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왝더독 4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文集 220512

10 0 2022-5-12 20:15
@라무 요게금지 나만아는표시있음 @라무




목 차




12. 모래집(2)

13. 전조

14. 종막

15. 커튼콜(1)





12. 모래집 (2)





현 대통령의 직속 기관에 소속된 송태갑이 여권도 아니고 야권의 대선 후보를 만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염정석은 송태갑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 염정석을 대하는 송태갑의 태도는 굉장히 저자세였다. 국정원 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분명,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여환은 낮은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별장 건물의 후면이었다. 이런 별장엔 반드시 출입문을 제외한 뒷문이 있기 마련이었다.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빠져나갈 통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개구멍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별장 출입문의 정 반대편에 도착한 여환이 주변을 둘러봤다. 어둠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눈동자는 머지않아 한곳에 멈췄다. 화단 안쪽이었다. 언뜻 화양목이 심어진 평범한 화단처럼 보였지만, 그 사이에 미처 흙으로 다 덮지 못한 문이 있었다.

여환의 긴 다리가 화단을 훌쩍 뛰어넘었다. 발로 흙을 헤치자 맨홀 크기만 한 정사각형의 나무문이 나타났다. 마치 다락방 출입문처럼 보이는 문엔 문고리가 없었다. 대신 굵은 황마 줄만 늘어져 있었다.

늘어진 줄을 붙잡은 여환이 손등에 한 바퀴 단단히 감아 돌렸다. 놓치지 않도록 제대로 쥔 후 단번에 힘을 주며 들어 올렸다. 뻑뻑하게 녹슨 문이 종잇장처럼 휙 들렸다. 문이 다 열리는 순간 퉁, 하고 경첩이 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여환은 본능적으로 동작을 멈추고 주변을 확인했다. 다행히 알아차린 사람은 없는 듯했다.

여환은 그제야 문 아래 드러난 계단을 바라봤다. 지하실로 이어지는 듯한 계단이었다. 캄캄한 어둠이 흡사 사람을 집어삼키는 아귀의 주둥이처럼 보였으나 계단 아래로 발을 내딛는 여환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지하실 특유의 습하고 쿰쿰한 곰팡내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계단은 예상대로 지하 창고까지 이어져 있었다. 자신의 손과 발도 식별하기 힘들 만큼 어두운 곳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핸드폰 플래시를 켤 수도 있었지만, 발각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여환은 결국 바닥에 널브러진 소품과 낡은 공구를 오로지 자신의 감각으로 피해 가며 신중하게 발을 움직였다.

눈이 어두움에 익숙해지고, 긴장이 풀린 다른 감각들도 서서히 열릴 즈음,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벽을 짚어 가며 이동하던 여환이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핏 계단의 형태가 보였다. 계단의 끝엔 어슴푸레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소리는 그 밖, 위쪽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시점에 대통령이 원장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걸세.”

여환은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말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소리가 느껴지는 거리감을 보아 지하실 통로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침내 여환의 머리 위에 나무판자 같은 것이 닿았다. 그 끝엔 지하실로 내려올 때 들어 올렸던 나무 문처럼 황마 줄이 달려 있었다. 판자를 머리와 손바닥으로 받쳐 든 여환이 아주 조심스럽게 밀어 올렸다.

“뭘 염려하시는지 잘 압니다. 그러나 이번엔 쉽지 않을 겁니다.”

고작 1cm 남짓 열린 틈으로 보다 분명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송태갑의 목소리였다. 제한적인 시야 때문에 그의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거실 쪽 소파에 앉아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때 여당 대표 비리 덮었던 거, 그거 저 아니었으면 아무도 못 했을 일입니다. 오히려 정 원장은 허수아비처럼 손 놓고 구경만 했던 인간이었죠.”

염정석의 언성이 높아짐과 동시에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고르지 못한 콧숨과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우음이 말을 대신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여환은 제 귀로 들은 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송태갑이 말한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국정원의 일로 인해 여당 대표의 비리가 묻혔던 사건이라면 생각나는 시점이 있긴 했다. 범죄 조직 화성파에 의해 만들어진 비코어 그룹의 몰락, 조직원 일망타진, 보스 박양일의 도주, 그리고 여환의 화성파 잠입 임무 종료. 그 모든 사건이 일어났던 시점이었다.

당시 여당 대표였던 자는 차기 대선 후보 중 전 대통령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본격 정계 입문 전 S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젊은 층에서도 호감도가 높은 인물이었고,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자라 온 성장 배경을 내세우며 보수 진영에서 역시 탄탄한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대선 후보가 결정되기 전부터 여론 조사 지지율의 50%를 가져가며 압도적인 대선 주자로 꼽혔었다.

그런 그에게도 위기의 순간은 있었는데, 바로 비자금 의혹이 불거졌던 때였다. 그가 전 대통령의 비자금 루트를 마련해 주는 고문 위원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며, 그 역시 같은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까지 엮여 있는 의혹의 수준에 비해 명확한 증거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고, 당사자였던 여당 대표 역시 터무니없는 마타도어에 불과하며 아직도 근거 없는 비방으로 정치를 하려는 야권 인사들에게 유감을 표한다는 입장을 전했었다.

비코어 그룹의 사건이 대한민국의 매스컴을 장악한 것이 그즈음이었다. 희대의 범죄 조직이 검거된 사건에 각종 루머와 음모론이 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화성파가 얼마나 끔찍한 조직이었는지, 그들의 장기 매매와 인신매매 수법이 무엇이었으며 그들이 들여온 마약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그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대한민국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정말 그들만의 힘이었는지 등등, 모든 매체가 자극적인 정보들을 여과 없이 쏟아 냈다.

국민들의 관심은 당연히 그쪽으로 쏠렸다. 현직 대통령과 유력한 대권 주자였던 여당 대표가 얽혔던 비자금에 대한 의혹은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여당 대표는 그렇게 의혹을 떨치고 마침내 대선 후보 1번이 되었다. 그가 바로 지금의 대통령 백근호였다.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것 같나? 한 번 국정원의 덕을 봤던 인간이야. 그런 인간이 두 번이라고 못 하겠어? 지금 국정원에 여당에 유리하도록 여론 조작 지시 내려진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염정석의 언성이 높아짐과 동시에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고르지 못한 콧숨과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우음이 말을 대신했다.

“의원님. 어차피 지금 대통령은 이빨 빠진 호랑이입니다. 기껏해야 여론 조작 정도밖에 못 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는 다음 대권까지 안정적인 지지율을 유지할 수도 없을 거고요.”

“선장이 있지 않나.”

염정석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단어에 나무판을 밀어 올리던 여환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염정석이 대체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송태갑이 말해 준 것이라면, 그는 왜 염정석에게 선장의 얘기를 했나. 여환은 천천히 내쉬는 송태갑의 한숨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열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선장은 저 없이 절대로 못 잡습니다.”

“못 잡더라도 이슈를 만들 순 있겠지. 박양일이 죽었을 때도 국정 수행 긍정 평가율이 올랐었다지, 아마?”

여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염정석의 말은 마치 박양일의 죽음에 대통령이 관여했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박양일을 잡는 것과 선장을 잡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대통령도 그걸 알기 때문에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겁니다. 선장의 실체를 잡지도 못했는데 섣불리 이용하려고 했다가 역풍을 맞을 수 있으니까요.”

송태갑의 말이 온여환에게 어떤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대통령이 박양일의 죽음에 관여했든 안 했든, 그럴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의원님. 대통령이 크게 실수한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게 뭔 줄 아십니까?”

“…….”

“하나는 그때 저를 원장 자리에 앉히지 않았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저를 국정원에서 내보내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통령을 위협할 수 있는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저인데 말이죠.”

여환은 송태갑이 왜 염정석을 만나고 있는 것인지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송태갑은 백근호의 비자금 의혹을 덮어 주고 자신이 원장 자리에 앉을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근호는 당선 후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정병주를 국정원장으로 임명했다. 정병주에게 밀려난 송태갑은 결국 국정원 제1차장 자리를 물려받는 것에만 그쳤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대의 범죄 조직을 소탕한 결과로 그 정도만 받아들기엔 송태갑이 가진 욕심의 그릇이 너무 컸다. 그래서 송태갑은 자신의 그릇을 채워 줄 사람을 찾게 된 것이다. 대통령의 약점을 쥐여 주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을.

“대통령의 비자금이 일신 그룹의 마루 미술관에서 흘러나온다는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현재 차명계좌의 실체와 실소유주를 찾느라 시간이 걸릴 뿐이지, 그것만 나오면 대통령과의 연결 고리를 찾는 건 금방입니다. 그때가 되면 대통령은 선장이 아니라 예수가 재림을 한다고 해도 못 빠져나갈 겁니다.”

송태갑은 비밀리에 대통령의 비자금 루트를 파헤치고 있다. 확실한 증거가 모이면 해당 정보는 야권의 대선 후보 염정석에게 넘어갈 것이고, 염정석은 현 대통령의 비리를 폭로하며 여당을 공격, 당선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장을 추적하는 일은 대통령에게 보여 주기 위한 쇼일 뿐이었다. 송태갑은 선장을 붙잡을 마음이 전혀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는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염정석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 그때 선장을 검거하고, 그 누구보다 명예롭게 국정원장에 임명되려고 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대화를 듣던 여환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정말 자네를 믿어도 되겠나.”

묻는 염정석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들어 있었다.

“의원님. 모든 정보는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선장의 정체에 대한 정보도, 대통령 비자금도, 모두 제 손에서 밝혀질 것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진 정보가 곧 의원님의 정보이기도 하고요. 저는 의원님이 이 나라를 이끄실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보필할 겁니다.”

모든 것은 정보를 가진 자들의 싸움이다. 누가 얼마나 더 많은 정보를 가졌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온여환은 지금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자가 송태갑일 거라는 사실에 반론의 여지를 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정보를 굴리고 있었다. 어쩌면 박양일의 편지에서 잘려 나간 내용도, 선장의 정체도, 그는 이미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았네. 그럼 나는 자네만 믿겠네.”

“예, 의원님.”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장의 불이 꺼지고, 출입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기척이 사라진 자리에 희미하게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마저도 잠잠해졌다. 멀리서 밤새만 구슬프게 울어 댔다.

여환은 컴컴한 지하실에서 잠시 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새삼스럽게 이 나라의 불행하고 암울한 미래 따위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당하고 깨끗한 선거는 동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고, 정치라는 게 들키지만 않으면 온갖 반칙이 다 허용되는 힘겨루기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막말로 여환은 이 나라의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 그게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 해도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 개판 같은 정치 싸움에 박하지의 이름이 끼어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송태갑이 추악한 승자가 되기 위해 은밀히 모아 온 정보가 무엇이든 여환은 이제 그걸 알아야겠다. 벌떡 몸을 일으킨 여환이 어두운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곧장 산에서 내려와 차로 돌아온 여환은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 화면을 켜는데 익숙한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박하지였다. 박하지에게서 전화가 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여환은 자연스레 며칠 전 받았던 그의 문자를 떠올렸다.



[상의할 게 있어. 연락해.]



그 뒤로 다른 문자는 더 없었다. 답장이 없는 여환에게 재촉 문자 한 번 하지 않았다. 온여환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걸 죽을 만큼 싫어하는 박하지였으니 당연했다. 그런 애가 이렇게 부재중 전화를 찍어 놓았으니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매일 박하지의 근황을 체크해서 보고하는 곰발에게선 별다른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여환은 생각을 멈추고 박하지의 번호 아래 붙어 있는 발신 아이콘을 눌렀다. 스피커폰으로 돌린 핸드폰을 거치대에 꽂아 두고 시동을 걸었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을 들으며 핸들을 돌렸다. 그의 차가 어둡고 외진 국도를 달려 나갔다. 전화는 쉽사리 연결되지 않았다. 두어 번 더 통화를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골이 나서 일부러 안 받는 건지, 잠이 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작게 혀를 찬 여환이 통화 종료를 눌렀다. 핸드폰 화면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는 약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공항까지 가는 거리를 생각하면 촉박한 시간이었다. 여환은 도로를 달리는 차의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다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박하지가 아니었다.

- 야이씨,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무슨 개똥 매너…….

“너 선장 통신 추적 계속하고 있지?”

몇 번의 신호음 끝에 튀어나온 목소리는 유성혜의 것이었다. 여환은 늦은 시각에 걸려 온 전화로 짜증이 잔뜩 난 유성혜의 말을 툭 자른 채 다짜고짜 물었다.

“그거 어디까지 알아냈어? 추적 가능해?”

- 아, 이 새끼가 진짜. 너도 나 쪼냐? 내가 지금 위에서 쪼이는 것도 모자라 너한테까지 쪼여야겠어? 그것도 이 시간…….

“어디까지 확인됐냐고.”

- 이게 왜 자꾸 말을 잘라!

“유성혜. 나 지금 급해.”

- …….

“어디까지 됐어?”

온여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지 유성혜가 잠시 말이 없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하고 대답을 유보한 유성혜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 저번에도 말했지만, 보안이 걸린 인터넷 전화인 데다가 IP 경유지만 수십 군데라서 추적은 불가능해. 이거 추적하려면 선장이랑 통신이 연결되어 있을 때 실시간으로 수십 군데가 넘는 IP 경유지 다 잡아내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하는데, 그건 지금 FBI에도 없을걸.

“선장이 어떤 방식으로 추적을 피하는 건지는 아는데, 정작 추적은 안 된다 이거야?”

- 야. 컴퓨터 코드는 풀이 과정이랑 정답이 딱 떨어지는 수학 문제 같은 게 아니야. 하나의 정답이 나와 있어도 그 정답으로 가는 길이 무궁무진하다고.

“그러니까, 방식은 아는데 추적은 어렵다 이거지?”

- 그렇다고! 몇 번을 말해, 진짜.

“그거면 됐어.”

- 뭐?

“일단 그것 좀 계속 파 줘.”

- 뭐, 뭐를? 뭘 계속 파?

“자세한 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 지금은 내가 박 대리 좀 보러 가 봐야 해서.”

- 뭐, 밧데리? 새벽에 전화해선 자꾸 뭔 소리 하는 거야, 진짜. 충전기 없냐?

“어. 나 지금 충전이 시급하니까 끊어.”

- 야, 온여……!

여환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차안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타이어가 도로를 내달리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별장에서 송태갑과 염정석의 대화 속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라 부유했다.

박양일과 대통령, 비자금과 일신 그룹, 국정원과 대선. 그 모든 것들이 어떤 점 하나를 중심에 두고 동심원을 이룬 채 회전하고 있었다. 바로 선장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조금도 묶이지 않아야 할 사람은 박하지였다. 한데 이상했다. 이 시점에서 동심원들의 중심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이 박하지였기 때문이다.

너는 왜 그곳에 있을까.

밀려들어 간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곳이 그의 자리였는지 잘 모르겠다. 여환은 혼란스러웠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박하지의 얼굴만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를 보러 가야겠다. 액셀을 꾹 눌러 밟는 여환의 발끝이 묵직했다.



* * *



이상한 꿈이었다.

옆으로 누운 몸을 바로 하려다가 벽에 부딪쳤는데, 신기하게도 벽이 따뜻했다. 에어컨을 튼다는 게 잠결에 난방을 틀었나. 그렇다기엔 목덜미에 내려앉는 공기는 여전히 기분 좋게 서늘했다. 하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적당한 온기가 싫지는 않았다.

가만히 등을 대고 있으려니 일정한 진동이 느껴졌다. 둥, 둥, 둥. 벽 너머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이 벽 너머에는 박하지가 혼자 사는 집의 거실밖에 없으니까. 아, 꿈이라면 가능한 일이겠구나. 잠결에 혼자서 수긍한 하지가 따뜻하고 진동이 느껴지는 이상한 벽에 더 깊숙이 몸을 붙이는 순간이었다. 귓가에 잔잔한 웃음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었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꿈결을 헤매던 하지의 정신이 서서히 현실과 맞닿기 시작했다. 그때 벽 안쪽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그의 허리를 감았다. 동시에 하지의 눈꺼풀이 번쩍 열렸다.

“안 자고 있는 거 아냐?”

꿈이라기엔 가라앉은 목소리가 너무 선명하고 간지러웠다. 온여환이었다.

놀란 하지가 몸을 벌떡 일으키려는데, 그의 허리에 감겨 있는 온여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는 그 힘에 밀려 다시 침대에 눕혀져야 했다. 등 뒤로 이상한 벽, 아니, 온여환의 가슴팍이 가깝게 밀착했다. 노크처럼 느껴졌던 심장 박동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그의 등줄기를 두드려 댔다.

“가만히 있어. 충전 중이니까.”

무슨 헛소리인가 싶은데, 목이 잠겨 목소리가 잘 안 나왔다. 하지는 아직 뻑뻑한 눈꺼풀을 무겁게 깜빡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실내가 밝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푸르스름한 것을 보니 해는 떴으나 아직 이른 아침 시간인 듯했다.

하지는 제 허리를 붙들고 있는 팔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여환의 팔이 늑골을 조이며 더 깊숙이 안아 왔다. 윽, 하고 눌린 신음을 내며 입술을 물자 살짝 힘을 풀긴 했으나 놓아줄 기미는 없었다.

눈 뜨자마자 온여환에게 붙잡혀 침대에 묶여 버린 박하지의 정신은 여전히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모호하게 오갔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몸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간신히 뒤척이며 몸을 비튼 하지가 겨우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비로소 온여환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의 눈꼬리가 나른하게 휘었다.

“잘 지냈어?”

한 달만이었다. 다시 만난 온여환의 얼굴은 왜인지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여려 보이기도 했다. 창문을 통해 내리비치는 햇살은 유난히 부옜고, 그 아래 누운 온여환의 얼굴은 잘 마른 솜꽃처럼 보송했다. 어쩌면 박하지의 눈꺼풀 아래 남아 있는 잠기운 한 겹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 보고 싶었지?”

“…….”

“흠. 잠이 덜 깼나. 우리 도련님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난 네가 성질부릴 때가 제일 섹시하던데.”

“…….”

“혹시 답장 안 했다고 화난 건…….”

하지의 손이 여환의 뺨에 닿았다. 혼자서 나불거리던 여환의 말이 멎었다. 하지는 개의치 않고 그의 뺨 위에 내려앉은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생각처럼 보송한 감촉은 아니었지만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살갗 아래의 온도가 천천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왜 안 했는데.”

하지는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물음이 제 입을 통해 나오는 게 조금 믿기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온여환도 꿈 같았으니, 제 목소리라고 현실처럼 느껴질 리 없었다. 평소보다 훨씬 낮게 잠긴 음성 때문에 더 그렇기도 했다.

“왜 내 문자 씹었냐고.”

여환의 얼굴이 전에 없이 당황스러워 보였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는 그의 대답을 다그치며 조금 더 과감하게 손을 움직였다. 잠에 취한 건지, 지난밤 마신 술이 덜 깬 건지, 행동을 하는 데에 생각이 따라오지 않았다. 그런 걸 의식할 수도 없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올라간 하지의 손끝이 그의 눈썹을 더듬었다. 잔털마저 가지런한 눈썹을 한 올 한 올 닦아 문지르다가, 건조해 보이는 눈가로 내려갔다. 피곤함이 묻어 있는 듯 눈꼬리를 오래도록 매만졌다. 여환의 속눈썹이 손톱 아래를 간질였다. 내리깐 눈이 하지를 향하는 게 느껴졌으나 하지는 일부러 그 시선을 피하며 손을 옮겼다.

“앞으로 내 연락 씹지 마.”

“…….”

“전화는 신호음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아. 무조건.”

얼굴선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매끈한 콧날과 깊은 인중 아래 뜨거운 숨을 뱉어 내며 달싹이는 입술까지 닿았다. 하지는 선명한 색을 띤 아랫입술을 홀린 듯이 꾹 눌렀다. 조용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만 보던 여환이 그제야 허, 하고 헛숨을 터뜨리며 웃어 버렸다.

“안 하던 짓 하는 거 보니까 잠 덜 깬 거 맞네.”

“대답이나 해. 알았냐고.”

“이것도 나쁘진 않아.”

“뭐라는…….”

나쁘진 않다면서 왜 제 입술을 조물락거리는 하지의 손가락을 콱 물어 버린 건진 모를 일이었다. 그리 세게 물진 않았지만, 순간 따끔한 감각에 하지가 손가락을 확 뺐다. 뒤로 물러나려는데 여환의 손이 뒤통수를 감싸 당겼다. 코끝에 풀냄새가 훅 끼쳤다.

“알았으니까 더 자.”

“…….”

“나도 좀 자게.”

여환의 말이 평소보다 느렸다. 조금 전까지 등을 타고 전해지던 그의 심장 박동이 이제는 하지의 귀 바로 밑에서 소리로 들려왔다. 그 시끄러운 존재감에 도무지 잘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졌다.

여환의 품에 얼굴을 묻은 하지의 눈이 다시 감겼다. 두 사람은 마치 아침이 온 적 없는 것처럼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 * *



하지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끔뻑거리던 하지가 옆자리를 돌아봤다. 깨끗했다. 누군가 누웠던 흔적조차 없이 말끔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꿈을 꿨나 싶었다. 하지가 아직 체온이 남은 듯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 일어났네.”

슬림핏의 검은색 폴라티를 입은 온여환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엔 물컵이 들려 있었다.

하지는 큰 걸음으로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여환을 귀신 보듯 올려다봤다. 꿈은 아니었네. 그따위 멍청한 말을 입 밖으로 뱉을 뻔했지만, 목이 칼칼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하지가 여환이 내미는 컵을 받아 들었다.

“안 더워?”

물 한 모금을 넘긴 후에야 목소리를 되찾은 하지가 온여환의 모습을 찬찬히 훑으며 물었다. 폴라티라니. 아무리 실내라지만, 낮 최고 기온이 31도를 웃도는 나라에서 적합한 차림은 아니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온여환의 대답은 그가 하루 평균 기온이 영하권인 나라에서 날아온 지 불과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고 보니 그는 비행을 마치고 곧장 박하지한테 온 것일 터였다. 잠들기 전 보았던 피곤한 얼굴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하지가 여환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봤다. 두어 시간의 수면으로 피로가 풀린 건지, 다행히 잠들기 전 보았던 얼굴보다는 덜 피곤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짓궂게 웃어 보이는 표정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도련님 옷은 좀 짧더라고.”

그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눈을 가늘게 뜬 하지가 물컵에 남은 물을 다 마시고 내려놓았다. 여환은 하지의 손에서 빈 컵을 가져가면서도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팔짱까지 낀 채 대놓고 하지의 얼굴을 감상했다.

하지는 자신의 꼴이 어떨지를 떠올렸다. 이제 막 베개에서 떨어진 머리는 형편없이 헝클어져 있을 테고, 지난밤의 음주로 얼굴 역시 잔뜩 부었을 것이다. 물론 하지가 그 사실을 자각하기 전부터 온여환은 그의 얼굴을 다 봤겠지만, 새삼스럽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손등으로 제 볼을 스윽스윽 문지른 하지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뭘 봐.”

톡 쏘아붙이는 말에 여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이제 잠 다 깼나 싶어서.”

그의 말이 잠들기 전의 상황을 반추하게 했다. 잠에 취했던 박하지가 온여환에게 벌였던 짓들 말이다. 얼굴을 쓰다듬고 더듬고 난리도 아니었다지, 아마.

뒤늦게 머릿속에서 그 장면들이 줄줄이 엮이어 재생되자 하지의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손으로 뒷덜미를 주무르며 헛기침을 하자 머리 위에서 픽 웃는 소리가 번졌다. 차마 고개를 들어 웃는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나와. 씻고 밥 먹자.”

여환이 밖으로 나가고 곧이어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는 괜히 더 뭉그적거리다가 민망한 소리나 들을까 싶어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

씻고 나오자 온여환이 식탁에 놓인 접시에 볶음밥을 옮겨 담고 있었다. 보통 음식은 사 와서 먹는 편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온여환이 직접 음식을 한 듯했다. 프라이팬에 볶인 밥을 옮기던 여환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하지를 향해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하지가 멈칫거리며 망설이자 뭐 못 먹을 거 탔을까 봐? 하고 농담 같지 않은 농담도 던졌다. 설마 못 먹을 걸 타진 않았겠지만, 과연 먹을 수 있는 맛일지 의심스럽긴 했다.

“앉아서 먹어. 적어도 사람이 못 먹을 걸 만들진 않으니까.”

여환이 싱크대로 돌아선 사이 자리에 앉은 하지가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었다. 여전히 께름칙한 의심을 거두진 못했지만, 맛이나 보자 싶어 포슬하게 쌓인 볶음밥의 모퉁이를 긁어 입에 넣었다. 걱정스레 찌푸렸던 눈썹이 천천히 펴졌다. 예상외로 나쁘지 않은 맛에 하지는 저도 모르게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하지의 맞은편에 앉던 여환이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운 식사 시간이었다. 대화를 이끄는 쪽은 주로 온여환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느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냐느니, 사다 준 옷은 어땠냐느니, 꼭 학교 다녀온 초등학생 아들 단속하듯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차피 곰발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고 받았을 거면서 입 아프게 뭐 하러 저런 걸 물어보나 싶었지만, 묻는 여환의 목소리가 편안해서 하지도 구태여 딴지를 걸진 않았다. 의미 없고 목적 없는 대화는 식사 시간 내내 이어졌다.

대화 속에 마 전무의 이름이 나온 것은 하지가 접시를 다 비웠을 때였다. 하지는 자신보다 먼저 식사를 끝냈던 여환에게 문자로 전했던 ‘상의할 것’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마 전무와의 식사 자리에서 나왔던 얘기들을 빠짐없이 전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박하지에게 쓸데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물어 대던 온여환은 왜인지 이번엔 묵묵히 입을 닫고 있었다.

그가 입을 뗀 것은 빈 접시를 모두 치우고 다시 식탁 앞에 앉았을 때였다.

“그러니까, 도련님은 구도완을 흔들기 위해 마자위를 이용하는 게 좋겠다 이거야?”

긴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한 여환의 말에 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도완이 흔들려야 내가 선장이랑 더 주도적으로 연락할 수 있으니까.”

선장과 하지의 사이에 구도완이 멀쩡히 버티고 있는 한은 하지가 선장에게 접근하려는 모든 시도가 수상해 보일 것이다. 그러니 구도완이 마자위에게 정신이 팔려 흔들리는 사이를 파고들어야 했다. 마침 구도완에게 마자위의 이름을 섞은 떡밥도 던져 놨으니 선장이든 구도완이든 조만간 입질이 올 터였다.

“사람이 많아지면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아진다는 거 알고 있지?”

“신경 써야 할 건 이미 충분히 많아. 하나 더 늘어난다고 티도 안 날 만큼.”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여환도 이내 하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박하지가 구도완과 전면전을 치르는 것보단 차라리 내부의 다른 적을 이용하는 게 훨씬 안전하리라는 생각도 물론 있었다.

“일단 알았어. 대신, 마자위가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먼저 알아보기 전까진 움직이지 마.”

“노력은 해 볼게.”

박하지가 출연 중인 이 연극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이벤트가 상호 합의하에 튀어나오는 공연 같은 게 아니었다. 온여환과 박하지가 아무리 치밀하게 대본을 짜도 언제 어디에서 돌발 상황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여환도 잘 알기 때문에 개운치 못한 하지의 대답에 무어라 더 말을 얹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 그럼 일 얘기는 끝?”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뜨리듯 여환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가뿐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커피 마실래? 물으며 찬장을 열었다.

“근데 집에 왜 이렇게 먹을 게 없어.”

휑한 찬장을 뒤적거리던 여환이 곰발에게 먹을 것 좀 채워 놓으라고 해야겠다며 구시렁댔다. 원하던 커피 원두를 찾을 수 없었는지 아쉬운 대로 홍차 티백을 꺼낸 여환이 포트에 물을 올렸다. 찻잔을 꺼내 티백을 넣고, 싱크대 앞에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여환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한국을 떠나던 시점부터 일상 같은 건 다신 누릴 수 없을 줄 알았다. 매일 같은 길로 출퇴근을 하고,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뻐큐와 가끔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고, 여유가 있는 날은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런 것들이 하나도 일상으로 느껴지지 않았었다. 이 삶이 제 것이 아니며, 박하지의 인생에 아주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질 시간일 뿐임을 알아서였다.

그럼에도 온여환이 만들어 내는 이런 순간들이, 함께 밥을 먹고 시답잖은 얘기를 늘어놓으며 차를 마시는 시간들이, 아주 조금은 일상을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금방 사라지고 말 거면서, 마치 영원처럼 감쪽같게.

“그 끄나풀은?”

하지가 일상과 동떨어진 대화 주제를 다시 끌어온 것은 그래서였다. 아늑하고 편안한 시간들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하지의 의도를 읽어 내지 못한 건지, 찻잔에 끓는 물을 붓던 여환이 응? 하고 되물었다.

“아버지 편지 조작했다던 그 끄나풀 말이야. 찾았냐고.”

“일 얘기 다 끝낸 거 아니었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셔.”

하지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여환이 다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는 금방 우러났다. 후, 하고 입바람을 분 여환은 검붉게 우러난 차를 천천히 한 모금 넘긴 뒤에야 답을 내놓았다.

“아직 찾는 중이야.”

“편지 원본은?”

“그것도 찾는 중.”

별 고민 없이 순순하게 튀어나오는 대답들은 하지의 궁금증을 하나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단순히 그가 답한 내용들의 불확실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뭐가 궁금한데.”

찻잔을 완전히 내려놓은 여환이 자신을 빤히 보는 하지와 눈을 맞췄다. 그는 자신을 관찰하고 파헤치려는 시선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래. 그런 것을 타고난 사내였다. 감추는 데에 능하고, 숨기는 것에 탁월한.

하지가 그와의 대화에서 가지는 불확실함은, 온여환이 언제든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그 불확신에서 오는 것이었다. 박하지의 불확신은 그 무엇으로도 해소시킬 수 없는 종류였다. 설사 온여환이 진실을 말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건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관계의 불안함이었다.

우리는 결국 깨어질 것이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이어진 적이 없었지만.

서글픔을 닮은 미래가 찻잔 속에서 출렁였다. 하지는 함께 요동치는 제 마음을 감추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화장실 가는 것까지 보고해야 돼?”

말끝에 필요 이상으로 날이 서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깎아 낼 마음은 없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내내 뒤통수로 여환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큰소리가 나도록 힘을 줘서 문을 닫았다.

어차피 온여환을 피하자고 들어온 화장실이라 딱히 볼일도 없었기에 괜히 손이나 씻었다. 평소보다 더 느리고 꼼꼼하게 거품을 씻어 내고는 내친김에 양치도 했다. 한 5분쯤 흘렀던 것 같다. 수건을 꺼내 젖은 손을 닦은 하지가 문고리를 돌렸다. 지루해진 온여환이 자리를 피해 사라져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잠시 했지만, 그는 역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장실 불을 탁, 끈 하지는 일부러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거실로 향했다. 하지가 소파에 앉음과 동시에 이번엔 여환이 식탁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그의 걸음이 소파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입매를 비튼 하지가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여환에게 그대로 손목이 붙잡혔다. 풀썩, 소파에 앉는 여환을 따라 그의 옆에 나란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뭐가.”

“뭐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냐고.”

다그쳐 묻는 여환은 그다지 화가 나 보이지도 않았고, 짜증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게 하지를 분하게 했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다가오는 쪽은 온여환이었고, 밀어내는 쪽은 박하지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가 타고 조바심이 나는 사람은 늘 박하지였던 것만 같다. 문득 그 사실이 너무나 억울해졌다.

“넌 내가 쉽지.”

박하지는 온여환에게 쉽게 읽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엔 너무 어려서 그러질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단 한 번도 전하지 않았지만, 온 얼굴과 행동으로 그를 좇았었다. 박하지는 온여환이 그때의 자신을 몰랐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모를 수도 없고, 몰라서도 안 됐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거였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티가 나고, 좋아도 좋은 티가 나고.”

“…….”

“난 네가 하는 말 하나하나 진심일까, 아닐까, 의심하고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

“넌 그냥 내가 쉽잖아.”

몇 년이 지났고,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온여환의 앞에선 예전의 박하지 그대로인지. 왜 아직도 온여환은 자신을 쉽게 주무르고, 박하지는 녹아 버린 초처럼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것인지.

“그렇게 말하면 좀 억울한데.”

그런 박하지의 억울함과 분함을 모르는 온여환이 도리어 자신의 억울함을 얘기했다. 하지의 눈가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뾰족해진 눈꼬리 위로 여환의 손이 닿았다. 달래듯 매만지는 손길을 피하려 고개를 돌리자 드러난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흠칫, 몸을 떤 하지가 재빨리 어깨를 빼내려고 했지만, 이마를 기대며 무게를 실어오는 온여환이 더 빨랐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막막한 건 난데 말이야.”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일까. 여환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웅웅 울렸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밀어 내는 공기가 쇄골을 타고 티셔츠 안까지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의 허리가 절로 바짝 섰다. 그런 와중에도 온여환이 자신을 잘 모르겠다는 소리만은 반갑게 들렸다. 제정신이 아니지 싶다.

“향수 뿌렸네?”

여환이 하지의 목덜미에 아예 코를 박았다. 그가 숨을 들이켜자 하지도 덩달아 가슴을 부풀렸다.

“베티베리오.”

“…….”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어?”

“……그냥 뿌린 거야.”

안 뿌리고 다니면 또 종류별로 사 올 테니까. 이어 붙인 말에 여환이 픽 웃었다. 부정은 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잘 어울리네. 진심이야.”

“…….”

“또.”

또?

할 말이 더 남았다는 건지, 아니면 하지에게 묻는 것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하지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또 물어보라고. 의심하고 생각하느라 머리 터지지 말고.”

여환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춰 왔다. 어깨가 가벼워진 하지는 도리어 가슴께가 무지근해졌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무엇을 물어야 할지 고를 수가 없었다.

오래전, 우리의 모든 것이 가짜였던 그 시절, 내게 해 줬던 말과 행동에 네 진심이라곤 하나도 없었는지. 그 오랜 세월 나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지. 나를 뒤흔드는 지금도 단지 내가 필요해서일 뿐인지. 너는 또 나를 이용하는 건지. 그러니까, 여전히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지.

명치에 맺혀 내려가지 않는 질문들을 고르고 골랐지만, 하지는 아무것도 골라내지 못했다. 대답을 듣기가 무서운 질문들이었다.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그래서 겨우 고른 질문은, 어떤 대답이 나오더라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은 종류의 질문이었다.

“나한테 정말, 하나도 숨기는 거 없냐고.”

하지가 여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그렇게 본다 한들 그의 속을 읽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하지는 알고 싶었다. 온여환이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지라도, 그 순간 진심을 가장하는 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그 눈이 얼마나 진심처럼 보일지.

“안 숨기고 싶어.”

그러나 말을 뱉는 온여환의 얼굴은 박하지가 상상하던 것과는 살짝 달랐다. 왜인지 그는 조금, 슬퍼 보였다.

“진심이야.”

깊게 울리는 여환의 목소리는 정말로 진심이 아닐 거라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하지는 저도 모르게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 버렸던 것 같다. 안 숨기고 싶어. 그 말속에 담긴 진짜 의미는 뒤로 밀어 둔 채, 이 정도면 됐다고.

“그럼 지금은 무슨 생각 중인데.”

하지의 물음에 여환은 조금 곤란한 듯 눈썹을 들썩였다.

“이것도 솔직히 얘기해?”

하지는 대답 없이 그의 눈만 빤히 들여다봤다. 어쩌면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환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는 그가 무어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두 뺨을 부여잡았다. 입술이 겹쳤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뭉개졌다. 더 이상의 말은 무의미했다. 그대로 여환을 밀어 넘어뜨린 하지가 탄탄한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소파 팔걸이에 등을 걸친 여환이 반쯤 앉듯이 누웠다. 긴 손가락이 하지의 허리선을 더듬으며 안았다. 다른 손은 그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사타구니 사이를 갉작이는 감각에 하지는 무릎 뒤가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하아, 살짝 떨어진 입술 새로 한낮의 마닐라처럼 무더운 숨이 샜다. 등을 떼며 고개를 밀어 올린 여환이 다시금 하지의 입술을 틀어막아 버리는 바람에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가 머릿속까지 휘돌았다. 그나마 이성적인 사고를 담당하던 세포들은 그 열기에 녹아 버렸고, 본능을 관장하는 것들은 온몸으로 퍼져 여환의 손이 닿을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하지의 손끝이 여환의 몸을 정신없이 탐했다. 상체에 슬림하게 달라붙어 있는 폴라티를 명치까지 끌어 올렸다. 손마디를 스치는 근육이 꼭 자석 같았다. 자꾸만 손을 끌어당겼다. 만지고 싶고, 더듬고 싶다. 그러나 조금만 움직여도 다시 미끄러져 내리는 옷이 답답한 듯, 하지가 여환의 폴라티의 목을 죽 늘어뜨렸다. 그 순간 맞물린 여환의 입술이 진동하듯 떨렸다. 하지의 입천장을 건드리던 혀가 쑤욱 빠져나가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간지러움에 고개를 들자 눈을 맞춰 오는 여환은 웃고 있었다.

“찢지는 마. 나 거리에서 스트립쇼 하는 거 보고 싶은 거 아니면.”

그것참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그 말을 속으로 삼킨 하지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여환이 하지의 옆구리 안쪽을 살짝 꼬집었다. 아읏, 허리가 비틀린 하지가 옆으로 무너졌다. 중심을 잃으며 소파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을 본 여환이 상체를 바로 세워 그를 안았다.

하지는 그 틈을 타 여환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옷을 끌어 올렸다. 여환의 머리가 단번에 쏙 빠져나왔다. 자고 일어나서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리 스타일이 쥐어뜯긴 것처럼 헝클어졌다. 눈앞까지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형형한 눈빛이 뚫고 나왔다. 저런 눈을 할 때마다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들풀에서 뛰어온 짐승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온여환은 알까. 아마도 모를 것이다. 저런 눈은 박하지만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가 다시 여환의 어깨를 밀었다. 상박을 타고 내려온 손바닥이 단단한 가슴을 넓게 쓸어 올렸다. 그러다 왼쪽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전에 보았던 커다란 흉터가 만져졌다. 여환의 근육이 딱딱하게 차오르는 게 느껴졌으나, 그가 하지의 손을 밀어 낼 것 같진 않았다.

하지는 내친김에 고개까지 기울여 그의 왼쪽 가슴 아래 난 흉터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흉터는 옆구리를 넘어 등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렇게 커다란 흉터가 예전에도 있었다고? 그걸 박하지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도 안 됐다.

“이건 어쩌다 다친 거야?”

하지가 흉터를 덧그리며 물었다. 왜인지 지금이라면 그에게서 거짓말이 아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여환은 평소처럼 쉽게 어물쩍 둘러대지는 못했다.

“……총상.”

“언제?”

“오래전에.”

“얼마나 오래전에?”

“……여유 있네, 도련님. 지금 그런 거 물을 정신이 다 있고.”

지금이 아니면 네가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렇지. 그 말은 차마 뱉지 못했다. 여환이 제 옆구리를 파고든 하지의 손을 잡아다 그의 가슴 위로 옮겨 왔기 때문이다. 손바닥 아래에서 요동치는 근육의 생명력이 다른 생각을 앗아 갔다. 어느새 여환의 손을 벗어나 스스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한 하지가 검지를 세워 그의 유두를 긁었다. 그린 듯한 복근을 따라 배꼽 부근까지 내려가자 여환의 눈꺼풀이 지그시 감겼다. 짙게 새는 숨이 하지의 얼굴까지 끼쳐 오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지는 새삼스러운 자각과 함께 여환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주욱,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여환이 감은 눈을 떴다. 어느새 브리프 안으로 사라진 하지의 손과 천천히 아래를 향하는 얼굴을 번갈아 보던 여환이 그의 턱을 올려 쥐었다.

“아까부터 자꾸 안 하던 짓을 하네.”

하지도 안다. 자신이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지금은 잠에 취하지도 않았고, 술을 마시지도 않았으니 핑곗거리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몇 시간 뒤에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박을지언정, 지금은 행위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싫어?”

하지는 여환의 골반께에 걸린 브리프를 허벅지까지 끌어 내렸다. 반쯤 일어선 성기가 퉁, 튀어 올랐다. 여환의 엄지가 하지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싫은 건 아니고, 이 작은 입에 얼마나 들어갈까.”

“…….”

“그게 걱정돼서.”

여환이 손끝으로 도톰한 입술을 살짝 뒤집으며 말했다.

“벌려 봐.”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하지가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여환이 그 사이로 기다란 중지를 쑤욱 집어넣었다. 하지의 혀가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감쌌다. 마디 안쪽을 타고 오르는 혀끝을 바라보던 여환도 혀를 내어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러다 손끝에 힘을 주어 하지의 혀 중앙을 꾹 내리눌렀다.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아래턱에 혀가 붙어 버린 하지가 아릿한 통증에 인상을 썼다. 발개진 눈으로 노려보자 여환이 혀 중앙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렇게 계속 혀 내리고 있어.”

천천히 떨어진 여환의 중지가 이번엔 하지의 아랫니 안쪽을 툭 건드렸다.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구부린 여환이 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낚듯 조심스레 아래로 당겼다. 하지는 그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내렸다. 허리까지 둥그렇게 말아 몸을 낮추자 코앞에 여환의 성기가 있었다. 턱을 당기던 여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하지는 망설임 없이 그의 성기를 머금었다.

“흐…….”

아직 다 발기한 것도 아닌데 입 안을 채우는 부피가 버거웠다. 하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온여환이 말한 대로 아래턱까지 혀를 내리고 천천히 삼켜 봤지만 빠듯하게 벌어지는 입꼬리가 아팠다. 코로 내뿜는 숨이 거칠었다. 숨을 고르듯 잠시 고개를 들어 올린 하지가 미끈거리는 귀두 끝을 핥았다. 눈앞에서 여환의 아랫배가 단단해지며 근육이 갈라지는 게 보였다. 목구멍 안쪽에서 울리는 낮은 신음도 들려왔다.

하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내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새 크기를 키운 것은 여전히 반밖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입 안을 꽉 채웠다. 어쩔 줄을 모르고 그대로 멈춰 버린 하지의 뒷머리에 큰손이 내려앉았다.

“괜찮아, 아직 더 들어가.”

들어가긴 뭐가 들어가. 제 좆의 크기는 생각도 안 하고 지껄이는 여환의 말에 하지가 눈을 치떴다. 발갛게 핏줄이 선 흰자위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눈이 마주치자 욕을 삼키듯 입술을 씹은 여환이 뒷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힘을 줬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얽혀 들었다. 그러곤 혀뿌리에 막혀 더 들어오지 못할 것 같던 좆이 목구멍 안까지 쑤욱 밀고 들어왔다.

“읍……!”

하지의 손이 위로 들린 여환의 골반을 꽉 붙들어 내리눌렀다. 고분고분 허리를 내려 주는가 싶던 여환은 하지가 방심하는 틈에 다시 한번 골반을 들어 올렸다. 숨을 내쉬기 위해 열렸던 목구멍에 굵은 기둥이 들어와 박혔다. 성기가 목젖을 건드리자 폐부가 확 조이며 울컥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하지는 그게 또 뭐라고 오기가 생겨 꾹 참았다. 그래도 한번 길을 내고 나니 혀를 어떻게 누르고 얼마나 힘을 빼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수월해졌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흐읍, 흐!”

하지는 여환의 움직임에 맞춰 힘겹게나마 고개를 움직여 보았다. 마찰열에 목이 타 버릴 것 같은 느낌과 달리 입 안은 넘치는 타액 때문에 점점 더 흥건해져 갔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여환의 좆 기둥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의 아래턱도 축축하게 젖어 갔다. 혀끝에서 미묘하게 비릿한 맛이 느껴졌을 때에야 하지는 이게 제 침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 거봐, 잘 삼키면서.”

여환이 손등으로 젖은 턱을 닦아 주며 말했다. 목구멍이 틀어막혀 숨을 헐떡거리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할 소리는 아니지 싶었다. 열이 들어찬 온여환의 눈을 마주하던 하지가 젖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아주 작정한 듯 고개를 내렸다. 하지의 코끝이 여환의 아랫배에 닿아 뭉개졌다.

순간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어깨를 파르르 떨던 하지가 숨이 달리는지 목구멍을 확 조였을 때였다. 여환이 그의 머리를 빠르게 들어 올렸다.

“하악!”

막혔던 숨이 터졌다. 귀두 끝에서 늘어진 애액이 하지의 턱을 타고 흘렀다. 여환의 허벅지에 대고 잔기침을 토해 내던 하지는 자신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온 팔이 상체를 들어 올리는 느낌에 겨우 눈을 떴다. 눈앞으로 여환의 얼굴이 들이닥쳤다. 거칠게 입술이 맞물리고 두툼한 혀가 밀고 들어왔다. 혀를 뽑아 나갈 듯 거칠게 행해지는 입맞춤에 하지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를 제 골반 위에 태운 여환은 그의 혀를 옭아매며 부드럽게 허리를 들썩였다. 그때마다 단단한 귀두가 바지와 속옷까지 뚫고 하지의 안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상상만으로 전신을 내달리는 짜릿한 감각에 하지의 허리가 떨렸다. 불거진 여환의 좆 위로 엉덩이를 비볐다. 의도가 분명한 몸짓에 여환이 하지의 둔부를 잡고 위로 치켜들었다. 동시에 고개가 틀어지며 입술이 떨어졌다. 그 탓에 하지는 엉덩이만 쳐든 듯한 자세로 여환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야 했다.

“그대로 있어.”

하지의 허벅지를 단단히 세워 고정시킨 여환이 끈으로 조여진 바지춤에 손을 댔다. 하지의 허리를 조이고 있던 끈이 헐거워지며 금세 바지가 내려갔다. 브리프까지 끌어 내린 여환이 꺼떡거리는 성기를 한 손에 감쌌다. 힘을 주고 있던 하지의 다리가 단숨에 주저앉았다.

“아아…….”

“벌써 이러면 어떡해.”

말투는 분명 나무라는 듯했지만 정작 목소리는 귀가 간지럽도록 다정했다. 귀두를 둥글게 문지르는 손길도 하지의 애를 태우기에 충분했다. 하지는 자신의 것을 동그랗게 말아 쥔 여환의 손아귀에 대고 허리를 들썩였다. 그때마다 움찔거리는 구멍에 여환의 성기가 스쳤다. 귓가에 가깝게 뱉어지는 여환의 숨이 점점 밭아졌다. 흥분감은 배가 되었다.

“나 없을 때 한 적 있어?”

여환이 한 손으론 여전히 하지의 좆을 문지르면서, 다른 손으론 그의 엉덩이 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미끄러져 내려온 손가락이 입구를 툭툭 두드렸다. 야릇한 긴장감이 더해졌다. 그러잖아도 앞에서 가해지는 자극에 감각이 치솟던 하지의 고개가 분별없이 흔들렸다. 정작 하지는 자신이 고개를 흔들고 있는지 끄덕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진짜? 저번엔 혼자 하고 있었잖아.”

“시끄러, 빨리, 아!”

사타구니 안쪽이 부르르 떨렸다. 기둥을 쓸어내리는 여환의 손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붙이고 있던 하지가 가까스로 고개를 떼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환의 벗은 가슴과 복근, 오목하게 들어간 배꼽 위까지 고인 정액이 보였다. 미처 벗지 못한 하지의 반팔 티셔츠의 앞가슴도 조금 축축해져 있었다. 하아, 겨우 한숨 돌리려는데 그대로 허리가 붙잡히며 순식간에 자세가 뒤집혔다.

“이렇게 빨리 싼 거 보니까 진짜 안 했나 봐?”

하지의 다리 사이에 자리한 여환이 근육을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을 훑어 올리며 씩 웃었다. 하지는 뒤늦게 쪽팔림이 밀려오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환의 다음 행동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됐기 때문이었다.

“또 그렇게 본다.”

“…….”

“사람 꼴리게.”

반들거리는 눈꼬리에 촉, 하고 짧게 입을 맞췄다가 떨어진 여환이 하지의 무릎을 한데 모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러곤 아직 허벅지에 걸쳐 있던 바지와 속옷을 손쉽게 벗겨 냈다. 옷가지가 날아가는 소리가 무력했다. 하지도 늘어진 옷자락처럼 온몸에 힘을 빼고 여환을 올려다봤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환이 제 어깨 위에 올라온 하지의 복사뼈에 입술을 붙였다가 혀로 핥았다. 아킬레스건 안쪽을 간질이는 혀끝이 한 번의 사정이 가져다준 허탈함을 몰아내고 뒤이어 다가올 자극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여환의 어깨에 올라간 다리를 떨어뜨린 하지가 못 참겠다는 듯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만하고 빨리 넣, 아읏!”

여환의 손가락이 아랫도리를 뚫고 들어왔다. 하지는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솔직하네.”

하지가 배출한 정액 덕분에 흠뻑 젖은 손가락이 수월하게 안을 휘저었다. 그걸 받아들이는 하지는 아래로 몰리는 힘을 빼느라 죽을 맛이었다. 안 그러고 싶어도 자꾸만 아래가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꼭 오물거리며 온여환의 손가락을 한 마디씩 집어삼키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장면을 온여환이 빤히 내려다보고 있기까지 하니까 더 미칠 것 같았다.

“여기는 더 솔직하고.”

“흐으!”

여환이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하지는 차라리 지금 안에 들어온 게 그의 좆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받아들여 아무렇게나 들쑤셔지고 싶었다. 그렇게 바란 하지가 여환이 손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으, 응, 거기, 아……!”

부족했다. 손가락이 닿는 자리보다 더 깊이, 더 가득 채워지길 원했다. 하지의 손바닥이 소파를 꽉 쥐었다. 그러곤 손에 힘을 주어 몸뚱이를 더 밀어 내렸다. 여환의 손가락이 더 깊게 안을 찔렀다. 회음부에 그의 손등뼈가 닿을 만큼. 여환의 허리를 감은 발끝이 공중에서 오므라들며 허벅지까지 떨려왔다.

“너 진짜.”

잇새에서 짓씹힌 목소리가 귓전에 때려 박힘과 동시였다. 하지의 안을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곧이어 여환의 단단한 귀두가 채 다물리지도 않은 입구 사이를 밀고 들어왔다.

“아아!”

겨우 앞대가리만 살짝 들어왔을 뿐인데 눈앞에 별이 튀었다. 한낮에 보는 별이라니. 현실감이 사라지다 못해 아예 녹아내렸다. 다른 의미로 아래도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밑구멍이 화끈거렸다. 손가락과 확연히 다른 굵기의 물건이 주름을 밀어 내며 차오르는데 어째서인지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하지는 깊은 물에 잠긴 사람처럼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참았다. 그의 아래가 닫히듯 오므라들었다.

윽, 하고 낮게 신음한 여환이 그의 둔부를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딴딴하게 굳은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풀어 줘도 소용이 없었다. 허리를 숙인 여환이 입으로 하지의 티셔츠를 들어 올리더니 빳빳하게 솟은 돌기를 입에 물었다.

“흐응! 아, 흐……!”

여환의 앞니가 동그란 유두를 긁어내렸다. 옆구리를 타고 차가운 물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절로 허리가 움직였다. 그 덕에 하지의 안을 채운 여환의 용적도 넓어져 갔다. 한쪽에 자극이 가해지면 다른 한쪽은 희미해지거나 의식이 되지 않아야 정상인데, 하지는 도리어 위아래 모두 선명해지기만 했다. 그의 좆에 불거진 핏줄도, 부드러우면서도 거칠한 혀끝의 표피도 그릴 수 있을 것처럼 또렷했다.

“아, 그만, 그, 흐읏!”

“뭘? 위, 아니면 아래?”

여환이 하지의 가슴에 붙인 입술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물었다. 하지가 숨을 헐떡거리며 답을 내놓지 못하자 다시 유두를 삼켰다. 이번엔 유륜까지 크게 물고는 그대로 빨아 당겼다. 여린 살점이 그의 입속으로 뜯겨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가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여환의 뒷머리를 감쌌다. 두피에 손톱을 박아 넣을 것처럼 손끝을 세웠다. 그제야 여환이 물고 있던 하지의 가슴을 놓아주었다. 젖꼭지에 몰려 있던 피가 갑자기 전신으로 번지는 기분에 하지의 힘이 탁 풀어졌다. 여환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래를 쳐올렸다.

“하으, 잠깐, 아아!”

무자비하게 찔러 넣는 좆에 장기가 한쪽으로 쏠려 처박히는 것만 같았다. 아랫배가 저릿거렸다. 내상을 입는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이 감각을 그런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최초의 통증과 그 뒤로 찾아오는 묵직한 울림, 뱃속을 들쑤시는 작열감, 허리를 간질이는 찌릿함, 머리통을 두드리는 심장 박동, 그리고 눈앞에서 번쩍거리며 점멸하는 온여환의 얼굴. 그 모든 것이 합쳐진 쾌감은 박하지가 그의 생애 느껴 본 감각 중 가장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이었다.

그건 온여환을 향한 그의 감정과도 닮아 있었다. 어쩌면 박하지가 온여환과의 섹스를 놓지 못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신조차 이해하기 힘든 감정을 섹스로 풀어내는 것은 차라리 쉬웠으니까. 그래서 섹스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분출하고 나면 사라질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나마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환의 허리를 옭아매며 매달리는 것도, 제 안을 들이찌르는 그에게 아래를 열어 주며 함께 흔들리는 것도,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갈구하듯 입을 맞추는 것도, 그저 이 순간이 만들어 낸 허상 같은 열기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거라고.

“아읏, 흐으……. 아!”

“하아, 박하지.”

“부르지, 마, 아아!”

“하지야.”

그럼에도 이따금씩 순간을 붙들고 싶어지는 때가 있었다. 온여환이 거짓을 담지 않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들. 아래를 난자하듯 찔러 대면서도 다정히 얼굴을 쓸어 주고, 버겁게 숨을 할딱이는 하지의 입술 사이로 숨을 불어 넣어 주며,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붙들어 불러 주는 그런 순간들. 그게 자꾸만 하지에게 미련을 남겼다.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시간을 새겨 넣고 있을 수도 있다고.

“빨리, 흐, 아!”

하지가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재촉했다. 하지의 얼굴 옆에 팔꿈치를 댄 여환이 그를 코앞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땀이 맺혀 젖어 버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이 무수히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어떤 말인지 다 알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도 해석할 수 없기도 했다. 마치 전혀 다른 행성에 사는 외계인들처럼, 언어로 뱉지 않는 여환의 말은 아마도 평생 하지의 의식 어딘가에서 외면당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그와 끝내 묻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운명인 거라고, 하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아, 하윽, 으……!”

몸통 전체를 뚫는 것만 같은 삽입이 점점 더 빨라졌다. 하지의 절정은 이미 배출된 지 오래였고, 그의 안에서 부풀어 오른 불기둥이 의식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여환은 계속해서 하지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 이름이 박하지의 심장 안까지 콱콱 박혀 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는 다 포기한 채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여환이 한 팔로 하지의 허리를 감아올렸다. 엉덩이가 들리며 아래가 더 깊이 맞붙었다. 살갗이 비벼지며 부어오른 엉덩이가 그의 골반 위에서 퍽퍽 짓뭉개졌다. 소파 끝까지 밀려난 하지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질 듯 젖혀졌다. 세상이 뒤집혔다. 드러난 목선을 핥으며 올라온 여환은 하지의 귓가에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진심이야.”

앞뒤 없는 말이었다. 뭐가 진심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한테 한 말 중 어떤 것이, 아직 하지 못한 말 중 무엇이 진심이라는 건지, 하지는 묻고 싶었지만 말이 안 나왔다. 온여환 역시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는 자지러질 듯한 신음을 내지르며 여환의 목을 안을 뿐이었다.

뒤집힌 세상은 여전히 따스하고 평화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얼마나 더 뒹굴었는지 모르겠다. 거실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다홍빛 노을에 살이 익어 갈 때까지 소파를 떠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더는 나올 것도 없는 하지가 부르르 몸을 떨며 기절하듯 눈을 감았을 때, 흐린 의식 너머로 부드럽게 몸을 닦아 주는 손길을 느꼈다.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몸 전체가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도 들었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하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른 밤이었다. 오늘 하루가 이렇게 다 지났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망연히 눈만 깜빡거리는데, 방 밖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여환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은 하지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채 사장이 뭘 찾았다고?”

방에서 잠들어 있는 박하지를 의식한 듯 통화를 이어 가는 여환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낮은 밤의 고요가 덜 닫힌 문틈으로 여환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전해 왔다. 덕분에 하지도 똑똑히 들었다. 그는 분명 채 사장이라고 했다. 아니, 최 사장이었나? 뭐가 됐든 미약하게 남아 있던 하지의 잠기를 깨우기에 충분한 문장이었다.

“……그거 말고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고?”

온여환의 입에서 나온 인물이 정말 박하지가 아는 그 채 사장일까. 만일 그렇다면 하지는 그가 왜 채 사장을 언급했는지 의문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 속에서 채 사장과 연락했던 시점을 더듬어 보았다. 확실히 최근은 아니었다. 일주일 전쯤인가. 채 사장에게 시간 날 때 연락 달라는 문자를 받기는 했었는데 정작 답장은 하지 못했다. AG코퍼레이션에 합류한 이후부터는 온여환과도 자주 연락하지 못할 만큼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기에 일부러 연락을 미뤄 두고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던 때라면, 그날이었다. 박하지가 채 사장에게 친모의 행방을 찾아 달라 부탁했던 날.

그날 박하지는 채 사장과 통화할 때 분명 온여환 몰래 가지고 들어왔던 대포 폰을 사용했었다. 혹시 온여환이 그것까지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설사 알았다 한들 박하지가 채 사장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들이 친모를 찾고 싶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게 왜 하필 지금인지 시기의 문제를 따져 볼 수는 있겠지만.

“……일단 알았어. 한국 들어가서 다시 연락할게.”

온여환이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하지는 어둠 속에서 다급하게 굴러가던 눈동자를 감추듯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바깥에서 새어 들어온 빛이 하지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눈꺼풀에 빛 그물이 어른거렸다. 하지는 자연스레 빛을 따라 움직이려는 눈동자를 애써 고정한 채 잠들어 있는 척했다.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온 여환의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는 호흡을 고르게 뱉는 것에 집중했다. 여환의 손끝이 뺨에 닿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가 솟을 뻔했지만, 자세를 뒤척이는 척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의 반측에 놀란 쪽은 오히려 온여환이었는지 뺨을 스치던 손끝이 금세 떨어져 나갔다. 그는 하지의 움직임이 다시 잠잠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의 이마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한결 더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나 이제 가 봐야 하는데.”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속삭이는 음성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의 눈에 비치는 박하지는 분명 잠들어 있었고,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게 당연한데도 더없이 애틋하고 다감한 목소리를 냈다. 박하지가 잠에서 깰까 봐 손끝에 힘을 싣지도 못하고 간지럽게 어루만지기만 하는 손길이나 주저함이 밴 한숨까지 모두 거짓으로 꾸며 낼 수 있다면, 박하지는 그가 지금이라도 연기자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의 얼굴에 머무르던 손길이 떨어졌다. 가 봐야 한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었는지 더 오래 시간을 끌지 못하는 듯했다. 얇은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려 준 여환이 걸음을 돌려 방 밖으로 나섰다. 거실에서 한동안 더 기척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혹시 몰라 잠시 더 눈을 감고 있던 하지는 온여환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눈꺼풀을 들었다. 여환이 거실 불을 끄고 나갔는지 실내가 좀 전보다 더 어두웠다.

몸을 일으킨 하지가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체중이 쏠리자 둔부 아래가 욱신거리고 쓰라렸다. 그래도 다행히 끈적하고 비릿한 배설액의 흔적은 없었다. 울긋불긋한 잇자국만 남은 맨몸을 잠시 훑어보던 하지가 발바닥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자 거실이 어둑했다. 일부러 불을 켜지 않은 하지는 자연스레 소파에 착석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온여환과 뒹굴었던 자리였지만, 그때의 난잡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왔다 갔던 시간들이 더욱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오늘 새벽에 와서 겨우 박하지의 얼굴만 보고 다시 사라진 온여환이 신기루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왜 마닐라에 왔었는지 묻지도 못했다. 혹시 정말로 박하지를 보기 위해서 온 것일까. 겨우 그 몇 시간을 함께 있겠다고?

모르겠다. 힘없이 고개를 저은 하지가 소파 위로 스르르 몸을 쓰러뜨렸다. 잠은 오지 않았으나 억지로 눈을 감았다. 온여환의 통화에서 엿들었던 채 사장의 얘기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고, 그가 자신에게 얘기해 주지 않는 한국에서의 일들이 무엇일지도 생각해 봐야 했으나,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는 제 얼굴 위로 스며들던 온기 가득한 손길과 집 안 곳곳에 희미하게 남은 그의 체취를 조금 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13. 전조 -





평화흥신소 채 사장에게 올겨울은 유난히 혹한기다. 그의 팔자 주름이 나날이 깊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아뜨, 아이씨, 뜨거버라!”

시장 골목 앞에서 산 호떡을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냅다 집어 던진 채 사장이 설탕물이 질질 흘러내린 턱을 황급히 닦았다. 먼지 낀 책상 유리에 얼굴을 비춰 보자 수염 자국이 남은 턱이 조금 벌게진 게 보였다. 화상을 입은 정도는 아니었으나 호떡 하나 먹으려다가 봉변을 당한 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되는 일이 없으려니 아주 가지가지 손대는 족족 짜증 나는 일만 생기는구나 싶었다.

종이봉투 위에 널브러진 호떡을 마저 먹고 싶은 마음마저 사라졌다. 채 사장의 눈길이 낡은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전화기에 가닿았다.

“하, 어떻게 출근하고 전화 한 번이 안 울리냐.”

그에게 올겨울이 유난히 혹독한 이유는 손님이 뚝 끊긴 흥신소 사정 때문이었다. 손님이 줄기 시작한 건 작년 가을부터였다. 책임을 전가하자는 건 아니지만, 박하지가 흥신소를 관두고 떠난 시점과 일치했다. 아무래도 유일하게 하나 있던 직원이 빠지다 보니 평소처럼 다양한 의뢰를 받기가 힘들어진 건 사실이었다. 사람을 안 구해 본 것도 아니었다. 하나같이 성에 차지 않아서 문제였지.

결국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일만 받으며 운영하다 보니 차츰 손님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거의 흥신소를 처음 차렸을 때와 비슷한 운영 수준이었다. 생각해 보면 박하지가 있을 때는 확실히 매출도 많이 올랐었고, 여기저기 소개로 일이 이어져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 녀석이 워낙 일을 꼼꼼하게 잘했으니까. 채 사장에겐 복덩이나 다름없긴 했다. 관둔다 그럴 때 월급 올려 줄 테니까 좀 더 있어 달라고 사정해 볼걸. 아쉬움에 쯥, 하고 입맛을 다시던 채 사장이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은 사람 찾아 달라 그럴 때는 언제고 왜 연락이 없어.”

박하지가 좀 틱틱거리는 구석은 있어도 앞뒤 다르게 구는 녀석은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채 사장이 핸드폰 통화 목록을 뒤졌다. 이전에 박하지와 연락했던 번호를 찾긴 했는데, 통화를 누르기까지는 살짝 망설여졌다. 이거 국제전환데. 그런 생각을 하며 턱밑을 긁적이던 채 사장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왕 전화 건 김에 이제 그만 놀고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좀 꼬셔 봐야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마침 그때 흥신소 출입문 위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지만 않았다면 분명 통화를 누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 어서 오세요.”

간만의 손님이었다. 채 사장은 곧장 핸드폰을 내려놓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고객님 일상을 평화롭게 지켜드릴 평화흥신소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말을 맺는 둥 마는 둥 끝을 흐린 채 사장이 출입문으로 들어선 남자를 찬찬히 훑었다. 문짝만 한 키의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시커멨는데, 눈동자만 오묘한 호박색을 띠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목구멍이 쫄렸다. 무섭다기보다는 사람 기를 눌리게 하는 외모였다. 존나게 잘생겼네. 그런 생각을 하는 채 사장의 앞으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채 사장은 왜인지 몇 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채성균 사장님?”

남자가 채 사장의 책상 맞은편에 놓인 초록색 접이식 의자를 빼 앉으며 물었다. 긴 코트 자락을 걷으며 다리를 꼬는 폼이 재수 없게 멋있었다. 그 순간 채 사장은 깨달았다. 이 새끼 흥신소에 의뢰하러 온 새끼 아니다. 채 사장의 경험상 저렇게 잘나고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가진 새끼들은 직접 흥신소를 찾아올 일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만약 용건이 있다면, 그건 십중팔구 위험한 일일 거라고, 채 사장 머릿속의 경고등이 사이렌을 울려 대기 시작했다. 채 사장이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예, 그렇긴 한데, 저기 무슨 일로…….”

“박하지 알죠?”

남자의 입에서 하지의 이름이 나오자 채 사장의 경고등은 사이렌이 아니라 아예 신호탄으로 바뀌었다. 그는 박하지와 일하며 이와 비슷한 일을 종종 겪었었다. 분기 행사처럼 찾아와 박하지가 어떤 사람의 아들인지를 알려 주며 조심하라고 일러 주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여기에 그 깡패 새끼 아들이 일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냐며 비뚤어진 정의감을 표출하러 오는 이들도 있었다. 남의 인생에 뭐 그리 관심들이 많은지.

물론 채 사장도 오지랖이 넓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는 동료가 관할 구역 업소에서 뽀찌 받는 걸 알고도 눈감아 주려다가 덩달아 휩쓸려 퇴직하게 됐지.

그렇지만, 아무리 그런 채 사장이라 해도 세상 사람들이 박하지에게 보이는 관심은 조금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채 사장이 경찰 일을 하며 범죄자 부모를 둔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자주 봐 왔던 터라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채 사장은 성실하게 잘살아 보겠다는 애 인생을 자꾸 들쑤시는 인간들이 꼴 보기 싫었다. 그게 다였다.

“……어어, 박, 누구요?”

그래서 이번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모른 척을 했다. 박하지 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한 깡패라며, 따위의 소리를 하던 사람에게 무슨 소리냐, 걔네 아버지 과천에서 블루베리 농장 하신다, 하고 받아치던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채 사장의 말을 들은 남자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했다. 픽, 비웃음이 걸리는 입꼬리가 살벌했다.

“보기보다 의리 있으시네. 낯선 사람이라고 모르는 척도 해 주시고.”

이 남자는 확실히 호기심에 차서 박하지를 찾아왔던 인간들하고는 달랐다. 순전히 채 사장의 감이었지만,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판단하는 감 하나는 꽤 괜찮았다. 박하지를 직원으로 들인 것도 그가 꽤 괜찮은 직원이 될 거라는 감이 왔기 때문이었듯이, 이 남자에겐 어설픈 변명이 안 통하겠다는 감이 왔다. 확실히.

“근데 내가 지금 좀 급하거든.”

피곤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관자놀이를 갉작이던 남자가 코트를 여민 단추를 풀었다. 그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더니 꺼낸 것은 총이었다.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뭔 시발 저딴 라이터를 들고 다녀, 라고 잠깐 생각할 뻔했던 채 사장은 그것이 책상 위에 놓이며 만들어 내는 묵직한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경찰에게 지급되는 소총과는 다른 베레타 권총이었지만, 소리만으로도 저게 진짜 총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채 사장이 다시 한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뒤쪽 벽까지 굴러가 부딪쳤다.

“앉아요.”

남자는 권총을 쥐지 않은 다른 손을 까딱이며 손짓했다. 너 같으면 앉겠냐. 그 소리가 입술 안쪽에서 맴돌았으나 차마 말할 순 없었다. 채 사장은 목숨이 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총을 가진 사람 앞에선 납작 엎드리는 게 사는 길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우는 목소리를 낸 건 본능이었다.

“왜, 왜 이러세요, 손님. 아니, 선생님. 대체 누구, 누구신데요, 예?”

“채 사장님 의리 있는 거 알았으니까, 이제 대답 똑바로 합시다. 작년 11월까지 평화흥신소에서 2년 근무하고 퇴직한 박하지 대리.”

침이 꼴깍 넘어갔다.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걔 친모 왜 찾았어요?”

“저, 저 진짜 저 아무것도 몰라요! 저 그냥 흥신소 하는 사람이에요, 선생님.”

“채 사장님. 제가 지금 당신이 모르는 거 물었어요?”

“…….”

“내가 박하지 어딨는지를 알려 달라 그랬어, 아니면 친모가 누구인지를 알려 달라 그랬어? 박하지 친모 왜 찾았는지, 그 이유만 말하라고.”

듣고 보니 그랬다. 박하지를 위협하거나 그를 해할 사람이라면 박하지의 위치 정보를 묻거나, 그 친모의 인적 사항 같은 걸 물어야 했다. 하지만 남자는 박하지의 친모를 왜 찾았는지만 묻고 있었다. 채 사장으로선 과연 그게 총까지 들이밀면서 물어야 하는 정보인지 이해가 안 됐다.

“당신이 박하지 뒤를 캔 거야, 아니면 누구한테 사주받고 캔 거야.”

머뭇거리는 채 사장을 남자가 재촉했다. 시야 끝에 걸리는 남자의 손가락이 자꾸만 총열을 쓰다듬었다. 채 사장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일단 눈앞의 남자가 박하지를 해할 사람인가 아닌가부터 판단했다. 저 좆같은 총을 보면 누구한테나 해로운 사람일 게 분명했지만, 왜인지 그 대상이 박하지는 아닐 것 같았다.

예사롭지 않은 인간인 건 분명했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 자체가 대답을 해 줘도 박하지에게 큰 해가 되진 않을 것 같은 질문들이었다. 제 앞에 들이밀어진 총 때문에 쫄아서가 아니라, 채 사장 나름의 논리적인 사고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채성균 씨.”

무섭게 이름을 부르고 지랄이야. 채 사장은 하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뗐다.

“박 대, 박 대리가 찾아 달라고…… 했어요.”

“……박하지가 직접?”

채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짧게 물었다. 왜?

“그건 저도 모르죠.”

“…….”

“진짜예요! 그냥 갑자기 전화 와서 찾아 달라고 한 거예요. 걔가 지금 한국이 아니라…….”

이 얘기는 괜히 했다. 아차, 싶어진 채 사장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진짜 박하지의 행방에는 관심이 없는 건가? 그럼 진짜 뭐 하러 이런 걸 묻는 거지? 박 대리는 어쩌다 이런 새끼랑 인생이 엮이게 된 걸까. 걔 팔자도 진짜 기구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를 살피는데, 남자가 별안간 시선을 올렸다. 눈이 마주쳐서 식겁했다.

“찾긴 찾았어요?”

“뭐, 뭘요?”

“박하지 친모요.”

“못 찾았어요. 아니, 찾아는 봤는데, 못 찾았다고 봐야…….”

채 사장의 대답이 오락가락하자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으면 그냥 재수 없게 잘생긴 얼굴인데, 인상을 쓰니까 뭔 표범이 따로 없었다. 채 사장이 다시 우는 소리를 냈다.

“아니, 제가 뭘 숨기려는 게 아니라요. 찾아보긴 했는데 뭐가 좀 이상해서 나도 박 대리한테 확인 좀 하려고 연락했었다고요. 근데 연락이 안 돼서 통화도 못 해 봤단 말이에요.”

“뭐가 이상했는데요?”

“…….”

“제가 급하다고 얘기했을 텐데요.”

뭐가 그렇게 급하다는 건지 남자는 잠시 고민할 틈도 주지 않았다. 흥신소는 고객과의 신뢰가 생명인데. 채 사장은 제 안의 신념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앞의 위협적인 남자를 향해 다시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박 대리 출생신고가 됐던 구청 기록이랑 다 뒤져서 찾긴 찾았는데, 그 사람이 한국에 들어온 게 박 대리를 낳기 5개월 전이었더라고요.”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그 전에 임신해서 한국에 들어왔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 있긴 하죠. 박 대리 아버지가 연변 여자 교도소까지 들어가서 씨를 뿌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요. 뭐, 대단한 사람 같긴 하던데…….”

실없이 덧붙인 채 사장의 말에 남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여자 교도소요? 하고 되물을 뿐이었다. 머쓱해진 채 사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기죄로 1년 살다가 나오자마자 한국으로 밀항한 거였어요. 그래서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이게 정보가 어디서 꼬였나 싶어 가지고 박 대리한테 다시 확인을 하려고…….”

“그게 백영란 씨가 확실해요?”

“예, 백영……. 어?”

무심코 대답하던 채 사장이 말을 멈추고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백영란 하지의 친모라 기록된 조선족 여자의 이름이었다. 남자는 그 이름까지 다 알면서 채 사장에게 확인을 하고 있는 거였다. 이쯤 되니 이 남자가 대체 누구인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저기 근데, 대체 누구십니까? 우리 박 대리랑 무슨 관계……. 아니, 걔한테 무슨 일 있습니까?”

연달아 쏟아지는 질문을 깡그리 무시하고 일어선 남자가 책상 위에 엎어 놓았던 총을 들었다. 채 사장의 어깨가 자연히 뒤로 밀렸다. 남자는 그런 채 사장을 보지도 않고 총을 다시 코트 안쪽으로 감춰 넣었다.

“협조 감사했습니다.”

“……협조요? 제가요?”

채 사장의 어리둥절한 눈빛을 무시한 남자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설마 이러고 가는 건가? 이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채 사장이 뭐라 한마디 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남자가 다시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오늘 제가 여기 온 거랑 백영란 씨 얘기, 박하지한테 전하지 마세요.”

채 사장은 자신이 뭐라고 하려고 했는지도 잊고 눈만 끔뻑거렸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얘기하지 말라고.”

남자는 살 떨리게 마지막 경고까지 날린 후에야 출입문을 나섰다. 문 위에 달린 종소리가 유난히 애처롭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채 사장은 문득 박하지의 안위가 염려되기 시작했다.

야, 박 대리야. 너 뭐 하고 다니냐.

그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온여환은 흥신소 밖으로 나오자마자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며 거치된 핸드폰에 유성혜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가 연결된 것은 신호음이 몇 번 걸리지도 않아서였다. 여환은 유성혜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전에 입을 뗐다.

“지금 채성균 사장 만나고 나오는 길이야. 그 사람은 백영란이 박하지의 친모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 뭐? 무슨 소리야, 기록상으로 백영란이 친모가 아닐 수가 없는데.

“백영란은 박하지의 출생신고 5개월 전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어. 그전엔 연변 여자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 ……교도소? 잠깐, 거기까진 확인 못 해 봤는데.

박하지의 출생일과 백영란의 행적까지는 미처 비교하지 못했었는지 유성혜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섞였다.

“확인 좀 해 줘. 나 지금 네 오피스텔로 가고 있으니까 만나서 얘기하자.”

여환은 알았다는 유성혜의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유성혜에게 이렇게까지 많은 부탁을 하게 된 건 미안했지만, 지금의 여환은 염치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박하지의 기록을 조사하던 유성혜에게 채성균이 그의 친모를 찾아다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박하지가 정말로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지금은 모르더라도 언젠가는, 어쩌면 빠른 시일 내 알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박하지는 눈치가 빨랐다. 머리도 비상했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한국에 있는 채성균에게 친모를 찾아 달라 부탁한 것이 고향을 떠나 갑작스럽게 차오른 그리움 때문일 리는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리고 그가 찾으려는 게 무엇이든 온여환은 박하지보다 먼저 알아내야 한다. 반드시.

쭉 뻗은 직선 도로에 연이어 파란불이 들어왔다. 여환은 망설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 * *



“그, 확인해 보니까 그 사람 말이 맞더라고.”

온여환이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 유성혜는 이미 백영란의 과거 이력을 모두 확인한 후였다.

“한국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사기죄로 연변 여자 교도소에 수감됐었던 게 맞아.”

자신이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정보를 흥신소 사장님이 알아냈다는 사실에 유성혜는 자존심이 조금 상한 듯 보이기도 했다. 이럴 때는 괜히 들쑤시지 않고 그냥 두는 편이 낫다는 걸 알기에 여환은 별말 없이 백영란에 대한 자료만 훑었다.

백영란은 박하지가 태어나기 불과 몇 주 전에 박양일과 혼인신고를 올렸다. 당시 백영란은 한국에서 불법체류 중이었으나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라는 점이 예외로 적용되어 강제 출국 절차를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백영란은 박하지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감추었다. 정황상 가출이었다. 이상한 점은 그 이후로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채 사장은 물론이고 유성혜도 박하지 출산 이후 백영란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이 정도면 가출이 아니라 실종이라고 봐야 했다.

“혹시 백영란이 정말 박하지 친모가 아닐 확률도 있어?”

“그건 모르는 일이지.”

여환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인 유성혜가 책상 위에 올려 둔 커피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넘긴 커피는 이미 다 식어 아이스커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백영란이 박하지 친모가 맞아. 서류에서 잘못된 내용은 확실히 없어. 백영란의 수감 시기랑 출산 시기가 겹치는 게 문제인데, 사실 교도소에서 임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거든. 그 당시 연변 교도소는 지금 우리나라 교도소랑 환경도 많이 달랐고.”

“수감 중 박하지를 임신했을 확률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는 거야?”

“단정 지을 순 없다는 거지. 어쩌면 수감 중에 낳고, 한국에서 출생신고가 된 걸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친모가 아닌 사람을 친모로 등록했을 수도 있고?”

“……뭐, 그 가능성도 없진 않겠다.”

당장 떠오르는 시나리오만 해도 너무 많았다. 단편적으로 남은 기록 속에서 과거의 시간을 모두 추론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끊어진 연결 고리를 이어 줄 무수한 가능성보다는 확실한 증거 하나가 필요할 때였다.

“회사에 박하지 유전자 정보 등록되어 있지?”

국정원에 소속된 요원들은 국정원 데이터베이스에 유전자 정보가 필수 등록된다. 온여환도, 유성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박하지는 모르고 있겠지만, 그의 유전자 정보 역시 국정원에 등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건 왜?”

“범죄자, 실종자 DNA 데이터베이스에서 박하지랑 일치하는 유전자 있는지 좀 확인해 줘.”

유성혜는 여환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온여환은 백영란의 기록이 이 정도로 미비한 이유가 실종 아니면 사망, 혹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거라고 추측하는 거였다. 그리고 뭐가 됐든 백영란과 박하지의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선 둘의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였고. 다만, 유성혜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딱 하나였다.

“야. 근데, 내가 이걸 대체 왜 하는 거니?”

“…….”

“너는 지금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임금도 없이 초과근무 시키면서 아무 설명도 안 해 주고 있잖아, 이 노 양심 새끼야.”

평소 같으면 지지 않고 받아쳤을 온여환이 웬일로 조용했다. 확실히 제가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긴 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번엔 어물쩍 넘어가 주지 않을 듯한 눈치인 유성혜를 알아차렸거나.

“처음엔 박하지한테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그러나 했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박하지의 친모 행방을 찾는 거랑 우리 일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단 말이야.”

“나도 몰라.”

온여환 입에서 모른다는 소리가 다 나오고. 차라리 입을 닫고 있을 때가 나았지 싶다. 답지 않은 그의 대답을 들은 유성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하느님이 알아, 부처님이 알아?”

“넌 뭐 믿는데.”

“나 무신론자야.”

이 세상에 믿을 건 나 하나뿐이지. 당당하게 덧붙이는 말에 여환은 픽 웃어 버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 자신을 온전히 믿는다는 유성혜가 그 누구보다 부러웠다.

“멋지네, 유성혜교.”

“온여환. 장난치지 말고. 나 이거 너한테 쉬운 일 해 준 거 아니야.”

유성혜가 여환의 손에 들린 자료를 가리키며 말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건 여환도 알고 있다. 백도어로 국정원 데이터 시스템에 접근하는 것도, 외부에서 자료를 빼내는 일도, 아무리 유성혜라 할지라도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유성혜는 그 일을 겨우 온여환 이름 석 자 보고 해 준 것이었다.

그 성의를 생각하면 온여환은 유성혜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낱낱이 고해야 마땅했지만, 아무리 말을 골라도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말은 온여환조차 이 일의 모든 정황이 파악되지 않아 해 줄 말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유성혜가 들어도 괜찮을 말들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장난치자고 한 말 아니야. 나도 이 일에 이 자료들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확인하려는 거야.”

“그러니까 그 확인을 왜 너 혼자 하냐고. 우리 회사 사람들은 다 병풍이냐?”

“국정원을 믿을 수가 없어.”

이 정도만 얘기해도 눈치가 빠른 유성혜는 온여환이 얼마나 위험한 일에 발을 담그고 있는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유성혜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국정원 소속 요원이 국정원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유성혜는 알고 있다. 신분을 감춘 채 언더 커버 활동을 하던 블랙 요원 중 몇몇이 회사를 믿지 못하고 지시 사항을 거부하다가 변절하는 사례를 본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외부에서 첩보 활동을 벌이다가 복귀하는 요원들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사상 검증을 거치고 요원 교육을 다시 받는 것이 바로 그러한 사례 때문에 생겨난 절차였다. 극비리에 진행된 화성파 잠입 작전을 수행하고 복귀한 온여환도 당연히 거친 절차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발언이 더 위험한 것이었다. 그가 외부의 환경에 물들어 변절한 요원이 아니라, 국정원 내부에서 그 뿌리를 의심하는 요원이라는 것이.

“신이 없다는 소리를 들은 신자 같은 얼굴이네.”

심란한 소리를 잘도 지껄인 온여환은 낯빛이 어두워진 유성혜를 보며 옅게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톡 쏘아붙인 유성혜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나 무신론자라고.”

“그래. 그러니까 넌 이쪽으론 눈도 돌리지 말고 그냥 너 하나만 믿어.”

“너 혹시 이거 다 송 차장님이랑 관련된 거야?”

“…….”

“아, 이 새끼 대답 없는 거 봐. 이 타이밍에 대답이 없으면 그건 긍정이잖아!”

유성혜가 짧은 단발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폭발하는 화산처럼 위로 치솟은 머리가 딱 유성혜의 심정 그대로였다. 혹시나 해서 던져 본 건데 그게 제대로 짚은 격이었으니 유성혜로서는 봉변이 따로 없었다.

온여환과 송 차장이 어떤 관계인지 가장 잘 아는 건 당연히 당사자인 두 사람이겠지만, 그 다음으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유성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유성혜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온여환이 4년 동안의 잠입을 마치고 복귀했을 때, 그가 화성파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삭제하고 온여환의 행적을 새로이 조작한 사람이 바로 유성혜였다.

그 과정에서 온여환의 공로가 오롯이 송태갑의 몫이 되는 것도 모두 지켜봤다. 송태갑이 차장 자리에 올랐을 때 차마 축하드린다는 인사를 건네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이름 없는 희생으로 만들어진 자리인지 알기 때문에.

그런데 온여환이 기어이 그런 송태갑을 겨냥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유성혜의 마음속에서 제 공로가 사라져도 가만히 있던 온여환이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설득과 납득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추측 그만해.”

유성혜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온여환이 그녀의 생각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다 네 생각이야. 넌 나한테 들은 게 없어. 그러니까 설사 일이 잘못돼도 넌 아무것도 몰랐다고만 하면 돼.”

“아는데 어떻게 모른다고 하냐!”

“뭘 아는데. 나 너한테 아무것도 얘기 안 했다니까?”

그게 사실이긴 했다. 온여환이 송태갑을 상대로 위험한 짓을 벌이고 있다는 추측만 할 뿐,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유성혜가 머리를 쥐어뜯던 손을 툭 떨궜다. 고작 몇 분 만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사람처럼 진이 빠진 몰골이었다.

“너 내가 이거 안 도와준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어쩔 수 없이 혼자 해야겠지. 힘들겠지만.”

“…….”

“그러다 걸리면, 그것도 뭐 어쩔 수 없고.”

“……아, 재수 없어. 아, 너무 싫어, 이 새끼 어떡해?”

이거 해 준다고 하면 진짜 개호구인 건데. 발 못 빼고 인생 좆 되는 지름길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유성혜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생겨 먹은 제 성격을 탓하며, 유성혜가 온여환의 손에 들린 자료를 휙 낚아챘다.

“바로는 안 돼. DNA 데이터베이스 뚫는 게 네 말처럼 뚝딱 되는 게 아니라고.”

“괜찮아. 급한 건 따로 있거든.”

“또 뭐!”

하나만 해 주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묻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성혜를 향해 여환은 웃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마치 이번 게 진짜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라서.

“국정원 보안 시스템을 다운시킬 거야.”

유성혜의 턱이 떨어졌다. 이 새끼 진짜 돌았나? 그 소리가 입안에서만 맴돌 때, 여환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아니라 선장이.”

“그게 대체 무슨……!”

“선장의 통신 방식을 카피해서 국정원 시스템에 들어갈 거야.”

국정원 보안 시스템을 아무 흔적 없이 뚫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유성혜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반드시 침입자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그 침입자가 국정원에서 가장 잡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쏠릴 터였다. 온여환이 유성혜에게 선장의 통신 방식에 대해 여러 번 확인했던 것도 바로 그 점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선장을 흉내 낼 거라고. 최대한 시끄럽고 요란하게.”

확실한 용의자를 만들 수 있고, 동시에 확실히 추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찾아야 할 게 있거든.”

더 이상의 확인은 필요 없었다. 여환에겐 확신이 있었다. 그가 찾는 물건은 분명히 송 차장에게 있다.



* * *



[사장님. 전화 안 받으셔서 문자 남겨요. 혹시 저번에 제가 부탁드렸던 거 어떻게 됐나 해서요. 그거 아니더라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시간 괜찮으실 때 전화 좀 주세요. 혹시 이 번호로 연락 안 되면 000-0000-0000 이쪽으로라도요. 꼭이요.]



채 사장의 번호로 평소 들고 다니는 핸드폰 연락처까지 더해 문자를 전송한 하지가 핸드폰을 다시 보스턴백 속에 감춰 넣었다. 온여환이 떠나기 전 들었던 통화 내용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분명 채 사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채 사장이든 최 사장이든, 이 세상에 채 씨가 채성균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온여환의 주위에 또 다른 채 사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분명히 열어 두고 있지만, 일단 확인은 해 봐야겠다 싶었다. 찜찜한 걸 남겨 둘 필요는 없었으니까.

가방 안쪽의 지퍼까지 꼼꼼히 잠근 하지가 가방을 침대 밑으로 밀어 넣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우웅, 낮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순간 채 사장의 답장인가 싶었지만, 진동은 침대 밑 가방이 아니라 바로 옆에 세워진 협탁 위에서 울리고 있었다. 협탁 위 핸드폰 화면엔 딸 전무의 번호가 떠 있었다. 왜 또 전화질이야. 탐탁잖은 눈으로 화면을 내려다보던 하지가 끊기지 않고 울리는 진동에 하는 수 없이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 굿모닝.

아침부터 버터를 처드셨나. 마자위가 쓸데없이 혀를 굴렸다. 선장과 구도완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그렇지, 이 인간도 진짜 만만치 않게 싫은 인간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 출근 전에 좀 만났으면 해서.

“회사에서 보시죠.”

- 아이, 우리 회사 밖에서 할 얘기 있는 거 알잖아.

“…….”

- 아직 결정 안 내린 거 알아. 재촉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결정에 도움이 될 푸시를 살짝 해 볼까 하고.

박하지에게 내어 줄 지분이라도 더 늘려 주려는 건가. 일단 들어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요.”

- 주소 보내 줄게.

전화를 끊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약속 장소가 적힌 문자가 들어왔다. 마닐라 시내에 있는 한 호텔 레스토랑의 주소였다. 아침부터 딸 전무와 얼굴을 마주하며 음식을 먹어야 한다니. 오늘도 아침은 거르게 되겠구나. 벌써부터 입맛이 떨어진 하지가 쯧, 혀를 차며 욕실로 향했다.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일을 하러 나갈 시간이었다.



* * *



레스토랑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도착한 하지가 움찔 걸음을 멈췄다. 이런 그림을 예상하고 나온 것은 아닌 터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뭡니까, 삼자대면이에요?”

왜 이 자리에 딸 전무와 구도완이 함께 나와 있는지, 하지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런 하지의 심정이 전해졌는지 구도완 역시 하지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앉지. 나도 박 대리가 오는 건 여기 와서 들은 얘기니까.”

“그래,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

딸 전무가 동그란 테이블의 비어 있는 자리 하나를 가리켰다. 둘 중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면 차라리 서 있겠다는 심정이었는데, 테이블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앉게 배치된 자리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가 자리에 앉자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두 사람의 앞엔 이미 음식이 나와 있었으나, 하지는 이 분위기에서 도저히 뭔가를 넘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마실 거라면 괜찮을 듯하여 시원한 아메리카노만 주문했다.

“이쯤이면 등장인물은 다 도착한 것 같은데, 이제 용건 좀 꺼내지 그래. 무슨 일로 아침부터 사람을 불러냈는지.”

구도완이 테이블 위에 포크를 탁 내려놓았다. 접시에 담긴 볼로네제 라자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벌써 다 먹었어? 아, 난 아직인데.”

“마 전무.”

“뭐가 이렇게 급해. 한국인들 빨리빨리 문화 그거 고쳐야 돼.”

이것만 먹고, 이것만. 푸실리 파스타 면을 포크로 콕콕 찍은 딸 전무가 같잖게 윙크를 날렸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팽팽히 늘어진 게 보였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소모적인 힘겨루기를 했는데,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딸 전무가 더 우위에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체할 듯한 분위기 속에서 꿋꿋이 음식을 해치우는 여유로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치 눈앞의 반려견에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치는 주인처럼 보였다.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포크를 조용히 움켜쥐는 구도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서는 게 보였다. 하지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는 게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피곤한 아침이 될 듯했다.

“아유, 너무 무섭게 보니까 음식이 안 넘어가네.”

다행히 딸 전무는 구도완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음식이 안 넘어간다는 사람치곤 접시를 반이나 비웠다. 그사이 박하지가 주문한 커피도 테이블에 놓였다. 하지는 타는 목을 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박 대리한테 대충 들었다고 하니 다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딸 전무가 박하지를 힐긋거리며 샐쭉 웃었다. 마치 우리 사이의 비밀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듯 은밀하게 눈썹을 찡긋거리는 게 꼴사나웠다. 하지는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런 박하지의 모습에 픽 웃은 딸 전무가 다시 구도완을 바라봤다.

“우리 보스가 이 사업을 좀 크게 키우고 싶어 해서 말이야. 우리 쪽에서 들어간 투자금도 꽤 많은데, 이 정도 규모로는 좀 부족한 것 같다 이거지.”

“투자금은 원금에 수익 분배까지 더해서 정리하기로 얘기 끝난 걸로 아는데.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지 않고도 그쪽에 돌려줄 투자금은 충분히 벌어들일 수 있고.”

“이거 왜 이래, 원금 돌려주는 거야 당연히 기본이지. 우리 말은 그 원금에 플러스 되는 수익을 좀 높여 보자 이거야. 필리핀 언론사도 좀 이용하고, 그거 뭐지, 투자 설명회인가? 그런 거 열어서 사람들도 좀 모으고. 이왕 벌이는 사업 제대로 벌여야지. 수익금 많아지면 구 대표, 아니, 제이크 대표도 싫을 거 없잖아?”

“언론까지 이용하면 그 리스크 누가 감당할 건데?”

“이쪽에 나랑 잘 아는 홍콩 자본 언론사 몇 개 있어. 뉴스 내보내는 건 일도 아니지.”

“뉴스가 나가면 계획이 노출될 확률도 높아진다고. 그 뒷감당을 누가 할 거냐는 거야. 그리고 여기서 수익률을 더 높이면 현금화도 더 힘들어진다는 거 몰라?”

“왜들 이렇게 답답하게 일을 해? 사업이야 걸리기 전에 빠르게 치고 빠지면 되는 거고, 현금화가 문제면 문제가 안 되는 방법을 찾으면 되지. 페이퍼 몇 개 더 만들어서 지분 구조 복잡하게 꼬고, 세탁기 몇 대 더 섭외해서 여러 대 동시에 돌리면 그거 아무도 못 찾아.”

점점 열이 오르며 핑퐁처럼 오가는 대화 속에서 하지는 조용히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딸 전무의 말은 사업의 규모를 확 키워 단기간에 수익을 뽑아내고, 이때 거액의 수익금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도록 페이퍼 컴퍼니와 자금 세탁 루트를 다양화해서 추적을 피하자는 소리였다. 말로는 간단했지만, 이게 듣는 것만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조 단위의 돈을 세탁하고 분산시킬 루트가 몇 개나 더 필요한 거였다. 구도완이 준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가 도와줄게.”

딸 전무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앞에 늘어놓은 건 사실 다 개소리였고, 이게 그의 진짜 속마음이었다.

“홍콩에 페이퍼 세우고, 중국에서 우리가 뚫어 놓은 세탁기 같이 돌리면 돼. 우리가 이런 거 도와주려고 들어온 거잖아, 구 대표.”

“야, 마 전무.”

딸 전무의 웃는 낯짝이 무색하게도 테이블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생글생글 잘만 웃으며 빈정거리던 딸 전무도 구도완의 ‘야.’ 한마디에는 기분이 상한 듯 미묘하게 표정을 굳혔다.

“남의 집에 왔으면 신발 자국 남기지 말고 얌전히 있다가 나가.”

구도완이 별안간 손을 뻗어 딸 전무의 접시 위에 놓여 있던 포크를 집어 던졌다. 은색의 포크가 딸 전무와 박하지 사이로 휙 날아갔다. 레스토랑의 상아색 대리석 바닥을 찍으며 떨어진 포크 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다른 테이블의 시선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밥 한술이라도 더 뜨고 나가고 싶으면 주인 행세하지 말고 적당히 하고 찌그러지라고.”

멀리서 새 포크를 들고 다가오는 직원을 본 딸 전무가 손바닥을 보이며 직원을 제지했다.

“우리가 진짜 적당히만 하면 후회할 텐데. 이쯤이면 됐다고 지금이라도 당장 발 빼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구 대표?”

꼭 치킨 게임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먼저 대가리를 돌리는 쪽이 지는 게임. 그러나 아무도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둘 다 대가리가 터져 버리는 게임. 대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박하지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벨이 울렸다. 승자가 나오지 못할 눈치 게임을 이어 가던 두 남자가 박하지를 바라봤다. 타이밍 한번 죽였다.

박하지는 자신의 재킷 안쪽에서 시끄럽게 벨을 울려 대는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항상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 둔다. 딱 하나, 선장에게 받은 핸드폰만 빼고. 이건 선장의 전화였다.

“시끄러운데 좀 받지?”

정신이 사나워진 딸 전무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는 그제야 핸드폰을 꺼냈다. 그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내진 핸드폰을 본 구도완의 표정이 굳었다. 본래 이 핸드폰의 주인이 바로 그였으니 당연히 알아봤을 것이다. 핸드폰 옆면 버튼을 눌러 벨 소리를 죽인 하지가 몸을 일으켰다.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받아.”

하지를 멈춰 세운 것은 구도완이었다. 전화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핸드폰을 노려보는 구도완은 금방이라도 하지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낚아챌 것만 같은 눈이었다. 하지가 핸드폰을 꼭 쥐었다.

“여기서 받으라고요?”

“그래.”

하지는 여전히 울려 대는 핸드폰과 구도완, 그리고 딸 전무의 얼굴을 차례로 일별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바라본 곳은 역시나 구도완이었다. 그는 진심이냐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진짜 여기서 받을까요?”

사정을 모르는 딸 전무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며 몸을 기울였다. 딸 전무는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이었다. 구도완과 박하지가 전화 한 통 가지고 쓸데없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저 전화가 대체 뭔 전화이기에 이 난리인지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딸 전무에게 선장의 존재를 들켜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아무리 구도완이라도 잘 알 것이었다.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던 구도완이 하지의 질문에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마 나가서 받고 오라는 뜻일 터였다. 하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왜, 무슨 전화인데? 난 불편할 거 없으니까 여기서 받아도 되는데!”

레스토랑을 나서는 하지의 뒤에 대고 딸 전무가 고개를 쭉 빼며 소리쳤다. 하지는 대꾸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출입구를 나와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난간을 짚고 고개를 쭉 뺀 하지는 위아래 층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

- 마 전무 말대로 진행해.

다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변조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음성보다 하지를 더 당황스럽게 한 것은 선장의 말이었다. 선장은 마치 조금 전까지 박하지와 마자위, 그리고 구도완이 나누었던 대화를 다 들은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는 괜히 한 번 더 비상계단의 위아래를 살폈다.

“혹시 도청하십니까?”

하지의 말에 선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낮은 전자음으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기괴했다.

- 그런 게 왜 필요하지? 주어진 정보 속에서 사람들 마음을 읽고 미래를 내다보는 게 내가 하는 일인데.

선장은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이런 식의 얘기를 하지는 다른 곳에서도 접해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박양일이 남긴 편지였다. 박양일은 마지막 편지에서 선장이야말로 이 세상을 아우를 수 있는 선장이라며 그를 향한 예찬론을 펼쳤었다. 마치 사이비 종교 신도의 간증 같았던 편지 내용을 다시 떠올린 하지는 금세 속이 거북해졌다.

어쩌면 박양일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선장에게 세뇌를 당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선장은 박양일의 아들인 박하지에게도 그 짓거리를 시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하지는 구역질을 누르듯 꾹 참아 냈다.

“미래를 내다보신다니 점쟁이가 부업이신 줄은 몰랐네요. 그럼 지금 하신 말씀을 구 대표가 썩 달가워하지 않을 것도 잘 아시겠어요.”

- 구 대표 일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신경 쓸 거 없어. 구 대표도 구 대표대로 해 줄 일들이 많거든.

“무슨 일이요?”

사업 홍보, 인력 관리, 투자자 모집 등등 선장이 구 대표가 해 줄 일이라고 언급한 내용들은 하나같이 다 잡역에 속하는 일들이었다. 그 일들을 잡역으로 분류하고 남부 세력들에 나눠 준 사람은 다름 아닌 구도완이었다.

“구 대표한테 그 일들을 맡길 거라고요?”

- 그쪽 일도 책임자가 필요하긴 하니까. 그리고 앞으로 주요 사업에 관한 얘기는 박 대리한테 직접 연락할 거야. 그러니까 박 대리도 나한테 보고하는 내용들 굳이 구 대표한테 이중으로 보고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의미십니까?”

- 의미? 혹시 내 말이 어려웠나?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선장은 괜한 말꼬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하지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했다. 하지가 선장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듯이 말이다.

“구 대표를 사업 진행에서 배제하시려는 이유가 뭔지 묻는 겁니다.”

구도완이 아무리 허울뿐인 대표라 할지라도 그는 현재 AG코퍼레이션의 대표직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요 사업에 관한 지시를 내리거나 보고를 올릴 때 대표를 건너뛰라는 것은 그를 뒷전으로 미뤄 두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 배제라니. 난 단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자는 거야. 이번 사업에서 박 대리가 맡은 일이 많아진 게 사실이잖아. 마 전무 말처럼 사업을 확장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그러려면 구 대표보단 박 대리가 마 전무를 상대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

선장은 구도완과 마자위 사이의 힘겨루기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 힘겨루기 속에서 누구의 손을 잡을지도 이미 결정한 듯했다. 당연히 마자위였다. 마자위가 끌어올 수 있는 자본력과 조직력이 이번 사업에서 큰 역할을 해 주리라는 것을 선장도 알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구도완이 마자위를 경계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 줄 꼭두각시가 필요했던 선장에게 구도완의 불안과 경계심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걸리적거렸다. 선장은 그래서 마자위를 컨트롤 할 사람으로 박하지를 택한 것이다.

- 왜, 대리 달고 마 전무 상대하려니까 버거워? 그런 거라면 말해. 지분율 더 높이고 이사로 올려 줄 수 있으니까.

박하지가 바라던 대로 되고 있었다. 구도완이 마자위를 경계하느라 사업적인 면을 신경 쓰지 못할 때, 그가 하던 일을 박하지가 도맡아 입지를 넓히는 것. 그게 애초 하지의 계획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기쁜 마음이 들진 않았다. 분명 박하지의 계획이었지만, 결국 그 계획을 실현시킨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선장의 선택임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운하지가 않았다. 쉽게 말해, 기분이 좆같았다. 한 인간이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 군림하듯 선택을 남발하고, 누군가를 쳐 내고 또 취하는 꼴을 바로 그 안에서 경험하고 있으려니 아무리 그게 자신의 의도였다 할지라도 차마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아마 그의 아버지도 이렇게 버려졌을 것이다. 하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평생을 살다가 버려졌던 세상에 뛰어들어 와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구 대표도…….”

- 응?

“구 대표도 죽습니까?”

박양일은 선장에게 버려진 후 죽었다. 그 이유가 선장에게 박양일이 더 이상 필요 없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박양일이 선장을 배신하려고 했기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박양일이 선장에게 버려졌던 첫 번째 꼭두각시이자 첫 번째 희생자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럼 이제 구도완이 두 번째가 될까?

- 박 대리, 사람한테 좀 약한 편인가? 내가 구도완을 죽일까 봐 걱정돼?

“…….”

- 하하, 내가 구도완을 왜 죽이겠어. 구도완이 지금껏 날 위해 애써 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도 저한테 밀렸다는 걸 알면 구 대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 가만히 있지 않으면, 뭐?

순간 선장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여전히 둔탁한 기계음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운이 스며 있었다. 박하지는 왜인지 처음으로 선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 본 것 같다고 느꼈다.

- 박 대리. 이 세상에 내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 그 사람들이 내 존재를 묻어 두는 이유가 뭐일 것 같아?

“…….”

- 함부로 꺼냈다간 본인도 다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러니 아무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건 엄청난 자기 확신이었다. 박하지는 인간성이 바닥나 버린 사람의 자기 확신은 타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 아,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 같네. 이만 자리로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어? 하던 얘기들은 마저 마무리 지어야지.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하지는 화면이 꺼질 때까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선장의 말을 곱씹었다.

함부로 꺼냈다간 본인이 다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 말이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미래에 보내는 선장의 경고 같았다. 그때, 하지의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움찔, 어깨를 떤 하지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선장과의 통화가 끝난 핸드폰을 집어넣고, 평소에 들고 다니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엔 딸 전무의 번호가 떠 있었다. 그새를 못 기다려 주고 전화질이었다. 인상을 쓴 하지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이 인간의 전화 음성을 듣고 싶진 않았다. 그는 허벅지 위를 간질이는 진동을 무시하며 레스토랑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직원의 안내 없이 테이블로 향하던 하지가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어째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하지가 혼자 앉아 있는 딸 전무를 향해 물었다.

“구 대표는요?”

“아, 뭐야, 왜 이제 와?”

여태 하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던 딸 전무가 귀에 댄 핸드폰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하지의 주머니 안쪽에서 징하게 울려 대던 진동도 그제야 끊겼다.

“구 대표 어디 갔냐고요.”

“방금 나갔어.”

“나갔다고요?”

“무슨 전화 받고 나가는 것 같던데.”

전화라. 하지는 조금 전의 통화에서 구 대표는 자신이 해결하겠다던 선장의 말을 떠올렸다. 참으로 즉각적인 해결이었다. 선장의 호출에 쪼르르 달려 나간 구 대표도 구 대표였고.

“구 대표 아마 다시 안 돌아올 겁니다.”

하지가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뭐야, 파투 난 거야?”

딸 전무가 인상을 팍 썼다.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누구 따라 화투판이라도 들락거렸었나. 하여간 이상한 데서 고급 한국어를 구사하는 홍콩인이었다.

“파투라고 볼 순 없죠. 어차피 구 대표 없는 자리에서 따로 할 얘기 있는 거 아니었어요?”

하지가 제 앞에 놓인 유리컵을 들었다. 그새 컵 속의 얼음이 많이 녹아 있었다.

“할 거야?”

목적어가 불분명한 딸 전무의 질문을 박하지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는 입 안에 들어온 작은 얼음조각을 혀로 굴려 한쪽 볼로 밀어 넣었다. 이가 시릴 만큼 차가웠으나 덕분에 머리는 한결 맑아졌다.

“새로 만들 페이퍼 컴퍼니들은 공동 관리라는 명목으로 가지고 갈 생각인 거죠? 그러다 구 대표 몰래 실소유주 다 마 전무님 앞으로 돌려놓으려는 걸 테고.”

“우리 박 대리 머리 잘 돌아가네.”

딸 전무가 짧게 박수를 쳤다. 그 오버스러운 반응에도 하지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여기까지의 얘기는 얼마 전 온여환에게 다 전해 들었던 정보였다. 박하지가 딸 전무에게 진짜로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이다음 대목이었다.

“페이퍼 컴퍼니 실소유주를 돌리려면 중간에서 서류 작업 해 줄 선수가 필요할 텐데. 그건 섭외됐어요?”

“당연히 섭외했지.”

“데니스 장?”

딸 전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번엔 퍽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데니스 장도 아느냐 묻는 그에게 하지는 불과 얼마 전 마사지 룸에서 두꺼운 자료를 통해 속성으로 알게 된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온여환이 딸 전무가 페이퍼 컴퍼니 서류로 장난질을 치려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데니스 장이었다. 어찌 보면 AG코퍼레이션의 역사를 같이한 개국공신 중 한 명인데, 딸 전무가 그런 사람을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런 일은 내부자를 많이 섭외하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그가 박하지를 자신 쪽에 두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사람이 하겠대요? 그쪽도 꽤 위험해질 텐데.”

“날 뭐로 보는 거야. 위험한 만큼 당연히 페이를 올려 줬지.”

“말을 흘릴 가능성은요? 그래도 이 회사가 세워질 때부터 거래했던 사람인데, 마 전무님보단 구 대표랑 더 각별할 거 아니에요.”

정확히는 구 대표가 아니라 선장이라고 해야겠지만.

“의외로 순진하네, 박 대리. 이쪽 일하는 사람들은 사람한테 정 안 줘. 돈한테 정 주지.”

“……그럼 내가 할 일은 데니스 장이 만져 놓은 서류가 구 대표 눈에 띄지 않도록 중간에서 적당히 바꿔치기하면서 이중 관리하는 거, 그리고 구 대표 낌새 지켜보면서 딸 전무님 전용 비둘기 되어 주는 거. 맞아요?”

“역시 뭐 설명할 게 없다니까. 말이 잘 통해.”

딸 전무는 박하지만 합류하면 완벽한 계획이 될 거라고 으스댔다. 정작 굳은 박하지의 얼굴은 보지 못한 듯했다. 특별히 흠잡을 데가 없는 계획이긴 했다. 어차피 단타로 진행되는 사업인 만큼 뽑아 먹을 게 있다면 계획도 최대한 심플하게 가는 게 맞았다. 그러나 하지는 이 모든 계획이 너무 쉽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선장은 주어진 정보 속에서 사람들 마음을 읽고 미래를 내다보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했었다. 물론, 사이비 교주 같은 그 말을 문장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로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당집을 차렸을 테니까.

그는 그저 정보를 취합하고 그걸 시기적절하게 이용하는 데에 능한 사람일 뿐이었다. 언젠가 박양일이 편지에 쓴 것처럼 질서와 규칙을 바로 세우고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선지자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비코어 그룹의 몰락이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과연 선장이 내다볼 수 있는 미래는 어디까지일까. 제 앞날도 예측할 수 없는 박하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범위였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했다.

“데니스 장이랑 자리 한 번 만들어 주세요. 최대한 조용히.”

하지의 말에 딸 전무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박 대리까지 만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냔 말도 했다.

“저도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 둬야 구 대표 눈을 막든 귀를 막든 할 거 아닙니까.”

“흐음, 뭐, 알았어. 조만간 자리 한번 만들어 볼게.”

“그럼 얘기 다 끝난 거죠?”

아침부터 거북한 인간들이랑 불유쾌한 대화를 너무 많이 나눴다. 하지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은 사람처럼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근데 박 대리. 진짜로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어?”

박하지는 딸 전무가 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전에 몸을 돌렸다. 내가 잘해 줄게, 그따위 말로 사람을 구슬리려는 딸 전무를 무시하며 밖으로 나섰다. 맑은 공기가 필요했다.



* * *



사람이 어떻게 그 정도로 확신에 찰 수 있을까.

맨바닥에 무릎을 세워 앉은 하지가 소파 다리에 등을 기대며 생각했다. 그는 선장과의 통화를 되짚고 있었다. 박하지와 통화하는 내내 선장은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목소리를 구별할 수 없게 변조된 음성 속에서도 그가 가진 확신만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상대가 박하지라서가 아니었다. 박양일이든 구도완이든 마자위든, 그는 누구라도 그렇게 대할 사람이었고, 그게 익숙해 보였다. 선장은 자신의 위치가 그 어떤 이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박하지에겐 그 자신감이 기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는 평생을 살아도 가지지 못할 자기 확신이라서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박하지는 언제나 확신이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고, 그의 그림자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도망치지 못했던 것은 그 확신이 없어서였다. 매일 밤 담장을 넘어 바깥에 나가면서도 그 이상을 해낼 자신은 없었다. 날이 밝기 전엔 꼭 집으로 돌아왔던 것도 그래서였다. 집 안에서 밖을 보고 짖던 개가 정작 문을 열어 주면 몇 미터 가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자유를 바라면서도, 자유를 찾아 떠날 자신은 없던 겁쟁이. 그게 박하지였다. 아등바등 삶을 이어 가며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최면처럼 되뇌는 암시 밑에는 결국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불확신이 팽배했다.

당연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자랐으니까. 좁은 세상에 갇혀 매일 매 순간 나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힘이 없는 존재인지를 세포에 새기며 성장했다. 그런 박하지가 선장이라는 인간을 상대하고 있다. 제 아버지도 이기지 못했던 선장을, 그 아버지의 밑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던 박하지가.

우스운 일이었다. 어쩌면 뻔한 결과가 예상되는 싸움이었다. 아니, 싸움이라고 할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선장이 파도라면 박하지는 그 물줄기에 휩쓸려 갈 모래였고, 그가 머리라면 자신은 사라져도 그만인 꼬리였다. 처음부터 알고 뛰어든 일이었고, 후회도 안 하지만, 애초부터 없던 확신은 점점 더 흐려졌다.

하지의 손이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툭 밀린 맥주 캔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반이 채 안 되게 남았던 맥주가 그대로 바닥에 쏟아졌다.

“아 씨.”

바닥이 어질러진 것보다 쏟아 버린 맥주가 아까웠다. 냉장고에 남은 맥주가 있던가. 아마 다 마셨던 것 같은데. 쩝, 입맛을 다신 하지가 취기에 나른해진 몸을 이끌고 욕실에서 수건을 꺼내 왔다. 굴러다니는 맥주 캔들을 한쪽으로 치워 두고 젖은 바닥을 대강 닦아 낼 때였다.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열한 시가 다 된 시각을 확인한 하지가 퍽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왼손엔 맥주 냄새를 풀풀 풍기는 수건이 들린 채였다. 하지의 오른손이 현관문 잠금장치를 열었다.

“뭐야?”

늦은 밤 뜬금없이 찾아온 방문객은 곰발이었다. 곰발일 거란 예상은 했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왜 찾아왔는진 모르겠다. 설마 이 밤에 또 하지에게 과제물을 내 주러 온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집에도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따위 생각을 하며 문손잡이를 꼭 쥐는데, 곰발이 웬 바구니를 불쑥 내밀었다. 언뜻 보기엔 과일 바구니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작고 길었다.

“이건 또 뭐야?”

기묘한 표정을 지은 하지가 바구니 안의 내용물을 살피려는데, 곰발은 이번에도 불쑥 그의 품에 바구니를 안겼다. 얼결에 바구니를 받아 든 하지는 그 바람에 문손잡이와 젖은 수건을 동시에 놓쳤다. 닫히려는 현관문 앞에 잽싸게 발을 댄 곰발이 툭 떨어진 수건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덤덤한 얼굴로 수건을 주워 올린 그는 바구니를 안고 있어 손이 없는 하지에게 차마 돌려주진 못하고 그냥 들고만 있었다. 하지는 그제야 바구니 안에 누워 있는 길쭉한 와인 병을 제대로 확인했다.

“이게 뭐냐니까.”

“와인이요.”

“그러니까 뭔 와인이냐고.”

“승진 기념 축하주입니다.”

“뭔 기념?”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렸다. 진짜 하다하다 별짓을 다한다.

“온여환이 보낸 거야?”

“예.”

“이제 명품에서 와인으로 품종을 바꿨대?”

곰발이 뭐라 대답할 듯 입을 열었으나, 마침 그때 집 안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눈짓으로 하지의 뒤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자 널브러진 맥주 캔들 사이에서 하지의 핸드폰이 존재감을 발휘하며 번쩍이고 있었다. 하지는 와인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거실로 돌아섰다.

“전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아니, 잠깐…….”

하지가 붙잡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곰발이 사라진 현관엔 그가 접어 놓은 수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허, 하고 헛숨을 내뱉은 하지가 제 발치에서 울려 대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온여환의 번호가 떠 있었다. 오늘은 웬일로 발신 번호가 다 보이게 전화한 것을 보니 꼭 받으라는 무언의 압박인 듯했다. 소파에 바구니를 툭 내려놓은 하지가 다시 맨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통화를 눌렀다.

“뭐야?”

- 다짜고짜 뭐야, 가 뭐야. 사람 당황스럽게.

말과는 달리 온여환의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운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밤 11시에 뜬금없이 시키지도 않은 와인 배달을 받은 박하지가 더 당황스러웠다.

“나 와인 안 좋아해.”

- 알아.

“근데 왜 보냈어. 나 안 좋아하는 거 알고 일부러 보냈냐?”

- 사람 성의를 참.

“누가 성의 보이래?”

- 또 맥주만 처드시지 말고 와인으로 분위기나 잡으라고. 도련님 그러다 간에 구멍 난다.

최근 박하지의 음주량이 부쩍 늘긴 했는데, 그걸 온여환이 어떻게 아나 싶었다.

“……곰발이 꼰질렀어?”

매일 비워지는 냉장고를 항상 채워 두는 사람이 곰발이었으니 아마 그의 고자질이 분명했다. 뭐 이런 것까지 꼰지르고 난리야. 중얼대는 하지의 말에 전화 너머의 온여환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 말하는 거 들으니까 또 맥주 마셨네.

이미 바닥을 어지럽힌 맥주 캔들을 보는 게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의 발끝이 괜히 빈 맥주 캔을 스윽 밀어 냈다.

“안 마셨어.”

박하지 자신도 안 속을 거짓말이었다.

- 혀 꼬이는데.

“안 꼬여.”

- 그래, 그럼 계속 떠들어 봐. 혀 짧은 소리 내는 거 꽤 귀여우니까.

그 말에 하지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귀엽다고 하니까 또 말 안 하지. 놀리듯 빈정대는 여환의 말이 짜증이 나서 계속 입을 붙이고만 있었더니 곧 여환도 잠잠해졌다. 가만히 건너오는 숨소리를 듣던 하지의 손이 무심코 와인 병을 만지작거렸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프랑스산 와인인 것 같은데 샤또까지 밖에 읽을 수가 없었다. 뒤에 적힌 문자들이 알파벳이긴 한데 영어는 아니라서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는 그냥 포기하고 눈을 돌렸다.

- 도련님.

“뭐.”

- 너 술 마시고 자는 거 그만해.

온여환의 목소리가 별안간 묵직해졌다. 괜히 분위기 잡고 있어. 하지는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왠지 손끝이 오므라들었다. 잘못한 것도 없이 혼나는 기분이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누가 들으면 내가 알코올 의존증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 몰랐나 본데, 도련님 알코올 의존증 맞아.

그의 말에 하지는 헛웃음이 터지는데 정작 온여환은 웃지도 않았다. 이게 설마 진짜 진심으로 말한 건가. 상황 파악이 된 하지는 순간 내가 무슨 알코올 의존증이냐며 소리칠 뻔했으나, 입이 열리기 전에 제 앞에 벌어진 술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봤자 맥주 대여섯 캔이었지만, 이와 같은 풍경이 며칠째 지속 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차마 적극적인 변명이 나오진 않았다.

“……내가 의존증이면, 그럼 넌 알코올 의존증인 사람한테 술을 보내?”

- 맥주 마실 바엔 와인이 나으니까.

“맥주보다 와인이 도수 더 높아.”

- 누가 와인을 맥주처럼 마시래? 맥주 몇 캔씩 마실 거 와인 한 잔으로 바꿔 보라고.

“내 취향까지 길들이려고?”

- 내가? 도련님을?

“…….”

- 길이 들기는 해 줄 거야?

네가 잘도 그러겠다. 타박하는 듯한 말과 달리 낮게 퍼지는 온여환의 목소리가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취기가 오르긴 했나. 받아칠 말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은 하지가 다시 입을 닫았다.

실내는 고요했고, 핸드폰에선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감이 느껴지는 미미한 통신 잡음이 들려왔다. 언뜻 종이를 넘기는 듯한 소리도 섞였다. 하지는 눈을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11시. 아마 한국은 자정일 터다. 온여환이 그 시간까지 책을 보는 건지, 아니면 일하느라 서류를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 하고 있었느냐고 물어보기만 하면 간단히 해결될 궁금증인데, 그런 일상적인 질문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는 구태여 다른 질문으로 입을 텄다.

“승진 기념이라는 건 뭐야.”

- 응?

“와인 말이야. 승진 기념 축하주라며.”

- 아, 그거. 박 대리에서 박 이사 됐잖아.

설마 했더니 진짜 그 의미였구나. 하지는 선장이 자신에게 이사 직함을 달아 주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선장과의 통화 내용은 온여환도 이미 다 들었을 것이다. 문자든 전화든 그 핸드폰으로 들어오는 모든 통신 정보는 자동으로 수집되어 국정원으로 넘어간다고 했었다. 박하지가 선장에게 핸드폰을 전해 받았던 그 날, 유성혜가 그의 핸드폰에 무슨 프로그램을 설치하며 해 줬던 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하지는 별안간 이 남자가 왜 쓸데없는 전화를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박하지와 선장의 대화는 녹음본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어서 확인할 것도 없을 텐데, 자정이 넘은 야심한 시각까지 종이를 들춰 가며 무언가에 열중해야 하는 바쁜 남자가 왜?

- 여보세요?

핸드폰 너머의 온여환이 말이 없어진 하지를 불렀다. 술기운에 붉어진 뺨을 문지르던 하지가 어, 하고 대답했다. 그거 한마디 하는데 쪽팔리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아, 왜 이래. 인상을 찡그리며 핸드폰에서 얼굴을 떼어 낸 하지가 낮게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졸았어?

“안 졸았어. 그리고 나 아직 이사도 안 됐어. 시켜 준다고 해도 싫고.”

하지는 자신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지 않게 느껴지도록 애써 무심히 답했다.

- 왜?

“늙어 보이잖아.”

온여환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꽂혀 드는 웃음소리가 꽤 근사했다. 하지는 어렵지 않게 여환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온여환이 저렇게 긴장을 풀고 웃을 때마다 보이는 무방비한 해제를 아주 좋아했으니까.

- 그래서, 늙은이들이나 하는 거 시킨다고 해서 기분이 안 좋은 거야?

“……기분 안 좋지 않은데.”

- 흐음.

“할 말 없음 끊어.”

- 그래, 끊어.

그러더니 여환은 정말로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먼저 끊으라고 한 건 자신이긴 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하지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전화가 끊긴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왜인지 바람맞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화면 위에 다시 온여환의 번호가 떴다. 무례하게 끊을 때는 언제고 왜 또 전화인가 싶은 하지가 곧장 통화 아이콘을 터치했다. 이번엔 내가 먼저 끊어 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귀에 붙이려는데, 바뀐 화면 속에 온여환의 얼굴이 보였다. 그 아래 작게 자신의 얼굴도 보였다. 하지는 그제야 이게 영상통화였음을 알아차렸다. 화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통화 아이콘부터 누른 자신의 불찰이었다.

“이게 뭐…….”

- 얼굴을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며칠 만에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다시 만나는 온여환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끝이 각진 반무테 너머의 눈이 선선히 휘어지며 한 곳을 향했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가 아니라 화면 하단에 떠 있는 박하지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 보니까 좋네.

“……안경 안 어울려.”

- 안경?

되묻는 여환의 눈이 이제야 카메라 렌즈를 향했다. 그가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꼭 바로 앞에서 눈을 마주치는 기분이었다. 괜히 화면을 똑바로 보기가 머쓱했다.

- 아, 이거.

뒤늦게 안경의 존재를 인식한 온여환이 중지 끝으로 안경 브릿지 부분을 슬쩍 밀어 올렸다.

- 영상으로 봐서 그래. 나 안경 꽤 잘 어울려.

“안 어울려.”

사실 거짓말이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조금 낯설긴 했지만, 온여환은 안경이 꽤 잘 어울렸다. 잘못 쓰면 사짜 냄새 짙게 나는 보험 설계사처럼 보인다는 안경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눈매가 너무 또렷하면 안경이 잘 안 어울린다던데.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얼굴이 잘나면 장땡인가 싶기도 하고.

- 안 어울리는데 뭘 그렇게 봐.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가 다급히 정신 줄을 잡았다.

“안 쓴 게 더 나아서.”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안경이 잘 어울리긴 했지만, 하지는 아무것도 얹지 않은 그의 맨얼굴이 더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헛웃음을 짓던 여환은 결국 안경을 벗었다.

이제 됐어? 확인하듯 물으며 눈을 맞춰 오는 그에게 하지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눈을 휘며 웃던 온여환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어딘가에 내려놓았다. 온여환의 얼굴이 조금 멀어지더니 책상인지 식탁인지, 하여간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집인지 개인 사무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을 생각하면 집이어야 마땅했지만, 주변이 어두워 가구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불 꺼진 실내를 밝히는 건 테이블 위의 스탠드뿐이었다. 불 다 꺼놓고 뭘 하고 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테이블에 늘어놓은 종이 쪼가리들이 설마 그냥 이면지는 아닐 텐데.

- 도련님.

“왜.”

- 혼자 머리 터지지 말고 그냥 물어보라니까.

스탠드 조명이 비치는 온여환의 얼굴이 은은하게 빛났다. 그는 꼭 박하지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에게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선장과의 통화 때문에 생각이 복잡했고, 전화를 받은 후엔 그가 대체 무슨 용건으로 이런 시답잖은 전화를 걸었나 궁금했고, 지금은 그냥, 그냥…….

“……뭐 하고 있었어?”

그게 궁금했다. 온여환이 뭘 하고 있었는지. 지금 어디에 있고, 왜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있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컵엔 커피가 들어 있는지, 물이 들어 있는지. 저녁은 언제 먹었고, 뭘 먹었고, 한국은 얼마나 추운지. 자꾸만 그런 것들이 묻고 싶었다. 둘 사이에 진짜로 묻고 확인해야 할 것들이 산적한데도 모두 외면한 채 그런 얘기나 나누고 싶었다.

- 조금 전에 집에 들어와서 씻고, 확인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 좀 보고 있었어. 그러다 곰발이 도련님한테 와인 전해 주러 올라간다길래 전화해 봤지.

“그건 무슨 자료인데.”

여환이 종이 뭉치 몇 장을 집어 들더니 의외로 순순히 카메라에 대고 비춰 주었다. 천천히 넘겨 주는데, A4 용지를 가득 메운 작은 폰트들이 영상통화의 화질을 이겨 내지 못하고 흐리게 뭉개졌다. 하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눈썹 사이를 좁혔다.

“안 보이는데.”

- 그럴 줄 알고 보여 준 거야.

그럼 그렇지. 하지는 허탈했지만 기를 쓰고 보고 싶은 마음은 또 없었다. 핸드폰을 든 팔이 슬슬 저려 왔다. 어차피 별다른 용건도 없는 전화겠다, 그냥 끊으면 될 일인데 이상하게 끊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아무래도 술을 마셔 머리가 굳은 게 틀림없었다. 알코올이 뇌세포를 녹인다더니, 술이 이렇게 무섭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돌리던 하지의 시선 끝에 문득 프랑스산 와인이 든 바구니가 들어왔다. 그걸 본 하지가 마치 장비를 교체하는 선수처럼 핸드폰을 내려놓고 와인병과 그 옆에 함께 놓인 오프너를 집어 들었다. 와인 병이 있던 자리에 비스듬히 누운 핸드폰이 천장과 하지의 얼굴을 반반씩 비췄다.

- 도련님 너 뭐 해?

느닷없이 오프너를 돌리며 낑낑거리는 하지의 모습에 온여환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중요한 작업이라도 하는 듯 한참 말이 없던 하지는 뽁, 하고 코르크 마개가 뽑힌 후에야 대답을 내놓았다.

“와인 마시게.”

- 누가 그렇게 마시래?

망설임도 없이 병나발을 부는 하지의 모습에 온여환이 경악을 했다. 같이 있었으면 당장에 병을 빼앗아 들었을 기세였다. 그러게 누가 이런 걸 사다 주랬나. 하지는 보란 듯 목구멍을 열고 입에 들어온 와인을 몇 모금 더 넘겼다.

“으…….”

입가를 닦으며 병을 내려놨다. 주둥이까지 꽉 차 있던 와인은 어느새 라벨지가 붙은 선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렇게 벌컥 들이켰으면서 정작 하지의 입에서 나온 감상은 맛없어, 였다. 역시 와인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쌉싸름한 단맛이 남은 혀끝을 날름거렸더니 온여환이 기가 찬다는 듯 숨을 터뜨렸다.

- 말 진짜 안 들어.

“지는.”

- 난 도련님 말 잘 들어.

“시끄러.”

- 최소한 노력은 하잖아.

“시끄럽다고.”

- 네.

손끝으로 지퍼를 잠그듯 입술을 여민 온여환이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대놓고 감상하겠다는 포즈였는데, 하지는 앞을 보느라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와인을 몇 모금 더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여전히 맛이 없었으나, 왜인지 지금은 술을 맛으로 마시는 단계를 넘어선 듯했다. 이 정도면 진짜 그만 마셔야 한다는 신호인데. 그런 생각이 들 즈음 하지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도 실장.”

박하지의 호칭에 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가 고개를 돌려 핸드폰 화면을 봤다. 그의 시야가 흐려진 건지 뭔지, 화면에 보이는 온여환의 얼굴이 처음보다 흐렸다. 그래도 턱을 괴고 있던 여환의 손이 스르르 내려가는 것은 잘 보였다. 여환이 자세를 바로 세웠다.

- 취하긴 취했나 보네. 그렇게 부르는 거 보니까.

“도 실장으로 살 때 어땠어?”

묻는 하지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비꼬자는 것도 아니고, 시비를 걸자는 것도 아니었다. 박하지는 정말로 궁금했다. 도 실장으로 살던 온여환의 마음 같은 게 새삼스럽게 알고 싶어졌다.

“안 불안했어?”

- …….

“4년이나 다른 사람으로 산 거잖아. 걸리면 어떻게 될까, 안 무서웠냐고.”

박하지도 온여환과 자신이 이런 식으로 그때의 이야기를 다시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박하지는 박하지대로, 온여환은 온여환대로 피하고 싶은 화제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 멀쩡하고 차분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꼭 누구 하나는 미친놈처럼 악을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피를 봤다. 그리고 그 누구 하나는 높은 확률로 박하지였다.

-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그냥 궁금해서. 말하기 싫어?”

- …….

“그래도 해.”

꼭 듣고야 말겠다는 듯한 하지의 말에 여환이 짧게 웃었다. 예, 분부대로 하죠. 장난스레 덧붙인 말 뒤로 옅은 한숨이 붙어 나오기도 했다.

- 별로 안 무서웠어. 불안하지도 않았고.

평온한 대답에 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때의 도 실장은 별칭 그대로 도라이 같은 남자였다. 조직 내에서 빠르게 인정을 받고, 많지 않은 나이에 핵심 간부급으로 올라선 데에는 도라이처럼 눈이 확 돌아서는 겁 없이 달려들고 일을 추진하던 면이 큰 역할을 했었다. 무엇보다 박양일을 회장으로 모시면서 그 아들인 박하지와 몰래 붙어먹었었다는 사실만 놓고 봐도 그는 겁대가리가 없었다.

- 걸리면 걸리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만약 그때 걸렸으면 어떻게 됐는데?”

- 뒤졌겠지.

온여환은 꼭 남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이미 지나온 과거라지만, 그가 겪고 실감했던 죽음의 무게를 얘기해 주는 것치곤 지나치게 가벼운 말투였다.

- 근데 죽는 건 별로 안 무서웠어. 그렇다고 목숨을 내놓고 다녔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무섭진 않더라.

“왜?”

- 글쎄. 죽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죽어 가던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그랬나 봐.

“…….”

- 여기 들어오기 전에 군인이었거든.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온여환이 5년 전 일을 이렇게 자세히 얘기하는 것도 낯설었지만, 도 실장이 되기 전의 온여환에 대한 것은 더욱 생소했다.

- 그때 가장 많이 봤던 게 내가 살려야 했던 사람들이 개죽음을 당하는 거였어. 난 분명 그 사람들을 살리고 싶어서 군인이 됐던 건데,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

“…….”

- 그런 걸 보고 나면 사람이 살고 죽는 게 꼭 누군가의 장난처럼 느껴져. 지금 바로 내 발밑에서 폭탄이 터져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지만, 온여환의 목소리엔 오래 묵은 무력감이 침전해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 박하지는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온여환을 상대로 이런 동질감을 느끼는 게 우습다는 걸 알면서도 작은 화면 밖까지 전해지는 마음을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적어도 지금 온여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확신이었다. 여전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고 그의 속을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으나, 지금 이 순간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서로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 걱정 마. 다행히 내 발밑의 폭탄은 아직 안 터졌으니까. 그리고 네 발밑의 폭탄이 터질 일도 없고.

“…….”

- 내가 찾아 없앨 거거든.

온여환의 그 한마디에는 왜 확신이 생겼을까. 박하지는 그를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언제든 수틀리면 자신이 먼저 떠나겠다 마음먹고 있으면서도, 그냥 그 말에는 안심이 됐다. 꼬아 보지 않고,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그대로 믿고 싶었다.

우리는 우리가 가여운 것이다. 박하지는 이역만리의 이국에서 저를 잡아먹겠다고 눈을 이글거리는 이들의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주제에 발밑의 폭탄이 무섭지 않다는 사내가 가여웠고, 온여환은 제 처지도 잊고 함부로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어린 시절의 그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박하지를 가여워 했다.

그래서 그 밤이 가여웠다. 두 사람은 용건도 없는 대화를 시원찮게 이어 가면서도 꽤 오래 전화를 끊지 못했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밤일지도 모르니까, 내일은 이 세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아주 오랫동안 밤을 이어 갔다.



* * *



온여환이 특임대를 전역하고 국정원을 택했던 것은, 더 이상 군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라면 필요에 따라 적진을 향한 공격이 필요했고, 그것을 살인이라고 생각해 머뭇거려선 안 됐다. 모든 것이 군인의 임무와 의무라고,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설사 그것이 합리화라 할지라도.

그러나 온여환의 눈앞을 가리고 있던 꺼풀은 오래 덮여 있지 못했다. 살릴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지 못했던 때부터였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옳다고 믿었던 임무와도 의무와도 부합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여환은 포상을 받았고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중위님 같은 군인이 되겠습니다. 이미 군인의 자격이 없는 그에게 그런 말들을 했다. 치가 떨리고 소름이 끼쳤다. 전역을 택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곳에서 자신의 임무는 끝났고, 의무를 지키지 못한 군인은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요즘 들어 온여환은 그때의 제 선택을 다시 떠올리는 일이 잦았다. 자꾸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정말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나. 내 역할은 정말 거기까지였나. 나는 의무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저버린 것인가. 여환은 끝내 그 답을 내리지 못했다.

- 너 진짜 이거 해야겠어?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생각한 여환은 그 답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은 채, 유성혜의 목소리가 튀어나온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10분 뒤에 시작하기로 하지 않았어?”

여환의 시선이 제 손목을 향했다. 그곳엔 군용 시계를 닮은 검은색 전자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아직 시간 남았는데.”

- 이거 진짜 할 거냐고, 미친놈아!

핸드폰을 뚫고 나오는 유성혜의 고함에 여환의 목이 꺾였다. 휘유, 바람을 분 그가 다시 귀를 갖다 붙이며 말했다.

“또 마음이 바뀌었나 보네. 그럼 시간 줄 테니까 10분 안에 최종 결정해. 아, 이제 9분이다.”

- 다시 생각 좀 해 봐. 너 이거 시작하면 진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다, 어?

“나 지금 옥상 올라왔어. 여기서 관두면 떨어져서 내려가야 하는데, 이러나저러나 돌이킬 수 없는 건 똑같네. 8분.”

여환은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노발대발 성을 내는 유성혜의 설교를 듣다못해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옥상 난간에 걸치듯 올려 둔 핸드폰에서 유성혜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그사이 여환은 바닥에 두었던 가방을 열었다. 리시버와 장갑, 로프 따위가 가장 먼저 보였고, 그 아래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콘크리트 벽돌도 들어 있었다.

그중 여환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권총이었다. 챙겨 온 장비 중 가장 쓰지 않는 게 좋을 물건이었지만,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탄창을 열어 실탄을 확인한 여환이 허리 뒤쪽에 채워진 홀스터에 총을 찔러 넣었다. 그리곤 가방을 통째로 들어 환풍구 앞으로 이동하기 전 난간의 핸드폰을 다시 집었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유성혜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 것은 아니었다.

“자, 이제 5분. 결정에 도움 좀 되라고 말해 주자면, 넌 내 쪽은 신경 쓸 거 없어. 20분 동안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보안 시스템을 헤집어 놓기만 하면 돼.”

- 그게 지금 도움 되라고 해 주는 말이라고?

“설사 일이 잘못되더라도 너한테 피해 갈 일 없다는 뜻이야. 내 입에서 네 이름 나올 일도 없고.”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성혜가 선장과 동일한 통신 방식을 이용해 국정원 보안 시스템에 침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온여환은 환풍구를 통해 퇴근한 송태갑의 집무실로 내려가 금고를 확인한다. 시스템이 복구되기 전 환풍구로 돌아간 온여환이 로프를 이용해 다시 옥상으로 복귀하면, 유성혜는 곳곳에 선장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여기까지가 그의 계획이었다.

-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잘난 척은 지 혼자 다 하고 있네.

여환의 말을 듣던 유성혜가 식식거렸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화가 난 듯했다.

- 야, 누가 지금 내 얘기하재? 나야 선장한테 덮어씌우고 튀면 그만이라 쳐. 너는 어쩔 건데? 너 거기서 나오기 전에 시스템 복구되고 카메라 켜지면 그대로 끝장이야.

유성혜의 말대로 여환의 계획엔 딱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국정원의 보안 시스템이 복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장의 통신 방식으로는 20분까진 안전하게 추적을 방어할 수 있다. 그러나 보안 시스템은 느리면 30분, 빠르면 10분 안에도 복구될 수 있었다. 10분 안에 시스템이 복구된다 하더라도 유성혜의 꼬리가 밟힐 일은 없겠지만, 온여환은 아니었다. 그 안에 송태갑의 집무실을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의 침입이 탄로 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지.”

- 말 같지도 않은 소릴……!

“3분. 나 이제 내려가야 돼. 어떻게 할 거야?”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가방에 있던 리시버를 귀에 꽂은 여환이 통화 연결 상태를 변경하고, 복면을 머리끝까지 올려 썼다. 흡사 그림자처럼 온몸이 새카매진 여환은 눈만 겨우 내놓은 상태로 환풍구 덮개를 뜯었다. 미리 나사를 돌려 두었던 덮개는 살짝만 건드렸을 뿐인데도 쉽게 분리되었다.

여환은 가방을 털어 장갑과 로프 장비를 착용했다. 송태갑의 집무실까지는 로프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환풍구 바깥의 기둥에 로프를 고정한 여환이 허리와 허벅지에 찬 하네스에 훅을 걸었다. 단단히 채워진 것을 확인한 여환은 이제 벽돌만 남은 가방을 환풍기 날이 돌아가는 환풍구에 통째로 밀어 넣었다. 텅, 텅, 날에 밀려 돌아가던 가방이 마침내 꽉 끼어 고정되었다.

날 사이로 고개를 빼고 높이를 확인한 여환이 뒤를 보고 내려갈 수 있도록 몸을 돌려 환풍구로 진입했다. 발끝으로 난간을 짚고 선 그가 무게 중심을 뒤로 보내며 자세를 낮췄다. 금방이라도 밑으로 떨어질 듯한 자세에서 장갑을 낀 손으로 로프를 꽉 잡아 고정한 여환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유독 하늘이 흐린 밤이었다. 달이 없었다.

“1분.”

리시버를 통해 유성혜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게 대답이 되었다. 여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밑을 내려다봤다.

“내려간다.”

- 너 신호 주면 바로 나와.

그는 대답 없이 가볍게 무릎을 굽혀 툭, 하고 발끝을 밀어 냈다. 촤르륵, 로프가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아래로 쑥 빨려 들어갔다.

송태갑의 집무실은 9층이었다. 로프를 잡지 않고 단번에 내려간 여환은 10층이 지났을 때 속도를 조절하며 멈춰 섰다. 그의 오른쪽으로 각 층의 천장 덕트와 이어지는 통로 입구가 보였다. 여환은 그 끝에 가볍게 다리를 걸고 곧장 몸을 미끄러뜨렸다. 통로 안에 쌓여 있던 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며 시야를 가렸다. 여환은 포복하듯 전진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환풍 통로의 설계도를 떠올리며 코너를 돈 여환이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을 멈췄다. 바로 앞에 있는 환풍구 덮개 아래로 송태갑의 책상이 보였다.

“도착했어.”

- 기다려.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 여환은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집무실엔 아무도 없었고, 복도까지 이어진 통로에서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이 시간에 차장실이 있는 9층을 방문할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온여환처럼 초대받지 않은 방문자가 아니고서는.

- 준비해. 10초 카운트 세고 들어갈 거야.

말을 마침과 동시였다. 유성혜는 숨도 돌리지 않고 곧장 카운트를 시작했다. 여환은 유성혜의 카운트를 들으며 손목에 찬 전자시계로 10분 타이머를 맞췄다. 유성혜가 보안 시스템에 침입하면 지하 1층, 중앙 보안실에 1차 경보가 울릴 것이다. 그리고 10분 이내 초동 진압이 실패할 시엔 국정원 전체에 경보가 울린다. 건물 전체가 시끄러워지면 여환에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안에 모든 걸 끝내야 했다. 리시버 속에선 여전히 유성혜의 카운터가 들려오고 있었다.

- ……3, 2, 1, 고. 들어가.

철컥, 환풍구 입구가 열렸다. 여환은 다리부터 천천히 몸을 내렸다. 발밑에 송태갑의 책상이 닿을 듯했다. 가벼운 반동으로 책상을 뛰어넘어 착지한 여환이 집무실 내 CCTV 위치를 확인했다. 언제나 빨갛게 빛나는 카메라의 눈이 꺼져 있음을 확인한 여환이 허리춤에서 손전등을 꺼내 곧장 송태갑의 금고로 향했다. 책장 안쪽에 자리한 작은 개인 금고는 송태갑의 지문으로만 열 수 있었다.

여환은 장갑을 벗고 허벅지 옆쪽에 달린 큰 주머니의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서 작은 용기에 담긴 알루미늄 가루를 꺼냈다. 송태갑의 지문을 채취하기 위함이었다. 손전등으로 금고를 비춘 여환이 지문 인식 센서 위에 조심스레 가루를 뿌렸다. 가볍게 입바람을 불자 센서 위에 남은 재색의 가루가 금세 지문의 형태로 묻어난 게 보였다. 이제 저 지문을 그대로 뜯어 낼 차례였다.

여환이 들고 있던 손전등을 입에 물고 센서 위에 투명한 필름지를 가져다 댔다. 지문의 모양이 망가지지 않도록 숨을 참으며 필름지를 부착한 여환이 완전히 밀착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떼어 냈다. 얇은 필름지에 마치 도장을 찍은 것처럼 지문이 옮겨졌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광학식 지문 인식 센서에 지문을 인식시키기 위해선 지문의 융선을 본뜬 모본이 필요했다.

반대쪽 주머니에서 손을 넣은 여환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흡사 손바닥만 한 보조 배터리처럼 생긴 것은 첩보 활동 시 사용하는 3D 실리콘 복제기였다. 3분이면 지문이 복제된 실리콘을 만들 수 있었지만, 여환에겐 그 3분조차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복제기의 헤드를 연 여환이 스캐너 위에 필름지를 부착하자마자 복제 버튼을 누르고 타이머의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약 2분이 소요되었고, 남은 시간은 7분 50여 초였다.

- 찾았어?

여환이 찾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유성혜가 초조하게 물었다. 복제기를 내려놓은 여환이 혹시 다른 정보가 있을지도 모를 송태갑의 책상 서랍을 뒤적이며 답했다.

“아직. 보안실 움직임은 어때?”

- 아직 시스템 복구는 못 했어. 내 코드도 아직 못 찾고 있는 것 같고. 난 일단 네 말대로 1급 기밀 데이터로 접근하긴 할 건데, 거긴 쉽게 안 뚫릴 거야.

“상관없어. 진짜 필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어차피 1급 기밀 데이터에 접근하는 것은 보안실의 총력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 시간은 얼마나 더 필요한데?

“찾는 덴 3분. 빠져나가는 데까진 6분.”

빠듯한 시간이었다. 초조하게 숨을 뱉은 유성혜가 말을 줄였다. 여환이 뒤적이던 송태갑의 책상에선 특별한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별 소득 없이 마지막 서랍까지 닫았을 때였다. 책상 위에 올려 둔 복제기 위에서 짧게 불빛이 깜빡이다가 꺼졌다. 스캔이 끝났다. 복제기를 집어 든 여환이 헤드를 열어 스캐너 부분을 밀어 올렸다. 그러자 불투명한 실리콘 캡이 나타났다. 손끝으로 표면을 쓸어 보자 아주 미세한 굴곡이 느껴졌다. 일단 스캔은 됐으나 센서에 제대로 인식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여환은 복제기에서 꺼낸 실리콘 캡을 검지에 붙이고 지문 인식 센서 위에 가져다 댔다. 반응이 없었다. 아랫입술을 문 여환이 천천히 손을 떼어 내곤 위치를 조정하여 다시 한번 시도했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환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곳에서 다시 지문을 채취해 스캔할 시간이 될까. 가늠하던 여환이 막 손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띠리릭. 지문이 인식되는 소리와 함께 철컥, 금고 문이 밀려 나왔다.

열렸다. 두꺼운 문을 열어젖혔다. 두 층으로 나누어진 금고 안에 두꺼운 서류 봉투와 USB, 외장 하드 등이 수납되어 있었다. 어쩌면 모든 자료 하나하나 대한민국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핵폭탄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환은 그런 것들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찾고 싶은 곳은 오로지 하나였다. 박양일의 편지.

여환은 편지가 들어 있을 만한 모든 것을 꺼내 뒤졌다. 봉투 안의 종이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자꾸만 흘렀다. 유성혜에게 말했던 3분은 이미 지나 있었다. 리시버에서 유성혜가 찾았어? 하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답할 여유도 없었다.

그때, 여환의 손이 멈칫 굳었다. 그의 손전등이 금고의 가장 밑바닥을 비췄다. 하얀 봉투가 납작하게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여환이 그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봉투를 집었다. 그러자 거꾸로 들린 봉투의 입구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무릎을 굽힌 여환이 제 발치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들어 펼쳤다. 상단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도 실장에게]



여환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건 박양일의 편지였다.

- 온여환, 찾았냐고!

아까부터 다급하게 온여환을 불러 대던 유성혜의 목소리가 이제야 제대로 들렸다.

“찾았어.”

- 그럼 빨리 들고 나와, 경보 울리기까지 3분밖에 안 남았어!

마음 같아선 유성혜의 말대로 원본 편지를 그대로 들고 나가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혹여라도 송태갑이 편지가 사라진 걸 알아차리면 곤란해졌다. 여환은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위해 편지를 바닥에 내려 둔 여환이 막 촬영 버튼을 누르려는데, 불현듯 마지막 문장 한 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인상을 찡그리며 화면 속 편지를 들여다보던 여환이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바닥에 놓인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편지에는 그가 여태 알고 있던 박양일의 편지에서 보지 못했던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건 여환이 결코 바라지 않던 내용이기도 했다.

- 야, 뭐 해! 빨리 나오라니까!

급박하게 울리는 음성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여환이 시간을 확인했다. 1분 30초. 그는 핸드폰 카메라로 편지를 마저 찍은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편지를 넣은 봉투를 원래 있었던 자리에 돌려놓은 여환이 금고 내외부를 정리한 뒤 문을 닫았다. 혹시 주변에 뭔가 떨어져 있진 않은지도 꼼꼼히 확인했다. 처음과 같은 상태였다.

이제 30초다. 자세를 낮춘 여환이 환풍구 안쪽으로 훅 뛰어올랐다. 난간을 손으로 짚고 오로지 팔 힘으로만 몸을 올렸다. 통로로 완전히 돌아온 여환이 빠르게 덮개를 덮고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중반쯤 갔을까. 갑자기 귀가 터질 듯한 경보가 울려 대기 시작했다.

- 전체 경보야! 곧 시스템도 복구될 거야, 너 최대한 빨리 나와!

여환은 유성혜의 말을 들으며 환풍 통로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로프에 이어진 몸이 환풍구의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시멘트벽을 때렸다. 여환은 밑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등 뒤로 손을 뻗어 로프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미처 장갑을 다시 끼지 못한 손이 그대로 미끄러져 내렸다.

“윽!”

1미터 남짓 미끄러진 여환이 재빨리 손에 로프를 감았다. 그의 손등에 감겨 고정된 로프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여환은 이를 악물며 옆면의 벽에 다리를 댔다. 무릎에 힘을 주고 선 여환이 자세를 다시 잡은 뒤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전체 경보는 멈추지 않았다. 폭발음처럼 귀를 멀게 하는 경보음이 마치 여환의 안에서 시작된 것만 같았다.

그는 박양일이 편지에 적혀 있던 마지막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아들 박하지, 그 아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네.]



대체 너는 이 모든 것에 어떻게 관계되어 있다는 걸까.

여환은 알 수 없었다.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먼지처럼 피어오른 안개가 더욱 짙어져만 갔다.



* * *



비상이었다. 늦은 시각이었으나 각 파트의 차장을 비롯한 모든 부처의 책임자들이 브리핑실에 모여 대책 회의를 나눴다.

“권 국장.”

“예, 차장님.”

“이번 해킹, 선장의 짓이라는 게 확실해?”

송태갑을 따라 그의 집무실로 들어선 권규호가 굳게 닫힌 문을 돌아봤다. 그는 문밖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송태갑이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가깝게 다가섰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선장과 동일한 통신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누구한테 확인한 내용이야?”

“유성혜 팀장입니다. 선장 통신 추적 관련 업무는 지금까지 유 팀장이 도맡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추적은 됐나?”

“그건 아직…….”

쯧, 혀를 찬 송태갑이 책상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살 안쪽까지 잘 다듬어진 손톱이 손등을 파고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지난 10년 부지런히 선장의 흔적을 쫓아왔던 그였지만, 선장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걸 본 적은 없었다. 다른 기관도 아닌 국정원을 상대로.

“마닐라 사업, 우리가 끼어든 거 눈치챈 것 같아?”

“거기까진 확신할 수 없지만, 저희가 선장을 다시 쫓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장이 이런 식으로 국정원을 헤집을 이유가 없었다. 송태갑이 낮은 침음을 흘렸다. 초조함에 목구멍이 콱 조여들었다. 지금은 선장이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송태갑이 짜 놓은 계획표에서 선장의 등장은 반드시 대선 이후여야 했다. 비자금 계좌가 파헤쳐진 대통령이 불명예스러운 퇴임으로 물러났을 때, 그 자리를 염정석이 채웠을 때, 그리고 국정원을 이끌 새로운 원장이 필요할 때.

그 타이밍이 오면 송태갑은 이번에야말로 제 손으로 선장의 대가리를 들고 세상을 놀라게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어금니를 사리문 송태갑의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박하지는? 무사한가?”

“예. 아직은 별다른 기미가 없지만, 혹시 모르니 사태를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예?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상사의 말에 권규호의 낯빛에 혼란이 서렸다. 이번 국정원 해킹이 선장의 소행이 확실하다면,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 데이터베이스에 접근을 시도하긴 했지만 실제로 손실된 자료나 밖으로 빼돌린 정보가 하나도 없다는 게 그 근거였다. 정말로 원하는 게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움직이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선장은 국정원의 개입을 눈치채고 경고를 해 준 셈이었다. 과연 그가 국정원의 계획을 어디까지 파악했는진 알 수 없으나, 무언가 알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괜한 도발을 했다간 현지에 파견된 박하지까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권규호는 아무리 송태갑의 지시라 해도 이번만큼은 그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선장이 뭔가 눈치챘다면 박하지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혹시 여기서 박하지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박하지를 버리다니?”

멋모르는 소리를 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송태갑이 중얼거렸다.

“박하지는 끝까지 살려 둬야 할 녀석이야. 죽어서도 안 되고, 놓쳐서도 안 된다고. 선장이 뭔가 눈치챘다는 걸 알면 달아나려고 할 수도 있어. 그냥 계속 지켜만 봐. 선장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되니까.”

권규호는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그 표정을 읽은 송태갑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휘저었다.

“하, 됐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가 신경 쓸 거 없고. 권 국장은 이번 해킹 사태를 책임지고 수습해. 언론 쪽 상황은 어떻게 돼가고 있지?”

“현재까진 아무 움직임도 없습니다. 이번 사건 내용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내부에서 철저히 정보를 차단하고…….”

“아니, 언론을 움직여.”

“……예?”

“이번 해킹 사건에 대한 정보를 흘리란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금 전 회의에서 이번 일은 모든 부처가 조용히 해결하라고 지시하지 않으셨습니까?”

“덮는다고 덮어질 일이 아니라는 걸 자네도 알잖아.”

그렇다고 해서 국정원 내부에서 자처하여 떠벌릴 일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가 정보기관의 보안 벽이 뚫린 사건이었다. 비록 구체적으로 파악된 피해 사실이 없다고는 하나 이는 국가 안보와 관련된 문제였다. 언론 보도가 나갈 경우 국정원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신뢰가 깨지는 것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송태갑 역시 모르지 않을 터였다.

“나중에 알려질 바에야 우리가 먼저 정보를 흘려주고 길을 잡아 주는 쪽이 훨씬 낫지 않겠나?”

“길을 잡아 주라는 말씀은…….”

“명확한 사실을 조금 더 명백하게 드러내 주라는 거지. 가령 BH의 부름엔 한달음에 달려갔던 국정원장이 정작 국정원 방어벽이 뚫린 지금은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 같은 거.”

지금까지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었던 권규호는 이제야 송태갑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가 겨냥하는 방향이 뚜렷했다. 원장이었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일이야.”

“차장님, 그래도 이건…….”

“아니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

“없는 말을 지어내라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왜곡하라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지?”

그의 말대로 날조도 아니고 왜곡도 아니었지만, 취사선택된 사실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규호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고, 그런 책임이라면 조직의 우두머리에게 내려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역시 취사선택된 사실을 비열하게 이용하며 합리화한 것일 수도 있고.

무슨 이유건 간에 권규호는 송태갑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 순간 마치 전차가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 한번 없이 열린 문 뒤로 등장한 것은 온여환이었다.

“제가 마닐라로 들어가겠습니다.”

“온여환.”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오는 여환의 눈빛에서 불티가 튀는 듯했다. 권규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바짝 긴장해 솟아 있는 근육이 돌덩이 같았다. 만일 그가 권규호의 손을 뿌리치고자 했다면 여지없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을 것만 같은 힘의 여환의 안에서 들끓고 있는 게 권규호의 손끝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가 지금 마닐라로 가겠다고요. 박하지의 동태를 확인하셔야 할 거 아닙니까.”

오늘의 온여환은 왜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감정이 격양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윗사람 앞에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오늘처럼 어딘가 흐트러진 표정을 내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선장의 등장이 온여환에게 그만큼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인가?

온여환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권규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런 권규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송태갑은 온여환의 상기된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혹시 그동안 박하지한테서 이상한 낌새라도 느낀 적이 있나?”

“그랬어야 합니까?”

송태갑의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친 여환이 비딱하게 웃었다. 그의 눈 안에서 선명히 피어오르는 적대감에 송태감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분노가 자신을 향하는 것인지, 선장을 향하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만일 이번에 그런 걸 느끼게 된다면 바로 보고 드리죠.”

“…….”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제 할 말을 마친 여환은 집무실을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시간을 끌지 않았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벼락 같았다.

“자네도 이만 나가 보지 그래.”

송태갑이 덩그러니 남은 권규호를 향해 말했다. 알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던 권규호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침묵으로 지그시 재촉하는 송태갑의 눈빛에 결국 고개를 꾸벅 숙였다. 권규호가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송태갑은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몇 시간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선장은 대체 왜 국정원 서버에 침입한 것일까? 단순히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이며, 왜 이런 방식이었을까?

이유가 무엇이든 이번 일로 선장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송태갑에겐 선장의 정체가 필요했지만, 그를 검거하는 것이 현 정부의 몫이 되어선 안 됐다. 일단은 감춰야 한다. 그가 지금까지 박하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송태갑은 문득 조금 전 온여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하지한테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적이 없냐던 자신의 질문에 그는 그랬어야 합니까? 라고 되물었다. 마치 송태갑에게 어떤 의도가 있지 않은지 떠보는 사람처럼.

“…….”

귀밑이 찌르르 당겼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가만히 숨을 들이켜던 송태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장 앞으로 다가선 그가 반듯이 선 책들을 밀어 내며 금고를 앞으로 끌어왔다. 지문 인식 센서 위에 손가락을 올리자 짧은 신호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송태갑의 손이 향한 곳은 금고의 가장 아래 감추어 둔 봉투였다.

그는 무늬 없는 봉투를 꺼내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자신이 보관하던 박양일의 편지 그대로였다. 편지의 내용이 동일한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다시 봉투를 닫은 송태갑이 금고 문을 굳게 닫았다. 아직은 이 편지를 사용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선장의 머리를 치러 갈 때,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라야 했다.



* * *



“뭘 찾았다고?”

출국 게이트로 향하던 여환이 다리를 멈췄다. 뒤에서 그를 따라 이동하던 승객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여환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승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열 바깥으로 이탈했다.

“유성혜, 다시 말해 봐. 뭘 찾아?”

- 나도 방금 확인한 거라 대체 뭘 찾은 건지……. 하아, 이게 왜…….

유성혜는 연신 헛숨을 뿜으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사이 여환은 사람들이 모여 선 게이트 앞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어젯밤부터 잠시도 긴장을 놓을 틈이 없었다.

오늘 오후 비행기로 마닐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던 온여환은 유성혜에게 박하지의 친모와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빨리 확인해 달라 부탁했었다. 마닐라에 도착하기 전까지 박하지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 혹은 그가 알지 못하는 정보까지 손에 넣어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온여환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유성혜도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끊은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똑바로 얘기해. 박하지 유전자 정보와 DNA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유전자 정보를 대조했는데, 그다음 뭐라고?”

- 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한숨 뒤에 이어진 유성혜의 말이 조금 이상했다.

- 일치자가 남성이야.

온여환도, 말을 전하는 유성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이야기였다.

“……남자가 확실해?”

- 30년 전에 신원 미상 변사자로 등록된 사람인데, 몇 번을 확인해도 맞아. 나도 이상해서 박양일 DNA 정보랑도 대조해 봤거든? 근데 이게…… 왜 이게 안 맞냐고. 박하지 박양일 아들 아니었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진짜. 터져 나오는 유성혜의 목소리가 온여환의 머리를 울렸다. 여환은 전화를 들지 않은 손으로 기둥을 짚으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박하지의 DNA 정보와 일치하는 남성이 나왔다. 그는 신원 미상의 변사자로, 박양일이 아니었다. 박양일과 박하지는 유전자 정보가 일치하지 않았다. 고로, 박양일은 박하지의 아버지가 아니다. 정리하는 데에 채 몇 초도 걸리지 않는 간단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장을 글로써 이해하는 것과 머리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는 간극이 컸다. 여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양일이 박하지의 친자가 아니라면, 그는 왜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박하지를 키워 온 것인가? 그가 자신의 친자도 아닌 아이를 20년이 넘게 키울 만큼 정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비록 친자는 아니지만 선장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증거를 믿고 맡길 만큼 온 마음으로 그를 사랑했었나? 박양일이, 박하지를? 그렇다면 박하지와 유전자 정보가 일치한다는 남자는 대체 누구지?

“그 신원 미상 변사자에 대한 정보는?”

- 모르겠어. 신원 미상이라 정보가 없어.

“일단 찾아봐.”

- 아무것도 없다니까!

“뭐라도 좋아, 그냥 아무거나……!”

여환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서인지 박하지를 둘러싼 모든 것이 희미했다. 시간에 가려진 이야기들 속에 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 여환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냥 확인만 좀 해 줘. 부탁할게.”

- ……알았어. 좀 더 찾아는 볼게.

“고맙다. 연락은 내가 할게.”

넌 곧장 마닐라로 가는 거야? 유성혜가 그렇게 물어 왔지만, 여환은 그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온여환이 왜 마닐라로 가는지, 가서 무엇을 할 생각인지 유성혜는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그는 유성혜와 통화를 했던 핸드폰의 전원을 그대로 꺼 버렸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새로운 핸드폰을 꺼내 송태갑의 집무실에서 찍었던 박양일의 편지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지막 문장 한 줄이었다.



[아들 박하지, 그 아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네.]



여환은 박양일이 마치 확언하듯 ‘아들 박하지’라고 새겨 넣은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괴리감이 불길한 생각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박하지가 박양일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는 누구의 아들인가. 박양일은 왜 박하지를 거두어 키웠는가. 사라진 그의 친모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박양일은, 박하지가 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가.

돋아난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이 점점 뚜렷해졌다. 여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바라보는 공항의 유리창 바깥으로 비행기 한 대가 떠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할 시간일지도 몰랐다.





14. 종막 -





핸드폰을 쥔 하지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신호음 세 번은 진작 지났으나 온여환과는 여전히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분명 통화 신호가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으라고 경고했었던 하지였다. 온여환은 또 그의 말을 저버렸다. 이를 악문 하지가 전화를 끊고 다시 걸려는 순간이었다.

“와, 사람 많네.”

설명회 준비가 한창인 컨퍼런스 룸 입구에서 자유분방한 어조의 한국말이 들려왔다. 딸 전무였다. 박하지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던 딸 전무가 막 걸음을 떼려는데, 그의 머리 위에서 걸다 만 현수막이 떨어졌다. 현수막을 놓친 남자가 사색이 된 채로 뛰어와 연신 허리를 숙였다.

머리 위로 떨어진 현수막을 짜증스럽게 걷어 낸 딸 전무는 망가진 머리를 매만지다가 오뚝이처럼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를 반복하는 남자의 대가리를 시원하게 갈겼다. 남자는 아픈 티 하나 내지 못했다. 딸 전무가 다시 하지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뒤로 스멀스멀 올라간 현수막이 비로소 제대로 걸리는 게 보였다.



Rauma Mtech Investment Promotion Presentation



라우마엠텍의 투자 설명회가 바로 오늘이었다.

“박 대리, 하이.”

“오셨어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자연스레 재킷 안주머니에 찔러 넣은 하지가 슬쩍 고개를 까딱였다. 하는 둥 마는 둥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에 픽 웃은 딸 전무가 그의 꼴을 쭉 훑었다. 애론 리 행세를 하던 시절 온여환이 사 주었던 진회색 더블 버튼 재킷을 입고 나온 박하지는 평소보다 훨씬 멀끔한 모습이었다.

“박 대리도 오늘 신경 좀 썼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박 대리한테 마이크 잡으라 그럴 걸 그랬어.”

“들어가세요. 자리 준비해 뒀습니다.”

하지는 또 헛소리나 늘어놓을 게 뻔한 딸 전무의 얘기를 사전에 차단하며 밖으로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다는 듯 앞을 막아서는 딸 전무에 의해 길이 막혔다.

“박 대리가 했으면 기자들이랑 사진도 찍었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자신을 피해 자꾸만 벽으로 가서 붙는 박하지를 집요하게 막아선 딸 전무가 연단에서 마이크 테스트 중인 구도완을 보며 혀를 찼다. 그의 앞으로 딸 전무가 돈을 먹여 부른 기자들 몇 명이 주르륵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설명회인 만큼 카메라는 들고 있지 않았다. 당연했다. 대표가 국제 지명 수배된 깡패 새끼인데 사진 촬영이 될 리가 없지.

“사업이라는 것도 다 마스크가 통해야 성공하는 거잖아.”

“…….”

“저쪽보단 나 같은 마스크가 더 믿을 만하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에 나온다더니, 결국 저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미 밖으로 나가기는 글러 먹었고, 벽과 딸 전무 사이에 끼어 한숨을 푹 쉰 하지가 연단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럼 가서 전무님이 마이크 뺏어 잡지 그러세요. 기자들이랑 사진도 좀 찍어 주시고.”

예전에 무슨 예능에서 그런 게임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남의 마이크 뺏어서 노래를 다 불러야 이기는 게임이던가. 딸 전무나 구도완이나 남의 거 뺏어 먹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실제로 행해진다면 아주 볼만한 게임이 될 것 같았다.

“됐어. 저런 게 또 은근히 귀찮으니까. 나야 뒤에서 챙길 것만 잘 챙기면 되지.”

“…….”

“어제 장 변호사 만난 건 어땠어? 얘기는 잘됐어?”

자신이 뺏어 먹을 밥상에 문젠 없는지 확인차 묻는 딸 전무의 목소리가 낮았다. 귓속말을 하듯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하지는 부담스러운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예, 잘 만났습니다. 좀 떨어지시죠?”

“별다른 낌새 없어 보이지?”

“뭐, 예, 사람 괜찮던데요. 의리 없고 돈 좋아하는 게 딱.”

너랑 똑같더라. 그 말은 차마 뱉지 못한 하지가 많은 의미가 담긴 끄덕거림으로 문장을 끝맺었다.

“거봐, 내가 괜찮을 거라 했잖아.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만 주면 믿을 만해져. 내가 그래서 박 대리 믿잖아.”

하지는 딸 전무가 말을 잇느라 여념 없는 틈을 타 슬쩍 몸을 틀었다. 그제야 딸 전무의 앞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딸 전무는 그런 하지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조르르 따라갔다. 뭘 이렇게 자꾸 꾸물꾸물 피하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나. 같이 밥상 훔칠 준비하는 도둑놈들끼리 대놓고 작당 모의하는 꼴 보여서 뭐 좋을 게 있다고 자꾸 들러붙는 건지 모르겠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 주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지은 박하지가 구도완이 서 있는 연단을 향해 눈짓했다. 그 짧은 눈치를 알아들은 딸 전무가 낄낄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여긴 보지도 않아. 대본 외우느라 정신없어.”

“그래도 조심 좀 하시죠. 조심해서 나쁠 거 없는데.”

“박 대리 너무 눈치 본다. 원래도 저쪽보단 나랑 더 친하잖아, 아니야?”

징그럽게 친한 척을 해 오는 딸 전무의 손이 하지의 어깨를 턱 짚었다. 둘 중 누구와도 친해지고 싶지 않은 박하지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주위에 딸 전무 관심 끌 만한 사람 없으려나. 뻐큐라도 있으면 붙잡아다가 대신 안겨 주려고 주변을 살피던 하지는 문득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엔 구도완이 서 있었다. 대본이 적힌 종이를 구겨 쥐고 박하지와 딸 전무가 자리한 레퍼런스룸의 구석을 노려보는 눈빛이 선명했다.

가만 보니 이 인간들이 박하지 하나를 두고 서로 내 사람이라고 기 싸움을 하는 꼴이었다. 내 사람이라니, 생각만 해도 속이 거북해진 하지가 딸 전무에게 붙잡힌 어깨를 확 빼냈다. 먼지라도 붙은 듯 어깨를 털어내는 손끝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이만 들어가시죠.”

“박 대리는?”

“전 여기 준비되는 거 마저 보고요.”

“하는 것도 없으면서 뭐 볼 게 있다고. 같이 가, 같이.”

딸 전무가 어깨동무를 할 듯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미친놈이 뭘 잘못 처먹었나. 오늘따라 딸 전무의 집요함이 더 성가셨다. 하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빼는데, 순간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진동에 자신의 전화인가 싶어진 딸 전무가 손을 거두어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는 그 틈에 딸 전무를 완전히 지나쳐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먼저 들어가세요. 전 전화 좀 받고요.”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흔들어 보인 하지가 또 잡힐세라 잽싸게 몸을 돌렸다. 그래서 출입문으로 향하는 자신의 뒷모습을 끝까지 따라붙는 구도완의 수상한 시선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박하지는 설명회장에서 한참 떨어져 나왔다. 비상구 표시가 붙어 있는 건물 코너까지 온 후에야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온여환의 번호가 아니었다. 그가 번호를 바꾸고 전화를 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기엔 떠 있는 번호가 박하지에게 이미 익숙한 번호였다. 채 사장이었다. 그동안 연락이 안 되더니 왜 하필 오늘처럼 정신없는 날 전화를 하는지. 하지는 어쩔 수 없이 볼멘소리를 내며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 ……하지야.

“뭐예요, 징그럽…….”

갑자기 왜 이름을 부르고 난리야. 거기까지 생각하던 하지가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채 사장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 하아, 내가 이걸 말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왜 그래요? 무슨 말인데요?”

- 하지야, 나도 진작 말하고 싶었는데, 솔직히 좀 무섭기도 했고.

“아니, 무슨 말……!”

답답함에 순간 언성을 높인 하지가 아차 싶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이 넓은 빌딩에서 박하지가 서 있는 코너까지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는 벽 안쪽으로 고개를 바싹 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말이냐고요, 사장님. 제발 제대로 좀 얘기해 봐요.”

알아들을 수 있게. 그 말에 채 사장이 길게 심호흡을 했다. 알았어, 제대로 얘기할게. 한껏 가다듬어 내뱉는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는 그 우스운 비장함에도 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 그, 네가 나한테 부탁했던 거 있잖아. 어머니 찾아 달라고 했던 거.

“혹시 찾았어요? 찾았는데 저 만나기 싫대요?”

- 아니, 들어 봐. 그래, 찾았어. 찾긴 찾았는데, 그게 뭔가 좀 이상해서 너한테 확인 좀 해 보려고…….

“무슨 소리예요? 찾았는데 이상하다니?

- 내가 찾은 네 어머니는 백영란 씨야. 너를 낳기 전까지 쭉 연변에 사셨고, 한국에 들어온 지 5개월 만에 너를 낳았어.

“……5개월이요?”

조산을 했다고 하더라도 5개월은 너무 일렀다. 그렇다면 그 전에 아버지를 만나 나를 가졌다는 건가? 하지의 생각을 채 사장의 말이 끊어 냈다.

- 5개월 전에는 연변 여자 교도소에 수감 중이셨고. 1년 동안.

“그건…….”

말이 안 됐다. 1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하고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아버지를 만나 박하지를 가진단 말인가.

- 그래, 이상하지. 나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싶어서 너한테 확인을 해 보려고 했어. 근데 그사이에 넌 연락이 안 되고, 웬 이상한 남자가 찾아와선…….

“이상한 남자요?”

- 그래! 웬 커다란 남자가 찾아와선 내 앞에 총을 들이밀면서 네 어머니 왜 찾았냐고 물어보더라니까!

총을 들이밀며 찾아오는 남자라니. 박하지 주변에서 그 정도 짓을 저지를 수 있는 남자들이라면 마닐라에 모여 있는 저 깡패들 아니면 박하지를 이곳으로 보낸 사람들밖에 없었다. 국정원. 그중에서도 제멋대로 마닐라와 한국을 오가는 남자. 하지는 온여환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요?”

- 몰라, 잘 기억도 안 나. 그냥 갑자기 찾아와서 네 어머니 왜 찾아다녔냐고, 누구한테 사주받은 거냐고 묻잖아. 그래서 내가 너한테 직접 부탁받은 거라고 하긴 했는데……. 하, 박 대리야. 너 어쩌다 그런 새끼랑 엮인 거냐? 태국에선 뭐 하고 있는데? 휴가를 가긴 한 거야?

채 사장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2년 동안 결근 한 번 안 하던 녀석이 갑자기 일까지 때려치우고 태국을 간다 그럴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다.

- 너 뭐 안 좋은 일에 엮인 거냐? 그런 거면 인마, 제대로 얘기를 해 봐. 그래도 나 형사였잖아. 내가 여기저기 부탁 좀 해 볼게.

사실은 형사가 아니라 파출소에서 생활 안전 업무를 담당하던 경찰관이었다는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는 채 사장이었다.

“그 남자 어떻게 생겼어요?”

- 어? 그 새끼?

“키 185 이상, 검은 머리에 옆머리 짧게 치고 눈 크고 속쌍꺼풀, 밝은 갈색 눈동자, 맞아요?”

-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좀 재수 없게 생겼어.

“…….”

- ……잘생겼었다고.

하지가 아는 한 자신이 말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재수 없게 잘생기기까지 한 사람은 한 남자뿐이었다. 온여환, 그가 채 사장을 찾아가 총을 들고 협박했다. 대체 왜? 박하지의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나? 혹시 하지가 추측했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가 박양일과 선장의 무언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걸까?

- 근데 그 새끼, 너희 어머니를 이미 알고 있었어.

“……예?”

뭐라고요? 다시 묻는 하지에게 채 사장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미 알고 있더라고.

- 이름까지 알던데? 그래서 난 너랑 아는 사람인가 했는데, 그 새끼가 너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라잖아. 자기가 찾아온 것도, 네 어머니에 대해서도.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요?”

- 어. 근데 네 어머니 얘기를 어떻게 너한테 안 하냐……. 나도 무서워 죽겠다, 진짜. 흥신소 혼자 지키는 것도 쫄린다고, 인마.

온여환이 박하지의 어머니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놀랍지는 않았다. 박하지에 대한 정보라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어 하나도 빠짐없이 꿰고 있을 남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제 어머니에 대해 숨기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박하지가 채 사장에게 따로 부탁했던 내용을 미리 알아보고 협박까지 하며 감추려고 했다는 사실은 그의 기분을 이 빌딩의 가장 깊은 바닥으로 처박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온여환은 또 박하지를 속이고 있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 사실과 진실을 감추고 적당한 먹이만 내던져 주며 멍청한 박하지를 길들이고 있다. 하지의 앞이마가 차게 식었다.

- 여보세요? 야, 박 대리.

“일단…….”

- 어? 뭐라고?

“일단 알겠어요.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 나중에? 나중에 언제…….

“지금 오래 통화 못 해요. 끊어요.”

- 야, 잠깐……!

하지는 채 사장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긴 핸드폰 화면에 최근 통화 목록이 떴다. 어젯밤부터 박하지가 온여환에게 줄기차게 걸어 댔으나 연결되지 못한 발신 전화도 보였다. 그의 번호를 가만히 노려보던 하지가 다시 한번 통화를 눌렀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에도 신호음이 세 번 넘어가기 전까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때는 나도 너한테 비밀이 생길 거야.

하얀 벽을 노려보며 핸드폰을 귀에 붙이는 하지의 숨소리가 컸다. 새액새액, 바람처럼 새어 나가는 숨소리 사이로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세는 것은 금방이었다.

어이없게도 웃음이 터졌다. 온여환은 언제나 그에게 불리한 순간마다 사라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슬그머니 다시 나타나 그럴듯한 변명과 해명으로 박하지의 마음을 녹이려 든다. 위선적이고 가증스럽게. 그를 탓할 것도 없었다. 그가 매번 그런 식으로 굴어도 등신같이 얌전히 기다리다가 순순히 넘어가 주던 것이 박하지였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뻔한 변명을 기다려 줄 생각도, 속아 줄 생각도 없었다. 인내는 끝났다.

아직도 신호음이 멈추지 않은 전화를 미련 없이 끊어 낸 하지가 곧장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바로 뒤에서 뻐큐가 달려들었다.

“으악, 깜짝아! 박 대리님, 여기서 뭐 하세요!”

하마터면 그대로 부딪쳐 코가 깨질 뻔한 것을 간신히 피하느라 벽에 어깨를 박은 뻐큐가 울상을 지었다.

“제가 얼마나 찾았다고요. 이제 곧 시작한대요, 얼른 오세요.”

“……그래. 가자.”

5분 뒤, 라우마엠텍의 투자 설명회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온여환을 위해 준비한 박하지의 피날레도 막을 올릴 때였다.



설명회는 장장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컨퍼런스 룸 앞에서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은 쉬이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설명회에서 들었던 사업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정보를 모으며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쪽은 라우마엠텍 관계자도 아니고, 설명회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았던 구도완도 아니었다. 투자자들은 설명회가 열리기 전 선투자를 하고 쏠쏠한 이익을 본 선배 투자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이 몇 퍼센트의 이익을 보았는지, 이 사업이 진짜인지를 그들에게서 확인받으려는 것이었다.

선배 투자자들은 라우마엠텍의 사업이 얼마나 전도유망한지 열변을 토했다. 자신들의 명함까지 직접 나눠 주었다. 그렇게 새로운 투자자들을 모집해야만 그들에게 더 많은 코인이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그 코인이라는 것이 언제 휴지 조각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모두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부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마자위랑 아주 다정하던데.”

그 난리 통 속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하지의 뒤로 구도완이 말을 걸어왔다.

“나 모르는 사이에 자위도 아주 잘 도와주는 사이가 됐나 봐.”

박하지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려놓는 것이 투자 설명회 시작 전 보았던 딸 전무와 박하지의 모습을 재연하는 듯했다. 더러운 말장난을 포함해서.

“사람 이름 가지고 장난치는 거, 나이 먹고 하기엔 좀 유치한 짓이지 않나요?”

“장난? 난 그냥 둘이 서로 많이 도와주고 친해진 것 같아서 한 말인데, 왜? 다른 뜻으로 들렸어?”

모르는 척 웃는 낯짝이 아까 설명회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던 그때와 똑같았다. 사람 속이는 뻔뻔한 표정. 하지는 제 어깨에 올라온 기분 나쁜 무게를 떨구려 옆으로 크게 한 걸음 옮겨 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구도완은 굳이 하지를 따라붙지 않았다. 하지의 시선이 다시 컨퍼런스 룸 앞으로 향하려는 때였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뿌듯하기라도 한가 보지?”

뿌듯? 상황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을 들은 하지가 구도완을 돌아봤다. 영문을 모르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 표정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구도완이 빈정이라도 상한 사람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뿌듯함 느끼기엔 아직 일러. 이 사업 끝까지 성공시키는 거, 결국 네가 아니라 내가 될 거니까.”

구도완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는 그의 말을 들은 뒤에야 구도완이 정말로 자신이 이 상황을 뿌듯해한다고 생각한다는 걸 이해했다. 사람들이 거짓된 정보에 현혹되고, 돈에 눈이 뒤집혀 또 사람을 부르고, 그 사람이 또 사람을 부르고, 구도완은 이런 걸 뿌듯하게 여겨야 정상인 세상 속에 사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는 그런 구도완의 얼굴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정상에 속하는 사람인가, 비정상에 속하는 사람인가.

“그러니까 방심하지 마. 마자위랑 뭐 얼마나 짝짜꿍들이 잘 맞는지 모르겠는데, 아직 이 사업 대표는 나야. 알았어?”

“……예. 구 대표님 다 가지세요.”

“뭐?”

이딴 게 정상이라면, 박하지는 그냥 이 세상으로부터의 추방을 택하겠다.

하지가 몸을 돌렸다. 그의 뒤로 구도완이 어딜 가느냐 묻는 게 들렸지만 답하지 않았다. 하지는 빌딩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핸드폰을 들었다. 온여환과 채 사장의 번호가 찍혀 있는 통화 목록을 끌어 내렸다. 그의 손이 멈춘 것은 데니스 장의 번호였다. 오늘 저녁 비행기를 타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아직 마닐라에 있을 것이다.

하지는 그 번호를 꾹 눌렀다. 신호음이 이어졌다. 데니스 장은 세 번의 신호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응답했다.

- Hello?

기다림에 지친 박하지에게 단비 같은 응답이었다. 온종일 기다려 들은 답이 겨우 이것이라는 사실에 실소하며, 하지는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답했다.

“I want to leave.”

이제 정말 할 일이 많았다. 추방의 절차가 복잡했다.



* * *



박하지는 선장과 달리 자기 확신이 없었다. 그에게 확신과 믿음이란 제 안에 싹튼 모든 불안 요소들이 철저히 배제된 후에야 간신히 생기는 종류의 마음이었고, 그걸 얻어 내기 위해선 반드시 확인과 증명의 과정이 필요했다. 박하지가 데니스 장을 만나서 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선장이 이 모든 일을 모르고 있다는 확실한 증명이 필요해서.

‘처음 뵙겠습니다. 박하지라고 합니다.’

어제 오후, 박하지와 데니스 장이 만난 곳은 마닐라 구시가지에 위치한 중국풍의 찻집이었다. 박하지가 고른 장소는 아니고, 이 자리의 주선자라고 볼 수 있는 딸 전무의 취향이었다. 가게를 통째로 빌린 것인지, 아니면 이 더운 나라에선 원래 한낮에 뜨거운 차를 즐기는 취미를 가진 이들이 없는 것인지, 찻집의 손님은 그들뿐이었다. 이럴 걸 알고 일부러 이 찻집을 골랐나 싶기도 했다.

‘반갑습니다. 데니스 장이라고 합니다.’

하지의 인사에 화답을 해 온 것도 딸 전무가 친히 붙여 준 통역사였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 통역사는 데니스 장의 바로 옆에 붙어 앉아 하지가 하는 모든 말과 딸 전무의 모든 말을 주의 깊게 듣고 한국어와 중국어로 하나도 빠짐없이 통역했다. 말로는 두 사람이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겠다며 갖은 생색을 다 내던 딸 전무가 살아 있는 도청기를 붙여 놓은 셈이었다. 얼추 예상은 했던 일들이라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었다고요.」

알이 두꺼운 무테안경을 쓴 데니스 장이 중국어로 말하고, 그 옆에 앉은 통역사가 한국어로 전했다.

‘예. 이번 일이 워낙 중요하니까요. 직접 뵙고 듣고 싶은 말도 있었고요.’

하지의 대답을 들은 데니스 장은 본격적으로 이번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딸 전무가 계획했던 공동 페이퍼 컴퍼니 설립과 실소유주 이전 문제는 모두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계약 서류는 이중으로 작성되었고, 구도완이 서류 열람을 원할 시 어떤 서류를 보여 주면 되는지, 박하지가 구도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들을 해 줘야 하는지 등을 아주 상세히 설명했다.

통역사를 거치지 않으면 하지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중국어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얼마나 유창하고 막힘없이 설명하고 있는지만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변호사다운 면모였다. 여기에서 박하지가 무엇을 지적하더라도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히 준비된 변론을 제시할 거란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딸 전무가 저 혀에 넘어갔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 전무님이 관리하실 수 있도록 명의를……. 어머!’

말을 잇던 통역사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난 것은 갑작스레 밀린 테이블에 데니스 장이 들려고 하던 찻잔이 엎어지면서였다. 통역사가 한국말로 통역을 하는 동안 여유롭게 홍차나 홀짝이던 데니스 장은 갑자기 제 명치를 치는 테이블에 큽, 하고 눌린 기침을 뱉었다.

엎어진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붉은 홍차가 그의 바지를 적셨다. 그 뜨거움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데니스 장이 바지를 펄럭이며 열을 식혔다. 그의 눈이 제 앞에 앉은 박하지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하지는 그제야 테이블 다리를 밀었던 발을 잽싸게 치우고 일어났다. 얼굴엔 걱정과 미안함을 한껏 드리운 채였다.

‘아, 죄송합니다. 다리를 치우려다가……. 괜찮습니까?’

데니스 장은 하지의 말을 통역 없이도 알아들었는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는 화장실 표시를 따라 출입문 바깥으로 향하는 데니스 장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의 뒤를 따르려 걸음을 뗐다. 그 모습에 얌전히 앉아 있던 통역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는 밖으로 나서려다 말고 통역사를 돌아봤다.

‘같이 가시려고요? 저 볼일 볼 건데 거기에도 통역이 필요한가.’

통역사의 얼굴에 곤란한 빛이 서렸다. 확실히 딸 전무에게 둘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오라는 지령을 받은 모양이었다. 가볍게 웃은 하지는 금방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출입문을 나섰다.

화장실은 찻집 출입문 바로 바깥에 붙어 있었고, 1층 상점과 공용으로 사용하는 곳인 듯했다. 하지가 화장실에 들어서자 세면대 앞에서 차가운 물로 허벅지의 열을 식히던 데니스 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는 측은한 표정과 함께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다. 역시 한국어였지만 남자는 이번에도 대강 알아들었다는 듯 멋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 다행이라는 듯 웃어 보인 하지가 몸을 돌려 화장실 문을 잠갔다. 철컥,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에 어정쩡한 자세로 바지를 닦던 데니스 장이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하지가 다가가자 그가 본능적으로 주춤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는 틀어 놓은 물에 손을 씻으며 말했다.

‘나는 마자위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데니스 장은 박하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챘는지 그의 입 모양을 주시했다.

‘그렇다고 구도완의 사람도 아니죠.’

하지의 음성은 물소리에 묻힐 만큼 작았으나, 그다음 말 만큼은 데니스 장에게 또렷이 닿았다.

‘선장.’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단어 하나는 분명하게 알아들은 데니스 장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박하지의 팔목을 덥석 붙잡고 먼저 화장실 칸 안쪽으로 들어선 것은 그였다. 세면대의 물은 여전히 틀어 둔 채였다.

「당신 누구야?」

데니스 장의 입에서 영어가 튀어나왔다. 중국어를 할 때보다 훨씬 사납게 들리는 말투였는데, 어쩌면 그건 말투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기분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말했잖아. 선장의 사람이라니까. 마자위의 사람도, 구도완의 사람도 아니라고.」

하지의 대답에 데니스 장의 낯빛이 퍼레졌다. 초조한 건지 불안한 건지 아니면 의심스러운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세 가지 모두였을 수도 있다.

「나는 그분한테 당신 얘기는 못 들었어!」

「그렇겠지. 그 사람이 언제 다른 얘기 하는 거 본 적 있어?」

「당신이 그분 사람이라면 그분을 통해 날 만날 수도 있었잖아! 왜 마자위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무슨 확인? 그리고 당신이 그분의 사람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증명할 수 있어?」

「증명? 내가 선장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 외 또 다른 증명이 필요해?」

「그렇지만…….」

데니스 장은 말문이 막힌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좁은 공간을 채우는 거친 숨소리가 세면대의 물소리와 섞였다. 하지는 데니스 장이 머리를 굴릴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이런 대화는 빠르게 몰아붙이고, 상대를 정신없이 만들어 사고를 정지시키는 게 중요했다.

하지는 짐짓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에 다가섰다. 데니스 장이 주춤 물러났다. 그래 봤자 얼마 가지도 못하고 변기에 다리가 걸리는 협소한 화장실이었다. 하지는 그 점을 십분 활용하여 데니스 장의 어깨를 변기 위에 꾹 눌러 앉혔다.

「아무래도 당신이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것 같은데, 증명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해야지.」

「뭐? 내가 뭘!」

하지는 그 짧은 순간 데니스 장에게 던질 질문을 수십 가지쯤 떠올렸다. 원래라면 왜 선장을 배신하고 마자위에게 붙었는지를 추궁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데니스 장이 여전히 선장의 사람이고 선장의 지시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렇다면 데니스 장이 이 자리에 나온 것조차 선장은 모두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런 거라면 데니스 장은 자신이 왜 마자위를 도우며 이 자리에 나왔는지 따위를 추궁하는 박하지를 선장의 사람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질문의 전제가 달라져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는 빠르게 생각했다. 데니스 장이 여전히 선장의 지시로 일을 하고 있다면, 그럼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그가 당황하며 궁지에 몰릴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오늘 아침, 왜 전화를 안 받았지?」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던져 본 말이었다. 박하지는 선장과 데니스 장 사이에 오간 얘기를 하나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이 쌓아 온 기존의 정보를 활용할 수 없다면, 차라리 새로운 정보를 던지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전화?!

「지금으로부터 여섯 시간 전, 두 번 연락을 시도했는데 두 번 다 안 받았잖아?」

「그게 무슨…… 연락 같은 거 없었어!」

데니스 장은 영문을 몰라 억울해 보였지만, 동시에 퍽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시간과 횟수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한 하지의 말에 저게 진짜인가, 생각하는 거였다. 오늘 아침에, 여섯 시간 전에, 정말로 선장에게 연락이 왔었나? 내가 그때 뭘 하고 있었지? 화장실을 갔었나? 기억을 되짚는 그에게 하지는 오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양손으로 그의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당신은 오늘 나를 만나기로 해 놓고 정작 선장의 연락은 안 받았어.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것 같아? 데니스 장이 마자위에게 돌아섰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무슨 소리야! 오늘도 선장이 시키는 대로만 했잖아!」

다급히 소리치는 그의 말에 순간 하지는 맥이 탁 풀렸다. 하마터면 붙잡고 있던 데니스 장의 멱살도 그대로 놓칠 뻔했다.

「다시 말해 봐.」

「마자위 사람 만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이러냐고!」

억울함에 덜덜 떨리는 데니스 장의 몸뚱이가 그의 말이 모두 진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덩달아 그의 멱살을 쥔 하지의 손도 떨려 왔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떨림 덕분에 자신의 떨림이 감추어져서.

「선장이 정말 다 알고 있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뱉은 말을 알아듣지 못한 데니스 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는 손끝에 힘을 주고 그의 멱살을 다시 제대로 틀어쥐었다.

‘선장이 다 알고 있냐고.’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던 데니스 장의 한순간에 피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사색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신 선장 사람 아니지?」

이제 와서 알아차려 봤자 늦은 일이었다. 빠르게 데니스 장 위에 올라탄 하지가 그의 머리를 변기 뚜껑 위에 처박을 듯 몰아붙였다. 허리가 한껏 젖혀져 고개가 뒤로 꺾인 남자가 허벅지를 퍼덕거리며 난리 통을 피웠지만, 무게로 찍어 누르는 박하지를 쉽게 뿌리치진 못했다. 컥컥거리며 기침을 하는 남자의 침이 하지의 얼굴까지 튀었다. 하지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얘기해. 선장이 어디까지 알고 있어?」

「미쳤어? 내가 그걸 얘기하면 난 죽은 목숨이야!」

「지금 말 안 해도 죽은 목숨이야.」

하지가 남자의 울대를 쥐어뜯을 듯 움켰다. 목구멍이 막힌 데니스 장은 차마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고상해 보이던 무테안경은 화장실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당신 선장이랑 계약할 때 의뢰인에 대한 보안을 철저히 지키는 게 계약 조건이었지.」

「크흡, 비, 비켜……!」

「지금 내 주머니 안쪽에서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거든. 당신이 멍청하게 선장에 대해 떠드는 바람에 내가 이 모든 걸 알게 됐다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할까? 나만 죽이진 않을 거야, 그렇지?」

데니스 장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박하지의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 모습에 차갑게 웃은 하지가 남자의 멱살을 확 잡아당겨 변기 아래로 끌어 내렸다. 크게 넘어진 데니스 장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는 남자를 뒤로한 채 화장실 칸막이 문을 열고 나왔다. 배수구가 좁은 세면대에선 미처 내려가지 못한 물이 바깥까지 넘쳐흐르고 있었다. 하지는 물을 잠글 생각도 안 하고 손을 씻었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애써 무시했다.

「난 혼자는 안 죽어. 그러니까 상황 파악이 됐으면 똑바로 말해. 선장이 어디까지 알아?」

젖을 손을 탈탈 턴 하지가 아직 변기 아래 주저앉아 있는 데니스 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분한 눈으로 하지를 노려봤다. 더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 눈이었다.

「나도, 나도 잘 몰라.」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

「진짜야! 나도 선장이 마자위의 일을 도와주라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하면 사업 수익이 다 마자위한테 넘어갈 텐데 왜 이걸 해 주라는 건지……. 그렇지만 안 물어봤어. 난 원래 그분한테 이유 같은 거 물어보면서 일하지 않아. 항상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한다고!」

「시키는 대로 하고, 돈도 받고?.」

「…….」

「그러니까 당신은 마자위에게도 돈을 받고 선장에게 또 추가 금액을 받았다?」

데니스 장의 말대로라면 선장은 마자위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어떤 의도로 이런 물밑 작업을 하고 있는지 다 알면서 눈감아 주고 있다는 소리였다. 자신의 일을 봐주는 데니스 장에게 마자위의 일에 동참하라고 돈까지 줘 가면서. 이건 단순히 모른 척해 주는 정도가 아니었다.

선장은 왜 마자위의 배신을 부추기는 걸까. 하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다, 다 말했어. 내가 말한 거, 선장한테 말 안 할 거지?」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데니스 장이 불안한 눈으로 하지를 올려다봤다. 하지는 그 처절한 얼굴 속에서 생존을 향한 강한 집념을 느꼈다. 생존. 그래, 그것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든 아니든, 일단은 자신이 살길부터 찾아야 했다.

「녹음본을 가지고 싶어?」

하지가 제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그의 모습에 하지는 어차피 이미 클라우드에 자동 공유가 되었으니 힘 뺄 필요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깨가 축 처진 데니스 장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하지는 그 질문에 대답이 될 만한 말을 던져 주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았어.」

「…….」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신분, 마닐라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 그게 준비되면 이 녹음본 넘겨줄게.」

박하지에게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방법이 필요했다. 그건 하지의 유일한 보험이었다.

「공짜로 해 달라는 말은 아냐. 돈 좋아하는 당신한테 공짜로 해 달라 그랬다가 언제 뒤통수를 맞을 줄 알고.」

「…….」

「US달러로 100만 달러.」

박하지가 선장에게 스위스 은행으로 입금받았던 돈이었다. 금액을 들은 데니스 장의 눈이 번뜩 뜨였다. 박하지는 그제야 비로소 딸 전무의 말을 이해했다. 이쪽 일하는 사람들은 사람한테 정 안 주고, 돈한테 정 준다던 그 말. 데니스 장이 그런 사람인 게 다행이었다.

「당신도 손해 보는 조건은 아니지 않아? 돈도 생기고 목숨도 부지할 수 있는데.」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는데?」

하지는 세면대 위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매무새를 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해진 모습이었다. 몸을 돌린 하지가 화장실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철컥, 돌아가는 문고리의 소리가 묵직했다.

「내가 떠나고 싶다고 할 때까지.」

문이 열렸다. 화장실을 떠나는 하지의 걸음이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 * *



오늘의 일몰 시간, 오후 6시 5분. 박하지가 집으로 돌아온 시각이 바로 그 시간이었다. 거실 가운데 덩그러니 서서 해가 지고 여광만 남아 노을이 우는 하늘을 바라보던 하지는 현관문이 돌아가는 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박하지가 즐겨 마시는 맥주와 간단한 음식을 사서 들어오던 곰발이 흠칫,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계속 두드려도 답이 없길래…….”

곰발이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에도 어둠은 아주 느리게 하늘을 잡아먹어 갔다. 비가 올 듯 흐린 날이었다. 붉었던 하늘은 점점 더 보랏빛에 가까워졌다. 꼭 우주를 보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색으로 피어난 하늘은 세상을 다 거짓처럼 보이게 했다. 보랏빛 바다를 떠다니는 먹구름도 거짓, 저 멀리 구름을 뚫을 듯 솟아 있는 뾰족한 마천루도 거짓, 낮과 다른 색으로 반짝이며 위장하는 나무도 거짓, 그리고 그 모든 걸 바라보고 서 있는 박하지도.

“곰발.”

부엌으로 향하던 곰발의 걸음이 멈췄다. 식탁 위에 음식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거슬리는 적막 속에서 박하지가 다시 한번 그를 소리 내어 불렀다. 곰발. 그 부름에 곰발은 꼭 하지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 본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밀히 따지자면 처음 들은 게 사실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가 자신을 곰발이라고 부르는 걸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쪽은 온여환을 왜 믿어?”

자신을 불러 놓고 한다는 말이 저런 말일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곰발은 짙은 그림자가 진 듯한 하지의 뒷모습을 빤히 봤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렇게 답하며 돌아보는 하지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노을빛이 비치는 얼굴의 분위기가 조금 다른 듯 보이기도 했지만, 노을 탓이겠거니 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래도 전직 깡패였다는 사람이 대체 왜 그런 일까지 해 주나 싶어서.”

턱을 까딱 들어 올린 박하지가 곰발이 사 온 맥주와 음식을 가리켰다.

“혹시 빚이라도 졌어?”

어정쩡한 자세로 괜스레 비닐봉지를 만지작거리던 곰발이 이내 박하지를 향해 완전히 돌아서며 말했다.

“빚을 지긴 했죠.”

돈처럼 벌어서 갚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문제지.

“예전에 형님이 잠실 하우스 정리하면서 수성파 새끼들을 한꺼번에 정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잔바리 새끼 몇 명이 형님 치겠다고 벼르고 있다가 저한테 돈을 찔러 주더라고요.”

“…….”

“타이밍 한번 뭣 같았죠. 저는 하필 그때 목돈이 필요했거든요.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뻔한 얘기였다. 돈이 필요했던 곰발은 그 돈을 받고 온여환이 며칠 후 홍콩에서 들어온 물건을 작업하러 인천항 컨테이너에 나갈 거라는 정보를 흘렸다. 수성파 놈들은 밀폐된 컨테이너에 온여환을 가둬 두고 작업을 뜰 예정들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회가 쳐져 나온 것은 온여환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다행히 곰발이 수성파 잔바리 놈들에게 돈을 받고 정보를 찔러 줬다는 건 알려지지 않았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근데 얼마 안 지나서 형님이 제 계좌에 돈을 꽂으셨더라고요. 이게 뭔 돈인가 했죠. 그때 제가 받을 수 있는 숫자의 돈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닥치고 그냥 받아 가라고만 하시더라고요.”

“…….”

“그때 아셨구나, 했어요.”

곰 발바닥 같은 손이 코밑을 벅벅 문질렀다.

“……구려.”

코끝이 발개진 곰발의 얼굴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바라보던 하지가 툭, 뱉듯이 꺼낸 말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곰발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의 눈가가 건조했다.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에 물기가 다 타서 사라진 사람처럼.

“온여환한테 홀린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다 구리지?”

나를 비롯해서. 그렇게 덧붙인 말은 들릴 듯 말 듯 작았지만, 곰발에게는 분명히 전해졌다. 그 안에 스민 어떤 자괴와 절망마저도 또렷하게.

“온여환이 왜 그랬을지는 생각 안 해 봤어?”

“…….”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냐고. 지금도 봐. 그때 그 일 하나로 그쪽을 이렇게 훌륭한 심부름꾼으로 이용하고 있잖아.”

그는 항상 절박한 사람들을 이용했다. 곰발이 그랬듯, 박하지도 그랬다. 그는 사기꾼이었다. 사람들의 돈을 빨아먹겠다고 거짓 사업 정보를 흘리는 사기꾼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박하지에게 만큼은 그랬다. 그가 박하지에게서 가져가려던 것이 단지 돈이 아니었을 뿐.

박하지가 그에게 바란 건 딱 하나였다. 나를 또 바보로 만들지 말라는 것. 그런데 온여환은 고작 그거 하나를 못 지켰다.

“이용당한 적 없습니다. 형님도 절 이용하신 적 없고요.”

곰발의 말에 하지는 헛웃음이 터졌다. 그의 모습이 마치 과거의 자신 같았다. 이용당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멍청하다. 분수를 모르고 그 사람이 나에게만큼은 진심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진심? 그게 대체 뭔데. 그 실체도 없는 게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안에서 솟구치는 뾰족한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박하지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까지 떨며 웃던 하지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어린애를 나무라는 듯한 곰발의 말이 둔탁하게 대가리를 쳐 내리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드는 하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뭐? 되묻는 음성이 갈라져 나왔다. 쯥, 하고 혀를 차며 인상을 쓴 곰발은 입을 열 듯 말 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라 그랬냐고, 씨발.”

기어이 하지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곰발이 그제야 하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5년 전에 회장님 사라지셨을 때 도 실장님……. 아니, 형님이 저한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도련님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라는 거였습니다.”

“…….”

“형님이 직접 움직여 알아보시면 도련님 위험해지실까 봐 매번 저한테 시키셨고요. 형님은 단 한 번도 도련님한테 관심 끊으신 적 없습니다.”

“……그래서? 스토킹하느라 수고 많았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

온여환이 박하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를 살폈다고? 그딴 것에 감사해야 하나? 하지의 손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다 잡아 뜯고 싶었다. 하지는 제 머리카락을 쥔 채 간신히 그 욕구를 참아 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씨발, 이용할 거 다 이용하고, 그렇게 사람 팔아넘기고서 안 죽고 잘 살아 있나 확인하면, 그럼 온여환이 했던 짓이 다 없던 게 돼?!”

“정말로 팔아넘길 생각이었으면……!”

무언가 말하려던 곰발이 입술을 꾹 물며 숨을 참았다. 그 꼴이 하지의 화를 더 돋웠다.

“말해.”

“…….”

“말하라고!”

“형님이 왜 그날 인천항에 못 나갔었는지 아십니까?”

비가 쏟아지던 인천항, 그날의 풍경이 하지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하지의 뒤로 보이는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보랏빛 하늘은 어느새 암흑이 되었고, 두 사람은 어슴푸레한 빛만 간신히 비쳐 오는 집 안에서 서로 다른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형님 총 맞았었습니다. 회장님한테요.”

그 순간 박하지는 박양일의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렸다.

‘도 실장 그 새끼가 국정원 프락치라고!’

그렇게 소리치던 말 뒤로 벼락같은 총성이 울렸었다. 박하지는 그 총소리를 잊고 있었다. 총소리가 났으면 그 총에 누군가는 분명히 맞았을 텐데,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사람이 온여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더욱더.

“심장 바로 밑을 관통했고,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아서 한 달 만에 깨어나셨습니다. 그 뒤로 반년을 누워 지내셨는데, 그런 와중에도 저한테는 늘 도련님 어떻게 지내는지만…….”

온여환의 왼쪽 옆구리에서 등까지 이어져 있던 커다란 흉터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내가 맞았네.”

박하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그가 맞았다. 분명히 5년 전까지는 없었던 흉터였다. 박하지가 온여환에 관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온여환은 그 흉터가 총상에 의한 것이라고,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라고만 했었다. 그게 박하지의 아버지에게 맞은 총이라고도, 죽을 뻔했었다고도, 그래서 그날 너를 데리러 인천항에 가지 못했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너는 나에게, 정말이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체 서로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한때의 동정, 얄팍한 동질감, 케케묵은 죄책감, 버리지 못해서 안고 가는 애증, 축축하게 자라나는 미련. 그 모두일 수도, 그 무엇도 아닐 수도 있다. 무엇이든, 하지는 단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한 건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면 이럴 수 없었다.

“두 분 사이에 뭐가 있는지 전 잘 모르고, 알 필요도 없지만요. 형님 얘기도 한 번은 좀 들어 봐요.”

“…….”

“사람한텐 누가 물어봐 주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얘기들이 있어요.”

곰발은 그 말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 홀로 남은 집 안에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내려앉았다. 박하지는 그 자리에 한참이나 굳은 듯 서 있었다.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바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려서였다. 화면엔 메시지 한 통이 떠 있었다. 데니스 장이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박하지가 부탁한 것을 지금 준비 중이고, 준비를 마치는 데엔 최소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메시지의 마지막엔 이런 질문이 적혀 있었다. 그래도 계속 준비할까? 하지는 답장을 누르지도 못하고 손을 떨궜다.

머릿속에 곰발이 했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사람한텐 누가 물어봐 주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얘기들이 있어요.

그러나,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말도 있는 법이었다. 하고 싶어도 도무지 입에서 나오지 않는 말들. 박하지와 온여환은 그런 말들을 너무 많이 삼켜 넣고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시작부터 어긋나서 도무지 이어질 수 없는, 그런 것이 우리였다.



하지가 보스턴백을 앞에 둔 지 한 시간째였다. 짐을 싸겠다고 꺼내 온 가방을 내려다보며 박하지는 무엇을 싸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천천히 집 안을 둘러봤다. 이곳에서 살았던 시간만 두 달 남짓이었다. 참 애매한 시간이었다. 여행이라기엔 길고, 생활이라기엔 짧았다. 박하지는 늘 그 애매한 기분으로 이 생활을 견뎠다. 아니, 지금뿐이던가. 그는 제 삶도 그런 식으로 견뎌 냈다. 언젠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 버릴 사람처럼 단출하게 살았다. 덕분에 떠날 때만은 항상 가벼웠다.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들고 갈 게 없었다. 짐이 없는 삶이란 이렇듯 홀가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빈 가방을 내려다보는 지금의 박하지는 왜인지 그런 홀가분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꼭 중요한 짐 하나를 빠뜨린 사람처럼 가방을 잠글 수가 없었다. 짐을 버리고 가는 것이 싫어서 짐을 만들지 않고 살았던 박하지인데, 지금은 왜 이토록 무언가를 버리고 가는 느낌이 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온여환의 얼굴이 떠오르는 이유도.

가져 본 적조차 없는 것을 버릴 수가 있나. 스스로 의문할 때였다. 잠그지 못한 가방 옆에서 핸드폰이 울었다. 길게 이어지는 진동에 혹시 온여환일까, 짧은 기대를 해 보았으나 화면에 뜬 번호는 구도완이었다. 밀려오는 실망감에 어깨가 처졌다.

바닥에 누운 핸드폰으로 손을 뻗으며, 하지는 불현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기대. 방금 제 안에 떠올랐다가 사라진 게 기대였었나? 아직도 그런 걸 가지고 있었나?

하지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감정을 떨쳐 버리려는 듯 빠르게 통화를 눌렀다.

- 박 대리, 뭐 해?

놀러 나오라고 부추기는 친구들끼리나 할 법한 첫마디에 하지의 미간이 밀려 올라왔다. 둘 사이에서 나올 만한 말은 절대 아니었다. 구도완답지 않은 친근한 말투에 의심부터 들었다.

혹시 무슨 낌새라도 알아차린 걸까. 아니다. 그렇다기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하지는 지레 겁먹어 요동치는 심장을 차분히 쓸어내렸다. 이곳에선 먼저 쪼는 새끼가 가장 쉬운 먹잇감이 된다. 박하지는 적어도 자신이 첫 번째 먹잇감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묻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말투였다.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픽픽 웃어 대며 이상하게 구는 것은 구도완이었다.

- 아, 내가 오늘 박 대리한테 꼭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잠깐 나오지?

“……오늘은 좀 피곤한데요. 내일 보여 주시죠.”

내일이 되면 나는 여기에 없을 거니까. 그 말을 속으로 삼킨 하지가 그냥 전화를 끊으려는 때였다. 어어, 하고 말을 끌며 과하게 톤을 높이는 구도완의 음성이 그의 귀를 잡아끌었다.

- 이 새끼가 내일까지 살아 있으려나 모르겠는데.

뒤이어 들려온 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내리치는 듯한 소리였다. 희미한 기침 소리도 들렸다. 하지의 뒷덜미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박하지는 그 소리의 정체를 안다. 언제였던가. 하지가 제 아버지에게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였던가. 그 말에 아버지는 가정 교사를 두들겨 팼다. 그는 아버지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 나온 가정 교사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얻어터지는 것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았다.

눈을 감으면 소리가 들렸다. 손바닥으로 귓구멍을 틀어막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사람의 발이 사람의 머리통을 걷어찰 때 나는 소리였고, 의식이 혼미해 숨이 꺼져 가는 이가 간신히 터뜨리는 가녀린 호흡이었다.

- 아이구, 우리 뻐큐 다 죽어 가네.

핸드폰 너머에서 걸려드는 단어는 딱 하나뿐이었다. 뻐큐. 하지는 스치듯 지나간 그 이름과 함께 오늘 설명회장에서 보았던 뻐큐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의 반이 함몰되어 일그러지는 장면을 떠올렸다.

“뭐…… 뭐 하는…….”

- 뻐큐 얘가 박 대리랑 좀 친했었지? 졸졸 따라다니고 그랬던 것 같은데.

퍽, 밀가루 반죽을 패는 듯한 소리에 하지의 어깨가 솟아올랐다. 구도완의 말이 잘 안 들렸다. 숨이 꽉 막히고 핸드폰을 쥔 손이 떨려 왔다. 지금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핸드폰 너머에서 다 죽어 가고 있다는 사람이 뻐큐라는 건가? 뻐큐가 왜? 아니, 구도완이 왜 뻐큐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두서없이 떠오를 때였다.

- 기절했나. 야, 말 좀 해 봐. 야, 야.

그가 입을 뗄 때마다 철썩철썩, 구타의 소음이 넘어왔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에 그려지는 건 사람이 사람에 의해 맞아 죽어 가는 장면이었다. 하지는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만해!”

무릎이 후들거렸다. 되는대로 뱉어 낸 목소리는 듣기 싫게 갈라졌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이 새끼야! 마치 살려 달라고 소리치듯 악을 쓰자 그제야 보이지 않는 폭행이 멎었다.

죽은 듯이 찾아온 그 정적에 하지는 온몸이 덜덜거렸다. 얼굴도 볼 수 없는 뻐큐가 핸드폰 너머에서 이미 죽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정말로 죽이고 말 인간이 그와 함께 있었다. 쯧, 혀를 차는 구도완의 음성에선 몰살된 인간성의 밑바닥만 느껴졌다.

- 하여간에 좋게 얘기를 해 주려고 하면 꼭 반말을 지껄여, 이 어린놈의 새끼가.

“뭐, 뭐 하는 거야, 지금, 대체 무슨 짓……!”

- 내가 박 대리 사무실에서 재미있는 걸 발견했거든.

그 순간 박하지의 사고가 정지했다. 하지의 머릿속엔 책장이 쓰러지고 서랍이 몽땅 쏟아져 나온 자신의 사무실 풍경만 그려졌다. 구도완은 그곳에서 대체 뭘 발견했을까.

- 아무래도 박 대리가 직접 와서 확인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박하지가 제집처럼 드나들며 생활했던 곳이 바로 사무실인데, 그곳에 뭐가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데니스 장이 만든 이중 계약서? 내가 그걸 거기에 뒀던가? 아니면 국정원에서 받았던 자료들? 아니, 그건 늘 그 자리에서 파기하는데. 그것도 아니면 박하지가 차곡차곡 모아 뒀던 이번 사업에 관한 증거들? 아니다, 그것조차 이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을 텐데.

무엇보다 가장 설명이 안 되는 것은 박하지의 사무실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구도완이 그가 아니라 뻐큐를 데리고 갔다는 점이었다. 대체 왜? 혹시 나 때문인가? 그때 그 가정 교사처럼 이번에도 또 나 때문에 누가 다친 건가? 내가 잘못해서? 실타래처럼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는 울음처럼 차오르는 숨을 불규칙적으로 몰아쉬었다.

- 여보세요, 듣고 있어? 박 대리! 하 참, 일단 긴 얘기는 와서 해, 와서. 이 새끼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이거든.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뻐큐가 무슨 이유로 그곳에 있든 일단은 살려야 했다.

“어디……. 어디, 야.”

- 주소 보내 줄게. 궁금하면 빨리 튀어 와, 박 대리.

알았지? 당부하듯 속삭이는 구도완의 목소리가 즐거운 듯 들떴다. 박하지는 그보다 먼저 전화를 끊었다. 문자가 날아온 것은 금방이었다. 주소를 확인한 하지가 텅 빈 가방에 핸드폰을 처넣고 급히 방을 나섰다. 거실엔 불이 켜져 있었고 소파는 안락해 보였으며 식탁 위엔 곰발이 사 온 맥주와 음식이 놓여 있었다. 사람 사는 집 같았다. 그러나 이 집엔 끝까지 박하지 하나 발 뻗고 편히 지낼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다.

하지는 곧장 현관문을 열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저 바깥,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 * *



온여환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향한 곳은 마닐라와 인접한 도시 중 하나인 퀘손 시티의 유흥가 띠목이었다. 마닐라의 화려한 유흥가에 비하자면 유흥가라고 칭하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한 곳이었으나, 온여환은 이 조용한 동네에 용무가 있었다.

클럽과 술집이 붙어 있는 중심 거리를 지난 여환은 동쪽으로 이동했다. 술집이 사라진 자리에 소규모 도박장과 마사지 숍이 보이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헬스클럽이라고 표시된 가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일종의 불법 안마방이었다.

여환은 그 헬스클럽 건물을 끼고 돌아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토바이 소리와 차 소리가 멀어졌다. 여환이 네온 불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Hey.”

바로 옆 건물과 이어지는 골목 끝에서 이 밤에 새카만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다가왔다. 헐렁한 민소매를 입고 목에는 치렁치렁한 금목걸이를 멘 남자가 여환의 행색을 쭉 훑더니 들고 있던 클러치백을 휙 던졌다. 여환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단번에 가방을 받았다.

“Check.”

남자의 영어는 간단하고 짧았다.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여환은 가방을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여권, 신분증, 항공 티켓, 핸드폰. 세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 물건들이 이 나라를 떠나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들이었다.

여환은 붉은색 커버로 감싸인 여권을 꺼냈다. 겉면에 적인 MAGYARORSZÁG, 머저로르사그는 헝가리의 국호였다. 여권을 열자 익숙한 박하지의 얼굴 옆으로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개인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온여환은 마닐라에 오기 전 그에게 했던 약속들을 떠올렸다.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주겠다고 했었다. 너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이름, 나이, 원한다면 성별까지 모두 바꾸어 주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적어도 이런 식으로 지키고 싶진 않았었다.

“No problem?”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며 여환을 기다리던 남자의 재촉이 이어졌다. 여환은 여권을 다시 집어넣고 가방을 단단히 잠갔다. 그의 뒷주머니에서 두둑하게 말린 돈뭉치가 꺼내져 나왔다.

“Check.”

여환에게서 돈을 건네받은 남자가 액수를 확인했다. 만족할 만한 금액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Good luck.”

돈뭉치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남자가 우수리로 행운을 떼어 주곤 몸을 돌렸다. 여환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 남자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 역시 걸음을 움직였다.

골목 밖으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탔다. 뒷좌석에 앉는 여환을 돌아본 기사는 거리와 방향이 맞지 않으면 내리라고 할 요량으로 행선지를 물었다. 여환은 그런 기사에게 열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지폐를 내밀었다. 자신의 어깨 위로 넘어온 돈을 냉큼 받은 기사는 최대한 빨리 가 달라는 그의 말에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돈값을 하기 위한 택시가 차선과 신호를 무시하며 도로를 달릴 때, 여환은 가방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내 곰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어졌다. 여환의 번호가 바뀌어서 안 받는 것일 리는 없었다. 온여환이 늘 제멋대로 바뀐 번호로 전화를 걸어온다는 걸 곰발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여환이 곰발의 번호를 재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 혀, 형님이십니까?

곰발이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도 없이 다짜고짜 온여환을 찾았다. 뭘 하고 있었는지 크게 숨을 헐떡거리며 형님, 하고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서 감추어지지 않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여환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뭔가 일이 터졌다.

“무슨 일이야?”

- 형님. 도련님이, 박하지가…….

그 이름의 등장과 함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덜컹거리며 달리던 택시의 커다란 엔진 소리도, 밖에서 울려 대는 클랙슨 소리도,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유흥가의 시끄러운 노랫소리도 죽은 듯 사라졌다. 그 속에서 곰발이 다음 말을 잇기까지는 억겁이 걸렸다.

- 없어졌습니다.

근처에 있을 줄 알았는데 차가 사라졌어요. 전화도 안 받고……. 금방 오겠지 싶어서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좀 쎄해서 집에 들어와 봤는데, 근데 가방이 없어졌습니다. 형님 아시죠? 침대 밑에 맨날 넣어 뒀던 그 가방이요. 보스턴백, 그게 없어요. 안 그래도 오늘 좀 이상한 말을 하긴 했는데 이렇게 없어질 줄은……. 죄송합니다, 제가 자리를 비워서…….

곰발의 말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여환은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택시 안에서 박하지, 그 이름만을 되뇌고 있었다. 골목 안에서 남자가 떼어 줬던 행운의 효력은 너무나 짧았고, 박하지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길었다.



* * *



박하지는 구도완이 보내 준 주소대로 차를 몰았다. 빗길에 야간 운전인 데다가 익숙지 않은 이국의 도로가 생소해서 도착 시간은 하염없이 늘어났다. 어두운 길을 달리는 내내 하지의 눈앞엔 얼굴이 알아볼 수 없도록 뭉개진 뻐큐가 아른거렸다. 차 유리 위로 쏟아지는 빗물은 마치 검붉은 피처럼 보였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와이퍼에도 눈앞이 자꾸만 부예졌다. 하지는 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끝에 힘을 꽉 주었다.

한 시간쯤 달렸던 것 같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불라칸에 위치한 오래된 낚시터였다. 빗줄기에 물이 불어난 낚시터에 차 몇 대와 검은 무리가 모여 있었다. 그중 유일하게 우산 아래 서 있던 남자 하나가 뒤를 돌아봤다. 손으로 전조등 불빛을 가리며 인상을 찡그리는 얼굴이 구도완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는 더 들어가지 않고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자 낚시터를 밝히던 불빛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밖에 서 있는 인간들이 꼭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하지는 잠시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숨을 골랐다. 빗물 때문에 흐릿한 전방을 빤히 주시했다. 구도완의 뒤에 주르륵 서 있는 네댓 명의 남자들 뒤로 시커먼 물이 넘실거렸다. 뻐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벌써 어떻게 해 버린 건 아닐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낚시터의 흙탕물이 하지의 심장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때, 차 밖에 있던 구도완이 내릴 생각이 없는 박하지를 향해 무어라 입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당연히 알아볼 수 없었고, 들리지도 않았다. 그가 제 뒤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남자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남자 한 명이 튀어나와 하지가 앉아 있는 운전석을 향해 다가왔다. 곧바로 문을 열 듯 손을 뻗었다.

하지는 그 남자가 차 문에 손을 대기 전에 문짝을 힘껏 걷어찼다. 불시에 문짝에 가슴을 얻어맞은 남자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하지는 그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구도완에게로 향했다. 박하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늦었어, 박 대리. 기다리다가 그냥 갈 뻔했어.”

“뭐 하는 겁니까.”

하지는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도 모르게 턱이 덜덜 떨렸지만, 차가운 장대비 때문이라고 여겨지도록 태연을 가장했다.

“깡패 짓 하던 버릇 못 버리셨어요?”

“뭐?”

“왜 죄 없는 애를 데려다 패고 난리예요. 그것도 이 야밤에, 피곤한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내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박하지는 구도완이 대체 왜 이러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박하지의 정체를 알았을까, 아니면 딸 전무와 박하지의 거래를 알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박하지가 다 때려치우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 알았을까.

어느 쪽이든 박하지는 구도완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건 박하지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반대로 구도완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래, 어쩌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는 그런 희망을 꽉 쥔 주먹 안에 욱여넣었다.

“하, 우리 박 대리가 괜히 한 번 센 척을 하고 싶은 모양이네. 아까는 그렇게 욕을 하고 지랄이더니.”

구도완은 그런 박하지의 속이 훤히 보인다는 듯 픽 웃었다. 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꼿꼿이 선 자세로 구도완을 노려봤다.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데요.”

“깡패 짓 하던 버릇 못 버렸나 보지, 뭐.”

어깨를 으쓱인 구도완이 박하지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의 뒤에서 우산을 들고 있던 남자가 덩달아 따라오며 팔을 뻗었다. 우산살을 타고 미끄러진 빗물이 하지의 정수리 위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금세 젖어 버린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속눈썹에 걸려 있던 물방울들이 자꾸만 눈 안으로 들어왔지만 하지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박 대리, 뻐큐 그 새끼랑 얼마나 친했어?”

“친하긴 뭐가 친해요.”

“왜 이래, 둘이 존나 붙어 다녔던 거 다 아는데.”

“제가 붙어 다니고 싶어서 붙어 다녔어요? 그 새끼 저한테 붙인 거 구 대표님이었잖아요.”

애초에 뻐큐는 박하지보다 먼저 이 회사에 들어왔던 녀석이었다. 그런 뻐큐가 박하지의 옆에 붙어 다녔던 것은 구도완의 지시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하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박하지 뿐인가. 측근의 대부분이 홍콩인인 구도완이 박하지를 감시는 하고 싶은데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멋모르는 뻐큐라도 붙여 놓았다는 것을 딸 전무도 알 것이다.

“그렇지, 내가 붙여 놓긴 했었지. 근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친하게 지냈던 것 같아서 말이야. 또 누가 알아? 둘이 떡이라도 치는 사이였을지?”

구도완이 하지의 눈앞에서 손바닥과 주먹을 탁탁, 부딪치며 상스럽게 혀를 날름거렸다. 코끝에서 비린 냄새가 올라왔다. 하지는 구역질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혹시 둘이 막 은밀한 비밀도 공유하고 그러는 사이였나?”

하지는 구도완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뻐큐가 처음부터 박하지의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이 각별히 친하게 지냈던 사이도 아니었다. 물론 회사 내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것은 맞지만 그건 뻐큐가 일방적으로 박하지를 따랐던 것이라고 봐야 맞았다. 그리고 박하지가 자신을 잘 따르는 뻐큐에게 거리를 두려고 했던 이유 중에는 그가 구도완의 사람이라는 이유도 당연히 있었다.

그런데 정작 구도완은 왜 이제 와서 자신이 붙였던 뻐큐를 인질로 삼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인지, 이렇게까지 하면서 하지에게 확인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딱 하나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구도완은 지금 박하지에게 어떤 대답을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구도완은 박하지와 뻐큐의 친분을 확인하려고 들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답을 뻐큐에게선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박하지를 불러서 확인하려고 하는 거겠지.

하지는 구도완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사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짐을 느꼈다. 만일 구도완이 박하지에게 정말로 치명적일 수 있는 사실을 가지고 있다면 이 낚시터에 처음부터 뻐큐가 아니라 박하지를 데리고 왔어야 했다. 지금처럼 어쭙잖은 유도 신문을 할 필요도 없었고.

“비밀이라면 저보다 구 대표님이랑 더 많겠죠. 걔 원래 구 대표님 사람이었잖아요.”

걸려들면 안 된다. 이건 그가 파 놓은 함정이고 덫이다. 그렇게 되뇌며 꺼낸 말에 구도완의 턱이 단단해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걔가 내 사람이라고?”

그의 표정이 하지의 예상보다 훨씬 더 험악했다. 걔 원래 구 대표님 사람이었잖아요. 그 말이 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것 같은데, 하지로서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예상이 안 되는 대화란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안개 속을 걷는 것과도 같았다. 언제 발을 헛디뎌 넘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하지를 숨 막히게 했다.

“그래, 좋아. 그럼 어디 누구 사람인지 진짜로 확인해 볼까?”

“…….”

“데리고 와.”

손가락을 까딱이는 구도완의 모습에 두 명의 남자가 주문을 받은 종업원처럼 튀어나왔다. 그들은 물 위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방갈로로 향했다. 철근으로 세워진 지지대가 물에 거의 잠겨 잘 보이지도 않는 방갈로는 그 둘의 무게를 견디지도 못하고 쓰러질 것처럼 불안했다.

정작 두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난간으로 향하더니 별안간 허리를 숙였다. 물가 쪽으로 손을 뻗은 그들이 힘을 써서 무언가를 건져 올렸다. 물속에 잠겨 있던 것이 수면을 뚫고 올라오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꽂혀 들었다.

커다란 포대 자루가 젖은 땅 위에 질질 끌렸다. 하지는 두 남자의 손에 끌려오다가 구도완의 뒤쪽에 털버덕 널브러지는 자루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에 푹 젖어 버린 자루에서부터 검은 물이 줄줄 흘렀다. 이번엔 정말로 빗물이 핏물처럼 보였다. 하지의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추위와 구분할 수 없는 떨림이 온몸을 적셨다.

“꺼내.”

자루를 끌고 왔던 남자들이 이번엔 위를 묶어 놓은 매듭을 풀었다. 구도완은 하지가 자루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슬쩍 걸음을 물렸다. 비켜선 그의 옆으로 검붉은 머리가 툭, 떨어졌다. 아니, 붉은 물이 들어 검붉어진 까까머리였다. 꼭 머리 뿌리가 자라 올라온 것처럼 두피까지 시커메진 뻐큐가 자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성한 데가 없었다. 두피가 갈라지고 눈썹이 찢어져 퉁퉁 부어오른 눈가가 온통 시뻘겠다. 코에선 콧물 같은 피가 덩어리째 흘러내렸고 입술은 아무런 의지도 없이 헤벌어져 있었다.

허억, 하지는 욕지기처럼 터지는 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후각을 통해 인식된 피 냄새는 이곳을 살육장으로 둔갑시켰다. 암모니아 냄새를 들이켠 사람처럼 코와 눈이 매워졌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하지의 허연 얼굴 위로 줄줄 쏟아졌다.

“아이고, 피떡이 됐네.”

가볍게 혀를 찬 구도완이 진흙이 묻은 구둣발로 뻐큐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고개가 헝겊 인형 위에 간신히 매달린 머리처럼 힘없이 들렸다.

“그래도 누군지는 알아보겠지?”

구도완이 하지를 향해 비죽 웃었다. 하지는 그의 말에 대답은커녕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왜 말이 없어. 우리 박 대리 놀랐나?”

구도완의 발등 위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눈을 감고 있는 뻐큐를 보며 박하지는 그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어린 박하지에게 정을 주며 잘해 주었던 가정 교사처럼. 어쩌면 박하지와 인생이 엮여 버렸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잘못이었다. 그런데 그런 걸 잘못이라고 할 수 있나.

하지의 눈앞이 뜨거워졌다. 그때, 구도완이 뻐큐의 고개를 받치고 있던 발을 확 빼냈다. 무릎을 세우고 풀썩 주저앉은 그가 포대 자루의 입구를 휙 들었다. 살짝 들린 뻐큐의 고개가 힘없이 늘어졌다.

“누군지 모르겠으면 알게 해 줘야지.”

구도완이 뻐큐가 담겨 있는 포대 자루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팔뚝까지 들어간 손이 무언가를 찾는 듯 연신 자루 안을 돌아다녔다. 아이, 씨발, 이거 어디 갔어. 찾는 것이 쉽게 잡히지 않는지 이번엔 어깨까지 집어넣었다. 순간 뻐큐의 어깨가 푸드덕 떨렸다. 흠칫, 하지의 어깨도 함께 들썩였다.

“어쭈, 이 새끼 아직 살았네.”

질기다, 질겨. 구도완이 비웃으며 다시 자루 안을 뒤적였다. 하지는 그제야 조금 전까지 의식 없이 열려 있기만 하던 뻐큐의 입술이 뻐끔거리는 게 보였다. 벌어진 입술 새로 미약하지만 분명한 숨이 흩어지고 있었다. 뻐큐가 살아 있었다. 그가 살아 있다. 그러나 저대로 두면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한 상태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비 내리는 낚시터의 밤은 너무 추웠다. 저대로 두면 분명 쇼크가 올 터였다.

어쩌지, 어떡하지.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는데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부어 있던 뻐큐의 눈꺼풀이 경련하며 뜨였다. 눈을 떴다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살짝이었지만, 그 벌어진 틈으로 피고름이 맺힌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어둡고 빗줄기에 시야도 흐렸지만, 하지는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눈. 내 죄를 덮어쓴 눈.

그 눈을 보는 순간 하지는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자신의 존재가 한 사람을 저토록 망가뜨릴 만큼 의미와 가치가 있나. 아무것도 모른 채 코인을 사들이며 돈을 쏟아붓던 영혼들과 식구가 귀한 집에서 자랐다던 뻐큐의 영혼을 꺼뜨리면서까지 지켜져야 할 존재인가.

나는, 그들을 외면한 채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나.

하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 찾았…….”

하지가 구도완에게 달려든 것과 구도완이 자루에서 손을 빼낸 것, 그리고 뒤에서 지켜보던 남자들이 구도완의 멱살을 쥐는 하지의 어깨를 그대로 바닥에 찍어 누른 것까지 모두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간신히 구도완의 옷깃을 붙잡았던 하지는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무릎이 꿇렸다. 진흙 바닥에 처박힌 무릎이 축축하고 무거웠다.

몸을 들썩여 봐도 쉬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가 눈을 치뜨며 구도완을 노려봤다. 흰자위로 빗물이 들이쳤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자신에게 달려든 박하지를 어이없게 바라보며 픽 웃은 구도완이 자루를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금 나한테 이럴 때가 아니야, 박 대리.”

구도완의 손등이 하지의 뺨을 탁탁 때렸다. 하지가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려 하자 이번엔 그의 턱을 억세게 쥐며 고정했다. 그리곤 하지의 눈앞에 뻐큐의 피로 범벅이 된 손을 들이밀어 보였다. 정확히는 그 손에 들린 작은 신분증이었다.

“이걸 보라고, 이걸.”

붉은 피로 얼룩덜룩해진 신분증에 뻐큐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지금보다 머리가 길고 어울리지 않는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푹 파이도록 꺼벙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분명 뻐큐였다. 사진 아래 적힌 그의 본명 ‘이복구’가 그걸 증명했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 떡하니 박혀 있는 신분증의 발급 기관, 그것은 또 다른 걸 증명했다.

“보여? 이게 뭔 줄 알아?”

NIS. 하지는 그것이 어느 기관의 약자인지 알고 있다.

“내셔널 인텔리, 인털……. 에휴, 씨발. 모르겠고.”

국가정보원.

“국정원이란다, 얘가.”

뻐큐가, 이복구가, 국정원 소속의 요원이었다.

“지 입으로 불었어.”

“무슨…….”

“이 새끼가 국정원 프락치라고.”

언젠가 박양일에게 들었던 말이 구도완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지칭하는 대상도 상황도 달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박하지가 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것. 그들에게, 그리고 그에게.

“왜…….”

온여환은 분명 이번 일에 외부인을 투입하기가 어렵다고 했었다. 국정원에 소속된 잘난 요원들을 두고 굳이 박하지를 섭외해 일을 벌이는 것은 그 이유라고, 박하지가 필요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었다.

그런데 왜, 어떻게, 뻐큐가 프락치가 될 수 있을까. 국정원에 소속된 사람이 박하지의 옆에 버젓이 붙어 다녔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그는 왜 오로지 박하지만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을까. 왜 알리지 않았을까. 왜 숨겼을까. 과연 그가 숨긴 것이 이것뿐일까. 그는 박하지를 또 얼마나 더 많이 속였을까. 또 속이고 있을까. 박하지는 이 모든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체 어떻게.

“와, 우리 박 대리 표정 리얼하네.”

“…….”

“근데 진짜 놀란 거 맞아?”

혼이 빠진 듯한 박하지의 얼굴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구도완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저 새끼랑 너랑 짜고 치던 고스톱판 들켜서 놀란 건 아니고? 어?”

굵은 손가락이 차갑게 식은 뺨을 뚫고 어금니 사이를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젖은 얼굴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하지가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다. 그러나 양팔이 붙잡힌 채 무릎이 꿇린 자세로는 구도완의 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저 새끼 들어온 게 너 들어오기 딱 한 달 전이었어. 그리고 곧장 너랑 붙어 다녔지. 그러다 너랑 딸 전무 붙어 다니기 시작하니까 저 새끼도 딸 전무 뒤 졸졸 따라다니면서 고기 얻어먹고 다니더라? 씨발, 둘이 세트야?”

“…….”

“내가 이걸 그대로 이 새끼한테 물어봤거든. 근데 이 새끼가 너랑은 죽어도 상관없다 그러네? 사람이 이 정도로 얻어터지면 살고 싶어서 거짓말이라도 하잖아. 근데 이 새끼는 절대 아니래. 넌 아무것도 몰랐대. 씨발, 영화 찍나. 나는 니들이 떡을 친 사이가 아니면 둘이서 짬짜미를 해 먹었다고밖에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

“이래도 이 새끼가 네 사람이 아니라고? 어?”

이복구의 정체와 늘 눈엣가시던 박하지를 한꺼번에 묶어 날려 버리려는 심보의 구도완이 흉측하게 눈을 부라렸다. 그 얼굴을 시뻘건 눈으로 노려보던 하지가 별안간 고개를 확 내렸다. 그 순간 살짝 미끄러지는 구도완의 손가락을 그대로 물어 버렸다.

“악!”

비명을 지른 구도완이 손을 확 빼내려고 하자 하지는 더욱 이를 악물었다. 구도완의 엄지에 하지의 이가 깊숙이 박혀 들었다. 손가락 마디를 끊어 먹을 듯한 힘에 구도완이 반대쪽 손을 휘둘렀다. 퍽, 박하지의 옆머리를 내리쳤다. 골이 튕겨 나가는 느낌과 함께 하지의 고개가 꺾일 듯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입은 벌리지 않았다. 낚시터를 울리는 고함이 더욱 커졌다.

그 꼴을 지켜보던 사내들은 멍청하게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구도완은 한국어와 광둥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뭘 보고만 있느냐고 악을 써 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놈들이 하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지의 이마와 얼굴을 붙잡고 억지로 턱을 벌리는 것보다 하지가 스스로 구도완의 손가락을 뱉어 내는 것이 먼저였다. 아랫입술은 구도완의 손에서 흐른 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살이 너덜거리는 손가락을 움켜쥐고 분하게 비명을 지르던 구도완이 이번엔 박하지의 목을 움켜잡았다. 컥, 하고 고개가 젖혀진 하지의 입안으로 빗물이 쏟아졌다.

“이 씨발 새끼, 친구 가는 길 외로울까 봐 저승길 동무해 주려는 거지? 그래, 너 오늘 내가 저 새끼랑 같이 보내 줄게.”

“흐읍, 당신 지금 이러는 거, 큿, 선장도 다 알, 아?”

그 자리에서 하지의 목을 뜯어 버릴 듯하던 구도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하지는 그가 선장이라는 단어 하나에 반응하며 순간 힘이 빠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허리를 써서 상체를 완전히 뒤로 젖혔다. 흙탕물이 고인 바닥에 등부터 떨어졌다.

“모르지?”

구도완에게 잡혔던 목을 감싼 하지가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퉤, 침을 뱉자 구도완의 피가 섞여 나왔다. 하지는 더러운 게 묻은 사람처럼 입술을 벅벅 닦았다. 손등에 묻어 있던 진흙이 입으로 들어와 모래가 씹혔다. 서걱거리는 혀끝으로 볼 안쪽을 훑으며 구도완을 봤다. 여전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비와 피, 흙을 골고루 묻혀 엉망이 된 꼴의 박하지를 응시하는 그의 눈엔 분명 허를 찔린 듯한 당황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그건 일부러 과하게 입꼬리를 비죽거리며 웃는 것으론 감추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모르시지. 그분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거든.”

“아니. 당신이 선장이 알기 전에 처리하고 싶은 거겠지.”

애써 여유를 잃지 않으려던 구도완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박하지는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생각들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든 와중에도 바쁘게 회로를 돌렸다. 선장의 얘기에 반응하는 구도완을 보자 그가 왜 자신과 이복구를 엮어 먹으려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그는 단순히 꼴 보기 싫은 박하지를 치워 버리자는 게 아니었다.

“뻐큐가 진짜 프락치라면, 상식적으로 내가 아니라 나한테 프락치를 붙인 당신부터 검증받아야 하잖아.”

뻐큐가 박하지와 붙어 다녔든 뭘 했든 가장 처음 이 회사에 뻐큐를 넣은 사람은 구도완이었다. 구도완도 그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뻐큐가 국정원 요원이라면? 가뜩이나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박하지와 옆에서 밀어붙이는 딸 전무에게 밀려 입지가 불안한 구도완은 또다시 선장에게 신임을 잃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박하지를 붙들고 어떻게든 제 선에서 해결해 보려고 이 생난리를 치고 있는 거다.

그래. 그런 거라면 구도완은 여전히 박하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다. 뻐큐가, 아니, 이복구가 국정원이든 뭐든 그걸 박하지와 연관 지을 연결 고리는 하나도 없다. 하지는 정신머리를 다잡았다. 그가 뭐라고 윽박지르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이복구가 진짜 국정원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따져 볼 문제였다.

“박하지.”

구도완이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의 눈동자가 그를 따라 올라갔다. 검은 우산을 쓴 구도완의 얼굴에 삭막한 그늘이 졌다.

“너 대가리 팽팽 돌아가는 거 하나는 내가 인정해 줄게. 근데 머리도 상황 봐 가면서 써. 너 지금 내 앞에서 배짱부릴 때 아닐 텐데.”

구도완의 한쪽 발이 옆으로 쓰러진 뻐큐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내가 의심받을 거라고?”

비웃으며 묻는 말끝이 사나웠다. 하지는 기가 눌리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지만 본능적으로 목이 굳었다. 그런 하지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자세를 낮춘 구도완이 뻐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다리에 체중을 실었다. 발밑에 깔린 뻐큐의 얼굴 근육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본 하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뻐큐는 이제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날 걸고넘어지자는 건가 본데, 좋아. 그럼 우리 둘 다 결백을 증명할 방법을 찾아볼까?”

구도완이 뻐큐의 어깨를 퍽, 걷어찼다. 힘없이 엎어진 뻐큐의 얼굴이 질벅한 흙 위로 처박혔다.

“이 새끼부터 물에 던져 보는 거야.”

하지는 제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커다래진 눈으로 구도완을 봤다. 투명하게 빗방울이 비치는 하지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구도완은 끔찍하게 웃었다.

“너나 나나 둘 다 이 새끼랑 관련 없으면 이 쳐 죽일 프락치 새끼야 뒤지든 말든 상관없는 거잖아, 그치?”

쓰러진 뻐큐의 등짝을 다시 한번 콱 지르밟은 구도완이 멀뚱하게 서 있는 녀석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뒤뚱거리며 튀어나온 남자 둘이 땅속에 파묻혀 들어가고 있는 뻐큐를 들어 올렸다. 한 사람은 팔을, 한 사람은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몸을 허공에 띄웠다. 뻐큐의 머리통과 가슴팍이 땅에 닿아 쓸리든 말든, 한껏 뒤로 꺾인 그의 어깨가 빠지든 말든 신경도 안 썼다. 그냥 죽은 짐승을 들어 옮기는 것 같았다.

“자, 잠깐…….”

무릎걸음으로 뻐큐를 붙잡으려는 하지의 앞을 구도완이 가로막았다. 그의 머리 위를 가리고 있는 우산이 덩달아 하지의 몸뚱이도 가려 주었다. 정수리를 때리던 빗줄기가 멎었다. 그럼에도 얼굴은 자꾸만 젖어 갔다.

뻐큐는 어느새 아까 봤던 그 방갈로로 돌아가 있었다. 그를 들고 옮겼던 사내 둘이 터진 머리통을 다시 자루 안으로 구겨 넣는 게 보였다. 그들은 방갈로 안에서 꺼내 온 벽돌 몇 개를 뻐큐의 품에 채워 준 후에야 입구를 봉했다. 자루를 들어 올리는 동작에 전보다 더 많은 힘이 들어갔다.

설마, 아니겠지. 겁만 주려는 거겠지. 고작 그 신분증 하나로 사람을 죽이진 않겠지. 하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의 바람은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들은 뻐큐가 담긴 자루를 정말 물속으로 빠뜨려 버릴 듯 난간에 걸쳐 올렸다. 하지는 저도 모르게 제 앞을 가로막은 구도완의 바짓자락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자, 잠깐만! 잠깐 기다리라고! 씨발, 쟤가 국정원이라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증거야 많지. 저 새끼 태어난 고향, 다니던 학교, 살던 집, 그리고 한국에서 국정원 면접 보던 시절 사진까지 싹 다 받았거든.”

“그, 그게 진짜라고 어떻게 믿는데? 조작되었을지 어떻게 아냐고!”

“아니, 씨발, 박 대리야. 내가 다 확인했다니까?”

구도완이 제 바지를 구겨 쥐고 있는 박하지의 손을 거칠게 털어 냈다. 비와 흙이 한데 뭉쳐 더러워진 제 바지를 펄럭이며 욕을 지껄이던 그가 다시 하지를 내려다봤다.

“근데 우리 박 대리 표정이 왜 그렇게 좆같지? 뭐 찔리는 거 있나? 저 국정원 새끼가 불쌍해?”

모르겠다. 뻐큐가 정말 국정원 사람이라면, 박하지를 속이면서 그의 옆에 붙어 있었던 거라면 그가 불쌍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식구니 뭐니 개소리를 지껄이며 제게 들러붙었던 뻐큐도, 자신을 철저히 도구로밖에 이용하지 않는 국정원도, 그리고 언제나 박하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온여환도, 다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럼에도 뻐큐가 죽는 꼴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뻐큐가 국정원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을 판단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뻐큐가 속해 있다는 국정원은 이 자리 그 어디에도 없는데. 뻐큐나 저나 이 순간 이곳에 버려진 비천한 운명들일 뿐인데.

난간 위에 아슬하게 걸려 있던 자루가 물 위로 확 기우는 게 보였다. 자루 끝이 높게 치솟았다. 그 모습을 본 하지가 구도완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진흙 위로 푹푹 빠지는 신발 때문에 한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엎어졌지만, 금세 다시 무릎을 세웠다. 휘청이며 달려 나가려던 때였다.

풍덩. 물소리가 메아리처럼 번졌다. 난간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하지는 뒷머리가 뽑혀 나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머리채가 휘어 잡혔다.

“왜 울고 그래, 네 편 사라지니까 그렇게 슬퍼?”

울었던가. 아니, 울고 있나. 하지는 아까부터 제 시야를 가리고 얼굴을 적시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귓가엔 수면이 깨지던 순간의 날카로운 파열음과 구도완의 음침한 목소리만 맴돌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세트로 잘 묶어서 포장해 줄 테니까.”

구도완이 하지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하지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뒷걸음질로 끌려가면서 뻐큐를 집어삼킨 물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비는 그칠 생각을 안 했고, 물은 더욱 시커멓게 불어났다. 뻐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대로 구도완의 손에 이끌려 가면 머지않아 하지도 그렇게 될 터였다. 시간문제였다.

겁이 나진 않았다. 이런 결말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오히려 너무 자주 떠올렸었다. 매일 밤 수시로 떠올렸고, 기억하지 못하는 꿈속에서 여러 번 칼에 찔려 살해당했으며, 어떤 날은 박양일이 발견됐었다던 티베트 공가산의 얼음 폭포에 자신의 시신이 걸리는 상상도 했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끔찍하고 가혹한 마지막을 눈에 그릴 때마다 늘 진심으로 각오하곤 했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라고. 그러나 그 현실이 이딴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지 않아야 할 미래가 피할 수 없는 화살처럼 날아왔고, 그 끝에는 박하지가 아닌 뻐큐가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그는 하지가 상상했던 수많은 마지막과 끔찍하게 똑 닮은 모습으로 사라졌다. 언제나 자신의 죽음만을 상상했던 박하지는 그것까진 대비할 수 없었다.

마치 급소를 내어 준 사람처럼 숨을 쉬지 못했다. 명치가 아팠다. 이런 걸 바랐던 게 아니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는 하지의 폐를 온전히 채워 갔다.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선 채로 익사할 것만 같은 그때, 하지는 먹구름 낀 하늘 사이로 달빛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뭐야.”

구도완이 걸음을 멈췄다. 허공에서 어른거리던 달빛이 점점 더 선명하게 눈앞을 비췄다. 아니, 애초에 달빛이 아니었다.

“씨발, 저 새끼들 뭐냐고!”

거칠게 외치는 구도완의 목소리 뒤로 젖은 땅을 헤치고 들어오는 차 소리가 났다. 탁, 탁,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발소리가 늘었다. 하지의 눈앞에 보이는 남자 하나가 당황하며 허둥거리더니 굴러다니던 쇠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미처 준비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남자의 모습이 하지의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퍽, 둔탁한 충돌음이 들렸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광둥어와 타갈로그어가 정신없이 뒤섞였다. 등 뒤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순간 하지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구도완의 손에 힘이 빠졌다. 하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뒤흔들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박하지!”

구도완의 목소리가 다시금 그를 쫓는 것만 같았다. 잡혔던 뒤통수가 아려 왔다. 발목을 잡아당기는 땅에 연신 발을 헛디뎠으나, 하지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무슨 난리가 벌어졌든 상관없었다. 그가 달려간 곳은 물 위에 떠 있는 방갈로였다. 하지는 뻐큐를 담은 자루가 떨어졌던 난간 앞에 섰다. 그러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위로 뛰어올랐다. 무릎을 펴며 몸을 기울였다. 검은 물이 눈앞까지 들이닥쳤다. 흡, 하고 크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박하지!

다시 한번 자신을 쫓는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엔 구도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구분할 틈도 없었다. 첨벙, 뻐큐를 집어삼킨 물이 머리부터 빠져든 하지를 감쌌다. 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강물을 가르며 손을 휘둘렀다. 뭐라도 잡히기를 바랐다. 뻐큐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쥘 수 있기를. 그러나 손에 걸리는 것이라곤 무정하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살뿐이었다.

어둠이 숨통을 조여 왔다. 물을 헤치던 하지의 팔도 점점 느려졌다. 몸에 힘이 빠지고 입이 벌어졌다. 열린 목구멍과 코로 비린내가 밀고 들어왔다. 그 순간 손끝에 두꺼운 천 자락 같은 것이 간지럽게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였으나 아무것도 쥐지 못했다.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몸뚱이가 깊은 바닥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 * *



“형님, 제가…….”

“비켜.”

서늘한 음성에 손을 뻗으며 다가오던 곰발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온여환은 제 품 안에서 늘어진 박하지를 더욱 꽉 안으며 곰발을 지나쳤다. 그의 턱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하지의 얼굴 위로 툭 떨어졌다. 고개를 내린 여환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갑게 젖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하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창백한 뺨이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미약한 숨을 간신히 토해 내는 몸뚱이는 물에서 건져 올렸을 때부터 의식 없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박하지가 몰고 왔던 차로 다가간 여환은 곧장 뒷좌석 문을 열고 하지를 눕혔다. 그러곤 트렁크를 뒤적여 커다란 자카드 담요를 꺼내 오더니 좌석 아래로 늘어진 하지의 다리를 잡아 올려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가만히 두면 젖은 옷이 체온을 자꾸 떨어뜨릴 터였다. 어느새 속옷 한 장만 겨우 남은 하지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버둥거렸다.

“박하지, 잠깐…….”

여환이 옆으로 돌아누우려는 하지의 어깨와 손목을 붙잡아 눌렀다. 손에 감기는 피부가 너무 여렸다. 굳은살이라곤 하나도 없이 뼈대만 도드라진 가죽에 몸소름만 돋아나 있었다. 이런 몸으로 저 깊은 물길에 뛰어들었다.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던 온여환의 바로 눈앞에서.

여환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차가운 몸뚱이를 붙잡아 고정한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그가 곧장 하지의 뒤를 따라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늦었더라면 박하지는 지금 어둠과 빗물에 삼켜져 영영 떠오르지 못할 곳에 잠겨 버렸을지도 몰랐다. 온여환이 지금처럼 제 앞에서 살아 숨 쉬는 박하지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차갑게 식어 버린 박하지의 모습을 떠올리던 여환은 오래전 아물었던 폐부의 총상이 다시 벌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숨이 제멋대로 쉬어졌다. 물속에서 박하지를 안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폐가 다시 망가져 버린 듯 호흡을 고를 수가 없었다. 시야 주변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눈이 뒤집힌다는 게 이런 기분이라는 걸 알았다.

“형님.”

여환의 뒤로 다가온 곰발이 그를 불렀다. 여환이 꽉 쥐고 있던 하지의 팔뚝을 놓았다. 하얀 피부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자신의 체온으로 마사지를 하듯 그 팔뚝 위를 살살 문지른 여환이 가지고 온 담요로 하지의 몸을 돌돌 말았다. 온몸을 꼼꼼히 감싼 여환은 혹여 하지의 호흡이 불편할까 봐 입가를 가린 담요를 턱밑까지 세심하게 내려 준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탁, 문을 닫고 돌아보는 얼굴은 조금 진이 빠진 듯 보였으나 뾰족하게 벼려진 시선만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넌 여기 정리하고 상황 파악부터…….”

“형님, 이거 먼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환의 말을 자른 곰발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흙이 묻은 그의 손에 줄이 달린 목걸이 형태의 신분증이 걸려 있었다.

“저기에서 나온 겁니다.”

곰발이 제 뒤를 힐긋거리며 말했다. 여환의 시선이 곰발의 뒤로 넘어갔다. 곤죽이 되어 늘어진 인간들 사이에 포대 자루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박하지와 함께 건져 올렸던 포대 자루 입구 바깥으로 얼굴이 다 터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살 안쪽에서 피가 맺혀 빗물에도 씻기지 않는 피고름으로 얼굴이 달덩이처럼 부어오른 남자는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 남자의 얼굴을 빤히 보던 여환이 곰발의 손에 들린 신분증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복구. AG코퍼레이션에선 뻐큐라고 불렸던 인물. 샛노란 까까머리가 영락없는 양아치였던 남자. 그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의 사진이 국가정보원 소속 신분증에 박혀 있었다. 훨씬 더 단정하고 정갈한 차림으로.

“……이게 저기에서 나왔다고.”

“예.”

아무리 온여환이라도 국정원에 소속된 요원 모두를 알 수는 없다. 보안상 신분을 밝히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는 조직인 만큼 한 건물을 쓰면서 서로의 이름과 부서를 모르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만일 이 신분증이 진짜고, 이복구가 정말로 국정원 소속 요원이라면 박하지는 물론이고 온여환도 몰랐던 이중 작전이 그의 발아래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셈이다. 누구의 짓일지는 파헤칠 것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

“형님.”

“일단 병원으로 데리고 가. 조용히 진료 봐줄 수 있는 곳으로.”

확인할 것이 많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살려 놓고 봐야 했다. 확인은 그다음이었다. 무엇보다 온여환은 지금 저 남자의 생사 여부나 신분 확인보다 더 시급한 일이 남아 있어 마음이 초조했다. 슬쩍 고개를 돌린 여환이 뒷좌석 창문 안쪽을 바라봤다. 박하지는 아까와 같은 얼굴로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의식 없는 얼굴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쉰 여환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꽉 감싸 눌렀다. 비는 지겹도록 쏟아지고 있었고, 열이 오른 그의 머리 위에선 아지랑이 같은 수증기가 피어났다.

“구도완은?”

“바로 쫓아갔습니다. 찾는 즉시 연락 주기로 했습니다.”

박하지와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박하지는 몰랐겠지만, 그의 핸드폰엔 여환이 심어 놓은 위치 추적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여환이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줄 때부터 미리 설치해 둔 것이었다. 물론 사용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걸 사용한다는 것은 박하지가 온여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뜻이었으니까.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온여환이 그의 위치를 파악했을 때, 박하지는 역시나 마닐라를 벗어나고 있었다. 속도로 보아 차로 이동 중인 듯했는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작정하고 마닐라를 떠날 사람이라면 배나 비행기를 탈 수 있는 항구 또는 공항으로 향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일 텐데, 이동 경로가 아무리 봐도 그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내나 민가가 없는 외진 곳으로 향하는 것도 수상했다. 이 시간에 혼자서 이런 지역으로 움직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환의 직감은 불길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곧장 현지 청부 업체를 섭외했다. 그러곤 곰발과 업체 직원들에게 실시간으로 박하지의 위치를 공유하며 택시를 탄 채로 이동했다. 최대한 빨리 가 달라며 돈뭉치를 꺼내는 여환의 모습에 택시 기사는 대답도 않고 속도를 높였다.

마닐라에 들어서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했던 빗줄기는 박하지와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졌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굵은 장대비였다. 건기에 들어서며 내리지 않았던 비가 한꺼번에 쏟아져 필리핀을 삼켜 버릴 듯했다. 그사이 박하지는 어느 한 곳에 한참 멈춰 있었다. 낚시터였다. 박하지가 이렇게 좋지 않은 날씨에 취미에도 없는 낚시를 하겠다고 이곳까지 오진 않았을 터였다. 거센 비와 물이 불어나 인적이 드문 낚시터, 그리고 깊은 밤. 좋지 않은 예감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여환은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기사에게 더 빨리 가 달라고 채근했다.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느리게만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밖을 내다볼 때였다. 여환의 시야에 얼핏 사람들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나무라기엔 키가 낮았고, 분명 움직임이 보였다. 박하지의 위치가 멈춰 있는 곳과 동일한 곳이기도 했다.

여환은 기사를 향해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그 모습에 기사가 핸들을 꺾어 여환이 가리킨 곳으로 차의 머리를 돌렸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저 멀리 낚시터의 물가를 비췄다.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여환은 자신이 어둠 속에서 보았던 인영임을 확신했다.

그때, 여환이 탄 택시의 양옆으로 또 다른 차들이 다가왔다. 곰발과 청부 업체 직원들이었다. 여환은 그들을 이끈 채 낚시터 안쪽까지 차를 몰고 들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영이 더욱 선명해졌다. 가만히 서 있던 무리들이 전조등 불빛과 소리를 의식하곤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그곳에서 여환은 구도완을 보았다. 그리고 구도완의 오른손이 움켜쥐고 있는 새카만 머리통도 보았다. 고작 그것만 보고도 알았다. 몸이 반쯤 눕혀져 뒷걸음질로 질질 끌려가는 저 사람이 박하지라는 것을.

그 뒤로는 그저 정신없이 내달렸다. 차가 언제 섰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구도완이 왜 박하지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가는 중이었는지, 여환이 하지와 연락하지 못했던 하루, 고작 그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때리며 앞으로만 향했다. 정신이 든 것은 구도완의 외침을 들었을 때였다.

박하지!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번뜩 고개를 돌렸다. 구도완이 물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 끝에 방갈로를 향해 뛰어가는 박하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난간 위를 오르고 있었다. 여환은 그제야 박하지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하지야! 그의 이름을 외치며 뛰었다. 빗줄기에 소리가 묻힐까 봐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박하지!

그 순간 자신을 돌아보는 구도완과 눈이 마주쳤고, 그의 눈이 귀신을 본 사람처럼 파르르 떨리는 것도 보았으나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서 박하지가 떨어지고 있었다. 여환은 제 앞을 가로막는 구도완을 집어 던지듯이 밀치고 하지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하지는 여환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가 검은 물 위로 몸을 던졌다. 하지를 삼킨 물에 하얀 포말이 일었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의 뒤를 따라 물에 뛰어들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그를 붙잡았으며, 그의 발목에 웬 포대 자루의 끈이 걸려 있어 그것까지 함께 건져 올렸다는 것이 단편적인 장면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물에서 나와 의식을 잃은 하지가 무사히 숨을 쉬는 것을 확인했을 때, 구도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사람은 다 놓쳐도 구도완은 놓치면 안 됐다. 욕을 삼킨 여환의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이 제대로 꼬였다는 것은 확실했다.

“넌 여기 상황 정리하고, 걔들한테 연락 오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 아까 그 번호로.”

“형님은 어디로 가시…….”

여환은 곰발의 질문을 무시한 채 차에 올랐다. 한시가 급했다. 차에 시동을 건 여환은 곧장 히터를 틀었다. 백미러로 하지의 얼굴을 살피던 여환이 급하게 핸들을 돌렸다. 진흙 속에 박혀 있던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낚시터를 벗어났다.

빗길을 달리며 틈틈이 하지를 힐긋거리던 그가 조수석에 내던져 둔 클러치백을 열었다. 박하지의 새로운 신분증과 여권, 돈뭉치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 여환이 찾아 쥔 것은 항공 티켓이었다. 출발은 내일 오전 10시였다. 시간을 확인한 여환이 다시 가방에 티켓을 쑤셔 넣었다. 10시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데, 상황이 너무 변했다.

구도완과 박하지, 그리고 이복구가 한 자리에 있었다. 이복구는 생사를 헤맬 만큼 얻어맞은 꼴이었고, 그의 가슴팍에선 국정원 소속 신분증이 나왔다. 만에 하나 이복구가 진짜 국정원 요원이라면 그는 송태갑의 지시로 비밀리에 붙은 요원일 것이다. 목적이라면 당연히 하나였다. 박하지를 감시하는 것. 송태갑은 박하지에게 얻어 내야 하는 정보가 있었고, 그 정보를 얻기 위해 이복구를 붙여 놓은 것일 터였다.

그런 와중에 이복구가 구도완에게 붙잡혔고, 구도완은 그 현장에 박하지를 불러냈다. 그가 이복구를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박하지를 불러낸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는 분명 무언가 확인하려던 의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구도완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온여환을 목격한 뒤였다. 그가 머리가 있다면 죽었다던 도 실장이 살아나고, 이복구와 박하지가 잡혀 있던 현장에 들이닥친 것을 귀신 영화의 한 장면 정도로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선장의 귀에 모든 얘기가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날이 밝으면,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빨리 국정원에도 이 소식들이 전해질 것이다. 그 말은 곧 박하지의 도주를 방해하는 요소가 급격히 늘어난다는 것과도 같았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박하지를 이 세상에서 증발시킬 시간이.

“하아…….”

여환이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우박이 정수리 위를 찍어 내리는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정신이 없어 박하지에게 연락하지 못했던 그 하루가 이토록 커다란 태풍이 되어 돌아올 줄 몰랐다.

온여환은 처음부터 박하지가 왜 이 세계에 얽혀 있는지, 어디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박하지를 건져 내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이게 정말 최선이었나, 하는 의미 없는 자문만 머리를 맴돌았다.

애초에 송태갑이 이 일에 박하지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그때 동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지가 태국에 가겠다고 했을 때 그냥 보내 주었더라면, 지금 가지고 있는 헝가리 여권을 그때 주었더라면. 그랬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온여환은 대체 뭘 위해서 박하지를 이 소용돌이 안으로 집어 던졌나. 그를 위한다는 마음은 정말 진심이었나. 제 옆에 두고 지켜보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여겼던 마음은, 사실은 그저 제 욕망에 기반한 욕심이었던 것은 아닌가.

여환은 머리를 털었다. 이딴 자책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부지런히 흘렀고, 여환에겐 시간이 없었다. 여환은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곤 박하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행적을 확인하려면 핸드폰 통화 목록부터 확인해 봐야 했다. 통화 아이콘을 누르자 곧장 신호가 갔다. 혹여라도 박하지의 핸드폰이 다른 곳에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진동 소리는 차 내에서 울렸다. 조수석 의자 밑에서 나는 소리였다.

주행 속도를 줄인 여환이 조수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의자 안쪽에 박하지가 늘 들고 다니던 보스턴백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여환이 가방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

“욱……!”

뒷좌석에서 신음 같은 통성이 건너온 게 그때였다. 미동 없이 누워 있던 박하지가 몸을 꿈틀거리며 튀어 올랐다. 여환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체가 기우뚱 앞으로 쏠림과 동시에 하지가 좌석 밑으로 고개를 처박으며 토악질을 해 댔다. 우욱, 내장까지 게워 올릴 듯한 소리와 달리 쏟아지는 건 멀겋고 비린 강물뿐이었다.

“박하지!”

여환이 무언가에 들이받힌 사람처럼 운전석을 박차고 나왔다. 뒷좌석 문을 연 그가 밑으로 쏠린 하지의 어깨와 얼굴을 붙잡아 세우고 등을 두드리려던 때였다. 하지가 발작하듯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여환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좌석에 고개를 처박으며 몸을 꿈틀거렸다. 담요에 꽁꽁 감싸진 채로 굼벵이처럼 기는 것밖에 할 수 없음에도 필사적으로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다.

우으, 윽, 내뱉는 말들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환은 다급히 하지의 얼굴을 붙잡아 올렸다. 손바닥에 닿은 뺨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박하지, 정신 차려.”

분명 눈을 떴지만 여환을 보고 있진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허공의 먼지를 붙잡듯 배회했다. 여환이 제 이름을 대며 외치는 말들은 그의 귀를 덮은 두꺼운 장벽에 막혀 그대로 튕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평소 온여환이 알고 있던 박하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감싼 여환이 하지의 어깨를 바로 세워 자신을 보게 했다.

“박하지, 진정해! 나라고!”

공중을 떠돌던 시선이 그제야 천천히 여환을 봤다. 그를 보고, 얼굴을 인식하고, 또 그가 누구인지 비로소 깨달았을 때, 박하지는 구역질을 토해 낼 때보다 더 강하게 경련했다. 숲속에서 괴물을 만난 사람처럼 발로 시트를 밀며 몸을 뒤로 무른 하지의 뒤통수가 반대쪽 창문에 닿았다. 쿵, 꽤 큰 소리가 났으나 아픈 것도 모른 채 그저 뒤로만 가려고 했다.

“건, 건드리지 마.”

여환에게 맞추어진 눈엔 원망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여환이 짐작할 수 있을 법한 원망이고 이유를 알고 싶은 두려움이었다.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

“……하지야.”

“내 이름 부르지도 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는 하지의 눈가가 발갰다. 물기가 차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겨우 말랐던 뺨이 강물보다 짜고 빗물보다 굵은 물줄기에 다시금 젖어 들었다. 그가 울고 있었다. 곧 죽어도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싫어서 이를 물며 참는 게 버릇인 박하지가, 온여환의 손바닥 아래에서 눈을 가린 채 겨우 울곤 했던 그가, 온몸으로 절망하며 울었다. 여환은 다시 손을 뻗어 그 얼굴을 닦아 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뻐큐가…….”

축축해진 얼굴은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하고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의 아랫입술이 달달 떨렸다. 울음을 참으며 말을 이으려고 할 때마다 딱, 딱, 이 부딪는 소리가 났다. 그 사이로 한 음절씩 겨우 눌러 뱉은 말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안개처럼 부옇게 공기를 채웠다.

“뻐큐가, 국정원 사람이라는 거……. 너 알고, 있었어?”

“그건…….”

“아, 당연히 알았으려나? 나는 물론이고, 내 어머니까지 조사했던 사람이니까?!”

이 모든 발화가 고통이라는 듯 하지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뱉은 말에 스스로 상처를 확인하고 사살당하는 그를 바라보는 온여환의 입에서도 참담한 신음이 샜다. 자신에게 꽂혀 드는 박하지의 두터운 불신과 절대로 풀지 못할 듯한 몸으로 엉켜 버린 의심과 오해, 그것들이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네가 내 말을 믿을지 모르겠지만.”

여환은 자꾸만 제 목구멍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토해 내듯 말을 뱉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뱉어야 할 것들이 많은 혀끝이 무겁고 텁텁했지만, 그럼에도 해야 하는 말들이 있었다.

“아니, 당연히 못 믿겠지만, 진정하고 내 말부터 들어. 오해가 있…….”

“오해? 어떤 게 오해인데? 이 일을 하는 동안 넌 항상 나를 속여 왔다는 거?”

기막히다는 듯 헛숨을 터뜨리며 묻는 하지의 말에 여환은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 박하지가 알고 있는 것이 오해라고, 사실이 아니라고 답해 주어야 하는데 온전히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대답을 돌려줄 타이밍조차 거하게 놓쳐 버렸다.

“아니면 날 못 믿어서 사사건건 감시하고 사람 붙여 내 행적 보고 받았던 거? 그래서 내가 내 어머니 찾겠다고 채 사장님한테 개인적으로 부탁했던 것까지 중간에서 잘라 먹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한테 낯간지럽게 와인 사다 바치면서 쇼했던 거?!”

악을 쓰는 하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말끝을 뭉개며 터져 나오는 울음에선 아이처럼 순수하기까지 한 서러움이 묻어났다.

“네가 그랬지. 네 말 하나하나 혼자 의심하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물어보라고. 그래, 물어볼게. 나 등신 만들고 좋았어?”

아니다. 그런 게 아니었다.

“대체 날 언제까지 속여 먹을 생각이었는데!”

“속이려던 게 아니야!”

박하지의 주변을 감시하고 그에게 곰발을 붙여 행적을 보고 받았던 건 그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친모에 대한 정보를 숨기려고 한 것 역시 그 정보가 위험한 정보인지 아닌지 판단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혹여라도 선장과 관련된 정보일 경우 그걸 알게 된 박하지를 선장이나 송태갑이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모든 정황을 파악하기 전까지 잠시 보류하려던 것뿐이었다.

“속이려던 게 아니면 뭔데! 내가 대체 왜……. 왜, 내 어머니에 대한 얘기조차 들으면 안 됐어, 왜?! 채 사장님도 알고 너도 아는 걸 왜 나만 몰라야 했냐고!”

“설명하려고 했어! 나중에 다 얘기하려고……!”

“그러니까 왜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었냐고!”

“편지를 찾았어!”

담요 아래 박하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여환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연마포에 뺨이 갈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박하지의 눈을 맞추며 차분히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모든 공기가 뾰족했고, 하지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공격적인 눈발뿐이었다.

“무슨 편지.”

“…….”

“무슨 편지냐고 묻잖아!”

“박양일의 마지막 편지 원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여환이 편지를 찍은 사진을 띄웠다.

“거기에 네 얘기가 있었어.”

박양일의 마지막 편지, 그 어디에도 없었던 박하지의 이름이 원본 편지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넘겨주는 여환을 하지는 여전히 미심쩍게 바라보면서도 담요 속에 감추어진 손을 천천히 빼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 위로 여환의 핸드폰이 넘어갔다.

화면에 띄워져 있는 것은 박하지도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박양일의 편지였다. 그때 보았던 것과 필체도, 종이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는 편지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만큼 화면을 채운 글자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좌우로 움직이던 그의 눈동자가 별안간 멈췄다. 여환은 그가 어떤 대목을 읽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게…….”

화면에 박혀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리는 하지의 표정에 형언하기 힘든 혼란이 깃들어 있었다.

“박양일은 네가 모든 걸 가지고 있다고 했어.”

“나는…… 몰라. 모른다고 했잖아.”

자신을 향하는 여환의 지긋한 시선을 마주하던 하지의 미간이 물결처럼 겹겹이 구겨졌다. 풀리지 않은 의문이 불쾌감과 섞이어 형형한 기세로 여환을 겨눴다.

“너한테 몇 번이나 얘기했어, 난 정말 모른다고. 겨우 이 종이 쪼가리 하나가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이딴 걸로 네가 날 속여 먹은 게 해명되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가 손에 들려 있던 여환의 핸드폰을 좌석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혹시 이 편지를 들이밀면서 내가 널 속였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너도 날 속인 거라고?!”

“그게 아니라 박양일이 널 속였다는 뜻이야!”

여환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열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자신조차 이해하기 힘든 이 말들을 박하지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 제 삶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을 박하지의 억울하고 서러운 눈을 마주하는 게 힘겨웠다.

“날 속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저 눈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온여환뿐이었다. 그에게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온여환뿐이었다. 그 사실이 여환을 숨 막히게 했다.

“……박양일은 분명 네가 모든 걸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정작 너는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네 몸뚱이 하나 말고는.”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차라리 계속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껏 그래 왔듯 여전히 모른 채로 살아간다면, 선장도 국정원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 산다면 그는 평화로울 수 있지 않을까.

“온여환!”

갈등하는 여환의 마음을 하지의 젖은 목소리가 뒤흔들었다. 여환은 차 루프 위에 한쪽 손을 얹으며 허리를 숙였다. 반쯤 흘러내린 담요에 맨몸이 고스란히 드러난 박하지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온여환은, 아주 오래전부터 저 아무것도 없는 남자가 눈에 밟혔다. 모든 게 다 갖춰진 성에 살면서도 늘 텅 빈 공허함을 안고 걷던 아이가 여전히 그 공터를 메우지 못한 어른이 되어 버린 지금까지, 그가 바랐던 건 그냥 저 아이가 더 이상 제 눈에 밟히지 않을 만큼 평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그 바람이 이토록 오랫동안 고단한 시간을 보내게 할 줄은 몰랐다. 그의 평화를 위해 여환이 해야 할 일은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말하지 않는 것일까.

여환은 오래 고민하지 못했다. 박하지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떨어졌고, 온여환은 제 발끝을 찍어 누르는 것만 같은 그 무거운 눈물을 외면하는 방법 따위 알지 못했으므로.

“네 친모를 찾아봤어.”

미묘하게 화제의 방향이 바뀐 여환의 말에 하지의 고개가 살짝 흔들렸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가를 찡그렸다.

“네 유전자 정보로 실종자 및 범죄자 기록을 조회했고, 30년 전에 등록된 신원 미상 변사자 중 일치자를 찾았어. 그런데.”

여환은 잠시 숨을 멈췄다. 아주 잠시일 뿐이었으나 그 짧은 찰나에 박하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온여환은 이 모든 이야기가 차라리 자신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친모가 아니라, 친부였어.”

그러나 이 끔찍한 세계는 오로지 박하지만의 것이었다. 온여환이 결코 나누어 들어 줄 수 없는.

“30년 전에 사망한, 네 친부.”

“그게 무슨…….”

“박양일은 네 친부가 아니야.”

“…….”

“그리고 어쩌면 사라진 네 친모가…… 지금의 선장일 수도 있어.”

그게 박하지가 이 말도 안 되는 세계를 짊어져야 했던 이유이자 진실이었다.

“뭐라…….”

박하지는 말을 다 맺지도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목소리가 속에서 삭아 들어가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하는 어느 동화의 주인공처럼, 그는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데.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데.

여환은 그의 눈에서 비치는 무수한 물음들을 어떻게 해소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얘기들이 박하지의 복잡한 머리를 풀어 줄 순 없을 거라는 무력감이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닥쳐온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그 익숙하고도 강렬한 허무에 여환은 서 있을 힘을 빼앗겼다. 그가 다시금 바닥에 주저앉았다.

“박양일은 편지에서…… 아들인 네가 모든 걸 가지고 있다고 했어. 하지만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는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어.”

온여환은 박양일의 원본 편지를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에서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었다. 분명 온전한 문장인데도 불구하고 혀끝에 씹히지 않는 음식을 올려놓은 것처럼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어 본 후에야 알았다. 온여환은 박양일이 박하지를 언급하는 방식에서 이질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아들 박하지, 그 아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네.



편지에서 박양일은 하지를 ‘아들 박하지’라고 칭했다. 자신의 아들을 말하는 아버지라면 보통 ‘내 아들’ 혹은 ‘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썼을 법도 하건만 하지의 이름 그 어디에도 그가 박양일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붙어 있지 않았다. 앞에선 아들이라고 했다가 뒤에선 남의 아이를 말하듯 ‘그 아이’라고 부른 것 역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물론 아들에게 애틋한 부정 따위 없는 아버지의 매정한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박양일의 유전자 정보가 박하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말도 안 돼…….”

하지는 잊고 있던 추위가 다시금 찾아온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댔다. 어떻게 그런 일이, 말도 안 되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잖아.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파리한 손끝이 닭살이 돋아난 팔뚝을 쓸어 올리다가 꽉 붙드는 모습이 위태로웠다. 꼬집듯 살을 파고드는 손가락에 하지의 팔뚝엔 금세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여환이 그 팔을 풀어내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데, 반사적으로 몸을 떤 하지가 다시 몸을 물렀다. 쿵, 쿵, 이번에도 하지의 뒤통수가 창문을 때렸다. 결국 여환은 더 다가가지 못하고 손을 거두었다.

“겨우……. 겨우 그거야?”

하지는 여환의 눈을 마주하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확신이 없는 목소리는 숨죽이고 귀를 기울여야만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냘팠다.

“내가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었, 아니,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의 아들……. 내가 어떻게, 왜…….”

“박양일이 그 편지에 왜 네 이름을 남겼을까 생각해 봤어.”

온여환도 아니길 바랐다. 그런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그 역시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 두고 의심해 봤다. 박양일이 아무리 부정 없는 아비였을지라도, 친아들이 아니었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엔 박하지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고. 박하지가 모든 걸 가지고 있다고 말한 이유는 편지를 남긴 후 그에게 선장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증거를 알려 주려고 했던 것인데, 그전에 죽어 버려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도 생각해 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봐도 박하지의 이름 앞에 부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지칭해야만 했던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온여환이 편지 원본을 처음 확인했던 그때 느꼈던 이질감과 같은 것이었다.

“만일 네가 아들이라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정보였고, 그걸 전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겨우 가정이었을 뿐이지만, 그 가정이 꽉 막혀 있던 의문점을 너무나 명확하게 터뜨렸다. 헐겁게 비어 있던 틈은 완벽히 채우고 박양일이 마지막 편지에 친아들도 아닌 박하지의 이름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선명하게 그려 냈다. 엉망으로 엉켜 버린 그물 아래 걸려 오랫동안 잠겨 있던 부표가 모습을 드러내듯이.

“어쩌면 네 존재 자체가…….”

선장의 정체를 증명하는 증거, 그 모든 것이 아니었을까.

“그만…….”

하지의 목소리가 맥없이 떨어졌다. 그는 여환이 차마 뱉지 못한 뒷말을 다 들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만해.”

바람처럼 흩어지는 음성이 여환의 심장 아래로 불어왔다. 습하고 시린 바람이었다. 여환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전해 들은 박하지의 심정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안타깝고 마음이 저려도 결코 당사자인 박하지 만큼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 함부로 이해한다는 위로조차 건네선 안 됐다.

“박하지. 아직 확실한 건 하나도 없어. 지금 확실한 거 하나는, 네가 여기에 머무르는 게 위험해졌다는 거야.”

여환은 자신이 하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를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게 하는 것,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박하지가 흔들릴수록 자신은 도리어 냉정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여환이 조심스레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다행히 하지는 아까처럼 온여환의 접근을 거부하며 몸을 뒤로 빼진 않았다. 여환이 하지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박하지는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좌석 시트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복구 일은…….”

온여환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내리깐 속눈썹이 자르르 떨렸다.

“나도 몰랐어. 정말이야.”

박하지가 과연 그 말을 믿어 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여환이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곤 이 정도뿐이었다.

“뻐큐는 어떻게 됐…….”

“병원으로 옮겼어.”

여환의 대답에 하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이다.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이며 안도했다.

“자세한 건 나도 더 알아봐야 하고, 일단은 여길 떠나는 게 먼저야. 설명은 가면서 할게.”

여환은 마음이 급했다. 그가 뒷좌석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여환은 출발이 오전 10시라고 되어 있던 헝가리행 티켓을 떠올렸다. 어쩌면 더 빠른 티켓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탁하게 잠긴 목소리가 여환의 귀를 끌었다. 고개를 든 여환이 하지의 입을 바라보며 응? 하고 되물었다. 하지는 전보다 조금 더 선명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로 가는데.”

“일단은 헝가리야. 거기가 종착지는 아니라 몇 번 더 옮겨야겠지만, 우선 헝가리로 가. 가면 공항에 사람이 나와 있을 거야.”

온여환을 향하는 박하지의 눈빛에선 아무런 확신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게 여환의 마음을 초조하게 했다.

“도련님. 아니, 하지야.”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빛들이 서로를 응시했다. 여환은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박하지를 택시에 태우고 인천항 컨테이너 터미널로 보냈던 그때. 늦지 않게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지키지 못했던 그때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나를 믿어 줘.”

그러나 이번엔 다를 것이다. 그때처럼 허망하게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다짐하듯 스스로 새긴 여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의 어깨를 꽉 쥐며 간절히 말했다.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나를 믿어 주기를. 하지는 말간 눈동자로 여환을 담아내기만 할 뿐,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가 입을 연 건 여환이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하지야.”

“……옮겨 줘.”

하지가 제 어깨를 붙잡고 있는 여환의 손등을 붙잡으며 말했다.

“뒷자리 머리 아파……. 앞으로 옮겨 줘.”

그건 대답 대신이었다. 긴 숨을 내쉰 여환이 벌어진 담요를 여며 하지의 몸을 가렸다. 그러곤 그의 한쪽 팔을 자신의 목 뒤에 감고, 겨드랑이와 무릎 오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가볍게 안아 들었다.

조수석 문을 연 여환은 의자에 놓여 있던 클러치백을 뒤로 치우고 하지를 내려놓았다. 하지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좌석 등받이 각도를 조절하고 안전벨트를 끌어다 채워 줄 때까지 하지는 내내 제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환은 혈색이 가신 차가운 뺨을 쓸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허리를 폈다.

빠르게 보닛을 돌아와 여환이 운전석 문을 여는데, 주머니 안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의자에 앉으려다 말고 핸드폰을 꺼낸 여환은 화면에 뜬 번호를 확인하고 자세를 바로 세웠다. 권규호 국장의 전화였다.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싶었지만 박하지가 마닐라를 뜨기 전까지 그들에게 수상한 낌새를 보여선 안 됐다. 게다가 지금은 한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아 두는 편이 좋았다.

여환이 진동이 길게 울리는 핸드폰을 든 채 조수석에 앉은 하지의 옆얼굴을 힐긋거렸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하지의 고개가 들렸다. 여환은 자신을 돌아보는 하지에게 핸드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미안. 받아야 하는 전화야.”

하지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의 시선이 다시 제 무릎을 향했다.

“금방 올게.”

운전석 문을 닫은 여환은 차에서 조금 떨어진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 온여환, 너 어디야?!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쏟아지는 권규호의 음성이 뭔가 심상찮았다. 혹시 벌써 모든 일이 그들의 귀에 들어간 걸까? 여환은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세워진 차를 확인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하지의 뒤통수가 보였다. 아직 그가 마닐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벌써 이 일들이 퍼지면 곤란했다.

여환은 다시 앞을 바라보며 뻐근한 눈썹 사이를 긁어내렸다. 얼굴엔 근심이 그늘처럼 묻어 있었지만 입을 통해 나오는 목소리만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여유로웠다.

“어디긴 어디예요, 마닐라지. 왜요?”

- 너 박하지 만나 봤어?

“……아뇨, 아직.”

- 박하지 동태 살피러 들어간 새끼가 왜 아직……! 하, 너 빨리 박하지 위치 파악해. 그리고 구도완……. 아니, 아니다. 그쪽은 회사에서 추가 인력 투입할 테니까 걔들한테 맡기고, 넌 당장 박하지부터 찾아!

정리 없이 쏟아지는 지시 사항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확실히 한국에 어떤 소식이 전해진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국정원에서 사람을 투입한다는 건 그만큼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온여환이나 박하지에겐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본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무리 온여환이라도 혼자서 박하지를 밖으로 빼내기가 어려워진다. 여환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인력이 들어오면 우리 쪽 움직임이 너무 눈에 띄지 않겠어요? 일단 제가 조용히…….”

-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상황 파악 안 됐어?!

권규호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고막 안쪽까지 꽂혀 드는 고함에 설핏 인상을 찌푸린 여환이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는데, 곧장 이어진 권규호의 말이 벌어진 거리를 메우며 날아들었다.

- 몇 시간 전에 라우마 코인 거래가 중단됐어!

“……코인 거래가 중단됐다뇨?”

여환이 핸드폰을 다시 귀에 붙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얘기였다. 온여환은 권규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이복구의 정체, 혹은 박하지의 발각, 그 정도의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론 그 말에 자신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인 거래 중단이라니.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하얘졌다.

- 오늘 투자 설명회 때 들어왔던 투자금까지만 챙기고 거래소에서 거래 중단시켰다고!

“……그게 언젠데요?”

- 말했잖아, 오늘이라고!

“아뇨, 시간!”

시간이 정확히 언제냐고요. 다그쳐 묻는 여환의 말에 권규호의 답은 금방 돌아왔다.

- 거래가 완전히 중단된 건 현지 시각으로 밤 9시야.

불과 몇 시간 전이다. 온여환이 곰발에게 박하지가 없어졌다는 전화를 받았던 시각과 비슷했다. 말인즉슨, 거래소에서 라우마 코인의 거래가 중단되고 투자금이 몽땅 빠지는 동안 구도완은 이복구를 잡아다 놓은 낚시터에 박하지를 불러들이고 있었다는 소리다.

- 판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아. 선장이 사업 철수시키고 몸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

선장이 대체 왜? 사업을 철수시킬 이유가 없었다. 바로 오늘 투자 설명회가 있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키울 타이밍이었다. 구도완에게 이복구와 박하지에 대한 보고를 받고 움직였다기엔 시간대가 안 맞았다.

그렇다면 선장은 오늘 문제가 터질 것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게 아니면 애초에 오늘을 디데이로 정한 채 움직였을까? 그렇다면 구도완과 박하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생각이 거기에서 멈추었을 때, 여환의 눈이 뒤를 돌아봤다. 그의 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조수석 문이 열린 채로.

- 온여환! 너 듣고 있어?

조수석에 앉아 있어야 할 박하지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았다. 여환이 세워진 차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이미 반쯤 열려 있는 조수석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아무도 없었다. 조수석에도, 운전석에도, 그리고 뒷좌석에도. 뒤에 던져두었던 클러치백과 박하지의 젖은 옷마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도둑맞은 사람처럼 허망하게 눈을 깜빡이던 여환이 돌연 허리를 굽히더니 조수석 의자 아래로 손을 뻗었다. 바닥을 더듬었다. 손에 닿는 것이라곤 바닥 매트의 거칠한 표면과 흙가루뿐이었다.

사라졌다. 박하지의 보스턴백이.

- 온여환!

사라졌다. 박하지가.

순간 핸드폰을 쥐고 있던 여환의 손가락에 힘이 빠졌다. 권규호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무심코 떨어지는 핸드폰을 따라가던 여환의 시선이 자동차 바퀴 옆에서 멈췄다. 통화가 끊긴 자신의 핸드폰 옆에 박살이 나 버린 핸드폰이 하나 더 보였다. 박하지의 것이었다.

“…….”

깨진 핸드폰 액정 위로 모든 것을 잃은 온여환의 얼굴이 조각조각 비추었다. 그걸 보는 순간 여환은 깨닫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눈을 맞추었을 때, 한 번만 더 믿어 달라고 말했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그 말간 눈동자에 담겨 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너를 믿을 수가 없다.

박하지가 내뱉지 못했던 말이 깨진 핸드폰 속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15. 커튼콜 (1)





“Ian!”

부엌에서 커다란 냄비에 시니강을 담아 나오던 마리아가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식탁 위에 차려진 공심채 볶음을 집어 먹으려던 이안이 푸드득 어깨를 떨었다. 갈 곳 잃은 손을 얼른 등 뒤로 감추며 몸을 돌려세운 아이가 사슴 같은 눈망울을 들어 올렸다. 스읍, 하고 아랫입술을 감쳐문 마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안은 마리아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타갈로그어로 웅얼거린 이안이 터덜터덜 부엌을 나섰다. 매일 아침, 어머니 마리아가 식사를 준비하면 안방에서 아버지 알랑을 깨우는 일은 이안의 몫이었다. 바나나 농장에서 운반꾼으로 일하는 알랑은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대로 곯아떨어져 아침이 될 때까지 기절 상태였다. 한두 번 깨우는 것으론 절대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이안은 제 아버지를 깨우는 일을 퍽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오늘은 이안이 방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알랑이 먼저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이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는 알랑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라면 피곤함에 눈도 제대로 못 떴을 시간이지만, 이안을 지나쳐 부엌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엔 잠이 묻어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알랑의 컨디션이 좋아진 것도 꽤 오래된 일이었다. 한 달 전부터 농장에서 알랑에게 배정된 할당량의 일을 나눠서 해 주는 사람이 생긴 덕분이었다. 그 덕에 퇴근 시간도 빨라졌고, 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즐길 수도 있게 됐다.

그러나 알랑을 깨우는 일이 수월해졌다고 해서 이안이 맡은 일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알랑을 깨우고 그를 따라 식탁에 앉았을 이안이지만, 최근의 이안에겐 알랑을 깨우는 일 외 새로운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바로 농장에서 알랑의 일을 함께 도와주는 사람이자, 한 달 전부터 창고 겸 다락방에 묵고 있는 낯선 이방인을 깨우는 일이었다.

이안은 발이 닿는 가운데 부분만 반질반질해진 나무 계단을 올랐다. 난간을 짚고 다락방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늘 그렇듯 잘 개어진 이불 위엔 베개가 반듯이 올라가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는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이방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린 이안이 계단을 올라갔던 폼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엄마, 형이 안 보여요!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소리치며 달려가려던 이안은 거실을 가로지르다 말고 우뚝 다리를 멈췄다. 텔레비전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였다. 알랑의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의 신발 뒤축엔 젖은 흙이 묻어 있었다.

어딜 다녀온 거지? 의아해진 이안이 다시 시선을 올렸다. 남자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안도 자연스레 그가 바라보는 텔레비전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지직거리며 노이즈가 발생하는 텔레비전에선 뉴스 보도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대사관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찍힌 장면이었다. 이안도 자주 봤던 장면 중 하나였다. 몇 주 전부터 아버지 알랑이 뉴스를 틀 때마다 지겹도록 나오던 뉴스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터졌던 필리핀 광산 개발 사기극에 다른 국가의 정부 인사가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번지며 해당 국가의 대사관 앞이 피해자들의 시위로 연일 혼란스럽다는 내용이 주였다. 이안은 듣고도 잘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과연 저 이방인은 뉴스 내용을 이해해서 보고 있는 건가? 왜인지 장난기가 솟아난 이안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발끝을 세운 이안이 살금살금 남자의 뒤로 다가갔다. 그사이 텔레비전 화면은 한 번 더 바뀌었다. 어느 동아시아 국가의 대변인이 기자들 앞에서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대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이안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화면 하단엔 그의 말들을 번역한 자막이 떠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에 현직 청와대 민정 수석의 이름이 거론된 것에 대하여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사죄드립니다. 김용준 수석은 사안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국가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사의를 표했고, 대통령은 이를 즉각 수용하였습니다. 정부는 필리핀 정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



“Wak!”

이안이 남자의 등을 훅 밀었다. 싱글벙글 입꼬리를 올린 이안의 눈이 반짝였다.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을 돌아볼 남자의 반응을 기대하는 눈이었다. 그러나 이안을 향하는 남자의 눈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대체로 친절한 이방인은 이따금 속을 알기 힘든 표정으로 생각에 빠질 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그런 때인 듯싶었다.

괜히 건드렸나. 머쓱해진 이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이방인의 눈매가 천천히 휘었다.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상냥한 미소였다.

“Hi.”

나직하게 인사를 건네며 웃는 뽀얀 얼굴의 이방인을 보던 이안은 양 뺨이 조금 화끈해졌다.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내린 이안이 입을 벌려 밥을 먹는 듯한 시늉을 보였다. 말을 해 봤자 알아듣지 못하는 이방인과는 대부분 이런 식의 수신호로 소통하는 편이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웬만한 말은 다 통했다.

이번에도 아침을 먹으러 가자는 이안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은 이방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텔레비전 전원 위에 손을 올렸다. 화면에 떠 있던 타국의 대변인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본 이방인이 버튼을 꾹 눌렀다. 팟. 화면이 암전됐다. 검고 선명한 눈동자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 * *



비가 오면 깊은 잠을 자기가 힘들다. 하지는 축축한 나무 냄새를 들이켜며 눈을 떴다. 속눈썹을 들어 올리는 게 철근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버거웠다. 뻑뻑한 눈꺼풀을 끔뻑거리자 마룻대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다락방의 낮은 천장이 점차 선명해졌다.

“아…….”

이대로면 이틀 연속 못 자는 건데. 하지는 왼팔을 들어 억지로 눈두덩 위를 덮어 봤지만 한번 깨 버린 잠은 쉬이 찾아올 기미가 없었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는 새벽의 고요를 타고 점점 더 또렷해졌다.

우기에 가까워진 필리핀 날씨는 변덕이 영국 날씨 뺨쳤다. 영국을 가 본 적도 없는 박하지가 할 생각은 아니긴 하다만, 그만큼 스콜이 퍼부었다가 그치는 일이 잦았다는 거다. 특히 그가 머무는 민다나오섬은 건기와 우기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마닐라보다 폭우가 쏟아지는 일이 더 잦은 지역이었다. 그나마 어제는 동이 틀 무렵에 짧게 내리고 그친 덕에 아침 산책으로 시간을 때웠다지만, 오늘은 사방이 캄캄했다. 비가 그치지 않으면 속절없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생겼다.

오늘도 푹 자긴 틀려먹었네. 누운 자리에서 크게 가슴을 부풀린 하지가 긴 한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하게 솟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창문이 창틀 위에서 덜컹거렸다. 하지의 눈이 자연스레 그의 정면에 뚫린 창문을 향했다. 지붕의 형태를 그대로 닮은 세모꼴의 유리창 위를 굵은 빗줄기가 쉼 없이 두드려 댔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보자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밤이 있었다. 박하지를 불면에 시달리게 하는 그날의 밤이었다.



그날, 차에서 내린 하지는 무작정 산으로 뛰었다. 길게 뻗은 직선 도로는 온여환에게 너무 쉽게 눈에 띌 것 같았고, 그렇다고 물로 뛰어들 수도 없으니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젖은 흙은 미끄러웠고, 어둠은 나무가 우거질수록 더욱 짙어졌지만 다리를 멈출 수는 없었다. 빗소리는 등 뒤에서 누군가 바짝 쫓아오는 소리 같았고,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마귀의 손처럼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며 발목을 붙잡을 것만 같았다.

초조함에 발이 꼬였고, 험한 지형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지고 굴렀다. 박하지는 그때마다 벌떡 일어나서 다시 내달리길 반복했다. 속옷 한 장 겨우 걸친 맨몸은 금세 상처와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다. 누가 봤으면 미친놈인 줄 알고 기절하고도 남았을 몰골로 참 오래도 뛰었다. 하지는 오히려 자신이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오래 뛰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이토록 도망치고 있는 걸까. 박하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박하지에게 남은 유일한 힘이자 그를 움직이게 했던 원동력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몇 시간을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비가 그친 것도 모르고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는데,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물가였다. 혹시 등신같이 다시 낚시터가 있던 자리로 돌아온 건 아니겠지.

끔찍한 상상을 하며 산을 벗어난 하지의 눈앞에 여명이 밝아 오는 수평선이 보였다. 바다였다. 어느 바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다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순간 하지는 잘 달리던 관절이 갑자기 고장 난 사람처럼 무릎을 푹 꺾으며 주저앉았다. 흙바닥에 대고 속을 게워 올릴 듯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땀이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어쩌면 눈물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온여환에게 들었던 삼류 드라마 같은 출생의 비밀과 좆같은 현실이 그제야 실감 났던 걸까. 아니면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던 걸까. 짠 내 나는 땀과 눈물을 쏟아 내던 하지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올렸다. 바다를 보던 하지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저 바다를 건너야 한다.

해변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선착장 다리 끝엔 낚싯배 몇 대가 매어져 있었다. 그중 가장 끄트머리에 묶인 배 위에서 현지인 몇 명이 서성이는 게 보였다. 해변가로 다가온 하지는 체액과 흙으로 범벅이 된 몸을 바닷물에 닦아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 위에서 자신들의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이들은 하지가 선착장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눈길을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의 몰골이 해수욕을 하러 나온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너덜너덜했고,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보스턴백을 무슨 서핑 보드처럼 꽉 안고 바다에 들어가진 않을 테니까.

하지는 출항 준비를 하는 그들의 배 앞에서 멈췄다. 배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지에게 다가왔다. 손을 휘저으며 무어라 소리치던 모습이 확실히 환영한단 의미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하지는 가방을 열어 돈을 꺼냈다. 정확히 세어 볼 시간은 없었으나 두께로 보아 꽤 큰 금액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환영하지 않더라도 그 돈을 환영하지 않을 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지가 건넨 돈을 의심스러운 얼굴로 받아 들었던 남자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는 하지의 행색을 훑어보며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에겐 이런 식으로 배편을 이용하는 이방인의 등장이 꽤 익숙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Where are you going?”

남자가 투박한 발음의 영어로 행선지를 물었다. 하지는 출발 준비를 거의 마친 배 위에 올라타며 답했다.

“Anywhere.”

눈을 가늘게 뜨며 어깨를 으쓱인 남자가 몸을 돌려 조타실로 향했다.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이들은 갑작스러운 동승이 당황스러운지 몇 번이나 박하지를 힐끔거렸다. 하지는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상갑판 근처 아무 곳에나 널브러져 앉았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하나가 다가와 구겨진 옷 몇 벌을 내밀었다. 아마 선원실에 버려져 있던 옷인 듯했다. 하지는 야자수가 그려진 빨간색 티셔츠와 꽃무늬 반바지를 말없이 받아 들었다. 시큼한 땀 냄새가 올라왔지만, 보스턴백에 담긴 그의 젖은 옷에서 나는 걸레 냄새보다는 나았다. 하지가 받은 옷에 팔다리를 꿰어 입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가 높아지고, 아침 빛이 선명해졌다. 박하지의 인생이 좆 된 날에도 태양은 눈부시게 떠올랐다. 그의 뒤에 국정원과 선장이 아가리를 벌린 채 붉은 눈을 번뜩이고 있는데도 태양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평화롭게 세계를 비추었다.

하룻밤 동안 박하지의 머리 위로 쏟아졌던 차가운 진실들은 그저 꿈처럼 메말라 갔다. 채 사장을 협박했던 온여환과 뻐큐의 정체, 박양일이 남긴 편지 원본에 등장한 자신의 이름, 갑작스럽게 밝혀진 출생의 비밀, 그리고 선장과 자신의 관계 사이에 채워지지 못한 물음표까지. 그 모든 것을 거짓말처럼 사그라뜨리며 찾아오는 아침에 현실감이 사라졌다.

보스턴백을 끌어온 하지가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엔 온여환이 준비해 뒀던 박하지의 새로운 이름과 신분증, 여권, 헝가리행 항공 티켓이 들어 있었다. 온여환이 박하지를 안전하게 헝가리로 보내려고 했었던 게 사실인지, 그는 정말로 박하지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 그 모든 것들을 숨겨 왔던 것인지, 그딴 걸 따져 보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온여환이 무슨 말을 했더라도 박하지는 그를 믿지 못했을 테니까. 그동안 온여환의 진심을 알고 싶어서 숱하게 묻고 또 물었던 일들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우리가 서로의 진심을 아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들이었나. 어차피 믿지 않았을 테고, 믿는 방법도 모르는데, 과연 그런 게 필요했었나.

온 세상이 부정당했다. 모든 게 거짓이었다. 아버지라고 믿어 왔던 사람에게까지 평생을 속아 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배신감에 치가 떨렸지만, 동시에 하지는 이런 기분에 익숙하기도 했다. 그게 우스웠다. 자신이 이 현실에 빠르게 적응해 가고 있다는 것이.

애초에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게, 그 자신의 삶을 찾는다는 게 가능한 일이긴 했을까. 제 삶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디로 흘러가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온전한 내 삶을 가진다는 건 얼마나 헛된 꿈이었던가. 어쩌면 이룰 수 없는 꿈을 꾼 결과가 이렇게 되돌아온 걸까. 아무도 답해 주지 않는 물음들이었다.

하지는 시간이 지나 버린 항공 티켓을 죽죽 찢었다. 손쉽게 찢어진 자유가 물살이 일렁이는 바다 위로 던져졌다. 서울에 살던 박하지도, 헝가리 땅은 밟아 보지도 못한 미래도 모두 바다 위로 흩어졌다. 이젠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다 밑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막막한 아침을 맞이하면서 하지는 눈물도 나지 않았던 것 같다.

배에서 내린 건 두어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도착한 곳은 민도로섬의 어느 작은 선착장이었다. 하지는 그곳에서 곧장 다른 배로 갈아탔다. 배를 얻어 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 배를 얻어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흔쾌히 배의 한 자리를 내어 주었고, 추가 금액을 지불하면 다음으로 갈아탈 배까지 알아봐 주었다. 민다나오섬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런 식으로 사흘에 걸쳐 낚싯배를 얻어 탔다가 갈아타기를 반복한 후였다.

사실 민다나오섬에 도착한 후에도 곧장 다른 배를 얻어 타고 이동하려 했으나, 마지막으로 탔던 배의 선원이 남긴 은근한 경고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는 박하지에게 돈을 받으며 여기서는 배를 얻어 타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해적이 많고 근처에 이슬람계 무장 단체들이 많다는 이유였다.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보이기까지 하는 선원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배를 타더라도 치안이 괜찮은 다바오로 이동해서 타라는 그의 말에 하지는 선원의 도움을 받아 해변 근처에서 차 한 대를 얻어 탔다. 그게 문제였다.

목적지까지 다섯 시간은 걸릴 테니 뒷자리에서 편히 자라던 운전자는 정작 하지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슬금슬금 차를 세우려 들었다. 차의 속력이 줄어들자 하지는 본능적으로 번쩍 눈을 떴다. 하지와 눈이 마주친 운전자는 시침을 떼고 다시 전방을 주시했지만, 짧은 순간 그의 눈이 하지의 보스턴백을 살피고 있었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위험을 직감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하지는 호시탐탐 자신의 가방을 노리는 운전자 앞에서 너 강도지, 하고 그를 대놓고 의심하는 위험한 짓거리를 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저 평온한 얼굴로 창밖을 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만 넌지시 전했다. 하지의 표정을 살피던 운전자가 별 의심 없이 민가에 차를 세웠을 때, 하지는 금방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당연히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뒤론 쭉 걸어서만 이동했다. 민다나오섬의 환경은 마닐라와는 확실히 달랐다. 도시 발달이 거의 안 된 건지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농지만 나왔다.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쉬운 지형이었다. 지도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하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쓸모 있는 것은 보스턴백 안쪽 주머니에 숨겨 둔 대포 폰이었지만, 그것도 전원을 켜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잠깐이라도 켜서 위치를 확인할까, 하는 갈등이 일었으나 금세 관뒀다. 이런 오지 산간에서 지도를 확인할 수 있는 와이파이가 터질 리도 없었지만, 와이파이가 터지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는 낚시터에 있던 자신을 단번에 찾으러 왔던 온여환의 모습을 떠올렸다. 위치를 알린 적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자신을 찾아냈는지 하지도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 없었으나, 그가 통신 장비를 이용해서 자신을 추적했으리란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온여환에게 받았던 핸드폰을 버리고 온 것도 그 이유였다.

결국, 하지는 지도며 핸드폰이며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채 드문드문 만나는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어 가며 이동했다. 하지가 다바오로 가는 방향을 물으면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꽤 열심히 설명을 해 주는 편이었는데, 소통이 제대로 되진 않았다.

마닐라와 달리 민다나오섬에선 영어 대신 타갈로그어가 훨씬 많이 사용되는 듯했고, 영어를 전혀 못 하는 현지인들도 많았다. 그럴 때는 대강 손짓과 눈빛으로 의미를 알아들어야만 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말로 설명을 들어 가며 길을 찾아야 했으니 체력은 당연히 배로 들었다.

하지는 자신이 맞게 가고 있는 것인지 확신도 못 한 채 그렇게 꼬박 반나절을 걸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즈음엔 눈앞이 어지러워 도저히 더 걸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민다나오섬은 필리핀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열대 우림 기후에 가장 가까운 곳이었는데, 그런 곳에서 하루 중 햇빛이 가장 뜨거울 시간에 그 열기를 고스란히 받으며 걸었으니 더위를 먹는 것이 당연했다.

정수리가 뜨끈했고, 길이 울렁거렸다. 며칠 동안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아 속에 든 것이 없는데도 자꾸 속이 미식거렸다. 하지는 어디든 민가가 나오면 신세를 질 요량으로 방향을 틀었다.

“Hey!”

그때, 등 뒤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외침이었는데, 하지는 돌아볼 정신도 없었다. 아니, 아예 돌아볼 생각조차 안 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지역에서 누가 자신을 부를 리가 없었으니까. 등 뒤가 계속 시끄러웠지만, 관심도 주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러나 하지는 몇 걸음도 채 더 걷지 못하고 손이 붙잡혔다. 작은 손이지만 꽤 강단 있게 돌려세우는 힘에 다리가 휘청였다. 몸을 돌리자 그의 명치까지도 안 오는 작은 키의 남자아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가 뭐라고 말하는데 하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신이 없기도 했거니와 아이는 영어가 아닌 타갈로그어를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가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이가 금세 입을 다물었다. 곤란한 듯 눈을 굴리던 아이는 손끝으로 박하지가 향하던 길을 가리켰다가 양팔을 겹쳐 크게 엑스 자를 만들어 보였다.

“……가지 말라고?”

하지가 한국말로 되묻자 아이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눈치껏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 길을 가리키고 엑스 자를 만들어 보이길 반복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하지가 가려고 했던 곳은 민다나오섬의 무슬림 자치구로 이어지는 길이었다고 한다. 현지인들도 꺼리는 곳을 하지 혼자 들어갔다면 아마 절대로 멀쩡하게는 못 나왔을 것이다.

“가야 돼.”

사정을 알 리 없는 하지는 풀린 눈으로 아이를 보며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나 갈 데 없어.”

눈치껏 하지의 말을 알아듣던 아이도 그 말만은 해석하기가 힘든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아이의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Ian!”

이름이 불린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Tatay! 그렇게 외친 아이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남자를 향해 손을 번쩍 들며 흔들었다. 따따이? 하지가 아무 생각 없이 아이의 말을 따라 읊자, 다시 하지를 돌아본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Tatay.

그 말이 아빠라는 뜻이란 건 하지도 나중에 알았지만, 그 순간 그 말을 입에 올리던 아이의 음성엔 분명 푸근한 안락과 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애써 조이고 있던 긴장이 탁 풀려 버렸던 것은.

아이의 순박한 눈동자와 그런 아이를 향해 달려오는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하지는 갑작스레 시야가 이지러지는 것을 느꼈다. 뱅글뱅글 도는 세상 속에서 도저히 눈을 뜬 채 제대로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꺾이고 몸이 무너졌다. 흙바닥 위에 얼굴이 처박혔다. 거친 땅에 뺨이 쓸렸지만 아픈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박하지는 그날 하루 중 가장 평온한 표정으로 눈꺼풀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누워 있던 곳은 이안의 매트리스 위였다.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사람 역시 이안이었다. 아이는 하지가 눈뜬 것을 보자마자 밖으로 달려가 알랑과 마리아를 데리고 왔다. 염려 섞인 표정으로 다가온 마리아가 손등으로 하지의 이마를 짚었다. 마치 열을 체크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하지의 눈을 보며 무어라 얘기하는데, 말뜻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강 하지가 길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바람에 그들이 보살펴 준 상황이라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후에 이안이 손짓 발짓을 이용해 설명해 준 것인데, 그날 하지는 만 하루를 꽉 채워 잤다고 했다. 하지가 눈을 뜬 밤이 길에서 쓰러진 그날 밤이 아니라 다음 날 밤이었다는 것이다. 너무 안 일어나서 죽은 줄 알았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지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 집에서 죽은 듯이 자는데도 내쫓지 않고 보살폈다는 것이다. 뿐인가. 그들은 하지가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음식을 나눠 주고, 다락방까지 내어 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친절했는지 하지는 지금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안은 생전 처음 보는 외모를 가진 자신을 왜인지 잘 따랐고, 마리아는 상냥했으며, 알랑은 무뚝뚝하게 그를 보살폈다. 가장된 친절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를 나눠 주는 따스함이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이만큼을 베풀면 이만큼이 돌아올 것이라 믿는 계산하에 나오는 행동도 아니었고, 상대가 박하지가 아닌 다른 누구였어도 그렇게 했을 사람들이었다. 재지 않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하지는 그 순수하기까지 한 다정함의 존재가 놀라웠다.

그가 이름도 모르는 필리핀 마을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그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듯한 다정한 온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모두 사라져 폐허가 되어 버린 박하지의 인생으로 돌아가면 다시 겪지 못할 온기라서, 그래서, 여기서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나온 시간과 이름을 모두 버린 채.

박하지가 알랑을 따라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바나나 농장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처음엔 그들에게 진 신세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함이었으나, 점차 일에 익숙해지며 떠나야 한다는 마음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온종일 땀 흘리며 일하고 돌아와 곯아떨어질 때면 자신이 왜 이 섬에 들어왔었는지도 잊었다.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들이 전생처럼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잊고 지낸다 한들 어느 세계에선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는 이곳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일주일 즈음 되었을 때, 처음으로 그들의 소식을 들었다. 알랑이 틀어 놓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였다. 뉴스 화면 하단엔 타갈로그어 자막이 떠 있었지만, 소식을 전하는 앵커는 영어를 사용했기에 대부분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닐라 광산 개발 사기극 주도자, 홍콩 조직원 마자위 검거. 그날 보도된 뉴스의 타이틀이었다.

왜 주도자가 구도완이 아닌 마자위가 되었을까. 하지는 마닐라를 떠나기 전 기자들에게 전송했던 자료를 떠올렸다. 그는 마자위가 투자 설명회에 불렀던 기자들과 언론사를 제외한 다른 곳에 AG코퍼레이션과 라우마엠텍의 사업 관련 자료를 모두 전송했다. 선장이고 온여환이고 다 버리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그때였다.

해당 자료를 받았다면 대표직에 이름을 올린 구도완을 주도자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왜 마자위가 주도자가 됐을까. 하지는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구도완의 검거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으니 편의상 마자위를 주도자로 모는 것이 훨씬 보기 좋았을 테고, 실질적으로 대다수의 페이퍼 컴퍼니를 관리하던 것 역시 마자위였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그것도 구도완 몰래 이중 계약서를 작성하며 벌인 짓이었지만 말이다.

정작 박하지를 진짜로 놀라게 했던 소식은 몇 주가 더 지난 뒤에 전해졌다. 아침 시간에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 뉴스 속보가 떴다. 광산 개발 사기극의 사업 수익금이 페이퍼 컴퍼니를 거쳐 바하마의 한 비밀 계좌로 입금되었으며, 해당 계좌의 소유주가 대한민국 정부 인사로 파악된다는 것이었다.

주도자였던 마자위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부인 중이지만, 과거 홍콩 남부 조직과 계좌 소유주로 지목된 인물 간의 거래 정황을 포착해 조사 중이라는 것까지가 보도 내용의 다였다. 계좌 소유주로 지목된 대한민국 정부 인사가 바로 김용준 민정 수석이었다. 하지는 어째서 사업 수익금이 민정 수석의 비밀 계좌로 흘러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마자위가 정말로 김 수석과 어떤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업이 도중에 엎어져 발각된 마당에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수익금을 전달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무엇보다 가장 이상한 것은 이 모든 사건 속에 여전히 선장의 존재는 거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하지가 데니스 장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선장은 마자위가 다른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고, 박하지가 그걸 돕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만일 마자위가 김 수석과 관련되어 있었다면 그 사실 또한 모를 수 없지 않았을까? 이 모든 일이 정말로 선장의 계획을 벗어난 일이 맞긴 할까?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선장의 계획하에 벌어진 일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모두를 속였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하지는 자신이 버리고 온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맞추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자신을 믿어 달라고 애원했던 그는 아직 박하지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원망하고 있을까, 상처 입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오래전의 박하지처럼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그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분명 그 세계가 아득했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던 호박색 눈동자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시 비 내리는 그 밤,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면 마음이 추워졌다.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하지의 손이 이불을 꽉 쥐었다. 창문을 때리던 빗줄기는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젖은 나뭇잎 사이로 희붐한 동살이 비치며 빗소리가 완전히 멎은 것을 확인한 하지는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을 자야 내일이 온다. 그 내일이 지나간 어제에서 나를 더 멀리 떨어뜨려 놓기를. 박하지는 그런 걸 바라며 눈을 감았다.



* * *



한 달 하고도 13일째였다.

그동안 라우마엠텍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AG코퍼레이션의 광산 개발 추진 사업이 사기극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라우마엠텍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순식간에 휴지 조각이 된 코인만 손에 쥐게 되었으며, 선장은 모든 책임을 구도완과 마자위에게 떠넘긴 채 다시금 바다 너머로 사라졌다.

투자 설명회가 열리기 직전 이번 사업에 활용될 예정이었던 페이퍼 컴퍼니들을 몰래 자신의 앞으로 돌려놓았던 마자위는 빼도 박도 못하고 사기극의 주도자로 지목되었다. 그와 짐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구도완은 오래된 낚시터에서 마지막 통신 기록이 잡힌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선장의 존재와 개입을 전혀 모르는 마자위는 홍콩 본조직에서조차 꼬리를 끊는 바람에 멍청하게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생겼다. 그런 와중에 얼마 지나지 않아 코인 거래소에서 빠져나간 현금이 대한민국 정부의 현직 민정 수석의 비밀 계좌로 흘러 들어갔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해당 사실을 알게 된 필리핀 정부가 대한민국에 정부 차원의 보상을 요구하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황은 국가 간 갈등으로까지 번지고 있었고, 쉬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국장님, 저희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오래된 모텔 커튼을 살짝 들춘 장동준이 어둑하게 땅거미가 진 마닐라의 구시가 골목을 내려다봤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쥔 채였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지금 국내 상황도 안 좋은데…….”

장동준의 얼굴 위로 언뜻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쳤다. 순간 눈가를 확 찌푸린 장동준이 커튼을 힘주어 닫았다. 자주색 암막 커튼 하나로 바깥과 객실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창가에서 몸을 떨어뜨린 그가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가구라곤 꼴랑 싱글 침대 하나와 티 테이블, 작은 미니 냉장고가 다인 모텔방이었다. 그나마 앉으라고 마련해 둔 테이블은 유성혜가 이미 선점하고 있었으므로 장동준은 침대 끄트머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장동준이 말한 ‘안 좋은 국내 상황’이라 하면, 오늘 새벽 한국의 한 언론사가 홈페이지 메인에 내건 기사에 대한 것이었다. 엠바고가 걸린 기사는 제목도 내용도 없었으며, 하얀 화면을 클릭하면 ‘해당 기사는 금일 정오(12:00) 이후 게시됩니다.’라는 문구만 떠올랐지만, 한국의 포털과 SNS는 해당 기사에 대한 추측과 억측들로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추측에 힘을 실어 준 것은 기사가 공개되기로 한 바로 그 시각에 긴급 브리핑을 잡은 청와대의 행보였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언론에서 필리핀 광산 개발 사기극에 연루되어 퇴임한 김용준 전 민정 수석에 대한 특종을 보도할 예정이며, 청와대는 그와 관련한 긴급 브리핑을 준비했을 거라고.

“……예, 알겠습니다.”

장동준이 쥔 핸드폰 너머에서 희미하게 권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알아들을 만큼 또렷하진 않았지만, 점점 미간이 좁아지는 장동준의 표정을 보면 무슨 말들을 하고 있을지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예. 변동 사항 생기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국장님이 뭐래요?”

장동준이 전화를 끊자마자 유성혜가 급히 물었다. 테이블 앞에 명치를 바짝 붙이고 앉은 유성혜의 얼굴엔 어떤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쯧, 하고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뜨린 장동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성혜의 눈썹과 입꼬리가 동기화라도 된 듯 동시에 축 처졌다.

“미치겠다, 진짜.”

테이블 위에 양팔을 겹치고 엎드린 그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달이 넘는 필리핀 생활에 아무리 유성혜라도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장동준과 유성혜가 필리핀에 들어온 것은 박하지가 사라진 바로 다음 날이었다. 국정원에서 대대적으로 투입한 추가 인력은 모두 국제 지명 수배자인 구도완 검거 작전을 위해 움직였고, 연락이 끊긴 박하지의 흔적을 쫓는 일에는 유성혜와 장동준, 단둘만 투입되었다. 박하지가 국정원의 계획으로 이번 일에 투입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극비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어휴, 씨발. 애새끼 하나 간수 못 해서 대체 몇 명을 고생시키는 거야.”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발을 툭 걸친 장동준이 현관문을 노려봤다. 정확히는 제 키만 한 문에 기대서 있는 온여환이었다. 팔짱을 낀 채 잠잠히 바닥을 내려다보던 여환이 자신을 향하는 게 분명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장동준은 더욱 위협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잘난 척은 지 혼자 다 하더니 일 이렇게 망쳐 놓으니까 속 시원하냐?”

“아, 왜 그래요, 또.”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유성혜가 상체를 바로 세웠다. 장동준이 저럴 때마다 중간에 낀 유성혜는 항상 곤란해하며 죽을상을 지었다. 여기에서 온여환이 한 마디라도 받아치면 장동준의 목소리는 더 커질 것이 분명했고, 유성혜는 기어이 등이 터질 테다.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온여환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나았다. 온여환 역시 피곤한 말다툼으로 힘을 뺄 마음 따위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몸을 돌린 여환이 문고리를 돌렸다. 어디 가, 이 새끼야! 등 뒤에서 장동준의 욕설이 날아들었다.

“너 이 새끼 박하지 어디 있는지 진짜 모르는 거 맞아? 또 니들끼리 사람 엿 먹이려고 쇼하는 거 아니냐고!”

쇼? 진짜 그런 거면 얼마나 좋을까. 온여환은 계획대로 박하지를 헝가리로 보냈고, 독일과 영국을 거쳐 마침내 아이슬란드까지 숨어들었다면. 그래서 박하지는 지금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아래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온여환은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그를 따라 아이슬란드로 들어가는 쇼를 펼칠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시도도 못 해 보고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쇼에 여환은 허무하게 웃어 버렸다.

“뭐야, 너 지금 웃냐? 웃음이 나와, 이 새끼야?”

“과장님! 그만 좀 하라니까요, 좀!”

“아오, 일 터지고 저 새끼부터 조져 봤어야 하는 건데, 씨발! 국장님은 대체 저런 새끼 뭘 믿고……!”

여환은 장동준의 성난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방을 나왔다. 방음이 잘 안 되는 긴 모텔 복도에 그의 목소리만 웅웅 울렸다. 지친 듯 고개를 까딱이던 여환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던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막 방에서 나온 유성혜가 보였다.

“어디 가.”

“내 방.”

여환이 대답과 동시에 다리를 움직였다. 문 앞에서 열쇠를 꺼내는데 여환의 걸음을 따라온 유성혜가 그의 뒤에 섰다.

“방에서 뭐 할 건데.”

열쇠를 돌리려던 여환이 그대로 멈춰 비딱하게 고개만 돌렸다. 유성혜가 언제부터 자신의 개인 시간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나 싶다. 어쩌면 관심이 아니라 의심인가.

“왜? 너도 내가 박하지 어디 숨겨 놓고 쇼하는 거 같아?”

“미친놈. 지금 네 꼴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오겠냐?”

“내 꼴이 왜.”

온여환의 반문에 고개를 휙 젖힌 유성혜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다니지만, 그 와중에 나날이 꺼져 가는 눈 밑을 온여환 본인만 모르는 듯했다. 살이 내린 온여환의 얼굴을 빤히 보던 유성혜가 갑자기 그를 옆으로 휙 밀쳤다. 그러곤 아직 문에 꽂혀 있는 열쇠를 마저 돌렸다.

뭐 하는 거야. 여환이 채 묻기도 전에 문을 연 유성혜가 마치 제 방이라도 되는 듯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쾅 닫혔다. 황당해서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던 여환이 다시 문을 밀었다. 먼저 방에 들어간 유성혜는 침대 위에 널브러진 자료들과 노트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면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침대였다. 그녀의 손이 노트북 밑에 깔린 종이 몇 장을 들추었다.

“너 이거 다 확인한 거야?”

박하지의 통신 기록과 필리핀 전역에 설치된 CCTV 좌표 따위가 적힌 종이에 빨간 줄이 죽죽 그어져 있는 걸 확인한 유성혜가 아연한 얼굴로 물었다. 성큼성큼 들어선 온여환이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휙 낚아챘다.

“나가.”

여환은 침대 위에 펼쳐 두었던 노트북도 탁 닫아 엎어 놓았다.

“박하지가 전 재산을 들고튀었어도 너처럼은 안 하겠다.”

“그러게. 내가 박하지라면 나 꼬셔서 전 재산을 들고튀었을 텐데.”

“농담이 나와?”

“농담 아닌데.”

침대 위에 굴러다니는 종이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앉은 온여환의 입가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정말로 자주 하던 생각이었다. 박하지가 조금만 더 영악하고 사람을 이용해 먹을 줄 알았으면 온여환에게서 더 많은 걸 뜯어내고도 남았을 거라고. 그를 국정원이든 구도완이든 선장이든, 하여간 누구에게라도 팔아먹고 떠날 수 있었을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자치곤 너무 계획이 없었거든.”

감정적이고 섣불렀다.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박하지는 꼴랑 보스턴백 하나 들고 맨몸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가진 거라 해 봐야 여환이 준비했던 클러치백 속의 돈뭉치들이었다. 여환의 기억으론 길어 봐야 한 달 겨우 버티고 살 정도의 액수였다. 어쩌면 그 돈도 이미 다 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허술하게 도망친 애가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게 문제였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박하지가 한 달 하고도 13일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느른한 한숨을 내쉰 온여환이 몸을 뒤로 눕혔다. 이미 그의 손과 눈이 몇 번이고 검토했던 자료들이 머리 밑에서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지난 한 달, 온여환은 박하지를 마지막으로 봤던 불라칸 바닥을 다 뒤졌다. 비유적 표현이나 과장이 아니라, 박하지가 사라졌던 장소를 시작으로 정말로 그 주변을 다 뒤집어엎고 다녔다. 그러나 박하지의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박하지가 박살 내고 떠난 그의 핸드폰에서 데니스 장과의 통화 및 문자 내역을 확인하고 그 뒤를 추적하기도 했지만, 데니스 장 역시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는 이번 일이 시작될 때 다니던 로펌에도 미리 사표를 제출했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사라질 생각이었던 거다. 이것까지 계획했던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박하지의 완벽한 증발이었다.

여환은 뻑뻑한 눈으로 가만히 천장만 바라보았다. 심장 박동이 꼭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같았다. 일 초, 일 분이 너무 빨리 흘렀다. 하루는 그보다 더 빨리 지나갔다. 날짜가 바뀔 때마다 박하지의 흔적도 점점 더 옅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 자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눈을 감으면 자꾸 자신을 믿지 못하던 그 불안한 눈동자가 떠올라 잠을 잡아먹었다.

가진 것 없이 사라진 건 분명 박하지인데, 매 순간 흐르는 시간에 영혼을 빼앗기는 건 자신이 된 것만 같았다. 온여환은 무력감 속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박하지를 찾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마음먹은 지는 이미 오래였다. 다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걸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게 여환을 계속해서 잠 못 들게 했다.

“너 박하지 찾아도 우리랑 공유 안 할 거지?”

가라앉은 유성혜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환은 눈만 한 번 깜빡거렸다.

“박하지가 박양일 아들 아니라는 것도 아무한테도 보고 안 했잖아.”

“그건 이 일이랑 상관없으니까.”

거짓말이다. 모든 비극은 그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온여환의 거짓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유성혜도 알고 있었다.

“그럼 내가 차장님한테 보고할까?”

여환이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유성혜가 그의 앞으로 몇 걸음 더 다가왔다.

“상관없다며. 아니야?”

“유성혜.”

“너 대체 뭐 하는 건데? 그날 송 차장님 방에서 네가 찾은 게 뭐야?”

“…….”

“나 차장님한테 전화 걸기 전에 빨리 말해.”

유성혜가 온여환이 한 짓들을 정말로 송태갑에게 보고하지 못하리라는 건 온여환도, 말을 하는 유성혜 본인조차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번엔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그녀 나름의 분명한 의사 표현이었다.

여환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지었다. 어차피 끝까지 숨기지 못할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 몰랐을 뿐이지. 그래도 한 달이면 유성혜 성격상 꽤 오래 참은 거라고 봐야 할까.

여환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유성혜가 괜히 움찔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줄 수 있는 남자는 유성혜를 지나쳐 출입문으로 향했다. 외시경에 한쪽 눈을 대고 바깥을 살피던 여환이 문고리를 돌렸다. 슬쩍 고개를 빼고 바깥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잠금장치까지 제대로 건 후에야 몸을 돌렸다.

“그때 송 차장 방에서 편지를 찾았었어.”

침대로 돌아온 여환이 자신의 흔적이 남은 자리에 그대로 다시 앉으며 말했다.

“무슨 편지?”

“너도 본 적 있을 거야. 내가 전에 보여 줬던 박양일 편지.”

“그 편지 너한테 있지 않았…….”

말을 잇던 유성혜가 별안간 아, 하고 입술을 벌렸다.

“……나한테 보여 준 그게 원본이 아니었던 거구나?”

온여환에게 편지가 조작됐을 가능성을 처음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유성혜였다. 그 이후 여환에게서 별다른 얘기를 듣지 못해 금방 잊어버렸겠지만.

“맞아. 원본은 따로 있었어.”

“송 차장님이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야? 왜?”

“삭제된 내용이 있었거든.”

삭제된 내용? 되묻는 유성혜에게 여환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엔 그날 송태갑의 금고에서 찍었던 원본 편지 사진을 띄워 둔 채였다. 핸드폰을 받아 든 유성혜는 장동준의 방에 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사진을 확인했다. 손가락으로 이미지를 확대하며 유심히 보던 유성혜의 눈이 커졌다. 허, 하고 옅게 바람을 뱉어 낸 입술이 한동안 말을 찾지 못하고 뻐끔거리기만 했다. 마침내 고개를 든 그녀가 조금 전과 달리 가늘게 뜬 눈으로 여환을 봤다.

“박하지가 선장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아니, 몰라.”

“모른다니? 걔랑 얘기 안 해 봤어? 둘이 좀 각별한 거 아니었…….”

“그게 아니라, 박하지는 선장의 정체고 증거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박하지는 늘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이 일과 왜 연관된 건지 모른다고. 나야말로 모든 사정을 알고 싶다고. 그러나 매번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온여환은 늘 그의 말을 마음 깊숙이 믿지는 못했었다.

네가 날 속이면 속아 줄게.

언젠가 온여환이 박하지에게 했던 말이었다. 맹목적인 믿음을 흉내 낸 말이었지만, 여환은 그 말의 본질과 밑바탕을 안다. 그건 결국 믿음이 아니라 의심을 기반한 문장이었다. 말로는 믿겠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머리 한쪽에선 네가 나를 기만하더라도 모르는 척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온여환은 자신이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그 의심이 혹시 모를 상황 속에서 박하지를 지킬 유일한 방편이자 끈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그게 대체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싶다. 결국 박하지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를 지키는 방법은 그가 하는 말을 끝까지 믿는 것이었는데, 그걸 몰랐다. 그런 주제에 박하지에게는 자신을 믿어 달라 말했었다. 기만당한 것은 온여환이 아니라 박하지였을지도 모른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거 확실해?”

유성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온여환은 그 말투와 목소리를 들으며 항상 박하지를 다그치던 자신의 목소리가 저렇게 들렸었을까, 생각했다. 고개를 살짝 내린 여환이 손끝으로 눈썹 위를 꾸욱 누르며 쓸어 올렸다.

“걔가 뭘 알면 지금처럼 조용히 숨어 있을 리가 없지.”

“그럼 이 편지는 뭔데? 박양일이 자기 살려 달라고 보낸 편지에 괜한 말을 적진 않았을 거 아냐.”

유성혜의 손가락이 핸드폰 화면 위를 톡톡 두드렸다. 여환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화면에 떠 있는 편지의 내용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여환은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대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읊을 수 있었다.



나한테 선장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증거가 있어. 아들 박하지, 그 아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네.



“그래, 괜한 말을 적진 않았을 거야. 박하지는 박양일한테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자기가 뭘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지만, 이미 선장과 관련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

“…….”

“박하지가 날 때부터 그걸 가지고 태어났다면 말이야.”

“……야, 너 지금 설마 박하지가…….”

“박양일의 유전자가 아니라면, 선장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거야.”

말도 안 돼. 핸드폰을 내려놓은 유성혜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웅얼거렸다. 즉각적인 반응에 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누가 들어도 저렇게 놀랄 일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말이 안 되는 일을 겪은 당사자인 박하지에겐 유성혜만큼이라도 놀랄 시간이 주어졌던가. 그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라도 가질 수 있었나. 되짚던 여환이 눈가를 구겼다. 시간이 없단 핑계로 모든 설명을 나중으로 미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나간 일을 떠올릴 때마다 늘어가는 건 무거운 한숨과 짙은 후회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박하지 엄마가…… 그 사람이 선장이라고 의심하는 거야?”

“…….”

“너 지금 이거 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 맞지?”

“유성혜. 나 지금 시간이 아까워서 미치겠는 사람이야.”

널 붙잡고 한가롭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유성혜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연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믿기 어렵겠지. 증거는 없고 정황뿐인 얘기니까. 그런데 내 얘기가 정말 뜬구름 잡는 얘기라면, 박양일이 왜 친아들도 아닌 박하지를 평생 숨겨서 키우다시피 했는지, 박하지의 친부는 왜 죽었고, 사라진 박하지의 친모는 대체 누구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걸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해.”

유성혜에게 박하지의 친부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지금은 퍼즐 조각처럼 튀어나오는 사실들을 하나씩 맞춰 나가며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퍼즐이 완성되기 전까진 그 위에 그려질 그림이 무엇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송 차장님은 아직 이 사실들을 모르는 거야?”

“아마도.”

확신할 수 없는 확신이었다. 박양일이 박하지의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송 차장이 알고 있었다면, 그 역시 온여환처럼 박하지 친부와 친모의 존재부터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인 걸 보면 송 차장은 박하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물질적인 증거 혹은 박양일이 남긴 증언이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박하지의 존재 자체가 선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럼 편지는 대체 왜 숨긴 건데? 숨길 이유가 없잖아. 혹시 송 차장님이 선장이랑…….”

유성혜가 어떤 의심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여환은 고개를 저었다.

“송 차장은 자기 손으로 선장을 잡고 싶은 사람이야. 그건 확실해.”

어쩌면 송태갑이 선장과 한패인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여환이 송태갑의 뒤를 밟았던 날, 염정석과 산장에서 나누던 대화를 듣고 그는 선장의 존재를 이용하려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그런 거라면 더 앞뒤가 안 맞지. 선장을 잡고 싶다면 오히려 편지를 공개하고 박하지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해야 했던 거 아냐?”

“선장을 잡고 싶지만, 그게 지금은 아닌 거겠지.”

“무슨 소리야, 대체.”

벌떡 일어난 유성혜가 양손으로 머리칼을 쥐어 올리며 몸을 돌렸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벽을 보며 지금까지 들은 얘기들을 중얼중얼 되짚던 그녀가 다시 여환을 바라봤다.

“선장을 잡고 싶긴 한데, 그 타이밍이 지금은 아니라서 편지의 존재를 숨겼다 이거지? 작전을 극비로 진행한 것도 그래서고?”

“맞아.”

“지금 잡지 말아야 할 이유는 뭔데?”

“송 차장은 바뀐 정권에서 원장이 되길 원하거든.”

“뭐?”

여환이 손목에 걸린 시계를 내려다봤다. 마닐라 시각으로 아침 10시 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국은 11시가 넘었을 것이다.

“한 시간 남았네.”

“뭐가?”

“기사 말이야. 무슨 내용인진 알지?”

엠바고가 걸려 있다지만 국정원 내부 직원 중 정보 접근 권한이 높은 이들 사이에선 이미 많이들 공유된 내용이었다.

“김 수석 비밀 계좌에 대한 거?”

유성혜도 대강의 내용은 아는 듯했지만, 해외에 나와 있는 탓에 정확한 파악은 못 한 것 같았다.

“지금 공개된 김 수석 비밀 계좌가 사실 김 수석은 관리만 했을 뿐이고 실소유주는 현 대통령 백근호라는 기사가 뜰 거야.”

허, 하고 콧바람을 뿜는 유성혜는 그리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민다나오섬의 비밀 계좌가 드러난 시점에서 해당 계좌의 존재를 대통령과 완전히 떨어뜨려 놓고 생각했을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과연 그것이 수면 아래 잠긴 의혹으로만 그칠 것이냐, 아니면 그물망에 걸려 줄줄이 딸려 올라올 것이냐의 문제였다.

“물론 대통령 비자금 의혹이 불거진 게 이번이 처음인 건 아니지만, 아마 이번엔 저번처럼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겠지.”

“저번처럼이라니?”

“전 정권에서 비자금 의혹 불거졌던 거 기억해? 지금 대통령이 당시 여당 대표였을 때인데.”

“그때 대통령 비자금 루트를 만들어 준 게 당 대표네 마네 했던 그거 말하는 거야?”

“그래. 그때 그 이슈를 덮었던 게 비코어 건이었어. 선장의 실체를 확실히 잡을 수 있었던 기회를 다 날리고 무리하게 검거를 지시했던 건 당시 국장이었던 송태갑 차장이었고.”

“아, 진짜…….”

온여환의 말을 듣던 유성혜가 바닥에 풀썩 쪼그려 앉았다. 그때 무리하게 작전을 펼쳤던 일로 온여환이 어떻게 됐었는지는 유성혜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송태갑이 단지 마음이 앞서서 그랬을 거라고 이해하려고 했었다. 온여환이 송태갑을 싫어하는 이유를 십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송태갑이 온여환이 위험해질 걸 다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짓을 벌일 사람까지는 아니었을 거라고 믿었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추악할 줄은 몰랐다.

“그때 그렇게 도와줬으면서 지금은 왜 정권이 바뀌길 원하는 건데? 혹시 그때 원장 못 돼서?”

여전히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묻는 유성혜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여환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유성혜의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처졌다.

“송 차장은 재작년부터 염정석 의원이랑 관계를 맺고 정권 교체 그림을 만들고 있었어. 그 전부터 계속 의혹만 있었던 비자금 계좌도 따로 추적 중이었고. 그런데 그사이에 박양일이 편지를 보낸 거야.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선장의 정체까지 들먹이면서. 만일 그 사실을 대통령이 알았으면 뭐라고 했을까?”

“당장 박양일을 잡아서 선장을 찾으라고 했겠지. 재작년이면 슬슬 레임덕 말도 나올 때였으니까.”

“맞아. 근데 송 차장은 이번 정권에서 선장을 잡게 되면 그 공이 또다시 지금의 대통령과 원장에게 돌아갈 걸 안 거야. 그래서 박양일의 편지에서 중요한 내용만 지우고 보고한 거야.”

편지의 존재를 아예 숨기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급하게 내용을 지우는 게 송태갑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삭제해야 할 중요 내용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박하지의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정권 교체가 안 되면 어쩌려고?”

유성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정권 교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닌데 너무 무모한 거 아니냐는 뜻이었다. 어쩌면 유성혜는 아직도 송태갑을 잘 모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여환은 다시 한번 시계를 내려다봤다. 기사가 뜨기까지, 이제 50분도 남지 않았다.

“이따가 뜰 기사, 그 정보가 어디서 나왔을 것 같아?”

유성혜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

“그것도 송 차장이라고?”

“필리핀에서 빠져나온 돈이 민다나오섬의 비밀 계좌로 꽂힌 건 외부 요인이지만, 그 비밀 계좌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는 지극히 내부에서만 돌 수 있는 정보야.”

“어떻게…….”

유성혜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게 여전히 많은 눈치였지만, 뭘 더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복잡하게 얽힌 일이었다. 라우마엠텍의 사업 수익금이 왜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로 꽂힌 건지, 마자위가 정말로 현 정부와 어떤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선장의 사업과 대통령 사이에 온여환이 모르던 무언가가 존재했던 건지 아직은 또렷이 밝혀진 게 없었다.

송태갑이 이 일로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릴 수 있게 된 것이 계획적인 건지 우연히 얻어걸린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지금의 온여환에겐 그딴 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도 했다. 우선순위를 두자면 그의 머릿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박하지였다.

“그래서, 너는 박하지 찾으면 뭘 어쩌고 싶은 건데?”

유성혜가 물었다. 여환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선장을 찾으려는 거야, 송 차장을 무너뜨리려는 거야?”

멀건 시선이 유성혜와 눈을 맞추면서도 왜인지 그 너머를 향하는 듯했다.

모르겠다. 나는 박하지를 찾아서 어쩌고 싶었던 걸까.

여환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찾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박하지를 찾는 것이 맞는 일인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찾아야겠다는 목표밖에 없었다.

“……뭘 어쩌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온여환은 박하지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그뿐이었다.



* * *



오늘은 농장이 쉬는 날이었다. 점심때 밥을 먹고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온 박하지는 저녁 시간이 다 될 때까지 한 번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아까부터 창틀에 머리를 박고 있는 하지의 손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 보스턴백 속에 깊숙이 감춰 두기만 하고 꺼낸 적 없던 물건인데, 오늘은 몇 시간째 손에 올려 두고 있었다. 전원 버튼 근처를 배회하는 엄지 끝엔 누를까 말까, 하는 망설임이 묻어났다.

점심때 봤던 뉴스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필리핀 뉴스를 통해 한국 소식을 접하는 것이 이제는 꽤 익숙하다지만, 오늘 본 뉴스는 개중에서도 가장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일전에 밝혀졌던 민다나오섬의 비밀 계좌가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일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필리핀 정부 인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번 사기극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일이 너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자위가 사기극의 주범이 되고, 사업 수익금이 대한민국 민다나오섬의 비밀 계좌로 흘러 들어가더니, 이제는 그 계좌의 주인이 대통령이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시작된 불이 바다를 건너 점점 더 크게 번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박하지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상황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선장이었다.

주어진 정보 속에서 사람들 마음을 읽고 미래를 내다보는 게 내가 하는 일인데.

언젠가 선장이 했던 말이었다. 마치 자신을 신격화하던 그 말에 세뇌를 당해 정말로 그가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믿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까지 말했던 사람이 상황이 이토록 부풀어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본다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선장은 꼬리 자르기에 능했다. 필요성이 사라졌다 싶으면 제 손발 노릇을 해 주던 이들도 사정없이 잘라 내던 게 바로 그였다. 박양일도, 구도완도, 모두 그렇게 잘려 나간 수족들이었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지금 필리핀 경찰에 붙잡혀 있는 마자위 역시 선장에게서 잘려 나간 꼬리 정도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헐거워진 못처럼 하지의 마음속에서 자꾸만 걸리적거렸다.

박양일도, 구도완도 내치고 잘라 내는 데에 거침없던 선장이 마자위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을 때는 다 알고도 모른 척을 했다. 꼬리가 머리 행세를 하겠다고 통통히 살을 찌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었다. 마치 결국은 일이 이렇게 엎어질 걸 예상이라도 했던 사람처럼 말이다.

선장은 정말로 미래를 내다봤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뻗어 나갈 때였다. 아래층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놀란 하지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졌다. 나무 바닥 위로 퉁 떨어진 핸드폰은 여전히 잠잠했고, 다락방까지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는 시끄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보통은 벨이 몇 번 울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는 마리아나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는데, 왜인지 오늘은 꽤 오래도록 벨이 끊기지 않았다.

다들 어딜 나갔나? 알랑은 집 뒤에 있는 창고 문을 손보겠다고 아까 공구를 챙겨 나가는 것을 보긴 했는데, 마리아와 이안은 어딜 갔는지 모르겠다. 타갈로그어를 못 하는 하지는 어차피 전화를 받아도 말을 알아듣지 못할 확률이 높았기에 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누군지 몰라도 전화를 거는 상대방은 꽤 집요한 성격인 듯했다. 보통 두어 번 시도하고도 연결이 안 되면 나중에 다시 하기 마련인데, 전화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끊겼다가 다시 울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집 안에 사람의 기척은 없고, 전화는 계속 울리고, 왠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전화를 거는 사람이 저 정도로 집요한 것을 보면 꽤 다급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혹시 또 모르지 않나. 운 좋게 상대방이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일지도. 하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낮은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곤 계단을 내려갔다.

딱 반쯤 내려왔을까. 현관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 옆으로 고개를 빼자 왼쪽 팔과 옆구리 사이에 흙이 묻은 공을 끼운 이안이 거실로 달려 들어오는 게 보였다. 밖에서 신나게 뛰놀다 온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이안이 전화를 드는 것까지 본 하지는 다시 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인사말 뒤에 갑자기 말끝을 올리며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이안의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네?」

하지가 다시 계단 옆으로 고개를 뺐다. 전화를 귀에 붙인 이안이 고개를 돌려 하지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더욱 묘해지더니 별안간 전화를 든 손을 내밀었다. 정확히 하지를 향해서였다.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리는 하지의 모습에 이안이 다시 한번 전화기를 까딱였다. 이번엔 전화를 받아 보라는 의미가 좀 더 명확히 전달되는 손짓이었다. 하지는 그제야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나 받으라고?”

당황해서 한국어가 그대로 나왔다.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온 하지는 이안의 앞으로 다가가면서도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나한테 전화를 받아 보라고 하는 게 맞는 건가. 다시 물으려는데 이안이 아예 그의 손에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게 본인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는 제 손에 들린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혹시 온여환일까.

그의 이름이 빠르게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정말 온여환일지도 몰랐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이 집에 박하지가 있는 걸 누가 알고 그를 바꿔 달라고 하겠는가.

순간 생각이 엉켰다. 하지는 지금 이 전화를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수화기의 하단을 손바닥으로 꽉 막은 채 주저하는데 말간 눈을 들어 올리고 있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의 눈동자에 걱정이 떠올랐다. 이안은 세심하고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하지의 얼굴에 서린 당혹감을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는 그 눈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아.”

그 말은 이안에게 하는 말이자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차피 평생 도망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 전화를 피한다고 해도 머지않아 한 번은 다시 겪게 될 일이었다. 그나마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하지는 긴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수화기를 귀에 댔다. 수화기의 아래를 막고 있던 손바닥도 떨어뜨렸다.

“……여보세요.”

기계 안에서 되울리는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게 낯설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자 박하지는 왠지 더욱 확신이 들었다. 온여환이 분명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해.”

한 번 더 힘주어 불렀을 때였다. 건너편에서 옅은 숨소리가 번졌다. 마치 짧게 웃는 듯한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전해졌다. 뒷머리가 쭈뼛 섰다. 하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마터면 그대로 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해 갔다.

박하지는 낮게 울리는 그 웃음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예상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 혹시 기다리던 전화라도 있었던 건가.

“…….”

- 그런 거라면 실망시켜서 미안해, 박 대리. 나도 박 대리한테 용건이 좀 있어서.

전화기 너머의 선장이 기계음으로 변조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 말이 바깥까지 새어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는 이안을 바라보고 서 있던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어차피 이안은 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대화였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찾는 데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박 대리가 아주 꼭꼭 잘 숨었더라고.

하지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석고를 들이마신 것처럼 꽉 막혀 굳어 버렸다.

- 이 번호로 데니스 장한테 연락했던 거 몰랐으면 아마 영영 못 찾을 뻔했어.

“…….”

- 장 변호사 그 친구가 참 성실하고 괜찮은데, 사람이 입이 좀 가벼워. 박 대리도 알지?

박하지가 데니스 장에게 연락했던 것은 이곳에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마닐라를 떠나오기 전에 부탁했던 것이 준비되었는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화가 연결됐을 때 박하지가 들었던 말의 대부분은 욕설이었다. 그중 반은 영어도 아니라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반이나마 들은 말을 조합해 봤을 때 데니스 장의 말은 대강 나도 좆 됐으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주었던 100만 달러가 아깝다는 생각보단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만 더욱 확고해졌었다. 그 뒤론 그의 말대로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그대로 잊어버렸다. 설마 그 연락 한 통이 선장에게 자신의 위치를 물어다 주는 실마리가 될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거기선 어떻게 지내? 말도 잘 안 통할 텐데.

선장은 마치 오랜만에 통화를 나누는 먼 친척처럼 친근하게 굴었다. 그의 말 뒤로 자꾸만 온여환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어쩌면 사라진 네 친모가 지금의 선장일 수도 있어.

그 말이 귓구멍 안에서 선장의 말과 섞여 자그락자그락 굴러다녔다.

- 박 대리, 말수가 많이 줄었네. 거기 생활이 좀 힘들긴 한가?

“……리가…….”

- 응?

“우리가 이딴…….”

하지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아래턱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렸다. 목소리도 함께 떨렸던 것 같지만 그런 걸 의식할 여력까지는 없었다. 성대를 열어 소리를 내는 게 물속에서 악을 쓰는 것처럼 갑갑하고 힘들었다. 명치가 조였다.

“……이딴 안부, 주고받을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요.”

겨우 뱉은 말에 건너편에선 여유로운 웃음이 돌아왔다.

- 그래? 그런 사이가 아니면 뭐, 내가 박 대리 죽이러 가기라도 해야 하는 그런 사이인가?

선장은 재미있는 농담을 했다는 듯 시원하게 웃었다. 기계음으로 뭉개진 웃음소리는 음산하게 명치 아래를 두드렸다. 박하지는 여전히 실감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일 수 있을까. 핏줄을 알아보는 것은 일종의 동물적 본능인데, 박하지는 그 본능이 모두 퇴화해 버린 것일까. 선장에게서 그 어떤 이끌림도 느낄 수가 없었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거라면 좀 섭섭하네. 난 박 대리가 꽤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마치 생각을 읽은 듯한 선장의 말에 하지는 발끝까지 섬뜩해졌다.

- 박 대리 덕분에 상황이 참 재미있게 완성됐거든. 마 전무 일도 그렇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그렇고, 덕분에 훨씬 더 수월해졌지. 몇 가지 돌발 상황들이 있긴 했지만.

“…….”

- 그래도 여러 가지로 고맙게 생각해. 그래서 전화한 거야. 인사라도 할까 해서.

선장이 정말 인사나 하려고 한 달이 넘게 박하지를 찾았을 거란 생각 따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선장이 박하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부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자위가 선장을 대신하여 주범으로 잡혀 들어간 것을 왜 박하지에게 고마워하는 것이며,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또 왜…….

생각을 이어 가던 하지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내내 이해가 되지 않아 엉켜 있던 실타래가 한꺼번에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만약에, 만약에 박하지가 선장의 계획을 도와주고 있었다면. 그러니까 그가 선장을 잡기 위해 해 왔던 모든 일이 사실 선장을 도와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면.

“……혹시 전부…… 당신이 꾸민 짓입니까?”

사업이 도중에 엎어진 것도, 마자위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잡혀 들어간 것도, 이 사업과 대한민국 정부를 연결시킨 것도, 다 처음부터 선장의 의도였다면.

- 어때?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지?

선장은 정말 신이 난 아이처럼 물었다. 변조로도 가려지지 않는 들뜬 기색에 하지는 나무껍질 같은 몸소름이 돋아났다.

- 내가 뭐라 그랬어. 너는 네 아버지보다 더 재미있는 일을 해 줄 것 같다고 했잖아.

“…….”

- 아. 도 실장한테도 인사를 좀 해야 하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아니, 이제 온여환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

- 어떻게 알았냐고? 말했잖아. 나는 주어진 정보 속에서 미래를 내다본다고.

“…….”

- 박 대리. 온여환도, 너도, 그리고 그 누구라도 나는 못 잡아. 절대로.

선장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국정원이 자신의 뒤를 쫓는 것도, 박하지를 이용해서 그를 잡으려고 한다는 것도. 그래서 박하지를 이 사업에 끼워 넣을 때부터 이런 식으로 활용할 작정이었던 거다. 대체 어디서부터 계획한 거였을까.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뭘까. 하필 박하지가 선택된 것도, 그것도 선장의 계획 중 하나였을까. 선장은 혹시 박하지가 박양일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까. 박하지가 누구의 아들인지, 어디에서 떨어진 아이인지, 그는 알까.

“당신…… 대체…….”

대체 누구야. 어떤 사람이야. 당신이 정말 날 낳은 사람이 맞기는 해? 묻고 싶은 말들이 혀뿌리에 모여들었다. 뱉기만 하면 되는데 온몸이 떨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손끝으로 누군가의 체온이 찾아들었다. 고개를 내리자 덜덜 떨리는 하지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있는 이안이 보였다. 아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옆구리에 소중히 끼고 있던 공도 내팽개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하지를 붙들고 있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이 뭐라고, 그게 하지를 버티게 했다. 하지는 굳은 혀를 겨우 움직였다.

“……나한테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 글쎄, 일종의 피날레?

“…….”

- 선장이라는 이름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전화 한 통으로 박하지의 숨통을 조이던 선장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또 그렇게 사라졌다. 끊긴 전화를 허탈하게 내려다보는 하지의 손이 흔들렸다. 아직 그의 손을 붙잡고 있던 이안이었다. 하지의 시선이 다시 아이를 향했다.

“……괜찮아.”

이번에도 이안과 자신에게 동시에 말한 하지가 쥐고 있던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이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손을 빼냈다. 다락방으로 향하는 하지의 뒤를 이안이 졸졸 따라왔다. 하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에게 하지는 한 번 더 괜찮다는 말을 전해 준 뒤 계단을 올랐다.

그는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부터 다급히 찾아 쥐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는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는 화면이 켜지자마자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긴 신호음이 들렸다. 하지가 눈썹 아래까지 자란 앞머리를 휙 쓸어 올렸다. 드러난 이마에 핏줄이 섰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몇 번의 신호음이 더 이어지는가 싶더니 곧 끊겼다. 핸드폰 너머에서 먼 소음이 섞여 들며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박 대리! 소리치는 채 사장을 향해 하지는 다짜고짜 제 말부터 전했다.

“사장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저 한국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다급히 문장을 뱉어 내는 동안 하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 *



늦은 밤, 장동준과 유성혜의 눈을 피해 모텔 밖으로 나온 온여환이 향한 곳은 낙후한 빌라였다. 한 층에 네 개의 현관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건물의 3층까지 단숨에 오른 여환은 ‘301’이라고 적힌 현관문을 톡, 한 번 두드렸다. 작고 불분명한 노크였음에도 안에서 철컥거리며 잠금 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건 금방이었다.

“오셨어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실내에서 곰발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 새끼는?”

“아직 아무 말 안 합니다.”

곰발의 어깨를 스치며 안으로 들어선 여환은 신발도 벗지 않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가 향한 곳은 굳게 닫힌 방문 앞이었다. 여환이 문고리를 쥐었다. 이번엔 최소한의 노크도 없었다. 벌컥, 문을 열자 방바닥에 누워 있던 이복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큼직한 꽃무늬가 그려진 파란색 이불 위에서 굼벵이처럼 몸을 말고 있는 그는 양팔이 등 뒤로 묶여 있었다. 두 발목 역시 초록색 테이프와 밧줄로 단단히 동여매진 상태였다. 그가 제 의지대로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뚫려 있는 입뿐이었으나, 자체적으로 박음질을 해 버린 것인지 이복구는 이곳에 온 뒤로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내뱉지 않았다.

방 안으로 완전히 몸을 들인 온여환이 문을 쾅 닫았다. 창문이 흔들릴 만큼 큰소리에 이복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여환은 그를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꽃무늬 이불이 발끝에 밟혔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던 그가 무릎을 굽혀 앉자 누운 채로 고개만 쳐들고 있던 이복구는 저도 모르게 꿈틀거리며 몸을 뒤로 물렀다. 손발이 자유롭지 못한 탓에 얼마 가지도 못했지만.

“먹여 줘, 재워 줘, 살려 줘.”

“……?”

“다 해 주는데도 이렇게 입 처닫고 있을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뒤지게 둘 걸 그랬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온여환의 눈동자엔 정말로 그를 향한 온정 따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까? 널 이 문밖에만 내던져 놓기만 해도 구도완이든 송 차장이든 찾아올 것 같은데 말이야.”

그가 이복구의 몰골을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얼굴이 터질 듯 맺혔던 피멍은 빠진 지 오래였고, 몸 여기저기 나 있던 상처들도 흉터만 살짝 남았을 정도로 가라앉았다. 머리통이 찢어져 꿰맸던 자국 역시 잘 아물어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아물어도 너무 잘 아물었지. 불과 한 달 전에 죽다 살아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쌩쌩하게 기운을 차린 이복구는 손발만 묶여 있지 않았다면 금방이라도 온여환에게 달려들 사람처럼 눈을 부라렸다.

“왜? 송 차장 얘기하니까 또 눈이 돌겠어?”

온여환이 보기에 이복구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다. 제 처지가 어떤지, 자신이 정말 눈을 부라려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직 스물여덟밖에 안 됐다고 했던가. 온여환은 송태갑이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을 박하지의 옆에 갖다 붙인 이유를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뭘 모르니까 알려 주지 않아도 되고, 더 간편하게 부릴 수 있었던 거다. 살아 있는 추적기, 딱 그 정도의 역할로.

이복구의 날 선 눈빛을 받아 내던 온여환이 씁쓸하게 혀를 차며 일어났다. 좁은 방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벽에 등을 기댄 그가 팔짱을 끼며 이복구를 내려다봤다.

“넌 이상하지도 않아?”

여환의 물음에 이복구가 눈동자만 올려 그를 봤다.

“송 차장이 박하지를 감시할 목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널 여기에 심어 뒀던 거라면, 지금 이 사달이 난 마당에 왜 널 찾지도 않을까.”

박하지가 사라졌을 때 가장 먼저 찾았어야 할 사람이 바로 이복구인데, 송태갑은 왜 그에게 연락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을까. 한국에서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온여환에게까지 알리지 않고 이복구를 잠입시킨 것이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아니, 송태갑이 그딴 걸 신경 쓸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좀 알아봤어. 송 차장이 왜 널 찾지 않는 건지.”

송태갑이 이복구를 마닐라에 보낸 것은 박하지가 마닐라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그는 화교 출신으로 중국 표준어와 광둥어에 모두 능한 이복구를 홍콩 북부에서 온 어린 조직원으로 둔갑시켰고, 박하지보다 더 일찍 구도완의 밑으로 들여보냈다.

이복구가 맡은 임무는 박하지를 감시하고, 그가 혹여라도 수상한 일을 벌이는 것 같으면 그 즉시 송태갑에게 보고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극비에 부쳐졌다. 온여환은 물론이고 권규호도 모르는 일이었다. 송태갑이 단독으로 이복구를 움직인 이유는 박하지가 정말로 선장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면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켜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하면서 박하지를 지켜본 것치곤 별다른 소득은 못 봤을 것이다. 박하지에게서 선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는 사이 이복구의 필요성도 점점 흐려졌다. 송태갑은 이복구의 존재를 점점 잊어 갔다. 그즈음, 국정원에 일이 터졌던 것이다.

“얼마 전에 국정원 서버가 뚫렸었어.”

이복구의 눈이 커지며 입이 뻐끔 열렸다. 그는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연했다. 그 일이 터진 직후 구도완에게 정체가 발각된 이복구는 소식을 들을 틈도 없이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났으니까.

“송 차장은 서버 침입자가 선장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선장이 뭔가 낌새를 알아차려서 국정원 서버에 침입한 거라면, 박하지의 정체 역시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지. 그래서 선장의 관심을 돌릴 만한 뭔가가 필요했던 거야.”

온여환은 그 침입자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진실도 아니었다. 지금 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송태갑이 선장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였다. 이복구는 온여환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무엇인지 예상을 하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눈이었다. 그래서 여환은 일부러 그 눈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송 차장은 선장한테 박하지 대신 널 갖다 바친 거라고.”

이복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부정은 그의 안에서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아무 소용없는 부정이라는 걸 그 역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구도완이 네 신분을 어떻게 알았을 것 같은데?”

“……개, 개소리, 하지 마, 변절자 새끼야.”

이곳에서 처음 듣는 이복구의 목소리였다. 그동안 그의 입을 열게 하려고 온갖 회유를 다 했었던 여환이지만, 정작 듣게 된 이복구의 말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이복구는 여전히 온여환을 향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국정원 소속 요원이라고 소개하면서 제 상관인 송태갑을 모함하고 국정원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온여환을 그저 배신자 혹은 변절자라고만 여겼다. 그게 여환을 허탈하게 했다. 그는 어디도 속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나 배신자 취급을 당했다.

나라는 존재는 아무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하게 태어난 인간인가. 그래서 박하지가 자신을 믿지 못했나. 주먹을 꽉 쥐며 숨을 참던 여환이 별안간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 냈다.

“이걸 다 듣고도 여전히 그렇게 충성스러운 눈빛을 유지할 수 있다니 참 대단하네. 그래. 못 믿겠다면 그냥 너 좋을 대로 생각해.”

여환이 몸을 돌렸다. 문을 확 열어젖힌 그가 그대로 방을 나가려다 말고 동작을 멈췄다.

“근데.”

그의 신발이 문간에 걸쳐 있었다.

“널 구하겠다고 제 발로 그 낚시터에 갔던 박하지는, 아마 널 믿었을 거야.”

“…….”

“넌 그날 물속에 던져진 너를 구한 게 나인 줄 알지? 난 네가 그날 거기에 빠진 줄도 몰랐었어.”

“…….”

“내가 도착했을 때 본 건 네가 아니라 널 구하겠다고 그 물속에 뛰어들던 박하지였어.”

걔 아니었으면 넌 죽었어. 내뱉는 여환의 목소리가 그날 내리던 빗줄기만큼이나 차가웠다.

“너 살리겠다고 사지로 뛰어들었던 사람보다 널 사지로 몰아넣었던 송 차장을 향한 충성심이 더 중요하다면, 그래, 계속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라고.”

여환이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는데, 그가 문고리를 잡음과 동시에 이복구가 소리쳤다.

“저기!”

다급한 외침에 여환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반쯤 닫았던 문을 도로 열며 그를 돌아봤다. 이복구가 바짝 쳐든 고개를 덜덜 떨고 있었다.

“그분, 그, 박 대리님은 무사해요?”

“…….”

“무사하냐고요.”

“……그거 확인하려고 찾는 거야.”

아프거나 다친 데는 없는지,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는지, 위험한 이들과 함께 있진 않은지,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제 두 눈으로 그 무사한 모습 한 번만 제대로 봤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서.

아니, 사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든 그를 다시 찾고만 싶은데 대체 어딜 가서 누굴 만나야 박하지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하지가 다른 우주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길이 보이지 않았다. 여환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거대한 신이 그의 뒤통수를 내리누르며 벌을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내가…….”

더듬더듬 이어지는 목소리에 여환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데요.”

온여환을 바라보는 이복구의 시선은 여전히 의심으로 요동치고 있었지만, 검은 동공만은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그때, 여환의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유성혜로부터 온 전화였다. 온여환이 모텔을 빠져나온 걸 안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여환은 일단 이복구의 말에 대답을 유보한 채 방을 돌아 나왔다. 거실을 지키고 서 있던 곰발이 잽싸게 다가와 그를 대신해 방문을 닫았다. 여환은 거실 한복판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 야, 너 어디야? 밖이야?

“어, 잠깐 나왔어. 왜?”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이긴 했지만, 말이 빠른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인데, 하고 다시 물으려던 온여환은 급히 이어지는 유성혜의 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유난히 작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건가 싶기도 했다. 뭐라고? 되물은 온여환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반대쪽 귀에 붙였다.

“똑바로 말해 봐, 뭐라고?”

묻는 여환의 말끝이 높게 올라갔다. 이복구의 방 앞에 서 있던 곰발의 시선도 온여환을 향했다.

- 아이씨, 박하지 통신 기록 떴다고!

유성혜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온여환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만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 어젯밤 그 채성균이라는 사람한테 국제전화가 들어갔어. 기지국은 필리핀 민다나오섬인데, 번호가 눈에 익어서 확인해 보니까 예전에 박하지가 그 사람이랑 연락하던 대포 폰 번호더라고.

박하지가 채 사장에게 그의 친모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대포 폰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눈감을 수밖에 없었던 건 온여환이 박하지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들켜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하지가 사라진 후 그 대포 폰조차 사용하지 않는 것을 알고 여환은 그가 당연히 눈치챘으리라 생각했다. 온여환이 대포 폰의 존재를 안다는 걸 눈치채진 못했더라도, 핸드폰을 사용하면 자신의 위치가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하지는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핸드폰을 사용해 채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온여환은 유성혜의 다음 말을 들은 후에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혹시 몰라서 어젯밤 채 사장 다른 통신 기록도 찾아봤는데,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티켓을 알아봤어. 그 뒤엔 무슨 여행사랑 통화했고.

그 순간 온여환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박하지가 가지고 사라졌던 클러치백과 그 속의 헝가리 국적 여권이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채 사장에게 대놓고 전화를 한 것이 속임수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다른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만큼 아주 다급한 일이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그 둘 중 온여환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박하지가 속이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이거 나 말고 또 누가 알아?”

- 아무도 몰라. 일부러 보고 안 하고 확인하자마자 너한테 먼저 얘기한 거야.

“그럼 하루만 보고 늦춰 줘.”

- ……노력은 해 보겠는데 오래는 못 숨겨. 채 사장도 내 체크 리스트에 있는 타깃이라서 아무리 길어도…….

“알아. 딱 하루면 돼. 그리고 내가 지금 헝가리 국적 신분 하나 보낼 테니까 아까 채 사장이 통화했다던 그 여행사에 예약 들어간 거 있는지 조회 좀 해 줘.”

여환은 용건을 다 전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했다.

우린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 * *



박하지가 채 사장에게 연락을 하고, 이후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기까지는 딱 사흘이 걸렸다.

채 사장은 지금 박하지가 혼자 한국에 들어오기는 힘들겠지만, 여행사를 끼면 눈을 피해 들어오기가 쉽다고 했다. 다만 문제는 여행사를 통과할 신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박하지는 순간 온여환에게 받았던 헝가리 여권을 떠올렸다. 온여환의 말대로라면 그 여권과 신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온여환과 박하지뿐이었다.

문제는 과연 그 말이 진실이냐는 것이었다. 온여환이 만일 마지막까지 박하지를 속인 거라면? 물론 그게 진실이 아니라 해도 현재로선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이 많지 않았다. 지금의 박하지는 정답이 없는 문제에서 그나마 가장 리스크가 크지 않을 오답을 선택하는 게 최선이었다.

박하지는 채 사장에게 헝가리 여권에 적힌 신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채 사장은 해당 신분을 통해 작은 여행사의 패키지여행 상품으로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항공편을 예약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온 한국인데, 오자마자 또 비다. 필리핀에서 지겹도록 보았던 비구름을 박하지는 대한민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만났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지나 몇 달 만에 돌아온 감회를 느낄 새도 없었다.

우중충한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던 하지가 검은색 볼 캡을 푹 눌러썼다. 그는 어깨를 적시는 빗방울을 피해 황급히 승강장에 서 있는 택시에 올라탔다. 그나마 사납게 쏟아지는 스콜이 아닌 봄비라서 다행이었다.

“어디로 갈까요?”

택시 기사의 입에서 나오는 한국어가 낯설었다. 하지는 목적지를 대는 것도 잊고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차를 출발시키던 기사가 고개를 돌려 하지를 봤다.

“손님. 어디로 모셔요?”

“……가리봉동이요.”

옛날 조선족 타운 앞으로 가 주세요. 느리게 덧붙이는 하지의 말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기사가 백미러로 하지의 외형을 훑었다. 조선족인가.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는 듯한 시선이 그의 얼굴에 끈질기게 달라붙었지만, 하지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기사가 시사 소식이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여성 진행자와 남성 패널이 한 시간 전에 있었던 일신문화재단 산하의 마루 미술관 이지원 관장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 최 기자님, 이지원 관장이 기자회견에서 양심선언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 예. 아무래도 대통령이 마루 미술관의 미술품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사실을 관장인 이지원 씨가 직접 밝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양심선언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 대한민국 최대 기업의 자제가 이렇게 직접 기자회견을 여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 내용도 상당히 충격적이라서,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 의혹이 불거진 지 불과 하루 만에 이런 소식까지 듣게 된 국민들이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거든요.

- 그렇죠, 저도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인데요. 이지원 관장의 기자회견 내용이 모두 사실일지 아닐지는 일단 검찰 조사로 넘어간 후 더 지켜봐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 다만 이지원 관장이 본인 입으로 직접 사실을 밝힌 만큼 회견 내용에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휴, 나라가 미쳐 돌아가는구만.”

차가 많아진 도로 위에서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은 기사가 혀를 차는 소리가 뒷자리까지 넘어왔다. 이게 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 그런 거라며 멍청한 국민들을 욕하던 기사는 그러면서도 라디오 채널을 돌리진 않았다. 차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박하지가 비행기에 타고 있는 동안 한국은 또 무언가 상황이 심각해진 것 같은데, 하지는 지금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선장. 그 사람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나니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선장을 찾으려면 뭐부터 찾아야 할까. 온여환은 박양일이 박하지의 친부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박양일이 박하지를 어떻게 아들로 삼게 된 건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니면 사라진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더 파 봐야 할까. 연변 여자 교도소에서 출소 후 한국으로 넘어왔다는 백영란, 그 여자가 정말로 박하지의 어머니이자 선장일까. 박하지를 한국에서 낳은 게 맞긴 한 걸까. 아니. 애초에 박하지가 알고 있는 그의 출생 연도와 생일이 진짜이긴 한 걸까.

하지는 머리를 채우는 생각들과 귓바퀴로 밀려 들어오는 라디오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에 부딪힌 빗방울이 택시가 달리는 속도만큼 옆으로 번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가 교량에 올랐다. 영종대교였다. 비 내리는 다리 위는 차로 꽉 차 있었고, 붉은빛의 브레이크등과 주황빛의 방향 지시등이 앞뒤로 깜빡이며 창문 밖에서 얼룩처럼 번졌다.

그 불빛들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려니 정말로 돌아온 게 맞구나, 실감이 났다. 그래도 집이 있는 곳에 돌아왔다고 배알도 없이 속이 편해지려고 했다. 박하지는 이런 자신이 등신 같아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택시 미터기가 멈춘 것은 그렇게 한 시간을 더 달려서였다. 어느새 해는 져 있었다. 비도 내리는데 골목 안까지 더 들어가 달라고 할까, 잠깐 생각했던 하지는 느리게 골목을 빠져나가는 앞차를 향해 클랙슨을 울리는 기사의 욕설을 듣곤 깔끔하게 포기했다. 몸 조금 편하게 가려다가 가시방석에 앉아 갈 판이었다.

하지는 가리봉 시장 골목 근처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그도 익숙한 길이었다. 다행히 비가 많이 내리지도 않아서 걸어가는 동안 옷이 많이 젖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는 어릴 때 늘 다니던 지름길을 통해 연정으로 향했다.

갑자기 나타난 박하지를 보고 혜령이 얼마나 놀랄지가 눈에 그려졌다. 하지는 머릿속으로 무슨 핑계를 대야 할까 생각했다. 어설픈 핑계는 눈치 빠른 혜령에게 절대 통하지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좁은 골목을 걸어 나가던 순간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좁은 길이 끝나고 큰길과 맞닿는 부분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들이쳤다. 이 골목 안까지 차를 몰고 들어오는 것도 대단하다 싶었는데, 한 대가 아니라서 더 놀랐다.

하지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멈췄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던 걸음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눈으로는 조금 전 제 앞을 지나간 불빛을 포함하여 골목으로 들어온 차가 몇 대인지를 셌다. 총 네 대였다. 연이어 들어온 차들이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서더니 시동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지름길을 벗어나면 10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연정이 있었다.

하지는 연정을 포함하여 이 주변에 차를 네 대나 몰고 온 손님들이 갈 만한 술집과 식당이 있었던가, 되짚어 봤다. 박하지가 필리핀에 가 있는 동안 상권이 바뀐 게 아니라면 이 골목에 그런 가게는 없었다.

귓불 밑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보슬비에 야금야금 젖은 옷이 살에 착 달라붙었다. 하지는 어둠 속에서 눈만 깜빡거리며 온 신경을 골목 바깥의 소리에 집중시켰다. 눅눅한 공기 사이로 묵직한 발소리와 알아듣기 힘든 말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하진 못했다. 골목 어딘가에서 울리는 오래된 중국 노래가 경청을 방해하기도 했다.

하지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은 여전히 어둠 속에 박하지의 존재를 숨겨 주었다. 하지는 그 어둠을 믿고 몇 걸음 더 움직였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골목 안까지 날아왔다.

“당신들 대체 왜 이러냐고요!”

혜령의 목소리였다. 무언가를 집어 던진 건지, 혹은 던져진 건지 양은 냄비 같은 게 거칠게 부딪쳐 굴러다니는 소리까지 들었을 때, 하지는 골목 끝으로 나아가던 보폭을 확 넓혔다. 눈꺼풀을 떨며 곧장 큰길로 튀어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방심했다.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이미 늦었다. 뒷덜미를 덮고 있던 상의가 확 당겨졌다.

“윽……!”

비명을 뱉으려 벌어졌던 입술이 커다란 손바닥 아래 꽉 막혔다. 동시에 허리를 감아 안는 팔에 그대로 몸뚱이가 갇혔다. 벗어나겠다고 무릎을 들어 올리며 발버둥을 칠수록 허리가 더 깊숙이 조여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하지는 바깥의 불빛에서 멀어져 점점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나서 급히 숨을 들이켜는데, 코밑을 스치는 향이 익숙했다. 기억 어딘가를 단번에 찌르는 향취에 하지는 다시 한번 코로만 숨을 들이마셨다. 같은 향이 났다.

손마디에 밴 오묘한 풀냄새와 달큰한 바닐라 향을 알아차린 하지가 눈을 부릅뜨며 제 입을 막은 손을 긁어내렸다. 한 손으론 손목을 쥐고 밀어 내며, 다른 손으론 손등을 꼬집고 할퀴었다. 그럼에도 박하지 얼굴의 반을 가린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고개를 흔들며 어떻게든 손을 떼어 내려 애쓰던 하지는 손바닥의 위치가 살짝 미끄러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입을 벌렸다. 그러곤 손날과 손바닥의 경계 사이를 콱 깨물었다. 으득. 살 씹히는 소리가 났다. 귓가에 대고 뜨거운 콧김이 뿜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는 아래턱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다문 입이 아예 살점을 뜯어 낼 것만 같았다. 송곳니 밑에서 비린 맛이 올라올 즈음이었다. 갑자기 몸이 돌려세워졌다. 입은 여전히 꽉 막힌 채였다. 예상치 못한 방향 전환에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던 하지는 그대로 허리가 붙들렸다. 그러곤 건물 하나가 끝나는 모퉁이 안쪽으로 밀어 넣어졌다.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 선 하지가 제 앞에 선 상체를 퍽 밀어 내려는데, 건물 외곽의 시멘트벽에 등허리가 부딪쳤다. 동시에 단단한 가슴이 그를 짓누를 듯 다가왔다. 거리가 어찌나 가까운지 어딘가에 부딪힌 볼 캡이 휙 들려 이마 위까지 올라갔다. 옴짝달싹 못 하게 내몰린 와중에도 하지는 미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여 댔다.

“가만히……!”

코앞에서 나직하게 퍼진 말소리에 하지의 몸짓이 단번에 멈췄다. 힘으로 누르고 붙잡아도 그칠 줄 모르던 몸부림이 그야말로 잠잠해졌다. 왜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서였다. 내내 어둡기만 하던 시야가 천천히 색을 찾아 갔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

“…….”

“제발.”

간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음성에 하지의 눈동자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힘이 들어간 턱, 굳게 문 입술, 단단하게 멍울진 코끝에서 한참 머물러 있던 시선이 마침내 눈까지 올라갔다. 너무 가까운 거리 탓에 눈앞의 얼굴을 온전히 담아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지만, 하지는 기어이 그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온여환의 얼굴에 낯선 초조함과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게 생경해서 박하지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외워서 새겨 넣듯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바깥에 국정원 사람들이 와 있어.”

낯선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인식하느라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다시 움직였다. 온여환이 말한 바깥이라 함은 조금 전 박하지가 뛰어나가려고 했던 그곳, 연정을 말하는 것일 테다. 거기에 국정원 사람들이 와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는 온여환에게 붙잡혀 끌려오기 전 들었던 혜령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큰일 아니야.”

온여환이 재빨리 말을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박하지는 또 한 번 그를 밀어 내려 생난리를 쳤을 것이다.

“너 사라지고 난 뒤부터 흥신소, 연정, 그리고 네 예전 집까지 비정기적으로 방문해서 확인했어. 오늘도 그 방문 중 하나일 뿐이야. 국정원 사람들 아직 네가 한국 들어온 것도 몰라.”

“…….”

“강혜령 씨한테 해 같은 거 안 입힐 거고, 5분이면 갈 거야. 그러니까 저 사람들 갈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에 좀 있어.”

“…….”

“가만히 있겠다고 하면, 손 내릴게.”

온여환이 박하지의 속내를 읽으려는 듯 신중히 눈을 맞췄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박하지는 대답을 머금은 채 대치하듯 눈싸움을 벌였다. 쌍방의 싸움이라기엔 온여환에게서 전투력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지 않았다. 박하지의 눈빛이 누그러진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온여환과의 재회도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지만, 예상은 하고 있었다. 평생 그를 피해 숨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그를 피해 달아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온여환을 피해 봤자 멀지 않은 곳에 국정원이 있었다. 지금 이건 제 발로 걸어 나가 국정원에게 붙잡히느냐, 아니면 이대로 온여환에게 붙잡혀 있느냐의 선택이었다.





@라무 요게금지 나만아는표시있음 @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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