 선량한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어쩌겠어. 이미 좋아하게 됐는데.]
그 날의 고백이 선선하게 바람처럼 건너왔다. 좋은 기억 가운데 경멸의 시선이 교차되어 섞였다. 지금도 이 문 너머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찢겨 나갈 것 같아서 빅터는 한 손으로 제 가슴께를 마구 쥐어뜯었다. 때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와 그를 바닥 없는 절망으로 밀어넣었다.
하비는 이런 고통을 어떻게 견딘 걸까.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처절한 이 아픔을, 무슨 생각으로 버틴 걸까. 얼마나 아팠을까.
어떤 극적인 상황에서도 아까워서 흘리지 않았던 것이 빅터의 뺨을 타고 내렸다. 깊은 회한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고, 목이 갈라지는 것처럼 쓰려 왔다.
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지는 눈물을 그저 두면서, 빅터는 하비가 겪었을 아픔과 고통들을 생각했다. 그것들은 다시 돌아와 빅터의 마음을 거칠게 헤집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이 모든 걸 시작한 게 하필 자신이라서. 멈출 수 있을 때 멈추지 못해서. 제일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거짓으로 널 아프게 할 생각만 한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용서를 구하고 싶지만 그럴 자격도 없었다. 그런데 매달리고 싶다. 마음 약한 하비는 어쩌면 받아줄지도 모른다. 그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죽여버리면 마음을 돌려줄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 빅터의 물기 젖은 눈이 광기로 번들댔다.
이리저리 갈라지는 정신 속에서 한가닥 남은 이성이 그를 말렸다. 하비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잉 보복하는 것을 명예롭지 못한다 여긴다. 경멸과 혐오가 섞인 하비의 밤색눈이 어딘가에서 빅터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두려워져서, 빅터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괴로워했다. 바닥에 떨어진 물기는 더 깊은 곳으로 빨려들듯이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다 받아들일테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마."
하비의 집사가 복도 끝에서 말없이 그런 빅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복잡한 심경이 어려 있었다.
***
“스터스 경은 잘 보고 오셨나요? 괜찮으신 건 맞죠?”
레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하비의 안부를 물어왔다. 저택으로 돌아온 빅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서 말은 나눠 보셨어요?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얼핏 들었는데….”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와. 방금도 이야기하고 온 거고.”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신거죠?”
일말의 희망을 안고 레나가 눈을 빛냈다. 그런데 빅터의 대답이 영 이상했다.
“좋은 이야기라……. 글쎄.”
레나가 불길한 예감에 얼굴을 굳혔다. 빅터가 애매하게 말을 흐릴 땐 분명 찜찜한 것이 있다.
“무슨 이야길 하고 오셨는데요?”
줄기차게 거부만 당하다가 몸의 대화를 잠깐 하고 온 게 다였다. 그나마 몸의 대화도, 끝난 직후 최악의 기분으로 끝났다. 의도한 것이긴 했지만 막상 당하니 온 몸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빅터는 하비를 살리기 위한 연료를 부었다. 그걸 애정으로 바꾸든, 증오로 치환하든 선택은 하비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전자를 택해주길 간절히 바랐는데, 하비는 후자를 택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가서 남은 불씨를 지펴야 할텐데, 벌써 자신이 없었다.
잠깐 보인 반응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나약한 비명을 지르는데, 더 할 수 있을지.
믿었던 주인이 길게 침묵하자 레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설마, 아픈 분한테 무슨 짓 하신 건 아니시죠? 몸도, 마음도 다 아프신 분인데요. 아무리 바보같은 주인님이라도 설마…….”
말이 없는 빅터를 보며 레나는 망연자실했다.
분명 뭔가 사고를 치고 왔다. 놀라서 더 물으려던 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빅터가 손을 들어 막았기 때문이었다. 뭐라도 해야 이 미칠 듯한 공허함이 달래질 것 같았다.
“지금은 바빠. 다음에 이야기하지.”
힘없이 늘어져 있던 기세에 갑자기 불이 붙었다. 흉폭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전에 없던 분노였다.
“이 야밤에 뭐 하시게요?”
빅터가 뒤돌아서며 스산한 얼굴로 레나를 보았다.
'헉...'
레나의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압도적으로 짓누르는 페로몬과 오랜만에 보는 주인의 광기였다. 덜덜 떨면서, 레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오메가임을 배려해서인지 금방 페로몬을 거두면서 빅터가 짧게 말했다.
“사냥.”
하비를, 그리고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자를 끌어내릴 차례였다. 하비와 한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반 로투스에게 진짜 지옥이 뭔지, 보여줄 때이다.
반 로투스에게 진짜 지옥이 뭔지, 보여줄 때이다.
그때였다. 잠시 생각하던 레나가 얼굴을 손으로 한 번 훑어 내렸다. 그리곤 눈을 반짝 빛냈다.
“주인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레나가 허겁지겁 어딘가로 가더니 빅터에게 한 아름 무언가를 안겨주었다. 빅터가 돌아온 레나를 보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건 뭐지?”
가면 투자회 때 썼던 검은 표범 가면과 눈이 뚫린 새까만 복면, 검은 가죽 장갑이었다. 급히 뛰어온 건지 레나가 헉헉대며 설명했다.
“더러운 짐승 피가 주인님께 튀면 안되니까요. 머리칼에도 튀실까봐 복면도 준비해 봤어요.”
말은 그리해도 레나는 그가 무슨 사냥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복면까지 살뜰히 챙긴 걸 보면 그러했다. 누군가에게 보이면 안 되는 사냥임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빅터는 의아한 얼굴로 레나를 보았다. 레나는 사람 사냥을 싫어했고, 빅터가 저지르는 잔인한 짓도 혐오하는 편이었다.
“내가 하는 ‘사냥’을 안 좋아했잖아. 갑자기 왜.”
레나가 창백하게 웃으며 빅터의 등을 떠밀었다.
“이번 사냥은 특별하니까요. 잘 다녀오세요, 주인님.”
빅터가 헛웃음을 지으며 레나가 준비한 것들을 챙겨서 나오는데, 따라붙는 벤과 진, 나스타도 비슷한 물품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너희도?”
벤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까만색 사냥개 가면을 쥐고 있었다.
“네. 레나가 다 챙겨줬습니다.”
“웬일이래. 나 이런 일에 그렇게 의욕적인 레나 처음 봤어.”
까만 고양이 가면을 쥔 나스타도 고개를 갸웃하고, 벤과 마찬가지로 같은 사냥개 가면을 들고 있는 진이 곁에서 대꾸했다.
“스터스 경이 관련된 걸 아는 거겠지.”
레나가 준비해 준 복면과 검은 표범 가면을 차례대로 쓰면서 빅터가 피식 웃었다.
“만족스러운 사냥이 되겠는걸.”
심지어 장갑마저 손에 꼭 맞았다.
***
반 로투스는 오늘도 몹시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하비가 사라지고 그에 대한 욕과 비방이 들려오는 것이 천국의 소리처럼 들렸다.
물론 처음 얼마간은 오랜 친구였던 하비에게 조금 죄책감도 들고,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마저도 금방 사라졌다. 어차피 욕 먹어도 마땅한 스터스 가였다. 자신이 손대지 않아도 누군가가 터뜨렸을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마저 들었다.
그 증거로 빅터가 돌아왔음에도 자신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온갖 사교 클럽에서 활개를 치고 다녀도 못 본 척 했고, 딱히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연인에 대한 의무인 것처럼 하비의 무성한 소문을 수습해주려는 정도의 성의만 보였다. 빅터의 귀환 이후 긴장하고 있던 반은 그제야 안심했다.
‘역시 그 놈도 하비를 이용한 거였어.’
빅터 또한 하비와 진실한 관계인 것처럼 공개적으로 연기를 한 것에 불과했다. 불쌍한 친구. 하비는 진심을 다했던 연인에게도 철저히 배신당한 것이다. 반은 그리 믿었다.
가면 투자회는 오늘도 성황이었다. 사회자인 반은 즐비한 귀족들을 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돈과 미인, 노예, 가면을 쓴 익명과 난잡한 섹스가 오가는 이 장소는 반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이제 방탕한 시간이 시작될 때이다.
게다가 오늘은 매력적인 알파 귀족 여성이 유혹해 왔다. 반은 약으로 인해 오메가가 된 하비를 본 이후로, 이상하게 같은 알파를 안는 취미가 새로 생겼다. 누가 봐도 알파임에 분명한 금욕적인 얼굴이 붉게 젖어서 애액을 흘리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떠올려도 아랫도리가 후끈거렸다.
그 때문인지 알파 ‘남성’ 에게 더욱 끌려서 왠지 까만 고양이 가면을 쓴 키 크고 늘씬한 알파 여성의 유혹을 뿌리쳤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건장한 체격의 알파 귀족 남자가 접근해 왔다. 얼핏 봐도 몸이 좋아 보이는 까만 사냥개 가면을 쓴 사내였다.
반은 가면을 썼음에도 이토록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감동했다. 본인의 성적인 매력이 이리도 출중한지 오늘에야 알았다.
‘오늘은 나의 날인가.’
알파 귀족 사내는 반의 가슴을 은근히 손대며 포도주를 한 잔 건넸다. 얼결에 포도주를 마신 반에게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비좁은 곳보다는 더 멋진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좀 멀리 나가서 관계를 즐기고 싶다는 은근한 말에, 반은 이성을 잃고 그를 따라나섰다. 어차피 투자회 행사는 다 끝났고, 뒤처리는 다른 자에게 맡겨도 되었다.
함께 밖으로 나가자 다소 어두운 길목 위에 마차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반은 홀리듯 거대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내부도 화려했다. 곳곳에 보란 듯이 박힌 보석과 쉽게 구하지 못하는 고급 원목 향이 가득했다. 돈 많은 귀족임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잘 보이지 않던 구석 자리에 압도적인 페로몬을 뿜는 검은 표범 가면의 사내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깜짝 놀란 반이 뭐라 대응하기도 전에, 검은 표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잘했어.”
“이, 이건 뭐…, 윽!”
당황한 반이 마차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갑자기 몰려드는 아득한 기운에 비틀거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까 사냥개 가면의 알파 귀족 사내가 내밀었던 포도주가 얼핏 떠올랐다.
‘거기 뭔갈 탄거였나……!’
반은 고꾸라지다 마차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졌다. 간신히 고개를 틀자 가물거리는 시야로 보이는 표범 가면 아래 아름다운 녹색 눈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쓰러지는 것도 추잡하군.”
“동의합니다.”
까만 사냥개 가면을 쓴 알파 사내가 혀를 찼다. 기억 날 듯 말 듯 한 목소리들을 가늠하다가 반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러다 반이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몸이 차가운 어딘가를 쓸고 있는 통각이 생겨서였다. 한 쪽 발목은 누군가에게 잡혀있고, 질질 끌려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추웠다.
반쯤 떠진 시야로 주변을 살피자 황량한 벌판이었다. 자신의 발목을 잡고 어딘가로 끌고 가고 있는 두꺼운 팔은 보통 것이 아니었다. 발목을 휘감고 있는 큰 손은 검은 가죽 장갑을 덧씌우고 잇었다.
반은 그제야 정신이 확 깨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누군지도 모를 자에게 잡힌 한 쪽 발목도 지끈지끈 아파왔다. 계속 끌려가던 반이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너, 뭐야! 여긴 어디야! 아무도 없나?! 누구 없어?”
끌고 가던 자의 걸음이 멎었다. 반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그 자를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보았다. 반을 향해 뒤돌아선 자는 검은 표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기절 직전에 마차에서 본 사람이었다.
그는 눈만 간신히 드러난 형태였는데, 어딘지 익숙한 녹색 눈이 짙은 분노로 일렁였다. 검은 표범 가면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혀부터 잘라버리기 전에, 닥쳐.”
반은 얼얼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건 분명히 아는 목소리였다. 정신이 명료하게 들자 기억이 났다.
“설마, 바르뎀 경?”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검은 표범 가면은 대꾸없이 반을 끌고 갔다. 목표는 저 앞에 있는 스산한 오두막집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소름 끼치는 풍경이었다. 자라다 만 누런 잡초들이 으스스 스산한 초겨울 바람에 떨리고, 믿기지 않을 만큼 인적이 전혀 없었다.
스삭, 스삭
잡초 사이를 헤치는 묵직한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고, 반은 두려운 눈으로 저를 끌고 가는 남자를 올려보았다. 등에 쓸리는 따가운 잡초들보다 무감정한 빅터의 눈빛이 더 소름 돋았다.
더 공포스러운 건 빅터가 체격이 큰 편인 자신을 한 손으로 끌고 가면서 전혀 무거운 기색조차 없는 것이었다.
빅터가 오두막을 열자 이미 대기하고 있는 세 명의 남녀가 있었다. 한 명만 빼고 모두 아까 반을 유혹했던 자들이었다.
“나, 날 속였어……!”
제일 먼저 반을 유혹했던 알파 귀족 여성, 나스타와 진, 벤이 주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중 반에게 포도주를 먹였던 알파 귀족 사내, 진이 나서서 고했다.
“약은 준비해 뒀습니다.”
끌고 온 반을 오두막 구석에 짐짝처럼 팽개쳤다.
쾅!
아파서 신음소리를 내는 반을 무시한 채 빅터가 전혀 흐트러짐 없이 고갯짓했다.
“저 돼지 새끼 앞에 놓아 둬.”
진은 종이로 감쌌던 알약 두 개를 꺼내 각자 하나씩 반 앞에 두었다. 구석에 구겨진 반이 도망갈 기회만 노리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나한테 뭐, 뭘 하려고?! 난 로투스 가문의 차남이다!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당장 우리 가문이 너희를……! 커억! 꺽!”
옆에서 조용히 대기하던 벤이 무표정한 얼굴로 두서없이 떠드는 반의 얼굴과 복부를 차례로 걷어찼다. 바위에 얻어 맞는 기분에 반은 피를 토하며 고개를 푹 꺾었다.
답답한 듯 복면과 가면을 벗은 검은 표범은 정말로 빅터 바르뎀 경이었다. 금발 머리와 함께 선명한 이목구비가 드러나고, 매력적인 녹색 눈이 길게 웃었다. 검은 가죽 장갑 끝을 잡아당겨 더욱 꽉 조인 빅터가 반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피에 젖은 얼굴로 반은 빅터가 왜 이러나 맹렬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반은 지금쯤 침상에 누워 있을 자신의 친구를 떠올리며 속으로 분노의 비명을 질렀다.
‘네가 끝까지……!’
하비 때문일 것이다. 빅터는 그를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발목을 잡는 하비의 존재에, 반은 치를 떨었다.
반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틀며 그를 바라보는 빅터의 눈은 맹수의 것과 같았다.
빅터는 앞니가 부러져 나간 흉한 몰골로 덜덜 떠는 반에게 대화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의자 손잡이를 툭툭 느리게 두들겼다.
이번엔 진이 다가와 날이 넓고 완만하게 구부러진 단검을 양손으로 바쳤다. 오두막에 비쳐 들어오는 차가운 달빛이 단검의 넓은 면을 반짝 비췄다.
단검을 손에 들고 날을 이리저리 확인하듯 살피는 빅터의 얼굴은 흡사 악귀였다.
“하비한테 먹인 그 약, 처음엔 그걸 먹이고 널 오메가로 만들어 바스칸 감옥의 가장 하층 죄수들에게 돌릴 생각이었거든.”
반이 마른침을 삼키다 기절할 듯 놀랐다. 바스칸 감옥은 악명 높았다. 거기다 최하단 층에는 가장 죄질이 악랄한 죄수들이 수감된 곳이었다.
빅터는 자지러질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는 반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근데 혹시라도 즐기면 어쩌나 걱정이 들더라고. 너같은 돼지 새끼는 그런 데서도 쾌감을 느낄 것 같거든.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어?”
나스타가 미간을 구기며 맞장구쳤다.
“생각만 해도 역겹네요.”
빅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관대한 척 말했다.
“일단 기회는 줘보려고.”
반의 앞에 놓인 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빅터가 잔인한 선택을 종용했다.
“여기 약 두 개가 있어. 하나는 네 놈이 하비한테 먹인 그 빌어먹을 약이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수면제야. 자고 일어나면 발가락 몇 개와 귀, 손가락 두어개는 날아가 있겠지만, 바스칸 감옥의 최하층 죄수들은 면할 수 있지.”
다 설명한 빅터가 앉은 채로 허리를 숙여 반을 재촉했다. 악마같이 비릿한 미소가 빅터의 입술에 걸렸다.
“무슨 약을 선택하게 될 지는 네 놈 운명에 달려있지. 자, 선택해.”
빅터는 주머니 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어 시각을 확인했다.
“빨리해. 괜히 시간 끌겠다는 개수작을 부리면 수면제고 뭐고 네가 의식이 있을 때 하나씩 절단낼 테니까.”
빅터의 느른한 협박에 반이 잘게 떨리는 손을 뻗어 하나를 선택했다. 물 따윈 없지만 빅터의 말없는 재촉에 우선 삼켰다. 목이 걸릴 것 같았지만 억지로 삼켰다.
네 쌍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반은 점점 몸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수면제……?”
하비가 먹었던 그 약은 아닌 것 같았다. 하비는 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고꾸라지며 괴로워 했으니까. 오메가로 강제로 변하는 것은 초반에 내장이 다 타들어 가는 것처럼 극도의 고통을 수반한다고 들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반을 모두가 싸늘한 눈길로 보았다. 그 중 나스타가 다가와 갑자기 반의 머리칼을 콱 움켜쥐어 올리더니 품에 있던 칼로 잘라냈다. 빠른 손길로 풍성한 머리칼 대부분을 쳐낸 나스타가 뒤로 물러났다.
볼품없이 드러난 맨머리를 빅터가 물끄러미 보았다. 안그래도 못 봐주는 얼굴이었는데 더 지독한 몰골이 되었다.
그때 빅터가 입을 열었고,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내가 설마 그딴 자비를 베풀었겠어? 로투스 경은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군 그래.”
비웃듯 말한 빅터가 넓적한 단검을 들고 반의 앞에 서서 무릎을 굽혔다. 그는 시험 삼아 예리한 날로 반의 맨머리부터 이마까지 천천히 그어 내렸다.
“끄아아악!”‘
반은 그 작은 칼짓에도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너무 아팠다. 몸이 이상했다. 피가 흘러내리는 감각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약이 아주 잘 들었다.
지켜보던 빅터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더니 칼날로 벌써 동공이 풀린 반의 뺨을 툭툭 쳤다. 마음에 안 들었다. 고작 이딴 아픔으로 정신이 나가다니.
하비는 더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했는데. 그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직 멀었다.
“네가 먹은 건 신경 하나하나가 예민해지고 고통이 극대화되는 약이야. 참고로 약 두 개가 다 그 성분이었어.”
애초에 속임수였고 선택의 여지 따윈 없었다. 친절히 설명을 마친 빅터가 이번엔 반의 손등 위로 단검을 내리꽂았다.
푸욱!
살이 갈라지고 분수처럼 붉은 피가 솟았다. 더 끔찍한 비명이 밤하늘을 찢었다.
빅터는 내리꽂은 단검에 더 힘을 실어 반에게 속삭였다.
“널 구해줄 놈은 아무도 없으니까, 돼지 새끼에 어울리는 비명이나 마음껏 질러. 하비라면 너같은 새끼라도 구해줬겠지만.”
빅터의 팔뚝 위로 터질 듯 핏줄이 솟았다. 뜨거운 핏물이 살아있는 것처럼 갈라진 반의 손등 틈에서 꾸물꾸물 번져 나왔다. 그 피는 빅터의 까만 장갑에 스며 들었다.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거든. 네 놈이 놓은 그 개같은 덫 때문에.”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픈 이름을 가슴 속에 구겨 넣으며, 광기 어린 녹색 눈이 옆으로 가늘게 찢어졌다.
“자, 이제 시작하지.”
***
새벽에 하비를 진료하던 의사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번쩍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난데없는 방문객이 빅터임을 확인한 의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이야. 의원님이었습니까? 스터스 경의 집사가 방문을 허락해 주던가요?”
“나도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선히 보내주더군. 아무튼, 약속했던 선물.”
빅터는 작은 상자를 의사의 무릎 위로 가볍게 던졌다. 의사가 멀쩡한 한 쪽 눈을 비비며 상자 안을 확인했다.
“갑자기 무슨 선물을…….”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의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피 묻은 사람의 눈알 하나가 들어 있었다. 신경 다발이 아직 붙어 있어, 살아있는 그대로 적출한 듯한 섬뜩함이 번들댔다. 안 물어봐도 이게 ‘반 로투스’의 것임은 알 수 있었다.
빅터가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버릴 거면 버려도 돼.”
기분 탓인지 빅터에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혹여 하비가 이 무시무시한 걸 보기라도 할까봐 의사는 얼른 상자 뚜껑을 닫았다. 한 쪽 눈을 차지한 의안을 습관적으로 만지며 의사가 조용히 물었다.
“…이 분은 무사합니까?”
빅터가 검은 가죽 장갑을 벗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무사하다면 무사하고. 네가 가서 일단 목숨은 붙여놔. 장소는 나스타가 알려줄테니까.”
빅터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의사가 허리를 숙였다. 아직도 심장이 덜컹거렸다. 들고 있는 작은 상자는 아직 따뜻했다. 언제 봐도 두려운 남자였다.
“알겠습니다.”
허둥지둥 나가는 의사에게 빅터가 경고처럼 덧붙였다.
“참, 집사가 내가 붙여준 의사들은 쫓아냈다고 하던데. 잘 설득해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대답을 대신한 의사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만 남자 빅터는 본능처럼 잠든 하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오늘이 완전히 지나기 전에 하비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어서 몸을 씻어내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빅터는 아직 김이 솟는 따뜻한 물통에 손을 넣어 몇 번이고 씻어냈다. 아무리 씻어도 피비린내가 빠지질 않았다. 문득 새삼스러웠다. 더럽혀진 지 오래였는데, 지금 와서 깨끗해지려고 하다니.
물기를 닦아낸 뒤 빅터는 하비의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하비의 가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머뭇대던 빅터가 반듯한 이마를 가리고 있던 밤색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직 흉흉한 기세가 남아있던 빅터에게서 살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널 아프게 한 새끼들은 전부 손봐준다고 했지. 제일 큰 벌레 하나를 처리 중이야. 조금만 참아.”
그는 잠든 자에게 진실된 애정과 갈망이 섞인 눈길을 보냈다.
“다 끝나고 나면 한 번만 말해줘.”
옴폭 꺼진 메마른 뺨을 어루만지는 빅터의 손이 떨렸다. 그의 목소리도, 침몰하는 배처럼 까마득히 추락했다.
“잘했다고, 이제 네 옆에 있어도 된다고.”
사람을 갈아버리는 무자비한 손은 하비 앞에서는 두려움에 떠는 평범한 것에 불과했다. 그 커다란 흉기 같은 손이 오래도록 하비의 고요한 얼굴에 머물렀다.
그 날 이후, 빅터가 지시내린 것들이 차근차근 시행되었다. 막아 놓았던 외교부 사람들의 업무 일지도 전달되었으며, 빅터의 소속 정보청 사람들이나 하비를 아끼는 자들이 보낸 정 가득한 편지들이 속속 스터스가 저택에 도착했다.
“이것들은 다 뭡니까?”
하비의 곁에 잔뜩 쌓인 종이와 선물, 꽃의 향연에 눈이 휘둥그레진 의사가 스터스가의 집사에게 물었다. 진땀 흘려가며 그것들을 분류하고 있던 집사가 불퉁하게 말했다.
“뭐긴 뭐에요. 바르뎀 경이 또 뭔갈 하고 있는 거겠지요.”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집사는 빅터의 노고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
빅터는 하비의 집사에게 하비가 깨어나면 저것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해달라 전했다. 하비가 현실에 미련이 남을 만한 것들 중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스터스가에 보냈다.
하비는 무의식과 이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힘겨운 생에의 줄다리기를 했고, 상태는 여전히 오락가락 했다. 그나마 빅터가 자신을 던진 결과로 하비는 아직 어둠 속에 영영 잠기지는 않았다.
그 결과는 빅터의 예상보다 더 참담했다.
퇴근 후 집사의 허락으로 스터스가 저택에 들어 온 빅터는 오자마자 하비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제 무언가를 가슴에 담지 않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듯 밤색 눈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침대 위에 등을 받치고 앉아 있지만 대화할 만한 여지는 없었다.
하비의 닫힌 마음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심정으로 빅터는 주변 사물을 살폈다.
‘저건 잘해놨고…….’
종이가 수북하게 쌓여 잘 분류된 협탁은 누가 봐도 제 주인의 취향을 반영했다. 누가 제 주인이 하비 스터스가 아니랄까봐, 아주 질서정연하게 먼지 하나 없이 해놓았다.
만족스러워하던 빅터의 눈이 방 전체를 둘러보자 찌푸려졌다.
‘방은 언제 봐도 좁아. 답답하군. 확장 공사라도 해주고 싶지만 질색할테고.’
하비가 제일 넓은 방은 손님맞이 용으로 내어놔서 정작 본인의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워낙 검소하게 사는 데다 지나치게 큰 방은 오히려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며 거부해 왔다.
소소한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다음 물어볼 것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빅터는 초조하게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건 해결되었나?”
하비의 집사는 몹시 곤란해 보였다. 요즘 그들의 공통적인 화제이자, 마음의 돌이었다. 말없이 집사가 고개를 내젓자 빅터는 침음성을 냈다.
“또?”
“예. 전혀 드시질 않습니다. 몰래 먹이려 해도 어떻게든 눈치채시고…….”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는 거지, 아직도.”
긴 한숨을 내쉬며 빅터는 이마를 짚었다. 등을 받친 의자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마치 무너지기 직전인 스터스가처럼.
“약을 아예 먹지않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빅터는 서양 의술에 능한 의사와 동양 쪽에 능한 뛰어난 의사 두 명을 데려왔다. 약재도 있는 대로 사왔고, 최고의 환경에서 하비의 몸을 돌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간단한 시술 이외에는 하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비가 무의식 중에도 약을 거부해와서,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조금만 이상한 냄새가 나도 거부하거나 간신히 먹이는데 성공하더라도 금방 토해냈다. 그러니 이제 억지로 먹여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집사를 포함한 모두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서 망설이던 차였다. 억지로 먹이려면 누군가가 하비의 몸을 강제로 속박하거나 묶어서, 그 틈에 입을 벌려 밀어넣어야 한다. 약을 뱉지 못하도록 턱을 다물도록 붙드는 것도 해야 한다. 하비의 몸에 그런 식으로 손을 대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빅터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못하면, 내가 해야지.”
그걸 다른 자에게 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놈이 하비를 강제로 만지는 것도 싫었다.
“어떻게 하시게요?”
빅터는 불안하게 묻는 집사의 물음을 무시하고 종이더미 옆에 숨기듯 놓인 동그랗고 까만 것들을 보았다.
“저게 오늘치 먹어야 했을 약인가?”
“예. 몸을 따뜻하게 하고 기력을 돋게 만드는 것이라 했습니다. 환이라고 하더군요.”
빅터가 보낸 의사 중 동양 의술에 해박한 자가 놓고 간 것이라 했다. 환자가 현재 너무 많이 지쳐 몸 자체의 기력을 끌어올리는 게 우선이라며 매일 먹게 하라고 했다. 탕약이라는 수상한 냄새가 나는 물약도 있었다.
하지만 먹질 않아 어쩔 수 없이 약이 쌓이고만 있었다.
“같이 먹여도 되나?”
“예.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안타까운 얼굴로 쌓여만 가는 약을 보고 있던 집사는 갑작스런 빅터의 말에 놀랐다.
“나가 있어. 다 끝나면 부를 테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는 물음도 쏙 들어갈만큼 빅터의 기세는 흉흉했다.
“너무 오래 끄시면 노크하겠습니다.”
“그러든가.”
빅터는 집사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오로지 눈길은 하비에게만 박혀 있었다.
집사가 흘끔대면서 불안한 태도로 나가자 빅터는 하비의 의식 없는 멍한 얼굴을 보며 으르렁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소용 없으니 헛짓하지 말라는 거지?”
빅터는 턱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할 의지조차 없는 하비를 노려보았다. 녹색 눈이 진한 감정을 안고 이글거렸다.
“죽어가는 걸 손놓고 지켜보라는 건가.”
마음이 달궈진 창으로 찔리는 것처럼 아프고 쓰라렸다. 잔인한 하비는 몇 번이나 같은 곳을 들쑤셨다. 차라리 날선 증오를 쏟아내는 게 나았다. 가끔 멀리서나마 볼 수 조차 없도록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빅터는 진주나 루비 같은 보석들이 잔잔하게 박힌 검은색 푸르지앵을 의자 받침대에 벗어두었다. 금사가 새겨진 목까지 올라온 러플 칼라를 매만지고 팔목까지 내려오는 옷자락을 걷었다. 굵은 팔뚝에 시퍼런 힘줄이 솟아 있었다.
그는 침대 위로 올라 앉았다. 어림도 없다는 듯 금발 아래 두 눈이 끈끈한 집착과 오기로 번들댔다.
“나 혼자 버리고 가려고?”
빅터가 한 손으로 하비의 눈을 가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이마에 제 이마를 대었다. 살아있는 자의 희미한 맥박이 느껴졌다. 생생한 삶의 증거에 매달리듯 빅터가 좋은 향이 나는 익숙한 살결에 이마를 부볐다.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쓴물을 빅터가 간신히 삼켰다. 여기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어떻게 견디고, 살아냈는데. 잠시 어리석었던 자에게 주는 결말이 이토록 잔인하다니. 원망이 들었지만 빅터는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뭘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한들, 하비가 겪었던 것 보다는 못하다. 그는 믿었던 발치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주었던 마음을 배신으로 돌려받으며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대쪽같이 강인했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만큼, 처절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빅터는 입술을 깨물고 피를 그렇게 많이 쏟았다던 하비의 아랫배를 살며시 만졌다. 지금은 단단한 근육의 감촉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비가 아파하며 쓰러질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무력했다.
들을지 모르겠지만 빅터는 하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작게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의식을 차린 것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좀 거칠어도 이해해줘.”
빅터는 일어나서 차갑게 식은 탕약이란 것을 먼저 가져왔다. 같이 먹여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탕약 안에 환을 떨어뜨렸다.
조심스럽게 하비의 입에 조금 흘려넣어 보려 했으나 약 냄새가 나는 걸 알자마자 바로 고개를 틀어버렸다.
이럴 줄 알고 있었기에, 빅터는 이번엔 망설임없이 탕약과 환을 조금 제 입 안에 머금었다. 그리곤 하비의 턱을 꽉 움켜쥐고 강제로 벌린 뒤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맞댔다. 내용물을 퍼붓는 것처럼 약을 전했다.
하비는 수상한 약냄새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손을 올려도 빅터의 맞은편 손에 짓눌렸다. 나머지 손으로 빅터의 가슴을 후려쳐도 무슨 단단한 성벽인 것 마냥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큿…!”
하비가 목으로 넘어오는 쓴 맛에 발버둥쳐도, 뱉어내려 해도 소용 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누워있는 사이 완력이 많이 약해져서 당해낼 수가 없었다. 더욱이 위에서 누르는 힘이었다.
결국 하비의 입가로 남은 탕약이 흘러 턱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발버둥치던 하비가 가슴을 치던 손을 올려 빅터의 목을 움켜쥐고 꽉 조였다. 어서 입을 떼라는 경고였다. 남은 힘을 다 쥐어짠것인지 손힘이 보통이 아니어서, 빅터조차 힘겹게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입 안의 약을 전부 흘려보낼때까지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간신히 넘어간 약물 때문에 하비의 목울대가 일렁이고, 빅터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떻게든 전부 밀어넣었다.
대충 끝난 것 같자 빅터가 혀로 씁쓸한 약초 향이 가득한 하비의 입안을 마지막으로 길게 쓸었다. 뒤로 물러나는 빅터의 목에 붉은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하비가 제 목을 긁어내리며 먹은 것을 어떻게든 토해내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할 수 없게 했다. 빅터의 큰 손이 입술을 빈틈없이 덮고 있어서 나오려던 약물은 도로 들어갔다. 한참을 몸으로 실랑이를 벌였다.
간신히 밀어넣은 약이 몸에 흡수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린 빅터가 드디어 하비의 입술 위에서 손을 뗐다. 한 차례 끝났다고 생각하자 빅터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갔다. 어떻게든 했다.
“하아…….”
침대 위는 난장판이었다. 약물이 튄 흔적하며, 하비의 얼굴은 입술이 젖어 번들거리고, 열이 올라 있었다.
한껏 전쟁을 치른 뒤 빅터는 물수건을 집어들고 와 하비의 턱과 뺨을 닦아냈다.
하비는 이런 와중에도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불쾌한 침입자를 그 초점 없는 눈에 가만히 담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인지조차 못하던 처음보다는 뭔가 쳐다보는 시선에 남다른 빛이 어려 있었다. 동물적인 경계와 미움이었다. 그 눈빛에 빅터는 또 가슴이 욱신거렸다.
따끔거리는 목을 손으로 쓸면서 빅터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몇 번 더 남았어.”
빅터는 목을 조르며 움켜쥐던 하비의 손이 생생했다. 주먹이 닿은 가슴에는 멍이 든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하비에게 차라리 맞는 게 마음의 짐이 그나마 덜어지는 기분도 들고, 그런 것보다 전에 비해 힘이 없는 것이 더 마음 아플 뿐이었다. 예전의 하비가 이랬으면, 아무리 그라도 큰 각오를 했어야 했으니까.
빅터가 남은 탕약을 들고 선언처럼 말했다.
“네가 아무리 목을 조르고 때려도 소용 없어. 난 끝까지 할거니까.”
이 탕약이 전부 그 몸 속으로 흘러들어갈 때까지, 이 전쟁을 몇 번이고 반복할 생각이었다.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빠짐없이 찾아와 할 것이다.
다짐을 실천해 남은 탕약을 거덜내고 나니 흐트러져 있던 침대는 이제 폭탄 맞은 것처럼 변해 있었고, 두 사람의 몰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빅터는 꿋꿋하게 물수건을 들어 하비의 얼굴을 닦아냈다. 땀범벅이 된 금발이 어지러이 날려 있고, 옷도 엉망이었지만 정작 본인 행색은 신경쓰지 않았다. 탕약에서 나온 약초 냄새가 가득한 얼굴을 꼼꼼하게 닦으며 빅터가 말을 걸었다.
“요즘 구교와 신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국왕은 빅터 같은 신흥 귀족들을 신교로 편입시켜 구교인 기존 귀족들을 견제 해보겠다는 셈을 굴리고 있었다. 구교인 기존 귀족에는 스터스가나 로투스가도 포함되었다. 빅터는 국왕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했다. 하비의 이마를 닦던 손길이 멎었다.
“근데 난 그런거 관심도 없어. 내 관심사는 딱 두가지 였거든.”
저음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돈, 그리고 너.”
경계심 가득한 밤색눈에 마음이 금방 흔들릴 것 같았지만 빅터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정확히는 네 잘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은 거였지만. 그건 한때의 치기였고. 제대로 된 욕망도 아니었어. 너무 늦게 깨달아서 네가 이렇게 된거지만…….”
빅터는 자신을 저주하고 욕했다. 제 때 먹지 못해 야윈 얼굴에도 음심이, 욕정이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참지 못한 빅터가 하비의 입술에 짧게 키스한 뒤 젖은 튜닉 위로 드러난 몸을 손으로 매만졌다. 이렇게 만져도 모자랐다. 하비가 직접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 지난한 고백을 다시 들려줬으면 했다.
무방비하게 쏟아지는 하비의 날 선 눈빛을 받으면서, 빅터는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함께 짧은 휴가를 가던 날, 마차 안에서 흔들리면서 누워 있던 하비의 허벅지는 극락이었다. 따뜻하고, 단단하게 솟은 근육이 오히려 더 편했다. 자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만지며 쑥스러워하던 그 손길도 너무나 그리웠다.
“알아줬으면 좋겠어. 네가 없었으면 난 일찍이 죽었어. 돌아와서 떵떵거리는 것도, 지금 살아서 말할 수 있는 것도, 전부 네 덕이야.”
자꾸만 움찔대며 도망가려는 허벅지를 붙들면서 빅터가 중얼거렸다. 지금 마음을 다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비의 시원한 페로몬을 한껏 들이키며 빅터는 하비의 다리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러니 네가 없어지면 나도 없는 거라고.”
엎드려 있느라 빅터는 하비의 눈에 점점 빛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 했다. 빅터를 바라보는 밤색 눈에는 붉은 손자욱이 생긴 그의 목이 잔상처럼 맺혔다. 진하게 타오르던 증오에, 희미한 죄책감이 섞였다. 침대에 힘없이 늘어졌던 하비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다가 멈췄다.
그것도 모르고 빅터는 계속 하비에게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부탁이니까 잘 챙겨먹고 빨리 건강해져. 그래야 날 미워할 힘도 생겨. 지금 같이 누워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못 해.”
지끈
하비는 또다시 몰려오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에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괴로움만 주는 이 남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론 끝도 없이 두려웠다. 손쓸 틈도 없이 잃어야 했던 것이 생각나서, 손끝이 저릴 정도로 힘들었다.
무언가 전해야 할 것이, 이 남자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사랑스러운 무엇이라고.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 온통 벌건 피가 하비의 눈 앞을 차지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비는 먹었던 약을 토해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입을 틀어막았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우욱!”
깜짝 놀란 빅터가 번쩍 상체를 일으켰다. 하비가 미간을 구기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서 빅터는 쩔쩔맸다. 대신 아프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더 고통스러웠다.
“왜 그래? 괜찮아?”
결국 빅터는 문을 박차고 나가 소리질렀다.
“집사! 의사 불러와!”
하비는 허연 위액을 뱉고, 아까 먹었던 약까지 도로 토해내고 있었다. 이미 흡수된 것들을 제외하고, 위 안에 남아있는 것이 없을 때까지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심지어 다시 피를 토하기도 했다. 대기하고 있던 의사가 왔을 때는 탈진해서 쓰러진 채였다.
빅터는 참담한 심정으로 진정제와 진통제를 맞는 하비를 보았다. 방 안엔 온통 탕약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가득했다.
***
반복되는 약 먹이기 전쟁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하비는 여전히 거부했고, 빅터가 온 몸을 써서 제압한 후에야 겨우 상황은 종료되었다.
의식이 있을 때는 어떤 방법을 써도 절대 먹지 않았기에, 그나마 제정신이 아닐 때를 노려야 했다.
동방에서 온 명의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것은 아닌지, 정말 효과가 있긴 했다. 거기다 다른 의사도 합세해 악화된 하비의 위장을 보호하는 약도 함께 투여했다. 하비의 상태는 다행히 점점 호전되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반 로투스 경의 실종과도 맞물리는 시기였다. 술에 취해 다리 아래 실족했을 거라는 예상이 우세했고, 찾기 위한 인력이 동원되었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사이, 하비가 의식을 차리고 눈을 뜨는 날이 길어졌다. 그때부터 하비는 침대 밖으로 나가 검술 훈련을 하고, 검을 묶어놓은 연습용 허수아비와 가상 대련을 했다.
어릴 때부터 익혀온 검식과 검격을 재확인하기라도 하듯 신중하고 날카로운 태도였다. 물론 체력이 많이 떨어진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 했지만.
챙! 채앵-!
집사의 언질을 받아 훈련장에 들어온 빅터는 낯익은 검 부딪치는 소리에 안심했다. 하비와 가장 어울리는 소리였다.
빅터는 비스듬하게 기대 서서 팔짱을 끼고 땀 흘리며 장검을 부대끼는 하비를 지켜보았다. 비스듬하게 검날을 흘렸다가 내려치는 속도에 힘을 가하고, 빼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올란시로 다시 돌아와서 처음 봤을 때도, 하비는 저런 모습으로 진지하게 검을 쓰고 있었다. 소드 클럽에서 누군가와 대련을 한 직후였다.
그때의 하비는 빅터를 보자 순간적으로 얼굴에 죄책감, 미안함 같은 것을 띄웠다. 하비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악수를 청했다. 이미 빅터의 얼굴을 알고 있는 듯 인사는 자연스러웠다.
[경이 빅터 바르뎀인가. 무사히 돌아와서 반갑고,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난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
외교부에서 일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내민 손을, 빅터는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맞잡았다. 꽉 잡아 은근히 자신 쪽으로 당겼다. 아픔으로 찌푸려진 밤색눈을 보며 당시 빅터는 빈정대듯 말했다.
[반겨줘서 고맙군. 앞으로 볼 일이 많을 거야, 스터스 경.]
빅터의 장담대로 ‘볼 일’ 이 그 후로 참 많았다. 안 좋은 일로 협박을 곁들여 얼굴 붉혀가며 하비를 괴롭히고, 또 힘들게 하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빅터가 쓰린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한참을 땀을 뽑고 움직인 후에야 하비는 검을 거두었다. 멀리서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하비가 문득 뒤돌아보자 빅터는 피할 새도 없이 그 시선이 노출되었다.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빅터를 본 하비의 얼굴이 즉각 일그러졌다.
“경이 왜 내 저택에 있지? 누가 허락했나.”
“경이 왜 내 저택에 있지? 누가 허락했나.”
성큼성큼 다가온 하비가 장검으로 빅터의 얼굴 바로 옆을 찍었다. 워낙 빠른 속도라 반응할 틈도 없었다.
콰악!
검날이 부르르 떨리며 박힌 곳 옆으로 나무껍질이 툭툭, 떨어졌다. 스친 검날에 빅터의 매끈한 뺨에서 핏줄기가 하나 흘렀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놀란 기색도, 아픔조차 없었다. 하비가 검을 찍은 채 얼굴을 가까이 하며 차갑게 말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린 한 장소에 있기엔 불쾌한 관계인 것 같은데.”
코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다가왔다. 늘 온화하고 다정하던 밤색눈에 이토록 분노로 가득 찬 적은 드물었다. 하비는 씹어뱉듯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무슨 볼 일이 남았지?”
빅터는 바로 옆에 검이 꽂혀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오로지 그 무심한 시선은 하비에게만 닿아 있었다.
무성한 사철나무 잎 아래 통과된 햇빛이 빅터의 화려한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 와중에도 빅터는 가까워진 하비의 숨결과 혈기가 도는 입술에 눈이 갔다.
‘키스하고 싶네.’
잠깐 생각하던 빅터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이 저택에 사람이 너무 없어 보여서. 내 체온이나마 좀 보태려고 왔지.”
어이없다는 듯 하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사용인 몇이 최근에 또 그만두었다. 전부 빅터가 지시해 퍼뜨린 스터스가에 대한 소문과 사람들의 손가락질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뭐, 사람이 없어 보여서 온기를 보태려 왔다고?
이 뻔뻔함은 어디까지 계속될 참인지. 하비는 검자루에 힘을 더 실었다.
“또 수작질인가.”
자신의 속은 이미 다 타들어가 잿더미만 남았는데, 이 남자는 다 쥐고 있으면서 여유롭기만 했다.
낮은 목소리로 하비가 경고하듯 말했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어. 경의 같잖은 협박에도 어울려 준 건, 내게 주어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남은 것이라 해봐야 고작 낡아빠진 스터스가의 명패, 고집스럽게 쥐고 있던 명예, 그런 것들이었다. 가끔은 탐탁지 않아도 자신에게 남은 책임이기에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눈 앞의 남자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바꿔 버렸다.
몸도, 마음도, 지녔던 신념까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줬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한 건지, 아직도 욕망이 들끓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당장이라도 만지고 싶다는 것처럼, 뜨거운 갈망이 향했다.
하비는 빅터를 고요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제 지겨웠다. 제가 한 것의 성과를 보려는 것처럼 끝도 없이 찾아와 사람을 기만하는 행태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저 달갑지 않은 욕구가.
“왜 미련이 남은 것처럼 구는 거지? 뭐가 남아서?”
뺨을 타고 흐르는 진득한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하비를 마주 보았다. 아니, 그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마음 어딘가가 잘게잘게 찢겨지는 것 같았지만 참았다. 하비가 이 정도로 몸을 움직이고 현실을 움켜쥐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을 증오하는 힘 때문이니까.
이를 돕기 위해 빅터는 초조함을 감추고 여유로움을 가장했다.
“잊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난 가질 수 있는 걸 다 가져야 직성에 풀려. 아직 부족하고.”
이런 잔혹한 관계가 아닌 다정한 시선이, 너의 사랑이 부족하다. 말해도 믿지 않을테니, 그저 빅터는 속으로만 삼켰다.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하비는 꽉 쥐었던 검손잡이에서 힘을 풀었다.
“아, 잠시 잊고 있었군. 경은 항상 누군가의 약점을 쥐고 흔들면서 즐기는 최악질이었는데.”
짧게 냉소한 하비가 찍었던 검을 빼냈다. 버석대며 나무껍질이 또 우수수 떨어졌다. 그는 허공에 한 번 휘두른 뒤 검집에 단번에 꽂았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하비는 한 걸음 물러서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보인 헛점은 다른 사람들 것보다 꽤 재미있었나? 포기 못하고 계속 오는 걸 보니 몇 배는 즐겼나 보군. 하긴, 그랬겠지.”
등에 닿았던 나무 껍질을 손으로 털어내다가 다음 말에 빅터가 화들짝 하비를 쳐다 보았다.
“알파가 약 하나로 임신하는 대단한 희극을 봤을테니.”
자조적인 말투도,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 담담했기에 더 확실하게 꽂혔다. 흐려지는 빅터의 얼굴을 보며 하비는 그 날의 회한을 천천히 쏟아냈다.
“돈 주고도 못 볼 명장면이었겠지만 아쉽겠어. 이미 끝났거든.”
하비가 한 손으로 자꾸만 무너지는 얼굴을 덮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이 남자를 마주하면서 뱉는 것들이 너무 아팠다.
바보같이 믿었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말뿐인 사랑에 매달려서 심취했던 자신을,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을까.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빅터 바르뎀 경은 원망할 대상이 아니었다. 속은 자신이 멍청했으니까.
하비는 빅터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눈을 내려 배를 가리켰다.
“이제 여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처참하게 구겨지는 빅터의 얼굴에 하비는 묘한 통쾌함과 이질감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얻는 기묘한 쾌감도 있었다. 이런 것에 상처받는 표정으로 슬퍼하는, 아니 슬퍼하는 ‘척’ 하는 저 가식적인 녹색 눈에 이상한 자학심이 생겨났다.
기이하게 일그러진 밤색 눈에 평생 억눌러 왔던 케케묵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별로 기억에도 없는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 목소리, 나직한 자장가, 기댈 만한 것들은 언제나 빨리 그를 떠나갔다. 혹독한 매질과 질책하는 높은 목소리, 모조리 잘못한 것들만 남았다.
지금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조금 마음을 기댔다고 무참한 꼴을 당해야 했다.
항상 묻고 싶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하비가 비명 지르듯 뱉었다.
“어떻게 이걸 쏟아냈는지 말해줘? 그것까지 말해줘야 여기서 나갈 생각인…!”
아, 이건 못 참겠다. 아찔해진 빅터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비의 손을 치워버리고 충동적으로 키스했다. 더 이상 저 말을 못하게 막아 버렸다. 도저히 계속 표정 연기할 자신이 없었다. 마음이 뜨거운 용암 속에 떨어져 자글자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비의 팔을 부러질 것처럼 꽉 움켜쥔 빅터가 격렬하게 입술을 부대끼고 뜨거운 혀를 자신의 혀로 강하게 옭아맸다. 반발하듯 하비의 혀가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단단히 얽었다.
“흐…, 읏,”
타액이 새어 흐르고, 하비는 뒷머리를 움켜쥐고 숨 막히게 키스하는 빅터의 기세에 점점 뒤로 밀리다 나무에 부딪치고야 멎었다.
쿵!
사철 푸른 뾰족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머리로 쌓였다. 그럼에도 혀가 몇 번이나 뒤엉키고, 섹스하는 것처럼 야하게 달라붙어 왔다.
행위가 거듭될수록 하비는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몸 속에 잠깐 품었던 독기마저 빅터가 죄 빨아들이는 기분이었다.
빅터와 턱이 부딪치고 그의 고개가 돌아가면서 입술은 더 깊이 파묻혔다. 더 파고들 곳이 없는데도, 어떻게든 안을 침범하려는 것처럼.
“그흐…, 만…!”
잠깐 틈이 생겼을 때 하비가 붙들린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우성 알파와 힘의 격차가 이런 것인가, 처음 느꼈다. 이런 식으로 찍어누르는 것에 큰 저항감이 생겨 하비는 주먹을 쥐어 빅터의 복부를 내리쳤다.
하필 저번에 맞아 멍이 든 곳을 때렸던지라 빅터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하비가 맨 허리의 검집이 복부를 찔러왔지만 빅터는 그것보다 그가 내뱉는 말들이 더 심장을 깊게 찔러 들어왔다.
한 마디, 한마디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겨우 입을 뗀 빅터가 숨을 몰아쉬는 하비를 안타까이 보았다. 머리에 붙은 뾰족한 사철 잎을 떼어냈다. 손가락을 찌르는 따가운 가시가 전혀 아프지 않고 달가웠다. 빅터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 갈테니까 그런 말…….”
하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언제나 자신감 가득하던 이 오만한 자의 눈에 고통이 가득 어리고,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마. 안해도 돼.”
비가 올 것처럼 찌푸린 하늘 아래, 빅터도 구름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하비의 머리에 붙은 남은 사철 잎도 떼어낸 빅터는 그것들을 꽉 쥐었다. 단단한 가시에 찔린 손에서 피가 조금 흘렀다. 뺨에 나던 피는 이미 응고되어 굳었지만 새로운 피가 생겨났다.
혼자서 하혈하며 괴로워했을 하비를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그를 비참하게 만든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빅터는 까맣게 죽어버린 밤색 눈에 대고 맹세했다.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빅터가 마음 속으로 하비에게 속삭였다. 날 밀어내려고 너까지 파괴하진 마. 나한테만 화내고 욕해. 그 끔찍한 일, 다신 떠올리지도 마.
입술을 지긋하게 깨문 빅터는 하비를 등지고 뒤돌아섰다. 이렇게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하는데, 한동안 아예 하비를 보지 않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돕는 길 같았다. 비록 보지 않고 견딜 자신은 없지만.
그런데 믿을 수 없는 말이 하비의 목소리를 빌려 전해왔다.
“3번, 아니 5번.”
빅터의 걸음이 우뚝 멈추고, 그의 숨소리조차 멎었다. 지금 들려오는 말들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명확했다.
“그 정도면 되겠나? 아무래도 내 몸이 목적인 것 같으니.”
하비가 제안하는 것은 농밀한 만남의 횟수였다. 이토록 눈물겨운 연기까지 할 정도로 빅터가 가지고 싶은 무엇. 그게 자신의 육신, 혹은 다른 무엇임을 알았다. 그래서 제안했다. 빅터와 하는 마지막 협상이었다. 그가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으리란 것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다 끝나면 다신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내게 접근하지도 마.”
심호흡을 한 빅터가 다시 뒤돌아섰다. 손 안을 가득 메운 가시 잎을 던지며 그는 평상심을 간신히 쥐어짰다.
이건 무조건 잡아야 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빅터는 일부러 입술을 삐뚜름하게 세웠다. 평소처럼 보여야 한다.
“5번? 10번은 되어야지.”
감히 자신에게 협상할 자격은 될까. 하비가 무엇을 말하든, 그는 받아들여야 했다. 이런 기회라도 있는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또 벌컥 욕심이 생겼다. 횟수를 늘려서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 더 욕심부려보기로 했다.
“원하는 걸 들어줄테니까,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슬며시 구겨지는 하비의 눈을 살핀 빅터가 본심을 말했다.
“약 잘 챙겨먹어. 내가 주는 거라고 버리지 말고.”
이상한 조건에 하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달라서, 혼돈이 왔다. 빅터는 하비가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비열한 이미지에 맞춰 다시 이야기했다. 그래야 하비가 들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써먹는 미소를 어렵사리 띠며 빅터가 입에 발린 거짓말을 했다. 자신을 깎아가며 던지는 거짓은 뱉는 동시에 빅터를 숨막히도록 갉아먹었다. 그의 영혼까지도.
“경이 건강해야 나도 즐거움이 있지 않겠어? 내가 아무리 악질이라도 허약한 사람 괴롭히는 취미는 없거든.”
그리 덧붙이자 하비가 안심하는 것이 보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빅터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처럼 굴 때마다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설레는 것처럼 반응하는 제 심장을 저버리고 싶었으니까.
하비는 주변을 잠깐 살폈다. 허락 없이 이 곳을 출입하는 사용인은 집사 밖에 없었지만, 그는 부르지 않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혼자 수련하는 것을 좋아하고, 집중하던 것을 방해받기 싫어하는 성미 탓이었다.
몸을 단단히 감쌌던 두툼한 모직 대련복을 벗어던지며 하비가 쏘듯이 말했다.
“지금 해. 땀냄새가 나서 좀 역겹겠지만, 빨리 끝내고 싶거든.”
도무지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망가진 것 같은 하비를 볼수록 빅터는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보는 것도 고통이었다. 하지만 제가 치러야 할 대가임을 알고 있었다.
빅터가 얼어붙은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다행히도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위기에서 구했던 입술은 지금도 그를 구제해 주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럼, 고맙게 받아들이지.”
하비를 나무 앞에 세워두고 빅터는 뒤돌라 말했다. 그가 자신의 입 속에 손가락을 넉넉히 넣어 타액을 묻히고는 하비의 반바지를 잡아 내렸다. 속옷까지 한꺼번에 벗어 던지는데 하비는 순순하게 협조했다.
기분 탓인지 구멍이 움찔대는 것 같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빅터가 봉긋하게 솟은 탄력 있는 하얀 엉덩이 사이로 입을 내렸다. 마른 입술을 부대끼고 혀를 밀어넣자 하비가 놀라 흠칫거리긴 했지만 소리를 죽였다.
빅터는 혀로 구멍 사이를 벌리면서 생각했다.
'좋은 냄새...'
검술 수련 전에 어찌나 열심히 씻은 건지 아직도 향긋한 입욕제 향이 가득했다. 집사에게 듣기로, 한 번 씻을 때 지나칠 정도로 오래 씻는다고 듣기는 했다. 질척하게 젖은 구멍에서 간신히 입을 떼자 희미한 알파 페로몬을 빅터의 코끝에 달라붙었다.
넣는다는 말 없이 이번엔 빅터의 손가락이 천천히 주름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하비가 입술을 깨물었지만 미처 다물기 전에 소리가 새어나갔다.
“읏…….”
오랜만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뻑뻑했다. 성급하게 달려들던 손짓이 아파하자 자신을 자제하려는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우습게도, 배려하는 모양새였다.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비가 고개만 돌려 말했다.
“찢어져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해.”
빅터가 대답없이 손가락을 구부려 내벽을 긁었다. 그는 하비가 어느 곳을 느끼는지, 좋아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깊은 곳을 꾸욱 누르자 부르르 떨리는 몸이 손가락을 통해 느껴졌다. 뜨거운 데다 구멍이 너무 좁아서 손가락이 잘릴 것 같이 조여들었다. 여린 점막을 자극하자 젖은 소리가 났다.
빅터는 당장이라도 박고 싶은 것을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는 동안은 내 마음이야. 내 뜻대로 하지 말라는 조건은 걸지 않았잖아?”
하비도 그 뒤로 한 마디 말 없이 침묵했다. 그 대신 빅터가 주는 감각에만 온 몸을 맡겼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신음을 버텼다.
빅터의 손이 구멍 안 이곳저곳을 들쑤실 때마다 머릿속에 차츰 열이 올랐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빅터 바르뎀, 그의 존재처럼 말이다.
내벽 안이 마를 만하면 빅터는 손을 꺼내 다시 타액을 묻히고 여러 번 구멍을 넓히려는 시도를 했다.
하비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은 시점일 때, 드디어 두꺼운 귀두가 천천히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움켜쥔 나무 껍질이 하비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허억….”
날카롭게 신음이 닫힌 하비의 입술을 열고 튀어나갔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막막한 두께와 압박감이었다.
푸욱-!
고작 귀두 끄트머리가 들어가는데도 찢어질 것처럼 통증이 몰려왔다. 우성 알파의 발기한 성기는 몇 번을 받아도 상상 그 이상이었다. 간신히 구멍 속을 파고든 큰 귀두가 모습을 감추고, 기둥의 시작 부분에서 진입을 멈췄다. 성난 성기가 혈관을 세우고 불끈거렸다.
“이것도 벗지?”
길게 늘어져 치렁대는 튜닉을 만지작대다 빅터는 고개를 숙여 튜닉에 입을 맞췄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장면을 보던 하비는 한 번에 벗어 옆으로 던졌다. 빅터의 입술이 닿은 옷을 꺼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 작은 동작에도 심장이 욱신거렸지만 빅터는 다른 것이 더 신경쓰였다.
‘손 벗겨지겠어.’
삽입한 채로 빅터가 옆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하얀 손수건을 주워 나무줄기에 묶었다.
하비가 그 위로 손을 짚게 하면서 그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땀이 흐르는 단단하고 굵은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고 핥으니 하비가 간지러운 듯 몸을 떨었다.
빅터는 하비의 입 속에 제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저었다. 뜨거운 혀와 입 안에서 긴 손가락이 돌아다닐 때마다 질척대는 야한 소리를 동반했다. 그런 식으로 타액을 묻은 검지를 집어 넣어 구멍 사이를 더 벌리자 하비는 부들부들 떨며 허리를 젖혔다.
빅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라 너무 안 들어가는걸.”
손가락을 빼내고 천천히 성기를 밀어넣었다. 힘들어하는 하비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빅터가 잘 단련된 가슴에 바짝 선 유륜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솟아있는 그것은 만지니 이미 단단해졌다.
하는 김에 탄탄한 가슴을 전체적으로 꽉 쥐었다가 펴자 낯익은 짜릿한 느낌에 하비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홱 꺾었다. 얇게 칼로 저미듯 한 쾌감이 순식간에 넓게 퍼졌다. 허리로 근육이 일시에 섰다.
“흣…….”
희미하기만 하던 하비의 알파 페로몬이 순간 폭주하듯 거세졌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허리를 들썩여 삽입하기 좋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빅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하비가 자신의 것을 받아들이는 광경을 감상했다. 푸들대는 굵은 허벅지가 벌어지고 하얗고 탄력 있는 엉덩이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볼기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손수건 위를 잡은 하비의 손 위로 겹쳐진 빅터의 손 사이에 땀이 맺혀 미끈거렸다.
“으….”
무심결에 하비는 빅터의 손등 위에 이마를 대고 젖은 숨을 토해냈다. 손등 위로 전해지는 하비의 숨결마저 야릇했다.
빅터가 다시 눈만 굴려 아래를 보니 거의 다 들어간 성기를 구멍이 열심히 물고 있었다. 안은 뻑뻑한만큼 조임이 엄청났다.
‘젠장…….’
아래에 피가 쏠려 더 묵직해졌다. 온 몸이 벌개져 땀 흘리면서도 묵묵히 성기를 받아들이는 하비의 모습이 눈이 돌아갈 만큼 음란했다. 하비가 최대한 안 아프게 하려고 별 수를 다 쓰고 있는데, 당장 박고 흔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돌겠네.’
빅터는 마지막 조금 남은 굵은 기둥은 허리를 밀쳐 넣어 쑤셔버렸다.
퍽!
하비가 헛숨을 뱉으며 온 몸에 힘을 넣었다. 구멍도 잘릴 것처럼 거세게 조여들어서 하마터면 바로 사정할 뻔했다.
미간을 조인 빅터가 하비의 동그랗고 작은 귀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다 들어갔어.”
빅터는 금방 움직이지 않고 자꾸만 움찔대는 내벽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한 손으로 하비의 배를 만지작대니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얼핏 들었다. 귀 뒤쪽과 목덜미, 어깨에 쪼듯이 키스를 하며 빅터가 물었다. 옅게 땀냄새가 났지만 이마저도 좋았다.
“괜찮아?”
하비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문 채 고개를 숙였다. 열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몸과는 달리 여전히 냉담한 반응이었다. 솔직한 신체만큼 입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지만 그건 지금의 빅터에겐 너무 큰 욕심이었다.
천천히 빼냈다가 다시 천천히 쑤셔 넣자 하비의 단단한 복부가 들썩거렸다. 잘 짜인 어깨가 잘게 진동을 일으키며 다른 무언가를 원했다.
하비는 입술을 달싹대다가 다시 꽉 다물었다. 안을 쑤시는 성기가 너무 느리게 삽입되고 나오자 마른 내벽이 모조리 딸려 나올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이런 것 말고, 더 깊숙한 곳을 빠르게 찍어 눌러줬으면 했다.
하지만 빅터는 삽입에 익숙해질 때까지 엉덩이를 움켜쥐고 천천히 밀어 넣을 뿐이었다. 하비가 원하는 건 이런 조심스럽고 배려 깊은 섹스가 아니었다. 그저 흔들고, 욕구를 배출한 뒤 이 엉망진창인 관계가 하나라도 더 빨리 끝났으면 했다.
“읏….”
하비는 신음을 참으면서 땀이 흐르는 뜨거운 몸을 비틀었다. 미처 닿지 못한 욕구로 괴로웠다. 빅터와의 이런 육체적인 유예 기간을 굳이 두고 마는 자신의 알 수 없는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왜…….’
관계를 끊으려면 아예 단단히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빅터의 출입을 완전히 허가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었다.
마음 한 켠에 남은 미련이 분명 존재했다. 그것은 끊임없이 하비를 괴롭혔다.
차마 밀어낼 수도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한 크기로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작은 미련은 빅터가 하는 말에 아직도 일일이 반응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하비의 속을 음울하게 떠돌았다.
그의 상념을 가르고 빅터의 성기가 다시 느릿하게 구멍 안을 찍었다.
“윽…!”
하비가 빅터의 한 손으로 팔을 움켜쥐고 헐떡였다. 단단한 팔뚝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하비는 무언의 애원을 보탰다.
빅터는 흠칫 하비가 잡은 팔을 내려보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만하라는 것이나 빼달라는 청이 아니었다. 미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잡아당기고 있었다.
절제되었던 욕망이 한껏 터져 나와 빅터의 수려한 얼굴이 이지러졌다.
“아플까봐 참았는데….”
퍼억!
끝까지 한 번에 박아 넣은 구멍에 경련이 일고, 하비의 몸 전체가 부들부들 떨렸다. 빅터가 엉덩이를 잡아 더 한껏 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인내심을 너무 시험하는 거 아닌가?”
구멍 안의 내벽이 붉게 타오르듯 벌름거렸다. 빅터는 길게 눈을 일그러뜨렸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안은 미치도록 좋았다.
“헉….”
가장 깊은 곳까지 처박은 성기는 아까완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거칠고,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출입할 때마다 구멍 주위로 거품이 일어 부글거리고, 내벽도 점점 젖어 들었다. 앞뒤로 드나드는 성기가 드러났다가 사라질 때 하비의 몸에서 이는 떨림은 더욱 격렬해졌다.
퍽! 푸욱! 퍼억-!
움직임이 너무 거세어 계속 앞으로 밀려나다가 하비는 나무 위를 감은 손수건 위를 양 손으로 붙들어야 했다.
차라리 이런 난폭한 것이 좋았다. 빅터의 배려는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불편했다. 함부로 다뤄지고, 난장으로 구르는 것이 자신과 빅터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그런데 자꾸만 묘한 감상과 느낌이 끼어들었다.
빅터는 하비가 느끼는 곳만을 집중적으로, 깊게 짓찧었다. 그가 주는 쾌감에서 달아나려고 해도 끝까지 쫓아왔다. 구멍 속에 박히는 굵은 성기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끈질기게 하비의 쾌감을 돋우었다.
가끔은 굵은 귀두가 쾌락점 위를 뭉근하게 짓누르기도 하고, 날을 세워 미친 듯이 쑤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하비는 온 몸이 녹을 것 같은 열기에 잔뜩 흐트러졌다. 허리가 앞으로 꺾이고, 둔부가 덜덜 떨렸다. 좁은 구멍으로 거세게 밀어넣는 빅터의 움직임이 제 모든 것을 다 삼킬 것 같았다.
“읏…!”
거기다 가슴 위를 집요하게 만지고 민감하게 만드는 손길에도 느끼기 시작했다. 갈색 유륜은 색이 진해지고, 어느새 퉁퉁 부어 있었다.
가장 느끼는 깊은 곳을 견딜 수 없는 속도로 쑤셔 박히자 결국 하비는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신음을 쏟아냈다. 너무 느껴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아…!, 윽, 큿, 으읏……!”
빅터가 허리를 거칠게 놀리다 하비의 뺨 위를 어루만졌다. 조금 묻어나는 물기를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짠 맛이 났다. 깊이 파묻은 채 빅터가 하비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헉….”
퍽!
쾌락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허리와 허벅지의 울림이 빅터의 몸으로도 전해졌다. 점점 발기하는 하비의 성기를 한 손으로 훑으며 빅터가 후욱, 뜨거운 숨을 뱉었다.
“울어줘. 넌 너무 참기만 하잖아.”
이런 작은 숨결에도 하비의 목과 어깨는 자극을 받아 움찔댔다.
이상했다. 거칠지만 몸 안을 헤집어 어떻게든 쾌감을 이끌어 내려는 수고도, 걱정스러운 말투도, 자신을 잘 아는 듯한 빅터의 다정한 말들이 자꾸만 하비의 신경을 건드렸다.
질긴 나무 껍질 위로 감은 하얀 손수건이 하비의 흐린 시야로 들어왔다. 손이 거친 나무 껍질에 다치지 않게 빅터가 감아준 것이었다.
생각하기 싫은 것들이 지친 하비의 마음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반발해 봐도, 몸 속을 어지럽히는 열처럼 끝끝내 하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비는 빅터를 보지 않았다. 이렇게 진득하게 달라붙더라도, 언젠가 그의 마음이 또 떠날 것이다.
빅터의 진심은 하비에겐 까마득한 절벽 위 흔들다리와 같았다. 언제 떨어질지 모를, 불안정한 것을 믿을 수는 없었다.
이미 바닥이라고 생각한 이곳에서 다시 밀려나 떨어지면, 그 아래는 무엇일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하비의 의식은 무의식 중에라도 빅터의 진입을 거부했다.
퍽!
“크읏….”
방심한 사이 치고 들어온 것이 하비의 쾌락점을 꾸욱 눌렀다. 이미 찔끔찔끔 쿠퍼액이 나오고 있던 하비의 성기가 묽은 액을 쏟아냈다.
한 번 갔지만, 기절할 것 같이 자극적인 큰 사정감은 그러고도 한참 뒤에 찾아왔다.
“으윽, …흣!”
하비는 사정하지 않는데도 순간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저릿한 쾌감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온 몸을 뒤덮는 강렬한 쾌감과 경직되는 근육에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절정에 달한 순간 하비의 호흡이 멈추고, 빅터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손톱이 깊숙이 단단한 팔에 박혀들었지만 빅터는 조금의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비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내벽을 강하게 조였다. 빅터도 이번엔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옆으로 더 잡아 벌리며 크게 박아넣었다.
구멍 안으로 뜨거운 정이 번지고 빅터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읏….”
하비가 간 뒤에도 몇 번이나 더 박던 성기는 정액을 넘치도록 쏟아내고 나서야 간신히 멈췄다. 천천히 뱉어낸 정액 사이를 가르고 쑤셔대는 빅터의 것은 아직 온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결합된 밀부 사이로 눅눅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이리 사정했는데도, 빅터의 흉흉한 성기는 하물며 흥분한 채 부피조차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숨이 죽고 있는 하비의 것을 손으로 잡아 자극을 주며 빅터가 귓등에 속삭였다.
“나머지는 안에 들어가서 해도 될까?”
말은 그리하면서 빅터는 조금씩 허리를 밀어넣고 있었다. 꿈틀대는 귀두가 예민해진 내벽을 쓸고 지나가는 움직임에 하비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비의 턱에 맺혔던 땀이 떨어져 점점이 땅 위를 진하게 적시고, 가랑이 사이를 흐르던 끈적대는 정액은 무릎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빅터가 하비의 턱을 잡아 돌려 키스했다. 혀가 엉키면서 다리도 얽히고, 결합은 더욱 깊어졌다.
잠깐 벌린 입 사이로 뜨거운 숨이 오갔다가 엉겨 붙기를 반복했다. 이 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절절한 입맞춤이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날아와 땀을 식히며 등을 차갑게 스쳤다. 그러나 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하비는 나뭇등걸에 매여 있는 하얀 손수건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입 속으로 밀려드는 빅터의 숨을 제 것과 교환했다.
손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가슴 어딘가가 여전히 따끔거렸다.
***
하비가 정신을 놓고 멍해졌을 때 빅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럴 땐 혼자서 하고 싶던 말들을 늘어놓았다.
솔직하게, 그 동안 격렬하게 변해왔던 심경들을 읊었다. 배신할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바뀌었다고. 반 로투스가 벌인 짓은 절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힘없이 늘어진 하비의 손을 잡아 제 이마에 대면서 빅터는 괴롭게 중얼거렸다.
“네게 힘든 일은, 나한테도 힘들어. 제발 그것만은 알아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의지 없는 밤색눈은 그런 빅터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하비의 손가락이 가끔 움직여 엎드려서 자고 있는 빅터의 얼굴에 다가가기도 했지만, 그 뿐이었다. 결코 닿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하비가 정신을 차린 날은 여지없이 섹스를 했다. 침대에서 뒹굴거나, 저번처럼 사람 없는 야외에서 몸을 섞거나, 아니면 하비의 서재에서 일을 치르기도 했다. 빅터는 목마른 사람처럼 하비의 몸을 취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를 그의 신뢰를 갈구했다.
하비가 빅터에게 뒤를 박히면서 붙든 작은 책장에서 우수수 책이 떨어지고,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빅터가 온 몸으로 사수해서 하비는 멀쩡했지만 빅터의 손이 조금 다쳤다.
그럼에도 하비의 집사에게 3일 방문 금지령을 받기도 했다. 빅터는 억울해 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관계하기로 약속한 횟수가 줄어들수록, 의식 없는 하비에게 하는 빅터의 혼잣말은 더욱 길어졌다. 초조함이 묻어나고, 더욱 애절해졌다.
하지만 빅터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비에게 깊게 인으로 박힌 슬픔과 고통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그 슬픔의 근원이 정확히 어디가 있는지 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한 번이 남았을 때였다. 세상은 늘 그렇듯, 그들에게 온전한 휴식을 허가하지 않았다.
하비 스터스의 이름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 들불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를 모른 척 하며 빅터는 꾸준히 외교부의 일들을 하비의 저택으로 옮겨주었다. 단 하나의 사건만 제외하고.
투서가 온 당일, 아직 사람들이 사태를 모를 때였다. 그 날 총괄 외교관이 빅터의 의원 집무실에 들렀다.
의외의 방문에 빅터는 그를 친절하게 맞이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비의 상사니까 적당한 예의를 차렸다.
‘온 이유는 알겠지만.’
일견 친절해 보이던 빅터의 얼굴에 살기가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의 마음은 조금도 모른 채 총괄 외교관은 두리번대며 다소 정신없어 보이는 의원실을 둘러보더니 슬슬 본론을 말했다.
“스터스 경의 저택에 매일 들른다고 들었소만.”
맞이용으로 내놓은 뜨거운 차를 불어 마시던 빅터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찻잔을 만지작대며 총괄 외교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은 것 같습니까?”
그걸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씁쓸하게 미소지은 빅터가 대충 둘러댔다.
“그럭저럭. 회복 중입니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신지?”
사실 그의 정보망으로부터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말하기 곤란한 사안일 것이다. 빅터의 예상대로 총괄 외교관은 한참 머뭇대더니 차 손잡이를 손끝으로 툭툭 찍었다.
“사실 스터스 경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일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전하기가 좀…….”
외면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는 시점이 왔다. 빅터는 경직된 미소를 보여 총괄 외교관에게 불편하다는 걸 여과 없이 드러냈다.
“사전 조사 차 보냈던 외교부 사람들이 해적에게 붙들렸다는 것 말입니까?”
빅터의 선방에 총괄 외교관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순순히 털어놓았다.
“벌써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달칵.
빅터는 찻잔을 내려두어 총괄 외교관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 날이 선 녹색 누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총괄 외교관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글쎄, 빠를 이야기가 있나. 잘 모르겠는데.”
존대를 하던 말투가 음습해지고, 목소리도 한껏 낮아졌다.
“설마 나더러 스터스 경을 해적들에게 떠미는 짓을 대신 해달라는 건 아닐테고.”
냉정한 눈길 속에 조소가 담겼다. 하비를 꾸준히 돌보고 있는 것이 빅터라는 것은 세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다소 무리한 부탁임을 알면서도 총괄 외교관이 빅터에게 올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 그건…….”
총괄 외교관은 더듬대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시인했다.
“그래도 어쩝니까. 스터스 경이 아니면 안된다는데. 나도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날이 창창한 젊은 외교관들의 생명이 그들 손에…….”
붙들린 외교관들은 대부분이 고위 귀족 출신이다. 해적들도 그것을 노렸을 가능성이 컸다. 인질 중에 평민 출신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때문에 귀한 자제를 인질로 잡힌 외교관들의 귀족 가문이 들고 일어날 기세였고, 총괄 외교관은 그들에게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을 터였다.
임페르 해적 때도 그랬고, 빅터는 현 시의원인 자신 또한 인질로 잡힌 귀족들에게 곧 모종의 압력을 받게 될 것임을 알았다. 라힌 스터스가 겪었을 그 일을, 자신도 비슷한 형태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빅터는 속으로 한숨 지었다.
‘정말 개같은 운명이군.’
그보다 눈 앞에 닥친 이 사람부터 처리해야 했다. 빅터는 당장이라도 이 비겁한 남자에게 뜨거운 찻물을 부어버리고 쫓아내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대접한 차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아직 김이 올라오는 차를 흘끗 내려본 빅터가 흉흉한 기세로 말했다.
“그렇다고 아픈 사람을 사지로 모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하비를 어디까지 몰아야 만족할 건지, 세상은 왜 이리도 잔인한 지 빅터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그의 손발을 자르고, 마음까지 뽑아낸 뒤에는 이제 텅 비어 버린 사람을 기어이 제물 삼으려 하고 있다.
“사지로 모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절대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했으니까요.”
당황하여 손을 흔드는 총괄 외교관을 빅터가 한심한 듯 보았다. 혀를 차며 빅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예?”
멍하게 되묻는 총괄 외교관의 살집 있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빅터가 비웃음을 띄웠다.
“해적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지. 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 지 잊었습니까.”
어린 시절을 해적선에서 강제로 보내야 했던 빅터이니만큼 해적의 생리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는 해적? 그런 건 없다. 간혹 세간에 의리를 지키는 해적이 종종 있다며 포장되어 떠돌긴 하지만, 그런 사례는 어디까지나 해적의 이해득실에 맞기 때문에 생긴 이례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이번 신생 해적들은 슬루인 제국을 등에 엎은 것이 정황상 확실했다. 하비를 보내주고 앞으로 그들의 모국이 이로비나 섬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납치한 외교관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만 봐도 그러했다.
이런 말을 뱉는 총괄 외교관의 속도 그리 편치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빅터는 그의 죄책감을 덜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찻잔을 으스러질 듯 쥐면서 빅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해적들이 정말로 약속을 지킨다 하더라도 내가 스터스 경을 보낼 일은 없습니다.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시죠.”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비에게 아무 일이 없도록 지켜줄 것이다. 빅터는 그리 다짐했다.
그래서 하비에게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둘만 있을 수 있는 좋은 곳으로, 그 곳에 가서 색다른 추억을 쌓으면 뭐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 빅터의 마지막 묘수였다. 혹여 하비에게 신생 해적단에게 납치당한 외교관들의 일이 흘러 들어갈까봐 걱정돼서인 것도 있었다.
스터스 가의 집사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어 절대로 그 일이 하비에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두었다. 스터스 가 저택으로 전달하던 외교부 문서에서도 그 일과 관련된 자료들은 모조리 빼두었다.
그리하여, 집사의 허락 하에 무조건적인 하비의 안전을 조건으로 여행은 시작되었다.
마차로 이동하는 것은 저번과 같았지만, 저번처럼 빅터가 하비의 허벅지를 베고 자는 일은 없었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따로 떨어져서 멀찍이 앉은 채 빅터는 가져온 일들을 처리했고, 하비는 말없이 덜컹대는 마차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기만 했다.
빅터가 서류를 읽던 눈을 올려 하비의 옆모습을 보았다. 비스듬하게 보이는 마르고 날카로워진 턱선으로 붉은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밤색 머리칼이 지는 노을을 한껏 받아 물들었다. 마차가 덜컹일 때마다 조금씩 들어오는 바람에 하비의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날렸다.
건장한 체격은 여전했지만 전에 비해서는 근육이 조금 빠졌다. 그나마 최근 들어 다시 검을 휘둘러 몸을 단련시키고 있기에 활력이 붙은 편이었다.
빅터는 서류를 더욱 꽉 쥐었다. 자칫 손이 나가 하비의 저 마른 턱을 부여잡고 키스할 것 같아서였다. 분출되지 못한 뜨거운 열이 계속 몸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억누르느라 힘들었다.
제 몸의 일부인 듯 가깝게 느껴졌던 때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하비 스터스는 어느샌가 견고하게 마음의 성문을 내리고 절대 열어주는 법이 없었다.
충격 요법이라도 동원해 부수고 들어가려면 가능은 하지만 그랬다간 이제 조금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하비의 정신이 정말로 망가질 것이다.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라고 누가 말했나. 하비는 착실히 이를 지키고 있었다. 괴로운 건 단단히 걸어 잠근 마음의 벽 앞에서 천년만년 기다리고 있는 자일 뿐이다. 빅터는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역시 힘드네.’
힘들 자격이 없다는 건 안다. 그럼에도 뭐라도 하비에게 부대끼고, 의미 없는 빈말이라도 섞고 싶었다.
대화를 시도해볼까. 지금은 하비가 정신이 든 상태라 가능했다. 찬 바람이 창가로 새어 들어오고 있어서 빅터는 닫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준비했던 말을 던지면서.
“춥지 않아?”
밖만 하염없이 보고 있던 밤색눈이 창문을 닫으려던 빅터의 손을 보았다. 저번에 넘어진 책장 때문에 자신 대신 다친 손가락이 작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전혀.”
역시, 받아치고 오갈 수 있는 대화의 형태를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할 말이 없어진 빅터는 한숨을 쉬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런데 스치듯 지나친 하비의 손이 뜨거웠다. 자리에 앉으려던 빅터가 흠칫하며 그 손을 돌아보았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단조로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신경쓰지마.”
내 몸 상태는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걸 말하는 듯한 냉정한 말투였다. 빅터가 어떤 노력을 해도 하비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행위였다. 빅터의 말과 행동들은 조금도 하비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의미가 되지 못한 채 그저 흘러 갔다.
빅터는 말없이 마차 내부의 수납공간에서 담요를 꺼내 하비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하비는 여전히 어떠한 말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창가를 보는 눈길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헛기침을 한 빅터가 다른 주제를 입에 올렸다. 불편한 공기를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고 싶었기에.
외교부에서 온 안건이나 문서들이 하비의 방에서 여전히 방치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던 빅터가 슬쩍 물었다.
“외교부에서 진행 하던 일, 어떻게 되고 있는 지 궁금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잘 하고 있겠지.”
“그래도 직접 확인하고 결과를 보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없어도 거긴 잘 돌아가. 실력 있는 사람도 많고.”
무덤덤하게 이어지는 대답에 빅터가 울컥했다. 이로비나 섬의 매입건은 하비가 그토록 애정을 쏟았던 일임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버린 것처럼 구는 것이 안쓰럽고, 그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더욱 괴로웠다.
‘그 일만 모르면 돼.’
이제 하비를 현실에 매어놓을 만한 것은 외교부 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기껏 튀어나오는 것은 이런 원망 섞인 어조였다.
“도망치는 거야?”
말해놓고, 빅터는 후회했다. 그제야 하비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밤색눈이 빅터를 담고 있었다.
“도망이라.”
몇 번이나 같은 단어를 외던 하비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 대답이 듣고 싶나? 그렇다면 그렇다구 해두지.”
아직도 뭔가를 붙들려는 희망도, 마음조차 보이지 않았다. 냉소와 함께 흘러나온 말에 빅터는 포기하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 일은 절대 모르게 할 거지만, 나중에 하비가 알기라도 하면…….’
해적들이 외교관 인질들을 정말로 죽이면 어떻게 될 것인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하비는 펄쩍 뛰면서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빅터를 원망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돌아봐 주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빅터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총괄 외교관이 특별히 하비가 괜찮아지면 꼭 이야기해 달라고 했던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말하면 하비가 분명 관심을 보이고 신경 쓸 중대 사안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앞뒤 안가리고 정말 가겠지.’
빅터의 정보망에도 이미 신생 해적단 뒤에 슬루인 제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딱히 관심 두지 않았던 이 건이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빅터가 이를 갈았다.
‘그 개새끼들을 진작에 잡았어야 했는데.’원인은 책임자인 하비가 오지 않으면 누가 관여하든, 협상하지 않겠다고 하는 섬 관리자 때문이었다. 이로비나 섬의 관리자는 해적을 낀 슬루인 제국과 하비의 모국이 자신들의 섬을 두고 싸우는 건 별 관심 없었다.
다만, 섬의 관리자는 하비가 섬의 세세한 사정에도 밝고, 섬을 사더라도 섬 고유의 문화를 최대한 보존하고 장려하겠다는 입장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섬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데 하비를 끼지 않고서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뻗댄 것이다.
해적 측은 하비의 모국이 이로비나 섬의 매입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대신해 하비가 직접 협상을 도와주면 외교관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물론 뒷배인 슬루인 제국이 지시한 사항임은 분명했다.
이로비나 섬의 실질적 소유가 도미니크 국이고, 비록 재정난에 시달리긴 하지만 무시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도미니크 국의 눈치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슬루인 제국조차 해적을 앞세워도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상황이 어떻든, 안 돼.’
대상이 무엇이든, 이제 그에게서 하비를 빼앗아 갈 수 없다. 설령 국왕이 명한대도 거부할 자신이 있었다. 여차하면 데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해 버리면 되니까.
빅터는 하비의 어깨에서 담요가 스르륵 내려가자 잡아서 다시 올려주었다. 단단하게 덮은 뒤 무감정해 보이는 하비의 밤색 눈을 마주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절대로 보내지 않을 거야.”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담요를 쥔 하비의 손이 조금 떨렸다. 신생 해적과 인질이 된 외교관들의 사안을 전혀 모를 텐데도, 하비는 왠지 불안해 보였다.
무엇에 대한 불안인지, 혹은 단순한 추위 때문인지, 어딘가가 또 아픈 건지. 여러 가지 생각이 빅터의 머릿속에서 섞였다가 파도 쓸리듯 사라져갔다. 그게 뭐든 더 이상 하비를 괴롭게 하지만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커다란 마차가 덜컹대며 두 사람을 싣고 목적지로 조용히 이동했다. 드디어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자 하비가 드물게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디지?”
모처럼 찾아온 대화의 기회에 반색하며 빅터는 기꺼이 답했다.
“별이 떨어지는 언덕.”
무슨 말이냐는 듯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빅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어. 우스갯소리로 부부 싸움 끝에 도달한다고 하는 곳이지.”
이해가 안간다는 듯 하비의 미간이 좁아지자 빅터는 다시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화해와 용서. 이 언덕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관계에 평화가 찾아온다고 하더라고.”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라서 별칭이 붙은 것일테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미처 다 갈지 못한 언덕에 누런 갈대숲이 굽이치고, 다른 쪽엔 구역별로 나뉜 튤립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꽃들이 투자용인데다 워낙 비싼 몸값이니만큼 공들여 관리한 태가 났다. 쉽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도 처져 있었다. 이곳도 빅터의 사유지 중 하나였다. 오늘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이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두었다.
빅터는 하비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며 별장 안으로 그를 들였다.
“추우니까 이제 바깥에 오래 있으면 안 돼.”
아늑한 규모의 별장 내부로 들어가니 벽난로가 있었다. 빅터가 손수 쪼개 온 장작을 집어넣자 남은 불씨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아직 난로를 피울 날씨는 아니지만 하비의 몸을 생각해서 피운 것이었다. 정작 빅터는 더워서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지만 아무 내색 않았다. 대신 옷을 얇게 추려 입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사용인이 있었지만 모두 직접 했다.
“이런 걸 어찌 손수 하십니까.”
“걸레는 제, 제가 빨겠습니다.”
“그건 이리 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용인들에게 빅터가 명했다.
“너흰 있는 게 더 불편하니 거주 지역으로 돌아가.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필요하면 부르겠어.”
별장 앞에 있는 작은 사용인의 집에 연락책인 단 한 명만 남겨두고 빅터는 전부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사이 하비는 난로 앞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빅터가 덮어줬던 담요를 쥐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고요한 밤색눈에 담겨 일렁였다.
빅터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허벅지에 옆얼굴을 비스듬히 기대었다. 하비의 차가운 손끝을 잡아서 온기를 전달하면서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릴 때 널 보면 늘 궁금했어.”
흘끗 빅터가 눈을 들어 하비의 반응을 살폈지만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편한대로 계속 이야기했다. 어차피 하비의 상태가 안 좋아진 이후로 같이 있어도 혼자인 기분이 들 때가 더 많았다. 이런 분위기는 익숙해졌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뭘 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욕심이 났어.”
점점 따뜻해지는 손을 꽉 잡으며 빅터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날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주면 좋겠다고.”
사람 많은 장소에서 무리하게 아픈 척 꾀병을 부려서 사람 놀라게 하질 않나, 스터스 가에 꾸역꾸역 빌미를 잡아 찾아가선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려고 기웃댔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관심은 점점 동경이 되고, 어느샌가 집착이 되었다. 하비가 알고 지내는, 혹은 그를 동경하는 여러 사람 중 하나가 되기 싫었다. 유일무이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해야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내 어릴 적 꿈은 사실 의원 같은 게 아니었어. 신대륙 개척자가 되고 싶었지. 지구 반대편까지 다 보고 온 최초의 사람이 되긴 이미 물 건너 갔지만….”
빅터의 증조할아버지 시대 즈음일 때, 이미 마젤란이 인류 최초로 목숨을 걸고 지구를 한바퀴 바닷길로 횡단했다. 그래서 빅터가 어릴 때부터 존경하던 위인도 그 자였고, 특별해지려면 그만큼의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르뎀 가를 무너뜨리고 나서 새 가문을 세우면 문양은 마젤란의 살아남은 부하 대표가 국왕에게 부여받은 것처럼, 지구 모양으로 할까 같은 패기 어린 고민도 했다. 빅터는 이어 말하면서 하비의 말라가는 손가락을 문질거렸다.
“정치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뭐, 반쯤은 이룬 건가. 해양 상단을 꾸려서 전세계를 돌아다녔으니까.”
비록 상단의 상당수는 임페르 해적 출신이긴 했지만 말이다. 살아 남아 성공해서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빅터의 집념이 해적들 사이에서도 먹혔다. 다행히 그에겐 상황에 적절한 재능이 넘쳤고, 해적과의 이해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오늘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던 빅터가 허탈한 얼굴로 일어났다. 아무리 말해도 닿지 않는 절대적인 마음의 벽이란 아직 버거웠다.
“좀 늦긴 했지만 저녁 식사부터 해야겠어.”
사용인이 준비해 주었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엔 빅터가 모든 것을 전부 했다. 해적선에서 생존해야 했던 경험으로 웬만한 요리는 할 줄 알았고, 솜씨도 꽤 있었다. 상단 일로 바빠진 이후로는 안 하긴 했지만 차근차근 요리를 준비하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그때 아무 말 없던 하비가 몸을 일으켜 연신 불길이 치솟는 주방으로 갔다. 멀리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음식 재료가 널려 있고, 식기들도 다양했다. 빅터의 뒷모습만 보였는데 워낙 분주해서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들었다. 뒤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걷어붙인 하얀 러플 블라우스에 붉은 소스가 튀어 있기도 했다. 단단하고 건장한 팔이 요리 도구를 들 때마다 볼륨이 커졌다.
가끔 보이는 옆얼굴은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이 사납던 기세는 전혀 없고, 오로지 음식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집중만 가득했다. 도축용 나이프로 능숙하게 돼지고기를 썰어서 팬에 넣고 휙 들어 올리던 찰나, 빅터의 눈이 하비가 서 있는 쪽으로 향했다. 시선을 느껴서였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빅터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요리에 정신을 쏟았다. 하비가 여기까지 올 리가 없다. 그의 앞으로 불길이 치솟았다.
‘잘못 느꼈겠지.’
그 틈에 하비는 한숨 돌리고 있었다. 기지를 발휘해 몸을 재빨리 벽 안쪽으로 틀었기에 망정이지, 들킬 뻔했다. 별 것 아닌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고기가 잘 익는 맛있는 냄새가 주방에서 새어 나왔다.
‘이게 뭐하는 건지.’
들어가서 당당하게 봐도 상관없는데, 몰래 훔쳐보는 듯한 모양새가 영 어색했다. 빅터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걸 알았다면 농담조로 한 마디 했을 것이다.
독이라도 넣으려는 것 같았냐고.
하비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왜 이리 모순된 짓만 일삼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솔직해 지자. 하비는 자신에게 말했다. 제 마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뭔가가 그의 시야를 흐리고 있을 뿐, 도피해 봤자 어차피 갈 곳도 없는데 계속 한 자리만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아예 정신을 놓고 그 싫은 기억으로부터 발을 빼버렸다. 하비는 자신이 이리 나약한 지 몰랐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알고 있잖아.’
사실 반 로투스와 그 일이 있고 나서, 빅터가 보인 행동들은 일관적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누가 봐도 헌신적인 행위들만 하고 있었다. 위협적일 만한 것은 일절 없었고, 오히려 하비에게 접근하는 위험 요소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전부 제거해 왔다. 골치 아픈 듯 하비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을 알리지도 않고.’
아무리 하비의 눈과 귀를 막아도 전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집사가 단속했지만 스터스 가 저택의 사용인들이나 바깥 사람들이 주고 받는 대화까지 전부 강제할 수는 없었다.
이로비나 섬에 보냈던 외교 인력들이 신생 해적에게 붙들려 인질이 되었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요구 사항으로 자신이 지목되었다는 것도, 이를 알리지 않으려 빅터와 집사가 무한정 노력해 왔다는 것도.
빅터가 마차에서 했던 말도, 그래서 의미를 알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절대로 보내지 않을 거야.]
진심일 것이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녹색 눈에 거짓이라곤 한 점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비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담요를 쥐었다.
‘또 나를 속이려는 수작일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외면해왔던 진실과 대면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결정을 해야 한다. 아끼던 사람들이 헛되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끊임없이 온 몸으로 부딪쳐가며 진심을 해명하려 하는 빅터와도, 결말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아직 마음이 서질 않았다. 마지막 한 번의 관계가 끝나면 정말 끊어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잃게 한 사람에게, 또 기회를 주고 싶다는 알량한 마음이 하비를 주저하게 했다.
[그래도 도저히 못 믿겠으면 이렇게 해.]
[있는 힘껏 날 증오해.]
[난 환자한테도 욕정하는 쓰레기 새끼니까, 그래도 돼.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고.]
기껏 상대가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빌미와 이유마저 주었건만. 어째서 그럴 수 없는 건지, 하비는 미치도록 답답했다. 그를 원망하는 마음조차 돌아돌아 자신에게 돌아왔다.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건 자신의 마음 박힌 감정 때문이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그 작고 순수한 감정은 가장 깊은 곳에 박혀 변형되지도 않았다.
하비는 자리로 돌아가서 편안한 흔들 의자에 앉아봤지만 이번엔 벽난로에서 나오는 열기가 불편했다. 주방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던 그 뜨거움을 닮아서였을까. 빅터가 은근히 미소마저 띄워가며 피워내던 그 불길 말이다. 속 어딘가가 당기는 것처럼 비틀렸다.
‘괴로워…….’
하비는 허리를 숙여 답답한 속을 게워내려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간혹 토해내던 피도, 흔한 위액조차도.
빅터가 꾸준히 보낸 그 약들이 효과가 있었다. 10번의 관계에 빅터가 내건 조건들은 약을 제대로 먹어라 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조건이었다.
‘약해진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빅터 바르뎀 경이 어떤 자인가. 상대가 아파서 쓰러지고 다 죽어가도 그가 점찍은 희생양은 반드시 끝장을 보는 사람이었다. 봐주는 것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보였다. 하비가 속으로 의문을 가졌다.
‘왜 약이 먹기 싫었던 거지.’
곰곰이 떠올려 보려던 때, 거부하는 것처럼 몸이 불쾌하게 가라앉았다. 경고 같았다. 떠올리지 말라는, 기억의 경고.
무의식의 영역이 다시 넓어지고, 하비는 눈 앞에 환각이 보였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갇힌 곳에서, 뭔가 바닥에 피가 가득했다. 뜨겁고 붉은 것이 작은 것과 섞여 끈적하게 흘렀다.
이건 뭘까. 더 깊이 파고들려던 찰나, 빅터가 주방에서 나와 그를 불렀다.
“다 됐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안 좋나?”
하비는 고개를 내젓고는 계속 달라붙는 환각을 날려 보냈다. 가끔 이미 알고 있는 기억들조차 자신을 희롱하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가림막을 쳤다. 그러다 보니 분명 잊은 건 아닌데, 마치 잊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비가 한 몸 같은 흔들 의자를 버리고 준비된 식탁으로 걸어가자 완성된 식탁에는 온갖 고기와 채소, 과일들이 산해진미로 널려 있었다. 제법 모양 좋게 꾸민 것도 많았다. 푸릇한 야채를 품에 안은 고기라든가, 그런데 고의로 뺀 듯 딱 한 가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비의 시선과 생각을 알아챈 빅터가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리며 고백했다.
“해산물은 안 좋아했던 것 같아서.”
드물게 하비의 입이 열렸다.
“원래는 좋아해. 아마 그땐….”
하비는 말을 하다 말고 다시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임신 중이어서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가 차마 나오지 않아서.
그 생각을 한 순간, 하비는 자신의 의식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그 때의 기억을 자꾸만 흐릿하게 지우려 했다. 쓴웃음이 났다.
‘이것 때문이었나.’
빅터도 알아들은 듯 씁쓸하게 표정을 숨겼다. 언제 들어도 고통스러운 과거였다. 식탁 아래 주먹을 터질 듯이 쥐어서 치밀어 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흘려보냈다.
슬픔을 감추고 빅터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다른 주제를 꺼냈다.
“내가 준비한 요리를 먹는 건 무식한 해적 놈들 말곤 네가 처음인 건 알아?”
하비는 묵묵히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에도 식욕이 돋질 않았다. 그건 빅터도 마찬가지였다. 암묵적인 룰처럼 둘 사이에서 주고받지 않아야 할 주제가 튀어나온 탓이었다.
그때 하비가 고개를 들고 잘 익혀진 돼지 고기 한 점을 찍어 솜씨 좋게 만든 소스에 찍었다. 맛을 보더니 그는 짧게 말했다.
“솜씨 좋네.”
하비는 다른 음식을 한 번 더 맛보았다. 기대도 안 했던지라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빅터에게 그간 마음 깊은 곳에 구겨놓았던 진심을 단편적으로나마 전했다. 입 안에 남은 소스는 막 넣었을 땐 알싸하지만 끝맛은 달달했다.
“고마워.”
엉망진창으로 삐걱대며 이어지는 이 아슬아슬한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그 끝은 당사자가 정해야 정해진다. 그래서 하비는 선택하기로 했다. 그가 정하지 않으면, 이 관계는 둘 중 하나를 완전히 망가뜨려서야 멈출 것이다.
하비의 속을 알지 못한 채, 빅터는 어딘지 먹먹한 얼굴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
그 뒤로 하비는 다시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긴 여운이 따랐다. 식사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빈 그릇은 대충 치워두고 향긋한 청결제로 각자 입을 헹구었다.
따닥!
마른 장작이 불길에 휩싸이고, 식탁 옆으로 따뜻한 불꽃이 일렁였다. 벌써 밤이 깊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튤립들도 검은 장막에 가려 모두 똑같은 색처럼 보였다. 이윽고 질 좋은 포도주를 꺼내온 빅터가 빈 잔을 내밀었다.
“한 잔 하겠어?”
하비는 빅터 모르게 품 안에 든, 미리 준비해 온 것을 재차 확인했다. 이 곳에 오기 전부터 고민 끝에 가져온 것이었다.
수락의 의미로 하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숙성된 치즈 덩어리와 포도주가 나란히 놓였다. 코르크 마개를 능숙하게 딴 빅터가 라벨이 붙은 포도주 병을 하비 쪽으로 돌리고, 하비 몫의 호리호리한 잔을 들어올렸다.
빅터가 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하비가 문득 기습처럼 물었다.
“반은 어떻게 된 거지?”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던 손이 흠칫했다. 그러나 빅터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보통을 가장했다.
“그 놈은…, 글쎄.”
모른다고도, 안다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대답이었다.
“경이 한 짓 아닌가?”
일정량 포도주가 찬 잔을 빅터에게서 건네받은 하비가 오랜 시간을 입어 그윽해진 향을 음미했다. 빅터는 눈을 힐끔대면서 제 몫의 잔에도 포도주를 채워넣었다. 따르면서도 눈은 계속 하비에게 쏠려 있었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건데.”
하비가 포도주 잔을 흔들자 밑둥에 찬 핏빛같은 포도주가 맑게 찰랑댔다. 알면서 물은 것이었다.
“사실은 얼마 전에 반이 날 찾아왔었어.”
행방불명은 로투스 가가 내건 성명이었다. 반 로투스는 생환했다. 심지어 하비에게 찾아갈 정도의 정신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멀쩡하다고도 볼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로투스 가는 반 로투스의 상태를 불문에 부쳤다.
빅터는 말없이 하비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반이 과연 어디까지 발악을 했을지도 알고 싶었다.
“만신창이가 됐더군. 정신도 그다지 온건해 보이지 않았고.”
하비의 잔에 자신의 잔을 짧게 갖다 댄 뒤 빅터가 한 번에 포도주를 들이켜 버렸다. 목이 탔다.
“그 새끼가 뭐라고 했는데.”
하비가 조용히 말했다.
“살려달라고 했어.”
빅터가 코웃음을 치더니 남은 술을 잔에 따랐다. 반 로투스를 굳이 살려둔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그게 전부야?”
“아니.”
하비는 반쯤 실성해서 산발이 된 몰골로 찾아와 엎드려 비는 옛 친구를 떠올렸다. 한 쪽 눈이 없었고, 아직 의안조차 맞추지 못해서 텅 비어 있는 끔찍한 얼굴이었다. 여기저기 칼로 베인 상처나 두들겨 맞은 듯한 흔적들도 있었다.
반은 울면서 하비가 원한다면 발이라도 핥겠다며 비천하게 굴었다.
그 때 하비의 심정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냉정에 가까웠다. 처음 봤을 때 조금 놀랐던 건 예상보다 더 참혹한 모습 때문이었지, 어떠한 인간적인 안타까움도 없었다.
그 때의 반 로투스가 애걸한 건 자신의 안위와 목숨 때문이었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려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되어서까지 버리지 못한 일말의 자존심이 빌고 있는 반 로투스의 한 쪽 눈알에 번들대고 있었다. 입으로는 잘못을 고하지만, 눈빛은 그의 진심을 보이고 있었다.
너만 없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이 될 리가 없었다고.
원망과 원한이 섞인 눈으로 하비를 올려 보고 있었다. 언제든 또 돌아설 수 있는 자의 비겁함도 여전했다. 이제는 명확히 보였다. 그토록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나서야, 모든 것을 잃고서야 보였다. 바보 같이.
하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도 했어.”
“그리고 또?”
하비가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보며 그게 반이 내뱉은 전부임을 알았다. 빅터는 사나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그게 다라니.”
당장이라도 다시 반 로투스에게 달려가 숨을 끊어놓으려는 것처럼 보여서, 하비는 만류했다. 그 날 반과 약속한 것도 있었다.
“이제 그만해도 돼.”
앞으로 반이 스터스가의 그림자도 밟지 않겠다는 것과 자신을 한 번 도와준다는 약속만 지킨다면 하비도 절대 빅터가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당시 반은 겁에 질렸으면서도 하비가 내건 약속을 긴가민가하게 받아들였다.
[정말 그것만 해주면 되는 거야? 정말이지?]
[약속은 반드시 지켜. 걱정마.]
[그런데 왜…. 도망가려고?]
누구한테서, 무엇에게서, 라는 말은 굳이 묻지 않았다. 하지만 하비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러면 안 되나?]
반이 제 손으로 흉측해진 얼굴을 덮으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아니. 처음으로 네가 인간처럼 보여서. 그 얼굴, 조금 더 일찍 내게 보여주지 그랬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끝은 역시나 원망이었다. 옛 친구의 치기 어린 불평을 더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기에, 하비는 용건이 끝난 뒤 즉시 자리를 떠났다.
반과의 그 약속이, 하비를 이 장소까지 이끌었다. 이를 알 리 없는 빅터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충분히 대가를 치렀다고? 아직 멀었….”
“더 이상 경의 손을 더럽히지 말란 소리다.”
단호하게 떨어진 하비의 말에 빅터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뚫어질 듯 바라보는 시선에 하비는 나머지 설명을 덧붙였다.
“이제 반 로투스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연거푸 한 번에 끝내버리는 빅터완 달리 하비는 아주 조금씩 마셨다. 극소량의 향긋한 포도주가 입 안에서 잔향을 남기고 사라졌다.
빅터는 눈을 좁히고 하비의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를 가늠했다. 신경에 자꾸만 잡히는 작은 신호가 점점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기대로 차오르는 마음을 굳이 감추지 않고 빅터는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 희망을 좀 가져도 되는 말이야?”
저녁 식사를 할 때부터 하비의 마음이 미묘하게 풀어진 것을 느꼈다. 티냈다가 아니라고 딱 자르고, 다시 예전처럼 냉랭한 모습으로 돌아갈까봐 초조해지긴 했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하비가 유리잔을 만지작댔다. 지문이 하얗게 묻어났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빅터가 말하는 허망된 것처럼.
“우리 사이에 희망이란 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잔에서 손을 떼며 하비가 빅터의 눈을 마주보았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녹색 눈동자가 그를 가득 담고 있었다.
“경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런 거겠지.”
한때 같은 형질끼리는 안된다는, 그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서까지 통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끌림이 더 운명적으로 느껴지고, 서로 부딪쳤던 것들조차 뜨거운 감정으로 미화되었다.
빅터가 필사적으로 진심을 욱여넣으려 할 때마다 좋았던 기억들이 생생해 졌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운 기억도 함께 부상했다. 자신을 봐달라는 저 간절한 눈빛에 금방이라도 또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지만 단단히 다잡았다. 빅터라면 어떻게든 막아설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못 해.’
하비는 부글거리며 달아오르는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더욱 감정을 절제했다. 지금부터는 신중해야 했다.
눈치 빠른 빅터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평소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그의 경계심을 풀어놓기 위해 아주 조금씩, 마음의 울타리를 일부러 열어두었다.
하비가 마시다 만 포도주잔을 옆으로 치웠다. 술기운이 평소보다 빨리 돌아서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홀린 듯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빅터에게 하비는 상체를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지막 한 번, 여기서 바로 하겠어?”
빅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향긋한 포도주 냄새가 하비의 체향과 페로몬과 뒤섞여 더욱 자극적이었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마음도 가까워진 것 같았다.
부르는 호칭은 전에 비해 아직도 멀었지만,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조금 보이는 것만으로도 빅터는 충분히 기뻤다. 역시 멀리 온 것이 잘한 선택이다 싶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원래라면 좋아하며 덥석 물었을 기회였다. 하지만 날카로운 예감의 기척이 빅터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한 번이라는 변수도 있었다. 아직 그릇이 놓인 테이블을 물끄러미 보면서 빅터가 되물었다.
“…여기서?”
망설이던 빅터가 조심스럽게 하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엎었다. 뿌리치지 않자 깍지를 끼고 엄지로 농밀하게 쓰다듬었다. 하비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밀도가 짙어진 눈이 뚜렷한 성욕을 담고 있었다.
그때 깍지 낀 손가락 사이를 엄지로 매만지고 있던 빅터가 미간을 구겼다.
“손이 너무 빨리 식어. 원래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빅터는 하비의 손을 잡은 채로 올려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 상태로 눈만 흘끗 올려 말했다. 속상하고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금방 차가워지잖아.”
하비는 순간 심장이 까마득히 추락하는 줄 알았다.
식는다. 차가워진다.
빅터가 안타까이 말하는 그 말들이, 가슴 안 쪽에서 봉인해 두었던 것들을 짓눌렀다. 울컥대는 감정이 올라와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하비는 역류하는 신물을 간신히 삼켰다. 왠지 눈가가 뜨끈했다.
‘지금은 안 돼. 참아.’
얼굴을 숙여 빅터가 표정을 보지 못하게 한 뒤 하비는 잡힌 손을 자신 쪽으로 거세게 끌어당겼다. 빅터가 당겨올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하비가 조용히 읊조렸다.
“상관없어.”
손이야 어떻든, 빨리 이 곳에서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빅터는 묘한 눈으로 하비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비록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하비의 깊고 진한 감정들이 전해졌다.
‘이게 뭘까…….’
이토록 적극적이라니, 현재의 하비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어서 더 불안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하비가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마지막 관계는 이 곳에서 할 생각 아니었나. 장소가 무슨 상관이야.”
그게 테이블이든, 바람이 횡횡한 들판이든, 몸을 가눌 수만 있는 곳이라면 상관없지 않냐고 하비가 덧붙였다.
잠시 말이 없던 빅터가 한 쪽 입술을 비틀었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
이번엔 하비 쪽에서 말이 없어졌다.
“이만 솔직해져. 내가 그런 것처럼, 너도 결국 날 끊어낼 수 없잖아. 모를 줄 알았어?”
하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심으로 빅터와 끝내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몸을 섞을 구실조차 주지 않아야 했다. 반 로투스에게는 일말의 여지 없이 마지막을 선고했건만, 빅터에겐 그러지 못 했다.
그 마음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 이제는 안다. 더 이상 어쩌지 못한다는 것도.
빅터는 못 참겠다는 듯 테이블 반대편으로 아예 건너갔다. 하비의 옆에 앉은 뒤 빅터가 심란하게 굳은 단정한 얼굴을 손으로 덮어 어루만졌다.
“관계 10번에 영원히 얼굴도 비치지 말라니. 그 말 할 때 네 얼굴이 어땠는 지 알아?”
입술을 지긋이 깨문 빅터는 이목구비 선명한 하비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어릴 때 해적선에서 밤마다 죽도록 그렸던 처연한 밤색눈과 곧고 짙은 눈썹, 길게 뻗은 우아한 콧대,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소중하게 별처럼 가슴에 박혀 들었다.
하비는 어딘지 숙연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훑는 것처럼 하비의 뺨을 쓰다듬은 빅터가 하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뜨거운 열이 전해졌다. 맥이 뛰고 있었다. 가슴 속의 박동보다 더 빨리.
“정말로 독하게 끊어낼 거면 날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했어야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나? 누군가의 약점이나 허점은 그게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바로 눈치챈다고.”
지금도, 하비는 뭔가 이상했다. 평소처럼 하고는 있지만 숨길 수 없는 미묘한 균열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빅터는 우선은 모른 척 해주고 있었다.
대신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비가 어떤 말을 하든, 무슨 반응을 보이든, 부디 알아주었으면 했다.
빅터가 하비의 이마에 마주대었던 제 이마를 걷어내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날 때려 죽여도 좋으니까 한 번만 믿어줘.”
에메랄드를 닮은 그 선명한 녹색 눈이 길게 휘었다.
“사랑해.”
마주보고 있던 밤색눈이 크게 뜨이고, 파르르 떨렸다. 빅터는 그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하비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곧이어 뱉는 말은 빅터에게 뼈아픈 한이 되었다. 그가 미끈한 눈썹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후회해.”
빅터의 인생에서 가장 솔직한 시간이었다. 언제나 무거워 하비에게 기울었던 진심의 추가 처음으로 빅터에게 기울었다.
“그 날, 네가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하비는 온 몸으로 던지는 빅터의 묵직한 진심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턱까지 차오르던 해묵은 감정들이 드디어 터져나올 때를 고르고 있었다. 단단히 세워둔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한계까지 도달한 슬픔이 파도쳤다.
왜 하필 지금이지.
왜 지금.
왜.
하비와 다르게 고른 숨을 고르게 뱉던 빅터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갔다. 부드럽게, 하지만 집요할 정도로 깊숙히 파고들었다.
하비는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마음이 너무 절실해서, 어떤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아서.
어느 새 빅터는 하비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당겨 더욱 깊은 키스를 유도했다. 혀가 난잡하게 엉키고, 뱀들의 교미처럼 야하게 얽혀들었다.
입을 뗄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붉은 살점이 서로를 더 취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입술 옆으로 미처 갈무리 하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끼익!
빅터가 한 팔로 하비의 의자를 잡아당겨 가슴팍을 단단히 붙였다. 단련된 상박이 서로 부딪치면서 은밀한 소리를 냈다. 입술의 연결이 깊어질수록, 하체로도 반응이 갔다. 서서히 중심이 부풀었다.
이윽고 아쉬운 듯 천천히 입술을 뗀 빅터가 부풀어 오른 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모자랐다. 눈 앞의 남자에게 더 깊이 닿고 싶다고 그의 육체가 꿈틀대며 주인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걸로도 안되겠나?”
하비는 숨을 몰아쉬며 붉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축축한 타액이 묻어났다. 누구의 것인지도 몰랐다.
이미 버거웠다. 한계 였다. 더 이상 이 위험한 남자를 가까이 하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몸이 달아올라 다음을 부축이고 있었다.
가슴을 전부 태워버릴 것처럼 강렬한 열기가 감돌았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었다.
하지만 하비는 쉽게 입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품 안에 가져온 것이 껄끄럽게 머릿속 신경을 긁어댔다.
“나는…….”
몇 번이나 달싹대던 하비의 입술이 결국 일자로 다물렸다. 말할 수 없다. 조금 후에, 대망의 끝을 볼 수 있는데. 그 전까지는 쉽게 속내를 털어놓으면 안 되었다.
묵묵히 기다리던 빅터는 실망한 기색을 숨기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꼭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야. 부담갖지마.”
하비가 흔들린 것을 본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돌려준 브로치와 함께 전해줘. 빅터가 낮게 덧붙였다. 하비는 빅터가 두고 간 물건을 떠올렸다.
그것을 줄 때 눈에 띠게 좋아하던 빅터의 얼굴과 질투한 자신을 한심해 하던 모습, 원래 네것이라 하자 다시 소년처럼 웃던 미소가 교차되었다. 하비의 가슴이 홧홧한 통증으로 지끈거렸다.
빅터는 쓸쓸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끝까지 안 돌려줘도 원망하지 않을게.”
하비는 그 나직한 속삭임에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빅터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아까완 다르게 덮치듯 빅터에게 키스했다. 빅터는 놀라서 눈을 치떴다.
빅터는 놀라서 눈을 치떴다.
“하비?”
하비가 빅터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고 입술을 겹치다 미끄러지자 이번엔 아래로 내려와 단단한 턱끝을 핥았다.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두려웠다.
또 거짓일까봐. 믿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하면서 하비는 더욱 가라앉아 왔다. 이제는 그 지옥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때이다.
촛불이 흔들거리면서 두 사람의 실루엣을 길게 창문에 비춰냈다. 하비는 입고 온 청남색 더블릿을 벗어던지고 튜닉마저 탈의했다. 빅터도 급한 손길로 상의를 벗어던지면서 맨 몸으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 역시 안에 들어가서 하는 게….”
빅터가 별장 안 쪽의 방 중 가장 큰 침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하비는 그가 다른 곳을 보지 못하도록 턱을 꽉 움켜쥐어 자신 쪽으로 돌렸다. 입술을 가까이 붙이면서 하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기서 해. 못 기다려.”
과감한 하비의 말에 빅터는 순간 침묵했다. 금방 눈에 불이 붙는 것을 보며 하비는 빅터의 앞에 놓인 포도주에 몰래 작고 하얀 알약을 떨어뜨렸다.
미리 준비해온 것이었다. 워낙 재빨리 넣은 데다 하비의 얼굴에 집중하고 있엇던 터라 빅터는 미처 보지 못 했다.
약은 포도주 안에서 빠르게 풀렸고, 넣은 흔적조차 금방 없어졌다. 하비는 빅터가 눈치채기 전에 약을 넣지 않은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빅터에게 건배를 위해 내밀었다. 눈을 크게 뜨는 그를 보며 하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왕 취해서 안기는 쪽이 마음 편할 것 같아서.”
피식 웃은 빅터는 하비와 잔을 맞대었다. 유혹할 때는 언제고, 다시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생각하면서.
빅터가 아까처럼 한 번에 포도주를 들이켰다. 고상하고 우아한 척 하던 시의원 빅터 바르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적에 가까운 모습에 하비는 이것이 그의 본질과 좀 더 맞닿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닦은 빅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하비의 목을 잡았다. 그대로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목덜미를 옅게 물고 귓등에 입술을 가까이 하고는 낮게 속삭였다.
“지금 멈추라고 하면 정말 미칠 지도 몰라.”
약한 살을 깨물리자 움찔하면서도 하비는 완전히 비워버린 빅터의 빈 유리잔을 주목했다. 눈을 돌려 다시 빅터를 바라보면서, 하비가 관계를 재촉했다.
“멈추지 마.”
주변에 불씨가 꺼질 때마다 넣는 향유가 담긴 호리병이 있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빅터는 다급히 이를 잡고 뚜껑을 열었다. 독한 향유 냄새가 났지만 아무도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빅터가 테이블 앞에 뒤돌아 서 있는 하비의 어깨를 움켜쥐고 구멍 사이로 향유를 들이부었다.
퍼억! 쨍그랑!
하비가 테이블로 거칠게 밀린 탓에 저 멀리 그릇이 밀려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의 단단한 팔에 부딪쳐 식기도 몇 개 떨어졌다.
요란한 소음 속에서, 하비는 빅터의 거칠게 흥분된 숨소리만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이제 곧,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갔다.
빅터는 떨어진 잔해들을 흘끗 보고 솟은 하비의 어깨 뒤 단단한 근육들을 손으로 쓸었다.
“끝나고, 내가 치울테니까 신경 꺼.”
손가락에 닿는 감촉에 욕정이 솟았다. 빅터는 허리를 숙여 옴폭하게 파인 날개뼈 부근을 혀로 길게 쓸었다. 하비 특유의 옅은 알파 페로몬조차 달았다. 하비가 움찔대며 차가운 테이블 위로 뺨을 기대었다.
“읏….”
갑자기 빅터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혹스러운 듯 미친 듯이 흔들거리는 시야를 떨쳐내려 했다.
“이게, 뭐…….”
빅터는 머리를 마구 뒤흔들며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하더니, 하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말도 안 된다. 이런 시점에서 느닷없이 잠이 온다고?
‘설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한가지 뿐이었다. 등만 보이고 있는 하비에게, 빅터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한테 뭘 먹인 거야.”
하비는 말이 없었다. 이건 도저히 인간적인 힘으로 참을 수 있는 잠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정신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빅터가 눈을 부릅뜨고 하비의 단단한 등을 노려보았다. 가만히 있던 등이 몹시 흔들렸다. 점점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빅터는 하비의 어깨에 자국이 생기도록 꽉 쥐었다. 하얀 피부에 새겨지는 붉은 자국을 보니 아까 먹은 적포도주가 생각났다.
거기다 약을 탄 게 분명했다.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잡고 뒤흔들고 있는 사이 말이다.
‘제기랄.’
이걸 노린 거였나. 마음을 연 것처럼 보인 것도, 적극적으로 군 것도, 전부.
빅터는 방심한 자신을 비웃었다. 그 틈을 노려 목적을 이룬 하비도.
‘하. 대단해, 정말.’
지금도 미동 하나 없이 엎드려 있는 하비를 보며 빅터는 필사적으로 하나를 떠올렸다.
하비가 굳이 정신을 잃게 하는 약을 먹이는 이유는? 자신을 죽이려고? 그것보다 더 미칠 것 같은 이유일 것 같았다. 그 하비 스터스라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가정이 하나 있었다. 빅터는 경악했다. 그건 정말로 안 된다.
“헉….”
악으로 버텼지만 빅터는 점점 하비를 붙든 손에 힘이 빠졌다. 정신을 차리려 할수록 더 극심한 잠이 몰려왔다.
‘안 돼. 정신 차려야….’
순간 빅터의 눈에 반짝이는 뭔가가 들어왔다. 작은 그것을 반대편 손에 집은 순간, 하비가 조용히 뒤돌더니 어깨에 잡힌 빅터의 한 손을 잡아 내렸다.
빅터는 손을 늘어뜨리고 결국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는 빅터에게 하비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평범한 수면제니까 걱정하지마. 좀 독한 것이긴 하지만.”
웬만한 사람이면 진작에 쓰러졌을 텐데, 역시 우성 알파라 그런지 약효가 느린 편이었다. 아니면 그 빅터 바르뎀이라 수면제조차 더디게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테니까.”
눈을 뜨려고 애쓰면서 빅터가 가물거리는 의식을 억지로 붙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뭐가…, 끝난 다는 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떠날 기회가 전혀 없을 것 같았거든.”
하비가 웃옷에서 손수건을 꺼내 뒤를 닦고는, 떨어진 옷들을 하나하나 주워 다시 입었다. 견고한 갑주를 걸치듯 가지런하게 옷매무새를 정비한 그가 상체를 숙여 빅터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올려보는 녹색 눈이 애처로웠다.
“네가 진심인 건 알았어. 하지만 우린 너무 많은 걸 잃었지. 이 관계에서 남은 건 상처 뿐이고.”
참고 참았던 말들이 이제야 나왔다. 빅터의 고백에 터졌던 감정의 둑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냉정하지는 않았지만, 관조하는 태도였다.
하비는 빅터의 부드러운 황금빛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미안하다.”
가물대며 감기는 녹색눈이 원망을 가득 담고 있었다. 반 로투스의 것과는 사뭇 다른 원망이었다. 증오하는 것도, 질투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진득한 ‘애정’이었다.
하비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빅터의 눈가를 손으로 길게 매만졌다. 이것을 그리도 갖고 싶었는데. 진실로 얻고 싶었던 것을 이제야 받게 되었는데.
하비는 자조했다. 입맛이 썼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할 생각이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그런 것조차 없으면 숨쉬는 것조차 죄악감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
그 어떤 것도 지키지 못 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떠나가는 것을 붙들 수도 없었다. 남은 것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믿어줬던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었다.
하비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가운데서도 외교부 사람들 만큼은 끝까지 자신을 버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빅터의 저택 사용인들도,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도.
그들의 믿음에 보답하고 나서야 살아있다는 감각이 들 것 같았다.
더욱이 이로비나 섬 매입건은 하비가 주도한 것이고, 붙들린 사람들도 그가 직접 보낸 인력이었다. 큰 책임감이 느껴졌다.
하비는 빅터의 목을 한 손으로 쓸 듯이 만졌다.
“이로비나 섬으로 갈 거다. 이걸 끝내고 나면 좀 자유로워질 것 같거든. 이 일이 끝나면 외교관도 그만둘 거야.”
쓸쓸한 여운이 하비의 목소리를 뒤따랐다.
“그만둘 목숨이 남아있다면 말이지.”
속삭이듯이 빅터의 귓가에 대고 말한 하비가 상체를 일으켰다.
“잘 지내.”
뒤를 돌아보려던 때, 빅터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크게 튀었다. 놀란 하비는 빅터의 눈이 다시 초점을 되찾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손에는 믿을 수 없는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페트를 흠뻑 적실 정도로 많은 출혈이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빅터가 비스듬하게 웃었다.
“시발…. 가긴 어딜 가.”
어느샌가 빅터의 손에 치즈를 자르는 용도로 쓰이는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 칼날을 꽉 쥐어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였다.
한 손에선 피를 미친 듯이 흘리면서, 다른 손으론 하비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통각으로 멀어지는 잠을 쫓으려는 것이었다.
당황한 하비가 칼을 빼내려고 할수록 빅터는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피가 나오는 속도가 빨라지고, 다급해진 하비는 빅터를 설득하려 했다.
“손 잘려. 놔.”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도무지 저 큰 손에서 작은 나이프를 빼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빅터는 창백해진 얼굴로도 협박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가면…, 더한 걸 자를 거야.”
혀도 깨물었는지 입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눈을 부릅뜨면서 빅터가 하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너무 강한 힘이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넌 못 가.”
지독한 저음이 하비를 영혼까지 옭아매었다. 발이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그딴 짓 절대 못 해.”
빅터는 보다 또렷해진 눈빛으로 하비를 응시했다.
“혹시라도 돌아오면, 네가 볼 건 내 시체일 거야.”
옷깃을 잡아당기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하비는 더 가지 못하고 빅터가 앉은 의자 아래로 주저앉아 버렸다.
쿠당탕!
그 바람에 빅터도 의자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하비와 엉겼다. 하비를 아래로 깔고 빅터는 근성으로 시간을 버텼다.
수면제를 준 사람이 이를 안다면 미친 놈이라며 기겁할 노릇이었다. 덩치 큰 동물에게도 먹히는 수면제였다. 경고하는 목소리가 하비의 귓전을 살벌하게 두들겼다. 빅터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못할 것 같아?”
오로지 피를 흘리는 통각으로 이를 이겨내며 빅터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으로 일어나려는 하비를 다시 잡아 넘어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쿵!
못 가게 온 몸으로 짓눌러 버린 뒤, 빅터는 어떻게든 하비를 설득하려 했다.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이겨냈다.
“네가 간다고 해서 일이 전부 해결되지도 않아.”
그는 하비에게 닿길 바라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해적의 생리는 그가 가장 잘 알았다.
“내가 도와줄게. 같이 해. 혼자 하지마.”
하비는 몸도 가누지 못해야 할 사람이 자신을 아래에 깐 것보다, 옷에도 스며드는 엄청난 양의 벌건 핏물에 더 놀랐다.
“피가 너무 나잖아. 이러다 진짜 죽어.”
듣는둥 마는둥 하던 빅터가 하비의 멱살을 잡아당겨 깊이 키스했다.
“으읏….”
혀를 깨물어서 나온 비릿한 피 맛이 하비의 입 안에서도 맴돌았다. 몽롱한 눈으로 하비를 내려 보며 빅터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상관 없어. 네 위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
그 순간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빅터가 하비의 위로 와르륵 무너졌다. 무거운 몸으로 짓누르고 있으니 빠져나가기도 힘들었다.
겨우 빅터를 밀어내고 일어나는데, 이번엔 빅터의 멀쩡한 손이 더블릿 아래의 튜닉을 세게 쥐고 있어서 갈 수가 없었다. 기절한 채로도 상상 이상의 힘이라 도무지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다른 편 손이 칼날을 쥐고 있고,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대체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가늠도 안 되었다.
‘옷이야 자르면 되지만.’
여기서 빅터를 두고 떠나면 과다 출혈로 죽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불러서 함께 의료 조치를 해야 했다.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빅터의 장담대로, 이대로 떠나면 그는 제가 한 말을 지킬 것이다. 혹시라도 돌아왔을 때 차가워진 빅터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실핏줄이 터져 벌개진 눈으로 하비는 잠시 의식이 없어진 빅터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한 손에선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입술에도 혈색이 사라지고 있었다.
왜 이 지경이 되어서도 보내주지 않는 건지. 미칠 것 같았다. 하비가 중얼거렸다.
“이제 제발…. 날 내버려둬.”
그때 무의식 중에 움찔대던 빅터가 빈 손으로 하비의 손을 잡았다. 특히 차가운 손끝 쪽을 꽉 말아 쥐었다. 불쑥 좀전에 빅터가 했던 말들이 생명력을 얻고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손이 너무 빨리 식어. 원래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금방 차가워지잖아.]
[사랑해.]
다정한 그 목소리에 울컥, 아슬아슬하게 혼자 버티고 있던 것들이 무너졌다.
어떻게 해도 녹지 않았던, 가슴 깊은 곳까지 얼어붙었던 것이 빅터의 고백에 뜨겁게 녹았다. 가슴 속을 잠궜던 뭔가를 일시에 해제시켰다. 응어리졌던 것이 녹아서 흘러내리고, 그것은 하비의 눈가에도 맺혔다.
빅터를 보면 괴롭고, 떠나고 싶었던 이유. 하비의 마음이 병들어가기 시작한 절대적인 계기.
스터스 가가 무너진 것보다, 믿었던 옛 친구가 배신한 것보다, 다른 어떤 것들보다 더 크고 중요한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곧 죽어도 자신을 놓지 않고 있는, 빅터 바르뎀. 이 남자 때문이었다.
하비는 그제야 계속 회피하던 장면과 마주보았다. 빅터의 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핏물처럼, 그때도 그랬다. 하혈하면서 함께 쏟겨나오던 작은 생명체는, 너무 빨리 식었다.
그래서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생명은 하비의 손을 떠나 멀리 달아났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가슴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걱정될 만큼.
하비는 빅터가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역류하는 뜨거운 덩어리가 목에 매달렸다.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금방 차가워졌다. 손에 있었던 그 너무나 작고 연약하던 생명은, 빅터에게 보여주기도 전에 너무나 빨리 차가워졌다.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빅터에 대한 분노로 승화되었고, 미움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감정의 본질은 금방 변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하비의 마음에 박혀 있었다.
빅터를 보면 숨이 막혔다. 사산아를 볼 때 느꼈던 참담함과 비참함, 아픔, 그럼에도 배신당했다는 이윤배반적인 감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런 것들이 몇 배로 하비를 고통스럽게 했다.
한 번 터진 뜨거움은 하비의 눈가에서 멎지 않고 흘렀다. 몸에 이런 것이 있었나. 몰랐던 작은 웅덩이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것은 때를 만나 바깥으로 일제히 향했다.
하비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짓씹었다. 비릿한 피맛이 났다. 차마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그의 속을 엉망으로 할퀴었다. 목에 내내 걸려 있기만 하던 뜨거운 덩어리가 드디어 터져 버렸다.
하비의 얼굴이 크게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투명한 물이 찡그린 밤색눈에 가득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멎지 않고, 계속.
피 맺힌 입술도 차마 뱉지 못한 오열로 구겨졌다. 마주하기 두려워 파묻어두었던 진실이, 어이없도록 간단한 빅터의 말 몇 마디에 풀려나와 도로 가슴을 후려쳤다.
그 뒤로 그 작은 생명이 어떻게 됐는지 차마 묻지도 못 했다. 차가운 땅 속에 있을까, 재가 되어 사라졌을까. 때 늦은 미안함과 후회가 가슴을 쳤다.
이 순간에도 의식을 깨우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금발의 미남자에게, 하비는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우리의 결실을 지키지 못 했다. 내가, 못 지켰어. 내가….
‘약을 계속 먹는 바람에.’
하비는 사산된 건 위가 아파서 먹었던 그 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후로도 약을 먹는데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굳이 약이 아니더라도 다른 모든 이유조차, 그 자신이 만들어낸 책임이라고 여겼다.
‘나 때문에….’
작은 깨달음 사이로 눈물은 쏟아지는 비처럼 그치지 않고 내렸다. 턱까지 적시다가 맺힌 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차가운 눈물에, 빅터는 초인적인 의지로 간신히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을 뜨자마자 눈물로 얼룩진 하비의 얼굴에 흠칫 놀랐다.
“왜.”
빅터는 더듬대며 억지로 손을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의식을 깨우려 날카로운 나이프를 쥐고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툭.
그 탓에 어떻게 해도 떼어낼 수 없었던, 세게 움켜쥐고 있던 나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 묻은 손이 하비의 눈가를 매만졌다. 미끌대는 피가 하비의 눈물에 섞여 붉은 자욱을 만들어냈다. 하얀 뺨을 가르고 붉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빅터가 잠긴 목소리로 계속해서 물기가 맺히는 하비의 눈가를 피묻은 손으로 닦아냈다. 닦아도, 닦아내도 멈추지 않았다.
“왜 울어.”
하비 스터스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빅터는 하비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아팠다. 누군가가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선득한 아픔이었다.
다시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띄엄띄엄 간격이 멀어졌지만, 빅터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갔다.
“해적 새끼든…, 반 로투스…놈이든, 다 죽여줄 테니까, …울지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어이가 없어서 하비가 일그러진 얼굴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찌푸린 눈 탓에 괴었던 눈물이 더 크게 쏟아졌다. 빅터의 손에서 나는 피 냄새가 짙게 코끝을 스쳤다.
하비가 절대로 떠날 수 없게, 그리고 더 이상 울지 않기를 바라며 빅터는 완전히 의식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하비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
마중을 나온 남자가 걱정스러운 듯 뒤를 자꾸만 힐끔댔다. 반 로투스가 몰래 보내준 사람이었고, 뱃길에 밝은 자였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늦을텐데.’
반은 하비에게 이로비나 섬으로 갈 배를 빌려주기로 했다. 빅터를 설득해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도록 해주겠다고 하비가 약속했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였다. 물론 ‘빅터 몰래 은밀히 준비할 것’이 하비가 내건 조건이었다.
하염없이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저 멀리서 달빛을 등지고 걸어 오는 체격 있는 사내가 하나 보였다. 풍기는 페로몬을 보아 알파였다.
“오셨습니…. 어?”
기다리던 남자가 아니었다. 하비 스터스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내였다. 왠지 음침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며 하비 대신 온 자가 입을 열었다.
“기다려도 소용 없을 겁니다.”
“예?”
“스터스 경은 오지 못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진이 사나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스터스 경은 이로비나 섬으로 가지 않을 거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
돌아온 빅터는 손에 거대한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그럼에도 표정은 밝았다. 처음에 상처에 놀랐던 빅터의 사용인들은 일상처럼 치부하며 곧 주인의 상처에는 관심을 끊었다. 대신 다른 것에 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집사 레나가 한 손에 붕대를 감은 빅터를 졸졸 쫓아가며 물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스터스 경이 드디어 용서해 주던가요?”
“아니.”
단호한 대답에 레나에게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 푼수 같은 웃음은 뭐에요. 빨리 가서 잘못했다고 계속 비세요. 스터스 경은 은근 마음이 약해서 받아줄지도 모르니까.”
바보 같다면서 힐난하는 건방진 집사에게 빅터는 피식 웃어줄 뿐이었다.
마침 같은 시각, 하비도 저택에 돌아와서 분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인님. 여기 먼지가…!”
먼지가 쌓인 창가를 본 집사가 호들갑을 떨며 청소하려 했다. 하지만 하비는 손을 뻗어 이를 막았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내버려둬.”
“예? 하지만…….”
결벽증이 극심한 하비였다. 고개를 갸웃하는 집사에게 하비는 창틀에 뽀얗게 쌓인 먼지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그 정도 먼지는 괜찮을 것 같아서.”
결국 떠나지 못했다. 완전히 의식을 놓을 때까지 끊임없이 빅터가 해주었던 말들 때문에. 절대로 놓지 않던 그 손 때문에.
[뭐가 어떻게 됐든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욕하려면 날 욕하라고. 왜 자꾸 너만 짊어지려고 해.]
[죄 많은 나도 멀쩡하게 고개 빳빳히 들고 사는데, 왜 네가….]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하비가 고개를 들어 밝게 햇살이 쏟아지는 창을 보았다. 오늘따라 날이 좋다.
“아, 그보다 내일부터 외교부로 출근할테니 준비 해주겠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쩍 벌리는 집사를 향해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끝내야 할 일이 있거든.”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고 있었다.
“어떤 사람과 함께 끝내기로 했어.”
--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직 전처럼 많은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하비는 빅터와의 협업을 수락했다.
빅터가 했던 말대로, 그의 도움을 받아야 풀리는 문제기도 했으니까. 무턱대고 감정적으로 받지 않겠다 해버리기엔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사안이었다. 현 상황에서 빅터만큼 해적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외교부에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난리가 난 것은 둘째치고, 하비는 빅터가 철저히 감춰둔 해적 관련건들을 모조리 쓸어왔다. 아직 당장 출근해 하루종일 일하기엔 몸 상태가 따라주질 않아서였다.
당시 우루루 몰려온 외교관들이 긴장된 얼굴로 하비의 근황을 물었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다시 나오시는 겁니까?]
[그 일은 털어내신거죠?]
여러 가지 걱정들이 하비를 맞았다. 하비는 피식 웃으며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빛, 염려 섞인 눈빛들을 훑었다. 돌아올 곳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제 괜찮아. 며칠 뒤부터는 정상적으로 나올테니 걱정 말고.]
하비의 확답에 외교관들이 눈에 띠게 기뻐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으으…. 그간 너무 힘들었어요. 스터스 경이 나오시질 않으니 총괄 외교관님이 어찌나 저희들을 들볶으시는지.]
[역시 수석 외교관님이 와주셔야 이 곳이 잘 돌아간다니까요.]
너스레와 호들갑을 동반한 사람들의 반응에 하비는 고마움마저 느꼈다. 불편 없도록 배려해주는 마음들도, 어두운 과거는 돌아보지 않도록 해주는 씀씀이도 모두.
그 뒤로 바로 빅터의 시의원 집무실이 있는 건물까지 온 것이다. 하비는 아직 다들 자신에게 이 건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를 눈치챘다. 당분간은 빅터와 단 둘만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여전하군.’
빅터의 의원 집무실에는 여전히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서류들이 보였다. 하비의 눈길에 빅터가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슬쩍 치우려 했다.
“어제도 밤 늦게까지 검토하느라.”
어차피 이제 저 정도 어지러운 것은 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쌓여있는 서류 더미에서 간단히 눈길을 돌리며 하비가 말했다.
“됐어. 그보다 놈들의 요구사항은?”
“이번 일 책임자를 넘기고 이로비나 섬의 소유권도 함께 넘긴다. 다시는 손 대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는 것이 최종 요구사항.”
턱을 매만지며 하비가 중얼거렸다.
“이번 건은 당연히 슬루인 제국이 뒷배겠고…….”
빅터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놀란 눈을 했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공적인 업무로 돌아가는 정보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던 빅터였다. 그래서 따로 운영하는 사적인 정보상을 마련해둔 것이고, 돌아오자마자 귀족들의 뒷정보를 꿰고 있는 로투스 가를 장악하려고 했다.
하비는 대답 대신 책상에 펼쳐놓은 지도의 어느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로비나 섬과 그들의 모국, 슬루인 제국이 연결된 해역이었다.
“이로비나 섬이 우리 수중에 들어가면 통행료를 내야 할 수도 있고, 여러모로 귀찮아지니까. 슬루인 제국 측에서는 막고 싶었겠지.”
자칫 무역 항로도 빙 둘러가야 하거나 꼬이는 수도 있었다. 최대한 그런 일은 없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 슬루인 제국 측의 입장이었고, 빅터도 하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자를 넘기는 건 여러모로 써먹으려고 그러는 거겠지. 네가 섬에 대한 지식이 많을 거라 판단했을 거고 여차하면 다음 인질로서의 가치도 있고. 개새끼들.”
그런 뒤 용도가 다하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지도 모른다. 욕설이 섞인 살벌한 뒷말은 무시하고, 하비는 담담하게 물었다.
“제일 효율적인 방법은, 생각해 봤나?”
“방법? 간단해. 신생 해적인지 뭔지 밀어버리면 돼.”
역시나 그다운 과격한 방법이다. 끈질긴 인내를 가지고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하는 하비의 방식과는 맞지 않았다.
하비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은 절대 군사를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며.”
“내가 동원할 거야.”
역시나 간단한 대답이다. 너무 시원시원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하비는 황당한 얼굴로 문제점을 짚었다.
“시의원이 개인적으로 군사를 동원한다고? 국왕의 허가 이전에 의회의 허가조차 나지 않을텐데.”
“긴급한 사안인데 밀어 부쳐보지 뭐.”
“말처럼 쉽지 않을텐데.”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어.”
자신감 넘치는 건 좋지만 하비가 걱정하는 건 다른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막대한 예산이 들어갈텐데. 경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를 설득할 정도가 되려면….”
하비의 걱정을 끊어내고 빅터가 씨익 미소지었다.
“잊었나본데 난 돈으로 의원직을 산 사람이야.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몇 달 전만 해도 빅터를 돈으로 의원직을 샀다며 경멸했던 입장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하비가 결국 가장 염려하던 점을 끄집어냈다.
“밀어붙이는 건 좋지만 계속 그런 식이면 당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건 알아둬.”
빅터가 속한 당인 홰그당은 무역으로 인한 부로 성장한 신흥 귀족인 빅터 같은 자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이었다. 종교는 주로 신교였으며, 그곳에서 빅터는 주목받는 인사였다.
반면 하비는 구교의 지지 세력이자 홰그당의 반대파인 토른당에서 밀던 인재였다. 지금은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기는 하지만, 한때는 그랬다.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도 어느덧 옛말이 된 지 오래였다. 하비의 가문인 스터스가가 후계도 없이 쇠퇴하고, 라힌 스터스의 불미스러운 일이 밝혀지면서 하비 스터스에 대한 당의 정치적인 지지는 완전히 끝장 났다.
게다가 같은 알파인 빅터 바르뎀과 공개 열애를 하면서 보수적인 구교 신자인 토른당의 의원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비는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당 활동조차 거의 하지 않았고, 의무적인 집회 참석만 간신히 하는 정도였다. 당 활동의 근원인 커피하우스에도 잘 가지 않고, 외교관 일에만 충실했다.
그에 비해 빅터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편이었고, 하비는 이를 지적하며 걱정한 것이었다.
기껏 걱정해 줬더니, 정작 당사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런 태평한 소리나 늘어놓았다.
“확실히 일거리는 줄어들겠군.”
하비는 딱딱한 얼굴로 대꾸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경의 파격적인 행보에 불쾌해하는 원로 의원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겠지? 젊은 피라고 감싸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더욱이 이번 사안은 그들의 자제도 엮여있고.”
“그게 뭐.”
본인의 입장은 생각지도 않고 가볍게 내뱉는 말에 하비가 답답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빅터는 책상 위로 깍지 낀 손을 얹고 하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당의 입장이니 국왕의 허가니 그딴 게 아니야.”
집요하고 끈끈한 시선이 하비에게 닿았다.
“네가 제 발로 걸어서 그 더러운 해적들 앞으로 갈까봐 그게 제일 걱정돼.”
빅터가 내내 노심초사하고 있던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하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혼자 해적 소굴로 가겠다는 결정은, 하비가 정신적으로 가장 궁지에 몰려있을 때 내린 판단이었다. 지금은 조금 여유도 생겼고, 무엇보다 끔찍한 과거라도 마주 볼 용기가 서고 있던 참이었다.
하나씩 하나씩 떨어뜨린 절망의 조각들을 주워가다 보면 언젠가 가장 완전한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때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서 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비의 대답에도 그리 안심되지 않는 듯 빅터는 연거푸 해적이 해달라는 대로 했을 때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해적 놈들은 볼 일이 끝나면 그 뿐, 네가 주로 해왔던 정당한 외교처럼 안전막이 전혀 없어. 약속도 깨면 그만이라고.”
하물며 국가 간에도 온갖 구실을 붙여 약속을 파기하고 제 나라의 이익에 맞춰 움직이기도 하는데, 규율 따위 없는 해적은 더할 것이다.
하비도 빅터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이런 쪽은 겪어본 자만이 아는 부분이 있었다. 좋은 협상을 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상대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정보 탐색이다.
책상에 깔린 지도를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내려보던 하비가 고개를 들었다. 진지한 밤색눈이 빅터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지?”
빅터는 피식 웃더니 날카로이 눈을 빛냈다.
“무조건 맞춰줄 생각 말고, 그 놈들의 본성을 이용해야 하지.”
“어떤 본성?”
“그놈들이 슬루인 제국이 돈을 대주고 있기에 지금은 별 불만이 없어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은 고개를 납작 엎드리고 충성스러운 개 노릇을 하고 있지만 천성이 하이에나인 해적들이 언제까지 그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까. 빅터는 그 점에 주목했다.
“지금쯤 더 큰 돈을 벌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 할 거다.”
하비가 깜짝 놀라 팔짱도 풀고 벌떡 일어났다. 빅터의 집무실 책상을 양 손으로 짚고 목소리를 낮췄다.
“설마, 돈을 미끼로 꾀어내겠다는 건가? 경의 개인 자산으로?”
빅터는 빙긋 웃고는 은근슬쩍 하비의 손을 잡았다.
“역시 바로 알아듣네. 대화가 참 편해. 다른 의원들도 네 반만 머리가 돌아가면 좋을텐데.”
의원들끼리의 집회 때마다 알아 듣게 풀어서 말하기 힘들다면서 반쯤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하비는 그런 빅터의 얼굴과 잡힌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옅게 한숨 쉰 하비가 제법 냉정하게 손을 빼내고는 잉크병에 담긴 펜을 집어들었다. 아쉬워하는 빅터의 눈길을 모른 척 하고 하비가 지도 위로 선을 그렸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 범위 내에 인질을 억류하고 있다고 짐작되는 지점이 있나?”
빅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하비의 뒤로 다가왔다.
“잠시만, 실례.”
잠깐의 양해 끝에 하비의 옆에 서서 손을 뻗었다. 그리곤 펜을 쥔 하비의 손등 위를 따뜻하고 넓게 완전히 덮어 버렸다. 별 상처없이 단정한 하비의 손도 큰 편인데,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꺾인 부분도 있는 빅터의 손은 더 컸다.
흘끗 쳐다보는 하비의 시선을 흘리고는 빅터가 그의 손을 제 뜻대로 움직였다. 펜이 천천히 움직여 바다 가운데를 찍었다.
“아마 이쯤.”
펜을 움직이면서 빅터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하비의 손 사이를 문질렀다. 빅터는 하비가 흠칫 떠는 반응을 즐기며 이젠 대놓고 귓가에 가까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여전히 이 통나무처럼 뻣뻣한 남자는 이런 은밀한 애무에 약하다.
“바다 한가운데처럼 보이지만….”
빅터가 하비의 귓가에 입을 대고 계속 속삭이듯이 말했다.
“뱃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아주 작은 바위섬이 있어.”
귓불이 붉어진 것을 확인한 빅터가 입술을 떼고 하비를 마주보고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칭찬해 달라는 듯 녹색 눈이 길게 휘었다. 점점 일그러지는 하비의 표정과 대비해 산뜻하기까지 했다.
“바로 여기일 거야.”
빅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강철 심장이 라도 녹았을 천진한 미소였지만, 하비는 그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 이러는 나도….’
빅터의 외모와 말이 빚어 내는 화려함 이면에 어떤 잔혹함과 비열함이 있는지 뻔히 알면서, 가슴께가 뻐근하게 뛰었다. 정말 염치 없는 심장이었다.
“정보는 감사히 받겠는데.”
하비는 불편한 태도로 빅터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한 걸음 멀어졌다.
“여기까지 해.”
이 거리가 적정선이었다. 씁쓸함이 빅터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하비는 이를 보면서도 묵묵한 침묵을 유지했다.
수면제를 먹이고 떠나려던 시도가 실패한 뒤, 빅터와 약속을 한 것이 있었다. 10번의 관계는 끝났지만, 이번 해적 건이 끝나기 전까지 서로 협력한다. 대신 다 끝나면 하비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물론 협력하는 동안 적정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추가적인 약조도 있었다. 하비는 그 동안 어떠한 협박, 강제, 억지력라도 작용하는 순간 약속은 없는 것이라 제약을 달기도 했다.
빅터는 하비의 체온이 떠나간 빈 손을 주먹 쥐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 들었어.”
줄 묶인 늑대가 이런 느낌일까. 처량한 표정에 하비는 마음이 조금 약해지려 했지만 다잡았다. 언제까지 저 제멋대로인 태도에 휘둘릴 수는 없었다.
믿음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지켜보고 싶다.
빅터는 변함없이 냉정한 얼굴을 지키고 있는 하비를 보며 억지로 입가를 끌어당겼다. 웃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밉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 놈들이 슬루인 제국의 개로서만 움직여 주지는 않을 거다. 그게 내 요지야.”
그때 폰이 몸에 좋다는 이논 홍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빅터의 집무 대리인인 폰은 라힌 스터스의 일이 알려진 이후에도 변함없던 사람 중 하나였다.
사실 하비는 의외였다. 스터스가의 무용을 존경한만큼 가장 실망할 것도 폰이라고 여겼는데, 그는 아무것도 듣지 않은 사람인 양 하비를 대하는 태도에 한 점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날이 많이 추워졌으니 차를 많이 드셔야 합니다.”
변함없는 그를 보며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자넨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가?”
그릇을 놓던 폰의 손이 흠칫했다. 제자리로 돌아가던 빅터조차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빅터가 대답 잘하라는 눈빛을 쏘아보내기도 전에, 폰은 담담하게 답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폰은 하비의 몫으로 찻잔을 놓고 뜨거운 찻물을 솜씨좋게 부어주었다.
“다만, 저한테도 보는 눈이 있습니다. 명색이 시의원 집무 대리인이 소문에만 휘둘리면 안 될 말이죠. 저는 제가 직접 본 것만 믿고 판단할 생각입니다.”
“…그런가.”
하비가 선선히 미소짓고, 폰이 내려준 홍차를 조금씩 마셨다.
쏘아지는 빅터의 눈길을 의식한 폰이 식은땀이 축축한 뒷목을 쓸었다. 헛기침을 하며 그가 슬쩍 덧붙였다.
“물론 전부 시의원님의 가르침 덕이지만요.”
따갑던 빅터의 눈빛이 다소 너그러워졌다. 폰은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오랜 사회생활의 숙련도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폰을 보며 피식 웃은 하비가 문득 떠오른 것을 화제로 올렸다.
“참, 로투스가에서 이상한 말이 나오고 있던데.”
잠시 빅터의 움직임이 멎었지만 이내 화사한 미소로 받아쳤다.
“무슨 말?”
“가주가 이미 병사했는데 이를 숨기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던걸.”
“아아, 그렇겠지. 아직 가주 대리를 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주가 그리 골골댔으니.”
아무렇지 않게 차를 홀짝대고 있는 모양새가 왠지 홀가분해 보였다. 게다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기시감을 느낀 하비가 찻잔에서 입을 떼고 빅터를 지긋이 보았다. 반 로투스를 건드린 것도 빅터였으니 로투스가에 어떠한 다른 짓을 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비의 의심스러운 시선에 빅터도 찻잔을 내려두고 어깨를 으쓱했다.
“왜? 내가 뭔갈 했을 것 같아서? 그럴 여력이 어디 있었겠어. 경을 돌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되던걸.”
결국 하비의 묵직한 시선을 못 이기고 빅터는 자수했다.
“아주 약간 뭔갈 하긴 했지.”
하비의 눈썹이 크게 찌푸려졌다.
“아주 약간?”
그럴 리가. 빅터의 ‘아주 약간’ 은 늘 믿을 것이 못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하비의 짐작이 맞았다.
빅터는 반 로투스를 오랜 시간을 걸쳐 충분히 작신작신 밟고 고문을 한 뒤, 친히 그의 목덜미를 잡고 로투스가의 저택으로 갔다.
병환으로 누워있는 그의 아버지에게 반 로투스를 던져주었다. 말그대로 시체를 끌고 온 것처럼 질질 끌고 와 방구석에 집어던져 버렸다. 손을 탈탈 턴 빅터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위험에 빠진 로투스 가의 차남을 내가 구해왔다.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잘 간수하도록.]
반 로투스는 한 쪽 눈이 없고 온 몸에 타박상과 칼로 얇게 썰린 듯한 끔찍한 상처들이 많았다. 심지어 손가락도 몇 개 없었고, 발가락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의 아버지는 침상에서 부들대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경악한 로투스가의 주치의가 당장 나가라며 난리를 피웠다. 로투스가를 호위하던 병력들조차 빅터가 데려온 자들에 의해 발이 묶인 채였다.
큰 소리가 오가는 그 방 안에서, 빅터는 꼼짝도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버티고 서서는 더 한 소리를 했다.
[이 지경이 된 걸 데려왔으니 당연히 답례비를 주어야지. 로투스가는 그 정도의 예의도 없는 건가?]
누가 봐도 반 로투스를 이리 만든 것은 빅터임이 훤히 보였다. 그런데도 빅터는 뻔뻔하게 자신이 그를 구해온 것이라 우겼다.
문제는 우기는 것도, 힘있는 자가 하니 진실이 된다는 점이었다.
[네 이놈! 해적의 손을 빌려 돈을 벌더니 하는 짓도 해적질이나 다름없구나! 더러운 녀석!]
로투스 가의 늙은 가주는 분노하며 빅터를 손가락질했다. 그러다 제 화를 못 이겨 격렬하게 기침하다가 피를 토해냈다.
감정 하나 없는 얼음장같은 눈으로 로투스가 사람들을 보던 빅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적과 일한 것보다 더한 짓을 하고 계시던데. 내게 그런 말 할 처지가 될는지.]
혀를 찬 빅터는 가주의 침상 앞에 있는 의자를 소리내어 당겨 앉았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간 해놓은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불법으로 노예 사업을 몰래 하고 있었잖아. 비승인된 노예 사업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거 모르나?]
늙은 로투스 가주의 얼굴에 큰 금이 갔다. 놀란 듯 입만 뻐끔대며 반박을 하려 했지만, 빅터는 틈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슬루인 제국 측으로 노예 사업을 확장하고 있던걸.]
[그, 그건 어떻게….]
당황하는 로투스가의 늙은 가주는 아예 얼굴이 칙칙해졌다. 그를 우습게 보던 눈빛이 일순, 냉기를 머금고 날카로워졌다.
[그 건에 관련해 이미 의회 안건으로 올려놨어. 로투스 가의 적법 행위에 대해 좋아할 의원들이 꽤 많을 거야.]
로투스가에게 정보를 책잡혀서 꼼짝 못하고 있는 귀족들이 많았다. 그런만큼 로투스가의 몰락은 그들에게도 기회가 될 것이다.
정말 즐거운 듯이 빅터가 한 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다음 집회가 기대되는군.]
먼지를 털어내는 듯 홀가분하게 일어난 빅터가 휙 뒤돌아 덧붙였다.
[아, 반 로투스 경을 구한 답례비는 본가로 보내지 말고, 내 저택으로 보내.]
방 안을 둘러본 빅터가 눈을 번뜩였다. 마침 좋은 것이 보였다.
[선금으로는 저걸 가져가지.]
반 로투스가 언제 제 아버지에게 바친 건지, 하비가 그의 생일 선물로 주었던 황금거북이가 가주의 찬장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하비가 주었던 것임을 기억해낸 빅터가 망설임없이 황금거북이를 손에 쥐었다.
빙긋 웃으며 빅터가 놀리듯 황금거북이를 늙은 로투스가의 가주 앞에서 흔들었다.
[선금은 이걸로 충분하겠어. 그럼 이만.]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뒷목 잡고 넘어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빅터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 더럽고 역겨운 집안에서 하비의 손길이 닿은 것이 하나라도 남아있는 것이 싫었다. 그의 마음이 타락한 것에 닿아 있는 것은 자신 하나면 족했다.
수하들을 이끌고 말을 몰아 돌아오면서 빅터는 다리 위에서 의외인 장면을 보았다. 한 거지 여인이 기웃대면서 사람들을 일일이 붙들고 있는 장면이었다.
[도와주세요…!]
성격 나쁜 귀족에게 걸리면 말발굽에 채일텐데, 그런 것도 감수하면서 어떤 거지 여인 하나가 구걸하고 있었다. 보통은 얼굴을 보이지 않고 납작 엎드려 통 하나를 두고 그 곳에 동전이 날아오기만을 얌전히 기다렸다.
‘저 아이 때문인가.’
빅터는 대번에 저 여인이 저러는 이유를 알았다. 그 옆에 비쩍 마르고 병들어 보이는 소년이 어미로 보이는 여인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돈 있어 보이는 자들에게 매달렸다.
[자비를…! 부디 자비를 베푸세요, 아이가 많이 아파요. 제발 약값이라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처절하게 아이를 살리려 애쓰는 그 모습에서, 빅터는 다른 것을 보았다. 마음이 이상하게 불편하고, 요동쳤다. 미천한 자 조차도 배 아파 낳은 아이 때문에 목숨까지 내건다.
사산아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던 하비가 떠올랐다. 그토록 강한 정신을 지녔던 하비 스터스가 한동안 망가질 정도로 힘들어 했다.
물론 스터스가의 몰락과 믿었던 자들의 배신도 한 몫 했겠지만, 빅터가 봐온 그의 아픔은 아무리 봐도 사산아에 대한 것이 커 보였다.
아이는 품었던 자에게 대체 어떤 존재일까.
기억을 송두리째 떨쳐 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픈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하비의 마음을 알려면 이해해야 할 것 같은 깊은 감정이었다. 하비에 대한 감상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두서없이 솟았다.
빅터는 한 번도 부모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부모는 기득권을 잃는 것이 두려워 자식이 해적에게 죽을 위험일 때일때조차 가주인 레토 바르뎀에게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 했다.
로투스가의 늙은 가주처럼, 몇몇 귀족들 중에는 자식을 대리용품 취급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랬는데….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춘 빅터는 말 옆에 전리품처럼 달아두었던 주머니에서 황금거북이를 꺼내 여인에게 던졌다.
[받아.]
얼결에 빅터가 던진 것을 받은 거지 여인이 허겁지겁 주머니 안을 확인했다.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이를 지켜보던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뺏기지 말고, 잘 챙겨가. 가장 가까운 금은방에 뛰어가되….]
말하던 빅터가 멈칫했다. 거지 여인이 황금거북이를 가져가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자칫 죽임당하고 뺏길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금은방 주인이 그녀를 신임하지 않고 훔친 것이라 여겨 치안대를 부를 위험도 있었다.
고민하던 빅터는 뒤에 있던 수하에게 고개를 돌려 명했다.
[나스타. 이 여자를 근처 금은방까지 데려가고 신원 확인도 같이 해줘.]
나스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토 달지 않고 빅터가 시키는 대로 잘 이행하겠다 답했다. 거지 여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빅터에게 허리가 닳도록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옆에 있던 아파 보이는 아이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빅터는 아무런 대꾸 없이 말을 다시 몰아나갔다.
‘이걸로 괜찮은 거겠지.’
사실 하비에게 되돌려 줄 생각이었는데, 이런 처리 방식이라면 하비도 크게 불만은 없을 것이다. 잘했다고 해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껏 말하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또 가식으로 생각할 테니까.’
이제 하비에게는,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생전 처음 베푼 작은 친절 따위로 생색내고 싶지도 않았다.
‘생전 처음?’
빅터는 순간 벼락같이 머리를 스치는 진실을 깨달았다.
연고도 없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대가 없이 줘 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무슨 생각을 그리 해.”
빅터가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하비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이미 폰은 차를 내놓은 뒤 다시 집무실 밖으로 다른 볼 일을 보러 간 지 오래였다. 하비가 다시 말했다.
“내 말, 듣고 있나?”
“어? 어. 듣고 있어.”
걱정스러움과 염려가 담긴 밤색눈이 그윽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도 안 들은 것 같은데. 어디 안 좋은 건가?”
“…미안. 방금 뭐라고 했지?”
한숨을 내쉰 하비가 그 사이 다 마신 찻잔을 치우고 지도를 가리켰다. 아까 빅터가 알려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작은 바위섬이었다.
“여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빅터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배의 규모와 숙련된 키잡이가 중요해. 배는 너무 작아도 안되고, 너무 커도 안 돼. 암초도 있고, 물살이 급격히 세지는 구간이 있거든. 거기만 뚫으면 순조롭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하비가 미간을 구겼다. 해야할 일이 많았다. 배편도 구해야 하고, 빅터에게서 신생 해적들과 거래할 돈을 빌린다 쳐도 그들을 어떤 식으로 구슬려서 인질이 된 외교관 인력들을 빼낼지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제국에서 대주는 뒷돈보다 더 큰 돈이 있다는 말인가?’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아하면 틀림없이 있다는 소리지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개인이 끌어모을 수 있는 자산이 어디까지인지 가늠도 안 되었다. 물론 제국에서 아주 큰 돈을 고작 해적에게 내놓았을 리는 없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빅터의 자산 규모는 상상초월이었다.
하비는 빅터가 지닌 부가 ‘투자 능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오로지 살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 모든 능력을 끌어올려야 했을 것이다.
하비가 무심결에 중얼거리듯 물었다.
“투자를 시작한 게 임페르 해적단에서부터…, 라고 했나?”
아직 상념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빅터가 무심코 답했다.
“그랬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보던 빅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건 왜?”
힘들었을 것 같아서. 밑바닥에서 그 정도 거부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것들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차마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한 심정이 하비의 목구멍 안에서 맺혔다. 마음의 틈과 기회만 엿보고 있는 이 늑대에게 쉽게 먹이를 줄 수는 없었다.
빅터와 거리를 두기로 한 것은 제 몸을 잘라낼 각오까지 하면서 혼자 가지 않도록 하겠다며 매달렸던 빅터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것 외에도 제 마음을 좀 더 들여다 보기 위함도 있었다.
하비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결심한 뒤로 더 이상 정신이 나가는 일도 없었다. 목표가 뚜렷해지니 실행력이 더해지고, 감정에만 파묻혀 비극 속으로 도피하는 일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좀 더 주변이 눈에 들어오고, 선명해졌다. 안부를 걱정하던 빅터의 사용인들과도 최근 만나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레나가 어찌나 기뻐하던지, 한 번 더 그 레스토랑에 데려가야겠다 생각하던 차였다.
하비는 말을 돌리며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아니. 그보다 실질적인 대안을 말해봐야 할 것 같은….”
“미안하다.”
하비의 말허리를 끊고 불쑥 빅터의 목소리가 난입했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하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뭐?”
빅터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정작 제대로 물어본 적도 없는 것 같아서.”
직접 물어보기가 겁이 났다.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정신을 놓을 정도로 그가 마주했을 현실이 끔찍했는지.
지금도 두려웠지만 빅터는 용기를 내어 하비의 눈을 직시했다. 주먹을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지금 말할 수 있을 때 말하지 않으면, 계속 물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말야. 가장 힘들었던 게 뭐였어? 너무 늦게 물어보는 것 같지만, 궁금해져서.”
하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할 말을 잃고 마른 세수를 한 하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해진 거지?”
“알아야 했는데, 알려 하지 않았으니까.”
하비가 말없이 빅터의 진지해진 녹색눈을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더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거짓은 없었다. 빅터가 재차 입을 열었다.
“솔직히, 물어보는 게 무서웠거든.”
널 가장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걸 알아야만 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괜찮냐고만 물었다. 전혀 괜찮지 않은 것을 알면서 말이다.
빅터가 기껏 낸 용기란 하비를 살리기 위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용도로 자신을 내던진 정도가 다 였다. 증오하라면서 부추기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괴로워 했다. 감당 못할 거면서 센 척 하고 허세를 떨었다.
그런데 미움받는 것보다 이게 더 두려웠다.
빅터는 마른침을 삼키고 하비의 입술만 뚫어져라 보았다. 마치 처분 선고를 앞둔 사형수 같았다.
하비도 본능적으로 이 대화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임을 알아챘다. 빅터의 집무실에서 생각지도 못한 난관을 맞았다.
말하기 싫었지만, 빅터의 의지를 보니 이제는 자신도 자유로워질 차례인 듯 했다. 털어놓고 나면 뭔가 후련해질 지도 모른다.
'자유로워져? 무엇이?'
생각 끝에 하비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까득, 소리가 나고 바다 위로 없던 긴 줄이 생겼다. 굳게 다물렸던 하비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위장약을 계속 먹어서 그렇게 된 줄 알았어.”
하비가 말하는 ‘그렇게’ 가 유산, 즉 사산아를 낳은 것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빅터의 눈이 충격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하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뒤로도 어떤 약도 안 먹었고. 입도 대기 싫더군.”
“그래서 그 뒤로도 어떤 약도 안 먹었고. 입도 대기 싫더군.”
하비는 원인을 자신에게 돌렸기에, 무의식 중에 모든 약을 거부했다. 돌이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른 요인도 많았다. 약간의 우연과 필연이 겹쳐 생긴,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안다.
하비가 손을 펼쳐 인근 해안이 표시된 지도를 접었다. 아직도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빅터를 보며 하비는 접은 지도를 손에 쥐었다.
“대답이 되었나?”
빅터의 눈이 더욱 진해지며 크게 일렁였다. 지도를 쥐고 그가 어디론가 바로 사라질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빅터는 한 손을 뻗어 하비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었다.
“약을 안 먹은 게…. 그런 이유 였다고.”
아직도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빅터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았다. 짐작은 했지만 하비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정말로 유산 때문일 줄이야.
빅터는 혼란스러웠다. 알파의 몸으로 비정상적인 일을 겪어서? 강제로 겪어야 했던 고통에 화가 나서?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빅터는 한 손으로 인중을 덮었다. 창살 같은 손가락 사이로 하비의 얼굴이 절반 가려 보였다. 하비는 조금 어두워 보였지만 다행히 자신을 좀먹는 감정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빅터가 침음성을 내며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까지…….”
하비는 약을 포기하고, 낫는 것을 체념하고, 자신을 스스로 벌주는 듯한 행태를 보였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빅터의 혼란을 다 안다는 얼굴로 하비는 지도를 가져가기 쉽도록 더 작게 접었다.
“시간은 많았으니 생각이란 걸 해 봤어. 나도 왜 그랬는지 잘 몰랐거든.”
하비가 입술을 물었다. 울컥 올라온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금세 구겨진 옷을 펴듯이 하비의 일그러졌던 얼굴이 제자리를 찾았다.
“혼자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
어렵게 뱉은 말은 빅터에게도 충분히 전해졌다. 하비의 말이 이어질수록 빅터의 얼굴은 아예 칙칙해지고, 또 다른 충격으로 물들었다.
“책임을 느꼈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아무것도 못 했지.”
빅터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묵직한 둔통이 찾아오고, 하비가 입술을 열 때마다 가슴이 수만 가지 형태로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저런 말을 하면서도 본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아팠다. 하비에게선 허무함과 무력감만 느껴졌다.
침묵을 가르고, 하비가 다시 입을 뗐다.
“아까 미안하다고 했던가.”
“…….”
“나도, 미안하다. 몰랐어.”
공허한 미소가 하비의 입가에 맺혔다가 사라졌다.
“알았다면 더 신경썼을 텐데.”
빅터는 숨이 턱턱 막혔다. 바다 아래 바다. 그 아래 끝도 없는 심해 속에 갇혀서 호흡도 못 하고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억지로라도 쥐어짜내는 기분으로 빅터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아니. 그건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라….”
그래도 막혔던 것이 그다지 뚫리는 것 같지 않았다. 하비에게 말을 걸수록, 그의 얼굴이 더 비참하게 구겨졌다.
“내가, 내가 그때 자리를 비워서…, 아니, 반 로투스를 방치한 내 잘못도 있고, 또….”
하비가 고개를 내저으며 횡설수설 이어지는 빅터의 말을 끊었다.
“알고 있어.”
고저 없는 하비의 목소리가 잔잔한 노랫소리처럼 빅터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가장 힘들었던 게 뭐였냐는 경의 물음에 답을 한 것 뿐이야.”
허벅지를 꽉 붙들고 있던 빅터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하비는 집무실 창문으로 걸어가 창을 열고 답답한 공기를 날려 보냈다.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았다.
“과거를 이야기한 거고. 지금은 멀쩡히 몸 챙기고 약도 잘 먹고 있어.”
창틀 아래 깔린 먼지가 보였지만 하비는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자신만을 보고 있는 빅터를 향해서.
“물론 경이 잘못한 것도 분명 있지. 날 실망시켰으니까.”
‘실망’ 이라는 단어에 빅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실망이란 건 누군가를 믿고 있을 때 유지되는 감정이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면 실망도 없다. 그것을 주지시키듯 하비는 제법 냉정한 말투를 이어나갔다.
“근데, 이젠 됐어.”
마치 내게 넌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런 존재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렸다. 빅터는 숨을 몰아쉬었다. 숨쉬는 것조차 잠깐 잊었다.
빅터가 애원하는 듯 절실한 눈으로 하비를 쫓았다. 하비는 예전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열었던 창문을 다시 닫고 있었다. 날이 많이 추워지고 있었고, 하비가 뱉는 입김에 하얀 김이 서렸다.
차갑게 낮아진 실내 온도에 빅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핏기 없는 얼굴로 빅터가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 기회를 줄 수는 없는 거야?”
꼼꼼하게 창문을 여미고 있던 하비가 멈칫했다. 다시 한 번 빅터의 낮은 목소리가 실내를 묵직하게 울렸다.
“내게 잘못을 빌 시간조차 주지 않을 생각인가?”
하비는 창을 완전히 닫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매달리는 것 같은 빅터의 목소리가 마음에 잔상처럼 맺혔다. 메마른 입술로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하비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결연한 의지가 새겨져 있었다. 잠깐 무너질 것처럼 흐트러졌던 표정을 갈무리하고, 하비는 뒤돌아섰다. 감정적인 모습은 아주 찰나였다.
“그 이야긴 이제 넘어가지. 충분히 대답했고, 경도 잘 알아들은 것 같으니.”
하비 스터스는 한층 잔인해졌다. 빅터에게서 사과도 앗아가고, 마음의 짐을 덜 기회도 주지 않았다. 가장 효율적으로 빅터의 마음을 적절하게 쳐내고, 잘라낼 뿐이었다. 사실 이러고 있는 하비의 마음도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빅터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떠나려고 했던 그 날, 아래로 쏟았던 피는 필사적으로 붙잡은 빅터의 피비린내에 덮였다. 그런 식으로, 그 날의 짙은 피냄새는 조금씩 옅어질 것이다.
후회 가득한 그 피냄새가 빅터가 쏟은 피에 가려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드디어 그의 마음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비는 짐짓 표정을 엄하게 고치고 남은 안건을 올렸다.
“이제 계약서를 작성해야돼.”
너덜거리는 가슴을 채 깁지도 못한 채 빅터는 몰아치는 하비의 사무적인 말을 받아야 했다.
“무슨 계약서?”
“개인 자산을 털어서 해적과 거래를 할 생각이라며. 공짜로 얻을 순 없지.”
빅터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하비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치고 들어오는 통에 정신도 차릴 수 없었다.
빅터는 테이블로 팔꿈치를 대고 아예 양 손으로 얼굴을 묻어 버렸다. 한숨소리가 길게 새어나왔다.
“…내게 그 돈을 다 갚겠다?”
“당연히.”
“네가 평생을 벌어도 못 갚을 액수일 수도 있는데?”
이미 다 생각해 놓았기에, 하비는 망설임 없이 차안을 줄줄 읊었다.
“우선 월급 차압 방식을 생각해 보고, 혹시 다 갚기 전에 내가 죽을 것 같으면 스터스가 저택을 파는 조건으로 해. 어차피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니고.”
고개를 숙인 채 빅터가 꽉 억눌렸던 숨을 가까스로 토해냈다.
“하.”
빅터는 피폐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된다는 듯 허탈하게 피식댔다.
“외교관, 그만둘 거라며. 무슨 월급 차압을 해.”
하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답했다.
“제안받은 자리가 있어.”
하비가 외교부에 이미 그만두겠다는 의지를 밝힌 상태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래서인지, 얼마전에 하비의 능력을 아까워한 토른당 원로 의원 하나가 제안한 것이 있었다.
시라보 은행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거래처를 관리하는 일을 주겠다고 했다.
빅터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자리?”
“…….”
“아, 그래. 나는 알 바 없다 이건가.”
빅터는 복잡한 얼굴로 말없이 하비를 한참이나 보았다.
예전에 외교관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을 때, 시 재정에서 군대를 동원해 해적을 소탕해 주겠다고 한 것도 끝끝내 거절했던 하비였다. 그런 사람이 대가 없이 뭔가를 얻으려 할 리가 없었다.
‘알지만….’
부디 빚진 것이 많은 자신에게선 그저 가져가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비에게 다 퍼주고 싶었다. 그것조차 못 하게 해서 더 답답했다. 보이지 않는 족쇄로 손발을 구속한 기분이었다.
빅터가 쓸쓸하게 하비를 건너보았다.
“이거 알아?”
그의 입술이 힘겹게 비틀렸다.
“넌 정말 사람 돌게 하는 재주가 있어.”
빅터는 마른 세수로 그새 까칠해진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어떤 것이든, 하비가 요구하는 것은 다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계약서는 어디서 작성할 거지? 여기서 바로?”
하비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 저택에서. 가문의 인장이 있어야 하니까.”
***
하비가 내건 조건은 바르뎀 가의 유력한 차기 가주로서의 빅터와 스터스가와의 일대일 계약이었다.
가주 대리로서 일하고 있던 빅터는 집무실에 가주의 인장이 찍힌 빈 계약서가 상당수 있었다. 그것으로 알음알음 사적인 이익도 취하고, 필요한 것들을 계약할 때 써 왔다.
‘이걸 설마 하비와 일할 때 쓰게 될 줄은….’
빅터는 참담한 심정으로 계약서를 들고 스터스가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앞장서는 하비의 강건한 등을 쫓아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연무장도 지나치고 있었다.
빅터의 걸음이 느릿해지더니 눈길이 익숙한 나무에 꽂혔다. 유독 키가 큰 나무였다. 저것에 몸을 기대어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차가우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뜨겁기도 했다. 마음을 찌르는 고통에 온 몸을 불살랐으므로.
그런데 눈에 익은 것은 나무 뿐만이 아니었다.
‘저건…?’
빅터가 완전히 걸음을 멈추자 하비가 의아한 듯 뒤돌았다.
하얀 손수건이 여전히 나무 기둥에 달려 있었다.하비의 손이 나무껍질에 다칠까봐 묶어둔 것이었다.
빅터는 그 날의 하비가 말하던 것들이 처절하게 떠올랐다.
[내가 보인 헛점은 다른 사람들 것보다 꽤 재미있었나? 포기 못하고 계속 오는 걸 보니 몇 배는 즐겼나 보군. 하긴, 그랬겠지.]
[알파가 약 하나로 임신하는 대단한 희극을 봤을테니.]
[이제 여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빅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저때 하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만 해도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하비의 시선도 그를 쫓다가 움찔했다. 여전히 매달려 있는 손수건을 민망한 듯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쩐 일인지 당황스러워 보였다.
“곧 떼어낼 거다. 신경쓰지마.”
빅터가 피식 웃으며 농을 던졌다.
“빈말로도 돌려준다는 소린 안하는군.”
“손수건 하나 정도야 경의 재산을 고려하면 우습잖나. 해적과 개인적으로 교섭 시도가 가능할 정도면서.”
“그렇긴 하지만.”
빅터는 가만히 나무 줄기를 감싸고 있는 하얀 손수건을 주시했다. 자세히 보다보니 조금씩 다른 것이 보였다. 녹색눈이 뒤늦은 깨달음으로 서서히 커졌다.
분명 안 좋은 기억일텐데 아직까지 떼어놓지 않은 손수건, 하비가 여태껏 말했던 것들. 분노 속에 가려졌던 감정들.
[내게서… 가져갈 것이 더 남았나?]
[아직 더 남았어? 이번엔 뭘 가져갈 생각이지?]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간 대화에서 있었던 것들, 차마 눈치채지 못했던 진실을 말이다.
하비가 말한 ‘가져갈 것’ 이란 것이, 설마…….
빅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일렁이며 긴장을 머금었다. 그는 더듬대며 말했다.
“지금은 물론 아니겠지만.”
“…….”
“혹시라도 말야.”
빅터를 바라보는 하비의 시선에 점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의도하지 않은 일로, 그러니까…. ‘그 일’ 에 지금까지 괴로워할 정도로….”
하비가 말했던대로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형태도 완성되지 않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아픔으로 고통받을 정도로.
빅터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하지만 꼭 확인해야 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낮은 목소리가 자르르 떨리고 있었다.
“날 사랑했던 건가?”
아주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하비의 표정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슬픈 것 같기도, 아니면 분노하는 것 같기도, 혹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수도 없는 감정들이 하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으로선 오랫동안 정의내릴 수 없었던 감정을 빅터는 너무나 쉽게 물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쉬워 보였다. 후회하는 것도, 누군가를 붙드는 것도, 마음을 부대끼는 것도.
하비는 허무한 얼굴로 말했다.
“…그랬다면.”
가까스로 또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었다.
“뭐가 달라지나?”
하비는 그 날의 감정을 솔직히 인정했다. 사실을 아니라 할 수도 없었고, 굳이 지금와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빅터는 말없이 하비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자조적인 미소가 입술 끝에 걸렸다. 무언가 터질 것 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아니.”
언제나 또렷하던 빅터의 녹색눈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의원 집무실에서부터 하비의 발언으로 받았던 충격이 한 겹, 두 겹 쌓이더니 결국 속을 갈기갈기 헤집어 놓았다.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후회? 그런 값싼 말로는 한참 부족했다. 빅터는 알 수만 있다면 지금의 이 지독하고 참담한 심정을 대체할 수 있는 단어를 알고 입 밖으로 뱉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막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교차로의 악마든, 신이든, 뭐든 좋으니 시간을 돌려줬으면 했다. 어쩌면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그 때로.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던 평온한 시간으로.
“난 아마 죽을 때까지 되새기겠지.”
빅터를 바라보던 하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할 틈도 없었다.
“일생에 단 한 번 있었던….”
빅터의 한 쪽 눈에서 조금씩 고이던 투명한 물이 길게 흘렀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누군가를 시궁창에 빠뜨리는 것도 너무나 쉬웠던 자의 눈물이었다.
날렵한 턱 끝에 맺혔던 물방울이 크기를 키워 기어이 떨어졌다.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왼쪽 눈에서만 눈물이 끝없이 내렸다.
“가장 값진 기회를 놓친 걸.”
깜박이자 사라졌다 드러난 짙은 녹빛의 눈에 다시 물이 괴었다. 젖은 목소리로 띄엄띄엄 빅터가 말했다. 목이 꽉 잠겨 있었다.
“지독하게 후회하면서.”
놀란 눈으로 빅터를 보던 하비는 천천히 이를 악물었다. 여태 잘 참아왔는데, 도저히 인내하기 힘들었다. 빅터의 말을 들으면서 쥐었다 폈다 한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부에서 잔잔하게 끓던 무언가가 일시에 폭발했다.
하비가 빠른 걸음으로 빅터에게 접근하더니 가슴께를 꽉 움켜쥐었다. 밤색눈이 미친 듯이 일렁였다. 하비는 그간 참았던 울분을 쏟아냈다.
“그래. 후회해.”
옷깃을 가득 쥔 손에 힘이 더욱 강하게 들어갔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남색 푸르지앙이 하비의 손 아래 구겨졌다. 으르렁대듯 얼굴을 가까이하고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죽을 때까지.”
하비는 반쯤 젖은 빅터의 얼굴을 가슴에 담았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얼굴만큼은 절대 못 지울 것 같다.
쥐었던 옷깃을 떨쳐놓으며 하비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그런 뒤엔, 기억해.”
“…….”
“절대 잊지마.”
몸을 떼어낸 하비가 빅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닌 척 했지만 늘 고요했던 밤색눈에도 동요가 가득했다. 등 뒤로 애틋하고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반쯤 올라온 물기를 삼키면서, 하비는 애써 평소처럼 말했다.
“서재가 있는 본관은 아직이야. 더 남았어.”
하지만 한 번 일었던 마음의 파도는 쉽게 잠잠해지지 않았다.
서재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더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익숙한 침묵이 감돌고, 어느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차라리 이 묵직한 공기에 순순히 짓눌리는 쪽이 마음 편했다. 감정의 찌꺼기는 금방 사라지지 않고 긴 여운을 남겼다.
본관 안에 들어서자 집사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하비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총괄 외교관 소식을 듣고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나 마나 억류된 외교관들 건에 관해 온 것일 테다. 급한 마음에 못 참고 달려왔겠지.
빅터를 돌아보며 하비가 말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빅터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꾸했다.
“천천히 와.”
하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빅터는 서재를 구경했다. 강렬하게 휘감았던 후회와 절망은 하비의 체취가 남은 서재 안에서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이 곳에 있는 것 만으로도 하비와 함께 있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살피자 정말 많은 책이 있었다. 구하기도 힘든 희귀판본이나 외국 서적들이 즐비했다. 유창한 외국어를 증명하듯 다양한 언어로 된 책들이 보였다. 여러 나라 사람들과 문서 작업을 해 본지라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빅터는 이래선 안되는 건 알지만, 책상 서랍도 몇 개 열어보았다. 하비에게 속으로 미안함을 전하면서도 손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서재에서 이리 돌아다니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은근히 들뜬 것도 있었다.
책상 가장 아래칸을 열었을 때였다. 빅터가 은빛으로 칠해진 얇은 책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띠었다.
‘이건 뭐지?’
귀한 것인 듯 가죽으로 꽁꽁 싸매었다. 칭칭 감긴 것을 벗겨내고 조심스럽게 열어서 펼치자 대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맹약서군.’
스터스가와 대대로 내려온 국왕들이 상호간에 맺어온 충성 맹약서. 책으로 따로 보관을 했을 줄은 몰랐다.
흥미로운 눈으로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 아주 공들여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였다.
‘왜….’
빅터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넘겨도, 또 넘겨도 같은 필체가 반복되었다.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식은땀이 관자놀이에 맺히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몇 백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똑같은 필체라니. 가주가 바뀌어도 여러 번 바뀌었는데, 국왕에게 맹세하는 서약서가 한결 같았다. 마치 찍어낸 듯이 누른 압력이나 글자의 간격, 모양, 꺾는 방식까지 동일했다.
그때였다.
“손버릇이 참 안 좋으시군요.”
집사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가 빅터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화들짝 놀란 빅터가 얼른 맹약서를 서랍 속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아. 조금만 보려다가 그만.”
한소리 퍼부으려던 집사는 꾹꾹 눌러 참고 차 쟁반을 조용히 내려두었다.
“뭘 그렇게 보셨습니까?”
“좀 이상한 게 있어서.”
“뭐가요? 맹약서에 무슨 문제라도?”
빅터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문제…. 있었지.”
“예?”
빅터는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모든 가주의 글씨체가 똑같을 수 있는 거지? 그 오랜 시간동안, 그게 말이 되나?”
“아아, 그거요….”
집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빅터는 발동하는 직감을 믿고 집사를 캐물었다.
“알고 있는 게 있나? 말해줘. 궁금해 미칠 지경이니까.”
집사는 어린 시절 하비 스터스의 편지와 얽힌 일까지는 몰랐다. 그 일로 빅터가 더 분노했고, 어린 하비에게 우롱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빅터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 조금 거리끼는 기색은 있었지만 말이다.
“주인님이 그다지 좋아할 만한 화제는 아닌 것 같지만….”
집사가 가는 눈을 뜨고 빅터를 흘끔 노려보았다.
“알려드리지 않아도 어차피 바르뎀 경은 알아내겠지요. 우리 가엾은 주인님을 직접 쑤셔서라도요.”
지레 찔렸지만 빅터는 꼿꼿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하며, 잘못은 비는 대상은 하비가 유일했으니까.
빅터가 집사의 불평은 모조리 무시하고 본론만 물었다.
“그래서 뭔데.”
“사실 스터스가의 필체는 대대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빅터가 아연한 눈길로 집사를 보았다. 필체가 같다고? 전부?
빅터의 놀람을 이해한다는 듯 집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부연설명을 붙였다.
“그래야 스터스가 본연의 정신, 영혼이 계승되거든요. 초대 가주의 고결한 뜻을 이어받는다는 뜻이죠. 가주가 될 인재는 일찍부터 필체 훈련을 받습니다.”
“필체 훈련? 그건 또 뭐야.”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세상에 어느 가문에서 필체를 전부 똑같이 하는 훈련 따위를 어릴 때부터….
황당한 듯 피식피식 웃던 빅터가 문득 얼굴을 굳히고 집사에게 되물었다.
“필체가 같다고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게 이어진다고? 그걸 정말로 믿은 건가.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집사가 빅터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하며 변명조로 말했다.
“그런 걸 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빅터는 불현 듯 머리를 스치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얼어붙었다. 어린 날 스터스가의 저택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이다. 운 좋게 하비를 찾다가 겨우 찾아낼 수 있었는데, 하비와 대화 몇 번 하지 못하고 당대 스터스가의 집사에게 쫓겨났다.
‘그때 분명 하비 목에 멍이 있었는데.’
어딘가에 호되게 맞은 듯한 시커먼 멍을 그 여리고 하얀 목 뒤에서 보았다. 스터스가의 도련님이 그런 멍을 달고 있을 리가.
당시엔 잘못 본 것이라 여겼지만 빅터는 지금 와서는 그게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돌연 사나워진 빅터의 눈빛에 집사가 주춤했다.
“필체 훈련 같은 것도 받는데 말이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빅터의 목소리는 점점 음산해졌다.
“더한 것도 받았겠지?”
이건 의심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어린 아이에게 필체를 강요하는 가문의 문화라면, 그건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나아가 다른 것들로 구속했을 테고, 목 뒤의 작은 멍 따위는 일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 그건…….”
빅터는 당황스러워 하는 집사의 반응에서 더한 확증을 얻었다. 그저 잘 나가는 귀족 도련님으로 곱게 자랐을 줄 알았는데, 하비는 생각보다 더한 역경과 고통을 겪은 모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하비 스터스의 고생길은 끝이 없었다. 거기다 빅터 바르뎀, 본인이 끼얹은 고행은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빅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천장을 올려 보며 분노로 뜨끈해진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빌어먹을.’
하여간 라힌 스터스나, 하비를 제외한 스터스가 일체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괜찮나 싶으면 이렇게 시커멓게 썩은 부위를 드러낸다. 그 안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문드러졌을 하비의 마음과 육체를 생각하니 빅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비만 아니었다면 이딴 가문 따위, 하루빨리 문을 닫게 하고 하비만 빼내고 싶었다. 하지만 제 가문 지키는 데 그리도 열성적이었던 자가 잘도 좋아하겠다 싶었다.
참을 수 없는 화로 홧홧하게 달아오른 빅터가 간신히 분기를 억누르고 말했다.
“그러면 설마 하비가 맞는 일도 있었….”
더 캐내려던 빅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문이 열리고 지친 기색의 하비가 들어섰다.
“주인님!”
집사가 눈에 띄게 밝은 얼굴로 주인을 맞았다.
“오래 기다렸나? 이야기가 길어져서.”
하비는 말을 하다 말고 두 사람 간의 묘한 분위기에 의아해 했다.
“왜들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집사가 허둥지둥 빈 쟁반을 챙겨들고 외쳤다.
“아닙니다!”
곧이어 빅터에게서도 잔뜩 억눌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하비가 찜찜한 마음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지만 어떤 추가적인 말도 나오지 않았다. 쟁반을 들고 집사는 재빨리 자리를 비웠고, 빅터는 어딘가 계속 불편한 기색이었다.
“정말 무슨 일 있었나 보군.”
“…후우.”
빅터는 대답 대신 열을 삭히는 것 같은 긴 한숨만 내쉬었다. 물어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기세였다.
하비는 금방 포기하고 다음 할 일을 떠올렸다. 가문의 인장을 찾으면서 왜인지 화가 난 듯한 빅터를 곁눈질로 보았다.
‘나중에 집사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하비가 헛기침을 하며 빅터의 주의를 돌렸다. 아까 전에 빅터와의 사이에서 진하게 오갔던 감정들은 총괄 외교관을 만나고 오면서 가라앉았다.
이번에 억류된 외교관의 부모인 귀족들이 한꺼번에 찾아와서 곤란했다는 둥, 조금만 도와주면 안되겠냐는 애걸에 가까웠다. 총괄 외교관이 이토록 저자세를 보이는 것도 처음이라 하비는 그를 안심시켰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생각해 볼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빅터와 마무리를 지어야 할 건이 있었다. 아직도 불편한 얼굴로 앉지도 않고 서 있는 저 남자와 말이다.
하비는 차가 놓인 테이블에 앉으며 가문의 인장을 꺼내 들었다. 단순하지만 고급스러운 외관의 나무곽에서 인장이 딸려 나왔다. 인장 아래 스터스가의 문양인 4등분된 방패가 선명히 드러났다.
하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계약서를 작성해 볼까.”
***
“바르뎀 경!”
몇 번 들어도 참 듣기 싫은 목소리다.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면서도 빅터는 상념에 빠진 척 잠깐 무시했다.
하비가 어린 시절 저 꼴보기도 싫은 스터스가 저택에 갇혀 상상도 못할 일을 겪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왜 더 빨리 알지 못했나. 알았다면 어떻게든 했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죄 없는 하비만 몰아세웠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쳐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괴감과 자책이 한없이 빅터를 갉아먹었다.
그러나 빅터는 자신에게도 제법 냉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상황 파악이 빨랐다.
'아무 힘도 없었던 시절인데, 내가 할 수 있었을까.'
그나마 해적선에서 생활을 걸고 실력을 키웠기에 망정이지, 자신조차 바르뎀 가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빅터 바르뎀 의원!”
그제야 빅터가 귀를 후볐다. 의장이 부르고 있었다.
“…저 귀 뚫렸습니다. 소리 지르지 마시죠.”
모든 귀족들의 눈이 빅터에게 향했다. 이 곳은 의회 회합 혹은 집회라 불리는 장소로, 귀한 암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각 테이블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검은색의 반지르르한 광택이 회의를 한층 엄숙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긴장감 가득한 회의장 내 공기를 의장의 목소리가 길게 울렸다.
“바르뎀 경이 올린 로투스 가의 안건 말일세. 불법 행위 및 비승인 노예 사업을 운영한 것에 관한 것은 국왕 폐하의 결정 권한으로 넘어갔네만. 다음으로 올린 안건은…. 대체 이게 뭔가?”
의장이 몹시 난감한 얼굴로 종이를 훑었다. 빅터는 앉은 채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보고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번 해적 사태를 시재정에서 끌어다 써서 해결 보겠다는 건가?”
의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대편 테이블에서 쾅 소리가 났다. 머리가 희끗하게 샌 의원 하나가 벌떡 일어나 빅터를 노려보았다. 주먹으로 내려친 것으로, 나이에 비해 몹시 정정해 보였다.
“이런 고얀! 기고만장한 것도 정도가 있지! 공적인 재정을 제 돈 쓰듯 해버리다니!”
그의 외침에 힘을 얻은 건지 옆에서 다른 의원도 자리를 떨쳤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홰그당의 정치인이었다.
“바르뎀 의원의 재산을 당장 환수하여 전수 조사해야 합니다! 라힌 스터스처럼 뭔가 구린 것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평소 빅터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빅터를 마주 보았다. 어떤 말을 나오든 하등 표정 변화가 없던 빅터는 스터스가의 이름이 나오자 휙 변했다.
냉정한 얼굴 가운데 비웃음을 머금고 빅터가 반박했다.
“지금 라힌 스터스 전의원의 이름을 꺼내는 건 지나친 비약 아닙니까? 오찬을 제대로 못 드셔서 노망이 나신 건 아니신지.”
빅터를 공격한 자가 노기를 띠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 건방진 놈이…!”
의장이 한숨을 내쉬며 의사봉을 여러 차례 두들겼다.
“자자. 조용히들 해요, 조용히!”
빅터를 대놓고 비난하는 목소리는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이번엔 서로서로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다른 자를 비난했다. 당 내에서도 작게 분열된 파가 있었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 물고 뜯었다. 수프 그릇을 사이에 둔 개떼라면 딱 이런 모양새일 것이다.
빅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종일관 싸움터가 된 회의장을 둘러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진정들 하시고. 제 이야기 다 안 끝났습니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주목시키기에 충분했다. 묘한 이끌림이 빅터의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 빅터가 제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언제 시재정을 끌어 쓴다고 했습니까.”
의장이 어리둥절하게 들고 있던 회의록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여기엔 분명 올란시를 대표로 올란시의 재정을 걸고 해적과 교섭한다고 되어 있네만.”
“명목상입니다. 그 정도로 해두어야 해적놈들이 관심을 가질 테니까요.”
의장은 놀림당한다고 생각했는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하게.”
기다렸다는 듯 빅터가 차근차근 준비해 온 의견을 귀족들 앞에서 풀어놓았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가 회의장 내를 넉넉히 울렸다.
“제 사유재산이 올란시 전체 재정과 맞먹는 규모라는 걸, 저 무지한 해적놈들이 한 번에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부득이하게 취한 조치입니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기함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빅터의 의도를 눈치챈 것이다.
“것 참.”
“허어.”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혀를 차는 사람, 수염을 근엄하게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긴 자, 혹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빅터를 의심스럽게 보는 자 등 다양한 반응들이 나왔다. 빅터는 서두르지 않고 당 의원들을 설득해 나갔다.
“국가에 속하는 공공 자산을 인질 교섭 시에 쓸 수 없다는 도의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도적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에 속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라힌 스터스 전의원이 내세웠던 공칙이었다. 빅터는 이 법칙이 아주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빙긋 웃으며 빅터가 폭탄을 터뜨렸다.
“그럼 개인 자산으로 하면 아무 문제 없지 않겠습니까.”
일견 산뜻하게까지 들리는 빅터의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장은 또 한 번 대혼란이 휩쓸었다. 다시 시끌시끌해진 회의장은 의장이 몇 번이나 중재하고 의사봉을 내려친 후에야 진정되었다.
빅터가 여러 가지 감정과 눈빛이 뒤섞인 회의장을 찬찬히 둘러보고는 그들의 마지막 염려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물론 문제가 생기면 당도 탈퇴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더 불거지는 목소리는 없었다. 비열한 비겁자들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빅터는 입매를 비틀었다.
“우선은 억류된 인질들을 구하는 게 먼저니까 말입니다.”
빅터의 결연한 의지에 웅성거림도 잦아들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색하게 웃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빅터의 발언은 파급력이 컸다.
빅터는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눈으로 회의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개인 자산을 물쓰듯 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 문제 지역이 내 구역이 아니라는 안심, 사안에 대한 방관, 무관심, 혹은 빅터의 자산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 등등.
익숙한 작태지만 새삼 구역질이 났다. 그가 납치당했던 과거에도, 이들은 같은 행태를 보였을 것이다. 빅터가 냉소했다.
‘벌레 같은 놈들.’
하비가 보고 싶어졌다. 그 남자가 회의장에 있으면 공기가 훨씬 맑아질텐데.
그 마음과는 별개로, 빅터는 익숙한 가면을 다시 쓰고 귀족들을 대했다. 이곳은 한치만 삐끗해도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전장이다. 알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계속 하비만 떠올랐다.
‘이 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그 시각, 하비는 불편한 마음으로 외교부의 한적한 쉼터에 앉아 있었다. 작은 공원으로 조성된 걷기 좋은 공터가 있었고, 잘 심긴 나무와 꽃, 풀들이 정돈되어 마음에 안정이 오는 곳이었다.
빅터가 집사로부터 알아낸 진실이 내내 마음에 걸려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는 스터스가의 필체가 전부 같다는 것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하비는 생각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어.’
빅터는 이미 해적선에 전달되었던, 인질들을 농락하는 편지에 대해 눈 감기로 했다. 나중엔 자신이 했다고 해두긴 했지만 빅터는 하비가 한 것으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다만 알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의심하는 정도였다.
하비가 골치아픈 듯 구겨진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 또 경멸하려나.’
스터스가가 아주 우습게 보일 것이다. 빅터는 전통과 사상에 대한 집착을 원래도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고리타분한 미친 짓이라 여겼겠지.
그나마 외교관을 해서 많은 것을 보고 외국에도 가본 하비는 이전의 스터스가 가주들에 비해 넓은 식견을 가진 편이었다. 그럼에도 집착에 가까운 스터스가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빅터가 이걸 이해해 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생각한 순간 하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말도 안되는 희망을 또….’
빅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미신이나 관습에 얽매이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다니.
하비는 자신이 아무래도 과거를 거울 삼아 교훈을 얻는 유형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일을 겪고도 헛된 망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때, 멀리서 복색을 제대로 갖춘 남자 하나가 긴장 어린 기색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새로 온 외교관이었다.
하비가 벤치에 기대었던 등을 곧추세우고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앳되어 보이는 얼굴로 그가 몹시 쑥스러워 했다. 하비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처음이라 더 긴장하는 듯 했다. 그럼에도 꽤 용기내어 접근했다.
“여기 법 조항이 헷갈려서요. 책을 찾아봐도 사례가 좀…….”
“어디 봐.”
하비는 신참 외교관이 가지고 온 종이를 뚫어지게 보더니 그에게서 펜을 건네받았다. 끝이 말라가는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힘을 주어 눌렀다. 무엇이 문제인지 대번에 파악한 하비가 옅게 미소지었다.
“책을 참고하는 것도 좋지만, 실질 사례가 일부 누락되는 경우가 있어. 그럴 땐 외교 국가 간의 실사례에만 집착하지 말고 각 국가의 현행법을 살펴.”
“그리고요?”
하비가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찍었다. 머리를 쓰라는 뜻이었다.
“현행법을 토대로 추론을 해야지. 각 국가의 문화도 자세히 알아야 하고, 민족성 같은 것도 알아두면 좋지. 단순하게 사례에만 접근하면 가끔 함정에 빠지거든.”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하면 너무 복잡하지 않나요? 시간도 없는데…….”
상사인 하비의 눈치를 보며 하는 소리는 보통 할 법한 고민이었다. 하비도 이해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이 신입 외교관에게는 큰 발전이 없을 터였다.
하비는 귀찮아 하지 않고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도 아끼지 않고 덧붙였다.
“이전 실사례를 참고해서 바로 끝내버리면 편하긴 하지만, 직접 찾고 수고를 들일수록 더 좋은 방법이 나올 거다.”
온화하지만 강한 말투로 하비가 엄하게 말했다.
“외교는 국가 간의 또 다른 전쟁이야. 이기려면 상대를 더 잘 알고 있어야지.”
신입 외교관이 눈을 반짝이며 하비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다.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수고해.”
들뜬 얼굴로 뒤돌아 사라지는 신입 외교관을 하비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늘 그렇지만, 새로 출발하는 자의 패기와 설렘, 열정은 곁에 있는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음?”
하비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신참 외교관의 뒤로 한 거대한 실루엣을 보았다. 커다란 키와 체격을 지닌 사내가 설렁설렁 걸어오고 있었다. 목표는 뚜렷해 보였다.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안 하비가 주변을 둘러 보았다. 막는 경비병이나 보안병이 전혀 없었다.
‘외부인인가?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 곳에서 볼만한 옷차림새는 아니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오는 모양은 뱃사람이나 한량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 대충 걸친 셔츠나 베스트, 서민 바지인 캐속은 꽤 질 좋은 것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그가 다가오면서 중얼거렸다.
“이기려면 상대를 더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라.”
온전히 하비 앞에 선 사내가 히죽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불한당 같은 느낌이 강해졌다. 삐딱한 걸음걸이에, 턱엔 정돈되지 않은 희끗한 수염이 이리저리 나 있었다.
“거 좋은 말을 들었수다, 스터스 경.”
하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날 알고 있나?‘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만 듣고 있으려니 발이 근질근질해서. 그래서 찾아와봤지.”
건장한 사내가 가리고 있는 햇빛이 하비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빅터 그 놈이 댁만 엮이면 어찌나 시끄럽게 굴던지. 안하던 짓도 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것도 양보할 정도니 말 다 했지 뭐야.”
빅터의 이름이 언급되자 하비의 기세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사내도 같은 알파라서 하비가 뿜어내는 페로몬 자체는 미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하비에게서 나오는 강렬한 투지나 칼로 벼린 듯한 견고한 의지가 전해졌다.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누구길래 함부로 경어도 없이 귀족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거지?”
역시 빅터의 말대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씨익 웃은 중년 사내는 하비의 옆에 털썩 앉았다. 오랜만에 대화할 기분이 나는 자다. 그것이 하비에 대한 중년 사내의 평가였다.
“동업자라고 해야 하나. 그 비슷한 거지. 한 배를 타는, 아니 탔던 사이?”
“바르뎀 경의 동업자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말했잖아. 고매하신 스터스 경의 얼굴이 궁금해서 와봤다고.”
의문의 중년 사내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하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자를 노려보았다. 빅터처럼 험한 상처가 여기저기 많이 난 얼굴이다. 살아온 세월에서 응축된 경험과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하비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주름 진 얼굴을 건너 보며 차갑게 말했다.
“고작 내 얼굴이나 보겠다고 외교부 건물 안까지 들어오는 수고를 들였다니. 더 의심스러운걸.”
중년 사내가 벤치 뒤로 팔을 걸치며 피식 웃었다. 하비는 찌푸리는 얼굴조차 우아했다. 남자답게 생긴 외모지만 화려한 빅터와는 다른 수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반할 만 했다.
결국 이럴 거면서 매일 복수한다 노래를 불렀던 건지.
속으로 빅터에게 혀를 차며 중년 사내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표정과는 반대로 감탄사같은 말이 흘러나갔다.
“듣던 대로 경계심 강한 미인이로고.”
하비가 헛웃음을 지었다. 미인? 자신은 전혀 미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되는대로 막 뱉는 사람인 것 같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의를 제기할 만한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본인은 한 번도 자신을 미인상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이없다는 시선을 아낌없이 보내는 하비에게, 중년 사내가 팔을 풀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사실은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었지만-.”
수염을 손등으로 거칠게 훑더니 그는 벤치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사업 이야기를 하려고 왔지.”
“사업?”’
“빅터 놈이 내게도 꽤 큰 판돈을 걸었거든.”
무슨 말이냐는 듯 하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신생 해적 놈들을 싹 갈아주면 좋겠다면서, 군 지원비를 내놓았어.”
하비는 벤치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벌떡 앞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군…지원비?”
무릎 부근의 바짓단을 꽉 쥐는 하비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빅터가 마지막 부탁이라며 찾아온 것이 아직도 선했다.
[거슬리는 그 신생 해적놈들, 다 쓸어줘. 비율도 전부 몰아주지.]
중년 사내에게는 이런 소탕이 재밌는 일이었다. 근질거리는 몸을 푸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어 중년 사내는 한동안 빤히 빅터의 얼굴만 들여다 봤다. 빅터는 진심인 듯 했다.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것을 돈이 부족하다고 여겨서 그런 줄 알고, 빅터가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돈독 오른 영감이라면서 욕지기를 뱉기도 했다.
[왜 모자란 것 같아? 그걸로 용병 고용비과 무기, 배 구입은 충분할 거다. 참고로 스웬 용병이 제일 실력 좋아.]
중년 사내가 이윽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도 솜씨 좋지만, 해전을 잘 하는 용병은 따로 있지. 친구들을 좀 모아봐야겠군. 고맙게 받으마.]
[남는 건 가져. 수고비로 생각하고. 앞으로 나한테 들러붙지 말라는 경고 겸.]
중구난방으로 난 턱수염을 쓸던 중년 사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날 다 주면 네 놈은 어떻게 살려고?]
[방법이 있겠지.]
빅터가 대수롭지 않게 이어 말했다.
[없어도 할 수 없고.]
중년 사내는 하비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과 빅터와 함께 고안한 작전을 설명했다. 문득 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나같은 양아치한테 곱게 키워온 상단을 전부 넘기다니. 절대 그 자식다운 발상이 아니란 말이지.”
“뭐?”
하비의 밤색눈이 크게 흔들렸다. 빅터가 상단을 넘겼다고? 동업자라는 이 사람에게?
중년 사내가 그런 하비를 한참 지켜보았다.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려는 듯, 오래.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중년 사내가 말했다.
“경은 빅터가 그 상단을 키우기까지 몇 년을 쓴 줄 알아?”
“…….”
“무려 12년이야. 나와 사업 구상을 하기 시작한 시간까지 합치면 17년. 그 놈이 살아온 시간의 절반 이상을 썼지.”
중년 사내가 피식피식 웃었다.
“그리 공들이고 평생을 바쳐온 것을 넘긴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 욕심 많은 녀석이?”
해적과 교섭하는 돈은 상단에서 번 돈을 개인 계좌로 은행에 넣어둔 것으로 일부 충당했다. 사실 중년 사내가 보기에 빅터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원래도 정상은 아닌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역대급 미친 짓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새로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하비가 무릎에 올려진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정말이란 말인가. 빅터는 이미 많은 자산을 지불했다. 이건 필요 이상의 선의였다. 너무 넘쳐서, 선의가 아니라 기만으로 느껴질 만큼의.
해달라고 한 적도 없고, 이리 되도록 바란 적도 없었다.
‘왜 그런 거야. 넌 무슨 생각인 거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이 들어간 하비의 주먹을 중년 사내가 흘끔 내려보았다.
“뭐, 여기까지 와보니까 조금은 알 것 같네.”
씨익 웃은 중년 사내가 하비에게 악수를 청하듯 한 손을 내밀었다.
“곧 내가 고용한 용병과 함께 작전 들어갈텐데, 그때 다시봅시다.”
하지만 하비는 악수를 받지 않았다. 중년 사내가 주먹을 풀 생각도 없이 미동 없는 하비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그가 허공에 뜬 빈 손을 아무렇지 않게 치웠다. 중년 사내는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을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키운 자식같은 놈이 말이지.”
“…….”
“그 쪽에게 많이 빠져있는 것 같거든.”
여전히 말이 없는 하비에게 중년 사내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모자란 녀석이지만 잘 부탁해.”
고개를 숙이지 않았지만 무게가 있는 목소리였다.
처음과 같은 가벼운 태도로, 중년 사내는 외교부 건물을 홀연히 떠났다.
***
오늘 약속 장소는 다시 빅터의 의원 집무실이었다. 보통 외교부 건물에서 하비는 탁 트인 넓은 공간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했고, 둘만 대화하기엔 썩 좋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폰은 두 사람이 대화를 매끄럽게 할 수 있도록 다과를 준비한 뒤 조용히 사라졌다.
어쩐지 둘 다 많이 화가 나 보였다. 특히 빅터는 끔찍한 얼굴이었다. 실제 잠을 아예 못 잤다. 그런 것치곤 건장했지만, 우성 알파의 체력 덕분이었다.
하비도 평소보다 얼굴에 열이 몰려 있었다.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었다.
차가 식어갈 때쯤, 드디어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말이 동시에 겹쳤다.
“왜 말 안 했어.”
“왜 말 안 했지?”
그런 뒤에 바로 침묵이 찾아왔다. 하비가 집무실 책상 위로 양 손을 올리며 먼저 말했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말해도 될까.”
“우리 둘 다 서로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말해도 될까.”
빅터가 이를 악물고는 밀려오는 분노를 삼켰다.
“말해.”
외교부까지 찾아왔던 그 이상한 남자를 떠올리면서 하비가 말했다.
“낮에 경의 동업자라는 사람이 찾아왔어.”
빅터에게 동업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하나 밖에 없었다. 순간 말하려던 것도 잊고, 빅터가 입을 벌렸다. 좀처럼 자신의 일에 참견하지는 않던 사람이었는데.
“찾아갔다고? 설마, 그 영감이? 외교부까지?”
빅터는 믿을 수 없었지만, 하비가 뱉는 말을 보면 전부 사실이었다. 하비는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옮겼으니까. 빅터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만 빼고 말이다.
딱딱한 얼굴로 하비가 따져들었다.
“경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계약서가 다 무슨 소용이야.”
하비가 일어나서 책상을 짚고 빅터에게 몸을 기울였다.
“동업자라는 사람에게 상단을 통째로 넘겼다며. 당장 철회해.”
빅터가 짜증이 나는 듯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그 영감이 재미가 들렸나…. 찾아가지 말라니까. 농담인 줄 알았더니.”
하비는 그 말에 더욱 기가 막힌 표정을 했다. 동업자가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도록 미리 손을 써두기까지 했다니.
이건 엄연히 월권이었다. 또 아무것도 모르고 빅터가 깔아놓은 길 위에서 구를 뻔했다. 그 길이 몹시 편한 길이든, 혹은 험난한 길이든 빅터가 지어놓은 것이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왜 넌 항상 제멋대로 날 휘두르려 하는 거지.’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조목조목 사실 관계를 짚고, 감정은 최대한 억누르려 노력했다.
“이번 건은 외교부 전체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시작한 일이기도 해.”
참으려 했지만 결국 하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결국 내 일인데. 경이 왜 그런 말도 안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거지?”
그 상단은 동업자가 말한대로, 빅터가 평생을 공들여 키운 것이었다. 빅터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하비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빅터에게 돈이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하비는 빅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빅터의 대답을 듣고 하비는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그깟 돈이 뭐 그리 소중하나?]
하비에게 돈은 그저 수단이었다. 필요하긴 하지만, 절실하지는 않은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빅터는 달랐다.
[그깟 돈 때문에 목숨을 여러 번 구했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거든.]
[돈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만이 날 인간으로 있게 하고, 나를 살게 해.]
빅터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 중에 꽤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이었다. 그런 소중한 것을 소모하게 하다니, 마음이 불편했다. 하비는 굳은 얼굴로 제안했다.
“이럴 거면 계약서, 다시 써. 안 그래도 저택 운영비가 너무 들어서 작은 곳으로 옮길까 생각 중이었는데…. 차라리 잘됐군.”
스터스가 저택을 팔아 빚을 갚겠다는 말이었다. 빅터의 독단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 저택을 지키려던 하비의 집착을 생각하면 엄청난 선택이었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빅터의 눈이 길게 일그러졌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이었다.
“…뭐라고?”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던 가운데, 빅터가 하비의 차가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똑똑히 들으라는 듯 빅터는 한 자 한 자 강조했다.
“난 절대 철회 안 해. 상단은 이미 넘겼어. 그리고 계약서는 다시 안 써. 이것도 이미 끝난 일이야.”
하비가 화가 난 얼굴로 빅터를 불렀다. 타협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독단에 신물이 났다.
“바르뎀 경!”
빅터는 길게 숨을 들이쉬어 머리를 식혔다. 극도로 차분하지만 폭발 직전의 무언가가 아슬아슬하게 빅터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왔다.
“넌 대체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뭐?”
“내가 너의 뭐냐고.”
생각지도 못한 간결한 물음이 하비를 관통했다. 빅터 바르뎀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 없었다.
하비가 금방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빅터는 선수를 쳤다.
“자칫 네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일이야. 그래서 그랬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진심을 토해낸 빅터가 입술을 짓씹었다. 혹여나 일이 잘못되어 닥칠 하비의 죽음을 가정해 봤을 때, 그 이후로는 자신의 삶도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깜깜했다. 바다 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막혔다. 단 일 분도 숨쉴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서 그랬다. 이 갑갑한 숨을, 인생을 조금이라도 트일 수 있다면….
빅터는 녹빛 눈동자를 번뜩였다.
“상단? 그딴 거 몇 개라도 더 팔 수 있어.”
“왜 그런….”
탕!
빅터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듯이 기대어 잡고 벌떡 일어났다. 왜냐는 물음조차 열이 받았다.
왜냐니. 어떻게 왜냐고 물을 수가 있지?
“정말 모르겠어? 하비 스터스 데 보르본 경.”
고개를 숙인 채 그는 비통해졌다. 왜 이렇게 몰라주는지, 머리에 뜨거운 열이 쏠렸다.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심정으로 빅터가 목소리를 높였다.
“시발, 네가 제일 우선이니까!”
빅터는 얼굴을 들어 찢어질 것 같은 가슴으로 하비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하비의 눈이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마구 뒤흔들리고 있었다.
저 얼굴이다. 감출 수 없는 하비의 혼란이 기꺼웠다.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가 되는 것보다, 어떤 식으로든 하비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빅터가 문득 자조했다. 그러면 뭐 하나. 마음은 전혀 전해지지도 않는데.
허무하게 비어버린 웃음을 짧게 뱉은 빅터가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냈다.
“사랑한다고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는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 죄책감,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빅터를 덮쳤다. 여기서 결판을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빅터는 미친 사람처럼 옆구리에 찼던 짧은 단도를 풀어 검집에서 뽑았다. 놀라는 하비를 비웃듯 보면서 빅터가 그 단검을 책상 위로 꽂았다.
팍!
나무 껍질이 튀었다. 검 손잡이를 힘껏 부여잡은 빅터의 손등 위로 핏줄이 튀어나왔다.
빅터가 앞으로 몸을 내밀어 하비에게 잔인하게 말했다. 녹색 눈 속에 광기가 새겨져 수런댔다.
“못 믿겠으면 팔 하나라도 잘라서 믿게 해줘? 그러면 좀 믿어주려나?”
빅터는 목울대에 일렁이는 쓴물을 삼켰다. 그러라면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 차라리 그게 속 시원할 것 같았다. 팔 하나 희생해서 진심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그깟 팔 따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하비는 절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빅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맹세는 잔인하리만큼 직설적이고, 마음을 후벼팠다.
상단을 왜 팔았고, 왜 자신을 과잉으로 도우려는 건지. 하비의 목구멍으로 치솟던 의문과 물음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미 답은 나왔다. 빅터에게서 수차례 보았던 깊은 후회, 회한, 그리고 고백.
빅터의 솔직한 감정과 목소리가 회오리치며 한 방향을 향해서 뻗어나갔다. 그건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높은 벽을 뛰어넘고, 두꺼운 담장을 허물어 하비에게도 닿았다.
드디어, 무너진 담장 사이에서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왔다. 그토록 바랐던 것이었다. 허물어진 틈에서 빛이 비틀대며 새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힘들었는지, 희미했다. 그래도 좋았다.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얼굴에서 하비는 오히려 희망을 보았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던 사람이 가장 큰 돈줄인 상단을 버렸다. 받아주지 않아 좌절을 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자신을 쫓았다. 절망하면서도 끝없이 갈망했다. 하비는 자신에 대한 빅터의 갈증을 원했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심장은 계속 피를 흘렸다. 너무 많이 흘려서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던 걸지도 몰랐다. 한동안 잠잠하던 위통이 다시금 찾아와서, 하비가 가까스로 말했다.
“칼부터 치워. 그러면 조금 믿어볼 테니까.”
빅터는 단검의 손잡이에서 손만 떼어냈다. 검날이 시퍼런 서슬을 보이면서 여전히 살벌하게 꽂혀 있었다.
“조금이라도 믿어줄 생각이면, 이번엔 내 말부터 들어.”
빅터는 밤 중에 떠오른 생각에 한 숨도 잘 수가 없었다. 스터스가의 필체가 모두 같다.
하비는 처음에 그 편지를 모른다고 했다. 나중엔 말을 바꾸긴 했지만, 진실이 아닌 듯 했고.
게다가 그 당시에는 라힌 스터스가 살아 있었다. 빅터는 등줄기에 한기가 서렸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망할 편지.”
모두를 비웃고, 살고 싶은 자들의 마음을 짓밟았던 무례한 편지를 말했다. 하비의 얼굴에도 긴장이 맺혔다. 가슴 안 쪽이 쓰라렸다.
그 반응을 눈여겨 보며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쓴 거 아니었지?”
하비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금이 가는 밤색눈을 직시하며 빅터는 음산하게 말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라힌 스터스 전의원, 네 그 개같은 아버지가 쓴 거, 맞지?”
‘개같은’ 이라는 과격한 수식어에 하비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긍정으로 알아들은 빅터가 드디어 폭발했다.
“너는 왜. 왜…! 진작에 말했으면 됐잖아. 그때 더 괴롭게 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비는 어두운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하하. 그래. 넌 빌어먹을 그 스터스가에 아주 뼈를 묻은 사람이니까. 절대 말할 리 없었겠지.”
제 가문의 오점이 될 일을 주절주절 떠들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빅터는 정말 궁금한 듯 필사적으로 물었다.
“하나 묻자. 라힌 스터스가 널 사칭하면서까지 편지를 보낸 이유가 뭐였어?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거든.”
하비가 숨죽였다. 여기까지 빅터에게 말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다 폭로된 지 오래다. 지금 와서 더 가릴 것이 있나.
결국 하비는 씁쓸하게 진실을 고했다.
“나만은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고 깨끗해야 하니까.”
“완벽? 깨끗?”
들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빅터가 단어를 되뇌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비는 그가 어쩌면 조금은 알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미련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상황상 어쩔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이해를 바랐다.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리 말하는 하비의 목소리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가문을 이어받을 가주가 될 사람이라서. 스터스가의 가주는 도덕적인 결점이 있으면 안 되니까.”
그런 자존심과 고고함이 스터스가를 지탱해 왔다. 당시 라힌 스터스는 너무 먼 길을 갔다. 그래서 제손을 더럽히더라도, 후대에 이어질 자신의 아들만은 깨끗하기를 바랐다.
풀어서 설명했는데도, 빅터는 전혀 납득가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렁이던 분노의 불길이 거세질 뿐이었다. 가까스로 이해하는 척만 했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은 이유지만, 어쨌든 알겠어.”
교차로의 악마와 거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까지 버리지 못했던 지독한 고집. 빅터는 이해는 안 가도, 미신에 현혹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오로지 하비를 위해서였다. 저리도 이해받길 바라는 얼굴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몰아세우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처참하게 구겨진 몰골로 빅터가 물었다. 다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대체 스터스가에서 어떤 삶을 산 거야?”
그리 묻는 빅터의 핏기 없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텅 빈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졌다. 다짐하듯이 그가 말했다.
“내가 이건 꼭 알아야 겠어서.”
하비는 차마 대답하지 못 했다.
죽지 못 해 살았다. 그저 해야 할 일만 하나씩 처리하면서, 그리 살았다. 어느덧 가문을 지키는 화석이 되어버렸고, 마음은 어디론가 날려가버린 채 몸만 남았다.
그랬는데, 눈 앞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이 남자가 돌아오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하비에게는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울릴 정도의 큰 변화였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심어둔 자에게 하나쯤의 환상은 남겨두고 싶었기에. 행복하게 산 귀족 도련님이라는, 그런 당당함과 기대 정도는 빅터에게 남겨두고 싶었다.
하비는 눈매를 일그러뜨리고 입술을 씹었다. 피맛이 났다.
‘나도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잖아.’
그런데도 빅터는 독니를 세우고 제 성정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건 빅터에게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하비가 속으로 갈등하고 쉽게 운을 떼지 못하자 빅터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여전히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어릴 때 스터스가의 저택에서 널 찾아냈던 날. 기억해?”
물론 기억하고 있다. 하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라는 것이 지독하게 안 어울렸던 자신의 참담함도, 그와 반대로 몹시 자유분방하게 보였던 건방진 소년의 모습도.
하마터면 함께 그 손을 잡고 나갈 뻔 했던 것까지 전부 기억했다. 집사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충동에 휩쓸려 그랬을 것이다.
빅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얼굴로 물었다. 차라리 아니기를,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 날 내가 봤던 게 정말이었나? 목에 있던 그 멍자국.”
하비가 움찔했다. 멍자국? 그런 건 언제 본 거지? 입도 떼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사이, 빅터가 쉬지 않고 몰아쳤다.
“매타작이라도 맞았던 거였어? 누구한테?”
물으면서도 빅터는 동시에 답을 알고 있었다. 누구한테기는. 명색이 스터스가의 하나뿐인 도련님에게 손찌검을 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아버지인 라힌 스터스 밖에 없다.
빅터는 무덤을 다시 파서 그 역겨운 시체를 꺼내 난도질 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고 여기까지 왔다. 참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누가 뭐라든 상관없지만, 하비가 상처받거나 그에게서 외면받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묵묵히 있던 하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제와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빅터에게 남겨둘 환상은 더 이상 없었다.
모조리 깨부수는 심정으로, 하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건 검술 훈련 때 내가 잘못해서 맞은 거였어. 그 날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하기도 했고.”
빅터는 비웃음을 머금고 냉소했다.
“검술 훈련? 필체 훈련 같은 그 비정상적인 것 말인가?”
하비가 무거운 얼굴로 변명처럼 말했다. 비웃음이 마음 아팠다.
“경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그래도 내겐 그게 현실이었어.”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비현실에 가까운 현실. 버거워도 이겨내야 하는 책임의 무게. 자신을 짓누르던 크고 무거운 방패를 나중엔 오히려 지켜야 하는 이상한 현실이었다.
할 말을 잃은 빅터가 한 손으로 괴로운 얼굴을 덮었다.
그랬던 건가. 역시, 그랬다. 하비 스터스는 철저히 무죄다.
“네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믿고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빅터는 원망하듯 말했다.
“너는 잘 살았어야 해. 왜 그러지 못했던 건데?”
해적선에서 하루하루를 복수심으로 연명했다. 그 더러운 정치가 놈의 아들은 자신을 배신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을텐데. 왜 자신은 이런 비참한 곳에서 죽어가야 하는 건지.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는 것도 모른 채 복수에 온 몸을 맡겼다. 뜨겁게 칼날을 갈면서 심장에 날카로운 끝을 박을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가장 힘들었던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해왔던 건지.
빅터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꾹꾹 눌러 담았던 한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나왔다.
“그래서 더 네가 미웠어. 편하게 누워서 놀고, 먹고, 자고, 가끔 필요한 일이 생기면 놀 듯이 처리하고. 그리 잘 산 줄 알았어.”
이제 손까지 덜덜 떨렸다. 자신이 저지른 짓들이 역으로 돌아와 빅터를 난도질했다.
“그런데 아닌 것 같더라고? 내가 완전 헛다리를 짚은 거였어. 내가 어젯밤에 그 생각이 갑자기 들었는데, 어떤 심정이었을 것 같아?”
하비는 아무 말 없이 빅터를 지켜봐 주었다. 그가 끝까지 말을 맺을 수 있도록, 묵묵하게.
“그것도 모르고 난, 나는….”
마음껏 증오했다. 나는 이리 힘들게 사는데, 너는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그 미련한 생각에 그 모든 복수를 시행했는데.
정말로 하비 스터스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죄가 있었다면 태어날 가문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과 병신같은 자신을 사랑한 죄 밖에 없었다.
‘하….’
빅터가 쓰러지듯 자리에 다시 앉았다. 우는 것 같았지만 실제 눈물은 없었다. 빅터는 스스로 눈물 흘릴 자격도 없다고 여겼다.
끝내 버리지 못했던 자존심, 자만, 드높은 오만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모래성처럼 쌓였던 허황된 것들이었다. 하비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었다.
“왜 넌 매번….”
힘 없는 목소리였다.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빅터는 간신히 눈을 들었다. 여전히 곧은 시선을 가진 남자를 담았다.
“더 비참한 건 뭔지 알아?”
“…….”
“난 말야. 내가 잘못한 일에도 널 이렇게 원망하는데, 넌 날 원망하지 않아.”
심지어 원망할 기회를 주었을 때도, 속 시원하게 원망하지 않았다. 거부하고 밀어내기만 했을 뿐이었다. 저주를 퍼붓거나, 폭력을 휘둘러 상처를 주거나, 그런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정도를 지켰다. 그게 더 미칠 것 같았다.
하비 스터스는 거울이었다. 그 앞에 서면, 자신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고, 추악한 속내까지 투명하게 나타났다.
쌓인 울분을 터뜨리며 빅터는 하비 대신 울부짖었다.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망가진 하비의 모습이 왜 지금 선명해지는 지.
“정신이 나갈 정도로 힘든데도! 그런데도 끝까지…,.”
빅터는 이제 두려웠다.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져야 이 단단한 방패 같은 거울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을까.
그런 날이 과연, 올 수는 있나.
한계까지 몰려서,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빅터가 하비의 피와 얼룩으로 더렵혀졌던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악귀처럼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빅터가 씹어뱉듯 말했다.
“대체 어디까지 날 시궁창에 쳐넣을 생각인 거야.”
하비를 원망할수록 돌아오는 건 더 한 자괴감 뿐이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쓰레기였나, 인간 말종이었나, 수거도 못할 짐승이었나, 온갖 생각이 그를 좀먹었다.
한없이 높았던 자존심이 하비 앞에서는 곤두박질 쳤다.
빅터가 비척비척 일어나 하비의 옆으로 걸어갔다.
쿵!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비의 밤색 눈이 커졌다. 빅터는 무릎을 바닥에 붙인 채 주먹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이제 용서해 달라고도 하지 않겠어. 그냥….”
처연하게 고개를 들어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만 있게 해줘.”
내용은 애걸이었지만, 눈빛은 달랐다. 굶주린 시선이었다. 마음을 얻는 건 체념했지만, 어떻게든 곁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엿보였다. 빅터가 입을 열 때마다 하비의 시선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뭐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테니까.”
하비는 당황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빅터를 붙들었다.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어마어마한 힘과 고집이었다.
“누가 보기 전에 일어나.”
“들어올 사람 없어.”
“내가 불편해. 이러지마.”
빅터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전에 수면제를 먹고도 피 흘리며 좀처럼 의식을 잃지 않았던 것처럼, 강렬한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광기를 닮은 그 지독한 집착은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도 묻어나 집무실 공기를 가득 메웠다. 하비는 숨이 막혔다.
“허락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압도감과는 다른 절실함에 하비가 욱신거리는 가슴을 붙들었다. 고삐 풀린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빅터가 괴로워하며 힘들어하는 것이 오로지 하비 스터스, 그 자신 때문이다. 그 사실에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펐다.
용서 같은 쉬운 단어는 이제 자신과 빅터 사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하비도 빅터 앞에서 천천히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올려다 보는 그 녹색눈이 마음에 박혀 들었다. 이 눈빛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정해진 단 하나만 쫓을 것 같은. 집요한 늑대의 눈이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빅터의 눈가를 만져 보았다. 에메랄드빛을 닮은 눈은 여전히 따뜻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아슬아슬했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그는 그저 이 관계가, 강처럼 조용히 흘러갔으면 했다. 흐르다 바다를 만나면 그 일부가 되는 것처럼. 처음부터 이미 바다를 만나 한데 섞이는 운명으로 정해진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다시 섞일 때였다.
눈가를 매만지는 하비의 손길에 처연하던 빅터의 눈빛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일주일 후에 작전이 시행되면, 체력이 많이 소모될거다. 잘 쉬어둬야지.”
하비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말만 뱉었다.
그러자 희망으로 잠깐 빛을 쬐었던 녹색눈이 금방 식었다. 빅터가 버림 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이던 사람이 말이다.
말을 할수록, 하비의 목소리에도 점점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는데.”
한숨을 길게 내쉰 하비가 빅터의 일그러진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러 펴주었다.
“네가 언제 가라고, 떨어지라고 한다고 말을 듣던 사람이었나?”
“…어?”
“원래대로만 해. 평소처럼 뻔뻔하게 굴어.”
손에 닿는 빅터의 피부가 전보다 훨씬 거칠어졌다.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한 흔적이었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저렸다. 하비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안하던 짓 하는 걸 보니 더 꼴사납거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빅터가 말간 녹색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을 보니 하비는 짧은 웃음이 나오다가도, 아까전의 절박하던 얼굴이 떠올라 진지해졌다.
내가 너의 무엇이냐고 묻던 빅터의 슬픈 외침이 다시 한 번 멀리서 몰려왔다. 하비는 그 절규에 속으로 대꾸했다.
'무엇이기는.'
하비는 자신의 삶을 여러 번 스쳐 지나간 빅터를 그때마다 다른 것으로 정의내렸다.
처음엔 좀 특이한 아이, 그 뒤엔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렸고, 나중엔 목의 가시같은 존재가 되었다. 무뢰배들에게서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섞인 날카로운 가시.
그러다 가시는 하비의 마음까지 꿰뚫었다. 심장에 뿌리내리고 자라 어느덧 영혼까지 옥죄었다. 배신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그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지닌 괘씸한 가시였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비는 홀가분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나한테 주고 간 물건도,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가져가. 내겐 필요없는 거니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흔들리는 시선에 대고, 하비가 다시 한 번 강하게 말했다.
“꼭 가져가. 잊지 말고.”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위통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꼭 가져가. 잊지 말고.”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위통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어차피 빅터가 들이붓듯이 스터스가 저택으로 보낸 온갖 약과 건강 관련 제품, 아예 팀으로 꾸려진 전담 의사 세 명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위통도 신경이 아주 예민할 상황이 생기거나 극도의 한계가 아니면 생기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저번에 와서 내 방에 놓고 간 물건 말야.”
드디어 상황 파악이 끝난 건지 빅터가 마른침을 삼키며 확인했다.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화색이 돌았다.
“그 말은….”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빅터가 말했다. 목소리가 아직 잠겨 있었다.
“이제 기대해도, 되는… 건가?”
늘 자신감 넘치던 얼굴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아슬아슬했다. 매번 죽상으로 있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던 차였다. 저 처참한 몰골을 보니 더 선을 그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모든 걸 잃은 지금, 남은 건 이제 이 사람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놓지 않는, 끝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이 가엾은 남자 말이다.
하비의 눈에도 희미한 애정이 꺼져가는 촛불처럼 일렁였다.
대답대신 하비는 빅터의 얼굴을 맴돌던 손을 내려 팔을 움켜쥐었다. 강제로 위로 끌어올리면서 자신도 허리를 펴 일어났다.
“일단 일어나. 어서.”
빅터가 워낙 체급이 큰 편이라 쉽게 누군가의 손에 몸이 움직일 사람이 아닌데도, 어느 정도 하비의 손에 딸려 올라갔다. 하비의 힘도 만만치 않아서였다.
그러나 온전히 일어나는 건 빅터의 의지로 해야 했다.
빅터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의 일어났을 때, 빅터가 하비의 팔을 반대로 휙 잡아당겼다. 허리 뒤에 책상을 두고, 한 손으로는 책상 위를 짚어 균형을 잡은 채였다.
“뭐….”
당황한 하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빅터는 그대로 하비의 입술을 노렸다.
균형을 잃고 자신 쪽으로 쏠린 몸을 받으면서 키스했다. 조금 거친 듯 적당히 도톰한 입술이 예전처럼 감미로웠다.
몇 대 맞을 각오를 한 것인데, 하비는 움찔하다가 그대로 순순히 허락했다. 쥐었던 하비의 주먹이 천천히 펴졌다.
조심스럽게 입술만 맞대고 있던 빅터가 혀를 내밀어 더욱 질척하게 얽으려 할 때야 하비는 뒤로 떨어졌다.
이제야 조금 믿긴다는 듯 빅터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이네.”
확인하는 방법도 꼭 빅터다웠다. 금세 붉어진 입술로 하비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믿어달라고 할 땐 언제고, 막상 겁나나? 감당 안 돼?”
평소대로 돌아온 빅터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맡겨만 주면, 뭐든 감당할게.”
“말은 잘하지.”
하비는 혀를 찼다. 여러 가지 의미로 저 혀놀림에 속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장갑을 내던져 결투를 신청 해도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하비의 눈이 제법 힘차게 제 자리로 돌아가는 빅터의 등을 쫓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걸음조차 가벼워 보였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거의 죽어가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걸 보니 마음이 조금 풀어지고 만다.
용서해줄 수 없냐고 비친 눈물과 처절하게 무릎을 꿇고 비는 애원에, 그동안 수없이 보인 진심에, 결국 넘어가고야 말았다.
하비는 어쩔 수 없는 자신에게 한숨지었다. 왜 이리도 이 남자 앞에서는 물러지는 건지. 제 마음이지만 참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시기적절하게 폰이 노크를 한 뒤 들어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
폰이 안내한 손님은 빅터의 동업자이자 하비의 외교부 건물에도 찾아온 적이 있는 중년 사내였다.
그의 이름을 이제야 처음 들은 하비가 심각한 얼굴로 웃음을 참았다. 실례라고 생각해서였다.
중년 사내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거, 그냥 웃지? 참는 게 더 기분 더러워.”
“알프레드라니. 언제 들어도 이 순간이 제일 짜릿하더라.”
결국 빅터가 맞은편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알프레드는 보통 집사에게 붙이는 이름이었다. 순종과 복종의 이미지가 강했기에, 한때 이름을 날린 해적선의 우두머리로서는 참 그랬다.
끝까지 웃음을 꾸욱 누르는 하비를 보며 빅터가 동의를 구했다.
“너무 안 어울리지 않아?”
웃는 빅터를 무시한 채 중년 사내, 알프레드는 하비에게 말했다.
“알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스터스 경.”
“이제와서 멋있는 척 하지마. 이미 늦었어.”
역시나 빅터를 무시한 알프레드가 하비를 향해 본론을 끄집어 냈다.
“그럼 사업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하비가 지도를 펼치면서 본격적인 작전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알프레드가 먼저 핵심을 짚었다.
“병력은 둘로 나누어 하나는 해적과 직접 교섭, 하나는 억류된 인질을 구출한다. 간단하겐 이렇게였던가.”
이번엔 빅터가 입을 열었다.
“병력 배치는 당연히 인질 구출 쪽에 더 많이 몰아야 해. 그게 목적이니까.”
옳은 말이기도 해서 하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비가 듣기에도 교섭 장소인 세비니아 만보다 인질을 억류한 이로비나 섬 자체에 해적이 더 많다고 들었으니까.
그런데 알프레드는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유를 몰라 그를 잠시 눈에 담던 하비가 빅터를 향해 물었다.
“그럼 병력 배치는 인질 교섭 쪽에 더 싣는 걸로 하고. 뭘로 교섭하는 거지? 금화? 금괴?”
“금화는 위조하기가 좀 곤란하니 금괴로 할 생각이야.”
처음 듣는 소리에 하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위조? 정말로 넘길 생각이 아니었던 건가?”
하비는 설마 그만한 돈이 없는데 거짓말 한 거냐는 눈빛을 쏘았다. 빅터는 발끈했다.
“물론 내게 정말 그만한 돈은 있어. 그래서 시 전체 재정만큼의 돈을 넘기겠다고 해놓은 거고.”
당 회합 때도 공식적으로 밝힌 상태니 정보가 신생 해적들에게도 흘러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빅터가 확실히 그만한 재정이 있고, 자신들에게 그 돈을 넘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빅터는 그 믿음을 이용했다. 감히 하비가 제 발로 자신을 떠나게 수를 쓴 놈들이니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놈들한테 돈까지 얌전히 던져준다고? 어림도 없지.’
신생 해적과는 끝장을 봐야 속이 풀리고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빅터가 잔인하게 웃었다.
“설마 내가 그 돈을 진짜 해적에게 넘길 거라고 생각했나? 돈은 미끼야. 신생 해적에게 정말로 거액의 돈을 넘기면 어떻게 될 것 같아?”
하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 봐도 훤했다. 신생 해적은 시재정급의 부를 거머쥐게 되고, 그렇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느낌상 그들은 임페르 해적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 같았으니까.
금으로 무기와 화포가 상향되면, 신생 해적의 전투력만 높여주는 꼴이다. 그건 더한 폭력으로 돌아가겠지.
하비의 우려대로였다. 빅터는 진중한 눈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놈들은 임페르 해적단과는 달라. 임페르 해적단은 애초부터 돈만 가지면 끝이었던 놈들이었지만, 신생 해적들은 돈만이 목표가 아니더라고.”
실제로 빅터와 알프레드 무리는 상단을 정식으로 꾸린 뒤엔 약탈을 하지 않았다. 엄격하게 불필요한 살상도 금했다. 임페르 해적단이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물론 부득이하게 필요한 경우에는 숨겨진 폭력성을 드러냈지만.
하비가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면?”
“덩치를 키워서 입지 괜찮은 나라 하나를 먹고, 그걸 중심으로 식민지 건설을 하려고 해.”
빅터가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하비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판에 끼겠다는 건가.”
“그렇지.”
잘나가는 국가들이나 하는 ‘땅따먹기’ 게임에 출사표를 던지겠다는 소리였다. 꽤 배포가 큰 해적들이었다. 하필 걸려도 이런 놈들에게 걸리다니. 하비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위조는 어떤 방식으로 하려고 하지? 보통 놈들이 아니라면 확인을 아주 제대로 할텐데.”
빅터가 대답했다.
“진짜 금처럼 무게를 맞춰야 하니…. 납을 이용해서 형태는 똑같이 만들고, 겉에 금을 칠하는 거지.”
“그래봐야 잘라보면 바로 들통날 텐데? 확인도 안해보고 받을 리가.”
등을 뒤로 젖히고 팔짱을 끼고 있던 알프레드가 입을 열었다.
“위에는 진짜 금괴로 배치해 놔야지. 아래에 까는 건 가짜 금괴가 될 거고.”
미간을 좁히며 생각하던 하비가 또 다른 문제점을 지적했다.
“무게가 문제가 될텐데. 배가 해면 아래 가라앉은 정도만 유심히 봐도 무게 정도는 금방 가늠해.”
대답은 역시 빅터가 했다.
“그래서 가짜 금괴의 안에는 특별한 걸 넣을 예정이야. 그걸로 무게를 맞춰야지.”
“뭘 넣을 생각인데.”
빅터는 하비의 눈길을 슬쩍 피하더니 얼른 다른 주제로 말을 바꾸었다.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끝까지 속일 수는 없겠지. 재수 없으면 바로 들킬 수도 있고. 운도 필요해.”
“진짜 금괴의 비율은 어느 정도로 할 거지?”
하비의 물음에 알프레드가 말했다.
“30%. 많으면 40%.”
“꽤 많군. 그 정도면 바로 들키진 않겠어.”
다음 안건은 무기와 전력에 대한 것이었다.
“배에 장착될 포는?”
“우리 쪽은 신식 곡사포를 배치해 놨어. 장거리도 가능하지. 탄도가 휘니까 잘 쓰는 애들로 두고.”
이번엔 눈을 감고 있던 중년 사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놈들은 슬루인 제국이 준 화포인데, 구형이야. 무거워서 기동 속도도 떨어지고 발사도 느려.”
하비가 팔짱을 끼고 심드렁하게 앉아 있는 중년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구형 화포 같은 것들은 슬루인 제국이 제공한 건가? 왜 신형을 주지 않았지?”
중년 사내가 눈을 뜨고는 느물거리며 말했다.
“잘 짖는 얌전한 개로 키워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건 제국 놈들도 알겠지. 자기를 물어뜯을 수도 있는 개한테 좋은 무기를 줄 수 없는 노릇이고. 안 그래?”
빅터가 기분나쁜 얼굴로 끼어들어 비아냥댔다.
“아. 그래서 영감이 상단을 만들기 직전까지 내게 무기 하나 안 쥐어줬던 거였군?”
“개취급 당한 건 기분 안 나쁘고? 고작 그딴게 기분 나쁘냐?”
투닥대는 두 사람을 말린 하비가 다시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 빅터는 헛기침을 하고 양측의 전력 비교를 했다.
“범선은 양 쪽 다 갈레온선으로 동일. 차이 나는건 화력과 인력 정도인데, 용병 수는 급박하게 끌어 모으느라 그리 많이 모으진 못했어.”
갈레온선은 애초에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신식 전선이었다. 그래도 제국 측에서 배는 좋은 것을 준 것을 보면 만약에 있을 신생 해적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그때 빅터가 진지한 얼굴로 하비에게 말했다.
“넌 붙들린 외교관 인질들을 구하는 쪽으로 가.”
하비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해적들이 원하는 교섭 대상은 나인데? 그게 무슨 소리지?”
“붙들린 인질들 얼굴을 아는 건 같은 외교관인 너 정도잖아. 직접 보고 구해내라고. 그 자식들이 인질을 빼앗길 걸 예상 못할 것도 아니고, 엉뚱한 놈들을 속이기 용으로 넣어놨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렇게까지 했을 것 같진 않지만 빅터는 하비가 그 쪽으로 가길 바랐다. 하비가 안간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보낼 생각이었다.
들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해서 하비는 떨떠름했지만 승낙했다.
“그럼 해적과 직접 교섭 때 내 역할을 누가 하는 거지? 눈을 속이려면 비슷한 체격이어야 할텐데.”
대답은 빅터에게서 금방 나왔다.
“나.”
알프레드는 대놓고 한숨을 쉬고, 하비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두 사람을 설득시킬 생각인지 빅터의 말이 더욱 교묘해지고 빨라졌다.
“다른 놈에게 맡기면 조금만 말을 섞어도 금방 들킬 거야. 인질을 구할 동안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야지. 그러려면 이번 사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내가 하는 게 나아. 이로비나 섬에 대한 것도 많이 알고 있으니까.”
하비는 할 말을 잃고 빅터를 물끄러미 보았다.
“혹시라도 내 얼굴이나 경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다면? 아니란 게 금방 들통나면?”
“그건 운에 맡겨야지. 최대한 너와 비슷하게 변장할 거야.”
“…정말 어이없는 발상이군.”
걱정스러운 두 사람의 눈길에 빅터는 변명하듯 말했다.
“난 끌려가 주는 척 하고 적당히 때를 봐서 탈출할 거야. 탈출할 때 신호를 보낼 테니 그 때 바로 포를 쏴.”
“어떤 신호?”
“금괴를 싣고간 범선에 붉은 깃발을 올릴 거야.”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하비는 입술을 짓씹었다.
“깃발을 올린 뒤에 탈출을 어떻게 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어야지.”
그런 뒤 헤엄쳐서 아군의 배까지 건너오겠다는 계획이었다. 너무 무모했다.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위험한 계획에 하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
“없어. 현재로선 이게 가장 좋은 대책이야.”
그 뒤로 하비가 몇 번이나 반대했지만 빅터의 의지는 확고했다. 알프레드는 포기한 듯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긴 시간의 회의 끝에 결론이 났다. 빅터의 말대로 하비는 인질을 구하는 쪽에 섞이기로 했고, 빅터는 하비 대신 해적과 교섭하는 쪽에 섰다.
빅터는 나오려는 사용인들을 막았다. 위험한 전투라는 증거였다. 그나마 필사적으로 우기는 벤만 하비 쪽에 붙여두었다. 저번에 하비 일 때문에 아직도 마음에 걸려 하던 지라,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항구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한 뒤 배에 올랐다. 벤이 제 주인에게 결연한 얼굴로 다짐하듯 말했다.
“이번엔 반드시 제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맡긴다.”
빅터가 믿는다며 벤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런데 벤이 머뭇대다가 말했다.
“저…오기 직전에 커피하우스에 들렀는데 말입니다.”
빅터가 키우는 정보를 취급하는 곳을 일컬었다.
“뭔가 들은 게 있어?”
“로투스가의 가주가 국왕 폐하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그건 원래 국왕이 따로 만나서 심문하기로 한 거잖아.”
빅터가 낱낱이 밝힌 로투스 가의 비리를, 국왕은 따로 직접 가주를 만나 확인하고자 했다. 이미 있었던 예정이기에 빅터는 의아하게 벤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았다.
“그렇긴 한데…. 독대했기에, 들을 만한 귀도 따로 없었고….무슨 말이 오갔을 지 몰라서 말입니다.”
“우선은 신경쓰지마. 정 찜찜하면 그 일은 다녀와서 바로 확인해볼테니까.”
항구에 어느덧 배로 가득 찼다. 이야기하는 사이 하비도 도착했고, 빅터를 발견하곤 다가가려 했다. 그러다 하비는 멈칫하고는 못 본 척 뒤돌아섰다. 빅터는 벤과 이야기하느라 미처 하비를 보지 못한 듯 했다.
각자 다른 배를 타야 하기에 올라야 할 배도 달랐다. 알프레드가 동원한 용병들이 와글와글 시끄럽게 소음을 내고 있었다.
빅터는 금괴를 실은 상선에 올라야 했다. 전투선인 튼튼한 갈레온선이 아니라, 크기가 그것보다 작은 일반 상선이었다. 하비가 탈 갈레온선은 인질을 구할 배였다.
그간 무시해왔던 돈의 힘이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었다니.
하비는 새삼 감탄했다. 혼자라면 어림도 없을 전개를 한순간에 이루어냈다. 병력이 모이는 것도 금방이었다. 빅터는 더 모으지 못했다고 속상해 했지만, 하비는 사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도 대단한 것임을 알았다.
그때였다. 언제 온건지 빅터가 불쑥 나타나 상념에 빠진 하비를 붙들었다.
“왜 말도 안하고 가려고 해.”
팔을 붙들린 하비는 내심 뜨끔했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금방 찾아내는 그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못 봤어.”
“못 보긴. 아까 오려다가 도망가는 걸 봤는데.”
도망이라는 말에 하비가 눈썹을 찌푸렸다.
“...바빠 보여서.”
이 무서운 남자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모양이었다. 빅터는 걱정스럽게 이마를 구기며 말했다.
“이로비나 섬에 도착하고 나면, 화승총을 특별히 조심해. 철갑 아머도 확실히 챙기고.”
철갑은 이로비나 섬에 상륙하는 자들, 실크 재질로 만든 아머는 해적선에 올라야 하는 용병들에게 각자 배급되었다.
빅터는 그것을 한 명도 빠짐없이 돌렸다. 혹여 인력 손실이 나서 작전이 실패할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정말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고개만 끄덕인 하비가 먼저 상선하려다 반대쪽으로 가는 빅터를 붙들어 세웠다. 아까부터 입 속에 맴돌던 걱정을 뱉었다.
“쓸데없이 다치지마.”
짧은 말에 많은 의미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눈을 선선히 뜨던 빅터가 이내 씨익 웃었다.
“너도.”
하비의 시선이 한참이나 그에게 머물렀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계속 가슴에 멀미처럼 일렁였다.
‘괜찮겠지.’
자신을 다독이며 먼저 고개를 돌려 배 위로 올라갔다. 하비의 뒷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던 빅터가 벤을 불러 은밀하게 명했다.
“하비한테 함부로 하는 놈이 있다면 명부에 올려. 일 끝나고 처리할 테니까.”
“물론입니다.”
벤에게서는 ‘알겠습니다’ 도 아닌 ‘물론입니다’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해전에 능한 용병이란, 대부분 중년 사내와 연관이 있던 해적들이었다. 유명한 해적들은 아니었어도, 크고 작은 해적단에서 있었던 자들이었다. 척 보기에도 험악해 보이는 사내들이 우글우글했다.
통솔하는 건 중년 사내였지만 그와 함께 일하게 된 하비는 심란한 표정이었다.
“이번에 함께 일하게 된 분이신가?”
“곱상한 게, 손도끼질 몇 번 보면 울면서 도망갈 것 같은데?”
“으하하핫!”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용병 겸 전직 해적들을 보니 하비는 마치 자신도 해적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거친 욕설과 사람을 앞에 두고 지껄이는 저급한 소리에 하비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힐 무렵이었다. 벤이 참다 못해 으르렁대며 검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하비가 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괜히 함께 일해야 할 용병과 부딪쳐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그때 알프레드가 언제 온건지 대신 앞으로 나섰다.
“그만들 하지.”
알프레드가 유들거리며 전직 해적들에게 경고했다.
“말조심해. 이래 봬도 꽤 험하게 살아온 분이거든.”
그는 고개를 휙 돌려 엄지로 하비를 가리켰다.
“그리고 빅터가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이니, 뭐 알아서 생각하고 처신해.”
빅터의 이름에 전직 해적들이 웅성대더니 기어이 잠잠해졌다. 싸한 분위기였다. 정적을 깨고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가 하나둘 이어졌다.
“그 또라이 새끼한테 잘못 보일 이윤 없지.”
“맞아. 괜히 칼침 맞고 뒈지지나 말자고.”
“칼이면 다행이게? 돈이 썩어나는 놈이니 총 한 정당 사람 하나씩으로 아낌없이 쏴주겠지.”
“그래서 우리 할 일이 뭐라고 했지?”
삽시간에 평정된 전직 해적 무리를 보니 하비는 또 한 번 심란해졌다. 빅터는 평소에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녔길래 해적에게까지 평가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그런데 막상 작전에 들어가자 뭔가 이상했다. 물살이 거센 구간을 넘을 때 조금 위험할 뻔 한 것을 빼고는 너무 순조로웠다.
심지어 인질을 억류한 곳까지 다다랐을 때도, 신생 해적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하비는 손쉽게 외교관 인력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모든 게, 너무 쉬웠다.
타앙! 탕!
멀리서 화승총이 불을 뿜고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화승총 자체가 많지는 않은 듯 했다. 발사되는 속도도 느렸다. 재수없게 머리를 맞아 즉사하는 용병들 말고는 수적으로 우세한 지라 큰 인력 손실 없이도 몰아칠 수 있었다.
먼저 화승총끼리의 전투가 벌어졌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근접전이 되었다. 앞에 나서서 위험천만하게 뛰어들던 하비도 이마나 뺨에 화약탄이 스쳐지나간 자국이 생겼다. 그나마 벤이 더 앞서서 뛴 덕에 부상이 덜했다.
언덕에 올라 목적지에 도착하자, 하비는 화승총을 거두고 칼을 휘두르려는 해적 하나를 찔러 바닥에 내리꽂았다. 용병들이 뒤따라 해적들에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쿵! 타다닥!
긴 화승총과 칼이 바닥이 나뒹굴고, 어깨를 꿰뚫린 해적이 살려달라 빌었다. 하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인질들은 어디에 있지? 살고 싶으면 말해. 치료는 해줄테니까.”
“지…지하 2층 제일 구석 자리요!”
하비가 검끝을 빼내고는 치료 가능한 사람을 불러주었다. 그리곤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지하 감옥 2층으로!”
사람의 숨을 완전히 끊지 않고 움직임을 제압하는 정도에만 그쳤지만, 그게 더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 하비를 무시하던 용병들의 눈에 서서히 이채가 일었다.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가 바뀌든 말든 하비는 제 눈 앞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끝없이 내달려 인질들이 억류된 장소까지 향했다. 다행히 모두들 무사했다.
“수석외교관님!”
“오실 줄 알았어요…!”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심각한 고문을 당한 흔적도 없어 보였다. 감격하며 끌어안고 우는 외교관들을 달래준 하비는 그들이 진정되자 밖으로 나갔다.
바닷바람이 길게 불었다. 용병들과 해적들을 처리하고 있던 알프레드를 붙들었다.
하비가 그를 노려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이 쪽에 잔존 병력이 별로 없다는 거.”
희끗한 머리가 섞인 검은 머리가 해풍에 어지러이 휘날렸다. 알프레드는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가볍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그런데 왜 날 여기로 보내고 용병을 더 많이…. 설마, 바르뎀 경이 시킨 건가?”
알프레드가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미련한 녀석. 그렇게 말렸는데, 들어처먹질 않더라니까.”
하비의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키고 있던 벤이 물었다. 그의 얼굴도 하비와 비슷했다.
“그럼 주인님은…괜찮으신 겁니까? 빨리 가봐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데요.”
하비는 오기 직전 그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선명했다.
[쓸데없이 다치지마.]
[너도.]
왠지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비는 초조한 얼굴로 중년 사내를 다그쳤다.
“바르뎀 경이 하려고 하는게 정확히 뭐지?”
알프레드가 곤란한 듯 다른 곳을 보다가 벤의 지긋한 시선이 합세되자 순순히 털어놓았다.
“가짜 금괴 안에 폭약 가루가 들었어.”
하비는 순간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온 몸에 힘을 주었다.
“…뭐?”
“그 미친 놈은 그걸로 전부 날려버릴 생각이야.”
아주 작정을 했다. 빅터는 제대로 미쳤다. 그건 알프레드도 같은 생각이었다.
알프레드는 자신에게만 언질을 주면서 비밀 유지를 당부했던 빅터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지었다.
[그 새끼들이 다시는 하비를 바다 한가운데로 부르는 일 따윈 없게 해주겠어.]
[…요약해서, 오로지 스터스 경 때문에 이 미친 짓을 한다 이 말이냐?]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빅터가 한심한 눈으로 알프레드를 보았다.
[한 놈도 살려두지마. 폭약으로는 다 못 죽일테니 잔당은 쫓아서 완전히 없애버려.]
하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에 생각보다 병력이 없었으니, 빅터가 있는 곳에 훨씬 많을 것이다.
“당장 가봐야겠어. 바르뎀 경이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해.”
“서두르지마. 나도 여기만 정리되면 바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어이! 다시 배 띄워!”
구시렁거리는 전직 해적 용병들을 앞세워 그들은 다시 바다로 나갔다. 빅터가 하비로 위장하여 교섭하고 있을 세비니아 만으로.
***
한편, 빅터는 밤색 머리칼의 가발을 쓰고 최대한 하비의 말투를 흉내내어 교섭하고 있었다.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는 이유로 마스크까지 끼고 있어서 금방 들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 곤혹스러워 하는 중이었다. 빅터가 난감함을 감추고 체격이 크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에게 물었다.
“아직 확인이 덜 끝났나?”
“기다려.”
신생 해적은 금괴 확인을 꽤 정밀하고 곰꼼하게 진행했다. 몇 번 찔러보고 말 것이라 생각했는데, 구석구석 꺼내어 확인했다.
몇 겹으로 진짜 금괴를 쌓아놔서 망정이지, 허술하게 했으면 금방 들켰을 것이다. 여러 번 금괴를 갈라 보거나 찔러 보던 해적 무리가 빅터가 있는 곳에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빅터는 눈을 돌려 상황을 살폈다. 이곳은 본선에 쇠사슬을 연결해 바짝 붙여놓은 금괴를 가득 실은 일반 상선 위였다.
영민한 녹색눈이 옆으로 옮겨갔다.
해적의 본선은 우두머리가 전두 지휘 중이었다. 본선에서 화승총인 아쿼버스를 든 자들이 처형할 것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빅터는 그들이 총을 쓰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쏘기 애매하도록 최대한 해적과 온 몸으로 엉겨붙어 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빅터가 있는 상선에는 대머리 부관이 내려와서 감시의 눈을 빛내고 있었다. 주변에서 칼을 쥔 해적들이 잡담을 하며 떠들었다.
“피스톨 가게에 괜찮은 게 들어왔다며?”
“근데 정교하지가 않아. 좀 더 잘 빠진 것이 나와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무식한 손으로 잘빠진 거 잡아서 뭐하게? 귀족 놈들이나 어울리겠지.”
어쨌든 아직까지는 상황이 괜찮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던 빅터는 해적 부관의 허리춤에서 귀해 보이는 단검을 발견했다.
‘음?’
손잡이가 보석으로 치장된 것으로, 그냥 봐도 고가의 물건이었다. 그게 뭔지 눈여겨 보던 중, 대머리 부관이 말했다.
“이제 밀린 이야기를 좀 해보지.”
부관은 베타였는데, 우성 알파인 빅터와 체격이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체구였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단검을 빼어든 부관이 손잡이로 빅터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마스크가 날아가고, 가발도 그 충격으로 조금 벗겨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빅터가 갑판 위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터진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노려보는 빅터 앞에 허리를 숙인 대머리 부관이 비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스터스 경이 오지 않고 우리 시의원님이 오셨는지 말이야.”
빅터의 눈매가 길게 늘어지더니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어쩐지 쉽다 했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 주위를 경계하고 대답도 건성이라 이상하다 생각하던 차였다.
“오. 알고 있었어?”
빅터가 맞는 것을 본 용병들이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신생 해적들이 그들을 제압한 뒤였다.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빅터가 생각보다 너무 일찍 들켜서 계획이 이토록 빨리 어긋날지도 몰랐다. 대머리 부관은 허리를 숙여 빅터의 머리칼을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말해. 진짜 스터스 경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끝까지 빅터가 입을 다물자 대머리 부관은 빅터를 갑판으로 내던졌다. 신생 해적들이 몰려와 빅터의 머리를 갑판에 박게 하고 실크 아머를 벗겼다. 그리곤 팔과 발목을 튼튼한 밧줄로 묶었다.
팔이 뒤로 꺾인 채 완벽히 묶인 빅터가 머리를 굴렸다.
‘역시 너무 무리했나.’
하비 쪽에 몰아서 보낸 것이 독이었다. 이쪽에 해적들이 더 많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 하비에게 더 보낸 것이다.
‘알고 나면 화내겠지.’
불같이 화를 낼, 아니 차갑게 분노할 하비가 떠올라 입맛이 썼다. 그래도 이것이 마음 편했다. 하비가 다치거나 불의의 사고를 겪을까봐 불안에 떠는 것보다 자신이 위험해 지는 쪽이 훨씬 나았으니까.
빅터는 시간을 벌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다. 아직 인질을 구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조금 떨어진 이로비나 섬에서 특별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스터스 경이 아니란 걸.”
그때 우두머리 뒤로 어떤 남자가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많이 보던 얼굴이었다. 빅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한 쪽 눈에 까만 안대를 한 사내였다.
“내가 말했으니까. 바르뎀 경.”
반시체로 저택에 누워만 있을 줄 알았던 남자. 반 로투스였다. 그러고 보니 슬루인 제국과 몰래 노예 사업까지 한다더니, 여기까지 진출한 모양이었다. 빅터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놀라운데. 경에게 이 정도의 의지란 게 있을 줄은 몰랐어.”
“나도 놀랐어. 하비인 줄 알았더니 바르뎀 경이 왔을 줄은 몰랐거든.”
빅터는 서서히 뜨거운 분노가 들끓었다. 여기에 하비가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차갑게 눈을 가라앉히고 빅터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부터 대답 잘 해야 할 거야. 하비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지?”
반 로투스는 비웃더니 웃음기를 싹 거두고는 비틀대면서도 앞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려고 했어.”
그가 신생 해적의 부관인 대머리에게 화려한 단검을 건네받았다. 절뚝거리며 걸어와서는, 빅터의 위로 칼날을 던졌다.
퍼억!
갑판 위로 칼날이 꽂혀 부르르 떨었다. 빅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서슬 퍼런 단검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손잡이 끝에 슬루인 제국의 황실 문양이 있었다. 작은 태양 모양이었다. 제국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품이었다. 제국은 황실의 물건을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으니까.
빅터의 눈이 다시 반에게 돌아갔다. 반은 복수에 취한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경이 나에게 했던 그대로를 전부 돌려주려고 했지.”
“…….”
“손가락, 발가락을 몇 개씩 자르고, 살갗을 얇게 저며서 포를 뜨려고 했어. 눈알도 하나 뽑고 말이지. 아, 하나론 부족하겠어. 공평하게 두 쪽 다 뽑아야 하지 않겠나?”
반이 실성한 얼굴로 히죽 웃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영영 빛을 못 보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어. 죽지 않고 일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였는데.”
빅터는 하나하나 반이 하는 말을 새겨들었다. 빠짐없이, 모두 다 그 머릿속에 박아넣었다.
돌아가면 로투스가의 뿌리를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받은 건 배로 돌려줘야 직성에 풀렸다.
밧줄에 묶인 굵은 빅터의 팔뚝에 힘이 들어가더니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음산하게 말했다. 그의 페로몬이 스멀스멀 갑판 전체로 뻗어나갔다.
“하비를 봐서 살려줬더니. 뚫린 입으로 못 하는 말이 없군 그래.”
비록 묶여 있어도 빅터가 여전히 무섭긴 한지 반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제 경이 그리 될 거니 너무 화내지마.”
반이 눈치를 주자 대머리가 슬쩍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도 알파인지라 우성 알파가 내뿜는 페로몬이 몹시 불편했다. 눈가를 찌푸린 채 대머리 부관은 묶인 빅터를 발로 걷어찼다. 가장 여린 배 안 쪽을 노려서 찬 덕에 빅터가 헛숨을 내쉬었다.
“쿨럭!”
대머리 부관이 다시 한 번 다리를 뒤로 물리고 거세게 걷어차려던 찰나, 빅터가 온 몸에 힘을 줘서 갑판 위를 굴렀다. 그대로 대머리의 남은 다리를 날려버렸다.
콰앙!
대머리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자 빅터가 벌떡 일어나 꽂힌 단검 앞으로 다가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손이 칼날에 베이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묶인 밧줄을 끊었다. 발목에 묶인 것도 금방 풀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황한 반이 신생 해적들에게 명했다.
“자, 잡아!”
빅터와 함께 온 용병들이 저항을 시작했고, 갑판 위는 싸움터가 되었다. 해적 본선에서도 칼을 든 해적들이 뛰어내려와 난입했다. 난장판이 된 갑판 위를 헤치고 빅터는 도망가는 반 로투스를 먼저 붙들었다.
“이거 놔!”
무표정한 얼굴로 빅터가 저항하는 반의 옆구리를 찼다. 그러자 반은 덜덜 떨며 금방 힘을 잃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빅터는 늘어진 반 로투스를 질질 끌고 금괴가 쌓인 곳까지 걸어갔다.
“넌 마지막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어.”
“이봐! 나를 구해!”
반이 발악하며 발버둥쳤지만 다들 용병에 막히거나 부상을 입어서 오지 못하고 있었다. 빅터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단조롭게 말했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하비의 눈을 뭐 어쩐다고? 살갗을 저며서 포를 떠?”
빅터는 다가오던 해적의 칼을 피하면서 반을 방패로 삼았다.
“살려줘, 빨리 나를…! 크악!”
해적의 칼에 가슴을 찔린 반이 입을 벌리고 지독한 통증에 입을 뻐끔댔다. 멀리서 해적들의 외침이 건너왔다.
“저것들이…!”
“잡아!”
본선에서 보고 있던 해적들은 빅터의 예상대로였다. 동료가 다칠까봐 화승총은 함부로 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 돈이 목적이 아니라, 이후 나라를 세울 목적이라 인력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해볼만한 싸움이었다.
쿠당탕!
그 사이 빅터가 금괴가 쌓인 곳으로 순조롭게 와서 반을 집어던졌다.
“오늘부로 그딴 생각 자체를 아예 못하게 될 거야. 네 머리는 이제 하비의 이름조차 담지 못할 거다.”
빅터는 싸늘한 얼굴로 금괴 더미를 보았다. 저 속에 폭약을 담은 가짜 금괴가 쌓여있다. 속을 비운 납 속에 성능 좋은 화약 가루로 가득 메운 것이다.
빅터가 용병 하나에게 눈짓을 해 갑판 아래 빈 공간에 숨겨놓았던 붉은 깃발을 세우게 했다.
깃발이 서자 용병들이 일제히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이제 곧 암초 위에서 망원경으로 살피던 정찰병이 준비된 신호를 전달할 것이다.
빅터가 외쳤다.
“모두 지시한 대로!”
싸우던 용병들도 즉각 멈추었다. 다들 실크 아머를 벗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조금 후에 천지를 흔들만한 큰 대포 소리가 들렸다.
퍼엉-! 펑!
큰 암초 뒤에 숨겨 대기시켰던 갈레온선에서 곡선을 그리며 대포가 여러 발 날아오고 있었다. 멀리 해적 본선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본선으로 돌아와! 응전한다!”
그대로 같이 바다로 뛰어들려던 빅터는 누군가가 잡아서 멈칫했다. 뒤로 돌아보기 전에 옆구리에 칼날이 박혔다.
푹!
다행히 빅터가 기민하게 피했기에 칼날이 아주 깊게 찌르지는 못했다. 칼을 박은 자는 신생 해적의 부관인 대머리였다.
“아직 나랑 이야기가 덜 끝났잖아.”
빅터는 대머리를 노려보며 찔린 칼날을 잡아 서서히 뽑았다. 통증이 몰려왔지만 이 악물고 참은 뒤 다른 한 손은 검손잡이를 잡은 대머리 손 위를 덮었다.
빅터는 그대로 검손잡이를 아래로 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대머리 부관이 당황했다.
“뭐, 뭐야.”
악력과 힘싸움이 대머리 사이에서 벌어지고, 이미 칼자국이 있던 빅터의 손바닥에 다시 피가 흘렀다.
조금씩 힘의 우세가 빅터에게 기울었고, 검끝이 대머리 부관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검손잡이를 아래로 눌러 방향을 바꾼 것이다.
창백해진 얼굴로 빅터가 비웃었다.
“난 할 이야기 없어.”
빅터가 그대로 검을 완전히 뒤집더니 대머리의 복부를 깊게 찍었다.
“큿!”
대머리가 피를 흘리며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사이 빅터는 옆구리에 찬 검집까지 통째로 뽑았다. 찔렀던 부위에서 단검을 뽑자 대머리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쏟아져 나왔다. 대머리 부관은 출혈 부위롤 손으로 막으며 괴로워했다.
“크악!”
빅터는 검집으로 단검을 밀어넣어 꽉 쥔 뒤,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로 뒤로 엄청난 포격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퍼엉! 펑!
연쇄적으로 배가 터져나갔다. 가짜 금괴에 있던 화약들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콰아앙!
바닷속으로도 진동이 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었다. 해수면이 크게 진동하고 물결이 거세게 파도쳤다. 바다 위로 큰 원을 그리며 폭발이 넓게 퍼져나갔다.
콰앙-!
다시 한 번 폭발음이 울렸다. 신생 해적의 본선도 바로 근처에 있었고 금괴 실은 배와 쇠사슬로 연결해놨기에 저 폭발에 휘말렸을 것이다.
몸 속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피를 느끼며, 빅터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을 잃지 않으려 했다. 바닷물이 닿는 상처 부위가 격렬하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준비된 곳까지 헤엄쳐 가야 했다.
‘젠장…….’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평소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손에 쥔 단검에도 힘을 주었다.
이걸 들고 가면 하비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슬루인 제국이 신생 해적에게 돈을 주어 움직였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신생 해적의 두목이 이런 모양의 단검을 차고 다니는 것은 목격자가 많았다. 이로비나 섬과의 거래에서 슬루인 제국을 명목상으로 제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뒤로 밀리는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해류도 더 거센 것 같았다.
‘안되는데….’
빅터는 숨이 부족해져서 머리를 간신히 해면 위로 내밀어 보았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멀리 왔다.
금괴를 실었던 배는 산산조각 나 있고, 배 파편과 신생 해적들의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저 속에 반 로투스도 있을 것이다. 형체도 못 남기고 폭사했을지도 모르고. 비참한 최후였다.
신생 해적의 본선도 피해를 크게 입은 채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그 뒤를 빅터가 동원한 갈레온선이 쫓고 있는 중이었다.
빅터가 말한대로 이 악물고 뿌리째 뽑으려 달리고 있었다. 다 잡으면 임금을 두 배로 주겠다는 말에 돈독이 오른 것이다. 빅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잘 하고 있네.’
대포 소리가 요란하고, 서로 쏴대고 있는데 한 눈에 봐도 신생 해적 쪽이 불리해 보였다. 구형 화포는 비거리도 짧고, 화력도 신형에 비해 약했다. 직선으로 쏘아지는 구형에 비해 신형은 곡사포로 멀리까지 갔다.
이제 얼마 안가 빅터가 고용한 용병들에게 붙들릴 것이다. 아니면 붙들리기 전에 그대로 분해되어 바다 속으로 영원히 가라 앉아도 좋았다.
‘어?’
그때 빅터가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저 멀리 갑판에 서서 망원경으로 이 쪽을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누군가를 절실하게 찾고 있는 듯 했다. 빅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눈치를 채고 바로 왔을 것이다. 돌아가면 잔소리를 크게 들을 지도 모른다. 망원경으로 빅터를 발견한 건지 배가 움직였다.
힘들여 헤엄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려니, 어느덧 배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배가 거의 붙자, 갑판 위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던 남자가 들고 있던 망원경을 떨어뜨렸다. 빅터를 발견하자마자 남자의 곁에 있던 벤이 얼른 사다리를 내렸다.
망원경을 떨어뜨린 남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빅터는 뭐라고 외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저 남자가 하비인 건 알겠는데, 그 외에는 다 불투명했다.
삐이이이
빅터의 귀에서 이명 소리가 났다. 폭약이 터진 게 영향을 준 듯 했다. 하비가 무슨 말을 외치는 지 알고 싶었다.
욕을 하고 있을까. 속였다고 화내고 있지는 않을까. 작전은 제대로 잘 된 건가. 이곳까지 온 걸 보면 확실히 잘 되었겠지.
하비 스터스, 그는 자신과 연계되면 참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준다. 지금은 몹시 분노한 상태다. 빅터는 왠지 멍했다. 바닷속도 따뜻하고, 이대로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하비의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허공에 멈췄던 모든 소리가 일시에 귓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올라와. 당장!”
불안한 얼굴로 하비가 외치고 있었다.
“빅터!”
처음으로 불리는 이름이었다. 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준다면 좋을텐데, 철없이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을 스쳤다. 실제 들으니까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로 좋았다.
빅터를 살피던 하비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다친 건가? 피가…….”
그러고 보니 옆구리에 칼을 맞았다. 아직도 피가 바닷속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러다 피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안색이 달라진 하비가 겉옷을 훌훌 벗었다. 자신이 가겠다며 말리는 벤의 말도 듣지 않았다.
하비는 경고하듯이 빅터에게 말했다.
“기다려. 안 올라올 거면, 내가 갈테니까.”
정말로 바다로 뛰어들 기세였다. 빅터는 어렴풋이 하비가 헤엄을 못 친다는 것을 떠올렸다.
“거기 있어. 헤엄도 못 치면서, 무슨.”
빅터가 머뭇거리던 자신을 비웃었다. 아직도 두려움이 남았던 걸지도. 하비가 정말 마음을 돌려준 걸까. 올라가면 다시 차가워지는건 아닐까. 전날밤, 그런 악몽을 실제로 꾸기도 했다. 선뜻 가기가 망설여졌던 이유였다.
그제서야 빅터는 내려진 사다리를 잡고 천천히 올라갔다. 시체를 뜯어먹다 여기까지 쫓아온 상어가 아슬아슬하게 물러났다.
사다리 끝 부분에 다왔을 때 하비가 손을 내밀었다. 단단하고 다부진 손이었다. 빅터는 그 손을 잡고 올라섰다.
“다른 놈들은?”
말없는 하비를 대신해 눈치 빠르게 벤이 대답했다.
“이미 다 건너왔습니다. 실종자가 두 명 있긴 하지만요.”
갑판 위에 올라선 빅터는 문득 한 팔을 불쑥 올렸다. 하비에게 잊지 말고 제일 먼저 이야기해주려고 했다. 중요한 증거품이 될 단검을 내밀었다. 조금 머리가 어질거리고 시야가 흐릿했지만 아직 견딜 만 했다.
“이건 슬루인 제국이 해적에 관여했다는 증거야. 본국에 가지고 돌아가면 유용할 거다.”
하비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물끄러미 빅터를 보았다. 극악한 환경에서 헤엄쳐 오면서도 이것만은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단검에 새겨진 문양에 손바닥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맞은편 손에서는 또 칼날을 맨손으로 쥐기라도 한건지 붉은 피가 철철 흘렀다.
하비는 눈시울이 시큰거리고 가슴 속이 울컥 달아올랐다. 이곳까지 오면서 얼마나 지옥이었는지 모른다. 온갖 불길한 상상이 실체인 것처럼 덮쳐와서 내내 불안에 떨었다. 빅터가 미처 뛰어내리지 못해 폭발에 휘말리거나, 잘못되어 해적에게 당하는 장면들이 시시때때로 떠올랐다.
그런데 피를 흘리면서도 먼저 내미는 게 자신에게 유용할 증거품이라니. 가슴이 꽉 차다 못해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이 무식하리만큼 직진밖에 모르는 남자는 태평하게 이런 것이나 내밀고 있다.
하비는 눈을 일그러뜨리더니 간신히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넌 왜 그렇게 항상 제멋대로야.”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적재적소에 필요한 손을 내밀었다.
[밖으로 나갈래? 여긴 너무 숨막혀. 파티도 재미 없고.]
태양빛에 그을린, 상처투성이인 작은 손이 예전처럼 자신을 향해 곧게 뻗어지고 있었다. 작은 나뭇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덧 뿌리 깊게 박힌 거대한 나무의 것처럼 굵고 단단해졌다.
그 손 위로, 피와 바닷물에 푹 절어서도 본연의 기세와 열정은 죽지 않는 소년같은 눈은 여전했다.
빅터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적에게는 끝없이 잔인한 녹색 눈이 길게 웃었다. 따스함이 가득했다.
“받으라니까.”
하비는 천천히 빅터가 목숨 걸고 가져온 증거품을 받았다. 벤이 응급 치료가 가능한 자를 불렀고, 빅터는 그제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급히 알코올로 소독한 뒤 출혈 부위를 틀어막고 붕대를 감았다.
얌전히 치료를 받고 있는 빅터를 보면서 하비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얼마나…….”
알프레드에게 가짜 금괴 안에 든 것이 화약이라는 걸 알고는 더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아마 사전에 말하지 않았을 것임도 알았다.
마음 같아선 정말 속인 것에 대해서 따져들거나 화내고 싶었는데, 그럴 마음조차 사라지게 했다. 빅터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하비는 선전 포고를 했다.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하지.”
빅터가 피식 웃었다.
“너와 할 이야기라면 기꺼이.”
벤은 커피하우스에 가서 이것저것 보고하고 할 일을 해야겠다며 먼저 사라졌다. 빅터는 벤에게 로투스가에 관해 모조리 알아내라고 따로 지시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전면전을 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느긋하게 하비와 시간을 즐길 생각이었는데, 할 이야기가 있다던 하비는 다른 일정을 입에 올렸다.
“난 정직 처리를 해야 해서. 외교부에 다녀와야해.”
빅터가 눈매를 찌푸렸다. 고집스러운 건 여전하다.
“꼭 그만둬야겠어?”
“약속했으니까.”
“누구와? 네가 하지도 않은 일로 널 비난하고 욕 보였던 사람들?”
예상했던 빅터의 싸늘한 반응에 하비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경도 마찬가지였잖아.”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알았어.”
결국 빅터는 한숨을 내쉬며 하비를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구출해 온 억류된 외교관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외교부에도 보고 하는 겸, 아직 하비가 할 일이 많았다.
‘잠깐 저택에 들러서 가져올 것도 있고.’
하비는 생각하다가 미소지었다. 드디어 돌려 주는 구나. 온전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당시 빅터의 억눌린 목소리가 지금도 뇌리에 선명했다.
[이건 두고 간다. 나중에 돌려줘. 줄 생각이 생기면 그때.]
하비는 자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그럼에도 뭔가 서툴렀던 것들이 떠올랐다. 입은 자신을 증오하라느니, 싫어해도 된다느니 했지만 눈을 보면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실어 보냈던 것도 생생했다.
빅터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게 서투르고 어설펐다. 사람들 앞에서 군림하며, 적을 혓바닥 위로 올려 가지고 노는 것도 곧잘 했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선 풋풋한 모습마저 보이곤 했다. 어설픈 질투까지 포함해서.
하비가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배웅 나온 집사와 들어가려던 하비를, 빅터가 아쉬운 얼굴로 슬쩍 붙들었다.
“아까 전에 나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저택으로 들어가던 하비가 멈칫하더니 뒤돌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있지. 다녀와서 해.”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저 표정을 보니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빅터는 일말의 기대감마저 생겼다. 그런데 하비를 보내고 났더니 밀렸던 통증이 몰려왔다. 하비와 함께 있을 때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들떠서 상처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윽….”
날카로운 칼날을 맨 손으로 쥐느라 또다시 생긴 상처가 욱신거렸다.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반복된 일이라 다 낫기도 전에 손바닥이 갈라졌다.
‘그나마 두 번 다 왼손이라 다행인가.’
허리에 단검으로 찔렸던 곳도 터진 건지 출혈이 생겼다. 빅터는 너덜거리는 몸을 이끌고 간신히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돌아가자마자 낯선 풍광이 보였다. 빅터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저택 앞에 서 있었다. 게다가 황실의 것으로 보이는 짐마차 뒤로 황실 군대가 바삐 움직였다.
마차에서 급히 내린 빅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구르는 사용인들을 먼저 보았다. 그들은 병사들을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황실 근위대가 여긴 왜…?’
현 국왕의 근위대였다. 빅터가 빠르게 눈을 굴려 이 곳에서 가장 높은 책임자를 찾아냈다. 저 쪽에서 지시하고 있는 부대장이 보였다. 병사들이 왔다갔다 하며 값나가 보이는 물건들을 빼가 거대한 짐마차에 실었다.
빅터는 그에게 다가가 상황을 물었다.
“무슨 일이지?”
“바르뎀 경이십니까.”
바로 알아본 부대장이 주먹을 가슴에 대고 간단한 예를 취한 뒤, 국왕의 전언을 전달했다.
“국왕 폐하의 명입니다. 오늘부로 바르뎀 경의 의원직을 박탈하고, 전재산을 압류합니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간 그가 이곳에서 해온 것들이 얼마며, 바친 것들이 얼마나 되고, 심어 놓은 새로운 문물들이 수십 개인데.
빅터는 노기를 참지 않고 드러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그의 분노를 타고 공기를 매섭게 찢었다.
“이유는? 아무리 폐하라도 내게 이럴 권리가 없을 텐데.”
근처에 있던 병사들 중 일부가 신음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혔다. 물건을 놓치는 경우도 생겼다.
부대장은 베타였기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언제 대해도 빅터 특유의 위압감이나 살기는 힘들었다.
전장에서 구른 그조차도 이럴진대, 펜대나 잡던 문인들은 오죽 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빅터의 위압감에 대한 이유를, 그도 이제야 알았다.
'해적이라...'
부대장이 허리를 펴고 이어 말했다.
“경의 소유로 된 상단이 해적질로 쌓아올린 것이라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무고한 시민의 피로 질서를 어지럽히고, 생명을 빼앗은 돈으로 부를 쌓은 경의 행위를 부당하다 여기셨습니다. 이제 질서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 경의 재산을 황실 국고로 압류하는 바….”
빅터는 화난 목소리로 부대장의 말허리를 단숨에 끊었다.
“개소리 하고 있네. 질서? 뭘 다시 바로 잡아? 그냥 내 것이 탐나서 그렇다고 해.”
“바르뎀 경! 국왕 폐하를 모독하는 겁니까?”
예전부터 본국의 국왕인 이나시우스 2세는 탐욕이 많은 자였다. 신교와 구교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해상 무역으로 부를 얻은 빅터 같은 신흥 귀족에게 손을 내민 것도, 같은 이치였다.
최근 전쟁에서 패해 막심한 손해를 입었던 차에 보기 좋은 먹잇감이 걸린 것이다.
빅터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어르고 달래는 것도 귀찮았는데, 마침 좋은 기회겠다 싶었겠지.”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경의 마음은 이해하니 소정의 폭언은 못 들은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빅터는 냉소했다.
“배려, 아주 고맙군 그래.”
“이왕 베푸는 김에 조금 더 베풀겠습니다. 폐하의 은총이라 생각하십시오. 저택도 원래는 바로 압류지만, 10일 정도 여유를 드릴테니까.”
“하. 그 사이 다른 살 곳을 알아보라?”
“드릴 수 있는 기한은 그 정도뿐입니다.”
빅터가 확신하는 말투로 물었다.
“로투스가의 가주, 그 다 죽어가던 놈이 찌른거지?”
침묵하던 부대장이 곧 딱 잘라 말했다.
“제보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빅터는 잠시의 머뭇거림을 보았고, 로투스가의 가주가 뒷배에 있음을 확신했다.
로투스가의 가주는 가문의 비리를 밝히는 자리에서, 국왕에게 역으로 제안했을 것이다. 국왕의 욕심을 꿰뚫고, 그에게 빅터의 재산을 전부 가질 수 있다고 꾀었을 테다. 노련한 수완가의 발상이었다. 여기까지는 미처 대비하지 못 했다.
빅터가 낮게 이를 갈았다.
“죽기전에 발악을 했군. 나름 효과적이었어.”
부대장이 빅터의 눈을 회피하더니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럼.”
그때 나스타와 레나, 진이 빅터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다들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주인님!”
“어떡해요. 황실 근위대가 와서….”
“다 가져가는데, 이걸 어떡하죠? 저택도 압류한다고 합니다.”
아직 생각이 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빅터는 안절부절 못하는 사용인들에게 되도록 차분하게 말했다.
“다 들었어. 호들갑 떨지마.”
그때였다. 어디선가 갈색 말을 몰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빅터도 언젠가 본가에서 본 적이 있는 사용인이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그 남자가 빅터를 찾아다녔다.
“바르뎀 경 있습니까!”
빅터가 그를 불러세웠다. 이 시점에 왜 본가에서 사람이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있어. 난 왜 찾아.”
“가주님이 직접 내리신 서지입니다. 받아보시죠.”
바르뎀 가의 가주는 현재 다른 지방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빅터는 정확히 언제 돌아온다는 언질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당황한 빅터가 가문의 독수리 문양이 박힌 서지와 가져온 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 영감이? 언제 돌아왔어?”
빅터의 불경한 발언은 익숙한 듯 사용인은 조금 미간을 찌푸린 것 말고 비교적 담담하게 대답했다. 현 바르뎀 가의 가주는 실력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빅터의 가벼운 말투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으니까.
“어제 도착하셨습니다.”
“왜 나한테 미리 연락을…. 뭐야, 이건.”
서지를 읽는 빅터의 눈이 서서히 커지다가,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일그러졌다. 빅터 바르뎀의 가주 대리 자리를 다른 자가 대신한다는 서지였다. 빅터의 등 뒤로 여전히 병사들이 물건을 가지고 저택을 드나들었다.
황당한 얼굴로 서지를 읽은 빅터가 그 서지를 구겨서 휙 내버렸다. 가주의 서지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보고도 못 본 척, 본가의 서지를 전달한 사용인이 빅터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런 소식으로 찾아뵙게 되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마지막 인사 올리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르뎀 본가에서 온 사용인온 그대로 말을 휙 타고 떠나버렸다.
분위기가 더 싸늘하게 식었다. 국왕의 명에 이어 바르뎀 본가에서의 서지라니. 놀란 사용인들 중에서 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 뭔데 그래요?”
레나는 빅터가 버린 서지를 주워서 펼쳐 들었다. 앞부분은 눈으로 읽다가 뒷부분은 부들부들 떨며 소리내어 읽었다.
“…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해적을 이용해 거짓된 부를 쌓은 일에 큰 실망을 느꼈다. 바르뎀 가의 명성에도 치명적인 해를 끼친 빅터 바르뎀을, 오늘부터 바르뎀 가에서… 제한다?”
모든 사용인들 사이에서 숨소리조차 멎었다. 어느 새 레나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다.
“다들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주인님을! 그 동안 얼마나 모두를 위해 일하셨는데……!”
빅터의 숨은 의도가 어떠했든, 그가 뼈빠지게 일한 건 사실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과도한 업무를 처리하고, 대리 가주 노릇도 착실히 해왔다.
이번에도 빅터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다. 버린 사람 치는 모양새였다.
여기에도 로투스가가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빅터가 바르뎀 가의 정식 가주가 되면, 회생의 기회조차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테니까.
사용인들이 망연자실하게 주인인 빅터의 입만 쳐다보았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빅터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생각 정리를 끝냈기 때문이었다.
“뭘 어떡해. 얼른 들어가서 병사들 모르게 물건 챙겨 나와.”
“예?!”
국왕이 상단까지 앗아간다 명했지만, 이미 그건 알프레드의 소유였다. 알프레드의 국적은 빅터의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빼앗아갈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저택과 곳곳에 사둔 사유지들, 본국의 은행에 저축해둔 금인데, 그건 어쩔 수 없이 저 욕심 많은 국왕에게 넘겨야 할 판이다.
‘다른 나라 은행에 혹시나 해서 약간 넣어둔 것이 있는 게 다행인건가.’
그것까지는 추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든 잔금을 빼올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는 있다. 사업 물건만 제대로 있다면 말이다.
빅터는 이제 가족보다 더 가족같아진 사용인들에게 미소지었다.
“너희라면 좋은 게 어디 있는 지 위치도 잘 알테고.”
“네?”
“그게 무슨….”
빅터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몹시 홀가분해 보였다. 그가 붕대 감은 손으로 더블릿을 탈탈 털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동안 내 밑에서 고생 많았다. 이렇게 된 건 재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더 고생할 필요 없어.”
하비의 일에 완전히 몰두하느라 더 큰 그림을 못 봤다. 그 사이 그의 적은 남은 힘을 끌어모았고, 가장 효율적으로 복수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빅터의 실책이었다.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게 이곳의 생리였다. 알고 있었는데, 못 했다. 그의 시선이 한동안 한 곳에만 머물러 미리 막을 수 있는 작은 신호를 놓쳤다.
빅터의 사용인들이 울상이 되어 빅터를 보았다.
“주인님…….”
“각자 갈 길 가고, 이번 달 치 봉급은 챙겨갈 저택의 물건으로 대신하지.”
다들 무슨 의미인지 금방 와닿지 않아 멍청한 표정이었다가 울컥했다. 지금 그들의 주인은 자신들을 나스타, 레나, 진, 다른 사용인들이 입 다투어 따져들었다.
“우리가 가긴 어딜 가!”
“끝까지 같이 갈 거라구요.”
“괜찮은 자리에 있는 적당한 주택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쪽으로 옮기시죠.”
“거기서 다시 시작하면 될 겁니다.”
여기저기서 결연한 말들이 나왔지만, 빅터는 어두운 얼굴로 피식 웃기만 했다. 그 마음들이 고맙기도 했지만, 이토록 따르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감이 들어서였다.
그토록 스터스가를 지키려 들었던 하비의 마음이 이제와서 조금, 이해되었다.
사랑에 눈멀어 별러왔던 복수를 미뤘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봐오고 걸어온 세계는 언제나 잔인했다. 방심하면 등 뒤로 거침없이 칼을 찔러 왔다. 그런 세계인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다지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건 있었다.
‘이제 좀 제대로 잘해주고 싶었는데.’
가진 사유지를 돌면서 여행도 다니고, 아픈 것도 다 낫게 해주고 싶었다. 빅터가 허탈하게 웃었다. 너무 웃겼다.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었다.
참으로 더러운 세상이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쓸데없이 공평하기까지 했다. 언젠가 다 가져가도 좋은데, 그게 왜 하필 지금이냔 말이다.
빅터는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레나가 걱정스럽게 다가섰지만 차마 붙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주인님…….”
빅터는 미친 사람처럼 끅끅대며 웃었다. 그 웃음에 광기마저 보였다.
언젠가 임페르 해적선 안에서 어린 빅터는 보이지 않는 신과 내기를 했다. 어차피 아무리 빌어도 신의 가호 같은 것은 없었다. 하비가 보낸 편지에서 신을 찾았지만, 그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만약 자신이 끝까지 살아남아 하비를 만난다면 당신이 한 번 이긴 것이라고. 그 뒤로 하비에 대한 복수가 성공하면 빅터는 자신이 이긴 것이라 선포했다.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보며 빅터가 욕지기를 뱉었다.
“하. 이번엔 완전히 졌네. 빌어먹을 놈.”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는 그의 눈을 가려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을 가려 사랑하는 이를 괴롭게 했다. 겨우 만회할 기회가 오자, 이번엔 그가 쌓은 모든 것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손과 발을 잘라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비에 대한 복수는 반도 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를 더욱 지옥으로 이끌었으며, 결국 이 꼴이 되었다. 그 어리석음은 빅터에게 더한 상처만 남겼다.
터져나오던 빅터의 웃음이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하비를 힘들게 했던 벌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건지도.’
그리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 편했다. 정말 그런 거라면 달게 받아들여야지.
빅터는 머리를 흔들어 달려드는 잡다한 생각들을 날려보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이대로 다 잃으면, 앞으로 하비의 약값조차 대지 못할 수도 있다. 거기다 멀리 데려온 저명한 의사들을 유지하는 일은 제법 큰 돈이 드는 일이었다.
외국의 은행에 있는 돈은 가져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리 큰 돈도 아니라 작은 저택이라도 하나 구입하면 별로 남는 것도 없었다.
하비는 자신이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빅터는 하비와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었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노력들이 스터스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짧은 수명의 숙명을 피하고, 하비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이라 보고 있었다. 실제로 매우 효과가 있었다. 당장 하비를 괴롭게 하던 위통도 거의 사라지지 않았는가.
‘어떻게 해야….’
빅터의 정신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머릿속에서 어지러운 상념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한 가지 생각만 하기 힘들었다.
그런 빅터를 스쳐 지나가며 황실 병사들이 저들끼리 잡담을 했다. 이번 신상 머스킷이 어떻다는 둥, 누군가가 관리를 잘 못해 화약고가 터졌다는 둥, 무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도 모르게 가만히 듣고 있던 빅터는 눈을 빛냈다. 평소에도 사람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어두는 것은 어릴 때부터 습관이었다. 소탕한 신생 해적들이 하던 대화가 번뜩 떠올랐다.
[피스톨 가게에 괜찮은 게 들어왔다며?]
[근데 정교하지가 않아. 좀 더 잘 빠진 것이 나와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무식한 손으로 잘빠진 거 잡아서 뭐하게? 귀족 놈들이나 어울리겠지.]
어떤 아이디어가 빅터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밑그림 그려졌다.
‘혹시 그것이라면.’
심호흡을 크게 한 빅터는 천천히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디 가세요?!”
“주인님!”
빅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섬뜩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너흰 따라오지마.”
빅터는 저택에 들어가더니 권총 한 자루를 들고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타악!
하비의 손에 쥐어 있던 펜이 힘없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뭐? 바르뎀 경이?”
외교부에서 잔업을 처리하고, 인질 구출건과 관련한 보고서를 쓰고 있던 하비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예! 국왕 폐하로부터 시의원 박탈에, 전재산 압류에, 저택까지 넘어가게 생겼답니다!”
“거기다 바르뎀 가로부터도 버림 받았고요. 가엾은 분…….”
빅터가 인질 구출을 위해 애쓴 것을 알고 있는 외교부 직원들은 하나같이 안됐다며 혀를 찼다. 하비는 빅터가 있을 방향을 본능적으로 휙 보았다. 유리창 너머에는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새들만 보였다. 하늘이 붉게 저물고 있었다.
하비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건 정말 아니다. 그에 대한 처분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 뭔가 불의가 개입되었다. 뚜렷한 목적을 가진 불의 말이다.
빅터가 그간 얼마나 악을 쓰며 쌓아올린 견고한 황금성이었는데. 온갖 울분을 이겨내고 복수심 하나에 매달려 온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했던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거기다 가문에서 퇴출이라니. 이게 무슨….’
하비가 털썩 주저앉으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하비와 빅터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외교부 직원들이 눈치를 보았다.
“안 가보세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하비가 쓰다 만 보고서를 내려보았다. 천천히 다시 앉은 하비가 펜대를 쥐었다.
“…할 일이 아직 남았잖아.”
하비는 입술을 꾹 물고 더욱 집중하려 했다. 빨리 끝내야겠다. 그런데 그럴수록 빅터의 얼굴이 눈 앞을 아른거렸다. 걱정이 되어서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외교부 직원들이 두 팔을 걷어 나섰다.
“이럴 때가 아니시잖아요! 얼른 가보세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이 정도는 믿어주실 수 있잖아요. 어서요!”
고민하던 하비는 굳은 얼굴로 외교관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럼 이번만 맡길테니, 고생해. 고맙다.”
“맡겨만 주십시오!”
“바르뎀 경은 우리 외교부의 은인이신걸요.”
“빨리 가시죠!”
외교관들의 응원을 받으며 하비가 외교부 건물 밖으로 말을 타고 뛰쳐나왔다.
곧장 빅터의 사유 저택으로 갔지만 참담하고 황량했다. 북적대던 저택은 생기가 하나도 없었고, 텅텅 비어 있었다.
그 많던 사병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문지기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가 하비를 저택 응접실로 안내했다. 몇몇 사용인들과 함께 앉아있던 레나가 하비를 발견하고 일어났다.
“스터스 경! 오셨어요?”
레나는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였다. 당연했다. 하비는 입술을 깨물고 불안을 삼켰다.
“괜찮나? 어떻게 된 거지? 바르뎀 경은? 남은 치료는 제대로 한 건가?”
평소의 하비 답지 않게 급한 듯 빠른 말투였다. 이제 바르뎀 경이 아니지만, 하비는 아직 귀족의 경어를 붙였다.
그때 한 쪽 눈에 안대를 한 익숙한 얼굴이 응접실로 등장했다. 하비의 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을 때 내내 스터스가에 머물렀던 의사였다. 의사는 손을 탈탈 털며 혀를 내둘렀다.
“그 분은 제가 급한대로 손봐드리고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체력 좋으신 건 여전하시더군요.”
그제야 정신 차리고 둘러보니 다른 익숙한 사용인들이 여럿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레나가 하비의 눈치를 살폈다. 빅터가 입단속을 시킨 모양이었다.
“그게…저….”
“나한텐 말해도 괜찮아.”
하비가 타이르자 머뭇대던 레나가 이실직고했다.
“주인님이 총 한 자루만 가지고 방에 틀어박히셔서, 다들 걱정하고 있던 차였어요.”
“…총을 가지고?”
하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걸로 뭘 하려는지 몰라도 좋은 의도 같지는 않았다. 대체 무얼 하려고 권총을 가져간 것인지.
또 레나가 울 것 같은 얼굴이라 하비는 우선 그를 다독였다.
“내가 가볼테니까 신경쓰지 말고 있어.”
하비는 값어치 나가는 가구나 물품들이 다 빠지고 텅텅 빈 빅터의 저택 안을 불안한 마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빅터가 자주 있는 개인 집무실 문 앞에 서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직 총소리는 안 났어.’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하비는 자신을 안심시킨 뒤 노크를 했다. 그러자 평소보다 날이 선 빅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말랬잖아.”
“나야.”
방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갈까 고민하던 차, 빅터가 방 안에서 말했다.
“들어와.”
하비가 서둘러 들어가자 레나의 말대로 총을 쥔 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빅터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개인 집무실의 책상 근처에 있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한 손은 붕대를 감고 있고, 상의를 탈의한 채 옆구리에도 어깨까지 이어지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빅터는 무덤덤한 얼굴로 하비를 잠깐 쳐다보더니 다시 권총을 살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여기까진 왜? 바쁜 거 아니었어?”
막상 얼굴을 보니 하비는 머리가 백지가 되었다.
“소식 들었어.”
어떻게 말해야 위로가 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갑자기 하루만에 모든 걸 다 잃은 사람에게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혼돈 뿐인 머릿속을 뒤져 간신히 꺼낸 말이 고작 이것이었다.
“…괜찮나?”
빅터가 총을 쥐고 살피면서 하비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글쎄, 괜찮은 건가? 잘 모르겠어.”
그리곤 흘끔 하비 쪽을 본 빅터가 총을 잠시 내려두었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빅터는 진지한 얼굴로 하비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빅터의 드넓게 펼쳐진 단단한 맨어깨에 생채기가 가득 했다. 근육으로 빠짐없이 둘러싸인 복부도 마찬가지였다. 붕대가 감긴 곳 외에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자는 눈빛이 더 아파 보였다. 빅터는 눈가를 길게 찡그렸다.
“넌 나 때문에 다 잃었는데, 나만 다 쥐고 있는 건 불공평하잖아?”
빈 웃음을 지으며 빅터가 놓았던 총을 다시 집어들었다. 마치 방아쇠를 당기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본 하비가 달려들어 아예 총을 잡아채려 했다.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빅터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다 뒤로 넘어갔다.
출렁!
하비는 빅터를 아래에 깔고 총을 들고 있는 한 쪽 팔목을 여전히 꽈악 붙들고 있었다. 손에서 권총을 잡아 빼내려고 노력하면서 하비가 절실하게 말했다.
“이러지 마.”
“뭘?”
빅터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비를 올려다 보았다.
그 사이 하비는 완력으로 총을 빅터의 손에서 완전히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예 권총을 손이 닿지 않도록 멀리 던져 치워두었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를 지켜보던 빅터가 뭔가 깨달은 듯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내게 남은 게 없는데 무슨 의미로 살라는 거지? 더 살고 싶지도 않아.”
잠깐 생각하던 하비가 간결하게 답했다.
“복수해야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오히려 당황한 건 빅터였다.
“어?”
“네 가문은 두 번이나 널 버렸어. 국왕 폐하도 마찬가지지.”
“…….”
“끝까지 살아남아서 잘되는 게 가문에 대한, 국왕 폐하에 대한 복수야. 알겠나?”
멍하게 하비를 올려보던 빅터가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난 이제 복수라면 지긋지긋한 사람인데.”
이제 그런 것으로는 자신을 살게 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빅터가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권총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공평하려면 역시 내가 없어지는 게….”
하비는 다시 빅터의 팔을 잡아 눌렀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다른 것을 생각했다.
빅터를 이 세상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뭘까. 문득 좋은 생각이 스쳤다. 정신적으로 몰리다보니 하비는 평소라면 절대 제정신으로 못할 행동과 말을 생각해 냈다.
하비는 다른 손으로 회중 시계가 함께 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빅터가 놀란 눈으로 하비가 꺼내든 것을 보았다. 자신의 눈색을 닮았다던 영롱한 녹색빛을 내는 브로치였다. 하비가 아직 빅터를 완전히 믿지 못한 와중에도 무의식 중에 사버린 그 문제적 물건이었다.
하비가 직접 훈장처럼 브로치를 빅터의 가슴에 대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있잖아.”
하비는 서툰 몸짓으로 빅터의 심장에 박아넣을 것처럼 꾸욱 눌렀다. 빅터가 죽을 힘을 다해 꽉 쥐고 왔던 제국의 증거품이 그의 손바닥에 새겨졌듯이, 브로치의 흔적이 맨살에 닿아 자국을 만들었다.
누른 채로, 하비가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상상도 못한 입술이 고스란히 부대끼자, 빅터의 눈이 미친듯이 흔들렸다. 이건 예상도 못한 전개였다.
능숙하지 못한 키스였지만, 확실히 혀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제대로 된 것이었다. 빅터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고, 그 사이로 하비의 것이 더욱 거칠게 난입했다.
뒤늦게 정신차린 빅터가 적극적으로 반응하려 했지만 하비의 입술은 이미 떠난 뒤였다.
저지른 짓에 대한 감정 때문에 하비의 눈과 입술이 조금 붉어졌다. 열기가 오른 얼굴로 하비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와서 좀 지겨울 수도 있지만.”
하비는 각오가 가득한 얼굴로 귓가에 속삭였다. 뜨거운 숨이 닿았다.
“안 지겹게 해줄테니까."
붕대 감긴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빅터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너무 벅차서 말도 안나온다는 표현이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일테다. 지나치게 행복해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뭐야. 지금 그걸 유혹이라고 하는 건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빅터는 계속 바보같은 웃음이 나왔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빅터가 눈을 덮었던 손을 치우고는 여전히 걱정과 염려를 가득 담은 밤색눈을 들여다 보았다.
‘이런 어설픈 유혹에도 넘어가는 나도 나지만….’
하비의 턱을 끌어당기면서 빅터가 옅게 미소지었다.
“다 얻은 것 같네. 고마워.”
그럼에도 하비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이제 오해를 풀어줄 시간이었다. 빅터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쩌나.”
결국 빅터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난 절대 죽을 생각 없거든.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
어리둥절해 하는 순진한 밤색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간질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뭘 오해한 거야. 총으로 내 머리라도 쏠 줄 알았나? 안에 화약도 없어.”
아니었던 건가. 멍하니 있던 하비가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로 항변했다.
“다들 걱정하고 있길래.”
“하여간 다들 걱정만 많아서. 아, 벤의 걱정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군. 로투스 가주가 이상하다고 미리 언질을 줬는데.”
충만하게 웃고 있는 녹빛의 눈을 마주보며 하비가 말했다.
“걱정 많이 했어.”
“내 사용인들은 항상 걱정이 많….”
“아니, 내가.”
단호하게 말한 하비가 빅터의 가슴에 얼굴을 내렸다. 의사가 감아준 새 붕대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하비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걱정했다고.”
의사 말론 피가 나든지 말든지 바닷물을 뒤집어 쓴 게 찜찜하다는 이유로, 오자마자 씻고 봤다는 빅터였다. 상처 부위를 피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겠다고 했는데 바로 거절하며 그대로 샤워실로 직행했다고 했다.
[하비가 해주는 거라면 모를까.]
빅터의 말을 고스란히 전달해주며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것이 생각나 하비가 피식 웃었다.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죽을 생각을 하는 지 알고, 정말 놀랐다.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자신의 평생을 옥죄온 이 남자가 사라진 인생은, 생각만으로도 허전하고 끔찍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겠지. 잠시나마 함께했던 좋은 기억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기분 탓인지 체온이 올라가는 듯 했다. 오랜만에 살갗이 닿아서인지 몸이 닿은 것 만으로도 둘 사이에 묘한 기운이 맴돌았다.
차마 얼굴을 들 용기가 안 났지만, 하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빅터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정말로 궁금한 게 아니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혹시 할 이야기라는 게 이런 거였나?”
하비가 귀를 붉혔다. 아까전에 한 짓이 새삼 다시 떠올라 점점 목까지 선명하게 물들었다.
“시끄러워.”
“좋아서 하는 소린데.”
하비가 올라탄 자세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빅터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근데 환자한테 이래도 돼?”
“그 몸으로 먼 거리를 헤엄까지 쳐서 온 사람이 할 소린 아니군.”
하비는 꽤 냉소적으로 사실을 꼬집었다. 빅터가 멋대로 위험한 짓을 한 것이 생각나자 슬쩍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정말 걱정된건지 내려가려 하자, 빅터가 손을 내저었다.
“아냐. 농담이었어.”
굳은 얼굴로 하비가 말했다.
“난 진심이야.”
빅터가 입을 다물었다가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넌 언제나 그랬지.”
빅터는 정말 내려가려는 하비를 다시 끌어당겨 올렸다. 심장 부근에 눌렀던 브로치가 덜컥대며 굴러 떨어졌다. 얼른 잡아 손에 쥔 빅터가 하비를 올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 이름 다시 불러줄 수 있어?”
멈칫하던 하비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성을 뺀 온전한 이름을 말했다. 여러 번, 확실히 들으라는 듯이.
빅터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죽음이 가까워질 때마다 필사적으로 버텼던 것들이, 맹독으로 이겨냈던 혹독한 나날들은 다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
어릴때 해적선에서 당돌하게 신에게 내건 내기에서 비록 졌지만, 결론적으로는 별로 손해 본 것이 없는 장사였다.
빅터가 하비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높은 코가 거슬리지 않게 부딪치고, 언제 닿아도 기분 좋은 입술에 다시 한 번 제 입술을 깊게 파묻었다.
깨고 나면 꿈 같은 것이 아니면 좋겠다. 빅터는 왠지 목이 매어 목소리가 잠겼다.
“사랑해.”
몇 번이고 허공에 메아리쳤던 그 말이, 돌아돌아 제 주인에게 돌아갔다. 하비가 선선히 미소지었다. 그의 마음에도 안정적인 순풍이 불었다.
상황을 오해해 저지른 조금 전의 부끄러운 일만 아니라면 말이다.
“…알고 있어.”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되살아난 하비의 웃음이 대신 대답했다.
빅터는 하비를 끌어안고 하얗지만 단단한 목덜미에 입맞추며 안도했다. 끝 없어 보이던 지옥 속에서도 포기않고 지금껏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빈 곳이 이제야 빈틈없이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비가 그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총은 왜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지?”
이번엔 빅터가 몸을 굴려 하비를 아래로 깔았다. 양 팔로 짚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복수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눈 앞에 있는 남자를 위해서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었다.
눈에 흥분을 가득 담고 빅터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지금은 좀 급해져서.”
그러자 말없이 하비의 단단한 양 팔이 빅터의 상처 가득한 맨등으로 올라와 끌어당겼다.
희미한 알파 페로몬이 살내음과 섞여 저릿저릿한 자극을 주었다. 여전히 시원하고 기분 좋은 페로몬이었다.
빅터는 하비의 풀어진 더블릿 사이로 손을 넣으며 예민한 귓볼을 물었다. 움찔거리는 작은 반응조차 자극적이었다.
문득 하비가 동그란 흔적이 남은 빅터의 탄탄한 가슴에 입맞추며 말했다.
“나도 그래.”
“응?”
처음으로 뱉는 고백이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하비는 처음으로, 밝고 환한 웃음을 보였다. 늘 짐덩이처럼 얹혀있던 것들이 모조리 사라진 듯한, 홀가분한 미소였다.
오랜 시간 어긋나 굴러가던 톱니는, 이가 맞지 않아 서로를 파괴했다. 드디어 모든 톱니가 빠지고 원이 되었을 때, 비로소 편안하게 함께 있을 수 있었다.
***
하비는 아침을 당혹스러운 한숨으로 시작했다. 아직 빅터의 성기가 그대로 뒤에 박혀 있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길고 두꺼운 팔을 천천히 내리고, 엉덩이를 움직여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그러자 구멍 안에 있던 정액이 함께 나와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벅지에 흐르는 느낌은 둘째치고, 묵직하고 뜨거운 성기가 구멍에서 밀려나가면서 내벽이 한번에 쓸렸다.
“읏….”
하비는 숨막히게 달아오르는 쾌감에 부르르 떨었다. 간밤에도 얼마나 정액을 들이부었는지 모른다. 사정을 한 횟수도 헷갈렸다. 절정은 사정 없이 느낀 것을 포함하면 아예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간신히 일어나서 맨몸으로 거울 앞에 서자 부스스한 밤색 머리칼 아래 지친 하얀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넓은 어깨에 잘 자리 잡은 근육이 팔을 움직이자 힘이 들어갔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구멍 안에 남아있던 정액이 또 흘렀다. 거울에 비친 하비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하비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어버렸다.
“후우…….”
머리가 하얗게 빌 정도로의 거대한 쾌감에 도달해도 빅터는 결코 허릿짓을 그만두지 않았다.
구멍에서 성기가 빠질 정도로 크게 튀어올라 온 몸을 붉히고 경련을 일으키면, 기어이 쫓아와 하비의 배를 찍어누르고 다시 성기를 박아넣었다.
빅터는 허리를 더 세게 밀어붙이며 사정 봐주지 않고 쑤셔 넣기를 반복했다. 감당하기 힘든 굵은 성기가 안 쪽을 박아대면 더 큰 쾌감이 밀려왔다. 안그래도 예민해진 내벽 전체가 비벼지고 마찰되면서 죽을 것 같은 뜨거움이 하비의 온 몸을 덮쳤다.
그러면 하비가 이불을 쥐어뜯으면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질렀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놀라운 비음이었다.
척추가 지릿거리는 강력한 쾌감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가려 하면 빅터가 아예 손깎지를 껴버리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미 갔는데도 계속 쑤셔박는 터에 금방 또 절정에 달하는 일도 잦았다.
하비는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고 벗어놓은 옷가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옷이나 빨리 입어야….’
갑자기 아래로 급격히 피가 쏠리는 느낌에 하비가 반사적으로 내려보았다. 그는 낭패라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간밤의 격렬한 정사를 생각만 했을 뿐인데, 아래가 섰다. 그만큼 빅터와의 섹스는 자극적이었다.
그때 소름끼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하비의 탄탄한 등 뒤에 맨살이 닿았다.
“다시 설만큼 야한 상상 한 건가?”
하비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넌 대체 왜 선 건데.”
엉덩이 사이로 닿는 성기가 벌써 흥분해 있었다. 아침 발기라기엔 너무 뜨겁고, 크고, 활기찼다. 빅터가 하비의 목 뒤로 숨을 나른하게 내쉬면서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아직 목이 다 풀리지 않아 잠겨 있었다.
“네 뒤태가 너무 완벽해서.”
사실 눈 뜨자마자 보인 게 밤새 쏟은 정액을 허벅지 사이로 하얗게 흘리면서 걷는 하비의 뒷모습이었다. 보자마자 바로 반응해 버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야한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빅터의 일침에 뭐라 반박하려던 하비는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게 누가 그런 거 흘리면서 돌아다니랬나.”
빅터는 얌전해진 하비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양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위압적인 상박이 하비의 가슴을 옭아매었다. 하비의 귓가에 대고 빅터가 속삭였다.
“네가 갈 때 어떤 지 알아?”
거울 속에서 하비와 눈이 마주치자 빅터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비가 민망한 얼굴로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자세로 빅터와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이 불편했다.
빅터는 피식 웃으며 차가운 공기에 바짝 선 하비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하비가 움찔움찔 떨면서 뜨거운 숨을 뱉었다.
“가슴팍이 빨개지면서 좀 부풀어올라.”
빅터는 집요하게 유두를 꼬집다가 크게 비틀었다. 그러자 하비가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참고는 경련하듯 부들거렸다.
“여기가 갑자기 붉게 물들고.”
빅터가 손바닥 전체로 근육이 발달해 볼록한 가슴팍을 천천히 만졌다. 하비는 야릇한 느낌에 미간을 구겼다. 자꾸만 익숙한 신음이 튀어나오려 했다.
하비의 가슴 골 사이를 손가락으로 그으면서 빅터가 씨익 웃었다. 얼굴을 내밀어 하비의 뺨에 입술을 누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턱이 뒤로 넘어가지.”
손을 아래로 내려 빅터가 한 손으로 하비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 탄력 있고 하얀 살덩이가 터질 것처럼 손 안에 들어찼다.
“허벅지가 떨리고….”
빅터의 반대편 손은 앞으로 가서 발기한 선단 위를 엄지로 꾹 눌렀다. 벌써 쿠퍼액이 나오고 있었다.
순간, 하비는 머리가 번뜩거릴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몰아쳤다. 이번엔 못참고 하비가 허리를 꺾었다.
“윽…!”
꺾은 허리를 따라 자신도 상체를 숙이면서 빅터가 하비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목 뒤, 귀, 거울에 비치는 하비의 가슴에도 희미하게 붉은 열이 올랐다.
쿠퍼액이 찔끔찔끔 나오는 선단을 더욱 세게 누르며 빅터가 낮게 속삭였다.
“마지막엔 여기서 물이 나와.”
“흐읏…. 그만….”
이번엔 하비의 한 쪽 발 위를 제 발로 누르면서 빅터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발가락도 엄청 움찔대지. 네 발가락이 꽤 길어서 접힐 때마다 발 전체 길이가 짧아지는 것 같다니까.”
하비가 있는 힘을 다해 성기를 움켜쥔 빅터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빅터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하비는 미미하게 열기가 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하비가 깨끗한 물에 담겼던 양동이 속 물수건으로 급히 쿠퍼액을 닦아내고, 새 것을 꺼내 빅터에게 던졌다. 한 손으로 능숙하게 잡은 빅터가 제 손을 닦았다.
하비가 다른 곳을 쳐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 건 또 언제 다 본거야.”
빅터가 얄미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너도 봤잖아. 내가 가는 거.”
하비는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대신 못 들은 척 하며 옷을 찾아 입었다. 그 모습을 보자 빅터가 장난스러운 기세를 더했다.
“내가 가는 모습은 어때?”
황급히 속옷을 입고 그 위로 덧입으려던 하비가 손길을 우뚝 멈췄다. 새벽까지 계속되던 거친 관계에서 사정 직전 빅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녹색눈이 하비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르 떨었다. 빅터의 몸 전체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잘 짜인 복근이 움찔거렸다. 허벅지 안 쪽 근육에도 경직이 오면, 구멍 안에 뜨거운 정액이 순식간에 들어찼다.
하비는 저도 모르게 빅터가 사정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어느새 다가온 빅터가 뚫어지게 그걸 지켜보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걸 노린 거였다. 저 철면피가.
하비가 이를 갈며 낮게 대꾸했다.
“안봐서 모르겠는데.”
거짓말인 걸 다 안다는 눈으로 빅터가 피식 웃었다.
하비는 그의 눈을 피해 재빨리 옷을 꿰입었다. 오늘은 총괄외교관이 제안한 자리에 첫 출근하는 날이었다. 하비의 능력을 아까워 하며 민간인 자격으로 이로비나 섬 관련 일에 참여하라는 제안이었다. 제안이 아니라 거의 협박 및 애원에 가까웠지만.
하비는 대신 이로비나 섬 건만 끝나면 자신은 완전히 외교부 일에서 손떼겠다고 밝혔다. 물론 총괄외교관은 그러겠노라고 했지만 집착 가득한 눈길을 보니 쉬워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하비가 다가온 빅터를 손으로 밀었다. 여기서 빅터에게 더 휘둘리면 정말로 출근을 못 하게 될 거라는 불안에 휩싸였다.
“늦었어. 이제 그만해.”
“아직 시간 한참 남았잖아. 아니야?”
“1시간은 일찍 가야지.”
빅터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로 눈가를 찡그렸다.
“그렇게 일찍?”
왜 정해진 출근 시간을 두고 더 일찍 가야한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된다. 과잉 노동이다.
빅터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후우. 조만간 외교부를 폭파시켜버릴까….”
작은 중얼거림으로도 하비는 불안해졌다. 빅터라면 정말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비가 뒤돌아보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그런 짓 했다간….”
“걱정마. 안 해. 농담도 함부로 못하겠네.”
네 농담은 농담같지 않게 들리니까 그렇다는 말은 간신히 삼켰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하비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굳이 당 탈퇴까지 했어야 했나?”
“네가 굳이 외교관을 그만둔 것과 같은 거야.”
딱히 할 말이 없어진 하비가 조용해지자 빅터는 그를 흘끗 보며 미소지었다. 그러더니 침대 위로 다시 몸을 던지고 양 손을 뒤통수에 댄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 안하고 뒹구는 게 이런 느낌이었군. 할 만한데.”
문득 빅터가 피식 웃었다.
“의외의 적성을 찾은 것 같아.”
그런데 꽤 냉정한 대답이 하비에게서 돌아왔다.
“적성은 침대에서 찾지 말고, 나가서 찾아.”
“오. 백수는 싫은 건가?”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도 있고.”
빅터는 하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리고는 안색을 바꿨다. 장난스럽던 아까와는 달리 꽤 차가워졌다.
하비는 빅터의 눈치를 살피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널 복권시키고 싶어 해. 다들 알아.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정말이었다. 시민들이 빅터를 다시 시의원으로 복권시키자고 성화였다. 해적을 소탕한 데다, 이로비나 섬을 취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인질들을 구했다.
임페르 해적단에 납치되었다가 아예 그 곳에서 자리잡고 해적질을 해서 상단을 꾸렸다는 이야기도, 소문을 몇 단계 거치면서 영웅담으로 변해 있었다.
-임페르 해적이 바르뎀 경에게 반해서 먼저 상단을 만들자고 제안했다면서?
-역시 그 능력 어디 가나.
-국왕 폐하께서 너무하셨지. 정말 해적질을 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하셨을 텐데.
-나서서 직접 해적질을 한 게 아니면 전재산 압류는 너무한 거 아닌가?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사실 국왕도 이런 상황임을 알고 있었고, 찜찜해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다시 돌려주거나 왕명을 물리기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 무시하고 있다고.
고작 10일도 안 된 사이 시여론이 이렇게 바뀌었다. 덕분에 빅터의 저택을 압류하라는 왕명은 한 달로 더 늦추었다. 사람들의 여론을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이렇게 아직도 빅터의 저택에서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물건이 너무 없는 게 흠이지만.'
하비가 가구만 남아 훤하게 빈 방을 휙 둘러보더니, 아무 말 없이 천장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빅터의 의중을 다시 떠보았다.
“바르뎀 가도 널 가문에서 제적시킨 걸 후회하고 있다잖아. 돌아가고 싶지 않나?”
빅터가 워낙 일을 잘 처리했고, 대리 가주 역할을 잘 소화한 것이 컸다. 빅터에 대한 소문이 긍정적으로 변하자 바르뎀 가 내부에서 점점 말이 나오고 있었다. 현 바르뎀 가의 가주가 건강도 별로 좋지 않았고, 대리로 둔 자는 일처리가 썩 뛰어나지 못 했기에 빅터의 빈자리가 유독 컸다.
그러나 빅터는 은근슬쩍 후회와 미안함을 비치는 바르뎀 가 사람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방관했다. 전혀 돌아갈 의지가 없어 보였다.
역시나 빅터가 코웃음을 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와서? 웃기고들 있어.”
“그래도 한 번 생각은 해보는 게….”
“난 절대 안 돌아가.”
솔직히 이제 바르뎀 가가 망하든 아니든 빅터는 그들의 존속 여부조차 상관이 없어졌다. 완전히 남이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허둥대다가 하루라도 빨리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직접 손대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편한가.
하비도 그런 마음을 엿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본인이 싫다는데 하비도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주변에서도 많이들 권하니 한 번쯤은 제대로 이야기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비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가는 대로 해.”
하비가 더 설득할 줄 알았던 빅터가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복장을 깔끔하게 완벽히 갖춘 하비가 뒤돌아 따라붙는 눈길을 마주보았다.
밤색 눈이 자상하게 휘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람들 말은 이제 더 신경쓰지마.”
예전처럼 애정 가득한 목소리에 빅터의 심장이 또 미친 듯이 널뛰었다. 지금도 듣고 있지만 간혹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젯밤에도 원없이 취했던 저 도톰한 입술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황홀한 얼굴로 빅터가 이어 말하는 하비를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그게 너다우니까.”
심지어 이 다정하고 멋진 연인은 이해심조차 넓었다. 사려 깊게 생각하고, 오롯이 빅터를 위한 조언이나 말을 해주었다.
잠시 말없이 누워있던 빅터가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옷을 주워 입었다.
하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디 나가려고?”
“같이 가게. 나도 갈 곳이 있어. 마침 외교부 건물과 방향이 같아.”
하비가 아는 척을 했다.
“아, 요즘 자주 가는 길드? 항상 좀 늦게 나가더니.”
“오늘은 약속이 일찍 잡혔어.”
그리 둘러댔지만 사실 조금이라도 더 하비와 같이 있고 싶었다. 약속 따윈 없었다. 어차피 오늘 가면 그 재수없는 길드장이 눈살만 찌푸릴 테니까.
열심히 옷을 꿰입느라 빅터는 몰랐다. 하비가 뒤돌아서면서 피식 웃는 것을.
‘핑계는.’
빅터가 요즘따라 매일 들르는 길드는 시계 장인들의 것이었다. 게다가 하비는 그가 따로 약속 없이 내키는대로 가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빅터가 하려던 사업은 귀족들을 상대로 한 고급스러운 총기 장사였다. 그러려면 시계 장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들은 손기술이 좋아서 세밀한 부품을 만드는 정교한 작업도 곧잘 했다. 그렇기에 있는 자들의 고상한 안목을 만족시키려면 더욱 필요했다.
그런데 시계 장인들을 총관리하는 길드에서 완고하게 빅터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빅터의 태도나 제안이 너무 황당해서였다.
빅터는 벌써 일주일 째 제집 드나들 듯이 시계 장인 길드를 방문하고 있었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정말 놀러오는 것처럼 당당하게 차를 요구하기도 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길드장은 빅터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은 언제 또 위로 올라설지 모른다.
“오늘 차는 좀 맛이 없군. 물온도가 너무 낮은 것 아닌가?”
“...차 내리는 솜씨가 별로라 그럽니다.”
지금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빅터를 미래를 위한 보험이라 생각해 쫓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매일 방문하는 빅터를 보며 조용히 길드장 혼자 이를 갈 뿐이었다.
오늘도 화려한 외모를 빛내며 이 금발의 미남자는 다부진 손길로 준비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길드장의 일터에서 말이다.
그나마 빅터가 그동안 시계 장인들과 꾸준히 연락을 트고 관계를 좋게 해두어서 망정이지, 성정 괴팍한 길드장의 인내심에 슬슬 한계가 보였다.
억지로 웃으며 시계 장인 길드장이 빅터에게 물었다. 여러 번 들어 아는 내용이었지만,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서였다.
“부싯돌은 황철석으로 한다고 하셨지요?”
빅터는 다른 나라에서 본 용병이 황철석으로 불꽃을 내서 담배를 피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 권총 부싯돌로 할 만한 것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황철석으로 부싯돌을 한다는 발상은 시계 장인 길드장에게도 매우 솔깃했다.
확실히 빅터가 가져온 사업 자체는 대물이긴 했다. 물꼬만 트이면 대박이 터질 것이다. 몇 가지 문제만 제하곤 말이다.
“그래. 황철석 공급은 이로비나 섬에서 할 거라고 몇 번 말해.”
빅터는 이미 하비에게도 말을 해두었고, 하비가 이로비나 섬 관리자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거기선 무조건 수락이었다. 준보석 급에 속하는 황철석이지만 다른 보석만큼 크게 값어치 있지는 않았다. 그걸 이렇게 써먹어 준다면 그들로서도 환영할 일이었으니까.
시계 장인 길드장이 헛기침을 했다.
“그것까진 좋다 칩시다. 그런데 말입니다.”
굳어진 얼굴로 길드장은 여유로운 빅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대금을 당장 치를 수 없다는 건 참아줄 수가 없군요. 거기다 이 건과 관련해서 저희와 평생 독점 계약이요? 무슨 자신감입니까?”
결국 터졌다. 오래 참았다 했다. 속으로 웃은 빅터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당장 선금을 내기가 어려우니 초기 매출은 전부 가지라고 해둔 것이다.
빅터가 놀리듯 느긋하게 덧붙였다.
“판매 시 무조건 예약제로만 한다는 건 왜 빼먹어.”
신분 여하, 가진 것 여부에 상관없이 예약 선착순을 매긴다는 가정 하였다. 취지는 좋았다.
너무 자신감이 넘쳐나는 태도라 자칫 솔깃할 뻔 했지만 시계장인 길드장은 간신히 정신 차렸다. 매일 들으니 이제 정말 세뇌가 될 것 같았다.
“하아…. 정말 곤란한 분이시네…….”
울그락푸르락 하던 길드장의 얼굴이 차차 가라앉았다. 회중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그가 눈에 띠게 화색이 되었다.
“우선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돌아가 주시죠. 곧 올 사람도 있어서요.”
“누구?”
“그, 그걸 제가 말해야 할 의무는 없지요.”
얼굴이 발그레지는 걸 보니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시계 장인 길드장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가 어지간히 좋은지 벌써 결혼식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아직 지속되고 있는 빅터의 정보 커피하우스에서 나온 정보였다. 유지할 돈이 없다며 해산하려고 했지만 다들 자발적으로 나선 탓에 소소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예전처럼 엄청난 정보를 모으지는 못하고 있지만.
빅터가 피식 웃었다.
‘평범한 과일 가게 여자라고 했던가.’
매일 애인에게 질 좋은 과일을 공급받으면서 한 번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빅터가 못마땅하다는 증거였다.
“그럼, 이만 가볼까.”
빅터가 일어나려던 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부리나케 길드장이 뛰어가 문을 열어주었고,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시끌하게 울렸다. 여자 목소리도 들렸다.
그때였다.
“어? 황금거북이다!”
작은 소년이 뛰어와 빅터의 다리에 매달렸다. 당황한 빅터가 아이에게 물었다.
“날 알아?”
소년이 배시시 웃으며 말하려던 때, 흥분한 여자의 목소리도 따라들었다.
“혹시…, 황금 거북이 나으리세요?”
빅터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대체 누구길래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꾸 거북이 타령을….
밝은 표정으로 들어온 여자를 보고서야 빅터는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다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너무 달라져서 순간 못 알아봤다. 그때의 꾀죄죄한 몰골이 사라지고, 예쁘장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아, 그 여자인가.’
하비가 반 로투스에게 선물로 주었던 그 황금 거북이를 로투스가에서 빼앗아서 와놓고는, 한 거지 여인과 아파 보이는 소년에게 주었다. 물론 왠지 유산한 하비가 떠올라서 처음 베푼 낯선 친절이었다.
그녀가 발그스름하게 얼굴을 물들이고 시계 장인 길드장에게 활발하게 말했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던 그 분이에요!”
그렇게 곧 결혼할 애인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려던 길드장의 계획은 박살 났다.
그녀는 빅터를 붙들고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황금 거북이를 판 돈으로 아이도 살렸고, 작은 과일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나으리 덕분에 사람 답게 살고 있답니다.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드리고 싶었는데 누구신지 몰라서…….”
나스타가 보석상에게 신분 보증을 해줄 때 귓속말로 해서 굳이 빅터임을 알리지 않은 탓도 있었다.
평소에 그녀가 얼마나 칭찬을 했던지 길드장은 질투 어린 얼굴로 빅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으리가 여기까진 왜 오신 거죠?”
길드장이 크게 움찔했다. 올 것이 왔다. 그리고 빅터에겐 아주 확실한 기회였다.
씨익 미소지은 빅터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기나긴 사연과 더불어 사업 내용까지 전부 공개 되었고, 완전히 몰입해서 듣던 여인은 급기야 길드장을 원망했다.
“당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런 좋은 분이 좋은 취지로 사업을 하시려고 하는데, 힘이 되어드리지는 못할 망정….”
빅터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지긋이 깨물어야 했다. 여인이 쌀쌀 맞은 얼굴로 길드장에게 말했다.
“정말 실망이에요. 당신이 이렇게 계산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서릿발 같은 여인의 말을 마지막으로 길드장은 울상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드디어 빅터가 고안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보낸 시계 장인 길드장의 공식 계약서가 빅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시계 장인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예술품에 가까운 권총은 곧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엄청난 가격임에도 예약자가 줄을 이었다.
빅터는 예약자의 이름을 전부 공개했고, 그래서 누군가가 끼어들거나 물건을 빼가려고 협박할 수도 없게 했다. 따라서 예약자가 아닌데 빅터의 권총을 가지고 있으면 눈총을 받았다.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것이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선물 받은 것이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애초에 예약을 받을 때 선물용은 따로 기입을 해두기 때문이었다.
“바르뎀 가, 로투스 가, 왕가에서 예약이 오면 반드시 바로 받지 말고 주신 명단을 확인하라고 하셨죠?”
이제 빅터와 제법 친해진 길드장이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빅터가 사과를 베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저 세 곳은 웬만하면 받지 말고 온갖 핑계를 대서라도 순서를 미루라고 해두었다.
“어차피 로투스 가는 가세가 너무 기울어서 저희 제품을 살 만한 여력도 안 될 텐데요?”
“상관 없어. 빌려서라도 사려는 멍청이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로투스 가 역시 빅터의 경우처럼 황실 군대가 와서 재산을 전부 국고로 가져갔다. 해적과의 해전 때, 반 로투스가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본 여러 용병이 목격 증언담이 국왕에게 전해진 것이다.
로투스 가의 가주가 몹시 분노했지만, 그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국왕이 배신한 것이다. 뒤통수를 맞고 진저리를 쳤을 로투스 가의 가주가 생각나 빅터는 속이 시원해졌다.
‘바르뎀 가도 뭐, 하는 걸 보니 얼마 안 가겠고.’
하는 족족 벌이는 사업이 다 망하거나 쪽박만 겨우 면할 정도였다. 그 쪽은 알아서 자멸할 것이 훤히 보여 이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와삭!
사과가 잘 익어서 몹시 달았다. 먹던 사과를 손에 들고 빅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몹시 산뜻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수고해.”
***
빅터의 사업이 대히트를 친 지 얼마 안 되어, 하비는 국왕이 직접 치하를 하겠다며 불러온 독대 자리에 불려 왔다. 해적을 물리치고, 이로비나 섬을 얻은 데다, 해적이 슬루인 제국과 내통했다는 증거품을 가져왔다는 이유였다.
여러 사람 앞에서 치하해도 될 것을, 굳이 독대를 명했다는 것은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비는 국왕과 마주앉아 확실하게 입장을 밝혔다.
“전부 빅터가 한 일입니다. 제가 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택 압류는 무를까 싶네. 사유지도 몇 개는 돌려주기로 결정했어.”
하비가 깜짝 놀라 무릎을 쥐고 물었다.
“예? 정말이십니까?”
“그 정도 공을 세운 자의 위신도 생각해 줘야지. 그게 정의 아닌가.”
국왕은 인자한 얼굴로 큰 것을 베푼다는 양 말했다. 하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빅터 대신 기뻐하며 주먹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좋은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사람들도 폐하의 온정과 정의를 이해할 겁니다.”
감사 인사와 함께 하비의 치하가 이어지자 국왕은 헛기침을 연발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세를 몰아 국왕이 슬쩍 하비의 눈치를 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저…. 요즘 경의 연인이 한다는 사업 말일세.”
굳이 ‘연인’ 이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을 보면 그걸 이용해 부탁할 것이 있다는 뜻. 하비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하비는 정확히 짚어서 다시 되물었다.
“예. 빅터가 하는 총기 사업 말씀이십니까?”
빅터에게 한 일 때문에 국왕은 그와 관련된 화제를 올리는 것을 몹시 껄끄러워 했다. 누가 봐도 빅터의 재산이 탐 나 빼앗은 것이 보였다. 다들 눈과 입은 있으나 뒤탈이 날까 쉬쉬하고 있었다.
국왕이 슬쩍 눈만 들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너머로 하비를 보았다. 칼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강건함과 대쪽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예약이 너무 밀렸던데. 혹시 내 것도 하나 가능한가 해서.”
이러려고 독대를 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이 진짜 국왕의 목적이었다. 왕자들도 쉽게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을 일찍이 보았고, 자신만은 당연히 국왕이니 어떻게 되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보는 눈도 많고, 빅터가 내세운 원칙도 있으니 직접 말하기엔 뭣했다. 빅터의 연인인 하비를 통해 비밀리에 얻고자 함이었는데, 하비도 이를 눈치챘다.
하비의 얼굴에 먹구름같은 어두운 기운이 어렸다.
“죄송합니다만,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폐하는 원칙을 지키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신분 여하, 가진 것 여하에 상관없이 선착 예약순으로만 판매된다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안되겠냐는 말이 쏙 들어가는 엄정한 목소리였다. 하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설마 언제나 솔선수범하시는 공명정대한 폐하께서 원칙을 깨는 일을 하시지는 않겠지요.”
하비의 반듯한 말에 국왕은 몹시 찔리는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불편해 보이는 국왕을 보며 하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 그러시다면.”
하비는 얼마 전에 빅터가 죽으려는 줄 알고 붙드느라 살아있는 게 국왕에게 복수하는 길이라는 불경한 말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심지어 속으로 국왕의 처분을 공평하지 않다며 불평을 가지기도 했지 않은가.
대대로 국왕과 맺었던 충성 맹약서가 떠오르자 하비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자신의 순서를 포기하고 국왕에게 넘기는 것으로 잠시나마 잃었던 충심을 지키기로 했다.
‘어쩔 수 없지.’
하비는 정말 아까웠지만 충심 하나로 국왕에게 말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표정까지는 차마 숨기지 못 했다.
“1018번은 제 것입니다. 사실 저도 예약해 놨습니다.”
다들 가지고 있기에 가지고 싶다는 심리는 아니었다. 그저 빅터가 고심해서 시작한 사업이고, 그의 고생과 손길이 닿은 것을 꼭 가지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웠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면서 바빴던 탓에 빅터의 자랑스러운 성과를 미리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일부 있었다.
“정신이 없어 늦게 예약한 바람에 순서가 많이 밀렸습니다만, 지금도 주문이 밀리고 있을 테니 제 예약표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럼 좀 더 빨리 받아보실 수 있을실 겁니다.”
정말 유감이지만 오로지 국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넘긴다는 표정이 너무 절실히 보였다. 거기다 하비는 진심인 듯 지나치게 진지하기까지 했다.
국왕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하비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뭐, 그렇게 까지……. 괜찮네.”
평소 표정 변화 없던 하비에게 크나큰 상실감이 엿보여서 차마 덥석 받을 수가 없었다. 받았다간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았다. 이리 충성심 많고 점잖은 사람에게 괜히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국왕은 입가를 파들거리면서 억지로 온화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직접 예약할테니 신경 끄게. 그대의 마음은 잘 알겠어.”
결국 국왕이 요즘 대유행인 빅터의 권총을 소지하는 날은 또 미뤄졌다. 심지어 아주 멀어 보였다. 하비의 말대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에도 성황리에 예약이 이뤄지고 있었으니까.
국왕과의 독대가 끝나고, 돌아온 하비가 이 일을 빅터에게 이야기했다. 심각한 얼굴로 말하길래 내심 긴장했던 빅터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표정이 미묘해졌다.
당시 국왕이 지었을 구겨진 얼굴과 지극히 충심 가득했을 하비의 진지한 얼굴이 머릿속에서 어렵지 않게 대비되었다.
조금 뒤, 하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웃지?”
빅터는 허리가 끊어져라 웃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그 욕심 많은 국왕이 차마 자신에게는 미안한 것도 있어 직접 말 못하고, 하비를 슬그머니 찔러 다른 자들보다 빨리 얻으려 한 모양이었다. 하비가 자신의 연인이니 금방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역시 하비 스터스였다. 그는 강적이었다. 정공법으로 국왕의 청탁을 확실히 물리쳤다. 심지어 의도치 않은 심리적 공격 효과까지 획득했다.
”그 얼굴을 직접 봤어야 했는데.“
빅터는 탁자를 손으로 내려치며 웃다 이제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하비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떨떠름하게 물러났을 국왕의 표정이 선했다.
눈가에 조금 흐른 눈물을 닦아내며 빅터가 말했다.
”뭐, 조금 불쌍하긴 한가.“
하비의 정공법에 먼저 처절하게 당한 기억이 있어서, 빅터는 썩 남 일 같지 않았다. 상대방은 흑심을 품고 대하는데, 하비는 너무 선뜻 진심으로 대해버리니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하비는 빅터나 국왕처럼 머리를 굴리고 셈을 해서 상대를 계산하여 움직이는 유형에겐 오히려 까다로운 상대였다.
“어쨌든 저택은 지켰네. 한시름 돌리겠어. 고마워.”
새로 집을 옮기는 데 들 금액이 상당히 부담이었는데, 여유 자금이 생겼다.
생각할수록 국왕의 일그러진 표정이 자꾸만 상상이 되어서 빅터의 웃음이 쉽게 멎지 않았다.
빅터가 실컷 웃게 놔두고 하비는 맞은편에서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턱을 괴고 차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물끄러미 보았다.
빅터를 보며 늘 생각하지만 그는 소리 내서 웃는 것이 몹시 자연스러워 보였다.
저리 호탕하게 웃을 때마다 하비는 사로잡힌 것처럼 빅터를 가만히 관찰했다. 입술이 옆으로 크게 벌어지면서 보조개가 생기고, 매력적인 녹색눈도 길게 늘어나 눈꺼풀에 거의 감춰졌다.
‘웃는 것도 조각처럼 웃는군.’
광장에 있는 아름다운 피에트 남신상이 웃는다면 딱 저런 느낌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정작 하비 자신은 다른 사람 눈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웃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이 남자 덕분에 자유를 얻었다. 그렇다고 지킬 것에 대한 책임감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더는 그 책임이 마음의 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산다는 게 벅차다는 걸 처음으로 체감했다.
빅터 특유의 활력과 표현의 풍부함 덕에 같이 있으면 그것들이 옮아오는 것 같았다. 죽은 것 같이 지내던 심장이 생명을 얻고 하비의 내부에서 속시끄럽게 굴었다.
‘좀 많이 시끄럽긴 하지만.’
이제 그런 것조차 익숙해졌다. 고요함이 오히려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빤히 보며 같이 웃고 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치자 하비는 흠칫했다. 괸 턱에서 손을 떼고 소식을 전한 것 뿐이라며 머쓱하게 말했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고마울 게 뭐 있어.”
고개를 숙이고 민망한 듯 찻잔을 만지작대던 하비는 턱에 닿는 손길에 눈을 들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 턱을 부드럽게 쥐고 하비의 얼굴을 당겼다.
맞은편에서 팔을 뻗은 빅터는 상기되어 열이 올라 있었다.
“몰랐나? 신사업이 성공한 것도 네 덕이고, 여태 내가 잘된 것도 다 네 덕인데.”
하비는 턱을 들린 채로 눈만 내려 대꾸했다.
“또 너무 간다.”
“정말이라니까?”
황금 거북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하비에게 이미 해주었고, 빅터는 정말로 모든 일이 그 덕분이라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도자기같은 하비의 피부결을 쓸면서 빅터가 씨익 웃었다.
“너는 내 인생의 뮤즈야.”
빅터는 턱을 손가락으로 지분대는 것만으로도 민감하여 흠칫거리는 하비를 놓아주었다. 그가 차를 홀짝대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뮤즈를 티타임에 덮칠 순 없지.”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 하비는 괜히 주변을 눈짓으로 훑었다. 스터스가 저택에 빅터와 있으면 아직도 빅터를 불편해 하는 집사 때문에 주로 이쪽으로 왔는데, 빅터의 사용인들과도 꽤 친근해져서 문제였다.
빅터가 둘만 있을 땐 사용인을 전혀 들이지 않으려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종종 빅터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민망한 상황을 만들어서, 대응이 안 되었다.
작은 다과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빅터가 눈을 굴리는 하비를 보며 상체를 가까이 했다.
“네가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많이 참는다고.”
하비가 무슨 뜻이냐고 눈짓으로 묻자 빅터는 한 손으로 제 눈가를 찍어서 내렸다.
“이렇게- 눈이 반달이 돼서 웃고 있을 때.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 지 모르지?”
하비의 딱딱하고 칼 같은 느낌 때문에 외모를 판단하기 보다는 평소에는 분위기를 먼저 보게 되는데, 일단 미소짓게 되면 그제야 얼굴이 보였다.
눈꼬리가 내려가면서 나이 답지 않게 근엄함마저 있는 얼굴이 휙 어려진다. 매사 굳어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동안으로 변하면서 편안함이 느껴지고, 좀 더 다가가기 친숙해졌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선 콧날이나 깊게 파인 밤색눈, 매끈한 하얀 피부나 적당히 부푼 입술, 그 모든 게 섬세하게 조합된 이목구비가 그제야 보이는 것이다.
하비가 웃을 때마다 넋놓고 보게 되는 이유였다. 빅터가 꽤 진지한 태도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데 가서 함부로 웃지마.”
하비는 빅터가 또 농담하는 줄 알고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하는 건지.
하비가 별 감흥 없이 받아들이자 빅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단코 진심인데 몰라주는 것이 안타까웠다.
“참, 돌려주겠다고 한 사유지가 어떤 건지 들었어?”
곧 왕명이 내려오겠지만 빅터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하비는 국왕에게 들은 대로 읊었다. 몇 군데를 들은 빅터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지막 양심을 내주었군.”
꽤 괜찮은 사유지들을 다시 내주었다. 나름대로 빅터와 화해를 하려고 생색을 낸 것이다. 총기 사업이 번창하고 다른 사업도 연달아 성공시키면 더 노골적으로 슬금슬금 하나씩 더 내어줄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다는 양 말이다.
그 시커먼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빅터가 속으로 국왕을 비웃었다.
그때 하비가 작은 편의용 화기에 데워진 새카맣고 큰 주전자를 가져왔다. 주전자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벌써 겨울의 중턱이다. 차에 새로 따르고 빅터의 것에도 따라주었다. 찻잔이 식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비는 돌아오다가 은행에 들렀던 일이 떠올라서 입을 열었다.
“아, 매달 들어오는 금화 대부분은 네 계좌로 돌려놨어.”
은행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결국 이런 목적이었다. 빅터가 눈썹을 찌푸리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정말 안 그래도 된다니까. 끝까지 이럴 거야?”
그러나 하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평생을 걸쳐서라도 갚겠다고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보다 월급도 깎였으면서 언제 다 갚아?”
정식 외교관이 아니라 민간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이라, 지급되는 돈도 줄었다. 슬쩍 구겨지는 하비의 미간을 보더니 빅터가 급히 덧붙였다.
“절대 무시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걱정되서 하는 소리야.”
“나 혼자 했으면 못 했을 일이었어. 그걸 도와줬는데 당연히 받은 만큼 갚아야지.”
칼같이 확고한 논리와 철학이었다. 마음 먹으면 반드시 하고 마는 하비의 성격을 알기에 빅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다른 것도 따로 만들어 놓았지만.'
빅터는 하비에게 받은 돈이 나중에 어떤 구실로든 다시 돌아가게끔 하는 기금을 만들었다. 은행장과 몰래 한 거래였다. 나중에 들키면 또 죽어라 혼나겠지만 스터스가 저택이 팔리는 것 만큼은 막고 싶었다.
빅터가 저질러 놓은 것들과 그 속내를 모르는 하비는 담담한 얼굴로 빅터를 달래듯 말했다.
“다음에 은행 일을 시작하면 더 빨리 갚을 수 있을 거야.”
확실히 은행 쪽이 외교관보다 월급이 훨씬 높긴 했다. 하비는 이로비나 섬 건만 끝나면 다른 의원이 제안한 은행 일을 해볼 생각이었다.
돈이란 것을 직접 다루고 운용하는 곳에 몸을 던져 보면, 빅터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직한 마음이었다.
여러 번 겪어보니 돈이란 게 그리 악독하지는 않았다. 가진 사람과 쓰임새가 문제지, 제대로 쓰기만 한다면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빅터가 이번 사업에서 번 돈으로 각종 약자들을 위한 사회시설 같은 곳에 후원을 하는데,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빅터는 하비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알았으니까 제발 무리하지는 마. 의사들이 뭐래? 괜찮대?”
빅터가 현재 제일 걱정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혹여 돈을 갚는다 어쩐다 하며 괜히 무리라도 하여 건강이 상할까봐.
하비도 그의 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안심시키려 했다.
“많이 좋아졌다고 했어. 그리고 의사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하비의 얼굴을 빅터가 잠시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더니 팔을 뻗어 하비의 손을 잡았다.
사실 할 말이 있어서 때를 재고 있었다. 전보다는 많이 따뜻해졌지만 아직 손 끝에 냉기가 남아 있어서 빅터는 마음이 아팠다.
“근데 그건 왜 물어봐.”
어두운 얼굴로 빅터가 말했다.
“그 신약, 남은 게 있냐고 물어 봤다면서.”
하비가 뜨끔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알았다. 고작 이틀 전에 의사를 붙들고 물어봤을 뿐인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빅터는 침묵하며 하비의 손을 만지작대기만 했다. 차마 화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이 화제에 대해서는 마음이 헤지고 닳았다는 것에 가까웠다.
고민하는 듯하던 빅터가 속으로 몇 번이나 말을 정리해서 감정적으로가 아닌, 정제된 말을 했다.
“분명 들었잖아. 넌 그거 한 번만 더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
“이미 속이 다 망가져서 안된다고 했다고. 지금은 절대 안정만 취해야 해.”
솔직히 일하고 있는 것도 그만두게 하고 싶었지만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하는 게 의욕도 나고, 정서에도 좋다는 의사의 말이 있어서였다.
“어차피 내가 싹 다 폐기해 버렸으니까 다신 찾지마. 이 세상에 형질을 바꾸는 약은 없는 거라고 생각해. 뒷골목에 풀린 비슷한 것들은 부작용이 더 심하고, 제대로 된 것들도 아니야.”
포기하지 않고 하비는 차분하게 물었다.
“따로 챙긴 여분이 몇 개 있다며.”
빅터가 아찔해진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 것도 다 말해준 거냐. 비밀이라고 분명 말했는데. 입 가벼운 자식.”
하비가 너무 절실하게 물어봐서 의사는 더 비밀 엄수를 하지 못하고 털어놓았다. 그도 하비에게는 유독 약했다. 간접적이긴 하지만 약을 만들어 하비를 괴롭힌 데 일조했다는 생각 때문에 더 그랬다.
하비는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정말 있는 건가?”
빅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없어. 그건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한테 넘겼거든.”
알파끼리의 연인 중에 진심으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자가 있었다. 임신될 확률도 극히 낮은 데다, 죽을 수도 있다고 몇 번이나 미리 경고를 했는데도 우겨서 가져갔다.
윈스턴 경이라고, 하비와 빅터가 사교계에서 떠들썩해지기 직전에 알파 연인으로 유명했던 귀족 청년이었다. 스터스 가만큼 윈스턴 가도 완고하고 구교를 믿는 가문이었는데, 가풍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남자였다.
윈스턴 경은 뒷골목에서 어떤 의사가 형질을 바꾸는 약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빅터에게까지 찾아왔다. 의사에게 먼저 찾아가서 끈질기게 물어, 빅터에게까지 흘러온 것이었다.
처음엔 결코 줄 생각이 없었는데, 제발 달라고 애원을 해서 못 이기고 줘버렸다.
하필 반듯하고 정 많아 보이는 윈스턴 경의 얼굴에서 하비가 비쳤다. 그래서 마음이 약해졌다.
‘나도 중증이라니까.’
어디서든 하비가 연상되면 질긴 마음이 흐늘흐늘해졌다. 아마 의사도 윈스턴 경에게서 하비와 비슷한 모습을 보아서 못 이기고 말해주었을 가능성이 컸다.
양 손을 펴보이며 빅터가 진짜임을 여러 번 강조했다. 칼자국이 여러 번 난 흉터가 하얀 손바닥에 몇 가닥 그어져 있었다.
“이제 진짜 없어.”
아무리 살펴봐도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하비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런가.”
급격히 어둠이 지는 얼굴을 보자 빅터의 마음이 술렁댔다. 가슴 속이 아프게 찌르르 울렸다. 웃게만 해주겠다고 다짐했는데, 가끔 그가 과거에 저지른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하비를 좀먹는 모양이었다.
역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빅터는 애써 밝음을 꾸미며 하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외출을 제안했다.
“이러지 말고 나가서 뭐라도 먹을까?”
하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빅터의 가슴에 있는 녹색 보석을 안은 금빛 브로치에 가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저걸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역시 더 좋은 걸 사줬어야 했다.
하비는 빅터의 말대로 이제 신약을 포기하고, 다음 월급 때 브로치나 새로운 걸 찾아보자고 다짐했다. 어차피 물어본 것도, 정말로 복용하려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마음 한가닥 남은 서글픈 미련에 가까웠으므로. 다시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차가운 현실이지만, 하비는 차곡차곡 접어 서서히 잊을 수 있는 곳으로 밀어넣었다. 언젠가는 이 차가움도, 일상의 따뜻함에 가려질 것이다.
하비가 사용인을 불러 괜찮은 곳을 수소문하려던 빅터를 말렸다.
“내가 괜찮은 곳을 알아.”
***
예전에 레나를 데려갔던 레스토랑이었다. 스테이크가 끝내준다던 레나의 자랑을 여러 번 듣고 배가 아팠는데, 하비가 데려올 때까지 참은 것이 다행이었다. 메뉴판에 있는 여러가지 것들을 종류대로 시킨 빅터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여긴 스테이크 말고 다른 것도 유명하더라고.”
들떠 있는 빅터를 보며 레나와 이야기했던 것들이 떠올라 하비가 잠시지만 옅게 미소지었다.
“각인된 알파와 오메가가 떨어지면 잠시라도 괴롭다고 하던데.”
“내가 알던 돌팔이 의사가 심장의 각인이니 뭐니 나불대던 적이 있었는데 말이지.”
시기를 생각하면 하비가 임신을 해서 오메가였던 때이니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빅터는 턱을 매만지며 그때를 회상했다.
“솔직히 말하면 떨어져 있을 때 정말…….”
지금 떠올려도 속이 답답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른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옆에서 계속 돌아가자고 떼쓰는 나스타를 따라서 나도 가고 싶었다니까.”
상단을 일부 분할해서 알프레드에게 넘겨줘야 했던 중대한 일만 아니라면 당장 돌아왔을 것이다. 빅터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정말 심장의 각인인지도 몰라.”
가만히 듣고 있던 하비가 반박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심장의 각인이 흔한 것도 아니고, 어설픈 오메가가 되었던 때였는데 가당키나 하냐는 합당한 의심이었다.
속으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하비는 딱딱한 이론만 내세웠다. 쑥스러워서인 탓도 있었다.
그때 빅터는 대답없이 푸릇한 채소 한 장과 토마토, 샐러드 속 고기 한 점을 야무지게 찍어서 하비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기습적인 행동에도 완전히 입에 넣은 것을 확인하자 빅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면 뭐 어때.”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하비가 얌전하게 받아먹는 걸 보며 빅터는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한테 그런 게 큰 의미 있어?”
기분 좋은 동의가 하비의 입술에 선선히 번져나갔다. 중요한 건 심장이 언제 뛰고, 누구를 봤을 때 반응하냐는 것이니까.
“돌려받은 사유지 중에 최근에 갔던 곳들, 조만간 가자.”
빅터의 권유에 하비도 당연한 듯 답했다.
“그러지.”
그 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시켰던 메뉴가 나왔다. 군침 도는 윤기 오른 스테이크와 랍스타, 특별한 방식으로 구운 치킨, 귀한 육수와 신선한 야채를 잔뜩 품은 왕실 요리 등이 즐비했다.
그 중 주방장이 직접 내온 오늘의 특별식도 있었는데 빅터가 고안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권총이 주방장의 허리춤에 반짝대며 보였다.
저도 모르게 하비가 그 권총을 빤히 쳐다보자 주방장은 으스대며 사라졌다. 몇몇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도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빅터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미리 이야기했으면 내가 길드에서 제일 잘 빠진 총으로 따로 빼놨을 텐데.”
“아니. 그건 기다렸다가 내 순서가 되면 내 손으로 직접 받을 거야.”
새치기는 용납 안된다는 완고함에 빅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 남자의 고집을 누가 말리나.
“그럴 것 같아서 안 가져왔어. 대신 다른 걸 가져왔지.”
마법처럼 빅터의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가 나왔다. 나올 때 둘 다 레스토랑 문을 닫을 까봐 서두르느라 못 봤는데, 언제 챙긴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비는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간신히 말했다.
“이게...뭔데.”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자랑스럽게 손으로 가리키며 빅터가 피식 웃었다.
“답례야. 답답하다고 생각되면 안받아도 돼.”
구속으로 느껴져서 싫으면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빅터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래도 괜찮으면 오른손에 받아줘.”
하비의 손가락에 딱 맞춘 단순한 문양의 은반지였다. 하비는 침묵했다.
레스토랑의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그것을 내밀며 빅터가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마음의 준비가 되면 사람들 앞에서 그걸 왼손에 껴줘.”
그 순간이 바로 약혼 반지가 결혼 반지로 변하는 때였다. 하비도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상자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반지가 나오는 순간, 하비의 심장도 크게 튀어올랐다. 온 몸의 피가 빠르게 역류했다.
청혼을 같은 알파, 그것도 일찍이 죽은 줄 알았던 남자에게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빅터와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하비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울고, 웃고, 아프고, 기쁘고, 때론 죽을만큼 슬펐던 기억들은 하나로 응축되어 하비의 가슴 속에 맺혔다.
수많은 감정이 얽힌 물감들은 자화상처럼 또렷하게 자리잡았다. 하비는 그 그림이 이제야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있었다.
여유롭게 말하긴 했지만 빅터는 대답을 기다리며 초조해 하고 있었다. 식은땀마저 나고 있었다.
밀려오는 감정들을 말아 쥐며 하비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멀리 출장 가 있을 때 말야.”
혼자만 쌓았던 마음을 조금씩 빅터에게 돌려주었다.
“살면서 기다리는 게 가장 힘든 순간이었어.”
영영 오지 않을 것도 아니고, 고작 몇 주 기다리는 건데도 매순간 영혼이 갉아먹히는 것 같았다.
하비의 입술에 진동이 오는 것처럼 떨렸다.
“기다리는 게... 그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
어느새 빅터의 손이 다가와 하비의 뺨을 문지르고 있었다. 상처 많은 커다란 손에 작은 물기가 묻어 났다.
“네 시간을 줘.”
빅터가 준 반지를 손에 꽉 쥐고 하비는 힘주어 말했다.
“그럼 받을게.”
마음 속에 맺힌 감정의 자화상은,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는 것도 기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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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되고 부서진 곳에서 난 상처가 아물면, 이젠 서로에게 맞춰진 톱니가 날 터였다. 그때가 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톱니가 다시 맞물리며 조금 잡음이 있고 시끄러운 날이 있더라도,
함께 하는 인생이 시작되는 건 변함없을 것이므로.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