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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Blood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11 0 2022-5-12 21:31
* blue blood 기다려 주신 분들께 -

우선, 드리고 싶은 말은 완결이 아닙니다; orz 나름대로 지금까지 바빴고 또 지금도 계속 바쁘고 있는 중이라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아, 일단 전에 올려뒀던 연재분만 대대적으로 수정했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큰 변화가 없지만 자잘한 에피소드와 대사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다시 읽으실 분은 다시 읽으셔도 좋다는;; (Ⅱ편 마지막 부분은 꼭 다시 읽으셔야 해요. 전개가 많이 변했어요) 6월 안에 글을 못 올리면 영영 못 올릴 것 같아 일단 급하게 수정분 올리고 차차 연재 진행하겠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완결은 아니라 연재란에 올려야 하나 고민하다 분량이 많아서 일단 1,2,3 이렇게 나눠 완결란에 올립니다. 3부분은 연재란에 연재하다 완결이 나면 옮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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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장 >


- 아힌스 -



…그날이 언제였던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아마도 잦은 병치레로 숱한 밤을 괴로워하며 지새던 유년기의 어느 겨울이었던 것 같다. 아직 열이 내리지 않은 작은 몸을 침대에서 느릿하게 일으켰던 어느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밤사이에 내린 눈 때문에 설탕가루를 가득 뿌려놓은 것처럼 온통 새하얬다.

‘………예뻐.’

비록 바람이 차니 절대 창문을 열어놓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삼 일을 내리 앓는 동안 커튼 한번 열어보지 못한 답답함에 나는 그만 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마른 장작개비처럼 가느다란 팔목으로 무거운 창을 끼기긱- 간신히 밀어 젖히자 지붕 위에 쌓여있던 눈송이가 하얀 눈보라가 되어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얼굴을 때리는 눈송이들은 차갑지만 몹시 아름다웠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결정들……. 손에 쥐고 싶었다. 투명한 눈꽃의 결정을 손에 쥐고 하늘에서 날아드는 수많은 그것들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은 나를 테라스로 유인했다. 그리고 그리하여 눈 쌓인 정원에서 움직이는 누군가의 까만 뒤통수를 발견했을 때…나는 그제서야 의사의 말을 어기고 테라스까지 나오게 만든 어리석은 욕심을 후회하고야 말았다.

모피코트를 앙증맞게 껴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귀여운 소년. 네 살 어린 동생은 이정도 추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유롭게 설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순록가죽으로 만든, 아이의 발에 꼭 맞아 어울리는 밤색 털신을 신고서는.
‘……….’
문득 언젠가 건강해지면 순록장화를 신고 사냥을 가자던 아버지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매년 했었던 약속이었다. 가슴 한쪽이 시려오는 아픔에 동생에게서 눈을 떼고 손가락 위로 날아든 새하얀 눈의 결정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면 가느다란 여섯 개의 가지를 파르르 떨다가 손가락에 내려 앉기도 전에 포로록 녹아버리는 육각의 결정은 나약하고도 무의미한 존재였다.

전날 다녀갔던 어머니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힌스, 넌 영리하고 예쁜 아이지. 하지만 아드리안 가의 후계자가 되기엔 너무나 약하구나. 이렇게나 가늘고 작은 손과 발로는 결코 기사조차 될 수 없는걸.’
‘……….’
‘나는 너를 사랑한다, 아힌스. 그렇지만 가문의 사람들은 강한 후계자를 원해.’
‘……….’
‘아힌스, 아힌스 폰 아드리안…내 귀하디 귀한 아가. 도대체 어미가 어찌 하면 좋겠니.’

몇 달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그녀는 꺼질 듯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낫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친 모친의 미소는 너무나 창백해서 가여울 정도였다. 어떻게든 마주 웃어주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입 꼬리가 허물어졌다.

‘불쌍한 내 아가. 어째서 이렇게 약하게 태어난 거니…. 모든걸 다 가질 수 있었는데. 네 손에 온 세상의 영광과 기쁨을 남김없이 안겨줄 수 있었는데!’

아름다운 입술에서 통곡에 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울지 말라는 말도,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마시라는 위로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

어린 나이였지만 조숙했기에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여덟 살이 되도록 골골대며 수시로 생사를 넘나드는 후계자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 떠드는지, 원로원의 고루한 늙은이들이 어떤 꼬투리를 잡으며 모친을 괴롭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 내게 직접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세상 소문이란 돌고 돌아 결국 당사자에게까지 전해지는 것. …모를 리가 없었다. 그에 더해서 동생이 태어난 이후부터 집안식솔들의 태도까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다. 바쁜 와중에도 밤마다 들르던 부친의 방문이 뜸해졌다는 것을, 잠자리를 정성껏 돌봐주던 하녀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다정히 웃어주던 모친의 미소가 굳어간다는 것을 모를 반편이도 아니었다…….

잠시 두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어차피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건강한 남동생이 나와는 달리 아장아장 활달하게 정원을 휘젓고 다니던 그때부터…언젠가는 그 아이에게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줘야 한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으니.

‘…아힌스. 실은 어제 네 아버지와 긴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그만…됐습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시려는 지 알겠어요.’

애원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건강한 둘째 아들에게 후계자리를 양보하라는 완곡한 명령이다. 그런 말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모친의 마음을 전혀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고 결국 이것이 순리라는 것쯤 알고 있지만…그래도, 그래도…모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만은 싫었다. 그런 배신감 따위는…………느끼고 싶지 않았다.

‘내일, 서약서를 파기하겠습니다.’

내뱉듯이 말을 꺼내자 어머니의 얼굴에는 묘한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천진한 잔인함이 가슴을 후벼 팠다. 몇 년 전 후계서약서를 썼던 어느 날에는 맏아들을 너무나 대견해했던 그녀였다. 약한 몸 같은 건 조금만 지나면 금방 튼튼해 질 거라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 아들, 너는 내 자랑이다, 내 보물이다, 그리 말하며 다정한 품 안에 폭 안아주던 그녀였다. …이젠 그 마음이 변한 건가요. 건강한 둘째 아들이 생겼으니 이제 그 마음 안에 나 같은 건 없어진 건가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보이지 않게 침대시트를 움켜잡으며 푹 고개를 숙였다. 붉게 충혈된 눈시울을 모친에게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맙구나 아힌스.’

…그래도 한번쯤은 건성으로라도 후계자리를 버리지 마라, 그리 안 해도 된다, 잡아주길 바랐었건만. 사붓이 웃으며 꺼낸 어머니의 대답은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 그리고 미안하다, 아힌스. 하지만 동생에게 후계자리를 영원히 빼앗겼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렴. 만일 앞으로 네 몸이 좋아진다면…언제라도 다시 장남인 네가 아드리안 가의 다음 대를 잇게 될 거야.’

…그런 말이 듣고 싶었던 게 아니다. 나는 다만…………….

그러나 모친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잠시만 물러나 있는 거야.
건강해지면 다시 네 자리를 돌려줄게.
약속하마.  

'어머니…,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건 하지 말아주세요.'

천 년이 넘는 아드리안 공작 가의 역사 속에서 한번 제 자리를 뺏긴 후계자가 복위된 선례가 있었던가. 맹세코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어린아이지만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할 일이라곤 지루한 책을 읽는 것 뿐이었다. 어머니는 자기자식이 생각보다 영특하다는 걸 모른다. …그녀의 약속이 새빨간 거짓이라는 것 따위 벌써 알고 있는데. 그런 바보 같은 거짓말보다는…………그저, 난 여전히 너를 가장 사랑하고 있단다…라는 한마디 말이면 족했을 것을.

나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쓰며 간신히 다음 말을 이었다.
‘제 거처는 샤휀 성으로 옮기겠어요.’

더 이상 여기서는 살 수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지내온 이 방은 대대로 아드리안 후계자에게 물려 내려오는 곳, 그러니 후계 서약서를 파기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곳에서 머물 자격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나를 대신해 후계자의 방의 주인은 어린 동생이 차지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옮겨야 하는 걸까. 지금 동생이 살고 있는 방…? 아니면 별관으로 옮겨가야 하나. …아니, 그럴 순 없었다. 절대로. 앞으로 전개될 그런 수모를 당하고 싶진 않았다.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다른 모두를 위해서도 차라리 아드리안 본성을 떠나는 편이 나았다.

‘………그래.’

그것에는 어머니 역시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후 조금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렇지만 봄이 되면 가는 게 어떻겠니. 더구나 샤휀 성은 북쪽에 있어서 추울 텐데 네가 가려면 그쪽에서도 준비가 많이 필요할거야.’ 라고 덧붙였지만 결국 가지 말라고 말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덕택에 괜한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괜찮습니다. 되도록 빨리 떠나겠어요.’  

쌀쌀맞은 대꾸에 모친은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따뜻한 위로도, 다정한 포옹도 해주지 않았다.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하겠다 말한 순간부터 어머니에게 느낄 수 있던 것은 그저 빛 바랜 모성의 오래된 향수뿐이었다.





까르르-


밖에서 울려 퍼지는 맑은 음색이 상념을 깨뜨렸다.

누가 웃는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 가죽신을 신고 돌아다니던 검은 머리 꼬마 옆에는 어느덧 몇 명의 또래 녀석들이 몰려들어 신나게 눈 뭉치를 던지며 놀고 있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호된 교육을 받는 귀족 가의 아이들이라지만 확실히 애들은 애들이었다. …겨우 눈 따위를 던지며 즐거워 하는 꼴이라니. 괜한 심술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작 네 다섯 살짜리 아이들이 눈밭을 뒹굴며 노는 모습이 사실 흉이 될 리는 없었다. 그냥 치졸한 열등감에서 나온 시기심일 뿐.  눈 오는 날엔 한 발짝도 밖에 나갈 수 없는 허약한 몸에 대한 자격지심과 그 때문에 모든걸 잃어야 한다는 분노. 비록 어젯밤엔 어른 흉내를 내며 짐짓 점잖게 대꾸했었으나 실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던 것이다.

약이 바짝 오른 꼬리 치켜든 전갈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머리 꼭대기에 열이 몰렸다. 아이들이 즐거워 보이면 보일수록 열이 올랐다.   

‘그나마 내일부터는 이 테라스에서 정원을 바라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드디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응어리가 폭발했다. 나는 테라스 한쪽 옆에 덮고 있던 하얀 눈을 뭉쳐서 꼴 보기 싫은 동생의 머리통을 향해 날렸다. 그러나 있는 힘껏 던진 눈덩이는 아래를 향해 던졌음에도 얼마 나가지 못하고 볼품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화가 나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똑 같은 짓을 반복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놀고 있는 꼬마들은 전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먼 거리에 떨어진 작은 눈덩이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흘렀다.

어째서 이런 형편없는 몸이어야 했을까. 어째서 하필……….

등을 동그랗게 말아 한참을 흐느끼다 고개를 들었을 때 문득 무리중의 한 아이가 멈춰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총명하게 반짝이는 흑요석의 까만 눈동자. 동생이었다. 너무 멀어 정확히 나를 보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괜히 분한 마음에 마주 노려보았다.

‘너는 이런 비참한 마음 따위 전혀 모를 테지. 약하다는 이유로 모든걸 당연하게 내줘야만 하는, 그런 마음 같은 걸 네가 어떻게 알겠어. 태연하게 내게서 다 뺏어가는 주제에!’

더 이상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와 커튼까지 차르륵 닫아버렸다. 어쩐지 동생이 자신을 비웃고 있던 것만 같았다. 그 건방진 까만 눈으로 이족을 얕잡아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전까지는 데면데면했던 아이가 갑자기 지긋지긋하고 미워졌다. 꽃같이 예쁜 그 하얀 얼굴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그러다가 문득, 초라하고 치졸한 내 모습이 더 싫어져 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모처럼 모인 가족들과 원로원 임원들 사이에서 내 후계서약서 파기가 조용히 이뤄졌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문 앞에 준비되어있는 사륜마차에 올라탄 나는 동생의 얼굴을 보고 가지 않겠느냐는 무신경한 어머니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의 키스를 마지막으로 마차바퀴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작별의 인사를 하는 순간까지 아버지는 아무런 당부의 말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와 새삼 서러울 것도 없건마는 자꾸만 왼쪽 가슴 언저리가 꾹꾹 아파와서 짜증이 났다.

하얀 눈이 가득 쌓인 눈밭 위에 검은 마차바퀴 두 줄만이 길게 궤적을 그렸다.


그렇게, 유년기는 끝이 났던 것 같다.










◈◈



20 년 후


제국력 1555년

어느 겨울


제국의 북쪽 경계지역을 두고 아르토니아 왕국과 영토분쟁이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아르토니아 인들이 변경지방의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제국의 최전방 요새를 공략하면서부터였다. 최초의 공격으로 변방 수비대의 반 이상이 전사하고 식량창고가 약탈당한데다 천연 요새 카슬란을 빼앗겼다는 소식이 수도에 전해지자 제국의 황제는 강경대응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북부지역 분쟁 해결을 위해 아드리안 공작을 총책임자로 파견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냉혹한 푸른 피의 귀족이라 일컬어지는 아드리안 공작 휘하 그의 검은 기사대가 북부에 도착했다. 그 해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뛰어난 지휘자의 통솔 하에 무서운 속도로 진군한 제국군은 피와 시체의 산을 넘어 왕국에 빼앗겼던 카슬란을 일시적으로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


윔플 집사는 며칠째 쏟아지는 폭설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아무리 원체 추운 지역이라지만 올해 겨울은 정말로 유난스러웠다. 끝도 없이 눈이야 그렇다 쳐도 호수의 얼음까지 도무지 녹지를 않으니 이거야 원. 그래도 이 근방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방한대비가 잘 되어있는 샤휀이라 이 정도지 저지대의 고만고만한 작은 저택에 살고 있는 귀족들은 애저녁에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한 이들도 꽤 됐다. …물론 거기에는 최근 북쪽변경지방에서 계속되는 잦은 분쟁 또한 한 몫 했지만.  

'그렇지만 이렇게 다들 떠나면 그만큼 이곳 치안은 더 불안해진단 말이지.'

이런저런 걱정에 한숨을 쉬던 집사는 하인들을 시켜 벽난로에 불을 더 넣으라고 재차 강조했다. 사실 앞으로 계속될 긴 겨울을 생각하면 땔감을 좀 아껴야 할 테지만 이 집의 까다로운 주인나리는 추위에 몹시 예민했기 때문에 차라리 난방비를 더 들여서라도 집안 온도를 높여두는 편이 나았다.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지붕에 쌓인 눈을 걷어낸다 어쩐다 수선을 떨었더니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고지대인만큼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하루가 빨리 가버리는 것이다. 집사는 잰 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엔 닭고기 수프 냄새가 온통 진동하고 있었다.

"에밀리 부인, 식사 준비는 다 되어갑니까."

전채요리로 내갈 절인 과일을 손보고 있던 뚱뚱한 에밀리 부인은 심드렁하니 거의 준비되었다고 대꾸한다. 그리고는 잠시 후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은 도련님이 식당에 내려 오시는 건가요?"

윔플 집사는 외알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휘적휘적 흔들었다. 근래 날씨가 추워지면서 젊은 성주는 방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심지어는 식사까지 모두 방으로 날라야 했으니 최근 성에서 주인을 대면할 수 있는 이는 식사를 나르는 집사와 주치의 한 명뿐이었다. 몸이 약해 추위를 못 견뎌 하는 탓도 있겠지만 해가 갈수록 냉소적이 되어가는 주인은 꼭 세상과 담을 쌓으려는 사람 같았다.

집사의 미간이 구겨지는 만큼이나 에밀리 부인의 한숨 또한 커졌다.

"그럼 또 방안에서 드시려는 건가요? 아유. 자꾸 그렇게 몸을 움직이질 않으시니 점점 더 건강이 나빠지는 거라고요. 게다가 요즘은 통 드시지도 않잖아요."     
"………."
"어제도 양고기를 해드렸지만 거의 손대지 않으셨어요. 저렇게 먹지를 않으니 몸에 살이 붙을 리가 없지. 정말이지 편식도 심하시고…. 양파나 완두콩을 먹지 않는 것도 나쁜 습관인데 말이죠. 그런 건 어릴 적에 집사님이 고쳐줬어야 했다고요."
"시끄럽소. 쓸데없는 소리 말고 트롤리나 내와요."

몇 번이나 주의를 주어도 이 사람 좋은 부인은 주인을 너무 격의 없이 대했다. 마치 친아들이나 손주쯤 된다는 듯이. 물론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건 알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그녀의 생각일 뿐 실제 주인은 이 집의 고용인들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가진 대귀족의 신분이었다. 혹시라도 눈밖에 나면 손짓 하나로 고용인의 목을 칠 수 있는 높디 높은 귀족나리. 그런데도 도무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둥글둥글한 성품 탓인지 에밀리 부인은 종종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하기야. 이 넓은 성에서 모시는 상전이라고는 하루에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든 주인 나으리 뿐이니 신분차를 실감을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래도 오래 전에는 상당히 번성했던 성인데 근 몇 십 년 간은 고용인들을 제외하고는 손님 그림자도 보기 힘드니.’

이게 다 사교성 없는 주인님 탓이라며 주억거리던 윔플 집사는 젊은 주인을 장가라도 보내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급작스레 문지기 소년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저, 집사님. 아무래도…손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
"손님? 이 시기에?"

집사는 외알안경의 코를 치켜 들으며 의심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손님 보기 힘들다고 투덜대자마자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작스런 방문자라니…그것도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 때에. 성에 물건을 대는 중인들이나 세금 문제 따위로 이따금 들르는 재무관들을 빼고는 손님이 없는 계절이었다. 참으로 이상스런 예감에 집사는 짐짓 문지기 소년을 다그쳤지만 돌아오는 말은 똑같았다.

"자,자꾸 묻지 마시고 빠,빨리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평소에는 행동거지가 조용조용한 아이였는데 말까지 더듬는 모양새가 제발 서둘러 달라는 듯 해 보여서 윔플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타이를 고쳐 매며 걸음을 서둘렀다. 여상스럽진 않지만 손님은 손님,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박자박.

음침할 정도로 고요하고 거대한 성의 홀에는 집사와 어린 시종의 발걸음 소리만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 고풍스러운 성에 꼭 들어맞게 섬세하고 꼼꼼한 집사 역시도 잠시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렴. 누가 그런걸 예상할 수 있었으랴. 고즈넉한 샤휀성의 눈 쌓인 중정에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단이 일렬로 포진해 있으리라는 황당한 전개를….






「분쟁이 잦은 루르발 지역에서 거리가 가깝고 설비가 잘 갖춰져 있는 샤휀성을
   봄이 오기 전까지 사령부기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니,
   적극적인 협조 바랍니다 형님.」

                         - 유엘 폰 아드리안 -


꾸깃-

금발의 젊은 성주는 가타부타 자세한 설명도 없이 명령조로 짧게 쓰여진 편지를 휴지조각처럼 구겨버렸다.
“건방진 놈”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한번 쳐주고는 구겨진 서신을 하사관의 면전에 집어 던지자 제복을 칼같이 갖춰 입은 군인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이게 무슨 무례십니까. 공작전하의 서신을 함부로 취급하다니!"
스프링처럼 튀어나오는 하사관의 반발에 성주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바짝 마른 주제에 깔아보는 새파란 눈동자엔 묘하게 박력이 넘쳐, 정면에서 시선이 부딪힌 하사관은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은발에 가까운 엷은 금발머리에 창백한 피부의 성주, 아힌스 폰 아드리안은 평균치보다 키가 꽤 크다는 걸 빼고는 소문 그대로 나약해 뵈는 미남자였지만 어딘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우선 가느다란 주제에 확 치켜 올라간 양 눈썹이 그러했고, 신경질적으로 마른 긴 손가락 역시 성격을 대변했으며 날카로운 턱선과 얇은 붉은 입술에 가서는…흡사 며칠 굶은 흡혈귀 백작과 견주어 볼만 했다. 한마디로, 얼굴은 제법 반반한 것이 성질은 참 더러워 보이더라 이 말이다.

"…무례? 무례라."
   
움찔.

"경. 내가 그대를 뭐라 불러야 하나."
"…호먼 경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세드릭이라 하셔도 좋고."
"아아 그래 그래, 세드릭 호먼 경. 뭐 호칭이야 그렇다 치고,  그대는 다른 이의 집을 방문 할 때 늘 이런 식인가? 응?"

금발의 미청년, 아힌스 폰 아드리안은 얇은 입술을 절묘하게 비틀며 이기죽거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무장한 기사들을 끌고 들이닥쳐서는 군대가 머물 준비를 해놓으라니! 여기가 저들 여관이나 캠핑 장소도 아니고 갈 테니 준비해놔라 그러면 네 알았습니다요 하고 꼬리 달린 개처럼 복종해야 한다 이건가. …미친놈. 정말이지 기가 막히다 못해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꼈다. 그렇잖아도 부실한 몸이라 오늘처럼 폭설이 오는 날은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는데 별 같잖은 소리까지 들으려니 없는 두통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흠흠. 물론 조금 놀라셨을 거라는 건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한창 전쟁 중이 아닙니까. 미리 알리지 못한 건 유감이나 사정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부디 협조 해주십시오.”

싸늘한 성주의 표정에 조금 위축되었던 하사관은 그럴싸한 명분이 생각난건 지 어깨를 주욱 피며 다시금 입을 놀렸다. 이만한 사정이 있는데도 말을 안 들을 테냐, 라는 초롱초롱한 눈망울. 다리를 꼬고 앉은 성주는 표정을 숨길 줄 모르는 세드릭 호먼의 어수룩한 태도를 한껏 비웃었다.

“사정 좋아하시네. 지나가는 개도 웃을 소리는 집어치워.”

그는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하사관을 비껴 바깥 창문 너머로 보이는 새까만 무리들을 경멸스레 노려봤다. 이 추위에도 흐트러짐 없이 사열식 하듯 정렬해 있는 검은 기사단. 아드리안 공작가의 흑기사단, 제국의 빛나는 별, 검은 독수리의 충성스런 부하들. 그리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전사들의 땀내나는 육체………….
…정말이지 쳐다만 봐도 밥맛 떨어졌다.
저런 근육질 바보들이 한시라도 샤휀 성에 머문다는 건 그로서는 절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절이야."
"예?"
“말귀 못 알아 먹나? 거절이라고 거절. 저것들을 데리고 당장 내 성을 떠나.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지는군.”
“아니, 성주! 아드리안 공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떠나라니요, 지금 당장 갈 데가 어딨다고! 이제 조금 후면 본부대가 도착할겁니다. 그들을 모두 얼려 죽일 작정이십니까!”
“죽든 살든 알게 뭔가. 애초에 이 따위 서신 한 장으로 해결하려는 그대 상관의 실책이지.”
“이보십시오 아드리안 공자!”

하사관은 시뻘개진 얼굴로 탁자를 탕, 내리쳤으나 금발의 젊은 귀족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외려 모욕당한 건 자신이라는 듯 새파란 눈동자로 깔아보는 시선이 꼭 잘난척하는 여우새끼 같아 세드릭 호먼은 어금니를 박박 갈았다. 대체 이 까다롭고 오만한 고집불통의 남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휴우…. 성주, 이러지 마십시오. 성주께선 이 제국의 대귀족이 아니십니까. 나라를 위해 군의 거처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귀족의 의무, 비록 사정상 일찍 통보하지 못했다 하나 샤휀과 가까운 국경을 지키는 군대를 위해 이 정도 배려를 못하십니까?”

“그런 배려 따위 나는 모르네. 군인들은 거칠고 민폐만 저지르는 존재야. 낮에는 민가에 내려가 가축을 잡아먹고 밤에는 술과 여자를 찾아 행패를 부린다지. 그런 것들을 내 성에 들일 수는 없어. 게다가 샤휀은 그대들을 받아주기엔 풍족하지 못한 땅이다. 다른 곳을 찾아보게.”

“…그런! 모든 군인들이, 기사들이 그럴 거라는 건 절대로 편견입니다. 아드리안 공작 전하는 뛰어난 지휘관이시고 흑기사들은 기강이 잘 잡힌 예의 바른 자들입니다.”

공작에 대한 언급이 있자 반듯한 성주의 미간에 서서히 주름이 잡혀갔다. 아주 싫은 소릴 들었다는 표정이었으나 조금 눈치가 둔한 세드릭 하사관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세드릭 경. 나는 인내심이 좋은 편이 못되네. 더 이상 긴말 하지 않을 테니 데리고 온 기사들을 챙겨서 당장 내 성을 떠나주게. 아드리안 공작이 뛰어난 지휘관이든 아니든 간에 난 그대들이 샤휀 성에 머무는 것, 절대 허락 못해."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성주는 우아하게, 그러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세드릭 호먼을 잘라냈다. 일그러지는 하사관의 얼굴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면서.

“아드리안 공자!”

“시끄럽군, 경. 난 지금 몹시 피곤하고 예민해. 더 이상 자네의 헛소리 들어주고 싶지 않아. 알아듣나?”

“이게 무슨,”

“-알아들었으면 당장 내 성에서 나가.”

군이 정 숙소가 필요하다면 저지대에 널린 게 귀족들이 버리고 간 저택이니 그곳을 쓰면 되는 것이다. 물론 샤휀보다야 당연히 불편할 테지만 그건 저들 사정이고 성주가 그것까지 챙겨줘야 할 의리는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이십 년 전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저주스런 혈육의 부대라는데야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성주의 비틀린 심사를 모르는 세드릭 하사관은 기름에 불을 붓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날리고 말았다.

“성주! 아무리 대귀족이라지만 당신 또한 공작가의 식솔이 아닙니까! 제국군의 대원수이자 아드리안 가의 가주인, 공작 전하의 명령을 이런 식으로 무시하면 결코 결말이 좋지 못할 겁니다!”
“……….”

샤휀의 성주는 품위 있게 탁자 위의 종을 두 번 흔들었다. 주인의 신호가 있자 순식간에 우르르 하인들이 들이닥쳤고 잠시 후 성주의 앞에서 침을 튀기며 일장연설을 하던 하사관은 달랑 들려 눈 내리는 중정으로 내쳐졌다.
“…막돼먹고 천한 것 같으니.”
눈 밭에 넘어진 채로도 뭐라 뭐라 항의하는 하사관의 몰골을 싸늘하게 비웃으며 아힌스 폰 아드리안은 커튼을 닫아버렸다.   









◈◈


"쉽지 않군요."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설원을 보며 툴락은 눈썹을 찡그렸다. 동복을 탄탄하게 갖춰 입었지만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뽀얀 서리처럼 얼고 성에가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루르발을 비롯한 이 지역 지리가 상세히 기록된 지도를 머릿속에 통째로 암기하다시피 해두었지만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그런 건 아무 짝에도 소용 없어졌다. 툴락은 일단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무조건 퇴각하라는 현지 지휘관의 당부를 떠올렸다. 그 말을 들었던 당시 툴락은 그를 겁쟁이라 비웃었었으나 막상 닥치고 보니 북부의 폭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지상의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지독한 눈 폭풍이란…정말로 끔찍했으니까.

"후우…. 이런 겨울을 몇 번이나 보냈을 텐데, 먼저 있던 사령부 놈들은 대체 뭘 한 건지 기가 차오. 월동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는 보고서는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황성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 놈들부터 교수대에 매달아야 할거요."

변경지역에서 흔히 있는 비리를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으나 이곳 북부 경계선은 해도해도 너무했다. 간도 크지. 국경 수비대란 작자들은 비축해 놓은 군량미는 물론 긴급시를 대비한 비상용 미곡까지 모두 해먹은 것도 모자라 국경의 주민들에겐 특별 경비세니 뭐니 하며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세금까지 뜯어내고 있던 것이다. 그런 주제니 월동 장비를 제대로 갖춰 놓을 리 없었다. 보고서에만 그럴싸하게 써두었을 뿐 뒤로 빼돌린 물자와 장비가 엄청났고 첫눈이 내릴 무렵 아드리안 공작의 군대가 보급 받을 수 있는 군수품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 덕택에 최전방 요새인 카슬란을 회복하고도 군대를 퇴각시켜야 하는 웃기지도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개 돼지만도 못한 놈들!”
“아무렴. 쓰레기 같은 놈들이지.”

평소 툴락과는 사이가 좋지 않던 부단장 슈미르조차 맞장구 쳤다. 정면으로 보았다간 실명하기 딱 좋은 설원 몇 십 킬로를 함께 진군하다 보면 없던 동료애도 싹 트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 욕할 때만 죽이 잘 맞는다는 거지만….

"제기럴. 얼른 샤휀에 입성하지 않는다면 발가락을 잘라야 할 것 같소. 더럽게 춥군."

"그러기 전에 도착해야겠지요. 먼저 보낸 세드릭 부대가 잘 도착했다면 지금쯤 뜨거운 칠면조 고기가 우리를 위해 익어가고 있을거요."

말을 마치자 여기저기서 꿀꺽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침묵하고 있어도 툴락과 슈미르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것이다. 툴락은 쓴웃음을 삼켰다. 벌써 몇 마리의 군마가 길바닥에서 얼어 죽었던가. 그간 생과 사를 함께 해온 용맹스런 흑기사들이나 추위는 죽음보다 두려웠다. 그들 대부분은 남부 출신이었고 개중엔 눈을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얼어붙은 동토는 흑기사들의 땅이 아니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내 툴락은 멀리로 아른아른 보이는 샤휀의 성채를 응시하며 잔걱정을 접었다. 하늘에서 빗발치듯 내리는 폭설에도 아랑곳없이 홀로 고고하게 서있는 새하얀 샤휀성……. 절벽을 등지고 선 우아한 하얀 성은 그야말로 고전명화에나 나오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삼백 년도 더 전에 지어졌다는 아드리안가의 고성은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샤휀에 파발을 보내라."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서늘한 젊은 공작에게서 드디어 명령이 떨어졌다. 툴락은 반보 앞의 거대한 흑마 위에 앉아있는 주군의 안색을 재빨리 살폈다.  

“먼저 간 세드릭 하사관에게 마중을 나오라 이를까요?”

홍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흑요석의 눈동자가 잠시 깜빡였다. 날렵한 턱을 슬쩍 기울이던 스물 네 살의 새파랗게 젊은 공작은 샤휀 성의 운치에도 전혀 감흥이 일지 않는지 평소와 비슷한 냉정함으로 일갈했다.

“그럴 필요는 없겠지. 다만 곧 입성할 테니 준비를 해두라 이르면 될 것이오.”

툴락이 알고 있기로는 샤휀의 성주와 공작은 친형제지간, 무려 이십 년 만에 상봉하는…말하자면 이산가족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감흥이 없는 것일까. 아무리 기꺼이 모시는 주군이라지만 참으로 냉정한 사내였다.

“존명. 그리하겠습니다.”







* 그 무렵 샤휀 성


"그래도 저대로 세워두다가는 모두 얼어 죽는 거 아닐까요?"

에밀리 부인은 조리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시커먼 무리들을 보여 근심스레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인상은 살벌하지만 아들만한 나이의 젊은이들인데 이 폭설에 밖에서 떨고 있는 모양새가 마음에 걸렸다. 농담 아니라 한 시간만 더 저러고 있는다면 아마 딱딱하게 굳어버린 발가락을 다 잘라내야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거기다 저 지치고 배고파 보이는 얼굴들이란…….

"쯔쯧…. 그러게 왜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나 그래. 우리 도련님이 어떤 분이신데."

전장에서는 우는 아이도 그친다는 소문의 무서운 흑기사단이었지만 인심 좋은 중년 부인의 눈에는 보살펴줘야 할 어린 청년들로만 여겨졌다. 아무렴. 저렇게 창백한 얼굴들로 달달 떨고 있는데 동정이 가지 않을 수 있나. 윔플 집사도 조금은 동의하는 바였지만 괜한 헛기침만 내뱉으며 내색은 하지 않았다.

"도련님도 참 너무하시지. 저러다 정말 사람 잡겠네."

"거 참! 쓸데없는 말 말고 가서 일이나 해요. 행여라도 불쌍하다고 뒤로 음식 같은 것 가져다 줄 생각은 아예 말고! 저들도 정 못 버티겠다 싶으면 떠날 테지요."

한마디로 일축하고 트롤리를 끌고 나가는 집사였지만 사실 그의 속도 그리 개운치는 않았다. 저쪽이 먼저 무례했던 건 사실이지만 제국의 군대를 상대로 이래도 괜찮은 걸까. 더구나 지금 밖에서 못 나간다고 버티고 있는 이들은 공작가의 검은 기사단인데. 주인이 집안사람들과 척을 지고 있다고는 하지만…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사정이고 공무를 수행하러 온 기사들에게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판단이 안 섰다.

그러나 그런 초조한 윔플 집사의 마음도 모른 채 이 집의 오만한 주인님은 여유롭게 식후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중정이 제일 잘 보이는 연회실의 테이블에 앉아서.
윔플은 따끈따끈한 홍차를 음미하며 (평소에는 그토록 싫어하던)창 밖의 폭설을 기분 좋게 바라보는 미남자의 우아한 자태에 한숨을 내쉬었다.

…괴팍하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사디스트까지 되신 겁니까, 주인님…….






◈◈


샤휀 성에 도착한 순간 툴락은 기막히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이미 어둑해진 눈 쌓인 중정에서 세드릭 부대는 얼어붙어 둔중해진 손놀림으로 힘들게 임시막사를 치고 있었다. 몇몇은 동복을 껴입고도 추운지 간신히 세워진 막사 뒤에서 삼삼오오 모여 바람을 피하고 있었는데 꼭 병들고 지쳐 오갈 데 없어진 불쌍한 늙은 짐승 무리처럼 볼품 없는 낯짝들이었다. 한때는 전장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흑기사들이었거늘 저런 초췌한 몰골이라니, 툴락은 속에서 열불이 올라왔다.

"허허. 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라오. 이 추위에 기사들을 저렇게 세워두다니!"

옆에서 부단장 슈미르도 노성을 터뜨렸다. 성정이 거칠기는 해도 자기 부하만큼은 무척 아끼는 사람이니 화가 날만도 했다. 그런 슈미르의 노성에 뒤이어 사령부 지휘관들의 동요된 목소리들이 하나 둘씩 잇따라 튀어나왔다. 어떻게 된 일 입니까. 막사를 왜 저기에 짓고 있는 겁니까. 이곳은 아드리안 공작 가의 성일 텐데 군을 이렇게 박대하다니 기가 막힙니다!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싸늘한 목소리가 소란을 일축시켰다.

"시끄럽군."

…뚝.
지휘관의 한마디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젊은 공작은 표정 없는 얼굴로 성의 본채와 중정의 기사들을 잠시 응시하더니 세드릭 호먼을 데려오라 지시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내는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조금 불쾌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일동은 침묵했다.
세드릭 호먼의 설명은 침착하고 상세했다. 어째서 우는 아이도 뚝 그친다는 흑기사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눈 속에 막사를 짓고 있는지, 왜 성에는 발도 못 붙이고 이 꼴이 된 건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몇 번이나 샤휀의 성주에게 간청했고, 심지어는 자존심이고 명예고 내팽개친 채 애원까지 했으나 그 이기적인 성주는 공작의 사자를 가차없이 내쳐버렸다. 결국 하다하다 안돼 공작의 권위를 내세워 협박하는 세드릭을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며 「내 방 창문 아래에서 떠드는 저 시끄러운 자를 멀리 쫓아버려. 얼마나 떠드는지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군.」 라는 말로 일축해 세드릭 일행을 귀찮은 비렁뱅이떼 취급해버린 성주였던 것이다.

듣다 보니 정말 기가 찰 정도로 한 톨의 동정심도 없는 냉정한 남자였다.

“…지독한 인간! 아무리 그래도 이 폭설에 사람을 내쫓다니.”
“완전히 독종이요 독종.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냉혈한이로구먼!”
“아니, 그런데 샤휀의 성주는 공작 전하의 형님이 아니오? 형님 된 분이 참 너무 하시는 구려. 동생이 모처럼 먼 길을 왔는데 환대는 못할 망정 문전박대라니!”
“역시 소문의 사이 나쁘다는 말이 사실이었…,”

거기까지 말이 나왔을 때 누군가가 눈치 없는 발언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에 쉽게 입을 놀렸던 경솔한 사내가 입을 흡 다물었다.
“…….”
침묵이 흘렀다. 절대로 실수였다. 흥분했다지만 감히 공작가의 집안 사정에 대해 왈가왈부하다니…. 실권으로 치자면 황제보다도 강한 아드리안 공작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게 없었다.
“…죄송합니다 요놈의 주둥이가 그만 주책을…!”
“……….”
충분히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이었으나 공작은 딱히 질책하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내는 조금 비딱한 자세로 백색의 성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드릭, 1층 창으로 침입하려는 시도는 해봤나.”

그리고 떨어진 한마디.
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젊은 총사령관을 주목했다. 1층 창으로 침입하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그런 참에 의외로 세드릭만은 공작의 말을 이해했던 건지 곤란하단 표정을 지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좀 힘들었습니다. 이쪽은 스물도 채 되지 않는데다 1층의 덧창을 모두 걸어 잠가 놓은 통에 엄두도 못 냈습니다 전하.”
“덧창이라.”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서 샤휀의 덧창이 모두 쇠로 만들어졌습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건 무리입니다.”

세드릭 호먼의 설명에 아드리안 공작은 침묵을 유지한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얼어 죽을 듯 수선을 피우는 늙은 귀족들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진중함이야말로 그의 최고의 미덕이었다. 잠시 후 그는 조금 턱을 조금 끌어당기면서 입을 열었다.

"공성추를 준비하게."
"예?"
"그 외에도 지금 준비할 수 있는 공성장비는 다 가져오도록."
"전하, 외람된 말이오나 공성장비는 대체 무슨 일로 찾으시는 겁니까."

공작은 짧게 답했다.

"툴락 경. 공성장비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공성장비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그야 성을 부수는 것 뿐이겠지요.”
“알면 명을 따르게.”

냉미남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기에 툴락은 추위에 뻣뻣하게 굳어있는 기사들을 집합시켜 시키는 대로 준비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른 귀족들도 총사령관의 뜻에 따라 왜 준비하는 줄도 모르면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급하게 준비된 공성추와 투석기, 공성탑 등이 눈 쌓인 중정 한가운데 일렬로 정비되어 놓여지자 아드리안 공작은 우왕좌왕 하는 무리에 명령했다.

"지금부터 성문을 부순다."
"……!"
"……헉."

일시에 여기저기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성문을…?'  '성문을 부숴?' '……성문을 부수라는군.'
툴락과 부단장 슈미르조차 어리둥절했다. 공성기로 성문을 부수라니 이쪽이 민가를 터는 무뢰배도 아니고 그런 무도한 짓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샤휀 성은 적의 성도 아니요, 일반 평민의 사가(私家)도 아닌 무려 300년이나 된 아드리안 가의 고성이다. 비록 고약한 성주 덕택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마는 그렇다고 성을 아예 때려부수고 들어가라니…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심한 짓이었다.  

"전하. 다시 한번 외람된 말이지만 일단은 저지대의 저택을 찾아보는 게 나을 듯 합니다."
“제 생각에도 공성장비까지 동원해 성주를 겁주는 건 좀 지나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전하의 뜻이 그리 확고하시다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아무렴요.”

한기가 서린 검은 눈동자가 한번 전신을 스치자 툴락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옆에서 슈미르 부단장이 혀를 끌끌 차댔지만 그의 주군은 말이 없기에 더 무서운 남자였다.

"공격."

짧게 떨어지는 한마디 명령에 툴락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공…공격------! 전군 공격이다!!!"

내키지 않는 뚱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슈미르 부단장도 우렁찬 목소리로 따라 외쳤다. 무방비인 귀족의 성을 공략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감히 주군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슈미르 보다 열 살이나 어리지만 그는 자신의 주군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평소 이런 무모한 명령을 내리지 않던 사내가 그리 하는 데에는 필시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애초에 샤휀을 고집하던 것부터 심상치 않았었으니.  

"전군 공격이다! 준비해라! 성문을 부순다! 공성추를 들어올려라!!!"

부단장의 말이 떨어지자 한나절을 추위에 떨었던 기사들의 눈에도 조금씩 광기가 흘렀다. 처음엔 조금 주저하던 자들도 ‘샤휀에 입성해서 인정머리 없고 싸가지 없는 금발 성주를 끌어내자’ 라는 구호가 들리자 분연히 일어나 공성기와 한 몸이 되어갔다. 군대를 박대한 소문의 허약한 성주에 대한 분노가 기사들을 움직인 것이다.

"성문을 부수고 샤휀성에 입성한다!"
"총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공성추로 성문을 부숴라!!!!!!!!!!!!"
"투석기로 창문을 부수고 공성탑을 받쳐라 2층 창으로 들어간다!"

"공격!!!!!!!!!!!!!!!!!!!!!!!!"

와아아아아아-----------


일대가 떠나갈 듯 함성이 울려 퍼졌다.

혹한에 지친 흑기사들은 개떼처럼 달려들어 성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기사도고 뭐고 간에 일단 성에 들어가면 따뜻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미친 들개처럼 돌진하게 만들었다. 북부 전선에 도착한 이후로 흑기사단의 가장 단결된 모습이었다.슈미르는 부단장으로서 이 사실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조금쯤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훌륭하군요. 이런 기세로 만일 아르토니아 성을 공략한다면…단언컨대 하루면 성공할 수 있을 거요."

툴락도 씁쓸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성문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성안에서 놀란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당연했다. 비록 군대가 성 앞 뜰까지 와 있다는 걸 알았다 하나 그들이 설마 자신들을 공격할 줄이야 예측했겠는가. …어찌되었든 자국의 군대인 것을.

“성문이 열렸나 보군요……….”

깊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희열감도 분명 존재했다.

“어디, 그 오만한 성주의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습니다.”
“흠흠. 그자도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했겠지요. 적당히 시위하다 물러갈 줄 알았나 보죠 감히 우리 흑기사들을 뭘로 보고.”

…사실 적당히 시위하다 물러가는 쪽이 정상이긴 했다.

“아무렴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지! 공작 전하께서 잘 생각하신 거요. 말 안 듣는 건방진 인간은 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돼.”

어색하게 큰 소리친 툴락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주군을 찾았다. 성을 공략하는 것에 성공했으니 이젠 수습해야 할 차례였다. 흥분한 기사들이 성안까지 들이닥쳐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총사령관이 한번 나서서 진정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공작전하, 대체 어디-,"

잠시 신경이 분산된 사이 아드리안 공작은 사라지고 없었다. 해가 저물어 사물의 실루엣마저 감춰지는 이때에 총사령관은 대체 어딜 간 걸까. 휘적휘적 한참을 찾던 중 툴락은 드디어 눈 쌓인 느릅나무 아래 서서 위를 올려다 보고 있는 주군을 발견했다.

'뭘 보고 계신 거지? 대체 저 위쪽에 뭐라도 있나?'

언뜻 2층 테라스에 사람 그림자 같은게 스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하얗게 눈 쌓인 나무 아래 아드리안 공작은 그림처럼 운치 있었으나 상황이 시급했다.

"전하, 성문이 열렸습니다. 이제 입성하실 때입니다."

툴락이 다가가도 한없이 위에만 바라보던 아드리안 공작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에는 기묘한 열기가 차 있었다.

"수고했네."

공작은 몸을 돌려 성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때 툴락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의 냉막한 상관이 아주 잠깐 웃었던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저 미친놈들이!”

아힌스의 손끝에 있던 찻잔이 떨어져 파삭-, 부서졌다. 더 이상 테라스에 느긋이 앉아 관망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힌스는 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은 공성추로 성문을 부수는 흑기사들을 부들부들 떨면서 노려봤다. 설마설마 했지만 정말로 성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 기사단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다고 되뇌었으나 어쨌든 이쪽이 현실이었다.

“맙소사.”

돌은 놈들. 고작 성에 들여놓지 않았다고 때려 부술 생각을 하다니, 무식해도 이렇게 무식할 수가! 치가 떨렸다. 아연실색한 아힌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뱅글뱅글 돌며 창 밖을 내려다보다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장신의 사내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뭐지?’
아까부터 관찰하고 있었다는 듯 당황한 아힌스에게 슬쩍 지어 보이는 차가운 미소…. 소름이 돋았다. 긴 검은 머리칼에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한 얼음 같은 미남자는 분명 언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누구였더라.’
희미한 기억 속의 얼굴들을 대조시켜 보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뒤돌아 나가려던 아힌스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우뚝 멈춰 섰다.
‘…유엘 폰 아드리안.’
대답을 듣지 않아도 확신이 섰다. 놈이 유엘이다! 희번뜩, 눈 속의 냉미남을 쏘아보자 사내는 이번엔 대놓고 아힌스를 비웃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쪽이 형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는지 꽤나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으드득-.
남의 성을 때려부수게 해놓고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니 아주 취미가 더러웠다.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아힌스는 몸을 돌려 뛰다시피 연회실을 빠져나갔다. 일단은 이쪽 문제가 더 급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우 복도에 도착했을 뿐인데도 성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깨진 유리 파편이며 날뛰는 성안의 사람들, 성안으로 휘몰아치는 눈보라까지……. 그 와중에 값비싼 도자기들을 구하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집사 윔플은 아힌스를 발견하고는 사색이 돼서 달려왔다.

"맙소사! 주인님! 주인님! 무사하신 겁니까!"
"……일단은."
"아이고 불행 중 다행입니다아.
아니지, 이럴게 아니라 일단 여기를 피하셔야 합니다. 신이시여 맙소사.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지!"

윔플이 아연해있는 아힌스의 팔목을 붙잡고 발을 옮기려는 순간 천장에 매달려 있던 무거운 샹들리에가 그들의 옆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디선가 날라온 투석에 맞아 부서진 것이다.
"………………세상에."
늙은 집사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무너진 잔해로부터 천천히 물러났다. 샹들리에의 산산이 부서진 파편들은 S자로 설계된 계단아래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힌스 역시 달달 떨리는 두 손을 움켜잡았다. 순식간에 너덜해진 성의 내부가 처참했다. 머리를 흔들어 겨우 정신을 차린 아힌스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지난 이십 년간 숱한 폭풍우와 눈보라를 견뎌온 성이었으나 이런 끔찍한 꼴을 보인 적은 없었다. 이건 재앙이었다.
“내…성이……!”
절규에 가까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경솔했던 판단을 자책해야 할지 무식하기 짝이 없는 흑기사들을 욕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한마디로 충격과 공포였다.

이윽고 함성과 비명 속에서 한줄기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까지. 공격을 멈춰라."
아힌스는 끼기긱- 소리가 들릴 만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중앙현관에는 늘씬한 장신의 사내가 표정도 없이 서 있었다. 조금 전 눈이 마주쳤던 바로 그 사내였다.

"…유엘…."

추측대로 놈이 유엘이었다. 흰 피부에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흑백의 명암대비가 뚜렷한 외모의 동생은 입고 있는 제복까지 모조리 흑색이라 마치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악마새끼처럼 불길해 보였다. 엉망으로 부서진 성문의 잔해를 전리품처럼 밟고 있는 꼴도 밥맛이었다. 아힌스는 인상을 쓰면서도 어린 시절 기억의 한 단편을 떠올리려 애썼다. '분명 정말 끔찍하게 싫어하긴 했지만 그래도 얼굴만은 꽤 귀여웠던 것 같은데….' 눈 앞의 동생이라 추정되는 남자는 조각상을 깎아놓은 듯한 대단한 미남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귀엽다는 말과는 백만 광년쯤 거리가 있었다. 석고인형처럼 싸늘한 표정은 사람 몇을 칼로 쑤셔 죽이고도 '그런가 보다' 하며 태연할 것 같아 보였다.

'지긋지긋한 자식.'
난관을 붙잡고 있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어째서 놈을 또 만나게 된 걸까.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자신에게서 어머니의 사랑과 후계자 자리, 살고 있던 방까지 모조리 다 털어간 주제에 아직도 가져갈 것이 남았던가. 욕설이 잇몸을 비집고 튀어 나왔다. 정말이지 끔찍한 인연이었다. 한 핏줄이라지만 모질게도 비틀린 운명!

아힌스는 떨리는 몸을 천천히 곧추세웠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새파랗게 질려있는 고용인들을 진정시켜야 하고, 무엇보다 저 무뢰배 같은 놈들이 더 날뛰지 않도록 자신이 나서야 할 때였다.





부서진 성문 안으로 흑기사들은 끝도 없이 밀려 들어왔다.
그들의 무자비한 군홧발은 아힌스가 아끼던 카펫을 거침없이 짓밟고 다녔다. 아힌스는 욱씬욱씬 쑤셔오는 가슴을 움켜 잡고 계단 난관에 비틀, 기대섰다. 위병이 도진 모양이었다.
'무식한 것들.'
그렇게 속으로 욕설을 짓씹으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어느새 고요하게 가라앉은 홀 에서 아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샤휀의 성주는 어디 계신가."

머리칼이 쭈뼛 설만큼 서늘한 목소리에 아힌스마저 흠칫 어깨를 떨었다.

"……."
“……."

모두들 대답이 없자 아드리안 공작은 걸치고 있던 무거운 우플랑드를 벗어 부관에게 털썩 건넨 후 저벅저벅 샤휀성의 고용인들에게 다가갔다.

"다시 한번 묻겠다. 샤휀의 성주는 지금 어디 계신가."
  
좀 전보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음성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사내였다. 운 나쁘게 공작과 눈이 마주친 앳된 얼굴의 하인은 울상을 지으며 띄엄띄엄 대답했다.

"……주인님이 어디 계신지는……저,저희도 잘 모릅니다. 2층에 계셨던 것 같은데 워낙 경황이 없어서…."
"……."

표정 없는 공작은 말도 없었다. 하인에게는 오히려 그게 더 공포스러웠는지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어댔다.

"주인의 거취도 모르는 하인은 자격 미달이다."

스릉-
차가운 한마디와 함께 무거운 검 집에서 새하얀 검신이 빠져 나왔다. 히끅. 하인은 기절할 듯 침음을 삼켰다. 어느새 다리 사이에서 오줌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으나 괄약근 조절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하인의 추태를 나무라지 못했다. 아드리안 공작은 너무나 냉혹했다. 흑발의 공작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검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아힌스는 비틀대는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온 힘을 다해 일갈했다.

"공작. 이게 무슨 행패시오!"

"…주인님!"
"……!"
"……!"

홀 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계단 위의 금발 성주에게 쏠렸다. 이내 묘한 탄성과 함께 기사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반짝였다. 간간이 터져 나오는 ‘저 자가 바로 그 샤휀의 성주’ 어쩌고 하는 소리들이 아힌스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런 그들을 가소롭다는 듯 비웃어 준 아힌스는 이를 악물며 아드리안 공작의 발치까지 천천히 걸어나갔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감추며 한껏 턱 끝을 치켜들자 냉혈한의 검은 눈동자가 도로록 이쪽으로 굴러와 고정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체 알 수 없는 눈동자는 그대로 잠시 아힌스를 응시했다.

"찾던 내가 왔으니 일단 이것부터 치우시지요."

검지 손가락으로 칼 끝을 꾸욱 밀자 공작의 한쪽 눈썹이 슥 치켜 올라갔다. 이것 봐라-? 하는 표정. 이색을 띠며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눈빛에 아힌스는 아드득 어금니를 갈면서도 한쪽 무릎과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아힌스 폰 아드리안, 샤휀의 성주가 아드리안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아힌스가 네 살이나 연상이지만 작위는 유엘이 더 높았기에 제국의 서열 상 먼저 인사하는 게 법도였다. 뿐만 아니라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 상대가 허락하지 않는 한은 먼저 고개를 들 수 없는 것 역시 규칙인지라 아힌스는 파르르 입술을 떨면서도 유엘이 일어나라 할 때까지 계속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형님."

아힌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의례형식일 뿐이지만 이런 행위 하나하나가 그의 위치를 새삼 각인시켜주는 것 같아 몹시 굴욕적이었다.

"………."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걱정해 준 덕택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탈하셨다니 다행이군요."

걱정은커녕 20년간 서신왕래 한번 없던 냉랭한 사이의 두 사람 입에서는 교과서 읽는 것보다도 더 어색한 안부인사가 오갔다. 보고 있는 사람들이 민망할 정도로 냉기류가 흐르는 불편한 분위기였다. 인사를 끝낸 아힌스가 불쾌한 듯 고개를 돌리자 아드리안 공작이 이윽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추궁과 변명의 시간이었다.

"거칠게 들어온 것은 예의에 어긋나나 성문이 굳게 닫혀있기에 형님께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콜록….

공작의 뒤에 서있던 툴락경은 순간 격한 기침을 토해냈다. '걱정은 무슨!'
물론 어이가 없는 건 아힌스 쪽도 마찬가지였다. '성문을 다 때려 부수고 들어온 주제에 그 따위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를 하다니-.'

"제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성문은 왜 닫혀 있었습니까?"
"……."
“본대가 가기 전 놀라지 마시라 미리 서신까지 보냈거늘 문이 굳게 닫혀 있기에 필시 형님께 사고가 생긴거라 짐작했습니다만.”
“…흠흠.”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편지 한 통 보내 놓으면 내가 네놈에게 성을 제공해야 할 의무라도 생긴다 이거냐!! …하고 따지기엔…아무리 아힌스라도 흉흉한 눈빛으로 성안을 점령하고 있는 흑기사들이 심히 마음에 걸렸다.

"……성문이 두꺼워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오. 모쪼록 추운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연대의 기사들이 달려들었는데도 소리가 안 들렸다…? 문이 정말 두꺼웠나 봅니다.”
“아 글쎄 들리지 않았다잖소!”

암튼 난 못 들었다니깐!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아힌스는 되려 뻥뻥 큰소리를 쳤다. 궁색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똥고집만은 천하제일이었다. 그 뻔뻔함에 툴락 이하 부하장교들은 입을 떠억 벌렸으나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백금발의 성주님은 콧방귀까지 뀌는 게 아닌가.

“그러는 아우님이야 말로 좀 무례하신 게 아니오? 남의 성문을 부숴놨으면 한마디 사과라도 있어야지.”

그래.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우선 그것부터 사과해야 할 일이다. 물론 사과를 한다 해도 앞으로도 이 성에 머무는 걸 허락하는 일 따윈 절대 없을 테지만.

푸른 눈을 빛내며 그렇게 제 주장만 해대는 아힌스를 아드리안 공작은 재밌다는 듯 가만히 주시했다. 재주부리는 애완동물이라도 보는 눈빛이었다.

“왜 말이 없으십니까. 주위를 좀 둘러보시지요. 남의 성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지나치게 침착하십니다?”

거기까지 들어준 공작은 비딱하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툴락을 향해 턱짓했다.

“그럼, 다친 사람도 없는 것 같으니 기사들에게 숙소를 배정하고 쉬게 하시오.”
“…아 예….”
“1,2층은 창이 모두 깨져 바람이 많이 들 테니 모포를 충분히 주도록 하고.”
“…내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아우님.”
“점호는 식사 후 직접 하도록 하지. 그럼 각자 위치로-.”
“이보시오 공작!”

이쪽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에 섬세한 금발 성주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랐다. 그 꼴이 꼭 약이 바짝 오른 살쾡이 같은 터라 툴락을 비롯한 몇몇 기사들은 속으로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토록 잘난척하며 군대를 통째로 얼려 죽이려 하더니만 아주 쌤통이었다.

“공작!!!!!!!!!!!”

결국 발끈한 아힌스가 한마디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공작의 커다란 손이 아힌스의 입술을 덮으며 다가왔다. 얼음 같이 차디찬 눈동자를 바짝 갖다 댄 그는 작게 속삭였다.

"여기까지만 하시지요 형님. 더 이상 흥분하신다면 내게 당신을 감금할 수 있는 빌미를 주는 겁니다."
"……!"
"사실 저로서는 그 편이 편하긴 합니다만…형님 체면을 생각해서 충고하는 겁니다. 문을 걸어 잠근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나직하고 서늘했다. 겉으로는 정중한 척 신사적인 척 말하지만 실상은 협박이었다. 더 이상 시끄럽게 굴면 지하 감옥에 쳐 넣겠다, 결론은 바로 그거였다. 커다란 손이 뺨을 스치듯 부드럽게 떨어지자 아힌스는 이를 갈며 대꾸했다.

"이번 일은…아무리 아드리안 공작이라 해도 재판에 회부할 수 있소."

유엘의 눈동자가 무감하게 웃었다.

"무슨 명목으로?"
"무단가택침입죄. 군대라 해도 주인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남의 성에 침입해서 멋대로 점거할 수는 없어. 그건 범죄요."
"그래서 조금 전 허락을 구했잖습니까 형님."
"난 전혀 허락한 적 없소."
"글쎄요. 곧 허락하시게 될 겁니다."
"그럴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만."
"………."
"………."
"아니. 당신은 반드시 허락하게 될 겁니다."
"하! 아주 자신감이 넘치시는구려? 왜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아? 대체 뭘 믿고?"

"이전에도 형님처럼 제멋대로 제 고집만 피우던 이들을 여럿 만나봤습니다. …아주 피곤한 작자들이었지요."
"……."
"허나 그런 이들을 삼일 쯤 지하에 가둬두고 물과 음식을 끊어버리면 결국은 모두 예, 라고 답하더군요. 딱히 고문을 가한다거나 괴롭힌 것도 아닌데 제 풀에 지쳐버리는 겁니다. 귀족들이란 대부분 정신력이 형편없거든요."
"……!"
   
하얗게 질리는 아힌스의 낯빛에 공작은 싸늘하게 조소하며 덧붙였다.

“형님께 꼭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말만 잘 듣는다면.”



  





◈◈



공성 때문에 1,2층은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다행히 안쪽에 있던 응접실은 무사했다.

때문에 흑기사들을 중앙 대식당으로 보내고 응접실에서 저녁을 들게 된 사령부의 인사들은 주인의 세련된 미의식에 몹시 감탄하고 있었다. 바닥부터 벽지까지 은은한 아이보리로 색감은 통일하되 미묘하게 문양과 광택에 변화를 주는 방식은 수도에서도 볼 수 없던 독특한 것이었다. 거기에다 조명의 밝기도 딱 적당했고, 마호가니 소파의 다리는 개브리올 식이어서 정말로 고풍스러웠다.

"오오…거기다 저 콘솔은 삼백 년 전 양식을 그대로 살린 수작이네요. 아마 이곳 성주는 응접실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했나 봅니다. 보세요. 모든 게 예전 스타일 그대롭니다."

한 사내의 감탄에 다른 이들도 연달아 각양각색으로 호응했다. 군인이라도 귀족근성은 어디로 안가는 것인지 다들 이런 것에 참 관심이 많았다. 툴락은 그런 장교들의 모습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관심 가는 거야 그렇다 쳐도 이런 때에 저런 식으로 호들갑을 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드리안 공작의 직속 부하가 아닌 대귀족 출신의 장교들은 어디에서든 티가 났다. 입만 살아서는 나불나불…눈치도 더럽게 없었다.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제일 꽁무니로 빠지는 주제에 말이다. 이번 공성 때도 너무 무례한 짓이라느니 같은 제국 귀족의 성에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는 없다느니 뒤에서 실컷 떠들어댔으면서 결국 성문이 무너지자 제일 먼저 포도주와 뜨거운 수프를 찾던 자들이었다. 태도 돌변하는 게 아주 박쥐 뺨쳤다.  
황제의 명 아래 참전한 같은 귀족 출신 장교라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게 정말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럴 때는 한마디 해주셔도 괜찮으련만.'

툴락은 멍청한 귀족들이 뭐라 떠들든 유유자적 나이프를 놀리고 있는 아드리안 공작을 보며 불만스레 투덜댔다. 적어도 공작만큼은 두려워하는 귀족들이니 조용히 하라 한마디 해준다면 모두가 입을 다물 테지만 정작 공작 전하는 그들이 뭐라 떠들건 전혀 관심 없는 눈치였다.

‘아니 원 무심해도 저렇게 무심하실까. 저 꼴깝 떠는 무리들을 보며 그래 고기가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 가십니까 전하? 참으로 비위도 좋으십니다.’

남이야 뭐라 하건 말건 워낙에 마이 페이스인 주군이었다. 툴락은 한숨을 내쉬며 샐러드를 휘저었다. 그리고는 잠자코 고기 한 점을 썰어 입에 넣었다.

‘…음.’

과연, 샤휀의 성주는 미적 감각뿐만 아니라 입맛도 까다로운 건지 주방장이 내온 요리들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세드릭이 설명하길 섬세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미남자라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그래. 비록 성격은 진짜 진짜 진짜 안 좋아 보였지만…취향만큼은 훌륭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이런 성에서 남은 겨울 동안을 보낼 수 있다면 기사들에게나 지휘관들에게나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았다. 기대한 것 이상으로 넓고 시설도 좋고…에 또 흠흠. …음식도, 괜찮으니까.
…다만 아까 그들이 들어오면서 부숴버린 성문과 창 때문에 당분간은 고생해야 할 테지만.
     
'아니, 그러고 보니 당장 오늘밤은 어떻게 한다?'

1,2층 창을 전부 깨버린 덕택에 아래층에 멀쩡한 방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뻥 뚫린 창 사이로 밤사이에 눈보라가 들이칠게 불 보듯 뻔했다. 기사들이야 워낙 튼튼하니 대충 모포 몇 장 던져주면 알아서들 잘 테지만 총사령관까지 그렇게 자게 둘 수는 없었다. 물론 체력이야 전혀 걱정 없는 인간이지만 노숙하는 것도 아닌데 감히 주군을 한데서 재우다니 그건 부관으로서 자존심 문제다.

'이것 참 난감한데. 그렇다고 3층의 하인들 방을 내놓으라 할 수도 없고!'

툴락은 이렇게 고민하는 자신의 속도 모르고 홀로 유유히 식사하고 있는 냉막한 총사령관을 보며 왠지 자꾸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침대시트만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앉아있는 아힌스에게 집사가 근심스레 물었다. 비록 몸은 허약해도 평생 기죽어 살아온 적 없는 주인에게 아까의 한판 승부는 타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괜찮네. 자넨 그만 나가보게."
"진정이 되시도록 뜨거운 차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괜찮다는데두. 필요 없으니 그만 나가 봐. 어서!"
"………."
"………."
"…그럼 부디 편히 쉬십시오."




털썩--

집사가 조심스레 뒷걸음질 쳐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아힌스의 몸이 침대위로 무너져 내렸다. 긴장 풀린 몸뚱이가 덜덜 떨려오는걸 느끼며 그는 애꿎은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크게 울려 퍼지던 사내들의 함성과 여기저기서 챙강챙강 창문 깨지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이명처럼 들려왔다. 더불어 사냥감을 노리는 듯 이쪽을 향하던 차가운 유엘의 얼굴도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이전에도 형님처럼 제멋대로 제 고집만 피우던 이들을 여럿 만나봤습니다. …아주 피곤한 작자들이었지요.’

‘허나 그런 이들을 삼일 쯤 지하에 가둬두고 물과 음식을 끊어버리면 결국은 모두 예, 라고 답하더군요. 딱히 고문을 가한다거나 괴롭힌 것도 아닌데 제 풀에 지쳐버리는 겁니다. 귀족들이란 대부분 정신력이 형편없거든요.’

‘형님께 꼭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말만 잘 듣는다면.’


"…잔인한 놈."

물론 자신도 그닥 너그러운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엘보다는 나으니 얼마든지 욕할 만 하다고 아힌스는 자기만의 편리한 사고방식으로 동생을 비난했다.

"빌어먹을. 이쪽이 형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내게 이따위로 대해? 어디 두고 보자. 반드시 내쫓아버리겠어!"
(…그러나 그렇게 되뇌는 와중에도 그의 손가락이 달달달 떨렸기에 별로 설득력은 없어 보였다.)

아힌스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맡의 술병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불면증이 올 때마다 정량을 정해 조금씩 마시는 브랜디였지만 오늘 밤은 분하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일 그 시건방진 면상을 또 봐야 한다 생각하니 속이 다 울렁거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을 쫓아내야 할 터인데.'

아힌스는 빈 술병을 아무렇게나 내던지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도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상대가 보통 내기가 아니니 어지간한 심술로 내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쪽이 완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천장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 '술에 취하니 헛소리까지 들리는 건가' 라며 중얼거리는 아힌스 눈에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자의 얼굴이 떡 하니 들어왔다.  

"………."
"………."
"………진짜로 취한 건가. 웬 헛것이…."
"술을 드셨습니까 형님."
"………!"

멍하니 풀려있던 두 눈이 삽시간에 번쩍 뜨였다.

"-아드리안 공작!"

코 앞에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흑발의 미남자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아힌스는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당연히 그의 침실이 맞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남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그러나 유엘은 그의 외침을 무시하며 태연하게 입고 있던 쉬르꼬를 바닥에 벗어 던졌다.

"공작! 내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들립니다. 그렇게 크게 외치는데 안 들릴 리 있습니까."

약식 갑옷을 천천히 풀어헤치며 동생이 느긋이 대답했다. 이제 그의 몸에 남은 건 갑옷 아래의 얇은 슈미즈 뿐이었다. 당황한 아힌스가 외쳤다.

"…오, 옷은 대체 왜 벗으시는 거요!"

허옇게 질린 얼굴로 빽 하니 내뱉자 유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에 표정이 생기니 한결 사람 같았으나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 건방진 미남자가 빙긋 웃는 얼굴로 아힌스쪽으로 자꾸만 가까이 다가온다는 거였다.

“왜…왜, 자꾸 이쪽으로 오는지…,”

왠지 모를 압박감에 아힌스는 두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엉덩이 걸음으로 조금씩 물러났지만
그럴수록 남자는 더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왔다. 기어이 아힌스의 코앞까지 다다른 사내는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제 슈미즈의 단추를 풀었다.

"왜 옷을 벗냐니, 자려면 당연히 벗어야지요. 옷 입고 자는 습관은 없으니까."
"…뭐라고?"

-툭.

단추가 풀린 하얀 슈미즈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남자는 상반신을 팽팽하게 드러내며 웃음기를 지웠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표정이 살벌했다.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당분간 형님의 침대를 신세지기로 했습니다. 옆자리를 비워주십시오."
"…하.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이!”

머리에 한껏 피가 몰린 아힌스가 건방진 말을 내뱉는 유엘의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고요한 가운데 살 부딪히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유엘은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채 굳어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 멋대로 결정 짓고 통보하는 거냐! 네놈 따위가 감히,"

그러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순간 아힌스는 유엘의 몸 아래 깔려 양 손목을 구속당했다.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려 했지만 아힌스를 쏘아보는 유엘의 검은 눈동자가 짐승처럼 사나웠다. 그가 손에 더 악력을 주자 손목뼈가 부러질 듯 아파왔다. 너무 놀라 숨쉬는 것 조차 잊은 아힌스에게 유엘은 음산한 목소리로 위협했다.

"…죽고 싶습니까."
“뭐……뭐,”
“허리까지 차는 눈 속에서 수 십 킬로를 진군해 왔어. 난 지금 미칠 듯이 피곤해. 숫처녀처럼 예민하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당신 따위, 바란다 해도 절대 안 건드릴 테니까.”

유엘은 황망함에 아무 말도 못하는 아힌스를 옆으로 주욱 밀며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피곤하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베개에 머리를 붙이자마자 쿨쿨 잠들어 버리는 사내를 보며 아힌스는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모든 게 과도한 술기운이 가져온 악몽 같았다.












아힌스는 좁고 단단한 벽에 둘러 쌓여 갇혀있었다.

앉아있는 공간은 너무 좁아 다리를 모아 그 사이로 손을 끼워 넣은 후 잔뜩 움츠리고도 답답했다. 숨을 쉴 때마다 단단한 회색 벽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나가고 싶어 주위를 둘러봐도 벽에는 문이 없었다.
통로 없는 감옥. 아무리 두드려도 들리지 않는 침묵. 그 속에서 그는 오롯이 정신만이 온전히 남아 억압받는 육체에 헐떡이며 괴로워했다.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걸까. 얼마나 참아야 벗어날 수 있나.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벽과 그만이 들어찬 아무도 없는 공간…. 아힌스는 수치도 잊은 채 청승맞게 흐느꼈다. 그를 짓누르는 답답한 회벽보다도 더 견딜 수 없는 건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 하나 없는 완벽한 적막이었다.
언젠가부터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벌레가 발끝부터 사각사각 좀먹어가고 있었다. 발바닥으로 침투한 벌레는 혈관을 타고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전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름이 오도도독 끼쳤지만 그는 도리 없이 싸늘한 돌벽 안에 갇혀서 눈물만 쏟아냈다. 스스로가 너무 초라했다. 땅 끝까지 꺼질 비참함이 제일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이것이 꿈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그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몽마의 질 나쁜 장난이다.
아힌스는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마지막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를 둘러싼 회벽을 몸으로 밀어보고 소리도 쳐봤다. 그러나 그의 비명에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건 무한히 되감기는 자신의 메아리 뿐….

혼자.
또 혼자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듯이 그는 또다시 홀로 남겨져 있었다. 세상과 유리된 채 돌 벽 안에서 피었다 영원히 죽어가는 시든 꽃처럼 무가치하고 잊혀진 존재.

아아….

끝은 언제나 오려는 걸까.
새벽은 언제나 밝아오려는 걸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파고들며 끝도 없이 반복하는…너절한 악몽은 참으로 질기고도 잔인했다.










반짝.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밤새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거짓말이었다는 듯 오늘의 하늘은 화창하고 맑았다. 겨울 특유의 건조하지만 청량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아힌스는 전날 잠들었던 모습 그대로 침대에 누워 반쯤 떠진 눈을 깜빡이며 천장의 문양을 하나 둘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주인님."

오늘도 어김없이 늙은 집사의, 시간에 맞춘 문안 인사가 들려왔다.

아힌스는 나른하게 웃었다.
저리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녕했다 답하기엔 간밤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갑자기 침실에 난입한 시건방진 남동생의 일부터…기억은 나지 않지만 결코 유쾌하지 못했던 어떤 꿈까지. 그러나 고용인에게 토로할만한 화제는 아니었다. 이십 년을 함께 했어도 집사와 그 사이엔 건널 수 없는 신분이란 강이 있었으니.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등받이에 기대 앉았다. 저혈압 때문에 두통이 몰려왔지만 그럭저럭 참을 정도는 됐다.

"유엘…아니, 아드리안 공작은?"

눈을 떴을 때 동생이 누웠던 옆자리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일찍 일어나 새벽녘에 나간 걸까.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물론 동생의 신변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내 집을 돌아다니는 무뢰한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아까 성을 둘러본다면서 나가셨습니다. …아무래도 하루 이틀 머물다 떠나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

아힌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술을 깨고 맑은 정신으로 다시 생각해도 참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겨울 동안 여기서 둥지를 틀 작정일까? 내도록 계속?

다른 사람이었다면 설마 성주의 허락도 없이 계속 막무가내로 그러겠는가 의심했을 테지만, 그 녀석만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남의 불편 따위야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게 녀석의 태도였으니.

"…윔플. 자네 보기엔 공작이 어떻든가."
"음. 정확히 어떤 질문이신지요?"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되묻는 집사에게 아힌스는 솔직하게 말해 보라 재촉했다. 머리에 열이 올라 흥분상태인 자신을 대신해, 공작에 대한 제3자의 객관적인 평을 듣고 싶었다. 지금은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판단해야 할 때였다.

"글쎄요. 어제 잠시 뵈어서 잘은 모르겠으나…일단은 무척 냉정해 보이셨습니다. 또 먼 길을 오느라 그랬는지 조금 피곤해 보이셨고요."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냉정보다는 냉혹이 더 맞는 표현이었고 조금 피곤해 보인 정도가 아니라 밥 먹고 숙소부터 찾는 폼이 꼭 잠 못 자서 죽은 귀신처럼 지쳐 보였었으나 집사는 짐짓 그렇게 얼버무렸다. 상황이 어떻든 주인의 친형제인데 함부로 말했다 뒤탈이 생기는 건 곤란했다.

"그리고 또?"
"그리고 굉장히 귀족적인 분이었습니다."

귀족적이라는 것 역시 모호한 표현이다. 정의하기에 따라 받아들이기에 따라 천차만별인 표현. 더구나 귀족에게 귀족적이라니…조금 우스웠으나 집사는 그보다 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엄청난 장신의 냉미남은 소설 속의 잔혹하고 무자비한 귀족의 전형, 그 자체였으므로…. 게다가 그건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주인과 일치하기도 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물론 윔플은 현명한 집사답게 그 말은 절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편견일지 모르나 일을 감정으로 해결하는 사람은 아닌 듯싶습니다. 화난다고 분노를 마구 분출하는 타입도 아니었고요.”
“문 좀 걸어 잠갔다고 남의 성을 부수고 들어오는 작자가 감정적은 아니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군요.”

…문 좀 걸어 잠근 정도가 아니잖아! 사람을 시켜 사자들을 내쫓은 것도 모자라 군을 통째로 얼려 죽이려 한 주제에! …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이 자기중심적인 주인님은 가늘게 실눈을 뜨고 집사에게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를 줬다.

“…아무래도 제 편견이었나 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주 사납고 이기적인데다 오만한 자입니다. 이대로 뒀다가는 성을 다 때려 부술 것도 같습니다.”

집사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아힌스는 눈에서 힘을 풀었다. 역시 객관적인 타인의 평을 들어보길 잘한 것 같았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군. 그 놈 아주 나쁜 놈이야.’ 고개를 주억이며 그렇게 확신한 그는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오게. 그리고 인장도."
"편지를 쓰시려는 겁니까."
"그래. 아무래도 슈스켈을 불러야겠어."
"예? …진심이십니까?"

윔플은 황급히 외알안경을 고쳐 썼다.

슈스켈 외르겐은 샤휀성의 유능한 법률 고문이었지만 하도 성품이 야비하고 능글맞아서 쫓겨났던 자였다. 성의 하녀들을 몇이나 건드리기도 했고 그를 신뢰했던 주인의 뒤통수를 몇 번이나 후려쳤던 경력이 있어 믿을만한 인간이 못되었다. 그런 남자를 이제와 다시 불러들이겠다니 대체 주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지.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딱 그 정도로 비열한 인간이 필요해."
"그러나…."
"아무 말 말게. 그보다 슈스켈이 지금 어디 있는 지는 아는가?"
"…남부로 내려간다 들었으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굳이 필요하시다면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그래.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알아봐."

아힌스는 하얀 편지지에 유려한 필기체로 간결한 문장을 완성했다.
편지의 겉봉에 뜨거운 촛농을 떨어뜨린 후 망설임 없이 인장을 찍는 주인을 보며 윔플은 자꾸만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몸서리쳤다. 어쩐지 성안에 점점 더 고약한 인간들이 꼬여가는 것만 같았다.








◈◈


세드릭 호먼은 천성이 밝고 유쾌한 사내였다. 거기다 솔직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성격 덕택에 남녀노소 상관없이 친구도 많았고 무엇보다 적이 별로 없는 타입이었다. 누구든 그에 대해 물어보면 8할 이상에게 '거, 썩 괜찮은 친구'라는 평가를 받는 유형이랄까. 결 좋은 갈색머리에 평범하지만 인상 좋은 서글서글한 외모 또한 사람들 호감을 사기에는 딱 적당했다.
툴락이 샤휀의 성주를 설득하기 위해 세드릭을 보냈던 것도 그런 그의 사교성을 높이 샀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계획은 무참히 실패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교 중 쓸만한 재목으로 꼽혔다.

그런 툴락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천성인지 세드릭은 오늘도 아침부터 부지런히 샤휀 성의 고용인들과의 화해의 무드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부인, 쨈 통을 이쪽에 놓을까요? 찾으신 쨈이 이것 맞지요? 붉은색 쵸크칠이 돼있는 통."
"옳아, 맞게 찾아오셨네요. 거기 놔줘요. 원 젊은 사람이 친절도 하지."
"하하하. 이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시키셔도 됩니다. 연약한 여자한테 무거운 걸 들게 할 수야 있나요. 성에 힘 좋은 장정들이 가득한 것을."

그의 말에 조리실의 하녀들이 일제히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웬만한 남자 팔뚝 두 배는 될듯한 체격 좋은 에밀리 부인에게 연약하다니 붙임성 있는 사내의 애교가 제법 귀여웠다. 중년의 부인 역시 아들 같은 사내의 립서비스가 썩 싫지는 않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메뉴는 뭔가요? 냄새가 아주 좋은데요?"
"호호. 뭘 것 같나요?"
"글쎄 부인께서 하시는 거니 뭔들 안 맛있겠냐만…이 고소한 냄새는, 킁킁…. 닭고기 그라탕입니까?"
"오…. 코가 좋군요. 닭고기 그라탕과 단호박 스프를 끓이고 있는 중이에요. 거기 쨈통에서 쨈을 꺼내어 그릇에다 퍼 담아 주겠어요? 엄청난 손님들이 갑작스레 들이닥치니 주방식구들로는 감당이 돼야 말이죠."
"죄송합니다 부인. 원래는 저희가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들이 아닌데…흠흠. 어제는 너무 추워서 제정신이 아니었지 뭡니까. 사실 군 작전을 수행하다 보면 피치 못하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있어요. 정말 저희는 원래 그런 사람들이 아닌데."

세드릭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에밀리 부인을 비롯한 젊은 하녀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세드릭 위아래를 슥 훑어보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이거 참…. 정말이라니까요. 우리 총사령관 아드리안 공작님도 사실은 굉장한 매너남이십니다. 심지어는 신사라는 별칭까지 있는걸요."

신사는커녕 지독한 냉혈한에 얼음송곳이라는 별칭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환심을 사둬 성에 머무는 동안 맛있는 음식을 제공받는 거였으니.

"어머나! 의외네. 되게 무서운 분일 줄 알았는데 숙녀에겐 잘 하시나 보죠?"

어디선가 어린 하녀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역시 화제가 젊고 매력적인 귀족에게 돌아가니 관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으음…뭐 그렇다고 봐야겠죠? 하하. 비단 숙녀 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에겐 믿음직한 충신이요, 타 귀족들에겐 귀감이 될만한 모범청년이지요. 얼굴에 표정이 없어서 그렇지 실은 누구보다도 자상하신 분입니다."

…물론 개뻥이다. 우유부단한 황제는 늘 공작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하고 딸이 있는 귀족들은 혹여 공작가에서 혼담이라도 들어올까 벌벌 떨었다. 아무리 권력도 좋다지만 저런 지독한 냉혈한에게 금지옥엽을 시집 보냈다간 평생 뒷방에서 눈물만 훔치며 살게 뻔하다는 말들이 대세였다. 어느 자신감 넘치는 귀족 영애 하나가 아드리안 공작을 유혹하다 무참히 차였다는 소문 이후로는 그런 경향이 더했다.
그렇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런 자세한 내막을 알 리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어머 그러시구나. 확실히 외모부터 귀티가 나긴 했어. 미남에 능력 좋고 집안도 좋고 매너까지 있다니 완전히 왕자님이네요 그쵸?"
"아-하하하…맞습니다. 대충 그런 셈이죠."

어색하게 웃음짓는 세드릭을 두고 여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기 시작했다.
아드리안 공작가에는 왕자님들만 산다는 둥 혈통이 좋아 그렇다는 둥 심지어는 세드릭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는지 은밀한 밤일 이야기까지 해대며 저들끼리 킥킥거렸다. 아힌스님은 미남이시지만 여자한테 눈길도 안 주는 게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뒷담화였다. 세드릭은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에 손 부채질을 했다. ‘이 여자들이 증말….’

"어머어머 그러고 보면 공작님과 아힌스 님 두 분, 어쩐지 닮은 것 같지 않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에요 분명 닮았다니까요! 생김 같은 거 말고 뭐랄까…접근하기 힘든 쌀쌀맞은 분위기 같은 거 말예요. 품위 있는 걸음도 그렇고 살짝 곁눈질 하는 것도 비슷해요. 이십 년이나 떨어져 지냈다지만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가봐요."

닮긴 별게 다 닮았다고 야단이네.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하나도 안 닮았다. 생긴 것도 정 반대고 화르륵 잘 달아오르는 샤휀 성주의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공작은 화가 날수록 싸늘하게 가라앉는 타입이었다. 여자들은 별걸 갖고 다 이리저리 꿰 맞추며 입방아를 찧는다고 혀를 찼다.

‘성격 나쁜 거, 딱 그거 하나만 닮았네! 암. 둘 다 성격 더러운 건 대동소이하지.’

그러나 그녀들은 형제가 둘 다 미남이라는데 초점을 맞췄다.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세드릭과는 보는 관점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뭐 얼굴이 밥 먹여 준답디까? 쳇. 나도 훈훈한 남자라는 말은 많이 듣는데.'

세드릭은 뚱한 얼굴로 말을 돌렸다.

"건 그렇고, 성주님도 곧 식사하러 내려오시겠군요. 해가 벌써 중천이니."
"어? 아뇨 아마 오지 않으실 거에요. 주인님은 아침식사를 잘 거르시니까요. 드셔도 침대 위에서 차나 한잔 드실까…."
"엑. 아니 그렇게 먹고 체력 유지가 됩니까? 아침을 잘 먹어야 하루가 든든한 건데."
"그쪽이랑 똑같이 생각하면 곤란하죠. 주인님은 섬세하신 걸요. 게다가 저혈압이라 아침에는 늘 식욕이 없으셔요."
"아아-섬세에-?"

재수없다는 듯 세드릭은 어깨에 추임새를 넣었다. 생긴 것도 얍실한 자식이 역시나 하는 짓도 꼭 그대로였다. 그 섬세하시다는 성주님의 명령 한마디에 팔다리가 들려 내쫓겨진 경험이 있는 세드릭으로선 심사가 비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 얼굴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어젯밤 잔뜩 깨져 기가 팍 죽은 모습 좀 보려 했더니.’

엷은 푸른 눈동자를 싸늘하게 빛내며 잘난척하던 성주의 꼬리 내린 모습을 확인하고 싶던 세드릭이었다. 좀 대장부답지 못한 심보지만 그래도 세드릭은 꼭 그 모습을 보고 싶었었다. 본래 이런 비딱한 성격이 아니었건만 아마도 어제 일이 몹내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이봐요, 젊은 양반. 더 도와줄 일도 없는데 그만 나가보지 그래요?
그쪽이 계속 여기 있다간 수다스런 하녀들 때문에 식사준비가 언제나 끝날지 모르겠네."

어영부영 죽치고 있는 세드릭에게 축객령이 떨어졌다. 주인에게 쓸데없는 호기심을 보이는 하녀들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에밀리 부인은 어느새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어이 세드릭! 어디 가냐?”

성의 복도와 홀, 기타 여기저기서 쉬고 있던 동료 기사들이 아는 체를 해왔다. 세련되게 잘 꾸며진 성과는 참 안 어울리는 전경이었으나 어쨌든 있으란다고 방구석에만 있을 흑기사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딜 가긴. 식사도 마쳤겠다 무기나 좀 손봐야지.”
“성실한 녀석. 그러지 말고 카드나 한판 하지? 한 사람 비는데.”
“그래? 얼마짜리 판인데?”

카드판에 내기가 빠질 리 없다. 마음이 슬쩍 동한 세드릭은 슬그머니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어차피 어제의 실수로 아드리안 공작을 따라가지도 못한 몸, 잠깐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한차례 패가 돌았다. 현란한 솜씨로 카드를 뒤섞던 녀석이 웃음기 섞인 소리로 샤휀의 성주 이야기를 꺼냈다. 호기심이 가득한 기색이었다.

“봤냐 그 백금발? 그거 황성의 레이디들이 제일 갖고 싶어 하는 색이잖아. 맨 염색한 사람들만 봐서 몰랐는데 천연 백금발을 보니 진짜 감탄이 나오긴 하더라. 더럽게 예뻐.”

“그렇지 그렇지. 게다가 눈도 파랗고 피부도 창백하대? 여자들이 좋아하는 섬세한 미남이란 게 딱 그런 타입인가 봐. 뭐랄까. 우리랑은 인종이 달라 보였어.”

“췟. 미남은 무슨! 딱 기생오래비더구만. 미남이란 모름지기 어깨 딱 벌어지고 갑빠가 있어야지! 바로 나처럼.”

“새꺄- 넌 마초타입이고.”

크크큭,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드릭도 따라 웃었다.

여자도 아닌 성주가 화제에 오르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어제 기사들을 고생시켰던 게 첫째 원인이라면 둘째는 역시 뭐니뭐니해도 그 놀랄 만큼 단정한 외모였다. 기사단에도 잘생긴 녀석은 많았지만, 그리고 황성에는 그보다 더 화사한 미모의 사내들도 많았지만 성주처럼 귀티 나는 차가운 분위기의 미남자는 없었다. 그처럼 허리를 똑바로 펴고 서서 기사들을 눈 아래로 깔아보는 재수없는 남자는 정말로, 매우 드물었던 것이다. (일단 제정신이 똑바로 박힌 놈이라면 무장한 기사를 앞에 두고 건방 떠는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에이 공작 전하께서 그 건방진 콧대 한번 콱, 눌러줬음 좋겠는데.”
“형제라던데 그게 가능할까?”
“사이 안 좋다잖아. 어제 하는 거 보면 모르냐? 얼어 뒈지라고 문도 안 열어 줬는데.”
“시팔. 정말 죽는 줄 알았지. 독한 인간!”
“그러게 사람이 외모보다 인성이 돼야 한다니깐.”
“맞아맞아.”

“…인성이 덜 돼서 무척 미안하군.”

…뚝.

뒷담 까던 기사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카드를 쥔 채로 굳어버린 그들은 1M 떨어져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성주에게서 한기를 느꼈다.

“…아…니, 성주님께서 기척도 없이 여길 어떻게……….”
“내가 내 성에서 못 갈 데라도 있나?”

냉소가 깃든 차가운 목소리가 기사들을 한껏 비웃었다. 매우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제국의 기사라는 작자들은 제 상관을 닮아 하는 짓이 비열하기 짝이 없군. 뒤에서 남의 흉이나 보며 도박판을 벌여?”
“말씀이…좀 지나치십니다. 공작 전하를 그리 평하다니, 모욕입니다.”
“모욕으로 치자면 내 쪽이 더하지. 그대들이 짓밟고 있는 내 카펫만 봐도 혈압이 오르네.”

한마디도 지지 않는 성주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 나섰던 세드릭 하사관은 아힌스 폰 아드리안을 정면으로 본 순간 할말을 잊고 말았다. 머릿속에는 빌어먹을. 이라는 네 글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이건 반칙이었다.
멋대가리 없는 실내용 블리오를 저렇게 우아하게 소화해내다니!
  
옷의 밑단과 소맷부리에 은사로 섬세한 자수가 놓여져 있는 산호색 블리오는 성주에게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장신의 호리호리한 사내는 어떤 옷이든 무난하게 소화하지만 특히나 산호색은 그의 엷은 금발과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존나 잘생겼네.'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보고 있자면 이상한 기분이 드는 남자였다.

그렇게 잠시 방심한 사이 성주는 성큼 다가와 망설임도 없이 도박판을 뒤집었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마치 한 마리 백조처럼 우아했으나…기사들은 절규했다.

“으악-! 내, 내 돈이------!!”
“미쳤습니까 판을 왜 뒤집어어어! 내가 다 이긴 판인데!”

“앞으로 내 성에서 이런 천박한 놀이 따윈 하지 말게. 참을 수 없으니까.”

성주는 기사들의 비명 따윈 무시한 채 뒤돌아 섰다. 그의 시선은 잠시 넝마가 된 카펫에 머물렀으나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즈려 물고는 멀어져 갔다. 스치는 찰나 세드릭 호먼은 흔들리는 성주의 눈동자를 똑똑히 보았다. 어딘가 상처받은 눈빛이었다.







사륵 사륵-

블리오 자락을 가볍게 끌며 걷던 금발 사내가 멈춰선 곳은 중정이 훤히 보이는 2층의 테라스였다. 그는 쫓아오는 세드릭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무심히 서서 아래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미풍에 실려온 하얀 눈꽃이 창백한 뺨에 내려앉아 그의 체온을 앗아가자 성주의 얄팍한 입술은 점차 보랏빛으로 질려갔다.

세드릭은 그의 뒷모습이 조금 위태로워 보인다 생각했다. 차라리 좀 전처럼 차가운 태도로 오만한 말들을 퍼부을 때가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아드리안 공자."

어색한 부름에 그제야 성주는 세드릭 쪽을 돌아봤다. 왜 따라 왔냐는 듯 몹시 귀찮은 표정이었다. 세드릭은 쑥스러운 마음에 헛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아까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동료들을 대신해서 사과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리실지는 모르겠지만."
“…됐어.”
“카펫을 망가뜨린 것도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군인들이라 다들 거칠어서 말입니다.”
"이미 됐다고 했을 텐데?"
  
남자는 냉소를 지으며 세드릭의 말을 잘랐다. 두 번 말하기 귀찮다는 태도였다.

"카펫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만 내려가 보시오. 그대가 사과한다고 새삼 달라질 것도 없어."
"……예."

결국 할말이 없어진 세드릭은 고개를 떨궜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성주는 대화를 나누기에 참 불편한 상대였다. 어지간한 여자보다도 더 까다롭고 섬세하다고 해야 하나. 보통의 사내라면 허심탄회하게 사과하면 술 한잔 마시고 받아 줄 텐데 눈 앞의 냉랭한 사내는 도무지 그럴 기색이 안 보였다.  
세드릭 호먼은 그대로 물러나려다가 문득 아직 날이 찬데 저렇게 서있다 감기라도 들까 성주가 조금 걱정이 되어(이런 생각이 드는 것부터가 이상하지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성주의 어깨에 살짝 걸쳐줬다. 최고급 직물은 아니지만 귀족 장교를 위한 가볍고 질 좋은 방한용 외투이니 성주의 어깨에 올려지기에도 부끄러울 물건은 아니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백금발의 성주는 어깨에 사붓이 느껴지는 무게감에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세드릭을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는 의아함을 띄고 있었다.

하사관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습관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추우신 것 같아서…."


피식…

순간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평소와 같은 쌀쌀한 냉소나 고소가 아닌 부드러운 미소였다.

……….

세드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느다란 백금발과 휘어진 긴 속눈썹이 너무나 고아해서…. 멍하니 석상처럼 굳어져 남자의 얼굴 표정 몸짓 하나하나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처럼 투명한 백금발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보랏빛으로 변색한 귀족의 입술마저 병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를 마주하며 가만히 웃던 샤휀의 성주는 이윽고 자신의 어깨위로 길고 얄팍한 손가락을 천천히 가져갔다.

툭….

바닥아래로 세드릭의 외투가 추락했다.

"………."

오만한 성주는 흔들리는 세드릭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그의 외투를 짓밟았다. 그림 같던 미소는 씻은듯이 사라지고 어느새 인형의 얼굴에 남은 것은 약간의 조소뿐이었다.


한번

두번

세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성주는 하늘거리는 백금발을 흩날리며 굳어있는 세드릭의 옆을 태연하게 스쳐 지나갔다. 스치는 몸에서 엷은 사향내음이 풍기는 듯 했다. 산호색의 옷자락이 사륵 끌리던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고 세드릭은 한 마디도 못한 채 차가운 귀족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쿵,쿵,쿵,쿵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저 재수없는 성주의 꼬리 내린 모습을 봐야 하는데…”

그런 거 없다. 그저 한시라도 성주의 미소를 더 보고 싶을 뿐. 숨이 가빠왔다. 세드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꼭 눈 속의 신기루에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



"북쪽 길은 이제 확실히 막혔습니다. 앞으로 열흘은 어제 같은 폭설이 반복된다 하니 썰매를 이용하지 않는 이상 이쪽으로 이동하는 건 무립니다."
"…보급로는 어떤가."
"아 그쪽도 수정안을 짜봤습니다만…역시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우회하는 편이 제일 안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선이 너무 길어. 남쪽에서 바로 오는 방법이 있나 알아보게. 지도에 없는 길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리 하겠습니다.”

스치는 칼바람에 툴락은 후드를 조였다. 눈은 일시적으로 그쳤으나 무섭도록 추운 날씨였다. 현지시찰을 위해 아드리안 공작을 따라나선 장교들은 내색은 안 했지만 주군의 지독함에 치를 떨었다. 긴 행군 다음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직접 시찰을 나서다니, 체력도 체력이지만 승리를 향한 그 열정이 더 대단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셔도 좋을 듯 합니다 전하.”
“…추운가?”

물론 춥지 이 양반아.

“저는 견딜 만 합니다만 말들은 못 견딜겁니다. 명마라지만 남쪽 태생입니다. 추위에는 약하지요.”
“……….”

못 마땅한 얼굴을 하는 아드리안 공작에게 툴락은 최대한 반짝반짝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주군과 오 년을 함께하며 익힌 나름의 필살기였다.

“…돌아가지.”

떨떠름하게 말 머리를 돌리는 공작 뒤에서 툴락은 함박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부관의 주책에 부단장 슈미르가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찔러댔다. ‘부끄럽지도 않수? 낫살이나 먹은 양반이.’ ‘아따, 거 원님 덕에 나발불면서 말도 많소 잉?’ 무언의 신경전이었다.

“그나저나 세드릭은 왜 떨궈두고 온 게요? 그렇게 챙기더니만.”
“어제 일로 반성 좀 하고 있으라 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임무에 실패했으니 그 정도 처벌은 있어야지요.”
“처벌이라…아닌 거 같은데?”

슈미르는 멀리로 보이는 샤휀성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중얼댔다. 툴락의 고개도 따라서 움직였다. 앞서 가던 아드리안 공작마저 성 쪽을 주시하는 게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저기가 보이나…? 눈도 좋네.’

입가에 하얗게 맺히는 성에를 문질러 털어내며 미간을 좁히자, 툴락은 간신히 두 사내의 시선이 모인 곳에 누군가 서 있는 걸 식별할 수 있었다.  

"2층 테라스 쪽을 보시는 겁니까? 백금발…아, 이곳의 성주로군요. 그리고 옆에 있는 갈색머리는 세드릭 호먼이고."
“…….”
“세드릭 녀석 저기서 뭘 하는 거지?”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먼 거리를 꿰뚫어 보고 있는 아드리안 공작을 대신해 슈미르가 의문을 드러냈다. 툴락 역시 궁금했다. 상황을 얼추 보니 상당히 진지한 것 같은데 무슨 말이 오가는 걸까. 공적인 일로든 사적인 일로든 친해질 까닭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
‘…………!!’
‘………!’
‘……………!!!!
말이 꽤 길어 보였다. 뭔가 세드릭이 어정쩡한 제스처를 취해가며 쩔쩔매는 것 같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혹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툴락은 내심 몹시 애가 탔다. 성주와 더 이상 트러블을 만들어서 좋을 게 없었다. 어젯밤 성을 무력으로 점령한 군대의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반감을 사고 있는데 거기에 기름을 붓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물론 세드릭, 내 자넬 믿긴 하네만………!’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외투를 벗어 성주의 어깨에 걸쳐주는 세드릭의 행동에 툴락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완전히 식겁했다.

‘저 얼빠진 놈이!  지금 제정신이야!’

전시가 아닐 때 군 장교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는 것은 상대가 레이디 일 때나 허용되는 일이다. 더구나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저 애틋한 손길이라니…! 저놈이 쳐 돌았나.

'레이디 취급을 하다니 감히 공작 전하의 형님을 모독하려는 거냐? 아니면 설마 설마 설마…지금 저 남자에게 정말로 구애라도 하고 있는 거냐 세드리익-!'

양쪽 다 진심으로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세드릭 호먼은 나름대로 툴락이 총애하는 젊고 재능 있는 장교였다. 저런 미친 짓을 하다 구설수에 휘말리기엔 아까운 녀석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속이 타는 툴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하녀석은 쌀쌀맞게 돌아서는 성주를 향해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마치 ‘나 지금 막 사랑에 빠졌어요♡’ 라는 듯한 아주 묘-한 분위기로. 그냥 오해라고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상대가 나빴다. 사랑의 시 속에나 등장할 법한 백금발의 미남 귀족, 그것도 신분으로 치자면 황제와 공작 다음가는 존귀한 남자 앞에서 절절매는 젊은 하사관이란 무궁무진한 상상을 가능케 했다.

툴락은 혈압 때문에 빳빳해진 뒷목을 잡으며 주위를 한번 휘- 둘러보았다.

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 나왔던 이십 여명의 장교들은 모두 2층 테라스의 기가 막힌 헤프닝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었다. 못보고 넘어가길 바랐던 툴락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제국은 남색에 관대하지 않았다. 물론 군대에서야 사정상 더러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사창가의 한구석엔 늘 그런 자들을 상대하는 업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남색은 환영 받지 못할 퇴폐적인 문화로 취급 당했다. 물론 귀족들 사이에선 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러니 이제 막 성공의 가도에 발을 들여놓은 전도유망한 귀족 출신 장교에게 남색가란 꼬리표가 붙는다는 건 매우 치욕스런 일이었다. 물론 저 잠깐의 상황만으로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다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라는 말도 있다. 괜한 오해 받을 상황을 만든 세드릭의 실수였다.

'아아 제길. 거기다 하물며 그 상대가….'

입안에서 절로 신음이 흘렀다. …곁눈으로 흘끗 본 주군의 분위기는 말도 못하게 살벌했다. 원래도 서늘한 양반이지만 지금은 손대면 얼음기둥이라도 될 것 같았다. 유난히 남색을 싫어하는 아드리안 공작이었다. 타인의 사생활엔 무심한 주제에 유난히 동성애만은 혐오해서 과거 언젠가 어린 소년병들을 강간하던 기사를 산채로 늑대 우리에 쳐 넣은 전적도 있었다. 그런 남자인데 더더군다나 자신과 피를 나눈 친형제와 부하장교가 눈이 맞아 추문을 흘리고 다닌다면 누가 기꺼워할까. 귀족에게 명예란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이었다.

‘…혹시 세드릭도 늑대밥으로 줘버리는 거 아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세드릭 네놈이 남색을 하든 여색을 하든 상관할 바는 아니다만 왜 하필 전하의 형님과 싸바싸바한 오해를 만들어서 사건을 만드는 거냐 이 사고뭉치야!’   
        
부하를 외면할 수만은 없었던 그는 쭈빗쭈빗 눈치를 보며 세드릭을 대신해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놨다.

"저, 전하. 샤휀의 성주님이 몸이 몹시 약하다더니 그래서 저런 결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호먼 경이 워낙에 친절하고 오지랖이 넓지 않습니까."
"……."
"외투를 벗어준 건 결코 전하의 형님께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닐 겁니다. 무엇보다 호먼 경은…추잡하고 더러운 남색가가 아닙니다."
“…….”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나.

더럽다는 표현까지 쓰고 싶진 않았지만 일단 부하녀석의 살 구멍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공작 전하의 비위를 맞추려니 없던 편견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런 얕은 수로는 먹히지 않는지 그가 세드릭의 변명을 할수록 아드리안 공작의 안색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결국 툴락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드릭 호먼이 공작의 눈밖에 나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의 교섭 실패에 이어 오늘은 남색 의혹이라니 사건이 너무 연달았다. ‘바보녀석.’ 그렇지만 아직까진 세드릭이 공적인 일로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아드리안 공작 또한 사적인 감정으로 일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니 돌아가서 단단히 주의를 주면 앞으로 더 큰일이 벌어지진 않을 거라 그는 안이하게 판단했다.

그것은 아주 잠깐, 기묘하게 일그러지던 젊은 주군의 표정을 보지 못했기에 나온 오판이었다.

“…더러운 남색가라.”

젊은 공작은 부관의 말을 씁쓸히 되새김질했다.

“………역시 그런가.”
“예?”
"툴락."
"네 말씀하십시오."
"도착하는 대로 세드릭 호먼을 집무실에 들르라 하게."
"전하!"

부름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입성 준비를 하라.

공작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하며 저만치 앞서 나갔다. 바람에 날리는 흑발이 사자의 갈기처럼 흩어졌다. 당황해 주군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툴락이 이내 재빨리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십 기의 흑기사가 한치의 흩어짐도 없이 거칠게 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선 어느새 다시 시작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




아힌스는 차게 웃었다.

어젯밤부터 바닥을 기던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은 엉망이 된 본성을 벗어나 따스한 온실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는 가늘고 하얀 손을 뻗어 찻잔을 들어올렸다. 백토로 만든 고운 도자기 찻잔에는 붉은색 홍차가 딱 좋을 정도로 식어있었다. 천천히 한 모금을 삼키고 시선을 들자 덩달아 차를 홀짝이는 얼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입에 대기도 전부터 차의 상하품을 따지며 얕은 상식을 떠벌리던 바보들이었다.

‘덜 떨어진 놈들.’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건 익숙하지 못했지만 저런 허영만 가득한 인간들이라면 문제없었다. 한 시간 내내 이들이 떠들어 대는 것은 고작해야 좁은 식견과 상식, 그리고 사교계의 화려함에 대한 그리움 따위였으니.

‘겨우 저런 자들로 그 녀석을 견제하겠다니 꿈도 크십니다, 황제.’
               
대륙에서 가장 막강하다는 제국 황제의 실권은 생각만큼 크지 못했다. 워낙 광활한 영토를 갖고 있어 먼 지방까지 세세한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황제에게 군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권은 중앙의 유력 대귀족들 소수에게 편중되어 있었고 그들이 황제에게 군대를 내줄 때는 반드시 귀족회의에서 합의를 거치고 나서였다.

그리고 바로 그 귀족회의의 의장이 아드리안 공작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황제가 전쟁을 원한다 해도, 혹은 원하지 않는다 해도 공작이 거절하면 황제는 어느 것 하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역대 황제들에게 아드리안 가문은 언제나 신임하면서도 동시에 견제할 수 밖에 없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수백 년간 반복해온 황실과 공작가의 정략결혼 이면에는 그런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뒤섞여 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유엘 놈은 황녀와의 혼인을 거절했다는 말이렷다?
…웃기는 자식.’

무척이나 유쾌했다.                                                         

뭐가 어떻게 되는 상황인지 자세히는 모르나 한가지 확실한 건 아드리안 공작이 정력결혼을 거절함으로써 황제와 공작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돌고 있다는 거였다. 유엘의 속내를 알 수 없는 황제는 불안할 테고 또 반대로 아드리안 가의 원로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결혼을 미루는 수장의 태도가 못마땅할 터. 전쟁까지 하고 있는 마당에 내부가 그렇게 불안하니 일이 잘 될 턱이 없었다.   
황제가 비록 모자란 자들일 망정 밀정이랍시고 눈 앞의 작자들을 공작에게 딸려 보낸 것만 봐도 그랬다. 두 권력자 사이의 갈등이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잘만하면 확실하게 써먹을 수 있는 카드가 될 수도 있었다.

‘이쪽의 뜻과 황제의 의지가 잘만 통한다면 어쩌면….’

온실에 들어설 때부터 우르르 몰려와 인사를 한답시고 기웃거리던 철새 같은 무리를 혹시나 싶어 티타임에 초대한 것이 이렇게나 다행스러울 데가 없었다. 비록 마주보고 있자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기분 나쁜 면상들이긴 했지만.

“저희는 모두 남작이상의 작위와 영지를 갖고 있는 귀족입니다. 그런데도 공작께서는 저희를 너무 푸대접 하십니다. 엄연히 다른 평기사들과는 신분 차이가 나는데도 말입니다.”
“그렇지요 정말 너무 하시죠.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모두 평등하게, 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한번은 다리를 다친 소년병에게 내 말을 양보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아놔 정말 어이가 없었다니까요. 그런 못 쓰게 된 천 것 따위야 버리고 가면 될 것을!”
“그 뿐입니까? 기사들이 군수품을 어느 정도 빼돌리는 건 거의 관례 같은 것인데 공작 전하는 너무 꽉 막히셨습니다. 젊은 분이라 그런지 영 유도리가 없어요. 성주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지요?”

“…글쎄. 뭐…불만이 생길만은 하군. 내 보기에도 그대들이 만일 황성에 남아있었더라면 지금처럼 고생스럽진 않았을 것 같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겁니다. 사실 황제폐하의 명만 아니었다면 왜 굳이 변경까지 와서 눈 속을 헤매고 다녔겠습니까? 오로지 이 제국과 폐하에 대한 충심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공작 전하께선 우리의 노고를 전혀 알아주지 않는단 말씀입니다. 심지어 어쩔 때는 저 평민출신 기사들보다도 박대를 하시며 쓸모 없는 소모품 취급을 하시니 속상해서 원!”

…그야 네놈들이 정말 쓸모가 없으니까 그렇지.

붉은 홍차를 다시 한 모금 삼키며 아힌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저들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까. 황제와 은밀히 접선코자 한다면 이들을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를 테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 말을 꺼내기엔 경험도 부족하고 남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황제까지 끌어들여 친동생을 쫓아내려 날뛰는 형님이란 과히 아름답지 못한 것이니.

‘그래 일단 슈스켈이 오면 상의해야겠군. 나쁜 쪽으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니 이번 일도 잘 해결하겠지. 그렇지만 일단 놈이 샤휀에 다시 터를 잡으면 이번에야 말로 쫓아내기 힘들텐데…윽…. 제기랄! 그 생각을 하니 또 위장이 쑤시는군.’

가슴 가운데를 누르며 색색 숨을 몰아 쉬자 눈치를 살피던 한 사내가 손을 뻗어왔다.

“…성주.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탁-

그러나 걱정해서 내민 손을 아힌스는 차갑게 걷어치웠다. 불쾌한 기색을 숨지기 못해 아차 싶었으나 크게 미안하진 않았다. 당황한 사내에게 아힌스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난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걸 아주 싫어해.”

화등잔만하게 커졌던 사내의 눈이 샐쭉하니 치켜 올라갔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무시할까 하다가 아힌스는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화사하게 웃어줬다. 아직은 쓸모가 있는 자들이니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아….”

사내들은 순간 불쾌감도 잊은 채 성주의 미모에 탄식을 흘렸다. 온실의 창을 느슨히 투과하던 햇빛은 성주의 금발을 은빛으로 산란시켰다. 그의 미소는 시인의 노래보다 감미로웠으며 물빛 눈동자는 유리처럼 맑았다. 단정한 아미와 어디 하나 남는데도 모자란 데도 없는 완벽한 균형…. 성격 나쁜 샤휀의 성주는 나무랄 데 없는 미남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플래티나 블론드네요. 달 아래선 완전히 은빛으로 빛날 것 같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겁도 없이 손을 뻗었다. 홀린듯한 표정이 아마 무의식적인 듯싶었지만 사내의 손은 착실하게 아힌스의 머리칼을 향하고 있었다. 무례한 그 손 위로 뜨거운 홍차를 부어 금붕어 같은 기억력을 비웃어 줘야 하나 아힌스가 잠시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정작 사내의 팔목을 거칠게 비틀어 버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



우두둑-

“…아악! 내 팔…팔이…!!”
“저,전하!!!”

팔목을 비틀고 있는 아드리안 공작의 표정은 한겨울처럼 서늘했다.

“이곳엔 어찌…?!”

일동이 새파랗게 질렸다. 조금 전 그를 향해 실컷 불평을 쏟아내던 귀족들은 모두 허둥지둥 일어나 예를 갖췄다. 아힌스조차 움찔, 떨었다.

“공작 전하, 기척도 없이 어찌 갑자기-”
“…차를, 그냥 차만 마시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렴요!”

굳이 그런 쓸데없는 소리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었건만 얼간이 같은 사내 하나가 뻣뻣하게 굳어 변명하는 바람에 분위기는 더 썰렁해졌다. 아힌스는 한숨을 내뱉었다. 차가운 시선이 그의 얼굴위로 떨어졌다. 집요하게 탐색 당하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형님.”
“……시찰을 나가셨다 들었는데 빨리도 들어오셨습니다. 좀 더 오래 계시다 와도 좋았을 텐데요.”        
“…….”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아드리안 공작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도 제 할말 다하는 아힌스를 고압적으로 내려다봤다. 그는 비틀고 있던 팔목을 떨궈내듯 놓으며 입을 열었다.

“안톤, 블랑쉐, 제이드, 칼브릭.”

“예,옙!”
“예,전하.”

“다들 물러가 있게.”
“…그리 하겠습니다.”

“잠깐. -칼브릭.”

흠칫.
“또 무슨 분부라도…?”

“잘리고 싶지 않다면 손버릇 조심하게.”
        
“……옛…?”


팔을 비틀렸던 칼브릭은 공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손버릇을 조심하라니…, 만지려던 건 성주의 머리칼이거늘 공작이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나 의문을 풀 여유는 없었다. 기가 죽은 사내는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동료들과 함께 온실 안을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역시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놈들이라고, 아힌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아하신 성주님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불행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정오의 온실 안에는 순백의 아이스베르크가 무더기무더기 피어 짙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문밖의 어둡고 추운 세상과는 달리 초여름의 싱그러움 한 자락을 베어 사붓이 옮겨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아힌스는 티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새로 우려낸 차를 다기에 따랐다. 어젯밤 그의 침실을 난입했던 동생이란 녀석에겐 물론 앉으라는 권유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할 테고 그게 아니라면 나갈 테지. 아쉬운 건 내 쪽이 아냐.’

…시건방진 놈. 어따 대고 저런 무시무시한 눈을 하는 거냐. 고약한 것 같으니!

화사한 온실 안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서있는 유엘의 모습은 꼭 천사들의 화원에 비집고 들어온 악마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저렇게나 미남인데도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오오라는 시커먼 색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 했다.

저 자가 과연 어린 시절 정원을 뛰어다니던 그 철부지 꼬마녀석이 맞는 걸까?
…하기사 그때도 썩 잘 웃는 녀석은 아니었지.

쓴웃음이 나왔다. 어리던 그 시절에도 동생과 함께 했던 추억은 많지 않았다. 기억 속의 자신은 늘 아팠고 유엘은 지나치게 어렸다. 그러나 만일 건강했다 해도 그다지 돈독한 형제사이로 발전하진 못했을 것이다. 아힌스는 미래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상대에게 당당히 손을 내미는 호탕한 성격이 아니었다.


“…예까진 무슨 일로 온 게요?”            
“…….”
“설마 꽃구경을 오신 건 아닐 테고, 남의 정원에 허락도 없이 흙 발을 들이미는 건 동생님의 취미신가?”

조금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가늘게 웃으며 유엘의 전신을 훑자 표정 없던 남자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지며 검은 눈동자에 음습한 광기가 차기 시작했다. 웃고 있던 아힌스의 얼굴이 도리어 굳어졌다. 괜한 도발을 했다는 생각에 다다다닥 이빨이 떨렸다.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재빨리 찻잔을 내려두고 일어나려는 아힌스에게 유엘이 물어왔다. 도망가려는 그가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무시하고 나가고 싶었으나 뒷목이라도 잡아챌듯한 남자의 살기에 꼼짝없이 발목이 붙들렸다. 아힌스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무심한 척 대답했다.

“-이야기라니.”
“조금 전 나간 자들 말입니다. 그자들과 무슨 담소를 나눴습니까. 제가 없는 사이 따로 온실에 부를 정도면 특별한 이야기가 오고 갔겠지요.”
“…하! 날 무슨 음모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취급하는군? 그들이 찾아왔기에 잠시 다과를 들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 것뿐이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라. 제법 그럴 듯 하군. 그럼 세드릭 하사관과는 무슨 용무로 만났습니까? 그와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세드릭 하사관? 세드릭 호먼 말이오? 그자는 여기서 또 왜 나옵니까, 이 상황에서? …아하. 날 감시라도 하셨나 보군. 나 원 기가 막혀서!”
“대답하세요.”
“난 할 말 없다니깐!”

질리게 독선적인 태도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눈 앞의 사내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마음에 안 든다고 홍차를 쏟아 부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쨌든 아힌스는 동생이 조금 무서웠던 것이다.

“자꾸 이상한 추궁을 할 셈이면 내가 먼저 일어나지. 피차 얼굴 마주하기에 불편한 사이잖나.”


콱-.

유엘은 돌아서 나가려는 아힌스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당황한 아힌스가 재빨리 잡아빼려 해봤지만 남자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오히려 팔목을 빼기는커녕 악력 때문에 뼈가 오그라들 것만 같아 아힌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말 이상했다. 키 차이는 크게 안 나는데 이 힘의 차이는 대체 뭘까. (아힌스는 자기가 찻잔 무게조차 버거워 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놔…놔라. 이거 놔! 네 녀석과 잠시라도 체온을 맞대고 싶지 않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몸에 손 닿는 게 싫다면 대답을 하시면 됩니다. 그들과 무슨 말을 주고 받았습니까. 그 얼간이 귀족들과 무슨 은밀한 거래라도 하셨습니까?”
“무슨…, 그런 짓 하지 않았다. 왜 이상한 오해를 하고 그래!”

생각만 했을 뿐 아직 일을 꾸미진 않았으니 거짓말은 아니라고 아힌스는 뻔뻔하게 생각했다.

“자꾸 집요하게 굴지 말고 비켜라. 왜 자꾸 치근대는 거냐 기분 나쁘게!”

어느새 반말로 유엘에게 대거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이십 년 만에 재회한 동생과 (비록 싸울망정)너무 자연스레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지하지 못하는 아힌스였다.

“기분…나쁩니까 내가?”
“그래 기분 나쁘다. 뻔뻔하고 무례한데다 불쾌해. 그러니 건방지게 굴지 말고 내 앞에서 비켜라!”  

기분 나쁘다는 확답을 듣는 순간 유엘의 눈썹이 사납게 휘었다.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무섭도록 차가웠으나 흥분해있던 아힌스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오랜 세월을 고립된 성 안에서 소황제처럼 살아왔던 탓에 상대의 미묘한 감정변화에는 조금 둔감한 성주님이셨던 것이다.
사납게 눈을 빛내며 코 앞까지 얼굴을 바싹 붙여온 유엘이 비웃듯 한쪽 입 꼬리를 비틀며 빈정거렸다.

“…그럼, 나와는 다른 당신은 고상하고 귀하신 몸입니까? 애송이 기사와 하루 만에 눈이 맞아 좋아 지내는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

분노로 상대를 밀어버리려는, 아힌스의 나머지 팔목을 유엘은 날렵하게 잡아챘다. 그리고는 허약한 형님을 제 쪽으로 와락 당기자 힘없이 몸이 주욱- 달려왔다. 키가 작은 것도 아닌데 어지간히 가벼운 몸이었다.

“지, 지금 뭐…뭐 하는 짓이냐! 당장 놓지 못해? 이런다고 내가 네 말을 들을 줄 알아? 내가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눴든 어떤 약속을 했든 네게 말해줄 이유가 뭐가 있어. 정 궁금하면 네 재주껏 알아보려무나!”

“지금 그 말, 후회하지 마십시오.”


휙-

유엘은 가볍게 아힌스의 허리를 낚아채 어깨 위에 걸쳤다.
갑작스레 몸이 뒤집혀 허공에 떠버린 아힌스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유엘의 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본능이었다.

“미쳤느냐? 당장, 지금 당장 날 내려놔!”

거꾸로 매달린 채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아등바등 몸을 비틀자, 유엘이 비어있던 손으로 찰싹, 엉덩이를 내리쳤다.

“얌전히 있어.”

아힌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단지 거꾸로 매달려 머리로 피가 몰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수치심으로 바르르 떨었다.
  
“왜…왜이래…. 이거 놔. 내려놔라! 무식하게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게야!”
“재주껏 알아보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리하는 중입니다 형님.”

흑발 미남은 거침없이 온실 문을 열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왔다. 온실 문으로 바로 연결되는 테라스를 지나자 고용인들과 기사들이 잔뜩 우글대는 현관 홀이 나왔다. 아힌스는 하마터면 까무룩 정신을 놓을뻔했다.

미친놈…미친놈이다. 이놈은.  
  
쏟아지는 시선들이 녹을 듯 뜨거웠다. 꼴사납게 동생의 어깨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성주의 모습이 그럴싸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웅성대며 모여드는 군상들의 행태에 아힌스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

그는 귀족이었다. 비록 몰락했다 해도 이런 변경의 성주라 해도, 태생부터 골수까지 귀족근성으로 차있는 섬세한 남자였다. 이런 취급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니 유엘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찾은 거였다. 이런 취급이 부끄럽고 싫다면 아까 놈들과 무슨 말을 했는지, 세드릭과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김없이 말하라고. 그렇게 무언의 협박 중인 것이었다. 만난 지 고작 하루뿐이건만 남자는 제 형님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했다. 고상한 척 턱 끝을 치켜 올리고 오만 건방은 다 떠는 아힌스는 실은 프라이드 하나에 목숨 거는 인종이었다. 작위도 권력도 없는 밀려난 후계자가 자존심을 빼면 뭐가 남겠는가. 자나깨나 자존심,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그 오만함…그거 하나뿐인 것을.

유엘은 정말 지독한 녀석이었다.

‘…빌어먹을 개…자식…….’   

서글픔이 목구멍까지 몰려들었다. 문득 눈가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힌스가 침실로 돌아올 수 있던 건 그 수치스러운 꼴로 샤휀 성의 온 복도를 다 돌고 난 이후였다.

그 사이 이 기가 막힌 동생 놈을 말리는 사람이라곤 늙은 집사와 힘없는 집안 가솔들이 전부였다. 성안에 우글대던 공작의 충성스런 흑기사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다들 좋은 구경 났다는 분위기였는데 개중에는 아까 아힌스가 판을 뒤집었던 도박꾼 무리도 있었다. …그 놈들이 특히 신나 보였다.
지난 밤 자신들을 골탕 먹였던 예쁘장한 젊은 성주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그래 오죽 좋았을까. 상대가 레이디라면 모를까 엄연히 사내였으니 기사도에 어긋난다는 최소한의 거리낌조차 없었다.

‘놔 줘…제발.’

마침내 그는 동생에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원했다. 태어나 가장 끔찍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막무가내에 독선적이고 잔혹한 남자의 행동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아힌스는 완전히 탈진한 창백한 얼굴로 온실에서 오갔던 그닥 영양가 없던 대화에 대해 토씨하나 빼먹지 않고 그대로 읊었으며 세드릭 호먼과 있었던 하잘 것 없는 일들까지 털어 놓아야 했다.
…그런 후에야 아힌스는 집요한 동생의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탈진해서 앵돌아 누운 아힌스에게 유엘은 한층 화가 누그러진 얼굴로 달래듯 속삭여댔다.

“화나셨습니까 형님? 그러게 진작에 말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거 아닙니까.”
“…나가….”
“앞으로도 이런 대접을 받고 싶지 않다면 행동을 주의하십시오. 지금은 전시고, 형님의 행동은 사소한 것 하나도 오해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게다가 칼브릭들이든…혹은 세드릭 하사관이든 당신과는 하등 사적인 만남을 가질 이유가 없는 인간들입니다. 앞으로 그들과 만나지 마십시오. 내 말 아시겠습니까.”
“…….”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힌스는 도저히,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비겁한 짓을 하려던 건 사실이지만 아직 말도 꺼내보지 못했고 유엘이 화낼 빌미를 준 것 따위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자신이 이렇게 취급 당해야 하는 걸까. …여긴 내 성이고 내가 주인인 것을!   

대답을 하지 않자 유엘은 마른 한숨을 내쉬더니 침대에 걸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한쪽 귀퉁이가 반동으로 출렁거렸다. 짜증스런 기분에 이불을 와락 끌어당겨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더니 녀석이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 눈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 차가운 시선이 느껴져 아힌스는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이십 년 만에 만난 형제지간입니다. 겉으로나마 반가운 척 할 수는 없는 겁니까.”
“헛소리.”

하핫…

유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으시군. 일이 뜻대로 안되면 성질부터 부리지. 스물여덟이나 먹어서는 아직도 그대롭니까?”

그러고는 그냥 나가려는가보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힌스는 그의 마른 등쪽에 느껴지는 낯선 온기에 당황했다. 어느새 다가온 남자가 이불을 뒤집어 쓴 아힌스를 팔 안에 가두고 있던 것이다. 낮은 숨결이 잠시 목 뒤를 간질였다. …오싹했다.

“내일도 모레도, 이곳 일대가 파악될 때까지는 계속 시찰을 나갈 생각입니다. 생각보다 지도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더군요.”  
“………그래서?”
“나갈 때 앞으로는 형님도 동행하셨으면 합니다. 성안에만 계시면 무료하실 테고, 또 아무래도……………수도 있고.”
“너, 너와는 아무 곳에도 같이 가고 싶지 않아.”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

유엘은 단호했다. 거절한다 해도 데려가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 동생의 태도가 상처받은 아힌스의 자존심을 다시 한번 헤집었다. 오늘에 와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입장과 현실을 바로 파악할 수 있던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유엘이 원한다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아무리 아힌스가 싫어도, 규칙과 법도가 어떻다 해도 결국 이기는 쪽은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으니 결국 서로의 우위를 결정 짓는 건 가장 원초적인 무력이었다.  

“내일은 새벽부터 나갈 것이니 저녁에 일찍 주무시는 편이 좋겠군요. 나중에 들르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형님.”

유엘의 냉정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정중한 인사처럼 그가 던지는 말은 실상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그걸 인정하는 수 밖엔 없었다.













* 외전 :  natural enemy



솔직하게 말하자면 동생이 처음부터 미웠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유엘이란 녀석이 가져올 해악을 몰랐던 때,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된 채로 열 달을 보낼 동안만큼은 아힌스 역시 보통의 아이들이 그렇듯 동생이 생기길 몹시 바랐었다. 느릅나무 아래 걸린 그네에 사붓이 앉아 부른 배를 감싸 안던 모친의 상기된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녀의 고운 연녹색 드레스 자락에 뺨을 부비며 어린 아힌스는 이제 곧 태어날 사랑스런 아가를 상상하곤 했었다. 이왕이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갈색머리를 물려받은 사랑스런 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고.  

결국 태어난 것은 아가주제에 흑요석의 눈동자를 무심히 굴리는…사교성 제로의 무뚝뚝한 남동생이었지만….






***


"…잘 익은 호박 같네요."

아기가 예쁘냐는 모친의 말에 아힌스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해산을 하고 몸을 추스른 후에도 한동안 들르지 않았던 그녀가 원망스러워 아이가 곱게 만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감기를 앓아 아기에게 옮을 까봐 그랬다는 건 알지만 어쨌든 섭섭한 건 섭섭한 거였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공작 부인은 호박 같다는 말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호박이라니. 이렇게 예쁜데 어디가 호박 같다는 거니? 아직 갓난 아이라 작기는 해도 이목구비를 보렴. 얼마나 반듯한지! 아마 크면 대단한 미남이 될 거야.

흥.

아힌스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모친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유모의 품에 안겨 이쪽을 말똥말똥 보고 있는 동생의 통통한 볼 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연한 살이 폭 파묻히는 느낌이 제법 보드랍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전에 본 다른 집 아기들은 이렇게 건드리면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우는 녀석도 있던데 이 녀석은 도무지 변화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댕그라니 눈만 뜨고 있을 뿐.

아기주제에 젖 달라고 울기를 하나, 귀엽게 옹알이를 하나.

아힌스가 상상했던 아기에 대한 로망은 유엘이 태어난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그저 이 새까만 눈동자를 가끔 깜박여 주는 게 유일하게 자신도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 아힌스는 영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를 닮은 곱고 섬세하고 사랑스런 아기였더라면.

"…그랬다면 조금쯤 예뻐했을 지도."     

아힌스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저 쬐끄만 녀석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유모나 하녀들의 시선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저런 반응도 없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짜증스런 마음에 고개를 휙 돌렸을 때였다.

"어머나, 아기가 형아한테 가보고 싶다네."

까만 눈동자로 이쪽을 집중해서 바라보던 녀석이 뭐라 옹알이를 했는지 어머니는 멋대로 해석을 덧붙였다. 유모 품에 있던 아기를 들어 이쪽에게 안겨주는 손길에 아힌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런 몽글몽글 하고 젖 냄새 나는 아기를 어떡하라고…!   
어떻게 안아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는 아힌스를 보며 사람들은 귀엽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쪽의 불유쾌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모르면서 모두들 제멋대로였다.
'-이익-!'
때마침 억지로 안고 있던 아힌스의 팔에 아기의 침이 주르륵 떨어졌다. 그는 화들짝 놀라 기겁을 하며 바르르 떨어댔지만 유모는 태평하게 웃으며 팔에 묻은 침을 닦아줬다. 그리고는 아기들은 원래 그런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원래 그런 거라니.
자신만큼은 절대로 침 따위 흘리지 않았을 거라며 아힌스는 핼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기고 뭐고 간에 더러운 건 질색이었다.

"아…아기, 그만 데려가세요. 제가 열이 아직 다 떨어지지 않아 피곤합니다. 게다가 감기가 아기한테 옮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얼른요."
  
물론 어설픈 거짓말이지만 아힌스는 필사적이었다.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되는 어린 유엘은 아힌스의 시각으로는 귀엽기는커녕 아주 성가신 존재였다. 팔다리도 짧은데다 제 몸하나 못 가누는 덜 자란 생물이 침까지 줄줄 흘린다니…아주 무례한 놈이었다.

빨리 좀 데려가지!
마음속으로 외치는 아힌스를 앞에 두고 유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빠안히 바라봤다. 깔끔떨면서 자신을 유모의 품에 넘기려는 형의 꼴이 웃긴다는 듯이. (…물론 갓난아기가 그런 심오한 사고를 할 리 없으니 비뚤어진 아힌스의 눈에만 고깝게 보였던 것뿐이다.)

…그러나 아무튼 그 다음으로 취했던 유엘의 행동은 분명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긴 했다.  


꽉.

"악-!"

"어마! 그럼 못써, 유엘!"

아힌스는 비명을 질렀다. 저 망할 동생녀석이 갑자기 조막만한 손을 뻗어 아힌스의 머리칼을 꼭 움켜쥔 채 놓질 않는 것이었다. ‘하등생물주제에 느닷없이 이런 짓을 하다니!’

유모와 공작 부인이 양쪽에서 아기를 도닥이는 데도 녀석은 고집스레 형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아파 아파 아파-!” 아힌스가 생리적인 눈물을 글썽이며 난리를 치는데도 녀석은 끄덕도 안 했다. 아주 독종이었다. 기어이 유엘은 아힌스의 반짝이는 가는 금빛 머리칼 몇 가닥을 손에 넣고서야 힘을 풀었다.  

“괘,괜찮니 아힌스?”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아기가 신기해서 그런걸 거야. 네 머리칼이 예쁘니까.”
“-어머니!”

아기를 두둔하는 모친이 기가 막혀 아힌스는 원망스런 눈으로 쏘아봤다. 이쪽 역시 네 살 주제에 만만치 않은 성깔이었으므로 모친은 화들짝 놀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0세 vs 4세.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나. 고민하는 그녀의 품에서 유엘은 제 작은 손바닥 안에 쥐여진 몇 가닥의 부드러운 금사를 보며 만족스레 웃고 있었다.

아힌스는 입을 떠억 벌렸다.

‘웃고 있다 웃고 있어. 지금 분명히 웃고 있다고!’

억측이 아니라 정말로 일자로 꼭 다물어져 있던 입술을 양 옆으로 살짝 들어 올린 폼이 딱 그랬다. 아기들은 원래 손안에 들어온 뭔가를 쥐는 습관이 있다고 애써 변명하며 아기를 들쳐 안고 가는 유모도, 심지어는 그들의 어머니조차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힌스는 분명히 봤다. 저 무뚝뚝한 놈의 흐뭇한 웃음을.

이건 절대로 고의였다.
저 말랑말랑한 놈이 이쪽을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뭐…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누가 아기를 무결한 순수의 존재라 했나. 사람은 태초에 선하게 태어났다고 대체 어떤 바보가 말했던가. 책에서 읽었던 철학자들의 논리는 죄다 헛소리였다. 저놈은 새끼 악마다. 봐라, 저 새까만 머리칼과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아마 어쩌면 귀까지 마족처럼 쫑긋 할지 모른다.  

아힌스는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을 소매로 박박 문질렀다. 앞으로 저놈은 절대로 내 방에 출입금지다. 침이나 질질 흘리고 팔다리도 짧은 불결한 새끼 악마는 절대 내 방에 못 들어와.

"익…! 어서 목욕물을 덥혀라! 제길, 내게 더러운 타액 따윌 묻히다니! 하등동물은 정말 어쩔 수 없어!!"


아힌스 폰 아드리안 4세, 유엘 폰 아드리안 0세.

성질 나쁜 두 형제의 최초의 만남이었다.













*** 꿈 ***


        
빛 줄기 하나 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힌스는 몸을 웅크렸다.

단단한 회벽으로 둘러 쌓인 거대한 감옥은 지옥처럼 적막했다. 그리고 반복되는 꿈……. 그래 꿈, 또 꿈이었다. 상자 속 같은 감옥에 앉아 말라 죽어가는 언제나와 같은 악몽….
‘추워…….’
어째서인지 꿈 속에서조차 그는 늘 추웠다. 벽난로에 불을 넣어도 두꺼운 솜털 이불을 몇 겹씩 덮어도 뼛속까지 시려오는 한기는 언제나 집요하게 아힌스를 쫓아왔다.
‘추워….’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더 이상 이 적막을 견딜 수가 없었기에…. 어둠 속에선 아힌스의 목소리만이 고요히 메아리 쳤다. 마음이 몹시도 쓸쓸하고 외로웠다.

‘…드디어 죽은 건가.’

이토록 적막하고 어둡다니 이곳은 어쩌면 정말로 죽음의 영역일지도 몰랐다.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 발을 걸치고 아슬아슬 살아가던 쓸모 없는 몸뚱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서 사그라졌는지도.

‘하하…드디어,드디어 이번에야말로 죽은 건가. 나…정말로…?’

서늘한 한기가 발 밑에서 쩌억 아가리를 벌렸다. 이리로 오라고, 이제 네 쉴 곳은 여기라고 속삭이듯-. 아힌스는 서글프게 웃었다. …무서웠다 세상 모든 것이. 꿈도, 현실도, 그리고 죽음 조차도….

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어느새 그는 울고 있었다.

‘…울지 마라.’

스스로를 달래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아힌스는 냉소를 머금으며 나약한 자신을 질책했다.

‘나는 귀족이다.’

‘나는 샤휀의 성주이며…’

‘아드리안 가의 장남이다……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는 자다….’

어리석은 주문…. 그래 봐야 눈물을 닦아줄 다정한 사람 하나 없는 것을.



.

.

..


촉.        


‘…괜찮아.’


…아…?



촉.


‘쉬- 착하지. 괜찮아 -울지마.’

        
…누구…?


촉.
촉.


이마에 따뜻한 무언가가 몇 번이나 가만히 닿았다 떨어졌다. 부드럽고 기분 좋은 새털 같은 감촉이었다.


누구지….
누군가 있어? 누군가 이 안에 나와 같이 있는 거야……나와 같이…?
-혼자가 아냐?

손을 뻗어 미지의 존재를 더듬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를 지켜줄 어미를 찾듯 아힌스는 그에게 뻗어온 온기를 갈구했다. 더듬는 사이 그 온기가 소리 없이 사라질까 두렵기까지 했다. 그는 그토록 절박했다.


어디야. 어디 있어…?

혼자 남겨지는 건 익숙한 일이지만…그래, 그렇지만… 정말은……끔찍하게 외로워서………  

‘가지마….’


움찔-

아하. 드디어 기척이 느껴졌다. ‘존재’의 행방에 아힌스는 촉촉하게 눈 밑을 적셨다. 반갑고도 서러웠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기분만으로 이렇게나 기뻤다, 이렇게나 기쁘고 또 기뻐서…안심이 돼서………

‘…가지 않아 아무데도.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다정하다. 그 느낌이 좋아 아힌스는 커다란 손에 얼굴을 부볐다. 고양이가 애교부리듯 살랑살랑…부드럽게.

‘당신은…꿈을 꿀 땐 인성이 변하십니까.’

중얼거림이 귓가를 간질였다. 메마른 한숨 소리도 작게 들려왔다.

‘지금 유혹하시는 겁니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살짝 웃어버렸더니 잠시 후 메마른 입술위로 따스한 온기가 조심스레 닿았다가 아주 천천히…느리게 떨어졌다.
      
그리고…그리고……그 후로는……………………………암전……….

아힌스는 그대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이번에는 깊고 깊은 심연의 평화로운 어딘가를 향해서.   



        


***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지난 수년간 부관으로 있던 짬밥을 총동원해 통밥을 굴려 본 결과, 툴락은 그의 주군이 현재 드물게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평소와 변함없이 서늘한 그 분의 얼굴을 보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뭐 ‘감’이라고 대답할 수 밖엔 없겠지만 말이다.

‘간밤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어제 저녁 식사를 끝내고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저렇지 않았는데 참 이상했다.

이곳 북부 지역의 진압이 예정대로 되지 않아 상당히 날이 서있던 공작이었다. 물론 원래도 유하고 다감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북부전선에서의 그는 정말 살기가 흐를 정도로 날카로웠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변방 수비대는 최악이었고 북부를 맡아달라 애원했던 황제는 정작 군수품 조달에는 소극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발목을 잡혔으니 아무리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라도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때문에 툴락은 어제 시찰을 다녀온 아드리안 공작이 제 친형제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걸 말리지 않았었다. 절제와 이성으로 누르고 있던 주군의 분노를 성주가 도발한 셈이었으니….

‘…그렇지만 좀 심하긴 하셨지.’

성주가 먼저 신경을 긁긴 했어도 어제의 주군은 유달리 폭력적이었다. 친혈육이 약간의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온 성을 개처럼 끌고 다니며 굴욕을 주던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냉혹한 에고이스트였다.
최소한 전장이 아닌 곳에서는 매너를 지킬 줄 아는 주군이었는데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겨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오늘은 기분이 좋으시다니…참으로 이상했다. 변덕스런 양반은 아닌데.

“전하. 어제 세웠던 시찰 계획서를 전체적으로 수정했습니다.
 분부하신 대로 마차가 지날 수 있는 좀 더 안전한, 남서쪽으로 가는 노선입니다.”
“수고했네.”
“그렇지만 이쪽은 민가가 모여 있는 곳이라 한창 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다는 걸 고려해 두셔야 할 듯 합니다. 아무래도 축제 중에 낯선 기사들이 돌아다니면 민심이 동요될 수도 있으니까요.”
“축제?”
“아, 며칠 후면 새해라 신년맞이 축제를 하는 모양입니다. 풍습에 따라 이 참에 결혼식을 겸하는 부부도 있을 테니 혹 광장으로 가신다면 거리가 꽤 복잡할 겁니다.”
“-그렇군. 참고하지.”

공작은 짧게 끊으며 보고서를 속독으로 읽어 넘겼다. 대강 읽는 것 같지만 내용 하나하나까지 정확히 훑어 기억한다는 건 누구보다도 툴락이 잘 알았다. 뭐로 보나 다방면에서 유능한 남자였다. 그리고 현 시국의 제국에 절대 없어서는 안될 인재이기도 했다. 거기다 더해서 아드리안 가라는 엄청난 배경과 외적인 장점까지 생각한다면…………’심하게 잘나셨군.’   

툴락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왠지 억울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람이 잘났으면 뭐하나. 인간미가 있어야지 인간미가! 이건 뭐 옆에 있다간 쨍- 하니 얼어붙게 생겼으니 나 정도 되는 부관이나 버티지. …흠흠.’

“그런데 그…축제라는 거. …즐거운 건가?”
“예-옙?”
“…….”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말을 놓쳤습니다. 헌데 축제는 왜 갑자기…?”

혹 신년 축제를 중지하라는 말이라도 나올까 툴락은 걱정스러웠다. 평민들의 마음을 얻는데 축제는 무척 중요한 행사였다. 그렇잖아도 외부에서 들어온 기사들 때문에 경계하고 있을 텐데 마을의 큰 축제를 훼방 놓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었다. …물론 일부 어떤 철없는 귀족들 중에는 일부러 축제 때를 노려 방화나 학살을 일삼는 지독하고 무자비한 인간들도 있긴 했다. 그것도 단순히 무료한 생활의 재미 따위를 위해서 말이다. 특히나 지방 같은 경우 농노들을 가축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귀족들이 특히나 많았기에 그런 끔찍한 일들이 꽤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설마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혹시 열 받은 김에 화풀이를 해야겠다거나…휴전기간에 심심풀이로 인간사냥이라도 해야겠다거나………………그런 건 아니시겠죠. 적어도 지금까지 평민들에겐 비교적 관대하시지 않았습니까.’

…툴락의 머릿속에는 주군이 축제 그 자체에 관심이 있을 거란 가능성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좋아할 것 같아서.”
“?”
“…….”
“전하, 좀 더 정확히-?”
“…됐네.”

말수 적은 아드리안 공작은 이내 설명을 포기한 듯 뒤돌아 섰다. 그리고는 창 밖의 눈 내리는 전경을 완상했다. 깎은 듯한 조각미남의 입가에 어느덧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늘 우울하게 전장을 떠돌던 사내로서는 잘 짓지 않던 표정이었다.
   
그렇게, 창가에 기대 서있는 주군의 모습이란 꼭 눈 오는 날 친구들과 나가 놀 것을 기다리는 소년의 그것과 비슷해서 툴락은 잠시 할말을 잃어버렸다.
‘내 눈이 시방 썩은 건가.’
저 사내가 말썽 많은 세드릭 녀석과 동갑은 동갑이었던 모양이다. 저 상기된 얼굴이라니…. 제국의 실질적인 이인자이자 이시대 최고의 기사라 불리는 냉혹한 공작이지만 아직 스물 네 살의 풋풋한 청년이기도 했던 것이다. 툴락은 그걸 이제야 실감했다.

“현관에 마차를 대기시키게.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럼 이제 형님을 모시러 가야겠군.”
“음? …그렇지만 샤휀의 성주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조금 전 집사에게 듣기로는 아직 한밤중이시랍니다.”

공작은 조금 이맛살을 구겼다. ‘그러게 일찍 자라니까.’ 작게 중얼대는 혼잣말도 들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툴락을 내버려 둔 채 아드리안 공작은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툴락은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우아하신…샤휀 성주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했다. 새하얀 이불보에 돌돌 말아진 그는 흑발 냉미남의 어깨 위에 사뿐히 걸쳐진 채로 등장했던 것이다. “맙소사! 이건 정말로 결례입니다!”늙은 집사가 뒤를 이어 헐레벌떡 뛰어왔다. “우리 주인님께 또 무슨 짓을 하시는 거에요! 자꾸 이런 식으로 굴면 앞으로 국물도 없어욧!” 훌륭한 솜씨를 자랑하던 여자 요리사도 따라 외쳤다.     

그러나 공작 전하의 마이 페이스는 그런 그들을 태연하게 물리쳤다.

“약속을 해놓고 늦잠을 자는 사람이 나쁜거다.”
“아니 우리 나리께서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다고-!”
“했어.”
“…옌장. 설혹 그러시더라도 귀한 분을 이런 식으로 데려가는 게 세상천지에 어딨습니까!”
“상관없다. 어차피 내-, 형님이시니.”

에고로 가득 찬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돌돌 감싸진 시트 속에 유일하게 밖으로 나와있는 성주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다 천을 잡아당겨 정수리까지 꼼꼼하게 여며줬다. 당황하는 하인들의 수선을 일축하며 공작이 명령했다.

“-출발한다.”


지난 20년간 두문불출한 까닭에 그 정체가 신비에 쌓여 있던 샤휀의 성주, 아힌스 폰 아드리안의 첫 영지 시찰은 이런 식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거대한 군마를 타고 나타난 흑기사단이 샤휀에 입성한지 어느새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공작 일행의 시찰과 다가오는 신년 축제의 어수선함이 맞물려 일대는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오랜 세월 성주의 무관심에 제 세상마냥 설치던 저지대의 군소 귀족들은 공작가의 수장을 응접하네 마네 하는 일들로 시끄러웠고 농노들과 평민들은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생전하고도 처음 보는 대귀족들의 행차에 한껏 들떠있었다. 눈은 여전히 깊게 쌓여갔지만 올해는 해가 저문 저녁때조차 여느 때와 같은 적막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벽지에 찾아 든 새로운 손님들은 큰 관심거리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마을 한구석 색주가 아가씨들 조차 혹여 젊고 건장한 기사들이 엄한 감시의 눈을 피해 그녀들을 찾아오지는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으니 샤휀 일대 전체가 들떠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그러나 그런 관심에서 벗어나 죽도록 고생만 하고 있는 운 없는 부대가 유일하게 하나 있었으니……바로 세드릭 호먼의 부대가 그들이었다.


“헥헥. 분명, 대장님은 미움 받고 있는 겁니다!”

눈 쌓인 계곡 길 한복판에서 곰 같은 덩치를 부르르 떨던 부하녀석 하나가 외쳤다. 퍼렇게 질린 얼굴이 조금 안쓰럽기는 했지만…,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응석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아, 그렇잖습니까. 지난번엔 선발대로 보내져서 죽도록 고생하고, 이번엔 다른 녀석들 다 쉬는데 우리만 수색대로 뽑히고-. 매번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췟.”
“나 원. 기사가 돼서 이 정도 일로 쩔쩔매다니 네 녀석 덩치가 아깝다.”
“기사는 뭐 사람도 아니랍디까? 저는 남쪽 출신이라 추운 건 딱 질색이란 말입니다. 제길.이렇게 추운 때 하필 수색대가 왠 말입니까. 대장님은 사령관의 죽마고우시라 들었는데 우리 부대 좀 쉬게 해달라고 잘 좀 말해보지 그랬어요오-”
 
따악-.

세드릭은 투덜대는 부하의 뒤통수를 화끈하게 후려쳤다. 보자보자하니깐 이 곰 녀석이 아주 헛소리를 한다. 세드릭 부대는 애초부터 정보부 성격이 강했으니 수색대를 파견한다면 제일 먼저 차출되는 게 당연한 건데 이렇게 헛소리를 하니- 개념 없는 놈은 어디를 가서도 꼭 티를 낸다. 바보 같은 놈.

‘…더구나, 죽마고우는 무슨.’

호먼가의 수장은 대대로 아드리안 공작가의 가신이었기에 세드릭 역시 차남으로서 몇 번 같은 스승을 모신다 하거나 하는 기회가 있었지만 썩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왜냐하면…같은 귀족이라도 그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격’이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호먼 남작가와 아드리안 공작가은 애초부터 그 ‘격’이 달랐다. 대대로 황실과 인연을 맺고 알게 모르게 국가의 모든 중대사에 관여해 실질적으로는 황제를 움직이는 제국 최고의 대귀족가와 평생 그들을 모시며 살아가는 남작가가 감히 어찌 동격이라 할까. 같은 스승을 모신다 해도 대귀족의 자제들과는 서는 위치부터 달랐다. 그러니 세드릭 호먼과 아드리안 공작 역시 주종 관계라면 모르되 죽마고우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에이 그렇다고 나가서 수색대나 하라는 한마디에 끽소리도 못하고 쫓겨오셨습니까? 사나이 갑빠가 있지!”
“인마 그럼 나더러 항명이라도 하라는 거냐? 그러다 정말 쫓겨나면 네놈이 책임질거냐 엉?”
“누가 항명하래요? 그냥 말이라도 한번 넣어보라는 거지.”
“전하의 눈빛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네가 봤으면 그런 말 못해 자식아. 완전히 얼음이야 얼음.”

새삼 지난 밤 불려간 집무실에서 한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주군을 떠올리자 저절로 고개가 휙휙 저어졌다. 전하께서 낮의 일로 심기가 불편하시니 알아서 조심하라던 상관의 조언을 듣고 미리 긴장하고 들어섰던 것인데도 그 북풍한설 같은 서늘함은 도무지 적응이 안됐다.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시면 속이라도 시원하지-.’


“저어…, 그런데 말입니다 대장님.”

곰탱이 부하는 세드릭이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데도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뭔가 굉장히 궁금하다는 얼굴로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뭐냐, 또?”
“정말로 그 소문이 맞는 겁니까?”
“무슨 소문.”
“대장님과 여기 성주가 실은 연인사이였다는 소문이 짜하던데요.”
“-뭐!”
“어제 시찰 나갔던 사람들 말로는 밀회의 현장까지 목격했다 하던데.”
“밀회라니, 이건 또 무슨 같잖은 헛소리야!”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헛소리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기가 막힌 세드릭이 주위를 둘러보자 곰탱이 부하의 용감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놈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가-”
“내깃돈이 꽤 많이 걸렸으니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정말로 그런 사이에요?”
“사이는 무슨 사이!”
“-하긴 성주가 대단한 미남이니 그런 쪽으로도 충분히 일이 있을 만 하죠. 저는 충분히 이해해요.”


퍽-

주먹이 나간 건 진심이었다. 정통으로 얻어맞은 눈치 없는 부하는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지만 동정할 가치도 없었다. 기사란 인종들이 본래 겉보기처럼 품위 있는 종자들이 아니란 건 진작부터 파악했고 사내놈 수다도 여자 못지않다는 것 역시 잘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일은 너무 심했다. 하루도 되지 않아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어이없는 추문이라니.

“다들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할 시간이 있으면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해라. 쯧. 기사라는 녀석들이 하는 짓들 하고는!

곳곳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 그냥 기다 아니다 한마디 하시면 될 걸 되게 딱딱하게 구십니다요! 어차피 우리끼린데 남색 좀 한다고 누가 뭐랄 것도 아니고-그리고 솔직히 그 얌체 성주 성도면 대장님껜 아깝죠.”

저 자식들이……!
불끈 화를 한번 내려던 순간이었다.


“호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거 아주 기가 막힌 소식인데?”

허스키한 낯선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들려온 것은.  

“-누구냐!”

산만하게 떠들고 있긴 해도 기사들이다. 낯선 자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경계하는 흑기사들과 세드릭의 당황한 눈빛에 사내는 크크큭…, 녹슨 쇠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두꺼운 로브를 입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뒤로 넘겼다. 짙은 잿빛 머리칼이 산만하게 쏟아졌다. 사내의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과 마주치는 순간 세드릭은 얼어붙듯 굳어버렸다.  

“허술한 건 여전하군 세드릭 호먼-. 자네가 그 까다로운 성주의 상대라니 그건 좀 믿기 힘들지만.”
 
옆에 있던 부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드릭을 바라봤다. “아는 사람입니까?”

아는 사람이냐고? 물론…알다마다. 너무나 잘 안다. 비록 한쪽 뺨에는 과거에는 없던 붉은 칼자국이 길게 흉 져 있지만…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저 사내를 몰라 볼 리 있겠는가.


“살아…계셨습니까.”
“보시다시피.”
“…그렇군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 하지. 어떤가?”
“…거절은 안 하겠습니다.”

슈스켈 폰 더블린- 잊혀진 옛 귀족의 이름을 되뇌며 세드릭 하사관은 쓰게 웃었다.











대낮인데도 낡은 술집은 벌써부터 북적거렸다. 안쪽 한구석에 앉은 세드릭 호먼은 좀 불편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폈다. 투박한 벽면과 중문 덧창은 마감질이 엉망이라 아귀가 맞지 않았고 통나무로 된 낡은 테이블은 비틀린 데다 손때가 반질반질 올라 몹시 불결했다. 게다가 이 술집은 주제에 여자장사까지 하는지 가슴을 허옇게 드러낸 다양한 나이대의 창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장죽을 물고 있었다. 모든 것이 조악하고 너저분했다. 그 가운데 슈스켈 폰 더블린은 딱 맞는 퍼즐의 한 조각처럼 더러운 퍼브와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세드릭은 내심 한숨을 토해냈다. 비록 그가 서민문화에 익숙하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민’문화지 하류층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허옇게 버짐이 핀 창녀를 보고는 씁쓸히 고개를 돌렸다. 올 나간 스타킹을 신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자들은 처음이었다.   

“불편한가?”
“…아닙니다.”
“뭐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나도 처음에는 꽤 놀랐었으니.”

나무 술잔에 가득 채워진 푸르죽죽한 압생트를 홀짝이며 슈스켈이 빈정거렸다. 세드릭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다 이해한다는 듯 그는 교활한 황제처럼 여유를 부렸다. …물론 그래봐야 꼴은 형편없었지만.

“한잔 받지?”
“저는 됐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이러긴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직 근무 중이라 정말로 술은 곤란합니다.”
“크큭…. 성실한 건 여전하군. 별로 변한 게 없어.”         

찌쥑- 찍-

“……!”

커다란 회갈색 쥐새끼가 발 사이로 기어갔다. 당황한 세드릭이 다리를 치켜들자 그 꼴을 본슈스켈은 목젖을 떨며 거슬리는 쉰 목소리로 웃어제꼈다. 어느 틈엔가 그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있던 요부타입의 풍만한 창녀 하나도 따라서 까르르 웃어댔다. 난장판이었다.

“여어- 그렇게 정색하지 말라고. 혼자 정갈한 척 하고 있으니 쥐가 덤비는 거 아닌가.”
“……선배님….”
“이런, 선배라니, 말조심해야지-세드릭.”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세드릭 호먼. 잘 들어둬. 내 이름은 슈스켈이다 슈스켈 푸쉐.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것 따위 용서 못해. 알아들었나?”

탕-.

사내가 탁자에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칼자국 난 뺨을 실룩이며 비열하게 웃는 그는 술집 안의 여느 탕아 못지 않았다. 세드릭은 그런 슈스켈을 조금 질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한때는 정말로 동경했던 사내가 아니던가. 사관학교 시절 누구보다도 영민함과 재치로 빛나던 화려한 남자였다. 조금 비딱한 성격마저도 매력의 일부로 취급 당하던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드릭과는 다른 의미로 좀 더 각별한 사이이기도 했었고….
         

“…너무 변하셨습니다.”
“사람이란 게 원래 변하는 존재야.”        
“저더러는 별로 변한 게 없다 하시더니.”
“그건 자네가 발전이 없는 인간이라 그런거고.”
“그런…”
“그건 그렇고, 아드리안 공작이 여기 와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혹시나 했었지만…지금 검은 매의 날개 안에 있는 건가?”
“예. 소속을 묻는 거라면 흑기사단에 있습니다. 전하를 따라 얼마 전 대 아르토니아 전에 참전도 했고요.”
“그래? 이거 참…일이 생각보다 재밌게 돌아가는데.”
“?”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세드릭에게 슈스켈은 천연덕스레 웃어 보이며 독한 압생트를 단숨에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녹색의 액체는 지독한 열기를 내뿜으며 그의 식도를 태웠다. 후욱-, 좋군. 제법 술꾼 같은 소리를 흘리며 그는 입가에 묻은 술을 혀로 핥았다.

“뭐 별로 고민할 필요는 없어 세드릭. 알다시피 내 자네에겐 빚이 좀 있으니 그걸 이번 기회에 갚아줄까 생각했을 뿐이니.”
“…빚이요? 무슨….”
“하하- 나 참.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그저 선물을 하려는 거야. 자네 인생에 큰 도움이 될만한 선물을.”

이상한 헛소리를 하는 슈스켈이 이상했으나 세드릭은 일단 그 문제는 그냥 넘기고 제일 궁금했었던 걸 묻기로 했다.  

“언제부터 이곳에 머무신 겁니까?”
“꽤 됐지. 아마 한 십 년? 그래 여기 성주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게 스무 살 때니 대충 맞는군.”
“성주? 아힌스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아힌스 폰 아드리안. 그 금발 녀석. 자네도 알겠지만 그 자식 성미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 거기 있는 동안 고생 좀 했다네. 허약해 빠진 놈이 성격은 어찌나 지랄맞던지!”                  
“말이 좀 지나치십니다.”

낄낄…

“왜, 네 애인 욕하는 소릴 듣자니 화가 막 치미냐? 아까 듣자하니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니 진짠가봐?”

슈스켈은 옆에 앉은 창녀의 허리를 휘어 감으며 천박한 소리를 지껄였다. 갈 때까지 간 한량 흉내를 내는 주제에 길게 찢어진 잿빛 눈은 사납게 세드릭의 표정을 훑고 있었다. 말은 제멋대로 해도 아힌스의 연통 하나에 한번 떠났던 마을을 되돌아온 그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일대에 퍼진 소문, 샤휀 성이 간밤 사이 검은 기사단에 점령당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통쾌하면서도 한 켠으로는 아주…몹시, 매우 불쾌했었다.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더니 고작 동생 놈에게 그 수모를 당해? 하여간에 귀족들이란 것들은 말만 많지 뭐하나 똑바로 하는 게 없어. 바보 같은 자식.’

“어머어머- 지금 이곳 성주에 대해 말하는 것 맞죠? 와! 그러고 보니 슈스켈 당신, 그 하얀 성에서 법…법률관…? 아무튼 뭐 그런 걸로 있었다 했었잖아. 그거 정말이었어?”
“낄낄…, 정말이라니깐 왜 날 못 믿고 그래.”

그는 여자의 몸을 더듬으며 끄덕였다. 정확히는 법률고문이지만 그런걸 정확히 밝힐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런 여자들의 관심사는 그가 성주와 연줄이 있다는 사실일 테니.
그 다음 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얌전히 있을 테니 성에 한번만 데리고 가줘요. 한번 구경해보고 싶어요 그런 곳-’

창녀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 창부인 주제에, 아니 오히려 그래서인지 더더욱 이 곳 여자들의 귀족들에 대한 동경은 대단했다. 한번쯤 그런 귀한 몸들을 상대해 보는 게 꿈이라며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계집들도 있었다. 슈스켈은 싸구려 창녀들의 그런 답지 않은 어리숙함이 사랑스러웠다. 귀족의 실체가 얼마나 역겹고 더러운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못 오를 나무라도 된다는 듯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서 탐욕을 키우는 모습이란 얼마나 깜찍한지…!

큭큭큭….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곧 콧소리를 내며 노골적으로 슈스켈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슈- 그럼 나 한번만 성에 데려가 줘요. 얌전히 있을게요. 그냥 자기 애인이라고 하면 되잖아? 그러면 그것들이 내가 뭐 하는 여자인지 알게 뭐야. 응? 난 그 성주라는 사람 한번 보고 싶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미남이기에 공물을 바치러 가는 날이면 포목점의 계집들이 그렇게 야단을 떠는지 말이야.”

“-아아 그래. 정 가보고 싶으면 다음에 한번 데리고 가주지. 아무렴-! 부탁을 들어줄 테니 백치미가 줄줄 흐르도록 멍청하게 웃어봐. 난 머릿속이 텅 빈 예쁜 여자들을 좋아해.”

희롱하는 말을 퍼부으며 창부의 목을 쓰다듬자 빤히 보이는 행동에도 여자들은 자지러질 듯 웃어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세드릭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오래 전, 그들이 함께였던 시절에도 바른 생활 사나이는 아니었지만 옛날의 슈스켈은 적어도 아무 여자에게나 추파를 던지는 천박한 남자는 아니었었다. 못 본 사이 슈스켈은 너무나 철저하게 타락해 있었다. 고상한 시니컬은 야비한 조소로, 그리고 깨끗하게 빛나던 잿빛 눈동자는 탁하게 흐려져 이제 남아있는 것은 능수능란한 수컷의 원숙미와 전보다도 더욱 교묘해진 혓바닥 뿐이었다.  
        
“선배…아니, 슈스켈님. 아드리안 공자와는 어떻게 알고 지내시는 겁니까.”

“이런저런 일로 한동안 그쪽 성에서 신세를 좀 졌었거든. 그리고 이번엔 그와는 좀 다른 문제로 돌아갈 예정이지. 그러는 흑기사단은 샤휀 성에 앞으로도 계속 머물 건가?”
 
“맞습니다. 겨울 동안 내내 머물 겁니다. 아힌스 님은 전하의 형님이시고 또 샤휀 역시 넓게 생각하면 공작가 영지의 일부이니 양해를 구할만한 곳이지요.”
        
세드릭의 말을 듣던 슈스켈은 의미심장하게 입가를 끌어올려 소리 없이 웃었다. ‘혈연관계라 양해를 구할만하다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깜박 속아 넘어갈 소리지. 그 까다로운 자식 성격에 잘도 그러겠다. 거짓말을 하려거든 좀 더 그럴듯하게 하는 게 어떠냐, 세드릭 호먼-.’

목 안으로 넘어가는 녹색의 압생트가 뜨거웠다. 철저한 쾌락주의자로서 슈스켈은 술과 여자, 그리고 재미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집 계집과 사내가 붙어먹건 올해의 작황이 흉작이든 풍작이든 심지어는 황제가 죽고 나라가 망하든지 상관없었다. 어차피 천성이 자기 중심적인데다 그나마도 벌써 한번은 세상에 버려져 비딱하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몸이었다. 누가 어찌되든 아무래도 좋았다. ‘뭐 맞다고. 분명 그게 내 천성이지.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녀석만은 방관하기 곤란해. 그 놈에겐 빌어먹을 목숨 빚이란 게 있으니 말이다.’


“그럼 한동안 같이 지내게 되겠군요. 이렇게 된 거 성까지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자네 먼저 돌아가게. 어차피 내 쪽이 급한 것도 아닌데 굳이 서두를 건 없지. …녀석은 골탕 좀 먹어야 하니까. 게다가 난 여기서 며칠 더 머물며 할 일이 있거든. 안 그래, 리사?”  

동행을 거절한 사내는 여자의 가슴을 힘껏 움켜잡았다. 여자가 신음을 흘리며 매달리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끈적해졌고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던 세드릭은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결심한 듯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선…아니 슈스켈 님.”
“ 님-자는 빼고 이름만 불러라.”
“…….”

여자를 탐하는 슈스켈은 이쪽엔 관심도 없는 듯이 건성으로 답했다. 세드릭은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그 옛일들이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아니면……일부러 이러시는 겁니까.’ 오래 묵은 과거를 이제 와 다시 끄집어내 토로하는 건 서로에게 거북하고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세드릭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한 후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런 말을 하면 우습다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저는…당신을 걱정했습니다.”
“…….”
“정말로 진심으로.”
“그거 아주 고맙군.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인데.”
“비꼬지 마십시오. 더블린 백작님 역시 내색은 안 하시지만 슈스켈 님을 몹시 걱정하고 계실 겁니다. …원래 부모의 마음이란 게 다 그렇잖습니까. 자식이 죄를 지어도, 집을 등지고 떠나도 잊지 못하는 게 부모입니다.”

세드릭의 마지막 말이 끝난 순간 창부의 몸을 더듬던 슈스켈의 잿빛 눈동자가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졌다. 길게 상흔이 난 뺨을 경련시키며 입술을 한 일자로 다물자 농탕질 하던 가벼운 사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세드릭의 위치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옆에 붙어있던 창녀는 정면에서 그 기이한 변화를 보고는 어깨를 떨었다.

저런 식으로 표정이 변하다니…어딘가 소름 끼치는 사내였다.


“그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먼저 돌아가 있겠습니다. 며칠 후 성에서 뵙지요.”
“…….”
“그리고…에, 그 옆의 여자분은- 죄송하지만 성주께서 출입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품행이…단정치 못하니까요.”
“……좋은 지적이군. 명심해 두지.”

긍정의 대답에 조금 가벼워진 걸음으로 세드릭이 계단을 올라설 때였다.

“…그런데, 세드릭 호먼-”
“?”

그 사이 다시 탕아의 가면을 뒤집어 쓴 슈스켈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던졌다.

“자네가 오래 전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나의 마음 같은 건 절대로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고 말이야. 아직 그 말 유효한가?”        
“!”


느닷없이 그 말은 왜……?         

희미한 기억을 되짚듯 미간을 좁히는 세드릭의 태도에 슈스켈은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버리고픈 잔인한 충동을 느꼈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무딘 인간이었다. ‘걱정했다’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창자가 꼬이는 줄 알았다. 그 어설픈 위로 한마디가 잠자고 있던 악의를 깨웠다. 슈스켈은 세드릭이 몇 번 고개를 갸웃하다 문을 열고 나설 때까지 낄낄대며 웃었다. 자신의 거미줄을 자극하는 모처럼의 먹이를 어떻게 괴롭혀 줄까 고민하면서.







            




“뭐 하는 사람입니까?”        
“그냥 전에 친분이 있던 분일세.”

부하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물리치며 세드릭은 말에 올라탔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설마 이런 곳에서 슈스켈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좀 더 솔직하게는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으리 라고도 생각지 않았었다. 들은 바로는 깊은 자상을 입고 비참하게 사라졌었다 했으니까.

“성에서 산다는 사람치고는 인상이 좋지 않군요. 차림새도 초라하고.”

그 말에 세드릭 역시 동의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화려하고 단정하던 옛 모습은 눈 씻고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
정말로 입맛이 썼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더블린 백작가의 아름다운 외동딸이자 슈스켈의 누이인 비올리따 폰 더블린은 세드릭의 정혼녀였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슈스켈은 자신의 사관학교 선배이자 처남이 되는 셈이다. 만일 그들이 그때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연상의 그녀와 혼인해 아이를 두엇쯤 낳고 잘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차오르는 답답함에 세드릭은 두 손으로 얼굴을 와락 감쌌다.

‘자네가 오래 전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나의 마음 같은 건 절대로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고 말이야. 아직 그 말 유효한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잔인한 말을 쉽게 퍼부었던 소년 시절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의 세드릭은 아이다운 편협함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엔 결코 용서할 수 없던 것들도 지금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성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해도…그렇다 해도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동경하던 선배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당연히 혼인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정혼녀였다. 하필 그 두 사람이 사랑이란 이름아래 이 세상에서 가장 비윤리적이며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어야 할까. 그들은 혈육이었다. 친 남매였다. 그 사이에 연정이 존재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더 구역질 나는 건 그 사랑이 결코 정신적으로만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육욕으로 흐려지던 비올리따의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떠올리자 위장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죄 많은 여자의 울먹임은 소년이었던 세드릭의 시각으로는 참을 수 없이 가증스러웠다.

‘…그래.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그때 무슨 말을 했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저 욕설을 실컷 퍼붓고는 냉정하게 돌아 나왔던 것 같다. 더럽다고, 역겹다는 말도 했던 거 같다.

가슴 한 켠이 무거웠다. 그 일이 그녀가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다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대범한 짓을 벌인 것에 비해 너무 심약한 여자였으니까.




“대장님, 곧 해가 집니다.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 돌아가야지.”

처져있던 어깨를 세우며 세드릭이 말 엉덩이를 때리자 적마(赤馬)가 거세게 말굽을 내디뎠다.
샤휀은 정말 묘한 곳이었다.         
그저 처음엔 머물 곳이 필요해 깃들었던 외딴 성이었거늘 이곳에선 하루하루 머물수록 점점 묘한 인연들을 만들게 되는 것 같았다. 아힌스 폰 아드리안…백 목련처럼 우아한 젊은 성주와, 그리고 오랫동안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남아있던 회색 눈의 슈스켈-.

어찌되었건 세드릭 호먼으로서는 그 두 사람을 남아있는 긴 겨울 동안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




“…춥군.”

아힌스는 얼어붙은 발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얀 이불보로 감싸인 몸은 여느 때보다 더 가늘고 창백했다.

“성주님 여기 구운 돌을 가져왔습니다. 안고 있으면 곧 몸이 따뜻해 지실 거에요.”
“…필요 없다 치워라.”
“고집 피우지 마세요.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치우라는데도-!”

탁-

소녀의 여린 손을 매섭게 내치자 달궈진 돌은 옆으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다가왔던 온기가 내심 조금 아쉬웠으나 시커멓고 불결한 것을 몸에 지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울상을 지으며 나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아힌스는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추위에 곱은 손이 잘 움직이지를 않아 몹시 짜증스러웠다.
잠시 후 다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눈만 들어 살피니 아드리안 공작의 차가운면상이 보였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비딱한 마음에 이를 갈며 경계하자 풋…, 하며 남자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들어왔던 아이가 울며 뛰쳐나가더군요. 이렇게 추워하면서 굳이 온돌을 물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정한 형제 흉내라도 내려는 지 닿을 듯 가까운 곳까지 다가와 유엘은 아힌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환장하게 제멋대로인 놈이었다. 언제부터 친했다고 형님, 형님 그 소리가 그리 쉽게 나오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형님에 대한 공경심 깨나 있는 놈으로 착각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내버려 둬라. 온돌을 물리든 들이든 내 알아서 할 일이다.”

‘미친놈. 얄팍한 슈미즈 차림으로 마차 안에서 깨어난 내 심정이 어떤 건지나 알기나 해?’ 이젠 더 놀랄 일도 없건만 웬수 같은 동생놈은 재주가 좋은 건지 늘 새로운 방법으로 아힌스를 충격에 빠뜨렸다. 아무리 사람이 자고 있기로서니 그걸 그대로 달랑 들고 나오다니 머리가 정상은 아닌거다.

화를 내는 아힌스에게 유엘은 ‘옷이야 아무데서나 사 입으면 그만 아닙니까.’라는 태평한 소리를 지껄였었다. 아무데서나 사 입으면 되는 거라니, 정말 한가한 소릴 한다. 무릇 옷이라는 건 못해도 한 달 이상은 잡고 찬찬히 맞춰 입어야 제 태가 나는 법이거늘! 견본품을 보고 옷을 고른 후 실제 옷감과 비교해 색이 제대로 나왔는지, 재질이 어떤 느낌인 지를 파악하고 가봉을 거쳐 또 한번 수정을 해준 다음 솜씨 좋은 장인에게 맡겨 꼼꼼한 바느질과 마무리를 하고 나서야 나오는 게 옷이라는 건데-, 저 잡놈은 그런 과정과 절차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 적당히 아무거나 완성된 옷을 고르라고 포목점에 자신을 덜렁 데려다 놨으니 뒷목 잡고 쓰러질 일이었다. (한마디로 기성복 입으라는 말에 삐쳤다)

“아이처럼 심술부리지 마십시오. 그러다 몸이 축나게 되면 형님 손해입니다.”

유엘은 던져버렸던 온돌을 집어 하얀 비단 손수건으로 감싼 후 아힌스에게 건넸다. 여전히 제 주장만 고집하는 주제에 목소리는 지난밤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자세히 살펴보면 남자가 지금 상당히 들뜬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을 테지만 불행히도 아힌스는 그런 쪽으로는 감이 느렸다.  

“…하지 마라. 내가 어찌되건 네가 무슨 상관이냐. 아니지, 오히려 네겐 더 잘된 일 아닌가? 내가 없어지면 네 일이 한결 수월해 질 테니 말이다.”
“…….”
“가식 떨지 말고 나가버려. 꼴도 보기 싫다. 옷 같은 거야 네 알아서 고르려무나. 어차피 너에게 내 의사 같은 건 필요 없잖니.”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기죽대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아힌스에게 유엘은 좀전과는 달리 한껏 굳어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몸을 기울여 속삭이듯 잔인한 말을 퍼부었다.

“맞는 말입니다. 이제야 당신 처지를 이해하셨습니까?”
“……읏.”         
“당신 의사 같은 건 제게 필요 없지요 전혀. 그러니, 토 달지 말고 내 말에 따르세요.”

비단 수건에 쌓인 온돌이 품 안을 억지로 파헤치며 들어왔다. 아힌스는 입술을 빠득 깨물면서도 그걸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었다. 곧 안 있어 따스한 온기가 몸 속으로 전달됐지만 아힌스의 마음은 그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고야 말았다.  














고드름이 얼었다.

해가 난지 언제인데 아직도 지붕 끝에 저런 게 붙어있나 싶어 아힌스는 손등으로 턱을 받친 불량한 자세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통. 통. 통….

햇살에 녹은 고드름 끝이, 물방울이 되어 바닥을 적시는 광경을 가만 앉아서 지켜보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는 찬 얼음 기둥을 뚝, 하고 분질러서 아이처럼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문득 어린 시절 생각이 났던 것이다.


수도의 아드리안 본가에서는 크고 작은 연회가 자주 열렸었다. 제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세가이니 당연한 거였지만 늘 침대신세였던 아힌스에게 그것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한번이라도 몸 져 누워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열꽃 핀 몸을 이불 속에 파묻고 홀로 누워있는 외로움이란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를….
문틈 너머 들려오는 흥겨운 현악기의 소리도, 사람들의 웃음 소리도 어린 아힌스에게는 그저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안주인이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연회기간엔 유독 모친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그런 상황은 아이를 돌봐주는 아랫것들의 손길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이만 아니라면 밖에 나가 시중을 들며 자기들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을 테고 뭐 하나라도 건질 수 있으련만 하필 병간호를 맡고 있으니 아이가 여간 원망스러운 게 아니었을 거다. 그렇다고 귀한 후계자를 나 몰라라 내버려 둘 수도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그네들의 모습을 보며 아힌스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처량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벽장 속의 꽃 같은 존재로군요.’

그의 교육을 맡아 돌봐주던 한 가정교사가 아힌스를 두고 했던 말이었다.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아침의 싱그러운 이슬조차 맺어보지 못한 채 시들어가는 꽃 말입니다. 아름답지만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지요. 하루 종일 보는 거라곤 답답한 방안의 것이 전부이니 생각도 편협하고 날이 갈수록 히스테릭해지는 겁니다. 저 아이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 말을 전해 듣고 분통이 터진 아힌스가 그를 당장 내쫓기는 했으나 사실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어린 마음에 그것이 사무쳤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입때까지 아팠던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간보다 배는 많았고, 자주 아프다 보니 예민해 지는 성미에 몇몇 부친이 붙여줬던 놀이상대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그가 퍼붓는 독설에 울며 도망치는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주변 사람들의 태도도 냉담해져 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니. 사랑하는 내 아들…. 왜 늘 그렇게 화를 내는 거니? 응?’

아이를 붙들고 흐느끼는 모친에게 아힌스는 냉랭한 목소리로 그저 좀 피곤할 뿐이라 대답했었다. 짜증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 건지, 끝없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유치한 둘째 시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아힌스도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그때 스스로를 조절하기 힘든 어린애였으니까.

만일 좀 더 세심하고 자상한 부모였다면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아힌스의 양친은 그러기엔 너무 바빴고 본인의 사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늘 약속으로 꽉 차 있었으며 언제나 외출을 해야 하는 절정의 인기인이었다. 그래서 부모는 변덕스럽고 제멋대로 구는 아들의 태도가 애정결핍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에 한번 얼굴 보기도 힘든 부모의 애정을 갈구해서라고는…전혀, 추측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차갑습니다. 만지지 마십시오.”

불쑥 튀어나온 손이 얼음 기둥을 뺏어갔다. 가차없이 단호한 손길이지만 체온만은 묘하게 따뜻했다. 아힌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동생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가만히 창 밖 전경으로 눈을 돌렸다.


펑-

펑------
펑---------------


여기저기서 축포가 터졌다. 와아아아-소리지르는 사람들의 함성도 힘찼다.

‘아직 신년이 되려면 며칠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 소란인가.’

이렇게 가까이서 축제 같은 걸 겪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집안에서 열리는 파티조차 나가지 못했기에 사람이 우글거리는 곳은 막연히 ‘싫다’라고 단정짓고 있었는데 막상 나와보니 그렇게 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솜사탕이나 사탕 같은 것을 잔뜩 품에 안고 발갛게 얼굴을 상기시킨 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귀여웠고 몸을 잔뜩 부풀린 알록달록한 의상을 입은 광대들도 신기했다. 마카롱이나 비스코티를 구워 팔던 과자장인들은 성주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가 지나가자 일제히 일어나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성주의 행차에 과하게 흥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커튼으로 가려진 창 안쪽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비로운 성주께 축복을-!’ 하고 외쳤다. 입때껏 영지민들에게 자비를 내비쳤던 적이 없는 아힌스로서는 조금 우스운 기분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의외네 정말.”

아힌스는 어깨 위에 걸쳐진 망토를 당겨 몸을 감쌌다. 바레트(모자)와 같은 색으로 맞춘 은은한 회색 빛의 망토는 두께에 비해 따뜻하고 질감이 폭신폭신했다. 피부에 닿는 그 느낌이 좋아 손 끝으로 부슬부슬 만지고 있던 아힌스가 문득 불편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을 때, 유엘이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눈치챘다.
                  
“뭘 봐.”
“…….”
“불쾌하니 고개 돌리거라.”
“싫습니다.”

고집이 들어간 대꾸에 아힌스는 눈을 부라렸다. 저 녀석이 같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니 내 잠시 정신줄을 놓은 게지! 더구나 촉감이 좋다고 매만지던 옷은 녀석이 억지로 골라 입혀놓은 것이 아니던가. 그걸 까맣게 잊고는 혼자 잔뜩 들떠있던 게 겸연쩍었다. 민망한 마음에 아힌스는 고개를 돌리며 괜한 소리로 유엘을 다그쳤다.

“이런 곳엔 대체 왜 온 게냐. 시찰을 다닌다면서 놀 궁리만 하고 있었구나.”
“…조금 전까진 형님도 즐거워 보이셨습니다만.”
“하. 웃기는 소리. 내가 이런 유치한 서민들의 놀이를 좋아할 듯 싶어?”
“…….”
“난 좋아하지 않는다. 시끄럽고 냄새 나고 보기만해도 번잡하다. 네가 날 억지로 끌고 나온 거지 언제 내가 가고 싶다 했느냐?”
“…….”
“…….”

“아 정말이라니깐!”

유엘의 묘한 침묵에 아힌스는 역정을 부렸다. 일부러 기분 나쁜 척 굳히고 있던 얼굴엔 화끈 열이 올랐다. 녀석의 말마따나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심술부리고 있는 것 같아 민망스럽기도 했다. 처음 성을 나섰을 때는 의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데다 강제로 끌려나간다는 생각에 정말로 불쾌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바깥 나들이에 흠뻑 빠져 나빴던 기분 같은 건 기억의 저편으로 밀쳐져 버렸다. 부끄러울 정도로 단순했다.

“-제기랄.”

티를 안 내려 노력했지만 촌놈처럼 신기하다는 듯 여기저기 둘러보던 자신을 저 건방진 동생 놈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좀 더 행동을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녀석에게 유치한 면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한없이 뜨끔거렸다.     
그러나 비웃음으로 일관할 줄 알았던 유엘은 전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나가보시겠습니까?”
“…뭐?”

무슨 엉뚱한 말을 하는 거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유엘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더니 귓불을 붉혔다. …답지 않게시리 수줍은 척은, 재수없는 놈.

“…밖에서 구경하는 게 어떠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저와 함께 이야기도 하고, 같이…축포도 쏘고.”
“싫다. 너 따위와 함께 어딜.”
“…….”  

으득-.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벌써 몇 번이나 유엘의 사나운 모습을 경험했던 아힌스는 아니라고 의심하면서도 어깨를 움찔 떨었다.

‘혹 때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설마, 나를?’

마차 안에는 유엘과 자신, 둘뿐이었다. 무슨 짓을 당한다면 말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랬기에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아힌스는 엉덩이를 슬금슬금 한걸음씩 물렸다. 물론 고개는 여전히 전혀 겁 안 먹은 척, 빳빳하게 세운 채였다.

그 모습에 유엘은 가볍게 혀를 찼다.

“당신, 스스로가 정말 싫은 타입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까?”

뭐라?

“겁은 많은 주제에 곧 죽어도 자존심은 못 버리지. 그래도 이십 년 만에 형제라고 찾아갔더니 대놓고 발톱부터 들이밀지를 않나…, 속 좁고 옹졸한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정말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 놈이 감히!

노려보는 아힌스의 눈빛만큼 남자의 목소리도 차츰 낮아졌다.

“지금 이 안에서, 내가 정말 원한다면 당신 하나쯤 어떻게 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저 참고 있을 뿐이지. 그러니 괜한 도발 말고 얌전히 계세요.”

마지막 말은 느리고 작았다. 정말로 인내하고 있다는 듯이.

차가운 겉모습과는 달리 은근히 다혈질이던 녀석이니 유엘의 말대로 이쯤에서 숙여줘야 한다는 걸 직감으로 알면서도 호승심이 아힌스를 부추겼다. 입은 자율신경이라도 된 마냥 제 멋대로 움직였다.

“뭘 참고 있다는 거냐.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게야? 하. 어디 할 테면 해보시지. 누가 겁날 줄 아느냐?”


휙-----


“읍-!”


덥쳐진 건 순식간이었다.

아힌스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유엘의 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턱을 움켜잡은 유엘의 악력이 너무 세서 턱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기 위해 벌린 입 사이로 동생의 혀가 거침없이 가르고 들어왔다.   

“읍-읍--!!”

아힌스는 더 커질 수 없으리만큼 눈을 부릅뜨고는 안간힘을 다해 유엘을 밀쳐내려 애썼다. 잡아먹을 듯한 키스는 아플 정도로 거칠었다. 유엘은 솜방망이 같은 주먹질을 해대는 아힌스를 비웃으며 가뿐히 제압하고는 그의 곱게 빗겨진 백금발의 머리채를 뽑아버릴 듯 뒤로 잡아챘다.

“악-!”

뒤로 젖혀진 목과 함께 마른 몸이 마차의 붉은 쿠션 위로 쓰러지자 보다 확실한 우위를 차지한 유엘은 그때부터는 마음껏 아힌스의 부드러운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목마른 자처럼 조급하게 달려들어 혀를 감아 올리다가 송두리째 먹어 치울 듯 치열을 훑고, 얄팍한 입술을 멋대로 자근자근 씹어댔다. 이성이 사라진 유엘의 흑안은 광기가 번들거렸다. 눈 앞의 사람이 제 형님이 아니라 딱 알맞게 살이 오른 먹이라도 되는 것처럼 잔인하게 물어뜯었다.        

“---!!!!”

한참을 쩝쩝대던 유엘의 정신이 돌아온 건 아힌스가 호흡곤란으로 가사상태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형님?”

급하게 입술을 뗐지만 파랗게 질린 아힌스는 새액-색 소리만 내며 제대로 호흡을 못 했다. 괴로운 듯 가슴만 쥐어뜯는 그를 보며 유엘은 몹시 당황했다. 당황이라니, 그에겐 참으로 드문 일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정말 그 말이 딱 맞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는 이내 아힌스의 등을 두들겨 호흡을 도왔다. “숨, 쉬십시오. 얼른!” 파랗게 질려있는 형님의 얼굴을 안쓰럽다는 듯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그는 마른 몸뚱이를 바짝 끌어 안았다. 그것은 양을 맛나게 잡아 잡수시던 포악한 늑대가 돌연 먹이의 상태를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모순되는 태도였지만 유엘은 그런걸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하악-. 콜록-!

“…괜찮아 응?”


짝--------
“손 치워! 이 나쁜 새끼!!”

“형…,”

“내게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앗-! 난 너 같은 동생 따위 없단 말이다! 네가 감히 나한테…나한테……!”

나한테 대체 왜 이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방금 전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무언가 아주 나쁜 짓을 당한 것 같은데 순간 너무 무서워 숨이 멈출 정도로 놀랐다. 마구 밀어붙여지고, 입술이 가로막히고…또 다시 힘으로 눌려져서…………,

“우욱…흑….”

목구멍으로 아이 같은 울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유엘에게 당한 짓들도,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도-

그 사실에 충격 받은 아힌스는 마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본 아이처럼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화가 나서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수가 없는데!’

고개를 양 손바닥에 파묻은 채 몸을 둥글게 말고 훌쩍훌쩍 흐느끼는 형의 모습에 유엘은 아까보다도 더더욱 당황했다. 키스를 좀 했다고 울다니…. 물론 무례했고, 자신이 잘못한 건 맞지만 열다섯 살 계집애도 아니고 스물 여덟이나 먹은 오만한 남자가 이런 식으로 우는 건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는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었다. 하자는 일에는 뭐든 싫다는 기색을 보이며 웃기지 말라고 비웃는 건방진 아힌스의 반응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세상에 저보다 잘난 사람은 없다는 듯 구는 태도가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론 가소로워 좀 눌러주려던 것 뿐이었는데….

“흐윽…흑…으흑….”
“형…님, …아힌스.”

유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가늘게 떨리는 아힌스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흩어진 머리칼을 사라락 뒤로 넘겨주었다. 달래듯 최대한 부드러운 손길로…. 다행히 이성을 잃어버린 아힌스는 그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있어 주었다. 통…통…. 맞대고 있는 심장이 부지런히 뛰어댔다. 맥박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서로의 거리가 가까웠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미안하다니까.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던 냉미남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되는대로 꺼내놓았다. 사람이 우는 걸 보고 이렇게 당황한 적은 처음이었다.

  

            
         








툴락은 고민스러웠다.

주군의 잘생긴 얼굴에 떡하니, 선명하게 찍힌 손바닥 자국에 대해 물어야 할지 그냥 입다물고 있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그러고 보니 입술도 조금 부르튼 것 같고, 얼굴빛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혹 어디가 아프신 건가.

“음…전하. 혹시…,”
“-아무 일도 없네.”

공작의 대답은 빨랐다. 벌써 몇 차례나 들은 질문이었던 듯, 묻기도 전에 무안을 당한 툴락은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나가계신 동안 영지에서 보급할 수 있는 물품들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척박한 곳이라 양곡 조달은 쉽지 않겠지만 방한 장비만큼은 확실히 구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군마 역시 보충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그래. 수색대의 상황은 어떤가? 길을 찾았나?”

“…그게, 남쪽은 몰라도 북쪽의 길은 지도에 나와있지 않은 작은 길목마저도 눈으로 막혀
아무래도 오가는 건 무리입니다. 역시 처음에 계획했던 그 노선이 제일 나을 것 같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아드리안 공작은 작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덧붙였다.

“샤휀 성의 수리는 어찌되어가나.”

아하. 그거요!
부관은 목소리가 모처럼 밝아졌다.

“완전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단은 전체적으로 수리가 끝났습니다. 부서진 성문과 창문도 모두 고쳤고 엉망이 된 내부도 정리했습니다. 아, 전하의 방으로 쓰일 침실 역시 정리가 되었으니 당장 오늘 밤부터는 편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당장 성주의 방에서 짐부터 옮겨 놓는 편이 좋겠지요?”

서른이 넘은 주제에 어서 칭찬해 달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툴락을 아드리안 공작은 냉담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2층의 어딘가에서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툴락은 환청이라 생각했지만 2층의 사령관 침실로 내정해 두었던 방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절망하고 말았다.

네 장의 튼튼한 이중 유리들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



유엘을 따라서 외출을 다녀온 후 아힌스는 사흘을 내리 앓아 누웠다.

스트레스로 골골대던 육체가 드디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어릴 때에 비해서는 많이 건강해진 몸이었으나 지난 며칠간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던 데다 결정적으로 안 하던 외출 탓이 컸다.
병명은 고작 몸살감기였으나 후유증은 상당했다. 밤새 열이 끓어 오르고 속에서 음식을 받지 않아 먹는 족족 게워내는 아힌스를 보며 윔플 집사는 속이 상했다. 그렇잖아도 마른 몸이 이젠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아 죽을 날 받아 논 환자처럼 변해버렸으니 이만저만 화가 나는 게 아니었다.

앓아 누운 성주를 두고 흑기사들은 약골주제에 성격이 하도 더러워 벌 받은 거라며 실컷 낄낄거렸으나 아힌스가 사흘이 지나도 여전히 병석을 벗어나지 못하자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실 알게 모르게 조금 예쁨 받고 있었다)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것이 아니냐, 고작 감기로 저렇게 앓아 누울 리가 없다 실은 백혈병(?) 같은 거 아니냐. 아니 그게 아니다. 정말은 공작 전하께 깐죽대다 한대 얻어맞고 뻗은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약골을 때릴 데가 어딨다고 때리냐 공작 전하는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 짐승이다…등등 동정 여론까지 흘러나왔다.
하필 그럴 때에 성주의 방을 들락거리는 아드리안 공작의 태도는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소문의 시작은 어떤 녀석이 전하께서 잠들어 있는 성주에게 저주를 거는 모습을 봤다고 실토하면서부터였다.

‘내가 분명히 봤다니깐!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고 있더라고. 뭔가 안 좋은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게 분명해. 틀림없이 전하께선 성주를 말려 죽이실 작정인 게야.'

‘바보자식아. 그럴 리가 있냐? 헛소리 좀 작작해, 자식아.’

‘뭐야 이 자식! 그럼 왜 지금까지 안 일어나는 건데? 넌 사람이 감기로 사흘이나 앓는 것 본 적 있어?’

‘아무리 그래도 저주는 너무했다. 그보다는 눈 뜨면 때린 데 또 때리려고 대기하고 있는 걸 네가 잘못 본거 아냐?’

‘아냐, 이건 내 생각인데 전하가 무슨 협박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전에도 복도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뭔가 말하라고 다그쳤었잖아. 어쩌면 지금쯤 방안에 가둬두고 고문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팔이나 다리 같은걸 부러뜨리면서.’


그렇게, 단순한 주제에 오지랖은 태평양 같은 흑기사들의 끊이지 않는 수다를 우연찮게 들어버린 세드릭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나 참…. 감기로 사흘 앓아 눕는 사람이 왜 없어? 일주일씩 앓는 사람들도 있는데. 니들은 감기 걸려 본 적도 없냐?”

“뭐? 그게 정말이야?”

세드릭의 말을 들은 기사들은 정말 몰랐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런가?’ ‘그렇다는군.’ ’오오- 감기가 생각보다 무서운 병이구나.’

바보들의 만담을 보는 기분에 세드릭은 뒷목을 잡았다. ‘그래. 저놈들이 감기에 걸릴 리가 없지. 원래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지 않는가.’


“그나저나 세드릭, 넌 네 애인이 아프다는 데 문병도 안 가냐? 매정한 놈.”
“애인?”

세드릭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자, 상대는 능청스레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애인.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그냥 다녀오지 그러냐. 상대가 남자라 좀 그렇긴 하다만 우린 그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어. 같은 동료잖냐. 그리고 뭐, 확실히 그 정도 미남이라면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렇게 역겹지도 않은 것 같고-”

뒤에 있던 자들이 그에 동조하며 야유를 터뜨렸다. 잘해보라는 쪽과 외모로는 세드릭이 너무 딸린다는 말도 나오고 그래도 성격은 네가 낫지 않냐는 위로도 심심찮게 있었다.

‘망할 놈들.’

대체 이 녀석들은 매일 모여 앉아 무슨 수다를 떠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니라고 부정하며 펄펄 뛰면 아마 그게 저 놈들이 가장 바라는 반응일 테니 세드릭은 일단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니들 혹시 지금 면회가능한지 아냐?”  

지난 사흘간 수색대에 합류하고부터는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때문에 성주가 아프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도 찾아갈 생각은 꿈에도 못 꿨다. 정말 눈 속에서 정신 없이 돌려졌으니까. (역사 속의 *씨가 생각난 세드릭이었다. 실컷 길 뚫어 놓으면 이 길이 아닌가벼~다른 길 파~하고 외치는 장교를 목 졸라 살해하고 싶었다)

“…에? 진짜 가려고?”
“그래.”

하필 이 타이밍에 성주의 소식을 물으면 정말 오해 받을 수도 있는 일이나 잠시 짬이 난 지금이 아니라면 성주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지난 테라스에서의 마지막 만남 이후 세드릭은 자주 성주의 꿈을 꿨다. 가끔은 눈 뜨고도 성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쩐지 조금 초조한 기분이었다 세드릭은.

“…너……”
“얼른 알려줘. 시간이 부족해.”

마른 목구멍에 침을 삼키는 세드릭의 초조한 얼굴을 본 동료들은 시끌벅적 농담 따먹기를 하던 분위기에서 일순 조용해졌다. 반쯤은 장난이라 생각하고 맞장구를 쳐 준건데 설마 진심이었단 말인가. 상대는 감히 아드리안 공작의 친형님이다. 좋지 못한 스캔들이라도 난다면 당장에 구 만리 같은 앞날을 뭉개버릴 수 있는 권력자의 혈육-. 흑기사들은 아드리안 공작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외했다. 뒤로는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도 결정적일 때 공작의 말 한마디면 등에 섶을 지고도 불 속에 뛰어 들 수 있는 인종들이었다. 그러니 주군의 빛나는 명예에 흠집을 내려는 자가 있다면 상대가 한솥밥을 먹던 동료 기사라 해도 칼을 뽑을 수 밖에 없었다.

“-세드릭 호먼.”

그런 동료들의 의중을 파악한 세드릭은 쓰게 웃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전하께서 좀 전에 집무실로 돌아가셨으니 지금이라면 얼굴은 볼 수 있을 거다.”
“그래. 고맙다.”
“…….”

“세드릭.”
“?”
“행여라도 꿈도 꾸지 마. 정신차려.”


걱정 반 협박 반이 섞여있는 그 말에 세드릭은 그만 웃고 말았다. -꿈이라는 건 내가 꾸고 싶다고 꿔지는 게 아냐 새꺄.







        



아프다. 아파.
뜨겁고 건조해. 목이 말라. 물 좀 줘…. 물………물 내놔.

아힌스는 괴로운 듯 자리에서 뒤척이며 습기를 찾아 헤맸다. 그렇지만 갈라진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는 고작 ‘으…으…….’하는 거친 쇳소리 뿐이었다. 좀 전까지 옆에서 시중들던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은 어디로 갔는지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푸석한 눈을 깜박이며 어렵게 홉 뜨고는 몽롱한 머리를 정리하려 애썼다.

침실…침대, 낮…?

아아. 성으로 돌아 온 건가.
며칠째 열병에 시달렸더니 정신을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아힌스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옆에 놓인 물잔을 집었다. 넘어가는 물조차 따끔따끔 목구멍을 자극했다. 신경은 한층 더 예민해져 있었다. 온 몸에 수백 개의 바늘을 빼곡히 꽂아놓은 듯 지끈거렸다. 자주 겪는 통증이라지만 그렇다고 적응이 되는 건 아니었다.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쯤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누구냐.”
“아, 접니다. 세드릭 호먼. 아프시다기에 괜찮은가 찾아왔습니다.”   
“…아픈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 이상한 말을 하는군.”

아차. 세드릭은 민망한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며칠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들어서 분명 약해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몸은 쇠약해졌을 지 몰라도 성주의 두 눈빛만은 번뜩번뜩 한 것이 전보다도 더 악에 받친 것 같았다. 몹시 심기가 불편하니 어서 꺼져라-는 눈빛이랄까나…. 그러나 그 모습이 싫기는커녕 어쩐지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애 쓰는 독 오른 방울뱀 같은 것이, 세드릭의 눈에는 조금 귀여워 보였다. (이런 게 바로 콩깍지다)

“이제 몸은 좀 나아지신 겁니까?”
“……아아. 지금 눈 앞에서 귀찮게 하는 누구만 아니라면 훨씬 나아질 것 같군.”
“정말 너무하십니다. 열 일 제쳐두고 찾아온 건데.”
“오라는 말 안 했네. 방해가 되니 이만 나가주지 그러나.”
“엇-그렇게 심한 말을! 저는 성주님이 걱정되어 잠도 못 잤었는데 섭섭합니다.”
“-얼른 나가…………뭐?”
“걱정했었다고요.”
“…걱…정…? 내 걱정을 했다고? -그대가 무슨 이유로?”

아힌스는 의심스런 표정으로 세드릭을 추궁했다. 걱정했었다는 말에 일순 당황하긴 했으나 그 말을 정말 믿는 건 아니었다. 사탕발림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엔 세파에 너무 많이 시달려 온 그였다.

“나 참. 걱정했다는데 이유가 어딨습니까. 그냥 마음이 그런걸요.”
“…….”
“이제 정말 나아지신 것 맞죠? 이런, 얼굴 살이 쏙 빠져서 완전히 파리하네. 누구 옆에서 시중드는 사람도 없습니까?”
“시끄러워.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조금 전까진 분명 누군가 있었다는 말을 하려다 아힌스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착각이었을 게 뻔했다. 앓는 동안 옆에 누가 있는 게 불편해 시종이고 집사고간에 모두 내보냈었다.  

“사,상관…안 할 수가 없으니 그렇죠.”
“뭐?”

세드릭 호먼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처음엔 그저 병문안 삼아 얼굴만 보고 갈 예정이었는데 성주와 말을 섞을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힌스의 결 가는 금발이 땀에 푹 절어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양새가 평소와 달라 기분이 묘했다. 창백하게 야윈 뺨과 푹 꺼진 눈 밑, 그리고 잠옷이 헐렁거릴 정도로 마른 몸은 병색이 완연했으나 결코 추하지 않았다. 세드릭은 부서질 것 같은 그 몸을 한번 품에 안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생각에 혼자 화들짝 놀랐다.

“하. 이상한 말을 하는군, 그대. 그대가 나와 무슨 관계이기에 상관을 못하나? 쓸데없이 변죽만 울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얼른 하고 나가게.”

“물론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걱정도 못합니까? 마음은 억울했지만 세드릭은 꾸욱 눌러 참았다.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말은 죽었다 깨나도 할 수 없었다. 용건만 말하고 꺼지라는 성주의 눈총에 못이겨 세드릭은 결국 며칠간 목구멍의 가시처럼 껄끄럽던 사내를 화제로 꺼냈다.   

“실은 며칠 전 마을의 외곽에서 슈스켈 폰…아니, 슈스켈 푸쉐 씨를 만났습니다. 이곳 성에 고용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요.”

“-뭐라? 슈스켈 푸쉐? 아니 자네가 그자를 어떻게 알지?”

슈스켈의 이름이 나오자 아힌스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갑작스레 진지해진 아힌스의 태도에 세드릭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소식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물은 건데 오해였던 모양이다. 괜한 말을 꺼낸 건가 망설이던 세드릭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세드릭 씨는 저와 예전에 인연이 있던 분입니다. 최근 십 년 정도는 연락이 두절됐었습니다만.”
“아아-뭐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자를 지금 마을 외곽에서 봤다 했나? 언제?”
“정확히는 사흘 전입니다. 급하지 않으니 여관에서 쉬다 오겠다 했었습니다. …헌데 그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나!
싸늘하게 대꾸하며 아힌스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땀에 젖어있던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집사를 통해 연락이 닿았다는 말은 들었으나 벌써 도착했었는지는 까맣게 몰랐다. 그런데 이미 사흘 전에 와 있었으면서 연통 하나 안 보냈다니! 이제오나 저제오나 전전긍긍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꼴이 우습게 된 것 같아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제길- 그 음흉한 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
“정말 더 이상은 못 참아. 그대, 지금 당장 나가서 마부에게 마차를 준비해 두라 하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진정하세요.”
“진정은 내가 할 일이고, 그대는 시키는 대로 해. 어서.”

푸른 눈동자가 차가웠다.
세드릭은 잠시 어찌할까 망설이다 결국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환자에게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후회스러웠다. ‘슈스켈 선배와 무슨 사이길래 저리 흥분하는 거지?’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는 설마 성주가 직접 마차를 몰고 슈스켈을 맞이하러 나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마부를 시켜서 데리고 오려나 보다, 쉽게 생각했을 뿐. 그러나 잠시 후 바람처럼 사라지는 마차의 뒤꼭지를 보며 세드릭의 얼굴은 납빛으로 변해버렸다. 망토를 뒤집어 썼으나 그 사이로 빠져 나온 금빛 머리칼은 이 성의 주인, 바로 아힌스 폰 아드리안이었으므로.





히힝----


말 울음 소리가 길게 들렸다. 곧이어 마차바퀴 굴러가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집무실에 있던 아드리안 공작과 툴락들은 창 밖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조금 전부터 다시 엄청난 폭설이 내리고 있거늘 대체 어떤 용감한 인간이 이런 날씨에 외출을 감행하는 건지 궁금했다. 툴락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어 젖혔다. 멀리로 마차의 몸체가 아직 보였다.

“가만 있어보자…백색, 푸른 색, 그리고 백합 문장-? 헉. 전하, 저 마차는 아무래도 성주의 문장을 달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드리안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콰당, 큰 소리로 문이 열리고 늙은 집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뛰어 들었다.


“공작 전하…! 말려주십시오!!”

“-무슨 일이냐.”

“주인님께서 볼 일이 있다면서 마차를 타고 나가셨습니다. 저 몸으로 멀리 가시다간 정말 큰 일 날지도 모릅니다! 제발 가서 좀 말려주십시오.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닙니까…!”
 

울음 섞인 집사의 애원에 공작의 검은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그는 뭐라 더 말하려는 노인을 저지하며 빠른 걸음으로 마사로 향했다. 현관문을 나서자 눈보라와 함께 칼바람이 몰아쳤다. 지독하게 추운 날씨였다.

이런 날 그 몸으로 외출을 하겠다니, 미친…!

절로 욕설이 튀어 나왔다. 공작은 말리는 툴락을 물리치며 급하게 말 등에 올랐다. 채찍으로 말의 엉덩이를 후려치며 달려나가자 뒤편에서 노집사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폭설 때문에 눈사태가 날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잡으셔야 해요-- 길이 위험합니다----------!

“…제기랄!”







바퀴 자국이 아직 짙게 남아있는 걸 보니 곧 있으면 따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유엘은 한 손으로는 고삐를, 다른 한 손으로는 채찍으로 말을 재촉하며 눈 속을 헤쳐 달렸다. 즈려 물은 입술은 푸른 빛으로 변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눈이 왔다 하면 주위의 모든 것이 백색으로 변해버리는 설산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이런 곳에서 행여 잘못되기라도 하면 십중팔구 시체도 건사하지 못할 터였다.

‘…바보같이 뭘 안다고 나가길 나가, 철없는 사람 같으니! 약골 주제에!’

다행히 멀리서 마차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따라 잡을 수 있을 만큼 근거리였다. 유엘은 말고삐를 바짝 조였다. 채찍질을 한 두어 번만 더하면 마차를 세우는 게 가능했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조금 안심한 마음으로 긴장의 끈을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안돼--------------------!!!!!!!!!!”


        
성주를 실은 백색의 마차는 순식간에 덮친 눈폭풍에 휩싸여 유엘의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외전 :  evolution



당시 세 살이었던 유엘이 장서고의 한쪽 귀퉁이에 꽂혀있던 그 책을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호오, 이건 제국 연대기군요. 귀한 책인데. 도련님 이런 책은 어디서 가져오셨습니까?」

계속되는 장마에 모두가 눅진히 지쳐있던 어느 날 오후, 유엘의 방에서 ‘그것’을 발견한 늙은 교수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정교하게 채색된 삽화가 한 가득 들어있는 오래된 제국 연대기. 철자법을 겨우 익히고 있던 아이가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 귀한 책이 왜 이 방에 있는 걸까. 노교수가 아이가 표시해 놓은 책갈피의 한쪽 페이지를 열자 누렇게 색이 바랬음에도 여전히 섬세한 터치의 초대 황제를 묘사한 삽화가 환상처럼 펼쳐졌다. 거대한 흑사자와 위대한 황제, 그리고 대륙을 물들이는 전쟁의 붉은 피-, 신의 계시를 전해주는 황금의 천사.

「이런 책에 관심이 있으셨던가요? 허허…. 처음으로 집은 책이 전쟁사라니, 도련님은 영웅이 되시겠군요.」

그러나 그의 물음에 어린 제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에 막 들어선 아이는 교수의 손에 들려진 자신의 보물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노교수가 헛헛하게 웃었다. 세 살배기 공작가의 차남은 아끼는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다른 영민함에 비해 유난히 말이 늦되고 감정표현도 부족해서 내 것 네 것에 대한 구분도 잘 못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오랜 연륜의 노교수는 재빨리 자신이 책의 소유에 관심이 없다는 몸짓을 보였다. 아이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는 짐짓 지나는 투로 차분히 설명했다. 모처럼 책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에게 흥미를 유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국 연대기는 오래된 책이지요. 보시고 있던 그 삽화는 건국황제가 신탁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황제의 옆에 있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천사가 바로 대천사장 미카엘이랍니다. 여덟 장의 날개와 녹을 듯한 금빛 머리칼 그리고 푸른 눈동자가 미카엘의 상징이지요.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천사?」

아이의 입에서 오랜만에 말문이 터졌다.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했다 생각한 교수는 신이 나서 이것 저것 덧붙여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천사.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또한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와 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와 선의 상징.

어려운 말들의 조합이지만 대강 눈치껏 알아들은 유엘은 집안 어딘가에 살고 있는 그림 속과 똑 같은 생물이 자신에게 퍼부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호박.’

’4등신.’

’하등동물, 내 방에 들어오지마. 꼴도 보기 싫어.’


「…….」

녹을 듯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우유 빛 하얀 피부가 분명 ‘천사’라는 것과 똑 같은 생물인 듯한데 순수와 선의 상징이라는 건 믿어지질 않았다. 제 방에 좀 발을 디딜라치면 도끼눈을 뜨고 왕왕대는 ‘그것’은 늘 하얀 모슬린 잠옷으로 가녀린 어깨를 감싸고는 침대 위에 누워 엄청나게 귀찮은 듯 이쪽을 바라보곤 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의 정체가 천사였다니. 그렇다면 혹시 그 녀석도 작은 등 어딘가에 여덟 장의 날개를 숨기고 있단 말인가.

왠지 조금 안절부절한 기분이 되어버린 유엘은 장황한 말을 잔뜩 떠들고 있는 늙은 교수를 내버려 둔 채 뒤돌아 섰다. 뭐라도 기분전환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마침 지금쯤 ‘그것’의 말동무 상대가 나타날 시간이었다. 유엘은 이번에도 몇 대 때려서 얼른 쫓아 보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천사’의 말동무들은 일부러 순한 애들을 고른 건지 하나같이 기가 약했다. ‘천사’가 몇 마디 쏘아붙이면 울면서 뛰쳐나오고, 자신이 조금 괴롭히면 도망가서는 다시 오지 않는다. 유엘은 그 단순 명쾌한 구조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이유로 놀이상대들이 도망칠 때마다 새 아이를 구해다 주는 부친이 싫었다.

‘어차피 그 녀석은 귀찮아 하는 것 같은데 뭐 하러 매번 새로 구해다 주는 거야.’


유엘 폰 아드리안, 3세 때의 일이었다.


 

        



* 4세



세월이 흘러도 녀석의 유난스런 성질머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유엘은 지난 밤 끙끙 앓고 있는 것이 하도 불쌍해 모처럼 방에 선물을 던져줬더니, 도리어 비명을 지르며 파들파들 떨던 형 녀석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저 징그러운 것을 당장 치워라! 악-! 내게 달려들지 않느냐 어서 치우지 못할까!’

…그러면서는 기어코 아랫것들을 달려오게 해 선물을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지. 바보 같으니. 겨울에 저만한 개구리 구하기가 어디 쉬운 줄 아나. 눈 밑, 얼은 땅 속을 파헤쳐 겨우 잡은 귀한 것인데 그걸 저리 홀대하다니 아무리 좋은 걸 줘봐야 소용이 없다.

다시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유엘은 땅을 몇 번 발로 걷어찼다. 잘해주고 싶었다. 형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그 의미가 가슴이 와 닿지는 않아도 늘 신경이 쓰이는 존재였다. 부러질 듯 가는 하얀 목덜미라던가 뽀얗지만 창백한 얼굴을 볼 때면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아련했다. 녀석이 성질을 낼 때마다 한대 확 패주고 싶다가도 제 기운을 주체 못하고 파들파들 떨 때면 금새 또 안쓰러워져서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은 네 살이고 형 녀석은 여덟 살이나 먹었지만, 그리고 키도 덩치도 아직은 저쪽이 더 컸지만 그래도 그런 애틋한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이쪽이 더 돌봐주고, 이쪽이 더 챙겨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 녀석이 사라진 건 어느 추운 날이었다. 겨울이라 해도 정말 유난히 추운, 그런 날이었다.

「…뭐라고?」
「오늘부터 방을 옮기시랍니다,」

짧게 말을 전하는 하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유엘은 짧은 다리로 다다다닥 모친에게 달려갔다. ‘가버렸다니 어딜? 어딜 갔다는 건가요? 이렇게 추운 날엔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녀석인데.’ 유엘의 격한 반응에 공작 부인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는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왜 이러니, 유엘. 아힌스는 가버렸단다. 멀리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이젠 네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해.」

이젠 네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해.

네 살 아이의 머리로는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힌스는 아힌스 유엘은 유엘, 유엘이 아힌스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모친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유엘에겐 그보다 아힌스가 여기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어차피 자주 보던 녀석은 아니었지만 존재와 부존재의 차이는 컸다. 마음 한구석이 몹시도 섭섭하고 아쉬웠다. 그렇지만 어째서 기별하나 없이 그리 급하게 떠났느냐는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글쎄……? 안 그래도 보고 가지 않겠느냐 물었었지만 한마디로 거절했는걸.
하긴. 너와 그 아이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으니까.」
「…….」

여전히 섬세하지 못한 여자였다. 아무리 그랬다고 그 말을 고대로 전하다니. 유엘은 눈만 깜빡이며 애써 분을 삭였다. 그 동안 자신이 보였던 호의가(아힌스가 밤에 울거나 끙끙 앓을 때면 아껴놨던 사탕이나 개구리 같은 장난감을 갖다 줬었다) 억울했다.   

「이런…. 너무 섭섭해 하지 마려무나, 유엘. 아주 헤어진 게 아니잖니. 그리고 곧 편지가 올 거야. 샤휀은 먼 곳이지만 편지가 오간다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진 않을 거란다.」  

모친은 웃으며 참으로 쉽게 말했다. 그녀는 자상한 사람이지만 자식들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너무 둔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큰아들의 외로움도 둘째 아들의 상심도 모친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유엘은 허탈한 속마음을 홀로 달랬다.      

천사는 등 속에 감춰두었던 여덟 장의 날개로 날아가 버렸단다. 그에게서 멀리로. 아주 멀리로-

유엘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천사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아드리안 저택은 아주 재미없는 곳이 돼버렸다. 내일 있을 사냥이나 즐거운 일들을 생각해봐도 전혀 설레지가 않았다. 어차피 녀석이 있었다 해도 매일 침대에서 골골대는 통에 같이 어울리지는 못했을 텐데도 그랬다. 꼭 아끼던 무언가를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예뻐서 침대 아래 잘 숨겨두고 가끔 열어보던 보물이 어느 날 홀랑 사라져 버린 것처럼 섭섭하고 화가 났다. 유엘은 그런 감정을 뭐라 정의하는 지 알지 못했다. 그저 화가 날 뿐이었다.

모친의 말대로 열흘 뒤에는 단정한 필기체의 편지가 저택에 도착했다. 그러나 물론 유엘에 대한 언급은 장문의 편지 어디에도 없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지나갔지만 오가는 그 많은 편지에는 그저 부모에 대한 안부인사뿐이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오지 않게 된 어느 날부터 아힌스의 편지는 유엘의 보물상자 깊숙한 곳에 안치되게 되었다. 정리에는 소질이 없는 공작 부인은 아들의 편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고 모든 것은 그와 같은 속도로 잊혀져 갔다. 유엘의 유년기 또한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 14세


무심한 소년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다.

유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어붙은 표정으로 젖은 침구를 노려봤다. -몽정. 말로만 듣던 그것이 그에게도 찾아온 것뿐이지만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어째서……?」   

꿈속의 상대는 네 다섯 살쯤 됐을까한 어린 천사였다. 화사한 백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주 아주 귀여운 꼬마아이. 자신은 젖내도 가시지 않은 그 어린 녀석과 밤새도록 성교했다.

「우욱--」   

속이 좋지 않았다.
침구에서 묻어나는 특유의 밤꽃 냄새도, 그 기묘한 꿈도 모든 게 역겨웠다. 유엘은 동이 틀 때까지 지독한 자기 혐오에 시달렸다. 꿈이 주는 메시지 따윈 생각하기도 싫었다. 금발과 푸른 눈이라는 데서 자연스레 연상되는, 잊고 있던 어린 형에 대한 기억까지 더해 첫 몽정은 최악이었다. 죄책감이 두근두근 심장을 두들겼다. 그런 주제에 간밤에 자신을 유혹하던 어린 천사를 은근슬쩍 다시 떠올리는 스스로의 이중성이 끔찍했다.

유엘은 꿈은 그저 꿈일뿐이라며 가벼이 넘어가고 싶었다. 첫 몽정 때 심지어 가축과 성교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이만하면 양반 아니냐,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고자 했다. 어떻게든 자신이 소아성욕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던져 버리고 싶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책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주기적으로 조금씩 형태만 바뀐 같은 꿈에 시달렸다. 작고 하얀 아이. 통통한 볼 살, 눈물이 가득 차 있는 새침한 커다란 푸른 눈동자-.
‘빌어먹을.’
열 네 살의 유엘은 충분히 이성적이었지만 꿈만큼은 통제할 수 없었다. 역겹다 불쾌하다 말해도 꿈 속의 자신은 밤마다 어린 천사와의 은밀한 성애를 욕망했다. 새초롬하게 붉은 입술을 삐죽대는 옆모습만 떠올려도 아래로 불끈 피가 몰렸다. 아이의 입술을 한번 훔치고 싶어 안달 난 자신은 정말 끔찍하게 비굴했다. 그리고 결국 아이를 차지해 자신의 남성을 증명한 후의…그 허탈감과 박탈감이란.

「-망할.」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다 누구라도-.
자책과 역겨움과 혐오, 그리고 뇌관이 타버릴 듯한 쾌락이 한데 뭉쳐 이성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유엘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죄 없는 형제에게 쏟아 부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린 형의 목을 비트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이 정말로 이상해진 것만 같았다.

결국 그 무렵부터 수면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어버린 그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위험한 사냥놀이로 관심을 돌렸다. 동물의 목덜미를 칼날로 베어 넘기고 식지 않은 붉은 피를 온 몸에 뒤집어 쓰는 걸로 카타르시스를 대신하는 귀공자는 잔혹했지만 누구도 소년을 말리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모친인 공작 부인 역시도.  

「내일 출병식이 있습니다. 배웅 나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사냥터와 사냥 대상이 바뀐 것 뿐이니까요.」   

비정상적인 욕망은 점차 소년을 갉아먹어갔다. 전보다도 더욱 말수가 줄어들고 냉혹해진 유엘이 첫 출사표를 던지고 전장에 나선 것은 고작 열 네 살의 겨울이었다.








* 24세


변방의 북풍은 살을 에는 듯 시렸다. 황량한 설원의 복판에 서서 제국 총사령관은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적진을 응시했다. 이미 한번은 차지했던 카슬란이지만 지금은 적국 국기가 꽂혀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아르토니아의 깃발을 보며 사내는 쓰게 웃었다. 저것은 본디 제국의 것이었다. 승리해야 하는 건 자신의 군대였다.

「-곧 첫 눈이 내릴 겁니다. 군사를 물리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전하.」   

‘그래. 물리려면 지금이 적기이지.’

그렇지만 쉽게 발이 안 떨어졌다. 지난 십 년간 전장에서 구르며 산전수전 다 겪어온 그였지만 이번처럼 힘든 전투는 드물었다. 제국의 기사들은 용감했고 전술과 전략 또한 훌륭했지만 보급이 엉망이었다. 척박한 카슬란은 자급자족이 불가능했기에 보급이 생명줄과 같은 데도 중앙에선 차일피일 지원을 미루고 황제의 눈치만 살폈다. 카슬란을 수복하라고 먼저 등 떠민 건 그쪽이면서 웃기지도 않는 작태였다. 아드리안 공작은 이를 갈았다. 황제가 왜 비딱하게 구는지 짐작이 안가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시였다. 제대로 된 군주라면 사적인 감정은 덮어뒀어야 했다.

결국 고립될 위험 때문에 스스로 카슬란을 버렸다. 군비를 확충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부하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아드리안 공작은 속이 쓰렸다. 후방이 약하다는 게 그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러나 머뭇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이쪽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릴 터, 기회가 있을 때 발을 빼야 했다.

그는 아쉬움에 입맛을 길게 다시면서 뒤돌아 섰다. 얼굴에 묻어있던 누군가의 더운 피가 후두두둑 떨어지자 옆에 있던 부관이 흠칫 놀라며 손수건을 건넸다.

「툴락 경, 근방에서 가장 조건 좋은 영지가 어디인가?」

「샤휀입니다. 아드리안가의 오랜 고성으로 설비가 잘 갖춰진 곳입니다. 척박하다지만 인근에선 그래도 거기가 가장 풍족하지요. 이건 들은 얘기 입니다만, 성주가 영지를 거의 방목하다시피 내버려둔다는데 그게 외려 장점으로 작용했다나요.」   

「샤휀?」

익숙한 명칭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뭘 떠올렸는지 이내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아, 그 샤휀…. 그렇다면 성주는 내 형님이시겠군.」

「예. 분명 성주의 이름이 아힌스 폰 아드리안 이었으니 형님 되시는 분이 맞을 겁니다. 지금 당장 예물과 격식을 갖춘 전서를 보내 전하의 의향을 알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 사람에게 예물까지 보내며 비위를 맞춰줄 필요 없어. 짧게 서신만 보낼 테니 날랜 자들로 선발대를 뽑아두게.」

그는 이를 드러내며 차게 웃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이곳에 와서 녀석을 만나게 되다니. 십대의 자신을 그토록 고민에 빠뜨렸던 까마득한 옛 기억의, 바로 그 형님을 말이다.  유년기엔 그리워했고, 사춘기 땐 원망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아힌스를 만난다는 생각에 유엘은 오랜만에 조금 흥분으로 들떴다. 물론 상대가 반가워서만은 아니었다. 그저 묵은 체증을 확 가시게 해 줄 성질 나쁜 사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가 한때 형제에게 애틋한 마음 따위를 품었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 잘 대해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fin.>






* 24세의 유엘은 아힌스만큼이나 비뚤어져 버렸음


유엘 폰 아드리안 :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냉미남.
특기: 검술&승마술
취미: 전략 시뮬레이션. 지도보기.
이상형: 백금발에 푸른 눈동자의 신경질적인 미인.

0세때 취향 직격해버린 형님덕택에 다른 데 눈 둘 곳이 없어 줄창 쌈질만 해대는 불쌍한 청춘.                  
  










◈◈




덜컹덜컹---


“이런 제길. 이놈의 눈보라는 언제나 그치려는지-! 쯧.”

거센 바람에 나무 덧창이 흔들리자 여관 주인은 뒤뚱거리며 바지런히 창문의 상태를 살피러 돌아다녔다. 새해가 얼마 안 남은 요즘이 일년 중 가장 날씨가 변덕스러운 시기였다.    이런 때에 혹 창이 망가지게 되면, 밖에서부터 밀어닥치는 풍압에 실내가 엉망이 된다는 걸 여러 차례 경험으로 익힌 여관 주인으로서는 자연 신경이 예민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날이 이런데 축제는 잘 치를 수 있을는지 걱정이군.”
“그런 건 걱정하지 말아요. 이러다가도 새해가 되면 눈보라가 딱 멈추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부인은 매년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남편에게 핀잔을 줬다. 그녀에겐 축제 같은 것보다는 당장 눈 앞에 닥친 문제가 시급했다. 손님들이 너무 장작을 헤프게 쓴다거나 숙박비를 제때 내지 않는 것부터 식량저장고의 야채들이 얼지는 않을까 하는 문제까지 아주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날에는 멀리 나갈 수가 없기에 저장해 놓은 식재료가 떨어지면 정말 난감해 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게 하나 있지.’

여주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2층의 골치 아픈 손님을 떠올렸다. 식량창고나 장작 따위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2층의 장기투숙객은 그녀의 의지를 벗어난 영역이었다.

“…여보. 푸쉐씨는 역시 눈보라가 끝날 때까지 계속 있을 것 같죠?”

“아-, 그 슈스켈이라는 작자?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런 날 어딜 가겠어. 얼른 날씨가 풀려서 빨리 나가버렸으면 좋겠구먼.”

“당신이 웬일이에요? 언제는 돈 계산 하나는 정확해서 좋다더니.”

“옘병.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나. 그 자식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 어제도 여자 때리는 걸 봤잖아. 뺨에 있는 흉터도 그렇고 보면 볼수록 영 꺼림칙해.”

남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그녀도 어제 일을 회상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성에서 일한다는 회색 머리칼의 젊은 사내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사내는 여러 가지 명목으로 마을에 이따금씩 내려왔고 그럴 때면 외곽에 있는 이 여관에도 빠지지 않고 들렀었다. 그는 젊은 사람치고 씀씀이가 좋은데다 박식하고 말재간이 있어 사람들에게 꽤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특히 여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선술집에서 한잔 걸친 후, 여관으로 오는 사내의 옆에는 꼭 젊은 여자 한두 명이 붙어 며칠씩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게 다반사였다. 사내의 여자들은 창녀가 대부분이었지만 순진한 처녀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그런 처녀들을 데리고 오는 날이면 꼭 사단이 났다.

어제도 그랬다.     

뭔가가 깨지고 살려달라는 요란한 비명이 들려 달려가 본 방안에선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몸의 여자가 울며 달려들었다. 방안은 난장판이고 만취한 사내는 애원하는 여자를 보며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주인 내외는 그런 사내의 표정에 소름이 끼쳤다.

점잖은 여관은 아니었기에 여자를 거칠게 다루는 사내들은 자주 있었고 온갖 진상을 부리는 인간들도 골고루 겪어봤다. 그러나 이런 타입의 남자는 처음이었다. 비록 구색만 갖춘 샤포와 낡은 프록코트를 걸친 허술한 차림이지만 말씨로 보나 씀씀이로 보나 중류층 이상의 사람임은 분명한데 그 기괴한 눈빛은 뭐란 말인가. 단순히 못 배우고 무식한 자들의 폭력과 남자의 그것은 질적으로 달랐다. 기분 나쁘고 끈적끈적한 뱀처럼 습하고 음산했다. 그런건 분명히 정상이 아니었다. 어디서 주워 듣기로, 배운 자의 폭력이란 못 배운 자의 폭력보다 더 질이 나쁘고 추잡하다 했었는데, 이 슈스켈이란 사내가 꼭 그랬다. 여관 주인은 만일 남자의 푼푼한 씀씀이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자신의 여관엔 발도 못 붙이게 했을 거라며 씁쓸하게 주절거렸다.

“그 여자아이, 잘못되진 않았겠죠?”
“그거야 모르지. 계집질을 하려면 곱게나 할 것이지 꼭 한번씩 미친 짓을 벌인다니까.”
“그렇지만 그런걸 알면서도 달라붙는 애들 역시 잘못이에요.”

제법 번듯한 외양 덕분인지 벌써 소문이 날대로 났는데도 사내의 주변엔 이상할 정도로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말 싫은 남자라 말하면서도 여주인은 조금쯤 계집애들의 그 심리를 알 것도 같았다. 슈스켈 푸쉐라는 사내는 낯설고 위험하면서도 가까이 하고픈 묘한 매력이 있었다. 한번쯤은 내 것으로 만들어 보고픈 남자였다.
  
두 내외가 그런저런 말을 하는 동안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슈스켈 푸쉐가 느릿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창 밖을 내다보며 사내는 매력적으로 웃어 보였다.
  
“좋은 날이로군요, 부인.”
  
간밤의 광기를 벗어버린 너무나 정상적인 인사에 여관 주인내외는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뭐…그야 눈만 그친다면 좋은 날이겠지요. 밤새 안녕하셨나요 푸쉐씨.”
”나쁘진 않았소.”
”…그거 참 다행이네요.”
어쩜 저리도 태연하게 나쁘진 않았다는 말을 할까. 여주인은 혀를 차며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사내의 길게 찢어진 예리한 눈이 날카롭게 이쪽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관찰 당하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 그녀는 불편한 공기를 바꿔보려고 밤부터 내내 떠들었던 화제를 꺼냈다.

“푸쉐 씨, 미안하게도 오늘 아침엔 우유를 대접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어제 오후에 눈사태가 나서 길이 막혔거든요.”
“눈사태? …호오 그거 참. 난 밤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요.”
“지반이 좀 무너졌답디다. 심한 건 아니고, 아마 하루 이틀 정도면 정리가 될 거라오.”

이번엔 남편 쪽이 대답했다. 슈스켈은 마음에 안 들지만 관심 있는 화제가 나오자 입이 근질근질 했던 것이다.   

“게다가 하필 무너진 곳이 샤휀 성의 어귀라 댁도 성으로 돌아가려면 길이 정돈 될 때까지 기다리셔야겠소.”

“뭐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어차피 나는 여기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오. 며칠 더 느긋하게 즐기다 가면 되겠군.”

슈스켈은 담뱃불을 당겨 입술 사이에 끼고는 악당처럼 싱긋 웃었다. 자신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뚱뚱한 주인사내가 제법 귀여웠다. 남편이 없을 때면 은근히 추파를 던지던 주인 여자가 새삼 내외하는 척 하는 것도 우스웠고 말이다. 어쨌든 적당히 시간을 죽이기에 이 싸구려 여관은 딱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서 며칠 더 질펀하게 놀다가 ‘손님'들이 영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쯤 슬슬 성으로 올라가면 적당할 것 같았다.

‘아마 똥줄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아힌스 녀석이 내가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는 걸 알면 이를 갈 테지만…뭐 됐다 그래. 그 자식 고생 좀 해봐야 이 몸이 귀한 걸 알지!’
        
이런저런 이유로 속을 태우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몹시 유쾌해졌다. 아힌스의 건방진 얼굴이 구겨지는 걸 꼭 봤어야 하는 건데 정말 아쉬웠다. 실컷 부려먹고는 이쪽이 귀찮아지자 가차없이 내치던 냉정한 인간! 비록 놈한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건 분명했지만 깨끗한 척, 잘난 척을 할 때마다 오장육부가 뒤틀렸었다. ‘내 성에서 그런 천한 놀이를 하려거든 나가주지 그러나? 사람이라면 짐승과 달리 지켜야 할 예의와 상식이 있는 건데 슈스켈, 넌 전자와 후자 둘 다 부족한 것 같군. 내 성에서 계속 눌러 살고 싶다면 가서 교양이나 더 쌓아오길 바라. 간 김에 네 짐승 같은 성욕도 자제하는 법을 배워오고. 과연 가능하다면, 말이다.’

‘놀고 있네.’

슈스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귀하신 나으리니 하녀와 놀아나는 슈스켈이 못마땅할 만도 했다. 물론 거기서 더 나아가 술 먹고 행패를 좀 부리기도 했고 값나가는 물건들을 슬쩍 빼돌린 전적도 있는 그였지만 불리한 사항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어쨌든 쫓겨난 데 대한 앙심은 컸으니까.

“낄낄…. 잘난 척 하더니 꼴 좋다. 그나저나 하필 성 어귀에 눈사태라니 성주의 상심이 크겠군 그래. 그거 치우는 데만도 경비가 꽤 들 텐데 돈이라곤 일원 한푼 계산할 줄 모르는 도련님이 오죽 난감할까.”

“성에서 일한다면서 성주님과 사이가 영 안 좋은가 보우?”

“뭐 그렇다기보다는 상성이 안 맞는다고 봐야지. 좁쌀영감 같은 것이 아주 사람을 잡으려고 한단 말요.”
  
“흠흠. 이렇든 저렇든 간에 그럼 푸쉐 씨한텐 잘 된 건가.”

“뭐가 말입니까?”

“어제 눈사태에 성주님 마차가 휩쓸렸답디다. 들은 말이라 정말인지는 모르나 성주님과 또 누구, 공작…이라던가? 아무튼 그런 귀한 사람이 같이 실종되는 바람에 군에서 비상이 걸린 모양이오.”

“!!”

빙글빙글 기분 나쁘게 웃고 있던 슈스켈의 미소가 순간 싹 가셨다. 그 바람에 입에 물고 있던 연초가 떨어져 낡은 프록코트에 구멍을 만들었다.

“…지금 누가 어떻게 됐다고?”
  
정색하는 태도에 여관 주인은 이상하다는 듯 추임새를 넣으며 재차 말했다.

“성주님이 실종됐다고 했소. 눈이 이렇게 내리는데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니…. 운이 어지간히 좋지 않은 이상은 살아있기 힘들 거외다. 그렇게 큰 눈사태도 아니었는데 참 운도 나빠. 몇 십 년이나 두문불출 하던 분이 왜 하필 이런 날 무리해서 외출을 하셨는지.”

“…………제기랄.”


콰당.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슈스켈이 벌떡 일어났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는 짜증과 함께 좀 전까지 비웃으며 욕하던 상대를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어리둥절하는 주인내외를 등지고 슈스켈은 2층의 방으로 향했다. 대강의 소지품만 가지고 당장 나가봐야 했기 때문이다.

‘코트 위에 걸칠 두꺼운 방한용 로브와 모자, 그리고 털신이랑…빌어먹을. 어지간히도 성질 급한 자식.’  

그는 일단 일대의 상세 지도와 영지에서 가장 노련한 사냥꾼들을 불러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씨에 사람을 찾는 데는 훈련 받은 기사보다 그들이 훨씬 나았다.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머리는 재빨리 돌아갔다. 어찌되었건 유능한 남자였다. 슈스켈은 아힌스가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실낱 같은 명줄을 붙들고 이십여년을 살아왔던 질긴 목숨이다. 그렇지만…그 운이 언제까지나 그와 함께 할 거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되도록 단시간 내에 구해내야 했다.

“젠장!”

다시 한번 욕설이 터졌다. 자신과의 사이가 좋건 나쁘건 간에 아힌스가 죽는 건 곤란했다.…정말로 곤란했다.

그건 정말 가정하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



파랗게 변색한 메마른 입술이 손끝에 닿았다.

사내자식 주제에 뭐 저리 붉은가, 그리 생각했던 입술이 지금은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엄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입술을 누르며 유엘은 잠들어 있는 아힌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긴 속눈썹, 피곤이 배어있는 마른 뺨과 눈에 젖은 금빛 머리칼 한 올까지…. 키가 훤칠하게 자란 걸 빼면 아힌스는 어릴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래 이 성격조차도 말이지.’

느릿느릿 달싹이는 숨결에 안도하며 유엘은 몸을 내려 그의 품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체온이 느껴지자 비로소 안도감이 몰려왔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그의 그림자를 보며 놓치면 이번에야 말로 끝장이라고, 절대로, 다시는 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거라고…그런 생각에 전신이 전율했다. 결국 앞 뒤 가릴 것도 없이 마차의 뒤를 따라 눈 속으로 뛰어든 유엘은 쏟아지는 눈 속에 휩쓸려 정신을 잃는 그 짧은 순간 허탈하게 웃었다.

겨우 이것이었나.

전장으로 도망치면서까지 잊기를 바랐고 그리고 정말로 잊었다 장담했었다. 이제는 꿈 속의 당신이 나타나도 눈 하나 깜짝 할 줄 아느냐, 그리 큰소리 치며 자신하기도 했었다. 유년기와 소년기를 지배했던 그림자 같은 존재는 더 이상 없는 거라고, 나는 이제 네 편지 한 장 따위에 일희일비 하는 순진한 어린애가 아니라고-.

그런데 어째서였던 걸까. 성문을 걸어 잠그고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는 백금발의 혈육을 본 순간 새삼 어린 시절의 그때와 겹쳐져 보였던 것은. 이쪽을 비웃으며 야멸차게 내치던 그 건방진 입술을 바라본 순간 잊고 있던 호승심이 끓어 올랐다. 어리던 그 시절, 아힌스의 텃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얼굴 좀 보겠다고 찾아오는 동생에게 온갖 구박을 일삼고 때로는 억지로 끌어낸 적도 있었다. 그 후로는 유엘도 자존심이 상해 형이 깨어있는 동안엔 찾아가지 않았었다. 고작 나이 몇 살 더 먹은 걸 갖고 유세란 유세는 다 떨며 잘난 척 하는 게 아주 재수없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때와 똑 같은 표정으로 똑 같은 짓을 반복하려는 아힌스가 가소로웠다. 때문에 유엘은 아힌스의 입장을 알려주고 싶었다. 더 이상 네가 멋대로 하대하던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똑똑히 각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돼버렸다.

기를 쓰며 달려들어 콧대를 눌러주고 자존심을 박박 긁어 울리기까지 했지만 결과는 또 다시 유엘의 패배였다. 그것은 마치 운명과 같았다. 아무리 벗어나려 애를 써봐도 벗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처럼 절망스런 운명…. 유엘은 아힌스의 목덜미를 물어 뜯어버리고 싶었다. 이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그간의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단숨에 자신을 사로잡아버린, 증오스런 형제의 목덜미를.  

‘왜 하필, 이 사람일까. 성격도 나쁘고 병치레로 늘 골골대는데다 가슴도 없는 남자. 게다가 하필이면…친형제.’

……….

유엘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어 아힌스를 바짝 끌어 안았다. 앞으로 어떡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앞날은 캄캄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과신하며 이곳에 왔던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다시 한번 손에 들어온 이 사람을 절대로 놓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그대로 움켜 쥘 수도 없다는 게 가장 참담했다. 동성이라는 건 어떻게든 무시할 수 있어도 친형제라는 사실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선 안되었다. 그건 패륜(悖倫)이었다. 패륜의 결말이 어떤 건지 유엘은 분명히 알았다.


“…으…답답해….”
“…….”
“뭐야…이것.”
“…일어나셨습니까.”

천천히 푸른 눈동자를 드러내는 아힌스를 보며 유엘은 쓰게 웃었다. 이런 애타는 마음 따위 아힌스는 평생 모를 터였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다.


“비켜라. 무겁다.”
아힌스는 비켜 줄 생각은커녕 남의 멀쩡한 머리칼만 자꾸 쓸어 넘기는 유엘의 귀찮은 손을 매정하게 걷어냈다. 그러나 이내 유엘에게 다시 손목을 잡혔고 고집스런 동생은 끝끝내 제 속이 찰 때까지 마음껏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왜 이러냐며 화를 버럭 내려던 아힌스는 문득 자신이 누워있는 자리가 몹시 불편하고 축축하다는 걸 인지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암벽으로 둘러 쌓인 기묘한 동굴 안 이었다.

“여기는?”
“기억 안 나십니까. 눈사태에 휩쓸리셨습니다.”  

아 그랬지. 슈스켈을 만나러 성을 나섰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우레 같은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그의 마차를 덮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기억이 끊긴 걸로 보아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그런데 왜 유엘이 함께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말끄러미 쳐다보는 아힌스에게 유엘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우연히 같이 휩쓸린 것뿐입니다. 설마 내가 형님을 구하러 온거라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쌀쌀맞은 말에 아힌스 역시 만만찮은 태도로 받아 쳤다.

“나 역시 너 따위가 날 구하는 것 바라지 않는다. 동생이랍시고 못된 짓만 일삼는 네게 내가 왜 도움을 구해? 허튼 소리 말고 저리 비켜라. 그리고 불쾌하니까 내 머리에서 손 떼.”


어둡고 습기 찼지만 나름 아늑했던 동굴 안의 공기가 쨍-하고 얼어붙는 순간이었다.












그런 동굴이 있다는 말은 들어봤다. 땅 속 깊은 곳에 구비구비 길게 뚫려 있으나 따로 입출구가 없다는 동굴. 단순히 암벽 틈에 난 작고 얕은 동굴이 아니라 여러 화학 작용으로 오랜 세월 만들어진 그 길고 긴 어둠의 통로 같은 동굴에는 만일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면 반드시 길을 잃지 않도록 표시를 해야 한다고 들었다. 미로 이상으로 복잡하며 출구를 찾기 힘들기에 자칫 잘못하면 평생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아힌스와 유엘이 있는 동굴이 바로 그랬다.

유엘이 아힌스의 몸을 끌어안은 채 눈사태에 밀려 떨어진 곳은 지반이 약해 땅 속으로 구멍이 난 부분이었고 그 안쪽은 깊은 지하의 석회동굴이었다. 물론 그 석회동굴 덕택에 두 사람이 혹독한 추위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지만…문제는 다음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갈라진 목소리가 동굴 내벽을 울리며 흩어졌다. 꺼질 듯 작은 소리였지만 모든 것이 고요했기에 더 크게 느껴졌다. 아힌스는 메마른 입술을 즈려물었다. 약한 소리를 하기 싫어 몇 시간이나 말을 삼가고 있었지만 접질린 발목과 부딪힌 충격에서 오는 고통이 갈수록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통증은 체온이 점차 떨어지면서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

처음 깨어났을 때는 차라리 나았다. 그때는 천장 구멍을 투과해 빛이 들어왔고 그걸로 흐릿하나마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나마도 보이지 않았다. 눈 때문에 구멍이 막힌 건지 아니면 폭설로 완전히 달이 가려진 건지 주위는 시종일관 컴컴했다.     

아힌스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딱딱하게 굳은 발가락을 쿡쿡 찔렀다. 그래도 아직은 감각이 둔중하게 울리는 걸로 보아 동상에 걸리지는 않은 듯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있으면 정말 얼어버릴 지도 모르겠군.’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동상에 걸리나 안 걸리나 자신은 걸을 수 없다. 발목을 접질린 탓도 있지만 원래부터 걷는 건 젬병이었다. 그가 걸을 수 있는 길은 융단이 깔려진 판판하고 곧은, 성의 복도 뿐이었다.
‘빛도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던 와중, 출구를 찾아 보겠노라며 그의 곁을 떠났던 동생이 돌아오는 소리가 찰박찰박 들려왔다. 그 소리가 반갑다기 보다는 짜증을 유발했다. 아힌스는 냉소를 머금었다. 가증스런 유엘이 정말 싫었다.   


“돌아왔습니다, 형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
“형님?”

-괜찮습니까? 대답을 않자 유엘이 다가와 어깨를 흔들려는 걸 아힌스가 찰싹 때려 밀어냈다.

“자꾸 만지지 말랬잖아. 내게 상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란 말이다.”
“…….”

날카롭게 노려보며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세웠다. 이런 동굴에 떨어졌다고, 주위에 도움을 구할 사람이 유엘밖에 없다고 그에게 매달리고 싶진 않았고, 또 그래서도 안되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는 게 아힌스 폰 아드리안이다. 나갈 길을 찾아보겠다며 떠난 동생이 자신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때마다 내심 안도하는 비겁함은 자신의 미덕이 아니었다. (라고 우기고 싶었다)

“제가 만지는 게 싫으면 형님께서 직접 옷을 열어 상처를 보여주십시오.”   
“됐어.”
“고집부리지 말아요. 치료해 놓은 곳이 괜찮은지 확인을 해야 할게 아닙니까.”

치료? 듣기만 해도 어깨를 움찔 떨린다. 조금 전 유엘은 뼈가 어긋나버린 아힌스의 발목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 악물으라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우둑- 제 자리로 돌려놓았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지.’ 그걸 치료라면 치료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욕설이 튀어나올 뻔 했다. 잘못된 뼈를 맞춰 주는 게 아니라 제대로 있는 뼈를 되려 부러뜨리려는 심보인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그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난번 마차 안에서 억지로 이상한 짓을 당한 후부터 아힌스는 유엘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감히 내게 그런 이상한 키스를 하다니. 절대로 용서 못해. 게다가 난 저 놈 품에서 울…기까지 하지 않았더냐. 그런 추태를 부리다니, 얼굴 마주하기도 민망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다가오는 유엘을 외면하자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귀찮다는 투였다. 그에 아힌스는 조금 울컥했다. …그냥 두고 가면 될 것을. 어차피 형제라지만 서로 끈끈한 우애가 있는 것도 아니요, 아픈 사람을 버려둘 수 없을 만큼 녀석의 인품이 고매한 것도 아니었다.(라고 생각했다) 상처든 뭐든 괜히 봐준다고 설치는 게 더 아힌스를 괴롭히는 일이었다. 공연히…기대를 하게 해놓고 나중에 가서 외면할게 어차피 뻔했다. 실제 아힌스는 지금까지 그런 일을 많이 당해왔었다. 경험은 지혜를 선사한다고, 스물 여덟의 아힌스는 결코 쉽게 남에게 마음 주지 않았다. 그게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쯧. 고집은….”

유엘은 기어이 아힌스에게 다가와 강제로 긴 블리오 자락을 걷어내고 발목을 살폈다. 푸른빛으로 변색한 상처를 보며 그는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찼다. “아프면 적당히 아픈 티를 내시는 게 어떨까요. 미련하게 참는다고 형님 프라이드가 지켜지는 건 아닙니다.” 쌀쌀맞은 비아냥에 도끼눈을 뜨자 녀석이 상처를 슬쩍 꾸욱 눌러왔다. “아흑-!” “아프십니까?” “…이…개…………!” “…개?” “……똥.” “……….” “……….” “풉-!” “웃지 마!!”


“걷는 건 무리이니 업히십시오.”
“…업혀? 왜?”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방향을 가늠하며 이동해 봐야지요.”
“…….”
“어서-.”
“난…가지 않아. 가려면 혼자 가거라.”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아힌스는 아예 몸채로 돌려 누워버렸다. 단호한 거부였다.옥신각신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또 고집을 부리는 아힌스 때문에 유엘은 머리가 아팠다.

“여기 있어봐야 도와 줄 사람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빠졌던 천장의 구멍은 다시 눈으로 덮였고 우연이 아니라면 그걸 발견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 
“여기서 굶어 죽기라도 할 작정입니까?”
  
일부러 위협조로 경고해봐도 아힌스는 잠시 어깨만 움찔할 뿐 대꾸가 없었다. 어지간히도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었다. 결국 유엘은 아힌스의 다리 사이에 팔을 집어넣어 공주님에게 하듯 단숨에 들어올렸다. 엇-!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잘해줘 봐야 버릇만 나빠진다.

“이거 놔라! 왜 넌 항상 제 멋대로인 거냐! 내버려두고 혼자 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조용히 좀 해.”
“싫다잖아! 내려놓으라고! 이 나쁜 놈!”

하….

유엘은 실소했다.

그는 소원대로 아힌스를 바닥에 털썩 내려놓은 후 손을 뻗어 그의 뾰족한 턱을 단단히 움켜 쥐었다. 커다랗게 당황한 아힌스의 눈과 마주치자 유엘은 몹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차피 그는 잘생긴 것과는 별개로 인상이 나빴다. 한쪽 입 꼬리를 들어올리기만 해도 상대를 열 받게 하기엔 충분했다.

“당신, 공주야?”
“……뭐?!”
“일이 잘 안되면 소리부터 지르지? 욕이라고는 개새끼,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해 더듬는 주제에. 킥…. 어디 더 해봐. 어디까지 참아줄 지는 들어보고 판단할 테니.”


이마에 힘줄을 불끈 세우며 화를 내려는 아힌스의 턱을 단단히 잡아 쥐고 유엘은 차갑게 빈정거렸다.
“하는 만큼 대접해준다고 했잖아. 왜 자꾸 성질을 돋워?”

“그냥 두고 가라고! 대접해 줄 필요도 없으니 그냥 두고 가란 말이다!”

“그냥 두고 가면? 이대로 죽을 참이야? 내가 조금 전 다녀온 길에 뭐가 있었는지 말해줄까?
 여기 굴러들어온 게 우리만이 아니었는지 인골이 있더군. 백골 사이로 시체를 파먹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걸 당신이 봤어야 하는데 참 아쉬워.”

“!”

“당신도 한 열흘쯤 후엔 그렇게 변해있을 테지. 그렇게 안 봤는데, 시체 벌레가 좋은가? 그 녀석이랑 친구하고 싶어?”

“네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잖아! 왜 자꾸 내 일에 참견을 해? 네가 뭐라고.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너 따위가!”

“-제기랄! 상관 안 할 수가 없잖아!!!!!!!”

여과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폭발했다. 음습한 동굴 안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던진 비수 같은 대화가 끝도 없이 메아리 쳤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찾아 온 정적 속에 들리는 건 제풀에 지친 아힌스의 밭은 숨소리뿐이었다. 이름 모를 동물들이 후두두둑 날아 도망가자 아힌스는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더 이상 말 싸움 할 기력도 없었다. “…왜 상관 안 할 수가 없는데……. 무시하고 가면 그만이지…. 누가 너더러 데리고 가달랬나? 네놈이 이러면 내가 고맙다고 엎드려 절이라도 할 것 같아…?” 투덜대듯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

결국 승리한 건 유엘이었다.

그는 기어코 반항하는 아힌스를 둘러 업고 앞으로 향했다. 뼈 밖에 안 남은 가느다란 팔을 억지로 목에 두르게 하고 다른 손으로는 아힌스의 엉덩이를 받쳤다.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유엘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끝끝내 굽히지 않는 건 그만큼 유엘에게 손 내미는 게 싫다는 뜻이다. 손 대는 것도 싫고, 말 섞는 것도 싫고, 심지어 목숨을 구해주는 것조차 싫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혈관이 팽팽하게 당길 정도로 열이 받았다. ‘그렇게 싫어? 그렇게까지 내가 끔찍해?!’

쉽게 달아오르는 성격이 아니었건만 요즘은 아힌스의 사소한 한마디에도 속이 뒤집혔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다그쳐서 실컷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등 뒤의 가벼운 몸뚱이가 파르르 경련하는 것이 불안해 유엘은 성큼성큼 걸음만 놀렸다.

…왜 이렇게 약한 걸까.

아힌스를 보면 평생 햇빛 아래 서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전설 속의 흡혈귀 백작이 떠올랐다. 달빛과 흑백의 음영 속에서 이미 시체로 화해버린 몸뚱이를 끌고 돌아다니는 그들처럼…아힌스에는 생기가 부족했다. 산 자의 영역보다는 죽은 자들의 영역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고상하고 아름답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로운 성에서 이 사내는 어딘가 한구석 늘 지쳐있었다.

유엘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찌되었든 빨리 출구를 찾아야 했다. 이대로는 등 뒤의 약골 형님이 위험했다. 아힌스는…한없이 괴롭히고 싶지만 그 이상으로 보살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정말.”

세드릭은 자책했다. 어째서 좀 더 조심하지 않았던가 후회했다. 슈스켈은 그런 세드릭 하사관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벌써 밤이었다. 성주가 실종된 지 정확히 하루 반이 지난 것이다. 뒤따라 나섰던 아드리안 공작 역시 타고 갔던 말만 눈 속을 헤치고 돌아왔을 뿐 행방이 묘연했다. 폭설은 미친 듯이 퍼부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날 사람을 찾겠다고 나와서 헤매고 있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능숙한 사냥꾼들조차 진저리 치는 날씨였으니.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군. 눈 속에 파묻힌 건지, 아니면 어디서 벌써 뒈진 건지.”

슈스켈의 거친 언사에 툴락과 다른 기사들이 발끈했지만 지금은 붙어 싸울 형편도 안되었기에 꾸욱 눌러 참았다. 이 드넓은 설원에서 아드리안 공작의 흔적을 찾기란 모래 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손은 곱고 발은 진작부터 얼어붙었으나 그들은 끈질기게 수색을 계속했다. 절대 자신들의 주군이 이렇게 쉽게 죽었을 리 없었다. 반드시 어딘가에 살아있을 게 틀림없다고 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다.

기사단을 두 팀으로 나누어 교대로 수색했다. 그러나 세드릭 호먼만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는 성주가 실종된 이후 한번도 쉬지 않고 계속 수색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책했다. 왜 하필 병석에서 막 일어난 성주에게 슈스켈 이야기를 했던가. 아니, 그건 그럴 수 있었다 치더라도 왜 자신은 그를 쫓아가지 않았던가. 어째서 자신은……………….


“그만 들어가 쉬게, 호먼 경. 이러다 저체온증으로 자네가 먼저 죽겠어.”

“…괜찮습니다. 제가 찾아야 합니다. 꼭….”

“미련하긴! 이러지 않아도 사령관께선 반드시 어딘가에 무사히 계실 걸세. 그러지 말고 가서 쉬어.”

“…….”

세드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틀렸습니다.’ 입 밖에 내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드리안 공작이 아니었다 걱정되는 것은…. 누군가 이런 자신을 알면 욕할 지 모르나 지금 세드릭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그의 주군의 안위가 아니라 샤휀의 성주였다. 그 약하디 약한 사내. 그 남자가 과연 이 얼음의 땅 위에서 생존해 있을까. 벌겋게 충혈된 눈에 작게 이슬이 맺혔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은…. 가장 치열했던 전투에서조차 이렇지 않았었거늘. 첫사랑이란 것은 불시에 찾아와 단 며칠 만에 사람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이제와 뒷걸음질 쳐 사라져 버렸다. 안타까움은 속을 태우고 쿵쿵 뛰는 심장을 이리저리 비틀어 죄였다. 내내 한가지 생각만 반복됐다. 왜 그를 쫓아가지 않았어. 대체 왜…………!   


“어째서 말리지 않았지?”

“…슈스켈 님.”

“결국은 네가 우유부단했던 탓이잖아. 자책을 하나, 세드릭? 그러나 이걸 어쩌지? 그래 봐야 성주는 벌써 저 세상에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절대로. 그 분은…….”
        
“당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세드릭 주위를 얼쩡대며 그의 약해진 마음에 기스를 내는 슈스켈의 행태에 툴락이 참다못해 외쳤다. 이 근방 지리에 능통하고, 데리고 온 자들을 일사분란하게 진두지휘하는 걸로 보아 유능한 사람이라 생각되지만 동시에 비열한 인간이었다. 과연 성주를 진정으로 염려해서 저러는 지는 몰라도 껄렁대는 태도는 시정잡배만도 못했다.

“흥.”

화를 내는 툴락을 한번 힐끗 쳐다본 슈스켈은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세드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색한 얼굴이었다.

“넌 비올리따가 죽을 때도 그랬지.”         
“!”
“위험을 예감하는 건 누구보다도 빠르면서 행동은 느려터졌어. 언제나 한 발 늦지. 그러면서도 교활해. 빠져나갈 구석은 꼭 하나씩 마련해 두거든.”
“저는…!”
“한가지 알려줄까, 세드릭? 넌 앞으로도 그 우유부단함 때문에 많은걸 잃어버릴 거다.”

그는 회색 눈동자에 경멸을 가득 담아 세드릭을 노려봤다. 세드릭 호먼은 뒤통수를 거대한 둔기로 두들겨 맞은 듯 충격 받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슈스켈은 말머리를 돌려 세드릭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느리고 여유 있는 걸음이었지만, 그러나 이 남자의 심사가 지금 몹시 날카롭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웃으면서 화를 내고 말 사이에 간격을 두는 의뭉스럽고 이중적인 사내였다.

잠시 후 저 먼 구석에서 누군가 절벽 낭떠러지 아래 산산조각 난 마차의 흔적을 찾았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찰박찰박--


축축한 바닥을 마찰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아힌스를 업은 유엘은 기계적으로 걸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아니면 하루나 이틀이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힌스는 이따금씩 축 늘어졌다가 다시 혼미한 정신을 수습하길 반복했다. 이따금씩 눈을 떠 보면 유엘이 여전히 걷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녀석이 제대로 방향이나 알고 걷는 건지 의심스러웠으나 한가지 확실한 건…등으로 전해지는 체온이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

…하지만 이건 참으로 이상했다. 왜 굳이 자신을 데리고 가려 하는 걸까. 근육질이나 거대한 체격은 아니지만 유엘의 체력이 대단히 좋은 편이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눈사태에 휩쓸렸다가 동굴 바닥에 떨어지고 몇 번이나 출구를 찾아 헤매는 건 아무리 건장한 사내라 해도 견디기 힘든 일일 터. 그런 상황에 짐밖에 안 되는 아힌스를 굳이 업고 다닐 필요가 뭐가 있을까.  

‘새삼 양심 때문에 사람을 두고 뒤돌아 설 수 없다는 건가.’   

흥……. 아힌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그 인내심이 얼마나 가나 두고 보자. 그래 봐야 네 어쭙잖은 동정이 얼마나 지속될까. 사람들 마음이란 게 본래 정말 다급해지면 제 목숨부터 챙기는 것이다.
차라리 아까 두고 가라 했을 때 가버리는 편이 좋았다. 기회를 차버리고 지진부진 하다 끝내 비참한 결말을 맞는 건 더 꼴사나웠다.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유엘을 신랄하게 비웃어 주리라 아힌스는 그렇게 결심했다.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노곤함에 졸음이 몰려왔다. 아힌스는 유엘의 뒷목에 얼굴을 부볐다.탄탄한 사내의 피부가 느껴지자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괜히 마음이 슬퍼졌다.   
   
사실 아힌스에게 이런 상황은 처음이 아니었다. 오래 전, 가문으로부터 버려졌던 그 어린 시절에 버림받은 아이가 가엽다며 따라 나섰던 여자가 하나 있었다. 여자는 아힌스의 스물 일곱 번째 가정교사였고 드물게 그가 따르던 사람이었다. …정말로 착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하루 한번 얼굴 보기도 힘든 모친보다 다정했고 늘 즐겁고 재미난 이야기로 방 안에 방치된 아힌스를 위로해줬다. 때문에 그 시절 아힌스의 이상형은 가정교사였다. 나중에 커서 혼인을 하게 되면 꼭 이런 여자와 할 거라고 맹세한 적도 있었다.

「아이가 예쁜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 연민으로 당신 젊은 시절을 버릴 참이오?」  
「하지만….」

아힌스가 그들의 대화를 들은 것은 우연이었다. 본가에 편지를 부칠 때마다 성에 들르던 우체부와 그녀가 그런 관계일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가브리엘, 당신 얼굴을 봐. 눈 밑은 검고 고왔던 피부는 죽어가고 있어. 그 버릇없는 귀족 꼬마를 돌보는 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일이라고. 그건 바보 같은 일이야. 미안하다고 떠나지 못하면 언제나 이 모양일 테지. 당신 인생을 완전히 망칠 셈이요?」
「…그렇지만.」
「긴 말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밤에 다시 와서 신호 할 테니 내가 말해뒀던 물건들을 가져 와. 없어져도 설마 당신을 의심하진 못할 거야. 어차피 어린앤데 뭘 알겠어?」

사내의 감미로운 유혹에 여자는 계속 망설였다. 멀리서 그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아힌스는 물론 그녀가 거절하길 바랐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리라고 믿었었다. 어미를 대신해 잠자리를 돌봐주고 상냥하게 웃어줬었다. 어딜 가더라도 떠나지 않겠노라고, 늘 항상 옆에 있겠다는 말도 쉴 새 없이 했던 그녀였다. 그녀가 자신을 짐스러워 하고 있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만일 가정교사가 원한다면 결혼까지 해 줄 용의도 있었다.(결혼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지만 결국 그날 밤, 그녀는 사내의 말대로 성안의 골동품과 값나가는 물건들을 챙겨 달아났다. 늘 하던 대로 자장가까지 불러줬으면서 여자의 걸음에는 망설임조차 없었다. 어린 아힌스는 뒤에 남겨져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사람들 시켜 잡지 않았다. …어차피 마음이 떠난 사람이란 인력으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떠나는 것이 그녀의 선택이라면 아힌스는 그 선택을 존중해줘야 했다. 왜냐면…비록 도둑놈일망정 우체부의 말이 맞았으니까.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했던 그녀의 태도가 모조리 거짓은 아닐 테지만 이 먼 오지까지 동행했던 건 동정이 맞았다. 여자는 그저 불쌍했던 거다, 버려진 아이가.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졌을 테지. 젊음을 희생해가며 돌봐 온 아이지만 반대로 아이가 자신을 의지할수록 떠날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을까. 아힌스는 자신이 그녀를 구속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여자를 잡지 않은 것은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였다. 배신당한 아픔은 쓰디 썼지만 그보다는 그녀에게 미안했고 짐 밖에 되지 않았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부모에게도, 가정교사에게도 자신은 그저 쓸모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

그 후 성년이 될 때까지 유사한 몇 번의 경험을 거치며 아힌스는 단단히 맹세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자신의 약함을 핑계 삼아 상대에게 부담을 지우지는 않겠다고. 상대의 동정심을 자극해 자신의 곁에 매어놓는 꼴 사나운 짓은 하지 않겠다고. 쉽게 틈을 보이고 쉽게 곁을 내줘서 결국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바보 같은 짓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아힌스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유엘의 목에 걸쳐진 팔에 힘을 풀었다.

고집을 부리고 있지만 상황이 더 나빠지면 유엘도 곧 떠날 게 뻔했다. 아마도 십중팔구는 자신이 자는 사이 버리고 달아날 터…. 그러나 만일 그런다 해도 아힌스는 유엘을 책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차피 그건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일 뿐이니까. 다만 그 헤어짐의 순간을 이왕이면 자신이 선택하고 싶었다. 똑 같은 결과라도 버림받는 것보다는 버려주는 쪽이 상처가 덜 될 테니까.


“두고 가랬잖아.”      
“…….”
“너한테 업혀있는 것도 체온이 맞닿는 것도 싫다. 나는 네가 정말 싫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확인 안 시켜 줘도 됩니다.”
“그런데 왜? 왜 나를 놓지 못하느냐. 양심에 걸려서 이런 거라면 내가 재밌는 진실을 하나 알려줄까? 폭설이 내리는 오늘 같은 날, 내가 왜 무리하게 마차를 끌고 나왔다고 생각하느냐 응?”
“…….”
“다 너를 쫓아내려 그런 거다. 건방지고 상식도 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너를 내 성에서 쫓아내려-,”
“-시끄러워.”
“왜, 화 나냐? 기분 나빠? 나쁘면 두고 가라니까아.”
“입, 닥치세요. 당신이 아무리 헛소리해도 안 두고 갑니다.”
“하. 가식 떨지 마라. 네가 무슨 이유로!”
“좋아하니까.”
“…뭐?”
“당신은 안 좋아해도, 내 쪽은 당신을 좋아하니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힌스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유엘의 등짝을 노려봤다. 어디서 감히 이빨도 안 들어갈 새빨간 거짓말을-. 저도 말해놓고 민망한지 새빨개진 유엘 놈의 목덜미가 아주 가관이었다.

“너……!”

두근…. 벌컥 화 내려던 순간 기묘한 감각이 심장 한구석을 두들겼다. 야릇하게 퍼지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아힌스는 가슴을 움켜쥐며 당황했다. ‘뭐지 이건…?’ 뭔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한, 이 감각은…. 아연한 심정에 팔 다리를 쭉 늘어뜨리자 성큼성큼 걷던 유엘이 걸음을 멈췄다.


“피곤하십니까?”
“…….”
“형님-.”

자신이 피곤할 일이 뭐가 있나. 한 일이라곤 업혀있던 것뿐인데. 그러나 유엘은 침묵이 긍정이라 생각했던지 한쪽 옆에 아힌스를 살살 내려놓고는 두꺼운 망토를 바닥에 넓게 깔았다. 뭐 하는 짓이냐고 말똥히 쳐다보는 아힌스에게 유엘은 “주무십시오. 피곤할 땐 쉬는 게 최곱니다.”라며 단호하게 자는 걸 권했다. 아힌스는 유엘의 태도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안 피곤해.”
“그래도 쉬라니깐.”
“…잠깐. 근데 너. 왜 말을 낮췄다 높였다 네 마음대로 바꾸는 거냐?”
“…….”  

저 불리할 때는 말을 아끼는군.

아힌스는 외투를 벗어 이불대용으로 덮어주는 유엘의 품에 안겨 스르륵 눈을 감았다. 사실 따지고 싶은 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이 이상 이러니 저러니 실랑이 하는 게 귀찮았다. 유엘이 막상 자리를 깔아주니 정말 피곤한 것도 같았다. 어둡고 적막한 동굴 안은 사람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몸도 마음도 자꾸만 축축 쳐져갔다. 춥다…, 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유엘의 팔이 감겨왔다. 자라고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는 커다란 손이 몹시 다정했다.
아힌스는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유엘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이런 짓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냥 마음이 외로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쩌면 또 혼자 남겨져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다정한 녀석의 체온이 그리웠다.  

“넌…정말 이상한 성격이다. 남의 성을 부수고 들어와 사람을 달달 볶던 주제에 이제와 친절한 척 하다니. 심하게 변덕스러워.”

“형님도 마찬가집니다.”

“…한 마디도 안 지지.”

“그것도 이하동문입니다.”

“재수없어.”

“…….”


이겼다!

드디어 유엘의 말문을 막았다는 유치한 호승심에 싱긋 웃는 순간 어둠 속에서 입술위로 촉촉한 무언가가 닿아왔다.  

쪽….

“!”
“주무십시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부드러운 키스가 시작됐다. 새털같이 가볍게 닿았다가 유혹하듯 달콤하게 빨아 올리는 숨결. 몽롱해 지는 정신을 느끼며 아힌스는 유엘의 입술에 매달리듯 호응했다. 키스가 깊어지고 형제의 혀가 얽혀갔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




입맞춤이란 참 이상한 행위였다. 서로의 피부와 피부를 잠시 맞대는 것뿐인데 결국은 그 속에 감춰진 마음까지 흔들어 버린다. 가볍게 몇 번이나 조근조근 닿아오는 깃털 같은 키스는 친애의 감정을, 진득이 입술 위에 머물다 따뜻한 숨결과 함께 물러가는 키스는 다정한 위로의 마음을…, 그리고 입술 사이를 가르고 혀를 농락하는 깊은 입맞춤은 허리가 떨릴 만큼의 진한 쾌락을 전해주는 것.  

아힌스는 밤 사이에 세가지 입맞춤을 모두 경험했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어둠은 결벽증적인 귀공자에게 관용을 선물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간밤에 애를 태우듯 천천히 각도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입맞춰 오는 동생의 키스에 그토록 기분 좋게 반응했을 리 없으니까….   








‘잠시 여기서 기다리세요.’

그렇게 말한 동생이 자리를 뜬 건 꽤 오래 전이었다. 아힌스는 등 뒤를 따뜻하게 감싸주던 유엘의 체온을 아쉬워하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눈 앞에는 동생이 가져온 굵은 양초 하나가 천천히 타오르며 주위를 밝혔고 어깨 위엔 아직도 유엘의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실로 어색하면서도 묘했다. 타인을 믿지도 말고 기대지도 말자는 걸 신조로 삼아왔었는데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걸까. 아힌스는 자신의 변덕에 혀를 찼다. 그렇지만 유엘이 그를 두고 가버렸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뭐 두고 가도 상관은 없지만 그 오지랖 넓은 녀석이라면 그럴 거 같다는 거지.”

조금 쑥스러운 마음에 아힌스는 애꿎은 양초를 손 끝으로 톡톡 밀어 넘어뜨렸다. 이런 양초는 갑자기 어디서 나왔냐고 아힌스가 출처를 캐묻자 유엘은 태연하게 ‘주웠다’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동굴 안이 무슨 시장판도 아닌데 양초 같은 것이 바닥에 떨어져 있을 리는 만무하고…굳이 가능성 있는 추측을 하자면 어제 발견했던 백골의 유품일 테지만, 그걸 ‘얻었다’도 아닌 ‘주웠다’고 표현하다니 어지간히도 뻔뻔하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었다. 전쟁터에서 한 십 년 굴렀다더니 정말로 약탈경제가 생활화 돼 버린 건지 하는 짓이 완전히 날강도였다. 하기야 남의 성에 밀고 들어와 며칠씩 먹고 자고 뒹구는 주제에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는 녀석이니 오죽할까.

“…그래. 게다가 남의 첫 키스도 막 멋대로 가져가는 놈이니까.”

어머니와도 그런 키스는 안 해봤거늘 아주 악랄한 놈이었다.(어머니랑은 원래 그런 키스 안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힌스는 가슴 한 구석이 좀 뜨끔했다. 왜냐면…뭐랄까…굉장히 기분 좋았으니까. 마차 안에서 유엘이 힘으로 누르고 키스했을 때는 딱 죽을 만큼 패주고 싶었는데 지난밤의 입맞춤은 그와는 딴판이었다. 굉장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나중엔 혀까지 섞여오는 통에 숨쉬기가 벅차고 힘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런 진한 키스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과도 자주 키스했었지만 혀를 섞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그보다 좀 더 커서는 아예 사람들과 피부를 맞대는 일 자체가 없었으니 입맞춤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다.

보통 다른 형제들도 원래 그런 키스를 나누는 건가.

문득 그는 궁금해졌다. 부모 형제 사이에는 가볍게 입을 맞추거나 뺨에 키스를 하는 게 정상이라 알고 있었는데 유엘과 두 번이나 혀를 섞고 보니 확신이 흔들렸다. 워낙 폐쇄적으로 살아왔던 터라 기초적인 상식이 좀 부족할 때가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가 읽어 온 수많은 책들을 되짚어봐도 형제 사이에서는 그냥 ‘입을 맞췄다’,‘키스했다’고 표현하지 혀를 섞었다는 구절은 없었던 것 같은데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힌스는 이내 골치 아픈 생각을 접었다.

아무튼 기분 좋았다. 좋았으면 그만인 거다. 비록 그 상대가 얼굴만 봐도 썩 유쾌하지 않은 유엘이긴 했지만 키스의 달콤함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편하게 생각하자며 아힌스는 천천히 두 눈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는 조금 웃었다.


몇 시간을 잤는지, 불편한 공간에서 눈을 뜬 아힌스에게 유엘은 육포를 내밀었었다. 동굴에서 얼마나 있게 될는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영양보충을 해둬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혹시 이것도 죽은 자의 짐에서 꺼내온 물건이 아닌가 싶어 미심쩍게 바라보는 아힌스의 눈빛에 그는 한쪽 입 꼬리를 비스듬히 세우며 웃었다. ‘아닙니다. 원래 기사들은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므로 기본적인 필수품은 몸에 늘 지니고 다닙니다. 전투를 하다 보면 동료들과 떨어져 길을 잃는 일도 더러 있으니 이런 물건들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유엘은 설명을 해주려는 것 외에 딴 뜻은 없어 보였다. 웃을 때마다 저런 비딱한 표정이라 자신을 비웃는 거라 여기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원래 표정이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유엘을 조금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기다리셨습니까.”
“……조금.”

정신을 다른데 두고 있는 사이 어느새 유엘이 다가와 있었다. 아힌스는 전날보다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고개를 까딱였다. 앉아서 받아먹는 주제에 꽤 건방진 태도였지만 유엘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저 정도만 해도 아힌스로서는 장족의 발전이었으니까.

그는 한쪽 팔에 짊어지고 온 자잘한 나뭇가지와 고깃덩이를 꺼내놓고 식사준비를 시작했다. 동굴 안에서 저런 건 또 어떻게 구한 건지 아힌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하게 보는데도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품에서 작은 부싯돌을 꺼내 곁가지에 불을 붙이고 조금 굵은 가지에는 고깃덩이를 꿰어 불 위에 걸었다. 일련의 과정들은 막힘 없이 착착 진행됐다. 유엘은 꼭 잘 훈련 받은 사냥꾼 같았다.

“이건…뭐야. 어디서 났어?”
“안에서 사냥을 했습니다. 먹을만한 것이니 믿고 드시면 됩니다.”

기사들의 필수품이란 어디까지 해당되는 건지, 유엘은 품에서 소금까지 꺼내 고기에 착착 뿌렸다. 그게 또 마냥 신기해서 아힌스는 뚫어져라 유엘의 손만 바라봤다. 맛있는 음식을 즐길 줄은 알아도 요리과정을 지켜본 일은 없었기에 모든 게 생경했다. 아주 단순한 조리과정이었는데도 대단해 보였다. 그런 아힌스의 상기된 뺨을 유엘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귀엽다는 듯이.

“…건방지게.”         

빈정이 상한 아힌스가 투덜거렸지만 정말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유엘이 이 와중에 사냥에 요리까지 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아힌스를 위해서였다. 아까, 유엘이 주는 육포를 삼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배고프기도 했거니와 위기상황이라는 자각 정도는 있어서 웬만하면 고맙게 먹으려 몇 번이나 억지로 삼켰다가 그만 통째로 토해버렸다. 비릿한 고기냄새에 비위가 상했던 것이다. 난감해하는 유엘을 보며 아힌스는 처음으로 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아드리안 본가에서 자신보다 더 귀하게 컸을 그도 아무렇지 않게 육포를 먹는데, 자신만 유별을 떠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이건 드실 수 있을 겁니다. 육포에 비하면 비린내가 훨씬 덜하니까요.”

유엘은 노릇노릇 구워진 꼬치구이를 집어 아힌스에게 건넸다.

“…그래.”

육포를 토해냈을 때 아힌스는 솔직히 또 한 소리 듣겠구나 싶었었다. 약골이라던가 계집애같다던가……. 그렇지만 예상외로 유엘은 타박하지 않았다. ‘먹을 수 없어? 그럼 할 수 없지.’ 하는 식으로 성큼성큼 가서는 새로운 식량을 확보해 온 것이다. 아힌스는 그런 유엘이 아주 조금 대단해 보였다. 속 좁고 치사하고 이기적인 새끼라고…속으로 욕 했었는데 녀석은 생각보다 너그러웠다. 어릴 때 남의 방에 개구리나 던져 넣는 그때의 그 유엘이 아니었다. 유엘의 눈매는 깊었고 행동은 사려 깊었으며 차가운 외양에 비해 자상했다.
때문에 아힌스는 별 말 없이 꼬치를 건네 들었다. 솔직히 굶어 죽는다 해도 이런 비위생적인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네 살이나 어린 동생이 저리 어른스럽게 구는데 이쪽도 마냥 투정만 부릴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에 어떻게든 한 입만 맛봐야겠다 다짐하고 고깃덩이를 베어 물었을 때였다.

“어…?”
“이것도 입에 안 맞으십니까?”

유엘이 조금 곤란하단 표정으로 물어왔지만 감동이 너무 커서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지, 이것?

“…맛있어….”

고소하면서도 담백하고…간간한 육질이 부드러웠다. 고작 소금 양념밖에 안 한 것인데 굉장했다. ‘배가 고파서 착각한 건가?’ 아힌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몇 번을 더 베어 물었다. 입맛이 꽤 까다로운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보다. 고작 불에 구운 정체 모를 고기에 감동받다니.

“정말로 맛있군. 이거, 무슨 고기지?”

아힌스는 기쁜 기색으로 유엘에게 물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유엘은 요리해준 음식이 맛있다는 데도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는 ‘장어……와 비슷한 것인데 말해도 잘 모르실 겁니다. …맛있다니 다행이네요.’라며 말을 흐렸다. 왜 저러나 싶었지만 곧 다시 요리에 빠져들었기에 고기종류 같은 건 아힌스의 뇌리에서 금방 잊혀졌다. 그저 유엘만이 오묘한 눈길로 아힌스를 잠시 바라보다 씨익 웃었을 뿐.



        








“입맛도 더럽게 까다롭던 자식이지.”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식탁의 정적을 갈랐다. 같이 식사를 하던 기사들은 빌어먹을 슈스켈의 목구멍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오른손에 포크 집어 올리기도 짜증날 정도로 모두 지쳐있었다. 덕택에 슈스켈은 신이 나서 거침없이 성주의 험담을 늘어 놓았다.

“요리에 들어간 향신료가 정량과 차이가 나면 아예 손도 대지 않아. 게다가 고기는 반드시 겉은 바삭하게, 속은 육즙이 배어나올 정도로만 익혀야 하고 힘줄은 꼼꼼히 제거되어야 하지. 문제는 놈이 그걸 요리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어디서 이상한 식도락 책이라도 읽은 건지 식성 까다롭기가 정말 말도 못해.”
“…….”
“아마 놈은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며칠도 못 살고 죽었을 거야. 황성의 귀족부터 지방의 대영주까지 귀하다는 인간들은 많이 만나봤지만 그 놈처럼 뼛속까지 성골인 놈은 없었어.”
“…….”
“아무렴. 아홉 겹으로 요를 깔아줘도 그 아래 깔린 콩 하나가 불편하다고 잠 못들 위인이지. 그런 인간이 지금쯤 뭘 제대로 먹고는 있을지…쯧.”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슈스켈은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고 그와 반대로 세드릭은 눈 앞에 놓인 고기 한 점 집어먹지 못한 채 얼어 있었다. 눈발이 점점 거세지자 더 이상은 정말 무리라고 판단한 툴락은 세드릭을 억지로 성으로 밀어 넣으며 쉬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세드릭이 자책감과 걱정으로 며칠간 한숨도 못 이뤘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슈스켈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는 세드릭이 쾡한 눈으로 비척대며 식탁에 앉자 기회를 노렸다는 듯 조로록 달려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성주 새끼가 있잖냐~’ 부터 시작한 험담을 빙자한 그의 말의 요지는…결국 ‘우리 아힌스는 한데서 고생하는데 네놈은 목구멍에 음식이 넘어가냐?’ …이거였다.

“아힌스는 온실 속 화초야.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최고급이 아니면 안돼. 어쩌면 지금쯤 쫄쫄 굶어서 울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 이건 아니려나? 하긴 쉽게 우는 놈은 또 아니지.”
“슈스켈 님…….”

세드릭은 차마 말을 못 잇고 고개를 떨궜다. 슈스켈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여기서 편안히 음식이나 먹고 있을 자격이 없었다. 성주와 공작 전하가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두 사람이 실종된 지 벌써 이틀이 넘었다. 시간이 갈수록 생존확률이 준다는 건 어린애도 아는 상식이었다. 등을 푹 꺼뜨리고 한숨을 내뱉는 그에게, 보다 못한 동료 기사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야 야, 물론 큰일이긴 하지만 그게 왜 네 탓이야. 그리고 두 분, 꼭 살아있을 테니 걱정하지마. 일단 식사부터 하고, 잠부터 자고! 그리고 또 찾아 보자구!”
“여,역시 그럴 테지? 아무 일도 없을 테지 응?”

조금 희망의 빛을 품고 고개를 드는 세드릭에게 슈스켈은 비열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마지막까지 한마디를 보탰다.

“아아…과연. 그 고매하신 귀족 도련님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나.”



     


        
        



“더 줘.”   
“천천히 드세요. 체합니다.”

아힌스는 육즙이 묻어있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입이 짧아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몇 입 못 먹었었는데 소금 간 밖에 안 한 이 꼬치구이는 굉장했다. 태어나 지금까지 먹어 본 중에 단연 최고라 할 정도로 입맛에 딱 맞았다. 혀끝에서 녹는 부드러운 육질은 예민했던 신경을 느슨하게 해줬고 아힌스는 한껏 관대한 기분으로 식사를 즐겼다. 은식기도, 식탁을 장식하는 꽃도 없는 초라한 동굴 속의 식사였건만 식욕은 평소의 갑절이었다.  

“좋군.”

몇 번이나 반복했던 감탄을 다시 내뱉었다.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생긋 웃자 동생의 긴 손가락이 다가와 입술에 묻은 기름기를 싹싹 닦아 줬다. 그러고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분이 풀려있는 아힌스에게 재빨리 베이비 키스를 꾹 눌러주는 유엘이었다.

“미친놈. 귀찮게 자꾸 왜이래.”

부루퉁하게 한마디 내뱉었지만 정말은 그닥 싫지도 않았다. 아힌스는 유엘이 다시 쥐어주는 꼬치를 집어 들어 우아하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사람이 계속 나쁜 일만 있으란 법이 있나. 가끔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행운을 누릴 때도 있는 거다. 충분한 만족감을 표하는 아힌스에게 유엘은 그가 정말 좋아할 소식을 그제야 꺼내 놓았다.

“출구를 찾았습니다. 이 길로 조금만 더 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정말로…?!”

끄덕.

“나가기 전에 옷을 단단히 챙겨 입어야 할 테지만.”            

눈보라는 그칠 줄을 몰랐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지척이 안 보일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눈은 아힌스가 마차를 타고 나갔던 날보다도 엄청났다. 그러나 출구 없는 동굴 속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희망찬 소식이었다. 꿀꺽-, 침음을 삼키는 상기된 아힌스의 뺨에 유엘은 다시 한번 입맞추며 그의 마른 등에 외투와 망토를 둘러줬다.

잘해줘도 미친놈이란 욕이나 먹고 있는 주제에 한없이 정신상태가 풀려있는 아드리안 공작이었다.  

   







샤휀의 성주와 아드리안 공작이 실종된 지 이틀 째. 사냥개를 앞세운 노련한 사냥꾼들은 드디어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옷가지가 찢긴 흔적-. 질 좋은 검은 비로드의 천 조각은 평민의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살아있는 두 사람을 찾지 못하겠거든 시체라도 찾아오라 닦달하던 슈스켈에게 우두머리 사냥꾼은 그것을 보여줬고, 공작의 부관으로부터 공작의 망토자락임을 확인 받았다.

'…수백 명이 흩어져서 이틀을 꼬박 찾았소. 눈 때문에 작업이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눈사태가 작은 규모였던 걸 감안해 볼 때 이쯤 되면 찾는 범위 내에선 없다고 봐야 할거요.'

'찾는 범위 내에선 없다…?'

슈스켈은 눈 꼬리를 가늘게 좁히며 사냥꾼의 말을 가늠했다. 아리송한 말에도 그는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그럼 말해봐라. 성주는 어디 있는 거냐. 집히는 데가 있으니 이런 천 조각 하나를 덜렁 들고 날 찾아온 걸 테지.’

'내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일지 모르나 그 귀한 분들이 어쩌면 '악마의 늪'에 빠진 것 같소.'

'악마의 늪이라.'

'이 지방 토박이들은 그곳을 그렇게 부른다오. 암반수가 흘러 나오는 동굴인데 아주 깊고 위험한 곳이요. 지반이 약한 데는 더러 구멍이 난 곳도 있어 운 나쁘게 실족을 하거나 하면 그대로 지옥의 아가리로 삼켜지는 거요.'

'처음 듣는 말이군. 그런 곳은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데?'

'그건 실체를 아는 사람이 얼마 없어 그럴 거요. 악마의 늪에 빠졌다 살아나온 사람은 손가락에 꼽히거든. 내부가 거미줄처럼 얽혀있어서 일단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헤매게 된다오. 어지간히 머리가 좋거나 특출하게 감각이 발달한 자가 아니면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어.'

'호오-. 실체를 아는 자가 거의 없다니…그거 참 난감하군. 그렇다면 만일 성주가 거기 있는 게 사실이라 해도, 대체 누구에게 안내를 부탁해야 하지?'


털복숭이의 곰 같은 사냥꾼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별 걱정을 다하시는군. 바로 당신 눈 앞에 있지 않소. 악마의 늪에서 살아나온, 머리 좋고 감각이 발달한 유일한 생존자가.'      









◈◈



“발목이 접질리고 타박상 좀 있는걸 빼면 큰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어지럽거나 피곤한 건 체력 때문이니 한동안 잘 먹고 잘 쉬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근육이 좀 놀란 모양이니 나중에 긴장이 풀리면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몇 번 정신을 놓기도 했다. 그건 괜찮은 건가?”

“일단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몸이 약한 건 선천적이군요. 그런 건 별 도리가 없습니다. 그저 늘 몸을 챙기고 조심하는 수 밖에요.”

“…….”

“…내려가겠습니다. 조금 후에 식사와 약을 달여 가져올 테니 그때까지 곁에 있어 주십시오.”


끄덕.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달칵.



“휴우-.”

루디는 크게 심호흡 했다.

뭐 저렇게 살벌한 인간이 다 있을까. 진료를 하는 것뿐인데 뒤에서 얼마나 찌리릿 노려보는지 하마터면 등에 구멍 나는 줄 알았다. 그는 손에 쥔 청진기를 내려 놓으며 식은 땀을 닦았다. 약제사 생활 삼십 년 만에 저런 고약한 환자와 보호자는 처음이었다. 하필 중요한 약재가 떨어져 이 폭설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늪 근방까지 올라갔던 게 실수였다. 악마의 늪에는 악마들의 서식지가 있고 그 근방에서 나는 풀들은 저주받은 초목들이란 말들이 떠돌아도 어리석은 미신이라 치부했었는데 설마 이 나이에 정말로 악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인종들을 만나게 됐을 줄 누가 알았으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눈밭 속에서 누군가를 업고 걷는 장신의 사내를 발견했을 때 뚱뚱보 루디는 그야말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아니, 지금 저 사람들 악마의 늪에서 나온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냥 무시했어도 됐으련만 그놈의 호기심이 뭔지 도저히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분명 한때는 잘 만들어진 세련된 차림이었을 쥐스코르트는 진흙으로 엉망, 부츠는 눈 속에 뒤덮여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검은 우단 망토는 여기저기 찢겨 나달나달해진 채로 등에 업힌 누군가의 몸을 아슬아슬 가려주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두 사람은 조난자가 틀림 없건만 묘하게 박력 있는 사내들이라 말 걸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용기를 내어 도와주겠다 손 내밀었을 땐…’그대로 비명횡사 하는 줄 알았지. 쩝.’

‘넌 누구냐.’      
‘헉! 왜…왜 이러십니까. 전 그냥 평범한 약제사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약제사? 약제사가 왜 살금살금 남의 뒤를 밟는 거지?’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던 걸까. 장신의 사내는 당황도 놀람도 없이 루디가 그의 어깨에 손을 대자마자 검을 휘둘렀는데 만일 그가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루디는 진작에 자신의 목이 떨어지고 없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사내의 발도술은 그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도와드리려고 했습니다요. 길을 잃으신 것 같고 또 차림을 보니 귀족나리들인 것 같아서. 정말로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일단 제발 칼 좀 치워주십쇼!’
‘…….’

얼음조각 같이 잘생긴 사내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꺾었다. 차가운 검은 눈동자가 루디의 말이 사실인지를 나른히 살피며 탐색하고 있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했다. 그렇게 덜덜 떨고 있는 루디를 구한 건 다름아닌 남자의 뒤에 업혀있는 또 다른 사내였다.

‘넌 정말 약탈은 일상이고 협박은 상습이구나.’
‘…형님.’
‘괜한 남의 영지민 위협하지 말고 그 흉한 것 집어넣어라.’
‘…….’

흑발의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검을 치우자, 업혀있던 다른 사내가 그제야 고개를 조금 들어 이쪽을 바라봤는데……뚱보 약제사 루디는 정말 생전하고도 처음이었다. 백금발에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 섬세한 이목구비가 잘 조화된 기가 막힌 미남이라니! 옆에 있는 장신의 사내와 함께 정말 보기 드문 미남들의 조합인지라 억,소리가 나올 뻔 했다. …비록 눈매는 둘 다 고약했지만.  

‘…거기.’
‘예…예!’

대답이 절로 나왔다. 생긴 것도, 목소리도 맥아리가 하나도 없는 것이 영락없는 샌님이거늘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사내였다. 그는 엷고 투명한 하늘 빛의 눈동자로 이쪽을 잠시 훑더니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약제사라 그랬나.’
‘예, 그렇습니다만. …혹 어디 아프신 데라도?’

콜록-

그 소리 하나가 모든 상황을 대변했다.
기침 소리가 터지자 그를 업고 있던 흑발 미남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보아하니 조난당한 동안 저 등 뒤의 샌님이 병을 얻은 모양이다. 사내는 지체 없이 입고 있던 쥐스코르트 단추 몇 개를 뜯어 루디에게 던졌다.

‘약제사. 너의 집으로 가야겠다. 안내해라.’

몹시 고압적인 태도였지만 그게 또 이 사내에겐 너무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 루디는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가 던진 몇 개의 단추가 상당한 가치의 보석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도 아, 그렇구나 이 사람들 역시 귀족들이었군…했을 뿐, 별다른 위화감도 들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남에게 명령하고 대우 받는데 익숙한 인종들이었다. 그래서 루디는 그 길로 이 기묘한 두 사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낯설고 두렵지만 동시에 그와 같은 이유로 무시하고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나중에 무슨 후환을 당하려고…. …에잉.’      



“아버지!”
“아빠.”
“파파,파파!!”

한숨 고르기도 전, 루디는 그에게 달려드는 딸들로 또 한번 넋이 나갔다. ‘이 정신 없는 녀석들-!’ 일곱이나 되는 딸들이 여기저기서 아빠니 파파를 외쳐대는데 귀가 다 먹먹했다. “이 녀석들! 한꺼번에 이러지 말랬잖아!” 호통을 치는 아버지에 한걸음 팔짝 물러났던 개구쟁이 딸들은 까르르 웃다가 다시 달려들었다. 말만한 처녀부터 쬐끄만 땅꼬마 숙녀까지 딸들은 루디가 데려온 손님들에게 참으로 관심이 지대했다. 누구에요? 뭐 하는 사람들이래요? 몇 살? 조난당한 사람들인가요? 와악-, 진짜 잘생겼다아-. 키도 엄청 커! 그 눈빛 봤어? 카리스마가 막 흘러-. 아잉 몰라몰라몰라!!!!

‘모르긴 뭘 몰라. 에휴. 저 철없는 것들-.’

애비가 저 얼음괴물들에게 잡혀먹을 뻔 한 것도 모르고 홍조를 띠며 이야기 꽃을 피우다 아예 손님방문 앞에 다닥다닥 달라붙는 딸들을 보며 그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그만들 내려가지 못해?! 거기가 어디라고 소리를 엿듣고 있어, 이 망아지 같은 녀석들!!”

꺄아악--
꺄-

   



참 요란스런 곳이다.

아힌스는 밖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끄러운 건 신경에 거슬렸지만 왠지 관심이 갔다.   

약제사의 집에 들어설 때 유엘과 아힌스에게 모이던 초롱초롱한 일곱 쌍의 눈동자를 생각하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었다. 딸이 일곱이라니. 귀족들은 많아야 자식을 셋, 보통은 하나나 둘을 두는 게 보통이다. 평민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 크지도 않은 집에 무려 일곱이라니, 참으로 놀라웠다. 더구나 약제사의 부인은 지금 또 임신 중이라 했으니 앞으로 태어날 아이까지 합친다면 장래에는 여덟이 되는 셈이 아닌가. 많은 사람이 한 집에 모여 살아서인지 약제사의 집은 정말 잠시도 조용할 때가 없었다. 여기서 왕왕, 저기서 쾅쾅, 또 잠시 정적인가 하면 까르르 웃음이 터지고…. 저렇게나 산만한데 모두들 불평 없이 웃고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만일 아힌스더러 이곳에서 평생 살라 하면 신경쇠약증으로 진작에 실려갔을지도….   

“시끄럽습니까?”
“…별로.”

문밖에 관심을 보이는 아힌스가 의아한지 발목을 온찜질해주던 동생이 말을 걸었다. 시끄럽다기 보다는 신기해서였지만 아힌스는 짐짓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부정했다. 그리곤 살짝 미간을 구겼다. ‘저 녀석은 평민의 집이 신기하지 않은 건가?’ …참 이상했다. 자신은 이렇게나 신기한데. 호기심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아힌스로서는 지난번 유엘과 함께 외출했던 걸 제외하면 이런 낯선 경험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2층 집과 헛간, 그 안에 가득한 평민의 자식들. 조촐한 탁자와 오래된 러그까지도, 책 속에서나 상상하던 그것들을 실제 겪게 되다니 아주 낯설고 어색했다. ‘아냐. 그러고 보면 동굴 속에 떨어지기도 했지. 그 전엔 마차를 타고 상점에서 옷을 맞춰 보기도 했고. 생각보다 최근 많이 돌아다녔군.…비록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생각하다 보니 어째 귓가가 조금 달아올랐다. 기분이 붕 뜬 것 같기도 하고 몸이 불편해 짜증이 나면서도 뭐랄까…뭐지. 이 간질간질한 느낌? 꼭 어린애가 세상구경 나와 신이 난 것 마냥 마음이 참 그랬다. 소위 말하면 ‘흥분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성격 비뚤어진 샤휀의 성주님은 애꿎은 미간만 구겼다.




똑똑-.

달칵.


약제사가 들어왔다. 뚱뚱한 사내의 손엔 역한 냄새가 나는 약과 식사가 들려있었다. 열린 문 밖에는 일곱 명의 딸들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을 보내왔다. 유엘이 그쪽으로 한번 시선을 주자 그녀들은 다시 한번 꺄악-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서워서 저러는 건지 좋아서 저러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크…흠. 죄송합니다. 딸들이 철이 없어서.”
“…확실히 좀 소란스럽긴 하더군.”
“힉! 거슬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서 주의를 주고 올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많이 거슬렸던 건 아니니까.”

휴우-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약제사는 들고 온 차반을 올렸다. 식기를 정리하면서도 부들부들 떠는 손을 보니, 이쪽을 퍽 두려워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아힌스가 “귀족을 처음 만나나?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는 것 같군. 나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니 그렇게 떨 필요 없어.” 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던졌지만 그는 억울하단 표정으로 이쪽을 한번 보고 유엘 쪽을 또 한번 보고 하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지간히도 심약한 사내였다.

“…약이 좀 쓸 겁니다. 쓴 맛이 나는 약초가 많이 들어가서….”
“됐어. 익숙하니까.”

고약한 냄새의 약을 아힌스는 얼굴 한번 구기지 않고 단번에 마셨다. 이보다 더한 약도 먹었었는데 새삼 싫을 것도 없었다. 그보다는 빨리 나아서 성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눈이 그쳤다고 했던가?”
“예,예. 그쳤습니다. 막 조금 전에요. 하하. 올해 눈이 유난히 많아서 예년처럼 그쳐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작년이랑 똑 같은 시점에 멈췄습니다. 정말 다행이지요. 이웃집 사람은 결국 오늘 저녁에 딸의 혼사를 치르기로 했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사내의 설명이 길었다. 눈 그쳤다는 게 기쁜 건지 아니면 이웃집 사람의 혼사가 기쁘다는 건지 잔뜩 긴장해 있던 사내는 눈이 마주치자 얼굴까지 붉히며 필요 없는 말을 횡설수설 덧붙였다. 아마 긴장하면 할수록 말이 많아지는 타입인듯했다. …과연, 아힌스가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사내는 더더욱 당황해 수다를 늘어놓았다.  

“아실지 모르지만 이 지방 날씨가 원래 그렇습니다요. 폭설이 계속되다가 신년이 가까워지면 어느 날 갑자기 뚝 멈춰요. 그때부터는 한 이주일간 신기할 정도로 눈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서 모두들 이때를 기다려 축제를 벌이고 덩달아 결혼도 하고…사냥대회 같은 것도 하고 그럽니다. 겨울 동안은 날씨가 좋은 기간이 이주밖에 지속되지 않으니 서둘러서 많은 일을 해치우려는 거지요.”  

“알아.”

-아니까 그만 나가줬으면 좋겠군. 쓸데없는 말을 경청하려니 피곤했다. 성에서는 누구도 아힌스에게 저런 쓸데없는 소릴 지껄이지 않는다. 그들은 꼭 필요한 말만 했고 아힌스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이 심약한 약제사는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지 “저…, 저, 혹시 내키신다면 이따가 아래층에 내려오셔서 같이 즐기셔도 괜찮습니다.” 하고 정말 어이없는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발목이 이 모양이라 거동이 불편한 걸 뻔히 알면서 왜 자꾸 헛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아힌스가 입을 다물고 사내를 주시하자 그는 더더욱 얼굴이 달아올라 허둥거렸다. 너무 당황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깐…, 죄송합니다. 딸들이…꼭 한번만 부탁해보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요지였군. 좀 어이없는 마음에 아힌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힌스 형제는 이 집 딸들에게 굉장한 관심을 받고 있는 듯 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마주칠 때마다 꺄악꺄악 하는 게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
아힌스는 창가로 물러나 앉아있는 유엘에게 시선을 던졌다. 약제사에게 내려가겠다, 약조하긴 했지만 거동이 불편한 이상 유엘의 허락이 필요했다.

“유엘-.”
“…….”

이쪽으로 귀를 열고 있으면서도 짐짓 관심 없는 척 창 밖만 보던 유엘이 결국 비딱하게 입을 열었다.

“…보는 눈들은 있어서.”
“?”

빈정대는 폼이 그새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싶어 아힌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유엘이 새까만 흑요석의 눈동자를 데로록 굴려 아힌스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은 딱딱한 주제에 눈동자만 굴리다니 좀 꼴이 우스웠다.

“…그렇게 내려가고 싶으십니까.”
“…….”
“피곤해 보이는데 쉬시는 편이 낫습니다.”
“평민들의 결혼식은 어떤 건지 궁금하다. 구경하고 싶어.”
“…….”

유엘은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러나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반면 순식간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루디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아힌스의 앞에 놓여진 차반 뚜껑을 손수 하나하나 뒤집어 열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참석해주시는 것 만으로도 신혼부부에겐 큰 축복이 될 겁니다. 결혼식은 저녁부터니까 우선 이것부터 드시고 천천히 푹 쉬시다 내려오세요.”
묽은 수프와 으깬 감자, 그리고 알 수 없는 몇몇 음식들이 순식간에 좌라락 눈 앞에 펼쳐졌다. 식 재료는 별 볼일 없지만 굉장히 신경 써서 차려온 느낌이라 아힌스는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냄새부터 취향이 아니었다. 배는 좀 고프지만 괴로운 음식을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거절할까 하던 중 어쩐지 눈에 익은 듯한 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진한 소스가 뿌려져 있으나 살이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저것은 분명…!

“아하. 아까 네가 구해왔던 그 고기로군.”

아힌스는 반갑게 외쳤다. 내내 무심하던 동생녀석이 문득 움찔, 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눈치채지 못한 그는 기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성에서 이런 걸 먹은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의외로 흔한 요리였던가 보다. 평민의 식탁에까지 부담 없이 올라오는 걸 보면. 한 점 잘라 먹어보자 역시나 그 맛이었다. “역시 맛있군.” 육질이 부드럽고 깔끔하다. 이렇게 좋은 것을 요리사는 왜 안 해줬을까. 감탄사를 연발하자 약제사도 흐뭇하게 웃었다.

“맛있으시다니 다행이네요. 겨울이라 구하기는 힘들지만 역시 원기 회복에는 뱀만한 게 없죠.”
“…….”   
“실은 제 마누라가 다른 건 몰라도 요리솜씨하나는 일품이에요. 일곱이나 되는 딸들을 키우느라 고생을 하면서도-”
“…잠깐. 지금 방금 뭐라고 했나?”
“예? 아, 제 마누라 요리솜씨가 뛰어나다고 했습죠 나으리. 하하, 제가 좀 팔불출입니다.”
“그거 말고. 더 전에…이게…, 무슨 고기라고?”
“…뱀 고기 입니다만?”

쩔그렁….

손에 쥐고 있던 포크가 떨어졌다. 아힌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었다.

영문을 모르는 약제사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듬더듬 덧붙였다. “저어, 뱀 고기라 해도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건 나으리들을 만났던 동굴 근처에 자생하는 식용 뱀인데 독 같은 것도 없고 아주 맛있어요. 무엇보다도 원기회복에는 역시 뱀…”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말이었다.   

“……아닐거야….”

아힌스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유엘 쪽을 바라봤다. 그렇지만 아니라고 대답해주길 바라는 형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유엘은…뭐랄까.
굉장히 미안한 얼굴을 하며 아힌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화나셨습니까?”
“…….”
“형님…,”
“말 시키지 마.”

유엘은 대화를 시도했다.
머리 끝까지 끌어다 덮어 가운데만 불룩하게 튀어나온 이불은 결벽증 성주님의 분노를 대변했지만 이대로 냉전을 지속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슬금 다가가 불룩 튀어나온 이불을 툭툭 건드려 봤다. “건드리지도 마라!” 그러나 반응은 격렬했다.

“……….”  
평생, 삐친 누군가를 달래기 위해 애써 본 적 없는 냉미남은 곰곰이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지금까지 써 왔던 방법들이란 대개 협박과 고압적인 명령이었는데 불행히도 지금 상황에선 둘 다 적당하지 못했다. 과묵한 남자는 정말로 난감했다. 고의는 아니었다고 사과해야 하는 건가. 그렇지만 뱀인걸 알고 먹였으니 분명히 고의다. 그렇지만 이치적으로, 상식적으로 그 때 구할 수 있는 식량이 그것 밖엔 없었다 말하기엔 상대가 너무 감정적이라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생각을 갈무리 한 후 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

“형님, 뱀은 좋은 보양식입니다.”
“…….”
“예부터 뱀 고기는 기력을 증진시키고 피를 따뜻하게 해줘서 자주 먹으면 혈색도 좋아진다 했습니다.”   
“……꺼져.”
“…생각을 달리 해보시면 남들은 돈 주고도 못 구한다는 청사(靑蛇)를 드신 겁니다.”

벌컥, 아힌스는 이불을 확 내리고는 버럭 화를 냈다. 듣자듣자하니 아주 이쪽을 바보로 보는 건가!   
“나쁜 자식! 너는 나를 기만했다!! 뭐? 장어와 비슷한데 나는 잘 모를 거라고?”
“…그건,”
“됐다!!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애당초 네게 무슨 신의가 있었다고…!”

아힌스는 뱀 고기를 맛나게 먹던 자신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고사리 같은 열 개의 손가락을 파들파들 떨어댔다. 무섭게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실상 얼굴은 반쯤 울상이라 가여울 정도였다. 하기야, 처음 사실을 알고 뒤로 넘어가려던 것보다야 훨씬 나아진 거지만….  

“나쁜 놈…나쁜 자식! 넌 거짓말쟁이야! 너 같은 걸 믿은 내가 바보였어.”
“울지 마십시오.”
“누가 울었다는 거야! 나한테 뱀 고기 같은 거나 먹인 주제에!”
“형님을 위해서였습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뭐어……!”

잠시 말문이 막혀 머뭇대자 유엘은 기회를 놓칠 새라 재빨리 형님의 두 팔목을 움켜 잡고는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형님, 맛있었잖습니까.”
“…….”
“형님은 음식에 대해 너무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뱀 고기라고 해서 특별히 이상한 음식이 아니에요.”

충분히 이상해…. 라고 중얼거리는 아힌스의 말을 무시하며 유엘은 택도 없는 논리를 계속 늘어놓았다.

“맛있으면 된 거지요. 기억해 보십시오. 고기를 먹으면서 조금이라도 거부감이 들었었습니까?”
“…….”

거부감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몰랐었으니까. 그렇지만 어쨌든 굉장히 맛있었던 건 사실이라 아힌스는 부릅 떴던 눈에 조금 힘을 풀었다. 유엘은 독기가 빠진 아힌스를 슬그머니 당겨 품에 안고는 등을 도닥이며 살살 달랬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언어능력을 발휘하고자 애썼다.  

“뱀은 나쁘지 않습니다. 나쁜 건 뱀 고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편견입니다.”

이 자식이 지금 그걸 설득이라고 하는 건가. 어이가 없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아힌스는 가만히 입술만 즈려 물었다. 그렇지만 마음 속은 기회만 된다면 동생 놈을 한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뱀 고기가 조금만 덜 맛있었더라도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줬을 텐데 참 안타까웠다.
  
결국 저녁 나절까지 계속되는 유엘의 이상한 논리에 설복한 아힌스는 그의 품에 안겨 결혼식이 있다는 아래층으로 실려 내려갔다. 뭔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분위기라 분하고 억울했지만 그는 곧이어 닥쳐온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뱀 고기 따위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평민들의 결혼식이란 생각보다 흥겨웠던 것이다.








◇의상 구분◇

* 유엘 폰 아드리안 공작

상의 - 슈미즈 + 베스트 + 쥐스코르트 + 모피코트 + 망토(or 우플랑드) & 목장식은 크라바트
하의 - 쇼오스(or 퀼로트) + 카농 + 부츠

전투시에는 쥐스코르트와 코트가 빠지고 갑옷과 쉬르꼬가 추가된다. 공식행사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스타일의 복식을 착용하기도. 날렵한 흑사자 타입의 남자다. 의복 역시 그와 비슷한 이미지로 심플한 블랙을 선호하는 편.


* 아힌스 폰 아드리안

상의 겸 하의 블리오 + 장식 허리끈 + 언더튜닉 + 굽이 낮은 구두

꼬르사아쥬를 추가해 입기도 한다. 유엘과 외출했을 때는 쇼오스와 푸르푸앵 + 바레트(모자) 의 르네상스식 의상을 착용. 아힌스는 특별히 신축성 있는 울과 실크같은 재질의 부드러운 옷감을 좋아한다.


* 슈스켈 푸쉐

상의 - 드레스 셔츠 + 베스트 + 프록코트 + 목장식은 자보나 크라바트
하의 - 팬털룬즈 + 부츠

때때로 검은색 샤포(모자)를 쓰기도 한다. 스스로 중인임을 자처하는 만큼 옷 재질과 디자인이 수수하다. 프록코트의 소매가 닳아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


* 세드릭 호먼

상의 - 슈미즈 + 푸르푸앵 + 약식 갑옷 + 로브
하의 - 캐니언즈 + 부츠

단순한 것 같지만 은근히 멋쟁이인 세드릭은 푸르푸앵에 러프칼라와 에폴렛을 효과적으로 강조하는 스타일을 좋아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디테일한 장식에 꽤 신경을 쓰는 편.











◈◈




헉…

헉………헉…….


혹한의 땅…. 버림받은 대지. 얼어붙은 설원………. 끝은 보이지 않는다.

감각을 잃은 발은 통제를 잃은 채 앞으로만 향했다. 단 한번이라도 멈추면 쓰러진다는 걸 알기에 몸은 그저 관성을 유지할 뿐 의지도 지각도 없었다. 잿빛 눈은 어둠과 절망으로 가라앉은 지 이미 오래, 슈스켈은 지옥의 밑바닥을 응시하며 부서질 듯 웃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크크큭…….
사랑스런 누이, 나의 꽃…, 연인은 목을 매어 죽었다. 그리고 가문은 슈스켈을 버렸다. 더러운 패륜아. 죽어서 시체조차 썩지 않을 파렴치한 놈- 나가라. 부친은 그리 외치며 외아들을 개처럼 내쳤다. 낄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입 모아 수근대지, 누이와 붙어먹은 더러운 놈이라고. 더러운 것, 더러운 것, 더러운 것…………개자식들!!!!!!!!!!!!!!!!!!!! 너희가 뭘 안다고!!!!!!!!!!!!! …굵은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 더운 기운을 느낄 새도 없이 칼 바람은 마지막 남은 순수를 짓밟고 지나갔다. 정강이 까지 쌓인 눈은 결국 그를 고꾸라뜨렸다. 털썩…. 슈스켈은 잿빛의 죽은 눈을 흐리며 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친 듯이 추웠다.

…세상은, 그가 바라던 모든 세상은 끝나버렸다. 그의 그녀와 함께…….


하하….


함께 떠나자고 했었다. 따뜻한 남쪽 땅, 아무도 알지 못하는 먼 곳으로 함께 가자고…. 빛나는 미래도 화려한 삶도 모두 버리고 나는 한가로운 시골의 필부가 되어 한 여자의 남편만으로 만족하며 평생을 살겠노라, 그런 꿈을 꾸던 때도 있었지. 너는 나를 위해 웃음짓고 아이는 둘이나 셋. 딸 아이는 사랑스런 너를 닮으면 좋겠다 속삭였었다. …하지만 개 같은 꿈이었어 그건. 알고 있어?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지-. 너는 너무나 약하고 사람들은 잔인해. 고작 죽으라는 말 한마디에 목을 매단 너는……한번쯤은 내 생각을 했을까. 홀로 남은 내가 어찌 살아갈 지 걱정하긴 했을까 응?  

갈라진 목구멍에서 더 이상은 흐느낌도 나오지 않았다. 꺼억 꺽…비틀린 신음만이 흘렀다.

슈스켈은 제 몸 위에 수북이 쌓여가는 눈을 방치한 채 배를 뒤집어 뉘였다. 검은 하늘은 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폭설을 퍼부었다. 더 이상은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 속이 포근하다 생각했다. 그는 가면 같은 얼굴을 비틀어 저 멀리 언덕 위로 환상처럼 아른대는 백색의 성을 바라봤다. 저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 건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생기는 궁금증에 슈스켈은 낄낄대며 웃었다. 마치 전설에나 나올 법한 성이로구나. 성 안에 살고 있는 자는 마녀인가 아니면 버림받은 공주인가. 어쩌면 그녀가 죽지 않았더라면…자신과 도망쳐 저런 곳에서 살았을지 모르겠다며 그는 흐릿하게 웃었다.

의식은 점점 멀어져 갔다. 눈 앞이 검게 암전되는 순간까지 슈스켈은 설원 위의 하얀 성을 그리운 듯 응시했다. 더 이상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세상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나버렸다. 부서지고 망가져 껍데기만 남은 영혼을 안고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미래는 암흑이었다.










…봐. 이봐. 여보시오.

일어나 보라니까….


“여보시오, 푸쉐 씨!”   

흔들.

“………!”

씹….

기분 나쁜 오한에 슈스켈은 몸을 떨었다. 잠시 암벽에 기대어 선잠이 들었던가 보다. 그는 충혈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잿빛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그 바람에 그를 깨운 사내는 흠칫 놀랐고 옆에 긴장한 채 서있던 세드릭은 더더욱 안색을 굳혔다. 좋지 못한 꿈 덕택에 심기가 불편한 슈스켈은 특유의 비웃음조차 짓지 않은 채 사내들을 닦달했다. “무슨 일로 깨운거요. 뭔가 단서라도 발견했나?” 빈정대는 말투에 사냥꾼은 재수 없는 자식이라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보시오. 불을 피운 흔적이 남아있소. 차갑게 식었지만 재가 흩어지지 않은 걸로 봐서 하루 이상 지나진 않은 것 같군.”

“…역시 살아있던 거로군.”

명줄 하난 질겨. 덧붙이는 마지막 말이 얄미웠다. 저도 실은 애타게 찾고 있는 주제에, 사람 속 뒤집는 덴 도가 튼 사내였다. 세드릭은 주먹을 불끈 움켜 쥐면서 애써 화를 참았다. 누구 들으라고 저러는 지는 어차피 뻔했다.

“출구와 가까운 곳에서 불을 피운 걸로 보아 벌써 빠져 나간 것 같소. 허 참…. 그 아드리안 공작이라는 사람 정말 대단한 사내요. 나조차도 이 동굴에서 근 일주일을 헤맸었는데 겨우 이틀 만에 탈출하다니, 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이야?”

“…….”

“게다가 개들이 냄새를 맡고 추적한 경로를 살펴보면 거의 헤매지 않고 최단경로를 찾아 나갔군. 이거야 원, 찾게 되면 정말 어떤 인간인지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소. 거의 괴물이야. 보아하니 뭔가를 구워 먹기까지 한 것 같은데, 이건 뭐 놀러 나온 것도 아니고 뭐가 이래? 사막에다 던져놔도 살아 남겠구먼.”

“시끄럽군. 난 아드리안 공작의 찬사나 듣자고 당신들을 고용한 게 아니야. 쓸데없는 소릴 하려거든 얼른 두 사람의 행방부터 찾아내.”

“…젊은 사람이 빡빡하기는. 이 정도의 솜씨를 보고도 감탄이 안 나오시오?”

타박하듯 혀를 차는 사냥꾼에게 슈스켈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사냥꾼이 눈치 없이 따라 웃자 그는 거칠게 사내의 멱살을 낚아채며 벽에 들이 박았다. 급작스레 뒤통수가 부딪힌 사냥꾼은 정신 없이 눈만 껌벅였다.

“닥쳐 영감.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곳을 빠져나갔다니 어디로 간 거지? 추적할 수 있겠나? 응?”
“큭-. 이 것 좀 놓고…얘기 합시다.”


쿨럭….

멱살이 풀린 덩치 큰 사냥꾼은 목을 문지르며 얼굴을 굳혔다. 체격이 좋은 것도 아닌데 슈스켈 푸쉐의 힘은 상당했다. 게다가 소문대로 위아래도 없는 개차반이었다. 재수없지만 결코 만만히 볼 순 없는 그에게, 사냥꾼은 얌전해진 태도로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눈이 멈췄으니 개들을 풀면 찾을 수 있을 거요. 추적은 내 전문이라오.”
“그럼 바로 시작하지.”

벌써 해가 뉘엿했다. 겨울에 산중의 해는 무척이나 짧다. 어두워지면 뒤를 밟기가 더 어려워 질 테니 가능한 빨리 찾아내야 한다고 슈스켈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지쳐있는 모두를 다그쳤다. 그에 반대하는 자는 물론 없었다.











와아아아아---

폭죽이 터졌다. 누구라 할 것 없이 하객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한편에선 파스티스로 건배했다. 꽝꽝꽝, 음악이 터져 나왔다. 관악기와 현악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실내는 순식간에 축제 같은 분위기로 돌변했다.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이 요란한 결혼식에 아힌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옆에선 유엘이 졸고 있었다. ‘…잠이 오냐. 신기한 놈.’

“안녕하세요, 도련님들?”

밝은 음성에 고개를 드니 지금 막 혼사를 치른 새 신랑 신부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약제사로부터 귀한 분들이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해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인사치레 차 온 것이었다. 가짜 꽃으로 장식한 연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무릎을 살짝 굽혀 발랄하게 인사했다.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굉장히 행복한가 보다고, 무심코 생각해 버릴 정도로 화사했다.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하고 축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신의 가호를!”

척박한 샤휀의 사람들은 처음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인사말로 신의 이름을 빌어 무언가를 외친다. 구습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그런 타지풍습에 익숙지 못한 아힌스는 어색하게 답례했다. “그대도 신의 가호를…. 아름다운 부부이니 해로하시오.” 그리고는 조금 쑥스럽게 웃었다.

금발 미남의 축사에 신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이 풋풋한 도련님들이 아마도 근처의 중소 귀족 중 하나일 거라 추측했다. 단정한 외모도 그렇지만 언행과 태도가 매우 정갈했다. 매너있고 근사한 남자였다. (비록 옆에 있는 총각은 졸고 있지만…;) “아니, 이 여자가….” 신랑은 뚫어져라 아힌스를 보는 신부에게 눈치를 주며 재빨리 먼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고 나서도 젊은 여성들은 아힌스의 곁에 빙 둘러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말 한마디라도 걸어주길 기대하는 반짝반짝한 눈동자가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나리들,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한참 흥에 겨워 박수치고 노래 부르던 약제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일곱 딸들은 이미 아힌스와 유엘의 옆에 진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으이그, 저 철없는 것들.’ 그는 양 손에 하나씩 쥐고 있던 파스티스를  두 사람에게 각각 건넸다. “…….” 커다란 나무 잔에 가득 담겨진 하얀 액체를 바라보는 아힌스의 시선에 약제사는 허둥지둥 설명했다. “파스티스입니다. 물을 섞으면 그렇게 부옇게 색이 변하지요. 맛이 썩 괜찮으니 한번 드셔보십쇼.”
“…….”
먹을 건 꽤 가리는 주제에 술에는 종류에 관계없이 관대한 아힌스는 향을 맡아보고는 한 모금씩 들이켰다.
“괜찮군.”
“-그렇죠?”
좋은 평가에 신이 난 약제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재차 권유했다.
“저희 집에서 직접 담근 흑맥주도 있는데 그것도 가져다 드릴까요?”
“흑맥주라…. 그것도 괜찮겠는데.”
약제사는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며 재빨리 술을 가지러 갔다. 저쪽도 벌써 몇 잔 걸친 건지 썩 기분이 들떠있는 것 같았다.

“적당히 드시지요.”

언제 깨났는지 유엘이 잔소리를 해왔다. 아힌스는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코웃음 쳤다. “뭘 얼마나 마셨다고. 걱정 마라. 이 정도로는 안 취해.” 그리고는 부연 파스티스를 꿀꺽 삼키자 목구멍이 알싸한 게 꽤 괜찮았다. ‘역시 에밀리 부인에게 이쪽도 마련해 놓으라고 해야겠어.’ 성의 창고 한구석, 각종 술들이 보물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는 저장고를 생각하며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아힌스에게 유엘은 혀를 찼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힌스의 침실을 찾았던 첫날에도 그는 잔뜩 취해있었다. 당시 바닥을 뒹구는 술병만 해도 종류별로 상당했지만 그때는 그냥 속이 상해 마신 줄 알았었다. …그런데 오판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힌스는 진짜 주당이었나 보다.

“…….”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면 그냥 술잔을 뺏어버릴까 망설이는 사이 어느새 원흉인 약제사가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요 나으리. 으하하하- 제 아내가 빚은 거지만 정말 맛 하난 기가 막히죠.”
여지없이 마누라 칭찬이 쏟아져 나왔다. …팔불출은 달래 팔불출이 아닌 것이다.   

“오…. 이쪽도 괜찮은걸. 맛이 아주 깔끔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러니 고래보다 더 단순한 팔불출 약제사는 더더욱 신이 났다. 한번 걸쭉하게 걸친 그는 살기가 번뜩이는 흑발 귀족의 시선도 모르고 아힌스와 주거니 받거니 난리가 났다. 살짝 볼에 홍조가 오른 아힌스가 배시시 웃자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힐끔 살피던 시선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변했다. 유엘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술 마신 아힌스가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평소처럼 인상이나 더럽게 쓰고 있을 것이지, 답지 않게 미소는 왜 뿌리고 다니는 겁니까. 못생겨서는.

“그런데…여기는 왜애-, 그런 것 안 하나?”
“네에~네 말씀만 하십쇼, 뭐 말씀이십니까아?”   

느릿해진 아힌스의 말투를 흉내내며 약제사가 싱글벙글 웃었다. 귀여운 아들이나 손자 보듯 이뻐하는 눈치였지만 유엘의 입장에선 달랐다. 아주 엉큼스런 영감탱이가 아닐 수 없었다. 물정 모르는 인간한테 술이니 뭐니 쥐어주며 꼬드기다니 질이 나쁜 놈이었다. 목을 비틀어 버릴까, 손가락에 뚜둑 힘을 주고 있는 동생의 마음도 모르고 아힌스는 녹을 듯이 웃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축제때에…하잖아…그거……. 불꽃놀이라고 하나…?”

“아하! 불꽃놀이요? 조금 후에 시작할 겁니다. 밖에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추우시면 2층 방에서 구경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래…?”

아힌스의 엷은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술기운에 물기가 살짝 어린 붉어진 눈가가 아련하게 빛났다.
“…….”
유엘은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한없이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라 못돼 먹은 말을 할 때마다 실컷 괴롭혀 주고 싶은 가학심이 일다가도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심장 한구석이 둔탁하게 아파왔다. 자존심 강한 형님은 오도카니 방안에 앉아 비스듬히 열린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버려진 아이 같았다. 그게 어떤 심정인지 유엘은 알 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아힌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싫었다. …그냥 막연히 싫었다.         

음악이 바뀌어 폴카가 시작됐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들 일어나 팔에 팔을 걸고 춤을 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흥겨운 정경에 아힌스는 넋을 잃고 바라봤다. 유엘에게도 여기저기서 춤 신청이 들어왔지만 그는 ‘춤 안춰.’ 냉정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무안해진 소녀들이 눈물을 글썽이던 말던 그는 관심도 없었다. 아힌스는 그런 동생에게 ‘매너없는 놈. 네가 그러니 애인이 없지.’라며 빈정댔다. 애인 없다는 말 같은 것 한적도 없는데 제멋대로 단정짓고는 낄낄대며 웃는 형님이었다.
고개를 숙여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그의 목덜미가 참으로 희고 가늘었다. 유엘은 사슴 같은 그의 목에 손 올려 부드럽게 쓸었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낮은 체온이 불안정해 보였다.
“그만 올라가시겠습니까?”
“…응.”
“사람을 시켜 목욕물을 덥혀 놓으라 하겠습니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한숨 주무시면 기분이 좋아지실 겁니다.”
“……그래.”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 예쁘지만 한없이 아슬아슬한 그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 사람은 가끔씩 이렇게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며 유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펑--------



“불꽃이군. 시작한 건가?” 아힌스는 창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무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물에 젖은 금발을 뒤로 쓸어 넘긴 그는, 몹시 나른했다.

펑- 펑?  펑---

몇 번의 불꽃이 더 터졌다. 하늘 높이 오르는 꽃 불꽃…. 붉은 색 푸른 색, 노랑, 연두…. 모처럼 눈도 오지 않는 밤하늘은 색색이 수 놓아진 불꽃으로 눈부시게 현란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수의 열기를 느끼며 아힌스는 발로 물을 튀기며 장난쳤다. 몸이 지친 것과는 별개로 모든 게 재밌었다. 그런 형님을 유엘은 못 말리겠다는 듯 타박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누가 좋다더냐? 유치하기 짝이 없으나 내 관대히 봐주는 게야.”
“유치하면 그만 보고 가서 잠이나 주무시죠.”
“………약제사가 2층에서 구경하라고 했다. 내가 봐주지 않으면 그가 실망할 거다.”
“전혀 실망 안 할겁니다. 아까 보니 술 먹고 잘만 돌아다니던데요. 형님 혼자 자신감 과잉이십니다.”
“…이런 낭만도 모르는 것 같으니!”

와락 아힌스가 성질을 냈지만 유엘은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아힌스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퍼지는 첨벙, 소리가 극도로 그의 신경을 예민하게 했다.

애초에 목욕을 도와줄 생각 따윈 없었다. 옷 벗는 것만 도와주고 방문을 나설 생각이었다. 유엘은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러나 이 제멋대로 오만한 형님은 당연하다는 듯 명령하는 게 아닌가. ‘어딜 가는 거냐. 옆에서 목욕시중을 들어라.’ 하도 어이가 없어 물끄러미 노려보자 이제는 당황도 하지 않으며 ‘싫으면 같이 목욕이라도 하던가….’ 라고 덧붙였다. 즉, 말하자면 혼자 있기가 싫다는 걸 빙 돌려 말하는 것인데 유엘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하얀 맨 몸뚱이를 들어낸 채 같이 있어달라고 말하다니, 이쪽을 죽일 셈인가. 별 속뜻 없이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더 야속했다. 비록 아힌스를 좋아하고 가끔은(…) 엉큼한 생각도 하는 유엘이지만 그렇다고 형님을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함부로 대할 만큼 아힌스는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살살해.”
“…….”
결국은 쇼오스와 슈미즈 조차 벗지 못한 채 머리나 감겨주고 있는 신세였지만.

유엘은 걷어붙인 하얀 슈미즈자락에 번지는 습기를 주시하며 눈을 내리 깔았다. 아힌스의 젖은 금발 따윈 보고 싶지 않았다. 길고 늘씬한 팔 다리와 날개 뼈가 살짝 튀어나온 매끈한 등은 잉큐버스보다 유혹적이었다. 욕조 밖으로 빠져 나온 아힌스의 모양 좋은 발가락이 움찔댈 때마다 유엘의 손길은 거칠어졌다. “…….”고요한 가운데 유엘의 숨소리만 크게 울렸다. 용케도 아힌스만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하고, 가서 쉬시지요.”
“싫다.”
“…목욕은 충분히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불꽃이 올라오고 있잖아. 더 구경할 테다.”

…망할 인간. 유엘은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다. 거기다 더해 거만하고 고집스럽기까지 했다. 찰랑? 물살이 뒤집히는 소리가 다시 한번 허공을 울렸다. 매끈한 하얀 다리가 거품위로 올라올 때마다 입 안에 침이 말랐다. 빠득-, 이를 갈며 유엘이 억지로라도 이 남자를 옷으로 칭칭 싸매 침대에 실어다 놔야겠다 결심했을 때였다.

“…그런데, 왜 안 하느냐.”      
“예?”

열기와 술기운으로 한껏 풀린 얼굴이 이쪽을 보며 헤실, 웃었다. 아힌스는 조금쯤 술에 취해 있음이 분명했다. “늘 했잖아…? 어제도, 그제도.” “…….” 유엘은 금빛 고운 머리칼의 물기를 닦아내며 아힌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아무래도 주정하는 폼이 심상치 않은 게, 얼른 침대로 데려가 재워야 할 것 같았다.   
“뭐야. 지금 뭐 하는 거냐.”
“입 좀 다무세요. 취하셨습니다.”
“……나 안 취했다니까.”
“아아, 분명 그러실 테죠. 안아서 침대까지 모셔갈 테니 목에 팔을 감으세요.”
완전히 주정뱅이 취급을 하며 안아 올리려 할 때였다.

쪽…….
“…….”

유엘은 아힌스에게 입혀 주려 집어 들었던 옷자락을 놓쳤다.
방금 무슨 일이….

“키스했잖아, 매일. 네가 항상 먼저 했으면서 왜 모르는 척 하는 거지?”
귓가에 나직이 아힌스가 속삭였다. 도드라진 그의 쇄골이 유엘의 가슴팍에 닿았다. 젖은 팔로 유엘의 목을 감싸며 아힌스는 달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웃음이었다.
“…….”
…천천히 유엘의 성기가 부풀어 올랐다. 아힌스의 취한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일 즈음 그의 중심은 하의 속에서 터질 듯 팽창해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유엘은 아힌스를 밀어내려 그의 양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러나 철없는 형님은 끝까지 뻔뻔하게 재촉했다.
“해 줘. 평소처럼. 키스하고 싶다.”
“…….”

유엘은 아힌스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그의 허리를 거칠게 낚아 채 허겁지겁 입맞췄다. 촤아아, 물 넘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자신의 슈미즈가 젖는 것도 모르고 아힌스의 붉은 입술을 정신 없이 탐했다.

“읍…으…좀 천천…히…!”

천천히는 무슨! 더 이상은 한계다.
눈 앞의 남자가 스스로 유혹한다는 자각이 있든 없든 그 따위 것 상관없었다. 말랑한 입술, 부드러운 몸…! 아까부터 시선을 자극하던 얄밉기 짝이 없는 하얀 허벅지를 움켜잡고 거칠게 주물렀다. 심장이 평소의 세배로 뛰는 것 같았다. 작은 입을 벌리고 들어간 혀가 원하던 이의 입안을 유감없이 휘저었다. 나긋이 호응해 오는 감각도 그를 미치게 했다. 유엘의 몸은 반쯤 기울어 거의 탕 안에 들어갔다. 물에 푹 젖은 하얀 슈미즈는 그의 잘 짜여진 근육에 착 달라붙어 적나라하게 실루엣을 비춰줬다.
허억 헉………….
철썩철썩 물 넘치는 소리와 가뿐 호흡 소리만이 전부였다. 아힌스는 유엘의 목에 팔을 휘감은 채 기분 좋게 웃었다. 이렇게나 거칠게 키스하는데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그저 입술과 온 몸을 통해 전해오는 온기가 마음에 드는지 유엘의 품에서 자유롭게 몸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하얗게 질린 금속성의 목소리가 갈라져 들려 온 것은-.


쾅----------------!!!!!!!!


“지금,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

방해 받은 연인과의 시간에 천천히 입술을 떼고 뒤를 돌아보는 아드리안 공작의 시선은 타오를 듯 검었다.
그의 시야 안에 들어온 것은 슈스켈 푸쉐의 경악과 분노에 찬 얼굴이었다.   










◈◈



“지금,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세상에서 가장 못 볼걸 봤다는 듯 슈스켈은 문 앞에 선채로 한동안 굳어있었다. 그는 충혈된 잿빛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여 상황을 집요하게 주시했다. 실내는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했지만 깊은 나무 욕조에 겹쳐져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보였다. 더구나 맨 몸뚱이로 얼굴만 발갛게 상기시킨 아힌스의 모습은 유곽의 어느 계집보다도 퇴폐적이고 음란했다.   


"하…!"

[슈스켈 푸쉐씨, 두 분을 찾았소-?,]


탁--!

누군가 들어오려는 기색에 슈스켈은 재빨리 몸을 안쪽으로 들이고 문을 걸어 잠갔다. 잠시 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 있냐는 물음에 그는 두 사람 다 찾았으니 일단 나가 있으라며 쌀쌀맞게 대답했다. 대답하는 와중에도 그는 물에 흠뻑 젖은 발정 난 짐승 같은 꼴로…주제에, 이쪽을 날카롭게 탐색하고 있는 흑발의 청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
"……."
"…슈스켈."
“!”

먼저 입을 뗀 건 의외로 아힌스였다. 그는 별 긴장감 없는 편안한 목소리로 슈스켈을 호명했다. 그에 슈스켈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어디, 지금 이 꼴이 무슨 상황인지 변명을 할 테면 해봐라, 그렇게 속으로 빈정대며 팔짱을 꼈다. 너무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왔다. 건방진 동생 놈을 쫓아버리게 얼른 성으로 돌아오라 닦달하던 놈이 그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꼴을 보이는 건가. …아니, 그 이전에 조금 전 두 사람이 대체 뭘 하고 있더란 말이냐. ‘하!’ 슈스켈은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고개를 부르르 흔들었다. 성주의 옆에 태연한 낯짝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는 분명 아드리안 공작일 터. 그러니, 분명 아힌스와 저 흑발 청년은 피를 나눈 친형제 사이가 맞았다.

"불렀으면 말씀을 하십쇼. 고매하신 나으리."

크극…. 쇠를 긁는 거북한 비웃음을 흘리며 슈스켈은 이죽거렸다. 그토록 제가 귀족인 걸 내세우며 고상함을 뽐내던 것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알몸으로 제 동생 품속에 들어가 숨을 할딱이고 있어? 하핫!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씨팔!

"건방진 놈. 예의가 없는 건 여전하군."
"-뭐라고?"
"남의 방에 들어설 땐 노크부터 하는 게 순서다. 더구나 욕실에 들어서며 허락도 받지 않다니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
"허!"

노크가 어쩌고 어째?! 이 망할 인간아! 슈스켈은 두 눈을 홉떴다. 조금도 꿀릴 것 없다는 듯이 아힌스는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나긋나긋해진 재수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뭘 봐? 목욕하고 있는 걸 알았으면 얼른 나가봐." 기 막혀 하는 슈스켈에게 아힌스는 꼭 한마디를 덧붙여 빈정댄다. "너 때문에 눈밭도 굴러보고 동굴 속에 갇혔다가 뱀 고기도 먹어보고…덕택에 아주 진귀한 경험 잘했다. 고약한 놈. 여기 있는 날 찾아낸 건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일들이 덮어지는 건 아니지. 그 일은 차후에 추궁할 테다."

"……."

슈스켈은 일그러뜨렸던 얼굴을 천천히 폈다. 공중에 흩어진 미약한 술 냄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저 태연함…. 아힌스 폰 아드리안은 오만하지만 뻔뻔한 성격은 아니다. 알몸으로 사내와 딥키스를 하다 들킨 주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천연덕스러움은 결코 아힌스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슈스켈의 목이 느리게 돌아갔다. 그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아힌스를 꼭 제 것인 양 안고 있는 아드리안 공작을 발라먹을 듯 노려봤다.

…감히….


"아주…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 군요. 공작 전하."
"……."
"뭣도 모르는 저 고집덩어리를 잘도 구워삶으셨습니다?"
"넌 누구냐."

무심하게 묻는 그에게 슈스켈은 허리를 숙이며 과장된 동작으로 인사했다. 왕의 앞에 선 광대처럼 우스꽝스럽고 가식적인 몸짓이었다.

"이 미천한 것은 슈스켈 푸쉐라고 합니다 전하. 과거엔 외르겐 가의 패륜아로도 불리었지요."
"!"
  
순간 공작의 무심한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슈스켈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변화를 포착하곤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모를 리가 없지. 슈스켈 외르겐, 한때는 외르겐 백작가의 총아였으나 누이와 배 맞아 집안을 패가망신시킨 둘도 없는 천하의 탕아! 비록 교류가 없었더라도 사교계에 몸담고 있는 이상 그 유명한 이름을 모를 황도의 귀족은 없다. 그렇다면 근친상간이라는 죄목 역시 똑똑히 알고 있을 터. ‘어디, 그 잘난 얼굴이 구겨지는 것 한번 구경합시다 공작 나으리.’   


쿵쿵--!

[여보시오, 푸쉐 씨! 슈스켈 푸쉐- 안에 공작 전하가 있는 게 맞소? 대답 좀 해보시오.]

"……."
“…….”
"…일단 옷부터 입으시지요. 아힌스 폰 아드리안, 귀하신 분. 아랫것들에게 맨 몸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빈정거림처럼 들릴 테지만 진심이었다. ‘…아힌스, 너를 누군가의 조롱거리로 만들 수는 없지.’ 슈스켈은 커다란 타월을 펼쳐 아힌스의 몸을 꽁꽁 감싸는 아드리안 공작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성주의 출현은 작은 마을에 큰 동요를 가져왔다.

샤휀의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시골 마을인지라 상류층이라곤 기껏해야 영세한 몰락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 정도가 다였던 영지민들은 젊고 잘생긴 백금발 청년이 말로만 듣던 샤휀의 성주라는 말을 듣고는 크게 고무되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검은 기사들의 행렬에 술렁임은 더더욱 커졌고 흑사자 깃발과 영주를 모셔갈 마차에 새겨진 백합문장은 긴가민가하던 이들을 더욱 확신케했다.

"나,나으리-."
약제사 루디는 달달달달 떨었다. 불쌍한 마음에 (협박에 못 이겨) 도와줬던 아힌스가 실은성주였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는 후들후들 다리를 떨며 혹시 대접에 소홀했던 건 없나, 뭔가 실례를 저지른 건 아닐까 엄청난 속도로 머리를 굴려가며 확인했다. 그는 공처럼 둥근 몸을 납짝 업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천한 소인의 집에 납시다니, 혹 시찰을 나오셨던 거였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소인이 죽을 죄를…!" 약제사는 바닥에 쿵쿵 머리를 들이박으며 눈치를 살폈다. 뭐 좀 실수한 게 있더라도 미리 낮추고 들어가면 좀 봐주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젊은 성주는 그의 행동에 관심 두기는커녕 그저 나른히 앉아 먼 창 밖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더 이상 불꽃은 피어 오르지 않는다.
“…….”
성주의 출현에 모두들 당황해 흩어진 것이다. 하늘을 곱게 물들이던 아름답던 불꽃들을 떠올리자 아힌스는 못내 아쉬웠다. 언제 또 그 반짝이던 것을 볼 수 있을까. 흥겨운 서민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던 축제…. 색소를 잔뜩 넣은 싸구려 과자조차 예뻐 보였었는데.

"이제 그만 가셔야 합니다."        
"……."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재촉했다. 아힌스는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안락한 자신의 성으로. 패배한 자들의 둥지처럼 남아있는 그 하얀 성으로….

"…약제사."
"예, 예. 말씀하십시오, 나으리!"
"이름이 루디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요, 소인의 이름은 루디 달시온 입니다."
"이 집 흑맥주는 유난히 맛있더군. 앞으로 성에 납품하게. 좋은 값에 쳐 줄 테니."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뜬 약제사는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귀족의 성에 물건을 댄다는 건 대단한 영광이었다. 더불어 평민들은 감히 접근하기 힘든 그 신비의 하얀 성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뜻!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루디는 장신의 흑발 사내가 성주를 안아 올리는 동작을 감탄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귀족들의 피가 다르긴 다른가, 저들 모친의 미모는 대체 어떻기에 저런 미남들을 줄줄이 낳았을꼬?’ 분위기부터가 다른 이들과는 차이가 났다. 전형적인 북국의 귀족처럼 푸른빛이 도는 흰 피부와 적막하고 차가운 아우라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정화되는 느낌의 사내들이었다.


“거참…. 묘하게 잘 어울리네….”

-멈칫.
“…….”
순간 공작 전하의 걸음이 멈췄다. 흑발 냉미남은 작게 흘린 약제사의 말에 반응해 이쪽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동시에 약제사는 경망스런 자신의 주둥이를 책했다. ‘남자 형제에게 잘 어울린다니, 이게 무슨 망언이냐!’

하여간에 이놈의 입을 꼬매 버려야 한다고 자책했지만 의외로 공작은 태연했다. 아주 잠시 머무르던 차가운 검은 눈동자는 곧 흥미를 잃은 듯 떨어졌고 그는 주위를 슥- 둘러보며 명령했다.   

"가지."

아드리안 공작이 발을 떼자 약제사의 좁은 집에 우글대던 기사들이 일제히 정렬한 채 뒤따라 나섰다. 검은 무리의 움직임은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절도 있었다.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은 마냥 신기했다. 말로만 듣던 흑기사단, 그리고 제국 최고의 권력자 아드리안 공작과 그의 품에 안겨있는 샤휀의 성주…. 몸을 숨긴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보던 루디의 일곱 딸들은 곱게 접었던 손수건을 흔들었다. 일생에 한번 볼까한 화려한 손님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뒤편에서 협박당하고 있던 늙은 아비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건 어쩌면 다행일지 모르겠다.  
‘허튼 소리라도 떠들고 다니면 네 딸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알았나?’
‘제, 제가 무슨…?’
‘조용히 해. 아무튼 이 집에서 성주들이 했던 짓들은 다 잊는 거다. 무엇을 봤든, 어떤 행동을 했던지 간에.’
콱-.
날카로운 단검이 약제사의 귀 끝을 스쳐 등 뒤의 벽에 박혔다. 아드리안 공작이 돌아서자마자 그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뒤를 붙잡혀 끌려왔다. 영문도 모른 채 이상한 사내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는 약제사는 퍼렇게 질려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잿빛 눈의 사내는 야비하게 그르렁대며 웃었다. ‘만일 이 마을에서 성주와 아드리안 공작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그때는….’
‘아무 말도, 아무 말도 않겠습니다! 저는-,’
‘쉬잇-.’
‘…….’
‘조용히 해야지. 누가 들으면 내가 협박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그래. 자, 그럼 약속 잘 지키게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

킬킬…. 사내는 그렇게 웃으며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풀썩….
곧이어 풀린 다리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너무 충격적인 사건에 온 몸에 기운이 빠져나갔다.약제사는 멍한 정신으로 잿빛 사내가 위협하던 말들을 떠올렸다. ‘조용히 해. 아무튼 이 집에서 성주들이 했던 짓들은 다 잊는 거다. 무엇을 봤든, 어떤 행동을 했던지 간에.’ …어째서, 무엇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걸까. 성주들이 무엇을 했다고? 내가 뭘 봤기에…? 그들이 무슨 이상한 짓을 했었던가? 봐서는 안 되는 뭔가를 했었던가? 이상한 것, 봐서는 안 되는 것………………?  

‘……엇…!’

어라. 그러고 보니 보통 약관이 넘은 친형제가…그런 식으로 얽혀있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발목을 다쳐 안고 다니는 거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앉아있는 동안도 거의 품 안의 새끼 새처럼 끌어안고 있었으니 그건 좀……….

그 순간 루디의 얼굴이 허옇게 탈색됐다.  

성주의 늘씬한 허리를 항시 끌어안고 있던 사내, 흑발의 무시무시한 냉막한 청년…. 성주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마다 오장육부가 뒤틀린다는 듯 서늘하게 노려보던 그의 눈빛이 왠지 익숙한데 이상타 싶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인데…? 그러니까, 사내가 저런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볼 땐-
그래.
성욕을 느낄 때지…!

‘…이런 젠장. 그거였군. 귀족들이란 정말이지-!’












덜컹---


“음….”
“…불편하십니까?”

유엘은 반쯤 잠든 아힌스를 고쳐 안으며 물었다. 많이 피곤했는지 아힌스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유엘은 씁쓸히 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 봤다. 그간에 많이 야위고 창백해진 뺨이 안쓰러웠다.

“쉽게 잠이 오십니까?”
“…….”
“나라는 짐승을 옆에 두고, 잠이 오냔 말입니다.”
“…….”
“…형님.”
“…….”
“…일어나세요. 지금 일어나지 않으시면 당신을 욕보이겠습니다.”
“…….”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완전히 잠든 모양이었다. 유엘은 쓰게 웃었다. 어차피 잠든 걸 알고 한 말이다. 깨어있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그는 마차가 흔들리 때마다 흐트러지는 아힌스의 금발을 곱게 쓸어 넘겼다. 그가 직접 감겨주고, 말려주고…한 올 한 올 곱게 빗긴 머리칼이었다.
“당신은 가끔 나를 미치게 합니다.”
유엘은 아힌스의 등을 습관처럼 토닥이며 독백했다. 이따금 바람결에 부드러운 향이 퍼질 때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째서 이 남자가 이토록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형님이었다, 친형님…. 그는 여자도 아닌 남자였으며 딱히 성적 매력을 뽐내고 다니는 타입도 아니었다. 유엘에게 살갑게 말을 건넨 적은 물론 한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마도 벌써 미친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서 딱 하나, 반려로 맞고 싶은 사람이 하필 당신이라니.”
이십 년을 두고도 잊지 못했다. 샤휀을 찾아간 것부터가 실수였다. 치기 어린 시절의 허상이라 생각했던 존재는 이젠 실체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유엘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힌스는 유엘의 운명이었다. 비록 유엘은 아힌스의 운명이 아니더라도, 그 반대는 맞았다. 이제와 샤휀을 떠난다 하더라도 자신은 평생 이 남자를 잊지 못하리라.

“나쁜 사람…. 나를 원하지 않는 당신이 밉습니다.”

그러나 만일 아힌스가 자신을 원한다 해도…그건 그거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차라리 혼자 가슴앓이를 하다 미련을 접는 편이 나았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소원이었다. 그를 안고, 만지고 은애하고…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참을 수가 없었다. 아힌스가 곁에 기대올 때면 이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유엘은 무수히 싸웠고 무수히 패배했다. 몇 번의 키스는 그 과정의 부산물이었다.
“…….”

‘이 미천한 것은 슈스켈 푸쉐라고 합니다, 전하. 과거엔 외르겐 가의 패륜아로도 불리었지요.’

슈스켈 외르겐…. 잿빛 사내가 떠오르자 차오르던 욕망의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슈스켈 외르겐, 슈스켈 외르겐, 슈스켈 외르겐……. 그가 여기 있었던가. 하필 여기 샤휀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던가.
“…….”
유엘은 그 사내를 알았다. 슈스켈 외르겐, 외르겐 가의 패륜아. 아직도 사교계에 이따금씩 회자되는 그 불명예스러운 이름.

‘들으셨어요 도련님? 외르겐 백작가 말이에요! 세상에, 그 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으셨죠?’
‘……대강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있겠는가, 대 이슈가 되어버린 스캔들을. 세간의 일에 무심한 유엘이지만 외르겐 가의 추문만은 귀에 꽂히듯 들어왔다. 친누이를 사랑한 사내의 비극적인 말로…, 그리고 그들 사이에 육체적 관계가 있었는가가 최대의 관심사였지. 십대의 유엘은 씁쓸히 웃었었다. 그게 그리도 죄가 된단 말이냐. 실상 저들도 뒤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더러운 짓을 하는 주제에 친 혈육의 사랑만은 용납할 수 없나? 그게 그토록 추잡하고 더러운 일인가, 응?
유엘의 분노를 모르는 하녀는 가볍게 말을 전했다.
‘그 백작가의 아가씨, 어제 밤에 목을 매어 죽었다 네요. 쯧쯧.’
툭….
‘…뭐…?’
‘외르겐 백작이 자살을 권했나 봐요. 그리고 아들은 차마 죽일 수 없었는지 뺨에 칼자국을 내고 쫓아냈답디다. 젊은 청년인데 누이의 시체를 확인하고는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는지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웃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대요.’
‘…….’
‘그래 봐야 이미 가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지만…. 아무튼 죽은 아가씨가 가엽네요. 예쁘고 사랑스런 아가씨였다는데 불쌍하기도 하지.’
여자의 혀 차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러나 유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선 죽었다는 여자의 잔상이 자꾸만 떠올라 숨이 가빠왔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사람들이 몇 마디 한다고 목을 매어 죽다니, 그까짓 것 무시하면 그만 아닌가? 여자가 한심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내 죽은 여자의 얼굴이 그의 금빛 천사와 겹쳐지며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그 녀석과 여자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나 유엘은 저도 모르게 전신을 후들후들 떨어댔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슈스켈 외르겐이란 사내가 동족처럼 다가왔다. 아마 자신이 그 슈스켈이란 사내였어도 견딜 수 없었을 거다. 진실로 아끼던 존재가 한줌 흙으로 화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찌 멀쩡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있고부터 유엘은 점점 더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자주 꾸는 꿈 속에서 그의 천사는 이따금씩 피를 묻히고 나타났다. 몹시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안했다. 얼마 후 그는 군에 입대했다. 전쟁터에 나가긴 이른 나이였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
유엘은 어느새 식은땀이 밴 손바닥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었다. 쓸데없는 기억-. 그렇게 자위했지만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는 불안과 불쾌감이 뒤섞여 들었다. 그는 아힌스의 고요한 얼굴을 응시했다. 잠들어있는 그의 혈색은 평소보다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형님.”
“…….”
“계속 주무시는 겁니까?”
“…….”
대답의 없는 자의 심장에 유엘은 가만히 귀를 가져갔다. 통통통…규칙적인 박동에 그는 안도했다. ‘아무렴….’ 그래. 적어도 아직은 괜찮았다. 아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 외전 : 슈스켈 푸쉐, 혹은 외르겐



열 아홉까지의 슈스켈 외르겐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그는 백작가의 외아들이었고 가문의 기대주였다. 미남은 아니지만 준수한 외모에 무엇보다 머리가 좋았던 그는 어디에서나 환영 받았다. 입담 좋고 재치 있는 사내란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였기에 그가 평균 한 달 동안 받는 각종 살롱과 파티의 초청장은 서랍이 꽉 찰 정도였고 수많은 여성들로부터 구애가 끊이질 않았다. 친구들은 그런 슈스켈에게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와 연줄을 만들어 보려 아등바등 매달렸다. 슈스켈이 그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깨가 조금 으쓱하는 건 호기로운 젊은이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슈스켈 외르겐이 단숨에 벼랑 끝까지 추락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시작은 어느 삼류 찌라시에 그에 대한 폭로기사가 실리면서부터였다.

「남매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륜인가 로맨스인가?」
「외르겐 백작가의 숨겨진 추문, 여동생과의 은밀한 연애」
「애욕전선, 백작의 딸」

표제어는 갈수록 자극적으로 진화했다. 분노한 외르겐 백작이 아무리 배후를 추적해도 찌라시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말 많은 사교계에서 근친이란 군침 도는 소재였다.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황성에선 슈스켈 외르겐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비올리따 외르겐의 이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들에게 의혹의 시선을 던졌다. 사실일까 아닐까. 두 사람 사이에 과연 육체관계는 있었을까. 천한 호기심은 최소한의 예의도 몰랐다. 발 빠르게 입 싼 귀부인들이 말을 옮겼고 외르겐 백작가는 굳게 현관문을 걸어 잠갔다.
‘그게 사실이냐.’
‘…뭐가 말입니까.’
‘애비 입으로 그 더러운 소문을 꺼내야 할까? 말해봐라. 네 놈이 정말 올라와 그런 짓을 했느냐?’
강직하고 보수적인 중년의 백작은 뺨 언저리를 부르르 떨었다. 추문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그는 참을 수 없어했다. 사실 백작이 찌라시 따위를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소문이 돌기 전 호먼 남작가에서 일방적으로 파혼을 요구해 왔었다. 영문을 몰라 하는 백작에게 당돌한 호먼가의 아들은 정숙하지 못한 여인과 혼인하고 싶지 않다 말했다. 그는 소년의 눈에 가득 차 있던 경멸을 떠올렸다. 믿고 싶지도 않고, 또 믿지도 않았지만 아들의 확언을 들어야 마음이 놓일 듯 했다. 외르겐 백작은 아들의 잿빛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사실이구나.’
‘…….’
‘…사실이었어. 그 소문이! 그 더러운 추문이!!!!!!!’

아버지의 절규를 들으며 슈스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거짓이라고 발뺌할 수도 있었다. 평소 그가 그랬듯 적당한 거짓말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었다.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슈스켈 마음 속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 겨울, 슈스켈은 모든 걸 잃었다. 연인은 죽고, 부모로부터는 절연 당했으며 맨 몸으로 내쫓겼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부모가 직접 새긴 뺨의 흉터뿐이었다.  









'머리털 색이 신기해서 주워와 봤다. 눈 속에서 바둥대는 네 모습을 테라스에서 지켜보고 있었거든.'
'…………뭐?'
‘재밌었다. 폭설을 맞으며 절규하는 네가 마음에 들었어. 그러나 그대 목소리까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야. 그러니 내가 허락할 때가 아니면 말하지 마라. 거친 음성이 내 예민한 청신경에 몹시 거슬려.’
'…….'

삼 년을 헤매고 마침내 눈에 파묻혀 죽어갈 무렵 그를 구해준 사람은 빌어먹게 건방진 변두리 성의 주인이었다. 죽 뻗은 긴 다리를 꼬아 앉은 채로 이쪽을 내려다 보는 눈길은 오만불손했다.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구경하듯이 금발 애송이의 눈빛은 매우 노골적이었다. 지금에 와 돌이켜 생각하면 오랜만의 외부인이 신기해서 그랬던 것 같지만 당시의 슈스켈은 아힌스가 어떤 놈인지 따위 알지 못했다. ‘저 새끼가 지금 날 구경하고 있는 건가. 좆만한 자식이…!’ 맨 몸으로 집시 생활을 하면서 그는 거칠어졌다. 아무렇지 않게 사기도 잘 치고 도둑질도 했으며 술 먹고 드잡이 질 하는 건 예사였다. 약관도 안 넘은 애송이 성주의 위엄 따위야 가소로웠다.

'허, 이거 참. 살려달란 말 안 했소마는? 꼴을 보아하니 이 성의 주인이신가 본데, 그 거만한 말투는 좀 집어치우시지. 옘병.'
'…….'

애송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이윽고 하인에게 명해서 슈스켈의 머리에 양동이 물을 퍼부었다. 아무리 실내라지만 겨울날 찬물에 쫄딱 젖어버린 슈스켈은 분노했다.

'씨발. 이 어린 놈의 자식이…!!'   
'시끄러워. 닥쳐. 입 조심해! 난 아드리안의 핏줄이다. 말을 삼가라.'
‘뭐? 말을 삼가? 지가 무슨 왕자라도 돼! 아드리안의 핏줄이라 봐야 기껏해야 멀고 먼 방계의 핏덩이쯤 되겠지. 이거 아주 웃기는 새끼 아냐?’
‘…새, 새끼? 이, 감히 나에게!’

슈스켈 뺨의 흉터가 보이지 않는지, 아니면 제 알량한 권력을 믿고 저러는 건지 성주는 끝까지 고압적으로 우겼다. 심지어는 제 하인들 조차 슈스켈이 껄끄러워 멀찍이 물러나 있는데 성주 혼자만 소황제처럼 오만했다. 거기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갖고 슈스켈의 욕설 한마디 한마디에 부르르 떨었다. 아주 어지간히도 전형적인 귀족 놈이었다. 슈스켈은 배알이 뒤틀렸다. 저 곱상한 얼굴하며 마디마디 섬세하고 우아한 자태라던가 부드러운 억양의 표준 말씨조차 재수없었다. 아마 꽤나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겠지. 곱디곱게 자라 세상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애송이 귀족….
‘퉤-!’
바닥에 침을 모아 뱉자 대번에 성주의 얼굴이 구겨졌다. 결벽증까지 있는지 침 뱉은 데로는 눈도 못 돌리고 헛구역질까지 했다. ‘아주 가지가지 하시는 군. 킬킬….’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니 건방진 것 정도야 너그럽게 넘어갈까 했는데 저 꼴을 보니 재밌어서 자꾸만 더 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는 옆에 놓여있던 컵 속의 물을 한입에 털어놓고 양치질 하듯 가글가글 하다 꿀꺽 삼켰다. 성주의 안색은 시체보다도 창백했다.

'더…더…더…더러운 놈…!!!!!!’
‘더러우면 물러서시지. 기분 나쁘게 사람 관찰하지 말고.’
‘침 튀기지 마! 더럽게! 게다가 물을 그렇게 역겹게 마시다니, 맙소사. 평민들이란 다 너같이 천박하더냐?'
'글쎄올시다. 소인만 특별히 이런 건지 다른 놈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보다 더 더러운 놈들도 많습죠. 예를 들면 일주일은 안 빤 양말을 벗어 코를 푸는 놈들도 있고, 그걸 또 도로 신는 놈들도 있고….'
'입 다물어!! 더 이상 말하면 그 방자한 입을 꿰매 버릴 테다!'

풉….

슈스켈은 배를 움켜 잡았다. 고상한 말로 화내는 자칭 아드리안 공자는 흥분으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씩씩대며 방을 뛰쳐 나갔다. 더러운 것들과는 도저히 상종할 수 없다는 듯이.

‘하하하…. 나 참. 웃기는 자식. 마음에 안 들면 이쪽을 내쫓으면 될 일이지 저가 도망가 버릴 건 또 뭐야. 비천한 평민이래도 구경할 구석이 아직 남았다 이거야?’

가소롭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제법 귀엽기도 했다. 큰소리 땅땅 치면서 바락바락 대들 때는 언제고 더러운 건 못 참겠다며 도망가다니 진짜 웃기는 놈이었다. 슈스켈은 턱을 쓸며 앉은 자리에서 방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 고상한 취향의 방에는 값 나가는 물건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화려하거나 번쩍이는 것들은 아니지만 슈스켈의 눈은 예리했다. ‘이거 생각보다 귀한 분이셨던가…? 변방의 귀족 치고는 재정상태가 괜찮은가 본데.’ 슈스켈은 비죽이 웃으며 결심했다. 올 겨울은 여기서 나야겠다. 그렇잖아도 갈 데는 없고 얼어 뒈지는 줄 알았는데 마침 딱 안성맞춤이 아닌가. ‘귀하신 나리에겐 좀 미안하지만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그 애송이 성주는 적당히 발라먹고, 이곳 영지에서 적당히 분탕질 좀 치면서 봄이 오면 한 재산 해가지고 나가야겠다.’
…외르겐 백작가의 총아는 집 나온 지 딱 삼 년 만에 완벽한 날강도가 돼있었다.



건방진 성주는 생각대로 순진했다. 선생도 없이 수천 권의 책을 독파한 나름 독서파 엘리트였지만 그게 일상생활 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인지 은근히 어리숙하고 서툰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슈스켈은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슬슬 꼬여냈다. 그리 어려운 과정은 아니었다. 말을 가르칠 땐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다지만 성주에겐 당근, 그거 하나면 만사 오케이였다. 외로운 청년은 자상한 한마디 말에 감동받고 따스한 배려 한번에 넘어갔다. 겉으로는 아닌 척, 무수히 방패를 두르고 있지만 한 꺼풀 벗겨 놓으면 시골 처녀보다도 순진한 남자였다. 그걸 대번에 파악한 슈스켈은 성주가 골머리를 앓고 있던 여러 가지 대내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며 신뢰를 쌓았다. 물론 나중에 뒤통수 칠 걸 작정하고 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지방 토호들이 어린 성주를 우습게 알고 세금을 횡령한다거나 하는걸 잡아내 단단히 혼을 내면서 뒤로는 적당히 봐주고 뇌물을 받아 먹는다거나…성의 살림을 봐주는 척 하면서 조금씩 값비싼 물건들을 빼돌린다거나. 물정 모르는 성주는 차차 대부분의 일들을 슈스켈에게 일임했다. 성주의 몸이 약해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없던 탓도 있지만 슈스켈 자체를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당시의 아힌스는 지금보다 훨씬 더 순수했다. 그래서 그는 옆에서 형처럼 돌봐주는 슈스켈을 한 점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성주가 단 한가지 눈치채고 질색한 일이 있다면 슈스켈이 마을 창녀들을 성으로 불러들이는 일이었다. 누가 결벽증 아니랄 까봐 낯선 타인이 성 안에 들어오는 건 귀신같이 눈치채고 화를 내는데…슈스켈은 그가 그럴수록 더더욱 여자들을 끌어들였다. 참 비뚤어진 심보였다. 남이 화를 내거나 하지 말라 하면 슈스켈은 더 하고 싶어졌다.

'아힌스. 이건 아주 자연스런 일이라고. 남자가 여자를 찾는 건 너무나 당연한 세상의 이치야. 원 이렇게 순진해서야….'
'여자가 왜 필요한데? 네 방에서 들리는 이상한 신음 소리도 그렇고, 나는 불쾌하다. 기분 나빠. 내 성에선 그런 짓 하지마.'
'나 참 까다롭게 굴기는. 그럼 넌 지금까지 여자 한번 안아본 일이 없단 말이야? 내숭 떨지마. 어차피 피차 같은 사내니 다 아는 사정이잖……아힌스?'
'…….'
'…맙소사. 너 설마 지금까지 동정인 거냐?'
'…닥쳐!'

으하하! 슈스켈은 배를 잡고 웃었다. 평민들은 어떤 지 모르지만 귀족 가의 아이들도 보통 열 넷, 열 다섯이면 첫경험을 하고 성에 눈을 뜬다. 그런데 녀석은 스무 살이 되도록 아무것도 모르는 깨끗한 몸이라니…. 그러니 이렇게 결벽증인거지. ‘푸흐흡….’ 이상한 웃음을 흘리는 슈스켈에게 아힌스는 화를 냈다.

'그런 건 성혼을 한 후에나 할 것이다. 너처럼 아무나와 굴러 먹지는 않아.'
'흥. 웃기지 마라. 사내 놈이란 다 똑 같은 거지, 같잖은 변명은!'
'이…!'
'이봐, 성주님.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그럼 넌 욕구가 생길 때 어떻게 해결해 온 거냐. 설마 혼자서 손으로?'
'?'
'그냥 솔직하게 말해봐. 놀리지 않을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손으로 혼자 뭘…?'
'…….'

…이건 좀 심하군….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에 슈스켈은 난감했다. 아마도 아힌스는 성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듯 했다. 보아하니 책도 고리타분한 것만 읽는 게, 플라토닉 러브라든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 밖에는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아주 무지하다기 보다는 정말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달까. …그렇지만 그게 더 골치 아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집사라는 늙은이는 애가 저렇게 크도록 뭘 가르친 거냐. 최소한 성교육은 좀 시켰어야 할 게 아냐! 이러니 이 곳 성의 하녀들이 못 먹는 떡 쳐다보듯 밤마다 허벅지나 찌르고 살지. 지척에 있는 기가 막힌 미남자가 소 닭 보듯 눈길 하나 주지 않았을 테니 얼마나 속들을 끓였을꼬.’


'…인심 썼다. 아힌스, '손'으로 한다는 게 어떤 건지 가르쳐 줄 테니 여기 앉아봐.'
'?'
'자 착하지, 다리 벌려.'

의심스런 눈빛을 던지면서도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르는 아힌스는 꼭 병아리 같았다. 이쪽이 제 엄마라도 되는 양 믿고 따르는 게 아주 귀여웠다. 슈스켈은 피식 웃었다. 순진한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이 이러할까. 녀석을 가르치다 보면 어쩐지 삶의 보람이 생겼다. 잘 이끌어 주고, 잘 가르쳐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 정작 그가 가르치는 내용은 죄다 쓰레기 같은 것들이었지만 불행히도 슈스켈은 그게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했다)

스윽-.

'뭘…?'

뭘 하는 거냐. 아힌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 빠른 슈스켈은 그의 블리오를 걷어 올리고 언더튜닉을 벗겼다. 그리고는 당황하는 아힌스에게 살살 눈웃음쳤다.

'가만있어. 좋은 걸 가르쳐 줄 테니.'  
'…….'
'오호라-. 이것 봐라? 아래쪽 털도 옅은 금빛이로군. 킬킬….'

아힌스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보통 사람만큼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지가 약이라더니 딱 그 짝이었다.

'아힌스, 왼손으로 성기를 받치고 천천히 주물러 봐. -그래, 잘한다. 영특한 녀석.'
'………아….'   
'쉬잇-. 착하지, 그래. 그런 식으로 계속해.'
'……이상…해….'
'이상하긴! 아주 잘하고 있어. 이제 오른 손으로 성기 끝을 긁어 봐. 다치지 않게 살살…. 고환은 계속 주무르고.'
'앗……. 아…흑…. 슈스켈…….'
'…….'

아힌스는 슈스켈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했다. 그는 몇 번 기둥을 훑어 내리고 뿌리 쪽을 자극하며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렸다. 그리고 곧이어 잠시 안쪽 허벅지가 바르르…떨리다가는 촤악…, 하얀 액이 흘러 나왔다. 아힌스는 학학…숨을 내쉬며 살짝 충혈돼 물기 어린 눈으로 슈스켈을 올려다 봤다.

나 잘했지? 라는 표정-.

'……그래. 잘했다…….'
'네 코에서 피가 흐르는군. …더러워. 내 카펫에 흘리지 말고 어서 닦아.'
'……씨발. 너 의외로 끝내주는구나.'
'욕하지 마라. 네 말투는 정말 몇 해를 지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천박하게시리.'

잠시 당황했던 슈스켈은 곧 표정을 수습하고는 아힌스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순진해 뵈는 것이 못된 놈에게 걸리면 잡아 먹히기 딱 좋았다. ‘성질은 뭣 같은 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의외로 야하군….’

'아힌스. 이건 앞으로…음,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가끔 성기가 설 때가 있잖아. 그 때 하는 거다. 괜히 안하고 쌓아두면 병 생겨. 장래의 니 마누라를 생각해서라도 분발해야지.'
'응.'
'휴우…. 내가 가르치긴 했지만 잘한 건지.'

입맛이 썼다. 어린 남동생이 자위하는 걸 목격한 것 마냥 기분이 영 구려서 슈스켈은 연초를 물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내놈이 저렇게 야해서야 여자 쪽이 도리어 민망할 것 같았다. 양심상 키스까지는 가르치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아힌스에게 이 이상의 성적인 지식은 알려주지 말아야겠다 결심했다.
‘…가만. 근데 내가 왜 저 녀석을 걱정하지? 벗겨먹고 나르면 그만인데.’

슈스켈은 서서히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자신을 예감했다.




아힌스에게 성적 유희를 가르치지 않은 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성에 대한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힌스는 슈스켈의 방탕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파국의 전조는 애를 뱄다며 찾아온 어느 계집의 배를 걷어차면서부터였다.

‘믿을 수 없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면 여자를 임신시키지도 말았어야지. 너의 책임감이란 고작 그 정도인가? 애가 생기면 걷어차서 유산부터 시키는 게 네 방식이냐?’

아힌스는 정말 불같이 화를 냈다. 뱃속의 태아가 자기 핏줄도 아닌데 그는 진심으로 연민했다. 그리고 죄책감조차 없는 슈스켈을 탓했다.

‘실망했다 슈스켈. 너라는 사람을 잘못 봤던 모양이야.’

여자를 유산시킨 이후부터 아힌스는 전처럼 슈스켈을 믿고 따르지 않았다. 그는 조금씩 내줬던 마음을 거둬갔다. 그러고도 슈스켈이 정신 못 차리고 사고를 치자 그는 아예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발걸음조차 끊었다. 얼마 안 있어 대대적인 감사가 시작되고 슈스켈의 각종 비리가 드러났을 땐, 아힌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 내 재산이 탐이 났나? ’
‘아힌스.’
‘너도 역시 다른 놈들과 다를 게 없어. …나를 속였지. 그리고 나는 또 바보같이 속아 넘어갔어. 그렇게 당해왔던 주제에.’
‘…미안하게 됐다.’
‘미안할 필요 없어. 속은 내가 멍청했던 것뿐이다.’

아힌스는 그 동안 슈스켈이 빼돌렸던 가물(家物)들을 모조리 되찾아 창고에 쳐 박았다. 그리고는 그 물건만큼의 가치를 현금으로 환산해 슈스켈에게 건넸다.
‘부족하면 말하게. 더 채워 줄 테니.’
그리 말하며 성에서 나가달라 요구하는 아힌스의 푸른 눈은 차가웠다. 상처를 받으면 받을수록 마음에 철갑을 두르는 남자였다. 부러질지언정 결코 휘지 않는 성격이었다. 아마도 이 남자가 전처럼 슈스켈을 믿고 따를 일은 이젠 죽었다 깨나도 없을 터였다.
‘…….’
속이 쓰렸다. 슈스켈은 누이가 죽은 후로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처음엔 그저 좀 사기치고 뜯어내려 했던 것뿐인데 어느 틈에 이렇게 곁을 내줬을까. 아힌스가 그에게 보였던 호의와 무한한 신뢰, 그 모든 것들을 잃는다는 것이 이렇게나 아프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돌아서는 아힌스의 얼굴은 지독하게 냉정했다. 순진하다고만 생각했던 애송이가 그렇게 무섭도록 차가워 질 수 있는 녀석인줄 처음 알았다.

'…아힌스. 절대로 후회할거다.'

끝까지 허세를 부리며 돌아서는 심장은 참으로 쓸쓸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슈스켈은…자신은, 어쩌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그를 아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당연한 사실을.





<fin.>




* 슈스켈 푸쉐 :

회색 눈과 회색 머리 & 날카로운 이목구비의 나쁜 남자.
특기: 사기&협박&섹스
취미: SM play. 도박.
이상형: only 비올리따
성격: 의외로 누구 돌봐주는 걸 좋아한다. 한번 마음에 든 건 욕먹으면서도 끝까지 챙겨주는 타입.





blue blood < 외전1 -a pair of lovers >


비교적 포근한 날이었다.

눈이 간간이 내리기는 했지만 바람은 잠잠했고 햇살은 구름 사이로 비쳐 사뿐히 대지 위에 내려앉았다. 잣나무 가지 위에 쌓여있던 무거운 눈이 호르륵 떨어질 때면 올망졸망 노닐던 참새떼들이 놀라 푸드득 날갯짓을 해댔다.
연중 이런 날만 계속된다면 북부도 꽤 살만할 터였다.

그러나 모처럼 좋은 날씨에도 슈스켈 푸쉐의 머리 위엔 먹구름만 가득했다. 매사에 비딱하고 배배 꼬인 그의 성품을 고려하면 그게 뭐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 해도 평화로운 한낮에 인상을 벅벅 쓰고 있는 사람을 상대하기란 참 뭣 같은 짓이었다. 결국 홀짝홀짝 술잔을 기울이던 세드릭은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한심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리 불만이 많으시면 차라리 공작 전하께 직접 화를 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뭐 심심풀이 땅콩이랍디까? 번번이 여기 와서 성질을 부리게.”

포도주의 밀봉된 코르크 마개를 잡아당기던 슈스켈 푸쉐는 신경질적으로 따개를 내던졌다. 뾰족한 두 개의 철제 송곳이 바닥을 구르는 꼴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나 마주 앉은 두 사내 중 누구도 그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몇 달새 그의 횡포에 익숙해진 세드릭은 혀를 차며 버려진 따개를 주워 익숙한 손놀림으로 코르크에 끼워 넣었다.   

“힘만 준다고 마개가 열리나요? 보세요, 이건 이런 식으로 교차시켜서…,”
“이 자식아, 나도 알아.”

슈스켈은 버럭 소릴 내질렀다.

얼마 전부터 포도주를 밀봉할 때 코르크 마개를 쓰는 게 유행이었다. 헝겊으로 밀봉할 때보다 보관하기도 좋고 숙성이 잘된다나 뭐라나…? 평민들 다니는 선술집이야 여전히 구식 방식을 고수하지만 돈 좀 있다 하는 귀족들은 죄다 코르크 마개 포도주를 선호했다. 슈스켈로서는 아주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술 맛이 좋아 봐야 다 거기서 거기지, 마시고 취할 수만 있으면 되는 걸 아주 배때기들이 불렀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사실 그는 코르크 마개 따는 법에 익숙지 않았다) 물론 아힌스는 그런 슈스켈의 주장을 귓전으로도 듣지 않았다.
‘야만스럽긴. 와인이란 자고로 향을 취하고 혀 끝으로 굴리며 그 오묘한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거야. 신께서 허락하신 최고의 음료를 너처럼 들이붓는다면 그거야말로 죄악이다.’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 슈스켈과 아힌스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쫄쫄쫄…….

어느덧 마개가 제거된 술병에서는 감미로운 액체가 흘러나왔다. 슈스켈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잔을 받아 들었다. 그는 뺨의 흉터를 실룩이며 투덜거렸다.

“어째서 아힌스만 아프단 말이냐. 화살을 몇 대나 맞은 놈은 저렇게 멀쩡한데, 왜 아힌스만 계속 골골대느냐고?”
“아휴 선배님…. 제발요! 그 말 한번만 더 하시면 백 번입니다.”
“제기랄…….”

탁자를 내리쳐봐야 답답한 마음이 해소될 리는 없다. 슈스켈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힌스는 여전히 아팠다. 수시로 고열에 시달리고 감기는 좀체 떨어지질 않는다. 조금 나아질만하면 악성 빈혈이 다시 찾아오는…, 끊임없는 병의 악순환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몸조리만 잘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했지만 완전히 입맛을 잃어 먹는 데 의욕을 보이지 않는데야 병을 이겨낼 기본 체력부터 무너지는 것이다. 아드리안 공작이 떠나있던 며칠간 섭식을 끊었던 것이 아힌스의 약한 몸에는 엄청난 타격이었던 것이다.

“제길….”

슈스켈은 후회했다. 어차피 저렇게 죽고 못사는 거 훼방은 뭐 하러 놓았을까. 공작이 때맞춰 돌아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아힌스가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다 섬뜩했다. 그 놈의 연정이라는 게 다 뭔지-.
…지긋지긋했다.
아힌스만은 피해가길 바랐는데 이미 너무 늦어있던 모양이다. 외로운 녀석이었던 만큼 사랑에 빠지는 시간도, 그 깊이도 남달랐던가 보다.     

“좀 침착하니 기다려보세요. 평소에는 그리 냉철한 척 하시더니 왜이리 안달이십니까? 조금씩이지만 성주께서 차도를 보이고 있잖아요. 곧 나아지실 겁니다.”

그러나 그리 말하는 세드릭 역시 썩 속이 편한 건 아니었다. 아무렴 짝사랑하던 상대가 아프다는데 마음이 좋을 리 있나. 이전까지 성주가 몸이 약하다 할 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요즘 들어서야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건강이 나쁘다는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말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신분이 높으면 무얼 하나. 방 밖으로 한발자국 내디디는 것 조차 힘들어 하는데.   

“…아무렴, 뭐라 해도 역시 건강이 최고지.”

이층 침실에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있을 성주를 생각하자니 돌덩이를 얹은 것 마냥 가슴이 무거워졌다.








***


콜록…콜록……! …읏….

“…괜찮으십니까, 형님?”

기침을 연발하는 아힌스가 염려스러웠다. 마른 등허리를 도닥여주며 유엘은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 …왜 이렇게 약한 걸까. 자신의 반 정도만이라도 건강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아힌스는 언제나 약했다.
이십 년 전의 어린 시절에도, 그리고 다 자란 지금 까지도….

“물을 좀 드시겠습니까?”

도리도리-

“그럼 식사를 좀 더,”
“…됐다. 도무지 식욕이 안나.”

어떻게든 한 입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안달이 난 동생 마음도 모르고 아힌스는 무심히 거절했다. 질 좋은 금사처럼 윤기 흐르던 머리칼은 푸석해진 지 오래였다. 혈관이 비치는 창백한 뺨도, 마른 손가락도……모두 다 안쓰러웠다. 유엘은 저도 모르게 형님의 몸을 바싹 당겨 끌어 안았다.

…어째서……?!

생사의 경계에서 살아 돌아온 유엘은 오히려 멀쩡했다. 심장 가까이 박혀있던 화살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고 나머지 상처도 달포가 지나가자 그럭저럭 아물었다. 의원은 아드리안 공작을 치료하며 몇 번이나 혀를 내둘렀다. ‘회복이 참……. …이런 말은 실례가 될 테지만…음, 거의 몬스터 수준이로군요…. 정말 튼튼하십니다.’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 있느냐며 의원은 인체의 신비를 연구하는 사람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와는 정 반대로 아힌스를 진찰하고 나면 늘, ‘…글쎄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요. 특별히 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이거 참…. 일단 살부터 좀 찌셔야 할 것도 같고…글쎄요……에헴.’ 하는 돌팔이 같은 소리만 해대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같은 부모 속에서 나온 자식이건만 왜 유독 아힌스만 맥을 못 추는 건지.

“…난 괜찮으니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아프고 나면 원래 가끔씩 이래.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

긴 속눈썹을 천천히 깜빡이며 아힌스는 동생을 위로했다. 그리고는 이내 아이처럼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에 유엘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웃어 보이는 형님이 어쩐지 불안했다.

“…뭐가 그리 재미나서 웃으십니까?”
“우습잖아. 난 괜찮은데 혼자서 안절부절…. 킥. 어릴 땐 침이나 흘리던 게 정말 많이 컸구나.”
“제가 언제요.”
“-하. 창피한 건 아나 보지? 그러나 모르는 척 해봐야 소용없다. 아기적에 네가 어땠는지는 내가 다 안다.”

아힌스는 오만하게 콧대를 세웠다. 그러나 이불 속에 폭 싸여서 그런 태도를 취해봐야 우스울 뿐이라 유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귀여운 사람….
사랑스러운 아힌스, 아기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

이불째 끌어안고 유엘은 아힌스와 한 몸이 되어 침대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아힌스는 품위 없는 짓이라며 타박했지만 말처럼 정말 싫은 건 아니었는지 금방 얌전히 안겨왔다. 그래서 이보다 좀 더해도 되나 보다 싶어 입가에 쪽쪽 키스를 퍼부었더니, 이번엔 건방지다며 따귀를 얻어맞았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변덕은 끈질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지난 이십 년간 간직했던 집요함을 십분 발휘해 유엘은 끝끝내 아힌스로부터 키스 허락을 받아냈다. 개처럼 뺨을 핥고 목덜미를 물어뜯기는 것보다야 키스가 낫다고 판단할 것일 테다. …순진하게도.

“아, 감기 옮는다니깐……!”
“괜찮습니다, 감기쯤.”
“귀찮다, 너란 녀석은 아까도 실컷 한 주제에……읍………!”


“…흣………응…….”

짐승처럼 달려드는 기세에 비해 키스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얄팍한 입술을 두드리고 들어와 감미롭게 혀끝을 적시고는 할짝할짝 혀 천장을 훑어 올린다. …간질간질하고…어딘지 부끄러우면서도 벌꿀처럼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흐트러지는 정신을 수습하며 아힌스는 간신히 동생과 호흡을 맞췄다. 몽롱한 가운데 심장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아…하아…. 이제…, 그만…해….”
“…형님…하아….”
“그만해…힘들다, 비켜라 유엘….”
“……사랑합니다, 아힌스.”

머리칼을 넘겨주는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귓불을 어루만지다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칠어지는 숨결도…. 아힌스는 가만히 두 눈을 깜빡이다 무심코 내뱉었다.

“……하고 싶다.”
“!”
“애무해봐라. 날 만족시켜봐…응? 마음이 내키면 상대해주마.”
“…형님.”

유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애써 참고 있는 자신을 자극하는 아힌스가 원망스럽다는 듯, 그는 매혹적으로 미소 짓는 형님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장난이라면 그만두십시오.”
“……킥.”
“…아힌스.”
“왜, 자신 없느냐? …아니면 겁나?”

혀 끝으로 살짝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잘생긴 미간이 서서히 굳어지는 광경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얼굴을 쥐고 있는 손의 미세한 떨림을 느끼며 아힌스는 배부른 포식자처럼 나른하게 몸을 비틀었다. 얇은 실내복이 스르륵 미끄러져 어깨 아래로 떨어졌다. 유두에 스치는 차가운 공기에 아힌스는 파르르 떨었다. 얽혀있는 다리 사이로 단단해진 유엘의 남성이 느껴졌다.

미묘한 순간이었다.

“…형,”


쾅--!

“약 먹을 시간입니다, 성주님-.”

“!”
“!”

유엘과 아힌스는 얽혀있던 채로 얼어 붙었다.
끼기긱-, 동시에 고개를 돌리니 가재 눈을 한 슈스켈 푸쉐가 여봐라는 듯 성큼성큼 들이닥쳤다. 그는 얼음 상태가 되어있는 묘한 자세의 연인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약, 드셔야지요 성주님? 아.프.시.잖.습.니.까. 감.기. 걸려 아프신 분이 무리하시면 안되지요. 대체 무슨 무리를 하고 계셨는지는 미천한 저로서는 짐작도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마치 이런 상황인걸 알고 들어왔다는 듯 슈스켈은 안색 하나 안 바뀌고 유엘과 아힌스 사이를 훠이훠이 갈라놓는다. 둘 사이의 시트를 휙 들어서 경계를 만든 후 흐트러진 아힌스의 옷깃을 정리하는 손길은 잽싸기 그지 없었다. 바람난 딸내미 단속하듯 시트로 칭칭 감아 아힌스를 미라처럼 만들어 놓고서야 그는 만족스럽게 손을 털었다.  

“…….”  

유엘의 표정은 급속도로 냉각되어 갔다. 사람 하나는 잡을 듯한 눈빛이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아힌스 역시 화가 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돌돌 파묻힌 시트 속에서 버럭 소리쳤다.

“슈스켈-! 내가 부를 때까진 마음대로 방에 들어오지 말랬잖아. 그리고 노크는 왜 또 안 해? 내 성에서 살려면 예의를 갖추란 말이……욱…, 쿨럭……!”
“쯧쯧. 것 보십시오. 내가 성질 좀 죽이랬지? 몸도 안 좋으면서 왜 소리는 고래고래 지르시나 그래?”
“…슈스켈 외르겐.”
“-’푸쉐’입니다, 전하. 내친 김에 전하께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짐승과 사람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   
“그건 바로 이성이 존재한다는 거죠. 자제력이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눈 앞에 아무리 맛있는 뼈다귀가 있더라도 몸에 안 좋다는 걸 알면 참아낼 수 있는 게 사람이란 겁니다.”
“콜록…콜록……….”
“보십쇼! 저 기침하는 거! 저걸 보면서도 그 짓을 하고 싶으십니까? 정말이지 사람이 지각머리가-, 쯧!”
“……….”

순식간에 지각머리 없는 사람이 돼버린 유엘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자제력 따윈 약에 쓸 데도 없는 짐승 슈스켈 푸쉐가 과연 저 따위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감기로 허덕이는 형님을 순간적이나마 덮치려 한 건 사실이 아니던가. 절대 손 안 대겠다는 조건으로 굳이 억지를 부려 아힌스의 옆에 붙어 있었던 것이니만큼 슈스켈의 무례함을 꾸짖을 명목이 없었다.

“콜록…. 하아…. 그만해. 내가 먼저 하자고 한 거란 말이다.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애한테 화를 내는 거냐? 너야말로 나이 값 좀 해라.”
“…뭐…? 먼저 하자고 뭘 해…? 허! 참! 하!”

슈스켈은 푸르르 뺨을 털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한달 만에 애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대낮부터 남자 품에 안겨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아니, 이건 원래부터 그랬었나…?
‘제기랄! 애초에 성교육을 제대로 시켰어야 했어!’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해맑은 눈동자를 보라. 민망한 짓을 하다 들켰으면 얼굴도 좀 붉히고 창피해하는 게 정상이거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힌스는 여전히 당당했다. 거기다 ‘그건’ 또 은근히 밝혀서 몸도 안 좋은 게 툭하면 제 동생을 침대로 유혹해대는 게 아닌가. 아마 중간중간 슈스켈이 달려 들어와 말리지 않았더라면 사단이 나도 벌써 몇 번은 났을 것이다.
‘어이구, 속 터져!’  

“그리고 노크 좀 하고 들어와라. 내 누누이 말했건만,”
“아, 네, 네! 그러시겠죠. 죽을 죄를 졌습니다, 성주 나리. 잘못했으니 약이나 드시지요?”

으드득 이를 갈며 아힌스의 손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약사발을 건네자 꿀꺽꿀꺽 잘도 받아 마신다. 쓴 약엔 이골이 난 것이다. 슈스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약 없이는 일주일도 못 버티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하겠다고? 아드리안 공작의 남성은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거의 흉기 수준이다.
…저걸 얘한테 넣겠단 말이냐, 지금!

저 죽일 놈.  
아힌스를 정말 사랑한다면 물건 크기나 줄이고 오란 말이다.

“고매하신 성주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당분간 잠자리를 갖는 건 절대 금지입니다. 건강해질 때까지는 손도 잡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슈스켈은 유엘의 앞에서는 꼬박꼬박 아힌스에게 존댓말을 했다. 자신이 함부로 대하는 걸 보면 공작이 아힌스를 만만히 볼 거라는 기우에서였다. 그러나 존댓말을 한다고 말 속에 숨어있는 가시가 숨겨지는 건 아니다.

아힌스는 비딱하니 받아쳤다.

“알았다. 알아들었다고-.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라. …정말 시끄러워서 원.”
“또, 또 귓등으로 흘리시는 군! 성주님, 약제사 말로는 한 열흘은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 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자중하십시오.”
“…약제사? 그는 집에 다녀 온다며 떠나지 않았던가?”
“오늘 낮에 돌아왔습니다. 하여간에-. 지금 말하던 요지는 그게 아니잖습니까?”
“아아….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그만해. 그보다는…이제부터 다시 한숨 잘 터이니 나가줘.”

아힌스는 창백한 뺨을 쿠션에 기대며 손을 휘저었다. 다분히 귀찮다는 태도에 슈스켈의 뒷목이 당겨왔다.
긴장감 없고 쓸데없이 오만하기만 한 백치 귀족 같으니-!
그러나 약도 다 먹였겠다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슈스켈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돌리며 문을 닫는 순간까지 집요하게 아드리안 공작을 노려봤다. ‘잘해! 이 어린 놈의 자식아! 아힌스한테 또 그 짐승 같은 성욕을 드러내면 자객을 동원해서라도 네놈의 흉기를 잘라버리고야 말겠다!’

…불행인건, 아드리안 공작, 즉 유엘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쪽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식욕이 없다.’
‘목구멍에서 넘어가지가 않는걸.’
‘…괴로워. 소화가 안 된다….’


마음이 아팠다.

잘 먹어야 병이 낫는다는데, 아힌스는 뭐든 깨작거리기만 하고 통 입에 넣지를 못한다. 그저 먹을 걸 가리는 거라면 어떻게 얼러라도 보겠지만 본인도 괴로워하는 기색이라 차마 강요할 수가 없었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형님을 옆에서 지켜만 봐야 한다는 건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생선도 싫고, 돼지고기도 싫고, 야채볶음도 싫고, 곡류도 질색이고……싫고싫고싫고…….

…………….

고민 끝에 유엘은 결국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형님-. 온실에 한번 내려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온실…? 쿨럭…. 거긴 왜…?”
“침실에만 계시면 답답하시잖습니까.”
“……아아. 조금 그렇긴 하지.”

제법 온순하게 끄덕이는 아힌스의 반응에 유엘은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했다. 아힌스의 고상함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러나 뭐라 해도 건강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힘없이 기대오는 아힌스를 사뿐히 들어올리며 유엘은 뻔뻔하게도 그리 생각했다.
…물론 순진한 아힌스는 그저 꽃구경하러 가는 줄로만 알았다. 유엘이 굳이 사람들 안 다니는 복도로 돌아돌아…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유령처럼 걸어가는데도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바빴다. 몸이 약한 탓도 있지만 아힌스는 원래도 좀 게을렀던 것이다.



“다 왔습니다 형님.”
“…그래. 오랜만이군 여기도. 내 아이스베르크는 잘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전에 유엘과 이곳에서 한바탕 다툼을 하고 난 후, 이번이 처음으로 방문하는 거였다. 그때 당시 화가 나서 잡아 뜯었던 아이스베르크들을 떠올리자니 새삼 속이 쓰려왔다.
…몹시 예뻐하던 꽃이었는데.
아힌스는 유엘의 품에 안긴 채로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화초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정원사가 손을 봤는지 많이 정리가 된 상태였다. 아이스베르크도, 부겐베리아도, 후리지아도 온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또……응?  

“…저건 뭐지?”

놀랍게도 온실에서 간단히 차를 즐길 수 있도록 설치된 티테이블 위에는 성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갈한 은식기와 포도주, 그리고 사각으로 접힌 넵킨까지-. 마치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완벽하게 세팅되어있는 차림새를 보고 아힌스는 유엘을 돌아봤다. 너는 어찌된 영문인지 아느냐는 물음을 담고서.

“…제가 준비한 것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

아힌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잘 차려진 식탁을 바라봤다.

“고맙…구나.”

유엘이 왜 굳이 온실에 오자고 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자신이 꽤 오랫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옆에서 신경이 많이 쓰였을 테지. 그러니 분위기를 바꿔 온실에서 꽃도 보며 식사하다 보면 좀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뜻일 게다.
아힌스는 흐릿하게 웃었다. 동생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일부러 온실에 식탁까지 차려놓았는데 또 구토증이 올라오면 그때는 어쩌나.

“유엘, 나는…….”
“드셔보십시오. 몸에 좋은 것들로만 준비했습니다.”

망설이는 아힌스를 의자 위에 앉히며 유엘은 어쩐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힌스는 눈썹을 치켜 떴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저 껄끄러운 웃음은 대체 뭐냐. 이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겐가?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향도 참 묘하다. 마음 속에서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이거, 뭐냐.”
“몸에 좋은 음식입니다.”

사기꾼 같은 녀석. 넌 전에 내게 뱀 고기를 먹일 때도 그리 말했었잖아.

아힌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자 유엘은 자신을 못 믿냐는 듯 은식기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확, 하고 풍겨오는 냄새가 감미롭다. 아힌스는 흘끔 요리를 살폈다. 황금빛의 스프와 질 좋은 송로버섯구이, 그리고 의외로 단출해 뵈는 스테이크가 다였다.

“…….”  
“드셔 보십시오. 위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서 만든 요리들입니다.”

특별히 이상할 건 없었다. 의외로 평범한 요리들을 보며 조금 안도하자 유엘이 재빨리 수프를 한술 떠서 어린애에게 하듯 음식시중을 들었다. 아힌스는 어색함도 없이 한입한입 수프를 받아 먹었다.

“-”
“어떠십니까.”
“생각보다……맛있네…?”

이것 참 의외다. 입맛이 없어 에밀리 부인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조차 넘기기 힘들었는데 이 수프는 예외다.
반응이 괜찮자 유엘은 스테이크도 잘게 썰어주며 먹어보라 재촉했다.
“!”  
…입 안에서 고소한 맛이 확 퍼진다. 스테이크 특유의 느끼한 기름기도 없었다. 아힌스는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맛이 세상에 또 존재한다니-. 뱀 고기 이후로 처음 느끼는 충격이었다.

“맛있구나. 담백하면서도 간이 제대로 뱄어. 이거 뭘로 만든 거냐?”
“스프는 타조고기로 만들었고, 스테이크의 재료는 곰입니다.”
“…타조? …곰?”

아힌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닭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평범한 것들을 주로 먹는 그로서는 다소 낯선 재료들이었다. 그게 뭐더라…? 책에서 보기는 했다. 타조와 곰. 타조는 날짐승이지만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는 못하는 생물이라 들었다. 그리고 곰은…덩치가 크고 네 발 달린 포유류라 했으니…….

“…….”

안타깝지만……. 아힌스가 가진 지식은 그게 전부였다. 북부의 성에서만 살아온 그가 타조와 곰을 실제로 봤을 리 만무하다. 그저, 유엘이 태연하게 말하는 걸 보니 뱀 고기처럼 징그러운 건 아닌가 보다 여길 뿐.

“더 드십시오, 형님. 모처럼 입맛에 맞는 음식이 나왔는데 식도록 두실 겁니까? 음식은 자고로 뜨거울 때 먹어야 맛이지요.”

유엘의 재촉에 아힌스는 더 이상 고민 않고 고기를 썰었다. 거의 한달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였다. 갑작스레 식욕이 요동을 쳤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전까진 음식 냄새도 맡기 싫었거늘….

“맛있다. 이런 음식이 갑자기 어디서 나왔지? 에밀리 부인이 만든 거냐?”
“아니요, 안타깝게도 성에는 그런 식재료가 없었습니다. 이건 모두 약제사를 통해 구해온 것들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형님.”

응응, 착하게도 아힌스는 잘도 받아 먹는다. 예쁘다. 정말 예쁘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우아하면서도 사랑스런 생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유엘은 누가 들으면 뒤통수를 후려갈길 소름끼치는 수식어로 아힌스를 묘사하며 혼자 흐뭇하게 웃었다.

누가 말리랴….
한창 사랑에 불타 올라 콩깍지 쓰여버린 남자를.









- epilogue



온실 앞을 지키고 서있는 슈스켈은 간간이 들려오는 아드리안 공작의 말에 심사가 뒤틀렸다.

- 스프는 타조고기로 만들었고, 스테이크의 재료는 곰입니다.

“저 약삭빠른 놈…!”

왜 타조의 ‘혓바닥’ 이란 말과 곰‘발바닥’ 이란 말은 빼먹느냐 이 사기꾼 공작 놈아.

- 많이 드십시오, 형님.

“진짜, 저걸 달려가서 그냥-,”

약제사가 가져온 수상쩍은 요리재료를 슈스켈이 확인 안 해봤을 리 없다. 그러나 하도 몸에 좋은 거라 수선을 피우는 탓에 혹시나 하고 내버려뒀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아힌스 저놈은 아주 좋단다. 그렇게 깔끔 떨고 결벽증 환자처럼 굴던 놈이 타조 혓바닥 요리와 곰 발바닥에 환장하는 모습을 보자니 허탈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몸에 좋은 거라는데. 그리고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하던 아힌스가 모처럼 먹을 만 하다는데-.

“하여간에 입맛도 희한해. 유난은 있는 대로 떨더니 그런 보양식류가 좋다 이거지? 좋다고. 앞으로 내가 개 잡아 먹는다고 욕하기만 해봐라. 망할 자식.”

잠시 후 식사가 끝나는 듯 하더니 온실 안에서는 묘한 신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응응…. 슈스켈은 쌍심지를 치켜 세웠다. 복도를 돌고 돌아 남들 눈을 피해 몰래 온실로 오더니, 그 이유가 아힌스가 이상한 음식을 먹는 꼴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짓을 하기 위해서였더냐?!
안된다! 절대 안되지. 아무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꼴은 못 본다.   


슈스켈은 거칠게 문을 열어 젖히며 온실로 뛰어 들어갔다.

성질 더러운 사위와 그에 못지 않게 성질 나쁜 장인의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fin.-





* 외전은 part 1 , part 2 , part 3 로 나눠 올릴 예정입니다.
  
독자님들이 강하게 어택하신 노골노골하며 응응하고 에로에로한 씬(…쓸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 유엘과 황제와의 갈등은 part2, part3 에서 나올 듯 합니다만…. 솔직하게 말해서 아직 쓰지는 않고 구상만 해뒀습니다. 여유를 갖고 나중에 천천히 올리려고요.

읽어주신 모든 분들, 좋은 하루되세요.



뱀발.

세드릭과 슈스켈은 절대, never-! 연인관계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 취향이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어서…. 오호호…;


* 슈스켈 푸쉐 :

회색 눈과 회색 머리 & 날카로운 이목구비의 나쁜 남자.
특기: 사기&협박&섹스
취미: SM play. 도박.
이상형: only 비올리따
성격: 의외로 누구 돌봐주는 걸 좋아한다. 한번 마음에 든 건 욕먹으면서도 끝까지 챙겨주는 타입.















안녕하세요 무쓰님.


부족한 글을 재미있게 읽어 주셨다니 고맙습니다.
자유동 퍼옴게시판에 올리셔도 좋습니다.
다만 오타와 비문을 아직 수정중이라 파일은 조금 천천히 보내드릴게요.
외전은 아직 구상중입니다.
완성되면 친니동과 날개동에 올리는 날, 완결 파일과 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



pk님 메일주소 : <[email protected]>

출처 : 날개동












슈스켈은 아힌스를 안고 들어가는 아드리안 공작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거늘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내가 얄미웠다. 흑기사들이 제각기 흩어지고 모든 것이 정리될 무렵까지도 슈스켈은 다리를 꼰 채 곰곰이 생각했다.

“세드릭-.”
“예 선배님.”
“저 두 사람, 항상 저래왔나?”
“?”
“지금까지 같은 방을 써 왔나, 이 말일세.”
“아아…예. 들으셨겠지만 입성할 때 마찰이 좀 있어서 성의 일부가 파손됐습니다. 때문에 방이 모자라 어쩔 도리가 없었죠.”
“어쩔 도리가 없었다라…핑계 한번 그럴싸하군.”

가당치도 않은 핑계다. 아무렴 벌써 며칠이 흘렀는데 그거 하나 수리 못했을까. 샤휀은 방한대비가 잘 돼있는 성이니 갈아 끼울 유리나 덧문을 고칠 장비 따위는 얼마든지 있었다. 마음만 있었다면 방 고치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 결국, 기어이 그 방에서 주무셔야겠다 이거구만. 잠자는 아힌스에게 이것저것 음흉한 짓도 할 수 있고 좋으시겠지. 망할 자식.”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공작 전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형제십니다.”
“미련한 자식. 네가 그러니까 욕 먹는 거야. 둔해 빠져서는!”
“제가 뭘요!”
“닥치고 가서 잠이나 자라. 눈은 쾡한게 아주 산송장 같구먼.”

슈스켈은 허리춤에서 술병을 꺼내며 이기죽댔다. 기껏 다시 찾아 든 샤휀이건만 마음에 드는 게 한구석도 없었다. 불손한 노집사의 눈빛도 기분 나빴고 성에 가득한 땀내 나는 기사들도 짜증났다. 저런 것들 틈에서 그 동안 우리 아힌스가 괴로워했을 걸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다. ‘근육질 바보들이 또 보는 눈은 있어서 밤마다 아힌스 생각하며 딸친거 아냐? 아 씨바.’ 단단히 콩깍지가 씐 슈스켈이었다.

“슈스켈 님도 그만 가서 주무시죠. 피로해 보이십니다.”
“난 아직 생각할 게 남았어. 먼저 가서 자.”
“술 마시면서 무슨 생각을 한다고 그러십니까? 그러지 말고 주무세요.”
“이봐 세드릭, 난 너 같은 단세포 아메바가 아니라서 생각해야 할 게 아주 많아. 내 주름진 두뇌는 언제나 복잡한 사고를 요구하지.”
“…나 참.”

세드릭은 입을 비죽 내밀며 투덜댔다. 불편한 사이지만 모처럼 생각해서 챙겨줬더니 싫은 소리만 잔뜩 들었다. 옛날의 슈스켈은 저렇게 대놓고 상대를 무시하지 않았었는데 정말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그럼 쉬세요.” 세드릭은 퉁명스레 인사하며 뒤돌아 섰다.

“잠깐, 세드릭.”
“왜 부르십니까.”
“자네 말일세. 역시 성주에게 관심 있는 거지?”
“!”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난 누구와 달라서 충분히 이해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몰라? 성주랑 자고 싶냐고-읍-!”
“이거 왜 이러십니까아!”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세드릭이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숨이 막힌 와중에도 슈스켈이 히죽 웃자 세드릭은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펄펄 뛰었다.

“제발 아무 말이나 막 함부로 하지 마세요! 그러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이상한 소문? 너와 성주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그거 벌써 쫙 퍼졌던데 뭘.”
“누가 그럽디까?”
“누구긴 네 동료라는 놈들이지. 뒤에서 맨날 낄낄대며 떠들던데.”
“그 자식들이 정말-.”
“왜 그리 흥분하나? 진짜가 아니라면 어차피 사라질 소문을.”
“……읏.”

말문이 막혀 당황하는 사내를 슈스켈은 흥미롭게 관찰했다. 미끼를 무는 어리석은 물고기를 보듯 이윽고 그의 눈은 예리하게 빛났다.

“세드릭, 마음이 있다면 있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아.”
“…어째서요?”
“내가 도와줄 지도 모르니까.”
“!”
“이런, 뭐지 그 의심의 눈초리는? 내가 못미더운가? 내 사랑이 파국으로 끝났다고 네 사랑까지 망치려는 것처럼 보여?”
“…….”
“설마 그럴 리가! 난 이래봬도 신사라고. 자넬 도왔으면 도왔지 해치지는 않아.”

썩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헛소리지만 의외로 슈스켈의 극적인 과장법은 호기심을 동하게 했다. 세드릭은 망설이며 슬슬 눈치를 살폈다. 슈스켈의 떡밥은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현실성은 없었다. 무엇보다 세드릭은 아직까지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과연 이게 정말 죽지 못할 연정인 건지, 아니면 스쳐 지나가는 바람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지만 그분을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떨립니다. 눈 사태에 실종되셨을 때는 앞이 캄캄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전 그분께 반한 모양입니다.”
“음 음 반했군. 확실해. 그거 반한 거 맞아.”
“…역시 그런 건가요.”

힘없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는 세드릭을 보며 슈스켈은 쾌재를 불렀다. 일이 잘 풀리려니 이런 얼간이가 제 발로 다 걸어 들어온다. 그는 슬슬 머리를 굴리며 세드릭을 구슬릴 계획을 짰다. 이대로도 세드릭이 아힌스를 좋아하는 건 틀림없지만 제대로 써먹기엔 아직 부족했다. 조금 더 부추겨서 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세드릭, 그렇게 실망할 거 없어. 자넨 시작도 하기 전에 안 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매사 그런 식으로 포기부터 하면 평생 연애하긴 글렀지.”
“…….”
“생각해 보게. 혹시 성주가 자네에게 관심이 있는 지도 모르잖나.”
“…그럴 리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래서도 안 되고요. 윤리에 어긋나는 사랑이 어떤 파국으로 치닫는 지는 선배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슈스켈은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미끼를 물지 않으려는 물고기는 시건방졌다. ‘감히 과거의 일까지 끄집어내다니.’ 그는 비뚜름히 웃으며 두 번째 떡밥을 던졌다. 이번엔 좀 더 유혹적이고 과감한 먹이였다.

“그래서, 자네가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다른 자가 성주를 차지한다 해도?”
“!”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나? 평생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사랑인데 말도 못 꺼내고 끝나도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다른 사람이라니…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다만 아힌스의 곁에 질 나쁜 벌레가 꼬였다는 것만은 사실이야.”
“질 나쁜 벌레…!”
“자네가 성주를 좀 더 유심히 지켜본다면 그 벌레의 정체도 곧 알 수 있겠지.”

유혹의 사과만을 던져 놓은 채 슈스켈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럼 나는 이만 자러 가야겠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군.” 발 빠르게 빠지는 슈스켈의 뒤 꼭지를 멍하니 보며 세드릭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질 나쁜 벌레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알듯 말 듯 힌트만 던져 주며 약 올리는 슈스켈이 원망스러웠다. 아마도 오늘 밤도 제대로 잠들기는 틀린 듯싶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세드릭은 머릿속의 벌레를 지우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금발 성주님의 안위도 몹시 염려스러웠다. 아드리안 공작만 아니라면 자신이 그 옆을 지켜줄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열이 많이 오르셨습니다.”
“성 밖에서 만난 약제사는 괜찮다고 했었네.”
“그야 조난당한 것 치고는 놀랄 정도로 무사하시지요. 그렇지만 원체 면역력이 없으십니다. 추위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아힌스의 얼굴엔 발긋하게 열꽃이 올랐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홍조라 착각할 만큼 혈색이 좋았으나 그건 오해였다. 유엘은 초조하게 턱을 괴었다. 모처럼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잘 노는가 싶었더니 형님은 또 앓아 누워버렸다. 의원은 단순한 몸살이니 푹 쉬면 나을 거라 했지만 그는 바짝바짝 애가 닳았다. 잠만 자는 아힌스가 불안했다.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아힌스 님은 보통 사흘에 한번은 감기에 걸리십니다. 그렇지만 오래 앓으시는 편은 아니니 이번에도 곧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그런가.”
“외려 이번에 저는 좀 놀랐습니다. 한기에 그리 노출되셨으니 큰 병이라도 걸리실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하셔서요. 조난당한 동안 명약이라도 드신 모양입니다 허허.”
“음 역시 청사(靑蛇)가….”
“예?”
“아무 것도 아닐세.”


의원이 나간 후 이번엔 집사가 들어왔다. 노집사는 아힌스를 구워먹을 작정인지 벽난로에 한 가득 장작을 넣고는 죽어라 불을 지폈다. “추우시면 불을 더 때겠습니다. 어쩔깝쇼?” 무서운 노인네였다.

“주인님과 전하께서 그리 사라지고 난 후 저 또한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어느 구석에서 살아는 계실까, 하도 걱정이 되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습니다.”
“……그러셨던 것 같소. 형님은 내가 돌볼 테니 집사는 그만 가서 쉬시는 게 좋겠소.”
“잠시만, 가기 전에 잠자리라도 돌봐드리겠습니다. 원 이렇게 얼굴이 상하셔서는…!”

집사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주름 진 눈가에는 근심을 가득 담고 그는 아힌스의 면면을 살폈다. 속 썩이는 손자를 보는 듯이 눈빛이 애잔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으리…아니, 전하라 불러 드려야 할 테지요.”
“좋을 대로 하시게.”
“저뿐만 아니라 고용인들 모두가 이번 일로 전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
“마음을 잘 열지 않는 분입니다. 상처가 깊으시죠. 게다가 프라이드가 높으셔서 저희 같은 고용인들에겐 속 얘기를 안 하십니다. …어쩌면 못 하시는 거겠죠.”
“…….”
“부디 잘 돌봐주십시오. 아닌 척 해도 늘 혈육의 정을 그리워하십니다.”
“…알겠네.”


달칵, 집사가 나가고 어두운 실내에 오롯이 두 형제만 남았다. 새액-색 숨을 내쉬는 아힌스의 옆에 누워 유엘은 깊은 번민에 휩싸였다.

“혈육의 정을 그리워하셨습니까?”
“…….”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허공에 대고 독백하듯 유엘은 가만히 속삭였다.

“그러면…저도 조금은 보고 싶으셨습니까.”
“…….”

실내의 공기는 달큰하게 뜨거웠다. 집사가 올려놓은 온도 이상으로 그들 사이에는 묘한 열기가 떠돌았다. 유엘은 아힌스의 마른 몸을 끌어 안으며 우울하게 토로했다.

“나도 그리웠습니다 형님. …아주, 아주 많이.”

타닥- 벽난로에서 거세게 장작이 타올랐다. 나즈막한 아드리안 공작의 목소리는 넓은 침실 안에서 조용히 메아리 쳤다. 공작의 욕망은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아힌스 폰 아드리안이 원하는 건 혈육의 정일 뿐 불륜이 아니었다. 유엘은 아힌스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버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버릴 수 없다면 가슴 속 깊은 곳에라도 묶어 두어야 했다. 아힌스를 비올리따 외르겐처럼 만들 수는 없었다.
"……."
아드리안 공작의 쓸쓸함과 함께 깊은 밤이 스러져 갔다.


다음날 이른 아침, 샤휀 성에 서신 한 장이 날아 들었다. 본가의 아드리안 대부인이 아들들을 만나기 위해 손수 행차한다는 서신이었다. 지난 이십 년간 볼 수 없던 활기와 긴장이 성안에 감돌았다.

이로써 무대 위에는 모든 배우가 모인 셈이었다.








***




“…어머니가 오신다고?”

아힌스가 물었다. 티포트를 들고 온 노집사는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흘 전 데본 성을 떠나셨다 하더군요. 눈 때문에 조금 지체가 되더라도 오늘 오후엔 도착하실 겁니다.”
“…….”
“더 자세한 얘기는 차를 마저 드시면 하겠습니다 주인님.”

쪼로록-
집사는 차를 따랐다. 뜨겁고 역한 냄새가 나는 차였다. 바위 상하는 냄새에 옆에서 시중들던 하인 아이도 물러섰지만 아힌스는 별 거부감 없이 찻잔을 들고 끝까지 비웠다. 어차피 몸에 좋은 것은 입에 쓰다. 이런 종류의 약에는 익숙했다.
“다 마셨으니 이제 말해보게. 느닷없이 그게 무슨 말인가.”
여덟 살 아들을 변방에 홀로 보내놓고도 이십 년간 왕래가 없던 사람이다. 모친의 방문을 마냥 기뻐하기엔 걸리는 구석이 많았다. ‘…유엘이 여기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본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자세한 이유는 모릅니다. 대부인께서 데본 호수에 휴양 차 머물고 계신데, 마침 샤휀이 근방이니 한번 들르시겠다는 말만 있었습니다.”
“…….”
“데본 공도 함께 오신다 했습니다. 길이 위험하고 호위가 부족하니 이왕이면 마중을 나왔으면 좋겠다 하시어 지금 기사들이 모시러 갔습니다. 어찌할까요 주인님. 일단 내부 정리도 하고 대청소도 해놨습니다만 부인께서 머무실 방은 주인님이 직접 정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동관 2층 방을 치우고 그리로 모시게. 부인들 취향으로 꾸며졌으니 좋아하실 걸세.”
“그리 하겠습니다. 당장 아이들을 보내야겠군요.”

집사는 허둥지둥 방문을 나섰다. 오랜만에 맞는 (제대로 된)손님이라 잔뜩 긴장한 모양이었다. 아힌스는 밤새 앓느라 축난 몸을 돌아 뉘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처음엔 껄끄러웠으나 막상 어머니를 만난다니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론 지난 날의 원망이 떠올라 괴로웠다. ‘아침에 유엘이 안 보인다 했더니 이런 거였군.’ 서신을 받고 급하게 나갔다고 들었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도 어머니지만 그녀와 함께 온다는 데본 공은 아드리안 가의 비중 있는 원로였다. 더불어 유엘과 반목하고 있는 현 황제의 장인이기도 했다. 괜한 꼬투리라도 잡히면 골치 아파질 테니 미리 대비해두는 게 나았다.

똑똑-

“누구냐.”
“나다, 아힌스.”   
“…나라니, 통성명을 똑바로 하시는 게 어떨까.”
“이거 또 왜 이러시나 우리 성주님. 너와 나 사이에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밝은 햇살을 등지고 슈스켈은 해맑게 다가왔다. 들어오란 말도 안 했는데 너무 당당한 태도였다. 아힌스는 한숨을 뱉었다. 어차피 저 인간한테 상식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오늘은 몸이 피곤해. 다음에 얘기하자.”
“다음에 언제? 네 동생이 여기서 실컷 죽치다 떠난 후?”
“…슈스켈.”
“목소리 깔지 마라, 아힌스 폰 아드리안. 날 여기까지 부른 건 너야. 공작의 군대를 내쫓기 위해 손을 빌려달라 하지 않았었나. 그새 까먹은 거야?”
“…….”
“들어봐라. 지금이 제일 좋은 기회야. 아드리안 대부인과 데본 공을 네 편으로 만들면 충분히 공작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어.”

누워있는 아힌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슈스켈이 싱긋 웃었다. 아힌스는 마뜩찮은 기색으로 슈스켈의 손을 쳐냈다. “앞서가지 마. 내게도 생각이 있어.” 내쳐진 손을 씁쓸히 바라보며 슈스켈이 반문했다. “생각이라니, 무슨 생각?” “…….” “왜 또, 변덕이 생기셨나 보지? 놈이 좀 잘해주니까 곁에 있고 싶어졌어?” “닥쳐.” “밸도 없고 지조도 없는 새끼.” “!”

아힌스의 푸른 눈이 희번뜩 빛났다. 그는 잠시 아픈 것도 잊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른 몸이 푸들푸들 떨렸지만 슈스켈도 말리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비틀거리는 아힌스를 깔아봤다.

“그 사이 꼴이 더 형편없어졌군.”
“너 또한 나보다 낫진 않아.”
“까분다.”
“할 말만 똑바로 하고 꺼져.”
“그 놈, 내쫓자.”
“…….”

아힌스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이제와 꽤 친한 동료라도 되는 듯 구는 슈스켈이 어이없었다. 제 주제파악을 하게 뭐라도 한마디 해주려다 문득 어지러워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슈스켈이 몸을 굽혀왔다. 친절한 척 등에 쿠션을 받쳐주고 물을 건네는 그가 가증스러웠다.

“이런다고 내가 또 속진 않아.”
“…….”
“슈스켈 푸쉐, 내가 너를 부른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지 전처럼 친구로 지내자는 뜻이 아니다. 그러니 감히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넌 내가 뭔가를 묻거나 요구하면 딱 그만큼만 행동하도록 해. 네 주제를 알아야지.”
“…건방진 새끼. 싸가지 없는 것만 여전하군.”

슈스켈은 침대가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아 다리를 꼬았다. 가늘어진 눈꼬리엔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화를 가라앉히려 협탁 위의 차를 들이켰다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아힌스의 눈이 모처럼 기쁘게 휘었다.
“…아힌스, 넌 정말 성격 최악이야.”
“피차일반이지.”
얄미운 놈. 슈스켈은 이를 갈았다. 처음 만났을 땐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애가 아주 성질만 더러워졌다. 틀림없이 나쁜 친구를 사귀어서 저 모양이 된………흠흠.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내가 제안하는 게 싫다면 잘난 네 생각을 말해봐라. 이대로 저 시커먼 놈들을 성안에 두는 건 싫을 거 아냐.”
“…….”
“공작이 널 구해줬다고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인데, 너 그거 착각이고 환상이야. 애초에 네가 왜 그 꼴이 되었는가를 생각해야지.”
“마음 흔들린 적 없다. 착각도, 환상도 꿈꾸지 않아.”
“그럼 왜 싫다는 거냐. 내가 모처럼 아드리안 대부인과 데본 공까지 불렀거늘 이 기회를 차버리다니 제 정신이냐?”
“…역시 네가 부른 거였나.”

슈스켈은 입 담배를 꺼내 물으며 빈정댔다.

“그럼 그녀가 자진해서 왔을 거라 생각했나? 그 매정한 여자가? 하핫- 나 원 참. 그거야말로 큰 착각이지.”
“…….”
“황실과의 혼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골머리를 썩고 있더군. 마침 데본에 와 있기에 슬쩍 찔러봤지. 아드리안 공작이 샤휀에 있으니 한번 다시 설득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정 안되면 아힌스 너라도 있지 않느냐, 그리 말하니 바로 확답이 오더군. 순하게 생겨서는 제법 정치적인 여자야.”
“………남의 모친을 함부로 말하지 마라.”

아힌스는 싸늘하게 대꾸했으나 실은 맥이 탁 풀렸다. 모친이 무거운 걸음을 하는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추측했지만 막상 현실로 드러나자 마음이 착잡했다. 귀족 가에서 부모 자식간의 정리란 어차피 그 정도였다.
“더 말하고 싶지 않으니 오늘은 그냥 나가봐라 슈스켈. 몸이 좀 나으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아힌스.”
슈스켈은 실컷 빈정거린 주제에 이제와 조금 미안했던지 낮게 혀를 찼다. 이대로 기운 없는 아힌스를 두고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눈치였다.
“날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 난 스물 여덟이고, 더 이상 모친의 정을 그리워할 나이는 아니야.”
“…….”
“그만 나가봐. …피곤하다.”
“…….”

별 도리 없이 슈스켈은 물러 나왔다. 어차피 처음부터 아힌스에게 큰 호응을 얻으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마음이 복잡했다. 특히 마지막에 녀석의 모친에 대해 언급한 건 좀 실수였다. “젠장. 그러게 왜 사람을 살살 약 올려? 열 받으니까 할 말 못할 말 마구 튀어나오지!” 꽝, 기둥을 한번 걷어찬 그는 짜증스레 성큼성큼 걸어갔다. 복도를 통과할 때마다 마주치는 시커먼 기사들을 치워야 할 쓰레기처럼 흘겨보며 그는 오늘만은 의복에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드리안 대부인과 꼬장꼬장한 데본 공에게는 틀림없이 첫인상이 중요할 터였다.







***


행차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대부인과 데본 공이 탄 화려한 사륜 마차는 별론으로 치더라도 옷상자와 기타 사치품이 든 짐마차가 무려 여섯 대나 됐다. 당연히 따르는 고용인들도 많았다. 지루한 걸 싫어하는 대부인을 위해 예인들도 부록으로 딸려왔다. 그들을 위한 십인승 승합마차는 성으로 가는 내내 몇 번이나 골창으로 빠져 속을 썩였다. 눈 때문에 길이 좋지 않은 까닭이었다.  

덜컹-

“이런, 또 빠졌군.”

툴락은 혀를 찼다. 주군을 대신해 혼쾌히 대부인을 마중 나온 그였으나 예인들의 승합마차만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멀쩡한 젊은 것들이 열 명이나 빽빽이 들어앉은 주제에 정작 자기들 마차가 골창에 빠지면 손 하나 까딱 안 했다. 허옇게 화장을 한 사내자식들이 손 끝 정리를 하며, ‘우린 무거운 거 못 들어요.’ 할 때면 진심으로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다. 예인 따위가 기사들을 부려먹다니 툴락의 고향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칭 타칭 초일류라는 저것들은 콧대도 하늘을 찔렀다. …문제는 아드리안 대부인이 그걸 용납한다는 거였다.

“세드릭, 애들 데려가서 바퀴 빼줘라.”
“아 왜 또 접니까. 저도 싫은데.”
“씁-!”

계급이 깡패란 말도 있다. 세드릭은 투덜대면서도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 지난 며칠간 눈 속을 헤매느라 지쳤을 법도 한데 역시나 성실한 녀석이었다.

“툴락 경.”

자신을 부르는 고운 미성에 툴락은 재빨리 사륜 마차의 옆으로 말을 붙였다. 창문이 살짝 열리고 아드리안 대부인이 수줍게 얼굴을 드러냈다.

“예인들의 마차가 또 속을 썩이는 건가요?”
“…예. 바퀴가 다른 곳으로 샌 모양입니다. 지금 기사들이 애쓰고 있습니다 부인.”
“번번히 마차가 서니 성가시네요. 안의 아가씨들도 추워하고, 모두들 괴로운 눈치니 예인들은 나중에 따로 오라 하세요. 자꾸 지체하다가는 식사 때를 맞추기도 힘들겠어요.”

중년의 아드리안 대부인은 교양 있는 말투로 사근사근, 그러나 냉정하게 말했다. 예인들을 아끼고 존중하면서도 그 때문에 발목 잡히는 건 싫은지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생긴 건 참 평범하고 아담한 보통의 여인인데 이럴 때는 어쩔 도리 없는 황가의 여식이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부인. 앞서 가시지요.”









화려한 행렬이 성문을 지나 드디어 현관 앞까지 다다랐다. 가장 선두에 있던 사륜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아드리안 공작이 다가가 대부인이 편히 내리도록 에스코트를 도왔다.
“오셨습니까 어머니.”
그는 딱 필요한 만큼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모친에 대한 존중을 보이되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는 전형적인 귀족 사내의 태도였다. 반면 아드리안 대부인은 아들을 만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호들갑스럽게 눈물을 글썽이며 준비해뒀던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찍었다. “이런 무정한 사람 같으니. 어미가 반갑지 않은 겁니까?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반색이라도 해주면 좀 좋아요.” 자그마하고 통통한 대부인은 연극 속의 여주인공처럼 행동을 과장했다. 뒤따라 내린 강마른 데본 공이 그녀에게 장단을 맞춰줬지만 유엘 폰 아드리안의 무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추우신데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모친의 눈물에 너무 익숙한 그였다.  


“어서 오십시오 마님, 그리고 데본의 영주님과 두 분의 공주님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집사는 현관까지 나와 정중하게 아드리안 대부인을 맞이했다. 뒤이어 따라 들어오는 데본 공의 모피코트를 받아 드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세 명의 여인과 데본 공이 홍해처럼 갈라진 길을 따라 들어서자 샤휀의 고용인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드리안 공작 휘하 기사들도 그 뒤에서 격식을 갖췄다.

“어머나, 소문대로 모두 여기서 머물고 있군요. 샤휀이 크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샤휀이 크다기 보다는 정예부대만 머물고 있습니다 부인. 덕분에 성주께 실례가 많지요.”

옆에 있던 공작의 부관이 그리 말하며 데본 공 쪽을 힐끗 보자 뭐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흠흠 헛기침을 한다. 황제의 압력이 없었더라면 원래는 북부에서 가장 크고 풍요로운 땅을 가진 그가 군대를 돌보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알력 때문에 애꿎은 샤휀이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니 속이 썩 편치만은 않았을 게다. 잠시 불편한 기류가 떠돌자 대부인이 화사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런데 성주는 어디에 있나요? 나는 얼른 우리 큰 아들이 보고 싶은데.”
“형님은 아프십니다. 몸이 나아지면 나중에 따로 인사를 드린다 하셨습니다.”
“아프다고? 어디가?”
“…그냥 감기몸살입니다.”      
“어머 세상에. 그럼 내가 가봐야겠네. 그 아이 방이 어디죠?”

다정한 어머니를 연기하는 그녀에게 유엘은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모친의 이런 성품을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나 아픈 아힌스에게 찾아가 호들갑 떠는 것만은 거슬렸다. 대부인은 발랄하지만 오래 상대하자면 피곤한 상대였다.(적어도 유엘에겐 그랬다) 그리고 좋은 어머니로서의 자질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유엘도 좋은 동생은 아니었다)   

“형님은 피곤하십니다. 쉬게 두시지요.”
“피곤하다니, 그럼 더더욱 내가 찾아가야지요.”
“…….”
“어미를 보면 피곤도 풀릴 겁니다. 아플 땐 본래 사람이 더 그리워지는 법 아니겠어요?”
“형님 자는데 방해되십니다.”
“어머어머, 방해라니! 공작, 어떻게 그런 섭섭한 말을 합니까.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잠깐 얼굴만 보는 건데 방해라니요.”  
“…….”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모자간의 대화를 경청하던 툴락은 속으로 대부인 윈, 을 외쳤다. 칼 바람 같은 아드리안 공작이 직격탄을 팍팍 날리는데도 조그맣고 오동통한 아드리안 대부인은 소녀처럼 웃으며 마이동풍으로 일관하는 게 아닌가. ‘못 알아 들어서 저러는 건지 알면서도 저러시는 건지 참.’ 마뜩찮게 굳어있는 아들을 무시하며 대부인은 집사를 재촉했다. “성주의 침실은 어디죠? 안내하세요 집사.”
노집사는 인자하게 웃었다.
“마님, 아힌스 님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우선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떨까요. 추운 데서 고생하셨을 것 같아 따끈한 스튜와 홍합 요리를 준비해뒀습니다.”
“…홍합?”
“예. 아시다시피 홍합은 내륙에선 구하기 힘든 식재료지요. 그러나 부인을 위해 특별히 조달해왔습니다. 지금쯤 요리가 완성됐을 텐데 늦으시면 다 식어버릴까 저어되는군요.” “…….”
노인은 위대했다.
끝끝내 고집을 피우던 대부인은 달큰하게 풍기는 음식냄새에 참으로 쉽게 넘어갔다. 그녀는 복실복실한 갈색 머리를 매만지며 데본 경과 뒤의 아가씨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아무래도 그 편이 낫겠지요? 식은 음식은 맛이 없으니까요.”





“…뭐랄까. 굉장한 분이네요. 오시자마자 성 안이 꽉 찬 느낌입니다.”
“음 원래 그런 분이지. 별칭이 살롱의 여왕이시잖나. 아들들과는 달리 사교성이 넘치셔.”

대부인 일행에게 응접실을 내주고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던 세드릭과 툴락, 그리고 슈미르 경은 제각각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툴락 같은 경우는 공작의 부관으로서 가끔 아드리안 대부인을 접했었으나 나머지 두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전장에 뛰어든 세드릭은 사교계의 부인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
질겅질겅 고기를 씹던 세드릭은 대부인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말하고 싶던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았다.
“솔직히…너무 심하게 안 닮으셨어요.”
“…역시 그렇지?”
“나도 처음엔 친 모자관계가 아닌가, 고민했었어.”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았다. 사람 생긴 거로 뭐라 할 일은 아니지만 대부인과 두 아들은 심하게 안 닮았던 것이다. 아드리안 공작과 샤휀의 성주도 닮은 구석은 없지만 두 사람은 최소한 미남이라는 공통점은 있었다. 그래서 뭇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부모네가 굉장한 미인인가보다고 추측해왔었는데….
“그럼 역시 선대 공작님이 굉장한 미남이셨다던가…?”
“그냥 평범한 호남이셨네.”
“음. 그건 내가 보장하지. 몇 년간 그분 밑에 있었으니까.”
“…….”
“…….”
“…….”
세 사람 다 말이 없었다. 혹시 양자라던가 애가 바뀐 건 아니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건 또 아닌 것이, 두 사람 다 아드리안 가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힌스의 백금발과 푸른 눈은 한대 걸러 한대 나타난다는 격세유전의 결과였고 아드리안 공작의 얼굴 골격은 선조들의 그것과 동일했다. 결국 세 기사는 하릴없이 인정했다. ‘둘 다 억세게 운이 좋았구나.’ …그야말로 유전자 조합의 승리였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렇게 대부인과는 성격조차 다를까요?”
“글쎄다. 환경 탓이 큰가 보지 뭐. 주군이나 성주나 둘 다 우중충한 것이, 아무래도 암울하게 자랐나봐.”
“쯧쯧. 역시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정이 화목해야….”
주위에는 다른 기사들도 많았으나 누구도 세 사람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군은 훌륭한 기사이자 뛰어난 전략가였으나 인간적으로는 참 삭막한 사람이었다. 샤휀의 성주도 그보다 나을 건 없었다. 게다가 그 쪽은 재수없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대본 공이 온 걸 보니 낌새가 심상치 않구려. 혹시 경은 뭐 아시는 거 있소?”

슈미르 부단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는 그 동안 보급을 미루며 군대를 고생시켰던 데본의 영주를 특히 미워했다. 아드리안 가의 원로 주제에 황제와 사돈 관계를 맺고 이중으로 줄타기 하는 모습이 꽤나 얄미웠던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툴락 역시 그를 박쥐라고 생각했다. 데본 공이 온 다음부터 기가 살아 돌아다니던 황제파 장교들을 생각하자 몹시 배알이 꼴렸다.
“나라고 아는 게 있을 리 있소? 서신이 오늘 아침에야 도착했는걸. 다만 짐작하건대…,”
그는 가만 목소리를 낮췄다.
“혼사문제로 온 것 같소. 데본 공과 같이 왔던 두 아가씨는 황제 폐하의 조카님들이 아닙니까. 그 공주님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데는 아무래도 꿍꿍이가 있겠지요.”
슈미르 부단장이 두 눈을 홉 떴다.
“…아니, 혼사? 이 와중에 무슨 혼사문제까지 꺼낸단 말이오?”
“쯧. 둔하시긴. 이런 와중이니 더 그러는 게지요. 황제가 입때까지 치사하게 압력 넣은 이유를 잊으셨소?”
“…….”
부단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전쟁터로 등 떠밀어놓고 난데없이 뒤통수치던 황제였다. 자기 딸이랑 결혼 안 하겠다는 한마디에 잔뜩 불안해져서는 아드리안 공작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는지, 번번히 앞길을 막고 훼방을 놓았었다. ‘…쫌팽이 같은 인간.’
“아드리안 가 사내들이 황가와 인연을 맺는 건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관례이니 깨기 어려울 겁니다. 만약 전하께서 끝끝내 거절하시면 차선책으로 샤휀 성주를 혼인시키려 들겠지요. 어쨌든 피가 이어져야만 안심할 수 있다고 믿는 족속들이니….”
“!”
가만 듣고있던 세드릭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 공작이 결혼 안 하는 것과 성주가 무슨 상관이라고!
“말도 안됩니다. 일단 성주께선 몸도 약하시잖아요. 하루가 멀다 하고 앓아 눕는 분이 혼인은 무슨…!”
“것도 좀 그렇지.”
“…근데 자네, 왜 그렇게 흥분하나?”
“…아…그게.”
당황한 세드릭 호먼에게 툴락은 날카롭게 혀를 차줬다. “이런 모자란 자식! 오해를 불식시키긴커녕 지가 더 크게 벌리고 다니니.”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 늑대 우리에 쳐 박히기 싫으면 알아서 처신 잘해!” 남의 속도 모르면서 툴락은 세드릭의 순정에 비수를 팍팍 꽂았다. 세드릭 호먼은 잔뜩 기가 죽어 고개를 떨궜다. 지난 밤 슈스켈이 약 올리듯 흘렸던 예의 ‘벌레’ 건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번엔 혼사문제가 오고 간다니 자꾸만 애가 닳았다.
그런 그에게 슈미르 부단장이 엄중히 충고했다.
“세드릭, 그런 쓸데없는 데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네. 해가 아직 남았을 때 전하께서 시킨 일을 수행해야 해.”
“!”
“…예의 그 ‘악마의 늪’ 말이오? 정말 전하께서 그걸 실행에 옮기겠다 하셨습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소. 다만 세드릭 부대가 가져온 정보에 흥미를 보이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할 테지요. 군대를 움직이는 건 여러모로 신중해야 하니까요.”
“…….”

비록 후퇴했다지만 아드리안 공작이 카슬란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군대를 재정비하고 보급로를 다시 뚫고자 잠정적으로 물러선 것뿐이었다.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시 카슬란을 공략하는 시점이 언제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봄이 와서 언 땅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보다 더 여유를 두고 연합작전을 펴야 한다는 축도 있었다. 아드리안 공작은 그 구체적인 시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짐짓 출전 의사가 없는 것처럼 샤휀에 눌러앉아 계속 수색대만 파견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모조리 막혔다는 데도 공작은 뜻을 꺾지 않았다. 집요하고 끈질긴 사내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된 곳이 악마의 늪이었다. 공작과 샤휀의 성주가 조난당했던 그 어둡고 습한 동굴이 북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는 걸 알려준 건 슈스켈 푸쉐가 데려왔던 우두머리 사냥꾼이었다. 다들 그 이야기를 대수롭잖게 듣고 넘겼지만 수색을 맡았던 세드릭 호먼은 유심히 새겨들었었다. 그리고 아드리안 공작은 세드릭이 알아온 정보에 관심을 보였다.

“동굴을 통과해 북으로 진군하시려는 겐가.”
“그게 가능한가를 알아보려 수색대를 보내는 게 아니겠소.”
“…….”
“만약 그 작전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세드릭, 자네 승진은 따 논 당상이로군. 전하께선 전공을 잊지 않는 분이니 크게 포상하실걸세.”  

툴락이 턱을 쓸며 웃었다. 아끼는 부하가 출세가도를 달린다니 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세드릭 역시 기대에 부응하고자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러나 머릿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샤휀 성주의 잔상이 남아 마음을 어지럽혔다.

유난히 그의 싸늘한 얼굴이 그리워지는 오후였다.   








***



잠결에도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꿈과 현실을 드문드문 오가던 아힌스는 애써 잠 기운을 몰아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 온 건지 유엘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왜.”

왜 그러고 앉아있어. 눈으로 묻는 아힌스에게 유엘은 더 자라는 듯 토닥였다. 그러나 잠은 이미 깨버렸다. 더 누워있기도 염증이 난 아힌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등받이에 기댔다. 은은한 촛불만이 아른거리는 실내는 어두웠다.

“벌써 저녁이냐.”
“해 떨어진 지가 조금 됐습니다. 늦은 밤은 아닙니다.”
“…그래. 어머니는?”
“아래 계세요. 나중에 내려가봐도 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지.”
“…나중에. 형님 몸이 나은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유엘은 점잖게 말렸다. 해쓱해진 아힌스가 안쓰러운지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형님의 마른 어깨에 담요를 덮어줬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도자기 다루듯 손길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얼마 전의 유엘과 비교하자면 참으로 격세지감인지라 아힌스는 저도 모르게 킥킥 웃었다.

“뭘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게냐. 내가 또 쓰러지기라도 할 까봐?”
“…형님.”
“비일비재한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런다고 곧 죽는 것도 아니고 스물 여덟 해 동안 잘 살아왔다. 어설픈 동정은 안 해도 돼.”
“동정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는다는 말 따윈 하지 마십시오.”

유엘은 정색하며 말했다. 변함없이 무표정하지만 말투에서 은근한 걱정이 묻어났다. 아힌스는 조금 묘한 기분이 되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요 근래는 유엘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잘 판단이 안 섰다. 괘씸한 놈이라 화를 내려다가도 녀석이 조근조근 신변을 챙겨오면 자기도 모르게 어물쩡 넘어가버리게 된다. 원래 저런 녀석이 아닌데 참 이상했다. 그렇지만 ‘너, 나한테 왜 그러냐’ 하고 따지기도 참 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잠 자다 흘러내린 이불 따위를 얌전히 정리해주는 손길이 싫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싶다고 눈짓하자마자 코 앞에 물을 대령하고, 몸이 좀 무겁다 싶으면 발 마사지까지 해주는 녀석이…가만 보면 꽤 편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냐. 이건 저 놈의 술책이야. 넘어가면 안돼.’  아힌스는 슬쩍 시선을 비끼며 톡, 쏘아붙였다. 이쯤에서 자중해야지 괜한 정을 붙였다간 이쪽만 낭패 볼 게 뻔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너와 무슨 상관이라고. 자꾸 찾아와서 성가시게 굴지 말고 네 볼일이나 보려무나. …그렇잖아도 바쁠 텐데.”

…아뿔사. 실수다. 마지막에 바쁠 텐데, 라는 말은 왜 붙였누? 누가 들으면 괜히 걱정하는 줄 알 거 아닌가. 아힌스는 이미 떠난 말을 도로 주워담을 수도 없고 후회는 되고 해서 입술만 잘근잘근 즈려 물었다. 그게 보기 싫었는지 유엘이 또 미간을 구겼다.

“짜증난다고 입술을 무는 건 나쁜 습관입니다. 성질 눌러 참는 연습 좀 하세요.”
“뭐야? 사돈남말하시네. 네 성질은 나은 줄 아는 거냐.”
“형님 보단 낫습니다.”
“우습지도 않다. 아무렴 내가 너보다 못하려고?”
“못합니다.”
“…이!”

버럭 성을 내는 아힌스를 보며 유엘은 씨익 웃었다. 이겼다는 승리의 미소였다. 그 덕택에 마음이 좀 느긋해졌는지 그는 협탁 위의 찻잔을 들어 입가에 댔다. 아힌스의 눈이 순간 반짝반짝 빛났다. 목이 탄 김에 한 모금 삼키려던 유엘은 움찔, 떨었다.  

“…….”
“…….”

탁-.

“…왜 안 마시는 거냐.”
“목 마르지 않습니다.”

아힌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몹시 실망한 기색이었다. 유엘의 뒷덜미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힌스의 눈을 보지 않았더라면 냄새도 맡지 않고 차를 마실 뻔했다. 유엘은 아힌스의 성격이 나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몸은 어떠십니까. 열이 좀 떨어졌나요?”
“…조금. 경험상 내일쯤이면 가뿐히 일어날 것 같다.”

손을 뻗어 반듯한 이마에 올려보자 확실히 어제보다는 열이 덜했다. 그게 좋았는지 유엘은 해사하게 웃으며 아힌스를 끌어 안고 침대 위를 반 바퀴 빙글 돌았다.

“정말 많이 나아지셨네요. 장하십니다 형님.”
“자…장하긴 누가! 내가 네 아들이라도 된다더냐? 건방지긴.”
“내 눈엔 아들보다 더 귀하고 예뻐 보입니다.”
“…어,어?”
“아프지 말고 제발 건강하세요. 성격 나빠도 괜찮으니 앓아 눕지만 말아요.”
“성격 얘기는 왜 또 나와?”

그렇게 큰 소리치면서도 아힌스의 뺨은 벌써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최근의 유엘은 정말 이상해졌다. 아프다고 봐주는 건지 아니면 그냥 말만 그렇게 하는지는 몰라도 녀석이 한마디 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스물스물 풀어졌다. 무표정한 놈이 가끔씩 방긋 웃는 모습도 생각해보면 꽤나 귀여웠…….

“…….”
“형님?”
“…그만 비켜라. 무겁다 유엘.”

아힌스는 슬쩍 시선을 비끼며 유엘을 물리쳤다. 심술궂은 동생 녀석과 부대끼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자꾸 마음이 새나간다. 아힌스는 그게 껄끄럽고 불안했다. 검은 털 난 짐승에게 마음 따위 줘봐야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매번 당하고도 또 실수를 반복하려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나가 봐. 너도 바쁘지 않느냐. 여기만 매어있을게 아니라 가서 공무를 봐야지.”
“…….”

유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쁜 건 사실이었다. 휴전 중에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진군 계획을 다시 짜고 보급로를 수정하고 거기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진력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리를 해서라도 아힌스를 보러 오는 이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끙끙 앓는 형님을 볼 때면 부아가 치밀고, 톡톡 쏴대는 아힌스와 실컷 말다툼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를 폭, 끌어안고 마구 키스의 비를 퍼붓고 싶었다. “…….” 그러나 아힌스의 말대로 그만 가봐야 한다. 비단 공무 때문만이 아니라 아힌스와 시간을 보낼 때마다 커져가는 가슴 속의 욕망이 두려워서.

유엘은 미련을 접고 차분히 일어섰다.  “그럼,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각자 서로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야 이거…원. 정말로 동생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봐?”
“!”
“문 밖에서도 서로 다정하게 챙겨주는 소리가 다 들리던데? 아주 굉장한 형제애야.”
“-슈스켈.”

아힌스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유엘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친 슈스켈은 오늘도 어김없이 비아냥을 일삼았다. 뭐에 또 심사가 틀린 건지 평소보다 표정은 더 음습했다. 그가 입술을 비틀 때마다 뺨의 흉터가 뱀처럼 뒤틀렸다.

“내가 왔을 때는 아프네 어쩌네 하며 내쫓더니, 저 놈은 좀 다른가 보지? 왜, 놈이 끌어안고 키스라도 해줬어? 달콤하게 속삭이며 너 아니면 못 살겠다 매달리디?”

기가 막힌 막말에 아힌스는 할 말을 잃었다. 슈스켈은 꼭 바람난 마누라 닦달하듯 화를 내고 있었다. 이 사내가 무례한 거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아힌스는 똑바로 슈스켈의 시선을 노려봤다. 비록 유엘의 군대를 쫓아내려 그를 불렀던 건 맞지만, 어쨌든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고 아힌스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슈스켈이 추궁할 권리는 없었다. 한때는 그에게 모든 일을 상의하고 처리하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슈스켈은 아힌스를 배신한 자였다.

“전에 알아듣게 말했을 텐데? 필요 이상의 참견은 사양한다고.”
“필요 이상의 참견? 이 순진한 바보 자식! 저 자식이 널 보는 눈이 어떤지 아직도 모르겠어?”
“…?”
“저 놈은 널………!!”
“?”
“………제기랄!”

꽝-, 슈스켈은 협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바람에 티포트가 넘어가고 찻잔이 깨졌지만 슈스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아힌스는 신경 썼다. “내 찻잔….”
‘저 모지란 놈! 지금 찻잔이 문제냐?’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고 찻잔 타령이나 하고 있는 아힌스가 답답했다. 미간을 찡그리며 아끼던 찻잔이었다는 둥 저게 깨져서 짝이 안 맞는다는 둥 계집애 같은 소리만 중얼대는 아힌스는 완전히 애였다. 저런 놈에게 공작 녀석이 음흉한 수작을 피운다는 말 따윈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힌스가 싫어하면 모를까 이젠 홍조까지 띠며 반기는 친동생인데 거기에 대고 니들 사이가 정상은 아니고, 그 품에서 좋아라 하는 네 놈도 몹시 비정상이란 말 따윈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슈스켈의 속은 바짝바짝 타 들어 갔다.

“아힌스…우선, 아드리안 공작의 침실부터 옮기자.”
“왜?”
“왜긴, 너도 불편할 테고 남 보기에도 좋지 않잖아.”
“글쎄. 최근엔 그닥 불편하지 않은데.”
“…불편하지 않다고? 넌 옆에 사람 있으면 잠도 못 자잖아?”
“나아졌나 보지. 별로 거슬리지 않는다.”

어이구, 두야. 슈스켈은 혈압이 올랐다. 같이 자다가 공작 놈이 못 참고 올라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렇게 눈치가 없을까.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성장한 남자 형제가 같은 방에서 잔다는 건 누가 봐도 어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드리안 대부인까지 성에 머무는 데 이상하게 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힌스, 너는 편해도 다른 사람은 아니야. 제국의 공작쯤 되는 자가 형님 방에 얹혀 잔다면 누가 들어도 비웃을 거다. 고집 피우지 말고 인정해. 너도 그 정도 상식이 없는 건 아니잖아.”
“…….”
“놈을 쫓아내란 말은 안 할 테니 방은 따로 쓰도록 해. 그게 서로에게 좋아.”
“…유엘과 꼭 같은 침실을 쓰고 싶은 건 아냐. 그렇지만 같이 잘 땐 따뜻하다.”
“그딴 거야 온돌 몇 개 구워줄 테니 그걸 안고 자면 되지!”
“…그런가.”
“그래. 그리고 망가졌던 방들도 거의 다 수리되었어. 아드리안 공작도 넓고 깨끗한 침실로 옮겨가면 편해할 거다.”

못 마땅한 듯 아힌스는 인상을 쓰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슈스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각방을 쓰게 하는 것부터, 그것부터가 시작이다. 아힌스가 녀석을 쫓아낼 마음이 없다면 자신이 나서서 쫓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만약 쫓아낼 수 없다면 더 극단적인 방법도 있었다. 어쨌든 아드리안 공작은 제거돼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 위험한 종자를 귀여운 내 새끼 옆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잘 생각했다. 당장 아랫것들에게 말해서 짐부터 옮기마.”
“…….”
“내일 아침엔 대부인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해. 아 참. 너 대부인과 함께 온 두 공주님들 얘기 들었어?”
“?”
“황제의 조카 뻘 되는 아가씨들인데 둘 다 참하고 예뻐. 각각 열 일곱, 열 아홉인데 이제 막 피어나는 꽃 같더라.”
“?”
“순진하긴. 너도 성혼할 나이가 지났는데 예쁜 아가씨들도 만나고 연애도 하고 해야지.”
“…….”
“보면 틀림없이 너도 좋아할 거야. 이런 구석에 쳐 박혀서 그 동안 너무 단조롭게 살아왔잖아. 내일 근사하게 입고 내려와. 음 아니다, 내가 직접 내려와서 챙겨주마. 일찍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어.”
“…….”

유엘의 방을 옮기겠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이 나서 떠드는 슈스켈을 아힌스는 의혹의 시선으로 쳐다봤다. 어차피 황가의 아가씨들이라면 뻔할 뻔자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걸 텐데 이쪽에게 좋을 일이 뭐가 있나 싶었다. 그런 아가씨들이 변방의 샤휀 성에 만족할 리도 없을 테고 아힌스 역시 몸이 허약해 그녀들을 챙겨주지 못할 테니 애당초 혼담이 들어와도 거절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무슨 꿍꿍인지 뚜쟁이처럼 떠벌리는 슈스켈이 못 미더워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어머니 때문이라도 내일 아침엔 식당에 내려가야 했다.





***



썩 좋은 눈치는 아니었지만 아힌스의 일방적인 통고에 유엘은 별달리 반발하지 않았다. ‘불편하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동생은 그렇게 답하며 뺨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물러났다. 요즘 한결 부드러워졌다지만 녀석의 예전 기세를 생각하면 한마디 반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그래서인지 아힌스는 그날 밤 내내 전전반측하며 잠을 못 이뤘다. 어딘가 허전하고 불편한 마음에 속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슈스켈이 구워준 온돌을 몇 개나 끌어안고 자는데도 포근하단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잠시 함께 있던 존재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참 쓸쓸했다.



“어디 보자, 역시 산호색이 제일 화사해 보일 테지만…음, 아가씨들보다 더 튀어 보이면 곤란하니 푸른색 계열로 고르는 게 낫겠지.”
“…….”
“이왕이면 네 눈 색깔에 맞춰서 연청색으로 할까?”
“…….”
“싫으면 라벤더로 하고.”
“…촌스러워.”
“자식, 까다롭긴! 그래, 일단 블리오는 연청색으로 하자. 허리끈은 그보다 조금 짙은 색으로. 그리고 집사 영감, 거기 구두 내오게.”
“…….”

당사자인 아힌스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있건만 새벽부터 들이닥친 슈스켈이 더 적극적이었다. 덕분에 평소 의복을 담당해왔던 노집사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대체 언제부터 남의 옷에 신경 썼다고 저 야단인지 모르겠다며 마찬가지로 아힌스도 한숨을 내둘렀다. ‘남의 옷은커녕 제 옷도 안 돌보던 것이…쯧.’

“왜 그러고 앉아있어. 얼른 머리도 손질하고, 세수도 좀 하고 그래. 게을러 빠져서는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병든 닭처럼 졸고 앉아있는 거냐.”
“…어제 제대로 못 잤다.”
“왜애? 쿠션 좋은 넓은 침대에 혼자 편안히 누웠는데 평소보다 더 잘 자셔야지.”
“……그러게.”

아힌스는 뻑뻑하게 당겨오는 눈가를 꾹꾹 문질렀다. 열도 많이 내리고 몸도 좋아진 것 같은데 이상하게 피로는 더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평소 끼고 자던 존재의 부재가 생각보다 신경 쓰였던 것 같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상념에 잠긴 아힌스에게 슈스켈은 빙긋 웃으며 말을 붙였다.

“걱정하지마. 혼인을 하면 네 불면증도 싹 사라질 게다.”
“얘기가 어떻게 그리 돌아가지?”
“아 정말이라니까. 이건 내 경험에서 나온 지혜라고. 여자랑 끝내주는 밤을 보내면 세상 모르게 잘 수 있어. 수면제 따위 보다 효과가 더 좋지.”
“끝내주는 밤…?”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결혼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좋은 게 더 많을 거다. 여자는 인생의 와인과 같은 존재야. 황홀하지.”

아힌스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황홀은 무슨. 제 놈이 여자 없인 못 사니 이쪽도 그런 줄 아는 모양이다. 끝내주는 밤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오가는 건지는 몰라도 아힌스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슈스켈의 침실에서 자주 흘러나오던, 이상한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부대끼는 걸 말하는 것일 터. 그러나 아힌스의 생각에 정숙한 숙녀라면 사내와 그런 짓을 할 리 없었다. 그런 짓이 어떤 짓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럴 것 같았다.

“적당히 하고 비켜. 머리 아파.”
“아직도 열이 덜 내렸나?”
“그건 아니고. 그냥 기분이 좀 안 좋다. 그냥…만사가 귀찮고 짜증스러워.”
“흐음….”

눈가를 가늘게 좁히던 슈스켈은 한 보 뒤에 서있는 노집사에게 눈짓해 나가라고 명했다. 집사는 마뜩찮은 기색으로 경계하다 결국 별 도리 없이 물러났다. 집사나 고용인들이 아무리 성주를 아끼고 사랑해도 악당 슈스켈, 그 한 사람의 존재보다는 못했다. 비록 비열하고 행실이 나쁜 인간이지만 최소한 그는 주인과 나란히 옆에 설 수 있는 사내였던 것이다.

“-봤지? 저 사람들이 아무리 널 위한다 해도 결코 지켜주지는 못해. 네 고독을 달래줄 수도 없을뿐더러 하다못해 말 상대조차 될 수 없지. 고용인이란 애초에 명령에 따르도록 교육 받은 자들이니까.”
“…그래서?”
“그러나 네 부인은 다르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비록 아래층 아가씨들이 정치적으로 복잡하다고는 해도 혼인을 하게 되면 네게 도움이 됐으면 됐지 그 반대가 될 사람들은 아니다.”
“…그래서?”
“공연히 짜증부리며 어리광 부리지 말란 얘기야.”  
“…….”
“네 속을 내가 모를 것 같아?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면 몸부터 안 좋아지는 거, 그거 아주 나쁜 습관이야. 이번에 저 여자들과 인연이 닿은 건 절대로 기회라고.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손가락이나 빨다 놓치는 건 아주 멍청한 짓이지.”
“…별로 여자들을 발판 삼아 출세하려는 욕심은 없어.”
“바보 같긴! 그럼 평생 이대로 살다 죽을 작정이야? 옆에 나쁜 벌레나 꼬이게 빈틈을 보이면서?”
“나쁜 벌레?”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내 말 들어 아힌스. 이번만은 네게 거짓말 하지 않아. 공주와 결혼 하도록 해. 비록 저 아가씨들은 아드리안 공작을 염두에 두고 여기까지 온 걸 테지만 널 보면 달라질 게다. 한 눈에 빠진다고 절대로 장담하지. 공주와 혼인해서 네 설 자리를 찾고, 감히 누가 널 건드릴 생각도 못하도록, 강해져라. 응?”
“…….”

아힌스는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는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슈스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못 알아듣는 건 아니었으나 그건 그의 의지와 반하는 일이었다. 아니, 반한다기 보다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혼인이라니…. 그것도 하필이면 공주와. 아무리 슈스켈이 강해지라니 어쩌니 떠들어도 마음에 잘 와 닿지가 않았다. 변화가 너무 컸고 모든 일이 지나치게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무엇보다도 어째서 슈스켈이 이렇게 무리해서 밀어붙이는지, 그것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슈스켈. 알아들었으니 그만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판단하마.”
“알아들었다고? 정말로?”
“아아…대충. 하지만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나. 다그치지 마. 나도 내 머리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피곤한 거냐.”
“…글쎄, 모르겠다. 네 말대로라면 내가 어리광을 부리는 걸지도. 아무튼 썩 좋진 않아. 머리도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쯧-. 투정은.”
“시끄러워.”

슈스켈은 피식, 웃었다. 아힌스가 이러니 저러니 말은 해도 결국은 슈스켈을 단호하게 밀어내지는 못했다.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아힌스는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타입에게는 약했다. 어쩌면 체력이 부족해서 더 빨리 포기하는 지도 모르겠으나…어쨌든 귀여웠다.

“…정 기분이 저조하면 좋은 거 해줄까?”
“…?”
“내가 전에 가르쳐 줬던 거 요즘 잘 하고 있냐.”
“주어를 똑바로 말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까칠하긴. 자위 말이다. 뻑 하면 신경질 내는 게 아무래도 욕구불만 같은데, 해 줘?”
“…혼자서 하는 거잖아 그건.”
“다른 사람이 해줄 수도 있지. 어차피 누가 하나 손으로 하는 건 마찬가진데.”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아힌스는 결국 슈스켈의 재촉에 다리를 벌렸다. 긴 의자에 느긋이 앉아 다리 벌리는 폼이 꽤 건방졌으나 슈스켈은 오늘따라 아힌스가 이뻐보였기에 용서하기로 했다. 그는 마치 어린 동생에게 색다른 재미를 가르쳐주려는 형처럼, 사심 없이 다가가 하얀 잠옷 자락을 걷어 올리고 성기를 감싸고 있는 금빛의 음모를 부드럽게 쓸었다.  

“……흐응.”
“허리를 좀 더 뒤로 눕히고 편하게 즐겨. 좋게 해주마.”

시키는 대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슈스켈은 아힌스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성기에 경건하게 키스했다.

“…뭘 하는 거야.”
“천국을 경험하게 해주려는 거다. 그 동안은 네가 너무 순진해서 안 했었지만…이젠 성혼도 해야 하니 하나하나 배워두는 게 좋겠지.”
“………아…?”

할짝, 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힌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슈스켈의 머리통을 내려다 봤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으나 붉은 혀가 자신의 성기를 핥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으음….”
새빨간 혀는 뿌리 쪽의 연한 살을 샅샅이 핥다가 기둥으로 진출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감각에 아힌스의 허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아흑…….”
아힌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지고 배꼽에 힘이 들어갔다. 혼자서 자위할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못된 말만 일삼던 슈스켈의 혀는 아힌스에게 극강의 쾌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천천히 즐겨.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슈스켈은 빙긋이 웃으며 귀두를 덥썩 물었다. 아힌스는 저도 모르게 슈스켈의 잿빛 머리칼을 움켜쥐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힌스-! 오오 내 아들, 세상에 어쩜 이렇게 훤칠하니 잘 크셨습니까.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근사하고 멋있게 자랐네요. 인물 훤한 것 좀 봐. 어쩜….”

대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아힌스를 답싹 끌어 안았다. 그녀의 말대로 모자의 키 차이는 상당해서 조금 우스운 꼴이었으나 대부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힌스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모친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비록 표정관리는 잘 하고 있지만 정말 어색하고 불편하고 신경 쓰이면서도……반가웠다. 무정하지만 지난 이십 년간 그리워하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뵈었더니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대부인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두 뺨에 손을 얹었다.
“그런가요? 어미 얼굴이 많이 늙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요. 여전히…어여쁘십니다.”
말간 아힌스의 얼굴이 슬프게 흐려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억 속의 어머니와는 차이가 많이 났으나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모친의 잔주름만큼 오랜 세월 헤어져 있던 두 사람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대부인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아힌스는 아니었다. 보고 싶고 그립고 애틋했으나…낯선 존재였다.

“이렇게 장성한 아들을 보니 어미 마음이 참 뿌듯합니다. 어디, 아프다더니 몸은 괜찮은 건가요?”
“많이 나아졌습니다.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할 거 없어요. 이렇게 얼굴 봤으면 됐지 뭘. 그보다, 우선 식사 전에 서로 인사부터 해야겠지요?”

한바탕 요란스레 재회의 기쁨을 표현한 그녀는 이만하면 만족스럽다 싶었는지 식탁에 둘러앉아있는 데본 공과 두 명의 공주를 차례로 소개했다. 대부인의 오른 편에 앉아있던 유엘과는 가볍게 아침 인사를 주고 받았다. 안색만으로는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썩 좋은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아힌스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그가 대부인의 표적이었던 모양인지 매우 지쳐 보이기도 했다.

“호호…이렇게 두 아들이 내 양 옆에 앉아있으니 너무 든든하네요.”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부인. 아들 둘이 모두 훤칠한 미남에 훌륭한 청년들이니 기쁘기도 하실 테지요.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데본 공께서도 손녀나 다름없는 두 공주님이 계신데 부러울 게 뭐 있으세요. 이제 막 피어나는 아가씨들이라 보기만 해도 화사하네요. 이런 공주님들이 내 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동통한 부인은 은근한 감정을 실어 그렇게 화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은 그녀지만 결국은 공작 가의 대부인이자 황실의 일원이었다. 한마디 한마디에 의도를 담고 뼈를 심는 데는 도가 텄다는 말이다. 아힌스는 속이 불편해지는 것 같아 물잔을 움켜 잡았다. 반듯한 미간에 주름을 만드는 유엘 역시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하십시오, 어머니.”
“공작,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인지는 어머니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아가씨들 때문에 그러는가요? 두 공주님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요?”

여자들에게 흥미가 생겼냐는 듯이, 말을 붙이는 모친에게 유엘은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순식간에 내려앉은 주위 온도에 대부인은 잠시 어깨를 떨었으나 끝끝내 말을 물리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그녀도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힘들게 오셨을 테니 당장 돌아가시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허나, 저 여자들을 형님이나 제게 억지로 붙이려고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유엘!”
“유치하고 편협하십니다. 지금이 어느 땐데 광대까지 끌고 와서 진지를 어지럽히는 겁니까? 지금의 샤휀은 일반 성이 아니라 군대 주둔지입니다. 황도의 연회장이 아니란 말입니다.”

차갑게 이치를 따져오는 유엘의 다그침이 대부인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원래도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아들이었으나 제 어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부인의 실속 없는 수다에도 침묵으로 받아 넘겨주던 이였는데 오늘의 그는 달랐다. 완전히 정색한 얼굴로 마치 타인을 대하듯 차게 구는 것이 아닌가. 결국 대부인은 천진한 척 하던 연기를 멈추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고고한 눈빛으로 유엘을 노려봤다. 조금 전의 어리숙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오만한 여왕의 자태였다.

“내가 와서 귀찮게 구는 게 싫다면 혼인을 하시면 되는 것 아니오, 공작.”
“안 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건은 황녀를 거절했을 때 이미 끝난 일인 줄 압니다.”
“-누구 맘대로!”
“황실의 도움이 없어도 나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허언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어머니께서 잘 아시겠지요.”
“…….”

대부인은 입술을 즈려 물었다. 유엘의 말은 조금도 틀린 게 없었다. 황실 사람들과 인연을 맺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입지가 흔들릴 아드리안 가가 아니었다. 그들의 역사는 길고 정통성은 확실했다. 되려 아쉬운 건 황제 쪽이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아드리안 공작이 제 수중에서 멀어질수록 불안해지는 건 황제였으니.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다. 대부인은 황제의 누이 동생으로 그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녀의 오라비는 도량이 좁고 의심이 많은 사내였다. 그런 타입의 사내를 구석으로 모는 건 좋지 못했다.

“…어째서 보다 안전한 길을 두고 돌아가려는 겁니까? 황제 폐하와 등 돌려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세상일이 그리 만만하고 우스워 보이나요 아드님? 한 발을 잘못 내디뎌 구렁텅이로 빠지는 게 정치판입니다. 안전 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치고도 뒤를 조심해야 하는 게 이 바닥입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황녀가, 아니면 내가 데려온 저 공주님들이 그리도 못 마땅합니까? 한사코 혼인을 못 하겠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어디 따로 마음에 둔 아가씨라도 있는 겁니까.”
“…….”
“…있군요. 맙소사. 내 정신 좀 봐. 공작도 스물 네 살이나 된 장성한 청년인데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니! 뭐 좋아요. 어디, 어떤 아가씬가요?”
“마음 속에만 담아둔 사람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혼인 안 하겠다 하는 건 아니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대부인은 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러 가던 도중 아들이 따로 보자 하여 따라 나왔거늘 들은 거라고는 복창 터지는 말뿐이었다. 결혼도 못하겠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여자를 데려올 생각도 없다. ‘어디 할 때까지 해보자 이겁니까?’ 그녀는 통통한 손을 눌러 흥분을 진정시키며 애써 말을 이었다.

“신분이 낮은 여자인가 보군요. 그러지 말고 한번 데려와 보지 그래요? 너무 심한 정도만 아니라면 첩으로 들이면 될 게 아닙니까. 부인이 있는 귀족들도 종종 첩을 들이곤 하니 크게 흉 될 건 없지요.”
“전혀, 첩 따위로, 들일 생각 없습니다. 조금도.”

유엘은 잘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 함부로 입에 올려도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 혼인 문제와는 상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대체 뭐가 문제죠? 사내로 태어나서 평생 혼자 늙어 죽을 작정인가요? 첩을 들일 생각도 없고, 혼인을 할 생각도 없다니!”
“혼자 늙어가도 상관없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 평생 외롭게 살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누구도 내 형님처럼은 만들지 않아요.”
“…!!”

희게 질린 모친의 얼굴을 유엘은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어린 시절 모친이 아힌스를 대하던 태도를 보며 그때부터 했던 결심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몸이 편하고자 누군가의 마음을 이리저리 이용해 먹는 속보이는 짓만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에게 대부인은 정말로 잔인했다. 차라리 아예 정을 주지 않는다면 모를까 아쉬울 땐 찾아가 사랑을 속삭이면서 귀찮아질 땐 매몰차게 내쳤다. 유모와 하녀들이 아이를 씻기고 재우고 돌보고, 뒤처리를 다해주는데도 그녀는 하루에 고작 반시간 내주는 걸 아까워했다. 그런 주제에 얼굴을 대면할 때는 또 세상에 둘도 없는 어머니인양 다정함을 가장했다. 일종의 희망고문이었다. 귀찮고 짐스럽지만 상대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이기심….

당시 어머니를 기다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던 아힌스를 생각하면 속에서부터 용암 같은 열기가 끓어올랐다. 정말로 가혹한 건 초지일관 무심했던 아비가 아니라 다정함과 무정함을 오가던 대부인 쪽이었다.

“저뿐 아니라 형님에게도 혼인을 강요할 생각일랑은 마십시오. 그분이 스스로 원하시면 모를까 감히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고 명령할 자격은 어머니께 없습니다.”
“…유엘.”
“후사가 문제라면 방계 쪽 아이들 중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욕심부리지 마세요.”
“네가 정말!”
“이만 가보겠습니다.”   

쌩, 하니 돌아나가는 아들을 보며 대부인은 할 말을 잃었다. 저렇게 말이 많은 이였던가…. 아들과 한번도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언성을 높여 다툰 적도 없었다. 그녀는 힘없이 카우치에 주저 앉았다. “어쩜 자식들이라곤 하나같이…!” 기대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조금 어수룩하더라도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 줄만한 아이를 원했었다.
“무정한 놈.”
얼음처럼 차가운 아들이 오늘따라 무척 원망스러웠다.







달칵.

티스푼을 내려놓는 작은 동작에도 여자들은 사냥 매처럼 눈을 빛냈다. 아힌스는 불편한 마음을 꾹 억누르며 애써 자리를 지켰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슈스켈은 예쁜 공주님들을 만나면 틀림없이 마음이 혹 할거라 큰소리 쳤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짜증만 배로 늘어났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입가에 가늘게 조소를 띠고 묻자 대놓고 사내의 얼굴을 훑던 두 줄기 시선이 후다닥 비껴갔다.
“으흠, 이거 참…. 공주님들께서 성주가 꽤 마음에 드셨나 보오.”
“…하.”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차주자 마주 앉은 세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마 이렇게 대놓고 빈정댈 줄은 몰랐는지 민망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매너를 지켜주기엔 아힌스의 속이 너무 불편했다. 두 공주는 큰 쪽이나 작은 쪽이나 하나같이 뻔뻔했다. 처음 만난 주제에 대놓고 눈웃음을 쳐대는 것도 우스웠고 사람을 시선으로 가두려는지 집요하게 바라보는 꼴도 신물 났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모친의 체면을 위해서였다.

“공주님들이 아직 나이가 어려 그런 거니 너무 불쾌해하지 마시오. 소녀들이 아닙니까. 잘생긴 미청년을 앞에 두고 마음이 설레는 것도 당연하지요.”
“글쎄요. 소녀치고는 참 부끄러움들이 없으십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애초에 너그러움이나 관대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예의 없는 사람에겐 똑같이 대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 말하며 아힌스는 오만하게 의자에 기대 앉았다. 주인으로서 자각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이런 자리에 선보여져 구경거리가 된다는 게 아주 못마땅했다. 여자들은 보면 볼수록 실망스러웠고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 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저쪽도 이런 자신의 무례한 태도에 정나미가 떨어지면 다행……………’헉. 뭐야. 저 눈빛들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불량한 태도를 보이면 흥미가 식을 거라 생각했거늘 두 배로 초롱초롱해지는 저 눈들은 뭐란 말인가.   
“…….”
등골이 서늘했다. 끝내주는 먹이라도 발견한 들짐승마냥 공주들은 아랫입술을 혀로 핥아 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황도에서 꽤나 놀던 여자들인지 아힌스를 아주 탐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거의 열 살이나 어린 여자들에게 기가 눌려 겁먹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아힌스는 몸에 바특 힘을 줬지만 솔직히 무섭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옆에서는 너구리와 여우를 섞어놓은 듯한 데본 공이 분위기 좋다며 헛소리를 해댔다. 조금 전에 먹은 아침 식사가 도로 넘어 올 것 같았다.  

그때였다.

“형님.”
“!”
“어디 불편하십니까. 안색이 또 안 좋군요.”
“유,유엘!”

구세주 같은 동생의 등장에 아힌스는 눈빛으로 매달렸다. 저 무서운 여자들과 한시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유엘 놈보다도 더 무서운 여자들이었다. 다행이 무언의 의미를 알아들은 건지 유엘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또 안 좋아진 거로군요. 아무래도 이만 일어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얼른 일어나야겠다, 유엘.”

서두르는 아힌스의 동작에 아가씨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 나왔다. 정말 매우 아쉽다는 듯 흘리는 그 소리에 온 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저 여자들이 십대 소녀들이라고!’ 말도 안 된다. 일전에 약제사네 딸들도 비슷한 또래였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슈스켈, 이 놈이 날 또 속인 게야! 망할 자식! 저 마녀들에게 날 팔아 넘기려 했음이 분명해!’   

유엘은 덜덜 떨리는 아힌스의 어깨를 안쓰럽게 안아주며 두 공주에게 눈빛으로 경고했다.

‘우리 형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공주들은 입을 뾰루퉁하게 내밀며 새침하게 유엘을 노려봤다. 비록 장래 낭군이 될지도 모르는 그였으나 당장은 낚아채간 금발머리 왕자님이 아쉬웠다. 황도에서도 보지 못한 백금발의 귀티 철철 넘치는 미남이었다. 예의가 어떠니 매너가 어떠니 운운하며 핀잔을 던지던 모습도 제법 복고풍으로 귀여웠다. 공작처럼 냉막하고 무심한 남자보다는 자극을 주면 바로바로 반응이 오는 아힌스 폰 아드리안과 사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그녀들은 생각했다.







***

평생에 유엘을 보며 안도하는 날이 올까 싶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던가 보다. 아힌스는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한숨을 토했다. 만일 유엘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예민해진 신경이 터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기 싫은 일에 억지로 떠밀려 다니는 것도 불쾌한데 하물며 그 염치없는 공주들이라니…!

“…속이 안 좋아.”
“형님.”
“어머니는…, 어딜 가셨어?”
“곧 테이블로 돌아오시겠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형님이 자리를 떠났다고 기분 상해할 분은 아닙니다.”
“…아아 그래.”

걱정 보다는 안도의 감정이 먼저 들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모친이 왜이리 낯설고 어색한 지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자신이 낯을 가리는 편이라지만….

“침실로 모셔다 드릴까요?”
“…아니. 온실로 가겠다. 그 편이 좋아.”

아힌스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유엘을 돌아봤다.

“함께 갈 테냐? 지난 번에 한번 와보긴 했겠지만 제대로 둘러보진 못했지. 시간이 난다면 거기서 차나 한잔 하자꾸나.”  

갑자기 왜 그런 마음이 드는 지는 몰라도 아힌스는 유엘과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자신이 아끼는 온실에서 동생과 대화를 나누며 골치 아팠던 생각들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차갑고 말도 없는 유엘이지만 녀석은 생각보다 정서를 교감하기에 괜찮은 상대였다.





“부겐베리아다. 정열적이고 화려한 꽃이지. 마음에 드느냐?”

백토로 만든 도자기 잔에 차를 따르며 묻자 유엘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새빨간 부겐베리아, 연보라 빛의 쟈스민, 아기자기한 후리지아까지 화사한 꽃들이 가득 피어있는 온실은 생동감으로 넘쳐났으나 한편으로는 계절과 맞지 않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온갖 종류의 새들이 날아다니는 커다란 새장까지 둘러본 유엘은 차를 입가에 대며 대답했다.

“부겐베리아보다는, 그 옆의 아이스베르크가 마음에 듭니다.”
“아이스베르크…? 음, 생각보다 취미가 고상하구나.”

아힌스는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유엘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아이스베르크는 장미 중에서도 곱고 섬세한 생김 때문에 주로 여성들 취향에 맞는 꽃이었다. 결혼식 때 신부의 드레스를 장식하는 꽃으로도 많이 쓰였다. …말하자면, 제국의 군장교에게 썩 어울리는 이미지는 아니라는 거다.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유엘이 슬며시 웃었다.

“…닮았잖습니까. 하얗고 새침한 것이.”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알쏭달쏭한 말만 던져놓고 짐짓 입을 다무는 동생이 묘해서 아힌스는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알다가도 모를 녀석.’

카우치에 몸을 늘어뜨리고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아 주위에 귀를 기울였다. 조그맣게 우는 새소리와 꽃들이 부대끼는 소리가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혔다. 온실이 비록 거대한 자연을 축소해 만든 작위적인 구조물이라지만 이렇게 편안히 앉아 휴식을 만끽하기에는 오히려 원시상태의 자연보다 나았다. 욱씬욱씬 쑤시던 위가 진정되고 두통 또한 잦아들자 아힌스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유엘을 바라봤다.

“마음에 들면 한 다발 꺾어주랴?”
“꽃, 말입니까?”
“그래. 내 화원에 가장 많은 게 아이스베르크다. 몽땅 뽑아가는 건 곤란하지만 네 침실을 장식할 정도라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아힌스로서는 크게 인심 쓴 거였다. 아이스베르크는 아힌스가 여덟 살 때 샤휀으로 오면서 처음 심었던 꽃이었다. 때문에 아픈 몸으로도 가능한 정원사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가꿔왔었다.

“줄게. 네겐 여러 가지로 빚진 것도 있으니. …그리고…동생이 원하는데, 그 정도쯤 못 주겠느냐.”

마지막 말은 목구멍에 두어 차례 걸렸다가 어렵게, 그리고 몹시 어색하게 빠져 나왔다. 아힌스는 이쪽을 바라보는 유엘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말해놓고도 조금 쑥스러웠다. 이제 와서 새삼 형이 어떠니 동생이 어떠니 하며 생색 내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문득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유엘과 자신이 완전한 타인이 아닌, 피가 섞인 가족이라는 걸 인정함으로써 무형의 안정감 따위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맞잖아. 내가 형. 그러니까 너는 동생이지.”

굳어있는 유엘에게 다시 한번 슬그머니 강조하자 동생의 잘생긴 얼굴이 흐릿하게 허물어졌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도 모를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인 유엘은 메마른 목소리로 그 말에 동의했다.

“…예. 제 쪽이 동생이니 형님은…, 형님이 맞지요.”
“내가 말을 잘못했느냐. 낯빛이 좋지 못하다.”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니다. 씁쓸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반응에 아힌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유엘의 얼굴로 가져갔다. 잔뜩 일그러진 미간이 보기 싫어 꾹 눌렀더니 반대로 손을 맞잡아 온다. “…어째서. 나와 형제라는 게 싫으냐?” 얼마 전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했을, 섭섭하단 기색을 잔뜩 실어 묻자 구겨진 얼굴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럼 왜? 내가 아니면 아이스베르크가 싫은 거냐? 말을 해봐. 왜 이렇게 굳어있는지.”

맞잡은 손만큼 몸도 바짝 다가갔다. 손가락 세 마디를 남겨놓고 아힌스는 유엘과 얼굴을 마주했다. 최근에 많이 친해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아힌스는 유엘을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엘은 이상한 녀석이었다. 거친가 싶다가도 부드럽고, 차가운 듯 하면서도 따뜻하고, 무심한 척하면서도 다정했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었으나 아힌스로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태도를 확실히 하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으련만 이 속을 알 수 없는 동생 놈은 제멋대로 사람마음을 휘젓고 다녔다. 유엘을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아힌스는 혼란스러웠다.

“…아힌.”
그렇게 부르며 유엘은 아힌스의 입술에 새털처럼 입맞췄다.

쪽….

아힌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힌, 이라니 너무나 낯선 약칭이었다.
“…….”
가까이 다가온 유엘의 가라앉은 검은 동공 속엔 기묘한 빛이 흘렀다. 느닷없이 가라앉은 분위기에 아힌스는 당황했다.

“유…엘…?”
“키스하고 싶습니다. …당신과.”      
“…….”

이상한 말을 한다. 언제는 허락 받고 키스했다고. 아힌스는 묘한 표정을 짓다가 작게 “그래.” 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겹쳐진 두 몸이 긴 카우치 위로 쓰러졌다. 유엘은 아힌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입술을 부드럽게 혀로 핥았다. 간지러워 고개를 도리질치자 킥킥 거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어 온다. 얄미운 마음에 한마디 하려 입을 벌리자 그 틈을 타고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마차에서보다는 부드럽게, 그러나 동굴 속의 키스보다는 더 진하고 격정적인 긴 입맞춤이 시작됐다. 아힌스는 숨을 헐떡이며 유엘의 호흡을 따라가려 애썼다. 미끈한 혀가 혀 천장을 훑고 치열을 더듬을 때면 저도 모르게 허리를 떨며 유엘의 품에 매달려 애원했다. “…천천히…, 조금만…조금만 천천히….” 그러나 뭉개진 발음으로 느리게 사정해도 유엘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는 뭐가 그리 조급한지 허겁지겁 먹어 치울 것처럼 더듬고 깨물고 마구 핥아 올렸다.
따닥-!
“아팟-!”     
마침내 이가 부딪혔을 때 아힌스는 작게 비명을 내지르며 유엘을 밀어냈다.
“왜 이래 대체!”
“…….”
“대체…!”

엉망으로 부딪혀오는 동생을 따끔하게 야단치려다 아힌스는 문득 말을 멈췄다. 유엘의 얼굴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너…왜…?”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혹은 쫓기다 지친 사람처럼 유엘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멍하니 아힌스를 보며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동생은 평소의 포커페이스는 어디다 내던진 건지 너무나 무방비 했다.

“…유엘.”
“…….”
“무슨 일이냐.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
“말해봐! 답답하게 입 다물고 있지 말고.”

한번도 유엘의 흐트러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알 수 없는 동굴 속에 떨어져 조난 당했을 때 조차도 침착하고 냉정하던 녀석이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이따금 못 보던 표정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저런 영혼이 빠져 나간 얼굴은 아니었다. 아힌스는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처음엔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가볍게 만지고, 입 맞추고…, 그리고 당신이 나를 봐주는 것만으로도 기뻤었는데.”
“…유엘!”

유엘은 서늘하게 웃으며 아힌스의 뺨을 쓸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동작이었으나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체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힌스는 긴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였다. 등줄기의 척추를 따라 꼬리뼈 끝까지 소름이 내달렸다. 오싹하면서도 하반신이 저려오는 묘한 감각이었다. 잔뜩 굳어있는 아힌스의 귓가에 유엘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아이스베르크는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
“꽃은…꺾는 그 순간부터 죽어가는 존재가 아닙니까. 나는, 그런 사랑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유엘은 아힌스의 손등을 감싸고 그 위로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쪽….

마침내 희고 고운 손 위에 깊디 깊은 화인이 새겨졌다. 유엘은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아힌스에게 웃으며 충고했다. 섧고 외로운 웃음이었다.

“…그러니 부디 도망치십시오 형님. 내 이기적인 욕망이 점점 더 커져서, 당신을 완전히 집어 삼키기 전에….”





“…….”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유엘이 떠난 후였다. 아힌스는 손등에 내려앉은 붉은 화인을 보며 숨을 멈췄다. 아까의 불길한 어떤 예감이 아힌스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부디 도망치십시오 형님. 내 이기적인 욕망이 점점 더 커져서, 당신을 완전히 집어 삼키기 전에.’

“…무슨 말이냐, 유엘.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해하지 못해.”

되뇌어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힌스는 양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건 아주 이상한 육감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어떤 본능적인 음습한 경고….

‘설마….’

머릿속을 스치는 불쾌한 의혹의 그림자는 아힌스를 자꾸만 혼돈 속으로 이끌었다.  







***

응접실로 되돌아온 아드리안 대부인은 아까의 절망감을 싹 지운 채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눈꼬리를 가득 휘며 한 사람 한 사람 번갈아 골고루 말을 건네는 그녀는 별칭처럼 사교계의 여왕다웠으나 실상 속내는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있었다. ‘잠깐 나갔다 왔더니 그 새를 못 참고 도망가? 엉덩이에 뿔난 망아지들 같으니! 이래서 딸을 낳았어야 하는 건데.’ 선을 뵈어야 하는 주인공들이 달아나버렸으니 응접실 분위기는 휑댕그러니 썰렁했다. 대부인은 민망함을 웃음으로 애써 감추며 테이블 밑의 손수건을 움켜 쥐었다.  

“성주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얼마 전 큰 일을 당했다더니 후유증이 오래 가네요.”
“이런…. 안타까운 일이군요. 모처럼 선남선녀들이 서로 좋은 시간을 보내려나 싶었는데.”   
“아유, 왜 아니겠어요. 성주와 공작도 공주님들이 마음에 든 눈치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정말 아쉽네요. 그렇지만 한 성에 머물고 있으니 만날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겁니다.”

데본 공과 말을 주고 받으며 살뜰하게 덧붙이자 한결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대부인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머리도 없고 까칠한 아들들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일까.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 한꺼번에 날라버렸으니 이건 어디 변명하기도 마땅찮았다. 늙은 여우 데본 공도 겉으로는 허허 웃어도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멀리서 찾아온 손녀나 다름없는 두 공주를 홀랑 버려두고 가버렸으니 얼마나 열이 뻗칠까.   

“헌데 큰 아드님께서 몸이 그리 약하신데 과연 혼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건….”
“보니, 매우 기품 있고 아름다운 청년이긴 했습니다만…흠. 아무리 그래도 저리 약하셔서야….”

슬그머니 트집을 잡아오는 중늙은이의 험담에 대부인은 눈꼬리를 치켜 세웠다. 자존심이 상한 데본 공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감히 아드리안 가의 직계를 간접적으로나마 힐난하다니 건방짐이 도를 넘어섰다. ‘이 늙은이가 황제와 사돈을 맺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글쎄요. 사람이 모든 걸 다 갖출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 아이가 아드리안 가의 피를 이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반려는 많은 걸 얻게 될 겁니다.”
“흠….”
“그리고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의사가 중요하지 않겠어요? 어때요, 공주님들? 직접 묻는 건 예의가 아니나 서로 허물없는 사이니 한번 들어봅시다. 성주와 공작이 남편감으로 어떻습디까?”

데본 공과 아드리안 부인의 공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공주들은 느닷없이 튀는 불똥에 당황했다. …아니, 당황하는 척 했다. 황도에서 어릴 때부터 단련된 작은 여우들은 살짝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당돌하게 대답했다.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네. 특히 아힌스 님이 좋아요. 아직 별 대화는 못 나눠봤지만 지적이고 우아해 보이셨어요.”

…지적? 우아? 데본 공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다가서는 나이의 그였지만 여자들의 안목만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기준으로 남자를 판단하는 걸까. 만약 데본 공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단연 아드리안 공작이다. 비록 새파랗게 젊은 놈이 시건방지고 얼음 뚝뚝 떨어지도록 차갑다고는 하나, 부와 권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혹은 남자답게 늘씬하게 잘 빠진 외양을 보나 절대로 아드리안 공작이 나았다. 계집애같이 파리해서는 하는 짓도 그에 못지 않은 샤휀의 성주 따윈 줘도 안 갖는다. 물론 데본 공 역시 성주의 가늘고 하얀 손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나 그것과 손주 사위 맞는 것과는 별개였다.   

“황도의 사내들과는 달리 정갈하고 순수하신 거 같아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청아한지…! 정말 잘난 아드님을 두셨어요, 대부인.”
“그래요…?”

대부인 역시 미미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대본 공과 같은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요 여우들이 아예 아힌스를 쥐고 흔들 작정이군.’ 허물없는 사이라는 게 빈 말이 아니듯 대부인은 공주들을 아주 어린 꼬맹이 때부터 봐 왔었다. 어떻게 보자면 두 아들 녀석보다 더 친하고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고로 그녀들의 남성편력 또한 꿰고 있었다. 그러나 원숙한 아드리안 대부인은 짐짓 모르는 척 차를 삼키며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 슈스켈의 전언을 받고 급한 김에 황녀 대신 데려온 공주들이니 아쉬운 대로 맏아들에게 붙여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천방지축에 철 없는 성품들이야 잘 가르치면 되는 일이고…. 그리고 아힌스는 물정 모르는 아이니 유엘보다는 설득하는 게 쉽겠지.’ 드세고 불여우 뺨치는 공주들이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멍청한 것보단 만 배 나았고 무엇보다 얼른 구두로나마 혼인을 성사시켜 황제의 불안을 달래야 했다.

“그럼 조만간 작은 파티라도 열어서 자연스럽게 친해질 기회를 마련해야겠네요.”  
“파티요?”
“예에, 파티 말입니다. 이 참에 성주의 위신도 세워줄 겸 주변 소영주들을 초대해서 서로 얼굴을 익히면 좋지 않겠어요?”
“그러나 공작이 좋아 안 할 텐데요…. 뭣보다 아직은 전시인데.”
“전시라도 어차피 신년파티는 해야 할 것 아녜요? 그걸 좀 크게 하겠다는 것뿐이에요. 틀림없이 기사들 사기도 올라갈 겁니다.”

대부인이 그럴듯한 명분을 갖다 붙이자 데본 공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 역시 황제와 공작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느라 많이 지쳐있던 것이다. 허약한 샤휀의 성주가 손주 사위가 된다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래? 일이 그렇게 됐단 말이지.”

슈스켈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털어놓은 어린 하녀에게 동화 몇 개를 쥐어주며 내보냈다. 그리고는 답답한 마음에 탁자 위의 물 주전자를 들어 주둥이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껏 자리를 마련해 줬더니 중간에 튀었다 이거지! …망할 놈. 하여간에 말은 드럽게 안 쳐 들어. 다 저 잘되라고 하는 짓이거늘.”

안 봐도 뻔했다. 불편한 자리에 앉아있으려니 궁둥이가 근질근질했겠지. 게다가 계집년들이 그 순진한 놈에게 오죽 추파를 던졌을까.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당부까지 해뒀는데 반시간도 못 채우고 튀다니 정말 얄밉기 짝이 없었다.

“엎어놓고 엉덩이를 팡팡 때려줄 수도 없고. 쯧.”

슈스켈은 빈 주전자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발로 한번 걷어찼다. 캉-, 소리가 나며 야단스레 굴러다니는 물건은 때려주라고 만들어진 것 같았다. 기회를 봐서 아드리안 대부인을 만나야겠다 벼르고 있었는데 그보다는 아힌스부터 찾아보는 게 급선무가 돼버렸다. ‘찾으면 이번엔 단단히 야단을 쳐서 단도리를 해놔야지. 제 놈이 얼굴 좀 반반한 거 빼면 뭐 믿을게 있다고 이렇게 튕겨, 튕기길.’
그는 복도를 걷는 내내 배로 늘어난 고용인들과 기사들을 흘겨보며 혼자 괜한 화풀이를 했다.


똑똑-

“문 여십쇼, 잘난 성주님.”
“…….”
“대답 안 하면 그냥 들어갑니다.”
“…….”
“씨발.”

쾅, 거칠 게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나 침실은 고요했다. ‘아직 안 왔나…?’ 이상스레 주위를 둘러보자 침대 가운데가 유독 볼록 하다. 슈스켈은 혀를 차고는 일부러 발걸음에 힘을 주며 다가갔다. 잠귀가 밝은 녀석이니 만약 자고 있는 거라면 깨우기 위한 요량이었다.   

“…….”
“자냐?”
“…….”
“주무십니까, 성주님. 예?”
“…….”

몇 번 무시를 당하자 이마에 혈관이 툭 튀어나왔다. 뭘 잘했다고 냉큼 침실로 와서 엎어져있나 싶었다. 사람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저가 먼저 동생 놈을 내쫓게 도와 달라 한 주제에 이제 와 태도를 싹 바꾸고는 멍청하게 굴다니 화가 났다. 슈스켈은 하얀 이불을 가차없이 확 잡아당기며 버럭 성을 냈다.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하셔야지요, 망할놈의 성주님아! 얼른 못 일어나…엇!”
“…….”
“아힌스! 너 얼굴이 왜 이래!”
“…치워.”
“아힌스!”
“시끄러워! 저리 나가!”

몸을 웅크리며 온몸으로 거부하는 아힌스를 붙잡고 슈스켈은 그의 턱을 고정시켰다.
‘맙소사!’
얼굴이 종이처럼 창백했다. 단정한 이마는 식은땀으로 젖어 촉촉하고 입술은 얼마나 물어 뜯었는지 피가 시뻘겋게 배어났다. 슈스켈은 눈이 뒤집혀서 아힌스의 어깨를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몸이 안 좋아서 나갔다더니 너 정말로 아픈 거냐?”
“상관 마. 내가 아프든 죽든 너와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나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이 자식아!!”
“하! 누굴 또 기만하려고 그 따위 달콤한 말을 지껄이는 게야? 그래 봐야 뒤로는 언제 배신하고 떠날지나 고민하는 주제에!”
“아힌스!!”
“나가! 나가, 나가란 말이다! 나가!”

아힌스는 몸부림치며 슈스켈을 힐난했다. 그러나 슈스켈을 욕하려는 의도보다는 제 꼴을 보여주지 않으려 그러는 것 같았다. 전부터 약한 모습 보이는 걸 수치로 생각하던 녀석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슈스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힌스를 당겨 품에 안았다. …녀석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울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팠다.

“진정해, 아힌스. 잘못 했다고 했잖아. 이제 속이지 않겠다고 했잖아.”
“…못 믿어. 넌 거짓말쟁이야. 사기꾼이야.”
“쉬-. 진정하고 천천히 호흡해봐. 지금 너 지나치게 흥분해 있어.”
“……싫어.”
“말 들어. 해치지 않아. 네가 아무리 바보 같은 짓을 한다 해도 비웃지 않으마.”
“…….”

슈스켈의 말대로 아힌스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꼭지까지 흥분해 있던 자신을 추슬렀다. 지푸라기처럼 옷자락을 쥐고 있는 마른 손이 안타까워 슈스켈은 등을 쓸어줬다. 조금 전까지 만나면 단단히 야단 쳐줘야겠다 벼르고 있던 다짐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어차피 이런 몸으로는 오래 살지도 못할 녀석인데…괜한 마음 고생을 시키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
“식당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냐?”
“…….”
“그게 아니라면 누가 해코지라도 했어?”

살살 달래며 이리저리 에둘러봐도 아힌스는 대답이 없었다. 슈스켈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머리를 굴렸다. 하녀에게 들은 바로는 티타임까지도 괜찮았다 했으니 일이 생겼다면 그 이후의 문제일 게다. …그 이후라면 틀림없이 아드리안 공작과 함께 했을 테고.   

“또 그 자식이냐? 공작 놈이 네게 무슨 짓을 했구나!”
“…아무 짓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쓸데없는 추측하지 마라.”

그러나 슈스켈은 이미 감을 잡았다. 그는 빠득, 이를 갈며 아힌스를 다그쳤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네가 왜 이래! 그 건방진 애송이가 못된 짓이라도 한 거냐? 어서 사실대로 말 못해?!”
“아무 것도 아니라잖아! 어디서 큰 소리야!”

뭐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되려 따지고 드는 아힌스가 의심스러워 슈스켈은 그의 푸른 눈을 직시하며 은근히 떠봤다.

“아힌스, 화 안 낼 테니 아무 거라도 말해봐. 네가 이렇게 희게 질리도록 고민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냥 닥치고 들어주기만 할 테니 속을 털어놔. 나 아니면 또 누구에게 속 이야기를 하겠어?”

아힌스는 그제야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행위를 멈추고 말간 눈으로 슈스켈을 올려다봤다. 미우나 고우나 유일무이한 친구이자 스승, 슈스켈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몇 번이나 망설이던 그는 결국 힘겹게 한마디를 꺼내 놓았다.

“…전부터….”
“그래.”
“전부터…조금…궁금했던 건데….”
“말해.”
“형제 사이에도 키스, 같은 거…하냐…?”
“!”

슈스켈은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기분이었다. 키스든, 자위든, 섹스든 아힌스는 전부 늦됐다. 워낙 무지하기도 하려니와 괜한 자존심 때문에 더 알아보지 않으려 하는 태도 탓도 컸다. 그러나 아무리 아힌스라도 사내인 이상, 아니 사람인 이상 본능적으로 위화감이 들지 않았을 리 없다. 조금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쾌감과 일신의 안이함 때문에 덮어 놓고 있었겠지.
“…….”
슈스켈은 슬슬 무지의 알에서 깨어나려는 아힌스를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힌스에게 제대로 된 상식을 가르칠 때도 됐다.
…최소한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얼굴을 했을까. 닿을 듯 말듯 애를 태우며 속삭이던 목소리…. 새까만 악마의 눈동자에는 죄책감과 광기를 동시에 담고 건드려선 안 되는 미지의 것을 갈구하듯 차게 웃던 너…. 왜, 너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도망치십시오 형님.’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가 내 성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버럭 성을 내고 싶어도 실낱 같은 이성이 준엄하게 경고했다.
-그를 도발하지마.
아힌스는 하늘빛 푸른 눈동자를 깜빡였다. 뭐가 잘못된 걸까. 지금까진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유엘의 손은 따스했고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는데…. 왜? 도망가라니, 어째서? 또 날 떠나려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 너 역시 내게 등을 보이려고? …왜? 무슨 이유로?






“…농담하냐.”

움켜쥔 주먹에 손톱이 새까맣게 파고들었다. 아힌스는 핏기 없는 얼굴로 속삭였다. ‘그럴 리 없어.’ 그러나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내려다 보는 슈스켈은 냉정하게, 조금의 오차도 없이 조금 전과 똑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모두 사실이다. 이 세상의 어떤 형제도 너희처럼 끼고 뒹구는 놈들은 없어. 혀를 섞어 키스하고, 몸을 더듬는 건 연인에게나 허락되는 행위다. 놈은 그 동안 너를 농락해 온 거야.”

퍽-, 베개가 날아와 박혔다. 슈스켈은 콧방귀를 꼈다. 그는 아힌스의 턱을 비틀어 쥐며 빈정거렸다.

“내게 화내봐야 소용없어. 난 네가 물어본걸 답해준 것뿐이다. 말했잖아, 처음부터. 아드리안 공작과 어울리지 말라고.”
“닥쳐. 거짓말하지마.”
“내가 할 일 없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네가 몰라도 어지간히 몰라서 하는 얘긴데, 너 네 동생 놈 눈깔 제대로 본 적 있냐? 그거 완전히 제대로 미친놈이야. 원래 평소에 이성적인 척, 냉정한 척, 바른 척 하는 것들이 까보면 진짜 미친놈이거든. 한 십 년 전장에서 구르면 그런 또라이가 되나 보지? 뻔히 안 되는 거 알면서 심심풀이 삼아 친형을 건드릴 정도면 돌아도 단단히 돈 거지, 미친 새끼.”
“입, 함부로 놀리지 마라!”
“너야말로 입 다물고 정신차려, 아힌스. 공작이 네게 좀 잘해준다고 그게 진심일거라 생각해? 이런, 천만의 말씀! 넌 또 속은 거야. 그 자식이 뭐가 부족해서 네 비위 맞춰가며 옆에 붙어있는데? 한번 건드려보니 만만하다 싶었던 게지. 어차피 전쟁 중에 마땅한 계집도 없는데 데리고 놀기에 적당했던 거야. 사내새끼랑 붙어먹는 재미가 또 쏠쏠하잖아. 임신할 걱정도 없고.”
“…닥쳐! 닥쳐, 닥치란 말이다!”
“아마 볼 일이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거다, 그 새끼는! 낄낄…. 착각도 정도껏 해 아힌스. 약해빠지고 성격 개 같은 네 놈 따위를 사랑해줄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한 줄 알아? 낳아준 어미한테도 버림받은 새끼가.”
“……!!!!!”

순간 움직임이 멈췄다. 아힌스는 석고상처럼 굳어서 자신을 사납게 닦아세우는 세슈켈을 멍하니 바라 봤다. 그의 손끝은 어느덧 덜덜 떨리고 있었다. 슈스켈은 쓰게 웃었다. 아힌스의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건드렸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의도한 결과였다.

“…슬프냐? 새삼 상처받을 가슴이 남아있어? 어리석기는. 그렇게 모질게 당하고도 또 기대를 하는구나, 이 바보 같은 놈아.”
“……아냐.”
“아힌스, 아무도 믿지 마라. 누구에게도 쉽게 정 주지마. 세상 인간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더럽고 쓰레기 같은 것들이야.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널 이용해먹을 생각만하지. 겉으로는 웃어도 뒤로는 온갖 흠을 잡으며 헐뜯는 것들이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아무도 믿지마.”
“…….”
“쉽게 마음 주면 되돌아오는 건 상처뿐이야. 충분히 잘 아는 놈이 왜 이래.”
“…….”
“아드리안 공작은 잊어. 그 놈이 네게 보이는 관심 따위, 다 가짜야. 대신 네겐 그보다 훨씬 나은 기회가 있잖아? 동생이랑 끌어안고 쪽쪽대는 것보단 탱탱하고 잘 빠진 예쁜 여자랑 자는 게 훨씬 낫지. 게다가 공주와 혼인해서 부마가 되면 가문에서도 더 이상 널 홀대 못 할거다. 성 안에 가득한 무식한 기사 새끼들 다 쫓아내고 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어차피 애초에 그게 네가 바라던 바였잖아.”

뺨을 쓸며 간살스럽게 속삭이자 아힌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슈스켈은 무너지는 마른 몸을 당겨 품에 안았다. 불쌍할 정도로 부들부들 떠는 몸이 가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힌스 같은 고집쟁이에겐 독해질 필요가 있었다. 어설프게 붙잡고 있는 혈육에의 집착 따위, 철저하게 깨부숴주리라 결심했다.

“아힌스. 예나 지금이나 네 옆에 있는 건 나뿐이야. 가진 것도, 쥔 것도 없는 나 같은 놈이 아니라면 누가 볼품없는 네 곁에 있겠어? 공작 놈처럼 널 기만하지도, 대부인처럼 널 버리지도 않아. 네가 믿을 건 나밖에 없어.”
“…웃기지마. 이 사기꾼 자식아.”
“이젠 사기 안쳐.”
“비켜.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져!”
“흥. 내가 없어지면 그때부터 눈물 뚝뚝 흘리면서 우시려고?”
“…나가, 제발.”
“틀렸어. 제발 도와줘, 라고 해야지. 끔찍한 동생에게서 벗어나게 해줘 슈스켈, 하고 애원해야지. 네가 그렇게 하면 난 너를 위해 최선을 다 할거야. 왜냐면, 너에게 나밖에 없듯 나에게도 너 밖엔 없으니까.”
“…놔.”

그러나 슈스켈은 더더욱 꽉 끌어 안으며 쇠를 끊는 듯한 거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상처받는 건 원하지 않아. 사람들이 네게 손가락질 하고 비웃는 꼴은 절대 두고 못 봐. 아힌스, 아힌스…. 난 니가 이뻐. 내겐 너뿐이야. 지난번엔 내가 실수했다고 했잖아. 이젠 그런 짓 안 해. 평생 곁에서 널 지켜줄게, 응?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 내 뜻대로 해. 이번만은 절대로 내가 옳다고.”







아힌스는 어두운 침실에 홀로 남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
백색으로 도배된 세상은 기만덩어리였다. 하이얀 눈 아래 없는 척, 숨어있는 오물들은 어떤 악취를 내며 썩어가고 있는 걸까. …역겨웠다. 어머니도, 슈스켈도, 그리고…유엘도.

‘네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친동생과 불륜을 하고 있던 거다, 이 멍청아.’
“…아니야.”
‘그 놈이 만져주니 좋았다고? 혀를 섞을 때마다 허리가 저릿한 게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그야 당연하지! 성감대를 더듬는데 안 느낄 인간이 어디 있어?’
“아냐…!”
‘내 말 명심해. 그 놈에게 몸을 허락하면 끝장이야. 철새처럼 한 철 머물다 갈 놈에게 실컷 농락당하다 처녀 뺏긴 여자처럼 굴면 그보다 더 꼴사나운 게 어디 있을까. 놈은 어차피 널 형으로도 안 봐. 괜히 헛 꿈 꾸지 말고 마음 단속 잘해. 또 뒤에 남겨져서 질질 짜고 싶어?’
“아니라고 했잖아!!!!!!”

쨍그랑?

아끼던 화병이 부서졌다. 아힌스는 짐승처럼 흐느꼈다. 유엘이 미웠다. 백치 같은 자신을 농락하고 틈날 때마다 키스의 달콤함을 알려준 그가 원망스러웠다. 슈스켈의 말대로 놈은 개자식이었다. 친형에게 발정하는 미친놈이었다. 그래, 그 놈이 나빴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이기적인 놈이 맞았다. 그래, 그런데……….

“……아파….”

아힌스는 지긋이 심장께를 눌렀다. 둔중하게 뛰는 심장이 고통을 호소했다. 아힌스는 몸을 공처럼 말아 아이처럼 웅크렸다. 눈물이 질척하게 비어져 나올 때마다 목구멍의 헐떡임이 더해갔다. …괴로웠다. 앞 뒤 정황이나 유엘의 의도 따위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슈스켈의 후벼 팔 듯한 논리를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십 년 전 가문에서 내쳐질 때 만큼, 가정교사 가브리엘에게 버림받았을 때 만큼…, 꼭 그만큼 괴로웠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자신에게 키스하고 애무했던 걸까. …잘해준 주제에. 마음 속의 빗장을 하나하나 벗겨가며 다정하게 안아줬던 주제에….

“너는 내게 그러면 안돼, 유엘…. 세상 사람 모두가 그런다 해도 너만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또르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아힌스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유엘을 만나 모질게 추궁하고 싶었다. 슈스켈의 말이 사실이냐고, 네가 정말 내게 음심을 품고 가벼운 마음으로 농락한 게 맞느냐고-.
“…….”
그러나 용기가 없었다. 재회한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힌스는 유엘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소중했다. 평생에 다시 없을 기쁨이었다. 유엘과 같이 있는 동안 아힌스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처럼 울고 웃고 떠들었다. 두 발로 흙을 내딛고 서서 서민들의 삶을 구경하고 그들과 함께 즐기고 술을 마셨다. 유엘은 다정했고, 아힌스를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처럼 떠받들었다. 단 한번도 귀찮은 짐짝처럼 취급하지 않았었다. 모친조차 내쳐버린 자신을 정말로 소중하다는 듯이…그래, 소중하다는 듯이…감싸줬었다.
아힌스는 그 모든 추억들을, 설렘들을 기만과 거짓으로 치부할 자신이 없었다.

“…….”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힌스는 협탁 위의 브랜디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투명한 유리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라 입 안에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야 어떻게 되어가든 눈 감고, 귀 막고 모든 오감을 정지시킨 채 현실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골머리를 썩히던 어머니와 공주들에 대한 생각은 저 구석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아힌스는 잔상처럼 떠오르는 유엘의 검은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침실은 어제보다도 쓸쓸하고 외로웠다.








** 번외



“금발머리, 귀여웠지?”
“그래.”
“화가 나서 빨갛게 달아오르다가는 나중엔 희게 질리는 것도 봤어?”
“그럼! 손 떨리는 것까지 다 봤지. 그런 주제에 혀 끝엔 가시를 달았는지 왜 그리 까칠해? 비쩍 말라서는 힘도 없어 보이는데 의외로 한 성질하더라.”

두 소녀는 까르르 웃었다. 수면 모자를 뒤집어 쓰고 나이트가운을 걸친 그녀들은 베개를 끌어 안고 수다 떠는데 여념이 없었다. 조신한 척 하는 건 사람들 앞에 설 때 뿐, 침실 안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천방지축인 말괄량이의 본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쁘잖아. 맨날 느끼한 변태 귀족만 보다가 이번에야말로 횡재했지 뭐. 몸도 안 좋고 가문에서 버림받은 음침한 사내라기에 틀림없이 깃털 빠진 까마귀 같은 몰골일 줄 알았다고.”
“아아-. 운이 좋았지. 저 정도라면 팔려가듯 하는 정략결혼이라도 참을 수 있어. 냄새 나는 영감탱이도 아니고, 이가 누렇게 변하지도 않았고, 배도 안 나왔어. 거기다 순진해 뵈더라. 난 아무리 잘생겨도 능글맞은 사내는 딱 질색이거든.”
“응, 나도! 내가 슬쩍 눈웃음도 치고 테이블 밑에서 발로 유혹도 해봤는데 발기하기는커녕 창백해져서 티스푼을 떨어뜨렸어. 아, 귀여워라.”
“뭐! 너 그런 짓까지 했단 말이야? 어머, 조그만 게 웃기지도 않아! 그 사람 나이로 보나 뭐로 보나 나랑 정혼할 확률이 더 높거든? 함부로 건드리지마.”
“어머어머 누구 마음대로! 넌 전에 이왕이면 아드리안 공작과 잘됐으면 좋겠다고 했었잖아.”
“흥, 에스코트를 좀 해달랬더니 싸늘하게 비웃으며 무안 주던 사내가 뭐가 좋다고? 내가 그 인간한테 망신당한 게 한두 번인 줄 아니? 정중한 척 하면서 아주 사람을 발 아래로 본다고.”
“그거야 네 사정이지. 누가 그런 매너 없고 인정머리 없는 남자한테 열 올리래? 아무튼 성주는 내 꺼야. 이번만큼은 너랑 나눠가질 생각 없어.”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쨍, 하니 얼어붙었다. 두 소녀는 서로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자매는 아니지만 거의 자매처럼 자라왔던 터라 친하기도 할뿐더러 서로 주거니 받거니 남자를 떠넘기던 사이였으나 남편 될 사람에게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건 정식 부인은 한 사람밖에 될 수 없었으니까.

“관두자. 어차피 너 같은 코흘리개 어린애랑 그 사람이 말이 통하기나 하겠니? 뭐로 보나 내가 낫지, 암. 키도 내가 더 크고, 가슴도 내가 더 크고, 눈도 내가 더 큰걸.”
“웃긴다. 그러는 너는 뭐 말이 통할 줄 알아? 문학은 빵점에 오페라 보면서는 하품이나 하고, 정치에도 역사에도 일자무식이면서.”

문학 빵점 소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안고 있던 베개를 내팽개치며 가슴을 내밀고 콧대를 높이 세웠다. 도도한 공작처럼 보이는 자세였다.

“에바. 넌 번번히 그런 문제로 나를 무시하는데, 내가 한가지 조언을 해주지.”
“흥!”
“살롱에서 주목 받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런 쓸 데 없는 지식 따윈 남자를 유혹하는데 아-무 필요 없어. 그거 알아? 남자들은 똑똑한 여자를 싫어해. 그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이 하는 말에 맞장구 치며 동조하는 여자를 원하거든! 그러니 매력적인 여자로 보이고 싶다면 어려운 책 읽을 시간에 가슴 마사지나 더 해주는 게 좋을 거야. 멍청한 여자보다는 가슴 납작한 여자가 더 인기 없으니까.”
“오-, 그래? 그렇지만 너는 전에 아드리안 공작에게 초대 황제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비웃음을 당했었지. 내 생각엔 샤휀의 성주 역시 가슴 큰 여자보다는 최소한의 상식 있는 여자를 더 좋아할 것 같아. 피부 관리 할 시간에 책 한 줄이라도 읽어두는 게 어때?”
“!”


잠시 후, 침실 안에선 난투극이 벌어졌다. 깃털베개가 침대 위로 날아다니고 액자와 화병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십대의 공주님들은 끓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문학 빵점 소녀는 크게 외쳤다.

“내가 매력이 없어서 공작 놈을 유혹 못 한 게 아니라고-! 그 놈이 고자란 말이닷! 내 가슴을 보고도 코웃음이나 치는 놈은 사내도 아니야!!!!”


밤마다 금발 천사님과 노니시는 공작님이 들었으면 큰 일날 소리였다. 공작은 고자라기 보다는 금발패치에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였을 뿐이다. 그런고로 이 사내는 가슴 큰 여자에게도, 지적이고 똑똑한 여성에게도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샤휀의 성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

아이는 잔뜩 달아올라 씩씩대면서 침대 머리맡의 사탕상자를 노려봤다. 알록달록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였다. 개나리 색 속지로 곱게 감싸인 안에는 보기만해도 생목 오를 법한 달짝지근한 사탕으로 가득했다. 여느 아이라면 환호성을 지를 환상적인 선물이었으나 금발의 도련님은 그 물건이 무척이나 괘씸한 듯 연신 쏘아봤다.

조그만 놈이 재주도 좋지. 예까진 또 어떻게 왔누?

‘버려라.’

한 마디에 옆에 서있던 시종 놈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친히 명령을 내렸음에도 우왕좌왕 하는 것이, 상전을 아주 우습게 보는 것만 같았다.

‘내 말 들리지 않아? 저 물건을 내 앞에서 치우라지 않았느냐.’
‘하오나 작은 도련님이 가져다 둔 상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하나쯤 맛 보시는 게…’

망설이며 권하는 시종에게 소년은 베개를 집어 던졌다. 마음 같아서야 더한 걸 던지고 싶었으나 고사리 같은 손에는 그 이상의 것을 쥘 힘도 없었다. 비리비리해서 악만 남은 그는 숨을 몰아 쉬면서도 못된 소리를 일삼았다.

‘왜애-? 그 말 병신 같은 놈이 네게 무슨 언질이라도 줬더냐? 누구 맘대로 맛보라 마라야? 누가 저런 사탕 따위 먹고 싶다던?’
‘…아힌스 도련님.’
‘꼴도 보기 싫어. 치워라, 저런 흉물스런 물건 따위!’

아이의 말에 침실을 돌봐주던 고용인들의 얼굴이 일제히 구겨진다. 병약하고 예쁜 아이지만 하는 짓은 도무지 곱지가 않다. 요즘 들어서는 둘째 시샘이라도 하는 건지 더욱 예민해져서 사소한 걸로도 자꾸 신경질을 부렸다. 마음 같아서야 모질게 체벌을 주고 싶지만 귀하신 공작 가의 아드님인지라 다들 속으로만 혀를 찼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쯔쯔. 커서 정말 뭐가 되려고.’ ‘클 때까지 살 수는 있고? 저렇게 성질이 고약하니 툭하면 병이 나는 게지.’

말 수가 좀 없기로서니 친동생에게 말 병신이라니, 싸가지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다. 게다가 얌전히 누워서 쥐 죽은 듯 지내도 귀찮은 판에 저리 성을 내며 큰 소리치니 참으로 얄미웠다.   

‘얼른 치우라는 내 말 안 들려? 치워. 어디 버리든 아니면 누굴 줘버리든 내 눈에 안 보이게 해.’
‘…예,예.’
‘그리고 유엘이 내 방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랬잖아. 불결하고 기분 나빠. 다시 한번 저런 물건이 내 방에 있을 시엔 너부터 자를 것이다.’
‘하지만 형님을 보려고 오시는 걸요. 너무 매정하게 대하지 마세요. 가엽잖습니까.’

아이는 매섭게 눈을 치떴다. 가엽다고? …대체 어디가? 아기주제에 나보다도 잘 걷는 그 녀석이? 태어나서 입때까지 잔병치레 하나 없는 그 녀석이? 돌부리에 넘어져서도 무릎이나 톡톡 치며 무심하게 일어서는 그 건방진 꼬마 녀석이?

잔뜩 앓고 난 터라 한껏 예민해져 있던 참이다. 눈 뜨자 마자 보이는 동생의 흔적이 눈에 거슬렸다. 과거엔 아이에게 감히 고개도 못 들던 아랫것들이 언젠가부터 대놓고 눈을 흘기는 것도 못마땅했다. 아이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소리 쳐 주고 싶었다. 내가 누워서 무위도식한다고 너희들은 손가락질 하지만 누워 있는 건 그래, 쉬운 일인 줄 아느냐고, 독한 약에 위벽이 헐어 먹을 거리를 하나하나 가려야만 하는 괴로움을 아느냐고…!
태어나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매일 방안에 갇혀 찾아오는 사람만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모친은 철철이 좋은 옷을 맞춰주고 부친은 생일마다 활과 검을 선물하지만 사용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주위엔 금은보화가 널려있고 각종 진미가 흘러 넘쳐도 아이에겐 하나같이 무용지물이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요 끈질기게 자리 보전만 하며 깔딱깔딱한 목숨을 연명하는 아이에게 그런 것은 모두 쓸데 없는 허영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세상만물이 다 귀찮고 미웠다. 차가운 벽만 바라보고 누워 있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고 잊을 만 하면 고개를 들이미는 동생도 괜히 싫었다. 아이의 눈에는 모든 것이 비딱하게만 보였다.

‘난 유엘이 싫다. 동생 같은 거 없었으면 좋겠어.’  
‘도련님!’
‘그러니 동정심을 자극해서 날 설득하려 하지 마라. 그런 하등동물 따위, 내 동생일 리가 없잖아.’

탕?

다음 순간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문이 열린 소리다. 조그만 게 힘도 좋지, 유엘은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서서 새까만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에서 하는 말을 다 들은 건지 동생의 인형같은 얼굴은 희미하게 분노를 담고 있었다. 이것 봐라? 아이는 침대에 누워서도 거만하게 콧대를 세웠다. 아무리 허약해도 이쪽은 네 살이나 연상이니 사고력에서부터 말발까지 상대가 안 된다. 감히 어딜?

‘어딜 또 들어오는 거냐. 누가 너더러 내 침실에 드나들라 했지?’
‘…….’
‘지난번에 분명 오지 말라고 했었잖아. 내 말이 우습게 들려?’
‘…….’

동생은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발끈 화가 났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훌쩍훌쩍 눈물을 떨구거나 아니면 최소한 얼굴이라도 찡그려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그러나 도자기 인형 같은 동생은 도무지 변화가 없었다. 화가 나긴 해도 뭐 이 정도로는 가소롭다는 듯 단정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꼴이 괘씸했다. 보통의 다른 아이라면 도망가도 벌써 도망갔을 텐데 저 녀석은 왜 변화가 없는 걸까. 그에 더욱 열이 오른 아이는 옆에 놓여있던 사탕상자를 집어 던졌다. 알록달록 예쁜 상자가 허공을 나르고 그 안에 있던 오색빛깔의 사탕이 와르르 쏟아져 흩어졌다.

그리고 그때서야 유엘의 까만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입을 앙 다물고 바닥에 흩어진 사탕을 보는 폼이 상처받은 것 같았다. 한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던 동생은 이윽고 원망스럽다는 듯 이쪽을 노려보며 물었다.

‘…사탕, 싫어해?’
‘!’

아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동생이 제대로 언어를 구사하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그다지 함께 어울리는 편은 아니지만 잠시 잠시 보는 동안에도 녀석은 벙어리처럼 꾹, 입을 다물고만 있었는데…. 그러나 놀란 건 놀란 거고 지금은 위엄을 보여야 할 때였다. 아이는 비웃듯 입 꼬리를 올리며 고압적으로 대답했다.  

‘사탕이 아니라 네가 싫은 거야. 나가, 유엘. 귀찮게 굴지마. 너는 널 좋아하는 사람들과 놀면 되잖아. 나는 너랑 너무 수준차이가 나서 어울리고 싶지 않아. 주제파악 못하는 어린애는 정말 질색이야.’

딱 부러지게 말하자 주위에서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어린애 주제에 어린애는 질색이라고 하니 다들 우습다는 눈치였다. 아이는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동생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더 어려운 말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런 말을 할수록 이쪽만 우스워지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위엄을 보이려다가 괜한 망신만 당했다는 생각에 목소리는 더 쌀쌀맞게 나왔다.
‘나가라니까! 얼른!’
유엘은 잠시 바닥의 사탕들을 노려보더니 짧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게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조그만 게 성깔은 있어서.’
누가 할 소리를 금발 도련님은 태연하게 내뱉었다. 고용인들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리고 유엘이 걸음을 딱 멈췄다. 녀석은 인형처럼 예쁜 얼굴을 돌려 차갑게 대답했다. 오늘따라 말이 좀 많은 동생이었다.

‘조금만 지나면 너 보다 훨씬 커질 거야. 그때가 되면 날 무시한 걸 울면서 후회하게 해주겠어.’


.
..



한 마디도 꺼내지 않던 것이 대체 어느 틈에 말을 배웠던 걸까. 아힌스는 쓰게 웃었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생각이 난다. 어릴 때의 유엘과 자신은 그야말로 견원지간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일방적으로 유엘을 시기하고 미워했던 거지만….

“……고얀 녀석.”

사탕 상자를 던져 버린 데 앙심을 품고, 그래서 그 다음에는 개구리를 던져 넣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한 겨울에 개구리 때문에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당시엔 몰랐는데 지금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런 짓을 할 녀석은 유엘밖에 없었다. 무뚝뚝하지만 은근히 개구쟁이에 제멋대로인 녀석이었으니 용의자로서 동기와 가능성이 충분했다.
아힌스는 피식 웃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형제는 형제였던가 보다. 그렇게 부대끼며 아옹다옹 다퉜던 걸 보면….


“주인님, 이제 식당으로 내려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노집사가 주의를 환기시키자 아힌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엘과 그 사단이 있은 후로 며칠이 흘렀지만 여전히 머릿속을 채우는 건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
마음이 괴롭기도 하고 막상 대면하기도 껄끄러워 아힌스는 그 동안 번번히 식사에 불참했고 간혹 우연히 지나다 유엘을 만나더라도 모르는 척 스쳐 갔었다. 그리고 그건 유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제멋대로였던 주제에 이번만큼은 아힌스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듯 모른 척 하는 그에게 정중하게 고개만 숙일 뿐 굳이 말을 걸지도, 알은 척을 하지도 않았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섭섭했다. 혼자만 속을 태우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슈스켈의 말대로 이쪽을 우습게 알고 갖고 놀다 이젠 질려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감히 내게.’
그러나 몇 번이나 고민을 반복하며 내린 결론은 어쨌든 한번쯤은 유엘과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거였다. 모든 것이 두루뭉실한 추측만 난무했기에 이렇다 할 확신을 끌어내기 어려했다. 무조건 슈스켈의 말만 믿고 척을 지자니 원통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 정말로 원통하고 분했다. 만약 이번에도 자신이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게 맞다면 이대로 주저앉아 울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따귀라도 후려쳐주던가, 유엘의 부하들을 죄다 내쫓아 한겨울에 동태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갚아주리라 맹세했다.

아힌스는 옷깃을 정리하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며칠 내내 훌쩍이며 울었지만 얼굴 어디에도 눈물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새벽부터 집사가 얼음으로 발갛게 부은 눈가를 가라앉혀준 덕택이었다. 접질렸던 발목은 아직도 시큰거리지만 걸을 만은 했다.

아힌스는 느릿한 걸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



달각달각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제외하면 식사시간은 조용했다. 하얀 테이블 보가 씌어진 거대한 직사각형의 식탁에는 가운데에 아드리안 대부인이 앉아있고 양 옆으로 공작과 성주가 앉아 무심하게 고기를 썰고 있었다. 힐끔힐끔 성주의 얼굴을 살피던 공주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금발 성주의 낯빛은 마치 패망한 왕국의 왕자라도 되는 것처럼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얼굴을 찌푸리는 것 조차 우아한 사내였다. 반면 데본 공은 그 꼴이 못마땅해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성찬을 앞에 두고 세상 근심이란 다 짊어진 저 표정이라니 있던 입맛도 떨어질 것 같았다. ‘원 사내자식이 표정하고는…!’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나선 건 역시 아드리안 대부인이었다. 그녀는 무뚝뚝한 아들들을 열두 번도 더 꾸중하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으며 방글방글 웃어 보였다. 동그마한 얼굴이 환해지도록 상냥한 웃음이었다.

“오래간만에 그대와 오찬을 함께 하니 기쁘네요. 한 성에 머물면서도 얼굴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니 참으로 속상합니다.”
“…송구합니다 어머니.”
“미안하다면 앞으로는 자주 좀 얼굴을 보여줘요. 공주님들도 낯선 성에 와서 외로우실 겁니다. 함께 얘기도 나누고 친분도 쌓고 그럼 좀 좋아요?”
“명심하겠습니다.”

눈을 내리깔고 짤막하게 대답하자 대부인의 입 꼬리가 부르르 떨린다. 그녀는 아힌스가 숫기가 없어 큰 일이라며 호들갑스럽게 웃어대다가는 넌지시 떠보듯 물었다.

“아 참, 며칠 후 신년에 있을 파티를 기억하나요?”
“파티라니요?”
“…사람도 참. 집사를 통해서 전하지 않았습니까. 신년파티를 열겠다고. 지역유지들에게 뿌릴 초대장과 명단은 이미 다 만들어두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모두들 앉아서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이 사람은 정말…어디까지 멋대로인 걸까. 아힌스는 쓰게 웃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사람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다닌다. 그런 점에서는 유엘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대부인 쪽이 더 섭섭하게 느껴지는 건 기대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였으니.

“헌데, 성주께선 두 공주님 중 어느 분을 에스코트 하시렵니까?”
“…!”

순간 손가락에서 나이프가 미끄러졌다. 아힌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나 두 공주의 표정이 강렬했다. 수컷을 유혹하는 발정기의 농익은 암컷들처럼 그녀들은 눈빛으로 아힌스를 압박했다. ‘날 선택해, 날!’ ‘내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부셔버리겠어!’

“…….”

여전히 무서운 여자들이었다. 소녀라기보다는 ‘여자’라는 느낌이 강했다. 아힌스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슬며시 책임을 회피했다.

“…글쎄요. 저보다야 공작 전하와 데본 공께서 에스코트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몸도 좋지 않고…또, 사교적이지도 않으니 괜히 옆에 있다간 폐가 될 듯 하군요.”

슈스켈이 뭐라 떠들든 저 여자들만큼은 절대로 싫었다. 만일 혼인을 한다면 첫날밤에 정기가 빨려 죽을 것 같았다. 실망으로 굳어지는 소녀의 얼굴들이 메두사처럼 무시무시했다. 손 끝부터 목덜미까지 도도독 소름이 돋았다.

“무슨 말씀을 그리합니까? 당연히 공작과 성주께서 한 분씩 에스코트해야지요. 그게 주인 된 도리이고 신사의 예의입니다. 몸이야 이제 많이 나은 듯싶으니 공연히 공주님들을 부끄럽게 하지 마세요.”

카랑---

대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접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아드리안 공작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 다들 크게 놀랐다. 이목이 집중됐음에도 공작은 태연히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차갑게 입 꼬리를 틀어 올렸다. 아힌스가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어 하는 그 표정이었다. 상대를 강압적으로 깔아뭉개려는 표정…. 그는 주위를 한번 무심히 둘러보고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부인을 향해 말했다.

“제가 전에 한번 말씀을 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벌써 잊으신 모양입니다.”
“!”

대부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다들 영문을 몰라 하는 가운데 그녀 홀로 아드리안 공작을 노려보며 표정을 굳혔다. 정색하는 아들의 태도에 조금쯤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아힌스는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했다. 오랜만에 보는 유엘의 화난 얼굴은 처음 샤휀 성을 뚫고 들어왔던 그 날처럼 서늘했다.

“…분명 강요하지 말라고 했었을 텐데요.”
“고,공작…. 나는 다만,”
“…….”
“내, 내가 뭘 얼마나 강요했다고 이럽니까아…. 나는 다만 조언을 했을 뿐입니다. 거기에 무슨 선택을 하든 그건 성주의 자유가 아닌가요…? 응? 그렇지요, 성주?”

대부인은 다급하게 아힌스를 보며 눈빛으로 매달렸다. 어떻게든 편을 들어달라는 눈치였다. 대체 무슨 일로 두 사람이 저러는 지는 몰라도 다 함께 하는 식탁에서 저런 꼴을 오래 보이는 것도 실례인지라 아힌스는 마지못해 그러마 대답했다. 그리고는 꺼낼까 말까 망설이던 말을 어렵게 털어 놓았다.

“…공작. 식사 후에 잠시 온실에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시간을 내주시지요.”

유엘의 무심한 눈동자가 검게 빛났다. 그는 식사하는 내내 회피하던 아힌스의 벽안을 비로소 마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이 보기에야 일견 거만해 보이는 태도였으나 아힌스는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건 거만을 떠는 것이 아니라 초조해 하는 것이었다. 유엘은 분명, 무언가를 갈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힌스는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


마지막 조사를 마치고 성에 돌아온 세드릭 호먼은 후드를 벗어 훌훌 눈을 털었다. 날씨가 잠잠하다지만 쌓여있던 눈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흩날려 의복을 적셔댄 까닭이다. 장화까지 벗어, 마중 나온 종자에게 맡기고 마른 헝겊으로 몸을 닦고 홀로 들어서자 보는 눈이 많았다. 세드릭은 가볍게 거수로 인사하고 툴락을 찾았다. 물고 온 정보를 알리는 게 시급했다.


“…그게 사실인가?”
“예. 악마의 늪이라는 동굴을 따라 끝까지 가봤습니다. 카슬란까지는 하루 반 거리도 되지 않더군요. 무서울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오, 맙소사!”

툴락은 경악했다. 하루 반 거리라니…. 눈 때문에 고생한 걸 제하더라도 최소 나흘은 걸리는 거리였다. 중간중간 계곡과 가파른 산길 때문에 고생을 해야 했고 요즘처럼 눈이 심하게 내릴 때면 아예 통행이 마비되어 왕래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하루 반 거리도 안 된다니….

“전하께 바로 알려야겠군. 내내 이 소식을 기다리셨네. 얼른 가서 아뢰게.”
“…제가요?”
“내가 보고해도 안 될 건 없겠지만 그보다는 자네가 직접 가서 전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네. 그리고 그게 자네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툴락은 슬쩍 눈을 찡긋하며 세드릭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번이라도 더 아드리안 공작에게 눈도장을 찍어두는 편이 앞날을 위해 유리하다는 거다. 그 동안 이런 저런 일들로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으니 이번 기회에 만회하라는 뜻도 포함해서였다. 세드릭은 코를 문지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툴락 경의 아래에 있으면 이런 점이 좋았다. 부하의 공을 가로채지 않는 좋은 상관이었다.

“아, 그런데 세드릭 호먼.”
“말씀하십쇼.”
“신년파티 소식 들었나?”
“예?”
“외근 다녀오는 바람에 못 들은 모양이군. 대부인께서 신년파티를 여신다네. 당장 예복을 준비하긴 힘들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제복을 잘 손질해두도록 해. 지방 유지들도 오는 모양인데 망신당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파티요? 이럴 때 말입니까?”
“…뭐 좀, 어이가 없긴 하네만 나름대로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네. 아무래도 대부인은 혼사를 서두르고 싶은 모양이야.”
“!”
“보면 뻔하지 않나. 샤휀에 공주들까지 대동해서 오신 걸 보면 많이 초조해지신 게지.”
“…전하와 황제 폐하의 사이가 그 정도로 악화된 겁니까?”

툴락은 미간을 구겼다. 악화가 된 건지 어떤 건지는 자신도 잘 모른다. 조금 쉴만하면 전장으로 내돌려졌으니 예민한 정치적인 문제에는 좀 둔감해진 게 사실이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아무래도 황제파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물론 대외적으로는 감히 공작 전하를 어찌하지 못하겠지만…그러나 이 세상 어느 권력자라도 비겁한 수작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비겁한 수작이라니….”
“여러 가지 말일세. 각종 독살, 납치, 암살…혹은 모해까지. 정치적인 라이벌을 끌어내리는 데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지. 게다가 황제는 특히 비열한 성품이니 전하께서는 되도록 약점을 안 만드시는 게 상책이야.”
“…….”

툴락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왜 주군이 혼인을 안 하겠다 완강히 버티는 지는 모르나 정치적으로는 썩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었다. 황제처럼 겁 많고 음흉한 사내를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얼마가 걸릴 지 모르는 카슬란 공략전을 생각한다면 싫은 혼인을 해서라도 후방을 튼튼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전쟁 중에 황제가 훼방을 놓아 보급을 막아버린다거나 하면 그거야 말로 큰 일이다. 바로 지난번에도 그런 식으로 골탕을 먹지 않았던가.

“그러니 전하께서 싫으시다면 차선책으로 성주라도 혼인을 하셔야지. 그 역시 아드리안가의 직계이니 마땅히 권리와 의무가 있어.”
“…부당합니다, 그건!”
“부당하거나 말거나 그게 전하에게도, 성주에게도 서로서로 좋은 선택이라네.”


태연히 어깨를 으쓱하는 상관이 얄미워 세드릭 호먼은 거친 걸음으로 문 밖을 나섰다. 최소한 아드리안 직계 중 하나는 황실과 혼인을 해야 안심이라니, 그럼 전하께서 하시면 되는 일 아닌가! 왜 하필 몸도 약한 샤휀의 성주가 그런 일에 나서야 하는지 절대로 수긍할 수 없었다.
“젠장!”
그 백합처럼 우아하던 사내 옆에 여자가 나란히 선다는 건 어쩐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쪽이 꼭 가지려고 욕심 내던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 주기도 싫었다. 성주의 희고 고운 손을 탐하는 누군가를 상상하기만 해도 분기가 끓어 올랐다. 세드릭은 흥분해서 씩씩거리다가 문득 어떤 기시감에 걸음을 멈췄다.
‘…뭐지?’
언젠가 분명 느꼈던 감정이다. 이런 장이 꼬이는 듯한 불쾌감은….
머리를 짚으며 고민하던 세드릭 호먼은 그러나 이내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지금은 보고가 우선이었다. 주군에게 조사결과에 대해 보고도 하고 슬쩍 운을 띄워 혼인 의사에 대해서도 한번 물어봐야겠다 결심했다.

“그나저나 어디 계신 거냐, 전하는…. 오찬도 끝났을 시간인데.”









아힌스는 백장미의 목을 꺾었다.

막상 불러내기는 했으되 쉽게 말이 안 떨어졌다. 뭐라 말머리를 꺼내야 할까. 며칠 전의 일부터 따져 물어야 하나, 아니면 그 전부터 해왔던 키스의 의미부터 추궁해야 할까. 마음이 번잡하고 우울했다. 깊은 탄식과 함께 장미의 모가지를 움켜쥐자 작게 돋아있던 가시가 하얀 손에 생채기를 만들었다. 새빨간 피가 잉크처럼 번져 나왔다.
“……쯧.”
뒤에 서서 그걸 지켜보던 유엘은 혀를 찼다. 그는 목에 두르고 있던 크라바트를 풀러 아힌스의 상처를 감쌌다. 겹쳐진 섬세한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피가 멈추자 유엘은 상처에 입을 맞췄다.   
“!”
“…….”
“무슨 짓이냐.”
“상처를 입은 당신이 나쁜 겁니다. 싫다면 빌미를 주지 마십시오.”
“억지다.”
“맞습니다.”
“…괘씸한 놈.”

무의미한 공방전이었으나 긴장은 한결 느슨해졌다. 아힌스는 유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젊고 잘생긴 제국 최고의 군장교가 형님 손에 난 작은 생채기 하나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차가운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지는 과정이 신기해 아힌스는 작게 웃었다.

“…유엘.”
“말씀하십시오 형님.”
“나는 네게 뭐냐.”
“…….”
“너는, 내게 도망가라고 말했지. 나는 며칠 동안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고민했다. 고민하고, 고민하고…또 고민했지. 그러다 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더구나. 그래…. 네 행동은 여러모로 이상했어.”

아힌스는 유엘이 감싸놓은 상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다시 유엘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검은 눈동자는 거죽은 서늘하되 그 속에는 깊은 열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까지는 좀체 알 수 없었다. 숨결 조차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아힌스는 유엘의 품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유엘의 심장박동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근두근….
조금씩 커져가는 그 소리가 어떤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아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말이 없는 사람은 상대를 지치게 한다. 늘 저 필요한 말만 뱉어놓고 돌아서는 동생 때문에 괴로웠다. 시작이 냉혹했으면 끝까지 냉혹했어야 했다. 반대로 다정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변치 않고 다정해야만 하는 거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듯 헷갈리게 구는 건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날 좋아하니?”
“예. 좋아합니다.”
“얼만큼?”
“…뭘 물으시는 겁니까.”
“대답해.”
“…좋아합니다. 아주, 많이.”

머리 위로 내려앉는 낮은 한숨에 아힌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유엘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아힌스는 알 수 없는 그의 눈을 노려보며 원망을 퍼부었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
“나를 놀리려고? 키스의 의미조차 모르는 내가 우스워서…?”
“…형님.”
“내가 영원히 모를 거라 생각했니? 아니면 알아도 상관없다고 생각 한 거냐? 잠시 놀다 버릴 사람이니까?”
“형님!”

유엘의 이마에 파르라니 혈관이 솟았다. 그는 아힌스의 양 어깨를 움켜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그 따위로 말하지 마십시오!”
“…닥쳐! 그럼 이유를 말하란 말이다. 무슨 까닭으로 날 멍청이로 만든 거냐! 왜!!”
“…!”

아힌스는 숨을 몰아 쉬었다. 심장이 둔중하게 아파왔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좀 더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이성을 놓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게 잘 안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뭣도 모르고 키스를 조르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을까. 심지어 그런 와중에 기분 좋은 쾌감까지 느꼈었는데….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슈스켈이 말했다. 너는 나를 농락한 거라고. 넌 철새 같은 놈이니 한 철 머물다 떠날 거라는 얘기도 했다. 그는 네가…네가 날 형으로도 생각 안 한다고 했다.”
“…….”
“…그게 사실이냐? 정말 나를 형으로조차 생각하지 않아…?”

아힌스의 벽안은 바람에 흔들리는 수면 같았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하게 유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동생이 부정해주기를 바랐다. 아힌스는 유엘을 가지 치듯 쳐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유엘의 대답은 참으로 매정하게도 긍정이었다.

“…어느 정도는…사실입니다.”

짜악------

아힌스는 따귀를 후려갈겼다. 마른 손이 무슨 힘이 있겠냐마는 원독이 실리자 묵직함이 달랐다. 안쪽 살이 터졌는지 유엘의 입가에 피가 번졌으나 아힌스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무더기무더기 피어있는 백장미를 가지째로 꺾어 유엘을 후려쳤다. 힘을 줄 수록 가시가 박혀들어 온통 손이 새빨갛게 물들었지만 머리 끝까지 차오른 분노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네가 감히 나를 농락해? 슈스켈의 말이 사실이라고? 감히 정말로 날 갖고 놀다 떠나려 했어?!

“……형님!!!!!”

콱, 유엘이 팔목을 낚아챘다. 그는 한줌도 안 되는 아힌스의 팔목을 비틀어 가시나무를 억지로 떨어냈다. 피 묻은 아힌스의 손바닥을 펼쳐보며 그는 버럭 성을 냈다.

“꺾어도 왜 하필 가시나무야! 파상풍 걸리려고 작정했습니까!”
“너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파상풍으로 죽든 네 놈 때문에 신경성 위염으로 피를 토하다 죽든!”
“왜 상관이 없습니까! 당신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상관이 없어!!!”
“이 자식아! 형 아니라며! 형으로 생각 않는다며!!”
“씨발!”
“욕하지마! 이 하등생물아!!!!!!!”

눈을 뒤집으며 소리지르는 순간 입술이 가로막혔다. 아힌스는 거칠에 입 맞춰오는 유엘의 등을 먼지 나게 두들겨 팼다. 또 키스로 대강 때우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이 죽일 놈! 감히 날 뭐로 보고!!!’

“…흣…!”
“헉헉….”
“…혀를 물어뜯다니 미쳤습니까.”
“누구 맘대로 키스하래?! 너야말로 미쳤느냐!”

와락-

“!”
“……형님.”
“이…이거 왜 이래! 놔라 놔! 누가 네 형이야! 아니라며! 왜 형도 아닌 남의 몸을 끌어안는 거냐! 이거 놔!”

마구 덮쳐오는 유엘의 무게를 못 이겨 기우뚱하던 아힌스는 결국 바닥의 양탄자로 쓰러졌다. 유엘은 답지 않게 개처럼 품으로 파고들었다. 냉랭해서 온갖 폼은 다 잡던 것이 애처럼 굴자 아힌스는 그 얄미운 등짝을 쩍,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꽤 아팠을 텐데도 유엘은 작은 비명 소리 하나 흘리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아힌스를 끌어 안고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천사인줄 알았어. 내 집에 사는 천사인줄 알았다고.”
“뭐…?”
“형 같은 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쳐다도 안 봤어. 살랑살랑 예쁜 금발로 표독스럽게 사람을 유혹해놓고 왜 이제 와서 형이래? 너한테 형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돌 것 같아. 뭣도 모르고 안겨올 때마다 아랫도리가 쑤셔 죽을 것 같다고!!”
“…유…유엘?”

맞닿아있는 심장이 쿵,쿵,쿵,쿵 뛰었다. 아힌스는 제 목덜미에 파묻고 있는 유엘의 고개를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손가락 한마디를 사이에 둔 동생의 얼굴은…의외로 몹시 지쳐보였다. 황관 하나를 빼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는 아드리안 공작인데 행복해 보이기는커녕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었다. 아힌스는 이런 얼굴 하나를 알고 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만나는 반갑지 않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너는…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냐.”
“…당신이랑 하고 싶어.”
“내 것을 다 가져가놓고 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는 표정이야?”
“……널 안고 내 것으로 하고 싶어. 가둬두고 나만 보게 하고 싶어.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매달리게 만들고 싶다고.”
“…………미친놈.”

아힌스는 팔을 둘러 덩치 큰 미친놈을 안아줬다. 아무리 화가 나도 속으로만 갈무리하는 녀석인데 그 동안 너무 참다 보니 머리가 좀 돌아버린 모양이었다. 가둬둔다느니 매달리게 만든다느니 하는 헛소리는 섬찟했지만 조금 가엽기도 했다.
‘지 형을 보고 천사인줄 알았다니 역시 하등동물이었어…….’

혀를 차는 와중에 아힌스는 맞닿아 있는 유엘의 중심이 커져 가는 걸 느꼈다. 당황해서 쳐다보자 유엘의 눈이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느릿하게 아힌스의 허리를 쓸었다. 성에 대해 둔감한 아힌스라도 이게 보통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챘다. 오싹하게 등줄기가 떨려왔다.

“…………흣.”
“왜…왜 이래….”
“…미안. 지금…조절이 잘 되질 않아서….”

갈라진 목소리가 조급해 보였다. 아힌스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유엘은 지금 자위를 하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어떻게? 남의 몸 위에서 이런 자세로 그걸 하겠다고?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슈스켈은 자위는 혼자 있을 때 하는 거라고 했다. 남에게 보이는 건 부끄러운 거니까 주의하라는 말도 했었다. 물론 그 ‘남’에는 슈스켈은 안 들어가는 것 같지만.

“비켜. 내 몸 위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못 움직입니다. 심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어느새 정중한 말투로 되돌아온 유엘이 속삭였다. 정말로 괴로워 보였다. 낮게 내쉬는 숨결이 금방이라도 정액을 분출할 것 같아 아힌스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저런 야한 얼굴이라니…. 자신도 슈스켈의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었더란 말이냐.
결국 동생에 대한 동정심이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다. 아무리 뻔뻔스런 놈이라도 저런 꼴을 형에게 오래 보이고 싶지는 않을 게다.

“……하려면, 얼른 해. 무겁고 짜증나니까.”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엘은 몸을 부대껴 왔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자위 방법이라도 되는지 그는 아힌스의 성기와 제 성기를 얇은 천 위로 마찰시키며 흥분을 고조시켰다. 창백했던 아힌스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놈만 해결하면 될 것이지 왜 남의 물건까지 자극시켜 이 사단을 만드는 지 모르겠다. 유엘의 밑에 깔려 할딱할딱 숨을 내뱉는 현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헉헉…….”
“…흐윽…읏……………!”
“아힌……아힌…….”

겹쳐지는 숨소리가 외설스럽다. 어느새 유엘의 어깨위로 올라간 아힌스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아힌스는 어쩌면 이게 바로 슈스켈이 말한 성희롱이라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던가. 단순히 유엘만 탓할 노릇은 아니었다.

“그만………만지지 좀 마…. 아아…싫어…!”
“가만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눈 꼬리에 눈물이 매달렸다. 송송 맺히는 땀으로 이마께가 촉촉히 젖었다. 아힌스는 자신의 성기가 벌떡 서는 걸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블리오 사이로 사내의 거친 손이 침입해 들어와 성기를 바싹 움켜잡았다. 깜짝 놀라 눈을 홉 뜨자 어느새 유엘의 손 안에서 두 개의 성기가 맞물리며 서로를 자극하고 있었다. 천박하게 얽혀있는 금빛과 시커먼 흑빛의 음모를 확인한 아힌스는 저도 모르게 찔끔 찔끔 멀건 정액을 방사했다.

“………유,유엘………이상해….”
“……헉헉…쉿-. 조금만 더…….”
“…아…안돼……흑…하지마아……아앗……!”

순간 고환을 자극하는 손길에 아힌스는 허리를 펄떡 튕겼다. 잔뜩 당겨졌다 오그라드는 고무줄처럼 온 몸이 탄력적으로 수축됐다. 그리고는 방사……. 쾌감이 전신을 달렸다. 주르륵, 힘  빠진 두 다리가 유엘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아힌스는 두 다리를 벌린 채로 숨을 몰아 쉬었다. 유엘도 성공리에 방사를 마쳤는지 기쁘게 입을 맞춰왔다.
"……."
아힌스는 신경질적으로 유엘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제 꼴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쭈욱 살폈다. 단정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블리오 자락까지 번진 하얀 액체에선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슈스켈과 장난처럼 자위할 때와는 천지차이로 몹시 수치스럽고 기분이 괴상했다. 그래. 정말로 이상했다. 꼭,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한것만 같았다.
글썽 글썽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부풀었다.

“……으…으…으……….”
“혀,형님…?”
“……으흑……흐흑…………!”

아힌스는 울음을 터뜨렸다. 훌쩍훌쩍도 아닌 대성통곡이었다. 유엘은 어쩔 줄 몰라하며 어린애처럼 우는 아힌스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왜 우십니까…. 허락하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허락했어 이 도둑놈아! 나쁜 놈! 날 건드렸어! 너 따위…너 따위가………!!”

유엘은 경기를 일으키는 아힌스를 끌어안고 등을 도닥였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키스 했을 때와는 사뭇 반응이 달랐다. 처녀 뺏긴 열일곱 살처럼 울어대는 아힌스를 끌어안고 유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죽일 놈이었다. 그 동안 잘 참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터뜨리다니 너무 미안했다. 진짜 성행위와 비교하자면 가소로울 정도의, 자위와 다름없는 행위였지만 아힌스에게는 충격이 컸던가 보다. 유엘은 밀려오는 죄책감에 얼굴을 못 들었다. 사람 열 둘 죽인 살인마보다 자신이 더 나쁜 놈 같았다.

그래서 유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허둥지둥 온실 문을 여닫고 나가는 누군가의 기척을. 평소라면 예리하게 날을 세우고 있을 그였지만 당장 눈 앞의 형님에게 빠져 주위의 새 울음 소리가 변한 것 조차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


“대부인께서 여러 가지로 애쓰시는 모양이지만…내 생각엔 쉽지 않을 것 같네.”

반백의 머리를 깨끗이 빗어 넘긴 중늙은이는 교활하게 눈을 빛내며 슈스켈을 돌아봤다. 파이프를 쥔 손은 다소 초조해 보였다. 그는 아드리안 대부인을 살살 꼬드겨 자신들을 여기까지 오게 한 슈스켈 푸쉐를 원망하는 눈치였다.

“황제 폐하로부터 또 독촉이 왔다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으시다는군.”   
“아아- 그러십니까.”
“그렇게 느긋해해도 되는 건가? 이번 일이 잘 성사되어야 자네도 원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크큿….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슈스켈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눈꼬리를 휘었다. 데본 공은 그런 슈스켈을 못 마땅하게 노려봤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의뭉스럽게 구는 태도가 영 눈에 거슬렸던 까닭이다.  

“알고 있으면 좀 적극적으로 나서보게. 지금 이대로라면 아드리안 공작도, 샤휀의 성주도 가능성이 없어. 형제가 죄다 돌부처들인지 공주를 보고도 눈 하나 깜빡 안 하지 않나?”
“…뭐, 평범한 형제는 아니지요.”
“알면 수수방관하지 말고 방법을 제시해보게. 이게 따지고 보면 자네 탓도 커. 가만 있었으면 중간이나 갈 일을 괜히 공작을 설득해 보겠다고 나서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 하고 있으니 이거야 원.”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이야 알았겠습니까?”

흉 진 뺨을 실룩거리며 슈스켈은 피식 웃었다. 물론 조소였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 앞뒤 생각도 않고 홀랑 꼬임에 넘어간 주제에 이제와 남 탓을 하다니 우스웠다. ‘다 늙은 영감탱이가 욕심은 많아가지고….’ 어쨌든 슈스켈에겐 잘된 일이었다. 이런 욕심 많은 속물일수록 이용해먹기엔 좋았으니.  

“공작은 확실히 만만히 볼 사내는 아니지요. 새파랗게 젊은 놈이지만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은 노련한 수컷이 아닙니까? 아마 우리 뜻대로 쉽게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그럼 어쩌자는 겐가.”
“그러니 차라리 샤휀의 성주에게 공을 들이는 게 더 낫다, 이 말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 이러나? 하지만 그 쪽도 만만치 않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는가.”

데본 공은 이맛살을 구기며 성을 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꼬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아드리안 공작이 정 안되면 샤휀의 성주를 꾀면 되는 일이었고, 고작 시골성의 성주 정도야 눈 감고도 찜 쪄 먹을 수 있다 장담했거늘…. 그러나 생각 외로 병약한 사내는 기가 세고 오만했다. 혼사를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질질 끌려 다닐 우유부단한 성격도 아니었다. 차라리 권력욕이라도 있다면 설득이 쉬웠을 것을, 이도 저도 아니고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니 찔러볼 구석조차 없었다.

“…생긴 건 기생 오라비같이 생겨서는 여자한텐 관심도 없는 눈치더군. 아니지, 어쩌면 여성편력이 너무 화려해서 그런 건지도. 그런 놈들이 뒤로는 더 구린 법이니까.”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슈스켈의 잿빛 눈이 순간 위험하게 번뜩였다. 데본의 중늙이는 미쳐 보지 못했으나 사람 하나를 통째로 회 쳐 먹을 사나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술 끝을 끌어올려 차분히 표정을 감추고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내처럼 조근조근 말을 건넸다.

“성주가 미남인건 사실이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영 숙맥이지요. 쓸데없는 상상력을 동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 그 사내는 제국의 마지막 남은 순결한 청혈(靑血)이외다.”
“흥. 그럼 더 큰일이 아닌가. 스물이 넘은 사내가 경험이 없다는 건 미덕이 아니라 무능일세.”
“…….”

슈스켈의 이마에 불끈 힘줄이 솟았다. 입술은 호선을 그리되 눈은 웃고 있지 않은 그는 눈 앞의 늙은이를 죽여 버릴까 고민하다 가까스로 인내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데본 공은 슈스켈의 기세에 의아한 듯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슈스켈이 더 큰 폭으로 성큼 다가서자 두 사람의 거리는 한층 가까워졌다. 그는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데본 공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머리에, 뚱뚱하고 못생긴 사내가 경험이 없다면 무능이겠지. 그러나 우리 아힌스는 아니야. 그건 걔한테 어울리는 계집년이 없어서 비롯된 일이니까요. 일례로 나리가 데려온 공주들이 아힌스에게 달려들면 들었지 그는 티끌만치 관심도 안 보이지 않았습니까?”
“이런 무례한-!”
“-닥쳐 영감탱이. 같잖은 말이나 씨부릴 생각 말고 당신 발등에 붙은 불이나 신경 쓰시지?”
“……!”

내년이면 육십을 바라보는 데본 공은 퍼렇게 질려서 입가를 경련시켰다. 뭐 저런 후레자식이 다 있누! 원래도 개 같은 놈이지만 본색을 드러낸 슈스켈 푸쉐의 태도는 경악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정작 슈스켈 본인은 싱긋 웃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아까의 본론으로 돌아가죠. 여하간에 중요한 건 성주를 어떻게 꾀어내느냐 하는 문제지요?”
“이……!”
“이보십쇼, 나으리. 당장 모가지가 간당간당 하지 않으십니까? 예까지 와 놓고, 게다가 일을 해결하겠다 큰 소리 탕탕 친 주제에 빈 손으로 돌아가면 그 속 좁은 황제가 잘도 그러냐, 알겠다-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건 다 네놈이-,”

핏대를 올리며 힐난하려던 데본 공은 순간 말이 막혔다. 이미 여기까지 일이 진행된 데야 놈을 탓해서 무엇 하리-.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어떻게 해서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시건방진 슈스켈 푸쉐를 단죄하는 건 차후 문제였다. 어쨌든 지금은 그의 두뇌가 필요한 때였으니. 결국 그는 이를 벅벅 갈면서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묘안이 있다면 말해보게. 그래, 무슨 수로 성주를 설득하겠다는 건가? 말했다시피 시간이 없어. 반드시 단기간에 해결해야만 해.”
“정론으로만 가려 하니 일이 안 되는 거지요. 크큭…. 요는 혼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는 것이려니.”

슈스켈은 의뭉스레 웃으며 품 속에서 사각으로 접힌 작은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데본 공 눈 앞에 대고 약 올리듯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게 대체 뭔가?”
“연인들을 위한 약.”
“!”
“물에 넣어 마셔도 감쪽같고 술에 넣어 마시면 더 효과가 좋지요. 만일 공주들께서 정말 아힌스 폰 아드리안을 반려로 맞고 싶어하신다면 아낌없이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인가.”
“뭐 보이는 대로, 추측하시는 대로-.”
“귀하디 귀한 레이디들에게 하룻밤을 빌미로 사내를 붙들어라, 이 말인가! 이건 고얀….”
“제가 알기로, 정숙한 숙녀들은 아니지요.”
“슈스켈 외르겐!”
“이런, 데본 공. 저는 외르겐이 아니라 천박한 협잡꾼 푸쉐입니다. 착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자꾸 점잖게 말을 돌릴 양이면 더 대화해 봐야 진전이 없겠군요. 아직은 여유가 있는 모양이니 소인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몸을 돌리는 슈스켈에 당황한 데본 공이 얼굴색을 바꾸며 달려들었다.

“슈스켈! 이 사람 이거 왜 이러나. 이렇게 가버리면 자네에겐 좋을 게 뭐 있다고.”
“황제께서 제게 자작 자리를 약조하셨다지만 솔직히 그런 자리 가져도 그만, 안 가져도 그만입니다. 막 굴러다니며 살았더니 이 생활이 편해져서 귀족 신분으로 돌아가는 게 썩 구미에 당기지도 않고 말입니다.”
“…슈스켈! 정말 이러긴가! ”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결론만 말하시죠.”
“…!”

노인은 마른 뺨을 푸르르 떨었다.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지만 사교계에서도 쫓겨난, 더러운 패륜아에게 이런 애걸을 해야 하다니 분기가 치밀었다. 그는 두 눈을 시뻘겋게 충혈시키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알겠네. 그녀들에게 한번 제안해 보지.”
“좋습니다.”
“헌데 과연 이 약으로 성주의 하룻밤을 취할 수 있다 쳐도…만일 성주가 그래도 혼인할 수 없다 버티면 어찌할 텐가? 그때는 공주의 명예를 더럽힌 자네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공주가 똑바로만 해준다면 아힌스 폰 아드리안은 반드시 혼인할 테니.”
“…확신하나?”
“그는 귀족의 긍지를 아는 사내요. 나 같은 놈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제 의지가 아닌 실수로 여자를 건드렸다 해도 반드시 책임감을 느낄 거외다.”

데본 공의 눈이 빛났다. 마주보던 슈스켈의 눈동자 역시 질 새라 번들거렸다. 목적은 같으나 동기는 전혀 다른, 두 모략꾼은 파이프를 빨며 서로의 의중을 살폈다. 먼저 운을 뗀 건 데본 공이었다.

“…그럼, 일을 치르는 때는 언제가 좋겠나.”
“신년파티 때가 안성맞춤이지요. 혼잡하기도 하거니와 모두에게 방종이 주어지는 시간이니 성주도 경계를 늦출 겁니다.”
“대부인에게도 알리는 게 좋겠지?”
“좋도록 하십시오. 알아도 상관없고 몰라도 손해날 건 없으니.”

데본 공은 턱을 쓸며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탐욕으로 빛나는 눈이 꼭 쥐새끼 같았다. 꼬장꼬장한 척, 잘난 척 해봐야 제 잇속만 챙기는데야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래 봐야 남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주제에. 슈스켈은 싱긋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데본 공. 자세한 계획은 나중에 따로 전하지요. 모쪼록 서로에게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암, 그래야지. 그러나 혹여 만에 하나라도 자네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시엔….”
“…….”
“…공작을 제거해야 할 지도 모르겠군.”

뒤돌아 나가려던 슈스켈의 걸음이 멈췄다. 데본 공은 그런 그에게 들으라는 듯 다시 한번 분명한 어조로 반복했다.

“황제께서 그리 명하셨네. 뜻대로 되지 않을 시엔 공작이 다시는 황도를 밟지 못하게 하라고.”
“…그 말을 굳이 제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탄 동지가 아닌가. 마지막까지 잘 협조해주길 바라네.”
“…흥.”

일이 잘 안되면 이쪽까지 제거할 테니 알아서 도와라, 이건가? 슈스켈은 조소했다. 나이깨나 먹은 영감이 한다는 수작질이 아주 얕고도 경박하다. 슈스켈은 콧방귀를 뀌며 프록코트의 옷깃을 여몄다. 잿빛 눈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글쎄올시다. 그건 그때 가봐야 아는 거고,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군요. 아드리안 공작의 안위 따위야 사실 제 알 바 아니기도 하고요.”
“…….”

가늘게 의중을 떠보는 시선을 뒤로 하고 슈스켈은 미련 없이 방문을 나섰다.







“더러운 여우 새끼. ”

복도를 걷는 슈스켈의 입가에는 잔잔한 비소가 떠올랐다. 데본 공을 욕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아힌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간다. 잘만하면 손도 안대고 코를 풀게 생겼다. 만일 이대로 후사도 없이 공작이 죽는다면 그 자리가 과연 누구에게 굴러 떨어질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아힌스다.

“이대로라면 차라리 아힌스가 혼인을 안 하는 편이 낫겠는걸? 그 망나니 계집들이랑 결혼 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공작 위를 넘겨받아 저 좋을 대로 사는 편이 낫지. …허, 그럼 이거이거, 약으로 어떻게 해보려던 작전은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렴 황제의 부마 따위와 아드리안 공작 자리를 비교할 수야 있나. 음…이거 참, 일이 잘되려니….”

박수를 치며 그렇게 해야겠다 헬렐레 웃던 슈스켈은 느닷없이 등장한 의외의 인물에 동작을 멈췄다.

“…뭐냐, 세드릭 호먼.”
“선배님…….”

눈 밑이 시꺼멓게 죽은 세드릭은 어딘가 충격 받은 사람 같았다. 좀비 같은 꼴로 그는 슈스켈에게 성큼 다가와 그의 어깨를 틀어 쥐었다. 슈스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지금 무슨 짓이냐는 듯 비딱하니 노려봤다. 세드릭은 힘겹게 말을 뱉었다.

“벌레가…, 선배님이 말했던 성주의 벌레가, 공작 전하였습니까……?”
“…!”

잿빛 눈이 홉 떠졌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자 거기서 확신을 얻은 듯 세드릭 호먼은 허탈하게 웃음을 토했다.

“…기가 막히는 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
“…어떻게 이런 일이……….”

부들부들 떠는 세드릭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질투와 분노가 점철된 야차 같은 사내의 얼굴이었다.









***


슈스켈은 거뭇하게 어두워진 북쪽 하늘을 노려보며 길게 담배 연기를 뱉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회색 줄기를 응시하는 잿빛 눈은 씁쓸했다. 그는 지친 등을 창가에 기대며 낮게 읊조렸다.

“이 모자란 놈아…왜 하필 네 동생이냐? 세상에 정 줄 데가 그리도 없어? 딱 봐도 안 되는 일을 왜 굳이 사서 해, 등신 같은 것….”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눈가의 잔주름을 일그러뜨리며 그는 천천히 회한에 빠져들었다. 길게 뻗어있는 백색의 설원이 마음을 한층 어둡게 가라앉혔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겨울…….

“…겨울엔 도무지 되는 일이 없어.”

비올리따가 죽었던 때도 유난히 혹독하던 어느 겨울이었다. 모질게 다그치는 아비의 말에 상처받고 목을 매달던 그 날은…눈도 참 많이 내렸었다.
곱고 예쁘던 내 누이….
잔 바람에도 어깨를 떨던, 제비꽃 같은 사람인데 차갑게 언 땅 아래선 또 어찌 견디고 있을까.

슈스켈은 섧게 웃으며 뺨의 흉터를 쓸었다. 눈 오는 날이면 흉터가 가려워져 거친 손으로 벅벅 긁다 보니 보기가 더 끔찍했다. 보다 못한 아힌스의 주치의가 상처에 바르라며 연고를 쥐어주곤 했지만 써먹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사실 보는 사람들이 흉측해서 그렇지 슈스켈 본인은 상처가 벌어지건 말건 상관없었다. 거울 같은 건 어차피 안본지 오래였으니.

“……제기랄.”

슈스켈은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짜증이 뱃속부터 치밀고 올라왔다. …아니, 짜증이 아니라 그건 분노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

‘온실에서 제가 뭘 본 줄 아십니까…?’
‘…….’
‘당신과 비올리따가 과거에 했던, 그와 똑 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입 맞추고, 서로를 연인처럼 바라보고……애무하고. 하, 그 절제와 냉철함의 화신 같던 주군께서 성주의 품에서 정신을 못 차리시더군요. 형제간에……, 친 동기간에 그게 가능이나 할 법한 말입니까…!!!’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선배님, 당신 설마 그들이 ‘그런 짓’ 하는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던 겁니까?’
‘흥분하지 말고 끝까지 말해봐. 그래서 그들이 어찌했지? ……교합이라도 한 건가?’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더 두고 볼 수가 없어 중간에 나와버려서….’


콱-.

슈스켈은 회상을 멈추고 쥐고 있던 파이프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 중간에 나와버렸다는 세드릭의 소심한 말을 듣는 순간, 슈스켈은 진심으로 눈앞의 비겁한 기사 놈을 족쳐버리고 싶었었다. 세드릭 호먼이 진심으로 아힌스를 사랑했다면 온실에서 그들을 등지고 나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아무리 충격을 받았다 해도, 상대가 까마득한 신분의 아드리안 공작이라 해도 그건 변명이 되질 않는다. 그대로 나가버리면 그 후로 아힌스에게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개새끼. 그런 주제에 아힌스를 원하느니 마느니 헛소리를 해? 예나 지금이나 비겁한 건 변한 게 없군, 가증스런 놈.”

우그덕-, 슈스켈은 바닥을 구르는 파이프를 발로 뭉개며 흉측하게 뺨을 일그러뜨렸다. 세드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실로 달려갔었으나 그때는 이미 아힌스는 없었다. 남아있는 건 부러진 장미 가지와 바닥에 흩어진 꽃잎뿐….

얼마나 허탈했던가.

슈스켈은 복잡해진 머리를 털어내며 키들키들 웃었다. 가끔은 자신이 왜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나 어이없기도 했다. 아힌스 따위가 뭐라고. 조금 신세를 지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언제는 은혜를 알았던가. 무시하고 돌아서면 그만인 것을. …그렇지만 이상하게 그게 잘 안됐다. 성에서 쫓겨나고도 북부를 떠나지 않았던 건 혹시 아힌스가 자신을 다시 불러주지는 않으려나 하는 미련에서였다. 미련, 그 놈의 미련……! 그래, 그 미련이 탈이었다. 음침한 샤휀에 쳐 박혀 외톨이처럼 홀로 노는 주제에 이따금씩 아주 외로운 얼굴을 해 보이는 아힌스는 어쩐지 꼭 돌봐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망할.”

그는 주먹으로 벽을 내리찍었다. 창백하게 질린 아힌스의 얼굴이 비올리따의 얼굴과 문득 겹쳐진 까닭이다. 비슷한 구석이라곤 하나 없는 두 사람이지만 서러운 그 운명만은 쌍둥이처럼 꼭 닮았다. 둘 다 한 가지에서 나온 혈육에게 열렬히 구애 받았고 외로움에 지쳐 그 빌어먹을 것을 받아들였다. 어설프게 순진해서는……그깟 이기적인 외사랑 하나를 거절 못하고 기어이 비극으로 치달은 것이다.

“모자란 것들. 그 까짓 게 뭐라고 줏대 없이 우왕좌왕하다 바보처럼 휘둘려? 제 연인하나 지켜주지도 못하는, 그런 나약한 사랑 따위가 다 뭐라고….”

벽에 부딪힌 주먹에서 피가 터지는 걸 보며 슈스켈은 낄낄대며 웃었다. 사랑, 그 까짓 게 다 뭐냐……? 폭풍처럼 휩쓸려 봐야 종래는 산산이 흩어져 움켜쥘 것 하나 없이 사라지는 것을. 악을 쓰고 매달려 봐야 어차피 안 되는 사랑, 그까짓 게 뭐라고 목을 매다나?

‘성주도…, 그 분 또한 동조했습니다. 결코 주군 혼자 매달리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설마 그 두 사람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겁니까?’
   
닥쳐.

‘선배님 말처럼 주군의 일방적인 감정이라면 성주가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렀겠지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마치 사랑싸움이라도 하듯 화를 내면서도 주군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그 차가운 사내가 말입니다.’

…닥쳐….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형제 사이에 사랑이라니, 차마 혐오스러워 생각하기도 싫은 그런 짓을…! 선배님,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당신도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가 아닙니까. 연인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매달렸던 사랑이 아닙니까!’

………닥쳐, 세드릭 호먼! 네놈 따위가 날 비난할 자격이 어디 있다고!!

챙그랑-, 창이 깨졌다. 슈스켈은 제 못난 얼굴을 비추는 투명한 유리창을 원수라도 되는 양 마구 부숴댔다. 꽃처럼 피어나는 붉은 피가 징그럽게 번졌다. 살갗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유리파편을 으스러뜨렸다. 흉측하게 비추는 제 얼굴이 꼴 보기 싫어서.

“…그래, 아힌스. 내가 그리 충고했건만 그새를 못 참고 쪼르르 그 놈에게 달려가서 그 봉변을 당해? 응? 기어이 놈이 좋다 이거지. 앞으로가 어찌되건 그 놈이 좋다 이거지?”

기이하게 양 끝으로 말려 올라간 입술이 비릿하게 웃었다. 슈스켈은 지금쯤 어디선가 엉겨있을 두 연놈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쥐새끼처럼 남의 사생활이나 캐다가 고자질하는 세드릭을 연이어 떠올렸다. 잿빛 눈이 이내 잔혹하게 빛났다.

“세드릭, 네놈이 비올리따를 망쳐놨듯 또 아힌스를 망치려 드는 꼴을 그냥 두고 볼 것 같으나? 가만두지 않겠어. 그리고 아드리안 공작,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 당신의 정념 따위 난 인정 못해.”

가능하면 데본 공이 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려 했으나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마음 속에서 잔혹한 본능이 슈스켈을 충동질했다. 내키는 대로 했다간 아힌스가 상처라도 받을 까봐 참고 있었지만 이젠 그 고삐도 풀려버렸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젠 아힌스가 우는 꼴을 꼭 보고 싶었다. 충고를 무시하고 스스로를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아힌스가 한심했다. 그리 잘난 척 하던 놈이 기어이 절망에 빠져 자신의 바지자락에 매달리면 어떨까. 짜릿할 테지. 어디 한번 울어보려무나. 그래야 세상 무서운 것도 알 테지. 바보 같은 놈. 정을 줬다지만 어차피 아직은 풋사랑이다. 아드리안 공작이 사라진다면 잠시 동안은 슬퍼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차차 해결될 일. 눈물을 좀 쏟더라도 더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백 번 나았다.

“…그리고 아힌스에게 상처 준 아드리안 공작, 당신은 곱게 죽도록 두지 않겠다.”

슈스켈은 안쪽 옷자락에서 예의 하얀 봉지를 꺼내 움켜 쥐었다. 그는 저열하게 웃었다. 감히 건드릴 수도 없는 막강한 권력자라지만 공작 또한 사내다. 그것도 사랑에 빠진 사내. 슈스켈은 그런 사내들을 괴롭히는 방법이 무언지 충분히 잘 알았다.

“마음에 둔 정인이 다른 년과 뒹구는 꼴을 두 눈으로 보는 기분은 어떨까요, 공작 나리. 어디 한번 지옥에 빠져 보시지.”

애당초 이런 목적으로 쓰려던 약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아힌스를 공주들과 혼인시키려고 어렵게 구해온 물건이었다. 그나마도 데본 공이 공작을 손수 제거해 줄 듯 하기에 슬쩍 물릴까 하던 계획이었으나…이제는 사정이 변했다. 슈스켈은 사각의 봉투에 든 흥분제를 탈탈 흔들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머릿속에서 그려봤다. 비실비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됐어. 이걸로도 충분해. 그러게 아힌스, 내 충고를 듣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잖아? 왜 자꾸 사람 말을 안 듣는 거냐.”

쭉 뻗은 날카로운 콧날에 신경질적으로 얇은 입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던 아힌스는 참으로 고집스러웠다. 적당히 굽히고 말을 들으면 좋을 것을,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다니 바보 같았다. 슈스켈은 너덜거리는 손등을 핥으며 흡족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일단 결심을 하니 뭣부터 해야 할 지 착착 떠오른다. 역시나 나쁜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갔다. 어떤 면으로는 천재라고 부를 만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슈스켈은 몰랐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비열하게 일을 꾸민다 해도 모든 것이 반드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세상엔 많고 많은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있고, 그것은 때론 예상과는 정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걸 이 간악한 사내는 잠시 망각하고 있던 것이다.







**


침실까지 오는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의장을 더럽힌 덕택에, 또 눈물로 얼룩진 얼굴 때문에 차마 제 발로 복도를 누빌 수 없던 아힌스는 결국 유엘에게 안겨 망토를 뒤집어 쓰는 신세였다. 키도 작지 않은 사내가 번번히 동생에게 안겨 다니니 그들에게 쏠리는 시선은 엄청났다. 저마다 호기심과 의아함을 담은 채 형제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라고 아힌스는 지레 찔려 생각했으나 사실은 주군이 또 할 일 없이 성주를 괴롭히나 걱정해서 쳐다 보는 거였다. 역시나 은근히 예쁨 받고 있는 아힌스였으므로)

‘…무례한 것들. 감히 어딜 눈 똑바로 뜨고 보는 게냐. 하여간에 주인이나 부하들이나 예의 없는 건 똑 닮았다니까. 쯧.’   

분한 마음에 아힌스는 이를 사려물고 바닥만 노려봤다. 어디선가 ‘약골’ 이라던가 ‘역시나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따위의 말이 들릴 때면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다. …물론 분해서였다. 유엘은 아힌스가 그런 반응을 보일 때면 부드럽게 도닥여 달랬다. 행동만 보자면야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남자인양.

찰싹-

“손 치워. 이게 다 누구 탓인데-? 이럴 정신 있으면 앞이나 똑바로 보고 걸어라.”

그러나 쌀쌀맞게 내뱉으며 돌아서봐야 결국은 유엘의 품 속이다. 안겨가는 주제에 아힌스는 까칠하기 짝이 없었다. 모처럼 차려 입은 연청색 의장을 더럽히는 하얀 액체가 다리 사이에서 천천히 굳어가고 있는 까닭이다. 그 꾸덕한 느낌이 싫어 아힌스는 오는 내내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손 내미세요. 소독하겠습니다.”

귀찮다고 밀어내려는 아힌스를 끝끝내 붙들어 앉혀놓고 유엘은 하얀 손에 박힌 잔 가시 하나하나를 뽑아내고 약을 발랐다. 그리고는 그 위를 붕대로 곱게 싸며 마지막으로 숙녀에게 하듯 정중하게 손등에 입맞췄다.  

“…….”
“…가시나무를 맨손으로 잡는 바보 같은 짓은, 다시는 하지 마.”
“…왜 또 반말이냐.”
“화나니까.”
“흥.”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자 유엘은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모르며 울지 말라고 뱅글뱅글 돌던 주제에….
아힌스는 팩 토라져 돌아 누웠다.

“…형님.”
“부르지마. 귀가 썩는다.”
“……잘못했습니다.”
“…….”
“함부로 입 맞춘 것도, 당신 몸에 손댄 것도 죄송합니다.”
“…미안할 짓을 왜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
“…….”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아힌스와 유엘은 둘 다 눈을 내리깐 채 얼굴을 붉혔다. 꽤나 당당한 척 하던 것과는 달리 사실은 서로를 몹시 의식하고 있던 탓이었다. 온실에서의 열기가 다시금 침실로 옮겨왔는지 아힌스는 슬금슬금 가려워지는 하체를 오므리며 바르르 떨었다.

“차…참을 수 없어도, 자위 같은 건 혼자 하는 거다.”
“…자위?”
“처, 천박하게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 네 꼴이 가여워서 거두어주긴 했으나 불쾌했다. 개도 아니고 남의 몸에 부비적거리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

유엘은 말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위라니, 둔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주제에 하는 짓은 영 실속이 없는 형님이시다.

“제가 한 짓이 정녕 자위라고 생각하십니까.”
“…음?”

끼익-, 유엘은 몸을 기울여 누워있는 아힌스의 양 옆에 팔을 짚었다. 백금발을 흐트러뜨리고 무방비하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은 병약하고 천진한 소년 같았다. 그리고 실제 정신연령으로 치자면 그와 다를 바도 없었다.
“…….”
유엘은 손을 뻗어 그런 아힌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조금 전에 우리가 한 짓은 자위 같은 게 아닙니다. 그건 엄연히 성교를 나눈 겁니다. 아니, 나눴다기보다는 형님께서 일방적으로 당한 거지요.”

아힌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뭔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진실이 현실로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
흔들리는 푸른 눈을 직시하며 유엘은 과연 추측대로 이 남자가 뭘 모르고 있었구나, 싶었다. 건드리면 건드는 대로 가만히 있기에 ‘혹시나’ 했었다. 혹시나 괜찮은 건가, 혹시나 이런 걸 싫어하지 않는 건가, 혹시나 저쪽도 나를 조금쯤 ‘그런’ 대상으로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역시 헛짚은 거였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유엘은 씁쓸히 자조했다.

“얼마 전에 우리가 떨어졌던 동굴을 기억하십니까?”
“…….”
“재미있게도, 그 동굴은 북쪽까지 뻗어있더군요. 생각보다 더 긴 동굴이었습니다.”
“…….”
“신년파티가 끝나는 대로,”
“…….”
“그 길을 따라 카슬란을 치러 갈 겁니다.”
“!”
“운이 좋았습니다. 땅이 얼어 적군도 우리가 쳐들어 올 거라곤 예상치 못하고 있을 테니 몇 배로 이득을 보는 셈이지요.”
“…그…,”
“봄이 올 때까지 샤휀에서 신세 질 생각이었는데 그보다 일찍 원정을 나서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잘된 일입니다.”

아힌스는 푸른 눈이 좌우로 요동쳤다. 동생의 느닷없는 원정 얘기가 어디서, 어째서, 갑자기, 왜 튀어나오는 건지 잘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어떤 본능적인 불안감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힌스는 그의 미간 사이에 입 맞추고 몸을 물리는 유엘의 옷자락을 놓칠 새라 움켜 잡았다.

“……유엘.”
“…….”
“그럼, 전쟁이 끝나면, 그 후에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

물러서서 아힌스를 내려다보는 유엘의 눈은 서늘했다. 다정하던 기색을 어느새 지우고 ‘아드리안 공작’으로 돌아간 동생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승전한다 해도, 혹은 패전한다 해도 샤휀으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왜…, 왜……?”

새까만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결심한 듯 가만 눈을 감았다 떴다.

“…내겐, 당신이 소중하니까요.”
“…!”

유엘은 아힌스가 좋았다. …너무 좋았다. 그러니 이대로라면 곤란했다. 이쪽을 경멸하고 미워하는 아힌스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괜한 욕심을 부려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유엘은 더는 스스로를 신용할 수 없었다. 조금 전의 상황처럼 약간의 기폭제만 주어진다면…또 흥분해서 아힌스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아힌스가 싫어하든 말든 억지로 망가뜨려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째서…? 왜…? 소중하면 곁에 남아야지, 내가 정말 소중하면 떠나질 말아야지!”

유엘의 심정 따위 알 바 없는 아힌스는 전신을 가늘게 떨며 그렇게 외쳤다. 그에게 있어 ‘떠남’ 이란 버려지는 걸 의미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푸른 하늘 빛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습기가 차 올랐다. 아힌스는 쥐고 있는 유엘의 옷자락을 어린애처럼 흔들었다.

“가지마…. 내, 내가 소중하다며…? 그럼 가지 마라. 전쟁 따위 알게 뭐냐, 응? 가지마. 여기서 같이 살자.”
“…….”
“그게 정 안되면 봄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그때까지만이라도 여기 있어. 어차피 그깟 전쟁, 무어 그리 급할 게 있다고…!”
“억지부리지 마십시오. 신년파티가 끝나면 바로 출발할겁니다.”
“…………유…엘…….”

기어코 부풀어 오르던 눈물 방울이 툭, 하고 뺨 위를 굴렀다. 아힌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만 깨물었다. 실컷 휘둘러놓고 느닷없이 떠난다는 동생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지 말라고 더 매달려야 할지, 아니면 차라리 자존심을 세우며 갈 테면 가보라고 배짱을 부려야 할지 가늠이 안 갔다. 아니, 이 시점에서 유엘이 왜 떠난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공언하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또 뭐가 잘못되었기에?

말을 잇지 못하는 아힌스를 보며 유엘은 망설이듯 느리게 손을 뻗었다. 한껏 흐트러진 금발을 정리해주고 싶었다.
“…….”
그러나 그는 이내 손을 거뒀다. 그리고는 제 옷자락을 구겨질 듯 쥐고 있는 아힌스의 길고 가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 빼며 매정하게 옷깃을 정리했다.

“…그럼, 쉬십시오 형님. 신년파티 때 뵙겠습니다.”

그때까진 아예 찾아오지도 않겠다는 말이다.

“…….”

아힌스는 하릴없이 멀어져 가는 유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가를 문질렀다. 짠 냄새가 나는 물기가 손가락에 묻어났다. 유엘은 울고 있는 아힌스를 보면서도 뒤돌아 선 것이다.
“……아….”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아힌스의 가슴 한 켠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또 다시 이별이었다.  









***


‘조그만 것이 참 성질도 고약하구나. 저리 가지 못해?’

‘도련님도 참…! 형님이 좋아서 예까지 찾아 온 걸 그리 매정하게 구셔요? 그러지 말고 다정하게 한번 안아 주세요. 동생이 귀엽지도 않나요?’

‘귀엽다니, 저 못된 새끼 악마가 어디가 귀엽다는 게야? 다 필요 없으니 얼른 내보내. 그리고 다음부턴 저 녀석이 내 침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해라. 내 카펫에 침이라도 흘리는 건 못 참아.’

‘아우…바바바!’

‘도대체 뭐라는 거야…? 윽-. 너, 내가 침 흘리지 말랬지? 걸음마도 잘 못하는 게 어딜 쏘다니는 거야. 이 하등생물! 바보 호박아!’




………….


“…내가 너무 심했던가….”

피식-, 아힌스는 쓰게 웃었다. 그러나 웃는다고 정말 웃는 건 아니었다. 발갛게 충혈된 눈엔 아직도 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긴 밤을 불면으로 지새운 아힌스는 평소보다도 더 창백한 안색 때문에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부질 없는 짓이지. 감히, 이 나를 두고 가다니…. 천하에 무례하고 매정한 놈.”

마른 손바닥으로 쓸쓸히 얼굴을 쓸던 아힌스는 문득 정성스레 감겨있는 붕대를 응시했다. 장미 가시에 찔렸던 상처에는 피가 멈춘 지 오래였건만 우습게도 아직도 통증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래….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손이 아니라 바로 심장이.

뒤돌아 멀어지는 유엘을 보며 얼마나 분노했던가? 얼마나 애가 끓었던가…!
어머니에게 버려질 때 만큼이나, 가정교사에게 배신당했던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괴로웠다.
다정했던 누군가를 떠나 보내야 한다는 그 서러움과 자괴감에 아힌스는 또 한번 고통 받아야 했다. 다시는 타인에게 마음 따위 주지 않겠다 맹세했거늘…………. 우습고도 우스웠다.

그것도 하필이면 어릴 때 그리도 괴롭혔던 동생이라니.


“…되돌려 받는 것인가. 고약하게 군 대가가 이런 거다, 이건가, 응? 대답해 봐라 유엘-.”

상대가 없는 걸 알면서도 아힌스는 빈정대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서글프면서도 화가 났다. 만일 유엘이 눈 앞에 있다면 장갑으로 얼굴을 후려쳐줬을지도 모른다.

“떠난다고? 네놈이? 감히 날 두고 떠난다는 말이 나와…? 난 아드리안 가의 장자이자 이 샤휀 성의 주인이다. 단언하건대 이 제국에서 나보다 더 지적이고 예의를 아는 귀족은 없어. 그런데, 포도주의 깊은 맛도 구분할 줄 모르는 주제에 다시는 날 찾아오지 않겠다고? 같잖은 것.”

첫 키스의 쓰디쓴 맛을 알려준 게 유엘이었다.
두 번째 키스의 달콤함을 알려준 것 또한, 그였다. 사람을 안고 잘 때의 따스함과 누군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든든함을 가르쳐 준 동생이 이젠 이별의 고통까지 안겨주려 하고 있다. 남의 성에 쳐들어와 멋대로 휘저어 놓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뒤돌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다 한다.  

너는…, 나를 바보로 만들려는 구나.

소중하다 말하며 나를 기만하고 있는 게지. 너 역시 다른 이들처럼 내게 싫증이 났을 테니까. 그래, 너는-


툭……….


“……….”

눈물이 떨어졌다.

아힌스는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훌쩍훌쩍 흐느끼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꼴이었지만 괴롭고도 서러웠다. 이제 조금 있으면 신년파티에 가야 하는데, 그곳에 이런 얼굴로 갈 수는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스물 여덟이나 먹은 주제에 이게 무슨 추태냐고 스스로를 질책해도 눈물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냥 심신이 다 지친 것만 같았다.


똑똑-


“……!”
“아힌스, 나 들어간다.”
“-안돼. 들어오지 마라, 슈스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프든 말든 너와는 상관없잖아. 제 시간에 나갈 테니 네 할 일이나 하도록 해.”
“……….”
“지금 문 열고 들어오면 용서하지 않겠어.”
“……그래. 알겠다. 늦지 말고 연회장으로 내려와라.”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아힌스는 몸을 돌려 뉘였다. 파티고 뭐고,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손수 주최한 파티만 아니었다면, 유엘이 마지막이라고 못 박아 둔 파티만 아니었다면………가지 않았을 텐데……….


‘신년파티 때 뵙겠습니다.’


……………….


“……내가 왜…너 따윌 만나….”


그러나 그렇게 허세를 세워봐야 부질없는 짓이었다.











저벅저벅-



“뭐-? 아프든 말든 너와는 상관이 없어? 식사도 거르고 방에 처박혀 있다 기에 걱정돼서 가봤더니! 씨팔.”

깡-!

“망할 자식!”

슈스켈은 발길에 채이는 대로 물건들을 걷어찼다. 아힌스가 괘씸하고 한심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자존심을 세운다고 상황이 감춰지리라 생각한 것일까. 그 놈의 같잖은 귀족 행세-!

“…그렇게도 놈이 좋은 거냐?”

슈스켈은 허탈하게 웃으며 거칠게 벽을 내리쳤다. 어디서 굴러먹다 흘러 들어 온 유엘 폰 아드리안이란 놈에게 분노를 터뜨리면서.

“……….”

한숨을 몰아 쉬며 슈스켈이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어딘가에서 비밀을 논하듯 작게 속삭이는 말 소리가 들려 왔다. 감이 좋은 슈스켈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되었으니 자네가 나서줘야겠네.’
‘…………하필이면 제가……’
‘………하는 것이 황제 폐하를 위한 것일세. ………반드시 공작을……하게’
‘그렇지만 꼭 그렇게까지…………합니까?’
‘…절호의 기회…………. ……부탁하네 세드릭 호먼 경.’
‘………데릭 공………………까지…………어쩔 수 ……….’


세드릭…? 슈스켈의 미간이 구겨졌다. 늙은 여우 데릭 공과 세드릭이 서로 친분이 있던가? 게다가 데릭 공은 친 황제파 인물인 것을…….

“…아항. 이것 봐라? 어쩐지 일이 상당히 재미있어 질 것 같군.”

얘기가 다 끝났는지 문이 열리려는 기척이 들리자 슈스켈은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복도를 좌우로 살피며 쥐새끼처럼 나오는 인물들은 아니나다를까, 데릭 공과 세드릭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친 황제파 인물이라 꼽히던 일부 장교들도 보였다. 슈스켈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뭔가 무척이나 수상쩍었다.

“그럼, 믿고 있겠네. 이번 일만 잘되면 자네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잘 처신하게. 필요한 건 뒤의 칼브릭 들이 도와줄 걸세.”
“그러나 그런 식으로 뒤를 노리는 건 너무 비겁-,”
“쉿-! 말 조심하게. 여긴 복도야. 누가 들을 줄 알고 경솔하게 구나?”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했겠지만 자네 부친인 호먼 경도 이미 동의한 일일세. 이대로 공작가의 밑닦개로 살고 싶나?”

세드릭은 곤란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그 속엔 망설임이 엿보였다. 교활한 데릭 공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선택을 확신했다. 우유부단한 듯 하지만 욕심 있는 사내다. 지금이야 양심상 고민하는 척 하더라도 세드릭 호먼은 반드시 이쪽으로 넘어올 터였다.

“잘 하게. 자네의 미래가 달린 일일세. 공작가의 세가 크다지만 그것도 공작이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크큭….”


데릭 공은 음산하게 웃으며 멀어져 갔다.

양심과 출세, 그리고 연적을 제거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드릭을 보며 슈스켈은 어깨를 떨며 웃음을 참았다. 참으로 가소로우면서도 우스웠다. 그래-, 역시나 너는 그런 놈이지, 세드릭.
그는 빙긋 웃으며 몸을 감추고 있던 기둥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 태연한 동작에 세드릭 호먼은 화들짝 놀라 허옇게 낯빛이 탈색됐다.

“여어-, 이거 우연찮게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었는걸? 세드릭 호먼, 정말 보면 볼수록 놀라워. 저 늙은 너구리와 공모를 할 배짱이 있었다니 말이야.”
“서…선배님. 대체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글쎄-, 어디까지 일까나…?”

킬킬대며 비웃자 세드릭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분을 삭이듯 천천히 이를 갈더니 이내 선수를 쳐 먼저 말을 꺼냈다.  

“거절할 겁니다. 공작 전하께 감정이 상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렇게 비열한 사내가 아닙니다. 선배님이 가서 고한다 해도 전하께서는 저를 신뢰하실 겁니다. 그러니 허튼 짓 할 생각은 마십시오.”
“무서워라. 지금 내게 협박하는 건가? 응?”
“협박이 아니라………,”
“뭐, 좋도록 해. 아까 일은 못 들은 걸로 해줄 테니.”
“-예?”

피식, 슈스켈은 다시 한번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드리안 대부인과 손잡은 주제에 일이 잘 안되어간다 싶으니 뒤통수를 치려는 데릭 공이나, 제 하찮은 욕심 때문에 주군을 배신하려는 세드릭 호먼이나 다 같잖고 우스운 인종들이었다. 거절하겠다니, 어디서 그런 되도 않는 거짓을 말하는가. 눈빛을 보면 벌써 반쯤은 넘어갔거늘-.

큭큭….

세드릭 호먼, 넌 그래서 안돼. 순진한 척 가면을 쓰고 있어도 결정적인 순간엔 가장 먼저 배신하지. 음흉하고 비겁한 인간아. 나이 서른만 넘으면 그 가면조차 벗어 던질 위인이다, 너는.
그렇지만 이번만은 눈감아 주마.
아드리안 공작의 안위 따위야 어차피 나완 상관없는 문제니까. 그 자가 죽어주면 나로선 좋은 것이고, 죽지 않는다 해도 손해날 건 없으니 나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셈이지.  

낄낄….

우리 아힌스를 울리더니 쌤통이다, 개새끼.


“잘해봐, 세드릭 호먼. 네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따위 난 관심 없다. 좋을 대로 해.”


살랑살랑 가볍게 손을 흔들며 슈스켈은 휘파람을 불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슈스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세드릭으로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늦은 저녁, 신년을 하루 앞둔 전날의 밤-, 드디어 파티의 막이 올랐다.

말이 신년파티지 실상은 샤휀의 지방 유지들과 인근 귀족들이 다양하게 초대된 가운데 공개적으로 선남선녀들을 맺어주려는-일종의 순수혈통끼리의 짝짓기와 유사한 이 연회는 목적에 맞게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은밀하고 성적인 농후함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분위기로 꾸며졌다. 자칭 타칭 사교계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아드리안 대부인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치밀하게 미친 까닭이었다. 대부인이 불러온 예인들이 여기저기서 흥을 돋구고 화려한 복색의 여인들이 수컷을 유혹하는 여왕벌처럼 짙은 향을 풍겨 파티는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파티의 실질적인 여주인공들, 두 명의 공주가 등장하며 더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어머나…. 정말 화려하네요.’
‘황족이잖아요. 그럴 만도 하죠.’
‘수도에선 저런 드레스가 유행인가보지요?’
‘후프가 좀 과하지 않나요?’
‘그래도 신선하네요. 조금 경박해 보이긴 하지만 아직 어린 아가씨들이니까요’

부채로 입을 가린 귀부인들은 아닌 척 하면서 서로의 옷차림을 보며 품평회를 늘어 놓았다. 딸이 있는 부인들은 제 딸을 돋보이게 하고 싶어 안달이었고, 반대로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부인은 한껏 부풀린 제 드레스를 뽐내며 거만하게 부채를 흔들었다. 물론 그네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파티에 참석한 젊고, 혈기 넘치는 전도유망한 청년들이었다. 예를 들면 제국 최고의 차기 실권자인 아드리안 공작이라던가…, 아드리안 공작이라던가, 아드리안 공작 같은 사내들 말이다.

‘흑발에 장신이라 들었는데 아직 연회장에 오지 않은 걸까요…?’
‘글쎄요…. 비슷한 조건의 사람은 있지만 아드리안 공작은 대단한 미남이라 들었는데 그 정도의 사람은 안 보이네.’
‘좀 늦나 보지요.’
‘그럼 샤휀 성주는요? 성주는 어디에 있는 거죠?’
‘으음…. 한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어 찾을 수가 없군요. 그래도 명색이 호스트인데 들어올 때도 보지 못했어요.’

부인들의 얼굴에 일제히 실망감이 드리워졌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제국의 사령관과, 이십 년간 인근에 살면서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베일 속의 샤휀 성주…. 그 두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은밀한 기대감에 온통 부풀어 있었거늘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노른자 없는 달걀처럼 맥 빠지는 파티가 아닌가.

‘성주가 대인기피증에 괴팍한 사내라더니, 그 말이 맞는가 봐요. 그러니 이런 파티에조차 나오질 않지.’
‘혹시 엄청난 추남인건 아닐까요? 호호….’
‘쉿-. 조용히 하세요. 듣겠어요.’


“아드리안 공작 전하 드십니다-.”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젊은 공작이 나타나자 일제히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여인들의 입에서도, 그리고 사내들의 입에서도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젊은 공작은 기대 이상으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서늘한 미남이었다. 공작가에 젊은 흑사자가 태어나 황제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더니, 그 말이 영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했다.

“늦으셨습니다, 공작.”

가장 먼저 다가가 말을 건 것은 아드리안 대부인이었다.

“바쁘다는 건 알지만 어미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요. 손님들도 공작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달꼴로 눈꼬리를 휘며 싫지 않은 투로 타박하는 대부인은, 그러나 여전히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유엘은 가만히 그녀를 살피다가 무심하게 내뱉었다.

“…형님은 아직 내려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움찔.

대부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역시나 아힌스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뻔히 보이는 속내에 유엘은 소리 없이 웃었다.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란 사람은.
유엘은 친근한 척 허리를 굽혀 아드리안 대부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서늘하게 속삭였다.

“멋대로 하시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내일 군대가 성을 떠나면, 어머니도 지체 없이 짐을 꾸리십시오. ‘그 사람’을 결혼시킬 생각 따윈 꿈도 꾸지 마시고요. 제가 허락 못합니다.”
“…공작!”
“마지막 경고입니다. 떠나지 않으실 시엔 강제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인의 얼굴이 분노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아들을 누를만한 힘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두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떠는 것뿐이었다.
‘오냐, 그래, 내가 떠나주마. 내 자식이지만 무정하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  

아힌스가 도착한 건 두 사람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인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퍼졌다. “아힌스 폰 아드리안 님 드십니다.” 일순 사위가 고요해졌다. 호기심으로 입구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성주가 들어서는 순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조금 늦었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고 계셨습니까, 어머니.”


성주는 생각보다 장신이었고, 생각보다도 훨씬 미남이었다.

그린 것처럼 섬세한 이목구비의 금발 미남을 보며 젊은 아가씨들은 한숨을 삼켰다. 그녀들은 그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조차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 같다고 생각했다.









***



챙-


“즐거운 새해 되세요 아드리안 공자-.”
“레이디께서도 좋은 일 있으시길 바랍니다.”

챙강-

“앞으로 자주 뵈었으면 좋겠네요 성주 님.”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지요.”


자정이 지나자 정원에선 폭죽이 터졌다. 곧이어 남부지방에서 올라온 질 좋은 샴페인 수백 병이 개봉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잔을 부딪히며 축사를 던지자 그때부터는 진짜로 정신이 없었다. 파티 따위에 익숙하지 않은 아힌스로서는 창백한 낯빛으로 가까스로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만 대꾸하는 게 고작이었다.

…정말로 피곤했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그를 주시하던 엄청난 시선들 때문에 잠시도 자리를 피해 있을 수 없던 것이다. 화려한 드레스와 독한 향수로 중무장한 여자들은 아힌스를 몇 겹으로 포위한 채 놔주질 않았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극성스러운 건 단연 공주들이었는데, 옆에 딱 달라붙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곤란한 요구를 하는 그녀들 때문에 아힌스의 신경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지난번 만찬 때는 제대로 대화도 나눠보지 못했지요? 같은 성에 머물면서도 얼굴 볼 길이 요원해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실례를 저질렀군요.”
“미안하시다면 춤 신청이라도 해주세요. 아까부터 대답 외엔 말도 없으시고…. 정말 너무해요.”
“그건…….”

…난감했다. 아힌스는 파티에서 춤을 춰본 경험 따윈 전무했다. 물론 귀족의 필수교양으로 댄스수업을 받은 적이야 있었지만 그건 아주 오래 전 얘기였고, 무엇보다 일단 상대가 마음에 안 들기에 의욕조차 안 생긴달까…. -예의 바른 척 하고 있지만 사실 아힌스는 뼛속까지 제멋대로인 에고이스트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이 없을까 싶어 아힌스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몇몇의 사내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다들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 외에는 대부분 취해있었다. 연회가 깊어질수록 눈이 맞은 연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아힌스가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의외로 아드리안 공작의 기사들은 단 한 사람도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음날 기습적인 출전을 위해 공작이 단단히 기사들을 단속한 결과였지만 아힌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기에 입술만 깨물었다.
‘이 귀찮은 여자들 같으니.’


“아힌스 님, 아까부터 자꾸 누구를 찾으세요?”
“…….”
“혹시 아드리안 공작을 찾으시는 건가요? 하기야, 사이가 좋아 보였으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힌스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딘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사실 아까 들어오면서부터 무의식 중에 유엘을 찾고 있던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공작 전하는 저편에서 신사분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걸요? 저긴 담배나 피우고, 정치 이야기나 하는 따분한 자리에요.”
“……아….”
“맞아요. 저쪽의 따분한 치들은 직책이 없거나 놀고 있는 사내들은 사내 취급도 안 해요. 뼛속까지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죠. 게다가 그 진득진득한 권력욕과 거만함이라니…. 마치 자신들이 다른 이들의 머리 위에 서있다 착각하는 것 같아요.”
“어머, 너무 싫다~”

아힌스가 그쪽을 바라보니 과연 유엘은 한 무리의 사내들과 뒤섞여 있었다. 게 중엔 늙은 사람도, 젊은 사람도 고루고루 있었으나 공통점은 유행을 타는 화려한 예복보다는 권위적이라 느껴질 정도의 정복을 갖춰 입고 머리엔 기름칠을 한 채 무게 꽤나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흥. 어딜 가나 꼭 저런 사람들이 있다니까?”
“신년파티에서까지 저래야 하나 모르겠어. 하긴, 제국 최고의 실권자가 왔으니 어지간히 흥분도 됐겠지.”

입을 삐죽이던 공주들은 이내 몸을 돌려 아힌스의 한쪽 팔을 흔들며 살갑게 졸랐다.

“그러지 말고 우리랑 춤 춰요, 예? 공작 전하는 이쪽엔 관심도 없어 보이는 걸요.”
“……….”

그녀의 말대로 장신의 흑발 사내는 이쪽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아예 몸을 돌리고 있었다. 사내들 사이에 끼어 제법 대화를 주고받던 육감적으로 생긴 한 귀부인이 유엘의 팔에 은근슬쩍 다정하게 손을 얹는 모습을 보며 마침내 아힌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으시다면, 한 곡 부탁 드리겠습니다, 레이디.”

공주는 기다렸다는 듯 생긋 웃으며 재빨리 아힌스의 옆에 달라붙었다. “가능하면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주페-라고.” 그리고 그녀가 샴페인 한잔을 권했다. “춤을 추시기 전에 한잔 드시는 것도 좋아요.” 목이 타는 기분에 아힌스는 샴페인을 끝까지 들이켰다. 묘하게 텁텁한 것이 불쾌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그들이 홀 가운데로 나오자 왈츠가 연주되었다. 아드리안 대부인이 데려온 눈치 빠른 악사들이 잽싸게 음악을 바꾼 것이다. 가장 가운데에 서서 아힌스가 여자의 허리에 손을 올리자 그들을 주목하는 시선들이 뜨거워졌다. 짜증이 몰려왔으나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한 채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궁중무도와는 달리 파트너와 밀착되는 춤인지라 독한 향수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저와 춤 추는 게 싫으신가요?”
“…그럴 리가요.”
“아니면, 제가 싫으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긴…, 싫으셔도 이젠 소용없지만요.”

춤 추는 와중에도 공주는 까르르 웃으며 끊임없이 말을 붙여왔다. 그녀가 그럴수록 아힌스의 마음은 불편해져 갔다. 마음이 그래서인지, 어쩐지 자꾸만 속이 뜨겁고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아 괴로웠다. 음악은 절정으로 치닫는데 가슴은 왜 이리 답답한 건지…….

“괴로우세요? 표정이 좋지 않네요, 아힌스 님.”
“………아닙니다….”
“그러게 처음부터 제게 잘하셨으면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잖아요.”
“………무슨………?”
“데본 공이 아무리 권하셨어도 썩 내키진 않았었는데…. 당신이 나빠요, 차가운 성주님.”

눈앞의 여자가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아힌스는 문득 치미는 토할 것 같은 기분에 몸을 구부렸다. 귓가에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뜨거우신가요? 가렵고 답답하고 괴로워요? …호호. 순진하시긴. 상류층 사람들이라면 한번씩 다 경험한 최음제인데 처음이신가봐….” “……!” ”최음제가 뭔지는 아셔요?” “……읏….” “괜찮아요. 오늘 밤 제가 다 알려드릴 테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누군가 부축하는 손길이 느껴지고,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 침실로……” 하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으나 그 이후론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아힌스는 비로소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침대 위였다. 아힌스는 제 몸을 타고 오른 수치도 모르는 공주를 보며 경악했다.

“마취제를 조금 섞었는데 효과가 좋네요. 후훗….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 정말로 마음에 들었어. 이 천연 백금발도,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단정한 외모도. 오늘밤이 지나면 모두 다 내 것이 될 테지요.”
“…비키시오, 레이디. 흣……!”

여자는 곱게 정리돼 있던 긴 머리를 풀어헤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상기된 얼굴로 비키라고 해봐야 설득력이 없잖아요?”
“아………읏….”
올라타있는 여자가 몸을 흔들 때마다 정신 없이 쾌감이 몰아 닥쳤다. 그러나 불쾌한 쾌감이었다. 아힌스는 이를 악물고 참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개미가 전신을 기어가는 듯한 가려움증이 일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매달렸다.

더웠다.

덥고 괴로웠다.

머릿속에선 오직 한가지 이름만이 떠올랐다.

“유엘………….”

일순 여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찾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검은 정복을 입은 동생은 만년설처럼 서늘한 표정이었다. 그는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녀가 악, 소리도 내뱉기 전에 거칠게 떼어냈다.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을 정신도 없이 아힌스는 무작정 그런 유엘의 품에 뛰어들었다.

괘씸하고, 얄밉고, 무정한 녀석이지만…. 그렇지만 너는……….

“괴롭다…. 괴로워, 유엘-. 어떻게 좀 해줘. 흐윽……. 왜 이제서야 온 거야, 이 하등한 놈 같으니-!”

아힌스는 유엘의 일그러지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붉게 상기된 뺨을 촉촉히 적시고 있었다.










**


신년파티 때 보자고 했던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이런 치졸한 마음을 들켜서는 안되겠지만 유엘은 아힌스를 탐욕스레 바라보는 뻔뻔한 뭇사람들의 눈깔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었다. 파티고 뭐고 다 끝날 때까지 방에 가둬뒀어야 했던 것을……. 그러나 설마 이렇게까지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공작 전하, 정말 굉장한 형님을 두셨네요. 봐요, 레이디들이 정말 세 겹이에요. 호호…. 저런 재미있는 장면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그 꼴이 보기 싫어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 등을 돌리고 서있건만 눈치 없는 부인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술에 살짝 취한 건지 유엘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하는 것도 모르고 팔에 은근히 몸을 기대오는 여자였다.
“어머나, 드디어 악착스레 매달리던 공주님이 성공했나 보네. 왈츠를 추려는 것 같은데요? 저 스토익해 보이는 성주께서 춤이라니….”

유엘의 미간에 혈관이 붉어졌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칼 바람이 몰아치는 테라스에 나와 머리를 식혔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젠장-!”

그가 결국은 누군가와 혼인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분명 언젠가는 누군가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행복하고도 단란한 가정을 꾸릴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왜 꼭 지금이어야 한단 말인가? 마치 자신을 조롱하듯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아힌스는 달빛을 타고 내려온 선인처럼 순결해 보였다. 아가씨의 손을 잡고 춤추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잘 어울려 괴이할 정도였다.  

꽝-!

유엘은 주먹에 힘을 실어 난간을 후려쳤다.

당장이라도 끌고 가서 가둬 버리고 싶은 욕망과 그의 행복을 위해 이대로 참아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또다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아힌스의 옆에 서있던 여자가 찢어 죽이고 싶도록 증오스러웠다. 감히 아힌스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그의 하늘빛 푸른 눈동자에 제 시선을 맞추는 발칙한 계집……!

“감히! 감히! 감히-!!!!”

내 것이다. 내 것이어야 했다. 내 혈육, 내 형제, 내 천사-, 나의 것-!

-결코,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형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난간을 잡고 있는 손은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푸르스름했다. 유엘은 서늘한 표정으로 입 꼬리를 비틀었다. 달빛은 유엘의 발 아래 광기 어린 그림자를 드리워놓았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네요, 전하.”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어린 미성에 유엘은 흑요석의 눈동자에 피어 오르던 광기를 감췄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여자는 샤휀에 머물고 있는 두 공주 중 작은 쪽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반갑지 않던 유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이 찬데 예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야 말로 나와 계시는 시간이 긴 것 같네요. 연회장이 불편하신가요?”
“공주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서릿발 같은 시선이 추웠는지 공주는 잠시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아드리안 공작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듣던 대로 무례하시네요. 아드리안 형제들은 다들 이렇게 차갑고 쌀쌀맞나요?”
“용건만 간단히 하십시오. 당신과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 기가 막혀!”
“할 말 없다면 이만 먼저 가겠습니다.”
“잠깐만요-! 전하의 소중한 형님에 관한 일인데도 그냥 가시겠다고요?!”
“!”

상대를 무시하는 듯하던 유엘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자그마한 공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당돌하게 말을 이었다.

“말 해야 할 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말하는 거에요. 홀로 가보세요. 주페가 순진한 도련님을 완전히 삼켜버리기 전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엘은 연회장으로 뛰어들어갔다. 느닷없이 난입한 아드리안 공작 때문에 군중이 술렁였지만 그런 것엔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고개를 몇 번 돌려 아힌스의 행방을 찾던 그는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대부인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대부인은 자그마한 어깨를 화들짝 떨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답지 않게 죄책감이 엿보이는 태도였다.

유엘은 이를 갈았다.

“형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유…유엘-,”
“대답하세요, 어서! 형님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나, 나는 몰랐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조금 전에야 들은 거야. 그러니 내 탓이 아니다, 유엘?”
“-뭘, 몰랐다는 겁니까. 말해 보세요, 어머니. 대체 형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기가 막혔다.

이 더럽고 천박한 놈들이 감히 누구를-!

유엘은 정신 없이 달렸다. 긴 검은 망토를 흩날리며 공작이라는 체면도 잊고, 그는 호위병 하나 없이 샤휀의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머리통 한구석이 날아간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망할 년이 감히 내 천사를 훔쳐갔다는 분노뿐.

쾅-!

“형님-, 여기 계십니까! 대답하십시오!”

난교를 벌이고 있던 방안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여기도 아니군.
핏빛으로 두 눈을 충혈시킨 채, 그는 곧 다른 방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어디에도 아힌스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이러려고 이별을 고한 게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정략에 희생되라고 놔준 게 아니었다.

‘…나는…, 나는 말입니다, 형님………!!!!!!!!!’


“대답해, 아힌스----------------!!!!!!!!”


꽝-----!

절망스런 마음에 아무 곳에나 주먹을 내질렀을 때였다.


- 유엘…………. ?

“…!”

아힌스의 목소리였다. 꺼져가는 듯 작고 힘없는 소리였지만 유엘은 확신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한을 물리치며 유엘은 끼릭-, 눈앞의 방문을 돌려 열었다. 샤휀의 객실 중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침실…. 내부로부터 새나오는 묘한 향초 타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마치 ‘그걸’ 위해 준비된 침대처럼 붉은 공단의 시트 위엔 옷을 반쯤 벗어 던진 여자와……한껏 흐트러진 아힌스가 야하게 얽혀 있었다. …눈 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형님-.”


유엘은 서늘하게 웃으며 당황한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밖으로 내던졌다. 드레스가 반쯤 벗겨진 그녀가 밖에서 무슨 곤욕을 당하든 알 바 아니었다. 내 천사의 몸에 감히 얽고 있던 천한 손을 발로 뭉개버리려 하는 순간…. 아힌스가 품 안으로 뛰어 들었다.  

“괴롭다…. 괴로워, 유엘-. 어떻게 좀 해줘. 흐윽……. 왜 이제서야 온 거야, 이 하등한 놈 같으니-!”









***



유엘은 서늘하게 웃으며 당황한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밖으로 내던졌다. 드레스가 반쯤 벗겨진 그녀가 밖에서 무슨 곤욕을 당하든 알 바 아니었다. 내 천사의 몸에 감히 얽고 있던 천한 손을 발로 뭉개버리려 하는 순간…. 아힌스가 품 안으로 뛰어 들었다.  

“괴롭다…. 괴로워, 유엘-. 어떻게 좀 해줘. 흐윽……. 왜 이제서야 온 거야, 이 하등한 놈 같으니-!”
“……형…,”
“왜, 왜 이제 온 거냐, 바보 같은 놈. 이 바보 호박-! 하………윽…….”

아힌스의 뺨은 눈물로 젖어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무심함을 가장하던 냉랭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그는 색색 숨을 고르며 뜨거운 몸을 던져왔다. 유엘은 반사적으로 그 마른 몸을 끌어 안았다. 머릿속을 스치던 그 수많은 생각들, 그 많던 분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건 오로지 애끓는 안타까움뿐이었다.

…왜, 어째서 이 사람에게서 눈을 떼었던 걸까. 이렇게나 좋은데. 이렇게나 귀하고 고운 사람인데………….

왜 내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형님….”

…사랑했다. 그리고 너무나 좋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째서인지도 모른다. 그냥, 처음 보는 그 순간부터 빠져버렸던 것 같다. 그래.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어렸던, 그 시절부터….

“…나를, 기다리셨습니까?”
“기다리긴 누가 널 기다린다는 게냐! 당연히 와야 할 놈이 오질 않으니 화가 난 것뿐이다.”

아힌스가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며 노발대발 성을 냈다. 유엘은 그만 풋, 웃음이 터져버렸다. 남들 앞에선 그렇게 고상한 척 점잖은 척 쌀쌀맞은 인사말 한마디 정도나 던지는 주제에 유엘의 앞에서만은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리면 히스테릭한 다혈질로 변해버린다. 그 갭이 귀엽다고 한다면 자신이 단단히 미친 걸까.     

스윽-, 유엘은 은근슬쩍 아힌스의 척추를 쓸어 내렸다. 당연하게도 아힌스에게선 신음이 흘러나왔다. 원망스레 올려다보는 푸른 눈에 입 맞추며 유엘은 악당처럼 씨익 웃었다.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싫다 해도, 거부한다 해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인내심 같은 건 어차피 바닥났으니까.”
“………뭐,뭐…히익…………!”

스커트처럼 늘어진 얇은 블리오 위로 엉덩이를 힘줘서 움켜 쥐자 아힌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쪽이 약했던가.’ 의외의 약점을 알아낸 유엘은 더 장난치는 걸 멈추고 번쩍 아힌스를 들어 그대로 침대까지 걸어갔다. 묘한 자세로 안겨버린 아힌스가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는 도리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곧 내려드릴 테니 화내지 마십시오. 언제는 제가 당신 말을 거역한 적이 있었습니까?”

참 뻔뻔한 말이었다. 최음제로 흐려졌던 푸른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아힌스는 바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흐읏…. 이…고얀………. 대체…하아…. 성문을 쳐부수고 들어오던 날부터…네가…네가 대체 언제 내 말을 들어주었다는 거냐…? 뻔뻔해도 유분수지………….”
“제가 그랬습니까? 그럼 이제부턴 잘 듣겠습니다.”

약속대로 그는 아힌스를 침대 위로 공손히 내려놓았다. …문제는 그 후 곧바로 형님의 배 위로 올라탔다는 거지만.

“……왜…왜 이래……! 아…앗….”
“…싫으십니까?”

다리를 제대로 펴주는 척하며 유엘은 은근슬쩍 무릎 뒤의 오금을 건드렸다. 서늘한 긴 손가락이 스치는 느낌에 아힌스는 여자처럼 다리를 오므렸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하반신을 바짝 세워버리고 말았다. 아까부터 발기되어있긴 했으나 이젠 더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제 모양을 잡아가는 성기를 보며 아힌스는 어쩔 줄을 몰라 벌벌 떨기만 했다. 이런 모습이 시선에 노출된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뭐…뭘 보는 거냐. 눈, 돌려……. 싫어……. 보지 마…. 유,유엘…보지 마 제발…….”
“…어째서요? 체면이 상하십니까? 형인 주제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이런 걸 세우고 있어서?”

꾹-, 서늘한 손가락이 곧추 서있는 하반신의 끝을 눌렀다. 아주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아힌스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전신을 수축시켰다.

“……앗…!”

재빨리 양 손바닥에 얼굴을 감췄으나, 그러나…벌어진 일은 수습될 수 없었다. 중요한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린 아이처럼 결국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질척하게 젖어버린 앞섶이 어깨를 들썩일 때마다 치덕거렸다.

“너…너무해……. 흐윽…….”
“쉿-. 울지 말아요. 아이도 아니고 번번히 우시다니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정도로 흥분해 있는지 몰랐습니다. 고작 조금 건드렸을 뿐인데….”

그 말이 더 수치스러웠다. …최음제에 취한 것 뿐이다. 약 때문에 어쩔 수 없던 것뿐인데 동생은 마치 자신이 정숙하지 못해 그런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유엘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지만 애초에 소통이 잘되는 형제는 아니었다.-

“슈, 슈스켈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했어. 흥분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내, 내가 나쁜 게 아니라고 했단 말이야…흐읏….”
“-그게 무슨 말입니까.”
“슈스켈은……!”

찌이익?

반쯤 흘러내렸던 옷이 그마저도 유엘의 손에 갈갈이 찢겨졌다. 아힌스는 동생의 느닷없는 광폭한 행동에 기절하리만치 놀랐다. 새까만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그는 야차처럼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슈스켈이, 그 작자가 형님께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 무슨 짓…?”
“그 자와 잤습니까?”
“자다니, 대체 뭘…,”

콱-, 유엘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까지 느긋했던 게 거짓이었던 듯 거칠게 달려들어 아힌스의 두 손목을 구속하고 억지로 입을 벌려 키스했다.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천장부터 목구멍까지 탐하자 토기가 몰려왔다. 아힌스는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발버둥쳤으나 상대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는 나머지 손으로 아힌스의 유두를 쥐고 비틀었다.  

“그 남자와…정말로 잤습니까? 대답해 보세요 형님. 설마 그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요? 예?”  
“흐읏……흣…이……이거 좀 놓고 말해……! 이 고약한 놈아!”


아힌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놈이 갑자기 광분해서 달려드는 걸까? 그렇잖아도 오감이 예민해져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인데, 그런 몸에 거칠게 달려들어 괴롭히는 유엘은 꼭 발정난 한 마리 짐승 같았다. …그러나 불한당의 손이 옆구리를 지나 날씬한 허리를 꼬집고는 기어이 회음부까지 진출하는 동안에도 결코 그만두라는 말만은 하지 않는 아힌스였다.

“아……히익-. 흑……유,유엘…….”  

음낭을 툭툭 건드리는 척 하더니 손가락은 이내 슬쩍 후퇴해 회음부를 지그시 눌러왔다. 사정을 끝내고 움츠러들었던 하반신은 그 저릿저릿한 자극에 다시 한번 머리를 치켜세웠다. 귀두에선 어느새 묽은 액체가 다시 질금질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차마 그 꼴을 볼 수 없어 아힌스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건 전혀 고상하지 못하다. 슈스켈이 자위 해줄 때와는 달리 유엘은 아힌스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이상한 자세로 눕혀놓고는 여자 같은 신음을 내뱉게 한다.

“그러지 마…응…? 아아…싫어. 차라리 그냥 만져줘…. 싫어 유엘.”
“…만지고 있잖습니까. 이걸로는 부족합니까? 이렇게 야한 몸이라서 슈스켈과도 그런 짓을 한 겁니까? 그 작자에게도 만져달라고 했나요? 몸을 맡긴 겁니까, 이런 식으로?”
   
참으로 집요한 사내였다. 저도 흥분해서 바지 앞섶이 터질 지경인 주제에 그는 아힌스가 대답할 때까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끈질기게 추궁했다. 만일 그렇다고 긍정하기라도 하면 하다 말고 일어나 슈스켈의 머리통을 부수러 갈 기세였다. 결국 아힌스는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흐느끼며 부인했다.

“슈…스켈과는…이런 짓 하지 않았어…. 슈스켈은…친구지만 사랑하지는 않아…. 내가 좋아하는 건…. 너, 너니까……이런 건 너랑만……,”  
“-”

음탕하게 움직이던 손놀림이 순간 멈췄다. 유엘은 전혀 뜻밖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아힌스는 그 와중에도 고개를 갸웃했다. ‘쟤가 또 왜 저러나.’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의 옷자락을 움켜 쥐자 그제야 유엘이 정신이 난 듯 수줍은 처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이쪽의 눈치를 살펴왔다. 그러고는 묻는다는 말이 참 기가 막혔다.

“…그렇다는 건 제가 특별이라는 겁니까?”
“……뭐?”
“나를 좋아한다는 건, 이런 행위를 같이 할 정도로 특별하다는 의미였습니까?”

아힌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저놈은. 만져달라니까 아주 쓸데없는 말만 하고 있다. 아힌스는 뚱한 얼굴로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응. 좀 특별해.”

…너는 참,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이런 행위고 저런 행위고간에 아힌스는 타인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 자체가 싫은 사람이었다. 슈스켈이 이따금 챙겨줄 때를 제외하고는 손끝만 닿아도 호들갑 떨면서 톡톡 털어버리는 자신인데 유엘이 특별하지 않다면 물고 빨고 끌어안는걸 허용할 리가 있나. 하여간에 동생이라고 하나 있다는 게 눈치가 영 둔치다.

그렇게,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유엘을 바라보는데……이상하다. 아힌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뻔뻔한 인간이, 저 고무줄보다도 튼튼한 신경줄을 가진 놈이……. 귀 끝까지 피가 몰렸는지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고는 울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왜 그래…?”
“…제가 정말 특별합니까? 당신에게, 정말로…?”
“……으응….”
“……정말로?”
“그래.”
“…그러면,”
“…?”
“제가, 당신에게 조금 더 이기심을 부려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으…, ………응.”


와락-


“…………사랑하고 있습니다, 형님. 나의, 아힌스.”


툭….

아힌스의 뺨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게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다. 곧이어 다가온 유엘의 키스는 좀 전보다 훨씬 다정하고, 달콤하고, 그리고 뜨거웠다.

“………아….”

아힌스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유엘의 등에 팔을 감았다. 태초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처럼, 맞닿아 있는 가슴은 알 수 없는 따스함으로 충만했다. 창가엔 홀로 타고 있는 양초가 두 사내의 그림자를 흐릿하게 비췄다. 그림자는 위 아래가 뒤바뀌며 몇 번 요동을 치더니 잠시 후엔 완전히 하나로 합쳐졌다. 단단한 사내의 등줄기가 크게 한번 휘자 마침내 그 아래에 있던 다른 사내의, 절정에 다다른 열락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금발의, 우아한 성주님의 목소리였다.





  





**



아힌스는 시린 눈밭을 걷고 있었다.

꿈 속이었다.

하얗고 하얗고 또 하얗고………. 온통 새하얀 세상. 아힌스는 이 꿈 속의 세상에 너무나 익숙했다. 그의 세상은 늘 춥고 고독한 겨울이었으니….

‘…외로워?’

누군가 물었다. 외로우냐고-.

아힌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외롭냐고-. 외로우냐고? 그건 바보 같은 질문이다. 여덟 살에 부모 슬하를 떠나 홀로 살아왔다. ‘혼자’라는 건 그에게 숨쉬는 것보다 더 익숙한 일상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외로운 건 아니었다. 그래. 그런 게 아니었다.

- 나는 다만…….

그냥, 추운 거야.

…추워. 춥다고.

또르르-, 뺨으로 눈물이 굴렀다. 하늘을 닮은 푸른 눈은 제 눈물마저 남의 것인 양 무심히 바라봤다.

…어째서 나는 항상 이런 혹독한 겨울을 헐벗은 채 견뎌야만 하는 걸까. 응?

걸음을 멈추자 발끝부터 폭신한 눈이 쌓여갔다. 아힌스는 가만히 눈동자를 굴려 차근차근 몸을 덮어오는 눈송이를 바라봤다. 어쩌면 이대로 얼음기둥이 되려는 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차라리 그 편이 따스할 것도 같았다. 그래. 추운 건 정말………질색이었으니까.


‘안돼.’

- 어…?

‘이리와.’

- 어………?


촉….


말캉한, 따스한 것이 가볍게 입술에 닿아왔다. 반쯤 눈사람이 된 꼴로 아힌스는 자신을 잡아오는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누구야…너.

‘…….’
‘…….’

…작았다.

작고, 까맸다. 아주 어리고, 작고 무표정해 보이는 아이였다. 눈 속에서 튀어나온 악마 인형 같은 어린 녀석….  

‘춥잖아. 같이 가자.’
‘…….’
‘넌, 추운 거 싫어하잖아.’
‘…….’
‘같이 가자.’
‘…….’

이상하다. 아이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도, 누구도 묻지 않았는데. 너는 내가 춥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응? 넌 어디서 온 아이니? 너는 누구야……?

‘같이 가자.’
‘…난…….’
‘같이 가자, 나랑-.’
‘…….’
‘같이, 가자.’

아힌스는 두 눈을 깜박였다. 아이를 따라가야 할까…?

‘…….’

아이의 손은 따뜻했다.  그리고 아이는…아힌스에게 같이 가자고 해주었다. 누구도, 지금까지 누구도 그리 말하지 않았는데.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

- 내가, 너와 함께 가도 되는 걸까?


네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응? 유엘, 대답해봐.





.

.

.



깜빡깜빡-.


“…어……?”


쯧-.

어디선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수면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아힌스는 쏟아지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이불을 움켜 쥐었다.

“아힌스. 정신 차리고 그만 일어나.”
“……으……슈스켈이냐?”

며칠은 앓은 사람마냥 갈라진 목소리가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짜증스레 허리를 비틀자 끔찍한 통증이 찾아왔다.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앓는 소리를 내자 슈스켈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꼴 좋군. 밤새 네 동생이 퍽이나 잘해줬나 보지?”
“-!”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아힌스는 통증을 무시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의 그것이…………꿈이 아니었나…?

“……아흑….”
“어딜 일어나는 거냐, 이 모자란 성주 새끼야! 허리 나가려고 작정했어?!”

욕설을 섞어 슈스켈이 소리질렀지만 아힌스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좌우로 고개를 돌려 유엘을 찾았다. 어젯밤의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면 옆에 있어야 하는 건 슈스켈이 아니라 유엘이어야 했다. 그래, 유엘이어야…….

“아항-? 오매불망 그리는 동생 님을 찾나 보지? 씨발. 수치를 알아라, 아힌스 폰 아드리안. 그 새끼는 이미 떠났어. 그래서 내 진작 말했지? 정 주지 말라고.”
“………떠나…?”


킬킬킬…….

슈스켈이 야비하게 웃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그는 당황으로 굳어진 아힌스를 신랄하게 비웃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떠났다고-. 네가 잠든 사이에 제 기사단을 끌고 샤휀을 떠났다, 이 말이다.”
“아냐……무슨…. 그럴 리가……. …거짓말 하지마. …그,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기는! 처음 당해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놀래? 사실이다. 아드리안 공작은 떠났어. 널 남겨두고.”


투둑-.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눈 앞이 흐려졌다. 발 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힌스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입을 틀어 막았다. 슈스켈이 재빨리 달려와 무너지는 아힌스를 받았다. 그는 잔뜩 비틀린 표정으로 아힌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잊어, 아힌스. 어차피 너와는 안될 운명이었어. 남자 형제따위를 사랑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냥 하룻밤 실수였을 뿐이잖아.” “……….” “쉿…. 울지마. 금방 잊을 수 있어. 그런 녀석 따윈 아무 것도 아니야.” “……아니야, 나는……나는…….” “쯧-. 너 지금 흥분했어, 아힌스. 약 먹자. 약 먹고 자자. 자고 나서 얘기하자, 응?”

슈스켈이 반강제로 넘겨주는 알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아힌스는 탈진해서 주저 앉았다. 그런 아힌스를 슈스켈은 살살 달랬다. 그는 아힌스를 이불 속으로 몰아 넣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잊어라, 아힌스. 굳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아도 좋아. 부디 그 놈만은…, 잊어버려.”


진심을 다해 충고하는 슈스켈의 등 뒤에선 유엘이 남겨놓은 하얀 편지 봉투가 자작자작 타고 있었다.











***



아드리안 공작이 떠난 며칠 후 대부인 일행 역시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공작에게 창녀처럼 내쳐졌던 공주는 수치심에 얼굴도 들지 못한 채 부랴부랴 제일 먼저 짐을 쌌고 그 뒤를 이어 대부인 역시 못마땅한 얼굴로 성을 떠났다. 그녀는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더라도 일이 실패했다는 것만은 깨달은 눈치였다. 그러나 의외로 아힌스와 공주를 다시 엮어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배후에 아드리안 공작의 압력이 있지 않았을까, 슈스켈은 다만 그리 짐작할 뿐이었다.

‘-가겠어요. 마지막으로 아힌스와 작별인사라도 나누고 싶지만 아프다니 할 수 없지요.’
‘성주께서 섭섭해 할 겁니다. 그러지 말고 며칠만이라도 더 머무르시지요.’
‘……아뇨. 물론 공작의 당부 때문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애가 불편해요. 아마 말은 안 해도 틀림없이 나를 원망하고 있을 테죠. 그러니 나 혼자 여기 더 남아서 뭐하겠어요? 내가 여기 있는다 해서 그 애 앞날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고 그 애가 내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니 이쯤에서 물러날래요. 황실과의 혼인 같은 건 이제 포기했어요. 아아. 혼인의 ‘혼’ 자만 꺼내도 지긋지긋하군요.’

슈스켈은 더 이상 대부인을 잡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냉정하고 계산적이었다. 곱게 자란 보통의 중년부인 흉내를 내는 주제에 실제로는 온 세상을 자기자신만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지독한 에고이스트였다.  

입맛이 몹시도 썼다.

기사단이 사라지고 불청객들이 떠나고 연회장을 가득 메우던 지역 유지들까지 모조리 빠져나간 샤휀 성은 공작이 찾아오기 이전에 그랬듯 몹시도 고요하고 황량했다. 이따금씩 느껴지는 고용인들의 작은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쥐 죽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마치 요란한 축제가 끝난 후의 공터 같군….”

슈스켈은 씁쓸하게 읊조렸다. 입에 물려있는 파이프에선 담배연기가 홀로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드르륵-, 바퀴 끌리는 소리에 그는 마침 아힌스의 침실에서 트롤리를 끌고 나오는 윔플 집사를 바라봤다. 뚜껑이 덥혀있는 은식기들은 손 하나 대지 않은 채로 깨끗했다. 슈스켈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또 안 먹겠다던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집사는 입을 꾸욱 다문 채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힌스는 이로써 거의 사흘을 내리 굶고 있는 셈이었다.

“………씨발.”
“의원도 더 이상 식사를 거르시는 건 위험하다 했소. 약 따위로 몸을 보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휴우.”
“-철딱서니 없는 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녀석이 툭하면 먹을 걸로 시위하는군. 어디 내버려둬 보시오, 영감. 저도 굶어 죽기 싫으면 언젠가는 먹겠지.”


슈스켈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걱정되는 마음 이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바보 같은 놈, 모자란 놈! 자존심을 그리 세우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이거냐?! 이 천하의 헛똑똑이! 덜 떨어진 종이 호랑이 같은 놈!!!!!!’

지들이 아무리 사랑한다 어쩐다 하며 절절이 매달려 봐야 세간의 눈엔 그저 불륜이다. 그것도 남자 형제끼리의 불륜. 그런 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지금이야 잠깐 좋아 죽겠지. 젊은 혈기에 현실 따위야 아무래도 좋을 성 싶지! 하지만 십 년이 지난 후엔? 이십 년이 지난 후엔? 아드리안 공작이 혼인해서 애라도 낳으면 그때 가서는 뒷방마님 흉내라도 내겠다는 거냐? 응?

“병신, 머저리-!”

꽝-, 콘솔을 내리쳤다. 주먹이 얼얼했다. 그러나 주먹보다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굶고 있는 자식을 보는 것마냥 속이 쓰리고 괴로웠다. 여동생이 죽은 이후로 이토록 정성을 쏟고 집착하는 대상은 아힌스가 유일했다. 슈스켈은 이따금 아힌스가 자신의 친동생이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오만하고 건방지면서도 한없이 불쌍한 이 녀석을 이런 식으로 외롭게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남동생 따위에게 마음이 흔들리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텐데.   

“너는 바보야, 아힌스. …언제나 최악의 수만 두지.”


‘사랑합니다 형님. 사랑하고 있습니다 형님-.’
‘응……응…흑…! 유엘, 다시 말해봐라. 응……다시….’
‘…후욱…. 헉…사랑합니다. 내 심장…, 나의 아힌스. 내 천사….’
‘……하앗………좋아……응, 더…더, 더……….’


…………….


“…씨발. 심장 같은 소리하고 있네. 냉정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혀 끝에 버터를 쳐 발랐나!”

쾅, 쾅-!
다시 한번 콘솔을 내리쳤다.

슈스켈은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벅벅 이를 갈았다. 지난 새벽 헐벗은 꼴로 찾아와 눈물로 호소하는 공주를 보고는 놀라 찾아간 침실 문 앞에서…자신은 무엇을 들었던가. 충격으로 발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소란을 피우면 사람들이 몰려올까 두려워 하인들을 시켜 아무도 가까이 들이지 못하게 막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을, 빌어먹을 공작 놈이 제 심장이니 천사니 미친 소리를 해대며 안는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참고 있었다는 말이다.

“…빌어먹을……!”

파샥--!

홧김에 콘솔을 다시 한번 내리쳤더니 기어코 원목이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아힌스가 아끼던 화병이 부서지고 말았다. 버럭 성질을 내려던 슈스켈은 이내 화를 꾸욱 눌러 참고 궁상스레 주저앉아 깨어진 화병조각을 주워 맞췄다. 그러면서도 아드리안 공작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건 결코 잊지 않았다.

“개 같은 공작 새끼-! 씨발씨발…….”

슈스켈은 진심으로 아드리안 공작이 싫었다.











**






“전하! 드디어 서쪽 방벽이 무너졌습니다! 오오…드디어! 드디어, 저 쳘벽의 요새가!!!!”

부관은 감격에 겨워 비명처럼 환호성을 내질렀다. 유엘이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로 무너진 방벽 사이로 아군이 성난 파도처럼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며칠간의 밤샘 공성이 드디어 종반에 다다른 것이다. 용맹하기로 이름 높던 아르토니아의 적병들은 그 엄청난 기세에 눌려 헛숨 한번 내쉬지 못하고 등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승세였다.

“툴락, 슈미르에게 궁수부대를 물리고 백병전을 준비하라 하게. 남문을 지키던 군사를 모조리 빼서 서쪽으로 진격하다. 하달-!”

부관이 검을 빼어 들고 말을 달려 나갔다. 곧이어 우렁찬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혈향에 반쯤 정신이 나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서쪽으로 대열을 갖췄다. 피 튀기는 백병전의 시작이었다.

“진격-!”
“진격하라--!!”
“승리가 코앞이다, 진격하라----!!!!”

수백 개의 장검이 허공을 가르고 양날 도끼가 휘둘러졌다. 흥분을 넘어 그들은 전율하고 있었다. 일만의 군사로도 힘들다는 카슬란을 오백의 기사로 공략할 때는 미친 짓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아드리안 공작이라 해도 이건 정신 나간 짓이라고, 이 폭설에 드디어 공작이 돌아버렸나 보다고 떠들었었다. 그러나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것도 고작 사흘 만에……. 악마의 동굴을 지나 단 하나의 인명손실도 없이 적의 뒤통수를 쳤다. 카슬란의 설계도까지 구해 가장 취약한 지점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폭약을 설치하는 치밀함에는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적은 제국군이 코 앞까지 다가가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진격하라! 성문이 열렸다! 성문이 열렸다!! 카슬란의 성문이 열렸어!!!!!”
“진격!!! 죽여라, 앞을 가로막는 건 모두 없애버려!!!!!!”
“진격! 진격! 진격! 진격---!!!!!!”
“진격하라---!!!!!!!!”


설원 위의 공작은 악마와도 같았다.
아니, 악마보다도 더 치밀하고 교활하고 지독했다.

결국 공세를 견디다 못한 카슬란에 백기가 내걸렸다. 땅이 울릴 정도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기사들이 일제히 피 묻은 검을 들어올려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잠시의 틈을 타 도망치려던 적군의 잔당은 남문 밖에 매복해있던 기사들에 가로막혀 몰살당했다. 카슬란을 뒤덮은 백색의 눈은 어느덧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종전(終戰)-.

그제야 아드리안 공작은 해맑게 웃었다.

값진 승리에 도취해서?
-천만의 말씀.

사랑에 빠진 정신 나간 사령관은 드디어 연인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있던 것이다.










“안됩니다, 전하!”
“…시끄럽군.”
“이러지 마십시오, 아직은 위험합니다. 적군의 잔당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모르는데 현 상황으로는 도저히 병력을 뺄 수 없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니 병력을 두고 가겠다는 말이 아닌가. 앞을 비키게.”
“못합니다!! 어찌 혼자 움직이겠다고 이러십니까? 말도 안됩니다 전하. 그러지 마시고 뒷정리가 될 때까지만이라도 참으십시오. 샤휀엔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잖습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겠네. 비키게.”

공작은 완고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고집스러움에 툴락은 혀를 내둘렀다. 본래도 주관이 뚜렷한 사내이긴 하지만 대체 이 시점에 그 성으로는 왜 돌아가겠다 이러느냔 말이다. 애초에 임시로 빌렸던 성, 전투가 끝난 지금으로선 돌아갈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렇잖아도 드디어 샤휀에서 벗어나 성질 더러운 금발 성주 놈의 눈치를 안 봐도 되겠다 싶어 박수를 치고 있던 참인데 대체 이 양반이 왜 이러실까.

“전하, 단 이틀이라도,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기다려 주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호위인력을 빼보겠습니다.”

카스란의 치안을 유지하고, 남은 잔당을 처리하고,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선 단 한 명의 군사라도 아쉬운 시점이다. 아드리안 공작이야 본인의 할 바를 다했다 하여도 아랫사람들 입장에선 그게 아니지 않은가. 누구보다도 그런 부분에 있어 배려가 깊던 공작이었건만 이번만은 이상했다. 그는 마치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무언가를 성에 남겨 두고 온 사람처럼 초조해했다. 이런 공작의 모습은 처음이라 더 낯설었다.

“……안돼. 기다릴 수 없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 해.”   
“……전하.”
“가겠다. 악마의 동굴을 통과하면 금방이야. 아르토니아 인들은 아직 모르는 곳이니 호위 따윈 필요 없어.”
“전하!!”

툴락은 두 주먹을 움켜 쥐었다.

아드리안 공작은 제국을 지키는 거대한 날개다. 꼭 자신의 상사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그는 몇 백 년에 한번 나올까 하는 제국의 소중한 인재였다. 쇠락해가는 제국이 이만큼 유지되고 있는 게 누구의 덕이란 말인가. 남부에서 공작이 야만족들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또 서부에 들끓는 해적들을 퇴치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북부에서 밀고 내려오는 아르토니아를 물리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거대한 제국이라 한들 무사할 수 있었겠는가.

“호위 없이는 절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정 가셔야 하겠다면 세드릭 부대를 내드릴 테니 데려가십시오.”
“-세드릭?”
“예 전하. 그는 젊지만 실력 있는 무인이니 중요한 때 도움이 될 겁니다.”

세드릭은 성실하고 충직한 부하였다. 툴락은 자신있게 세드릭을 추천했다. 본래는 최정예 기사들을 호위로 붙여야겠지만 지금 그들을 카슬란에서 빼낼 여유는 없었다. 아니, 툴락은 오히려 세드릭 부대가 최정예 기사단보다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전장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공을 세우지 못한 그들은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온 몸을 바쳐 공작을 지키려 들 것이다. 상당히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반드시 데려가십시오. 혼자서는 절대 못 가십니다.”

공작은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리다가는 잠시 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이란 사내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으나 더 이상 부관과 말다툼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일어나봐, 아힌스.”
“…….”
“그만 일어나서 식사해. 언제까지 이럴 참이냐?”
“…….”
“아힌스! 너 정말 이럴래?!”


묵묵부답. 아힌스는 겨울을 나는 고치처럼 둘둘 말은 이불 속에 콕 틀어박혀 고개도 내밀지 않았다. 그는 벌써 며칠째 이 모양이었다. 활동이라곤 이따금씩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일 뿐. 그러다 보니 원체도 마른 몸은 이젠 아주 못 봐줄 지경으로 가늘어져 버렸다. 슈스켈은 궁둥이를 뗐다 붙였다 하며 초조하게 침대 머리맡을 어슬렁거렸다.

“아힌스…. 미련하게 자꾸 왜 이래. 그 녀석이 가버렸다는 걸 알잖아. 떠난 사람에게는 미련 두지 않는 게 네 알량한 긍지가 아니었던가? 그나마도 이젠 상관 없다는 거냐?”  
“…….”
“이대로 굶어 죽는 거야 네 자유지만 세상에 실연당해서 죽는 것만큼 꼴불견이 없다는 건 알아둬. 흥. 나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보란 듯이 잘 살겠다. 세상에, 촌스럽게 상사병이 다 뭐야?”

그래. 촌스럽게 상사병이 다 뭐냐. 그 따위 놈 얼른 잊어버리고 보란 듯이 잘 살란 말이다. 토끼 같은 자식새끼랑 여우 같은 마누라 끼고 살아봐라. 무뚝뚝한 동생 놈 따위가 다 뭐야? 평생 저만 아껴주겠다고 달려드는 여자가 지천에 깔리고 널렸는데 고작 실연 한번 당했다고 널부러져 있어? 에이 못난 놈.

“아힌스-,”
“…귀찮게 굴지 말고 나가있어.”
“!”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잔뜩 쉰 낮은 목소리. 그러나 이게 얼마 만에 듣는 아힌스의 육성이던가!

“드디어 정신 차린 거냐? 아힌,”

찰싹-.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나가라고 했잖아. 내 말 안 들려?”
“……!”
“너는, 왜 쓸데없이 남의 침실에 와서 재잘대는 거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말이 우습게 들리나? 난 네게 분명히 경고했어. 너와 나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라고-. 시건방지게 굴지 말고 꺼져.”

지금까지 침묵했던 게 무색하리만치 아힌스는 싸늘한 표정으로 비수가 꽂힐 말들만 골라 내뱉었다.

“아힌스, 너…….”
“-이거 놔라.”
“!”

정수리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억지로 걷어치우자 비로소 드러난 얼굴은 예상보다도 더 까칠했다. 눈 밑은 거뭇하게 내려앉았고 입술은 죽은 시체처럼 푸르스름했다. 더 나쁜 건 아힌스의 엄지 손가락이었는데, 그 마르고 짤막한 손가락은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완전히 헤져있었다. 손톱까지 빠져 핏덩어리가 엉겨 굳어져있는 손가락을 보자 슈스켈은 겁이 더럭 났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힌스의 양 뺨에 손을 올렸다.

“맙소사……! 이게, 이게 다 무슨 꼴이냐! 이게 다 무슨 꼴이야! 응? 너 미쳤어?! 손은 왜 물어뜯어!”
“…………닥쳐.”
“눈 밑은 또 왜이래! 너 진짜로 그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신 거냐! 죽으려고 환장했어?!”
“……닥치라고 했잖아!!!!! 걱정하는 척 하지마! 너도 어차피 같은 놈이잖아! 다 똑같잖아!! 내 보호자라도 되는 양 굴지마!!! 넌덜머리가 나!!!!!!”

와장창?

“그만두지 못해, 아힌스!!!”
“내가 다치거나 말거나 죽거나 말거나 너와 무슨 상관이냐? 왜? 또 내 재산이 탐나? 하……좋도록 해. 다 가져가버려. 그까짓 것 하나도 필요 없어. 그러니 다 가지고 내 눈앞에서 썩 꺼져!!!!!”


짝?!


기어이 손이 올라갔다.

“아힌스-”

그러나 욱하고 치미는 성질을 참지 못해 아힌스의 뺨에 손을 올린 슈스켈은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다 죽어가는 몰골로 사력을 다해 악을 쓰던 아힌스가 기어이 끈 풀린 인형처럼 쓰러져 오열을 시작했던 것이다.


두근…

두근……


맙소사…………….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 아파왔다.

그 곱던 금빛 머리칼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리고 마른 등을 들썩이며 숨 죽여 우는 아힌스의 흐느낌은 높아졌다 낮아졌다 일정한 리듬을 반복하며 끊어질 듯 이어졌다. 어느새 슈스켈의 탁한 잿빛 눈엔 물기가 차 올랐다. 울며 불며 매달리는 가녀린 여인들을 학대하던 지독한 사디스트는 어디로 가고 여기 남아있는 건 제 새끼가 안타까워 안절부절 못하는 털 빠진 초라한 사내였다.  


“…흐흑………으………으………. 흐으……….”
“……울지 마라 아힌스.”
“흑…흑……으으………”
“……그 녀석이 그렇게 좋으냐? 울 정도로 좋아? 슬퍼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널 버리고 갔는데도 좋아?”
“……아냐……. 버리지 않았어…. 다시 올 거야. 이 곳으로…. 날, 버리지 않아, 유엘은…. 사랑한다고 했어. 내가 소중하다고 했어. …그러니까……그러니까………”
“-정신차려. 그럴 리가 없잖아. 그 놈은 오지 않아. 왜냐면-”


놈은 곧, 죽을 테니까…………….


“……유엘은 샤휀으로 돌아 올 거야. 꼭 올 거야…. 날, 사랑한다고 했어….”
“………….”

슈스켈은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울고 있는 아힌스가 너무도 가여워서…. 안 되는 인연에 집착하는 녀석이 불쌍하고, 불쌍하고, 불쌍하고………그리고 또한 한심해서.

녀석은 오지 않아 아힌스. 교활한 데본의 늙은이는 아드리안 공작의 생존을 원하지 않아. 놈은 곧 비참하게 진흙 바닥을 구르게 될 테지. …억울해서 차마 눈도 못 감고 죽어갈 게다. 제 아무리 잘난 공작이라도 그런 비열한 자들은 당해낼 수 없어. 그자는 전쟁의 신일지는 몰라도 뛰어난 정치가는 아니니까. 뒤로 수작을 부릴 줄도 모르고 남의 약점을 쥐고 흔들 줄도 모르지. 그러니 그 자는 시궁창을 기어 다니는 쥐새끼들에게 당하게 되어있는 거다. 그게 필연이야.


“잊어버려 아힌스. 곧 또 다른 사랑이 올 거다. 이 좁은 성밖을 한 발짝만 벗어나면 얼마나 넓은 세상이 펼쳐지는지 몰라. 봄이 오면 함께 샤휀을 떠나자.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곳을 떠돌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 놈이 생각조차 안 나는 때가 올 거야.”     
“…거짓말.”
“…….”
“넌 그 오랜 세월 세상을 떠돌면서도 여전히 외로운 눈을 하고 있잖아.”
“…!”
“여전히…누군가를 잊지 못하는 눈을 하고 있잖아. 그런 주제에 왜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거냐. 왜 내게만 잊으라고 강요하는 거야, 이 사기꾼 놈아…!”

날카로운 질책에 슈스켈의 몸뚱이가 크게 흔들렸다.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그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뺨의 흉터를 일그러뜨렸다. 죽을 듯이 괴로워 보였다. 아니…. 어쩌면 진작부터 죽어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옛 연인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산 채로 죽어있던 건지도….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유엘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한시라도 빨리 연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곤히 자는 모습에 깨우지도 못하고 두고 왔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는 첫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는 열여덟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로 앞만 보고 달렸다. 떨어져 있던 것이 고작 며칠인데 이토록 그리울 수가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시간의 흐름이 변한다더니 그게 정말 참말이었나 보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가고 있습니다 형님.”

이제 잠시 후면 당신을 볼 수 있어.
이 악마의 동굴만 통과하면 그대에게…………….  


슈웅?

콱-!


“……전하……………………………………!!!!!!!!”


……………….


“……크읏…….”


유엘의 검은 눈이 홉 떠졌다.

“……….”

그는 입가를 타고 흐르는 진득한 액체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쇠 냄새가 나는 붉은 액체였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대체 뭘까. 유엘은 무심히 뒤를 돌아봤다. 갈 길이 바쁜데 멈춰선 말이 얄궂었다.

“……….”
“………전하………. 화살이………. 왼쪽 심장에 화살이……”

누군가 귀에 대고 시끄럽게 외쳤다. 그러나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등 뒤의 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스르릉- 장검을 빼어 들었다.

……………….

은빛 검이 긴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그제야 유엘은 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누군지 떠올랐다.
………세드릭 호먼….


카각?!


“전하---------------!!!!!!!!!!”



꽃처럼 붉은 피가 만개했다. 다시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아…….”

유엘은 아힌스와 함께 했던 어느 날의 불꽃놀이를 기억했다. “…….” 심장에서 피어나는 혈화(血花)는 그날의 그 불꽃보다도 아름다웠다. 그의 차가운 입술에 흐린 미소가 떠올랐다. 어째서 하필 이런 때에 그 날의 당신을 추억하는 걸까.  

“………아힌스.”


이제 잠시 후면 당신을 볼 수 있어.

이 악마의 동굴만 통과하면
그대에게…….

평생을 함께 하자고 말하겠어.   











***


타닥타닥-


장작이 타 들어갔다.

아힌스는 벽난로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고양이처럼 졸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뺨에는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닦지도 않고 남아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고답적인 미남자였다.

“…….”

불꽃이 흔들흔들 춤을 출 때마다 긴 속눈썹 아래 드리워진 그늘이 명암을 달리했다. 혈색 없는 얇은 입술은 얌전히 다물어져 있었다. 발끝을 까딱이다 그게 불편했는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세를 바꿨다.

“……늦는군.”

이따금씩 눈이 떠질 때면 그는 어김없이 투정을 늘어놓았다. 기다리는 건 오직 한 사람….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재미머리 없는 동생녀석. 난폭하고 눈치도 없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바보 유엘…….

“돌아오면 따귀를 후려쳐 주겠다. 감히 잠든 사이에 사라지다니.”



끼익…….

오래 묵은 경첩소리가 고즈넉한 밤 공기를 갈랐다.

아힌스는 턱을 살짝 기울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밤은 너무 늦어있었다. 침실에 쏟아지는 달빛은 온화하지만 밤을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피 냄새를 뿌리며 침실에 발을 들여놓은 사내에게 아힌스는 무심히 시선을 던졌다.

“…너는 누구냐.”
“……….”
“누구냐고 물었다.”
“…당신에게, 뺨을 맞아야 할 사람………?”


그리 농을 치며 사내는 낮게 웃었다. 쇳소리가 섞인 불편한 음색이었다.

“……유엘.”

어둠 속의 사내가 한 발짝 다가왔다. 아힌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피곤했다.
눈 앞의 사내가 꿈인지 현실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한걸음 한걸음 사내가 다가올수록 점점 지쳐갔다. 진동하는 피 냄새에 이성이 자꾸만 흐려졌다.

아힌스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너는 어째서…….


“………형님.”
“…….”
“…형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감에 아힌스는 천천히 호수 같은 눈을 깜빡였다. 툭…. 눈물이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즈려물며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늦었잖아.”

어째서 말도 없이 가버렸는지, 왜 이런 피투성이 몸뚱이로 돌아왔는지 따위…. 한마디도 물을 수 없었다. 혀끝에 담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힌스는 흐느꼈다. 유엘의 등에는 뽑지도 않은 화살이 여기저기 박혀있었다. 피에 절은 몸은 바로 서지도 못할 만큼 처참했다. 그러나 아힌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다정한 한마디의 말조차도 건넬 수 없었다. 오만하게 안락의자에 누워 마음에도 없는 투정이나 부리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게 전부였다.


“…울지 마십시오. 당신이 울면 어떻게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당신을……”
“……….”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피에 절은 유엘이 무릎을 굽혔다. 상처가 벌어지며 투두둑…피가 넘쳐 흘렀다. 말리지도 못해 아힌스는 무심히 그를 관망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몽롱했다. 달빛 아래 한편의 희극이 공연되는 것 같았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형님. 당신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하신다면….”
“……….”
“…형님.”  

아힌스는 가만히 웃었다. 자신의 발끝에 키스하는 어리석은 동생을 보며 그는 다만 조용히 웃어버렸다.


“……가서, 피나 닦고 오너라. 내 카펫이 더러워지기 전에.”










<完>










◈ epilogue ◈



지저분하게 엉긴 갈색머리를 털어내며 세드릭 호먼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정말 불륜 따윈 질색이란 말입니다. 하지 말라는 걸 왜 꼭 하려는 겁니까? 청개구리도 아니고!”
“웃기는군. 불륜이 싫은 게 아니라 네가 차이는 게 싫은 거겠지.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하지 않아?”
“그게 그거죠! 나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불륜커플들 때문에 번번히 실연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거냐구요.”
“넌 배짱이 없잖아. 거기다 우유부단하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 싫어해.”
“아힌스 님은 여자가 아닙니다!”
“아아, 아힌스? 걘 너란 인간 자체가 관심 없는 거고. 아마 얼굴도 거의 기억 못할걸?”

비수를 꽂는 발언에 세드릭은 울상을 지었다. 원래도 무신경하고 잔인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지금 막 실연당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말해야겠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했다가는 붕대를 감고 있는 억센 손이 더 지독해질 것 같아 꾹 눌러 참았다. 여러모로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 따위 표정 짓지마 개시키야. 네가 그런다고 그 시커먼 속내를 내가 모를 것 같냐?”
“무슨 속내요!”
“뻔뻔한 새끼. 공작을 구한 충신 흉내를 내고 다녀봐야 네놈이 암살기도에 어느 정도 가담했다는 사실은 안 변해.”
“어쨌든 결정적일 때 도왔으면 된 거 아닙니까! 하여간에 당신이고 공작 전하고 간에 다 재수없어.”
“이 시발놈의새퀴가! 죽고 싶어 환장했냐? 엉?”

슈스켈은 소독약을 상처에 쏟아 부었다. 치지직…소리를 내며 자상에서 타들어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오자 세드릭은 소금세례를 받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미쳤어요! 날 정말 죽일 작정이십니까?”
“닥쳐, 이 이중인격의 가식적인 새끼야. 네놈이 아드리안 공작의 뒤를 치려 했다는 사실을 고자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라.”
“어쨌든 결국 안 했잖아요! 나라고 뭐 속이 편하기만 했는지 아십니까? 초반부터 데본 공의 제의를 거절했으면 제일 먼저 제가 제거됐을 거란 말입니다. 게다가 가문까지 운운하며 협박해왔고-.”
“웃기시네. 연적을 제거하고 싶었다는 말은 왜 빼먹냐? 솔직하게 말해라 자식아. 마지막까지 망설였다고-. 아무튼 넌 진짜 밥맛 없는 놈이야.”
“그러는 선배님은 뭐 좀 낫습니까? 어차피 방관했었잖아요. 오히려 전하가 죽기를 바랐던 거 아닌가요?”
“……망할.”


슈스켈은 들고 있던 붕대를 집어 던지며 가슴팍을 뒤져 연초를 꺼내 베어 물었다. 잔뜩 꼬인 얼굴이 꽤나 볼만했다. 세드릭은 이때다 싶어 슬금슬금 다가가며 이기죽거렸다. 사실 이런 식으로 상대를 약 올리는 건 그의 성격이 아니었으나 슈스켈의 옆에 있으며 안 좋은 것만 닮아가는 세드릭이었다.

“정말, 왜냐구요? 저야 정황상 그랬다치고 선배님은 뭡니까?”
“뭐긴, 뭐가 뭐야!”
“약제사가 그러던데요? 샤휀 성의 기분 나쁜 흉터 사내가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동굴 근처에 머물고 있던 거라고요. 응급처치가 조금만 늦었어도 전하의 생명이 위험했을 거라면서 천운이다 하던데…. 뭡니까, 대체? 약제사는 왜 보내셨어요. 애초에 전하를 살리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그 입 싼 약제사 놈…! 으득. 화살촉도 제대로 안 뽑아놓고 응급처치가 어째?!”
“아니, 화살촉 뽑는 거야 약제사가 아니라 의원이 할 일이죠. 그리고 애인부터 만나야 한다며 한사코 거부한 전하 잘못인 걸 왜 애먼 사람을 탓해요?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하세요. 왜 전하를 살리려고 했던 겁니까?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죽다 살아나더니 세드릭의 말발이 세졌다. 슈스켈은 이를 갈았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갑자기 기세가 등등해져서는……! 네놈이 공작을 도왔다고 갑자기 고속 승진이라도 할 것 같으냐? 썩어빠진 속물 같은 놈. 그래 봐야 넌 아힌스 아래야. 고로 내 아래인 셈이라고! 까불지 마 이 자식아.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위층 올라가서 아드리안 공작이나 끌어내와. 의원에게 치료나 받고 세레나데를 부르던가 말던가 해야 할 것 아냐? 출혈과다로 죽어서 아힌스 충격 받게 할 일 있어? …그 빌어먹을 공작 놈.”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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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드디어 완결입니다. 기대하셨던 것만큼 좋은 완결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쓰는 입장에서는 마냥 행복하네요. ;ㅁ;
blue blood는 제게 첫 작품이니만큼 의미도 깊고 참…쓰면서도 많이 괴로웠습니다. 머릿속으로 구상해 놓은 걸 글로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중간중간 흐름이 흔들릴 때마다, 엉망진창의 문맥을 볼 때마다 몇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던 것을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의 격려 덕에 결국 꾹꾹 눌러참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비록 부족한 글이지만…그리고 민망할 정도로 불성실한 연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 그리고 감상주신 분들 추천 주셨던 분들……. 정말로 고맙습니다. 제 부족한 글이 모든 분들께 조금이나마 행복을 드렸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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