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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ky Strike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10 0 2022-5-12 21:33
Lucky Strike



“좋아해.”

애절한 목소리가 빈 교실에 울렸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진심을 끌어 모아 던진 한 마디였기에 조용한 음성이었지만 힘이 담겨 있었다. 상원은 초조하게 두 손을 모아 쥐고,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침묵뿐이었다. 혹시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 작아서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는 다시 한번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널 좋아해. 진심이야, 나는…….”

상원은 고개를 들었다가 발끝까지 얼어붙는 기분을 맛보았다.
고백을 결심했을 때,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남자가 고백을 했으니 상대에게 욕을 먹을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한대 맞을 수도 있다고 각오하고 왔다. 하지만 상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조석희?”

창가에 기대어 앉아있던 사내가 그제야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90이 훌쩍 넘는 장신의 거구였기에 살짝 얼굴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상원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상대에게 완벽하게 무시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욕을 퍼붓고 주먹을 날렸다면, 이 정도까지 비참한 기분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각오로 던진 고백이 상대에게는 화를 낼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참함을 넘어선 참담한 기분이었다.

“몰랐네요.”

조석희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자신에게 전달되는 고백 따위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표정은 여전했지만 대화에 참여할 기분이 이제야 든 모양이었다.

“상원선배. 호모였어요?”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상대에 대한 조롱이 역력히 드러났다.
고백에 대한 호불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의미와 약간의 조롱뿐.

“저 먼저 가볼게요. 약속이 있어서.”

예의바른 척 하고 있었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백을 거절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곤혹스러움도 없었다. 그는 상원의 어깨를 툭 쳐보이고는 음악실 문을 나섰다.
들어왔을 때 보였던 무표정에서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은 채.
그는 그렇게 음악실을 나가버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상원은 교복이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년이 넘게 진행시켜온 짝사랑이었다.
하지만 고백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성향을 알린 적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상대가 다름 아닌 조석희였다. 조석희를 상대로 짝사랑이라니.
희재 고등학교를 다니는 누구라 할지라도 조석희를 상대로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냐고.

그럼에도 상원은 오늘 조석희에게 고백을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의 전근이 결정되지 않았더라면 그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평소의 자신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을 벌였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희박한 가능성을 꿈꾸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생각보다 몇 배는 더 참담했고 비참했다. 차라리 깨끗하게 거절을 당했으면 기분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내가……미쳤지.”

상원은 자신의 헛된 기대에 자조 섞인 웃음을 보냈다. 마지막이랍시고 너무 기분을 냈다.
상대는 조석희다. S반의 조석희.

“후우…….”

빗줄기가 걸음을 옮길수록 더 거세졌다. 운동화에서 꾸덕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온몸이 흠뻑 젖고 말았다. 흡사 물에 빠진 꼴이었다. 이렇게 참담한 기분인데 날씨까지 좋았다면, 더더욱 최악이었을 것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다고 믿으며, 그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당장 내일부터 전학을 핑계로 학교에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상원은 스스로를 달랬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자 미처 느끼지 못했던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상원은 물이 흐르는 운동화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녁 준비를 하던 그의 어머니가 놀라서 수건을 들고 뛰어 나오셨다.

“어머, 우산은?”
“안 가져갔어요.”
“아침에 비 온다고 그랬잖니. 얘는 정신을 어디다 두고.”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침에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어제 밤부터 고백에 대한 생각 때문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해 한귀로 흘려버렸을 것이다.
상원은 어머니가 내어준 수건을 받아 들고 아직도 물기가 뚝뚝 흐르고 있는 머리를 닦아냈다. 빨리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그런다고 이 더러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았지만,
빨리 잠드는 데는 도움이 될 테니까. 잠이 들면 목구멍에 들러붙어 숨을 쉴 때마다 들이마시게 되는 이 수치심과 비참함을 조금은 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참, 너 그 얘기 못 들었지?”
“무슨 얘기요.”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워낙 반색을 하며 말을 꺼냈기 때문에 상원은 어쩔 수 없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버지, 전근 취소되셨대. 갑자기 인사 발령이 바뀌어서 다른 사람이 부산으로 내려가게 됐다고 하더라. 그래서……어머!! 얘!!!”

상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구역질이 솟아나와 그는 재빨리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우웩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음악실에 먼저 가 있기 위해 3분 만에 먹어버린 점심을 게워내고 말았다.

다 틀렸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간신히 삼켜서 목구멍에 붙어있던 수치심을 게워냈으니 세상은 온통 수치심으로 가득 차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최악의 상황은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는 것을.




“너 전학 간다고 하지 않았어?”

김동석이 삼일 만에 나타난 자신의 짝을 바라보며 놀라서 물었다. 상원은 힘없이 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됐어, 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몸살이 났다는 핑계로 학교에 빠지는 것도 삼일이 한계였다.
아들의 일류대 진학을 바라는 자신의 부모님이 아들이 언제까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방관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후우…….”

상원이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삼일 간 침대에 누워있으며 온갖 생각을 다 했지만 딱히 다른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고,
지금 조석희를 찾아가 그때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면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던진 그 말은 농담이었다고 둘러댈 수도 없다.

……그저 졸업하기 전까지 최대한 조석희의 눈을 피해 다니며 죽은 듯이 사는 길밖에 없다.
우선 조석희가 자주 다니는 곳이나 아지트로 삼는 곳은 발길도 돌리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다행히 6반은 별관에 처박혀있어서 잘만 하면 별관 안에서만 생활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신관으로 건너갈 일은 학생회와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없으니 이번 기회에…….

“이상원. 회장이 불러.”
“회장?”

상원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서며 책을 덮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회장이 자신을 호출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하루의 시작이 좋지 않았다. 원래도 지지리 운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요즘 들어 특히 더 불운해지는 것 같다.
상원은 혹시 멀리서라도 조석희를 보게 되면 얼굴을 가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책을 집어 들고 교실을 나섰다. 회장인 김이경이 있는 2학년 교실은 때문에 별관과 신관이 이어지는 계단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조석희가 있는 S-1반은 바로 그 계단 앞에 있었다. 상원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으로 최대한 얼굴을 가리며 복도를 걸었다. 다행히 신관으로 갈 때까지 그를 아는 척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회장.”

2학년 D반의 문을 열자 이경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색을 했다.

“선배. 며칠간 안 보이시더니 어떻게 되신 거예요.”
“비를 맞았더니 몸살이 나서.”
“전학을 가신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아아, 그게…….”

상원은 학생회장에게 일부러 전학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원래 학생회 임원은 2학년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상원이 맡고 있는 서기직은 후임자가 생겼다가도 꼭 무슨 사정이 생겨서 공석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2학년 때부터 서기를 하고 있던 상원은 임시직을 맡았다가 지금은 아예 다시 서기로 학생회 활동을 하기로 해주었다. 학생회에서 6반인 상원에게 서기직을 맡긴 것도 그로서는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그의 실력이 6반에 머무를 수준이 아니었지만, 일단 6반에서는 학생회 임원이 나온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헛소문이겠지.”

전학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꺼내고 싶지 않은 상원은 대충 얼버무렸다.

“선배 짝인 동석 선배가 하신 말씀인데요?”

이경의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상원은 잘못 걸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회장인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전학을 가려했다는 것이 그의 심기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전학을 가는 거였으면 벌써 갔겠지.”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은 성격이었기에, 웃고 있었지만 상원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긴 그렇겠죠.”

상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해야 했다면, 눈치 빠른 이경이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선배라면 다 결정된 전학도 어쩌면 물거품이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

이경의 뼈아픈 한마디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악의 없이 던진 한마디일지라도 자신에게는 현실이 되어있기에, 도저히 농담으로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설마 저한테 말 한마디 없이 전학을 가시거나, 서기직을 관두시거나 하지는 않으시겠죠. 선배가 그렇게 무책임한 인간은 아닐 것이라고 믿어요.”
“다, 당연하지.”

상원은 학생회 탈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번으로 미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반 학생인 상원이 S반 학생들과 함께 방과 후 활동을 할 수 있게 편의를 봐주는 것에는 다름 아닌 학생회 일원이라는 자리도 크게 한몫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학 입시 설명회 문제 때문에 불렀어요. 저번에 회의 때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들은 것은 잘 잊지 않는데도 꼼꼼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회의에 오고간 대화들은 모두 적어두었던 것이다. 그런 상원은 서기가 적임자였다.

“저희 재단에서 주최하는 것이라서 아마 당초 예상보다 더 크게 열릴 것 같아서요. 물론 대부분의 일은 선생님들이 하시겠지만 기타 잡무는 저희 학생회에서 도와드려야 하니까, 선배 듣고 계세요?”
“어?……어, 응.”

어디선가 분명 조석희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상원은 재빨리 주변을 탐색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근방에 조석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몸살이시라더니 아직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몹시, 안 좋아.”

상원은 재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경이 자신의 손으로 상원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 안 나는데요?”
“속이, 속이 안 좋아.”

상원이 한 손으로 자신의 위 부근을 움켜쥐고 인상을 썼다. 조석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이제는 진짜로 위가 아프다는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양호실로…….”
“됐어! 그냥 내가 알아서 갈게. 걱정하지 마.”

김이경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에 온화하고 차분한 사람이 뭘 저렇게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대나 싶은 것이다. 게다가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럼 오늘 수업 끝나고…….”
“끝나고 만나. 끝나고.”

상원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 맞다. 잠시 만요.”

이경은 상원이 부탁했던 책을 떠올리고 교실로 돌아가 책을 가지고 다시 나왔다. 하지만 상원은 이미 복도 끝에서 거의 달리다시피 걸어가고 있었다.

“상원 선배!”

이경이 책을 한 손에 들고 그를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상원이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예비 종이 울렸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을 알리는 본 종이 울릴 시각이었다.
빨리 책을 건네주고 교실로 돌아가야겠다고 김이경은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복도 끝에 서 있는 상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서, 초조하게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선배. 이 책이요.”

이경이 책을 내밀려고 하는 순간 상원의 시야에 낯이 익은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

상원이 화들짝 놀라 이경에게 달려들 듯이 달려가 자신의 몸을 숨겼다. 그러다 상원은 갑자기 팔을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잃고 말았다.

“조심해요.”

이경이 재빨리 상원의 팔을 붙들어 주었다. 보통사람이었다면 몸의 균형을 금방 되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이상원이었다.

“읏!!”

상원을 잡아주려던 이경마저 함께 몸의 균형을 잃고 복도에서 넘어지고 만 것이다. 이경의 몸 위에 넘어진 상원이 후다닥 일어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 아, 그래 이것만 가져가면 되지?”
“네, 선배……, 그런데 그 쪽은 교실하고 반대방향인데요?”
“알아.”

상원이 짧게 대꾸하고 이경이 건네준 책을 옆구리에 끼고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5초 후에 조석희가 저 계단을 올라올 것이었다. 절대로 그의 눈에 띄면 안 된다고 결심을 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신은 그의 소망을 져버린 것이다.
니체는 그랬다. 신이 죽었다고. 아니 정확히 하자면 짜라투스투라가 말했다. 아무튼 신은 죽었다고 그랬지만, 상원은 믿지 않았다. 신은 살아있다. 살아서 이토록 자신을 잔인하게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전생에 유다였던 게 분명하다. 신을 팔아먹은 대가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상원아! 오늘부터 목재에 페인트칠하는 것 배운다고 했어. 너 준비물 안 갖고 왔지?”

상원을 알아본 6반의 친구가 친절하게 오늘의 수업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하긴. 니스랑 락카랑 페인트를 어디서 알아서 해, 인마. 흐흐. 그리고 오늘 수업 기술실에서 한다고 했어.”

6반 학생이 기술실의 위치를 알려주려고 손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하필이면 몇 초 후에 조석희가 올라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계단과 일치되는.

“먼저 가. 나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어딜? 우리 교실도 저 쪽인데?”
   
둔한만큼 친절한 같은 반 급우가 손수 상원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기까지 했다. 상원은 어떻게 해서라도 친구의 친절을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의 온화하고 침착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앞뒤 사정보지 않고 그의 손을 던지듯이 뿌리쳐버렸다. 결과적으로 친절을 베풀어주려던 6반의 학생은 들고 있던 시너 통을 놓치고 말았다. 공중에 날아오른 시너 통은 벽에 부딪히는 순간 뚜껑이 열렸고 퍽하는 소리와 함께 물줄기처럼 쏟아졌다.

“――!”

불행인지 다행인지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시너가 튀지 않았다.

“……조석희!”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소리처럼 터져나간 한마디.
누군가에게는 불행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다행일 수 있는 서막이 열렸다.



“미안.”

그 와중에 날아 오른 시너 통 뚜껑에 이마를 얻어맞아 피를 보고 만, 상원이 중얼거리듯 사과를 건넸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조석희가 그런 그를 어이없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정말 미안하게 됐다.”

선배로서 침착하고 차분하게 사과를 건네려 했지만 그의 손끝은 아까부터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조석희를 정면으로 바라보기에 상원의 용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나왔음에도 조석희 특유의 분위기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속된 표현으로 조석희는 눈만 마주쳐도 상대를 임신시킬 것 같은 인간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재력으로 보낼 수 있는 서울의 수많은 명문고를 두고 이 학교를 택한 이유는 다름 아닌 남고, 라는 이유 하나였다. 한국보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외국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킨 것인지 몇 번이나 퇴학을 당한
조석희를 받아줄만한 학교도 희재고 뿐이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런 남자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울 판국인데 게다가 삼일 전에 고백했다가 장렬하게 거절을 당하고 난 후가 아닌가.
상원은 속으로 지조 없는 아버지 회사의 인사 발령 담당자를 욕하며 조석희에게 수건을 건넸다.

“이걸로 닦아.”
“됐습니다.”

매몰찬 거절의 말을 들은 상원이 움찔하며 들고 있던 수건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찌됐든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아무튼 오늘일은 미안하게 됐다.”

속으로 말을 고르면서도 상원은 삼일 전의 일을 조석희가 꺼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조석희는 끝내 음악실에서의 일은 입에 담지 않았다. 아무래도 늘 하던 대로 상대를 개무시하겠다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계속 유지할 모양이었다.
상원은 이번만큼은 상대의 더러운 성격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문을 닫고 나가려는 그의 등 뒤로 조석희의 낮은 이죽거림이 들려왔다.

“재수 없긴.”
“…….”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냥 흘려들었을 수도 있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이상원에게는 비수처럼 날아드는 말이었다.
이상원이란 인간에게는 예의상이라도 행운이 함께 하길, 이라는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하지만 뒤로 넘어지면 등뼈는 물론이요, 코뼈는 옵션이고, 멀쩡했던 갈비뼈까지 살얼음판 금이 가듯 쩍쩍 갈라지는 인간이 바로 이상원이었다.
각종 중요 시험 때마다 열병에, 복통에, 심지어는 교통사고까지. 그러한 상원의 불운은 희재고 입학시험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희재 고등학교의 시스템은 일반 고등학교와는 사뭇 달랐다. 근방 여섯 개의 학교는 사립 윤화재단에서 설립한 학교로 일명 육시랄 고등학교라 불리었다. 교복 원단까지 같았지만, 단추와 배지의 모양만으로 학교를 구분할 수 있었다.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사실은 더 이상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학생들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 곳이 바로 이 육시랄 고등학교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이쯤 되니 아무리 학교를 세운 목적이 특수하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이사장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었다. 사립이라 할지라도 학교 유지에 대한 최소한의 명목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이사장은 희재고에 나름의 해결책을 마련해 놓았다.

희재 고등학교는 학년 당 여섯 반이 편성되어 있었다.
S-1반, S-2반, D반, K반, I반은 흔히 말하는 특수 학급이었다. 약간 모자라는 학생들을 위한 특수 학급이 아닌, 뛰어난 수재들을 위한 학급이었다. 저 무분별해 보이는 학급의 이니셜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S-1반은 S대를 진학을 목표로 두고 있는 문과 학생, S-2반은 같은 등급의 이과 반이었다. D반은 일명 Doctor반으로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를 목표로 하는 학급이었으며, K반은 카이스트를 비롯한 일류 공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의 반이었다.

I반은 아이비리그, 즉 담쟁이덩굴(Ivy)로 뒤덮인 8개의 일류대 유학을 꿈꾸는 소수 학생들의 반이었다. 각 반의 학생들은 목표로 하고 있는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업을 받는다.
최고의 교수진이 만들었다는 교재는 주변 학원에서 가장 탐내는 비급이었다. 교사진 역시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초빙해왔을까 싶을 정도로 최강의 팀을 이루고 있었다.
뿐인가? 따로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빵빵한 방과 후 활동 지원과 학생 일인당 한 자리씩 분배되는 도서관의 자리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학급 목표에 맞는 학교에 진학했을 경우 대학교 입학금이 장학금으로 지원되는 제도 역시 주변에 칭찬이 자자한 것 중 하나였다.
문제는 나머지 한 반의 보통 학급이었다. 그 반의 이름은 다름 아닌, 6반.
……단지 6반, just 6반, 그냥 6반이었다.

한마디로 희재 고등학교의 진정한 의미의 특수반은 6반이었던 것이다. 6반의 학생들은 여타 육시랄 고등학교의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수업시간에 늘 잠을 청했으며, 무단 조퇴와 결석은 기본이고,
대학 진학에는 관심도 없고 고등학교 졸업에만 의의를 두는 무리들이었다. 그 중 군계일학의 학생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이상원이었다.
희재 고등학교에 입학 원서를 넣었을 때만해도 상원은 자신이 6반의 일원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입학시험 당일 날 39도의 이유모를 열병과 설사가 겹치지 않았다면, 그는 당연히 S반에 입학할 수재였던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희재고 6반 합격.
합격이었지만 불합격이나 마찬가지인 결과에 상원은 엄청난 고민을 했다. 차라리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보라는 부모님의 만류도 있었지만, 상원은 어디에서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에 희재고 6반에 입학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 그가 입학 후 첫 모의고사에서 S-1반 학생들을 제치고 전교 석차 3등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희재고에서 유명해졌다. 더불어 그의 불운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혀를 차며 그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무리 공부를 잘 한다 해도 실전에서 운이 따라주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수군대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상원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언젠가,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운이 따라주길 바라며.
그런 그였으니 조석희가 던진 한 마디에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
“재수가 없으려니까.”

조석희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말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탓에 그의 한국어 발음은 조금 어눌하고 느릿느릿했다. 하지만 사막의 모래처럼 버석거리는 그의 어조와 어울려 큰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거지같은 게 다 붙는다, 까지 말하면 선배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죠.”
“…….”

이미 말해놓고 뭘, 이라도 대답한다면 너무 구차하겠구나 싶어 상원은 입을 다물었다.

“웬만하면 다시는 보지 말죠. 선배님.”
“……어.”

대답을 하면서 상원은 등을 돌리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비참한 순간에도 조석희의 모습을 보고 가슴을 두근거렸을 게 분명하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초라해질 수 있을까 싶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은 지키고 싶었다.

“……여러 의미로, 미안하게 됐다.”

상원은 작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양호실 문을 나섰다. 수업 시간이었지만 그는 별관의 도서관으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그고 한참을 울었다. 아무리 불운한 일이 닥쳐도 그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어쩌면 자신이 불행한 인간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그는 한참을 울었다.



“어디 갔다 왔어? 어울리지 않게 웬 땡땡이?”

상원의 짝인 동석이 그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자신들이야 땡땡이 치고 학교 담을 타넘는 게 일상이라지만 6반에 잘못 떨어진 상원은 단 한번도 수업시간에 빠진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얌전한 슈퍼개가 갑자기 미쳐 상원의 발을 물어뜯어 응급실에 실려 갔던 경우나, 멀쩡하던 간판이 떨어져 그의 손가락이 부러져 응급실에 택시를 타고 간 경우나, 하늘에서 급작스레 떨어진 우박 때문에 우산살이 부러져
그의 안구를 건드린 덕분에 응급실에 갔던 경우 등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냥 좀, 할 일이 있어서.”

상원은 사물함에서 문제집을 꺼내와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6반의 학급 분위기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교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기본이오, 유리창은 하도 깨트려 먹으니 아예 떼어버린 지 오래였다. 다른 학급에 구비되어있는 최첨단 컴퓨터와 모니터 시설은 6반 교실에서 철수시켰다.
3번의 절도와 5번의 파손 후에 교장으로부터 내려진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꿋꿋이 공부를 하는 상원의 집중력은 선생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상원의 뒷자리에서 PMP로 야동을 보면서 오늘도 꿋꿋하게 딸을 치고 있던 윤대진이 혀를 쯧쯧차며 말했다.

“이상원 무슨 고민되는 일…, 오예, 하아! 죽인다. 아무튼, 무슨 고민되는 일 있냐?”
“응? 갑자기 왜?”
“……너, 골치 아픈 일 있으면 수학 문제집 풀잖아. 솔직히 그딴 거 안 풀어도 늘 백점이면서.”

뒤에서 늘 야동만 보고 성인 잡지만 뒤적거리는 줄 알았던 급우가 날카로운 지적을 하자 상원은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과생치고 상원의 수학실력은 수준급이었다. D반의 수업을 무리 없이 따라갈 정도였으니
고등학생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수학문제집을 푸는 것은 마음이 혼란스러워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안정을 찾으려고 할 때였다.

“고민은 무슨.”

상원이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상원은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와 선이 가는 외모 때문에 첫인상은 가냘파 보였다.
흐트러짐 없고 단아한 외모 때문에 그는 신을 모시고 살며 금욕 생활을 하고 있는 신부와 같은 순결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진지해 보이는 눈빛과 그의 조용한 목소리는 상대에게 무한한 신뢰감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왜? 혹시 밤마다 어떤 여학생이 생각이 나서 막 가슴이 벌렁 벌렁거리고 잠이 안와? 이 형님이 다리 좀 놔줄까?”

대진이 낄낄거리며 농을 건넸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는다.”

실없는 농담 같지만 친구가 딴에는 자기 걱정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상원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던진 농담에도 조용히 고민을 하다 해답을 던져줄 정도로 고지식하고 진지한 성격이었다.
터무니없는 상원의 순수성에 6반 학생들은 처음에 적응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의 장점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혹시 누가 너 괴롭혀? 언놈이냐. 누가 감히 6반의 학생을 괴롭혀! 씨발, 다 죽여 버릴게.”

자고 있던 승완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어디에 싸움이 나면 신나게 달려가는 쌈닭의 본능과도 같은 습관이었다. 상원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잠이나 자.”
“하암……, 아무튼 뭐 싸울 일 있으면 깨워. 시발, 요즘 싸움이 뜸해 좆이 쑤셔서……. 이놈의 학교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시발 특수반이 왜 일케 많아……시발.”

잠꼬대를 하는 것인지 한풀이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었다. 그 와중에 생물수업을 위해 들였다가 반의 애완동물이 되어버린 잉어가 어항에서 또 탈출을 해서 교실이 물바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악! 시발, 저 새끼, 빨리 잡아서 처넣어!”
“무슨 놈의 잉어새끼가 핑퐁만 처먹고도 저렇게 힘이 세고 지랄이야!!!”

교실은 탈출한 잉어를 잡기 위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상원은 가만히 한숨을 쉬며 풀고 있던 문제집을 다시 펼쳐들었다.
진흙탕 속에 핀 연꽃은 오늘도 홀로 고매한 향기를 흘렸다. 그 향기를 알아주는 이 드물었기에, 그 자태는 처연하기만 했다.     


학년 당 6학급이었기 때문에 희재 고등학교의 학생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수에 비하면 교사는 큰 편이어서, 3년간 얼굴도 모르고 졸업을 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즉, 마음만 먹는다면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

그런데 왜 아침부터 또 조석희와 마주치게 된 것인지에 대해 상원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옆에는 학생회장인 김이경도 함께였다. 상원이 학생회 일을 그만두려는 데에는 별관에 처박혀 나오지 않으려는 것도 있었지만,
다름 아닌 조석희가 학생회 임원을 하고 있다는 이유가 컸다. 희재고의 학생회는 사회에 나가서도 대단한 배경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그의 아버지가 그를 그 안에 넣어버린 것이다.
남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에 취미가 없는 조석희가 학생회 일에 참여할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가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생회장이 조석희에게 의논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오늘처럼.

“하필……, 또 오늘이야.”

멀리서 걸어오는 조석희를 발견할 순간 그는 어디로 숨어야할지 주변을 둘러보다 재빨리 차 뒤로 몸을 숨겼다. 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그는 바닥에 절을 하듯 넙죽 엎드려, 두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에겐 수많은 차 안에서도 하필,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할 차를 고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헉!”

부릉,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휭하고 주차장을 떠난 차 때문에 상원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학생회장인 이경과 걸어오고 있던 조석희의 표정이 단번에 구겨졌다.

“선배?”

상원을 알아본 이경이 깜짝 놀라 외쳤다.
운이 더럽게 없는 것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차분한 상원이 학교 주차장 근처에서 납죽 엎드려 있는 모습은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상원 선배, 거기서 뭐하세요.”
“나? 하하, 나 음……, 렌즈 찾아.”

상원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더듬는 시늉을 했다.

“렌즈요? 선배 시력 양쪽 모두 1.5 아니었나요?”
“…….”

상원은 속으로 망했다고 중얼거렸다. 하필 학생회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 학생회장과 함께 마주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내 것 말고.”
“그럼 누구 렌즈요? 다른 사람 렌즈를 선배가 왜 찾아줍니까.”

6반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경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아무리 이상원이 6반으로 입학을 했고 현재도 6반 소속이긴 했지만, 실력은 다섯 반 그 어디에 둔다고 해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학생회 간부이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이 꼴통 반 깡패들의 놀림거리가 된다는 사실이 자존심 강한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친구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와줄 수도 있지, 뭐.”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중얼거렸다.
상원은 자신의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대단히 좋은 편이었다. 한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고, 이해력도 빨랐으니까. 그는 희재고 특수 학급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상위권을 차지할 만한 수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말솜씨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한 마디를 해도 천천히 곱씹고 나서 말을 내뱉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상대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는 무게가 있었다.
그런데 자꾸 조석희 앞에서는 망언만 내뱉는 꼴이 되고 있으니, 상원은 죽고 싶을 따름이었다.
……아버지, 그러게 갑자기 왜 전근 얘기를 꺼내셨나요.

“여기서 계속 시간 낭비할 거면 난 먼저 들어간다.”

희미하게 짜증이 묻어나는 어조로 조석희가 이경에게 말했다. 대놓고 앞에서 시간낭비라고 일컬어진 상원은 잠결에 면도칼을 집어 들어 양치질한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경에게 말을 건넸다.

“나중에 보자. 김이경.”

나는 됐으니 빨리 들어가 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김이경은 자신의 선배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렌즈를 찾고 있는데 홀랑 들어가 버릴 정도로 경우가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됐어요. 같이 찾아드릴게요. 넌 들어가.”

학생회장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렌즈를 찾으려고 하자, 상원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친절은 조금도 반갑지 않다. 둘이 가던 길을 가고 자신은 바로 일어나서 교실로 향하면 깨끗하게 끝날 문제였다.
아니, 애당초 차가 조금만 더 늦게 출발했다면……, 아니 그 차가 아니라 저 옆 차에만 숨었어도……, 아니, 오늘 5분만 일찍 출발했더라도! 아니, 아니, 아버지의 전근이 그렇게 쉽게 번복되지만 않았어도!
……아니다, 애초에 이렇게 태어나버린 내 죄가 크다.
오만가지 생각이 상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렇지만 침착하게 그는 회장인 이경을 밀어냈다.

“됐어. 금방 찾아. 못 찾으면 그냥 올라가지.”
“그럼 그냥 올라가요.”

김이경이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S반, K반, I반의 괴물 같은 라이벌들을 제치고 학생회장 직을 차지한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사시미 칼날 같은 결단력. 그리고 쇠심줄 같은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뇌와 판단력은 기본 조건이었다.
조석희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아직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상원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경이 그를 잡아 일으켰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관으로 가실 거죠?”
“그래. 안녕. 잘 가라.”

상원은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6반 소속이라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일이 되리라고 상원은 생각지도 못했다.

“선배.”

예상지 못한 목소리에 별관으로 종종걸음을 옮기던 상원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귀와 뇌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 목소리는 꿈에서나 그리던 바로 그…….

“상원 선배.”
“응?”

방금 대답이 어색하게 들리지는 않았을까 조마조마해하며 상원은 고개를 돌렸다. 너무 빨리 돌리면 애가 닳아 보일 테고,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돌려도 건방져 보일 테니 적당한 속도로.
조석희가 천천히 상원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느릿느릿 하게 걷는 것 같았는데, 키가 큰데다 서양인에 가까운 다리가 긴 체형이었기 때문에 몇 걸음 걸리지 않았다. 짧게 자른 머리 때문에 한눈에 들어오는 두상이 매우 근사하다고,
상원은 늘 생각했다.

아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상원은 호흡을 조절하며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조석희를 마주보고 섰다.

“왜 불렀어.”
“뭐 하나 물어보려고요.”
“그래.”
“선배 스토커예요?”
“――!!”

상원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면전에 대놓고 하는 조석희의 표정이 잔인하리만치 무표정하다는 것이 우선 놀라웠고, 혹여 저 앞에 서 있는 이경이 듣지는 않았을까 싶어 두려웠다.
하지만 상원의 입장이나 체면 따위 관심 없다는 얼굴로 조석희는 재차 그를 다그치듯 되물었다.

“선배 스토커냐고요.”
“아니, 나는……, 스토킹을 할 만한 사람은 못 된다고 생각하는데.”

상원은 자신은 스토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킹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쓸데없이 솔직한 고백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 말에도 신중을 기하려는 그의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조석희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스토커 아니면 사람 앞에 나타나는 짓 좀 그만 두시겠어요?”

원래도 저음인데다 한국어 발음이 어눌한 편이기 때문에 조석희의 말을 끝까지 듣고 이해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온 몸에서 페로몬을 분출하는 조석희가 1미터 반경 앞에 있는 이상원에게는 더더욱.

“……어?”

그는 막 조석희의 ‘stalker'발음이 끝내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 보자고요. 아침부터 벌레 밟아서 기분 더러운 사람도 생각을 하셔야지.”

아침부터 벌레로 전락한 상원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조석희의 감정 섞인 혼잣말에 상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조석희의 말이 옳았다.
오늘은 그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정말 재수가 없는 아침이었다.



“……내가 벌레 같은가.”

아침부터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학 문제집 반 권을 풀어낸 상원인 입을 열고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엥? 좆또 그게 무슨 소리야?”

자다가 귀신 오나니하는 소리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윤대진이 물었다.

“나 벌레 같은 느낌이 들어?”

상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진에게 되물었다. 이게 드디어 미친 건가하고 대진이 상원을 아래위로 훑어보았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은 차분하고 단아한 얼굴 그대로였다.

“벌레면, 바닥에 기어 다니거나 수풀을 날아다니거나 하는 그런 벌레 말하는 거지?”

자신들과는 고차원 적인 사고를 하는 상원을 배려해 윤대진이 확인 차 그의 말속에서 사용된 벌레의 사전적 의미를 확인했다.

“그렇지. 뛰어다니는 것도 포함해서. 메뚜기나 사마귀, 귀뚜라미 같은 애들까지 모두.”

일단은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둬야겠다고 생각한 상원이었다.

“푸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것들하고 널 왜 갖다 대냐.”

대진이 침을 튀겨가며 웃었지만, 상원은 따라 웃지 못했다. 오늘 아침 조석희로부터 면전에서 벌레취급을 당한 후라, 감히 웃을 수가 없었다.

“누가 너한테 벌레 닮았대? 크크. 소심한 녀석. 그래서 반나절을 수학문제집을 풀면서 고민했냐? 졸라 웃기네, 어떤 씹새끼가 농담 한마디 던졌다고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냐. 이 겉똑똑아.”

어떤 씹새끼가 조석희라는 것, 그리고 상원의 1년간 짝사랑 상대라는 것이 대단히 큰 문제였다. 하지만 그걸 상대에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상원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빙신아. 너 진짜 설마, 자기가 벌레 같다고 진지하게 3초 이상 생각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대진이 키득거리며 상원의 어깨를 툭툭쳤다. 하지만 상원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해 무언의 긍정을 해버렸다.

“에!! 뭐야! 너 진짜 그딴 생각하고 있어!?”
“……가능성은 늘 있으니까.”
“가능성이고 지랄이고 어떤 새끼야. 어떤 개씹새끼가 그런 말을 했어!”

대진이 읽고 있던 성인 잡지를 내려놓고 소리쳤다.
윤대진이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받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상원이었다. 선생들조차 내던진 돌머리 윤대진에게 이해할 때까지 단 한번도 화를 내지 않고 일주일간 천천히 설명을 해서
시험을 통과시킨 장본인이 바로 상원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6반에 어울리지 않는 병신샌님이라고 상원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대진이 그 일이 있은 이후에는 상원의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데려와. 어떤 개쉑인지 부랄을 네 쪽으로 만들어 강판에 갈아 주스를 만들어 처먹여 줄 테니까.”

듣기에 거북할 정도로 상스러운 욕을 퍼부으며, 대진이 씩씩거렸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끔찍하다.”
“그 새끼야 말로 무슨 농담을 너같이 고지식한 새끼한테 해서,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드냐! 이 지경으로!”
“얘 지경이 어떤데.”

옆에서 오토바지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던 동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수학문제만 풀고 있잖아. 폐인처럼!”
“……풀면 안돼? 학생이?”
“아 시발, 우리 반에서 누가 문제집을 풀어!!”

윤대진의 말이 옳았다. 6반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두눈박이가 외눈박이 나라에 가면 병신이 되듯, 학생이지만 6반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지퍼나 올리고 말해. 변태새끼야.”
“여기서 왜 지퍼 얘기가 나와!”

대진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손을 짚어 교복 지퍼를 올렸다. 흥분한 상태로 지퍼를 올린 바람에 살이 씹혀 대진이 괴성을 지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으아아악!!!!!!”
“또 지랄이다. 또.”
“미친 새끼, 저거.”

상원이 한숨을 내쉬며 자기가 해주겠다고 대진을 간신히 진정시켜, 지퍼에 씹힌 살을 풀어주었다.
6반의 반장은 승완이었다. 가장 싸움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반장 노릇을 하는 것은 상원이었다. 게다가 담임마저 버린 폐가 같은 교실에 등대가 되어주는 것도 상원이었다.
뿐인가? 각종 위급한 상황에서 차분하게 사태를 진정시키고 해결하는 것도 상원의 몫이었다. 워낙 6반 학생들이 생각 없고 거칠게 놀다보니 교실 안에서 피를 보는 경우도 허다했다.
상원은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응급 처치에 관한 서적을 혼자 찾아 읽어서 이제는 웬만한 응급 처치는 양호교사 못지않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6반의 이상원은 완벽하게 적응된 생명체였다.

“거기 뒤에 약 상자 좀 가져다 줘. 약 발라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아, 시발. 존나 아프네.”

대진이 눈물을 고인 눈으로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동석이 가져다 준 약상자에서 소독약과 연고를 꺼내어 상원은 능숙하게 대진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상처가 난 곳이 거북한 지역이어서 얼굴을 찡그릴 만도 한데, 그는 그런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약을 발라주며 친구에게 참을 만 하냐고 친절하게 물을 뿐이었다.
이상원이 6반에 떨어진 것은 개인적으로는 큰 불행이었지만, 6반 학우들에겐 대단히 큰 행운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태여 입 밖에 꺼낼 만큼 성격이 어른스러운 인간은 한 명도 없었다.

“시발, 이게 무슨 벌레야. 천사지.”
“응?”

대진의 중얼거림에 상원이 눈을 치켜뜨고 되물었다.
하얗고 결이 좋은 피부는 그의 차분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말을 하기 전 생각을 할 때 살짝 내리감는 눈은 고급스러운 난초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180에 가까운 큰 키였지만, 손바닥으로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질 만큼 몸의 비율도 좋았다. 고양이 입 꼬리처럼 살짝 올라간 입술에 아주 약간의 미소만 머물러도 보는 사람의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로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늘 맏형 같은 성품으로 자신들을 돌봐주는 상원에게 감히, 벌레라고 칭한 인간이 누구인지 대진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흠, 아니 나 이제 바지 올려도 되냐고.”

교실에서 사람이 있건 없건 꼴릴 때 동영상을 보며 자위를 즐길 만큼 얼굴 두께가 남다른 대진이었지만, 낯부끄러운 말은 죽어도 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올려. 제발.”

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담탱 온다.”

앞자리 녀석의 외침에 모두들 슬근슬근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물론 담임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교탁에 서 있을 때까지, 자기 자리 찾기는 계속될 정도로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다들 제발 좀 자리에 앉아봐라. 수업종 친지가 언젠데 여태 돌아 다니냐.”
“수업 종 안 들려요. 스피커 좀 고쳐줘요.”

한 놈이 잔뜩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놈은 이틀 전에 스피커를 향해 수제작한 불꽃 폭탄을 날려 홀라당 태워버린 장본인이었다. 3학년 6반의 담임은 학생들의 이런 작태에 포기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귀로 흘려버리고,
자신이 할 말만 전달하기 시작했다.

“오늘 국어 수업은 자습으로 대체된다. 내일 대학 입시 설명회가 있기 때문에 학교가 지금 정신이 없으니까 다들 조용히 자습해.”
“왜 또 자습이야. 짜증나게.”
“그냥 체육하면 안돼요? 밖에서 공 좀 차게.”
“체육은 무슨 놈의 체육이야.”

6반 학생들에게 체육이란 운동장에 나가 난동을 부리며 논다는 의미였다. 내일 중요한 행사가 있는 만큼, 담임 입장에선 그런 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럼 집에 보내주시든가요.”
“수업도 다 안 끝났는데 가긴 어딜 가. 이 녀석들아. 자습이나 해!”

다른 반의 수업을 빼는 것보다 6반에서 수업을 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선생들은 6반의 수업을 자습으로 대체시켰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수업에 1g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상원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그럼 보충 수업 해주시는 건가요?”

상원이 조심스레 자신의 담임에게 물었다.

“아, 하하. 그게 상원아.”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상원은 단번에 알아챘다. 6반에서 3년간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학교의 선생들이 자신의 반을 어떤 식으로 취급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상원이 공손하게 대답하며 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학교의 이러한 처사에 매우 불합리하다 생각하여 자신의 의사를 선생님들에게 피력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상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상원은 6반에 잘못 섞인 불순물일 뿐이었다.
하나의 불순물 때문에 전체를 바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데 일년이 걸렸다. 상원은 환경에 자신을 매우 적절하게 맞춰가는 타입이었다.
주어진 환경에 투덜거릴 시간에 그는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타고난 박복함 때문에 예기지 못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생긴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상원이는 그럼 다른 반에 수업이라도 보내버려요.”

딴에 반장이라고 승완이 그럴 듯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담임의 표정은 곤란하다는 뜻을 내비췄다. 6반인 상원이 자신들의 반에 와서 수업을 듣는 것을 반기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학년 학기 초에 상원이 전교 석차 3위를 차지했을 때도 같은 논의가 불거졌다. 이상원을 저대로 6반에 둘 것인가 말 것인가. 선생들은 상원의 반 이동을 모두 찬성했지만, 학생들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현재 성적은 현재 성적이고, 입학 성적은 입학 성적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은 상원의 거처에 대한 여론으로 이어져 그가 3년 내내 전반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그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번에 빠진 부분은 나중에 선생님께 프린트 받도록 할게요.”

상원이 재빨리 수습을 해나갔다. 6반에서 생활하면서 포기와 단념이라는 단어를 먼저 배우게 된 그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6반 학생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들에겐 다른 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두뇌는 없었지만, 따스한 마음에 보답할 줄 아는 의리는 갖추고 있었다. 물론 의리를 그럴 듯 하게 표현할 줄 아는 매너와 예의는 구비하지 못했다.

“그래라. 아참, 상원아 그리고 심부름 하나만 해줄래?”

6반의 담임이 챙겨 가지고 온 프린트를 뒤적거리면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상원의 짝인 동석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씨벌.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드럽게 시키기는.”
“뭐라고 했냐. 김동석!”
“뭐요? 제가 뭐라고 했나요?”

동석이 책상에 고개를 대고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동석은 170도 안되는 작은 키에 여드름이 벅벅난 꼬마였지만 근방에서 악명이 높았다. 자그마한 체구를 얕보고 덤볐다가 콧대가 내려앉을 정도로 맞은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권투 국가대표 라이트급 선수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법을 몸으로 알고 있었다. 저 조그만 꼬마 녀석은 평소에는 얌전하다가도 눈이 돌면 어떻게 돌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6반의 담임은 익히 들어왔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흠, 뭘 비 맞은 중처럼 그렇게 중얼 거리냐 이 말이지. 아무튼 상원아 심부름 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쌤.”

반장인 승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심부름 간다는 놈이 가방은 왜 들고 일어나. 한승완. 이 자식, 너 저번에도 심부름 간다고 하고선 그대로 집에 갔잖아!”
“눈치 한번 빠르시긴.”

한승완이 집어 들었던 커다란 가방을 옆 자리에 내려놓으며, 흥 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른 반에 심부름을 보낼만한 제대로 된 인간이 상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담임의 심부름은 늘 그의 차지였다.
평소에는 그런 사실을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텐데, 오늘 상원의 기분 상태가 저조하다는 것을 눈치 챈 6반 아이들은 격렬할 정도로 담임에게 반항을 시도했다.

“그럼 절 보내시든가요. 제가 우리 반에서 생긴 것도 제일 잘 생기고, 멋지잖아요.”

지퍼에 그곳이 끼여 방금 전까지 눈물을 그렁거리던 대진이 손을 들며 말했다. 아직 아래가 얼얼해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상원을 위한 그 나름대로의 우정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표현이라는 것이 6반 담임에게는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백금발로 염색을 하고 입술과 코에 피어싱을 한 개날라리 녀석을 굳이 다른 반에 심부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녀석도 심부름을 보내면 99퍼센트 돌아오지 않을 타입이었다.

“미친, 내가 너보다 잘생겼지. 제가 다녀올게요.”

이 녀석은 97퍼센트.

“제가 갔다 올게요. 담배도 한대 빨고 올겸.”

…96.7퍼센트.  

“지랄 옘병들 하네. 반장인 내가 갔다 온다니까!!”

……101퍼센트.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주세요.”

점점 흙빛으로 변해가는 담임의 표정을 살핀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6반의 담임은 누군가 심부름을 가겠다고 또 나서기 전에 얼른 상원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2학년 S-1반에 가져다주고 오기만 해라. 고맙다.”

종이를 받아든 상원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젠 아버지를 원망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신관으로 가는 상원의 발걸음은 데드맨 워킹보다 무거웠다. 아침에 그 꼴을 당하고도 S-1반으로 찾아간다면 조석희가 자신을 스토커로 생각한다 해도 반론을 펼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짝사랑을 진행 중일 때는 일부러 만날 기회를 만들려고 해도 만나지지 않더니, 피해 다니려고 할수록 만날 기회가 생기는 이 상황은 신의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도 매우 악질적인 장난.

“어쩌지.”

최대한 천천히 걷는다고 왔는데도 벌써 2학년 S-1반에 도착해버렸다. 그는 앞문에서 서성거리다 크게 숨을 내쉬고, 예의바르게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교실 안에서 수업을 하던 학년 주임이 대답했다. 상원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최대한 조금, 앞문을 열어 꾸벅 인사를 했다.

“오, 네가 웬일이냐.”

상원은 대답대신 들고 있던 종이를 들어보였다. 누가 보낸 것인지 알아챈 학년 주임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원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업 중에 누군가 찾아왔는지 궁금해진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지만 얼굴이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만 문틈이 열려있었다.

“들어와라.”

학생 주임 선생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상원은 참으로 예의바른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지키고 싶은 것은 있었다. 더 이상 조석희 앞에서 망가지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풋!”
“뭐야, 저거.”
“하하하!!”

작게 열린 문 틈 사이로 손만 넣은 채 종이를 내민 모습에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학생 주임 선생은 대체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상원을 쳐다봤다.
저 녀석이 장난을 치나 싶었지만, 이제는 아예 종이를 흔들며 가지러 오라는 시늉까지 해보이고 있었다.

“뭐? 지금 너 뭐하는 거냐.”
“…….”

상원은 입술을 꾸욱 깨물고 다시 종이를 흔들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버릇없이 변모해야하는 이 상황이 참으로 싫었다.

“이 녀석이 버릇없이!”

결국 수업 중이었던 선생이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앞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상원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들고 있던 종이를 교실 안쪽으로 재빨리 날리고 복도를 가로 질러 달렸다.
계단을 내려와 별관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그는 숨을 고르며, 벽에 기대어 섰다.

“……하아.”

다리가 풀려버렸다. 원래도 꼬인 인생이었지만 상식 밖의 세계에서 서성거리고 있자니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최악이다.”

최악이라고 믿으면 그 이상의 최악이 닥쳐오고 있었다. 이제는 입 밖으로 최악이란 단어를 내뱉는 것조차 무서워졌다.
아무도 없는 별관의 복도에 주저앉아 상원은 먼지 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유유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니 눈이 부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렇게 멍하게 복도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교실에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후였다. 담임은 브루투스 너마저, 라고 말하던 시저와 같은 눈빛으로 상원을 노려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 해? 안 가고? 영화 보러 가야지.”
“미안, 너희들끼리 가. 나는 공부할 게 좀 남아서.”
“인간이 양심이 좀 있어야지. 저번 달에 본 모의고사에서 너 전국 100등 안에 들었다면서! 공부할 게 뭐가 남아있냐!!”

대진이 버럭 외쳤지만 상원은 애매모호하게 웃으며 그냥, 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의사표현이 분명한 상원이 저렇게 말할 때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눈치가 빠른 동석이 대진의 목을 조르며 그를 잡아끌었다.

“병신, 쟤가 우리랑 같냐. 상원이가 좀 놀아주니까 이 새끼는 맞먹으려고 들어. 좀 냅둬. 얘 공부 좀 하게.”
“미안.”
“됐어. 그럼 내일 봅세.”

오늘 개봉하는 영화를 같이 보러가자고 약속을 어겨가며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냐고 외치는 대진을 승완과 동석이 질질 끌고 교실을 나갔다.
교실에 남은 상원은 부지런히 가방을 싸서 별관 구석에 있는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신관과 마찬가지로 별관에도 도서관이 구비되어 있었다. 시설 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몇 년간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의미로 6반 학생들로부터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성한 의자 하나 없는 도서관이었다. 상원은 기술 시간에 배운 실력으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의자를 끌고 와 구석에 앉았다.

이 곳은 상원의 아지트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상원이 6반에 들어오기 전에는 6반 연합학생들의 끽연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도서관 본연의 목적을 찾게 된 것이다. 상원이 이곳을 차지하기까지에는 승완의 도움이 컸다.
그가 1학년 때 직접 2,3학년 6반 선배들을 찾아가 얻어낸 승낙이었다. 물론 쉽게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일주일 내내 선배들에게 얻어터져가면서 쫓아다녀 승낙을 받아온 얘기는 6반 학생들 사이Lucky charm

"선배 합격 축하해요"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던 조석희가 상원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흔들었다.
"한번만 더 해볼게. 혹시 모르잖아"
"뭘 더 해봐요. 합격이라고 나와 있는데"
인상을 쓰고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툭툭 두드렸다. 거기에는 상원의 이름과 수험번호, 합격을 축하한다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하지만 상원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잘못된 것일 수도 있잖아. 전산상의 문제라든가"
"그래서 아까도 학교에 전화해서 문의해봤잖아요"
"...그래도"
상원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혹시 모르니까 한번만 더 확인해보자, 라고 중얼거렸다. 집에서 합격자 명단을 확인 했을 때 상원은 인터넷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했고, 전화로
두번째 확인을 했을때는 주민등록번호를 잘못 누른것 같다고 했다. 결국 조석희는 상원을 데리고 집 근처의 피씨방으로 와서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눌러 확인시켜줘야 했다. 그런데 한다는 소리가 이번엔 전산상의 문제라니.
"이쯤에서 그냥 기뻐하면 안돼요?"
"혹시 모르잖아. 섣불리 믿었다가 합격 취소라도 되면...."
상원의 눈시울에 근심이 스쳐갔다. 작년에 거의 합격을 손에 쥐었다가 마지막 구술면접을 가던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안타갑게 재수를 했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상원이 겪었던 불행한 일들을 전해 들으면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게 보통이다.
거의 다 붙은 대학에 구술면접만을 남겨두고 교통사고가 나서 불합격했다는 얘기는 어디에 가서 꺼내지 못할 정도로 현실성이 없었다.
상원은 그런 현실성 없는 불운을 주변에 달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덜컥 합격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니 조석희는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드려요, 총장하고 통화라도 시켜드리면 직접 확인할래요?"
서울대 총장하고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통화는 가능할 거라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상원이 그걸로 안심하고 자신의 합격사실을 받아 들인다면 노력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아니, 아니 괜찮아"
상원이 두 손을 내저으며 얼른 대답했다.
"그럼 믿으실 거죠?"
"응"
"축하해요 선배"
조석희가 다시한번 축하인사를 건네자, 상원의 뺨이 붉게 달아오른다. 조그만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하는 상원을 조석희는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안 믿겨진다. 내가...합격이라니"
상원이 손가락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어루만지면서 감격에 겨운 얼굴을 했다. 작년에 인도로 걷고 있던 그를 트럭이 뒤에서 들이받는 바람에 상원은
한달가량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올해 무사히 시험도 보고, 논술도 치르고 면접까지 마치고 합격을 손에 넣은 이 상황이 상원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선배 잠시만"
조석희가 상원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다. 상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경쾌하게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냐, 바로 앞에 있는 모니터의
화면도 다른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목뒤에 닿은 니트의 감촉만이 그의 감각을 지배했다.
"합격했네"
담담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축하 안해줘요?"
"....어?"
"합격"
조석희가 모니터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가리켰다. 상원은 그제야 깜짝 놀라서 이번에 시험을 본 것이 자신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맞다. 미안. 깜빡했어. 깜빡할게 따로 있지, 미안 정말. 아,아니 축하해! 합격 축하해 석희야"
쉬지도 않고 자책에서 사과, 축하까지 상원은 한번에 늘어놓았다. 조석희가 피식 웃더니 그런 상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그럼 이제 선배 아닌가?"
"응?"
"같은 학교, 같은 학번이니까 선배 아니잖아요"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의 같은 학번으로 대학에 붙었으니 조석희의 말이 옳았다. 더 이상 선배라는 호칭으로 불리기엔 무리가 따르는 상황이었따.
사실 상원이 희재고를 자퇴한 시점에서  선배라는 호칭은 효력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석희는 줄곧 상원을 선배라고 불러왔고 상원 역시
거기에 의견을 달지 않았다.
"아, 그렇겠다.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이름 불러야 하나?"
상원은 조석희가 자신을 상원선배 내지는 선배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다. 파충류의피부처럼 서늘한 조석희의 목소리가 내는 "ㅅ" 발음이 특히나 마음에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이름만으로 불러준다면 그 또한 좋았다.
......실은 그냥 어떻게든 불러만 줘도 좋을 것 같았다.
"형? 상원 형?"
"---!!!"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상원은 놀라 얼굴빛이 변했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아니, 한층 가까운 느낌이 드는 호칭이었기에 이내 입이 귀에 걸리고 말았다.
"아니면 그냥 상원아?"
"---!!!"
지화자, 이건 더 좋구나!
"어색하네요"
"아, 아니야 괜찮아"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를게요 선배"
조석희는 선배, 라는 부름에 상원은 온몸의 신경이 초콜릿으로 변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조석희가 허리를 숙여 멍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상원의
귀에 속삭였다.
"집으로 가요 상원선배"
그리고 그는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걸어갔다. 상원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일어나 조용히 조석희의 뒤를 따라 나섰다.















"앗. 잠깐...잠깐만"
현관 앞에서 쓰러지면서 상원이 간신히 내뱉은 말이었다. 뒤에서 상원의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던 조석희가 왜요, 하고 물었다.
아직 오른쪽 신발을 채 벗기도 전이었다.
"우선 벗고...."
"걱정마세요 제가 다 벗겨드릴 거니까"
"아니, 내 말은 신발을...."
조석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상원의 운동화 한쪽을 벗겨주었다. 그리고 목덜미를 끌어 안아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샤워는 커녕 침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런 일들을 벌이는게 상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조석희를 거절할 만한 힘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고로 반한 놈이 지는 것이 연애세계의 냉혹한 법칙이었다.
"하아...."
입술이 떨어져나가자 상원이 발그레한 얼굴로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몇번을 봐도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비현실적으로 잘 생긴 외모였다.  상원은 문득 자신의 뺨을 후려갈겨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애인인데다 대학까지 합격했으니
아무리 봐도 이건 꿈인게 분명했다.
상원이 자신의 손바닥으로 뺨을 찰싹 내리치자 조석희가 낯을 찌푸리며 무슨 짓이냐는 눈빛을 보낸다.
".....안 믿겨져서"
"뭐가요"
"그냥, 다"
조석희가 상원의 목 부근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선배 좋을대로 믿어요. 꿈이건 현실이건"
"....응"
가벼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상원은 눈을 감고 조석희를 끌어 안았다. 그가 현실과 꿈 사이에서 행복을 맛보고 있을때 조석희의 인정머리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선배 오늘은 뒤에 넣어도 되죠?"
묻고는 있지만 의사를 묻는게 아니었다. 오늘은 뒤에 넣고 싶으니 그리 알라는 통보와 마찬가지였다. 수능 며칠 전부터 대학 합격이 완전해질때까지 무리하는
것은 자제해달라는 상원의 부탁 때문에 조석희는 취향에도 맞지 않는 금욕 생활을 해야만했다. 예기치 않은 사고 때문에 재수를 택해야 했던 상원이 얼마나
실망을 하고 속상해 했는지 옆에서 지켜보았던 조석희로서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부탁이었다.  물론 물고 빨고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서로의 욕망을 달래주긴
했지만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어린애 장난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었다. 조석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상원의 엉덩이 사이로 성기를 밀어넣는 상상을 해왔다.
좁고 습한 구멍 안에 들어가고 싶어 아까부터 아래가 아플 정도로 당기고 있었다.
"선배도 제가 넣어 줬으면 좋겠죠?"
조석희가 무릎으로 상원의 바지 앞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선배 내가 넣어주면 좋아하잖아요. 아프다고 해도 아프다고 울어도 결국엔 질질 싸잖아요"
아무래도 오늘 조석희는 말로 전희를 풀어나갈 모양이었다. 귀족같은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 조석희의 모습에 상원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바지 내려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원은 자신의 벨트와 버클을 차례대로 끌러 바지를 내렸다. 허벅지 아래로 바지를 내리자 조석희가 한손으로 주욱 잡아당겨 발치까지
벗겨내 버렸다.
부끄러웠다. 상원은 아직도 남 앞에서 바지를 벗는 행위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드러난 맨다리에 조석희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청바지 속 살덩이를 문질렀다.ㅏ
허벅지 안쪽이 쏠려 아팠지만 상원에게는 그런 고통의 여유가 없었다.
흥분한 남자의 숨결이 귓가와 목덜미에 축축하게 와 닿는 느낌에 상원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석희야"
상원이 초조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선배 바로 넣어도 돼요?"
열기 띤 목소리가 물었다. 얼마간 사용하지 않은 그곳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넣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면서도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조석희가 자신을 원한다는 느낌이 상원의 정신적 만족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익숙한 손동작으로 버클을 끄르고 지퍼를 내린 조석희가 단단하게 달아오른 자신의 살덩이를 한손에 쥐고 상원의 다리를 벌렸다. 희뿌옇게 젖어든 선단이
긴장으로 움츠러든 구멍에 비벼졌다.  별개의 생명체 처럼 끄덕끄덕 움직이는 그 느낌에 상원은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와 이어지고 싶었다.  아프고 힘들어도 지금은 아무런 생각 없이 좋아하는 사람의 몸과 맞닿고 싶을 뿐이었다.
"선배.... 비벼주기만 해도 여기 부드럽게 벌어졌다. 오므라지는 거 알아요?"
짓궂은 손놀림으로 조석희가 상원의 엉덩이 계곡을 어루만졌다. 상원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음란해요 선배"
"..."
자신이 그동안 참아달라고 부탁을 했으면서 조석희가 건드리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음란한 반응을 보인다는 생각에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선배한테 엄청 야한 냄새나요"
조석희의 나른한 속삭임에 이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넣을게요"
조석희가 상원의 한쪽 어깨를 끌어안고 허리를 아래로 숙여 몸을 밀어 넣었다. 훅, 하고 몸속을 치고 올라오는 이물감에 상원은 이를 깨물었다.
"힘, 빼요 긴장풀고"
"....아, 움직이지...."
움직이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들어줄 성격도 아니었지만, 그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 여유도 없는 상태였다.
조석희는 벌쭉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사정을 두지 않고 달아오른 성기를 끝까지 박아버렸다.  상원은 한껏 눈을 치켜 뜬 채, 나오지 않는 비명을 목 안으로
삼켰다.
조석희가 한번 더 허리를 추어 올리자 상원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적셨다. 고통으로 인해 생리적으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상원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뿌옇게 변할 정도로 눈물이 다시 고였다.
"아....파"
조석희의 팔에 매달린 상원이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참아요 선배"
하지만 조석희는 무자비했다. 뻑뻑하게 조여진 구멍 안으로 살덩이를 쑤셔 넣으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참았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원이 원하는대로 조석희는 대학합격 사실이 확인될때까지 나름,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해왔다. 상대가 알아주건 말건 그에게 그정도는 대단한 배려였다.
조석희는 상원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추삽질을 했다. 귀두 끝이 아슬아슬하게 밖으로 나올라 치면 그는 단번에 뿌리 끝까지 박아 올렸다.
"...아, 아,,,,앗! 아! 읏...."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열기를 띄었다. 상원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벌려 남자가 자신의 안으로 더 깊이 드나들 수 있도록 도왔다.
조석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상원은 순진한 얼굴을 하다가도 이럴 때는 놀랄 만큼 적극적이었다. 어떤 것이 본 모습인지, 그는
혹시라도 자신이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가끔 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조석희를 흥분시키고 자극했다. 정작 본인은 그런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얼굴을 했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선배.... 좋아요?"
"응, 좋아. 너무 좋아"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상원은 몇 번이나 좋다고 대답했다. 쾌감에 솔직한 몸이었다. 상원이 느낄수록 그의 달짝지근한 체향이 전해졌다. 조석희가 그의 목덜미를
핥았다. 동시에 아래가 바짝 조여들었다.
"너무 보채지 말아요"
"...응?"
"그러지 않아도 잔뜩 박아줄 테니까"
"아, 안 보챘는데...흣"
조석희가 허리를 움직이자 상원이 입술을 깨물며 그의 팔뚝을 붙들었다. 아래서부터 전해지는 아찔한 감각에 조석희의 팔을 잡고 상원은 몸을 지탱했다.
상원은 아직도 섹스가 무서웠다. 그가 상상했던 섹스는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한 교감이었다. 하지만 조석희와 하는 섹스는 난폭하고 거칠었으며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우같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연줄이 끊어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연이 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상원은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석희 몸에 매달려 엉엉 울기도 했다.
그렇다고 섹스가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커다란 살덩이가 내부를 파고들면 상원은 선명한 쾌감을 느꼈다.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만족감, 그가 자신의 내부에서
흥분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뿌듯함, 육체적인 만족도 좋았지만 상원은 조석희가 자신의 몸 위에서 근육을 경련하며 절정을 맞이하는 순간에 가질 수 있는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그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배 아래, 진짜 맛있는거 알아요?'
조석희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음란한 말을 귓가에 지껄였다. 상원은 어떻게그곳이 맛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그저 그가 자신을 먹는 것에 질리지 않기만 바랄 뿐.
"선배 나 좋아해요?'
"응...좋아"
"선배 구멍 안에 들어가 있는게 뭔지 알아요?"
"응...아, 알아"
조석희가 안에 들어가 있는 성기의 끝을 내벽에 문지르며 물었다.
"뭔데요? ...이게 뭔지 말해봐요"
"너...앗, 읏"
"정확히..말해봐요"
상원이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석희는 끈질기게 질문했다. 그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상원이 천박한 단어를 말하게 하는 것을 즐겼다. 몇 번을 시켜도
그때마다 상원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네 것"
"제게 한두 개예요? 선배도 내 건데"
조석희가 상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허리를 거칠게 놀리며 말했다. 상원이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음란하고 저질스런 단어를 입 밖에 내는 게 여간 곤혹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를 가볍게 질근질근 깨물며 빨리 말해봐요, 하고 채근했다.
상원이 울먹이며 움츠러든 목소리로 답했다.
"네...자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상원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조석희가 그런 상원의 뺨에 입을 맞추며 느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맞아요 선배 제 자지 좋아하잖아요"
"...."
수치심에 상원은 급기야 눈물을 보인다. 조석희가 소리 없이 눈만 슬며시 웃으며 재차 물었다.
"선배 제 자지 안 좋아해요? 그럼 싫어?'
"아니...."
"제 자지 좋아하죠?"
상원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좋아해 하고 한숨을 내뱉듯 고백했다. 조석희가 웃었다. 그는 상원의 어깨를 힘껏 안고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를 참아내던 상원은 결국엔 엉엉 울면서 조석희에게 매달려 좋아해 석희야, 너무 좋아, 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햇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난 후에야 조석희는 상원의 안에 그간 쌓아두었던 욕망을 모두 쏟아냈다.














"아...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상원은 꽉 잠긴 목을 풀기 위해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생각대로 이상한 목소리만 방안에 울렸다.
"일어났어요?"
샤워를 하고 온 것인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조석희가 침대에 다가와 앉았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어깨에 떨어지는 물기가 이상하게 색스러운 분위기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주무세요"
"아... 괜찮아"
아직도 이상한 목소리가 나와 부끄러웠다. 상원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목이 완전히 갔네. 선배는 너무 소리를 질러서 그래"
"미안.. 다음부터 안 지를게"
상원의 말을 들은 조석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내 상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는 웃어버렸다.
"소리 질러요. 그 소리 듣자고 박아주는 거니까"
".....!"
대수롭지 않게 던져진 말에 상원의 뺨이 뜨근하게 데워졌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황망하기 그지없는 이 상황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자고 가실 거에요?"
"어? 응"
"전화 하셔야죠"
외박을 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상원이 부모님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을 조석희는 알고 있었다. 밖에서 무얼 하든 최소한의 선만 지키면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굳이 그걸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헉 맞다."
상원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여기저기 남아있는 을긋불긋한 자국이 조석희의 시선을 끌었다.
상원은 가끔 이런 식으로 조석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또 한번 해달라는 신호로 봐도 좋은 것인가.
물론 나는 좋지만, 저쪽은 아래가 발긋하게 부어오를 정도로 무리를 한 상태인데.
"부모님한테 합격했다는 말씀도 안드렸어. 내 전화기!"
상원이 허둥거리며 자신의 핸드폰을 찾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조석희는 쓴 웃음을 지으며 침대 옆에 있는 협탁을 가리켰다.
"거기 두었어요"
핸드폰을 손에 쥔 상원은 그제야 자신이 속옷도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이번에는 속옷을 찾아 허둥거렸다.
조석희가 침대 시트를 들어올려 상원의 몸 위에 감아주었다.
"It`s ok?"
상원이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조석희를 보더니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 통화 좀...."
"알겠어요"
방을 나서며 조석희는 잔뜩 들뜬 얼굴로 핸드폰 폴더를 여는 상원의 모습을 흘끗 바라봤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상원이 저런 얼굴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부모님이니 어쩔 도리가 없지.
"네 합격했어요. 진짜요. 최종합격이래요"
방문 너머로 들리는 상원의 흥분한 목소리에 조석희는 웃으며 생각했다.
그나마 가족이 부모뿐이라서 다행이라고. 저 거슬리는 꼴을 한번만 참아 주면 될테니까.









"뭐라고요?"
"....미안, 부모님께서 조부모님하고 외조부모님들께도 다 연락을 해서 지금 오시는 중이라고 해서..... 정말 미안해"
대학에 합격했다고 양쪽 조부모님까지 불러들였다는 부분에서 조석희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부모 한번 참아주는 것도 그에겐 대단한 인내였다.
"그래서 지금 가겠다고?"
조석희가 다시 매서운 눈을 하고 묻자 상원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일올게. 내일 자고 갈게 응?"
"오늘 자고 가요"
"오늘은 안 돼"
"아까는 자고 간다면서요"
"....미안해"
사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 차이는 없었다. 아래 욕심도 채웠겠다 그리 급한 문제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석희는 심정이 나서 상원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가지 마세요"
"석희야...."
상원의 눈망울에 자괴감이 가득 차올랐다. 사정이야 어쨌든 한입으로 두 말을 한 셈이니 견실한 성격의 상원은 죄책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이 커다란 집에서 나 혼자서 외롭게 있으라고요?"
"...석희야"
아까와는 다른 부름이었다.
지금까지 이 큰 집에서 혼자 너무나도 잘 지내온 주제에, 어떻게 저런 식으로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조석희가 외롭다니 지나가던 개가 들으면
웃다가 사례들려 쓰러질 소리였다.
"외로워요 선배"
"...."
"선배 없으면 밤에 잠도 못 잔다고요"
"...."
너 원래 불면증 환자잖아. 석희야.
"그러지 말고 아예 같이 살자고요 선배"
"......그게"
"이제 대학도 합격했으니까 여기서 같이 살아요"
상원이 몇 번이나 거절을 했지만 조석희는 끈질기게 여기서 같이 살자고 권했다. 학교도 그만두고 재수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부모님이 친구도 아닌 후배와의
동거를 납득하지 못할 것이란 이유로 상원은 계속 조석희의 청을 거절했다.
"여기서 같이 살 거죠?"
조석희가 이번엔 아예 다짐을 받아낼 요량으로 끈질기게 물어왔다. 같이 살면 상원이 집에 갈때마다 벌이는 이 실랑이를 끝낼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선배 대답해요"
"나...."  
"네 선배"
"나 갈게!"
상원이 조석희의 어깨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현관문을 닫고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조석희는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취급에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책을 집어 던지며 온통 삑 소리로 처리될 법한 영어로 된 욕설을 거칠게 내뱉었다.











집으로 돌아온 상원은 부모님과 양가 조부모님들의 축하 인사를 배부르게 받을 수 있었다. 대학 입학 선물도 두둑하게 현금으로 받고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말만 하라는 얘기까지 들은 터였다.
1년간 재수생활을 청산하고 1지망 대학 원하던 과에 붙었고 더이상 바랄게 없을 정도로 행복한 저녁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아까부터 타르 찌꺼기처럼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는 근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한정식 집에 가서 근사한 저녁을 먹으면서도 상원은 한손으로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아들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상원은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석희에게 문자를 보내 미안하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답문이 오지 않았다. 조석희가 원체 문자를 잘 보내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아까
그렇게 뛰쳐나온 후라 상원은 신경을 쓰지않을 수가 없었다.
같이 살자.
사귀는 상대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말 중 하나일 것이다. 조석희를 짝사랑 하는 시기에 상원은 감히 그와 같이 산다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다.
처음 같이 살자는 얘기를 들었을때는 그저 좋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상원은 애인과의 동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렸다.
석희와의 즐거운 동거를 꿈꾸던 상원은 몇 개의 게시물을 읽은 후 파리하게 안색이 질려버렸다. 자세까지 고쳐 앉아 이런저런 게시물들을 5시간동안 정독한
상원이 내린 결론은 한줄.
[연애 초반에 같이 살면 금방 질려서 결국엔 헤어지게 된다]
결국 상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을 조석희에게 돌려줘야 했다. 처음에 조석희는 그럴 줄 아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그럼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급기야는 수능을 칠 때까지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조석희는 하루에 한번, 두번도 아니고 세번도 아니고 딱 한번씩, 물었다. 자기랑 같이 살지 않겠냐고.
상원은 그때마다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전전긍긍하며 그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는 더이상 없을 좋은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재수를 하게 되었으니 밖에 나가 후배와 같이 살겠다는 말을 부모님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영 거짓은 아니었다.  학원을 다니는데 교통이 불편한 것도 있었고 공부를 하는데 방해를 받을 만큼 집이 시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상원이 밖에 나가서 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이유를 말했을때 조석희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렇다고 상원이 아예 외박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전에만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면 친구 집에서 자는 정도는 순순히 허락해주시곤 했다. 조석희도 여기에 만족했다.
두사람 사이에 별다른 문제없이 지금까지 관계를 지속해온 것은 상원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문제는 이 소중한 기적이 언제 사라질지몰라 슬슬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조석희가 기분 나빠 보이거나 지루해 하는 기색을 보이면 상원은 그날 하루 종일 소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같이 살기라도
해서 조석희가 자신에게 만약 질리기라도 하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후우..."
상원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도 용기가 나지 않아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이럴 때는 석희가 먼저 전화를 해주면 좋을텐데. 그는 용건이 없으면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문자를 먼저 보내는 것도 늘 자신이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게  대응해주고 있지만,  조석희는 기본적으로 상냥한 성격이 못되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통한 자체로 좋았는데 자꾸 욕심이 생긴다. 이래서는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욕심을 억누르지 못한다. 주제 넘는 욕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엔 그가 자신에게 질려버리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요즘은 좋아한다는 말도 예전처럼 쉽게 건네지 못했다.
"전화 좀 해줘..."
상원이 핸드폰을 이마에 대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상원은 놀라서 폴더를 열고 여보세요 하고 소리쳤다.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조석희?"
[...]
"여보세요? 안들려?"
[잘 들려요 선배]
낯설음과 낯익음을 동시에 들려주는 목소리였다.
"...김이경?"
[와, 그래도 제 목소리 단번에 맞추시네요]
"...."
자신을 선배라고 부르며 전화할 인간은 지금으로서는 조석희를 제외한다면 김이경 하나뿐이었다. 얘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상원은 골치가 아파왔다.
"왜 전화했어?"
[선배 너무하시네요. 오랜만에 전화한 후배한테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시다니]
후배도 후배 나름이었다.
상원은 그때 김이경이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아직까지 소름이 돋았다. 사람 좋고 똑똑하다고 생각한 후배가 뒤로는 이런 저런 일들을 꾸민 것이
영 꺼림칙했다.
"무슨 일인데. 용건이 있어서 전화한거 아니야?"
상원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고 다짐했다. 조석희도 그랬다. 김이경은 성격이 뱀 같아서 절대로 믿으면 안 되는 놈이라고.
[축하드리려고 전화했어요]
"어? 무슨 축하?"
[선배, 합격하신거 축하드리려고요]
"헉.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합격 발표가 난지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가족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합격소식을 아는 것은 조석희뿐이었다.
동석이나 승완이 대진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전처럼 대학 운동장 강당 앞에 명단이 붙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으로 주민등록번호나
수험번호를 눌러서 확인이 가능할텐데, 어쩐지 오싹했다.
[그 정도 쯤은 뭐, 그런데 선배 왜 갑자기 서울대로 지망학교를 바꾸신 거예요?]
"사사받고 싶어했던 교수님께서 퇴임하셔서.... 그냥 어쩌다 보니"
이유를 말하면서 상원은 뺨을 긁적거렸다. 어쩌다보니가 아니었다. 조석희는 상원에게 같은 학교 가길 요구했다. 미국에 있는 대학을 포기하고 이곳에 남기로
했으니 그정도는 당연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 게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상원이 사사받고 싶어 했던 교수님도 건강상의 문제로 퇴임하셨기 때문에 그로서는
연대를 고집할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상원은 망설임 없이 조석희가 가고자 하는 학교로 지망학교를 변경했다.
[아무튼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다. 그런데 너는..."
상대가 아무리 날고 기는 김이경이라 할지라도 직접 대학 합격 여부를 묻기가 조금 그랬다. 게다가 김이경은 한 문제라도 실수하면 떨어질 수 있는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과를 선택했을 테니 말이다.
[학교에서 뵙겠네요]
"...."
얄미울 정도로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들으니 잠시라도 그런 걱정을 했던 자신이 바보같아지는 순간이었다.
"그, 그래 축하해 잘 됐다"
그래도 축하는 해줘야겠다 싶어 상원은 김이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선배 뉴스 안보셨어요?]
"응? 뉴스는 왜?"   
상원은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뉴스를 보기는 했지만 챙겨보는게 아니라 시사 상식은 대체로 신문을 통해 얻는 편이었다.
[저 이과 만점자로 인터뷰해서 뉴스에 나왔는데 못 보셨구나]
"헉 전국에 한명 있다는 만점자가 너였어?"
문과에 비해 유독 이과 과목이 어려워 등급 기준이 십여 점이나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이과에 만점자가 딱 한 명 나왔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름아닌 김이경이라니.
[선배 서운해요. 저는 선배가 보실 줄 알고 전날 미용실 가서 머리도 다듬었는데]
"그래? 미안, 나 뉴스는 잘 안봐서"
습관적으로 사과는 했지만 상원은 방금 자신이 사과할 타이밍이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과를 철회해야 하나? 아니 그래도 뉴스에 까지 나온 건데
몰랐던 건 너무 했나?
[제 합격 소식이야 그렇다 쳐도, 선배 합격소식은 정말로 기쁘네요]
"으 응, 그래"
자기 합격보다 내 합격 소식이 더 기쁘다고 말해주니 이건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데 마냥 기뻐하기에는 어감이 참 묘했다.
[그런데 이제 그럼 선배가 아닌가?]
"...."
상원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럼 뭐라고 부르죠? 형? 보통 재수생은 말 놓으니까 이름 불러야 하나?]
"...그냥 선배라고 해"
[역시 그게 좋겠네요 그럼 나중에 뵈요]
통화를 마친 상원이 폴더를 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이경과 또 학교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머리가 아파왔다.
합격 여부까지 알아내 전화를 한 정성이면 아무래도 아직까지 좋아한다는 고백이 유효한 것 같았다.
석희가 알면 난리가 날텐데.
상원은 통화목록에서 얼른 김이경의 번호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조석희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잠자? 뭐하고 있어?]
문자를 보내고 한참을 기다리니 답문이 왔다.
[술 마셔요]
어디서? 누구랑? 무슨 술 마셔! ..... 라고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만 상원은 떨리는 손으로 간결한 문장을 만들어 보냈다.
[너무 많이 마시지마. 집에 일찍 들어가고 ^^]
다음 번 답문은 바로 도착했다.
[집에서 술 마셔요]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상원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아는 한 조석희는 혼자 청승맞게 술을 마실 인간이 전혀 아니었다. 본인 입으로도 혼자 술 마시는 짓은
안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대체 누구랑 술을 마신다는 것이지? 차라리 밖이었다면 바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가볍게 한잔 하는거라 치지.
집에서 누굴 불러서 술을 마셔? 조석희가 친구를 집으로 데려올리는 없잖아!
상원은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입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거실에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들끼리 사이좋게 술잔을 나누며 여담을 즐기고 있었다.
"저 잠깐만 요 앞에 갔다 올게요"
"이 밤중에 어딜 간다고?"
안주를 준비하고 계시던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상원은 대충 얼버무리며 금방 오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너도 한잔 같이 하자. 이제 상원이도 어른이니까 한잔해도 되겠지"
상원의 할아버지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저 나가봐야 하는데...."
"그럼 어른이 주시는 거니까 한잔만 받고 가렴"
어머니가 상원의 등을 떠밀며 웃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어른들의 기분을 맞춰드리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께서 주시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였다.
고개를 돌리고 술잔을 쭈욱 들이켜자, 옆에 계시던 외할아버지도 술병을 내밀었다.
"외할아버지 술도 한잔 받아야지"
"네"
상원은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외할아버지께서 주시는 술도 받아마셨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도 자신의 술도 받으라고 하시며 웃었다. 상원은 약간 알딸딸한 기분으로
아버지께서 내미시는 술잔을 공손하게 받았다.









초인종소리가 들리자 조석희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상원뿐이었지만 그는 일부러 모르는 척 누구냐고 물었다.
"....나야"
현관문 밖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연이어서 들려왔다. 조석희는 천천히 도어락을 풀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어디에서부터 뛰어온 것인지 땀투성이가 된 상원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거기에 서 있었다.
"웬일이에요 오늘 바쁘다더니"
"하아....아니, 나....잠깐 하아... 근처에 볼일 보려다가...."
"이 밤중에 이 근처에 무슨 볼일을 보시려고 했는지 물어보면, 선배 얼굴이 거기서 더 빨개지려나?"
조석희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상원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 누르며 말했다.
"하아... 그게.... 그러니까...."
"들어와요, 구질구질한 변명 들어줄테니까"
상원이 숨을 몰아쉬며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으면서도 숨소리가 거칠게 이어졌다. 조석희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아 왜?"
"어디서부터 뛰어 온거에요?"
"버스정류장..."
버스정류장이라고 해봤자 걸어서 5분 거리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고작 그 거리를 뛰었다고 저렇게 까지 색색거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조석희가 상원의
앞에 얼굴을 바싹대고 숨을 들이켰다.
"선배 술 마셨어?"
"아?,,,하아, 응"
취중에 달리기 까지 했으니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조석희는 상원의 손을 잡아 소파에 앉혀놓고 얼음물을 가져다 주었다. 상원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주자, 상원이 흠짓하고 몸을 떨었다.
"무슨 술을 마셨어, 누구랑 어디서"
상원은 자신이 묻고 싶었던 질문이 조석희의 입을 통해 나오자 벙찐 표정으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구랑 마셨냐고 선배"
"아, 응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어머니도 한잔 주시고"
상원이 손가락으로 한명 한명 꼽아 보이며 대답했다. 조석희가 남아있던 상원의 새끼손가락을 굽히며 말했다.
"그럼 저한테도 한잔 받으셔야죠"
"너?....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누구요?"
"술 마시고 있다면서 .... 너 혼자서는 술 안마시잖아"
일단 근처에 볼일 있는 척 이 집에 들른다는 계획까지는 세웠지만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해놓지 않았다. 혼자서 술 안마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집에 들른 것이 상대에게 뻔뻔스럽게 보이지는 않을까 싶어 상원은 다음말을 찾지 못했다.
"선배랑 마시려고 했어요 축하주"
조석희가 등 뒤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와인과 치즈 옆에는 와인글라스 두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자신을 위해 축하주까지 마련해 놓았다고 하니, 상원의
죄책감은 배가 되었다.
"미안해... 내일은 꼭 자고 갈게"
"그걸로 빚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오랜만에 등장한 빚쟁이 발언에 상원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귄지 일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조석희식 거래방식에 적응을 할 수 없었다.
상원은 목숨이 위험하지 않는 이상 조석희에게  돈을 빌리는 일만은 절대 하지 말자고 늘 다짐해왔다. 어떤식으로 이자가 붙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화,,,났어?"
"네"
조석희가 글라스에 와인을 따라 상원에게 건네며 대답했다.
와인 잔을 받아들면서 상원은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웃음을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상원은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며 소파에 앉아 조석희를 힐끔힐끔 거렸다. 와인 잔을 한손에 들고 여유롭게 서 있는 조석희는 누가본다 하더라도 스무 살 청년이라고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나이 들어 보인다거나 겉늙어 보인다는 것은 아니었다. 조석희에게는 그 나이 특유의 풋풋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툭툭 내뱉는 말투는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느슨한 공기와 어우러져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했다.
오만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상원은 넋을 놓고 조석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 아니야 이거 맛있다"
"당연히 맛있겠죠, 특별히 주문한 상품인데"
"아, 그렇구나 많이 마시면 안되겠다. 비싼 거니까"
와인잔을 기울여 입술에 가져다 대고 있던 조석희의 눈썹이 쿰틀거렸다. 그는 일부러 상원에게 술을 마시고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자신이 혼자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안절부절 못하며 상원이 이 집으로 뛰어 올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면 술에 취하게 만들어 버리자고 계획하던 차에,
저런 소리를 들으니 그의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가끔 조석희는 상원의 쓸데없이 올바른 사고방식이나 생활패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찮아요. 마시려고 산 거니까 마셔요"
"아니야. 나 어차피 집에도 가봐야 하고, 그냥 조금만 마실게. 고마워"
상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들어보였다. 조석희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런 상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는 대체 왜 그래요?"
"응? 나?"
자신이 또 무슨 실수를 한것인가 싶어 상원은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사랑이 식는다는데  실수라도 해서 정나미가 떨어지면 어쩌지.
"뭘 믿고 그러는 거에요. 일부러 그래요?"
"나? 내가? 왜......?"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조석희의 책망하는 듯한 말투가 목을 졸랐다.
"사람을 넋 놓고 한참을 바라볼 정도로 좋아하는 주제에, 왜 그런 식으로 굴어요? 일부러 저 열받게 하시려고 그러는 거에요?"
"내가? 일부러? 무슨 소리야. 석희야. 나 그런적 없어"
"선배 정말 연애 처음해보는 사람 맞아요?"
상원이 고개가 떨어져라 힘차게 끄덕였다.
"처음이야. 진짜야. 나 네가 첫사랑이고. 키스도 처음이고... 다른것도 다 처음이야"
같은 남자 입장에서 전혀 자랑스럽지 않은 일임에도 상원은 정색을 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상원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조석희는
상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드는 발언을 내뱉거나 행동을 하면 이 인간이 지금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 한달만에 섹스를 하고 밤을 같이 보내기로 약속을 해놓고 갑자기 친척이 온다고 집으로 가버리지를 않나. 야한 냄새 풀풀 풍기면서 이 밤에 찾아와 놓고 집으로
간다는 헛소리에, 같이 살자는 제안은 아직까지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이런저런 핑계만 늘어놓기까지.
온몸으로 좋아한다는 아우라를 내뿜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발을 빼는 것이다. 조석희는 상원이 모든것을 버리고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미 한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군"
조석희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짜증이 섞인 어조로 중얼겨렸다. 상원은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아까까지는 최고의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조석희에게 헤어지자는 얘기를 들으면 모든 행복이 다 무의미하게 색이 바래고 말 것이다.
"선배는 정말 나를 좋아하기는 해요/"
"좋아해 정말, 너무나"
내 마음이 무겁게 느껴져 네가 질릴까봐 이 말은 차마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사실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그럼 어디 증명해봐요"
"증명?"
"선배가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증명해 보라고요"
상원은 막막함을 느꼈다. 다짜고짜 좋아하는 마음을 증명하라니,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자신의 마음을 낱낱이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그랬다가 너무 부담스러워 할 수 도 있으니 반의 반 정도만 보여주고 싶다.
"그걸 어떻게 해?"
조석희가 상원의 아랫배에 손바닥을 얹고 대답했다.
"몸으로 증명해야죠"
",,,그러니까 어떻게?"
손바닥이 스르륵 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느낀 상원은 몸이 굳었다.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조석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상원은 쩔쩔 매면서도 조석희가 하는대로
몸을 맡겼다. 그의 손가락이 상원의 다리 사이에 머물렀다.
"나...아직 아픈데"
하루에 두번 몸을 벌려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다.
지금은 그나마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픈것은 아픈것이다.
"그거 말고요"
상원이 눈을 깜빡거린다.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조석희가 몸을 숙여 상원의 귀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 대었다.
"선배, 혼자 하실 때 제 생각하시죠?"
"...!!"
"저는 혼자하면서 선배 생각하거든요, 선배 느낄 때의 표정이나 냄새, 끝내주게 조여드는 구멍같은거...."
어눌한 발음이 귓가를 스칠 때마다 상원은 아래가 오싹해졌다. 무서웠다. 바지 앞섶이 이미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게 느껴졌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느껴버리게 된 자신이, 상원은 무서웠다.
"선배도 제 생각....하면서 하시죠?"
"그....혼자 그렇게 막 하는건 아니고..."
"그럼 포르노 보면서 해요? 야동 같은거?"
"아니야 그렇지는 않아"
"그럼 어떻게 해요?"
상원은 조석희의 목소리에 약했다.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할 때도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했지만, 이렇게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고 말을 건네면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조석희가 상원의 귓볼에 입술을 살짝 비볐다.
"혼자 하실때 제 생각하시죠?"
"....응, 미안...."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상원은 일단 사과를 건넸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런 행위를 할때 상배방이 자신을 생각한다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어떻게 하시는지 보여주세요 그럼 믿을게요"
"어? 무슨 말이야?"
'선배 혼자 하시는 모습, 보고 싶다고요"
"마, 말도 안돼!"
상원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정색을 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조석희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증명하실 거에요, 선배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혈서 쓸게"
상원이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질색이었지만 그런것으로 석희를 믿게 할 수 있다면 혈서로 연애편지라도 써서
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 걸 받아서 어디다 쓰라고, 필요 없어"
...... 내가 혼자 하는걸 봐서 어디다 쓰려고, 그거야 말로 필요 없잖아.
상원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열심히 상대를 설득시키려 노력했다.
"가, 각서는 어때?"
"그런 각서 법적 효력없어요. 선배랑 내가 결혼한 것도 아닌데"
"그렇구나 결혼은 못하니까... 아, 그러면 내가 집으로 돌아가서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처음부터 차분하게 글로 써서 주면...윽"
아래를 파고드는 아픔에 상원이 비명을 삼켰다. 조석희가 우악스럽게 상원의 다리 사이를 움켜쥐었다.
"그런 글자 나부랭이 필요없다고요, 선배.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하지만, 그런거....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서 해"
조석희가 기가 차다는듯 웃었다.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고 안겨서 엉엉 울면서 좋다고 헐떡거리는 사람이, 이제와서 내외를 하는 이 상황이 어이없었다.
"선배 다른 사람 앞에서 하라는게 아니라 제 앞에서 하라고요"
"....그치만...."
"보고 싶어서 그래 선배가... 내 생각하면서 하는거 보고 싶어서 그래"
어린 아이 구슬리듯 한 말투에 상원의 눈동자에 고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원은 조석희의 부탁에 약했다.
"...그럼 믿어 줄거야?"
"네, 믿어줄게요"
상원은 믿어준다는 그 한마디에 중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할게. 안 될 수도 있지만 해볼게 "
다른 사람앞에서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위를 한다는 상상은 감히 해본 적 없는 상원이었다. 과연 제대로 흥분이나 할 수 있을까.
상원은 한숨을 쉬며 침실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어디 가요?"
"어? 침대에서 해야지"
"소파 두고 왜 굳이 거기서 해요"
"소, 소파에서?"
상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자위라고는 침대에 누워 시트를 뒤집어 쓴 채, 두어 번 해본것이 고작인데 갑자기 소파라니.
"저기 앉아서 다리 벌리고 제대로 하는거 보여줘요"
"아, 앉아서?"
"그럼 누워서 하시게요? 누워서 하는것도 나쁘지 않지만"
조석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뭐,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 소파를 가리켰다. 상원은 덜덜 떨리는 다리로 소파에 가 앉았다. 지금이라도 조석희가 농담이에요 하면서
웃어주면 좋을텐데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그의 얼굴에선 그런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할게"
상원이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살덩이를 움켜 잡았지만 대책이 서지 않았다.
"선배 평소에도 그렇게 해요?"
"아니... 이불 뒤집어 쓰고 해"
상원의 솔직한 고백에 조석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지마.... 긴장되는데"
"선배가 귀여워서 그래"
조석희가 상원의 뺨을 손바닥으로 스윽 만졌다. 손길이 닿자마자 마법처럼 하얗게 질렸던 상원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말도 안돼, 내가 어디가 귀여워, 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조석희는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어 주었다.
"이번엔 이불 없이 해봐요 . Apple선배"
이번엔 목덜미와 귓볼까지 새빨개졌다. 사과향이 날 것 같았다. 낱낱이 핥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 누르며 조석희는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나른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자, 빨리요, 선배 어떻게 하는지 보여줘 그래.... 그렇게 다리 벌리고 불알도 만져봐요 선배, 잘하네 구멍도 보여줘요, 허리 들어봐 응...그렇게
상원은 눈을 감고 그가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과연 흥분이나 할까 싶었는데 슬슬 아래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선배 하면서 제 이름은 안 부르세요?"
"어? 모, 모르겠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절정에 다다르면 정신이 없을 때 불렀던 것도 같다.
"그럼 제 이름 부르면서 해보세요"
"석희야......."
상원이 눈가를 찡그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전혀 다른 의미로.
"그렇게 원마이 섞인 목소리로 부른 다고요?"
"아니...그게 아니라"
"제 이름 불러부세요 네?"
상원은 정말로 울고 싶었다. 남의 집 소파에 앉아 바지를 내리고 다리를 벌려 자위를 하고 있는것도 모자라 상대의 이름까지 불러야 한다는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서,,,석희야.."
"좀 더 섹시하게 불러봐요 선배. 내가 넣어주면 몇 번이나 부르잖아. 내이름"
"....석희야 하아----"
손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다.
"선배 구멍도 움찔거리는거 알아요? 거기에 넣어줬으면 해요?"
조석희의 목소리가 음란하게 울렸다. 상원은 그의 손이 자신의 아래를 훑고 있는것 같아 점점 달아올랐다.
"자위할 때 거기도 만져요?"
"아니..읏"
"그럼 만져봐요 응 , 거기 아래"
상원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왼손을 뻗어 조석희가 시키는 대로 아직도 빨갛게 부어 있는 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넣어주면 좋겠죠?"
"하아...응..."
수치심따위 날아가버렸다. 상원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석희야 ..하아...응 앗, 흥"
너무나도 근사하고 멋진 조석희.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온몸으로 부딪쳐오는 감각을 떠올렸다. 상원은 눈을 감고 손바닥에 힘을 주어 살덩이를 곧추 세웠다.
아찔한 감각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석희야 석희야.. 좋아....하아 좋아해"
"선배 안에 제가 들어가 있는 상상해요?"
"응,...읏, 하읏"
"뭐가 들어가 잇어요?"
"너..하아,,네것"
몸이 너무 뜨거워져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상원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안에 들어와 움직이는 남자의 단단한 살덩이를 떠올렸다.
"선배가 좋아하는게 제 좆이죠?"
"응, 응 좋아...읏"
"제 좆이 어떻게 움직여요? 선배 안에서?"
제 정신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음란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상원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흥분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알코올이 몸에 들어가니 그만큼
이성도 희석된 모양이라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커...너무 딱딱해"
"그거 넣어줬으면 좋겠어요? 도와 줄까?"
"응..하아..아"
너무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느라 상원은 퍼스너 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이미 단단하게 피가 몰린 성기를 손에 쥐고 조석희가 상원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목덜미 아래에 얼굴을 묻고 그가 중얼거렸다.
"선배....진짜 여기서 야한 냄새 나"
"하아...석희야"
하루에 두번은 무리라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상원은 조석희의 목을 끌어 안았다. 혼자 손을 움직여도 타들어가는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가
이 열기를 해결해줬으면 좋겠다.
"다리 벌려봐 넣어줄게"
"아..아파"
상원은 본능적으로 조석희의 어깨에 매달려 아래가 벌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었다.
"괜찮아요... 한 번 넣어서 여기 부드럽게 벌어지잖아"
조석희가 상원을 자신의 무릎 위에 천천히 앉히며 속삭였다.
악마의 속삭임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에 상원은 그의 어깨에 매달리고 있던 손을 풀고 말았다. 푹 소리와 함께 안으로 살덩이가 쑤셔 넣어졌다.
조석희가 탁한 신음소리를 내며 상원을 안았다.
"석희야...응"
"상원선배 좋아?"
"응...좋아 아픈데... 너무 좋아 하아, 아"
상원은 울면서 조석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라도 조석희가 자신의 마음을 믿어준다면 몇 번이라도 다리를 벌려 안길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도 단단한 몸도 외국영화배우 같은 콧대도 머리카락도 이기적인 성격도 , 아랫배에 까칠하게 닿은 음모도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좋았다.
"..... 선배, 제 자지 맛있어요?"
"응..응응"
매일 좋았다.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처럼, 매일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처럼 상원은 조석희가 매일 좋았다.
"매일...늘 좋아해 석희야..."
조석희가 입을 맞추며 얕게 웃었다. 그래요, 선배는 질리는 법이 없지. 하는 만족스러운 중얼거림 뒤에 다시 격렬한 섹스가 이어졌다.
상원은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상대가 자신에게 질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나 죽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상원이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잇던 조석희가왜요, 하고 심상한 말투로 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와 계신데... 외박했잖아. 진짜 혼날거야"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외국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해서인지 가끔 상원은 그와 대화를 나눌때 현격한 문화차이를 느꼈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성격차이일 수도 있지만,
"오늘 돌아가시는데 배웅도 안해드렸으니까 당연히 혼나지"
상원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던 조석희가 놓아주질 않았다.
"석희야...."
"선배 저를 너무 나쁜 놈으로 만들지 마세요"
"...무슨 소리야?"
넌 원래 나쁜놈이잖아.
"선배 조부모님들이 살아계신걸, 귀찮아하게 만들지 말라고"
"....."
상원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놈이라고 해도 얘는 왜 이렇게 성격이 나쁜 것일까.
"나 가봐야 해"
그 한마디에 지금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선배 여기서 지내요"
"...."
"여기서 지내. 내 옆에서 계속"
계속, 이란 단어가 상원의 심장에 직격으로 꽂혔다. 사랑에 한없이 약한 남자 이상원의 눈에 하트가 그려졌다
"석희야..."
"선배 부모님한테 오늘 가서 말씀드려요"
"오늘은 좀...."
가뜩이나 말하기 어려운 주제인데 굳이 오늘 꺼낼 필요는 없었다. 화가 난 부모님께 이런 얘기를 꺼내면 오히려 성공률이 적어질텐데.
"오늘해요. 오늘 안되면 내일도 안되는 거 마찬가지잖아"
조석희식 논법에 상원이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줄거지?"
조석희가 다시 한번 힘주어 물었다 몇 번이나 거절을 했는데도 계속 같은 질문을 하는 그의 마음에 상원은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를 위해서 오늘 꼭 가서 말하자. 안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일단 그렇게 하자.
"응 그럴게 , 그렇게 할게"
상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석희가 상원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상원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조심, 조심 쓸어내렸다.
맹수를 길들인 조련사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상원은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의미의 만족을 느끼고 있는 조석희의 입가에도 야릇한 미소가 그려졌다.










[뭐라고요? 외출금지?]
"응, 미안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상원은 아버지에게 불려가 무릎을 꿇고 한 시간 동안 꾸중을 들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상원은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의 꾸지람을
달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 이후에 내려진 징계였다.
"엄청 혼났어. 할아버지하고 할머님 오셨는게 그게 무슨 버릇이냐고, 후....혼날 짓 하긴 했다"
[선배 혼나거야 내 알바 아니고, 그런데 집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외출금지라고요?]
"어...."
대답을 해놓고도 상원은 뭔가 찜찜함을 느꼈다.
"저기 석희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건데"
[뭘요]
"...설마 나 집에서 쫓겨나라고 일부러 물어보라고 어제 시킨 건 아니지?"
머릿속에 떠돌고 있던 의혹을 입박으로 내니 어쩐지 더 확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리가요]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
"하하하하....."
상원은 전화기를 붙들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조석희의 얼굴이 떠올라 매가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좋을까. 거짓말을 하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이런 인간에게 반해버렸으니.
[그래서 며칠간 못 나오는데요?]
"일주일..."
전화기 너머에서 알아듣기 힘든 욕설이 들려왔다. 그래도 수화기를 떼고 욕을 해주는 예의에 상원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농담이죠? 그 정도로 무슨 일주일 씩이나 외출금지를 당해]
"아하하 그게... 조부모님들 네 분이 다 나 때문에 오셨는데 내가 허락도 없이 나가서 외박한 거잖아. 혼날짓 한거 맞아"
[아무리 그래도 선배 성인아니야?]
"그러게 아무튼 오늘 그래서 못 갈것 같아. 미안해"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상원은 조마조마했다. 그나마 통화중이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무거운 침묵이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알겠어요 어쩔 수 없지]
이죽거리는 어조가 아닌 깔끔하게 떨어지는 말투에 상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리리 화를 내는게 나으려나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럼 너 잠은 어떻게해?"
특별한 사정이 없는이상, 그간 상원이 이틀에 한번은 조석희의 집으로가서 그가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와주곤했다. 외출금지긴 해도 조석희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준다면
잠을 자는 것은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면제 먹으면 돼요]
"수면제? 그거 몸에 안 좋잖아"
수면제를 무슨 사탕 씹어 먹듯이 한 움큼씩 삼키는 그의 습관을 아는 상원은 질겁을 하며 되물었다.
"먹지마 석희야 수면제 자꾸 그렇게 먹다가 큰일 나"
[그럼 어떻게 해요. 딱히 방법이 있는것도 아닌데]
울상이 된 상원이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집으로 네가 오면 안돼?"
[싫은데요]
안되는 것도 아닌 싫은데요 였다.
"내방...잠자는 정도면 괜찮은데"
[선배 안고 잠만 자는 취미는 없어. 그렇다고 머리에 트로피 떨어지는것도 사양하고 싶고, 그만 끊을게요]
"응...그래"
통화를 마치고도 상원은 떨떠름했다.
예전에 한번 조석희가 상원의 방에 온 적이 있었다.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조석희를 놀란 상원이 있는 힘껏 밀쳐낸
것은 정말 본의가 아니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상원의 성격을 아는 조석희도 그 정도는 이해해줄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바람에 그의 머리 위로 수학경시대회 트로피가 떨어진 것
만큼은 아무래도 용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조석희는 상원의 불운이 자신의 행운을 넘어서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그 일이 벌어진 다음날 책상 선반에 있는 트로피를
모두 치워놓았다는 얘기는 끝내 하지 못했다.
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동안 조석희를 보지 못한 것은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미국에 갔다 올때도 고작 닷새였는데.......
그때도 상원은 조석희를 위해 공항에서 기다렸다가 리무진 안에서 그가 잠이 들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 어쩌지"
상원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언젠가 조석희에게 수면제가 효과가 있냐고 물었을때 그는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그럼 자기가 그 제약회사를 사들였을 것이라는 농담아닌 농담을 했다.
아버지께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볼까.... 아니 그랬다가 외출금지기간이 일주일이 아니라 열흘로 늘어날게 뻔하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자애로운 편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일절 단호했다.
그럼 밤에 탈출을 해야 하나.
상원은 방과 연결되어 있는 발코니로 다가가 아래로 뛰어내릴 수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한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상원아 엄마랑 아빠랑....
방문이 갑자기 열리자 놀란 상원은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어머니가 달려와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발코니 너머로 머리부터 떨어질 뻔했다.
"....늘 조심해야지"
"죄송해요"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아직까지 아들의 불운이 안타까운 것이 어머니의 심정이었다
"추운데 발코니 문은 왜 열어두고 있니"
"그냥...조금 답답해서요"
"아빠랑 모임갔다 올테니까 집에 꼼짝 말고 있어라. 괜히 나갔다가 더 혼나지 말고, 안 그러던 애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화가 나서 저러는 거야. 아마
삼일만 지나도 화 풀리실 거야"
"예 알겠어요"
"밥은 반찬 내어서 먹으면되겠지만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사다줄게"
"아니요 알아서 잘 챙겨먹을 게요. 걱정마세요"
"그래 혹시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문자 보내고 알았지?"
"네 잘 다녀오세요"
상원은 나가면서까지 아들의 식사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배웅했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잠시나마 탈출을 꿈꿨던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들어왔다.
어머니 말씀대로 삼일만 참으면 아버지 화가 풀릴 수도 있는데 괜히 나갔다가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동안 조석희가 수면제를 많이 먹어 잘못되기라도하면,
"....안돼"
상원은 꺼림직한 생각을 떨쳐내려는듯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의 집에 일을 하러 오시는 분이 하루에한번은 오시니까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괜찮을...아니 , 조석희에게 그런 일이 생길리가 없다. 그는 대단하니까.
절대로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행운이 나 때문에 가려져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지.
상원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물어 뜯었다. 상원은 자기 방으로 가서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잠 안온다고 수면제 많이 먹지마. 우유 뜨겁게 해서 마시면 좋대 ^^]
웃는 이모티콘을 붙일까 말까 몇 분을 고민을 하다가 붙이는 쪽을 택했다. 상원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답문자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F.H.M]
상원은 한참을 문자를 바라본 후에야 알파벳 세 개가 뜻하는 의미를 알아 차렸다.
fucking hot milk.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뜨거운 우유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쯤 되시겠다.
아아... 석희야. 대체 나는 너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가질 거 다 가지고 잘 생기고 머리까지 좋은 네가 성격은 어째서 이 모양이니. 사람이 걱정을 해주면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왜 퍼킹이 붙는 거냐. 그런데 왜 난 그런 네가 이렇게 좋은 걸까.
"미처 진짜"
정말 이 콩깍지는 평생이 가도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상원은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다 다음 번 문자를 보냈다.
[우리집 와서 잠만 자고 가면 안돼?"
이번엔 웃는 이모티콘은 붙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답문이 왔다.
[No.]
단호하고 깔끔한 문자였다.
상원은 그가 두 문장 이상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을 받아 본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더 이상 얘기 해봤자 기분만 상하겠다 싶어 그는 문자를 보내느것을
멈추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조석희와 처음 사귀게 되었을때, 상원은 그가 자신을 받아준 사실 자체만으로도 황송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연애라는것이 늘상
즐거운 일만 있는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렇게 본의 아닌 일로 조석희의 심기가 어그러지게 되면 상원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 이런 문제를 누구에게 상담할 수 없다는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동석과 승완 대진에게 이 얘기를 꺼내기라도 하면 당장 승완이
칼을 들고 조용히 조석희를 찾아갈게 분명했다. 동석이랑 대진 역시 같이 가서 싸웠으면 싸웠지, 말릴 인간들이 절대 아니었다.
침대 맡에 앉아 끝나지 않을 고민을 하던 상원에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이 시간에 집을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인터폰을 들어 대문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모자를 쓰고 있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구세요?"
[우리다! 문 열어라!!]
우렁찬 목소리에 상원은 놀라서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승완을 위시한 동석과 대진이 손에 폭죽을 들고 마당을 가로 질러 들어오고 있었다.
"너희들 웬일로...."
"야 인마, 합격해 놓고 왜 말을 안해 !"
"축하한다! 이상원"
"대박 축하해!"
대진이 들고 있던 폭죽을 터트렸다. 펑 소리와 함께 상원이 입고 있떤 셔츠 앞자락에 불이 붙었다.
"으악!!"
폭죽을 터트린 대진이 놀라서 펄쩍 뛰어 올랐다. 행동이 민첩한 동석이 가장 먼저 달려가 자신의 옷을 벗어 불이 붙은 상원의 셔츠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불은 순식간에 진화되었다. 승완이 상원 앞으로 걸어와 셔츠를 열어 젖혔다.
"다친 데는 없...."
상원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안도하려던 승완의 눈이 상원의 하얀 속살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의미심장한 흔적을 발견했다.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셔츠 자락을 여며주고 승완은 외쳤다.
"안 다쳤네! 멀쩡해 다친 사람 없다! 무사하다!"
"안다치긴. 셔츠자락에 불붙었으니까 화상 입었을 거야. 좀 보자"
눈치 없는 대진이 상원의 셔츠 깃을 잡고 벌려 확인하려 했다 그러자 승완이 화를 버럭 내며 대진의 목덜미를 잡고 집어 던져 버렸다.
"만지지마! 감히, 누구 옷을 벗기려 들어!"
막내딸 옷 벗기려던 외간 남자를 떼려 죽이려는 기세였다. 한 손으로 덩치가 곰만 한 대진을 날려버린 승완의 힘도 놀라웠지만 상원은 자신의 옷을 죽기 살기로
붙들고 있는 친구의 심증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남자끼리 어때 괜찮아"
"안돼! 가서 당장 옷갈아 입고 나와 당장!"
승완이 등을 떠밀자 상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눈치 없는 대진은 무슨 일이냐고 끈질기게 묻고 동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그러네"
"...씨발"
"뭐가 아직도야? 뭐가? 아, 뭔데. 나 좀 가르쳐줘봐"
"닥쳐!씨발놈아"
"뭐야 미친 새끼 , 괜히 승질 내고 지랄이야"
"누가 그러게 상원이 옷에 대고 폭죽을 쏘고 지랄하래, 시발 보기 싫은거 봤더니 눈이 썩은 것 같잖아"
"상원이 맨몸이 뭐가 눈이 썩어  체육 시간에 옷 갈아입을 때 봤는데 매끈매끈 이쁘기만 하던데"
동석이 대진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 갈겼다. 대진이 으르릉 거리며 친구들을 노려보고 있을때 집안에서 으앗 하는 상원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승완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동석이 손을 내밀었다. 운동을 하는 동석은 어지간히 속이 상하지 않으면 담배를 피우는 법이 없었다.
승완은 말없이 담배를 꺼내 친구에게 내주었다.











"....나 외출금지인데"
"니 나이가 몇 개인데 외출금지냐. 게다가 우리가 다른 일도 아니고 네 대학 합격 축하하러 간다는 건데 설마 부모님이 뭐라고 그러시겠어"
"그건 그렇지만...."
"에이 괜찮아. 괜찮아 바로 집 앞이잖아. 설사 뭐라고 하시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면 되지"
외출 금지라서 못 나간다는 상원을 끌고 세 사람은 그의 집 근처 호프집을 찾았다. 대학 합격 축하주를 마시자는 친구들의 청을 상원은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 합격한것은 어떻게 알았어?"
"인마 그거 서운하다. 왜 제일 먼저 나한테 말 안했어?"
승완이 투덜거렸다.
".....혹시나 해서"
상원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합격이 믿기지 않아. 하루에 서너번은 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치고 합격을 확인했다.
대학등록금을 내고 나서 더 확실해지면 친구들에게 말해줄 생각이었다. 괜히 설레발 쳤다가 일이 어그러지면 친구들까지 속상해질까봐 두려워서였다.
"으이구 소심한놈 내 그럴 줄 알고 너희 어머니한테 합격하면 말씀 좀 해달라고 연락 넣어 놨다"
동석이 상원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미안해, 진작 얘기했어야 하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
상원은 자신이 말해주지 않았는데 알아내어 축하를 위해 찾아온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오늘 술값 네가 쏴"
"오케이 그래 알았어. 대신 나 오늘...."
"일찍 들여보내 줄게. 걱정을 하덜 말어"
호프집으로 들어가자 대진이 큰 소리로 안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외출금지야? 너희 부모님 좀 프리한 편 아니던가?"
동석이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 밖에 내었다.
"그러신 편인데..... 내가 혼날 짓을 좀 해서"
"무슨 짓을 했는데 엄마 지갑에서 돈이라도 뽀렸냐?"
권투를 하면서도 체급조절에는 영 관심이 없는 대진이 서비스 안주를 한 웅큼씩 입안에 넣으며 물었다.
"얘가 너냐? 상원이가 너야?"
"혼날짓을 했다잖아. 그게 아니면 뭔데? 거실에서 몰래 딸치다 걸렸어?"
"...대진아"
상원이 애절하게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윤대진 저건 머리에 그 생각밖에 없지"
"외출 금지 당할 정도로 혼날 짓이 당장 뭔지 안 떠오르니까 그렇지. 그냥 니가 니 입으로 불어"
상원이 뻥튀기를 입에 물고 오믈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조부모님들 오셨는데 ...내가 나가서"
"엥? 외출 할 수도 있지 뭘 그런걸 가지고 그러셔"
"...나가서 안 들어갔어"
"...."
"...."
"어딜 나갔다가 안들어가? 집에 안 들어갔다고? 밤새 뭐했는데? 어딜 갔는데?"
눈치도 없는 대진이 침묵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한 채 쉴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점원이 주문한 안주를 가져다주자 동식이 대진에게 그거나 처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승완이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상원아"
그가 연기를 상원의 반대 방향으로 내뱉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상원을 불렀다. 그것은 흡사 사랑에 눈이 멀어 집나갔다가 배가 불러 들어온 딸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아버지의 부성애가 담긴 음성이었다.
"나는. 반대다"
"...."
"남자, 여자 이전의 문제야 그건 그놈은 개새끼야. 생긴 것만 번지르르 하지 완전 개새끼라고"
승완이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한승완이 조석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상원도 직접 목도한 바가 있었다. 같이 입원해있던 병원복도에서 승완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잠시 그 자리에 멈칫하던
그는 망설임 없이 조석희를 향해 링거 병을 집어 던졌다. 들짐승 같은 반사신경을 가진 조석희가 팔을 들어 링거병을 쳐낸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파편에 휠체어를
타고 있떤 상원의 손등에 꽂힌 것은 정말 불운한 사고였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조석희와 한승완은 감히 네 놈이 라고 외치며 서로를 향해  잡아 죽일 것
기세로 달려 들었다.
상원이 간신히 뜯어말려 두 사람을 떼어놓긴 했지만 승완은 그날 이후로 말버릇 처럼 조석희의 배에 한방을 더 넣어줘야 했다는 말을 곱씹었다.
졸업 후 삼촌이 운영한다는 고급 일식집에서 본격적으로 회를뜨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 승완을 생각하면 도저히 농담으로 웃어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대야. 누워서 생각해보고 서서 생각해보고 앉아서 생각해봐도 반대야"
"...."
"나도 반대"
동석이 차가운 컵에 맥주를 따르며 산뜻하게 대답했다. 대진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가 싶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여태 그놈하고 만나는 것도 참 싫지만, 앞으로도 만난다면 더 싫을 거 같아"
"아, 조석희!"
그제서야 대화의 주제를 파악한 대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근데 아직도 걔랑 사귀어? 우와 대단하다 그놈 여자는 존나 자주 갈아탄다고 유명하던 놈이잖아. 고딩 주제에 학교에 여자들 존나 찾아오고 교문앞으로
금발도 오고 가슴 존나 큰 라틴계 누나도 오고 그치? 맞지?"
"...응 맞아"
상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고 해도 조석희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대해 듣는 것은 매우 불편했다.
가끔 그런 생각조차 들었다. 과연 자기 하나로 조석희가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새끼랑 아직도 만나? 걔는 딴 년도 만나면서 너 만나는거 아니야?"
대진이 악의없이 던진 한마디가 상원의 심장을 관통했다.
"만날 걸. 그놈이라면 만난다."
동석이 맥주를 가득 채운 잔을 각자 앞으로 하나씩 돌리며 대진의 말을 거들었다. 상원의 얼굴이 파르르 질러갔다.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해 보여 승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상원을 두고 왜 바람을 펴! 우리 상원이가 어디가 어...."
거기까지 말하고 승완은 지그시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상원의 편을 들어주는 동시에 그 빌어먹을 조석희 편까지 들어주는 발언이었다.
"아무튼 싫어 난 걔가 싫어 무조건 싫다"
"...미안하다"
아무리 좋은 친구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조석희와 헤어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조석희가 한승완을 위시한 선배들과 연락을 끊으라는 말을
내뱉을 때도 미안하단 말밖에 하지 못했다.
둘다 소중한 관계였다. 어느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심때문에 양쪽 모두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상원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야, 그만하자 오늘 상원이 합격 축하하자고 모인 자린데"
대진이 술잔을 들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동석도 그만하자고 테이블 밑으로 승완의 발을 슬쩍 걷어찼다. 오늘 축하자리의 주인공인 상원의 표정이 안됐다
싶을 정도로 창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그 얼굴을 보니 승완도 미안해졌는지 자신의 앞에 있던 맥주잔을 들고 건배제의를 했다.
"건배하자 건배"
"그래 상원이의 합격을 축하하며 위하여!"
"위하여!"
"지화자!"
네 사람의 맥주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첫잔은 무조건 원샷이야. 상원아"
대진이 웃으며 말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마시는 맥주는 더없이 시원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이전에 있었던 일을 안주거리 삼아 시시덕거렸을 때까지는 좋았다. 상원도 간간이 핸드폰을 보며 부모님께 연락이 오는지 체크했고
동석도 웃으며 걱정말라고 연락이 오면 자신이 얘기해주겠다고 말했다.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갑자기 대진이 찌개 안주가 먹고 싶다고 알탕을 시키자 승완이 맥주와 알탕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소주 한병을 시켰을 무렵이었다.
상원이 더 이상 마시면 안 될 것 같다고 거절을 하자 승완이 딱 한잔 정도는 괜찮을 것 이라고 한잔을 권유했고, 한잔은 두잔이 되고 두잔은 석잔이 되었고...
결국에 이 상황에 이르게되었다.
"으하하하하 시발 진짜 내가 얼마나 회를 잘 뜨는 줄 알아? 주방장 형님들도 내 칼솜씨를 보면 다들 놀란다고 크하하하하 조석희새끼 회쳐버릴꺼야"
"회쳐버려...회쳐버려"
동석이 옆에서 음습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어우 술마시니까 뽀순이들 보고 싶네 우리 뽀순이들!"
대진이 공중을 향해 손을 허우적 거리며 뽀순잉과 뽀순퀴의 이름을 외쳤다. 상원이 히죽거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 난 뽀순 퀴 싫어! 애는 착하지만 난 걔 별로야"
"으하하하 조석희 개새끼는 애도 나쁘고 별로 잖아"
상원이 갑자기 손으로 깔깔거리고 웃는 승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야 그러지마 왜 우리 석희 욕해 으앗!"
승완이 사정없이 상원의 손등을 깨물었다.
"에이. 퉤 우리석희? 우리 석희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안돼. 난 니네 사귀는거 반대다!"
그러자 상원이 망설임 없이 바닥에서 흙을 쥐어 승완의 얼굴에 뿌려버렸다.
"으악!!"
승완이 두 손으로 얼굴을 잡고 괴성을 지르자 동석과 대진은 박장대소를 해댔다.
"야, 인마! 무슨 짓이야"
"흙 들어갔으니까 찬성해주는거다?"
상원이 승완의 팔을 붙잡고 애교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대박 이상원 완전 대박 하하하하"
"한승완 눈에 흙들어갔는데 어쩔거임? 크크크"
"꺼져! 시발 절대 싫어. 그 새끼 진짜 걸리면 뒈지는거야"
승완이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며 시근덕 거렸다. 아무리 술에 취해 이성이 희미해져 있는 이 상황에서도 그의 호불호는 확실했다.  상원이 끈질기게 승완에게
매달려 찬성해달라고 졸랐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가! 이놈아 가버려!! 업어주고 키워줬더니 아주 그냥 제대로 삐뚤게 자라가지고"
상원의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승완이 팔에 매달린 그를 떨쳐내며 소리쳤다.
" 야 니네 아빠 화났다 빨리 가라 크크크"
"우리 아빠? 우리 아빠가 어디있어?"
상원이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을 잃어버린 아이같은 가련한 상원의 모습에 승완이 시발 하고 욕을 내뱉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웬수, 웬수 같은놈"
"헤헤헤 승완아"
상원이 손을 번쩍 펼쳐친구의 등을 안았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헤어졌던 가족처럼 서로를 힘차게 끌어 안았다.
"승완아 내 친구 내 친구들 헤헤헤 "
"얘 술 취하니까 완전 골 때리네, 크핫"
대진이 상원의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흩트려주었다. 동석도 그런 상원이 귀엽다는 듯이 뺨을 꼬집어 주려 손을 뻗었다. 술에 취해 상원의 뺨 대신 한승완의
팔뚝을 꼬집은 것이 약간의 소란을 빚게 했지만,
"으악 시발 손 치워 어딜 꼬집고 지랄"
"아 드러워 한승완 얼굴 기름"
동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보고 기분 나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우 시발 벌써 자정이 넘었네 가자 집에 가야지 "
대진이 시계도 없는 손목을 보고 동석과 승완의 옷을 잡아 끌었다. 상원이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잘가 얘들아 나중에 또 봐"
몸까지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상원은 친구들이 사라질 때까지 손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세 사람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자 상원은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몸을 돌렸다.
"나나나, 눈누나나 나나"
의미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던 그의 앞을 장신의 남자가 가로막아 섰다.
"어?"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끝내주게 잘 생긴 남자가 기가 찬다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아"
상원은 입을 딱 벌리고 탄성을 질렀다.
"우리 석희만큼 잘 생긴 사람이 또 있었다니"
"...."
상원이 손을 들어 그 남자의 얼굴을 이리저리 더듬어 만졌다. 오뚝한 콧날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미간이 조석희와 매우 닮은 남자였다.
"잘생기셨네요"
상원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눈앞의 남자는 조석희와 매우, 엄청나게 매우, 닮아있었지만 조석희는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조석희라면 집 앞에서 이 늦은 밤까지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정말 잘 생기셨습니다"
상원이 다시 힘을 주어 말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처럼 그의 눈은 놀라움과 설렘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지금 그 얘기 듣자고 여기서 두 시간동안 서  있었는지 알아?"
남자의 험악한 일갈을 듣자 상원이 흠짓하고 어깨를 떨었다.
그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울긴 뭘 잘했다고... 하아 말을 말자 젠장"
"...우리 석희가 목소리는 더 멋있는데"
울먹이면서도 우리석희 자랑을 상원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석희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아냐 . 성격은 진짜 나빠도 멋있다. 끝내주게 멋있다. 운도 좋고
너무너무 멋있다. 성격이 좀 안좋긴 해도 짱 잘생겼다. 목소리도 완전 좋고 영어도 캡 잘한다.  성격이 더러워도 난 조석희가 좋다.
우리 석희가 제일 멋져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술주정을 늘어놓는 상원을 조석희는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성격 안 좋은거 이제 알았어요? 아예 광고를 하지 그래?"
"조석희는 개새끼다!!!!"
상원이 두 손을 모으고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조석희는 황담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저기에 불이 커지면서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까지
생겼다.
"선배 미쳤어?"
"아...사람들이 다 싫어하면 좋겠다"
"뭐라고요?"
"...나만 좋아하면 좋겠어"
"뭘 선배만 좋아해"
"석희"
상원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만 좋아하면 좋겠따. 나만 석희 좋아하고 싶어"
"선배만 좋아해. 됐어?"
상원이 갑자기 조석희를 와락 끌어 안았다. 조석희는 이전까지 상원에게 약간의 알콜 섭취는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당장
그 생각에 수정을 가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끌어안아?"
"....미안해"
"뭐라고?"
"잠깐만...잠깐만 이러고 있을께"
조석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상원은 분명 자신을 조석희 닮은 잘생긴 행인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렇게 끌어안았으니 이건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며칠 간 미국에 갈 일이 생겨  잠시 얼굴을 보러 왔더니 연락두절, 한 술 더 떠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리며 와서 한다는 소리가 조석희 개새끼에
외간 남자로 추정되는 인간까지 끌어안아?
"가지가지 하는군"
"....석희 보고싶다"
"보고 있잖아요"
"어, 그런가?"
상원이 흐릿한 눈을 하고 헤헤 웃었다. 조석희가 상원의 코를 비틀어 쥐어 사정없이 흔들었다.
"으악 아파"
"you`re impossible" (너 진짜 구제불능이다)
"맞아 미션 임파서블이다. .... 아 집에 어떻게 들어가지 쫒겨날거야. 분명 쫓겨나고 말거다. 나 외출금지인데"
머릿속을 스친 우울한 생각에 상원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등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거기 너 상원이냐?"
"어? 아버지다"
상원이 대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하고 몸을 돌리려던 상원의 턱을 쥐고 조석희가 짙은 키스를 하기 시작한 것도 그와
동시였다. 술에 취해 따끈하게 달아오른 점막을 혀로 핥아주자 상원이 새된 신음소리를 내며 그에게 매달렸다.
조석희는 일부러 상원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잘 보이도록 몸을 틀어 상원의 허리를 한손으로 바싹 끌어 안았다.
부드러운 입술을 혀로 맛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키스를 마쳤다.
"....아"
아직도 무슨 일이 잇었던 것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원이 멍한 얼굴로 입술을 만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문 앞에 서있던 상원의 아버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석희는 허리를 숙여 상원의 귀에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이고 사라졌다.
-잘자요. Apple선배.
그 목소리를 듣자 상원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의 화려한 술주정은 거기에서 끝이 나고 말았다.








숙취로 잠이 깨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상원은 현재 온몸으로 겪는 중이었다.
"....으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끙끙거려도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거인의 발소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싶어 상원은 침대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방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부엌에서 밥을 준비하고 계시던 어머니가 묘한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물 마시려고요"
상원이 냉장고 문을 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통을 꺼내 컵에 따르는 와중에도 상원은 어머니의 기이한 시선을 느껴야만 했다.
"..어 저.... 많이 화 나셨어요?"
외출금지를 당한 지 하루만에 친구들하고 술을 먹으러 나갔으니 당연히 혼이 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불안해 하고 묘하게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하룻밤 사이에 어머니의 뺨이 핼쑥해진 것 같아 보였다.
"너 아버지 서재에 계실테니 가봐라"
"네? 아 예"
생각해보니 어제 가게를 나온 뒤로 기억이 없었다. 상원은 혹시 자신이 술김에 부모님 앞에서 무슨 실수를 한 것인가 싶어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서재 문 앞에 서서 아버지 저예요 하고 부르자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렸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때 상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 앉아라"
아버지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상원이 기억하기로 아버지가 담배를 끊으신지가 10년도 넘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상원은 서재 문을 닫고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는 담배 한개비를 끝까지 다 피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너 말이다. 이 상원....."
"네 아버지"
손에 식은땀이 나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상원은 어제 자신이 무슨 술주정을 부린 것인가 기억해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어떤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짓을 저지른거지. 욕이라도 했나? ...막 토한 걸까? 뭐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아버지가 담배까지 피우시는걸까....설마 춤을 춘 것은 아니겠지./
"물어볼게 있는데...솔직하게 대답해라"
"예"
상원은 대답하면서도 계속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그...사람 누구냐"
"예? 누구요?"
"어제 집 앞에서... 그 사람 말이다"
상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 앞에서 그 사람이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누구 말씀하시는거에요? 혹시 동석이랑 승완이랑 대진이요?"
"아니 그 녀석들 말고"
상원은 뺨을 긁적거렸다. 그 세명을 제외하면 대문까지 같이 올 사람이 없는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저 어제 걔들하고 술 마셨어요 죄송해요. 허락 안 받고 나가서...."
상원은 일단 사죄를 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어제 너랑 대문앞에서,,,,하아"
말을 잇기가 힘든지 아버지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아들인 다음, 그는 천천히 대화를 재개했다.
"너하고 그 짓 하던 인간 말이다"
"그짓이라뇨?"
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들의 청명하고 순수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의 아버지는 말로 하기 힘든 착잡함을 느꼈다. 저렇게 착하고 올바른 아들을 앉혀놓고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에겐 너무도 힘들었다.
"....너한테 키스하던 사람 말하는거다"
"예? 키스요?"
상원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스라뇨? 제가요? 누구하고요?"
"....모르니까 내가 너한테 묻고 있는거 아니겠냐"
상원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 보앗지만 어제 조석희가 집으로 온다는 연락은 받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자신과 키스를 했단 말인가.
"말도 안돼"
상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듣고 그의 아버지도 침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도 안 되는 걸 내가 어제 목도했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럴 리가 없는데...."
조석희가 대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릴 인간도 아니고.
자신이 조석희가 아닌 다른 사람과 키스할 인간도 아니고- 물론 조석희인줄 알고 김이경과 했던 키스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럴리가 없어요 아버지가 잘못 보셨을 거예요"
상원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아"
그의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가 그걸 봤단 말이다. 내 이 두눈으로 똑똑히"
"아버지...."
"내 눈으로 본 것을 어떻게 잘못 본것이라고 넘겨버리겠냐. 아무리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도 그렇게 현실회피하고 싶지는 않다"
상원은 자신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의 아버지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런 성격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숱하게 겪었지만 그는 신념을 버리면서까지 손에 넣는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의 일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피우면서까지 저렇게 고민을 하셨다는 얘기에 상원은 미안해졌다.
하지만 아닌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저 그런데 진짜 아닌데....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신거 아니에요?"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너를 내가 들쳐 업고 왔는데?"
"그럼 키스를 한게 아닌건?"
"그럼 어제 두 다리 쭉 펴고 잤겠지"
상원은 곤혹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술에 몇번 취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술에 취한다고 아무나 붙들고 키스를 한다는 술주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조석희가 아닌 누군가에게 키스를 하겠다는 마음이 들리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상원은 조심스레 가설을 냈다.
"저기.혹시...변태를 보신거 아닐까요?"
"뭐라고?"
"저는...술에 취했다고 아무하고나 키스하지는 않거든요"
조석희가 아니라면 누구하고도 키스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집 앞에서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것도 아버지 앞에서 키스를 당했다는 사실이 영
찝찝했지만 일단 오해는 풀고 싶었다.
"만약 했더라도 그건 제 의지가 아니었을 거예요. 변태가 막무가내로 한게 분명해요. 맹세해요"
상원이 선서를 하듯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꾸며낸 거짓이 한올도 보이지 않는 그 맑은 눈망울에 그의 아버지는 근심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구나 그 변태놈이 너를... 이럴 줄 알았으면 쫓아가서 경찰에 신고를 하는건데!"
"예? 변태 놈이라고요?"
생각지 못한 단어가 상원의 혼란을 이끌었다.
"그래. 키는 엄청 크고 어두워서 얼굴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허우대 멀쩡한 사내놈이 왜 남의 귀한 집 아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서 변태짓을 해!
빌어먹을 나쁜 자식!!!"
그의 아버지가 그제야 분노를 토해냈다.
"아, 저...저 올라가볼게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원이 의자에서 일어서려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넘어졌다. 그 바람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상원아 괜찮니?"
서재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어머니가 큰 소리가 나자 안으로 달려와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요 어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상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것인지도 몰랐다. 방금 전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들은 정보가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설마 얘한테 손대신거 아니죠?"
"어머니 절대 그런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넘어졌어요"
상원이 놀라서 어머니의 손을 붙들었다.
"얘가 뭐래요? 어제 그거"
밤새 자신의 아들일을 걱정하던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술에 취한 상원을 남편이 데리고들어왔을때만해도 그녀는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늘 순종적이고 조용하던 자신의 아들이 요즘 들어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소한 반항을 하는것을 그녀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아들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했을 때 이정도의 문제는 일으켜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다운 면모라 생각해서였다. 상원을 2층 방에 늬여놓고 남편이 서리 맞은 것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때까지도 그녀는 이 사태에
대해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남편의 입을 통해 들은 얘기는 들으면서도 머리로 정리하기까지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남들과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절대 나쁜것이
아니라고 아들에게 늘 가르쳐왔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길 바랬다. 가뜩이나 이상한 불운에 휩싸여 이런저런 사고를 당하는 아들이 성적인 취향까지
소수에 속한다면 평범한 행복과는 저만큼 떨어질 것 같아 안타가웠다.
"술에 취해서 기억이 없지만 어떤 미친 변태 놈이 지나가다가 그런 것 같다는데 나쁜 녀석, 남의 귀한 집 아들한테 그딴 짓을 하다니"
"여보, 그러면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지 않아요?"
"어제 그놈을 잡아다가 경찰서에 넘겨버렸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요즘 세상에 흉흉하니 이런일도 있네요. 아들이라 걱정 안했더니"
어머니가 상원을 애처로운 눈을 하고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먼저 올라가볼게요"
하얗게 질린 상원이 입을 열었다.
"그래 가서 좀 쉬렴"
"...어제 허락 안 받고 외출한거 진짜 죄송해요. 나중에 벌 받을게요"
비틀거리며 일어서면서 상원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천사처럼 착한 아들을 두고 그가 타락의 길을 걸었으리라 잠시나마
의심했던 그의 부모님은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래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상원은 다시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신의 방과 연결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원의 머릿속을 뛰놀던 거인이 이제는 커다란 대못을 망치로 박아댔다.
방으로 돌아온 상원은 울상이 되어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처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때에는 그는 자신에게 키스를 한 것은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다.
술에 취한 남자를 덮치는 여자 얘기는 들어본 적 없었지만 그래도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남자라니 게다가 키크고 덩치가 좋은? 한술 더 떠 허우대가 멀쩡해?!
자신의 아들을 덮친 변태에게 허우대가 멀쩡하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도저히 무심코 넘길 사실이 아니었다. 정확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셨지만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아버지께 저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 매우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임에 분명했다.
상원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하면서 자신에게 키스를 할 남자는 단 두명 뿐이었다.
조석희와 김이경.
거기에 아무런 기별 없이 자신을 대문 앞에서 기다릴 인간을 추려내면 한 명만 남는다.
"....김이경"
상원은 손가락 끝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한번의 실수는 눈감고 넘어간다 해도 같은 실수가 두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은 본인에게 크나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게 벌써 김이경과 나눈 두번째 키스였다.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자신이 왜 그랬을까 후회해 봐도 어제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초조하게 자책하던 상원은 어제 입었던 코트를 뒤졌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조석희로부터 여러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걸 보니 죄책감이 깊어져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상원은 그대로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고객님의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 문자보면 연락해줘.
상원은 문자를 꾹꾹 눌러 찍어 보냈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생각해보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김이경
역시 핸드폰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으아! 진짜!"
상원은 핸드폰 폴더를 접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하필이면 이럴때 김이경도 핸드폰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어제 벌어진 일을 조석희가 눈치 채고 둘이 이미 크게 싸우고 사고가 생긴 것이라면
"안돼 그럴리 없어"
상원은 다시 단축번호 0번을 눌러 조석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전화가 꺼져있다는 안내 목소리만 들려왔다. 조금 지나자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저녁을 먹으라고 방문을 두드렸다. 머리는 복잡하기만 한데 배는 염치도 없이
꼬르륵 거리며 허기를 알렷다. 자신은 밥 먹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음식을 거부할 주제도 되지 못했다.
상원은 방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조용히 저녁식사를 했다 어머니를 대신해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올라와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조석희의 핸드폰은
꺼져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2층에서 뛰어내려서 석희네 집으로 잠시만 다녀올까. 상원은 발코니 창을 열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제 그렇게 사고를 쳐 놓고 오늘 또 나가버린 다면 자신은 진짜 인간의 자식이 아니라 개의 자식이다.
자신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던 아버지나 하룻밤 사이에 헬쑥해진 어머니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석희야-"
발코니에 서서 상원은 한숨을 쉬듯 그의 목소리를 불러보았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지기 전에 침대 위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상원은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쥐고 번호를 확인했다.
070으로 시작하는 눈에익은 숫자가 화면에 떴다. 상원은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
[선배]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좋은 목소리.
상원은 자신이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만큼 행복했다.
"응 석희야. 지금 어디야?"
[미국이요]
예상했던 대로였다. 조석희가 미국에서 전화를 걸면 항상 뭔가 복잡한 조합의 숫자가 핸드폰 화면에 뜨곤했다. 그가 미국에 갔다는 말을 듣자 상원은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무슨 사고가 생겨 핸드폰이 꺼진 것은 아닐테니.
[거기 지금 저녁인가? 아, 잠시만]
핸드폰 너머에서 유창한 영어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조석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원은 사모하는 가수의 노래를 감상하는 여고생이 된 기분으로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 됐어요]
"너 가방이 없어?"
어는정도 간단한 회화는 알아듣는 상원이 전화기 너머의 대화를 듣고 물었다.
[first class는 짐이 다른 곳에서 나온 다고 하네요 이 항공사는 처음이라 몰랐어요. 찾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first class는 비싸지 않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던 상원에게 전용 제트기를 타고 움직이는 것보다 덜 비싸다는 대답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조석희였다.
그의 경제관념은 감히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미국에 갔어?"
[일이 좀 생겨서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상원은 입을 다물었다. 조석희는 서너달에 한번쯤 미국에 갔다 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미국을 다녀온지가 이주가 안되었다. 즉, 이번 것은
일상적인 방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괜히 이것저것 물었다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면 안된다고 자신을 추슬렀다.
궁금함에 입술이 실룩실룩 움직이는 이 꼴을 전화기 너머 상대가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 안 궁금해요?]
"...궁금해"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조석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공기가 약간 흔들리는듯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별일 아니에요 누가 좀 죽어서요]
상원은 잠시 자신이 들은 말을 사전적 의미 그대로 해석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조석희는 가끔 단어를 잘못 사용할 때가 있었다.

상원은 그때마다 저 이상한 쓰임을 고쳐줘야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석희가 단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사용했다는것보다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다는 가설이 더 현실성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친척 어른 중에 한분이 돌아가셨다고요]
초여름에 밭에서 막 뽑아 차가운 개울물로 닦은 야채처럼 산뜻한 어조로 조석희가 대꾸했다.
....얘야 넌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는거니.
"그..큰일 아니야?"
[큰일은요 어차피 나이 차면 죽는거지]
"그, 그래도 고인되신 분이 좋은 곳 가셨길 빈다"
상원이 자세를 바로 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석희야"
[아니, 아니요, 그말 할때 선배 표정이 눈앞에 선하다 싶어서요.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요. 정말 오래 살다 가신 거니까. 본인도 ok하셨을 거야]
"......"
상원은 이 인간에게 보통 사람의 감성을 갖게 하는 것은 영불가능하겠구나 싶었다.
[선배랑 같이 왔으면 좋았겠지만, 선배 아직 외출 금지?]
"응 그렇지 뭐"
[별다른 일은 없어요?]
"응. 별다른 일......없어"
상원은 대답해놓고도 속이 뜨금해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제 돌아오는거야?"
[글쎄요 한 이삼일쯤 걸리지 않을까. 그렇게 복잡한 일은 아닌데 이런 일은 변호사만으로도 처리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응 그래"
그 부분이 뭔지 몰라도 상원은 자신과는 평생 관련이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보고싶어]
"....!"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상원의 얼굴이 단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빨리 갈게 선배]
"....응"
[그동안 외출금지 풀어놓건, 뭐든 해놓으라고]
"알았어 응 그럴게"
뭐든할게 석희야. 정말 뭐든 할게.
[선물은 또 초콜릿 사다줘요?]
상원은 조석희가 초콜릿 -정확히는 촤콸릿- 이라고 발음하는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응 그거면 돼"
두 사람이 사귀고 난 후 조석희가 처음 미국에 가게 되었을때 무슨 선물 받고 싶냐고 묻자 상원은 별다른 생각없이 미국이니까 미국 초콜릿? 이라고 대답했다.
조석희는 그때 한참을 웃었던 것 같다. 상원은 자신의 대답이 그렇게 웃긴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직도 그 이유는 찾아내지 못했다.
[알겠어요 사다줄게요 기다려요]
"응 그럼 언제 인천 도착하는지 나중에 알려줘"
[문자로 보낼게 선배]
상원은 너무나도 달콤한 통화를 마치고 한참을 침대에서 말없이 버둥거렸다.
"헉 이럴때가 아니지"
상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김이경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좋을 때일수록 불행한 일들을 말끔하게 정리해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그 불행이 흙발로 찾아와 행운까지 짓밟아버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상대방 핸드폰에 신호가 갔다.
[어? 선배?]
전화기 너머에서 예상치 못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이경! 너!"
[무슨 일, 아 , 잠시만요]
상원은 이번에도 아까와 비슷한 대화가 흘러나오는것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조석희만큼 자연스러운 네이티브 발음은 아니었지만 제법 유창한 영어였다.
[선배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너도 혹시 짐을 못 찾아서 물어본거야?"
[아 예. 여기는 fist class짐이 나오는 곳이 따로 있다고 하네요 원래 타고 다니는 항공사가 있는데 시간이 안맞아서요]
"거기 미국?"
[와 어떻게 아셨어요? 선배 저한테 관심 많으신가봐요]
상원은 조석희가 본인도 ok하시며 돌아가셨을것이라고 했던 친척어른이 김이경과도 무슨 연관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언제 오는데"
[한 삼사일 걸리나]
"...."
그나마 다행이었다. 올 때는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겠구나.
[저기 조석희 보인다. 저 자식 비행기 안에서 내내 눈도 안 마주치던데 선배한테 전화왔다고 말하면 쳐다보려나, 조,,,!"
"안돼!!"
상원은 큰소리로 소릴 질렸다.
"안돼 하지마 석희 부르지마 절대 부르지마"
상원이 단호하게 김이경을 뜯어 말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미묘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알았어요 안 부를게요 그런데 선배가 어쩐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하셨어요?]
"너 그날 있었던 일 말하지마, 그러면 나도.....용서해줄테니까"
[무슨 일이요?]
"시치미 떼지마. 너는 대체...하아 ..됐어. 너 귀국하면 얘기하자"
상원은 얼굴을 맞대고 단호하게 다시 거절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렇게 기계를 사이에 두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선배 지금 저한테 만나자고 하신거에요?]
"할 얘기가 있다는거지, 다른 뜻은 절대로 아니다. 오해하지마"
[하하하, 선배 상관없어요. 아무튼 그럼 한국에서 뵙죠. 선배 전화세 많이 나와요]
상원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 국제전화를 사용하고 있다는사실을 떠올렸다. 핸드폰을 로밍해 가서 아무렇지 않게 한국에서처럼 사용하는 누군가와는 사정이
다른 상원은 그럼 나중에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후우"
핸드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상원은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일단은 며칠간은 차분하게 집에서 근신하면서 머리를 식히는게 우선이었다.
할수 없는 일에 관해서 고민해봐야 자신만 손해일테니.
상원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별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하지 말아달라고.
열어놓은 발코니 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넘실거리며 들어와 그의 발끝을 간질였다.








상원은 핸드폰의 시계와 전광판에 떠있는 도착시간을 번갈아 확인하며 목을 길게 뺐다. 조석희가 문자로 알려준 대로라면 비행기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여간해서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 둘다 썩 마땅치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나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일주일을 채운것은 아니지만 며칠 간 집안일을
도우며 근신을 한 덕분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대학에 무사합격을 한 것일테지만,
상원은 다시한번 전광판을 바라보며 비행기 도착여부를 확인했다. 조석희가 타고 온다고 했던 편명 옆에 도착, 이라는 반가운 두 글자가 보였다.
그 글자만으로도 상원은 가슴이 설렜다. 삼사십분만 기다리면 그를 볼 수 있었다.
역시 바로 문자가 도착했다. 비행기가 계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기를 켜서 보낸 모양이다.
[어디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어요]
조석희답지 않은 문자였다
어디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으라니? 금방 갈테니까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가 아니고?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깝다고 공황에서 집으로 가는 리무진까지 대기시켜놓는 인간이?
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철이 든 것은 아닐테고, 에라 모르겠다. 커피가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니 상원은 그냥 그자리에 서서 조석희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한 시간 넘도록 기다려 허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끝내주게 멋진 조석희가 출국장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원은 콧노래를 부르며 출국장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한두 사람씩 캐리어를 밀고 문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바륵바륵 웃고 있던 상원의 눈에 양복차림을 하고 검은색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김이경의 모습이 들어온 순간 그의 미소는 그대로 이지러지고 말았다.
"어? 상원선배?"
김이경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물론 상원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너, 너가 왠일이야?"
"선배야말로 여긴 웬일이에요, 저 마중 나오셨어요?"
"아니 절대 아니"
상원이 민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해의 싹은 밑동부터 잘라 버리는것이 지금 상황에선 옳았다.
"흐음 그럼 누구 마중 나왔으려나"
"....."
"내 옆에서 나하고 눈도 안 마주치던 그 녀석인가?"
"...넌 왜 이거 타고 온거야, 다른 비행기도 많은데"
"이게 한국으로 오는 가장 빠른 항공편이었거든요. 서비스는 별로지만, 아 그래서 조석희가 이걸 탔구나"
김이경이 살랑거리며 눈웃음을 쳤다. 예전 같았으면 아 이녀석인상 정말 좋구나 했겠지만 상원은 더 이상 그의 가식에 속지 않았다.
"너 이리 좀 와봐"
"왜요? 석희기다리는거 아니었어요?"
"잠깐 할 얘기가...."
상원은 잠시 열려진 문틈 사이로 조석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멀리서 그가 세관을 통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빨리 와 빨리"
상원이 김이경의 팔을 붙들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는 김이경은 즐거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일인데요 선배"
상원은 주변을 둘러보고 재빨리 말문을 열었다.
"너 그날 있었던 일, 절대 석희한테 말하지마"
"네? 무슨일이요"
"그날 했던거"
"뭘 해요?"
김이경이 반지레하게 웃으며 물었다. 안경 유리에 빛이 반사되어 도저히 그의 눈빛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우리 집앞에서 ......키스한거"
".....?"
웃고 있던 입가가 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눈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너가 억지로 했잖아. 분명...난 절대 너하고 키스 같은거 안해. 맨정신으로 절대. 죽어도"
"우와, 선배 그거 진짜 상대한테 엄청 상처되는 말인거 알아요?"
"알아. 하지만 학실한게 서로를 위해 낫잖아. 나도 잊을게 피차 좋은 일도 아니니까"
상원이 단호하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김이경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요? 왜 피차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표정이었다.
"...나 너 안 좋아해"
"알아요 왜 그걸 굳이 와서 또 말해주는지 모르겠지만"
"....."
상원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김이경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원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국제전화로 전화까지 걸어서 일부러 가장 빠른 항공편을 택해
한국으로 돌아왔건만 오자마자 듣는 소리가 이거라니. 게다가 하지도 않은 키스로 나쁜 놈 취급을 받는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이 손해였다.
"좋아요 말 안할게요"
"진짜지?"
"네. 대신 선배도 제 소원하나 들어주세요"
상원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진다. 그러나 김이경은 심술을 거둘 생각이없었다. 어차피 나쁜 놈으로 찍힌 이 마당에 관용의 미덕 따윈 개나 줘버리라지.
"이상한 소원은 안돼"
"그런거 아니에요"
"뭔데"
"학교에서 절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예전처럼이라니?"
"후배처럼 대해달라고요. 미술실에서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하고"
미술실에서의 일, 은 상원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남에게 그런 식으로 독한 말을 퍼붓고 손을 휘두른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상원은 자신이 똑같이 행동할 것임을 알고 있기에 뒤에도 그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물론 때린 것은 미안하다는 사과는 했지만,
"선배가 저 후배로 안 보신다고 했잖아요. 그거 취소해요"
"...후배로 보면 되는거지?"
"네. 후배"
상원은 김이경이 말하는 저 후배라는 호칭이 대체 어떤 저의를 품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일단 지금은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알겠어 그렇게 하자"
"좋아요 그럼 나중에 뵙죠 선배"
김이경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상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 문제는 이렇게 일단락 되는....
"...!!"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아 저기, 이 이경이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
"백 년 만에 만나도 그놈하곤 인사하지마"
"응 미안해"
그 재수없는 김이경과 같은 비행기를 타서 상원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커피나 마시면서 기다리라고 한건데 자신이 짐을 찾는 사이에 두사람은 이미 마주친 모양이었다.
"내 전화는 왜 안받고"
"미안해 전화온지 몰랐어"
상원이 울상이 되었다.
조석희는 쳇 하고 쓰게 혀를 찼다 오랜만에 만난 상원의 이런 표정을 보고 싶었던게 아니었다.
"선배 나 보고 싶었어?"
미국에서 통화를 하면서도 무던히 듣던 말이었다.
"응...너무 보고 싶었어"
상투적인 물음 한마디에도 상원은 날것 그대로의 진심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온몸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애정을 드러냈다. 몇 번을 확인해도 질리지 않는 애정이었다.
조석희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상원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잡아당겨 상원에게 입을 맞추었다. 공황에 있던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두사람에게 쏠렸다. 자신이야 상관없었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상원을 위해 머플러로 그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머플러 사이로 보이는 뺨이 향긋하게 무르익어 있었다. 키스를 멈추고 다시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어 주자 상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라니 떨렸다. 조석희가 거기에도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
"가려줬잖아요"
조석희가 들고 있던 머플러를 살짝 흔들며 대꾸했다. 하지만 상원의 새빨개진 얼굴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선배"
"...응"
조석희가 상원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조석희의 품에 푹 안겨져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주변의 술렁이는 소리만 들어도 상원은 등 뒤의 따가운 시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되었다.
"석희야...차타면...."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조석희가 상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한 피로가 그대로 몰려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상원은 조심조심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조석희는 한참을 그대로 상원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러 들어간 조석희를 상원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캐리어 가방을 정리하고 나서 거실에
있던 상원에게 목례를 하고 나갔다.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간 이 집에 드나들면서 일을 하는 아주머니와 얼굴을 마주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처음에 상원은 아주머니가 말을 아예 못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아주머니가 냉장고에 갈비를 재워두었으니 불에 올려서 익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그에게 했을때,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책을 놓칠뻔했다.
"뭘 또 90도로 인사를 해요"
'어?"
샤워를 마쳤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조석희가 거실로 나왔다. 브리프 한장만 입고도 그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상원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감기걸려 옷 입어"
"이 정도로 감기 안걸려요"
조석희가 소파에 앉았다. 상원은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잡지를 읽는척했다. 페이지를 넘기고 있지만 저쪽에 앉아 있는 조석희가 신경쓰여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상원은 아까부터 언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어떻게 애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일단 김이경의 실수를 막아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평생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그러나 상대를 기만하는 것을 상원은 체질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말을 해야 하긴 하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
"선배"
"으응?"
그가 자신의 옆을 탁탁 손으로 두드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상원은 잡지를 테이블위에 내려놓고 그 옆으로 가 앉았다. 조석희가 상원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고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에서 주식시세와 이달의 증권에 관한 정보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조석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심둥한 어조로 말했다.
"선배가 돈이 있으면 종목을 추천해주겠는데"
"종목?"
"주식이요"
"주식 같은거 하면 안돼.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잖아"
상원이 절곡한 눈으로 대답했다. 잠시 표정이 굳어 있던 조석희가 큭큭 거리며 그렇죠, 한다.
"패가망신하죠 맞아요 패가망신"
"...진짜야 우리 아버지 친구 분들 중에 주식 때문에 망하신 분들 꽤 계셔"
"그래 맞아. 그러니까 선배는 그렇게 위험한 주식은 하지마"
"응 하지 말아야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상원을 보며 조석희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친척 어르신의 사망으로 인해 외가 쪽 기업의 지분 문제가 조금
복잡해졌다.  그것 때문에 주주총회가 열리고 이런저런 모임에 불려가게 되었는데 그때 스치듯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한국의 모 기업을 합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해당기업의 주식이 30%이상 오를텐데 자신이야 이 이상 재산을 불릴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하지만 상원에게 귀띔이라도 해줄까 했던 건데,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니.
"선배 부모님 한번 뵙고 싶네요"
"우리부모님? 인사드리려고? .....음 후배라고 소개시켜드려야 하나? 갑자기 말씀드리면 놀라실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상원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또 너무 앞서가는군"
"응?"
"그렇게 본다는게 아니라 그냥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고, 대체 어떤 환경이면 선배같은 인간이 생길 수 잇는건지"
"나? 내가 왜?....이상해?"
"이상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민망함에 상원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좀 이상한가 하하"
"귀여워"
목덜미를 문지르던 손이 우뚝 멈췄다. 상원이 고개를 푹 숙였지만 붉어진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조석희가 그런 상원의 귀에 대고 몇번 더 귀여워, 귀여워 선배. 라고 말했다.
심장이 터져 버릴것 같아서 상원은 눈을 질근 감았다. 귓볼에 스칠 듯이 움직이던 조석희의 입술이 뒤로 물러갔다.  
"선배 선물 맘에 들어요?"
"...어?..응 맘에 들어"
사실 선물을 받긴 했지만 상원은 뜯어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였다. 굳이 포장을 뜯지 않아도 케이스의 모양이나 달콤한 냄새만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였다
"뜯어보지도 않고?"
"집에 가서 뜯어보려고 했어"
"보지도 않고 마음에 든다고요?"
"응 네가 준거면"
가끔 이런 식으로 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키스 한번에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얼굴을 붉히는 주제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조석희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뜯어봐요 먹어봐"
"알았어 같이 먹자"
상원이 초콜릿 박스를 싸고 있던 고급스런 금색 포장지를 뜯어냈다. 상원이 하나를 집어 조석희에게 먼저 준 다음 다른 하나를 꺼내 자신의 입에 넣었다. 무엇을 먹든 그는 자신이 먼저
먹는 법이 없었다.
"선배는 그런데 왜 매번 선물이 초콜릿이야?"
조석희가 초콜릿을  끝을 깨물어 먹으며 물었다. 갖고 싶은 선물이 없냐고 묻자 상원이 미국 초콜릿이라는 대답을 해서 정말,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음, 아버지가 출장 가셨다 오시면 항상 나는 초콜릿을 사다주셨거든. 내가 어릴때부터 초콜릿을 좋아해서, 어머니는 향수를 사다주시고"
어머니는 향수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향수를 사다주시면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향수를 늘 보석처럼 조심스레 다루며  소중히
보관했지만  한번도 사용하지는 안으셨다.
상원은 그것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같아서는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을것도 같았다.
조석희가 주는 선물은 모두 소중했다.  너무나 소중해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자체가 상원에겐 선물이었다.
"초콜릿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그래"
"좋아 죽겠다는 표정"
"안 그랬어 내가 언제...."
"그랬어요 난 그 표정에 익숙하거든"
조석희가 상원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자신의 무릎에 앉히며 말을 이었다.
"항상 선배는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잖아"
"...."
상원은 등 뒤로 느껴지는 조석희의 맨살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선배는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나거든요... 음 특히 여기"
조석희가 상원의 목덜미에 코를 댔다. 축축한 호흡이 머리카락과 엉겨붙어 민감한 목덜미를 간질였다. 아래에 비벼지는 감각까지 더해 상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조석희가 상원의 목덜미를 물고 빨며 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더듬었다.
"여기 꼿꼿하게 섰어요"
힘을 받아 모양이 또렷해진 작은 돌기를 손톱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한다. 상원은 점점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릎에 앉히며 희롱당하는 것은 또 다른 수치심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 먹어봐도 돼요?"
일부러 묻는다.
상원이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옷 올려봐요 선배가...응 그렇게"
상원은 그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옷을 걷어 움켜쥐엇다. 조석희가 상원의 몸을 들어 자신과 마주보게 만든다음 그의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할짝거리다가 이빨로 질근질근 깨물었다.
신음소리를 내는것을 참으려 했지만 목 안쪽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원은 그런 소리를 내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왜 그래요"
"....."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상원이 대답하지 않자 조석희는 다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일부러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았댔다.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쪽 가슴에만 집중되는 자극을 상원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간신히
참아냈다. 조석희가 손가락 끝으로 다른 쪽 가슴돌기를 슬근슬근 문질렀다. 피부에 어린 열기를 그 정도의 손길로는 풀어낼 수가 없었다.
"..석희야"
"왜요 선배"
애를 태우려는듯 일부러 무심하게 묻는다. 상원은 자신의 입으로 다른쪽 유두를 만져달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해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조석희는 어울리지도 않는 배려심을 발휘해 끈질기게 이유를 물었다.
"제가 만지는게 싫어요? 싫어서 그래? 선배?"
"아니, 싫지 않아"
"그럼 왜 그래요 표정이 왜 그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표정에는 다정함의 기색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알면서도 상원은 매번 그 거짓 다정함에 넘어가고 만다.
"좋아서 그래...."
"어디가 좋아요?"
"...네가 만져주는곳"
"제가 어디를 만져줬는데요?"
상원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부근을 가리켰다.
"만져줘서 좋았어요?"
"..."
"아니면 입으로 빨아줘서 좋았어요?"
",,,,입으로 해줘서 좋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입으로 이런 야한 말들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얼굴에 피가 몰려 화끈화끈 했지만 상원은 조석희가 원하는 대답을 모두 들려주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게 상원의 지고지순한 마음이었다.
그것이 설사 음담패설이 된다 할지라도,
조석희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초콜릿 박스에서 초콜릿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상원은 가만히 그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입 벌려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두려움을 갖고도 상원은 착한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 안으로 조석희는 들고 있던 초콜릿과 함께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다물지 말고 가만히 있어"
상원은 눈만 뎅글뎅글 뜨고 겁에 질린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조석희는 기분이 좋아졌다. 무서워하면서도 자신이 시켜면 어김없이 그대로 해주는 상원의 태도에 흠족함을 느낀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초콜릿을 지근지근 녹여 상원의 입 안에 덧발라 주었다. 입이 벌어져 있어 마저 삼키지 못한 침이 상원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석희가 입을 대어 그것을 핥아댔다.
입안에서 꾸덕꾸덕하게 녹은 초콜릿을 조석희는 손가락에 쿠욱 찍어 발랐다.
"허리 좀 들어주세요"
"...?"
상대가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몰라 의아하단 얼굴을 하면서도 상원은 엉거주춤 허리를 들었다. 조석희는 망설임 없이 상원의 바지를 벗기고 다리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 초콜릿을 치덕하고 발랐다.
"서, 석희야!"
아무리 조석희를 사모해 마지않는 상원이라 할지라도 말릴 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초콜릿을 그런곳에 바르다니 하늘과 땅이 뒤바꿔도 용납되지 않을 행위였다.
"하지마 더러워"
"어디가 더러운데"
"...거기"
조석희가 자꾸 손가락을 집어넣으려고 하는통에 상원은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여 피했다.
"그 더러운 곳에 넣고 싸는 저는 뭐예요 그럼"
"그래도.... 하지마, 선물을....그런데다 그러지마"
상원은 조석희의 어깨를 두손으로 붙들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겪어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기본적으로 상원은 조석희의 페니스를 제외한 다른 것을이
뒤로 들어오는 것을 엄청 꺼려했다. 애널 섹스도 처음에는 이상하고 무섭다는 이유로 필사적으로 피하는 것을 조석희는 늘 애 달래는 유치원보모가 된 심정으로 꼬여내 다리를 벌리게 했다.
좀 더 이런저런 일들을 같이 하고 싶은데 상원은 조석희의 기준에서 진도가 너무 느렸다.
"해도 돼요"
"안돼 미국하고 한국은....달라"
상원은 걸핏하면 양국의 문화차이를 주장했다. 물론 조석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논리였다.
"왜 싫어요?"
귀와 뺨에 입을 맞추며 조석희가 물었다. 곤란한 질문을 던져 대답을 하게 만들때, 그가 상원을 달래는 방법이었다.
"....더러워"
"그런식으로 말하면 더럽지 않은게 없지. 선배 내 페니스도 더러워?:
조석희가 팬티위로 불룩하게 솟아 있는 살덩이를 가리키며 묻는다.
"아니..."
"입증해봐요 거짓말 아니라고"
조석희가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댄다. 그러자 제스처의 의미를 바로 파악해버린 상원은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거짓말 한거예요? 선배?"
"아니야.... 그렇지 않아"
조석희가 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거만한 눈동자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상원은 정확히 읽어냈다. 손을 뻗어 그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반쯤 힘을 받은 성기가 튀어 나온다. 상원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것을 입에 물었다.
샤워를 하고 나왔지만 수컷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뻣뻣한 체모가 뺨에 닿을 정도로 무성했다. 상원은 정성스럽게 털을 헤집어 곧추선 남자의 살덩이를 손에 쥐었다. 부드러운 살갖에
이가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혀를 움직여 조석희의 성기를 적셨다.
"...입술 모으고 빨아요 네 목구멍 끝까지 넣어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은 조석희가 희미하게 눈을뜨며 이런저런 음란한 지시를 내렸다.
상대의 서투름이 흥분을 부추겼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상원은 여전히 이런 행위에 어린아이처럼 서툴렀다.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상원의 얼굴은 유난히 어려보인다. 조석희는 손을 뻗어 상원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상원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 정도의 손길로도 느끼는 것이다. 남자들이 꿈꾸는 여자의 상이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창부라고 하던가. 성직자처럼 고결하고 단정한 얼굴을 한 상원이 창부처럼 다리를 벌리고 쾌감에 젖은 교성을 내지르는 모습은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서투른 펠라에도 그는 벌써 입안이 마를 정도로 욕망을 느꼈다.
"선배...."
흥분에 들뜬 목소리.
상원이 고개를 들었다. 조석희의 내리감은 눈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돈다. 그가 진심으로 흥분했음을 확인한 상원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순간 상대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상원은 행복했다.
그가 상원을 일으켜세웠다. 흘러내린 바지 사이로 보이는 속옷위가 도톰하게 부풀어 올라 있는것을 보고 조석희가 물었다.
"선배도 제 것 입에 물고 무슨 생각하셨어요 이렇게 세우고"
"아니 이건 그냥...."
아까 전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것이라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조석희는 차분하게 상대의 대답에 귀 기울여 듣고 잇을 성격이 아니었다.
"선배가 빨아서 제 좆에도 초콜릿이 묻었네요"
"미안해 닦아 줄게"
상원이 허둥지둥 티슈를 찾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케이스를 찾고 손을 뻗으려던 그는 등 뒤에서 잡아끄는 힘에 의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괜찮아요 어차피 넣을건데"
"뭐?"
"선배 안에서 도달하고 싶어요, 선배 뱃속에 제 자지를 넣고 내장에 흠뻑 싸고 싶어요"
"...석희야"
그냥 하자고 한다디만 해도 응해줄 텐데, 대체 왜 저런 상스러운 말들을 쏟아내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저질스럽고 음란한 말을 지껄이면서도
그는 여전히 귀족과도 같은 고아한 아름다운 눈을 하고 있었다.
저눈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넘어갔을까.
상원은 스스로 조석희의 무릎에 올라가 앉으면서 씁씁한 아픔을 느꼈다. 이런 순간에도 여자처럼 질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상대가 눈치 채지 않길 바랬다.
"좋은 냄새"
밀착된 몸으로 흔들리는 조석희의 웃음소리가 느껴졌다. 그는 상원의 엉덩이 사이에 자신의 성기를 가져다대고 천천히 밀어넣었다. 불룩하게 부푼 귀두 끝이 구멍에 걸쳐져 억지로 몸을 벌렸다.
상원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조석희를 좋아해도 이 순간만큼은 죽어도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천천...히"
"못해... 나 흥분해서 금방 갈 것 같거든"
그말과 동시에 굵직한 살덩이가 안으로 무지막지한 기세로 쑤셔넣어진다. 갑작스런 삽입에 상원의 입술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넣기만 했는데...머리끝까지 저릿해. 선배 안 엄청 축축하고 조여요"
조석희가 상원을 끌어안고 조요한 목소리로 감상을 들려주었다.
"무슨 맛이에요?"
"...어?"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상원이 얼뜬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선배 아래로 초콜릿 먹고 있잖아. 맛있냐고 묻고 있는거예요"
조석희가 허리를 움직였다. 상원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입술이 겹쳐졌다. 두툼한 혀가 상원의얇은 입술 여기저기 핥았다.
"나는 선배 맛있는데....하아 갈 것 같아"
그가 달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허리를 짧게 연달아 올렸다. 아래부터 달콤하게 마비되는 그 감각에 상원이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조석희가 몇번이나
갈 것 같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해도 그는 절대로 쉽게 끝내지 않음을 상원은 수 많은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응...하아...아..아, 응 흣"
허리가 흔들리면서 상원의 신음소리도 이러저리 흔들렸다. 조석희는 꼿꼿하게 선 상원의 유두를 이빨로 잘근잘근 씹었다. 아프다고 울먹이며 말했지만 그는 나폭하게
상원의 엉덩이를 움켜쥘 뿐이었다.
"아파...응 . 아흣.. 윽 읏..."
"그래도 좋죠?"
"하...아"
"빨리 그래도 좋다고 말해요...빨리"
조급하게 재촉하는 목소리에 상원은 돌기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대답했다.
"좋아...하아..좋아"
"선배 애널 초콜릿 맛있게 먹는데요. 개걸스럽게 벌름거리면서"
초콜릿이 쿠퍼액과 뒤섞여 질척거리는 음란한 소리를 냈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상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게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그럼 뭐가 맛있는건데 응?"
다정한 목소리.
땀에 젖은 손바닥이 상원의 등을 쓸어내리자 오싹한 욕막이 전해졌다.
덫이었다.
상원은 먹이에 독이 들어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베어 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다.
안을 빠듯하게 누르고 있는 성기의 크기를 봐서 이미 상대가 흥분할 대로 흥분해 있다는 것이 뻔한데 그의 얼굴은 차분하기만 하다. 욕망을 저렇게 까지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같은 남자로서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욕망의 끝이 어디에 다다를지 알기에 상원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니가 맛있어"
조석희의 시원한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하지만 만족스럽단 표정은 짓지 않았다. 상원은 그가 자신이 기다리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집요하고 음흉하게 자신을 괴롭힐 것임을 알고 있었다.
"네가...네 흥분한 자지..."
조석희가 천천히 허벅지에 힘을 주어 허리를 들어올렸다. 살갗이 부딪힐 때마다 몸 전체에 전해지는 열기에 상원은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하아...좋아.... 해줘"
"you need to explain it in the concrete" (구체적으로 말해봐)
영어가 이렇게 섹시한 언어라는 생각은 전에 해본적이 없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혀가 굴리며 만들어 내는 음성이 달팽이관을 지나 뇌로 전달되며 몸 전체에 달콤한 소리를 퍼지게 해주었다.
상원은 약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한 눈을 하고 천박한 말을 내뱉었다.
",...안에 해줘, 내 안에 뜨거운 정액을... 잔뜩 싸줘.... 제발"
조석희가 그제야 만족스런 포식자의 얼굴을 하고 상원의 몸을 바싹 끌어 안았다. 남자의 욕망을 다스릴 이유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상원은 아래가 찢어질 듯이 거칠게 거듭되는 추삽질에 직전까지 발휘된 상대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해야 했다.
조석희는 자신을 그렇게 자유로이 놓아버렸다.

















배부근에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와 닿는 느낌에 눈이 떠졌다.  따끈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상원의 몸을 닦아주고 있던 조석희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할게"
설득력없는 목소리였다. 상원은 목에 손을 대고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찮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거니까. "
그렇게 말하고 조석희는 상원의 배는 물론이고 다리사이 그리고 아래까지 꼼꼼이 닦아주었다. 누워서 고스란히 몸을 닦이는 처지에 놓인 상원은 민망함에 베게에 고개를 묻었다.
차라리 다 닦이고 난 다음에 눈을 뜰걸.
"아....!"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놀란 상원이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제가 안에 잔뜩 싸 놓아서.,... 나오네요"
안에서 손가락이 돌아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몸안에 있던 정액이 조석희의 손가락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방울져 나오는 정액이 시트를 적셨다.
"시트...더러워져"
"어차피 세탁할 건데 뭐"
"...."
이 시트를 세탁해주실 분과 가끔 얼굴을 마주치게 될텐데....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지 상원은 벌써부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만 빼"
아직도 안에서 휘저어지고 있는 손가락 때문에 상원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남으면 선배 고생하잖아요, 아, 다 나왔다"
조석희가 수건으로 정액이 흘러나온 상원의 아래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됐다고 몇 번을 뜯어 말렸지만 다시 새수건에 물을 적셔와 다시 말끔하게 마무리해주었다.
"오늘 주무시고 가실거죠?"
"....응"
이 몸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몇 번을 한것인지 세번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얼마간 떨어져 있었다가 보게 되는 날이면 조석희는 이렇게 지쳐 혼절을 할때까지 자신을
안았다. 상원은 그래서 일부러 오늘 집에서 나올 때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말을 하고 나왔다.
조석희가 상원의 옆에 몸을 모로 세워 누웠다.
"잘 됐군요, 오늘 잠은 푹 잘수 있겠네"
거의 며칠간 두 시간도 채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수면욕이 먼저였겠지만 조석희는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상원을 본 순간 성욕이 한계치까지 치솟아 버리고 만 것이다.
땀에 젖은 상원의 몸에서 그가 좋아하는 체향이 났다.
조석희는 상원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이거 없이 지내온 과거의 시간들은 이젠 기억의 어떤 곳에도 자리 잡지 못할 것 같았다.
"석희야 있잖아...."
말랑말랑한 수면의 부근에서 조석희가 응 하고 대답했다.
"나 허락 받았어"
"....응"
"....그러니까 언제부터 들어와야 하는지 알려줘"
"응... ...... 잠깐, 뭐라고요?"
조석희가 눈을 떴다. 혼곤하게 흐려지던 의식이 명확한 사고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기 언제부터 들어와도 되는지...입학 전날에 들어오는게 나으려나?"
어렵게 받은 허락이었다. 처음에 부모님께 나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을때 두분 다 펄쩍 뛰셨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너의 특별한 사정도 있기 때문에 절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 두분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상원은 차분하게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못난 자식을 믿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앞으로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고, 여기까지는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이 합격한 학교는 전국에서 내노라는 수재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니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다, 후배의 집이 학교 근처에 있는데
물론 이 후배도 서울대 경영대에 합격한 학생이다. 통학하는 시간도 줄여 공부에 몰두하고 부모님께 폐 끼치는 것도 줄일겸-- 여기서는 양심의 가책을 마구 느꼈다-- 나가서 살겠다.
그리고 혹시 그 변태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으니 --양심의 가책이 절정에 이르렀다.--- 집에서 당분간이라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내고 싶다.
상원의 설명을 들은 그의 부모님은 의논을 해보겠다는 대답을 한 후 그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다음날 아버지가 그럼 한 학기 동안은 밖에서 생활해 보라는 허락을 해주신 것이다.
"일단 한 학기동안만 허락받은 건데 그 후의 일은 어떻게든 되겠지"
상원의 말을 듣고 있던 조석희가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상원은 불안해졌다. 혹시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가 싶어 얼굴이 하얗게 질려 그는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저기...불편하면 말해, 나 안들어와도 돼. 너희 집에서 학교가 더 가깝긴 하지만, 우리 집에서도 그리 먼 것은 아니고 ... 나 생각보다 방 어지럽히니까...아무튼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
상원은 으스러질 듯 강하게 껴안는 힘에 숨을 들이켰다.
"선배...내일 아니 오늘 들어와"
"뭐? 안돼. 나 짐도 아직..... 너도 빈방 정리 안 해놨잖아"
"해놨어요"
"뭐?"
"선배 방 두개 비워놨어요. 마음에 드는 걸로, 아니 두개다 쓰셔도 돼요"
"...석희야"
상원의 눈에 상대에 대한 연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자신을 위해 빈 방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발언이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든 것이다.
조석희가 상원의 정수리에 키스를 해주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에 상원은 눈물이......
"선배"
"응"
"집에서 쫓겨나신 거죠"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아니"
아, 그래요? 하고 되묻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어쩐지 아쉬워 하는 눈치였다.
"....내가 쫓겨났으면 좋겠어?"
"네"
"...."
이제는 그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귀찮은 거구나.
"저는 선배가 기댈 곳이 저밖에 없었으면 좋겠어요"
조석희가 솔직하게 자신의 독점욕을 드러냈다.
"선배가 제 집이 아니면 갈 곳이 없고, 저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나 한테만 웃고 나하고만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가족이고 뭐고 나만 봤으면 좋겠다고 선배.
그러니까 다른 연놈한테 한눈 팔지마. 누구든 선배한테 손대면 그 손을 잘라버릴거야. 이건 내거니까"
섬뜩하게 이어지는 집착어린 고백에 상원은 술김에 저지른 실수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겠다고 아주 잠시라도 생각했던 자신의 멱살을 짤짤 흔들어 주고 싶었다.
"그 손을 잘라서 박제로 만든 다음 선배 방에 걸어줄거야. 매일매일 그 밑에서 섹스할 거라고 알겠지?"
"...."
김이경의 손 밑에서 섹스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오싹한 생각에 상원은 굳게 다짐했다.
이 비밀은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고.
늘 생각하지만 끝내주게 잘 생긴 조석희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리고 달콤 쌉싸래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럼 짐은 다 간거니?"
"예 옷이랑 책만 옮기는 건데요 뭘"
자신이 들어간다고 얘기한 다음 날 빈방에 가구까지 채워넣은 집주인의  용의주도함에 상원은 결국 두손을 들게 되었다. 입학전에 들어와 새집에 익숙해지라는 것이
집주인의 친절한 제안이었다.
"정말 집세는 안 내도 되는거야? 아무리 친해도 집세는 줘야 하는거 아니니?"
"음 그러게요"
집세를 내겠다고 말해보았지만 조석희는 코웃음을 쳤다. 그까짓 푼돈을 받아서 뭐해, 라는 말을 굳이 돌려서 얘기하는 예의도 갖추지 못한 인간이 조석희였다.
"그 후배는 뭐하는 학생인데 그 큰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거니?"
"부모님이 외국에 계셔서 혼자 지내는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집이 원래 조석희가 혼자 지낼 목적으로 구한 집이란 사실만 제외하면.
"학생 혼자서 고생이 많겠다. 엄마가 반찬 좀 해서 일주일에 한번씩 가져다 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거기 일하는 분이 계셔서 반찬 같은건 다 해주신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괜찮겠어?"
다 큰 아들 보내면서도 어머니는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상원은 웃으며 괜찮다고 몇 번이나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마지막 옷 짐을 싣고 상원은 부모님께 인사드렸다.
"주말에 올게요"
"전화 자주하고 ,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상원이가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걱정되잖아요"
"전화 드릴게요 가서도 바로 전화드릴게요"
상원은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문제를 일으키는 성격은 아니어도 문제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체질이니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요즘은 그나마 넘어지고 다치는 일은 예전보다 덜 했지만 사고의 발생빈도가 범인보다 훨씬 높은 것은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상원은 웃는 얼굴로 자신의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저 가볼게요, 짐 정리 좀 하고 연락드릴게요"
상원이 이사 날짜를 미루지 못하도록 이사차까지 수배해 보낸 조석희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현관앞에서 자신을 배웅하는 부모님께 또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상원은 차에 올라탔다.
집에서 나와 다른 사람과 살아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상원은 멀어지는 자신의 집을 뒤돌아보며 묘한 감상에 젖었다.
어쩐지 부모님을 속이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어디쯤이에요 빨리 오세요]
그러나 조석희로부터 온 한통의 문자가 우울한 기분을 희석시켜 주었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불초 소자는 이 문자 한통을 연달아 세번을 읽고 또 읽을 만큼 얘가 좋습니다.
상원은 지금 가고 있다고 조석희에게 답문을 보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상원은 운명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눈만 마주쳐도 하루가 행복하던 짝사랑 상대와 동거라니.
자신처럼 운이 없는 인간에게 다시 오지 않을 행운이었다. 상원은 손바닥으로 뺨을 철썩 치며, 소중한 행운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생각보다 짐이 없네요"
"응 가구도 별 필요 없고 책하고 옷만 있으면 되는데 뭐"
상원이 가져온 짐을 조석희는 심상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석연찮은 태도였다.
"이 중에서 선배가 제일 아끼는 물건이 뭐예요?"
"뭐?"
"가장 아끼는 물건이 뭐냐고요"
대화라는 것은 흐름이 있다. 던져지는 말에는 숨겨진 이면이 있어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거나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이 대화이다.
지금 상원은 자신이 지난 대화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고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끼는 물건?"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차원에서 되물었다.
"네"
조석희가 상원의 짐을 살피며 대답했다.
"글쎄 이건가?"
상원이 몇 개 챙겨온 CD중 하나를 꺼내며 대답했다.
"좋아하는 가수에요?"
조석희가 CD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CD한장이 상원에게는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고 하니 궁금증이 동한 것이다.
"응 좋아해. 그거 싸인 받은거야. 콘서트 갔다가 운이 좋아서 싸인CD받은 거야."
상원은 그날의 행운을 잊지 못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간 것도 기분이 좋았는데 좌석번호가 행운권에 당첨되어서 싸인 CD까지 받았으니 주변에 종종
자랑을 늘어놓을 정도로 운이 좋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조석희는 마뜩찮은 눈을 하고 CD케이스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가사집을 꺼냈다.
"잘 생겼어요?"
"잘생겨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노래가 좋으니까 좋은거야"
"다른 놈이잖아. 저번거랑,이건 누구예요"
"루시드 폴, 노래 좋아 한번 들어봐"
"귀찮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조석희는 CD를 돌려주지 않았다. 짐을 정리하면서도 상원은 그가 언제  CD를 돌려줄까 기다렸지만 그는 끝까지 그걸 들고 있었다.
"그거 여기 넣어둬야 하는데"
책 정리까지 마친 상원이 돌아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조석희가 손에 들고 있던 CD를 들어 보이며 이거요? 하고 묻는다.
상원이 손을 내밀었다.
"아 , 이거 저 빌려주세요"
"응? 아까 안 듣는다고 하지 않았어?"
"예"
"...그런데 왜 빌려가?"
조석희가 소리없이 웃었다.
아름답고 사악한 옆모습을 보던 상원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 인질로 잡혔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만에 하나 자신이 집을 나가기라도 하면  CD는
다시 볼 수 없겠구나. 미안하다 싸인CD야. 내 생각이 짧았다.
"배고프시죠? 밥 먹고 섹스할까요? 아니면 섹스하고 밥 드실래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던져진 질문에 상원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냥.... 그거 밥만 먹으면 안 되는거야?"
아직 해가 지지도 않은 초저녁이었다. 아직 짐정리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몸을 겹치게 되면 오늘 하루는 날려버리게 되는 셈이었다.
상원의 곤란함을 읽은 것인지 만 것인지 조석희는 그럼 밥 차려놓을게요. 라고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결국 그의 말 어디에서도 오늘 섹스는 건너뛰겠다는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상원은 조그많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단한 하루를 예감했다.











조석희가 잠든 것을 확인한 상원은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 맡에서 그의 숨결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지만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거실로 걸어 나오긴 했는데 혹시라도 조석희가 잠에서 깰까봐 불은 켜지 못했다. 상원은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초저녁부터 격렬한 섹스를 했던 터라 도중에 잠이 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이 반이나 남아있었다. 성격상 일을 하다 끝마치지 못하면
신경이 쓰여 다른일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이사 첫날이라 평소보다 더 신경이 곧두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맘 같아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짐정리를 싹 마치고 싶었지만 이 새벽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신병자로 낙인찍일게 분명하다 아니, 이전에 조석희를 잠에서
깨우는 짓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조석희는 하루에 5시간 이상 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 그는 하루에 다섯시간을 자는 것도 자신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 기적을 방해하는
인간은 남녀노소 지위를 막론하고 엄청난 분노가 쏟아졌다. 잠을 자게 만들어 주는 상원에게는 대놓고 화를 내지 않았지만 몇 번 실수로 침대에서 움직이다 그의 팔이나
다리를 밟아 잠을 깨웠을때 보였던 눈빛은 ----
"에비-!!"
머릿속에 떠오른 조석희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몰아내며 손을 내저었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석희를 볼때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성격이 저렇게까지
모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함 없이 자랐을 텐데 아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겠지.
뛰어난 두뇌와 운, 외모와 재력을 가졌으니 그래서인지 하나를 좋아하면 여간해선 질리지 않는 자신과는 다르게 그는 뭐든 쉽게 질려했다.
상원은 길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조석희가 끈질기게 동거를 하자고 권유를 해서 같이 살기 시작했지만 과연 이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이런데서 뭐하세요"
"헉!"
갑작스럽게 자신의 목을 끌어안는 손 때문에 놀란 상원이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에서 덜깬 눈을 한 조석희가 그곳에서 불퉁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서, 석희야"
"뭘 그렇게 놀라 이 집에 선배 아니면 나밖에 더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자는 줄 알았어"
조석희는 상원의 뺨을 쓰다듬는 손을 더두지 않았다. 상원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으며 들어가서 자, 하고 말을 이었다.
"선배 근처에 없으면 깊게 잠 못자는거 알면서 그런 소리하네"
그 말은 상원에게 양날의 검 같았다. 조석희가 자신을 필요로 해준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서글펐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의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는데
가끔은 혹시 그것 때문에 사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왜 여기서 혼자 청승을 떨고 있어요?"
"아, 그냥 잠이 안와서"
말을 하는 와중에 조석희가 상원의 눈꺼풀 위에 부드럽게 두어번 입을 맞추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스킨쉽을 해왔다.
상원은 그럴때마다 당혹감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몰라했다.
"불면증?"
"아니 그런건 아니고  그냥 이사 첫날이라 좀 긴장되나봐"
얼굴에 닿아있던 입술이 슬며시 웃는게 느껴졌다.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 밑으로 손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재워드릴께요"
"응?"
어떻게 재워줄 것인지 묻기도 전에 조석희는 상원을 소파에서 번쩍 들어올렸다. 공중에 들어올려지며 상원은 소긍로 혀를 찼다. 체격차가 있다고 해도 자신의 키가 180에
가까운 남자인데 그런 몸을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안아 올린 상대에게 감탄했다.
조석희는 상원을 안고 침실로 들어와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시트를 끌어 상원의 몸에 덮어주고는 자신도 그 옆에 모로 누워 그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자 이제 자요"
"...."
참으로 무성의한 남자였다.
흔한 자장가도 없고 손으로 토닥여주는 정성을 보이지도 않았다. 상원은 시트 안에서 눈만 뎅글뎅글 뜨고 자신의 옆에 누운 남자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유려한 선이
시선을 끌었다.
"잠 안와요?"
"...응"
"...나는 졸린데"
그가 상원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상원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조석희의 숨결에 가슴이 떨렸다.
좋겠다. 나는 니 냄새만 맡으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정신이 번쩍 드는데....
혹시 자신의 체향이 자신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하고 손등에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조석희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자요?"
"...."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상원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자는 척을 했다.
"자는 척 하는 거예요?"
"...아니야"
"내 불면증이 옮기라도 했나"
조석희가 상원의 몸을 바싹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목덜미를 만지는 손의 움직임이 다정했다.
"그러면 좋겠다. 그래서 네 불면증이 나으면 좋을텐데"
상원은 저도모르게 불쑥 진심을 입 밖으로 냈다. 조석희가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뭐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너 힘드니까"
"그렇다고 ......됐어요, 불면증 같은게 뭐 좋다고 그걸 옮겨. 선배 같은 사람은 정신병원 신세 지게 될걸"
그렇게 말하는 조석희의 말투가 차가웠다. 상원은 괜한 말을 꺼낸건가 하고 후회되었다. 묘한 침묵이 어둠 속에 머물렀다.
상원은 눈을 감고 어서 잠에 빠지길 기다렸다.
"선배"
"응"
"재미있는 얘기해봐요"
"....."
잠을 재워주겠다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조석희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애초에 재단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떠올리고 상원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무슨 얘기?"
"글쎄 선배가 나 몰래 짝사랑 할때 스토커 하던거?"
"...스토킹 안했는데...."
소심하게 항의해봐도 소용없었다. 조석희는 상원의 어깨에 코를 문지르며 다시한번 나른한 목소리로 졸랐다.
"스토킹하던 얘기나 해봐요"
"별 거 없어"
조석희가 상원을 안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닥치고 애기하라는 의사표현이었다.
상원은 머릿속으로 이제는 먼 옛날같은 지난날의 일을 떠올렸다.










주변을 돌아보자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자신인 귀신 옷으로 갈아입혀지고 학교 뒷산으로 올려보내졌다. 모두 제비를 잘못 뽑아
생긴 불행이었다.
시계도 핸드폰도 챙기지 못했다.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축제 이벤트의 일환으로 담력훈련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학생회 임원들이 그 일을 주관해 집무를 맡게 된 것까지도 괜찮았다. 그러나 귀신 역이 필요하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말이 나왔을때부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상원은 어김없이 끝이 빨간색으로 칠해진 나무젓가락을 뽑아들었다.
오컬트가 자신에게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설명할 기회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뒷산에 세워진 허름한 교사 2층 구석에서 학생들을 기다리게 된 그는 공포감과 긴장, 정신적인 부담으로 인해.....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나고 나니 사방이 새카만 어둠이었다. 아래층에서 같이 귀신역할을 하던 학생회 후배들이 아직 있는 것은 아닌가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허름하고 어두컴컴한 교사를 당장이라도 벗어나 학교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상원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옷 때문에 초여름임에도 한기까지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이성을 잠식한 공포때문에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상원은
차라리 이대로 기절해서 내일 아침에 눈뜨길 기도했다. 움크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청각이 예민해졌다.
상원은 교사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뒤이어 두런두런 이어지는 말소리는 분명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잇음을 확신시켜주었다.
"...!"
상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날이 밝을 때까지 아래로 내려갈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지금 올라오는 사람을 잡아야 했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교태어린 여자의 웃음소리 뒤에 낯익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두사람이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오자 상원은 자신이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음을 확신했다.
계단 앞에 선 상원이 자신이 알고 있는 후배에게 인사를 먼저 해야 할지 상황 설명을 먼저 해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교사에 울렸다.
상원은 아차 싶었다. 자신의 차림새가 상대편에게 충분히 오해를 살만하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다.
"난...."
상원의 고민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말을 마치기 전에 얼굴을 강타한 충격으로 그대로 바닥에 쓰려졌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아 학교로
내려올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발로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다음 순간 눈을 뜬 것은 학교 양호실 침대였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조석희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선배였어요?"
"...응"
"몰랐네 그냥 앞에 있길래 한대 친 건데  미안하게 됐어요"
진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였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과거의 일까지는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제가 학교까지 옮겨 드렸으니 피장파장이죠"
".....학생회 후배들이 나중에 데리러 왔다고 하던데?"
너무나도 당당한 조석희의 어조에 상원은 잠시 자신의 기억을 의심해야 했다. 그런가요, 하고 조석희가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물에 빠진 왕자를 해안가에서 발견해놓고 자신이
구한 척 하던 이웃나라 공주는 조석희에 비하면 그나마 양심이 있는 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상대를 후려쳐서 기절시켜 놓고 그대로 사라진 주제에 조석희는 지금 피장파장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지금 선배가 가진 좋은 추억인가요?"
"아니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너랑 마주친거라서 잊혀지지는 않아"
대책없을 정도로 긍정적이고 욕심없는 사람이었다.  이상원은.
조석희는 그런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희고 고운 피부는 빛의 입자를 머금은 듯 해사하게 빛났다. 손등으로 상원의 얼굴 언저리를 쓸어내려주며 조석희가 물었다.
"다른건 없어? 좀 좋은거"
"있어. 있다."
상원이 기억이 났는지 약간 홍조 띤 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은 일진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에 넘어져서 인대를 다쳐깁스를 하게 된 것에서부터 시작해 미술 수업을 하던 도중 이젤이 부러져 거의 완성된 그림위로 물통을 쏟았고
열심히 정리해 놓은 필기노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목발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가던 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쉴 수록 복이 달아난다는 옛어른들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이쯤 되니 과연 애초에 달아날 복이 있긴 한건가 싶기도 했다.
게다가 이상하게 오늘따라 머리도 무겁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감기기운이 있는건가.
상원은 계단 중간에 멈추어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이 조심해!"
뭘 조심해야 할지 뒤를 돌아 확인하려 했을때는 이미 늦은 상황.
상원은 갑작스레 자신에게 밀려오는 남학생에게 떠밀려 그대로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려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원에게 부딪혀온 남학생은 계단 난간을 잡아 굴러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다리에 이어 몸까지 박살나겠구나 하며 상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요?"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선배 괜찮아요?"
"....어"

상원은 자신을 잡아 준 손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금의 상황을 파악했다.
"조심하셔야죠"
"고마워"
후배가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인 후, 바닥에 떨어진 상원의 목발을 주워 그에게 돌려주었다. 상원은 목발을 받아들고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안 다쳐서 다행이예요"
마지막으로 던지는 목소리마저 다정했다. 상원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예의바른 후배의 옆에 서 있던 남학생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6반의 상원선배"
"아 6반 이상원"
남자의 시선이 짧게 상원의 얼굴을 스쳤다. 상원의 얼굴은 더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잠시만"
조석희가 손으로 미간을 누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제 기억이 맞다면 선배 잡아준 놈 김이경 아닌가요?"
"응"
"....지금 이딴걸 좋은 추억이라고 말하는 거고?"
"응"
"어디, 어느 부분이?"
"그날 처음으로 네가 내 이름 불러준 거잖아. 이상원 이라고"
상원의 눈이 한치의 거짓도 가식도 없는 순수한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는 조석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어조로
자신을 불렀지만 일단 짝사랑 상대에게 이름이 불려졌다는게 중요했다.
"선배....정말 저 좋아하셨나 봐요"
"당연하지 얼마나 좋아했는데 학교에서 한번이라도 마주치면 하루가 기분 좋았다고 먼발치에서만 봐도 좋았어"
옛일을 회상하는 상원의 목소리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는건 어때요?"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조석희가 묻자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된 상원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좋아"
"그냥 좋기만 해요?"
"꿈같아.....안 믿겨져"
"이게 사실 선배가 다 상상한거고 꿈이라면 어쩔거예요?"
"절대 안깰거야, 이거 꿈이라면 죽을 때까지 잠만 잘래"
농담 섞인 한마디에도 상원은 금세 울상이 되고 말았다. 조석희는 상원의 뺨에 이를 세워 슬쩍 깨물었다. 저렇게 온몸으로 애정을 표출하면서 정작 이제야
이집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꽤씸하기 짝이 없었다.
"아파"
뺨을 물린 상원이 몸을 뒤로 뺐지만 조석희는 다시 몸을 바싹 붙이며 짖궂게 이곳저곳을 깨물었다.
"아파 석희야"
"참아 봐요"
이곳저곳을 깨물던 움직임은 어느새 달콤한 입맞춤으로 변해 상원의 몸을 들뜨게 만들었다. 촉촉하게 이어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더 좋은건 없어?"
"...응? 뭐가?"
"더 좋은 일들이요 그런거 말고"
상원이 자신때문에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워도 이건 아니었다. 자신이 몰랐던 시절에도 상원은 좋은 추억 하나 정도는 갖길 원했다.
"음, 글쎄 그냥 가끔 복도에서 만나면 니가 묵례하고 지나가는 것도 너무 좋았고, 너희랑 같이 체육관 쓰는날도 너무 좋았고 음, 멀리서 봐도 좋았어"
"그런거 말고 더 없어요?"
"응, 없는데"
"....."
어떻게 그 짝사랑을 2년 가까이 진행시켜 온 것인지 묻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인걸까. 한번 좋아하면 여간해서 질리지 않는 상원의 취향이.
"상원선배"
"응"
"그럼 앞으로 좋은 거 많이 만들어요 나랑"
답지 않은 달콤한 말에 온몸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석희의 가슴께로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상원쪽이 먼저 안기는 것도 요즘에서야
가능해진 일이다. 조석희가 상원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얹고 부드럽게 쓸어내려주었다.
그 다정함에 상원은 겁쟁이가 되어갔다. 그로부터 애정을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그럴수록 그것이 언젠가는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많이 만들어줘 석희야, 사랑해 세상에서 내가 너를 제일 사랑해.... 그러니까 나한테 질리지 말아줘, 제발
입에 담지 못한 말들이 쌓여갈 수록 마음에 무게가 더해졌다.
이 마음을 들키는 날에는 분명 상대가 부담스러워 자신을 외면할 것이라 생각하며 상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요의 사이로 두 사람의 숨소리가 맞물리는 듯 잦아들었다.













조석희와의 동거는 생각보다 무난했다.
평소 말이 별로 없는 그는 적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기분 좋을 정도의 다정함을 내보였다. 물론 과한 스킨쉽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는 기대 이상의 배려를 발휘해 상원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해주었다.
범인이 이해하기 힘든 조석희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 때문에 꽤나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나날이 달콤한 신혼생활로 변모하자 상원은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이 커질수록 언젠가 덮쳐올 불행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조석희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면 자신에게 질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나름의 궁여지책을 마련했다. 그것은.....
"수업 가시는거예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상원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잠에서 덜 깬 눈을 한 조석희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아침이라 거뭇하게 자란 수염에 상원은 눈을 떼지 못했다.
"선배 수업 가시는 거냐고요"
"어, 응 수업가지"
조석희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되도록이면 아침 수업을 시간표에 넣지 않았다. 반면 상원은 수업이 모두 1교시부터 시작되도록 시간표를 잤다.
"선배 수업 끝나면 몇 시에요?"
"글쎄 한 3시쯤 되려나"
"흐음"
조석희가 마뜩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자신의 일과와 매번 어긋나는 상원의 수업표가 거슬린 것이다.
"그럼 집으로 바로 오실건가요?"
"응 그러려고"
조석희가 상원에게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운동화를 두 쪽 모두 신은 상원은 살짝 까치발을 들어 몸을 최대한 앞으로 숙였다.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저는 일이 있어서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조석희는 양키새끼라 위아래도 모르고 싸가지가 없다는 승완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서양식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의견에는 조심스럽게 찬성표를 던질 수 있었다.
증거로는 조석희는 모닝키스 같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척척 해내는 것이다.
"선배 얼굴"
반대로 모닝키스하나에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자신은 타고난 한국인일거라 생각하며 상원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 그.... 나 가볼게"
"그래요"
조석희가 여전히 졸린 얼굴을 하고 상원을 배웅했다. 상원은 콩딱콩딱 뛰는 심장을 움켜쥐고 현관을 나섰다. 버스에 올라타서도 계속 입술을 손가락으로 마지작거렸다.
상원은 최대한 조석희와 학교에서 마주치지 않도록 시간표를 짜두었다.
특히 공강과 점심시간이 겹치지 않게 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덕분에 2학년 전공수업까지 듣게 되어 수업에 뒤쳐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공부해야 했다.
오늘 아침에 있는 수업도 굳이 듣지 않아도 좋을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는 전공 선택 과목중 하나였다.
쉬는 시간도 없이 연속 3시간을 수업하고도 번번이 시간을 넘길 정도로 빡빡한 수업이었다 그러고 나면 다음 수업까지 남는 시간이 채 30분도 되지 않아 빵과 우유로
점심을 떼우기 일쑤였다. 하지만 상원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조석희가 자신에게 질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유보시킬 수만 있다면
몇년이건 빵으로만 점심을 떼워도 상관없으니까.
상원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쳐지나가는 창밖 풍경으로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너희들 의대 훈남 알아?"
수업이 끝나자마자 매점에서 사온 뺭을 먹고 있던 상원의 귀에 동기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의대 훈남?"
"의대 신입생 중에 엄청 잘생긴 애가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잖아. 키가 거의 190넘고 모델같이 생겨서 애들이 난리던데"
잘생긴 의대라면 몇 명 쯤 있을 법했다. 하지만 키가 190이 넘는다는 조건에 상원은 짐작이 가는 인물이 있어 뺭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게 편치 않았다.
"의대 훈남이 의대 수석으로 들어왔단는 걔 아닌가?"
....김이경 맞구나,
"난 의대 훈남보다 경대 왕자님 쪽이 훨씬 더 취향이던데"
"경대 왕자님? 그건 또 누구야?"
"얘도 키가 190 훌쩍 넘고 진짜 잘생겼대. 나도 지나가면서 저번에 중도 앞에서 한번 봤는데 정말 예술이더라. 왕자님이란 별명이 괜히 붙은게 아니야"
제발 아니길. 그 왕자님이 자신이 모시고 살고 있는 그 왕자님이 아니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는 분명 없었지? 그런 외모라면 분명 소문이 났을 텐데"
단과별로 오리엔테이션을 하더라도 특출 난 외모의 신입생이라면 타대학에도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라면..... 둘이 하루종일
반라로 침대 위에서 삼일간 뒹구는 것으로 대신했던 낯 뜨거운 기억이......
"게다가 경대 왕자님은 혼혈이라는 얘기도 있더라구. 영어 끝내주게 잘 한다고"
"아 맞다. 나도 그 얘기 들었다. 이름이 좀 특이하던데 약간 여자 같은 이름이고, 조성희던가?"
"...조석희"
힘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
"어 ! 맞는데. 그런데 상원오빠가 어떻게 알아?"
"그냥 좀....알아"
"친해요?"
상원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친하다고 하기에 조석희는 아직까지 그 속을 알기 어려운 인간이었고, 그렇다고 부정을 하기엔
오늘 새벽까지 했던 일을 떠올리면 양심상 그럴 수가 없었다.
"친하시면 소개 좀 시켜줘요. 소개팅 자리 마련해주시면 안되요?"
한명이 눈빛을 빛내며 상원을 졸라댔다. 상원은 손사래를 치며 딱 잘라 대답했다.
"안돼 걔 그런거 별로 안 좋아해"
"에이 혹시 알아요? 그런 거 안 좋아하는데 저를 보고 반할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여정이는 신입생 사이에서도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때문에 주가가 높은 아이였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자신감이 얄밉지 않은 성격이기도 했다.
"미안하다. 그런데 진짜 그 정도로 친한게....."
"상원선배"
"....!"
상원은 놀라 들고 있던 뺭을 놓치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상원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 쪽을 향해 움직였다. 조석희는 상원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길고 걸음이 빠른 그는 금세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쟤 맞지? 경대 왕자님!"
"왠일이야 직접보니까 진짜 잘생겼다. 키 190 넘을 것 같은데"
넘어. 넘지. 우리 석희 정확히 193이야. 학생 기록부에서 봤을 때 193이었으니 지금은 더 컸을지 모르겠지만.
"상원오빠 친한거 아니야?"
"아니 그냥 가, 같은 학교를 나와서 그래"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상원은 무릎 위에 떨어진 뺭을 주워 들고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래도 전화번호 정돈 알지 않나? 그냥 전번만 따주시면 안되요?"
"상원오빠 곤란하시면 핸드폰 번호 누구한테 받았는지 말 안할게요 네?"
보기 드문 초특급 연락처가 걸린 문제라 그런지 아이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상원은 진땀이 흘렀다. 자신이 석희 번호를 알려주어 그가 화를 내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싫었다. 자신과 비교되지 않는 예쁘고 귀여운 여학생이 그의 연락처를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끔찍하게 싫었다.
"미안...그게...."
"어 상원선배"

이번에 그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던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원의 옆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이 저마다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선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식사는?"
"...어. 이거"
상원이 먹고 있던 뺭을 들며 대답을 대신했다.
"이런걸로 끼니 떼우지 마세요. 위 버려요"
"다음 수업이 바로 있어서 어쩔 수 없어"
"다음 수업 1시에 시작하죠? 잠깐 시간좀 내주실래요?"
말끝이 내주실래요? 하는 의문형으로 끝났지만 상원은 그 속에 담겨진 명령형을 읽어냈다. 지은 죄가 있는 그로서는 조용히 먹고있던 뺭을 들고 김이경을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인적이 드문 건물 뒤로 가자 김이경이 활짝 웃으며 상원의 손을 맞잡았다.
"선배 인연이긴 한가봐요 이런데서 이렇게 뵙고"
"...그래"
같은 단대가 아님에도 드넓은 학교 안에서 이렇게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그러나 상원에게는 그 인연이 반갑지 않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선배 저한테 빚지신 거 기억하죠?"
"...."
단도직입적인 주제 선정에 상원은 할 말을 잊었다. 착한 후배노릇은 애당초 그만둔 김이경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그래 지킬거야"
"그럼 내일 점심 같이 먹어요"
"뭐? 무슨 점심을 너랑 같이...."
"같은 학교 후배 점심 사주는게 어디가 어때서요"
지극히 평범한 식사약속이었다. 약속을 한 당사자 둘이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가진 것이 걸리돌로 작용했지만 상원은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것이 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다.
"내일 그럼 중도 앞에서 1시에 뵙죠. 저도 이만 수업 가봐야 해서요"
김이경이 사라지고 나자 상원은 힘없이 건물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그의주변에 동기 여학생이 몰려들었다.
"상원오빠 방금그 사람 의대 학생아니야?"
"응 맞아"
"수석으로 들어온 의대 훈남 맞죠?"
"...수석은 맞아"
얼굴이 잘 생긴것에는 동의할 수는 있어도 정신이 훈훈하지 않기에 훈남이란 표현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쟤하고는 어떻게알아요?"
"같은 학교 나왔어"
"상원 오빠네 학교 대체 어딘데 그렇게 물이 좋아요, 장난아니다. 저 사람 연락처는 아세요?"
"이경이?,,,,,응"
"그럼 핸드폰 번호 알려주시 안되나?"
"...그게 좀 그렇다"
이번에는다른의미로 껄끄러웠다. 안 그래도 약점을 잡혀 있는 마당에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김이경은 껄끄러운 인간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중에서 가장 껄끄럽다고 할 수 있었다.
"오빠 미팅한번만 시켜주세요. 상원오빠 후배들로만 미팅자리 만들면 진짜 애들 줄 서겠다."
"오빠도 같이 미팅 나가자"
사실 상원도 과내에서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키도 크고 단정하고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데다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입학 초에 상원은 제법 많은 대시를
받았다. 물론 그때마다 자신은 사귀는 사람있다고 예의바른 태도로 거절했다.
그런 성실성까지 후한 점수를 쳐서 아직까지 상원을 눈여겨 보는 여학우들이 있을 정도였다.
"난 사귀는 사람 있어"
"에이 사귀는 사람 있어도 미팅은 그냥 미팅인데 뭐"
"맞아요 가벼운 미팅인데 한번은 괜찮잖아요"
상원은 의아한듯 눈을 치떴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히든 발언이었다. 상원에게는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적으로 상대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현대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가벼운 관계라는 말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튼 난 그런거 안해. 어 나 수업들어가야 한다. 나중에 다시보자"
상원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그의 등 뒤로 동기 여학생들이 원성어린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수업이 있는 건물로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는 아까 전의 일들이 뒤죽박죽 덩어리져 굴러다녔다.
경영대 왕자님이라니!
조석희의 외모와 성격등을 떠올리면 왕자님이라는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알면 그는 분명 얼굴을 찡그리며 싫어할테지.
.....그에게 비밀이긴 하지만, 상원도 몇 번 석희가 왕자님 같다는 생각을 하곤했다. 그렇지만 그 왕자님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의 곁을 스쳐지나간 수많은 여자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애태웠는데 그걸 다시 하라고 하면 죽었다깨어나도 못할 것 같다.
자신의 독점욕이 이렇게 심한 사람인지, 상원은 요즘들어 처음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남자가 남자를 상대로 독점욕이라니 꼴사납다. 절대로 이런 모습을 조석희가 알게 해선
안된다. 상원은 어깨 위 가방을 다시 고쳐맸다.













"선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나른한 목소리에 상원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눌한 발음으로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음성이 너무나 좋아 슬그머니 웃은 것도 같다.
축축한 입술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선배 침대에 누워서 자"
"...응"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상원은 간신히 눈을떠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책상 위에서 엎드려 자요. 잘 거면 침대에서 자"
"아니야. 페이퍼 쓸게 있어서 조금 더 해야해"
상원이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대답했다. 침착하고 차분한 상원이 가끔 이렇게 어린애같은 행동을 보이면 조석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어 상원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왜?"
"아니요 그냥"
눈이 마주치자 상원은 붉어진 얼굴이 부끄러운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밝은 어조로 말을 건넸다.
"오늘 수업은 잘 들었어?"
"늘 그렇죠 뭐"
멍하게 앉아있는 것 같아도 그가 수업의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원은 고등학교 시절 아는 후배를 통해 들었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그와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너무나 멋진 석희의 모습을 훔쳐보다 수업은 커녕 자신이 그에게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게 분명했다.
"아까 우리과 애들이 너보고 잘생겼대"
상원은 무심코 말하고 아차 싶었다. 가뜩이나ㅏ 자기 잘생긴걸 아는 놈에게 그런 말을 해줄 필요는 없는데
"선배는요?"
"응?"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책상 위에 책을 챙기고 있던 상원의 손이 잠시 멈칫한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난에 휩싸인 상원의 모습이 조석희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어떻게요?"
짓궂었다. 그는 상대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진심으로 즐겼다. 상원은 알면서도 매번 그의 손바닥에서 춤을 출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네가 잘 생겼다고 생각해. 정말 잘 생겼으니까.키고 크고....멋져"
그렇게 말하는 상원의 눈가가 촉촉하게 붉어져 있었다. 연모하는 가수를 바라보는 소녀 팬 같은 눈망울이었다.
"그런데 왜 인사만 하고 말아요? 난 선배가 와서 말 걸 줄 알았는데"
슬쩍 눈인사만 하고 지나간 장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상원은 눈을 깜빡이다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나는 그냥 말걸 새도 없었는데"
"전 선배가 말 걸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상처받았어요"
그런 일로 상처는 커녕 머리카락하나 다치지 않을 인간이었다.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체가 글러먹었다는 증거였다.
"선배는 저하고 아는 척 하는게 싫으신가 봐요. 제가 부끄러우세요?"
"아니 절대 그럴리가"
부끄럽기는 커녕 , 이 남자가 내 남자라고 할수만 있다면 전국방송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라들이 조석희에게 눈독을 들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내일 같이 점심 식사나 할까요?"
그나마 두 사람이 시간표 공강이 겹쳐 같이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 내일이었다. 그러나 상원에게는 내일 피할 수 없는 상대와의 점심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내일은.....약속있는데"
누구와의 약속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상원은 자신이 없었다. 한두번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매번 이렇게 상대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래 좋아 조석희가 묻는다면 솔직하게 대답해버리자.
상원은 단호하게 결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조석희는 너무나도 쉽게 관심을 거두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같이 먹죠"
"응 그래"
조석희가 상원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옷 갈아입으러 가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그는 항상 이런식이었다. 고집을 부리는 법은 있어도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그게 조석희의 방식이었다. 쿨하고 멋있었다. 그런 석희가 너무나도 좋았지만 가끔은 그가 자신을 위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바로 안 잘거면 같이 샤워하면서 섹스하실래요?"
마치 친구에게 맥주 한잔을 권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다. 셔츠 단추를 툭툭 끄르는 그의 우아한 손동작이 상원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문가에 기대 서 있던 조석희가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해보이고 사라졌다. 상원은 홀린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왕자님이 자신을 위해 망가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거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선배"
"으악!"
손에 들려있던 책들이 우르르 바닥에 쏟아졌다. 김이경이 웃으며 떨어진 책을 주워졌다.
"내가할게 괜찮아"
"아니요 저 때문에 떨어졌는데요"
반은 맞는말이었다. 하지만 반은 아니었다.
어제 샤워를 하며 너무 격하게 섹스를 한 덕분에 상원은 지금 누군가 어깨를 툭 치기만 해도 허리가 찌릿하게 울릴 정도로 아팠다. 소리없이 등 뒤로 다가온 김이경이 갑자기
자신을 부른 것에도 놀라긴 했지만 책을 놓친 데에는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이유였다.
책을 가지런히 주운 상원은 허리를세웠다. 다시금 올라오는 고통에 자연스레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 괜찮아"
"밥 사주실 거죠?"
김이경이 넉살 좋게 묻는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식당에서 먹는 밥이야 아무리 비싼 것을 고른다 해도 두 사람 몫이면 만원을 넘기지 않으니 부담이없었다.
김이경이 앞장 서 걸었다. 그가 지나가는 길옆으로 여자들의 시선과  수근거림이 퍼져나갔다. 작은 속삭임에도 의대 수석 훈남이라는 세 단어는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을 정도였따.
상원은 앞장서 걸어가고 있는 김이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관심과 찬사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당연한 것을 왜 굳이 입 아프게 말하고 있을까 하는 오만함이 살짝 내비쳐지기도 했다.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서자 또 다시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수재들만 모인다는 학교에서도 괴물들이 모인다는 의대 거기에 가장 꼭대기에 있는 괴물이 얼굴마저
잘생겼으니 소문이 파다하게 날 만도 했다.
식권을 사서 음식을 받아온 다음 상원은일부러 구석진 테이블에 앉았다. 김이경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같은 과 동기나 선배들의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왜 이렇게 구석에 앉았어요"
자신의 음식을 받아온 이경이 앞에 앉으며 물었다.상원은 그냥, 하고 대답하고 숟가락을 들어 맨밥을 퍼먹었다.
"학교생활은 어떠세요"
"좋아. 당연히 좋지"
"불편하신 점은 없어요?"
"다 좋을 수는 없지만 불편하다고 여길만한 것도 없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상원의 얼굴을 김이경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원은 그런 이경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고....음 아직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애들 다들 착하고 좋아"
고등학교에서 만난 녀석들은 평생 친우로 남을 만한 아이들이었다. 지금 대학에서 만난 과 동기들도 모두 좋은 애들이긴 했지만 상원은 아직까지 이렇다할 정을 붙이진 못했다.
"선배한테 다 반말해요? 형이라고 부르나?"
"아니 그냥 이름으로 불러. 여자애들은 오빠라고 부르긴하지만"
일년 재수하는 정도로는 현역으로 들어온 아이들과 굳이 구별을 두지 않았다. 동기 중에서 남자애들은 대다수가 상원을 이름으로 부르며 반말을 썼고 여자애들은 그나마 오빠라고
불러주긴 했지만 반말과 존댓말을 지들 멋대로 사용했다. 재수한 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도 아니라고 생각해 상원들은 동기들이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써도 괜찮다고 여겼다.
"아 그래요?"
숟가락으로 쌀밥을 뜨던 김이경이 설핏 인상을 쓰며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싸가지 없는 것들이 있단 말이에요?"
상원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싸가지 라니....."
"한살 많은것도 엄연히 많은 건데 반말을 한다고? 하하하 어이가 없네"
"어이없을 것 까지는...."
"지들이 뭔데 상원선배한테 반말을 하고 이름을 불러요?"
"괜찮아 원래 재수한건...."
상원이 자신의 동기들이 특별히 버릇없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김이경의 음산한 표정을 본 순간 소용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너도 나한테 반말하고 싶으면 해 그냥"
"저요? 제가 왜요?"
"결과적으론 같은 학번이잖아"
김이경이 피식 웃었다. 입술 끝이 보기 좋게 올라가 얼핏 보면 달콤해 보이는 미소였다. 하지만 상원은 그 겉보기 등급에 절대로 속으면 안된다는 것을 직접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같은 학번이라도 아니 설사 삼수를 하셔서 제 후배로 들어온다고 하셔도 선배는 선배예요"
"아...그래"
고맙다고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찰나, 옆자리에 누군가 식판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당혹스런 무례한 행위의 주인공이 누군인지 확인도 하기 전에 의자를 빼는 소리가 이어졌다.
"오랜만이다 반갑다"
김이경이 던지는 인사가 상원의 귓가에 맴돌았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옆에 누가 앉아있는 것인지 상원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옷과 특유의 분위기 게다가......
"집어 치워"
어딘가 어눌한 발음과 차가운 어조.
"...석희야"
상원은 차마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오늘 약속 있다고 하더니 왜 이 새끼랑 밥을 먹고 있어요 선배"
문장의 형태는 의문형이었지만 어조는 명령형이었따.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후배랑 식사한번 할 수 있지"
김이경이 정말 좋은 후배인양,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겉모습에 속을 사람은 그 테이블에는 없었다. 센스 좋은 옷차림과 해사한 외모 지적으로 보이는 은테안경에
시선을 던지는 것은 주변에 있는 여학생뿐이었다.
"선배는 너같은 후배 둔적 없어"
"너한테도 선배인데 나한테도 선배지"
"닥쳐"
조석희가 이죽거리며 살벌하게 영어로 된 욕설을 내뱉었다. 백 미터 밖에서도 치명적인 페로몬을 폴폴 풍기는 외모를 가진 이 모델같은 남자가 얼마나 성격이 좋지 않은지
알고있는 사람은 모두 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는 여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리는 조석희를 혼미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둘이 왜 밥을 먹어"
조석희가 다시 매섭게 다그쳤다. 김이경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웃을 뿐이었다. 자기가 할말은 다 했다는 듯이. 김이경은 나중에 죽여야지 하고 마음먹고 조석희는 상원을
향해 삭막한 시선을 던졌다.
"선배가 한번 설명해보시지"
"아 그게....."
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하나 막막해졌다. 말을 하고 나면 상대가 자신에게 뭐라고 말을 할지 어떤 시선을 던질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발밑이
아찔할 정도로 두려웠다. 숟가락을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보라고 선배"
보기 딱할 정도로 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조석희의 한마디에 사색이 되어 손가락까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이경은 배알이 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사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만 혼자 아직까지 쩔쩔매고 있는 모습이 그의 더러운 성격을 자극한 것이다.
내가 먹지 못하는 감을 남이 달게 먹는 꼴은 보기도 싫었다.
"선배 밥 먹을 사람 없어서 그래"
"뭐?"
김이경이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며 대답했다.
"선배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다고 몰랐어? 그래서 나랑 먹는거야"
"아무리 친한 놈이 없다고 해도 왜 너 같은 새끼랑 상원선배가 밥을 먹어"
"친한 놈이 아예하나도 없으니까그렇지 선배 왕따잖아"
"뭐?!!"
놀라 소리친쪽은 상원이었다. 조석희는 아무말없이 눈썹을 살짝 치떴을 뿐이다.
"선배랑 어울리는 동기 없어 몰랐어?"
"....."
조석희가 상원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상원은 그가 김이경의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야 석희야 진짜 아니야"
"왜"
조석희가 입을 열었다
"뭐가 왜야"
그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상원이 눈을 끔뻑거렸다.
"왜 선배가 그런 취급을 받아"
"소문이 좀 돌았나보지 특이체질에 대해서"
김이경이 웃으며 손가락을 쥐었다펼치며 무언가 터져나가는 시늉을 했다. 조석희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특이 체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운이 좋지 않은 상원을
동정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기분나빠하며 꺼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선배 그래서 혼자 밥먹어요?"
조석희의 직접적인 물음에 상원이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게 아니야 . 제가 지금 헛소리하는 거야"
"선배 성격에 너한테 그런 얘길 할것 같아?"
김이경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무덤덤한 그의 말투가 화제의 신빙성을 더했다. 조석희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꼈다.
상원은 이 말도 안되는 오해를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김이경 너 대체 무슨 말을..... 아니야 석희야 나 정말 아니라니까. 나 친구많아"
아직 동기를 친구라 부를 만한 단계는 아니었지만 오해를 푸는 것이 먼저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하지만 조석희 눈에 깃든 노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김이경 똑바로 말하라니까."
상원이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후배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선배가 저랑 밥 먹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요?"
"그래"
상원은 차라리  솔직히 털어놓고 상대에게 힐책을 당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이경이 어깨를 으쓱 해보이고는 빠르게 진실을 쏟아냈다.
"선배가 나랑 술 취한 채 집앞에서 키스를 했다고 생각한 그 사실을 너한테 숨기고 싶다고 하셔서 그럼 내가 나랑 밥 먹자고 한거야 입막음 대가로"
"....."
상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식은땀으로 촉촉히 젖은 손바닥이 점점 차가워졌다. 누군가와 트러블에 휘말리는 자체를 싫어하는 평화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특히나 좋아하는 상대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이 상원의 숨통을 비틀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몸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두려웠다. 자신에게 그가 당장이라도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 지를 것 같았다.
"선배"
침묵이 깨어졌다.
"....응"
상원은 고개를 들고 옆에 앉아있는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듣건, 무슨 짓을 당하건 감내하리라 마음먹으며,
조석희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푸른 기가 돌만큼 창백하게 얼어붙은 그의 시선이 상원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날카로운 금속의 물질이 살갗을 낮게 찌르고
훑어 내리는 느끼에 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
"그러니까....."
불에 그슬린 가죽처럼 글겅거리는 음성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선배가 왕따당하고 있다는 얘기인 거죠?"
".....!"
국어도 잘하는 녀석이 왜 화제를 파악 못하는 것이냐! 석희야!
그게 아니잖아!
상원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선배 일은 내가 알아서 할거니까 이제 너같은 놈이랑 선배가 밥 먹을 일 없을 거다"
조석희가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김이경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상원의 손목을 잡아 일어섰다.
"가요, 선배"
너르고 든든한 등을 앞에두고 상원은 코끝이 찡해졌다. 비록 그가 자신을 왕따라고 믿고 있을지언정 이렇게 신경을 써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집으로 가요 선배"
".....응"
그 한마디에 상원의 머릿속에 있던 오후 수업 일정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조석희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주잡은 손을 통해 느껴지는 손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상원은 무서워 진즉에 도망가 버렸을 것이다.
"너 수업 괜찮아?"
"안 괜찮으면요?"
돌아보지 않고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조석희가 툭 내뱉는다.
"안 괜찮다고 하면 선배가 책임져주실 건가요?"
새 울음같은 경쾌한 알림음이 울리면서 문이 열렸다. 신발을 벗으면서도 조석희는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럼 지금이라도 다시 학교로...."
돌아보는 조석희의 표정이 험악했다. 상원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운동화 끈을 한손으로 풀렀다. 신발을 벗을때까지 조석희는 그 자리에 서서 얌전히 상원을 기다려 주었다.
"침실로 가요"
"어? 침실?"
조용히 얘기나하겠구나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침실이란 단어에 상원은 놀라 눈을 부릅 떴다. 조석희가 침실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아주머니가
갑작스럽게 들어닥친 두 사람을 보고 청소기 전원 버튼을 눌러 껐다.
"수업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일이있어서요. 다른 방부터 청소해주세요"
"예"
아주머니가 청소기를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상원은 어버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석희가 먼저 입고 있던 재킷과 윗옷을 벗어 던졌다.
"석희야 ....계신데"
상원이 등 뒤에 문을 가리켰다. 문 너머에서는 아주머니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듯 청소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 있는 집에서 그것도 앞으로 계속 얼굴을
마주쳐야 할 사람을 두고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애당초 어째서 분위기가 이런 방향으로 흐르게 된 것이냐!
"설마 제가 선배랑 오붓하게 얘기나 나누자고 수업을 제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신건 아니죠?"
"아니.그래도....."
조석희가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오자 상원은 뒤로 두발자국 물러섰다.
"얌전히 벗어요. 그 새끼랑 밥 먹고 있는 식당에서 그대로 박아버리고 싶은거 참아준 거니까"
조석희가 긴 팔을 뻗어 상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팔 위로 들어"
짧게 내려진 명령에 상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위로 들었다. 조석희가 니트의 끝자락을 붙들고 위로 올려 쑤욱 벗겨냈다.
"우악"
상원이 다시 옷을 움켜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니트는 저멀리로 던져지고 난 후였다.
"석희야 나중에....... 아주머니 계시잖아"
"어때요 이미 다 아는데"
두 사람이 남긴 격렬한 정사의 흔적- 얼룩진 시트와 정액으로 가득 찬 콘돔- 들을 처리하는 것은 일하는 아주머니의 몫이었다.
상원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사람을 문 너머에 두고 이런 짓을 벌이는건 부적절하게 여겨졌다.
"그래도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흐익"
커다란 손이 바지안으로 성큼 들어오자 상원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선배 엉덩이가 아기 피부처럼 부드러워요"
조석희가 허리를 숙이며 속삭였다. 이렇게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면 상원은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상대의 그런 수법을 알면서도 상원은 매번 거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김이경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요"
"알아, 그런데....."
"아무리 밥먹을 사람이 없다고 해도 김이경 새끼를 만나요?"
엉덩이를 움켜쥔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상원은 움찔하고 허리를 퉁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왕따 같은거....."
"됐어 괜찮아. 내가 있잖아요 이제 나한테 말해요"
기분이 묘했다. 따돌림 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석희의 발언에 든든한 아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시간표 바꿔요"
귓바퀴를 혀로 핥으며 조석희가 말했다.
"....정정기간 지났어"
솜털까지 아찔하게 서는 느낌에 상원은 바지자락을 움켜쥐었다. 조석희의 치아가 귓볼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앞으로 학교에서 점심은 나하고만 먹어"
"시간 맞으면...."
"맞춰. 나도 억지로 맞출테니까"
눈물이 나올 만큼 다정한 맨트에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이경과 식사를 한 이유는 자신이 따돌림을 당해서가 아니라 술김에 저지른 실수 때문이라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입술이 맞물려지는 동시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만다.
문 너머에서 청소기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데도 조석희는 망설임 없이 상원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리고 침대에 눕혔다.
"선배 엉덩이가 부드러워요"
조석희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주무를 때마다 상원은 발끝을 움츠렸다. 그의 애무는 끈질겼다. 상대방을 고통과 쾌락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엎드려 봐요 선배 엉덩이에 대고 비비고 싶어요"
문 너머 청소기 소리가 여전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상원은 천천히 몸을 뒤집어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웠다. 바지의 버클을 끄르는 소리 뒤에 퍼스너를 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조석희가 상원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겹쳤다. 엉덩이 사이에 닿는 단단한 살덩이의 감촉에 상원은 몸이 떨렸다.
"닿기만 해도 좋아하시네요"
상원의 엉덩이 사이에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져다댄 조석희는 위아래로 슬근슬근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음부를 가로질러 고환에 닿는 단단한 살덩이의 감각이 상원을 흥분시켰다.
"....아"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참으려고 상원은 시트를 물었다.  조석희는 허리를 깊숙이 찔러 흔들며 특유의 외설스런 말들을 지껄였다.
선배 불알에 제 자지가 닿는 느낌이 어때요?
선배는 털도 부드럽네요 아직 만지지도 않았는데 앞이 뿌옇게 젖었어요.
그런 말들이 귓가에 쌓일수록 상원은 소리를 참는 것이 어려워졌다.
조석희는 습한 숨소리를 내며 상원의 목덜미를 입술로 애무했다. 그가 혀로 뺨을 핥았을 때, 상원은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신음을 내뱉었다.
"못 참겠어요? 선배 지금 시트에 사타구니를 대고 비비고 있잖아"
"....응 빨리"
"빨리 어떻게 해달라는 것인지 확실히 말씀하세요"
"만져줘"
상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촉촉하게 젖은 눈이 선정적으로 보였다. 조석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를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손을 뻗어 상원의 성기를 쥐었다.
기대감에 고조된 상원의 몸이 움찔거리며 움직였다.
조석희가 손가락 끝으로 뿌옇게 젖은 끝을 문지르자 시트를 쥐고 있떤 상원의 손끝이 떨렸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정도로는 달아오른 욕망이 만족되지 못했다.
"만져주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갖다대고 비비네요"
"석희야...."
"만져주는 정도로는 안되는 건가?"
삽입섹스에 관해서 처음에 상원은 고지식 할정도로 무서워하고 꺼려했다. 조석희는 그런 상원을 달래고 어르느라 얼마나 그 더러운 성격을 억눌렀는지 모른다.
지금은 쾌감에 익숙해져 조를 줄도 아는 상원의 변화가 그에겐 반갑기 그지없었다. 상원의 입에서 나오는 음란한 말들과 야한 행동들이 조석희를 만족시켰다.
그가 손가락으로 말랑말랑하게 부어오른 상원의 구멍을 만지작거렸다.
"아침에 해서.... 아직 부어있어"
손가락이 점차 안으로 더듬어 들어왔다. 온몸을 잠직해오는 쾌감에 상원은 몸을 덜덜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방문 너머에서는 아직도 청소기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선배 넣어도 돼요?"
하루에 두번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같이 살게 된 날 상원은 횟수에 대한 제안을 해왔다. 삽입이나 사정 횟수에 대한 제한이 아니라 단순한 섹스 횟수에 대한 것이라면
상관없다고 조석희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횟수가 엄격히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에 넣어서 못 넣잖아"
"....."
조석희가 검지와 중지를 번갈아 구멍안으로 집어 넣으며 말했다.
"하루에 두번은 안되는 거죠?"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물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번번이 철회하는 것이 얼마나 민망한지 알면서도 조석희는 일부러 상원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하루에 두번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해"
"뭐라고요?"
"해도 돼. .... 석희야 해줘"
무너지듯 나온 상원의 응답에 조석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사람 있는데 그래도 돼요?"
일부러 몇 번이고 그는 상원이 스스로의 말들을 올바른 신념을 건전한 모럴을 엉망으로 휘젖게 만들었다. 자신을 위해 상대가 스스로 더러운 것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람 있는데도 지금 넣어달라고 하는 건가요? 설마"
"....석희야"
울먹이는 목소리.
사랑스런 애틋함에 조석희는 온몸이 훅 하고 달아올랐다.
그는 그대로 상원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삽입해버렸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작된 삽입에 두사람 모두 쾌감보다는 고통이 앞섰다.
"선배 긴장 풀어요"
"아, 아파...."
"괜찮아 질거예요 응 그렇게.."
그가 애액으로 미끈해진 상원의 성기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아래위로 흔들어 주었다. 달뜬 신음소리가 상원의 입사이에서 새어나왔다. 동시에 아래의 긴장이 조금씩 풀어졌다. 조석희는
천천히 남아있는 부분을 안쪽에 박아 넣었다.
"----!!"
"...읏 죽이...게 조이는데"
완전히 밀어 넣은 채로 조석희는 한참을 그대로 숨을 골랐다. 그는 상원의 몸에 들어간 그 직후의 순간을 좋아했다. 맞닿은 아래를 통해 전해져 오는 열기와 내부의 미묘한 꿈틀거림이
느껴지는 그 순간을.
그는 손바닥으로 상원의 곧게 뻗은 등을 쓸어내렸다. 남자의 등이었다. 여자처럼 안겨오는 맛이 나지 않는 허리와 단단한 등은 아무리 호리호리 하더라도 남자라는 사실을 몇 번이나
자각하게 만들었다.
여자의 살갗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닿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애초의 남자의 것을 받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여자의 성기에 삽입을 하는 행위도 그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흥분시킨 상대는 지금까지 단 한명도 없었다. 자신의 아래에 깔려 흐느끼는 남자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잔뜩 부풀어올라 채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상원의 페니스를 손에 쥔 감촉도 끝내줬다.
"선배 , 이제 움직일게"
조석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선전포고를 하듯 자신의 행위에 대한 예고를 던졌다. 상원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느다란 목덜미를 쥐고 숨이 막힐 때까지 조르고 싶다는
잔인한 욕망이 조석희를 뒤흔들었다. 그는 허리를 난폭하게 추어 올렸다.
"악.... 아, 아파"
아직은 움직이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석희는 못들은 척 다시한번  허리를 흔들었다. 뻑뻑한 내부의 살갗이 그의 페니스를 감싸쥐듯 함께 움직였다.
츠읍, 하는 질척한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아파 서, 석희야 ...아 ..천천히"
"선배"
조석희가 상원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나랑하면.... 아파도 좋죠?"
"...."
"아파도 좋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아래를 세우고 좇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거잖아"
푸른빛이 도는 실크 시트에 이미 얼룩이 진 상태였다. 이미 청소기 소리는 집의 끝에서 울리고 있었다. 자신의 체액으로 젖은 시트와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뒤섞여 상원의
수치심은 평소보다 배는 고조되었다.그리고 고조된 수치심은 솔직한 욕망을 배가 시켰다.
"...좋아 석희야 ....너무 좋아"
울음섞인 상원의 대답에 조석희는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뒤로는 어떠한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짐승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상원의 허리를 위에 자신의 체중을 실어
허리를 놀려댔다.
상원도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침대가 찌걱거렸다. 이러다 침대가 무너져버리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 무렵에 조석희는 상원의 안에 뜨근한 정액을 사출시켰다.
그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자신의 몸위에 무너지듯 엎드린 후에야 상원은 자신이 이미 사정을 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낮의 섹스가 얼마나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것인지
상원은 까무룩하게 찾아드는 잠을 통해 알아차리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은 수면을 취하고 난 이후에 눈을 뜨면 사람이 처음으로 갖게 되는 감정은 의아함이다. 상원은 눈을 두어번 껌뻑이고 나서야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왜 더 자지 않고"
"....몇 시야"
"일곱시 조금 안 되었어요"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 조석희는 샤워는 물론이고 옷까지 멀끔히 갖춰 입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의 손에는 영어로 된 경제학 원서까지 들려있었다.
아직도 벌거벗은 채 시트를 몸에 감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진 상원은 다시 잠든 척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잠 깨신거죠? 식사하세요. 차려놨어요"
"어 그래....."
잠든척은 물건너 갔구나.
상원은 몸을 반대편으로 뒤척거리며 대답했다. 시트 아래를 살짝 들추어 보니 이미 석희가 수건으로 깨끗이 몸을 닦아준 모양이었다. 한층 더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물 적셔서 닦아드리긴 했지만 샤워하시고 싶으심 하세요"
조석희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상원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한 모양인지 안쪽에서 흘러내리는 느낌조차 없었다.
상원은 후다닥 욕실로 달려가 샤워 콕을 열고 몸을 닦았다. 아무리 상대가 수건에 물을 적셔 닦아준다고 해도 섹스를 하고 난후에는 반드시 샤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조석희는 아까 말한 대로 저녁식사를 준비해놓고 식탁앞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먹지"
"저 외로움 많이 타잖아요. 선배 없이 혼자 밥 먹고 싶지 않아요"
저 능청스런 거짓말에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상원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국이 따끈한 것을 보니 조석희가 다시 데워서 식탁 위에
올려놓은 모양이다.
"괜히 나때문에 배고픈데 기다린거 아니야/"
미안한 마음에 빙 돌려 표현했다. 조석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슬쩍 웃어보이며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이집에 들어온 이후
상원의 체중이 이킬로그램이나 분 이유들이 식탁위에 가지런히 놓혀있었다.
"음식이 너무 많아"
"많으면 버리면 되죠"
"...음식은 버리면 안되는데"
"그렇다고 남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잖아요"
뺭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마리앙투아네트조차 저 조석희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앞으로는 조금만 차리자. 음식 남으면 아까우니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조석희는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응?"
갓지은 윤기나는 쌀밥위에 최고급 명란젓을 얹으며 상원이 대답했다. 젓갈류는 입에 대지도 않는 조석희였지만 상원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받아낸 후론 식탁위에 반드시 젓갈류 찬을 한가지씩은 올리게 했다.
"선배 따돌림 당하는거요"
"컥..."
상원이 밥알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조석희가 의외의 다정함을 발휘해 상원을 감싸 안아 준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끝이 좋았다고 해도 오해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만 했다.
"서, 석희야 그거....."
"잘 됐어요"
"어? 뭐라고?"
상원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됐다고요,. 선배 그렇게 된거"
"...무슨 소리야 그게..."
상원은 이녀석이 혹시 따돌림이나 왕따 라는 단어의 사용을 잘못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외국생활을 오래한 것치고 조석희는 한국어 구사 능력이
매우 휼륭했지만 아주 가끔 생각지도 못하게 잘못 알고 있거나 뜻을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상원은 조심스럽게 잘못된 그의 단어 사용을 고쳐주곤 했다.
"앞으로는 저하고만 식사하고 저하고만 다니시면 되겠네요 흐음 아예 저랑 수업을 들으시는 것은 어때요?"
"...수업 정정 기간 지났다니까. "
"과를 옮기시면 어때요?"
".....석희야"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정말 아무렇지 않게 줄줄이 내뱉는 저 배짱은 세계 최강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저게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미국으로 같이 가요"
"....."
...진심이구나.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는 괜찮아. 따돌림 당하는 것도 아니고"
"뭘 부끄러워 해요 선배처럼 재수가 없는 사람이면 따돌림 당할수도 있죠"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됐어요 아무튼 내일부터 선배 점심시간에 맞춰서 제가 학교 갈게요. 어떻게든 맞춰줄 테니까 선배도 최대한 맞춰봐요"
이건 감동을 해야 할지 절말을 해야 할지 미묘한 순간이었다. 이기주의의 결정체이고 자기중심의 최절정에 서 있는 조석희가 상대방을 위해 저렇게까지
맞춰준다는 이야기는 황송하기 그지없었지만 애인이 다른 사람과 술김에 키스를 했다는 것보다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버리는 데에는 확실히 기분이
착잡했다.
"석희야"
조석희가 내미는 제안이 아무리 달콤하다 할지라도 상원은 진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석희야 나 정말 그런거 아니야. 나 친구들도 많고 동기들하고도 친해"
물잔을 들어올리며 조석희는 그런 상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재수가 없긴해도 ...그런걸로 사람 차별할 만큼 동기들이 나쁜애들도 아니고"
조석희가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 사소한 동작하나에도 타고난 기품이 묻어났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원은 아차 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나 따돌림 당하는거 아니야. 믿어줘"
선배로서 연장자로서 상원은 석희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랬다. 조석희의 눈동자가 상원의 시선을 차갑게 훑어내려갔다. 그리고는 빙긋 웃었다.
"선배, 그래서 내일 점심시간이 몇 시라고?"











조석희는 결국 상원의 시간표를 프린트한다음 매 점심시간마다 중도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수락을 하긴 했지만 상원은 그게 과연
며칠이나 갈까 싶었다. 조석희를 처음봐온 순간부터 그에 관해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생각은.
그놈 참 이기적이다.
이 한줄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법도 없었고 모든것을 일단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조석희란 인간을 너무나 좋아하긴 했지만 가끔그가 보여주는
이기주의의 절정은 섬뜩하기조차 했다. 과연 그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까. 언제까지 옆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수그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그가 너무나도 좋았다. 가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귀족적인 외모도 독특한 발음과 목소리도, 짓궃은 장난도, 잠이 모잘랄때
보여주는 잠투정도 온몸으로 끌어안으면 느낄수 있는 단단한 근육도 어떻게 이런 사람을 싫어할 수 잇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
같이 지내는 하루가 쌓이는 만큼 마음은 커져만 갔다.
그런 상원이었지만 조석희가 자신을 위해 희생적으로 뭔가를 해준다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상원은 저 말도 안되는 점심 약속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랬건만.....
"늦었어요"
중도관 앞 벤치에 앉아있던 조석희가 시계를 보며 한마디 했다. 오늘로 일주일재 같이하는 점심식사였다.
"수업이...하아.....늦게 끝나서"
숨이 턱까지 차서 헉헉거리며 상원은 간신히 대답했다. 조석희가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가 일어서자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가요"
"너 지금 밥 먹으러 가면 수업 늦는거 아니야?"
상원역시 조석희의 시간표를 프린트 한 종이를 받아 외우고 있었다. 수요일은 두 사람이 함께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20분이 채 되지 않는데, 교수님께서 10분이나
오버하는 바람에 오늘의 점심은 물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괜찮아요 하루 정도는"
"수업을 안 들어가겠다고 ? 됐어 빨리 들어가"
"수업 한번 안 들어간다고 큰일나는거 아니잖아요. 땡땡이 한두번 쳐봐요?"
"...."
상원이 수업을 빼먹은 것은 거의 아니 전부 조석희와 관련된 일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종종 도서관에서 조석희의 아로마테라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수업을 빼먹곤 했다.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요 배고파"
"응 그래"
어차피 말려봤자 들을 인간도 아니었다. 상원은 그냥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치고 다음 수업이라도 들여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석희의 뒤를 따라 나섰다.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여학생이 조석희를 쳐다보는지 상원은 그수를 이십명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다리도 길고. 어깨도 넓고 얼굴도 잘생기고..... 저기에 성격까지
좋았으면 진짜 큰일났겠지. 성격이 더러워서 정말 다행이야.
"뭐해요 멍하니 서서"
"아, 아니야 가고있어"
길에 멈춰서서 조석희의 뒤태를 감상하던 상원이 허둥지둥 다시 움직였다. 지나가던 사람하고 부딪히자 상원은 자리에 멈춰서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부딪히고 말았다. 조석희가 한숨을 쉬며 상원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목을 움켜줬다.
"거기서 얼마나 사람들한테 고개 숙이고 있을거예요 빨리 가요. 나 배고프다니까"
"아 그래 가자"
상원은 석희가 자신의 손을 놓아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손목을 움켜쥔 채로 그대로 식당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손....."
상원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한마디 했다.
"손이 왜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안그래도 눈에 띄는 주제에 남자의 손까지 잡고 걸으니 시선집중의 효과가 두배였다. 상원은 누군가의 시선을 끄는 재주도 취미도 없기에 지금 이 상황이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상관없어요"
"안 돼 상관있어"
상원이 단호하게 말하며 잡혀 있던 손을 잡아 뺐다. 조석희가 잠시 눈을 크게 부릅뜨고 상원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마음대로 해 라는 제스처였다.
조석희가 앞서 걸어가고 상원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잡혔던 손목이 화끈거렸다. 이런 사소한 접촉에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이 고마운 한편, 자신들의 관계가 들통나 상대방에게 피해가 갈까 두렵기도
했다.
2층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테이블에 앉아있자 두 사람의 주변으로 여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조석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비스듬히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집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얼굴을 마주보고 식사를 하니 상원으로서는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경우일 뿐, 석희가 자신에게 질려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상원은 식사시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애당초 김이경의 심술로 시작된 점심 약속은 이렇게 계속 지속될 수만은 없었다.
"석희야 저기...."
상원이 어렵게 입을 연 순간 주머니에 있던 조석희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귀찮다는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요 전화 좀"
"그래 음식 나오면 내가 받아둘게. 통화하고 와"
조석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대며 걸어나갔다. 빠르게 들려오는 영어에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일제히 쏠렸다.
작작 멋있을 것이지.
"에휴...."
절로 나오는 한숨에 시름이 깊어졌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상원의 어깨를 누군가 반갑다는 듯이 툭 치며 아는 척을 해왔다.
"상원이형 여기서 뭐해요?"
"진철이구나"
동기 중에 상원을 형이라 부르는 몇 안되는 녀석이었다. 상원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
"형 왜 이렇게 얼굴보기가 힘들어요 수업만 끝나면 바로 나가버린다면서요 혹시 우리 몰래 CC되신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거 아니야"
"식사 혼자하세요? 저희랑 같이 하실래요? 민환이랑 종근이도 좀 있다 올건데"
"나는....."
일행이 있다는 말로 거절을 하려고 했는데 저 멀리서 민환이 상원과 진철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우 형. 얼굴보기 힘들어요"
"야, 나도 안그래도 그 얘기하고 있었다."
"같이 밥 먹어요. 김교수님 수업 중간 프레젠테이션 하는 거 조 짜셨어요? 저희랑 같이 하실래요?"
상원은 같이 밥 먹자는 것을 우선 거절하고 조는 같이 짜자고 얘기해야 하나 아니면 조를 같이 짜는 것을 수락하고 밥 먹는 것을 거절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일단 중요한 식사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은 순간 상원은 이십년간 숱하게 겪어온 불길한 전조의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
상원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불행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리 위에 은색의 번쩍이는 식판과 정체불명의 시뻘건 국물이 날아들고 있었다.
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상원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것이 그간 그가 몸으로 체득한 필살의 방어수단이었다.
으악, 하는 비명소리보다 뜨근한 국물이 먼저 상원의 상수리 부근을 적셨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테인리스 식판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끄러운 식당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상원이 형 괜찮으세요?"
상원의 근처에 서 있었지만 엎어진 식판의 피해를 한방울도 입지 않은 민환이 놀라서 물었다. 상원은 치켜 들었던 팔을 치우고 감았던 눈을 떴다.
"형 괜찮아요? 옷 다 버렸네"
"어, 나 괜찮은데....."
식판의 주인인 여학생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상원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아, 어떡해"
상원의 점퍼와 니트가 온통 김칫국물과 반찬국물로 얼룩져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굴 한번 찡그리는 법 없이 오히려 울먹이는 여학생을 달래주었다.
"괜찮아요 늘 있는 일인데요 뭘 안다치셨어요?"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세요. 이게 뭐냐 정말"
"형 옷 다버렸잖아요"
화를 낸 건 상원의 곁에 서 있던 같은 과 동기들이었다. 물기가 촉촉하게 맺혀있던 여학생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상원이 황급히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진짜 괜찮아요. 사람이 실수도할 수 있죠. 신경쓰지 말아요"
"형 옷은 어떡해요. 일단 체육관이나 기숙사 같은 데라도 가서 샤워부터 해요"
뒤늦게 달려온 종근이 온갖 반찬을 뒤집어 쓴 상원을 보고 기겁을 했다.
"으악 이게 뭐야 잠깐만 내가 가서 휴지 가져올게"
"여기도 치워야 하는데"
상원이 바닥에 널브러진 반찬들과 스테인리스 식판을 보고 걱정스럽게 한소리했다. 그러자 민환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걸 왜 형이 치워요 . 엎은 사람이 치우든가 해야지"
"어차피 옷도 버렸는데 내가 치우지 뭐"
상원이 바닥에 떨어진 식판을 주워들었다.
"사람이 진짜. 어휴 주세요. 내가 치울 테니까"
민환이 상원의 손에 들려있던 식판을 빼앗듯 건네받았다. 대학에 와서 길에서 넘어지거나 지우개를 잃어버리는 정도의 자잘한 불운은 있었지만 이런 큰 사고는
처음이었기에 상원은 입맛이 썼다.  혹시 자신의 특이 체질이 조석희의 옆에 머물면서 조금쯤은 희석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조석희의 눈에 그 상황이 완벽한 오해의 한 장면으로 비춰진 것으로 상원의 불행은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테이블을 가로 달려오는 기세에 모두들 굳어버리고 말았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조석희는 민환의 손에 들려있던 식판을
빼앗아 그대로 쳐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챈 상원은 필사적으로 그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조석희가 살벌하게 소리쳤다.
"석희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젠장"
조석희가 본인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상원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옷의 안쪽에 적혀있는 브랜드 태그를 보고 주변에 서 있던 몇 명이 기겁을 하며 조석희와 상원을 번갈아 보았다.
"옷버리잖아.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빌어먹을 fuck"
겉옷으로는 수습이 되지 않자 이번에는 입고 있던 셔츠까지 벗어 상원의 얼굴과 옷을 닦아주었다. 옷을 벗을수록 드러나는 그의 근육에 근방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의
얼굴이 조금씩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가 그랬어?"
조석희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어 상원의 옆에 서 있던 민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니야 걔 아니야!"
상원이 기겁을 하며 뜯어 말렸다.
"그럼 너냐!"
"아니야! 걔도 아니야"
"그럼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선배한테 그런겁니까"
잇새로 짓씹듯 내뱉은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본능적으로 어깨를 흠칫 떨었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한대 후려칠 험악한 기세였다.
상원은 이 오해를 빨리 풀어야 겠단 생각에 석희의 팔에 힘껏 매달렸다.
"그런거 아니라니까. 너도 알잖아. 나 원래 재수 없는거"
원래 재수없다는 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뱉은 상원의 기백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원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고였어. 사고 100퍼센트 사고"
통화를 마치고 식당입구에 들어섰을때 조석희 눈에 들어선 것은 반찬 찌꺼기를 뒤집어쓴 상원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조석희는 피가 꺼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 식판을 뒤집어 엎어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모습은 종조오 그의 학교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아무리 돈 많은 자제들이 다니는 상류층 학교라 할지라도 동양인에 대한 멸시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영국으로 학교를 옮겼을때,
그에게 어떤 무리가 시비를 걸면서 식당에서 일부러 음식을 엎어버린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석희는 자신에게 음식을 엎은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테이블에 수십차례나 갖다 박는 것으로 존재감을 증명해 이후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런 일들을 겪은 그에게 방금 전의 상황은
완벽하게 따돌림의 현장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멀쩡히 걷던 사람도 내 앞에서는 막 넘어지고 그러잖아. 괜찮아. 가서 씻고 옷 갈아입으면 돼"
자신의 불행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원의 모습에 조석희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못했다.
"누가 그런거예요"
"...고의 아니라니까"
"누가 선배 앞으로 넘어진 거냐고"
조석희가 서늘한 눈을 주변으로 돌렸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한 여학생이 눈에 띄게 얼굴이 하얗게 떠서 몸을 떨었다. 조석희가 들고 있던 식판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저기 ... 죄송"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사과의 말 비슷한 것을 내뱉었다.
"주우세요"
"네?"
"바닥에 흘린거 주워담으라고"
이해하기 힘든 그의 요구에 식판을 들고 있던 여학생의 얼굴이 이번에는 파릇하게 변했다. 상원이 그의 팔을 잡고 그만하라고 나가자고 햇지만 소용없었다.
"빨리 주워 담으시죠"
"아, 예"
여학생이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을 주워 식판위에 담았다. 상원은 그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대체 이 성격더러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상원으로서는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학생이 어느 정도의 음식 잔해를 정리하자 조석희는 식판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 그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눈빛에 상원은 본능적으로 사악한 기운을 느끼고
여학생 앞을 막았다.
얼굴위로 뿌려지는 따끈한 느낌에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승완의 판단도 옳았다.
조석희는 진정, 개새끼였다.
















"그걸 왜 선배가 맞아?"
"그렇다고 여학생이 맞게 할 수는 없잖아"
샤워를 하던 상원이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식당에서 일이 벌어지자 여학생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조석희를 바라보게 되었다.
"선배 착한 것도 그 정도면 멍청한 겁니다"
"어때, 나야 어차피 옷도 다 버렸는데"
당신이 그걸 왜 가로막냐고 길길이 날뛰는 조석희를 간신히 끌고 나왔다. 기숙사 샤워실을 빌려 샤워를 하면서도 상원은 오늘 또 한번
저 인간의 더러운 성격을 목도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본인은 이 정도 일어 꿈적하지 않을 정도로 조석희를 좋아하고 그때 식당에 있던 여학생들은 그 정도 일에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칠 정도로만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서.
사랑도 병이라면 이건 중증이었다.
"...나도 참"
'선배가 왜요?"
샤워실 밖에서 상원의 새 옷을 들고 서 있던 조석희가 물었다. 상원이 아니야 하고 머리를 헹궈냈다.
"아직도 안끝났어요?"
조석희가 불쑥 샤워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알몸을 보인게 한두번이 아닌데도 상원은 이런 상황에서 저도모르게 몸이 움츠려 들었다.
"그, 금방 끝나. 미안 잠깐 더 기다려줘"
기숙사에 사는 동기에게 빌린 샤워볼로 거품을 만들면서 대답했다. 몸을 닦는 와중 따끔한 시선에 뒤를 바라보자 조석희가 샤워실 문 앞에 기대어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잇었다.
"...왜"
어색하게 떨리는 목소리.
"뭐가요"
"아니,,,, 쳐다봐서"
"선배 지금 내가 여기서 하자고 하면 할래요?"
".....!"
들고 있던 샤워볼을 놓치고 말았다. 조석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선배 엉덩이 보이니까 아래가 당기네요"
엉덩이를 가리자니 다리 사이가 문제였다. 사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시선 때문에 상원의 페니스가 반쯤 일어서 있었다.
"나가서 기다려. 바로 씻고 갈게"
"알았어요"
조석희가 순순히 물러나 주자 상원은 속도를 내 몸을 씻었다. 아래를 가라앉히기 위해 차가운 물로 몸을 헹궈냈다.
샤워실 밖으로 나가자 조석희가 들고 있던 수건과 속옷을 건넸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사물함에 옷가지들을 상비해둔다는 얘기를 상원이 했을때 조석희는 가관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가 선배,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상원을 불렀다.
티셔츠에 목을 넣으며 상원이 아무렇지 않은척 대답했다.  그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상원의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주었다.
"선배는 원래 그렇게 재수가 없었어요?"
"...응?"
"태어나면서 부터 원래 그렇게 재수가 없었냐고요"
"...응"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불운을 일부러 입에 담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거 안바뀌는 건가요?"
두사람이 사귈 무렵에 조석희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행운을 나누어주겠다고 말했다. 상원 역시 물기어린 눈으로 그래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하는
자세로 넙죽 엎드렸다.
하지만 바뀐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석희는 여전히 억세게 운이 좋았고 상원은 여전히 더럽게 운이없었다.
"바뀌면 참 좋겠는데 말이지 하하"
뒤따르는 웃음소리가 힘이 없었다. 그건 매해 비는 소원이지만 올해도하늘은 상원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모양이다.
수건으로 상원의 머리를 닦던 그가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혹시나 이번 일로 인해 자신에게 질려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 상원은 덜컥 겁이났다. 조석희가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상원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누, 누가 보면...."
"내가 키스하고 싶어서 하는건데 누가 뭐라 그래요"
그가 이번엔 상원의 반대편 뺨에 입을 맞추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황홀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가 다른 사람의 시선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로 애정을 표현해주는 것은 황홀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원의 머릿속에는 미약하게나마 이성이 흘렀다. 상원이 손을 들어 석희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상해요"
"뭐가 또 이상해"
"선배는 여러모로 저한테 특별하신거 같아요. 아니 특이한 건가"
특별로 해줘. 특별.
상원은 간절하게 앞 단어가 선택되길 바랬다
"아 특이하다가 맞겠군요"
"하하 그렇지 내가 좀 특이하긴 하지"
웃으며 맞장구를 쳐도 웃는게 아니었다. 상원은 반찬 얼룩이 남아있는 운동화를 신었다. 눈에 뛸 정도의 얼룩은 아니었지만 냄새가 나서 석희를 거슬리게
하는건 아닌가 싶어 신경이 쓰였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운동화도 한컬레 더 가져다 나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운동화 끈을 고쳐 매었다.
"상원선배"
조석희가 이름까지 부르자 상원은 바싹 긴장이 되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응 왜?"
"토끼 앞발 하나 드릴까요?"
눈을 두번 깜짝였다. 머리를 긁적거리다 상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토끼까 이렇게 까충깡충 뛰는 토끼를 말하는 거지?"
양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자리에서 껑충 뛰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그런 수고가 아깝지 않게 조석희는 단호한 어조로 네, 그 토끼요 하고 대꾸했다.
"토끼를 왜? 키우자고?"
"토끼를 왜 키워요 냄새나고 더럽게"
"그, 그럼 앞발만 준다고?"
귀여운 토끼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채 앞발을 자르는 조석희의 흉악한 모습이 떠오르자 상원은 오싹해졌다. 조석희가 상원의 턱을 손으로 잡으며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
"설마 제가 그걸 잘라 준다고 생각한건 아니겠죠?"
"...아하하....하하"
잠시나마 상상했던 장면을 재빨리 지워버린 상원이지만 상대방이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똑똑한데 참 멍청하기도 하고, 정말 모르겠단 말이지 선배란 사람"
"별로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아....."
말하고 나니 한층 자신이 더 멍청해진 기분이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불운을 눌러주는...."
"부적같은거?"
"네 그런거요"
상원의 시선이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이제는 그 의미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 조석희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상한거 떠올리지 마세요 선배가 상상하는 그런데 가자는 거 아니니까"
조석희가 나가자고 턱짓을 했다. 상원은 옷을 챙겨입고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나 기독교라서....안되는데"
너른 등에 대고 조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봤자 조석희는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뭔가 생각에 빠진 모양이었다.
부적이란. 어머니가 아신다면 뒤로 넘어가실 만한 일이었다. ....사실 남자 애인 문제가 시급하긴 하지만 아니 대낮에 부적을 써주겠다고 자신을 끌고 가는
남자의 등짝이 멋있어 보이는 자신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렴 어떠랴. 이미 나는 저 등의 노예이건만.
"같이 가"
상원은 부지런히 달려가 성큼성큼 앞장 서 걷는 석희의 옆에 섰다. 뭔가 골몰히 생각에 잠긴 그는 아무런 말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이게 뭐야"
"로또 라고 하죠. 한국에서는"
"알아. 이게 로또인지. 그런데 이게 뭐냐고"
상원은 자신을 학교 앞 편의점으로 데리고 온 상대방의 저의가 지극히 궁금해졌다. 그래서 무례함을 무릅쓰고 두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복권이요 45개 숫자 중에서 6개 고르는 거예요 무작위로"
"알아 그런데 왜 이걸 하려는 거야?"
"부적으로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언제 로또 부적으로 삼는 관습이 생긴걸까. 상원은 멀뚱하게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이 잠겼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조석희는 일부러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편의점 테이블에 마련되어 있는 볼펜을
하나 집어 들고 아무렇게나 번호를 여섯개 골랐다.
"그냥 아무거나 골라도 돼?"
"네"
"나도 해볼까?"
조석희가 상원에게 종이와 펜을 건넸다. 상원이 테이블에 몸을 기대에 고민고민하며 여섯개의 숫자를 골랐다. 상원의 몸이 옆으로 바싹 다가오자 특유의
달큰한 체향이 확, 하고 끼쳐온다.
조석희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상원이 고개를 들어 왜? 하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일부러 쌀쌀맞게 대답햇다. 요즘 계속 이모양이다. 상원이 근처에 다가오기만 해도 아래가 바싹 당겨 다른 생각을 할 수 조차 없었다.
같이 살아 욕구를 원할 때마다 해소하면 좀 낫겠거니 싶었는데 더 심해졌다.
사실 그는 상원이 학교에 다니는 것도 못마땅했다. 원하면 늘 손이 닿는 거리에 있어주길 바랐다.
"다 골랐다"
상원이 웃으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얼굴선이 단정하고 차분한 외모인데 저렇게 웃으면 몇 살은 어려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저런 얼굴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왕따를 당해 우울한 대학생활
4년을 마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얘기해줄까.
"이거 한 게임에 얼마야? 나 두게임 했는데"
상원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 했다.
"됐어요"
조석희가 상원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편의점 카운터로 가져갔다. 만원짜리로 종이 두장을 모두 계산하고 로또 복권을 받아왔다.
"여기요 선배"
"고마워"
복권을 받아든 상원은 신기하다는 듯 종이를 살펴보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거 내거 아닌데? 난 5번이랑 7번이랑..."
"이거요 이건 제가 가지죠"
조석희가 상원이 고른 로또를 자신의 지갑에 두번 접어 집어 넣었다.
"그럼 이건 네가 고른거야?"
"네"
"와 너는 운이 좋으니까 진짜 맞을 수도 있겠다"
상원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가끔 맞아요"
"...뭐?"
"가끔 맞는다고요. 1등은 아니지만 3등 같은건 거의 맞고 예전에 두어번 2등까지 맞추기도 했어요"
"뭐?!"
"1등은 안 되는거 같더라고요. 뭐 2등 해봤자 푼돈이니까"
"푸, 푼돈 이라니 잠깐 잠깐만"
상원이 편의점 벽에 붙어있는 저번 주 당첨 금액을 확인해 보다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거 당첨되면 어떡해 혹시 1등 당첨되면어떡하지"
"안 된다니까요"
"되면....!"
조석희가 상원의 앞에 붙어 있던 금액을 확인하고 픽, 하고 웃었다 .
"한국은 당첨 금액도 쥐꼬리만 하잖아요. 1등이라고 해봤자 얼마 되지도 안는데 뭐"
"저 돈이라면 인생이 바뀔수도 있어"
상원이 정색을 하자 조석희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가 이렇게 크게 웃는 경우는 드물었다. 진정으로 웃기거나 진정으로 상대방이 우습거나......
아무래도 이번에는 후자인 모양이었다.
"설마 순진하게 일이 십억으로 사람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 하는 건가?"
"...."
"걱정마세요 그런 푼돈 생긴다고 바뀔 거 하나 없어"
도련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상원은 자신이 들고 있는 로또 복권이 몇 백 배는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건만,
몇 천만원 혹은 몇 십억을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석희야"
"예"
조석희가 편의점 진열대에서 콘돔을 고르며 대답했다.
"...이게 부적이야?"
"네 제가 써준 부적, 잘 간직하세요 Good luck"
오랜만에 들어본 조석희  Good luck 에 상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조석희가 기분 좋은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상원은 조석희가 고르던 콘돔을 오늘 밤 분명 쓰게 될 것이란 예감을 하며 편의점을 나섰다.








식당사건 이후로 과내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경영대의 성격 더러운 킹카와 함께 식사를 하는 이상원.
상원은 요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여학생들이 부쩍 들었음을 느끼는 중이었다. 쉬는 시간에 음료수를 뽑아주며 갑작스럽게 연락처를 묻는 경우나
과제를 위해 같은 조를 하자는 제안이 유독 늘었다. 개중에는 대놓고 조석희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게 대동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물론 상원은 알아서 자기 선에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상원오빠. 오늘 점심 어디서 드세요?"
여자들은 뭔가 부탁을 할때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을 상원은 요즘들어 알게 되었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얼굴만 간신히 아는 여학생 무리들이
상원을 둘러쌌다.
"글쎄 뭐 아무데서나 먹을 것 같아"
"저희랑 같이 먹으러 갈래요?"
"미얀 선약이 있어서"
상원은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둘러싼 무리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빠, 오빠랑 매일 점심 드시는 분이 그 경영대 다니시는 분 맞죠?"
"...응"
알면서 뭣하러 물을까.
"같은 고등학교 나오신 거예요?"
"...어"
"오빠하고 많이 친하세요?"
"글쎄, 친하다기 보다...."
사귀는 사이긴 하지만, 친하다고 볼 수는 없다. 상원은 늘 그렇게 믿었다. 만약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조석희란 사람하고는 관계를 유지시킬 자신이 없었다.
"야아, 매일 같이 점심 먹는데 당연히 친하겠지, 그렇죠? 오빠?"
이쪽도 갑자기 오빠타령이었다.
"어, 그, 그냥 뭐"
그런데 분명 이쪽은 재수를 해서 나와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저희랑 같이 가시면 안돼요? 그냥 옆에서 밥만 먹을게요"
"아님 옆에서 있다가 그냥 우연히 동석하는건 어때요?"
"...글쎄"
상원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느쪽이라 할지라도 석희가 반가워 할리는 만무했다. 반가워하기는 커녕 싸늘하게 무시할게 분명했다.
그랬다간 이번에야 말로 진정한 왕따는 맡아놓은 당상이었다.
그때 강의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자욱하게 퍼졌다.
"어, 석희....."
"뭐해요 안 나오고"
평소보다 날이 선 목소리였다. 상원은 서둘러 가방을 매고 자리를 나섰다. 여자 동기들의 원망섞인 시선을 뒤로하는게 쉽지 않았지만 상원에게 최우선은 늘
조석희였다.
복도를 걸어가는 조석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상원은 불안했다. 그는 걸음이 빨랐기 때문에 뒤처지면 어느새 놓쳐버릴 것 같았다.
"배고프다 뭐 먹을까"
상원이 앞서 걷는 조석희의 등에 대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오늘 수업없어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후 수업은?"
"휴강 됐어요"
"아, 그렇구나 좋겠다"
"뭐가 좋아요. 휴강됐는데 학교까지 와서 밥 먹고 돌아가잖아. 귀찮게"
".....미안해"
그제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상원은 눈치 채고 얼른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조석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미안 그럼 그냥 오지 말지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혼자 병신처럼 밥 먹는 선배를 두고 나 혼자.... 됐다. 말을 말자"
"...."
미안했다.
밥 먹을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강의실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원은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조석희가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느낌,
돌봐준다는 이 느낌에 중독 되어갔다. 도저히 사실을 밝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뭐 먹고 싶어요"
"응?"
"뭐 먹고 싶냐고 선배"
"그냥 아무거... 헉 아니 김치찌게 먹으러 가자. 김치찌게 오랜만에 그런거 먹고 싶네"
조석희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질색했다. 상원이 파닥거리며 간신히 생각해내는 모습을 보던 조석희가 힐깃 시계를 확인했다.
"선배 공강이 얼마나 있다고 했어요?"
"나? 한시간 정도"
"그럼 집에가서 밥 차려 달라고 하고 한번만 하실래요? 택시로 바래다 줄게"
"안돼! 나, 다음 시간에 퀴즈 있어, 안돼"
공강 시간에 섹스를 했다간 체력저하로 제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을 뿐더러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차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학점과 관련된 퀴즈인데 그걸 백지로 냈다간 전공 교수님께 찍혀 4년 내내 고생할 것이 뻔했다.
"절대 안돼"
이 문제에선 여간해선 양보가 없는 석희였기에 상원은 또 한번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알았어요 그럼 식당으로 가죠"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상원은 상대가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식당으로 들어서서 음식을 받아 올때까지 조석희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을 보고 상원은 그가 조금 화가 났음을 알아차렸다.
"저기 앉아요"
"응"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상원은 소심하게 그가 가리키는 테이블로 갔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석희는 말이 없었다.
상원은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화났어? 나 때문에 화난거야? 그럼 내가 섹스하자고 하면 화풀거야?....구질구질하다.
밥이나 먹자.
그는 부지런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조석희가 식사하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싶었지만 눈이 마주치면 할 얘기가 없었기에
열심히 밥과 반찬만 퍼먹었다. 옆 테이블이 시끄럽다 했더니 어느새 네 명의 여학생이 앉아있었다.
주변에 늘 무심한 조석희는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식사만 했다. 상원은 무심코 옆을 바라보다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왜"
"아,...아니"
상원의 벌어진 커다란 눈이 어느 방향을 향했는지 조석희는 정확히 짚어냈다. 자신이 앉아있는 방향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여자 무리들이
상원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수업 몇 시에 끝나요?"
"...4시"
"데리러 올게요"
그 한마디에 옆 자리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이 다시 수근대기 시작했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갈게 나 잘가. 집"
말해놓고도 그 유치함에 상원은 머리를 쥐어 뜯고 싶었다. 나 잘가. 집. 이라니 유치원생도 아니고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게다가 옆 과 동기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듣고 있는 이 와중에!
"선배 집 잘 오시는거 몰라서 데리러 간다는 거 아닙니다. "
상원은 대답없이 맨밥을 입에 구겨 넣었다. 동기 여자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십중팔구 아는 척을 해올게 분명했다. 아까부터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말을 걸지 못해 안달이 났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데리러 올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그래,., 어"
건성으로 대답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조석희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소리나게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원이 깜짝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밥도 제대로 못먹어, 병신처럼. 그냥 당당하게 먹어요"
"아니 나는 무서운게...."
"애들 때문에 그런거야?"
조석희가 엄지손가락을 옆으로 눕혀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영문을 모르는 과 동기들은 찬스인가 싶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상원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당신들...."
조석희가 긴 다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 순간 상원은 왁, 하고 비명을 질렀다. 상원이 갑자기 기괴한 소리를 내자 조석희가 그쪽으로
언짢은 시선을 돌렸다. 주의를 일단 돌렸는데 어떤 식으로 그를 이자리에서 빼돌려야 할지, 계략에는 재능이 없는 상원으로서는 까막득하기만 했다.
계략을 못 꾸미면 순발력이라도 좋던가. 그렇지 못하거든 거짓말이라도 잘 하든가!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
그러던 상원의 눈이 급작스레 그게 벌어졌다.
"왜 그래요"
마뜩찮은 말투로 조석희가 물었다. 상원은 대답없이 손으로 목을 감싸고 얼굴을 찌푸렸다. 조석희가 한번 더 왜그래, 하고 이유를 다그쳐 물었다.
하얗게 질린 상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편식이 없는 상원이었지만 그가 못먹는 음식이 딱 하나 있었다.
깻잎이 들어간 반찬들이었다. 깻잎 알레르기가 유난히 심해 한입만 먹어도 호흡곤란이 올 정도였따. 옆에 앉은 여학생들이 신경 쓰여 음식에 들어간
깻잎을 보지 못한 것이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왜그래? 선배!!"
부축해주기 위해 조석희가 손을 뻗은 동시에 상원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냉정해 보이던 조석희의 표정에서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켁켁거리며
기침을 하던 상원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조석희가 응급차를 부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희 핸드폰을 옆에 서 있던 학생에게 던졌다.
"선배, 정신차려, 응급차 곧 올거니까! 선배! 정신 좀 차려봐요"
이런저런 사고는 많았어도 튼튼한 체력을 자랑하던 상원이 자신의 앞에서 쓰러지자 조석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누군가 뛰어 들었다.
"나 차 가져왔으니까 내 차 태워"
"됐어 꺼져"
조석희가 김이경의 손을 차갑게 내쳤다.
"선배 병원에 데려다 준 후에 꺼질 테니까 빨리 업기나 해!"
김이경이 소리를 지르자 조석희는 입술을 깨물고 상원을 등에 업었다. 세 사람이 사라지고 난후 남겨진 여학생들은 다음번 발표조는 반드시 이상원과
짜야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했다.
쓸데없는 오해는 갈대밭의 불처럼 번져갔다.










상원의 몸상태와 증상을 살펴본 응급실 의사는 주사를 놓도록 하고 간단한 약을 처방해주었다.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게 나타난 것은 평소보다
면역체계가 약해져서 나타난 증상이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집에서 쉬라는 말을 덧붙였다.
상원은 제 발로 응급실을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자신이 태워다주겠다는 김이경앞에서 조석희는 모범택시를 부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원은 기절한 자신을 태워다 준 고마운 후배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응급실을 나서기 전에 구석에서 조석희와 김이경이 험악한 분위기로 얘기를 나누다가 거의 멱살잡이직전까지 간 것이다.
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냐고 물었다가 조석희가 귀신같은 얼굴로 상원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자신 때문에 석희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아 상원은 마음이 무거웠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조석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상원은 자신이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알레르기로 쓰러진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석희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만 바라보았다.
상원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라 석희의 눈치만 살폈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면서 상원은 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살기를 띠는 조석희의 눈을 마주하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현관에서 상원은 조석희의 등 뒤에 대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는 싸늘하게 돌아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한층 더 미안해진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입안에 들러붙어 있는 말을 쥐어짜듯 내뱉었다.
미안해, 내 실수였어. 괜히 너까지 사람들 이목 끌게 하고  귀찮게 해서 미안해, 자꾸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것도 미안하다.
신발을 벗던 조석희가 물끄러미 고개 숙인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들어오기나 해요. 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차갑게 들려 상원은 운동화 끈을 한참동안 풀어야 했다.











"선배 내일 수업없죠?"
저녁을 먹던 중 조석희가 물었다. 낮 동안 내 말이 없던 터라 불안하게 그의 눈치만 살피던 상원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림받았던 애완동물이
주인의 손길을 타는 듯한 눈빛으로.
"응 없어"
"그럼 집에서 좀 쉬세요"
"안그래도 그러려고"
중간 리포트 준비도 해야 하고 다음주에 있을 쪽지 시험도 공부해야했다. 상원은 학교 도서관보다는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편을 선호햇다.
"저는 내일 볼일이 있어서 늦어요"
"그렇구나"
그는 요즘따라 가끔 저렇게 볼일을 본다고 하고는 나가곤 했다. 무슨 볼일이냐고 물으려다 상원은 그만두었다. 너무 스토커 같이 보이면 큰일이니까.
"친구들이라도 불러서 노세요"
"응"
무심코 대답을 하던 상원은 응? 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친구들 부르라고요. 선배 친구라고 해봤자 그 사람들 뿐이겠지만"
그 사람들. 이라고 말하는 조석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상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끔뻑 거렸다.
"선배들 불러서 집에서 노시라고요"
"집에서?.... 우리 집으로 가라고?"
샐러드를 자신의 접시로 옮기던 조석희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는 자신의 집에 타인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들과 만날때 가끔 불러들이기도 했지만 그게 반복되다 보면 귀찮은 일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집으로 누군가를 부르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 어떤 여자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친하지 않은 타인이 자신의 공간을 휘젖고 다니는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상원과 함께 살면서 정한 제 1규칙이 사람을 부르지 말것, 이었다.
아들이 사는 집 구경을 하고 싶다는 어머니를 상원이 아직까지 부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어머니가 이곳을 구경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석희는 거기에 관해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다.
그런 그가 친구들을 불러도 된다는 허락을 했는데 상원은 고마워하기는 커녕 그 관대함을 축객령으로 이해한 것이다.
"제가 언제 선배한테 나가라고 했습니까. 여기가 선배 집이지 또 무슨 집이 있어요"
"그렇지. 그렇긴 한데.... 친구들 부르라고?"
자신이 알아들은 것이 맞는지 상원은 다시금 확인했다. 이런것은 삼세번을 확인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네"
"...고등학교 친구?"
상원의 고등학교 친구라면 6반 아이들밖에 없었다. 학생회 후배나 선배 중에도 간간히 연락을 하는 애들은 있었지만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상대가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네"
"동석이나 대진이가 오면..... 승완이도 올거야"
승완의 이름이 상원의 입에서 나오자 조석희가 잠시 인상을 구겼다. 이전에 있었던 일때문에 두 사람은 대놓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상원은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승완의 앞에서는 석희의 이름을 석희의 앞에서는 승완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죠 저 오기 전에만 내보내세요"
"진짜?"
"네"
답지 않는 그의 관대함에 상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체 쟤가 뭘 잘못 먹고 저러는 건가.
"왜? 너 걔들 집으로 오는거 싫어하잖아"
"싫어요"
조석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선배가 좋다면 참아볼까 하고요"
"...어?"
상원은 들고 있던 젖가락을 놓쳤다. 입이 쩍 벌어졌다.
"제가 싫어도 참는다고요. 음식물 보여요 입은 다무세요"
조석희가 쌀쌀맞게 면박을 주자 상원은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싫어도 상대를 위해 참는다니 그건 조석희 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상원은 조석희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뭘봐요"
"..."
평소와 다름없이 끝내주게 잘생기고 끝장나게 싸가지 없는 조석희가 맞느데 대체 왜....
"제 방에는 들어가지 마세요. 저 오기 전에 내보내시고요 그정도만 지켜주시면 되요"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나중에 만나도..."
"만나세요"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권유형의 어미였지만 그속에 담긴 명령의 의미를 상원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집 밖에서 만날게"
사실 아직 친구들에게 조석희와 산다는 말은 하지 않은 그였다. 그저 집에서 나와 산다고만 살짝 흘려놓은 상태였다.
"몸도 아픈 사람이 밖에 왜 싸돌아 다녀요 됐어요"
"..."
"음식준비는 아주머니께 말해놓을게요 올때 선배가 좋아하는 샌드위치 사다줄게요"
"...응 고마워"
찜찜하긴 했지만 일단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조석희가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상원이 식탁앞으로 상반신을 내밀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쪽하고 입 맞추는 소리에 상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식사 끝나시면 후식으로 뭘 준비해드릴까요"
조리대에서 음식을 정리하던 아주머니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가 먹고 싶냐고 조석희가 상원에게 물었다.
상원은 아무거나 다 좋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는 과일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상원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다른 사람 앞에서 키스를 한 부끄러움보다 조석희의 목소리가 세상의 어떤 과일보다 더 향기롭다는 생각이 앞선 것이다.
이러다가 이내 상사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문득 드는 어느날이었다.









집으로 초대했을때 세사람의 반응은 제각각 이었다. 대진은 텔레비전 화면의 인치수를 물은 다음 오케이를 했고 승완은 거기에 술이 있는지 확인했고
동석은 음식이 있으면 가겠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 모두 정오 쯤에 상원이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오기로 약속이 되었다.
옆구리에 세제를 끼고 나타난 승완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괴상한 감탄성을 날렸다.
"흐에엑, 이건 뭐야. 이 집은 대체 뭐야?"
신발을 벗던 대진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집안 내부를 둘러보았고 동석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상원은 승완이 내미는 세제를 받아 들였다.
"이런 걸 왜 사왔어. 괜찮은데"
"집들이 한다는데 당연히 사와야지. 집들이 맞지?'
"하하하 그런가?"
상원은 애매한 대답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가 진짜 네가 사는 하숙집이냐? 집 주인이 누군데 이런데 하숙을 놔? 이런 집에서 살면서 돈이 궁할 리도 없을텐데"
가끔 쓸데없는 부분에서 날카로운 감을 발휘하는 승완이었다.
동석이 상원을 힐끔 쳐다보았다. 눈썹을 찡그린채 어색하게 웃는 친구의 모습에서 진실을 읽어내릴 수 있었다. 집에서 나와 산다고 했을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사실을 눈으로 보게 되니 입맛이 썼다.
"하숙이 아니고 그냥..음..."
"한승완 병신아. 서울대생이니까 나라에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자취하게 해주는 거잖아. 그런 것도 모르냐"

대진이 가방에서 태그도 붙어있지 않은 씨디를 주섬주섬 꺼내며 아는척을 했다.

"오, 그런가. 역시 일류대학생이라 나라에서 지원도 해주는 거야? 존나 장난 아닐세"
"서울대는 역시 다르군"
"...."
듣도 보도 못한 정책론이었다.
"술이다! 술이 잔뜩 있어"
냉장고 문을 연 승완이 신이 나서 외쳤다.
"야아 존니스트 비싼 맥주가 잔뜩 있네. 크어 이건 또 뭐야 와인인가?"
"그거 내 거 아닌데...."
맥주야 상관없지만 와인가격이 어느정도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곤란했다. 평범한 사람과 경제관념이 다른 조석희였지만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특히 한승완이 자신의 와인을 마셔버린 것을 알면 얘기는 달라진다.
"집 주인거야? 조금만 마실게 조금만"
손이 빠른 승완이 잽싸게 글라스에 와인을 부으며 말했다.
"상원아 이거 화면 죽이는데? 장난아니다!"
대진이 자신이 가져온 씨디를 DVD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시킨 모양이었다. 거실안에 간드러지는 여성의 교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동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냉장고를 뒤져 음식을 한아름 안고 소파에 앉아 대진과 함께 동영상을 관람했다. 승완은 연신 괴성을 지르며 이술 저술 맛보았다.
가격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가죽소파에는 음식물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뭔가 말하려던 상원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어차피 말을 한다고 들을 인간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와 놀라고 조석희가 발언한 시점에서 이미 끝난 문제였다. 애당초 무슨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한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나도 이제"
상원은 석희가 평소보다 늦게 오길 바라며 동석의 옆으로 가 앉았다. 승완이 술잔을 쟁반에 담아와 세 사람에게 돌렸다.
"나 저녁에는 일이 좀 있어서 못 마실 것 같아"
상원이 유하게 거절했지만 승완은 코웃음을 쳤다. 저녁에 일이 있는것은 너뿐만이 아니라고 일언지하에 상원의 말을 날려버렸다. 상원은 하는수 없이
술잔을 받아들었다.
"내가 요즘 빠져있는 여배우인데 가슴 열라 빵빵하지 않냐? 내가 점찍으니까 역시 조금 있다 바로 뜨더라고 흐흐"
대진이 화면에서 요염하게 뽐내고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꼭 여기까지 와서 그걸 봐야겠냐. 미친놈아"
"어때 내 완소 영상인데 남의 취미생활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라고 아 시발 존나 꼴린다"
대진이 화면 속에서 뒤엉켜 있는 남녀를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동석이 뒤에서 그런 대진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 갈겼다. 대진이 뒤통수를 붙잡고
동석에게 흰눈을 흘겨 떴다.
"에이 대진이 취미잖아. 남들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닌데 뭘 공공장소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볼걸"
"...저놈은 보고도 남지"
"헉, 설마"
"헤헤, 헤헤헤헤"
대진이 멋쩍은듯 웃으며 그 사실을 시인했다.
"으악 안돼 너 그런거 공공장소에서 보다 잡혀가. 교실에서 보는거와 차원이 다르다고"
상원은 기겁을 했다. 친구의 기괴한 취미를 이해하기까지 쉬운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저마다 특이한 취향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대진을 이해하기로 한 그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걱정마 여자있는데선 안보니까. 그 정도 상식쯤은 있다고 에헴"
"애초에 상식이 있으면 그런건 혼자 있을때 보라고. 이 변태새끼야!"
동석이 구박을 해봐도 대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니네 그 소식 들었냐?"
자신에게 돌려진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 했는지 대진이 대뜸 화제를 돌렸다.
"무슨 소식?"
과자를 통째로 입안에 털어 넣던 동석이 무심한 어조로 대물었다.
"뽀순 퀴 사망소식"
"컥-!"
웬만한 일에는 흥분하는 법이 없는 동석이 과자가 목에 걸려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소리야? 뽀순 퀴가 왜 죽어? 성동이가 금이야 옥이야 키우고 있는거 아니야?"
승완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최성동은 6반의 사육담당이었다. 대진이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말마라. 그새끼가 뽀순 퀴 살라고 목재로 집까지 만들어 줬잖아. 그런데 퀴년이 집에서 탈출해서 바퀴벌레약을 집어 먹었나봐. 쯧쯧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니 좀 짠하지"
"아! 시발 바퀴벌레 키우는 주제에 바퀴벌레 약은 왜 설치해! 왜!"
"애완 바퀴랑  그냥 바퀴랑 같냐. 천지차이지 하, 그나저나 인생허무하군. 뽀순 퀴 3층 집 마련했다고 성동이 싸이에 사진 올라왔던게 어그제 같은데"
"아 기분 진짜 더럽다. 술이나 좀 줘"
"...."
상원은 이들에게 뽀순퀴가 천수를 누리다 가다 못해 최고의 호사를 누리다 갔다는 얘기는 평생 못하겠구나 싶었다. 동석이 가장 속상해하며 술을 언거푸 마셨다.
"그래서 장례는 언제한데?"
"다음주에 모인다던데 다들 갈거지?"
"당연히 가야지. 무슨일이 있어도 다들 와"
승완이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엄숙하게 말했다. 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가도 되려나?"
"그럼 넌 그럼 6반 아니야?"
6반으로서 졸업장을 받지 못한 것이 상원은 이내 맘에 걸렸다. 하지만 6반 졸업생들은 상원을 당연히 자신의 반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답잖은 소리 집어치우고 너도 꼭 와"
"그래 알겠어"

다른 친구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지만 그래도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던 반의 애완곤충의 사망소식에 상원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특히 뽀순퀴는
그에게 이런저런 사연들을 안겨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성동이는 다른 바퀴 분양 받는대?"
"아니 세상에 뽀순 퀴 만한 애는 없다고 다시는 바퀴벌레는 키우지 못할 거래"
"하긴 그렇겠지"
상원이 힘없이 맞장구를 치자 대진이 뭐가 생각났는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넌 뭐가 좋다고 웃고 자빠졌어!"
"상원이도 바퀴벌레 키우고 있잖아"
"뭐? 바퀴벌레? 이 집에 바퀴벌레가 있다고?"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 상원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대진이 손을 흔들며 아니, 하고 말을 잇는다.
"그 바퀴 말고 조석희말야. 빨리 발음하면 서퀴, 바퀴랑 비슷하잖아. 크크크"
"하하하하"
"푸하하하하!"
"사람 이름 갖고 그러지마"
괜스레 얼굴이 빨개진 상원이 친구들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소용이없었다. 특히 한승완은 숨이 멎을 정도로 격렬하게 웃으며 온몸을 떨었다.
"크하하하 서퀴바퀴 으하하하하 서퀴, 바퀴..... 크하하하하 존나 잘 어울려"
"한승완 너도 참..."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는 친구들을 보며 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려봤자 이제 그들 사이에서 조석희는 서퀴바퀴로 불리게 될게 자명했다.
"아 서퀴바퀴 존나 싫어. 보기만 하면 밟아 죽이고 싶어"
"...."
"에이 아무리 그래도 밟아 죽인다가 뭐냐. 알터진다. 그냥 태워 죽여라"
동석까지 거들고 나서자 상원은 옆에 치워주었던 술잔을 들어 조용히 들이켰다. 친구들에게 이 집에서 조석희와 함게 동거중이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가슴이 막막해져왔다. 술이 자신의 시름을 덜어주고 용기를 더해주길 바라며 상원은 언거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상원아 일어나봐 . 이상원!!"
상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떴다. 언제 잠이 든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술을 마시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놓은 것이다.
"어. 왜그래"
술때문에 부운 눈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상원이 물었다.
"...저거 말려라"
동석이 가리킨 곳에는 승완과 조석희가 살벌한 기세로 대치 중이었다.
"으악!"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상원이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석희가 오기 전에 친구들을 돌려보낸다는 것이 술에 취해 그대로 잠이 들어 이지경이
된 것이다.
"이새끼 니가 여길 왜 나타나냐고"
한승완이 지금이라도 당장 짓이겨 죽여 버릴 것 같은 기세로 말했다. 조석희가 한승완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
"제가 여기 나타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여기가 상원이 자취집이지 왜 너네 집이냐고! 이 개 씨부랄 바퀴벌레 같은 놈아!"
조석희의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원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 바퀴벌레 같은 인간의 집에서 참 오래도 계시는 군요"
동석은 역시, 하고 혀를 찼다.
"어? 뭐라고?"
하지만 이해력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승완은 방금 전 말이 어떠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동석이 그런 승완의 어깨를 툭툭 치고
귀엣말을 속닥거렸다.
"뭐! 무, 무슨 소리야. 됐어! 말도 안돼!"
승완이 애써 사실을 부정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상원과 눈이 마주쳤다. 하얗게 질린 상원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야! 그럴리 없어!!!!"
승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조석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이새끼 어떻게 우리 천사같은 상원이를 꼬여낸 거야 대체 무슨 협박을 해서 그런거냐고"
"승완아 그런거 없어. 협박같은거 안했어"
상원이 깜짝놀라 외쳤다. 옆에 서 있던 눈치 없는 대진은 동석을 흔들며 아까 귀엣말 한게 뭐냐고 끈질기게 물었다.
"제가 무슨 협박을 했다는거죠"
"시발 무슨 비디오라도 찍어서 협박하는거 아니냐고! 그러지 않고서 저 착하고 순진한 애가 왜 너랑 같이 살겠어!"
"어! 상원이랑 조석희가 같이 사는거야? 진짜?"
시조새 파킹하는 수준으로 대진이 뒷북을 울렸다.
"협박은 하지 않았지만 비디오는 하나 찍어두긴 했죠"
"뭐?"
"뭐라고?"
"진짜?!!"
이번엔 상원도 같이 놀랐다. 조석희가 상원을 보고 말했다.
"왜요? 보고 싶으세요?"
"아니 보고 싶은게 아니라....."
"농담이에요 선배"
조석희가 삐뚤어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웃는 얼굴 한번에 심장이 화끈 달아오른 상원은 한손으로 가슴 부근을 꾹 누르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노,농담이라도 그런 농담은 하지마"
"맞아 씨발 하지마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으니까. 이 개새끼야"
비디오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 승완이 다시 분노를 불태우며 외쳤다.
"감히 어디 순진하고 착한 우리 상원이 한테 그따위로 더러운 농담을 지껄이고 지랄이야. 시궁창 같이 더러운 새끼가! 시발"
"순진하고 착하다라"
조석희가 하얗게 질려 있는 자신의 애인을 힐긋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착한 것은 맞는데 선배님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진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거야"
승완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이상원이라는 인간은 순진무구함 그 자체였다. 딸내미의 타락을 믿는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듯이 그는
상원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을 조석희는 천잡한 단어를 사용해 박살내기 시작했다.
"선배가 제 좆을 얼마나 맛있다는 듯이 빠는줄 아세요?"
"...!"
"...!"
"석희야!"
거실에 있던 세 사람 모두 기겁을 했다. 윤대진만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좆이 무슨 맛이냐고 질문을 던졌다가 정신을 차린 동석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다.
"뒤로 박아주면 엄청 느끼면서 음란한 소리를 낸다고요 몇 번이나 박아달라고 조르면서...."
"닥쳐 ! 이새끼야!"
한승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뒤엉켜 싸웠다. 상원이 기겁을 하며 떼어놓으려 했지만 조석희도 한승완도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김동석!"
상원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동석은 싸늘한 표정으로 팔짱만 끼고 서 있을뿐이었다.  엔간해선 상원이 곤란한 상황을 지켜볼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번 만큼은 조석희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안되겠다고 생각한 상원은 얻어 맞을 것을 각오하고 승완의 팔에 매달렸다.
"참아 한승완"
그나마 승완이 말이 통할 거라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상원의 바람을 말끔하게 배신했다.
"왜 나를 말려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이 없는 승완이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자 상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누구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매달리는 겁니까?"
이번엔 조석희도 세모눈을 치켜뜨자 상원은 거의 패닉상태에 빠졌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한승완과 조석희 모두 발끈하게 만든 것이다
"이거 놔"
매몰차게 말하며 승완이 무섭게 손을 뿌리쳤지만 상원은 놓지 못했다.  상원의 그런 행동은 승완뿐만 아니라 조석희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선배 그 손 놓으시죠"
"안돼 그럼 둘이 또 싸울거잖아"
"냅둬. 그럼 내가 싸우면 되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김동석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돌발상황이었다. 두사람을 막아낼 능력이 없는 상원은 이번엔 조석희 앞을 가로 막았다.
"하지마 진짜 왜 그러냐 니들"
"왜그런지 몰라서 이래? 이 멍청한 자식아!"
김동석이 사납게 인상을 쓰며 소리 질렀다.
"상원선배 비켜"
"너도 참아 도대체 왜그래"
어쩌면 이쪽이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조석희를 말려보았다.
"저 새끼가 마음에 안 드니까 그런거죠. 아시면서 왜 묻습니까"
"뭐? 저 새끼? 이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동석아 제발 승완이 좀 말려줘"
....그럼 이쪽이려나.
"싫다니까 시발"
동석도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는 상황이었다.
"나가 너희들 나랑 나가서 이야기하자"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해 내린 결론이었다.
"너랑 얘기할게 뭐있어. 난 저 씨발놈하고 볼일이 있는건데"
"나가라니까! 일단 나가!"
상원이 자신들에게 목청을 높히자 한승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쁘다. 예쁘다. 우쭈쭈쭈 키운 딸내미에게 아빠는 상관하지 마세요, 라는
한방을 맞은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야 가자"
동석이 승완의 팔을 끌었다. 그러나 승완은 두눈 부릅 뜨고 상원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는 오늘 두번 연거푸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배신을 당한 것이다.
"나가자고 상원이가 꺼지라잖아"
"동석아 그게 아니라...."
"됐어 나는 갈거다. 한승완 병신처럼 계속 거기 서 있던지 마음대로해"
동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으로 나갔다. 눈치를 살피던 대진은 자신이 가져온 씨디를 챙겨서 동석의 뒤를 따라 나섰다.
"이상원"
승완이 친구의 이름을 차분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 지금 나가는데...너 계속 여기 있을거면 나 너 안본다"
"뭐?"
"간다"
한승완이 소파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나갔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상원은 친구들 뒤를 쫒아가려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조석희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어딜가요"
"잠깐 나가서 얘기를 좀...."
"무슨 얘기? 나랑 헤어질 테니까  그 꼴같잖은 우정 지속하자는 얘기 하시려고?"
"아니야 그런얘기를 왜 해"
"그럼 나갈 필요 없어 어차피 저 녀석들이 바라는 얘기는 그거고 선배는 그런 얘기 안할 거니까"
"잠깐...나갔다 올게"
상원이 신발을 신었다. 등 뒤에서 조석희가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선배 지금 날 두고 가겠다고요?"
"...같이 나갈수도 없잖아"
그렇게 대답하는 상원의 목소리에 손톱옆에 돋은 거스러미 같은 까칠함이 묻어났다. 조석희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확한 뜻은 몰라도
저것이 욕설이라는 것쯤은 상원은 짐작할 수 있었다.
"화났어?"
"...응"
짧은 물음에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조석희는 입을 다물었다. 상원은 다녀온다고 말을 남기고 현관 밖으로 튀어 나갔다. 문이 닫히는 동시에 조석희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봉투를 던져버렸다. 상원에게 주려고 사온 샌드위치가 바닥에 흩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상원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친구들이 화가났을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그들은 몇 배나 싸늘했다.
특히 김동석은 말도 못 붙일 정도였다.  그새끼랑 헤어지기 전에는 우리한테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그딴 취급받으면서 사귀는 너라는 놈도 다시보게
되었다고.
승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대진은 눈치를 살피며 술을 따랐다.
상원은 입을 다문 채 죄인처럼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에게도 자존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 앞에서 그런 취급을 받았으니 당연히 화가 나고
속도 상했다 아무리 반이 달라다고 해도 직속 선배인데 후배인 조석희가 욕설까지 퍼부은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라고 상원도 동감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로 조석희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이냐? 그건 또 아니었다.
어떻게 사귀게 된 석희인데. 내 평생 한번 온 행운인데.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랑인데.....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다.
네사람은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에야 술집에서 나와 헤어졌다. 멀어져가는 길에 동석은 몇번이나 좆석퀴 새끼랑 헤어지라고 소리 질렀다.
상원은 힘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왔다. 현관에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그는 드라마에서 봤던 부모나 집안이 반대를 하는 연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친구들의 반대에도 이렇게 골머리가 아픈데 실제 부모님 문제까지 뒤엉키면 정말 장난이 아닐텐데.... 아니 거기까지 생각했다간 머리가 터질테니까 일단 보류
석희와의 교제후 처음으로 현실문제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거실에 널브러진 유리조각을 보고 뒷덜미가 싸늘해졌다.
이 난장판을 벌여놓은 인간과 오늘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하는 입장이었다.
"휴....."
늦은 시간에 청소기를 돌릴 수도 없어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찾다가 상원은 포기했다. 자신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텐데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는 집주인
얼굴을 보러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 왔어"
상원은 조석희가 사용하는 방문을 열었다. 거실을 진창으로 만들어 놓고도 조석희는 침대에 느긋하게 누워 책을 읽고 잇었다.
"늦으셨네요"
"응 조금
"무슨 얘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셨어요"
"...즐거울 리가 없잖아"
대답해 놓고 상원은 괜한 말을 한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저 성격 더러운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진 것이다.
"그래요 그럼 가서 주무세요"
돌아온 산뜻한 대답에 상원은 눈을 치뜨며 방금전 들은 소리가 맞는지 뺨을 긁적였다. 조석희가 왜 나가지 않는냐는 듯이 고개를 들어 상원을 바라보았다.
"너는 안자?"
두 사람이 동거 후에도 조석희의 불면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상원을 끌어안아야지만 잠이 들었다. 상원의 방에 침대가 놓여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거의 석희가 사용하는 침대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그것은 암묵적인 룰이었다.
"이것저것 할게 좀 있네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조석희가 대답했다.
"그럼 가서 잘게 잘자"
"잘 자요"
느릿한 발음이 달콤한 굿나잇 인사를 날렸다. 문밖을 나가면서 거실의 참상을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면 아까전에 벌어졌던 일을 믿지 못할 것이다.
작은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나서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정신적 피로 때문인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방문 열리는 소리가
상원의 귓가에 새어 들어왔다.
침대의 한쪽이 기울어지는게 느껴졌다. 눈을 떠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잠을 떨치는게 어려웠다. 상원은 비몽사몽 몸을 뒤척였다.
시트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는건가 생각했다.
조석희는 잠이 올때까지 상원을 끌어안고 있는게 보통이었다.
상원은 습관적으로 자리를 내주었다. 화가 난 것은 화가 난 것이고 끌어안겨 자는 것은 자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상원은 조석희가 하는대로 몸을 두었다.
하지만 뒤이어진 남자의 행동은 상원을 단박에 정신차리게 하기 충분했다.
"...!!"
놀란 상원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뒤에서 조석희가 그대로 어깨를 눌렀다.
"가만히 있어요"
"...잠깐만"
시트 안으로 손을 넣어 속옷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단단한 양물감이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도된 삽입에 상원의 몸은 반사적으로 경직되었다. 뒤에서 상원의 어깨에 손을 얹고 허리를 움직이던 조석희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힘, 빼요 너무 조이잖아"
마치 이 모든 것이 상원의 탓이라는 어투였다. 숨을 내쉬어 긴장을 풀려하는 상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석희가 다시 허리를 추어올리며  살덩이를 밀어넣었다.  뻑뻑하게 벌어지는 감각에 두 사람 모두 호흡이 거칠어졌다.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는 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삽입을 그만 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늘 참아냈다. 참아내는 것은
자신의 본분이라도 되는 양, 무리를 해서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 했다.
"아...으"
삽입이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거기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굵직한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쾌락보다 고통이 앞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조석희는 남아있던 살덩이를 끝까지 밀어넣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린 아래에서 피가 혈관을 타고 팔닥팔닥 뛰었다. 삽입만으로도 상원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여 달라는 최소한의 예의를 상대에게 요구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조석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퍽 허리를 쳐올렸다. 그 바람에 힘이 빠진 채
늘어져 있던 상원은 침대에 고개를 박고 엎드린 자세로 쓰러지고 말았다. 무자비한 추삽질이 이어졌다. 팽팽하게 힘줄이 돋은 성기가 상원의 하얀 엉덩이를
출입할 때마다 조석희는 목구멍안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새어져 나왔다. 그래도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으....아..!"
남자 하나가 눕기에 알맞은 크기의 싱글 침대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평소라면 귓가에 음란한 말들을 지껄이며 수치심을 느끼게 했을 조석희가 이상할 정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게다가 그 침묵을 보충할 요량인지 그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흉포한 기세로 허리를 놀렸다.
아래로 찍어 내리듯 조석희가 추삽질을 거듭하는 덕분에 상원은 베개에 턱을 묻은 채 호흡도 간신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흡곤란으로 발끝이 무너져 내리고 머리가 핑 도는 감각에 두려워진 상원은 침대 헤드를 움켜 쥐었다.
"ㅡ시발"
뒤에서 들려오는 한국어 욕설과 함께 내벽 안으로 뜨거운 액체가  울컥 쏟아져 들어왔다.
영어로 욕을 해도 멋있고 한국어로 욕을 해도 끝내주게 섹시하게 들리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다시 침대가 끼걱거리며 흔들렸다.









"그만둬요"
"...응?"
"그만두라고요"
3번의 연이은 사정으로 녹초가 된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려고 머리를 굴려보았다. ....답이 안나오는 인간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상원은 혼자 고민하다 오답을 내느니 솔직하게 묻는것이 낫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거 그만두시라고요"
"..."
침묵하는 상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조석희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선배가 쓸쓸해할까봐 부르라고 한건데 그냥 그만둬요"
"그래...생각해준건 고마운데"
어쩐지 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당신을 위해 참겠다는둥, 친구를 집으로 불러와도 된다는 둥, 그런말을 들었을때 감동보다는 두려움이 우선이었다.
대체 얘가 왜이렇게 내게 잘해주는걸까. 죽기전에 사람이 변한다던데, 저러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님 헤어지기 전의 친절이라던가.
"그 꼴  못 보겠어. 기분 더럽다고"
"...."
그나마 지금은 원래의 싸가지 상실 버전이라 그의 꿍꿍이를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게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냥 다른 거랑 놀아요"
원체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조석희는 사람을 사물화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강했다.
"다른거라니... 친구들 말고 누구랑 만나라고"
안그래도 친구들에게 이 인간과 끝내지 않으면 절교를 하겠다는 선언을 듣고 온 뒤었다. 그런데 이쪽에서도 절교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거"
"...."
"내가 해줄게 다른거 아무트느 그 인간들 만나지 마요. 진짜 싫으니까"
...그 인간들도 너 싫데.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키며 상원은 몸을 반대로 돌렸다. 조석희 등 뒤에서 끌어 안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하고 왔어요"
"별 말 안했어"
정말 별다른 말이 오간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있다가 왔어요"
잠시 친구들을 만나고 오겠다고 하고 나간 상원이 돌아오지 않자 조석희는 처음에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후에 고개를 든 감정은 불안이었다.
응급실에서 김이경이 한말이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굴길레 저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기절까지 하는거냐. 숨통을 쥐고 아주 사람을 잡아 족치는구나. 그런식으로 해라. 선배가 너한테 질려서
나가 떨어지면 내가 그때 바로 낚아채 버릴 테니까.
응급실 안이니 신경쓰지말고 반 죽여 놔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들었을때 창백하게 질린 상원과 눈이 마주쳤다  조석희는 자신을 보며 이죽거리고
있는 김이경에게 다시한번 그런소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마디 해주었다.
조석희는 자신의 품에 안겨져 있는 상원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요즘따라 골격이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왕따까지 당한다는 말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럴수도 잇고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빌미로 상원을 자신의 옆에 묶어 둘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숨통은 좀 틔어주자 싶어 기분은 더럽더라도 선배들 그 밥맛없는 한승완까지 포함해서 초대를 허락한 것이다.
나름 배려심을 발휘해 저녁늦게 샌드위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상원은 술이 취해 자고 있고 윤대진은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양 포르노를 생중계하고 있었으며
김동석과 한승완은 장식장의 술까지 꺼내 마시고 있었다.
없는 관대함을 긁어모아 그것까지는 참아 넘긴다 하더라도  한승완이 자기가 뭐라고 상원을 싸고 도는 꼴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상원이 한승완의 팔에 매달리는 모습을 본 순간 머리가 아플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상식선에서 상원에 대한 빌어먹을 승완의 감정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섹슈얼적인 감정이 섞여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친구를 위해서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다는 것은 상식선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니까.
지독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원에 대한 주변의 속절없는 비호도  그걸 허용하는 상원의 우유부단함도.
"선배"
"응"
상원이 기계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속없어 보이고 일편단심인 사람이지만 돌아설 때는 가차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이미 한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강단있는 성격이다. 이상원은.
"선배"
여전히 상원은 몸을 돌리지 않고 왜 하고 대답한다.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나갔으면 그나마 불안이 덜 했을텐데 급히 나가느라 손에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들어와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방문을 열자 조석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구태여 스트레스를 받게 하기 싫어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침대에 기대어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스트레스를 받건말건  저 인간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이곳에 있을거란 확신이 필요했다. 조석희는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던지고 상원의 방에 들어와
잠들어 있는 그의 속옷을 끌어내리고 다짜고짜 섹스를 시작했다.
"선배 나랑 살아요"
"어? 무슨 소리야. 살고 있잖아"
갑작스런 발언에 상원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가련한 모습을 보면 측은지심이 들어야 하는데 아래가 바싹 당겨옴을 느꼈다.
나라는 인간도 어지간 하구나.
그는 상원의 양팔을 들게 한후 바짝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댔다. 잔인한 욕망을 부추기는 냄새였다.
조석희가 일어서기 시작한 자신의 사타구니를 상원의 몸에 비비면서 한껏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곤란한 듯 상원이 이마를 찡그렸지만 별다른 거절의 말은
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냥 가둬놓고 학교에도 보내고 싶지않았다.  조석희에게도 티끌만한 인간성이 존재하기에 상원이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자신하고만 밥을 먹고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 썩 나쁜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아 음식하나 잘못먹었다고 기절할 정도라면 그냥 두고 볼 문제가 아니었다.
조석희는 자신의 팔안에 안겨있는 상대를 위해 차선책을 강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기주의의 절정체이자 안하무인의 완성판인 조석희가 아니면 말고, 라는 제멋대로의 신념을 누르게 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책상에 앉아 노트정리를 하고 있던 상원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무언가에 눈을 부릅 떴다.
"받으세요"
",,,어?"
"선배 거요"
조석희가 다시 상원에게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상원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긴 했지만 대체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가늠도 하지 못했다.
"대체 이게 웬 강아지야"
하얀 털뭉치 같은 강아지였다. 강아지라고 부르기엔 몸집이 좀 크긴 했지만 일단은 개수준으로는 온전히 성장하지 못한 생명체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강아지를 안고 있던 상원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키우시라고요 이거면 심심하지 않을거예요"
"....."
"선배 심리상태에 도움도 되고"
"......아하하"
강아지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 우울증 환자나 자폐아 아동에게 치료의 일환으로 사용된다는 상식정도는 상원도 알고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은 자신이 대체 어느 쪽에 속하는지여부였다.
"앞으로는 얘한테 정붙이세요"
아무래도 조석희는 이 강아지 한마리가 상원의 친구들을 대신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모양이었다.
아아, 석희야 대체 넌 심성이 왜 그모양인거니.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머릿속이기에 친구 대신 개를 키우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니.
"잘 키우세요"
"나 개 키워본 적 없는데"
상원이 조심스럽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어렸을 적에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샀다가 처음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 이후에 -그것도 자연사도
아닌 병아리의 탈출로 인한 교통사고사였다.- 상원은 다시는 애완동물을 키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무언가에 남다른 애정을 주었다가 죽음으로 그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걸 메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 배운 것이다.
"잘됐네 이번에 키워보면 되잖아"
조석희가 개털이 붙은 재킷을 벗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넌 개 키워봤어?"
"네 몇 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비인간적인 평소의 행각을 비추어볼때, 애완동물을 키운다든가 하는 과거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진짜? 우와 안 믿기는데"
상원이 자신의 품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강아지의 털을 손바닥으로 쓸어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조석희가 개를 몇 번 키워봤다하니 아까보다는
불안감이 많이 줄어들어싿.
"무슨 종으로 키웠어?"
"개요"
"...그러니까 무슨 종"
"글쎄 잘 모르겠는데 갈색 털이었던가"
이래야 조석희지.
그가 자신외의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 천하의 조석희가 자신을 위해 이런 방법까지 생각해냈다는 것이 어뚱하긴 해도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귀여워요?"
"...?!"
"그 개새끼 귀엽냐고요"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상원의 품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강아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의 생각이 들킨것같아 얼굴을 붉혔던 상원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무, 물론 귀엽지. 찹살떡 같잖아"
하얀 털 때문에 찹살떡 같아 보이는 점도 귀여웠지만 분홍색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고 있는 모습이 흡사 웃는 것 같아 보여서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났다.
"이름 지어 주세요 선배 개니까"
이미 자신의 개로 낙점이 된 모양이었다. 상원은 눈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쉰후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암컷이야?"
"아니 수컷"
상원이 으음 하고 고민에 빠졌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상희는 어때?"
"설마 선배이름 한글자 제 이름 한글자 따서 개새끼한테 붙이자는건 아니겠죠?"
"아하하하 노, 농담이지. 네 이름을 어떻게 갖다 붙여"
사실 석희를 짝사랑 하던 시절의 상원은 절세의 미녀로 다시 태어나 그와 결혼하게 된다면 자식의 이름은 상희나 석원이로 짓겠다는 즐거운 망상을
하곤했다. 상원은 다시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아 생각났다."
"뭔데요"
조석희는 자꾸 자신에게 달라붙으려고 앞발을 바둥거리고 있는 강아지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대꾸했다.
"뽀순 멍"
".... what the fuck...."
잇새로 나지막하게 터져 나온 욕설에 상원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당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데려온 강아지가 또다른 스트레스거리가
되면 안되겠다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 그걸로 해요"
"아니 다른걸로..."
"그걸로 해요 뽀순 멍"
조석희는 이백만원 가까이 주고 데려온 개에게 빌어먹을 정도로 촌스런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했다.
뽀순멍이 조그만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상원의 배에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 귀여운 애교에 넘어간 상원이 어색한 손길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석희의 입가에 근사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실종되었다. 원체 잘 웃지도 않는 인간인데 웃음기가 멸종한 것처럼 사라져버리자 집안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그럼안돼! 뽀순 멍아!"
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테이블 위에 쌓여있던 장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조석희가 말없이 성큼 걸어가 한손으로 뽀순 멍의 목덜미를 들어올렸다. 상원이 석희의 손에서 얼른 강아지를 빼앗아 안았다.
"주세요 버릇 고쳐야지"
"아직 강아지잖아. 애기니까 말로 타일러"
"어릴 때 두들겨 패야 기억에 남을 거 아닙니까"
어릴때 한번도 두들겨 맞아본 적 없는 사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신빙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상원이 필사적으로 강아지를 끌어안았다. 뽀순멍이 석희의 신발에 똥을 쌌을 때 그는 매섭게 강아지 등짝을 후리쳤다. 그 광경을 목격한 상원은
조석희가 개를 키웠다는 얘기 자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성격 나빠져 때리지마 안돼"
강아지에게 훈련을 시키려면 돌돌 만 잡지나 신문으로 코를 치는정도가 적당했다.
이 얘기를 조석희에게 했을때 그는 어디보자 하면서 400페이지에 가까운 올 컬러 화보 잡지를 말아 가져와 내리치려 했다.
의문이 확실시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상원은 조석희가 뽀순멍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기겁을 하며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조석희의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버릇없는 개새끼가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것도 마음에 안들었는데 상원이 그 강아지를 감싸고 도니 속이 뒤틀린 것이다.
상원이 자신을 안아주자 신이 난 뽀순 멍이 혓바닥으로 주인의 목덜미를 핥았다.
"아하하 간지러워 하지마"
상원이 웃으며 뽀순 멍의 목덜미를 손으로 긁어주듯 털을 훑어주었다. 그러자 뽀순멍은 아까보다 더 격하게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선배"
"하하하....어?"
강아지와 눈을 마주치며 장난을 치느라 대답을 한박자 느리게 돌아온 것도 조석희의 심기를 거슬렸다.
"확실히 닦아 개새끼 침냄새 맡게하지 말고"
그가 손으로 목덜미 부근을 가리키자 상원이 응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강아지를 끌어안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저러라고 사준 개새끼가 아니었는데
조석희는 방문너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쓰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그 재수 없는 것들보다 저 멍청한 개새끼가 무해하겠지. 하는 생각이
그에게 손톱만한 위안을 안겨주었다.
불행히도 그 조그만 위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퇴근을 하기 전에 차려놓은 저녁을 먹으며 상원은 최대한 일상적인 말투로 하루종일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내일 말이야. 나 어디 갔다와야 할 것 같아"
"그래요?"
바싹 긴장을 했건만 조석희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때만큼은 그의 서양적인 사고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은 뽀순 퀴의 추모식이 있는 날이었다. 날짜와 장소는 대진이 상원에게 문자로 보내주었다. 평소같으면 승완이나 동석이 챙겼을 테지만 그날 이후로
두 사람 모두 상원에게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자신에게 말을 건네주지 않는다고 해도 친구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오전 수업이 끝나면 바로 뽀순퀴의 추모식에 참여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너는 내일 뭐해?"
"저도 저녁에 어디 갔다 와야 해요 한 두어시간"
상원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들어 저런식의 외출이 잦았다.
"몇 시쯤 들어와?"
"8시까지는 들어올거예요"
상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됐다. 그럼 뽀순 멍이 저녁 좀 챙겨주라. 시간이 좀 애매했거든"
"...."
"애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식탐을 조절못하더라고, 자율 급식이 되면 좋겠는데 부어 놓기만 하면 다 먹어 치워서 말이야"
상원이 식탁 밑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뽀순 멍의 머리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조석희가 눈썹을 찌푸렸다.
"알게 뭐야 한끼 안먹는다고 안 죽어"
"밥주는게 뭐 어렵다고 너 예전에 개 키워봤을때 밥 한끼정도는 줘봤을꺼 아냐"
"그걸 제가 왜 줍니까. 무슨 상관이라고"
"....."
조석희가 예전에 개를 몇 번 키워봤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상원은 그제야 파악이 가능했다. 큰 저택에 개는 있었지만 나는 키우지 않았다,겠지.
"밥 먹는데 개새끼 치워요"
"뽀순 멍아 저리가 있어"
상원이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지만 뽀순멍은 자신과 놀아준다는 뜻인줄 알고 한층 더 격한 꼬리놀림을 보였다.
"개씨끼 털날려 꺼져"
개를 몇 마리나 키워봤다는 남자가 더없이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애초에 뽀순멍에게는 상원만이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에
잠시 으르렁거리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상원은 그저 좋다고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조석희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꼴보기 싫은 인간들 만나느니 집에서 개나 키우라고 사온 것인데 이건 키우다 못해 모시는 판국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하나에 빠지면 간도 쓸개도
다빼주는 이상원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
"뽀순 멍아 형이 밥 먹고 같이 산책 가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응?"
"누구 맘대로 산책을 가요"
"응?"
"밥먹고 저랑 영화보기로 했잖아요"
"내가? 언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 상원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지금요"
"...석희야"
조석희는 지금 개상대로 심통을 부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선배는 개새끼랑 저랑 둘 중에 누가 더 중요해요?"
"당연한 걸 왜물어"
"선배 요즘 저한테 너무 무심한 것 같아서요. 전 선배밖에 없는데 "
무덤덤한 목소리로 거짓말도 잘 늘어놓는다. 그래도 그 거짓말에 놀아나고 마는 상원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그게, 하고 할 말을 찾는다.
"뽀순멍이 아직 어리잖아. 잘 보살펴줘야지"
"선배 저도 어리잖아요 보살펴 주셔야죠"
한살 때부터 스스로 기저귀를 갈아 치웠을 법한 얼굴을 한 사내가 얼토당토 않는 어리광을 부렸다.
"너 나랑 한살밖에 차이 안나"
"저한테 애정 좀 가져주세요 외로워"
"...이미 많이 갖고 있어"
상원은 자신이 가진 애정의 반의 반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늘 생각했다.
"더 가져봐요."
"...그.... 이 이상은 힘들어"
이 이상이라니 그러면 자신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상원은 굳게 믿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좋아하더니 사귀고 나니 시시해요? 먹고 보니 별거 아니다?"
"아니야! 사귀고 나니 더 좋아! 먹어보니 진짜 맛있어"
상원이 정색을 하고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조국 통일을 외쳐도 이보다 더 애절하지는 않을 기세였다.
"진짜?"
"응 진짜"
조석희가 영어로 really,라고 묻자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이야. 사귀고 나서 시시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조석희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는 상원을 관찰했다.
"선배 나 맛있어?"
"어?"
"맛있냐고요 대답해봐"
흥분해서 얼떨결에 외친 한마디가 분위기를 끈적하게 만들었다. 상원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맛있다고 대답하면 분명 이 이후 자신의 입에 들어올 것은 음식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대답했다간 이어질 심술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냥 던져본 말이에요? 그럼 저 선배한테 농락당한거네"
농락이란 단어에 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이쯤되면 누가 농락을 당하는지 개도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상원선배 저 갖고 놀아요?"
"아니 절대 아니"
"그런데 왜 대답을 안해"
남자의 심술궂은 재촉에 상원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마음 속 깊은 곳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맛있어. 너랑 있는 시간도 대화도 키스도 그냥 좋아. 배부르고 행복해"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는지 조석희가 상원에게 자신의 무릎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보는 사람도 없겠다. 내가 좋아하는 단단한 허덕지 옳다구나,
하며 상원은 빼지도 않고 가서 앉았다
"키스할래?"
"응"
나이어린 후배의 반말도 그저 좋았다. 연애의 밀고당기기 따위 모른다. 나쁜 남자라는 것을 알고 가끔은 잠자리용 아로마테라피로 이용당하는 것도 알지만
화가 나기는 커녕 마냥 좋았다.
상원은 두손으로 조석희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가 입술을 맛대어 오길 기다렸다. 조석희는 일부러 상원의 입술 근처만 간질이며 아이처럼 순수한 키스만
반복했다. 하지만 그의 다리 사이는 아까부터 단단하게 불거져 있는 상태였다. 상원도 엉덩이 부근에 닿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두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방으로 들어가자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기 일보직전의 순간이었다. 그때 상원의 발치에서 뭔가 물컹하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석희의 발에 닿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닿은 물체가 지나치게 부드럽고 말캉했다.
"....?"
상원의 시선이 아래로 내린 곳에는 뽀순 멍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주 조금 그러나 평소와 치명적으로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면 상원의 다리에 매달린 채 민망한 자세로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
"....어"
본능적으로  허리를 위 아래로 흔드는 그 모습에 상원은 할말을 잃었다. 오냐오냐 하며 키우던 강아지가 자신을 상대로 흔히 속된 말로 붕가붕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뽀순 멍의 움직임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
"...!"
상원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렸던 조석희는 그 광경을 발견하고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뽀순 멍아.....하하.....못쓴다"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발에서 떨어트리려 했지만 뽀순멍의 허리놀림은 점점 격렬해질 뿐이었다. 본능에 눈뜬 강아지의 자연스러운 행위였지만 개를
키워본 적 없는 상원은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엉켜있을때 조석희의 머릿속은 깔끔하게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었다.
"fucking...."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한 조석희는 거침없이 뽀순멍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우악스러운 손놀림에 놀란 뽀순멍이
낑낑 거리며 버둥거렸다.
"안돼 죽이면"
조석희의 더러운 성정을 아는 상원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안 죽여"
"때리지마"
"안 때려"
"...."
불안이 엄습해왔다. 조석희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쪽이 한 층 더 불안을 고조시켰다.
"죽이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는다면 대체 뭘...."
"선배는 내가 악마라도 되는지 아나봐"
조석희가 살짝 허리르 굽힌 채 고아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인사해"
"뭐?"
간신히 그 사악한 눈길에서 빠져나온 상원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작별 인사"
손톱만큼 남아있는 관대함을 발휘한 조석희가 상원의 앞으로 끙끙거리고 있는 뽀순멍을 내밀며 말했다. 선뜻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상원을 뒤로하고
조석희는 성큼성큼 걸어가 현관앞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안돼!!!!"
찢어지는 절규가 뒤늦게 이어졌지만 매정한 현관문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닫혀버렸다. 상원이 허겁지겁 뒤를 쫒아지만 조석희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다시 집으로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문자를 날려도 답문이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조석희는 정확히 30분 후 세상에서 더할나위 없이 상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름다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뽀순멍을 데려오라고 소리쳤지만 조석희는 들은채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상원을 끌어안고 조석희는 좀 조용히 하라는 말만
던질 뿐이었다.  상원은 처음으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조석희에 대한 깊은 절망감과 원망을 느껴야 했다. 조석희는 숙면을 취했다.











"어? 이상원 진짜 오랜만이다!!"
"상원이? 상원이가 왔다고?"
"진짜? 이상원왔어?"
상원이 교실로 들어서자 모여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오늘 상원에게 장소와 날짜를 알려준 대진이 허둥지둥 달려와 그를 맞이했다.
"잘왔어 연락이 없어서 안 오는줄 알았네"
"와야지 뽀순 퀴 추모식인데"
눈치가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진이었지만 상원의 목소리가 유독 힘이 없고 표정도 좋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6반의 애완벌레였던
뽀순 퀴의 추모식은 희재고 별관에서 열렸다. 학교에서 추모식을 여는 것을 허락했냐는 상원의 질문에 대진은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하는 산뜻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너  서울대 갔다면서 어떻게 용하게 들어갔어? 답 밀려 쓰거나 유실되거나 시험보러 갔다가 사고 당하거나 그런 일 없었어?"
남들에겐 살아생전 한번 일어나기도 힘든 하지만 상원에겐 늘상 있을 법한 일들을 주르륵 나열하며 개중 한명이 물어왔다.
"아니 다행히 운이 좋았어"
"푸하하하하 니가 운이 좋다는 말을 하니까 웃긴다"
"그러게 하하"
악의룰 두지 않고 던져진 말이었지만 상원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재수를 하게 된 것도 불의의 사고 때문이었으니까.
"시발 누가 장례식장에서 경망스럽게 쳐 웃고 지랄이야!"
교실구석에서 묵직한 일갈이 터졌다. 상원을 둘러싸고 왁자지껄했던 일행이 어느새 흩어져 그의 앞으로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졌다.
일을 하다말고 온 것인지 흰색 주방장 복을 입고 회칼을 들고 비스듬히 앉아있는 한승완의 모습은 호러 그 자체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무갂기를
하며 그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 ...안녕"
그날 이후로 처음 승완과 마주하게 된 상원이 인사를 건넸다. 평소였으면 우리 상원이 하고 맨발로 뛰쳐나왔을 한승완이 일부러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누가봐도 나 삐졌어, 하고 광고를 하는 유치하게 짝이 없는 제스처였다.
한승완은 희재고 내 뿐만 아니라 근방의 학교에서도 악명을 펼치던 인간이었다. 한승완이란 이름 석자가 유명해진 이유는 험한 일들이 벌어져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콧노래를 부르는 그의 태평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 한승완이 눈에 빤히 보이는 유치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모두들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는 왜 깎고 있어?"
상원이 승완의 손에 들려 있는 무와 칼을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에게 화가 나서 말을 건네지 않아도 한승완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는 생각에서였다.
승완은 상원이 서 있는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너"
다른 친구들과 떠들고 있던 녀석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 말이야?"
"그래 너"
한승완이 억지로 그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놓고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왜 무를 깎는지 이유가 궁금하지?'
"아니?"
발로 정강이를 까는 소리가 잔인하게 울렸다.
"궁금하지?"
"그래 궁금해 뒈지겠다"
억지로 궁금증을 자아낸 승완이 무를 깎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회를 잘 뜨려면 칼놀림이 중요하거든, 이 무가 투명해서 건너편이 보일 정도로 한번도 끊이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칼 연습을 하는거지"
",,,아 그러셔"
"오늘 밤까지 이걸 다 마스터 해놓으라는 주방장 형님의 말씀이 있으셔서 지금 이 자리에서 피나는 연습을 하는 거라고, 어때? 궁금증은
좀 해결 되었나?"
"...그래"
승완이 상원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마른 기침을 했다. 그제야 상원은 그가 자신에게 할 말을 다른 친구를 붙잡고 늘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승완다운 방법이었다. 웃음이 났다. 사실 오늘 이곳에 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사귀는 상대를 친구들이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헤어지지 않으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을 정도니.
게다가 뽀순 멍 사건까지 겹쳐서 사실 상원은 현재 조석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는 그의 물음에 원래 있떤 곳에
되돌려주고 왔다는 짧은 대답만이 돌아왔다.
몇 년간 짝사랑해온 상대지만 그런 조석희의 행동에는 화가 났다.
오늘도 상원은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어, 상원이 왔냐"
뒤늦게 교실로 들어온 동석이 상원에게 인사를 햇다. 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주자 상원은 감정이 복받치어 뭉클해졌다.
그래도 역시 친구들은 끝까지......
"그럼 헤어진거지?"
추모식을 위해 모무에게 초가 하나씩 나눠지고 있었다. 초를 받아들던 상원이 방금 전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에 영문을 알지 못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지다니? 누구하고?"
"누구는 누구. 그 빌어먹을 새끼 말고 누가 있어?"
동석이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여주며 대답했다.
"조석희?"
"그래"
"....아니"
상원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오자마자 동석은 단호하게 등을 돌려버렸다. 아예 눈도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동석은 상원의 짝이었다. 그가 학교를 떠날 때까지도 마지막 까지 옆에 있어주던 친구였다. 모두가 등을 돌려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이 되어줄 거라
생각한 친구가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평소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문제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조석희는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쁜놈이
아니라고 두둔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쁜 놈일 수도 있었다.
두둔해주지도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마음이 가장 안타까웠다.
상원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렸다 그가 우는 모습을 발견한 오늘의 사육담당 최성동이 큰소리로 외쳤다.
"역시 너밖에 없구나! 상원아 흑.....우리 뽀순 퀴 생각만 하면...흐엉엉"
그가 굵직한 울음을 터트리자 시끌벅쩍한 교실이 조용해졌다. 교실의 불을 끄고 모두 한 손에 촛불을 들고 있던 터라 분위기가 단번에 숙연해졌다.
"뽀순 퀴에게.  너는 우리의 희망, 우리의 귀염둥이 ,,,,크흑,, 우리는 너를 정말로 사랑,,,,흑흑 네가 비행을 성공했을때 ,.,,커흡"
학교 야영을 가면 사회자가 저열하게 슬픔을 자아내는 바로 그 분위기였다. 최성동이 뽀순퀴의 시체가 든 작은 상자를 꺼내들었을때 슬픔은 절정에 달았다.
상원은 그 분위기에 기대어 마음껏 슬픔을 토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상원이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던 조석희가 힐끔 시선을 던졌다. 오셨어요. 하는 물음에 응 , 하고
힘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상원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조석희의 눈에 불쾌함이 스쳐간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상원의 문을 두드렸다.
"저 들어가요"
안에서 수락을 하기도 전에 조석희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고 있던 상원이 조금 놀란 눈을 하고 돌아보았다. 말간 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조석희는 한눈에 알아차렸다.
"울었어?"
"아니"
어색한 대답이 거짓말을 부각시켰다. 조석희는 다시한번 물었다.
"울었어요?"
"...."
상원은 대답하지 않고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피곤했다. 집으로 돌아올때도 동석이도 승완이도 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대진만 눈치를 살피다가 잘가라는 말은 툭 던졋을 뿐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상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인데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뽀순멍과 이런저런 일이 뒤엉켜 지금은 조석희와 말을 하고 싶지 않은게 상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왜 대답을 안해요?"
"나 피곤한데"
"누가 당신 피곤하냐고 물어봤어? 울었냐고 물어봤잖아요"
"안 울었어"
셔츠를 벗던 상원이 잠시 멈칫하고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아직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상원이 내 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 이 사람이 나를 장님 취급하는 것인가. 조석희는 눈을 치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개새끼는 안돼"
"....."
"선배한테 발정난 개새끼는 나 하나로 족하잖아"
애교라면 나름 나쁜남자식 애교였다. 평소대로라면 상원이 이쯤에서 무표정을 무너트리며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가만히 눈만 꿈뻑 거릴 뿐이었다.
그런 눈짓에는 귀찮음 마저 묻어났다.
"석희야"
"응 선배"
그렇게 답하며 조석희는 상원의 옷을 받아 들었다.
"나 오늘 정말 피곤해.....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잇고 싶다는 말이 의미심장한 울림을 띠었다. 옷걸이에 옷을 걸어주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아무리 기분이 좋지 못해도 상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자 있고 싶다고요?"
"응 혼자"
"...."
혼자라 함은 침대를 아예 홀로 쓰겠다는 말이었다. 이집으로 이사온뒤 둘이 다른 침대를 쓴 날은 하루도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 조석희에게 오늘 잘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문가에 기대 서있던 조석희가 불만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상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상원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나가달라고 말을 했다.
작은 목소리지만 의지가 어린.
"주무세요 선배"
"그래"
조석희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상원은 침대에 주저앉았다. 옷을 벗는 것도 귀찮아 그대로 누워 버렸다.
문을 사이에 두고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뭐라고?"
"지금 들으신 그대로예요"
밉살스럽게 지껄이며 빈정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투였다. 그렇기에 상원은 더더욱 의심스런 눈초리로 상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제 그렇게 석희를 방밖으로 내쫓긴 했지만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연애를 하면 한없이 상대에게 너그러워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치졸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들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이 딱 그런 때였다.
자신은 상대에게 차갑게 대해도 상대방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할 얘기가 있으니 소파에 앉으라고 말을 할때까지도 상원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선배 이번 주말에 시간있어요?
하고 물을때도 기분전환이나 하러 가지는 건가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이런 전개라니.
"이번 주말에 같이 엠티가요"
"엠티라니 무슨 엠티?"
"저희 과에서 가는거요, 같이 가요"
종전과 같은 말을 듣고도 상원은 이해가 되지 않아 얼굴을 찡그렸다.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상원의 이마를 누르며 인상쓰지마 라고 가볍게 타박햇다.
"석희야 너희과 엠티를 지금 나한테 가자고?"
"네"
",,,있잖아. 네가 자란 나라에선 어떨지 몰라도"
미국이나 영국의 관습따위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상원은 문화차이로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려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가 다르면 엠티에 참여하지 않거든 조인 그러니까 과끼리 같이 가거나 할 수는 있는데 개인적으로 한명만 다른 과에 참석하거나
하지는 않아"
이쯤되면 훌륭한 설명이었겠지.
"알아요"
"....."
아니 애초에 설명이 필요없었구나.
"그래서 제가 과대한테 부탁했어요"
"그게 가능.... 아니 그런 부탁을 왜해?"
"같이가요 엠티. 선배 그런거 안 가봤을거 아냐"
한숨이 나왔다. 이놈의 왕따설은 언제쯤 사그러들것인가.
"우리과 엠티 갈게"
"가도 누가 놀아주기나 한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의대 훈남과 경대 왕자님을 노리는 여학생이 상원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을텐데, 그러나 구태여 그런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어쩐지 그 얘기를 했다간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됐어 안가면 안갔지 왜 내가 너희 과 엠티에 가"
"선배 사람 친구 사귀고 싶은 거잖아"
"뭐?"
"사람 친구 말이에요"
"...."
"이번에 가서 만들어요 그러면 되잖아"
상원은 이 애가 교직쪽에 뜻을 두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반에서 왕따가 발생한다면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이들 몇명
불러다 지금부터 친구라하고 명령을 내리고도 남았겠지. 번호를 매겨 제비뽑기를 한 다음 짝을 지어 친구를 만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잖아. 게다가 난 너희 과도 아니고...."
이성적인 설득을 해보려 했다. 물론 조석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가 만들어 줄게요 선배"
마치 조립 부품을 사와서 로봇을 만들어 주겠다는 어투였다. 언제나 그런식이었겠지. 그가 가진 외모와 권력 재능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자신의
주변에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랏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그러니까 화는 그만 내요. 나 주말에 약속도 깨고 가주는 거라고"
그의 긴 팔이 상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것이 조석희 나름의 애교이고 신경 써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를 내려다보며
상원은 복잡 미묘한 심정이었다. 그냥 넘어가주자니 뽀순 멍 사건이 너무 컸고 그렇다고 계속 화를 내자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이 남자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먼저 반한 사람이 죄였다. 이말이 요즘 상원에게 가슴속에 박히다 못해 뼈에 사무치고 피를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내죄가 크다"
조용한 중얼거림에 조석희가 고개를 들어 네? 하고 되묻는다.  미간을 찌푸린 그 얼굴조차 상원에겐 장인이 조각해 놓은 작품처럼 보였다.
업보다. 업보.
전생에 난 얘를 도살하고 그 집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현세에서는 보듬어 주고 너른 마음으로 이해를 해줘야 해.
상원은 손을 들어 조석희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업보야 업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상원의 입가에 씁쓸한 중얼거림이 머물렀다. 관광버스를 빌려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펜션으로 향하는 길에서 상원은
두통을 느꼈다. 다른 과의 엠티에 참여한 것도 부담스러운데 조석희가 자신의 선배- 친구도 아닌 무려 같은 학번인 선배! - 라고 상원을 소개하자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던진 것이다. 이후 쏟아지는 관심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원체 이런저런 불운한 사고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하긴 했지만 시선을 받는것과 관심을 받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여학생들의 접근이야 그렇다 쳐도 남학생들까지 눈을 빛내며 대체 둘이 어떻게 하다 친해진 것이냐는 질문을 해올 줄 몰랐건만,
"이것 좀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
상원은 정확히 여섯번째 받고 있는 캔커피를 받아들이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커피 캔을 가방안에 넣으려고 지퍼를 열었지만 이미 들어찬 과자로 인해 넣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마실래?":
상원이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석희에게 커피 캔을 내밀며 권했다. 조석희가 커피캔을 슬쩍 보았다가 도로 눈을 감았다.  상원은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저 왕자님이 원두로 내린 커피도 아닌 커피캔을 마실리 없는 것이다.
캔커피까지 넣으면 가방 지퍼가 닫힐 것 같지 않아 상원은 뚜껑을 따 커피를 마셨다. 그리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로 벌써 두번재 커피 캔을 비우는 중이었다.
"으..."
매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상원은 빈 캔을 좌석 앞 그물 안에 넣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다행히 아무런 사고 없이 평탄햇다.
상원이 커피를 들이켜는 것을 본 여학생이 자신의 커피를 또 그에게 선물한 것을 제외하면,
그 모습을 본 조석희는 그것봐, 라고 조금은 으스대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친구 만들 수 있잖아요"
"아니 이건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미보다 너때문에...."
상원은 말을 맺지 않았다.조석희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득의만면한 미소에는 오만함이 듬뿍 묻어났다. 내가 손댔으니 당연히 당신 같은 사람도
친구가 생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 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상원은 속으로 아이고 하며 한탄했다. 자신이 정말 전생에 큰 죄를 지은 게 분명하구나. 후생을 위해서는 현세에 조석희에게 잘 대해줘서 선업을 쌓아야 겠다.
"주세요"
"응?"
조석희가 턱짓으로 상원이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상원이 놀란 눈으로 이거? 하고 되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상원의 손에서 가방을 뺏아듯 건네받아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놓았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조석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원은 스스로의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호리호리한 편이긴 하지만 상원은 키가 180에 가까운 성인 남자였다. 그런 자신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대신 들어주는 것이 얼토당토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기뼜다. 석희가 저런식으로 자신을 배려해주는 행동을 보이면 남자주제에 소녀와 같은 감성으로 다시 한번 반하게 되는 것이다.
조석희가 뒤쳐져 있던 상원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상원이 정신을 차렸을때 여학생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기울었다.
"선배 빨리 오세요 피곤하실 텐데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답지 않은 다정한 발언에 상원의 뺨이 훅 달아올랐다. 그것은 상원의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이 단번에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첫 인상과 달리 어딘지 부족하게 느껴지는 소년다운 매력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상원에게 시선이 쏠렸다. 상원은 허둥지둥 조석희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자 조석희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어라 비오네 오늘 비온다는 얘기 없었는데"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조석희의 동기가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한마디 했다. 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여행을 동석할때마다 비가 오고 자잘한 사고가
생겨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은 늘상 있어 왔다. 이전에 수학여행을 가다 버스가 고장나 조석희와 도중에 내린 적도 있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에도 콘도에 도착하자 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상원은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다.
"선발대 애들이 바비큐 파티 준비해놨다던데 가서 치워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아 짜증나게 비가 갑자기 쏟아지냐"
상원이 얼굴색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던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튕겼다.
"선배 신이야?"
"어?"
"자기 마음대로 비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정도면 자의식 과잉인데요"
조석희는 한국어 발음은 서툰데 저런 식의 어려운 어휘를 사용하곤 했다. 상원은 그 캡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캡을 마냥 좋다고 해실 댈
상황이 아니었다.
"자의식 과잉이라니"
"선배 때문에 비 온다고 생각하면 그게 자의식 과잉이라고"
"....그래"
참 그다운 위로방식이었다. 차갑고 쌀쌀맞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한마다. 얼음위에 잠시 내리쬐는 햇볕처럼 미약한 따스함이었지만 상원은 거기에서
위안을 찾았다.
"조석희 지금 나올 수 있냐"
버스 안에서 자신을 과대라고 소개한 키 큰 남학생이 문앞에서 소리쳤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나도 가서 도와줄게"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일손이 필요한 모양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혼자 방에 있기도 뻘쭘하고 석희가 비를 맞으며 일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됐어 쉬어요"
조석희가 지나가면서 손등으로 상원의 뺨을 툭 쳤다. 방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모두 방을 나간것을 확인한 뒤에야 상원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아, 어쩌면좋아. 이렇게 속절없이 좋아만 해도 되는 것일까. 이러다 종래엔 미쳐버려서 조석희의 스토커가 되어버리겠지. 그러면 안되는데 버림받는다
해도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텐데 , 그래야 마지막 기억이라도 좋게 남을 텐데.
상원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 즈음 이었다.
"예 들어오세요"
"...어 저기"
버스에서 봤던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상원은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세요?"
"다들 나갔어요?"
"비와서 뭐 치우러 가야 한다고 나갔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원은 미안함을 느꼈다. 자의식 과잉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자신이 이곳에 따라와서 아무래도 하늘이 노해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언제쯤 오려나"
여학생의 혼잣말을 들으며 상원은 죄책감이 한층 더해졌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그냥 같이 게임이나 하자고 온건데...."
"그럼 제가 같이 해드릴까요?"
평소였으면 숫기 없는 상원으로서 입 밖에 내지 못할 말이었다. 겉다리로 따라온 엠티에 비까지 내려 여학생들이 놀 상대가 없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이라
생각한 그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게다가 조석희가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고 데려온 것이 아닌가.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어? 진짜요? 그럼 그러실래요?"
"예 같이 해드릴게요 게임"
두 손을 모으고 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거 해보셨어요?"
자신의 불운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며 지내온 남중, 남고 6년의 세월이었다.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그에겐 낯설기만 한 게임 이름이 적힌 상자였다.
"설명해주세요 한번 해볼게요"
상원은 더없이 진지한 자세로 여학생에게서 게임의 법칙을 들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이해력이 좋은 그는 시범 게임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규칙을
외웠다.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었다.









"으아! 안돼! 왜 하필 거기야?"
주사위를 던진 여학생이 절규를 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은행장을 맡은 또 다른 여학생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돈을 대출받으라고 방금 전 주사위를
던진 친구를 꼬드겼다. 상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상원오빠 차례에요"
은행장을 맡은 여학생이 주사위를 상원에게 건네주었다. 상원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주사위를 툭 던졌다.
"으하하하 형 블랙홀인데요? 3회 쉬고 가래요"
"...아이고"
상원이 앓는 소리를 하며 자신의 말을 옮겼다. 그는 주사위를 던질때마다 불운의 구렁텅이로 푹푹 빠지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주변에서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장본인인 상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약간 탄식을 섞어가며 주사위를 던지고 말을 옮겼다.
"상원이 형 정말 장난아니다. 어떻게 던질 때마다 그래요?"
"아, 하하하 그러게"
"신기하다 신기해 이정도면 놀라운 세상 이런거에 제보해도 될 정도인데요?"
"어머 그러게"
모두들 처음보는 상원의 특이 체질에 관심을 기울이고 모여 들었다. 이제 게임은 다들 안중에 없었다 상원이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주변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오빠 괜찮아요? 돈 다 잃었네"
"그러게 대출 받아야 하나?"
"상원오빠는 건물도 없고 땅도 별로 없어서 대출 받기도 힘들겠어요"
은행장이 안타깝다는 듯이 대답했다. 상원도 뺨을 긁적거리며 게임판을 돌아보았다. 게임을 지켜보던 한 녀석이 상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형 힘내세요, 인생 한방이잖아요"
"하하하 그런가?"
"다음번에는 분명 좋은 숫자가 나올거에요"
"파이팅!"
"오빠 힘내요"
다들 상원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건넸다. 상원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가식없는 깨끗한 미소는 보는 상대로 하여금 절로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상원은 한번도 자신이 나쁜 패가 나오거나 좋지 않은 숫자가 나온 것으로 투덜대거나 짜증내지 않았다.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긴 했지만,
전적으로 자신의 불운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다들 감동하고 말았다.
조석희는 멀찌감치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원과 눈이 마주치면 그는 살짝 눈짓으로 인사를 해주었다. 그러나 절대 옆으로 와서 말을 건네거나
아는 척을 하는건 아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방에서 마음 같아서는 석희 옆에 앉아있고 싶었지만 그가 바라는 것 같지 않아서 상원은 눈치만 살폈다.
"상원오빠 괜찮지 않아?"
"성격도 진짜 좋은것 같아. 말도 조근조근 엄청 다정하게 하고"
"번호 따볼까"
처음엔 조석희와 특별한 관계 때문에 쏟아졌던 관심이 지금은 온전히 이상원이란 인간에게 향해 있었따. 키도 크고 깔끔한 외모에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에
매너도 좋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개망나니 6반 학생들도 일년 남짓 만에 모두 자신의 편으로 만든게 이상원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타입이었다.
상원이 어떠한 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지 조석희는 현장에서 두눈으로 직접 그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형 이거 끝나시면 저희 방으로 가서 한잔 하실래요?"
"어 나 술 잘 못하는데 괜찮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냥 마시다 보면 느는거지"
"오빠 그러지말고 저희랑 게임이나 해요. 쟤들이랑 술 마시면 토할 때까지 못나온다니까요"
여학생들이 상원의 팔을 붙잡고 자신들과 함께 게임을 하자고 졸랐다. 상원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햇다. 개중 한명이 상원에게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을 받아든 그가 자신의 번호를 누르고 있을 무렵 조석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어?"
"잠깐만"
그가 밖으로 나가자고 턱짓을 해보였다.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해주고 있던 상원이 잠깐만 하고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근데 왜 석희는 상원오빠한테 선배라고 부르는거야?"
누군가 조석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고등학교 선배라서"
"한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라 이건가?"
그말에 상원이 큰 소리로 웃었다. 청아한 향이 묻어날 것 같은 단정한 옆얼굴을 근처에 있던 여학생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나도 선배라고 부르고 싶다. 이상하게 오빠보다 더 가까운 느낌이드는데"
"에이 무슨 그냥 오빠라고 불러"
"저도 상원선배라고 불러볼래요, 그래도 되죠?"
아까부터 적극적으로 상원에게 호감을 표시하던 여학생이 애교섞인 어조로 물었다. 상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떼려는 순간,
"안돼"
"....어?"
"넌 같은 학번 동기잖아. 오빠라고 부르던가 이상원이라고 이름 불러"
조석희였다.
어울리지 않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석희야...."
상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의 조석희를 올려다보았다.
"할 얘기 있어 선배"
쟤는 대체 여기까지 와서 무슨 할얘기가 있다는 건지.
중요한 얘기라면 집에 가서 하자고 하고 싶었고 별 대수롭지 않은 얘기라면 나중에 하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석희는 상원이 그런 바람을 입밖에
내기도 전에 등을 돌리고 먼저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 석희 왜 저래"
"뭐 기분 나쁜일있나"
찬바람을 일으키고 조석희가 나가버리자 방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상원은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닐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남아있는 아이들을 토닥여주고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온 상원이 신발 끈을 매려고 허리를 숙였는데 조석희가 다짜고짜 그의 팔목을 잡아 끌었다.
"어?"
"빨리 와요"
"잠깐, 나 신발 끈..."
신발 끈을 묶고 따라가겠다는 말도 끝내지 못했다. 손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남자의 힘에 상원은 운동화 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조석희는 상원을 건물의 가장 구석에 있는 화장실 안으로 끌고갔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기에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일까.
상원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어그의 말을 기다렸다.
"끈 묶을 거예요?"
"....아니 괜찮아"
흰색 신발 끈은 바닥에 끌려 더러워진지 오래였다. 조석희가 상원의 신발을 흘긋 내려다보고 그럼, 이라고 입을 뗀후 화장실 끝칸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한 사람이 서 있기도 좁은 화장실 칸 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으려니 상원은 목덜미가 뜨근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함을 느꼈다.
조석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배, 라고 불렀다. 울림이 큰 화장실이라 목소리가 평소보다 달짝지근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응?"
"선배 여자한테도 흥분할 수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내가 지금 여자까지 신경 써야 하냐고"
조석희가 상원의 턱을 손으로 움켜쥐고 벽으로 몰아 붙였다.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상원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당신, 여자하고도 돼?"
"혹시... 그, 연애 대상으로 묻는거야?"
"그래"
옆으로 길게 찢어진 상원의 눈매에 당혹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대체 왜 이 시점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을 이야기 해줘야 하는 것인지....
조석희가 빨리 말해요, 라고 한번 더 재촉했다.
"나,,, 원래 여자가 좋은 취향인데...."
"원래 남자 좋아하는거 아니고?"
"...응"
"그런데 왜 나를 좋아해?"
"어?"
"왜 나를 좋아하냐고요"
지금까지 들어본적 없는 질문이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지 어언 3년이 되어가는 지금, 억지로 자신의 과 엠티에 끌고와서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화장실 칸막이로 데리고 들어와
던질 만한 질문이던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거야?"
"네"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은 아닌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상대방의 저 괴이쩍은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까. 상원은 고민을 시작했다.
"아,,,그냥 운도 좋고... 멋있고 잘 생기고... 처음엔 관심이 가서 보다보니까 좋아하게됐어.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행운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된 감정이었다. 그것이 어쩌다 애정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정확한 메커니즘은 상원도 알지 못했다.
"그럼 나만큼 운 좋고 멋있고 잘생긴 자식 보면 또 좋아하겠네?"
"엑? 아니야. 너만큼 운 좋은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 ...너보다 멋진 사람도 그렇고"
웅얼거리는 상원의 얼굴이 단박에 붉어졌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석희의 배배 꼬인 심사는 그 정도로 풀리지 않았다.
"여자도 좋아한다면서 남자도 되고"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제가 좋다는 건가요?"
상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바로 그거야 너라서 좋은거야. 딱히 남자가 좋다 이런게 아니라 그냥 너라서 좋은거야.
상원의 해맑은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석희가 살짝 인상을 쓴 채 지긋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선배"
"응"
"나 좋아해요?"
"...응"
대답을 하면서도 상원은 가슴이 아팠다. 어떤 경우에 물어도 자신은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제 좇 빨아주세요"
"...뭐?"
"빨아 달라고요 지금"
자신이 잘 못 들은게 아닐까 했던 희망이 산산조각 나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조석희는 상대가 당황해하거나 말거나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바지
퍼스너를 내렸다.
"서, 석희야"
"해주세요 선배 나 좋아한다면서"
"좋아해 좋아는하지만..."
누가 들어올 수도 잇는 화장실 안에서 무릎을 꿇고 남자의 성기를 빠는 것과 좋아하는 문제는 영 다른 것이었다.
"좋아하는데 그것도 못해줘요? 선배 나 좋아한다는 거 거짓말이에요?"
이 인간에게 좋아한다는 의미가 모든 것을 해줄수 있다는 것으로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좋아하는 거랑 이거는....."
"이거는 다른 문제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죠?"
조석희가 고개를 숙여 상원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 대고 말했다.
"선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실망할거예요"
"....."
대체 난 너에게 몇 번을 실망했는데 너도 한번쯤은 실망하고 넘어가 주면 안되겠니.
"선배 빨아줘요"
이미 단단하게 불거져 있는 살덩이를 끄집어내어 상원의 허벅지사이에 비비며 그가 음란한 말을 지껄였다. 청바지 위로도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귓가에 닿은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평연함을 띠였다.
"빨리 해주세요"
솔직히 상원은 아직 조석희란 인간에게 느낀 실망을 모두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못 견딜 정도로 상대가 좋으면서도 인간적인 부분에서 실망은 어쩌지 못했다.
이번 엠티 동행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서였다. 조석희에게 일말의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데 인간적인 면모는 고사하고 다짜고짜 게임을 하던 자신을 화장실 구석으로 끌고와 오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숨이 났다.
이런 비인간적인 인간의 행태도, 그리고 거기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자신도,
"...입으로?"
상원이 물었다. 조석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손으로 상원의 턱을 잡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의 감촉이 뺨을 스쳤다.
상원은 눈을 감은채 입을 벌렸다. 입안 꽉 차게 들어오는 살덩이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까칠한 음모가 코끝에 닿았다.
"물고만 있을거에요?"
재촉아닌 재촉이었다.
상원은 입술을 오므리고 혀를 움직여 입안에 들어와 있는 밑동을 핥았다. 조석희가 한손으로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탁한 음성으로 근느 상원에게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귀두 끝은 혀를 세우고 핥아봐요, 숨은 참고 길게 빨아주세요, 목구멍에 닿을때까지 넣어주세요 네, 그렇게.
누가 올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참아내며 상원은 자신의 연인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혀와 입을 움직였다.
"눈 떠"
조석희가 명령조로 말했지만 상원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음란한 눈빛을 하고 있는지 상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선배 눈 떠 눈뜨고 내 자지 보면서 빨아줘요"
천박한 속삭임.
그 한마디에 상원은 감았던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남자의 음모였다. 검게 윤기가 흐르는 짧고 곱실곱실한 음모,
뒤로 이어져 있을 때 엉덩이 위로 느껴지는 그것이었다.
조석희가 허리를 짧게 차 올렸다. 숨이 껄떡껄떡 차올랐다. 그래도 끝까지 그는 자신의 입안에 물려있는 살덩이를 뱉어내지 않았다.
조석희의 입에서 건조하고 탁한 신음소리가 나왔다.
상대가 자신의 행위로 인해 흥분을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햇다. 상원은 신체적인 쾌감의 고조보다 정신적인 만족감을
중요시 여겼다.
이쯤하면 됐을까 싶어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한번, 눈을 깜빡거렸다. 조석희가 갑자기 상원의 팔을 움켜쥐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또 뭘시키려고 하는걸까. 궁금증보다 두려움이 앞선 상원은 그대로 굳어 서 있었다.
"...왜 그런 표정짓는 거예요"
"내가 뭘"
"유혹하는 표정으로 남자 좇 빨면서 흥분했어요?"
조석희가 거침없이 손을 뻗어 상원의 다리 사이를 움켜쥐었다. 상원의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다. 반쯤 일어선 그곳이 자신의 음란함을 내비치는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선배"
평소와는 약간 다른 들뜬 목소리였다.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왜, 하고 대꾸했다, 조석희가 조그맣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상원은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나 선배 거 하고 싶어"
"..어?"
"선배꺼 빨고 싶다고 지금"
말이 의미로 와 닿지 않는 순간이 올수도 있음을 상원은 경험하는 중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거야..."
"나 지금 당신거 입으로 하고 싶다고..... 시발, 몇번이나 말하게 하는거야"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해서 들으니 귀는 이상없다는 것이 확인되엇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말하고 있는 조석희가 미친 것인가.
"...석희야 왜그래"
상원은 솔직한 심정을 입밖에 내었다.
두 사람이 몸을 섞은지 벌써 일년 여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에게서 입으로 서비스를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조석희는 자신이 받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지만 자신이 남자의 것을 입에 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행동했다. 이기주의의 절정체인 그가 누군가에게
봉사를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처음에 상원은 기대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예 포기상태였다. 그냥 같이 몸을 맞대고 비비는 것만으로도 황공무지올소다 라고 생각할 수 박에.
그런데 지금 자신의 것을 빨고 싶다니!! 그것도 화장실 구석에서!!
"내가 뭘요"
"...내가 무슨 잘못했어?"
상원은 자신이 석희의 심기를 건드려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석희가 상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피식웃었다. 선이 유려한 입술에  걸린 비웃음에
상원은 아까보다 한층 더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사람 말이 그렇게 말 같지 않나"
거기까지였다. 조석희의 친절한 설명은,
이후부터는 모든것이 행동이었다. 그는 상원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바지와 팬티를 함께 끌어내렸다. 제지할 틈도 주어지지않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점막에 아래가 침범당하는 감각에 상원은 헉, 하고 비명을 질렀다. 조석희가 상원의 살덩이를 손에 쥐고 혀로 밑동부터 귀두부근까지 핥았다.
소름끼칠정도로 좋았지만 겁이 덜컥 나서 상원은 손으로 상대를 밀어내려고했다. 그러자 아래에 무릎을 끓고 앉아있던 조석희가 사나운 얼굴을 하고 혀를 찼다.
"가만히 있어요 버르작거리지 말고"
"...아, 아파"
"안 아프게 해줄게"
조석희의 단골맨트였다. 넣기 전에 항상하는 말,
선배 안아프게 해줄게요 살살 할게요, 아프다고 하면 넣다가 바로 뺄게요 정말로, 선배 나 믿죠? 기타 등등.
세상에 믿으면 안되는 말이 세가지 있다했다. 중국집의 지금 출발했어요  상인의 이거 하나도 안남기고 파는거에요, 그리고 남자의 오빠 믿지?
상원에게 세번째는 조석희의 선배 나 믿죠? 였다...... 못 믿어. 나 너 못믿는다. 어떻게 널 믿겠니 석희야
"선배 나 믿죠?"
"..."
상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빠르고 명석한 조석희가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좋을대로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고 하고자 하는 행위를 이어갔다.
조석희는 입을 크게 벌려 상원의 반쯤 일어선 성기를 머금었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애무가 시작되었다. 상원은 차마 그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댔다.
혀를 사용해요.
그가 항상 나른한 목소리로 던지던 한마디가 어떤의미였는지 상원은 지금 전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혀를 사용하는 것이..... 이런것이었구나.
"하아,,,아"
참으려고 해도 새된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터져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벽에 기대고 서 있는 것도 간신히 였다. 몇 번의 혀놀림만으로 상원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할딱거리자 조석희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조석희는 남자의 좆 따위 입에 물고 빨 생각을 한번도 한적이 없었다. 상대가 이상원이라고 할지라도, 그런데오늘은 이상하게 자신의 것을 열심히 물고 끙끙거리고
있는 상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이상할 정도로 욕구가 들끓게 된것이다.
다리가 풀린 상원이 조석희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조석희가 상원의 셔츠안으로 손을 넣어 오독하니 솟아있는 유두를 지분거렸다. 혀가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에 감각이 가득 차 올랐다. 입술을 깨물어 이상한 소리가 새나가는 것을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
상원은 재빨리 두 손으로 상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어지간히 느낀 모양이었다.
조석희는 웃으며 상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상원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까지 셀수 없이 몸을 겹쳐왔던지라 조석희는 상원의 몸 어디가 민감한지
눈을 감고도 정확히 집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음란한 말을 시키면 시키는 대로 줄줄 내뱉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과 관련된 말은 자처해서 내뱉지 않는 점이 이상원
다웠다. 웃음이 났다. 이상한 유쾌함이 들끓었다.
조석희는 손바닥으로 상원의 엉덩이를 감싸듯 잡고 열심히 혀를 움직였다. 입안에서 무게를 더하는 살덩이의 느낌과 특유의 냄새가 싫을만도 한데 그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더 몰아 붙이고 싶었다. 절정으로 한계까지.
"아, 아,,,,,,자,,,,"
상원이 잠깐, 이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조석희는 힘껏 빨아들여 감각을 고조시켰다. 어깨를 쥐고 있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상원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울컥 하고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조석희는 입안에 있는 정액을 그대로 삼켜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쁜 맛은 아니었다.
조석희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사정을 하고 나서도 상원은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선배"
"..."
"선배 좋았어요?"
"...아....어....응"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좋았는데?"
"...응
"얼마나 좋았는지 듣고 싶어요 선배"
"아...응"
무슨말을  물어도 응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석희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다른 사람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고 저하고만 있는게 가장 좋을만큼, 그렇게 좋았어요?"
"...응"
결국 조석희는 상원의 바지와 팬티까지 손수 입혀주는 매너로 서비스를 마무리했다.













넋이 나간다.
상원은 문장 그대로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머리로 정리가 되지 않아 한참을 지나서야 응? 하고 되묻기 일쑤였고 대화는 커녕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같이 놀러온 학생들은 갑작스런 상원의 변모에 적응되지 않아 처음에는 어디가 아픈것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상원이 그때마다 괜찮다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거듭되는 그의 행동에 처음에 걱정을 해주던 사람들도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자 말을 건네지 않게 되었다.
멀찌감치 앉아 조석희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 친구들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자신의 과 엠티에 데려와 놓고서 그는 상원이 사람들에게 격리되어 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상원은 엠티에서 어떤 인간관계도 구축하지 못하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상원의 상태는 여전했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꿈을 꾸는 듯한 무언가에 홀린듯한.
"식사하세요"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상원은 한템포 느리게 응 하고 대답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상원의 뺨을 스쳐 이마 위를 만졌다.
"열도 없는데"
"...응?"
"얼굴이 발긋한거 같아서 열 있나 하고요"
"아니 열없어"
그렇게 대답하면서 상원은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설마 야한 생각이라도 하고 계신건가"
"...!!"
"bingo?"
"아, 그,그...게"
거짓말을 못하면 둘러대는 능력이라도 있음 좋으련만,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팔을 허우적대는 상원의 모습은 방금전 발언을 긍정하는 꼴이었다.
조석희가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을 상원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번 엠티를 기점으로 상원의 상사병이 더 심해진게 분명했다.
"선배 무슨 생각했는데요?"
"....밥이나 먹자"
상원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자포자기 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엠티를 다녀온 이후 그의 머릿속은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만 무한 반복이었다. 너무나 많이 재생시켜 기억이 늘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무슨 생각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마지막말은 상원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였다. 변화가 있는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상원은 처음에 자신의 착각이 아닐까 했다.
"말해줘"
이번엔 얼굴을 부비었다. 상원은 자신의 허리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는 조각같은 얼굴 때문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착각이 아니다. 그날 이후 조석희는 애교가 늘었다. 자신이 애교를 부린다는 자각은 아직 없는 것 같지만 분명 이전보다 더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스킨십을
시도했다.
"벼,별로 그냥...밥먹자 식겠다"
"선배 그거 기억해요?"
"....뭐 뭘"
또 무슨 온갖 짓궂은 질문이 나올까 두려워진 상원은 식은땀이 흘렀다.
"선배가 했던말, 그날"
"그날...."
그날이라 함은, 분명 그날을 뜻하는 것이렷다.
상원의 머릿속에 그날 자신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 떠올랐다.
하아....그만, 아,,,,하악..... 따위의,
"선배 그말 진심이세요?"
"어? 진심?"
신음소리에 진심을 담을 수 있다면 그날 신음은 순도 100% 진심을 담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고 저하고만 있는게 가장 좋을만큼 그렇게 좋았단 말이요"
".....!"
"그렇게 좋으셨어요?"
"아니,그게.... 그러니까..."
넋이 나갈 정도로 좋았다는 말을 하면 밝히는 것 같아 보일까봐 상원은 열심히 주제를 돌릴 궁리를 했다.
"밥 먹어야지!"
애써 밝은 소리로 외쳤는데 조석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립서비스였어요? 그냥 했던 말에 제가 병신처럼 속은건가요?"
"좋았어! 립서비스따위 아니야, 정말 좋았어. 너무 너무 좋았어. 정말로....."
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번만 이야기 했어도 되는데 표현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정말 다른 사람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응"
사귀는 사람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상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코 앞의 남자가 그 누구보다 중요했다.
"친구들도?"
"응"
"부모님도?"
"...응"
잠시 망설이다 대답한 상원은 불효자를 용서해주세요 하고 중얼거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상원의 대답을 들은 순간 조석희가
순간, 활짝, 말그대로 활짝, 웃었다.
상원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사람의 웃는 얼굴이 향기로울 수도 잇구나. 그래 석희의 웃는 얼굴을 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아니 지금 죽어야 하는건지도 몰라.  천하의
개새끼 조석희가 이렇게 다정하게 웃어주는 날은 다시는 오지 않을테니까. 내 인생 최고의  정점을 찍은게 분명해 3초 뒤면 인생 내리막길이야. 내리막길.
"선배"
조석희가 상원의 손을 잡아끌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상원은 응 하고 대답하며 그를 올려다보앗다.
"밥먹으러 가자 선배"
"그래"
이것이 지옥으로 자신을 끌어내리는 손이라고 할지라도 백만번이고 천만번이고 잡으리라.
"밥 먹으러 가지는데 뭘 그렇게 비장한 표정을 해요"
"아, 하하 아니야"
상원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조석희는 피식웃으며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상원선배"
"응?"
조석희가 상원의 밥위에 손수 명란젓을 올려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 신경 안써도 되는거죠?"
"무슨 신경?"
"선배 친구가 있건 말건 이젠 신경쓰고 싶지 않아요 다정한척하는거 힘들거든요"
"아하하하,,,,,아....하하"
하마터면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가락을 삐긋해서 그대로 밥알을 식탁위에 흩뿌릴 뻔했다. 그게 다정한 척이었다니, 두번만 더 다정했다간 정말 큰일나겠다.
"그래 이제 신경쓰지마"
"네 어차피 선배는 나만 있으면 되니까"
자신이 한 말이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것도 당사자에게-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저하고만 살아요 앞으로, 나하고만 밥먹고 , 나하고만 놀고, 좋네 그거"
앞으로 펼쳐질 애인의 고립된 삶에 대해 논하는 조석희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거기에 홀려 상원은 정말 좋은건가 그거 라고 생각할 뻔했다.
"선배"
"어?"
"지금 프로포즈하고 있잖아요"
"....."
"프러포즈하는데 멍하게 앉아만 있으면 어쩌라고요 대답좀해봐요"
상원은 잠시 조석희의 "propose"발음을 감상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단어의 의미가 상원의 뇌세포를 자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초.
"어?!...."
당신은 친구는 물론 가족들로부터도 고립시켜 나만 보게 만들겠어. 라는 살벌한 선언을 프로포즈라고 내미는 남자를 보며 상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석희가 턱을 괴고 그런
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얽히자 상원은 지금 이 순간을 농담이나 장난으로 넘길수 없음을 깨달았다.
저 같잖은 프로포즈를 석희는 정말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것이엇다.
절대로 이룰수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상원은 포기를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고백하고 잇었다.
남들이 듣는다면 미친거 아니냐고 반문할 내용의 프로포즈였다.사흘은 굶은 사람에게 내밀어진 독이 든 음식과 같았다.  먹으면 죽는다. 하지만 먹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상원에겐 애초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사약을 받아들 준비를 하고 상원이 입을 열었는데 현관에서 벨소리가 울려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상원이 누구지? 하는 눈빛을 보내자 조석희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가 나갈게"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조석희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선배 돈 많은가봐요"
고도의 비꼼이었다. 언젠가 혼자 있을때 잡상인에게 문을 열어주었다가 먹지도 못할 건강식품을 잔뜩 사들인 상원을 향한,
잡상인이나 교인이라면 자신보다 석희가 나가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상원은 반박도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1초만에 퇴치할 거라 생각했던 불청객이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주인보다 더 당당히 들어오는 낯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낯선 얼굴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웬일이세요"
의외라는 듯 그러나 결코 당황하지 않고 태연한 어조로 조석희가 물었다.
"주말에 왜 갑자기 약속을 취소했니"
"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그 중요한 일이 뭔데"
"그 중요한 일이 뭔데?"
차갑고 건조한 음성으로 그녀가 자신의 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감정이 배제된 듯한 태도는 그녀가 주말의 약속문제로 인해 화가 났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다.ㅏ
하지만 조석희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다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선배 식사해요"
"어?,,,,어"
인사를 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상원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고 숟가락 쥔 손에 힘만 주었다.
"반찬 입에 안 맞아요?"
상원이 밥상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조석희가 약간 인상을 쓰고 물었다.
아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잇던 그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대체 언제즘 인사를 드려야 하나 눈치를 살피느라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지금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에 대해 할 말이 그것뿐이라고?"
"네"
이제나저제나 인사를 드릴 기회를 찾으며 그는 눈만 깜빡거렸다.  어물거리던 그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조석희를 힐긋 쳐다보았다.
이렇게 눈치없는 성격이었던가 하는 의문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색한 분위기에 질식해 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갈 무렵에야 조석희가 입을 열었다.
"여기 같이 사는 선배예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간신히 숨통이 트이는 기분으로 인사를 했다. 남자의 어머니는 적당한 거리를 둔채 그래요 하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별다른 호감도 적대도 드러내지 않고 다시 시선을 아들에게 돌렸다.
"이번 주말에 다시 시간 잡았다."
"알겠어요"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거다. 대동그룹여식도 시간이 남아돌아서 너만 기다리고 있는건 아니니까"
"알겠다고 했습니다"
대답을 하는 조석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상원은 눈치가 그리 둔한 편도 아니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결혼을 전제로 한 맞선임을 그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간다"
"안 나갑니다"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준 후 걸어나갔다.
어색한 침묵이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 던져졌다.
"저기 있잖아....."
먼저 입을 연 것은 상원이었다"
"뭐가 있어요"
조석희가 무뚝뚝하게대꾸했다.  그가 당황하거나 미안해하면 평소보다 더 차가워진다는 것을 알게된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어찌됐건 지금 이 순간의
상원에겐 그런 조석희의 태도가 매정하게만 느껴져 서러움이 더해졌다.
"그럼 없는거구나"
"뭐가요"
"너랑 나 사이에 믿음"
조석희가 짧게 혀를 찼다. 내 이럴줄 알았다는 얼굴을 하고 상원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말 안한거예요, 선배 기분나빠할게 분명하니까"
"내 생각에는.... 전후 관계에 문제가 있는것 같은데"
말을 잇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상원은 시선을 내렸다. 기분이 지독하게 좋지 않았다. 상원은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
"애초에 말 못할 일을 안 하면 되는거 아니야"
"별거 아니에요"
"...."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 마음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상원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체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석희야 너한테는 별거 아닐 수도 잇지만,,,,"
"아버지한테는 당분간 결혼얘기 하지 않겠다고 약속 받았어요"
당분간, 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의 문제를 남자는 애당초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상원은 가만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머니는 또 다른 문제에요, 집안이 다른데"
부모님의 사이가 나쁜것은 아니지만 조석희는 외가와 친가를 엄격히 구분했다. 집안이 다르니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상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그 사고방식을 반박하고 싶었다.
"집안이 다르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쉽게 설명되는 문제야?"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선배. 그냥 나가서 밥만 먹고 오는 거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선배가 이렇게 반응할 거 아니까 일부러 말 안한 거잖아요"
근간에 그는 가끔 볼일이 있다며 두어시간씩 나갔다 돌아오곤 했다. 무슨 볼일이냐고 묻고 싶은 것을 지나친 관심을 보이면 상대가 질려할까봐 묻지도 못하고 꾹 참았던 상원이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때 물어볼껄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면 계속 나한테 말 안하고 나갈 생각이었어?"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상원은 상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가끔 사람다워 보이지않았던 저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상원은 알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
상원은 멀뚱히 상대를 응시했다.
자신에겐 친구와 가족도 버리라는 독점욕을 드러내더니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맞선을 보러 다닌다는데 미안하다는 말은 커녕 당연하다는듯한 태도였다.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바람피우는 것도 아닌데 선배 이런걸로 며칠씩 우울해하잖아"
"....네가 신경쓰고 싶지 않았던건 아니고?"
"그것도 없잖아 있죠"
이쯤되면 화도 나지 않았다. 슬픈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고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니 이제는 조석희가 자신과 같은 인종이 아닐수도 잇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식사하세요"
툭 던져진 한마다.
상원은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무언가가 툭, 하고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동석이 옳았다. 조석희 이 개새끼는 세상이 두쪽이 나도 절대 인간이 되는 법이 없겠지. 자신을 특별 대우해준다고 우쭐해하던 자신이 멍청한 것이다.
조석희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상원은 조석희가 식사를 마칠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왜 안먹냐는 그의 물음에 상원은 별로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선배 화 났어요?"
"아니"
상원이 고개를 흔들자 조석희는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 뒤에서 상원이 작은 목소리로 석희야, 하고 부른 후 말문을 열었다.
"난 네가 이해가 안돼"
"그래요?"
"응"
그렇게 말하고 있는 상원의 표정은 쓸쓸해보였다. 조석희는 그가 맞선 문제로 자신을 돌려서 비난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해하도록 노력해보세요 한번"
별생각없이 던진 말이었다. 사람마다 입장차이가 있는것이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상원에게 이해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구태여 상원에게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상원이 한참 그를 쳐다본후 그래,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가 볼일이 있다고 잠시
나갔다 들어오겠다고 한 것은 그날 저녁 무렵 즈음이었다. 그리고 상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동석아 손님오셨다"
"손님? 누구?"
운동 중이던 동석이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자신을 이시간에 체육관으로 찾아올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글쎄다. 아주 쓸데없이 잘생긴 놈이던데"
"...."
동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이 아는한, 쓸데없이 잘 생긴 놈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놈하나였다. 입구로 나가니 고까운 표정을 지은 자신의 후배가 서 있었다.
"니가 여긴 웬일이냐"
용건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여기 왜 나타났느냐는 짜증의 물음이었다. 조석희 역시 상대가 자신에게 반감을 드러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물어보고 싶은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하하하"
김동석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이내 사나운 눈으로 고등학교 후배를 노려보았다.
"내가 너 궁금한거 알려주는 사람이냐?"
"하나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오만하고 성격 더러운 저놈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일테지.
"상원이?"
"어디 있습니까?"
동석은 피식 웃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이 후배는 지금보다 더 재수없는 낯짝을 하고 교실로 찾아왔다. 그렇다고 지금 조석희가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 행동하느냐, 그것은 또 아니다.  조금 달라진 것은 상원을 찾고 있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초조함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숨기고 있지만 사람의 기척을 잘 읽는 동석은 그가 매우 초조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석의 입가에 미소가 덧그려졌다.
"글쎄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설마 상원이가 네 연락도 안받고 잠수라도 탔냐"
"...."
두사람의 직전의 만남은 최악이었다.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임에도 조석희는 동석과 그 무리를 향해 욕지거리를 해댔다. 동석의 자신의 친구에게 그새끼와
헤어지지 않으면 다시는 보지말자는 선언까지 했을정도였다. 조석희의 적개심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자라 오만하기 짝이없는 조석희가 자존심을 굽히고 여기까지 찾아온걸 보니 동석은 실실 웃음이 났다.
"상원이랑 같이 살 정도로 친한 사이아니었어? 그런데 연락이 안되는건가?"
"....."
"어쩌냐 상원이 한번 화나면 무서운데"
"......"
조석희의 얼굴이 점점 더 살벌하게 구겨졌다. 동석의 이죽거림도 멈추지 않았다.
"두사람 사이에 생긴 문제인데 왜 나한테와서 해결해 달라고 하는지 알수가 없네, 그리고 내가 상원이한테 의사도 묻지 않고 걔 거처를 마음대로 알려주면 쓰나"
이건 대놓고 알려주기 싫다는 광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였으면 그러든가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겠지만 조석희는 지금 그런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상원이 평소 성정을 떠올리면 믿기지 않을 만큼의 단호함이있었다. 한번 그것이 무엇인지 겪어본 조석희로서는 지금 이 상황을 앉아서
손놓고 방관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상원과 마주친 이후에 맞선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결혼생각이 없다는 얘기는 했지만 마련한 자리는 나가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 그녀의 흔들림 없는 지론이었다. 결과는 신경쓰지 않겠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조석희역시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가서 차만 마시거나 밥만 먹고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돌아오면 여자들로부터 오는 연락은 일체받지 않았다.
이정도로 어머니가 결혼 문제를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거라고 여겼다. 별거 아닌 일이니까.
하지만 상원은 신경을 쓸게 분명했다. 그런 모습을 보기 싫어서 일부러 얘기를 하지 않은건데 그게 또 상원의 심기를 긁은 모양이었다.
솔직히 피곤했다. 연애라는 것이 매사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배려하는 것은 조석희에게 대단히 낯설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상원을 손에 넣고 싶었다. 그래서 그 성가심을 감내하고 있었건만, 볼일이 있다고 나간 상원은 다음날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핸드폰은 꺼져있는상태였다. 핸드폰을 켜기만 하면 위치추적을 하든 뭐든 할텐데 상원은 단 한번도 핸드폰 전원을 켜지 않았다.
물론 과후배를 가장해 그의 집에도 확인을했다. 상원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을 확인하자마자 조석희는 하는수 없이 가장 친한 친구인 동석을 찾은 것이다.
"상원선배랑 연락되십니까"
조석희는 다시한번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갔다.
"글쎄"
동석이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며 이죽거렸다. 맘같아선 저 목을 비틀어 당장 상원선배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싶었지만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알려주셨음 좋겠습니다"
"싫어"
"...."
인내심의 한계는 이미 예전에 박살난지 오래였다. 주먹을 쥐고 있는 조석희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부탁드립니다"
조석희가 고개를 숙였다. 뒤를 돌아가려던 동석의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이놈이 이렇게까지 나올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석희는 한참을 고개를 숙인채 서 있었다.
"글쎄다. 네가 열대만 맞고도 나한테 똑같이 그렇게 고개를 숙일 수 있으면 한번 생각해보든가 하지"
심술이었다.
저 개새끼가 순순히 열대를 맞아 줄리도 없거니와, 그렇다고해도 상원의 거처문제를 이새끼한테 이야기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뭐?"
"알겠습니다"
조석희가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근처에 걸어두며 말을 이었다.
"열대만 맞으면 되는건가요?"
"하하하하하하"
김동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쪽에서 줄넘기를 하던 대진이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을 가웃거렸다.
"왜그래? 뭔일인데 그렇게 신이 났냐. 어 얘는 그 개새끼 아냐?"
눈치없는 대진이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조석희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을 했다.
"맞아 그새끼"
"이 새끼가 여긴 무슨 일이야"
동석은 발치에 놓여있던 글러브를 집어 들어 대진에게 던졌다.
"잘됐다. 윤대진 너도 같이 하자"
"응? 뭘 같이해?"
"사이좋게 다섯대씩 할까. 내가 다섯대. 대진이가 다섯대씩 때린다. 그래도 되지? 조석희"
동석이 조석희에게 헤드기어를 던져주었다. 영문도 모르고 신이난 대진이 얼른 글러브를 손에 끼웠다.
"우와! 진짜? 이 새끼 패도 된다고? 완전 신난다!"
대진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후배가 눈에 거슬렸다. 그렇다고 막 증오스럽거나 죽여버리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조건없이 다섯대나
때릴 수 있다니 마치 공짜로 오락실에서 철권 다섯판을 하는 기분이었다.
"마음대로 하시죠"
조석희가 헤드기어를 머리에 쓰며 링 위로 올라갔다. 동석이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했다.
퍽, 하는 소리가 도장 안에 울려퍼졌다. 준비를 하기도 전에 얻어맞은 조석희가 턱을 감싸쥔 채 비틀거렸다. 동석이 눈을 빛내며 양쪽 글러브를 맞부딪혔다.
순식간에 상대를 향해 두번째 펀치를 날리는 동석의 순발력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아 진짜 괴물이다"
"뭐야 저쌔끼"
대진이 마지막으로 날린 라이트 훅을 매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 조석희를 보며 도장 안에 수근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헤드기어를 벗어 매트 위로 던지며 조석희가 핏물을 뱉어냈다.  대진의 펀치를 연달아 다섯번이나 맞고도 조석희는 신음소리를 내기는 커녕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좋은 선수를 키우는데 인생을 걸고 있는 동석의 아버지가 불쑥 조석희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아버지 얘는 신경쓸거 없어요"
동석이 정색을 하며 아버지를 가로 막았다.
"신경쓸거 없다니 이렇게 좋은 맷집을 가졌는데"
"관장님 저도 맷집 좋아요"
관장님의 사랑에 맹목적인 독점욕을 보이는 대진이 글러브로 자신의 가슴을 퉁퉁 쳐보였다.
"약속 지키시죠"
조석희가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말했다.  동석이 묘한 표정으로 그런 후배를 내려다 보았다.   조석희가 고개를 들자 다시
동석을 내려다 보는 형국이 되었다. 동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약속? 무슨 약속?"
"열대만 맞으면 상원선배 어디 있는지 말씀해주신다는 약속 말입니다"
"내가? 난 생각해본다고만 했는데?"
"ㅡ!!"
순간 조석희의 얼굴에 살기가 치솟았다. 김관장이 어깨를 살짝 움직여 펀칭 미트를 내뻗었다. 가죽이 찢어지며 미트 안에서 스펀지가 튀어 나왔다.
"시발!"
동석을 향해 날린 주먹이 가로막히자 조석희가 흉포한 기세로 욕설을 내뱉었다. 동석은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팔짱을 끼고 서서 대치했다.
"내가 당신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상원선배야. 그런데 상원선배 못 찾으면 그 이유도 사라진다는 것만 알아둬"
분노를 짓씹어 삼키는 그의 눈빛에서 방금 전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동석을 노려보던
조석희가 매트 위에서 내려와 옷을 집어 들었다.
"야 조석희"
김동석이 그를 불러 세웠다. 조석희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불러세운 이유 여하에 따라 살인도 불사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난 상원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
조석희의 얼굴에 한층 더 살기가 일렁였다.
"한승완한테 가봐, 그놈은 알고 있을거다"
조석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동석은 알 수 있었다.
"상원이가 제일 의지하는 녀석이니까 분명 어떻게든 연락하고 있을거다"
조석희는 알겠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도장에서 빠져 나갔다. 그때 김관장이 혀를 차며 말문을 열었다.
"저놈은 글러먹었어. 저건 사람 죽일 주먹이야. 저런 놈은 권투하면 지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지 쯧쯧"
"관장님 제 펀치는요? 제 편지도 살인 펀치라고 빨리 칭찬해주세요 "
"살인펀치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그래서 결승전에서 ko패 당하냐. 빨리 연습이나 해"
"아, 시발, 빨리 나도 칭찬해줘요 빨리 빨리"
대진이 김관장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어서 자신을 칭찬하라고 강요하고 있을때 동석은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재빨리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눈치는 더럽게 없는 주제에 끼어들기 좋아하는대진이 누구에게 전화하는 거냐고 묻자 동석은 한승완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왜? 한승완한테 전화해?"
"좆서퀴 찾아간다고, 너 내가 시키는 대로 오른쪽 옆구리 확실히 아작냈지?"
"응 우둑 소리 들리던데 새끼 뼈가 부러졌는데도 앓는 소리 하나 안내 무서운 놈, 후려 팬 내 주먹도 아픈데"
대진은 주먹을 줬다 폈다 하며 중얼거렸다.
"근데 찾아가면 찾아가는 거지 왜 전화까지 해서 알려주냐. 어차피 알게 될텐데 귀찮게"
"누가 찾아가는거 알려준데"
"그럼 왜?"
"그 새끼 오른쪽 옆구리 후려갈기라고"
"...."
대진은 가끔 친구가 보여주는 이상한 유치함에 놀라곤 햇다 평소엔 쿨하고 어른스러워서 존경스러운 녀석이건만,
"좆서퀴가 그렇게 싫으냐?"
"시발 존나 싫어"
승완이 전화를 받지 않자 동석이 다시 통화를 시도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싫으면 상원이 얘기는 왜 알려줬냐. 크하하하  설마 그 새끼가 상원이 못찾으면 너 죽일까봐 무서워서 그랬냐?"
동석이 대진을 힐끗 노려보았다. 그의 주먹이 대진의 턱밑으로 다가오기 까지 0.5초도 걸리지 않았다.
"죽고싶지 윤대진"
"아 시발놈이 왜 나한테 승질이야. 농담도 못해!"
"내가 왜 그새끼를 무서워하냐 문제는...."
"문제는 뭐"
동석은 그가 상원의 행방을 듣기 위해 순순히 자신에게 맞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맞다가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반격해올거라고 생각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열대 다 맞아주고 고개까지 숙여오는 조석희를 보는 순간 이새끼가 상원이를 좋아하긴 억수로 좋아하는 구나 하는 불길하고도
꺼름직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친 것이다.
"저 새끼 이상원 진짜 좋아하긴 하나보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던데 저런 놈이 뭐가 부족해서 남자를....음, 상원이가 나쁘다는건 아니지만 아무튼 저런 놈은 자기 좆을 청순하게 간직하지 않는단 말이지"
"청순 ....좆 아 진짜"
동석이 얼굴을 찡그리며 질색을 했다.
"왜애! 둘이 여태 손만 잡지는 않았을거 아니야"
"....상상하기 싫으니까 말을 말자. 너 그리고 그 얘기 승완이 앞에서 하지 마 승완이 칼 들고 그놈 죽이러간다"
"아이고 그러는 넌 왜 서퀴벌레 놈을 한승완한테 보냈냐? 칼로 찔러 죽이라고?"
"아니"
동석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안 알려줬어도 조석희는 어떻게 해서든 상원이 찾았을걸"
"그럼 걔가 찾게 놔두지 그 새끼 고생도 하고 얼마나 좋아"
"넌 걔가 자기 손으로 상원이 찾았을때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안해봤냐?"
"응 그런것까지 생각해야돼?"
늘 별 생각없이 사는 대진이었다. 동석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런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석희 같은 놈은 한 사람한테 만족하는 타입 아닌거 알지?"
"어 청순한 좆타입이.... 하하하 알았어 안할게 아무튼 그게왜?"
"그런 놈이 한사람한테 집착하게 되면 어떻게 될거 같아"
눈동자를 굴리던 대진이 짝 손뼉을 치며 아아, 하고 입을 열었다.
"완전 개또라이 쌍또라이. 씹창또라이 되어서 집착하잖아. 스토커처럼, 크크 장난 아닐걸, 나 아는 형 존나 카사노바였는데 어떤여자한테 뽕 가서
결혼했는데 쩔어, 전화 안받으면 1분마다 하고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어디갔다왔냐 누구 만나고 왔냐고 환자처럼 캐묻고  형수한테 바람피우면
자기 몸에 휘발유 붓고 껴안고 죽는다고 했대. 크크크 근데 이게왜? 이 얘기가 여기서 지금 왜 나와?"
"....넌 야동이랑 권투생각만 하면 돼서 좋겠다"
"응 좋지 근데 왜? 이 얘기 왜 하냐고?"
"됐어 됐다"
단순하고 편한 친구의 고민거리를 늘려주고 싶지 않은 동석은 손을 내저었다. 그때 옆을 지나가던 김관장이 아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아까 그놈하고는 척도 지지말고 적도 두지마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타입이더라"
"관장님 저는 어떤 타입이에요? 저도 멋진 별명 붙여주세요"
"너는 미워도 다시한번"
"왜요! 제가 뭘요! 내가 얼마나 예쁜데요 잘봐봐요 머리색도 바꿨는데"
대진이 꽥꽥거리며 자신의 자주색 머리를 들이밀었다. 김관장은 신경도 쓰지않고 다른 선수들의 자세를 고정해주며 등을 돌렸고 대진은 관장님이
자기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이건 사기라고 소리 지르며 줄넘기를 시작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
동석은 아버지가 던지고 간 말을 입으로 중얼거려보았다. 늦었다. 이미 자신의 친구인 상원이 그 너무 먼 당신과 엮여버린 후였다.   
동석은 다시 핸드폰 통화버튼을 눌러 한승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막내 너 또 전화온다"
"냅둬요 조선족이 또 아직 낳지도 않은 내 아들 잡고 있다고 전화하는거예요"
의자에 앉아 무를 깎고 있던 승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핸드폰이란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아 그놈 잘생겼다"
승완은 자신이 깎아놓은 무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못했다.
"승완아 잠깐 나와봐"
일년 일찍 들어왔다고 깝쳤다가 승완에게 딱 한대 맞고 그 다음날 사이좋게 친구가 되자고 울며겨자먹기로 악수를 청한 김군이 승완을 불렀다.
"왜?"
주방의 세계에서 일년은 결코 맞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승완은 뻔뻔스럽게 자신의 선배에게 반말을 했다.
"누가 너 찾는데?"
"여자?"
"...그럴리가"
"그럼 안 나가 . 남자가 감히 왜 날 부르고 지랄이야. 용건이 있으면 지가 쳐 와야지. 여자도 아닌 주제에 , 꺼지라고해"
남녀차별이 지독한 남자였다. 남자에게는 예의따위 차릴 필요가 없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게....니가 가서 말할래?"
무를 깎던 손을 멈춘 승완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유난히 차게 빛났다. 김군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알았어 알았어 가서 말하고 올게"
자신의 선배가 후다닥 사라지자 승완은 자신이 깎아 놓은 무를 만족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따 이껍질이 투명해서 글씨가 보일 정도로 깎아야 한다는데 그게 가능하기나 한거야"
한승완은 무 껍질을 눈앞에 가져다 대어 보면서 투덜거렸다.
"야 이녀석아 애꿏은 무는 그만 좀 깎고 감자랑 생강 좀 깎아 놔라"
지나가던 주방장이 승완을 보고 한마디 던졌다. 주방 총책임자의 말에는 승완도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료를 보관해두는 냉장고로 들어가 커다란 들통을 가져왔다.
성인남자 둘이 간신히 옮길 수 있는무게를 한승완은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번쩍번쩍 들어올렸다. 그의 크나큰 장점중 하나였다.
"아 젠장 이놈의 감자는 깎아도 갂아도 끝이 없네"
재료를 씻고 다듬는 것은 주방 막내들의 일이었다. 물론 한승완이 자신의 선배에게 우격다짐으로 넘긴 청소와 설거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찮은 일은 질색하는 한승완이 재로를 다듬는 일을
승낙한 이유는 칼을 다루는 기술을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찮은 것은 귀찮은 거였다.
"아 귀찮아!"
그는 반쯤 깍던 감자를 내던지며 버럭 소리 질렀다.
"저도 귀찮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승완은 자신도 모르게 칼을 움켜쥐었다.
"뭐야 넌"
"피차 귀찮은 것은 질색이니까 대화는 금방 끝내고 가도록 하지요"
조석희였다. 그의 등 뒤로 얼굴이 파랗게 질린 김군이 서있었다. 주방 안쪽으로 방문객을 들이지 않는 것은 철칙이었다.
"주방은 외부인 출입금지다 꺼져"
승완이 조석희에게 던진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김군이었다.
"아니 그게 나도 분명히 출입금지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한사코 널 봐야 한다고..."
김군은 필사적으로 말렸을 것이다. 저 빌어먹을 조석희 새끼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그냥 뚜벅뚜벅 안에 들어왔을 테지.
안봐도 비디오 척하면 삼천리다.
"지가 뭔데 보고 싶다고 여길 들어와 재수 없게"
"저도 선배님 보고 싶어서 여기 들어온거 아닙니다"
선배님이란 호칭에 존대어까지 사용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상대방의 심기를 긁는 말투였다. 그걸 그대로 참아줄 용의도 업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승완이었다.
"아 시발 뭐라는거야 빨리 꺼져 니 얼굴보면 나도 내 성질 못누르니까"
그냥 던지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예전에 조석희에게 칼을 꽂아 넣은 전적이 있는 남자였다.
"빨리 나갈 수 있도록 협조해주시면 되겠군요"
그러나 상대도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자신의 배에 꽂힌 칼을 뽑아 상대의 배에 꽂아 넣은 놈이 바로 조석희였다.
게다가 협조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는 꼬락서니가 심상치않았다.
"협조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꺼져 너랑 할말 없어"
"저는 있습니다"
한승완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도 조석희는 뒤로 물러서기는 커녕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 사이에서 김군만 어쩔줄 몰라 하며 말했다.
"그, 그러지 말고 밖에서 조용히 얘길 나누는게 어떠십니까"
김군이 재빨리 중재에 나섰지만 대치 상태에 들어간 두 사람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어올리 없었다.
"시발  난 니 할말 따위 조금도 관심 없거든"
"선배님이 제가 하는 말에 관심이 있건말건 저는 해야겠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어디있냐니 뭐가?"
"상원선배 말입니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상원이 한테 묻지"
두 사람이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승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석희가 자신에게 와서 상원의 행방을 묻고 있는데 그는 조금도 놀랍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마디로 승완은
상원의 거처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디있습니까"
"상원이한테 물으라니까"
"연락이 안되니까 선배님께 묻고 있는겁니다"
"어? 그래? 이상하다 아까 낮에 나하고는 잘만 통화했는데?"
"......"
"다시 전화해봐"
"연락 안됩니다"
"아 맞다. 상원이 전에 쓰던 핸드폰 해지시켰다고 하더라 너한테는 말 안했어?"
"...."
"너랑 어지간히 말하기 싫은가보다 크크크"
상대방이 들어서 기분 더러워질 만한 말들을 승완은 아무렇지 않게 줄줄 늘어놓았다. 평소였으면 가만히 듣고 잇지 않았겠지만 조석희는 현재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상원 선배랑 직접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해. 누가 뭐라고 했어? 헐, 존나 어이없네, 꺼져라 좋은말로 할때"
한승완이 들고 있던 칼을 휘휘 내저으며 관대하게 말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자면 강판에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조석희새끼가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기분이 좋아져 보여주는
관대함이었다.
물론 그 관대함이 상대방에게 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석희는 이를 사려물었다. 멱살을 움켜쥐고 당장 불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그런것에 순순히 굽힐 상대가 아니었다.
차라리  동석이 상원의 행방을 알고있는 편이 나았다. 그쪽은 재수없긴해도 말이 통하는 인간이니까. 한승완은 꼴통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꽉 막혀 있는 최악의 꼴통.
그런 꼴통에겐 어떤 논리도 먹히지 않는다.
"부탁드립니다"
조석희의 입에서 오늘 두번째로 부탁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그에게는 천지가 개벽하고도 남을 노릇이었다. 그러나 조석희 자존심보다 상원을 찾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날 상원이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조석희는 설마 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를 시도했지만 신호음만 갔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고 한시간 내내
통화버튼을 눌러도 상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원의 핸드폰 전원을 꺼져버렸다. 혹시 무슨일이 생긴건가 싶어 집앞으로 나가 상원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 와중에 셀수도 없이 많은 통화를 시도했지만 핸드폰 전원이 꺼져있다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새벽녘이 되어 하늘이 밝아올 즈음, 조석희는 상원이 자신의 손에서 또 한번 떠나갔음을 인정해야 했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예전에는 차라리 소리라도 지르고 화를 내서 예고라도 했지. 이번에는 나간다거나 떠난다는 뉘앙스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급소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상원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장해제를 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믿어도 좋아. 이 사람이라면 내 약한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아 등의 막연한 믿음.
거기에 잔뜩 취해 있는 상대에게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고 사라진다니. 그건 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는 상원의 집으로 연락을 해서 부모님께 아들의 행방을 돌려서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착한 후배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으니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보라는 말이었다. 졸지에 착한 후배가 된 조석희는 전화를 끊고 학교로 가서 상원이 수업을
받는 인문과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상원의 모습은 수업이 끝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과사를 찾아갔다가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다.
상원이 다음학기 휴학계를 낸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한참동안 아무런말도 하지 못했다.
두번재 강스트라이크였다. 이젠 분노를 넘어서 비참함까지 밀려왔다. 이상원이란 인간이 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일까.
자신을 향해 내비치는 감정은 모두 연기가 아니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동거를 허락하고 몸을 섞고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은 것일가.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기 시작햇다.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씹어 삼키면서 그는 상원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일이 있어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바로 상원의 주변 사람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날리는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맞아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생전 처음 상대방에게 손놓고 맞아줘가면서 얻은 정보가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미칠 지경이었다.
"아 시발 감자야 혼자 껍질 벗는 능력 좀 가지면 안되겠니"
감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저 금발머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상원선배한테 할 얘기가 있습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건 내 알바 아니거든, 나 감자 깎아야 하거든? 존나 중요한 일이거든, 좀 꺼져주라"
한승완이 감자를 칼끝에 꽂아 넣고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주먹을 쥔 조석희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빌어먹을 금발새낄르 피떡이 되도록 때려 상원을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fucking stupid jerk I can`nt  take it anymore I could kill you......
"감자 깎아야 한다고 시발"
한승완이 들고 있던 감자를 조석희에게 던지며 으르렁거렸다. 분위기를 봐선 칼부림이 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조석희가 허리를 굽혀 자신의 발치에 구르고 있던 감자를 주워들었다. 사람의 손에 들려있는 감자가 이렇게 까지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김군은 이날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흡시 감자로 사람을 쳐죽일 기세였다.
"....깎아 드리죠"
"뭐라고 ? 시발아?"
"깎아드리겠습니다. 감자"
"뭐?!!"
제대로 들었지만 이해를 못하는 한승완,
"그 중요하고도 중요하다는 빌어먹을 감자, 다 깎아드릴테니 상원선배 어디 있는지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승완이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과연 개싸가지 좆서퀴가 맞는 건가.  감자를 깎아줄테니 상원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혹시 저거 저놈 거죽을 뒤집어 쓴 딴놈이 아닐까.
칼로 거죽을 확인해 볼까나.
"너 미쳤냐?"
승완은 그나마 현실성 있는 가설을 던졌다.
"아닙니다"
조석희의 차가운목소리가 그의 온전한 이성을 뒷받침해주었다 승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생각해보니 놈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조석희란 놈이 원래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고분고분 나오는 타입도 절절절절대로 아니건만,
"그런데 니가 감자를 다 깎겠다고? 니가? 싸가지 더럽게 없고 혼자 잘난 척만 쩔어서 과일 따윈 누가 깎아주는 것만 쳐먹게 생긴 네가?"
"네"
"감자 깎아주는 아줌마 고용하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사실 그럴 작정이었다. 하지만 조석희는 눈하나 깜짝이지 않고 능숙하게 거짓으로 답했다.
"푸하하하하하하"
한승완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히던 새끼가 군대 후임으로 들어온 날의  선임의 기쁨이 이러했을까 싸가지 없는 며느리 괴된 시집살이를 시킬 생각에 신이 난 시어머니의 표정이 이렇게나
해맑을까.  웃음이 도저히 멈추지 않는 한승완은 꺽꺽 거렸다.
"크하하, 컥 너,,,, 네가 감자를 깎아? 감자를?"
"네"
"푸하하, 나 나 잠시만 더 좀 웃는다 크하하"
승완은 그 이후로도 박장대소를 했다. 조석희는 우두커니 서서 그가 웃음을 멈추길 기다렸다.
"아 시발 좋아. 깎아 당장 깎아. 그런데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깎아"
억지였다. 애초에 시한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머리좋은 조석희가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알겠다고 짧게 대꾸했다. 승완은 옳다구나 싶었다.  자기 월급을 쏟아부어서라도 필요하지 않을 감자를 주문해야
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줄줄이 단서를 붙였다.
"내일부터는 새벽부터 와서 까. 한 5시전까지는 와. 괜히 어슬렁 거리다 다른 사람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네"
조석희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승완은 점점 더 신이 났다.
"절대로 다른 사람을 고용한다거나 하지마, 수작부리면 그대로 끝인거다"
"알겠습니다 대신 선배님도 약속지키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 내가 인정하는 날에 상원이 만나게 해줄게"
승완의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시발놈아 백날 감자만 까다 좆이나 까라. 내가 귀하고 예쁜 우리 상원이 연락처를 너한테 넘기나. 어디한번 두고보자.
"저기 승완아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울리는데"
직전까지 벽에 매달려 눈치를 살피던 김군이 선반에 놓인 전화기를 가리키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좋아진 스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김동석? 야 , 내가 존나 웃긴... 뭐? 엥? 아... 오호! 그래 오케이 알겠다"
흥분해서 지금 이상황을 설명하려던 승완은 전화기 너머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통화를 끝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식언하지 마십시오"
"식언이 뭔데"
미국에서 살다온 조석희보다 한국말이 서툰 승완이 물었다.
"말 바꾸지 말란 말입니다"
"사나이 한승완을 우습게 아는구만"
조석희는 눈만 살짝 내리깔았다. 대단히 우스운 새끼 같으니, 의 한마디를 입안에 삼키며
"야, 야 그런 의미에서 나 부탁하나만 해도 되겠냐?"
승완의 갑작스런 친한척에 조석희는 기분이 나빠졌다.
"딱 한대만 맞자"
대답을 할 새도 주지 않았다. 한승완의 주먹은 정확히 조석희의 오른쪽  옆구리에 꽂혔다.
"아아, 십년묵은 채찍이 내려가네"
"채찍이 아니라 체증인데...."
김군이 소심하게 승완의 단어를 고쳐주려 했지만 흥분한 그의 귀에는 그딴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조석희는 한손으로 오른쪽 갈비뼈 부근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오늘 감자 다 깎아놔. 나는 밥 먹고 올테니까"
승완이 수북하게 쌓인 감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흡사 콩쥐에게 일을 시키고 마을 원님의 생신 잔치에 가려는 팥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조석희는 입고 있던 셔츠의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고 승완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콩쥐의 손에 들린 칼이 살벌하게 번뜩거렸다.












"젠장 막내 어디갔어! 당장 한승완새끼 불러와"
야채 저장고 안에 들어갔던 주방장의 노기 띤 목소리가 주방에 울려퍼졌다. 옷도 채 갈아입지 못한 승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안으로 걸어왔다.
"무슨일인데 그렇게 주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요"
"너, 너 이놈새끼"
주방장이 부들부들 떨며 저장고를 가리켰다. 거기에 쌓여있는 하얀 물체를 본 승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저게 대체 뭐야. 저 미친 감자무더기는 뭐냐고"
"아하하 그게..흐음"
말문이 막혓다.
조석희와 감자계약을 맺고 난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토바이를 사려고 모아둔 돈을 털어서 감자를 대량 주문한 것이다. 하루에 그 많은 양을 다 쏟아내면 재미가
없으니 일주일간 나눠서 해달라고 부탁까지 해놓을 요량이었다. 과연 조석희새끼가 그 많은 감자를 모두 깎아 놓았을까 하는 기대감에 밤잠을 설치기 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야채 저장고 반을 차지하고 있는 감자더미를 보니, 심란함이 생각보다 더 했다. 한상자에 20킬로그램하는 감자를 스무 상자 시켰으니 400킬로그램 가량이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많이 모여 있으면 존나 징그러운 거군요. 벗은 감자라는 거"
"벗은 감자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야. 감자 주문 네가 넣었다며 이 많은 감자를 대체 어디다 쓸건데"
"글쎄요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고민 좀 해봐야겠네요"
승완이 턱을 괴며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햇다. 하지만 사고방식이 10퍽스 직소 퍼즐보다 단순한 그는 매우 간략한 해답을 내놓았다.
"먹죠 뭐"
"...."
"삶아서 먹죠, 볶아서도 먹고 나 감자 열라 좋아하는데"
주방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며 욕지거리를 했다. 이 빌어먹을 금발 꼴통아 이 가게 사장 조카만 아니었어도 당장에 짤라버렸을텐데.
"저 감자를 다 먹는다고?"
"두고두고 먹어요 어차피 이것도 오래 못갈테니까"
"껍질 벗겨놓은 감자가 오래 못가는 건 당연한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냐"
"아 맞다. 그렇구나"
사실 그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조석희 새끼가 저만큼의 감자껍질을 벗겨놓은 것도 기적이라 여겼다. 분명 반도 하지 않고 칼을 집어 던지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보나마나 뻔했다. 감자깎는 아주머니를 고용했겠지. 감시를 해서 다시는 수작부리지 못하게 하면 내추럴 본 싸가지 조석희 새끼는 하루도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갈게 분명했다.
"에이 감자 그까이꺼 금방 먹잖아요. 전 삶은 감자 앉은 자리에서 열개도 먹는데요 뭐, 형님들 불러다가 한 상자씩 책임지고 먹으라고 해요 그럼 되겠네"
"야...너....."
"주방장님이 감자전도 만들어주고 그래요. 손님들 서비스로 하나씩 넣어주고 그럼 되겠네요 하하하하 그럼 전 이만 옷 갈아입으러 갑니다"
승완은 손을 흔들며 주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내일은 서른 상자쯤 주문해두고 새벽부터 나와서 감시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며.
하지만 승완의 바람과는 달리 감자 전쟁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젠장"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던 조석희는 짜증을 내며 손에 들고 잇던 감자를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혀 으스러지는 감자의 냄새가 그의 짜증을 부추겼다.
빌어먹을 금발머리 자식이 자신을 엿먹이기 위해 더러운 공작을 할거라고 생각했지만.... 감자로 만들어진 무간지옥이라니.
귀찮은 것은 질색이라 껍질을 깎아야 하는 과일은 누가 깍아주지 않으면 먹어본 역사가 없는 인간이 조석희였다.
고생이란 단어와 정반대의 인생을 살고 있던 그가 이런곳에서 감자를 깎고 있는 것이다.
"후..."
조석희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칼을 집어 들었다.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고 잇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보다 다루는게 익숙해졌지만 가끔은 헛손질을 해
손을 베었다. 손에 생기는 상처는 참을만 햇다. 그러나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두통은 뭘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전에도 두통이 있긴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니 불면증도 심해졌다. 하루에 30분도 자질 못했다.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정도였다. 그 와중에 혹시 상원에게 연락이 올까 싶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도
못했다.
"미쳤군 진짜"
그렇게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까짓 사내 새끼 하나 때문에 이러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성질 같아선 이상원이건 감자건 신경 끊어버리고 싶은데
그게 가능하지 않으니 문제였다.
이젠 오기가 발동했다. 상원을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믿음까지 생겨났다.
"어디 두고 보자고 선배"
조석희는 이를 갈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시발"
점심상을 보자마자 승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일식점 직원전체의 낯빛도 함께 어두워졌다. 며칠간의 식사를 생각하면 시발이란 단어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이게 뭐야!! 감자볶음에 감자전에 감자 국에  밥에 감자는 왜 또 넣고 지었어!! 누구야!!"
"나다"
주방장이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주방장님 여기가 감자농장도 아니고 이게 뭐예요, 하다못해 생선조가리 하나라도 얹어 주시지"
입이 댓발 나온 한승완의 반찬투정에 근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내가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면 동정심을 보이겠다면 ......한승완 너"
주방장이 스윽하고 시선을 돌리며 승완을 노려보았따. 승완이 쳇 하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 감자 전쟁 닷새째.
그 새끼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승완은 새벽에 나와 감시를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조석희는 말그대로 새벽같이 나와 특유의 싸가지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감자를 벗길 뿐이었다. 이틀이면 나가 떨어질 거라고 예상했던 조석희는 포기하지 않았고 승완은 계속 주문량을 늘려갔다. 그렇게 야채 저장고에 감자만 쌓여갈 뿐 사태는
진전이 없었다.
튀기고 볶고  삶고 으깨고  할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손님들께 서비스로 제공하고 직원들이 먹고 있었지만 도저히 쌓여가는 양을 따라갈 수 없었다.
"너 내일도 감자주문 저따위로 해놓으면 진짜 가만 안둔다"
"아우 하루만요 하루만 더 하면 되요 딱 하루만"
"그놈의 하루 타령을 대체 며칠째 하는거야. 만에 하나 내일 감자가 더 늘어나 있으면 그 감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관해뒀다가 너만 먹일거다"
너만 먹일거라는 말을 듣자 승완이 헛구역질을 했다. 닷새 내내 감자만 먹엇다. 처음엔 집으로 가져가서 야식으로 삶아먹기도 했는데 지금은 보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승완은 자신이 감자를 혐오하게 되는 날이 올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하루만 더 버티면 된다고요 다들 힘좀 내요"
"....진짜 못 먹어 이젠"
"그러는 넌 왜 안먹냐. 막내"
"엇흠 감자가 몸에 얼마나 좋은데 다들 안먹고 엇흠"
승완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모두들 속으로 꼴통 금발새끼 라며 그를 욕했다.  그리고 핏줄을 끔직하게 생각하는 사장의 가문을 욕했다.
"아무튼 난 경고했다. 내일도 그따위로 주문 넣으면 널 감자랑 같이 파묻어 버릴테니 그럴줄 알아"
주방장의 힘은 가게에서 막강했다. 요리솜씨가 워낙 뛰어나 그를 스카웃 해가려는 사람이 줄을 슬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장도 함부로 못할 정도였다.
"알겠어요 알았어 방법을 모색해볼게요"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을 희번덕 거리는 한승완의 모습을 보며 주방장과 직원들은 모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주문서 인데 다시한번 확인해주면 안될까?"
감자를 가져온 도매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전표를 승완의 앞으로 내밀었다. 승완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맞는데 왜 자꾸 확인을 하냐고 되물었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한꺼번에 감자를 1톤이나 시키는 경우는 드물어서....여긴 일식집이고"
시장에서 채소 도매를 10년이 넘게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주문은 처음이라 감자를 배달하러 사장이 직접 차를 몰고 온 것이다.
"제가 주문한거 맞아요. 저기에 쌓아주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잔금은 바로 현금으로 드릴거고요"
"...그래요 그럼"
한승완은 자신의 돈이 주방 창고에서 척척 쌓이는 모습을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마지막 감자상자를 쌓아두고 온 아저씨에게 잔금을 치루고 있을무렵, 멀리서 조석희가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둘은 인사도 하지 않았다.
조석희가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감자상자를 힐긋 바라보고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앞에 선 한승완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봐라봐라 나의 감자를 그리고 어서 패배를 인정해라.
"이거 다 하면 되는겁니까"
"뭐?"
"오늘은 이것만 다 하면 되는 거냐고요"
"...다 할 생각이냐"
조석희는 대답하지 않고 주방안쪽으로 가 세워져 있던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았다.  한승완도 의자를 가지고와 그 옆에 앉았다. 이 많은 감자를 다 벗겨낼 것인지 자신의 눈으로
감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석희는 재킷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손바닥에 알약을 덜어냈다.  의학상식이라곤 배아플땐 소화제 머리아플땐 두통약 뿐인 한승완 눈에도 한번에 먹기엔 많은 양의 약이었다.
조석희는 손바닥위에 놓인 약을 입안에 털어넣고 물도 마시지 않고 씹어 넘겼다.
"그건 뭐냐. 마약 같은건 아니겠지"
조석희는 양키놈이니까 마약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드는 순간 승완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조석희는 들고 잇던 약병을 던졌다. 약병을 들고 영어로 적힌 부분을 한참 보던 한승완은 짜증을 냈다 .
"시발 나더러 먹어보라는 말이냐?"
영어라면 소문자 a와 b의 구분조차 어려운 그에겐   약통을보고 약을 알아맞추라는 건 가혹한 처사였다
조석희는 약통을 빼앗으며 차게 말했다.
"진통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수면제로 사용하는 약이지만"
"수면제? 수면제를 왜 먹냐? 오히려 잠 깨는 약을 먹어야 하는거 아냐?"
1톤이나 되는 감자를 받기위해 그는 새벽 3시에 나와야 했다.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승완은 지금도 눈이 가물가물했다. 졸리고 피곤한 것으로 치자면 조석희도 만만치 않을 텐데
잠을 깨는 약이 아니라 수면제를 먹고 있다니 승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잠을 못자서요"
승완은 그제야 처음으로 조석희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조석희의 얼굴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까칠해보였다. 눈 밑도 시꺼멓고 눈을 충열되어 제 정신이긴 한 걸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잠을 왜?  설마 내가 새벽부너 일 시키고 있다고 시위하는 거라면..."
"원래 불면증입니다"
조석희가 승완의 말을 잘랐다.
"하루 이틀 못 잔거 갖고 그러는 거냐. 내가 니 나이때는 사흘 밤낮을 새워도...."
"일주일쨉니다"
"뭐?"
"잠 못 잔지 일주일째라고요 됐습니까"
잠을 못자면 두통이 심해진다.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정도로. 거기에 감자깍기 노동까지 하고 있으니 컨디션은 날이 갈수록 바닥을 쳤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상원의 부재였다.
"구라까고 있네 사람이 어떻게 일주일동안 잠을 안자 그랬으면 벌써 죽었지"
"....."
조석희는 대단한 수면장애였기 때문에 미국에서 내노라 하는 의사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태어나면서 갖게 된 불면증은 저주 받은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주변에서 나돌 정도였다.
그는 상원을 만나 숙면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게 되었다.
상원의 목덜미나 귓볼 허벅지 근처등 체온이 높은 부위에서 맡을 수 있는 달콤한 체향이 자신을 감싸 안으면 조석희는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어떤 기분 나쁜일이 생겨도
상원을 안고 있기만 하면 평안함이 온몬으로 번졌다.
조서희에게 이상원이란 존재는 무엇보다 필요한 존재였다.
아니 필요를 넘어서 필수적인 존재였다.
"야야 너  진짜 일주일 동안 잠 안자고 여기서 감자 까고 있는거냐 시발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해"
승완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같잖은 동정심을 보이는 건가 싶어 조석희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남의 일에 신경 끄시죠"
"아니 그게 아니고 괜히 우리 가게에서 너 죽었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손님들이 오겠냐고 사람 뒈진 가게에 누가 좋다고 음식을 먹으러 와 안그래?"
"....."
"죽으려면 꼭 네집에 가서 죽어라. 니네 동네 집값도 떨어트릴겸"
한승완이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상원선배 찾기전엔 죽는일 없을 겁니다"
남의 가게 주방에 앉아 감자를 벗기며 던진 말에 박력이라던가 비장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남자가 적어도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 대체 상원이를 왜 찾는 거냐. 싸워서 너 싫다고 나간 애를 "
승완도 자세히 상황을 아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원이 퉁퉁 부운 눈을 하고 찾아와 자신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을때 둘 사이에 큰일이 있음을 짐작했다. 한승완은 자세한
내막도 돈의  사용처도 묻지 않고 상원에게 돈을 바로 내주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반드시 갚겠다는 친구의 말은 그자리에 잊어버렸다.
어차피 받을 생각으로 빌려준 돈이 아니었다.
조석희가 자신을 찾아와 상원을 만나게 해달라고 지랄을 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다. 물론 그 지랄이 이런 감자전쟁으로 번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너 설마... 상원이 찾아서 죽여 버리려고..."
"선배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조석희가 섬뜩한 문장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비쳤다. 그리고 잠시 뒤 덧붙여 말했다.
"선배 찾는 이유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그 지랄을 하고 있냐?"
"이유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찾을 겁니다"
자신의 기준에서 정상 범위를 한참 벗어난 녀석을 보며 한승완은 미친놈하고 중얼거렸다.
"꼭 해야 할 말 있다며 설마 그것도 모르고 있는건 아니겠지"
"일단 만난 다음에 생각하면 됩니다"
할말은 정말 많았다.
왜 그렇게 자신을 쉽게 떠난 것인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두번이나 떠났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인지 . 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 할말이 넘쳐났다. 이후의 일은 모두 만나고 난 다음에 하면 된다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
잠시 딴 생각을 한 탓인지 칼날이 조석희의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 크게 베이지 않았지만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상처가 났다. 조석희는 조그맣게 욕을 내뱉으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대충 손에 감았다. 그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에 꽤 아물지 않은 상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승완은 입을 다물고 조석희를 지켜봤다. 초췌한 꼬라지를 하고 있으면서도 제 잘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조석희는 여전히 싫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야 그만해"
".....?"
"그만하고 가"
"무슨 소리 하는겁니까"
만약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면 조석희는 들고 있던 칼을 감자의 껍질이 아닌 한승완의 머리가죽을 벗기는데 사용하리라고 맹세했다.
"그만 가보라고 상원이 만나려면 지금 가야 출발시간에 맞출수 있을거다. 8시에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한승완은 며칠전에 동석이 전화로 했던 말이 이것이구나 싶었다. 조석희가 상원이 어디있는지 직접 찾게 하는 것보다 우리가 알려주는 게 나을거라고. 그러니 적당히 하고 상원의
연락처를 알려주라던 그 말에 승완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석의 말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출발시간? 무슨 출발....설마"
"저 앞으로 가면 공황으로 가는 버스가 30분마다 한대씩....쌍"
승완은 자신의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섬뜩한 금속소리에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목덜미 부근이 뜨근한 것을봐서 귀옆이 찢어진게 분명했다.
"야 이 개새끼야. 알려줘도 지랄이야. 빌어먹을 쌍놈새끼"
조석희가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5분만 늦게 알려줬으면 선배 귀가 아니라 목을 찢어났을 겁니다"
"이런!! 씨발 !! 개늠이"
한승완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석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털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야! 이 좆서퀴! 개새끼야!  너 상원이 한테 손끝하나 대기만 해봐라 내가 너 죽인다"
나쁜 놈에게 자신의 딸을 넘겨줘버린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 담긴 외침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선배 죽으면 저도 죽으니까 전 이제 상원선배 없으면 못 살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난 뒤 조석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혼자 남겨진 승완은 한손으로 피가 흐르는 귀를 붙잡고 입맛을 다셨다.
방금 전 조석희가 던진 말에서 떨쳐내기 힘든 불길함을 읽은 그였다.
그사람이 없으면 나는 못산다. 그 사람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라니 어디 유행가에서나 쓰일 법한 말인데도 대단히 기분 나쁘게 들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히드로 공항 인근이 비행기가 운행할 수 없는 상태여서 오늘 런던행 항공이 모두 결항된 상태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티케팅을 하려고 항공사 카운터로 갔던 상원은 항공사 직원의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아이슬란드 화산 폭팔문제로 인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럽행 항공이 결항된 상태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항공사측에서도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천재지변으로 인한 문제라...."
저 말줄임표에 무한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항공사 직원도 진심으로 미안하단 표정을 짓고 있긴하지만 별다른 해결책을 내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그게....천재지변으로 인한 문제라서 저희도 확답을 드리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다른 항공사 고객님들도 현재 기다리고 계시는 상황이구요"
다른 항공사 직원들도 당황스런 표정으로 열심히 뭔가를 설명중이었다. 인천공항 안이 북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변경사항은 어떻게 알수 있나요?"
"여기로 전화하셔서 항공사편명을 입력하시면 안내방송이 나갑니다. 불편을 끼쳐 정마로 죄송합니다"
직원이 전화번호가 찍힌 안내문을 건네주었다.
"아니에요....어쩔 수 없죠"
상원은 여권과 바우처를 다시 가방안에 챙겨 넣었다. 비어있는 의자를 찾아 앉기는 했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티케팅을 하기 전에 부모님께전화를 드려
영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어렵게 꺼낸 참이었다. 어머니는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들어오라고 울먹거리셨고 아버지는 갑작스런 아들의 말에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께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도착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쳤다.
"하아....."
상원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불효를 지금 막 저지르고 난 뒤인데 항공사 결항문제로 인해 당분간 한국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을 부모님께 어떻게 꺼낸다는 말인가.
급하게 준비된 도피처이기 때문에 수중에 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승완에게 돈까지 빌려 더이상 돈을 빌릴수도 없었다. 비행기가 언제 떠날지 모를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었다.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한국을 떠나겠다고 결심을 굳힐때까지  수많은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이 방법이 과연 옳은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석희에게 한마디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가 외국으로 떠난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아니 그를 떠나 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온 이후 상원은 심각한 금단증세와 싸워야 했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고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
조석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평생 같은 실수를 반복할게 뻔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이기적이고 매력적인 남자곁에서 같은 문제로 상처받고 상처받고 상처받는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인간이 변하는 일은 없겠지. 그리고 자신은 시간이 지날 수록 그를 더 좋아하게 될테고 두려웠다.
다른것이라면 어떻게든 참아내겠지만 남자의 곁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사람이 생길수도 있다는 생각은 온몸의 피를 창백하게 얼어붙게 만들정도로 두려웠다.
결국 상원은 상대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를 택했다. 그런데 어렵사리 선택한 도피조차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운이 없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수 밖에 없는 상황에 상원은 입밖에 내어 중얼거렸다.
그때 누군가 상원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맞아요 정말 운이 없죠. 선배는"
"...!!!!"
"하필 출국하는 날 모든 비행기가 결항되다니 정말 재수도 없죠"
"...석희야 네가 어떻게 여길..."
"택시타고 왔어요"
질문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석희는 일부러 엉뚱한 대답으로 맞받아쳤다.
"다행히 길도 안 막히더라구요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하하, 진짜 죽여버릴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라 걱정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하는 조석희의 눈빛에 상원은 소름이 끼쳤다. 이상했다. 도망갔던 애인을 잡은 것인데 조석희는 차분하기 그지 없는 태도였다.  타고난 귀티는 여전했지만
뭔가 평소와는 달랐다. 어딘가 어긋난 느낌.
"진부하다 선배는 어쩜 그렇게 레퍼토리가 똑같아요? 그냥 도망치면 끝인가"
"....."
레퍼토리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진부함을 토로하고 있으니 상원은 할말을 잊었다. 조석희가 손가락 끝으로 상원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선배 진짜 날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조석희가 묻는다. 상원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옆에서 큭큭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상원의 불안감은 점점 고조되었다.
상대가 욕을 하고 화를 내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왜"
"...어?"
"너 왜 날 두고 가려고 하는거냐고"
갑작스런 조석희의 반말에 상원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 갖고 놀았어?"
그가 상원의 앞으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반말로 물었다 얼굴이 빨개진 상원이 고개를 재빨리 내저었다.
"아니 절대 그런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랬어?"
"...."
"왜 그런건데 설명좀 해봐. 진짜 궁금해서 그래"
그렇게 말하며 그가 상원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닿은 온기에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흠짓 떨었다. 그걸 본 조석희의 입가가 살짝 굳었다.  
"나.... 그렇게 살 자신없어"
"그렇게 라니?"
"너한테는 별일 아니겠지만... 난 네가 다른 여자 번연히 만나고 맞선보고 돌아오는거 참기 힘들어"
상원은 이 문제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결국에 어쩔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별일 아니잖아요, 라고.
지금도 이렇게 옆에 있는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만큼 좋아죽겠는데 그때가 되면 저 말들을 자신이 수긍하게 될까봐 참기힘들었다. 그나마 실낱같은 이성이 남아 있을때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것뿐이야?"
"넌...."
상원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얘기해봤자 무한 평행선을 그을 화제였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난 너 설득시킬 자신없어"
세상에는 노력으로 되는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 있는데 조석희의 사고방식은 후자에 속했다.
상원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며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잡힌 손이 뜨거웠다. 빨리 그가 손을 놓았으면 하고 바랬다.
"그럼 내가 선배 설득시키면 안되나?"
"뭐?"
"내가 그럼 선배 설득시키면 되잖아요"
다시 본연의 존대말으로 돌아와 있었다. 상원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석희가 갑자기 상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잡고 있던 손을 얼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한테 한눈 안팔게요. 선배외의 사람하곤 손도 잡지 않을 거고, 마음도 주지 않을게요"
소리 높여 사랑고백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귀에 충분히 들릴만한 목소리였다. 개중에는 기겁을하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평생 선배하고만 살게. 상원선배하고만 섹스하고, 당신하고만 사귈테니까 나 버리지 마세요"
"서, 석희야"
상원이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눈에 띄는 남자가 여자도 아닌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랑고백을 하는 장면에 당연히 사람들이 이목이 쏠렸다.
조석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상원의 무릎에 얼굴까지 숙이고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러지마 석희야"
당연히 상원은 당황스러웠다. 사람들 앞에서 본의아니게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것은 둘째치고라도 이 말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가슴 떨리는 자신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아는 조석희라면 지금 이 말들은 분명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거짓말일게 분명했으니까.
일반인이 연극 대사를 읽는 것처럼 감정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지 않고 문장의 높낮이도 일정했다. 예전같으면 또 거짓말하고 있네. 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을텐데 이상했다.
가슴이 쿡쿡 쑤시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상원선배 나 없으면 못 살잖아. 나도 그래요"
이젠 아예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조석희를 떼어내려고 손을 들었던 상원은 그의 손이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져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마 계속 잠을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타깝고 가엽긴 했지만 상원은 상대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이유가 짐작이 되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잠 때문에 그래? 너 며칠동안 못잔거지?"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나 없는 동안에도 잘 살아왔잖아. 그러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이건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조석희를 힘껏 안고 싶어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자존심이고 이성이고 집어던지고 첩이라도
좋으니 평생 같이 사귀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살 수 없는 것은 상원, 자신이 될테니까.
"어떻게든 살아진다고요?"
상원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조석희가 되물었다.
초췌한 인상이었다. 얼굴이 퀭한 것은 둘째 치고 눈빛이 불안정했다. 이전의 일이 떠올라 상원은 덜컥 겁이났다.
"너.,...어디 아픈거 아니야?"
"말해봐요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건데"
조석희가 상원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등 위에 난 자잘한 상처가 상원의 시선을 끌었다.
"이건 또 어디서 난 상처야. 무슨 일 있었어?"
싸워서 생긴 상처같지 않았다. 시일을 두고 주기적으로 날카로운 뭔가에 베인 상처같았다. 상원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스치자 조석희가 피식 웃었다.
"왜요? 자해라도 했을까봐요?"
"...."
"선배 없다고 내가 내 손목 칼로 긋기라도 했을까봐? 내가 그정도로 병신같아 보여요?"

"...그게 아니라"
조석희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상원을 찾기 위해 손놓고 맞아주고 주방 구석에 앉아 감자를 벗기는 노동까지 했다. 설득시켜 달라 해서 사람들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병신 같아 보이면 왜 그냥 집을 나갔어요?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그런거 아니잖아"
"선배 그거알아요? 당신 사람 갖고 노는데 천부적이야. 순진한척 지고지순한척 혼자 다 하더니 결국엔 자기 좋을대로 하는거잖아"
"뭐라고?"
감정에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원색적인 비난도 아니었다. 조석희는 상원을 똑바로 보고 가지고 있는 불만사항을
토로했다.
"노력해서 안되는 문제는 그냥 회피하면 끝인가? 매사 그렇게 살거에요? 안되겠다 싶으면 도망가고 상처받겠다 싶으면 고개돌리고"
"어차피 안되는데 그럼 어떻게해 나더러 고스란히 나중에 몇 배나 커져 돌아올 상처를 떠안으라고? 왜? 왜 나만 그래야 하는데"
"될지 안될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고. 그리고 언제 내가 선배한테 상처를 떠안으라고 햇어"
남녀 치정싸움도 쏠쏠한 구경거리였다. 하물며 남남  치정싸움은 오죽하겠는가. 평소였으면 내성적인 상원이 주변을 신경써서 그만하자고 했겠지만 지금 그에겐
남들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럼 네가 상처받기라도 해? 네가?"
상원은 기가찼다. 헛웃음이 났다. 조석희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이번 것은 무리였다.
도저히 듣고 넘어가줄 수가 없었다.
"석희야 니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아?"
"전 상처 받으면 안되요?"
"아니 안될것 없어. 솔직히 나는.... 네가 나때문에 상처받았으면 좋겠어"
상원은 담담하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이기적인 진심을 드러냈다.
"난 네가 나 때문에 상처받고 망가졌으면 좋겠어. 항상 여유있고 오만하기까지 한 네 모습도 너무 좋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때문에 상처받고 절망을 느껴봤음 좋겠어"
"나도 상처받고 선배 때문에 망가져요"
조석희가 손바닥으로 왼쪽 이마를 감싸 쥐었다. 두통이 심해져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한시라도 빨리 상원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몇날 며칠이고 침대에서 자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선배....."
상원을 설득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을때 지나가던 중년부부가 노골적으로 두 사람을 향해 혐오의 시선을 던졌다. 남들이 뭐라하건 조석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분명 수치를 느끼고 움츠러들 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연인이 남들에게 모욕을 느끼는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선배 조용한데 가서 얘기해요 우리"
그렇기 때문에 건넨 한마디였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상원에게 그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런 순간에서도 그는 스스로가 망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국 넌 니가 제일 중요한거잖아"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예요 그거"
두통이 심해져 조석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머릿속에서 도끼질을 하는것 같아 토악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발이라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영락없이 상원에게는 그 소리가 자신을 향한 불만으로 들릴 뿐이었다.
"난 너때문에 친구도 가족도 버릴 뻔했어. 그런데 넌 대체 뭘 버렸어? 그저 원하는 것은 다 손에 쥐려는 거잖아"
"선배만 손에 쥐면 되요"
"나도, 겠지"
단호하게 덧붙여 지는 한마디에 조석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가 제발 이라고 중얼거리며 상원의 손목을 잡았다.
"상원 선배 집으로 가요. 우리 집으로 가요"
상원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석희와 말을 나눌수록 상원의 결심은 굳어져갔다.
"선배, 제발 좀...."
상원은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손목에 남아있는 온기가 지금도 눈물날 정도로 아쉬웠지만 상원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용기를
모아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지 않을거야 미안해"
"...."
조석희는 한참 상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괴괴한 정적속에 갇힌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
"선배 마음대로 하세요"
꽤 잔잔한 음성이었다. 비꼬는 것도 아니었고 무시하는 어조도 아니었다. 다정한 음색도 아니었다. 처음듣는 익숙하지 않은 그것에 상원은 몸이 떨렸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하는지 안녕 이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상원은 결정하지 못했다.
조석희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호모의 치정싸움이 의외로 싱겁게 끝나자 모여 있던 인물이 흩어졌다.
상원은 공항에 혼자 남겨졌다.













아이슬란드 화산 문제로 인해 유럽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운항이 취소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외국인들은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거나
그조차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공항에서 노숙을 했다. 상원 역시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인천공항에 머물러야 했다.
유례없는 항공기 결항 사태를 취재하러 왔던 방송사 카메라에 우연히 잡혀 방송을 탄 것이 상원에게 있었던 단 하나의 특별한 일이었다.
덕분에 방송을 본 친구들이 인천공항까지 상원을 찾아와  때 아닌 이산가족(?)상봉 장면이 연출되었다.
"너희들이 여긴 웬일이야 어떻게 알고 왔어?"
"텔레비전에서 봤어. 야 진짜 꼴이 말이 아니다"
상원이 계면쩍게 웃으며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아무리 신경쓴다 해도 모양새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고 니가 여기에서 왜 이러고 있냐. 외국가서 유학한다는 놈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텔레비전에서 상원을 찾아낸 장본인 한승완이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상원이 힘없이 화산때문에 하고 얼버무렸다.
"넌 어찌 된 놈이 외국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한테 말 한마디도 없냐. 서운하게"
동석이 상원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인상을 썼다. 상원이 미안하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지만 동석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상원은 몇번이고
승완에게 자신이 한국을 떠나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떳떳하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환송을 받으며 갈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뭐야 진짜 외국가? 승완이 새끼가 너 한국에 없다고 했을때 뻥까지 말라고 했는데 아오 근데 여기 진짜 넓다. 나 공항 처음 와 보는데 ...역시 가슴은 서양이군"
공항을 둘러보다가 자연스레 서양 여자들을 시선으로 뒤쫒고 있는 대진을 보고 동석이 혀를 찼다.
"밥은 좀 먹었냐. 이거 먹어"
승완이 도시락 통에 싸온 삶은 감자를 꺼냈다. 동석은 말없이 음료수를 상원의 무릎에 던졌다.
"고맙다 같이 먹자"
상원이 같이 먹기를 청했지만 모두들 질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감자 됐어. 진짜 역해"
"아 시발 보기만 해도 목구멍에서 좆물이 올라온다. 치워라"
",,,,응 그래"
상원은 조심스레 감자 하나를 베어 물었다. 승완은 인천공항이 자신의 감자를 사들이면 참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상원은 동석이
옆에서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땐 모르는척 하는 것이 자존심이 센 승완을 위한 행동이었다.
"가서 지낼 곳은 정했어? 학교 같은데 들어가는 건가?"
"아직 정해진 건 없어"
상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앳되 보이는 상원의 얼굴 때문에 친구들은 한층 더 걱정스러워했다.
"아. 근데.... 흐음"
갑자기 승완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주변을 살폈다. 뭔가 말하기 어려운 주제를 꺼낼 모양이었다.
".....안 왔디?"
"누구?"
"시발개호로쌍놈새끼"
한번의 쉼 없이 내뱉는 욕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엿다. 상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택시를 타고 왔다던 조석희가 누구에게
정보를 들었는지 예상이 가능해지는 순간이었다.
"...왔었어"
"와서 뭐라디. 시발놈. 혹시라도 욕하고 너 때린 거라면 지금이라도 내가 가서...."
"없어 그런거"
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와서 너 보고만 갔어? 끌고 가거나 그런 것도 없이?"
승완이 기겁해서 물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끄엑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의자로 몸을 늘어트렸다.
"이상하다 그럴리가 없는데"
동석도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친구들의 반응에 상원이 먹고있던 감자를 내려놓았다.
"왜? 뭐가 그럴리가 없어?"
"그 미친 새끼가 너 얼굴 보고 보내주자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거 아냐"
"그런 짓이라니?"
동석이 승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래도 상원이 가지 전까지 연락을 하던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이쪽을 통해 혹시 이야기가 흘러 갔을 것이라 생각해서 였다.
"아 시발 솔까 말하기 싫었다. 됐냐?"
"무슨 말을 하는거야"
상원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동석도 승완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결과야 어쨌든 유치한 심술로 조석희를 골탕먹인 것이니 말을 꺼내는 것이
께림직 했던 것이다.
24금을 제외하면 머릿속이 누구보다 순수한 대진이 해맑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좆서퀴가 너 내놓으라고 우리 도장에 찾아왔는데 동석이가 안 알려준다니까 존나 굽신굽신대면서 제발 알려 주십셔 형님 딱 이래서 우리가 다섯대씩 때렸어"
"...."
"....."
"....그게 뭐야"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이 전국하위 0.0001% 에 속해있던 대진의 줄거리 요약은 도저히 들어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동석이 입을 열었다.
"그놈이 찾아왔었어. 네 연락처 달라고"
"...그랬구나"
"너 나한테 연락처 안줬잖아. 그래서 모른다고 했지 알아도 안 가르쳐준다고 했고"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조석희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그놈이 너 있는 곳을 알려주면 뭐든 하겠다고 해서 좀 맞으라고 했지"
"뭐?"
"딱 열대만 맞으라고 했어 방어 없이. 그럼 생각해 본다고"
"그래서 ...때렸어?"
"그래서 걔가 맞았느냐고 묻는 쪽이 더 정확한 질문이겠지"
조석희의 더러운 성격을 고려하자면 동석의 말이 맞았다. 상원은 질문을 다시 고쳐했다.
"그래서 맞은 거야?"
"응. 열대 다 맞았어"
"나도 다섯대 때렸어. 졸라 힘껏 패서 갈비뼈 나갔는데 끽 소리도 안내더라 독한 새끼"
상원은 자신이 맞기라도 한듯 잔뜩 인상을 찌푸린채 옆구리에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어떻게 됐어? 넌 나 어디 있는지 몰랐잖아"
상원은 승완에게 연락을 취했다. 동석은 고지식한 부분이 있어서 자신의 유학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지. 난 생각해본다고 했지, 말해준다고 한적은 없다고"
"..."
상원은 온몸에 피가 싹 가시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조석희 성격에 살인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냥 넘어갔냐고?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놈 머릿속을 내가 알게 뭐야"
상원도 하긴 하고 한숨을 쉬었다. 2년간 교제를 했으면서도 대체 이 남자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뭐 그래도 한마디는 했다. 한승완한테 가보라고"
상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승완에게 옮겨졌다. 승완이 쳇하고 입을 열었다.
"왔어. 와서 시발놈이 너랑 할말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알려준거야?"
"아니야 그냥 알려준거 절대 아니다. 내가 그렇게 의리 없는 놈으로 보여?"
승완이 펄쩍 뛰며 말했다. 상원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를 탓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두 사람 사이 안 좋잖아"
"사이라고 할 것도 없이 난 그자식 존나 싫어 완전 밥맛이야"
팔에 붙은 벌레를 털어내는 것처럼 한승완이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왜 알려줬어?"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동석은 그래도 어렸을 적부터 운동을 해와서 페어플레이 정신을 갖추고 잇었다. 승완에게는 페어플레이 정신은 고사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심도 없었다.
".....그놈이 감자껍질을 깠거든"
"뭐?"
"감자 껍질을 깠다고, 새벽에 와서"
상원은 두눈을 깜빡거리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들려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조석희가 설마 감자 껍질을 벗겼다는 거야?,,,,,왜?"
그의 집을 드나들고 같이 살기까지 했던 상원이지만 조석희가 자신의 손으로 집안일을 하는 것은 손에 꼽을 만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몰라, 내가 감자 껍질 벗겨야 하니까 꺼지라고 했더니 자기가 해준다잖아.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먼저 시킨거 절대 아니다. 걔가 껍찔 깐다고 했을뿐"
며느리 시집살이 시킨 것은 절대 자신의 문제가 아니며 며느리가 거기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는 시어머니의 어조였다.
"얼마나?"
"그, 그게 좀 많이...... 으아 진짜 맹세코, 내가 먼저 하자고 한거 아니다. 지가 자청했어. 웃기지도 않은 새끼. 누가 그러면 감동할줄 알고, 찌질한 놈.
혼자 잘난척은 다 하더니 며칠동안 와서 일만 하더라고"
조금 많이 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무리가 따르는 양이었다. 아직도 승완의 가게에서는 넘치는 감자를 주체하지 못해 매일 저녁 억지 감자파티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마지막 날 조석희가 거의 감자를 손도 안 대고 나가서 1톤 가량의 감자는 저장이 가능하다는 사실 정도.
아마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상원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한에선 조석희는 그런 일을 묵묵히 할 위인이 아니었다.
"결국에 석희가 약속한 만큼 일을 다 한거야?"
"아니 처음부터 그런것은 없었어. 그냥 내가 오케이 하면 그때 알려준다고 했지"
"...."
이런 말도 안되는 약속을 냉철한 조석희가 받아들였단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더불어 한승완이 결국엔 오케이를 했다는 사실 역시.
"내가 절대로 감자 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오케이 한 것은 아니야. 대진이 씹쌔끼야. 웃지 말라니까"
"크크크 애 통장 빵구 났다 크크크크"
"나 때문에 그렇게 된거야?"
상원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차 올랐다. 안그래도 승완에게 비행기 값을 빌렸는데 석희와의 내기에 사용된 감자값 얘기까지 더해지니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왜 너때문이야. 그놈 때문이지. 감자는 왜 까겠다고 지랄을 해서, 암튼 내가 너 간다고 말해줫어. 말해주고 나서도 잘한 짓인지 백번 고민했지만"
"대체 왜 얘기해준거야?"
마음속에 의문이 남아있던 상원이 다시 입밖에 내어 물었다.
"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뭐랄까"
표현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승완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그 아리송한 감정을 설명 못해 머리만 긁적였다.
"그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겠다 싶어서"
동석이 입을 열었다.
"맞아! 바로 그거야! 그거였어"
승완이 맞장구를 쳤다. 자신이 어떻게 골탕먹인다 해도 조석희는 상원이 있는 곳을 언제가 되었든 찾아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매우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동석이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한국에 있을때 마주치는 편이 나을 거 같았어. 나는 그래야 무슨 문제가 생겨도 해결하기 쉬울테고...."
사실 동석은 조석희가 자신의 친구를 찾는다면 당연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끌고 갈거라고 생각했다. 이왕 끌려갈거 외국에 나갔다 한국에 오는것보다
한국에서 해결을 보는게 나은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널 두고 그냥 갔어? 깽판 놓다가 공항 보안요원들한테 끌려 나간건 아니고?"
"아니 내가 그냥 같이 안간다고 했더니 돌아갔어"
"그게 이해가 안간다는 거야. 그 새끼가 개고생을 하고 순순히 물러났다는 게 말이 되냐고, 뭐 다른 꿍꿍이가 있는거 아니야?"
승완 역시 조석희가 상원을 어떻게든 설득해 집으로 데려갈 거라고 믿었다. 사실 그놈이랑 사는 것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외국으로 가는것도 탐탁치 않았다.
일단 한국에 머물게 한 다음 조석희를 떼어놓아야 겠다고 승완은 통통한 꿈을 꾸었다.
"난 석희가 애초에 고생을 자처했다는게 이해가 안가"
이해가 가지 않는건 피차일반이었다.
"...그런애가 아닌데"
상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애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조석희는 뭔가를 위해 희생하는 법을 몰랐다. 희생하지 않아도 원하는것은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는 남자였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완전 그런 놈이던데"
대진이 감자를 입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너한테 미쳤잖아. 그새끼 그러니까 그 지랄을 한거지. 걔라고 뭐 별수 있어 다 똑같이 좆달린 남자지. 어 자기가 두번이네 좆 달린 남자. 자지 , 크크크"
이상한 언어유희를 발견한 대진은 혼자서 키득거리며 좋아했다. 그러나 나머지 세사람은 웃지 않았다. 상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승완과 동석은 서로 곤란하단
눈짓을 주고 받았다.
응원해주고 싶지 않은 연애를 갈라놓자니 친구가 폐인이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조석희를 두둔해주는 말을 해주자니 입이 썩을것 같았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동석이 묻자 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있다가 비행기 다시 뜨면 가야지. 별 수 없잖아"
그런 친구를 물끄러미 보던 승완이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자기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던 동석은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중요한 결정을 하는건 결국 너잖아. 조석희가 아니라"
"...."
"그러니까 선택권이 없다는 투로 얘기하지마. 결과야 어쨌든 니가 선택한 거다"
"그래 고마워"
마음이 무거웠지만 상원은 친구의 진심어린 조언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이 모든 사실은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자신에게 왔던 단 하나의 행운을 놓아버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행운이 언제 자신에게서 달아날까. 평생을 조마조마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을 지탱하기란 불가능했다.
사람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었다. 가지지 못했을 때는 손에만 넣는다면 세상 그무엇도 필요없다고 생각하며 기도했는데, 막상 손에 넣고 나니  그것을 지킬 힘이 없어 전전긍긍 할 뿐이었다.
상원은 그날 저녁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친구들을 보내고 의자에 누워 높은 공항 천장을 바라보았을때 그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럽게 울음이 터졌다. 조석희의 집에서 나온 그날 이후 처음으로 상원은 소리내어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옆에 누워있던 노부부가 상원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달랬다.
그리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 어떤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좋아질거다. 지금보다는 분명 좋아질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름도 모르는 노부부의 친절이 상원의 눈물을 간신히 멈추게 햇지만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알고 있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지난 일년여의 시간을 떨칠 수 없는 것임을.
그보다 좋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 또한,
다음날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의 운항이 재개되었다는 희소식이 공항에 안내방송으로 울려 퍼졌다.















항공사 카운터를 통해 탑승 수속을 밟고 짐을 보낸 상원은 마지막으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를 했다. 어제 기분 좋게 헤어지긴 했지만 막상 비행기를
탄다는 말을 하니 다들 목소리가 밝지만은 않았다.
특히 승완은 힘들면 언제든 한국으로 와버리라는 말을 세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상원은 습관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사실인데 그것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이기적인 것도 유분수지"
상원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나무랬다. 게이트를 지나 보안검색을 위한 기나긴 줄에 합류했다. 운항이 재개된 항공이 한두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난히 줄이 길었다. 멍하게 서 있던 상원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작은 열쇠고리가 띤 것은 우연이었다. 빨간색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열쇠고리였다.
고리부분이 낡아 어디선가 떨어진 것 같았다. 뒷면에는 1949. 12.24 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낡고 작은 열쇠고리였지만 새겨진 날짜로 미루어보건데 분명 당사자들에겐 소중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상원은 그것을 집어들고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혹시 이것을 빠뜨리셨나요? 이 열쇠고리가 혹시 당신 것은 아닌가요?
기다리는데 지쳐서 친절함이 바닥이 난 외국인들은 대부분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그냥 보안 요원에게 맡겨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상원을 어젯밤 위로해주던
노부부가 검색대 앞에서 당황한 얼굴을 하고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싶어 상원은 노부부 앞으로 가서 자신이 주운 열쇠고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노부부 얼굴에서 믿기 힘들만큼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백발이 성한 할머니가 thank you sweetie 를 연발하며 상원의 뺨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할아버지도 그의 손을 맞잡고 몇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상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의 친절에 인사를 따로 한다는게 갑작스런 운항 재개로 인해 노부부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마 두움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상원은 노부부에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이건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프러포즈를 하며 건넸던 선물이라며 열쇠고리에 대한 사연을 설명해줬다. 자신의 행운의 마스코트를 돌려줘서 고맙다고, 할머니는 상원의
두손을 꼭 쥐었다.
노부부는 검색대를 지나 출국심사를 받으러 가기 전까지 상원의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상원은 손을 흔들어 주고 잣니이 서 있던 줄의 맨 끝으로 돌아갔다.
그의 집을 나설때 상원은 맨손으로 나왔기 때문에 같이 했던 시간을 기념할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하나쯤은 챙겨 왔어야 하나 후회가 밀려왔다.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꽤나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상원은 긴 줄의 끝에 서서 만약 그날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가져올까, 하는 백일몽을 꾸기 시작했다.
조석희는 아직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CD를 인질로 잡고 있겠지. 그 인질을 도로 가지고 오는 것도 좋았을텐데, 자신의 책상 안쪽에 조석희가 외국에 갔다 올때마다 사다주는
초콜릿 상자 포장지를 모아둔 것도 생각이 났다. 재수 공부를 하면서 받은 석희의 손글씨가 적힌 쪽지도 있었다.
많았다. 하나를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상원은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상원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동석의 말이 옳았다. 모두 다 내가 결정한 일이니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일단은 새로운 곳으로 가서 정신없이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지내다보면 시간이 흐를테고 그러다보면 그리움이 조금은 퇴색되겠지.
그러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여 살만해질 때쯤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후의 문제는 그때 생각하면......
".....?"
등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게이트 앞에서 뭔가 소란이 빚어진 것 같았다.  별일 아니겠지 하던 상원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잠깐이면 된다고 비켜"
"안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여권과 보딩패스가 확인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합니다"
"비키라고 했잖아!"
설마했다. 그러나 보안요원 제지 사이로 영어로 욕설을 퍼붓는 소리를 듣는 순간 상원은 소란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상원은 줄을 빠져나와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 환자복을 입은 조석희와 그를 막고 있는 보안요원 그리고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뒤엉켜
소란을 빚고 있었다.
"...석희야"
상원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안요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조석희가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지금 환자복을 입고 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모든것이 설명이 될 얼굴이었다.
"너...아직도 잠 못 자고 있어?"
그 집을 나온지 열흘이 훌쩍 넘고 있었다. 원체 조석희의 불면증이 심하긴 했어도 그는 늘상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그가 타의건
자의건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상황이 아주 심각하단 소리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짧은 대꾸가 돌아왔다.
아, 그렇지 자신은 더이상 조석희를 신경 쓸 자격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걱정을 하는 것도 가식적으로 내비칠 뿐이었다.
자신의 뻔뻔함이 부끄러워진 상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소란의 장본인이 게이트밖으로 나오자 보안요원들도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도련님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던 남자가 조석희를 향해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퇴원했어"
"하지만 의사선생님께서....."
조석희가 고갯짓을 했다. 조용히 입다물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양복을 입고 있던 남자가 한발자국 물러섰다. 조석희가 상원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슬프거나 괴로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특유의 무표정하고 냉랭한 눈빛이었다. 상원은 조석희의 표정에서 그가 모든 것을 정리했음을 짐작했다.
"왜 왔어"
상원은 일부러 차가운 태도를 취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흔들릴게 분명했다.
"줄게 있어서 왔어요 선배"
"뭔데"
조석희는 대답대신 환자복에서 편지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자 조석희가 픽, 하고 웃었다.
"이거 받는다고 하나 변할 거 없어요 그냥 받아. "
"...그래"
변할 거 하나 없다는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상원은 편지봉투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조석희가 움켜쥐어 자신의 쪽으로 끌어 당겼다.
훅, 하고 와닿는 남자의 열기에 상원은 그대로 굳었다.
"5초만"
밀어내야 했다. 이러지 말라고 한살이라도 더 먹은 자신이 단호하게 끊어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 5초가 지나자 조석희는 상원을 놓아주었다. 상원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놓지 말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조석희가 작은 목소리로 Good bye 라고 속삭인 것도 같았다. 방금 전까지 끌어안고 있던 열기가 꿈결처럼 멀어졌다.
상원이 정신을 차렸을땐 조석희도 검은 양복도 이미 인파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상원은 그런것을 조금도 신경쓰지 못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로 인해 손이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심하다. 이 정도에 눈물이 날만큼 좋아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래. 이상원 이병신아. 멍청한 녀석아. 머저리야. 천하의 등신아, 쪼다 백치야.
자신을 향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욕을 쏟아부으며 상원은 심장떨림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봉투를 발견하고 황급히
봉투 끝을 뜯어보았다.
거기엔 코팅된 작은 종이와 짧은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코팅된 종이는 로또 복권이었다. 1등 당첨이 된 로또 복권을 준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랬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 돌려줘야 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또 종이 뒷면에는 매직으로 꽝, 이라는 글씨가 큼직막하게 쓰여있었다.
상원은 한참을 그 복권을 들여다 보다가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만큼 간결한 내용이었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편지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원선배, 이건 내 부적인데 당신 줄게. 숫자 12개를 골랐는데 당첨번호와 하나도 안 겹치는 것도 나름, 행운이니까.  Ps. 런던은 날씨가 똥 같으니까 감기 조심해]
상원은 이전에 조석희가 자신을 편의점으로 데려가 사주었던 복권이 떠올랐다. 그때 두사람은 서로 복권을 나눠가졌다. 조석희는 자신의 복권을 상원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건 자신이 써준 부적이니까 잘 간직하라고, 그리고 그는 상원의 복권을 자신의 부적, Lucky charm으로 간직해온 모양이다.
"....."
상원은 고리가 끊어진 낡은 열쇠고리를 찾아주었을때 보여준 노부부의 미소가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에겐 보잘 것 없는 물건이겠지만  몇 십년간 소중히 간직해온
이유를 설명하며 그녀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던 조석희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냉랭하고 사람을 깔보는 듯한 표정, 꾹 다문 입술, 살짝 내리감은 눈.
그런 얼굴을 하고 상대방의 불운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의 진심과 차갑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인사.
"학생 뭐해요. 선반위에 가방 올려놓고 주머니 안에 있는거 모두 비우세요"
보안 요원이 상원의 어깨를 툭 치면서 검색대를 가리켰다.
이번이 상원의 차례였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냐고 묻는 말도 없이 집주인은 문을 열어주었다.
"미안해"
"....."
상원은 현관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쏟아냈다.
"제 발로 나갈때는 언제고 돌아오니까 어이없어 하는거 알아. 황당하겠지. 한 대때리고 싶겠지. 네 말 안 믿은 것도 내 멋대로 모든 상황 판단하고
결정내려 행동한 것도 사과할게.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 나중에 더 큰 상처 받을까봐 회피한거 맞아. 네가 안 변한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내심 전제로 깔아놓고
내맘대로 판단했어. 그것도 사과할게 혼자 상처받을 것만 생각하고 네 상처는 신경쓰지도 않았어. 이기적인 건 나였어. 미안해....정말 미안해.
석희야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각서를 쓰라면 쓸게. 다시는 널 두고 어디 가지 않을거야. 니가 나 버리기 전까지 절대 어디 가지 않을 거야. 아니 니가
나 버리면 그냥 죽을게. 죽어버릴게. 죽어버리는게 나으니까....용서해줘"
정확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상원은 몰랐다.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한번의 거름도 없이 그대로 쏟아냈다. 고개를 숙인 채였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석고대죄를 하라고 하면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겠노라고 상원은 다짐했다.
"때려도 돼. 화풀릴 때까지 맞을게"
"......"
"욕해도 좋아. 어떻게 하면 네 화가 풀릴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할게"
"....."
마주잡은 두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차가운 말이 돌아오거나 비웃음 같은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어색한 침묵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상원은 두눈을 꼭 감고 자신에게 돌아올 형벌을 기다렸다.
"화가 풀릴때까지 사람을 패는 과오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머리 위에서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상원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조석희의 옆에는 조석희의 어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그...저...그게...."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상원은 문을 열어준 상대도 확인하지 낳고 바로 고개를 숙여 말을 쏟아낸 자신을 저주했다. 최소한 누가 있는지 정도는 확인을 해야 했건만,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온몸의 핏기가 가셨다. 최악이었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그런 짓 안해요. 아니 못하는거 아시잖아요"
조석희는 어머니를 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퍽이나 그러겠다"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들의 집으로 남자가 찾아와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다시 받아들여 달라는 사랑고백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표정이 좋을리가 없겠지.
상원은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1분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지금 이자리에서 배를 가르고 죽을 수도 있을텐데.
"그럼 당분간 네말대로 할테니 그견은 생각해 보도록 하렴"
"당분간이 아니라니까요"
벽에 기대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조석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미소를 보고 가슴이나 두근거리고 있다니 자신은 바닥에 머리를 박아 죽어도 마땅찮은 놈이라고 상원은 끊임없이 자책했다.
"알겠으니까 아까 네가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라"
"네 그러죠"
조석희의 어머니가 현관으로 와서 구두를 신었다.  그녀가 자신의 옆을 지나가자 상원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몸조리 잘하거라"
"예 나중에 영국에서 뵐게요"
"학생도 그만해요, 뭘 그리 잘못했다고 맞는다는 소리까지 해"
"그...... 죄송합니다"
조석희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더니 그만 가보겠다고 문을 열었다. 상원은 엉거주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햇다. 또다시 그녀의 한숨이 들려왔다
무안함과 수치 죄스러움으로 상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조석희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와, 이제 어쩌지"
"....미안하다"
죽고 싶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까 말까인데 어머니 앞에서 아들내미가 남자애인이 있다는 사실까지
까발리게 했으니 이건 한두대로 맞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상원은 또 고개를 숙이며 애끓는 사과를 토해냈다.
"내가 정말, 생각이 짧았어. 너만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네가 아프면 누군가 있을수도 있는데 정말 미안해 본의아니게 이런 실수를 .... 미안해
책임질게. 내 행동 모두 책임질게"
상원의 앞에 선 조석희의 입가엔 장난스런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하고 있는 상원에겐 그게 보일리가 없었다.
"선배 어떻게 책임지실건가요. 저희어머니한테 그런 얘기까지 하시고"
"...네가 원하는대로 할게. 평생 을 다해 갚으라고 해도 갚을게 정말 미안하다"
조석희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어쩌지 웃음이 터져 나올것 같았다.
사실 그는 어머니를 불러다 놓고 자신에게 한번만 더 맞선을 강요하면 아예 아버지 쪽으로 적을 옮겨버리겠다고 물려받은 주식도 어머니와 적대 관계에 있는
주주들에게 헐값에 넘겨버리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은 조석희 본인이었다.
그런것을 모를리 없는 아들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하자 어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이전에 그 애, 때문이니 하고 물었다.
조석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초인종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선배 방금 제 인생 조졌잖아"
조지다. 라는 표현에서 상원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나는...."
"조졌어. 정말 조졌어. 내 인생 완벽하게 조졌어"
삼단 콤보였다.
"미안해 정말.... 일부러 그런건 절대 아니야"
일부러 하라고 해도 가능하지 않은  시기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이런 기막힌 불운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조석희는 가여운 이 남자가 좋았다.
"내 인생 어떻게 책임지실 건데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말만해 정말...진심으로 사과할게"
상원은 두손을 꼭 쥐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대로 두면 피를 토하고 죽을 기세였다.
조석희는 상원의 어깨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순진한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이 한 청년의 전도유망한 미래를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버렸단 죄책감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두 손 앞으로 내밀어봐"
"...응"
상원은 울면서 두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아무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자신의 양팔을 부러트려 놓으려는 모양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무서워서 두손이 벌벌
떨렸지만 원한다면 두 다리도 내어놓자고 다짐했다 .
"손 뻗어서 나 안아요"
"...응? 뭐라고?"
방금 막 머릿속으로 두 팔이 부러지는 장면을 떠올린 상원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되물었다.
"날 안으라고 그 팔로"
"....어?"
"안아. 당장"
조석희가 명령했다. 상원은 엉거주춤 팔을 뻗어 조석희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조석희도 팔을 둘러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한번의 몸짓으로
상원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받아 준 것이다.
"결혼 안해. 약속 다 받아놨어요"
도망갈 궁리만 했던 자신과 비교되는 훌륭한 석희의 태도에 상원은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석희야 미안...."
"미안한줄 알면 나한테 잘하라고 앞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상원은 조석희를 양손으로 힘껏 끌어안고 미안하단 말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울음과 뒤섞여 나중엔 미양, 미양, 하는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조석희는 끝까지 괜찮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미안....흑....미안해"
"미안하면 더 세게 끌어안아"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을 다해 석희를 끌어 안은 상원은 미안하단 말을 반복했다. 조석희는 상원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어 체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잘할게. 앞으로 더 잘할게 미안해 네가 했던 말 믿을게. 다시는 너 상처주지 않을게 미안해"
"그래요 상처주지 마세요"
조석희는 상원으로부터 마음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건 회생이 불가능했다. 그는 진심으로 가슴이 아팠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괴로웠다
조석희도 인간이었다.  애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은 절망을 느끼는 . 그러나 조석희는 인간이되 보통의 사람과는 종자가 다른 인간이었다.
사실, 그는 상원의 머리를 움켜쥐고 집으로 끌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뿐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상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영영 놓아줄 생각따윈 이만큼도 없었다.
두통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기절을 해 병원에 입원한 와중에도 그는 상원이 타기로 한 비행기 편명을 알아냈다.
런던, 그곳은 외가의 본사가 있는 도시였다. 그 말은 즉, 자신이 원한다면 그곳에서 상원의 생활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망쳐놓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조석희는 덕분에 매우 바빴다. 이곳저곳에 전화를 넣고 사람을 불러다 지시를 내렸다.
일단 상원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그의 짐은 분실되고, 소매치기로 가진돈이 모두 털릴 예정이었다. 한국사람이 있는 가게에서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지 못할 것이고,
운이 좋게 일자리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다음날이면 이유 불문 해고를 당할 것이다. 어학원에 등록하면 그 어학원이 며칠 내로 문을 닫게 되어 돈을 날리는 불행도
그를 기달고 있었다.
몇 개 더 손을 써놓긴 했지만 아마 그방법까지 가지 않아도 상원이 돌아올 것임을 조석희는 예감했다. 일단 한국에 돌아오게 하면 반은 성공이었다.
상원이 자신을 떠나는 이유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도피가 지속될 수 없음을 본인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사정범위 안에만 들어오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덫을 놓으면 된다. 자신의 발로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래도 보고 싶은 것은 어쩌지 못했다. 오늘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갔을만큼.
게이트 앞에서 상원을 끌어안았을때, 조석희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상원을 놓아주었다.
개똥같은 런던날씨 때문에 감기에 걸리지 말고 하루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삼키고 그는 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상원이 극적인 순간에 등장해 엄청난 불운을 턱, 하니 쏟아 낸 것이다.
"선배 아까 한말 사실이죠?"
"응"
뭐가 사실이냐고 묻는지는 몰라도 상원은 일단 대답했다.
어머니 앞에서 강제 아웃팅까지 시켜 창창한 인생 망쳐놓은 마당에 못해줄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조석희는 그럼 변호사를 불러 계약서를 작성해야겠네 라고 중얼거렸다.  무슨 계약서냐고 묻고 싶었지만 상원은 차마 입이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질문을
했다가 조석희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웠다.
"이제 선배 인생은 나랑 죽던가 나랑 살던가. 두가지 밖에 없어"
나지막한 속삭임에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이번과 같이 함부로 도피를 결정짓는 행위는 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좋아하면서 공항에서는 왜 그랬어"
"...미안"
"상처받았잖아. 선배는 그럴때보면 무서워"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진심이 섞여있었다. 이 빌어먹을 순댕이는 짜증이 날만큼 행동력이 좋다. 느릿느릿 온순해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에선 칼 같은
단호함을 발휘해 조석희로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하나도 안 무서워. 시시한 인간이야"
상원이 반론을 펼쳤지만 조석희는 허리를 으스러트릴 기세로 손에 힘을 주어 그 말을 반박했다.
"아 맞다. "
상원은 공항에서 받은 로또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조석희에게 건넸다.
"이거 네거잖아"
석희가 자신을 받아주면 가장 먼저 이것을 돌려주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래요 제것이죠"
조석희가 받아든 로또 종이를 자신의 지갑안에 고이 접어 넣어두었다 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상원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중얼거렸다.
"그게 네 Lucky charm 인거지"
중얼거림을 들은 조석희가 한쪽눈을 치뜨고 상원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대답이 바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 아니야?"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상원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조석희는 상원의 턱을 손가락으로 지고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지금보니 선배가 제  Lucky charm 인거 같네요"
"...아"
예기치 않은 고백에 상원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조석희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입술이 겹쳐졌다. 오랜만의 키스에 상원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황홀감을 느꼈다.
"선배 제가 준 부적 잘 갖고 있죠?"
"...뭐?"
"그때 내가 준 복권"
"...어?....?!"
부드럽게 이어지던 키스가 잠시 멈추었다. 상원의 어깨가 굳어졌다. 분명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조석희가 짐짓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했다.
"전 선배가 준거라면 소중하게 간직하는데"
"아, 아니 있을거야. 어딘가 있을거야 책상서랍이나 옷안에 분명히 있을거야. 버린 적은 없어"
"버려?"
"아니 안 버렸어. 정말이야"
"당첨된 복권을 그렇게 함부로 놔두면 어떻게 해요"
"당첨...됐어?"
상원의 얼굴이 한층 더 파리하게 질렸다. 사실 당첨 유무는 조석희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고른 숫자이니 최소한 3등 정도는 당첨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그였다.
사실 3등이건 1등이건 그에게 당청금액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소액 따위 있어도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상원이 자신이 건네준 것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시이 기분 나쁠 뿐이다.
"어떻게 하지? 당첨된 거면...... 아 정말 난 죽어야 해. 당장 찾을게"
방으로 달려가려는 상원의 어깨를 조석희는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
"선배 그런거 말고 다른 것 줄게요"
조석희의 말에 상원의 커다란 눈에선 눈물이 왈칵 맺혔다. 당첨된 로또 종이까지 잃어버린 자신에게 또다른 선물을 건네준다는 다정함에 감동한 것이다.
이런 석희를 내버려두고 바다 건너까지 도피하려고 했다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 이번에는 절대로 어디에 흘리면 안돼요"
"그래 약속할게"
엄숙한 목소리로 상원은 맹세를 했다.
"좋아 그럼 벗고 소파에 올라가 엎드려요"
"....응?"
"엎드리라고요. 서서는 불편하잖아"
"뭘? 엎드리고 서서....."
"서서하고 싶으면 벽 짚으세요 응 그렇게"
조석희가 상원이 당황해 하고 있는 틈을 타 그의 양 손목을 쥐어 벽에 갖다 붙였다.
지금은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미어지는 서정적인 재회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요사스런 분위기가 형성된단 말인가.
상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조석희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농담일게 분명했다. 차가워보이긴 해도 그는 본심이 매우 따스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런 인간이니까. 당연히 지금 하는 행동도 분위기 전환을 위한 장난일테지.
"선배 안에 행운을 나눠드릴께요"
"어? 뭐?"
"그러니까 절대 흘리지 마세요, 내가 좋다고 할때까지"
상원은 설마 싶었다. 조석희가 바지 퍼스너를 내리고 단단하게 발기한 그것을 꺼내들자, 짧은 시간동안 상원의 머릿속에 머물렀던 설마는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훅 하고 끼쳐졌다. 뒤어어 난입한 숨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상원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남자는 서정적인 애틋한 재회의
장면에서 19금으로 건너뛰어 버릴 줄 아는 기괴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둥 뒤에서 뻗어온 팔이 상원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을 고스란히 전하듯이.
그 모든 것은 본인이 결정한 선택이며, 결과는 그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그 몫이 크고 무겁긴 해도 조석희의 심장에 자신과 같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에 상원은 의의를 두었다. 일단은 그 의의에 기대어 마음의 평화를 찾기로 결심했다.
상원은 조석희로부터 그날 엄청난 양의 행운을 받아내야 했다. 실로 행운으로 가득 찬 하루였다
















"어, 너 학교 자퇴했다면서"
"자퇴한거 아니에요"
"휴학했다고 하던데 유학간다는 소문도 있고"
"일이 좀 있어서요"
상원은 벌써 오늘 몇번이나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으니 같은 과 동기나 선배들이 상원을 볼때마다 깜짝 놀라서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비단 같은 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석희때문에 안면을 트게 된 사람들까지 상원에게 아는척을 해왔다.
"어라 선배"
이번엔 김이경이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원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선배 학교 그만두셨다면서요"
"...그만둔건 아니었어"
"거의 보름동안 무단결석했다던데 학점 포기하신거예요?"
"안 그래도 교수님 찾아뵈려고"
그동안 성실하게 수업듣고 과제를 제출해왔으니 F는 면하겠지만 무단결석만큼 가서 사과를 드려야겠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같이 밥 먹을까요"
김이경이 자신이 들고 있던 식판을 상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상원이 강하게 거부의 뜻을 밝혔다.
"안돼 석희 조금 이따가 오기로 했어"
"너무하신다. 이젠 대놓고 차별하시네요"
"미안해 그렇지만 너랑 같이 있는거 보면 석희 안 좋아할거야 상처받으면 어떻게해"
"상처받다니? 누가 누굴 때려서요?"
"그런 상처 말고 . 마음의 상처"
"...지금 선배 조석희 얘기하고 있는거 맞아요?"
"그래 석희"
"...."
김이경은 잠시 상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배를 부여잡고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선배 상원 선배 말이 되는 소리를..... 하하하하"
면전에서 비웃음을 당하자 상원은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왜 말이 안돼. 석희도 사람이야. 걔도 똑같은 사람인데 뭐가 말이 안돼"
"선배 걔는요, 하하하 미안하지만 여기가 병든 놈이라고요"
김이경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부근을 가리켰다. 누가 뭐라해도 김이경은 조석희가 어떤 놈인지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아니야 선입견이야. 석희 그런 사람아니야"
상원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김이경은 대체 조석희 새끼가 이 순진한 사람에게 무슨 수를 쓴 것일까 싶어 안타까움을 느꼈다.
"선배 그놈은 개새끼예요"
김이경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석희 오해했어. 그런데...... 아니야. 정말 그런 사람 아니야"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상원이 조석희에게 단단히 넘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이경은 하는 수 없지 싶어 자신의
비장의 카드를 내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상원선배 선배가 그때 저한테 말씀하신거 저 아니에요"
"응? 무슨 소리야 갑자기?"
"선배네 집앞에서 키스...."
여기까지 말하자 상원이 으악, 하면서 김이경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말하지마 안하기로 했잖아"
김이경이 상원의 손을 내리며 친절하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거 저 아니라고요"
"뭐? 네가 아니라고?'
"예. 저 아닌데요"
"그때는 네가...."
"선배가 저랑 맨정신으로는 죽어도 안한다는 둥, 제가 억지로 했다는둥, 소리를 하시니 열받아서 그랬어요"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술에 취한 선배한테 키스를 할 기회가 있었다면 전 키스에서 안 그쳤을거예요"
"...너"
"전 애초에 왜 선배가 절 지목하셨는지 그 자체로도 이해가 안간다니까요"
거짓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인상착의로  범인을 추렸는데 거기서 조석희를 뺀 것일테지. 상원이 자신과 키스를 했다는 오해르 하고 있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지만 더 이상 그 개새끼 대신 오명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럼누가...."
"글쎄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중에 봐요 하하하핫"
김이경이 경쾌한 목소리를 내며 식판을 들고 사라졌다. 남겨진 상원은 혼란에 빠졌다. 분명히 아버지가 그때 키가 크고 허우대가 멀쩡한 남자 변태 라고 설명하셨는데
....설마
"아닐거야"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조석희가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보란듯이 키스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랬다간 집에서 쫓겨날게 불보듯 뻔한......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생각에 상원은 날짜를 따져보았다. 그때쯤 분명 같이 살자는 석희의 제안이 점점 거세어졌다. 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닐 것이다. 절대 그걸리 없어. 우리 석희는 자신을 배려해주는 따스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니까. 맞아 확인해보자.
상원은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 다시 머무르겠단 말을 전해드린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어색한 관계였지만 이 의문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무뚝뚝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에요 아버지"
[웬일이냐 네가 이시간에]
"다름이 아니라 뭣 좀 여쭤보려고요"
[설마 유학에 관한 걸 물어보려는 거면 당장 끊는다]
"아니에요 아버지 그런거 절대 아니에요"
아들의 떠난다는 전화를 받고 어머니가 며칠을 우셨다는 애기를 전해들었을때 상원도 눈시울을 붉혔다.
"저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시겠지만"
한참 뜸을 들인 상원은 말을 이었다.
"그때 집앞에서 보셨다는 그 변태에 대해서 여쭤볼게 있어서요"
[아 그 변태녀석 왜? 혹시 그녀석 잡힌거냐?  ]
"그건 아니고요 잡힐 수도 있어서요 혹시 인상착의 같은거 특별히 기억나는 거 없으세요?"
[글쎄다 워낙 어두워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충격적인 상황이라 세세한 것보다 전체적인 장면만이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그 변태를 잡을 수 있는 단서라고 하니 상원의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기억을 더듬었다.
[그놈 얼굴은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그때 그런 생각이 들긴 했구나]
"무슨 생각이요?"
[그 자식, 쓸데없이 잘생겼다. 이런 느낌?]  
"...."
[어째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다. 키도 엄청 크고 허우대가 멀쩡한 놈이었으니까 경찰들한테 잘 설명해라. 다시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예 아버지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쳤다. 상원은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알려준 인상착의를 따지자면 떠오르는 사람이 딱 한명 있었다.
"헉 저기 걸어오는 사람봤어?"
"우리학교 학생 맞아? 정말 잘 생겼다"
여기저기서 여학생들이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상원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상대가 식당안으로 진입했음을 직감했다.
멀리서 상원을 알아본 조석희가 한 손을 슬쩍 들어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근처 여학생들 사이에서 일제히 작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중 한명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쟤가 경대 킹카지? 오늘 나 실물 처음 봤는데 심하게 잘생겼다 뭐랄까 아 적절한 표현이 안 떠오르네"
"쓸데없을 만큼 잘생겼다?"
"응 ! 맞아 그거"
상원은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어느새 조석희가 저만치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서 한층 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 미소와 마주친 순간 상원의 머릿속에도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말았다.
정말 넌 쓸데없을 만큼 잘생겼구나.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 애 그런 짓을 저지른 거니. 왜 대체 왜왜왜왜.
"선배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방금 왔어"
"저 주문 좀 하고 올게요"
조석희가  가방을 상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상원은 잠시 고민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있잖아 석희야 혹시 말이야"
혹시나 누가 들을까 상원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조석희가 어깨너머로 고개만 돌려 상원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우리 집앞에서 나 술 취했을때 키스한 적 있어?"
"네"
그가 너무도 순순히 자신의 죄를 시인하자 상원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또 술에 취해 집앞에서 키스를 한 날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때 우리 아버지가 나와계셨는데 못봤어?"
"글쎄요 어두워서"
조석희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 고혹적인 자태에 상원은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또다시 석희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의심할뻔 했던 것이다.
아 정말 이러면 안되는데,
"배고프겠다. 빨리 음식 주문해서 받아와"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ok싸인을 만들어 보였다. 상원은 거기에 또 얼굴을 붉혔다. 저런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지닌 사람이 그런 잔인한 짓을 할리가 없지.
자신을 사지로 내몰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 아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그가 상처받고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것을 믿어줘야 했다.
석희가 비록 성격이 좋지 않고 냉정한 구석이 있고, 오만하고 사람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고 고생은 모르고 자랐고 다른 사람 배려할 줄 모르고
싸가지는 좀 없지만 그래도 가슴은 따뜻한 인간이니까.
조석희가 음식을 받아와 상원의 앞에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상원은 나긋하게 웃어주었다. 문득 조석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선배는 어머니 닮았나 봐"
"어 그런 소리 많이 듣........"
"왜요"
상원은 거무스름한 눈썹과 얄미울 정도로 예쁜 눈을 하고 있는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지, 한번도 상원의 부모님을 본적이 없는 석희가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어머니 뵌적 있던가"
상원이 넌지시 돌려 물었다. 조석희가 아니,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다음 나올 질문이 무엇인지 분명 감이 올텐데, 그는 평안한 얼굴이었다. 상원은 젓가락을 입에 문체  왜 그랬어 하고 중얼거려본다.  질문의 의미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조석희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그냥 이라고 대답한다.
뒷목이 빳빳하게 굳어온느게 느껴졌다.
그래 , 그냥.
너는 그냥 남의 아버지 앞에서 나한테 키스를 했구나. 내가 너희 어머니 앞에서 고백을 했을때는 니 인생 조졌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더니 .
내인생은 그럼 어찌하라고 그런거니. 석희야. 네 표현대로 내 인생 조지려고 그런거야? 정말 그런거니?....... 이경아. 네 말이 맞구나.  얘는 개새끼야. 하지만
말도 하고 아파할 줄도 알고 나를 사랑해주는 개새끼구나. 그러니 어쩌겠어. 내가 키우는 수밖에.
"내가 그렇게 좋아요?"
자신을 향한 눈길을 영 엉뚱하게 해석한 조석희가 대뜸 묻는다.  상원은 엉겁결에 응, 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조석희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도 선배 좋아, 라고 말을 건넨다.
답답함과 설레임이 동시에 가슴 속으로 치받쳐 올라 상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할 뿐이었다.
그렇다. 이것도 모두 자신이 선택한 결과니 받아들여야만 했다.
비록 결과가 영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긴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상원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 한가한 하루의 늦은 점심이었다.







ㅡ the end .
에서 유명한 일화였다.

6반 학생들을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담임마저 버린 어둠의 반이었다. (-물론 그 어둠의 자식들은 지들끼리 술 마시고 담배피고, 본드를 불며 나름 오순도순 행복하게 지냈지만.-)
그 어둠의 반을 이끌어나가는 정신적 지주는 다름 아닌 상원이었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은 그런 상원을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내에서 뭐든지 해주려고 했다. 그들은 묘한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왔던 것이다.

“후우…….”

상원은 일단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꺼버렸다. 분명 내일 입시설명회 때문에 회장이 자신을 불이 나게 호출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회장과 같이 있으면 조석희와 만날 확률이 그만큼 커졌다. 이럴 때는 조용히 잠수를 타는 것이 최고였다.
조석희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이시간이면 학교를 나서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굳이 외우려하지 않아도 1년간 그의 뒷모습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면 학교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만의 하나라는 가능성을 떠올려볼 때, 밤 10시까지는 학교에 처박혀 있다가 가야겠다고 상원은 다짐했다.


“……!”

잠깐 엎드려 있는다는 것이 아예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어다. 아무래도 요 며칠 잠자리를 설친 것이 원인이 된 것 같았다.
상원은 핸드폰을 켜서 시각을 확인했다. 벌써 11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그는 후다닥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1, 2, 3학년을 통틀어 6반 학생 중에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기에 별관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별관 현관은 수위 아저씨가 잠가버렸을 게 분명했다. 상원은 자신의 친구들이 알려준 개구멍을 통해 별관을 빠져나왔다. 주머니 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을 시작했다.
화면에 뜬 회장, 이라는 두 글자가 상원을 고민에 빠지게 했다. 전화통화를 하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머뭇거리던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선배.」
“미안. 배터리가 다 나가서.”
「선배 진짜 요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응?”
「선배답지 않잖아요. 오늘 바쁘다는 거 뻔히 알면서, 이 시간에서야 핸드폰 켠 것도 그렇고. 무슨 일 있어요?」

오늘 학생회 일을 돕지 않고 땡땡이를 쳐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니 상원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로 대충 통화를 끝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선배. 무슨 일 있죠?」
“있는데, 너한테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정보의 양을 조절하는 편을 택했다. 그 쪽이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상원 자신에게도 좋았다.

「좀 서운한데요? 선배.」

서운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잘도 말한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슬그머니 웃었다.

“미안하다. 3학년이라 솔직히 좀 힘들어.”

학생회 서기직을 2년간 연임하면서 받은 약속은 최소한의 참여였다. 아무래도 3학년에게 시시콜콜한 일까지 모두 챙겨야 하는 서기 자리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이경은 별다른 말없이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럼 잘 들어가고, 내일 봐요. 내일은 얼굴 볼 수 있는 거죠?」
“혹시…….”

내일 조석희도 참석을 하느냐는 질문을 하려다 상원은 아니다, 하고 말문을 돌렸다.

「왜요?」
“내일 보자. 내일.”

내일의 태양은 내일 뜨겠지.
상원은 스칼렛 오하라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리며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오늘 밤의 출출함을 달래기 위한 야식을 사러 그는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낯익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상원은 진열대로 가서 컵라면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때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가 편의점 안으로 걸어들어 왔다. 반쯤 벗은 듯한 여자의 옷차림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눈을 떼지 못했다.
허리를 살짝 숙여 물건을 고를 때마다 푹 파인 그녀의 티셔츠 사이로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상원은 괜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죄를 짓는 것 같아 고개도 들지 못했다.

“여기요.”

허스키한 음색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이 화들짝 놀라 네, 하고 대답했다.

“콘돔 이것밖에 없어요? 스킨레스 초박형은 없는 거예요?”
“예?……아, 예. 그것밖에…….”

너무나 노골적인 질문에 알바생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상원은 아무 라면이나 골라잡고 빨리 편의점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뭐해. 왜 안 나와.”

신이시여…….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쯤 되면 자신이 조석희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조석희가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스킨레스 2000 없어서.”
“아무거나 사.”
“싫어. 다른 건 너무 두꺼워서 느낌이 별로라니까.”

그녀가 교태어린 몸짓으로 남자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냥 하자니까. 오늘은 그냥 넣어도 되는 날인데.”

조석희가 웃었다. 앉아있던 상원은 자신의 심장소리가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어,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부근을 꾸욱 눌렀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진열대 구석에 달린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긴장이 되거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좋아하는 여배우의 모습이 브라운관에 나타나기만 해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곤 했다. 상원은 얼굴색이 붉게 변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관동별곡을 외웠다.

“그럼 그냥 할까.”
“응, 그냥 해줘.”

이어지는 여자의 애교스런 교태에 조석희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평연한 얼굴로 외설스러운 농담을 지껄였다.

“그런데 넌 조금이라도 두꺼울수록 좋은 거 아니야?”
“뭐야. 자기!”

그녀가 눈을 흘기며 장난스럽게 밀어내자 조석희가 콘돔 코너에서 아무거나 집어서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아르바이트생에게 던지듯이 내밀었다.

“계산.”
“……아, 예.”

알바생이 후다닥 캐시 박스 안에서 잔돈을 꺼냈다. 잔돈을 받아든 조석희가 피식 웃으면서 어이, 하고 말문을 열었다.

“네?”

아르바이트생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아까까지는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조석희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당황하던 차였다.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남자가 자신에게 말까지 건네자 아르바이트생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너 얘랑 하고 fuck하고 싶냐.”
“네???”
“Fuck, 하고 싶냐고.”

조석희가 자신의 옆에 서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귀로는 똑똑히 들려도 그 황당함 때문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물음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은 눈을 껌뻑거리면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귀 어둡네. 얘한테 박고 싶냐고 물었잖아.”
“아, 아니요, 저는 그럴 생각이…….”

아르바이트생이 두 손을 내저었다. 노출이 심한 여자의 옷차림에 눈이 가는 것은 남자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박을 수만 있다면, 땡큐베리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살벌한 남자의 앞에서 토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거 아니면 쳐다보지 마. 내가 먹을 걸 누가 쳐다보면 기분 더러우니까.”

여자를 바로 옆에 두고도 저런 상스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점이 조석희다웠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도 여자는 기분이 나쁜 표정을 짓기는커녕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조석희의 팔에 매달려있었다.
사귀는 남자로부터 저런 취급을 받으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벗어버린 옷처럼 수치심도 함께 벗어버린 것인가. ……아니 지금 누구를 손가락질 할 주제가 되지 못했다.
저런 취급을 받아도 좋으니 한번만이라도 조석희의 옆에 서고 싶은 것이 상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말 구차하고 구질구질하다. 이런 마음을 들킬 바에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힉!!!”

상원은 자신의 앞으로 달려든 무언가에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성격의 상원에게도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할 만큼 질색을 하는 것이 있었다.

“으악! 바퀴벌레!!!!!”

바퀴벌레가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상원은 패닉상태였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며 바퀴벌레의 돌진을 막았다.
하지만 생존본능이 지구상 그 어떤 생명체보다 바퀴벌레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물체를 귀신같이 피하며 온힘을 다해 푸드득 날아올랐다.

“으아악!!”

상원은 눈앞에 서있는 벽 뒤에 재빨리 몸을 숨기고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바퀴벌레 소동 때문에 시끄러웠던 편의점 안에 잠시간 침묵이 찾아들었다. 바들바들 떨던 상원은 이제 끝난 것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앞에 놓여진 벽이, 벽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우.”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유학생들 특유의 제스처. 어색할 만도 한데 조석희는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서양인에 대한 편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상원은 조석희의 자유분방한 성격이 서양인과 닮아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믿었다. 처음 조석희에게 눈이 간 것도 동양인답지 않은 그런 제스처나 감탄사 때문이었다.

“선배, 설마 바퀴벌레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요?”
“……어?”

미처 조석희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상원이 되물었다.
조석희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상원은 그제야 자신의 조석희의 팔을 힘껏 움켜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 미안.”

상원이 재빨리 손을 놓았다.

“정말 바퀴벌레 때문에 이런 거면 꼴사납다 싶고, 아닌 거라면…….”

정말 꼴사납게도 바퀴벌레 때문이었다고 대답하려던 상원은 입을 다물었다. 조석희의 눈동자에 스친 감정을 읽은 것이다.  

“아닌 거라면, 정말 기분 더럽잖아.”

조석희가 웃으며 발치에서 움직이고 있던 바퀴벌레를 짓밟아 버렸다. 그런 후에 그는 저만치서 콘돔을 들고 웃고 있는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편의점 밖으로 사라졌다.
상원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자괴감에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짓눌려 살해당한 바퀴벌레 시체보다 못한 자신의 처지에 서러움이 울컥 올라와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조석희라는 인간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 몇 백번, 아니 몇 천 번째 거듭되고 있는 자문을 해보았지만 오늘도 역시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초여름이었다. 하복 소매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자명종 시계가 고장 나고, 어머니는 오늘따라 늦잠을 잔데다, 타고 온 버스가 고장 나 도중에 탄 택시는 사고가 났기 때문에 오늘 치르게 된 전국 모의고사에 늦게 되었다는 변명을 담임에게 늘어놓는 자신이 우울해진 상원은
어깨를 늘어트리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상원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한 이사회에서 이번 시험 결과로 인해 그의 반 편성을 결정하겠다고 했다. 상원은 이번 시험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들 납득할 만한 성적을 내겠다고 다짐을 하며
정말 죽을 만큼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와 같이 참담했다.
운명은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이 또 한번 얄궂은 화살을 날린 것이다. 차라리 반편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상원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조심해! 라고 소리쳤고 상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또 구나, 라는 생각에 상원은 아예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눈만 감았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몸 어디에도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원이 조심스레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커다란 이동 칠판이 놓여있었다.

“……?”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다른 사람이 다 무사해도 자신만 다치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 그에게 이런 우연치 않은 행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와우.”

낮은 음색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지나갔더라면 본인이 크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놀라거나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안 다쳤어? 괜찮아? 다친 사람 없어?”

야구부 학생들이 그제야 창가로 우르르 달려와 물었다. 상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조석희 넌 괜찮냐?”

그때 상원은 눈앞에 서 있던 남학생의 이름이 조석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 전학 온 학생이 그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대단히 화려한 전적을 자랑해 몇 명의 여자를 임신시켰다든가 전학 온 첫날부터 교문 앞에 여자들이 진을 치고 기다렸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상원은 자신과는 관련 없는 소문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그 화제의 전학생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전학생의 발음이 조금 독특하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야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조금만 빨리 걸었어도 사고 났을 수도 있었겠는걸.”

복도에 서있던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조석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여다.

“그럴 리 없죠. 전 럭키(Lucky)하거든요.”

자신에 찬 조석희의 모습이 상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Lucky. 행운.
자신과는 평생 인연이 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것으로 인정한 그 목소리와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부터 상원은 조석희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원아.”
“…….”
“이상원!”
“어? 어? 왜?”

동석이 상원에게 캔커피를 내밀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창 밖에 뭐가 있어?”
“아니, 그냥.”
“비 오는 게 그렇게 신기하냐? 공부 잘하는 네 눈에는 뭐 다른 게 보이나?”

자신의 짝이 방금 전까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창 밖을 확인하며 동석이 중얼거렸다. 상원이 캔커피의 뚜껑을 따며 조용히 웃었다.
오늘 아침에 그는 우연히 조석희와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다. 평상시처럼 조심스럽게 조석희를 관찰하던 상원의 귀에 그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들린 것은 우연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젠장, 체육하기 싫은데 비나 내리지.

그리고 수업종이 울리자마자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 상원은 이 얘기를 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 누구에도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혼자만 간직한 행운이 가슴 속에서 따스하게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실실 웃어?”
“아니야. 아무것도.”
“에에? 아무것도 아니긴. 너 여자친구라도 생긴 거 아니야?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동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자고 있던 대진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비 올 때 하면 섹스가 더 맛있어. 자지털이 곱슬거려서 더 찰지게……, 아 시발. 꼴리네.”

가방에서 잡지를 뒤적거리는 대진을 보며 동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진짜. 에휴, 미친 새끼.”
“비가 오면 더 그런다잖아. 어쩔 수 없지.”

이런 순간에도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친구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상원이었다.

“그게 어떤 여자인지 몰라도 좋은 여자이길 바란다.”
“응? 뭐라고?”
“됐다. 하던 생각 계속 하라고. 청소시간 끝나기 전까지 계속 해.”

동석의 말에 상원이 깜짝 놀라서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나 잠깐 회의실에 갔다 올게.”
“그래라.”

상원은 친구가 건네준 캔커피를 자리에서 다 마시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회의록을 정리해서 제출하기로 한 약속을 깜빡한 것이다. 비 오는 것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아, 정말 왜 이러지.”

요즘 들어 자신의 실수가 늘어났다는 것을 상원도 알고 있었다. 물론 회장인 이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에 꺼내지 않는 회장의 배려심을 위해서라도 상원은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재빨리 회장 책상 위에 놓인 회의록을 집어 들었다. 회의실을 나가려던 상원의 눈에 소파가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파에 누워 있던 조석희의 모습이 들어왔다.

“……!!”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상상하지 못한 인물을 만난 상원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상원은 조석희가 소파 위에서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조용히 나가야겠다고 생각해 몸을 돌린 순간, 갑자기 조석희의 얼굴을 가까이 보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 그저 조석희의 바로 앞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

상원은 말없이 조석희를 내려다보았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여자들 사이에서 칼부림이 있었다는 얘기가 뜬소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커다란 소파도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건장한 체격과 모델 같은 외모까지 지녔으니
어떤 여자가 마다할 수 있을까. 게다가 목소리도 매력적이었지. 어눌한 한국어 발음까지 달콤하게 들릴 정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조석희는…….

“대단해…….”

상원은 무심코 중얼거린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황급히 막았다. 다행히 조석희는 깊이 잠들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틀어막긴 했지만, 그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조석희는 대단했다.
대단히, 감탄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행운아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를 발견한 순간 상원이 처음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부러움이 동경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원은 조석희를 동경하고 있었다. 뭘 해도 안 되는 자신과는 다른 조석희에게 애초에 질투심 같은 것을 가질 깜냥도 없었다.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완연히 차이가 나는 행운의 정도에 상원은 상대를 우러러 볼 수밖에 없었다.

상원은 늘 조석희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조석희는 존재 자체로도 반짝였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황홀하게 반짝였다. 별과 같았다. 그 아름다운 별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다.
저 별에 손이 닿는다면 자신도 혹시 그 행운을 조금 나누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멈추지는 못했다. 상원은 천천히 조석희의 얼굴 위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따스했다. 그 온기를 더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조석희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깨달을 새도 없이 상원은 화들짝 놀라 그대로 회의실 밖으로 뛰어나왔다. 소매 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이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자고 있는 조석희에게 키스를 하다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이 날 것 같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 몸에서 불이 난 것 같았다. 손끝이 벌벌 떨리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상원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토기가 느껴졌다.
상원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위에 있던 내용물을 말끔히 비워냈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변기 물을 내리는 순간 그는 직감했다. 조석희에 대한 자신의 동경은 오늘로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날은 상원의 조석희를 향한 짝사랑의 서막이 열리게 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이 녀석들아. 떠들지 좀 마라. 손으로 실습하지. 입으로 실습하냐?”
“에이, 선생님. 입으로 하는 실습도 잘해둬야 나중에 애인한테 사랑받죠.”

대진의 너스레에 실습실을 돌아다니고 있던 가사 선생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성적인 주제와 결부시키고 마는 윤대진은 선생들 사이에서도 악동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사립학교는 수업 과목과 시수는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결정할 수 있었다. 희재 고등학교의 교장은 예체능의 수업시수를 줄이고 그 시간을 국영수 주요 과목으로 대체했다. 대학 합격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었다.
하지만 6반의 경우, 기존의 예체능 수업은 물론 실과뿐만 아니라 가사 수업까지 듣고 있었다. 산만하기 그지없는 6반 학생들에게 학문적인 수업보다는 실습 위주의 수업이 그나마 나을 것이라 생각한 학교 측의 배려였다.
그러나 앉아 있어도 시끄럽고 어수선한 6반 학생들을 데리고 실습을 진행 하는 선생들은 죽을 맛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요리를 하는 시간의 실습실은 난장판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 시발 짜증나. 이거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반장인 승완이 시커멓게 탄 닭다리를 건져 올리며 투덜거렸다. 승완이 속한 2조의 조리대 위에는 새카맣게 탄 닭다리들이 무덤처럼 수북이 쌓여있었다.
실습 시간이 끝나면 맥주랑 함께 치킨을 먹겠다는 일념 하에 오늘의 메뉴를 닭튀김을 정한 승완의 조는 이미 망조가 깃들어 있었다.

“젠장. 겉은 탔는데 속은 왜 핏국물이 떨어지고 지랄인지 모르겠네.”

승완이 젓가락으로 새카만 페인트를 뒤집어 쓴 듯한 닭다리를 헤집어 보며 짜증을 냈다. 옆 조인 대진이 낄낄거리며 그럴 줄 알았다고 한마디를 던졌다.

“뭘 그럴 줄 알아! 그러는 너네 조는 아까부터 뭘 하고 있는 건데!”
“떡볶이.”
“떡볶이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게 떡볶이냐? 떡국 아냐? 한강에서 낚시하는 기분으로 떡을 건지는 게 무슨 떡볶이냐.”
“구, 국물을 좀 자잘하게 졸이면 되는 거지!”
“하, 그 얘기는 아까 10분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좀 졸아붙어서 물을 더 부은 것뿐이니까. 신경 끄시지. 떡볶이 완성되고 한 입만 먹게 해달라고 빌어도 절대 안준다. 이 개새야.”

승완이 말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지 않고 대진도 주먹을 쥐고 손을 세워보였지만 그들 중 누구도 한강에 빠진 떡볶이나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인격의 닭튀김 따위는 입에 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못했다.

“3조는 어떠냐?”

승완이 동석과 상원이 속해있는 조를 향해 물었다. 동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대답을 대신했다. 3조의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재료만 제대로 사와 빵에 처넣으면 망할 수가 없다는 동석의 의견으로 선택된 메뉴였다.
동석의 혜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조 음식들 사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어디, 좀 보자. 뭐 했는데?”

승완이 동석의 머리 위에 자신의 머리를 얹으며 물었다. 동석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승완을 떨어뜨렸다.

“씨발놈아. 비듬 떨어져. 머리 흔들지 마.”

옆에 있던 같은 조원이 동석을 조리대에서 멀찌감치 밀어냈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고 있는 3조의 조원들은 샌드위치의 안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거 맛있냐? 나 한개만 줘.”

대진도 침을 흘리며 나타났다.

“나도 한 조각만 주라.”
“나도, 나도!!”

여기저기에서 굶주린 짐승들이 몰려들었다. 3조의 조원들이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아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어디. 손만 대봐라. 니들 손을 잘라다 빵에 넣어 손드위치를 만들어 먹여 줄 테니까.”
“상원아. 나 한 개만 주라. 응? 상원아.”

동석이 으름장에 대진은 방향을 바꿔 상원에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원은 멍하니 계란 껍데기만 까고 있었다.

“상원아. 절대 주지 마. 한 놈한테 먹이면 다 몰려와 처먹을 거니까.”
“맞아! 결국엔 점수 매길 마지막 한 조각도 안 남을 걸.”
“나 한 조각만!! 한 조각만!!”

여기저기에서 샌드위치 한 조각만 달라고 손을 내밀고 아귀처럼 아우성쳤지만 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달걀 껍데기만 벗겼다. 가사 선생이 와서 자리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친 후에야 간신히 아귀 떼가 흩어질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눈치가 빠른 동석이 상원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응? 무슨 소리야.”

상원이 달걀을 손에 쥔 채, 놀라 대답했다. 방금 전 까지 있었던 소란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동석은 혀를 찼다. 오늘 하루 종일 저런 식이었다.
아침부터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하고 말을 걸어도 한참 후에 응? 하고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너 기분이 참, 좆같아 보여서.”
“……아.”

상원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그냥 그는 웃어 보이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동석은 매가리 없는 짝의 미소를 보고 안심할 만큼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또 무슨 일 있어? 누가 삥이라도 뜯어? 아님 부모님하고 싸웠어?”
“아니, 그런 일 없어.”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기분 잡치게.”
“어, 미안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상원이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며 사과를 건넸다. 자신이 무심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상대방이 불쾌함을 느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미안해진 것이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아이고, 됐다. 관두자.”
“미안해. 동석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됐다고, 인마. 쓸데없이 착해빠져가지고.”

동석은 자신의 짝인 상원을 진심으로 아꼈다. 농담으로도 너 참 재수가 없구나, 라는 말을 건네지 못할 정도로 불운한 것이 상원이 인생이었다.
그런 불운한 삶을 살면서 늘 꿋꿋하게 말없이 노력하는 상원을 보며 동석은 아버지가 늘 신조처럼 말씀하시던 7전 8기의 용기를 떠올렸다. 조용하고 얌전해 보이는 상원이 얼마나 강한지 3년간 지켜봐온 동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상원은 어떤 이상한 일이 생겨도 우는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겨울에 다 같이 얼음낚시를 하러 가도 상원이 서 있는 곳만 균열이 생겨 사람하나가 빠질 구멍이 생긴 일도 있었다.

덕분에 얼음물에 빠져 목숨이 위험했을 때도 구조 된 후 상원은 덜덜 떨면서도 이번이 119 구급차를 서른여덟 번째 타는 것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던졌을 정도였다.
그런 상원이 요 며칠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힘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으니 동석으로서는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있잖아. 동석아.”
“응. 왜.”

상원이 주저주저하다 아니야, 하고 말끝을 흐렸다. 답답해진 동석이 빨리 말하라고 상원을 재촉했다.

“그러니까. 어……, 바퀴벌레를 남자가 무서워하면 많이 꼴사나워?”
“바퀴벌레? 왜? 바퀴벌레 봤어?”

동석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상원이 바퀴벌레를 봐서 저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든 찾아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니. 여기서 본 건 아니고, 음……. 아무튼 남자가 바퀴벌레 때문에 막 소리 지르고 그러면, 확실히 꼴사납지?”
“좀 그렇긴 하지……, 헉, 아니. 사람이 무서워하는 게 있을 수도 있지. 암, 그럼.”

자신의 대답을 듣고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는 상원의 표정을 알아챈 동석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저기 있는 한승완 새끼도 무서워하는 거 있어.”
“승완이도?”
“그래. 무서워서 아주 그냥 보기만 해도 오줌 질질 싸는 게 있지.”
“나도 질 좋은 AV를 보면 그냥 질질 싸지.”

뒤에 서있던 대진이 친구를 위해 한마디 거들었다. 물론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승완이도 무서워하는 게 있어?”

상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한승완은 희재고뿐만 아니라 근방 학교에서도 유명한 싸움꾼이었다. 상대가 몇 명이 오든 어떤 놈이랑 붙든 눈 하나 깜짝하지 없는, 겁 대가리 상실한 놈으로 유명했다.
혹자는 승완이 머리가 나빠 상대방의 숫자도 제대로 세지 못해 그런 것이라 비난했지만, 그의 강단이 세다는 것에는 이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승완도 무서워서 질색을 하는 것이 있다하니 상원으로서는 반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게……, 뭐드라. 기억이…….”

동석이 머리를 긁적거리자 상원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동석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들고 있던 칼을 집어 들어 승완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귀신같은 감으로 승완이 몸을 틀어 자신을 향해 날아든 과도를 피해냈다.

“어떤 씨발새끼야!!!!!”

동석이 손가락으로 그런 승완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 무서워하지?”
“……그건 무서워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니야. 저 새끼 존나 쫄았을 거다.”
“물론 쫄겠지만……, 그게…….”

과도가 날아든 방향을 확인한 승완이 씩씩거리며 동석에게 다가왔다.

“너냐. 김동석. 나한테 이걸 집어 던진 게.”

범행을 자백하면 과도를 그대로 이마에 꽂아 넣을 기세였다.

“아니. 윤대진이 던졌어. 내가 봤어.”

그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뒤에서 오뎅을 자르고 있는 대진을 가리켰다. 인간은 평균적으로 3분에 한번씩 거짓말을 한다는 연구 내용이 발표된 적이 있었다.
그 기사를 전해들은 동석은 배를 잡고 웃으며 자신은 태어나서 1분 이상 진실을 말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김동석이란 인간은 30초에 한번씩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양치기 소년이었으니까.

“윤대진, 시발 새끼야!”

이번에도 그 거짓말에 홀딱 넘어간 한승완이 과도를 치켜들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과도가 대진의 손가락 사이에 꽂혔다. 윤대진이 기겁을 하며 뒤돌아보았다. 일단 그는 손을 더듬어 자신의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사함을 확인한 대진은 사정 볼 것 없이 승완에게 덤벼들었다. 그 바람에 대진이 속한 4조가 심혈을 기울여 졸이고 있던 한강 떡볶이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분노에 사로잡힌 4조가 2조의 이중인격 닭튀김을 향해 돌진해 엎어버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2조와 4조의 전쟁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반 전체가 휘말려 실습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석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상원에게 말했다.

“봤지? 다들 무서워하는 게 있잖아.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내려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논리에 상원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결국 살아남은 음식은 3조의 샌드위치 하나뿐이었다.



“아 시발. 한승완 개새. 내가 그 놈하고 말을 다시 하면 내 자지를 간다.”

여기저기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눈 밑에 시퍼렇게 멍이 든 대진이 접시를 들고 걸으며 투덜거렸다.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하는 6반 학우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두들겨 팼고
학생주임이 달려와 그들을 뜯어 말리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오늘 수업 끝나고 남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사라진 담임에게 뇌물을 바치자는 계획을 세운 그들은 그나마 먹을 만한 샌드위치를 공물로 지정했다.
원래는 반장인 승완과 상원이 가는 게 맞겠지만, 싸움을 하다 신이 난 승완이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는 바람에 그는 지금 상처를 꿰매러 병원 응급실로 보내진 상태였다.

“미친 새리. 좆병신같은 새리. 뭐 좋다고 유리창을 깨서 나한테 이 고생을 시키고 지랄이야.”

거칠게 욕을 내뱉고 있어도 대진이 친구인 승완을 걱정한다는 것을 상원은 알아 차렸다.

“너는 좀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너는 안 다쳤냐?”

상원이 싸움에 끼어드는 일은 없었지만 가끔 날아오는 물건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본의 아니게 부상을 당하곤 했다. 오늘은 다행히도 상원은 무사히 싸움을 관전할 수 있었다.

“괜찮아. 나는.”
“넌 조리실에서 싸움할 때는 특히 조심해라. 괜히 날아드는 칼에 꽂히는 수도 있으니.”
“그래. 조심할게. 고마워.”

그때 싱긋 웃는 상원의 어깨를 누군가 툭, 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상원은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담임을 회유할 공물을 떨어트렸다는 사실보다 착한 상원을 누군가 치고 지나갔다는 생각에 화가 난 대진이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복도를 걷던 누군가가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 새끼가. 하늘같은 선배도 못 알아보고. 부딪혔으면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명찰의 색을 확인한 대진이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백금발 머리에 피어싱을 주렁주렁 매단 윤대진을 보고도 상대는 주눅 든 기색 없이 고개만 꾸벅 숙였다.

“벙어리냐. 이 새끼야. 똑바로 사과 못해?”
“됐어. 대진아, 그냥…….”

복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떨어진 샌드위치를 줍던 상원은 하마터면 자신의 눈을 의심할 뻔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는 상대는 다름 아닌 조석희였다. 상원은 대진의 바지자락을 쥐고 빨리 가자고 눈짓을 했다. 하지만 조석희 특유의 건방진 말투가 거슬린 대진은 방금 전 사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나한테 말고 상원이한테 하라고. 제대로 해, 이 새끼야.”

상원은 샌드위치를 담은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등 뒤에서 조석희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심장이 아플 만큼 떨렸다. 상원은 일초라도 빨리 이 복도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이미 조석희에게 스토커에 바퀴벌레 취급까지 받은 터라 더 이상의 데미지는 사양하고 싶었다.
그때 어디선가 메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선배.”

상원은 맹세코 김이경의 환한 웃음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이경이 손을 흔들며 복도 저 편에서 다가오자 상원은 반색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경아, 안녕. 반가워. 오랜만이다.”
“어제 만났는데. 오랜만인가요?”
“그, 그렇구나. 아무튼 반갑다.”

상원이 이경의 손을 덥석 잡으며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해보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대진은 그런 상원을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건 뭐예요? 웬 샌드위치?”
“실습시간에 만든 거야.”
“와, 실습 시간에 이런 것도 해요? 재밌네, 6반은.”

악의가 담긴 말이 아니었지만 상원은 그 말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다른 반과 커리큘럼이 다른 만큼 그가 노력해야 할 시간이 늘어간다는 뜻이었다.

“하나 먹어 봐도 돼요?”
“아, 그게…….”

떨어트리지만 않았어도 이 곤란에서 자신을 구해준 후배에게 얼마든지 줬을 샌드위치였다. 상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등 뒤에 서있던 조석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먹어.”
“……?”

상원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조석희가 샌드위치를 가리키며, 다시 한번 명확한 발음으로 이경에게 대답했다.

“먹고 싶으면 먹어. 그래도 되죠? 선배.”
“어……, 그래도 되긴 하는데……. 그게…….”

조석희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이 사고회로에 들어오자 상원의 뇌에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다. 이경이 그럼 잘 먹을게요, 하며 샌드위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대진은 땅에 떨어진 샌드위치 따위 누가 먹든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맛있네요. 선배가 만드신 거예요?”

이경이 웃으며 물었다. 상원이 고개를 흔들며 주절주절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아니, 나는 그냥 빵에 버터만 바르고 삶은 달걀 껍데기만 깠고, 다른 애들하고 조금씩 도와서 만든 거야. ……고마워.”

마지막의 고맙다는 인사는 샌드위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상원의 눈에 조석희의 발이 보였다. 저 발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송할 정도였다.

“너도 하나 먹어봐라. 조석희.”

이경이 그래도 되죠? 하는 눈으로 상원을 바라보았다. 상원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접시 위에 놓여진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두 번에 나누어 샌드위치를 입에 넣은 조석희가 음, 하고 맛을 음미했다.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움직이자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맛있네.”

조석희가 적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툭 던졌다.
그 한마디에 상원의 머릿속에는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져 오르고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방금 들으셨나요? 조석희가 샌드위치가 맛있다고 말했어요! 들으셨죠? 다들 들으신 거죠! 그 샌드위치 빵에 제가 버터를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간 달걀 껍데기를 깐 게 저랍니다.

“고……마워.”

마음속의 외침을 간신히 억누르며 상원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혹시 방금 전 있었던 일로 일생의 행운을 다 써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해진 것이다.

“수업종 치겠다. 가자.”

이경이 석희의 어깨를 치며 턱짓을 했다. 대진도 상원에게 어서 가서 공물을 바치자고 손짓을 했다. 방금 전 있었던 믿기지 않을 황홀한 순간에 빠져있는 상원의 옆을, 조석희가 지나갔다.  

“공부는 때려치우시고, 샌드위치나 만드시는 게 낫겠네.”

조석희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 그것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어차피 당신 따위 공부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는 쟁반 위에 놓인 샌드위치 하나를 더 집어 들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경도 수업 끝나고 보자고 상원에게 인사를 한 후 수업 준비를 하러 갔다.

“아는 새끼들이냐? 둘 다 싸가지 존나 없게 생……헉, 야. 너 괜찮아? 얼굴에서 피를 토하고 있잖아!”

대진이 외침에 상원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허둥지둥 복도 끝으로 달려가 버렸다. 상원의 얼굴색은 관동별곡 전체를 세 번 반복해 외우고 난 후에야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그날 6반 담임에게 바쳐진 바닥에 두 번 떨어진 샌드위치는 공물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기분 좋은 일 있냐?”
“어? 나?”

옆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는 동석을 보며 상원이 되물었다. 남을 속이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동석은 사람들의 표정과 기색을 읽는 것에 능했다. 하지만 상원 같은 경우는 그런 기술이 없다 해도 누구라 할지라도 그의 기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상원은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으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수학문제를 풀고, 번뇌를 느끼면 관동별곡을 외웠으며,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상기된 얼굴을 하고 원소주기율에 가락을 붙인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알게 돼.”

이 친구에겐 포커 게임을 절대 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동석은 말을 이었다.

“어제까지는 머리 위에서 천둥이 우르르 쾅쾅거리더니, 오늘은 웬일이냐.”
“아, 하하하. 그러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던 상원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고 동석에게 물었다.

“저기 있잖아. 나 말이야.”
“응.”

동석이 가방에서 오토바이 잡지를 꺼내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나……, 샌드위치 가게 낼까?”
“뭐?!”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는 듯이 동석이 되물었다.  

“저기, 나 샌드위치 만드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칭찬을 들어서.”
“…….”
“아니, 그러니까 내가 다 만든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말이야. 버터를 바르고 달걀 껍데기를 벗기는 것 정도로 도움이 된다면 말이야.”
“미쳤냐. 공부를 때려치우긴 왜 때려치워. 너처럼 공부 잘하는 놈이 공부 안하고 무슨 놈의 샌드위치 가게야.”

동석이 냉정하게 상원의 백일몽을 박살내주었다.

“그……런가?”
“그래. 별 시답지 않은 소리하지 말고 공부나 해. 얘가 아직 봄인데 더위를 먹었나.”

짝의 면박을 듣고도 상원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조석희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어깨가 부딪치게 되어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는 친절한 칭찬을 건넨 것이다. 이 믿겨지지 않는 행운에 상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제는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운이 좋다고 생각된 날이었다. 상원은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불운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물론 부정했지만 아예 인정을 하고 난 뒤에는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좋은 일을 반복하고 선행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 불운의 구덩이가 메워질 것이라 상원은 믿었다. 상원은 늘 상상해왔다. 자신의 불운이 끝나는 그 날을.
상원은 조심스레 추측했다. 어제의 그 일이 구덩이가 메워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상원아!”
“응?”
“너 미술시간에 제출한 수행평가 작품 사라진 거, …선생님께서 못 찾겠다고 그냥 다시 해서 제출하라는데? 학기 끝나기 전까지만 내래.”

……아직 안 끝났구나.
상원은 미술 선생님의 불행한 전언을 전해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이어리에 파란색 펜으로 미술 수행평가라고 적어놓았다. 파란색 펜은 그 날 있었던 안 좋은 일을 적는데 사용하고 빨간색 펜은 좋았던 일을 쓰는데 사용했다.
……자신의 빨간색 펜이 이 다이어리를 적기 시작한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단 한번도 교체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긴 했다. 그래도 간간히 빨간 글씨가 보이기도 했다.
길을 가다 예쁜 꽃을 봤다든가, 좋아하는 반찬을 먹었다든가,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했다든가 하는 일들.

상원은 그 소소한 일에 기쁨을 부여했다.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소중한 것들을 그는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어놓았다.
다이어리를 덮으려던 상원의 눈에 빨간색 펜으로 샌드위치, 라고 적어놓은 어제의 사건이 들어왔다. 옆에 하트를 그려 넣을까 무던히 고민하다 그는 별표를 다섯 개 그려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최고의 별점은 일곱 개의 별이었다. 일생에 언젠가 한번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별.

그렇다고 다섯 개의 별이 흔하게 벌어지는 사건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상원이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컴퓨터를 사준 날 이후로 단 한번도 없었으니.
어제의 일은 그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다. 그 일만 떠올리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발끝이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붕붕 떴다. 뭔가 자신이 행한 일이 부정적인 기운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상원은 가능하면 그 무엇인가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보호해 행운을 가져오게 할 텐데.

“아이, 시팍. 바퀴벌레잖아!!”

교실 구석에서 누군가 짜증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아이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죽이라고 소리쳤다. 상원도 반사적으로 다리를 모으고 의자 위로 올라갔다.
상원의 안색이 다시 창백하게 굳은 것을 본 동석이 교실 구석을 향해 엄하게 소리쳤다.

“잡아! 잡아서 족쳐. 밟아 죽여. 알은 안 터지게 죽여.”

사살명령이 내려졌다. 동석은 승완 다음의 실세였다. 자그마한 체구인 그를 얕보았다가 코뼈가 부러진 학생이 6반에만 다섯 명이 넘었다. 그의 명령에 모두들 바퀴벌레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스텝 공격을 퍼부었다.
어서 이 혼란이 끝나기만을 기도하고 있던 상원의 귀에 대진의 한마디가 흘러들어온 것은 우연과도 같은 일이었다.

“우리 할매가 그러셨는데 살생을 하면 그 업보가 돌아와서 나중에 벌레로 태어난다던데. 크크. 니들 다음 생에 바퀴벌레 찜.”

별다른 의도를 갖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바퀴벌레 잡기에 혈안이 된 학우들을 놀리기 위해 짓궂은 말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진의 한마디가 상원에게는 크나 큰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자신에게 어제 있었던 일이 혹시 자신이 행한 일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 생긴 일이라면……?

“안 돼!!!”

상원이 의자 위에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바퀴 사냥에 한참이던 6반 학생들이 모두 그런 상원을 바라보았다.

“잡지 마. 안 돼. 죽이지 마.”

상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안된다. 저 바퀴벌레를 죽이면. 어제 있었던 일은 편의점에서 자신 대신 조석희의 발에 무참히 짓밟혀 죽은 바퀴벌레의 희생으로 생긴 행운이 분명했다.
그 당시 분명 조석희는 상원과 바퀴벌레를 동일시했다. 자신 대신 바퀴벌레가 죽음으로써 해서 조석희의 경멸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원은 카르마(Karma)를 믿었다. 자신이 지금 이 곳에서 바퀴벌레의 죽음을 방관한다면 그 업보가 돌아와 큰 불행으로 다가 올 것을 확신했다. 별 다섯 개짜리 행운은 되돌려 줘야 했다. 업보는 돌고 도는 것이므로.

“제발 죽이지 마. 바퀴벌레가 우리한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건 아니잖아.”
“병균 같은 거 옮기잖아.”

대진이 사타구니 사이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누군가 옆에서 쟤는 다른 병보다 성병을 최우선으로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속닥거렸다.

“그러면 바퀴벌레를 더러운 환경에서 살게 하지 않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게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상원이 간절한 목소리로 급우들을 향해 말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6반에서 이상원이란 존재는 묵묵히 사람들을 도와주고 부탁을 들어주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호소하자 모두의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교실 끝에서 자고 있던 승완이 책상 위에서 일어나 부스스 눈을 떴다. 동석과 승완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은 합의를 이끌어 냈다.

“죽이지 마. 다리 하나라도 다치게 하지 말고 생포해라. 우리 상원이의 부탁이다. 바퀴벌레를 생포한 자에게는 화장실 청소 일주일 면제권을 주겠다.”

동석이 이번에는 바퀴벌레 생포 령을 내렸다. 교실 바닥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을 휘두르던 아이들은 일제히 두 손을 모으고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분단 끝에서 잡았다! 하는 기쁨어린 외침이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아이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우유 곽에 자신이 생포한 바퀴벌레를 넣어 동석에게 제출했다. 그것을 받아든 동석은 내용물을 확인하고 자신의 짝인 상원에게 건넸다.

“자.”
“……어?”
“깨끗한 환경에서 키우자며.”

깨끗한 환경에서 살게 하자는 것이 언제 키우자는 얘기가 된 것이냐고 상원은 차마 묻지 못했다. 바퀴벌레가 든 우유 곽을 받아든 순간 머리 속이 창백하게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사고는 정지했고 온 몸은 굳어버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렇게 해서라도 바퀴벌레의 희생을 갚아줄 수만 있다면.

“자아, 좋아.”

승완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교단으로 걸어갔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것은 뭔가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기 전에 보이는 그의 버릇과도 같았다. 다들 바싹 긴장한 얼굴로 승완을 지켜보았다. 물론 상원은 우유 곽을 한손에 들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바퀴 벌레의 이름을 공모하겠다. 좋은 생각이 있는 자들은 손을 들고 말해라.”

엄숙한 그의 제안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 안에 있는 학생들의 손이 일제히 올라갔다. 교실 뒤에 있는 ‘마호메트 나폴레옹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켈란젤로 링컨 아인슈타인 관우 장비 뽀순뽀순 잉’이 어항 속에서 뛰어오른 것도 그와 동시였다.


“마리 앙뚜아네트.”

누군가 세계사 책의 한 구절을 손으로 짚으며 소리쳤다. 승완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퀴가 암컷이라는 증거 있어?”
“아까 동석이가 알 밴 거 안 튀게 사살하라했잖아. 알 밴 거면 암컷 아냐?”

그럴듯한 추측에 승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리 앙……, 아무튼 그 이름도 후보로 넣도록 하지.”
“그게 암컷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해. 날개 밑을 들추어봐서 보지인지 자지인지 확인을 해봐야지.”

대진이 턱을 괴고 진지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아 이 발정난 개새끼야. 벌레가 보지, 자지가 어디 있냐.”
“병신아. 그럼 벌레는 섹스를 어떻게 해. 벌레라고 섹스 안 한다는 증거 있어? 그럼 애를 어떻게 낳아?”
“시발, 난 과학시간에 벌레가 섹스 한다는 소리 한번도 못 들었거든?”
“맨날 과학 시간에 처 자놓고 무슨 개소리야.”
“그럼 책에 벌레 자지라는 단어가 나와? 어디 나오는데?”

때아니게 불거진 곤충 성기 논란에 모두들 일제히 생물책을 찾으며 자신의 의견을 지지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우유 곽을 손에 든 채 서 있던 상원이 작은 목소리로 동석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동석이 손을 번쩍 들어 의견을 표했다.

“야, 상원이가 그러는데 바퀴벌레는 자지 그런 거 없대. 무슨 기관이 있다는데.”
“병신아. 그게 바퀴들한테는 자지야.”

대진이 끝끝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바퀴벌레의 암수구분을 할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여성의 이름과 남성의 이름을 함께 사용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자, 그럼 다른 좋은 이름은 없어?”
“우리나라 위인 이름은 어때? 쪽바리 새끼들 싹 다 몰아버린 이순신이나 에 또…….”
“세종대왕은 어때?”

상원은 눈을 감고 자신 때문에 바퀴벌레에 이름이 붙여지게 될 위기에 처한 훌륭한 위인들에게 사죄했다.

“세종대왕 존나 짜증나. 시발 국어시간에 그 시키 때문에 우리 머리 아픈 거 생각하라고.”

국어에 유난히 약한 대진이 다행히 세종대왕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 안을 제시했다. 상원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수십 번 읊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헤라클래스 어때? 이 새끼가 아주 힘이 세다잖아.”
“그럼 짱이란 얘기인가?”
“그렇다는 뜻이지.”

여기저기에서 헤라클래스에 대한 얘기가 숙덕숙덕 오고간 후, 모두들 찬성에 뜻을 더했다. 그중 누구도 헤라클래스가 실존 속 인물이 아니라는 이견은 제시하지 않았다. 상원은 그나마 양심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을지 문덕 어때? 얘도 한가락 했던 것 같은데? 근데 중국놈 피가 섞였나. 이름이 희한하네.”

대진이 국사 책을 뒤적거리며 을지 문덕의 후손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안을 내놓았다. 을지 문덕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바퀴벌레의 더듬이만큼도 없는 인간들이 그거 참 좋은 이름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자, 그럼 이만 후보 등록은 마치도록 하고 이 중에서 좋은 이름을 선정하자.”

승완이 칠판에 빼곡히 적힌 이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실 안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모두들 자신이 내놓은 이름이 그 중 제일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누구도 자신이 내놓은 이름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담임이 들어와 제지를 할 때까지 소란은 계속 되었다. 그 날 6반은 처음으로 정규 수업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모두 모여 회의를 계속했다. 열띤 토론 끝에 6반의 두 번째 마스코트로 임명된 바퀴벌레의 이름은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 레오 마리 앙뚜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 문덕 뽀순뽀순 퀴’로 정해졌다. 먹이는 ‘마호메트 나폴레옹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켈란젤로 링컨 아인슈타인 관우 장비 뽀순뽀순 잉’이 먹는 핑퐁을
나누어 분배하기로 했다. 승완의 선창에 6반 아이들은 ‘뽀순뽀순 퀴’를 삼창하고 집으로 헤어졌다.

……졸지에 바퀴벌레를 학급 애완동물로 사육하게 된 상원은 혼자 조용히 울 수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한바탕 울고 개운한 기분으로 오늘의 공부를 마친 상원은 밖으로 나온 후에야 시간이 제법 지나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짙은 남색의 하늘에 은색별이 박혀있는 모습을 보며 상원은 미술실에서 보았던 그림을 떠올렸다.
같은 재단의 선린예고 미술 선생이 그렸다는 그림은 늘 상원의 눈을 끌었다. 화려한 그림도 뛰어난 그림도 아니었지만 상원은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을 얼굴도 알지 못하는 타인으로부터 이해받는 것 같았다.

상원은 기지개를 크게 켜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큰 길을 지나가고 있는 그를 누군가 뒤에서 선배, 하며 반갑게 불러 세웠다. 학생회 후배들이었다. 상원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눈으로 재빨리 조석희의 모습을 찾았다.
가끔 조석희가 학생회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석희의 평상시 행동을 반추해보면 학생회와 그는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지만 학생회장인 김이경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석희의 동석을 허락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석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배, 지금 집에 가시는 거예요?”

김이경이 살가운 웃음을 지으며 상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마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흩날렸다. 이경의 눈가에 띤 웃음이 진해지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태워다 드릴까요.”

상원은 큰길 옆에 세워진 검은색 벤츠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김이경은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벤츠를 통한 하교를 권했다. 상원은 자신이 주제에 맞지 않은 호사를 누렸다간 평생에 맛볼 행운을 다써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때마다 고개를 저어야 했다.

“버스타고 가면 돼. 금방 가는데 뭐. 고마워.”

거절을 하면서도 고맙다는 감사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는 상원이었다. 그런 그의 말이 가식적인 겉치레가 아니라는 것쯤은 함께 학생회 활동을 해온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상원이 후배들에게 인사를 해보이고 뒤돌아 걷고 있는데 김이경이 그 뒤를 따라나서며 그를 불러 세웠다.

“선배. 잠깐만요.”
“응?”
“상원 선배는 어떻게 한 번을 제 부탁을 안 들어주세요?”

상원이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쌍꺼풀 없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에 다정한 웃음이 머물렀다. 이목구비가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차가워 보일 수도 있는 상원의 인상을 해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눈웃음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너희 집하고 우리 집 방향도 반대잖아. 기름 아깝게.”

기름이 아까운 사람이라면 애초에 벤츠를 등하교 자가용으로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와아. 선배, 제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지금 기름타령 하고 계신 건가요? 너무하신데요.”

김이경이 새치름하게 웃으며 상원을 바라보았다.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상원은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겨버렸다. 김이경의 단점이자 장점은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후회 안하실거죠?”
“후회는 무슨. 내일 봐.”

내일 있을 학생회 회의를 떠올리며 상원은 인사를 했다. 김이경도 체념한 태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길모퉁이를 지나 한참을 걸어 내려가니 버스 정류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원은 가방에서 단어장을 꺼내들고 몇 번이나 읽어 첫 글자만 봐도 외울 수 있는 단어들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단어장을 넘기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상원은 뺨에 닿는 시선을 느끼고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

하마터면 입 밖으로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상원은 황급히 다시 단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광색 펜으로 그은 중요 단어조차 그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상원은 다시 조심스럽게 옆을 힐끗 확인했다.

……역시나였다.
조석희가 버스 정류장에 세워진 디스플레이 패널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김이경이 아까 던진 의미심장한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상원은 그제야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것을 행운으로 해석해야 할지, 불운으로 해석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놀라운 일이었다. 같은 버스 노선을 타기 때문에 가끔 버스 안에서 그를 보긴 했지만, 이렇게 버스 정류장에서 직접 마주치는 일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상원은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 레오 마리 앙뚜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 문덕 뽀순뽀순 퀴의 영험함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석희가 말을 걸면 어쩌나 싶어 상원은 속으로 수만 가지 시뮬레이션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조석희는 삐딱하게 선 자세에서 불편한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상원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세계대전을 치루는 중이었다.
선배로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야 할까? 아니야, 인사를 할 타이밍은 이미 놓쳤잖아. 하지만 여기 앉을 때는 단어장을 보느라 볼 새가 없었는걸. 무시한 거라고 생각해서 혹시 조석희가 기분 나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냐, 쟤는 내가 지금 여기 나타난 것도 어쩌면 스토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 나 스토킹 하는 거 아닌데……. 스토킹한거 아니라고 말해볼까? ……더 기분 나빠하겠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날씨 얘기를 꺼내볼까? ……날씨 얘기를 꺼낼 만큼 친근한 사이도 아니구나. 버스는 왜 안 오지. 아……, 그냥 이렇게 영원이 버스가 안 오면 좋겠다. 헉……, 안돼. 이런 생각은 정말 스토커 같잖아.
다리 좀 봐. 진짜 길다. 손가락도 길고……, 아, 한번만이라도 저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얽을 수 있다면……, 헉! 안 돼. 방금 거 너무 변태 같았어. 이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말을 한번 그래도 걸어 볼까? 샌드위치도 맛있었다고 칭찬했잖아. ……아, 버스는 왜 안 오는 거야.

상원은 버스정류장 전광판에 초조한 시선을 던졌다. 그때 어디선가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가 빠르게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다가왔다. 상원이 고개를 돌리자 호피 무늬가 표범보다 잘 어울릴 것 같은 여자가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걸어오고 있었다.

“석희야아!!”

그녀가 애교스런 콧소리를 내며 조석희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눈물이 날만큼 부러운 그 광경에 상원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누나, 차는요?”
“갑자기 고장 나서 나도 지금 택시타고 내린 거야. 아 오늘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지 모르겠어.”

재수가 없다, 는 그녀의 표현에 괜히 찔린 상원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 가끔 그렇죠. 재수가 없는 날이 있어.”

조석희가 자신보다 너 댓살은 많아 보이는 여자의 허리를 한 손으로 바싹 끌어안으며 이죽거리는 투로 말했다.  

“택시 타고 갈까? 우리 집 오늘 아무도 없어.”

교태어린 여자의 멘트에 조석희는 망설임 없이 OK를 했다. 상원은 그날 편의점에서 보았던 여자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걱정했다가 조석희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떠올리고는 이 상황을 수긍하고 말았다.
동시에  들끓는 자괴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감히 어떻게 자신이 주제도 모르고 타인을 걱정한다는 말인가. 좋아한다고 마음을 고백한 상대는 자신이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외설스런 말들을 주고받는 이 상황에서!

상원은 한시라도 빨리 아무 버스나 오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했다. 전광판에 마침 그가 타야할 버스의 숫자가 번쩍거리며 떴다. 상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스를 기다렸다.
밤공기를 가르며 버스가 나타나자마자 그는 재빨리 버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리를 잡아 앉은 후에 상원은 뒤따르는 광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웅, 그럼 어떡해. 택시가 안 오잖아. 이거 타면 10분이면 도착하니까.”

호피 무늬 옷으로 몸을 휘감은 여자가 조석희의 손을 잡고 이끌며 애교스럽게 그를 졸라댔다. 조석희가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버스의 계단에 올라섰다. 두 사람은 버스의 맨 끝 좌석으로 가 앉았다. 상원은 울고 싶어졌다.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 레오 마리 앙뚜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 문덕 뽀순뽀순 퀴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치닫고 마는 것을.
버스의 문이 닫히고 출발했다. 상원은 앞좌석의 손잡이를 쥐고 고개를 숙인 채, 빨리 그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자신을 무시하는 조석희도 슬펐지만, 무엇보다 가장 슬픈 것은 다른 여자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조석희였다.
그리고 그 여자들이 한없이 부러워지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싫었다.

다음 번 정거장의 정차를 알리는 방송을 들으며 상원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귀를 찢는 굉음과 엄청난 충격이 버스를 덮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손잡이를 잡고 있었던 상원은 간신히 자리에서 나뒹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뒷좌석에 무방비하게 앉아있었던 여자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버스 뒷문까지 굴러야했다. shit, 이라고 소리친 조석희는 아슬아슬하게 버스 좌석 앞에 세워진 봉을 잡고 몸의 균형을 바로 세웠다.
놀란 버스 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확인했다. 버스의 후미를 박은 트럭이 중앙선을 벗어나 세워져 있었다. 순식간에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사는 우선 뒷좌석에 날아오듯 엎어진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옷은 이미 코에서 쏟아진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이게 괜찮아 보여요!!”

그녀가 코를 움켜쥐고 울상을 지었다.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봐선 목숨에 지장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상원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뒷좌석에 앉은 조석희의 안녕을 살피려 고개를 돌렸다.

“……!”

상원은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조석희를 발견하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 눈은 마치 이 모든 사고가 네 탓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어때?”

그가 뒷좌석에서 내려와 그녀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몰라, 코뼈 부러진 것 같아. 아, 시발. 짜증나.”
“집에 갈 수 있겠어요?”
“집에 가긴 어딜 가. 병원으로 가야지. 코뼈 부러진 거면 다시 수술해야 한단 말이야. 재수술은 돈이 두 배로 든다고.”

그녀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조석희가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내가 택시 타자고 했잖아.”
“그럼 지금 이게 내 탓이라는 거야?”

그녀가 울먹거리며 조석희를 올려다보았다. 조석희는 짜증이 난다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스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리 둔한 상대라도 눈치 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태도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편하고 간단하게 섹스를 즐길 기회를 날려 심기가 불편할 뿐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짜증나. 몰라. 나 병원 갈 거야.”

자존심이 상한 그녀가 조석희의 손을 팽개치고 버스에서 내려갔다. 버스 기사가 보험에 관한 것을 설명해줄 요량으로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렸다.  
버스에 황량하게 조석희와 단둘이 남겨진 상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조석희와 눈이 마주친 상원은 안 되겠다 싶어서 후다닥 일어나 버스 뒷문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버스를 무사히 탈출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조석희의 손에 무자비하게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어디 가요.”
“어? 나……, 나 집에…….”

안 좋은 방향이긴 했지만 조석희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았다는 사실에 상원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혀가 꼬이는 것을 간신히 이빨로 다잡아 집에 가려고, 라고 말을 마쳤다.
조석희는 하지만 상대방의 말 따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기사가 전화번호를 적고 가라는 것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는 상원을 질질 끌고 걸었다.
그의 손에 끌려가면서 상원은 황송함과 당혹스러움의 가운데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공원의 후미진 곳으로 상원을 끌고 온 조석희는 그를 구석에 내동댕이치듯 던지고 물었다.

“너 대체 뭐야.”
“……어?”
“너 대체 뭐하는 인간이냐고.”

조석희가 느릿한 발음으로 그렇게 두 번 물었을 때, 상원은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조석희의 손이 뒷덜미에 닿았다는 황송함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당혹스러움만이 그득 들어찼다.
조석희가 멋 대로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대놓고 자신에게 반말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뭔데 자꾸 이렇게 거슬려. 재수 없게.”

조석희가 주먹으로 벽을 후려치며 말했다. 상원은 그가 단순히 앞에서 알짱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심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조석희의 심기를 단단히 뒤틀리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미안……,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

상원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조석희가 그의 머리를 움켜쥔 채 앞으로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다 뽑혀버릴 것 같은 고통이 전해졌지만, 상원은 차마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랬다간 진짜 아픈 게 무엇인지 조석희가 기꺼이 맛보게 해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선배 덜 떨어진 사과 들으려고 데려온 거 아니거든.”
“아, ……어.”

한대 얻어맞을 위기에서도 상원은 가까이서 본 조석희의 얼굴이 근사하단 생각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었다.

“너 때문에 오늘 날린 거니까, 네가 책임지고 빨아.”
“응?”
“Suck my dick, bitch.”

상원은 방금 전 들은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관용적 표현인 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상원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 비치(bitch)아닌데, 여자 아니야……. 나.”

조석희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독하게 뒤틀린 웃음 뒤에 이어진 독설은 상원을 지근지근 짓밟아 버리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선배? 안아 달라는 눈으로, 발정 난 암캐 같은 눈으로 보고 있잖아.”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나는 그냥…….”
“역겨운 사랑 타령 따위 또 할 생각은 아니지? 선배.”

서걱, 하고 잘려버린 마음에 상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조석희는 바지의 퍼스너를 내리고 자신의 성기를 한 손으로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상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가져대 댔다.

“빨아.”
“……조석희. 난…….”
“시발, 빨라고. 못 알아들어?”

고압적인 어조였다.
상원은 무서웠다. 슬펐고, 황당했고, 두려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벌벌 떨리고 다리가 풀린 이 상황에서 도망쳤다간 그 뒤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조석희의 살벌한 눈이 이미 그가 어느 한계점을 넘어섰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뭐든 해야만 했다.
결심을 마친 상원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자 위에서 피식, 하는 비웃음이 들려왔다.

“뭐야. 얌전빼는 얼굴을 하더니 내 좆이 그렇게 맛있어 보이나 보지? 침까지 삼키게.”
“그게 아니라…….”

긴장을 해서 그런 것이라고 상원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 안으로 울컥 들어온 남자의 살덩이 때문에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닥치고 빨리 빨기나 해.”

생리적인 혐오감과 목구멍을 찌르는 감각에 상원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하지만 조석희는 상대의 상태 따위는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애초에 자신과 같이 있던 여자가 코피를 쏟은 상황에서도 섹스 가능 여부만 신경 쓰던 인간이었다.

“이빨 세우지 마. 혀로 하라고.”

조석희가 상원의 턱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오랄 섹스에 대한 코치를 하기 시작했다. 상원은 입속에서 무게를 더해가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살덩이에 숨이 막혀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조석희가 자신의 성기를 상원의 입 안에서 빼내고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선배, 설마 처음 해?”
“……아, ……응.”
“흠, 호모주제에 쓸데없이 버진이란 말이군.”

여기서 버진이란 단어는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고 정정해주려다 상원은 입을 다물었다. 어떤 단어를 사용한다 해도 자신이 처음이라는 사실 관계를 바로잡기에는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갑자기 조석희가 손가락을 상원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

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이러냐는 것이냐는 눈짓을 해보였다.

“이렇게 하라고.”

조석희가 손가락을 상원의 혀 위에 음란하게 문지르며 말했다. 그가 턱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상원의 턱을 타고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흘러 내렸다. 상원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닦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게 그의 솔직한 속내였다.

“선배, 그런 거 신경 쓸 거 없어요.”
“응?”

갑작스럽게 돌아온 조석희의 존댓말에 상원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선배 얼굴 보면서 하는 거 아니니까.”
“…….”
“빨리 입이나 벌리시죠.”

그가 반쯤 선 자신의 성기를 손에 쥐고 상원에게 윽박질렀다. 상원은 체념한 듯 입을 벌리고 다시 그의 것을 입안으로 받아들였다. 혀에 스치는 단단한 살덩이의 감촉과 코에 닿는 거친 체모의 느낌이 생경한 만큼 사실적이었다.
조석희는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는 성격만큼이나 이기적인 구강성교를 즐겼다. 상대의 목구멍이 아플 만큼 그는 허리를 놀려 상원의 입 안에 자신의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원에게 그는 심상한 말투로 입술을 오므리라는 둥, 혀를 사용하라는 둥의 말 따위를 늘어놓았다. 상원의 움직임이 멈출 때마다 그는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어 난폭하게 상대를 잡아 당겼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곤혹스러운 시간이 절정에 이르자 조석희는 상원의 입 안에 고스란히 정액을 토해내고 말았다. 상원은 쿨럭 거리면서 입안에 가득 찬 정액을 바닥에 뱉어내었다.

“쿨럭――, 쿨럭. 욱――.”

바지 퍼스너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원은 손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악마 같은 남자가 온몸이 자릿자릿한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어땠어요. 선배? 오매불망하던 좆을 빤 소감이. 좋았어요?”

상원은 하마터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응, 이라고 대답할 뻔했다. 수치도 모르는 자신을 책망하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석희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들고 먼지를 털며 그런 상원에게 경멸에 찬 시선을 던졌다. 한 손으로 가방 끈을 움켜 쥔 그는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공원을 걸어 나갔다.
상원은 수돗가로 가서 입을 헹구었다. 하지만 이미 입안 점막에 젖어든 그 비릿함 맛은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상원은 몇 번이나 입안을 헹구어야 했다.   



상원이 열이 나자 그의 어머니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아들이 이상한 사고에 휘말려 어딘가를 다쳐오는 일은 종종 있어도 이런 식으로 몸이 아파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분명 심적으로 충격을 받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는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오늘 하루 쉬고 내일 학교에 가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렴.”
“네.”

힘없이 웃어 보이는 아들의 이마를 손으로 만져주며 그녀는 방문을 나섰다.
어머니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 워낙 크고 작은 사고에 자신은 단련되었다고 하지만 부모님한테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불 안에 몸을 둥글게 말고 들어가 상원은 아버지의 전근이 오늘이라도 다시 성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위의 현실성 없는 소원을 빌어보았다.

“……전학가고 싶어.”

건조한 음성이 방 안에 조용히 울렸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그 바람에 우울해진 상원은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어제 있었던 그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이 그런 일을 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꿈을 꾼 게 아닐까하고 반문해 보았지만 뜨겁게 부어있는 입안 점막과 교복 재킷에 남아있는 희미한 얼룩이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조석희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까지는 파악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2년 넘게 버텨온 학교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던 스스로를 어떻게 추슬러 여기까지 온 것인데. 고작 이런 문제로 무너질 수…….

“……전학가고 싶다.”

상원은 베개를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마음속의 말랑말랑한 부분을 뱉어냈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왔지만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든 힘들고 솔직히 무섭다고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참을 뿐이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듯싶다. 1년간 마음속에 품어왔던 상대에게 비참하게 거절을 당한 것으로 모자라 성적 배설을 처리해주는 일을 겪게 되다니.

“전학 가자.”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음속의 결심을 다잡았다. 역시 전학만이 살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방문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원아. 학교 후배가 문병 왔는데.”
“네?”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에 상원은 후배라는 단어에서 적합한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청 잘생긴 후배인데 누구니?”

엄청 잘 생긴, 이란 수식어는 상원의 머릿속 뉴런을 재빠르게 통과해 뇌 속의 회색 피질을 자극시켰다. 펑, 하고 만들어진 얼굴은 상원을 패닉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들어오라고 한다?”
“예? 아, 잠깐만, 세수도 해야 하고 양치도……머리도 감고……, 옷도 좀 갈아입은 다음에.”

상원이 허둥지둥 한손에는 수건을 다른 한손에는 옷을 움켜쥐고 일어서서 대답했다. 어머니는 웃으며 현관으로 사라졌다. 세수를 먼저 해야 할지 옷을 먼저 갈아입어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을 때,
방문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부스스한 머리라도 빗자 싶어 상원은 책상 위에 있는 빗을 움켜쥐었다. 방문이 열렸다. 그렇게 상원은 빗과 수건, 옷을 움켜쥔 채로 서서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선배, 아프시다면서요.”
“어…….”

상원이 빗으로 이경을 가리키며 입술을 뻐금거렸다.

“표정이 왜 그러세요. 제가 못 올 데 온 것도 아니고.”
“……우리 집을 어떻게 알고?”
“학생부만 한번 보면 되는 건데, 뭐가 어렵다고요.”

이경이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감기 걸리셨다면서요. 여기 푸딩이랑 과일 좀 사왔어요. 열 날 때는 입맛부터 찾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상원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봉투를 받아 들었다. 키가 큰 남자가 둘이나 서 있으니 방안이 비좁게 느껴졌다. 상원은 이경에게 아무데나 앉으라고 권했다.
침대 위에 긴 다리를 쭉 뻗으며 앉는 김이경을 물끄러미 보던 상원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와, 너도……제법 잘 생겼구나.”
“네?”
“아니. 이전에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 ……잘 생겼구나. 너도.”

이경은 상대방의 칭찬에 웃어야할지 화를 내야할지 몰라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서도 빠지지 않는 외모였다. 배경, 두뇌, 성격에 외모까지 훌륭한 조합을 이루어 황태자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살아오던 그가,
알게 된 지 이년이 다 되어가는 사람에게 이제야 제법 잘 생겼다는 얘기를 듣게 된 것이다. 때늦은 칭찬이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김이경은 이번 경우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되었다.

“고맙긴 한데 설마 그걸 지금 아신 건가요?”
“뭐가?”
“저 잘생긴 거요.”

김이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잘생겼다는 발언을 하자 이번에는 상원이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동안 제 얼굴도 안 보신 거예요?”
“아니. 봤지.”
“그런데요?”
“남자 얼굴에 그다지 관심 둘 이유는 없잖아. 나도 남자고, 너도 남잔데…….”

상원이 자신과 이경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경의 무표정한 얼굴이 잠시 흔들렸다. 의외의 곳에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상원은 가끔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상식을 뒤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아무튼,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수업 끝난 거야?”
“네.”

김이경은 일부러 마지막 교시 수업은 듣지 않고 학교를 나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겁이 많은 동물에게 성큼 다가갔다가는 신뢰를 얻긴 커녕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냥 감기인데. 괜히 여기까지 오게 했네. 걱정 안 해도 됐을 텐데.”
“선배가 전화도 안 받으시고 무단결석을 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걱정이 되지요.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겠다.”

자신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경의 걱정이 별스러운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걱정을 앞세워 집까지 찾아온 후배의 노력이 약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매우 잘생긴 후배, 라는 한마디에 밑도 끝도 없이 조석희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믿은 자신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역시 전학을 가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상원 선배.”
“응?”

전학의 꿈에 젖어있던 상원이 이경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대에 앉아 있던 이경이 어깨를 뒤로 젖힌 채,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경은 늘 행동거지가 바른 타입이었다.
저렇게 느긋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뭔가 속으로 꿍꿍이를 계획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어? 아니. 없어.”

상원이 대답해 놓고 자신의 대답이 너무 빨랐던 것은 아닌가 싶어 식은땀을 흘렸다. 거짓말에 능하지 않은 상원으로서는 이렇게 화제 차단을 하는 편이 최선이었다.

“그럼 설마 진짜 아픈 거예요?”

이경이 상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약간의 미열에 그는 흠, 하고 인상을 썼다.

“설마라니. 진짜 아파.”

상원이 이경의 손을 밀어내며 대답했다. 결석을 할 정도의 고열이 아니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진 것이다.

“왠지 선배답지 않네요.”
“나다운 게 뭔데?”

안 그래도 심경이 복잡했던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져 가시 돋친 말투로 대꾸하게 되었다.

“선배는 강하잖아요. 조용하고 느린데, 늘 보면 그 자리에 계시거든요.”

후배의 어른스러운 칭찬에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의 반응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아무튼 제가 그래서 선배 존경하는 걸요.”
“어?”

의외의 발언이었다.
학생회장인 이경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조금 더 살갑게 구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생회 선배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3학년인 상원에게 서기직을 연임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 다름 아닌 이경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주는 부분에 상원도 특별히 부담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단 한번도 이경이 자신을 존경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경의 태도에서 그런 감정이 묻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김이경이란 인물의 입에서 쉽게 존경이란 단어가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희재고의 수많은 수재들을 젖히고 학생회장에 앉은 김이경은 아까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수려함을 밝혔듯이 스스로가 잘났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존경한다니?

“선배가 늘 그 자리에서 노력하시는 모습, 존경한다고요.”
“……어, 하하.”

방금 전까지 전학에의 열망을 불태우던 상원은 차마 그 자리에서 도망가려 한다는 소회를 밝히지 못했다. 천하의 김이경에게 존경한다는 고백까지 들은 이 마당에 차마 상원은 그 얘기를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방어막이 필요하겠다 싶어 상원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기, 네 얘기 정말 고마운데……, 나 부탁할 게 있어.”
“뭔데요. 선배.”
“……나 학생회 일 그만두고 싶어.”

상원에게 학생회일은 정말 특별한 의미였다. 특수 학급이나 마찬가지인 6반 학생이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어디에도 소속감을 갖지 못하는 상원이 무게중심을 가질 수 있던 이유에
학생회가 제법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머리가 좋은 김이경이 모를 리 없었다. 최소한의 참여로 연임을 약속받긴 했지만 상원이 학생회 일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에 그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왜요?”

놀라거나 화내는 일 없이 김이경은 차분한 태도로 이유부터 물었다.

“아, 나 공부도 해야 하고…….”
“선배. 학생회 일에 그렇게 많은 시간 뺏기는 것은 아니잖아요.”
“…….”

김이경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상원은 그 이상 변명의 말을 늘어놓지 못했다. 상원이 하는 일이라고는 한달에 한번 있는 전교 학생회의 회의록 정리나 가끔 학교 행사가 있을 때 일을 도와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가끔 있는 행사에서 간간히 조석희를 마주친다는 것이 상원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학생회 임원도 아닌데 조석희가 왜 학생회실에서 어슬렁 거리냐는 질문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간 그 이해되지 않는 그의 출연을 즐긴 주제에 이제와 그걸 묻는 것도 입장이 우스워지는 것이다.

“공부하시는 거 많이 힘드세요?”

후배의 걱정스러운 어조에 상원은 염치없이 기대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이경이 알겠어요, 하고 말을 이었다.

“선배. 그러면 회의록 정리만 해주세요. 다른 업무는 제가 대신 할게요.”

이경이 2학년이라 할지라도 벌써 치열한 입시 경쟁의 출발선에 서있음을 상원은 알고 있었기에 그의 제안에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동관에 있는 도서관 열쇠 드릴게요.”
“응?”
“동관(東館) 도서관이요.”

이경이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관의 도서관은 학생회장에게만 열쇠가 주어지는 개인공간이었다. 그곳은 역대 학생회장들이 모아놓은 최고의 입시자료들이 구비되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희재고 내의 비고(秘庫)였다.
거기에 쌓인 자료를 한번만 훑어도 서울대 합격은 맡아놓은 당상이라는 얘기가 전해졌다.
상원은 자신에게 그곳 열쇠를 선뜻 내주겠다고 하는 후배의 의도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어 두 눈을 크게 치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대단히 마음에 드는 제안이긴 하지만. ……왜?”
“뭐가요?”
“그렇게 해서 내가 학생회에 있을 이유는 없잖아.”

상원이 성격과 재능이 서기직에 잘 어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재가 발에 차일 정도로 널린 희재고에서 그를 능가하는 인재를 찾는 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상원의 물음에 글쎄요, 라고 말끝을 늘이던 이경이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존경하는 선배를 위해서, 라고 해두죠.”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원이 따라 일어서자 이경이 손짓을 했다.

“아픈데 쉬세요.”
“현관까지는 바래다줄게.”
“열 있으시잖아요. 찬바람 쐬면 안 좋아요.”

김이경이 상원의 이마를 다시 한번 손으로 짚어주며 말했다. 오늘을 이상할 정도로 스킨십이 잦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그럼 멀리 안나갈게, 하고 손을 흔들었다.

“상원 선배.”
“응?”
“저희 집에서 예전에 키우던 개가 한 마리 있었거든요.”

이건 또 무슨 갑작스런 개타령인가 싶었다.

“원래는 주인이 있던 개인데 저희 집에서 키우게 되었거든요. 정말 예뻐했어요. 제가 목욕도 시켜주고 밥도 주고. 저 그런 거 귀찮아하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도맡아 했어요.”
“아, 그렇구나.”

어린 김이경도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가 개밥을 챙겨주는 장면은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이 열린 틈을 타서 목줄을 풀고 녀석이 집을 나가버렸더라고요.”

상원은 뿔테 안경 속에서 차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경의 눈에 왠지 모를 스산함을 느꼈다. 상원은 어색한 목소리로 그거 참 안됐네, 라고 맞장구 쳐주었다.

“원주인한테 되돌아갔더라고요. 차를 타고 달려도 두 시간이 넘는 거리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

결과는 확인해야 할 것 같아 던진 질문이었다.

“목줄을 바꿨죠. 다시는 도망 못 가게.”

산뜻하게 돌아온 대답에 상원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김이경이 생각해 보고 연락 달라는 인사를 마치고 방문을 나설 때까지 상원은 석연찮은 이야기의 교훈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날 밤 동관 도서관과 전학의 기로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상원은 이경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동관의 도서관이 2학년 S반과 정반대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위로 삼으며 상원은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상원아.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리 앙뚜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문덕 뽀순뽀순 퀴, 말이다. 핑퐁만으로 영양섭취가 충분할까?”

동석의 진지한 물음에 상원은 자신의 짝이 왜 저 머리로 공부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6반에서 애완 바퀴의 이름을 정확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동석뿐이었다. 대진은 뽀순이라고 불렀고 승완은 알렉스라고 불렀다.
헤라라고 부르는 녀석도 있었고 을지라고 부르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한마디로 지 좋을 대로 부르고 있는 셈이었다.

“다른 것도 같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단 한번 일을 벌이면 본격적으로 달려드는 6반 학생들의 성미대로 교실에는 이미 곤충 사육 케이스까지 들어서 있었다. 아이들의 기행에 일찌감치 손을 들어버린 담임은 그 사육 케이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다른 거, 뭐?”
“글쎄. 음. 빵 부스러기 같은 거?”
“오케이.”

동석이 경쾌한 목소리로 대진에게 빵을 사러가자고 소리쳤다. 쉬는 시간에 김이경에게 약속대로 동관 도서관 열쇠를 받은 상원은 가방에 도시락과 책을 챙겨 일어났다.

“어디 가?”

자고 있던 대진을 깨워 교실을 나가려던 동석이 그런 상원을 발견하고 물었다.

“오늘부터 당분간 혼자 먹을게.”
“엑, 왕따도 아니고. 왜?”
“공부할 게 좀 있어서.”

상원이 혼자 있고 싶을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멘트였다. 눈치가 빠른 동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치라고는 엄마 뱃속에 고이 모셔두고 나온 대진이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공부할 게 또 있어? 맨날 공부만 하면 너 존트 큰일 난다. 운동도 좀 하고 그래야 사람다워 지는 거야.”
“상원이가 지금의 너보다 백배쯤은 사람다울걸.”

대진의 몸을 해부하면 장기가 다 페니스 모양일거라는 설이 있었다. 동석은 윤대진 장기 페니스 모형 설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 맞다. 그렇구나.”

대진이 대단한 생각을 떠올렸다는 듯이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친 후 상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너도 남자구나. 그래서 혼자 있을 곳을 찾는 거지? 내 잡지 빌려줄까?”
“……고맙지만 사양할게.”
“왜? 원하는 타입을 말해봐. 타입별로 다 갖추고 있으니까.”

대진의 사물함은 성인 잡지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니 영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6반 학생들은 가끔 대진의 잡지를 빌리러 오기도 했다. 대진은 넓은 아량을 베풀어 자신의 잡지를 그들에게 대여해 주었다. 물론 유료로.

“특별히 너는 공짜로 빌려줄게.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상원이 너랑 똑같은 줄 아냐.”

동석의 핀잔에 대진이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내가 뭐! 상원이는 그럼 오나니 안 하냐? 얘라고 평생 안 해?”
“안 해.”

갑작스레 나타난 한승완이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대뜸 대답했다.

“미친. 이상원은 남자도 아니냐? 딸도 안 치게!”

대진이 지지 않고 맞받아 쳤지만 승완의 입장은 한겨울 피똥을 누는 시어머니의 기세보다 매서웠다.

“안 쳐. 우리 상원이는 절대 그런 거 안 해.”
“어…….”

중간에 선 상원은 친구의 저 밑도 끝도 없는 오해를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줘야 할지 몰라 입술만 뻐금거렸다. 당혹감에 할 말을 잃을 때마다 보이는 상원의 버릇이었다.

“이상원도 존나 딸칠걸. 상원이 딸친다에 내 손목을 건다.”

대진이 자신의 두꺼운 손목을 승완의 얼굴 앞에 들이밀며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네 손목 잘라서 목에 걸고 다닐 거다.”

승완이 잇새로 으르렁거리며 대꾸했다.
한 떨기 고고한 난초 같은 이미지인 상원은 승완의 머릿속에서 이미 또 다른 생명체로 자라고 있었다. 그가 상원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얹고는 내 말이 맞지? 하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상원이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시선을 돌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그것은 무언의 부정이었다.

“손목 내놔! 오우 예!!”

졸지에 반장의 손목을 얻게 된 대진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승완은 곱게 키운 딸이 외간 남자의 손을 잡고 나타난 광경을 목격한 아버지처럼 부들부들 떨며, 상원을 노려보았다.

“……너……. 무슨……, 안 돼. 그럴 리 없어.”
“…….”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저도 남자랍니다.

“안 돼! 상원이는 그런 짓 안 해! 절대 안 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승완이 염불을 외는 중처럼 중얼거렸다.

“손목 내놔! 손목. 니 손목으로 난 똥 닦아야지.”

흥분한 대진이 승완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의 분노는 배가 되었다.

“에이! 시발!”

승완이 홧김에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은 것은 불행히도 옆에 서서 히죽거리고 있던 동석이었다. 동석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얻어맞고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었다. 동석이 승완의 허벅지에 로우킥을 정통으로 날렸다.
오랜만에 붙은 두 사람의 싸움에 6반 교실은 순식간에 난장이 되었다. 상원이 희재고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친구들의 싸움을 보며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그는 교실을 빠져 나왔다.

손등으로 아직도 후끈거리는 뺨을 슬근슬근 문지르며 상원은 동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몇 달 전에 승완이 똑같은 질문을 했더라면 상원은 부끄럽긴 하겠지만 해본 적 없다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을 것이다.
거대한 운명에 맞서 싸우는데 삶의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느라 상원은 미처 그런 분야에까지 눈을 돌리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야릇한 꿈을 꾸다 잠에서 깬 그는 본능적으로 팬티 안으로 손을 넣어 스스로를 달래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절정에 다다르며 상원은 조석희의 얼굴을 떠올리진 않았다. 양심상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르진 못했다. 대신 그는 조석희와 비슷한 넓은 가슴이나 손 따위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것이 절대 조석희의 것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상원은 재빨리 복도를 둘러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조석희를 만난다면 진짜 그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조석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원은 주머니 안에 있는 도서관 열쇠를 손으로 확인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자물쇠를 열려고 열쇠를 꺼냈을 때, 상원은 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소를 하시는 분이 가끔 들어가 정리를 한다는 얘기를 이경에게 전해들은 상원은 별다른 생각 없이 도서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나서 상원은 천천히 도서관 안을 살폈다.

역대 학생회장들의 취향에 따른 책들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이 많은 곳 특유의 종이 먼지 냄새에 상원은 우울함이 조금씩 스러져감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상원은 책을 읽는 것도, 책이 많이 쌓인 장소도 좋아했다.

“그래. 이걸 전화위복 삼으면 되지.”

가만히 생각하면 자신이 전학가고 싶다고 해서 부모님이 오냐, 하고 보내줄 문제도 아니었다. 이 곳에서 조용히 1년을 보내며 최대한 조석희와 마주치지 않고 지낸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다이어리에 빨간 볼펜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졸업할 때까지 조석희를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가끔 뒷모습을 보는 정도라면 괜찮을지도. 그래. 뒷모습정도면 매우 괜찮을 거다.
조석희는 앞모습만큼이나 뒷모습도 아름다웠다. 균형 잡힌 등근육과 긴 팔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야.”

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상대다. 보고 있으면 괴롭기만 할 테니 아예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 ……뒷모습은 괜찮을지도 몰라. 아니면 상대가 아예 눈치 채지 못하게 잠이 든 모습도 괜찮을 텐데. 바로 저렇게…….

“――!!!”

상원은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 익숙한 어깨, 저 익숙한 팔 근육, 저 익숙한 허벅지 근육, 무엇보다 저 익숙한 등짝이라니!!
계산 능력이 탁월해 모의고사 수학 문제를 다 풀고도 시간이 남아 한번 꼼꼼하게 검산을 하는 상원이었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의문에도 답을 내지 못 했다.
왜 조석희가 여기서 엎드려 자고 있는 것인가, 이 곳의 열쇠는 회장만 갖고 있다는 데 쟤가 어떻게 들어와 있는 것인가, 김이경이 들여보낸 거라면 왜 그는 자신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신은 정말 왜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는 것인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이 본능적으로 상원을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사소한 문제는 온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긴장한 탓에 뒤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는 점.
아슬아슬하게 책이 쌓여있던 책장을 팔꿈치로 건드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책이 와르르 쏟아졌다. 상원은 허겁지겁 책장 위에서 쏟아지는 책을 받으려고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이미 조용한 도서관의 평화는 책이 바닥을 치는 소리로 깨지고 말았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조석희의 어깨가 움찔, 하고 움직였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상원의 눈에 포착되었다.

“…….”
“……. …….”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상원은 유리 케이스에 핀으로 날개가 꽂혀 박제된 나비의 심정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뒤로는 책장으로 막혀있어 더 이상 움직일 곳도 없었다.
조석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여기 정말 너 때문이 아니라 이경이가……, 열쇠를……, 정말이야. 널 따라온 게 아니야.”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는 데 상원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상대방이 믿어줄 리 없는 변명이었다. 이틀 전 그런 모멸적인 일을 강요당하고도 이렇게 뻔뻔히 나타나다니.
정말 말 그대로 스토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 정도면 경찰에 신고를 당해도 마땅한 수준이었다. 조석희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다. 한대 얻어맞을 각오까지 하고 상원은 눈을 질근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떤 물리적 충격도 전해져 오지 않았다.

“……?”

조심스레 눈을 뜨고 바라보니 조석희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고 여전히 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눈빛이…….

“……어디 아파?”

괜한 오지랖 때문에 스토커로 신고 당한다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이쯤에서 Damn it, 이나 Fucking정도는 중얼거려줘야 눈앞의 남자를 조석희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이 쪽을 노려볼 뿐이었다.

“……워.”
“뭐?”
“시끄러워. 잠 깨우지 마.”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험악한 목소리였다. 상원은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한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쥔 조석희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상원은 지금 이 상황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아 손바닥으로 뺨을 더듬어 찾아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철썩 내려쳤다. 그 소리에 다시 조석희가 몸을 일으켰다.

“I’m telling you for the last time.”

갑자기 쏟아진 영어 문장에 상원은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영어듣기를 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목소리가 영어 듣기 평가 성우로 활약해준다면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듣고도 남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스친 것도 잠시.

“Never! ever! don't say any single word.”

이마에 총구가 겨누어 진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스산한 저음에 상원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 예스, 라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그러자 조석희는 거짓말처럼 다시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상원은 책장을 등지고 선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석희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뀌고 나서야 상원은 찬찬히 바닥에 앉을 수 있었다. 바닥은 차고 허리가 아팠다.
상원은 핸드폰도 교실에 있는 가방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는 난폭한 맹수 한 마리가 언제 깰지 모르는 낮잠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상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도서관에서 조난당했음을.



지구의 전체 인구 중 30%가 불면증을 경험한다는 통계가 있다. 개중 9%는 만성 불면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조석희는 숙면을 취해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불면증 환자였다.
이틀에서 나흘에 한번 정도로 잠을 청하는 게 그에겐 일상이었다. 조석희는 조금이라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것들은 기꺼이 복용했다. 술이든 약물이든, 여자든.
학교에서 잠이 오면 그는 이곳을 수면실로 이용했다. 양호실은 들락거리는 학생들 때문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옥상은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들려 애당초 수면 장소에 포함시킬 수도 없었다.
동관의 도서관은 열쇠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는데다 수업 종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외진 곳에 위치해 수면 장소로는 최적이었다.

조석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습관대로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두 시간 반이면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이틀은 버틸 수 있으니. 오늘은 평소보다 푹 잠을 잤는지 머릿속이 맑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까부터 코끝에 좋은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목을 양 옆으로 차례대로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의 눈에 누군가 바닥에 엎드려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뭐야.”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던 누군가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조석희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상원이 가방에서 노트를 주섬주섬 꺼내어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 위로 그 노트를 치켜들었다.

「이경이가 들여보내 준 거야. 확인해 봐도 돼.」

믿어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질 기세였다. 조석희는 김이경에게 확인할 생각도 없었다. 누가 들여보내줬건 눈앞의 상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조석희의 눈매가 여전히 험악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자 상원은 다시 노트에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잘 잤어?」

아까 긴 문장을 썼을 때 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 쓴 세 글자였다. 조석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저건 벨도 꼴도 없는 건가 싶었다.

“그게 선배랑 무슨 상관인가요.”

쌀쌀맞은 후배의 대답에 상원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내 곧 평온한 얼굴로 노트에 글자를 적어 올렸다.

「엎드려 자면 팔도 저리고 소화도 안 되는데…….」

더 이상 대화를 할 가치를 없다 여긴 조석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상원이 재빨리 다른 글자를 적어 노트를 번쩍 들었다.

「나 가도 돼?」
“가지 말라는 말은 안 한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글자놀이 시킨 기억도 없고.”
“……네가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해서.”

그제야 상원이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잔뜩 목소리를 죽인 채였다.
조석희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얼핏 잠결에 조용히 하라고 말 한 것도 같았지만 그렇다고 몇 시간 동안 바닥에 앉아있는 융통성 없는 인간에 대한 책임감은 느끼지 못했다.

“그럼 가야겠다.”

상원이 바닥에 있던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났다.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상원은 한 손으로 위 부근을 움켜쥐고 얼굴을 붉혔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인데 바닥에 앉아 얼음 땡 놀이를 하느라 식사도 하지 못한데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식사 안 하셨어요?”
“어……, 응.”

상원은 가방 안에 있는 도시락을 떠올리며 어디든 다시 조용한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도 훌쩍 넘긴 지금 교실로 돌아가 도시락을 꺼낸다면 친구들이 대체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끈질기게 물을게 분명했다.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그럼 여기서 하고 가시죠. 저는 나갈 거니까.”
“그래도 돼?”
“김이경한테 열쇠 받으셨다면서요.”

상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용하셔도 되죠.”

그 한마디에 상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푸르스름한 눈동자나 흰 피부 때문에 차가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작은 변화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제가 사용하는 시간은 제하고.”

덧붙여진 단서에 상원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잠시나마 조석희에게 다정한(?) 배려를 듣게 되어 벨도 없이 기쁨을 맛보다 도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조석희와 단 둘이 남겨지는 것도 나름 고역이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행스런 단서였다.

“……언제 오는데?”
“보통 이 시간.”
“알겠어.”

상원은 그럼 아침이나 수업이 끝나고 와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학과 맞바꾼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정 힘들면 전학을 갈 땐 가더라도 이 자료를 한번이라도 훑어보고 가야겠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절대 이 시간에는 안 올게.”

선서를 하듯 진지한 어조로 말하는 상원을 조석희는 옆 눈으로 흘깃 쳐다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상원의 옆을 지나 문으로 가려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
“응?”
“무슨 향수 써요?”
“향수? 아니, 전혀.”

혹시 누군가의 향수가 묻어난 것인가 싶어 상원은 자신의 소매에 고개를 대고 킁킁거려 보았다. 하지만 향수의 향이라 할만한 냄새는 조금도 맡을 수가 없었다. 조석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참, 선배.”
“어!”

오늘따라 조석희로부터 많이 불리자 상원은 기쁨을 갖추지 못하고 약간은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안 좋았던 일을 계기로 이런 일도 생기니, 세상은 참 살아볼만 한 것 같았다.

“혹시 제가 한국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아세요?”
“……아니.”

조석희가 미국에서 다녔던 학교가 사립명문 고등학교였다는 얘기는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이사장과 친분이 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학교에서 쫓겨난 이유에 관한 소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선생을 임신 시켰다더라, 대낮에 약물에 취해 여자 기숙사에서 집단 섹스를 하다 걸렸다더라, 더 이상 건드릴 여자가 없어 질려서 자기 발로 자퇴를 했다더라, 하는 등등의.

“누굴 좀 건드렸거든요.”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석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어째서인지 그가 지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꽤나 잔인해 보이는 미소를.

“제가 잘 때 깨는 걸 엄청 싫어해서요. 덕분에 절 건드린 녀석은 아직도 누워있겠지만.”
“…….”

하마터면 자신도 침대에 누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숨을 쉬어야 처지가 될 수도 있었겠구나 싶어 상원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늘은 운이 좋으시네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상원은 조석희가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아 창가를 바라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때문에 한층 더 처연해진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말을 연심을 품고 있는 상대에게 들었건만, 상원은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있던 상원은 6교시 수업이 끝날 즈음에야 가방을 들고 도서관을 나왔다.


자신의 반 앞으로 찾아온 상원을 보고 김이경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선배. 안녕하세요.”

차마 안녕 못하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던 상원은 대충 얼버무린 후에 이경을 복도의 끝으로 데리고 갔다.

“무슨 일이세요?”
“이거.”

상원이 열쇠를 이경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나 여기 이용 못할 것 같아.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있더라고.”

조석희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할까 하다 상원은 다른 사람이라는 대명사로 뭉뚱그려 그를 지칭했다. 다른 사람에게 괜히 조석희를 피한다는 느낌은 주고 싶지 않은 게 그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아, 석희요?”

하지만 김이경은 그런 상원의 바람 따윈 무색하게 콕 집어 그 이름을 거론했다.

“석희가 왜요. 그 녀석 거기 자주 가지도 않아요. 가끔 낮잠 자러가는 정도인데.”

그 가끔이 자신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이 될 뿐이었다. 상원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서로 방해되는 것 같아서.”
“괜찮아요. 그 녀석 자는 것만 방해안하면 웬만하면 문제없을 거예요.”
“…….”

침묵의 행간을 읽어 낸 이경의 어조에 약간의 경악이 실려 있었다.
  
“진짜요? 설마 정말 석희 녀석 자는 것을 깨우셨어요?”
“……응.”

우울하게 대답하는 상원을 보고 이경이 쳇, 하고 작게 혀를 찼다.

“선배는 운이 좋으신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네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평생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후자일걸.”

김이경도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석희가 자는 것을 깨우고도 이런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 다닌다는 것은 운이 좋다는 말로도 모자랄 사건이었다.
조석희가 도서관을 가는 빈도를 알고 있는 이경이 마주칠 확률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첫 날 조석희의 잠을 깨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그가 바란 것은 잠을 청하러 온 조석희와 마주쳐 모진 말을 듣고 상처받은 상원이었거늘.   

“아무튼 나 안 할래. 도서관.”

상원이 다시 김이경의 앞으로 열쇠를 내밀었다. 상처를 받긴 받았는데 출혈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이경이 상원의 손을 밀어내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그 녀석 점심시간 전후로만 가끔 잠자러 가는 거니까, 정 곤란하시면 그 시간은 피해서 가세요.”
“…….”
“자료들은 좀 훑어 보셨어요?”
“응. ……대단하더라.”

그곳은 대학 입시 자료뿐만 아니라 대학에서의 다양한 전공 자료들까지 구비되어 있는 보고였다.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선배들의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노하우가 담긴 자료들이었다.
사실 그 자료들 때문에 상원은 오늘 열쇠를 건네주러 오기까지도 수백 번 고민을 한 것이다.

“선배한테 도움 많이 되실 거예요. 수업 때문에 많이 힘드시잖아요.”

상원이 받는 수업은 6반 학생들의 수준에 맞춘 것이었다. 전국 석차에서 상위권을 랭크 하는 그가 그런 수준의 수업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시간낭비였다.

“도서관 시설은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들지, 당연히…….”

냉난방 시설은 물론이고 인체공학적인 의자에 책상, 심지어 샤워까지 할 수 있는 욕실과 화장실이 따로 구비되어 있었다. 6반 학생들이 상원을 위해 마련해 준 도서관도 쓸만했지만 시설적인 면에서는 이곳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럼 사용하세요. 저도 선배가 거기에 있는 편이 마음이 편하니까.”

자기가 거기에 있는 것과 니 마음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다 상원은 그만두었다. 후배의 친절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실례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수업종이 울리자 김이경이 그만 가보겠다고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상원의 손에는 여전히 그 도서관 열쇠가 들려있었다. 동그란 열쇠고리에 손가락을 끼어 흔들자 찰랑, 하는 쇳소리가 청명하게 들렸다.
상원은 손바닥으로 열쇠를 움켜쥐고 결심했다.
이 열쇠는 자기에게 주어진 행운의 한 가닥일 수도 있으니 놓지 말자고.



“――!!”

상원이 쥐고 있던 열쇠가 바닥에 떨어지자 쨍그렁, 하는 소리가 조용한 도서관 공기를 갈랐다. 쇠사슬에 결박당한 사람처럼 상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책상 위에 앉아있던 조석희가 이 쪽으로 걸어와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주워 상원에게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열쇠를 받아들면서도 상원은 눈앞의 광경이 이해가 가지 않아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상원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할 일이었다.

“난 아니야.”

상원이 핸드폰 화면을 가리키며 억울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조석희가 온다는 점심시간 전후를 피해도 한참이나 피한 시간이었다.

“뭐가 아니에요.”
“네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거야. 하느님 걸고 맹세해.”
“선배 크리스천?”

왜 갑자기 종교 얘기로 주제가 흐려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원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할 수만 있다면 신성모독이 될지라도 하나님을 끌고 들어가리라 다짐했다. 상원은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크리스천인데 호모예요? 나중에 지옥 가시는 거 아니에요?”

총알을 정통으로 이마에 박아 넣고 손가락으로 총알이 잘 들어갔는지 꾹꾹 쑤셔 확인하는 꼴이었다. 상원은 자신은 호모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을 뿐이라는 얘기를 하는 편이 나을까 고민하다가
조석희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가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별 수 있나.”

한숨과도 같은 한마디에 조석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함은 1그램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웃음소리였다.

“아무튼 나는 이만.”

상원은 재빨리 가방을 고쳐 매고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조석희와 같은 공간에 단 둘이 5초 이상 머무르면 며칠간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받게 된다. 그저 자리를 피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웃고 있던 조석희가 갑자기 표정을 거두고 상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얻어맞는다고 생각한 상원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은 상원의 뺨에 뭔가가 와 닿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떠보니 조석희의 얼굴이 목덜미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으악!!”

상원이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서 뛰어 올렸다. 조석희는 그런 상대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번도 이런 식으로 조석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적이 없는 상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울상을 지었다.
가까이서 봐도 조석희의 얼굴은 근사했다. 눈썹에서부터 이어지는 콧날과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매, 강인해 보이는 턱과 육감적인 입술을 도드라져 보이게 만드는 인중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가까이서 보는 소녀 팬의 심정을 상원은 한껏 맛보았다. 물론 이런 팬은 조석희 측에서 일찌감치 거부를 한 상태이긴 하지만.

“무슨 샴푸 써요.”
“나?”

조석희가 인상을 썼다. 그럼 여기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또 누가 있냐는 힐난을 하려는 듯이.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은 상원은 차분하게 자신이 사용하는 샴푸의 브랜드를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머니가 사다 주시는 대로 관심을 두지 않고 쭉 사용을 해왔던 터라, 샴푸통의 색만 희미하게 기억이 날 뿐이었다.
의식이 선택적 저장기능을 통해 기억을 만든다고 했던 책의 문구는 이렇게 또렷이 기억나는데 매일 사용하는 샴푸 브랜드를 떠올릴 수 없구나.
상원은 입을 뻐끔거리며 자신의 기억력과 투쟁해보았지만 어떤 소득도 얻어내지 못했다.

“다음에 알려줄게.”

상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조석희는 몸을 뒤로 뺐다. 그의 몸이 뒤로 멀어지자 풍선을 놓친 어린아이와 같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한 건지 물어봐도 돼?”

조석희가 향수나 샴푸에 관심을 가질 타입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향수를 뿌린 여자와 붙어 있어서 향이 옮아왔으면 옮아 왔지 직접 향수를 사용할 남자는 절대 아니었다.
상원은 혹시 그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글쎄요.”

조석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도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상원은 한층 더 겁이 났다.
……그럼 이건 무의식적인 괴롭힘일지도.

“그럼 언제 알려줘?”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뵙죠.”

상원은, 처음으로 갖게 되는 두 사람만의 약속인가! 하고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상대가 자신을 바퀴벌레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좋다고 손꼽아 내일만 기다리겠는가.

“그런데 너……, 나랑 마주치는 거 싫어하지 않아?”

질문을 던지면서도 스스로에게 머리 위로 칼을 집어던지는 기분이었다. 조석희는 상대방을 배려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었다.

“네. 싫어해요.”

머리 위로 던져진 칼이 푹, 하고 정수리를 관통했다. 상원은 보이지 않는 피를 철철 흘리며 간신히 어색한 목소리로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잠만 잘 온다면.”

조석희의 혼잣말에 상원은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하나 싶어 대단히 곤혹스러웠다. 멀리서 그를 바라볼 때도 성격이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갑자기 자신을 끌고 가 그런 이상한 행위를 시켜 놓고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지 않나, 샴푸 브랜드를 알아오라고 시키지 않나. 게다가 갑자기 잠자는 얘기는 왜 꺼낸단 말인가.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왕복하는 상원은 과연 자신의 심장이 언제까지 버티어줄까 싶었다.

“알았어. 알아가지고 올게.”
“내일 뵙죠.”

그가 나가려는 것 같아 상원은 옆으로 몸을 틀어 길을 비켜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 부근에 코를 가져다 대어 킁, 하고 냄새를 맡으며 물었다.

“바디 클렌저는요?”
“――!”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상원의 심장은 그대로 직격당하고 말았다.

“바디 클렌저도 알아 오세요. 내일까지.”

상원은 얼굴은 물론 귓불, 목덜미, 심지어 손가락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조석희가 심상한 말투로 뭐라고 영어로 중얼거렸다. 정확한 문장은 듣지 못했지만 당신 지금 모습이 사과 같다는 뜻인 것 같았다.  
조석희가 도서관을 나가자 상원은 휘청거리다 책장에 몸을 기댔다.
Apple이란 단어가 그렇게 섹시하게 들릴 수 있다니.
상원은 생각했다. 영어 한 단어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조석희가 될 것이라고.


“헉, 너 꼴이 왜 그래.”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무심코 짝에게 시선을 돌렸던 동석은 깜짝 놀랐다. 문제집을 풀고 있던 상원이 혹시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인가, 하는 얼굴로 동석을 바라보았다.

“너, 너, 누가 이런 꼴을 만든 거야.”

웬만한 일에는 흥분하는 법이 없는 동석이 말까지 더듬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한껏 멋을 부린 상원이 쑥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늘 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대체 누구한테 코치 받은 거야.”

동석이 상원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다. 옷차림에 관심이 없는 상원에겐 학교에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늘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단추를 채워 다니는 모범생형 교복 패션을 추구했다.
하지만 오늘은 교복 안에 시골에서 만든 고추장냄새가 날 것 같은 새빨간 카디건에 다리에 짝 붙는 교복바지, 풀어헤친 넥타이까지 눈뜨고 봐주기 힘든 수준이었다. 게다가 무스로 떡이 진 머리는 강풍이 불어도 꿈쩍할 것 같지 않았다.

“짜잔. 형님 작품이지.”

뒤에서 나타난 대진이가 흐뭇한 얼굴을 했다. 백금발에 피어스를 주렁주렁 하고 있는 대진의 상태를 살펴본다면 지금 상원의 모습은 그나마 절제의 미가 발휘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동석은 망설임 없이 주먹으로 그런 대진의 배를 후려 갈겼다.

“억!!”

대진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자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6반 학생중 누가 다치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살뜰히 돌보는 것은 상원의 일이었다. 하지만 동석은 그 꼴을 그대로 지켜보지 않았다.

“너 상원이 당장 원상복귀 안 시키면 니 머리에 불 지른다.”
“내가 뭘! 멋있기만 하구만!”

자신의 패션철학이 확고한 대진이 지지 않고 대거리했다. 그때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나타난 한승완이 경악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으악!! 우리 상원이!!”
“……안 어울려?”

승완까지 저런 반응을 보이자 상원은 슬슬 불안한 기색이었다.

“안 어울리는 문제가 아니잖아! 누구야! 누구 짓이야!”

동석이 손가락으로 씩씩거리고 있는 윤대진을 가리켰다.

“이 새끼. 너 설마 상원이 몸에 피어스 구멍 만든 건 아니지? 그랬단 봐. 내가 직접 니 뇌에 피어스 구멍 새겨줄 테니까.”

6반 학생들은 자신을 살뜰히 챙기고 돌봐주는 상원을 아꼈다. 그중 반장인 한승완은 상원을 자신의 딸처럼 아꼈다. 딸의 몸에 피어스 구멍을 만든 놈을 눈뜨고 지켜볼 아버지는 몇 없었다.
한승완이 입에서 불을 내뿜자 상원은 자기가 먼저 옷을 갈아입겠다고 세 사람을 설득시켜야 했다.

“당장, 당장 갈아입어. 머리도, 머리도 감아.”

엄한 아버지가 되어버린 승완이 상원의 떡 진 머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안 그래도 조석희에게 직접 건네줄 샴푸를 들고 왔던 상원이었기에 어려움 없이 머리의 고난을 씻어낼 수 있었다. 10분 후 상원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상원의 청초한 분위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기에 승완은 흐뭇한 얼굴로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동석이 물었다. 상원이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 상원은 거짓말을 할 바에 아예 주제를 돌리거나 말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평소였으면 거기에서 그쳤을 동석이었지만 오늘은 그냥 넘기기 못했다.

“여자 생겼냐?”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상원이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착하고 순진한 상원이 꽃뱀에게 걸리면 그 꽃뱀을 생으로 잡아다가 물어뜯어 껍질을 벗겨버릴 것이라고 했던 승완만큼은 아니었지만 동석도 만만치 않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자신의 짝이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감정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런데 웬 중요한 약속.”
“그런 게 있어.”

상원이 원소주기율표를 흥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동석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누구랑 만나는 것인지는 얘기하진 않아도 좋아하는 상대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내는 태도였다.  

“그런데 웬 샴푸를 갖고 다녀?”

머리를 해결하고 오라는 승완의 호통에 상원이 가방에서 샴푸를 꺼냈던 것을 떠올린 동석이 물었다. 상원의 노래가 뚝 멈추었다. 뭘 생각하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파랗게 변했다가 아주 가관이었다.
동석은 정확히는 몰라도 저 샴푸가 오늘 사태의 근원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있잖아. 너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뭔가를 주면, 싫어?”
“그게 무슨 말이야. 뭔가를 주다니?”
“선물은 아니고, 절대 부담 갖지 않을만한 것인데, 뭘 물어봐서 그걸 대답해주기로 했거든. 그런데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상원이 묻지도 않은 것들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득시키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동석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난 내가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뭔가 받으면 싫을 것 같은데. 아니 아예 안 받을 것 같아.”

권투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인 아버지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동석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맺고 끊는 게 확실했다.  

“난 좋아. 선물이라면 무조건 땡큐 베리 감사.”

뒤에 앉아있던 대진이 끼어들어 대답했지만 상원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뭔가 말을 건넬까 하던 동석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 상원이 우쭈쭈쭈, 하는 육아 방식을 유지하는 한승완과는 다르게
그는 냉철하게 상원을 대하는 편이었다. 상원은 현명하니까 분명 고민하다 정답에 이를 것이라고 동석은 믿었다.
그때 교실 뒤에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학교에 오면 일단 잠자리부터 마련하는 한승완도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려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뭔데, 저래.”

오토바이 잡지를 뒤적거리던 동석이 대진을 툭 치며 물었다. 대진에게 한 대 얻어맞은 기억 따윈 이미 블랙홀에 집어던진 윤대진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몰라. 가볼까?”

하지만 두 사람이 교실 뒤로 가기도 전에 궁금증은 간단하게 해소될 수 있었다.

“야아! 이거 봐라. 상원아. 이거 봐. 너 보여주려고 연습했어.”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리 앙뚜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문덕 뽀순뽀순 퀴의 전담 사육사 중 한 명이 대단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상원을 불렀다. 상원이 고개를 돌렸을 때, 6반의 교실에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퍼져나갔다.

“으아아악――!!”

상원이 악을 쓰며 의자 아래로 숨었다. 한번도 언성을 높이거나 오두방정을 떠는 상원의 모습을 본 적 없는 6반 아이들은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상원을 위해 뽀순 퀴에게 특별한 훈련은 시켜 온 사육사는
작금의 사태를 오도카니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물방개처럼 붕붕 날고 있는 뽀순 퀴의 허리에 연결된 실이 들려 있었다.

“……얘 나는데.”

그가 소심하게 뽀순 퀴를 가리키며 말을 건넸지만 상원의 비명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승완이 뽀순 뽀순 퀴를 다시 케이스 안에 집어넣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상원의 부탁에 의해 반에서 애완 바퀴를 키우게 된 6반이었기에 그의 바퀴 혐오증이 밝혀진 시점에서 뽀순 퀴 과연 이대로 좋은가! 하는 찬반 논란이 불거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리 앙뚜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문덕 뽀순뽀순 퀴의 사육 담당을 맡은 학생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이 아이는 날기도 하고 똥도 잘 싸고 잘 먹는다는 원시적인 변론을 펼치자
대다수의 학생들이 동정론으로 넘어갔다. 반장인 승완도 차마 자신의 나쁜 머리로 이름을 붙여준 애완 곤충을 내다버리자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상원의 눈치만 살폈다.

결국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상원이 날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고 6반 아이들은 ‘뽀순 뽀순 퀴’를 굵직한 목소리로 삼창하고 회의를 마쳤다.
바라지 않은 선물을 억지로 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된 상원은 절대로 샴푸를 조석희에게 주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거라고요?”

조석희가 자신의 앞에 펼쳐진 샴푸와 바디클렌저를 보고 물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말뚝 박았다.

“절대 주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냄새만 확인하고 돌려주면 돼.”

어울리지 않는 상원의 자린고비 흉내에 조석희는 기가 차 웃음도 나지 않았다. 그럴 거 대체 왜 여기까지 들고 나온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조석희로서도 냄새만 확실히 확인하면 끝날 문제였기에 순순히 샴푸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 코를 가져다 댄 조석희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을 보고 상원은 바디클렌저 병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바디클렌저의 냄새를 확인 한 조석희는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표정을 펴지 않았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이게 아닌데.”
“이거 맞아. 어머니께 여쭤보고 분명 같은 걸로 사온 거야.”

대체 어디에 쓰려는 것이냐고 어머니가 물어봤지만 상원은 모호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이거 맞아요? 완전 다른데.”
“그러면 한 번 더 확실히 여쭤보고 알려줄……, 헉. 나 너 한 번 더 보려고 일부러 틀린 브랜드 상품 가져온 거 아니다. 절대 아니다.”

상원이 머릿속을 스친 의혹에 스스로가 깜짝 놀라 하지 않아도 좋을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네 부탁 들어주는 게 귀찮거나, 얼굴 보러 오는 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일부러 핑계 만들어서 보러온 것은 절대 아니야.”

말을 마치고 나서 상원은 엄청난 자괴감에 빠졌다.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나는 당신의 스토커입니다. 라고 광고를 하는 꼴이었다.
조석희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층 더 험악하게 구겨졌다.

“손.”
“어?”
“손 줘보세요.”

그 말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얼어버린 상원의 손을 조석희가 낚아채었다. 그리고는 손목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고 다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동물적인 그의 행동에 상원은 기겁을 하며 손을 뒤로 빼려했지만 두 사람의 힘 차이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작은 아이의 손목을 꺾듯 상원의 몸부림을 제압한 조석희는 그가 확인하고 싶은 향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가, 간지러워.”

상원이 항의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뭔가에 홀린듯한 표정으로 조석희는 상원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조석희의 얼굴에 상원은 심장을 입으로 뱉을 뻔했다. 조석희는 상원의 머리카락과 목덜미 부근에 코를 가져다 대고, 체취를 맡았다. 상원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악마의 유혹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영원과 같은 순간이 지나고 조석희가 고개를 들었다. 조석희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사악해 보인다 하고 상원같이 눈에 콩깍지가 쓰인 사람들에겐 섹시하기 그지없어 뵈는 눈동자에 불쾌함이 스쳐갔다.
상원은 혹시 자신의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여기저기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 거렸다. 조석희가 싫어할만한 냄새의 정체는 찾지 못했지만 상원은 일단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
“미안하시겠죠.”
“…….”

습관대로 사과를 하긴 했지만 뭐가 미안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는 상원은 상대가 이유를 설명해주길 기다렸다.

“향수 사용하시면서 왜 거짓말 했어요.”
“응?!”
“향수 사용하잖아요.”
“아니야. 나 향수는 정말 안 써.”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거짓말 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조석희의 입가에 고소가 걸렸다. 상원은 이 억울함을 대체 어떻게 호소해야하나 싶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상원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어, 다시금 신성에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다.

“하나님 걸고 맹세할게. 정말 너에게 거짓말한 적 없다.”
“선배의 하나님은 이미 선배가 호모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버린 거 아닌가?”
“…….”

그러니까 나는 호모가 아니라 네가 특별히 좋다는 얘기를 하면 지금 이 분위기에서 맞아 죽겠지.

“정말인데…….”

상원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졸지에 조석희에게 말 한 번 더 건네려고 얕은 수작이나 부리며 향수나 뿌리는 스토커가 되어 버린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진 것이다. 갑자기 상원이 아, 하고 손가락으로 조석희의 뒤를 가리켰다.

“저거.”
“……?”

조석희가 귀찮다는 듯 뒤를 돌아본 곳에는 욕실이 있었다.

“나 가서 씻고 올게. 샴푸랑 바디클렌저 사용 안하고 물로만. 그리고 확인하면 되잖아.”

자신이 생각해 낸 방안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상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에게는 어떻게든 자신이 스토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게 중요했다. 조석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도서관 안에 딸린 욕실은 대체 누가 이런 시설을 구비하게 한 것인지 궁금증이 일게 만들었다. 상원은 한쪽 구석에 옷을 벗어 두고 샤워 콕을 열었다.
차가운 물이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아직은 낮에도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추운 초봄이었다. 이 날씨에 냉수로 샤워를 했다간 감기에 걸릴 확률이 100%를 넘어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원에겐 주어진 다른 선택 안이 없었다.

상원은 입술을 깨물고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콕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물로만 깨끗이 씻은 후에 상원은 다시 옷을 입었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지만, 이렇게라도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얼음물에 들어가도 상관없었다. 수건이 없어 손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고 밖으로 나가니 조석희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

이제 맡아보라고 하려던 상원의 말을 조석희가 가로 막았다.

“선배의 같잖은 연애감정 때문에 시간낭비하게 만든 거면.”

조석희는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피식, 하고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의 눈매가 가늘게 이지러졌다. 상원은 그의 기분이 평소보다 좋지 않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 챘다.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목소리 톤도 평상시 보다 조금 낮아진 상태였다.  
상원은 머릿속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자아가 자신이 잠든 사이에 향수를 사용한다거나 다른 샴푸를 사용했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그의 정신을 잠식했다.
아무도 없는 동관의 도서관에서 저 무지막지한 후배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상원은 그 자리에 서서 조석희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제발 한번만 자신의 몸에 닿길 원했던 조석희의 기다란 손가락이 뻗어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너무 가까이 붙지 마.”
“왜요.”

조석희의 나른한 음성이 바로 턱밑에서 들려왔다. 상원은 일부러 시선을 위로 돌리고 말을 이었다.

“머리카락에서 물기 떨어져. 옷……젖어.”

침착한 척 하려 했지만 조석희의 코가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져 상원은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조석희는 상원의 목덜미에서부터 귀밑, 정수리와 뺨 부근을 천천히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간질간질한 느낌에 상원은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거짓말한 건 아니군.”

공기를 진동시킨 목소리가 척추를 타고 전해졌다. 긴장으로 목구멍이 딱 붙어버린 것 같았지만 상원은 억눌린 목소리로 거짓말 아니야, 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거기에서 그만 떨어져 주었으면 좋으련만 조석희는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점점 그는 자신의 몸을 상원 쪽으로 기대기 시작했다.
상원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상대와는 키는 물론이고 체격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났다. 두 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고 상원은 무게를 견뎌냈지만,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선배.”

자신을 다정하게 부르는 그 목소리에 상원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했다. 맹세코 조석희는 자신을 이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위협하거나 귀찮다는 듯이 혹은 무관심한 어조로 선배, 라고 부를 뿐이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상원은 스스로의 혀를 깨물어 보았다. 연한 살덩이에 밀려드는 고통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그는 후배의 부름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그래.”
“부탁 좀 할게요.”

조석희의 목소리가 유난히 가라앉아 있었다.

“무, 무슨 부탁을?”

그의 부탁이라면 지구 세 바퀴 반이라도 돌 각오가 되어 있는 상원이었다.

“……잠시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석희의 무게는 모두 상원의 몸으로 쏟아지고 말았다. 상원은 휘청거리며 그의 몸을 간신히 받아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싶어 자신의 몸 위로 쓰러진 조석희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잠이 들었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상원은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몸을 움직여 조석희를 안은 채 바닥에 앉았다. 조석희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이 잘생긴 이 남자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자는 장면을 몇 번이나 꿈꿔왔던가.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이 숨을 쉴 때마다 사르륵 움직이는 모습을 상원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워, 눈물이 날 때 까지 눈을 부릅뜨고 상원은 조석희를 지켜보았다.
상원은 그렇게 오매불망 그리던 상대에게 자신의 무릎을 내주었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붉은 별들을 그리며.
조석희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네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흘?! 나흘 동안 잠을 못 잤다고?”

상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조석희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원은 시험기간에도 최소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야한다고 믿는 주의였다.
그래야만 머리가 맑고 집중이 잘되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늘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해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법이 없었지만 밤을 새어 공부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듬이 깨져 그 다음날까지 악영향을 미쳐 상원은 될 수 있으면 밤을 절대로 새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그렇다 쳐도 나흘간 잠을 자지 않았다니.

“그러고 어떻게 생활이 돼? 안 졸려? 머리 안 아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조석희의 눈에 귀찮은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원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셋 중 하나만 대답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생활이 되고, 졸리면 저한테 잘 된 일일 테고 머리는 아픕니다.”
“대체 왜 나흘 동안 잠을 안 잤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안 잔 게 아니라 못 잔건데요.”
“왜?”
“그 이유를 알았으면 나흘 동안 잠을 못 자지 않았겠죠.”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오자 상원은 자신이 정말 쓸 데 없는 질문을 던졌구나 싶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상원의 상식으로는 사람이 나흘 간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병원은 가 봤어?”
“하, 진짜 끈질기네.”

넌더리를 내며 조석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상원은 사람은 살리고 봐야겠단 생각에 걷어차일 각오를 하고 끈덕지게 질문을 던졌다.

“병원 가봤어? 검사 같은 거 해봐. 뇌에 이상 있는 거면 어떡해.”
“상원 선배.”
“응…….”

대답을 하면서 상원은 조석희가 발음하는 자신의 이름이 정말 감미롭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될 수 있으면 선배 앞에 계속 이름을 붙여주면 좋을 텐데. ……이름 더 안 불려주려나.

“뇌파나 전신 MRI검사 하는데 비용이 어느 정도 드는지 아세요?”
“아니…….”

가족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병원 검사 비용에 관해서는 한 번도 관심을 기울여 본적 없었다. 조석희의 입에서 비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봐선 꽤나 많은 금액이 드는 모양이었다.
상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아놓은 적금 통장을 깨서라도 가능하면 석희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검사 받으려면 한국 돈으로 음, 백만 원 정도 들죠.”
“저기, 혹시 비용 때문에 그런 거라면…….”

어떻게 말을 꺼내야 상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고심하며 상원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배려는 악어가죽보다 더 딱딱한 상대의 마음에 와 닿을 리 없었다.

“비용이 무슨 상관이에요.”
“응?”

비싸서 검사 안 받는다는 얘기 하려던 거 아니었나.

“전 하루에 한번씩, 365일을 받아도 돼요. 돈이 무슨 상관이냐는 얘기 하려고 한 겁니다.”

조석희의 말투는 느릿했다. 필요할 때가 아니면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혹자는 그게 타고난 조석희의 개 같은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일이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냐는 일관된 태도.
조석희를 짝사랑한 지 일년이 넘어가는 상원이었지만 여기에는 이견을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원은 오늘, 거기에 개인적 성격뿐만 아니라 배경적 부유함도 한 몫 할 것이라는 가설을 덧붙였다.
상원은 지금 태어나서 자신이 원하면 이루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을 남자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제가 불면증 이유를 밝힐 수 있음에도 검사를 안받아 봤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해서요. 말씀드렸다시피 돈이라면 썩어 넘쳐날 정도로 있거든요.”

아버지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굴지의 IT 재벌 CEO고 외가는 미국에서도 한손에 꼽히는 석유 재벌이라는 소문이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었다.
썩어 넘쳐날 정도로 돈이 있다는 표현을 저렇게 내뱉는 것은 상류층 자재들로 넘쳐나는 희재고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그럼 아까 잠깐이라도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조석희는 네 시간이면 자신에게는 며칠은 충분하다는 얘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뭐. 그렇긴 하군요.”

그의 대답에 상원이 활짝 웃었다. 얇은 입술 끝이 꽃잎이 말려 올라가는 것처럼 보기 좋게 움직였다.

“그럼 내일도 이 시간에 오시죠.”

웃고 있던 상원의 미소가 망치로 후려친 석고상 부서지듯 와르르 무너졌다. 방금 전 조석희가 던진 한마디에 유체이탈을 경험한 것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상원이 눈을 깜빡거리며 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자리에서 일어 선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상원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너랑 만나.”
“선배 저 만나러 오시는 거 싫어하지 않잖아요.”
“당연히 좋……, 아니, 그러니까 그건 내 문제고. 너는 나 싫어하잖아.”

휘리릭, 하고 다시 공중에 칼이 던져졌다. 바람을 가르며 칼이 내려오는 소리를 상원은 똑똑히 듣는 중이었다.

“네.”

짧은 대답과 함께 이번에도 정수리 중앙에 날카로운 칼날이 박혔다.
아프다, 몇 번을 들은 말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상원은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잠이 오니까.”
“응?”
“선배 냄새 맡으면 잠이 좀 오는 것 같거든요.”
“…….”

이게 또 뭔 소리냐. 내 체취에 수면제라도 섞여 있다는 얘기인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비과학적 얘기에 상원은 겁에 질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로마 테라피 같은 거?”

자신의 체향을 그런 향긋한 풀들에게 비교하는 것이 좀 민망하긴 했지만 상원은 더 이상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해두죠.”

조석희에겐 정확한 명칭이나 메커니즘 따위는 중요지 않았다. 잠을 자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오케이였다. 섹스든 술이든, 약이든 잠을 이루기 위해 닥치는 대로 하던 시절도 있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호모 스토커라 하더라도 불면증을 달래는데 유용하다면 이용해 줄 용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의사 따윈 중요치 않았다. 싫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붙들고 와, 이용하면 그만이니까.

“알겠어. 좋아. 그런데 나도 조건 하나만 붙일게.”

상원이 결의가 가득 찬 눈을 빛내며 말했다. 조석희는 고개를 끄덕, 했다.

“내가 널……, 너를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해줬으면 좋겠어.”

대체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솟아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난 후 상원의 얼굴은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을 무시하는 상대방에게 두 번이나 고백을 한 셈인 것이다.

“아, 그거.”

조석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저랑 상관없으니까.”
“…….”

그 날의 목소리와 조금도 변함없는 무심함이었다.

“저한테 그 불운만 옮기지 않으면.”
“응, 안 옮겨. 절대 안 옮아.”

역병 환자 취급을 받아도 그저 좋은 상원이었다. 더 이상 볼일이 없다고 생각한 조석희는 그럼 내일 봐요, Apple선배. 라고 인사를 한 후 도서관을 나섰다.
남겨진 사과 인간 이상원은 몇 번이나 입속으로 Apple이란 단어를 중얼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상원은 집으로 돌아가 다이어리에 빨간 펜으로 별을 7개나 그려 넣었다. 오늘은 스토커 바퀴벌레에서 사과로 격상된 해방의 날이었다.
뽀순뽀순 퀴를 방생시키지 않은 그 선업이 그대로 돌아온 것이라 믿으며 상원은 난생처음 바퀴벌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고기를 챙겼다.
Lucky charm

"선배 합격 축하해요"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던 조석희가 상원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흔들었다.
"한번만 더 해볼게. 혹시 모르잖아"
"뭘 더 해봐요. 합격이라고 나와 있는데"
인상을 쓰고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툭툭 두드렸다. 거기에는 상원의 이름과 수험번호, 합격을 축하한다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하지만 상원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잘못된 것일 수도 있잖아. 전산상의 문제라든가"
"그래서 아까도 학교에 전화해서 문의해봤잖아요"
"...그래도"
상원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혹시 모르니까 한번만 더 확인해보자, 라고 중얼거렸다. 집에서 합격자 명단을 확인 했을 때 상원은 인터넷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했고, 전화로
두번째 확인을 했을때는 주민등록번호를 잘못 누른것 같다고 했다. 결국 조석희는 상원을 데리고 집 근처의 피씨방으로 와서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눌러 확인시켜줘야 했다. 그런데 한다는 소리가 이번엔 전산상의 문제라니.
"이쯤에서 그냥 기뻐하면 안돼요?"
"혹시 모르잖아. 섣불리 믿었다가 합격 취소라도 되면...."
상원의 눈시울에 근심이 스쳐갔다. 작년에 거의 합격을 손에 쥐었다가 마지막 구술면접을 가던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안타갑게 재수를 했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상원이 겪었던 불행한 일들을 전해 들으면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게 보통이다.
거의 다 붙은 대학에 구술면접만을 남겨두고 교통사고가 나서 불합격했다는 얘기는 어디에 가서 꺼내지 못할 정도로 현실성이 없었다.
상원은 그런 현실성 없는 불운을 주변에 달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덜컥 합격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니 조석희는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드려요, 총장하고 통화라도 시켜드리면 직접 확인할래요?"
서울대 총장하고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통화는 가능할 거라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상원이 그걸로 안심하고 자신의 합격사실을 받아 들인다면 노력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아니, 아니 괜찮아"
상원이 두 손을 내저으며 얼른 대답했다.
"그럼 믿으실 거죠?"
"응"
"축하해요 선배"
조석희가 다시한번 축하인사를 건네자, 상원의 뺨이 붉게 달아오른다. 조그만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하는 상원을 조석희는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안 믿겨진다. 내가...합격이라니"
상원이 손가락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어루만지면서 감격에 겨운 얼굴을 했다. 작년에 인도로 걷고 있던 그를 트럭이 뒤에서 들이받는 바람에 상원은
한달가량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올해 무사히 시험도 보고, 논술도 치르고 면접까지 마치고 합격을 손에 넣은 이 상황이 상원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선배 잠시만"
조석희가 상원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다. 상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경쾌하게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냐, 바로 앞에 있는 모니터의
화면도 다른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목뒤에 닿은 니트의 감촉만이 그의 감각을 지배했다.
"합격했네"
담담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축하 안해줘요?"
"....어?"
"합격"
조석희가 모니터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가리켰다. 상원은 그제야 깜짝 놀라서 이번에 시험을 본 것이 자신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맞다. 미안. 깜빡했어. 깜빡할게 따로 있지, 미안 정말. 아,아니 축하해! 합격 축하해 석희야"
쉬지도 않고 자책에서 사과, 축하까지 상원은 한번에 늘어놓았다. 조석희가 피식 웃더니 그런 상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그럼 이제 선배 아닌가?"
"응?"
"같은 학교, 같은 학번이니까 선배 아니잖아요"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의 같은 학번으로 대학에 붙었으니 조석희의 말이 옳았다. 더 이상 선배라는 호칭으로 불리기엔 무리가 따르는 상황이었따.
사실 상원이 희재고를 자퇴한 시점에서  선배라는 호칭은 효력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석희는 줄곧 상원을 선배라고 불러왔고 상원 역시
거기에 의견을 달지 않았다.
"아, 그렇겠다.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이름 불러야 하나?"
상원은 조석희가 자신을 상원선배 내지는 선배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다. 파충류의피부처럼 서늘한 조석희의 목소리가 내는 "ㅅ" 발음이 특히나 마음에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이름만으로 불러준다면 그 또한 좋았다.
......실은 그냥 어떻게든 불러만 줘도 좋을 것 같았다.
"형? 상원 형?"
"---!!!"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상원은 놀라 얼굴빛이 변했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아니, 한층 가까운 느낌이 드는 호칭이었기에 이내 입이 귀에 걸리고 말았다.
"아니면 그냥 상원아?"
"---!!!"
지화자, 이건 더 좋구나!
"어색하네요"
"아, 아니야 괜찮아"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를게요 선배"
조석희는 선배, 라는 부름에 상원은 온몸의 신경이 초콜릿으로 변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조석희가 허리를 숙여 멍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상원의
귀에 속삭였다.
"집으로 가요 상원선배"
그리고 그는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걸어갔다. 상원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일어나 조용히 조석희의 뒤를 따라 나섰다.















"앗. 잠깐...잠깐만"
현관 앞에서 쓰러지면서 상원이 간신히 내뱉은 말이었다. 뒤에서 상원의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던 조석희가 왜요, 하고 물었다.
아직 오른쪽 신발을 채 벗기도 전이었다.
"우선 벗고...."
"걱정마세요 제가 다 벗겨드릴 거니까"
"아니, 내 말은 신발을...."
조석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상원의 운동화 한쪽을 벗겨주었다. 그리고 목덜미를 끌어 안아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샤워는 커녕 침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런 일들을 벌이는게 상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조석희를 거절할 만한 힘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고로 반한 놈이 지는 것이 연애세계의 냉혹한 법칙이었다.
"하아...."
입술이 떨어져나가자 상원이 발그레한 얼굴로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몇번을 봐도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비현실적으로 잘 생긴 외모였다.  상원은 문득 자신의 뺨을 후려갈겨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애인인데다 대학까지 합격했으니
아무리 봐도 이건 꿈인게 분명했다.
상원이 자신의 손바닥으로 뺨을 찰싹 내리치자 조석희가 낯을 찌푸리며 무슨 짓이냐는 눈빛을 보낸다.
".....안 믿겨져서"
"뭐가요"
"그냥, 다"
조석희가 상원의 목 부근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선배 좋을대로 믿어요. 꿈이건 현실이건"
"....응"
가벼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상원은 눈을 감고 조석희를 끌어 안았다. 그가 현실과 꿈 사이에서 행복을 맛보고 있을때 조석희의 인정머리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선배 오늘은 뒤에 넣어도 되죠?"
묻고는 있지만 의사를 묻는게 아니었다. 오늘은 뒤에 넣고 싶으니 그리 알라는 통보와 마찬가지였다. 수능 며칠 전부터 대학 합격이 완전해질때까지 무리하는
것은 자제해달라는 상원의 부탁 때문에 조석희는 취향에도 맞지 않는 금욕 생활을 해야만했다. 예기치 않은 사고 때문에 재수를 택해야 했던 상원이 얼마나
실망을 하고 속상해 했는지 옆에서 지켜보았던 조석희로서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부탁이었다.  물론 물고 빨고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서로의 욕망을 달래주긴
했지만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어린애 장난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었다. 조석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상원의 엉덩이 사이로 성기를 밀어넣는 상상을 해왔다.
좁고 습한 구멍 안에 들어가고 싶어 아까부터 아래가 아플 정도로 당기고 있었다.
"선배도 제가 넣어 줬으면 좋겠죠?"
조석희가 무릎으로 상원의 바지 앞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선배 내가 넣어주면 좋아하잖아요. 아프다고 해도 아프다고 울어도 결국엔 질질 싸잖아요"
아무래도 오늘 조석희는 말로 전희를 풀어나갈 모양이었다. 귀족같은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 조석희의 모습에 상원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바지 내려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원은 자신의 벨트와 버클을 차례대로 끌러 바지를 내렸다. 허벅지 아래로 바지를 내리자 조석희가 한손으로 주욱 잡아당겨 발치까지
벗겨내 버렸다.
부끄러웠다. 상원은 아직도 남 앞에서 바지를 벗는 행위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드러난 맨다리에 조석희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청바지 속 살덩이를 문질렀다.ㅏ
허벅지 안쪽이 쏠려 아팠지만 상원에게는 그런 고통의 여유가 없었다.
흥분한 남자의 숨결이 귓가와 목덜미에 축축하게 와 닿는 느낌에 상원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석희야"
상원이 초조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선배 바로 넣어도 돼요?"
열기 띤 목소리가 물었다. 얼마간 사용하지 않은 그곳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넣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면서도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조석희가 자신을 원한다는 느낌이 상원의 정신적 만족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익숙한 손동작으로 버클을 끄르고 지퍼를 내린 조석희가 단단하게 달아오른 자신의 살덩이를 한손에 쥐고 상원의 다리를 벌렸다. 희뿌옇게 젖어든 선단이
긴장으로 움츠러든 구멍에 비벼졌다.  별개의 생명체 처럼 끄덕끄덕 움직이는 그 느낌에 상원은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와 이어지고 싶었다.  아프고 힘들어도 지금은 아무런 생각 없이 좋아하는 사람의 몸과 맞닿고 싶을 뿐이었다.
"선배.... 비벼주기만 해도 여기 부드럽게 벌어졌다. 오므라지는 거 알아요?"
짓궂은 손놀림으로 조석희가 상원의 엉덩이 계곡을 어루만졌다. 상원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음란해요 선배"
"..."
자신이 그동안 참아달라고 부탁을 했으면서 조석희가 건드리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음란한 반응을 보인다는 생각에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선배한테 엄청 야한 냄새나요"
조석희의 나른한 속삭임에 이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넣을게요"
조석희가 상원의 한쪽 어깨를 끌어안고 허리를 아래로 숙여 몸을 밀어 넣었다. 훅, 하고 몸속을 치고 올라오는 이물감에 상원은 이를 깨물었다.
"힘, 빼요 긴장풀고"
"....아, 움직이지...."
움직이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들어줄 성격도 아니었지만, 그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 여유도 없는 상태였다.
조석희는 벌쭉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사정을 두지 않고 달아오른 성기를 끝까지 박아버렸다.  상원은 한껏 눈을 치켜 뜬 채, 나오지 않는 비명을 목 안으로
삼켰다.
조석희가 한번 더 허리를 추어 올리자 상원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적셨다. 고통으로 인해 생리적으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상원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뿌옇게 변할 정도로 눈물이 다시 고였다.
"아....파"
조석희의 팔에 매달린 상원이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참아요 선배"
하지만 조석희는 무자비했다. 뻑뻑하게 조여진 구멍 안으로 살덩이를 쑤셔 넣으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참았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원이 원하는대로 조석희는 대학합격 사실이 확인될때까지 나름,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해왔다. 상대가 알아주건 말건 그에게 그정도는 대단한 배려였다.
조석희는 상원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추삽질을 했다. 귀두 끝이 아슬아슬하게 밖으로 나올라 치면 그는 단번에 뿌리 끝까지 박아 올렸다.
"...아, 아,,,,앗! 아! 읏...."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열기를 띄었다. 상원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벌려 남자가 자신의 안으로 더 깊이 드나들 수 있도록 도왔다.
조석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상원은 순진한 얼굴을 하다가도 이럴 때는 놀랄 만큼 적극적이었다. 어떤 것이 본 모습인지, 그는
혹시라도 자신이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가끔 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조석희를 흥분시키고 자극했다. 정작 본인은 그런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얼굴을 했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선배.... 좋아요?"
"응, 좋아. 너무 좋아"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상원은 몇 번이나 좋다고 대답했다. 쾌감에 솔직한 몸이었다. 상원이 느낄수록 그의 달짝지근한 체향이 전해졌다. 조석희가 그의 목덜미를
핥았다. 동시에 아래가 바짝 조여들었다.
"너무 보채지 말아요"
"...응?"
"그러지 않아도 잔뜩 박아줄 테니까"
"아, 안 보챘는데...흣"
조석희가 허리를 움직이자 상원이 입술을 깨물며 그의 팔뚝을 붙들었다. 아래서부터 전해지는 아찔한 감각에 조석희의 팔을 잡고 상원은 몸을 지탱했다.
상원은 아직도 섹스가 무서웠다. 그가 상상했던 섹스는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한 교감이었다. 하지만 조석희와 하는 섹스는 난폭하고 거칠었으며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우같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연줄이 끊어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연이 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상원은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석희 몸에 매달려 엉엉 울기도 했다.
그렇다고 섹스가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커다란 살덩이가 내부를 파고들면 상원은 선명한 쾌감을 느꼈다.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만족감, 그가 자신의 내부에서
흥분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뿌듯함, 육체적인 만족도 좋았지만 상원은 조석희가 자신의 몸 위에서 근육을 경련하며 절정을 맞이하는 순간에 가질 수 있는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그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배 아래, 진짜 맛있는거 알아요?'
조석희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음란한 말을 귓가에 지껄였다. 상원은 어떻게그곳이 맛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그저 그가 자신을 먹는 것에 질리지 않기만 바랄 뿐.
"선배 나 좋아해요?'
"응...좋아"
"선배 구멍 안에 들어가 있는게 뭔지 알아요?"
"응...아, 알아"
조석희가 안에 들어가 있는 성기의 끝을 내벽에 문지르며 물었다.
"뭔데요? ...이게 뭔지 말해봐요"
"너...앗, 읏"
"정확히..말해봐요"
상원이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석희는 끈질기게 질문했다. 그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상원이 천박한 단어를 말하게 하는 것을 즐겼다. 몇 번을 시켜도
그때마다 상원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네 것"
"제게 한두 개예요? 선배도 내 건데"
조석희가 상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허리를 거칠게 놀리며 말했다. 상원이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음란하고 저질스런 단어를 입 밖에 내는 게 여간 곤혹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를 가볍게 질근질근 깨물며 빨리 말해봐요, 하고 채근했다.
상원이 울먹이며 움츠러든 목소리로 답했다.
"네...자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상원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조석희가 그런 상원의 뺨에 입을 맞추며 느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맞아요 선배 제 자지 좋아하잖아요"
"...."
수치심에 상원은 급기야 눈물을 보인다. 조석희가 소리 없이 눈만 슬며시 웃으며 재차 물었다.
"선배 제 자지 안 좋아해요? 그럼 싫어?'
"아니...."
"제 자지 좋아하죠?"
상원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좋아해 하고 한숨을 내뱉듯 고백했다. 조석희가 웃었다. 그는 상원의 어깨를 힘껏 안고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를 참아내던 상원은 결국엔 엉엉 울면서 조석희에게 매달려 좋아해 석희야, 너무 좋아, 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햇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난 후에야 조석희는 상원의 안에 그간 쌓아두었던 욕망을 모두 쏟아냈다.














"아...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상원은 꽉 잠긴 목을 풀기 위해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생각대로 이상한 목소리만 방안에 울렸다.
"일어났어요?"
샤워를 하고 온 것인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조석희가 침대에 다가와 앉았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어깨에 떨어지는 물기가 이상하게 색스러운 분위기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주무세요"
"아... 괜찮아"
아직도 이상한 목소리가 나와 부끄러웠다. 상원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목이 완전히 갔네. 선배는 너무 소리를 질러서 그래"
"미안.. 다음부터 안 지를게"
상원의 말을 들은 조석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내 상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는 웃어버렸다.
"소리 질러요. 그 소리 듣자고 박아주는 거니까"
".....!"
대수롭지 않게 던져진 말에 상원의 뺨이 뜨근하게 데워졌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황망하기 그지없는 이 상황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자고 가실 거에요?"
"어? 응"
"전화 하셔야죠"
외박을 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상원이 부모님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을 조석희는 알고 있었다. 밖에서 무얼 하든 최소한의 선만 지키면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굳이 그걸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헉 맞다."
상원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여기저기 남아있는 을긋불긋한 자국이 조석희의 시선을 끌었다.
상원은 가끔 이런 식으로 조석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또 한번 해달라는 신호로 봐도 좋은 것인가.
물론 나는 좋지만, 저쪽은 아래가 발긋하게 부어오를 정도로 무리를 한 상태인데.
"부모님한테 합격했다는 말씀도 안드렸어. 내 전화기!"
상원이 허둥거리며 자신의 핸드폰을 찾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조석희는 쓴 웃음을 지으며 침대 옆에 있는 협탁을 가리켰다.
"거기 두었어요"
핸드폰을 손에 쥔 상원은 그제야 자신이 속옷도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이번에는 속옷을 찾아 허둥거렸다.
조석희가 침대 시트를 들어올려 상원의 몸 위에 감아주었다.
"It`s ok?"
상원이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조석희를 보더니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 통화 좀...."
"알겠어요"
방을 나서며 조석희는 잔뜩 들뜬 얼굴로 핸드폰 폴더를 여는 상원의 모습을 흘끗 바라봤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상원이 저런 얼굴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부모님이니 어쩔 도리가 없지.
"네 합격했어요. 진짜요. 최종합격이래요"
방문 너머로 들리는 상원의 흥분한 목소리에 조석희는 웃으며 생각했다.
그나마 가족이 부모뿐이라서 다행이라고. 저 거슬리는 꼴을 한번만 참아 주면 될테니까.









"뭐라고요?"
"....미안, 부모님께서 조부모님하고 외조부모님들께도 다 연락을 해서 지금 오시는 중이라고 해서..... 정말 미안해"
대학에 합격했다고 양쪽 조부모님까지 불러들였다는 부분에서 조석희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부모 한번 참아주는 것도 그에겐 대단한 인내였다.
"그래서 지금 가겠다고?"
조석희가 다시 매서운 눈을 하고 묻자 상원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일올게. 내일 자고 갈게 응?"
"오늘 자고 가요"
"오늘은 안 돼"
"아까는 자고 간다면서요"
"....미안해"
사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 차이는 없었다. 아래 욕심도 채웠겠다 그리 급한 문제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석희는 심정이 나서 상원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가지 마세요"
"석희야...."
상원의 눈망울에 자괴감이 가득 차올랐다. 사정이야 어쨌든 한입으로 두 말을 한 셈이니 견실한 성격의 상원은 죄책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이 커다란 집에서 나 혼자서 외롭게 있으라고요?"
"...석희야"
아까와는 다른 부름이었다.
지금까지 이 큰 집에서 혼자 너무나도 잘 지내온 주제에, 어떻게 저런 식으로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조석희가 외롭다니 지나가던 개가 들으면
웃다가 사례들려 쓰러질 소리였다.
"외로워요 선배"
"...."
"선배 없으면 밤에 잠도 못 잔다고요"
"...."
너 원래 불면증 환자잖아. 석희야.
"그러지 말고 아예 같이 살자고요 선배"
"......그게"
"이제 대학도 합격했으니까 여기서 같이 살아요"
상원이 몇 번이나 거절을 했지만 조석희는 끈질기게 여기서 같이 살자고 권했다. 학교도 그만두고 재수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부모님이 친구도 아닌 후배와의
동거를 납득하지 못할 것이란 이유로 상원은 계속 조석희의 청을 거절했다.
"여기서 같이 살 거죠?"
조석희가 이번엔 아예 다짐을 받아낼 요량으로 끈질기게 물어왔다. 같이 살면 상원이 집에 갈때마다 벌이는 이 실랑이를 끝낼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선배 대답해요"
"나...."  
"네 선배"
"나 갈게!"
상원이 조석희의 어깨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현관문을 닫고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조석희는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취급에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책을 집어 던지며 온통 삑 소리로 처리될 법한 영어로 된 욕설을 거칠게 내뱉었다.











집으로 돌아온 상원은 부모님과 양가 조부모님들의 축하 인사를 배부르게 받을 수 있었다. 대학 입학 선물도 두둑하게 현금으로 받고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말만 하라는 얘기까지 들은 터였다.
1년간 재수생활을 청산하고 1지망 대학 원하던 과에 붙었고 더이상 바랄게 없을 정도로 행복한 저녁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아까부터 타르 찌꺼기처럼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는 근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한정식 집에 가서 근사한 저녁을 먹으면서도 상원은 한손으로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아들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상원은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석희에게 문자를 보내 미안하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답문이 오지 않았다. 조석희가 원체 문자를 잘 보내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아까
그렇게 뛰쳐나온 후라 상원은 신경을 쓰지않을 수가 없었다.
같이 살자.
사귀는 상대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말 중 하나일 것이다. 조석희를 짝사랑 하는 시기에 상원은 감히 그와 같이 산다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다.
처음 같이 살자는 얘기를 들었을때는 그저 좋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상원은 애인과의 동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렸다.
석희와의 즐거운 동거를 꿈꾸던 상원은 몇 개의 게시물을 읽은 후 파리하게 안색이 질려버렸다. 자세까지 고쳐 앉아 이런저런 게시물들을 5시간동안 정독한
상원이 내린 결론은 한줄.
[연애 초반에 같이 살면 금방 질려서 결국엔 헤어지게 된다]
결국 상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을 조석희에게 돌려줘야 했다. 처음에 조석희는 그럴 줄 아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그럼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급기야는 수능을 칠 때까지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조석희는 하루에 한번, 두번도 아니고 세번도 아니고 딱 한번씩, 물었다. 자기랑 같이 살지 않겠냐고.
상원은 그때마다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전전긍긍하며 그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는 더이상 없을 좋은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재수를 하게 되었으니 밖에 나가 후배와 같이 살겠다는 말을 부모님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영 거짓은 아니었다.  학원을 다니는데 교통이 불편한 것도 있었고 공부를 하는데 방해를 받을 만큼 집이 시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상원이 밖에 나가서 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이유를 말했을때 조석희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렇다고 상원이 아예 외박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전에만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면 친구 집에서 자는 정도는 순순히 허락해주시곤 했다. 조석희도 여기에 만족했다.
두사람 사이에 별다른 문제없이 지금까지 관계를 지속해온 것은 상원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문제는 이 소중한 기적이 언제 사라질지몰라 슬슬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조석희가 기분 나빠 보이거나 지루해 하는 기색을 보이면 상원은 그날 하루 종일 소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같이 살기라도
해서 조석희가 자신에게 만약 질리기라도 하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후우..."
상원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도 용기가 나지 않아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이럴 때는 석희가 먼저 전화를 해주면 좋을텐데. 그는 용건이 없으면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문자를 먼저 보내는 것도 늘 자신이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게  대응해주고 있지만,  조석희는 기본적으로 상냥한 성격이 못되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통한 자체로 좋았는데 자꾸 욕심이 생긴다. 이래서는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욕심을 억누르지 못한다. 주제 넘는 욕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엔 그가 자신에게 질려버리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요즘은 좋아한다는 말도 예전처럼 쉽게 건네지 못했다.
"전화 좀 해줘..."
상원이 핸드폰을 이마에 대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상원은 놀라서 폴더를 열고 여보세요 하고 소리쳤다.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조석희?"
[...]
"여보세요? 안들려?"
[잘 들려요 선배]
낯설음과 낯익음을 동시에 들려주는 목소리였다.
"...김이경?"
[와, 그래도 제 목소리 단번에 맞추시네요]
"...."
자신을 선배라고 부르며 전화할 인간은 지금으로서는 조석희를 제외한다면 김이경 하나뿐이었다. 얘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상원은 골치가 아파왔다.
"왜 전화했어?"
[선배 너무하시네요. 오랜만에 전화한 후배한테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시다니]
후배도 후배 나름이었다.
상원은 그때 김이경이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아직까지 소름이 돋았다. 사람 좋고 똑똑하다고 생각한 후배가 뒤로는 이런 저런 일들을 꾸민 것이
영 꺼림칙했다.
"무슨 일인데. 용건이 있어서 전화한거 아니야?"
상원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고 다짐했다. 조석희도 그랬다. 김이경은 성격이 뱀 같아서 절대로 믿으면 안 되는 놈이라고.
[축하드리려고 전화했어요]
"어? 무슨 축하?"
[선배, 합격하신거 축하드리려고요]
"헉.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합격 발표가 난지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가족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합격소식을 아는 것은 조석희뿐이었다.
동석이나 승완이 대진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전처럼 대학 운동장 강당 앞에 명단이 붙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으로 주민등록번호나
수험번호를 눌러서 확인이 가능할텐데, 어쩐지 오싹했다.
[그 정도 쯤은 뭐, 그런데 선배 왜 갑자기 서울대로 지망학교를 바꾸신 거예요?]
"사사받고 싶어했던 교수님께서 퇴임하셔서.... 그냥 어쩌다 보니"
이유를 말하면서 상원은 뺨을 긁적거렸다. 어쩌다보니가 아니었다. 조석희는 상원에게 같은 학교 가길 요구했다. 미국에 있는 대학을 포기하고 이곳에 남기로
했으니 그정도는 당연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 게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상원이 사사받고 싶어 했던 교수님도 건강상의 문제로 퇴임하셨기 때문에 그로서는
연대를 고집할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상원은 망설임 없이 조석희가 가고자 하는 학교로 지망학교를 변경했다.
[아무튼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다. 그런데 너는..."
상대가 아무리 날고 기는 김이경이라 할지라도 직접 대학 합격 여부를 묻기가 조금 그랬다. 게다가 김이경은 한 문제라도 실수하면 떨어질 수 있는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과를 선택했을 테니 말이다.
[학교에서 뵙겠네요]
"...."
얄미울 정도로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들으니 잠시라도 그런 걱정을 했던 자신이 바보같아지는 순간이었다.
"그, 그래 축하해 잘 됐다"
그래도 축하는 해줘야겠다 싶어 상원은 김이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선배 뉴스 안보셨어요?]
"응? 뉴스는 왜?"   
상원은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뉴스를 보기는 했지만 챙겨보는게 아니라 시사 상식은 대체로 신문을 통해 얻는 편이었다.
[저 이과 만점자로 인터뷰해서 뉴스에 나왔는데 못 보셨구나]
"헉 전국에 한명 있다는 만점자가 너였어?"
문과에 비해 유독 이과 과목이 어려워 등급 기준이 십여 점이나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이과에 만점자가 딱 한 명 나왔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름아닌 김이경이라니.
[선배 서운해요. 저는 선배가 보실 줄 알고 전날 미용실 가서 머리도 다듬었는데]
"그래? 미안, 나 뉴스는 잘 안봐서"
습관적으로 사과는 했지만 상원은 방금 자신이 사과할 타이밍이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과를 철회해야 하나? 아니 그래도 뉴스에 까지 나온 건데
몰랐던 건 너무 했나?
[제 합격 소식이야 그렇다 쳐도, 선배 합격소식은 정말로 기쁘네요]
"으 응, 그래"
자기 합격보다 내 합격 소식이 더 기쁘다고 말해주니 이건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데 마냥 기뻐하기에는 어감이 참 묘했다.
[그런데 이제 그럼 선배가 아닌가?]
"...."
상원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럼 뭐라고 부르죠? 형? 보통 재수생은 말 놓으니까 이름 불러야 하나?]
"...그냥 선배라고 해"
[역시 그게 좋겠네요 그럼 나중에 뵈요]
통화를 마친 상원이 폴더를 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이경과 또 학교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머리가 아파왔다.
합격 여부까지 알아내 전화를 한 정성이면 아무래도 아직까지 좋아한다는 고백이 유효한 것 같았다.
석희가 알면 난리가 날텐데.
상원은 통화목록에서 얼른 김이경의 번호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조석희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잠자? 뭐하고 있어?]
문자를 보내고 한참을 기다리니 답문이 왔다.
[술 마셔요]
어디서? 누구랑? 무슨 술 마셔! ..... 라고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만 상원은 떨리는 손으로 간결한 문장을 만들어 보냈다.
[너무 많이 마시지마. 집에 일찍 들어가고 ^^]
다음 번 답문은 바로 도착했다.
[집에서 술 마셔요]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상원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아는 한 조석희는 혼자 청승맞게 술을 마실 인간이 전혀 아니었다. 본인 입으로도 혼자 술 마시는 짓은
안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대체 누구랑 술을 마신다는 것이지? 차라리 밖이었다면 바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가볍게 한잔 하는거라 치지.
집에서 누굴 불러서 술을 마셔? 조석희가 친구를 집으로 데려올리는 없잖아!
상원은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입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거실에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들끼리 사이좋게 술잔을 나누며 여담을 즐기고 있었다.
"저 잠깐만 요 앞에 갔다 올게요"
"이 밤중에 어딜 간다고?"
안주를 준비하고 계시던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상원은 대충 얼버무리며 금방 오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너도 한잔 같이 하자. 이제 상원이도 어른이니까 한잔해도 되겠지"
상원의 할아버지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저 나가봐야 하는데...."
"그럼 어른이 주시는 거니까 한잔만 받고 가렴"
어머니가 상원의 등을 떠밀며 웃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어른들의 기분을 맞춰드리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께서 주시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였다.
고개를 돌리고 술잔을 쭈욱 들이켜자, 옆에 계시던 외할아버지도 술병을 내밀었다.
"외할아버지 술도 한잔 받아야지"
"네"
상원은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외할아버지께서 주시는 술도 받아마셨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도 자신의 술도 받으라고 하시며 웃었다. 상원은 약간 알딸딸한 기분으로
아버지께서 내미시는 술잔을 공손하게 받았다.









초인종소리가 들리자 조석희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상원뿐이었지만 그는 일부러 모르는 척 누구냐고 물었다.
"....나야"
현관문 밖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연이어서 들려왔다. 조석희는 천천히 도어락을 풀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어디에서부터 뛰어온 것인지 땀투성이가 된 상원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거기에 서 있었다.
"웬일이에요 오늘 바쁘다더니"
"하아....아니, 나....잠깐 하아... 근처에 볼일 보려다가...."
"이 밤중에 이 근처에 무슨 볼일을 보시려고 했는지 물어보면, 선배 얼굴이 거기서 더 빨개지려나?"
조석희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상원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 누르며 말했다.
"하아... 그게.... 그러니까...."
"들어와요, 구질구질한 변명 들어줄테니까"
상원이 숨을 몰아쉬며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으면서도 숨소리가 거칠게 이어졌다. 조석희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아 왜?"
"어디서부터 뛰어 온거에요?"
"버스정류장..."
버스정류장이라고 해봤자 걸어서 5분 거리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고작 그 거리를 뛰었다고 저렇게 까지 색색거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조석희가 상원의
앞에 얼굴을 바싹대고 숨을 들이켰다.
"선배 술 마셨어?"
"아?,,,하아, 응"
취중에 달리기 까지 했으니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조석희는 상원의 손을 잡아 소파에 앉혀놓고 얼음물을 가져다 주었다. 상원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주자, 상원이 흠짓하고 몸을 떨었다.
"무슨 술을 마셨어, 누구랑 어디서"
상원은 자신이 묻고 싶었던 질문이 조석희의 입을 통해 나오자 벙찐 표정으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구랑 마셨냐고 선배"
"아, 응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어머니도 한잔 주시고"
상원이 손가락으로 한명 한명 꼽아 보이며 대답했다. 조석희가 남아있던 상원의 새끼손가락을 굽히며 말했다.
"그럼 저한테도 한잔 받으셔야죠"
"너?....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누구요?"
"술 마시고 있다면서 .... 너 혼자서는 술 안마시잖아"
일단 근처에 볼일 있는 척 이 집에 들른다는 계획까지는 세웠지만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해놓지 않았다. 혼자서 술 안마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집에 들른 것이 상대에게 뻔뻔스럽게 보이지는 않을까 싶어 상원은 다음말을 찾지 못했다.
"선배랑 마시려고 했어요 축하주"
조석희가 등 뒤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와인과 치즈 옆에는 와인글라스 두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자신을 위해 축하주까지 마련해 놓았다고 하니, 상원의
죄책감은 배가 되었다.
"미안해... 내일은 꼭 자고 갈게"
"그걸로 빚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오랜만에 등장한 빚쟁이 발언에 상원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귄지 일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조석희식 거래방식에 적응을 할 수 없었다.
상원은 목숨이 위험하지 않는 이상 조석희에게  돈을 빌리는 일만은 절대 하지 말자고 늘 다짐해왔다. 어떤식으로 이자가 붙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화,,,났어?"
"네"
조석희가 글라스에 와인을 따라 상원에게 건네며 대답했다.
와인 잔을 받아들면서 상원은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웃음을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상원은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며 소파에 앉아 조석희를 힐끔힐끔 거렸다. 와인 잔을 한손에 들고 여유롭게 서 있는 조석희는 누가본다 하더라도 스무 살 청년이라고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나이 들어 보인다거나 겉늙어 보인다는 것은 아니었다. 조석희에게는 그 나이 특유의 풋풋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툭툭 내뱉는 말투는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느슨한 공기와 어우러져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했다.
오만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상원은 넋을 놓고 조석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 아니야 이거 맛있다"
"당연히 맛있겠죠, 특별히 주문한 상품인데"
"아, 그렇구나 많이 마시면 안되겠다. 비싼 거니까"
와인잔을 기울여 입술에 가져다 대고 있던 조석희의 눈썹이 쿰틀거렸다. 그는 일부러 상원에게 술을 마시고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자신이 혼자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안절부절 못하며 상원이 이 집으로 뛰어 올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면 술에 취하게 만들어 버리자고 계획하던 차에,
저런 소리를 들으니 그의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가끔 조석희는 상원의 쓸데없이 올바른 사고방식이나 생활패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찮아요. 마시려고 산 거니까 마셔요"
"아니야. 나 어차피 집에도 가봐야 하고, 그냥 조금만 마실게. 고마워"
상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들어보였다. 조석희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런 상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는 대체 왜 그래요?"
"응? 나?"
자신이 또 무슨 실수를 한것인가 싶어 상원은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사랑이 식는다는데  실수라도 해서 정나미가 떨어지면 어쩌지.
"뭘 믿고 그러는 거에요. 일부러 그래요?"
"나? 내가? 왜......?"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조석희의 책망하는 듯한 말투가 목을 졸랐다.
"사람을 넋 놓고 한참을 바라볼 정도로 좋아하는 주제에, 왜 그런 식으로 굴어요? 일부러 저 열받게 하시려고 그러는 거에요?"
"내가? 일부러? 무슨 소리야. 석희야. 나 그런적 없어"
"선배 정말 연애 처음해보는 사람 맞아요?"
상원이 고개가 떨어져라 힘차게 끄덕였다.
"처음이야. 진짜야. 나 네가 첫사랑이고. 키스도 처음이고... 다른것도 다 처음이야"
같은 남자 입장에서 전혀 자랑스럽지 않은 일임에도 상원은 정색을 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상원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조석희는
상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드는 발언을 내뱉거나 행동을 하면 이 인간이 지금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 한달만에 섹스를 하고 밤을 같이 보내기로 약속을 해놓고 갑자기 친척이 온다고 집으로 가버리지를 않나. 야한 냄새 풀풀 풍기면서 이 밤에 찾아와 놓고 집으로
간다는 헛소리에, 같이 살자는 제안은 아직까지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이런저런 핑계만 늘어놓기까지.
온몸으로 좋아한다는 아우라를 내뿜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발을 빼는 것이다. 조석희는 상원이 모든것을 버리고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미 한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군"
조석희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짜증이 섞인 어조로 중얼겨렸다. 상원은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아까까지는 최고의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조석희에게 헤어지자는 얘기를 들으면 모든 행복이 다 무의미하게 색이 바래고 말 것이다.
"선배는 정말 나를 좋아하기는 해요/"
"좋아해 정말, 너무나"
내 마음이 무겁게 느껴져 네가 질릴까봐 이 말은 차마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사실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그럼 어디 증명해봐요"
"증명?"
"선배가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증명해 보라고요"
상원은 막막함을 느꼈다. 다짜고짜 좋아하는 마음을 증명하라니,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자신의 마음을 낱낱이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그랬다가 너무 부담스러워 할 수 도 있으니 반의 반 정도만 보여주고 싶다.
"그걸 어떻게 해?"
조석희가 상원의 아랫배에 손바닥을 얹고 대답했다.
"몸으로 증명해야죠"
",,,그러니까 어떻게?"
손바닥이 스르륵 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느낀 상원은 몸이 굳었다.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조석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상원은 쩔쩔 매면서도 조석희가 하는대로
몸을 맡겼다. 그의 손가락이 상원의 다리 사이에 머물렀다.
"나...아직 아픈데"
하루에 두번 몸을 벌려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다.
지금은 그나마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픈것은 아픈것이다.
"그거 말고요"
상원이 눈을 깜빡거린다.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조석희가 몸을 숙여 상원의 귀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 대었다.
"선배, 혼자 하실 때 제 생각하시죠?"
"...!!"
"저는 혼자하면서 선배 생각하거든요, 선배 느낄 때의 표정이나 냄새, 끝내주게 조여드는 구멍같은거...."
어눌한 발음이 귓가를 스칠 때마다 상원은 아래가 오싹해졌다. 무서웠다. 바지 앞섶이 이미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게 느껴졌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느껴버리게 된 자신이, 상원은 무서웠다.
"선배도 제 생각....하면서 하시죠?"
"그....혼자 그렇게 막 하는건 아니고..."
"그럼 포르노 보면서 해요? 야동 같은거?"
"아니야 그렇지는 않아"
"그럼 어떻게 해요?"
상원은 조석희의 목소리에 약했다.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할 때도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했지만, 이렇게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고 말을 건네면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조석희가 상원의 귓볼에 입술을 살짝 비볐다.
"혼자 하실때 제 생각하시죠?"
"....응, 미안...."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상원은 일단 사과를 건넸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런 행위를 할때 상배방이 자신을 생각한다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어떻게 하시는지 보여주세요 그럼 믿을게요"
"어? 무슨 말이야?"
'선배 혼자 하시는 모습, 보고 싶다고요"
"마, 말도 안돼!"
상원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정색을 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조석희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증명하실 거에요, 선배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혈서 쓸게"
상원이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질색이었지만 그런것으로 석희를 믿게 할 수 있다면 혈서로 연애편지라도 써서
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 걸 받아서 어디다 쓰라고, 필요 없어"
...... 내가 혼자 하는걸 봐서 어디다 쓰려고, 그거야 말로 필요 없잖아.
상원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열심히 상대를 설득시키려 노력했다.
"가, 각서는 어때?"
"그런 각서 법적 효력없어요. 선배랑 내가 결혼한 것도 아닌데"
"그렇구나 결혼은 못하니까... 아, 그러면 내가 집으로 돌아가서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처음부터 차분하게 글로 써서 주면...윽"
아래를 파고드는 아픔에 상원이 비명을 삼켰다. 조석희가 우악스럽게 상원의 다리 사이를 움켜쥐었다.
"그런 글자 나부랭이 필요없다고요, 선배.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하지만, 그런거....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서 해"
조석희가 기가 차다는듯 웃었다.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고 안겨서 엉엉 울면서 좋다고 헐떡거리는 사람이, 이제와서 내외를 하는 이 상황이 어이없었다.
"선배 다른 사람 앞에서 하라는게 아니라 제 앞에서 하라고요"
"....그치만...."
"보고 싶어서 그래 선배가... 내 생각하면서 하는거 보고 싶어서 그래"
어린 아이 구슬리듯 한 말투에 상원의 눈동자에 고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원은 조석희의 부탁에 약했다.
"...그럼 믿어 줄거야?"
"네, 믿어줄게요"
상원은 믿어준다는 그 한마디에 중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할게. 안 될 수도 있지만 해볼게 "
다른 사람앞에서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위를 한다는 상상은 감히 해본 적 없는 상원이었다. 과연 제대로 흥분이나 할 수 있을까.
상원은 한숨을 쉬며 침실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어디 가요?"
"어? 침대에서 해야지"
"소파 두고 왜 굳이 거기서 해요"
"소, 소파에서?"
상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자위라고는 침대에 누워 시트를 뒤집어 쓴 채, 두어 번 해본것이 고작인데 갑자기 소파라니.
"저기 앉아서 다리 벌리고 제대로 하는거 보여줘요"
"아, 앉아서?"
"그럼 누워서 하시게요? 누워서 하는것도 나쁘지 않지만"
조석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뭐,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 소파를 가리켰다. 상원은 덜덜 떨리는 다리로 소파에 가 앉았다. 지금이라도 조석희가 농담이에요 하면서
웃어주면 좋을텐데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그의 얼굴에선 그런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할게"
상원이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살덩이를 움켜 잡았지만 대책이 서지 않았다.
"선배 평소에도 그렇게 해요?"
"아니... 이불 뒤집어 쓰고 해"
상원의 솔직한 고백에 조석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지마.... 긴장되는데"
"선배가 귀여워서 그래"
조석희가 상원의 뺨을 손바닥으로 스윽 만졌다. 손길이 닿자마자 마법처럼 하얗게 질렸던 상원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말도 안돼, 내가 어디가 귀여워, 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조석희는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어 주었다.
"이번엔 이불 없이 해봐요 . Apple선배"
이번엔 목덜미와 귓볼까지 새빨개졌다. 사과향이 날 것 같았다. 낱낱이 핥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 누르며 조석희는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나른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자, 빨리요, 선배 어떻게 하는지 보여줘 그래.... 그렇게 다리 벌리고 불알도 만져봐요 선배, 잘하네 구멍도 보여줘요, 허리 들어봐 응...그렇게
상원은 눈을 감고 그가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과연 흥분이나 할까 싶었는데 슬슬 아래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선배 하면서 제 이름은 안 부르세요?"
"어? 모, 모르겠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절정에 다다르면 정신이 없을 때 불렀던 것도 같다.
"그럼 제 이름 부르면서 해보세요"
"석희야......."
상원이 눈가를 찡그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전혀 다른 의미로.
"그렇게 원마이 섞인 목소리로 부른 다고요?"
"아니...그게 아니라"
"제 이름 불러부세요 네?"
상원은 정말로 울고 싶었다. 남의 집 소파에 앉아 바지를 내리고 다리를 벌려 자위를 하고 있는것도 모자라 상대의 이름까지 불러야 한다는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서,,,석희야.."
"좀 더 섹시하게 불러봐요 선배. 내가 넣어주면 몇 번이나 부르잖아. 내이름"
"....석희야 하아----"
손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다.
"선배 구멍도 움찔거리는거 알아요? 거기에 넣어줬으면 해요?"
조석희의 목소리가 음란하게 울렸다. 상원은 그의 손이 자신의 아래를 훑고 있는것 같아 점점 달아올랐다.
"자위할 때 거기도 만져요?"
"아니..읏"
"그럼 만져봐요 응 , 거기 아래"
상원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왼손을 뻗어 조석희가 시키는 대로 아직도 빨갛게 부어 있는 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넣어주면 좋겠죠?"
"하아...응..."
수치심따위 날아가버렸다. 상원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석희야 ..하아...응 앗, 흥"
너무나도 근사하고 멋진 조석희.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온몸으로 부딪쳐오는 감각을 떠올렸다. 상원은 눈을 감고 손바닥에 힘을 주어 살덩이를 곧추 세웠다.
아찔한 감각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석희야 석희야.. 좋아....하아 좋아해"
"선배 안에 제가 들어가 있는 상상해요?"
"응,...읏, 하읏"
"뭐가 들어가 잇어요?"
"너..하아,,네것"
몸이 너무 뜨거워져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상원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안에 들어와 움직이는 남자의 단단한 살덩이를 떠올렸다.
"선배가 좋아하는게 제 좆이죠?"
"응, 응 좋아...읏"
"제 좆이 어떻게 움직여요? 선배 안에서?"
제 정신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음란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상원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흥분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알코올이 몸에 들어가니 그만큼
이성도 희석된 모양이라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커...너무 딱딱해"
"그거 넣어줬으면 좋겠어요? 도와 줄까?"
"응..하아..아"
너무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느라 상원은 퍼스너 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이미 단단하게 피가 몰린 성기를 손에 쥐고 조석희가 상원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목덜미 아래에 얼굴을 묻고 그가 중얼거렸다.
"선배....진짜 여기서 야한 냄새 나"
"하아...석희야"
하루에 두번은 무리라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상원은 조석희의 목을 끌어 안았다. 혼자 손을 움직여도 타들어가는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가
이 열기를 해결해줬으면 좋겠다.
"다리 벌려봐 넣어줄게"
"아..아파"
상원은 본능적으로 조석희의 어깨에 매달려 아래가 벌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었다.
"괜찮아요... 한 번 넣어서 여기 부드럽게 벌어지잖아"
조석희가 상원을 자신의 무릎 위에 천천히 앉히며 속삭였다.
악마의 속삭임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에 상원은 그의 어깨에 매달리고 있던 손을 풀고 말았다. 푹 소리와 함께 안으로 살덩이가 쑤셔 넣어졌다.
조석희가 탁한 신음소리를 내며 상원을 안았다.
"석희야...응"
"상원선배 좋아?"
"응...좋아 아픈데... 너무 좋아 하아, 아"
상원은 울면서 조석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라도 조석희가 자신의 마음을 믿어준다면 몇 번이라도 다리를 벌려 안길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도 단단한 몸도 외국영화배우 같은 콧대도 머리카락도 이기적인 성격도 , 아랫배에 까칠하게 닿은 음모도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좋았다.
"..... 선배, 제 자지 맛있어요?"
"응..응응"
매일 좋았다.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처럼, 매일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처럼 상원은 조석희가 매일 좋았다.
"매일...늘 좋아해 석희야..."
조석희가 입을 맞추며 얕게 웃었다. 그래요, 선배는 질리는 법이 없지. 하는 만족스러운 중얼거림 뒤에 다시 격렬한 섹스가 이어졌다.
상원은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상대가 자신에게 질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나 죽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상원이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잇던 조석희가왜요, 하고 심상한 말투로 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와 계신데... 외박했잖아. 진짜 혼날거야"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외국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해서인지 가끔 상원은 그와 대화를 나눌때 현격한 문화차이를 느꼈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성격차이일 수도 있지만,
"오늘 돌아가시는데 배웅도 안해드렸으니까 당연히 혼나지"
상원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던 조석희가 놓아주질 않았다.
"석희야...."
"선배 저를 너무 나쁜 놈으로 만들지 마세요"
"...무슨 소리야?"
넌 원래 나쁜놈이잖아.
"선배 조부모님들이 살아계신걸, 귀찮아하게 만들지 말라고"
"....."
상원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놈이라고 해도 얘는 왜 이렇게 성격이 나쁜 것일까.
"나 가봐야 해"
그 한마디에 지금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선배 여기서 지내요"
"...."
"여기서 지내. 내 옆에서 계속"
계속, 이란 단어가 상원의 심장에 직격으로 꽂혔다. 사랑에 한없이 약한 남자 이상원의 눈에 하트가 그려졌다
"석희야..."
"선배 부모님한테 오늘 가서 말씀드려요"
"오늘은 좀...."
가뜩이나 말하기 어려운 주제인데 굳이 오늘 꺼낼 필요는 없었다. 화가 난 부모님께 이런 얘기를 꺼내면 오히려 성공률이 적어질텐데.
"오늘해요. 오늘 안되면 내일도 안되는 거 마찬가지잖아"
조석희식 논법에 상원이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줄거지?"
조석희가 다시 한번 힘주어 물었다 몇 번이나 거절을 했는데도 계속 같은 질문을 하는 그의 마음에 상원은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를 위해서 오늘 꼭 가서 말하자. 안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일단 그렇게 하자.
"응 그럴게 , 그렇게 할게"
상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석희가 상원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상원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조심, 조심 쓸어내렸다.
맹수를 길들인 조련사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상원은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의미의 만족을 느끼고 있는 조석희의 입가에도 야릇한 미소가 그려졌다.










[뭐라고요? 외출금지?]
"응, 미안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상원은 아버지에게 불려가 무릎을 꿇고 한 시간 동안 꾸중을 들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상원은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의 꾸지람을
달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 이후에 내려진 징계였다.
"엄청 혼났어. 할아버지하고 할머님 오셨는게 그게 무슨 버릇이냐고, 후....혼날 짓 하긴 했다"
[선배 혼나거야 내 알바 아니고, 그런데 집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외출금지라고요?]
"어...."
대답을 해놓고도 상원은 뭔가 찜찜함을 느꼈다.
"저기 석희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건데"
[뭘요]
"...설마 나 집에서 쫓겨나라고 일부러 물어보라고 어제 시킨 건 아니지?"
머릿속에 떠돌고 있던 의혹을 입박으로 내니 어쩐지 더 확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리가요]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
"하하하하....."
상원은 전화기를 붙들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조석희의 얼굴이 떠올라 매가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좋을까. 거짓말을 하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이런 인간에게 반해버렸으니.
[그래서 며칠간 못 나오는데요?]
"일주일..."
전화기 너머에서 알아듣기 힘든 욕설이 들려왔다. 그래도 수화기를 떼고 욕을 해주는 예의에 상원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농담이죠? 그 정도로 무슨 일주일 씩이나 외출금지를 당해]
"아하하 그게... 조부모님들 네 분이 다 나 때문에 오셨는데 내가 허락도 없이 나가서 외박한 거잖아. 혼날짓 한거 맞아"
[아무리 그래도 선배 성인아니야?]
"그러게 아무튼 오늘 그래서 못 갈것 같아. 미안해"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상원은 조마조마했다. 그나마 통화중이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무거운 침묵이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알겠어요 어쩔 수 없지]
이죽거리는 어조가 아닌 깔끔하게 떨어지는 말투에 상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리리 화를 내는게 나으려나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럼 너 잠은 어떻게해?"
특별한 사정이 없는이상, 그간 상원이 이틀에 한번은 조석희의 집으로가서 그가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와주곤했다. 외출금지긴 해도 조석희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준다면
잠을 자는 것은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면제 먹으면 돼요]
"수면제? 그거 몸에 안 좋잖아"
수면제를 무슨 사탕 씹어 먹듯이 한 움큼씩 삼키는 그의 습관을 아는 상원은 질겁을 하며 되물었다.
"먹지마 석희야 수면제 자꾸 그렇게 먹다가 큰일 나"
[그럼 어떻게 해요. 딱히 방법이 있는것도 아닌데]
울상이 된 상원이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집으로 네가 오면 안돼?"
[싫은데요]
안되는 것도 아닌 싫은데요 였다.
"내방...잠자는 정도면 괜찮은데"
[선배 안고 잠만 자는 취미는 없어. 그렇다고 머리에 트로피 떨어지는것도 사양하고 싶고, 그만 끊을게요]
"응...그래"
통화를 마치고도 상원은 떨떠름했다.
예전에 한번 조석희가 상원의 방에 온 적이 있었다.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조석희를 놀란 상원이 있는 힘껏 밀쳐낸
것은 정말 본의가 아니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상원의 성격을 아는 조석희도 그 정도는 이해해줄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바람에 그의 머리 위로 수학경시대회 트로피가 떨어진 것
만큼은 아무래도 용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조석희는 상원의 불운이 자신의 행운을 넘어서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그 일이 벌어진 다음날 책상 선반에 있는 트로피를
모두 치워놓았다는 얘기는 끝내 하지 못했다.
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동안 조석희를 보지 못한 것은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미국에 갔다 올때도 고작 닷새였는데.......
그때도 상원은 조석희를 위해 공항에서 기다렸다가 리무진 안에서 그가 잠이 들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 어쩌지"
상원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언젠가 조석희에게 수면제가 효과가 있냐고 물었을때 그는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그럼 자기가 그 제약회사를 사들였을 것이라는 농담아닌 농담을 했다.
아버지께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볼까.... 아니 그랬다가 외출금지기간이 일주일이 아니라 열흘로 늘어날게 뻔하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자애로운 편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일절 단호했다.
그럼 밤에 탈출을 해야 하나.
상원은 방과 연결되어 있는 발코니로 다가가 아래로 뛰어내릴 수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한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상원아 엄마랑 아빠랑....
방문이 갑자기 열리자 놀란 상원은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어머니가 달려와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발코니 너머로 머리부터 떨어질 뻔했다.
"....늘 조심해야지"
"죄송해요"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아직까지 아들의 불운이 안타까운 것이 어머니의 심정이었다
"추운데 발코니 문은 왜 열어두고 있니"
"그냥...조금 답답해서요"
"아빠랑 모임갔다 올테니까 집에 꼼짝 말고 있어라. 괜히 나갔다가 더 혼나지 말고, 안 그러던 애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화가 나서 저러는 거야. 아마
삼일만 지나도 화 풀리실 거야"
"예 알겠어요"
"밥은 반찬 내어서 먹으면되겠지만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사다줄게"
"아니요 알아서 잘 챙겨먹을 게요. 걱정마세요"
"그래 혹시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문자 보내고 알았지?"
"네 잘 다녀오세요"
상원은 나가면서까지 아들의 식사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배웅했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잠시나마 탈출을 꿈꿨던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들어왔다.
어머니 말씀대로 삼일만 참으면 아버지 화가 풀릴 수도 있는데 괜히 나갔다가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동안 조석희가 수면제를 많이 먹어 잘못되기라도하면,
"....안돼"
상원은 꺼림직한 생각을 떨쳐내려는듯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의 집에 일을 하러 오시는 분이 하루에한번은 오시니까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괜찮을...아니 , 조석희에게 그런 일이 생길리가 없다. 그는 대단하니까.
절대로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행운이 나 때문에 가려져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지.
상원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물어 뜯었다. 상원은 자기 방으로 가서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잠 안온다고 수면제 많이 먹지마. 우유 뜨겁게 해서 마시면 좋대 ^^]
웃는 이모티콘을 붙일까 말까 몇 분을 고민을 하다가 붙이는 쪽을 택했다. 상원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답문자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F.H.M]
상원은 한참을 문자를 바라본 후에야 알파벳 세 개가 뜻하는 의미를 알아 차렸다.
fucking hot milk.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뜨거운 우유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쯤 되시겠다.
아아... 석희야. 대체 나는 너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가질 거 다 가지고 잘 생기고 머리까지 좋은 네가 성격은 어째서 이 모양이니. 사람이 걱정을 해주면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왜 퍼킹이 붙는 거냐. 그런데 왜 난 그런 네가 이렇게 좋은 걸까.
"미처 진짜"
정말 이 콩깍지는 평생이 가도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상원은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다 다음 번 문자를 보냈다.
[우리집 와서 잠만 자고 가면 안돼?"
이번엔 웃는 이모티콘은 붙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답문이 왔다.
[No.]
단호하고 깔끔한 문자였다.
상원은 그가 두 문장 이상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을 받아 본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더 이상 얘기 해봤자 기분만 상하겠다 싶어 그는 문자를 보내느것을
멈추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조석희와 처음 사귀게 되었을때, 상원은 그가 자신을 받아준 사실 자체만으로도 황송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연애라는것이 늘상
즐거운 일만 있는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렇게 본의 아닌 일로 조석희의 심기가 어그러지게 되면 상원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 이런 문제를 누구에게 상담할 수 없다는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동석과 승완 대진에게 이 얘기를 꺼내기라도 하면 당장 승완이
칼을 들고 조용히 조석희를 찾아갈게 분명했다. 동석이랑 대진 역시 같이 가서 싸웠으면 싸웠지, 말릴 인간들이 절대 아니었다.
침대 맡에 앉아 끝나지 않을 고민을 하던 상원에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이 시간에 집을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인터폰을 들어 대문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모자를 쓰고 있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구세요?"
[우리다! 문 열어라!!]
우렁찬 목소리에 상원은 놀라서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승완을 위시한 동석과 대진이 손에 폭죽을 들고 마당을 가로 질러 들어오고 있었다.
"너희들 웬일로...."
"야 인마, 합격해 놓고 왜 말을 안해 !"
"축하한다! 이상원"
"대박 축하해!"
대진이 들고 있던 폭죽을 터트렸다. 펑 소리와 함께 상원이 입고 있떤 셔츠 앞자락에 불이 붙었다.
"으악!!"
폭죽을 터트린 대진이 놀라서 펄쩍 뛰어 올랐다. 행동이 민첩한 동석이 가장 먼저 달려가 자신의 옷을 벗어 불이 붙은 상원의 셔츠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불은 순식간에 진화되었다. 승완이 상원 앞으로 걸어와 셔츠를 열어 젖혔다.
"다친 데는 없...."
상원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안도하려던 승완의 눈이 상원의 하얀 속살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의미심장한 흔적을 발견했다.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셔츠 자락을 여며주고 승완은 외쳤다.
"안 다쳤네! 멀쩡해 다친 사람 없다! 무사하다!"
"안다치긴. 셔츠자락에 불붙었으니까 화상 입었을 거야. 좀 보자"
눈치 없는 대진이 상원의 셔츠 깃을 잡고 벌려 확인하려 했다 그러자 승완이 화를 버럭 내며 대진의 목덜미를 잡고 집어 던져 버렸다.
"만지지마! 감히, 누구 옷을 벗기려 들어!"
막내딸 옷 벗기려던 외간 남자를 떼려 죽이려는 기세였다. 한 손으로 덩치가 곰만 한 대진을 날려버린 승완의 힘도 놀라웠지만 상원은 자신의 옷을 죽기 살기로
붙들고 있는 친구의 심증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남자끼리 어때 괜찮아"
"안돼! 가서 당장 옷갈아 입고 나와 당장!"
승완이 등을 떠밀자 상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눈치 없는 대진은 무슨 일이냐고 끈질기게 묻고 동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그러네"
"...씨발"
"뭐가 아직도야? 뭐가? 아, 뭔데. 나 좀 가르쳐줘봐"
"닥쳐!씨발놈아"
"뭐야 미친 새끼 , 괜히 승질 내고 지랄이야"
"누가 그러게 상원이 옷에 대고 폭죽을 쏘고 지랄하래, 시발 보기 싫은거 봤더니 눈이 썩은 것 같잖아"
"상원이 맨몸이 뭐가 눈이 썩어  체육 시간에 옷 갈아입을 때 봤는데 매끈매끈 이쁘기만 하던데"
동석이 대진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 갈겼다. 대진이 으르릉 거리며 친구들을 노려보고 있을때 집안에서 으앗 하는 상원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승완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동석이 손을 내밀었다. 운동을 하는 동석은 어지간히 속이 상하지 않으면 담배를 피우는 법이 없었다.
승완은 말없이 담배를 꺼내 친구에게 내주었다.











"....나 외출금지인데"
"니 나이가 몇 개인데 외출금지냐. 게다가 우리가 다른 일도 아니고 네 대학 합격 축하하러 간다는 건데 설마 부모님이 뭐라고 그러시겠어"
"그건 그렇지만...."
"에이 괜찮아. 괜찮아 바로 집 앞이잖아. 설사 뭐라고 하시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면 되지"
외출 금지라서 못 나간다는 상원을 끌고 세 사람은 그의 집 근처 호프집을 찾았다. 대학 합격 축하주를 마시자는 친구들의 청을 상원은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 합격한것은 어떻게 알았어?"
"인마 그거 서운하다. 왜 제일 먼저 나한테 말 안했어?"
승완이 투덜거렸다.
".....혹시나 해서"
상원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합격이 믿기지 않아. 하루에 서너번은 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치고 합격을 확인했다.
대학등록금을 내고 나서 더 확실해지면 친구들에게 말해줄 생각이었다. 괜히 설레발 쳤다가 일이 어그러지면 친구들까지 속상해질까봐 두려워서였다.
"으이구 소심한놈 내 그럴 줄 알고 너희 어머니한테 합격하면 말씀 좀 해달라고 연락 넣어 놨다"
동석이 상원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미안해, 진작 얘기했어야 하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
상원은 자신이 말해주지 않았는데 알아내어 축하를 위해 찾아온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오늘 술값 네가 쏴"
"오케이 그래 알았어. 대신 나 오늘...."
"일찍 들여보내 줄게. 걱정을 하덜 말어"
호프집으로 들어가자 대진이 큰 소리로 안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외출금지야? 너희 부모님 좀 프리한 편 아니던가?"
동석이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 밖에 내었다.
"그러신 편인데..... 내가 혼날 짓을 좀 해서"
"무슨 짓을 했는데 엄마 지갑에서 돈이라도 뽀렸냐?"
권투를 하면서도 체급조절에는 영 관심이 없는 대진이 서비스 안주를 한 웅큼씩 입안에 넣으며 물었다.
"얘가 너냐? 상원이가 너야?"
"혼날짓을 했다잖아. 그게 아니면 뭔데? 거실에서 몰래 딸치다 걸렸어?"
"...대진아"
상원이 애절하게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윤대진 저건 머리에 그 생각밖에 없지"
"외출 금지 당할 정도로 혼날 짓이 당장 뭔지 안 떠오르니까 그렇지. 그냥 니가 니 입으로 불어"
상원이 뻥튀기를 입에 물고 오믈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조부모님들 오셨는데 ...내가 나가서"
"엥? 외출 할 수도 있지 뭘 그런걸 가지고 그러셔"
"...나가서 안 들어갔어"
"...."
"...."
"어딜 나갔다가 안들어가? 집에 안 들어갔다고? 밤새 뭐했는데? 어딜 갔는데?"
눈치도 없는 대진이 침묵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한 채 쉴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점원이 주문한 안주를 가져다주자 동식이 대진에게 그거나 처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승완이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상원아"
그가 연기를 상원의 반대 방향으로 내뱉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상원을 불렀다. 그것은 흡사 사랑에 눈이 멀어 집나갔다가 배가 불러 들어온 딸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아버지의 부성애가 담긴 음성이었다.
"나는. 반대다"
"...."
"남자, 여자 이전의 문제야 그건 그놈은 개새끼야. 생긴 것만 번지르르 하지 완전 개새끼라고"
승완이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한승완이 조석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상원도 직접 목도한 바가 있었다. 같이 입원해있던 병원복도에서 승완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잠시 그 자리에 멈칫하던
그는 망설임 없이 조석희를 향해 링거 병을 집어 던졌다. 들짐승 같은 반사신경을 가진 조석희가 팔을 들어 링거병을 쳐낸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파편에 휠체어를
타고 있떤 상원의 손등에 꽂힌 것은 정말 불운한 사고였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조석희와 한승완은 감히 네 놈이 라고 외치며 서로를 향해  잡아 죽일 것
기세로 달려 들었다.
상원이 간신히 뜯어말려 두 사람을 떼어놓긴 했지만 승완은 그날 이후로 말버릇 처럼 조석희의 배에 한방을 더 넣어줘야 했다는 말을 곱씹었다.
졸업 후 삼촌이 운영한다는 고급 일식집에서 본격적으로 회를뜨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 승완을 생각하면 도저히 농담으로 웃어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대야. 누워서 생각해보고 서서 생각해보고 앉아서 생각해봐도 반대야"
"...."
"나도 반대"
동석이 차가운 컵에 맥주를 따르며 산뜻하게 대답했다. 대진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가 싶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여태 그놈하고 만나는 것도 참 싫지만, 앞으로도 만난다면 더 싫을 거 같아"
"아, 조석희!"
그제서야 대화의 주제를 파악한 대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근데 아직도 걔랑 사귀어? 우와 대단하다 그놈 여자는 존나 자주 갈아탄다고 유명하던 놈이잖아. 고딩 주제에 학교에 여자들 존나 찾아오고 교문앞으로
금발도 오고 가슴 존나 큰 라틴계 누나도 오고 그치? 맞지?"
"...응 맞아"
상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고 해도 조석희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대해 듣는 것은 매우 불편했다.
가끔 그런 생각조차 들었다. 과연 자기 하나로 조석희가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새끼랑 아직도 만나? 걔는 딴 년도 만나면서 너 만나는거 아니야?"
대진이 악의없이 던진 한마디가 상원의 심장을 관통했다.
"만날 걸. 그놈이라면 만난다."
동석이 맥주를 가득 채운 잔을 각자 앞으로 하나씩 돌리며 대진의 말을 거들었다. 상원의 얼굴이 파르르 질러갔다.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해 보여 승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상원을 두고 왜 바람을 펴! 우리 상원이가 어디가 어...."
거기까지 말하고 승완은 지그시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상원의 편을 들어주는 동시에 그 빌어먹을 조석희 편까지 들어주는 발언이었다.
"아무튼 싫어 난 걔가 싫어 무조건 싫다"
"...미안하다"
아무리 좋은 친구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조석희와 헤어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조석희가 한승완을 위시한 선배들과 연락을 끊으라는 말을
내뱉을 때도 미안하단 말밖에 하지 못했다.
둘다 소중한 관계였다. 어느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심때문에 양쪽 모두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상원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야, 그만하자 오늘 상원이 합격 축하하자고 모인 자린데"
대진이 술잔을 들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동석도 그만하자고 테이블 밑으로 승완의 발을 슬쩍 걷어찼다. 오늘 축하자리의 주인공인 상원의 표정이 안됐다
싶을 정도로 창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그 얼굴을 보니 승완도 미안해졌는지 자신의 앞에 있던 맥주잔을 들고 건배제의를 했다.
"건배하자 건배"
"그래 상원이의 합격을 축하하며 위하여!"
"위하여!"
"지화자!"
네 사람의 맥주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첫잔은 무조건 원샷이야. 상원아"
대진이 웃으며 말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마시는 맥주는 더없이 시원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이전에 있었던 일을 안주거리 삼아 시시덕거렸을 때까지는 좋았다. 상원도 간간이 핸드폰을 보며 부모님께 연락이 오는지 체크했고
동석도 웃으며 걱정말라고 연락이 오면 자신이 얘기해주겠다고 말했다.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갑자기 대진이 찌개 안주가 먹고 싶다고 알탕을 시키자 승완이 맥주와 알탕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소주 한병을 시켰을 무렵이었다.
상원이 더 이상 마시면 안 될 것 같다고 거절을 하자 승완이 딱 한잔 정도는 괜찮을 것 이라고 한잔을 권유했고, 한잔은 두잔이 되고 두잔은 석잔이 되었고...
결국에 이 상황에 이르게되었다.
"으하하하하 시발 진짜 내가 얼마나 회를 잘 뜨는 줄 알아? 주방장 형님들도 내 칼솜씨를 보면 다들 놀란다고 크하하하하 조석희새끼 회쳐버릴꺼야"
"회쳐버려...회쳐버려"
동석이 옆에서 음습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어우 술마시니까 뽀순이들 보고 싶네 우리 뽀순이들!"
대진이 공중을 향해 손을 허우적 거리며 뽀순잉과 뽀순퀴의 이름을 외쳤다. 상원이 히죽거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 난 뽀순 퀴 싫어! 애는 착하지만 난 걔 별로야"
"으하하하 조석희 개새끼는 애도 나쁘고 별로 잖아"
상원이 갑자기 손으로 깔깔거리고 웃는 승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야 그러지마 왜 우리 석희 욕해 으앗!"
승완이 사정없이 상원의 손등을 깨물었다.
"에이. 퉤 우리석희? 우리 석희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안돼. 난 니네 사귀는거 반대다!"
그러자 상원이 망설임 없이 바닥에서 흙을 쥐어 승완의 얼굴에 뿌려버렸다.
"으악!!"
승완이 두 손으로 얼굴을 잡고 괴성을 지르자 동석과 대진은 박장대소를 해댔다.
"야, 인마! 무슨 짓이야"
"흙 들어갔으니까 찬성해주는거다?"
상원이 승완의 팔을 붙잡고 애교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대박 이상원 완전 대박 하하하하"
"한승완 눈에 흙들어갔는데 어쩔거임? 크크크"
"꺼져! 시발 절대 싫어. 그 새끼 진짜 걸리면 뒈지는거야"
승완이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며 시근덕 거렸다. 아무리 술에 취해 이성이 희미해져 있는 이 상황에서도 그의 호불호는 확실했다.  상원이 끈질기게 승완에게
매달려 찬성해달라고 졸랐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가! 이놈아 가버려!! 업어주고 키워줬더니 아주 그냥 제대로 삐뚤게 자라가지고"
상원의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승완이 팔에 매달린 그를 떨쳐내며 소리쳤다.
" 야 니네 아빠 화났다 빨리 가라 크크크"
"우리 아빠? 우리 아빠가 어디있어?"
상원이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을 잃어버린 아이같은 가련한 상원의 모습에 승완이 시발 하고 욕을 내뱉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웬수, 웬수 같은놈"
"헤헤헤 승완아"
상원이 손을 번쩍 펼쳐친구의 등을 안았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헤어졌던 가족처럼 서로를 힘차게 끌어 안았다.
"승완아 내 친구 내 친구들 헤헤헤 "
"얘 술 취하니까 완전 골 때리네, 크핫"
대진이 상원의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흩트려주었다. 동석도 그런 상원이 귀엽다는 듯이 뺨을 꼬집어 주려 손을 뻗었다. 술에 취해 상원의 뺨 대신 한승완의
팔뚝을 꼬집은 것이 약간의 소란을 빚게 했지만,
"으악 시발 손 치워 어딜 꼬집고 지랄"
"아 드러워 한승완 얼굴 기름"
동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보고 기분 나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우 시발 벌써 자정이 넘었네 가자 집에 가야지 "
대진이 시계도 없는 손목을 보고 동석과 승완의 옷을 잡아 끌었다. 상원이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잘가 얘들아 나중에 또 봐"
몸까지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상원은 친구들이 사라질 때까지 손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세 사람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자 상원은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몸을 돌렸다.
"나나나, 눈누나나 나나"
의미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던 그의 앞을 장신의 남자가 가로막아 섰다.
"어?"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끝내주게 잘 생긴 남자가 기가 찬다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아"
상원은 입을 딱 벌리고 탄성을 질렀다.
"우리 석희만큼 잘 생긴 사람이 또 있었다니"
"...."
상원이 손을 들어 그 남자의 얼굴을 이리저리 더듬어 만졌다. 오뚝한 콧날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미간이 조석희와 매우 닮은 남자였다.
"잘생기셨네요"
상원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눈앞의 남자는 조석희와 매우, 엄청나게 매우, 닮아있었지만 조석희는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조석희라면 집 앞에서 이 늦은 밤까지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정말 잘 생기셨습니다"
상원이 다시 힘을 주어 말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처럼 그의 눈은 놀라움과 설렘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지금 그 얘기 듣자고 여기서 두 시간동안 서  있었는지 알아?"
남자의 험악한 일갈을 듣자 상원이 흠짓하고 어깨를 떨었다.
그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울긴 뭘 잘했다고... 하아 말을 말자 젠장"
"...우리 석희가 목소리는 더 멋있는데"
울먹이면서도 우리석희 자랑을 상원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석희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아냐 . 성격은 진짜 나빠도 멋있다. 끝내주게 멋있다. 운도 좋고
너무너무 멋있다. 성격이 좀 안좋긴 해도 짱 잘생겼다. 목소리도 완전 좋고 영어도 캡 잘한다.  성격이 더러워도 난 조석희가 좋다.
우리 석희가 제일 멋져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술주정을 늘어놓는 상원을 조석희는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성격 안 좋은거 이제 알았어요? 아예 광고를 하지 그래?"
"조석희는 개새끼다!!!!"
상원이 두 손을 모으고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조석희는 황담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저기에 불이 커지면서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까지
생겼다.
"선배 미쳤어?"
"아...사람들이 다 싫어하면 좋겠다"
"뭐라고요?"
"...나만 좋아하면 좋겠어"
"뭘 선배만 좋아해"
"석희"
상원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만 좋아하면 좋겠따. 나만 석희 좋아하고 싶어"
"선배만 좋아해. 됐어?"
상원이 갑자기 조석희를 와락 끌어 안았다. 조석희는 이전까지 상원에게 약간의 알콜 섭취는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당장
그 생각에 수정을 가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끌어안아?"
"....미안해"
"뭐라고?"
"잠깐만...잠깐만 이러고 있을께"
조석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상원은 분명 자신을 조석희 닮은 잘생긴 행인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렇게 끌어안았으니 이건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며칠 간 미국에 갈 일이 생겨  잠시 얼굴을 보러 왔더니 연락두절, 한 술 더 떠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리며 와서 한다는 소리가 조석희 개새끼에
외간 남자로 추정되는 인간까지 끌어안아?
"가지가지 하는군"
"....석희 보고싶다"
"보고 있잖아요"
"어, 그런가?"
상원이 흐릿한 눈을 하고 헤헤 웃었다. 조석희가 상원의 코를 비틀어 쥐어 사정없이 흔들었다.
"으악 아파"
"you`re impossible" (너 진짜 구제불능이다)
"맞아 미션 임파서블이다. .... 아 집에 어떻게 들어가지 쫒겨날거야. 분명 쫓겨나고 말거다. 나 외출금지인데"
머릿속을 스친 우울한 생각에 상원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등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거기 너 상원이냐?"
"어? 아버지다"
상원이 대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하고 몸을 돌리려던 상원의 턱을 쥐고 조석희가 짙은 키스를 하기 시작한 것도 그와
동시였다. 술에 취해 따끈하게 달아오른 점막을 혀로 핥아주자 상원이 새된 신음소리를 내며 그에게 매달렸다.
조석희는 일부러 상원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잘 보이도록 몸을 틀어 상원의 허리를 한손으로 바싹 끌어 안았다.
부드러운 입술을 혀로 맛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키스를 마쳤다.
"....아"
아직도 무슨 일이 잇었던 것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원이 멍한 얼굴로 입술을 만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문 앞에 서있던 상원의 아버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석희는 허리를 숙여 상원의 귀에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이고 사라졌다.
-잘자요. Apple선배.
그 목소리를 듣자 상원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의 화려한 술주정은 거기에서 끝이 나고 말았다.








숙취로 잠이 깨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상원은 현재 온몸으로 겪는 중이었다.
"....으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끙끙거려도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거인의 발소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싶어 상원은 침대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방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부엌에서 밥을 준비하고 계시던 어머니가 묘한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물 마시려고요"
상원이 냉장고 문을 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통을 꺼내 컵에 따르는 와중에도 상원은 어머니의 기이한 시선을 느껴야만 했다.
"..어 저.... 많이 화 나셨어요?"
외출금지를 당한 지 하루만에 친구들하고 술을 먹으러 나갔으니 당연히 혼이 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불안해 하고 묘하게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하룻밤 사이에 어머니의 뺨이 핼쑥해진 것 같아 보였다.
"너 아버지 서재에 계실테니 가봐라"
"네? 아 예"
생각해보니 어제 가게를 나온 뒤로 기억이 없었다. 상원은 혹시 자신이 술김에 부모님 앞에서 무슨 실수를 한 것인가 싶어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서재 문 앞에 서서 아버지 저예요 하고 부르자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렸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때 상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 앉아라"
아버지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상원이 기억하기로 아버지가 담배를 끊으신지가 10년도 넘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상원은 서재 문을 닫고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는 담배 한개비를 끝까지 다 피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너 말이다. 이 상원....."
"네 아버지"
손에 식은땀이 나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상원은 어제 자신이 무슨 술주정을 부린 것인가 기억해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어떤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짓을 저지른거지. 욕이라도 했나? ...막 토한 걸까? 뭐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아버지가 담배까지 피우시는걸까....설마 춤을 춘 것은 아니겠지./
"물어볼게 있는데...솔직하게 대답해라"
"예"
상원은 대답하면서도 계속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그...사람 누구냐"
"예? 누구요?"
"어제 집 앞에서... 그 사람 말이다"
상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 앞에서 그 사람이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누구 말씀하시는거에요? 혹시 동석이랑 승완이랑 대진이요?"
"아니 그 녀석들 말고"
상원은 뺨을 긁적거렸다. 그 세명을 제외하면 대문까지 같이 올 사람이 없는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저 어제 걔들하고 술 마셨어요 죄송해요. 허락 안 받고 나가서...."
상원은 일단 사죄를 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어제 너랑 대문앞에서,,,,하아"
말을 잇기가 힘든지 아버지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아들인 다음, 그는 천천히 대화를 재개했다.
"너하고 그 짓 하던 인간 말이다"
"그짓이라뇨?"
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들의 청명하고 순수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의 아버지는 말로 하기 힘든 착잡함을 느꼈다. 저렇게 착하고 올바른 아들을 앉혀놓고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에겐 너무도 힘들었다.
"....너한테 키스하던 사람 말하는거다"
"예? 키스요?"
상원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스라뇨? 제가요? 누구하고요?"
"....모르니까 내가 너한테 묻고 있는거 아니겠냐"
상원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 보앗지만 어제 조석희가 집으로 온다는 연락은 받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자신과 키스를 했단 말인가.
"말도 안돼"
상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듣고 그의 아버지도 침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도 안 되는 걸 내가 어제 목도했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럴 리가 없는데...."
조석희가 대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릴 인간도 아니고.
자신이 조석희가 아닌 다른 사람과 키스할 인간도 아니고- 물론 조석희인줄 알고 김이경과 했던 키스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럴리가 없어요 아버지가 잘못 보셨을 거예요"
상원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아"
그의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가 그걸 봤단 말이다. 내 이 두눈으로 똑똑히"
"아버지...."
"내 눈으로 본 것을 어떻게 잘못 본것이라고 넘겨버리겠냐. 아무리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도 그렇게 현실회피하고 싶지는 않다"
상원은 자신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의 아버지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런 성격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숱하게 겪었지만 그는 신념을 버리면서까지 손에 넣는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의 일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피우면서까지 저렇게 고민을 하셨다는 얘기에 상원은 미안해졌다.
하지만 아닌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저 그런데 진짜 아닌데....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신거 아니에요?"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너를 내가 들쳐 업고 왔는데?"
"그럼 키스를 한게 아닌건?"
"그럼 어제 두 다리 쭉 펴고 잤겠지"
상원은 곤혹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술에 몇번 취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술에 취한다고 아무나 붙들고 키스를 한다는 술주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조석희가 아닌 누군가에게 키스를 하겠다는 마음이 들리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상원은 조심스레 가설을 냈다.
"저기.혹시...변태를 보신거 아닐까요?"
"뭐라고?"
"저는...술에 취했다고 아무하고나 키스하지는 않거든요"
조석희가 아니라면 누구하고도 키스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집 앞에서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것도 아버지 앞에서 키스를 당했다는 사실이 영
찝찝했지만 일단 오해는 풀고 싶었다.
"만약 했더라도 그건 제 의지가 아니었을 거예요. 변태가 막무가내로 한게 분명해요. 맹세해요"
상원이 선서를 하듯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꾸며낸 거짓이 한올도 보이지 않는 그 맑은 눈망울에 그의 아버지는 근심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구나 그 변태놈이 너를... 이럴 줄 알았으면 쫓아가서 경찰에 신고를 하는건데!"
"예? 변태 놈이라고요?"
생각지 못한 단어가 상원의 혼란을 이끌었다.
"그래. 키는 엄청 크고 어두워서 얼굴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허우대 멀쩡한 사내놈이 왜 남의 귀한 집 아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서 변태짓을 해!
빌어먹을 나쁜 자식!!!"
그의 아버지가 그제야 분노를 토해냈다.
"아, 저...저 올라가볼게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원이 의자에서 일어서려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넘어졌다. 그 바람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상원아 괜찮니?"
서재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어머니가 큰 소리가 나자 안으로 달려와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요 어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상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것인지도 몰랐다. 방금 전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들은 정보가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설마 얘한테 손대신거 아니죠?"
"어머니 절대 그런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넘어졌어요"
상원이 놀라서 어머니의 손을 붙들었다.
"얘가 뭐래요? 어제 그거"
밤새 자신의 아들일을 걱정하던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술에 취한 상원을 남편이 데리고들어왔을때만해도 그녀는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늘 순종적이고 조용하던 자신의 아들이 요즘 들어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소한 반항을 하는것을 그녀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아들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했을 때 이정도의 문제는 일으켜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다운 면모라 생각해서였다. 상원을 2층 방에 늬여놓고 남편이 서리 맞은 것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때까지도 그녀는 이 사태에
대해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남편의 입을 통해 들은 얘기는 들으면서도 머리로 정리하기까지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남들과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절대 나쁜것이
아니라고 아들에게 늘 가르쳐왔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길 바랬다. 가뜩이나 이상한 불운에 휩싸여 이런저런 사고를 당하는 아들이 성적인 취향까지
소수에 속한다면 평범한 행복과는 저만큼 떨어질 것 같아 안타가웠다.
"술에 취해서 기억이 없지만 어떤 미친 변태 놈이 지나가다가 그런 것 같다는데 나쁜 녀석, 남의 귀한 집 아들한테 그딴 짓을 하다니"
"여보, 그러면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지 않아요?"
"어제 그놈을 잡아다가 경찰서에 넘겨버렸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요즘 세상에 흉흉하니 이런일도 있네요. 아들이라 걱정 안했더니"
어머니가 상원을 애처로운 눈을 하고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먼저 올라가볼게요"
하얗게 질린 상원이 입을 열었다.
"그래 가서 좀 쉬렴"
"...어제 허락 안 받고 외출한거 진짜 죄송해요. 나중에 벌 받을게요"
비틀거리며 일어서면서 상원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천사처럼 착한 아들을 두고 그가 타락의 길을 걸었으리라 잠시나마
의심했던 그의 부모님은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래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상원은 다시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신의 방과 연결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원의 머릿속을 뛰놀던 거인이 이제는 커다란 대못을 망치로 박아댔다.
방으로 돌아온 상원은 울상이 되어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처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때에는 그는 자신에게 키스를 한 것은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다.
술에 취한 남자를 덮치는 여자 얘기는 들어본 적 없었지만 그래도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남자라니 게다가 키크고 덩치가 좋은? 한술 더 떠 허우대가 멀쩡해?!
자신의 아들을 덮친 변태에게 허우대가 멀쩡하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도저히 무심코 넘길 사실이 아니었다. 정확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셨지만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아버지께 저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 매우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임에 분명했다.
상원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하면서 자신에게 키스를 할 남자는 단 두명 뿐이었다.
조석희와 김이경.
거기에 아무런 기별 없이 자신을 대문 앞에서 기다릴 인간을 추려내면 한 명만 남는다.
"....김이경"
상원은 손가락 끝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한번의 실수는 눈감고 넘어간다 해도 같은 실수가 두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은 본인에게 크나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게 벌써 김이경과 나눈 두번째 키스였다.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자신이 왜 그랬을까 후회해 봐도 어제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초조하게 자책하던 상원은 어제 입었던 코트를 뒤졌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조석희로부터 여러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걸 보니 죄책감이 깊어져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상원은 그대로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고객님의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 문자보면 연락해줘.
상원은 문자를 꾹꾹 눌러 찍어 보냈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생각해보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김이경
역시 핸드폰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으아! 진짜!"
상원은 핸드폰 폴더를 접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하필이면 이럴때 김이경도 핸드폰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어제 벌어진 일을 조석희가 눈치 채고 둘이 이미 크게 싸우고 사고가 생긴 것이라면
"안돼 그럴리 없어"
상원은 다시 단축번호 0번을 눌러 조석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전화가 꺼져있다는 안내 목소리만 들려왔다. 조금 지나자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저녁을 먹으라고 방문을 두드렸다. 머리는 복잡하기만 한데 배는 염치도 없이
꼬르륵 거리며 허기를 알렷다. 자신은 밥 먹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음식을 거부할 주제도 되지 못했다.
상원은 방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조용히 저녁식사를 했다 어머니를 대신해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올라와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조석희의 핸드폰은
꺼져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2층에서 뛰어내려서 석희네 집으로 잠시만 다녀올까. 상원은 발코니 창을 열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제 그렇게 사고를 쳐 놓고 오늘 또 나가버린 다면 자신은 진짜 인간의 자식이 아니라 개의 자식이다.
자신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던 아버지나 하룻밤 사이에 헬쑥해진 어머니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석희야-"
발코니에 서서 상원은 한숨을 쉬듯 그의 목소리를 불러보았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지기 전에 침대 위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상원은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쥐고 번호를 확인했다.
070으로 시작하는 눈에익은 숫자가 화면에 떴다. 상원은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
[선배]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좋은 목소리.
상원은 자신이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만큼 행복했다.
"응 석희야. 지금 어디야?"
[미국이요]
예상했던 대로였다. 조석희가 미국에서 전화를 걸면 항상 뭔가 복잡한 조합의 숫자가 핸드폰 화면에 뜨곤했다. 그가 미국에 갔다는 말을 듣자 상원은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무슨 사고가 생겨 핸드폰이 꺼진 것은 아닐테니.
[거기 지금 저녁인가? 아, 잠시만]
핸드폰 너머에서 유창한 영어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조석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원은 사모하는 가수의 노래를 감상하는 여고생이 된 기분으로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 됐어요]
"너 가방이 없어?"
어는정도 간단한 회화는 알아듣는 상원이 전화기 너머의 대화를 듣고 물었다.
[first class는 짐이 다른 곳에서 나온 다고 하네요 이 항공사는 처음이라 몰랐어요. 찾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first class는 비싸지 않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던 상원에게 전용 제트기를 타고 움직이는 것보다 덜 비싸다는 대답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조석희였다.
그의 경제관념은 감히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미국에 갔어?"
[일이 좀 생겨서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상원은 입을 다물었다. 조석희는 서너달에 한번쯤 미국에 갔다 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미국을 다녀온지가 이주가 안되었다. 즉, 이번 것은
일상적인 방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괜히 이것저것 물었다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면 안된다고 자신을 추슬렀다.
궁금함에 입술이 실룩실룩 움직이는 이 꼴을 전화기 너머 상대가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 안 궁금해요?]
"...궁금해"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조석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공기가 약간 흔들리는듯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별일 아니에요 누가 좀 죽어서요]
상원은 잠시 자신이 들은 말을 사전적 의미 그대로 해석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조석희는 가끔 단어를 잘못 사용할 때가 있었다.

상원은 그때마다 저 이상한 쓰임을 고쳐줘야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석희가 단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사용했다는것보다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다는 가설이 더 현실성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친척 어른 중에 한분이 돌아가셨다고요]
초여름에 밭에서 막 뽑아 차가운 개울물로 닦은 야채처럼 산뜻한 어조로 조석희가 대꾸했다.
....얘야 넌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는거니.
"그..큰일 아니야?"
[큰일은요 어차피 나이 차면 죽는거지]
"그, 그래도 고인되신 분이 좋은 곳 가셨길 빈다"
상원이 자세를 바로 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석희야"
[아니, 아니요, 그말 할때 선배 표정이 눈앞에 선하다 싶어서요.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요. 정말 오래 살다 가신 거니까. 본인도 ok하셨을 거야]
"......"
상원은 이 인간에게 보통 사람의 감성을 갖게 하는 것은 영불가능하겠구나 싶었다.
[선배랑 같이 왔으면 좋았겠지만, 선배 아직 외출 금지?]
"응 그렇지 뭐"
[별다른 일은 없어요?]
"응. 별다른 일......없어"
상원은 대답해놓고도 속이 뜨금해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제 돌아오는거야?"
[글쎄요 한 이삼일쯤 걸리지 않을까. 그렇게 복잡한 일은 아닌데 이런 일은 변호사만으로도 처리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응 그래"
그 부분이 뭔지 몰라도 상원은 자신과는 평생 관련이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보고싶어]
"....!"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상원의 얼굴이 단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빨리 갈게 선배]
"....응"
[그동안 외출금지 풀어놓건, 뭐든 해놓으라고]
"알았어 응 그럴게"
뭐든할게 석희야. 정말 뭐든 할게.
[선물은 또 초콜릿 사다줘요?]
상원은 조석희가 초콜릿 -정확히는 촤콸릿- 이라고 발음하는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응 그거면 돼"
두 사람이 사귀고 난 후 조석희가 처음 미국에 가게 되었을때 무슨 선물 받고 싶냐고 묻자 상원은 별다른 생각없이 미국이니까 미국 초콜릿? 이라고 대답했다.
조석희는 그때 한참을 웃었던 것 같다. 상원은 자신의 대답이 그렇게 웃긴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직도 그 이유는 찾아내지 못했다.
[알겠어요 사다줄게요 기다려요]
"응 그럼 언제 인천 도착하는지 나중에 알려줘"
[문자로 보낼게 선배]
상원은 너무나도 달콤한 통화를 마치고 한참을 침대에서 말없이 버둥거렸다.
"헉 이럴때가 아니지"
상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김이경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좋을 때일수록 불행한 일들을 말끔하게 정리해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그 불행이 흙발로 찾아와 행운까지 짓밟아버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상대방 핸드폰에 신호가 갔다.
[어? 선배?]
전화기 너머에서 예상치 못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이경! 너!"
[무슨 일, 아 , 잠시만요]
상원은 이번에도 아까와 비슷한 대화가 흘러나오는것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조석희만큼 자연스러운 네이티브 발음은 아니었지만 제법 유창한 영어였다.
[선배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너도 혹시 짐을 못 찾아서 물어본거야?"
[아 예. 여기는 fist class짐이 나오는 곳이 따로 있다고 하네요 원래 타고 다니는 항공사가 있는데 시간이 안맞아서요]
"거기 미국?"
[와 어떻게 아셨어요? 선배 저한테 관심 많으신가봐요]
상원은 조석희가 본인도 ok하시며 돌아가셨을것이라고 했던 친척어른이 김이경과도 무슨 연관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언제 오는데"
[한 삼사일 걸리나]
"...."
그나마 다행이었다. 올 때는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겠구나.
[저기 조석희 보인다. 저 자식 비행기 안에서 내내 눈도 안 마주치던데 선배한테 전화왔다고 말하면 쳐다보려나, 조,,,!"
"안돼!!"
상원은 큰소리로 소릴 질렸다.
"안돼 하지마 석희 부르지마 절대 부르지마"
상원이 단호하게 김이경을 뜯어 말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미묘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알았어요 안 부를게요 그런데 선배가 어쩐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하셨어요?]
"너 그날 있었던 일 말하지마, 그러면 나도.....용서해줄테니까"
[무슨 일이요?]
"시치미 떼지마. 너는 대체...하아 ..됐어. 너 귀국하면 얘기하자"
상원은 얼굴을 맞대고 단호하게 다시 거절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렇게 기계를 사이에 두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선배 지금 저한테 만나자고 하신거에요?]
"할 얘기가 있다는거지, 다른 뜻은 절대로 아니다. 오해하지마"
[하하하, 선배 상관없어요. 아무튼 그럼 한국에서 뵙죠. 선배 전화세 많이 나와요]
상원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 국제전화를 사용하고 있다는사실을 떠올렸다. 핸드폰을 로밍해 가서 아무렇지 않게 한국에서처럼 사용하는 누군가와는 사정이
다른 상원은 그럼 나중에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후우"
핸드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상원은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일단은 며칠간은 차분하게 집에서 근신하면서 머리를 식히는게 우선이었다.
할수 없는 일에 관해서 고민해봐야 자신만 손해일테니.
상원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별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하지 말아달라고.
열어놓은 발코니 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넘실거리며 들어와 그의 발끝을 간질였다.








상원은 핸드폰의 시계와 전광판에 떠있는 도착시간을 번갈아 확인하며 목을 길게 뺐다. 조석희가 문자로 알려준 대로라면 비행기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여간해서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 둘다 썩 마땅치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나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일주일을 채운것은 아니지만 며칠 간 집안일을
도우며 근신을 한 덕분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대학에 무사합격을 한 것일테지만,
상원은 다시한번 전광판을 바라보며 비행기 도착여부를 확인했다. 조석희가 타고 온다고 했던 편명 옆에 도착, 이라는 반가운 두 글자가 보였다.
그 글자만으로도 상원은 가슴이 설렜다. 삼사십분만 기다리면 그를 볼 수 있었다.
역시 바로 문자가 도착했다. 비행기가 계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기를 켜서 보낸 모양이다.
[어디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어요]
조석희답지 않은 문자였다
어디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으라니? 금방 갈테니까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가 아니고?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깝다고 공황에서 집으로 가는 리무진까지 대기시켜놓는 인간이?
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철이 든 것은 아닐테고, 에라 모르겠다. 커피가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니 상원은 그냥 그자리에 서서 조석희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한 시간 넘도록 기다려 허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끝내주게 멋진 조석희가 출국장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원은 콧노래를 부르며 출국장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한두 사람씩 캐리어를 밀고 문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바륵바륵 웃고 있던 상원의 눈에 양복차림을 하고 검은색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김이경의 모습이 들어온 순간 그의 미소는 그대로 이지러지고 말았다.
"어? 상원선배?"
김이경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물론 상원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너, 너가 왠일이야?"
"선배야말로 여긴 웬일이에요, 저 마중 나오셨어요?"
"아니 절대 아니"
상원이 민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해의 싹은 밑동부터 잘라 버리는것이 지금 상황에선 옳았다.
"흐음 그럼 누구 마중 나왔으려나"
"....."
"내 옆에서 나하고 눈도 안 마주치던 그 녀석인가?"
"...넌 왜 이거 타고 온거야, 다른 비행기도 많은데"
"이게 한국으로 오는 가장 빠른 항공편이었거든요. 서비스는 별로지만, 아 그래서 조석희가 이걸 탔구나"
김이경이 살랑거리며 눈웃음을 쳤다. 예전 같았으면 아 이녀석인상 정말 좋구나 했겠지만 상원은 더 이상 그의 가식에 속지 않았다.
"너 이리 좀 와봐"
"왜요? 석희기다리는거 아니었어요?"
"잠깐 할 얘기가...."
상원은 잠시 열려진 문틈 사이로 조석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멀리서 그가 세관을 통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빨리 와 빨리"
상원이 김이경의 팔을 붙들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는 김이경은 즐거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일인데요 선배"
상원은 주변을 둘러보고 재빨리 말문을 열었다.
"너 그날 있었던 일, 절대 석희한테 말하지마"
"네? 무슨일이요"
"그날 했던거"
"뭘 해요?"
김이경이 반지레하게 웃으며 물었다. 안경 유리에 빛이 반사되어 도저히 그의 눈빛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우리 집앞에서 ......키스한거"
".....?"
웃고 있던 입가가 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눈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너가 억지로 했잖아. 분명...난 절대 너하고 키스 같은거 안해. 맨정신으로 절대. 죽어도"
"우와, 선배 그거 진짜 상대한테 엄청 상처되는 말인거 알아요?"
"알아. 하지만 학실한게 서로를 위해 낫잖아. 나도 잊을게 피차 좋은 일도 아니니까"
상원이 단호하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김이경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요? 왜 피차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표정이었다.
"...나 너 안 좋아해"
"알아요 왜 그걸 굳이 와서 또 말해주는지 모르겠지만"
"....."
상원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김이경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원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국제전화로 전화까지 걸어서 일부러 가장 빠른 항공편을 택해
한국으로 돌아왔건만 오자마자 듣는 소리가 이거라니. 게다가 하지도 않은 키스로 나쁜 놈 취급을 받는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이 손해였다.
"좋아요 말 안할게요"
"진짜지?"
"네. 대신 선배도 제 소원하나 들어주세요"
상원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진다. 그러나 김이경은 심술을 거둘 생각이없었다. 어차피 나쁜 놈으로 찍힌 이 마당에 관용의 미덕 따윈 개나 줘버리라지.
"이상한 소원은 안돼"
"그런거 아니에요"
"뭔데"
"학교에서 절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예전처럼이라니?"
"후배처럼 대해달라고요. 미술실에서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하고"
미술실에서의 일, 은 상원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남에게 그런 식으로 독한 말을 퍼붓고 손을 휘두른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상원은 자신이 똑같이 행동할 것임을 알고 있기에 뒤에도 그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물론 때린 것은 미안하다는 사과는 했지만,
"선배가 저 후배로 안 보신다고 했잖아요. 그거 취소해요"
"...후배로 보면 되는거지?"
"네. 후배"
상원은 김이경이 말하는 저 후배라는 호칭이 대체 어떤 저의를 품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일단 지금은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알겠어 그렇게 하자"
"좋아요 그럼 나중에 뵙죠 선배"
김이경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상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 문제는 이렇게 일단락 되는....
"...!!"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아 저기, 이 이경이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
"백 년 만에 만나도 그놈하곤 인사하지마"
"응 미안해"
그 재수없는 김이경과 같은 비행기를 타서 상원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커피나 마시면서 기다리라고 한건데 자신이 짐을 찾는 사이에 두사람은 이미 마주친 모양이었다.
"내 전화는 왜 안받고"
"미안해 전화온지 몰랐어"
상원이 울상이 되었다.
조석희는 쳇 하고 쓰게 혀를 찼다 오랜만에 만난 상원의 이런 표정을 보고 싶었던게 아니었다.
"선배 나 보고 싶었어?"
미국에서 통화를 하면서도 무던히 듣던 말이었다.
"응...너무 보고 싶었어"
상투적인 물음 한마디에도 상원은 날것 그대로의 진심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온몸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애정을 드러냈다. 몇 번을 확인해도 질리지 않는 애정이었다.
조석희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상원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잡아당겨 상원에게 입을 맞추었다. 공황에 있던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두사람에게 쏠렸다. 자신이야 상관없었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상원을 위해 머플러로 그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머플러 사이로 보이는 뺨이 향긋하게 무르익어 있었다. 키스를 멈추고 다시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어 주자 상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라니 떨렸다. 조석희가 거기에도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
"가려줬잖아요"
조석희가 들고 있던 머플러를 살짝 흔들며 대꾸했다. 하지만 상원의 새빨개진 얼굴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선배"
"...응"
조석희가 상원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조석희의 품에 푹 안겨져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주변의 술렁이는 소리만 들어도 상원은 등 뒤의 따가운 시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되었다.
"석희야...차타면...."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조석희가 상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한 피로가 그대로 몰려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상원은 조심조심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조석희는 한참을 그대로 상원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러 들어간 조석희를 상원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캐리어 가방을 정리하고 나서 거실에
있던 상원에게 목례를 하고 나갔다.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간 이 집에 드나들면서 일을 하는 아주머니와 얼굴을 마주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처음에 상원은 아주머니가 말을 아예 못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아주머니가 냉장고에 갈비를 재워두었으니 불에 올려서 익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그에게 했을때,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책을 놓칠뻔했다.
"뭘 또 90도로 인사를 해요"
'어?"
샤워를 마쳤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조석희가 거실로 나왔다. 브리프 한장만 입고도 그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상원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감기걸려 옷 입어"
"이 정도로 감기 안걸려요"
조석희가 소파에 앉았다. 상원은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잡지를 읽는척했다. 페이지를 넘기고 있지만 저쪽에 앉아 있는 조석희가 신경쓰여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상원은 아까부터 언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어떻게 애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일단 김이경의 실수를 막아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평생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그러나 상대를 기만하는 것을 상원은 체질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말을 해야 하긴 하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
"선배"
"으응?"
그가 자신의 옆을 탁탁 손으로 두드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상원은 잡지를 테이블위에 내려놓고 그 옆으로 가 앉았다. 조석희가 상원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고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에서 주식시세와 이달의 증권에 관한 정보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조석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심둥한 어조로 말했다.
"선배가 돈이 있으면 종목을 추천해주겠는데"
"종목?"
"주식이요"
"주식 같은거 하면 안돼.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잖아"
상원이 절곡한 눈으로 대답했다. 잠시 표정이 굳어 있던 조석희가 큭큭 거리며 그렇죠, 한다.
"패가망신하죠 맞아요 패가망신"
"...진짜야 우리 아버지 친구 분들 중에 주식 때문에 망하신 분들 꽤 계셔"
"그래 맞아. 그러니까 선배는 그렇게 위험한 주식은 하지마"
"응 하지 말아야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상원을 보며 조석희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친척 어르신의 사망으로 인해 외가 쪽 기업의 지분 문제가 조금
복잡해졌다.  그것 때문에 주주총회가 열리고 이런저런 모임에 불려가게 되었는데 그때 스치듯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한국의 모 기업을 합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해당기업의 주식이 30%이상 오를텐데 자신이야 이 이상 재산을 불릴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하지만 상원에게 귀띔이라도 해줄까 했던 건데,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니.
"선배 부모님 한번 뵙고 싶네요"
"우리부모님? 인사드리려고? .....음 후배라고 소개시켜드려야 하나? 갑자기 말씀드리면 놀라실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상원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또 너무 앞서가는군"
"응?"
"그렇게 본다는게 아니라 그냥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고, 대체 어떤 환경이면 선배같은 인간이 생길 수 잇는건지"
"나? 내가 왜?....이상해?"
"이상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민망함에 상원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좀 이상한가 하하"
"귀여워"
목덜미를 문지르던 손이 우뚝 멈췄다. 상원이 고개를 푹 숙였지만 붉어진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조석희가 그런 상원의 귀에 대고 몇번 더 귀여워, 귀여워 선배. 라고 말했다.
심장이 터져 버릴것 같아서 상원은 눈을 질근 감았다. 귓볼에 스칠 듯이 움직이던 조석희의 입술이 뒤로 물러갔다.  
"선배 선물 맘에 들어요?"
"...어?..응 맘에 들어"
사실 선물을 받긴 했지만 상원은 뜯어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였다. 굳이 포장을 뜯지 않아도 케이스의 모양이나 달콤한 냄새만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였다
"뜯어보지도 않고?"
"집에 가서 뜯어보려고 했어"
"보지도 않고 마음에 든다고요?"
"응 네가 준거면"
가끔 이런 식으로 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키스 한번에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얼굴을 붉히는 주제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조석희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뜯어봐요 먹어봐"
"알았어 같이 먹자"
상원이 초콜릿 박스를 싸고 있던 고급스런 금색 포장지를 뜯어냈다. 상원이 하나를 집어 조석희에게 먼저 준 다음 다른 하나를 꺼내 자신의 입에 넣었다. 무엇을 먹든 그는 자신이 먼저
먹는 법이 없었다.
"선배는 그런데 왜 매번 선물이 초콜릿이야?"
조석희가 초콜릿을  끝을 깨물어 먹으며 물었다. 갖고 싶은 선물이 없냐고 묻자 상원이 미국 초콜릿이라는 대답을 해서 정말,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음, 아버지가 출장 가셨다 오시면 항상 나는 초콜릿을 사다주셨거든. 내가 어릴때부터 초콜릿을 좋아해서, 어머니는 향수를 사다주시고"
어머니는 향수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향수를 사다주시면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향수를 늘 보석처럼 조심스레 다루며  소중히
보관했지만  한번도 사용하지는 안으셨다.
상원은 그것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같아서는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을것도 같았다.
조석희가 주는 선물은 모두 소중했다.  너무나 소중해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자체가 상원에겐 선물이었다.
"초콜릿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그래"
"좋아 죽겠다는 표정"
"안 그랬어 내가 언제...."
"그랬어요 난 그 표정에 익숙하거든"
조석희가 상원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자신의 무릎에 앉히며 말을 이었다.
"항상 선배는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잖아"
"...."
상원은 등 뒤로 느껴지는 조석희의 맨살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선배는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나거든요... 음 특히 여기"
조석희가 상원의 목덜미에 코를 댔다. 축축한 호흡이 머리카락과 엉겨붙어 민감한 목덜미를 간질였다. 아래에 비벼지는 감각까지 더해 상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조석희가 상원의 목덜미를 물고 빨며 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더듬었다.
"여기 꼿꼿하게 섰어요"
힘을 받아 모양이 또렷해진 작은 돌기를 손톱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한다. 상원은 점점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릎에 앉히며 희롱당하는 것은 또 다른 수치심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 먹어봐도 돼요?"
일부러 묻는다.
상원이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옷 올려봐요 선배가...응 그렇게"
상원은 그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옷을 걷어 움켜쥐엇다. 조석희가 상원의 몸을 들어 자신과 마주보게 만든다음 그의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할짝거리다가 이빨로 질근질근 깨물었다.
신음소리를 내는것을 참으려 했지만 목 안쪽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원은 그런 소리를 내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왜 그래요"
"....."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상원이 대답하지 않자 조석희는 다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일부러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았댔다.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쪽 가슴에만 집중되는 자극을 상원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간신히
참아냈다. 조석희가 손가락 끝으로 다른 쪽 가슴돌기를 슬근슬근 문질렀다. 피부에 어린 열기를 그 정도의 손길로는 풀어낼 수가 없었다.
"..석희야"
"왜요 선배"
애를 태우려는듯 일부러 무심하게 묻는다. 상원은 자신의 입으로 다른쪽 유두를 만져달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해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조석희는 어울리지도 않는 배려심을 발휘해 끈질기게 이유를 물었다.
"제가 만지는게 싫어요? 싫어서 그래? 선배?"
"아니, 싫지 않아"
"그럼 왜 그래요 표정이 왜 그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표정에는 다정함의 기색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알면서도 상원은 매번 그 거짓 다정함에 넘어가고 만다.
"좋아서 그래...."
"어디가 좋아요?"
"...네가 만져주는곳"
"제가 어디를 만져줬는데요?"
상원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부근을 가리켰다.
"만져줘서 좋았어요?"
"..."
"아니면 입으로 빨아줘서 좋았어요?"
",,,,입으로 해줘서 좋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입으로 이런 야한 말들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얼굴에 피가 몰려 화끈화끈 했지만 상원은 조석희가 원하는 대답을 모두 들려주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게 상원의 지고지순한 마음이었다.
그것이 설사 음담패설이 된다 할지라도,
조석희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초콜릿 박스에서 초콜릿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상원은 가만히 그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입 벌려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두려움을 갖고도 상원은 착한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 안으로 조석희는 들고 있던 초콜릿과 함께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다물지 말고 가만히 있어"
상원은 눈만 뎅글뎅글 뜨고 겁에 질린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조석희는 기분이 좋아졌다. 무서워하면서도 자신이 시켜면 어김없이 그대로 해주는 상원의 태도에 흠족함을 느낀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초콜릿을 지근지근 녹여 상원의 입 안에 덧발라 주었다. 입이 벌어져 있어 마저 삼키지 못한 침이 상원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석희가 입을 대어 그것을 핥아댔다.
입안에서 꾸덕꾸덕하게 녹은 초콜릿을 조석희는 손가락에 쿠욱 찍어 발랐다.
"허리 좀 들어주세요"
"...?"
상대가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몰라 의아하단 얼굴을 하면서도 상원은 엉거주춤 허리를 들었다. 조석희는 망설임 없이 상원의 바지를 벗기고 다리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 초콜릿을 치덕하고 발랐다.
"서, 석희야!"
아무리 조석희를 사모해 마지않는 상원이라 할지라도 말릴 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초콜릿을 그런곳에 바르다니 하늘과 땅이 뒤바꿔도 용납되지 않을 행위였다.
"하지마 더러워"
"어디가 더러운데"
"...거기"
조석희가 자꾸 손가락을 집어넣으려고 하는통에 상원은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여 피했다.
"그 더러운 곳에 넣고 싸는 저는 뭐예요 그럼"
"그래도.... 하지마, 선물을....그런데다 그러지마"
상원은 조석희의 어깨를 두손으로 붙들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겪어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기본적으로 상원은 조석희의 페니스를 제외한 다른 것을이
뒤로 들어오는 것을 엄청 꺼려했다. 애널 섹스도 처음에는 이상하고 무섭다는 이유로 필사적으로 피하는 것을 조석희는 늘 애 달래는 유치원보모가 된 심정으로 꼬여내 다리를 벌리게 했다.
좀 더 이런저런 일들을 같이 하고 싶은데 상원은 조석희의 기준에서 진도가 너무 느렸다.
"해도 돼요"
"안돼 미국하고 한국은....달라"
상원은 걸핏하면 양국의 문화차이를 주장했다. 물론 조석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논리였다.
"왜 싫어요?"
귀와 뺨에 입을 맞추며 조석희가 물었다. 곤란한 질문을 던져 대답을 하게 만들때, 그가 상원을 달래는 방법이었다.
"....더러워"
"그런식으로 말하면 더럽지 않은게 없지. 선배 내 페니스도 더러워?:
조석희가 팬티위로 불룩하게 솟아 있는 살덩이를 가리키며 묻는다.
"아니..."
"입증해봐요 거짓말 아니라고"
조석희가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댄다. 그러자 제스처의 의미를 바로 파악해버린 상원은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거짓말 한거예요? 선배?"
"아니야.... 그렇지 않아"
조석희가 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거만한 눈동자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상원은 정확히 읽어냈다. 손을 뻗어 그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반쯤 힘을 받은 성기가 튀어 나온다. 상원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것을 입에 물었다.
샤워를 하고 나왔지만 수컷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뻣뻣한 체모가 뺨에 닿을 정도로 무성했다. 상원은 정성스럽게 털을 헤집어 곧추선 남자의 살덩이를 손에 쥐었다. 부드러운 살갖에
이가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혀를 움직여 조석희의 성기를 적셨다.
"...입술 모으고 빨아요 네 목구멍 끝까지 넣어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은 조석희가 희미하게 눈을뜨며 이런저런 음란한 지시를 내렸다.
상대의 서투름이 흥분을 부추겼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상원은 여전히 이런 행위에 어린아이처럼 서툴렀다.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상원의 얼굴은 유난히 어려보인다. 조석희는 손을 뻗어 상원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상원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 정도의 손길로도 느끼는 것이다. 남자들이 꿈꾸는 여자의 상이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창부라고 하던가. 성직자처럼 고결하고 단정한 얼굴을 한 상원이 창부처럼 다리를 벌리고 쾌감에 젖은 교성을 내지르는 모습은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서투른 펠라에도 그는 벌써 입안이 마를 정도로 욕망을 느꼈다.
"선배...."
흥분에 들뜬 목소리.
상원이 고개를 들었다. 조석희의 내리감은 눈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돈다. 그가 진심으로 흥분했음을 확인한 상원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순간 상대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상원은 행복했다.
그가 상원을 일으켜세웠다. 흘러내린 바지 사이로 보이는 속옷위가 도톰하게 부풀어 올라 있는것을 보고 조석희가 물었다.
"선배도 제 것 입에 물고 무슨 생각하셨어요 이렇게 세우고"
"아니 이건 그냥...."
아까 전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것이라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조석희는 차분하게 상대의 대답에 귀 기울여 듣고 잇을 성격이 아니었다.
"선배가 빨아서 제 좆에도 초콜릿이 묻었네요"
"미안해 닦아 줄게"
상원이 허둥지둥 티슈를 찾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케이스를 찾고 손을 뻗으려던 그는 등 뒤에서 잡아끄는 힘에 의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괜찮아요 어차피 넣을건데"
"뭐?"
"선배 안에서 도달하고 싶어요, 선배 뱃속에 제 자지를 넣고 내장에 흠뻑 싸고 싶어요"
"...석희야"
그냥 하자고 한다디만 해도 응해줄 텐데, 대체 왜 저런 상스러운 말들을 쏟아내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저질스럽고 음란한 말을 지껄이면서도
그는 여전히 귀족과도 같은 고아한 아름다운 눈을 하고 있었다.
저눈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넘어갔을까.
상원은 스스로 조석희의 무릎에 올라가 앉으면서 씁씁한 아픔을 느꼈다. 이런 순간에도 여자처럼 질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상대가 눈치 채지 않길 바랬다.
"좋은 냄새"
밀착된 몸으로 흔들리는 조석희의 웃음소리가 느껴졌다. 그는 상원의 엉덩이 사이에 자신의 성기를 가져다대고 천천히 밀어넣었다. 불룩하게 부푼 귀두 끝이 구멍에 걸쳐져 억지로 몸을 벌렸다.
상원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조석희를 좋아해도 이 순간만큼은 죽어도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천천...히"
"못해... 나 흥분해서 금방 갈 것 같거든"
그말과 동시에 굵직한 살덩이가 안으로 무지막지한 기세로 쑤셔넣어진다. 갑작스런 삽입에 상원의 입술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넣기만 했는데...머리끝까지 저릿해. 선배 안 엄청 축축하고 조여요"
조석희가 상원을 끌어안고 조요한 목소리로 감상을 들려주었다.
"무슨 맛이에요?"
"...어?"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상원이 얼뜬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선배 아래로 초콜릿 먹고 있잖아. 맛있냐고 묻고 있는거예요"
조석희가 허리를 움직였다. 상원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입술이 겹쳐졌다. 두툼한 혀가 상원의얇은 입술 여기저기 핥았다.
"나는 선배 맛있는데....하아 갈 것 같아"
그가 달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허리를 짧게 연달아 올렸다. 아래부터 달콤하게 마비되는 그 감각에 상원이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조석희가 몇번이나
갈 것 같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해도 그는 절대로 쉽게 끝내지 않음을 상원은 수 많은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응...하아...아..아, 응 흣"
허리가 흔들리면서 상원의 신음소리도 이러저리 흔들렸다. 조석희는 꼿꼿하게 선 상원의 유두를 이빨로 잘근잘근 씹었다. 아프다고 울먹이며 말했지만 그는 나폭하게
상원의 엉덩이를 움켜쥘 뿐이었다.
"아파...응 . 아흣.. 윽 읏..."
"그래도 좋죠?"
"하...아"
"빨리 그래도 좋다고 말해요...빨리"
조급하게 재촉하는 목소리에 상원은 돌기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대답했다.
"좋아...하아..좋아"
"선배 애널 초콜릿 맛있게 먹는데요. 개걸스럽게 벌름거리면서"
초콜릿이 쿠퍼액과 뒤섞여 질척거리는 음란한 소리를 냈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상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게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그럼 뭐가 맛있는건데 응?"
다정한 목소리.
땀에 젖은 손바닥이 상원의 등을 쓸어내리자 오싹한 욕막이 전해졌다.
덫이었다.
상원은 먹이에 독이 들어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베어 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다.
안을 빠듯하게 누르고 있는 성기의 크기를 봐서 이미 상대가 흥분할 대로 흥분해 있다는 것이 뻔한데 그의 얼굴은 차분하기만 하다. 욕망을 저렇게 까지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같은 남자로서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욕망의 끝이 어디에 다다를지 알기에 상원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니가 맛있어"
조석희의 시원한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하지만 만족스럽단 표정은 짓지 않았다. 상원은 그가 자신이 기다리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집요하고 음흉하게 자신을 괴롭힐 것임을 알고 있었다.
"네가...네 흥분한 자지..."
조석희가 천천히 허벅지에 힘을 주어 허리를 들어올렸다. 살갗이 부딪힐 때마다 몸 전체에 전해지는 열기에 상원은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하아...좋아.... 해줘"
"you need to explain it in the concrete" (구체적으로 말해봐)
영어가 이렇게 섹시한 언어라는 생각은 전에 해본적이 없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혀가 굴리며 만들어 내는 음성이 달팽이관을 지나 뇌로 전달되며 몸 전체에 달콤한 소리를 퍼지게 해주었다.
상원은 약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한 눈을 하고 천박한 말을 내뱉었다.
",...안에 해줘, 내 안에 뜨거운 정액을... 잔뜩 싸줘.... 제발"
조석희가 그제야 만족스런 포식자의 얼굴을 하고 상원의 몸을 바싹 끌어 안았다. 남자의 욕망을 다스릴 이유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상원은 아래가 찢어질 듯이 거칠게 거듭되는 추삽질에 직전까지 발휘된 상대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해야 했다.
조석희는 자신을 그렇게 자유로이 놓아버렸다.

















배부근에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와 닿는 느낌에 눈이 떠졌다.  따끈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상원의 몸을 닦아주고 있던 조석희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할게"
설득력없는 목소리였다. 상원은 목에 손을 대고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찮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거니까. "
그렇게 말하고 조석희는 상원의 배는 물론이고 다리사이 그리고 아래까지 꼼꼼이 닦아주었다. 누워서 고스란히 몸을 닦이는 처지에 놓인 상원은 민망함에 베게에 고개를 묻었다.
차라리 다 닦이고 난 다음에 눈을 뜰걸.
"아....!"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놀란 상원이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제가 안에 잔뜩 싸 놓아서.,... 나오네요"
안에서 손가락이 돌아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몸안에 있던 정액이 조석희의 손가락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방울져 나오는 정액이 시트를 적셨다.
"시트...더러워져"
"어차피 세탁할 건데 뭐"
"...."
이 시트를 세탁해주실 분과 가끔 얼굴을 마주치게 될텐데....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지 상원은 벌써부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만 빼"
아직도 안에서 휘저어지고 있는 손가락 때문에 상원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남으면 선배 고생하잖아요, 아, 다 나왔다"
조석희가 수건으로 정액이 흘러나온 상원의 아래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됐다고 몇 번을 뜯어 말렸지만 다시 새수건에 물을 적셔와 다시 말끔하게 마무리해주었다.
"오늘 주무시고 가실거죠?"
"....응"
이 몸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몇 번을 한것인지 세번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얼마간 떨어져 있었다가 보게 되는 날이면 조석희는 이렇게 지쳐 혼절을 할때까지 자신을
안았다. 상원은 그래서 일부러 오늘 집에서 나올 때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말을 하고 나왔다.
조석희가 상원의 옆에 몸을 모로 세워 누웠다.
"잘 됐군요, 오늘 잠은 푹 잘수 있겠네"
거의 며칠간 두 시간도 채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수면욕이 먼저였겠지만 조석희는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상원을 본 순간 성욕이 한계치까지 치솟아 버리고 만 것이다.
땀에 젖은 상원의 몸에서 그가 좋아하는 체향이 났다.
조석희는 상원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이거 없이 지내온 과거의 시간들은 이젠 기억의 어떤 곳에도 자리 잡지 못할 것 같았다.
"석희야 있잖아...."
말랑말랑한 수면의 부근에서 조석희가 응 하고 대답했다.
"나 허락 받았어"
"....응"
"....그러니까 언제부터 들어와야 하는지 알려줘"
"응... ...... 잠깐, 뭐라고요?"
조석희가 눈을 떴다. 혼곤하게 흐려지던 의식이 명확한 사고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기 언제부터 들어와도 되는지...입학 전날에 들어오는게 나으려나?"
어렵게 받은 허락이었다. 처음에 부모님께 나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을때 두분 다 펄쩍 뛰셨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너의 특별한 사정도 있기 때문에 절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 두분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상원은 차분하게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못난 자식을 믿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앞으로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고, 여기까지는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이 합격한 학교는 전국에서 내노라는 수재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니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다, 후배의 집이 학교 근처에 있는데
물론 이 후배도 서울대 경영대에 합격한 학생이다. 통학하는 시간도 줄여 공부에 몰두하고 부모님께 폐 끼치는 것도 줄일겸-- 여기서는 양심의 가책을 마구 느꼈다-- 나가서 살겠다.
그리고 혹시 그 변태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으니 --양심의 가책이 절정에 이르렀다.--- 집에서 당분간이라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내고 싶다.
상원의 설명을 들은 그의 부모님은 의논을 해보겠다는 대답을 한 후 그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다음날 아버지가 그럼 한 학기 동안은 밖에서 생활해 보라는 허락을 해주신 것이다.
"일단 한 학기동안만 허락받은 건데 그 후의 일은 어떻게든 되겠지"
상원의 말을 듣고 있던 조석희가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상원은 불안해졌다. 혹시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가 싶어 얼굴이 하얗게 질려 그는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저기...불편하면 말해, 나 안들어와도 돼. 너희 집에서 학교가 더 가깝긴 하지만, 우리 집에서도 그리 먼 것은 아니고 ... 나 생각보다 방 어지럽히니까...아무튼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
상원은 으스러질 듯 강하게 껴안는 힘에 숨을 들이켰다.
"선배...내일 아니 오늘 들어와"
"뭐? 안돼. 나 짐도 아직..... 너도 빈방 정리 안 해놨잖아"
"해놨어요"
"뭐?"
"선배 방 두개 비워놨어요. 마음에 드는 걸로, 아니 두개다 쓰셔도 돼요"
"...석희야"
상원의 눈에 상대에 대한 연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자신을 위해 빈 방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발언이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든 것이다.
조석희가 상원의 정수리에 키스를 해주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에 상원은 눈물이......
"선배"
"응"
"집에서 쫓겨나신 거죠"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아니"
아, 그래요? 하고 되묻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어쩐지 아쉬워 하는 눈치였다.
"....내가 쫓겨났으면 좋겠어?"
"네"
"...."
이제는 그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귀찮은 거구나.
"저는 선배가 기댈 곳이 저밖에 없었으면 좋겠어요"
조석희가 솔직하게 자신의 독점욕을 드러냈다.
"선배가 제 집이 아니면 갈 곳이 없고, 저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나 한테만 웃고 나하고만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가족이고 뭐고 나만 봤으면 좋겠다고 선배.
그러니까 다른 연놈한테 한눈 팔지마. 누구든 선배한테 손대면 그 손을 잘라버릴거야. 이건 내거니까"
섬뜩하게 이어지는 집착어린 고백에 상원은 술김에 저지른 실수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겠다고 아주 잠시라도 생각했던 자신의 멱살을 짤짤 흔들어 주고 싶었다.
"그 손을 잘라서 박제로 만든 다음 선배 방에 걸어줄거야. 매일매일 그 밑에서 섹스할 거라고 알겠지?"
"...."
김이경의 손 밑에서 섹스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오싹한 생각에 상원은 굳게 다짐했다.
이 비밀은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고.
늘 생각하지만 끝내주게 잘 생긴 조석희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리고 달콤 쌉싸래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럼 짐은 다 간거니?"
"예 옷이랑 책만 옮기는 건데요 뭘"
자신이 들어간다고 얘기한 다음 날 빈방에 가구까지 채워넣은 집주인의  용의주도함에 상원은 결국 두손을 들게 되었다. 입학전에 들어와 새집에 익숙해지라는 것이
집주인의 친절한 제안이었다.
"정말 집세는 안 내도 되는거야? 아무리 친해도 집세는 줘야 하는거 아니니?"
"음 그러게요"
집세를 내겠다고 말해보았지만 조석희는 코웃음을 쳤다. 그까짓 푼돈을 받아서 뭐해, 라는 말을 굳이 돌려서 얘기하는 예의도 갖추지 못한 인간이 조석희였다.
"그 후배는 뭐하는 학생인데 그 큰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거니?"
"부모님이 외국에 계셔서 혼자 지내는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집이 원래 조석희가 혼자 지낼 목적으로 구한 집이란 사실만 제외하면.
"학생 혼자서 고생이 많겠다. 엄마가 반찬 좀 해서 일주일에 한번씩 가져다 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거기 일하는 분이 계셔서 반찬 같은건 다 해주신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괜찮겠어?"
다 큰 아들 보내면서도 어머니는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상원은 웃으며 괜찮다고 몇 번이나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마지막 옷 짐을 싣고 상원은 부모님께 인사드렸다.
"주말에 올게요"
"전화 자주하고 ,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상원이가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걱정되잖아요"
"전화 드릴게요 가서도 바로 전화드릴게요"
상원은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문제를 일으키는 성격은 아니어도 문제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체질이니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요즘은 그나마 넘어지고 다치는 일은 예전보다 덜 했지만 사고의 발생빈도가 범인보다 훨씬 높은 것은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상원은 웃는 얼굴로 자신의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저 가볼게요, 짐 정리 좀 하고 연락드릴게요"
상원이 이사 날짜를 미루지 못하도록 이사차까지 수배해 보낸 조석희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현관앞에서 자신을 배웅하는 부모님께 또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상원은 차에 올라탔다.
집에서 나와 다른 사람과 살아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상원은 멀어지는 자신의 집을 뒤돌아보며 묘한 감상에 젖었다.
어쩐지 부모님을 속이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어디쯤이에요 빨리 오세요]
그러나 조석희로부터 온 한통의 문자가 우울한 기분을 희석시켜 주었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불초 소자는 이 문자 한통을 연달아 세번을 읽고 또 읽을 만큼 얘가 좋습니다.
상원은 지금 가고 있다고 조석희에게 답문을 보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상원은 운명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눈만 마주쳐도 하루가 행복하던 짝사랑 상대와 동거라니.
자신처럼 운이 없는 인간에게 다시 오지 않을 행운이었다. 상원은 손바닥으로 뺨을 철썩 치며, 소중한 행운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생각보다 짐이 없네요"
"응 가구도 별 필요 없고 책하고 옷만 있으면 되는데 뭐"
상원이 가져온 짐을 조석희는 심상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석연찮은 태도였다.
"이 중에서 선배가 제일 아끼는 물건이 뭐예요?"
"뭐?"
"가장 아끼는 물건이 뭐냐고요"
대화라는 것은 흐름이 있다. 던져지는 말에는 숨겨진 이면이 있어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거나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이 대화이다.
지금 상원은 자신이 지난 대화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고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끼는 물건?"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차원에서 되물었다.
"네"
조석희가 상원의 짐을 살피며 대답했다.
"글쎄 이건가?"
상원이 몇 개 챙겨온 CD중 하나를 꺼내며 대답했다.
"좋아하는 가수에요?"
조석희가 CD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CD한장이 상원에게는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고 하니 궁금증이 동한 것이다.
"응 좋아해. 그거 싸인 받은거야. 콘서트 갔다가 운이 좋아서 싸인CD받은 거야."
상원은 그날의 행운을 잊지 못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간 것도 기분이 좋았는데 좌석번호가 행운권에 당첨되어서 싸인 CD까지 받았으니 주변에 종종
자랑을 늘어놓을 정도로 운이 좋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조석희는 마뜩찮은 눈을 하고 CD케이스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가사집을 꺼냈다.
"잘 생겼어요?"
"잘생겨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노래가 좋으니까 좋은거야"
"다른 놈이잖아. 저번거랑,이건 누구예요"
"루시드 폴, 노래 좋아 한번 들어봐"
"귀찮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조석희는 CD를 돌려주지 않았다. 짐을 정리하면서도 상원은 그가 언제  CD를 돌려줄까 기다렸지만 그는 끝까지 그걸 들고 있었다.
"그거 여기 넣어둬야 하는데"
책 정리까지 마친 상원이 돌아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조석희가 손에 들고 있던 CD를 들어 보이며 이거요? 하고 묻는다.
상원이 손을 내밀었다.
"아 , 이거 저 빌려주세요"
"응? 아까 안 듣는다고 하지 않았어?"
"예"
"...그런데 왜 빌려가?"
조석희가 소리없이 웃었다.
아름답고 사악한 옆모습을 보던 상원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 인질로 잡혔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만에 하나 자신이 집을 나가기라도 하면  CD는
다시 볼 수 없겠구나. 미안하다 싸인CD야. 내 생각이 짧았다.
"배고프시죠? 밥 먹고 섹스할까요? 아니면 섹스하고 밥 드실래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던져진 질문에 상원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냥.... 그거 밥만 먹으면 안 되는거야?"
아직 해가 지지도 않은 초저녁이었다. 아직 짐정리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몸을 겹치게 되면 오늘 하루는 날려버리게 되는 셈이었다.
상원의 곤란함을 읽은 것인지 만 것인지 조석희는 그럼 밥 차려놓을게요. 라고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결국 그의 말 어디에서도 오늘 섹스는 건너뛰겠다는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상원은 조그많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단한 하루를 예감했다.











조석희가 잠든 것을 확인한 상원은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 맡에서 그의 숨결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지만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거실로 걸어 나오긴 했는데 혹시라도 조석희가 잠에서 깰까봐 불은 켜지 못했다. 상원은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초저녁부터 격렬한 섹스를 했던 터라 도중에 잠이 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이 반이나 남아있었다. 성격상 일을 하다 끝마치지 못하면
신경이 쓰여 다른일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이사 첫날이라 평소보다 더 신경이 곧두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맘 같아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짐정리를 싹 마치고 싶었지만 이 새벽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신병자로 낙인찍일게 분명하다 아니, 이전에 조석희를 잠에서
깨우는 짓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조석희는 하루에 5시간 이상 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 그는 하루에 다섯시간을 자는 것도 자신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 기적을 방해하는
인간은 남녀노소 지위를 막론하고 엄청난 분노가 쏟아졌다. 잠을 자게 만들어 주는 상원에게는 대놓고 화를 내지 않았지만 몇 번 실수로 침대에서 움직이다 그의 팔이나
다리를 밟아 잠을 깨웠을때 보였던 눈빛은 ----
"에비-!!"
머릿속에 떠오른 조석희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몰아내며 손을 내저었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석희를 볼때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성격이 저렇게까지
모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함 없이 자랐을 텐데 아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겠지.
뛰어난 두뇌와 운, 외모와 재력을 가졌으니 그래서인지 하나를 좋아하면 여간해선 질리지 않는 자신과는 다르게 그는 뭐든 쉽게 질려했다.
상원은 길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조석희가 끈질기게 동거를 하자고 권유를 해서 같이 살기 시작했지만 과연 이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이런데서 뭐하세요"
"헉!"
갑작스럽게 자신의 목을 끌어안는 손 때문에 놀란 상원이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에서 덜깬 눈을 한 조석희가 그곳에서 불퉁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서, 석희야"
"뭘 그렇게 놀라 이 집에 선배 아니면 나밖에 더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자는 줄 알았어"
조석희는 상원의 뺨을 쓰다듬는 손을 더두지 않았다. 상원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으며 들어가서 자, 하고 말을 이었다.
"선배 근처에 없으면 깊게 잠 못자는거 알면서 그런 소리하네"
그 말은 상원에게 양날의 검 같았다. 조석희가 자신을 필요로 해준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서글펐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의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는데
가끔은 혹시 그것 때문에 사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왜 여기서 혼자 청승을 떨고 있어요?"
"아, 그냥 잠이 안와서"
말을 하는 와중에 조석희가 상원의 눈꺼풀 위에 부드럽게 두어번 입을 맞추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스킨쉽을 해왔다.
상원은 그럴때마다 당혹감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몰라했다.
"불면증?"
"아니 그런건 아니고  그냥 이사 첫날이라 좀 긴장되나봐"
얼굴에 닿아있던 입술이 슬며시 웃는게 느껴졌다.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 밑으로 손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재워드릴께요"
"응?"
어떻게 재워줄 것인지 묻기도 전에 조석희는 상원을 소파에서 번쩍 들어올렸다. 공중에 들어올려지며 상원은 소긍로 혀를 찼다. 체격차가 있다고 해도 자신의 키가 180에
가까운 남자인데 그런 몸을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안아 올린 상대에게 감탄했다.
조석희는 상원을 안고 침실로 들어와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시트를 끌어 상원의 몸에 덮어주고는 자신도 그 옆에 모로 누워 그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자 이제 자요"
"...."
참으로 무성의한 남자였다.
흔한 자장가도 없고 손으로 토닥여주는 정성을 보이지도 않았다. 상원은 시트 안에서 눈만 뎅글뎅글 뜨고 자신의 옆에 누운 남자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유려한 선이
시선을 끌었다.
"잠 안와요?"
"...응"
"...나는 졸린데"
그가 상원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상원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조석희의 숨결에 가슴이 떨렸다.
좋겠다. 나는 니 냄새만 맡으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정신이 번쩍 드는데....
혹시 자신의 체향이 자신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하고 손등에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조석희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자요?"
"...."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상원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자는 척을 했다.
"자는 척 하는 거예요?"
"...아니야"
"내 불면증이 옮기라도 했나"
조석희가 상원의 몸을 바싹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목덜미를 만지는 손의 움직임이 다정했다.
"그러면 좋겠다. 그래서 네 불면증이 나으면 좋을텐데"
상원은 저도모르게 불쑥 진심을 입 밖으로 냈다. 조석희가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뭐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너 힘드니까"
"그렇다고 ......됐어요, 불면증 같은게 뭐 좋다고 그걸 옮겨. 선배 같은 사람은 정신병원 신세 지게 될걸"
그렇게 말하는 조석희의 말투가 차가웠다. 상원은 괜한 말을 꺼낸건가 하고 후회되었다. 묘한 침묵이 어둠 속에 머물렀다.
상원은 눈을 감고 어서 잠에 빠지길 기다렸다.
"선배"
"응"
"재미있는 얘기해봐요"
"....."
잠을 재워주겠다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조석희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애초에 재단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떠올리고 상원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무슨 얘기?"
"글쎄 선배가 나 몰래 짝사랑 할때 스토커 하던거?"
"...스토킹 안했는데...."
소심하게 항의해봐도 소용없었다. 조석희는 상원의 어깨에 코를 문지르며 다시한번 나른한 목소리로 졸랐다.
"스토킹하던 얘기나 해봐요"
"별 거 없어"
조석희가 상원을 안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닥치고 애기하라는 의사표현이었다.
상원은 머릿속으로 이제는 먼 옛날같은 지난날의 일을 떠올렸다.










주변을 돌아보자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자신인 귀신 옷으로 갈아입혀지고 학교 뒷산으로 올려보내졌다. 모두 제비를 잘못 뽑아
생긴 불행이었다.
시계도 핸드폰도 챙기지 못했다.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축제 이벤트의 일환으로 담력훈련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학생회 임원들이 그 일을 주관해 집무를 맡게 된 것까지도 괜찮았다. 그러나 귀신 역이 필요하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말이 나왔을때부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상원은 어김없이 끝이 빨간색으로 칠해진 나무젓가락을 뽑아들었다.
오컬트가 자신에게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설명할 기회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뒷산에 세워진 허름한 교사 2층 구석에서 학생들을 기다리게 된 그는 공포감과 긴장, 정신적인 부담으로 인해.....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나고 나니 사방이 새카만 어둠이었다. 아래층에서 같이 귀신역할을 하던 학생회 후배들이 아직 있는 것은 아닌가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허름하고 어두컴컴한 교사를 당장이라도 벗어나 학교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상원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옷 때문에 초여름임에도 한기까지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이성을 잠식한 공포때문에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상원은
차라리 이대로 기절해서 내일 아침에 눈뜨길 기도했다. 움크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청각이 예민해졌다.
상원은 교사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뒤이어 두런두런 이어지는 말소리는 분명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잇음을 확신시켜주었다.
"...!"
상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날이 밝을 때까지 아래로 내려갈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지금 올라오는 사람을 잡아야 했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교태어린 여자의 웃음소리 뒤에 낯익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두사람이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오자 상원은 자신이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음을 확신했다.
계단 앞에 선 상원이 자신이 알고 있는 후배에게 인사를 먼저 해야 할지 상황 설명을 먼저 해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교사에 울렸다.
상원은 아차 싶었다. 자신의 차림새가 상대편에게 충분히 오해를 살만하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다.
"난...."
상원의 고민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말을 마치기 전에 얼굴을 강타한 충격으로 그대로 바닥에 쓰려졌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아 학교로
내려올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발로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다음 순간 눈을 뜬 것은 학교 양호실 침대였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조석희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선배였어요?"
"...응"
"몰랐네 그냥 앞에 있길래 한대 친 건데  미안하게 됐어요"
진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였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과거의 일까지는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제가 학교까지 옮겨 드렸으니 피장파장이죠"
".....학생회 후배들이 나중에 데리러 왔다고 하던데?"
너무나도 당당한 조석희의 어조에 상원은 잠시 자신의 기억을 의심해야 했다. 그런가요, 하고 조석희가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물에 빠진 왕자를 해안가에서 발견해놓고 자신이
구한 척 하던 이웃나라 공주는 조석희에 비하면 그나마 양심이 있는 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상대를 후려쳐서 기절시켜 놓고 그대로 사라진 주제에 조석희는 지금 피장파장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지금 선배가 가진 좋은 추억인가요?"
"아니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너랑 마주친거라서 잊혀지지는 않아"
대책없을 정도로 긍정적이고 욕심없는 사람이었다.  이상원은.
조석희는 그런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희고 고운 피부는 빛의 입자를 머금은 듯 해사하게 빛났다. 손등으로 상원의 얼굴 언저리를 쓸어내려주며 조석희가 물었다.
"다른건 없어? 좀 좋은거"
"있어. 있다."
상원이 기억이 났는지 약간 홍조 띤 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은 일진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에 넘어져서 인대를 다쳐깁스를 하게 된 것에서부터 시작해 미술 수업을 하던 도중 이젤이 부러져 거의 완성된 그림위로 물통을 쏟았고
열심히 정리해 놓은 필기노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목발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가던 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쉴 수록 복이 달아난다는 옛어른들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이쯤 되니 과연 애초에 달아날 복이 있긴 한건가 싶기도 했다.
게다가 이상하게 오늘따라 머리도 무겁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감기기운이 있는건가.
상원은 계단 중간에 멈추어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이 조심해!"
뭘 조심해야 할지 뒤를 돌아 확인하려 했을때는 이미 늦은 상황.
상원은 갑작스레 자신에게 밀려오는 남학생에게 떠밀려 그대로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려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원에게 부딪혀온 남학생은 계단 난간을 잡아 굴러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다리에 이어 몸까지 박살나겠구나 하며 상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요?"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선배 괜찮아요?"
"....어"

상원은 자신을 잡아 준 손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금의 상황을 파악했다.
"조심하셔야죠"
"고마워"
후배가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인 후, 바닥에 떨어진 상원의 목발을 주워 그에게 돌려주었다. 상원은 목발을 받아들고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안 다쳐서 다행이예요"
마지막으로 던지는 목소리마저 다정했다. 상원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예의바른 후배의 옆에 서 있던 남학생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6반의 상원선배"
"아 6반 이상원"
남자의 시선이 짧게 상원의 얼굴을 스쳤다. 상원의 얼굴은 더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잠시만"
조석희가 손으로 미간을 누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제 기억이 맞다면 선배 잡아준 놈 김이경 아닌가요?"
"응"
"....지금 이딴걸 좋은 추억이라고 말하는 거고?"
"응"
"어디, 어느 부분이?"
"그날 처음으로 네가 내 이름 불러준 거잖아. 이상원 이라고"
상원의 눈이 한치의 거짓도 가식도 없는 순수한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는 조석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어조로
자신을 불렀지만 일단 짝사랑 상대에게 이름이 불려졌다는게 중요했다.
"선배....정말 저 좋아하셨나 봐요"
"당연하지 얼마나 좋아했는데 학교에서 한번이라도 마주치면 하루가 기분 좋았다고 먼발치에서만 봐도 좋았어"
옛일을 회상하는 상원의 목소리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는건 어때요?"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조석희가 묻자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된 상원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좋아"
"그냥 좋기만 해요?"
"꿈같아.....안 믿겨져"
"이게 사실 선배가 다 상상한거고 꿈이라면 어쩔거예요?"
"절대 안깰거야, 이거 꿈이라면 죽을 때까지 잠만 잘래"
농담 섞인 한마디에도 상원은 금세 울상이 되고 말았다. 조석희는 상원의 뺨에 이를 세워 슬쩍 깨물었다. 저렇게 온몸으로 애정을 표출하면서 정작 이제야
이집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꽤씸하기 짝이 없었다.
"아파"
뺨을 물린 상원이 몸을 뒤로 뺐지만 조석희는 다시 몸을 바싹 붙이며 짖궂게 이곳저곳을 깨물었다.
"아파 석희야"
"참아 봐요"
이곳저곳을 깨물던 움직임은 어느새 달콤한 입맞춤으로 변해 상원의 몸을 들뜨게 만들었다. 촉촉하게 이어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더 좋은건 없어?"
"...응? 뭐가?"
"더 좋은 일들이요 그런거 말고"
상원이 자신때문에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워도 이건 아니었다. 자신이 몰랐던 시절에도 상원은 좋은 추억 하나 정도는 갖길 원했다.
"음, 글쎄 그냥 가끔 복도에서 만나면 니가 묵례하고 지나가는 것도 너무 좋았고, 너희랑 같이 체육관 쓰는날도 너무 좋았고 음, 멀리서 봐도 좋았어"
"그런거 말고 더 없어요?"
"응, 없는데"
"....."
어떻게 그 짝사랑을 2년 가까이 진행시켜 온 것인지 묻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인걸까. 한번 좋아하면 여간해서 질리지 않는 상원의 취향이.
"상원선배"
"응"
"그럼 앞으로 좋은 거 많이 만들어요 나랑"
답지 않은 달콤한 말에 온몸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석희의 가슴께로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상원쪽이 먼저 안기는 것도 요즘에서야
가능해진 일이다. 조석희가 상원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얹고 부드럽게 쓸어내려주었다.
그 다정함에 상원은 겁쟁이가 되어갔다. 그로부터 애정을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그럴수록 그것이 언젠가는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많이 만들어줘 석희야, 사랑해 세상에서 내가 너를 제일 사랑해.... 그러니까 나한테 질리지 말아줘, 제발
입에 담지 못한 말들이 쌓여갈 수록 마음에 무게가 더해졌다.
이 마음을 들키는 날에는 분명 상대가 부담스러워 자신을 외면할 것이라 생각하며 상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요의 사이로 두 사람의 숨소리가 맞물리는 듯 잦아들었다.













조석희와의 동거는 생각보다 무난했다.
평소 말이 별로 없는 그는 적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기분 좋을 정도의 다정함을 내보였다. 물론 과한 스킨쉽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는 기대 이상의 배려를 발휘해 상원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해주었다.
범인이 이해하기 힘든 조석희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 때문에 꽤나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나날이 달콤한 신혼생활로 변모하자 상원은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이 커질수록 언젠가 덮쳐올 불행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조석희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면 자신에게 질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나름의 궁여지책을 마련했다. 그것은.....
"수업 가시는거예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상원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잠에서 덜 깬 눈을 한 조석희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아침이라 거뭇하게 자란 수염에 상원은 눈을 떼지 못했다.
"선배 수업 가시는 거냐고요"
"어, 응 수업가지"
조석희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되도록이면 아침 수업을 시간표에 넣지 않았다. 반면 상원은 수업이 모두 1교시부터 시작되도록 시간표를 잤다.
"선배 수업 끝나면 몇 시에요?"
"글쎄 한 3시쯤 되려나"
"흐음"
조석희가 마뜩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자신의 일과와 매번 어긋나는 상원의 수업표가 거슬린 것이다.
"그럼 집으로 바로 오실건가요?"
"응 그러려고"
조석희가 상원에게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운동화를 두 쪽 모두 신은 상원은 살짝 까치발을 들어 몸을 최대한 앞으로 숙였다.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저는 일이 있어서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조석희는 양키새끼라 위아래도 모르고 싸가지가 없다는 승완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서양식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의견에는 조심스럽게 찬성표를 던질 수 있었다.
증거로는 조석희는 모닝키스 같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척척 해내는 것이다.
"선배 얼굴"
반대로 모닝키스하나에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자신은 타고난 한국인일거라 생각하며 상원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 그.... 나 가볼게"
"그래요"
조석희가 여전히 졸린 얼굴을 하고 상원을 배웅했다. 상원은 콩딱콩딱 뛰는 심장을 움켜쥐고 현관을 나섰다. 버스에 올라타서도 계속 입술을 손가락으로 마지작거렸다.
상원은 최대한 조석희와 학교에서 마주치지 않도록 시간표를 짜두었다.
특히 공강과 점심시간이 겹치지 않게 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덕분에 2학년 전공수업까지 듣게 되어 수업에 뒤쳐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공부해야 했다.
오늘 아침에 있는 수업도 굳이 듣지 않아도 좋을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는 전공 선택 과목중 하나였다.
쉬는 시간도 없이 연속 3시간을 수업하고도 번번이 시간을 넘길 정도로 빡빡한 수업이었다 그러고 나면 다음 수업까지 남는 시간이 채 30분도 되지 않아 빵과 우유로
점심을 떼우기 일쑤였다. 하지만 상원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조석희가 자신에게 질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유보시킬 수만 있다면
몇년이건 빵으로만 점심을 떼워도 상관없으니까.
상원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쳐지나가는 창밖 풍경으로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너희들 의대 훈남 알아?"
수업이 끝나자마자 매점에서 사온 뺭을 먹고 있던 상원의 귀에 동기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의대 훈남?"
"의대 신입생 중에 엄청 잘생긴 애가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잖아. 키가 거의 190넘고 모델같이 생겨서 애들이 난리던데"
잘생긴 의대라면 몇 명 쯤 있을 법했다. 하지만 키가 190이 넘는다는 조건에 상원은 짐작이 가는 인물이 있어 뺭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게 편치 않았다.
"의대 훈남이 의대 수석으로 들어왔단는 걔 아닌가?"
....김이경 맞구나,
"난 의대 훈남보다 경대 왕자님 쪽이 훨씬 더 취향이던데"
"경대 왕자님? 그건 또 누구야?"
"얘도 키가 190 훌쩍 넘고 진짜 잘생겼대. 나도 지나가면서 저번에 중도 앞에서 한번 봤는데 정말 예술이더라. 왕자님이란 별명이 괜히 붙은게 아니야"
제발 아니길. 그 왕자님이 자신이 모시고 살고 있는 그 왕자님이 아니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는 분명 없었지? 그런 외모라면 분명 소문이 났을 텐데"
단과별로 오리엔테이션을 하더라도 특출 난 외모의 신입생이라면 타대학에도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라면..... 둘이 하루종일
반라로 침대 위에서 삼일간 뒹구는 것으로 대신했던 낯 뜨거운 기억이......
"게다가 경대 왕자님은 혼혈이라는 얘기도 있더라구. 영어 끝내주게 잘 한다고"
"아 맞다. 나도 그 얘기 들었다. 이름이 좀 특이하던데 약간 여자 같은 이름이고, 조성희던가?"
"...조석희"
힘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
"어 ! 맞는데. 그런데 상원오빠가 어떻게 알아?"
"그냥 좀....알아"
"친해요?"
상원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친하다고 하기에 조석희는 아직까지 그 속을 알기 어려운 인간이었고, 그렇다고 부정을 하기엔
오늘 새벽까지 했던 일을 떠올리면 양심상 그럴 수가 없었다.
"친하시면 소개 좀 시켜줘요. 소개팅 자리 마련해주시면 안되요?"
한명이 눈빛을 빛내며 상원을 졸라댔다. 상원은 손사래를 치며 딱 잘라 대답했다.
"안돼 걔 그런거 별로 안 좋아해"
"에이 혹시 알아요? 그런 거 안 좋아하는데 저를 보고 반할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여정이는 신입생 사이에서도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때문에 주가가 높은 아이였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자신감이 얄밉지 않은 성격이기도 했다.
"미안하다. 그런데 진짜 그 정도로 친한게....."
"상원선배"
"....!"
상원은 놀라 들고 있던 뺭을 놓치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상원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 쪽을 향해 움직였다. 조석희는 상원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길고 걸음이 빠른 그는 금세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쟤 맞지? 경대 왕자님!"
"왠일이야 직접보니까 진짜 잘생겼다. 키 190 넘을 것 같은데"
넘어. 넘지. 우리 석희 정확히 193이야. 학생 기록부에서 봤을 때 193이었으니 지금은 더 컸을지 모르겠지만.
"상원오빠 친한거 아니야?"
"아니 그냥 가, 같은 학교를 나와서 그래"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상원은 무릎 위에 떨어진 뺭을 주워 들고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래도 전화번호 정돈 알지 않나? 그냥 전번만 따주시면 안되요?"
"상원오빠 곤란하시면 핸드폰 번호 누구한테 받았는지 말 안할게요 네?"
보기 드문 초특급 연락처가 걸린 문제라 그런지 아이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상원은 진땀이 흘렀다. 자신이 석희 번호를 알려주어 그가 화를 내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싫었다. 자신과 비교되지 않는 예쁘고 귀여운 여학생이 그의 연락처를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끔찍하게 싫었다.
"미안...그게...."
"어 상원선배"

이번에 그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던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원의 옆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이 저마다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선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식사는?"
"...어. 이거"
상원이 먹고 있던 뺭을 들며 대답을 대신했다.
"이런걸로 끼니 떼우지 마세요. 위 버려요"
"다음 수업이 바로 있어서 어쩔 수 없어"
"다음 수업 1시에 시작하죠? 잠깐 시간좀 내주실래요?"
말끝이 내주실래요? 하는 의문형으로 끝났지만 상원은 그 속에 담겨진 명령형을 읽어냈다. 지은 죄가 있는 그로서는 조용히 먹고있던 뺭을 들고 김이경을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인적이 드문 건물 뒤로 가자 김이경이 활짝 웃으며 상원의 손을 맞잡았다.
"선배 인연이긴 한가봐요 이런데서 이렇게 뵙고"
"...그래"
같은 단대가 아님에도 드넓은 학교 안에서 이렇게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그러나 상원에게는 그 인연이 반갑지 않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선배 저한테 빚지신 거 기억하죠?"
"...."
단도직입적인 주제 선정에 상원은 할 말을 잊었다. 착한 후배노릇은 애당초 그만둔 김이경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그래 지킬거야"
"그럼 내일 점심 같이 먹어요"
"뭐? 무슨 점심을 너랑 같이...."
"같은 학교 후배 점심 사주는게 어디가 어때서요"
지극히 평범한 식사약속이었다. 약속을 한 당사자 둘이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가진 것이 걸리돌로 작용했지만 상원은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것이 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다.
"내일 그럼 중도 앞에서 1시에 뵙죠. 저도 이만 수업 가봐야 해서요"
김이경이 사라지고 나자 상원은 힘없이 건물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그의주변에 동기 여학생이 몰려들었다.
"상원오빠 방금그 사람 의대 학생아니야?"
"응 맞아"
"수석으로 들어온 의대 훈남 맞죠?"
"...수석은 맞아"
얼굴이 잘 생긴것에는 동의할 수는 있어도 정신이 훈훈하지 않기에 훈남이란 표현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쟤하고는 어떻게알아요?"
"같은 학교 나왔어"
"상원 오빠네 학교 대체 어딘데 그렇게 물이 좋아요, 장난아니다. 저 사람 연락처는 아세요?"
"이경이?,,,,,응"
"그럼 핸드폰 번호 알려주시 안되나?"
"...그게 좀 그렇다"
이번에는다른의미로 껄끄러웠다. 안 그래도 약점을 잡혀 있는 마당에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김이경은 껄끄러운 인간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중에서 가장 껄끄럽다고 할 수 있었다.
"오빠 미팅한번만 시켜주세요. 상원오빠 후배들로만 미팅자리 만들면 진짜 애들 줄 서겠다."
"오빠도 같이 미팅 나가자"
사실 상원도 과내에서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키도 크고 단정하고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데다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입학 초에 상원은 제법 많은 대시를
받았다. 물론 그때마다 자신은 사귀는 사람있다고 예의바른 태도로 거절했다.
그런 성실성까지 후한 점수를 쳐서 아직까지 상원을 눈여겨 보는 여학우들이 있을 정도였다.
"난 사귀는 사람 있어"
"에이 사귀는 사람 있어도 미팅은 그냥 미팅인데 뭐"
"맞아요 가벼운 미팅인데 한번은 괜찮잖아요"
상원은 의아한듯 눈을 치떴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히든 발언이었다. 상원에게는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적으로 상대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현대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가벼운 관계라는 말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튼 난 그런거 안해. 어 나 수업들어가야 한다. 나중에 다시보자"
상원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그의 등 뒤로 동기 여학생들이 원성어린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수업이 있는 건물로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는 아까 전의 일들이 뒤죽박죽 덩어리져 굴러다녔다.
경영대 왕자님이라니!
조석희의 외모와 성격등을 떠올리면 왕자님이라는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알면 그는 분명 얼굴을 찡그리며 싫어할테지.
.....그에게 비밀이긴 하지만, 상원도 몇 번 석희가 왕자님 같다는 생각을 하곤했다. 그렇지만 그 왕자님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의 곁을 스쳐지나간 수많은 여자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애태웠는데 그걸 다시 하라고 하면 죽었다깨어나도 못할 것 같다.
자신의 독점욕이 이렇게 심한 사람인지, 상원은 요즘들어 처음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남자가 남자를 상대로 독점욕이라니 꼴사납다. 절대로 이런 모습을 조석희가 알게 해선
안된다. 상원은 어깨 위 가방을 다시 고쳐맸다.













"선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나른한 목소리에 상원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눌한 발음으로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음성이 너무나 좋아 슬그머니 웃은 것도 같다.
축축한 입술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선배 침대에 누워서 자"
"...응"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상원은 간신히 눈을떠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책상 위에서 엎드려 자요. 잘 거면 침대에서 자"
"아니야. 페이퍼 쓸게 있어서 조금 더 해야해"
상원이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대답했다. 침착하고 차분한 상원이 가끔 이렇게 어린애같은 행동을 보이면 조석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어 상원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왜?"
"아니요 그냥"
눈이 마주치자 상원은 붉어진 얼굴이 부끄러운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밝은 어조로 말을 건넸다.
"오늘 수업은 잘 들었어?"
"늘 그렇죠 뭐"
멍하게 앉아있는 것 같아도 그가 수업의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원은 고등학교 시절 아는 후배를 통해 들었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그와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너무나 멋진 석희의 모습을 훔쳐보다 수업은 커녕 자신이 그에게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게 분명했다.
"아까 우리과 애들이 너보고 잘생겼대"
상원은 무심코 말하고 아차 싶었다. 가뜩이나ㅏ 자기 잘생긴걸 아는 놈에게 그런 말을 해줄 필요는 없는데
"선배는요?"
"응?"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책상 위에 책을 챙기고 있던 상원의 손이 잠시 멈칫한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난에 휩싸인 상원의 모습이 조석희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어떻게요?"
짓궂었다. 그는 상대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진심으로 즐겼다. 상원은 알면서도 매번 그의 손바닥에서 춤을 출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네가 잘 생겼다고 생각해. 정말 잘 생겼으니까.키고 크고....멋져"
그렇게 말하는 상원의 눈가가 촉촉하게 붉어져 있었다. 연모하는 가수를 바라보는 소녀 팬 같은 눈망울이었다.
"그런데 왜 인사만 하고 말아요? 난 선배가 와서 말 걸 줄 알았는데"
슬쩍 눈인사만 하고 지나간 장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상원은 눈을 깜빡이다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나는 그냥 말걸 새도 없었는데"
"전 선배가 말 걸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상처받았어요"
그런 일로 상처는 커녕 머리카락하나 다치지 않을 인간이었다.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체가 글러먹었다는 증거였다.
"선배는 저하고 아는 척 하는게 싫으신가 봐요. 제가 부끄러우세요?"
"아니 절대 그럴리가"
부끄럽기는 커녕 , 이 남자가 내 남자라고 할수만 있다면 전국방송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라들이 조석희에게 눈독을 들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내일 같이 점심 식사나 할까요?"
그나마 두 사람이 시간표 공강이 겹쳐 같이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 내일이었다. 그러나 상원에게는 내일 피할 수 없는 상대와의 점심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내일은.....약속있는데"
누구와의 약속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상원은 자신이 없었다. 한두번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매번 이렇게 상대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래 좋아 조석희가 묻는다면 솔직하게 대답해버리자.
상원은 단호하게 결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조석희는 너무나도 쉽게 관심을 거두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같이 먹죠"
"응 그래"
조석희가 상원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옷 갈아입으러 가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그는 항상 이런식이었다. 고집을 부리는 법은 있어도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그게 조석희의 방식이었다. 쿨하고 멋있었다. 그런 석희가 너무나도 좋았지만 가끔은 그가 자신을 위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바로 안 잘거면 같이 샤워하면서 섹스하실래요?"
마치 친구에게 맥주 한잔을 권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다. 셔츠 단추를 툭툭 끄르는 그의 우아한 손동작이 상원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문가에 기대 서 있던 조석희가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해보이고 사라졌다. 상원은 홀린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왕자님이 자신을 위해 망가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거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선배"
"으악!"
손에 들려있던 책들이 우르르 바닥에 쏟아졌다. 김이경이 웃으며 떨어진 책을 주워졌다.
"내가할게 괜찮아"
"아니요 저 때문에 떨어졌는데요"
반은 맞는말이었다. 하지만 반은 아니었다.
어제 샤워를 하며 너무 격하게 섹스를 한 덕분에 상원은 지금 누군가 어깨를 툭 치기만 해도 허리가 찌릿하게 울릴 정도로 아팠다. 소리없이 등 뒤로 다가온 김이경이 갑자기
자신을 부른 것에도 놀라긴 했지만 책을 놓친 데에는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이유였다.
책을 가지런히 주운 상원은 허리를세웠다. 다시금 올라오는 고통에 자연스레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 괜찮아"
"밥 사주실 거죠?"
김이경이 넉살 좋게 묻는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식당에서 먹는 밥이야 아무리 비싼 것을 고른다 해도 두 사람 몫이면 만원을 넘기지 않으니 부담이없었다.
김이경이 앞장 서 걸었다. 그가 지나가는 길옆으로 여자들의 시선과  수근거림이 퍼져나갔다. 작은 속삭임에도 의대 수석 훈남이라는 세 단어는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을 정도였따.
상원은 앞장서 걸어가고 있는 김이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관심과 찬사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당연한 것을 왜 굳이 입 아프게 말하고 있을까 하는 오만함이 살짝 내비쳐지기도 했다.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서자 또 다시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수재들만 모인다는 학교에서도 괴물들이 모인다는 의대 거기에 가장 꼭대기에 있는 괴물이 얼굴마저
잘생겼으니 소문이 파다하게 날 만도 했다.
식권을 사서 음식을 받아온 다음 상원은일부러 구석진 테이블에 앉았다. 김이경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같은 과 동기나 선배들의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왜 이렇게 구석에 앉았어요"
자신의 음식을 받아온 이경이 앞에 앉으며 물었다.상원은 그냥, 하고 대답하고 숟가락을 들어 맨밥을 퍼먹었다.
"학교생활은 어떠세요"
"좋아. 당연히 좋지"
"불편하신 점은 없어요?"
"다 좋을 수는 없지만 불편하다고 여길만한 것도 없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상원의 얼굴을 김이경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원은 그런 이경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고....음 아직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애들 다들 착하고 좋아"
고등학교에서 만난 녀석들은 평생 친우로 남을 만한 아이들이었다. 지금 대학에서 만난 과 동기들도 모두 좋은 애들이긴 했지만 상원은 아직까지 이렇다할 정을 붙이진 못했다.
"선배한테 다 반말해요? 형이라고 부르나?"
"아니 그냥 이름으로 불러. 여자애들은 오빠라고 부르긴하지만"
일년 재수하는 정도로는 현역으로 들어온 아이들과 굳이 구별을 두지 않았다. 동기 중에서 남자애들은 대다수가 상원을 이름으로 부르며 반말을 썼고 여자애들은 그나마 오빠라고
불러주긴 했지만 반말과 존댓말을 지들 멋대로 사용했다. 재수한 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도 아니라고 생각해 상원들은 동기들이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써도 괜찮다고 여겼다.
"아 그래요?"
숟가락으로 쌀밥을 뜨던 김이경이 설핏 인상을 쓰며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싸가지 없는 것들이 있단 말이에요?"
상원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싸가지 라니....."
"한살 많은것도 엄연히 많은 건데 반말을 한다고? 하하하 어이가 없네"
"어이없을 것 까지는...."
"지들이 뭔데 상원선배한테 반말을 하고 이름을 불러요?"
"괜찮아 원래 재수한건...."
상원이 자신의 동기들이 특별히 버릇없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김이경의 음산한 표정을 본 순간 소용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너도 나한테 반말하고 싶으면 해 그냥"
"저요? 제가 왜요?"
"결과적으론 같은 학번이잖아"
김이경이 피식 웃었다. 입술 끝이 보기 좋게 올라가 얼핏 보면 달콤해 보이는 미소였다. 하지만 상원은 그 겉보기 등급에 절대로 속으면 안된다는 것을 직접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같은 학번이라도 아니 설사 삼수를 하셔서 제 후배로 들어온다고 하셔도 선배는 선배예요"
"아...그래"
고맙다고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찰나, 옆자리에 누군가 식판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당혹스런 무례한 행위의 주인공이 누군인지 확인도 하기 전에 의자를 빼는 소리가 이어졌다.
"오랜만이다 반갑다"
김이경이 던지는 인사가 상원의 귓가에 맴돌았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옆에 누가 앉아있는 것인지 상원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옷과 특유의 분위기 게다가......
"집어 치워"
어딘가 어눌한 발음과 차가운 어조.
"...석희야"
상원은 차마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오늘 약속 있다고 하더니 왜 이 새끼랑 밥을 먹고 있어요 선배"
문장의 형태는 의문형이었지만 어조는 명령형이었따.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후배랑 식사한번 할 수 있지"
김이경이 정말 좋은 후배인양,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겉모습에 속을 사람은 그 테이블에는 없었다. 센스 좋은 옷차림과 해사한 외모 지적으로 보이는 은테안경에
시선을 던지는 것은 주변에 있는 여학생뿐이었다.
"선배는 너같은 후배 둔적 없어"
"너한테도 선배인데 나한테도 선배지"
"닥쳐"
조석희가 이죽거리며 살벌하게 영어로 된 욕설을 내뱉었다. 백 미터 밖에서도 치명적인 페로몬을 폴폴 풍기는 외모를 가진 이 모델같은 남자가 얼마나 성격이 좋지 않은지
알고있는 사람은 모두 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는 여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리는 조석희를 혼미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둘이 왜 밥을 먹어"
조석희가 다시 매섭게 다그쳤다. 김이경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웃을 뿐이었다. 자기가 할말은 다 했다는 듯이. 김이경은 나중에 죽여야지 하고 마음먹고 조석희는 상원을
향해 삭막한 시선을 던졌다.
"선배가 한번 설명해보시지"
"아 그게....."
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하나 막막해졌다. 말을 하고 나면 상대가 자신에게 뭐라고 말을 할지 어떤 시선을 던질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발밑이
아찔할 정도로 두려웠다. 숟가락을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보라고 선배"
보기 딱할 정도로 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조석희의 한마디에 사색이 되어 손가락까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이경은 배알이 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사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만 혼자 아직까지 쩔쩔매고 있는 모습이 그의 더러운 성격을 자극한 것이다.
내가 먹지 못하는 감을 남이 달게 먹는 꼴은 보기도 싫었다.
"선배 밥 먹을 사람 없어서 그래"
"뭐?"
김이경이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며 대답했다.
"선배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다고 몰랐어? 그래서 나랑 먹는거야"
"아무리 친한 놈이 없다고 해도 왜 너 같은 새끼랑 상원선배가 밥을 먹어"
"친한 놈이 아예하나도 없으니까그렇지 선배 왕따잖아"
"뭐?!!"
놀라 소리친쪽은 상원이었다. 조석희는 아무말없이 눈썹을 살짝 치떴을 뿐이다.
"선배랑 어울리는 동기 없어 몰랐어?"
"....."
조석희가 상원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상원은 그가 김이경의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야 석희야 진짜 아니야"
"왜"
조석희가 입을 열었다
"뭐가 왜야"
그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상원이 눈을 끔뻑거렸다.
"왜 선배가 그런 취급을 받아"
"소문이 좀 돌았나보지 특이체질에 대해서"
김이경이 웃으며 손가락을 쥐었다펼치며 무언가 터져나가는 시늉을 했다. 조석희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특이 체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운이 좋지 않은 상원을
동정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기분나빠하며 꺼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선배 그래서 혼자 밥먹어요?"
조석희의 직접적인 물음에 상원이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게 아니야 . 제가 지금 헛소리하는 거야"
"선배 성격에 너한테 그런 얘길 할것 같아?"
김이경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무덤덤한 그의 말투가 화제의 신빙성을 더했다. 조석희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꼈다.
상원은 이 말도 안되는 오해를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김이경 너 대체 무슨 말을..... 아니야 석희야 나 정말 아니라니까. 나 친구많아"
아직 동기를 친구라 부를 만한 단계는 아니었지만 오해를 푸는 것이 먼저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하지만 조석희 눈에 깃든 노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김이경 똑바로 말하라니까."
상원이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후배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선배가 저랑 밥 먹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요?"
"그래"
상원은 차라리  솔직히 털어놓고 상대에게 힐책을 당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이경이 어깨를 으쓱 해보이고는 빠르게 진실을 쏟아냈다.
"선배가 나랑 술 취한 채 집앞에서 키스를 했다고 생각한 그 사실을 너한테 숨기고 싶다고 하셔서 그럼 내가 나랑 밥 먹자고 한거야 입막음 대가로"
"....."
상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식은땀으로 촉촉히 젖은 손바닥이 점점 차가워졌다. 누군가와 트러블에 휘말리는 자체를 싫어하는 평화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특히나 좋아하는 상대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이 상원의 숨통을 비틀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몸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두려웠다. 자신에게 그가 당장이라도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 지를 것 같았다.
"선배"
침묵이 깨어졌다.
"....응"
상원은 고개를 들고 옆에 앉아있는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듣건, 무슨 짓을 당하건 감내하리라 마음먹으며,
조석희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푸른 기가 돌만큼 창백하게 얼어붙은 그의 시선이 상원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날카로운 금속의 물질이 살갗을 낮게 찌르고
훑어 내리는 느끼에 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
"그러니까....."
불에 그슬린 가죽처럼 글겅거리는 음성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선배가 왕따당하고 있다는 얘기인 거죠?"
".....!"
국어도 잘하는 녀석이 왜 화제를 파악 못하는 것이냐! 석희야!
그게 아니잖아!
상원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선배 일은 내가 알아서 할거니까 이제 너같은 놈이랑 선배가 밥 먹을 일 없을 거다"
조석희가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김이경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상원의 손목을 잡아 일어섰다.
"가요, 선배"
너르고 든든한 등을 앞에두고 상원은 코끝이 찡해졌다. 비록 그가 자신을 왕따라고 믿고 있을지언정 이렇게 신경을 써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집으로 가요 선배"
".....응"
그 한마디에 상원의 머릿속에 있던 오후 수업 일정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조석희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주잡은 손을 통해 느껴지는 손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상원은 무서워 진즉에 도망가 버렸을 것이다.
"너 수업 괜찮아?"
"안 괜찮으면요?"
돌아보지 않고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조석희가 툭 내뱉는다.
"안 괜찮다고 하면 선배가 책임져주실 건가요?"
새 울음같은 경쾌한 알림음이 울리면서 문이 열렸다. 신발을 벗으면서도 조석희는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럼 지금이라도 다시 학교로...."
돌아보는 조석희의 표정이 험악했다. 상원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운동화 끈을 한손으로 풀렀다. 신발을 벗을때까지 조석희는 그 자리에 서서 얌전히 상원을 기다려 주었다.
"침실로 가요"
"어? 침실?"
조용히 얘기나하겠구나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침실이란 단어에 상원은 놀라 눈을 부릅 떴다. 조석희가 침실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아주머니가
갑작스럽게 들어닥친 두 사람을 보고 청소기 전원 버튼을 눌러 껐다.
"수업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일이있어서요. 다른 방부터 청소해주세요"
"예"
아주머니가 청소기를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상원은 어버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석희가 먼저 입고 있던 재킷과 윗옷을 벗어 던졌다.
"석희야 ....계신데"
상원이 등 뒤에 문을 가리켰다. 문 너머에서는 아주머니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듯 청소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 있는 집에서 그것도 앞으로 계속 얼굴을
마주쳐야 할 사람을 두고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애당초 어째서 분위기가 이런 방향으로 흐르게 된 것이냐!
"설마 제가 선배랑 오붓하게 얘기나 나누자고 수업을 제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신건 아니죠?"
"아니.그래도....."
조석희가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오자 상원은 뒤로 두발자국 물러섰다.
"얌전히 벗어요. 그 새끼랑 밥 먹고 있는 식당에서 그대로 박아버리고 싶은거 참아준 거니까"
조석희가 긴 팔을 뻗어 상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팔 위로 들어"
짧게 내려진 명령에 상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위로 들었다. 조석희가 니트의 끝자락을 붙들고 위로 올려 쑤욱 벗겨냈다.
"우악"
상원이 다시 옷을 움켜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니트는 저멀리로 던져지고 난 후였다.
"석희야 나중에....... 아주머니 계시잖아"
"어때요 이미 다 아는데"
두 사람이 남긴 격렬한 정사의 흔적- 얼룩진 시트와 정액으로 가득 찬 콘돔- 들을 처리하는 것은 일하는 아주머니의 몫이었다.
상원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사람을 문 너머에 두고 이런 짓을 벌이는건 부적절하게 여겨졌다.
"그래도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흐익"
커다란 손이 바지안으로 성큼 들어오자 상원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선배 엉덩이가 아기 피부처럼 부드러워요"
조석희가 허리를 숙이며 속삭였다. 이렇게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면 상원은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상대의 그런 수법을 알면서도 상원은 매번 거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김이경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요"
"알아, 그런데....."
"아무리 밥먹을 사람이 없다고 해도 김이경 새끼를 만나요?"
엉덩이를 움켜쥔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상원은 움찔하고 허리를 퉁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왕따 같은거....."
"됐어 괜찮아. 내가 있잖아요 이제 나한테 말해요"
기분이 묘했다. 따돌림 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석희의 발언에 든든한 아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시간표 바꿔요"
귓바퀴를 혀로 핥으며 조석희가 말했다.
"....정정기간 지났어"
솜털까지 아찔하게 서는 느낌에 상원은 바지자락을 움켜쥐었다. 조석희의 치아가 귓볼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앞으로 학교에서 점심은 나하고만 먹어"
"시간 맞으면...."
"맞춰. 나도 억지로 맞출테니까"
눈물이 나올 만큼 다정한 맨트에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이경과 식사를 한 이유는 자신이 따돌림을 당해서가 아니라 술김에 저지른 실수 때문이라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입술이 맞물려지는 동시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만다.
문 너머에서 청소기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데도 조석희는 망설임 없이 상원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리고 침대에 눕혔다.
"선배 엉덩이가 부드러워요"
조석희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주무를 때마다 상원은 발끝을 움츠렸다. 그의 애무는 끈질겼다. 상대방을 고통과 쾌락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엎드려 봐요 선배 엉덩이에 대고 비비고 싶어요"
문 너머 청소기 소리가 여전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상원은 천천히 몸을 뒤집어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웠다. 바지의 버클을 끄르는 소리 뒤에 퍼스너를 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조석희가 상원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겹쳤다. 엉덩이 사이에 닿는 단단한 살덩이의 감촉에 상원은 몸이 떨렸다.
"닿기만 해도 좋아하시네요"
상원의 엉덩이 사이에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져다댄 조석희는 위아래로 슬근슬근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음부를 가로질러 고환에 닿는 단단한 살덩이의 감각이 상원을 흥분시켰다.
"....아"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참으려고 상원은 시트를 물었다.  조석희는 허리를 깊숙이 찔러 흔들며 특유의 외설스런 말들을 지껄였다.
선배 불알에 제 자지가 닿는 느낌이 어때요?
선배는 털도 부드럽네요 아직 만지지도 않았는데 앞이 뿌옇게 젖었어요.
그런 말들이 귓가에 쌓일수록 상원은 소리를 참는 것이 어려워졌다.
조석희는 습한 숨소리를 내며 상원의 목덜미를 입술로 애무했다. 그가 혀로 뺨을 핥았을 때, 상원은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신음을 내뱉었다.
"못 참겠어요? 선배 지금 시트에 사타구니를 대고 비비고 있잖아"
"....응 빨리"
"빨리 어떻게 해달라는 것인지 확실히 말씀하세요"
"만져줘"
상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촉촉하게 젖은 눈이 선정적으로 보였다. 조석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를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손을 뻗어 상원의 성기를 쥐었다.
기대감에 고조된 상원의 몸이 움찔거리며 움직였다.
조석희가 손가락 끝으로 뿌옇게 젖은 끝을 문지르자 시트를 쥐고 있떤 상원의 손끝이 떨렸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정도로는 달아오른 욕망이 만족되지 못했다.
"만져주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갖다대고 비비네요"
"석희야...."
"만져주는 정도로는 안되는 건가?"
삽입섹스에 관해서 처음에 상원은 고지식 할정도로 무서워하고 꺼려했다. 조석희는 그런 상원을 달래고 어르느라 얼마나 그 더러운 성격을 억눌렀는지 모른다.
지금은 쾌감에 익숙해져 조를 줄도 아는 상원의 변화가 그에겐 반갑기 그지없었다. 상원의 입에서 나오는 음란한 말들과 야한 행동들이 조석희를 만족시켰다.
그가 손가락으로 말랑말랑하게 부어오른 상원의 구멍을 만지작거렸다.
"아침에 해서.... 아직 부어있어"
손가락이 점차 안으로 더듬어 들어왔다. 온몸을 잠직해오는 쾌감에 상원은 몸을 덜덜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방문 너머에서는 아직도 청소기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선배 넣어도 돼요?"
하루에 두번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같이 살게 된 날 상원은 횟수에 대한 제안을 해왔다. 삽입이나 사정 횟수에 대한 제한이 아니라 단순한 섹스 횟수에 대한 것이라면
상관없다고 조석희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횟수가 엄격히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에 넣어서 못 넣잖아"
"....."
조석희가 검지와 중지를 번갈아 구멍안으로 집어 넣으며 말했다.
"하루에 두번은 안되는 거죠?"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물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번번이 철회하는 것이 얼마나 민망한지 알면서도 조석희는 일부러 상원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하루에 두번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해"
"뭐라고요?"
"해도 돼. .... 석희야 해줘"
무너지듯 나온 상원의 응답에 조석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사람 있는데 그래도 돼요?"
일부러 몇 번이고 그는 상원이 스스로의 말들을 올바른 신념을 건전한 모럴을 엉망으로 휘젖게 만들었다. 자신을 위해 상대가 스스로 더러운 것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람 있는데도 지금 넣어달라고 하는 건가요? 설마"
"....석희야"
울먹이는 목소리.
사랑스런 애틋함에 조석희는 온몸이 훅 하고 달아올랐다.
그는 그대로 상원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삽입해버렸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작된 삽입에 두사람 모두 쾌감보다는 고통이 앞섰다.
"선배 긴장 풀어요"
"아, 아파...."
"괜찮아 질거예요 응 그렇게.."
그가 애액으로 미끈해진 상원의 성기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아래위로 흔들어 주었다. 달뜬 신음소리가 상원의 입사이에서 새어나왔다. 동시에 아래의 긴장이 조금씩 풀어졌다. 조석희는
천천히 남아있는 부분을 안쪽에 박아 넣었다.
"----!!"
"...읏 죽이...게 조이는데"
완전히 밀어 넣은 채로 조석희는 한참을 그대로 숨을 골랐다. 그는 상원의 몸에 들어간 그 직후의 순간을 좋아했다. 맞닿은 아래를 통해 전해져 오는 열기와 내부의 미묘한 꿈틀거림이
느껴지는 그 순간을.
그는 손바닥으로 상원의 곧게 뻗은 등을 쓸어내렸다. 남자의 등이었다. 여자처럼 안겨오는 맛이 나지 않는 허리와 단단한 등은 아무리 호리호리 하더라도 남자라는 사실을 몇 번이나
자각하게 만들었다.
여자의 살갗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닿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애초의 남자의 것을 받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여자의 성기에 삽입을 하는 행위도 그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흥분시킨 상대는 지금까지 단 한명도 없었다. 자신의 아래에 깔려 흐느끼는 남자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잔뜩 부풀어올라 채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상원의 페니스를 손에 쥔 감촉도 끝내줬다.
"선배 , 이제 움직일게"
조석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선전포고를 하듯 자신의 행위에 대한 예고를 던졌다. 상원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느다란 목덜미를 쥐고 숨이 막힐 때까지 조르고 싶다는
잔인한 욕망이 조석희를 뒤흔들었다. 그는 허리를 난폭하게 추어 올렸다.
"악.... 아, 아파"
아직은 움직이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석희는 못들은 척 다시한번  허리를 흔들었다. 뻑뻑한 내부의 살갗이 그의 페니스를 감싸쥐듯 함께 움직였다.
츠읍, 하는 질척한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아파 서, 석희야 ...아 ..천천히"
"선배"
조석희가 상원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나랑하면.... 아파도 좋죠?"
"...."
"아파도 좋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아래를 세우고 좇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거잖아"
푸른빛이 도는 실크 시트에 이미 얼룩이 진 상태였다. 이미 청소기 소리는 집의 끝에서 울리고 있었다. 자신의 체액으로 젖은 시트와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뒤섞여 상원의
수치심은 평소보다 배는 고조되었다.그리고 고조된 수치심은 솔직한 욕망을 배가 시켰다.
"...좋아 석희야 ....너무 좋아"
울음섞인 상원의 대답에 조석희는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뒤로는 어떠한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짐승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상원의 허리를 위에 자신의 체중을 실어
허리를 놀려댔다.
상원도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침대가 찌걱거렸다. 이러다 침대가 무너져버리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 무렵에 조석희는 상원의 안에 뜨근한 정액을 사출시켰다.
그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자신의 몸위에 무너지듯 엎드린 후에야 상원은 자신이 이미 사정을 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낮의 섹스가 얼마나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것인지
상원은 까무룩하게 찾아드는 잠을 통해 알아차리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은 수면을 취하고 난 이후에 눈을 뜨면 사람이 처음으로 갖게 되는 감정은 의아함이다. 상원은 눈을 두어번 껌뻑이고 나서야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왜 더 자지 않고"
"....몇 시야"
"일곱시 조금 안 되었어요"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 조석희는 샤워는 물론이고 옷까지 멀끔히 갖춰 입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의 손에는 영어로 된 경제학 원서까지 들려있었다.
아직도 벌거벗은 채 시트를 몸에 감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진 상원은 다시 잠든 척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잠 깨신거죠? 식사하세요. 차려놨어요"
"어 그래....."
잠든척은 물건너 갔구나.
상원은 몸을 반대편으로 뒤척거리며 대답했다. 시트 아래를 살짝 들추어 보니 이미 석희가 수건으로 깨끗이 몸을 닦아준 모양이었다. 한층 더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물 적셔서 닦아드리긴 했지만 샤워하시고 싶으심 하세요"
조석희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상원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한 모양인지 안쪽에서 흘러내리는 느낌조차 없었다.
상원은 후다닥 욕실로 달려가 샤워 콕을 열고 몸을 닦았다. 아무리 상대가 수건에 물을 적셔 닦아준다고 해도 섹스를 하고 난후에는 반드시 샤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조석희는 아까 말한 대로 저녁식사를 준비해놓고 식탁앞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먹지"
"저 외로움 많이 타잖아요. 선배 없이 혼자 밥 먹고 싶지 않아요"
저 능청스런 거짓말에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상원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국이 따끈한 것을 보니 조석희가 다시 데워서 식탁 위에
올려놓은 모양이다.
"괜히 나때문에 배고픈데 기다린거 아니야/"
미안한 마음에 빙 돌려 표현했다. 조석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슬쩍 웃어보이며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이집에 들어온 이후
상원의 체중이 이킬로그램이나 분 이유들이 식탁위에 가지런히 놓혀있었다.
"음식이 너무 많아"
"많으면 버리면 되죠"
"...음식은 버리면 안되는데"
"그렇다고 남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잖아요"
뺭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마리앙투아네트조차 저 조석희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앞으로는 조금만 차리자. 음식 남으면 아까우니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조석희는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응?"
갓지은 윤기나는 쌀밥위에 최고급 명란젓을 얹으며 상원이 대답했다. 젓갈류는 입에 대지도 않는 조석희였지만 상원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받아낸 후론 식탁위에 반드시 젓갈류 찬을 한가지씩은 올리게 했다.
"선배 따돌림 당하는거요"
"컥..."
상원이 밥알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조석희가 의외의 다정함을 발휘해 상원을 감싸 안아 준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끝이 좋았다고 해도 오해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만 했다.
"서, 석희야 그거....."
"잘 됐어요"
"어? 뭐라고?"
상원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됐다고요,. 선배 그렇게 된거"
"...무슨 소리야 그게..."
상원은 이녀석이 혹시 따돌림이나 왕따 라는 단어의 사용을 잘못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외국생활을 오래한 것치고 조석희는 한국어 구사 능력이
매우 휼륭했지만 아주 가끔 생각지도 못하게 잘못 알고 있거나 뜻을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상원은 조심스럽게 잘못된 그의 단어 사용을 고쳐주곤 했다.
"앞으로는 저하고만 식사하고 저하고만 다니시면 되겠네요 흐음 아예 저랑 수업을 들으시는 것은 어때요?"
"...수업 정정 기간 지났다니까. "
"과를 옮기시면 어때요?"
".....석희야"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정말 아무렇지 않게 줄줄이 내뱉는 저 배짱은 세계 최강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저게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미국으로 같이 가요"
"....."
...진심이구나.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는 괜찮아. 따돌림 당하는 것도 아니고"
"뭘 부끄러워 해요 선배처럼 재수가 없는 사람이면 따돌림 당할수도 있죠"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됐어요 아무튼 내일부터 선배 점심시간에 맞춰서 제가 학교 갈게요. 어떻게든 맞춰줄 테니까 선배도 최대한 맞춰봐요"
이건 감동을 해야 할지 절말을 해야 할지 미묘한 순간이었다. 이기주의의 결정체이고 자기중심의 최절정에 서 있는 조석희가 상대방을 위해 저렇게까지
맞춰준다는 이야기는 황송하기 그지없었지만 애인이 다른 사람과 술김에 키스를 했다는 것보다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버리는 데에는 확실히 기분이
착잡했다.
"석희야"
조석희가 내미는 제안이 아무리 달콤하다 할지라도 상원은 진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석희야 나 정말 그런거 아니야. 나 친구들도 많고 동기들하고도 친해"
물잔을 들어올리며 조석희는 그런 상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재수가 없긴해도 ...그런걸로 사람 차별할 만큼 동기들이 나쁜애들도 아니고"
조석희가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 사소한 동작하나에도 타고난 기품이 묻어났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원은 아차 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나 따돌림 당하는거 아니야. 믿어줘"
선배로서 연장자로서 상원은 석희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랬다. 조석희의 눈동자가 상원의 시선을 차갑게 훑어내려갔다. 그리고는 빙긋 웃었다.
"선배, 그래서 내일 점심시간이 몇 시라고?"











조석희는 결국 상원의 시간표를 프린트한다음 매 점심시간마다 중도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수락을 하긴 했지만 상원은 그게 과연
며칠이나 갈까 싶었다. 조석희를 처음봐온 순간부터 그에 관해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생각은.
그놈 참 이기적이다.
이 한줄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법도 없었고 모든것을 일단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조석희란 인간을 너무나 좋아하긴 했지만 가끔그가 보여주는
이기주의의 절정은 섬뜩하기조차 했다. 과연 그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까. 언제까지 옆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수그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그가 너무나도 좋았다. 가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귀족적인 외모도 독특한 발음과 목소리도, 짓궃은 장난도, 잠이 모잘랄때
보여주는 잠투정도 온몸으로 끌어안으면 느낄수 있는 단단한 근육도 어떻게 이런 사람을 싫어할 수 잇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
같이 지내는 하루가 쌓이는 만큼 마음은 커져만 갔다.
그런 상원이었지만 조석희가 자신을 위해 희생적으로 뭔가를 해준다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상원은 저 말도 안되는 점심 약속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랬건만.....
"늦었어요"
중도관 앞 벤치에 앉아있던 조석희가 시계를 보며 한마디 했다. 오늘로 일주일재 같이하는 점심식사였다.
"수업이...하아.....늦게 끝나서"
숨이 턱까지 차서 헉헉거리며 상원은 간신히 대답했다. 조석희가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가 일어서자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가요"
"너 지금 밥 먹으러 가면 수업 늦는거 아니야?"
상원역시 조석희의 시간표를 프린트 한 종이를 받아 외우고 있었다. 수요일은 두 사람이 함께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20분이 채 되지 않는데, 교수님께서 10분이나
오버하는 바람에 오늘의 점심은 물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괜찮아요 하루 정도는"
"수업을 안 들어가겠다고 ? 됐어 빨리 들어가"
"수업 한번 안 들어간다고 큰일나는거 아니잖아요. 땡땡이 한두번 쳐봐요?"
"...."
상원이 수업을 빼먹은 것은 거의 아니 전부 조석희와 관련된 일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종종 도서관에서 조석희의 아로마테라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수업을 빼먹곤 했다.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요 배고파"
"응 그래"
어차피 말려봤자 들을 인간도 아니었다. 상원은 그냥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치고 다음 수업이라도 들여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석희의 뒤를 따라 나섰다.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여학생이 조석희를 쳐다보는지 상원은 그수를 이십명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다리도 길고. 어깨도 넓고 얼굴도 잘생기고..... 저기에 성격까지
좋았으면 진짜 큰일났겠지. 성격이 더러워서 정말 다행이야.
"뭐해요 멍하니 서서"
"아, 아니야 가고있어"
길에 멈춰서서 조석희의 뒤태를 감상하던 상원이 허둥지둥 다시 움직였다. 지나가던 사람하고 부딪히자 상원은 자리에 멈춰서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부딪히고 말았다. 조석희가 한숨을 쉬며 상원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목을 움켜줬다.
"거기서 얼마나 사람들한테 고개 숙이고 있을거예요 빨리 가요. 나 배고프다니까"
"아 그래 가자"
상원은 석희가 자신의 손을 놓아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손목을 움켜쥔 채로 그대로 식당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손....."
상원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한마디 했다.
"손이 왜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안그래도 눈에 띄는 주제에 남자의 손까지 잡고 걸으니 시선집중의 효과가 두배였다. 상원은 누군가의 시선을 끄는 재주도 취미도 없기에 지금 이 상황이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상관없어요"
"안 돼 상관있어"
상원이 단호하게 말하며 잡혀 있던 손을 잡아 뺐다. 조석희가 잠시 눈을 크게 부릅뜨고 상원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마음대로 해 라는 제스처였다.
조석희가 앞서 걸어가고 상원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잡혔던 손목이 화끈거렸다. 이런 사소한 접촉에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이 고마운 한편, 자신들의 관계가 들통나 상대방에게 피해가 갈까 두렵기도
했다.
2층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테이블에 앉아있자 두 사람의 주변으로 여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조석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비스듬히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집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얼굴을 마주보고 식사를 하니 상원으로서는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경우일 뿐, 석희가 자신에게 질려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상원은 식사시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애당초 김이경의 심술로 시작된 점심 약속은 이렇게 계속 지속될 수만은 없었다.
"석희야 저기...."
상원이 어렵게 입을 연 순간 주머니에 있던 조석희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귀찮다는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요 전화 좀"
"그래 음식 나오면 내가 받아둘게. 통화하고 와"
조석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대며 걸어나갔다. 빠르게 들려오는 영어에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일제히 쏠렸다.
작작 멋있을 것이지.
"에휴...."
절로 나오는 한숨에 시름이 깊어졌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상원의 어깨를 누군가 반갑다는 듯이 툭 치며 아는 척을 해왔다.
"상원이형 여기서 뭐해요?"
"진철이구나"
동기 중에 상원을 형이라 부르는 몇 안되는 녀석이었다. 상원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
"형 왜 이렇게 얼굴보기가 힘들어요 수업만 끝나면 바로 나가버린다면서요 혹시 우리 몰래 CC되신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거 아니야"
"식사 혼자하세요? 저희랑 같이 하실래요? 민환이랑 종근이도 좀 있다 올건데"
"나는....."
일행이 있다는 말로 거절을 하려고 했는데 저 멀리서 민환이 상원과 진철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우 형. 얼굴보기 힘들어요"
"야, 나도 안그래도 그 얘기하고 있었다."
"같이 밥 먹어요. 김교수님 수업 중간 프레젠테이션 하는 거 조 짜셨어요? 저희랑 같이 하실래요?"
상원은 같이 밥 먹자는 것을 우선 거절하고 조는 같이 짜자고 얘기해야 하나 아니면 조를 같이 짜는 것을 수락하고 밥 먹는 것을 거절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일단 중요한 식사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은 순간 상원은 이십년간 숱하게 겪어온 불길한 전조의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
상원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불행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리 위에 은색의 번쩍이는 식판과 정체불명의 시뻘건 국물이 날아들고 있었다.
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상원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것이 그간 그가 몸으로 체득한 필살의 방어수단이었다.
으악, 하는 비명소리보다 뜨근한 국물이 먼저 상원의 상수리 부근을 적셨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테인리스 식판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끄러운 식당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상원이 형 괜찮으세요?"
상원의 근처에 서 있었지만 엎어진 식판의 피해를 한방울도 입지 않은 민환이 놀라서 물었다. 상원은 치켜 들었던 팔을 치우고 감았던 눈을 떴다.
"형 괜찮아요? 옷 다 버렸네"
"어, 나 괜찮은데....."
식판의 주인인 여학생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상원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아, 어떡해"
상원의 점퍼와 니트가 온통 김칫국물과 반찬국물로 얼룩져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굴 한번 찡그리는 법 없이 오히려 울먹이는 여학생을 달래주었다.
"괜찮아요 늘 있는 일인데요 뭘 안다치셨어요?"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세요. 이게 뭐냐 정말"
"형 옷 다버렸잖아요"
화를 낸 건 상원의 곁에 서 있던 같은 과 동기들이었다. 물기가 촉촉하게 맺혀있던 여학생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상원이 황급히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진짜 괜찮아요. 사람이 실수도할 수 있죠. 신경쓰지 말아요"
"형 옷은 어떡해요. 일단 체육관이나 기숙사 같은 데라도 가서 샤워부터 해요"
뒤늦게 달려온 종근이 온갖 반찬을 뒤집어 쓴 상원을 보고 기겁을 했다.
"으악 이게 뭐야 잠깐만 내가 가서 휴지 가져올게"
"여기도 치워야 하는데"
상원이 바닥에 널브러진 반찬들과 스테인리스 식판을 보고 걱정스럽게 한소리했다. 그러자 민환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걸 왜 형이 치워요 . 엎은 사람이 치우든가 해야지"
"어차피 옷도 버렸는데 내가 치우지 뭐"
상원이 바닥에 떨어진 식판을 주워들었다.
"사람이 진짜. 어휴 주세요. 내가 치울 테니까"
민환이 상원의 손에 들려있던 식판을 빼앗듯 건네받았다. 대학에 와서 길에서 넘어지거나 지우개를 잃어버리는 정도의 자잘한 불운은 있었지만 이런 큰 사고는
처음이었기에 상원은 입맛이 썼다.  혹시 자신의 특이 체질이 조석희의 옆에 머물면서 조금쯤은 희석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조석희의 눈에 그 상황이 완벽한 오해의 한 장면으로 비춰진 것으로 상원의 불행은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테이블을 가로 달려오는 기세에 모두들 굳어버리고 말았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조석희는 민환의 손에 들려있던 식판을
빼앗아 그대로 쳐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챈 상원은 필사적으로 그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조석희가 살벌하게 소리쳤다.
"석희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젠장"
조석희가 본인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상원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옷의 안쪽에 적혀있는 브랜드 태그를 보고 주변에 서 있던 몇 명이 기겁을 하며 조석희와 상원을 번갈아 보았다.
"옷버리잖아.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빌어먹을 fuck"
겉옷으로는 수습이 되지 않자 이번에는 입고 있던 셔츠까지 벗어 상원의 얼굴과 옷을 닦아주었다. 옷을 벗을수록 드러나는 그의 근육에 근방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의
얼굴이 조금씩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가 그랬어?"
조석희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어 상원의 옆에 서 있던 민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니야 걔 아니야!"
상원이 기겁을 하며 뜯어 말렸다.
"그럼 너냐!"
"아니야! 걔도 아니야"
"그럼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선배한테 그런겁니까"
잇새로 짓씹듯 내뱉은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본능적으로 어깨를 흠칫 떨었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한대 후려칠 험악한 기세였다.
상원은 이 오해를 빨리 풀어야 겠단 생각에 석희의 팔에 힘껏 매달렸다.
"그런거 아니라니까. 너도 알잖아. 나 원래 재수 없는거"
원래 재수없다는 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뱉은 상원의 기백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원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고였어. 사고 100퍼센트 사고"
통화를 마치고 식당입구에 들어섰을때 조석희 눈에 들어선 것은 반찬 찌꺼기를 뒤집어쓴 상원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조석희는 피가 꺼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 식판을 뒤집어 엎어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모습은 종조오 그의 학교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아무리 돈 많은 자제들이 다니는 상류층 학교라 할지라도 동양인에 대한 멸시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영국으로 학교를 옮겼을때,
그에게 어떤 무리가 시비를 걸면서 식당에서 일부러 음식을 엎어버린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석희는 자신에게 음식을 엎은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테이블에 수십차례나 갖다 박는 것으로 존재감을 증명해 이후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런 일들을 겪은 그에게 방금 전의 상황은
완벽하게 따돌림의 현장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멀쩡히 걷던 사람도 내 앞에서는 막 넘어지고 그러잖아. 괜찮아. 가서 씻고 옷 갈아입으면 돼"
자신의 불행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원의 모습에 조석희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못했다.
"누가 그런거예요"
"...고의 아니라니까"
"누가 선배 앞으로 넘어진 거냐고"
조석희가 서늘한 눈을 주변으로 돌렸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한 여학생이 눈에 띄게 얼굴이 하얗게 떠서 몸을 떨었다. 조석희가 들고 있던 식판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저기 ... 죄송"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사과의 말 비슷한 것을 내뱉었다.
"주우세요"
"네?"
"바닥에 흘린거 주워담으라고"
이해하기 힘든 그의 요구에 식판을 들고 있던 여학생의 얼굴이 이번에는 파릇하게 변했다. 상원이 그의 팔을 잡고 그만하라고 나가자고 햇지만 소용없었다.
"빨리 주워 담으시죠"
"아, 예"
여학생이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을 주워 식판위에 담았다. 상원은 그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대체 이 성격더러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상원으로서는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학생이 어느 정도의 음식 잔해를 정리하자 조석희는 식판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 그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눈빛에 상원은 본능적으로 사악한 기운을 느끼고
여학생 앞을 막았다.
얼굴위로 뿌려지는 따끈한 느낌에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승완의 판단도 옳았다.
조석희는 진정, 개새끼였다.
















"그걸 왜 선배가 맞아?"
"그렇다고 여학생이 맞게 할 수는 없잖아"
샤워를 하던 상원이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식당에서 일이 벌어지자 여학생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조석희를 바라보게 되었다.
"선배 착한 것도 그 정도면 멍청한 겁니다"
"어때, 나야 어차피 옷도 다 버렸는데"
당신이 그걸 왜 가로막냐고 길길이 날뛰는 조석희를 간신히 끌고 나왔다. 기숙사 샤워실을 빌려 샤워를 하면서도 상원은 오늘 또 한번
저 인간의 더러운 성격을 목도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본인은 이 정도 일어 꿈적하지 않을 정도로 조석희를 좋아하고 그때 식당에 있던 여학생들은 그 정도 일에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칠 정도로만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서.
사랑도 병이라면 이건 중증이었다.
"...나도 참"
'선배가 왜요?"
샤워실 밖에서 상원의 새 옷을 들고 서 있던 조석희가 물었다. 상원이 아니야 하고 머리를 헹궈냈다.
"아직도 안끝났어요?"
조석희가 불쑥 샤워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알몸을 보인게 한두번이 아닌데도 상원은 이런 상황에서 저도모르게 몸이 움츠려 들었다.
"그, 금방 끝나. 미안 잠깐 더 기다려줘"
기숙사에 사는 동기에게 빌린 샤워볼로 거품을 만들면서 대답했다. 몸을 닦는 와중 따끔한 시선에 뒤를 바라보자 조석희가 샤워실 문 앞에 기대어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잇었다.
"...왜"
어색하게 떨리는 목소리.
"뭐가요"
"아니,,,, 쳐다봐서"
"선배 지금 내가 여기서 하자고 하면 할래요?"
".....!"
들고 있던 샤워볼을 놓치고 말았다. 조석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선배 엉덩이 보이니까 아래가 당기네요"
엉덩이를 가리자니 다리 사이가 문제였다. 사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시선 때문에 상원의 페니스가 반쯤 일어서 있었다.
"나가서 기다려. 바로 씻고 갈게"
"알았어요"
조석희가 순순히 물러나 주자 상원은 속도를 내 몸을 씻었다. 아래를 가라앉히기 위해 차가운 물로 몸을 헹궈냈다.
샤워실 밖으로 나가자 조석희가 들고 있던 수건과 속옷을 건넸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사물함에 옷가지들을 상비해둔다는 얘기를 상원이 했을때 조석희는 가관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가 선배,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상원을 불렀다.
티셔츠에 목을 넣으며 상원이 아무렇지 않은척 대답했다.  그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상원의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주었다.
"선배는 원래 그렇게 재수가 없었어요?"
"...응?"
"태어나면서 부터 원래 그렇게 재수가 없었냐고요"
"...응"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불운을 일부러 입에 담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거 안바뀌는 건가요?"
두사람이 사귈 무렵에 조석희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행운을 나누어주겠다고 말했다. 상원 역시 물기어린 눈으로 그래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하는
자세로 넙죽 엎드렸다.
하지만 바뀐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석희는 여전히 억세게 운이 좋았고 상원은 여전히 더럽게 운이없었다.
"바뀌면 참 좋겠는데 말이지 하하"
뒤따르는 웃음소리가 힘이 없었다. 그건 매해 비는 소원이지만 올해도하늘은 상원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모양이다.
수건으로 상원의 머리를 닦던 그가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혹시나 이번 일로 인해 자신에게 질려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 상원은 덜컥 겁이났다. 조석희가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상원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누, 누가 보면...."
"내가 키스하고 싶어서 하는건데 누가 뭐라 그래요"
그가 이번엔 상원의 반대편 뺨에 입을 맞추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황홀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가 다른 사람의 시선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로 애정을 표현해주는 것은 황홀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원의 머릿속에는 미약하게나마 이성이 흘렀다. 상원이 손을 들어 석희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상해요"
"뭐가 또 이상해"
"선배는 여러모로 저한테 특별하신거 같아요. 아니 특이한 건가"
특별로 해줘. 특별.
상원은 간절하게 앞 단어가 선택되길 바랬다
"아 특이하다가 맞겠군요"
"하하 그렇지 내가 좀 특이하긴 하지"
웃으며 맞장구를 쳐도 웃는게 아니었다. 상원은 반찬 얼룩이 남아있는 운동화를 신었다. 눈에 뛸 정도의 얼룩은 아니었지만 냄새가 나서 석희를 거슬리게
하는건 아닌가 싶어 신경이 쓰였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운동화도 한컬레 더 가져다 나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운동화 끈을 고쳐 매었다.
"상원선배"
조석희가 이름까지 부르자 상원은 바싹 긴장이 되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응 왜?"
"토끼 앞발 하나 드릴까요?"
눈을 두번 깜짝였다. 머리를 긁적거리다 상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토끼까 이렇게 까충깡충 뛰는 토끼를 말하는 거지?"
양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자리에서 껑충 뛰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그런 수고가 아깝지 않게 조석희는 단호한 어조로 네, 그 토끼요 하고 대꾸했다.
"토끼를 왜? 키우자고?"
"토끼를 왜 키워요 냄새나고 더럽게"
"그, 그럼 앞발만 준다고?"
귀여운 토끼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채 앞발을 자르는 조석희의 흉악한 모습이 떠오르자 상원은 오싹해졌다. 조석희가 상원의 턱을 손으로 잡으며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
"설마 제가 그걸 잘라 준다고 생각한건 아니겠죠?"
"...아하하....하하"
잠시나마 상상했던 장면을 재빨리 지워버린 상원이지만 상대방이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똑똑한데 참 멍청하기도 하고, 정말 모르겠단 말이지 선배란 사람"
"별로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아....."
말하고 나니 한층 자신이 더 멍청해진 기분이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불운을 눌러주는...."
"부적같은거?"
"네 그런거요"
상원의 시선이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이제는 그 의미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 조석희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상한거 떠올리지 마세요 선배가 상상하는 그런데 가자는 거 아니니까"
조석희가 나가자고 턱짓을 했다. 상원은 옷을 챙겨입고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나 기독교라서....안되는데"
너른 등에 대고 조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봤자 조석희는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뭔가 생각에 빠진 모양이었다.
부적이란. 어머니가 아신다면 뒤로 넘어가실 만한 일이었다. ....사실 남자 애인 문제가 시급하긴 하지만 아니 대낮에 부적을 써주겠다고 자신을 끌고 가는
남자의 등짝이 멋있어 보이는 자신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렴 어떠랴. 이미 나는 저 등의 노예이건만.
"같이 가"
상원은 부지런히 달려가 성큼성큼 앞장 서 걷는 석희의 옆에 섰다. 뭔가 골몰히 생각에 잠긴 그는 아무런 말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이게 뭐야"
"로또 라고 하죠. 한국에서는"
"알아. 이게 로또인지. 그런데 이게 뭐냐고"
상원은 자신을 학교 앞 편의점으로 데리고 온 상대방의 저의가 지극히 궁금해졌다. 그래서 무례함을 무릅쓰고 두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복권이요 45개 숫자 중에서 6개 고르는 거예요 무작위로"
"알아 그런데 왜 이걸 하려는 거야?"
"부적으로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언제 로또 부적으로 삼는 관습이 생긴걸까. 상원은 멀뚱하게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이 잠겼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조석희는 일부러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편의점 테이블에 마련되어 있는 볼펜을
하나 집어 들고 아무렇게나 번호를 여섯개 골랐다.
"그냥 아무거나 골라도 돼?"
"네"
"나도 해볼까?"
조석희가 상원에게 종이와 펜을 건넸다. 상원이 테이블에 몸을 기대에 고민고민하며 여섯개의 숫자를 골랐다. 상원의 몸이 옆으로 바싹 다가오자 특유의
달큰한 체향이 확, 하고 끼쳐온다.
조석희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상원이 고개를 들어 왜? 하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일부러 쌀쌀맞게 대답햇다. 요즘 계속 이모양이다. 상원이 근처에 다가오기만 해도 아래가 바싹 당겨 다른 생각을 할 수 조차 없었다.
같이 살아 욕구를 원할 때마다 해소하면 좀 낫겠거니 싶었는데 더 심해졌다.
사실 그는 상원이 학교에 다니는 것도 못마땅했다. 원하면 늘 손이 닿는 거리에 있어주길 바랐다.
"다 골랐다"
상원이 웃으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얼굴선이 단정하고 차분한 외모인데 저렇게 웃으면 몇 살은 어려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저런 얼굴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왕따를 당해 우울한 대학생활
4년을 마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얘기해줄까.
"이거 한 게임에 얼마야? 나 두게임 했는데"
상원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 했다.
"됐어요"
조석희가 상원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편의점 카운터로 가져갔다. 만원짜리로 종이 두장을 모두 계산하고 로또 복권을 받아왔다.
"여기요 선배"
"고마워"
복권을 받아든 상원은 신기하다는 듯 종이를 살펴보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거 내거 아닌데? 난 5번이랑 7번이랑..."
"이거요 이건 제가 가지죠"
조석희가 상원이 고른 로또를 자신의 지갑에 두번 접어 집어 넣었다.
"그럼 이건 네가 고른거야?"
"네"
"와 너는 운이 좋으니까 진짜 맞을 수도 있겠다"
상원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가끔 맞아요"
"...뭐?"
"가끔 맞는다고요. 1등은 아니지만 3등 같은건 거의 맞고 예전에 두어번 2등까지 맞추기도 했어요"
"뭐?!"
"1등은 안 되는거 같더라고요. 뭐 2등 해봤자 푼돈이니까"
"푸, 푼돈 이라니 잠깐 잠깐만"
상원이 편의점 벽에 붙어있는 저번 주 당첨 금액을 확인해 보다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거 당첨되면 어떡해 혹시 1등 당첨되면어떡하지"
"안 된다니까요"
"되면....!"
조석희가 상원의 앞에 붙어 있던 금액을 확인하고 픽, 하고 웃었다 .
"한국은 당첨 금액도 쥐꼬리만 하잖아요. 1등이라고 해봤자 얼마 되지도 안는데 뭐"
"저 돈이라면 인생이 바뀔수도 있어"
상원이 정색을 하자 조석희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가 이렇게 크게 웃는 경우는 드물었다. 진정으로 웃기거나 진정으로 상대방이 우습거나......
아무래도 이번에는 후자인 모양이었다.
"설마 순진하게 일이 십억으로 사람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 하는 건가?"
"...."
"걱정마세요 그런 푼돈 생긴다고 바뀔 거 하나 없어"
도련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상원은 자신이 들고 있는 로또 복권이 몇 백 배는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건만,
몇 천만원 혹은 몇 십억을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석희야"
"예"
조석희가 편의점 진열대에서 콘돔을 고르며 대답했다.
"...이게 부적이야?"
"네 제가 써준 부적, 잘 간직하세요 Good luck"
오랜만에 들어본 조석희  Good luck 에 상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조석희가 기분 좋은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상원은 조석희가 고르던 콘돔을 오늘 밤 분명 쓰게 될 것이란 예감을 하며 편의점을 나섰다.








식당사건 이후로 과내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경영대의 성격 더러운 킹카와 함께 식사를 하는 이상원.
상원은 요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여학생들이 부쩍 들었음을 느끼는 중이었다. 쉬는 시간에 음료수를 뽑아주며 갑작스럽게 연락처를 묻는 경우나
과제를 위해 같은 조를 하자는 제안이 유독 늘었다. 개중에는 대놓고 조석희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게 대동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물론 상원은 알아서 자기 선에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상원오빠. 오늘 점심 어디서 드세요?"
여자들은 뭔가 부탁을 할때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을 상원은 요즘들어 알게 되었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얼굴만 간신히 아는 여학생 무리들이
상원을 둘러쌌다.
"글쎄 뭐 아무데서나 먹을 것 같아"
"저희랑 같이 먹으러 갈래요?"
"미얀 선약이 있어서"
상원은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둘러싼 무리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빠, 오빠랑 매일 점심 드시는 분이 그 경영대 다니시는 분 맞죠?"
"...응"
알면서 뭣하러 물을까.
"같은 고등학교 나오신 거예요?"
"...어"
"오빠하고 많이 친하세요?"
"글쎄, 친하다기 보다...."
사귀는 사이긴 하지만, 친하다고 볼 수는 없다. 상원은 늘 그렇게 믿었다. 만약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조석희란 사람하고는 관계를 유지시킬 자신이 없었다.
"야아, 매일 같이 점심 먹는데 당연히 친하겠지, 그렇죠? 오빠?"
이쪽도 갑자기 오빠타령이었다.
"어, 그, 그냥 뭐"
그런데 분명 이쪽은 재수를 해서 나와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저희랑 같이 가시면 안돼요? 그냥 옆에서 밥만 먹을게요"
"아님 옆에서 있다가 그냥 우연히 동석하는건 어때요?"
"...글쎄"
상원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느쪽이라 할지라도 석희가 반가워 할리는 만무했다. 반가워하기는 커녕 싸늘하게 무시할게 분명했다.
그랬다간 이번에야 말로 진정한 왕따는 맡아놓은 당상이었다.
그때 강의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자욱하게 퍼졌다.
"어, 석희....."
"뭐해요 안 나오고"
평소보다 날이 선 목소리였다. 상원은 서둘러 가방을 매고 자리를 나섰다. 여자 동기들의 원망섞인 시선을 뒤로하는게 쉽지 않았지만 상원에게 최우선은 늘
조석희였다.
복도를 걸어가는 조석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상원은 불안했다. 그는 걸음이 빨랐기 때문에 뒤처지면 어느새 놓쳐버릴 것 같았다.
"배고프다 뭐 먹을까"
상원이 앞서 걷는 조석희의 등에 대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오늘 수업없어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후 수업은?"
"휴강 됐어요"
"아, 그렇구나 좋겠다"
"뭐가 좋아요. 휴강됐는데 학교까지 와서 밥 먹고 돌아가잖아. 귀찮게"
".....미안해"
그제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상원은 눈치 채고 얼른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조석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미안 그럼 그냥 오지 말지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혼자 병신처럼 밥 먹는 선배를 두고 나 혼자.... 됐다. 말을 말자"
"...."
미안했다.
밥 먹을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강의실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원은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조석희가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느낌,
돌봐준다는 이 느낌에 중독 되어갔다. 도저히 사실을 밝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뭐 먹고 싶어요"
"응?"
"뭐 먹고 싶냐고 선배"
"그냥 아무거... 헉 아니 김치찌게 먹으러 가자. 김치찌게 오랜만에 그런거 먹고 싶네"
조석희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질색했다. 상원이 파닥거리며 간신히 생각해내는 모습을 보던 조석희가 힐깃 시계를 확인했다.
"선배 공강이 얼마나 있다고 했어요?"
"나? 한시간 정도"
"그럼 집에가서 밥 차려 달라고 하고 한번만 하실래요? 택시로 바래다 줄게"
"안돼! 나, 다음 시간에 퀴즈 있어, 안돼"
공강 시간에 섹스를 했다간 체력저하로 제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을 뿐더러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차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학점과 관련된 퀴즈인데 그걸 백지로 냈다간 전공 교수님께 찍혀 4년 내내 고생할 것이 뻔했다.
"절대 안돼"
이 문제에선 여간해선 양보가 없는 석희였기에 상원은 또 한번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알았어요 그럼 식당으로 가죠"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상원은 상대가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식당으로 들어서서 음식을 받아 올때까지 조석희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을 보고 상원은 그가 조금 화가 났음을 알아차렸다.
"저기 앉아요"
"응"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상원은 소심하게 그가 가리키는 테이블로 갔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석희는 말이 없었다.
상원은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화났어? 나 때문에 화난거야? 그럼 내가 섹스하자고 하면 화풀거야?....구질구질하다.
밥이나 먹자.
그는 부지런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조석희가 식사하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싶었지만 눈이 마주치면 할 얘기가 없었기에
열심히 밥과 반찬만 퍼먹었다. 옆 테이블이 시끄럽다 했더니 어느새 네 명의 여학생이 앉아있었다.
주변에 늘 무심한 조석희는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식사만 했다. 상원은 무심코 옆을 바라보다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왜"
"아,...아니"
상원의 벌어진 커다란 눈이 어느 방향을 향했는지 조석희는 정확히 짚어냈다. 자신이 앉아있는 방향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여자 무리들이
상원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수업 몇 시에 끝나요?"
"...4시"
"데리러 올게요"
그 한마디에 옆 자리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이 다시 수근대기 시작했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갈게 나 잘가. 집"
말해놓고도 그 유치함에 상원은 머리를 쥐어 뜯고 싶었다. 나 잘가. 집. 이라니 유치원생도 아니고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게다가 옆 과 동기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듣고 있는 이 와중에!
"선배 집 잘 오시는거 몰라서 데리러 간다는 거 아닙니다. "
상원은 대답없이 맨밥을 입에 구겨 넣었다. 동기 여자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십중팔구 아는 척을 해올게 분명했다. 아까부터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말을 걸지 못해 안달이 났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데리러 올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그래,., 어"
건성으로 대답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조석희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소리나게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원이 깜짝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밥도 제대로 못먹어, 병신처럼. 그냥 당당하게 먹어요"
"아니 나는 무서운게...."
"애들 때문에 그런거야?"
조석희가 엄지손가락을 옆으로 눕혀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영문을 모르는 과 동기들은 찬스인가 싶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상원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당신들...."
조석희가 긴 다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 순간 상원은 왁, 하고 비명을 질렀다. 상원이 갑자기 기괴한 소리를 내자 조석희가 그쪽으로
언짢은 시선을 돌렸다. 주의를 일단 돌렸는데 어떤 식으로 그를 이자리에서 빼돌려야 할지, 계략에는 재능이 없는 상원으로서는 까막득하기만 했다.
계략을 못 꾸미면 순발력이라도 좋던가. 그렇지 못하거든 거짓말이라도 잘 하든가!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
그러던 상원의 눈이 급작스레 그게 벌어졌다.
"왜 그래요"
마뜩찮은 말투로 조석희가 물었다. 상원은 대답없이 손으로 목을 감싸고 얼굴을 찌푸렸다. 조석희가 한번 더 왜그래, 하고 이유를 다그쳐 물었다.
하얗게 질린 상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편식이 없는 상원이었지만 그가 못먹는 음식이 딱 하나 있었다.
깻잎이 들어간 반찬들이었다. 깻잎 알레르기가 유난히 심해 한입만 먹어도 호흡곤란이 올 정도였따. 옆에 앉은 여학생들이 신경 쓰여 음식에 들어간
깻잎을 보지 못한 것이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왜그래? 선배!!"
부축해주기 위해 조석희가 손을 뻗은 동시에 상원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냉정해 보이던 조석희의 표정에서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켁켁거리며
기침을 하던 상원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조석희가 응급차를 부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희 핸드폰을 옆에 서 있던 학생에게 던졌다.
"선배, 정신차려, 응급차 곧 올거니까! 선배! 정신 좀 차려봐요"
이런저런 사고는 많았어도 튼튼한 체력을 자랑하던 상원이 자신의 앞에서 쓰러지자 조석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누군가 뛰어 들었다.
"나 차 가져왔으니까 내 차 태워"
"됐어 꺼져"
조석희가 김이경의 손을 차갑게 내쳤다.
"선배 병원에 데려다 준 후에 꺼질 테니까 빨리 업기나 해!"
김이경이 소리를 지르자 조석희는 입술을 깨물고 상원을 등에 업었다. 세 사람이 사라지고 난후 남겨진 여학생들은 다음번 발표조는 반드시 이상원과
짜야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했다.
쓸데없는 오해는 갈대밭의 불처럼 번져갔다.










상원의 몸상태와 증상을 살펴본 응급실 의사는 주사를 놓도록 하고 간단한 약을 처방해주었다.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게 나타난 것은 평소보다
면역체계가 약해져서 나타난 증상이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집에서 쉬라는 말을 덧붙였다.
상원은 제 발로 응급실을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자신이 태워다주겠다는 김이경앞에서 조석희는 모범택시를 부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원은 기절한 자신을 태워다 준 고마운 후배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응급실을 나서기 전에 구석에서 조석희와 김이경이 험악한 분위기로 얘기를 나누다가 거의 멱살잡이직전까지 간 것이다.
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냐고 물었다가 조석희가 귀신같은 얼굴로 상원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자신 때문에 석희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아 상원은 마음이 무거웠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조석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상원은 자신이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알레르기로 쓰러진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석희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만 바라보았다.
상원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라 석희의 눈치만 살폈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면서 상원은 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살기를 띠는 조석희의 눈을 마주하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현관에서 상원은 조석희의 등 뒤에 대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는 싸늘하게 돌아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한층 더 미안해진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입안에 들러붙어 있는 말을 쥐어짜듯 내뱉었다.
미안해, 내 실수였어. 괜히 너까지 사람들 이목 끌게 하고  귀찮게 해서 미안해, 자꾸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것도 미안하다.
신발을 벗던 조석희가 물끄러미 고개 숙인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들어오기나 해요. 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차갑게 들려 상원은 운동화 끈을 한참동안 풀어야 했다.











"선배 내일 수업없죠?"
저녁을 먹던 중 조석희가 물었다. 낮 동안 내 말이 없던 터라 불안하게 그의 눈치만 살피던 상원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림받았던 애완동물이
주인의 손길을 타는 듯한 눈빛으로.
"응 없어"
"그럼 집에서 좀 쉬세요"
"안그래도 그러려고"
중간 리포트 준비도 해야 하고 다음주에 있을 쪽지 시험도 공부해야했다. 상원은 학교 도서관보다는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편을 선호햇다.
"저는 내일 볼일이 있어서 늦어요"
"그렇구나"
그는 요즘따라 가끔 저렇게 볼일을 본다고 하고는 나가곤 했다. 무슨 볼일이냐고 물으려다 상원은 그만두었다. 너무 스토커 같이 보이면 큰일이니까.
"친구들이라도 불러서 노세요"
"응"
무심코 대답을 하던 상원은 응? 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친구들 부르라고요. 선배 친구라고 해봤자 그 사람들 뿐이겠지만"
그 사람들. 이라고 말하는 조석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상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끔뻑 거렸다.
"선배들 불러서 집에서 노시라고요"
"집에서?.... 우리 집으로 가라고?"
샐러드를 자신의 접시로 옮기던 조석희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는 자신의 집에 타인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들과 만날때 가끔 불러들이기도 했지만 그게 반복되다 보면 귀찮은 일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집으로 누군가를 부르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 어떤 여자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친하지 않은 타인이 자신의 공간을 휘젖고 다니는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상원과 함께 살면서 정한 제 1규칙이 사람을 부르지 말것, 이었다.
아들이 사는 집 구경을 하고 싶다는 어머니를 상원이 아직까지 부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어머니가 이곳을 구경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석희는 거기에 관해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다.
그런 그가 친구들을 불러도 된다는 허락을 했는데 상원은 고마워하기는 커녕 그 관대함을 축객령으로 이해한 것이다.
"제가 언제 선배한테 나가라고 했습니까. 여기가 선배 집이지 또 무슨 집이 있어요"
"그렇지. 그렇긴 한데.... 친구들 부르라고?"
자신이 알아들은 것이 맞는지 상원은 다시금 확인했다. 이런것은 삼세번을 확인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네"
"...고등학교 친구?"
상원의 고등학교 친구라면 6반 아이들밖에 없었다. 학생회 후배나 선배 중에도 간간히 연락을 하는 애들은 있었지만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상대가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네"
"동석이나 대진이가 오면..... 승완이도 올거야"
승완의 이름이 상원의 입에서 나오자 조석희가 잠시 인상을 구겼다. 이전에 있었던 일때문에 두 사람은 대놓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상원은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승완의 앞에서는 석희의 이름을 석희의 앞에서는 승완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죠 저 오기 전에만 내보내세요"
"진짜?"
"네"
답지 않는 그의 관대함에 상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체 쟤가 뭘 잘못 먹고 저러는 건가.
"왜? 너 걔들 집으로 오는거 싫어하잖아"
"싫어요"
조석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선배가 좋다면 참아볼까 하고요"
"...어?"
상원은 들고 있던 젖가락을 놓쳤다. 입이 쩍 벌어졌다.
"제가 싫어도 참는다고요. 음식물 보여요 입은 다무세요"
조석희가 쌀쌀맞게 면박을 주자 상원은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싫어도 상대를 위해 참는다니 그건 조석희 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상원은 조석희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뭘봐요"
"..."
평소와 다름없이 끝내주게 잘생기고 끝장나게 싸가지 없는 조석희가 맞느데 대체 왜....
"제 방에는 들어가지 마세요. 저 오기 전에 내보내시고요 그정도만 지켜주시면 되요"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나중에 만나도..."
"만나세요"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권유형의 어미였지만 그속에 담긴 명령의 의미를 상원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집 밖에서 만날게"
사실 아직 친구들에게 조석희와 산다는 말은 하지 않은 그였다. 그저 집에서 나와 산다고만 살짝 흘려놓은 상태였다.
"몸도 아픈 사람이 밖에 왜 싸돌아 다녀요 됐어요"
"..."
"음식준비는 아주머니께 말해놓을게요 올때 선배가 좋아하는 샌드위치 사다줄게요"
"...응 고마워"
찜찜하긴 했지만 일단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조석희가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상원이 식탁앞으로 상반신을 내밀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쪽하고 입 맞추는 소리에 상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식사 끝나시면 후식으로 뭘 준비해드릴까요"
조리대에서 음식을 정리하던 아주머니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가 먹고 싶냐고 조석희가 상원에게 물었다.
상원은 아무거나 다 좋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는 과일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상원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다른 사람 앞에서 키스를 한 부끄러움보다 조석희의 목소리가 세상의 어떤 과일보다 더 향기롭다는 생각이 앞선 것이다.
이러다가 이내 상사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문득 드는 어느날이었다.









집으로 초대했을때 세사람의 반응은 제각각 이었다. 대진은 텔레비전 화면의 인치수를 물은 다음 오케이를 했고 승완은 거기에 술이 있는지 확인했고
동석은 음식이 있으면 가겠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 모두 정오 쯤에 상원이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오기로 약속이 되었다.
옆구리에 세제를 끼고 나타난 승완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괴상한 감탄성을 날렸다.
"흐에엑, 이건 뭐야. 이 집은 대체 뭐야?"
신발을 벗던 대진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집안 내부를 둘러보았고 동석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상원은 승완이 내미는 세제를 받아 들였다.
"이런 걸 왜 사왔어. 괜찮은데"
"집들이 한다는데 당연히 사와야지. 집들이 맞지?'
"하하하 그런가?"
상원은 애매한 대답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가 진짜 네가 사는 하숙집이냐? 집 주인이 누군데 이런데 하숙을 놔? 이런 집에서 살면서 돈이 궁할 리도 없을텐데"
가끔 쓸데없는 부분에서 날카로운 감을 발휘하는 승완이었다.
동석이 상원을 힐끔 쳐다보았다. 눈썹을 찡그린채 어색하게 웃는 친구의 모습에서 진실을 읽어내릴 수 있었다. 집에서 나와 산다고 했을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사실을 눈으로 보게 되니 입맛이 썼다.
"하숙이 아니고 그냥..음..."
"한승완 병신아. 서울대생이니까 나라에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자취하게 해주는 거잖아. 그런 것도 모르냐"

대진이 가방에서 태그도 붙어있지 않은 씨디를 주섬주섬 꺼내며 아는척을 했다.

"오, 그런가. 역시 일류대학생이라 나라에서 지원도 해주는 거야? 존나 장난 아닐세"
"서울대는 역시 다르군"
"...."
듣도 보도 못한 정책론이었다.
"술이다! 술이 잔뜩 있어"
냉장고 문을 연 승완이 신이 나서 외쳤다.
"야아 존니스트 비싼 맥주가 잔뜩 있네. 크어 이건 또 뭐야 와인인가?"
"그거 내 거 아닌데...."
맥주야 상관없지만 와인가격이 어느정도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곤란했다. 평범한 사람과 경제관념이 다른 조석희였지만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특히 한승완이 자신의 와인을 마셔버린 것을 알면 얘기는 달라진다.
"집 주인거야? 조금만 마실게 조금만"
손이 빠른 승완이 잽싸게 글라스에 와인을 부으며 말했다.
"상원아 이거 화면 죽이는데? 장난아니다!"
대진이 자신이 가져온 씨디를 DVD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시킨 모양이었다. 거실안에 간드러지는 여성의 교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동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냉장고를 뒤져 음식을 한아름 안고 소파에 앉아 대진과 함께 동영상을 관람했다. 승완은 연신 괴성을 지르며 이술 저술 맛보았다.
가격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가죽소파에는 음식물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뭔가 말하려던 상원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어차피 말을 한다고 들을 인간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와 놀라고 조석희가 발언한 시점에서 이미 끝난 문제였다. 애당초 무슨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한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나도 이제"
상원은 석희가 평소보다 늦게 오길 바라며 동석의 옆으로 가 앉았다. 승완이 술잔을 쟁반에 담아와 세 사람에게 돌렸다.
"나 저녁에는 일이 좀 있어서 못 마실 것 같아"
상원이 유하게 거절했지만 승완은 코웃음을 쳤다. 저녁에 일이 있는것은 너뿐만이 아니라고 일언지하에 상원의 말을 날려버렸다. 상원은 하는수 없이
술잔을 받아들었다.
"내가 요즘 빠져있는 여배우인데 가슴 열라 빵빵하지 않냐? 내가 점찍으니까 역시 조금 있다 바로 뜨더라고 흐흐"
대진이 화면에서 요염하게 뽐내고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꼭 여기까지 와서 그걸 봐야겠냐. 미친놈아"
"어때 내 완소 영상인데 남의 취미생활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라고 아 시발 존나 꼴린다"
대진이 화면 속에서 뒤엉켜 있는 남녀를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동석이 뒤에서 그런 대진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 갈겼다. 대진이 뒤통수를 붙잡고
동석에게 흰눈을 흘겨 떴다.
"에이 대진이 취미잖아. 남들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닌데 뭘 공공장소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볼걸"
"...저놈은 보고도 남지"
"헉, 설마"
"헤헤, 헤헤헤헤"
대진이 멋쩍은듯 웃으며 그 사실을 시인했다.
"으악 안돼 너 그런거 공공장소에서 보다 잡혀가. 교실에서 보는거와 차원이 다르다고"
상원은 기겁을 했다. 친구의 기괴한 취미를 이해하기까지 쉬운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저마다 특이한 취향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대진을 이해하기로 한 그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걱정마 여자있는데선 안보니까. 그 정도 상식쯤은 있다고 에헴"
"애초에 상식이 있으면 그런건 혼자 있을때 보라고. 이 변태새끼야!"
동석이 구박을 해봐도 대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니네 그 소식 들었냐?"
자신에게 돌려진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 했는지 대진이 대뜸 화제를 돌렸다.
"무슨 소식?"
과자를 통째로 입안에 털어 넣던 동석이 무심한 어조로 대물었다.
"뽀순 퀴 사망소식"
"컥-!"
웬만한 일에는 흥분하는 법이 없는 동석이 과자가 목에 걸려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소리야? 뽀순 퀴가 왜 죽어? 성동이가 금이야 옥이야 키우고 있는거 아니야?"
승완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최성동은 6반의 사육담당이었다. 대진이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말마라. 그새끼가 뽀순 퀴 살라고 목재로 집까지 만들어 줬잖아. 그런데 퀴년이 집에서 탈출해서 바퀴벌레약을 집어 먹었나봐. 쯧쯧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니 좀 짠하지"
"아! 시발 바퀴벌레 키우는 주제에 바퀴벌레 약은 왜 설치해! 왜!"
"애완 바퀴랑  그냥 바퀴랑 같냐. 천지차이지 하, 그나저나 인생허무하군. 뽀순 퀴 3층 집 마련했다고 성동이 싸이에 사진 올라왔던게 어그제 같은데"
"아 기분 진짜 더럽다. 술이나 좀 줘"
"...."
상원은 이들에게 뽀순퀴가 천수를 누리다 가다 못해 최고의 호사를 누리다 갔다는 얘기는 평생 못하겠구나 싶었다. 동석이 가장 속상해하며 술을 언거푸 마셨다.
"그래서 장례는 언제한데?"
"다음주에 모인다던데 다들 갈거지?"
"당연히 가야지. 무슨일이 있어도 다들 와"
승완이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엄숙하게 말했다. 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가도 되려나?"
"그럼 넌 그럼 6반 아니야?"
6반으로서 졸업장을 받지 못한 것이 상원은 이내 맘에 걸렸다. 하지만 6반 졸업생들은 상원을 당연히 자신의 반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답잖은 소리 집어치우고 너도 꼭 와"
"그래 알겠어"

다른 친구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지만 그래도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던 반의 애완곤충의 사망소식에 상원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특히 뽀순퀴는
그에게 이런저런 사연들을 안겨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성동이는 다른 바퀴 분양 받는대?"
"아니 세상에 뽀순 퀴 만한 애는 없다고 다시는 바퀴벌레는 키우지 못할 거래"
"하긴 그렇겠지"
상원이 힘없이 맞장구를 치자 대진이 뭐가 생각났는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넌 뭐가 좋다고 웃고 자빠졌어!"
"상원이도 바퀴벌레 키우고 있잖아"
"뭐? 바퀴벌레? 이 집에 바퀴벌레가 있다고?"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 상원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대진이 손을 흔들며 아니, 하고 말을 잇는다.
"그 바퀴 말고 조석희말야. 빨리 발음하면 서퀴, 바퀴랑 비슷하잖아. 크크크"
"하하하하"
"푸하하하하!"
"사람 이름 갖고 그러지마"
괜스레 얼굴이 빨개진 상원이 친구들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소용이없었다. 특히 한승완은 숨이 멎을 정도로 격렬하게 웃으며 온몸을 떨었다.
"크하하하 서퀴바퀴 으하하하하 서퀴, 바퀴..... 크하하하하 존나 잘 어울려"
"한승완 너도 참..."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는 친구들을 보며 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려봤자 이제 그들 사이에서 조석희는 서퀴바퀴로 불리게 될게 자명했다.
"아 서퀴바퀴 존나 싫어. 보기만 하면 밟아 죽이고 싶어"
"...."
"에이 아무리 그래도 밟아 죽인다가 뭐냐. 알터진다. 그냥 태워 죽여라"
동석까지 거들고 나서자 상원은 옆에 치워주었던 술잔을 들어 조용히 들이켰다. 친구들에게 이 집에서 조석희와 함게 동거중이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가슴이 막막해져왔다. 술이 자신의 시름을 덜어주고 용기를 더해주길 바라며 상원은 언거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상원아 일어나봐 . 이상원!!"
상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떴다. 언제 잠이 든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술을 마시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놓은 것이다.
"어. 왜그래"
술때문에 부운 눈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상원이 물었다.
"...저거 말려라"
동석이 가리킨 곳에는 승완과 조석희가 살벌한 기세로 대치 중이었다.
"으악!"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상원이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석희가 오기 전에 친구들을 돌려보낸다는 것이 술에 취해 그대로 잠이 들어 이지경이
된 것이다.
"이새끼 니가 여길 왜 나타나냐고"
한승완이 지금이라도 당장 짓이겨 죽여 버릴 것 같은 기세로 말했다. 조석희가 한승완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
"제가 여기 나타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여기가 상원이 자취집이지 왜 너네 집이냐고! 이 개 씨부랄 바퀴벌레 같은 놈아!"
조석희의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원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 바퀴벌레 같은 인간의 집에서 참 오래도 계시는 군요"
동석은 역시, 하고 혀를 찼다.
"어? 뭐라고?"
하지만 이해력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승완은 방금 전 말이 어떠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동석이 그런 승완의 어깨를 툭툭 치고
귀엣말을 속닥거렸다.
"뭐! 무, 무슨 소리야. 됐어! 말도 안돼!"
승완이 애써 사실을 부정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상원과 눈이 마주쳤다. 하얗게 질린 상원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야! 그럴리 없어!!!!"
승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조석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이새끼 어떻게 우리 천사같은 상원이를 꼬여낸 거야 대체 무슨 협박을 해서 그런거냐고"
"승완아 그런거 없어. 협박같은거 안했어"
상원이 깜짝놀라 외쳤다. 옆에 서 있던 눈치 없는 대진은 동석을 흔들며 아까 귀엣말 한게 뭐냐고 끈질기게 물었다.
"제가 무슨 협박을 했다는거죠"
"시발 무슨 비디오라도 찍어서 협박하는거 아니냐고! 그러지 않고서 저 착하고 순진한 애가 왜 너랑 같이 살겠어!"
"어! 상원이랑 조석희가 같이 사는거야? 진짜?"
시조새 파킹하는 수준으로 대진이 뒷북을 울렸다.
"협박은 하지 않았지만 비디오는 하나 찍어두긴 했죠"
"뭐?"
"뭐라고?"
"진짜?!!"
이번엔 상원도 같이 놀랐다. 조석희가 상원을 보고 말했다.
"왜요? 보고 싶으세요?"
"아니 보고 싶은게 아니라....."
"농담이에요 선배"
조석희가 삐뚤어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웃는 얼굴 한번에 심장이 화끈 달아오른 상원은 한손으로 가슴 부근을 꾹 누르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노,농담이라도 그런 농담은 하지마"
"맞아 씨발 하지마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으니까. 이 개새끼야"
비디오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 승완이 다시 분노를 불태우며 외쳤다.
"감히 어디 순진하고 착한 우리 상원이 한테 그따위로 더러운 농담을 지껄이고 지랄이야. 시궁창 같이 더러운 새끼가! 시발"
"순진하고 착하다라"
조석희가 하얗게 질려 있는 자신의 애인을 힐긋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착한 것은 맞는데 선배님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진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거야"
승완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이상원이라는 인간은 순진무구함 그 자체였다. 딸내미의 타락을 믿는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듯이 그는
상원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을 조석희는 천잡한 단어를 사용해 박살내기 시작했다.
"선배가 제 좆을 얼마나 맛있다는 듯이 빠는줄 아세요?"
"...!"
"...!"
"석희야!"
거실에 있던 세 사람 모두 기겁을 했다. 윤대진만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좆이 무슨 맛이냐고 질문을 던졌다가 정신을 차린 동석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다.
"뒤로 박아주면 엄청 느끼면서 음란한 소리를 낸다고요 몇 번이나 박아달라고 조르면서...."
"닥쳐 ! 이새끼야!"
한승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뒤엉켜 싸웠다. 상원이 기겁을 하며 떼어놓으려 했지만 조석희도 한승완도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김동석!"
상원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동석은 싸늘한 표정으로 팔짱만 끼고 서 있을뿐이었다.  엔간해선 상원이 곤란한 상황을 지켜볼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번 만큼은 조석희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안되겠다고 생각한 상원은 얻어 맞을 것을 각오하고 승완의 팔에 매달렸다.
"참아 한승완"
그나마 승완이 말이 통할 거라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상원의 바람을 말끔하게 배신했다.
"왜 나를 말려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이 없는 승완이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자 상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누구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매달리는 겁니까?"
이번엔 조석희도 세모눈을 치켜뜨자 상원은 거의 패닉상태에 빠졌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한승완과 조석희 모두 발끈하게 만든 것이다
"이거 놔"
매몰차게 말하며 승완이 무섭게 손을 뿌리쳤지만 상원은 놓지 못했다.  상원의 그런 행동은 승완뿐만 아니라 조석희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선배 그 손 놓으시죠"
"안돼 그럼 둘이 또 싸울거잖아"
"냅둬. 그럼 내가 싸우면 되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김동석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돌발상황이었다. 두사람을 막아낼 능력이 없는 상원은 이번엔 조석희 앞을 가로 막았다.
"하지마 진짜 왜 그러냐 니들"
"왜그런지 몰라서 이래? 이 멍청한 자식아!"
김동석이 사납게 인상을 쓰며 소리 질렀다.
"상원선배 비켜"
"너도 참아 도대체 왜그래"
어쩌면 이쪽이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조석희를 말려보았다.
"저 새끼가 마음에 안 드니까 그런거죠. 아시면서 왜 묻습니까"
"뭐? 저 새끼? 이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동석아 제발 승완이 좀 말려줘"
....그럼 이쪽이려나.
"싫다니까 시발"
동석도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는 상황이었다.
"나가 너희들 나랑 나가서 이야기하자"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해 내린 결론이었다.
"너랑 얘기할게 뭐있어. 난 저 씨발놈하고 볼일이 있는건데"
"나가라니까! 일단 나가!"
상원이 자신들에게 목청을 높히자 한승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쁘다. 예쁘다. 우쭈쭈쭈 키운 딸내미에게 아빠는 상관하지 마세요, 라는
한방을 맞은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야 가자"
동석이 승완의 팔을 끌었다. 그러나 승완은 두눈 부릅 뜨고 상원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는 오늘 두번 연거푸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배신을 당한 것이다.
"나가자고 상원이가 꺼지라잖아"
"동석아 그게 아니라...."
"됐어 나는 갈거다. 한승완 병신처럼 계속 거기 서 있던지 마음대로해"
동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으로 나갔다. 눈치를 살피던 대진은 자신이 가져온 씨디를 챙겨서 동석의 뒤를 따라 나섰다.
"이상원"
승완이 친구의 이름을 차분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 지금 나가는데...너 계속 여기 있을거면 나 너 안본다"
"뭐?"
"간다"
한승완이 소파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나갔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상원은 친구들 뒤를 쫒아가려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조석희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어딜가요"
"잠깐 나가서 얘기를 좀...."
"무슨 얘기? 나랑 헤어질 테니까  그 꼴같잖은 우정 지속하자는 얘기 하시려고?"
"아니야 그런얘기를 왜 해"
"그럼 나갈 필요 없어 어차피 저 녀석들이 바라는 얘기는 그거고 선배는 그런 얘기 안할 거니까"
"잠깐...나갔다 올게"
상원이 신발을 신었다. 등 뒤에서 조석희가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선배 지금 날 두고 가겠다고요?"
"...같이 나갈수도 없잖아"
그렇게 대답하는 상원의 목소리에 손톱옆에 돋은 거스러미 같은 까칠함이 묻어났다. 조석희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확한 뜻은 몰라도
저것이 욕설이라는 것쯤은 상원은 짐작할 수 있었다.
"화났어?"
"...응"
짧은 물음에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조석희는 입을 다물었다. 상원은 다녀온다고 말을 남기고 현관 밖으로 튀어 나갔다. 문이 닫히는 동시에 조석희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봉투를 던져버렸다. 상원에게 주려고 사온 샌드위치가 바닥에 흩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상원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친구들이 화가났을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그들은 몇 배나 싸늘했다.
특히 김동석은 말도 못 붙일 정도였다.  그새끼랑 헤어지기 전에는 우리한테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그딴 취급받으면서 사귀는 너라는 놈도 다시보게
되었다고.
승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대진은 눈치를 살피며 술을 따랐다.
상원은 입을 다문 채 죄인처럼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에게도 자존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 앞에서 그런 취급을 받았으니 당연히 화가 나고
속도 상했다 아무리 반이 달라다고 해도 직속 선배인데 후배인 조석희가 욕설까지 퍼부은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라고 상원도 동감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로 조석희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이냐? 그건 또 아니었다.
어떻게 사귀게 된 석희인데. 내 평생 한번 온 행운인데.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랑인데.....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다.
네사람은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에야 술집에서 나와 헤어졌다. 멀어져가는 길에 동석은 몇번이나 좆석퀴 새끼랑 헤어지라고 소리 질렀다.
상원은 힘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왔다. 현관에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그는 드라마에서 봤던 부모나 집안이 반대를 하는 연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친구들의 반대에도 이렇게 골머리가 아픈데 실제 부모님 문제까지 뒤엉키면 정말 장난이 아닐텐데.... 아니 거기까지 생각했다간 머리가 터질테니까 일단 보류
석희와의 교제후 처음으로 현실문제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거실에 널브러진 유리조각을 보고 뒷덜미가 싸늘해졌다.
이 난장판을 벌여놓은 인간과 오늘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하는 입장이었다.
"휴....."
늦은 시간에 청소기를 돌릴 수도 없어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찾다가 상원은 포기했다. 자신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텐데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는 집주인
얼굴을 보러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 왔어"
상원은 조석희가 사용하는 방문을 열었다. 거실을 진창으로 만들어 놓고도 조석희는 침대에 느긋하게 누워 책을 읽고 잇었다.
"늦으셨네요"
"응 조금
"무슨 얘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셨어요"
"...즐거울 리가 없잖아"
대답해 놓고 상원은 괜한 말을 한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저 성격 더러운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진 것이다.
"그래요 그럼 가서 주무세요"
돌아온 산뜻한 대답에 상원은 눈을 치뜨며 방금전 들은 소리가 맞는지 뺨을 긁적였다. 조석희가 왜 나가지 않는냐는 듯이 고개를 들어 상원을 바라보았다.
"너는 안자?"
두 사람이 동거 후에도 조석희의 불면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상원을 끌어안아야지만 잠이 들었다. 상원의 방에 침대가 놓여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거의 석희가 사용하는 침대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그것은 암묵적인 룰이었다.
"이것저것 할게 좀 있네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조석희가 대답했다.
"그럼 가서 잘게 잘자"
"잘 자요"
느릿한 발음이 달콤한 굿나잇 인사를 날렸다. 문밖을 나가면서 거실의 참상을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면 아까전에 벌어졌던 일을 믿지 못할 것이다.
작은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나서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정신적 피로 때문인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방문 열리는 소리가
상원의 귓가에 새어 들어왔다.
침대의 한쪽이 기울어지는게 느껴졌다. 눈을 떠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잠을 떨치는게 어려웠다. 상원은 비몽사몽 몸을 뒤척였다.
시트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는건가 생각했다.
조석희는 잠이 올때까지 상원을 끌어안고 있는게 보통이었다.
상원은 습관적으로 자리를 내주었다. 화가 난 것은 화가 난 것이고 끌어안겨 자는 것은 자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상원은 조석희가 하는대로 몸을 두었다.
하지만 뒤이어진 남자의 행동은 상원을 단박에 정신차리게 하기 충분했다.
"...!!"
놀란 상원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뒤에서 조석희가 그대로 어깨를 눌렀다.
"가만히 있어요"
"...잠깐만"
시트 안으로 손을 넣어 속옷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단단한 양물감이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도된 삽입에 상원의 몸은 반사적으로 경직되었다. 뒤에서 상원의 어깨에 손을 얹고 허리를 움직이던 조석희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힘, 빼요 너무 조이잖아"
마치 이 모든 것이 상원의 탓이라는 어투였다. 숨을 내쉬어 긴장을 풀려하는 상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석희가 다시 허리를 추어올리며  살덩이를 밀어넣었다.  뻑뻑하게 벌어지는 감각에 두 사람 모두 호흡이 거칠어졌다.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는 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삽입을 그만 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늘 참아냈다. 참아내는 것은
자신의 본분이라도 되는 양, 무리를 해서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 했다.
"아...으"
삽입이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거기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굵직한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쾌락보다 고통이 앞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조석희는 남아있던 살덩이를 끝까지 밀어넣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린 아래에서 피가 혈관을 타고 팔닥팔닥 뛰었다. 삽입만으로도 상원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여 달라는 최소한의 예의를 상대에게 요구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조석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퍽 허리를 쳐올렸다. 그 바람에 힘이 빠진 채
늘어져 있던 상원은 침대에 고개를 박고 엎드린 자세로 쓰러지고 말았다. 무자비한 추삽질이 이어졌다. 팽팽하게 힘줄이 돋은 성기가 상원의 하얀 엉덩이를
출입할 때마다 조석희는 목구멍안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새어져 나왔다. 그래도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으....아..!"
남자 하나가 눕기에 알맞은 크기의 싱글 침대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평소라면 귓가에 음란한 말들을 지껄이며 수치심을 느끼게 했을 조석희가 이상할 정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게다가 그 침묵을 보충할 요량인지 그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흉포한 기세로 허리를 놀렸다.
아래로 찍어 내리듯 조석희가 추삽질을 거듭하는 덕분에 상원은 베개에 턱을 묻은 채 호흡도 간신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흡곤란으로 발끝이 무너져 내리고 머리가 핑 도는 감각에 두려워진 상원은 침대 헤드를 움켜 쥐었다.
"ㅡ시발"
뒤에서 들려오는 한국어 욕설과 함께 내벽 안으로 뜨거운 액체가  울컥 쏟아져 들어왔다.
영어로 욕을 해도 멋있고 한국어로 욕을 해도 끝내주게 섹시하게 들리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다시 침대가 끼걱거리며 흔들렸다.









"그만둬요"
"...응?"
"그만두라고요"
3번의 연이은 사정으로 녹초가 된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려고 머리를 굴려보았다. ....답이 안나오는 인간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상원은 혼자 고민하다 오답을 내느니 솔직하게 묻는것이 낫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거 그만두시라고요"
"..."
침묵하는 상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조석희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선배가 쓸쓸해할까봐 부르라고 한건데 그냥 그만둬요"
"그래...생각해준건 고마운데"
어쩐지 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당신을 위해 참겠다는둥, 친구를 집으로 불러와도 된다는 둥, 그런말을 들었을때 감동보다는 두려움이 우선이었다.
대체 얘가 왜이렇게 내게 잘해주는걸까. 죽기전에 사람이 변한다던데, 저러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님 헤어지기 전의 친절이라던가.
"그 꼴  못 보겠어. 기분 더럽다고"
"...."
그나마 지금은 원래의 싸가지 상실 버전이라 그의 꿍꿍이를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게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냥 다른 거랑 놀아요"
원체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조석희는 사람을 사물화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강했다.
"다른거라니... 친구들 말고 누구랑 만나라고"
안그래도 친구들에게 이 인간과 끝내지 않으면 절교를 하겠다는 선언을 듣고 온 뒤었다. 그런데 이쪽에서도 절교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거"
"...."
"내가 해줄게 다른거 아무트느 그 인간들 만나지 마요. 진짜 싫으니까"
...그 인간들도 너 싫데.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키며 상원은 몸을 반대로 돌렸다. 조석희 등 뒤에서 끌어 안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하고 왔어요"
"별 말 안했어"
정말 별다른 말이 오간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있다가 왔어요"
잠시 친구들을 만나고 오겠다고 하고 나간 상원이 돌아오지 않자 조석희는 처음에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후에 고개를 든 감정은 불안이었다.
응급실에서 김이경이 한말이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굴길레 저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기절까지 하는거냐. 숨통을 쥐고 아주 사람을 잡아 족치는구나. 그런식으로 해라. 선배가 너한테 질려서
나가 떨어지면 내가 그때 바로 낚아채 버릴 테니까.
응급실 안이니 신경쓰지말고 반 죽여 놔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들었을때 창백하게 질린 상원과 눈이 마주쳤다  조석희는 자신을 보며 이죽거리고
있는 김이경에게 다시한번 그런소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마디 해주었다.
조석희는 자신의 품에 안겨져 있는 상원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요즘따라 골격이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왕따까지 당한다는 말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럴수도 잇고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빌미로 상원을 자신의 옆에 묶어 둘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숨통은 좀 틔어주자 싶어 기분은 더럽더라도 선배들 그 밥맛없는 한승완까지 포함해서 초대를 허락한 것이다.
나름 배려심을 발휘해 저녁늦게 샌드위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상원은 술이 취해 자고 있고 윤대진은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양 포르노를 생중계하고 있었으며
김동석과 한승완은 장식장의 술까지 꺼내 마시고 있었다.
없는 관대함을 긁어모아 그것까지는 참아 넘긴다 하더라도  한승완이 자기가 뭐라고 상원을 싸고 도는 꼴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상원이 한승완의 팔에 매달리는 모습을 본 순간 머리가 아플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상식선에서 상원에 대한 빌어먹을 승완의 감정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섹슈얼적인 감정이 섞여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친구를 위해서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다는 것은 상식선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니까.
지독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원에 대한 주변의 속절없는 비호도  그걸 허용하는 상원의 우유부단함도.
"선배"
"응"
상원이 기계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속없어 보이고 일편단심인 사람이지만 돌아설 때는 가차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이미 한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강단있는 성격이다. 이상원은.
"선배"
여전히 상원은 몸을 돌리지 않고 왜 하고 대답한다.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나갔으면 그나마 불안이 덜 했을텐데 급히 나가느라 손에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들어와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방문을 열자 조석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구태여 스트레스를 받게 하기 싫어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침대에 기대어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스트레스를 받건말건  저 인간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이곳에 있을거란 확신이 필요했다. 조석희는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던지고 상원의 방에 들어와
잠들어 있는 그의 속옷을 끌어내리고 다짜고짜 섹스를 시작했다.
"선배 나랑 살아요"
"어? 무슨 소리야. 살고 있잖아"
갑작스런 발언에 상원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가련한 모습을 보면 측은지심이 들어야 하는데 아래가 바싹 당겨옴을 느꼈다.
나라는 인간도 어지간 하구나.
그는 상원의 양팔을 들게 한후 바짝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댔다. 잔인한 욕망을 부추기는 냄새였다.
조석희가 일어서기 시작한 자신의 사타구니를 상원의 몸에 비비면서 한껏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곤란한 듯 상원이 이마를 찡그렸지만 별다른 거절의 말은
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냥 가둬놓고 학교에도 보내고 싶지않았다.  조석희에게도 티끌만한 인간성이 존재하기에 상원이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자신하고만 밥을 먹고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 썩 나쁜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아 음식하나 잘못먹었다고 기절할 정도라면 그냥 두고 볼 문제가 아니었다.
조석희는 자신의 팔안에 안겨있는 상대를 위해 차선책을 강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기주의의 절정체이자 안하무인의 완성판인 조석희가 아니면 말고, 라는 제멋대로의 신념을 누르게 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책상에 앉아 노트정리를 하고 있던 상원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무언가에 눈을 부릅 떴다.
"받으세요"
",,,어?"
"선배 거요"
조석희가 다시 상원에게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상원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긴 했지만 대체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가늠도 하지 못했다.
"대체 이게 웬 강아지야"
하얀 털뭉치 같은 강아지였다. 강아지라고 부르기엔 몸집이 좀 크긴 했지만 일단은 개수준으로는 온전히 성장하지 못한 생명체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강아지를 안고 있던 상원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키우시라고요 이거면 심심하지 않을거예요"
"....."
"선배 심리상태에 도움도 되고"
"......아하하"
강아지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 우울증 환자나 자폐아 아동에게 치료의 일환으로 사용된다는 상식정도는 상원도 알고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은 자신이 대체 어느 쪽에 속하는지여부였다.
"앞으로는 얘한테 정붙이세요"
아무래도 조석희는 이 강아지 한마리가 상원의 친구들을 대신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모양이었다.
아아, 석희야 대체 넌 심성이 왜 그모양인거니.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머릿속이기에 친구 대신 개를 키우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니.
"잘 키우세요"
"나 개 키워본 적 없는데"
상원이 조심스럽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어렸을 적에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샀다가 처음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 이후에 -그것도 자연사도
아닌 병아리의 탈출로 인한 교통사고사였다.- 상원은 다시는 애완동물을 키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무언가에 남다른 애정을 주었다가 죽음으로 그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걸 메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 배운 것이다.
"잘됐네 이번에 키워보면 되잖아"
조석희가 개털이 붙은 재킷을 벗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넌 개 키워봤어?"
"네 몇 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비인간적인 평소의 행각을 비추어볼때, 애완동물을 키운다든가 하는 과거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진짜? 우와 안 믿기는데"
상원이 자신의 품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강아지의 털을 손바닥으로 쓸어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조석희가 개를 몇 번 키워봤다하니 아까보다는
불안감이 많이 줄어들어싿.
"무슨 종으로 키웠어?"
"개요"
"...그러니까 무슨 종"
"글쎄 잘 모르겠는데 갈색 털이었던가"
이래야 조석희지.
그가 자신외의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 천하의 조석희가 자신을 위해 이런 방법까지 생각해냈다는 것이 어뚱하긴 해도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귀여워요?"
"...?!"
"그 개새끼 귀엽냐고요"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상원의 품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강아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의 생각이 들킨것같아 얼굴을 붉혔던 상원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무, 물론 귀엽지. 찹살떡 같잖아"
하얀 털 때문에 찹살떡 같아 보이는 점도 귀여웠지만 분홍색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고 있는 모습이 흡사 웃는 것 같아 보여서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났다.
"이름 지어 주세요 선배 개니까"
이미 자신의 개로 낙점이 된 모양이었다. 상원은 눈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쉰후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암컷이야?"
"아니 수컷"
상원이 으음 하고 고민에 빠졌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상희는 어때?"
"설마 선배이름 한글자 제 이름 한글자 따서 개새끼한테 붙이자는건 아니겠죠?"
"아하하하 노, 농담이지. 네 이름을 어떻게 갖다 붙여"
사실 석희를 짝사랑 하던 시절의 상원은 절세의 미녀로 다시 태어나 그와 결혼하게 된다면 자식의 이름은 상희나 석원이로 짓겠다는 즐거운 망상을
하곤했다. 상원은 다시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아 생각났다."
"뭔데요"
조석희는 자꾸 자신에게 달라붙으려고 앞발을 바둥거리고 있는 강아지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대꾸했다.
"뽀순 멍"
".... what the fuck...."
잇새로 나지막하게 터져 나온 욕설에 상원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당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데려온 강아지가 또다른 스트레스거리가
되면 안되겠다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 그걸로 해요"
"아니 다른걸로..."
"그걸로 해요 뽀순 멍"
조석희는 이백만원 가까이 주고 데려온 개에게 빌어먹을 정도로 촌스런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했다.
뽀순멍이 조그만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상원의 배에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 귀여운 애교에 넘어간 상원이 어색한 손길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석희의 입가에 근사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실종되었다. 원체 잘 웃지도 않는 인간인데 웃음기가 멸종한 것처럼 사라져버리자 집안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그럼안돼! 뽀순 멍아!"
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테이블 위에 쌓여있던 장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조석희가 말없이 성큼 걸어가 한손으로 뽀순 멍의 목덜미를 들어올렸다. 상원이 석희의 손에서 얼른 강아지를 빼앗아 안았다.
"주세요 버릇 고쳐야지"
"아직 강아지잖아. 애기니까 말로 타일러"
"어릴 때 두들겨 패야 기억에 남을 거 아닙니까"
어릴때 한번도 두들겨 맞아본 적 없는 사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신빙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상원이 필사적으로 강아지를 끌어안았다. 뽀순멍이 석희의 신발에 똥을 쌌을 때 그는 매섭게 강아지 등짝을 후리쳤다. 그 광경을 목격한 상원은
조석희가 개를 키웠다는 얘기 자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성격 나빠져 때리지마 안돼"
강아지에게 훈련을 시키려면 돌돌 만 잡지나 신문으로 코를 치는정도가 적당했다.
이 얘기를 조석희에게 했을때 그는 어디보자 하면서 400페이지에 가까운 올 컬러 화보 잡지를 말아 가져와 내리치려 했다.
의문이 확실시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상원은 조석희가 뽀순멍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기겁을 하며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조석희의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버릇없는 개새끼가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것도 마음에 안들었는데 상원이 그 강아지를 감싸고 도니 속이 뒤틀린 것이다.
상원이 자신을 안아주자 신이 난 뽀순 멍이 혓바닥으로 주인의 목덜미를 핥았다.
"아하하 간지러워 하지마"
상원이 웃으며 뽀순 멍의 목덜미를 손으로 긁어주듯 털을 훑어주었다. 그러자 뽀순멍은 아까보다 더 격하게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선배"
"하하하....어?"
강아지와 눈을 마주치며 장난을 치느라 대답을 한박자 느리게 돌아온 것도 조석희의 심기를 거슬렸다.
"확실히 닦아 개새끼 침냄새 맡게하지 말고"
그가 손으로 목덜미 부근을 가리키자 상원이 응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강아지를 끌어안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저러라고 사준 개새끼가 아니었는데
조석희는 방문너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쓰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그 재수 없는 것들보다 저 멍청한 개새끼가 무해하겠지. 하는 생각이
그에게 손톱만한 위안을 안겨주었다.
불행히도 그 조그만 위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퇴근을 하기 전에 차려놓은 저녁을 먹으며 상원은 최대한 일상적인 말투로 하루종일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내일 말이야. 나 어디 갔다와야 할 것 같아"
"그래요?"
바싹 긴장을 했건만 조석희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때만큼은 그의 서양적인 사고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은 뽀순 퀴의 추모식이 있는 날이었다. 날짜와 장소는 대진이 상원에게 문자로 보내주었다. 평소같으면 승완이나 동석이 챙겼을 테지만 그날 이후로
두 사람 모두 상원에게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자신에게 말을 건네주지 않는다고 해도 친구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오전 수업이 끝나면 바로 뽀순퀴의 추모식에 참여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너는 내일 뭐해?"
"저도 저녁에 어디 갔다 와야 해요 한 두어시간"
상원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들어 저런식의 외출이 잦았다.
"몇 시쯤 들어와?"
"8시까지는 들어올거예요"
상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됐다. 그럼 뽀순 멍이 저녁 좀 챙겨주라. 시간이 좀 애매했거든"
"...."
"애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식탐을 조절못하더라고, 자율 급식이 되면 좋겠는데 부어 놓기만 하면 다 먹어 치워서 말이야"
상원이 식탁 밑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뽀순 멍의 머리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조석희가 눈썹을 찌푸렸다.
"알게 뭐야 한끼 안먹는다고 안 죽어"
"밥주는게 뭐 어렵다고 너 예전에 개 키워봤을때 밥 한끼정도는 줘봤을꺼 아냐"
"그걸 제가 왜 줍니까. 무슨 상관이라고"
"....."
조석희가 예전에 개를 몇 번 키워봤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상원은 그제야 파악이 가능했다. 큰 저택에 개는 있었지만 나는 키우지 않았다,겠지.
"밥 먹는데 개새끼 치워요"
"뽀순 멍아 저리가 있어"
상원이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지만 뽀순멍은 자신과 놀아준다는 뜻인줄 알고 한층 더 격한 꼬리놀림을 보였다.
"개씨끼 털날려 꺼져"
개를 몇 마리나 키워봤다는 남자가 더없이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애초에 뽀순멍에게는 상원만이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에
잠시 으르렁거리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상원은 그저 좋다고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조석희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꼴보기 싫은 인간들 만나느니 집에서 개나 키우라고 사온 것인데 이건 키우다 못해 모시는 판국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하나에 빠지면 간도 쓸개도
다빼주는 이상원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
"뽀순 멍아 형이 밥 먹고 같이 산책 가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응?"
"누구 맘대로 산책을 가요"
"응?"
"밥먹고 저랑 영화보기로 했잖아요"
"내가? 언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 상원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지금요"
"...석희야"
조석희는 지금 개상대로 심통을 부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선배는 개새끼랑 저랑 둘 중에 누가 더 중요해요?"
"당연한 걸 왜물어"
"선배 요즘 저한테 너무 무심한 것 같아서요. 전 선배밖에 없는데 "
무덤덤한 목소리로 거짓말도 잘 늘어놓는다. 그래도 그 거짓말에 놀아나고 마는 상원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그게, 하고 할 말을 찾는다.
"뽀순멍이 아직 어리잖아. 잘 보살펴줘야지"
"선배 저도 어리잖아요 보살펴 주셔야죠"
한살 때부터 스스로 기저귀를 갈아 치웠을 법한 얼굴을 한 사내가 얼토당토 않는 어리광을 부렸다.
"너 나랑 한살밖에 차이 안나"
"저한테 애정 좀 가져주세요 외로워"
"...이미 많이 갖고 있어"
상원은 자신이 가진 애정의 반의 반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늘 생각했다.
"더 가져봐요."
"...그.... 이 이상은 힘들어"
이 이상이라니 그러면 자신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상원은 굳게 믿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좋아하더니 사귀고 나니 시시해요? 먹고 보니 별거 아니다?"
"아니야! 사귀고 나니 더 좋아! 먹어보니 진짜 맛있어"
상원이 정색을 하고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조국 통일을 외쳐도 이보다 더 애절하지는 않을 기세였다.
"진짜?"
"응 진짜"
조석희가 영어로 really,라고 묻자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이야. 사귀고 나서 시시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조석희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는 상원을 관찰했다.
"선배 나 맛있어?"
"어?"
"맛있냐고요 대답해봐"
흥분해서 얼떨결에 외친 한마디가 분위기를 끈적하게 만들었다. 상원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맛있다고 대답하면 분명 이 이후 자신의 입에 들어올 것은 음식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대답했다간 이어질 심술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냥 던져본 말이에요? 그럼 저 선배한테 농락당한거네"
농락이란 단어에 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이쯤되면 누가 농락을 당하는지 개도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상원선배 저 갖고 놀아요?"
"아니 절대 아니"
"그런데 왜 대답을 안해"
남자의 심술궂은 재촉에 상원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마음 속 깊은 곳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맛있어. 너랑 있는 시간도 대화도 키스도 그냥 좋아. 배부르고 행복해"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는지 조석희가 상원에게 자신의 무릎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보는 사람도 없겠다. 내가 좋아하는 단단한 허덕지 옳다구나,
하며 상원은 빼지도 않고 가서 앉았다
"키스할래?"
"응"
나이어린 후배의 반말도 그저 좋았다. 연애의 밀고당기기 따위 모른다. 나쁜 남자라는 것을 알고 가끔은 잠자리용 아로마테라피로 이용당하는 것도 알지만
화가 나기는 커녕 마냥 좋았다.
상원은 두손으로 조석희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가 입술을 맛대어 오길 기다렸다. 조석희는 일부러 상원의 입술 근처만 간질이며 아이처럼 순수한 키스만
반복했다. 하지만 그의 다리 사이는 아까부터 단단하게 불거져 있는 상태였다. 상원도 엉덩이 부근에 닿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두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방으로 들어가자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기 일보직전의 순간이었다. 그때 상원의 발치에서 뭔가 물컹하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석희의 발에 닿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닿은 물체가 지나치게 부드럽고 말캉했다.
"....?"
상원의 시선이 아래로 내린 곳에는 뽀순 멍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주 조금 그러나 평소와 치명적으로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면 상원의 다리에 매달린 채 민망한 자세로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
"....어"
본능적으로  허리를 위 아래로 흔드는 그 모습에 상원은 할말을 잃었다. 오냐오냐 하며 키우던 강아지가 자신을 상대로 흔히 속된 말로 붕가붕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뽀순 멍의 움직임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
"...!"
상원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렸던 조석희는 그 광경을 발견하고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뽀순 멍아.....하하.....못쓴다"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발에서 떨어트리려 했지만 뽀순멍의 허리놀림은 점점 격렬해질 뿐이었다. 본능에 눈뜬 강아지의 자연스러운 행위였지만 개를
키워본 적 없는 상원은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엉켜있을때 조석희의 머릿속은 깔끔하게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었다.
"fucking...."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한 조석희는 거침없이 뽀순멍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우악스러운 손놀림에 놀란 뽀순멍이
낑낑 거리며 버둥거렸다.
"안돼 죽이면"
조석희의 더러운 성정을 아는 상원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안 죽여"
"때리지마"
"안 때려"
"...."
불안이 엄습해왔다. 조석희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쪽이 한 층 더 불안을 고조시켰다.
"죽이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는다면 대체 뭘...."
"선배는 내가 악마라도 되는지 아나봐"
조석희가 살짝 허리르 굽힌 채 고아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인사해"
"뭐?"
간신히 그 사악한 눈길에서 빠져나온 상원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작별 인사"
손톱만큼 남아있는 관대함을 발휘한 조석희가 상원의 앞으로 끙끙거리고 있는 뽀순멍을 내밀며 말했다. 선뜻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상원을 뒤로하고
조석희는 성큼성큼 걸어가 현관앞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안돼!!!!"
찢어지는 절규가 뒤늦게 이어졌지만 매정한 현관문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닫혀버렸다. 상원이 허겁지겁 뒤를 쫒아지만 조석희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다시 집으로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문자를 날려도 답문이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조석희는 정확히 30분 후 세상에서 더할나위 없이 상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름다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뽀순멍을 데려오라고 소리쳤지만 조석희는 들은채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상원을 끌어안고 조석희는 좀 조용히 하라는 말만
던질 뿐이었다.  상원은 처음으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조석희에 대한 깊은 절망감과 원망을 느껴야 했다. 조석희는 숙면을 취했다.











"어? 이상원 진짜 오랜만이다!!"
"상원이? 상원이가 왔다고?"
"진짜? 이상원왔어?"
상원이 교실로 들어서자 모여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오늘 상원에게 장소와 날짜를 알려준 대진이 허둥지둥 달려와 그를 맞이했다.
"잘왔어 연락이 없어서 안 오는줄 알았네"
"와야지 뽀순 퀴 추모식인데"
눈치가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진이었지만 상원의 목소리가 유독 힘이 없고 표정도 좋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6반의 애완벌레였던
뽀순 퀴의 추모식은 희재고 별관에서 열렸다. 학교에서 추모식을 여는 것을 허락했냐는 상원의 질문에 대진은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하는 산뜻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너  서울대 갔다면서 어떻게 용하게 들어갔어? 답 밀려 쓰거나 유실되거나 시험보러 갔다가 사고 당하거나 그런 일 없었어?"
남들에겐 살아생전 한번 일어나기도 힘든 하지만 상원에겐 늘상 있을 법한 일들을 주르륵 나열하며 개중 한명이 물어왔다.
"아니 다행히 운이 좋았어"
"푸하하하하 니가 운이 좋다는 말을 하니까 웃긴다"
"그러게 하하"
악의룰 두지 않고 던져진 말이었지만 상원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재수를 하게 된 것도 불의의 사고 때문이었으니까.
"시발 누가 장례식장에서 경망스럽게 쳐 웃고 지랄이야!"
교실구석에서 묵직한 일갈이 터졌다. 상원을 둘러싸고 왁자지껄했던 일행이 어느새 흩어져 그의 앞으로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졌다.
일을 하다말고 온 것인지 흰색 주방장 복을 입고 회칼을 들고 비스듬히 앉아있는 한승완의 모습은 호러 그 자체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무갂기를
하며 그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 ...안녕"
그날 이후로 처음 승완과 마주하게 된 상원이 인사를 건넸다. 평소였으면 우리 상원이 하고 맨발로 뛰쳐나왔을 한승완이 일부러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누가봐도 나 삐졌어, 하고 광고를 하는 유치하게 짝이 없는 제스처였다.
한승완은 희재고 내 뿐만 아니라 근방의 학교에서도 악명을 펼치던 인간이었다. 한승완이란 이름 석자가 유명해진 이유는 험한 일들이 벌어져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콧노래를 부르는 그의 태평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 한승완이 눈에 빤히 보이는 유치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모두들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는 왜 깎고 있어?"
상원이 승완의 손에 들려 있는 무와 칼을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에게 화가 나서 말을 건네지 않아도 한승완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는 생각에서였다.
승완은 상원이 서 있는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너"
다른 친구들과 떠들고 있던 녀석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 말이야?"
"그래 너"
한승완이 억지로 그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놓고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왜 무를 깎는지 이유가 궁금하지?'
"아니?"
발로 정강이를 까는 소리가 잔인하게 울렸다.
"궁금하지?"
"그래 궁금해 뒈지겠다"
억지로 궁금증을 자아낸 승완이 무를 깎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회를 잘 뜨려면 칼놀림이 중요하거든, 이 무가 투명해서 건너편이 보일 정도로 한번도 끊이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칼 연습을 하는거지"
",,,아 그러셔"
"오늘 밤까지 이걸 다 마스터 해놓으라는 주방장 형님의 말씀이 있으셔서 지금 이 자리에서 피나는 연습을 하는 거라고, 어때? 궁금증은
좀 해결 되었나?"
"...그래"
승완이 상원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마른 기침을 했다. 그제야 상원은 그가 자신에게 할 말을 다른 친구를 붙잡고 늘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승완다운 방법이었다. 웃음이 났다. 사실 오늘 이곳에 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사귀는 상대를 친구들이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헤어지지 않으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을 정도니.
게다가 뽀순 멍 사건까지 겹쳐서 사실 상원은 현재 조석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는 그의 물음에 원래 있떤 곳에
되돌려주고 왔다는 짧은 대답만이 돌아왔다.
몇 년간 짝사랑해온 상대지만 그런 조석희의 행동에는 화가 났다.
오늘도 상원은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어, 상원이 왔냐"
뒤늦게 교실로 들어온 동석이 상원에게 인사를 햇다. 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주자 상원은 감정이 복받치어 뭉클해졌다.
그래도 역시 친구들은 끝까지......
"그럼 헤어진거지?"
추모식을 위해 모무에게 초가 하나씩 나눠지고 있었다. 초를 받아들던 상원이 방금 전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에 영문을 알지 못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지다니? 누구하고?"
"누구는 누구. 그 빌어먹을 새끼 말고 누가 있어?"
동석이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여주며 대답했다.
"조석희?"
"그래"
"....아니"
상원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오자마자 동석은 단호하게 등을 돌려버렸다. 아예 눈도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동석은 상원의 짝이었다. 그가 학교를 떠날 때까지도 마지막 까지 옆에 있어주던 친구였다. 모두가 등을 돌려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이 되어줄 거라
생각한 친구가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평소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문제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조석희는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쁜놈이
아니라고 두둔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쁜 놈일 수도 있었다.
두둔해주지도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마음이 가장 안타까웠다.
상원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렸다 그가 우는 모습을 발견한 오늘의 사육담당 최성동이 큰소리로 외쳤다.
"역시 너밖에 없구나! 상원아 흑.....우리 뽀순 퀴 생각만 하면...흐엉엉"
그가 굵직한 울음을 터트리자 시끌벅쩍한 교실이 조용해졌다. 교실의 불을 끄고 모두 한 손에 촛불을 들고 있던 터라 분위기가 단번에 숙연해졌다.
"뽀순 퀴에게.  너는 우리의 희망, 우리의 귀염둥이 ,,,,크흑,, 우리는 너를 정말로 사랑,,,,흑흑 네가 비행을 성공했을때 ,.,,커흡"
학교 야영을 가면 사회자가 저열하게 슬픔을 자아내는 바로 그 분위기였다. 최성동이 뽀순퀴의 시체가 든 작은 상자를 꺼내들었을때 슬픔은 절정에 달았다.
상원은 그 분위기에 기대어 마음껏 슬픔을 토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상원이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던 조석희가 힐끔 시선을 던졌다. 오셨어요. 하는 물음에 응 , 하고
힘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상원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조석희의 눈에 불쾌함이 스쳐간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상원의 문을 두드렸다.
"저 들어가요"
안에서 수락을 하기도 전에 조석희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고 있던 상원이 조금 놀란 눈을 하고 돌아보았다. 말간 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조석희는 한눈에 알아차렸다.
"울었어?"
"아니"
어색한 대답이 거짓말을 부각시켰다. 조석희는 다시한번 물었다.
"울었어요?"
"...."
상원은 대답하지 않고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피곤했다. 집으로 돌아올때도 동석이도 승완이도 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대진만 눈치를 살피다가 잘가라는 말은 툭 던졋을 뿐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상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인데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뽀순멍과 이런저런 일이 뒤엉켜 지금은 조석희와 말을 하고 싶지 않은게 상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왜 대답을 안해요?"
"나 피곤한데"
"누가 당신 피곤하냐고 물어봤어? 울었냐고 물어봤잖아요"
"안 울었어"
셔츠를 벗던 상원이 잠시 멈칫하고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아직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상원이 내 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 이 사람이 나를 장님 취급하는 것인가. 조석희는 눈을 치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개새끼는 안돼"
"....."
"선배한테 발정난 개새끼는 나 하나로 족하잖아"
애교라면 나름 나쁜남자식 애교였다. 평소대로라면 상원이 이쯤에서 무표정을 무너트리며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가만히 눈만 꿈뻑 거릴 뿐이었다.
그런 눈짓에는 귀찮음 마저 묻어났다.
"석희야"
"응 선배"
그렇게 답하며 조석희는 상원의 옷을 받아 들었다.
"나 오늘 정말 피곤해.....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잇고 싶다는 말이 의미심장한 울림을 띠었다. 옷걸이에 옷을 걸어주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아무리 기분이 좋지 못해도 상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자 있고 싶다고요?"
"응 혼자"
"...."
혼자라 함은 침대를 아예 홀로 쓰겠다는 말이었다. 이집으로 이사온뒤 둘이 다른 침대를 쓴 날은 하루도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 조석희에게 오늘 잘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문가에 기대 서있던 조석희가 불만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상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상원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나가달라고 말을 했다.
작은 목소리지만 의지가 어린.
"주무세요 선배"
"그래"
조석희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상원은 침대에 주저앉았다. 옷을 벗는 것도 귀찮아 그대로 누워 버렸다.
문을 사이에 두고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뭐라고?"
"지금 들으신 그대로예요"
밉살스럽게 지껄이며 빈정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투였다. 그렇기에 상원은 더더욱 의심스런 눈초리로 상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제 그렇게 석희를 방밖으로 내쫓긴 했지만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연애를 하면 한없이 상대에게 너그러워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치졸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들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이 딱 그런 때였다.
자신은 상대에게 차갑게 대해도 상대방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할 얘기가 있으니 소파에 앉으라고 말을 할때까지도 상원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선배 이번 주말에 시간있어요?
하고 물을때도 기분전환이나 하러 가지는 건가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이런 전개라니.
"이번 주말에 같이 엠티가요"
"엠티라니 무슨 엠티?"
"저희 과에서 가는거요, 같이 가요"
종전과 같은 말을 듣고도 상원은 이해가 되지 않아 얼굴을 찡그렸다.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상원의 이마를 누르며 인상쓰지마 라고 가볍게 타박햇다.
"석희야 너희과 엠티를 지금 나한테 가자고?"
"네"
",,,있잖아. 네가 자란 나라에선 어떨지 몰라도"
미국이나 영국의 관습따위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상원은 문화차이로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려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가 다르면 엠티에 참여하지 않거든 조인 그러니까 과끼리 같이 가거나 할 수는 있는데 개인적으로 한명만 다른 과에 참석하거나
하지는 않아"
이쯤되면 훌륭한 설명이었겠지.
"알아요"
"....."
아니 애초에 설명이 필요없었구나.
"그래서 제가 과대한테 부탁했어요"
"그게 가능.... 아니 그런 부탁을 왜해?"
"같이가요 엠티. 선배 그런거 안 가봤을거 아냐"
한숨이 나왔다. 이놈의 왕따설은 언제쯤 사그러들것인가.
"우리과 엠티 갈게"
"가도 누가 놀아주기나 한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의대 훈남과 경대 왕자님을 노리는 여학생이 상원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을텐데, 그러나 구태여 그런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어쩐지 그 얘기를 했다간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됐어 안가면 안갔지 왜 내가 너희 과 엠티에 가"
"선배 사람 친구 사귀고 싶은 거잖아"
"뭐?"
"사람 친구 말이에요"
"...."
"이번에 가서 만들어요 그러면 되잖아"
상원은 이 애가 교직쪽에 뜻을 두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반에서 왕따가 발생한다면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이들 몇명
불러다 지금부터 친구라하고 명령을 내리고도 남았겠지. 번호를 매겨 제비뽑기를 한 다음 짝을 지어 친구를 만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잖아. 게다가 난 너희 과도 아니고...."
이성적인 설득을 해보려 했다. 물론 조석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가 만들어 줄게요 선배"
마치 조립 부품을 사와서 로봇을 만들어 주겠다는 어투였다. 언제나 그런식이었겠지. 그가 가진 외모와 권력 재능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자신의
주변에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랏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그러니까 화는 그만 내요. 나 주말에 약속도 깨고 가주는 거라고"
그의 긴 팔이 상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것이 조석희 나름의 애교이고 신경 써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를 내려다보며
상원은 복잡 미묘한 심정이었다. 그냥 넘어가주자니 뽀순 멍 사건이 너무 컸고 그렇다고 계속 화를 내자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이 남자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먼저 반한 사람이 죄였다. 이말이 요즘 상원에게 가슴속에 박히다 못해 뼈에 사무치고 피를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내죄가 크다"
조용한 중얼거림에 조석희가 고개를 들어 네? 하고 되묻는다.  미간을 찌푸린 그 얼굴조차 상원에겐 장인이 조각해 놓은 작품처럼 보였다.
업보다. 업보.
전생에 난 얘를 도살하고 그 집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현세에서는 보듬어 주고 너른 마음으로 이해를 해줘야 해.
상원은 손을 들어 조석희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업보야 업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상원의 입가에 씁쓸한 중얼거림이 머물렀다. 관광버스를 빌려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펜션으로 향하는 길에서 상원은
두통을 느꼈다. 다른 과의 엠티에 참여한 것도 부담스러운데 조석희가 자신의 선배- 친구도 아닌 무려 같은 학번인 선배! - 라고 상원을 소개하자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던진 것이다. 이후 쏟아지는 관심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원체 이런저런 불운한 사고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하긴 했지만 시선을 받는것과 관심을 받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여학생들의 접근이야 그렇다 쳐도 남학생들까지 눈을 빛내며 대체 둘이 어떻게 하다 친해진 것이냐는 질문을 해올 줄 몰랐건만,
"이것 좀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
상원은 정확히 여섯번째 받고 있는 캔커피를 받아들이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커피 캔을 가방안에 넣으려고 지퍼를 열었지만 이미 들어찬 과자로 인해 넣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마실래?":
상원이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석희에게 커피 캔을 내밀며 권했다. 조석희가 커피캔을 슬쩍 보았다가 도로 눈을 감았다.  상원은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저 왕자님이 원두로 내린 커피도 아닌 커피캔을 마실리 없는 것이다.
캔커피까지 넣으면 가방 지퍼가 닫힐 것 같지 않아 상원은 뚜껑을 따 커피를 마셨다. 그리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로 벌써 두번재 커피 캔을 비우는 중이었다.
"으..."
매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상원은 빈 캔을 좌석 앞 그물 안에 넣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다행히 아무런 사고 없이 평탄햇다.
상원이 커피를 들이켜는 것을 본 여학생이 자신의 커피를 또 그에게 선물한 것을 제외하면,
그 모습을 본 조석희는 그것봐, 라고 조금은 으스대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친구 만들 수 있잖아요"
"아니 이건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미보다 너때문에...."
상원은 말을 맺지 않았다.조석희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득의만면한 미소에는 오만함이 듬뿍 묻어났다. 내가 손댔으니 당연히 당신 같은 사람도
친구가 생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 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상원은 속으로 아이고 하며 한탄했다. 자신이 정말 전생에 큰 죄를 지은 게 분명하구나. 후생을 위해서는 현세에 조석희에게 잘 대해줘서 선업을 쌓아야 겠다.
"주세요"
"응?"
조석희가 턱짓으로 상원이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상원이 놀란 눈으로 이거? 하고 되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상원의 손에서 가방을 뺏아듯 건네받아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놓았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조석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원은 스스로의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호리호리한 편이긴 하지만 상원은 키가 180에 가까운 성인 남자였다. 그런 자신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대신 들어주는 것이 얼토당토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기뼜다. 석희가 저런식으로 자신을 배려해주는 행동을 보이면 남자주제에 소녀와 같은 감성으로 다시 한번 반하게 되는 것이다.
조석희가 뒤쳐져 있던 상원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상원이 정신을 차렸을때 여학생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기울었다.
"선배 빨리 오세요 피곤하실 텐데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답지 않은 다정한 발언에 상원의 뺨이 훅 달아올랐다. 그것은 상원의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이 단번에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첫 인상과 달리 어딘지 부족하게 느껴지는 소년다운 매력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상원에게 시선이 쏠렸다. 상원은 허둥지둥 조석희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자 조석희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어라 비오네 오늘 비온다는 얘기 없었는데"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조석희의 동기가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한마디 했다. 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여행을 동석할때마다 비가 오고 자잘한 사고가
생겨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은 늘상 있어 왔다. 이전에 수학여행을 가다 버스가 고장나 조석희와 도중에 내린 적도 있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에도 콘도에 도착하자 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상원은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다.
"선발대 애들이 바비큐 파티 준비해놨다던데 가서 치워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아 짜증나게 비가 갑자기 쏟아지냐"
상원이 얼굴색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던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튕겼다.
"선배 신이야?"
"어?"
"자기 마음대로 비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정도면 자의식 과잉인데요"
조석희는 한국어 발음은 서툰데 저런 식의 어려운 어휘를 사용하곤 했다. 상원은 그 캡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캡을 마냥 좋다고 해실 댈
상황이 아니었다.
"자의식 과잉이라니"
"선배 때문에 비 온다고 생각하면 그게 자의식 과잉이라고"
"....그래"
참 그다운 위로방식이었다. 차갑고 쌀쌀맞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한마다. 얼음위에 잠시 내리쬐는 햇볕처럼 미약한 따스함이었지만 상원은 거기에서
위안을 찾았다.
"조석희 지금 나올 수 있냐"
버스 안에서 자신을 과대라고 소개한 키 큰 남학생이 문앞에서 소리쳤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나도 가서 도와줄게"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일손이 필요한 모양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혼자 방에 있기도 뻘쭘하고 석희가 비를 맞으며 일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됐어 쉬어요"
조석희가 지나가면서 손등으로 상원의 뺨을 툭 쳤다. 방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모두 방을 나간것을 확인한 뒤에야 상원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아, 어쩌면좋아. 이렇게 속절없이 좋아만 해도 되는 것일까. 이러다 종래엔 미쳐버려서 조석희의 스토커가 되어버리겠지. 그러면 안되는데 버림받는다
해도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텐데 , 그래야 마지막 기억이라도 좋게 남을 텐데.
상원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 즈음 이었다.
"예 들어오세요"
"...어 저기"
버스에서 봤던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상원은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세요?"
"다들 나갔어요?"
"비와서 뭐 치우러 가야 한다고 나갔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원은 미안함을 느꼈다. 자의식 과잉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자신이 이곳에 따라와서 아무래도 하늘이 노해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언제쯤 오려나"
여학생의 혼잣말을 들으며 상원은 죄책감이 한층 더해졌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그냥 같이 게임이나 하자고 온건데...."
"그럼 제가 같이 해드릴까요?"
평소였으면 숫기 없는 상원으로서 입 밖에 내지 못할 말이었다. 겉다리로 따라온 엠티에 비까지 내려 여학생들이 놀 상대가 없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이라
생각한 그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게다가 조석희가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고 데려온 것이 아닌가.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어? 진짜요? 그럼 그러실래요?"
"예 같이 해드릴게요 게임"
두 손을 모으고 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거 해보셨어요?"
자신의 불운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며 지내온 남중, 남고 6년의 세월이었다.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그에겐 낯설기만 한 게임 이름이 적힌 상자였다.
"설명해주세요 한번 해볼게요"
상원은 더없이 진지한 자세로 여학생에게서 게임의 법칙을 들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이해력이 좋은 그는 시범 게임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규칙을
외웠다.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었다.









"으아! 안돼! 왜 하필 거기야?"
주사위를 던진 여학생이 절규를 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은행장을 맡은 또 다른 여학생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돈을 대출받으라고 방금 전 주사위를
던진 친구를 꼬드겼다. 상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상원오빠 차례에요"
은행장을 맡은 여학생이 주사위를 상원에게 건네주었다. 상원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주사위를 툭 던졌다.
"으하하하 형 블랙홀인데요? 3회 쉬고 가래요"
"...아이고"
상원이 앓는 소리를 하며 자신의 말을 옮겼다. 그는 주사위를 던질때마다 불운의 구렁텅이로 푹푹 빠지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주변에서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장본인인 상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약간 탄식을 섞어가며 주사위를 던지고 말을 옮겼다.
"상원이 형 정말 장난아니다. 어떻게 던질 때마다 그래요?"
"아, 하하하 그러게"
"신기하다 신기해 이정도면 놀라운 세상 이런거에 제보해도 될 정도인데요?"
"어머 그러게"
모두들 처음보는 상원의 특이 체질에 관심을 기울이고 모여 들었다. 이제 게임은 다들 안중에 없었다 상원이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주변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오빠 괜찮아요? 돈 다 잃었네"
"그러게 대출 받아야 하나?"
"상원오빠는 건물도 없고 땅도 별로 없어서 대출 받기도 힘들겠어요"
은행장이 안타깝다는 듯이 대답했다. 상원도 뺨을 긁적거리며 게임판을 돌아보았다. 게임을 지켜보던 한 녀석이 상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형 힘내세요, 인생 한방이잖아요"
"하하하 그런가?"
"다음번에는 분명 좋은 숫자가 나올거에요"
"파이팅!"
"오빠 힘내요"
다들 상원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건넸다. 상원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가식없는 깨끗한 미소는 보는 상대로 하여금 절로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상원은 한번도 자신이 나쁜 패가 나오거나 좋지 않은 숫자가 나온 것으로 투덜대거나 짜증내지 않았다.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긴 했지만,
전적으로 자신의 불운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다들 감동하고 말았다.
조석희는 멀찌감치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원과 눈이 마주치면 그는 살짝 눈짓으로 인사를 해주었다. 그러나 절대 옆으로 와서 말을 건네거나
아는 척을 하는건 아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방에서 마음 같아서는 석희 옆에 앉아있고 싶었지만 그가 바라는 것 같지 않아서 상원은 눈치만 살폈다.
"상원오빠 괜찮지 않아?"
"성격도 진짜 좋은것 같아. 말도 조근조근 엄청 다정하게 하고"
"번호 따볼까"
처음엔 조석희와 특별한 관계 때문에 쏟아졌던 관심이 지금은 온전히 이상원이란 인간에게 향해 있었따. 키도 크고 깔끔한 외모에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에
매너도 좋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개망나니 6반 학생들도 일년 남짓 만에 모두 자신의 편으로 만든게 이상원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타입이었다.
상원이 어떠한 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지 조석희는 현장에서 두눈으로 직접 그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형 이거 끝나시면 저희 방으로 가서 한잔 하실래요?"
"어 나 술 잘 못하는데 괜찮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냥 마시다 보면 느는거지"
"오빠 그러지말고 저희랑 게임이나 해요. 쟤들이랑 술 마시면 토할 때까지 못나온다니까요"
여학생들이 상원의 팔을 붙잡고 자신들과 함께 게임을 하자고 졸랐다. 상원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햇다. 개중 한명이 상원에게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을 받아든 그가 자신의 번호를 누르고 있을 무렵 조석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어?"
"잠깐만"
그가 밖으로 나가자고 턱짓을 해보였다.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해주고 있던 상원이 잠깐만 하고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근데 왜 석희는 상원오빠한테 선배라고 부르는거야?"
누군가 조석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고등학교 선배라서"
"한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라 이건가?"
그말에 상원이 큰 소리로 웃었다. 청아한 향이 묻어날 것 같은 단정한 옆얼굴을 근처에 있던 여학생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나도 선배라고 부르고 싶다. 이상하게 오빠보다 더 가까운 느낌이드는데"
"에이 무슨 그냥 오빠라고 불러"
"저도 상원선배라고 불러볼래요, 그래도 되죠?"
아까부터 적극적으로 상원에게 호감을 표시하던 여학생이 애교섞인 어조로 물었다. 상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떼려는 순간,
"안돼"
"....어?"
"넌 같은 학번 동기잖아. 오빠라고 부르던가 이상원이라고 이름 불러"
조석희였다.
어울리지 않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석희야...."
상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의 조석희를 올려다보았다.
"할 얘기 있어 선배"
쟤는 대체 여기까지 와서 무슨 할얘기가 있다는 건지.
중요한 얘기라면 집에 가서 하자고 하고 싶었고 별 대수롭지 않은 얘기라면 나중에 하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석희는 상원이 그런 바람을 입밖에
내기도 전에 등을 돌리고 먼저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 석희 왜 저래"
"뭐 기분 나쁜일있나"
찬바람을 일으키고 조석희가 나가버리자 방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상원은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닐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남아있는 아이들을 토닥여주고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온 상원이 신발 끈을 매려고 허리를 숙였는데 조석희가 다짜고짜 그의 팔목을 잡아 끌었다.
"어?"
"빨리 와요"
"잠깐, 나 신발 끈..."
신발 끈을 묶고 따라가겠다는 말도 끝내지 못했다. 손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남자의 힘에 상원은 운동화 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조석희는 상원을 건물의 가장 구석에 있는 화장실 안으로 끌고갔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기에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일까.
상원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어그의 말을 기다렸다.
"끈 묶을 거예요?"
"....아니 괜찮아"
흰색 신발 끈은 바닥에 끌려 더러워진지 오래였다. 조석희가 상원의 신발을 흘긋 내려다보고 그럼, 이라고 입을 뗀후 화장실 끝칸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한 사람이 서 있기도 좁은 화장실 칸 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으려니 상원은 목덜미가 뜨근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함을 느꼈다.
조석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배, 라고 불렀다. 울림이 큰 화장실이라 목소리가 평소보다 달짝지근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응?"
"선배 여자한테도 흥분할 수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내가 지금 여자까지 신경 써야 하냐고"
조석희가 상원의 턱을 손으로 움켜쥐고 벽으로 몰아 붙였다.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상원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당신, 여자하고도 돼?"
"혹시... 그, 연애 대상으로 묻는거야?"
"그래"
옆으로 길게 찢어진 상원의 눈매에 당혹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대체 왜 이 시점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을 이야기 해줘야 하는 것인지....
조석희가 빨리 말해요, 라고 한번 더 재촉했다.
"나,,, 원래 여자가 좋은 취향인데...."
"원래 남자 좋아하는거 아니고?"
"...응"
"그런데 왜 나를 좋아해?"
"어?"
"왜 나를 좋아하냐고요"
지금까지 들어본적 없는 질문이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지 어언 3년이 되어가는 지금, 억지로 자신의 과 엠티에 끌고와서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화장실 칸막이로 데리고 들어와
던질 만한 질문이던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거야?"
"네"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은 아닌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상대방의 저 괴이쩍은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까. 상원은 고민을 시작했다.
"아,,,그냥 운도 좋고... 멋있고 잘 생기고... 처음엔 관심이 가서 보다보니까 좋아하게됐어.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행운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된 감정이었다. 그것이 어쩌다 애정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정확한 메커니즘은 상원도 알지 못했다.
"그럼 나만큼 운 좋고 멋있고 잘생긴 자식 보면 또 좋아하겠네?"
"엑? 아니야. 너만큼 운 좋은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 ...너보다 멋진 사람도 그렇고"
웅얼거리는 상원의 얼굴이 단박에 붉어졌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석희의 배배 꼬인 심사는 그 정도로 풀리지 않았다.
"여자도 좋아한다면서 남자도 되고"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제가 좋다는 건가요?"
상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바로 그거야 너라서 좋은거야. 딱히 남자가 좋다 이런게 아니라 그냥 너라서 좋은거야.
상원의 해맑은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석희가 살짝 인상을 쓴 채 지긋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선배"
"응"
"나 좋아해요?"
"...응"
대답을 하면서도 상원은 가슴이 아팠다. 어떤 경우에 물어도 자신은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제 좇 빨아주세요"
"...뭐?"
"빨아 달라고요 지금"
자신이 잘 못 들은게 아닐까 했던 희망이 산산조각 나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조석희는 상대가 당황해하거나 말거나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바지
퍼스너를 내렸다.
"서, 석희야"
"해주세요 선배 나 좋아한다면서"
"좋아해 좋아는하지만..."
누가 들어올 수도 잇는 화장실 안에서 무릎을 꿇고 남자의 성기를 빠는 것과 좋아하는 문제는 영 다른 것이었다.
"좋아하는데 그것도 못해줘요? 선배 나 좋아한다는 거 거짓말이에요?"
이 인간에게 좋아한다는 의미가 모든 것을 해줄수 있다는 것으로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좋아하는 거랑 이거는....."
"이거는 다른 문제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죠?"
조석희가 고개를 숙여 상원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 대고 말했다.
"선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실망할거예요"
"....."
대체 난 너에게 몇 번을 실망했는데 너도 한번쯤은 실망하고 넘어가 주면 안되겠니.
"선배 빨아줘요"
이미 단단하게 불거져 있는 살덩이를 끄집어내어 상원의 허벅지사이에 비비며 그가 음란한 말을 지껄였다. 청바지 위로도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귓가에 닿은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평연함을 띠였다.
"빨리 해주세요"
솔직히 상원은 아직 조석희란 인간에게 느낀 실망을 모두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못 견딜 정도로 상대가 좋으면서도 인간적인 부분에서 실망은 어쩌지 못했다.
이번 엠티 동행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서였다. 조석희에게 일말의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데 인간적인 면모는 고사하고 다짜고짜 게임을 하던 자신을 화장실 구석으로 끌고와 오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숨이 났다.
이런 비인간적인 인간의 행태도, 그리고 거기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자신도,
"...입으로?"
상원이 물었다. 조석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손으로 상원의 턱을 잡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의 감촉이 뺨을 스쳤다.
상원은 눈을 감은채 입을 벌렸다. 입안 꽉 차게 들어오는 살덩이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까칠한 음모가 코끝에 닿았다.
"물고만 있을거에요?"
재촉아닌 재촉이었다.
상원은 입술을 오므리고 혀를 움직여 입안에 들어와 있는 밑동을 핥았다. 조석희가 한손으로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탁한 음성으로 근느 상원에게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귀두 끝은 혀를 세우고 핥아봐요, 숨은 참고 길게 빨아주세요, 목구멍에 닿을때까지 넣어주세요 네, 그렇게.
누가 올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참아내며 상원은 자신의 연인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혀와 입을 움직였다.
"눈 떠"
조석희가 명령조로 말했지만 상원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음란한 눈빛을 하고 있는지 상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선배 눈 떠 눈뜨고 내 자지 보면서 빨아줘요"
천박한 속삭임.
그 한마디에 상원은 감았던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남자의 음모였다. 검게 윤기가 흐르는 짧고 곱실곱실한 음모,
뒤로 이어져 있을 때 엉덩이 위로 느껴지는 그것이었다.
조석희가 허리를 짧게 차 올렸다. 숨이 껄떡껄떡 차올랐다. 그래도 끝까지 그는 자신의 입안에 물려있는 살덩이를 뱉어내지 않았다.
조석희의 입에서 건조하고 탁한 신음소리가 나왔다.
상대가 자신의 행위로 인해 흥분을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햇다. 상원은 신체적인 쾌감의 고조보다 정신적인 만족감을
중요시 여겼다.
이쯤하면 됐을까 싶어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한번, 눈을 깜빡거렸다. 조석희가 갑자기 상원의 팔을 움켜쥐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또 뭘시키려고 하는걸까. 궁금증보다 두려움이 앞선 상원은 그대로 굳어 서 있었다.
"...왜 그런 표정짓는 거예요"
"내가 뭘"
"유혹하는 표정으로 남자 좇 빨면서 흥분했어요?"
조석희가 거침없이 손을 뻗어 상원의 다리 사이를 움켜쥐었다. 상원의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다. 반쯤 일어선 그곳이 자신의 음란함을 내비치는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선배"
평소와는 약간 다른 들뜬 목소리였다.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왜, 하고 대꾸했다, 조석희가 조그맣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상원은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나 선배 거 하고 싶어"
"..어?"
"선배꺼 빨고 싶다고 지금"
말이 의미로 와 닿지 않는 순간이 올수도 있음을 상원은 경험하는 중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거야..."
"나 지금 당신거 입으로 하고 싶다고..... 시발, 몇번이나 말하게 하는거야"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해서 들으니 귀는 이상없다는 것이 확인되엇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말하고 있는 조석희가 미친 것인가.
"...석희야 왜그래"
상원은 솔직한 심정을 입밖에 내었다.
두 사람이 몸을 섞은지 벌써 일년 여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에게서 입으로 서비스를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조석희는 자신이 받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지만 자신이 남자의 것을 입에 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행동했다. 이기주의의 절정체인 그가 누군가에게
봉사를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처음에 상원은 기대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예 포기상태였다. 그냥 같이 몸을 맞대고 비비는 것만으로도 황공무지올소다 라고 생각할 수 박에.
그런데 지금 자신의 것을 빨고 싶다니!! 그것도 화장실 구석에서!!
"내가 뭘요"
"...내가 무슨 잘못했어?"
상원은 자신이 석희의 심기를 건드려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석희가 상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피식웃었다. 선이 유려한 입술에  걸린 비웃음에
상원은 아까보다 한층 더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사람 말이 그렇게 말 같지 않나"
거기까지였다. 조석희의 친절한 설명은,
이후부터는 모든것이 행동이었다. 그는 상원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바지와 팬티를 함께 끌어내렸다. 제지할 틈도 주어지지않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점막에 아래가 침범당하는 감각에 상원은 헉, 하고 비명을 질렀다. 조석희가 상원의 살덩이를 손에 쥐고 혀로 밑동부터 귀두부근까지 핥았다.
소름끼칠정도로 좋았지만 겁이 덜컥 나서 상원은 손으로 상대를 밀어내려고했다. 그러자 아래에 무릎을 끓고 앉아있던 조석희가 사나운 얼굴을 하고 혀를 찼다.
"가만히 있어요 버르작거리지 말고"
"...아, 아파"
"안 아프게 해줄게"
조석희의 단골맨트였다. 넣기 전에 항상하는 말,
선배 안아프게 해줄게요 살살 할게요, 아프다고 하면 넣다가 바로 뺄게요 정말로, 선배 나 믿죠? 기타 등등.
세상에 믿으면 안되는 말이 세가지 있다했다. 중국집의 지금 출발했어요  상인의 이거 하나도 안남기고 파는거에요, 그리고 남자의 오빠 믿지?
상원에게 세번째는 조석희의 선배 나 믿죠? 였다...... 못 믿어. 나 너 못믿는다. 어떻게 널 믿겠니 석희야
"선배 나 믿죠?"
"..."
상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빠르고 명석한 조석희가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좋을대로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고 하고자 하는 행위를 이어갔다.
조석희는 입을 크게 벌려 상원의 반쯤 일어선 성기를 머금었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애무가 시작되었다. 상원은 차마 그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댔다.
혀를 사용해요.
그가 항상 나른한 목소리로 던지던 한마디가 어떤의미였는지 상원은 지금 전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혀를 사용하는 것이..... 이런것이었구나.
"하아,,,아"
참으려고 해도 새된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터져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벽에 기대고 서 있는 것도 간신히 였다. 몇 번의 혀놀림만으로 상원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할딱거리자 조석희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조석희는 남자의 좆 따위 입에 물고 빨 생각을 한번도 한적이 없었다. 상대가 이상원이라고 할지라도, 그런데오늘은 이상하게 자신의 것을 열심히 물고 끙끙거리고
있는 상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이상할 정도로 욕구가 들끓게 된것이다.
다리가 풀린 상원이 조석희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조석희가 상원의 셔츠안으로 손을 넣어 오독하니 솟아있는 유두를 지분거렸다. 혀가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에 감각이 가득 차 올랐다. 입술을 깨물어 이상한 소리가 새나가는 것을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
상원은 재빨리 두 손으로 상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어지간히 느낀 모양이었다.
조석희는 웃으며 상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상원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까지 셀수 없이 몸을 겹쳐왔던지라 조석희는 상원의 몸 어디가 민감한지
눈을 감고도 정확히 집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음란한 말을 시키면 시키는 대로 줄줄 내뱉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과 관련된 말은 자처해서 내뱉지 않는 점이 이상원
다웠다. 웃음이 났다. 이상한 유쾌함이 들끓었다.
조석희는 손바닥으로 상원의 엉덩이를 감싸듯 잡고 열심히 혀를 움직였다. 입안에서 무게를 더하는 살덩이의 느낌과 특유의 냄새가 싫을만도 한데 그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더 몰아 붙이고 싶었다. 절정으로 한계까지.
"아, 아,,,,,,자,,,,"
상원이 잠깐, 이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조석희는 힘껏 빨아들여 감각을 고조시켰다. 어깨를 쥐고 있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상원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울컥 하고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조석희는 입안에 있는 정액을 그대로 삼켜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쁜 맛은 아니었다.
조석희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사정을 하고 나서도 상원은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선배"
"..."
"선배 좋았어요?"
"...아....어....응"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좋았는데?"
"...응
"얼마나 좋았는지 듣고 싶어요 선배"
"아...응"
무슨말을  물어도 응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석희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다른 사람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고 저하고만 있는게 가장 좋을만큼, 그렇게 좋았어요?"
"...응"
결국 조석희는 상원의 바지와 팬티까지 손수 입혀주는 매너로 서비스를 마무리했다.













넋이 나간다.
상원은 문장 그대로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머리로 정리가 되지 않아 한참을 지나서야 응? 하고 되묻기 일쑤였고 대화는 커녕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같이 놀러온 학생들은 갑작스런 상원의 변모에 적응되지 않아 처음에는 어디가 아픈것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상원이 그때마다 괜찮다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거듭되는 그의 행동에 처음에 걱정을 해주던 사람들도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자 말을 건네지 않게 되었다.
멀찌감치 앉아 조석희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 친구들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자신의 과 엠티에 데려와 놓고서 그는 상원이 사람들에게 격리되어 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상원은 엠티에서 어떤 인간관계도 구축하지 못하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상원의 상태는 여전했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꿈을 꾸는 듯한 무언가에 홀린듯한.
"식사하세요"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상원은 한템포 느리게 응 하고 대답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상원의 뺨을 스쳐 이마 위를 만졌다.
"열도 없는데"
"...응?"
"얼굴이 발긋한거 같아서 열 있나 하고요"
"아니 열없어"
그렇게 대답하면서 상원은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설마 야한 생각이라도 하고 계신건가"
"...!!"
"bingo?"
"아, 그,그...게"
거짓말을 못하면 둘러대는 능력이라도 있음 좋으련만,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팔을 허우적대는 상원의 모습은 방금전 발언을 긍정하는 꼴이었다.
조석희가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을 상원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번 엠티를 기점으로 상원의 상사병이 더 심해진게 분명했다.
"선배 무슨 생각했는데요?"
"....밥이나 먹자"
상원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자포자기 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엠티를 다녀온 이후 그의 머릿속은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만 무한 반복이었다. 너무나 많이 재생시켜 기억이 늘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무슨 생각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마지막말은 상원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였다. 변화가 있는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상원은 처음에 자신의 착각이 아닐까 했다.
"말해줘"
이번엔 얼굴을 부비었다. 상원은 자신의 허리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는 조각같은 얼굴 때문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착각이 아니다. 그날 이후 조석희는 애교가 늘었다. 자신이 애교를 부린다는 자각은 아직 없는 것 같지만 분명 이전보다 더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스킨십을
시도했다.
"벼,별로 그냥...밥먹자 식겠다"
"선배 그거 기억해요?"
"....뭐 뭘"
또 무슨 온갖 짓궂은 질문이 나올까 두려워진 상원은 식은땀이 흘렀다.
"선배가 했던말, 그날"
"그날...."
그날이라 함은, 분명 그날을 뜻하는 것이렷다.
상원의 머릿속에 그날 자신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 떠올랐다.
하아....그만, 아,,,,하악..... 따위의,
"선배 그말 진심이세요?"
"어? 진심?"
신음소리에 진심을 담을 수 있다면 그날 신음은 순도 100% 진심을 담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고 저하고만 있는게 가장 좋을만큼 그렇게 좋았단 말이요"
".....!"
"그렇게 좋으셨어요?"
"아니,그게.... 그러니까..."
넋이 나갈 정도로 좋았다는 말을 하면 밝히는 것 같아 보일까봐 상원은 열심히 주제를 돌릴 궁리를 했다.
"밥 먹어야지!"
애써 밝은 소리로 외쳤는데 조석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립서비스였어요? 그냥 했던 말에 제가 병신처럼 속은건가요?"
"좋았어! 립서비스따위 아니야, 정말 좋았어. 너무 너무 좋았어. 정말로....."
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번만 이야기 했어도 되는데 표현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정말 다른 사람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응"
사귀는 사람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상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코 앞의 남자가 그 누구보다 중요했다.
"친구들도?"
"응"
"부모님도?"
"...응"
잠시 망설이다 대답한 상원은 불효자를 용서해주세요 하고 중얼거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상원의 대답을 들은 순간 조석희가
순간, 활짝, 말그대로 활짝, 웃었다.
상원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사람의 웃는 얼굴이 향기로울 수도 잇구나. 그래 석희의 웃는 얼굴을 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아니 지금 죽어야 하는건지도 몰라.  천하의
개새끼 조석희가 이렇게 다정하게 웃어주는 날은 다시는 오지 않을테니까. 내 인생 최고의  정점을 찍은게 분명해 3초 뒤면 인생 내리막길이야. 내리막길.
"선배"
조석희가 상원의 손을 잡아끌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상원은 응 하고 대답하며 그를 올려다보앗다.
"밥먹으러 가자 선배"
"그래"
이것이 지옥으로 자신을 끌어내리는 손이라고 할지라도 백만번이고 천만번이고 잡으리라.
"밥 먹으러 가지는데 뭘 그렇게 비장한 표정을 해요"
"아, 하하 아니야"
상원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조석희는 피식웃으며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상원선배"
"응?"
조석희가 상원의 밥위에 손수 명란젓을 올려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 신경 안써도 되는거죠?"
"무슨 신경?"
"선배 친구가 있건 말건 이젠 신경쓰고 싶지 않아요 다정한척하는거 힘들거든요"
"아하하하,,,,,아....하하"
하마터면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가락을 삐긋해서 그대로 밥알을 식탁위에 흩뿌릴 뻔했다. 그게 다정한 척이었다니, 두번만 더 다정했다간 정말 큰일나겠다.
"그래 이제 신경쓰지마"
"네 어차피 선배는 나만 있으면 되니까"
자신이 한 말이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것도 당사자에게-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저하고만 살아요 앞으로, 나하고만 밥먹고 , 나하고만 놀고, 좋네 그거"
앞으로 펼쳐질 애인의 고립된 삶에 대해 논하는 조석희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거기에 홀려 상원은 정말 좋은건가 그거 라고 생각할 뻔했다.
"선배"
"어?"
"지금 프로포즈하고 있잖아요"
"....."
"프러포즈하는데 멍하게 앉아만 있으면 어쩌라고요 대답좀해봐요"
상원은 잠시 조석희의 "propose"발음을 감상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단어의 의미가 상원의 뇌세포를 자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초.
"어?!...."
당신은 친구는 물론 가족들로부터도 고립시켜 나만 보게 만들겠어. 라는 살벌한 선언을 프로포즈라고 내미는 남자를 보며 상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석희가 턱을 괴고 그런
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얽히자 상원은 지금 이 순간을 농담이나 장난으로 넘길수 없음을 깨달았다.
저 같잖은 프로포즈를 석희는 정말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것이엇다.
절대로 이룰수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상원은 포기를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고백하고 잇었다.
남들이 듣는다면 미친거 아니냐고 반문할 내용의 프로포즈였다.사흘은 굶은 사람에게 내밀어진 독이 든 음식과 같았다.  먹으면 죽는다. 하지만 먹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상원에겐 애초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사약을 받아들 준비를 하고 상원이 입을 열었는데 현관에서 벨소리가 울려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상원이 누구지? 하는 눈빛을 보내자 조석희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가 나갈게"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조석희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선배 돈 많은가봐요"
고도의 비꼼이었다. 언젠가 혼자 있을때 잡상인에게 문을 열어주었다가 먹지도 못할 건강식품을 잔뜩 사들인 상원을 향한,
잡상인이나 교인이라면 자신보다 석희가 나가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상원은 반박도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1초만에 퇴치할 거라 생각했던 불청객이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주인보다 더 당당히 들어오는 낯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낯선 얼굴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웬일이세요"
의외라는 듯 그러나 결코 당황하지 않고 태연한 어조로 조석희가 물었다.
"주말에 왜 갑자기 약속을 취소했니"
"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그 중요한 일이 뭔데"
"그 중요한 일이 뭔데?"
차갑고 건조한 음성으로 그녀가 자신의 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감정이 배제된 듯한 태도는 그녀가 주말의 약속문제로 인해 화가 났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다.ㅏ
하지만 조석희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다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선배 식사해요"
"어?,,,,어"
인사를 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상원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고 숟가락 쥔 손에 힘만 주었다.
"반찬 입에 안 맞아요?"
상원이 밥상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조석희가 약간 인상을 쓰고 물었다.
아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잇던 그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대체 언제즘 인사를 드려야 하나 눈치를 살피느라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지금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에 대해 할 말이 그것뿐이라고?"
"네"
이제나저제나 인사를 드릴 기회를 찾으며 그는 눈만 깜빡거렸다.  어물거리던 그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조석희를 힐긋 쳐다보았다.
이렇게 눈치없는 성격이었던가 하는 의문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색한 분위기에 질식해 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갈 무렵에야 조석희가 입을 열었다.
"여기 같이 사는 선배예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간신히 숨통이 트이는 기분으로 인사를 했다. 남자의 어머니는 적당한 거리를 둔채 그래요 하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별다른 호감도 적대도 드러내지 않고 다시 시선을 아들에게 돌렸다.
"이번 주말에 다시 시간 잡았다."
"알겠어요"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거다. 대동그룹여식도 시간이 남아돌아서 너만 기다리고 있는건 아니니까"
"알겠다고 했습니다"
대답을 하는 조석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상원은 눈치가 그리 둔한 편도 아니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결혼을 전제로 한 맞선임을 그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간다"
"안 나갑니다"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준 후 걸어나갔다.
어색한 침묵이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 던져졌다.
"저기 있잖아....."
먼저 입을 연 것은 상원이었다"
"뭐가 있어요"
조석희가 무뚝뚝하게대꾸했다.  그가 당황하거나 미안해하면 평소보다 더 차가워진다는 것을 알게된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어찌됐건 지금 이 순간의
상원에겐 그런 조석희의 태도가 매정하게만 느껴져 서러움이 더해졌다.
"그럼 없는거구나"
"뭐가요"
"너랑 나 사이에 믿음"
조석희가 짧게 혀를 찼다. 내 이럴줄 알았다는 얼굴을 하고 상원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말 안한거예요, 선배 기분나빠할게 분명하니까"
"내 생각에는.... 전후 관계에 문제가 있는것 같은데"
말을 잇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상원은 시선을 내렸다. 기분이 지독하게 좋지 않았다. 상원은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
"애초에 말 못할 일을 안 하면 되는거 아니야"
"별거 아니에요"
"...."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 마음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상원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체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석희야 너한테는 별거 아닐 수도 잇지만,,,,"
"아버지한테는 당분간 결혼얘기 하지 않겠다고 약속 받았어요"
당분간, 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의 문제를 남자는 애당초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상원은 가만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머니는 또 다른 문제에요, 집안이 다른데"
부모님의 사이가 나쁜것은 아니지만 조석희는 외가와 친가를 엄격히 구분했다. 집안이 다르니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상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그 사고방식을 반박하고 싶었다.
"집안이 다르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쉽게 설명되는 문제야?"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선배. 그냥 나가서 밥만 먹고 오는 거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선배가 이렇게 반응할 거 아니까 일부러 말 안한 거잖아요"
근간에 그는 가끔 볼일이 있다며 두어시간씩 나갔다 돌아오곤 했다. 무슨 볼일이냐고 묻고 싶은 것을 지나친 관심을 보이면 상대가 질려할까봐 묻지도 못하고 꾹 참았던 상원이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때 물어볼껄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면 계속 나한테 말 안하고 나갈 생각이었어?"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상원은 상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가끔 사람다워 보이지않았던 저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상원은 알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
상원은 멀뚱히 상대를 응시했다.
자신에겐 친구와 가족도 버리라는 독점욕을 드러내더니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맞선을 보러 다닌다는데 미안하다는 말은 커녕 당연하다는듯한 태도였다.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바람피우는 것도 아닌데 선배 이런걸로 며칠씩 우울해하잖아"
"....네가 신경쓰고 싶지 않았던건 아니고?"
"그것도 없잖아 있죠"
이쯤되면 화도 나지 않았다. 슬픈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고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니 이제는 조석희가 자신과 같은 인종이 아닐수도 잇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식사하세요"
툭 던져진 한마다.
상원은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무언가가 툭, 하고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동석이 옳았다. 조석희 이 개새끼는 세상이 두쪽이 나도 절대 인간이 되는 법이 없겠지. 자신을 특별 대우해준다고 우쭐해하던 자신이 멍청한 것이다.
조석희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상원은 조석희가 식사를 마칠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왜 안먹냐는 그의 물음에 상원은 별로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선배 화 났어요?"
"아니"
상원이 고개를 흔들자 조석희는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 뒤에서 상원이 작은 목소리로 석희야, 하고 부른 후 말문을 열었다.
"난 네가 이해가 안돼"
"그래요?"
"응"
그렇게 말하고 있는 상원의 표정은 쓸쓸해보였다. 조석희는 그가 맞선 문제로 자신을 돌려서 비난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해하도록 노력해보세요 한번"
별생각없이 던진 말이었다. 사람마다 입장차이가 있는것이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상원에게 이해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구태여 상원에게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상원이 한참 그를 쳐다본후 그래,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가 볼일이 있다고 잠시
나갔다 들어오겠다고 한 것은 그날 저녁 무렵 즈음이었다. 그리고 상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동석아 손님오셨다"
"손님? 누구?"
운동 중이던 동석이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자신을 이시간에 체육관으로 찾아올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글쎄다. 아주 쓸데없이 잘생긴 놈이던데"
"...."
동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이 아는한, 쓸데없이 잘 생긴 놈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놈하나였다. 입구로 나가니 고까운 표정을 지은 자신의 후배가 서 있었다.
"니가 여긴 웬일이냐"
용건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여기 왜 나타났느냐는 짜증의 물음이었다. 조석희 역시 상대가 자신에게 반감을 드러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물어보고 싶은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하하하"
김동석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이내 사나운 눈으로 고등학교 후배를 노려보았다.
"내가 너 궁금한거 알려주는 사람이냐?"
"하나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오만하고 성격 더러운 저놈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일테지.
"상원이?"
"어디 있습니까?"
동석은 피식 웃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이 후배는 지금보다 더 재수없는 낯짝을 하고 교실로 찾아왔다. 그렇다고 지금 조석희가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 행동하느냐, 그것은 또 아니다.  조금 달라진 것은 상원을 찾고 있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초조함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숨기고 있지만 사람의 기척을 잘 읽는 동석은 그가 매우 초조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석의 입가에 미소가 덧그려졌다.
"글쎄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설마 상원이가 네 연락도 안받고 잠수라도 탔냐"
"...."
두사람의 직전의 만남은 최악이었다.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임에도 조석희는 동석과 그 무리를 향해 욕지거리를 해댔다. 동석의 자신의 친구에게 그새끼와
헤어지지 않으면 다시는 보지말자는 선언까지 했을정도였다. 조석희의 적개심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자라 오만하기 짝이없는 조석희가 자존심을 굽히고 여기까지 찾아온걸 보니 동석은 실실 웃음이 났다.
"상원이랑 같이 살 정도로 친한 사이아니었어? 그런데 연락이 안되는건가?"
"....."
"어쩌냐 상원이 한번 화나면 무서운데"
"......"
조석희의 얼굴이 점점 더 살벌하게 구겨졌다. 동석의 이죽거림도 멈추지 않았다.
"두사람 사이에 생긴 문제인데 왜 나한테와서 해결해 달라고 하는지 알수가 없네, 그리고 내가 상원이한테 의사도 묻지 않고 걔 거처를 마음대로 알려주면 쓰나"
이건 대놓고 알려주기 싫다는 광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였으면 그러든가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겠지만 조석희는 지금 그런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상원이 평소 성정을 떠올리면 믿기지 않을 만큼의 단호함이있었다. 한번 그것이 무엇인지 겪어본 조석희로서는 지금 이 상황을 앉아서
손놓고 방관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상원과 마주친 이후에 맞선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결혼생각이 없다는 얘기는 했지만 마련한 자리는 나가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 그녀의 흔들림 없는 지론이었다. 결과는 신경쓰지 않겠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조석희역시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가서 차만 마시거나 밥만 먹고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돌아오면 여자들로부터 오는 연락은 일체받지 않았다.
이정도로 어머니가 결혼 문제를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거라고 여겼다. 별거 아닌 일이니까.
하지만 상원은 신경을 쓸게 분명했다. 그런 모습을 보기 싫어서 일부러 얘기를 하지 않은건데 그게 또 상원의 심기를 긁은 모양이었다.
솔직히 피곤했다. 연애라는 것이 매사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배려하는 것은 조석희에게 대단히 낯설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상원을 손에 넣고 싶었다. 그래서 그 성가심을 감내하고 있었건만, 볼일이 있다고 나간 상원은 다음날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핸드폰은 꺼져있는상태였다. 핸드폰을 켜기만 하면 위치추적을 하든 뭐든 할텐데 상원은 단 한번도 핸드폰 전원을 켜지 않았다.
물론 과후배를 가장해 그의 집에도 확인을했다. 상원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을 확인하자마자 조석희는 하는수 없이 가장 친한 친구인 동석을 찾은 것이다.
"상원선배랑 연락되십니까"
조석희는 다시한번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갔다.
"글쎄"
동석이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며 이죽거렸다. 맘같아선 저 목을 비틀어 당장 상원선배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싶었지만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알려주셨음 좋겠습니다"
"싫어"
"...."
인내심의 한계는 이미 예전에 박살난지 오래였다. 주먹을 쥐고 있는 조석희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부탁드립니다"
조석희가 고개를 숙였다. 뒤를 돌아가려던 동석의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이놈이 이렇게까지 나올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석희는 한참을 고개를 숙인채 서 있었다.
"글쎄다. 네가 열대만 맞고도 나한테 똑같이 그렇게 고개를 숙일 수 있으면 한번 생각해보든가 하지"
심술이었다.
저 개새끼가 순순히 열대를 맞아 줄리도 없거니와, 그렇다고해도 상원의 거처문제를 이새끼한테 이야기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뭐?"
"알겠습니다"
조석희가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근처에 걸어두며 말을 이었다.
"열대만 맞으면 되는건가요?"
"하하하하하하"
김동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쪽에서 줄넘기를 하던 대진이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을 가웃거렸다.
"왜그래? 뭔일인데 그렇게 신이 났냐. 어 얘는 그 개새끼 아냐?"
눈치없는 대진이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조석희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을 했다.
"맞아 그새끼"
"이 새끼가 여긴 무슨 일이야"
동석은 발치에 놓여있던 글러브를 집어 들어 대진에게 던졌다.
"잘됐다. 윤대진 너도 같이 하자"
"응? 뭘 같이해?"
"사이좋게 다섯대씩 할까. 내가 다섯대. 대진이가 다섯대씩 때린다. 그래도 되지? 조석희"
동석이 조석희에게 헤드기어를 던져주었다. 영문도 모르고 신이난 대진이 얼른 글러브를 손에 끼웠다.
"우와! 진짜? 이 새끼 패도 된다고? 완전 신난다!"
대진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후배가 눈에 거슬렸다. 그렇다고 막 증오스럽거나 죽여버리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조건없이 다섯대나
때릴 수 있다니 마치 공짜로 오락실에서 철권 다섯판을 하는 기분이었다.
"마음대로 하시죠"
조석희가 헤드기어를 머리에 쓰며 링 위로 올라갔다. 동석이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했다.
퍽, 하는 소리가 도장 안에 울려퍼졌다. 준비를 하기도 전에 얻어맞은 조석희가 턱을 감싸쥔 채 비틀거렸다. 동석이 눈을 빛내며 양쪽 글러브를 맞부딪혔다.
순식간에 상대를 향해 두번째 펀치를 날리는 동석의 순발력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아 진짜 괴물이다"
"뭐야 저쌔끼"
대진이 마지막으로 날린 라이트 훅을 매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 조석희를 보며 도장 안에 수근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헤드기어를 벗어 매트 위로 던지며 조석희가 핏물을 뱉어냈다.  대진의 펀치를 연달아 다섯번이나 맞고도 조석희는 신음소리를 내기는 커녕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좋은 선수를 키우는데 인생을 걸고 있는 동석의 아버지가 불쑥 조석희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아버지 얘는 신경쓸거 없어요"
동석이 정색을 하며 아버지를 가로 막았다.
"신경쓸거 없다니 이렇게 좋은 맷집을 가졌는데"
"관장님 저도 맷집 좋아요"
관장님의 사랑에 맹목적인 독점욕을 보이는 대진이 글러브로 자신의 가슴을 퉁퉁 쳐보였다.
"약속 지키시죠"
조석희가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말했다.  동석이 묘한 표정으로 그런 후배를 내려다 보았다.   조석희가 고개를 들자 다시
동석을 내려다 보는 형국이 되었다. 동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약속? 무슨 약속?"
"열대만 맞으면 상원선배 어디 있는지 말씀해주신다는 약속 말입니다"
"내가? 난 생각해본다고만 했는데?"
"ㅡ!!"
순간 조석희의 얼굴에 살기가 치솟았다. 김관장이 어깨를 살짝 움직여 펀칭 미트를 내뻗었다. 가죽이 찢어지며 미트 안에서 스펀지가 튀어 나왔다.
"시발!"
동석을 향해 날린 주먹이 가로막히자 조석희가 흉포한 기세로 욕설을 내뱉었다. 동석은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팔짱을 끼고 서서 대치했다.
"내가 당신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상원선배야. 그런데 상원선배 못 찾으면 그 이유도 사라진다는 것만 알아둬"
분노를 짓씹어 삼키는 그의 눈빛에서 방금 전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동석을 노려보던
조석희가 매트 위에서 내려와 옷을 집어 들었다.
"야 조석희"
김동석이 그를 불러 세웠다. 조석희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불러세운 이유 여하에 따라 살인도 불사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난 상원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
조석희의 얼굴에 한층 더 살기가 일렁였다.
"한승완한테 가봐, 그놈은 알고 있을거다"
조석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동석은 알 수 있었다.
"상원이가 제일 의지하는 녀석이니까 분명 어떻게든 연락하고 있을거다"
조석희는 알겠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도장에서 빠져 나갔다. 그때 김관장이 혀를 차며 말문을 열었다.
"저놈은 글러먹었어. 저건 사람 죽일 주먹이야. 저런 놈은 권투하면 지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지 쯧쯧"
"관장님 제 펀치는요? 제 편지도 살인 펀치라고 빨리 칭찬해주세요 "
"살인펀치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그래서 결승전에서 ko패 당하냐. 빨리 연습이나 해"
"아, 시발, 빨리 나도 칭찬해줘요 빨리 빨리"
대진이 김관장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어서 자신을 칭찬하라고 강요하고 있을때 동석은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재빨리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눈치는 더럽게 없는 주제에 끼어들기 좋아하는대진이 누구에게 전화하는 거냐고 묻자 동석은 한승완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왜? 한승완한테 전화해?"
"좆서퀴 찾아간다고, 너 내가 시키는 대로 오른쪽 옆구리 확실히 아작냈지?"
"응 우둑 소리 들리던데 새끼 뼈가 부러졌는데도 앓는 소리 하나 안내 무서운 놈, 후려 팬 내 주먹도 아픈데"
대진은 주먹을 줬다 폈다 하며 중얼거렸다.
"근데 찾아가면 찾아가는 거지 왜 전화까지 해서 알려주냐. 어차피 알게 될텐데 귀찮게"
"누가 찾아가는거 알려준데"
"그럼 왜?"
"그 새끼 오른쪽 옆구리 후려갈기라고"
"...."
대진은 가끔 친구가 보여주는 이상한 유치함에 놀라곤 햇다 평소엔 쿨하고 어른스러워서 존경스러운 녀석이건만,
"좆서퀴가 그렇게 싫으냐?"
"시발 존나 싫어"
승완이 전화를 받지 않자 동석이 다시 통화를 시도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싫으면 상원이 얘기는 왜 알려줬냐. 크하하하  설마 그 새끼가 상원이 못찾으면 너 죽일까봐 무서워서 그랬냐?"
동석이 대진을 힐끗 노려보았다. 그의 주먹이 대진의 턱밑으로 다가오기 까지 0.5초도 걸리지 않았다.
"죽고싶지 윤대진"
"아 시발놈이 왜 나한테 승질이야. 농담도 못해!"
"내가 왜 그새끼를 무서워하냐 문제는...."
"문제는 뭐"
동석은 그가 상원의 행방을 듣기 위해 순순히 자신에게 맞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맞다가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반격해올거라고 생각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열대 다 맞아주고 고개까지 숙여오는 조석희를 보는 순간 이새끼가 상원이를 좋아하긴 억수로 좋아하는 구나 하는 불길하고도
꺼름직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친 것이다.
"저 새끼 이상원 진짜 좋아하긴 하나보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던데 저런 놈이 뭐가 부족해서 남자를....음, 상원이가 나쁘다는건 아니지만 아무튼 저런 놈은 자기 좆을 청순하게 간직하지 않는단 말이지"
"청순 ....좆 아 진짜"
동석이 얼굴을 찡그리며 질색을 했다.
"왜애! 둘이 여태 손만 잡지는 않았을거 아니야"
"....상상하기 싫으니까 말을 말자. 너 그리고 그 얘기 승완이 앞에서 하지 마 승완이 칼 들고 그놈 죽이러간다"
"아이고 그러는 넌 왜 서퀴벌레 놈을 한승완한테 보냈냐? 칼로 찔러 죽이라고?"
"아니"
동석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안 알려줬어도 조석희는 어떻게 해서든 상원이 찾았을걸"
"그럼 걔가 찾게 놔두지 그 새끼 고생도 하고 얼마나 좋아"
"넌 걔가 자기 손으로 상원이 찾았을때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안해봤냐?"
"응 그런것까지 생각해야돼?"
늘 별 생각없이 사는 대진이었다. 동석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런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석희 같은 놈은 한 사람한테 만족하는 타입 아닌거 알지?"
"어 청순한 좆타입이.... 하하하 알았어 안할게 아무튼 그게왜?"
"그런 놈이 한사람한테 집착하게 되면 어떻게 될거 같아"
눈동자를 굴리던 대진이 짝 손뼉을 치며 아아, 하고 입을 열었다.
"완전 개또라이 쌍또라이. 씹창또라이 되어서 집착하잖아. 스토커처럼, 크크 장난 아닐걸, 나 아는 형 존나 카사노바였는데 어떤여자한테 뽕 가서
결혼했는데 쩔어, 전화 안받으면 1분마다 하고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어디갔다왔냐 누구 만나고 왔냐고 환자처럼 캐묻고  형수한테 바람피우면
자기 몸에 휘발유 붓고 껴안고 죽는다고 했대. 크크크 근데 이게왜? 이 얘기가 여기서 지금 왜 나와?"
"....넌 야동이랑 권투생각만 하면 돼서 좋겠다"
"응 좋지 근데 왜? 이 얘기 왜 하냐고?"
"됐어 됐다"
단순하고 편한 친구의 고민거리를 늘려주고 싶지 않은 동석은 손을 내저었다. 그때 옆을 지나가던 김관장이 아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아까 그놈하고는 척도 지지말고 적도 두지마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타입이더라"
"관장님 저는 어떤 타입이에요? 저도 멋진 별명 붙여주세요"
"너는 미워도 다시한번"
"왜요! 제가 뭘요! 내가 얼마나 예쁜데요 잘봐봐요 머리색도 바꿨는데"
대진이 꽥꽥거리며 자신의 자주색 머리를 들이밀었다. 김관장은 신경도 쓰지않고 다른 선수들의 자세를 고정해주며 등을 돌렸고 대진은 관장님이
자기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이건 사기라고 소리 지르며 줄넘기를 시작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
동석은 아버지가 던지고 간 말을 입으로 중얼거려보았다. 늦었다. 이미 자신의 친구인 상원이 그 너무 먼 당신과 엮여버린 후였다.   
동석은 다시 핸드폰 통화버튼을 눌러 한승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막내 너 또 전화온다"
"냅둬요 조선족이 또 아직 낳지도 않은 내 아들 잡고 있다고 전화하는거예요"
의자에 앉아 무를 깎고 있던 승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핸드폰이란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아 그놈 잘생겼다"
승완은 자신이 깎아놓은 무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못했다.
"승완아 잠깐 나와봐"
일년 일찍 들어왔다고 깝쳤다가 승완에게 딱 한대 맞고 그 다음날 사이좋게 친구가 되자고 울며겨자먹기로 악수를 청한 김군이 승완을 불렀다.
"왜?"
주방의 세계에서 일년은 결코 맞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승완은 뻔뻔스럽게 자신의 선배에게 반말을 했다.
"누가 너 찾는데?"
"여자?"
"...그럴리가"
"그럼 안 나가 . 남자가 감히 왜 날 부르고 지랄이야. 용건이 있으면 지가 쳐 와야지. 여자도 아닌 주제에 , 꺼지라고해"
남녀차별이 지독한 남자였다. 남자에게는 예의따위 차릴 필요가 없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게....니가 가서 말할래?"
무를 깎던 손을 멈춘 승완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유난히 차게 빛났다. 김군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알았어 알았어 가서 말하고 올게"
자신의 선배가 후다닥 사라지자 승완은 자신이 깎아 놓은 무를 만족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따 이껍질이 투명해서 글씨가 보일 정도로 깎아야 한다는데 그게 가능하기나 한거야"
한승완은 무 껍질을 눈앞에 가져다 대어 보면서 투덜거렸다.
"야 이녀석아 애꿏은 무는 그만 좀 깎고 감자랑 생강 좀 깎아 놔라"
지나가던 주방장이 승완을 보고 한마디 던졌다. 주방 총책임자의 말에는 승완도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료를 보관해두는 냉장고로 들어가 커다란 들통을 가져왔다.
성인남자 둘이 간신히 옮길 수 있는무게를 한승완은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번쩍번쩍 들어올렸다. 그의 크나큰 장점중 하나였다.
"아 젠장 이놈의 감자는 깎아도 갂아도 끝이 없네"
재료를 씻고 다듬는 것은 주방 막내들의 일이었다. 물론 한승완이 자신의 선배에게 우격다짐으로 넘긴 청소와 설거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찮은 일은 질색하는 한승완이 재로를 다듬는 일을
승낙한 이유는 칼을 다루는 기술을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찮은 것은 귀찮은 거였다.
"아 귀찮아!"
그는 반쯤 깍던 감자를 내던지며 버럭 소리 질렀다.
"저도 귀찮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승완은 자신도 모르게 칼을 움켜쥐었다.
"뭐야 넌"
"피차 귀찮은 것은 질색이니까 대화는 금방 끝내고 가도록 하지요"
조석희였다. 그의 등 뒤로 얼굴이 파랗게 질린 김군이 서있었다. 주방 안쪽으로 방문객을 들이지 않는 것은 철칙이었다.
"주방은 외부인 출입금지다 꺼져"
승완이 조석희에게 던진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김군이었다.
"아니 그게 나도 분명히 출입금지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한사코 널 봐야 한다고..."
김군은 필사적으로 말렸을 것이다. 저 빌어먹을 조석희 새끼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그냥 뚜벅뚜벅 안에 들어왔을 테지.
안봐도 비디오 척하면 삼천리다.
"지가 뭔데 보고 싶다고 여길 들어와 재수 없게"
"저도 선배님 보고 싶어서 여기 들어온거 아닙니다"
선배님이란 호칭에 존대어까지 사용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상대방의 심기를 긁는 말투였다. 그걸 그대로 참아줄 용의도 업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승완이었다.
"아 시발 뭐라는거야 빨리 꺼져 니 얼굴보면 나도 내 성질 못누르니까"
그냥 던지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예전에 조석희에게 칼을 꽂아 넣은 전적이 있는 남자였다.
"빨리 나갈 수 있도록 협조해주시면 되겠군요"
그러나 상대도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자신의 배에 꽂힌 칼을 뽑아 상대의 배에 꽂아 넣은 놈이 바로 조석희였다.
게다가 협조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는 꼬락서니가 심상치않았다.
"협조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꺼져 너랑 할말 없어"
"저는 있습니다"
한승완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도 조석희는 뒤로 물러서기는 커녕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 사이에서 김군만 어쩔줄 몰라 하며 말했다.
"그, 그러지 말고 밖에서 조용히 얘길 나누는게 어떠십니까"
김군이 재빨리 중재에 나섰지만 대치 상태에 들어간 두 사람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어올리 없었다.
"시발  난 니 할말 따위 조금도 관심 없거든"
"선배님이 제가 하는 말에 관심이 있건말건 저는 해야겠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어디있냐니 뭐가?"
"상원선배 말입니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상원이 한테 묻지"
두 사람이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승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석희가 자신에게 와서 상원의 행방을 묻고 있는데 그는 조금도 놀랍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마디로 승완은
상원의 거처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디있습니까"
"상원이한테 물으라니까"
"연락이 안되니까 선배님께 묻고 있는겁니다"
"어? 그래? 이상하다 아까 낮에 나하고는 잘만 통화했는데?"
"......"
"다시 전화해봐"
"연락 안됩니다"
"아 맞다. 상원이 전에 쓰던 핸드폰 해지시켰다고 하더라 너한테는 말 안했어?"
"...."
"너랑 어지간히 말하기 싫은가보다 크크크"
상대방이 들어서 기분 더러워질 만한 말들을 승완은 아무렇지 않게 줄줄 늘어놓았다. 평소였으면 가만히 듣고 잇지 않았겠지만 조석희는 현재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상원 선배랑 직접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해. 누가 뭐라고 했어? 헐, 존나 어이없네, 꺼져라 좋은말로 할때"
한승완이 들고 있던 칼을 휘휘 내저으며 관대하게 말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자면 강판에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조석희새끼가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기분이 좋아져 보여주는
관대함이었다.
물론 그 관대함이 상대방에게 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석희는 이를 사려물었다. 멱살을 움켜쥐고 당장 불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그런것에 순순히 굽힐 상대가 아니었다.
차라리  동석이 상원의 행방을 알고있는 편이 나았다. 그쪽은 재수없긴해도 말이 통하는 인간이니까. 한승완은 꼴통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꽉 막혀 있는 최악의 꼴통.
그런 꼴통에겐 어떤 논리도 먹히지 않는다.
"부탁드립니다"
조석희의 입에서 오늘 두번째로 부탁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그에게는 천지가 개벽하고도 남을 노릇이었다. 그러나 조석희 자존심보다 상원을 찾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날 상원이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조석희는 설마 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를 시도했지만 신호음만 갔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고 한시간 내내
통화버튼을 눌러도 상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원의 핸드폰 전원을 꺼져버렸다. 혹시 무슨일이 생긴건가 싶어 집앞으로 나가 상원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 와중에 셀수도 없이 많은 통화를 시도했지만 핸드폰 전원이 꺼져있다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새벽녘이 되어 하늘이 밝아올 즈음, 조석희는 상원이 자신의 손에서 또 한번 떠나갔음을 인정해야 했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예전에는 차라리 소리라도 지르고 화를 내서 예고라도 했지. 이번에는 나간다거나 떠난다는 뉘앙스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급소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상원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장해제를 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믿어도 좋아. 이 사람이라면 내 약한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아 등의 막연한 믿음.
거기에 잔뜩 취해 있는 상대에게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고 사라진다니. 그건 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는 상원의 집으로 연락을 해서 부모님께 아들의 행방을 돌려서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착한 후배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으니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보라는 말이었다. 졸지에 착한 후배가 된 조석희는 전화를 끊고 학교로 가서 상원이 수업을
받는 인문과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상원의 모습은 수업이 끝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과사를 찾아갔다가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다.
상원이 다음학기 휴학계를 낸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한참동안 아무런말도 하지 못했다.
두번재 강스트라이크였다. 이젠 분노를 넘어서 비참함까지 밀려왔다. 이상원이란 인간이 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일까.
자신을 향해 내비치는 감정은 모두 연기가 아니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동거를 허락하고 몸을 섞고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은 것일가.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기 시작햇다.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씹어 삼키면서 그는 상원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일이 있어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바로 상원의 주변 사람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날리는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맞아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생전 처음 상대방에게 손놓고 맞아줘가면서 얻은 정보가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미칠 지경이었다.
"아 시발 감자야 혼자 껍질 벗는 능력 좀 가지면 안되겠니"
감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저 금발머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상원선배한테 할 얘기가 있습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건 내 알바 아니거든, 나 감자 깎아야 하거든? 존나 중요한 일이거든, 좀 꺼져주라"
한승완이 감자를 칼끝에 꽂아 넣고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주먹을 쥔 조석희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빌어먹을 금발새낄르 피떡이 되도록 때려 상원을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fucking stupid jerk I can`nt  take it anymore I could kill you......
"감자 깎아야 한다고 시발"
한승완이 들고 있던 감자를 조석희에게 던지며 으르렁거렸다. 분위기를 봐선 칼부림이 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조석희가 허리를 굽혀 자신의 발치에 구르고 있던 감자를 주워들었다. 사람의 손에 들려있는 감자가 이렇게 까지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김군은 이날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흡시 감자로 사람을 쳐죽일 기세였다.
"....깎아 드리죠"
"뭐라고 ? 시발아?"
"깎아드리겠습니다. 감자"
"뭐?!!"
제대로 들었지만 이해를 못하는 한승완,
"그 중요하고도 중요하다는 빌어먹을 감자, 다 깎아드릴테니 상원선배 어디 있는지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승완이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과연 개싸가지 좆서퀴가 맞는 건가.  감자를 깎아줄테니 상원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혹시 저거 저놈 거죽을 뒤집어 쓴 딴놈이 아닐까.
칼로 거죽을 확인해 볼까나.
"너 미쳤냐?"
승완은 그나마 현실성 있는 가설을 던졌다.
"아닙니다"
조석희의 차가운목소리가 그의 온전한 이성을 뒷받침해주었다 승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생각해보니 놈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조석희란 놈이 원래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고분고분 나오는 타입도 절절절절대로 아니건만,
"그런데 니가 감자를 다 깎겠다고? 니가? 싸가지 더럽게 없고 혼자 잘난 척만 쩔어서 과일 따윈 누가 깎아주는 것만 쳐먹게 생긴 네가?"
"네"
"감자 깎아주는 아줌마 고용하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사실 그럴 작정이었다. 하지만 조석희는 눈하나 깜짝이지 않고 능숙하게 거짓으로 답했다.
"푸하하하하하하"
한승완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히던 새끼가 군대 후임으로 들어온 날의  선임의 기쁨이 이러했을까 싸가지 없는 며느리 괴된 시집살이를 시킬 생각에 신이 난 시어머니의 표정이 이렇게나
해맑을까.  웃음이 도저히 멈추지 않는 한승완은 꺽꺽 거렸다.
"크하하, 컥 너,,,, 네가 감자를 깎아? 감자를?"
"네"
"푸하하, 나 나 잠시만 더 좀 웃는다 크하하"
승완은 그 이후로도 박장대소를 했다. 조석희는 우두커니 서서 그가 웃음을 멈추길 기다렸다.
"아 시발 좋아. 깎아 당장 깎아. 그런데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깎아"
억지였다. 애초에 시한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머리좋은 조석희가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알겠다고 짧게 대꾸했다. 승완은 옳다구나 싶었다.  자기 월급을 쏟아부어서라도 필요하지 않을 감자를 주문해야
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줄줄이 단서를 붙였다.
"내일부터는 새벽부터 와서 까. 한 5시전까지는 와. 괜히 어슬렁 거리다 다른 사람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네"
조석희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승완은 점점 더 신이 났다.
"절대로 다른 사람을 고용한다거나 하지마, 수작부리면 그대로 끝인거다"
"알겠습니다 대신 선배님도 약속지키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 내가 인정하는 날에 상원이 만나게 해줄게"
승완의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시발놈아 백날 감자만 까다 좆이나 까라. 내가 귀하고 예쁜 우리 상원이 연락처를 너한테 넘기나. 어디한번 두고보자.
"저기 승완아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울리는데"
직전까지 벽에 매달려 눈치를 살피던 김군이 선반에 놓인 전화기를 가리키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좋아진 스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김동석? 야 , 내가 존나 웃긴... 뭐? 엥? 아... 오호! 그래 오케이 알겠다"
흥분해서 지금 이상황을 설명하려던 승완은 전화기 너머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통화를 끝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식언하지 마십시오"
"식언이 뭔데"
미국에서 살다온 조석희보다 한국말이 서툰 승완이 물었다.
"말 바꾸지 말란 말입니다"
"사나이 한승완을 우습게 아는구만"
조석희는 눈만 살짝 내리깔았다. 대단히 우스운 새끼 같으니, 의 한마디를 입안에 삼키며
"야, 야 그런 의미에서 나 부탁하나만 해도 되겠냐?"
승완의 갑작스런 친한척에 조석희는 기분이 나빠졌다.
"딱 한대만 맞자"
대답을 할 새도 주지 않았다. 한승완의 주먹은 정확히 조석희의 오른쪽  옆구리에 꽂혔다.
"아아, 십년묵은 채찍이 내려가네"
"채찍이 아니라 체증인데...."
김군이 소심하게 승완의 단어를 고쳐주려 했지만 흥분한 그의 귀에는 그딴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조석희는 한손으로 오른쪽 갈비뼈 부근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오늘 감자 다 깎아놔. 나는 밥 먹고 올테니까"
승완이 수북하게 쌓인 감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흡사 콩쥐에게 일을 시키고 마을 원님의 생신 잔치에 가려는 팥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조석희는 입고 있던 셔츠의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고 승완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콩쥐의 손에 들린 칼이 살벌하게 번뜩거렸다.












"젠장 막내 어디갔어! 당장 한승완새끼 불러와"
야채 저장고 안에 들어갔던 주방장의 노기 띤 목소리가 주방에 울려퍼졌다. 옷도 채 갈아입지 못한 승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안으로 걸어왔다.
"무슨일인데 그렇게 주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요"
"너, 너 이놈새끼"
주방장이 부들부들 떨며 저장고를 가리켰다. 거기에 쌓여있는 하얀 물체를 본 승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저게 대체 뭐야. 저 미친 감자무더기는 뭐냐고"
"아하하 그게..흐음"
말문이 막혓다.
조석희와 감자계약을 맺고 난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토바이를 사려고 모아둔 돈을 털어서 감자를 대량 주문한 것이다. 하루에 그 많은 양을 다 쏟아내면 재미가
없으니 일주일간 나눠서 해달라고 부탁까지 해놓을 요량이었다. 과연 조석희새끼가 그 많은 감자를 모두 깎아 놓았을까 하는 기대감에 밤잠을 설치기 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야채 저장고 반을 차지하고 있는 감자더미를 보니, 심란함이 생각보다 더 했다. 한상자에 20킬로그램하는 감자를 스무 상자 시켰으니 400킬로그램 가량이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많이 모여 있으면 존나 징그러운 거군요. 벗은 감자라는 거"
"벗은 감자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야. 감자 주문 네가 넣었다며 이 많은 감자를 대체 어디다 쓸건데"
"글쎄요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고민 좀 해봐야겠네요"
승완이 턱을 괴며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햇다. 하지만 사고방식이 10퍽스 직소 퍼즐보다 단순한 그는 매우 간략한 해답을 내놓았다.
"먹죠 뭐"
"...."
"삶아서 먹죠, 볶아서도 먹고 나 감자 열라 좋아하는데"
주방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며 욕지거리를 했다. 이 빌어먹을 금발 꼴통아 이 가게 사장 조카만 아니었어도 당장에 짤라버렸을텐데.
"저 감자를 다 먹는다고?"
"두고두고 먹어요 어차피 이것도 오래 못갈테니까"
"껍질 벗겨놓은 감자가 오래 못가는 건 당연한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냐"
"아 맞다. 그렇구나"
사실 그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조석희 새끼가 저만큼의 감자껍질을 벗겨놓은 것도 기적이라 여겼다. 분명 반도 하지 않고 칼을 집어 던지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보나마나 뻔했다. 감자깎는 아주머니를 고용했겠지. 감시를 해서 다시는 수작부리지 못하게 하면 내추럴 본 싸가지 조석희 새끼는 하루도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갈게 분명했다.
"에이 감자 그까이꺼 금방 먹잖아요. 전 삶은 감자 앉은 자리에서 열개도 먹는데요 뭐, 형님들 불러다가 한 상자씩 책임지고 먹으라고 해요 그럼 되겠네"
"야...너....."
"주방장님이 감자전도 만들어주고 그래요. 손님들 서비스로 하나씩 넣어주고 그럼 되겠네요 하하하하 그럼 전 이만 옷 갈아입으러 갑니다"
승완은 손을 흔들며 주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내일은 서른 상자쯤 주문해두고 새벽부터 나와서 감시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며.
하지만 승완의 바람과는 달리 감자 전쟁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젠장"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던 조석희는 짜증을 내며 손에 들고 잇던 감자를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혀 으스러지는 감자의 냄새가 그의 짜증을 부추겼다.
빌어먹을 금발머리 자식이 자신을 엿먹이기 위해 더러운 공작을 할거라고 생각했지만.... 감자로 만들어진 무간지옥이라니.
귀찮은 것은 질색이라 껍질을 깎아야 하는 과일은 누가 깍아주지 않으면 먹어본 역사가 없는 인간이 조석희였다.
고생이란 단어와 정반대의 인생을 살고 있던 그가 이런곳에서 감자를 깎고 있는 것이다.
"후..."
조석희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칼을 집어 들었다.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고 잇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보다 다루는게 익숙해졌지만 가끔은 헛손질을 해
손을 베었다. 손에 생기는 상처는 참을만 햇다. 그러나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두통은 뭘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전에도 두통이 있긴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니 불면증도 심해졌다. 하루에 30분도 자질 못했다.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정도였다. 그 와중에 혹시 상원에게 연락이 올까 싶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도
못했다.
"미쳤군 진짜"
그렇게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까짓 사내 새끼 하나 때문에 이러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성질 같아선 이상원이건 감자건 신경 끊어버리고 싶은데
그게 가능하지 않으니 문제였다.
이젠 오기가 발동했다. 상원을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믿음까지 생겨났다.
"어디 두고 보자고 선배"
조석희는 이를 갈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시발"
점심상을 보자마자 승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일식점 직원전체의 낯빛도 함께 어두워졌다. 며칠간의 식사를 생각하면 시발이란 단어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이게 뭐야!! 감자볶음에 감자전에 감자 국에  밥에 감자는 왜 또 넣고 지었어!! 누구야!!"
"나다"
주방장이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주방장님 여기가 감자농장도 아니고 이게 뭐예요, 하다못해 생선조가리 하나라도 얹어 주시지"
입이 댓발 나온 한승완의 반찬투정에 근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내가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면 동정심을 보이겠다면 ......한승완 너"
주방장이 스윽하고 시선을 돌리며 승완을 노려보았따. 승완이 쳇 하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 감자 전쟁 닷새째.
그 새끼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승완은 새벽에 나와 감시를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조석희는 말그대로 새벽같이 나와 특유의 싸가지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감자를 벗길 뿐이었다. 이틀이면 나가 떨어질 거라고 예상했던 조석희는 포기하지 않았고 승완은 계속 주문량을 늘려갔다. 그렇게 야채 저장고에 감자만 쌓여갈 뿐 사태는
진전이 없었다.
튀기고 볶고  삶고 으깨고  할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손님들께 서비스로 제공하고 직원들이 먹고 있었지만 도저히 쌓여가는 양을 따라갈 수 없었다.
"너 내일도 감자주문 저따위로 해놓으면 진짜 가만 안둔다"
"아우 하루만요 하루만 더 하면 되요 딱 하루만"
"그놈의 하루 타령을 대체 며칠째 하는거야. 만에 하나 내일 감자가 더 늘어나 있으면 그 감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관해뒀다가 너만 먹일거다"
너만 먹일거라는 말을 듣자 승완이 헛구역질을 했다. 닷새 내내 감자만 먹엇다. 처음엔 집으로 가져가서 야식으로 삶아먹기도 했는데 지금은 보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승완은 자신이 감자를 혐오하게 되는 날이 올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하루만 더 버티면 된다고요 다들 힘좀 내요"
"....진짜 못 먹어 이젠"
"그러는 넌 왜 안먹냐. 막내"
"엇흠 감자가 몸에 얼마나 좋은데 다들 안먹고 엇흠"
승완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모두들 속으로 꼴통 금발새끼 라며 그를 욕했다.  그리고 핏줄을 끔직하게 생각하는 사장의 가문을 욕했다.
"아무튼 난 경고했다. 내일도 그따위로 주문 넣으면 널 감자랑 같이 파묻어 버릴테니 그럴줄 알아"
주방장의 힘은 가게에서 막강했다. 요리솜씨가 워낙 뛰어나 그를 스카웃 해가려는 사람이 줄을 슬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장도 함부로 못할 정도였다.
"알겠어요 알았어 방법을 모색해볼게요"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을 희번덕 거리는 한승완의 모습을 보며 주방장과 직원들은 모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주문서 인데 다시한번 확인해주면 안될까?"
감자를 가져온 도매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전표를 승완의 앞으로 내밀었다. 승완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맞는데 왜 자꾸 확인을 하냐고 되물었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한꺼번에 감자를 1톤이나 시키는 경우는 드물어서....여긴 일식집이고"
시장에서 채소 도매를 10년이 넘게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주문은 처음이라 감자를 배달하러 사장이 직접 차를 몰고 온 것이다.
"제가 주문한거 맞아요. 저기에 쌓아주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잔금은 바로 현금으로 드릴거고요"
"...그래요 그럼"
한승완은 자신의 돈이 주방 창고에서 척척 쌓이는 모습을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마지막 감자상자를 쌓아두고 온 아저씨에게 잔금을 치루고 있을무렵, 멀리서 조석희가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둘은 인사도 하지 않았다.
조석희가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감자상자를 힐긋 바라보고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앞에 선 한승완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봐라봐라 나의 감자를 그리고 어서 패배를 인정해라.
"이거 다 하면 되는겁니까"
"뭐?"
"오늘은 이것만 다 하면 되는 거냐고요"
"...다 할 생각이냐"
조석희는 대답하지 않고 주방안쪽으로 가 세워져 있던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았다.  한승완도 의자를 가지고와 그 옆에 앉았다. 이 많은 감자를 다 벗겨낼 것인지 자신의 눈으로
감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석희는 재킷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손바닥에 알약을 덜어냈다.  의학상식이라곤 배아플땐 소화제 머리아플땐 두통약 뿐인 한승완 눈에도 한번에 먹기엔 많은 양의 약이었다.
조석희는 손바닥위에 놓인 약을 입안에 털어넣고 물도 마시지 않고 씹어 넘겼다.
"그건 뭐냐. 마약 같은건 아니겠지"
조석희는 양키놈이니까 마약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드는 순간 승완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조석희는 들고 잇던 약병을 던졌다. 약병을 들고 영어로 적힌 부분을 한참 보던 한승완은 짜증을 냈다 .
"시발 나더러 먹어보라는 말이냐?"
영어라면 소문자 a와 b의 구분조차 어려운 그에겐   약통을보고 약을 알아맞추라는 건 가혹한 처사였다
조석희는 약통을 빼앗으며 차게 말했다.
"진통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수면제로 사용하는 약이지만"
"수면제? 수면제를 왜 먹냐? 오히려 잠 깨는 약을 먹어야 하는거 아냐?"
1톤이나 되는 감자를 받기위해 그는 새벽 3시에 나와야 했다.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승완은 지금도 눈이 가물가물했다. 졸리고 피곤한 것으로 치자면 조석희도 만만치 않을 텐데
잠을 깨는 약이 아니라 수면제를 먹고 있다니 승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잠을 못자서요"
승완은 그제야 처음으로 조석희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조석희의 얼굴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까칠해보였다. 눈 밑도 시꺼멓고 눈을 충열되어 제 정신이긴 한 걸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잠을 왜?  설마 내가 새벽부너 일 시키고 있다고 시위하는 거라면..."
"원래 불면증입니다"
조석희가 승완의 말을 잘랐다.
"하루 이틀 못 잔거 갖고 그러는 거냐. 내가 니 나이때는 사흘 밤낮을 새워도...."
"일주일쨉니다"
"뭐?"
"잠 못 잔지 일주일째라고요 됐습니까"
잠을 못자면 두통이 심해진다.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정도로. 거기에 감자깍기 노동까지 하고 있으니 컨디션은 날이 갈수록 바닥을 쳤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상원의 부재였다.
"구라까고 있네 사람이 어떻게 일주일동안 잠을 안자 그랬으면 벌써 죽었지"
"....."
조석희는 대단한 수면장애였기 때문에 미국에서 내노라 하는 의사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태어나면서 갖게 된 불면증은 저주 받은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주변에서 나돌 정도였다.
그는 상원을 만나 숙면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게 되었다.
상원의 목덜미나 귓볼 허벅지 근처등 체온이 높은 부위에서 맡을 수 있는 달콤한 체향이 자신을 감싸 안으면 조석희는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어떤 기분 나쁜일이 생겨도
상원을 안고 있기만 하면 평안함이 온몬으로 번졌다.
조서희에게 이상원이란 존재는 무엇보다 필요한 존재였다.
아니 필요를 넘어서 필수적인 존재였다.
"야야 너  진짜 일주일 동안 잠 안자고 여기서 감자 까고 있는거냐 시발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해"
승완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같잖은 동정심을 보이는 건가 싶어 조석희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남의 일에 신경 끄시죠"
"아니 그게 아니고 괜히 우리 가게에서 너 죽었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손님들이 오겠냐고 사람 뒈진 가게에 누가 좋다고 음식을 먹으러 와 안그래?"
"....."
"죽으려면 꼭 네집에 가서 죽어라. 니네 동네 집값도 떨어트릴겸"
한승완이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상원선배 찾기전엔 죽는일 없을 겁니다"
남의 가게 주방에 앉아 감자를 벗기며 던진 말에 박력이라던가 비장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남자가 적어도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 대체 상원이를 왜 찾는 거냐. 싸워서 너 싫다고 나간 애를 "
승완도 자세히 상황을 아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원이 퉁퉁 부운 눈을 하고 찾아와 자신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을때 둘 사이에 큰일이 있음을 짐작했다. 한승완은 자세한
내막도 돈의  사용처도 묻지 않고 상원에게 돈을 바로 내주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반드시 갚겠다는 친구의 말은 그자리에 잊어버렸다.
어차피 받을 생각으로 빌려준 돈이 아니었다.
조석희가 자신을 찾아와 상원을 만나게 해달라고 지랄을 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다. 물론 그 지랄이 이런 감자전쟁으로 번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너 설마... 상원이 찾아서 죽여 버리려고..."
"선배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조석희가 섬뜩한 문장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비쳤다. 그리고 잠시 뒤 덧붙여 말했다.
"선배 찾는 이유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그 지랄을 하고 있냐?"
"이유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찾을 겁니다"
자신의 기준에서 정상 범위를 한참 벗어난 녀석을 보며 한승완은 미친놈하고 중얼거렸다.
"꼭 해야 할 말 있다며 설마 그것도 모르고 있는건 아니겠지"
"일단 만난 다음에 생각하면 됩니다"
할말은 정말 많았다.
왜 그렇게 자신을 쉽게 떠난 것인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두번이나 떠났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인지 . 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 할말이 넘쳐났다. 이후의 일은 모두 만나고 난 다음에 하면 된다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
잠시 딴 생각을 한 탓인지 칼날이 조석희의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 크게 베이지 않았지만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상처가 났다. 조석희는 조그맣게 욕을 내뱉으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대충 손에 감았다. 그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에 꽤 아물지 않은 상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승완은 입을 다물고 조석희를 지켜봤다. 초췌한 꼬라지를 하고 있으면서도 제 잘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조석희는 여전히 싫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야 그만해"
".....?"
"그만하고 가"
"무슨 소리 하는겁니까"
만약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면 조석희는 들고 있던 칼을 감자의 껍질이 아닌 한승완의 머리가죽을 벗기는데 사용하리라고 맹세했다.
"그만 가보라고 상원이 만나려면 지금 가야 출발시간에 맞출수 있을거다. 8시에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한승완은 며칠전에 동석이 전화로 했던 말이 이것이구나 싶었다. 조석희가 상원이 어디있는지 직접 찾게 하는 것보다 우리가 알려주는 게 나을거라고. 그러니 적당히 하고 상원의
연락처를 알려주라던 그 말에 승완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석의 말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출발시간? 무슨 출발....설마"
"저 앞으로 가면 공황으로 가는 버스가 30분마다 한대씩....쌍"
승완은 자신의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섬뜩한 금속소리에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목덜미 부근이 뜨근한 것을봐서 귀옆이 찢어진게 분명했다.
"야 이 개새끼야. 알려줘도 지랄이야. 빌어먹을 쌍놈새끼"
조석희가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5분만 늦게 알려줬으면 선배 귀가 아니라 목을 찢어났을 겁니다"
"이런!! 씨발 !! 개늠이"
한승완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석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털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야! 이 좆서퀴! 개새끼야!  너 상원이 한테 손끝하나 대기만 해봐라 내가 너 죽인다"
나쁜 놈에게 자신의 딸을 넘겨줘버린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 담긴 외침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선배 죽으면 저도 죽으니까 전 이제 상원선배 없으면 못 살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난 뒤 조석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혼자 남겨진 승완은 한손으로 피가 흐르는 귀를 붙잡고 입맛을 다셨다.
방금 전 조석희가 던진 말에서 떨쳐내기 힘든 불길함을 읽은 그였다.
그사람이 없으면 나는 못산다. 그 사람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라니 어디 유행가에서나 쓰일 법한 말인데도 대단히 기분 나쁘게 들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히드로 공항 인근이 비행기가 운행할 수 없는 상태여서 오늘 런던행 항공이 모두 결항된 상태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티케팅을 하려고 항공사 카운터로 갔던 상원은 항공사 직원의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아이슬란드 화산 폭팔문제로 인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럽행 항공이 결항된 상태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항공사측에서도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천재지변으로 인한 문제라...."
저 말줄임표에 무한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항공사 직원도 진심으로 미안하단 표정을 짓고 있긴하지만 별다른 해결책을 내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그게....천재지변으로 인한 문제라서 저희도 확답을 드리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다른 항공사 고객님들도 현재 기다리고 계시는 상황이구요"
다른 항공사 직원들도 당황스런 표정으로 열심히 뭔가를 설명중이었다. 인천공항 안이 북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변경사항은 어떻게 알수 있나요?"
"여기로 전화하셔서 항공사편명을 입력하시면 안내방송이 나갑니다. 불편을 끼쳐 정마로 죄송합니다"
직원이 전화번호가 찍힌 안내문을 건네주었다.
"아니에요....어쩔 수 없죠"
상원은 여권과 바우처를 다시 가방안에 챙겨 넣었다. 비어있는 의자를 찾아 앉기는 했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티케팅을 하기 전에 부모님께전화를 드려
영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어렵게 꺼낸 참이었다. 어머니는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들어오라고 울먹거리셨고 아버지는 갑작스런 아들의 말에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께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도착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쳤다.
"하아....."
상원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불효를 지금 막 저지르고 난 뒤인데 항공사 결항문제로 인해 당분간 한국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을 부모님께 어떻게 꺼낸다는 말인가.
급하게 준비된 도피처이기 때문에 수중에 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승완에게 돈까지 빌려 더이상 돈을 빌릴수도 없었다. 비행기가 언제 떠날지 모를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었다.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한국을 떠나겠다고 결심을 굳힐때까지  수많은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이 방법이 과연 옳은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석희에게 한마디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가 외국으로 떠난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아니 그를 떠나 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온 이후 상원은 심각한 금단증세와 싸워야 했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고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
조석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평생 같은 실수를 반복할게 뻔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이기적이고 매력적인 남자곁에서 같은 문제로 상처받고 상처받고 상처받는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인간이 변하는 일은 없겠지. 그리고 자신은 시간이 지날 수록 그를 더 좋아하게 될테고 두려웠다.
다른것이라면 어떻게든 참아내겠지만 남자의 곁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사람이 생길수도 있다는 생각은 온몸의 피를 창백하게 얼어붙게 만들정도로 두려웠다.
결국 상원은 상대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를 택했다. 그런데 어렵사리 선택한 도피조차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운이 없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수 밖에 없는 상황에 상원은 입밖에 내어 중얼거렸다.
그때 누군가 상원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맞아요 정말 운이 없죠. 선배는"
"...!!!!"
"하필 출국하는 날 모든 비행기가 결항되다니 정말 재수도 없죠"
"...석희야 네가 어떻게 여길..."
"택시타고 왔어요"
질문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석희는 일부러 엉뚱한 대답으로 맞받아쳤다.
"다행히 길도 안 막히더라구요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하하, 진짜 죽여버릴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라 걱정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하는 조석희의 눈빛에 상원은 소름이 끼쳤다. 이상했다. 도망갔던 애인을 잡은 것인데 조석희는 차분하기 그지 없는 태도였다.  타고난 귀티는 여전했지만
뭔가 평소와는 달랐다. 어딘가 어긋난 느낌.
"진부하다 선배는 어쩜 그렇게 레퍼토리가 똑같아요? 그냥 도망치면 끝인가"
"....."
레퍼토리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진부함을 토로하고 있으니 상원은 할말을 잊었다. 조석희가 손가락 끝으로 상원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선배 진짜 날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조석희가 묻는다. 상원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옆에서 큭큭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상원의 불안감은 점점 고조되었다.
상대가 욕을 하고 화를 내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왜"
"...어?"
"너 왜 날 두고 가려고 하는거냐고"
갑작스런 조석희의 반말에 상원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 갖고 놀았어?"
그가 상원의 앞으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반말로 물었다 얼굴이 빨개진 상원이 고개를 재빨리 내저었다.
"아니 절대 그런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랬어?"
"...."
"왜 그런건데 설명좀 해봐. 진짜 궁금해서 그래"
그렇게 말하며 그가 상원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닿은 온기에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흠짓 떨었다. 그걸 본 조석희의 입가가 살짝 굳었다.  
"나.... 그렇게 살 자신없어"
"그렇게 라니?"
"너한테는 별일 아니겠지만... 난 네가 다른 여자 번연히 만나고 맞선보고 돌아오는거 참기 힘들어"
상원은 이 문제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결국에 어쩔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별일 아니잖아요, 라고.
지금도 이렇게 옆에 있는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만큼 좋아죽겠는데 그때가 되면 저 말들을 자신이 수긍하게 될까봐 참기힘들었다. 그나마 실낱같은 이성이 남아 있을때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것뿐이야?"
"넌...."
상원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얘기해봤자 무한 평행선을 그을 화제였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난 너 설득시킬 자신없어"
세상에는 노력으로 되는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 있는데 조석희의 사고방식은 후자에 속했다.
상원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며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잡힌 손이 뜨거웠다. 빨리 그가 손을 놓았으면 하고 바랬다.
"그럼 내가 선배 설득시키면 안되나?"
"뭐?"
"내가 그럼 선배 설득시키면 되잖아요"
다시 본연의 존대말으로 돌아와 있었다. 상원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석희가 갑자기 상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잡고 있던 손을 얼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한테 한눈 안팔게요. 선배외의 사람하곤 손도 잡지 않을 거고, 마음도 주지 않을게요"
소리 높여 사랑고백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귀에 충분히 들릴만한 목소리였다. 개중에는 기겁을하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평생 선배하고만 살게. 상원선배하고만 섹스하고, 당신하고만 사귈테니까 나 버리지 마세요"
"서, 석희야"
상원이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눈에 띄는 남자가 여자도 아닌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랑고백을 하는 장면에 당연히 사람들이 이목이 쏠렸다.
조석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상원의 무릎에 얼굴까지 숙이고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러지마 석희야"
당연히 상원은 당황스러웠다. 사람들 앞에서 본의아니게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것은 둘째치고라도 이 말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가슴 떨리는 자신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아는 조석희라면 지금 이 말들은 분명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거짓말일게 분명했으니까.
일반인이 연극 대사를 읽는 것처럼 감정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지 않고 문장의 높낮이도 일정했다. 예전같으면 또 거짓말하고 있네. 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을텐데 이상했다.
가슴이 쿡쿡 쑤시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상원선배 나 없으면 못 살잖아. 나도 그래요"
이젠 아예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조석희를 떼어내려고 손을 들었던 상원은 그의 손이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져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마 계속 잠을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타깝고 가엽긴 했지만 상원은 상대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이유가 짐작이 되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잠 때문에 그래? 너 며칠동안 못잔거지?"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나 없는 동안에도 잘 살아왔잖아. 그러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이건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조석희를 힘껏 안고 싶어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자존심이고 이성이고 집어던지고 첩이라도
좋으니 평생 같이 사귀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살 수 없는 것은 상원, 자신이 될테니까.
"어떻게든 살아진다고요?"
상원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조석희가 되물었다.
초췌한 인상이었다. 얼굴이 퀭한 것은 둘째 치고 눈빛이 불안정했다. 이전의 일이 떠올라 상원은 덜컥 겁이났다.
"너.,...어디 아픈거 아니야?"
"말해봐요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건데"
조석희가 상원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등 위에 난 자잘한 상처가 상원의 시선을 끌었다.
"이건 또 어디서 난 상처야. 무슨 일 있었어?"
싸워서 생긴 상처같지 않았다. 시일을 두고 주기적으로 날카로운 뭔가에 베인 상처같았다. 상원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스치자 조석희가 피식 웃었다.
"왜요? 자해라도 했을까봐요?"
"...."
"선배 없다고 내가 내 손목 칼로 긋기라도 했을까봐? 내가 그정도로 병신같아 보여요?"

"...그게 아니라"
조석희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상원을 찾기 위해 손놓고 맞아주고 주방 구석에 앉아 감자를 벗기는 노동까지 했다. 설득시켜 달라 해서 사람들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병신 같아 보이면 왜 그냥 집을 나갔어요?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그런거 아니잖아"
"선배 그거알아요? 당신 사람 갖고 노는데 천부적이야. 순진한척 지고지순한척 혼자 다 하더니 결국엔 자기 좋을대로 하는거잖아"
"뭐라고?"
감정에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원색적인 비난도 아니었다. 조석희는 상원을 똑바로 보고 가지고 있는 불만사항을
토로했다.
"노력해서 안되는 문제는 그냥 회피하면 끝인가? 매사 그렇게 살거에요? 안되겠다 싶으면 도망가고 상처받겠다 싶으면 고개돌리고"
"어차피 안되는데 그럼 어떻게해 나더러 고스란히 나중에 몇 배나 커져 돌아올 상처를 떠안으라고? 왜? 왜 나만 그래야 하는데"
"될지 안될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고. 그리고 언제 내가 선배한테 상처를 떠안으라고 햇어"
남녀 치정싸움도 쏠쏠한 구경거리였다. 하물며 남남  치정싸움은 오죽하겠는가. 평소였으면 내성적인 상원이 주변을 신경써서 그만하자고 했겠지만 지금 그에겐
남들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럼 네가 상처받기라도 해? 네가?"
상원은 기가찼다. 헛웃음이 났다. 조석희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이번 것은 무리였다.
도저히 듣고 넘어가줄 수가 없었다.
"석희야 니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아?"
"전 상처 받으면 안되요?"
"아니 안될것 없어. 솔직히 나는.... 네가 나때문에 상처받았으면 좋겠어"
상원은 담담하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이기적인 진심을 드러냈다.
"난 네가 나 때문에 상처받고 망가졌으면 좋겠어. 항상 여유있고 오만하기까지 한 네 모습도 너무 좋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때문에 상처받고 절망을 느껴봤음 좋겠어"
"나도 상처받고 선배 때문에 망가져요"
조석희가 손바닥으로 왼쪽 이마를 감싸 쥐었다. 두통이 심해져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한시라도 빨리 상원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몇날 며칠이고 침대에서 자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선배....."
상원을 설득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을때 지나가던 중년부부가 노골적으로 두 사람을 향해 혐오의 시선을 던졌다. 남들이 뭐라하건 조석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분명 수치를 느끼고 움츠러들 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연인이 남들에게 모욕을 느끼는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선배 조용한데 가서 얘기해요 우리"
그렇기 때문에 건넨 한마디였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상원에게 그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런 순간에서도 그는 스스로가 망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국 넌 니가 제일 중요한거잖아"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예요 그거"
두통이 심해져 조석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머릿속에서 도끼질을 하는것 같아 토악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발이라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영락없이 상원에게는 그 소리가 자신을 향한 불만으로 들릴 뿐이었다.
"난 너때문에 친구도 가족도 버릴 뻔했어. 그런데 넌 대체 뭘 버렸어? 그저 원하는 것은 다 손에 쥐려는 거잖아"
"선배만 손에 쥐면 되요"
"나도, 겠지"
단호하게 덧붙여 지는 한마디에 조석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가 제발 이라고 중얼거리며 상원의 손목을 잡았다.
"상원 선배 집으로 가요. 우리 집으로 가요"
상원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석희와 말을 나눌수록 상원의 결심은 굳어져갔다.
"선배, 제발 좀...."
상원은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손목에 남아있는 온기가 지금도 눈물날 정도로 아쉬웠지만 상원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용기를
모아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지 않을거야 미안해"
"...."
조석희는 한참 상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괴괴한 정적속에 갇힌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
"선배 마음대로 하세요"
꽤 잔잔한 음성이었다. 비꼬는 것도 아니었고 무시하는 어조도 아니었다. 다정한 음색도 아니었다. 처음듣는 익숙하지 않은 그것에 상원은 몸이 떨렸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하는지 안녕 이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상원은 결정하지 못했다.
조석희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호모의 치정싸움이 의외로 싱겁게 끝나자 모여 있던 인물이 흩어졌다.
상원은 공항에 혼자 남겨졌다.













아이슬란드 화산 문제로 인해 유럽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운항이 취소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외국인들은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거나
그조차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공항에서 노숙을 했다. 상원 역시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인천공항에 머물러야 했다.
유례없는 항공기 결항 사태를 취재하러 왔던 방송사 카메라에 우연히 잡혀 방송을 탄 것이 상원에게 있었던 단 하나의 특별한 일이었다.
덕분에 방송을 본 친구들이 인천공항까지 상원을 찾아와  때 아닌 이산가족(?)상봉 장면이 연출되었다.
"너희들이 여긴 웬일이야 어떻게 알고 왔어?"
"텔레비전에서 봤어. 야 진짜 꼴이 말이 아니다"
상원이 계면쩍게 웃으며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아무리 신경쓴다 해도 모양새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고 니가 여기에서 왜 이러고 있냐. 외국가서 유학한다는 놈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텔레비전에서 상원을 찾아낸 장본인 한승완이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상원이 힘없이 화산때문에 하고 얼버무렸다.
"넌 어찌 된 놈이 외국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한테 말 한마디도 없냐. 서운하게"
동석이 상원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인상을 썼다. 상원이 미안하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지만 동석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상원은 몇번이고
승완에게 자신이 한국을 떠나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떳떳하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환송을 받으며 갈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뭐야 진짜 외국가? 승완이 새끼가 너 한국에 없다고 했을때 뻥까지 말라고 했는데 아오 근데 여기 진짜 넓다. 나 공항 처음 와 보는데 ...역시 가슴은 서양이군"
공항을 둘러보다가 자연스레 서양 여자들을 시선으로 뒤쫒고 있는 대진을 보고 동석이 혀를 찼다.
"밥은 좀 먹었냐. 이거 먹어"
승완이 도시락 통에 싸온 삶은 감자를 꺼냈다. 동석은 말없이 음료수를 상원의 무릎에 던졌다.
"고맙다 같이 먹자"
상원이 같이 먹기를 청했지만 모두들 질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감자 됐어. 진짜 역해"
"아 시발 보기만 해도 목구멍에서 좆물이 올라온다. 치워라"
",,,,응 그래"
상원은 조심스레 감자 하나를 베어 물었다. 승완은 인천공항이 자신의 감자를 사들이면 참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상원은 동석이
옆에서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땐 모르는척 하는 것이 자존심이 센 승완을 위한 행동이었다.
"가서 지낼 곳은 정했어? 학교 같은데 들어가는 건가?"
"아직 정해진 건 없어"
상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앳되 보이는 상원의 얼굴 때문에 친구들은 한층 더 걱정스러워했다.
"아. 근데.... 흐음"
갑자기 승완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주변을 살폈다. 뭔가 말하기 어려운 주제를 꺼낼 모양이었다.
".....안 왔디?"
"누구?"
"시발개호로쌍놈새끼"
한번의 쉼 없이 내뱉는 욕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엿다. 상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택시를 타고 왔다던 조석희가 누구에게
정보를 들었는지 예상이 가능해지는 순간이었다.
"...왔었어"
"와서 뭐라디. 시발놈. 혹시라도 욕하고 너 때린 거라면 지금이라도 내가 가서...."
"없어 그런거"
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와서 너 보고만 갔어? 끌고 가거나 그런 것도 없이?"
승완이 기겁해서 물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끄엑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의자로 몸을 늘어트렸다.
"이상하다 그럴리가 없는데"
동석도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친구들의 반응에 상원이 먹고있던 감자를 내려놓았다.
"왜? 뭐가 그럴리가 없어?"
"그 미친 새끼가 너 얼굴 보고 보내주자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거 아냐"
"그런 짓이라니?"
동석이 승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래도 상원이 가지 전까지 연락을 하던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이쪽을 통해 혹시 이야기가 흘러 갔을 것이라 생각해서 였다.
"아 시발 솔까 말하기 싫었다. 됐냐?"
"무슨 말을 하는거야"
상원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동석도 승완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결과야 어쨌든 유치한 심술로 조석희를 골탕먹인 것이니 말을 꺼내는 것이
께림직 했던 것이다.
24금을 제외하면 머릿속이 누구보다 순수한 대진이 해맑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좆서퀴가 너 내놓으라고 우리 도장에 찾아왔는데 동석이가 안 알려준다니까 존나 굽신굽신대면서 제발 알려 주십셔 형님 딱 이래서 우리가 다섯대씩 때렸어"
"...."
"....."
"....그게 뭐야"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이 전국하위 0.0001% 에 속해있던 대진의 줄거리 요약은 도저히 들어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동석이 입을 열었다.
"그놈이 찾아왔었어. 네 연락처 달라고"
"...그랬구나"
"너 나한테 연락처 안줬잖아. 그래서 모른다고 했지 알아도 안 가르쳐준다고 했고"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조석희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그놈이 너 있는 곳을 알려주면 뭐든 하겠다고 해서 좀 맞으라고 했지"
"뭐?"
"딱 열대만 맞으라고 했어 방어 없이. 그럼 생각해 본다고"
"그래서 ...때렸어?"
"그래서 걔가 맞았느냐고 묻는 쪽이 더 정확한 질문이겠지"
조석희의 더러운 성격을 고려하자면 동석의 말이 맞았다. 상원은 질문을 다시 고쳐했다.
"그래서 맞은 거야?"
"응. 열대 다 맞았어"
"나도 다섯대 때렸어. 졸라 힘껏 패서 갈비뼈 나갔는데 끽 소리도 안내더라 독한 새끼"
상원은 자신이 맞기라도 한듯 잔뜩 인상을 찌푸린채 옆구리에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어떻게 됐어? 넌 나 어디 있는지 몰랐잖아"
상원은 승완에게 연락을 취했다. 동석은 고지식한 부분이 있어서 자신의 유학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지. 난 생각해본다고 했지, 말해준다고 한적은 없다고"
"..."
상원은 온몸에 피가 싹 가시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조석희 성격에 살인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냥 넘어갔냐고?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놈 머릿속을 내가 알게 뭐야"
상원도 하긴 하고 한숨을 쉬었다. 2년간 교제를 했으면서도 대체 이 남자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뭐 그래도 한마디는 했다. 한승완한테 가보라고"
상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승완에게 옮겨졌다. 승완이 쳇하고 입을 열었다.
"왔어. 와서 시발놈이 너랑 할말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알려준거야?"
"아니야 그냥 알려준거 절대 아니다. 내가 그렇게 의리 없는 놈으로 보여?"
승완이 펄쩍 뛰며 말했다. 상원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를 탓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두 사람 사이 안 좋잖아"
"사이라고 할 것도 없이 난 그자식 존나 싫어 완전 밥맛이야"
팔에 붙은 벌레를 털어내는 것처럼 한승완이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왜 알려줬어?"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동석은 그래도 어렸을 적부터 운동을 해와서 페어플레이 정신을 갖추고 잇었다. 승완에게는 페어플레이 정신은 고사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심도 없었다.
".....그놈이 감자껍질을 깠거든"
"뭐?"
"감자 껍질을 깠다고, 새벽에 와서"
상원은 두눈을 깜빡거리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들려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조석희가 설마 감자 껍질을 벗겼다는 거야?,,,,,왜?"
그의 집을 드나들고 같이 살기까지 했던 상원이지만 조석희가 자신의 손으로 집안일을 하는 것은 손에 꼽을 만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몰라, 내가 감자 껍질 벗겨야 하니까 꺼지라고 했더니 자기가 해준다잖아.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먼저 시킨거 절대 아니다. 걔가 껍찔 깐다고 했을뿐"
며느리 시집살이 시킨 것은 절대 자신의 문제가 아니며 며느리가 거기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는 시어머니의 어조였다.
"얼마나?"
"그, 그게 좀 많이...... 으아 진짜 맹세코, 내가 먼저 하자고 한거 아니다. 지가 자청했어. 웃기지도 않은 새끼. 누가 그러면 감동할줄 알고, 찌질한 놈.
혼자 잘난척은 다 하더니 며칠동안 와서 일만 하더라고"
조금 많이 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무리가 따르는 양이었다. 아직도 승완의 가게에서는 넘치는 감자를 주체하지 못해 매일 저녁 억지 감자파티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마지막 날 조석희가 거의 감자를 손도 안 대고 나가서 1톤 가량의 감자는 저장이 가능하다는 사실 정도.
아마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상원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한에선 조석희는 그런 일을 묵묵히 할 위인이 아니었다.
"결국에 석희가 약속한 만큼 일을 다 한거야?"
"아니 처음부터 그런것은 없었어. 그냥 내가 오케이 하면 그때 알려준다고 했지"
"...."
이런 말도 안되는 약속을 냉철한 조석희가 받아들였단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더불어 한승완이 결국엔 오케이를 했다는 사실 역시.
"내가 절대로 감자 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오케이 한 것은 아니야. 대진이 씹쌔끼야. 웃지 말라니까"
"크크크 애 통장 빵구 났다 크크크크"
"나 때문에 그렇게 된거야?"
상원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차 올랐다. 안그래도 승완에게 비행기 값을 빌렸는데 석희와의 내기에 사용된 감자값 얘기까지 더해지니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왜 너때문이야. 그놈 때문이지. 감자는 왜 까겠다고 지랄을 해서, 암튼 내가 너 간다고 말해줫어. 말해주고 나서도 잘한 짓인지 백번 고민했지만"
"대체 왜 얘기해준거야?"
마음속에 의문이 남아있던 상원이 다시 입밖에 내어 물었다.
"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뭐랄까"
표현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승완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그 아리송한 감정을 설명 못해 머리만 긁적였다.
"그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겠다 싶어서"
동석이 입을 열었다.
"맞아! 바로 그거야! 그거였어"
승완이 맞장구를 쳤다. 자신이 어떻게 골탕먹인다 해도 조석희는 상원이 있는 곳을 언제가 되었든 찾아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매우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동석이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한국에 있을때 마주치는 편이 나을 거 같았어. 나는 그래야 무슨 문제가 생겨도 해결하기 쉬울테고...."
사실 동석은 조석희가 자신의 친구를 찾는다면 당연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끌고 갈거라고 생각했다. 이왕 끌려갈거 외국에 나갔다 한국에 오는것보다
한국에서 해결을 보는게 나은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널 두고 그냥 갔어? 깽판 놓다가 공항 보안요원들한테 끌려 나간건 아니고?"
"아니 내가 그냥 같이 안간다고 했더니 돌아갔어"
"그게 이해가 안간다는 거야. 그 새끼가 개고생을 하고 순순히 물러났다는 게 말이 되냐고, 뭐 다른 꿍꿍이가 있는거 아니야?"
승완 역시 조석희가 상원을 어떻게든 설득해 집으로 데려갈 거라고 믿었다. 사실 그놈이랑 사는 것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외국으로 가는것도 탐탁치 않았다.
일단 한국에 머물게 한 다음 조석희를 떼어놓아야 겠다고 승완은 통통한 꿈을 꾸었다.
"난 석희가 애초에 고생을 자처했다는게 이해가 안가"
이해가 가지 않는건 피차일반이었다.
"...그런애가 아닌데"
상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애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조석희는 뭔가를 위해 희생하는 법을 몰랐다. 희생하지 않아도 원하는것은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는 남자였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완전 그런 놈이던데"
대진이 감자를 입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너한테 미쳤잖아. 그새끼 그러니까 그 지랄을 한거지. 걔라고 뭐 별수 있어 다 똑같이 좆달린 남자지. 어 자기가 두번이네 좆 달린 남자. 자지 , 크크크"
이상한 언어유희를 발견한 대진은 혼자서 키득거리며 좋아했다. 그러나 나머지 세사람은 웃지 않았다. 상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승완과 동석은 서로 곤란하단
눈짓을 주고 받았다.
응원해주고 싶지 않은 연애를 갈라놓자니 친구가 폐인이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조석희를 두둔해주는 말을 해주자니 입이 썩을것 같았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동석이 묻자 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있다가 비행기 다시 뜨면 가야지. 별 수 없잖아"
그런 친구를 물끄러미 보던 승완이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자기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던 동석은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중요한 결정을 하는건 결국 너잖아. 조석희가 아니라"
"...."
"그러니까 선택권이 없다는 투로 얘기하지마. 결과야 어쨌든 니가 선택한 거다"
"그래 고마워"
마음이 무거웠지만 상원은 친구의 진심어린 조언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이 모든 사실은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자신에게 왔던 단 하나의 행운을 놓아버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행운이 언제 자신에게서 달아날까. 평생을 조마조마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을 지탱하기란 불가능했다.
사람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었다. 가지지 못했을 때는 손에만 넣는다면 세상 그무엇도 필요없다고 생각하며 기도했는데, 막상 손에 넣고 나니  그것을 지킬 힘이 없어 전전긍긍 할 뿐이었다.
상원은 그날 저녁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친구들을 보내고 의자에 누워 높은 공항 천장을 바라보았을때 그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럽게 울음이 터졌다. 조석희의 집에서 나온 그날 이후 처음으로 상원은 소리내어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옆에 누워있던 노부부가 상원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달랬다.
그리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 어떤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좋아질거다. 지금보다는 분명 좋아질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름도 모르는 노부부의 친절이 상원의 눈물을 간신히 멈추게 햇지만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알고 있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지난 일년여의 시간을 떨칠 수 없는 것임을.
그보다 좋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 또한,
다음날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의 운항이 재개되었다는 희소식이 공항에 안내방송으로 울려 퍼졌다.















항공사 카운터를 통해 탑승 수속을 밟고 짐을 보낸 상원은 마지막으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를 했다. 어제 기분 좋게 헤어지긴 했지만 막상 비행기를
탄다는 말을 하니 다들 목소리가 밝지만은 않았다.
특히 승완은 힘들면 언제든 한국으로 와버리라는 말을 세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상원은 습관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사실인데 그것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이기적인 것도 유분수지"
상원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나무랬다. 게이트를 지나 보안검색을 위한 기나긴 줄에 합류했다. 운항이 재개된 항공이 한두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난히 줄이 길었다. 멍하게 서 있던 상원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작은 열쇠고리가 띤 것은 우연이었다. 빨간색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열쇠고리였다.
고리부분이 낡아 어디선가 떨어진 것 같았다. 뒷면에는 1949. 12.24 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낡고 작은 열쇠고리였지만 새겨진 날짜로 미루어보건데 분명 당사자들에겐 소중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상원은 그것을 집어들고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혹시 이것을 빠뜨리셨나요? 이 열쇠고리가 혹시 당신 것은 아닌가요?
기다리는데 지쳐서 친절함이 바닥이 난 외국인들은 대부분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그냥 보안 요원에게 맡겨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상원을 어젯밤 위로해주던
노부부가 검색대 앞에서 당황한 얼굴을 하고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싶어 상원은 노부부 앞으로 가서 자신이 주운 열쇠고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노부부 얼굴에서 믿기 힘들만큼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백발이 성한 할머니가 thank you sweetie 를 연발하며 상원의 뺨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할아버지도 그의 손을 맞잡고 몇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상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의 친절에 인사를 따로 한다는게 갑작스런 운항 재개로 인해 노부부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마 두움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상원은 노부부에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이건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프러포즈를 하며 건넸던 선물이라며 열쇠고리에 대한 사연을 설명해줬다. 자신의 행운의 마스코트를 돌려줘서 고맙다고, 할머니는 상원의
두손을 꼭 쥐었다.
노부부는 검색대를 지나 출국심사를 받으러 가기 전까지 상원의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상원은 손을 흔들어 주고 잣니이 서 있던 줄의 맨 끝으로 돌아갔다.
그의 집을 나설때 상원은 맨손으로 나왔기 때문에 같이 했던 시간을 기념할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하나쯤은 챙겨 왔어야 하나 후회가 밀려왔다.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꽤나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상원은 긴 줄의 끝에 서서 만약 그날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가져올까, 하는 백일몽을 꾸기 시작했다.
조석희는 아직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CD를 인질로 잡고 있겠지. 그 인질을 도로 가지고 오는 것도 좋았을텐데, 자신의 책상 안쪽에 조석희가 외국에 갔다 올때마다 사다주는
초콜릿 상자 포장지를 모아둔 것도 생각이 났다. 재수 공부를 하면서 받은 석희의 손글씨가 적힌 쪽지도 있었다.
많았다. 하나를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상원은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상원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동석의 말이 옳았다. 모두 다 내가 결정한 일이니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일단은 새로운 곳으로 가서 정신없이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지내다보면 시간이 흐를테고 그러다보면 그리움이 조금은 퇴색되겠지.
그러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여 살만해질 때쯤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후의 문제는 그때 생각하면......
".....?"
등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게이트 앞에서 뭔가 소란이 빚어진 것 같았다.  별일 아니겠지 하던 상원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잠깐이면 된다고 비켜"
"안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여권과 보딩패스가 확인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합니다"
"비키라고 했잖아!"
설마했다. 그러나 보안요원 제지 사이로 영어로 욕설을 퍼붓는 소리를 듣는 순간 상원은 소란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상원은 줄을 빠져나와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 환자복을 입은 조석희와 그를 막고 있는 보안요원 그리고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뒤엉켜
소란을 빚고 있었다.
"...석희야"
상원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안요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조석희가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지금 환자복을 입고 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모든것이 설명이 될 얼굴이었다.
"너...아직도 잠 못 자고 있어?"
그 집을 나온지 열흘이 훌쩍 넘고 있었다. 원체 조석희의 불면증이 심하긴 했어도 그는 늘상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그가 타의건
자의건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상황이 아주 심각하단 소리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짧은 대꾸가 돌아왔다.
아, 그렇지 자신은 더이상 조석희를 신경 쓸 자격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걱정을 하는 것도 가식적으로 내비칠 뿐이었다.
자신의 뻔뻔함이 부끄러워진 상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소란의 장본인이 게이트밖으로 나오자 보안요원들도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도련님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던 남자가 조석희를 향해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퇴원했어"
"하지만 의사선생님께서....."
조석희가 고갯짓을 했다. 조용히 입다물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양복을 입고 있던 남자가 한발자국 물러섰다. 조석희가 상원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슬프거나 괴로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특유의 무표정하고 냉랭한 눈빛이었다. 상원은 조석희의 표정에서 그가 모든 것을 정리했음을 짐작했다.
"왜 왔어"
상원은 일부러 차가운 태도를 취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흔들릴게 분명했다.
"줄게 있어서 왔어요 선배"
"뭔데"
조석희는 대답대신 환자복에서 편지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자 조석희가 픽, 하고 웃었다.
"이거 받는다고 하나 변할 거 없어요 그냥 받아. "
"...그래"
변할 거 하나 없다는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상원은 편지봉투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조석희가 움켜쥐어 자신의 쪽으로 끌어 당겼다.
훅, 하고 와닿는 남자의 열기에 상원은 그대로 굳었다.
"5초만"
밀어내야 했다. 이러지 말라고 한살이라도 더 먹은 자신이 단호하게 끊어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 5초가 지나자 조석희는 상원을 놓아주었다. 상원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놓지 말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조석희가 작은 목소리로 Good bye 라고 속삭인 것도 같았다. 방금 전까지 끌어안고 있던 열기가 꿈결처럼 멀어졌다.
상원이 정신을 차렸을땐 조석희도 검은 양복도 이미 인파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상원은 그런것을 조금도 신경쓰지 못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로 인해 손이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심하다. 이 정도에 눈물이 날만큼 좋아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래. 이상원 이병신아. 멍청한 녀석아. 머저리야. 천하의 등신아, 쪼다 백치야.
자신을 향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욕을 쏟아부으며 상원은 심장떨림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봉투를 발견하고 황급히
봉투 끝을 뜯어보았다.
거기엔 코팅된 작은 종이와 짧은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코팅된 종이는 로또 복권이었다. 1등 당첨이 된 로또 복권을 준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랬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 돌려줘야 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또 종이 뒷면에는 매직으로 꽝, 이라는 글씨가 큼직막하게 쓰여있었다.
상원은 한참을 그 복권을 들여다 보다가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만큼 간결한 내용이었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편지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원선배, 이건 내 부적인데 당신 줄게. 숫자 12개를 골랐는데 당첨번호와 하나도 안 겹치는 것도 나름, 행운이니까.  Ps. 런던은 날씨가 똥 같으니까 감기 조심해]
상원은 이전에 조석희가 자신을 편의점으로 데려가 사주었던 복권이 떠올랐다. 그때 두사람은 서로 복권을 나눠가졌다. 조석희는 자신의 복권을 상원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건 자신이 써준 부적이니까 잘 간직하라고, 그리고 그는 상원의 복권을 자신의 부적, Lucky charm으로 간직해온 모양이다.
"....."
상원은 고리가 끊어진 낡은 열쇠고리를 찾아주었을때 보여준 노부부의 미소가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에겐 보잘 것 없는 물건이겠지만  몇 십년간 소중히 간직해온
이유를 설명하며 그녀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던 조석희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냉랭하고 사람을 깔보는 듯한 표정, 꾹 다문 입술, 살짝 내리감은 눈.
그런 얼굴을 하고 상대방의 불운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의 진심과 차갑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인사.
"학생 뭐해요. 선반위에 가방 올려놓고 주머니 안에 있는거 모두 비우세요"
보안 요원이 상원의 어깨를 툭 치면서 검색대를 가리켰다.
이번이 상원의 차례였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냐고 묻는 말도 없이 집주인은 문을 열어주었다.
"미안해"
"....."
상원은 현관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쏟아냈다.
"제 발로 나갈때는 언제고 돌아오니까 어이없어 하는거 알아. 황당하겠지. 한 대때리고 싶겠지. 네 말 안 믿은 것도 내 멋대로 모든 상황 판단하고
결정내려 행동한 것도 사과할게.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 나중에 더 큰 상처 받을까봐 회피한거 맞아. 네가 안 변한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내심 전제로 깔아놓고
내맘대로 판단했어. 그것도 사과할게 혼자 상처받을 것만 생각하고 네 상처는 신경쓰지도 않았어. 이기적인 건 나였어. 미안해....정말 미안해.
석희야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각서를 쓰라면 쓸게. 다시는 널 두고 어디 가지 않을거야. 니가 나 버리기 전까지 절대 어디 가지 않을 거야. 아니 니가
나 버리면 그냥 죽을게. 죽어버릴게. 죽어버리는게 나으니까....용서해줘"
정확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상원은 몰랐다.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한번의 거름도 없이 그대로 쏟아냈다. 고개를 숙인 채였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석고대죄를 하라고 하면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겠노라고 상원은 다짐했다.
"때려도 돼. 화풀릴 때까지 맞을게"
"......"
"욕해도 좋아. 어떻게 하면 네 화가 풀릴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할게"
"....."
마주잡은 두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차가운 말이 돌아오거나 비웃음 같은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어색한 침묵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상원은 두눈을 꼭 감고 자신에게 돌아올 형벌을 기다렸다.
"화가 풀릴때까지 사람을 패는 과오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머리 위에서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상원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조석희의 옆에는 조석희의 어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그...저...그게...."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상원은 문을 열어준 상대도 확인하지 낳고 바로 고개를 숙여 말을 쏟아낸 자신을 저주했다. 최소한 누가 있는지 정도는 확인을 해야 했건만,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온몸의 핏기가 가셨다. 최악이었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그런 짓 안해요. 아니 못하는거 아시잖아요"
조석희는 어머니를 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퍽이나 그러겠다"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들의 집으로 남자가 찾아와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다시 받아들여 달라는 사랑고백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표정이 좋을리가 없겠지.
상원은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1분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지금 이자리에서 배를 가르고 죽을 수도 있을텐데.
"그럼 당분간 네말대로 할테니 그견은 생각해 보도록 하렴"
"당분간이 아니라니까요"
벽에 기대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조석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미소를 보고 가슴이나 두근거리고 있다니 자신은 바닥에 머리를 박아 죽어도 마땅찮은 놈이라고 상원은 끊임없이 자책했다.
"알겠으니까 아까 네가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라"
"네 그러죠"
조석희의 어머니가 현관으로 와서 구두를 신었다.  그녀가 자신의 옆을 지나가자 상원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몸조리 잘하거라"
"예 나중에 영국에서 뵐게요"
"학생도 그만해요, 뭘 그리 잘못했다고 맞는다는 소리까지 해"
"그...... 죄송합니다"
조석희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더니 그만 가보겠다고 문을 열었다. 상원은 엉거주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햇다. 또다시 그녀의 한숨이 들려왔다
무안함과 수치 죄스러움으로 상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조석희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와, 이제 어쩌지"
"....미안하다"
죽고 싶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까 말까인데 어머니 앞에서 아들내미가 남자애인이 있다는 사실까지
까발리게 했으니 이건 한두대로 맞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상원은 또 고개를 숙이며 애끓는 사과를 토해냈다.
"내가 정말, 생각이 짧았어. 너만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네가 아프면 누군가 있을수도 있는데 정말 미안해 본의아니게 이런 실수를 .... 미안해
책임질게. 내 행동 모두 책임질게"
상원의 앞에 선 조석희의 입가엔 장난스런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하고 있는 상원에겐 그게 보일리가 없었다.
"선배 어떻게 책임지실건가요. 저희어머니한테 그런 얘기까지 하시고"
"...네가 원하는대로 할게. 평생 을 다해 갚으라고 해도 갚을게 정말 미안하다"
조석희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어쩌지 웃음이 터져 나올것 같았다.
사실 그는 어머니를 불러다 놓고 자신에게 한번만 더 맞선을 강요하면 아예 아버지 쪽으로 적을 옮겨버리겠다고 물려받은 주식도 어머니와 적대 관계에 있는
주주들에게 헐값에 넘겨버리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은 조석희 본인이었다.
그런것을 모를리 없는 아들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하자 어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이전에 그 애, 때문이니 하고 물었다.
조석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초인종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선배 방금 제 인생 조졌잖아"
조지다. 라는 표현에서 상원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나는...."
"조졌어. 정말 조졌어. 내 인생 완벽하게 조졌어"
삼단 콤보였다.
"미안해 정말.... 일부러 그런건 절대 아니야"
일부러 하라고 해도 가능하지 않은  시기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이런 기막힌 불운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조석희는 가여운 이 남자가 좋았다.
"내 인생 어떻게 책임지실 건데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말만해 정말...진심으로 사과할게"
상원은 두손을 꼭 쥐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대로 두면 피를 토하고 죽을 기세였다.
조석희는 상원의 어깨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순진한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이 한 청년의 전도유망한 미래를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버렸단 죄책감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두 손 앞으로 내밀어봐"
"...응"
상원은 울면서 두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아무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자신의 양팔을 부러트려 놓으려는 모양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무서워서 두손이 벌벌
떨렸지만 원한다면 두 다리도 내어놓자고 다짐했다 .
"손 뻗어서 나 안아요"
"...응? 뭐라고?"
방금 막 머릿속으로 두 팔이 부러지는 장면을 떠올린 상원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되물었다.
"날 안으라고 그 팔로"
"....어?"
"안아. 당장"
조석희가 명령했다. 상원은 엉거주춤 팔을 뻗어 조석희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조석희도 팔을 둘러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한번의 몸짓으로
상원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받아 준 것이다.
"결혼 안해. 약속 다 받아놨어요"
도망갈 궁리만 했던 자신과 비교되는 훌륭한 석희의 태도에 상원은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석희야 미안...."
"미안한줄 알면 나한테 잘하라고 앞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상원은 조석희를 양손으로 힘껏 끌어안고 미안하단 말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울음과 뒤섞여 나중엔 미양, 미양, 하는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조석희는 끝까지 괜찮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미안....흑....미안해"
"미안하면 더 세게 끌어안아"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을 다해 석희를 끌어 안은 상원은 미안하단 말을 반복했다. 조석희는 상원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어 체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잘할게. 앞으로 더 잘할게 미안해 네가 했던 말 믿을게. 다시는 너 상처주지 않을게 미안해"
"그래요 상처주지 마세요"
조석희는 상원으로부터 마음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건 회생이 불가능했다. 그는 진심으로 가슴이 아팠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괴로웠다
조석희도 인간이었다.  애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은 절망을 느끼는 . 그러나 조석희는 인간이되 보통의 사람과는 종자가 다른 인간이었다.
사실, 그는 상원의 머리를 움켜쥐고 집으로 끌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뿐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상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영영 놓아줄 생각따윈 이만큼도 없었다.
두통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기절을 해 병원에 입원한 와중에도 그는 상원이 타기로 한 비행기 편명을 알아냈다.
런던, 그곳은 외가의 본사가 있는 도시였다. 그 말은 즉, 자신이 원한다면 그곳에서 상원의 생활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망쳐놓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조석희는 덕분에 매우 바빴다. 이곳저곳에 전화를 넣고 사람을 불러다 지시를 내렸다.
일단 상원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그의 짐은 분실되고, 소매치기로 가진돈이 모두 털릴 예정이었다. 한국사람이 있는 가게에서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지 못할 것이고,
운이 좋게 일자리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다음날이면 이유 불문 해고를 당할 것이다. 어학원에 등록하면 그 어학원이 며칠 내로 문을 닫게 되어 돈을 날리는 불행도
그를 기달고 있었다.
몇 개 더 손을 써놓긴 했지만 아마 그방법까지 가지 않아도 상원이 돌아올 것임을 조석희는 예감했다. 일단 한국에 돌아오게 하면 반은 성공이었다.
상원이 자신을 떠나는 이유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도피가 지속될 수 없음을 본인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사정범위 안에만 들어오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덫을 놓으면 된다. 자신의 발로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래도 보고 싶은 것은 어쩌지 못했다. 오늘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갔을만큼.
게이트 앞에서 상원을 끌어안았을때, 조석희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상원을 놓아주었다.
개똥같은 런던날씨 때문에 감기에 걸리지 말고 하루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삼키고 그는 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상원이 극적인 순간에 등장해 엄청난 불운을 턱, 하니 쏟아 낸 것이다.
"선배 아까 한말 사실이죠?"
"응"
뭐가 사실이냐고 묻는지는 몰라도 상원은 일단 대답했다.
어머니 앞에서 강제 아웃팅까지 시켜 창창한 인생 망쳐놓은 마당에 못해줄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조석희는 그럼 변호사를 불러 계약서를 작성해야겠네 라고 중얼거렸다.  무슨 계약서냐고 묻고 싶었지만 상원은 차마 입이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질문을
했다가 조석희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웠다.
"이제 선배 인생은 나랑 죽던가 나랑 살던가. 두가지 밖에 없어"
나지막한 속삭임에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이번과 같이 함부로 도피를 결정짓는 행위는 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좋아하면서 공항에서는 왜 그랬어"
"...미안"
"상처받았잖아. 선배는 그럴때보면 무서워"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진심이 섞여있었다. 이 빌어먹을 순댕이는 짜증이 날만큼 행동력이 좋다. 느릿느릿 온순해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에선 칼 같은
단호함을 발휘해 조석희로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하나도 안 무서워. 시시한 인간이야"
상원이 반론을 펼쳤지만 조석희는 허리를 으스러트릴 기세로 손에 힘을 주어 그 말을 반박했다.
"아 맞다. "
상원은 공항에서 받은 로또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조석희에게 건넸다.
"이거 네거잖아"
석희가 자신을 받아주면 가장 먼저 이것을 돌려주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래요 제것이죠"
조석희가 받아든 로또 종이를 자신의 지갑안에 고이 접어 넣어두었다 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상원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중얼거렸다.
"그게 네 Lucky charm 인거지"
중얼거림을 들은 조석희가 한쪽눈을 치뜨고 상원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대답이 바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 아니야?"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상원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조석희는 상원의 턱을 손가락으로 지고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지금보니 선배가 제  Lucky charm 인거 같네요"
"...아"
예기치 않은 고백에 상원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조석희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입술이 겹쳐졌다. 오랜만의 키스에 상원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황홀감을 느꼈다.
"선배 제가 준 부적 잘 갖고 있죠?"
"...뭐?"
"그때 내가 준 복권"
"...어?....?!"
부드럽게 이어지던 키스가 잠시 멈추었다. 상원의 어깨가 굳어졌다. 분명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조석희가 짐짓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했다.
"전 선배가 준거라면 소중하게 간직하는데"
"아, 아니 있을거야. 어딘가 있을거야 책상서랍이나 옷안에 분명히 있을거야. 버린 적은 없어"
"버려?"
"아니 안 버렸어. 정말이야"
"당첨된 복권을 그렇게 함부로 놔두면 어떻게 해요"
"당첨...됐어?"
상원의 얼굴이 한층 더 파리하게 질렸다. 사실 당첨 유무는 조석희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고른 숫자이니 최소한 3등 정도는 당첨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그였다.
사실 3등이건 1등이건 그에게 당청금액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소액 따위 있어도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상원이 자신이 건네준 것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시이 기분 나쁠 뿐이다.
"어떻게 하지? 당첨된 거면...... 아 정말 난 죽어야 해. 당장 찾을게"
방으로 달려가려는 상원의 어깨를 조석희는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
"선배 그런거 말고 다른 것 줄게요"
조석희의 말에 상원의 커다란 눈에선 눈물이 왈칵 맺혔다. 당첨된 로또 종이까지 잃어버린 자신에게 또다른 선물을 건네준다는 다정함에 감동한 것이다.
이런 석희를 내버려두고 바다 건너까지 도피하려고 했다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 이번에는 절대로 어디에 흘리면 안돼요"
"그래 약속할게"
엄숙한 목소리로 상원은 맹세를 했다.
"좋아 그럼 벗고 소파에 올라가 엎드려요"
"....응?"
"엎드리라고요. 서서는 불편하잖아"
"뭘? 엎드리고 서서....."
"서서하고 싶으면 벽 짚으세요 응 그렇게"
조석희가 상원이 당황해 하고 있는 틈을 타 그의 양 손목을 쥐어 벽에 갖다 붙였다.
지금은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미어지는 서정적인 재회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요사스런 분위기가 형성된단 말인가.
상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조석희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농담일게 분명했다. 차가워보이긴 해도 그는 본심이 매우 따스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런 인간이니까. 당연히 지금 하는 행동도 분위기 전환을 위한 장난일테지.
"선배 안에 행운을 나눠드릴께요"
"어? 뭐?"
"그러니까 절대 흘리지 마세요, 내가 좋다고 할때까지"
상원은 설마 싶었다. 조석희가 바지 퍼스너를 내리고 단단하게 발기한 그것을 꺼내들자, 짧은 시간동안 상원의 머릿속에 머물렀던 설마는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훅 하고 끼쳐졌다. 뒤어어 난입한 숨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상원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남자는 서정적인 애틋한 재회의
장면에서 19금으로 건너뛰어 버릴 줄 아는 기괴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둥 뒤에서 뻗어온 팔이 상원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을 고스란히 전하듯이.
그 모든 것은 본인이 결정한 선택이며, 결과는 그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그 몫이 크고 무겁긴 해도 조석희의 심장에 자신과 같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에 상원은 의의를 두었다. 일단은 그 의의에 기대어 마음의 평화를 찾기로 결심했다.
상원은 조석희로부터 그날 엄청난 양의 행운을 받아내야 했다. 실로 행운으로 가득 찬 하루였다
















"어, 너 학교 자퇴했다면서"
"자퇴한거 아니에요"
"휴학했다고 하던데 유학간다는 소문도 있고"
"일이 좀 있어서요"
상원은 벌써 오늘 몇번이나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으니 같은 과 동기나 선배들이 상원을 볼때마다 깜짝 놀라서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비단 같은 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석희때문에 안면을 트게 된 사람들까지 상원에게 아는척을 해왔다.
"어라 선배"
이번엔 김이경이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원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선배 학교 그만두셨다면서요"
"...그만둔건 아니었어"
"거의 보름동안 무단결석했다던데 학점 포기하신거예요?"
"안 그래도 교수님 찾아뵈려고"
그동안 성실하게 수업듣고 과제를 제출해왔으니 F는 면하겠지만 무단결석만큼 가서 사과를 드려야겠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같이 밥 먹을까요"
김이경이 자신이 들고 있던 식판을 상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상원이 강하게 거부의 뜻을 밝혔다.
"안돼 석희 조금 이따가 오기로 했어"
"너무하신다. 이젠 대놓고 차별하시네요"
"미안해 그렇지만 너랑 같이 있는거 보면 석희 안 좋아할거야 상처받으면 어떻게해"
"상처받다니? 누가 누굴 때려서요?"
"그런 상처 말고 . 마음의 상처"
"...지금 선배 조석희 얘기하고 있는거 맞아요?"
"그래 석희"
"...."
김이경은 잠시 상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배를 부여잡고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선배 상원 선배 말이 되는 소리를..... 하하하하"
면전에서 비웃음을 당하자 상원은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왜 말이 안돼. 석희도 사람이야. 걔도 똑같은 사람인데 뭐가 말이 안돼"
"선배 걔는요, 하하하 미안하지만 여기가 병든 놈이라고요"
김이경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부근을 가리켰다. 누가 뭐라해도 김이경은 조석희가 어떤 놈인지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아니야 선입견이야. 석희 그런 사람아니야"
상원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김이경은 대체 조석희 새끼가 이 순진한 사람에게 무슨 수를 쓴 것일까 싶어 안타까움을 느꼈다.
"선배 그놈은 개새끼예요"
김이경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석희 오해했어. 그런데...... 아니야. 정말 그런 사람 아니야"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상원이 조석희에게 단단히 넘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이경은 하는 수 없지 싶어 자신의
비장의 카드를 내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상원선배 선배가 그때 저한테 말씀하신거 저 아니에요"
"응? 무슨 소리야 갑자기?"
"선배네 집앞에서 키스...."
여기까지 말하자 상원이 으악, 하면서 김이경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말하지마 안하기로 했잖아"
김이경이 상원의 손을 내리며 친절하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거 저 아니라고요"
"뭐? 네가 아니라고?'
"예. 저 아닌데요"
"그때는 네가...."
"선배가 저랑 맨정신으로는 죽어도 안한다는 둥, 제가 억지로 했다는둥, 소리를 하시니 열받아서 그랬어요"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술에 취한 선배한테 키스를 할 기회가 있었다면 전 키스에서 안 그쳤을거예요"
"...너"
"전 애초에 왜 선배가 절 지목하셨는지 그 자체로도 이해가 안간다니까요"
거짓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인상착의로  범인을 추렸는데 거기서 조석희를 뺀 것일테지. 상원이 자신과 키스를 했다는 오해르 하고 있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지만 더 이상 그 개새끼 대신 오명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럼누가...."
"글쎄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중에 봐요 하하하핫"
김이경이 경쾌한 목소리를 내며 식판을 들고 사라졌다. 남겨진 상원은 혼란에 빠졌다. 분명히 아버지가 그때 키가 크고 허우대가 멀쩡한 남자 변태 라고 설명하셨는데
....설마
"아닐거야"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조석희가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보란듯이 키스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랬다간 집에서 쫓겨날게 불보듯 뻔한......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생각에 상원은 날짜를 따져보았다. 그때쯤 분명 같이 살자는 석희의 제안이 점점 거세어졌다. 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닐 것이다. 절대 그걸리 없어. 우리 석희는 자신을 배려해주는 따스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니까. 맞아 확인해보자.
상원은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 다시 머무르겠단 말을 전해드린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어색한 관계였지만 이 의문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무뚝뚝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에요 아버지"
[웬일이냐 네가 이시간에]
"다름이 아니라 뭣 좀 여쭤보려고요"
[설마 유학에 관한 걸 물어보려는 거면 당장 끊는다]
"아니에요 아버지 그런거 절대 아니에요"
아들의 떠난다는 전화를 받고 어머니가 며칠을 우셨다는 애기를 전해들었을때 상원도 눈시울을 붉혔다.
"저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시겠지만"
한참 뜸을 들인 상원은 말을 이었다.
"그때 집앞에서 보셨다는 그 변태에 대해서 여쭤볼게 있어서요"
[아 그 변태녀석 왜? 혹시 그녀석 잡힌거냐?  ]
"그건 아니고요 잡힐 수도 있어서요 혹시 인상착의 같은거 특별히 기억나는 거 없으세요?"
[글쎄다 워낙 어두워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충격적인 상황이라 세세한 것보다 전체적인 장면만이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그 변태를 잡을 수 있는 단서라고 하니 상원의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기억을 더듬었다.
[그놈 얼굴은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그때 그런 생각이 들긴 했구나]
"무슨 생각이요?"
[그 자식, 쓸데없이 잘생겼다. 이런 느낌?]  
"...."
[어째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다. 키도 엄청 크고 허우대가 멀쩡한 놈이었으니까 경찰들한테 잘 설명해라. 다시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예 아버지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쳤다. 상원은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알려준 인상착의를 따지자면 떠오르는 사람이 딱 한명 있었다.
"헉 저기 걸어오는 사람봤어?"
"우리학교 학생 맞아? 정말 잘 생겼다"
여기저기서 여학생들이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상원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상대가 식당안으로 진입했음을 직감했다.
멀리서 상원을 알아본 조석희가 한 손을 슬쩍 들어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근처 여학생들 사이에서 일제히 작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중 한명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쟤가 경대 킹카지? 오늘 나 실물 처음 봤는데 심하게 잘생겼다 뭐랄까 아 적절한 표현이 안 떠오르네"
"쓸데없을 만큼 잘생겼다?"
"응 ! 맞아 그거"
상원은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어느새 조석희가 저만치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서 한층 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 미소와 마주친 순간 상원의 머릿속에도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말았다.
정말 넌 쓸데없을 만큼 잘생겼구나.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 애 그런 짓을 저지른 거니. 왜 대체 왜왜왜왜.
"선배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방금 왔어"
"저 주문 좀 하고 올게요"
조석희가  가방을 상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상원은 잠시 고민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있잖아 석희야 혹시 말이야"
혹시나 누가 들을까 상원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조석희가 어깨너머로 고개만 돌려 상원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우리 집앞에서 나 술 취했을때 키스한 적 있어?"
"네"
그가 너무도 순순히 자신의 죄를 시인하자 상원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또 술에 취해 집앞에서 키스를 한 날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때 우리 아버지가 나와계셨는데 못봤어?"
"글쎄요 어두워서"
조석희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 고혹적인 자태에 상원은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또다시 석희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의심할뻔 했던 것이다.
아 정말 이러면 안되는데,
"배고프겠다. 빨리 음식 주문해서 받아와"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ok싸인을 만들어 보였다. 상원은 거기에 또 얼굴을 붉혔다. 저런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지닌 사람이 그런 잔인한 짓을 할리가 없지.
자신을 사지로 내몰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 아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그가 상처받고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것을 믿어줘야 했다.
석희가 비록 성격이 좋지 않고 냉정한 구석이 있고, 오만하고 사람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고 고생은 모르고 자랐고 다른 사람 배려할 줄 모르고
싸가지는 좀 없지만 그래도 가슴은 따뜻한 인간이니까.
조석희가 음식을 받아와 상원의 앞에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상원은 나긋하게 웃어주었다. 문득 조석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선배는 어머니 닮았나 봐"
"어 그런 소리 많이 듣........"
"왜요"
상원은 거무스름한 눈썹과 얄미울 정도로 예쁜 눈을 하고 있는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지, 한번도 상원의 부모님을 본적이 없는 석희가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어머니 뵌적 있던가"
상원이 넌지시 돌려 물었다. 조석희가 아니,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다음 나올 질문이 무엇인지 분명 감이 올텐데, 그는 평안한 얼굴이었다. 상원은 젓가락을 입에 문체  왜 그랬어 하고 중얼거려본다.  질문의 의미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조석희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그냥 이라고 대답한다.
뒷목이 빳빳하게 굳어온느게 느껴졌다.
그래 , 그냥.
너는 그냥 남의 아버지 앞에서 나한테 키스를 했구나. 내가 너희 어머니 앞에서 고백을 했을때는 니 인생 조졌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더니 .
내인생은 그럼 어찌하라고 그런거니. 석희야. 네 표현대로 내 인생 조지려고 그런거야? 정말 그런거니?....... 이경아. 네 말이 맞구나.  얘는 개새끼야. 하지만
말도 하고 아파할 줄도 알고 나를 사랑해주는 개새끼구나. 그러니 어쩌겠어. 내가 키우는 수밖에.
"내가 그렇게 좋아요?"
자신을 향한 눈길을 영 엉뚱하게 해석한 조석희가 대뜸 묻는다.  상원은 엉겁결에 응, 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조석희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도 선배 좋아, 라고 말을 건넨다.
답답함과 설레임이 동시에 가슴 속으로 치받쳐 올라 상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할 뿐이었다.
그렇다. 이것도 모두 자신이 선택한 결과니 받아들여야만 했다.
비록 결과가 영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긴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상원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 한가한 하루의 늦은 점심이었다.







ㅡ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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