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922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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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级 大众 无倾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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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12 20:51
날이 엄청나게 추웠다. 너무 추워서 바람이 불때마다 얼굴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얇은 교복 사이로 칼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치는 가운데 올이 성긴 목도리 한장만이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었다.
소년은 그 속에 시린 코끝을 푹 파묻고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엇비슷한 코트를 입은 십여 명의 아이들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추위에 붉어진 뺨을 하고도 밝게 웃으며 졸업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친구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어대 말을 붙일 틈이 없었다.
결국에는 기다리다 못해 앞으로 나서 말을 걸었다.
"저기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어색하게 부르는 소리에 당사자보다 친구들이 더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반도 다른데다 평소 친하지도 않던 소년이 그를 찾는게 이상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선뜻 응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친구들에게 잠시 기다리라 말한 뒤 소년을 따라나섰다.
운동장이 졸업식 인파로 붐볐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제법 걸었다. 시끄러운 교사를 지나 음악실과 미술실이 한데 모인 별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말라 붙은 담쟁이넝쿨이 엉긴 담을 곁에 두고 섰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자 잔뜩 흐린 하늘에서 이따금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멀리 운동장의 소음이 아련하게 들리고 바람이 불때마다 죽은 잎들이 버석버석하게 마른 소리를 냈다. 그 바람이 가라앉길 기다려 소년은 입을 열었다.
"추운데 불러내서 미안."
그 말에 그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나 가볍게 기침을 하곤선 코밑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두툼한 코트를 입고 폭신해 보이는 목도리를 하고 있는데도 추운 모양이다.
그래서 소년은 서둘러 용건을 밝혔다.
"줄게 있어서."
그리고 품속에서 빨갛게 곱은 손을 집어넣고 한동안 망설였다.
......점점 굵어지는 눈발이 소년을 재촉했다. 이윽고 품에서 꺼낸 것은 반으로 구겨진 편지였다. 꽤나 오랫동안 가지고 다닌 듯 모서리가 까맣게 닳은 봉투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어떤 종류의 편지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잇었다. 설령 이곳이 남학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편지를 본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언제나 웃고 있던 입술이 무표정해졌다. 그것을 보고 편지를 건네던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욕설이 퍼부어지거나 주먹이 날아온데도 별수 없다. 어차피 냉담한 반응을 각오하고 졸업날을 고른 거였다. 듣기로는 먼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했다.
아마도 교문을 나서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이 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단지 이런 마음이 있었노라고 알아주기를 바랐다. 긴 정적이 흐르고 바람이 쌩하게 불었다. 코끝을 스치는 겨울 냄새를 맡으며 소년은 슬슬 팔이 묵직해진다고 생각했다. 손에 들린 편지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이 편지에 무게를 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무게가 싸늘해져 이제 그만 포기하고 돌아서야겠다 생각한 순간 그가 손을 내밀어 편지를 받아들었다. 이어 싱그레 웃으며 답례를 했다.
"고마워."
예상외의 반응에 소년은 조금 놀랐다. 편지를 거절당하리란 걱정에 앞서 이런 경우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소년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인 듯 했다. 설령 동성이 주는 러브레터일지라도
경멸을 던지거나 모욕을 주지 않을 만큼 말이다.
이에 안도 섞인 기쁨을 느끼고 소년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입술을 살짝 휘어 마주 웃어주면서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고맙다는 인사까지 들었으니 이제 충분하다. 그 미소를 그가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봐왔다. 새삼스럽다는 듯 갈색 눈동자가 잠시 일렁이다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편지를 졸업앨범에 끼우고 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가볼께.졸업 축하한다."
"그래 너도."
서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소년은 걸음을 옮겨 떠나는 그를 보았다. 헌칠한 뒷모습이 멀어지다 말고 문득 이쪽을 돌아봤다. 때마침 부는 바람에 짧은 머리칼이 화르륵 흩어지고 입술에서 새어나온 입김이 허옇게 번졌다. 얼굴이 트는지도 모르고 소년은 고개를 똑바로 든 채 그 모습을 응시했다. 돌아보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종종 시선을 붙잡았던 그를 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란 생각 때문이다.
눈을 시리게 하는 바람과 진눈께비에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웃고 있으리란 생각만이 들었다.
잠자코 서 있던 그는 곧 몸을 돌려 저편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소년도 점점 눈발이 굵어지는 것을 깨닫고 느슨해진 목도리를 다시 감으며 발길을 옮겼다.
시베리아처럼 추운, 어느 졸업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
"싸움이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돌아오던 김택승은 멈짓했다. 주차장에서 일어난 소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싸움인 것 같았지만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목소리가 여자인 걸로 봐서 사랑 싸움이 분명했다 .
"사람이 어쩜 그래? 왜 이렇게 사람 피를 바짝바짝 말려?"
"......"
"내 맘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렇게는 못할 거야!"
격양된 여자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뒤섞여 있었다. 그에 비해 남자는 변명할 생각도 없는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곧 가슴을 쿵쿵 치는 소리와 함께 "더는 못참겠어!" 라고 비명처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또각또각 힐이 내달리듯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참견하지 않으려 주차장 구석에 서 있던 김택승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지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모델처럼 키가 크고 고상하게 생긴 여자였다. 그 여자의 뒤를 따라 나타난 남자 역시 그러했다.
그는 내달리는 여자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어 돌아보는 여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서로 눈을 맞춘지 얼마 되지 않아 여자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슬같은 눈물방울이 남자의 깎은 듯 반듯한 옆모습을 지나쳐 낙하했다. 툭, 툭, 눈물방울 부셔지는 소리가 텅빈 주차장에 울려 김택승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울지마."
불현듯 흘러나온 목소리는 깊고 다정했다. 도한 매우 침착하기도 해 바닥에 설탕이 가라앉은 커피처럼 달콤했다.
곧 등을 펴고 여자를 바로 세운 남자가 큰 손으로 여자의 뺨을 어루만져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얼굴에 엉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려 준 뒤 턱을 가볍게 치들어 당겼다.
가만히 입술이 포개지는 광경을 김택승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보는 것처럼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후, 짧고도 짙은 키스가 끝나고 빙그레 미소 짓는 남자를 따라 여자도 희미하게 웃었다. 어딘가 지치고 체념한 것 같은 기색이었지만 어쨌든 싸움은 끝난 것 같았다.
남자의 승리가 분명해 보이는 결말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며 두 사람이 몸을 돌리자 김택승은 주차장 기둥 뒤로 바짝 몸을 숨겼다. 훔쳐볼 의도는 없었으나 지켜보고 있었단 걸 알려봤자 좋은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가고 나면 가게로 돌아갈 요량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문득 발걸음을 멈춘 남자가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어딜 보는 거지?"
의문을 느낀 찰나, 김택승은 곧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남자와 걷고 있던 여자 역시 깨달았다. 당장에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남자를 뿌리친 손이 허공을 날았다.
짜-악!
김택승이 뺨이 아파져 올 정도의 따귀였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린 김택승은 고개가 돌아간 남자와 분노를 금치 못하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게 중요해?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차마 말을 잊지 못하던 여자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몇발짝을 걷다가 신고 있던 힐을 냅다 벗어 던지고는 맨발로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오래지 않아 빨간 컨버터블에 시동이 걸리면서 타이어가 요란하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부아아앙! 하고 분통을 터트리듯 요란한 엔진음이 터졌다가 멀어졌다.
주차장에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고 남자만이 홀로 남았다. 그가 곧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하는 모습을 보고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렸다.
남자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까 전까지 호소력 짙은 눈빛으로 여자의 마음을 장악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울지 말라고 여자를 달래던 침착함은 여전해 손을 들어 따귀를 맞은 곳을 만져보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치웠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띈 광경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름이 아나라 유리에 비친 본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통로 유리에 바싹 다가선 남자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성스레 매만지기 시작했다. 김택승은 그 광경에 어이가 없어졌다. 아까 여자에게 따귀를 맞은 이유도 마찬가지인 탓이다.
금방 화해한 애인보다 입술에 묻은 립스틱을 더 신경 써 닦았으니 뺨을 맞을 만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자를 쫒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따귀를 맞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고 있다.
여러모로 놀라운 광경이라 생각하며 김택승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나저나 어느 타이밍에 나가서 가게로 돌아가지?
난감해하던 그순간.
부우우웅~~~
핸드폰이 경련하는 소리에 김택승은 화들짝 놀랐다. 텅 빈 주차장에 그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몹시 당황스러웠다.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 했으나 서두르는 바람에 상황이 악화됐다.
핸드폰을 바닥으로 떨어트리다 못해 차 저편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도 핸드폰은 계속 웅웅 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전화가 끊어지고 정적이 찾아들자 난감함이 엄습했다. 이 소란으로 남자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지켜보고 있었단 사실을 알고 불쾌해하면 일이 난처하다.
시비를 걸어오면 필시 매니저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그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어 김택승은 먼저 나서서 사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때 저벅저벅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온다는 걸 알고 김택승은 사과하기로 맘을 먹고 모습을 드러냈다. 헌데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분명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건만 어디 간 거지. 의아하게 생각하던 와중 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불쑥 내밀어 졌다.
"여기."
끔쩍 놀란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남자가 등 뒤 가까운 곳에 서서 핸드폰을 내밀고 있었다. 아마 차 저편으로 넘어간 핸드폰을 줍느라 안 보였나 보다.
김택승의 핸드폰을 주워온 남자의 표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고도 자연스러웠다. 핸드폰을 안 받고 벙벙해 있는 김택승을 보고 약간 의아해 하는 기색마저도 그러했다.
헌데 그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잘생겨서 그런가 고민하던 김택승은 남자가 재차 핸드폰을 내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상태여서 상대의 표정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머리 위로 미소 짓는 기척이 느껴졌다.
"죄송하다고 할 게 아니라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김택승이 고개를 들었을때 남자는 이미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서 어렴풋한 체향이 맡아졌다.
코롱이나 향수라기엔 미묘하게 달착지근한 향기였다. 이 향기도 뭔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던 김택승은 곧 아차했다. 괜한 일에 휘말려 너무 오랫동안 가게를 비웠다. 한창 바쁠 시간인데 다들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김택승은 서둘러 발길을 옮겨 가게로 돌아갔으나 강유형의 질책은 피할 수가 없었다.
"쓰레기 버리러 어디까지 다녀온거야? 왜 이리 늦어?"
쩌렁쩌렁한 호통에 죄송하다는 말을 주워섬긴 김택승은 얼른 주방으로 돌아가 산 처럼 쌓인 설거지를 해치웠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뒤 하나둘씩 비워지기 시작하는 룸을 치웠다.
그렇게 한동안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마감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룸을 정리하고 나온 김택승은 갈 채비를 하고 바에서 정산 중인 강유형에게 다가갔다.
"저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에 강유형은 일견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물러나기 직전 바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휙하고 던졌다. 얼른 받아들고 보니 드링크제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자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김택승은 슬그머니 웃으며 몸을 돌렸다.
무뚝뚝하지만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다. 이곳 <Blossom> 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 덕분이다.
원래는 음료수를 납품하는 업체에서 배달 일을 하는데 힘든 일을 꾸준히 하는 모습을 좋게 본 그가 이 일자리를 제의해왔다.
김택승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지라 흔쾌히 허락했다. 술 파는 곳이라고 해도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클럽이다 보니 취객으로 애먹을 일도 적었고 무엇보다 보수가 괜챃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 그래 보여도 마음 씀씀이가 좋은 강유형이 있어 편했다.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라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드링크제를 챙겨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아직 해가 뜨기 전인 거리를 걸으며 드링크제를 마셨다. 막 새벽이 시작되려는 하늘은 한껏 어두웠고 공기 중엔 알콜 냄새가 가득했다.
쓰레기차의 소음과 비틀거리는 취객의 고함소리가 교교한 정적을 부수었으나 김택승에겐 즐거운 퇴근 시간이었다. 밤일이 몸은 고되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삐 출근하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만큼은 좋았다.
비록 돌아갈 집이 옥탑의 단칸방이라고 할지라도 맘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저도 모르게 즐거운 나의 집을 콧노래로 부르며 김택승은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속에서 아침을 향해 걸었다.
*
굿모닝 ♪ 빠빠빠 빠빠 빠빠빠빠~♬ 굿모닝 ♪ 빠빠빠 빠빠 빠빠빠빠~♬
알람이 오두방정을 떠는 소리에 김택승은 부스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든지 이제 네 시간 눈을 뜨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하지만 깨자마자 느껴지는 더위에 졸음이 달아났다.
얄팍한 지붕으로 직격하는 햇살이 방안의 온도를 후끈하게 높여 놓았기 때문이다. 옥탑방에서 지내기 힘든 여름이 되었으나 어차피 씻고 자기만 하면 되니까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어디서든 까다롭지 않은 게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김택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밖으로 나가 보는 눈을 신경쓰지 않고 속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맨몸에 찬물을 덮어썼다.
몇 번 물을 끼얹으니 언제 더웠냐는 듯 시원해졌다 머리를 비누로 감은 뒤 몸이 마를 동안 쪼그리고 앉아 빨래를 했다. 빨래를 할때만큼은 옥탑방에 이사오길 잘 했다고 뿌듯함을 느꼈다.
날씨만 좋으면 두꺼운 청바지도 빳빳하게 잘 마르기 때문이다. 몸이 마르자 김택승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고 라면을 꺼냈다. 날이 더워 버너를 밖에 두고 작은 양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는 라면을 매우 좋아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라면이라 답할 수 있었다. 라면만은 하루 새끼 일년 열두달을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면과 스프를 넣고 3분 40초간. 시계를 보지 않고도 정확한 시간에 불을 끈 김택승은 냄비뚜껑을 접시 삼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코를 훌쩍이고 쪼그린 다리를 이쪽저쪽으로 펴가면서 뜨거운 면발을 후루룩 삼켰다.
오 분 만에 라면 한 냄비를 해치우고 물을 한 컵 비우자 배가 불뚝 일어났다. 김택승은 만족스럽게 배를 문지르며 냄비를 씻어 엎어둔 뒤 나갈 채를 했다.
오늘은 가게로 출근하기 전에 병원에 들러야 할 일이 있었다. 일전에 촬영한 MRI결과가 나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별일 아닐게 분명하지만 또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 큰 맘먹고 검사를 했다. 그곳에선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서둘러 집을 나선 김택승은 빠른 걸음으로 치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그가 다니는 종합병원은 지하철로 30분 거리였다. 언제 와도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라 예약을 했음에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호명하는 소리에 진료실에 들어간 김택승은 담당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하도 봐서 이웃처럼 익숙해진 담당의는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선지 인사를 받고도 자리를 권하는 모습이 영 딱딱했다. 그려러니 하고 별스럽게 생각지 않은 김택승은 자리에 앉았다.
"일전에 하셨던 MRI검사 결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택승은 벽면에 걸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곧 스크린에 그의 머릿속을 3D로 촬영한 그림이 떠올랐다. 마치 손으로 만지듯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영상이 신기했으나 이어지는 설명에 마냥 신기해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설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의사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김택승의 상태를 말해주었다. 덕분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김택승은 궁금한게 없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침묵한 채로 창밖에서 우는 매미소리에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냉방으로 창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그 소리가 이상하게 선명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김택승은 천천히 방금 깨달은 사실을 입에 올렸다.
"그러니까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거군요."
그렇다고 대꾸한 의사는 괜한 위로 같은건 하지 않았다. 아마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택승의 머릿속엔 작은 파편은 들어 있었다. 이십 대의 가장 좋은 시절을 병원에서 보내도록 한 교통사고의 흔적이었다.
당시의 충격으로 두개골에 박힌 파편을 제거해야 했는데, 마치 제거하지 못한 게 남은 것이다. 의사는 그게 언제 두부처럼 부드러운 뇌 속으로 파고 들어 치명적인 영향을 줄지 모른다고 말했다. 하필이면 물질대사에 관여하는 간뇌 부근에 자리잡고 있어 그럴 경우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모양이다.
제거 또한 어려워 수술을 시도한다고 해도 성공확률이 낮을 뿐더러, 김택승처럼 이미 큰 수술을 했던 경우에는 더욱 위험했다.
김택승은 혼자서 그 모든 상황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정기점진 때 오면 됩니까?"
의사가 사무적이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김택승의 반응을 예상치 못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려는 것을 불러 세운다.
"저기."
김택승은 "예?" 라고 반문하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 얼굴이 여상해 언제 죽을 지 모를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의사는 김택승의 난처한 기색으로 하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만 아르바이트에 늦을지도 몰라서요."
"아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가보세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는 그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 김택승은 몸을 돌려 발길을 옮겼다. 그 모습이 어디가 아프다기보다는 그저 병문안을 온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병원을 나서 밖으로 나가자 여름의 열기가 훅 끼쳐왔다. 잠시 제자리에 멈춰서 쏟아지는 햇볕을 쬐고 있노라니 에어컨 바람으로 차가웠던 피부가 서서히 데워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 더위가 지긋지긋할 테지만 아직은 반길만했다. 한 차례 불어온 시원스런 바람에 짧은 앞머리가 이마를 간질여 손을 들어 그곳을 문지른 김택승은 괜스레 혼자서 피식웃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얄궃다. 모든 일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자신마저 이렇게 되었다는 걸 녀석이 알면 뭐라고 할까. 그 녀석이 곁에 없는게 낫다고 여긴적은 난생처음이라 김택승은 입안으로 스미는 씁쓸함을 느꼈다. 피식거리고 웃는 바람에 부르튼 입술이 찢어져 핏방울이 솟아났던 것이다.
붉게 물든 입술을 빨면서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반사되는 햇볕 때문인지 아니면 입고 있는 티셔츠 때문인지 분주한 도심으로 발길을 옮기는 뒷모습이 유난히 희었다.
*
병원에서 나온 시간은 적당했는데 환승을 잘못하는 바람에 출근이 늦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매니저 강유한이 평소보다 더 일찍 나와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희한하게 김택승이 지각하는 날에만 일찍 나오는 것 같았다. 김택승은 머쓱한 표정으로 장부정리를 하는 그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평소라면 나무랐을 강유형이 이상하게 빤히 쳐다봐서 김택승은 조금 긴장했다. 감이 좋은 사람이라 병원에 다녀온 사실도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럼 이유를 물을 텐데 사실대로 답하기가 곤란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릴 하면 당장 수술하자고 병원에 끌고 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에 앞서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볼일 때문에 나갔다가 환승을 잘못해서요."
다행히 강유형은 의문을 갖는 대신 가볍게 면박을 주었다.
"매일같이 지하철 타고 다니는 놈이 그걸 헷갈려하냐."
"그러게요."
계면쩍게 웃으며 김택승은 서둘러 가방을 벗고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오픈 준비하겠습니다."
"내 커피나 먼저 타줘라."
김택승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강유형이 늘 마시는 대로 우유를 조금 넣고 라떼를 만들었다. 그런 뒤 옷을 갈아입고 오픈준비를 서둘렀다. 오래지 않아서 가게 식구들이 출근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이어졌다.
정말로,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심지어는 김택승의 기분조차 그러했다.
이윽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자 김택승은 다시금 장부를 붙잡고 앉은 강유형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다음 아르바이트를 뛰러 지하철에 올라탔다. 주말에는 오전 중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원래는 어제도 일했어야 하는데 병원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 생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김택승은 아르바이트를 미루면서까지 검사를 받은 걸 후회했다. 결과가 그런 줄 알았으면 하지 말걸 그랬다. 돈도 돈이거니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타인의 상실은 빈자리로 느껴졌었는데 자신의 상실은 어떤 식으로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언제 죽어 없어질지 모른다니까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이 새삼스러워 보였다.
김택승은 손을 들어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따금거리는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이 안에 든 조금만 파편이 자신의 목숨을 결정짓는다는게 신기했다.
하긴, 원래 인생에서 중요한건 작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곧 전동차가 목적지에 도착해 김택승은 상념을 털어버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간을 걸어 편의점에 당도하니 손님들도 바쁜게 보여 서둘러 앞치마를 챙겨 입고 카운터에 섰다.
간신히 한숨 돌리고 고개를 들었을 땐 어느새 아침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이제 좀 한가해지나 싶어 창밖을 내다본 김택승은 도로가에 정차한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눈을 끔벅거렸다. 차 키를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무척이나 낯익었다. 바로 요전에 <Blossom>주차장에서 김택승을 여러모로 놀라게한 그남자였다.
긴 다리를 놀려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그는 곧장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리고 표정없는 얼굴로 온장고에 든 드링크제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바코드를 찍으며 김택승은 쓸데없는 쑥스러움을 억눌렀다.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또 마주친 게 약간 민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김택승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스치다시피 한 종업원 얼굴을 기억할 리가 없다. 끝까지 모르기를 바라며 이천백 원이라고 하니 남자가 지갑을 꺼냈다.
이어 안을 확인해보고는 난감한 듯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돈이 없나 생각하던 김택승은 문득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곧 무표정하던 눈이 반달로 휘어지며 보조개가 쪽 들어갔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사람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수 있을 듯 했다. 이에 무심코 감탄을 하던 김택승은 또다시 기시감을 느꼈다. 그렇게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을 건네는 모습이 무척이나 낯익었다.
"잔돈이 없는데 백원만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일순 유리를 닦은 것처럼 머릿속이 밝아졌다. 어렴풋한 기시감을 꿰뚫고 선명한 기억이 떠올랐다. 역시 아는 얼굴이다.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니라 보다 옛된 얼굴에 같은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김택승이 멀거니 보는 이유를 남자는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다. 농담을 진담으로 들었다 생각했는지 살짝 웃음을 흘리고는 "카드 괜찮죠?"라고 물어왔다.
멍해 있던 김택승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그가 내민 카드를 건네 받았다. 이 상황조차 흡사 시간을 거스른 듯 해 무어라 말할 수없는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하고 김택승은 결제를 한 뒤 카드를 돌려주었다. 그때 드링크제를 챙기던 남자가 카드를 발치에 흘렸다.
보통은 카드부터 주울텐데 그러질 않고 느긋하게 드링크제를 마신다. 혹 카드 흘린 걸 모르나 싶어 말해 주려던 김택승은 그냥 제가 카드를 주워 내밀었다.
그러자 그것을 받아든 남자가 대신 빈병을 돌려주며 싱긋이 웃었다.
"고마워요."
나지막한 저음이 듣기 좋았다. 어릴 때보다 한층 더 깊고 성숙해진 목소리였다. 향수와 함께 미묘한 기분이 스친 것도 잠시 그와 눈이 마주친 김택승은 남자의 얼굴에 어떤 기색이 떠오른 걸 봤다. 혹 자신을 알아 본건지도 모르지만 먼저 아는 척을 하기엔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연이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이름이 뭐냐고 물어볼 수도 없어 김택승은 다시 입술 끝을 들어올리고 인사를 하는 남자를 잡지 못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대신 예의 바른말에 반사적으로 안녕히 가시라고 고개를 숙여 보였을 뿐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는 벌써 편의점 밖으로 나가 정차해두었던 아우디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 차마저 사라지자 김택승은 비로소 남자가 자신을 알아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단지 그날 주차장에서 마주친 종업원을 알아본 거였다.
괜히 의식했다는 걸 알고 김택승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못 알아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세월이 십년이나 흐른데다 애초에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김택승 역시 백 원만 깎아달라는 그 말만 아니었더라면 기억하지 못할 뻔했다. 물론 옛일을 떠올렸다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모두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이고 그를 만나서 무언가를
말할만한 사람은 김택승이 아니었다. 그저 인생에 한 번쯤 벌어질 법한 우연일 뿐이다.
그렇게 술렁이던 마음을 정리한 김택승은 문득 제 손에 들린 빈병을 자각했다. 흘린 카드를 주워준 대신에 받은 빈병이었다.
'카드 흘린 걸 모르는게 아니었구나.'
처음부터 대신 주워줄 거라고 생각하고 줍지 않은 거였다. 그러고도 감사의 말은 켜녕 빈병만 돌려준 것이 좀 어이없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빈병을 재활용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데 손님이 끊긴 탓인지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한번 계기가 생기자 언제 잊어버렸느냐는 듯 그때의 일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졌다.
겨울이었고 첫눈이 내렸으며 종업식이 가깝던 때였다.
*
열일곱의 김택승이 가장 갖고 싶었던 건 크리스마스 씰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한번도 사본 적이 없어서였다. 가격이야 한장에 3천원으로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용돈이란 걸 받아본 적 없는 김택승에겐 아까운 돈이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전후에는 돈 쓸 데가 많아 늘 지나치곤 했다.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같이 자란 동생들 챙기고 저금하기도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김택승은 자율학습을 하는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러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겨울이 깊어지고 연휴가 가까워지면서 시내에는 들뜬 공기가 감돌았다.
김택승이 일하는 패스트푸드점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리고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사슴뿔 모양의 머리띠를 끼고 주문을 받아야 했다. 익숙지 않은 머리띠를 끼고 있으려니 귀 뒤쪽이 아팠다. 그것을 참으면서 주문을 받고 있는데 한 무리의 고교생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김택승과 같은 교복을 입고 노란색 배지를 단 걸로 봐서 동급생인 모양이었다. 학교가 근처라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제각기 주문을 했다. 누가 한턱을 내기로 했는지 한명이 주문을 한꺼번에 받아서 왔다. 한데 마주 서보니까 낯이 익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복도를 오가며 자주 본 것 같았다. 항상 웃는 얼굴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선생님과도 스스럼없는 분위기라 눈에 띄었다.
그에 비해 김택승은 조금도 눈에 띄는 편이 아니라서 상대는 김택승의 동급생이란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대신 서글서글한 얼굴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한뒤 주문을 했다. 김택승도 주문을 받아서 확인했다.
"치즈버거세트 세개와 새우버거 세트 하나 오레오 아이스 네개 어니언 링 하나 주문하셨습니다. 그럼 20,100원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는 곧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안을 보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친구들에게 "100원있냐?" 라고 물어봤지만 없다는 대답만 돌아오자 결국 현금을 도로 넣고 카드를 꺼냈다. 받아보니 보통 보던 카드가 아니라서 조금 당황했다. 내색하지 않고 결제를 하려 했으나 기기가 움직이질 않았다. 가끔 먹통이 될 때가 있어 점장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김택승은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에 그를 쳐다봤다.
"저기."
"네."
재깍 대답하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가 김택승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머리를 하고 있음에도 사뭇 달라 보였다. 뭐라고 해야 하나 또레 같지 않고 이미 완성된 느낌이었다.
"100원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그렇게 말한 그는 곧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대신 이거 드릴게요."
그것은 크리스마스 씰이었다. 학교에서 파는 걸 사고 싶었지만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 이유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어차피 사봤자 쓸데도 없으니까 하고 내년을 기약했는데.....
김택승은 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20,100원 받았습니다."
현금 20,000원과 씰 한장을 건넨 그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도리어 김택승이었다. 값을 따져도 씰 낱장이 300원이니까 김택승이 이득이다. 무엇보다 갖고 싶던 것을 우연히 얻었다는 기쁨이 강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씰이 갖고 싶었다고 말하기는 그래서 대신 콜라도 꽉 눌러담고 감자도 푸짐하게 담아주었다. 그리고는 햄버거와 함께 쟁반에 들려 보내고 제 주머니에서 100원을 꺼내 씰 대신 채워 넣었다.
그게 김택승의 처음이자 마지막 씰이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쓸 일이 생기면 붙여야지 하고 사전 표지에 끼워뒀었는데 그럴 일이 생기지 않아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재회로 그것을 떠올리게 된 김택승은 씰이 아직도 그안에 있을지 궁금했다. 집에 가면 한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받은 전화 때문에 씰에 관한 것도 그와 마주친 일도 없던 일처럼 잊어버리고 말았다.
*
주말이 지나고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모두가 직장이다 학교다 바쁠 시간에 김택승은 PC방에 앉아 있었다. 어제 일자리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편의점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관두라는 전화를 받았다. 해고 통보가 기분 좋을 순 없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아이가 자꾸 땡땡이를 쳐서 헛걸음하는 일이 잦아 차라리 다른 일거리를 구하는게 나을 것 같았다. 다만 평일 서너 시간밖에 일할 수 없는데다 휴가철이 가까워져서 적당한 자리가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눈이 빠지게 구인란을 쳐다보던 김택승은 마침내 괜찮은 일자리를 하나 발견했다 건물 청소인 것 같은데 두 세시간만 하면 되는 일이라 제법 좋아 보였다.
단지 시간이 이르고 거리가 멀었다. 서울에서 벗어난 외진 곳에 위치해 아직 사람을 못 구한 모양이었다. 그럼 김택승도 오가기 힘들겠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문의만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김택승은 전화를 걸었다. 오래지 않아서 젊고 산뜻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주홍 화랑입니다.
화랑이라고? 구인광고에는 그런말이 없어 조금 당황했으나 일단은 목소리를 내 용건을 밝혔다.
"아르바이트 구하신다고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왜인지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또박또박하게 직접 방문해달라고 말을 해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출발하려면 대충 시간에 맞을 것 같아서 요금을 내고 곧장 PC방을 나왔다.
김택승은 무더위가 시작된 거리를 걸어 지하철을 탔다. 조금 졸다 보니 생각보다 금방 역에 도착했다. 출구를 나와서 약간 길을 헤맨 끝에 여자가 말한 담쟁이 덩쿨이 드리운 긴 담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담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나무로 만들어진 큰 대문이 보였다. 대문 옆에 문패처럼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주홍 화랑>
담이 높아서 겉으로 보기엔 화랑인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화랑이라기 보다 부잣집 단독주택같은 느낌이었다. 신기하다 생각하며 벨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잔디가 깔린 정원이었다. 돌을 박아 징검다리처럼 만든 길 끝에 미술관 같은 현대적인 건물이 자리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큰 창 너머로 보기 좋게 걸려 있는 그림들이 눈에들어왔다. 그 창을 지나서 김택승은 현관으로 들어갔다. 현관 정면에 작은 데스크를 두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미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김택승과 통화했던 사람인지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택승씨죠? 어서오세요. 전 이함은이라고 해요."
악수를 청하며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이 붙임성도 좋고 상냥하게 보였다. 곧 자리를 권하며 차가운 녹차를 내줘 고맙다고 말한 김택승은 일에 관해 물어보았다.
한달에 한번 전문 업체가 오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화랑이 문 열기 전에 와서 기본적인 것만 치우면 되는 거였다. 단지 오가는 거리가 있어 자는 시간을 더 줄여야 할 듯 했다. 그렇지만 단순히 청소치곤 보수가 괜찮아서 김택승은 평일에 일하겠다고 확답을 했다. 그러자 이함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을 보여주었다.
1층은 안내데스크와 전시실이 두곳, 아까 김택승이 차를 마신 테라스와 탕비실 휴게실 사무실로 이루어져 있었고 2층에는 김택승으로선 용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방이 몇 개 있었다. 3층은 입구만 보여주었는데 듣기로는 화랑 주인이 쓰는 곳이라고 했다.
"주로 서울에 머무시고 여기서 생활하는 일은 거의 없으세요. 바쁠 땐 계시기도 하는데 좋은분이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웃으면서 그리 말하는 걸 보니 화랑주인이 까다로운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어차피 마주칠 일도 없을 거라고 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전시물 운반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함은은 가끔 엘리베이터가 멈추긴 해도 위험하진 않으니까 당황하지 말고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지하의 보관실과 자재실, 창고, 기계실까지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넓으니까 일일이 청소할 필요는 없고 유리만 신경써 달라고 당부한 뒤 일 층의 데스크로 돌아가 화랑 대문과 현관열쇠를 건넸다. 추가로 보안 록에 관한 주의를 듣자 돌아갈 시간이 됐다. 김택승은 내일부터 일하겠다고 말하고 화랑을 나섰다.
이함은이 그런 김택승을 배웅하면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처음 전화 받았을 때 목소리가 젊으셔서 놀랐어요. 젊은 분이 오니까 좋기는 하네요."
솔직하게 감사를 표시하자 이함은이 고충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덧붙였다. 고맙다고 인사한 김택승은 오래 일할 수 있었음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화랑을 나섰다.
파랗게 잔디가 깔린 정원을 지나는데 풀냄새가 짙었다.
담장 아래 조로록 핀 물망초와 초롱꽃도 보기 좋았다. 이끌리듯 고개를 돌려 등 뒤의 화랑을 바라보자 문득 기대감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여기가 좋아질 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
"화랑이라고?"
강유형은 김택승이 무심코 한 소리에 반문했다. 저녁을 먹던 도중 어쩌다 김택승이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특이하게 화랑 청소를 하게 됐단 말에 강유형이 문득 중얼거렸다.
"손님 중에도 화랑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던데"
매니저로서 인맥이 남다른 강유형이라 화랑 주인을 아는지도 모르지만 딱히 묻고 싶진 않았다. 그보단 언제 일하느냐는 질문에 내일 아침부터 일한다고 대꾸하고 아차 싶었다.
강유형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지적했던 것이다.
"내일 아침? 잠은 언제 자고?"
김택승은 재빨리 대꾸했다.
"다녀와서 자면 됩니다. 오후에 과외를 가나 오전에 청소를 하나 똑같아요."
"거기가 어딘데."
김택승은 짧게 설명했다. 대충 둘러댈까 싶었으나 거기에 넘어갈 강유형도 아니고 거짓말은 하기 싫어 결국 바른대로 고했다. 그러자 강유형이 한숨을 푹 쉬었다 .
"멀잖아. 밤새 일하고 거기 가서 또 청소를 한다고? 잔다고 해봤자 네다섯 시간이네."
강유형은 김택승이 예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외에도 이런저런 사정을 알고 있어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곤했다. 그렇지만 부모가 없다고 투정부릴 나이도 지났고 살면서 교통사고 한두번 쯤 누구나 당할 수 있다. 이유 없는 호의가 필요할 만큼 힘들진 않았다.
힘들어 봤자 평생 일할 것도 아니고 다음 해 등록금을 모을 때까지만 바싹 일할 생각이니 상관없다.
그래서 나무라듯 걱정하는 말에 김택승은 그저 엷게 웃기만 했다. 그걸 보고 속내를 짐작한 강유형은 더 말하지 못했다. 그저 짧게 혀를 차며 무리하지 말라고 툭 던진 뒤 가게나 열어야겠다고 발길을 돌렸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많이 바쁘진 않았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밤을 보내자 동이 터 올랐다. 일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은 김택승은 장부 정리를 하는 강유형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묵직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오르고 나서야 노곤함이 밀려왔다. 덕분에 졸다가 내릴 역을 지나칠 뻔했다. 화들짝 놀라 전동차에서 내렸을 땐 사방이 출근인파였다. 그들을 헤치고 간신히 개찰구를 통화해 출구로 나오자 사포처럼 따가운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덕분에 화랑에 도착할 때쯤엔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그런데 화랑도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햇살 때문에 시원하지가 않았다. 저 하나 시원하자고 이 넓은 건물에 에어컨을 틀 수도 없고 해서 일하기가 힘들었다. 어떡할가 갈등하던 김택승은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싶어서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옷을 한꺼풀 벗은 것만으로도 훨씬 시원했다.
벗은 티셔츠를 가볍게 빨아 바깥에 널어두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청소라면 신물나게 해봐서 요령이라면 충분했다. 분주하게 화랑을 오락가락 하며 꼬박 두시간을 일하고 나서야 청소가 끝났다. 후, 하고 이마에 솟은 땀을 닦고 김택승은 청소도구를 제자리에 갖다 넣었다. 한데 들통 하나가 보이질 않았다.
아마 3층에 두고 온 모양이다. 올라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들통이 계단입구에 놓여 있었다. 이것만 가져다 두고 돌아가자고 피곤함을 억누르며 들통을 집어든 순간,
철커덕,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3층에서 나오는 사람이라면 화랑 주인인게 분명했다.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더니 일을 시작하자마자 만난 걸로 봐선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낯선 사람을 보고 상대가 당혹해 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얼른 몸을 돌리고 인사하려던 김택승은 멈칫했다.
"......"
"......"
둘은 한동안 서로 말없이 쳐다봤다. 의아해 하는 얼굴을 마주한 채로 김택승은 입을 반쯤 벌렸다. 어떻게 이곳에? 멈칫한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차분하던 커피색 눈동자가 스푼으로 막 휘저은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설탕 녹듯이 가라앉더니 친근한 빛을 떠올렸다.
"또 보네요."
가볍게 건네는 인사에 퍼뜩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하고 어정쩡한 대꾸를 흘린 김택승은 눈을 내리깐 채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우연한 만남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동창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반가워하기도 그렇고.....
여전히 쳐다보는 눈동자에 알아보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반복되는 마주침이 신기하고 약간은 의문스러운 듯 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김택승은 가만히 선 남자를 보고 자신이 엘리베이터를 가로 막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들통을 가지고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한데 남자가 선뜻 동승하지 않았다. 순간 계단으로 갔어야 하는 건가 싶었으나 반복할 새도 없이 남자가 성큼 걸음을 옮겨 탔다.
그리고는 곁에 나란히 서서 버튼을 눌렀다.
화물용이라 느리터진 엘리베이터는 결코 좁지 않았다. 다만 어색한 공기가 엘리베이터를 좁은 것처럼 느끼게 했다. 불편함을 떨치려 김택승은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했다.
먼저 인사를 건네야 할 것 같은데 한번 타이밍을 놓치니까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그때 다행히도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새로 오셨다는 분인가 보군요."
김택승은 "네" 하고 대답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가 사뭇 호의적인 태도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김택승은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조심스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훤칠한 키만큼이나 크고 단단하면서 굳은 살 없이 매끄러운 손이었다.
손톱마저 거스러미 하나 없이 가지런해 마치 깎은 듯 했다. 덕분에 청소하느라 지저분해진 저의 손이 눈에 띄었다. 그게 거북스러워 금방 손을 놓고 싶었지만 손을 잡은 채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단한 인사한 뒤 그는 곧 제 소개를 하려 했다.
"저는 이곳을 운영하는...."
차분하게 말을 잇는데 그의 이름이 생각날 듯 말듯 했다. 김택승은 재채기가 나오기 일보 직전의 기분으로 답답해하다가 "하, 선...."하고 이어지는 말에 퍼뜩 깨달았다.
"맞다! 하선연."
자가도 없이 그의 이름을 내뱉고 나서야 제 실수를 깨달았다. 줄곧 생각나지 않던 이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올라 말이 먼저 나가 버렸던 것이다.
엉겁결에 말을 가로채고 아는 채 해버렸다는 생각에 귓등이 달아 올랐다. 후끈거리는 목덜미를 쓸어 만지는 김택승을 보고 남자가 얼굴 가득 의문을 떠올렸다.
말해주지도 않은 이름을 알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할테다. 그의 갈색눈동자에 번진 의아함을 보면서 김택승은 변명처럼 제 이름을 말했다.
"....김택승입니다."
그러자 의아하게 보던 시선이 깊어졌다. 웃음기 없는 눈으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찬찬히 살펴 맘이 졸아들었다. 동창인걸 알아본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알아보길 기대하고 가슴이 설레는 것도 아니고 제 맘을 제가 모르다니 희한했다.
김택승은 잡고 있던 손을 자연스럽게 놓으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하선연이 가볍게 쥔 손아귀를 놓지 않은 채 가까운 곳에서 지그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는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희미한 당혹감을 느끼던 차.
"!"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덜커덩 흔들렸다. 놀라서 황급히 손을 놓고 안전 바를 붙잡은 김택승은 멈춰선 엘리베이터의 불이 깜빡거리는 것을 보았다.
곧 표시등이 전부 꺼지고 침묵이 찾아들었다.
아무래도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것 같았다. 김택승은 비상벨을 찾았으나 작은 건물의 화물용 엘리베이터라서 그런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당황하지 말고 연락하라던 이함은은 말을 떠올리고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청소하느라 던져둔 가방 속에 있었다. 보아하니 하선연도 맨손에 키 하나만 쥔 상태였다.
두 사람은 난색을 표시한 채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일단 9시면 함은씨가 출근하니까 엘리베이터가 멈춘 것을 알아차릴 겁니다.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기다려보죠."
침착한 말에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난처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린 하선연이 사과를 했다.
"오시자마자 놀라게 해 드렸네요. 엘리베이터를 교체해야 하는데 일이 많아서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시일이 오래 걸린다고 하더군요."
괜찮다고 대꾸한 김택승은 하선연이 제 몸에 시선을 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자신이 벗고 있음을 깨닫고 몹시 어색한 기분이 되었다. 괜한 민망함에 팔뚝을 문지르노라니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 챈 그가 덧붙여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몸이 좋으셔서요. 달리 운동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딱히 운동같은걸 하고 있진 않았다. 노동으로 말라붙은 몸은 운동으로 만든 근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활동량이 많다보니 군살이 없을 뿐이다. 그 몸을 쭉 훑어 내려가던 눈길이 옆구리에서 멈추었다. 그곳엔 채 무뎌지지 못한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얼기설기 꿰맨 자국이 교통사고 당시의 참상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크게 의식해본 적은 없었다. 벌거벗고 있는 목욕탕에서도 담담했는데 이상하게 그의 시선은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이리저리 훑어보는 눈빛이 마치 약점을 파헤치는 느낌이었다. 오래지 않아 하선연은 자연스레 눈길을 돌렸으나 그래도 불편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에 불이 확 나갔다.
동시에 시야가 사라졌다. 놀라서 김택승은 기척을 곤두세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상대를 가늠했다.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새카만 어둠인데도 시선이 느껴졌다. 김택승은 긴장한 채 그 시선을 마주 봤다. 하선연이 갑자기 입을 열거나 몸을 닿아 온다면 주먹을 날리게 될 것만 같았다.
그만큼 몸의 모든 감각이 예리하게 곤두 서 있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와 단둘이란 사실이 김택승을 지극히 예민하게 만들었다.
불은 금방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도 도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며 중력이 진동하자 긴장이 죽 빠져나갔다. 찰나에 온몸이 땀으로 엷게 젖은 것을 깨닫고 김택승은 하선연을 힐긋 쳐다봤다. 그는 평이했다. 불이 꺼졌는데도 별반 놀란 것 같지 않았다. 그냥 김택승과 눈이 마주치자 입술 끝을 살짝 들어 보일 뿐이다. 어딜 봐도 위협적으로는 보이질 않아 조금 전 왜 그리 긴장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꼭 사자 우리에 갇힌 기분이라 아직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그 아픔을 삭이려 김택승은 입술을 질끈 거렸다. 이에 하선연이 약간 미간을 좁히던 찰나, 엘리베이터가 땡-! 하는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곧이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함은이 나타났다. 그녀는 안을 보고 두번 놀랐다. 김택승이 남자와함께 있는 것을 보고 한번 놀라고, 김택승의 벗은 상반신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희미하게 홍조를 띤 이함은은 태연한 척 하며 김택승에게 눈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놀라셨죠?"
그녀가 둘에게 말을 걸었으나 누구 하나 쉽사리 내리지 못했다. 결국 먼저 내리라고 권하는 하선연의 말에 김택승이 마지 못해서 걸음을 뗐다. 본의 아니게 그를 등 뒤에 두자 왠지 등골이 써늘했다. 뒤덜미를 쓸어 만지며 김택승이 내리고 나서야 한발 늦게 하선연이 내렸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벗어남으로서 그들 사이에 감돌던 미묘한 긴장은 천천히 사그러졌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함은이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진짜 어서 엘리베이터를 교채하든지 해야지 안 되겠네요. 그나저나 사장님도 계시는 줄은 몰랐어요. 갑자기 마주쳐서 당황했겠다."
그 말에 하선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조로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갇힌 김에 통성명했습니다."
그리고 깔끔한 말투로 덧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건 김택승 쪽에서 해야 할 말인지라 얼른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짧게 시선이 엉키고 하선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금방 몸을 돌렸다 너른 보폭으로 화랑을 나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여유로웠다. 그것을 바라보던 김택승은 "근사한 분이죠?" 라는 이함은의 말을 긍정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긍정할 수가 없었다.
"선연씨도 택승씨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눈에 보이는 태도는 그런 것 같았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자신을 붙잡았던 손의 촉감이 선명했다. 부드럽고 매끈하면서도 차갑고 건조한 손이었다.
잠시 악수했던 오른손을 폈다 쥐었다 하던 김택승은 이함은이 헛기침을 흠흠 하고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많이 덥죠?"
여자 앞인데 여태까지 벗고 있었단 걸 깨닫고 김택승은 죄송하단 말한 뒤 얼른 널어두었던 티셔츠를 걷어 입었다. 이함은은 농담삼아 더우면 벗고 일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그 상태로 남자와 또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아무래도 내일부턴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김택승은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는 이함은의 제의를 거절하고 화랑을 나섰다. 그리고 역으로 가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하철에 타서 피곤한 몸을 가누며 서 있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캄캄한 창밖이 보였다. 그러자 아까 엘리베이터에 찾아왔던 정전이 생각났다.
암흑 속에서 남자와 응시한 순간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음에도 그 시선이 분명했다. 사람의 시선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거였다. 사소한 발견에 작은 놀라움을 느끼며 김택승은 피곤함으로 아든 눈을 감았다.
*
"에취!"
김택승은 작게 재채기를 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재채기 한 번에 손에 잡힐 듯 선명했던 기억이 와르르 흩어져버렸다. 꿈을 꾼 것 같은데 눈을 떴을 땐 무슨 꿈을 꿨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느낌만을 남기고 어렴풋하게 현실감이 잦아들었다. 창문으로 스미는 희미한 빛과 덜덜덜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느끼고 김택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목이 칼칼하고 머리가 띵했다. 내내 선풍기를 돌린 탓인것 같은데 타이머가 고장이 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묵묵히 선풍기를 끄고 나갈 채비를 한 김택승은 무거운 몸을 추스르고 집 밖으로 발을 디뎠다.
하늘을 이고 보니 왜인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바람까지 왱왱 불어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러다 다시 무더울 수도 있다 싶어 일단 우산 없이 출근했다.
그런데 평소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자 뒤늦게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밤새 비가 안 내려서 안 오겠거니 했는데 판단착오였다. 지하철 안에서 내리는 비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김택승은 비를 맞으며 화랑까지 달려야 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는 것은 면했지만 얇은 티셔츠가 젖어버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젖은 티셔츠를 벗어 제습기 앞에 널어두고 갈아입으려 가져온 티셔츠를 찾아 가방을 열었다. 어찌 된게 아무리 뒤져도 티셔츠가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꺼내두고 깜빡한 모양이다. 왜 이렇게 덤벙거리나 스스로를 탓한 김택승은 어떡하나 망설였다. 젖은 옷을 입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땀 냄새가 지독해질 터였다.
땀 냄새 폴폴 풍기는 몸으로 지하철에 타고 싶지는 않아서 별수 없이 하루만 더 벗고 일해야 할 것 같았다.
웃옷을 벗은 채로 김택승은 청소를 시작했다. 오늘은 비가 와서 평소보다 할일이 많았다. 우선 바닥의 물기부터 제거하고 자잘한 물건들을 제자리에 치우고 있는데 덜커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동작을 멈추자 현관의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동작을 멈추자 현관의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3층이 아닌 걸로 봐선 이함은인 모양이었다.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또 훌렁 벗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업쇼어 뭐라도 입어야 했다.
그러던 와중 문득 휴게실 옷걸이에 걸린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우선 저거라도 입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김택승은 옷걸이에서 셔츠를 벗어 팔에 꿰었따.
단추를 잠글 새도 없이 앞섶을 여미자 문간에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퍼득 인사하려고 고개를 숙인 김택승은 흰 운동화를 신은 발을 보았다.
갓 진열장에서 꺼낸 듯이 하얀 운동화.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따. 비에 젖은 데다 풀쪼가리가 묻어 있어 진짜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사이즈가 큰 걸로 봐선 남자의 발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김택승은 운동복을 입은 긴 다리와 흠뻑 젖은 티셔츠를 보았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걷어 올리며 하선연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고 있었다. 헌데 표정이 영 이상했다. 마치 놀람을 숨기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왜 저러나 하고 김택승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그제야 굳어 있던 눈썹이 스스르 풀리면서 입가에 웃는 빛이 떠올랐다.
"좋은 아침입니다."
비가 와서 좋은 아침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어울리는 산뜻한 인사였다. 날씨가 흐린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깅이라니 비에 젖지만 않았으면 스포츠 음료의 선전처럼 보였을 테다. 그의 발밑에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김택승은 근처에 걸려 있던 수건을 집어 건넸다. 한데 하선연이 그걸 받아 몸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봐왔다.
의아해서 그를 마주보자 미묘한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덩달아 시선을 내린 김택승은 자신이 걸친 셔츠를 보고 영문을 알았다.
"아."
그가 운동 후에 갈아입으려고 걸어두었던 셔츠인가보다. 그걸 김택승이 입고 있으니 황당했을 것이다. 제 불찰을 깨닫고 김택승은 곧장 사과를 했다.
"허락없이 입어서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벗어드리겠습니다."
"아뇨."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나오는 대꾸에 김택승은 다시 한번 말했다.
"아니면 세탁해서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마음에 드신 것 같은데 그냥 가지시죠."
그저 몸을 가리기 위해 잠시 입었던 거라 거듭 돌려주겠다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하선연은 부드러운 어조로 계속 거절을 했다. 그 태도가 은근히 완강해서 진짜로 셔츠를 주고 싶다기 보다는 남이 입었던 건 도로 입기 싫은 모양이었다. 결국 억지로 떠안기기도 뭐하고 준다는데 못 받을 이유도 없어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럼 잘 입겠습니다."
그러자 하선연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어째 어이없어 하는것 같아서 김택승은 너무 넙죽 받았나 싶어 "돌려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하지만 곧장 고개를 저어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여전히 빗물을 뚝뚝 흘리는 걸 보고 수건을 내밀었다.
"닦으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청소기를 밀어야 하는데 바닥을 적셔놔서야 곤란하다. 하선연이 얼결에 수건을 받자 김택승은 셔츠가 마를 때까지 입고 있으려고 대충 단추를 잠겼다. 단추를 잠그며 보니까 괘 좋은 셔츠인 것 같아 생각지도 못하게 득을 본 기분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기분 좋은 기색이 곁으로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하선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것 참..... 곤란하네."
뭔 소린가 싶어서 김택승은 그를 쳐다봤으나 하선연은 물어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젖은 수건을 적당히 던져놓고 몸을 돌려 위층으로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은 김택승은 턱을 긁적긁적했다. 셔츠를 주기가 곤란하단 말이었나.
아니 그럼 애초에 돌려준다는걸 거절하진 않았을 텐데 뭐가 곤란하단 건지 모르겠다. 남의 셔츠를 말없이 입었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뭔가 반응이 모호했다.
김택승은 미처 그의 셔츠를 남몰래 입어본 것 처럼 보였다거나 그의 셔츠를 가지게 되어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할 일이 많음을 깨닫고 답이 없는 의문 대신 제 일에 관심을 돌렸을 뿐이다. 그렇게 한동안 부지런히 일하다 보니 하선연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아랫단을 가볍게 접은 면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걸친 멋스러운 차림이었다. 그렇게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휴게실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팔걸이 쪽으로 뻗어서 드러눕는다. 그러다 유리창을 닦는 김택승을 발견하고 말했다.
"제가 좀 피곤해서요. 잠시 눕겠습니다"
이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눈을 감았다. 긴 다리가 팔걸이 밖으로 삐죽 튀어 나간 광경을 보고 김택승은 고개를 갸웃 했다. 아침 일찍 조깅을 하고 와서 피곤할 정도면 잠을 더 자는 편이 낫지 않나. 뭐 비가 와서 노곤하겠거니 생각하고 제 일을 계속하던 김택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창가의 소파에서 잠든 하선연 때문에 그쪽 유리를 닦을 수가 없었다. 딱 그쪽만 못 닦으니 티가 나서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김택승은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를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청소한다고 계속 오락가락했는데 조금도 거슬리지 않나 보다. 일부러 헛기침을 해보고 발소리를 내봐도 기척이 없어 진짜로 잠든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살그머니 가서 곁에 쪼그리고 앉아 진짜 잠들었나 손을 휙휙 흔들어 보았다.
그럼에도 눈꺼풀 하나 꿈쩍하지 않아 진짜 잠들었나 싶은데 문득 새삼스런 기분이 들었다. 이 얼굴을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많이 변한 것도 같고 전혀 안 변한 것도 같았다.
가지런한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김택승은 문득 눈썹에 난 조그만 흉터를 발견했다. 그 흉터 때문에 눈썹 중간이 살짝 끊겨 있었다. 예전에도 이랬는지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던 김택승은 소용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눈썹만이 아니라 어디가 변했어도 변했을 테다.자신 역시 많이 변했으니 말이다. 변치 않는 것은 오로지 이자리에 없는 사람 뿐이다.
영원히 소년인 그가 어른이 된 하선연을 봤더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여전히 멋있다고 했겠지. 어쩌면 전혀 못생겨졌다고 툴툴거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렴풋이 미소 짓던 김택승은 슬그머니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렸다. 불현듯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하선연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얼굴이 익어버릴 것처럼 뜨근해졌다. 잠든 사람을 코앞에서 쳐다보다 들켰으니 민망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히죽거리기까지 한 것 같아서 더욱 창피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김택승은 유리창을 닦던 걸레로 황급히 바닥을 닦는 척했다. 그럼 어른스런 아량으로 모른 척 해주면 좋을 텐데 하선연은 콕 집어서 질문을 했다.
"유리창 닦던거 아녔습니까."
"....얼룩이 보여서요."
어렵사리 목소리를 쥐어짜내 그리 답하자 "흐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꼭 둘러댈 말이 그것밖에 없냐는 것 같아서 걸레를 쥔 손이 오그라들었다.
애꿎은 바닥만 문지르던 김택승을 동정하지 않고 하선연은 확인사살을 했다.
"제가 그렇게 잘 생겼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농담 같은 말이지만 농담만은 아닌 말이었다. 엷게 웃는 얼굴에 그 기색이 묻어났다. 꼭 잘생겨서 쳐다본건 아닌데. 미묘하게 억울한 기분을 느끼면서 김택승은 항변도 못하고 바닥만 닦았다.
그렇게 닦다보니 진짜로 얼룩이 띄어서 결국 바닥을 전부 다 닦았다. 마침내 허리를 폈을땐 척추가 우두둑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 하선연도 진짜로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툭툭 두드린 김택승은 걸레를 빨아놓고 뒷정리를 한 뒤 돌아갈 채비를 했다.
다행히도 비가 그쳐 우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가방을 챙긴 김택승은 멀찍이서 하선연을 살펴봤다. 자는 것 같으니 굳이 깨워 인사하기보다는 그냥 가는게 나을 것 같았다. 고개만 꾸벅 숙여보이고 몸을 돌리려는데 문득 창가에 해가 드는 것이 보였다. 시원하게 비를 퍼붓고 가벼워진 구름 사이로 햇살이 스미고 있었다.
저대로 두면 소파에 누운 하선연의 얼굴에도 햇볕이 든다. 아무리 비온 직후라고 해도 한여름의 태양 빛이 포근하지만은 않을테다.
결국 김택승은 발길을 옮겨 창가로 다가갔다. 또 민망해질까 봐 하선연이 누운 소파를 빙 둘러가서 소리없이 블라인드를 잡아 당겼다. 이어 눈이 부시거나 얼굴이 뜨겁지 않도록 적당히 블라인드를 쳐 놓았다. 이 정도면 햇빛에 방해받지 않고 숙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김택승은 조용히 휴게실을 나왔다. 그리고 보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문간에 서서 다시 꾸벅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오자 비로 씻겨 청명해진 햇살이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손을 들어 제 얼굴에 손바닥만한 그늘을 만들어보았으나 곧 소용없단 생각이 들었다. 가린다고 해서 가려질 햇볕도 아니고 어쩌면 내년엔 다시 겪을 수 없는 더위인지도 모른다. 그럼 차라리 실컷 누리자는 생각으로 김택승은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워버리고 햇살 속으로 발을 디뎠다.
*
<Blossom>의 휴무는 공식적으로 한달에 한번이다. 매달 셋째 주 수요일 마다 청소 전문 업체가 오기 때문이다. 이날은 직원들이 유급으로 쉴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한데, 말단인 김택승과 매니저인 강유형은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휴무일엔 두 사람만 나와 업체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곳을 구석구석 치웠다.
저녁 무렵에 일을 마치고 청소 업체가 돌아가자 바의 술병을 꺼내서 닦고 있던 김택승은 대금을 지불하고 온 강유형이 다가와서 묻는 말을 들었다.
"아, 배고프다. 저녁 뭐 먹을까?"
김택승은 크게 고민 않고 대답했다.
"라면 끓일까요?"
그러자 강유형이 미간을 찌푸리고 핀잔을 줬다.
"모처럼 둘이 저녁 먹자는 데 라면이 뭐냐, 라면이."
"어.... 그럼 짜장면 드실래요?"
김택승이 대꾸에 강유형은 혀를 차고 몸을 돌리면서 "됐다, 너한테 뭘 묻겠냐" 라고 내뱉었다. 이어 걸음을 옮기다 그를 돌아보고 재촉했다.
"뭐해? 저녁먹으러 안가?"
그제야 밖에 나가 먹자는 소린 줄 알고 김택승은 후다닥 앞치마를 벗고 핸드폰을 꺼내다 부재중 표시가 뜬 것을 봤다. 알고보니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정기점진 할때는 아닌데 싶어서 김택승은 강유형에게 먼저 차에 가 계시라고 말한 뒤 전화를 걸었다. 오래지 않아서 전화를 받은 담당의가 여보세요 라고 말문을 열었다.
-아 김택승씨, 전화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깐 전화를 안 받으시더군요.
"예 일하는 중이라서요."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누가 기다리고 있어서 긴 통화는 어렵다고 하자 담당의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수술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치료하느라 애쓴 것도 있고 나이도 있으니 수술을 받는 쪽으로 고려해보라는 소리였다. 쉽게 포기하지 말고 상담을 받아보라는데 지금 상황으로선 그럴 시간을 내는 것 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김택승은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기다 몇 걸음 가지 못해 멈춰서고 말았다.
의사가 포기하지 말라고 한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이걸 포기라고 해야 하는건가. 잘 모르겠다. 그저 검사결과를 들었을 때 신기할 만큼 담담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소리가 실감이 안 났을뿐. 제거 수술 성공 확률이 낮다는 말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냥 '아 그렇구나 수술은 안 하는게 낫겠구나' 하고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결론이 지어졌다.
그렇다고 견디지 못할 만큼 투병생활이 괴롭지는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만큼 사는게 고된 것도 아니었다. 김택승은 대체로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고 그래서인지 삶에 미련이 없었다. 죽음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 까닭은 아니었다.
그는 매우 가까이에서 그것을 보았다. 우울로 들뜬 얼굴과 싸늘하고 축축한 감촉, 그리고 다시는 입 밖으로 내어볼 수 없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얼음 같은 상실감을 삼키며 김택승은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운동화 끈을 밟고 멈칫했다. 아무리 단단히 묶어도 언젠가는 다시 풀리고야 마는 끈이다.
그리움도 꼭 이와 같았다.
허리를 수그러 끈을 묶고 있노라니 늦어지는게 이상했던지 강유형이 도로 그를 찾아 들어왔다. 그리고 왜 이렇게 꾸물거리느냐고 투덜대다가 운동화 끈을 묶는 김택승을 보고 말했다.
"운동화 새로 사야겠네."
옆 고무가 떨어져 너덜거리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강유형이 한 소리했다.
"돈 좀 주더라도 밑창 두꺼운 걸로 사 신어라. 만날 컨버스화만 신으니까 금방 떨어지잖아"
뭣하면 자기가 하나 사 주겠다는 강유형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김택승은 제발에 신긴 운동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딱히 값이 저렴해서 캔버스화를 고집하는 건 아니었다.
김택승이 언제나 캔버스화를 신는 것은.... 일종의 습관에 가까웠다. 사용이 정지된지 오래된 번호를 아지까지 외우고 있는 것이나 이미 잊었어야 할 기억이 지금까지도 선명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김택승은 어째서 자신이 캔버스화를 신게 되었는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라....너 키 컸잖아?'
놀란 얼굴로 키를 재보던 하얀 얼굴.
'나도 더 크겠지.?
아무렇지 않은 듯 되묻는 말에 김택승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고 그러자 그는 영원히 소년일 것처럼 천진스런 얼굴로 씩 웃었다.
'금방 역전할 테니까 그때까지 크지말고 기다려라.'
그러겠다는 약속은 지킬수가 없었다. 대신 새 운동화를 살 땐 전에 신던 밑창이 두껍고 높은 운동화 대신 평소 안 신던 밑창이 낮은 캔버스화를 샀다.
막상 캔버스화도 신어보니 나쁘지 않아서 이후엔 계속 그것만 신었다. 그가 곁에 없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아직까지 그와 함께한 시간이 헤어진 시간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김택승은 운동화 한컬레쯤은 부담없이 받으란 소리를 우회적으로 하는 강유형에게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전 이게 좋아요. 운동화라면 괜찮습니다."
완곡하게 거절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강유형의 표정이 대번에 뽀루퉁해졌다. 나가서 같이 저녁을 먹고 가게에서 쓸 그릇을 고르는 동안에도 내낸내그러고 있더니 결국엔 매장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두툼한 운동화 대신 캔버스화를 사서 떠안겼다. 이것마저 받지 않으면 화를 내리란 걸 알고 있기에 김택승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강유형이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타박을 놓았다.
"고마우면 난처해하는 대신 좀 웃어라."
결국 못 이기고 슬그머니 웃자 강유형이 쇼핑백을 던지고는 앞서갔다. 그를 쫒아가면서 김택승은 어느새 가슴 속에 고였던 차가움이 녹아버린 것을 느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고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잊을 순 없다. 자신의 죽음 역시 그러할 거다. 그 사실이 슬프지 않은게 다행인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
강유형이 사준 새 운동화를 신었더니 발걸음이 날아갈 듯 했다. 이상하게도 항상 새 옷이나 새 가방보다 새 신을 신는게 기분이 좋다. 그래서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하는 모양이다.
김택승은 열 걸음 걸을때마다 한 번씩 코끝이 하얀 새 캔버스화를 바라보면서 화랑을 향해 걸었다. 신발에 한눈을 파느라 전봇대에 머리를 들어박을 뻔한 걸 면하고 화랑에 도착하니 어째 문이 열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자마자 평소와는 다른 차가운 공기가 끼쳐왔다. 차갑다 못해 추울 만큼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이함은은 이렇게 전기를 낭비할 것 같지 않아서 하선연일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역시 휴게실 소파 팔걸이에 긴 다리가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거기 누운 하선연은 일전과 한 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바뀐 거라곤 옷차림 뿐이다. 가볍게 다리를 꼰 자세까지 똑같아서 마치 오려 붙인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블라인드 역시 전에 쳐 줬던 것처럼 딱 얼굴을 가릴 만큼만 드리워져 있었다.
굳이 깨우지 않으려고 김택승은 조용히 가방을 벗고 티셔츠를 갈아입은 뒤 청소도구를 꺼냈다. 가볍게 주변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려는데 좀 망설여졌다.
청소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하선연이 깰 것 같았다. 그렇다고 청소기를 안 돌릴 순 없어서 그냥 작동을 시켰다.
위이잉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지만 하선연은 깨지 않았다.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마음 놓고 청소를 했다. 그러다보니 그가 있단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새신도 신었겠다 화랑도 시원하겠다 날씨까지 화창해서 괜스레 즐거웠다.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박자에 맞춰 밀대로 열심히 바닥을 닦다가 방향을 바꾸려고 노랫말처럼 팔짝 뛰어 돌아선 그때.
"......"
소파에 누운 채로 물끄러미 쳐다보는 하선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 김택승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민망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요전에도 이러더니 왜 이런 상황에서만 눈이 마주치는지 모르겠다. 아까 시끄럽게 굴땐 안 깨다가 고작 콧노래에 깨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왜 그러냐 따질 수도 없어 애써 태연한 척 다시 밀대를 밀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콧노래에 잠이 달아났는지 어쨌는지 하선연은 소파에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를 팔 걸이에서 한꺼번에 내리고 일어서는 모습을 힐끗 쳐다본 김택승은 그만 풋, 하는 소리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하선연이 실눈을 떴다. 기분 나빴나 싶었지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소파 쿠션에 기대 잔 탓에 뒷머리가 온통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옷은 멀끔한데 머리는 완전히 까치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말 안 듣는 머리 때문에 무던히도 신경을 쓰곤 했다. 제 모습이 비추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뒤통수를 비춰보고 툭하면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척하며 뒷머리를 매만졌다.
세월이 십년이 흘렀어도 저 머리만은 그대로 구나 하는 생각에 김택승은 웃음을 삼켰다.
"왜 웃습니까?"
불쑥 던져진 질문에 김택승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멀쩡한 얼굴에 곤두선 머리가 우습기도 하고 학창시절 생각에 정겨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창인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소릴 할 수는 없어서 눈을 내려깔고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그냥.... 좋아서요."
사실 웃는데 기분 좋은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리가 없다. 당연한 대꾸앞에서 하선연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크게 생각할 것도 없건만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한 말이 어디가 이상한가 옅은 의문을 느꼈으나 김택승은 밀대 질을 마저 했다. 하선연이 일어난 참에 그가 누워있던 소파 밑까지 깨끗이 닦았다.
그러다 창가에 놓인 머그잔을 봤다. 아마도 하선연이 소파에서 자기전에 마시고 그대로 둔 모양이다.
빈 잔이라고 생각하고 치우려던 김택승은 커피가 남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깝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남은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그러자 저만치에서 이쪽을 비스듬하게 쳐다보던 하선연의 눈이 등잔만해졌다. 그것을 보지 못한 김택승은 머그잔을 탕비실에 갖다 두었다. 그런뒤 다시 마저 치우러 돌아오다가 불현듯 하선연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김택승 씨."
성까지 붙여 부르는 말에 김택승은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꾸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어느새 다시금 완벽해진 하선연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조금전까지 뒷머리가 엉망이었는데 언제 감쪽같이 정리한 건지 모르겠다.
화랑을 운영할게 아니라 미용실을 운영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김택승은 다소 의아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왜인지 바라보는 눈빛이 무척이나 진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 죄송하지만....."
조금 주저하던 하선연이 눈을 슬쩍 치들어 김택승을 보고 말했다.
"관두시는게 좋을 겁니다."
잠시 그의 눈썹에 한눈을 팔던 김택승은 처음엔 그게 화랑을 관두라는 소린 줄 알았다. 또 해고인가 하고 실망이 찾아들던 와중, 하선연이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김택승씨를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뭐가? 김택승은 어리둥절해졌다. 해고가 왜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관두라는 게 화랑이 아닌가?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반문하려던 찰나. 눈을 가늘게 뜬 하선연의 표정이 보였다. 난처한 듯 누그러트린 얼굴에 눈빛만은 담담했다. 틀림없이 상대를 거절하는 태도였다. 그걸 보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아니겠지.'
김택승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자각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러나 하선연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에게까지 관심 받는게 익숙한 듯 했다.
그의 눈에 서린 무심함이 이런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은 혼자가 좋아서요."
어깨를 으쓱하며 김택승의 탓이 아니라는 식의 말이 쐐기를 박았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 말을 달리 해석할 순 없었다. 덕분에 일순 머리가 멍해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아졌다. 그러나 얼굴을 계속 봐야 하는 사이에 현실도피는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김택승은 짐작한 바가 맞는지 확인하고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그러니까 제가..... 사장님을..."
사장님이라는 말이 참으로 안 어울렸지만 마땅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았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입술을 모으고 김택승의 말을 잘라먹으며 반문했다.
"사장님?"
그게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호칭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제가 사장님께....어떤..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거라면...."
어렵게 난무하는 생각들 중 적합한 말을 고르기가 엄청나게 어려웠다. 질문을 해 놓고도 자신이 뭔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차리리 하선연도 알아듣지 못하고 '감정이라뇨?' 하고 반문했으면 좋겠다. 그럼 제가 잘못 생각한 거라고 안도하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불행히도 하선연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난처한 기색으로 후, 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김택승의 짐작대로 뭔가 오해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김택승이 그를.... 그러니까 좋아하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고 당혹스러워 감택승은 입술을 뻐금거렸다. 대관절 어쩌다 그런 오해를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물론 주차장에서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들키기는 했다.
그러나 의도한 바가 아니었고 편의점에서 마주친 것도 화랑에서 일하게 된 것도 단순한 우연일 뿐이다. 동창이란 걸 알아본 탓에 영문모를 행동을 했을 순 있다.
그의 셔츠를 입고 있기도 했고, 쳐다보면서 히죽 거리기도 했지만... 김택승은 등줄기가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해받을만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되짚어보니 그렇지도 않다.
하선연의 입장에선 충분히 오해할 만 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해도 김택승으로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아니라고, 착각이라고말하려 입을 열었다.
"아니 전...."
헌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목구멍이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한차례 바람이 불 듯 머리속이 수선스러워지면서 옛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눈처럼 휘날리던 꽃잎, 우산을 두드리던 비. 낙엽 부셔지던 햇살, 그리고 겨울의 차가운 향기. 얼굴을 부르트게 하던 바람을 맞으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단지 뭔가가 마음에 걸려 무엇을 말하려던 건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멍해진 김택승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하선연이 싱그레 웃었다. 반달이 된 눈으로 보조개 푹 패는 미소를 띤 채 잠짓 김택승의 마음을 헤아리듯 말했다.
"뭐, 제가 잘못 생각한 거겠지요.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알아서 착각을 시인하는데도 뭔가가 찜찜했다. 민망한 기색 하나 없이 웃는 모습이 진짜로 잘못 생각했다고 여긴다기보다는 그저 모르는 척 해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한편으로 말문을 막아버리는 세련된 거절같기도 했다. 그러는 것을 보니 아니라고 말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강한 부정은 긍정으로 보일 뿐이고 말로 설득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입을 다물어버리자 하선연이 선심쓰듯 위로를 주어섬겼다.
"제가 한말 너무 마음에 두지 않길 바랍니다."
선웃음을 지어 보인 그는 사무적인 태도로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그런 뒤 저쪽으로 걸어가는데 가지런했던 뒷머리가 다시 스르륵 일어났다.
강아지 꼬리처럼 머리 한 가닥이 불쑥 튀어오르는 것을 보고 김택승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저놈의 뒷머리.
그렇게 실소하고 나니 동요가 가라앉아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억울하고 당황스럽긴 한데 큰일은 아닌 듯했다. 하선연이 제 입으로 잘못생각했다 말했으니 그걸로 됐다.
진짜 무슨 감정이 있어서 상처받은 것도 아니고 오해에 연연할 만큼 남의 시선을 신경쓰는 편도 아니다.
속내야 어찌됐든 화랑에서 일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언젠가는 사실을 알겠거니 하고 밀대를 빨러가려던 김택승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차여본 것은. 나름대로 중요한 일인데 별 감흥이 없었다. 아직까지 차여서 가슴 아플 정도로 누군갈 좋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인가 보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한번쯤은 누군가를 간절히 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좀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김택승은 짧게 수술에 관한 생각을 떠올렸으나 그뿐이었다. 별로 고민하거나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대신 어서 일을 마치고 들어가 라면이나 끓여 먹자 생각하면서 힘차게 밀대를 밀었다.
*
날이 갈수록 더워졌다. 올여름엔 폭염이 유난히 빨리 찾아와 적년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하는 의문이 절로 일으켰다. 작열하는 태양은 도시의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고, 연립주택의 작은 옥탑방을 불가마로 만들어 놓았다. 화랑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한낮에 자게 된 김택승은 더위에 잠 못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고장 난 선풍기밖에 없는 옥탑방은 한증막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눈 그늘이 시커멓게 내려앉은 것을 보고 강유형이 한소리를 했다.
"너 얼굴이 왜 그모양이야?"
얼굴이 어떤가 싶어 김택승은 무심코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강유형의 눈에 대충 깎은 턱수염이라도 들어왔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강유형이 혀를 차고 말했다.
"시커멓게 말라붙어 가지고는 가죽만 남은 꼴이잖아.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냐."
재깍 고개를 끄덕였으나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름이라서 살이 빠지는 거라고 변명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에는 갑자기 저녁을 쏘겠다며 인근의 유명한 삼계탕 집에서 배달을 시켰다. 괜히 무리하게 주머니를 턴 것은 아닌가 싶었으나 미안해하는 모습을 좋아할 사람도 아니라 김택승은 고맙다는 말만 하고 묵묵히 삼계탕을 먹었다.
대추 한 알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그릇을 비우고 나니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보양식이라 기운이 복돋아지는 느낌이었다. 먹은 값을 하려고 김택승은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일했다. 주방 일을 손바쁘게 도와주고 금세 쌓이는 쓰레기통을 비우고 돌아오는데 낯익은 차가 보였다.
갓 출고된 것처럼 잘 닦인 검은 아우디였다. 그걸 보자 혹시 하는 생각과 함께 하선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초에 만난 곳이 여기라 오늘 밤 와 있대도 이상하지 않다.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속에서 김택승은 가게로 돌아가 화장실을 점검하려 했다.
그때 강유형이 그를 불러 당부했다.
"VIP룸에 손님들 돌아가신다니까 나가서대리 불러드려."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이고 VIP룸으로 갔다. 막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이 나오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근사하게 차린 젊은이들로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화려하게 차린 사람들 속에서 흑백의 클래식함이 두드러지는 이는 다름 아닌 하선연이었다. 역시나 검은색 아우디는 그의 차였나 보다.
일전의 일로 그와 마주치는게 썩 달갑진 않았다. 묘한 오해를 사고 있는 탓에 혹시라도 착각이 깊어질까봐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손님 대접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김택승은 그쪽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보이고 입을 열었다.
"대리기사 몇 분이나 필요하십니까."
"아, 일단 두 사람이면 됩니다."
그렇게 대꾸하며 김택승을 본 하선연의 눈동자가 멈칫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김택승이 대리기사를 불렀다.
VIP룸에 매상이 높다 싶더니 오늘따라 대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멀쩡한 사람은 하선연뿐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사람들을 전부 배웅했다. 그리고 혼자가 된 후에야 비로소 김택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도 이만 돌아가봐야겠네요."
김택승은 대리기사가 필요하냐고 물어보았다. 피곤해 보이기는 해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는 게 술을 전혀 안 마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시기는 했는지 차 키를 건네며 대리기사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전화를 건 김택승은 잠시 후 주차장에서 그의 아우디를 끌고 올라왔다.
그런 뒤 정차를 해놓고 운전석에서 내리려는데 문득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택승씨."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을 하자 짧게 웃은 하선연이 미간을 문지르며 부탁했다.
"괜찮다면 물 한잔만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라서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게로 돌아갔다. 금방 유리잔에 얼음물을 갖고 나오니 하선연이 아우디 앞에서 등을 보인 채로 서있었다.
세월을 입어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모습이었다. 김택승은 그쪽으로 다가가 유리잔을 내밀면서 말을 걸었다.
"여기 물 가지고 왔습니다."
곧 잔을 말끔히 비우고 하 하는 짧은 한숨을 토해낸 하선연이 잔을 도로 내밀었다. 그러나 김택승은 그것을 받아들지 못했다. 유리잔을 잡기전에 그가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만 잔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챙캉!
김택승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진 유리잔이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라 김택승은 하선연을 물러서게 한 후 황급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말에 하선연이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김택승은 일단 큰 파편부터 집어 치우려고 허리를 숙였다. 숙인 몸 위로 그늘이 진다 싶더니 뭐가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받친 김택승은 툭 떨어지는 머리를 보고 당혹했다.
쓰러진 건 다름아닌 하선연이었다. 그를 부축하자마자 독한 알콜냄새와 함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그제야 하선연이 엄청나게 취했음을 알았다. 너무 멀쩡해 보여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김택승은 그를 떠안은 채 "사장님, 사장님!" 하고 여러 번을 불렀다.
그러나 전혀 미동이 없어 방금전까지 멀쩡하게 서있던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일단은 차 안에 눕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축 늘어진 하선연은 매우 무거웠다. 김택승은 어렵사리 차 문을 열고 그를 뒷자석에 눕혔다. 그리고 대리기사가 도착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정신 차리게 하려고 애썼다. 아무리 대리기사가 바래다 준다해도 집까진 제 발로 걸어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었다.
죽은 것처럼 미동이 없어 이대로 보내도 될지 모르겠다. 이래선 대리기사도 난처하고 잘못하면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 결국 직접 바래다주기로 마음먹었다.
한숨을 쉬며 가게로 돌아간 김택승은 강유형을 찾아서 그를 직접 바래다줘야 겠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강유형이 의아하다는듯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손님을 바래다주는것은 좋은데 집은 어떻게 알고 네가 가겠다는 거냐?"
"제가 일하는 화랑 주인이라서요."
예전에 언급했던 화랑을 운영한다는 손님이 김택승의 고용주임을 알고 강유형은 놀란 표정을 했다.
"거참 서울바닥 좁네."
혀를 차면서 말하는 소리에 동창이라는 것까지 알면 더 놀라겠구나 싶었다. 굳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김택승은 하선연을 바래다주러 가게를 나왔다. 뒤따라 나온 강유형이 운전석에 앉은 김택승을 보고 운전 조심하라면서 차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김택승은 염려 말라고 살짝 웃어 보인 뒤 액셀을 밟았다.
부드러운 핸들을 돌려 도로에 올라서자 밤이 깊어 한적해진 거리가 보였다. 뒷자석에 꿈쩍하지 않고 뻗은 하선연을 룸미러로 간간히 살피면서 김택승은 화랑으로 차를 몰았다. 3층에 그가 생활하는 곳이 있으니 거기 눕혀 놓으면 될 것 같았다.
차로 달리자 목적지까지는 금방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것과는 비교가 안 돼서 차가 좋기는 하구나 생각하며 김택승은 조심스럽게 주차를 했다. 그런 뒤 운전석에서 내려 뒷자석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하선연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한 번 더 손을 내밀어 어깨를 뒤흔들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업어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화랑까지 올라가려면 꽤나 고생하겠다. 그러던 중 문득 열쇠에 생각이 미쳤다. 가방을 가게에 두고 와서 김택승에겐 화랑 열쇠가 없었다. 일단은 하선연이 가진 열쇠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그에게 손을 뻗던 김택승은 옷깃을 건드리려는 찰나 주저했다. 괜히 더듬었다가 이상한 오해라도 사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열쇠를 찾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다. 김택승은 난감한 눈으로 고개를 늘어트린 채 잠든 하선연을 바라봤다.
.....웬만해선 눈을 뜰것 같지 않았다. 몇 번이나 깨워도 못 일어났으니까 주머니 좀 뒤진다고 해도 깨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김택승은 문득 한심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진짜 그를 좋아하거나 스토킹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조심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결국 찔릴 것 없다는 생각으로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그는 엷은 물색의 여름 재킷 아래 얇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바지의 포켓을 툭툭 두르려 봤으나 잡히는게 없었다. 그래서 팔을 뻗어 여름용 재킷을 들치다가 멈칫했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달달한 체취가 몰칵 풍겨왔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일까. 의문을 하며 계속 살펴보니 안주머니에 뭐가 들어 있었다. 열쇠인 것 같아서 김택승은 잠긴 단추를 열려고 손가락을 꿈지럭 거렸다.
그때, 하선연의 눈썹이 찌그러들며 잠투정 같은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
김택승은 반사적으로 굳었다. 숨조차 멈춘 채로 있다가 하선연이 표정을 풀고 잠잠해지는 모습에 나오려던 한숨을 도로 삼켰다. 도대체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건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타박한 김택승은 빨리 열쇠를 찾으려고 자세를 바꿨다. 하선연의 어깨너머를 한 손으로 짚은 채 나머지 손을 써 안주머니의 단추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든 열쇠를 끄집어내면서 몸을 물리던 찰나. 하선연과 시선이 부딪혔다.
엄청나게 난처했다. 완전히 빼도 박도 못할 꼴이었다. 뭐라 변명을 해야 할지 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표정없는 하선연을 마주 보고 눈꺼풀을 끔벅거리던 김택승은 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가로막았다. 그러느라 떨어트린 열쇠가 그의 가슴팍에 떨어졌다. 곧 손바닥에 와 닿는 촉촉한 살갖의 촉감에 상황은 더 망측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마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들을 수가 없어서 반사적으로 막았는데 이거야말로 상대를 덮치는 꼴이 아닌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김택승은 서둘러 내뱉었다.
"아닙니다."
입술이 막힌 하선연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가볍게 찡그렸다. 그를 마주본채 김택승은 거듭 말했다.
"사장님이 생각하는 그런거 아닙니다. 오해할 만한 건 알겠지만 진짜로, 아닙니다."
흡사 애원하다시피 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까지 말하는데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눈빛을 한 채 하선연을 바라보던 김택승은 이 상태로 계속 오해라고 주장하기에는 어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각오하고 조심스레 손을 치웠다.
다행히도 하선연은 피곤한 듯 한손을 들어 이마를 짚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자신의 말을 들어준건가 싶어서 김택승은 약간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그의 가슴팍에 떨어진 열쇠를 집으려던 그때, 축늘어져 있던 하선연이 갑자기 움직였다.
열쇠를 집은 손목을 낚아채 확 잡아당긴 것이다. 균형을 잃고 그의 위로 넘어진 김택승은 눈을 크게 떴다. 그대로 입술이 닿았던 것이다.
그러느라 부딪힌 코가 아프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김택승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하선연이 손에 쥔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악수 했을 때보다 더 강하게, 마치 부러트리기라도 할 것 처럼 붙잡고 있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들다 도리어 뒤덜미마저 붙잡혔다. 내리누르는 힘 때문인지 아직 남은 상처가 저릿하게 아파져 왔다.
고통에 신음을 내뱉은 김택승은 그 틈을 타서 파고드는 혀를 느꼈다. 그것이 깊숙하게 들어와서 강하게 혀를 빨았다.
그러자 눈앞이 아득해져 와 전력을 다해 잡힌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이어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아차, 싶었을땐 이미 주먹을 날린 후였다.
퍽!
"윽!"
정통으로 들어간 주먹이 하선연의 턱을 그대로 날렸다. 짧은 신음과 함께 고개가 휙 돌아간 하선연이 시트 속에 처박혔다.
신음조차 없이 잠잠해진 그를 보고 김택승은 얼어 붙었다. 바래다주겠답시고 데려온 손님에게 주먹질을 하다니, 더구나 상대는 그가 일하는 화랑의 주인이기 까지 했다. 아무리 놀랐다 해도 그렇지 아무리.... 키스를 했다고 해도 그렇지.
짙게 휘감기는 촉감이 생생했다. 알콜과 함께 희미한 단맛도 났다.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조금도 부드럽지 않았다.
항상 부르터 거칠거칠 하고 툭하면 피가 나는 입술이었다.
아니라서 다행이라 해놓고는 대체 왜.
손등에 달리 어떤 흔적은 묻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젖은 느낌만이 머물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것을 한동안 물끄러미 보던 김택승은 길고 얕은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마도 술김에 상대를 착각한 모양이었다. 단순한 주정에 놀라서 과하게 반응하고말았다. 마지막에 힘을 빼긴 했지만 정확하게 주먹이 들어가서 머리가 띵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술때문에 어지러울 텐데 뻗어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일단은 그를 옮기고 나서 괜찮은지 어떤지 살펴봐야 했다.
김택승은 늘어진 하선연의 팔을 당겨 그를 끌어내 둘러업고 계단을 오라갔다. 질질 끌리는 다리를 힘들게 추슬러 대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 질렀다.
마침내 현관을 지나 휴게실 소파 위에 그를 던졌을 땐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그것은 하선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울 것 같아서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틀어놓은 뒤에야 김택승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그를 화랑까지 데려왔으니 임무는 완수한 셈인데 턱은 어떨지 모르겠다. 보긴엔 멀쩡해도 나중에 멍이 올라올 수도 있었다.
김택승은 탕비실로 발길을 옮겨 위생비닐을 찾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꺼낸 얼음을 넣고 수건으로 감싸 소파에 뻗은 하선연의 턱에 받쳤다. 하필이면 때린 곳이 얼굴이라 걱정이 됐다. 무엇보다 사과할 일이 염려스러웠다. 차마 제 입으로 그가 키....스를 해서 놀라 때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상대도 분간 못할 정도로 취한 그가 이 일을 기억할 지 의문이었다.
어찌하나 고민하며 하선연을 쳐다보던 김택승은 주머니 핸드폰이 울리는 걸 느꼈다. 꺼내보니 강유형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가방은 경비실에 맡겨놓을테니 거기서 바로 퇴근해
시간을 보니 벌써 가게 마칠 때가 다 되었다. 생각지 못한 사고가 있었던 데다 하선연이 무거워 옮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떻게든 사과해야 할테지만 일단은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았다. 나중에 하선연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이야기를 할 요량으로 김택승은 메모지를 찾았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라고 간략하게 적은 뒤 기억 못할까 봐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두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대화로 해결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김택승은 화랑을나왔다.
*
다음날 김택승은 하루종일 하선연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가게에 출근해 밤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먼저 전화해볼까 싶어도 밤이 늦어 일단은 내일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에 관한 걱정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두고 평소처럼 가게를 오가며 일했다. 그러다 잠시 짬이 나 바람도 쐴겸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러 밖으로 나갔다. 미처 몰랐는데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발이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유독 비가 많은 여름이라고 생각하며 주방장에게 얻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무는데 문득 벨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깨닫고 전화를 받은 김택승은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소음에 움찔 놀랐다.
혹 광고 전화인가 싶어서 뒤늦게 액정을 살펴보니 제대로 된 번호가 찍혀 있었다. 다만 모르는 번호라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서 김택승은 담배를 빼고 물었다.
"여보세요?"
그러자 시끄럽게 쿵쾅거리는 소리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 ....입니까?
물어보는말에 대강 제 이름인 것 같아서 김택승은 곧바로 대꾸했다.
"네 제가 김택승인데요. 누구십니까?"
뭐라뭐라 대꾸를 하는것 같기는 한데 뭐라는지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김택승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재깍 대답하는 말에 수화기 너머로 웃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제일 때문에 전화했을 테다. 그런데 너무 시끄러워서 통화할 상황이 아닌듯 싶었다.
김택승은 이따 조용한 곳에서 다시 연락해달라고 했으나 하선연은 그 말을 듣는 대신 제 용건을 말했다.
-....호텔인데...여기로.... 를 ...오시면.....
말하는 맥락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그쪽으로 오라는 말인것 같았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기는 했으나 지금 당장은 일하는 중이라 무리였다.
김택승은 그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사정을 밝혔다.
"지금은 일하는 중이라서 힘들고 내일 뵙는게 어떻습니까?"
아침 일찍 화랑에서 보기 어려우면 낮에 봐도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한데 하선연이 자리를 옮겼는지 갑자기 소리가 조용해졌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똑바로 들리기 시작했다.
-저는 오늘 꼭 만났으면 좋겠는데요.
아무래도 그는 지금 만났으면 하는 모양이다. 난처함에 턱을 긁적이다가 다시금 청해봐도 소용이없었다. '정 안되면 하는 수 없지만, 가능한 오늘보면 좋겠지요'
하는데 가해자 처지에서는 도저히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김택승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자 모 호텔의 클럽으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하선연은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별수없이 담배를 주머니에 도로 쑤셔 넣은뒤 가게로 돌아간 김택승은 강유형을 찾아 조퇴를 부탁했다.
그말에 강유한 은 적잖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작년 신종 독감에 걸려 다 죽어가면서도 조퇴하지 않으려고 버텼으니 갑작스런 청이 이상할 만도 하다.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대꾸할 말이 궁했다. 멀쩡해 보이는 얼굴로 아프다고 거짓말 할 수도 없고 누굴 때려 합의를 하러 간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입을 다문 채로 묵묵히 서 있노라니 강유형이 사정을 캐묻는 대신 말없이 보내주었다.
속으로 그에게 사과를 한 김택승은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우산을 빌린 뒤 가게를 나왔다.
이미 지하철은 끊겼을 시간이라 택시에 올라탄 김택승은 목적지를 말하고 초조한 기분으로 올라가는 미터요금을 바라보았다.
빗속을 뚫고 얼마간을 달려 이윽고 하선연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땐 만원짜리 한장이 훌쩍 날아가버렸다.
신음성을 삼키며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린 김택승은 곧장 하선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어찌 된게 받지를 않았다. 우산을 받쳐든 채로 거듭 통화를 시도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직접 찾아보는게 더 나을 것 같아 문지기에게 대리기사라고 적당히 둘러대고는 클럽 안으로 발을 들였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클럽 안에는 청춘을 즐기는 남녀들로 가득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고막을 두드리는 가운데 김택승은 일단 화장실을 확인해보았다.
보통 클럽이나 술집에서 전화를 받지 않을 때에는 화장실에 박혀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선연은 그곳에서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컴컴한 와중에 인파 속에서 찾는 것도 무리다 싶어서 김택승은 지나가는 웨이터를 붙잡고 그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다행히 눈에 띄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웨이터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른쪽 복도 끝에 있는 VIP룸에 있다고 말을 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선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룸 앞에 서서 일단 문을 두드려본 김택승은 벨소리도 못 듣는데 노크소리를 들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인 것은 텅텅 비어 있는 좌석이었다. 테이블 위에 꽉 차있는 빈 병만이 누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하마터면 그냥 돌아 나갈 뻔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테이블 한 구석에서 껌벅거리는 핸드폰 불빛 때문이었다. 그걸 보고 핸드폰을 확인하러 안쪽으로 들어간 김택승은 테이블 저편에 누워 보이지 않았던 하선연을 발견했다.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긴 다리를 꼰 채 편안히 잠든 모습이 화랑에 있을때와 한치의 다름없어 보였다.
다만 파랗게 부어오른 턱만이 평소와 다를 뿐이었다. 붓기는 많이 빠졌으나 맞았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크게 멍이 들어 있어 보기가 안좋았다.
멍이 빠지려면 한참이나 걸릴 듯 해 괜스레 미안해졌다. 일단 죄송하다 사과라도 하려면 그를 깨워야 할 것 같아서 김택승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혹 또 만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었으나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는지 기다란 속눈썹을 부스스 들어 올린다.
"....김택승씨?"
상대방을 확인하듯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김택승은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천천히 눈을 깜박거린 하선연이 엉뚱한 소리를 뇌까렸다.
"진짜 왔네요."
오늘 꼭 만나야 한다고 강조를 할때는 언제고 진짜 왔느냐니, 마치 자신이 오리란 걸 예상치 못했단 투였다. 일행을 다 보내고 혼자 남아있던 건 오겠다는 말에 자신을 기다린게 아니었나? 의아해하는 김택승을 신경쓰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하선연이 문득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레 테이블 위 어지럽게 늘어진 술병들 사이에서 물병을 찾아낸 김택승은 그것을 하선연 손에 쥐어 주었다.
그걸로 목을 축인 하선연은 물병을 도로 테이블에 내려 놓으면서 이번에는 불평을 했다.
"왜 이렇게 늦은 겁니까?"
비도 오고 차도 끊긴 상황에서 이만하면 충분히 빨리 온거였다. 설령 늦었다 해도 그건 제때 전화를 받지 않은 그의 탓이었다. 무엇보다 진짜 왔다며 놀라워할땐 언제고 이제와 늦었다고 타박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생각하며 김택승은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묵묵히 사과했다.
그리고 어젯밤의 일에 대해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기억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젯밤에 제가 본의아니게...."
한데 그때 미간을 찌푸린 하선연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나가서 이야기하면 안되겠습니까?"
정신없이 술병이 늘어선 룸은 이야기하기엔 좋은 장소가 아니기는 했다. 게다가 이틀 연속으로 술을 마신 탓인지 머리를 짚은 하선연이 적잖이 피곤해 보여 신선한 공기를 쐬는게 좋을 것 같았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김택승은 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클럽을 나왔다.
귀가 먹을 만큼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자 바람에 섞인 빗줄기가 뺨을 때렸다.
비를 피해 우산을 편 김택승은 하선연이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것을 보고 그의 머리위에 우산을 씌워 주었다. 덕분에 어깨가 닿도록 가까워진 하선연이 눈꼬리를 접으며 나지막한 소리로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흔한 말인데도 보조개가 들어가는 미소 때문인지 어째 등줄기가 근지러워졌다. 괜한 쑥스러움에 입술을 꾹 깨물었던 김택승은 미소를 거둔 그가 빗속으로 성큼 발을 옮기는 걸 보고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 말도 없이 날아오는 키를 붙잡느라 우산을 든 채로 허둥거리자 여상한 목소리가 기울어진 우산을 지적해왔다.
"비가 들이치네요."
다시 우산을 바로 세운 김택승은 서둘러 차에 당도해 뒷자석에 올라타는 하선연을 보고 엉겁결에 운전석에 앉았다.
차 키가 있어 운전석에 앉기는 했는데 앉고 보니까 어째 상황이 좀 묘했다. 마치 비가 와서 그를 마중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 만난 목적은 어디까지나 어젯밤의 일을 사과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김택승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고는 말문을 열었다.
"저, 어젯밤일은...."
"그 이야기는 화랑으로 가면서 하지요."
어젯밤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말을 잘라버린 하선연은 팔짱을 낀 채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면서 하자는걸 보면 아무래도 김택승더러 운전을 하란 소리 같았다. 이래서야 목적이 뒤바뀐것 같지만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기도 그렇고 화랑이라면 어차피 가야할 곳이라 일단은 운전대를 잡았다.
한데 막상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하니 가면서 이야기하자던 하선연은 내내 조용했다.
룸미러로 힐끗 뒤를 쳐다보자 잠이 들어버린 듯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결국 차마 깨우지도 못하고 김택승은 묵묵히 빗속을 달렸다.
지하철을 타고 갈때와는 다르게 오래지 않아 화랑에 도착했다. 역시 차를 타는게 빠르긴 빨랐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김택승은 도착했다고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머리를 등받이에 기댄 하선연은 미동이 없었다. 깊게 잠이 든 모양이라 아무래도 흔들어 깨워야 할 것 같았다.
깨우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하며 운전석에서 내린 김택승은 뒷문을 열고 몸을 숙여 하선연의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불현듯 손목이 붙잡혀 심장이 덜컹 했다. 언제 잠에서 깼는지 하선연이 눈을 뜨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 또 입맞춤을 당하는게 아닌가 싶어 긴장하고 있노라니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어쨌는지 그가 손목을 놓아주면서 농담조로 말을 했다.
"설마 또 때리려던 건 아니겠죠."
"그러니까 그건...."
오해라고 말을 하려던 김택승은 그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것을 깨닫곤 뒤로 물렀다. 그러자 뒤따라 차에서 내린 하선연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아직도 비가 오네요."
빗발이 굵지 않아 우산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김택승은 그 말에 우산을 꺼내서 펼쳐 들었다. 곧 당연한 듯 그곳으로 들어온 하선연이 주머니에서 손을 찔러 넣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김택승 혼자서 우산도 받치고 대문도 여느라 바빴다. 결국 실내에 당도했을 때 김택승의 옷은 축축하게 젖어버리고 말았다.
하선연을 신경쓰느라고 미처 제 몸을 가리지 못한 탓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빗방울을 떨어내며 재킷을 벗은 하선연은 자연스레 한 손을 내밀었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차 키를 건네준 김택승은 대신 재킷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기지개를 길게 펴며 하는 소리를 들었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피곤해서 이만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김택승씨는 어쩌시겠습니까?"
그말에 김택승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어젯밤 일때문에 만나자고 한 게 아니었던가? 아직 아무 이야기도 못 했는데 올라가겠다고 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아니 잠깐만...." 하고 입술을 떼려 하니 싱긋이 웃으며 제 할말만 했다.
"주무시고 가라고 하고 싶어도 역시 집에 들아가 쉬는 편이 낫겠지요. 그럼 문단속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러고는 냉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붙잡을 새도 없이 닫힘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렇게 그가 가버리고 홀로 남겨진 김택승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럴거면 도대체 뭐 하러 자신을 거기까지 불러낸 것인지 모르겠다. 설마 비도 오고 하니 마중 나와 운전해줄 사람이 필요하기라도 했나. 어쨌든 괜한 헛걸음을 하자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마따나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어도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아까 택시비로 돈을 다 써버려 지갑에는 달랑 교통카드 뿐이었다. 지하철이 다니기 시작할 시간엔 어차피 화랑에 다시 출근해야 한다. 결국 여기에서 밤을 보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허락도 없이 화랑에 묵어도 되나 싶었지만 하선연이 어차피 자고 가라는 식으로 권했고 발이 묶인 것 또한 그 때문이니 괜찮지 싶었다. 몇 시간 정도 신세를 지는 거야 상관없을 것 같아서 휴게실 소파를 빌리기로 맘 먹었다. 일단은 소파가 젖지않도록 축축해진 옷과 신발을 벗어 널어두고 수건을 이불 삼아 자리에 누웠다.
한데 눕고 보니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선연이 누워 있을 때는 발이 한참이나 밖으로 튀어 나가더니 어찌 된게 제 다리는 그렇지 않았다.
자로 잰 듯 사이즈가 딱 맞아 편안하기 이루 말할데가 없었다. 편하면 됐다고 스스로를 달랜 김택승은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그리고 탁탁탁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자장가인양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슨 일인지 잠이 오질 않았다. 예민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통 뒤통수만 닿아도 잠이 드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리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는 와중에 빗방울 소리가 여러가지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주로 하선연에 관한 생각이었는데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곱씹을 수록 놀라웠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춥던 그 졸업식 날에는 설마 다시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같은 학교라는 것을 알았지만 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 벚꽃이 휘날리던 봄날, 우연히 그를 뜻밖의 장소에서 맞닥뜨렸다.
*
봄이 절정이었다. 햇살과 함께 펄럭이는 꽃잎에 눈이 어지럽고 마음이 들떠 올랐다. 열여덟이란 사실이 지나치게 실감이 날만큼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어깨에 묻은 벚꽃 잎을 떼어 괜한 호기심으로 씹어보던 김택승은 버스가 당도한 걸 보았다. 요금을 치루고 버스에 오르자 소풍 갈 생각에 들뜬 아이들이 한가득 타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 김택승은 조금 놀랐다. 교복 입은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풍이라고 복장이 불량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학교 방침에 분명히 교복을 입고 와야 한다고 들었는데 모두 약속이라도 한듯 사복을 입고 있었다. 덕분에 혼자 교복 차림인 모습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뭔가 잘못 알았나 싶은 생각에 김택승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교문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학주가 버티고 서서 사복입은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보내 기합을 주고 있었다. 무사히 교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사람은 김택승 뿐인 듯 했다. 아니 한명 더 있었다.
시원스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지나치는 그는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먼지 한톨 없는 빴빳한 교복이 교복 같지가 않았다.
신고 있는 운동화도 눈처럼 희어 금방 진열대에서 꺼내온것 같았다. 그 깨끗함에 감탄하던 김택승은 그와 얼핏 눈이 마주쳤다. 햇살 아래 밝은 갈색 눈동자가 익숙했다. 지난 겨울, 패스트푸드점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주었던 녀석이다. 짧은 미소가 그 얼굴을 스쳐 혹 자신을 알아보는 건가 싶었지만 금방 고개를 돌려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한창 기합을 받는 친구들에게 여유롭게 인사한 그는 배신자라는 원망을 들으며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운동장 위의 스탠드 석에 앉았다.
김택승도 달리 앉을 곳이 없어서 그곳에 올라가 앉았다. 서먹한 거리에 앉아 있으려니 미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달리 말 붙일 이유를 찾지 못하고 김택승은 운동장만 마냥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이 없는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때마다 벚꽃잎이 한들거렸다. 마침내 기합이 끝났을 때쯤엔 까만 교복에 벚꽃 잎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대절한 버스를 타고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도 사방이 벚꽃이었다. 아침에 겪어야 했던 기합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 아이들은 신나게 떠들었다. 줄 맞춰 걸으라는 선생들의 말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뛰고 엉키면서 박물관 주변의 공원으로 흩어졌다. 김택승도 박고영이나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도시락부터 뜯었다.
평소보다 이른 점심을 해치우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반별로 모이기 전에 박물관이나 둘러볼까하고 발길을 옮기는데 저만치 교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복 입은 아이들 틈에 있어서인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김택승은 자신도 저렇게 눈에 띄나 하고 괜스레 옷깃을 만지작 거렸다.
그러다 배가 묵직한 것을 느꼈다. 바깥에서 먹으니까 입맛이 돌아서 너무 많이 먹었나보다. 그는 속을 비우러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박물관의 화장실은 깨끗했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나오던 김택승은 미처 정돈하지 못한 옷자락이 허리 밖으로 튀어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집어 넣으려고 다시 칸막이에 들어갔는데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마저 옷차림을 정돈한 김택승은 밖으로 나가려다 세면대 앞에선 뒷모습에 멈칫했다.
아까 지나쳤던 그가 미간을 모은 채로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거울에 비친 뒤통수를 보는 중이었다.
말이 보는 거지 자기 뒤통수가 보일리 없었다. 애써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봐도 소용이 없자 난감한 얼굴로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뒷머리 한가닥이 비죽하게 튀어나온게 적잖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어울리지 않게 찡그린 얼굴로 어떻게든 뒷머리를 눕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거의 머리를 적시다시피 해서 눕힌 뒤에야 됐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손을 뗐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가려다 다시 뒷걸음질쳐서 거울 앞에 붙었다. 머리가 또 뜨지는 않았는지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데 김택승의 눈엔 그보다.....
등 한가운데 묻은 벚꽃잎이 더 신경이 쓰였다. 아까 스탠드에 앉았을 때 묻은 것일까. 마치 누군가 일부러 남겨놓은 흔적같았다.
그는 끝까지 그 벚꽃잎을 눈치채지 못하고 뒷머리만 매만지고 있었다. 혼자서 그 벚꽃잎을 떼 주고 싶다고 생각하던 김택승은 그러지 못하고 입술을 질근 거리며 대신 제 등을 툭툭 하고 털었다.
순간, 그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뒤를 확 돌아보았고 서로 눈이 마주쳤따. 당황한 김택승은 놀란 나머지 잘근거리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곧 희미하게 쇠맛이 느껴지면서 그걸 본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너......"
그말에 무심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낸 김택승은 빨갛게 피가 묻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손들을 도로 핥다가 묘한 듯 물끄러미 보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발길을 돌려 그곳을 나와 버리고 말았다.
마치 몰래 지켜보던 모습을 들킨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순전히 등짝에 묻은 그 벚꽃잎 때문이라 생각하며 김택승은 피가 마를 때까지 아랫입술을 빨았다.
찢어진 입술에서 나던 피는 금방 멎었으나 그날은 하루종일 그가 눈에 밟혔다. 두드러지는 교복 뒤에 붉은 벚꽃잎이 언제 떨어질까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게 됐다. 그렇게 보다보니 어째서 뒷머리에 그렇게나 신경을 썼는지도 알게 되었다. 수시로 뒷머리를 쓸어내리느데도 뒤집어진 한가닥이 제자리에 돌아가지 않았다.
마치 꼬리같이 불쑥 튀어나와 바람이 불때마다 팔락거렸다. 왠지 잡아당기고 싶어지는 머리칼이 마음 한켠을 간질였다. 그 간지러움이 실제로도 느껴지는 양, 김택승은 재채기를 가볍게 했다
"에취!"
코를 훌쩍이노라니 몸이 약간 으스스했다. 어깨를 웅크리던 김택승은 여전히 들려오는 빗소리에 어렴풋이 제 상황을 깨달았다.
차비가 없어서 화랑 휴게실 소파에 누워는데 졸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다시 깬거지?
쌀쌀해서 그런가 하고 수건을 끌어 덮던 김택승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컴컴한 가운데 누군가 로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순간 도둑인가 싶었으나 도둑치고는 너무 조심성이 없었다. 손전등 불빛을 이리저리 흔들고 뭔가를 헤집으며 시끄럽게 굴었기 때문이다.
이 밤중에 저리 돌아다닐 사람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아마도 하선연일것이다. 이함은이 깔끔하게 정리해둔 서랍을 온통 뒤집어 놓고 있어 김택승은 무심코 입을 열고 물었다.
"찾으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그말에 놀랐는지 황급히 일어서려던 하선연이 테스크 상판에 머리를 쾅! 소리나게 박았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화랑이 울릴 정도라 김택승은 놀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
머리를 싸안고 도로 주저앉은 하선연은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아파 죽겠는지 한동안 그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선 입을 열었다.
"....대체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곧 발거벚은 김택승의 모습을 보고 괴이쩍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김택승은 또 쓸데없이 오해를 하지 않도록 재빨리 설명했다 .
"사장님이 부르시는 바람에 택시비를 다 써버려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옷은 사장님께 우산을 씌여 드리느라 다 젖어서 말리는 중입니다."
김택승의 대꾸에 할 말이 없어진 하선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헛기침을 흠흠했다. 그리고는 미처 몰랐다는 듯 타박을 놓았다.
"진즉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택시비를 드렸을텐데."
그럴 생각이었더라면 그렇게 냉큼 올라가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김택승은 사과를 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덕분에 놀라게 해드린 것 같네요."
그걸 탓하지 않을 염치는 있는지 하선연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보이며 아까 데스크에 부딪힌 뒤통수를 계속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그가 뭔가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김택승이 물었다 .
"그나저나 안 주무시고....."
"아, 머리가 좀 아파서 구급약을 찾고 있었습니다."
구급함이라면 데스크가 아닌 휴게실에 있었다. 휴게실로 돌아간 김택승은 선반에서 구급함을 찾아 뒤따라온 하선연에게 건넸다. 한데 구급함에도 그가 찾는 진통제는 없었다. 어차피 숙취로 온 두통이라면 약을 먹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다. 김택승은 하선연에게 소파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꿀을 꺼냈다. 경험상 이럴땐 달달한 것을 마셔주는 게 좋았다.
그동안 하선연은 찝찝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김택승이 널어 놓은 티셔츠며 바지 양말을 보고 못마땅한 기색을 얼굴 가득 드러냈다.
그러다 김택승이 머그잔에 꿀물을 타서 건네자 재빨리 만면에 미소를 띄었다.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아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고개를 살레살레 젖는 김택승을 보고 하선연은 꿀물을 한모금 마시며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위로 올라가시죠. 소파에선 불편하실 테니 제가 손님방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런 제안에 김택승은 조금 놀랐다. 그렇게 신세를 질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고 개인적인 공간에 선뜻 남을 들일 사람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에 받은 오해도 있고 해서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어 일단 거절했다.
헌데 빈말이 아니었는지 하선연이 계속 권유를 해왔다. 어찌나 말을 교묘하게 하는지 결국에는 그렇게 하겠노라 승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택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선연은 머그잔을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했다.
"그럼 빨랫감 챙기고 따라오세요."
말리기만 하고 도로 입을 생각이었는데 빨랫감이라고 하니 좀 머쓱했다.
혹 여기저기 젖은 옷을 널어놓은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자고 가라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뜬 군소리를 할 입장이 아니라서 김택승은 짐을 챙겨 하선연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여태껏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3층의 사가는 아래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어쩐지 전원주택처럼 아늑한 기분이라 도시적인 분위기의 하선연과는 별로 안 어울렸다. 어쨌거나 좋은 곳임은 분명해 제가 쉬어갈 방을 안내받은 김택승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을 커다랗고 폭신해 보이는 침대가 채우고 있었다.
도대체 침대에서 자보는게 얼마만의 일이더라, 기억을 더듬는 김택승에게 하선연이 말했다.
"잠은 이곳에서 주무시고 옷은 저쪽 세탁실에서 빨면 됩니다."
"세탁실이라고요?"
김택승의 반문에 하선연은 직접 앞장 서 세탁실을 보여주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세탁기를 작동시키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려줘 차마 그냥 말려 입으면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고 나니 이번에는 김택승을 빨아야 한다는 듯 욕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각종 목욕용품과 수건의 사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수건에도 머리수건과 목욕수건 발수건이 따로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마지막으로 샤워가운을 한 장 내어준 하선연은 갈아입을 수 있도록 새 속옷과 양말까지 챙겨주었다. 마치 오성급 호텔에 버금가는 서비스라 고맙다는 말로 부족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감사인사를 생략할 수없어 고개를 꾸벅이며 고맙다고 말을 하니 하선연이 선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했다.
"이정도야 별일 아닙니다. 그냥 나중에 빨래 널어 놓고 주무시는 것만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알겠다고 대답한 김택승은 먼저 자러가겠다는 하선연에게 인사를 하고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뜨거운 물을 원없이 맞고 나니 몸이 노곤해져 비로소 졸음이 밀려왔다. 욕실을 나가 뻐근한 눈을 문지르며 옷을 널어놓은 김택승은 제 방으로 돌아가 커다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이루 말할 수 없는 폭신함이 온몸을 감싸오며 새삼스레 하선연의 친절이 감탄스러워졌다.
비오는데 먼 곳까지 불러내 놓고 사과할 기회를 주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듯 했다. 퍼렇게 멍이 든 상태로도 이만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라면 굳이 어젯밤 벌어진 불의의 사고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고의가 아니었음을 충분히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가능한 그를 민망하게 만들 만한 말은 삼가고 사과해야겠다 다짐했던 김택승은 졸음이 밀어닥치는 걸 느꼈다. 아까 선잠을 잤더니 깨어 있는 것보다 더 피곤했다. 뜨거운 물에 샤워도 했겠다 폭신한 이불도 따뜻하겠다 그는 마음놓고 잠이 들었다.
*
'아프다.'
김택승을 깨운 것은 낮익은 고통이었다. 교통사고로 입었던 상처가 새삼스러운 통증을 호소해왔다. 마치 금방 사고를 당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대처럼 내리치던 비와 온몸을 때리던 헤드라이트 불빛,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에 이어 전신을 덮치던 충격이 다시금 생생해졌다. 사고의 순간,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어둠이 덮쳤고 이게 죽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쉬움이 없었다. 놀랄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바람에 깨달았다. 살면서 불행했던 적도 없지만 딱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행복했던 적도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나 미련이 없던 거였다. 그저 내려오는 어둠이 안온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살아 있었고 그 증거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고통이 살아있는 증거라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김택승은 몸을 움직여보려고 노력했다.
가위눌림과 비슷한 증상이니 일단 일어나서 움직이다 보면 사그러질 통증이었다.
한동안 애쓴 끝에 김택승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다. 곧 팔을 뻗어 침대 밑으로 내리자 온몸을 쑤시던 괴로움이 천천히 가셨다. 아직도 내리는 비 탓에 후유증이 온 모양이라고 짐작하고 어슴푸레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비가 내려 어둑한 방안에는 서늘한 습기가 깔려 있었다. 푹신한 침대에 낮섦을 느끼고 김택승은 누운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여기가 어딘가 싶었다가 곧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영문을 깨달았다.
'그랬지, 어제 화랑에서.....'
택시비가 없어 화랑 소파에서 자다가 삼 층으로 올라온게 기억났다. 덕분에 모처럼 침대에서 잘 수 가 있었다. 그 안락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도로 눈을 감던 차에 퍼뜩 지금이 몇 시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언제나 그의 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모닝 벨소리가 없었다. 알람을 새로 맞췄어야 하는 건데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각인거 같아서 시간을 확인하려고 시계를 찾아 고개를 든 김택승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어째 어젯밤 잤던 데가 아닌 것 같았다.
그 방보다 더 넓고 어둡게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팔꿈치에서 뭔가가 부딪혔다. 뒤따라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불분명한 잠꼬대에 등줄기가 싸해졌다. 차마 고개를 돌리기가 두렵다고 생각하는 와중 등 뒤로 뒤척이는 몸이 닿아왔다. 이어 벗은 어깨에 헝클어진 머리칼이 기대왔다. 김택승은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뒤를 돌아본 순간 낯빛을 달리했다. 바로 곁에 머리를 파묻고 자는 이는 다름아닌 하선연이었다.
기겁한 김택승은 이불을 걷어차며 도망치다 그만 침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침대가 높아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아픔이 느껴졌으나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보다는 하선연이 깰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떨어진 상태로 숨을 죽인 채 있노라니 천천히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여왔다. 그 소리가 고른걸로 봐서는 아직 깨지 않은 모양이라 김택승은 소리 없이 느긋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빠끔히 뜬 눈으로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모로 누운 하선연이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비오는 날 특유의 그늘이 드리워 날짝지근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벗은 상태였다.
아침을 맞아 일어선 그의 다리 사이에서 황급히 시선을 돌린 김택승은 어째서 그와 함께 자고 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커다란 침대에 하선연이 자고 있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그의 침실인 모양이다. 한데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어젯밤 손님방에서 잠들었는데, 자다가 화장실에 다녀온 것 말고는......
기억을 되짚던 김택승은 헉 하는 신음을 삼켰다. 설마 그때 방을 착각한 건가. 눈도 제대로 안 뜨고 볼일을 본 뒤 문이 여러 개라 헷갈려서 대충 자던 곳이라 짐작되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침대에 도로 기어들어가 누웠는데 그게 하필이면 하선연의 곁이었나보다.
김택승은 낭패해서 눈썹을 흐렸다. 가뜩이나 이상한 오해를 산 마당에 이일을 들키면 매우 곤혹스러워질 테다.
다행히 하선연은 아직 자고 있어 어젯밤의 일을 모르고 있었다. 깨기 전에 조용히 나가면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김택승은 최대한 숨을 죽여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과 함께 떨어진 베개를 제자리에 놓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하선연이 이불이라도 찾는지 웅크리고 누웠던 몸을 바로 했다. 깜짝 놀란 김택승은 하마터면 그와 부딪힐 뻔하고 놀라서 물러나다가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유리잔을 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침대 밑에 늘어져 있던 이불에도 예외는 없었다. 하필이면 유리잔에 든게 와인이라 선명하도록 얼룩이 남았다.
김택승은 난감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간밤에 신세를 지고 이불까지 버려놨으니 민폐가 따로 없었다.
가뜩이나 깔끔한 사람이라 아무래도 빨아 놓는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이 방에 있었단 걸 들키겠지만 나쁜 짓을 하려던 것도 아니니 폐를 끼치고 모른 체 하는 것보다는 낫다 싶었다.
김택승은 허리를 숙여 이불을 안아 들고 늘 하던 대로 욕실로 가서 옷을 벗은 채 이불을 빨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금방 물에 담근 탓에 얼룩이 잘 빠졌다. 꼼꼼하게 이불을 손으로 문질러가며 얼룩을 빼고 있는데 문득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동적으로 그쪽을 돌아본 김택승은 머리가 엉망으로 뒤집힌 하선연이 문간에 우두커니 선 것을 보았다. 제집이라서 누가 있는 줄 모르고 문을 열었다가 많이 놀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표정이 굳어보였다.
빨래한답시고 알몸이었기에김택승도 조금 당황했다. 일어서서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 하선연이 불쑥 내뱉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아, 이불을 좀 버리는 바람에...."
그 말에 하선연이 그가 빨고 있던 이불을 바라보았다. 그게 자기 침대에 있던 것임을 알아보고 점차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미간을 찡그리고 이마를 짚었다.
마치 두통이 심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골치 아픈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침묵이 이어져 뭐가 잘못됐나 하고 괜스레 불안해졌다.
"......"
잠시후,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뱉은 하선연은 곧 어쩡쩡하게 있는 김택승을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이불은 됐으니까 그만 나오세요."
김택승도 나가고 싶었지만 알몸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욕조에 쪼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마저 하고 금방 나가겠습니다"
그러자 "흠" 하는 소리를 내뱉은 하선연이 턱을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럼 뒤처리 잘하고 나오십시오."
문이 닫히자 혼자가 된 김택승은 서둘러 이불을 건져놓고 대충 몸을 씻었다. 그리고 하선연이 당부한 대로 머리카락이나 거품을 남기지 않으려고 욕조를 꼼꼼하게 치웠다. 그의 상식으로는 뒤처리란 말을 달리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건으로 몸을 닦은 김택승은 옷을 찾아 입고 욕실을 나갔다. 마침 가운을 걸친 하선연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말했다.
"저, 어젯밤 일은...."
실수였다고 말하려는데 하선연이 별로 뒷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을 가로챘다.
"몸은 괜찮습니까?"
갑자기 안부를 묻는 영문을 몰랐으나 괜찮았기 때문에 김택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하선연의 턱에 남아있는 멍을 보았다.
푸르딩딩한 흔적을 보니 주먹질을 사과하러 여기까지 왔다는게 생각이 났다. 김택승은 어젯밤 일까지 포함해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왜인지 멈칫한 하선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가늠하듯 시선을 준 채로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이 잘 안나서요. 혹시 우리가...."
"괜찮습니다!"
주차장에서 키스한 일을 언급하려는 거로 생각한 김택승은 황급히 말문을 막았다. 키스해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피차 민망한 일을 입 밖에 꺼내 뭐하겠는가.
"서로 실수한 거니까..그냥....없었던 일로 하는게 어떨까요"
김택승이 어색하게 뒤통수를 문지르며 말하자 하선연의 동공이 커졌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곧 눈을 가늘게 뜨고 반문하는 말에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어차피 처음도 아니고."
첫 키스라면 주먹을 날리고도 억울했겠지만 그게 아니니 상관없다. 입술 좀 부딪혔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런데 당연한 말을 듣고 하선연의 표정이 더욱 오묘해졌다. 미처 몰랐다는 식의 반응 이라서 좀 이상했다.
설마 이 나이 먹도록 키스 한번 못해봤을거로 생각했나? 그렇게 숙맥처럼 보이진 않았을 텐데 싶어서 김택승은 턱을 긁적였다.
그 모습에 하선연이 팔짱을 끼고 손끝으로 제 팔을 톡톡 두드렸다. 모호한 표정이 뭘 생각하는 지 알 수 없었으나 다만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말실수를 했나 싶어 제가 한 말을 되짚어 보아도 딱히 이상한 소릴 한거 같지 않았다. 어쨌든 할 말은 다 끝난 것 같아서 김택승은 "그럼 이만 내려가보겠습니다" 라고 몸을 돌렸다. 그때 하선연이 불현듯 이름을 불러 세웠다.
"김택승씨."
"네."
재깍 답하면서 멈춰서자 그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스쳤다. 짐짓 턱을 쓸어 내리며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일하러 가시는 겁니까?"
당연한 걸 왜 묻느냔 표정으로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선연이 에두르는 말을 했다.
"밤에 일하고 또 화랑일까지 하려면 많이 힘드시겠군요."
"아뇨. 뭐...."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시내쪽에 더 나은 일자리를 소개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뜬금없는 소리에 김택승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뭔 말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가 한 박자 뒤늦게 사실상 해고 통보임을 깨달았다. 말이 소개지 관두고 딴데 알아보란 소리였다. 일이 좋게 마무리 되어가는듯 하다가 갑자기 그런 말이 나와서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김택승이 황급히 "제 실수때문이라면..."
하고 항변하러하자 하선연이 툭 내뱉었다.
"제가 불편하시잖습니까."
순간 김택승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물론 편하진 않았다. 묘한 오해를 하고 있는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세상에 편한 고용주가 어디 있겠는가. 사장이야 다 불편한 법이고 무엇보다 화랑을 관두고 싶지 않아서 김택승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장님을 대하기 편하진 않습니다만.... 싫은 건 아닙니다."
그래도 하선연의 표정에 변화가 없어서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좋아합니다."
말해놓고 보니 이번엔 또 너무 직설적이었나 싶었다. 혹시 다른 뜻으로 알아듣고 부담스러워 해고하려는건 아니겠지 하고 김택승은 하선연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런것 같진 않았다. 하선연은 잠시 뭔가를 생각한 듯 하다가 불현듯 성긋이 웃어보였다.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미소가 보기 좋았지만 김택승은 그미소를 맘 편히 감상할 수 없었다. 이어진 대답이 걸적지근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렇군요."
역시 그렇다니 무슨 의미일까.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저기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좋다는 뜻입니다" 하고 제말을 설명했다.
하선연이 웃는 얼굴로 "물론 그렇겠죠" 라고 답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고용여부라 김택승은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럼 이곳에서 계속 일해도 되는 겁니까?"
하선연은 언제 관두라고 했느냐는 듯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눈꼬리를 접은 채로 물었다.
"여기가 상당히 좋으신가 봅니다."
거리가 다소 멀긴 해도 시간대도 알맞고 보수도 괜찮다. 일도 어렵지 않고 이함은도 잘해주는데 어디가서 이런 일자리를 구한단 말인가. 김택승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하선연이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늘이면서 "그래요....."라고 뇌까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늦었지 않습니까? 이만 내려가 보세요."
자기가 불러 세워 놓고 재촉하는 말에 김택승은 발길을 돌렸다. 이어 현관문을 여는데 등 뒤에서 덧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힘드실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왜 오늘은 힘들거라 생각하는지 희미한 의문이 들었으나 비가 와서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들었다. 하선연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릴 했는지 알았더라면 그처럼 흘려듣진 못했을거다. 하지만 김택승은 미처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착각을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하선연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각자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생각하고 맘을 놓을 뿐이었다.
*
화랑일을 마치고 돌아와 지하철을 나설 때쯤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가 그친 것을 보고 김택승은 우산을 접고 옥탑방이 있는 연립주택으로 향했다.
오피스텔 촌을 지나 막 연립주택이 있는 모퉁이를 도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주차된 차에서 강유형이 내리고 있었다.
"매니저 여긴 어떻게...."
어리둥절해 그를 보자 손에 뭔가를 든 강유형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화를 냈다.
"너 핸드폰은 뭐하러 들고 다녀?"
그 말에 전화하셨냐고 반문한 김택승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액정이 까만게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 강유형이 한숨을 팍 쉬었다.
"조퇴를 해서 무슨 일인가 보러 왔더니 연락도 안되고 대체 어딜 돌아다니는 거냐."
그러고 보니 어제 그에게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고 조퇴를 했다. 간밤에 많은 일이 있어 완전히 잊고 있었다.
걱정했구나 싶어서 김택승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강유형은 손에 든 초밥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들던 김택승은 문득 강유형이 하는말에 멈짓했다.
"너 무슨 향수 뿌렸어?"
"예?"
그럴리가 없어서 되물으니 강유형이 고개를 약간 기울여 목덜미 냄새를 맡았다.
"좋은 냄새 나는데."
조금 당황해서 김택승은 제 옷깃에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과연 강유형의 지적대로 뭔가 향긋한 냄새가 났다. 달작지근하진 않지만 하선연에게서 나던 냄새와 비슷했다. 간밤에 그의 집에서 지내느라 옮았나보다. 코에 익어 미처 알지 못했다.
향수는 아니라고 대꾸한 김택승은 가방을 내려놓은 뒤 도로 밖으로 나갔다. 비가 막 그친 참이라 바깥이 더 시원했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얻어온 플라스틱 의자를 닦아 놓고 빨래통을 엎어 임시 식탁을 만든 김택승은 초밥의 포장을 벗겼다. 이런데서 먹기에는 황송할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초밥들이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국물을 강유형 쪽에 밀어두고 김택승은 나무젓가락을 갈라 내밀었다. 그리고는 먹으라는 손짓에 잘 먹겠다 말한 후 계란 초밥을 입에 넣었다 그러자 강유형이 싼 것부터 먹는다고 괜스레 타박했다. 이어 지나가는 것처럼 슬쩍 물었다.
"무슨 일이야?"
어제 조퇴를 하고 가서 이제야 돌아온 게 맘에 걸리는 모양이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김택승은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난색이 되었다.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그래서 어설피 선웃음을 짓고 답했다.
"별일 아니에요."
그 말에 강유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야 죽는일 아니면 다 별일 아니지."
강유형은 그리 말했지만 어쩌면 자신에겐 죽는 일도 별일 아닌지 모른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자 강유형이 난처하게 만들기 싫은지 영문을 캐는 대신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쨌든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말해라. 나중에 들통나서 혼나지 말고."
김택승은 "예" 라고 대답하며 싱그레 웃었다. 그 모습에 강유형이 "웃지마 정든다" 라고 중얼거렸다.
투박한 배려에 고맙단 소릴 하고 싶었지만 해봤자 핀잔이나 할게 분명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항상 그랬다. 쌀쌀맞은 것처럼 굴어도 정이 깊었다. 만약 수술에 관해 말할 사람이 있다면 그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말할 수 없다. 강유형이라면 분명히 죽음을 기다리기보단 수술을 통해 네 삶을 지키라고 할테다. 그러나 김택승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제 머릿속에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이 들어 있대도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 ,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술을 받고 병원을 나서는 순간 벼락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게 사람의 운명이다.
한데 단순히 그 확률을 낮추려고 힘든 수술을 감행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도 그에겐 교통사고의 병원비 때문에 진 빚이 남아있었다.
어렵사리 빚을 갚으면서 등록금을 모으고 있는데 수술을 하면 또 빚이 생긴다.
어차피 수술하지 않는다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만일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걸로 충분하다.
강유형과 나란히 앉아 맛있는 초밥을 먹는 지금이 만족스러운데 불확실한 미래로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강유형이 안다면 어째서 네 미래를 욕심내지 않는 거냐고 화낼지도 모르지만 이게 김택승이 사는 방식이었다.
한동안 두사람은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초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강유형이 건넨 담배로 식후땡을 했다.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하늘아래 서늘한 공기 사이로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부는 바람은 시원하고 코끝을 스치는 향기는 알싸했다. 그 가운데서 김택승은 쌉쌀한 평온을 맛보았다.
*
비가 내리자 무시무시한 폭염이 찾아들었다. 바야흐르 휴가철의 시작을 알리는 무더위였다.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로 거리에선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자연히 <Blossom>에도 손님이 뜸해져 휴가 일정이 잡혔다. 그것은 화랑도 마찬가지였으나 김택승은 좋아할 수가 없었다. 가게와 화랑의 휴가가 절묘하게 어긋나는 바람에 시간이 애매하게 비었기 때문이다. 매년 휴가철이면 해변으로 가 맥주나 음료수 등을 팔면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곤 했는데 올해는 그럴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나 싶었던 김택승의 고민은 의외로 금방 해결되었다. 화랑 청소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이함은과 맞딱드렸다. 막 나가려던 참이라 꾸벅 인사를 하노라니 그녀가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올리며 산뜻하게 웃어보였다.
"퇴근하는 길이세요?"
"네."
잠시 성수기를 비켜난 휴가에 관해 성토하던 이함은은 뜨거워지는 공기를 자각한듯 서둘러 돌아가 보라고 손짓했다. 한데 한 번 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김택승이 막 몸을 돌리던 찰나 무엇인가 생각난 듯 황급히 목소리를 냈다.
"아, 맞다 택승씨. 혹시 사람 좀 소개해줄 수 있으세요?"
불쑥 튀어나온 말에 김택승은 몸을 돌리고 이함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띤 채로 용건을 설명했다.
"다름이 아니라 다음 주에 며칠 정도 운전해주실 분이 필요하거든요. 택승씨라면 괜찮은 분을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괜찮은 사람이라. 평소 대인관계가 크게 넓지 않은 김택승은 시간 되는 사람이 있을지 머리 한바퀴를 굴리다가 다음주가 <Blossom>의 휴가기간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저....."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 같은 기분에 잠시 머뭇거린 김택승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저는 안될까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이함은은 곧 반문했다.
"다른 일 하고 계신것 아니었어요?"
"그렇긴한데 다음주에는 시간이 비거든요 며칠만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어머 그래요? 택승씨가 해준다면 저희야 당연히 좋죠!"
흔쾌히 김택승의 청을 받아들인 이함은은 나와야 할 시간을 알려주면서 정장차림이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장은 없지만 그거야 빌리면 되고 휴가 기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느니 무슨 일이라도 하는게 낫다.
김택승은 이함은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장을 빌리러 강유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택승은 주변에 비슷한 치수의 정장을 가진 사람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강유형은 휴가철에도 일이나고 타박을 하긴 했지만 흔쾌히 정장과 구두를 빌려주기로 했다.
주말이 지나고 약속한 날 김택승은 정장을 가지고 화랑으로 나갔다. 평소처럼 청소를 대충 한 뒤 대충이나마 몸을 닦고 빌린 정장을 입느데 꽤나 어색했다.
머리가 너무 짧아서 그런지 영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화장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다가 인기척을 듣고 밖으로 나간 김택승은 막 화랑에 당도한 이함은을 보았다. 그녀는 정장을 입은 김택승을 보고 진심이 묻어나는 칭찬을 해줬다.
"옷이 날개라더니 근사하네요."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김택승은 이함은이 묻는 말에 옷깃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넥타이는요?"
"아...."
미처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하고 강유형에게 말하는 걸 깜빡했다. 여름이라서 반드시 넥타이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함은의 반응을 보니 아닌가 보다.
어떡하나 싶어 뒤통수를 긁적거리던 중 마침 현관에서 하선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볍게 발을 털고 화랑 안으로 들어온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리고 있었다. 평소 늘어트리고 다니던 머리칼도 깔끔하게 걷어 올려 훨씬 사람다운 느낌이었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좋아 보여서 김택승은 괜히 소맷부리를 만지작 거렸다.
같은 정장을 입어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구나 싶었다.
무심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들어오던 하선연은 김택승을 보고 멈칫했다. 영문 모를 놀라움이 갈색 눈동자를 스쳐 김택승은 이함은이 그에게 아무 언질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이미 말을 했는지 이함은은 짧게 덧붙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운전은 김택승씨가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더라면 놀랄 이유도 없을텐데 하선연은 의외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정장을 입은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봤다.
덕분에 김택승은 당장 정장을 벗고 티셔츠로 갈아입고 싶어졌다. 저렇게 쳐다볼 만큼 안어울리나 싶었던 것이다.
김택승을 민망하게 만든 시선은 곧 목덜미에서 멈춰섰다. 그리고는 옅은 의문을 드러냈다.
"넥타이는?"
....역시 맸어야 하나보다. 하선연이 툭하니 뱉은 질문에 김택승은 계면쩍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게 빌린단 걸 깜빡했습니다."
"빌리는 걸 깜빡했다고요?"
마치 넥타이 빌린다는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선연은 반문을 했다. 그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가 넥타이 하나 없는게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흠, 하고 턱을 쓰다듬은 그는 곧 차 키를 던지고 몸을 돌리면서 내뱉었다.
"어쩔 수 없죠. 일단 시간이 없으니 출발합시다."
김택승은 키를 받아들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따라갔다. 이함은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넨 뒤 정원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자 웬 벤츠가 한대 서 있었다.
실수해서 긁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났다. 그래서 주저하고 있노라니 뒷자리에 올라탄 하선연이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물어왔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김택승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일단 앉고 보니 촉감 좋은 시트가 너무 편안해서 일하는 기분이 안들 지경이었다. 곧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자 하선연이 목적지를 밝혔다.
"백화점부터 갑시다."
짤막한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택승은 인근의 백화점으로 차를 몰았다.
잠시후, 목적지에 당도해 차에서 내린 하선연이 김택승더러 내리라고 손짓을 했다.
운전사답게 차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던 그는 어리둥절해졌으나 시킬 일이 있나 보다 싶어서 하선연을 따라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하선연이 서슴없이 걸어 남성복 매장으로 가 넥타이 코너를 찾는걸 보고 뒤늦게 백화점에 들르자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김택승의 넥타이를 사기 위해 온거였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엷은 광택이 흐르는 연회색 넥타이를 집어 건네는데 싫다 할 수도 없고 좋다 할 수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넥타이를 빌릴 걸 잘못했다. 선뜻 받아들지 못하는 김택승을 보고 하선연이 그럴리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마음에 안 듭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군말할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에 김택승은 잠자코 넥타이를 받아들었다. 곧이어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매는데 내심 식은땀이 흘렀다. 젊은 남자 둘이와서 쇼핑하는게 신기해서 그런지, 아니면 하선연이 워낙 눈에 띄는 편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전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넥타이를 매본 적이 별로 없어 그렇게 시선을 받으니까 자꾸만 손이 꼬였다.
그걸 보다 못한 직원이 결국 "제가 매 드릴께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잠시후, 넥타이를 맨 김택승이 하선연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신중하게 그를 살피던 하선연은 뭐가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다.
짧게 혀를 차고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그 손을 피해 뒷걸음질 치다 그만 넥타이를 붙잡히고 말았다. 주차장에서 손목을 잡아당기던 그때처럼 넥타이를 확 잡아챈 하선연이 그것을 도로 풀면서 뇌까렸다.
"왜 도망갑니까."
김택승은 어렵사리 "도망간적 없습니다" 라고 대꾸했다. 그 말에 하선연이 어련하겠냐는 듯 조금 웃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와서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날렵하게 손이 움직이는 와중 어쩐지 긴장이 되어 뒷덜미가 욱신거렸다. 지끈거리는 느낌을 달래려고 김택승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자 넥타이를 다 매고 손을 떼던 하선연이 김택승의 턱을 살짝 건드렸다.
순간 놀라서 진짜로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시큰거리는 아픔으로 미간을 찌푸려 드는 가운데 하선연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입술...."
"네?"
김택승의 반문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왜인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응시하는 눈빛이 낯설었다. 그러다 금방 고개를 젓고는 넥타이와 같은 색깔의 행거치프를 집어 앞 포켓에 찔러 넣었다. 일순 가슴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이 선연했다.
어깨를 움찔 땐 김택승은 손을 치운 하선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걸 얼빠진 얼굴로 쳐다봤다.
"이제 됐군요. 그만 갑시다."
김택승은 계산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하선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따라오는 기척이 없음을 깨닫고 얼핏 뒤를 돌아보는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그의 손가락이 들어왔던 가슴팍을 괜히 한번 문질렀다. 이상하지만 그 손가락이 가슴 속의 뭔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김택승은 내심 고개를 젖고 그의 뒤를 따랐다.
*
벤츠에 탄 하선연은 인천공항으로 가자고 말을 했다. 김택승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한데 얼마 가지 않아 목적지가 바뀌었다.
도중에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은 하선연의 표정이 안 좋아졌던 것이다. 몇 마디 대꾸를 하고 통화를 끊은 그는 김택승에게 말했다.
"차 돌려야겠습니다. 오기로 했던 분이 건강문제로 경유지에 내리셨다는군요. 저라도 둘러봐야 할 것 같으니까 바로 파주로 갑시다."
원래는 공항에서 고객을 픽업해 파주로 갈 생각이었나보다. 그런데 일이 틀어져 공항에 들르지 않고 바로 파주로 가자니 머릿속에서 경로가 엉켰다.
일단은 고속도로에서 내리려고 빠져나가는 길을 찾았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파주까지 가는게 문제였다. 다시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려니 길이 엄청나게 막혔던 것이다. 피서 인파로 입구부터 밀리기 시작해 섣불리 고속도로로 나갔다간 갇히게 될 가능성이 컸다. 결국 국도를 이용하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모르는 길이라 걱정이 됐지만 내비게이션이 있으니까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생각이 섣부른 판단임을 깨달았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던 중 길이 뚝 끊어져 멈춰야 했던 것이다.
토사가 무너져 지나가지 못하도록 도로를 막아둔 상태였다. 김택승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그래요?"
별수 없이 차를 돌리며 김택승은 다른 길을 찾아보려 했으나 네비게이션에는 뜨지 않았다. 오히려 올바른 경로가 아니라는 메시지만 나와서 그냥 꺼버리고 고속도로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선연이 문득 도로 위 표지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표시가 되어 있네요. 고속도로까지 가지말고 이쪽으로 가는게 좋겠습니다."
내비게이션에는 없는 길이라 좀 불안했지만 고속도로에서 마냥 서 있긴 싫었다. 그래서 하선연의 말을 따라 표지판을 읽으며 차를 몰았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나타나는 표지판이 꽤 정확한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도로가 점점 좁아지더니 나중엔 밭과 산만 보이는 시골 길을 달리게 됐다.
표지판조차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아서 절로 근심스러워졌다. 그러다 마침내 표지판이 나타났다. 문제는 그 표지판에 파주가 없다는 거였다.
인근의 지명만 나와있고 어느쪽이 파주인지 알수가 없었다. 결국 잠시 차를 세우고 어느쪽으로 가야할지 고민했다.
그때 하선연이 옆에서 말했다.
"오른쪽 아닙니까?"
표지판을 가만히 바라보던 김택승은 곧 고개를 저었다.
"직진해야 할 것 같은데요."
파주와 함께 표기되어 있던 지명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선연이 웃으면서 아니라고 우회전하라고 말했다. 어지간하면 고용주 말을 따르고 싶지만 여태껏 줄곧 표지판을 봐온게 김택승이었기 때문에 그는 직진일 거라고 다시 한번 말을 했다. 그러나 하선연은 웃는 얼굴을 무너트리지 않은 채로 계속 오른쪽이라고 주장했다.
답답해서 김택승이 "여태 운전한 건 접니다" 라고 하니 하선연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럼 바꾸죠. 이제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고집도 참 세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절대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설득하길 포기하고 운전대를 내주었다. 그러자 운전석에 올라탄 하선연이 밸트를 매면서 한소리를 했다.
"참 고집이 세네요."
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김택승은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맘편히 시트에 기대 앉았다.
하선연은 빨리 길을 잃은 상태에서 벗어나고픈지 좁은 길을 다소 속도를 내 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표지판이 나왔고 그걸 보고도 김택승은 별말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한 하선연이 곧 싱그레 웃으며 "차 돌려야겠네요"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파주는 아까 그 길에서 직진이었다.
어쨌거나 돌아가야 할 텐데 외길이라서 차를 돌릴 데가 마땅찮았다. 도로 옆이 다 고랑이라 자칫하면 바퀴가 빠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한참동안 차 돌릴 곳을 찾던 중 고랑이 솟은 자리가 보였다. 저기서 차를 돌리면 되겠다는 김택승의 말에 하선연이 미간을 좁히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돌려볼 테니까 밖에서 좀 봐주세요."
김택승은 알겠다고 차에서 내려 후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앞으로 뺐다가 뒤로 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차가 쉽게 돌려지지 않았다 결국 하선연이 남은 공간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는지 운전석에서 내려 뒤로 왔다.
손바닥 두개정도 남는 공간을 보고 "뒤로 좀 더 빼도 괜찮지 않을까요" 라고 묻는데 선뜻 답하기가 어려웠다. 고랑을 매운 땅이 물러서 장담할 수가 없었다.
성인 남자 두명이 올라서 있는건 괜찮아도 차는 모르겠다. 그것을 말하려 입을 연 순간 갑자기 발이 아래로 쑥 꺼졌다.
"어."
휘청한 김택승은 엉겹결에 옆에 있던 하선연을 붙들었다. 덕분에 하선연도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발밑의 흙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균형을 잃었다. 발밑의 흙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로 넘어갔다. 동시에 차도 같이 뒤로 미끄러지면서 푹 내려앉았다.
흙더미와 함께 구르다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높이가 야트막하고 밭의 흙이 부드럽게 젖어 있어 딱히 다친곳은 없었다.
문제가 바퀴가 빠져버린 벤츠였다.
딱 보기에도 쉽사리 꺼내기가 어려워보였다. 어떡하지 고민하는 가운데 옆에서 하선연이 끙 하는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흙을 뒤집어 써서 꼴이 엉망이었다.
흙투성이인건 김택승도 마찬가지였다.
"좀더 안전한 자리에서 돌릴 걸 그랬나봅니다."
여기서 차를 돌리자고 한게 자신이라 김택승은 몸을 일으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하선연이 재킷을 벗으면서 대꾸했다.
"됐으니까 차나 좀 들어봅시다."
두 사람은 재킷을 벗어 놓고 차를 밀어 올리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들어도 보고 밀어도 보고 용도 써봤다가 악도 써봤다. 그러다 결국엔 안돼서 기운만 실컷 빼고 출동서비스를 불렀다. 진즉 부를 걸 그랬다고 한숨을 쉰 하선연은 힘든지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항상 말쑥하던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까 새삼스러웠다.
지친 듯 표정이 엶어진 얼굴에 묽은 노을빛이 드리웠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하고 김택승은 그의 곁에 주저 앉았다.
바람이 불자 하선연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냄새가 풍겼다. 달착지근한 향기가 아닌 땀과 흙냄새였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멍하게 넋을 놓고 있는데 하선연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담배 있습니까?"
"아뇨.... 담배 피우십니까?"
그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은 적도 없고 워낙 깔끔한 사람이라 분명히 비흡연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금연했습니다."
끊었다면서 담배를 찾는걸 보면 힘들어서 한대 피우고 싶은가보다. 목적은 이루지도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고생만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째 함께 있을때 늘 사고가 생기는것 같아서 김택승은 하선연을 힐끗 쳐다봤다. 그의 턱엔 김택승이 때려서 생긴 멍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그래도 희미하게 누르스름한 자국이 있었다.
담배가 그리운지 긴 숨을 토해낸 하선연은 한동안 부스럭거리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김택승에게 내밀었다.
"먹을래요?"
그건 막대사탕이었다. 정장 주머니에 이런게 들어있다니 정말 안 어울렸다. 그래서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사탕을 툭 던지며 내뱉었다.
"어쩌다 보니 입에 붙어서 담배 대신 먹는 겁니다."
어떡하면 딸기맛 사탕이 입에 붙을 수가 있나 의문하면서 김택승은 잠자코 하선연을 따라 포장지를 까고 사탕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과 함께 딸기향이 입안에 번져갔다. 달착지근한 향이 익숙해서 그제야 그에게서 나던 냄새가 뭔지 알 것 같았다. 평소 쓰는 삼푸나 코롱에서 사탕의 단내가 더해져 그런 냄새가 나는 거였다.
아마도 금연 때문에 사탕을 입에 달고 사나보다. 은근히 보이는 것과 다른 데가 많은 사람이다.
예전부터 그랬지 하고 김택승은 사탕을 와작와작 깨물어 먹었다. 그러다 뭔가 찝찔한 맛이 입안에 스미어 무심코 입맛을 다셨다. 그때 문득 시선을 준 하선연이 지적했다.
"입술."
입술? 그 말에 엄지로 입술을 훑어본 김택승은 붉은기가 묻어나는걸 보았다. 사탕을 먹다가 그만 터 있던 입술이 찢어진 모양이다. 입술 씹는 버릇때문에 김택승의 입술은 여름에도 곧잘 부르텨 있었다. 툭하면 피가 나서 얼룩덜룩 딱지가 남아있곤 했다. 그래서 덤덤하게 입술을 빠는데 하선연이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 손을 뻗었다.
"그럼 거기가...."
말문을 흐리며 닿아온 손끝에 김택승은 굳어버렸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손가락이 얇고 거친 살갗을 훑었다. 응시하는 시선이 이상하고 입술을 만지는 촉감이 낯 뜨거워 어쩐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냥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 느낌을 삭이려 입술을 핥는 순간, 혀에 그곳을 만지던 손가락이 닿았다.
희한하게도 짜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사탕을 먹고 있어서 그런지 매우 달았다. 놀라서 입을 꾹 다문 김택승은 너울거리는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거기 머금은 빛 때문일까.
그가 턱을 끌어당겼을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정작 입술이 닿은 순간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저 입술을 핥아 여는 움직임이 신중하다고 느꼈다. 그래선지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포개진 혀에선 짙은 딸기맛이 났다. 작은 사탕 조각이 아직도 그 입안에 남아있었다. 맛을 공유하듯 혀를 문지르며 하선연은 한참 동안 사탕을 녹였다. 그 사탕처럼 머리 한구석이 녹는 기분이었다.
옅은 맛을 남기고 사탕이 사라져버리자 그는 김택승의 턱을 놓고 물러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듯 웃는 얼굴이었다.
노을에 그 미소가 은은히 빛나서 어쩐지 꿈이라도 꾼 것 처럼 멍했다. 하지만 아직도 혀에 딸기맛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그 맛이 희미해져가는 것을 느끼며 김택승은 나지막이 물었다.
"왜 키스한 겁니까."
그러자 하선연이 이유가 필요하냐는듯 눈을 지그시 뗐다. 그래도 김택승은 정면으로 그를 마주 본 채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고 하선연은 이윽고 입을 열어 짧게 말했다.
"그냥요."
김택승은 허탈해서 어깨를 약간 늘어트렸다. 여운이 가셔버린 얼굴로 어이없어하는 그에게 하선연은 친절히 덧붙였다.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이 이상 뭐가 있느냐는 듯 태연한 모습이라 더 물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하고 싶어서 했겠지 그보다 정확한 대답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 마침 서비스차량이 도착한 걸 보고 하선연이 반가운 표정을 했다.
"아, 왔군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김택승은 좁은 길을 달려오는 서비스차량을 볼 수 있었다. 당도한 직원이 신속하게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다. 크레인을 걸어 벤츠를 끌어내고 고장 난 곳이 없는지 점검을 마쳤다 그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김택승과 하선연은 차에 올라탔다. 해도 졌고 차림도 엉망이라 이대로는 파주까지 갈 수 없었다.
결국 서울에 돌아가기로 하고 김택승은 찾아드는 어스름을 가로질러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노오란 가로등이 끝 없이 늘어선 길 너머로 조금씩 어둠이 깊어지자 덩달아 생각도 깊어졌다. 그렇지만 그리 많은 생각을 하고 있진 않았다. 단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되감는 것처럼 아까 있었던 일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하선연과의 입맞춤이.....
싫지 않았던 것이다.
두번째라서 그런가 불쾌하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물크러질 정도로 말랑한 입술이라든지 딸기맛이 나는 혀라든지 입천장을 핥아 올렸을 때 끼친 간지러움이라든지 그런게 자꾸 생각났다. 덕분에 옆에 앉은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무심코 입 맞춘 곳을 확인하게 될게 뻔했기 때문이다.
김택승은 키스한 입술을 확인해 보고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불야성의 도시로 차를 달렸다.
*
화랑에 도착한 것은 밤이 깊은 후였다. 벤츠를 주차하고 시동을 끄자 일시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눈을 감은 채로 시트에 푹 파묻혀 있던 하선연은 피곤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따라 내린 김택승은 그를 보고 속으로 조금 웃었다 하선연의 꼴이 그야말로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후줄근해진 옷차림은 둘째 치고 시트에 눌려 있던 뒷머리가 온통 곤두서 있었다. 마치 공사판에서 막 퇴근한 사람 같았다.
오늘 여러가지로 새로운 모습을 보는구나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이만 돌아가려고 키를 내밀었다. 그런데 하선연이 키를 받는 대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종일 식사도 못했군요."
그 말을 들으니 새삼스레 강한 허기가 느껴졌다. 거의 온종일 굶다시피 해서 위장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하선연도 적잖이 배가 고픈지 주먹으로 명치를 지그시 누르면서 말을 이었다.
"속이 다 쓰릴 지경이네요. 김택승 씨는 괜찮습니까?"
"네. 돌아가서 먹으면 됩니다."
"집까지 또 한참 가야 하는거 아닙니까?"
"한참까지는 아닙니다."
"그래도 배 고플 텐데."
그러면 얼른 돌려보내 주는게 답이다. 그래야 돌아가서 씻고 밥도 먹고 할텐데 이상하게도 말이 길었다. 뭔가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는건가 기다리던 김택승은 어쩐지 그가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혹, 저녁 같이....."
하선연은 가볍게 머리를 젖고 대꾸했다.
"전 상관없습니다만 김택승씨가 배고프실 것 같아서요."
같이 먹고 싶다는건지 아니란 건지 여전히 애매해 김택승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반문했다.
"그러니까 같이 먹자는 거죠?"
의도를 확실히 하려는 질문에 하선연이 어떻게 해도 괜찮다는듯 말했다.
" 정 그러고 싶으시다면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요지는 저녁을 먹고 가라는 소리같았다. 그냥 '저녁 먹고 가세요' 라던가 '혼자먹기 그런데 같이 저녁 드실래요?' 라고 말하면 될 걸 왜 저렇게 애두르는 것일까. 설마 아까 일 때문에 먼저 권하기가 그랬나.
어쨌든 김택승 역시 배가 고프기도 하고 어렵게 말하는 권유를 거절하기도 그래서 같이 먹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그와 함께 화랑으로 들어가 3층으로 올라갔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하선연은 현관에서부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더러워진 상태라 그대로 들어갈 순 없는 모양이다.
덕분에 김택승도 그자리에서 옷을 벗는 수밖에 없었다. 옷을 다 벗자 속옷 차림이 된 하선연이 자연스레 욕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제가 샤워부스를 쓰겠습니다. 김택승씨는 욕조에서 씻으세요."
솔직히 말해서 같은 공간에서 벌거벗고 씻기가 적잖이 민망했다. 아까 일만 아니었어도 아무 생각 없었을 텐데 이제는 의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앞에서 티를 낼 수도 없고 김택승은 덤덤한 척 욕실로 따라갔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샤워부스가 반투명해서 생각만치 민망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택승은 그가 샤워부스에서 나오기 전에 먼저 나가려고 비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충 문질러 씻었다. 샤워기 밑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서둘러 거품을 헹군 뒤 제대로 닦지도 않은채 밖으로 튀어 나갔다. 너무 빨리 나왔는지 하선연은 한참 동안 나오질 않았다. 진짜로 배가 고파 속이 쓰려 올 때쯤에야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나타나 김택승을 의아한 듯 위아래로 훑어봤다.
"굉장히 빨리 씻으시네요."
제대로 씻고 나온 게 맞느냐는 눈치였지만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제야 미심쩍은 눈길을 돌린 하선연이 방으로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씼었더니 더 배고프네요."
그런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김택승은 그가 살짝 웃으면서 덧붙이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제 입맛은 까다롭지 않으니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렇게 하선연이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홀로 남겨진 김택승은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아무거나 괜찮다는 말은 아무래도 김택승더러 저녁을 준비하란 소리 같았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한 것도 그이고 집주인도 그인데 알아서 하라니까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굳이 입맛 이야기를 덧붙이는게 더 부담스러웠다.
보통은 직접 요리하는 사람보고 하는 말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어차피 시간이 늦어서 배달이 마땅찮은데다 피곤해서 뭔가를 사 먹으러 나가기가 어려웠다. 덕분에 김택승은 짙은 의구심을 느꼈다.
애당초 요리를 시키려고 저녁을 먹고 가라 한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어쨌든 대충이나마 먹을 것을 찾아보려고 냉장고를 열었던 김택승은 심중을 굳혔다. 냉장고는 그야말로 텅텅 비어 있어 먹을 거라곤 얼음 띄운 냉수뿐이었다.
뭔가를 먹으면 누군가 노력을 해야 했다. 이제와서 혼자 알아서 드시라고 돌아가 버릴 수도 없고 편의점에라도 갔다와야 하나 궁리하던 김택승은 혹시 모르니 화랑에서 뭐라도 찾아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탕비실을 뒤졌다.
고맙게도 천장 구석에 언제부터 있엇을지 모를 라면 두 봉지가 남아 있었다. 라면은 김택승에게 늘 고마운 존재였다. 이거면 되겠지 하고 김택승은 위층으로 올라가 냄비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은 뒤 면과 스프를 넣고 정확하게 3분 40초 허기가 져서 그 어느 때보다 라면이 맛있게 보였다.
곧 가스불을 끄고 식탁에 냄비를 올린 김택승은 수저를 챙기면서 하선연을 불렀다.
곧 머리를 말리고 옷을 차려입은 그가 주방에 나타났다. 그런데 식탁에 준비된 식사를 보고 "음..." 하고 애매한 소리를 흘렸다.
"라면이네요."
뻔한 사실을 말하는 어조가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 않아서 김택승은 설마 라면을 싫어하나 하고 생각했다. 세상에 라면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어왔는데 아니었나보다.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지 모르고 서 있노라니 하선연이 스르륵 식탁에 앉아 젖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선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라면 먹는건 굉장히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라는 걸 보면 역시나 즐겨 먹는 편은 아닌 모양이다. 그 짐작이 맞은 듯 맛있어 보인다고 말했지만 선뜻 라면에 손을 대진 않았다.
칭찬하면서 그러니까 어째 더 머쓱했다. 진짜로 빈말이라는게 느껴진 탓이다. 애써 끓인 라면이 무색해서 조금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김택승은 그의 몫까지 먹어 치우기 위해 묵묵히 젖가락질을 했다. 그러다 물이 없는 것을 보고 물병을 가질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물을 가지고 돌아와 냄비에 젓가락을 집어넣자 뭔가가 허전했다. 잡히는게 없었던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안을 들어다본 김택승은 순간 놀랐다. 무슨 영문인지 어느새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얼마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어찌 된 일일까.
의아해서 맞은편을 쳐다본 김택승은 입을 반쯤 벌렸다. 눈에 보이는 광경이 아까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후- 후-"
입김으로 면발을 대충 식힌 하선연이 뜨겁지도 않은지 빠른 속도로 라면을 먹고 있었다.
몇 번 씹기가 무섭게 삼키고 뜨겁지도 않은지 빠른 속도로 라면을 먹고 있었다. 이어 젓가락으로 냄비바닥에 남은 면발을 싹싹 긁어 삼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영 안 내키는 모습이더니만 물 가지러 간 사이 누가 라면에 뭐라도 넣고 갔나 싶었다.
열심히 먹은 하선연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던 김택승은 뒤늦게 자신도 먹던 중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젓가락을 들었으나 젓가락질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냄비바닥을 휘젖던 하선연이 그것을 아예 통째로 들어 올린 것이다. 그러다 뒤늦게 같이 먹는 사람을 떠올린 듯 김택승을 한번 힐끔 쳐다봤다. 김택승은 거의 반사적으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전 다먹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말에 하선연이 냉큼 냄비를 들고 국물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넘어가는 목젖이 호쾌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무슨 라면 선전처럼 텅 빈 냄비를 내려놓으며 "하―" 하고 한숨을 내뱉은 하선연이 돌연 시침을 뚝 땠다.
언제 그랬냐는 표정으로 빈 냄비를 김택승 쪽으로 살그머니 밀어놓고 손을 뻗어 티슈로 점잖게 입가를 닦았다. 뒤어어 물을 한모금 마시면서 뻔한 소릴 했다.
"잘 먹었습니다."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우던 것치고는 무난한 인사였다. 그렇지만 먹는 모습자체가 그 어떤 말보다 맛있었단 뜻이기도 했다. 그게 은근히 뿌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텅 빈 냄비를 보노라니 괜히 흐뭇해져 살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미소를 띤 채로 식탁을 치우는 김택승의 모습을 보고 하선연의 눈썹이 흐려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한 기색이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서 설거지를 시작하는 김택승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편 김택승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라면을 찾아서 끓이고 하다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졌다. 막차시간이 아슬아슬해 서돌러야 했지만 일단 시작한 설거지는 마저 해놓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가게에서 늘 설거지 담당이라 저도 모르게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냄비를 닦고 있었던 것이다.
얼른 끝내고 차가 끊기기 전에 돌아가려 빠르게 손을 놀리던 김택승은 순간 아차 싶었다. 너무 서두른 나머지 거품 묻은 접시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사기그릇이 산산조각 았다. "앗" 하는 소리를 내뱉은 김택승은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된게 하선연만 옆에 있으면 사고를 치는 것 같다. 깨진 조각을 치우려고 쪼그리자 도와주려는 것 처럼 굽히는 무릎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하겠습....."
위험하다는 생각에 만류하려고 고개를 든 김택승은 덩달아 고개를 든 하선연을 보고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싱크대에 쿵, 하고 등을 부딪혔다.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선연이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식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자 잠시간 잊고 있었던 입맞춤이
상기됐다. 차 안에서 눈길을 피한 보람도 없이 그의 입술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남자 입술이 뭐가 저리 예쁜지 모르겠다. 상황도 잊은 채 넋을 놓은 것을 깨닫고 김택승은 정신을 차리려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하선연이 피식 웃는 웃음을 흘리고 툭 하니 내뱉었다.
"제가 그렇게 좋습니까?"
김택승은 주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라고?'
너무 직설적이라서 순간 농담인가 했다. 그렇지만 입가의 미소와는 달리 눈빛에는 진심이 엿보였다. 저녁 먹자는 소리는 어렵게 하더니, 어렵게 할 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의 오해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김택승은 기름에 불붙듯 얼굴을 붉혔다. 아까의 키스도 그렇고, 줄곧 그것을 의식하고 있던 행동도 그렇고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던 것이다.
"아니..... 아닙니다."
어렵사리 목소리를 쥐어짜 낸 말에 하선연은 대꾸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붙잡고 일어나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얼이 빠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엉겹결에 그 손을 붙잡자 그가 팔을 확 잡아 당겼다.
"!"
그대로 그의 가슴에 넘어진 김택승은 거기에 코를 박았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찌 된게 물러설 때보다 더 그와 거리가 가까웠다. 코에서 반 마디. 입술에서 한 마디. 내쉬는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덕분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누가 심장을 압박하는 것처럼 가슴이 미친듯이 뛰었다. 속눈썹의 개수라도 셀만치 바싹 다가든 채로 그는 눈꺼풀을 내리깔고 있었다. 무엇을 보는지 자명했다. 까칠한 입술을 보고 있었다. 김택승은 본능적으로 예감했다. 이번에 키스하면 키스만으로는 끝나지 않을테다......
길고도 짧은 정적 속에 침묵 아닌 침묵이 입술과 입술 사이에 흘렀다.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김택승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눈꺼풀을 들어올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까맸다. 투명하게 연하던 눈동자가 제 색을 잃었다. 그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그가 어깨를 움직이려던 찰나.
따라랑 다라랑 라라랑 ♬
어디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동작을 멈췄지만 전화를 받으러 가진 않았다. 벨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듯 지그시 김택승을 쳐다보기만 했다. 마른 침을 삼키던 김택승은 이윽고 벨소리가 멈추자 귀가 먹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벨소리가 끊어지기 무섭게 다시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멜로디로 이루어진 벨소리와는 달리 인정사정 없이 시끄러운 소리였다. 결국 하선연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잠깐만요."
그가 몸을 돌리면서 한숨 같은 걸 내쉬는 것도 같았으나 정확하진 않았다.
그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긴장에 어깨를 늘어트릴 뿐이었다.
나지막하게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택승은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바닥에는 깨진 사기 접시가 나뒹굴고 있어 일단 이것부터 치워야 할 것 같았다.
키친타월로 사기조각을 싸 버리고 설거지를 마치고 났을 땐 기분이 싱숭생숭 했다. 가슴이 이상하게 선덕거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안의 무언가가 거침없이 변하는 느낌이라 그게 뭔지 숙고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곤란함이 밀려들었다. 이제 막 막차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김택승의 주머니에는 언제나처럼 택시비 정도의 돈은 없었다. 어떡하나 망설이고 있노라니 예전에 하선연이 차비가 없으면 말하라고 했던게 생각났다. 화랑을 여관으로 쓰기보다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식으로 말했던거 같은데 참, 제 입으로 택시비를 달라고 말하기가 뭐했다. 어떡할까 고민하는 사이 하선연이 통화를 마치고 큰 걸음으로 돌아왔다.
"깨진 그릇은 치웠습니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실수한거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사실 김택승은 그릇 깬 일을 그리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아까의 일로 심란한데다 어떻게 택시비 이야기를 꺼낼까 하는 고민때문이었다. 아무리 말하라고 했지만 너무 뻔뻔스런 부탁이 아닌가 싶어 괜스레 챙피해졌다. 그래서 답지 않게 쭈뻣거리노라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선연이 은은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떠보는 것 같은 어조로 슬쩍 물었다.
"제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네?"
정곡을 찔린 기분에 김택승은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하선연이 평소보다 친절하게 말했다.
"그럴 거 같아서요."
혹 차가 끊겨서 택시비를 달라고 하려는 걸 눈치챘나 싶어 김택승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저....."
"말씀하세요."
부드럽게 부추기는 말투가 무슨 말이든지 들어줄 듯했다. 엷게 미소 띤 얼굴도 어딘가 너그러웠다. 덕분에 용기를 얻은 김택승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했다.
"택시비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일순 공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하선연의 미소엔 변화가 없었으나 무언가 김이 센 것처럼 약간 어깨가 내려갔다. 김택승은 그제야 그가 제 사정을 짐작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가용도 있고 운전도 잘 안하는 사람이 대중교통 막차 시간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럼 무엇을 짐작하고 말해보라 부추겼던 걸까? 그 의문의
해답을 찾기도 전에 하선연이 말을 이었다.
"할 말은 그거뿐입니까?"
그렇게 되묻는 모습이 마치 그를 실망시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달리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하선연이 허탈한 듯 조금 웃었다. 다소 어이없어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차마 더는 택시비 타령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지하철이 운행하는 데까지만 이라도 타고 간 뒤 강유형이나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겠다. 안 되면 걷는 수도 있고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김택승은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선연은 팔짱을 끼고 선 채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다 멈칫했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가볍게 문을 당겨 문을 열다 멈칫했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가볍게 문을 밀어 닫았던 것이다.
철커덕, 문이 닫혀 뒤를 돌아보자 머리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김택승은 허공에 든 손을 가볍게 주먹 쥐었다. 내려앉은 듯 닿아온 입술이 간지러웠다. 딱히 간지러울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잠시후, 다시 눈을 뜬 김택승은 그가 간단한 방법을 두고 왜 굳이 돌아가려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는 걸 들었다.
"자고 가세요."
물론 잠만 자고 가라는 소리는 아닐 테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하선연이 주먹 쥔 손을 살짝 끌어당겼다. 그대로 끌려 가슴이 아주 닿자 몇 겹의 천너머로 심장박동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맥박이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끼며 김택승은 다시금 가까워진 입술을 삼켰다. 혀가 섞이고 맛이 어우려지고 향이 피어오른다.
치열을 훑으며 혀를 감아올리는 움직임이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그러다 혀끝을 살짝 깨물려 등줄기를 떨었다. 말초신경이 저릿하면서 귓전의 솜털이 오싹오싹 곤두섰다. 이게 아픈건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하선연이 키스를 아 잘한다는 사실이었다.
혼이 빠진 듯 휘청이는 김택승의 허리를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손이 바싹 끌어갔다. 문에서 떨어져 그에게 몸을 기대게 된 김택승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키스가 짙어지고 호흡이 느려질수록 산소가 부족한지 눈앞이 가물거리면서 어지러웠다. 다리에 도무지 힘이 안 들어가고 자꾸만 오금이 저렸다.
결국 무릎이 꺾이자 입술이 떨어졌다. 김택승은 부축하는 팔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젖은 입술을 핥으면서 호흡을 고르길 기다리고 있던 하선연에게 물었다.
".....이것도 그냥 하고 싶어서?"
그는 대답대신 약간 웃었다. 소리없이 보조개만 패는 웃음이었다. 예전에 소리없이 웃는 사람은 믿지 말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들 말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웃는 걸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제 질문이 쓸데없이 느꼈졌던 것이다. 그냥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은 김택승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괜히 기분이 이상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충동적이든, 뭐든 서로 키스하고 의식한 이상 아무 느낌 없이 태연할 순 없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따지거나 괜한 자존심을 세워 그것을 거부하기엔 김택승은 너무 솔직했다. 결국엔 그래 왔듯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다.
김택승이 팔을 들어 그의 어깨에 두르자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진 하선연이 허리를 옥죄왔다. 등을 바짝 끌어안고 가슴을 밀착한 채 혀를 뭉겼다. 덕분에 맞붙은 배 아래로 부대끼는 성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얄팍한 바지 사이로 들어온 그의 허벅지가 고간을 거세게 밀어 붙였다. 그 바람에 성기가 지끈거려 바지를 적시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하선연은 바지를 벗기는 대신 허리 께에서 김택승의 티셔츠를 붙잡아 끌어올렸다.
티셔츠가 벗겨지고 훤히 드러난 맨살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옮긴 그가 목을 핥고 턱을 빨아왔다. 그 입술이 뜨거워 낮은 한숨을 흘리는데 갈비뼈를 타고 거꾸로 올라오던 손이 유두를 건드렸다. 덕분에 깜짝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이상한 소리를 낼 뻔했다. 평소 의식하지 않던 곳이 오늘따라 지극히 예민해져 있었다.
여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굉장히 창피했다. 김택승은 나오려는 신음을 억눌렀으나 반응까지 숨길수는 없었다. 느릿하게 유두를 둥글리고 짓누르는 하선연이 그 반응을 즐기는게 느껴져 더 그랬다.
"저기, 이제..... 그만....."
그만 하라고 말하려던 김택승은 하선연이 귓전에 흘린 소리에 혀를 깨물었다.
"이제 그만 여기....만져달란 소립니까?"
아래로 내려온 손이 엉덩이를 주무르다가 다리 사이로 파고 들었다. 왜 앞도 아니고 뒤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위기감이 들면서 기분이 야릇해졌다. 긴 손가락이 회음부를 문지르고 엉덩이 사이로 빠져나가자 허리가 떨렸다.
"벨트 좀 풀어보세요."
나지막이 속삭인 그는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웃었다. 그 미소에 심장이 덜커덩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심장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김택승은 멍하게
그 얼굴을 응시했다. 설령 더한 짓을 시킨대도 거절하지 못할 만큼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드는 미소였다. 덕분에 불안감마저 엄습해 자신이 이렇게나 외모에 약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손은 어느새 그의 말에 따라 벨트를 풀고 있었다.
벨트가 잘그럭거리고 앞섶이 열리자 품평하듯 밑으로 시선을 내린 하선연이 "흐음" 하고 모호한 소감을 흘렸다. 그리고는 천 너머로 달군 칼처럼 뜨겁고 단단하게 느껴지는 성기를 밀어붙이며 속삭였다.
"침대로 갈래요?"
김택승은 자신의 대답이 의미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네" 라고 말하는 대신 허리에 걸쳐져 있던 바지를 마저 벗어 내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
맴맴맴맴 치이이이익― 맴맴맴맴 치르르르르―
멀리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했다. 공기가 이렇게 서늘한데 매미 우는 소리라니. 드러난 어깨마저 차가워 계절감이 사라졌다. 어쩐지 춥다고 생각하면서 이불을 찾아 끌어 덮던 중, 어디서 익숙한 소음이 들렸다. 굿모닝하지 않은 벨소리. 바로 김택승의 모닝콜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반사적으로 머리가 깨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노곤해 얼른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그때 뭔가 뒤척이다 빠각 , 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사방이 조용해졌다. 다시금 평화가 찾아들어 아늑한 매미 울음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그렇게 얼마를 더 잤을까.
춥다 못해 으슬으슬한 것을 느끼고 김택승은 희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옥탑방과는 달리 사방이 어둑했다. 서늘한 에어컨 공기와 함께 두꺼운 커튼이 창문을 가린게 보였다. 순간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아침을 맞이한 걸 기억해내고 김택승은 어젯밤의 일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현관에서 시작된 키스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물론 내내 키스만 한 건 아니다. 다른것도 많이 했다. 끝까지 가진 않았지만 한 게 더 많았다.
그 일들을 떠올리자 어제 못 느꼈던 부끄러움이 새삼스럽게 밀려들었다. 혼자서 뒷덜미가 후끈후끈해진 김택승은 몸을 일으키려다 멈칫했다. 허리에 팔이 둘러져 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등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하선연이 보였다. 전에도 이렇게 자더니 베게 밑으로 내려가서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안고 자는게 버릇인거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불과 한달전만 해도 그라는 사람을 깡그리 잊고 살았다. 그런데 우연하게 재회한 후로는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었다. 엘레베이터에 갇히질 않나 황당한 오해를 사질 않나. 주정에 놀라 주먹질을 하지 않나. 실수로 한침대에서 자질 않나. 결국에는 이렇게까지 됐다. 모든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 같았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로는 하루하루 살기에도 바빠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데 요즘에는 그 일상에서 한발짝 벗어난 듯했다. 비슷해 보여도 무언가가 달랐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까지 이대로 누워있을수는 없었다. 김택승은 조심스레 그의 팔을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여기저기에 벗어 놓은 옷가지며 바닥에 떨어진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엉망진창이라 누가보면 레슬링이라도 한 줄 알겠다. 김택승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잡념을 떨치고 대충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배터리가 분리된 채로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렴풋이 알람이 울리다 만게 기억났다. 아무래도 하선연이 시끄러워서 배터리를 분리해 던져버린 모양이다.
아침에 들었던 소리가 이거였나 하고 도로 배터리를 끼운 김택승은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켜지지가 않았다. 벌써 베터리가 닳은거 같지는 않고 이상했다. 아무래도 바닥에 떨어지며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워낙 오래 쓴데다 원래부터 액정 귀퉁이도 깨져 있어 무리도 아니었다. 어차피 가게도 휴가 중이고 급하게 연락올데도 없으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서비스센터에 가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챙겨둔 뒤 욕실로 간 김택승은 무심코 거울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목덜미와 쇄골 께가 온통 울긋불긋했던 것이다. 잘못하면 옷 위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몸 여기저기에 정액이 말라붙어 따끔따끔했다. 섹스나 다름없는 행위 끝에 샤워고 뭐고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잠이 든 탓이다. 특히 다리사이가 그랬다. 허벅지를 붙이게 한 하선연이 정액을 진탕 싸놓았기 때문이다. 샤워비누로 몇 번이나 몸을 문지르고 나서야 비로서 그것들이 깨끗하게 씻겨나갔다.
샤워를 마칠 때까지도 하선연은 계속 잠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라 좀 더 자도록 내버려두고 김택승은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런 뒤 시트를 모아 세탁기를 돌리고 어젯밤에 빨아둔 셔츠를 입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옷깃위로 키스마크가 보일락 말락 이다. 고개를 조금 숙이거나 하면 완전히 드러났다. 밴드라도 붙여 가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노라니 등 뒤에서 하선연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김택승을 보고 놀라는 대신 게슴츠레 하게 뜬 눈으로 "일찍 일어났네요." 라고 말했다. 그런 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온통 뒤집어진 머리를 긁적거렸다.
광고에나 나올 것처럼 산뜻한 아침인사도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한 옷차림도 없었다. 얼굴에 베게 눌린 자국만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이 좀 우스워서 내심 피식거린 김택승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덕분에 표정이 애매해진 김택승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으나 하선연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커피 한잔만 달라는 소리를 남긴 채 욕실로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집이라 화랑으로 내려가야 하나 싶었지만 용케 원두가루와 커피메이커는 있었다. 집안에 커피향기가 은은하게 감돌 무렵, 욕실을 나와 집안을 오가던 하선연이 문득 소리를 내 불렀다.
"김택승 씨."
먼저 커피를 마시고 있던 김택승은 무슨 일인가 싶어 잔을 손에 든 채로 발길을 옮겼다. 드레스룸으로 짐작되는 곳의 거울앞에 서 있던 하선연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느 쪽이 낫습니까?"
그의 손엔 넥타이 두개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둘다 검은색이라 그냥 보기에는 똑같은거 같았다. 어느 쪽이 낫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김택승은 미간을 모았다. 한참을 유심히 살핀 뒤에야 하나는 갈색이고 하나는 자주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차이가 너무 미세해 하나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모르겠다고 대꾸하자 하선연이 계속 하나만 골라보라고 답을 요구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다 자주색이 감도는 넥타이를 골랐다. 하선연이라면 그런 색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넥타이를 번갈이 목에 대보던 그는 자주색 넥타이를 내려놓고 갈색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맘대로 할 거면 뭐 하러 물어봤는지 모르겠다. 참 청개구리같다고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뜨거운 커피잔에 묻어나는 살갗을 보았다. 부르튼 입술에서 떨어진 거였다. 껍질이 일어났나 싶어서 이로 질근거리던 김택승은 문뜩 와 닿는 시선을 느꼈다. 넥타이를 메다 말고 하선연이 이쪽을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왜 보나 싶어서 김택승이 눈을 끔벅거리자 다시 눈길을 돌린 그가 넥타이를 매면서 입을 열었다.
"입술이 왜 그렇습니까."
"아....."
보기 안 좋았나 싶어서 김택승은 씹던 입술을 놓았다. 거칠거칠하게 일어나니까 자꾸만 물어뜯게 된다. 뭐라도 사서 발라야 하는데 매번 잊어버리는 바람에 입술이 울긋불긋했다. 오늘은 꼭 약국에 들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김택승을 보고 하선연은 더이상 별말 하지 않았다. 대신 넥타이를 메느라 뒤집었던 셔츠 깃을 바로 한 뒤 재킷을 입었다. 그리고 김택승이 만들어 놓은 커피를 마시며 오늘 일정을 말했다. 어제 일을 마무리하러 파주에 갔다가 서울에서 몇가지 볼일을 보면 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말하는 어조가 참으로 평이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태연한 태도도 의식한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이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라 가깝다고 느껴졌던 게 마치 착각인 듯 했다. 그러자 왜인지 커피가 유난히 쓴 것 같았다.
너무 진하게 우렸나 하고 까만 액체를 들여다보던 김택승은 문득 그가 자신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자신 같으면 거절한 상대에게 섣불리 다가가진 않을 텐데 그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만일 자신이 정말로 그를 좋아하고 있었더라면 그런 태도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는 대신 김택승은 귓등에 걸리는 매미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맴맴맴 쓰르르르― 맴맴맴맴, 치르르르르―
커피를 다 마셨는지 빈 잔을 내려놓은 하선연은 이만 출발하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택승도 서둘러 식은 커피를 마저 들이키고 나갈 채비를 했다. 두 사람은 준비를 마친 뒤 차에 올라 다시금 파주로 달렸다.
다행히도 어제처럼 길이 막히지는 않아 별다른 사고 없이 점심때쯤엔 파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틀에 걸쳐 어렵사리 온 것치고는 용건은 금방 끝났다.
트렁크에서 선물 꾸러미를 꺼내 들고 안으로 들어가 하선연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어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고는 다리에 쥐가 난 것처럼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아마도 그 고객이 오질 못해 일정이 취소되어 누구에게 사과라도 한 모양이다. 어쨌든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난 것 같아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이제 서울로 돌아갈까요?"
고개를 끄덕인 하선연이 덧붙였다.
"슬슬 점심시간이니까,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에 뭔가 먹는 게 좋겠습니다."
어제 식사 때를 놓쳐 종일 굶다시피 해서 그런지 오늘은 제때 식사를 할 모양인가 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김택승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자마자 밥부터 먹는 편이라서 아까부터 배가 고팠던 것이다. 아침에 마신 커피 한잔은 허기를 달래긴 커녕, 식욕만 자극해놓았다. 뭐 드실 거냐는 질문에 하선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제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는데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김택승씨가 먹고 싶은 걸로 먹죠."
평소라면 주저 없이 라면이라고 답했겠지만 이런 데서 라면을 끓일 수는 없고, 뭘 먹을지 고민이 됐다. 그때 마침 저만치에 선지국밥 집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선지국밥을 먹어본 지가 오래되었다. 빈속에 뜨근한 선짓국 한 그릇 먹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김택승은 대답했다.
"선지국밥 어떠세요?"
'선지'라는 대목에서 하선연이 일순 멈칫했다. 마치 선지가 뭔지 모르는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설마 안 먹어봤나 생각했는데 그가 혹시나 해서 묻는다는 식으로 말했다.
"제가 사는 것이니 신경쓰지 말고 진짜 먹고 싶은거 드셔도 됩니다."
가격에 상관없이 선짓국이 먹고 싶었던 김택승은 국밥집이 가까워지자 속도를 늦추며 대답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 그래요."
일단 수긍하고 잠시 입을 다문 하선연은 앞쪽에 선짓국밥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말 국밥 한 그릇으로 괜찮겠습니까?"
이제 하선연에게 어느정도 익숙해진 김택승은 헷갈리는 법 없이 바로 요점을 찍어 물었다.
"혹시 선지 못 드십니까?"
하선연은 웃으면서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뇨, 그런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맛있는거 드시라구요."
못 먹지는 않아도 좋아하진 않는구나. 하선연의 대꾸에 그것을 짐작한 김택승은 말했다.
"그럼 사장님 드시고 싶은 걸로 먹죠."
"제가 사는 거잖습니까. "
그가 사는 거니까 그가 먹고싶은 걸로 먹으면 될 텐데 왜 굳이 김택승이 고르길 원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도 좋아할 만한 메뉴로 골라야 겠다는 생각에 김택승은 아쉬움을 삼키며 선짓국 밥집을 지났다. 그리고 한동안 달리다 멀찍이 선 가든을 발견했다. 고깃집인 모양인데 그거라면 하선연도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고기가 먹고 싶다니까 군말하지 않고 흔쾌히 응했다.
가든 앞에 차를 세우고 나니 생각보다 그럴싸한 곳이었다. 정원도 잘 꾸며져 있었고 한옥으로 만들어진 건물도 멋들어졌다. 머리에 단정하게 쪽을 진 점원의 안내로 두 사람은 연못을 낀 독채로 안내됐다. 곧 탁자가 차려지고 밑반찬이 깔렸다. 하선연이 골라 보라 해서 메뉴판을 들여다 본 김택승은 의아함을 느꼈다. 어찌된 게 가격이 적혀있지 않았다. 그래도 시내보다 저렴하겠지 싶어서 김택승은 제일 무난해 보이는 등심을 시켰다. 소고기를 그다지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알 만한 부위가 그거뿐이었다.
잠시 후, 마블링이 아름다운 소고기가 나왔다. 점원이 거세시킨 수소를 도축해서 일주일 동안 숙성시킨 한우라고 설명하며 직접 고기를 구워주었다. 한입 크기로 잘라 겉만 살짝 익혀 주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고기 자체가 맛이 있어 뭔가를 곁들이거나 싸먹을 필요도 없었다. 연방 감탄하며 구워주는대로 덥석덥석 집어먹었더니 삼인분이 금방 동났다. 솔직히 말해 간에 기별도 안가는 기분이라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하선연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선선하게 웃으며 "모자르면 더 시키세요" 라고 권해준다.
자신이 많이 먹어서 그는 얼마 못 먹은 것 같기도 하고, 보통 남자 둘이 고기 오 인분은 시키니까 김택승은 점원에게 고기 삼 인분만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도 가져 오기가 무섭게 접시가 비었다. 하선연이 먹을 수 있도록 젓가락만 빨았는데도 그랬다. 그냥 처음부터 많이 시킬 걸 하고 괜히 후회가 됐다. 괜히 불판 닦는 비계조각을 뒤적거리고 있노라니 하선연이 아쉬운 기색을 눈치채고 말했다.
"더 드시지 그래요?"
"어.....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김택승의 물음에 선뜻 고개를 끄덕인 하선연이 나서서 추가로 주문을 했다. 이렇게 잘 먹어도 되나 싶었지만 사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기쁜 맘으로 새로 나온 고기도 열심히 구워먹었다. 밑반찬도 하나같이 맛있어서 싹싹 긁어먹었더니 적당히 배가 불렀다. 된장에 밥 한공기 먹으면 딱 맞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여기 등심 삼인분 더 부탁합니다."
하선연이 묻지도 않고 고기를 또 시켰다. 괜찮다고 말해도 빈말이라 여기는지 많이 먹으라고만 했다. 정말로 더 안먹어도 되지만 시켜주는 게 고마워서 김택승은 묵묵히 젓가락질을 했다. 하선연이 손수 구워주면서 맛있느냐고 묻기까지 해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결국 불판을 비운 후에는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순전히 고기로 배를 채워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조금 느끼한 것도 같아서 된장과 밥이 절실했다. 한데 하선연이 지나가던 점원에게 또다시 고기를 추가했다.
김택승은 깜짝 놀라 말했다.
"저 진짜로 배부릅니다. 그냥 된장에 밥이나....."
그말에 하선연이 웃으며 천진하게 대꾸했다.
"사양만 하시는 걸 보니 아직 부족한 모양이네요. 된장에 밥 드시지 말고 고기 드시죠."
그럼 사양 말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했던 것일까. 뭔가 기대했던 말 대신 된장에 밥 타령을 해서 배가 덜 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된장과 밥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에 김택승은 말했다.
"아뇨, 벌써 많이 먹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네요."
"많이 드시긴요, 이 정도는 충분히 사드릴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다는 말을 더 얻어먹긴 미안하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하선연이 걱정 없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물론 식사 값이 걱정되기는 했다. 소고기가 저렴해 봤자 선짓국밥 만큼이나 저렴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배가 불렀다. 더는 먹어봤자 맛도 모를 것 같아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일종의 기대감마저 떠올린 하선연의 얼굴을 보니까 차마 먹기 싫다는 소리가 안 나왔다. 왜 자꾸 먹이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김택승은 뒤늦게 된장에 밥 타령을 할 게 아니라 소고기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계속 사양만 하고 기뼈하는 기색을 안 보여서 권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미 감사를 전하기엔 늦은 것 같았다.
결국 언제 또 이렇게 소고기를 먹어보겠냐는 생각에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고 고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구워주는 대로 꾸역꾸역 먹었다. 잠시 후, 고기를 다 먹었을땐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더 먹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겠다는 생각에 김택승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정말로 진짜 너무나도 잘 먹었습니다. 소고기를 이렇게 실컷 먹어본 적이 없는데 오늘 그래 보네요. 한 십년은 소고기 안 먹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제야 하선연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동의하는 기색으로 점잖게 대꾸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사드리는 보람이 있네요."
너무 잘 먹다 못해 토할 것 같았다. 삽겹살로도 이렇게 배를 채워본 적이 없는데 참으로 사치스러웠다. 김택승은 부른 배를 끌어안고 힘겹게 하선연을 따라서 계산대로 나갔다. 그러다 계산서를 본 점원이 "사십만 천 원입니다." 하고 말하는 소리에 하마터면 그대로 자빠질 뻔했다. 많이 먹긴 했지만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다. 대충 계산해보니까 어찌 된 게 시내보다 더 비싼 것 같았다.
점심 한끼 값으로는 지나치게 과했다. 갑자기 제 뱃속으로 들어간 소고기가 무지 아깝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맛을 음미하며 먹는 건데 그랬다.
삼박사일 화장실도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김택승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계산을 마친 하선연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지갑을 품에 넣고 나오는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커피 드세요."
하선연은 옷깃을 정돈하고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보고 말했다.
"자판기 커피네요."
뻔히 아는 사실을 말하는 모습이 라면을 봤을 때의 반응과 같았다. 그래도 라면을 맛있게 먹었으니 이것도 맛있게 먹겠지 하고 김택승은 재차 권했다.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잔을 받아 든 하선연이 진심은 아닌 기색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이어 오묘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그동안 먼저 잔을 비운 김택승은 미안함을 담아서 말했다.
"너무 비싼 밥을 얻어먹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뭘요, 괜찮습니다."
싱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데 참 고맙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고기 사준 건 고맙지만 배가 미어터지도록 사줄 필요는 없었다.
덕분에 식사 값이 너무 많이 나와서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한 끼에 사십만원짜리 식사를 먹었더니 금덩이를 삼킨 것처럼 뱃속이 묵직했다.
표정이 불편해진 김택승을 보고 하선연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그냥..... 과식한 모양입니다."
실제로 속이 더부룩하기도 해 김택승은 매슥거림을 참느라 입술을 질근거렸다. 그러다 하선연이 거슬리는 듯 힐끗 쳐다보는 것을 깨닫고 얼른 입술을 놓았다. 사십만 원짜리 식사를 대접받은 사람의 태도치고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로 입가를 끌어올리고 차로 향했다.
이왕 먹은거, 부담스러워하기보다는 먹은 만큼 열심히 일하는게 나을 테다. 그렇게 맘먹고 김택승은 하선연이 종이컵을 비우길 기다려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금 가던 길을 재촉했다.
서울로 가는 길 내내 김택승은 솟구치는 트림을 삼키느라 무진장 고생했다. 이윽고 서울에 들어설 무렵에야 간신히 속이 가라앉았다.
내부순환도로로 들어선 걸 보고 하선연이 종로 쪽으로 가자고 해서 김택승은 핸들을 걲었다.
그리고 혼잡한 시내로 차를 내렸다. 비싼 차를 타면 차들이 저절로 비킨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벤츠라 그런지 북적거리는 도로에서도 한결 운전이 편했다. 그때 하선연이 병원 건물에 들어서 있는 약국을 보고 말했다.
"잠시 저기 들렀다 가죠."
갑자기 웬 약국인가 싶어 김택승이 물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대답 대신 하선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딱히 캐물을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주차장으로 차를 세우자 잠시 다녀오겠다고 그가 내렸다.
홀로 남겨진 김택승은 금세 무료해졌다. 약국에 잠깐 들리는 것 치고는 어째 오래 걸린다. TV나 볼까하고 DMB를 켰더니 화면은 나오는데 소리가 안 나왔다. 소리 높이는 법을 몰라서 방법을 찾아 헤매던 중, 문득 똑똑하고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차창 밖에서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안을 들여다 보는 하선연이 보였다.
미처 그가 온 줄 몰랐던 김택승은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런데 하선연이 차에 올라타는 대신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핸드폰 어디 있습니까?"
사장님 손에 있지 않냐고 대답하려던 김택승은 제 핸드폰을 말하는 것임을 알고 되물었다.
"전화하셨습니까?"
그러면서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는데 액정이 깨져 까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핸드폰이 고장 나서 신경을 끄고 있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전화를 받지 못했다. 급한 용건이었나 싶어 김택승은 뒤통수를 긁적이고 말했다.
"핸드폰이 고장이 나서요,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마도 모닝콜이 울리더란 이야기를 하려던 하선연이 멈칫했다. 그 모닝콜 덕분에 자기가 핸드폰을 던진게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곧 김택승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고 약간 주저하다 질문했다.
"혹시 제가 그랬습니까?"
어젯밤에만 해도 멀쩡했고, 김택승은 배터리를 분리해 집어던진 적이 없으니 범인은 같이 잤던 그뿐이다. 아침의 일에 이어 어젯밤의 일도 연상이 돼 괜히 그를 마주 보는 게 어색해졌다.
열기에 들떠 있던 얼굴까지 생각나 시선을 수그리자, 그걸 긍정으로 알았는지 어쨌는지 하선연이 곧장 사과를 해왔다.
"미안합니다. 변상해 드리지요."
"아, 아뇨. 원래부터 상태가 좀 안 좋아서……."
"그럼 새로 하나 사 드리겠습니다."
이어 김택승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턱짓하며 덧붙였다.
"어째 수리비가 더 나올 것 같네요."
말마따나 오래된 기종이고 액정도 금이 가 있어 새로 살 때가 되기는 했다. 어차피 수리를 받는다고 해도 액정까지 갈아야 해서 괜히 그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꼴이다. 그럴 바에야 요즘엔 공짜폰도 많으니까 가입비나 내달라고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김택승은 그렇게 하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킷에 놔두고 간 지갑을 챙긴 하선연이 약국에서 볼일을 보고 오길 기다렸다가 같이 거리로 나갔다.
김택승은 당장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선연은 아닌 모양이었다. 핸드폰부터 보러 가자는 말에 "지금요?"라고 반문하자 이상하다는 듯이 "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지내려고요."라고 대꾸했다. 이어 대리점으로 가자고 말하면서 유리에 반사되는 햇살이 눈부신 듯 가리개를 내렸다. 결국 반대할 이유가 없어 그가 말한 곳으로 차를 몰았다.
큰 빌딩을 끼고 있는 대리점은 보통 보던 대리점과는 좀 달라 보였다. 자동문으로 들어서 널찍한 실내를 가로지르자 유니폼을 챙겨 입은 직원이 깍듯한 태도로 인사를 해왔다. 그리고 보석 상자처럼 반짝거리는 진열대로 안내했다. 거기엔 미끈하게 빠진 최신 핸드폰이 즐비했다. 그것을 한 번 훑어보고 하선연이 물었다.
"어떤 거 쓰실 겁니까?"
김택승은 진열대를 보는 대신 곧장 직원에게 질문했다.
"공짜 폰으로 보여주세요."
그 말에 하선연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공짜 폰이라고요? 그런 것도 있습니까."
그의 질문이 의아해서 김택승은 머리를 기울였다. 요즘 세상에 널린 것이 공짜 폰인데 그걸 모른다는 말인가. 도리어 자신이 잘못 알고 있나 싶어서 직원을 쳐다보자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요금제에 따라 공짜나 다름없는 기종도 있습니다."
하선연은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좀 미심쩍은 기색이었다. 무료로 핸드폰을 준다는 말이 안 믿기는 모양이다. 그러다 김택승에게 시선을 주고 말했다.
"제가 변상해드리는 거니까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고르세요."
어째 점심 먹을 때랑 비슷한 말이라서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수십만 원짜리 점심도 선뜻 사고 핸드폰까지 사주려는 걸 보니까 좋다기보다는 걱정이 됐다. 아무리 부자라도 그렇지 이렇게 돈을 물 쓰듯 해도 되나 싶었다. 무슨 사업을 크게 하는 것도 아니고 화랑이 수입원 전부인 것 같은데 진짜 괜찮은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그 화랑조차 장사가 잘되는지 미심쩍었다. 아무리 아침에 잠깐 있다 간다 해도 손님이 오는 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온다는 고객만 해도 오다 말아서 경제적인 타격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가격을 신경 쓰지 말라니, 배포가 크다기보다는 씀씀이가 헤펐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자신에게 이렇게 쓸 정도면 사기꾼에게 걸렸다간 아예 가산을 탕진하겠다. 곱게 자라서 세상 물정을 모르나 보다 하고 김택승은 내심 혀를 찼다. 외양은 야무지게 생겨서 영 미덥지가 못했다.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낸 채로 김택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가입비만 내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전화만 하면 되는데요 뭐. 공짜 폰이면 충분합니다."
하선연의 말을 자르고 대꾸한 김택승은 저렴한 것으로 보여 달라고 점원에게 부탁했다. 그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하선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요즘 핸드폰으로 전화만 하진 않잖아요. 제가 지금 쓰는 기종이 괜찮은데, 그걸로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여기서 우물쭈물하면 또 자기가 만족스러운 걸로 골라버릴 테다. 그럼 안 된다는 생각에 김택승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비싼 건 필요 없습니다."
그 태도에 하선연은 약간 당혹한 것 같았다. 자기가 변상한다고 했고 좋은 걸로 바꿔주겠다는데도 굳이 마다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는 수긍하지도 않는 모양이다. 단순히 부담스러워 빈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 탓에 핸드폰이 고장 난 거잖습니까. 정말로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김택승은 대답하는 대신 그를 물끄러미 봤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그의 친절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이다. 상대방을 고려해서 배려한다기보다는 자기 생각 따라 내키는 대로 베푼다. 김택승은 답지 않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험한 일을 많이 해서 좋은 핸드폰을 가지고 다녀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기껏 사주셨는데 금방 망가지면 아깝지 않습니까."
그런데 김택승의 설명을 듣고 하선연은 갑자기 싱그레 웃었다.
"아…… 그게 이유였습니까?"
왜 웃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흡족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핸드폰 그렇게 쉽게 안 망가져요. 제가 사드리는 거라고 애지중지할 필요 없습니다."
"……."
김택승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그냥 사람의 선입견이란 참 무섭구나 하고 생각했다. 별로 오해할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희한하게 오해를 한다. 김택승이 아깝다고 한 건 그가 사준 핸드폰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쓸데없이 비싼 거 샀다가 망가지면 아깝다는 뜻으로 말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그걸 설명해봤자 믿을 거 같지도 않고, 순순히 가입비만 내줄 것 같지도 않아서 결국에는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쓰는 거랑 같은 핸드폰으로 달라고 말하는 하선연을 보면서 턱을 긁적거렸다. 왜인지 그와 함께 있으면 어떻게든 그의 의견을 따르게 된다. 물론 고집이 세고 은근히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이겠지만…… 자신이 이상하게 그에게 약한 것도 있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하던 김택승은 실없는 생각을 했다. 잘생겨서 그런가.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세태에 저도 모르게 물들었다고 쓸데없이 자책을 하던 중, 직원이 간단한 서류작성을 요청했다. 거기에 몇 가지 사항을 기재해 넣은 뒤 하선연과 함께 라운지로 나가서 개통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매장과 마찬가지로 널따란 라운지는 텅 비어 있었다. 하선연의 화랑처럼 불필요하게 큰 대리점이라고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사용설명서를 훑었다. 핸드폰임에도 불구하고 사용설명서가 꽤나 두툼했다. 그런데도 홈페이지의 안내를 참조하라는 설명이 많아 뭔가 복잡해 보였다. 잠시 후 직원이 핸드폰을 가져다줘서 김택승은 시험 삼아 전화번호를 하나 입력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터치 형식을 할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지라 전화번호부를 여는 것조차 어려웠다. 결국 서투르게 만지는 걸 보다 못한 하선연이 핸드폰을 가져가 시범을 보여주었다.
"페이지 넘기듯이 만지면 됩니다. 이렇게요. 한 번 해보세요."
하선연의 말을 따라 하니까 훨씬 수월했다. 일단 화면 넘기는 법을 익히고 나니까 조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것저것 건드리다 보니 재미가 있어서 김택승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방 감탄사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하선연이 손짓을 했다.
"보여 드릴 게 있으니까 핸드폰 좀 줘 봐요."
두 대의 핸드폰을 나란히 놓은 하선연이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명함을 교환하듯이 자동으로 전화번호가 교환됐다. 놀랍다 못해 신기해서 김택승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에게 핸드폰을 받아 따라서 몇 번을 두드려 봐도 놀라움이 가시질 않았다. 같은 짓을 반복하는 그를 보고 빙그레 웃던 하선연이 문득 말했다.
"요즘에 나오는 핸드폰은 상상도 못할 만큼 기능이 좋아요. 차를 운전하는 것도 가능하죠. 물론 차에 옵션을 장착해야 합니다만."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자동운전프로그램 같은 건가 보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고 경이로움을 숨기지 못한 채 핸드폰을 바라보던 김택승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하선연이 듣기에 다소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럼 대리운전기사는 어떡합니까? 죄다 실직할 텐데."
그러자 미처 거기까지 생각해보지 않은 듯 잠시 머뭇거린 그가 곧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음주상태에선 핸드폰 조작도 어려울 테니까요, 괜찮을 겁니다."
"아, 그래요."
그 말에 김택승은 조금 안도했다. 예전에 대리기사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수입이 짭짤해서 나중에 취직하면 부업으로 생각했던지라 망하면 곤란하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뭔가 좀 이상했다. 자동운전이 안 되는 거라면 핸들 잡고 운전하나 핸드폰 잡고 운전하나 그게 그거인 것 같았다. 그럼 실용성이 없지 않나 하고 의아해서 옆을 보자 하선연이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 그제야 김택승은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아무리 태연한 척 해도 웃음을 참는 기색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김택승은 설마 농담이었냐고 물으려 반쯤 입을 열자 그가 잠깐 기다리라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수그리고는 어깨를 미미하게 들썩거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이없고 황당해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홀딱 속아 넘어가다 못해 애먼 대리운전기사까지 걱정했으니 얼마나 우스웠을까. 철이 든 이후 이렇게 창피해보긴 처음이다.
얼굴을 붉히다 못해 태우고 있노라니 비로소 다 웃는 하선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김택승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설마 진짜로 믿을 줄은 몰랐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어가야 덜 창피하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괜스레 뜨거운 뺨을 손등으로 한 번 훔치고 고개를 숙인 채 손에 쥔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까맣고 반짝반짝한 핸드폰이 어느새 지문으로 얼룩덜룩했다. 그걸 옷자락에 문지르던 김택승은 탁자에 얹어진 하선연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보았다. 그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소리 나게 두드린 그가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로 청했다.
"고개 좀 들어봐요."
벌게진 얼굴을 아직 가라앉히지 못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가슴이 쿵덕했다.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매우 다정했던 것이다. 캄캄한 밤 잦아드는 모닥불을 바라보듯이 따스한 시선이었다. 덕분에 창피함과는 다른 감정으로 얼굴이 홧홧했다. 뜨거운 건 얼굴이 아니었다. 가슴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빠지고 있노라니 그가 기습적으로 가까워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자 콧잔등에 촉촉한 느낌이 닿았다 떨어지면서 쪽, 하는 소리가 났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보인 것은 허물없는 미소였다. 햇빛을 바가지로 뒤집어쓴 것처럼 환한 얼굴로 하선연이 "하하." 소리 내 웃고 있었다. 그리고 멍하게 있는 김택승을 보고 한쪽 눈썹을 살짝 찌그러트리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왜, 아쉬워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건 순간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콧잔등의 뽀뽀가 그동안 했던 키스보다 더한 감흥을 주었다. 그래서 김택승은 콧잔등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보고 피식 웃은 하선연이 이만 가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쉬움은 그제야 밀려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좀 더 이렇게 있고 싶었다. 그렇다고 붙잡을 수도 없고 해서 김택승은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하선연이 다음으로 가자고 한 곳은 인사동이었다. 종로에서 가까웠지만 딱히 차를 댈 곳이 없어서 유료 주차장에 차를 넣어야 했다. 주차 뒤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하선연이 핸드폰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이번엔 좀 걸릴 겁니다. 근처에서 적당히 시간 보내고 계세요. 갈 때 되면 전화하겠습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김택승은 그냥 차 안에서 기다리며 핸드폰 사용법이나 익히려고 했다. 그런데 계속 그것만 들여다보니까 목이 뻐근했다. 어쩐지 속도 계속 더부룩하고 눈도 침침한 것 같아서 잠시 걸을까 하고 차에서 내렸다. 인사동에는 별로 와본 적이 없는데 오히려 명동보다 외국인이 더 적은 것 같았다. 거리가 아기자기하고 구석구석에 뭐가 많이 있어 나름대로 정취가 있기는 했다. 노점에서 파는 음료수도 생과일주스보단 식혜가 눈에 띄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김택승은 나무로 깎아 만든 작은 액세사리를 파는 노점을 발견했다. 각양각색의 인형이 올망졸망해 눈길을 끌었다. 그 사이로 핸드폰 줄도 보여 혹하는 맘이 들었다. 핸드폰 줄 같은 건 귀찮아서 안다는 편인데 새 핸드폰이 생기니까 괜히 맘이 갔다. 일단 구경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둘러보고 있으니 문득 하선연의 핸드폰도 비어있던 게 생각났다. 밥도 얻어먹었겠다, 핸드폰도 받았겠다, 핸드폰 줄로 성의 정도는 보이면 좋을 것 같았다. 현재 가진 돈이 많진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무심결에 뭐가 좋으려나 훑어보던 김택승은 과연 그가 좋아할지 의문을 느꼈다. 자신만 해도 성가셔서 안 달고 다니는데 길거리 노점에서 산 물건을 마땅해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그냥 관두자고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김택승 씨."
부르는 소리에 발길이 우뚝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자 하선연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 있었다. 여기엔 웬 일인가 싶었으나 곧 이 근처에서 볼일이 있을테니 마주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이 그가 가까이 다가서면서 말했다.
"근처 미술관 좀 둘러보고 있었는데 나와 있었네요. 뭐 하고 있었습니까?"
"그냥 바람이나 쐴 겸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김택승의 대꾸에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인 하선연은 뜻밖의 제의를 했다.
"그럼 같이 가실래요?"
"……그래도 됩니까?"
할 일도 없고 혼자서 심심하던 차라서 가능하면 그러고 싶었다. 다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되물으니 상관없다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 걸었다. 김택승은 그 뒤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미처 몰랐는데 인사동 부근에 소규모 미술관이나 전시관이 많은 모양이다. 하선연은 그곳에 들러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기도 하고 미술품을 감상하기도 했다. 김택승은 잘은 모르지만 자신 안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나름대로 의미를 이해하고자 미간을 모은 채 희게 칠해진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와 대화하다 다가온 하선연이 질문을 던졌다.
"어때요?"
"네?"
뭘 묻는 건가 싶어 반문한 김택승은 곧 감상을 묻는 것임을 깨달았다. 왜 문외한인 사람의 감상을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서 뭐라고 말할지 고민이 됐다. 그런데 딱히 그럴싸한 말이 생각 안 나 그냥 느낀대로 말했다.
"두부 같네요."
"두부?"
김택승의 소감에 반문을 던진 하선연이 피식 웃더니 턱에 손을 괴고는 짐짓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발길을 옮기면서 차례대로 저건 어때 보이냐고 질문했다. 허세 부릴 말재간도 없어서 김택승은 그냥 보이는 대로 솔직하게 대꾸했다.
"공사장 근처에 떨어진 페인트 같습니다."
"헌책방에 쌓인 책 같기도 하고……."
"구겨진 시트 같네요."
김택승의 대답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계속 어깨를 들썩거리던 하선연은 한 바퀴를 다 둘러보고 난 후에 물었다.
"이 중에 뭐가 제일 마음에 듭니까?"
김택승은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저거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검은색에 가까운 푸른색이 칠해진 캔버스에 노란 선 한 줄이 던져져 있는 그림이었다. 아까는 그냥 노란 선이 그어져 있구나 생각했는데 가만히 쳐다보니까 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데 하선연이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밤 비행기 같아서요?"
김택승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길게 던져진 노란 줄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비행기 불빛 같다고 생각했다. 아직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발견할 때마다 사라질 때까지 발걸음을 멈춘 채로 응시하곤 했던 것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이었는데 하선연이 그걸 꿰뚫어 본게 놀라웠다. 설마 진짜로 밤 비행기를 묘사한 작품이었나 싶어 김택승이 물었다.
"그걸 그린 겁니까?"
하선연이 고개를 가로젓고 그림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냥……"
이어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밤에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해서요."
그의 대답에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에 고인 어둠을 가르며 날아가는 밤 비행기,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그 비행기가 그의 눈에도 보인 것이다. 달리 그 기분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고 김택승은 한동안 말없이 그와 나란히 서서 그림을 감상했다. 뺨에 바람이 스치고 귀에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결국 하선연은 그 그림을 구입했다. 큐레이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와 이만 가자고 발길을 옮겼다. 그를 따라 무심코 왔던 길을 돌아가던 중 문득 아까 봤던 좌판이 눈에 들어왔다. 옹기종기 모인 나무인형을 스쳐 지나가던 찰나,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걸음이 멈춰 세워졌다. 김택승이 갑자기 제 자리에 멈추자 무슨 일이냐는 듯 하선연이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십니까?"
김택승은 잠시 주저하다 말문을 열었다.
"괜찮으시면……하나 사드릴까 싶어서."
뭘 사준다는 건지 모르고 다가온 하선연은 김택승의 시선을 따라 좌판을 봤다. 작지만 조잡하고 귀엽지만 쓸모없는 물건에 그의 눈길이 가 닿자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왜인지 말을 잇는데 상당히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아까 자신이 느낀 걸 그가 느꼈다면 싫어 할 것 가지 않았다. 그냥 하나쯤 가지고 싶어 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하선연이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표정이 빠져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침묵한 채 빤히 쳐다보았다. 그동안 머릿속에 별의별 추측이 지나갔다. 돈도 없으면서 별짓을 다 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누가 이런 걸 사준다고 한 게 처음인가, 별로 막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서 괜한 소리를 했나 싶었다. 그때 다시 좌판으로 시선을 돌린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골라도 됩니까?"
"네?"
퍼뜩 알아듣지 못하도 되돌린 반문에 그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김택승은 엉겁결에 대꾸했다.
"신경 쓰지 말고 원하시는 대로 고르셔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신중하게 나무인형을 살펴보았다. 손으로 집어 가까이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더니 마침내 뭔가를 집었다. 펭귄 비슷하게 눈이 똥그란 인형이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싱글거리며 핸드폰 줄을 고른 걸 보고 김택승은 주인에게 계산을 했다. 몇 천원 안 할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비쌌다. 표정을 보고 비싸다 생각하는 걸 알아챘는지 주인이 주저리를 늘어놓았다. 그건 다른 것보다 특별해서 좀 더 값이 나간다는 소리였다. 하필 집어도 좌판에서 제일 비싼 걸 집은 모양이다. 어쨌든 마음대로 고르라고 했으니 군말을 할 순 없었다.
계산을 하고 김택승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발길을 옮기는 하선연을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선연은 차로 가는 내내 고리를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눈을 떼질 못했다. 그리고 차에 도착해 시트에 앉자마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바로 끼우려고 했다. 그런데 영 요령이 없어 계속 헛손질을 했다. 핸드폰 줄같은 건 한 번도 안 끼어본 것 같아서 결국 김택승이 손을 내밀었다.
"제가 끼워 드리겠습니다."
하선연이 제가 해보겠다고 한동안 고집을 피우다가 결국 포기하고 핸드폰과 핸드폰 줄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김택승은 의외로 생각처럼 잘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맨손으로 끼우려니까 구멍이 좁아서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수를 써야겠다 싶어 제 머리에 손을 가져가니 짧은 검은 머리가 까끌했다. 아무래도 긴 머리칼이 필요해서 김택승은 하선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왜 그렇게 보냐는 듯 마주 보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선연이 조금 머뭇한 것 같았으나 내민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냥 간지러운 것처럼 어깨를 조금 움직였을 뿐이다.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본 김택승은 무심코 감탄했다. 숱이 많으면서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마치 명주실 같았다. 새카만 자신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색도 엷어서 햇볕에 비치면 마치 갈대밭처럼 반짝거렸다. 한때는 바람이 불 때마다 한들거리는 이 머리카락이 시선을 끌곤 했다. 뒤집혀 팔락거리던 뒷머리를 장난처럼 집어당기며 헤집어보고도 싶었다. 그런데 지금 그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다.
무어라 할 수 없는 소감으로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간지러움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그러자 쏟아지는 앞머리 아래 자신을 응시하는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짙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커피처럼 고요하고 깊으면서 뜨거운 눈빛이었다. 거기에 스푼을 넣고 휘젓는 것처럼 김택승의 마음도 휘저어지는 기분이었다.
"……."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목구멍이 간지러운 것을 느꼈으나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 수가 없었다. 김택승은 어느새 벌어졌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신 손안에 남은 머리칼 한 올을 골라내 잡아당겼다.
"읏."
머리카락을 뽑을 걸 예상치 못했는지 하선연이 짧은소리를 내뱉었다. 이어 미간을 모으고 따끔거리는 머릿속을 문지르며 말했다.
"머리칼은 왜 뽑습니까?"
김택승은 대꾸대신 이유를 보여주었다. 핸드폰 줄에 그의 머리카락을 걸어 좁은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는 머리카락은 그 사이를 쉬이 빠져나왔고 그걸 잡아 당기자 핸드폰 줄도 같이 딸려 나왔다. 지혜라고 할 것도 없는 생활의 요령이었다. 매듭으로 마무리를 지어 핸드폰을 돌려주니 하선연이 툭 하고 내뱉었다.
"그러려고 만진 겁니까?"
그럼 다른 이유가 있나 싶어 되물은 김택승은 곧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갑자기 머리칼을 만져서 엉큼한 짓이라도 하는 줄 알았나 보다.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던 중, 문득 아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네?"
"왜, 아쉬워요?"
김택승은 하선연이 한 방 먹었다는 식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리거나 농담으로 받아칠 줄 알았다. 한데 그러는 대신 멈칫했다. 마치 의표를 찔린 것처럼 짧은 정적이 흐르고, 곧 눈길을 돌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쉬우면 뭐라도 해줍니까?"
가벼운 대답에 김택승은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도 같았지만 착각이었나 보다. 인지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서 그게 뭐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이만 출발하자는 소리에 시동을 걸고 목적지를 물었다. 이에 그가 짧게 대꾸했다.
"제 오피스텔로 갑시다. 거기서 김택승씨는 바로 퇴근하세요."
오늘의 볼일은 이걸로 끝인가 보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김택승은 핸들을 잡고 엑셀을 밟았다. 곧 벤츠가 부드럽게 도로를 미끄러져 나가 차의 흐름에 합류했다. 시내를 빠져나와 한강을 끼고 달리는데 뉘엿뉘엿 석양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제에 이어 함께 보는 두 번째 석양이었다. 그렇지만 운전사 노릇은 오늘로서 끝이라 세 번째 석양을 보게 될 일은 더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주말이고 다음 주는 화랑 휴가였다. 열흘이 훌쩍 넘어야 다시 볼 수 있는 것이다. 김택승은 무심코 요즘 같은 때 휴가를 일주일씩이나 쓰다니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손님도 없는 화랑인데 문이라도 열어놔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열흘이 지나고 나면 일하러 가야 한다는 것도 까먹었다. 따지고 보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열흘쯤이야 가게 일로 바쁘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새학기를 기다리는 봄방학처럼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화랑 문을 열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김택승은 잠자코 차만 몰았다.
하선연의 오피스텔은 한남동 부근에 자리해 있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 김택승은 그가 내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고 키를 뽑았다. 그리고 하선연에게 키를 건넸다. 그것을 돌려받은 그는 의무적인 인사치레를 했다.
"이틀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내일부터는 휴가니까 푹 쉬세요."
"네."
"그럼 전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하선연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이 서슴없었다. 뒤를 돌아볼 것 같지 않은 등을 바라보자 어쩐지 불러 세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반쯤 열었던 입술을 도로 닫았다. 딴 사람이었더라면 막창에 술이나 한잔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나 해봤을 텐데. 하긴, 막창을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아쉬움 비슷한 기분을 삼키며 김택승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터벅터벅 발길을 옮기던 찰나.
"김택승 씨."
등 뒤에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걷던 걸음을 멈춘 김택승은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갔던 걸음 그대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하선연이 보였다. 김택승의 앞에 우뚝 발걸음을 멈춰선 그는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손을 꺼내 무언가를 휙 던졌다. 평소처럼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받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상하게 말한다.
"괜찮으면 김택승 씨 쓰세요."
손 안에 흔히 보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입술에 바르는 보호제였다.
"아…… 고맙습니다."
입술이 매끈한 그가 이런 걸 갖고 다니다니 의외였다. 아니, 이런 걸 갖고 다녀서 입술이 매끈한 건가. 반사적으로 고맙다고 하자 "그럼." 하고돌려시 몸을 도렬 걸어가 버린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김택승은 손안에 쥔 입술보호제를 꾹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거칠거칠한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키스할 때 촉감이 별로였나..... 곧 괜한 생각이라고 내심 고개를 저은 김택승은 안 좋은 버릇이니까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뒤 입술보호제를 주머니에 챙기고 집으로 돌아가려 발길을 옮겼다. 비상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가자 버스정류장이 보였지만 잘 모르는 곳이라서 몇 번을 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하고 역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혼자 걸으면 으레 그렇듯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까 고작 이틀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난생처음 벤츠를 몰아보질 않나, 그 벤츠가 고랑에 빠지질 않나, 하선연과 흙투성이가 되질 않나, 길에서 키스하질 않나, 그보다 더한 일도 했다고 생각하니까 뒤늦게 쑥스러웠다. 종일 멀쩡하게 그의 얼굴을 봤는데 헤어진 뒤에야 새삼 얼굴이 붉어졌다. 괜히 헛기침을 하고 김택승은 배가 터지도록 소고기를 먹은 일이나 팔자에도 없는 최신기종 핸드폰을 갖게 된 일도 생각했다. 같이 그림 구경을 한 건 나름대로 즐거웠다. 그가 핸드폰 줄을 선뜻 받은 일은 좀 의외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우 일박이일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굉장히 오랫동안 함께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일을 한 게 아니라 휴가라도 다녀온 느낌이었다. 덕분에 집으로 가는 발길이 조금 아쉬웠다. 그 기분을 털어버리고 김택승은 애써 지하철로 가는 걸음을 빨리했다.
오래지 않아 출입구를 발견해 플랫폼으로 내려가니 때마침 전동차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내리기를 기다려 올라타자 빈자리가 보였으나 별로 피곤하지 않아서 그냥 입구 근처에 섰다. 곧 전동차가 움직이고 김택승은 지하를 달리느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자 까만 유리에 정장을 차려입은 제 모습이 비쳤다. 어딘지 허전해 보이는 옷깃을 하선연이 사준 넥타이가 여며주고 있었다. 괜히 그것을 만지작거린 김택승은 머리를 길러볼까 생각했다. 그동안은 성가셔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를 고수했는데 새삼 기르고 싶어졌다. 그럼 정장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만졌을 때 촉감도 지금보다는 더 좋을 테다. 김택승은 손안에 남은 보드라운 갈색 머리칼의 감촉을 되새기며 까칠한 뒤통수를 쓸었다. 그러다 만만찮게 까칠한 제 입술을 쳐다보았다. 머리도 머리지만 벌긋한 입술이 애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르튼 얼굴로 입술이나 뜯어먹고 콧물이나 흘리는 어린애. 흠 하나 없어 뵈는 하선연에 비해 정장이 안 어울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작게 한숨을 토해낸 김택승은 아까 그에게 받은 입술보호제를 떠올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괜스레 치밀어 오르는 쑥스러움을 억누르며 뚜껑을 열고 입술에 가져다가 부드러운 느낌이 닿기 직전, 멈칫했다.
왜인지 썼던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뭉개진 자리가 없어 아무래도 새 거 같았다. 평소 쓰던 것도 아닌 걸 왜 갖고 다녔을까 의문을 느낀 김택승은 아까 그가 약국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 이유가 설마 이 때문인가 싶었으나 에이, 아니겠지 하고 곧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마도 자신이 쓰려고 샀다가 입술 뜯는 모습이 거슬린다는 생각에 던져준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순간 영문도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부드러운 버터향이 나는 입술보호제를 바르는데 자꾸만 입가가 히죽거렸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상상이 됐다. 애써 술렁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려던 김택승은 결국이제 기분을 어기지 못하고 '뭐 어때." 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냥 그가 자신을 위해서 고다 준 거라도 여기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편이 훨씬 더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로선 굳이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마음 가는 것을 믿기로 하자 기분 좋은 설렘이 찾아들었다.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웠다. 그것을 보고 김택승은 의아한듯 힐긋거리는 주변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리고는 익숙하지 않게 미끌거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핥아보았다.
*
주말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월요일, <Blossom>은 여름휴가를 마치고 정상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주말 동안 밀린 잡일을 끝내고 오랜만에 푹 쉰 김택승은 오후에는 가게로 나갔다. 평소처럼 일직 나가 오픈 준비를 하고 있노라니 강유형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 어째 휴가를 보냈는데도 하얗다 못 해서 창백한 얼굴이었다. 알고보니 휴가기간 동안 햇볕을 못 쬐고 술만 진창 마신 모양이다. 해장 커피나 한잔 달라는 소리에 커피를 만들던 김택승은 떠오른 바가 있어 핸드폰을 꺼내고 말했다.
"저, 핸드폰 번호 좀 불러주세요."
"핸드폰 번호?"
반문하는 소리에 김택승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대꾸했다.
"핸드폰이 고장나서 새로 사는 바람에 전화번호를 다 날렸어요."
내 번호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게 바꾸라고 할 때 진즉 바꾸지 그랬냐, 잔소리하던 강유형은 뒤늦게 김택승이 손에 든 핸드폰을 보고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너 핸드폰이……."
김택승이 최신기종을 살 성격이 아니란 걸 아는 그로선 의외였을 것이다. 사실 자신이 쓰기엔 너무 비싼 핸드폰이긴 했다. 김택승은 핸드폰을 고장낸 사람이 사준 거라고 설명했으나 강유형의 찌푸려진 미간은 펴지질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아주 많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보더니만 고개를 확 돌리고 퉁명스런 목소리로 번호를 불러주었다.
그날은 가게 사람마다 김택승의 핸드폰 보고 한마디씩 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주방보조는 대놓고 부럽다는 표정을 지어서 좀 민망했다. 제 돈으로 산 게 아니라니까 더 부러워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이거 기본요금 되게 높은데 괜찮아요?"
"응?"
주방보조는 김택승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앱이 어쩌고저쩌고 설명을 했다. 태반이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딱 하나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기본요금만 몇만 원이 훌쩍 넘는다는 사실이었다. 부가기능을 좀 추가하면 십만 원은 우습게 나오는 모양이다. 하선연이 일시불로 계산해버려 기본요금밖에 안 나올 거로 생각하던 김택승은 깜짝 놀랐다. 주로 통화에 어쩌다 문자 좀 하는 걸로 그렇게 비싼 요금을 낼 수는 없었다. 김택승이 난처해하자 주방보조가 기기는 중고로 팔고 저렴한 휴대폰으로 바꾸라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래야겠지만 애써 사준 걸 팔기가 좀 그랬다. 생각지도 못한 고민을 떠안게 된 김택승은 일하는 내내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간신히 사용법에도 익숙해졌는데 바꾸고 싶지 않았다. 물건 욕심이 별로 없는 그로선 별난 일이다.
하지만 이리저리 알아보고 이박삼일 고민해본 결과, 역시 김택승이 내기에는 버거운 요금이었다. 결국 팔기로 결정을 내리고 하선연에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말도 없이 바꾼 걸 알게 된다면 아무리 그라도 섭섭해할 테다. 설령 섭섭해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말을 하는 게 도리일 듯 했다. 그런데 화랑이 휴가기간이라서 만날 일이 없었다. 전화를 하려니까 이런 일로 전화하기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핑계 같았기 때문이다.
실은 핸드폰을 바꾼 뒤 전화번호도 날려버리고 해서 한 번도 통화를 못해봤다. 딱히 전화 올 데도, 전화할 데도 없는 탓이었다. 그래서인지 제일 처음 번호가 등록된 하선연에게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결국 번호를 누르다 그만뒀다. 보통은 친구 사이도 아니고 애인 사이도 아닌 사람과 아무용건도 없이 통화하진 않으니까 말이다. 한데 막상 용건이 생기고 보니 오히려 전화할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 목적인지 불분명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마주칠 때까지 기다릴까 싶기도 했으나 너무 길었다. 휴가도 일주일씩이나 되는데 우연히 만나려면 대체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열흘이라 생각해도 멀고 보름이라 생각하면 아득하다. 항상 빨리 가서 걱정이던 시간이 이 경우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김택승은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고 저녁을 먹은 뒤 담배 한 대 피고 오겠다며 틈을 타 밖으로 나갔다. 열대야의 공기가 후덥지근한 가운데 이제는 손안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핸드폰을 들고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그리고는 하선연의 전화번호를 찾아서 꾹 눌렀다. 한데 왜인지 심장이 압 밖으로 뛰어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김택승은 결투라도 청하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들었다. 연결음이 길어져 끊어야 하나하고 갈등하던 차, 덜컥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김택……"
서둘러 입을 열던 김택승은 갈라지는 목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황급히 목을 가다듬노라니 저편에서 하선연이 불렀다.
- 김택승씨?
"네, 김택승입니다."
제 이름을 말한 뒤 용건을 잊어버리고 멍해진 김택승은 곧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닫고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런데 침묵이 길었던 탓일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미안하지만 지금은 좀 바빠서요,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아, 죄송합……."
니다, 라고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통화가 뚝 끊겼다. 동시에 제 맘속에서도 뭔가가 툭 끊긴 것 같았다. 뚜- 뚜- 뚜- 뚜- 반복되는 신호음을 멍하게 듣고 있던 김택승은 그 신호음마저도 멎고 나서야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그리고 그것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담배를 꺼냈다. 진짜로 담배 피우러 나온건 아닌데 갑자기 담배가 당겼다. 그런데 막상 피우기 시작하니까 연기가 매웠다. 말보로를 피는 주방보조에게 얻은 거라 평소보다 독했다.
김택승은 회색빛 연기가 섞인 기침을 연방 콜록거리며 코를 훌쩍거렸다. 그러다 따가운 눈가를 닦아내고는 담배꽁초를 발 밑에 떨어트렸다. 주워야 한다는 걸 알지만 왜인지 그러기 싫었다. 김택승이 발끝으로 꽁초를 툭 차고는 몸을 돌려 가게로 돌아갔다.
*
그 날은 참 이상했다. 밤새도록 일진이 사나워서 계속 사고를 쳤다. 손님 옷에 물을 쏟는가 하면, 포장은 놔두고 햄을 쓰레기통에 버린다던가 양상추를 뜨거운 물에 씻는다던가 하는 사소한 실수를 연발했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두던 주방장도 결국에는 짜증을 터트렸다. 식칼로 도마를 쾅쾅 쳐가며 소리를 치는데 강유형조차 말리지 못했다. 결국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가게가 마칠 때쯤엔 녹초가 되어버렸다. 뒷정리를 하고 장부정리를 하는 강유형에게 이만 돌아가겠다고 인사를 하니 목소리에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는지 괜찮으냐고 걱정을 해왔다. 김택승은 괜찮다고 애써 입가를 끌어올려 보이고 가게를 나섰다.
화랑에 들릴 필요 없이 곧장 집으로 돌아가 쉬면 되는데도 지하철로 향하는 발걸음이 느렸다. 이상하게 집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혼자 잠자고 밥 먹고 다시 가게로 출근하는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하철 역사에 앉아 지나는 사람을 구경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외국인, 어디론가 떠나는 듯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대학생, 뾰족한 힐을 신고 서둘러 지나치는 회사원,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고등학생…… 저마다의 삶에 바빠 김택승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택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데 왜 갑자기 엉뚱한 곳에 툭 떨어진 허전함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화랑 아르바이트를 안 가서 시간이 남는 탓에 이러나 보다. 날씨도 흐린데 쓸데없이 시간 까먹지 말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자고 생각하며 김택승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막 들어오는 전동차를 보고 플랫폼에 섰다.
그때, 귓전에 희미한 벨소리가 들렸다. 누가 전화를 이렇게 안 받을까 생각하다 뒤늦게 그게 제 벨소리임을 깨달았다. 핸드폰을 바꿔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김택승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으나 곧장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액정에 뜬 이름 세 글자 때문이었다.
서서히 전동차가 멈춰서는 가운데 김택승은 느리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김택승씨.
여상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자 순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전화해줬구나 싶어 반갑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 확실치 않은 가운데 하선연이 말을 이었다.
-아까 무슨 일로 전화하셨나 싶어서요.
"별일은 아닙니다. 그냥 핸드폰 때문에……"
-지금 어디에요?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출근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플랫폼으로 쏟아져 나오고 김택승은 차례를 기다려 전동차에 올랐다. 그러면서 "지하철요. 퇴근하는 길입니다."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하선연이 잘 됐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제 오피스텔로 올래요? 만나서 얘기하죠.
만나자고?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머뭇거린 김택승은 전동차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저도모르게 발걸음을 크게 내디뎠다. 정신을 차렸을 땐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전동차가 출발하고 공기가 진동하는 소음이 귀를 때렸다. 그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김택승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2002호입니다. 조금 후에 뵙죠.
전화를 끊고 김택승은 개찰구를 나섰다. 하선연의 오피스텔이 여기서 멀지 않아 버스를 타고 가는 게 빨랐기 때문이다. 차비를 버린 셈이 됐으나 크게 아깝지는 않았다. 그저 화랑 휴가가 끝날 때까지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전화로 말하는 것보단 얼굴 보고 말하는 게 낫지 싶어서 김택승은 가뿐해진 발걸음으로 출구의 계단을 올랐다.
잠시 후, 김택승은 하선연의 오피스텔에 당도했다. 2002호라고 해서 엘리베이터에 탔더니 버튼이 20층까지밖에 없었다. 제일 꼭대기 층이구나 생각하면서 막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누군가 기달려 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김택승은 열림 버튼을 누르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람을 기다려주었다. 곧 배달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종이로 포장된 큰 짐을 들고 탔다. 김택승도 배달기사를 해본 적이 있어서 남일 같지가 않았다. 몇 층으로 올라가느냐고 물어보니 고맙다고 인사하며 20층을 눌러달라고 말했다. 우연히도 같은 층이라 생각하면서 20층을 눌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데 배달기사가 말을 걸었다.
"20층에 내리세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엇, 하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혹시 2002호?"
어떻게 알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배달기사가 짐을 떠넘겼다.
"집에 안 계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잘 됐네요. 하선연씨한테 온 물건입니다."
"아니, 저는……"
하선연이 아닌데요, 라고 미처 말하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20층에 도착했다. 엉겁결에 짐을 떠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김택승은 "고맙습니다!" 하고 씩씩하게 인사한 택배기사가 닫힘 버튼을 누르는 걸 보았다. 수령인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가버리는 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2002호에 가는 길이기도 하고 정신없이 바쁜 처지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라 짐을 안은 채로 발길을 옮겼다. 부피는 적은데 크기가 커서 그런지 제법 무거웠다.
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아서 뭘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앞이 잘 안 보여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던 김택승은 어째서 택배기사가 자신이 2002호로 간다는 걸 쉬이 짐작했는지 깨달았다. 20층에는 오피스텔이 두 채뿐이었다. 2001호, 2002호 현관문 두 개가 호텔처럼 바닥에 카펫이 깔린 널따란 복도를 마주 보고 있었다. 건물이 꽤나 넓어 보이던데 오피스텔이라면서 왜 두 채밖에 없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헤멜 일은 없구나 하고 김택승은 2002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짐을 내려놓고 초인종을 눌렀으나 희미한 새소리만 들릴 뿐 인기척이 없었다. 한 번 더 초인종을 눌러봐도 마찬가지라 결국 핸드폰을 꺼냈다. 하선연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통화가 됐다.
"김택승입니다. 도착했는데……."
-아, 미안해요. 지금 가는 중입니다.
이른 아침에 전화해서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럼 밖에서 봐도 됐을 텐데 굳이 여기서 보자고 했는지 모르겠다. 벽에 기대둔 짐을 보면서 김택승은 혹시나 하고 물었다.
"사장님 앞으로 물건이 왔습니다."
-받으셨습니까?
"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집에 사람이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라서요. 경비실에 맡길 순 없는 물건이라……. 금방 도착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일단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지만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받게 하려고 굳이 오피스텔에서 보자고 했나 보다. 근처에 김택승이 일하는 가게가 있으니까 집에 가지 않았다면 가까이 있을 거라 예상했을 테다. 그럼 진즉 미안하지만 짐 좀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지, 괜히 도와주고도 억울했다. 김택승은 신발 뒤꿈치로 바닥을 툭툭 차면서 하선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좀체 나타나질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아 있노라니 슬그머니 졸음이 몰려왔다. 김택승은 헤드뱅잉을 하면서 꾸벅꾸벅 졸다가 벽에 뒤통수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희미하게 땡, 하고 엘리베이터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다른 층에서 나는 소린지 아닌지 몰라 쉽사리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저 무의식 속에서 카펫을 서벅서벅 밟으면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 발소리가 제 앞에 우뚝 멈춰 서고,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픽 웃는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옷깃 스치는 소리와 함께 턱에 뭔가 닿았다. 손인 모양이다. 그게 턱을 밀어 올려 반쯤 열려 있던 입술을 닫았다. 그렇지만 고개를 젖히고 있는 탓에 다시금 자연스레 입술이 벌어졌다. 곧 숨죽인 웃음소리가 지나가고 코가 꽉 꼬집혔다.
반쯤 의식이 돌아와 있던 김택승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긴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위로 들어 올리자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는 하선연이 보였다.
"아, 오셨어요."
뻑뻑한 눈을 끔벅거리며 인사하는 모습에 하선연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사과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차가 좀 막혀서요."
이상하다 싶어서 김택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출근 시간 지나서 차 안 막힐 텐데……."
그 말에 잠시 침묵한 하선연이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일단 침부터 닦으세요."
침까지 흘리면서 잤나 싶어 김택승은 황급히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축축하지도 않은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양손으로 번갈아 입가를 문지르는 모습을 모른 체하고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벽에 기대둔 짐은 미처 못 본 것처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김택승이 짐을 챙겨서 따라가야 했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보인 것은 제 옥탑방만큼 넓은 현관이었다. 차는 무리더라도 오토바이 한 대 정도는 너끈히 세울 정도였다. 신을 벗고 거실에 발을 들였을 땐 놀라움이 더했다. 무슨 운동장만 한 실내가 보여서 이게 오피스텔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오피스텔처럼 트인 구조기는 한데 복층인데다 워낙 평수가 넓어서 도무지 오피스텔로는 안 보였다. 이러니까 서울 시내 집값이 말도 안 되게 비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 입구에 우두커니 선 걸 보고 하선연이 뭐하냐는 듯이 돌아봐서 김택승은 제 소감을 털어놓았다.
"집이 참 넓네요."
하선연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래 봤자 오피스텔이잖아요. 화랑이 더 넓습니다."
그래도 화랑 위층 집은 방도 많고 가구도 많아서 그렇게까지 넓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이 집은 흰색인데다가 가구가 적어서 집이라기보다는 미술관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벽벽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 개중엔 김택승이 알만큼 유명한 것도 있어 막연히 비싸겠다는 생각을 주워 삼키며 가져온 짐을 내려놓았다. 앉으라는 말에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기다리노라니 잠시 후,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하선연이 김택승이 받아놓았던 짐의 포장을 벗기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것은 큼직한 그림이었다. 다름 아닌 밤 비행기였다. 왠지 모를 반가움에 김택승은 입을 열었다.
"이건……, 요전에 본 그림이네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하선연이 그를 보고 물었다.
"어디에 걸면 좋겠습니까?"
그의 집이니까 그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싶었으나 일단은 벽을 한 바퀴 둘러보고 적당한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가 좋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흠……."
그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심해서 김택승은 제가 가서 그림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림을 들고 벽에 대 보였더니 하선연이 "조금만 더 위로 들어봐 주시겠습니까." 라던가 "약간 더 옆으로 가주세요."라고 지시를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까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팔이 아파서 조금 힘을 빼면 곧장 "조금 내려갔습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와서 요령을 피울 수도 없었다. 한참 만에야 간신히 위치를 정해서 그림을 바닥에 내려놓자 다른 요구가 이어졌다.
"공구함은 뒷베란다 창고 쪽에 있습니다."
아마도 못을 박아 그림을 걸어달란 소리일 테다. 일이 이렇게 되리란 걸 아까부터 예감했던지라 그냥 군말 없이 뒷베란다로 갔다. 그러면서 그라는 사람에게 익숙해진 자신을 새삼 깨달았다. 이게 좋은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지만 못 하나 박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고 핸드폰 이야기를 꺼내려면 알아서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만 막상 공구함을 가지고 와 못을 박으려니 벽이 높아서 받침대가 필요했다. 김택승은 스툴을 끌어왔다가 높이가 낮은 걸 보고 식탁 의자를 가져왔다. 그걸 놓고 올라서서 전기드릴로 벽에 구멍을 뚫은 뒤 나사못을 끼워 넣고 그림을 걸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는 수평을 맞추기 어려워 그림을 붙잡은 채로 하선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로 걸렸습니까?"
그런데 바로 뒤에 서 있던 하선연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림을 붙잡고 있는지라 돌아볼 수도 없어 어디 갔나 하고 김택승은 그를 불렀다.
"사장님?"
"……흠."
대답 대신 모호한 소리를 내뱉은 하선연은 그림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어쩐지 옆구리가 간질간질한게 팔을 쳐든 탓에 드러난 맨살을 보는 모양이다. 흉터가 크게 남은 자리라서 그의 시선이 좀 신경 쓰였다. 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곳을 북북 긁기라도하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그러지도 못하고 재차 그를 불렀다.
"사장님?"
그럼에도 대답이 없어서 못을 잘못 박기라도 했나 하고 다시 그림을 들었다. 그때, 갑자기 옆구리에 뭔가 닿았다. 들려 있던 티셔츠 속으로 손이 들어와 상처를 만졌던 것이다. 깜짝 놀란 택승은 그림을 든 채로 휘청거렸다. 다행히도 옆구리를 만지던 손이 재빨리 허리를 받쳐줘서 어렵사리 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선 뒤에도 손은 빠져나가지 않았다. 천천히 손끝으로 상처를 더듬으며 위로 올라왔다.
손은 그림을 들고 발은 높은 곳에 선 채로 택승은 꼼짝을 못했다. 그림을 못에 걸면 손이 자유로워질 텐데 그 생각을 미처못했다. 그저 단단한 손가락이 엉겨 붙은 살갗을 누를 때마다 끼쳐오는 따끔거림과 간지러움에 흠칫거리는 어깨를 억눌렀다.
일전에 화랑에서 잤을 때도 유난히 흉터를 어루만지더니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한 번 크게 다쳤던 곳이라서 그런지 약점을 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그와 키스를 하거나 애무를 할때보다 더 긴장이 됐다.
어금니를 사려 물다시피 하고 있는데 흉터를 따라 갈비뼈를 세며 위로 올라오던 손끝이 유두에 닿았다. 이번에는 반응을 누르지 못하고 흠칫 허리가 튀었다. 동시에 손에 든 그림이 조금 미끄러졌다. 이러다간 액자를 떨어트리고 말겠다. 그것을 짐작한듯 유두에 닿은 손가락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티셔츠 아래로 빠져나갔다. 이어 무심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다시 걸어보세요. 이번엔 제대로 봐 드리죠."
"……."
택승은 입술을 달싹이다 도로 입을 닫고 그림을 걸었다. 하지만 신경은 여전히 그가 건드린 유두에 쏠려 있었다. 하다못해 팔을 움직일때마다 티셔츠에 쓸리는 느낌마저 적나라했다. 꼭 어딘가 간지러운것 같은데 어디가 간지러운지 찾을수 없을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선연은 태연하게 그림 위치를 조정했다. 한참 동안 왼쪽을 더 올렸다가 내렸다가 한 후에야 비로소 승낙이 떨어졌다. 의자에서 내려온 택승은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뒷걸음질을 쳐 하선연의 뒤에 섰다.
그리고는 소바닥으로 가슴을 꾹꾹 문지르다 그가 돌아보는 모습에 황급히 손을 내렸다.
"보기 좋네요.'
솔직히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택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제 표정이 이상해 보일까봐 서둘러 식탁의자를 제자리에 갖다놓고 공구함을 치웠다. 그러고 돌아오니 하선연이 주방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물었다.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액자를 들고 한참 끙끙거린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목이 말랐다. 시원한 거나 한잔 달라는 말에 하선연이 오렌지주스를 따라 자기고 왔다. 그런뒤 소파에 앉아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전화까지 할 정도면 중요한 일 같은데."
"아뇨.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냥 말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문을 연 택승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핸드폰 사주신건 감사하지만 요금이 너무 비싼것 같다. 괜찮다면 다른 폰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말하고 보니 참 궁색한것 같았다. 다른 폰으로 바꾸고 싶다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핸드폰 팔아도 되냐는 소리라니, 그냥 말 안할걸 그랬다고 답지않은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하선연은 선뜻 웃으면서 "사정이 그렇다면 어쩌겠습니까, 알아서 하세요" 라고 말했다. 자기가 사준 핸드폰을 어떻게 쓰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가 불쾌해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테 썩 마음이 놓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진짜로 핸드폰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견물생심이라고 생전에 안쓰던 좋은 걸 쓰니까 욕심이 났나 보다. 싼값에라도 하루빨리 팔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택승은 주머니에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용건이 끝났음을 깨닫고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하선연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택승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을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저분해 보이는 컨버스화를 신으면서 택승은 그에게 인사를 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등 뒤로 창이 보였다.
거실 한쪽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창밖이 잔뜩 흐렸다. 어째 비가 오는것 같아서 택승은 그쪽 눈짓하며 슬쩍 물었다.
"지금 비 오나요?"
그 말에 뒤를 돌아본 하선연이 몸을 돌려 창 쪽으로 걸어가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아까부터 날이 흐리다 싶더니 기어코 비가 오는 모양이다. 어째 올해는 유난히 비가 잦은 것 같다. 접이식 우산이라도 하나 사야겠다고 김백승은 말을 꺼냈다.
“죄송한데 우산 좀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비 좀 맞는 건 상관없지만 버스를 타야 해서 옷을 버리면 곤란하다. 그제야 하선연이 “아.” 하는 소리를 내뱉고 신발장을 열어 우산을 꺼냈다.
점잖은 갈색 체크무늬의 이단 우산이었다. 그것을 건네면서 그는 마치 진담처럼 말했다.
“대여료는 후불입니다. 반납하면서 내세요.”
이제는 그의 이런 말이 농담인 줄 알고 있었기에 김택승은 그러려니 하고 우산을 받아들었다. 대신 안녕히 계시라고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현관을 나섰다. 한데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로 발길을 옮기면서 생각해보니까 하선연이야 말로 줘야 할 우산 대여료가 있었다. 십 년 전 아무 말도 없이 우산을 빌려 간 적이 있었던 것이다.
장맛비처럼 굵직하게 내리는 비로 철쭉이 뚝뚝 떨어지던 열여덟의 어느 날 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꽃을 밟고 가기가 그래서 김택승은 요리조리 발을 피해 언덕을 올라갔다.
비 내리는 날씨가 제법 쌀쌀해 우산을 잡은 손끝이 차가웠다. 도서관에 도착해 우산을 접어두고 나서야 한결 차가움이 가셨다. 사람 없는 접수처에서 방문자 기록을 적고 안으로 발을 들이자 적막이 덮쳐왔다. 재단 소유의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다.
학생들이 전부 돌아간 방과 후에는 더욱 그랬다. 김택승 역시 자진해서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학년이 바뀌면서 새로운 담임에게 도서관 일을 하라고 지목당한 탓이다.
전부터 유독 이런 일에 지목이 잘 되는 그였다. 학급위원이라서기보다는 무언가를 시키는 게 핑계를 만들기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보답이라며 참고서나 문제집, 상품권 같은 것들을 손쉽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 딴에는 배려해주는 거겠지만 가끔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부모가 없어도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은 마치 그게 전부인 양 생각했다. 부모가 없어서 좋은 점도 있다고 여기는 건 김택승뿐인 듯했다.
어쨌든 김택승은 책장 밖에 나와 있는 책들을 제자리에 꽂기 시작했다. 주로 선생님들이 이용하는 곳이라서 평소엔 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한데 오늘은 누가 다녀갔는지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날도 춥고 해서 얼른 정리하고 돌아가려고 김택승은 책을 한꺼번에 안아 들었다. 그 상태로 까치발을 한 채 책을 끼우노라니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결국 받침대를 쓰는 게 나을 거 같아 구석에 있던 계단식 받침대를 끌고 왔다. 그리고 거기에 올라서서 책을 끼워 넣기 시작하는데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도서관에 남은 사람이 혼자라고 생각한 탓에 김택승은 끔쩍 놀라 하마터면 책을 다 떨어트릴 뻔했다. 그 동요가 겉으로 드러났는지 금방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미안.”
차분하면서도 가벼운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덕분에 같은 학생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당장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품에 안은 책이 무거운데다 받침대에 올라선 상태라 뒤를 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신을 부른 것 같아서 김택승은 용건을 물으려 했다. 그때 먼저 입을 연 목소리가 말했다.
“거기 있는 잡지…….”
잡지라는 말에 김택승은 제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낡아빠진 미술잡지가 그득 꽂혀 있었다. 그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등 뒤에서 아련한 빗소리에 섞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니, 그 옆에.”
그 말을 따라 이끌리듯 손이 움직였다.
“그 옆에…… 음. 더 옆으로.”
80년대서 어른거리던 손이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말하는 목소리가 멈추었다. 11월 호가 맞는지 몰라 책등을 잡은 채로 뜸을 들였으나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높은 곳에 올라서 있는 다리와 셔츠 자락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허리춤. 그리고 허공에 들어 올려 진 재킷의 끝단과 한껏 당겨진 팔. 짧아진 소매 위로 드러난 마른 손목에 이르기까지.
상대는 김택승의 아주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덕분에 등허리 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땐 그 울림이 피부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등골이 간지러웠다.
“그거 맞아.”
김택승은 낡은 잡지를 조심스레 빼내 뒤쪽으로 팔을 뻗었다. 곧 손에서 잡지가 사라졌고 페이지가 파라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제가 들고 있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으면서 김택승은 등 뒤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 잡지를 훑어보던 상대방은 그리 오래지 않아 탁 소리가 나게 표지를 닫았다.
“이제 됐어. 다시 가져가.”
대체 뭘 본 건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느끼며 김택승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실수로 잡지를 도로 주던 상대의 손까지 붙잡고 말았다.
석고처럼 서늘하고 건조한 손이었다. 당혹해서 퍼뜩 손을 뗀 순간, 높은 곳에 선 탓에 균형을 잃고 말았다. 더불어 한 손에 안고 있던 책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쏟아졌다.
낭패한 김택승은 서둘러 받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몸을 숙여 바닥에 흩어진 책을 줍기 시작했다. 그때 길고 매끈한 손 하나가 시야에 들어와 맨 처음 떨어졌던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게 내밀어 지는 걸 보고 김택승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젖은 머리칼을 늘어트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그 녀석이었다. 1반이던가 2반이던가. 동급생이라도 층이 달라서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마주했다기엔 어폐가 있나. 김택승이 내민 책을 받아들자 살짝 웃어 보이고는 “그럼.” 하고 곧장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책장 사이로 사라지는 그의 뒤통수를 김택승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동급생이라는 것 말고는 여전히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남은 것은 손에 든 잡지와 바닥에 흩어진 책뿐이었다.
김택승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묵묵히 책들을 정리해 들어 올렸다. 그러자 비 내리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우산 하나가 보였다. 우산을 높직하게 세우고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김택승은 불현듯 깨달았다.
‘저거 내 우산인데.’
금방 빗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려 확실하진 않았다. 그러나 책을 마저 정리하고 다시 현관으로 나갔을 땐 그 사실이 분명해졌다.
김택승이 우산을 세워두었던 우산꽂이는 텅 비어 있었다. 어쩐지 머리칼이 젖어 있더라니 우산이 없었나 보다. 김택승도 어쩌다 주운 우산이라 크게 아깝지는 않았다. 단지 비가 그칠 때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제자리에 꽂아두었던 잡지를 다시 빼들어 펼쳐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오래된 잡지에서 무엇을 보고 갔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페이지에 표시가 남은 것도 아니라 그것을 알아낼 순 없었다. 그런데 무심코 다른 호수도 꺼내 펼쳐본 순간 의아한 점이 발견됐다. 찢어진 페이지가 있었던 것이다. 평소 아무도 들쳐 보지 않는 거라서 막연히 그가 찢어갔으리라 짐작이 됐다. 이렇게 낡은 미술잡지에 관심을 두다니 의외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한편으로는 도서위원으로 곤란한 감도 있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기회가 되면 물어보고도 싶었으나 막상 다시 만났을 땐 그러질 못했다.
며칠 뒤, 장마가 끝나갈 무렵 여느 때처럼 도서관 청소를 마친 김택승은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듯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는데 일전의 일 때문에 우산이 없었던 것이다. 등교할 땐 적당히 누군가에게 얻어 쓰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돌아갈 때보니까 아무도 없었다.
방과 후 도서관 청소를 하고 가는 바람에 늦어버린 탓이다. 그렇다고 우산 좀 가져다 달라고 할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사는 다른 아이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내리는 기세를 보아하니 금세 그칠 것 같지 않아 그냥 맞고 가야 하나 고심하던 김택승은 저 밑에 낯익은 우산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 요전에 김택승이 잃어버린…… 아니, 뺏겨버린 우산이었다. 그 우산을 받쳐 들고 가는 뒷모습이 낯익었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가 틀림없는 그였다.
김택승은 잠시 망설이다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발밑에서 길 위로 흐르던 빗물이 튀어 오르고, 가방을 받쳐 든 팔뚝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비탈길을 달려 그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자 심장이 숨 가쁘게 펄떡거렸다. 거칠어진 호흡을 내뱉으며 가방을 내린 김택승은 눈을 휘둥그레 뜬 그를 볼 수 있었다.
비 오는 날의 어스름으로 물든 얼굴이 놀람으로 소란스럽다가 서서히 조용해졌다. 짙어진 눈동자에 왠지 모를 낯익음이 스치고 입가에 일종의 미소마저 떠오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등줄기가 간지럽고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김택승은 말없이 가방을 등에 멨다. 그리고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이거. 내 우산이야.”
“아아.”
애매한 대답을 흘리면서 제가 받쳐 든 우산을 올려다본 그는 불쑥 손잡이를 내밀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달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선뜻 받지 못해 주저하고 있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거라며.”
“어, 응.”
가져가란 재촉에 우산을 건네받은 김택승을 보고 그가 싱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집까지 별로 안 멀어.”
무슨 소린가 했던 김택승은 오래지 않아서 상황을 깨달았다. 여기서 우산을 가져가 버리면 비를 고스란히 맞게 되니까 우산이 있는 김택승이 바래다 줘야 한단 뜻이었다.
우산 좀 같이 쓰려다 일이 귀찮게 되어버렸다. 버스 정류장까지만 씌워주고 네가 가져가라 말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오히려 우산을 꼭 돌려주겠다는 심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여간 집도 가깝다 하고 우산도 필요하니까 그를 바래다주기로 했다.
김택승은 우산을 받쳐 든 채로 그와 함께 교문을 향해 걸었다. 한 우산 속에서 말없이 걷자니 좀 어색했다. 그렇지만 상대는 딱히 불편해하는 것 같지 않아 굳이 말을 건네진 않았다. 그냥 잠자코 발길을 옮겨 교정을 걸었다.
어둑해지려는 운동장엔 운무가 내렸고 빗방울이 호기심 많은 고양이처럼 우산을 툭툭하고 쳐댔다. 이따금 맞닿은 어깨에서 옷 스치는 소리가 났고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축축한 바람을 타고 흘러와 귓전을 스쳤다. 오른손으로만 우산을 들고 있었더니 팔이 아파서 김택승은 왼손으로 우산을 바꿔 들었다. 그러자 무심한 목소리가 한마디 했다.
“비 들이쳐.”
김택승은 하는 수 없이 우산을 도로 오른손에 들었다. 이에 만족했는지 어쨌는지 그가 희미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웬 노랜가 했더니 반대쪽 귀에 이어폰을 한쪽 꽂고 있었다. 그가 무슨 노래를 듣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빗소리에 띄엄띄엄,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고 흘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교문을 지나 도로를 건너 사위가 어두워지고 거리 곳곳에 가로등이 밝혀질 때까지 그와 함께 걸었다.
그의 집은 생각보다 멀었다. 가깝다고 하더니만 순 거짓말이었다. 체력엔 자신 있는 김택승조차 다리가 아프다고 느낄 정도였다. 보석상자처럼 번쩍거리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발길을 늦춘 그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우산 쓸 거야?”
눈을 둥그렇게 뜬 김택승은 그제야 비가 그친 것을 알았다. 우산을 옆으로 젖히자 비 대신 바람이 스치는 밤하늘이 드러났다. 대체 언제 그친 것일까.
그것도 모르고 그와 줄곧 같은 우산 속에 있었다. 그게 좀 낯부끄럽고 머쓱해 김택승은 얼른 우산을 접었다. 그리고 쑥스러움을 달래려 입술을 질근거렸다. 그걸 보고 살짝 미간을 모은 그가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무심결에 입술을 물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김택승은 깨물던 입술을 놓았다.
곧이어 같이 사는 여동생 중 한 명이 찔러준 입술 보호제를 떠올리고 그걸 꺼내서 발랐다. 그런데 입술에 뭔가를 바르니까 끈적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또 입술을 빨고 있노라니 그가 툭 하니 물었다.
“맛있어?”
맛있을 리가 없다. 김택승은 고개를 젓고 대꾸했다.
“아니…… 크레파스 맛인데.”
크레파스 맛이라는 소리가 우스웠는지 어쨌는지, 그는 흘리듯이 웃고는 몸을 돌렸다. 인사라도 할 것처럼 서 있더니만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치 내일 또 볼 것처럼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김택승은 맘속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가라는 말이었는지 내일 또 보자는 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우산을 손에 든 채로 멀거니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막상 걷기 시작했을 땐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맞지 않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돌아가는 길엔 비가 오지 않았다.
도리어 날이 개어 별이 하나둘씩 뜨기 시작했다. 그 하늘을 바라보고 우산을 흔들면서 김택승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어렵게 받은 우산을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동생들이 쓰고 다니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와의 관계 역시 그러했다. 같은 반이었던 적도 없고 이동수업을 할 때조차 교실이 겹치지 않았다. 몇 번의 마주침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아마도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기억 속에 묻혀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지독히도 춥던 졸업식 날, 김택승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리고……
‘고마워.’
빗속을 걸어 정류장으로 가면서 김택승은 새삼스레 그 편지를 떠올렸다.
그는 유학을 떠났고 일말의 접점조차 없어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여태까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한데 만일 그 편지의 대답이 긍정적이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아마 지금 같진 않았을 테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지금이기에, 십 년이나 지나 다시 만난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십 년이라는 공백에 마음이 자작해졌다. 많은 것이 사라지고 많은 것을 잊고 살았다. 그것을 메우듯 내리는 비가 고스란히 제 가슴에 고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김택승은 걸음을 옮겼다.
*
핸드폰은 금방 팔렸다. 눈독을 들이던 주방보조에게 저렴한 값으로 넘겼기 때문이다. 대인배가 따로 없다면서 주방보조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고마움의 표시로 인터넷에서 김택승이 쓸 핸드폰을 사다 주었다.
최신기종은 아니라도 나름대로 좋은 휴대폰이었다. 이 정도면 전에 쓰던 휴대폰처럼 어디 내놓기 부끄럽진 않을 거라고 농담을 했다. 김택승도 그가 사다 준 핸드폰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전처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계속 만지작거리거나 수시로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어쨌든 하선연이 사준 핸드폰이 워낙 고가라 헐값에 팔고 새 핸드폰을 샀어도 돈이 제법 남았다. 요전에 아르바이트한 비용까지 생각하면 검사비를 메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덕분에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으나 그 기분은 오래가질 못했다. 잦은 비로 인해 벽에 물이 새기 시작하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전화해서 집주인을 불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집주인은 “어머. 이걸 어째~!” 라면서 전에는 멀쩡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없이 돌아가 버렸다.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 같아 손수 신문지를 발라 손을 봤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호우가 내리거나 태풍이 칠 때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일단은 비가 적게 오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윽고 가게 일을 마치고 월요일이 되어 화랑으로 향할 땐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밤새 일해서 소금에 절여진 것처럼 피곤한데도 잠이 안 왔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다 지나치는 풍경이 낯익음을 느꼈다. 그 낯익음에 화랑에서 일한 지도 벌써 한 달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벌써 한 달이 아니다. 고작 한 달이다. 그런데도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 하선연과 그랬다.
조금 후에 화랑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레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어떤 사이인지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단순한 동창이라거나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그렇다고 친구는 아니고 연인은 더더욱 아니다. 하선연은 둘째치고 김택승부터 그가 자신에게 있어 어떤 위치인지 모르겠다. 그와의 관계는 여태까지 김택승이 겪어온 모든 관계와 달랐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무얼까 고민하던 김택승은 가는 한숨을 내뱉었다. 굳이 뭐라고 단정 지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선연은 그냥 하선연이다. 동창도 상사도 친구도 연인도 아닌 그냥 하선연. 그거면 됐다는 생각에 김택승은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목적한 역에 도착해서 담쟁이넝쿨이 드리운 담을 따라 걸어 화랑으로 들어서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햇살이 내리는 정원은 언제나처럼 조용했고 오도카니 선 건물은 말없이 김택승을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간 김택승은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휴게실의 소파는 비어 있었고 에어컨도 꺼져 있었다. 나중에라도 누군가와 마주치지나 않을까 싶어서 김택승은 바깥을 주시하며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나 청소를 마칠 때까지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일주일 만에 온 건데 그냥 청소만 하고 돌아가려니 괜스레 허전했다. 하선연에게 줄 것도 있고 해서 김택승은 쓸데없이 미적거렸다. 그러자 현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걷는 구두 소리에 귀가 퍼뜩 뜨였다. 휴게실 밖으로 고개를 내민 김택승은 현관에 선 낯익은 인영을 보았다.
“어머, 택승씨! 아직 있었네요.”
그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은 이함은이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한 김택승은 머쓱해서 귀를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신은 구두를 확인했다. 분명히 힐을 신고 있는데 왜인지 그 소리를 남자 구두 소리로 착각했다. 덕분에 하선연인 줄 알았다.
이함은은 운전사 노릇 하는 동안 별일 없었느냐고 물어왔다. 김택승이 벤츠를 고랑에 빠트렸다고 말하자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까르르 자지러졌다. 그러면서 자기도 차 때문에 고생이었다고 떠들다가 김택승을 보고 말문을 흐렸다.
“택승 씨?”
“……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김택승은 뒤늦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함은을 발견하고 급히 사과했다.
“아, 미안합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뇨. 딱히 무슨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반응이 영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네. 나 섭섭해요.”
이함은이 짐짓 투정부리듯 하는 소리에 김택승은 조금 찔리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상대가 그녀란 걸 확인하자 실망감 비슷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함은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반가움보다 그 기분이 앞섰다. 그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순간 멍해졌던 것이다.
재차 사과한 김택승은 대신 관심을 기울여 휴가 잘 보내셨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이함은은 언제 섭섭했냐는 듯 휴가지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얼마간 앉아 있었으나 더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저기, 이거 사장님께 빌린 겁니다. 대신 전해주세요.”
만나게 되면 직접 주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언제 마주칠지도 모르고 그냥 돌려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함은은 알겠다면서 흔쾌히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화랑을 나서자 어느새 들떴던 마음이 우유 거품 꺼지듯이 사라져 있었다. 도착하기 전 좋았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라앉았다.
마치 뭔가를 잔뜩 기대하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기분이었다. 의아한 건 스스로도 대체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화랑은 변함없고 이함은도 만났으니 보지 못한 건 하선연뿐인데 항상 화랑에 있는 사람이 아니니 없는 것도 당연하다.
시무룩해질 이유가 하등 없다고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대여료 대신 챙겨온 걸 꺼냈다. 바로 딸기 맛 막대사탕이었다.
담배 대신에 먹는다고 하기에 일부러 딸기 맛으로 고르느라 슈퍼에서 한참 동안 사탕 통을 뒤적거렸는데, 쓸데없는 수고였다. 자신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김택승은 껍질을 벗기고 사탕을 입안에 집어넣고 와작와작 깨물어 먹었다.
덕분에 입안에 단맛이 가득 찼지만 왜인지 전만큼 맛있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그 단맛이 떫어지는 것을 느끼며 김택승은 집을 향해 재촉할 것도 없는 걸음을 재촉했다.
*
“너 무슨 일 있지?”
불쑥 던져진 질문에 김택승은 넷북을 들여다보던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바 건너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강유형이 빤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가 만든 자동계산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피고 있던 김택승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요.”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김택승의 하루는 여전했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로 출근해서 일하고, 화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잠드는 일상. 크게 좋을 것도 없지만 크게 나쁜 일도 없는 나날이었다. 달라진 거라곤 날씨 정도……?
입추와 말복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덥다지만 올여름 내도록 옥탑방에서 지낸 김택승에게는 1, 2도 차이도 크게 느껴졌다. 이젠 자다가 너무 더워서 찬물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자는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강유형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뭐가 있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모으더니 커피잔을 내려놓고 캐물었다.
“병원에서 뭐라고 해?”
“별로…….”
수술에 관해서 생각해보겠다고 답한 뒤로는 가보지 않아서 말할 일이 없었다. 사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치고는 멀쩡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넷북을 그에게 돌려줬다.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강유형은 그러냐고 대꾸했지만 넷북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김택승을 노려보다시피 한 채로 서 있더니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니,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어.”
김택승은 자신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아는지 의문스러워서 물었다.
“왜요?”
“그냥 느낌이 그래.”
그냥 느낌이 그렇다니까 반박할 말도 없고 해서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라 너무 아무 일도 없는 게 일이라면 일이었다. 턱을 긁적이던 김택승은 그나마 맘에 걸렸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핸드폰 팔지 말걸 그랬다 싶기는 해요.”
“그, 핸드폰 망가트렸다는 사람이 사준 거 말이야?”
“네.”
강유형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인 김택승은 차라리 모르는 사람에게 팔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주방보조에게 팔아놓고 막상 보란 듯이 가지고 다니며 쓰는 모습을 보니까 답지 않게 후회가 됐던 것이다. 아무리 준 사람이 그러라고 했다 해도 돈을 받고 파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강유형이 미간을 모으고 물었다.
“왜, 사준 사람이 팔았다고 뭐라 그래?”
“아뇨, 팔기 전에 물어봤습니다. 그러라고 해서 판 거예요.”
“그럼 문제 될 것도 없잖아.”
“아니 그냥 제가…… 아까워서요…….”
쓸데없는 욕심인가 싶어 말꼬리를 흐리던 김택승은 강유형의 얼굴이 찌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뭐가 엄청나게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짓고 있어 역시 괜한 물욕이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강유형이 독심술사라도 되는 것처럼 툭하니 내뱉었다.
“핸드폰 사준 거, 네가 다니는 화랑 주인이지?”
어떻게 알았나 싶어서 김택승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걸 보고 강유형이 괜히 말했다는 듯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네 녀석이 아무한테나 그런 걸 덥석 받을 것 같진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화랑에 다니면서부터…….”
무슨 얘길 하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째 강유형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딴청을 피우려는 것처럼 넷북을 들여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사람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렇게 대꾸한 김택승은 불현듯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왠지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다기엔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딱히 무슨 일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걸 설명하지 못하고 김택승은 몸을 돌려 제가 마시던 커피잔을 주섬주섬 씻었다. 그리고 강유형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말했다.
“그럼 전 오픈 준비하겠습니다.”
강유형은 그런 김택승을 보고도 별말 하지 않았다. 그냥 굳은 표정으로 넷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뒤로하고 김택승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음을 번잡스럽게 하는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바닥을 닦고 의자를 내리고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렇지만 소란스러워진 기분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
다음날 화랑으로 출근하는 길에는 추적추적 찬비가 내렸다. 덕분에 한여름이라지만 아직 좀 추웠다. 얇은 티셔츠 한 장만 입은 탓에 더 그랬다. 빨리 비를 피하려고 김택승은 우산을 받친 채로 잰걸음을 쳤다.
이윽고 화랑에 도착해 우산을 접었을 땐 축축해진 살갗이 차가웠다.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자 떨어진 빗소리 대신 정적이 찾아들었다.
괜스레 어둑한 화랑을 한 바퀴 둘러본 김택승은 적막함을 느꼈다.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매일 일하는 곳임에도 낯설어 보였다. 비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한 김택승은 괜한 기분을 떨치려 서둘러 청소를 시작했다.
밀대부터 빨아놓고 청소기를 밀려고 화장실로 갔는데 어째 하수구에 물이 잘 내려가질 않았다. 그래서 창고로 가서 하수구 용액을 갖고 와 부어놓았다. 덕분에 배수관이 뚫릴 때까지 물을 쓸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밀대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 뒤뜰의 수돗가를 찾았다.
거기서 치덕치덕 밀대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 뒤뜰의 수돗가를 찾았다. 거기서 치덕치덕 밀대를 빨고 있노라니 고등학교 때가 생각났다. 도서관 청소 때문에 매일같이 수돗가에서 밀대를 빨곤 했었는데…… 그러고보니 거기에서 하선연과 만난 적이 있었다.
아마도 막 장마가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어 긴 팔 교복이 반팔로 바뀐 무렵이었다. 태양 볕이 따가워지는 점심시간. 김택승은 도서관 바닥을 닦아놓고 밀대를 빨러 수돗가로 갔다.
도서관 일을 미리 해놓고 방과 후엔 아르바이트를 갈 참이었기 때문이다. 수돗가로 가자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초여름에 걸맞은 햇살이 내리쬐었다.
더워서 밀대를 기대놓고 재킷을 벗은 김택승은 옷을 펜스에 걸어두려 했다. 한데 벌써 누가 재킷을 펜스에 걸어두고 수돗가 반대편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일전에 김택승의 우산을 가져가 버린 녀석이었다. 갈색 빛이 도는 가지런한 뒤통수가 영락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줄 것이 있던 김택승은 아쉬움을 느꼈다. 이름을 모르는 탓에 마주쳤을 때 줘야 하는데 하필 교실에 두고 나왔다. 그냥 줄게 있다고 몇 반이냐 물어봐도 되겠지만 이상하게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철벅거리며 목덜미를 씻던 그가 갈색 눈동자를 들어 물끄러미 쳐다봐왔음에도 그랬다. 그저 멀뚱하게 마주 보다 잠자코 몸을 돌려 밀대를 놔둔 반대편 수돗가로 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어놓고 철벅철벅 밀대를 빨면서 김택승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크게 활발하진 않지만 딱히 내성적이지도 않아서 사람 사귐에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만큼 얼굴을 익혔으면 말 붙이는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서로 상성이 안 맞나보다고 생각하며 김택승은 밀대를 빨다 말고 쏟아지는 물을 멍하게 응시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놀라서 앗 하는 소리를 내뱉자 수돗가 저편에서 소리 없이 웃는 기척이 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재킷을 챙겨 멀어지고 있었다. 언뜻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김택승은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뒤늦게 자신을 향한 장난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뭐냐고 화를 내거나 같이 물 좀 뿌려주고 능청스레 말을 걸었다면 좋았을 텐데,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넋을 놓고 있던 김택승은 신발이 축축해지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수도꼭지를 잠갔다. 수도꼭지에서 손을 떼고 다시 고개를 들자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단순히 충동적으로 장난을 친 걸까 아니면 나름대로 아는 척을 한 걸까. 어쩌면 이쪽의 반응을 기대하고 자연스레 대화를 트려 한 건데 눈치가 없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느냐는 생각에 김택승은 밀대를 꾹꾹 밟아 짠 뒤 도서관 뒤쪽 해가 잘 드는 곳에 세워놓았다. 그런데 교실로 돌아가려고 보니까 재킷을 수돗가에 둔게 생각이 났다. 김택승은 발길을 돌려 수돗가로 돌아가 펜스에 걸쳐진 재킷을 되찾았다. 마침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려 그대로 발길을 서둘렀다.
덕분에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졸음이 밀려오는 5교시가 시작된 후였다. 졸음과 씨름하다 보니 조금 으슬한 것 같아서 재킷을 껴입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어째 품도 크고 소매도 남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 옷과 바뀐 것 같았다. 바뀔 틈이 있었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 재킷을 벗은 것은 점심시간뿐이었다.
수돗가에서 재킷을 벗어 펜스에 걸쳐둘 때 재킷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도 그가 바꿔 들고 갔나 보다.
이제 싫든 좋든 그를 찾아가야 했다. 김택승은 잊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이 있나 싶어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다 손끝에 잡히는 것이 있어 꺼내보았다. 그것은 이름표였다. 촌스럽게 선명한 노란색의 이름표에 까만 이름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 선 연
이런 이름이었구나……. 다른 아이들이 부르는 걸 들어본 것 같았다. 이름에 같은 받침이 두 개라니 특이했다. 하선연, 선연. 가만히 그 이름을 뇌어보니 어쩐지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 이름표를 넣어놓고 김택승은 재킷을 도로 벗었다. 조금 썰렁했지만 남의 재킷을 입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던 것이다. 치수가 커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똑같은 교복인데도 엄청나게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이 기회에 그걸 줄 수 있겠다 싶어서 김택승은 연습장에 잘 싸둔 종이를 확인해보았다. 바로 일전에 그가 들여다보던 미술잡지였다. 안보는 잡지 중 일부를 정리한다고 해서 그가 필요할 것 같은 페이지를 찢어 두었는데 마침 잘 됐다. 그렇지 않아도 건넬 기회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택승은 깨끗하게 접은 종이를 그의 재킷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쉬는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재킷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섰다. 같은 층이 아닌 걸 보면 아마도 윗반인 듯했다. 우선 위층으로 올라가 대강 살펴보자는 생각으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그때였다. 머리에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하얀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새것과 다름없이 깨끗한 운동화였다. 그것을 보고 계단을 내려오던 사람과 마주친 것을 깨닫고 김택승은 무의식적으로 비켜갔다. 한데 상대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서 멈칫했다. 다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니 또 앞을 가로막는다. 당혹해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 안에 역광이 뛰어들어왔다. 덕분에 목소리가 먼저 귓속을 파고들었다.
“네 거지?”
이어 풀썩, 하고 무언가 얼굴에 덮어씌워 졌다. 김택승의 재킷이었다. 머리에서 그것을 끌어내리자 나란히 선 녀석이 보였다. 이젠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하선연이다. 그의 도톰한 입술 밖으로 하얀 막대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동시에 달착지근한 냄새가 났다. 낯익은 냄새였다.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서 나는 단내였다.
그래서 김택승은 항상 주머니에 막대사탕을 넣어 다녔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입안에 든 것을 쪽쪽 빨면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재킷을 순순히 건넨 김택승은 그 자리에서 곧장 재킷을 걸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입안에 든 딸기 맛 사탕을 빼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건 대여료.”
달큼한 냄새를 풍기며 웃은 그는 가볍게 계단을 올라가 사라졌다. 계단의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그 모습을 금세 감추었다.
서서히 북적거리는 소음이 재차 들려오고, 계단을 뛰어가던 누군가의 팔에 부딪쳐 김택승은 난간 옆으로 비켜섰다. 손에 움켜쥔 재킷을 보노라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대여료라니, 그거라면 말도 없이 우산을 빌려 갔던 그가 내야 할 판국이었다.
사탕 하나를 갖고 억울해하는 것도 웃겨서 김택승은 잠자코 재킷에 팔을 끼웠다. 그러다 문득 의문을 느꼈다. 김택승의 재킷에는 이름표가 없었다. 어제 빨래를 해서 깜박하고 달지 않은 탓이다.
한데 어찌 알고 갖다 주려 한 걸까. 재킷을 갖고 계단을 내려오던 걸 보면 분명히 자신을 찾아오던 길이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딱히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가만 생각해보니까 역시 물장난은 아는 척을 하려던 거였나 보다. 딴엔 수줍음을 탄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중 문득 머리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앗.”
짧은소리를 내뱉으며 어깨를 움츠린 김택승은 어디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등 뒤에서 새나오는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그곳에서 한 손에 우산을 든 하선연이 젖은 손을 털면서 웃고 있었다. 과거 수돗가에서 장난을 걸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련한 듯 묘한 감상이 스쳐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마른 것 같기도 하고, 못 보던 사이 머리를 자른 탓에 한들한들하던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어디 해변에라도 다녀왔는지 살갗도 약간 탄 것 같았다. 불쑥 나타난 그를 찬찬히 살피던 김택승은 매우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실제로도 오랜만이긴 했다. 휴가가 끝나고도 몇 주, 더위는 채 가시지 않았지만 이제 가을의 길목에 섰던 것이다.
그런데 반갑기보다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커피를 많이 마셔서 속이 약간 울렁거리는 느낌과 비슷했다. 제 기분을 가늠하지 못한 채로 김택승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런 뒤 마주 고개를 까닥인 하선연과 얼굴을 맞대자 예상치 못한 어색함이 뒷덜미를 긁었다.
오래간만이라서 그런지 어째 좀 서먹했다. 그래서 괜히 밀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답지 않게 불쑥 말을 걸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정확히는 너무 늦게 돌아온 겁니다.”
김택승이 말을 걸어올 것을 짐작하지 못한 듯 약간 멈칫한 하선연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비가 와서 빨리 돌아오려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어젯밤에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밤새도록 돌아다녔으면 적잖이 피곤할테다. 피곤한 사람 붙잡고 서먹해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일이나 마저 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 김택승은 밀대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젖은 우산을 아무렇게나 밖에 던져놓은 하선연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신발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탕비실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곳부터 닦으려고 따라 들어간 김택승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거긴 하지만 여기서 보리라곤 생각지 못한 탓이다. 솔직히 말해서 참 뜬금없었다.
개수대 하나까지 세련되게 꾸며진 화랑이라 마치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대체 이게 웬 걸까 하고 멍하니 쳐다보는데 그 모습을 발견한 하선연이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든 채 말했다.
“코코아도 됩니다.”
……자랑하는 투로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커피자판기에 코코아 나오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 그보다 갑자기 왜 커피자판기를 갖다 뒀는지 모르겠다. 화랑 탕비실에는 커피메이커도 있고 좋은 원두가루도 있다. 손님을 대접할 차 종류라면 찬장에 그득한 걸로 아는데 뭐 하러 어울리지도 않는 커피자판기를 갖다 놨을까.
의문에 휩싸인 김택승을 향해 하선연이 말했다.
“한 잔 드시겠습니까?”
권하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고 해서 김택승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커피자판기 앞으로 간 하선연이 당연하다는 듯 척하니 손을 내밀었다. 김택승은 그 손과 자판기를 번갈아 보고 그럼 그렇지 하는 기분이 되어 물었다.
“얼마입니까?”
“300원입니다.”
한 치의 민망함도 없이 그리 말하는 하선연을 보고 김택승은 잠시 밀대를 내려놓고 바지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찾아냈다. 개중 300원을 집어 건네자 손바닥의 동전 세 개를 힐끗 본 하선연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덧붙였다.
“혼자만?”
“…….”
혼자만 마시는 게 예의가 아니긴 했다. 그러나 자판기 주인이 그리 말하니 300원을 더 꺼내는 손길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강탈 아닌 강탈을 한 하선연은 600원을 자판기에 넣고 정중하게 주문을 받았다. 헤이즐넛인지 밀크커피인지 코코아인지 묻는 말에 집으로 돌아가 잘 요량으로 코코아를 주문한 김택승은 곧 종이컵에 담긴 코코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밀크커피를 빼든 하선연과 난데없는 티타임을 갖게 됐다.
설탕이 미처 다 녹지 못할 만큼 달디단 코코아를 마시며 김택승은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리는 하선연을 곁눈질했다. 분명히 예전에 식당에서 권했을 때만 해도 내키지 않아 하는 눈치더니,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종이컵을 물고 있었다. 설마 그때 맛본 커피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자판기를 들여놓은 건 아니겠지. 무심결에 생각한 김택승은 의혹이 깊어지는 걸 느꼈다.
그거 말고는 손님도 안 오는 화랑에 자판기 커피를 들여놓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짐작이 맞는다면 참……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의외성이 이상하진 않았다. 오히려 신선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라면이나 자판기 커피를 잘 먹는 게 그리 신선할 이유는 없었다. 대중의 기호에 맞게끔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한데도 하선연의 반응은 새롭게 느껴졌다.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코코아 마시는 것도 잊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목이 길게 드러나는 티셔츠에 실내복 느낌의 면바지를 입은 모습이 비가 자작하게 내리는 배경에 잘 어울렸다. 사방에서 풍기는 비 냄새와 커피향기가 뒤섞여 코끝이 달달해 김택승은 제가 마시는 것이 코코아인지 커피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다 종이컵을 비운 하선연이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반사적으로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굳이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마치 그가 아닌 바깥을 보고 있던 척을 하게 됐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눈이 마주치는 것보다 더 티나는 행동이었을 테다. 덕분에 뺨이 뜨끈해졌다.
감정적인 동요를 숨기려 김택승은 애써 미간을 모으고 비 내리는 풍경을 쳐다보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무성한 나뭇잎 아래 비를 피하고 있는 새 한 마리였다. 갈색 깃털에 흰 가슴이 볼록한 모습이 이름은 몰라도 흔히 봐온 텃새 같았다.
별거 아니라지만 김택승은 옆얼굴을 훑어 내려가는 하선연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쳐다보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건 이상하고 그렇다고 간지러운 시선을 계속 무시하기도 힘들어 어떻게든 그의 주의를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입술을 모으고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휫휫거리는 소리에 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광경을 하선연도 보았는지 마침내 그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속으로 안도한 김택승은 연이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휙 휫휫휫 휘이익
새소리와 흡사한 휘파람 소리에 새는 머리를 기웃거리고 꽁지를 흔들어댔다. 그러다 저도 부리를 열어 무어라고 지저귀기 시작했다. 날카롭고도 맑은 새소리가 빗줄기를 가르고 들려오자 하선연이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뇌까렸다.
“휘파람을 잘 부시는 군요.”
“잘 부는 건 아니고…… 보통입니다.”
“흠, 그럼 전 보통이 아닌가 보군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에 김택승이 “네?” 하고 대꾸하자 흘깃 시선을 준 하선연이 말을 이었다.
“혀 마는 거 됩니까?”
김택승은 당연히 되는 거 아닌가 하고 혀를 동그랗게 말아보았다. 그걸 보고 하선연이 제 입을 손가락질 했다. 한데 그의 혀는 오목하게 파일 뿐 김택승처럼 동그랗게 말리지 않았다. “어.” 하는 소리를 낸 김택승은 어렴풋하게 초등학교 시절 자연 시간에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간혹 혀가 말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던 것 같다.
“이게 안 돼서 휘파람을 못 붑니다.”
하선연의 말에 그렇구나 생각하던 김택승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말했다.
“그럼 이것도 안 됩니까?”
“뭐가요.”
“혀를 떠는 거요. 봉쥬르르르르르르.”
김택승이 혀를 한껏 떨며 소리를 내자 미간을 찡그린 하선연이 곧장 따라해봤다.
“봉쥬……르르르?”
“아뇨, 르르르르르하고 혀를 이렇게……”
“봉쥬르?”
안 되는 모양이다. 하선연은 입을 우물거리며 혀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진지하게 방법을 일러주며 시범을 보이던 김택승은 문득 하선연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애를 쓰는 걸 보고 이 상황이 어이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열을 올릴 일이 아닌데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씨름하는 하선연이 왠지 웃겼다. 결국 김택승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비죽거리다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푸훗……”
그러자 입술을 움직거리던 하선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놀란 듯 눈을 약간 크게 뜨고 김택승을 쳐다봤다. 뺨을 부풀린 채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느라 김택승은 그 모습을 뒤늦게 발견했다.
곧 휘둥그레진 시선을 깨닫고 머쓱함을 느끼며 들어 올렸던 입꼬리를 내렸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나서도 하선연의 눈길은 쉬이 거두어지지 않았다.
어색함을 참지 못한 김택승이 한손을 들어 올려 뒤통수를 긁적일 때까지도 뭐 괴상한 거라도 본 사람처럼 김택승을 뚫어져라 봤다. 설마 비웃는 거로 생각해 기분이 나빠서 저러나 싶었던 김택승은 뒷덜미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눈꺼풀을 살짝 찡그린 하선연은 문득 한 손으로 턱을 살짝 괴었다. 그리고 고심하는 표정으로 김택승을 찬찬히 살피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뇨, 한데……”
무슨 소릴 하려는지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린 그는 말을 고르는 듯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툭 하고 내뱉듯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웃으니까 이상하네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김택승은 눈을 끔뻑거렸다. 웃는 모습이 이상해 보인다는 건가? 아니면 웃음소리가 이상하기라도 했나? 웃으니까 보기 좋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이상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본 터라 김택승은 조금 민망해졌다.
별로 타인이 가타부타하는 말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님에도 그랬다. 웃긴 일이지만 마치 콤플렉스를 자극받은 열다섯 소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리를 뜨고픈 맘에 빈 종이컵을 버린 뒤 밀대를 잡고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전 이만 청소하겠습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피하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새삼 지나치게 솔직한 성격을 탓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어깨가 붙잡혔다. 찰나였지만 강한 힘이었다. 어쩐지 단호하게 멈춰 세워져 김택승은 뒤를 돌아보았다. 김택승은 그게 자신의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시선을 모로 둔 표정이 비단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김택승보다는 본인의 생각이나 기분에 더 주의를 두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시간을 끌다가 그렇게 말한 하선연은 곧 손을 내리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덧붙였다.
“그냥 조금 이상하다구요.”
진짜 이상한 건 아니고 조금 이상하다니. 어차피 이상하다는 소리 아닌가. 변명도 아니고 핑계도 아닌 소리를 한 하선연은 자기가 한 말이 모순적이라는 걸 깨달은 듯 미간을 모았지만 금세 뭐 어떠냐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손을 홰홰 저어 보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핸드폰 벨소리에 몸을 돌렸다.
하선연이 저만치로 가버리고 혼자 남은 김택승은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었다. 같은 나라 말로 하는 소리가 이렇게 이해가 안 되다니, 당최 뭔 소리를 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제 일을 하려고 청소를 시작한 김택승은 화랑을 오가는 내내 전에 없던 행동을 했다. 유리창에 제 모습이 비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쳐다보게 됐던 것이다. 정확한 뜻은 몰라도 이상하다는 말만은 뚜렷이 남아 진짜로 웃는 모습이 이상한가 싶었다. 하여튼 칭찬은 아닌 것 같아서 더 맘이 쓰였다.
김택승은 쓸데없이 멋쩍은 기분을 떨치며 대걸레로 바닥을 꾹꾹 밀었다. 그동안 하선연은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간간이 대꾸만 하는 게 일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웬 통화를 저리 길게 하나 싶어서 그를 슬쩍 쳐다본 김택승은 헛손질을 했다. 덕분에 허리를 삐끗할 뻔하고 황급히 자세를 바로했다.
바보 같은 행동을 했음을 깨닫고 창피해하며 다시 걸레질을 시작했으나 영 건성이었다. 바닥의 얼룩 대신 다른 데 관심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러려고 해도 전화받는 하선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핸드폰에 낯익은 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김택승도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하선연이 직접 골라 거금 만 원을 들여 사주었던 핸드폰 고리였다. 자신이 달아줘 놓고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직 잘 쓰고 있는 모양이다. 만 원이나 준 거라서 매고 다닐 만한 가보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왜인지 마음이 따끈해졌다.
그제야 김택승은 아까까지 기분이 별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자각이 없었는데 기분이 풀어지고 보니까 그랬던 것 같다.
진짜 열다섯 소녀도 아닌데 웃는 얼굴이 이상하다는 말에 꽁했던 건가. 하선연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종잡을 수 없기는 자신도 마찬가지다. 다 커서 별것도 아닌 일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다니, 잦은 비보다 더 변덕스럽다.
통화하는 하선연을 곁눈에 두고 움직이면서 김택승은 조금 이상해진 자신을 깨달았다. 전에는 스스로가 참 무던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뭔가가 달라졌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랬다.
덕분에 김택승의 마음속에 희미한 의문이 싹 터 올랐으나 어차피 당장은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지금은 하선연의 핸드폰에 달린 고리에 신경이 팔려 더는 고심할 수가 없었다. 그 작은 핸드폰 고리 하나가 뭐라고 김택승을 기쁘게 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김택승은 그저 남몰래 속으로 웃었다.
*
여름과 가을이 힘겨루기를 하는 바람에 일교차가 큰 폭으로 벌어졌다. 낮에는 한여름을 방불케 할 만큼 덥다가도 밤이 되면 은근히 쌀쌀해졌던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유형은 감기에 걸렸다.
환절기가 되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이 늘 감기에 걸리는 그였다. 연방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재채기를 하는 그에게 김택승은 부탁받은 약을 건네면서 죽이 담긴 봉투도 같이 내밀었다.
“이게 뭐냐.”
알면서 묻는 말에 대답 대신 죽 그릇을 꺼냈다. 직접 끓인 게 아니라서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제일 비싼 전복죽으로 사왔다. 뚜껑을 열어 수저를 건네면서 “이거 드시고 약 드세요.” 라고 말하자 강유형은 죽을 뜨면서도 중얼중얼 타박을 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내가 죽 사 먹을 주변머리도 없는 줄아냐. 이따가 약값이랑 받아가.”
“이 정도는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잔소리 말고 받아가.”
안 받으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기어이 쥐여줄 거라는 걸 알기에 김택승은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다. 대신 강유형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가게 안팎의 잡일을 꼼꼼하게 챙겼다. 다행히도 그다지 바쁘지는 않았다.
그저 감기 걸린 그를 보고 수선 피우는 손님이 몇 있었을 뿐이었다. 그 손님들을 배웅하고 마저 다른 손님들을 배웅하러 룸으로 들어간 김택승은 순간 움찔했다. 손님들 사이에 흰 셔츠를 입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순 하선연인 줄 알았다. 셔츠는 약간 달랐지만 정장이 완전히 똑같은 탓이다. 솔직히 검은색 정장이 다 거기서 거기라 그냥 비슷한 거겠지 생각했는데 아무리 봐도 예전에 하선연이 가게에 왔을 때 입었던 정장과 똑같았다.
매우 클래식한 디자인이라 그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새삼 스스로의 관찰력에 놀라며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그 남자를 관찰했다. 하선연과 같은 정장을 입은 그 남자도 꽤나 근사했다. 그렇지만 하선연이 입었을 때와 같은 느낌은 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임에도 담배 연기에 휩싸인 것처럼 아득한 특유의 분위기가 없었다.
같은 옷을 입어도 참 다르구나 싶어서 김택승은 그 남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친 남자가 피식 웃어 보였다. 무례하게 멀거니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김택승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 모습에 남자가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
“김……택승씨?”
“네.”
재깍 대답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 김택승은 갑자기 가까이 와보라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일단 손님이 하는 말이라 시키는 대로 했더니 어깨에 턱 하니 손을 올리고는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빤히 보던데 혹시 자기에게 마음이 있느냐, 김택승이 본인 스타일인데 생각 있으면 같이 나가지 않겠느냐는 등 갖은 추파를 던졌다.
덕분에 안 그러려고 해도 정색이 돼서 절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은 그저 하선연과 똑같은 정장을 입고 있어서 쳐다봤을 뿐이다. 거절하고 자리를 피하려 하자 남자가 팔을 붙잡아왔다. 팔을 붙잡은 손아귀가 강해서 이걸 완력으로 뿌리쳐야 하나 싶던 와중, 마침 강유형이 나타나서 끼어들었다.
그는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을 보고 재빨리 남자에게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김택승을 힐끗 보고 명함 한 장을 강유형에게 건네고는 발길을 옮겼다. 김택승이 그를 마저 배웅하러 발길을 옮기려 하자 강유형이 만류를 했다. 안 나가도 된다는 듯 고개를 저은 강유형은 손에 든 명함을 보고 몇 마디를 궁시렁댔다. 그리고 손안에서 그걸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고 김택승의 명찰에 시선을 준 뒤에 말했다.
“네 명찰, 떼어 버리는 게 낫겠다. 정직원도 아니니까 굳이 하고 있을 필요 없겠지.”
애초에 일을 시작했을 때 명찰을 달아야겠다고 한 것이 강유형이라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게 의아했다. 하지만 굳이 명찰을 고집할 이유도 없어서 김택승은 잠자코 명찰을 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유형이 작게 한숨을 쉬면서 덧붙였다.
“앞으로 저 손님이 들어오면 배웅은 네가 나가지 마. 어지간하면 딴 사람에게 부탁하고 아니면 나 불러.”
곧장 그러겠다고 대답하노라니 강유형이 의구심서린 눈초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본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뇨, 아무것도.”
옷차림 외에는 아무 이유 없다. 강유형은 “그럼 됐다.” 라고 돌아섰지만 영 찜찜한 모습이었다. 김택승도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추파를 받는 거야 흔한 일이었지만 하필 상대가 하선연과 같은 옷을 입은 남자라는 사실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어느 구석이 어떻게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간에 그랬다.
어쩌면 그날이 좀 이상한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손님을 보고 하선연이 아닌가 흠칫흠칫 놀라는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쓰레기 버리려 나갔다가 주차장에 세워진 검은색 아우디를 보고 놀라고, 갈색 머리카락으로 염색한 키 큰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놀라고,하선연의 벨소리와 같은 벨소리를 듣고도 놀라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을 보고 놀라는 것도 아닌데 수시로 놀랐다.
뭣보다 의문인 건 실제로 하선연을 맞닥뜨린다고 해서 놀랄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죄지은 것도 없고 그를 피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하선연과 비슷한 무엇가만 보여도 가슴이 펄쩍펄쩍 뛰어올랐다.밤새 그런 증상에 시달리고 났으니 새벽이 되어 화랑으로 향할 때엔 하선연이 없었으면 싶었다.
계속 하선연이 주변을 오락가락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직접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후딱 청소하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화랑에 들어선 김택승은 창가에 선 뒷모습을 보고 발길을 멈춰 세웠다.
최근 짧아진 머리 탓에 긴 뒷덜미가 쑥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어깨엔 채 밝아오지 않은 아침의 그늘이 드리워진 채였다.
뒷짐을 진 하선연은 김택승이 온 것은 모르는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정적이 아닌 침묵으로 그를 맞이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김택승은 실감했다. 밤새 자신이 느꼈던 것은 그의 그림자일 뿐이다.
눈앞의 저 사람이야말로 진짜 하선연이다. 마치 스크린 속에서만 보던 사람을 실물로 본 것 같은 묘한 소감이 찾아왔다.
그때 불현듯 하선연이 고개를 돌리다 김승택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으음?” 하는 표정으로 뒤돌아본 그는 특유의 무심하면서도 약간 탓하는 것 같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언제 왔습니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별거 아닌 말에 갑자기 가슴이 쿵 했다.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제 심장을 짚어봤다.
놀랄만한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게 놀란 게 맞기는 한 건가?약간의 혼란 속에서 다가든 하선연은 김택승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커피 마시고 싶은데 잔돈이 없어서요. 300원 있습니까?”
‘커피 마시려고 기다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다시 마음이 차분해졌다.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을 내려둔 채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을 찾아냈다. 마침 딱 300원이 있었다. 그걸 건네받은 하선연은 자판기로 가서 커피 한잔을 뽑아 마시기 시작했다. 잔돈이 더는 없어서 커피를 뽑을 수 없었던 김택승은 혼자 커피를 홀짝거리는 하선연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자 저도 좀 민망하기는 했는지 하선연이 빈말을 던졌다.
“좀 마실래요?”
김택승은 반쯤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하선연도 반쯤은 엉겁결에 종이컵을 내밀었다.
별생각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돌려준 김택승은 하선연이 오묘한 표정으로 종이컵을 받는 걸 보았다.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니 그가 문득 싱그레 웃었다.
“하긴, 간접키스 정도는 상관없겠죠.”
순간 멍했던 김택승은 한 박자 뒤늦게 그 말의 뜻을 깨달았다. 그러자 심장이 또 쿵 했다.
동시에 얼굴에 열이 몰리며 관자놀이가 뜨끈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 뺨이 그대로 폭팔할 것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싸 쥔 김택승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이상하다. 뭐 그리 낯부끄러운 말이라고. 사실 맞는 말이지 않는가. 실제로 키스도 한데다 그보다 더한 짓도 한 사인데 간접키스쯤이야 뭐 어떻단 말인가.
겸연쩍게 피식 웃고 넘길 일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자체가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당장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다리가 떨렸다.
“왜 그래요?”
숙인 머리 위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빨리 평정을 되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김택승은 재빨이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얼굴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명히 이마까지 벌겋겠지만 표정은 그럭저럭 수습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하선연의 눈동자에 반짝하고 빛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꼭 어디가 아픈 사람 같은데.”
“아뇨…… 아프지 않습니다.”
부정하는 김택승을 보고 하선연은 느긋하게 여유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흠, 정말 괜찮습니까?”
이번에는 김택승이 대답을 주저했다. 스스로 정말 괜찮은지 알 수 없던 탓이다. 아픈 건 분명히 아니지만 이러한 상태를 괜찮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입이 열었다.
“사실 요즘 좀.”
말하는 목소리가 거칠어 김택승은 헛기침을 했다. 하고 보니 하선연에게 토로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팔장을 낀 채로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그를 보고 김택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맙니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말해보세요.”
무심하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재촉을 받으니까 더 입이 얼어붙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하다 마는 게 예의도 아닌 것 같고 굳이 숨길 일도 아닌 것 같아서 억지로 말을 꺼냈다.
“그냥, 이상한 것 같아서요.”
“이상해요?”
웃는 모습이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은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 입으로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말하려니 이상했다.
진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가 봐 김택승은 애써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닌 일에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놀라는 일이 잦습니다.”
하선연은 지그시 쳐다보는 눈을 하고 고의인지 아닌지 모를 긴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의사처럼 주의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름도 다 갔는데 더위 타는 겁니까? 몸이 허해지면 그럴 수도 있죠. 헛것이 보이거나 그래요……?”
“헛것은 아니지만 일전에 같은 옷을 입었다는 것만으로 딴 사람을 사장님이라 착각한 적은 있습니다.”
김택승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선연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실제로 올라갔다기보다는 기색이 그랬다는 말이다.
말투만은 여전히 심각한 채로 그는 말을 이었다.
“혹 핸드폰이 울린 것 같아 자꾸들여다보게 되지는 않습니까?”
그랬었나 고심하던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 와서 아무도 없으면 괜히 울적해지죠? 그러다 내가 있으면 웬일인가 싶어 놀라고.”
들으면 들을수록 족집게 같았다.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일까지 속속들이 집어내 김택승은 깜짝 놀랐다.
마치 제 맘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뇌까렸다.
“돗자리 까셔도 되겠습니다.”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띤 하선연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간헐적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왜 저러나 하고 멀뚱하게 쳐다본 김택승은 이윽고 그가 하는 말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뭘 말해주기라도 하고 저렇게 물었으면 좋겠다. 혼자 웃기만 하고 아직도 모르겠느냐니, 더 모르겠다.
어리둥절한 김택승의 표정을 보고 하선연의 미소가 깊어졌다.
눈빛도 한층 더 깊어진 것 같았다. 곧 웃음도 아니고 한숨도 아닌 모호한 소리를 흘리더니 의미심장한 소리 했다.
“뻔한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러다 문득 손을 뻗어와 김택승은 움찔해 눈을 감았다. 곧 그 손이 아이 다루듯 머리를 마구 헝클어놓았다. 부스스해진 머리로 다시 눈을 뜨자 손을 거둬간 하선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을 했다.
“정 모르겠으면 병원에라도 한번 가보든가요.”
김택승은 두근두근하는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짚어보고는 진짜 그러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순간 키스 당하는 줄 알고 놀라서 눈을 질끈 감았던 것이다.
어쩌면 머릿속에 들어 있다는 파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심호흡을 해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킨 김택승은 곧 제 일을 시작했다. 청소기를 밀고 밀대 질을 하는 동안 창가에 선 하선연은 연방 하품을 했다. 아까 커피를 마셨는데도 졸리는 모양이다.
나중에는 팔짱을 낀 채 서서 눈을 감고 있기에 보다 못한 김택승이 말했다.
“그렇게 졸리시면 올라가서 주무시지 그러십니까.”
그 말에 가물가물한 눈을 들어 올린 하선연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시간을 바로잡아야 하니까 밤까지는 자면 안됩니다.”
결국 버티다 못 한 하선연이 휴게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저대로 자려나 보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택승 씨.”
재깍 대답하며 다가가자 그가 데스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스크 위에 찾아보면 귀이개가 있을 겁니다. 그것 좀 가지고 와요.”
아마도 이함은이 쓰는 모양인 듯 데스크 위에 조그만 상자에 귀이개와 면봉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찾아가지고 돌아오니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비운 하선연이 앉으라는 식으로 턱짓을 했다. 시키는 대로 앉은 김택승은 곧 그가 제 무릎에 털썩 눕는 것을 보았다.
“미안한데 귀 청소 좀 해주지 않겠습니까.”
“…….”
그가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채로 쳐다보는데 그 시선에 왜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뭔가 그냥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상황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렇게 밑에서 올려다보면 제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텐데 하고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간 이 상황이 좀 당혹스러워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들고 앉아 있던 김택승은 어렵사리 대꾸했다.
“주무시려던 것 아닙니까.”
무릎은 벤 채로 고개를 가볍게 흔든 하선연은 곧 턱을 옆으로 돌려 귀를 내보이고는 눈을 감았다.
“눕고는 싶은데 자기는 싫어서 부탁하는 겁니다.”
혼자서는 귀를 파기 어려워서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잠들기 싫어해서라니 남의 무릎을 베고 눕는 것치고는 이유가 참 특이했다.
어릴 적에 동생들 귀를 파주는 건 항상 김택승의 몫이었으므로 귀를 파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김택승은 그의 귀 주변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걷어서 치우고 하얀 귀를 들여다보았다.
다른 곳은 여름을 지내면서 좀 탔는데 귀만은 여전히 치즈처럼 희었다.
귀속도 깨끗해 보여서 별로 귀를 팔 필요가 없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조심스레 귀이개를 귀속으로 넣었다.
그러자 하선연의 목이 뻣뻣해지는 게 느겨졌다. 뭔가 귀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싫어 긴장되는 모양이다.
아프지 않게 하려고 가장자리부터 살살 긁어 들어가니 미간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좀 더 깊은 곳을 파보려고 잘 보기 위해 다른 손으로 귓불을 붙잡았다.
순간 하선연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깜짝 놀란 김택승은 하마터면 귀이개로 그의 귓속을 쑤실 뻔하고 황급히 손을 뺐다.
그러자 김택승이 붙잡았던 귀를 마구 문지른 하선연이 힐끔 눈길을 돌려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렇게 갑자기 만지면 놀라잖습니까.”
귀를 파는데 귀를 안 만지고 어떡하란 말인가.
그래도 일단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김택승은 귀를 좀 보겠다고 말을 한 뒤 귓불을 붙잡았다.
말랑하고 약간 차가운 귓불이 아프지 않게 살짝 잡아당기며 귓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있노라니 투덜거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 좀 들면 안되겠습니까? 숨결 때문에 간지럽잖아요.”
그 말에 고개를 뒤로 물린 김택승은 난처함을 느꼈다.
이렇게 예민해서야 어떻게 귀를 파나.
어차피 귀지는 별로 없는 것 같고 귀 파는 걸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아 이만 하는 게 좋겠다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귀 안 파도 될 것 같은데요.”
그것을 무시하고 하선연이 말했다.
“계속해봐요.”
별수 없이 다시 귀를 붙잡고 고개를 멀찍이 한 채로 귀이개를 움직이던 김택승은 하선연이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진짜로 귀 파느라 잠이 깬 건지 어쩐 건지 아까와는 달리 누운채로도 안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그것을 방해하지 않고 적당히 한쪽 귀를 청소한 김택승은 다른 쪽도 해주려고 고개를 돌리라 말했다. 이에 하선연이 몸을 돌려 얼굴을 김택승 쪽으로 두었다. 그러자 김택승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옆구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얇은 티셔츠를 뚫고 그가 내 쉬는 숨결이 피부에 닿아왔다.
하필이면 흉터가 남은 자리라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김택승이 숨 때문에 간지럽다고 고개 좀 물리라 할 판국이었다.
한데 단순히 간지러움뿐만이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기도 뭐했다.
날숨에서 맡아지는 달짝지근한 냄새에 이르기까지, 마치 잠든 새끼고양이를 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귀여워서 마구 만지고 싶기도 하고 그대로 두고 싶기도 한 기분 말이다.
김택승은 쓸데없는 생각을 거두고 가능한 귀 파기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때 문득 손을 움직이던하선연이 옆구리의 티셔츠 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상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덕분에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아 귀를 파던 손을 잠시 멈추고 도로 티셔츠를 끌어 내리려고 했다.
한데 그 손목을 붙잡은 하선연이 그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드러난 피부에 입술을 묻었다.
“읏…….”
얇고 뜨거운 입술의 감촉에 김택승은 나오려던 신음을 깨물었다.
곧 김택승의 손목을 놓아준 손이 티셔츠를 걷어 올렸고 입술이 흉터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볍에 핥고 빨면서 올라온 입술이 이윽고 유두에 이르렀다. 작게 돋아 오른 유두를 살짝 깨무는 행동에 김택승은 귀이개를 놓쳐버리고 대신 소파를 꽉 움켜쥐며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잠깐만…….”
그러사 하선연이 유두에 입술을 붙인 채로 말했다.
“그쪽이 먼저 시작한 겁니다.”
도대체 언제 이쪽이 먼저 시작했다는 건지 모르갰다.
평범하게 귀를 파고 있었을 뿐인데…… 김택승의 억울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선연은 한참 동안 양쪽 유두를 번갈아 오가며 티셔츠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헝클어진 머리를 들어 올렸을 때 새빨개진 김택승의 얼굴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울상을 한 채 토마토처럼 익은 얼굴을 보고 피식 웃은 하선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아― 해봐요.”
“…….”
“아―”
머뭇거리다 아―하고 입을 벌리자 마찬가지로 벌어진 입술이 입술을 덮어왔다.
말랑한 체온의 혀가 들어와 입속을 누비고 이따금 코가 부딪치는 것을 느끼며 김택승은 감은 눈 앞에서 폭죽이 터지듯 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입술과 혀를 번갈아 빨면서 한참 동안 실컷 입안을 맛보던 하선연은 마지못한 듯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김택승이 멍한 눈초리로 고개를 물린 그를 바라보자 짧게 혀를 차고 도로 입술을 덮쳐왔다.
그렇게 이어진 키스가 끝이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키스하느라 젖혀진 목을 쓸어내리고노 울대를 어루만지던 하선연이 풀쑥 뇌까렸다.
하고 싶은데……”
곧 몸을 떼고 젖은 김택승의 입술을 엄지로 쓸면서 잠깐 미소를 지었다.
“하고 나면 분명히 졸릴 테니까 참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크게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택승은 고개를 숙이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그렇게 황급히 키스의 여운을 지웠을 때 하선연은 언제 키스 같은 걸 했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전 조깅이나 하고 오겠습니다. 정리하고 퇴근하세요.”
알겠다고 대답한 김택승은 옷을 갈아입으러 3층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귀이개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을 주워 올리며 아직도 솟아 있는 유두를 손바닥으로 짓누른 김택승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딴 사람 귀는 못 파주겠다. 제 귀를 팔 때도 오늘 일이 생각날 테니까 말이다. 귀이개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으려 데스크로 간 김택승은 그것을 상자에 넣으려다 망설였다.
여기 두면 이함은도 나중에 쓸 텐데 어째 창피스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유가 낯 뜨겁지만 마치 자위하느라 더러워진 티슈라도 갖다놓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중에 새것으로 사다 놓는 게 낫겠다 생각하고 귀이개는 그냥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왠 귀이개야? 아까 네 주머니에서 떨어지던데, 이런 걸 왜 갖고 다녀?”
이상하다는 듯 물은 강유형은 입바람으로 귀이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설명할 말이 없어 애매한 표정으로 서 있노라니 그가 마침 잘됐다는 듯이 덧 붙였다.
“그렇고 보니 귀 판지도 오래됬네. 잠깐 빌리자.”
그 말에 김택승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아, 그게…….”
“왜?”
강유형이 의아한 듯 쳐다보는 시선 속에서 김택승은 그의 손에 들린 귀이개를 바라보았다.고작 귀이개를 빌려주기 싫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빌려주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냥 귀이개라 생각하고 빌려줄 거리면 애초에 이함은의 데스크게 갖다놓았지 굳이 들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뭐라 말을 못하고 서 있는 김택승을 보고 강유형은 그와 귀이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약간 못마땅한 기색으로 귀이개를 휙 하고 던져두었다.
“귀 팔 때나 쓰는 거 아니면 좀 잘 갖고 다니든가.”
뒤통수를 긁적긁적하고 있노라리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강유형의 바의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고무줄이며 철사 끝 같은 잡동사니를 헤집다가 빈 휴대폰 고리를 찾아냈다.
마침 귀이개 뒤쪽에 작은 구멍이 있어 핸드폰 고리에 잇기가 쉬웠다.
그걸 핸드폰에 달자 좀 우스꽝스러웠으나 확실히 잃어버릴 염려는 덜할 듯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서 갖고 다닐만한 물건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강유형이 제 반응을 보고 소중한 것이라 짐작해 해드폰 고리로 달아준 만큼 떼버리기도 그랬다. 뭐 갖고 다니면 편하기야 하겠지 하고 김택승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돌려놓았다. 그런 뒤 강유형을 도와 날짜별로 영수증을 정리하다가 힐끗거리는 시선을 느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싶어 그를 바라본 김택승은 곧 헛기침을 큼큼한 강유형이 무언가를 건네는 것을 보았다.
"손님이 선물 삼아 준 건데, 계절이 좀 지난거라서 말이야"
받아들고 보니 호텔 숙박권이었다. 해운대 바닷가에 있는 유명한 이름이 박혀 있어 돈 주고 사려면 꽤나 비쌀 듯 했다. 이게 왠건가 싶어 그걸 바라보는 김택승을 보고 강유형은 괜히 딴곳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나는 뭐 어차피 같이 갈 사람도 없고 하니까 너나 쓰라고.”
고마운 일이기는 한데 매일같이 일해야 하는 처지라 부산까지 내려갈 여유가 없었다.
김택승은 마음만 받으려고 도로 숙박권을 돌려주며 말했다.
“고맙지만 전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 주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러자 그가 내민 숙박권을 돌려받지 않으려고 뒷짐을 진 강유형이 대꾸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면 주말 정도는 빼줄 수 있어. 어차피 여름도 거의 지나가서 손님도 줄었고 이번 휴가 때도 내내 일했다며?
여름에 적어도 바다는 한번 봐야지.”
떠미는 말에 김택승은 조금 웃고는 답했다.
“매니저도 이번 여름에 바다 한번 못 봤잖아요.”
그 말에 강유형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그의 속내를 모르고 김택승은 그의 손을 붙잡아 숙박권을 도로 돌려주면서 말했다.
“그럼 매니저가 쓰시면 되겠네요.”
강유형은 같이 갈 사람도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억지로 숙박권을 떠넘기려 했다.괜찮다고 해도 부득불 받으라고 우겨 결국에는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같이 갈 사람이 없는데……. 하고 숙박권을 내려다 보는 김택승에게 강유형은 은근슬쩍 덧붙였다.
“정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말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바쁜 주말 매니저인 그까지 자리를 비우기는 어려울 테다.
부탁하면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주겠지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매일 가게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부산까지 같이 가고 싶어 할 것 같진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진즉 그냥 같이 가지고 말했을 것이다.
바닷가라…… 일하러는 몰라도 놀러 간 적은 하도 오래되어서 가 보고 싶기는 했다. 일류 호텔에 조식까지 포함된 숙박권이니 주말 동안 시간을 보내려 가기엔 참 좋을 것 같았다.
어둠이 내린 바닷가에서 누군가와 함께 걷는 모습을 상상하던 김택승은 어느새 자연스레 하선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장면엔 무리가 없어 그에게 같이 가자고 말해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러나 벌써 휴가기간 동안 바닷가에 다녀온 눈치였고 주말 동안 꼬박 시간을 내야 할 텐데 그걸 달가워할지도 의문이었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여자인 이함은에게 같이 가자고 할 수도 없고, 이런 일로 강유형을 번거롭게 하긴 그랬다. 이렇게 주변에 사람이 없었나 하고 김택승은 새삼 스스로의 인간관계를 돌아봤다.
먹고 살기 바빠서 주위에 신경을 못 쓰고 살았던 탓이다.
무엇보다 그 녀석이 떠난 이후 딱히 누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잠시 외로움이라고 할 만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으나 김택승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만일 자신이 잘못되었을 때 슬퍼할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무 미련도 없으니까 남은 사람도 그러기를 바랐다.자신이 느꼈던 상실을 아무에게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하여간 이왕 생긴 숙박권.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고 일단은 하선연에게 말이나 해보기로 했다.
안되면 혼자라도 가지 싶어 별 부담 없이 물어볼 생각이었다.그런데 막상 가게 일을 마치고 날이 밝아 지하철에 오르자 긴장이 됐다.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갑자기 부산에 같이 안 가겠느냐 말하는 건 너무 뜬금없는 것 같고,
숙박권을 보여주면서 말을 하면 자연스러우려나…… 화랑에 도착할 때까지도 내내 그 생각만 났다.
이윽고 화랑 건물로 들어섰을 때 인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밤낮을 되돌리는 데 성공을 했는지 어쨌는지 하선연은 아래층에 없었다.
어쩌면 직접 보고 말하는 것보다 문자나 전화로 말하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김택승은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며 몇 번이나 비슷한 말을 썼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결국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 수도 있으니 나중에 보내자 하고 핸드폰을 닫았다.
그러다 금방 마음을 바꿔 지금 안 보내면 더 보내기 어려운 걸 생각하고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만지락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인이라도 생겼습니까?”
화들짝 놀란 김택승은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운동복 차림을 한 하선연이 서 있었다.
자고 있던 게 아니라 조깅을 하고 온 참인지 이마가 가볍게 땀으로 젖은 상태였다.그곳을 스포츠 타월로 닦으며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얼마나 열중했는지 제가 온 것도 모르더군요.”
그랬나 싶어 김택승은 뒷덜미를 긁적긁적했다.
그에게 문자하려던 참이라고 부산 이야길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뒤에서 문자 내용을 보았던지 하선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부산에는 무슨 볼일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간 멈칫했으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이야기하자 싶어서 김택승은 말문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하다보니 호텔 숙박권이 생겨서요. 같이 가는게 어떨까 싶어서……”
“그러니까 누구하고?”
그야 당신하고요…… 하고 말을 하려니 괜스레 쑥스러웠다. 퍼뜩 말을 꺼내지 못하고 김택승은 애꿏은 뒤통수만 북북 긁었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대답하기도 전에 하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가는 겁니까?”
“이번 주말에요.”
김택승의 대답에 하선연은 고개를 돌려 데스크에 놓여 있던 탁상달력을 집었다. 그리고는 짐짓 숙고하듯 들여다보며 말했다.
“다행히도 이번 주말에는 별일이 없군요.”
그럼 같이 가는 건가 하고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말하기도 전에 제 의도를 알아차렸나 보다.
굳이 청할 필요 없어서 좋다고 생각하던 와중, 김택승은 곧 제 짐작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팔짱을 낀 하선연이 제 앞에 버티고 서서 턱짓을 했던 것이다.
“별일이 없다니까요.”
“네?”
왜 했던 말을 하나 싶어 반문하자 하선연이 미간을 모으고 똑같은 말을 또 했다.
“이번 주말에 아무런 예정도 없다는 말입니다.”
김택승이 멍하게 있노라니 곧 고개를 내저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휴가 때도 심심했는데 이번 주말에도 마찬가지겠군요. 김택승 씨는 좋으시겠습니다.주말에 바닷가도 놀러 가고. 누구랑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는 자기도 바다를 참 좋아하는데 이번 여름에 바닷가를 못 가서 수영실력이 녹슬었을 거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해운대가 좋더라며 여러 가지 말을 늘어놓았다.
비로소 그의 의도를 깨달은 김택승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안 해도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건만, 그걸 모르고 또 빙빙 에둘러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적당한 때 말을 자르고 물어봤다.
“같이 가실래요?”
분명히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도 한선연은 놀라는 척을 했다.
냉큼 그러겠다 대답도 안 하고 “주말에 한가하긴 한데……” 하고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너그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정 그러시다면 거절할 수 없겠네요. 같이 가도록 하죠.”
이제 그의 화법에 완전히 적응한 김택승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토요일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대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가게 일은 매니저가 빼줄 테고 일요일 아르바이트는 다른 교대에게 부탁해 그럭저럭 주말 동안 시간을 만들었다.
막상 약속을 정해놓으니까 오랜만에 놀러 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들떠 올랐다.
빨리 토요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하루가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설레서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화랑으로 출근하자 기분 좋은 게 티가 났던지 강유형이 질문을 던져왔다.
“무슨 좋은 일 있어? 표정이 밝은데.”
“그야 당연히 매니저 덕분이죠.”
“나?”
기쁜 듯 반문하는 그에게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말 부산에 다녀오겠습니다. 숙박권 정말 감사드려요.”
그 말에 강유형의 표정이 조금 애매해졌다. 그러나 곧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가서 잘 놀다 와.”
“고맙습니다.”
가서 쓸 돈은 있느냐며 용돈까지 걱정해주는 강유형의 기색이 묘하게 씁쓸했다.
그러나 평소라면 알아차렸을 김택승은 들떠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부산에 갔을 때 뭐라도 사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머릿속으로 가진 여윳돈을 꼽아보았다.늘 쪼들리는 살림이라 빡빡하기는 해도 일박이일 정도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가게 식구들에게 부산은 뭐가 맛있다더라 어디가 좋다더라 하는 정보를 주워들으며 김택승은 토요일이 오기만은 손꼽아 기다렸다.주방보조에게 수영복도 빌리고 일찌감치 짐을 싸놓았다.
마침내 토요일이 되었을 땐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해져 편의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이윽고 교대시간이 되었을 무렵, 앞치마를 벗은 김택승은 창밖 저쪽에서 검은색 아우디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도로가에 정차를 한 아우디가 그를 재촉하듯 클락션을 울려 때마침 온 아르바이트생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가방을 챙겨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김택승은 차를 타기 전 열린 차창 너머로 꾸벅 인사를 하고 보조석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운전석 문이 열리며 하선연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모습을 드러낸 그는 한껏 바닷가 기분을 낸 차림이었다.
머리가 작아서 그런지 별로 커 보이지도 않은 선글라스가 얼굴을 절만을 가리고 있었다. 그 선글라스를 추어올리며 다가온 하선연은 비키라는 듯 손짓을 휙휙했다. 그래서 차 문을 놓고 한걸음 물러서자 제가 보조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웬일로 직접 차를 몰고 왔나 했더니만 역시나 부산까지의 운전은 제 몫이 될 모양이었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기에 김택승은 불만 없이 운전석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짐을 뒷좌석에 두고 안전벨트를 맨 뒤 핸들을 잡았다.
그러자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밀어 올린 하선연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바닷가로 가는 거 맞습니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도로 선글라스를 쓰며 하선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차림새는 평소와 똑같군요.”
옷가지가 몇 벌 없어 바닷가에 간다고 해서 달리 입을 건 없었다.그것을 설명하는 대신 김택승은 차를 도로로 몰아가며 대꾸했다.
“그래도 수영복은 갖고 왔습니다.”
수영복이라는 말에 하선연은 흥미를 보였다. 어디 있느냐고 물어서 가방속에 있다고 답을 하니 직접 꺼내보기까지 했다.
꺼내봤다기보다는 수영복이 든 주머니를 열어본 정도였으나 그 정도로 어떤 수영복인지 살펴보기에는 충분했을 테다.한데 어째 반응이 영 이상했다. 그는 주머니 속 수영복과 김택승을 번갈아 보다가 약간 아연한 듯이 물었다.
“정말로 이걸 입을 겁니까?”
“네.”
빌린 거라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 김택승은 하선연이 “흠.” 하고 자세를 바로 하는 모습을 보았다.
뭔가 약간 심란해 보이는 게 수영복이 많이 촌스럽나 싶었다.사실 주머니채로 빌려온 거라 어떤 수영복인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
비키니도 아니고 남자 수영복이야 거기서 거기니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하선연의 반응을 보니까 썩 좋진 않은 모양이다.
좀 촌스러워도 바닷물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됐지 뭐 하고 김택승은 운전에 신경을 돌렸다.
고속도로에 차를 얹고 달리기를 얼마간. 밤새 일하고 원래 자야 할 시간이라 적잖이 졸렸다.
옆에서 하선연이 자고 있는 탓에 더욱 그랬다.결국 견디다 못해서 휴게소에 들렸다 가기로 하고 차를 고속도로에서 내렸다.
그리고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하선연이 일어날 줄을 몰랐다. 어깨를 흔들며 휴게소라고 말을 해도 귀찮다는 듯 미간을 모으고 계속 잠을 청했다.
별로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김택승은 혼자 차에서 내려 볼일도 보고 커피도 마셨다.
그렇게 잠시 바람을 쐬고 나니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하선연을 위해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 가지고 차로 돌아간 김택승은 다시금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오래 달리지 않아 맛있는 냄새 때문인지 하선연이 가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일어나셨습니까? 뒤에 감자랑 마실 것을 사두었으니까 좀 드세요.”
그 말에 자세를 바로 한 하선연이 뒤에 두었던 비닐봉지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들여다보고 물었다.
“……이게 뭡니까.”
“구운 감자랑 맥반석 오징어인데요. 안 좋아하십니까?”
하선연은 구운 감사에 찔러둔 이쑤시개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먹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드셔 본 적이 없다고요?”
어째 살면서 휴게소 감자도 못 먹어봤나 싶어 반문하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하는 것 때문에 탄수화물 끊은 지가 오래됐습니다.”
이어 감자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근육을 만드는 데 있어 탄수화물이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설명했다. 러시아인이 살찌는 이유가 전부 감자 때문이라나 뭐라나.
그러면서도 꾸준히 종이 그릇 안에 든 감자를 비워나갔다.
하나 먹어보라는 말도 안 하고 혼자서 감자를 다 먹더니만 이번에는 맥반석 오징어를 찢으며 말했다.
“오징어도 칼로리가 높아서 건강에는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질겨서 많이 먹으면 턱이 넓어지죠.”
김택승은 그가 늘어놓은 불평 아닌 불평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어차피 다 먹을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젠 화랑에 맥반석 기계를 들여놓아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까 다를까, 하선연은 감자 한 접시에 맥반석 오징어 한 마리, 그리고 식혜 한 병과 콜라 한 캔을 모조리 다 먹었다.
남길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닌가 싶어 조금 걱정이 됐다.
역시나 오래가지 않아서 하선연의 표정이 조금씩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휴게소 얼마나 남았습니까?”
“삼십 분은 더 가야 할 것 같은데요.”
그를 힐끗 보면서 답을 하자 하선연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선글라스를 썼다.그리고 다리를 꼬고 턱을 받친 채로 창밖을 응시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불편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김택승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만일 정말 편안한 상태라면 십중팔구는 잠이 들었을 테다. 자지 못하고 저렇게 있다는 건 무엇인가 다급하다는 뜻이었다.
그를 생각해서 김택승은 100킬로를 지키던 속도를 조금 더올렸다. 되도록 가능한 한 빨리 휴게소로 가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얼마 가지 못해서 차가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고가 났다거나 한 건 아니고 도로보수를 하느라 한쪽 차선을 막아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남은 차선으로만 간다고 차가 조금 밀렸다.그러나 이 정도로도 하선연은 적잖이 초조한 모양이었다.
항상 몸가짐이 단정해 생전 다리를 떨거나 한 적이 없었는데 왠일인지 다리를 떨고 있었다.
“정 급하시면 식혜 빈 통 가지고 뒷좌석에 가세요.”
그러자 이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하선연이 당최 무슨 말이냐는 듯 선글라스 위로 눈썹을 휘었다.
“식혜 빈 통이라뇨? 제가 왜 그게 필요합니까?”
아무래도 그는 제 상태를 티 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페트병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던가.
가뜩이나 자신과의 싸움으로 힘든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김택승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휴게소로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행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가 뚫리기 시작했다.
생전 않던 끼여들기 까지 하면서 달린 끝에 저만치 휴게소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선연이 적잖이 안도하느 모습에 김택승도 덩달아 안도하며 휴게소로 들어가려고 차선을 변경했다.
한데 휴게소가 가까워지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주차장이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내리고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이유가 확실해졌다.
휴게소 앞에 큼지막하게 폐업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이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았나 보았다. 그래도 일단 화장실은 있겠지 싶어서 김택승은 건물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춰 서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풀고 있던 곧장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래도 아직 걸을 정도에 여유는 있나 보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잰걸음을 쳤다.
김택승은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담배나 한대 피려고 차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보니 라이터가 없어 차 안을 들여다보는데 문득 화장실로 갔던 하선연이 도로 나오는 게 보였다.
벌써 볼일을 다 봤나 하고 생각하던 김택승은 그의 미간이 심상찮게 구겨진 걸 보고 일이 원만하게 끝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빨리 갑시다.”
그 한마디를 내뱉고 도로 차에 올라탄 하선연을 따라 김택승은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면서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무런 대꾸가 없다.
혹 화장실 문이 잠겨져 있다거나 휴지가 없어 볼일을 못 본게 아닌가 걱정스러워 그가 창피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었다.
“……화장실은 괜찮았습니까?”
그 말에 하선연이 이마를 짚으며 내뱉었다.
“무척 더럽다는 것 말고는 괜찮더군요.”
휴게소가 문을 단는 바람에 화장실이 많이 더러웠나 보다. 그래서 볼일을 안 보고 나온 모양인데 다음 휴게소까지 가려면 한참이나 걸린다.
더럽든 어쨌든 여기서 해결을 하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다만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러나 말재주가 없는 김택승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사실을 말하는 게 최선일 듯 했다.
“저, 죄송하지만 더러워도 좀 참고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다음 휴게소까진 꽤 멀어요.”
그 말에 하선연의 얼굴에 갈등이 비쳤다. 어지간하면 그냥 가자고 우길텐데 그러지 못하는 걸 보아하니 많이 급한가 보다.
백 마디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는 모범을 보이는 게 좋겠다 싶어서 김택승은 휴지를 들고 앞장을 섰다.
화장실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차 안에서 지켜보던 하선연도 결국에는 그를 따라나왔다.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가 되어가는 휴게소 뒤쪽에 화장실에 당도해보니 확실히 더럽기는 했다.
입구해서부터 고약한 냄새가 등천했다.
슬쩍 안으로 들어가 변기를 들여다보자 도무지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차차리 노상에서 해결을 보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다시 화장실을 나온 김택승은 저만치에 우겨진 수풀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하선연을 손짓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분명히 같은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에 수풀을 헤치고 걷는 발길이 조심스러웠다.
혹 신발을 버리게 될까봐 김승택은 마지못해 뒤를 따라오는 하선연을 돌아보고 말했다.
“발밑 주의하세요. 사장님처럼 참기 힘든 사람들이 많이 왔을 테니까…….”
그러자 하선연이 질겁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 나더러 여기서 볼일을 보라는 겁니까?”
김택승은 발길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밖에서 볼일을…….”
“볼 수도 있죠. 바지에 실례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럼 전 저쪽에서 볼테니까 사장님은 여기에서 보세요.”
나란히 엉덩이를 까고 일을 보는 게 우스울 수는 있겠지만 이제 그의 창피함을 덜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서
김택승은 수풀 저편으로 갔다.
곧 적당한 자리를 찾아 허리춤을 풀고 바지를 끌어내리려니 하선연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덕분에 적잖이 창피해졌지만 먼저 창피를 무릅써야 그를 볼일을 보기가 쉬워질 것이다.사실 볼일이 보고 싶지는 않아서 바지만 끌어 내리는 척하고 그냥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러다 잘하고 있나 싶어서 목을 길께 빼고 하선연을 힐끗 쳐다보는데 등을 돌리고 선 하선연은 여전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래서 다시 바지를 추스르고 그에게 다가가 일부러 개운한 척 말을 했다.
“속을 비우니 훨씬 편하네요. 휴지도 여기 있으니까 얼른 일 보세요.
정 쑥스러우시면 저는 차에 가 있겠습니다.”
그러자 아까의 다급함이 어딜 갔는지 약간 꺼림칙한 기색만 남은 표정으로 하선연이 말했다.
“아뇨. 제가 먼저 차로 갈 테니까 조금 있다가 오세요.”
“네?”
“차라리 그냥 차에서 페트병을 쓰는 게 낫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차 쪽으로 가는 뒷모습에 김택승은 뒤늦게 깨달았다.
급하다는 볼일이…… 큰 게 아니었구나. 아까 감자를 잔뜩 먹은 데다 부득이하게 화징실을 찾기에 큰 거 인 줄로만 알았다. 작은 거라면 그러게 장소를 가릴 필요가 없다고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그로서는 노상방뇨가 용납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저렇게 까다로워서야 세상 살기 어렵겠다고 생각하던 김택승은 일순 멈칫했다.
그가 맘 편하게 볼일을 볼 수도 있도록 제가 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지까지 까고 볼일을 보는 척했으니 분명히 오해를 했을 테다. 뒤늦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창피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김택승은 얼굴을 싸 쥐었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쇼를 했다. 밖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엉덩이를 내놓는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 볼일을 보는 척했을 뿐이지만 이제 와 그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설명한다고 해도 안 믿길 것 같았다.
오히려 쓸데없는 변명이라 민망함이 더해질 가능성이 컸다. 덕분에 김택승은 한참 동안 혼자서 창피함을 삭인 후에야 차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미 모든 걸 끝내놓고 기다리고 있던 하선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김택승도 입을 다문 채로 차에 시동을 걸고 고속도로로 나갔다.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라디오라도 틀까 고심하던 중, 하선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예에…….”
“식혜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잖습니까.”
마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사다 둔 김택승의 잘못이라 책하는 듯했으나 김택승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하선연이 선글라스를 도로 쓰면서 말을 했다.
“그런데 김택승 씨는 제가 자는 사이에 뭘 드셔서 그런 겁니까?”
간신히 가라앉았던 얼굴이 다시 후끈해져 김택승은 전방만을 주시한 채로 대꾸했다.
“……그냥 커피 한잔 마셨을 뿐입니다.”
그러자 놀리는 건지 어쩐 건지, 하선연이 담담하게 충고를 했다.
“앞으로는 고속도로에서 커피는 삼가는 게 좋겠군요.”
대꾸할 말이 없어 김택승은 그냥 그래야겠다고 대꾸했다. 억울한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으나 하선연을 상대로 억울한 적이 어디 한 두번 이었던가.
이런 오해쯤이야 오해 축에도 안 든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김택승은 부산으로 차를 몰았다.
부산에 직접 차를 끌고 가본 적이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상당히 도로가 복잡했다.
아직 퇴근 시간이 멀었는데도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표지판은 또 어찌나 복잡한지, 네비게이션이 없었다면 한참이나 길을 헤맬 뻔했다.
다행히도 해운데 부근에 들어서는 도로가 잘 뚫려 있어 다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달려 도로 저편으로 바다가 보이자 김택승은 창문을 내렸다.
순간 짠 내가 물씬 풍겨왔으나 덕분에 고속도로에 겪었던 해프닝도 잊히고 마음이 파도 위로 뜬 튜프처럼 둥실거렸다.
바다가 눈에 들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해변에 다다른 김택승은 손쉽게 숙박할 호텔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다를 끼고 있어 도로 하나만 건너면 곧장 해변이 있는 좋은 위치였다. 주차를 한 뒤 카운터로 가 숙박권을 내밀자 직원이 방을 확인해주었다.
“바다가 보이는 방이구요. 투 베드룸입니다. 뭐 필요하신 것은 없으세요?”
없다고 대꾸한 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문득 등 뒤에서 하선연이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투 베드룸?”
그 말에 김택승이 고개를 끄덕거리노라니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어디서 난 겁니까?”
“왜요?”
“보통 이런 숙박권은 트윈 베드인 경우가 많아서요.”
강유형이 준 거라서 자세한 건 잘 모르겠다. 다만 숙박권에 관해 묻는 어조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남자 둘이 한방을 쓰는데 침대가 두 개인 쪽이 당연한지라 하선연의 반응이 좀 의아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지 하고 김택승은 으레 그렇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직원이 안내해준 방은 전망이 탁 트여 시원했다.
새삼 이런 곳에 묵을 수 있게 해준 강유형에게 고마움이 느껴져 김택승은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자고 있을 강유형에게 문자로나마 도착했다고 감사인사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데 키패드를 꾹꾹 누르고 있노라니 등 뒤에서 그것을 힐끔 쳐다본 하선연이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보내는 겁니까?”
“아, 숙박권을 준 사람한테요.”
“흐음.”
그러자 선글라스를 만지락거리며 턱을 괴고 있던 하선연이 연이어 물어왔다.
“당첨권도 아니고 일부러 예약한 것 같은데, 당신하고 같이 오고 싶어서 준 거 아닙니까?”
김택승은 그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숙박권은 선물 받은 거라 그랬고 저와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강유형에게 숙박권을 준 사람은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인기가 많아서 항상 초대며 선물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듣기로는 받아본 차 키만 열 손가락에 걸 정도라고 했다.
그러니 매일같이 보는 가게 동생과 근사한 호텔에서 주말을 보내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하선연은 김택승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어째 수긍을 한다기보다는 묘하게 흥미로워하는 표정이었다.
“덕분에 저도 이 방을 쓰게 되었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네요.”
하선연이 하는 말에 김택승은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저희 가게 매니저가 준 겁니다. 다음에 가게 오실 때 인사하시면 되겠네요.”
그러자 그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뇌까렸다.
“아…… 그 매니저 말이군요.”
그리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피식거렸다.
원래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혼자 웃게 내버려두고 김택승은 문자를 보낸 뒤 나갈 준비를 했다.
후딱 해변으로 달려나가 바닷물에 몸 좀 담그고 모래찜질을 하면서 통닭을 뜯을 생각이었다.
이제 여름이 지나가는 판국이라 서두르지 않으면 어두워질 터였다.
그래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수영복이 든 주머니를 꺼내는데 하선연이 나갈 채비는 않고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김택승은 옷을 갈아 입으러 방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수영복 안 가져오셨습니까?”
그러자 왜인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선연이 대꾸했다.
“아뇨, 가져왔습니다. 갈아입고 나오면 저도 갈아입죠.”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발길을 옮긴 김택승은 티셔츠를 벗고 속옷과 바지를 한꺼번에 끌어내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수영복을 거냈다.
한데 잡히는 느낌부터가 이상했다. 어라, 하고 수영복을 펼쳐본 김택승은 곧 입을 딱 벌렸다.
무난하고 평범한 사각 수영복을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호피무늬에 아랫도리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날 법한 삼각 수영복이었다. 게다가 양쪽 옆은 끈으로 엮여 있어 민망하기 짝이 없는 디자인이었다.
어쩐지, 이래서 아까 수영복을 보고 하선연이 놀랐구나 싶었다.
단순히 무늬가 촌스러워서 그런줄 알았는데, 이건 도저히 입고 나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빌려준 걸까 하고 주방보조를 떠올린 김택승은 그의 사복 패션이 꽤나 파격적이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평소에는 그냥 유니폼을 입으니까 그런 취향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한참을 아연해 있던 김택승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수영복을 내던지고 황급히 속옷을 끌어올렸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온 하선연은 당황한 얼굴을 보고 뻔뻔스레 말했다.
“뭘 새삼스레 그러십니까. 야외에서 엉덩이 까는 것도 본 사인데.”
“아니 그건…….”
뒤늦게 변명을 하려던 김택승은 하선연이 바닥에 떨어진 수영복을 집어 올리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그걸 펼치며 하선연은 마치 진심인 양 말을 이었다.
“호피무늬라, 굉장한 수영복이네요. 이걸로 갈아입으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하긴, 여러 가지 의미로 굉장한 수영복이기는 했다.
“왜요, 이거 입으면 보기 좋을 것 같은데. 애써 빌린 거지 않습니까.”
보기 좋을 것 같다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몹시 의심스러웠으나 칭찬하는 말은 계속되었다.
“요즘 누가 촌스럽게 사각 수영복 입습니까. 대세는 삼각이죠. 저야 잘 몰라서 그냥 사각 수영복을 가져오기는 했습니다만 할 수만 있다면 저도 삼각 입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호피무늬 수영복이 최신 유행이라고 잘 어울릴 거라며 거듭 추천을 했다.
듣다 보니 멀쩡한 옷을 바닷물에 담그느니 그냥 수영복을 입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솔직히 소화할 자신은 없었지만 최신 유행이라면 흔하지 않겠는가. 하선연 말마따나 애써 빌려 온 걸 묵히기도 아깝고 옷이라면 그가 더 잘 아니까 그의 말을 따르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얼마간을 주저하다 입고 나가겠다고 수영복을 도로 받아들었다.
잠시 후, 수영복을 입고 밖으로 나간 김택승은 마찬가지로 수영복을 입은 하선연을 보았다.
평범한 사각 수영복에 얇은 후드 점퍼를 걸치고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편안하고 보기 좋아 보였다. 반면 호피무늬 삼각 수영복 하나 달랑 입은 김택승은 영 어색한 기분이었다. 진짜 아랫도리만 가리고 홀랑 벗은 느낌인다 하선연의 눈에는 이상해 보이지 않는지 별말이 없었다.
어차피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해변이라 김택승은 그대로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여름이 끝물인데도 해변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오히려 적당히 한가한게 휴가철 보다 더 좋은 것 같았다.
파라솔이 쭉 꽂혀 있는 해변을 따라 걸으면서 김택승은 따가운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지나가는 사람 대부분 힐끔힐끔 보는 게 아니라 아예 대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얼핏 수영복 때문인가 싶었으나 본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이 아니라서 기분 탓이겠거니 했다.
그때 문득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Hey!”
돌아보니 왠 외국인이 한 명 서 있었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한, 말 그대로 양키였다.
건장한 몸에 수 놓인 타투가현란해서 잠시 거기에 정신을 팔고 있노라니 뭐라뭐라 영어로 말을 한다.
대강 같이 어울리지 않겠느냔느 소리 같았는데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그전에 나선 하선연이 고개를 저으며 딱 잘라 거절을 했기 때문이다.
“OK…….” 하고 어깨를 으쓱인 외국인이 가버리고 나서 그는 별 이상한 경우를 다 보겠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김택승이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유명한 곳이라 외국인이 많기는 해도 뜬금없이 같이 놀자고 말을 걸어오는 일이 흔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외국인이 아니기는 했으나 말투가 어눌한 게 약간 교포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거절하고 파라솔을 빌렸는데 어째 하선연의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였다.
분명히 호텔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입가가 은근히 올라가 뭐 재미난 일이라도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영 귀 찮았던지 해변에 흥미를 잃은 듯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가 바닷물에 안 들어갈냐는냐고 물어봐도 대꾸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고 혼자 바닷불에 들어갔다.
따갑고도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그고 서 있으려니까 금세 차가운 파도가 몰아닥쳐 피부를 적셨다.
곧 그 속으로 뛰어든 김택승은 실컷 수영을 했다. 수영을 해본 지가 아주 오래되었는데도 별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
이렇게 바닷가에 놀러 와본 지가 얼마다 되었더라…….
거의 한 십 년은 된 것 같았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 녀석과 함께 종종 바닷가로 놀러 오곤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건강이 나빠진 이후로는 바닷가에 가지 못했다.
덩달아 김택승도 그날 이후 바다에 가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바다에 가자고 해도 공부나 아르바이트 핑계를 댔다.
그 녀석, 박고영이 섭섭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선연과 함께 바다에 온 사실을 안다면 무척이나 부러워할 테다. 그도 여기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에 김택승은 가만히 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고영아, 라고 그 이름을 소리 내 부르는 일은 아마도 다시없을 것이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그리움을 헤치듯 김택승은 멀리까지 수영을 해갔다. 해변이 멀찌감치 보인느 곳에 김택승은 하선연을 찾아보았다.
여전히 파라솔 밑에 혼자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다시 해변으로 헤엄쳐 나갔다.
바닷물에서 걸어나가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이나이 쏠렸다. 노동으로 다져져 군살이라고는 없는 몸이 시선을 끄는 줄도 모르고 그냥 흉터 때문일거라고 생각한 김택승은 파라솔수영을 가르쳐 준것도 그 녀석이었다. 건강관리를 한다고 수영교실에 다닌 탓에 수영실력이 꽤 좋았던 것이다. 아래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채 앉아 있는 하선연에게 다가갔다. 혼자 안 심심하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갑자기 머리에 뭐가 덮어씌어졌다. 끌어내려 보니까 그가 입고 있던 점퍼였다 이걸 왜 주나 하고 쳐다보자 군말 말고 입으라는 듯 턱짓을 해왔다. 그리고는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돌아가자는 식으로 말했다.
"슬슬 배도 고프고 하니 호텔에 가서 식사나 할까요."
아까 차에서 감자와 오징어를 그렇게 먹어놓고는 벌써 배가 고픈가 싶었다. 아직 나온지 한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아 돌아가기가 적잖이 아깝기도 했다.
뭣보다 그는 바닷물에 손조차 담이는 않는서다. 그러니 적어도 해가 떨어질때까지는 있고 싶은 마음에 김택승은 대꾸했다.
"배고프시면 통닭 시켜 드릴까요?"
"통닭을요? 해변에서?"
해변에 오면 당연히 통닭을 시켜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휴게소 감자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니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일단 시켜주면 잘 먹을 거라는걸 알아서 김택승은 통닭집 전화번호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레이싱걸 수준으로 늘씬하게 잘 빠진 미인이었다. 그 미인의 뒤쪽에 선 여자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김택승을 보고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기,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놀지 않을래요? 우리도 두명인데."
평소에는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는지라 기분이 좀 이상했다. 해변이라 그런가 하고 생각하고 김택승은 하선연을 쳐다보았다. 자신은 둘째치고 그가 남자 둘이서 썰렁하게 있는것보다 여자와 함께 있는 편을 즐거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자리에서 일어난 하선연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미소가 해변의 어떤 여자도 유혹할 수 있을 듯했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미소와는 반대였다.
"미안하지만 그쪽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리고는 왜인지 김택승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가 곧 미간을 찌푸리고는 제 친구와 함께 가버렸다. 어째 하선연이
어깨에 얹은 손때문에 묘한 오해를 받은 기분이라 김택승은 미간을 모으고 말했다.
"저분들이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은데요."
하선연은 대답대신 선글라스를 도로 꼈다. 그리고는 뭐 어떠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곁눈질로 김택승의 수영복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김택승씨가 입은 수영복 때문 아닙니까?"
입으라고 권할때는 언제고 수영복 때문에 오해를 받는거라니 좀 어이가 없었다. 하선연의 말마따나 진짜로 이런 수영복이 유행이라면 괜한 오해를 받을 리도 없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그가 입은 것 같은 사각 수영복을 입고 있어 왠지 속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사장님이....." 하고 말을 꺼내려 하자 그것을 뚝 잘라먹은 하선연이 물에 젖은 상태인 김택승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야한 것 같은데, 참 보기와는 달리 대담하십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농담처럼 하는 말에서 서늘한 기색이 느껴졌다. 어째 기분이 나빠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해 김택승은 의아해졌다. 혹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었나 싶어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말했잖습니까. 그 수영복이......"
다시 수영복 타령을 하면서 말을 잇던 하선연은 문득 본인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잠시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다가 방긋 선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이만 식사하러 가는게 어떻겠습니까?"
별로 놀 기분이 아닌 것 같아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잘 됐다는 듯 손목을 잡아 챈 하선연이 발길을 옮겼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이 무척이나 빨라 김택승은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렇게나 배가 고팠나 하고 턱을 긁적거렸다.
*
쾅!
샤워 하고 옷부터 입으라며 욕실에 밀어 넣어진 김택승은 얼떨떨한 얼굴로 세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세게 붙잡혔던지 하선연이 잡았던 손목이 좀 얼얼했다.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힘이 세다. 하긴, 날마다 운동으로 몸 관리를 하는 사람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뻐근한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뜨거운 물로 소금기를 씻어내고 호피 수영복을 물에 담가둔 김택승은 샤워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마저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땐 김택승과 마찬가지로 샤워를 끝낸 하선연이 평소 같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불편해 보이던 기색은 어딜 가고 느긋하니 점잖고 예의 발라 보이는 분위기였다. 앞장을 서며 "오늘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하고 묻는 말투도 평상시 같았다. 그동안 배가 고파서 심기가 나빴던 거였나 하고 묘하게 납득한 김택승은 일단은 기분이 풀렸으니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고 그와함께 발길을 옮겼다.
그가 사주겠다고 해서 어스름이 내리는 거리를 걷던 도중 부산 명물인 돼지국밥집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사람들이 부산에 가면 돼지국밥과 밀면을 꼭 먹어야 한다고 말했던게 생각이 났다. 써 붙여 놓은 가격도 무척이나 저렴해서 좋은 것 같았다. 저기 가자고 말해볼까 한 김택승은 하선연이 다른 쪽을 바라보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저쪽에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정통 프랑스 요리로 소문난 곳인데 제법 맛이 괜찮아요. 그 건물 라운지도 보기 좋고...."
한참 말을 하다가 김택승의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덧붙인다.
"아, 물론 저는 어디라도 상관없습니다. 이왕 사드리는 거니까 김택승씨 드시고 싶은 걸로 드세요."
김택승은 이 상황이 낯설지가 않다고 느꼈다. 그의 운전기사 노릇을 할때 선지국밥 한 그릇 먹으려다가 소고기를 먹고 돈이 엄청나게 나왔던 일이 생각났다.
그가 말하는 레스토랑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돼지국밥보다 저렴할 것 같진 않았다.
일전 소고기 건으로 또 얻어먹기가 부담스러운 감도 있고, 제돈은 아니었지만 아까웠다. 그러나 돼지국밥을 먹자고 하면 분명히 이래저래 핑계를 댈 것이 뻔해서 김택승은 말 없이 앞장을 섰다. 어디 가는 거냐며 의아한 표정으로 따라오는 그를 개의치 않고 돼지국밥 집으로 들어가 일단 자리부터 잡고 앉아 주문했다.
"돼지국밥 두 그릇이요."
그리고 당혹한 듯 아직까지 밖에 선 그를 불렀다.
"사장님, 이리와서 앉으세요."
마지못한 기색으로 좁은 가게 안에 들어와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하선연은 연방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가건물에 입주해 있는 허름한 가게라 통 적응이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곧 이곳이 마음에 안 드는지 선웃음을 꺼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부산의 흥취가 묻어나는 곳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걸로 대접을 해도 될는지.... 덕분에 좋은 호텔에서 숙박하게 되었으니까 좀 더 괜찮은 곳에서 보답하고 싶네요."
"여기도 괜찮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오는 대답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하선연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려 했다. 그때 주문한 돼지국밥 두 그릇이 나왔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김택승은 수저통을 열어 그에게 수저를 챙겨주고 물을 따랐다. 그리고는 양념장과 새우젓, 부추무침을 적당히 넣어 간을 한 뒤 후후 입김을 불어가며 먹기 시작했다.
벌써 먹기 시작한 걸 보고 나가자고 할 수도 없고, 하선연은 할 수 없이 수저를 들었다. 이어 김택승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간을 하고 맛을 보았다.
영내키지 않는 듯 깨작거리는 모습이었으나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굉장히 까다로워 보여도 실상은 별로 까다로운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역시나, 점점 국밥을 뜨는 수저질이 빨라지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아가며 그릇째 먹고 있다. 김택승은 슬그머니 웃으면서 그에게 고추와 마늘이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막장에 찍어 먹으라고 하니 거절하지 않는다.
결국 돼지국밥집을 나왔을땐 배가 빵빵하게 불렀다. 빨개진 얼굴로 두 사람은 배를 문지르며 연방 손부채를 파닥거렸다. 고추와 마늘을 많이 집어먹어서 입이 꽤 매웠다. 매운맛을 달래려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산 김택승은 하나를 하선연에게 주고 어둠이 내린 해변으로 나갔다.
한산한 해변에는 서늘한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습기가 가득한 바람에 밀려온 파도가 자작하게 모래를 적셨다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얼룩진 물결에 드리워진 불빛은 먼바다까지 닿지 못해 수평선은 몹시도 어두웠다. 덕분에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불분명해 보였다. 그것을 가늠하며 걷던 김택승은 어느새 맥주 캔이 비어버린 것을 깨닫고 손안에 가볍게 구겼다. 그리고 버릴 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주머니에서 꺼내보니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강유형인 것 같아 내용을 확인 하려는데 옆에서 하선연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까도 그렇고 다른 사람의 핸드폰에 참 관심이 많았다. 별로 거릴낄 게 없어서 그냥 내버려두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들려왔다.
"핸드폰 고리가 특이하네요."
어쩌다 화랑에서 가져온 귀이개를 핸드폰 고리삼아 달고 있던 김택승은 흠칫했다. 문자 내용은 잘도 들여다보더니만 이건 이제야 발견했나 보다. 그사실을 깨닫자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쥔 손이 등 뒤로 돌아갔다.
왜인지 창피했다. 모양 문제가 아니라 하필이면 그가 쓴 귀이개를 매달고 다닌다는게 부끄러웠다. 어떤 의미부여를 한 것도 아니고 강유형이 빈 핸드폰 고리를 줘서 진짜로 우연히 달고 다니게 된 건데 막상 하선연에게 들키니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의 성격상 또 오해할 게 분명했다.
제 귀지를 파던 귀이개까지 핸드폰 고리로 만들어 달고 다닐 정도면 얼마나 자기를 좋아하는 거냐고 설레발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애써 시치미를 땠다.
"별로.....특이할 것 없는데요."
그리고 화제를 돌리려고 딴소릴 했다.
"맥주 다 마셨으면 캔 이리 주세요. 제가 저쪽에 버리고 올게요."
하지만 하선연은 넘어가지 않았다. 맥주 캔을 달라고 내민 손을 깡그리 무시한 채 목을 길게 빼고는 김택승의 등 뒤에 가린 손을 기웃거렸다.
"이리 좀 내봐요. 뭔지 좀 봅시다."
"볼 것 없습니다. 맥주 캔이나 이리...."
"그럼 그냥 보여주면 되잖아요. 뭔가 낯익은 물건 같은데...."
거절하는 말에도 포기 하지 않고 집요하게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해 나중에는 다 알면서 일부러 자신을 놀리려고 이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답지않게 빼는 행동이 그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와 내보이기도 그래서, 한동안 뒷걸음질을 치며 핸드폰을 숨기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뜬 하선연이 곧 따라 뛰었다. 뒤를 힐끗 돌아본 김택승은 빠른 속도로 쫒아오는 하선연이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아니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 잡아봐라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자각이 없는지 하선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도리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도망치면 당연히 잡고 싶은게 사람 맘 아닙니까?"
"누가 도망을 친다고...."
"그럼 거기 서서 핸드폰 내놔 봐요."
별것도 아닌 일에 정말이지 집착이 세다. 이쯤 되니까 김택승도 왠지 오기가 들어 멈추기가 싫었다. 게다가 달리기라면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를 무시하고 더욱 속력을 높였다. 매일 아침 조깅을 하는 하선연도 지지 않으려 들었다.
결국 야밤에 해변가에서 영문 모를 경주가 벌어졌다. 얼마나 전속력을 다해 달렸는지 로맨틱한 분위기라기 보다는 추격전에 가까웠다. 그 긴 해변을 단숨에 내달려 나중에는 달릴 곳이 없어졌다.
헐떡거리며 해변 끄트머리에 다다른 김택승은 지척에 이른 하선연을 돌아보고 재빨리 몸을 피했다. 바다쪽으로 애둘러 다시 도망가려는데 순간 세찬 파도가 몰려와 발을 붙잡았다. 동시에 하선연이 뻗은 손에 붙잡혔다. 덕분에 균형을 잃어버린 김택승은 불분명한 소리를 내지르며 자빠졌다.
그를 붙잡고 있던 하선연도 예외일 순 없었다. 한참 달리기를 한 탓에 기운이 다빠진 터라 두 사람은 보기 좋게 물속으로 나둥그라졌다.
밀도가 높은 바닷물이 온몸을 덮어씌우며 모래 섞인 짠물이 입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허둥거리다가 어렵사리 몸을 일으킨 김택승은 자신을 잡고 일어나려는 하선연 때문에 다시 넘어졌다. 물에 빠질만한 깊이도 아닌데 일어나질 못해서 둘 다 한참을 버둥거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을땐 콧속과 귓속에 짠물이 들어가서 죽을 맛이었다. 쿨럭거리며 눈에 들어간 짠물을 닦아낸 김택승은 제 손에 들려 있어야 할 핸드폰이 없어진 걸 깨달았다. 헉 하고 몸을 숙여 모랫바닥을 더듬어봐도 잡히는게 없었다. 그때 마찬가지로 홀딱 젖어 기침을 하고 있던 하선연이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고 그러는 영문을 물어왔다.
"왜 그래요?"
"핸드폰요."
그제야 김택승이 바꾼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핸드폰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고 하선연도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도가 잔잔한 편이 아닌데다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잡히는 거라곤 모래뿐이어서 영락없이 핸드폰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어떡하나 하고 계속 모랫바닥을 더듬던 김택승은 문득 손끝에 뭐가 와 닿는 것을 느꼈다. 핸드폰은 아니었다.
하선연의 손이었다. 자신처럼 모랫바닥을 더듬다가 서로 손이 닿았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 올린 탓에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젖은 채로 물을 뚝뚝 흘리는 그가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쏴아아, 몰려왔다 우르르, 몰려가는 파도소리가 요란한 탓인지 어째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맞닿은 손을 그대로 둔 채로 하선연은 조금 웃었다. 평소에 짓는 미소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미소가 아니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라 웃는다기보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 상태로 그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귀는 또 파주면 되잖습니까."
김택승은 젖은 얼굴이 뜨끈해지는 걸 느꼈다. 그 귀이개 때문에 핸드폰을 찾으려던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핸드폰을 잃어버린 거니까.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거니까 찾으려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하선연의 말만 들으면 꼭 그 귀이개가 아까워 이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선연은 물방울이 맺힌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슬쩍 농담을 했다.
"숟가락만 한 귀이개로 파면 핸드폰에 매달 필요도 없겠죠."
아니, 그러니까 그 귀이개가 아니라 핸드폰을 찾는 건데. 그때 김택승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자세를 바로 한 하선연이 덧붙여 말했다.
"이번에 사드리는 핸드폰은 바꾸면 안 됩니다."
그 말에 김택승은 약간 멍해졌다. 그가 사준 핸드폰을 바꿔도 되겠느냐 물었을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라 해서 진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심 두 번이나 그럴 수는 없다 싶어 고개를 끄덕거리던 김택승은 곧 고개를 끄덕거릴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뇨, 이번에는 안 사주셔도 됩니다. 사장님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나 때문에 잃어버린 거 맞잖아요."
가볍게 대꾸한 하선연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 올린 뒤 문득 아래로 시선을 내려 제가 붙잡은 김택승의 손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아직도 그와 손을 잡고 있었다는걸 깨닫고 김택승은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놓아주는 것 같던 손이 도로 깍지를 엮어왔다. 그렇게 손가락을 얽어맨 채로 뚫어져라 얼굴의 어느 부분을 쳐다봐왔다. 거기가 입술이라 김택승은 조금 긴장했다.
곧 나지막이 뇌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키스하고 싶은데."
움찔한 김택승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하선연이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아까 마늘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봅니다. "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모습을 곁눈으로 보면서 하선연은 이래서 레스토랑이 좋은거라고 혼자서 투덜거렸다. 그말에 그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맞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다른 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감쌌다.
입술을 포개며 눈을 감은 김택승은 그의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짠물 때문에 입술이 조금 따가운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의 말마다나 마늘이나 고추를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짧게 키스를 하고 입술을 떨어트린 김택승은 그가 모르고 있던 것을 짚어 주었다.
"저도 많이 먹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똑같이 먹은 탓에 마늘 맛 같은건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촉촉한 살맛과 바닷물의 짠맛만이 느껴졌을 뿐이다.
조금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붙잡았던 뒷덜미를 놓아주는 김택승을 보고 하선연은 무표정한 얼굴이 됐다. 평소라면 능글맞은 말로 받아치거나 했을 사람이라 저렇게 무표정하니까 좀 이상했다. 행여 다른 사람들이 볼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키스해서 놀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걱정에 나머지 손도 슬그머니 놓으려고 하자 그것을 붙잡은 하선연이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등 뒤로 힐끗 시선을 던지며 해변 저편에 있는 호텔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멀리 뛰어온 겁니까. 돌아가려면 한참이나 걸리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사과하는 김택승의 손을 끌어당겨 축축해진 제 주머니에 집어 넣고 하선연은 걷기 시작했다. 그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김택승은 그의 손안에 잡힌 손가락을 꿈지락거렸다. 좀 너무 세게 잡고 있어서 손끝이 살짝 저렸다.
놓아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냥 보기보다 힘이 센가 보다 생각하며 묵묵히 호텔을 향해 긴 해변을 걸었다.
하선연의 불평은 타당했다. 호텔까지는 엄청나게 멀었다. 뛰어올 땐 몇 분이 안걸리는 것 같더니 걸어가니까 한참이 걸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을 때는 피로가 몰려와 진이 쭉 빠졌다. 들어가자마자 씻고 뻗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하선연이 카드키로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먼저 들어가는 하선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달칵 하고 문이 잠긴 순간 몸을 홱 돌린 하선연이 갑자기 어깨를 밀쳤다 가볍게 등을 부딪친 김택승은 곧장 덮쳐오는 입술을 느꼈다. 혀가 깊숙이 들어왔다가 제 혀를 빨아가 꽉 깨물었다. 아파서 끙, 하는 신음을 내뱉노라니 혀를 놓아준 하선연이 입술을 붙인 채 으르렁거렸다.
"미치겠군."
곧 사납게 입술을 겹쳐와 숨을 쉴수가 없었다. 각도를 바꾸느라 간신히 숨을 쉴 틈이 생기자 김택승은 심호흡을 하기 위해 하, 하고 입술을 크게 벌렸다.
그 입술을 도로 덮어오면서 한 손이 눈을 가렸다. 왜 눈을 가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입맞춤의 느낌이 적나라 했다. 깊숙하게 들어왔다가 짙게 훑고 강하게 빨아 당기는 움직임이 점점 달콤해져 저도 모르게 그의 옆구리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안에 모레가 버석버석 집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느낀건지 어떤건지 잠시, 입술을 땐 하선연이 지그시 눈을 맞춰왔다. 그 얼굴에도 모레가 묻어 있어 묘한 소감이 찾아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키스한 여자보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입술에 묻은 립스틱을 더 신경쓰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입맞춤보다는 샤워가 더 급한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김택승은 붙잡았던 옷자락을 놓았다. 한데 그 손을 붙잡아 올린 하선연이 다시 입술을 맞춰왔다.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긁어내리자 모레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부딪치는 입술에서도 알갱이가 느껴졌으나 키스는 계속 되었다. 뒤섞이는 호흡이 점점 뜨거워지며 머리가 멍해졌다. 단순히 얇은 살갗을 서로 문지를 뿐인 행위가 넋을 빼놓았다.
그것이 지펴 놓은 욕구에 두 사람은 서둘러 상대의 몸을 더듬었다. 그리고 옷을 벗기려 서로의 티셔츠 끝자락을 붙잡고 들어 올리는 순간,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모레가 한 바가지나 떨어져 내렸다.
당황한 김택승과 하선연은 동작을 멈추고 그 모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곧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옷을 벗기려는데 자꾸가 뭔가 툭툭 떨어졌다.
조개껍데기다 모레알갱이다 계속 떨어져 내려 결국에는 옷을 벗기다 말고 동시에 푸훗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번져나가고 김택승은 그의 옷자락을 놓고 말했다.
"뭘 하든 샤워부터 해야 하겠는걸요."
그렇군요 라고 고개를 끄덕인 하선연은 문득 빙그레 웃으며 뇌까렸다.
"뭘 하든 말이죠.....?"
꼭 하던 걸 계속하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약간의 낯부끄러움을 무릅쓴 김택승이 욕실로 들어가 대충 모레를 털어냈다. 뒤따라온 하선연도 옷을 벗고 모레를 털었다. 마지막으로 티셔츠를 벗어 던진 그가 돌아서 거울을 보는데 그의 등 한가운데 붉은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뭐가 묻은 줄 알았다. 마치 그해 봄. 털어주고 싶어 눈길을 끌었던 벚꽃잎처럼...... 순간 아련한 감상에 빠진 김택승은 무심코 손을 내밀어 그곳을 만졌다 곧, "아야." 하는 목소리와 함께 하선연이 뒤를 돌아봤다.
뭐하는 거냐는 듯 쳐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비로소 이 계절에 벚꽃잎 같은 게 있을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다시 시선을 내렸을 때 보인 것은 그의 등짝에 생긴 상처였다. 아까 넘어지면서 어디 부딪치거나 긁혔는지 등 한가운데 빨간 멍이 들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만지는 바람에 좀 아팠나보다. 김택승은 멍든 자리를 긁적거리는 그에게 곧장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왜 하필 벚꽃잎이라 착각했을까. 어쩌면 옛 추억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살아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때는 그 벚꽃잎 하나가 왜 그렇게 눈에 밟혔는지, 그 생각을 하며 무심결에 입술을 질근거리던 김택승은 문득 하선연이 미간을 모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또....."
무슨 소린가 싶어 깨물던 입술을 놓으니 그의 시선이 그곳에 와 닿았다.
그래서 무심코 손등으로 입술을 닦자 빨갛게 피가 묻어나는 것이 보였다. 입술이 찢어졌나 하고 도로 피묻은 손등을 핥는데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묘해서 동작을 멈추고 바라보자 그가 문득 미간을 모았다. 무언가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제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어쩐지 어색해진 김택승은
피가 나는 아랫입술을 빨면서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런데 불쑥 뻗어온 손이 그러질 못하게 했다. 대신 피가 맺힌 입술을 검지로 쓸었다.
약간의 의혹이 서린 하선연의 눈동자는 보기 드물게 짙어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붉어진 입술에 열중해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길이 마치 과거의 자신을
쳐다보는 듯해 김택승은 괜히 안절부절 못했다. 평소 같지 않게 진지한 시선이 그를 긴장시켰다.
입술을 가만히 문질러보는 그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눈만 굴리던 중,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김택승은 '응?' 하고 생각했다.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면서 다시 확인해봐도 그대로였다. 아까 현관에서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밝은 욕실에서 보니까 알겠다. 김택승은 약간의 황당함에 아까까지의 조마조마함도 잊고 손을 내밀었다.
"머리에....."
김택승이 무엇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고 하선연은 그 손을 피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심각해 있었다. 그러다 김택승의 손에 끌어 내려지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눈앞에 미역이 축 늘어져 있었다. 길고 검은 줄기가 주르륵 딸려 내려오는 데 어째 지금까지 몰랐을까 싶었다. 두 사람은 김택승의 손끝으로 들고 선 미역을 말없이 쳐다봤다. 이걸 머리에 덜렁덜렁 매단 채고 해변을 걸어왔던가. 그렇게 외모에 신경 쓰는 사람이 이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어쩐지 놀라워서 김택승은 눈을 들어 하선연을 물끄러미 봤다. 본인도 적잖이 민망한지 표정이 모호했다.
웃어넘겨야 할 일을 웃어넘기지 못해 어떡하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김택승의 손에서 미역을 낚아채 욕실 변기에 집어넣고 물을 내린 후 홱 돌아서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아픕니다."
"네?"
뭐가 아프다는 건가 싶어서 반문하자 하선연이 등을 돌려 보이고는 말한다.
"아까 김택승씨가 만지는 바람에 아프잖아요. 이거 어떡할 겁니까?"
세게 문지른 것도 아니고 살짝 만진 것 때문에 아플리가 없다. 만지기 전에는 멍이 든 사실조차 모르는 기색이었는데 아무래도 이 상황을 넘기려는 핑계 같았다.
말도 안되는 고집이 민망함을 무마하려는 노력이라 생각하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웃어버리면 그가 더 창피할 것 같아 애써 웃음을 깨문 김택승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돌아서 보세요."
그리고 밴드 하나로 떼우는 거라면 소용없다고 말하는 하선연의 등에 입술을 내렸다.
"....!"
날개 뼈를 손으로 집은 채 살그머니 벚꽃잎처럼 붉게 남은 자국 위로 입술을 붙이자 그의 등이 경직하는 것이 느껴졌다. 길게 늘어놓던 말은 자취를 감추고 긴장한 듯 숨을 들이쉬는 소리만이 들렸다. 한동안 입술을 붙이고 있다 고개를 들어 올린 김택승은 그의 등 뒤에서 기웃거리며 물었다.
"아직도 아픕니까?"
왜인지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하선연은 김택승이 그의 얼굴을 살피려 하자 급히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거울에 비친 눈가가 어쩐지 붉어진 것도 같았으나 돌아오는 대꾸만은 태연했다.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그럼 다행이라고 말한 김택승은 그의 등 뒤에서 물러나 욕조에 물을 틀었다. 그때 그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처 몰랐는데 김택승씨....."
한데 물소리 때문에 뭐라는지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도로 물을 잠그고 "네?" 하고 반문을 해봐도 그냥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겠거니 하고 마저 옷을 벗어 던지고 씻기 시작했다. 곧 아까 모습 그대로 멀거니 선 하선연에게 샤워부스를 쓰라고 하자 왜인지 입가에서 손을 땐 그가 땅이 꺼저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짧게 혀를 차곤 샤워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땐 온몸이 물먹은 솜 같았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침대 중 아무 곳에나 털썩 누운 김택승은 그대로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선연은 혼자 분주했다.
샤워코롱을 뿌리고 머리를 꼼꼼하게 말린 뒤 스킨케어에 데오드란트까지 바르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잘건데 참 신경쓰는 구나 싶어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택승은 하선연이 문득 시선을 주는 것을 보았다. 가만히 눈을 마주쳐 오는 것이 어째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말해보라는 식으로 엎어진 고개를 쳐들자 그가 김택승이 누워 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서 불현듯 질문을 던졌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김택승은 멈칫했다. 정적이 흐르고, 김택승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함을 느꼈다. 아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기 보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난감해졌다.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 그와 오래전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굳이 숨기려던 건 아니었으나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과 있었던 일도 기억해낼테고 그럼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의 일까지 기억해낼지 모른다. 시베리아처럼 춥던 겨울날, 그에게 전해주었던 모서리가 까만 편지를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녀석.... 박고영의 이야기를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자신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십년이나 지난 지금에 이르러 몰라도 될 소식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줄곧 알아보지 못해 그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 새삼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덕분에 방금까지 가벼운 흥분과 피로로 들떠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미미한 혼란이 가슴 밑바닥에서 느껴져 김택승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심란해진 표정을 보고 하선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집요하게 답을 기다렸을텐데 그러는 대신 갑자기 김택승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누웠다.
화제를 돌릴 수 있게 된 건 다행인데 왜 딴 침대를 놔두고 여기에 눕나 싶어서 김택승은 어안이 벙벙해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김택승의 베개까지 뺏어 벤 하선연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김택승씨 때문에 아프다고 했잖습니까"
아까는 덕분에 괜찮다고 해놓고는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곧 멋대로 김택승을 돌려 눕히고는 허리를 당겨 쿠션처럼 끌어안고 말했다.
"돌보기 편하라고 같이 눕는 겁니다."
이어 하품을 가볍게 하고는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스스럼없는 접촉에 순간 긴장되었으나 더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같이 자고 일어날 때마다 허리가 안겨 있던걸 보면 그저 사람의 체온을 좋아하는 가보다. 그러나 김택승은 누군가와 끌어안고 자는 게 영 적응되지 않았다. 혼자 자는 것이 익숙하다보니 내 쉬어지는 숨결이나 맞닿은 피부로 통탕거리며 전해지는 맥박이 몹시 신경 쓰였다. 그가 던진 질문으로 기분이 어수선해진 탓에 더 그런것 같았다.
덕분에 편안하게 있지 못하고 몸을 경직시킨채 옆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그리 오래지 않아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깨어 있을 땐 딴 생각을 하거나 웃고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빈틈없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제 품에서 이렇게 편안히 잠들수가 있을까 싶어서 마음이 조금 말랑말랑해졌다.
그리고 내리 감은 속눈썹이 참 길다고 생각하면서 면도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은 턱을 유심히 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하선연이 조금 몸을 뒤척거렸다. 그러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그 느낌이 간지러워 다른 손으로 팔뚝을 긁다보니 어느새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있었다.
마치 명주실처럼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그게 손안에서 사락거리는걸 느끼며 택승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됐다.
예전에는 이 머리카락을 만져볼 생각조차 못했다.
소풍날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에도 벚꽃잎을 떼어주기는 커녕 뒤돌아 나오기에 바빴다. 그 뒤로도 쉬이 친해지질 못하고 언제나 먼발치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함께 누워 있다니 사람의 인연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참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다. 주변에 항상 친구가 많았고 누구나 웃는 얼굴로 그를 대했다.
아마 마음을 빼앗긴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고영도 그를 바라보는것이 좋다고 그랬다.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시간 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었는데 이제는 택승도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자고 있을뿐인 그를 바라보는게 지루하지가 않았다.
딱히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표정을 짓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까지 복잡하던 기분도 졸음 섞인 피로도 사라져 택승은 밤이 깊어가는것도 모르고 잠든 하선연의 얼굴을 마냥 응시했다.
*
꽤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음에도 희한하게 밥때가 되자 눈이 번쩍 떠졌다.
숙박권에 조식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사시간이 지나기 전에 내려가서 밥을 먹어야 했다. 택승은 달라붙어 있는 하선연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샤워를 했다.
그리고 서둘러 옷을 껴입은 뒤 아직도 한밤중인 그를 깨웠다. 잠투정을 하는걸 아랑곳하지 않고 흔들어 깨우자 견디지 못한 하선연이 결국 떠지지도 않는 눈을 하고 욕실로 기어들어 갔다.
잠시 후, 언제 졸음에 겨워 못 견뎠느냐는 듯 멀끔한 모습으로 하선연이 나타났다.
마치 슈퍼맨이 전화 부스에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듯 놀라운 광경이었다.
택승은 짐을 챙기자마자 하선연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조식을 제공하는 호텔 뷔페를 찾았다. 하선연은 고작 이것 때문에 그렇게 두드려 깨운거냐는 듯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아침이라 입맛이 없다면서 캔디류 몇개를 집어 주머니에 넣어놓고는 커피 한잔만을 홀작거렸다.
덕분에 아까운 마음이 들어 그의 몫까지 먹느라고 과식을 했다. 접시를 다섯번이나 꽉 채워서 먹었더니 음식이 목구멍까지 찬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하선연과 같이 있으면 과식을 하게 되는것 같았다.
꽉찬 배를 떠안고 체크아웃을 한 뒤 호텔 밖으로 나오자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서 하늘은 높고 햇살은 뜨거우며 바람은 선선했다. 차창을 한껏 열어놓고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즐기며 택승은 호텔 플런트에서 가져온 관광안내지도를 펼쳐 들었다. 이왕 부산까지 왔으니 몇 군대라도 명소를 둘러보고 싶었다. 그래서 택승은 설레는 기분으로 하선연에게 지도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어디 가고 싶은데 없으십니까?"
그러나 하선연은 그리 흥미로워하는것 같지 않았다.
그냥 아무 데나 가자고 그러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외국여행도 수없이 다녀왔을 사람이 부산이 처음일리가 없었다. 그럼 그가 가보지 않은곳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택승은 지도에 표시된 곳 중 눈에 띄는 곳을 가리켰다.
택승은 지도에 표시된곳 중 눈에 띄는 곳을 가리켰다.
"음, 송정이나..... 태종대는 어떠세요?"
"태종대요?"
태종대에 관심이 있는지 반문을 한 하서연은 덧붙여 말했다.
"자살명소로 유명한 곳 말이군요."
자살명소라는 말에 택승은 미간을 모았다. 태종대 말만 많이 들어봤지 자살명소로 유명한지는 처음 알았다.
자살명소라는 곳에 가기에는 좀 그런가 생각하던 중 하선연이 한마디를 더했다.
"커플이 그곳에 가면 반드시 깨진다는 속설도 있죠."
그것 역시도 모르던 일이라 택승은 손가락으로 모인 미간을 문질렀다.
자살명소는 바닷가니까 그럴수 있다 치더라도, 커플까지 깨놓는 명소라니 어째 하선연과 가기에는 영...... 내키질 않았다.
상세하게 아는걸 보면 그도 이미 가본적 있는것 같고, 부산에 더 좋은 명소도 많은데 굳이 태종대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싶어 택승은 다른 의견을 물었다.
"그럼 태종대 말고 어디 갈까요?"
그런데 그것을 달리 받아들였는지 하선연의 입꼬리가 싱긋이 올라갔다.
"저와 함께 태종대는 가기 싫은가 봅니다."
이왕이면 그도 안 가본 곳이 낫지 않나 싶어 택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아마도 자신이 태종대 말고 다른 곳에 가자는 이유가 속설 때문이라 생각하는것 같아 괜히 좀 뜨끔했다. 택승은 혼자 싱글거리는 그를 애써 신경쓰지 않고 다른 장소를 골랐다.
한데 부산에 자주 내려왔었는지 어찌 된게 안 가본 데가 없었다. 센텀시티는 물론이거니와 달맞이 공원이며 광안리며 동백섬이며 전부 다 가봤다고 해서 난감했다. 그러다 문득 사찰이 눈에 띄어 물었다.
"범어사에 가 보신적은 있습니까?'
습관적으로 가본적이 있다고 하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한 하서연이 되물었다.
"절 말입이까?"
그리고는 그렇다고 대꾸하는 말에 마뜩잖은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절은 딱히..... 가볼 만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영남 3대 사찰중 하나라니까 가보면 좋을것 같은데요."
썩 내키지는 않은지 답이 없어서 그럼 어디 다른데 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그런 곳은 또 없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범어사를 목적지로 잡고 차를 몰아갔다.
부산의 복잡한 도로에 제법 익숙해진 탓에 범어사를 찾아가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하듯 범어사도 산 중에 자리하고 있어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표를 끊은뒤 어느정도는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길이 잘 닦여있어 크게 힘들것 같지는 않았다.
숲이 뿜어내는 공기가 신선해 삼림욕 하는 기분도 들어 택승은 기꺼운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잘 따라오나 싶던 하선연이 오래지 않아서 지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조깅하는 사람치고는 이상하게 힘들어 하는것 같았다. 알고 보니 멋을 내느라 조리처럼 생긴 샌들을 신은 탓에 발이 불편한 모양이다.
한 걸음 옮기고 미간을 모았다가 한 걸음 옮기고 다시 한숨을 쉬어대 결국 택승은 발길을 멈추었다. 대신 그에게 다가가 운동화 한짝을 벗고는 말했다.
"신발 바꿔 드릴 테니까 이거 신으세요."
그 말에 하선연이 산뜻하게 웃는 얼굴로 거절했다.
"아뇨, 운동화가 어울리는 차림이 아니라서요."
보아하니 살갗이 홀딱 까져서 물집이 잡힌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옷차림을 걱정하는게 참으로 그다웠다. 그러나 멋에 신경
쓰다가는 유혈 사태가 일어날 것 같아 택승은 한쪽 무릎을 끓은 뒤 운동화 끈을 풀어 신으라고 빌려주고는 말없이 하선연을 올려다 보았다. 그 얼굴에 결국 더는 군소리를 못하고 택승의 어깨를 짚고 운동화를 신었다. 다른 쪽도 그렇게 운동화를 신겨주고 끈까지 묶어준 후 몸을 일으켜 대신 하선연의 샌들을 신었다. 샌들을 별반 신어보자 않은 탓에 발이 허한게 영 어색했다.
덕분에 어기적어기적 발걸음을 옮기자 하선연이 그 모습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그렇습니까."
어울리는건 둘째 치고 불편해서 이런걸 어떻게 신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하선연도 그랬는지 운동화로 갈아 신은 그는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말도 없던 아까와는 달리 여유로운 표정으로 앞서 걸으며 장난처럼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대여료 주셔야죠."
택승은 발걸음을 우뚝 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의아했던지 덩달아 발걸음을 멈춘 하선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를 마주봤다. 그러나 택승은 무슨 말을 하는대신 불쑥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멈칫한 하선연이 조금 몸을 뒤로 물렸으나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재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 있던 것을 꺼냈다. 아까 뷔페에서 하선연이 주머니에 챙겨두었던 생캔디였다.
그가 미처 뭐라기 전에 포장을 까 입에 쏙 넣으니 새콤달콤한 딸기맛 과즙이 우러나왔다. 그것을 우물거리면서 택승이 말했다.
"저야말로 대여료 받아가겠습니다."
그 말에 하선연의 눈이 조금 커졌다. 허를 찔린 듯 놀라는 표정이라 어쩐지 우쭐해졌다. 괜스레 뿌듯한 기분을 숨긴채로 태연스레 몸을 돌리고 택승은 남몰래 웃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등 뒤에서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하선연은 정말 예상 밖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앞서 가는 택승의 뒷모습을 보고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샌들을 신은 채로도 벌써 저만치 멀어진 택때문에 불현듯 느껴진 낯익음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택승의 까만 뒤통수를 쫓아었다.
오래지 않아 차츰 드러난 사찰의 모습은 사뭇 아름다웠다. 과연 영남에서손꼽히는 사찰다웠다.
두 사람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등나무와 그 사이에 자리한 조계문을 지나 계속 걸어 올라갔다. 이윽고 경내에 이르자 청명한 햇살아래 정가한 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바람이 불때마다 땅그랑 땅그랑 들려오는 풍경소리와 새소리가 산 아래의 번잡함을 잊게 해주었다. 하선연도 오기전에는 별로라는 기색이더니 막상 당도하고 나서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대웅전 앞에 다다라 한번 합장을 한 뒤에 두사람은 산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대숲을 끼고 있는 담장길에 다다르자 바람이 불때마다 댓잎 스치는 소리가 참 운치 있었다. 멀리 산허리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여유를 만끽하던 중 새삼 여행을 보내준 강유형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어젯밤 핸드폰을 바닷물에 빠트려 잃어버리는 바람에 문자에 답장도 못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강유형은 걱정을 할 수도 있겠다 싶어 연락을 해야 할것 같았다.
"저, 괜찮으시면 문자 한 통만 쓸 수 없겠습니까?"
하선연은 선선히 핸드폰을 꺼내 건네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그것을 받아든 택승은 다소 서툰 손놀림으로 내용을 입력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으니 연락이 안되도 걱정하지 말라고 적은뒤 수신란에 강유형의 핸드폰 번호를 두드려 넣었다.
그러자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선연이 문득 물어왔다.
"전화번호를 잘 외우시나 봅니다."
딱히 그런건 아니라서 택승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어 전송하기를 누르고 핸드폰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핸드폰을 받아든 하선연이 흠 하고 전송한 내용을 한번 더 확인하더니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 번호는 어떻게 외우는 겁니까?"
그러면서 가족이냐고 캐물었다.
갑작스레 없던 가족이 생길리는 없고, 굳이 숨길 이유도 없는지라 매니저 번호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하선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보나 싶었던 택승은 곧이어 날아드는 질문에 조금 멍해졌다.
"제 번호는요?"
뜬금없이 자기 번호는 왜 묻는 것일까. 설마 몰라서 묻는건 아닐 테고,
뭣보다 어째서 그의 번호를 외우고 있으리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한 눈에 기억할 만큼 인상 깊거나 쉬운 번호도 아니고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잖은가.
그와 통화한 횟수라고 해봤자 손에 꼽을만한데도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선연은 턱짓을 하면서 말했다.
"불러봐요."
불러주고 싶어도 아는 번호가 없었다. 택승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진담이냐는 듯 하선연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택승은 할 말이 없어서 그 눈썹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덕분에 사실이라는 것을 안 하선연이 "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 혹 전화번호 못 외운다고 섭섭해하는건가 싶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강유형의 번호도 일전에 핸드폰을 바꿨을때 그가 서운해하기도 했고 비상시에 연락할 번호 하나쯤은 외워야 겠다는 생각에 애써서 외운거였다. 아니, 그보다 왜 자신만 그의 번호를 외우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택승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풀풀 풍기는 그에게 반문을 했다.
"그럼 사장님은 제 번호 외우고 계십니까?"
외우고 있을리가 없다. 예전에 그가 핸드폰을 바꿔줬을때 번호도 바꾼데다가 택승의 번호도 그와 마찬가지로 썩 외우기 좋은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데 전혀 기대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010-xxxx-xxxx."
택승은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람 말 한마디에 이렇게나 놀라보긴 정말 오랜만인것 같았다. 해핸폰 같은걸 들여다본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것은 이미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 빈손이었다. 무엇보다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기색없이 단번에 번호를 외워 불렀다. 상상치도 않았던 일에 택승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물었다.
"어떻게....."
하선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냥요."
그러자 어쩐지 마안함이 밀려들었다.
그가 자신의 번호를 외우고 있다면 왠지 자신도 그의 번호를 외우고 있어야 할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하선연이 신경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 전화번호쯤이야 모를 수도 있죠."
솔직히 외우고 있는 그가 신기할 지경이라 택승은 이해해줘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성급한 생각이었나 보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닌것 같으니 신경 쓰지 마시죠." 하면서 몸을 돌리는 하선연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그런게 아니란 말도 듣지 않고 시무룩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택승의 운동화를 질질 끌며 터덜터덜 걸어갈 뿐이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도 괜찮다고만 해서 결국 택승은 제 잘못도 아니고 어쩔수 없다 싶어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산사를 한 바퀴 돌고 나니 한구석에 기념품 같은걸 파는 조그만 상점이 보였다.
가게 사람들 다 일하는데 혼자만 쉰게 미안해서 택승은 엽서라도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것저것을 구경하는데
팔을 낀채로 한발짝 뒤에선 하선연의 낌새가 영 이상했다. 선글라스를 쓴 코 밑에 입이 어째 좀 튀어나온것 같았다.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무표정한 채하 고있 어도 부루퉁한 기색이 드러나 택승은 엽서를 고르다 말고 물었다.
"왜 러십니까?"
"......."
그러자 미간을 모은채 한동안 입술을 들썩거리다 이마를 짚으면서 말을 했다.
"고도가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어지럽네요."
여기가 어지러울 마만 고도가 높았나 생각하던 택승은 그럼 서둘러 내려가야겠다 싶어 얼른 엽서를 계산했다.
그리고 빨리 내려가자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내려가는 중에도 계속 어지러운지 표정이 안 좋았다
체한 사람처럼 답답해하는 기색이라 택승은 괜찮으냐고 물다. 그 말에 하선연이 혼잣말처럼 얼거렸다.
"그냥 좀 현기증이...... 아까 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까 일? 그새 아까 일이 뭔지 잊고 있었던 택승은 비로소 전화번호에 관한 일을 떠올렸다. 낙담하는게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사과도 했고 됐다고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틀림없이 그 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거였다. 그렇게나 섭섭한가 싶어 택승은 턱을 긁적이고 말했다.
"이번에는 사장님 번호도 꼭 외우고 있겠습니다."
그러자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척 하선연이 말했다.
"제 번호라뇨? 진짜 그 일 때문에 그런거 아닙니다."
이어 제가 그렇게 속 좁은 사람으로 보이느냐며 하하하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택승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신경을 쓰는 것도 미안한 일 같아 더는 말을 안 꺼내려 했다.
한데 그것도 마뜩찮은지 포기한듯 한숨을 푹 쉰 하선연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외운다 했습니다."
그리고 꼭 외우라면서 약속을 강요했다.
결국 택승은 산을 다 내려오기 전에 강제로 하선연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말았다.
막힘없이 전화번호를 외우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하선연은 마음이 풀린듯 평소 같은 모습이 됐다.
그 번호 하나 외우는게 뭐라고 , 신경 쓰는 모습이 살짝 황당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그가 제 번호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좋은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보다 더 그와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절을 내려와 산기슭에 이르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하선연의 몫까지 엄청 먹었음에도 어느새 아침 먹은 것이 다 소화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오후가 되면서 기온이 올라가 덥기도해 뭔가 시원한걸 먹으면 좋을것 같았다. 때마침 주위를 두리번거 리던중 그럴싸해 보이는 밀면집이 눈에 들어왔다. 하선연이 또 뭐라뭐라 쓸데없이 말을 길게 할까봐 택승은 양해를 구하지 않고 밀면 집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런데 하선연도 이제는 망설임 없이 선뜻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마뜩잖은 듯 주변을 두리번거 리는 대신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로소 택승의 메ㅠ뉴 정에 신뢰가 생긴 모양이다. 그래서 거리낌없이 밀면 두 그릇을 시켰다.
면이라서 그런지 식사가 굉장히 빨리 나왔다. 수저를 챙겨주고 막 젓가락을 들었는데 하선연이 밀면 위에 예쁘게 얹어진 계란 반쪽을 보고 물었다.
"계란 흰자 좋아하십니까?"
크게 좋아한다기보다는 딱히 가리는게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하선연이 계란 흰자를 택승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웬일인가 싶어 고맙다고 말을 하기가 무섭게 그가 싱그레 웃으면서 덧붙였다.
"저는 노른자를 좋아합니다."
"......."
흰자를 좋아한다고 노른자를 싫어하는건 아니었지만 택승은 그냥 말없이 노른자를 그에게 덜어주었다. 그러자 하선연이 놀라는 척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노른자 달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고맙습니다."
그리고 잘 먹겠다면서 노른자를 집어 먹는 모습이 참 즐거워 보였다.
덕분에 택승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가만 생각해보면 반강제로 노른자를 뺏긴 셈인데도 싫지가 않았다. 이것도 재주다 싶은게 그에게는 왜인지 항상 바라는 대로 선선히 내어주게 된다. 그게 조금도 귀찮거나 아깝지가 않아서 신기했다.
잘생겨서 그런가 하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택승은 문득 이래도 되나 싶어졌다.
계란 노른자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한 것까지도 원하는대로 줄 수 있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줘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데 곰곰이 따져보면 준 것보다 받은게 더 많아서 이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는것 같았다.
괜한 상념을 떨치고 밀면 그릇을 비운 택승은 하선연이 국물까지 후루룩 들이켜 마시는 동안 잠시 짐을 정리했다.
아까 사찰에서 산 엽서들을 구겨지지 않게 가방 한 구석에 집어넣고 있는데 밀면 그릇을 내려놓은 그가 문득 물었다.
"그게 뭡니까?"
아까 혼자서 서운해 하느라 뭘 사는지 제대로 안 봤나 보다. 고작 엽서긴 해도 어쨌든 기념품이라 택승은 같이 부산에 온 기념으로 그에게도 한장을 내밀었다.
"한 장 가지실래요?"
그 말에 무심코 손을 뻗던 하선연이 멈칫했다. 정지화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라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혹 이상한거라도 있나 하고 봐도 평범하게 엽서가 들어 있는 봉투뿐이다. 곧 봉투에서 택승에게로 서서히 시선이 옮겨지고, 하선연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뭔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엽서 한장을 가지고 갔다.
그런데 엽서를 갖고 간 후에도 뭔가 골똘한 기색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봐야 할 듯 싶었다. 고속도로가 막히기 전에 서울로 올라가는 편이 좋을것 같았다.
하선연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택승은 어제 먹은 돼지국밥의 보답으로 제가 계산을 했다. 그런 뒤 차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에어컨을 켜는 대신 창문을 한껏 열어놓고 달리자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왔다. 바람 소리만이 귓전에 가득한 가운데 하선연은 줄곧 침묵하고 있었다.
창가에 팔꿈치를 올린채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평소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기분이 별로인 것 같지도 않아 뭔가 이상했다. 마치 아주 깊은 생각속에 잠겨 있는것 같았다.
바람소리가 시끄러워 딱히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택승은 그저 묵묵히 차를 몰았다. 어지럽게 펄럭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달리노라니 저만치 오후의 햇살이 반짝이는 바다가 보인다. 막상 바다를 보니까 이대로 떠나기가 아쉬워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모래를 밟고 파도에 발을 적셔보고 싶었다 .그래서 잠시 바닷가에 들러도 되겠느냐고 하선연에게 물었다. 그가 선선히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여 택승은 잠시 차를 돌렸다.
해가 천천히 기울고 있는 시간인데다 주말도 다 끝나갈 때라 해변에는 별반 사람이 없었다. 이따금 연인들만이 서로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택승은 약간 뒤쳐져 따라오는 하선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왜인지 그의 손으로 시선이 갔으나 먼저 나서 손잡을 용기는 없었다. 분위기가 가볍다면 장난 삼 아라도 그래 볼텐데 하선연은 아직도 빌려 신고 있는 운동화를 바라보며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그래서 택승은 등 뒤로 두 손을 돌리고 제 손을 마주 잡은채 걸었다.
파도와 바닷바람, 그리고 오렌지색의 햇살을 곁에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얼마를 걸었을까. 점점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노을이 짙어지는 게 보였다. 어느새 수평선 가까운 곳 까지 다다른 노오란 해가 황혼을 흩뿌리고 있었다. 바다위의 잔물결은 검은색과 황금색으로 빛나고 빨간 하늘의 얼굴은 서쪽으로 갈수록 푸르러졌다. 그 끄트머리에 뜬 샛별에서 다시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장미색과 살구색이 아련한 빛으로 어지러이 뒤섞여 흩어진 구름의 꽁무니를 보라색으로 물들였다. 마구잡이로 흩뿌린 물감을 정교하게 문질러 놓은 것처럼 근사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바라보는 김택승의 마음은 썩 즐겁지가 못했다.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점점 섭섭함이 짙어졌다. 길을 서두르기에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으나 그만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음 같아선 한 이박삼일쯤 더 있다가 가고 싶었다
평소 여유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생활에 불만을 느껴본 적이 없건만, 오늘만큼은 맘대로 시간을 낼수 없는 처지가 아쉬웠다.
그래서 괜스레 입술만 질근거리고 있노라니 딱지가 져 부르튼 살갗이 느껴졌다.
어제 입술이 찢어졌는데 별 신경을 안 쓴 탓이다.
모처럼 하선연에게 선물 받은 것도 있고, 써야겠다 싶어서 택승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주머니를 더듬어 입술보호제를 꺼냈다.
그러자 약간 앞서 걸어가는 듯했던 하선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기다려주었다. 어째 입술 바르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괜히 긴장돼서 서둘러 입술을 뭉개듯이 발랐더니 입 주변이 온통 끈적거렸다.
덕분에 애써 바른 보람도 없이 자꾸만 입술을 핥게 됐다.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방 아랫입술을 빨자 하선연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나지막이 물었다.
"맛있습니까?"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택승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조그맣게 대꾸했다.
"아뇨..... 크레파스 맛인데요."
순간 하선연이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김택승은 노을이 역광으로 드리워진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스치는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걷어 올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는 희미한 어둠이 드리운 얼굴로 김택승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수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가고 숱한 생각들이 엉켰다 풀려났다. 이윽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김택승은 그것이 뭔지 보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면서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졌고 노을마저도 옅어지며 자세히 살필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어 눈을 돌리지도 못하고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쏴아아- 우르르- 쏴아아- 우르르-
침묵이 길어져 파도소리가 점점 뚜렷해질 무렵, 하선연이 불현듯 손을 뻗어 김택승의 손을 잡았다. 얽어오는 손가락이 열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뜨거워 데일 듯이 놀랐다. 곧 손을 끌어당겨 걸어가는데 너른 등에서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체온까지도 뜨거웠다. 뭔지 모를 열기에 휩싸인 듯 김택승은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의 열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입이 마르고 목덜미가 홧홧해졌다.
해변을 돌아나가 인적 드문 곳에 주차된 차에 이른 하선연은 보조석 문을 열고 팔을 끌어당겼다. 덕분에 평소와는 달리 그쪽으로 올라타게 된 김택승은 곧 차 시트가 확 넘어가 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뱉었다. 무어라 할 틈도 없이 차 문을 닫은 그가 육식동물이 먹잇감 위에 올라타듯이 재빠르게 올라탔다.
순식간에 그의 몸 안에 갇혀버린 김택승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뜩이나 해가 져 어두컴컴해지는 중이라 시야는 어둡기만 했다. 보이는 거라곤 일렁이는 눈동자 뿐이었다. 평소 설탕이 가라앉은 커피처럼 부드럽던 눈빛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열기에 들떠 있어 그 같지가 않았다. 일말의 초조함과 갈급함마저 느껴져 김택승은 움츠러드는 스스로를 느낄 수 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하선연이 자신을 해치기라도 할 것 처럼 조금 겁이 났다. 마치 그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처럼 근거 없는 두려움이 들었다.
덕분에 그가 문득 손을 뻗었을 때 김택승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 반응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 당장에라도 덮칠 것처럼 양손으로 어깨를 짚고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던 하선연이 조금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창밖으로 비쳐 들어오는 불빛에 비로소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어째서 그가 무섭다고 느꼈는지 의아해질 만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상냥하게 누그러진 눈동자에 흡족한 듯 입술을 흰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다정해 보였다. 아주 느리게 손을 뻗어 이마에서부터 뺨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는 손도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입술에 걸린 미소가 평소와는 달랐다. 언제나 같은 선웃음도 아니고 속 모를 아리송한 미소도 아니었다.
그저 기쁜듯 흐뭇하게 웃는 얼굴에 진심이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가슴이 넘실거렸다. 뭔가 꽉 들어차 넘칠듯, 심장이 물그릇이라도 된 것처럼 출렁출렁했다. 곧 뺨을 쓰다듬던 손이 입술을 어루만져왔다.
보호제로 찐득해진데다 딱지로 얼룩진 입술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숙여 가볍게 뽀뽀를 해왔다.
쪽, 하고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고 다시금 입술을 가만히 빨아 당기며 핥아본 하선연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크레파스 맛이네요."
이어 깊숙하게 입술을 포갰다. 깊어지는 입맞춤에 눈을 감은 택승은 뜨거운 손이 허리춤을 헤집고 들어와 맨살을 누비는 것을 느꼈다. 어찌나 체온이 높은지 그 손이 훑어 지나갈 때마다 피부에 불이 붙는 듯했다.
덩달아 제몸도 뜨거워지며 입술 사이로 새는 입김이 달아올랐다.
더운숨이 뒤섞이고 좁은 차안에 입술 부딪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렸다.
머리까지 뜨거워지다 못해 어지러워질 무렵, 몸을 일으켜 세운 하선연이 티셔츠 끝자락을 잡고 한번에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택승의 태셔츠도 끌어 올렸다. 저항하지 않고 팔을 들어 올린 택승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바지 벨트를 풀어내는 그의 손을 거들었다 앞섶이 벌어지고 툭 불거진 성기를 보자 순간 저도 모르게 강한 욕구가 들었다.
그 욕구에 거부감을 느끼지않고 택승은 그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 당겼다. 이어 입술에 가까워진 그의 성기를 삼켰다.
"......!"
하선연이 헛숨을 들이키며 시트를 꽉 움켜쥐는 소리가 들렸다.
붙잡은 허리가 떨리며 성기가 입안에서 꿈틀거렸다. 빨아야 한다는건 알겠는데 너무 크고 굵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무엇보다 언제 침을 삼켜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성기를 물고만 있는데 신음을 참는듯 헐떡거리던 하선연이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성기가 목구멍을 콱 찔러오면서 숨이 탁 막혔다. 턱이 빠질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입안을 빠르게 오가는 성기를 받아내는 것이 몇 번, 곧 그가 한숨을 토해내며 성기를 확 뽑아냈다.
덕분에 삼키지 못한 침이 택승의 입술 밖으로 주르르 흘렀다.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세를 내린 하선연이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 제 성기가 들어갔던 곳인데도 거리끼지 않고 샅샅이 키스해 고여 있던 침을 삼킨 다음 바지를 찢다시피 해서 앞섶을 벌리곤 거기에 성기를 묻었다. 이어 한 손으로는 어깨를 내리누르고 한손으로는 아프도록 엉덩이를 움켜쥔채 없는 구멍이라도 뚫어 박을것 처럼 성기를 추어올렸다.
그것이 회음부를 사정없이 찔러대 야릇한 아픔이 느껴져 택승은 입술을 문채로 욱욱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하선연이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떼고 손가락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말캉한 혀를 마구 짓누르며 손가락으로 입천장을 긁어대 손바닥이 저릿저릿했다.
끈적하게 젖은채 다리 사이를 문지러대던 성기가 엉덩이골 사이 입구를 찌르고 있어 더 그렇게 느껴졌다.
입속을 누비는 손가락과 부대끼는 성기에 정신을 못차리고 숨을 몰아쉬던 택승은 몸을 경직했다. 욕구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달은 상태였으나 막상 뒤로 성기를 받아들이려니 반사적으로 두려움인지 거부감인지 모를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짚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하선연은 물러나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지그시 눈을 맞춘 채로 침이 흥건히 젖은 손가락을 천천히 옮겨갔다. 작게 오뚝선 유두를 가볍게 둥글렸다가 더 아래로 내려가 쿠퍼액으로 미끄럽게 젖은 택승의 성기를 몇번 훑고는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졌다.
그의 손가락이 그곳에 와 닿자 수치심과 당혹감으로 어째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택승은 구겨진 비닐봉지 같은 표정을 한 채 허둥거렸다. 그러자 하선연이 어깨를 짚은 상태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넣었다.
몸속으로 들어오는 이물감도 이물감이지만, 그가 자신의...... 거기에 손가락을 넣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팔뚝으로 얼굴을 가려버린 택승은 울먹임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잠깐만.....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하선연은 듣지 않았다. 손가락을 더 깊은 곳으로 파묻어와 팔뚝을 치운 택승은 그를 억지로 밀어내려 했다.
물론 그런다고 밀려날 하선연이 아니었다. 자기를 방해하는 손을 얽어 옆으로 밀어 붙이고는 손가락을 살짝 뺐다가 다시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이윽고는 끝까지 밀어 넣고 안을 더듬는 탓에 쉰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만....!"
그러자 쉬 - 하고 이마를 붙인 하선연이 살짝 고개를 뒤로 물려 눈을 맞춘채로 조용히 불렀다.
"택승아."
택승아, 하고 이름을 부르는 그 말에 몸부림을 치려던 택승은 동작을 멈추었다. 뭐라고.....? 되묻고 싶어 하는 듯 눈을 크게 뜬 그의 얼굴을 보고 하선연은 희미한 미소를 깨문 채 다시금 불렀다.
"택승아. 가만, 가만히....."
택승은 그 말을 듣고 벌게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워진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엷게 흘러내려 살갗으로 스며들었다.
택승아, 택승아,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에 더는 저항 할 수가 없었다. 뒤로 들어오는 손가락이 늘어나는 동안 응얼거리는 신음을 삼키며 참아낼 뿐이었다.
이윽고 바지를 완전히 벗겨 내 버린 그가 한쪽 허벅지를 밀어 올리면서 지그시 몸을 붙여왔다. 이제껏 눈을 꽉 감고 있던
택승은 다른 무엇인가가 좁은 입구로 밀려들어 오는 느낌에 도로 눈을 크게 떴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빠르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밀고 들어오는게 너무 크고 끝도 없어서 그대로 살이 찢어져 버릴것만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모른채 고개를 이리저리 내젓는걸 보고 하선연이 턱을 붙잡아 고정하고 입을 맞추었다.
떨리는 혀를 빨아가 삼키면서도 택승의 몸에 자신을 밀어 넣는것을 멈추지 않았다.
흐르는 진땀에 맞붙은 살갗이 젖어들고, 몇번의 후퇴와 전진이 반복된 끝에 이윽고 성기가 전부 파묻혔다.
그러자 택승의 입술을 놓아준 하선연이 탄성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리고 잘했다고 칭찬하듯 택승의 머리카락을 쓸어 만지며 끈적해진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당장 죽을 사람처럼 헐떡거리는 택승이 진정할 때까지 몇 번이나 어린아이를 어르듯 그렇게 했다. 그러다 지쳐 흐려진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자 얼굴을 마주 본 채로 빙그레 웃었다. 한데 그것도 잠시, 다음 순간 거칠게 허리 짓을 했다.
"아!"
외마디 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힌 택승은 사정없이 부딪쳐오는 그의 성기를 느꼈다. 퍽퍽퍽, 좁은 차안에 살 부딪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리면서 차가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좁은 실내에 팔꿈치며 무릎이며 발끝 같은게 마구 부딪쳤으나 그걸 아파할 겨를조차 없었다.
사정없이 처올리는 성기가 너무나도 난폭해서 딱 죽을것 같았다. 숨쉬는 것만으로도 벅찬 택승은 정신을 못 차리고 마구잡이로 신음을 내뱉었다.
"으, 으읏.....! 아, 으....!"
"후우, 젠장.....!"
도중에 성에 안 차는 듯 욕설 비슷한 말을 내뱉은 하선연이 택승의 한쪽 무릎을 제 팔에 걸었다. 그리고 치골로 가뜩이나 벌어져 있는 허벅지를 단단히 짓눌렀다.
그렇게 한계까지 택승의 몸을 벌리고 끊임없이 짓쳐 들었다.
그가 왕복해 자신을 쳐 댈 때마다 마치 기름을 들이붓는듯 가랑이 사이가 뜨거워졌다.
피부가 예민하게 달아오르며 유두가 곤두서 오르고 하선연의 복근에 부대껴지는 성기에서 체액이 질금질금 흐르기 시작했다.
입술이 절로 벌어지며 허리가 뒤틀렸다.
손끝과 발끝까지 율과 흡사한 긴장이 흘렀다.
아픔과 경악으로 거칠던 신음의 색이 달라진 것을 느끼고 하선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곧 서슴없던 허리짓의 속도를 늦추고 성기를 뭉근하게 비벼대며 애를 태웠다. 그러는 사이 입술을 질근거리며 앓고 있던 택승은 몸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열기의 불꽃을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눈꺼풀 안에 빛이 깜박거리는 걸 보고 그는 두 손을 뻗어 하선연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그리고 그에게 매달린 채 애걸했다.
"이제 그만..... 빨리....."
그 말에 눈빛이 일변한 하선연이 그의 등을 움켜 안았다.
엉덩이 밑으로 손을 밀어 넣고는 빠르고 강하게 추삽질을 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 놓았음에도 타이어가 끽끽 소리를 내며 밀리기 시작했다.
곧 치달아오는 절정에 택승은 몸을 한껏 웅크렸다.
오래지 않아 용광로의 쇳물이 흐르는 것처럼 정수리를 관통하는 전율이 느껴졌다.
마치 격통과도 같은 감각에 택승은 비명조차 내뱉지 못하고 몸을 휘었다.
그렇게 드러난 가슴을 물어 뜯으며 하선연도 눈을 질끈 감은채 어깨를 떨었다.
"......!"
물어뜯긴게 가슴이 아닌 심장인듯 아찔했다. 맥박도 호흡도 순간 모두 멈춰버리는, 흡사 죽음과도 비슷한 감각을 느끼며 택승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그 손아귀가 아플 만도 하건만 하선연은 뿌리치는 대신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그를 끌어안아 왔다.
*
잠시 선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새벽이었다.
사방이 파란 어스름으로 뒤덮여 새벽 특유의 냄새를 풍겼다. 택승은 묵직한 몸을 뒤척이다가 은근히 찾아드는 통증에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교통사고 후유증을 겪는 거라면 차라리 별생각이 없었을 텐데, 생소한 곳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당혹스러웠다.
천천히 멈췄던 숨을 내쉰 김택승은 누운 자세 그대로 제 몸의 감각을 확인해 보았다.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몇 번이나 맛보았더니 제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발가락도 한번 꼼지락 거려보고, 손가락도 몇 번쯤 쥐었다 펴보고, 코도 살짝 킁킁거려 보았다. 다행히 어디 크게 망가진 데는 없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온몸의 감각이 그렇게나 거세게 날뛰었는데 멀쩡한 것이 신기했다.
여태까지 했었던건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듯 격렬한 섹스였다.
매일같이 이런 섹스를 하고 살면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들겠다고 다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김택승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허리를 안은 채로 곁에 누워 잠든 하선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눈썹 하나 미동하지 않는것이 깊게 잠이 든 듯했다. 밤새도록 그렇게 격렬히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택승은 그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살며시 그의 팔을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침대 아래로 나동그라질 뻔하고 황급히 벽을 붙잡았다. 쥐라도 난 것처럼 하반신에 아무런 힘이 없어 다리가 제멋대로 쓰러지려고 했다.
어렵사리 균형을 잡고 일어섰더니 그야말로 무릎이 후들거렸다. 좁은 차안에서 일을 치른 탓에 팔꿈치며 정강이며 온데가 멍이었다. 그가 물어뜯은 가슴엔 이빨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어 한동안 목욕탕 가기는 글러 보였다.
그러다 지금 목욕탕이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부산에 머물러 있는게 문제란 걸 깨달았다.
차에서 완전히 기진해버린 택승을 들쳐 메고 도로 호텔에 온 하선연은 스위트룸을 잡아 킹사이즈 침대에 그를 던져놓았다.
그리고 좁은 데서는 못 해 먹겠다면서 다시금 김택승을 사납게 몰아쳤다.
덕분에 깜박 기절까지 하고 말았는데 씻겨주겠다며 욕실로 데리고 가서는 물속에서 다시....... 그리고 침대로 자리를 옮겨서 또........ 몇 번을 해댔는지,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용했다.
체력 하나는 자신있는 김택승이라 이만큼 버텼지 보통사람이었다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밤새도록 그와 뒹구느라 서울로 돌아가지 못한 덕분에 본의 아니게 가게를 땡땡이치게 됐다. 지금쯤 강유형이 엄청나게 화가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됐지만 곧 자신답지 않게 뭐 어쩌랴 싶어졌다.
전화로는 사과해봤자 성의없을 테고, 일단 서울에 올라가서 생각할 문제라고 머리 한구석으로 그 일을 밀쳐두었다.
지금 당장은 그런걸 고민하고 싶지않았다.
어젯밤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담배가 무척이나 당겼다. 택승은 제 가방을 뒤져 두 개비 찔러온 담배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베란다로 나가서 피려고 속옷을 찾다가 창밖이 바다인걸 보고 그냥 발길을 옮겼다.
어차피 맞은편에 보이는 것이라 곧 바다뿐이니까 상관없겠지 싶어 알몸으로 나갔다.
스위트룸이라 그런지 베란다도 널찍하고 새벽 바다가 보이는 경치도 훌륭했다.
한데 막상 안락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려니 금연은 아닌가 걱정이 됐다. 참을까도 싶었으나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바닷가의 새벽공기가 담배를 부추겼다.
결국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뱉자 가슴이 뿌듯했다. 밤새 살을 맞대었던 사람이 뒤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비슷한 감각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자다가 문득 깨어났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몸이 서늘하게 식도록 베란다에 앉아 있었던 택승은 담배가 꺼진 것을 보고 꽁초를 버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가 멈칫했다.
어느새 잠에서 갠 하선연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머리를 괸 채로 누워 있었다. 언제 깼습니까, 하고 입술을 달싹이려 하자 그러지 말라는 듯 가만히 검지를 세워 보였다. 그런 뒤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을 따라 가까이 다가간 택승은 침대에 걸터앉아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뗀 후에야 담배 냄새가 날텐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하선연이 개의치 않고 다시 턱을 당겨가 순순히 입술을 내주었다.
잠시 후, 촉하고 살갗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새벽이라 낮게 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일 잘 듣는 걸로 달라고 그랬는데 효과가 없나 봅니다.
아직 부르터 있는 입술을 가리키하는 말에 택승은 혀로 아랫입술을 훑었다.
그런데 약사탓만 할게 아니었다. 오늘 자신의 입술을 엉망으로 만든데는 그가 큰 몫을 했다.
그것을 지적하려고 입을 열던 택승은 불현듯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멋대로 짐작하고 좋아했던 일이 진짜였나 보다.
자신을 신경써 일부러 약국에 가 입술보호제를 사왔다는 것을 깨닫자 순간 가슴이 지끈해졌다.
분명히 기분 좋아야 할 일인데 기분이 좋은 한편, 이상하게 안타까운 기분도 들었다.
곧 하선연이 목덜미에 팔을 걸어와 택승은 그대로 그의 곁에 누웠다.
제팔을 배개삼아 내어주고 벗은 가슴에 머리를 묻게 한채로 그가 하품을 크게 했다. 덕분에 들썩이는 가슴이 맞닿은 얼굴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가 택승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그리고는 그곳을 코끝으로 문질거리며 뇌까렸다.
"머리가 많이 길었네요."
그 말에 택승은 얼마 전까지만해도 반삭이었던 자신의머리가 꽤나 따가웠으리란걸 짐작했다.
단순히 시간이 없어서 이발소에 가는걸 미루고 있었는데 머리를 기르는 편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오래지 않아서 내쉬는 숨결 때문에 정수리가 촉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호흡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택승은 자연스레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오히려 새삼스럽기까지 느껴졌다. 굳이 되새겨볼 필요도 없을만큼 자신은 그를......
좋아하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고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하선연에게 세뇌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난생처음 누군가가 좋아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느껴지는 감정에 택승은 당혹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틀림없이 기쁘고 행복해야 할텐데 어째 그렇지만은 않았다. 도리어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져 내렸다. 그 이유를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서로의 마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 그의 뺨에 남은 배개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 기분이 묘해졌다. 예전에 그와 밤을 보내고 났던 날, 그의 얼굴에 남은 자국을 봤을때도 이랬다.
너무나도 스스럼없는 모습이라 착각 때문에 자신을 거절한사람 같지가 않았다. 만약 자신이 그를 진짜로 좋아했더라면 일종의 기대나 희망을 품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를 진짜로 좋아하지 않는게 다행이라 여겼다.
그게 이제와 이렇게 변할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는 아무것도바뀐것이 없는데 자신의 마음만이 혼자 움직인 것이다.
'혼자' 라는 그 단어에서 택승은 난생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좋아하는 사람의 품에 있어도 쓸쓸한, 아니 도리어 그렇기에 씁쓸한 감정을 자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 가슴을 찌르는건 그럼에도 지금 순간이 지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었다.
덕분에 택승은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몇 십니까."
깜박 잠이 들었다가 하선연이 움직이는 기척에 잠이 깬 택승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질문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오는 것은 벗은 어깨에 닿아오는 입술이었다. 이에 만족하고 다시 잠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벌써 주말이 다 지나고 늦은 월요일 아침이다.
화랑 청소도 빼먹었으니 오늘이라도 가게에 출근하려면 늦지 말아야했다.
그래서 부스스 눈을 뜨고 시간을 보려고 하자 하선연이 고개를 붙잡아 돌리고 입을 맞추어왔다. 입술이 메말라 거칠텐데 하는 걱정도 잠시, 상관 않고 부드럽게 감겨드는 혀가 달콤했다.
"으음....."
일어난 직후의 나른함이 뒤섞인 키스를 맛보고 택승은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추려는 하선연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는 밀려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받으세요."
전화를 무시하려는 그를 김택승은 억지로 침대 밖에 밀어냈다. 그러자 불만스러운 표정이 된 하선연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곳에나 던져둔 핸드폰을 찾아서 한참을 돌아다녔다. 저러다 벨소리가 끊기겠다 싶을 무렵, 어렵사리 핸드폰을 찾아내 전화를 받았다. 그가 통화하는 사이에 욕실로 들어가 씻으려고 김택승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전화를 받은 하선연의 입술에 선웃음이 떠올라 동작을 멈추었다.
"아, 네. 제가 하선연입니다..... 물론이죠. 알고 있고 말고요."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전화를 받는 기색이 묘했다.
입가에 빙긋 걸린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딱딱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에 관련된 전화는 아닌 것같고, 혹 자신을 찾는 전화는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얼핏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그럴 사람이 없어 다시 욕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김택승은 이어지는 말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내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고맙다고 인사라도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잘 됐군요."
하선연이 대꾸하는 말이 아무래도 자신과 무관한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이쪽을 힐끗 보고 말을 이었다.
"물론 잘 있습니다. 다소 일정이 길어진것 뿐이라..... 아아, 그건 어렵겠는데요. 지금 샤워하는 중이라서."
아직 샤워하는 중도 아니었고 전화를 건 사람이 강유형인게 분명해 택승은 바꿔달라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그것을 무시해버린 하선연이 전화를 끊으려는 듯 대답을 길게 했다.
"예에, 물론이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도록 하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이어 가까이 다가온 김택승을 모른척, "그럼." 하고 인사한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대로 핸드폰을 휙 던져버리는 그의 모습에 일단은 대답이 확실한 질문부터 던졌다.
"매니저였죠?"
"그렇더군요."
가볍게 대꾸를 한 하선연은 매니저가 고객의 소중한 정보를 사사로운 일에 이용해도 되는거냐고 한마디 했다.
그러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묻는 김택승을 보고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별말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바꿔주셨습니까?"
울상을 한 채 김택승이 물어오자 하선연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제게 걸려온 화를 왜 바꿔줘야 합니까?"
그거야그렇지만 틀림없이 강유형도 자신을 바꿔 달라 했을 것이다. 한데 저렇게 끊엇으니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겟다.
하선연이야 강유형이 크게 중요하지 않겠지만 김택승에게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무단결근으로 잘리기라도 하면 생계에 큰 타격을 입는다. 이미 끊어져 버린 전화를 가지고 어물쩍거릴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온뒤 혼자서 느긋한 하선연을 채근해 체크아웃을 했다.
하선연은 어디서 빚쟁이라도 쫓아오느냐며 마뜩잖아 했으나 마지막 양심은 있는지 제가 나서 운전대를 잡았다.
밤새도록 힘들게 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보조석에 편하게 앉아서 가게된 택승은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를 마지막으로 일별했다. 그러자 어쩐지 긴 꿈이라도 꾼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앞으로 부산에 올때면 항상 그의 생각을 하게 될 테다.
왜냐하면 다시는 함께 올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렇게 같이 있어도 그와의 미래를 상상하긴 어려웠다.
일방적인 감정으론 아무것도 약속 받을 수 없는 탓이다. 아직 부산을 벗어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택승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운전하는 하선연을 생각해서 자지 않으려고 했는데 몸이 노곤하다 보니까 견디기가 어려웠다. 자기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어느새 서울이었다. 그렇게 오래 잤나 싶어서 시간을 확인한 김 택승은 깜짝 놀랐다. 도대체 어떡하면 두 시간이 채 안되는 시간 동안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 수 있는지 모르겠다. 휴게소도 한번 안 들리고 엄청나게 밟아댔나 보다.
덕분에 차라리 곯아떨어진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깨어 있었으면 차마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을 테다.
여하튼 살아서 서울로 돌아온 택승은 얼마간을 더 달려 화랑에 당도했다. 어째 여름 휴가만큼이나 오랜만인 것 같았다.
짧은 여행기간 동안 자신이 많이도 변했다고 느끼기 때문인가 보다. 조금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하선연과 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유리창으로 그 모습을 본 이함은이 현관문을 열어주면서 맞이했다.
"어머, 두사람이 같이 웬일이에요? 무슨 밀월여행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아마도 농담으로 하는 소리겠지만 아주 틀린말은 아니었다. 덕분에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애써 참고 택승은 화랑 청소 빼먹은 걸 사과했다.
"오늘 아침에 제때 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으면 지금이라도 청소를....."
그러자 이함은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어차피 월급 주는 사람은 사장님인걸요. 같이 오는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상관없지 않나요?'
질문을 받은 하선연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휴게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에게 차라도 한잔하시겠느냐고 물은 이함은은 자판기 커피나 한잔 뽑아달라는 말에 아하하, 하고 모호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택승에게도 의사를 물어왔다. 느긋하게 커피 마실 시간이 아니라 고개를 젓노라니 데스크에서 동전을 꺼내 자판기에 넣은 이함은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대체 이 자판기는 갑자기 왜 들인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안 어울리는거 같지 않아요?"
안 어울리는건 사실이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택승은 어쩌다 이 시간에 같이 화랑으로 왔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냥 같이 갈 사람이 없어 사장님과 부산에 갔다 왔다고 말하자 다행히도 이함은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대신 자판기에서 커피를 꺼내 이거나 사장님께 갖다 달라 말하고는 일이 있다며 사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마침 잘 됐다 싶어서 택승은 그녀에게서 받아든 커피를 가지고 휴게실에 앉아 있는 하선연에게로 갔다.
그리고 그것을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벌써요?"
"일찌감치 출근해봐야 할것 같아서요."
택승의 대답에 하선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봐야 한다고 말을 하니 잠자코 커피를 마시는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내려갔다. 시금털털한 표정으로 "그렇습니까." 라고 대꾸를 하는데 화를 내거나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대놓고 실망을 하니까 괜히 미안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관심하게 굴지 않는 그가 조금 야속했다.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차가운게 나을 텐데, 제가 필요한 것처럼 구니까 마음이 심란했다.
쌩하게 돌아서지도 못하고 어떡하나 망설이던 김택승은 가보라며 고개를 휙 돌린 하선연에게로 다가가 드러난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리고 유치한 장난에 왜 이러냐는 듯 돌아보는 틈을 탓 재빨리 입술을 부딪쳤다.
원래는 이마에 할 생각이었는데 조준이 잘못돼서 콧등에 입술이 부대꼈다.
하선연의 눈동자가 약간 놀란듯 둥글어져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김택승은 조금 웃어 보였다. 좋아하는 쪽은 자신이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오기 싫어도 매일 와야 하니까...... 내일 또 뵙겠습니다."
그 말에 비로소 하선연이 마지못한 듯 피식 웃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택승은 발길을 돌렸다. 휴게실을 나와 가방을 챙겨들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새삼 제가 한 말이 와 닿았다. '내일 또 뵙겠습니다.'
내일 뿐이랴, 모레도 글피도 계속 만나야 한다.
그 사실에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를 계속 볼 수는 있는 것이다.
바보처럼 그것만으로도 화랑에 빨리 돌아오고 싶어졌다. 그래서 택승은 멀어지는 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빨리 갈수록 빨리 돌아올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듯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말간 하늘 아래 환했다.
*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택승은 일찌감치 가게로 출근했다. 이틀이나 무단결근을 했으니 어느 정도의 성의라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찍 나온 보람도 없이 강유형이 귀신같은 얼굴로 벌써 출근을 해 있었다.
바 앞에 글라스를 놓고 앉아 있다가 문을 열고 나타난 그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너....!" 하고 소리를 치려다 말고 인상을 구기며 입을도로 꾹 물었다. 무조건 했다는 생각에 택승은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애써 생각해 숙박권까지 주며서 놀다와라 보냈더니 연락두절에 무단결근까지 하고 말았다.
솔직히 잘린다고 하더라도 할말이 없었다. 강유형이 무슨 소리를 해도 감내하겠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어째 한참 전에 떨어졌어야 할 불호령이 잠잠했다. 왜 이렇게 조용하나 싶어서 슬쩍 눈을 들어 올리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화가 난 것과는 다른 기색이라 택승은 뭐라고해야 할지 몰라서 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른 강유형이 바에 올려두었던 글라스를 훌쩍 마시고는 물었다.
"부산에는 그 화랑주인과 갔던 모양이지?"
택승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리자 강유형은 등 것도 없는 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다 도무지 못 참겠다는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택승에게로 다가와서 말했다.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 남자는....."
무어라 욕설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던 강유형은 듣고 있는 택승을 의식해 어렵사리 말을 골랐다.
".....내 생각엔 그 남자와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말에서 택승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그가 이런 소리를 하는지 혼란스러워졌다.
"만나봤자 네게 상처만 입힐 사람이야. 좋아지기 전에 관둬."
침울한 얼굴로 충고하는 말이 마치 택승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상처만 줄 사람이라 진짜로 좋아지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더 늦기전에 관두는게 옳을지 모르나 순간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졌다. 머리로는 맞는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은 어째서인지 부정하고 싶어졌다.
덕분에 한동안 대꾸를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던 택승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강유형의 기분에 맞춰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그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제 갓 자각한 마음을 없던것처럼 지우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가 기대하는 대답이 아니더라도 말을 해야 했다. 그에게만은 솔직히 털어놓고 싶었다.
"유형이 형."
택승이 잘 쓰지 않는 호칭으로 그를 부르자 강유형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그러나 그 표정은 이미 택승의 대답을 에감한 것처럼 어두웠다.
"그럴수 없어요."
결론부터 말을 한 택승은 살짝 웃으면서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강유형의 표정에 한바탕 복잡한 감정이 휩쓸고 지나쳤다. 곧 그 모든게 다 빠져나가고 허탈한듯 무표정해진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그리고는 한동안 입을 다문채로 말이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걱정스레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연락도 없이 무단결근을 한건 못 봐주겠다. 월급 깎이는건 당연한 일이고 당분간 쉴 생각은 접어."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택승은 군말 없이 알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빨리 오픈 준비 안하고 뭐하느냐는 호통에 정신을 퍼뜩 차리고 제 일을 찾아 뛰어갔다.
일을 며칠이나 쉰 탓에 가게 사람들 눈총이 엄청나게 따가왔다. 기념품 삼아 사 온 엽서도 갖고 오는걸 잊어버려서 고스란히 그 눈총을 받아야 했다.
꼬장꼬장한 주방장은 가게가 네 놀이터인줄 아느냐며 한껏 역정을 부렸고 주방보조는 도대체 어떡하면 매니저가 그렇게 봐주느냐고 눈치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럼에도 택승은 그런말들에 맘 상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제 할일도 찾아서 하고 다른 사람 일도 열심히 도맡아 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퇴근을 한 김택승은 여느 때와 같이 화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매일같이 들리는 곳이고 평소처럼 일하러 갈 뿐인데 기분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어수선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곧 하선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울렁거리고 긴장한 사람처럼 초조해졌다. 제 얼굴조차 주체가 되지 않아 무표정을 가장할수록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나중에는 그것도 안 돼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서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오늘따라 지하철이 참 느렸다. 역마다 멈춰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여러가지 이유에 상관없이? 화랑에서 하선연을 만나는 게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이 어이없고, 생소하고, 조금은 난처했다.
이윽고 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나온 택승은 얼마간을 걸어 화랑에 당도했다. 대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앞에 다다랐는데 막상 그와 볼 생각을 하니까 폭풍이 몰아치듯 속이 시끄러웠다. 어떻게든 제 마음을 추스르려 택승은 잠시 걸음을 멈춰서 숨을 골랐다. 심호흡을 깊숙하게 연거푸 하고 손바닥으로 뺨을 몇 번 찰싹찰싹 두드린뒤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문득 현관문 유리에 비친 제 얼굴이 보였다. 촌 아이처럼 빨간 뺨에 만화경처럼 어지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다른사람 같아 택승은 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김택승에게 익숙한 것은 덤덤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이 표정을 어디서 본 건가 싶어 기억을 더듬다 보니 무균실 비닐에 가려진 그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서 목소리만큼은 열기가 넘쳤다.
그저 바라만 봐도 즐거웠다고, 고맙다는 그 말 한마디로 행복하다며 살짝 웃었다.
조금만 더 그를 좋아할 수 있도록 계속 살고 싶다던 눈동자가 그 순간엔 아픈 사람같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택승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얼굴이 비친 유리창을 더듬었다. 그리고 박고영의 얼굴을 더듬더 보듯이 어루만졌다. 그때에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상대방은 그를 알지도 못하는데 단순히 좋아하는 맘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아직 모르겠다. 과연 이것을 행복이라 칭할 수 있는지.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하선연이 나타났다. 그는 다소 멍하게 서 있는 택승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서서 뭐하는 겁니까?"
택승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혼자만의 마음이라 무작정 그를 만난것을 기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를 보면 볼수록 다른 감정은 가셔버리고 반가운 기분만이 남았다. 불과 어제 오후에 헤어졌으면서 몇년만에 만난 것처럼 맘이 짠했다. 그래서 가만히 입술을 휘고 눈을 내리 깔았다.
그 모습을 말없이 보던 하선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그렇게 웃는 모습이 눈에 띄였죠."
예전부터라는 말에 택승은 도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가 말하던 예전이 재회하고 난 후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먼 예전인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선연은 그 말을 흘러 넘기고 안으로 들어오라는듯 비켜섰다.
그리고 택승이 건물안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려 주머니에 뭔가를 찔러 넣어주었다.
꺼내보니 핸드폰이었다. 가죽으로 된 고급스러운 핸드폰 줄까지 달려있어 상당히 근사해 보였다. 이미 개통까지 된 상태라
어찌된 영문인가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내 명의니까 요금 걱정할 필요 없이 그냥 쓰면 됩니다."
택승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 키나 아파트 키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랍니까."
정 싫으면 명의이전 하라면서 하선연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솔직히 기기를 받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요금까지 내준다니까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거절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해서 마치 진짜 차 키나 아파트 키라도 받은것 처럼 심란했다. 기쁜 반면 어째서 좋아하지도 않는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던 것이다. 어쩌면 생각없는 친절에 저 혼자 생각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좋은맘으로 선물해준거라 나중에 명의변경을 할 생각으로 고맙다고 말을 한 택승은 일을 시작했다.
주변정리부터 한 뒤에 도구함에서 청소기를 꺼내오자 그새 휴게실 소파에 길쭉하게 누운 하선연의 모습이 보였다.
팔걸이 밖으로 튀어 나간 다리나 딱 얼굴을 가릴 만큼 처진 블라인드가 여느때와 다름없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런 하선연을 바라보는 택승의 마음이었다. 전엔 청소기를 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는데, 이제는 언제나와 같은 그의 모습에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혼자만의 마음이기에 아무것도 바랄수 없는 처지지만, 지금 이 순간 택승은 어쩌면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이런 따뜻한 기분이 행복이 아니라면 달리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까. 이것이 박고영이 말했던 것과 같은 행복인지는 확인할 수 없어도 가능한 오래도록 이 풍경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가 반드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앗다. 그렇게 작은 바람을 안고 택승은 잠자는 하선연을 방해하지 않도록 살며시 청소기를 내려 놓았다.
*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선 날씨가 몹시 애매해졌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니 감기 조심하라는 멘트가 날씨예보의 중심이 된 가운데 사람들은 옷차림에 혼란을 느꼈다. 찌는듯 무더운 대낮에 외투를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법 쌀쌀해진 한밤에 한팬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택승은 고민하지 않고 반팔을 고집했다.
가능한 오래도록 반팔을 입고 있으려고 노력하는 그였다. 추워지기도 전에 긴팔을 입으면 한겨울에는 어찌 버티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게 일을 마치고 화랑으로 출근하는길, 드러난 팔이 제법 차가워진 걸 느낄수 있었다. 이제 반팔 입을 날도 얼마남지 않은것 같다. 어쩐지 여름이 지나가 버리는게 아쉬워 택승은 입맛을 다셨다. 특히 이번 여름은 여러모로 의미 깊은 탓이기도 했다. 처음 하선연과 만났을땐 그로 말미암아 겪게된 상황들이 참 난처했었는데 지금은 그 기억에도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김택승은 혼자 피식거리면서 대문을 지나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때 어렴풋이 전화벨 소리가 들렷다. 화랑쪽에서 나는 벨소리라 누가 데스크로 전화한 모양이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걸려오는 전화라면 받아야 할 것 같아서 김택승은 걸음을 빨리했다. 급히 문을 열고 로비로 달려가 데스크의 전화기에 손을 뻗은 순간, 벨소리가 뚝 끊겼다. 정 급한 일이면 다시 연락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손을 거두는데 이번에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보니까 이함은의 이름이 떠 있었다. 방금 데스크로 전화한 것도 그녀인 모양이다.
"여보세요."
-택승씨? 미안한데 지금 어디에요?
전화를 받자 이함은이 어디를 걸어가고 있는지 약간 흔들리는 목소리로 들어왔다. 방금 화랑에 도착한 참이라고 하자 잘됐다면서 용건을 밝혔다.
-사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집 전화도 안 받으시고 핸드폰도 안 받으셔서요. 혹시 거기 계세요?
전화를 받은 채로 화랑을 대강 둘러본 김택승은 대꾸했다.
"없는 것 같은데요. 일단 제가 다시 찾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실래요?
김택승은 알겠다고 대꾸한 뒤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화랑 안쪽까지 둘러보고 핸드폰을 꺼냈다. 먼저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해봤다고 해도 확인 차 한 번 더 해보는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에게 괜히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부산에서 한결 더 가까워진 느낌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용건 없이 전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만일 사귀는 사이라면 아무 이유없이도 맘 편하게 전화해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스쳤다. 혼자 좋아하는 것과 서로 좋아하는 것의 차이는 이런데서 생기나 보다. 단지 마음을 표현할 수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도 참 크게 느껴졌다.
이미 외우고 있는 그의 번호를 누르자 통화연결음과 함께 그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랐다. 하선연♡이라는 글자가 김택승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일전에 핸드폰을 주기 전 그가 손수 이렇게 입력해놓았다. 뒤에 붙은 하트가 영 낯부끄럽고 적응이 안돼 몇번이나 지우려고 시도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하트표를 지운 걸 그가 보면 실망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하선연이라고 입력해놓은 것과 하선연♡이라고 입력해놓은 것의 느낌이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제 핸드폰 들여다볼 사람이 누가 있나 싶어 내버려두었다.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던 중 김택승은 문득 다른 소리가 섞이는 것을 깨달았다. 수화기에서 귀를 떼고 집중해보니 어디서 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선연의 핸드폰인 것 같았다. 벨소리를 따라간 곳은 휴게실의 소파 위로 거기에 그의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다. 이게 여기 있으면 화랑에 내려왔다는 소린데…… 하고 핸드폰을 집어 드는 순간, 김택승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제 사진이 떠 있었다. 그냥 사진도 아니고 해변에서 호피무늬 수영복을 입은 전신사진이었다. 이걸 언제 찍었지? 아니 뭣보다 왜 이런걸 전화할 때 뜨도록 설정해 놓은 건지 모르겠다. 누가보면 어쩌려고…… 얼굴이 확 달아오른 김택승은 어떡하나 싶어서 허둥거렸다. 그러다 제가 전화를 끊어야 사진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고 연결을 끝냈다. 그럼에도 한동안 부재중 통화로 표시되면서 사진이 액정에서 없어지지가 않았다.
해변도 아니고 일상에서 호피무늬 수영복을 입은 제 모습을 보니까 진짜 엄청나게 민망했다. 저런 걸 입고 태연하게 돌아다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냥 입었을 때와 달리 사진으로는 옆 트임 때문에 엉덩이가 거의 드러날 지경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주방보조에게 수영복 좀 빌려달라고 말한 자신을 훼방 놓고 싶은 심정이다. 가뜩이나 그에게 전화 거는 일이 어려운데 이래서야 아주 못 걸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이 전화를 걸때마다 그가 이 사진을 보게 된다는 말이 아닌가. 으악하는 소리가 절로 입 밖에 나오려고 했다. 솟구치는 창피함을 주체못하고 손부채를 퍼덕이고 있던 김택승은 뒤에서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그만 "으악." 하고 실제로 소리를 치고 말았다. 거의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하선연이 서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아, 아니 그게……."
제 사진이 머릿속을 오락가락하던 와중 김택승은 이함은의 용건이 먼저라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고 이함은 씨가 사장님을 찾아서요."
"아, 조깅하고 샤워하러 올라가면서 핸드폰을 깜박했네요."
"집 전화도 안 받으신다고 하던데요."
"귀찮아서 콘센트를 빼뒀습니다."
무심하게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이함은이 참 고생이 많겠구나 싶었다. 일단 연락해주라고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줬다. 곧 그녀와의 통화를 한 하선연은 큰일이 아니었던지 오래지 않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다시 그 사진이 생각났다. 그것에 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나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게 통화하는 바람에 이미 말할 타이밍이 지나버린 것 같기도 하고, 민망한 사진이니까 지우라고 말하기도 뭐했다. 왜냐하면 솔직히 그가 자신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게 기뻤기 때문이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라서 마음이 술렁술렁했다. 단순히 핸드폰의 데코레이션을 위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쁜건 기쁜거였다.
그래서 괜히 그의 핸드폰이 든 곳을 힐끗거렸다. 그러자 하선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김택승의 시선이 닿는 곳을 착각하기라도 했는지 손을 뻗어 김택승의 콧등을 검지로 가볍게 치고는 말했다.
"지금 어딜 보는 겁니까?"
허물없는 스킨십에 김택승은 콧등을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코를 감싸 쥐고 그를 쳐다보았다. 가끔은 키스나 애무보다 이런 사소한 접촉에 더 놀라고는 했다. 친근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마음에 와 닿는 정도가 더 강했기 때문이다. 둥글어진 그 눈을 보고 하선연은 은근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유혹하고 싶으면 확실히 해요, 그렇게 야하게 쳐다보지 말고."
야하게 안 쳐다봤는데…… 그냥 주머니를 쳐다봤을 뿐이라고 생각한 김택승은 곧 그 옆에 뭐가 있는지를 떠올리고 뒷덜미가 뜨끈해졌다. 덕분에 괜스레 턱을 긁적거리며 "그런거 아닙니다." 라고 말하니 하선연이 "그래요?" 라고 웃으면서 손을 머리 위에 얹고는 마구 헝크러트렸다. 제 머리가 흐트러지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면서 남의 머리를 흩트리는 건 상관없나 보다. 덕분에 그가 손을 떼자 머리가 완전히 까치집이 되어버렸다. 쑥스러워진 김택승은 거울 볼 생각도 못하고 머리를 손으로 대충 쓸어내렸다. 그걸 보고 하선연이 또 풋하고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울렁거리는 마음이 한 일 리터씩은 불어나는 기분이었다. 자꾸만 이렇게 혼자서 좋아져도 되는 걸까. 지금도 충분히 좋아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좋아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런 걱정이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선연은 다시금 손을 내밀어 김택승의 머리카락을 가다듬어주었다. 미용사처럼 신중한 표정으로 가르마를 없애고 잔머리를 한가닥 한가닥 방향을 잡아서 넘겼다. 이윽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그러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탓에 머리가 도로 흐트러지는 것을 보고 말했다.
"혹시 왁스 스프레이나 …… 아니면 젤 같은 거라도 없습니까?"
"없는데요."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나오는 대답에 하선연은 하나쯤 장만하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하긴, 만지기에는 아무것도 안 바르는게 낫겠네요."
만진다는 단순한 말이 이렇게 야릇하게 들릴 줄이야, 순식간에 생각이 멀리 나가버리는 것을 깨택승은 혼자 자책했다. 부산에서 돌아온 이후 발정이라도 났나보다고 엄한 추측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청소를 하기 위해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한데 아무래도 그 수영복 사진이 맘에 걸렸다. 전화할때마다 그 사진이 뜬다고 생각하니까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제 사진을 간직해준 것은 고맙지만 전화할 때 뜨는 사진은 딴 걸로 좀 바꿔줬으면 좋겠다. 그럼 다른 사진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새로 받은 핸드폰에 혼자서 사진 찍는 기능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선연이 휴게실에서 발 뻗고 누울 동안 김택승은 혼자 로비에서핸드폰을 뒤적거렸다. 그럭저럭 문자에는 익숙해졌는데 아직 다른 기능들은 사용해보지 않은 탓에 미숙했다. 이렇게 저럭헤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가 마침내 자가촬영기능을 찾아낸 김택승은 시험 삼아 한 장을 찍어보았다. 그리고 찍힌 사진을 확인해봤다가 깜짝 놀랐다. 정녕 이게 내 얼굴인가 싶었다. 콧구멍도 너무 크고 턱도 두툼하고 눈도 쭉 찢어진 게 하여간 …… 봐줄만한 사진이 아니었다. 이런 사진을 줄 바에야 차라리 수영복 사진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어떡하지 고민을 했다. 그러다 핸드폰에 검색 기능이 있는 것을 깨닫고 검색을 해봤다.
<핸드폰 사진 잘 찍는 법>
곧 이런 저런 검색 결과가 떠올랐다. 몇 개 클릭을 해보니까 나름의 노하우가 있는 모양이다. 45도 각도로 위에서 찍되 눈을 크게 뜨고 찍으란 거였다. 턱에 콤플렉스가 있으면 볼에 바람을 넣거나 턱을 괴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대충 알 것 같아서 김택승은 다시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기에 도전했다. 아까 턱이 별로였던 것 같으니까 볼을 부풀리고 눈을 크게 치켜뜨고…… 어째 좀 웃긴 거 같은데 진짜 이게 사진이 잘 나오나 모르겠다. 그렇게 한동안 핸드폰 카메라를 노려보는데 옆통수가 따끔따끔했다. 뭔가 싶어 찍다 말고 고개를 돌린 김택승은 문가에 기대선 채 이쪽을 보고 있는 하선연을 발견했다. 뭐 대단히 재밌는 거라도 보는 사람처럼 눈가에 얄궂은 웃음이 철철 넘쳤다.
"뭐하고 있는 겁니까?"
웃음기가 섞인 물음에 그제야 혼자 생쇼를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김택승은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귓전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냥 …… 사진이 좀 필요한 것 같아서요."
"그럼 자연스럽게 찍으면 되잖아요. 나 원."
그러고는 나지막이 키득거리고는 웃는 소리에 김택승의 얼굴이 더워졌다. 누구 때문에 사진을 찍으려는 건데 그 맘도 모르고 저런다. 그래서 손부채를 퍼덕거리며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놓으려니 하선연이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와서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봐요."
이어 카메라를 준비시키고는 김택승의 어깨에 손을 얹어 가까이 당겼다. 그의 얼굴이 바싹 가까워져 김택승은 침을 꼴깍 삼켰다. 등으로 돌린 그의 팔이 마치 춤에 안겨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턱 너무 들지만 말고 카메라 쳐다봐요."
시키는 대로 한다고는 했지만 그가 신경 쓰여서 눈꺼풀이 어지럽게 깜빡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찍힌 사진을 확인해본 하선연이 눈 감았다면서 다시 찍자고 말을 해왔다.
"조금 더 바싹 붙어 봐요. 얼굴이 가운데로 나오게끔."
그러면서 어깨를 한층 더 끌어당겨 볼이 맞닿았다. 마치 아기 볼이라도 갖다 댄 양 보들보들했다. 귓전에 난 솜털까지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나, 둘, 셋."
찰칵, 하는 소리가 지나가고 이제 됐다면서 서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입술이 스쳤다. 아니, 코가 스친 건지 입술이 스친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뭐가 스치긴 스쳤다. 덕분에 그대로 얼어붙은 김택승은 아주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하선연을 쳐다보았다. 곧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진다 싶더니 바로 입술이 포개졌다. 겹쳐지는 입술이 너무 달콤했다. 서로 부등켜 안은 채로 몸을 기댈 곳을 찾아 비틀거렸다. 그러다 벽 대신 선 유리창에 등이 부딪쳤고 가슴팍 위로 하선연의 손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의 손이 스치는 곳. 제 손이 스치는 곳. 그 모슨 것들이 아찔하게만 느껴졌다.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입술을 거부할 수 없으면서도 맘 한구석으로 희미한 의문이 스쳤다.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이렇듯 모든 걸 내보여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옆구리를 쓸어 올리며 몇 번이고 흉터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눈물 나도록 좋았다. 단순히 쾌락이라고 할 수 없는 감각이 느껴져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했을 때와는 다른 쾌감이 들었다. 이제 어쩔 수 없었다. 이토록 그를 좋아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것이 생각의 전부였다.
흉터를 타고 내려간 입술이 배꼽에 머무르는 동안 손이 바지 벨트를 풀어내고 앞섶을 벌렸다. 곧 성기가 공기 중에 노출 된다 싶더니 갑자기 뜨거워졌다. 하선연이 제 성기를 입안에 품은 것이다. 깜짝 놀란 김택승은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붙잡은 허벅지를 놓아주지 않았다. 성기에 달라붙는 혀의 놀림이 구음에 서툰 자신과는 완전히 달라서 순식간에 사정감이 치밀어 올랐다.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어봤으나 소용없었다. 미처 비키라고 할 새도 없이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으읏……!"
그걸 느끼고 재빨리 입술을 뗀 하선연이 손으로 성기를 강하게 훑어주었다. 정액을 째내는 그의 손길을 따라 허리가 마구 뒤틀렸다. 잠시후 짙은 탈력감과 함께 머리가 몽롱해졌다. 끈적해져 버린 눈꺼풀을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온 사방에 정액이 튀어 있었다. 하선연의 손이나 셔츠에는 물론이거니와 얼굴에까지 묻어 있어 깜짝 놀란 김택승은 그것을 손으로 닦아주려했다. 그 손을 뒤로하고 셔츠를 벋어 얼굴에 묻은 정액을 훔친 하선연은 더러워진 셔츠를 집어던지고는 몸을 일으켜 입술을 겹쳤다. 제 성기가 들어갔다 나온 입술이건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도리어 몸이 떨릴 정도로 좋았다. 그것을 달래기라도 하듯 등을 어루만진 그가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은데요."
맞닿은 곳에서 아직 바지에 갇혀 있는 그이 성기가 불룩해진 것이 느껴졌다. 김택승은 덜덜거리는 손으로 그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스스로 제 바지와 속옷을 벗은 채 몸을 돌렸다. 몸을 도서야 아침인데다 밖아 훤히 보이는 통유리 앞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으나 그를 말리 틈은 없었다. 질척거리는 소리에 이어 그가 밀려들어오는 느낌에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다행히도 주변 상황에 대한 자각은 하선연도 있던 모양이다 오래 끌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유리를 부수기라도 할 듯 몰아붙였다. 결국 그가 사정하는 순간 한번 더 사정하게 된 김택승은 처음보다 더 긴 절정의 순간이 물러가고 나자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했다. 그를 따라 하선연도 바닥에 드러누웠으나 역시나 불편한지 김택승의 팔을 펼쳐 베개 대신 벴다. 졸지에 팔베개 신세가 된 김택승은 정사의 여운이 물러갈 때까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렇게 화랑을 왔다갔다 했어도 이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휴게실 천장도 아니고 로비의 천장을 보고 있노라니 매일 일하는 곳에서 섹스를 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더불어 더러워진 유리창에 시선이 갔다. 유리창에 기댄 채 마구 몸을 비빈대다 사정까지 해서 얼룩이 엉망으로 져 있었다. 닦으려면 좀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선연이 잠시 몸을 굴려 바닥에 내동댕이쳐 있던 핸드폰을 주워왔다. 그리고 도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아까 찍은 사진을 확인해 보았다.
"잘 나왔네요."
그렇게 말하고 건네주는 핸드폰을 받아 보니 그와 자신이 뺨을 맞댄 채 찍은 사진이 보였다. 제 얼굴은 불그스름한 게 좀 이상했지만 하선연의 사진만큼은 잘 나온 것 같았다. 수영복 사진 대신 쓰라고 주기에는 같이 찍은 거라 부적절할지 몰라도 그의 사진을 가지게 돼 무척이나 기뻤다.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 "사장님이 참 잘 나오셨네요." 하고 말을 하지 하선연이 피식 웃으면서 농담조로 물었다.
"그래도 실물이 더 낫지 않습니까?"
제 팔을 베고 곁에 누워 웃는 얼굴을 보는데 부정할 수 가 없었다. 아무리 사진이라 하더라도 실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웃을 때마다 음영이 드리우는 눈꼬리, 보조개 때문에 더욱 볼록해 보이는 뺨, 얇게 퍼지는 입술. 그에게서 풍기는 달착지근한 냄새에 이르기까지. 제 기억 속에 새겨지는 그의 모습보다 매초 눈에 보이는 그이 모습이 훨씬 더 낫다. 그래서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네요."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대답할 줄은 몰랐던지 하선연은 잠깐 웃음을 거두고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김택승 씨도 실물이 훨씬 낫습니다."
예의 삼아 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속의 제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아서 실물도 그렇다고 하면 그 앞에 나서기가 부끄러울 뻔했다. 김택승은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제 외모에 옅은 불만을 느꼈다. 좀더 근사한 얼굴이었다면 자신을 좋아해 주었을까. 외모가 전부는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외모 같은 건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수술로 콧대를 높이고 턱을 깎은 성형미남이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라 말 한마디에 책임지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는데 얼굴이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 그저 비 온 후 크는 죽순처럼 날마다 자라는 맘이 약간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삼키며 김택승은 제 팔을 베고 누워 그새 잠든 하선연의 옆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
디링디링~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에 가게에 출근해 있던 김택승은 의자를 내리다 말고 핸드폰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달랑거리는 핸드폰 줄이 주머니에 걸려서 쉽게 나오질 않았다. 보기 좋긴 해도 그뿐이라 적잖아 거치적거렸다. 그래도 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주머니에 걸린 핸드폰 고리를 빼낸 뒤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바라보았다. 누구에게 온 것인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었다. 전화도 아니고 김택승에게 문자를 보낼만한 사람이라면 몇 없었다. 그것도 이모티콘까지 찍어가며 보낼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배고프네요 (つ-( -)つ」
참 겉보기와 안 어울리는 이모티콘이라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헛웃음을 지었다. 가능하면 자신도 이모티콘을 찍어가며 답장을 하고 싶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다 할 대답이 필요한 내용이 아닌 탓이다. 문자함을 꽉 채우고 있는 그의 문자는 전부가 이런 식이었다. 핸드폰을 바꾼 후 이따금 이렇게 연락을 하는데 대부분이 뚜렷한 목적이 없었다. 때문에 문자를 자주 하던 편도 아니고 해서 답장을 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도 이렇게 간간이 문자를 받는 것이 좋았다. 틈날 때마다 정체 모를 이모티콘으로 채워진 문자함을 다시 볼 정도로 기뻤다. 지금처럼 답장을 고민하는 것조차 행복한 것 같아 싱그레 웃던 김택승은 문득 헛기침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나왔는지 주방보조가 다소 뜨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조금 민망해진 김택승이 서둘러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자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을 했다.
"됐어요. 어차피 연애하는 거 다 아니까."
그런 소리는 한 적이 없어서 눈을 둥그렇게 뜬 걸 보고 주방보조가 그럼 모를 줄 알았느냐며 콧방귀를 풍 끼었다.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모를 수가 있겠어요. 한창 좋을 때란 건 알지만 짝 없는 사람들 생각해서 좀 자중해 달라고요. 아까 매니저 완전 썩은 표정으로 나가는 거 못 봤어요?"
강유형이 있다 간 것도 몰랐던 김택승은 그런가 하고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짝사랑이라 연애라고 표현하긴 어렵겠지만 제 상태가 그렇게나 티가 났나 보다. 사실 요즘 종일 하선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뭘 봐도, 뭘 해도, 모든 생각이 그로 귀결됐다. 마치 바보가 된 기분이라 자제하려 해도 잘 안 됐다. 아마도 모든 게 처음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제 감정이 놀랍고도 신기해 아무리 곱씹어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론 좋아할 수 있을 때 실컷 좋아하자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잘못도 아니고, 비록 혼자만의 맘이라고 해서 참을 필요는 없는것 같았다.
어쨌든 답장을 하려고 김택승은 짬이 날 때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바로 답문을 보냈어야 하는 건데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더 모르게 되어버렸다. '밥 드세요.' 이건 너무 예의가 없어 보이고, '뭐하세요?' 이건 너무 뜬금없고, 한참이나 고민을 하다가 그만 실수로 쓰다 만 문자를 보내고 말았다. 앗, 했을 땐 이미 전송된 뒤였다. 어떡하지 싶어서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있던 중 곧장 전화가 왔다.
-뭡니까?
수화기 너머로 불쑥 날아온 대꾸에 김택승은 당황해서 서둘러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문자를 잘못 보냈어요."
-나한테는 답장도 없으면서 말입니까?
문자를 잘못 보냈단 말을 다르게 생각했는지 하선연이 곧장 말을 맞받아쳤다.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던 걸 잘못 보냈다 생각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고 대꾸하려는데 하선연이 곧이어 말했다.
-미안하면 밥이나 사요.
"……밥이요?"
-이따가 화랑에서 봅시다.
사준다는 말도 아직 안했는데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뚜- 뚜- 거리는 소리에 김택승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넣었다. 밥 한 끼 쯤이야 못 사줄 것도 없지만 요즘 그를 만나는 건 정신 건강에 적잖이 안 좋았다. 얼굴을 보고 나면 태풍이라도 치듯이 맘이 시끄러워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설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우선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흘렀다.
간신히 일을 마치고 쏜살같이 퇴근해 지하철에 오른 김택승은 가는 중이라고 연락을 할까 말까 또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이른 아침이고 어차피 화랑에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전동차가 역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화랑으로 향했다.
그런데 하선연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화랑은 텅 비어 있었다. 인기척이 없어 자고 있나 하고 휴게실 소파를 들여다봐도 마찬가지였다. 오는 길에 그의 차가 눈에 띄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아직 인가 보다. 청소하면서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싶어서 김택승은 제 일부터 먼저 시작했다. 그러나 평소처럼 청소를 끝낸 후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더 미적거리며 기다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마음이 물 끼얹은 재처럼 파시식 식어버렸다. 혼자 있을 때가 더 많은 화랑인데도 이상하게 생소해 보였다. 그 썰렁함이 낯설지가 않아 김택승은 턱을 기울였다. 언제 또 이런 기분을 느꼈더라……. 얼마간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휴가가 끝나고 화랑에 다시 출근했을 때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굉장히 긴 휴가라 여겼는데 돌이켜보니 고작 일주일이었다. 평소에는 금방 지나가 버리는 그 칠일이 그때는 왜 그렇게 길었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일하러 가는 걸 그렇게 기대해본 적이 없건만, 빨리 화랑에 나오고 싶어 좀이 쑤셨다. 오히려 휴가를 즐기기보다 휴가가 끝나기를 바란 셈이다.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함은의 구두 소리를 하선연의 발소리로 착각할 정도로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미 예전부터 자신은 하선연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만날 수 없는 휴가기간이 길게 여겨졌고 그가 없는 화랑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떻게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싶어서 김택승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원래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기는 했지만 새삼 스스로의 둔함이 놀라웠다. 사실 까다롭지 않고 무던한 성격은 본인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여태까진 그런 점에 이렇다 할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상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여하튼 농담 삼아 한 말을 혼자서 약속이라 착각했는지도 모르고, 오늘은 아닌가 보다 하고 김택승은 가방을 챙겨 화랑을 나섰다. 파랗게 개인 가을 하늘이 유독 좋아 보였다. 바람도 선선하고 햇살도 적당히 밝아서 외출하기에 참 좋을 듯했다. 오늘 그와 만났으면 즐거웠겠지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담쟁이넝쿨이 시들어가는 돌담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지하철역을 향해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출입구 근처에 까만 아우디가 서 있었던 것이다. 설마 하선연의 차인가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마치 거기에 대답이라도 하듯 운전석 문이 열리면서 하선연이 나타났다. 그는 차에 한 팔을 올린 채로 비스듬하게 서서 빨리 걸어오라는 듯 김택승을 지그시 쳐다봤다. 서두러 멈췄던 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가자 인사도 생략한 채 미간을 좁히고는 말했다.
"봄도 아닌데 대청소라도 했습니까? 왜 이렇게 늦어요? 나올 때가 됐다 싶어서 화랑까지 안 올라가고 기다렸는데."
그가 이곳에서 기다리는 줄 알았다면 당연히 일찍 나왔을 테다. 전혀 몰랐다고 대꾸하자 하선연이 턱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핸드폰은 폼으로 가지고 다닙니까? 문자했잖아요."
그랬나, 하고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지하철역 앞 (ㆀ-∂-)ノ」이라고 문자가 당도해 있었다. 그냥 안 올 거로 생각해서 미처 신경을 못 썼다. 면구스러워진 김택승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노라니 하선연이 타라면서 차에 올라탔다. 웬일로 운전석에 앉은 그는 김택승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물었다.
"그럼 뭐 사줄 겁니까?"
뭐든 드시고 싶은 걸로……라고 말하려던 순간. 머릿속에 지갑의 재정상태가 스쳐 지나갔다. 어제 교통카드를 충전하느라고 현금을 다 써버렸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갑을 펼쳐 확인해보자 천 원짜리 몇 장 밖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낭패하여 김택승은 말을 잊었다. 늘 필요한 돈만 갖고 다니는지라 지금 당장은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신용카드를 가진 것도 아니라 적잖이 난감했다.
지갑을 들여다본 채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김택승의 표정을 보고 하선연은 대강 사정을 집작한 듯했다. 밥 안 사줄 거냐고 면박을 주거나 다음에 사달라고 미루는 대신 운전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 불쑥 말을 꺼냈다.
"김택승 씨 집으로 가죠."
그 말에 김택승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가 자신의 집으로 온다니,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냥 친구라면 별생각 없이 집에 오라고 할 텐데 상대는 하선연이다. 아무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돼지국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제 옥탑방에 초대하기는 좀 그랬다. 대접할만한 것도 없고 편하게 앉을 자리조차 없어 간다고 해봤자 불편해하는 모습만 보다가 보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희 집요?" 하고 반문을 하자 하선연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액셀을 밟으면서 대꾸했다.
"왜요, 집에 숨겨둔 부인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자제 못 하고 날 덮치기라도 할 것 같아요?"
그가 진담처럼 던진 농담에 김택승은 어버버 거렸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 데 곧장 말이 안 나왔다. 그러자 하선연이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진짜로 그럴 겁니까? 김택승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참 엉큼하시네요."
"아닙니다!"
먼저 제 집에 오겠다고 했으면서 마치 자기가 끌어들이는 것처럼 말을 해 억울해진 김택승은 고개를 붕붕 저으면서 부정을 했다. 그 모습에 하선연이 그럼 손만 잡는 걸로 알겠다고 능청을 떨었다. 그 말투가 마치 "오빠 믿지?" 라는 말에 속아주는 사람처럼 들렸다. 어쨌든 차가 이미 도로로 올라가버려 언제까지 어물쩍거릴 수도 없고, 일단 집에 돈이 있으니까 그리고 가야겠다 싶어 김택승은 길을 가르쳐 주었다.
집이 골목 안에 있는지라 차는 인근 유료 주차장에 대놓고 좀 걸어야 했다. 이쪽이라며 앞장 서 걸어가는데 괜히 뒤따라오는 하선연의 발소리 때문에 등짝이 근질근질했다. 집에 누군가 오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전에 강유형이 들렀다 갔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워낙 가족 같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약간 긴장이 됐다. 어질러 놓을 것도 없지만 어질러져 있지는 않은가 걱정이 되고 빨랫줄에 널린 속옷 같은 건 치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음흉한 생각이 있다고 오해받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이미 갈 데까지 다 간 사이라지만 집으로 부르는 건 또 다르지 않은가. 뭣보다 진짜로 솔직하게 그런 생각이 아예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건 그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시끄럽게 술렁거리는 맘을 안고 김택승은 모퉁이에 있는 슈퍼를 지나쳐 골목으로 한참을 들어가 낡은 맨션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여깁니다." 하고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노라니 등 뒤에서 의아한 듯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는 없습니까?"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오르는데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들렸다. 3층쯤에서 "왜 엘리베이터가 없는 겁니까?" 하고 묻더니 4층쯤에선 "참 이상하네요." 라고 덧붙인다. 이윽고 5층에 다다랐을 땐 힘들어서 그런가 말이 없었다. 반 층을 더 올라가 옥상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자 시야가 탁 트이며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김택승은 옥상을 가로질러 널려 있는 빨래를 걷었다. 그동안 주위를 둘러본 하선연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층수는 얼마 안 되는데 전망이 좋네요."
어째 자기 오피스텔보다 더 좋은 것 같다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플라스틱 의자를 가리키며 잠시 앉아 있으라 한 김택승은 방 안으로 들어가서 빨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대충 개서 박스 안에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하선연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큰 그가 천장이 낮은 옥탑방에 들어와 있으니 기둥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그는 신문지가 발린 벽지와 모서리마다 비 얼룩이 진 천장, 구불텅하게 일어난 장판과 서랍 대신 쌓여 있는 박스같은 것들을 한번 둘러보고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허름하고 살풍경한 주변을 보고도 의외로 별말이 없었다. 앉으라는 권유 없이도 앉아서 뭐 할 말 없느냐는 듯 김택승을 빤히 쳐다볼 뿐이다. 그 시선에 뭔가 대접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입을 열었다.
"차부터 한잔 드실래요? 찾아보면 봉지 커피가 어디에 있을 겁니다."
자판기 커피 입맛이니까 봉지 커피도 잘 마실 테다. 그러나 고개를 가로 저은 하선연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대꾸했다.
"그보다 빈속이라 배고픕니다. 먹을 것 좀 없습니까?"
남의 집에 빈손으로 왔으면서 뻔뻔스레 먹을 것을 요구해온다. 그러나 김택승은 집에 조금이라도 그에게 먹을 것을 사줄 만한 현금이 남아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물었다.
"그럼 중국집이라도 시켜 드릴까요?"
그 말에 마뜩잖은 듯 하선연은 고개를 저었다.
"기름진 건…… 요즘 위장이 안 좋아서요."
그렇다고 부엌도 없는 곳에서 밥을 해줄 수는 없었다. 편의점에 레토르트 죽이라도 사와야 하나 고민하는 김택승을 보고 하선연이 슬쩍 덧붙였다.
"요즘 날씨가 쌀쌀하고 하니까 국물이 당기네요."
국물 하면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김택승이 "라면은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것도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라면 정도는 손쉽게 끓일 수 있겠다 싶어 김택승은 잠시 슈퍼에 다녀오겠다고 밖에 나갔다. 근처 동네의 작은 슈퍼에 가 뭘 살까 고민하다 오랜만에 특제 라면을 끓이기로 마음 먹고 삼양라면 두 봉지와 스팸을 한통 샀다. 그리고는 긴 계단을 다시 밟으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바깥에서 버너를 꺼내고 냄비에 물을 올려놓은 김택승은 하선연이 뭘하고 있나 싶어서 옥탑방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는 주인도 없는 방에 드러눕다시피 한 채로 사진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김택승을 발견하고 뒤늦게 양해를 구했다.
"아, 사진 좀 봐도 됩니까?"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사진첩에 든 사진을 흥미롭게 쳐다본다. 사진이 별로 없는 김택승이라 손바닥만 한 사진첩에 그의 인생이 전부 다 들어 있었다. 발견된 직후 시설에서 찍은 사진부터 시작해서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들과 찍은 사진, 생활을 도와준 은사님과 찍은 사진,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박고영과 찍은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그 사진을 보고 김택승의 사정을 대충 짐작했을 텐데 하선연은 굳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유심히 어린 시절 김택승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있었기에 김택승은 긴장했다. 어쩌면 그가 교복을 보고 옛일을 기억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딱히 김택승을 알아보고 놀라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긴 남자 교복이야 거기서 거기니까 모를 수도 있겠다. 그는 단지 까까머리를 한 김택승의 사진을 보면서 혼자 피식거리고 있었다. 별로 웃긴 사진도 아닌데 그런다. 어디가 이상하기라도 한가 싶어서 사진첩을 들여다보던 중, 문득 소풍 찍은 것 같은 사진 한 장을 보고 심장이 벌떡 일어났다. 여태까지 김택승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였다. 박고영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 뒤쪽에 하선연의 뒷모습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의도해서 찍은 것도 아니고 찍고 보니 프레임 안에 우연히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여태껏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제 모습을 알아본 건지 어쩐건지, 하선연이 그 사진을 사진첩 안에서 끄집어 냈다. 그러자 뭔가가 툭 떨어졌다. 김택승도 어디 있는지 모르고 있던 크리스마스 씰이었다. 어디에 넣어놨나 했더니 그 사진의 하선연이 찍혀 있어서 같이 넣어두었던 모양이다. 멈칫한 하선연은 그 씰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느릿한 동작으로 사진첩 안에 도로 돌려놓았다. 그저 옛날 씰이니까 아무래도 기억을 못 하다보다. 대신 그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같이 찍은 사진이 많은데 친구입니까?"
우연히 찍힌 뒷모습이 아닌 박고영에 관한 물음이라서 김택승은 동작을 멈췄다. 그렇다고 답했으나 역시, 박고영을 모르는 눈치였다. 세월도 세월이고 박고영이 그의 앞에 직접 나선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막상 조금도 알아보지 못하는 하선연을 보니까 묘한 안타까움이 들었다. 마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자신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역시 그에게 그렇게 잊힐까 봐 조금 쓸쓸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박고영이라는 녀석입니다."
그러냐며 사진을 다시 사진첩에 올려놓은 하선연은 무심하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맘을 달랜 김택승은 물이 끓는 소리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라면을 끓는 물에 넣고 스팸을 열었다. 대충 과도로 스팸을 조각낸 라면 속에 털어놓고 면이 익기를 기다리는데 냄새를 맡고 하선연이 방 밖으로 나왔다. 버너 앞에 쪼그리고 않아 있는 김택승과 마찬가지로 쪼그려 앉아 코를 킁킁거린다. 곧 불을 끄고 밑 접시와 젓가락을 내준 김택승은 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하선연은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젓가락을 놀렸다. 그의 입안으로 후루룩후루룩 면이 사라져가는 걸 보고 찬물에 담가둔 생수통을 꺼내 와 그의 옆에 놓아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팸 한통이 통째로 들어간 라면이 어지간히도 짠지 하선연은 라면 한 젓가락과 물 한 모금을 번갈아가며 먹었다. 사이사이 커다란 스팸 덩어리를 젓가락으로 찍어 먹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도 잘 먹어서 저 먹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택승은 문득 피식 웃었다. 쪼그리고 앉아 먹고 있던 탓에 다리가 저린지 그가 끙, 하고 다리를 한쪽씩 폈다가 접었기 때문이다. 평소의 제 모습과 한 치 다름이 없어 놀랍고도 우스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참지 않고 시원하게 웃었다.
갑자기 웃는 소리에 의아해진 하선연은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런 김택승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 입에 들어갔던 라면을 도로 접시에 뱉어내고는 미간을 모은 채 내뱉었다.
"그렇게 웃으면 이상하다고 그랬을 텐데요."
"그래도……."
나오는 웃음을 어쩌란 말인가. 억지로 입술을 깨물고 눈꺼풀을 내리깔자 곧 한숨을 쉰 하선연이 라면을 도로 먹으면서 무심하게 덧붙였다.
"그럼 뽀뽀하고 싶어지니까 참아요."
"……손만 잡으라면서요."
김택승이 약간 볼멘소리로 대꾸하니 하선연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했다.
"그러니까 나도 참고 있잖아요."
진담인가 하고 멍해진 김택승을 놔두고 하선연은 뺏길 새라 라면에 집중했다.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린 김택승이 냄비에 젓가락을 넣었을 땐 이미 잡히는 게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를 끓일 걸 그랬다. 혹 라면을 혼자 다 먹으려고 뽀뽀 어쩌고 하는 소리로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빈 젓가락을 문 김택승이 아쉬워하는 동안 하선연은 냄비를 들어 국물까지 후룩후룩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빈 냄비를 내려두고 앓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간히도 다리가 저렸는지 몇 번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더니만 부른 배를 연방 쓰다듬는다. 이어 물 한 병을 통째로 들이켰다.
그동안 김택승은 수도를 틀어 설거지를 했다. 냄비 하나라서 설거지는 금방 끝이 났다. 비누로 손을 씻고 뒤로 돌았을 땐 옥상 난간에 걸터앉은 하선연이 막대사탕을 빨고 있었다. 구름 한점 없는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사탕을 쭉쭉 빠는 모습이 소년 같았다. 처음 만났던 그 시절처럼 열여덟으로 보였다. 사진첩 속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듯,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되돌아와 아련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어쩐지 가슴이 콕콕 따가워지는 그리움에 잠시 말을 잊었던 김택승은 곧 자신을 돌아본 하선연이 엷게 미소 짓는 것을 보고 과거에 머물렀던 시간이 현재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고 느껴지는 자신의 감정이 어릴 적과는 확연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하선연에게 가까이 다가간 김택승은 뭔가 훌쩍 날아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았다. 받고 보니 사탕이었다. 먹으라는 듯 턱짓을 한 하선연이 말했다.
"밥값입니다."
참 계산 하나는 확실하구나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그의 곁에 걸터앉아서 사탕 껍데기를 뜯었다. 순간 바람이 불어 놓쳐버린 사탕 껍데기가 나비처럼 바드득 날아가버렸다. 다시 줍지 못하고 사탕을 입안에 집어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우러났다. 그 맛이 마음을 예쁜 색깔로 물들였다. 햇살도 바람도 모든게 더할 나위가 없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함께 앉아 있는 하선연이 이 공간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그의 모습을 오려 이곳저곳에 붙여 놓고 싶을 정도였다. 김택승은 그 모습이 존재하는 지금을 제 눈 안에 간직해두려고 애썼다. 그의 마음을 가질 수는 없어도 그와의 추억은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나중에 그를 마음에서부터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안을 테다. 지금은 그저 가능한 그때가 천천히 오기를 바라며 입천장이 홀딱 다 까질 만큼 느리게 사탕을 녹여 먹을 뿐이었다.
*
월말이 가까워져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급이 들어왔다. 그러나 은행에서 통장정리를 해보고 잔액을 확인한 김택승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가게를 며칠 빠지는 바람에 구멍 난 곳이 메워지지가 않았다. 부산에서 돈을 쓴 것도 있고 핸드폰 명의변경에 나간 돈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현상유지중이지만 조금이라도 돈 나갈 일이 생기면 바로 마이너스라 어떻게든 해야 했다. 일단 지금 하는 일로도 시간이 빠듯해 정기적인 아르바이트는 무리였다. 하루 이틀 정도 빰을 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아보는 게 좋을 같았다. 그래서 모처럼 PC방을 찾은 김택승은 열심히 구인광고를 뒤져보았다. 보다보니 화랑이 있는 동네에서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걸 찾았다. 이거라면 화랑을 오가면서 할 수 있겠다 싶어 바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아직 자리가 남아 있어 일거리를 받을 수 있었다.
가게를 마치고 잠시 사무실에 들러 전단지와 테이프를 받은 김택승은 화랑으로 가는 길 곳곳에 그것을 붙였다. 절반쯤 남은 전단지는 이따 집에 감녀서 붙일 생각으로 화랑에 가져와 데스크에 올려두고 청소를 시작헀다. 청소기를 돌리고 밀대 질을 하며 한동안 바지런히 움직인 끝에 서둘러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런 뒤 돌아가려고 가방을 챙기는데 언제 온 건지 하선연이 데스크 쪽에 서서 전단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곤두박질쳤다가 다시 올라붙었다. 운동복을 입고 스포츠타월을 목에 두른 걸 보면 조깅을 하고 들어오는 참인가 보다. 때문인지 살짝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저것도 보기가 좋구나 흐뭇하게 생각하던 중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제 맘을 홀라당 까발린 기분에 자연스러운 표정이 지어지질 않아 김택승은 손을 바지춤에 닦는 척 시선을 피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하선연이 범상하게 말을 걸었다.
"이게 뭡니까?"
"아, 그냥 아르바이트입니다."
김택승의 대꾸에 하선연은 도대체 아르바이트를 몇 개나 하느냐고 중얼거렸다. 딱히 대답이 필요한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잠자코 있노라니 그가 선듯 말했다.
"이왕 본 김에 좀 도와드리죠."
그에게 기대할 수 없는 행동이라 김택승은 약간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괜찮다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을 선다. 전단지 붙이는 일이 재미있어 보이기라도 했나, 솔직히 그가 도와준다고 해봤자 방해만 될게 뻔했다. 보나 안보나 시급 타령을 하면서 음료수라도 사내라고 할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것만 같은 행동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의 조그만 호의가 기뻐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하선연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김택승은 아까 전단지를 붙였던 길목과 반대방향으로 갔다. 그리고 전단지를 붙임 직한 곳에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테이프를 찍찍 찢어 손등에다 임시로 붙여두었다. 그걸 보고 하선연은 자기도 해보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테이프를 건넸는데 어째 영 손재주가 없어 보였다. 힘을 써 억지로 찢는 바람에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져 김택승이 찢은 것처럼 고르지가 않았다. 결국 테이프를 돌려 받은 김택승은 테이프 찢는 법을 일러 주었다.
"이렇게 잡고 손목을 써서 단번에…… 찢어내는 겁니다."
"흠."
강의 효과가 있었던지 도로 테이프를 받은 하선연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럴싸하게 찢어냈다. 그게 뿌듯한지 테이프를 잔뜩 찢어 손등에 주렁주렁 붙이다 못해 김택승의 등짝에까지 붙여 놨다. 당혹한 김택승이 뭐하는 거냐고 물으니 임시로 붙여 놓을 데가 없지 않느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맘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고 일단은 전단지 붙이는데 신경을 집중했다. 사실 그건 바람이고 그게 테이프를 붙인답시고 손가락으로 등을 꾹꾹 누를 때마다 몹시 신경이 쓰였다. 뿐만이랴, 행동도 말투도 눈빛도 하선연의 존재 모든 것에 자꾸만 정신이 팔렸다.
그에게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억지로 붙들어두고 김택승은 전신주나 빈 벽 같은 곳에 빠른 속도로 붙여 나갔다. 덕분에 손등에 붙여 두었던 테이프가 금방 떨어져 버렸다. 하선연이 쓰라고 손등을 내밀어 얼마간 거기 붙은 것을 썼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등짝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한 장 한 장 떼어준다. 그것을 건네 받느라 이따금 손끝이 스칠 때마다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마치 전극이라도 하나 달린 것 같았다. 그가 닿아올 때마다 불이 깜박깜박 들어오는 전구가 달린 전극…….
등짝에 있는 테이프도 다 쓰고 해서 다시 테이프를 찢고 있는데 하선연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런 전단지 붙이면 손님이 많이 옵니까?"
"아무래도 그러니까 사람까지 써가면서 붙이는 거겠죠."
괜히 쑥스러워져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그 말에 하선연이 진담인 양 농담을 했다.
"우리 화랑도 이런 전단지 만들어 붙이면 어떨까요?"
하지만 김택승에겐 그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화랑에 손님이 오는 걸 보지 못한 터라 하선연이 홍보를 고민할 정도로 사정이 안 좋은가보다하고 심각하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러시는 게 좋겠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에 하선연은 미간을 약간 모았다. 피식거릴만한 가벼운 농담에 진지하게 반응해버린 김택승은 "그럼 공짜로 붙여주는 겁니까?" 하를 질문에 대답을 망설였다. 원래는 돈을 받아야 하는 일이라 선뜻 그렇겠다는 답이 안 나왔다. 조금 미안하기는 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싸게 해 드리겠습니다. 시간당 삼천 원 정도로, 아니면 오백 장당 만 원 정도로요."
그 말에 하선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공짜로 안 해준다고 섭섭해 할 줄 알았더니 도리어 어깨까지 들썩이고 웃어서 조금 어리둥절했다. 잠시후 "농담한 겁니다."라고 덧붙이는 말에 너무 곧이곧대로 그의 말을 들었음을 깨달았다. 왠지 재미라고는 없는 고지식한 사람처럼 보인 것 같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전단지를 다시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김택승 씨."
평소 같으면 즉시 대답하며 쳐다봤을 김택승은 조금 주저했다. 실은 스스럼없이 웃는 모습에 맘이 설레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십니까." 하고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대하니 하선연이 용건을 말하는 대신 턱을 기울여 얼굴을 바라봐 왔다. 때문에 황급히 눈꺼풀을 내리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것도 소용없이 피한 대로 따라와 어떻게든 시선을 맞춰보려 기웃댄다. 저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던 김택승은 바보 같은 실랑이임을 깨닫고 말았다.
"애도 아니고, 왜이러십니까?"
말에 하선연이 콧등을 찡그린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쪽이야말로 애도 아니고 왜 이러는 겁니까?"
눈을 안 마주치려고 자꾸 피하는 게 이상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무언가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나마 차마 쓸데없이 쑥스러워져서 그랬다는 말은 못하겠고, 김택승은 달아오른 이마를 손을 들어 가리고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냥 내버려두세요."
말하고 보니까 진짜 애 같았다. 마치 엄청 신경 써달라는 것처럼 들려서 더 창피해졌다. 이렇게까지 말이나 행동이 제 뜻대로 안 되긴 난생처음이다. 혼자 좋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걸 숨기지 못하고 다 드러내다니, 괜스레 속상했다. 적어도 그의 앞에선 태연한 척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조차 되질 않는 탓이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마저 느끼며 김택승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선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이 애가 탈 정도로 궁금했으나 흉해졌을 얼굴을 들어 확인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어찌할 바를 모르는 침묵 속에서 멀리 새 우는 소리만이 삑삑 들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김택승은 갑자기 머리 우로 뭐가 철썩 떨어지는 걸 느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지자 무언가가 묻어 나왔다. 희고 끈적끈적한…… 새똥이었다.
새똥이야 어쩌다 맞을 수도 잇는 거라지만 하필 이런 순간이라니, 세상이 자신을 창피하게 만들려고 작정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허탈하고 상심해서 새똥을 닦을 기분조차 나질 않았다.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는 맘으로 바지춤에 아무렇게나 손에 묻은 새똥을 문지러 닦으려는 순간, 손목이 붙잡혔고, 곧 손끝에 타월이 닿았다. 하선연이 조깅할 때 쓰는 타월이라 그런지 굉장히 촉감이 부드러웠다. 그걸로 꼼꼼하게 손을 닦아낸 그가 이번에는 머리의 새똥을 닦아주었다.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들어 새똥을 떼어낸 뒤 장난스럽게 타월 끄트머리로 머리를 세차게 문지른다. 덕분에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어서 타월을 한번 털어 태연스레 목에 걸었다. 그 얼굴에 찝찝해 하는 기색조차 없는 게 놀라웠다. 솔직히 가슴을 살짝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느새 눈을 들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택승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늘게 눈웃음을 치면서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 뺨을 하고 미소 짓는 그를 보노라니 꼭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너무너무 좋아서 그 마음을 끌어안고 있기가 힘들었다. 용량을 초과하여버린 심장이 매 순간 뻐근했다. 제 맘이 이런 걸 그는 알고나 있을까……?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있던 김택승은 문득 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하선연에게 전화가 온 모양인지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허물없는 어투로 통화를 시작했다.
"응, 그래. 그렇지. 아니……."
자신에게는 늘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는 그가 반말을 하는 모습이 생소했다. 새삽스레 그에게 자신이 모르는 가족과 친구, 혹은 연인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면서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접점이 얼마나 실낱같은지가 느껴졌다. 또한 새똥에 맞은 데다 손등에는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이고 전단지를 든 제 모습도 실감이 났다. 어쩐지 가슴이 허해져 가볍게 한숨을 쉬는데 문득 미간에 뭔가 닿아왔다. 퍼뜩 고개를 드니 하선연이 통화를 하면서 손을 뻗어 제 미간을 만지고 있었다. 어느새 찌그려진 인상을 펴주기라도 하듯이 엄지로 살살 문지른다. 그 행동이 마치 제 심장을 손안에 넣고 주무르는 것 같았다.
"글쎄…… 있긴 하지. 별건 없는데 그냥 귀여워."
그렇게 말하면서 하선연은 김택승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빛나는 눈을 하고 미간에서 눈썹까지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하지 그럼 뭐라 그러냐."
그 모습에 김택승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졌다. 전화 온 사람이 친구인 모양인데 왜 자신을 보면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머리로는 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 거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은 그렇지가 못했다. 가슴이 팔딱팔딱 제자리 뛰기를 했다. 오래지 않아 손을 거두고 다음에 보자고 전화를 끊은 하선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은 전단지를 보고 말했다.
"얼마 안 남았네요."
그제야 일하던 중이었다는 걸 깨닫고 김택승도 애써 태연한 척 전단지를 다시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꾸만 방금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반복재생되었다. 손수 머리의 새똥을 닦아주던 손길이나 타월을 도로 목에 걸치던 행동, 미간을 만지며 했던 말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덕분에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맘속처럼 이렇게 크게 자리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자신도 그의 맘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만일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서 잘해줄 자신이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받고 있다고 행복하다고 느끼게 해줄 테니 부디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삼키며 바지런히 일한 탓에 어느새 마지막 남은 전단지까지 전부 붙였다. 손을 턴 김택승은 하선연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답으로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드릴게요."
하선연은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느냐며 싱긋이 웃었다. 그러면서도 슈퍼마켓 말고 서른한 가지 중에서 고르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알겠노라고 순순히 대답한 김택승은 그와 함께 인근의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았다. 아이스크림 값으로 두 시간의 시급이 날아간 셈이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덥석덥석 베어 먹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느라 손에 녹은 아이스크림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그걸 힐끗 본 하선연이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한마디 했다.
"내가 또 닦아줄 거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한 김택승은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으며 대꾸했다.
"저도 새똥 묻은 타월은 싫습니다."
그러자 한 방 먹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누구 때문에 버린 타월인 줄 아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덩달아 웃으며 김택승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쭉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욕심이 들었다. 이렇게 혼자만의 감정으로도 행복한데 그 자신과 은 마음이란 걸 알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한 상상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 그의 머리 위에 새 한 마리가 파아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높이 날아갔다.
*
다음날엔 가을 하늘이 찬비를 뿌렸다 덕분에 기온이 급속도로 낮아졌다. 여전히 반팔 차림이었던 김택승은 제법 쌀쌀함을 느꼈다. 올해는 추위가 빨리 온다는데 참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겨울은 그에게 여러모로 힘든 계절이기 때문이다. 난방비도 많이 나오고 툭하면 수도관이 동파하는데다 몸도 자주 아프기 때문이다. 따듯하게 하고 다녀야 다친 곳이 덜 아픈데 그러질 못해서 매년 겨울이면 뼈마디가 시리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할 수 있었다. 겨울이 오기전에 미리미리 저축을 좀 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내린 비에 어제 붙인 전단지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발견했다. 하선연과 같이 붙인 건데 벌써 이렇게 되다니 적잖이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고작 전단지일 뿐이라고 애써 생각을 바꾸고 화랑으로 간 김택승은 흐린 날씨에 실내가 어두컴컴한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하선연은 없는 모양이다. 약간 아쉬운 기분이 들었으나 화랑에는 일하러 오는 거지 그를 보러 오는 게 아니다. 요새 너무 그에게 정신이 팔려서 제 일을 소홀히 한 것 같다고 반성하며 김택승은 가방을 내려 놓고 젖은 옷을 턴 뒤에 청소를 시작했다.
우선 주변 정리를 하느라 흐트러진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놓고 휴지통을 비우려 봉지를 찾았다. 아무래도 휴지통을 한번 씻을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데스크와 휴게실, 탕비실 등의 휴지통을 모아 놓고 차례대로 내용물을 비웠다. 데스크 휴지통에 화장 솜과 면봉이 잔뜩 있는 걸로 봐 이함은이 또 출근해서 화장을 한 모양이다. 전에 우연히 맨얼굴을 한 그녀와 마주친 적이 있는데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하선연과 버금가는 변신이었다고 회상하며 휴게실 휴지통을 비우려는데, 그때 안에 뭐가 보였다. 휴게실 휴지통에는 보통 티슈 몇 장 말고는 없는 편이라서 이게 뭔가 하고 안을 들여다 본 김택승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리고 한동안 휴지통을 쳐다본 채로 멈춰 있다가 느릿하게 손을 집어넣어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스포츠 타월이었다. 파란색에 흰색 글씨가 있는, 어제 하선연이 썼던 거였다. 정확히는 김택승도 쓴 셈이다. 머리에 묻은 새똥을 그가 이걸로 닦아주었으니까.
한번 털고 나서 태연하게 목에 걸기에 새똥 묻은 걸 개의치 않아 하는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잠시 걸쳤던 셔츠도 도로 입기 싫어서 가지라고 주는 사람이다. 연인의 입술에 묻은 립스틱도 닦아내지 않았던가. 그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버리는 게 당연하다. 짧게나마 부산에서 모래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고 달라진 것 같다 느끼기도 했지만, 제 착각이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빨면 되는 걸 그냥 버리다니. 스포츠 타월은 가격도 비싼데 차라리 날 주지하고 김택승은 타월을 주섬주섬 챙겼다. 펼쳐보니까 새똥이 말라붙은 데다 휴지통에 쳐박혀 있어 약간 냄새가 나기는 해도 멀쩡했다. 휴지통을 씻는 김에 가서 빨라 널어두려고 남은 쓰레기를 마저 비우고 휴지통과 타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깥 수돗가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타월부터 빨기 시작했다. 비누를 잔뜩 치대 문지른 뒤 맑은 물이 나오도록 깨끗이 행궜다. 다 빨고 나니 마치 새것처럼 깨끗해졌다.
한데 개운해져야 할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도리어, 서글퍼졌다. 타월에 묻은 새똥 얼룩이 사라져버리니까 그가 제 머리를 다정하게 닦아주었던 일도 함께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더불어 그 행동에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었던 마음까지도 흩어진 기분이었다. 그에게 있어선 새똥을 닦아준 것도, 그 타월을 휴지통에 버린 것도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설레고 혼자서 기대했다가 혼자서 실망한 것뿐이다. 당연한 일이니 조금도 슬플 게 없는데 왜 이렇게……
아플까.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흐려지는 걸 느끼고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타월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얼굴은 차갑게 식어도 아픔으로 달궈진 가슴은 식어지지가 않았다. 진짜 별일 아닌데 맘이 너무 아팠다. 그동안 그를 좋아하며 행복하다고 느꼈던 게 다 거짓말 같았다. 자기 합리화 같은 위안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계속 좋아할 수 없으니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르겠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도 자신을 싫어해본 적은 없었는데, 그의 앞에서는 절로 못나 뵈는 스스로가 싫어질 정도였다. 지금도 제 기대가 휴지통에 처박힌 것처럼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김택승이 축축한 타월에서 다시 고개를 들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타월을 대야에 남겨놓고 김택승은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연방 문질렀다. 그리고 타월을 다시 빨아 널어둔 뒤 휴지통을 수세미로 벅벅 닦아놓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청소에 열중하고 났더니 어느덧 화랑이 깨끗해졌다. 제 모습이 거울처럼 비칠 정도로 반짝거리는 로비를 보노라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휴, 하고 허리를 편 김택승은 문득 담배가 당겨 가방에서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꺼내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수돗가 처마 밑에서 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웠다. 알싸한 연기가 끝없는 술렁거림으로 지쳐 잠잠해진 마음을 한 바퀴 휘돌고 한숨처럼 빠져나갔다. 아까와 같은 괴로움이 사라진 자리에 대신 우울함이 남았다. 그 우울함을 조금이라도 털어 내려는 듯 김택승은 담배연기를 토해냈다.
언제까지 이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짝사랑도 괜찮다고 여겼던 건 그게 행복하다고 착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다. 자신이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적어도 보답 없는 마음을 언제까지 이어나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난생ㅇ처음 느낀 감정을 없던 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으니…….
김택승은 담뱃재 터는 걸 잊은 탓에 툭, 하고 젖은 바닥으로 떨어져 꺼지는 불씨를 보았다.
고백하자.
조금이나마 이 마음을 털어놓고 나면 꽉 차서 터질 것 같은 이 가슴도 조금은 여유로워질 테다. 그리고 거절당하고 나면 미련 없이 돌아서자.
김택승 은 언젠가 지금을 돌아봤을 때 아픈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더 많았으면 헀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해보았으니 이 설렘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고스란히 간직해놓고 싶었다. 이따금 꺼내볼 수 있는 사진처럼 말이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김택승은 조금씩 개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고 담배를 끈 뒤 몸을 돌렸다.
*
"고백이요?"
주방보조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반문을 했다. 덕분에 약간 민망해진 김택승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한창 깨가 쏟아지는 연애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주방보조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거야 뭐……."
그리고는 갑자기 김택승의 어깨를 탁 밀쳤다. 엉겁결에 벽에다 등을 부딪힌 김택승은 멱살이 잡혀서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김택승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댄 주방보조가 인상을 찌그러트리고 느끼하게 속삭였다.
"날 봐, 널 원해, 알러뷰 베이뷔~."
그러면서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이게 아닌데 하고 말미잘처럼 움찔거리는 입술을 뜨악하게 보고 있던 김택승은 문득 날아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하는 짓들이야?"
입구에서 강유형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황급히 김택승의 멱살을 놓고 물러선 주방보조가 웃으면서 "장난 좀 치고 있었어요." 라고 말하자 도끼눈을 뜨며 말을 뱉는다.
"다시는 그딴 장난치지 마, 보기 안 좋으니까."
그 말에 입을 쭉 다문 주방보조는 김택승을 보고 강유형 모르게 입술을 뻐끔거렸다.
'오늘따라 매니저 되게 까칠하다, 그죠?'
강유형이 이쪽을 보고 있었기에 대답을 못하고 김택승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김택승에게 그가 손짓을 했다.
"창고 재고 확인 좀 하게 따라와 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김택승은 그를 따라서 주차장과 닿아 있는 창고로 향했다. 각종 양주와 기타 주류를 넣어두는 곳이라서 관리를 제일 잘해야 하는 곳이었다. 재고 현황이 적힌 장부와 실 재고를 확인하기 위해 두 사람은 역할을 분담했다. 강유형이 장부에 표시하는 동안 김택승은 술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고 개수를 불러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빈 박스를 버리고 재고를 정리한 뒤 타월로 술병을 닦아놓았다. 곧 장부점검을 마친 강유형도 타월을 들고 술병 닦는 일을 도왔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술병을 닦고 있는데 강유형이 주저하다 말문을 열었다.
"네가 만나는 사람에 관해서...... 내가 괜한 소리를 했다."
아직도 그 일에 관해 신경을 쓰고 있는 줄은 몰랐던 김택승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요즘 사이가 조금 서먹하기는 했으나 정신이 딴 사람에게 팔려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에 도리어 미안해진 김택승이 사과하자 강유형이 보기 드문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신경 쓰지 말고 연애상담이든 뭐든 힘든 거 있음 말해."
자신을 생각해 애써 웃어주는 그 얼굴을 보니까 순간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김택승은 당황해서 고개를 수그렸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목이 꽉 메고 코가 시큰거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술병 닦는 손을 조금 높이 들어 올렸다. 물론 그런다고 얼굴이 가려지진 않았지만 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담담하게 물을 뿐이었다.
"......힘드냐?"
김택승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코를 한번 훌쩍인 뒤 식 웃어 보였다. 강유형처럼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힘들 리가 없다. 바보 같은 얼굴을 보고 강유형은 이상하게 웃지 말라며 면박을 주었다. 그말에 머쓱해져 괜히 술병을 뽁뽁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닦았다. 그러고 보니 만날 제 이야기만 하는 기분이었다. 늘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건 강유형이라 미안해진 김택승은 저도 질문을 던졌다.
"매니저는 요즘 어떻습니까?"
강유형은 자기 이야기엔 시큰둥했다. "그냥 뭐, 늘 똑같지." 라면서 술병을 닦았다. 그에게 목매는 사람이 많은 걸로 아는데 누구에게나 심드렁한 그였다. 남 걱정은 그만하고 이젠 제 사람을 찾으면 좋을 텐데 생각하던 김택승은 잠시간 망설이다 물었다.
"만약에 매니저는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고백하실 건가요?"
그 말에 강유형은 술병을 닦던 손을 멈췄다. 그냥 가볍게 물은 건데 술병을 내려놓고 타월을 만지작거리며 꽤 긴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김택승의 눈을 마주 보고 입을 열었다.
"......촛불이나 풍선 같은 건 우습겠지. 폭죽도 노래도 필요 없고 기다리다 보면 이 순간이다 싶은 때가 올 테니까 그냥 좋아한다고 말할 거다."
말하는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진지해서 김택승은 얼른 반응하지 못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왠지 감명 깊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백도 그가 말한 것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제 마음을 말하는데 무슨 방법이 필요하고 계획이 있겠는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그 말 한마디면 모든 게 충분해질 것이다.
그날 밤에 다시 비가 내리는 바람에 손님이 뜸해졌다. 덕분에 강유형이 회식이나 하러 가자며 가게 문을 일찍 닫았다. 다들 웬일이냐 기뻐하면서 서둘러 뒷정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늦은 새벽이라 회식을 간다고는 해도 갈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결국 인근에 24시간 운영하는 회 센터로 가서 모둠회며 해물탕 같은 걸 시키고 반주를 했다. 다들 노는 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라 회식자리는 무척이나 떠들썩하다 못해 시끄러웠다. 이럴 때만큼은 매니저와 주방장도 죽이 맞아 술잔을 잘도 부딪혔다. 나중에는 다들 얼큰히 취해 해가 뜰 시간인데도 2차를 가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김택승은 아르바이트 때문에 가봐야 했다. 그래서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으나 모두 우우 거리며 제재를 했다. 어디 말단 직원이 딴 일로 2차를 빠지는 거냐고 원성이 높았다. 다행히도 강유형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를 두어 장 쥐여 주면서 택시타고 가보라고 그랬다. 분위기 맞추느라 맥주를 몇 잔 마시기는 했지만 정신을 말짱했던 김택승은 극구 사양을 했다. 그래도 부득불 타고 가라고 돈을 쥐어 준다.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돈을 받은 뒤 감사하다 말을 하고는 2차 가는 일행을 배웅했다. 그리고 나서 몸을 돌리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떠 있는 이름을 보니 하선연♡이었다.
여전히 퉁탕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이 시간엔 웬일인가 싶어 김택승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김택승 씨. 가게 마칠 시간이죠?
"네."
-그럼 화랑에 가야 할 테니까 같이 돌아가시죠. 지금 근처에 있습니다. 그 말에 김택승은 대리운전이 필요한 거구나 짐작하고 서둘러 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안되겠습니다. 제가 맥주를 몇 잔 마셔서요. 취하진 않았어도 음주운전이니까 대리기사 부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 대신 침묵이 들려왔다. 곧 나지막한 목소리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만 김택승이 미처 간과한 사실을 지적했다.
-제가 언제 김택승 씨한테 운전해달라고 그랬습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여태까지의 행동이 늘 그래서 당연히 대리운전을 시키려는 것이라고 속단한 것이다. 한데 아니었나 보다. 그저 근처에 있다가 돌아가는 길에 태워 주려 했다는 걸 알고 김택승은 "아...." 하고 애매한 소리를 흘렸다. 그러다 놀라움과 미안함에 조금 횡설수설을 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좀 착각을 해서...... 그럼 진짜 여기에 오실 겁니까? 저 가게에 없는데요. 아니, 인근에 있기는 합니다만....."
-어딥니까?
간략하게 위치를 설명하자 알겠다고 곧장 통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김택승은 왜 혼자 착각을 했을까 자책했다. 어쩌면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오면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오래지 않아서 하선연의 차가 보였다. 까만색 아우디가 멈춰 서기를 기다려 김택승은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은 하선연은 말이 없었다. 혹 아까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건 아닌가 싶어서 일단은 사과를 했다.
"저, 아까는 착각해서 죄송했습니다.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 말에 하선연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답했다.
"평소에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그거야....."
반쯤 입을 열었던 김택승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에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뻔뻔스럽다고 생각한다. 자기중심적인데다 제멋대로고 고집이 세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책임지기 싫어하고 이기적이고 하여간 좋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대꾸를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린 김택승을 보고 하선연도 굳이 말을 건네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길을 달려 어느덧 화랑에 도착했다. 차가 멈춰 서길 기다렸다가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자 비가 잦아들어 차가워진 공기에 숨통이 트였다. 그와 단둘이 서먹하게 앉아 있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던 것이다. 곧 차를 잠그고 온 하선연과 함께 발길을 옮겼다.
대문을 열고 잔디가 시들어버린 정원으로 들어서는데 아까 재린 비로 희미하게 안개가 낀 것이 보였다. 화랑 뒤쪽이 숲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잔디 가장자리의 징검다리를 밟던 김택승은 문득 "으악!" 하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땅이 젖은 걸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잔디밭을 가로지르던 하선연이 진창이 묻은 발을 들어보였다. 평소에도 징검다리를 무시하고 잔디를 가로지르더니만 잔디가 시들어 흙탕물이 고여 있으리란 걸 생각 못했나 보다. 투덜거리며 다른 쪽 발을 내딛자 이번에는 바짓가랑이까지 젖어버렸다. 저러다 신발은 물론이거니와 옷까지 다 버리겠다 싶어서 김택승은 소리를 쳤다.
"잠깐만 거기 계세요!"
그리고 가방을 벗어두고 양말과 신발을 벗었다. 그런 뒤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맨발로 잔디에 들어갔다. 시든 풀에 엉긴 이슬과 젖은 흙 알갱이가 발바닥과 발등에 이리저리 달라붙었다. 얼마 가지 않아 금세 발이 시려 와 걸음을 빨리해 하선연의 앞까지 당도했다. 그의 한 손을 제 어깨에 짚은 하선연이 시키는 대로 하자 그의 발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겨 내고 바짓가랑이를 접어주었다. 다른 쪽 발도 마저 그렇게 해주고 그의 신발을 들고 섰는데 문득 잔디를 밟고 선 그의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 발이 어쩌면 저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 굳은살은커녕 발톱에 거스러미 하나조차 없었다. 석고로 만들어진 발을 봉숭아물에 살짝 담갔다 꺼낸 것 같았다. 그게 감탄스러워 김택승은 하선연의 맨발을 물끄러미 보았다. 보통은 지저분하다고 느껴져야 할 발이 유리관에 진열된 보석처럼 자신이 갖기엔 너무 귀중해 보였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 아픈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가 평소에 사장님을. 아니, 하선연 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죠."
벌써 그 질문을 잊어버렸는지 어쨌는지 하선연은 왜 새삼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는 듯 바라봐왔다. 숙였던 고개를 들고 그 얼굴을 마주 본 태로 김택승은 살짝 웃었다.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가느다란 빗줄기가 그의 머리칼에 투명한 그물을 얹었다. 손을 내밀어 그것을 털어주고 싶다는 기분을 삼키며 가까스로 입술에 머물러 있던 말을 뱉었다.
"많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아주 많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마침내 토로하고만 고백의 말에 하선연은 반응이 없었다. 한동안 느리게 눈꺼풀을 깜박이면서 김택승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띠어 웃었다. 그 웃음은 그가 의식적으로 짓곤 하는 선웃음과는 달랐다. 맛있는 것을 잔뜩 먹고 만족한 사람처럼 배부른 표정이었다. 이제야, 드디어, 마침내와 같은 종류의 의기양양함이 비치는 미소이기도 했다. 그렇게 웃다가 하선연은 쑥스러운 사람처럼 손을 들어 입가에 대고 살짝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이것 참 당혹스럽네요. .....아, 물론 무척이나 기쁩니다. 저를 좋아해주신다니 고맙네요."
그런 말에 김택승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냥 담담하게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턱을 만지작거리며 흐뭇하게 김택승을 쳐다보던 하선연은 난감한 척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다 보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희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습니까."
이어 뻔뻔스레 덧붙였다.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서요."
마치 허락 같은 말이었으나 사실은 거절하는 소리였다. 지금 이대로 어떤 관계로도 엮이지 않은 채 아무 책입도 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는 굳이 연인이라는 관계로 서로를 구속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에 김택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했던 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속이 후련해져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태연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하선연은 짐짓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혹시 마음이 상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 앞으로도 우리가 문제없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만."
그에게 차였다 해서 화랑을 관두거나 할 생각은 없었던 김택승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말하고 싶어서요."
곧이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말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선연은 하하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뇨, 뭘 이런 걸 가지고. 제가 오히려 고맙죠."
고백의 말을 털어버리려 김택승은 발이 시리니까 이만 돌아가자고 어깨를 돌렸다. 하선연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를 따라왔다. 함께 화랑 뒤편의 수돗가로 가서 발을 씻은 후 신발에 묻은 진흙탕도 닦아내 놓고 자판기 커피 한잔으로 썰렁함을 달랬다. 커피를 다 마신 하선연이 곧 씻어야겠다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김택승은 제 일을 했다. 그런 일련의 상황이 평소와 아무 다름없었다. 심지어는 김택승의 기분마저도 그래서 하선연을 좋아했던 일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듯 했다.
김택승은 청소를 마무리하고 가방을 챙겨 화랑을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려 정원을 지나치는데 아까 그와 한참 서 있던 곳이 보였다. 그곳만 잔디가 푹 꺼져 있어 눈에 띄었다. 모든 게 태연해서 오직 그 자리만이 고백의 증거인 듯 했다. 아니, 이 태연함 자체가 그에게 고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진즉 이럴 걸 그랬다고 김택승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고 잰걸음을 걸었다. 흘러가는 비구름이 그 뒷모습에 차가운 잔비를 뿌렸다.
*
가을이 점점 깊어져 산에 단풍이 들었다. 화랑의 정원에도 알록달록하게 빨갛고 노란 꽃이 피었다. 그것을 보면서 이함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아~ 올여름 애인도 못 만들었는데 벌써 가을이라니, 같이 단풍놀이 갈 사람도 없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푸념 조로 시작했다가 분노 조로 끝나는 말에 김택승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하선연이 상그레 미소 지으면서 입바른 소리를 했다.
"함은 씨 정도 되는 미인이 아직 애인이 없다니 참 이상한 일이에요."
그 말에 생긋 웃은 이함은은 곧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테이블을 탕 소리나게 쳤다.
"솔로 세 명이서 이게 뭐예요! 우리끼리 단합대회라도 가요. 전 당장 오늘 밤에라도 괜찮으니까."
오늘이 금요일 아침이라 내일부터 주말이기는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함은은 일찍부터 출근을 했다. 옷차림이고 화장이고 기합이 빡 들어가 있어 분명히 저녁에 약속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택승이 의아해서 물었다.
"오늘 저녁에 바쁘신거 아닙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함은은 이마를 짚고 얼굴을 숙인 채로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소개팅하기로 했는데 아까 문자 몇 툥 주고받아보니까 글렀어요. 나이가 서른이 넘은 사람이 이모티콘이나 남발하면서 실없는 소리나 하는 거 보니까 똥차인 게 틀림없네요."
그러면서 소개팅을 한 백번쯤하고 나면 문자 한 통만으로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고 묘한 대목에서 우쭐거렸다. 이모티콘이나 남발하면서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건 하선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김택승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평소에는 이미지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서 이함은은 그의 그런 모습을 잘 몰랐다. 자신보다 하선연과 더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그랬다. 그렇다면 그녀보다는 자신이 그에게 더 가까운 것일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고만 김택승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뭐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선연에게 거절당한 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똑같이 해가 뜨고 지고, 평소같이 잠자고 일하고 밥 먹고, 지금은 이렇게 태연하게 하선연과 나란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식음을 전폐하고 괴로워하는 이별 노래들은 제게 해당하지 않는 모양이다. 어쩌면 시작조차 못 하고 끝나버렸기에 그런 건지도 모른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그러자 하선연이 김택승 쪽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요즘 날씨도 좋으니 바람 쐬러 나가는 건 좋은 생각입니다만 김택승씨가 좀 바빠야 말이지요. 주말에도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김택승은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관뒀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비상금을 모아야겠다 싶어서 편의점을 관두고 대신 새벽시장에 나가 일용직을 뛰고 있었다. 막노동이라 몸은 고되어도 일당은 꽤 짭잘했다. 한데 제 대답에 하선연이 그랬느냐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까지 그만두시고...... 괜찮으십니까?"
왜 괜찮으냐고 묻는지 몰라서 김택승은 고개를 기울였다. 묻는 어조가 마치 어디가 아프기라도 해서 관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들렸던 것이다. 그러다 한 박자 뒤늦게 거절당한 일 때문에 아르바이트까지 그만둔 게 아니냐고 묻는 말임을 깨달았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에게 거절당한 일이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기에 하선연의 걱정은 괜한 짓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마음을 쓰는 태도가 씁쓸하기도 했다. 오히려 거절당했다는 걸 일깨워 주었기 떄문이다. 그냥 사정이 있어서 관둔 거라고 짤막하게 대꾸하자 하선연은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물어왔다.
"그럼 주말에 시간 내실 수 있겠습니까?"
하선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함은이 김택승의 팔을 붙잡고 졸라댔다.
"그렇게 해요. 저번에도 난 쏙 빼놓고 사장님이랑 둘이서 부산에 갔다 왔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엔 다 같이 단풍놀이 가요."
애교스럽게 물어오는 말에 어째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저번 주 새벽시장에서 일하다가 어깨를 삐끗한 것이 아직 낫지 않았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가게에서도 계속 술병을 나르고 하다 보니 회복이 더뎠다. 이번주말에도 무리해서 일하면 분명히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지라 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너무 먼 곳만 아니라면....." 하고 대꾸하자 이함은의 얼굴이 확 피었다. 곧 고개를 돌려 하선연을 보고 물었다.
"그럼 우리 단풍놀이 가는 거죠?"
아까 자기가 먼저 갈 것처럼 말해놓고 하선연은 뜸을 들였다. 시간이 될는지 모르겠다며 핸드폰을 꺼내 스케줄을 확인해보더니만 고민하는 어투로 말을 잇는다.
"다른 일이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가야 하는 일이 아니긴 합니다. 시간을 뺄 수 있을 법도 한데......"
이함은은 사장님이 꼭 같이 가셔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다. 달랑 세 명인데 한 명이 빠지면 어떡하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하선연은 김택승을 힐끗 보면서 확답을 하지 않았다. 마치 김택승의 권유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김택승은 그것도 모르고 멍하게 한눈을 팔았다. 손에 든 커피의 존재도 잊어버린 듯 허공을 바라본 채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이함은이 "택승 씨?" 하고 말을 건 후에야 아, 정신을 차리고 눈을 끔벅거리다 말했다.
"사정이 안 되신다면 어쩔 수 없죠."
그 말에 이함은은 적잖이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럼 안 가는 거예요?"
"저희 둘이 가면 되잖습니까."
별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는 김택승을 보고 이함은은 호호호 웃으며 팔을 찰싹 때렸다. 둘이서만 가면 꼭 데이트하는 것 같다나. 그러다 스스로를 주책이라 평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김택승으로선 어색할 게 없었다. 어차피 직장 동료일 뿐인데 뭐 어떠랴 싶었다. 정 둘이 어색하면 다른 사람을 불러도 되잖은가. 때마침 머릿속에 강유형이 떠올라 그를 이함은에게 소개해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 않더라도 왠지 서로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하선연이 왜인지 피식거리고 있었다. 자신과 이함은이 단둘이 동물원을 가는 게 좋은 모양이다. 혹 이함은과 잘돼서 맘접기를 바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곧 과한 생각이라고 내심 고개를 젓노라니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하선연이 묘한 소리를 했다.
"그렇다면 저는 빠져 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왕이면 다 같이 가야죠."
이함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하선연은 김택승 쪽을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그렇다면 빠져주겠다니...... 그제야 김택승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아무래도 이함은과 잘되기를 바란다기보다는 자신이 일부러 둘이 가자는 식으로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질투심 유발 같은 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상대가 어느정도 맘이 있을 때나 가능한 거지, 좋아하지 않는단 걸 뻔히 알고 이미 거절까지 당했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함은이 계속 같이 가자는 식으로 말을 하자 결국 하선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부탁을 하니 모른 척할 수 없겠네요. 다소 원망을 듣겠지만 다른일은 미루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냐면서 좋아하는 이함은과는 달리 김택승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보일 수가 없었다. 이제 와 같이 놀러 가게 된 것을 좋아하기도 그렇고, 새삼 싫어하기도 그랬기 때문이다. 하선연은 고백 전과 같은 사이를 원한다고 했지만 김택승은 그전이 자신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질 않았다. 무작정 그가 좋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달라야 하니까 행동을 결정하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이런 것도 차츰 나아지겠지 싶어서 김택승은 생각을 접고 당장 내일 가자며 계획을 세우는 이함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날, 가게를 마친 김택승은 강유형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서 역으로 가기 전 잠시 마트에 들렀다. 그가 마실 것을 담당했기 때문에 음료수와 물을 사야 했다. 마시기 좋게 500ml 짜리로 몇 병을 사 가방에 집어넣고 곧장 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탔다.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중간에서 환승을 해 과천으로 가는 전동차에 올랐다. 서울대공원 앞에서 두 사람과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역에 도착해 출입구를 올라가니 평소보다 편안한 모습으로 차려입은 이함은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김택승을 보고 팔짝팔짝 뛰어온 그녀는 일하고 와서 안 피곤하냐고 걱정을 했다. 이어 사장님은 주차하고 오실 거라고 매표소 쪽에 가 있자고 앞장을 섰다.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겨 매표소 앞에 당도해 한담을 나누고 있노라니 곧 하선연이 나타났다. 가벼운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 매우 캐주얼해서 상당히 어려 보였다. 이함은은 깜짝 놀란 듯 탄성을 내뱉으며 칭찬을 했다.
"정말 동안이세요. 잘하면 대학생으로도 보이겠는걸요?"
그 말에 하선연은 짐짓 곤란한 척 점잔을 떨었다.
"이래서 캐주얼은 입고 싶지 않았는데......동안인 게 마냥 좋지만은 않아서요."
약간 주춤한 이함은이 "어머.....그러세요." 하고 대꾸하는 동안 김택승은 그렇게까지 어려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생긴 걸 떠나서 어릴 적부터 세상살이에 빤한 어른스러움이 있었기 때문에 풋풋함이 묻어나는 대학생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김택승의 속내를 모른 채 얼마간 이어지던 두 사람의 칭찬하기가 끝나자 김택승을 포함한 세 사람은 매표소로 발길을 옮겼다. 놀이동산은 다들 나이가 있으니 다음으로 미루고 동물원에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 동물원까지 운행하는 코끼리 열차가 있어 그걸 타고 거기까지 이동을 했다.
단풍철이라 인파가 들끓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한가했다. 주로 가족단위의 행락객이 느긋한 분위기로 동물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변이 다 산이고 나무가 많아서 경관이 매우 수려했다. 동물원도 매우 널찍해서 제법 볼게 많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기린이었다. 마침 먹이를 주고 있어 그것을 구경한 뒤 하마며 코끼리 따위를 구경했다. 그러다 보니 오래지 않아 배가 고파져 왔다. 다들 아침을 안 먹고 나온 터라 구경은 뒷전으로 하고 벤치에 앉아 먹을 것부터 챙겼다.
이함은이 수제 햄버거와 주먹밥을 꺼냈고 김택승은 마트에서 사온 음료수를 꺼냈다. 하선연은 대신 영수증을 받았다. 사장님답게 무언가를 준비해오기보다는 단풍놀이에 들어가는 경비를 내주기로 한 것이다.
식사거리가 펼쳐지는 동안 김택승은 음료수의 뚜껑을 따서 이함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하선연에게도 음료수를 내밀었다. 한데 하선연이 손 내밀어 받는 대신 그걸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뭐하나 싶어서 가져가라고 한 번 더 손을 내밀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손이 더러워서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그의 손으로 시선이 갔다. 손이 더러워질 일도 없었기 때문에 깨끗하게만 보였다. 아마 자기도 뚜껑을 따 달라는 소린가 보다. 습관적으로 그의 말을 들어주려 뚜껑을 비틀던 김택승은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이함은의 음료수를 따준 건 악력이 약한 여자라서 그런 거라 남자인 그의 음료수까지 따줄 필요는 없었다. 손이 더러우면 차라리 물티슈를 주는 게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김택승은 음료수 뚜껑을 열어주는 대신 이함은에게 물티슈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있다고 그래서 사장님 주라고 말을 한 뒤 그냥 음료수를 건넸다.
아니나 다를까 하선연은 물티슈로 손을 대충 닦고 수월하게 음료수 뚜껑을 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음료수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까 역시나 굳이 해줄 필요 없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신이 해주었던 모든 행동이 혼자만의 오지랖이었던 것만 같았다. 또 다르게는 그에게 거절당함으로써 그렇게 오지랖을 부릴 기회조차 없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신경 안 써도 되고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김택승은 묵묵히 햄버거를 먹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구경을 나섰는데 무슨 볼거리라도 있는지 어느 우리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뭔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아기곰이 사육사와 공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함은은 보이지 않는 듯 까치발을 한 채로 고개를 길게 빼고는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평소에는 힐을 신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상당히 아담했다. 어쩐지 여동생 같은 느낌도 들고 안 돼 보여서 김택승은 발 디딜만한 데가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화단에 살짝 앉으면 잘 보일 것 같아 그녀의 어깨를 톡톡 치고 그쪽을 가리켰다.
너무 높다고 생각했는지 이함은은 괜찮다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것을 보고 우선 양해를 구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려 화단에 내려주었다. "어머!"하고 놀란 이함은은 곧 아기곰이 잘 보이는 것을 깨닫고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별거 아니라 고개를 젓고 아기곰을 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하선연이 구경은 안 하고 미묘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단풍놀이라면 이함은과 둘이 가도 상관없다고 말했을 때와 같았다. 또 질투 유발을 위해 괜히 이런다고 생각하나 보다. 한번 착각에 빠지면 무슨 말을 해도 되돌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 그러려니 했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귓전에 대고 말을 했다.
"저도 잘 안 보입니다."
이에 갑자기 귀가 화끈거리는 걸 느끼고 김택승은 손을 들어 올려 그곳을 문질렀다. 귓속말 때문이라면 간지러워야 할 텐데 어찌 된 일인지 후끈거리면서 아팠다. 그 아픔이 가시도록 귀를 쥐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놓으면서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럼 안과에 가보시는 게 좋겠네요."
그보다 작은 김택승도 잘 보이는데 훌쩍하니 큰 그가 그럴 리 없었다. 갑자기 눈이라도 나빠졌다면 또 모를까. 그래서 그렇게 말을 했더니 하선연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공기 중으로 기분 좋은 소리가 번져나가자 주변 사람들이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저만치 나이 어린 여학생들은 저 사람 좀 보라며 서로 옆구리를 툭툭 치기까지 했다. 그만큼 그의 웃는 모습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정작 그 옆에 있던 김택승은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단지 아기곰이 사육사와 공을 던지고 노는 광경에 시선을 줄 뿐이었다. 아니, 실은 아기곰과 사육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빨간 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잠자기 전 불을 다 꺼놓았을 때 깜박거리며 보이는 충전기의 램프 불빛 같았다. 오직 그것밖엔 보이지가 않았다.
잠시 후, 조금 식상해졌는지 이함은이 그만 다른 곳에도 가보자고 화단에서 내려와 같이 발걸음을 옮겼다. 지치지도 않으며 남자 둘을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는데 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쉬지 않고 걷는 바람에 슬슬 다리가 아파져 왔다. 좀 쉬어가자고 김택승과 하선연은 조류관 앞에서 발길을 멈춰세웠다.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벤치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니 이함은은 남자들이 왜 이러냐며 혼자 주변을 둘러보러 가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하선연은 끙, 하는 소리를 내면서 신발부터 벗었다. 오늘도 멋 부린다고 운동화 대신 로퍼를 신어 발이 피곤한 모양이다. 그가 신발을 벗고 발을 내놓은 걸 보다가 김택승은 문득 풍겨오는 냄새를 자각했다. 원뿔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새장 앞이라 과히 향기롭지가 못했다. 다른데 앉을 걸 그랬나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노라니 저만치 다른 벤치가 있는 게 보였다. 저쪽으로 가자고 김택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선연이 지친 듯이 말했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김택승은 무심코 제 신발과 바꿔 신자고 말 할 뻔했다. 가까스로 그 말을 참을 수 있었던 건 아까 자신이 괜한 오지랖을 피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는 게 발이 편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테다. 그럼에도 로퍼를 신고 나온 것은 그게 더 좋다고 생각한 탓이다. 한테 굳이 제가 나서서 신발을 바꿔주네 마네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제 신발이 썩 보기 좋은 것도 아니고,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중시하는 사람이니까 호의랍시고 그런 소릴 하면 거절하기 난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발을 바꿔준다고 말하는 대신 그냥 벹치에 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예전 부산에 갔을 때 그에게 운동화를 내줬던 일을 조금 후회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제 운동화가 더러워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신으라고 준 것이 뒤늦게 창피해졌다. 그러면서 대여료라며 그의 주머니 속에 든 사탕을 빼먹기나 하고......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있나 자신을 달래 봐도 말없이 그와 앉아 있으려니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정적을 자각하고는 또 난처해졌다. 별로 그와 침묵한 채 있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데 어찌 된 일인지 좀 어색했다. 실은 많이 어색했다. 전에는 이럴 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새삼 무슨 말을 해보려고 해도 마땅한 화제가 떠오르지도 않고, 억지로 떠드는 게 더 부자연스러울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떠돌아 보니까 종내는 멍해져 버렸다.
생각 없어 보이는, 어떻게 보면 생각이 아주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김택승을 보고 하선연이 문득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선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약간 뜬금없이 나온 말이라 살짝 얼이 빠져 있던 김택승은 "네?" 하고 반문을 했다. 그 반문에 대꾸하는 대신 진짜 미안한 듯이 난처한 기색을 띠고 쳐다본다. 그제야 일전에 거절당한 일을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다 생각해서 한 말이란 걸 깨달았다. 덕분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과라면 저번에 거절당했을 때도 충분히 들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맘이 생각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이미 거절당할 것을 알고 했던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걸 다 떠나서 그가 미안해할 만큼 힘들지 않았다. 눈물이 끝도 없이 흐른 것도 아니고 불면으로 밤을 지샌 것도 아니다. 밥도 잘 먹었고 일도 잘 다니고 모든 것을 평소대로 하고 있다. 그의 얼굴까지 이렇게 보고 있는데 어떻게 이보다 더 멀쩡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제 태연함에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라 왜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생각들이 세찬 바람처럼 김택승을 한 바퀴 스치고 지나쳣다. 그러나 그저 "저는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만 내뱉었을 뿐이다. 그의 심정을 정말로 아는지 모르는지, 하선연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닙니다. 당분간은 제가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발이 아팠냐는 듯 도로 신을 신고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김택승은 잠시 제자리에 앉은 채로 그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그가 절룩거리며 걸어갔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은 그와 신발을 바꾸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가로젓고 그것을 지워버렸다. 그런 뒤 그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혼자 새를 구경하고 온 이함은과 함께 두 사람은 영장목류가 있는 구역에 도착했다. 유인원이나 고릴라 같은 게 있는 곳이라 상당히 시끄러웠다. 보통 원숭이보다 상대적으로 귀여운 다람쥐원숭이 우리 앞에 아이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어른인 세 사람은 뒷전에 멀찍이 서서 잘 보이지도 ㅇ낳는 원숭이를 찾아야 했다. 그때 옆에서 엄마 등에 업혀 있던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손에 쥐고 있던 딸랑이를 놓친 모양이다. 그게 하필이면 하선연의 발치로 떨어졌다. 하선연은 그것을 힐끔 내려다보고 느릿한 동자긍로 주워 올렸다. 그리고 아이에게 건네다 눈이 마주쳐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걸 본 아이가 울음을 뚝 그쳤다. 엄마가 웬일이냐며 놀라는 가운데 그가 활짝 웃어 보이자 베시시 웃기까지 했다.
"어휴, 얘 좀 봐. 벌써부터 이렇게 얼굴을 밝히면 어떡해?"
그렇게 아기를 핀잔 준 엄마가 고맙다면서 칭찬을 했다.
"학생이 너무 잘 생겨서 그런가 봐요."
하선연은 고상하게 미소 띤 얼굴로 아니라며 아기가 참 예쁘다고 칭찬을 돌려줬다. 그런데 입꼬리가 올라간 수준이 아주 싱글벙글하였다. '학생' 이라고 불리다 못해 '너무' 라는 부사까지 붙은 '잘 생겼다' 는 칭찬을 들어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 모양이다. 엄마와 하선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함은이 "아기들은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더니 사실인가 봐요." 하고 말을 하자 헛기침을 하고는 아닌 척했다.
"아마 딸랑이를 주워줘서 그런 거겠죠."
그리고 흐뭇한 얼굴로 김택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택승은 그들의 이야기를 집중해 듣고 있지 않았다. 나무 뒤에 찰싹 달라붙어 숨어 있는 다람쥐원숭이를 보는 중이었다. TV에서 보던 것보다는 참 작구나 하는 생각 따위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동시에 자신의 눈에 좋아 보이는 건 다른 사람 눈에도 좋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도 좋아할 정도면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그를 좋아하고 더 힘들어했을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넋이 딴 곳으로 가 있는 것을 보고 하선연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다람쥐원숭이가 그렇게 귀엽습니까?"
그 말에 김택승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함은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팔을 가볍게 두드린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피곤하세요? 아까부터 조금 멍하신 것 같은데."
이함은이 하는 말에 김택승은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집에 돌아가서 자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 바람에 하선연의 미모와 관련된 화제는 잊히고 말았다. 하선연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다른 원숭이들도 보자고 발길을 옮겼다.
몇 발짝 걷지 않아 세 사람은 여러 종류의 원숭이 우리가 쭉 늘어선 곳에 당도했다. 철창 가까이 다가가자 먹을 것이라도 기대하는지 원숭이들이 기웃거리며 모여들었다. 다른 관람객도 있는데 희한하게 그들 앞으로만 몰려들었다. 특히 하선연을 주시해 이함은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원숭이들도 아기랑 똑같나봐요? 사장님 앞으로만 모이네요."
하선연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대꾸했다.
"제가 동물을 좋아해서 그런가 봅니다."
마치 동물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이유야 뻔했다. 잘생겼으니까 동물들도 보는 눈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우리에서 뭐가 날아와 하선연의 머리통에 부딪혔다.
"……."
하선연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고 그의 머리통에 부딪힌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먹다 남은 사과쪼가리였다. 꼼꼼하게도 발라먹었는지 대만 예쁘게 남아 있었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무어라 할 말도 없고 원숭이들이 원래 장난이 심하다며 난간에 팔을 기대고 짐짓 태연한 척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으앗!" 하고 소리를 쳤다. 철창 안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손을 쑥 빼 그의 머리카락을 콱 움켜잡았던 것이다. 이에 하선연의 뒤통수가 철장 쪽으로 홱 말려갔다. 그걸 보고 다른 원숭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어 머리칼을 잡으려 했다. 그냥 뒀다간 머리카락이 통째로 뽑힐 기세라 김택승은 재빨리 난간에 발을 올리고서 철장을 세게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가 나자 움찔한 원숭이가 손을 놓았다. 황급히 물러선 하선연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놀란 가슴을 쓸어 만졌다. 그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이함은이 말했다.
"이게 웬일이야. 택승 씨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하선연은 머리를 황급히 가다듬었다. 놀란 맘보다는 망가진 머리가 더 신경 쓰이나 보다. 한데 원래 곱슬머리라서 그런지 머리카락이 쉽게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특히 뒤통수에서 불쑥 일어난 한 가닥이 그러했다. 올린 발을 거두고 아래로 내려온 김택승은 물끄러미 그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예전 같은 감상이 스쳐 지나갔으나 아주 잠깐이었다. 곧 무덤덤해져 무심코 달가워하지 않을 말을 내뱉었다.
"곱슬머리라서 그런가 봅니다."
이함은이 "네?"라고 반문을 해 김택승은 약간 주저하다 곱슬머리라서 잡아당기고 싶게 생기지 않았냐고 말을 했다. 그러자 미간을 좁힌 하선연이 딱 잘라 대꾸했다.
"저 곱슬머리 아닙니다."
……누가 봐도 곱슬머리로 보인다. 파마를 한 게 아니라면 분명히 곱슬머리가 맞다. 왜 곱슬머리가 아니라는지 모르겠다. 뭐, 본인이 곱슬머리가 아니라는데 어쩌겠는가.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는 김택승의 눈에 다시금 일어나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뒤통수의 뒤집어진 저 머리카락은 곧 죽어도 차분해지지 않을 기세였다. 그게 우스웠는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던 이함은이 우리를 벗어나려는 듯 앞장서 가는 하선연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그맣게 속삭였다.
"곱슬머리 맞는 거 같아요."
고등학교때부터 저랬으니까 확실하다. 고개를 끄덕거리던 김택승은 문득 그가 곧은 머리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럼 화장실에서 머리카락을 눕히려고 애쓰던 그와 마주치지 않아도 됐을 테다. 지나칠 때마다 그 머리가 뒤집혔나 하고 쳐다보거나 어쩐지 잡아당겨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곱슬머리니까, 어차피 이런 생각도 부질없다고 여기고 남몰래 키득거리는 이함은과 함께 그를 따라 걸었다.
동물원을 한 바퀴 대강 둘러보고 나자 슬슬 돌아갈 분위기가 되었다. 이함은은 야외에 나온 것만으로도 만족한 기색이었고 김택승은 저녁에 출근해야하니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때마침 힘들게 걸어 내려갈 필요가 없도록 동물원 위쪽에 리프트가 있었다. 그걸 타고 내려가기로 하고 표를 끊었는데 자리배치가 좀 애매했다. 한 사람만 따로 떼놓고 타기도 그렇고, 어른 셋이서 탈 수 있는 정도의 넓이라 이함은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올라가게 됐다. 약간 부실한 느낌이 나서 위태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함은은 단풍이 곱게 물든 산을 보며 환성을 질렀다.
"와! 정말 근사하네요. 전 서울대공원에 단풍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나오길 잘했죠?"
그러나 어째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왜인지 김택승과 하선연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 채로 있었다. 김태승은 멀리 보이는 산에 한눈을 팔고 있었고 하선연은 연방 머리를 쓸어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김택승은 아까부터 마음이 영 딴 데 가 있는 것만 같았다. 머쓱해진 이함은은 결국 어깨를 움츠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이함은은 혼잣말을 한 꼴이 됐다는 걸 알고 김택승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러네요. 경치가 참 좋습니다."
그러자 다시 얼굴이 밝아진 이함은이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높은 리프트에서 무섭지도 않은지 다리를 흔들며 남친들과 단풍놀이나 벚꽃구경을 갔던 일화를 이야기해주었다.
"예전에 남자 친구랑 강원도로 놀러간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운전을 저에게 시키고 휴게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난리 난리를…… 정말 홀딱 깨지 뭐에요."
그 말에 동물원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하선연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것을 모르고 김택승은 별생각 없이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함은은 똥차들의 특징은 무책임한데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거라면서 하나같이 자신감만큼은 하늘을 찌른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다들 생긴 건 멀쩡했다며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 모르는 거라고 열변을 토한다. 그 이야기를 심란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하선연이 이함은이 잘생긴 사람이 싱글이라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봐야 한다고 말을 하자 더는 못 듣겠다는 듯 불쑥 입을 열었다.
"잘생긴 남자라고 다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그 말에 이함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으면서 지적했다.
"아~ 그러니까 사장님은 잘 생기셨어도 나쁜 남자는 아니라는 말씀이죠? 그럼 스스로 잘생기셨다는 걸 인정하시는 거네요."
하선연은 굳이 그런 건 아니라고 헛기침을 했다. 아마 그를 겨냥해서 한소리가 아님에도 괜히 찔렸나 보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습이라 김택승은 무심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똥차 이야기로 열 올렸다며 손부채를 퍼덕거리는 이함은에게 말했다.
"의외로 그런 남자 많으니까 만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괜찮아요. 이제 하도 데여서 그런 남자한테는 눈길도 안 주거든요."
김택승과 이함은이 서로 마주보며 씩 웃는 가운데 옆에서 하선연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 있다보니 리프트가 호수 부근을 지났다. 가을 햇살이 수면에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와중에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쓰르륵거렸다. 저 멀리 이름 모를 새 무리가 날아가고 시원스러운 바람이 불어와 세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가을의 여운이 끝나갈 무렵, 이윽고 리프트가 출구에 도착했다. 리프트에서 내려 서울대공원을 빠져나가면서 이함은이 즐거웠다고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김택승도 모처럼 바람을 쐰 기분이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했다. 서울에 살면서도 한번 와보질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곳 같았다. 다음에는 놀이동산에도 가보자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차장 부근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이함은은 김택승에게 돌아가는 방향을 물었다. 그리고는 제 집과 같은 방향이 같으니까 지하철도 같이 타면 되겠다고 말을 했다. "돌아갈 때는 안 심심하겠네요." 라면서 웃는데 그 말을 듣고 있던 하선연이 나서 말했다.
"지하철이라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두 분 다 태워 드리죠."
정말이냐고 좋아하는 이함은이 하선연과 함께 앞장을 서 가는 가운데 김택승은 뒷전에서 좀 머뭇거렸다. 차라리 지하철을 타고 싶었으나 여기서 혼자 그러겠다고 하기는 좀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대놓고 하선연이 피하는 꼴이 될까봐 마지못해 주차장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웬일로 하선연이 운전대를 잡기에 이함은이 보조석에 타고 김택승은 뒷좌석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하선연이 갑자기 한손으로 어깨를 짚고 팔을 휘둘렀다. 그러면서 "으음……."하고 심각하게 신음을 냈다. 그걸 보고 이함은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깨라도 아프세요?"
하선연이 애써 "별일 아닙니다. 그냥 좀 삐끗해서요."하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동을 걸다 말고 다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누가 봐도 나 어깨가 아파서 운전하기 힘들다는 제스처라 김택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 밖으로 나가서 운전석의 문을 열고 말했다.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당연한 듯 김택승에게 운전을 맡겨왔으면서도 새삼스럽게 고맙다고 말한 하선연은 이함은이 비켜준 옆자리로 옮겨 탔다. 대신 김택승은 운전석에 앉아서 차에 시동을 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한데 힘을 줄 때마다 새벽시장에서 다쳤던 어깨가 지끈지끈했다. 움직이는 것만으로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김택승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액셀을 밟아 운전대를 돌려 주차장을 벗어났다. 옆에 앉은 하선연이 그것도 모르고 다리를 꼰 채 등받이에 편안히 기대앉아서는 잠을 청하듯이 눈을 감았다.
얼마간을 달려 이함은을 집 압까지 데려다주고 인사한 뒤 김택승과 하선연이 다시금 도로로 나갔다. 그리고 하선연이 화랑으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적어도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말은 진짜였나 보다, 김택승의 집으로 가자고 그래서 알겠다고 핸들을 돌렸다.
오래지 않아 옥탑방 근처로 이르러 김택승은 차를 정차시켰다. 그런 뒤 운전석에서 내려 하선연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구경 잘했다고 덧붙이자 하선연이 뭘 이런 걸 갖고 그러냐며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것이 재미있었는지 오늘따라 유독 웃음이 잦은 그였다. 어딘지 모르게 흐뭇한 표정으로 싱글거리는 게 이런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하긴, 구속을 원치 않는 그로서는 김택승이 고백을 해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이 속 시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거절했을 당시에도 난처해하기보다는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좋으면 된 거라고 생각하며 김택승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곧 살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쇠 맛이 비쳤다. 피가 나는 모양이라 아랫입술을 빨고 있노라니 그 모습을 본 하선연이 무심하게 손을 내밀어 왔다. 김택승은 흠칫해서 다가오는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손끝에 얇은 살갗에 닿아오기 전,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나 슬쩍 피해버렸다.
그것을 보고 하선연의 눈이 조금 커졌다. 김택승은 다급히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가을이라 건조해서…… 보호제 바르면 됩니다."
곧 가방을 뒤져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입술보호제를 찾아냈다. 뚜껑을 열고 입술에 그것을 꾹꾹 바르노라니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자기가 준건 어쨌냐는 듯 쳐다보는 눈길을 모른 체하고 김택승은 새로 사두었던 입술보호제의 뚜껑을 닫았다. 곧이어 그의 시야에서 숨기듯이 새 입술보호제를 가방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다행이랄지 하선연은 새 물건에 관해서 이렇다 할 질문을 던지진 않았다. 다만 희미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서 태워줘 감사하다고 한 번 더 인사하고 곧장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순간 팔이 붙잡혀 뒤를 돌아본 김택승은 아이처럼 자신을 꼭 붙잡은 손을 보았다. 이에 하선연도 스스로의 행동이 의아한 것처럼 당혹한 기색이었다. 그러다 금방 팔을 놓아주고는 말했다.
"……그냥 오늘 저도 즐거웠다고 말씀드리려던 겁니다."
그렇습니까, 하고 대꾸한 김택승은 몇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잠자코 걷는데 그가 여전히 뒤에 서 있는 게 느껴졌다. 어쩐지 신경 쓰여 돌아보고 싶었으나 돌아보면 쉬이 걸음을 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당기는 뒤통수를 애써 참으면서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부우우웅- 하고 그의 차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래, 차라리 이쪽이 맘 편하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
"……형! ……승이 형!"
멍한 표정으로 밀대를 변기 속에 집어넣은 채 철썩철썩 문지르고 있던 김택승은 문득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주방보조가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손가락으로 밀대를 가리킨다. 다시 앞을 돌아보고 제가 밀대를 변기 속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김택승은 사정을 설명했다.
"아, 이거. 변기에 뭐가 묻어서 닦고 있는데. 변기 솔이 보이질 않아서."
그러자 주방보조가 낭패한 표정으로 말했다.
"변기 솔이라면 바로 옆에 있잖아요."
"응?"
먼 소린가 싶어 변기 옆을 보니까 변기 솔이 곱게 놓여 있었다. 김택승은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눈을 끔벅거렸다. 아까는 분명히 없었는데 참으로 이상하다. 얼이 빠진 그를 보고 주방보조가 어이쿠야, 이마를 짚었다.
"게다가 변기 솔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홀 바닥 닦는 걸래를 변기에 집어넣으면 어떡해요."
그렇지만 딱히 무엇으로 닦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간 눈에 띄는 밀대를 집어다 닦은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어이없는 짓이기는 했다. 뭐라 변명도 못하고 밀대를 변기에서 끄집어내는 그를 보고 주방보조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새 왜 그래요? 한 며칠 잠도 못 잔 사람처럼 멍해서는……. 어디 아파요? 전에 얼핏 듣자하니 교통사고가 크게 난 적 있다면서요."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통사고의 후유증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 날이 추워지기 전이라 딱히 쑤시는데도 없고 요전에 어깨가 삐끗했던 것도 거의 나았던 것이다. 그래서 딱히 아픈 곳은 없다며 고개를 젓던 김택승은 문득 제 머리에 있는 파편을 떠올렸다. 겉보기로는 아무 증세가 없어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언제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게 새삼 자각됐다. 이것 때문에 멍청해지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김택승은 괜히 뒷덜미를 슥슥 문질렀다.
"그래도 좀 가서 쉬어요. 피곤해서 그런지도 모르니까. 밀대는 제가 빨아둘게요."
빼앗다시피 밀대를 가져가는 주방보조에게 고맙다 말을 하고는 직원용 화장실을 나와 휴게실 간이의자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주변의 걱정을 살만큼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면 자각을 못 해서 그렇지 진짜 피곤하기라도 한 것일까……? 피로엔 약도 없다니까 이따가 사우나나 한번 가야겠다는 생각하며 앉아 있던 김택승은 문득 인기척을 들었다. 누구 없냐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웬 잡상인이 들어와 있었다. <Blossom>은 출입구 찾기가 어려워 잡상인이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내보내나 싶어 난감한 표정을 짓던 중 다리를 저는 잡상인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꾸러미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총각, 뭐 필요한 거 없소? 한번 보기라도 해봐, 없다고 하면 바로 나갈테니까.
필요한 거……. 무심코 잡상인이 펼치는 꾸러미를 보는데 면봉과 때밀이 타월 사이에 귀이개가 있는 것이 보였다. 전에 화랑에서 귀이개를 갖고 온 뒤 새 걸로 갖다놓는다는 걸 깜박하고 있었다. 딱히 귀이개를 파는 곳이 보이지 않은 탓이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김택승은 천 원 주고 귀이개를 샀다. 고맙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이는 잡상인을 배웅하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귀이개를 곧장 가방 속에 챙겨 넣었다.
그날은 툭하면 가게 사람들에게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들었다. 오죽하면 그 팔팔한 주방장까지도 힘들면 좀 앉아 있으라고 했다. 진짜로 괜찮은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김택승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퇴근해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까만 차창밖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니 평소보다 더 무표정한 것 같기는 했다. 이래서 다들 피곤해 보인다고 그랬나보다. 괜히 차창을 보면서 입가를 들어 올려 씩 웃어 보인 김택승은 몹시 멍청해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관둬버렸다. 올겨울만 지나면 이런 생활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붓고 있는 적금을 찾아서 학교에 복학한 뒤 졸업 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고…….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김택승은 그 생각이 참으로 피상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은 그럴싸한 직장도 따뜻한 가정도 평탄한 인생도 딱히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남들이 꺼리는 밑바닥 삶을 살아도 별로 불만이 없을 자신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러자 순간 마음 한켠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하고 고개를 갸웃한 김택승은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처음으로 제 죽음에 대해 느껴진 감정을 무심코 지나쳐버렸다.
오래지 않아 전동차가 역에 도착해 평소 같은 길을 발방 화랑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검은색 아우디가 있는 걸로 봐 하선연이 화랑에 있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테라스에 창문이 열려있었다. 밑으로 내려와 있는 게 분명했다. 또 소파에서 자고 있는 거라면 청소기를 밀기가 어려울 텐데 걱정하며 김택승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잊지 않고 데스크에서 원래 귀이개가 들어있던 상자를 꺼냈다. 새로 사온 귀이개를 넣어두기 위해서였다. 그때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뭡니까?"
하선연의 목소리라서 김택승은 돌아보지 않고 대꾸를 했다.
"귀이개요."
그러자 등 뒤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귀이개를 본 그가 웃는 기척을 냈다.
"조그맣잖아요. 내가 숟가락만 한 걸로 가져다준다고 그랬는데."
가볍게 웃으면서 받아줄 수 있음직한 이야기였으나 그럴 수가 없었던 김택승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숟가락만 한 걸로는 귀 못 파잖아요."
그 반응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하선연이 미간을 모았다. 가볍게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미심쩍어하더니만 문득 팔짱을 끼고 소리를 내 이름을 불러왔다.
"김택승 씨."
"네?"
김택승은 평소처럼 곧장 대답하면서 즉각 돌아보았다.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싫어서 눈을 마주보고 마주 보노라니 어째선지 긴장이 됐다. 그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볼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한 하선연은 흠, 하고 팔짱 꼈던 손을 풀어 귀이개를 가리켰다.
"그럼 그건 잘 파시는지 좀 봅시다."
그리고 앞장을 서 휴게실로 가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김택승은 청소를 해야 하는데, 라고 조금 중얼거리긴 했지만 곧 귀이개를 가지고 순순히 가서 앉았다. 그러자 드러난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하선연이 귀를 내보였다.
일전에 귀 만지지 마라, 숨 쉬지 마라, 잔소리를 해서 김택승은 신중하게 귓속을 들여다보았다. 별로 청소할 필요가 없어 보여 "귓밥 별로 없는데요." 라고 말을 하자 하선연이 몸을 돌려 반대쪽 귀를 드러냈다. 별수 없이 반대쪽 귀를 살피고 있는데 하선연이 또 옆구리를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워야 마땅한데 어찌 된 게 앞서 김택승은 미간을 모았다. 사포로 문지르기라도 하는 듯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신경이 곤두서 올랐다. 그래서 그만 하라고 말을 하려던 참에 하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흰 티셔츠는 안 입습니까?"
여름도 다 지나가고 날씨가 서늘해져 이제는 김택승도 긴팔을 입고 있었다. 흰 티셔츠를 입는 게 좋아 보였던 모양인데 막상 입고 있을 땐 아무 소리를 안 하더니 뒤늦게 타령이다. 김택승이 안 입는다고 대꾸를 하자 섭섭했는지 어쨌는지 대놓고 티셔츠를 걷어 올리며 흉터를 살펴보았다.
"이런 말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이 흉터, 꼭 난해한 작품 같습니다."
그의 손끝이 흉터를 더듬는 것을 느끼면서 김택승은 화랑을 운영하는 사람이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냐고 무심하게 대답한 뒤 귀를 마저 파는데 하선연이 계속 말을 이었다.
"진짜 작품이었다면 곧장 사들였을 텐데……아마 저한테 큰돈을 벌어다 줬을 겁니다."
난해한 작품이라고 했으면서 돈벌이가 되나? 이해가 안 돼 김택승은 조금 건성으로 대꾸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
그러다 티셔츠를 가슴께까지 끌어 올린 하선연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황급히 손을 뒤로 물렸다. 전에도 이러더니 또 이런다. 다치면 어떡하려는지……. 그러다 흉터를 끈적이게 핥아 올리며 유두를 빠는 혓바닥에 하마터면 귀이개를 놓칠 뻔했다. 그가 스치는 곳마다 신경이란 신경은 죄다 모이는 듯이 아팠다. 그것을 모르고 작은 유두를 떼놓을 듯 깨물고 둥글리며 짓눌리다 다시 빤다. 결국에는 티셔츠까지 억지로 벗겨내는 바람에 귀이개를 손으로 놓치고 말았다. 곧이어 목을 깨물어와 김택승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걸 보고 막 키스를 하려던 하선연이 행동을 멈추었다.
"……."
그가 침묵한 채로 빤히 바라보자 김택승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아프다는 것을 티내고 싶지 않았다. 멀쩡하게 괜찮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그조차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서두르는 말을 내뱉었다.
"할 거면 빨리 하세요."
영문 모를 아픔은 둘째 치더라도 어차피 할 거면 후딱 해치우는 게 좋다 싶었다. 키스로 끝내면 다행인데 그러지 못할 경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럼 출근할 이함은도 신경 써야하고 또……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갈 게 분명했다. 다지 욕구만을 위해 몸을 겹치는 것은 상관없으나 그 이상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김택승이 내뱉은 말에 하선연은 하던 것을 마저 하는 대신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올리고 뚫어지게 쳐다봐왔다. 속눈썹에 그늘이 드리운 얼굴이 어째 불쾌해하는 것 같기도 해 김택승은 아랫입술을 빨았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인데 너무 분위기 깨는 말이었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선연은 불평을 하는 대신 어깨를 늘여트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럴 기분 사라졌으니까 됐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도로 티셔츠를 찾아 입는 김택승을 힐끗 보고 하선연은 곰곰이 생각하는 투로 말했다.
"많이 피곤하신가 보지요."
티셔츠를 입은 뒤 귀이개를 찾던 김택승은 여기서도 그런 소리를 듣는구나 생각했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이 전부 그 소리를 하니까 진짜로 피곤한 게 맞나 보다. 그래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하선연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일찍 돌아가 쉬세요. 청소는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더러운 것 같지도 않고."
마침 귀이개를 찾아내 허리를 편 김택승은 그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들어가 쉬십시오."
어떡할까 갈등하던 김택승은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월급 받는 입장이니까 그냥 하겠습니다."
그 말에 하선연이 또 모호한 표정이 됐다. 맞는 말을 했건만 어째서 그른 소리를 들은 것처럼 표정이 저런 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곧 몸을 휙 돌리면서 내뱉듯이 말을 했다.
"월급 주는 입장에서 말하는 겁니다. 돌아가요."
사장으로서 돌아가라고 하면 아르바이트생이야 따르는 게 당연한 일이다. 열을 더 하라는 것도 아니고 쉬라는 거니까 굳이 고집 세울 필요 없다 싶어 김택승은 "고맙습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귀이개를 데스크에 갖다 두었다. 그리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창가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하선연에게 이만 가보겠다고 한 번 더 인사를 했다. 하선연은 대꾸가 없었다.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화랑을 나오는데 등 뒤로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창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나 보다. 그렇지만 김택승은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돌아보지 않았다. 아만 묵묵히 발검을을 옮겨 대문을 나설 뿐이었다.
*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면서 <Blossom>에 뜸해졌던 손님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원래 더울 때와 추울 때 영업이 잘되는지라 얼마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최근 강유형에게 꽂힌 손님이 있어 그 손님이 매일같이 눈도장을 찍으며 다른 손님을 몰고 왔기에 매상도 껑충 뛰어올랐다. 덕분에 보너스가 지급되어 김택승은 주말에 새벽시장에서 일하더 걸 관둘 수 있었다. 학교에 복학할 준비를 해야 하니 이제는 일하는 대신 주말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영어고 뭐고 바빠서 못 들여다보는 동안 몽땅 까먹은 것 같았다. 요즘 취업하기가 하늘의 벌 따기라는데 이럴 때 자격증이라도 몇 개 따놓고 토익이나 토플에도 신경 써야겠다 싶었다.
이번 겨울만 지나면 가게와 화랑 일도 관둘 생각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그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은 무리니까 대신 과외 아르바이트나 다시 구해야겠다. 별로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지 않아 걱정이기는 했으나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김택승은 이런저런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주방에서 부르는 소리에 달려 들어가 룸에 서빙 할 접시를 받았다. 식기와 잔과 물수건 같이 필요한 것들을 챙겨 들고 나가는데 문득 안으로 들어오는 무리가 보였다. 개중에 눈에 확 띄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하선연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줘 차린 모습이었다. 말 안듣는 곱슬머리도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마치 사진 같은 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웬일인가 싶어서 눈을 둥그렇게 뜬 김택승은 일단은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있어 아는 척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앟은 채로 서빙 할 룸에 들어갔다. 이어 인사를 하고 테이블에 필요한 것들을 내려놓던 중, 누가 말을 걸어왔다.
"저 기억 안 나세요?"
무심코 고개를 든 김택승은 약간 어색하게 웃으면서 쳐다보는 남자를 발견했다. 나름 반듯하게 생긴 얼굴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생각이 안 났다. 동창이나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뭐라 대답할지 몰라 애매한 표정으로 있노라니 그가 김택승의 가슴팍을 보고 말했다.
"이름표 떼셨네요. 김택승 씨."
그제야 비로소 생각이 났다. 전에 하선연과 똑같은 정장을 입고 있어 순간 착각을 불러일으키게끔 했던 남자였다. 강유형이 피하라고 했던 게 기억나 김택승은 "네." 하고 짧게 대답한 뒤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룸을 나왔다. 잠깐 스친 것치고는 참 기억력이 좋았다. 어쩌면 가게에 몇 번 오가면서 자신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오가는 모습만 보고 어떻게 사람한테 관심을 품을 수가 있는지 신기했다.
크게 시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김태승은 문득 앞이 가로막혀 고개를 들었다. 하선연이었다. 보란 듯 버티고 서서 팔짱을 낀 상태였다. 일단은 가게 손님으로 왔으니까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싶어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말에 하선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 들었다.
"몰라서 묻는 겁니까?"
"네?"
갑작스러운 반문에 김택승이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하선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내뱉었다.
"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척합니까."
분명히 고개를 숙였던 김택승은 머리를 갸웃하며 말했다.
"인사드렸는데요. 다른 분과 같이 계시기에 그냥 말은 안 걸었습니다."
"그걸 인사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하선연이 토로하는 불만에 김택승은 별생각 없이 답했다.
"가게에 손님이 오시면 늘 그렇게 인사하는데요."
매니저인 것도 아니고 ㅇ리개 아르바이트생이 오는 손님을 붙잡고 일일이 인사하지는 않는다. 아까 다른 직원이 맞아주는 걸 봤는데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그 대답에 잡깐 다물었던 하선연이 반문을 던졌다.
"손님?"
"...네."
그럼 손님이 아니면 뭐란 말이지. 화랑에선 사장님과 아르바이트생이고 가게에서는 당연히 그냥 손님일 수박에 없다. 지극히 당연한 대답을 했을 뿐이건만, 하선연의 표정이 굳었다. 그 상태로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딱 자르는 말투로 내뱉었다.
"저는 이대로가 좋다고 했을 텐데요."
그거라면 기억하고 있다. 자신을 거절했을 때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김택승은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그대론 데요?"
거절당하기 전과 달라진 게 별반 없어서 새삼 그 말을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제 대답에 그가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했던 것일까. 그가 바라던 말이 아니었다는 건 알겠는데 한창 일하는 중이라 나중에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김택승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오늘 가게가 많이 바빠서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따 화랑에서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하선연이 미묘하게 딱딱해진 어조로 내뱉었다.
"내가 뭣 때문에 이러는지는 알고 사과하는 겁니까?"
김택승은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화랑에서라든지 다른 데서 이야기하는 거라면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일하는 중에 이러는 건 곤란했다. 그가 본론을 바로 말하는 편이 아니라서 더욱 그랬다. 뭐에 화가 났는지 아느냐니, 그걸 안다면 애초에 기분 나쁘게 하지도 않았을 테다. 덕분에 전에는 그다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초조하고 답답하고, 답지 않게 짜증이 났다. 이렇게까지 반응할 상황이 아닌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이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어쩌면 가게에서까지 그를 마주 보고 그에 관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게 싫은지도 몰랐다. 그 감정을 어째야 할지 몰라 김택승은 손님이니까, 하고 제 기분을 누른 채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소홀히 한 것 때문이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하선연이 어깨를 꽉 붙잡았다. 잠깐 몸이 흔들린 김택승은 조금 놀랐다. 어째 화가 난 것 같은 눈이었다. 기분 상해하거나 투덜거리기는 해도 화는 낸 적이 없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제가 역정을 내거나 욕설을 한것도 아닌지라 더욱 르랬다. 어째서 사관하는 말에 화를 내는 것일까. 전과는 달리 하선연은 김택승을 붙잡은 손에 당황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추궁하려는 것처럼 쳐다보는 눈이 단호했다. 그가 무어라고 입을 여는 순간, 복도 저쪽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고개를 돌리니 잠깐 손님을 배웅한다고 자리를 비웟던 강유형이었다. 그의 시선이 김택승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못 박혀 있었다. 곧 가까이 다가온 그가 김택승을 붙잡고 선 하서년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손 놓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직원이라서요. 책할 일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시죠."
지금 상황이 꼭 진상 손님이 직원을 때리기라도 할 것 같은 그림이라는 걸 깨닫고 하선연은 마지못해 손을 놓았다. 그리고 강유형에게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아는 사이라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입니다."
맞느냐고 확인하려는 듯 강유형이 김택승을 힐끗 쳐다보았다. 김택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낮췃던 몸을 바로 하고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우리 택승이와 아는 사이시라고요?"
'우리' 라는 말에 하선연의 턱이 움찔했다. 그리고는 김택승과 강유형을 번갈아 보고 마찬가지로 선웃음을 띠워 올렸다. 평소보다 입술에 한껏 힘을 주고 미소 지은 그는 곧 "아...." 하는 감탄사를 흘리고는 악수를 청했다.
"하선연이라고 합니다. 여기 매니저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가게에도 종종 오시곤 하셨죠."
일견 스스럼없는 척 서로 손을 맞잡은 하선연과 강유형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가벼운 악수치고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손을 흔들고 잇어 김택승은 어지간히도 반가운가 보다고 생각했다. 강유형이 했던 말도 있고 해서 별로 두 사람이 잘 맞을 거라 생각해본 적 없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싱글거리며 악수하는 모습이 서로 호의가 넘치는 듯했다. 잠시 후 손을 놓은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팔짱을 꼈다. 하선연은 그렇다 치더라도 강유형은 손님 앞에서 팔짱 끼는 사람이 아니라 좀 의아했다. 뒤늦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가운데 강유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는 갑자기 전화 드려 죄송했습니다. 우리 택승이가 갑자기 연락이 안되니까 걱정이 되어서요."
"이해합니다. 그때의 숙박권은 아주 잘 썼습니다. 투 베드룸이라 다음날 스위트룸으로 옮기긴 했습니다만."
잠자코 두 사람이 하는 대화를 듣고 있던 김택승은 스위트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좀 민망해졌다. 아무리 강유형이 제 사정에 환하대도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긴 뭐했다. 그래서 도중에 끼어들어 말했다.
"사장님, 룸에 안 들어가 보셔도 괜찮습니까? 일행분이 찾으시겠습니다."
그 말에 강유형이 재빨리 받았다.
"그러히겠군요. 괜히 저희가 붙들어두고 잇엇네요. 이만 들어가 보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가보라는 듯 김택승에게 눈짓을 했다. 김택승은 이때구나 싶어서 꾸벅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두 사람이 뭐라 뭐라 더 말을 하는 것도 같았는데 제가 잇어봤다. 도움 될 것도 없고, 마침 주방보조가 설거지 좀 같이 하자며 불러 저쪽 일은 잊고 주방으로 향했다.
얼마 후, 산같이 쌓인 접시를 처리하고 났더니만 기우닝 죽 빠졌다. 김택승은 잠시 쉴 틈도 없이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려고 들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복도에 기대 서 있던 사람이 벌떡 등을 일으키더니만 가까이 다가와서 불쑥 손을 내밀었다. 김택승이 당황해 쳐다보니 아까 룸에서 아는 척을 했던 남자였다.
"저..."
왜 이러시냐고 묻기도 전에 제 손에서 들통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이리 주세요.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제가 힘이 약한 여자도 아니고, 들통 속에 음식물 쓰레기가 한 가득인데 그걸 손님에게 들라고 할 수는 없었다. 김택승이 괜찮다면서 버티자 남자가 같이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결국 들어주겠다 아니다 승강이를 벌티다 그만 들통이 홱 뒤집어지고 말았다. 바닥으로 음식물 쓰레기가 몽땅 쏟아지고, 김택승은 할 말을 잊은 채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울상이 된 남자가 급히 사과했다.
"미, 미안합니다. 전 단지 도와주려 했을 뿐인데.... 그러니까 진즉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마치 김택승을 탓하는 말이엇으나 손님이라 뭐라 하지도 못하고 김택승은 묵묵히 고개를 적었다. 그리고 제가 치울 테니 들어가 보시라 하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맨손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들통에 주워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는 남자가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 김택승도 계속 괜찮다고 말을 했다. 차라리 돌아가 주는 편이 좋으련만, 자꾸 옆에서 그러니까 적잖이 신경 쓰였다. 그러던 중 우물쭈물하던 남자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럼 전화번호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됩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반문했다.
"예?
곧 얼굴을 붉힌 남자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처음 본 순간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제가 남자라서 거리껴질 수는 있습니다만..."
조금 망설이던 남자는 한층 어이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돈은 좀 많거든요."
"......"
머리가 좀 아찔했다.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는데 어ㄸ거하면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전화번호 가르쳐주는 거랑 돈이 많은 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다른 직원에게 스폰서 운운하면서 질척이는 진상 손님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 들어보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이런 ㅇ리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했다. 배가 튀어나오거나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도 아니고 고작해야 같은 또래의 얼굴도 반반한 사람이 그런 소릴 하니까 신기하기까지 하다. 돈이 많아서 저러나 하고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뱉은 김택승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저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자리를 피하려 음식물 쓰레기를 대강 쓸어 담은 들통을 들고 일어나는데 팔뚝을 움켜잡은 남자가 다시 한 번 말을 했다.
"돈 이야기 때문에 기분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제가 실수를 한 것 같네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실 순 없겠습니까?"
기회고 뭐고 애초에 이 남자와 만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김택승은 억지로 팔을 빼고 죄송하다고 말을 반복한 뒤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 앞을 가로막는 남자 때문에 말을 반복한 뒤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 앞을 가로막는 남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복도에 갇혔다.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전화번호 좀 가르쳐주세요. 고작 전화번호 하나가 뭐 어떻다고 이러십니까? 사람 창피하게..."
끈질긴 태도에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김택승도 조금씩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좋은 어조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고작 네깟 놈이 전화번호 하나 가지고 날 망신 주느냐는 거였다. 언제까지 그런 헛소리를 듣고 잇을 수도 없고, 맘 같아선 머리통이라도 한 대 휘갈기고 싶은데 손님이라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남자가 성큼 한발 가까이 다가왔다. 움찍한 김택승은 무의식적으로 손이 나갈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뻐억-!
"으악!"
손님이라서 주먹을 날리지 못한 게 아니라 앞서 날아 온 주먹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통으로 코를 얻어맞은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질 듯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벽을 짚고 간신히 버티고 서 얼굴을 싸쥐었다. 어지간히도 아픈지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을 보고 김택승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강유형일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선연이 가볍게 손목을 돌리면서 거만하게 턱을 치든 채로 남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주먹을 날린다거나 하는 상황을 생각할 수 없었던 김택승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조금 벌렸다. 말로 깐죽거리다 선빵을 허락학 합의금을 뜯어내면 뜯어냈지 절대로 저 불리한 일은 안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김택승과 눈이 마주친 하선연은 차가운 표정이었다. 마치 책하기라도 하는 시선에 억울함을 느끼는데 곧 정신을 차린 남자가 "이 씨이...!" 하고 비틀거리며 몸을 날렸다. 어설프게 움켜진 주먹이 하선연에게로 날아갔으나 가볍게 피해버린 그가 다리를 걸었다. "억!"하고 비틀거린 남자는 곧 음식물쓰레기의 찌꺼기가 남겨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멜론껍질이며 수박껍질에 얼굴이 문질러지는 걸 보고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윽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만하면 좋을 텐데 아까의 끈질긴 요구에서 드러났듯이 남자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모양이다. 수박껍질을 집어 들어 하선연에게 잽다 집어던졌다. 그걸 보고 눈이 커진 하선연이 몸을 피하려다 등 뒤에 김택승이 있음을 알고 멈칫했다.
그 탓에 수박껍질이 얼굴을 정통으로 때리고 말았다. 수박씨 하나가 그의 뺨으로 흘러내리고, 곧 손동으로 그것을 닦아낸 하선연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내뱉었다.
"네가 원숭이냐?"
"원숭이라고? 이 씨발놈이!"
원숭이라는 말을 조롱이라 생각했는지 눈이 뒤집힌 남자가 하선연에게로 덤벼들었다. 그러자 못 해먹겠다고 중얼거린 하선연이 놈의 어깨를 벽으로 확 밀치며 주먹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에 이어 꽥 하는 소리가 연타로 울렸다. 곧 바닥으로 자빠진 남자를 축구공처럼 걷어차는데 말릴 생각도 못한 채 김택승은 멍청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렇게 목줄 풀린 개처럼 날뛰는 사람이 제가 봐오던 그 사람이 맞는가 싶었다. 구둣발로 머리를 까대는데 저러다 사람 하나 잡겠다. 그제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퍼뜩 정신을 차린 김택승은 글르 붙잡으려다가 음식물쓰레기를 끌어 담느라고 지저분해진 제 손을 발련했다. 동시에 왜인지 새똥 묻은 스포츠 타월이 휴지통에 처박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 때문에 주저하던 중, 뒤늦게 소란을 깨닫고 강유형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비로소 남자를 걷어차던 발을 멈춘 하선연은 후, 하고 한숨을 쉬고는 자세를 바로했다. 이어 느긋하게 바짓가랑이를 털고 재킷의 옷길을 한번 잡아당겨 정리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까지 말끔하게 가다듬고 나서야 곤죽이 된 남자를 보고 아연해진 강유형에게 말을 건넸다.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합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 몇 자을 곤죽이 되어 기절한 남자 얼굴에 뿌리고 덧붙였다.
"이걸로도 부족하면 찾아오라 하십시오."
그런 뒤 문득 생각난 듯 카드를 꺼내 강유형에게 내밀었다.
"술값 계산과 가게 배상을 이걸로 하시죠."
얼결에 그것을 받은 강유형은 하선연이 놀라서 굳어 있는 김택승의 손을 낚아채는 걸 보았다. 김택승의 손에서 들통이 떨어지고, 다시 음식물 쓰레기가 바닥으로 쏟아져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하선연이 그의 손을 세차게 잡아당기며 으르렁거리는듯이 내뱉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저딴 거 주워 담지 마."
끌려가면서 김택승은 바닥에 쏟아진 음식물을 한 번 보았다가 그가 붙잡은 손을 또 한 번 보았다. 음식물쓰레기를 만졌다고 화낼 거면 더럽혀진 제 손은 왜 붙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항변도 못한 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의 뒤통수를 보노라니 갑자기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얻어맞은 에 자신이라도 된 듯 온몸이 고통스러워졌다.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애꿎은 원망이 들며 그의 모습이 눈앞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죽기 직전에 본다는 주마등처럼 그의 등에 붙어 있던 벚꽃잎과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웃는 모습, 바람에 한들거리는 머리카락 따위가 어지럽게 흘러갔다. 그러다 마치 칼에 찔린 것처럼 머리인지 심장인지 모를 곳이 아파졌다. 입술을 깨문채 버텨보려던 김택승은 결국 암전되듯 꺼져버리는 시야를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의식을 잃은 순간과 의식을 되찾는 순간은 인지를 할 수가 없다. 그냥 어느 순간에 보면 정신을 차리고 있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는 도대체 뭐가 잇는 것일까, 꿈일까?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린 김택승은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장이 낮설어 순간 모르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까 아는 곳이었다. 탈의실 겸 휴게실 한구석에 놓여 있는 간이침대였다.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나 하고 김택승은 몸을 일으키다 흠칫 놀랐다. 발치에서 락커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하선연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석상처럼 꿈쩍 않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니라면 자는 중이라 생각했을 테다. 얼마나 미동이 없는지 혹시 눈뜨고 자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ㄱ런데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그의 속눈썹이 떨리고 잇는 것을 보니 자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가 어째서 가게 탈의실에 있는 것인가 기억을 더듬어보던 김택승은 아까 손님으로 왔던 것을 생각해 냈다. 한데 어쩌다 이런 상황이 연출된 것인지는 기억이나질 않았다. 그래서 다소 두서없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
그 말에 선뜻 답하지 않고 침묵하던 하선연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난생처음 간호하고 있는 중입니다."
얼음주머니를 갖다 놓은 것도 아니고 식사 시중을 들어준 것도 아닌데 어디가 가놓라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아프지도 않은 사람을 눕혀 놓고 무슨 간호를 한단 말인가.
"저 안 아픈데요."
김택승이 그렇게 답하자 하선연은 표정이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멀쩡한 사람도 갑자기 짚단 쓰러지듯 하나 보군요."
"제가 스러졌습니까?"
엥, 하는 기분으로 반문하는 소리에 갑자기 인상을 쓴다.
"쓰러졌으니까 거기 누워 있지 그럼 잠이라도 잤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천천히 기억이 회복되었다. 끈질기게 굴던 남자와 주먹을 휘두른 하서연, 그리고 음식물쓰레기가 묻은 손... 그러고 보니 그 남자는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하선연이 경찰서에 안 가고 여기 있는 걸 보면 뿌린 돈으로 합의가 된 건가 싶었다. 그나저나 수표 뿌리면서 부족하면 말하라니, 무슨 드라마라도 한 편 보는 줄 알았다. 뭐, 실제로는 음식물쓰레기가 바닥에 뒹굴고 잇어 그리 근사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직후에 기억이 끊긴 것을 보면 하선연에게 끌려 나가가다 쓰려졌나 보다. 아파서 잡을 못 이루거나 움직이지 못한 적은 있어도 가위로 잘라낸 것처럼 기억이 끊긴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과음을 해도 필름 끊기는 일이 좀체 없는지라 좀 신기했다. 만성적인 저혈압이나 빈혈에 시달리는 사람만 기절 같은 걸 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예의 그 파편 때문에 이런 건가...
무심코 뒤통수를 쓸어 만진 김택승은 체한 사람처럼 손 좀 딴다고 낫는 게 아니란 걸 깨닫고 팔을 내렸다. 어차피 예방할 방법이 없어 걱정해봤자 도리가 없다. 당장은 아픈데도 없고 풀 자고 일어나 개운하기까지 했다. 김택승은 얊은 모포를 걷고 일어서면서 물었다.
"매니저는 어디 갔습니까?"
여기 누워 있다는 건 매니저도 자신이 쓰러졌다는 걸 안다는 소리였다. 아마 걱정을 많이 할 거라는 생각에 물어보니 하선연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그 얼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당사자인 하선연이 여기 있으니 그 대신에 누구라도 그 일을 수습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손님이라서 중재하는 기분으로 매니저가 나선 모양이다. 부디 잘 해결되어야 할 텐데 생각하며 김택승은 답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팔짱을 낀 채 버티로 앉아 있던 하선연이 어디가 안 좋아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모으고 물어왔다.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습니까?"
김택승은 옷을 갈아입으려고 자신의 락커 앞으로 가서 조끼를 벗으며 고개를 저였다.
"아뇨. 그냥..."
"그냥 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번호 알려주고 말 걸 그랬다 싶어서요."
연락이 와도 안 받을 수 있는 건데 이런 적이 처음이라 긋 애각을 하지 못했다. 더굽ㄴ에 일이 커져 버린 것 같아 조금 후회가 들었다. 그때였다. 순간 머리에 그늘이 그리워져 셔츠 단추를 풀다 말고 김택승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선연이 어깨 옆을 짚고 선 채로 얼굴을 깊숙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어 씹듯이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 뜨끔해진 김택승은 눈을 깜박거렸다. 혼자서 자책한 건데 나서준 사람 입장에선 기분 나쁜 소리였나 보다.
"아뇨. 저는 그냥 사장님한테도 그렇고 우리 매니저한테도."
죄송해서 그런 거라고 말을 이르녀는데 하선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빠져나갔다. 여태까지 바온 것과는 사무쇼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못마땅해 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지어도 저렇게 무표정하진 않았다. 위협적인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닌데 아무 표정도 없는 그 얼굴이 어쩐지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탈의실 형광등 불빛이 흐려 내려다보는 하선연의 얼굴이 어두운 탓에 더 그런 것 같았다.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그런 하선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택승은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뇌까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쪽은 우리인데 난 아니군."
짧은 말이라 순식간에 귓전을 스텨 무슨 뜻인지 얼글 ㄴ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하선연이 사납게 입술을 덮쳐왔다. 너무 갑작스럽게 부닥쳐와 입술에 아픔이 느껴지면서 피 맛이 배어 나왔다. 그것을 헤집으로 거칠데 들어온 혀가 들쑤싣ㅅ 입안을 휘저었다. 그리고는 뽑아 갈 것처러 혀를 강하게 빨았다. 혀뿌리가 아플 지경이라 김택승은 "....!" 하고 소리 나지 않는 신음을 흘렸다. 그것을 느낀 하선연이 김택승은 더욱 세게 몰아부쳤다. 다리 사잉에 집어넣은 허벅지가 고간을 짓눌렀고 돌덩어리 같은 그의 가슴팍이 김택승의 가슴을 마구 밀어댔다. 덕분에 등짝이 락커 선반에 눌려 아픈 데다 덜컹덜컹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났다. 이러다 누가 들어오겠다 싶은 와중에 뜨거운 손바닥이 벌리다 만 셔츠 자락을 투두둑 뜯어냈다. 이 때문에 떨어진 단추가 탁탁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단추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유니폼이라서 아무 단추나 갖다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서년의 손이 유두를 집어 올리며 비트는 바람에 그 걱정이 금방 달아나 버렸다. 한참 동안 김택승의 유두를 괴롭히며 입안을 탐하던 하선연은 잠시 입술을 떼고 아픔인지 뭔지 모를 감각에 헐떡거리고 있는 김택승의 눈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좀 정신이 없었던 김택승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때문에 눈의 초점을 잡지 못했다. 대신 등이 아프기도 해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다른 손으로는 입가를 훔쳤다. 축축해진 입술을 손등을 닦노라니 갑자기 그 손목을 하선연이 부러지라 움켜쥐어왔다.
잡힌 손목을 한번 내려다본 김택승은 입술을 닦는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 어떤 식으로 보였을지 생각하지 못하고 희미한 당혹감에 말을 했다.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매니저가 들어올 수도 있고..."
그 순간, 하선연의 눈동자가 색을 달리했다. 평소에는 옆은 갈색 눈동자가 어둠처럼 까맣게 진처졌다. 그는 팔을 세차게 잡아당긴 다음 김택승의 반대쪽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이 때문에 그에게 등을 보이게 된 김택승은 팔에 겹쳐져 있던 셔츠가 뜯기사디피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등 뒤에 맹수라도 한 마리 올라타고 있는 것처럼 등줄기가 오싹해졋다. 당장에라도 끊는 물이 쏟아질 것처럼 타는 입김이 목덜미에 와 닿았고, 나지막이, 그러나 묵직한 울림이 도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아프다고 했으니 상관없겠죠."
그거 말고 이곳이 가게 탈의실이라는 사실 같은 건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다. 허리를 움켜쥐는 손아귀가 억센 것을 보노라니 말로 한다 해서 빠져나갈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했다. 주변 환경이 그렇기는 하지만 괜히 승강이를 벌여봤자 시끄러워지기만 할 것 같아서 김택승은 순순히 벨트를 풀고 속옷과 함께 바지를 끌어내렸다. 곧 성급한 손이 아랠르 더듬다가 아무덧도 없이 메마른 것을 깨닫고는 김택승은 도로 돌려세웠다. 또 등이 선반에 베길까 봐 그는 재빨리 락커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차가운 쇠붙이의 느낌이 살잩에 달라붙으면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다. 그러다 하마터면 소리를 칠 뻔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싿. 예고도 없이 무릎을 꿇은 하선연이 성기를 한압에 물었던 것이다.
반사적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손안에 그러쥐며 심택승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성기를 입안에 넣고 뻐는 하선연의 얼굴이 지극히 외설스러웠다. 그 모습을 보자 큰 죄를 짓는 것처럼 가책 비슷한 감정이 맘을 휘저어왔다. 그러나 쾌감만은 달라서 제 기분을 개의치 않고 내달렸다.
"....읏! 그만 빼....!"
빛보다 빠르게 사정감이 찾아들어 김택승은 하선연의 머릴르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떼지 않고 더 사체가 성기를 빨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사정해버리고 만 김택승의 손가락에 그의 머리카락이 엉켜 들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가느다란 그 머리카락의 느낌마저 아찔했다.
손에도 아니고 입에다 정액을 쏟아내 버리고 만 김택승은 아연해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입술과 턱이 정액으로 온통 엉망인 모습이 보였ㄷ. 그러나 그것을 닦기는 커녕 대충 핥아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한쪽 다릴르 걷어 올리며 마주 서서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가 한층 다가서 옆으로 벌린 허벅지를 누루자 좁은 입구에 성기가 닿았다. 덩북네 코가 마주 닿을 정도로 가까운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눈동자만이 까맣게 타는 가운데 성기가 밀어닥쳤다. 김택승은 이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곧 몸이 열리는 통증과 함께 아픈 건지 좋은 건지 몰를 쾌감이 찾아들었다. 그가 세차게 짓쳐들어올 때마다 그 감각이 뱃속을 찢어놓았다.
잠시 후, 몸을 바싹 붙인 채로 움직이던 그가 허벅지를 움텨자은 손을 후르르 떨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나 그가 사정했음을 알수 있었다. 끝난 건가.. 하고 생각했으나 하선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성기를 뺀다 싶더니만 몸을 돌려세우고 뒤에서 다시 삽입해왔다. 그가 빼는 순간 정액이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음에도 그랬다. 참지 못하고 김택승은 신음을 흘렸다.
"으흑...! 아.....!"
거친 움직임에 락커가 시끄럽게 덜컹거리고 차가운 쇠붙이에 얼굴이 밀어붙여 졌다. 아무리 팔에 힘을 주고 버티려 해봐도 그럴 수가 없었다.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머릴르 락커에 들이받게 됐다. 하지만 그것을 아프다고 느낄 여력조차 없었다. 지나친 감각에 자신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입술을 깨물고는 도저히 그 느낌을 감당해 낼 수가 없어 신음이 사방으로 굴렀고, 락커가 흔들리는 소리깢 더해져 누군가 탈의실 문을 열어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결국 김택승은 한 번 더 사정했다. 절정의 순간이 아니라 추락의 순간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그제야 비로소 하선연이 허리를 놓아주어 후들거리는 다리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절로 몸이 쓰러졌다. 뒤에서 흘러내리는 정액이 느껴졌으나 기진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바닥에 누워 헐떡거리고 있는데 위에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무펴정한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아까의 얼음장 같은 기색과는 달랐다. 다만 한 번도 그에게서 본 적이 없는 감정이라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고 더워졌던 몸이 식을 무렵, 불현듯 몸을 숙인 그가 뒤통수를 부드렇게 당겼다. 잠시 후 희미한 한숨과 함께 조용히 닿아왔다. 거칠기 짝이 없던 섹스를 상상할 수 없는 키스였다. 부르튼 입술을 상처라도 핥아주듯이 가만가만 할짝거렸다. 신음을 내뱉느라 메말랐던 입술이 부드럽게 젖고 나서야 조심스레 허벅지를 놓아주고 뒬 물러섰다.
"갈아입을 옷은 있습니까."
그가 나지막하게 물어오는 말에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버린 건 유니폼이라서 제 옷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선연이 축축한 아랫도리를 바지 속으로 대충 쑤셔 넣으면서 말했다.
"그럼 옷 갈아입으십시오. 이만 돌아갑시다."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하선연의 뒷모습을 보면서 김택승은 의아해졌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의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왠지 이 상황이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져 낯설 뿐이다. 그러다 가슴이 답답해져와 생각하기를 관둬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후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나면 아무 상관없는 남남이었다. 그 생각을 하고 나서야 아까 하선연이 내뱉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아졌다.
'그쪽은 우린 데 난 아니군.'
"....."
속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으나 김택승은 그것을 토해내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한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더니 가게는 이미 끝마친 뒤였다. 강유형 대신 주방보조가 남아 가게를 지키고 있어 김택승은 그를 도와서 문을 닫았다. 불을 다 끄고 가스를 점검한 뒤 직원용 출입구를 잠그는데 핸드폰이 울려 잠시 통화를 한 주방보조가 전화를 끊고 말했다.
"매니저네요. 형 일어났다니까 알아서 퇴근하고 병원에 간 일은 잘 해결 됐으니까 신경 쓰지 말래요. 아, 그리고 이거요."
깜빡할 뻔했다면서 하선연의 카드와 명세서를 건네받았다. 고맙다고 대꾸한 김택승은 누구보다 강유형에게 이 말을 햐애 할 텐데 생각했다. 지금 바로 전화를 걸어 인사를 할깓 싶었으나 아무래도 얼굴을 보고 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일단은 저쪽에서 버티고 기다리는 하선연이 더 신경 쓰였다. 먼저 차에 앉아서 김택승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잇었기 때문이다.
김택승은 주방보조에게 늦게까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돌려보낸 뒤 그의 차로 갔다. 그가 운전석에서 내리질 않아서 보조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그런데 하선연이 운전대에 팔을 올린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 딱히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썩 유쾌하지 않은 생각에 골몰한 분위기였다. 하긴. 사람 하나를 그렇게 들이팼으니 즐거울 리 없을 테다. 김택승은 아까 주방보조에게 전해 들었던 말을 입에 올렸다.
"병원으로 간 사람은 크게 문제가 없나 봅니다."
그 말에 하선연이 툭 하니 내뱉었다.
"더 팰 걸 그랬나 보군요."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김택승은 침묵했다.확실히 오늘의 그는 좀 이상했다. 다른 사라메게 주먹을 날린 것부터가 그랬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을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런 착각은 할 수 업섰다. 분명히 본인 때문일 텐데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만치 때려놓거 더 팰 걸 그랬다는 걸로 봐선 누굴 때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했다. 세상에 폭력으로 해결될 일이 뭐가 있겠느냐마는... 하여간 일단은 돌려줄 게 있어 카드와 명세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걸 힐끗 본 하선연이 손을 내밀어 받아갔다. 그 순간 그의 손등에 난 상처가 눈에 띄었다. 남자를 두드려 패면서 그의 손등에도 상처가 생겼던 모양이다. 이빨에 찢기기라도 했는지 긁혀서 피가 맺힌 데다 불그스레하게 멍이 들어 붓고 있었다. 그걸 보고 김택승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도로 차에서 내렸다.
"어디 가는 겁니까?"
차창을 내린 하선연이 묻는 말에 김택승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구급약 좀 가지고 오겠습니다."
다시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 김택승은 바 안에서 구급상자를 찾았다. 그리고는 스프레이식 소염제와 빨간약, 밴드 같은 것을 챙겨 차로 들어가 말했다.
"손 내보세요."
왜인지 하선연은 손 내미는 것을 조금 망설였다. 의도하지 않고서는 망설이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상처 치료하는 게 무섭기라도 한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닌지 그가 곧 손을 내밀어 물티슈로 상처부위를 닦아내로 빨간약을 발랐다. 꽤 따가운지 하선연의 미간이 찌푸려 들었다. 평소 같으면 엄살을 떨 텐데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닌가 보다. 약을 바른 뒤에 밴드를 붙이고 스프레이를 부릴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차마 왜 그랬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처치를 마치고 남은 것을 내일 가게에 돌려놓으려 가방에 집어넣은 김택승은 어느새 시간이 오전에 이른 것을 보았다. 화랑 청소도 해야 하고 일단은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선연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차에 시동을 풀었다. 그런 뒤 사이드 브레치크를 잡는데 밴드를 붙인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흠 없이 매끈하던 손이 그런 것을 보니까 왠지 새삼스러웠다. 덕분에 김택승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말았다.
"참 안 어울리네요."
김택승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무엇을 말한 건지 깨달은 하선연은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처럼 대꾸했다.
"그러네요. 참... 안 어울리는군요."
비단 밴드가 아닌 간밤의 일을 통틀어 하는 소리 같았다. 역시 스스로 생각기에도 답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그때 한도안 본인 손을 쳐다보던 하선연이 문득 시선을 거두고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도도 걸었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풀면서 말했다.
"전 손이 아파서 운전 못 하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어째 운전대 잡기에 의아하다 싶었다. 웬일로 솔직하게 운전하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친 것은 사실이라 지즉 바꿔줄 생각이었다. 김택승은 순순히 보조석에서 비켜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화랑으로 가려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데 하선연이 불쑥 말했다.
"밥이나 먹읍시다. 힘썼더니 배고프네요."
밥 먹는 것은 좋은데 아까 탈의실에서 섹스를 하고 제대로 씻지도 않은 상황이라서 찝찝하지도 않은가 싶었다. 사실 김택승은 좀 찝찝했기 때문이다. 가능한 뒤처리를 하고 나오기는 했지만 하선연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설령 그랬다고 해도 샤워부터 하고 싶어 할 사람이었기에 밥을 먹으러 가자는 것이 좀 신기했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그냥 그가 가자는 한식당집으로 차를 몰았다.
한옥같은 구조로 생긴 한식당은 아침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그래도 아침식사를 하는 모양이라 갈비탕 두 그릇을 주문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오고, 일단 먹기 시작하니까 참 잘 들어갔다. 밥이 맛있을뿐더러 이래저래 난리를 친 찻에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갈비탕에다가 밥을 훌훌 말아 깍두기와 함께 열심히 먹고 있으려니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왜인지 하선연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남 먹는 걸 빤히 보기에 고춧가루라도 묻었나 하고 김택승은 냅킨을 집어 입가를 닦았다. 그러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뭐가 묻은 게 아니라 잘 먹기에 쳐다본 것뿐이빈다. 아까 보니 좀 마른 것 같아서..."
왜인지 그는 말을 하다가 말았다. 뭔가 뜨끔한 사람처럼 도로 입을 다물어 버리는 바람에 김택승은 마른 게 어쨌다는 건지 몰랐다. 자신더러 한 소리 같은데 요새 줄곧 피곤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살이 빠졌을 수도 있다. 다만 남에게 관심이 없는 하선연이 알아볼 정도면 진짜 많이 빠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거에 신경을 써야겠다 싶어 김택승은 배를 채우려 꾸역꾸역 갈비탕을 입안에 퍼 넣었다. 하선연도 더는 별다를 말을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그렇게 갈비탕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자 배가 불뚝 일어섰다. 모처럼 잘먹었다 생각하고 김택승은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들이켰다. 배가 부르니까 어쩐지 졸려서 화랑 철소고 뭐고 집에 가서 그냥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고 한 것처럼 하선연이 말했다.
"오늘은 화랑 청소할 필요 없습니다."
"네"
일전에도 그냥 가라고 해서 청소를 안 했기에 오늘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반무능ㄹ 하자 하선연이 손을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몸 상태가 안 좋아 오늘은 화랑 문 안 열겁니다."
"네?"
일저네도 그냥 가라고 해서 청소를 안 했기에 오늘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반문을 하자 하선연이 손을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몸상태가 안 좋아 오늘은 화랑 문 안 열겁니다."
이런 식으로 설렁설렁 일해서 돈이 벌리나 싶었지만 화랑 문도 안 연다는데 굳이 가서 청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청소할 시간도 이미 지났고 어젰밤 그 난리를 겪어서 적잖이 피곤하기도 했다. 어째 날로 월급을 타 먹는 것 같아 좀 미안하기는 했으나 쉬고 싶은 것도 사실이라 김택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만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나온 하선연에게 김택승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침 잘 먹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잠시 물끄러미 바라봐왔다. 오늘따라 자주 저렇게 쳐다보네하고 고개를 갸우샇던 중, 조금 주저하다 건네 오는 말이 들렸다.
"그럼 다음에 스팸 넣은 라면이나 또 끓여주시죠."
그거야 별일이 아니다. 그냥 삼양 라면 사고 그팸 사서 물에 넣고 끓이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그 말에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목이 뜨거워지면서 무언가가 치받아 김택승은 미미하게 일그러트린 얼굴로 재빨리 말했다.
"잠깐만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릭 거의 도망치다시피 해서 화장실을 탖았다. 곧장 칸막이로 뛰어 들어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는 변기 커버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마자 속에서 무언가 왈칵 하고 치밀어올랐다. 김택승은 명치 부근을 움켜잡고 몸을 숙였다. 동시에 아까 먹었던 갈비탕이 모조리 쏟아져 나왔다. 변기를 붙잡은 채 한참을 욱욱거리다 보니 몸에서 진땀이ㅏ 났다. 이윽고 속을 비우고 고개를 들었을 땐 손바닥이고 이마고 다 축축했다. 그러면서 눈앞이 아득해지는 현기증이 찾아들었다. 설마 또 쓰러지는 것은 아니겠지 싶어 김택승은 벽을 짚고 버텼다. 그 상태로 잠시 눈을 감자 하선연이 한 말이 귓전을 뱅뱅 맴돌았다. 스팸 넣은 라면 좀 끟여달라니. 그냥 별거 아닌 말인데....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뭔가를 참을 수가 없어졌다.
모르겠다. 하선연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자신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아니 실제ㅐ로 그랬다. 어차피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은단 걸 알고 고백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서 거절당한 후에도 여전히 화랑에 다니며 하선연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태연하게 라면 끓여 달라고 말하는 하선연에게는 그런 모양이다.
김택승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눈을 떴다. 그리고 다소 머리가 맑아졌음을 깨닫고 변기 문을 내린 뒤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얼굴을 닦았다. 혹시 토한 티가 나지는 않나 거울을 보니까 좀 해쓱해진 것 같기도 했다. 요즘 입맛이 없어서 잘 안 먹고 토한 탓인가, 아무래도 위궤양인가 보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김택승은 가는 길에 위장약이나 사가야겠다며 머리카락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냈다.
대충 얼굴이 수습된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가자 차 부근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하선연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싸한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가 그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나부꼈다. 그것을 보느라고 김택승은발걸음ㅇ르 멈춰 세웠다. 날리는 머리카락을 걷어올리는 그 모습 하나에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손가락 사이로 새는 바람과 햇살을 튕기며 반짝이는 갈색 머리칼.. 왜인지 넋이 나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스스로가 어느 한 시점에 못 박혀버린 것 같았다.
곧 바람이 그치고 시간도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했지만 방금 지나쳐버린 순간에 붙잡힌 김택승은 계속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한 하선연이 뒤를 돌아볼 때까지도 그랬다. 그의 일견 무심한 시선과 마주치고서야 가위에라도 풀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잇었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묻는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 김택승은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몰았으나 마음 한구석만은 여전히 돌아가지 못할 곳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 사실을 아는 듯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참으로 서늘했다.
*
비 오는 일요일 아침, 김택승은 지하철역에서 행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일전에 쓰러진 일도 있고 해서 병원에 갈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일단은 습과넞긍로 집을 나서기는 했는데 막상 병원에 가려니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만일 머릿속의 폭탄에 타이머가 켜진 거라면 수술말고는 방법이 없다. 할 마음ㅇ 없는 이상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펴능로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생명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점을 말이다. 그 두려움을 자각지 못하고 병원 생각을 뒷전으로 미뤄버린 김택승은 기분을 달리하려 했다. 모처럼의 주말이고 일도 없는 날이다. 이런저런 일에서 벗어나 불쑥 혼자서 어딘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각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라고 상관없다. 그저 낮선 곳에서 낮선 사람들 사이를 걷다 보면 복잡한 생각을 훌훌 털어버리고 편애질 수 잇을 것 같았다. 그러나 비도 오고 돈도 아까우니까 멀리 갈 수 없어 새악만 하고 그냥 평소처럼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오래지 않아 목적지에 내린 김택승은 우산을 받쳐 들고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우산을 털어 비닐에 집어넣은 뒤 열람실로 들어가자 그리운 냄새가 났다. 화창한 날의 냄새와는 다른 눅눅한 냄새, 비 오는 날의 책 냄새였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도서관 일을 도맡아 해서 그런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니 새삼스레 낮익은 책들이 눈에 띄어 어느새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은 저만 치로 물러가 버렸다. 마침 예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스릴럴 소설을 발견해 선 채로 그 채의 페이지를 넘겼다. 처음에는 조금만 훑어볼 생각이었는데 생각대로 안 됐다. 결국에는 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몰입해버리고 말았다. 한창 흥미진진한 대목을 읽으며 책장을 넘기던 차, 주머니의 핸드폰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도서관이라 누구인지 확인하기 보다는 일단 책을 두고 박으로 나가 액정을 들여다보았던 하선연♡이다.
거절한 후로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그였다. 그러다 가게에서 한바탕 난리가 난 뒤로는 소식이 뚝 끊겼다. 어떻게 보면 자신 때문에 그런 일에 휘말린 거라 거리를 두려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잘 됐다 여기고 있었는데 액정에 든 그의 이름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또 위궤양이 도지는지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김택승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데 어째 대꾸하는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하고 했던 말을 반복하자 그제야 툭 하고 굴러 나오듯 목소리가 들렸다.
-어딥니까?
앞데 말 다 잘라먹고 인사도 없이 하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틱틱거리며 불평을 할 수도 없어서 그처럼 짤막하게 대답했다.
"도서관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뚝 끊어버린다. 대체 뭔가 싶어서 김택승은 제 손에서 깜빡거리며 꺼지는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그러가 달게 뭐냐고 도로 열람실 안으로 들어가 책을 펼였다. 단어가 다 따로 노는 것처럼 문장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덕분에 도통 페이지가 넘어가질 않았지만 그대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얄팍해진 집중력을 억지로 채찍질해가며 공부라도 하듯 꿋꿋하게 읽었다. 그러던 중, 어느새 맞은편 책장에 누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키가 커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은근하게 풍겨오는 달착지근한 냄새 때문이 안리다ㅗ 그랬을 테다. 손하나, 발 하나, 사소한 몸짓, 멀찍이 선 뒷모습, 그런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구분해낼 수 있었다. 참으로 쓸모없는 능력이라 생각하며 김택승은 다시 고갤르 숙여 책을 바라보았다. 온다고 말한 적도 없고, 찾아온 것은 그쪽이니까 먼저 아는 척하겠지 싶어 잠자코 있었다. 그 상태로 묵묵히 책을 보는데 피이작 몇 장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한 도서관이라 말을 거는 것은 그렇다 치더랃 헛기침을 하거나 책을 떨어뜨리거나 어깨를 치는 식의 행동도 없었다. 그냥 책장 저편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책자이라는 애매한 거리를 둔 채로 김택승은 하선연과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함께 잇는 것도 아니고 따로 있는 것도 아닌 묘한 상황이었다. 서로를 의식하고 있으면서 모르는 체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동시에 단순한 침묵이 아닌 정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게 썩 불편핮 않아 김택승은 그가 말을 걸어오길 내버려두고 계속 책을 읽었다. 그러다 이윽고 닿아오는 시선에 눈꺼풀을 들러 올렸다. 책장 저편에서 하선연이 마침내 이쪽으로 눈길을 던졌던 것이다. 언제나와 같이 선웃음 띤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조용한 표정에 짙은 시선이 말없이 흘러왔다. 도서관이라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인지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기만 한다.
이에 멍치가 미묘하게 죄어들었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져와, 김택승은 바깥바람이라도 쐬야 하나 싶어서 책장에 책을 밀어 넣었다. 그때 저편에서 책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책을 너무 세게 밀어 넣는 바람에 반대쪽에 꽂혀 있던 책들이 밀려 떨어진 모양이다. 그것을 주우려고 김택승은 서둘러 발검음을 옮겨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이미 몸을 숙이고 책을 줍던 하선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또 여깁니까."
또 라니? 언제 그와 도서관에서 만나 적이 있던가? 그러자 귓전에 '그옆에... 음, 더 옆으로' 하고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비가 내리던 도서관의 어둑함도, 지한 책 냄새도, 한껏 팡르 뻗치느라 드러난 옆구리에 느껴졌던 시선도 생각이 났다. 그와 도서관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덕분에 '또'라고 붙인 말 한마디가 마음이 쓰였다. 혹시 옛날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속 시원히 물어볼 수도 잇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가 안다면 아는 대로, 모른다면 모르는 대로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저 이렇게 추억을 되살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서 책을 줍고 있노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비, 도서관, 그리고 하선연이라는 이 세 가지가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아득한 느낌을 거슬러 김택승은 마지막으로 남은 택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다 먼저 책을 잡은 하선연의 손짜기 붙잡고 말았다.
마치 석고처럼 건조하고 서늘한 손이었다. 덕분에 그와 처음으로 살갖이 닿았던 때처럼 묘한 감각이 스쳐 당황한 김택승은 서둘러 손을 놓았다. 당황한 것은 그뿐만이 아닌지 다시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집으려다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멈칫하고도로 손을 거두었다.
그렇게 책 한 권을 사이에 둔 채로 손을 들썩거리고 있노라니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희미하게 장난스런 기분으로 서로 네가 집으라는 듯 책을 툭툭 밀어대다가 결국 김택승이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뻐근해진 무릎을 펴 일어나는데 우두둑하고 어디서 젓가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키던 하선연의 무릎에서 난 소리였다. "으음."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툭툭 두드리는 모습이 마치 할아버지 같았다. 그 모습에 또 피식하고 웃음 김택승은 그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선연을 보았다.
이렇다 할 표정이 없는 그 얼굴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뗜 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라 그런 모양이다. 마치 화장을 벗은 여자의 민낯을 보는 것처럼 맨 얼굴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미묘한 낯설음 속에서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김택승은 사서가 트레이를 미는 소리에 시선을 골렸다. 여기서는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우니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나가서 용건을 물어보든지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가자고 입술을 뻐끔거린 뒤 발걸음을 옮겼다.
바깥엔 어느새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꽤 쌀쌀해서 어깨를 한번 움츠린 김택승은 뒤따라 나온 하선연을 돌아보고 물었다.
"주말인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딱히 만날 사람이 없거나 갈 데 없는 신세는 아닐 것 같아서 도서관에 있다는 말 한마디에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그 말에 선뜻 대답을 못하는 모습을 보니까 또 요구할 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 성가신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그가 말하길 기다리던 김택승은 한 박자 뒤늦게 돌아온 대답에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냥요."
일견건성인 듯 말을 했지만 비단 그런 것만은 아니지 설명을 덧붙였다.
"오고 싶어서 왔습니다."
당연히 오고 싶어서 왔겠지, 무심코 그렇게 생각한 김택승은 희미한 기시감을 느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다 보니까 벤츠가 도랑에 빠졌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 아무 이유 없이 키스해놓고 똑같은 소리를 했다. '그냥요.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다만 기분 탓인지 그때와는 느낌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과거엔 정말로 그냥이었다면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본인이 말을 않으니까 말한 대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렇게 왔으니 뭘 할 건가 싶어서 김택승은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물끄러미 마주 봐오던 하선연이 흐르는 침묵을 자각한 듯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커피 자판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 잔 안 사줄 겁니까?"
"....."
그래 뭐, 커피 정도야. 김택승은 자판기 앞으로 가서 주머니의 잔돈을 뒤졌다. 한잔에 400원이나 해서 천 원짜리를 깨야만 했다. 옆에서 그걸 보고 하선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화랑의 커피는 참 저렴하군요."
그래 봤자 100원인데 엄청난 차이인 것처럼 말한다. 뭣보다 그 300원을 고스란히 삼키는 것은 바로 그이지 않은가. 김택승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버튼을 누른 뒤 커피가 나오길 기다려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하선연은 무슨 바리스타라도 되는 양 커피 맛을 홀짝홀짝 보다가 문득 미간을 찡그리고 중얼거렸다.
"비싸면서 맛도 별로 네요."
막상 제 몫의 커피도 나오길 기다려 마셔보니까 김택스의 입에는 그 맛이 그 맛 같았다. 자판이 커피야 배합이 다 똑같을 텐데 차이가 있나? 골몰하며 입맛을 쩝쩝 다시던 그는 어느새 울렁거리던 속이 괜찮아진 걸 깨달았다. 상태가 안 좋았던 것이 깨끗하게 가시고 지금은 아주 맘이 편안했다. 마치 그에게 고백하기 전으로.... 아니, 그를 좋아하지 전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어쩐히 묘하게 하선연의 표정이 진지해 보인다는 것만 빼면, 시간이 거꾸로 돌았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싸구려 커피를 마시면서 나누는 별거 아닌 잡담이 부담없이 즐거웠다.
어느새 커피 한잔을 다 비워낸 김택승은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가서 밥 먹고 가게에 출근하려면 이쯤 해서 도서관을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을 하니 얼핏 하선연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그 기색에 이어 혼란스러움도 떠올랐다. 마치 제 기분을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 같아서 김택승은 좀 의아해졌다. 일단 저런 감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왜 저러지 하고 쳐다보는 김택승의 시선을 느끼고 하선연은 곧 평이해졌다. 아니, 평이한 얼굴을 가장했다. 그리고 자기도 돌아가 봐야 겠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배웅하러 주차장으로 나간 김택승은 그가 차에 올라타기를 기다려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한데 차에서 타지 않고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혹 또 운전해달라는 건가 싶어 운전석을 바라보자 그것을 짐작했는지 하선연이 그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가보라는 듯 ㅗ개를 가볍게 끄덕여 인사를 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마주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자 내일 보자고 말을 하는 게 그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화랑에는 일하러 가는 거라 그가 잇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특별한 볼일이 없으면 화랑에서 만나는 걸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마치 냉리 아침 화랑에서 기다리고 있겠단 소리처럼 들렸다. 딱히 할 말이 잇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오늘 이미 했을테니까. 무슨 일인가 의아하면서도 내일이 되어보면 알겠지 싶어 굳이 묻지 않고 김택승은 그가 먼저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로 하선연이 먼저 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그래서 약간 머뭇거리다 고개를 한 번 더 꾸벅이고 몸을 돌렸다. 역시 등 뒤에 누군가를 남겨두고 가는 일은 영 익숙하지가 못했다. 그런데 요즈음 특히 하선연을 상대로 이런 일이 잦은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하고 김택승은 발걸음을 옮겼다. 주차장 쪽을 빠져나와 도서관 건물 사이를 걷노라니 어느새 낙엽조차 다 떨어져 버리고 나뭇가지가 앙상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이번 겨울은 길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며 터벅터벅 걷는데, 조금씩 기분이 이상해졌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속이 쿡쿡 쓰렸다. 걸으면 걸을수록 처음엔 따끔거리던 아픔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누가 못을 때려 박는 것처럼 아파졌다.
결국 얼마 못 가 김택승은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짓누르듯이 둥글거리며 제자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이러지. 울렁거리던 속도 가라앉고 기분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불편해졌다. 모처럼 예전같이 별거 아닌 이야기도 즐겁게 나누고 좋다가, 돌아서자마자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진짜 이제라도 병원에드러봐야 하나 싶어서김택승은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실제로 눈에 들어온 것은 시간이 아니었다. 핸드폰 줄이 안보였다. 고리만 달랑 남아 있고 정작 중요한 장식줄은 사라지고 없었다. 제가 산 것도 아니고 하선연에게 받은 거라서 이게 어디 갔나 싶었다. 왓던 길을몇 발짝 되돌아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려 봐도 보이질 않아 아무래도 이렇어버린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싶어 포기하고 가려는 데 어찌 된 일인지 핸드폰 줄이 아닌 더 중요한 걸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게 뭔지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에 아까부터 치밀어 오르던 가슴의 통증이 한층 더해졌다. 발걸음을 옮길 수조차 없어 김택승은 앞섶을 늘어지라 움켜쥔 채로 몸을 조금 수그렸다. 깊게 심호흡을 하다가 입술을 지그시 사려물어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프다... 왜 이렇게 아프지. 시한폭탄 같은 파편은 머릿속에 있는데 정작 아픈 곳은 심장이었다. 교통사고의 휴유증이라 생각해도 상처부위가 아닌 심장이 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설마 심장병이라도 걸린 것은 아니겠지 하고 눈ㅇ르 질끈 감은 채로 괴로움을 견뎌내던 김택승은 문득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눈꺼풀을 들러 바닥을 내려다보자 발치에 빗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어찌 된 게 제 발치에만 떨어져 있어 의아해진 순간, 다른 곳에도 빗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다시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또 비인가, 우산을 꺼내야 하는데 김택승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슴의 통증에 정신이 팔려 멍하게 내리는 비를 맞고 서 있다가 띠리링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라보니 비로 끊임없이 얼룩지는 액정에 강유형의 이름이 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김택승은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애인지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까도 이러더니만 핸드폰이 고장나기라도 했나. "여보세요."라고 한 번 더 목소리를 내자 비로소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울어?
울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비가 와서 우는 소리처럼 들리나 하고 생각한 순간 어째 얼굴이 뜨거운 것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타고 흐르는 빗물이 미지근했다. 입술로 흘러드는 빗물의 맛도 찝찌름한 게 아무래도 빗물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제야 제가 '울고 있구나' 하고 깨달은 김택승은 손을 들어 얼굴을 닦아냈다. 다만 비가 내리고 있어 별로 소용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차라리 우산을 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빗물이 눈물을 씻어 주지 못할 테다. 어쩌면 비가 내리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비 때문에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자리에 선채로 줄줄 쏟아지는 눈물을 내버려두고 있었다. 마치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 수화기 너머에서 강유형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힘드냐?
왜 우는지 몰라서 멍한 머릿속에 그 말이 맴돌았다.
힘든지 어떤지 몰라서 혼란스러워하던 택승은 제 손에 움켜쥐어진 가슴팍을 보았다.
마치 심장을 뜯어낼듯 손톱을 세우고 있어 아무래도..... 그런것 같았다. 이렇게 눈물이 둑 터지듯이 흘러나오는걸 보면 많이 힘든가 보다. 그동안 멀쩡하게 먹고 자고 해서 이렇게 괜찮은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언제나 자신에게 둔감해서 이렇게 눈물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제 마음을 자각하는것이 매번 이토록 느려서 어떡하나 싶었다.
한심스런 기분에 택승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일견 전처럼 태연하게 커피를 마실고 웃고 이야기해도 마음만은 전과 달랐다. 이제는 맘대로 그를 좋아할수 없는 것이다.
아무 대꾸도 없는것이 걱정스러웠던지 강유형이 괜찮으냐며 묻는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할말이 없었다.맘 같아선 괜찮다고 하고 싶어도 그건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하나도 안괜찮았다. 너무 많이 힘들었다. 가슴이 몹시도 아파와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아직도 여전히 그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는데 그 감정이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래서 버리려 해도 제 안에 자리한 거라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아무리 자신을 힘들게 만들어도 마찬가지다.
덕분에 아무 대답이 없어도 계속 괜찮으냐고 물어오는 말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새나오는 울음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짓이겨진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으나 그 조차알지 못했다. 뒤섞인 빗물에도 불구하고 눈물에서 느껴지는 짠맛이 너무 강해 알수 없던 탓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산도 쓰지 않은채 우두커니 선 자신을 힐끗거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한차례 세차던 비가 잦아들고 있는데도 계속 비가 쏟아진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쏟아지는 눈물을 내버려둔채로 택승은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 울고 또 울었다.
*
"택승이형 얼굴이 왜 그래요?"
출근한 택승을 보고 주방보조는 헉 하고 놀랐다.
그럴만도 한게 얼굴이 너무 오랫동안 찐 호빵처럼 퉁퉁 부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불그스레하기까지 해서 피자맛 호빵같이 보였다. 제대로 눈뜨기가 어려워 제꼴이 어떤 상태인지 짐작하고 있던 택승은 칼칼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냥 좀."
주방보조는 할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펑펑 운 얼굴이라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보통 성인 남자가 우는 모습도 잘 상상이 안가는데 무슨 일에도 덤덤한 택승이 그러는건 더욱 상상이 안됐다. 어쩌면 운게 아니라 어디가 아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방보조는 질문을 던졌다.
"어디 아파요? 볼거리에 걸린거 아니에요?"
나이가 몇인데 볼거리에 걸리겠냐 싶어 택승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고 주방보조가 말했다.
"그럼 대체 왜 이런 건데요."
민망스럽기는 하지만 굳이 거짓말을 하긴 싫어서 그냥 솔직히 답했다.
"울어서."
제 입으로 울었다니까 진짜 울었구나 하고 주방보조는 아연해했다. 그 뿐만 아니라 온가게 식구들이 택승의 얼굴을 보고 그런 표정을 지었다. 이미 그가 운걸 알고 있던 강유형만이 아무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차마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묻지는 못하고 눈치만 봤다. 심지어는 그 성격 나쁜 주방장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택승은 주변 사람을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여태껏 스스로를 버티게 해주었던 자기최면이 사라지고 나자 암담해졌다. 자신이 안괜찮다는건 알겠는데 이제부터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탓이다.
만병통치약이라는 시간이 흐르기만을 마냥 기다려야 하는것일까? 그럼 그때까지 이렇게 괴로운건 어떡하라고, 다른병과 달리 진통제를 먹는다고 듣는 것도 아닐텐데.
그날은 유독가게 식구들이 그를 챙겼으나 택승은 알지 못했다. 주변으로 생각이 돌아갈 여력조차 없었다. 그냥 큰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다행히도 가게가 크게 바쁘지 않아 빠져나간 넋을 억지로 챙겨넣지 않아도 되었다. 시간이 흘러밤이 다 지났을때 쯤엔 그럭저럭 부은 얼굴도 가라앉고 평소 같은 모습이 되었다. 문제는 날이 밝아 화랑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는 거였다.
솔직히 태연할 자신이 없어 좀 겁이 났다.
이 상태로 무슨 얼굴을 하고 하선연의 얼굴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또 눈물이 쏟을지도 모르고 어떤 식으로든 이상하게 굴것만 같았다. 그걸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도 걱정스러웠다.
요즘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것만 같아 이제 보지 말자고 할까봐 무서웠다.
대체 어쩌자는 걸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려워만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택승은 제 머리를 탈의실 락커에 쿵쿵 들이받았다. 결국에는 락커를 좀 찌그러트린 뒤에야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걱정스러운 기색인 강유형에게 이만 가보겠다고 인사를 했다. 그는 섣부른 위로를 하기는 싫은지 그러라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를 뒤로하고 가게를 나서자 아직 어두컴컴한 거리가 보였다.
짧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가까워져 어느덧 해가 짧아졌기 때문이다. 싸늘한 어둠을 헤치며 지하철로 간 택승은 얼마후 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랐다. 언제나와 같이 화랑으로 가는 돌담길을 걷는데 바싹 말라붙은 담쟁이 넝쿨이 보였다.
여름엔 환하게 아침 햇살이 비치던 길목도 어슴푸레한 어스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모든게 마치 제 마음같이 어두침침했다.
이윽고 화랑 대문에 도착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택승은 고개를 푹숙인채 정원의 징검다리 위로 올라섰다.
말라 붙은 잔디에 눈을 고정한 상태로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걸음을 옮기는데 무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의 이유를 찾으려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앞이 밝아졌다. 창문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던 것이다.
막 날이 밝기 직전이라 가로등마저 꺼져 있어 사방이 어두운데 안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불을 밝힌 화랑은 마치 커다란 보석상자 같았다. 그 가운데 하선연이 서 있었다. 편안한 차림으로 한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다.
천천히 창가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 사실에 이루 말할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아닌, 그렇다고 웃음조차 아닌 모호한 표정으로 택승은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쪽을 쳐다본 하선연과 눈이 마주쳤다. 제법 거리가 있었고 어두웠으나 그는 단번에 택승을 알아보았다.
멀리서도 자신을 눈치채고 일종의 반가움 같은게 그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손이라도 흔들고 싶은 사람처럼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고 가만히 응시해오는 모습이 죽도록....
택승은 목이 콱 메는걸 느꼈다.
진짜 미쳤나 보다. 아니면 어디가 망가져 버렸던가. 그가 너무 좋아서 당장 심장이 멎을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여태까지 무엇도 개의치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온 자신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그게 겁이 나고 무서워서 더는 견딜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기에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걸 알면서도 택승은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이고 뭐고 신경쓰지 않고 길도 무시해버린채 마른 풀이 돋아난 정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 모습을 본 하선연의 눈이 커졌다.
현관문을 열고 나온 그가 소리쳐 불렀으나 들리지 않았다.
"김택승씨!"
오히려 그 목소리에서 멀어지기 위해 더 빨리 다리를 놀렸다. 대문을 쿵소리가 나게 열어젖히고는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하는 거리를 뛰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하선연이 부르는 소리가 쫒아왔다.
"김택승씨!"
그 목소리가 조금도 멀어지지 않은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그가 따라오고 있었다.
쫓아오지 말라고 소리치고픈 것을 억누르고 택승은 이를 악물로 달렸다.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어깨에 맨 가방이 거치적거리자 그것마저 던져버리고 뛰었다. 이에 혀를 찬 하선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택승!"
제발 따라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러다 진짜로 죽어버릴것 같으니까 조금이라도 숨돌릴수 있도록 마음속에서 정말로 한발짝만, 단 반걸음만이라도 비켜줬으면 했다. 한데 그래주질 않아서 제안의 그가 너무 크고 무거웠다. 덕분에 갈걸음이 느려지고 가슴이 터질것 처럼 숨이 찼다.
도무지 자신으로선 감당이 안돼 지쳐 가는데 악을 쓰듯 커다란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택승아!"
거기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택승은 크게 휘청거렸다.
돌부린지 뭔지에 발이 호되게 부딪쳤다.
시큰한 아픔이 느껴지는걸 무시하고 계속 달리는데 등뒤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택승아, 잠깐만.....거기....!"
거친 숨소리에 드문드문 섞여오는 제 이름이 그렇게 원망스러울수가 없었다.
마치 예전엔 누구에게도 불려보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길어서 펄럭이는 머리카락에 손끝이 닿아왔고, 손바닥이 어깨에 부딪치다 미끄러졌다. 택승이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바람에 안달이 난 손아귀가 결국 뒷덜미를 낚아챘다.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진 상태로 달리던 택승은 뒤로 휙 하고 넘어졌다.
짧은 순간 밝아오는 아침으로 얼룩진 하늘이 시야를 스쳤다. 등이 그의 품에 부딪히면서 하선연의 얼굴이 하늘을 점령했다.
그대로 주저앉아버리며 눈을 감았더니 세상이 핑그르르 한바퀴 돌았다.
"....후우 하아, 헉, 헉....."
한동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가라앉을때 쯤에야 이런저런 다른 세상의 소리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리 새우는 소리, 어디선가 차가 달리는 소리, 바람이 귓전을 스치는소리, 거기에 하선연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까지......
마치 거기에 잠을 자다 깨어나듯 택승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렇게 보기가 두렵던, 그러나 볼수 없게 되는건 더욱 두렵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거꾸로 내려다보는 하선연의 얼굴은 얼마나 뛰었는지 아직도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택승은 불쑥 입을 열었다.
"왜 쫓아오는 겁니까."
하선연은 한숨을 탁 쉬고는 말했다.
"도망치면 잡고 싶은게 사람 맘 아닙니까."
부산에도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다만 그때의 도망과 지금의 도망이 다를뿐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정말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만약 돌뿌리에 발이 걸리지만 않았어도 따돌릴 수 있었을 텐데 따라잡히고만것이 억울했다.
쓸데없이 힘만 썼구나 싶어 택승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발을 땅에 디디고 서다 말고 움찔 어깨를 떨었다.
오른발 끄트머리에서 격통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까 돌뿌리에 채이면서 뭔가 잘못 되었나 보다. 미간을 찡그리며 그곳을 내려다보자 아까 비틀거니는걸본 건지 하선연이 앞쪽으로 와서 말했다.
"신발 좀 벗어 봐요."
택승은 시키는 대로 하려고 했으나 발가락이 아파서 꾸물거렸다.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선연이 허리를 숙여 택승의 발목을 잡고는 운동화를 벗겨냈다. 그러자 양말 끄트머리가 벌겋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발톱이 뽑히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걸보고 길바닥에서 살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하선연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살짝 허리를 숙여 등을 내밀었다.
"업혀요."
"...네?"
"업히라고요. 보면 모르겠습니까."
택승이 미심쩍어 되돌리는 반문에 하선연은 손짓을 휙휙 했다. 진짜로 업히라는 소리 같기는 한데 선뜻 그럴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라는 사람의 등을 빌리는게 영 어색하기도 하고 그렇게 죽자사자 도망쳐놓고 제 발도 아니고 업혀서 돌아가는게 우습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택승은 "괜찮습니다." 라고 운동화 한짝을 손에 든채로 절룩절룩 걷기 시작했다.
차마 운동화에 다시 발을 집어넣을 생각은 할 수 없어서 양말인 채로 도로를 밟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하선연이 성큼성큼 걸어와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등을 내밀었다. 업히라는 말도 생략한 태도가 단호했다. 택승이 계속 망설이노라니 뒤로 손을 뻗어 손목을 잡아 제 어깨에 걸친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거절하기도 그래서 끝내는 그의 등에 업히게 됐다.
엉덩이를 떠받친 하선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야가 쑥 높아졌다.
그러고보니 남의 등에 업히는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아주 어릴때나 그래보고 조금 자란 뒤에는 다른 동생들을 업어 키우기 바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박고영을 업고 뛴적은 있어도 제가 업힌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느낌이 사뭇 색달랐다. 그가 걷는 걸음을 따라 흔들리는 몸도 그렇고, 등과 맞닿은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체온도 그렇고, 이따금 엉덩이를 추어올리는 팔도 그렇고, 참 모든것이 새삼스러웠다.
한참을 되는대로 뛰었더니 화랑까지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덕분에 슬슬 무거워질법도 한데 그런기색이 없었다.
마치 꽃바구니라도 을러멘양 발걸음이 가벼웠다. 바람이 불때마다 한들거리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여 택승은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자 하얀 귀가 아주 잘보였다. 그러고 보니 귀 뒤쪽에 꽤 큰점이 있었다. 얼굴에는 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좀 신기했다. 손을 내밀어 한번 만져보고 싶었으나 그럴수가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화랑에 도착해 택승은 대문에서 내려달라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것을 무시하고 하선연은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휴게실까지 걸어가 소파에 당도한 뒤에야 비로소 그 위에 택승을 내려주었다. 이어 조심스레 양말을 벗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가서 구급상자 갖고 오겠습니다."
그러더니만 엉뚱하게 로비로 나갔다. 잠시 후, 사무실까지 갔다 오고 나서야 도로 돌아와 난감한듯 물었다.
"구급상자 어디 있습니까?"
택승이 묵묵히 바로 코앞에 있는 휴게실 선반위를 가리키자 뒤늦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그것을 내리는 동안 양말을 벗고 살펴보니 짐작했던 대로 엄지발톱이 반쯤 빠진채였다.
차라리 깨끗하게 빠졌더라면 좋았으련만, 깨져서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었다.
그걸 본 하선연이 미간을 모으고 중얼거렸다.
"뽑아야겠는데요. 병원에 가서....."
그 말을 끊으며 택승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뽑으면 됩니다."
제 손으로 발톱을 뽑는게 쉬운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꼴로 병원까지 가서 똑같은 처치를 받느니 이자리에서 해결하는 쪽이 나았다. 하선연은 어떻게 뽑는다는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택승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택승이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발가락으로 손을 가져가는걸 보고 말했다.
"그냥 뽑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택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선연은 소파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택승의 다리를 제 무릎에 올리고는 말했다.
"제가 할테니까 다른데 보고 있든지 해요."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다른곳도 아니고 발에 손을 댄다고 해서 택승은 극구 사양을 했다.
방금 씻고 나온것도 아니고 피로 얼룩져 더러운 상태인데 그가 어떻게 맨손으로 만진다는 말인가. 일단은 자신이 싫어서 한사코 뜯어말렸다.
"진짜로 제가 하겠습니다. 그게 낫습니다."
택승이 몇번이나 다리를 빼려고 하면서 만류했으나 하선연은 듣지 않았다.
무릎을 제 옆구리에 딱 낀채로 구급상자 안에 들어 있던 소독약을 손에 부었다. 그리고는 한손으로 발을 잡고 다른손은 발톱으로 가져가며 짧게 말했다.
"아플 겁니다."
"아니 잠깐.....!"
아픈것보다는 그가 제 발을 만지고 있다는 창피함이 더했다.
그래서 아플거라는 말을 무시하고 소리를 치다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발톱에 불덩이를 올린듯 화끈한 아픔이 찾아들었다. 순간 눈물이 핑돌 정도로 아파서 택승은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하선연이 여전히 발을 붙잡은채로 뽑아낸 발톱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택승에게도 보여주었다.
"깨끗하게 뽑혔습니다."
무슨 이빨 뽑은 것도 아니고, 왜 저걸 들여다보는지 모르겠다.
노상방뇨도 못할만큼 깔끔 떠는 성격이 아니었던가. 도무지 하선연이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행동인데다 더럽다는 기분때문에 택승은 어쩔줄을 몰랐다. 그걸 보고 씩 웃은 그가 발톱을 내려놓고는 소독약을 들었다. 차가운 소독약이 발가락에 부어지자 다시 한번 눈물 쏙 빠지는 아픔이 느껴졌다.
콧등이 다 시큰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코를 훌쩍이노라니 하선연이 칭찬하듯 말을 했다.
"잘 참는군요. 울려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애도 아니고 좀 아프다고 울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이미 자신을 울린적이 있다. 그것도 대로변에서 아주 펑펑, 불과 어제 벌어진 일이지만 아마도 그는 모를 것이다. 두번 그렇게 울었다가는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택승은 다리를 빼려고 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좀 가만있어 봐요."
하선연은 버둥거리는 택승의 다리를 억지로 붙잡고 약을 발랐다. 그러나 택승은 계속 벗어나려 애를 썼다.
실은 제 발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만지는건 더 싫었다. 그의 발과는 달리 자신의 발은 아주 못생겼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일한답시고 서있는 탓에 발바닥은 물론 발가락에도 굳은살이 덕지덕지 한데다가 공사판을 돌아다니며 생긴 이러저런 흉터들이 발등에 가득했다. 새끼발톱은 두쪽 다 모양이 망가졌고 왼쪽발은 한번 부러졌다가 잘못붙는 바람에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조각한 것처럼 예쁜발을 가진 그와 비교해서 흉측스러웠다.
자신의 다른모습까지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 제발 발을 좀 놓아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하선연은 그 발을 억지로 붙잡고 처치를 계속했다. 그의 손이 상처부위를 살살 스칠때마다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것을 느끼고 하선연이 택승을 힐끗 돌아보더니만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
택승은 그야말로 뛰어오를듯이 파드득 거렸다.
간지러워서 깜짝 놀란것이다. 그 반응이 재미있는지 어깨를 들썩인 하선연이 발을 꽉 붙잡은채 아예 대놓고 간질거렸다. 덕분에 몸부림과 함께 웃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나왔다.
"으하으으! 그, 그만.....!"
그 반응에 하선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간지럼 되게 타네요."
그리고는 아예 작정하고는 발가락 사이까지 마구 간질였다. 그렇게 간지럼을 태우는 발작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택승은 소리를 지르며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우아하아악! 하지마... 히이익! 그만 하라고!"
이윽고는 반발까지 막 튀어나오는데 소리높여 웃던 하선연이 귀여워 죽겠다는듯 순간 그 발에 입을 쪽 맞추었다. 택승은 간지럼도 잊고 얼어붙었다.
하선연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듯 눈을 크게 뜨고 당혹한채 굳어 있었다. 아까의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대신 어색한 공기가 주위를 맴돌았다.
"....."
"....."
누가 계속이라 할것 없이 이어지던 침묵을 깨트린건 하선연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큼큼하고는 처치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거즈를 붙이고 밴드를 바르는데 발톱이 부러진게 아니라 발가락이 부러진양 덕지덕지 바른다. 솜씨가 없어 서툰데다 아까일이 당황스러워 그것을 무마하려고 손을 계속 움직이는 모양이다.
그 못지않게 택승도 그만치 당황해 있었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는동안 두툼해진 엄지발가락을 보고 택승은 고맙다고 말을 하려 그를 쳐다보았다.
한데 구급상자를 정리하느라 몸을 숙이는 바람에 뒤꿈치가 드러난 그의 발이 보였다. 왜인지 거기가 새빨갛게 일어나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택승은 또 신발을 불편한 것으로 신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곧 그뿐만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자신을 뒤쫓느라 뛰었던 탓이다. 구급상자를 그냥 정리하고 있는걸 보면 아직 아픈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택승은 뒤꿈치가 드러나 있던 그의 발을 확 잡아당겼다. 놀라서 쳐다보는 하선연을 무시하고 그가 했던 것처럼 종아리를 옆구리에 끼고 발을 붙잡았다.
그런뒤 구급상자를 턱짓하고 말했다.
"그것 좀 줘보세요."
그제야 발이 따가운걸 깨달았는지 하선연은 군소리 않고 구급상자를 밀어 주었다.
자세히 보니까 뒤꿈치뿐만이 아니라 새끼발가락 같은데도 빨갛게 살갗이 일어나 있거나 물집이 잡혀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업고 걸어오느라고 더 그런것 같았다.
신발좀 편안한거 신지, 왜 만날 불편한것만 신는지 모르겠다. 하긴, 그래도 예쁘기만 한 발이었다. 다시 봐도 반복되는 감탄을 삼킨채 택승은 소독약을 집어들고 그것을 발에 난 상처위에 뿌렸다. 그러자 등 뒤에서 하선연이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아픕니다, 좀 살살해요."
굳은살 하나 없는 발에 난 흉이라서 매우 아파 보이기는 했다. 어쨌든 치료는 해야 하니까 소독약을 마저 뿌리니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아프다니까요."
투덜거리는 소리에 택승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울 만큼 아프진 않나 본데요."
그 말에 하선연이 시큰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김택승씨도 저 울리고 싶습니까?"
택승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네."
울릴수 있으면 울리고 싶었다.
아파서 울든 좋아서 울든, 슬퍼서 울든, 자신 때문에 그가 눈물 흘려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럼 분명히 마음이 아플테니까 웃어주는 쪽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처럼 밝게 웃는 소리를 들을수만 있다면 그깟 간지럼이 대수랴. 간지럼 때문에 몸부림치다가 숨이 넘어가도 괜찮을것 같았다.
그만큼 하선연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도무지 안 되겠다.
치료를 하다말고 동작을 그친것이 이상했는지 하선연이 어깨를 붙잡아와 택승은 그의 발을 놔주고 몸을 돌렸다.
이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한번 거절당했어도 도리가 없다. 자신을 끈질기다고 생각해도 어떡하겠는가.
이대로라면 머릿속에 든 파편이 자신을 어쩌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터질것 같은데.
너무 힘들어서 딱 죽을것 같으니까 이제 안 되겠다. 도저히......
포기 못 하겠다.
눈앞의 이 남자가, 하선연이 꼭 필요했다. 뭔가를 이렇게 원해보긴 처음이었다. 죽기보다 그를 놓치는게 더 싫었다.
그럴바에야 발버둥이라도 치는게 낫겠다. 이렇게까지 좋아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힘들거라면 그를 가지기 위해 힘들고 싶다.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선연의 묘한 눈으로 택승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알듯 모를듯 어떠한 감정이 그의 갈색 눈동자에서 당장에라도 넘칠 것처럼 춤을 추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자리해 있었으나 채 마지막 한 방울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아직까지 이름 붙여지지 않은 정체모를 무언가였다. 그것을 가늠하듯 그 눈을 물끄러미 보던 택승은 문득 던져진 질문을 받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합니까?"
오래도록 하선연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던 택승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당신 생각합니다."
그 말에 하선연의 눈이 커졌다.
그 안에 조용히 입술을 들어 올리는 택승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전에 본적 없는 아주 환한 웃음이었다. 흰 수건으로 뽀득뽀득 닦아낸 하늘처럼 개운하고 밝았다. 아주 흔해빠진 고민 한 자락까지도 전부 털어버린듯 시원스러운 웃음이기도 했다.
그래선지 언제나 조금 부끄러운듯 내리깔고 있던 까만 눈동자가 몹시도 반짝거렸다.
툭하면 붉어지던 뺨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사소한 장난에 꺄르륵 넘어가는 아기처럼 예쁜 얼굴이었다.
그것을 멍하게 보고 있던 하선연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놀란 택승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선연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갰기 때문이다.
눈만 커다랗게 놀란 택승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가 저렇게 얼굴 붉히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신기하거나 놀랍다기보다는 어디가 이상한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래서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괜찮으십니까?"
그 말에 한 손으로 뜨거워진 제 얼굴을 더듬어 보던 하선연이 정색이라고 할까 질겁이라고 할까, 아무튼 화들짝 놀란 모습으로 손을 내밀어 거리를 두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요."
"네?"
"기분... 기분 나쁘니까."
혹시 찰거머리처럼 달라붙겠다는 제 심산을 알아차린 건가 싶어서 택승은 조금 뜨끔했다.
얼굴에 다 표시가 나나 하고 손으로 더듬어 보기라도 해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독심술사도 아니고 갑자기 이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낯이 벌게진게 창피한지 하선연은 조금 고개를 수그리고 이마를 짚으면서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그리고는 몇 번이나 얼굴을 쓸어 만졌다.
덕택에 조금 진정이 될 기미가 보였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택승을 힐끗 쳐다봤다.
한데 침착하려 애쓴 보람도 없이 다시 얼굴이 불에 달군 것처럼 빨갛게 익어버렸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던 택승은 한발짝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려고 했다. 그 모습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을 내젓던 하선연이 견디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한발을 다가가자 두발을 물러선다.
두발을 다가가니 아예 도망칠 기세였다.
이에 택승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도망치면 잡고 싶어지는게 사람 심리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말에 하선연이 뒤로 발을 빼던 행동을 멈췄다. 그것을 보고 택승은 못을 박았다.
"그러니까 도망치지 마세요."
도망치는 자신을 붙잡아 놓았으니 그는 도망치면 안 된다. 선뜻 붙잡혀주지는 않더라도 애써 볼수 있도록 희망을 품을수 있는 거리에 있어주어야 할 게 아닌가. 제 기분을 알겠느냐는 듯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택승은 곧이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하선연은 도망치지 않았다.
순순히 성큼 다가온 택승에게 옷깃을 붙잡혀 주었다. 여전히 뺨을 불태우고 있으면서도 제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택승의 미소 한번에 마지막 한 방울이 채워져 넘쳐버린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택승은 그의 옷깃을 끌어다 소파에 도로 앉혔다.
그리고 발을 끌어 제무릎에 놓고 까진 발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나머지 발도 그렇게 해주고 있노라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평온함이 느껴졌다.
물론 예전과는 달리 이것이 길지 않을 것임을 안다. 가끔은 제 욕심을 주체 못해 힘들기도 할테고 스스로가 작고 못나게 느껴져 괴롭기도 할 테다. 어쩔땐 심장이 미어지게 아프거나 또 눈물을 펑펑 쏟아버릴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적어도 그 힘겨움이 행복하고자 하는 발버둥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행복해지려 애쓰다 보면 그 노력까지도 행복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희망을 품고 택승은 그의 발등에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
그리고 마치 결혼식에서 언약을 맹세하듯이 정중히 이마를 댔다.
그 행동에 하선연이 놀라는 기척이 들렸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들고 하던일을 계속했다.
잠시 후, 처치가 끝나자 그의 발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전 제 일 하겠습니다."
평소와 같이 그렇게 말하고 구급상자를 정리한 뒤 청소를 시작했다.
무언가 극적인 장면이 지나간 것도 같은데 너무나도 평이한 그의 모습에 되짚어 보지도 못하고 하선연은 조금 멍해져 있었다.
그러다 청소기 돌릴거니까 소파 위에 다리 올리라는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는 그런 제 행동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것은 택승도 마찬가지였다.
남몰래 웃음짓던 그는 하선연이 기분 좋게 소파위로 드러눕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로인해 전에는 모르던 따뜻함을 알게 된 이상, 그것을 기억하는 동안에는 언제까지고 그를 좋아하는걸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다.
그거면 됐다고 택승은 잠자코 청소기를 돌렸다. 그 모습위로 어느새 환하게 떠오른 아침 햇살이 눈부신 빛을 뿌렸다.
*
딴따라딴따따~
-.....여보세요.
고상하게 울리던 음악 끝에 들린건 어째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라면 자다 일어나 전화를 받아도 멀쩡할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하긴, 적어도 욕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보통 사람처럼 머리카락도 뒤집혀 있고 뺨에 베개 자국도 남아 있었으니까. 택승은 침대에 엎어진 채로 전화를 받고 있을 하선연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입을 열었다.
"정오까지 삼성에 있는 극장으로 오세요."
-.....네?
그가 자세한 것을 물어보기 전에 그냥 전화를 끊었다.
길게 얘기해봤자 딱히 설명할 말도 없고 괜히 쑥스러워질 게 뻔해서였다.
안 나오면 어떡하지 싶은 생각이 안드는건 아니었으나 궁금해서라도 나올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아놓고 택승은 부지런을 떨었다. 날씨가 추운데도 물을 뒤집어쓰면서 샤워를 한 뒤 선풍기를 켜놓고 머리를 말렸다.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백을 뒤져 생전 한쓰던 로션도 찾아내 바르고 옷도 제일 최근에 산 것으로 골라 입었다. 그런뒤 깨끗하게 빨아둔 운동화에 끈을 끼우고 새 양말을 꺼내 놓았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손질하다가 머리카락이 꽤 길어버린것을 깨닫고 뭔가를 발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백을 뒤져 어디선가 받은 조그만 샘플용 왁스를 찾아냈다.
한데 막상 바르려고 보니까 예전에 아무것도 안 바르는게 만지기 좋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꼭, 만져주길 바라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택승은 왁스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대충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고 나서 운동화를 신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역으로 가려고 거리를 걷는데 공기 중에서 겨울 냄새가 맡아졌다. 조금은 차갑고 선뜻한 향기였다.
그러나 날씨가 화창해서 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해 정답기까지 했다. 지하철역에 당도한 택승은 교통카드 잔액이 거의 다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충전기 앞으로 갔다. 하지만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다가 그냥 말았다. 이제 한동안은 교통카드 쓸일이 없을텐데 당분간 표를 끊어 다니자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자동발매기에서 표를 끊고 개찰구를 통과해 플랫폼으로 나가 전동차에 몸을 실었다.
얼마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을땐 인파로 길목이 북적북적했다.
주말이라서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거리가 붐볐다. 모두가 즐거운 표정을 짖고 있는 것만 같아 택승도 기분이 좋아졌다.
머지않아 약속 장소에 다다르자 입가에 웃음이 피시식 피어올랐다. 제일 잘 보이는 곳에 하선연이 팔짱을 떡하니 끼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끝나고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지 신경 써 입은 티가 역력하게 났다.
평소에는 정장 입을때가 아니면 안차린듯 차려입고 다니는 편인데 오늘은 대놓고 '나 힘줬음.' 이라고 써 붙여 놓은것 같았다.
완벽하게 차분한 머리카락을 보니 확실했다. 덕분에 굉장히 눈에 띄는지라 다가가서 말을 걸기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먼저 아는 체 하기도 전에 그가 자신을 발견했다.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하지만 엷게 반기는 기색이 섞인 얼굴로 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택승은 그에게로 다가가 뒤통수를 긁적이다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누가 뜬금없이 불러내는 바람에 별로 안녕하지 못합니다."
정색하는 척 말을 해도 목소리가 가벼웠다.
약간 과장된 느낌이 섞여 있기도 했다. 평소 느닷없이 불러내는건 그도 마찬가지라 크게 미안하진 않았다.
그래도 다른 볼일이 있다면 빨리 보내줘야 할것 같아서 질문을 던졌다.
"바쁘십니까?"
"그건 왜 물어요?"
묘하게 기대가 서린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반문하기에 택승은 말을 이었다.
"오늘 시간 좀 내주실 수 없을까 싶어서요."
그러자 냉큼 대답하려던 하선연이 스스로를 자제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스케줄을 확인하는 척했다. 그걸 보고 택승은 대답을 예측했다. 진짜 볼일이 있다면 오늘 일을 저런식으로 확인해보진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흠흠 헛기침을 한 하선연이 마침 시간이 남는다고 말해왔다.
"다행이도 오늘은 크게 일이 없네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인 택승은 그럼 가자고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어디 가는 거냐고 물어왔으나 대답은 뻔했다. 극장에서 만나는 이유야 영화를 보기 위해서인게 당연하다.
택승이 매표소 앞에 서서 "뭐 보실래요?" 라고 묻자 그가 빤하게 쳐다봐왔다.
주말에 갑작스레 불러내 영화를 보자는게 이상했나 보다. 그래서 제가 보여 드리는 거라고 재빨리 덧붙였다.
"흠." 고개를 기울인채 상영작을 한번 훑어본 하선연은 한창 절찬리에 상영중인 인기작을 골랐다. 잠시후 두 사람은 대기표를 들고 기다린 끝에 표를 사러 갔다. 한데 미리표를 예매해 놓지 않은 탓에 좋은 좌석이 없었다.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들고 봐야 하는 앞자석만 남아 있었다. 결국 그냥 다른거 보자는 하선연의 말에 따라 제일 좌석이 한가한 영화를 아무거나 골랐다. 마침 삼십분만 지나면 상영시간이라 계산을 하고 표를 받았다. 줄에서 벗어나 지갑을 챙기는데 하선연이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스낵 코너에서 팝콘과 콜라를 사왔다. 어쩐지 영화관에서 군것질 같은건 안할 인상이라 좀 의외였다. 식당에서 밥 먹고 마시는 자판기 커피도 꺼리던 그이지 않은가. 그래서 "팝콘도 드십니까?" 하고 물으니 콜라를 쭉 빨아 마시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안 좋아합니까?"
마치 제 입맛보다는 택승의 의견을 중요시하는 기색이었다.
아무거나 가리는거 없이 잘먹는 택승이라 당연히 팝콘도 좋아했다. 그래서 아니라며 고개를 젓자 그럼 됐지 않느냐고 팝콘 상자를 턱하니 안겨주었다. 그리고는 탄산은 몸에 안 좋은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콜라를 쭉쭉 빨아 마셨다.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이 없어 두사람은 팝콘을 씹어 먹으며 개봉예정작을 소개하는 광고지를 읽었다.
대단해 보이는 영화가 없고 손이 심심해 택승은 그것으로 조그만 모자를 접었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어쨌는지 하선연이 어떻게 접는거냐고 물어왔다. 쉽다고 말을 하며 접었던 모자를 도로 펼쳐 다시 접어 보이는데 하선연은 정말이지..... 지지리도 손재주가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아주 간단한 것을 도무지 따라하지 못했다.
지난주에 발톱이 빠졌을때 밴드 감아놓은 꼴을 보고 어렴풋이 짐작한 사실이긴 했다. 들입다 감아만 놔서 조금만 움직여도 골무처럼 흘렁 벗겨져 별 도움이 안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일주일 동안 하선연은 통 화랑에 나타나질 않았다.
주중에 잠깐 얼굴을 보기는 했는데 어째 영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금방 가버려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건 일주일 만이었다. 눈도장이라도 많이 찍어두고 싶었던 택승으로서는 적잖이 아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따로 불러내기에는 지난 일주일간 좀 바빴다. 큰일은 아니지만 사소하게 처리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도 바빴던 것 같아서 택승은 질문을 던졌다.
"지난주에 많이 바쁘셨습니까?"
"아뇨, 그다지......"
모자 접는데 열중해 있느라 무심코 대답한 하선연은 눈을 들어 시선을 맞추고는 물었다.
"그건 왜 묻습니까."
"별일은 아니고 화랑에 안 보이셔서요."
그 말에 하선연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조금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리고 애꿎은 광고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원래 극적인 연출을 하려면 애를 좀 태워야 하는 법입니다."
"극적인 연출요?"
무슨 소린가 도통 짐작이 되질 않아 턱을 기울이며 묻노라니 그가 "아무튼." 하고 주저하다 대꾸했다.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묻는 건데 가게 일 하루정도 쉴순 없습니까?"
지난번 부산에 갔을때 무단으로 결근을 했던지라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그러나 이제는 가게하고 상관없이 한동안은 시간이 없어 무슨 일인가 물어보려 입을 열었다. 그것을 보고 나올 질문을 예상했는지 하선연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아, 무슨 일인지는 물어보지 말고요. 어쨌든 다음주 중에 쉴수 있도록 해봐요. 무단결근이라도 하든가."
무단결근을 뉘집 개 이름처럼 말을 한다. 절대 남의 밑에서는 일 못할 사람이구나 싶어 갑자기 걱정스러워졌다. 파리만 날리는 화랑이 망해서 직장을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면 어떡하나 싶었던 것이다. 저렇게 까다로운 성격으로 회사생활에 적응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취직을 해도 못견디고 때려치운후에 자기 사업한답시고 빚내다가 망하기 딱 좋아 보였다.
먹고 사는거야 자신이 어떻게든 돌봐주면 되니까, 대출만큼은 못 받게 해야겠다고 혼자서 이런저런 결심을 했다. 그렇게 있다보니 영화관에 입장할 때가 되었다. 상영관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하선연의 손에 여전히 광고지가 들려 있었다.
아직도 모자를 접는걸 포기 안한 모양이다. 영화가 시작된 후에도 그건 보지 않고 광고지만 접었다 폈다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모자를 접어내고는 의기양양해하며 택승의 머리위에 올렸다. 뒷사람에게 방해가 될까봐 모자를 벗으려 해도 손을 붙들고는 그러지 못하게 한다. 결국 엉겁결에 손을 잡은 채로 영화를 보게 됐다.
역시나 관람객이 적은 영화에는 이유가 있나 보다. 무지하게 재미가 없어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자꾸만 그가 붙잡은 손에만 신경이 갔다. 입맞춤은 물론 갈데까지 갔으면서도 괜스레 가슴이 쿵덕쿵덕 떡방아를 찧었다.
마치 첫데이트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첫데이트라고 할수 있나. 비록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서 데이트라 이름 붙여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은 자유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덕분에 영화가 끝나고 나왔을때는 뭘 봤는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딴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며 나가는 걸로 봐서는 굳이 집중해볼 필요가 없었나 보다. 어쨌든 영화를 봤으니 이제 차를 마셔야 할 차례였다. 마침 바로 옆에 커피숍이 보여서 택승은 그곳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따라 들어온 하선연이 "커피 마실 겁니까?" 하고 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뭐 마실거냐 되물었다.
하선연은 메뉴판을 보는등 마는등 하고 말했다.
"아메리카노요."
반면 택승은 초콜릿 칩에 생크림까지 듬뿍 올라간 다디단 커피를 시켰다.
이왕 돈 주고 먹는거 맛있는걸 먹자 싶었기 때문이다.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는데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신 하선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쓴맛이 입에 안 맞는 모양이다. 사탕을 입에 물고 다니고 자판기 커피를 좋아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사실은 단것을 무지 좋아하는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택승은 자신의 커피를 그에게 밀어주었다.
"그거 드시지 말고 이거 드세요."
하선연은 아니라고 점잔을 뺐다. 그러더니만 조금 맛이나 보겠다고 스푼으로 생크림을 떠 입에 넣었다. 맛만 보겠단 것치고는 스푼이 무척이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쳐다보다가 택승은 툭하니 물었다.
"애초에 단 것을 시키지 왜 아메리카노를 시키셨습니까?"
물으면서도 사실 시침을 뗄줄 알았다.
그냥 맛만 본거라고 끝까지 우길거라 생각했는데 웬일일까, 하선연은 약간 망설이다 처음으로 솔직하게 이유를 털어놓았다.
"이렇게 빼입고 자바초콜릿칩프라페를 달라거나 화이트모카프라푸치노 같은걸 달라고 할순 없잖습니까."
자바초콜릿..... 뭐라고? 말하다가 혀를 씹을것 같은 메뉴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말한 하선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잘생긴 사람에겐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는 겁니다."
그가 제 입으로 대놓고 잘생겼다 말한것도 처음이었다.
듣기에 따라 무척이나 재수없을수도 있겠지만 평소 그가 얼마나 내숭을 떠는지 알고 있던 택승에겐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가식을 완전히 내려놓고 말을 하는것 같아서 그와 한층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듣고 보니 저렇게 잘 차려입고 생크림이 산처럼 올라간 음료에 빨대를 꽂아 쭉쭉거리면 좀 우스울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하선연은 눈썹을 들어 올리고 비웃는 거냐면서 그 핑계로 자기가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지를 한참이나 강조로 떠들더니만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살피는 시선으로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봐왔다.
"오늘 왜 나오라고 그랬습니까?"
문득 던져진 질문에 택승은 살짝 웃었다.
"그냥요."
그 대답에 "따라 하지 말고 사실대로..." 라고 말을 하는 하선연 보다 앞서 덧붙였다.
"보고 싶어서요."
그러자 조금 당황한듯 스푼을 커피잔에 땡그랑, 하고 부딪친 하선연이 잠시 침묵하다가 문득 커피잔을 들고 그걸 꿀꺽꿀꺽 들이켰다. 뜨겁지는 않다고 해도 얼음을 갈아 만든 거라서 꽤나 차가울 텐데도 단번에 마셔버렸다.
덕분에 머리가 띵한지 오만상을 쓰며 이마를 짚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날이 더운것도 아니고 이제 추운데 왜 저러나 싶어서 택승은 괜찮으냐고 물어 보았다.
그 말에 하선연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말 좀 함부로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사람 잡겠네요."
그러게 누가 차가운걸 그렇게 마시라고 했나. 그리고 함부로 한 말이 아니었다. 진짜 보고 싶어서 불러낸 건데 정색하고 그런말 하지 말라니, 안그러려고 해도 괜히 섭섭했다. 저 혼자 좋아하고 있는 거니까 어쩔수 없지 하고 스스로를 달랜 택승은 미처 또 촌병이라도 난 것처럼 벌게진 얼굴을 손등으로 훔치는 하선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오자 오후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직 저녁을 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계획한 대로라면 밥을 먹어야 할 차례였다. 걸으면서 택승이 "식사하러 가실래요?" 라고 묻자 가게 때문에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시계를 확인한 하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제가 사드리죠. 먹고 싶은것 없습니까?"
그 말에 택승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늘 얻어먹었으니까 제가 사드릴께요. 이 근처에 스테이크 잘하는집이 있다고 해서 알아뒀는데."
택승답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하선연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매번 선짓국밥이니 돼지국밥 같은것만 타령하다가 스테이크를 먹자는게 새삼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미심쩍다는 듯이 물어왔다.
"오늘 무슨 날입니까?"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자 "아니면 복권 당첨됐어요? 혹은 보너스라도 받았다든지." 라는 질문이 쏟아졌다.
이어 이거구나 싶은 표정으로 말을 했다.
"뭐 부탁할게 있는 거군요. 뭡니까? 뜸들이지 말고 말해 봐요."
그다운 추측이기는 했다. 갑자기 이유없이 불러내 영화보여주고 밥까지 사주니까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택승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무엇이든 들어줍니까?"
그 말에 하선연이 흠칫했다. 선뜻 들어줄 것처럼 말을 하더니만 막상 분위기 잡고 말하니까 걱정이 되나 보다.
분명히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발뺌할거라 생각했는데 하선연은 의외로 선뜻 대꾸했다.
"한번 말해 봐요."
순간 '절 좋아해 주면 안되겠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다. 그러나 아직은 할수 없는 말이었다.
적어도 시간이 흘러 그를 다시 만난 후에나 해봄직한 말이었다. 그래서 충동을 내리누르고 원래 하려던 말을 입에 올렸다.
"지갑 좀 줘봐요."
설마 지갑을 몽땅 털어가려나 싶었는지 하선연은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말한바가 있어 싫다고는 못하고 지갑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택승은 자신의 지갑 안에서 대일밴드를 꺼냈다.
그리고 그의 지갑안에 끼워 넣고 말했다.
"까졌을때 챙겨다니면서 붙이세요."
발에 흉생기는거 싫으니까... 라는 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도로 지갑을 받은 하선연은 다시 그것을 펼쳐보고 대일밴드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일순 그 얼굴에 어떤 일렁임이 스치는 것도 같았으나 곧 "그게 부탁이라면야 뭐, 들어줄 수밖에 없겠네요." 하고 거드름을 피웠다.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택승이 알아두었다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런데 입구로 들어서자 직원이 하선연에게 "오랜만에 오셨네요." 라고 아는 척을 해왔다.
그리고는 남자분과 같이 오신건 처음아니냐는 말을 덧붙였다.
유명한 곳이라서 예전에 종종 오곤 했었나 보다. 뭐,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택승은 별생각이 없었다.
반면 하선연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괜히 찔리는지 "그냥 아는 분들과 사업차 몇번 왔습니다." 하고 변명을 했다.
그러냐고 가볍게 대꾸하고 안내받은 자리로 가서 식사를 주문했다. 마실건 하선연이 사겠다고 해서 괜찮은 와인도 한병 추가했다. 오래지 않아 나온 음식들은 다 맛있었다. 와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향이 매우 좋은것 같았다.
어차피 뭐가 나와도 상관없긴 했다. 중요한것은 그와 같이 있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먹으면서 택승은 "그럼 이제..... " 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하선연이 먼저 말을 했다.
"이제 드라이브입니까?"
어떻게 알았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모를줄 알았느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말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난 다음에는 드라이브죠."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택승은 턱을 긁적이고 덧붙였다.
"많이 그래보셨나 봐요."
의표를 찔린 것처럼 하선연은 입을 다물고 딴청을 피웠다.그러다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가게에는 안 나가봐도 되는 겁니까?"
"오늘은 괜찮습니다."
그 대답에 하선연은 굳이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냥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고 택승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주차장으로 가 당연한 듯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운전하게 될거라 예상했던 택승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오늘 자신이 새삼스럽게 구는 것도 맞지만 하선연도 좀 새삼스러운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이런저런 핑계로 제게 미루었을 일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로 데이트 하는 것처럼 매너있게 굴어서 기분이 묘했다.
그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북한산 언저리의 드라이브 코스에 올랐다.
차를 타고 얼마간을 달려 야경이 근사한 곳에서 잠시 내리자 별보다 반짝이는 도시가 보였다 흩뿌려진 색색의 불빛이 수북하게 깔린 보석을 보는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제 주머니에 퍼 담을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택승은 나지막하게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그를 마주 보고 말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시간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뇨,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짐짓 점젆게 겸양을 보인 하선연은 오늘은 자기가 시간을 내줬으니까 택승씨도 꼭 시간을 빼놓으라고 말을 했다.
그러다 택승이 대답은 않고 물끄러미 바라봐오는 시선에 말하기를 그쳤다. 그를 바라보는 택승의 눈빛은 사뭇 묘했다.
늘 모든것을 고스란히 내보이다시피 하는 까만 눈동자가 오늘 따라 유난히 알쏭달쏭했다. 평소보다 더 솔직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행동 역시 그러했다. 항상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택승이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스스로 나선 적은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무슨 볼일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물어오는 말에 택승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다른 이유없이 그가 보고 싶어서 부른 거였다. 우연하게도 오늘이 박고영의 생일이기는 했다. 열여덟의 나이에서 멈춰버린 그의 생일을 택승은 쉬이 잊을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선연과 함께 있다 보니 더욱 그랬다.
박고영의 마지막 생일날, 그는 유난히 활기차 보였다.
초코파이에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들어 있는 초를 몽땅 꽂았다. 그 초의 개수가 진짜 나이가 될때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르겠지만 박고영은 하선연과 같은 대학교에 가길 원했다. 꼭 그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MT도 가고 동아리에도 가입해서 대학 생활을 누리길 바랐다. 첫사랑과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게 그의 유일한 바람이자 투병생활의 버팀목이었다.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이어갈수 있도록 살고 싶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견뎠다.
병마와 싸우며 시들어가는 그 모습은 차마 지켜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면서도 살고 싶어하는 그 간절한 마음을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다. 박고영이 조금 더 자신의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미안해질 정도로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것 같았다. 어떻게든 살고 싶었던 마음을 말이다. 택승은 가만히 하선연의 얼굴을 응시했다. 야경의 빛이 반사된 그 모습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겼다.
이미 보지 않고도 그릴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얼굴이지만 매 순간 새로워지는 탓이다. 덕분에 그와 만나지 못하게 될 시간동안 그의 모습을 놓쳐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택승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그러잡고 제 결심을 곱씹었다. 마침내 수술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를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이후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언제 찾아들지 모르는 죽음을 안은채로 그의 마음을 달라 할 순 없었다.
아무리 죽음을 예측할 수 없는게 사람의 삶이라지만 적어도 피하려는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택승도 제 삶에 미련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를 포기할수 없게 된 이상 더는 제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을수가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서 그를 계속, 계속 좋아할 수 있기를 바랐다. 포기하지 않고 갈구해 이윽고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 마음을 담아서 택승은 간절히 하선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서린 희망과 두려움을 읽은듯,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혼란과 불안이 얼굴을 잠시 스치고, 하선연은 무언가를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참지 못해 성급해진 말이 입밖으로 흘러나오려는 순간.
"에취!"
재채기를 한 택승은 코를 훌쩍거렸다. 한참 좋다가 어째 분위기를 깨버린것 같아서 적잖이 민망했다.
그렇지만 날씨가 꽤 추워진 탓에 높은 곳에서 있노라니 제법 쌀쌀했다. 어느새 몸이 식어버려 더욱 그랬다. 코를 한번 문지르고 택승은 혹시나 제게 무슨 말을 하려 했나 싶어 물었다.
"아까 무슨말 하시려던 건....."
"여태까지 잘해놓고 왜 마지막 코스는 빼먹는 겁니까."
"네?"
그가 손가락을 까닥까닥해서 뭔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던 택승은 확 뻗쳐온 손에 뒤통수가 딸려 가는걸 느꼈다.
자연스레 눈이 감기고 입술에 입술이 와닿았다. 입술이 포개지자마자 머릿속에서 생각이 사라지며 희미한 감탄만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어쩌면.... 이렇게나 달콤할까.
생크림이 올라간 커피보다 더, 딸기 맛 사탕보다 더,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의 입술이 달았다.
짧고도 깊게 겹쳐졌던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데이트 마지막 코스인 키스가 빠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이 떨어진 직후의 미묘한 쑥스러움과 어색함 속에서 눈꺼풀을 내리깔고 있노라니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좋아한다면서 먼저 좀 덮쳐 봐요."
항상 자기가 키스한다는 느낌이 들기라도 했나 보다.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일단은 수술후에 건강해지고 볼일이다. 그때는 싫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으면서 택승은 잠자코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가 잦아들 때 쯤, 조용히 인사를 건네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하선연씨."
이름이 불린 탓인지 그는 조금 새삼스럽게 쳐다봐왔다. 그 눈을 마주 보고 살짝 입술을 들어 올린 채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들어가 보시라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 뒤 그가 떠나길 기다렸으나 조금 아리송한 표정이 된 하선연은 선뜻 떠나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을 해와 택승은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만큼은 자신이 그를 배웅하고 싶었다. 결국 아무리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버티자 하선연이 마지못해 출발했다.
깜박거리며 멀어지는 까만색 아우디의 미등 불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택승은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가 입술에 남긴 여운이 느껴졌으나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조각 남아 있던 불안까지 빗자루로 쓸어내듯 싹싹 털어버리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
"음."
조그만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낀 여직원은 나이가 꽤 지긋했다.
주로 예물을 취급하는 고급 보석상이다 보니 고객들이 새파랗게 어린 직원을 꺼리는 탓이다.
덕분에 그녀는 꽤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간 정.재계 인사를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지만 개중에도 눈앞의 남자는 꽤 인상 깊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배경은 둘째치고, 개인적인 감상만으로 여태껏 본 남자중 유일하게 보석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사한 머리카락과 밝은 피부결은 물론, 긴 속눈썹에 어우러진 옅은 색눈동자가 고상하고도 화려했다.
날렵한 얼굴선과 우아한 몸매가 아주 세련된 데다 옷차림 또한 무엇하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매번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기대가 될 정도였다. 보석을 고르는 안목 역시 탁월해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다만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절대로 반지만은 사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목걸이며 귀걸이며 무엇이든 이거다 싶으면 가격을 상관하지 않았으나 매번 다른 사람을 위한 선물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하긴, 한여자에게 머물만한 이유가 없기는 하다. 저런 얼굴이면 나라도 그러겠다고 생각하면서 여직원은 오랜만에 나타난 남자를 맞았다. 그 인사를 받은 그가 곧장 입을 열어 요구를 해왔다.
"반지를 좀 보고 싶은데요."
여직원은 조금 놀랐지만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그를 반지가 진열된 곳으로 안내했다. 주로 약혼이나 결혼 프러포즈에 사용되는 다이아반지가 모인것을 보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남성용으로 보고 싶습니다."
본인이 낄건가? 그다지 반지같은 장신구를 즐기는것 같지는 않아서 좀 의아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남성용의 반지를 보여주었다. 여성용보다는 아무래도 수요가 적어서 종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걸 보고 마뜩잖은 표정을 짓더니만 다른 것은 없느냐고 물어온다.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게없는 모양이라 여직원은 몇개 진열대에 내놓지 않은 상품을 보여주었다.
별도로 구매할 고객이 있거나 아니면 판매가 되지 않아 다시 세공될 제품들이었다. 그것을 한동안 살펴보던 남자는 마침내 어떤 반지를 집어 들었다.
분명히 그에게 어울리는 화려하고 큼직한 반지를 고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였다. 링에 조그만 다이아몬드 하나가 박혀있는 아주 단순한 반지였다.
너무 수수하지 않나 싶었지만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그것을 손안에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불쑥 질문을 던졌다.
"첫 고백에 반지는 부담스럽습니까?"
여직원은 약간 당황했다.
반지나 예물같은걸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까 여러가지 고민에 맞닥뜨린 사람들을 많이 보기는 했다.
고백을 고민하는 사람부터 결혼을 갈등하는 사람까지, 가끔은 당신이라면 어떡하겠느냐는 식의 질문을 받기도 해 질문 자체는 크게 놀랄것 없었다. 단지 그게 눈앞의 남자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연애문제에 한해서는 보석을 고르는 것처럼 아무 망설임 없을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덕분에 얼결에 본심을 말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대답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부담스럽지 않다고 해야 남자가 편지를 구매할 텐데 당혹해서 그 사실을 잊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단은 잡아놔야 할 테니까 포장부탁드리빈다."
말하는 걸로 봐선 어지간히도 맘이 초조한 모양이다. 그런데 포장해 달라는게 남자반지라서 좀 의아했다.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여직원은 내색 않고 반지를 닦아 정성스레 포장한 뒤 결제를 부탁했다. 카드를 내민 남자는 하선연이라고 제 이름 석 자를 쓰고 반지를 받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보석상을 나왔다.
주차된 차를 찾으러 건물 밖으로 발길을 옮기던 하선연은 쨍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추운지 귀 끝이 조금 빨개졌으나 꿋꿋하게 등을 펴고 걸었다. 차람새가 약간 썰렁해 보여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멋쟁이는 여름에 쪄죽고 겨울에 얼어 죽는 법이다. 패딩 같은건 아무리 추워도 스키장 갈때까 아니면 입지 않는 그였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하선연은 문득 어느날 남성복 매장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쇼윈도에 진열된 심플한 회색 코트가 눈길을 끌었다.
소재도 보드라워 보이고 매우 가벼울 것 같았다. 이미 비슷한 코트가 있는 그였으나 선뜻 발길이 가게 안으로 향했다.
곧 마중 나온 직원이 가져다준 코트를 직접 만져보았다. 축감도 아주 부드럽고 핏도 훌륭했다. 포장해달라고 말한 하선연은 잠깐맘요, 하고 덧붙였다.
".....저쪽의 니트와 바지도 같이, 아 저 신발도 포장해 줘요."
코트와 어울림 직한 옷을 한벌 사서 다시 가게 밖으로 나가 걷노라니 이번에는 스포츠 웨어 매장이 보였다.
두툼한 패딩이 눈길을 끌었다. 미관상으로는 별로라도 따뜻하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하선연은 코트가 담긴 쇼핑백을 한번 내려다보고 어깨를 으쓱한 뒤 스포츠 웨어 매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패딩과 티셔츠, 청바지를 두 벌 샀다.
운동화와 장갑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그 매장을 나왔을땐 양손에 쇼핑백이 주렁주렁했다. 그러다 전자 상가 앞에서 또 발길을 멈췄다. 온열 기구가 그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그는 거의 안으로 발을 들일 뻔했으나 짐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발길을 옮겼다. 몇 미터 안 되는 거리를 한 시간 만에 도착한 하선연은 뒷자석의 쇼핑백을 내려놓고 문득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통화목록을 보면서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망설이게 하는 건 수영복 입은 사진이 저장되어 있는 한 남자였다. 용건 없이는 통 먼저 전화하거나 문자를 보내지 않는 그다.
오늘은 아침에 문자를 보냈는데도 여태껏 답이 없었다. 하선연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통화버튼에 손가락을 오락가락 했다. 그러다 혀를 차며 핸드폰을 옆자리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시동을 걸어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오피스텔에 도착해 자신의 집으로 올라간 그는 짐을 놓고 샤워부터 했다. 그런뒤 스킨케어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기타 등등 일련의 일을 마친 후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앉은 자리 맞은편에 걸린 밤 비행기가 보였다
원래는 저쪽 빈 벽에 붙어 있던 거였는데 얼마 전에 옮겨 걸어두었다. 그것을 한동안 물끄러미 보던 하선연은 다시 핸드폰을 확인해보았다.
이어 아무 연락도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아예 전원을 거버리고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기 위해 오디오를 켰다.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왔으나 클래식이라서 그런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통 졸업가로 많이 불리는 스코틀랜드 민요가 흘러나오자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한참 무언가를 되짚어보듯이 골몰하던 하선연은 몸을 돌려 서재로 들어갔다. 책이 쭉 꽂혀 있는 책장 앞에 선 그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하지만 찾는게 없는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다시금 몸을 돌린 그가 뒤진 곳은 창고였다.
거기에 이런저런 쓸모없는 것들, 혹은 미관을 헤치는 물건들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사투를 벌이며 그곳의 박스를 모조리 뒤집은 결과 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고등학교 졸업앨범이었다. 선 자리에서 곧장 졸업앨범을 펼쳐 든 그는 페이지 한가운데 흰 편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희다기에는 어패가 있었다. 모퉁이가 까맣게 닳아서 전체적으로 손떼가 타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여기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에 선이 그려졌다.
앨범과 함께 편지를 들고 소파로 돌아온 하선연은 자리에 털썩 앉아 편지를 앞뒤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편지에는 뜯어진 자국이 없었다.
받은 직후 앨범에 끼워 넣고 무심하게 잊어버린 탓이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앨범조차 한번 펼쳐보지 않았다.
하선연은 단단히 밀봉되어 있는 편지를 뜯기 시작했다. 되도록 봉투가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런 손길이었으나 별 소용 없었다.
이윽고 봉투가 열리자 그 안에 고여 있던 십 년의 세월이 스르륵 흘러 나왔다.
안에 든 것은 봉투와 마찬가지로 하얀 편지였다.
3학년 2반 하선연에게, 라고 소박하게 출발한 편지는 특별할게 없었다.
지켜봐 왔고 좋아한다는게 하고 싶은 말의 전부였다.
대답을 바라진 않은듯 이렇다 할 요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선연이 글줄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내용에 별스러움이 없는 탓은 아니었다.
편지가 짧아 채 몇 줄을 읽기도 전에 맨 밑에 쓰여 있는 이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하선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럴리 없다는 듯 편지 말미에 적힌 이름 석자를 뚫어지라 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그곳에 적힌 이름이 달라지는건 아니었다.
박. 고. 영.
다소 생소한 이름 세 글자가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정지화면이라도 된 것처럼 거기에 시선을 못박고 있던 하선연은 손에서 편지를 떨어트리고 졸업앨범을 뒤졌다.
서둘러 책장을 넘기는 손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러다가 그만 칼날과 다름없이 날카로운 종이에 손끝을 베이고 말았다.
"읏" 하고 짧은소리를 내뱉으며 책장을 놓친 그는 그곳에서 찾고 있던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택승이었다.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에 약간 어색하게 눈을 뜬 얼굴이 놀란 사람처럼 보였다. 앳된 뺨과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수줍은 기색이 바람결에 책장 넘어가듯 옛 기억을 화라락 불러일으켰다.
징글벨 소리가 울리던 패스트푸드점 특유의 냄새와 벗꽃이 날리던 운동장의 눈부심. 도서관에서 스쳤던 뜨거운 손끝의 촉감, 그리고 크레파스 맛이 난다고 중얼거리던 목소리까지....
멍청해져있던 하선연은 택승의 바로 옆에 박혀 있는 이름 세글자를 발견했다.
박고영.
여자아이처럼 조르만 얼굴을 어디선가 보았다. 제 기억속에서가 아니라 예전 택승의 옥탑방에서본 사진첩 안에서였다.
택승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있던 사진.
마치 물벼락을 맞은듯 머리가 싸해졌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추운데 불러내서 미안..... 줄게 있어서.'
코끝을 시리게 하던 겨울바람과 흩날리던 진눈깨비 그리고 눈꺼풀을 내리깐채 조용히 웃던 얼굴.
크게뜨인 하선연의 눈동자가 황망해졌다.
그의 무릎에서 졸업앨범마저 미끄러져 떨어지고, 대신 아무렇게나 얹힌 손가락의 피가 그의 바지에 붉은 자국을 만들었다.
그 자국이 엄지손톱만 하게 켜질 동안 하선연은 꼼짝하지 못했다. 그의 발치에 구르는 편지를 주워 다시 읽어볼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멍한채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제가 그렇게 좋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직접 고백하기 전에는 단 한번도 자신의 질문에 긍정을 한 적이 없다. 부정을 하면 부정을 했지 먼저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좋아서요.'
'이런 말 죄송하지만.....관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선연은 아찔함을 느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생각나는 단어라곤 단 한 가지였다.
오해 혹은 착각.
순간 몸속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한번도 그런 류의 직감을 틀려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창피해할 일이건만 어찌된게 맘이 서늘했다. 그러다 오래지 않아서 그에게 고백받았음을 떠올리고 맘을 달랬다. 시작은 오해였을지언정 결과는 아니다. 예전일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이 중요하다고 애써 생각하던 그때.
불현듯 전화벨이 울렸다.
하선연은 떨어진 졸업앨범과 편지, 그리고 봉투를 두리번 거리다 일단은 전화를 받으려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함은이 약간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핸드폰을 꺼두셔서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나중에 하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오피스텔에까지 전화를 한 걸 보면 급한 일인 모양이다. 그래서 하선연은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얼마 동안 그녀의 설명을 듣고 서있던 하선연은 지금 바로 가겠다 말한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재킷과 차 키만을 챙긴채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거실을 돌아보는 그의 시선 끝에 편지가 떨어져 있었다. 순간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길을 거두고 그는 현관문을 나섰다.
잠시 후, 무시무시한 속도로 차를 몰아 화랑에 도착한 하선연은 달리다시피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를 보고 울적한 표정으로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함은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시계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아니 어떻게 벌써 오셨어요? 아까 오피스텔에서 전화받으신거 아니에요?"
하선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한숨을 푹푹 쉬며 쳐다보던 종이를 낚아챘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내용을 훑는 동안 옆에서 이함은이 울상을 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출근을 안한것 같더라고요. 무슨일 있나 싶어 전화해보니까 전화기도 꺼져 있는 상태고..... 내일도 안 나오면 사장님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서랍에 이런게 있지 뭐예요."
그것은 일종의 사직서였다.
펜글씨 교본에 대고 쓴것처럼 반듯한 글자가 일신상의 이유로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통보하고 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말투가 참으로 정중했다. 그러나 그 정중함이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하선연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우리가 뭐 섭섭하게 한거 아니냐며 한숨을 쉬던 이함은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마저 입을 다물자 화랑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김택승이라는 이름 석글자가 박혀있는 그 글씨체는 하선연이 졸업앨범에서 꺼낸 편지의 글씨체와 확연하게 달랐다.
누가봐도 서로 다른 사람이 쓴게 분명했다.
그것을 깨달은 하선연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편지를 확 구겨 움켜쥔 채로 그는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사장님, 어디 가세요!" 하고 소리치는 이함은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게 나을수도 있었다. 만일 지금 뒤를 돌아보았더라면 겁을 집어먹을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화랑을 나서 차에 올라탄 하선연이 갈곳은 한군데였다. 다름아닌 택승의 옥탑방이었다. 주차위반을 신경쓰지 않고 차를 아무렇게나 버려둔채 골목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낡아빠진 맨션의 계단을 두개씩 올랐다. 그리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 옥상을 가로질러 다 무너져가는 옥탑방에 도착했다.
문을 부술 듯 세찬 기세로 달려와 놓고 막상 하선연은 멈칫했다.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문채로 한동안 숨을 고르고 표정과는 달리 침착하게 문을 두드렸다. 물론 그것은 잠깐이었다.
아무런 답도 없자 문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김택승씨! 김택승씨!"
불러도 답없는 이름을 연거푸 외치다가 하선연은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멘트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몇번을 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옥탑방에도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결국 몸을 돌린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차에 올랐다. 바퀴의 마찰음이 공기르 찢어놓을 정도로 세게 핸들을 꺾고는 매일같이 택승이 출근하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가게에 도착했을때 하선연의 수명은 십년쯤 늘어나 있었다. 격렬한 난폭운전으로 다른 운전자에게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었기 때문이다. 아마 과속카메라에 찍힌 딱지만도 여러장일 테다.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차장 한가운데 차를 던져두고 하선연은 이제 막 오픈 준비를 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가는 그를 보고 직원이 나와서 "손님, 아직 오픈하기 전인데요." 라고 말을 했으나 듣지 않았다.
곧장 바에 앉아 있는 강유형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기세가 심상치 않은 하선연을 보고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신지....."
하선연은 소리를 치지 않으려는 듯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했다.
"김택승씨 어디 있습니까."
눈썹을 찡그린 강유형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연락이 안 되나요?"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하선연이 내뱉는 말에 강유형의 낯빛이 일변했다. 그것을 본 하선연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강유형의 반응을 보고 지금 상황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사태 파악이 안되는듯 강유형은 핸드폰을 꺼내 택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가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멘트를 듣고 하선연을 스쳐 지나면서 내뱉었다.
"집에 가봐야....."
그러다 우두커니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하선연이 그의 집에 안들렀을리 없다는데 생각이 미친 모양이다. 그리고는 당혹스러움과 염려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주 금요일에 가게를 관뒀습니다. 복학하기전에 잠시 쉬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그래서....."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보냈다는 거였다.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자책이 그의 얼굴을 점령하자 하선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강유형에게서 알아낼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몸을 홱 돌려 가게를 나왔다. 그런뒤 다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어 액셀을 콱 밟았다. 하지만 기어를 움직이지 않아 타이어 미끄러지는 소리만 요란하게 났다. 곧 욕설을 내뱉으며 운전대를 쾅 내려친 하선연은 기어를 바꾸려고 손을 내렸다.
한데 이곳을 떠난다 한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수 없었다.
김택승에 관해 아는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탓이다. 이미 관둬버린 편의점에 갔을리는 없고 집, 화랑, 가게 이외에 어디갈 곳이 있는지 하선연은 알지 못했다. 그 사실에 분노가 끓어오르는듯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나 여유만만하게 웃고 다니던 그 표정이 아니었다. 남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적 없는, 아니 자신에게조차 보여준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차창에 비친 제얼굴을 하선연은 참을수 없는 것처럼 손을 들어 가렸다.
그러다 그 손을 꽉 움켜쥐었다.
결국 마땅히 갈곳을 찾지 못해 별수 없이 택승의 옥탑방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어두컴컴하게 불이 거져 있는 문을 몇번 두드리다 무작정 기다릴태세로 난간에 걸터 얹았다. 그러자 지난 늦여름에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그를 한차례 스치고 지나쳤다. 하지만 실제로 스치는건 겨울냄새 가득한 찬바람 뿐이었다.
옷도 얇게 입은탓에 한자리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 이쪽저쪽을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시선이 옥상에 있는 여러가지 물건위로 머물렀다 떨어져 갔다. 장난감처럼 작아서 위험해 보이는 버너와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플라스틱 의자, 재떨이 대신인것 같은 캔과 다 지그러진 양철 세숫대야 같은 것들이 그의 시야를 스쳤다.
모든것이 궁색하기 짝이 없어 순간 그의 눈가가 약간 흐려졌다.
전에는 어째서 이 사실을 몰랐는지 알수 없었다. 다른 것이라곤 오로지 김택승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 말이다. 그것에 의문을 느끼듯 하선연은 다시 한번 찬찬히 옥상의 풍경에 눈길을 주었다.
김택승이 라면을 끓여먹는 냄비와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 수돗가와 그의 속옷이 널려있던 빨랫줄 같은 것들을 눈여겨 보았다. 밝은 여름의 햇살아래 그 모든게 잠시 빛나는 듯했지만 곧 불어오는 찬바람에 사라져버렸다. 옥상은 비어 있었고 김택승은 이곳에 없었다.
하선연은 한참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맴을 치기도 했다. 그러다 나중엔 난간에 걸터앉아오로지 맨션으로 들어오는 길목만을 쳐다보았다. 많은 사람이 그의 시선을 지나쳤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배달부와 강아지 목줄을 끌고 가는 아저씨, 늦은밤 귀가하는 직장인과 술에 취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하선연이 기다리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깊어 길에 지나는 사람이 없어지고, 주변에 불빛들 마저 하나둘 사라질 때까지도 하선연은 그 난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차갑게 얼어버릴 동안에도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뿐이다. 견디다 못해 소용없다는걸 알면서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또다시 반복되는 안내메시지...
죄없는 핸드폰을 부수기라도 할 듯 움켜쥐었던 하선연은 이를 악물고 재차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핸드폰줄이 떨어지고 없었다. 고리마저도 어느틈에 사라져 있었다. 김택승에게 받았던 거라서 하선연은 당황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너무 어두워 바닥에 뭐가 떨어져 있는지 찾을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찾다가 옥상 한가운데 우두커니 멈춰 섰다.
단순히 핸드폰 줄을 잃어버린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더 중요한걸 잃어버린 표정 같았다.
무언가가 지극히 불안한 듯, 그 얼굴에 두려움이 얼룩져갔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쥔 하선연은 몸을 휙 돌려 다시 옥탑방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에 아무도 없다는걸 몇번이나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김택승씨! 김택승씨! 나와 봐요... 택승씨!"
그러다가 제 분을 못이겨 문을 쾅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그러자 덜컹거리며 진동하던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자물쇠나 손잡이가 망가지지 않은걸로 봐서는 부서진건 아니었다. 애초에 잠겨 있지 않은 모양이다. 왜인지 문을 두드리기만 하고 당겨보지를 않았던 하선연은 혀를 차며 문을 열어젖혔다. 곧 까만 어둠이 내린 조그만 사각의 공간이 보였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켜자 징- 하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면서 아무도 없는 빈방이 보였다. 정리할것도 없는 작은 방이라지만 무척이나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머리카락 한올 없었고 나와 있는 옷 역시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김택승의 물건이 남아 있어 하선연의 얼굴엔 희미한 안도감이 떠올랐다. 사실 그가 이사를 했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짐이라고 해봤자 박스 몇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종적을 감춰버린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언젠간 돌아오겠지 하고 하선연은 방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입술을 깨문채로 망부석처럼 앉아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 얼굴 위로 무수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무엇을 곱씹는지 오래지 않아 으드득, 하고 살갗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픔을 참듯 내리감은 눈꺼풀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무릎에 올린 주먹에도 희게 뼈가 도드라졌다. 무엇이 그를 이런 상황속에 빠트린 건지는 명확했다. 다름 아닌 자만심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단서라도 찾기 위해 곱게 접혀있는 박스 뚜껑을 열어젖혔다.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더라도 김택승이 어디 있는지 찾을 기세였다. 그러나 그 손은 금방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박스안에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겉에는 <유형이 형에게> 라고 쓰여 있었다. 당장 하서연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는 턱을 깨문채로 상자를 박스에서 끄집어냈다. 성급한 손길에 내용물이 바닥으로 투두둑 떨어졌다. 안에들어 있던 것은 몇가지가 되지 않았다. 메모 한장과 편지봉투, 그리고....... 입술보호제였다.
예전에 하선연이 사주었던 입술보호제가 데굴데굴 굴러가 바닥에 부딪쳐 멈췄다.
하선연은 그것을 뚫어지게 보다가 손을 뻗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쓰다만 몸통이 닳아있었다. 잃어버린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연이어 메모와 편지봉투를 주워들자 그 위에 간단하게 적힌 말이 눈에 들어왔다.
- 이걸 보시면 제 소식을 들으셨을텐데 물건은 적당히 처분해주시고 예금은 제가 자란 곳에 맡겨주세요. 마지막으로 나머지는 그냥 하선연씨에게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그동안 죄송했고 감사합니다.
그것을 읽는 하선연의 눈동자가 심하게 출렁거렸다. 메모의 뉘앙스가 사뭇 이상했다. 마치 다시 돌아올 사람 같지 않은 말투였다.
짐이 고스란히 있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그의 예측이 빗나간 내용이었다. 그 메모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하선연은 잘 놀려지지 않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열었다. 박고영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풀로 꼭꼭 붙여놔서 열기가 힘들었다. 거의 찢다시피 하고 봉투를 열어 편지를 펼쳤으나 읽을 것은 없었다. 편지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 더 이상 당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붙은 씰 한장, 그 아래 적힌 이름 석 글자.
김 택 승
하선연은 머리라도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많이 좋아한다는 그말에 이기적으로 굴어버리고 만 것을 죽도록, 죽도록 후회했다.
*
갑작스레 몰아닥친 한파로 거리가 무척이나 썰렁했다.
때이른 추위에 사람들은 옷깃을 꼭꼭 여몄다. 행여나 찬바람이 들어올까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종종걸음을 치기 바빴다. 꽉 다문 입술에서 새어나온 하얀 입김이 허공에 흩어져 마침내 세상의 모습은 겨울이 되었다.
그 가운데를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이 추위에 무척이나 얄팍한 옷차림이었다. 셔츠와 재킷 한장. 거기다 맨발에 구두. 쳐다보는 것만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셔츠단추마저 열려있어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남자가 추워 보이는것은 비단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자의 표정이 겨울만큼 스산했다. 그는 막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병원에서 좋은 소식을 안고 나오긴 어려웠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럴줄 알았으면 차라리 모를걸 그랬다. 모를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럴수 없었다.
회색의 뒷모습을 하고 남자는 천천히 걸었다. 바삐 길을 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만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 발걸음이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무겁고 괴로운 감정이 그 발목에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질질 끌리는 발을 힘겹게 움직이는 남자의 마른턱에서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가늘게 흘러나왔다. 마치 숨쉬기 힘든것처럼 가쁜 숨소리가 희미하게 색색거리며 들렸다. 누가 들었다면 폐가 안좋거나 심장이 나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자가 병원에서 안고 나온 소식은 본인에 관한건 아니었다.
오래전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몸에 커다랗게 그때의 흉터가 남아있어 모를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이 아직도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워낙 부지런하고 체력도 좋아서 타고난 건강체라 여겼다. 조금도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아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남자는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그럴만도 한게 그가 사라지고 나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실은 가만히 있을수 조차 없어 쉼없이 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다리가 천근같아 잠시 발길을 멈추거나 어디 앉아 쉬는게 좋을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도무지 멈춰설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발이 아닌 마음이 그를 쉬지 못하고 걷게 했다. 잠시라도 주저할 때면 이루말할수 없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심장마저 멈출지경이라 걷는수 밖에 없었다. 아니,정확히는 헤매고 있었다.
후회를 돌이킬 방법을 찾아서. 하지만 그런 방법은 보이지 않았고 그는 계속 헤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멍하게 걷던 남자는 무언가 눈앞을 스치는걸 보았다.
벚꽃잎인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이 연이어 떠올랐다.
이 계절에 벚꽃이 피었을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벚꽃잎이 아닌 진눈깨비 였다.
허여멀겋게 흐린하늘이 차가운 얼음조각을 뿌리고 있었다. 그것이 따갑게 뺨을 찌르는걸 느끼고 걸음을 옮기려던 남자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시야를 흩트리는게 벚꽃잎이 맞나 보다. 눈앞에 커다란 벚나무가 한그루 보였다. 봄의 절정에 이른듯 화려하게 만개해 흩날렸다.
바람이 불때마다 화르르 꽃잎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뿐 남자가 보고 있는것은 건물 외벽에 장식된 커다란 판넬이었다.
<봄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간단한 문구와 함께 벚나무가 그려진 판넬이 풍경처럼 서 있었다. 한동안 그 앞에 우두커니 발길을 멈춰 세운 남자는 더이상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교정에 만개한 벚꽃을 보는중이었다. 나이는 열여덟. 뒤집어지는 머리카락이 인생 최대의 고민인시절, 만발한 벚꽃이 그것을 잊게 해줬다.
창가에 턱을괴고 앉아 답지 않은 감상에 빠져있던 그는 문득 분위기깨는 광경을 보았다. 누가 등뒤에 커다랗게 [똥]이라고 쓴 종이를 붙이이고 지나가고 있었다. 녀석은 평소좀 얼이 빠져 있어 저런 장난질을 자주 당했다.
아까 1교시 무렵부터 지금까지 붙이고 있는걸로 봐선 진짜 얼빠진 놈임이 틀림없다. 지나가는 녀석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웃는데도 눈치를 못챈다. 그냥 내버려두면 분명히 집에가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릴 테다.
어떻게 저걸 모르나 싶어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러다 녀석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까만 머리통이 어째 좀 낯이익었다. 분명히 학교 밖에서 본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턱을 괸채로 머리를 기울이며 기억을 더듬던 그는 문득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녀석과 지나치던 까만 머리통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등뒤에 붙어있던 종이를 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반으로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하다못해 뗀 종이를 보여주며 놀리지도 않았다.
남을 도와준 기분에 괜히 생색을 내며 뿌듯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냥 밥을 먹듯이 무심하게 보이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무심하다고 생각할수가 없는게 저 바보같은놈이 온종일 놀림거리를 붙이고 다녀도 누구하나 신경쓰지 않은 탓이다.
그냥 킬킬거리며 웃기 바빴지 수많은 동급생중 단 한명도 그걸 떼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까만 머리통을 한 저녁만이 그렇게 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걸로 봐서는 아는 사이 같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놈은 제 등에 뭐가 붙었다 떨어진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덕분에 이상스레 묘한 장면을 본 기분이 들었다. 남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에 감탄할 때와 비슷했다.
여자애의 가느다란 손목이 움직이는 거라던가, 계단을 올라갈때 드러나는 복사뼈를 볼때와 유사한 느낌이었다.
봄이라서 그런가, 하고 귀를 만지작거리던 중 그는 곧 까만 머리통을 한 녀석을 어디에서보았는지 기억해냈다. 지난 겨울방학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백원이 모자란 적이 있었다. 카드로 결제하려 했는데 안되기도 하고, 마침 주문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또래로 보여 백원만 깎아달라고 시답잖은 소리를 했다. 대신 씰을 주겠다고는 했지만 그냥 해본 말에 가까웠다.
본인 가게도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이 멋대로 깎고 말고 할일이 아니란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없이 씰을 가져가더니만 진짜로 백원을 깎아주었다. 대신 제 백원을 채워 넣는것 같아서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머리에 쓴 이벤트용 머리띠가 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귀여워 인상 깊었다.
뒤늦게 같은 학교였구나....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모처럼 흥미로운 일이 생긴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왜인지 짧게 깎은 까만머리를 눈으로 뒤쫓게 되었다.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학교 앞에서, 동그란뒤통수만 보이면 시선이 먼저 달려나갔다.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나눈적도 없고 친구라 말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으나 사소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무심하면서도 은근한 성격이라든지,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다닌다든지, 입술을 무는 버릇이 있다든지 하는 것들을 말이다. 특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입술이었다. 항상 부르터 울긋불긋해 괜히 눈에 거슬렸다.
조금이라도 당혹스럽거나 쑥스러운 일이 있을땐 입술을 문채로 눈을 내리깔곤 했는데, 어쩌다 입술을 빤다 싶으면 어김없이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불그스레한 그 빛깔이 가끔은 야릇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인지 이후로는 무언가를 바른 입술을 싫어하게 됐다.
그전에는 여자들이 빨간 립스틱을 바른 모습을 관능적이라고 여겼다. 한데 그 생각이 언제부터 바뀐 건지는 깨닫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부르튼 입술이 남은 탓이라는 걸 모르고 어쩌다 입술에 립스틱이 묻어나면 그걸 닦아내기 바빴다.
유년시절의 기억이 성격을 결정하듯, 사춘기시절의 기억이 취향을 결정한 모양이다.
그래서 무심할 수 없었다. 짧게 깎은 까만 머리도, 눈꺼풀을 내리까는 미소도, 웃다가 툭하면 찢어지곤 하는 입술도, 모두 마음을 채웠다. 어쩌면 그의 모습이 십년전부터 간직해온 자신의 바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독히도 춥던 그 겨울날 졸업식에서 보았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은 닫혔다.
언제나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에게 열여덟 찰나의 일은 큰 의미가 없었다. 연애나 사랑도 모두 즐거운 일로만 생각하고 진심 같은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바보 같은 짓을 했으며, 지금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
그 단어가, 그 감정이 낯설어 남자..... 그러니까 하선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병원을 나와 황망한 기분에 미처 차를 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비로소 차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병워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정신빠진 사람처럼 거리를 걸을수도 없어 택시를 붙잡았다.
차에 올라타자 훈기가 끼쳐오며 얼어붙었던 살갗이 따끔거렸다. 그것을 쓸어 만지려니 택시기사가 물어왔다.
"어디로 갈까요?"
그는 선뜻 대꾸하지 못했다. 그걸 알았더라면 이렇게 넋을 놓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쉬이 입을 열지 않자 목적지를 재차 물어와 결국에는 그냥 화랑으로 가자고 말을 했다.
얼마간 도로를 달려 화랑에 도착했을 땐 온몸이 물먹은 솜 같았다.
정작 찬바람을 맞으면서 돌아다닐땐 모르겠더니 히터 바람을 맞으니까 어깨가 축축 쳐졌다. 당장에라도 쓰러질것 같은 몸을 끌고 대문으로 들어선 하선연은 푹푹 꺼지는 발로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발 아래서 메마른 풀들이 버석거리며 부서지고, 마른 나뭇가지 사이를 윙윙거리며 불어온 바람이 목덜미를 찬손으로 어루만졌다. 그 손이 벌어진 옷깃에 파고드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걷는데 그리 넓지 않은 정원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할수만 있다면 그냥 이곳에서 쓰러져 쉬고 싶었다. 피로와 불안에 지쳐 정신이 아득해졌다. 메마른 혀에서 느껴지는 맛이 불길하기까지 했다.
결국 하선연은 동작을 그쳤다.
그렇게 멀거니 서있어도 생각만은 계속 맴을 쳤다. 아무리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봐도 항상 결말은 제자리였다.
한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게 후회의 특징인것처럼 벗어날수 없었다.
마치 덫에 갇힌것만 같은 기분에 몹시도 답답해졌다. 추운 날씨에 재킷 하나 구두하나 입었을 뿐인데 족쇄에라도 매인양 갑갑했다.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다 아예 손가락을 걸어 다 뜯어내도 마찬가지였다. 구두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싸늘하게 식은풀의 시체를 밟아봐도 그랬다.
이렇게까지아무것도 할수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사람의 환심을 쉽게사는 외모와 부족함 없는 돈, 그리고 타인의 맘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성격때문에 여태까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인생을 살았다. 적어도 필요한게 있다면 무엇이든 가질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아무리 가진것이 많다 해도 김택승에게 해줄수 있는건 없었다. 그러자 제가 가진 모든것이 다 무익하게 느껴졌다.
진정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공허감이 찾아들었다.
텅 비어버린 속으로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라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깊은 어지럼증이 찾아들었다.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고만 하선연은 잔디속에서 무언가를 밟았다. 살갗속을 파고드는 아픔이 날카로웠다.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떠 발밑을 내려다 보니까 여기서 보리라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핸드폰 줄이었다. 하선연은 발의 아픔도 잊고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들었다. 밟는 바람에 핸드폰 고리에 달린 조그만 나무인형의 얼굴이 부서져 있었다.
까맣게 칠해진 머리가 어쩐지 김택승과 닮아 보여서 샀는데 그만 자신이 망가트리고 말았다. 비단 나무 인형만이 아니다. 김택승과의 관계도 제가 망치고 말았다. 그가 위해주는 모든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가 했던 말 행동, 눈빛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고 무심코 넘겨왔다.
심지어는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고백조차 새겨듣질 않았다. 바로 이자리에서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고백하기까지 숱한 갈등과 고민을 했을 텐데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내보였던 진심은 전부 무시했으면서, 유일하게 가슴에 박힌 것은......
- 더 이상 당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참으로 한심스러워 우습기까지 했다.
쓴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으로 하선연은 가만히 망가진 인형에 묻은 흙을 닦아냈다. 입으로 후후 바람을 불어 작은 먼지까지 털어버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도로 그것을 달려고 했으나 구멍이 좁아서 끼우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전에 김택승이 머리카락으로 핸드폰 고리를 끼운게 생각이 났다. 그래서 따라해 보는데 머리카락이 너무 가늘어서 그런지 잘되지 않았다. 몇개나 새로 뽑아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도 할수가 없었다. 김택승이 없으니 이깟 핸드폰 고리를 거는것 조차 맘대로 안됐다.
예전에는 그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잘 먹고 잘 살았던것 같은데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간 만나 왔던 사람들은 물론 제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껏 돈쓰면서부족함 없이 즐겁게 살아왔건만, 돌이켜 봤을때 떠오르는 것이라곤 오로지 김택승의 얼굴뿐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살펴주던 목소리였다.
-까졌을때 챙겨 다니면서 붙이세요.
기껏 무슨 말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더니 겨우..... 하선연은 고개를 숙여 제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다친곳에서 피가 찔끔찔끔 나고 있었다. 아픔은 별반 느껴지지 않았으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품에서 대일밴드를 꺼냈다.
그리고 포장을 벗겨 붙였더니 어찌된게 밴드를 붙이기 전보다 더아파져 왔다.
밴드에 소독약이라도 묻은 것처럼 콧등이 시큰해졌다. 가슴이 시리며 사무치도록 외로워졌다. 메마른 정원과 컴컴하게 불꺼진 화랑의 모습이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비단 겨울인 탓은 아니다. 온 사방에 남아 있는 김택승의 흔적과 그럼에도 이 자리에 없는 그 때문이다.
이젠 그가 없는 풍경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풍경속에 혼자 남은 자신의 모습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겨울 풍경속에서 지금 하선연은 혼자였다.
발에서 느껴지는 건지 가슴에서 느껴지는건지 원인 모를 격통을 느끼고 그는 얼굴을 싸쥐었다.
입술을 찢으면서 온몸이 떨리는 감각을삼켰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괴로워 보긴 처음이라 어째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 이유가 고작 김택승 한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것 같았다. 이러는것 조차 자신답지 않아 마치 딴사람이 된듯했다. 그동안 감정 하나 맘대로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왔는데 제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왜. 어째서. 단지 타인에 불과한 김택승이 대체 뭐라고 자신을 이렇게 뒤흔들어 놓는단 말인가. 변화를 바란적도 없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자신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는 제 자리에 갖다 놓지도 않고 종적을 감춰 버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소식만을 남겨둔 채로...
치솟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하선연은 스스로 제뺨을 때렸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살갗이 얼얼해졌다. 사정을 안보고 후려쳤더니 오래지 않아 뺨이 터질것 같았다. 이렇게 때려봐도 부족하다. 가슴을 쳐도 똑같고 입술을 터트려도 마찬가지다. 모든게 그와 같아지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덕분에 자신의 것도 되지 못하고 그의 것도 되지를 못했다. 어정쩡하게 변하다만 일그러진 모습으로 혼자 남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터져 나왔다. 하선연은 뺨을 치다 말고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파삭거리며 부서져 흩어지는 잔디를 움켜쥔채 고개를 수그렸다.
"...으으..."
얼룩진 바닥으로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이 아연했다. 눈물을 흘려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안나는데 한두방울도 아니고 비오듯 펑펑 쏟아졌다. 입에서는 곧 죽을 사람같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가슴은 눈물을 생산하느라 쥐어짜듯이 아파왔다.
나이 다 먹고서 이렇게 어린애같이 울고 싶지 않았으나 제 맘대로 그칠수 조차 없었다.
끝내는 커다랗게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어엉 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가 꼭 벙어리 같았다.
메말라 버린 풀을 적시는 눈물이 마치 눈을 태우는듯했다. 이렇게 울다가는 자신도 어떻게든 되어버릴것 같았다.
멀쩡한 곳은 김택승이 다 가져가 버리고, 여기 남은것은 못나기 짝이없는 나머지 같았다. 만일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영영 반쪽뿐인 삶을 살아야 할테다. 그리고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후회와 고독일 것이다. 그러자 안개같은 두려움이 싸늘하게 스며왔다. 다시는 웃을수 없는모습을 상상하기가 무서웠다. 지금의 고통이 평생 계속될까봐 덜컥 겁이 났다.
그러지 않을수만 있다면 김택승이 정말로 더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대도 괜찮았다. 아예 싫어하거나 미워해도 된다. 욕해도 좋고 때려도 좋다. 매일같이 자신을 거절하고 매순간 상처주길 차라리 바랐다.
그저 돌아오기만 한다면 살아서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걸로 족했다.
김택승이 발을 디뎠던 그 자리에 머리를 붙이고 하선연은 생전 찾아본적도 없는 신을 찾았다. 제발 제발 이라는 단한마디 말만으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간절히, 자신의 불행을 빌었다. 김택승이 돌아와 차라리 그리해주기를 바랐다.
그가 없는 한은 그 불행조차 기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청하는 그의 소원을 신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색깔없는 겨울하늘로 흩어지는 울음소리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뿐이다.
*
겨울이 깊어져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경기가 어렵다 어쩐다 해도 연말은 연말이었다. 대형스크린에서는 북극곰이 산타가 던져주는 콜라를 마셨고 백화점 외벽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원하는 플랜카드가 크게 붙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즐거운 캐럴뿐이다. 길거리의 인파는 물론이거니와 쇼윈도에 장식된 곰이니형조차 혼자가 아니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혼자인 사람은 있었다. 그들은 솔로인 신세를 한탄하며 친구들과 의기투합하거나,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드물게 크리스마스가 오는지 가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게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표정으로 병실을 지키고 있는 남자였다.
제 빛이 흐려진 갈색 눈동자가 오롯이 침대에 누운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캐럴이나 깊은밤 울려 퍼지는 찬송가도 그에게 크리스마스를 일깨워 주지는 못했다.
시간이 하루하루 흘러 겨울이 깊어지고 연말연시가 되어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지난여름을 떠돌고 있었다. TV에서 어김없이 타종식이 방영되고 군중이 카운트다운을 세며 새해를 기다려도 그만은 다른 것을 기다렸다.
한살 더 나이를 먹는것도 희망을 품고 새해의 계획을 세우는 것도, 기다리는 사람이 당도하기 전까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오로지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는 것만이 그가 할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를 기다리게 하는 이는 아주 먼 길을 돌아오는 중이었다. 남자를 힘들게 한만큼이나 아득한 길인듯했다.
마치 다시 태어나 어른으로 자라는 것처럼 인생을 한번 되살아 보았다. 난생처음 누군가가 좋아져 어쩔줄 모르는 심정을 맛보았고 좋은만큼 힘들어 가슴도 실컷 아파봤다.
이윽고 시야가 밝아지며 마침내 지금에 다다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때 처음으로 보인 것은...
모자였다. 종이 모자.
하선연이 영화관에서 접었던, 하도 접었다 폈다 해서 흐물흐물해져 버린 바로 그 종이 모자였다.
저게 왜 보이지 하고 시선을 약간 돌렸더니 고개를 수그린 하선연이 머리에 그걸 쓰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모자라서 제가 쓸때는 작다고 느껴졌는데 하선연이 쓰니까 별로 그런 느낌이 없었다. 예전에 소파에 누웠을때도 그렇고, 어째 기분이 조금 씁쓸름했다.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나 싶어서 확인차 다시 써보려고 택승은 팔을 움직여 그 종이 모자를 들었다. 그리고 제 머리위에 얹어봤다.
흠. 그런데 거울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화장실에 가면 있겠지만 몸에 뭐가 이것저것 주렁주렁 붙어있어서 움직이지를 못하겠다.
일단 산소마스크부터 벗으려고 생각한 택승은 조심스레 팔을 움직이다 물끄러미 보는 시선을 느꼈다.
모자를 가져가는 손길에 제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고 하서연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줄곧 응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닿아오는 시선이 깊었다. 그를 보고 택승은 눈꺼풀을 떨었다.
그러지 않을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제가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전혀 다른사람 같았다. 멋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수 없는 차림에 엉망으로 뒤집어진 머리,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인데도 낯빛은 거무죽죽하다. 무엇보다 항상 매끈하던 입술이 엉망진창으로 부르터 있었다. 얇은 살갗이 벗겨져 얼룩덜룩하게 불그스름한데다 곳곳에 딱지가 앉은 채였다.
언제나 입술 무는걸 마땅찮은 표정으로 보았던 그이기에 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느릿하게 몇번 눈을 깜박여봐도 그는 하선연이 맞았다.
겉모습이야 어쨌든 다른 사람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그를 향해 흘렀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응시한채 하선연을 바라보던 택승은 잠자코 손을 들었다. 그리고 하선연의 뺨을 닦았다. 그러자 화상이라도 입은듯 손가락이 화끈거렸다. 그가 흘리는 눈물이 지나치게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참고 연거푸 그의 턱을 흝었으나 주룩주룩 쏟아지는 눈물이 끝이 없었다. 그것을 참고 연거푸 그의 턱을 닦아 봐도 금세 흠뻑 젖어버려 마치 강이라도 이를 기세였다.
그를 울리고 싶으냐는 말에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네' 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을 철회해야할 판국이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역시 우는 모습을 보니까 좀 속상했다. 거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며 퀭해진 눈가며 해쓱해진 뺨이며, 꼴이 말이 아니었다. 덕분에 가볍게 한숨을 쉰 택승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묻고 나서야 괜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어딜봐서 괜찮아 보이냐고 퉁명스레 답할 터였다. 그러나 하선연은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그 턱아래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택승은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제 맘속을 자박자박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새삼스러운 모습으로 약한 부분을 쿡쿡하고 찌른다. 하나도 안 괜찮다고 할 줄 알았는데...거짓말과는 달랐다.
괜찮다고 대답하는 마음만큼은 진실로 느껴졌다.
그 이면에는 자신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택승은 그 모든것을 아주 수월하게 깨달을수 있었다. 제 마음을 보듯 그의 마음이 환했다. 자신이 그를 생각하듯 그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실은 그를 보자마자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무너지는 곳에서 구조된 표정이라 모를수가 없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게 이상스러울 정도로 그의 마음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그의 품속에서 제 마음을 불현듯 깨달았던 것처럼 그의 마음을 깨달았다.
덕분에 택승은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언젠가 그가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고 뻔뻔스레 '나 좋아합니까?' 라고.
그러나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순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하선연의 눈이 커졌다.
저는 울고 있는데 웃는 김택승이 이상스러웠을 것이다. 순간 울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듯. 억울함과 먹먹함이 꽉 멘 목소리로 말했다
"왜 웃습니까?"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
그의 맘속에도 제가 들어 있다. 마치 제 맘과 같은 맘이다. 그런데 어떻게 웃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볼이 터져라 한껏 미소짓고 있떤 택승은 하선연이 던진 말에 답했다.
"그냥.....좋아서요."
그리고 두 손을 뻗어 그의 눈물 젖은 얼굴을 잡아당겨 키스했다. 그의 입술에서는 짠맛이 났다. 바다의 소금기보다 더 진했다. 언제나 달콤하기만 하던 입술이 그렇게 짤수가 없었다. 게다가 바닷가의 모래보다 더 까칠했다. 사포로 한바탕 문지르기라도 한모양이었으나 그 어느때보다 부드럽게 마음이 녹아들었다.
입술을 뗀 택승은 멋대로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쉽사리 손댈수 없었던 머리카락과 축축하게 젖어있는 뺨을 쓸어 만졌다. 서늘하고 건조해서 조각을 만지는것 같던 얼굴이었다. 이어 까칠하게 수염이 돋아난 턱도 문질러 보았다. 항상 깔끔하게 면도되어 매끄러웠던 턱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단 한가지 더 바라는게 있다면....
"웃으면 더 좋을 텐데."
울면 속상하니까. 평소처럼 웃어줬으면 좋겠다.
예전이라면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표정보다 선웃음이 더 흔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모양이다.
억지로 웃으려 입술을 들어 올리는 얼굴이 마치 주머니에 오랫동안 넣고 다닌 편지봉투 같았다.
여기저기가 눈물로 얼룩진데다 구겨져 있어 차라리 우는게 낫다 싶은 표정이었으나 그것조차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덕분에 무척이나 행복해졌다. 지나치게 행복해서 콧등이 시큰했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슬픈것도 아닌데 어째서 울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웃다 말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당황스러웠다. "어?" 하고 눈가를 문질러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본 하선연이 손을 들어 뺨을 닦아와 택승은 비시식 웃었다. 분명히 행복해서 웃음이 나는데, 희한하게 눈물도 같이 나왔다.
웃으면서 우는 꼴이라니. 울다가 웃는 그보다 더 이상할 테다. 그 모습을보고 하선연의 입가에서도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눈물로 얼룩진 채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면서 웃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지는 둘다 생각지 않았다. 그저 상대방의 입술에 걸린 미소에서 천국을 보았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환하게 웃어줄 뿐이다.
<외전>
거리에는 아직까지 새해의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전광판에 보이는 새로운 년도가 낯설었고, 백화점 건물에는 신년맞이 새일을 광고하는 플랜카드가 크게 붙어 있었다.
라디오에서도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라는 말이 흔하게 나와 그제야 비로소 해가 바뀌었다는게 실감이 났다. 그동안은 병원에만 있느라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확실히 병실에 있을때와는 기분이 많이 달랐다. 조금 억지를 부려서라도 퇴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선연 덕분에 아무리 환자노릇이 편했다고는 해도 병원은 병원이다. 무엇보다 그가 내는 병원비가 신경쓰였다.
처음에는 일인실에 옮겨진 이유가 단순히 수술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위험한 수술이었으니까 병원에서 배려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실은 하선연이 입원비를 지불한 탓이다. 그의 신세를 질생각이 아니었던 택승으로선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살면서 남에게 그다지 신세를 져본적이 없어서 더 그랬다. 제가 병원비를 내려고 다인실로 옮기겠다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자기가 불편해서 그런다며 퇴원하는 순간까지 일인실에 있도록 했다. 그리고는 어느틈엔가 수술비마저도 전부 지불해버려 몹시 난감했다.
아무리 돌려주겠다고 해도 듣지 않아 더는 말을 하기 어려웠다.
사실 이외에도 부담스러운건 또 있었다.
하루종일 병실에 붙어있는 하선연 때문이다. 화랑일은 뒷전으로 하고 내내 병실에서 노닥거리는데 불편하다는 핑계로 자꾸 물건을 들여와 적잖이 낯부끄러웠다.
별도의 간이침대와 침구 의자 매끼니의 식사와 심심하다고 가져온 노트북이며 게임기에 이르기까지..... 병원에 입원을 해 있는건지 살림을 차리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퇴원하길 잘했지, 하고 생각하던 택승은 불현듯 던져지는 질문에 하선연을 돌아보았다.
아직까지는 환자취급을 해주려는듯 운전석에 선뜻 앉아 있었다. 모포도 펼쳐서 덮어주고 안전벨트도 직접 매주고 평소처럼 난폭운전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디 불편한데는 없는지,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유난히 다정스레 굴었다.
그런 태도가 싫은건 아닌데 좀...... 적응이 안됐다. 말 그대로 낯설어서 어색하고, 솔직히 안어울리는 옷을 입은것처럼 느껴졌다. 뭔가 타고난 성격을 거스르는 듯 보였던 것이다.
무슨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냥 퇴원해서 좋다고 말을 한 택승은 하선연이 달리는 방향이 목적지와 다른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천천히 주의를 기울이며 운전하는 그를 보며 물었다.
"저희 집은 이쪽이 아닌데요."
"압니다."
"그럼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그 말에 하선연은 몰라서 묻느냐는 듯이 대꾸했다.
"당연히 화랑입니다. 그 몸으로 옥탑방에 돌아갈 생각이었습니까?"
그가 보기에는 남루해도 자신에게는 맘 편히 누울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겨울이라 우풍도 많이 들고 뜨거운 물쓰기도 힘들테지만 돌아간다는 말을 쓸 만한 곳은 거기밖에 없는 것이다. 한데 '당연히' 라는 말까지 써라며 화랑으로 가자는걸 보니 집으로 돌아가긴 무리일것같았다.
설령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와 함께일게 뻔해 차라리 화랑으로 가는게 나을듯 했다.하루 정도는 신세를 져도 괜찮겠지 싶어서 택승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이윽고 화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택승은 이함은이 한달음에 뛰어서 마중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왜이렇게 오랜만인 거 같죠? 퇴원한 거 보니까 너무 반갑네요."
"일전에는 문병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번에 이함은이 들러서 위로해준 일을 고마워하자 그녀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당연한 일을 갖고 뭘요. 그나저나 건강해져서 정말 다행이에요. 처음 소식 들었을땐 얼마나 놀랐다고요!"
원망조로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고 택승은 턱을 긁적거리며 죄송하다 사과를 했다.
그말에 또 뭘 사과하냐면서 이함은이 추우니까 들어가자고 앞장을 섰다. 그래서 택승은 하선연과 함께 그녀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인순간 오랜만에 맡아보는 화랑의 냄새가 그를 반겼다. 물감 냄새와 찰흙냄새가 뒤섞인 것 같은 독특한 향에 마음이 편안해 졌다. 덕분에 기분이 약간 묘해졌다. 돌아갈곳은 제 옥탑방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된게 이곳에서 더 '돌아왔구나.' 하는 기분이 느껴졌다. 택승은 그것이 같이 있는 사람들 때문임을 알았다. 옥탑방으로 돌아갔더라면 아무도 없어 도리어 썰렁했을 테다.
하지만 이곳에는 곁에 있어주는 사람도 나와 맞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순간 맘이 포근해져와 택승은 눈을 내리깐채 잠자코 웃었다.
짐을 정리하기 위해 하선연이 자리를 비운새 이함은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차를 한잔 내주었다.
그것을 마시며 택승은 잠시 그녀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얼굴이 좋아보여서 안심이네요."
그 말에 택승은 슬그머니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주는 밥만 먹으며 가만히 있은 탓에 오히려 살이 올랐다.
뿐만 아니라 하선연이 몸에 좋다는건 모조리 갖다 먹여서 평소보다 더 안색이 좋았다. 어디 가서 아픈 사람이라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라 좀 낯부끄러웠다.
"사장님도 이제 괜찮아지신것 같고, 다행이에요. 진짜 다들 얼마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지........"
이함은은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맘고생이 심했다면서 그간 얼마나 하선연이 꼴이 엉망이었는지를 털어놓았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않고 미친듯 하더니만 나중에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는 거였다.
택승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을땐 사람 하나 잡는줄 알았다고 혀를 내둘렀다. 일전에 본 강유형까지 비슷한 소리를 했었기에 그간 하선연의 상태가 대충이나마 짐작이 됐다. 실제로 살이 쏙 빠져서 한동안은 저보다 더 환자 같았다.
어쩜 그렇게 사람이 종적을 감출수 있느냐고 타박하던 이함은은 오래지 않아서 가벼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해가 바뀌어서 너무 우울하다고 구구절절하게 토로를 했다.
"이맘때가 진짜 제일 싫다니까요. 년도가 바뀌면서 한살 설세면서 또 한살, 생일 지나면서 또또 한살, 일년에 세 살씩 나이 먹는 기분이에요."
그러면서 애인도 없는데 억울하다고 우는 시늉을 했다. 일년에 세 살씩 먹는다는 말에 공감이 가는걸 보면 자신도 나이를 먹긴 했나보다. 그만 하더라도 스무살 초반에 사고를 당했을땐 의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다들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될거라고 했으나 열심히 재활훈련을 해서 어떻게든 이겨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담당의가 소개시켜준 뇌과의의 솜씨가 훌륭해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다만 의식을 되찾는 것도 늦었고 회복도 빠른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은 예전의 자신이 혼자였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덕분에 지나간 세월이 썩 아쉽지는 않았다.
잠시 후, 짐을 정리하고 내려온 하선연이 이만 올라가 쉬는게 어떻겠냐고 말을 해와서 택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함은과 짧게 인사하고 위층에 올라가보니 그가 이미 제방을 만들어 두었다. 전에 묵었던 손님방이 아니라 보다 창이 크고 환한 곳이었다. 어째 분위기가 집안의 다른곳과는 달라서 완전히 새로 손봤으리란 사실이 어렵지 않게 짐작됐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래도 며칠있다 옥탑방으로 돌아가긴 힘들것 같았다. 이미 하선연에게 신세를 많이 져서 더는 폐 안끼치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그를 걱정시킨 만큼 하자는 대로 하는게 좋을듯 싶었다.
그 생각으로 택승은 저어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대신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하선연의 얼굴에 여태껏 보지 못한 뿌듯함이 피어올랐다.
기분이 무척 좋아졌는지 방 구석구석을 가리키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침구에 신경을 썼는데 어떨지 모르겠군요 라텍스 소재의 매트리스에 100% 이집트산 면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한번 앉아보는게 어떻습니까?"
앉아보래서 일단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친 택승은 매트리스가 부드럽게 몸을 떠받치는걸 느꼈다. 이불도 확실히 보드랍고 냄새가 좋았다.
다만 이게 얼마나 좋은건지 아냐며 역설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희미한 우려가 들었다.
전부터 하선연의 씀씀이가 헤프다고 느껴온 탓이었다. 자신의 병원비까지 신세를 지고 났더니 그의 재정상태를 걱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택승은 제 옆 자리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잠깐만 여기 와보세요."
헌데 왜 그러냐고 곁에다가 앉은 하선연을 마주보니까 어째 나무랄 생각이 사라져 갔다. 대신 살짝 고개를 기울인채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얼굴만이 보였다. 살이 빠져 약간 날카로워진 턱선 때문에 조금 더 남자다워진 것같기도 하고 전과 달리 괜한 가식이나 허세가 사라진 눈동자가 진실되어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가슴이 설렌단 소리다.
심장이 두근두근 하는 가운데 택승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시선에 하선연의 얼굴에서도 천천히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맘이 떨려 숨쉬기가 조금 어렵다고 느껴질 무렵,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배 안 고픕니까?"
택승은 눈을 깜박거렸다.
배야 고프긴 하다. 요새 잘 먹어서 위장이 늘어났는지 넣는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말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던 터라 약간 기분이 묘했다. 그렇다고 뭘 기대한 건지도 애매해 일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하선연이 재차 물어왔다.
"뭐 먹고 싶은거 없습니까?"
그 말에 '아무거나요.' 라고 대꾸하려던 택승은 순간 떠오르는게 있어 주저하다 말을 했다.
"라면요."
택승의 대꾸에 하선연의 표정이 묘해졌다. 먹고 싶은게 겨우 라면이냐는 기색과 그 맘을 이해하는 기색이 동시에 떠올랐다.
사실 병원에 있는 동안 식사는 잘했어도 라면만은 먹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선연은 잔소리를 하는 대신 순순히 그러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식사를 준비할 동안 택승은 욕실을 빌렸다.
확실히 병원과는 달리 좀더 편안하게 씻을수 있을것 같았다. 다시 한번 퇴원하길 정말 잘했다고 느끼면서 아직 제살처럼 아물지 못한 수술 부위를 조심스레 피해가며 씻었다. 이어 가볍게 물로 닦으려고 붙여둔 거즈를 뗐다.
뒤통수라 수술한 곳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살이 열렸다 닫힌 자국이 만져질 뿐이었다. 아마도 수술때문에 민 머리가 다 자라지 않아 고스란히 드러나 보일 테다. 나중에 머리를 길러 가려야겠다고 생각하며 택승은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스스로를 평가해 본적이 거의 없는데 새삼스레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통 남자구나 하는 것이 자각 됐다. 아니, 온 몸이 흉터투성이니까 보통보다 좀 못한 것 같았다.
덕분에 하선연처럼 뭐 하나 부족할거 없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약간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포기하지 않고 수술하길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거울속 자신에게 씩 웃어 보인 택승은 곧 샤워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마침 하선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한달음에 식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냄비에 든 라면을 보고 멈칫했다.
딱 봐도 물이 한강이라 맛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하선연이 젓가락과 접시를 챙겨주어 잘 먹겠다고 하고 자리에 앉았다. 생긴것과 달리 맛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면발을 들어 입에 넣었으나 안타깝게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일단 물이 너무 많은데다 면도 지나치게 퍼져있었다.
게다가 불을 끄고 계란을 넣었는지 국물이 탁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끓여준 성의를 생각해서 묵묵히 먹었다.
"맛있습니까?"
"......."
택승은 순간 날아온 질문에 주저했다.
한 0.5초쯤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노라니 찰나를 놓치지 않은 하선연이 가자미눈을 했다. 택승이 진심으로 라면을 맛있다고 생각해주지 않아서 적잖이 섭섭한 모양이다. 이제라도 맛있다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택승은 곧 하선연이 혀를 차며 젓가락을 내려놓는걸 보았다.
"사실, 내가 먹어도 그래요."
그리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에 택승도 따라서 웃고 말았다.
전이라면 분명히 맛있어서 기절하겠다는 것을 온 몸으로 표현할 때까지 섭섭함을 드러내며 신경쓰이게 굴었을 테다. 한데 제 입으로 솔직하게 평을 하는 모습이 예전처럼 애써 기분을 맞춰주지 않아도 된다는걸 보이려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손수 무언가를 해주는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러자 밍밍하기만 하던 라면이 맛있게 느껴졌다.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택승은 묵묵히 라면을 먹었다. 그를 따라 하선연도 다시금 젓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나니 슬슬 잠이 쏟아졌다. 이를 닦은 뒤 TV를 보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모습에 하선연이 이만 자라고 말을 해왔다.
그래야겠다고 방으로 발길을 옮긴 택승은 그가 따라오는 것을 봤다. 왜 따라오나 싶어 쳐다보자 잠자리를 돌봐주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병실에서야 한 방에 있으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막상 이부자리를 정돈해주는 모습이 적잖이 민망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지나치게 상냥해서 괜히 등짝이 근질거렸다.
그렇다고 왜 이러냐 정색을 할 수도 없고, 하라는 대로 침대에 누운 택승은 이마를 쓸어주는 손길을 잠자코 받았다. 뭔가 과분한 사치를 누리는 기분이라 괜히 머쓱했다. 그래서 입을 열고 말을 했다.
"사장님도 가서 주무세요."
그 말에 하선연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멋대로 사직서 썼으면서 누구더러 사장님이라는 겁니까."
"아....."
이름을 불러야했나 하고 짧게 고민하는 사이 그가 다시 말을 시켰다.
결국 조금 망설이던 택승은 "하선연씨도 가서 주무시는게....." 라고 말을 하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얼마간을 고민한 끝에야 비로소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아 입을 열었다.
"선연씨도 가서....."
한데 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선연씨라니, 차라리 그냥 이름을 부르는게 낫겠다. 엄청나게 낯부끄러워서 두번 다시는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귓등이 벌게진 채로 입을 다물어 버린 택승을 보고 하선연은 눈꼬리를 가늘게 접었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택승씨도 그럼 주무세요."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듯 몸을 움직였다.
그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르게 입밖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왜 마지막은 빼먹습니까?"
순간 그가 예전에 데이트의 마지막을 잊지 말라고 지적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 너무 뻔뻔스러웠나 싶었다. 그래도 누군가 잠자리를 돌봐주는 것이 처음이라 한번쯤은 누려보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그 말에 동작을 멈춘 하선연은 다시 택승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금 당황스럽다는 듯 웃더니만 택승의 코끝을 가볍게 쥐고 입술을 내렸다.
쪽, 하고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의 촉감이 부드러웠다. 한때는 엉망으로 부르터 있더니 이제야 원래대로 나았나 보다.
뒤로 물러서는 그 입술을 택승은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봤다. 그 시선을 느낀 하선연이 잠시 멈칫했다.
오래지 않아 한숨같은 희미한 소리가 입술사이로 흘러나왔고, 곧이어 입술이 포개졌다. 언제나 뽀뽀 수준이던 입맞춤이 오늘따라 깊었다.
혀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택승은 한껏 입을 벌렸다. 짙게 엉겨오는 혀에 애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혀끝이 입천장을 핥았을땐 절로 무릎이 일어섰다. 어느새 그의 목덜미를 그러안은 채로 가쁜 숨을 내 쉬고 있었다.
택승은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젖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선연의 눈동자 역시 까매져 있었다.
그러나 다시금 닿아온 입술은 무척이나 점잖았다. 몸을 물린 하선연은 키스하느라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준뒤 머리를 한번 쓸어주고 말했다.
"내 꿈 꿔요."
어째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택승은 그 말을 남기고 스탠드의 불을 꺼주고 방을 나가는 하선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금 모호한 기분으로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
며칠 후, 화랑에 나가 있던 택승은 이함은이 한숨을 푹 쉬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다소 격약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글쎄, 실컷 그림을 사겠다고 해서 포장까지 다 해놓은걸 취소하겠다는 사람이 있지 뭐예요."
"그렇습니까?"
"유난히도 까탈스럽게 굴더니만 이러네요. 아무리 화랑이 한가해도 이런 고객은 정말 싫어요!"
투덜거리는 말 중에 걸리는 것이 있었던 택승은 미간을 모으고 물어봤다.
"화랑이 많이 한가한 편입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덕분에 친구들이 신의 직장이라고 부러워해요."
이함은의 대꾸에 택승의 미간이 한층 더 좁혀들었다. 화랑이 한가하다는것은 일이 없다는 뜻이었고 그건 즉, 돈이 안벌린단 소리였다.
그럼 수술비라도 돌려주겠다는 제말을 거절할 처지가 아닐텐데 하선연은 병원비의 병자도 못꺼내게 했다. 택승으로서는 여러가지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한파 때문에 화랑에서 며칠째 폐를 지고 있어 더 그랬다.
어떻게든 신세갚을 궁리를 하던 택승은 예전에 그와 함께 전단지를 돌렸던 일을 기억해냈다. 그런거라도 찍어서 붙이면 사람들이 더 오지 않을까 싶었다. 겉보기에는 화랑처럼 안 보이는 곳이라 홍보가 좀 필요할것 같았다.
일단은 좀 혼자서 알아보려고 택승은 화랑 위층으로 올라갔다. 대강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짐 가방을 뒤져보니 걸칠만한게 별로 없었다. 하나 둘 씩 하선연이 집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나 유행지난 점퍼 같은게 무척이나 거슬렸던 모양이다. 대신 그가 산옷을 택승이 머무는 방옷장에다 걸어 놓았다 아무래도 그 옷들을 입길 원하는듯 했지만 그렇게까지 뭔가를 받고 싶진 않아서 모른체 하고 있었다. 그가 산옷이라면 비쌀게 뻔해서 부담스러운데다 지금 여기에 돈을 쓸상황이 아닌게 보여서 내키지가 않았다. 설령 단순히 빌려주는 거라고 해도 선뜻 손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셔츠를 받았던 일로 그가 다른사람이 한번 입은 옷을 다신 안입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더 그랬다.
그러고 보니 그때 받은 셔츠가 어디 있을 것이다. 옷가지가 별로 없어서 수술을 위해 가방을 싸고 나올때 그럴싸한건 다 집어온 탓이다.
다행히도 예상이 맞아 수월하게 셔츠를 찾을수가 있었다. 여름용이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얇아보이진 않아서 적당히 입으면 될것 같았다.
택승은 실내복 삼아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고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한참 단추를 잠그고 있는데 문득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언제부턴가 하선연이 문간에 서 있었다. 어깨를 기대고 비스듬하게 서서 뚫어져라 보는 눈길이 좀 민망스러워 서둘러 셔츠를 여미자 그가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문득 미간을 모은채로 입을 열었다.
"그거, 여름 셔츠 아닙니까?"
"패딩 입으니까 괜찮습니다."
그 말에 하선연의 미간이 한층 찡그려들었다.
"패딩이라고 해봤자 솜이잖아요. 지금 밖에 날씨가 어떤지 아십니까?"
한창 한파라서 추운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추위엔 이골이 나, 찬 바닥에서 자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
그래서 괜찮다고 답을 했는데 하선연이 은근 슬쩍 권유를 해왔다.
"옷장에 입을만한 옷 가져다뒀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입던 거 입으면 됩니다."
곧장 되돌린 거절에 그는 약간 답답해하는 어조로 설명했다.
"이 날씨에 얼어죽겠군요. 잠시 빌려드리는 거니까 그냥 입으세요."
"다른 사람이 입었던 옷은 싫으시지 않습니까."
무심코 말을 내뱉은 택승은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손을 내린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러자 정곡을 찔린듯 뜨끔한 표정으로 서있던 그가 문득 제 셔츠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 그러고 보니 그거 제가 빌려드린 셔츠 아닙니까?"
빌려줬다고? 그랬었나. 택승은 좀 어리둥절해졌다.
"제게 주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하선연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시침을 딱 뗐다.
"그런 적 없습니다만."
"..... "
뻔뻔스럽게 줬다 뺐는 말에 택승은 별수 없이 단추를 도로 풀었다. 그리고 셔츠를 돌려주고 다른 옷을 찾아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하선연이 돌려받은 셔츠를 아무렇게나 던지면서 짧게 불렀다.
"김택승씨."
"네?"
무슨 소린가 싶어 쳐다보니 난감한 얼굴이 된 그가 한숨을 푹쉬었다.
"김택승씨 주려고 산 옷들입니다. 환불기간도 지났으니 입어주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대체 저 옷을 언제 샀기에 환불기간도 지났단 건지 모르겠다.
옷장에 든 옷이 한 두벌이 아니라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째서 본인 입을 것도 아닌걸 몇 벌씩이나 사들였던 것일까.
혹 물건을 사는거 자체를 좋아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 보면 전부터 같은옷 입은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잠깐 머물다 갈 자신 때문에 방하나를 통째로 바꾸는 것도 이상스러웠다.
아무래도 하선연은..... 쇼핑 중독인 것 같았다. 가뜩이나 경기도 어렵고 화랑에 손님도 없는데 정말 큰일날 취미였다. 보통 쇼핑중독은 스트레스 때문이라는데 자신이 그에 한몫을 한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다. 어쩌면 옷장의 옷들도 제가 앓아누운 동안에 산거라서 환불기간이 지나버린지도 모른다.
이래선 안 된다 싶어 택승은 심각한 얼굴로 하서연을 돌아보았다.
"저 때문이라면 죄송합니다."
단순히 옷 이야기에서만 그치는건 줄 알고 하선연은 팔짱을 딱 끼고 말했다.
"그럼 저 옷 입고 나가요."
결국 택승은 하선연이 사준 옷을 입었다. 그걸 입고 나오는데 또 어딜가냐고 캐물어와 떼어놓느라고 한참이 걸렸다.
마침 그에게 볼일이 있지 않았더라면 나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냥 바람 쇠러 간다는 말로 대충 둘러대고 화랑을 나선 택승은 인근에 있는 인쇄소를 찾았다. 다행히도 전단지를 찍는건 크게 비싸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를 해본 끝에 전단지를 찍기로 했다. 다만 지갑사정이 썩 좋지 못해 가장 저렴하게 주문했다. 좀 더 좋은걸로 하면 좋으련만, 어쩔수 없다 생각하고 택승은 괜스레 솟구치는 미안함을 삼켰다.
다음날, 택승은 전단지를 받으러 다시 인쇄소를 찾았다.
돈을 치르고 전단지를 가져오는데 종이라서 그런지 꽤나 무거웠다. 일단은 무게도 줄이고 시간을 절약할겸 가는길에 전단지를 뿌리기로 했다. 그럴 생각으로 테이프를 챙겨온 그는 능숙한 솜씨로 박스에 끈을 엮어 가방처럼 을러 맸다. 그런뒤 전단지를 몇장 꺼내 들고 다니며 붙이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곳마다 전단지를 붙이면서 걸었더니 화랑에 도착할 때쯤엔 박스가 어느 정도 가벼워졌다. 화랑 입구까지 전단지로 예쁘게 도배를 한 택승은 화랑으로 돌아가 전단지를 내려놓았다.
그때, 등 뒤에거 벌컥 문열리는 소리가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하선연이었다. 뛰어왔는지 머리카락이 휘날린 그의 손에는 전단지가 들려있었다. 아마도 오는 길에 붙어있는걸 본 모양이다. 굳이 생색낼 생각이 없었던 택승은 턱을 조금 긁적거렷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그가 전단지를 들어 보이며 묻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전혀 생각지 못한 듯 목소리가 황망했다.
그저 전단지일 뿐인데 많이 놀란 모양이다. 도와드리려 그랬단 말은 너무 뻔한 소리 같고, 쑥스러운 기분에 뭐라고 말하나 싶었던 택승은 그의 표정에 좋아하는 기색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진짜 당황해하는 눈치뿐이라서 괜한 일을 했나 싶은 생각이 뒤늦게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눈을 내리깔고 변명도 뭣도 아닌 말을 중얼거렸다.
"그냥 화랑이 썰렁한게 걱정 돼서..... 사장님 망하시면 안되잖아요."
하선연은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린 채로 멈칫했다. 그제야 택승이 어떤 생각으로 전단지를 만들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잠시 후, 전단지를 발견한 직후와는 다른 모호한 표정으로 턱을 한번 쓰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손님 여부를 걱정할 만큼 운영이 어렵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저 돈 많....."
그리고 부자라는 식으로 말하려다 왜인지 주저했다.
새삼스레 본인의 경제사정이 자각이라도 된 모양이다. 머리를 한 바퀴 굴리는 듯한 표정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고 곧 눈썹을 늘어트렸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그렇게 돈이 많은 편이 아니죠. 실은 언제 파산할지 모르는 상탭니다."
아무리 그래도 파산까지 생각지 않았던 택승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화랑도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될지 모르고 곧 길바닥에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을 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파산이야 일이 아닌데 항상 좋은것만 입고 쓰던 그가 가난한 생활을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곧 결연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나이도 젊고 몸도 건강한데 극복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나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택승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갈 데 없으면 제가 돌봐드리면 되죠. 그동안 신세도 많이 졌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에 하선연이 정말이냐는 듯 눈치를 힐끔 보면서 되물었다.
".....저 먹여 살려 주는 겁니까?"
"제가 이래 봬도 생활력은 강해서요. 사장님 한명 쯤은 책임질수 있습니다."
둘이서 힘을 합치면 뭘해서든지 성공할수 있다고 그를 격려하다 어느 틈인가 그가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뭔가 걱정스럽고 필사적인 기색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따스한 눈빛이었다. 덕분에 또 가슴이 쿵덕뛰어서 택승은 말문을 그쳤다. 그러자 하선연이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로 물었다.
"그럼 저 책임지시는 거군요."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노라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자신이 생각한 뉘앙스의 말이 아닌듯 했다. 또 뭔가를 오해하는건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하선연이 확인사살을 했다.
"지금 저한테 프로포즈 하시는 겁니까?"
"예?"
머리를 한대 가볍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어 택승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문했다. 그러고 보니 책임을 진다는 등, 먹여 살린다는 등, 그런소리를 자각 없이 늘어놓았다. 마치 프로포즈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천천히 귓등이 달아올랐다. 손등으로 뜨거워진 뺨을 문지르며 뭐라 대답해야하나 고민을 하는데 하선연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그것을 모른 채 허둥거리던 택승은 한동안 입술을 빠끔거리며 횡설수설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제 말은 그런게 아니라...... 물론 책임지겠다는 말은 진짜지만..... 그래도 일단은....."
말꼬리를 늘이며 어쩔줄을 몰라 하다 결국에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묘하게 들뜬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출렁거렸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른뒤 택승은 불현듯 내뱉었다.
"진심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예상치 못한듯 눈을 크게 뜨는 하선연을 보고 확언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정도는 아니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적어도 밥은 굶지 않도록 성실하게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한눈 안 팔고 오로지 선연씨만 바라볼 테니까...... "
선연씨, 라는 말을 자연스레 입밖으로 나온 택승은 마지막 말을 짧게 망설였다.
"제 곁에 있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모습을 본 하선연의 눈빛이 일변했다. 뜨겁게 일렁이는 눈으로 팔을 낚아채 끌어당기는 바람에 택승은 순식간에 확 딸려갔다. 으스러져라 안긴 품에서 환자라서 참으려고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고 뇌까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곧 몸이 번쩍 들렸다. 택승의 엉덩이를 받쳐들고 가볍게 안은 그는 곧장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3층으로 올라가 침대위에 그를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수술부위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되는지 이 와중에도 뒤통수를 조심스레 받치고 있었다.
그 손길에서 염려가 비쳐 택승은 그의 어깨를 두 팔 벌려 끌어안았다. 그의 품안에 갇혀 입술을 열고 몸을 열고 마음을 열었다. 한치의 틈도 없을 만치 바싹 몸이 맞닿았고 잠시의 틈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부딪쳤다. 달아오른 호흡만이 세상의 소리가 되어버린 가운데, 택승은 제 안에서 절정을 구하는 그를 끌어안고 조그맣게 신음했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땐 하선연의 품 안이었다.
그의 품안에서 눈을 뜬 것이 몇번째더라. 사방에서 그의 냄새가 났고 그의 체온으로 따듯하게 몸이 데워져 있었다. 적당히 차가운 공기가 그의 품을 더욱 포근하게 느끼게끔 만들어 주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채로 그것을 실컷누린 택승은 조용히 몸을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던 하선연은 깊이 잠이 든 채였다. 내리깐 속눈썹에 평화로운 음영이 드리워져 있어, 그의 긴 속눈썹을 가늠해 보려 손을 들어 올린 택승은 잠시 멈칫했다. 전에 없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돌려봐도 저렇게 돌려봐도 그것은...... 반지였다. 작은 은색의 반지가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한말의 대답임을 택승은 알았다. 실로 과분한 대답이라 섣불리 감탄하기조차 어려웠다. 그저 마음 가득히 뿌듯한 행복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를 한층 더 깊이 끌어안았다. 자신에게 드러내 보인 진심속으로 첨벙 뛰어들기라도 하듯이.
*
"네에에?"
한껏 목소리를 끌어올리고 반문하는 이함은을 보고 택승은 짐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선연이 파산하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직장을 잃게되는 셈이다. 신의 직장이라고 부러움까지 받았다는데 갑작스레 알게 되면 충격이 클까봐 살짝 언질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깜짝 놀라 괜스레 제가 미안해졌다.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하선연의 과소비를 고쳐놓고 바른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택승은 위로의 말을 주워섬겼다. 이함은씨 정도면 어디에서도 환영받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말하려던 중 갑자기 그녀가 말도 안된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파산이라니, 그럴 리가요."
"믿고 싶지 않은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하선연이 직접 그렇게 말을 했다고 덧붙이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작품 하나만 팔면 제 일년치의 월급이 나오는 곳인데 무슨 소리세요. 그리고 설령 화랑이 문을 닫는다고 해도 사장님이 파산하실 리가 없어요."
그러면서 돈에 익사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재산이 많다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했다. 그럼에도 택승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웃으면서 데스크의 모니터를 돌려 지난해의 매출 내역을 보여주었다.
과연, 세기가 힘들마큼 0이 많이 붙어있는 숫자가 나열되어있기는 했다. 그것까지 보고 나니 이함은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엄청난 착각을 했음을 깨닫고 택승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가벼운 웃음을 터트린 이함은이 손에 들고 있던 전단지를 팔락거리며 말했다.
"제가 일전에 한 말 때문에 오해하셨나 봐요. 아유, 내가 괜한 소리 했나봐."
그리고는 염려 푹 놓으라면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파산이 아니라니까 다행이기는 한데, 제 멋대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이루 말할수 없는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모른 체한 그에게 일종의 원망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오해를 하고 있으면 그것을 풀어줘야지 왜 한술 더 떠 걱정을 시키는 것일까.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책임을 지네마네 엄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이 낯부끄러움을 어떡하나 싶어 얼굴을 싸쥐었던 택승은 때마침 하선연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산뜻하기 짝이없는 얼굴로 이함은에게 인사를 하더니만 거짓말을 했다는 미안함도 없는지 뻔뻔스레 말을 걸어왔다.
"일찍 일어나 있었네요. 좀 더 자지 그랬습니까."
택승은 대꾸 없이 고개를 저었다. 차마 말문을 열지 못하는 택승의 민망함을 생각해서인지 이함은은 아까 있었던 일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사장님과 한번 이야기 해보라는 듯 휴게실로 들어가는 그를 향해 등을 떠밀었다.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기분으로 택승은 휴게실 소파에 앉아 있는 하선연에게 다가갔다. 알고 봐서 그런가, 언제나와 같이 근사한 차림에서 여유가 흘러 넘쳤다. 만일 몰랐더라면 똑같은 광경을 보고도 느끼는 바가 달랐을 것이다. 곧 파산할 사람이 저래도 되는 걸까 걱정을 느끼고 진지하게 앞으로의 대책을 모색하려 했을테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보일지 짐작하니 진짜로 그가 좀 얄미워보였다. 그런 택승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인 하선연은 커피 자판기를 보고 말했다.
"곧 파산할 처지라서 커피 한잔도 마음대로 못 마시겠네요."
진짜 그렇다 해도 그가 수익을 가지는 자판기라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도 괜히 불쌍한 턱을 하며 은근슬쩍 덧붙인다.
"정말이지, 이젠 택승씨 밖엔 믿을 사람이 없군요. 제게 택승씨가 있어줘서 참 다행입니다."
자신의 기분을 살피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어찌된 일인지 기분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도리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방금전까지 그에게 한 마디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러기는 커녕 사랑스럽다는 기분이 솟구쳤다.
눈앞에서 능청을 떠는 그가 이제야 그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예전과는 달리 자신을 위해 주고 잘해주려고 애쓰는 다정함도 좋았지만 지금처럼 청개구리 같은 모습도 좋았다.
둘다 하선연의 모습인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눈빛이 따스해진 그를 보고 마음이 놓인 듯, 그는 마치 고백같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나 버리면 안 됩니다."
택승은 그러겠노라는 대답 대신 반지를 낀 손을 입가로 올려 헛기침을 가볍게 했다.
그 모습에 하선연의 얼굴에 안도가 뒤섞인 정다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웃는 입술이 보기가 좋아서 참지 못해 한발 더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맞닿아오는 입술은 보드라웠고, 맞닿은 마음 역시 그러했다. 그렇게 서로 입술을 포갠 두 사람의 머리위로 겨울의 햇살이 온기를 뿌렸다.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봄을 기다리고 있기에 봄보다 더 따스한 햇살이었다. 두 사람은 부쩍 다가온 행복을 처음처럼 고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