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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보통 십대 소년들 1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原型 미국의 보통 십대 소년들

文集 220512

10 0 2022-5-12 20:11
미국의 보통 십대 소년들


1부





장목단, 2007





우리의 우둔함은 전염성이 있는 것 같아

어딘가 비어있고 닫혀 있어

우린 성공하지 않았지만, 실패작도 아니야

우리의 끝을 볼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빌어먹을, 그렇게 질질 짜지 않아도 돼

우린 어떻게 채워가야 할까 고민을 하지만

늘 검은색 타르와 텁텁한 숨결만 채워갈 뿐이야

우린 언제나 서로를 어떻게 만끽할까 고민하지

어떻게 파괴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늘 어리석은 방식으로 사랑을 해

서로를 부수며 낄낄거려.

우린 그렇게 어리석은 사랑을 해





*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2년보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며 보내는 두 달 동안 더 많은 친구를 만들 수 있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엠마가 말했다. 살결이 희고 머리카락 역시 희끗희끗한,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여자였다. 하얀 색의 스타킹에 낮은 단화를 신고 회색의 주름치마를 입은 70년대 전형적인 여교사 상이었다. 단정한 옷차림의 그녀가 작년 봄, 학기 중에 전학을 온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네가 그 곳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라.

상대방이 가치를 두는 것에 동조하고 그리고 네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려라.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2년보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며 보내는 두 달 동안 더 많은 친구를 만들 수 있다.

라고. 단정한 여교사가 내게 했던 말은 어디선가 한번 들어봤을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엔 그 말이 진심으로 와 닿고 조금은 두렵기까지 했다.

워싱턴으로 이사를 왔을 때는 모든 것이 생경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워싱턴의 회사에 스카우트 되면서 가족은 뉴욕에서 워싱턴 D.C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뉴욕에서 다니던 학교는 사립이긴 했지만 전일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는 아니었기에 워싱턴으로 이사를 오면서 새로운 학교를 알아봐야만 했다.

마침, 가을 학기를 끝내고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 시기였기에 학교를 알아볼 시간은 많았다. 사립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학교를 알아보던 부모님은 하버드 부속기관에서 발행한 Guide to Prep Schools 에 소개된 10개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눈여겨보았다.

동부지역 중심으로 학교를 알아보던 부모님의 눈에 띈 것은 St Berkshire School이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긴 했지만, 버크셔 고등학교에 무리 없이 입학할 실력은 아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선택이 내심 불안하긴 했었다.

입학원서와 수속에 관한 서류를 받기 위해 버크셔 고등학교를 방문한 엄마가 가져온 학교의 팜플렛을 보는 순간 나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 속 월튼 고등학교를 연상하게 하는 팜플렛이었다. 174에이커의 대지 위에 세워진 커다란 위용을 자랑하는 고딕풍의 절제되어있는 건물과 머리를 숙이는 법을 배운 적 없을 것 같은 거만해 보이는 소년들, 넓은 강당과 호화로운 구내식당, 승마를 하는 여자아이들의 사진을 보자 그 속에서 당당히 하나로 융화될 자신이 없어졌던 것이다.

팜플렛 속의 세계는 축소되어있는 상류 사회였다. 백인들 위주로 모든 것이 구성되어 있는 WASP들의 모임이었다.



이런 곳에 입학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입학원서를 내고 나서는 붙는 것도 걱정이었고 학교에 떨어지는 것도 걱정이었다.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본 후 몇 주 뒤에 집으로 합격 통지서가 왔을 때, 설렘과 함께 찾아온 두려움에 몹시도 떨었다. 부모님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나를 축복했고 이 학교에 입학한 것만으로도 내 인생이 앞으로도 계속 탄탄대로의 길을 걷게 될 것인 양 말했다.

하지만 정작 학교에 첫 등교를 했을 땐, 부모님의 기대와는 반대인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내게 약간의 호기심만 있을 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난 오후 수업에 처음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기억하기론, 데니스 선생님이 가르치는 문학수업이었다. 사형수에 대해 다룬 ‘DEAD MAN WALKING’라는 소설을 읽고 나서 에세이 발표를 하는 시간이었다. 소설은 보지도 않았고 그 내용을 다룬 영화도 초반부까지 보다가 포기했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참여할만한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그저 소설과 사형제도에 대한 토론을 지켜볼 뿐이었다. 선생이 내 의견을 묻긴 했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한 토론이었기 때문에 썩 괜찮은 의견은 제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새로운 상황에 놓인 인간이 흔히 그렇듯 위축되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몇몇의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엠마 선생님이 말한 ‘네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려라. 중요한 것은 네가 그 곳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 말은 그리 유용하지 않았다. 나는 적응에 익숙한 성격이 아니었고, 반 안의 아이들은 경계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처럼 도도했다. 얼굴엔 미소가 머물었지만 그 뿐이었다. 처음 만난 타인에게 무조건적인 배려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북관의 상담실에 들려 동아리에 대해 상담교사의 설명을 들었다. 10대 사립 고등학교에 대한 기대에 걸맞게 학생들을 지원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였다.상담 교사의 말로는 동아리 활동과 관련된 지출은 학교에서 완벽하게 지원되고 있다고 했다. 선생이 건네준 종이에는 예능, 봉사활동, 스터디 클럽 같은 백여 개의 동아리 모임 내역이 담겨 있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와 달리 상당히 지원 금액이 클 것 같았다. 일반 고등학교에서 즐기기에는 금액 적으로 부담스런 취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카누, 승마가 그랬다. 아버지라면 승마클럽에 가입 시키려 들었겠지만 개인적인 취향 안에는 그런 목록이 없었다.

나는 공부벌레처럼 수학클럽과 에세이 클럽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수학이야 개인적인 취향이었지만, 에세이는 예전부터 줄곧 약했기 때문이었다. 뉴욕의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SAT 역시 언어가 엉망이었고 문학과 쓰기에서 B가 수두룩했다. 뉴욕이었다면 스포츠클럽이 아닌 스터디 클럽만을 눈여겨 보는 내게 공부벌레라며 놀려댔겠지만, 이 학교에서는 그럴 걱정이 없어 보였다. 공부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곧 이 학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일 테니까.

다만 학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이민자로서 버크셔 고등학교에서 결속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했다. 꿈을 꿀 때부터 한계를 정해놓는 일들. 그것은 굳이 입으로 떠들어 대지 않아도 피부로 느낄 수 있으며 이 땅으로 건너올 때부터 뼈저리게 체감해왔던 것들이다. 노란 살색의 피부로는 얻을 수 없는 백인 중심사회 속으로의 귀화. 이민자에게는 영원한 짝사랑인 것들을 추하게 생각하고 당당해지려 노력했지만 버크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99%에 가까운 백인들을 보자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권의식에 가득 찬, 도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틈에서 학교생활을 할 생각을 하니 뒷골이 당겨 왔다. 에너지가 소진되는 기분에 한숨을 내쉴 때였다.

농구공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내 앞으로 날아왔다. 조금만 더 빨리 걸었어도 저 커다란 농구공에 코를 부딪쳐 피를 봤을 것이다. 벽에 튕겼다가 느린 속도로 내 바로 앞에서 굴러가기를 멈춘 농구공은 좀 전부터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무리로부터 날아온 모양이었다.

“앗, 괜찮아?”

저 멀리 소란스럽던 무리로부터 키가 커다란 소년이 뛰어왔다. 블리스라는, 버크셔 학생으로서는 처음 내게 인사를 건넸던 녀석이었다. 물론 그런 사소한 이유로 녀석을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녀석을 기억하게 된 건 오후 문학수업에서 사형 제도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녀석의 태도 때문이었다.

공격적이라고 생각했다. 유치하게 보일 수 있는 고등학교 토론회에서 열을 올리고 수업 분위기를 열정적으로 이끌어나가는 태도가. 그는 어느 곳에 가더라도 눈에 띌 타입이었다. 지금만 해도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어딘가 호전적인 인상이었다.

“응. 맞진 않았어.”

“미안, 놀랐지?”

“뭐… 별로.”

사실은 놀랐지만, 녀석이 말투와는 다르게 내가 놀랐다는 사실을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 말을 둘러댔다.

“레이 자식한테 던진다는 걸 그 새끼가 피하는 바람에. 아무튼 미안해.”

“괜찮아. 안 맞았는걸.”

“맞았으면 아팠을 거야. 세게 던졌거든.”

순간 에어로 가득 찬 단단하고 무거운 공에 뺨을 맞고 쓰러지는 상상을 했다. 좀 전의 세기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분명 전학생을 괴롭힐 의도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녀석이 해명을 한 뒤에도 미심쩍긴 했다. 불온한 건달을 보는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 억지웃음을 짓자, 녀석은 내가 마음을 놓았다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학교 둘러보는 중이었어? ”

“아니, 상담소 들렸다가 오는 길. 동아리 목록 받아가래서.”

동아리 홍보물을 돌돌 말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그래? 너 농구 좋아하면 나한테 말해. 나 농구부거든.”

씨익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녀석이 말했다. 검은 색 자수로 23 숫자를 새긴 오렌지색 정품 어센틱 저지를 품에 넉넉하게 입고 있는 폼이 누가 봐도 농구선수처럼 보였다. 손목 아대에서부터 손가락 아대까지 착용한 녀석은 꽤나 운동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맨 살의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 근육의 굴곡이 느껴졌다. 부담스럽지 않은, 멋진 근육이었다.

“관심 생기면 말할게.”

사실 농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네이트 로빈슨 같은 작은 선수도 농구를 한다지만, 내게 농구는 ‘하는 경기’보다는 최소 6피트를 넘는 인간들이나 하는 ‘보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블리스도 그냥 해본 말 같아서 설렁설렁 넘어가려 어깨를 으쓱했다.

“레슬링은 좋아해?”

“보는 것만.”

“보는 거 좋아하면 가끔 내 방으로 놀러 와. 3층 기숙사 애들이랑 레슬링 자주하고 놀거든. 프로선수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정도는 돼.”

꽤 어린애들처럼 노는군.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행동양식이나 표현 방법이 정제되지 않고 표현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저… 불편해?”

“뭐가?”

“아까부터 얼굴 찌푸리고 있길래.”

“……내가?”

반신반의하며 물어보자 아마도 녀석은 내 표정을 따라 하려는 듯 미간 사이를 좁히며 말했다.

“응. 이렇게. 아까 전에 봤을 때부터.”

“……그 정도로 찌푸리지는 않았어. 단지, 조금 어색했을 뿐이지. 그 정도로 사교성이 없는 사람은 아냐.”

정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하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바닥에 농구공을 능숙하게 두어 번 튀긴 후 긴 팔을 이용해 공을 옆구리에 끼웠다. 따듯한 미풍에 실린, 아주 옅은 향기였지만 격렬한 운동이었는지 땀냄새가 났다.

가까이 다가온 녀석은 내 표정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며 나를 위 아래로 살폈다. 내 얼굴 표정이 얼음 속에 갇힌 것 같다는 표현을 쓰며, 따지고 보면 오늘 초면인 사람에게 무례한 얘기를 했다. 녀석의 그런 태도가 시건방지긴 했지만 비꼬기 위해서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녀석의 눈동자 색과 생김새, 성격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나에 대한 모든 감상을 끝낸 듯 녀석은 갑갑하게 조여져 있던 넥타이를 손 끝으로 가리켰다.

“넥타이를 매기 전에 단추 두어 개 정도는 풀어줘도 돼. 그래야 좀 느슨해지거든.”

“……”

“넥타이를 조여 매는 습관이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넥타이를 꽉 매면 경정맥이 막히게 돼서 뇌출혈 위험이 생기거든.”

“……”

“그리고 머리 끝까지 잠근 단추 좀 풀어봐.”

“뭐?”

여태 이상한 소리를 하다가 머리 끝까지 잠근 단추를 풀라니. 황당함에 멍한 얼굴을 한 내게 블리스는 말을 이었다.

“긴장 풀라고. 너 오늘 처음 봤을 때부터 답답해 보였거든. 이 학교에 대해 뭔가 기대치가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거든. 왜냐면.”

녀석은 바닥에 무성의하게 튕겨대던 공을 내 뒤편으로 세게 집어 던졌다. 살벌한 소리를 내며 날라간 공을 누가 맞았는지 ‘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바로 빌어먹을 자식이라는 욕이 날라왔다. 어이없는 상황에 녀석을 쳐다보자 공을 던진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즐거운 듯 말했다.

“여기 애들은 머저리, 푼수들뿐이거든.”

방금 전학 온 소심한 아시아 소년에 대한 충동적 훈계. 그리 교훈적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알게 된 게 블리스 아이언사이드였다.

안으로 삭이는 일은 여자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신감에 차있는 오만한 백인. 이곳 버크셔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머저리와 푼수들뿐이라는 일반론을 지지하는 소년. 녀석은 고등학교 내의 학생들이 머저리, 푼수들뿐이라는 증거를 자신을 포함한 주변 친구들에게서 찾은 듯 성급하게 일반화 시킨 감이 있었다. 일부 머저리와 푼수들이 정상인의 흉내를 내며 교내를 활보하고 다니긴 했지만, 이 학교에 대한 인상은 일년여가 지난 지금도 그다지 바뀌진 않았다. 도도하고 권위에 찬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 미래에 미국을 이끌어갈 거라는 남들에 비해 조금 더 커다란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 소년, 소녀들이었다. 물론, 아까 말 한 것처럼 그 외의 범주에 드는 녀석들도 있긴 했다.





“코란을 열심히 읽고 있더군.”

“완전히 개종했나 봐?”

“개종까진 아니지, 표면적인 거거든.”

오늘 설교의 주제는 인내에 관한 것이었다. 시험과 유혹을 인내한 위대한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내 옆에 앉은 두 소년들에게는 인내란 단지 시험 공부와 연애, 스포츠에 있어 필요한 것이었는지 별로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게다가 교회 안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녀석들에게 신앙이란 그리 큰 가치는 아닌 듯 보였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에 안 나온대?”

“지금쯤 여자친구 집에서 신나게 떡 치고 있을걸?”

“너네 형은 너보다 더 하다.”

“응. 그런 것 같아. 가끔 존경스럽다니까.”

머저리와 푼수의 대화는 성스러운 교회 안에서 나눠지기에는 어딘가 음험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구석에 앉아있고 작게 속삭이는 대화라고 해도 그 대화를 나만 들으란 법은 없었다.

“형이 사귄 여자랑 두 달 동안 섹스 안 한 건 초등학교 때 사귄 여자애들을 제외하고 처음 있는 일이야.”

“오늘 만발의 준비를 했겠네.”

“그렇지. 역사적인 날이거든. 키스만해도 임신시킬지 몰라. 그건 그렇고 그 여자애가 이슬람교에 무척 심취했나 봐. 우리 형을 상대로 두 달이나 버틴 걸 보면.”

내 옆에 앉아있던 노부인이 살짝 내 옆의 두 소년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위험스런 대화가 들키기라도 할까 노파심에 팔꿈치로 옆에 앉아있던 레이의 옆구리를 눌렀다. 그제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화를 멈추며 나를 본다.

“조용히 해. 학교에서 떠들어도 되는 얘기잖아.”

조그만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말을 하고 나서야 레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쉬지 않고 놀려대던 입을 다물었다. 이 말 많은 소년은 블리스와의 오래된 친구로 <방금 전학 온 소심한 아시아 소년에 대한 충동적 훈계> 사건이 있을 때 블리스의 농구공을 맞았던 녀석이다-물론 그 뒤에 피의 복수극이 있었다. 아마도 블리스는 레이를 통해 머저리와 푼수라는 단어를 착안해 낸 듯 했다.

결 좋은 붉은 금발 머리의 이 소년은 강렬한 햇빛을 받으면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피부가 새하얬다. 녀석의 녹슨 청동 빛 푸른 눈동자는 늘 생기발랄하게 장난거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 거리곤 했다. 그 장난의 대상이 보통 여자라는 것 때문에 녀석은 버크셔 고등학교 내에서 바람기로 악명을 떨쳤다. 게다가 레이 녀석의 형 마티는 레이 보다 더 유명한 바람둥이로 버크셔 고등학교 내에서 끔찍한 악명을 떨쳤었다. 이 집안 유전자 자체가 바람둥이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는 설이 돌 정도였지만, 레이의 아버지 트레이시 로만은 여자와는 거리가 먼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유전자설 보다는 두 형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보상 욕구로 여자들을 건들이고 다닌다는 가설이 더 지지를 얻게 되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여자애들은 여자애들과 자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녀석들을 좀 더 매력적으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바람둥이와 나쁜 남자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그녀들의 심리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숙하고 참한 남자를 재미없다고 매도하고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뭔가 잘못된 일이다. 그 때문에 레이 로만 같은 자식이 여자애들의 인기에 기세 등등해 있는걸 봐야 하니 말이다.

“아름다운 말씀이야.”

잠자코 가만히 설교를 듣는가 싶던 녀석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일시적인 욕구에서 모든 악이 파생된다니. 뭔가… 너무 감동적이지 않아?”

“거기서 왜 감동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흠, 무심한 녀석.”

녀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블리스에게 듣기로 레이 로만은 무신론자에 가까웠다. 레이의 집안 자체가 블리스와 나처럼 교회를 나오게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의 아버지는 니체이즘에 깊숙이 빠져있는 인물로 원칙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방임적 쾌락주의를 실천했다. 물론, 그의 방임적 쾌락주의가 돈에 국한된 것이긴 했지만. 그가 실천해온 사상은 그의 자식들에게 성에 관한 방임적 쾌락주의로 빠져들 수 있는 어떤 당위성을 마련해주었다.

블리스가 어려운 용어를 쓰면서 설명하긴 했지만, 간단히 말해 레이 로만은 어두운 쪽으로 조숙한 십대였다. 그런 그가 한 주에 한번씩 교회를 찾아오며 욕구에 의해 파생된 죄들을 회개하는 건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늘은 회개할게 별로 없어.”

궁금하지도 않은데 레이 녀석이 속삭였다.

“이번 주엔 시험 때문에 섹스를 못했거든. 여자 젖가슴만 상상해도 쌀 정도로 욕구불만이야. 이런 젠장. 상상했더니 발기해버렸어.”

“…또라이.”

심각해지는 나완 달리 블리스는 뭐가 그리 웃긴지 웃음을 안으로 삼키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

변태 자식들. 다신 블리스 아이언사이드, 레이 로만과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리라. 발기를 참기 위해 눈을 감을 레이와 웃음을 참아내느라 고개를 숙인 블리스를 보며 다짐했다.





어머니는 한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위치한 교회를 다녔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그녀만이 어난데일에 있는 교회를 다녔는데 그 이유는 이부 예배로 한인들을 위해 한국어로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뉴욕에 살 때도, 뉴 햄프셔주에 살 때도 그랬다. 그녀는 유독, 아시아인들 틈에 있을 때에만 안정감을 느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가족은 그녀를 제외하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에 다녔다.

뉴 햄프셔 주에 살 때는 동양인이라고는 아버지와 동생과 나, 이렇게 셋밖에 없는 교회를 다녔었다. 노란 무리를 보는 경계의 시선이 익숙함으로 바뀔 때쯤 뉴욕으로 이사를 갔고, 그 곳에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워싱턴 DC로 이사를 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 때문에 워싱턴 DC로 올 때 가장 큰 일 순위의 문제는 정착할 교회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쉽게 풀렸는데, 아버지를 스카우트 해왔던 직장 상사가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 곳은 우연찮게도 블리스 아이언사이드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다녔던 곳이다.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커다란 랭글리의 할아버지 저택에서 좁은 워싱턴 DC로 분가하기 전부터 다녔던 곳이라고 했다. 수정체였을 때부터 다니기 시작해 지금 까지도 다니고 있으니 나름대로 유구한 이 교회의 역사에 한 몫을 한 셈이다. 녀석의 행동거지만을 살펴볼 때, 모태신앙이라는 추측을 할 사람은 없겠지만.

랭글리 타운에 위치한 교회는 외곽에 위치한 덕에 주차 시설도 좋고 공해에 찌들은 도심보다 자연환경도 좋았다. 거대한 강단을 가진 것도, 신자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교회는 전국에 배포되는 기독교 신문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편이었다.

일년이 넘게 다니며 알게 된 거지만, 교회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 많은 목회 저서를 지어낸 목사의 역량이었다. 목사가 쓴 책은 기독교 신학과 교리를 성경 중심으로 체계화한 기독교 신학 강해서가 대부분이었지만, 실생활에 적용되는 크리스천 지침서도 여러 권 이었다. 현대인의 나태해진 신앙심의 태엽을 감는 탁월한 기독서적은 신앙심이 거의 없는 내가 봐도 감동적이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넝쿨이었다. 태아를 감싼 양수처럼 견고하고 풍만하게 자라있는 넝쿨은 이 교회의 세월의 흐름이 그대로 담긴 것이었다. 그 신성한 아름다움은 무신론자의 고개를 숙이게 할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가냘픈 잎을 찢어 공중에 흩뿌리는 나에겐 해당되지 않겠지만.

“따지 마.”

블리스의 말에 힐끗 쳐다봤을 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제 막 돋아난 여린 잎을 땄다.

잎을 손안에서 비벼 뭉개 바닥에 버린 후, 녹색 즙으로 더러워진 손을 청바지에 닦아냈다.

“벽이 답답할 것 같지 않아?”

“뭐?”

“이 교회는 언제부터 답답하게 이 풀 더미에 덮여 있었을까.”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일걸? 왜? 보기 좋잖아.”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아 녹색 즙이 묻은 손으로 녀석의 볼 살을 잡아 늘렸다.

“너도 이 넝쿨로 덮어놓으면 꽤 볼만하겠다.”

저 얼굴이 녹색으로 물드는 모습이라니. 슈렉 보다 훨씬 더 기괴할 것 같았다. 피부의 느낌이 좋아 만지작거렸더니 녀석의 눈꼬리가 얇아졌다.

“왜, 간만에 하고 싶은가 보지?”

“나도 적극적일 때가 있어야지.”

“…이런 데서 적극적이면 뭐하냐?”

코웃음 치며 째려보는 녀석의 눈을 지긋이 감겨주곤 코를 잡아당겼다.

높지만 섬세한 콧대의 연골을 잡아 늘리자 살짝 감겨있던 파란 눈동자가 다시 또 나를 흘겨본다.

그러고 보면, 블리스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가지고 유난히 장난을 잘 치는 편이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건데, 상당히 유아기적인 행동이었다. 서로를 만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십대 또래들로서는 상당히 어색한 일일 법도 한데 여태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칠한 것처럼 풀빛으로 물든 녀석의 볼을 핥고 싶은 기분에 머쓱해져 잡아당기던 손을 떼었다.

“밥 먹으러 갈까? 진짜 배고프다. 오늘 늦잠 자서 아침도 못 먹었거든.”

“그 얘긴 내가 아까부터 하고 싶던 얘기야.”

어색한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리스는 배고프다는 타령을 하며 허공에 어색하게 떠 있던 내 손을 잡아 식당 안으로 이끌었다.

조용히 각자의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식당 안은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소박하게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면 다들 세상에서 한자리씩 꿰 차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도 있었고, 무일푼에서 시작해 랭글리의 대 저택 안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대부분이 십일조 헌금을 일반 회사에 다니는 사람의 월수입만큼이나 내는 사람들이었다.

그 속에서 식사를 하는 아버지의 표정은 그들 틈에 섞이는 중요한 임무라도 맡은 듯 편안해 보이질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상사의 아내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단정한, 기품이 서린 아버지의 눈매는 어떤 엄격함마저 느껴지곤 했다. 지나치게 반듯해 이 세상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못할 온순한 초식동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영화에 나올법한 저택의 동양인 집사 같은, 자신의 어떤 부분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엄격함.

그런 아버지가 극도로 흥분하는 모습을 본적은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정치가나 사업가 보다는 세무사 타입의 남자였다. 인간관계에 있어 정치적 목적을 갖는 게 서투른 사람이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런 아버지라고 해도 어떤 목적 없이 순수하게 랭글리 지역에 위치한 교회를 다니려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그 목적이 비틀렸건 곧았건, 그 목적에 대해 동생과 나는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었다.

식판 위에 음식을 욕심껏 담은 우리는 식사는 식탁 위에서 하는 것이라는 예절을 철저히 무시한 채 교회의 뒤뜰로 나왔다.

구즈베리 나무 밑 평평한 돌 위에 식판을 내려놓고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주말만큼은 가정부를 쉬게 하는 블리스의 어머니와 일요일 오후만큼은 어머니를 쉬게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로 우리는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점심을 해결하곤 했다. 레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계란 노른자 알레르기가 있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녀석의 입에 오늘의 메뉴는 병원 행을 담보로 해야 하는 만찬이었다.

“계란 노른자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난 여태 거짓말인 줄 알았어.”

“레이가 맨날 거짓말만 하는 줄 아냐?”

음식을 먹으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녀석이 대답했다. 녀석은 전에 먹은 음식을 넘기지도 않은 채 입안에 집어넣었다. 커다랗게 부풀은 볼이 씰룩거리는 모습이 우스워 바라보고 있는데도 먹는 데만 열중한 녀석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 음식도, 멕시칸 음식도 가림 없이 먹을 수 있는 식성을 가진 녀석이었다.

“뭐… 그런 거 있잖아. 뭔가 섬세하게 여자들을 자극하는 보호본능, 그런 감정을 일으키려는 거짓말인 줄 알았지.”

“하! 걔가 우리들한테 그런 말을 해서 뭐하게? 우리한테 매력적으로 보일 일 있어?”

상상만으로도 기분 나쁜지 먹은 걸 게워내는 흉내를 내며 정도 이상으로 화를 냈다.

나 역시 레이 로만이 눈웃음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더부룩해져 왔다.

“그건 그래.”

어깨를 으쓱하며 타코를 돌돌 말아 입안에 집어넣었다. 크레페와 비슷한 이 멕시칸 음식을 만드는데 꼬박 하루는 걸렸을 것 같았다. 계란 노른자를 얇게 펴 그 위에 음식을 곁들여 낸 음식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텔 같은 규모는 아니지만 전문적인 요리사를 두고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일요일의 점심은 입에 맞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마음에 들었는지 블리스는 음식을 가지러 한차례 더 다녀왔다.

“배 안 불러?”

“성장기라서 그래. 요즘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파.”

“나도 성장긴데 그 정도 까진 아냐.”

“…내가 너랑 같냐?”

짓궂은 말에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자 녀석이 큰 소리로 웃었다. 녀석이 키가 크긴 했지만, 나 역시 비웃음 당할 정도로 작은 키는 아니었다. 게다가 한참 자랄 나이라 그런지 성장한 몸은 제법 어른의 맵시를 흉내 냈다. 물론, 쳐다봐주는 여자애는 많지 않지만.

“네가 비정상적으로 큰 거야.”

“응. 거기도 멋지게 크잖아.”

“…미친 새끼.”

어이가 없어 웃자, 녀석도 따라 웃었다. 녀석의 사이즈는 부러울 만한 사이즈긴 했다. 그 사이즈가 내게 도움을 준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러고 보면, 레이만 그런 게 아니고 나도 욕구 불만 인가 봐.”

“교회에서 한다는 소리가.”

“너도 욕구 불만이잖아. 얼굴이 노랗게 떴는데?”

“염병할 자식. 나 원래 노랗잖아. 그리고 더 노래진 이유는… 알잖아? 나 시험 망친 거?”

편하게 욕구불만 타령이나 하는 블리스가 얄미웠다. 사실, 어제부터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어제, 그러니까 토요일에 봤던 SAT에서 작문 영역인 에세이 부분을 완전히 망쳤기 때문이다. 원래 자신 있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이번 시험의 주제는 너무도 모호했고 평소에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주제였다.

주제는 ‘누가 누구를 미쳤다고 하는가?’ 였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시험지를 받아 보았을 때에는 너무도 당황해서 신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패닉 상태에 빠져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25분 내내 끙끙거리며 뭔가 적어내긴 했지만, 내가 쓴 글에는 주제도 없었고 시험관을 만족시킬만한 예문도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적어 내린 글은 페이지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시간이 촉박해 급하게 요상한 결론을 내리고 나서 글귀 마지막에 이년아, 너도 내 입장이 되어봐(Bitch, put yourself in my shoes!) 라고 적으려던 걸 가까스로 참았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시험 문제를 생각하면 속이 쓰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단지 시험관을 욕하는 것으로 해결이 된다면 좋겠지만, 문제의 초점은 그게 아니었으므로 더더욱 속이 쓰렸다. 앞으로 시험이 많이 남았다고는 하나 내가 계속 언어 파트를 잘 보리라는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배가 아린 느낌에 신음하며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타코를 집어먹던 블리스가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에세이 때문에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잘 알겠다는 눈빛이다.

“또 작문 때문에 그런 거지?”

나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며 녀석은 잘난 척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번 주제가 누가 누구를 미쳤다고 하는가…였지?

네가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시험 문제에서 감독관이 원했던 대답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기준이라는 것은 사람의 욕구에 의해 만들어진 거야.

누가 누구를 미쳤다고 말 하는 것은 초월자의 입장에서 보면 인습이고 문화인 셈이지. 흑과 백, 선과 악도 같은 선상에 있어. 그런 가치들은 얼마든지 있지.

가치들을 계속해서 열거하다 보면 결국에 정상인과 미친 사람간의 차이점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돼. 깨달음이라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에 더더욱 누가 누구를 미쳤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야.”

솔직히 녀석이 하는 말을 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잘난척하는 녀석에 대한 거부감에 이해하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녀석은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불쾌한 내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넌 뭐라고 썼는데?”

“알아서 뭐하게. 기억도 안나.”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해봐. 난 말해줬잖아.”

기름을 잔뜩 묻힌 채로 볼을 잡아 늘리기 위해 뻗어오는 손을 탁, 쳐냈다. 하지만 녀석은 굴하지 않고 끝내 노란색 기름을 묻혀가며 양 볼 살을 잡아 늘렸다.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잡아당겼지만, 잡아당긴 볼이 얼얼해질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끝내 항복을 받아낸 녀석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대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내용의 글을 썼지. 그 예로 우디 앨런과 순이 프레빈에 대해서 썼고.”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리자 블리스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려는 듯 낑낑거렸다. 넌 역시 최고라며 내 등을 두들기기까지 했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글이었으니 자칭 에세이의 천재인 블리스는 얼마나 나를 한심하게 여겼을까. 예시가 나빠도 한참 나빴다. 우디 앨런은 정말 미쳤으니까.

“넌 정말 가끔씩 바보짓을 하는데…”

“뭐?”

“그 때가 제일 귀여워. 푸하하!!!”

블리스가 구즈베리 나무 기둥에 손을 짚고 터진 웃음보를 수습하는 동안 나는 열 받아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 개수대에 그릇을 놓았는데도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웃을 셈인지, 블리스에게 한방 먹여주기 위해 뒤뜰로 돌아갈 때였다.

녀석의 아버지가 호들갑스럽게 웃고 있던 아들이 신경 쓰였는지 뜰에 나와 있었다. 배를 잡고 뒹굴었는지 녀석의 하늘색 니트엔 잔디가 붙어있었다.

저렇게 뒹굴 정도로 나의 불행이 웃음거리가 될만한 소재인지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네 웃음 소리가 교회 안까지 들리는구나.”

아버지의 등장에 느슨하게 잔디 위에 앉아있던 녀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레이와 더불어 거칠 것 없는 무법자 블리스 녀석도 무서워하는 것은 있었다.

“어디에서건 그렇게 경박하게 웃지 마라.”

“네.”

블리스는 웅얼거리는 소리로 대답하면서 콧잔등을 긁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웃는지 궁금해 할 정도였다.”

좀 전의 웃음소리를 기억해낸 듯 미간 사이를 좁힌 그는 뒤에 어색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말했다.

“잘 지냈느냐? 블리스 녀석이 귀찮게 하지 않던?”

보통 저런 말을 할 때는 다정한 얼굴로 근육이 완화된 표정을 짓지 않던가. 목공용 조각도로 조각된듯한 그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사실과 반대로 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의 불편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물론, 그는 아들 친구와 함께 있을 때의 불편함에 대해선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가봐야 할 것 같구나. 의원님과 얘기 중이었거든.”

“네.”

“재미있게 놀고, 대신 집엔 일찍 들어가야 한다.”

그는 나에게 걸어와 등을 두들기더니,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등에 남겨진 커다란 손을 가진 남자의 감촉에 어깨를 으쓱하며 좀 전에 결심했던 한방을 먹여주기 위해 블리스의 배를 가볍게 쳤다. 윽, 가벼운 신음을 흘린 블리스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레이 네 집에 가서 놀자. 진작 갈걸 그랬어.”

훈계로 인해 머쓱해진 기분을 감추려 블리스가 팔꿈치로 가볍게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나에게 자신이 가장 어려워하는 상대를 들킨 기분이 그리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잘생긴 미간이 아주 조금 어그러져있는,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킨 어린 아이가 짓는 정제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블리스와 나 사이엔 인종적, 경제적,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 서로 교차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지만, 유일하게 닮은 점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주말에 영화를 보거나 야구를 하기 위해 차를 타고 집 밖을 나가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레이나 조쉬처럼 아버지와 농담을 하는 일도 없었다.

물론 두 아버지 사이에는 성격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의 아들들과 유난한 정을 쌓지 못 한데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버지와의 소통이 두 아들들에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 역시. 우리 둘은 쓸데없는 반항심을 키울 정도로 아버지와의 사이가 나쁘다고도 할 수 없었다.다만, 아버지와 아들, 서로에게 견고하게 쌓여진 벽 때문에 고립된 사람들일 뿐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동화되어 벽을 허물기엔 너무 낯선 존재. 벽을 허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이었다.





*





새벽은 창백하게 다가왔다. 문학 소년이나 쓸 만한 낯간지러운 표현이긴 했지만 창 밖으로 펼쳐진 세계는 창백하게 물들어 있었다. 동이 트기 직전의, 물에 풀어 놓은 푸른 색 잉크 같은 하늘로 어둠은 뻗어 있었다. 형광등 대신 독서등을 켜 놓았더니 주황색 유화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짙고 따듯한 조명이 창 밖의 새파란 풍경과 대비를 이루었다.

나는 그 안정적인 대비의 경계에 앉아있었다.

초여름 이었지만 창 밖의 공기는 싸늘했다. 다시 침대에 들어가 누울까 했지만, 예민하고 날카로운 상태의 사람이 보통 그러하듯이 잠이 오질 않았다. 딱히 예민해질 이유는 없었다. 그저, 화장실이 가고 싶어 일어난 새벽, 창 밖의 풍경을 보고 넋을 잃었을 뿐이다.

기숙사 건물 앞에 심은 포퓰러나무가 안개에 싸여 있었다. 그 밑에 작은 벤치는 새벽이슬에 젖어 있을 것이었다. 버크셔 고등학교의 교목인 포퓰러나무는 학교의 이곳저곳에 심어져 있었다. 그 나무들은 학교 근처 포토맥 공원에 심어져 있는 벚꽃 나무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십대 소년들의 예민한 마음을 자극 할만 했다.

방안의 붉은 전자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어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이른 아침을 맞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발견한 것은 새하얗게 말리 비틀어진 하얀 덩어리였다. 그것도 내 얼굴 위로 잔뜩 묻어있었다. 볼과 입술 근처 사이, 입술 위에까지 그것은 묻어있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급한 숨을 몰아 쉬며 내 얼굴 위로 페니스를 붙이며 저 하얀 점액질을 뿌려대던 녀석의 모습이. 헐떡이며 바르르 떠는 내 얼굴 위로 정액을 쏟아내던 녀석의 포식자의 눈빛이.

빌어먹을, 깨끗한 뒷정리를 기대하고 잠든 건 아니었지만 정말로 정액을 닦아주지 않았을 줄이야. 잠든 내 얼굴 위에 묻은 정액덩어리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을 녀석을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샤워를 하며 말끔히 씻은 뒤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트를 살폈지만 다행이 눅눅하게 젖어있는 곳은 없었다.

내 정액은 녀석의 배 위에 뿌려댔으니 시트가 젖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샤워를 마친 후 말끔하게 다려놓았던 세벌의 교복 중 하나를 골라 단정하게 갈아입었다. 수업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블리스 녀석이 일부러 뒤처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쾌감으로 나의 새벽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새벽에까지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장에 꽂혀있던, 기숙사에서 20분 가까이 떨어진 서관에서 빌렸던 책을 꺼냈다. G.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었다. 사일 전 마지막으로 읽었던 부분에 꽂힌 책갈피를 빼냈다. 초반이기에 재미도 감동을 느끼진 못했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담과 이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시적이고 근원과 뿌리에 대한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곤욕인 이야기였다. 이런 소설을 볼 때면, 가슴에 앙금처럼 불편함이 남았다. 그럼에도 참고 읽는 것은 몇 해 전부터 시작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들을 정복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문학적인 것이나 감상을 자극 하는 것이라면 학을 떼는 내게 내린 극단의 조치였다.

두 시간 가량 책을 읽고 뻣뻣해진 허리를 펴 운동을 했다. 어제 밤 짓눌려있던 은밀한 곳으로부터 둔하게 퍼지는 감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예전에 비해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픔은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해서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나는 내가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그 녀석과의 섹스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가슴을 쥐어짜는 행위에 대한 혐오감과 죄책감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 둔감해지고 있었다. 20여분 사이, 나 자신을 완전히 잃어가는 시간 이후 찾아오는 허무함은 여전했지만.

어떠한 감정적 소모도 없는, 단지 함께 잠을 자는 사이. 그것이 동성 친구간에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우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일관성 있는 관계이다. 우정 그리고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긴장감 왜에 우리 사이에는 또 어떤 것이 있겠는가.

블리스와 나의 관계를 망쳐놓는 어떤 비극의 선상 위에 있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라고 나는 나름대로 우리 사이를 정의 내려놓고 있었다.





학교의 규모가 큰 만큼 버크셔 고등학교는 크게 동관과 서관, 남관과 북관, 가운데 위치한 건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북관은 음악실과 미술실이 위치한 곳이었다. 학생들의 자치기구 건물이나 상담소, 여학생들의 기숙사가 이곳에 있었다. 마지막 용도를 위해 이곳에 오지는 않지만, 수업이나 동아리 활동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곳에 의무적으로 들려야 했다.

화요일 아침의 첫 수업은 음악시간이었다. 북관에 위치한 멀티미디어실에서 수업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경이 아름답게 된 학교였기에 건물과 건물이 이어진 길을 걷는 것은 그다지 지루한 일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 풀 한 포기의 뿌리조차 용납하지 않는 단단한 길 위를 느리게 걸었다. 멀티미디어실이 열리긴 했겠지만, 수업 시간까지는 30여분이나 남아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부지런을 떨던 들뜬 기분이 아침까지 남아 나는 남들보다 일찍 멀티미디어 실로 향하고 있었다. 기숙사가 위치한 동관에서 북관으로 걷는 길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새파란 잔디가 유일하게 깔리지 않은 길목 옆으로 관리가 잘 된 식물들이 자라났다. 잡초나 아름답지 못한 꽃을 피우는 풀은 정원사의 손에 의해 정기적으로 꺾이고 잘려 나갔다.

조경수로 자라난 포퓰러 나무 주위로 고풍스럽게 휘어진 갈색의 펜스에는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붉은 장미가 피어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향기를 뿌리는 장미 꽃망울은 감성을 자극 했다.

멀티미디어실에 도착해 가운데 자리에 자리를 맡았다. 블리스는 적어도 15분 뒤에나 도착 할 것 같았다. 수업은 한참이나 남아있고 굳이 교실 안에 있을 이유가 없어 좀 전에 걸었던 길을 걷기로 했다.

장미가 핀 펜스로 다가가 크게 벌어진, 꽃잎에 코를 박아 넣었다. 향이 아주 진했다. 장미로 만들어진 향수에서 느끼지 못할, 자연스럽고 야만에 더 가까운 냄새였다.

“뭐해?”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소녀처럼 장미에 코를 박고 감상에 잠겨있었다는 민망함에 어깨를 흠칫했다.

뒤에서 말을 걸어온 소년이 어깨에 얹은 손을 떨며 웃었다. 키안 음악 선생님의 수업을 같이 듣는 칼릭스 다올린이었다.

“장미냄새가 좋나 봐?”

웃음소리가 묻어나긴 했지만 목소리엔 비꼬거나 비웃으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향수로 맡는 장미향 보다는 생화의 냄새가 더 좋긴 하지.”

“……”

“사실, 두 냄새가 같다는 것도 모르겠어. 향수에선 시체냄새가 나거든. 죽은 꽃의 냄새.”

“보통 향수를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죽은 꽃 냄새라니. 음침한 표현에 녀석을 쳐다보자 창백한 느낌을 줄 정도로 새하얀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녀석이 야구부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한 피부였다. 손만 대도 상처가 날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래. 보통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겠지. 하지만, 향수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아마도 난 남들과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머리를 쓸어 올린 녀석이 말했다.

“이 학교의 좋은 점 다섯 가지를 꼽으라면, 학교 어디에서나 정리 정돈이 잘 된 조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거야.”

“나머지 네 개는 뭔데?”

“……그건 차차 생각해봐야지.”

웃음을 터트리자 흠,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녀석이 말했다.

“좋은 거야 뭐… 한두 개가 아니지. 늘 풍족한 학교니까.”

“그래. 부족한 게 없어 불만일 정도로.”

녀석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하자, 눈을 맞춘 칼릭스가 나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혼자야?”

“응?”

“늘 ‘패거리들’과 붙어 다녔잖아.”

“패거리라니?”

“너까지 포함해 다섯 명”

“뭐야, 우린 그렇게까지 붙어 다니지 않는다고.”

“……그래, 다섯이라기보다는 블리스와 조이 둘만 붙어 다니지.”

칼릭스의 말에 나도 모르는 새 주먹이 꽉 쥐어졌다. 별 의미 없는 단순한 놀림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지만 칼릭스의 독설은 그렇지가 않았다.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을 들켜버렸기 때문에 언제나 녀석과의 관계에선 내가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게도 그 날은 정신상태가 해이해져 있었다. 경계심이 잔뜩 물에 풀어진 휴지조각처럼 풀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흥얼거리며 나의 방으로 들어온 녀석에게 민망한 정사를 보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단지 벅이 내준 AP 수학문제를 물어보려는 것이었겠지. 몸을 겹치던 그 때, 두 소년의 욕망이 타인에게 보여 준 장관.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심장이 저 바닥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기분이다.

다음에 또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으로 뻣뻣해진 턱을 의식적으로 당기며 반박할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수업이 겹치는 게 많아서 그래.”

좀 더 멋진 변명거리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사실, 칼릭스에게 내숭을 떨 이유는 별로 없었다. 녀석은 아주 우연히 내가 그다지 순수한 인간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내 가장 감추고 싶은 밑바닥까지 보아버린 녀석이었다.

그 모습을 아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하나는 블리스 녀석이고 다른 하나가 이 칼릭스 다올린 녀석이었다.

후자의 인물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겠지만. 내 말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흉내를 냈다. 못미더워 하는 나를 보고 웃으며 녀석이 말했다.

“음악 같이 들을래?”

포퓰러 나무 밑 갈색의 펜스 위로 넘어온 장미를 뒤로 밀어내며 앉은 칼릭스는 바닥에 늘어져있던 한쪽 이어폰을 내게 내밀었다.

이어폰은 귀에서 빼 낸 상태였지만, 음악은 이어폰을 통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보나마나 마릴린 맨슨의 노래일 것이었다.

시끄럽게 고막을 학대하는 음악 따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 뭐, 시간도 많은데.”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자 녀석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녀석의 옆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시끄러운 음악이 고막으로 쏟아졌다.

내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문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미심쩍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녀석은 낮은 허밍 소릴 내며 따라 불렀다.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감고는 입 꼬리를 양 옆으로 말기까지 했다. 기분 좋은 망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따라 부르는 녀석이 신기했다. 노래는 새로운 가사가 나온 뒤에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식이었다. 그리고, 가사가 아주 자극적이었다.

내가 굳은 걸 느꼈는지 눈을 슬며시 떴다. 녀석은 자세를 바로 잡더니 내 눈을 쳐다봤다. 뻔뻔하게도 웃고 있었다.

세 번째 같은 구절이 반복 되었을 때 세모눈을 하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악동 같은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말했다.

“성질 돋우는 게 재미있어?”

“아니.”

“싸우자는 거지?

“설마.”

나를 조롱하는 게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에 한방 먹이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르며 어금니를 붙인 채 말했다.

“그럼 뭐야.”

“……단지, 후유증이 너무 길어서.”

이어폰을 확 떼어내며 칼릭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화를 내는 내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녀석을 노려보았다.

“아… 미안미안.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는 마. 우스운 일이 아닌데… 네 반응이 너무 웃겨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웃음을 멈춘 녀석은 주머니에 들어있던 mp3 플레이어의 전원을 껐다. 이어폰을 플레이어에 돌돌 말아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후, 좀 전의 웃음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야누스처럼. 이질적인 변화에 미심쩍은 눈으로 녀석을 흘겨보자, 좀 전보다 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문 잠그는 걸 절대 잊지 말아. 다른 사람이 본다면… 나처럼 웃어줄지 장담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칼릭스는 코를 찡긋하며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녀석의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반역, 반역, 파티, 파티, 섹스, 섹스, 섹스, 격렬함을 잊지 마라. 섹스, 섹스, 섹스. 그 격렬함을 잊지 마라.

나를 비난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나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것인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건물의 문이 닫히기 직전,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 장관을 보고 나처럼 웃어줄 수 있을까?





*





“이것 좀 볼래?”

블리스가 에세이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앞으로 사진을 들이밀며 말했다. 녀석의 커다란 손 안에는 사진 묶음이 들려 있었다. 그 사진들은 투명한 비닐로 꼼꼼하게 싸여있었다. 빗물이나 먼지, 세월에 의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을 것처럼 무장된 느낌이었다. 비닐 안의 사진은 새파란 하늘에 구름처럼 분무되어있는 새하얀 콘트레일을 담고 있었었다.

“…이게 뭐.”

언제부터 녀석에게 하늘을 찍는 감성적인 취미가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손에 들린 사진을 치워내며 문제집을 보자, 다시 집요하게 사진으로 시선을 가로막는다.

“자세히 좀 보라고.”

귀찮아하는 내 얼굴을 못 본 척, 랩 안에서 사진을 꺼내 든 녀석이 말했다.

“그냥 콘트레일 사진이 아냐. 일요일 오후에 랭글리에서 찍었던 건데, 첫 번째 사진이 2시 47분에 찍었던 거고, 두 번째 사진이 4시 45분경.

세 번째 사진이 5시 50분경에 찍었던 거야. 뭔가 이상한 거 없어?”

“…콘트레일 한번 오래 가네.”

“그래! 그거야. 사진으로만 보던 컴트레일을 발견한 거지!”

뭐가 그리 기쁜지 사진을 든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입술에 찐한 베이비키스를 남긴 녀석은 얼굴을 찡그리며 입술을 닦아내는 내게 말했다.

“컴트레일이 뭔지 알아?”

“콘트레일?”

“아니, 컴트레일. 콘트레일과 혼동하기 쉽지만 다른 점이 있어. 둘 다 언뜻 보기에는 항공기에서 분무하는 흰색의 비행운 같아 보이거든. 콘트레일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성분은 수증기이고 비행운이 생긴지 20여분이 흔적이 거의 사라지곤 하지.하지만 컴트레일을 구성하는 성분은 그렇게 순수하지가 않아. 컴트레일은 알루미늄, 마이콥플라스마, 적혈구, 기름, 각종 바이러스들을 포함하고 있지.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3시간이 지나도록 비행운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어. 점차 넓어지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지.”

손끝으로 비행운이 확장되어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 수평을 그리며 뻗어나간 비행운의 모습은 위협적이기 보다는 평화로워 보였다.

“…왜 이런 걸 뿌리는 건데.”

내 질문이 매우 맘에 들었다는 듯, 블리스는 녀석답게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현상은 걸프전, 아프간내전 때 특히 많이 발견 되었지. 요 근래에는 인구 밀집 지역에서도 많이 발생하고 있어. 청명한 하늘을 회색으로 변질되게 하는 원인 중의 하나. 왜 이런 걸 뿌리는가. 모든 음모론이 그렇듯이 아직 확실한 것은 없어. 다만, 늘 그렇듯이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거지.”

X파일의 폭스 멀더의 말투를 흉내 내며 녀석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이 직접 찍었다는 사진 밑에 깔린, 아마도 컴퓨터로 프린트했을 법한 사진들을 천천히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진을 조심스럽게 팩 안에 집어넣은 후 잡동사니를 집어넣는 캐비닛 안에 팩을 집어넣었다. 전에 저 캐배닛 안을 살짝 들여다본 일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프리메이슨, UFO, 크롭써클이나 초능력과 관련된 각종 인쇄물이 담겨 있었다. 손으로 직접 적은 듯한 원고지도 몇 개 발견되었다. 처음엔 블리스의 정신이상자 같은 얘기에 대해 기겁했었다.게다가 나는 음모론 추종자라 하면, 어두운 방안에 틀어박혀 음습하게 자료나 뒤적거릴 자폐아 이미지를 상상해 왔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이미지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존재였다. 블리스 아이언사이드는 미국의 보통 십대 소년들이 그렇듯이 정치, 사회와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어 보였다. 아니, 완벽하게 그런 종류의 것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 사회와 공생 관계를 맺고 있는 각종 음모론-CIA, UFO, 9.11테러 등의-에 대해서 자신의 관심을 인정하는 걸 보면 그랬다.

특히, 블리스는 집이 아닌, 집 근처의 공원이나 번화한 거리를 걷곤 할 때 서로가 따분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무언가 이야기 거리가 필요할 때,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각종 음모론에 대해 떠들곤 했었다. 물론, 나 역시도 이 나라에 어지럽도록 범람하고 있는 각종 음모론에 대해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모든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너무도 구식이었다.

켜켜이 쌓아져 온 가족들과의 신뢰 관계, 안정된 부모님의 수입, 착한 여동생, 지혜로운 부모님. 이 모든 것들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보살핌. 황색 언론, 각종 가판대를 장식하고 있는 정신이상자들의 환상에 불을 지피는 이야기들에 열광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넌 어째 멀쩡한 세상에 대해 걱정만 늘어놓을까.”

녀석의 한숨에 나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믿든 안 믿든 진실은 그곳에 있지.”

“기가 막혀서…… 솔직히 생각을 해봐. 환경단체에서 마이콥플라즈마, 기름에다가 각종 바이러스를 뿌리고 다니는 비행기를 가만히 두겠냐?”

“멀쩡히 다니고 있으니까 그게 음모론 이라 이거지.”

“됐다. 너한테 이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 누구를 위한 음모론 인지 모르겠군. 네 흥미를 위한 음모론 일지도 모르지.”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지껄이는 블리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문제집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좀 전에 읽던 부분을 찾으려는데 녀석의 손이 문제집을 밑으로 누르는 바람의 얼굴을 마주볼 수 밖에 없었다.

“아 또 왜.”

“공부 나중에 해.”

“공부하자고 네 방에 부른 거 아니었어? 계속 그럴 거면 내 방에 갈 거야.”

“매정한 자식.”

입술을 삐죽 내밀며 비죽거리는 녀석에게서 에세이 문제집을 잡아 채 좀 전에 보던 페이지를 펼쳤다. 녀석 때문에 종이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잔뜩 골이 난 표정을 짓는 녀석을 흘겨보자,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알아챈 듯 어린아이처럼 내밀고 있던 입술을 집어넣었다. 정제 되지 않은 저 아이 같은 표정이라니. 아버지 앞에서는 절대 그러지도 못하면서. 프레드씨는 점잖아 보이기만 하던 아들이 사실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오늘 보려고 했던 에세이 예문을 블리스가 입을 다문 사이 다 읽었다. 녀석의 침대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교복을 입은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가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여태 지켜본 바로는 블리스는 침대 시트를 일년에 단 두 번만 가는 녀석이었지만, 찝찝함 보다는 피곤함이 더 컸다. 게다가 배게에서 땀 냄새가 아니라 향수냄새가 났다. 불가리 블루 옴므 오드뚜왈렛이라는 이상하고 긴 이름을 가진 늘 뿌리고 다니는 향수였다. 향수는 블리스의 취향이라기보다는 레이의 취향이었다. 남자 친구끼리 향수를 선물 하는 것은 뭔가 낯 뜨거운 일이지만 레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블리스에게 향수를 선물했다. 듣기로는 중학교 때부터 그래왔던 것 같다. 나는 느끼한 그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블리스가 별 불만 없이 사용하는 걸 보면 그도 맘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베개에 코를 박고 있자니, 진드기를 비롯한 각종 먼지가 걱정됐지만 커버만큼은 며칠 전에 갈았는지 보지 못한 디자인이었다. 편한 마음으로 축 늘어져 있는데 블리스가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귀찮아.”

“네 엉덩이 본떠서 벽에 걸어놓고 심심할 때마다 자위할까? 넌 잘 모르겠지만 정말 예술적이거든.”

“미친 새끼.”

큭큭거리며 웃자 블리스가 신발을 벗으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좁아. 여기서 같이 누울 생각하지마.”

“네 위에 누우면 되겠네.”

말 그대로 내 위에 그 기다란 몸을 눕히는 바람에 허파에 압박이 와 팔꿈치로 밀어냈다. 굴하지 않고 팔을 잡아 채 감싸 안으며 배 앞으로 손을 밀어 넣은 녀석 때문에 숨이 찼다.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지자 그제야 양 다리를 벌려 내 다리 옆으로 올려 무게를 줄여주었다. 귀찮을 정도로 스킨십을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녀석의 가슴이 등을 눌러와 숨 쉬기가 힘들었다. 가만히 늘어져 있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목덜미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닿았다가 사라질 때마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바지 안의 셔츠를 빼낸 녀석이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밋밋해서 좋아.”

“……염병할 자식. 밋밋하다니. 훌륭한 복근이 느껴지지 않아?”

“미안하지만, 전혀 느껴지지가 않아.”

쿡쿡거리며 녀석은 소름으로 움츠러든 내 어깨에 턱을 올려 귓불을 깨물었다. 갈수록 분명한 목적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녀석과 입을 맞추고 싶어 고개를 돌리자, 녀석도 기다렸다는 듯 입을 맞춰왔다.

물고, 빨고, 깨물고, 먹어버리고. 터트리고.

블리스의 입술을 깨물자 약하게 갈라져있던 피부 조직이 툭, 하고 붉은 피를 터트렸다. 녹슨 철 맛이 나는 키스를 나누는 기분은 묘했다. 입술을 떼어 내려는 블리스의 아래 입술을 살짝 잡아당기며 혀를 집어넣어 혀 아래의 설소대를 건드리자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으……나한테 피나? 입술 아파.”

“내가 터트린 것 같아.”

녀석의 등에 눌린 불편한 자세로 키스를 하려니 숨이 찼다.

블리스 역시 자세가 불편했는지 등에 기대고 있던 가슴을 떼며 두 팔로 몸을 지탱해 몸을 트는 것을 도왔다. 머리 옆으로 녀석의 팔 때문에 움푹하게 들어간 침대를 느끼며, 블리스의 갈라진 입술 위로 스며드는 피를 살짝 핥았다.

마주보는 블리스의 눈이 묘한 열기를 띠었다. 어제 밤에도 마주쳤던 눈이다. 녀석이 몸을 지탱하던 팔을 굽히며 부드럽게 입술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너… 확실히 피부가 좋아 진 것 같아.”

“피부?”

“응. 훨씬 더 부드러워 진 것 같거든.”

“나 오늘 로션 바르는 것도 잊었는데?”

피부가 좋아졌다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만지작거렸지만 특별히 좋아졌다는 느낌은 없었다. 단지, 녀석의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미끄러울 뿐이었다.

“내가 밤에 로션 발라줬잖아.”

“……네가?”

황당함에 얼굴을 찌푸리자, 녀석이 장난스런 말투로 말했다.

“정액이 피부에 좋대….”

“……”

“……라는 건 장난이고. 그렇게 살벌하게 노려보지마. 미안!”

블리스의 한마디 때문에 기억났다. 내 얼굴에 축축하게 묻어있던 하얀 덩어리들. 헐떡이며 내 얼굴 위로 점액질을 뿌려대던 모습이.

“…맞아.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네. 사실, 널 보자마자 없애버리려고 했었는데 말이야.”

본인의 위기는 생각도 못한 체, 블리스는 킥킥거리며 웃기 바빴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교과서를 집자 그제야 내 위에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여전히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는지 낄낄거리고 있었지만.

“야아… 미안하다니까.”

“이리와. 좀 맞자.”

“사랑하는 지우야. 대화로 하지 않으련? 어제 네가 너무 자극…”

자극적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녀석을 밀어 쓰러트리며 입술을 잡아 늘이자 마지막 말은 결국 뱉지 못했지만. 물론, 내 밑에서 둘둘 말은 교과서를 피해 애원하는 블리스의 모습 역시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





“JFK 홈페이지 운영자한테 온 단체 메일… 너한테도 보내줄게. 오늘 가서 꼭 읽어봐.”

더위를 피해 스타벅스 안에 들어와 시원한 커피를 시켜놓고 기다리는 내내 녀석은 JFK 음모론에 대해 얘기했다. 짜증스런 내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 반응 없는 나를 얌전히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신나게 떠들어 댔다. 몇 주 전에 갑자기 JFK 암살 사건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더니 인터넷 클럽까지 가입한 블리스는 전혀 흥미를 보이 않는 내 표정을 보며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너의 이딴 정신병자 같은 이야기를 듣느니 차라리 스니퍼와 섹스를 하겠어. 물론 내가 대주는 걸로.”

“그런 젓가락과 섹스하는 게 낫겠다고?!”

스니퍼는 같은 반의 소심하기 그지없는 남학생으로 화장실에서 우연한 기회로 스니퍼의 페니스를 보게 된 다른 반의 아이가 전교에 스니퍼 페니스의 사이즈를 소문내면서 남학생들은 물론 여학생들의 공공연한 이야기 제물이 되곤 했다. 레이가 회원으로 있는 신문 반에서 펴낸 소식지의 아주 작은 가십란에 실린 얘기였다. 가쉽란에 글을 쓰는 학생은 버크셔에서 가장 뻔뻔하다고 여겨지는 레이 자식이었다. 스니퍼의 페니스 사이즈가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 알고 글을 썼는지 모르고 썼는지는 친구인 나도 알 수 없지만. 실제로 녀석의 페니스를 본적은 없어서 그 진위여부를 가리진 못했지만 녀석의 페니스가 정말 젓가락처럼 얇다면 그 녀석과의 섹스는 무척 재미가 없을 거다. 애널에 들어오기 전에 부러져 버릴 테니까. 하지만 블리스의 저 짜증나는 음모론 이야기를 듣는 것 보단 훨씬 덜 짜증이 날 거다.

“네가 지금 말하는 음모론이나 탐 크루즈가 말하는 사이언 톨로지의 교리나… 내게는 그게 그거같이 느껴지거든.”

“단지 흥미 거리야. 탐크루즈의 열렬한 신앙심과 내 취미를 비교하는 건 좀 지나친데?”

“똑같아. 전도 하듯이 네 취미를 강요하잖아.”

짜증스럽게 내 뱉으며 푸라푸치노 카라멜-이름도 특이한, 질릴 정도로 달콤한 커피를 스트로우로 빨아 마셨다.

화요일에 컴트레일 음모론에 대해서 말한 것까지 참을 순 있었다. 내 메일로 보내준다는 얘기까진 하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강요하진 않았어.”

“그게 그거야.”

더 이상 음모론에 대해 한마디라도 뻥끗 한다면 이 자리를 뛰쳐나가 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더 이상의 반박은 하지 않았다. 평소 내 성향이 공격적인 건 아니었지만 학교를 나온 뒤부터 더위에 지쳐 제정신이 아니었던 내게 녀석의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얘기들은 토끼를 사자로 만들 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너 오늘 섹스 할 수 있겠어?”

“……갑자기 그건 왜.”

“생리 하는 것 같아서.”

테이블 위에 놓인 얇은 빈 플라스틱 컵을 녀석의 얼굴 위로 던져버렸다. 이마에 텅-, 하고 맞고 빈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 플라스틱 컵이 통통거리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블리스는 피식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컵을 주웠다. 주우면서도 성질 나쁜 자식이란 말을 계속 궁시렁거렸다. 좀 전의 텅, 하고 비어있는 소리가 난 것은 녀석의 뇌가 비어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꽤나 요란한 일을 벌였는지 주변에서 힐끗거리며 쳐다본다. 속이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생리는 일주일 전에 끝났어.”

“큭큭…”

“생리는 끝났어도 기분은 여전히 더러우니까, 음모론 따위 얘기 하지 말란 말이야. 네가 그런 거에 흥미를 갖는 걸 보면 꼭 정신이상자처럼 느껴진다고.”

질 나쁜 정신이상자들이 좋아하는 강간, 윤간, 변태 플레이에 취미를 갖는 것 보다는 훨씬 더 건전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빴다. 적어도 나의 친구들은 정상적이 길. 정상적으로 성장해 이 세계에 도움이 되는 어른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





블리스 아이언사이드는 일본 포르노를 좋아한다. 백인 금발미녀보다 노란 피부에 새까만 머리털, 새까만 음모가 난 동아시아인이 나온 포르노를 좋아했다.

무엇이 그를 아시아인들이 화면 속에서 꿈틀거리는 포르노를 좋아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계기에 의해, 녀석이 아시아인들과의 섹스에 환상을 품게 되었는지는 녀석이 더 어렸을 때, 녀석의 부모가 그를 세상 밖으로 보내는 대신 자신들의 품 안에 꽁꽁 숨겨놓고 싶을 만큼 어렸던 그 나이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처음에 내가 이 버크셔 고등학교에 전학 왔을 때를 나는 뚜렷하게 기억한다. 이미 한 학기가 지나서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분위기에 걱정하고 있던 내게 녀석은 말을 걸어왔다. 워싱턴 사람들은 다 이런가 싶을 정도로 친절하게 자신의 무리에 나를 소개시켜 주었으며 전에 다니던 학교와 다른 기숙사 생활 시스템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모두 어둡게 계획된 공략으로 내가 갈색 피부의 인도인이었다면 그런 다정한 친절은커녕 인사를 나누지 않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이 학교에 예쁘장한 동양인 여학생이 있었다면 역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녀석과 섹스를 하게 된 것을 모두 블리스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애매모호한 태도로 녀석의 모든 작업들을 받아들였던 나는 사감과 동기들의 눈을 피해 갖는 섹스를 즐기기까지 했다.

22시 30분에 모든 불이 점멸된 후 모두가 잠들었을 자정을 넘긴 시간이 되면 녀석은 내 방으로 몰래 들어와 내 입을 손으로 꼭 막고는 소리를 죽여가며 섹스를 하곤 했다. 게다가 이렇게 주말이라 기숙사를 나와도 되는 날이면 녀석의 집에서 녀석의 부모 눈을 피해 섹스를 즐겼다. 방안 구석에 꼭꼭 숨겨 놓았던 출처가 의심스럽고 녀석의 정신세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각종 도구를 사용하면서 까지.

한 달에 한두 번 질펀한 섹스를 위한 관장을 하곤 했다. 하지만 녀석의 집에는 관장약이 없으므로 (어느 누가 게이거나 심한 변비가 아닌 이상 집에서 관장약을 사용하겠는가) 애널 속으로 살짝 데워진 우유를 집어넣고 변기에 앉아있는 시간이 제일 괴로웠다. 아니, 괴롭다기 보다는 민망하다고나 할까. 향긋한 여성용 질 내 세척제로 애널 안까지 닦고 나가는 나의 섹스 전의 노력을 녀석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별로 알려주고 싶지도 않고.

“오! 달리잉~ 힘들었지?”

그 큰 덩치로 오버하며 달려드는 녀석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준 후 털썩, 몸을 파묻을 듯이 쇼파 등받이에 기댔다. 찰싹 달라붙어 귀찮게 하는 녀석을 진이 빠져서 때려주기도 힘들다.

버크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학식이 높고, 좋은 집을 가지고, 자식들을 사립학교로 입학 시키는,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었다. 블리스의 아버지 프레드 아이언사이드는 정계 쪽 인사로 다음 년 시장 후보로 거론 되는 정치가였다. 블리스의 어머니는 변호사로 주중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주말에는 그녀의 남편이 시장이 되게 하기 위해 파티장소에서 고군분투 하는 여자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어떻게 음모론이나 좋아하는 아들이 자랐는지 정말 미스터리다.

오늘 같은 주말에도 블리스의 부모는 쉬지 못하고 정계 인사로부터 초대받은 파티에 가야 했다. 백악관 근처 잔디밭, 스타벅스, 포토맥 공원 등지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온 시간이 5시쯤이었는데 블리스의 부모는 6시에 시작하는 파티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을 대하는 예절 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하게 아버지에게 교육 받았었다. 그게 또 백인 어른들에게는 귀엽게 보였는지 블리스의 어머니는 나를 좋아했다.

피자, DVD 빌려보기에는 과하다 싶은 돈을 녀석에게 주고 녀석의 부모님은 5시 30분쯤에 집을 나섰다. 피자를 시켜 배터지게 먹고, 그 먹은 피자가 막 위를 지나고 있을 무렵에 관장을 했고 지금은 이렇게 소파에 앉아있다. 본격적인 놀이를 시작할 차례다.





워싱턴의 여름 날씨는 덥고 습하다. 초 여름이었기에 어렸을 적 한 여름에 한국에 갔을 때 느꼈던 더위보다 덜했지만 잔뜩 돌아다녀 땀 냄새가 풀풀 풍겼다.

우리는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에 들어갔다. 온전히 샤워를 하기 위한 공간이었기에 욕실 안은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옷을 홀딱 벗은 뒤에 부스로 들어가 따듯한 온수를 틀었다. 녀석이 스펀지에 잔뜩 바디 샴푸를 짜 거품을 내어 축 늘어진 페니스를 성급하게 비벼 닦았다. 온수에 거품을 닦아내고 나자 축 늘어져 있던 페니스가 반쯤 서있었다.

“…빨아줘.”

평소의 목소리보다 한 톤 정도 낮아진 목소리가 짜릿하게 욕실 안을 울렸다. 나는 침을 삼키며 무릎을 꿇었다. 머리 뒤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를 느끼며 녀석의 페니스를 입에 담았다.

하아… 하고 낮은 녀석의 한숨이 욕실 안을 공명하며 울린다. 나는 입에 담은 녀석의 힘없는, 아니 점차 힘을 얻어가는 페니스의 귀두부분을 살짝, 핥았다. 혀를 세워 자잘한 주름들을 핥자 나른한 단 한숨을 쉰다.

이렇게 오럴을 하는 상황에서도 녀석의 손은 부지런하게 거품이 잔뜩 일어난 스펀지로 서로의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

“하…… 아래도 핥아줘.”

어설프게 문지른 스펀지를 바닥에 던져버린 후 물에 젖어 촉촉해진 머리카락 사이로 녀석의 커다란 손이 가르고 들어온다. 단단하게 머리를 감싼 감촉이 물기 때문인지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입술을 솟아오른 페니스 아래의 고환에 갖다 대자 녀석의 코에서 흥분한 숨소리가 흩어져 나온다. 압박하듯 고환을 입안에 넣고 애무하자 머리를 감싼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혓바닥으로 느릿하게 입안에 들어온 말캉한 고환을 핥아대며 오른손으로 녀석의 페니스를 애무했다. 한참을 따듯한 물길을 받으며 녀석의 페니스를 애무하자 딱딱한 봉처럼 단단해진 페니스가 배에 닿을 듯이 서있었다.

“손가락 넣어봐…”

페니스의 귀두 부분만을 장난하듯 할짝이던 나를 옆구리에 손바닥을 끼워 일으켜 욕실 벽에 밀어 내며 녀석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 이외의 공간에서는 섹스를 환영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녀석은 아마도 욕실에서 섹스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하자.”

“안돼, 손가락… 넣으라니까..”

급했는지 야수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며 말하는 녀석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속으로 fuck you를 날리며 벽에 등을 맞대고 섰다. 등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정신이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내가 못 마땅 했는지 왼쪽 다리를 구부려 자신의 옆구리 사이에 끼우며 멍하니 열려있는 내 입술에 키스했다. 유연한 근육이 말캉거리며 타액을 빨아들이는 기분 좋은 감각에 뜨거운 날숨이 절로 토해졌다.

“손가락 넣어서 문질러봐.”

녀석의 말 대로 오른손의 손가락 한 개를 한쪽 다리가 녀석의 옆구리에 끼여 적나라하게 드러난 아누스 안으로 조금씩 집어넣어갔다.

그렇게도 좋은 거냐, 나는 꿈틀거리며 이물질을 반기는 나의 애널의 조임에 민망해 하며 끝까지 집어넣었다. 아무런 윤활제도 없이 빡빡하게 들어간 입구를 풀기 위해 꿈틀거리며 익히 알고 있는, 자위 할 때, 녀석이 찔러 들어올 때마다 수 십 번 수 백 번이고 건드렸던 전립선을 문질렀다.

“흑!”

짧지만 강렬한 스파크에 녀석의 몸에서 부르르 떨어대자 지켜보고 있던 녀석의 숨도 거칠어진다.

“손가락 한 개 더 넣어봐.”

거친 숨을 내쉬는 녀석의 말대로 손가락 한 개를 더 집어 넣어 긁어대자 오줌이 마려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 있기도 힘들다. 주저앉고 싶다. 거친 숨을 몰아 쉬던 녀석이 갑작스럽게 애널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어 울음과도 같은 신음을 흘려댔다.

“아악…. 학…… 으…아아응….ㅇ….”

네 개의 손이 안에서 비벼지며 거칠게 휘두르고 있었다. 강한 쾌감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운 감각에 숨이 멎어버릴 것 같다. 빠르고 강하게 수축하는 애널 내부에서 축축하게 네 개의 손가락이 비벼지자 까무러칠 것 같다. 특히,중 녀석의 두 개의 손가락은 전립선을 건들이다 가도 기역자로 구부려져 애널 안을 버릇없이 휘둘렀다.

“악! 아학!!”

찌걱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두 개의 손가락이 빠졌다. 곧이어 녀석의 두 손가락도 빠져 나왔고 녀석은 따듯한 물이 쏟아져 내리는 바닥위로 나를 엎드리게 했다. 엉덩이만 높이 쳐들게 한 채로 블리스는 윤활유도 없이 한번에 꿰뚫고 들어왔다.

“!!!!!!!”

아무런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꿰뚫고 들어온 녀석의 페니스의 압박감에 놀라 나는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숨조차 쉬지 못하고 압박감에 끙끙거리고 있자 녀석이 엉덩이를 커다란 손으로 비틀듯이 잡아댄다.

전에 녀석이 한참 커다랗게 발기 됐을 때 장난으로 자로 재본 적이 있었는데 녀석의 페니스의 길이는 7인치가 조금 넘는 크기로 아버지가 자주 말하는 센치 단위로 18센치나 되었다. 그 둘레는 어린애들 팔목 수준이고!

아픔에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배가 아려서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손을 가져가자 녀석이 페니스를 잡으려고 한 걸로 안건지 배로 가져간 손을 쳐냈다. 녀석은 지독히도 내가 뒤로만 가는 것을 밝혔다. 미친 변태새끼!

“좀… ㅇ.. 천천히 해. 이 미친 새꺄!”

아파서 울어대자 달래는 척 아랫배를 그 커다란 손으로 쓸어대지만 결국 쓰다듬음은 결박으로 바뀌어서 엉덩이를 더 높게 올렸을 뿐이다. 딱딱한 욕실 바닥에 개처럼 엎드려 슬금 슬금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녀석의 페니스에 울고 있는 내 꼴이 한심하다.

반쯤 빼낸 페니스를 천천히 꽂아 넣기 시작하자 샤워기가 내뿜는 시끄러운 물줄기 소리 사이로 쿨쩍,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녀석을 흥분시켰을 것이다. 이 섹스에 미친 새끼가 갑자기 두 손으로 아랫배를 결박하더니 미친 듯이 박아대기 시작했다.

“악…아퍼… 윽! 미친놈아!!”

“너… 진짜 꿈틀대… 하아… 애널이 페니스에 달라 붙는 것 같어.. 윽..”

히끅거리며 울어 대는 내 위로 미친 듯이 박아대는 녀석은 그 와중에도 정확하게 전립선 부근만을 건들여 숨이 넘어 갈 것 같았다. 일부러 강약 조절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강하고 빠르게 허리를 놀리는 통에 도저히 그 페이스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나는 움직임을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그저 가만히 녀석의 폭력에 가까운 삽입을 받아들였다. 중간중간 자꾸만 쳐지는 엉덩이에 짜증이 났는지 강하게 아랫배를 끌어올려 깊은 삽입을 했다.

“하아…하아…… 나…나 주…죽을 것 같애!”

이게 비명인지 아니면 악에 받친 소린지, 아니면 그저 신음 소린지 모르겠다. 다만 쾌락이 너무 커서 돌아버릴 것 같다.

녀석도 이를 악물었는지 내뱉는 신음 소리가 억눌려있다.

“아흑! 악! 아악!!”

그냥 박는 것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위로 쳐올리고 돌리고 찢어 발기듯이 애널 안을 찔러댄다. 힘을 주어 위로 페니스를 올리자 욕실 타일에 밀린 얼굴이 따갑게 쓸렸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새도 없이 또다시 빠지고 또다시 밀려들어오는 페니스에 온 몸이 경련을 일 듯 떨어댄다. 아파서 죽을 것 같으면서도 온 정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쾌락에 사정의 기운이 도는 페니스에서는 찔끔거리며 정액을 흘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한번도 터치하지 않았음에도 온전이 애널 안에서 녀석의 페니스에 비벼지는 물리적인 반응 만으로 페니스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정액에 나는 짐승처럼 울어댔다.

내가 한번의 사정을 지루할 정도로 괴롭게 끝낸 뒤 녀석은 지루한 자세를 바꿀 겸 축 늘어진 나를 마주보게 하더니 자신의 어깨 위에 내 다리를 걸치고는 말을 타듯 내리 깔고 앉으며 나를 위에서 아래로 박아대기 시작했다. 하필 자리 잡은 곳이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바로 그 지점이었기에 나는 숨을 쉬기도 힘이 들었다.

쿨럭거리며 기침을 해대면서도 녀석이 빠르게 몰아세우는 통에 숨을 들이쉬기 위해 입을 벌릴 때마다 코와 입 안으로 샤워기의 따듯한 물이 흘러 들어왔다. 이거 날 죽이려는 고문이 아닐까 괴로워하면서도 뒤에서는 계속해서 전립선이 건드려져 나는 바닥을 긁어대던 오른손을 들어 강하게 녀석의 머리통을 갈겼다.

“학….악…. 물….물! 물…마셔서… 흑…윽…”

병신같이 울어대는 통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나 보다. 갑작스런 충격에 시뻘건 눈으로 나를 내려보다 그제야 내가 쏟아지는 물줄기에 숨도 못 쉬고 있는걸 알았는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페니스를 넣은 채로 무릎걸음으로 움직여 물줄기가 내리는 곳에서 조금 비껴 올렸다.

“그만 하고 싶어?”

이 색마가 왠일로 이런 말을 하나 싶어, 괴로움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울자 녀석이 악마처럼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아무리 박아대도 울지 마, 그렇게 예쁘게 울어대면 멈출 수가 없잖아.”

미친 놈 같으니라고…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녀석은 다시 밀어붙였다. 등이 아리고 아프고 항문 안 역시 괴로웠지만, 나의 페니스는 다시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다시 진득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괴로워서 울었다. 사정감이 다가오는지 좀 전보다 움직임이 급박해졌다.

나는 더더욱 그 속도를 따라갈 수도 없고 애널 안의 조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조금씩 찔끔거리며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를 내 안에 조금씩 흘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벌써 두 번째의 사정을 시작한 뒤라 애널 안이 급격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윽! 밖….에서 악! ㅎ…해…….”

내 말을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듣지 못한 건지 눈마저 질끈 감은 채 거친 숨소리를 내며 사정에 집중하던 녀석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과 동시에 안에서 정액 덩어리들을 발산했다. 주르륵, 하고 안에서 뜨겁게 퍼지는 정액들에 직장 안이 충만하고 뜨겁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좋아… 하아… 지우… 진짜 좋았어.”

“하아….으…..하아…..”

어깨에 올려진 다리를 옆구리 사이에 끼우며 블리스는 헐떡거리며 내 위로 엎어져 내렸다. 나의 심장과 마찬가지로 녀석의 심장이 방망이질 치듯 쿵덕거렸다. 하지만 애널 내부에 그대로 집어넣고 있는 녀석의 페니스 크기는 줄지 않아, 오늘은, 녀석과의 유희는 지독히도 길겠구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욕실에서 십분 가량 서로의 심장을 맞댄 채로 숨을 고르다, 페니스를 빼낸 녀석은 섹스 후 나른함을 즐기려던 나를 억지로 엎드리게 해 애널 안의 정액을 조심스럽게 긁어 댔다. 따듯한 온수를 받아 섬세하게 안의 이물질을 닦아낸 녀석은 그 순간의 다정함과는 다르게 나를 질질 침대 위로 끌고 가버렸다.

결국 그 날은 녀석은 두 번의 사정, 나는 세 번의 사정을 해야만 했다. 아무리 철없는 십대라도 녀석의 침대를 어지럽힐 순 없어 콘돔을 끼고 섹스를 했다. 지치도록 섹스하고 나서 녹초가 된 후 티비를 보며 뒹굴 거리다 옷을 다 갖춰 입은 15분 뒤에 녀석의 부모님이 오셨는데 상당히 소름 돋는 시간이었다. 15분만 더 녀석과 이불 위에서 뒹굴고 있었을 때 녀석의 부모와 마주쳤다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어 간다. 녀석의 집에서 뭉그적거리며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녀석의 집과 내 집이 걸어서 1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구간이라 녀석의 부모님이 차를 태워주신다고 한걸 그냥 우겨서 나왔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와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으려니 후회가 됐다.

워싱턴 DC는 흑인이 65%나 되는 도시다. 물론 행정 중심지가 밀집되고 중상층이 밀집된 구역은 흑인들의 수가 현저히 떨어지긴 하지만 어쨌든 혼자 걸어 다니기에는 무서운 건 사실이다. 가끔씩 등 뒤에서 차가 달리며 비추는 헤드라이트에도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게다가 이런 클락션 소리라면, 더더욱 겁이 날 수밖에…

“헤이~”

두 번의 시끄러운 클락션이 울린 후 예의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자동차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다 그냥 무시하고 계속해서 걸음을 걸었다.

다리가 말을 안 듣긴 했지만 좀 전보다는 걸음을 빨리 했다.

“…조이 아냐?”

심야의 무례한 인간에게서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려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걸음을 갑자기 멈추자 나인걸 확신했는지 무례한이 반갑게 내 이름을 불러댔다.

“조이, 이 한밤중에 위험하게 어딜 가는 거야?”

이 목소리는… 칼릭스가 틀림없었다.

“집에 가는 거야. 어딜 가는 게 아니고.”

“여태 블리스 집에서 논거야?”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뒤 돌자 차의 창문에 손을 대어 턱을 받친 채로 나를 보고 있는 칼릭스가 보였다. 헤드라이트에 강하게 대비된 차 안의 어두운 내부 때문에 녀석의 얼굴이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목소리나 얼굴의 어슴푸레한 윤곽이나 칼릭스인 건 확실해 보였다.

“좀… 늦게까지 놀다가 이렇게 됐어.”

“뭘 하고 놀았기에 걸음걸이가 그렇게 우스꽝스럽지?”

빌어먹을.

“또 호모놀이 한 거야?”

“입 닥쳐! 내 성깔 돋우지 좀 말아.”

엑셀을 거의 밟지 않은 채 천천히 내 옆을 따라오는 녀석은 한 손은 창가에 걸쳐 턱을 괜 채로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무방비한 얼굴에 주먹을 내려 꽂아주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

“태워줄까?”

“필요 없어.”

솔직히 좀 얻어 탔으면 좋겠지만 차갑게 말하며 무시해버렸다.

“혹시 아픈 걸 즐겨?”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저 비뚤어지고 냉소적인 저 입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미국인인 주제에 잔뜩 안개가 낀 런던의 70대 노인 마냥 냉소적인 독설을 내뱉는 저 입술과 그의 사상을. 창백하기 그지없는 피부에서 느껴지는 침울함, 전혀 미국인답지 않은 칼릭스 다올린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하필 저 녀석에게 그런 현장을 들키다니.

전과 같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저 독설에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는 못했다.

“넌 지금껏 뭐했는데.”

부러 이야기의 화재를 돌리며 녀석의 말을 잘라냈다. 이렇게 단둘이 남게 될 때 녀석은 일부러 블리스와 나의 얘기들, 곧 섹스에 관해 신랄하게 까발리곤 했다. 호모를 엄청나게 경멸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블리스와 나는 애널 섹스는 즐기지만 호모는 아니었기에 칼릭스의 저런 독설을 듣는 것은 뭔가 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너와 같은 것을 했지.”

“뭐?”

“하지만 상대는 여자애야.”

라면서 픽, 하고 웃는다. 이때쯤 되면 내 정신도 정상은 아니게 된다.

“널 어떻게 죽이면 가장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가… 생각하는 중이야.”

“존 게이시처럼 마술을 부려, 손목을 수갑으로 채우고, 뾰로롱~ 마술을 부리며 목을 서서히 졸라가지. 하지만 조이, 엉덩이를 까발리긴 싫어.”

“염병할! 존 게이시는 게이잖아! 가장 평범한 방법, 전기톱으로 처절하게 죽여주마.”

그 방법이 평범한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연쇄 살인범이 없어 생각 없이 소리치고 말았다. 죽여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손에는 전기톱이 없으므로 행동으로 옮길 순 없었다. 다만 씨근덕거리며 불편한 걸음의 보폭을 늘렸을 뿐이다. 걸을 때 마다 척추를 타고 찌르르-하고 올라오는 둔한 통증에 살짝 아래 입술을 물기까지 했다.

녀석도 신경질적인 내 반응에 더 이상은 건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그 얼음같이 차가운 혀 놀림을 멈추었다. 한번만 더 혀를 놀렸으면 그 혓바닥을 1피트 정도 늘려줄 생각이었다. 아쉽게도 그 차가운 독설은 더 이상 쏟아지지 않았고 차 안에서 작게 흘러나오던 음악의 볼륨을 조금 높이더니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Hey, Hey, Hey, Hey, Hey

the beautiful people, the beautiful people

Hey you, what do you see?

something beautiful, something free?



역시나 마릴린 맨슨의 노래다.

교회 다니는 우리 부모님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락그룹이자 가장 싫어하며 입에 담기도 싫어하는 그룹. 나는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나의 부모가 머리 뚜껑을 열고 국자로 편견덩어리들을 집어넣는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저런 것들을 싫어했다. 기괴한 분장들,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 이상한 노랫말. 지금 칼릭스가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낮게 흥얼거리고는 있지만 잠시 후에 motherfucker라외쳐 댈 것을 나는 안다.

마치 부타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낯설음에 떨고 크리스천이 절에서 불안에 떠는 것 같이 전혀 상성에 맞지 않는 것들이다. 저런 기괴한 것들은. 다행히도 칼릭스는 새하얀 분장을 하지도, 굽이 7인치는 되어 보이는 신을 신지도, 머리 정중선을 제외하고 모두 밀어버린 이상한 헤어스타일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그 무엇보다 그런 종류의 것들에 다가서있고 신비주의를 지향하며, 살쪄가는 미국을 비하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 날아온 부모 밑에서 자라난 나와 같은 신미국인은 그래서 그의 사상을 좋아했고 그의 냉소적인 우울함마저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그 현장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들킨 녀석이 칼릭스 다올린이라 다행인 점도 있었다. 남 뒷말하지 않는 이 믿음직한 녀석이 아니었다면 스니퍼에 대한 악성 루머가 애교일 정도로 괴로운 학교생활을 하게 됐을 것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걸었을까, 불이 켜진 집이 십여 미터 앞에 보였다. 그 때까지 아무런 말없이 무한정 마릴린 맨슨의 노래를 리플레이 하던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콘돔은 끼고 하지?”

…갑작스런 질문.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들인 질문의 의도를 생각하기 위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곧 그 말에서 느껴지는 일차적인 의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저 조용히 뇌까렸다.

“당연하지.”

사실 오늘 욕실에서 섹스 할 때 콘돔을 끼고 하지 않은 것이 찔리긴 했지만 대체로 콘돔을 끼고 했기 때문에 그러노라고 대답했다. 갑자기 성교육이라도 하려는 셈인가?

“그래, 게이 섹스는 위험해. 언제나 에이즈의 위험에 처해 있지.”

“그 입 한번만 더 놀리면 죽여 버릴 줄 알아.”

나와 블리스를 무슨 에이즈 환자로 취급하는 거냐, 지나친 걱정은 오히려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저 녀석이 지나친 걱정의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물론 나도 너희가 HIV 바이러스 양성반응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고맙다. Motherfucker.”

“뭘, 이년아.”

서로가 서로에게 욕을 내뱉은 뒤 킥,하고 웃으며 눈빛을 교환했다. 개인적으로 절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싫지는 않다. 막연한 거리감은 느껴지지만 너무 멀지 않게 느껴지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으나 타격을 줄 수는 없는 거리에 서 있었다. 우리들은. 물론 블리스와 나에 대해 지껄일 때는 입을 찢어발기고 싶지만.

나는 다올린이 조용히 케디의 엑셀레이트를 밟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부모님께서는 주무시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늦게 들어갈 것이라고 전화를 해놓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거실에서 TV를 보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단지 ‘이제 오니’라는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현관에 들어서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어 세탁물을 담는 바구니에 집어넣은 뒤 발을 깨끗하게 닦고 욕실 옆에 놓여진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왔다. 친구들이 놀러 올 때마다 집에 들어오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그들의 눈엔 성가시고 경건해 보이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는 모습이 부끄러워 어렸을 적엔 거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약간의 신경질적인 결벽증을 가지고 있어 신발은 물론 하루 종일 신고 있었던 양말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백인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그 친구가 하루 종일 밖에서 신고 다니던 신발을 현관에 놓여진 거친 솔 같은 것에 벅벅 긁고 자신의 집안으로 들어가던 것을 보았을 땐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마치 커다란 문화적 장벽에 부딪힌, 처음으로 이 흰둥이 녀석과 노란 피부의 내가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자각하게 된 날이었다.

“오늘 뭘 하고 놀았니?”

“내셔널 몰에서 놀았어요. 스타벅스, 링컨 기념관, 잔디밭에서 뒹굴기.”

“다 큰 사내녀석 둘이 재미있나 보구나.”

물론 다 큰 사내 녀석 둘이라 신났지요. 속으로 코웃음을 흘리며 순진한 부모님들의 앞 소파에 앉아 깎아놓은 지 얼마 안된 사과조각을 포크로 찍어먹었다. 부모님에게 비뚤어진 반항이나 하는 철없는 어린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조롱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부모님이 나의 백인 친구들 중 가장 좋아하는 블리스의 정체가 전형적인 와습으로 포장된 동양인 킬러라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 포장된 모습에 넘어간 부모님이 우스웠다.

나의 부모는 미국적인 것들을 환영하고, 미국인들처럼 자신의 나라 이외에는 다른 나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마치 영원히 태평성대가 이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아메리칸 바보가 되길 바랬다. 그러는 자신들은 정작 문화 행사 중 하나로 열리는 세미나에서는 구석이나 뒷자리에 앉아-그것도 맨 뒷자리는 않지 않는다. 눈에 띄기 때문이다- 너무 멀어 보이지 않는 프리젠테이션을 보기 위해 가늘게 눈을 뜨곤 했다. 절대 손을 들지도 않았다. <특히 엄마는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들면 큰 수치라도 받을 것 같은 겁먹은 태도를 유지했다.

어렸을 때에는 이 모순적인 학습 방식에 대해 커다란 혼란을 겪었었다. 밖에서는 미국적인 것을 요구하면서도 안에서는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이 이중적인 생활에 얼마나 혼란스러워 했냐면 어렸을 적 아동 상담까지 받아야 할 정도였다. 나는 내 이상한 발음을 비웃는 백인아이들이 있는 학교를 거부했으며, 방 안에서는 신발을 신은 채 고집을 부렸었다. 지금에 와서야 미국에 이민 온 2세들의 자연스런 고민이란 걸 알게 됐지만 그걸 추억으로 여기며 웃을 수는 없다. 내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발음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들어가서 씻고 잘게요.”

“그래, 얼른 자라.”

어찌 이리도 부모자식간의 대화가 단촐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불만 없이 나는 세면대에서 칫솔질과 세수만 간단히 한 다음에 침대로 곧바로 직행해버렸다.





*





체육 시간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지만 피할 수 없는 시간. 체육을 그렇게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을 쏟는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성과가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버크셔의 학생들은 교복은 물론 체육복까지 정해진 옷을 입어야만 했다. 체육시간을 앞둔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모두들 일제히 탈의실로 향하곤 했는데 나는 오늘만큼은 정해진 수순을 밟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샤워를 할 때 까지만 해도 등, 목덜미, 가슴팍을 중심으로 블리스 녀석이 남긴 키스마크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냥 같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열정적인 여자애와 섹스를 하다가 생긴 것이라고 영웅담 말하듯 말 하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조이 몸에 환장한 여자 친구와 불타는 밤을 보냈다’는 요란한 소문이 나는 것은 싫었다. 내 몸에 환장한 여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여자애와 열정적으로 잤다고 영웅담 말하듯 얘길 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화장실에서 몰래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탈의실이 아닌 화장실로 직행하는 이유를 멍청한 블리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같은 수업을 듣기 위해 탈의실로 향하던 칼릭스는 그 이유를 아는 것 같았다. 그 야유를 담은 눈빛이라니. 결국 얼굴을 붉히며 옷을 태연히 갈아입고 나온 나는 개인 사물함에 옷을 던지듯 집어넣은 뒤 급식소 뒤편에 위치한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5.’10’의 키. 176센티미터. 나는 한번도 내 자신이 작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일년 전부터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것에 불만이 있긴 했지만 키 높이 구두나 운동화를 신으면 6피트가량은 되어 보여서 그렇게 큰 불만은 없었다. 가장 위안이 된 것은 나보다 작은 백인 녀석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열등한 체격조건이 아닌데도 나는 녀석들이 즐겨 하는 레슬링, 농구 따위를 잘 하지 못했다.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친구를 사귀는데 도움이 되기에 열심히 하지만 전력에 도움이 되는 편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팀에 몸을 부대끼며 운동을 하는 존재 정도로 인식되는 수준.

처음에 블리스에게 꼬여 농구부에 들었었지만 워낙 키가 큰 애들이 많아 중도에 포기하고 테니스 부에 들어서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별로 소질 있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오늘 체육 시간은 자율적으로 시간이 주어졌다. 여자애들 몇 명은 피구, 농구나 축구를 하기 위해 빠졌고 남자애들 몇 명은 여자애들과 같이 놀기 위해 남자애들 무리에서 나가 떨어졌다. 학교의 분위기는 기본적으로 뭉쳐 다니는 패거리가 없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마음이 맞는 녀석들은 같은 종목의 운동을 하기 위해 인원수를 조정하곤 했다. 불행하게도 나와 마음이 맞는 녀석들은 레슬링이나 농구등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목의 운동을 하기 위해 인원수를 조정하는 중이었다.

지난 토요일에 블리스 녀석과 가졌던 관계에 대한 후유증의 증상은 간단히 말해 부자연스런 움직임이었다. 항문에 커다란 봉오리를 꽂아놓았다가 몇 년 만에 빼놓은 것 같은, 텅 비어있는 상실감은 애널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결리듯이 아픈 허리는 뒷전이었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쌩쌩하게 운동장 위를 뛰어다니는 저 블리스 아이언사이드는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의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비밀스런 분노가 온 몸을 감쌌지만 나는 그저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격렬하게 움직이기에는 몸이 좋지 않아 농구코트 한쪽에 앉아 녀석들이 농구하려고 짝을 맞추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농구코트의 끝에서 블리스가 인원을 맞추기 위해 나를 불러댔지만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자 쉽게 포기하고는 주변에서 금방 인원을 충당했다. 재수 없는 자식. 자기 때문에 이렇게 농구 코트 밖에서 구경이나 하는 줄 아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저 시꺼먼 속을 알고 싶었다.

블리스는 페니스도 크지만 키도 컸다. 어깨와 등이 넓은, 멋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스포츠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과식을 즐기는 녀석들을 제외하고 미국 애들은 기본적으로 운동을 굉장히 좋아해서 동아시아 인들의 밋밋한 몸매와는 다른 굴곡미가 있었다. 블리스는 그 몸매 좋은 미국인들 중에서도 꽤나 아름다운 형식이 갖춰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녀석의 얼굴은 전형적인 미국식 미남 얼굴이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면 서부의 사나이로, 연미복을 걸치면 남부의 우아한 귀족으로도 바뀔 수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느껴지는 매카시즘류의 급진적인 포스터에 사용될 법한 얼굴이었다. 높게 솟은 코와 두툼한 입술, 눈썹 부분의 뼈가 튀어나와 상대적으로 눈매가 깊어 보이는 1950년대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미남이었다. 비오는 날 가만히 누워 떨어지는 빗물을 맞고 있노라면 눈가에 고인 빗물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백인.

자신의 얼굴의 특징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고 또 외모에 대해 자신이 넘쳤기 때문에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기 좋아하는 녀석은 나와 외적인 것을 비교하는 행위를 즐겼다. 한참 발기한 서로의 성기를 보며 크기를 비교했고 나의 거뭇한 음모를 좋아했으며, 툭 튀어나온 내 눈매를 보면서 유쾌해하기까지 했다.

녀석보다 하얗긴 했지만 백인이 될 수 없는 동양인의 피부, 신체의 이곳저곳을 재면서 발견하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신체의 차이를 녀석은 광적으로 좋아했다. 가장 좋아한 것은 아마도 털이 나지 않은 팔뚝과 깨끗한 엉덩이로 녀석은 분홍빛의 애널을 일본 오타쿠처럼 좋아했다. 꿈틀거리는 혓바닥으로 애널을 애무할 때 나의 자지러지는 소리, 쿨쩍하고 찐득한 소리를 내며 삽입되는 소리…

저 블리스는 어두운 욕망을 철저히 나에게만 투과시킴으로써 정치가인 아버지에게 방해 되지 않으려 애썼다. 애초에 동양인 소년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으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보통의 미국 아이들처럼 그다지 섬세하지 않은 두뇌를 굴릴 필요가 없었을 텐데.

하지만 나 역시도 그런 관계를 떠벌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고 알려지는 건 더더욱 싫었다. 녀석에게는 녀석 나름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 있고, 나는 놓치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평범한 십대의 생활, 더도 말고 딱 그 수준으로.





*





농구 코트 밖에서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엉덩이가 아팠다. 푹신한, 텅 비어 있는 듯한 애널을 쉬게 해줄 쿠션이 있는 의자가 필요했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엉덩이가 아프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가장 무리가 가지 않는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멀리서 보았다면 그저 평범하게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가까이서 봤다면 보통 사람들이 앉는 것과는 다른 불편한 자세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농구 안 해?”

마치 신발에 스펀지를 대놓은 것처럼 조용히 다가온 얇은 목소리에 놀라 무의식중에 상당히 미묘하게 정상을 벗어나있던 자세를 고쳐 잡았다. 둔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지만, 등 뒤에서 있던 애나가 내 옆에 앉았을 때는 내 표정은 조금 더 찌푸려져 있었다.

“저 자식들이 안 놀아줘.”

“……불쌍한 장.”

“빌어먹을 소심한 성격을 고치고 싶어.”

물론 서로가 장난인 것을 알고 있기에 표정은 한 없이 울상이었지만 목소리는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형편없는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장, 장의 마음속에 너 자신을 가두고 있는 커다란 벽을 없애버려. 자 따라서 말해봐. 난 너희들과 농구하고 싶어. 끼워주지 않을래?”

“집어 치워. 애나.”

라면서 피식 웃자 애나도 따라 웃었다. 높은 톤이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는 시원한 웃음소리가 영리해 보였다.

애나 머피는 보통 나를 ‘장’이라고 이름 대신 성을 불렀는데 예의 바른 척 하기보단 그 어감이 좋아서라고 했다. 아버지의 딱딱하고 짧은 스타카토 같은 ‘장’이 아닌, 부드러운 ‘z’에 가까운 발음의 느끼한 프랑스 여자 같은 말투로 애나는 나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평소 다른 사람이 나의 이름을 부를 때는 별 느낌 없었는데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라는 인격 자체가 ‘장’과 ‘지우’, ‘조이’ 혹은 혼합된 이름으로 존재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픈 거야?”

“조금…”

“어디가?”

“……배가 좀 아파.”

애널 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 아프기도 하고…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꾀병을 부릴 때 가장 보편적인 핑계인 배가 아프다는 말을 했다. 물론 애나는 그 말을 믿는지 양호실에서 약을 타와 주겠다고 친절히 말했다.

“됐어. 그냥 참을 수 있는 정도야… 근데 넌 왜 아무것도 안 하는데?”

“너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구나.”

”응?”

”나 다리 다쳤잖아. 물론 바지에 가려 붕대 감은 건 안보이겠지만.”

라면서 체육복 밑단을 살짝 들어올렸는데 얇은 발목을 타이트하게 감은 붕대가 보였다.

“너무 꽉 감은 것 같은데…… 너 다리 이렇게 가늘지 않잖아.”

“안 그래도 지금 인어공주가 된 기분이야. 유리조각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라면서 태연하게 농담을 넘긴다. 나는 애나의 이런 점이 좋았는데, 애나에게 농담을 걸 때와 같은 기분으로 어머니에게 농담을 걸면 어머니는 정색을 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지금 네 엄마한테 시비 거는 거니?

“어쩌다 다친 건데?”

“계단에서 샌디가 달려들었어.”

“샌디?”

“우리 집 개, 날 너무 좋아해.”

“내가 개라도 널 좋아할거야.”

“오, 고마워. 장”

감격한 듯 말하는 애나의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떨렸다. 서로의 유머감각을 시험하는 약간의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 대화이긴 했지만 이것이 애나와 내가 서로 소통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녀도 나도 불편함을 느끼진 못했다. 다만 이런 식의 대화로는 서로의 어떤 부분도 건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도 나도 알고 있었다. 서로의 잘 포장된 페르소나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는 걸.

“장은 여기서 여자친구 사귄 적 없지?”

서로의 페르소나만을 건들 인다는 느낌을 애나도 가졌던 것일까. 좀 전보다 진지한 질문을 하는 목소리는 그녀의 평소 목소리보다 약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별로 데쉬하는 애가 없어.”

“있긴 있다는 얘기네. 그리고 별로 없다는 건 좀 과장된 얘긴데?”

“단지 여자애들의 이국적인 취향일 뿐이야. 그냥… 나도 내가 좋아하는 애가 나타나면 사귀고 싶어.”

”이국적인 취향이라기엔 너무 열렬히 좋아해서 문제지.”

“여자애인 당사자한테 그런 소릴 들어서 기쁘네.”

작전 타임인가 보다. 몇 미터 앞에서 각 팀의 멤버들이 허리를 숙인 채 타원형으로 모여서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프로도 아니면서 형식을 갖추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짧은 작전 타임을 마친 뒤 농구 코트로 돌아가려는지 숙였던 허리를 피는 블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이 코트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애나와 나를 발견했는지 아는 체를 한다. 물론 애나에게는 눈웃음을, 나에게는 혓바닥을 내밀며 이상한 표정을. 가볍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자 호탕하게 웃으며 농구코트로 달려간다.

잠시간의 정적이 블리스의 등장으로 인해서인지 아니면 나의 마지막 발언 때문이었는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장, 오해 하지마. 난 너한테 그런 감정 없어.”

“오해할 뻔 했어.”

“쿡, 엘린이 알면 날 죽일 거야.”

얘기의 요지는 엘린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로군.

“너한테 관심이 있대.”

“왜 네가 대신 이런 얘길 하는 건데?”

“…모르겠어. 친구가 걱정되나 보지.”

“미안하지만 애나, 난 연애 얘기엔 정말 젬병이야. 게다가 난 너와 이런 종류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자신의 얘기가 다소 타인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파고들었다는 생각을 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서로가 의식적으로 피해가기 위해 노력했다. 서로가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대한 얘기, 봉사활동 중에 생긴 일들, 자신들의 가족……. 피하고 싶은 부분을 제외한 얘기들은 한없이 매끄러웠다. 그녀는 아마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연애에 대한 편견을 가진, 겁쟁이라고.

체육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농구 후반전도 지금 막 끝났는지 블리스가 저 멀리서 쿵쾅거리며 뛰어오는 게 보였다. 마치 사자한마리가 연약한 먹잇감을 발견하고 뛰어오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내 덩크슛을 봤어?”

“…옆의 금발의 미녀와 얘기하느라 아무것도 못 봤어.”

라고 옆의 애나를 힐끔거리자 애나가 킥,하고 코웃음을 흘렸다.

“우리 팀이 이겼는데… 넌 관심도 없구나.”

“친구가 어디 아픈지도 모르는 너 보단 나.”

“어디 아파?”

“거기.”

이둔한 녀석은 한참을 생각하는가 싶더니 픽, 하고 작은 실소를 흘렸다.

“실은, 나도 얼얼해. 뛸 때마다 쓸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가 갈수록 위험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되어 더 이상의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애나는 뭔가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다행히 건전한 사상을 가진 애나는 그런 방면의 상상력은 없어 보였지만.

“앞으로, 음식 잘 골라먹어야겠어. 안 그래?”

바보자식. 배 아픈 거랑 네 거시기 얼얼하게 쓰린 거랑 무슨 관계가 있냐. 오로지 근육 조직만으로 구성되어 있을 녀석의 대뇌를 생각하며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애나, 미안해… 옷 갈아입으러 먼저 가볼게.”

애나가 다리를 다쳤는걸 알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몰라서 그러는 건지 블리스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는 나를 데리고 농구코트 밖으로 나왔다. 블리스의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팔목에 팔 안쪽의 여린 살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에 기분이 나빠 녀석에게 잡혀있는 손을 뿌리쳤다. 꽤 거친 동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난 화장실에서 갈아입을래.”

“왜?”

설마 했지만 이둔한 자식,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를 줄은 몰랐기에 기가 막혔다.

“키스마크 때문이잖아. 애무해주는 건 좋은데, 키스마크는 남기지 마. 알겠어?”

“아아… 난 또,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녀석에게 짜증이 났다. 블리스에게 테레사 수녀와 같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모를 바라는 것은 달팽이에게 칼루이스를 이기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무모한 짓이긴 했다. 하지만, 자기가 해놓고도 저렇게 태연하게 성 관계 후의 고통은 나 혼자만 감당해야 한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건 뭔가 부당했다.

“나도 지금 사타구니 사이가 무진장 얼얼하다고. 농구 하는 내내 쓸려서 잔뜩 긴장했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면 어떡하나…”

“됐다. 너한테 반성을 바란 게 잘못이지.”

“그런 걸로 화내지마… 계집애처럼.”

”그럼 넌 내가 여자애였으면 소중히 대했을 거란 얘기냐?”

녀석과 나는 서로에게 심각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심각한 싹이 틀만한 것은 절대로 파고드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 노력 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부담이 가질 않는 다는 것은…….

“갑자기 왜 그래.”

“…….”

“또 그 생각을 하는 거야? 전에 그 얘긴 끝났잖아.”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게 되잖아.”

“제발 좀 이 조그만 머리통으로 땅바닥 저 아래 맨틀까지 파고들지 말아줄래?”

“염병할, 지옥에나 가버려.”

짜증나는 자식. 좀 더 이성적인 대화를 해야 하는데 재 덩어리만 남은 생각 속에서 끄집어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노란색 정액받이. 속살은 물론 뼈까지 드러낸 기분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해서 걸어갔다. 금방 블리스의 갈고리 같은 손아귀에 잡히긴 했지만.

“너 도대체 갑자기 왜 이래!”

“…….”

“나와 섹스 하는 게, 몸을 섞는 게 싫어?”

저 녀석은 한번도 섹스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동양인과의 섹스를 즐길 뿐이니까. 녀석으로부터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단지 우리 둘 뿐이야.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아. 예민하게 좀 굴지마.”

“내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냐.”

“하지만 즐겁잖아. 즐거움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나쁜 자식, 너는 마약을 파는 파렐보다 더 악질적인 녀석이야.

블리스와 함께 있으면 서로의 행동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실제적으로 서로의 행동이 서로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어져 버린다. 또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블리스의 말대로라면 섹스는 단 두 사람만의 스포츠-그 극단적인 발언은 수긍할 수가 없지만-이므로 그로 인해 우리 둘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비정치적이며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행위. 내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거부하면 블리스는 또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나를 설득할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결국에 남는 문제는 내가 블리스와의 섹스를 싫어하느냐…인 것이다.

“……지우, 오늘 밤에 찾아갈게.”

한참을 침묵하는 내게 블리스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속에 녀석만의 자신감이 넘쳐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자식.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겉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나는 진작 이 모든 고민을 끝맺을 답안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녀석과 몸을 섞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삽입의 반복, 그 지루한 반복을 나는 지긋지긋하게도 열망하고 있었으므로.





*





머리가 돌 정도로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았다. AP과목 중 사회과학 종류의 과목에 취약했기에 이주에 한번 첼시가 유럽역사에 대해 쪽지시험을 보는 날이면 그 전날은 진이 빠지도록 공부를 해야 했다.퍼센트는 크지 않지만 한 학기 동안의 점수를 정산할 때 쪽지 시험 결과가 포함되어 우습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곧 죽어도 아이비리그에 가야했고, 이곳의 대부분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동양 애들은 수학을 잘한다고 했다. 보통 자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유학을 온 경우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도 수학을 잘했다. 그것은 미국의 평균적 수학능력에 대한 것도 포함되지만 이 버크셔 고등학교 내에서도 나의 수학 실력은 월등히 높았다. 어렸을 적 영재교육의 일환으로 나는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에게 과외 비슷하게 AP-Calculus배워왔던 것이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꽤나 이름 있는 대학에 다녔다는 것을 귀에 쥐가 나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부모님의 야망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아이비리그에 가야 했다.

물론 부모님의 야망이 아닌 나의 개인적인 야망도 작용하긴 했다. 부모님이 미국에 와 막 기반을 잡기 시작했을 때는 아니었다. 자리를 잡고 유색인종보다 백인의 비율이 높은 부잣집 동네로 이사 가기 시작하면서 나는 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저 덩치 큰 백인들에게 무시 받지 않기 위해, 저 새하얀 백인들이 나의 태양을 가려버리기 전에 나는 성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약한 것들, 체육이나 사회과학 하위 개념의 과목들은 극복할 수가 없었다. 유럽의 역사, 미국의 사회 같은 것은 나의 부모님들의 머리 속에서 나올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있긴 하지만.

선생 첼시는 미국의 건국사가 동화같이 매끄러운 이야기 구조를 갖게 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오라고 했다. 그것으로 간단히 쪽지 시험을 치를 것이고, 평가를 내리겠다고 했다.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은 성격의 나에게 이런 악질적인 시험은 밤잠을 설치게 하는 위력이 있었다.

아, 난 왜 이다지도 시험 하나에 연연하는 걸까. 마치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영웅담 말하듯 자주 얘기하는 1970년대의 이야기 속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피 말리게 공부하던 그 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학교 안에서 숨막혀하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되는 끔찍한 환상. 내가 이렇게 출세 지향적이 된 건 다 아버지의 무시무시한 얘기들 때문일 것이다.

도서관에서 프린트한 미국의 건국사 부분을 쌓아놓고 나는 하나하나 꼼꼼하게 분석하며 읽고 있었다. 갑자기 그늘진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인용하면 좋을 것 같은 부분에 붉은 펜으로 줄을 그었다.

갑자기 거미다리 같이 길고 가느다란 손이 눈앞의 시야를 방해했다. 손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드니 칼릭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다른 반의 케빈과 케빈의 쌍둥이 여동생 루시가 앉아서 칼릭스와는 판이하게 다른 미소로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첼시가 지옥으로 떨어지길 바라는 표정이군.”

프린트물을 잔뜩 쌓아놓고 고뇌하는 내 표정이 그렇게 악랄했던가? 작게 소근거리는 칼릭스의 말에 케빈과 루시가 킥, 하고 웃었다.

“사실이 그래. 지금 몇 시야?”

“7시 20분 좀 넘었어.”

“…어쩐지 도서관에 사람이 없더라. 너흰 저녁 먹었어?”

”응. 방금 먹고 온 거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는지 몰랐다. 버크셔는 학생들의 식사를 꼭 챙기는 악습관이 있어서 재학중인 학생들은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명단에 체크를 꼭 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식사를 거를 경우에 시끄러운 영양사와 면담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시간이 10분도 안 남았다는 사실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칼릭스가 손목을 붙들었다.

“내가 보기보다 자상하잖아. 네 이름에 체크 안 되어있기에 체크하고 왔어.”

라면서 손을 끌어 자리에 앉혔다. 한 여름에 차가운,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손바닥의 온도가 신기하다. 문득 녀석의 입에서 나는 뱀파어이라는 고백이 흘러나와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덕분에 귀찮은 일이 줄었네.”

“블리스랑은 같이 안 먹어?”

“…뭐, 꼭 같이 먹어야 하나? 먹고 싶을 때 먹는 거지.”

블리스 이름을 꺼낸 의도가 무엇이었건 칼릭스의 입에서 나오는 블리스란 단어는 꽤나 꺼림직한 이름이었다. 급식 명단에 내 이름을 체크해준 고마움이 반으로 줄어들려고 한다. 케빈과 루시가 옆에 있어 망정이지 두 사람이 없었다면 오전 체육 시간에 화장실을 간 이유에 대해서 캐물었을 것이다.

“그렇지. 그건 그렇고 내일 시험에 대해 예비는 해놨어?”

“…지금껏 하고 있는 중이야. 감도 안 잡혀.”

도서관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평소의 톤으로 대화를 나누는 우리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어느새 이곳이 도서관인 것을 잊어버릴 만큼.

“넌 다행히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별로 없구나.”

“…무슨 소리야?”

“역사 왜곡이란 건 자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지. 게다가 미국의 건국사 같은 경우는 우리 미국인들에게 짧지만 당당한 역사를 주었고.”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내가 맘에 들었는지 한쪽 입술을 살짝 올려 웃으며 칼릭스는 옆에 잔뜩 쌓여져 있던 프린트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밖에서 놀자. 갑갑해. 케빈이랑 루시 이렇게 셋이 놀면 아마도… 즐거울 거야.”

칼릭스의 얼굴이 너무도 즐거워 보여서, 나는 오늘 들었던 수업을 복습해야 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





칼릭스 다올린, 미국의 십대 같지 않은 십대. 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먼지가 잔뜩 쌓여있는 고루한 고서적을 들여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책은 침울했고, 우아했으며 때로는 유쾌했다.

우울한 런던의 날씨 같은 그를 알게 된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일이었다. 친구가 되지도 적이 되지도 않은 채 같은 반에서 자연스레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그런 방식이었으니까. 가끔 나누는 대화를 통해 내가 그의 사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곤 했었다.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은 비틀즈 헤어 스타일로 우아해 보이기도 했지만 한없이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스타일이었다. 다행히 앞머리가 눈썹위로 짧게 쳐지진 않아서 더벅머리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노란색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어서 짧은 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목덜미로 지저분하게 흘러내려 있었다. 지금의 질끈 묶은 머리는 비틀즈 보다는 세련된 히피에 가까웠다.

“목이 말라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도 아깝더군. 근데 갑자기 뒤에 서 있던 일본인처럼 보이는 관광객이 그 콜라 캔을 5개나 사가는 거야. 전혀 아까워 보이는 표정이 아닌, 당연히 지불할 것을 지불해야 한다는 표정으로.”

해는 이미 지고, 뜨거웠던 대기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붉은 조명등 아래 잔디밭에 팔을 지지해 옆으로 긴 몸을 뉘인 칼릭스는 매점에서 사온 크래커를 입에 물고는 루시의 얘기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8시 반, 공부에 대한 생각은 잊은 채 주황색 유화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은 조명 아래 잔디밭에 앉아 루시의 수다를 듣는 것은 생각보다 초조하지도 재미없지도 않은 일이었다. 내일 쪽지시험을 보기 때문에 지금 당장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밤을 새겠다는 안일함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8시 30분. 점등을 불과 2시간밖에 남기지 않은 시간에 이렇게 밖으로 나와 수다를 떨고 있다는 것은 11학년에 와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설레기도 했고.

“아… 그 노란 무리들은 콜라 한 캔을 2달러 50센트를 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더라고. 물론 관광객이라서 물가에 대해 전혀 모를 수도 있는 거지만… 내가 봤던 노란 사람들은 돈을 쓰는데 별로 거리낌이 없어 보였어.”

“루시, 네 앞에 노란 사람이 있는걸 까먹은 거야?”

그저 누워서 나른하게 크래커나 집어먹던 칼릭스가 눈을 빛내며 루시의 실수를 지적했다.

당사자인 나는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지만 칼릭스는 백인으로서 다소 거친 언사가 미안했는지 난감한 듯 웃고 있었다.

“오, 미안. 무시하는 발언은 아니었어. 혹시 기분 상했니?”

“그다지.”

“음… 아무튼 미안. 꼭 아시아 사람들만이 아니고 나 역시 그래. 관광지 장사가 제일 쉽다고 하잖아. 돈을 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거니까.”

옆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던 케빈이 경계가 풀어진 듯 흘러내린 은색의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맨하튼 물가는 좀 심하지 않아? 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3달러에 샀던 물건이 한 블록 건너가서 보니까 1달러 20센트더라. 진짜 기가 막혔지.”

케빈과 루시는 이란성 쌍둥이로 유전적 특징이 달라 전혀 남매로 보이지 않는 쌍둥이었다. 케빈은 안경을 쓴 지적으로 보이는 스타일이고, 루시는 주근깨 때문에 말괄량이 아가씨로 보이는 소녀였다. 하지만, 같은 유전적 요소는 있었다. 은발에 가까운 결 좋은 금발머리로 미국인 보다는 스위스 미남, 미녀 같은 낭만이 있었다. 높게 솟은 콧대, 파랗고 푸른 눈동자, 새하얀 피부. 지금 막 알프스의 초원에서 뛰어온 듯한.

이야기는 대부분 루시와 케빈이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가끔씩 칼리스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띄우긴 했지만 나는 대부분 이야기를 들으며 말을 아꼈다. 그건 오늘의 이야기에서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이끈 루시 때뿐이 아닌 평소 나의 버릇이었다. 나는 일종의 언어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의식적으로 발음을 신경 쓰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어보다 먼저 배웠던 한국어는 딱딱한 말끝에 경계가 느껴지는 낭만 없는 어감이 있었다. 언어의 체계를 먼저 닦았던 한국어의 영향인지 아니면 부모님의 딱딱하기 그지없는 영어 때문인지-아마 둘 다이겠지만 나는 상당히 영어 발음에 민감한 편이었다.

루시와 케빈이 별 생각 없이 내 뱉는 영어의 발음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가 얼마나 탄식이 나올 정도로 형식이 갖춰졌는지 본인들은 모를 것이었다. 물론 나의 영어에도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지만, 간혹 ‘B’을 ‘V’로 발음하는-듣는 사람은 몰라도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부분은 있었다. 그것이 미국을 모국으로 알고 자란 자와, 한국과 미국 두 나라를 모국으로 알고 자란 자의 차이점임을 나는 어렸을 적부터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가 오갔다. 대학, 거창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인생 계획, 집안 이야기, 봉사활동 등등.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놀라울 정도로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이야기로 인해 시간을 빼앗겼다는 것이 아닌, 이야기로 인해 오늘 하루가 즐거웠다는 적어도 뭔가가 남는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는 벌써 9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시험에 대한 대책 없이 얘기만 하던 우리는 취침 시간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시간 가까이 앉아있느라 밑에서 뭉개진 잔디로 인해 축축함이 느껴지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여학생 기숙사 근처까지 루시를 데려다 주었다. 케빈과 칼릭스의 방이 내 방과는 끝과 끝에 있었던 탓에 녀석들과 헤어지고 나 혼자 내 방이 있는 기숙사 끝까지 걸어왔다. 땀에 젖은, 냄새가 나는 교복을 옷걸이에 걸며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좁은 욕실로 들어섰다.

간단한 샤워를 마친 뒤, 갑자기 불안해진 나는 도서관에서 프린트했던 미국의 건국사에 관한 내용들을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 15분으로 15분 뒤면 점등에 들어갈 것이었다. 평소 10시 반에 잠드는 건 아니었지만, 여태 시험에 대비해 공부해놓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초조해졌다.

도서관에서 칼릭스가 말해줬던 내용들을 곰곰이 떠올리며, 내일 시험에 대한 예비 답문을 만들기 위해 프린트에서 인용할 만한 구절을 하얀 백지 위에 적어보았다. 긴장으로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한 대뇌의 신경조직이 만들어낸 기발한 문구, 글의 개요들.

30여장이나 프린트했던 복사물을 절반 정도 간추렸을까, 목이 뻐근한 느낌에 근육을 풀기 위해 목을 돌렸다. 불편한 자세를 유지했던 목은 꽤 긴장해있었는지 움직일 때마다 우드득하고 소리를 냈다. 몇 번이고 목을 돌리며 어깨와 목의 긴장한 근육을 풀자 기생하듯 뭉쳐있던 피곤이 풀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몇 분을 의자에 앉아 근육을 풀었을까… 나른하게 풀어진 긴장에 온 몸의 힘이 빠져 의자에 몸을 늘어트렸다. 마주 보이는 벽에 붙여놨던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나머지 것들을 정리하고 나면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야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점등을 했는지 방 안을 밝히는 빛이라곤 책상 위 스탠드뿐이었다.

“공부하고 있었어?”

흠칫, 하고 어깨가 떨려왔다. 등 뒤에 서서 어깨에 커다란 손을 올려놓은 블리스는 흠칫하고 떠는 내가 우스웠는지 낮은 웃음을 흘렸다.

평소 문을 잠가놓지 않고 생활을 하긴 했지만, 물론 블리스는 문을 잠가놨더라도 들어왔을 것이다. 녀석은 나의 방 열쇠를 복사해놓고 있었으므로 어느 때고, 내가 잠 들어있을 때라도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들어와 놀라게 하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이다.

그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더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으읏-, 하고 신음에 가까운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응. 내일 시험이잖아.”

애무하듯 뭉쳐있던 어깨의 근육을 풀어주는 의도를 알았기에 일부러 시험이라고 말 하긴 했지만, 블리스는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녀석은 내가 칼릭스와 쌍둥이 남매와 수다를 떠는 사이에 모든 공부를 마쳤을 테니까.

“별로 꼼꼼히 준비 안 해도 돼. 별로 반영되지도 않는데다가 서술식인데 뭐.”

“이 과목 잘 못하잖아.”

“내가 가르쳐 줄게. 내일 쉬는 시간에 중요한 포인트만.”

내가 벗어나려면, 또 어떻게든 설득을 해서 오늘 밤 나를 안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내 말투는 벌써 체념의 빛을 띄웠다. 하지만, 녀석과 다르게 나는 미국의 역사는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다 정리 못했어.”

“그럼 넌 공부해… 방해 안 할게.”

미친놈 섹스 하면서 공부가 가능할 리가 없잖아. 거머리보다 더 끈질기게 달라붙는 녀석에게 짜증을 내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녀석이 입술을 부닥쳐왔다.

갑작스런 침입에 놀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뜨거운 근육덩어리가 조심스럽게 지분거리며 혓바닥 아래의 설소대를 간질였다. 으윽, 간지러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감각에 녀석의 얼굴을 밀어내려 하자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못 빠져나오게 한다.

축축한 혀를 세워 꼼꼼하게 혓바닥을 지분대는 감각에 소름이 돋아 몸을 떨자, 귀엽다는 듯 입 안에서 젖은 웃음을 흘린다. 이대로 가다간 녀석과 잘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돌리려 하지만 녀석의 커다란 손 때문에 쉽지가 않다.

미친 자식, 섹스에 미친 자식. 섹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너처럼 환장하진 않았어. 라는 생각과는 반대로 페니스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참 짐승이지…….

녀석도 숨이 찼는지 머리를 감싼 손에 힘을 빼며 입술을 떼어냈다. 누구의 타액인지 알 수 없이 번들거리는 그 입술에서 거친 숨이 쏟아져 나왔다.

“넌 그냥 가만히 공부만 해.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직 다 안 아물었단 말야.”

“하자. 하고 싶어 미치겠어. 아프지 않게 할게. 응?”

등 뒤에서 귓불을 끈적하게 물고 늘어지는 녀석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내 말을 듣는 척 하면서 재빨리 계획대로 나를 유도하는 능수능란함에 짜증이 났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몇 번이나 넘어갔었기에, 오늘 역시 기계적인 패턴대로, 녀석을 받아들일 것을 알았다. 스물스물 올라오는 감각에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윤활제는 가지고 왔어?”

등 뒤에서 귓불을 잡아당기는 블리스의 입술이 웃고 있는 게 느껴진다.

“응. 손수건도 가져왔어. 그리고 콘돔은…… 미리 끼고 왔지.”

“짐승자식.”

“너에 한해서만……”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어깨에 양 손을 집어넣어 일으킨 블리스는 내가 앉아있던 의자 에 앉아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러 내기 시작했다. 살짝 엉덩이를 들어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브리프를 살짝 내려 페니스를 꺼냈다. 녀석의 말대로 콘돔을 끼워놓은 페니스는 배에 닿을 듯이 팽팽하게 서 있었다.

“진짜…… 미친놈이야. 넌.”

“네 생각만 하면이래.”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닌데?”

책상에 걸터앉아 녀석의 커다란, 배에 닿아있는 흉물스런 페니스를 보고 있으려니 녀석이 허리를 잡아 뒤돌아서게 했다. 기숙사에 들어와 있을 때는 편안한 추리닝을 입었기 때문에 버클을 푸를 필요도 없었다. 녀석은 손쉽게 브리프와 바지를 한꺼번에 내려 엉덩이를 드러나게 했다.

“달콤~한 파인애플 향이야. 네 엉덩이가 얼른 먹고 싶대.”

“제발 좀 입 닥치고 해.”

“쑥스러워 하기는… 쿡”

변태영감처럼 입을 놀리는 저 혓바닥을 어떻게든 처리해버리고 말 테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허리를 눌러 책상에 엎드리게 하고는 녀석은 드러난 엉덩이에 뜨거운 손을 대었다. 조심스럽게 엉덩이 사이의 계곡에 윤활제 입구를 끼워 넣은 블리스는 튜브의 끝 부분을 누르며 조금씩 짜내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차가움에 부르르 몸을 떨자 좌우로 벌리고 있던 손으로 부드럽게 엉덩이를 애무한다. 끊임없이 애널 안으로 파고들 것 같은 차가운 점액질의 크림이 녀석의 말처럼 파인애플 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안으로 달큰한 향이 맴도는 것 같기도 했다.

“맛있냐?”

“좀… ㅎ… 닥쳐줄래?”

윤활재의 입구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살짝 몸을 떨었다. 정액덩어리 같은, 차가운 젤리가 뜨거운 내부의 온도에 액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힘을 빼면 그대로 흘러내릴 것 같은 감각에 긴장한 애널에 녀석의 뜨거운 페니스가 닿아왔다.

간단한 애무도 없이 블리스의 무릎 위로 내려진다. 하지만 부드럽게 들어오기 시작한 페니스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직장의 끄트머리까지 파고들어온다. 숨이 막히는 감각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아랫배를 쓸어준다.

“아파?”

“…아프진 않…아.”

“그럼 계속할게.”

더워… 너무 더웠다. 아랫배를 감싼 녀석의 손바닥이 너무 더워서 온 몸으로 그 열기가 다 퍼져나갈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뜨거운 날숨을 토해내는 녀석의 숨결도, 애널 안으로 파고든 녀석의 페니스도 모두 뜨겁고 더웠다. 관자놀이에 맺혀진 땀방울이 미끄러지며 턱 끝에 맺혔다. 삽입을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불쾌할 정도로 땀이 흘렀다.

“응……읏!”

허리를 단단하게 잡고 짧고 강하게 아래로 끌어내리는 동시에 블리스는 허리를 올리며 더욱 깊게 삽입을 반복했다. 허리를 감싼 녀석의 손에서도 땀이 흘러 놓쳐버릴 것 같았다. 피가 몰리는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해도 거친 숨을 놓치듯 내뱉어진 짧은 신음에 불안해졌다. 그다지 완벽하지 않은 버크셔의 기숙사의 방음 시스템은 이런 위험한 놀이를 눈감아줄 만큼의 여력이 없다.

입술 안으로 삼켜진 신음에 방안이 적막에 쌓일 때 마다, 쿨쩍, 하고 낯 뜨거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나치게 윤활제를 많이 넣어서 애널이 수축 할 때마다 페니스와 내벽 사이에서 조금씩 흘러내려 입구에서 땀과 범벅이 되었다. 하얗게 거품이 일어나 녀석의 고환이 엉덩이에 닿을 때마다 불쾌했다.

“마…ㅇ읏… 마..주보고 할래?”

녀석도 참기 힘든지 이를 악물며 작게 귓가에서 속삭였다. 나는 그저 빠른 삽입에 허덕이며 녀석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애매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미끈하게 들락거리던, 페니스가 갑자기 쑤욱 빠지더니 귀두 부분만 걸친 채로 급하게 안으로 쳐 넣어졌다. 쑤셔 넣듯 애널 안으로 들어온 페니스로 인해 안에서 맴돌던 점액질이 허벅지 아래로 잔뜩 흘러내렸다. 흐윽, 높은 신음을 입안에서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떨자 녀석이 페니스를 빼며 몸을 일으켰다.

“안되겠다.. ㅇ…불,불편해. 하아… 침대에서.”

미끄럽게 페니스를 빼낸 애널이 천천히 그 입구를 닫는 동안 바닥에 떨어진 윤활재와 내벽안의 체액이 지저분하게 바닥을 더럽혔다. 정신 없이 침대위로 내던져지는 동안, 바닥에 떨어져있던 체액을 밟은 듯한 느낌에 기분이 묘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다리를 자신의 옆구리에 끼우며 곧바로 삽입을 한 블리스 때문에 흐으음, 흐으음 하고 속 안으로 신음을 삼키며 허리를 휘었다. 침대 위로 지저분하게 체액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애널 안에 간지러운 두드러기가 난 것 같았다. 긁어내리듯, 녀석의 커다란 페니스가 끊임없이 마찰을 하는 동안,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녀석의 밑에 깔려 쾌락에 꺾여진 고개 위로 새까만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반사된 스탠드의 불빛이 보여 왔다. 책상에 어지럽게 널려진 좀 전까지 공부하던 미국의 건국사가 프린트 된 종이들이 널려있었지만, 더 이상 아무런 신경도 쓰이질 않았다. 온 몸의 관절이 다 덜그럭거리는 것 같다. 아무리 블리스와 섹스를 해도 이 생소한 감각은 견딜 수가 없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괴로움에 질끈 눈을 감은 그 미세한 사이로, 밝은 스탠드 빛이 무언가에 의해 가로막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온 몸의 체온이, 땀을 비오듯 흘리던 몸이 영하로 떨어지는 기분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검고 커다란, 기다란 장신의 누군가가 침대 옆, 바로 내 머리 앞에 서 있었다. 들킨 건가? 숨이 막히는 감각에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블리스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전에 말했지. 섹스를 하려면……”

저 차가운 음성 하나에 사막처럼 뜨거운 열기를 내 뿜던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간다. 뭔가에 홀린듯 계속해서 허리를 쳐올리던 블리스도, 누군가의 침입을 느꼈는지 갑자기 굳어버렸다.

“다음부터는 문 잠그는 걸 절대 잊지 말라고. 다른 사람이 본다면 나처럼 웃어줄지 장담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라이브 게이 섹스쇼를 보여주고 싶었어?”

으윽, 갑자기 크게 부풀어있던 페니스가 빠져나가면서 애널을 자극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광에 의해 검게 물들어있던, 머리맡의 사람이 누군지 확실해졌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고 작았지만, 그 음성에서 뭔가 혐오하는 듯한, 신랄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칼릭스였다.

커다랗게 부푼 페니스를 감출 생각도 없이 침대에서 내려간 블리스가 차가운 독설을 내뱉던, 불쾌한 표정을 짓던 칼릭스의 멱살을 잡았다.

“원하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지만, 관람요금이 좀 비싼걸?”

”더러운 자식.”

“왜 자꾸 더러운 자식들이 뒹구는 방에 들어오는 거야. 이미 반쯤 예상하고 들어오는 거 아냐?”

흥분에 낮게 갈라진 블리스의 손아귀에 멱살이 잡히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칼릭스가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시선을 나에게 던지며 말했다.

“난 더러운 호모놀음엔 관심 없어.”

내 눈을 똑똑히 바라보면서 내뱉는 그 말. 왜 난 이런 순간에도 저렇게 정확한 엑센트와 발음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감탄하는지 모르겠지만, 차갑게 내 뱉어진 그 말은 여태 장난스럽게 내뱉곤 했던 독설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심장을 향해서 겨냥한 날카로운 화살촉 같은, 경멸이 느껴졌다.

“뭐라고?”

“이거 놔, 난 너한텐 볼일 없어.”

차가운 냉기마저 풍기며 거칠게 블리스의 손을 떼어낸 칼릭스가 얼어붙은 나의 얼굴위로 다가왔다. 머리 속에서 요란하게 아무것도 입지 않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하체의 모습이 떠올랐다. 배출하지 못한 욕망에 부푼 페니스와, 긴장에 풀어진 다리, 그 위로 흘러내린 지저분한 체액과 윤활제.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럽게 범벅이 된 엉덩이가 녀석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손대면 그대로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숙인 칼릭스가 비죽,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방해해서 화났지?”

목울 대로 마른 침이 넘어가는 감각. 내가 아는 칼릭스가 맞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냉기에 입을 열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뱉어야 할 말 따위,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원하지 않는데, 계속해서 보게 되네?”

“…….”

“물론 너도 보여주고 싶진 않았겠지만.”

아아… 정말이지 이런 모습은 치욕스럽기 그지없다. 눈을 질끈 감고 모든 걸 회피해버렸으면 좋겠지만, 칼릭스 다올린은 조용히 방을 나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래……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노크해.”

“백 번도 더 한 것 같아. 뭐, 물론 그런 사정이 있었으니 이해는 해. 잘거라고 생각하고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봤는데. 하!”

평범한 자기의 또래라고 생각해 왔던 친구가, 이렇게 다른 덩치 큰 남학생의 아래에 깔려 신음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분노의 원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여력은 없지만, 적어도 칼릭스의 분노는 불분명하나마 알 것 같았다.

“……조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나와 반대로 칼릭스의 음성은 흥분에 떨려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어떠한 단호한 결심이라도 내린 듯 차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계면쩍은 웃음이라도 지어야 하는 것일까?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섹스란게. 너희 둘의 관계를 망가트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

“아니다. 아니야. 이런 설교를 하러 온건 아니었어!”

흥분에 부풀어 오른 페니스가 어느 새 반쯤은 수그러들어 있었다. 하지만 애널 안에는 윤활제와 체액의 이물감이 가득해서 친구와 쾌락을 즐기는 나란 존재 자체가 무척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네가 첼시가 내준 시험문제가 너무 어렵다고 그래서.”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이 상황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의 말이 흘러나와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전혀 컨트롤되지 않는 표정의 나와는 반대로 칼릭스는 나를 지극히 침착하게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미국의 건국사, 그 표리부동한 역사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해서, 모범 답안지라고 적어봤는데… 네가 봐줬으면 해서.”

“……”

“……도움이 될까 해서. 단지 그 이유였어.”

아아…….

부끄럽기 그지없어서, 나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





미국에서 백인의 비율이 세 번째로 높은 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을 때, 그 때는 겨우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내가 원하는 주의, 동양인의 비율이 높은 기숙사 학교에 다니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고, 또한 가정의 경제적 형편도 따라주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전자, 전기기기 공업 쪽에서 근무하셨는데 아마도 그 때는 거의 일용직 노동자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다.

그 날, 이사를 하게 되어 처음으로 북동부 지역의 뉴 햄프셔주에 있는 사립 초등학교에 등교를 했을 때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반 안의 아이들은 모두 야릇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 중 한 소년은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길게 찢으며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내 주위에서 계속 어슬렁거렸다. 또 다른 한 명은 조이 장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내 짧고, 이상한 발음의 영어를 흉내 내며 자신의 무리들과 시끄럽게 웃어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울고 싶지 않아서, 그 어린 나이에도 그것만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학교 앞 골목에 대여 져있던 어머니의 차를 타고 나서야 울음을 터트렸다.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전에 살던 동네의 아이들은 나의 얼굴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았으며 더더욱 내 영어 발음을 문제 삼지 않았었다. 게다가 나만 빼고 모두가 색이 옅은 눈동자에 커다란 눈과 쌍꺼풀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내가 전에 다니던 학교는 마치 어머니가 반찬을 만들기 귀찮을 때 만들곤 했던 볶음밥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다. 흰색의 쌀밥과 노랗게 풀어진 계란, 갈색의 햄, 잘게 부서진 검은 색 김 그리고 여러 가지 야채들. 그러나 이곳의 아이들은 오로지 하얀 쌀밥만을 생각나게 했다. 새하얀 밀가루가 아닌, 새하얀 쌀밥이 떠오르는 그 적절하지 못한 비유를 훗날에는 비웃었지만.

그 암울했던 첫날, 그 속에 불순물처럼 끼어든 내 존재가 파고들 틈은 없어 보였다. 내 존재의 미미함에 대한 고민이 아닌, 물위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는 내 자신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녀석들과 친해졌더라? 그 구체적인 동기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친구가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할 때 느끼는 그 충만한 감정의 교류, 그 구체적인 배경은 그저 희미한, 무채색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그리 튀는 성격이 아니었다. 친구들을 선동해서 파티를 열지도, 여행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선동자의 뒤에서 조용히 돕는 부류였다. 그것이 백인들 사이에서 홀로 튀는 동양인이 아닌 백인들 사이에 그림자처럼 희미한 동양인이 되는 비결이었다.

덥다. 바람도 불지 않는지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작열하는 태양에 피부를 보호할 생각도 없이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나는 허기대신 생각을 채우고 있었다. 점심 급식 명단에 체크를 하자마자 급식소 옆 잔디밭에 드러누웠는데,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저 옛날에 대한 회상에 빠진 영양가 없는 생각에 제동을 거는 타인의 등장.

“여기서 뭐해?”

타는 듯이 붉은 머리가 인상적이다. 원래는 오렌지 빛인데 태양을 등지고 있어서 오렌지 빛 머리가 더 붉어 보이는 것이다. 타는 듯 붉은 머리에 새파란 바다 같은 눈동자, 주근깨가 잔뜩 인 창백한 얼굴이 시야를 가렸다. 전혀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 모든 조합자체만으로 원색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생각.”

“무슨 생각?”

“그냥 아무것도 아닌 생각.”

허리를 굽힌 채 여전히 드러누운 나를 내려다보는 아벨의 표정은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찌푸려져 갔다. 그 이름만큼이나 생동감 넘치는 타는듯한 머리와 푸른 눈동자엔 생명력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그 에너지만으로도 눈이 시리다.

“쓸데없는 고민만 많은 십대라니.”

“그러는 지는 70먹은 노인네인가?”

70먹은 노인네라고 하기에는 에너지가 넘쳐나는 아벨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내 코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너무 늦게 사춘기가 오는 거 아냐? 난 초등학교 때 모든 인생에 대한 비밀을 풀었다고.”

“그래서 네 인생은 그렇게도 유치한 거구나.”

“……여기서 입도 막아버릴까?”

코를 잡아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내가 우스웠는지 어린 아이처럼 깔깔거리면서 녀석은 웃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정신을 반쯤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파리처럼 달라붙는 아벨을 떼어내 버리기 전에는 정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시험 잘 봤어? 우린 점심 시간 끝나고 나서 시험 본다는데.”

“그 손이나 좀 놓고 말해.”

“알았어. 알았어. 시험 잘 봤어?”

“응. 내 생애 처음으로. 내 좌뇌는 연산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있더라고.”

불과 몇 십분 전 까지 만해도 머리 속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던 칼릭스 다올린이었다. 겨우 잊고 있었는데 아벨 녀석 때문에 다시 생각나 버렸다. 아침, 혼이 빠진 상태로 칼릭스가 남기고 간 A4용지에 꼼꼼한 글씨체로 적힌 미국의 건국사에 대한 비판을 읽었었다. 그 논리적이기 그지 없는, 명쾌하고 공격적인 문체.

내가 그의 답을 그대로 베꼈던가, 아니면 그 내용에서 새로운 사항을 추론해서 답안지를 썼던가. 시험을 보고 난 후 어떤 구성과 어떤 표현을 사용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기억에 남는 건 내가 무척 논리적이고 첼시의 맘에 들 만한 답안지를 썼다는 것과 그 답안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게 칼릭스 다올린이었다는 것이었다.

블리스는 어제의 다짐처럼 내게 건국사에 대한 요점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칼릭스가 남기고 간 프린트 물 때문에라도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 점심 식사를 같이 하려는 블리스의 손을 뿌리치는 나를 그대로 놓아준 것도 나의 수치심을 알기 때문이었다.

수치스러운 이 마음.

아벨이 급식소로 돌아간 후, 작열하는 태양빛을 그대로 받아내기 버거워진 나는 얇은 노트를 펴 얼굴 위에 얹어놓고는 또 다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여동생 지은이 키우는 고양이인 나비의 발바닥 모양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끊임없이 상처받은 얼굴의 칼릭스가 떠올라서, 숨 조차 쉴 수가 없었다.

상처받은 칼릭스? 내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부끄러움에 팔목으로 두 눈을 가리기 전에 보았던 칼릭스의 표정은 그러했다. 단지 그 표정 하나 때문에 내가 이러한 감정에 휩싸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칼릭스와 나는 같은 반이지만, 함께 운동을 한다거나 점심 식사를 같이 한다는 둥, 교차하는 접점이 없었으므로 사과할 기회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사과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칼릭스와 멀어지는 것은 싫었다. 사과를 한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 네가 나를 위해 필기를 하는 동안 블리스와 섹스를 해서 미안하다고 이딴 말을 내뱉어야 하는가? 아니면 무례하게 섹스를 방해한 칼릭스에게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결정 내리지 못하겠고, 아무것도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런 수치감에 절어있다는 자체가 괴로웠다.





*





English II를 담당하는 갈색머리의 선생은 칠판에 필기를 하기 위해 뒤돌아서 있었다. 아마 그녀는 버크셔의 고등학교 내에서 가장 필기를 많이 하는 선생일 것이었다. 그만큼 수업 시간은 지루했고 이 수업이 끝나고 나면 손목이 지끈거리며 아팠다. 하지만 필기를 게을리 했다가는 노트를 빌리는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처음엔, 필기에 집중하느라 알지 못했다. 손가락 끝이 팔을 쿡쿡 누르며 책상 위에 놓여진 종이 쪽지를 가리켰을 때에야 알아챌 수 있었다. 블리스는 음모론 따위나 지껄일 때에야 짓던 진지한 표정으로 어서 빨리 쪽지를 읽으라고 입을 벙끗 했다.

일부러 무시하며 칠판 위의 필기에 집중하자 이번에는 옆구리를 찔러온다. 짜증에 녀석을 노려보자 기분 나쁘게 웃고 있다. 안 읽으면 저 기분 나쁜 면상을 또 봐야 할 것 같아 겨드랑이 아래에 놓여진 성의 없이 접힌 쪽지를 폈다.

- 화났어?

내가 화나 보였나? 성의 없이 갈겨진 짧은 글에 황당하기도 했지만, 저 둔하기 그지 없는 자식이 엉뚱하게 감지한 내 감정은 사실이 아니었다. 난 계집애처럼 그런 일에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별로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어깨를 으쓱 하고는 다시 칠판을 바라보았다. 제길, 저 선생은 엄청난 속도로 필기를 하고 있었다. 따라잡으려면 글씨체가 엉망이 될 정도였다.

나의 반응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녀석은 다시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녀석은 겨드랑이 사이에 쪽지를 밀어 넣으며 옆구리를 찔렀다.

- 오늘 점심, 안 먹어서 걱정했어. 쵸코렛 바 있는데 먹을래?

블리스가 걱정이란 걸 한다니, 놀랍기도 했지만 그다지 진심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게다가 하필, 수업 시간에 이런 내용의 쪽지를 보내는 저의가 무엇인지…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수업 시간 끝나고 말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내용이 아닌가.

선생은 여전히 필기를 하고 있었고, 다급해진 나는 녀석을 노려보며 입을 벙끗 거리며 말했다. 지랄하지 말고 필기나 하라고.

역시 녀석답게 전혀 개의치 않으며 무언가를 적던 녀석은 다시 쪽지를 밀어 넣으며 옆구리를 찔렀다. 빌어먹을 블리스 녀석은 이 상황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 오늘따라 네 옆모습이 눈이 부셔. 네 찢어진 눈이 오늘따라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아마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칠 셈이었겠지만, 여자를 꼬실 때나 쓰는 싸구려 발언의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종이를 구겨 킥킥거리며 또 무언가를 쓰고 있는 녀석의 머리통에 던져버렸다. 한참이나 뒤떨어진 필기를 따라잡기 위해 칠판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필기를 멈춘 채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선생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조이. 뭘 그렇게 주고받지?”

도둑질 하다 걸리면 이런 기분일까? 당황스러움에 얼어붙은 우리를 향해 걸어오던 선생은 수업을 방해한 것이 못마땅한 듯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수업을 방해할 만큼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블리스는 즐겼을지 몰라도 나는 안 즐겼다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막상 얼어붙은 혀에서 언어로 나오진 않았다. 그녀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구겨진 종이를 집어 드는 바람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대단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엉뚱한 쪽으로 오해할 만한 내용이 있긴 했다.

그저 짧은 문장일 뿐이다. 오늘따라 네 옆모습이 눈이 부시다고. 네 찢어진 눈이 오늘따라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글자가 적힌 쪽지일 뿐이다. 게다가 진심이 아닌 장난이고. 하지만 짧은 꽁트를 읽는 것처럼 오랫동안 구겨진 종이를 보던 선생은 굳은 얼굴로 블리스가 좀 전까지 낙서하던 노트를 거의 강제적으로 빼앗았다.

뭐라고 적혔던 걸까, 걱정으로 블리스를 노려봤지만 녀석은 곤란한 것을 들켰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정말, 이 시간만 끝나면 요절을 내주리라… 마음 속으로 수천 번이고 다짐했다.

블리스의 낙서를 보던 선생의 표정이 좀 전보다 더 안 좋아 졌다. 어제의 일도 충격적인데 오늘도 이렇게 충격을 받아야 하나, 엉뚱한 오해를 하는 선생에게 뭐라 변명을 해야 하는 건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 가지의 생각이 오갔다.

“블리스… 조이. 상담실로 따라올래?”

어색하게 블리스와 눈을 마주친 선생은 뭔가 대단한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목소리가 떨려왔다. 당장이라도 블리스를 때려눕혀 선생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지만, 뒤돌아서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간 선생은 그런 여유조차 주질 않았다. 뻣뻣하게 긴장으로 굳어진 채 교실 문을 나서는 선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허탈함에 진이 빠져버릴 것 같았다.





음모론, 그것은 비단 JFK, 프리메이슨, IMF 같은 유명인 혹은 단체만을 향한 것이 아닌 나 같은 평범한 고등학생에게도 적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음모론의 배후 세력은 블리스 아이언사이드이고, 그는 나를 수치심에 자살하게 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블리스가 옆에서 지껄일 때마다 어처구니없다고 치부해버렸던 음모론 따위를 왜 지금 와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다행히 블리스와 나의 부모가 학교로 불려오는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다. 선생과 나, 그리고 블리스… 이렇게 셋만의 상담 선에서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앙금처럼 불안함은 남았다. 나는 심각해지고 싶지 않았다. 녀석과 키스도 하고 섹스를 하지만 게이로 오해 받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에게서 성적인 욕망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게이가 아니냐고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물어보던 칼릭스의 말에도 그저 시니컬하게 웃어 넘겼었다.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저 블리스와 난 섹스가 즐거울 뿐이니까. 더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물론 깊게 파고든다고 해도 그 시꺼먼 진실은 말할 것이다. 장 지우. 당신은 타락한 십대일지언정 게이는 아니라고.

투명 매니큐어가 발라졌는지 정리 정돈이 잘 된 손톱이 반질거렸다. 그 깔끔한 손 끝이 가리킨 부분부분이 찢어진 난잡한 종이에는 급하게 갈겨진 글씨가 있었다. 어지러운 필기체로 휘갈겨져 있었지만 내용만큼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알고 있어? 네가 찢어진 눈을 살짝 감으면 얼마나 키스하고 싶은 모양새를 내는지…. 라는 말은 그저 동급생에게 장난으로 내뱉을 만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악센트는 긴장으로 굳어져 뻣뻣했다. 모멸감을 주기 위한 빈정거리는 말투는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게이라고 해도 그녀가 우리의 연애를 방해할 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학교 방침은 교내 연애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물론, 동성연애를 허락하는 방침 자체는 없었지만.

블리스와 내가 단순히 수업 시간에 쪽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선생이 기분이 상했다면 상담실에 끌려오지 않고 단순한 훈계 조치로 끝났을 것이다. 허나 쪽지의 내용만으로 상담실로 불려온 것이라면 선생의 지나친 월권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쪽지에 대해 거짓의 살을 붙이고 붙여 이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는 길 밖에 없었다.

상담실을 문을 닫자마자 나는 온 힘을 다해 블리스의 뒤통수에 주먹을 날렸다. 오늘 있었던 최악의 일들에 대한 모든 원흉, 악당, 머저리 자식. 네 생각 없는 행동이 만든 이 끔찍한 상황을 봐! 소리치고 싶었다. 날아간 주먹에 휘청거리며 몇 발자국 앞으로 튀어져 나간 블리스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쨌든 다행이지? 아버지 귀에 들어갔다간 진짜 뼈도 못 추려.”

“절대 미안하단 말은 안 하지?”

“결국 해결 됐잖아.”

“그러니까 안 미안하단 말이지?”

사과를 종용하는 내 말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던 블리스는 결국 마지 못해하며 말했다. 그저 격양된 내 감정을 상대하기 피곤하다는 투로.

“미안하다. 됐냐?”

“짜증나는 자식. 너 때문에 오늘 하루 최악이야.”

울분에 쌓여있는 나를 녀석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블리스는 내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의아스러운 듯이 보였다. 나는 녀석의 표정에 나타난 것처럼 녀석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사고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녀석은 우뇌가 모두 썩어버린 걸까? 아무런 정서적인 고통이나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죄책감마저? 부아가 치미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까 봐 녀석을 지나쳐 가려는데 녀석이 강하게 오른쪽 팔목을 붙잡았다.

“야, 너 솔직히 쪽지 때문이 아니고 칼릭스 때문에 계속 짜증내는 거지.”

“헛다리 집지마, 병신자식.”

“아니야, 너 아까 점심 안 먹은 것도 그 새끼 때문이지.”

“배가 안고파서 안 먹은 거야.”

가령 칼릭스 때문에 점심을 먹지 않았다고 해도, 블리스가 이렇게 나를 다그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화장실로 끌고 가면서까지 나를 닦달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고.

상담실과 연결된 기다란 복도에서의 다툼이 선생의 이목을 끌까 봐 화장실로 거칠게 끌고 갔다. 녀석의 무식한 힘에 질질 끌려가면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 했다. 녀석과 앞으로도 계속 친구로 지내게 된다면 내 인생에 얼마나 더 마이너스가 될 것인가를.

화장실에 나를 밀어 넣으면서 녀석은 문을 잠갔다. 이 일종의 위험스런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녀석에 비해 열등한 내 체격에 저주라도 퍼붓고 싶어진 나는 내 몸을 자학하는 대신 녀석을 거칠게 노려봤다.

“이거 먹어. 배고프겠다.”

나의 노려봄을 모른 척 시치미 떼며 녀석은 말했다. 나는 정말 미치도록 이 능글능글한 점이 싫었다. 갈색 비닐로 포장된 초콜렛 바를 내밀며 녀석은 복장 터질 것 같은 내 표정과는 정 반대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난 그게 비위가 상했고.

“너나 처먹어.”

“배고프잖아. 난 밥 먹었어.”

“너나 처먹으라니까!”

입가에 닿을락 말락 갖다 댄 바를 잡아 채 바닥에 던지며 소리쳤다. 더위에 잔뜩 녹은 쵸콜렛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마치 개념조차 막연하고 계산도 불가능한 일그러진 분노에 물든 내 마음 같았다. 나는,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쵸코렛 바를 내밀던 그 자세로 얼어붙은 블리스를 보면서, 나는 할말을 잊었다. 내 행동이 지나쳤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그럼에도 사과할 마음은 없었으며, 나는 뭔가 이 상황을 초래한 방향을 알 수 없는 분노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녀석에게 이 모든 책임을 묻기 위해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나는 그…저, 네가 장난을 더,덜 치고, 나를 좀 더 배려해줬으면 좋겠어.”

이런 변명을 하는 순간에는 좀 당당했으면 좋으련만, 병신처럼 더듬거리는 내 꼴이 우스웠다.

“어제도 오늘도 다 네가 그래서 그래. 네가 나를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다올린 처럼?”

“그 자식 이름은 왜 자꾸 입에 올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려 작정했는지, 녀석은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을 꺼냈다.

“내가 다올린 처럼 널 생각해줬으면 좋겠냐고 물은 거야. 대답해봐 조이.”

“왜 그런걸 묻는 거야?”

“대답해봐. 내가 칼릭스 다올린처럼 했으면 좋겠어?”

“누구의 방식을 따르라는 게 아니잖아. 됐어, 친구 사이에 이런 친절을 요구하는 것도 웃겨. 다 관둬.”

다 병신 같은 짓거리야. 왜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거지? 중심을 찾기 힘든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에 짜증이 치밀어 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이 다시 한번 어깨를 잡는 바람에 문고리를 놓치고 말았다.

“아니? 우린 친구가 아니야.”

이번엔 또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가. 나는 허탈한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말도 안 되는 말싸움, 녀석의 배려 없음, 또 설득 당하는 나도 다 지긋지긋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절교 선언이라도 하려는 건가?

“뭐?”

“어떻게 친구끼리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해? 그런 건 친구가 아니야.”

“……”

“우린 친구가 아니야. 안 그래? 지우?”

이렇게 맺고 끊음을 잔인하게 할 수 있는 녀석이었던가? 갑자기 절교 선언을 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멍하니 녀석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왜, 이제 와서 호모로 오해 받으니까 친구가 하기 싫어졌어?”

격분한 마음과는 반대로, 나는 차분히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여태껏 녀석의 노리개처럼 놀아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녀석에 대한 배신감에 대한 분노로 심장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심장을 좀 먹어가던 심장의 분노는 곧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내가 널 좋아하니까…”

“……뭐?”

”내가 널 사랑하니까, 우린 친구가 아니야. 그렇지?”

10톤 가량의 헤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아득한 기분에 휩싸였다. 맙소사,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에 벙어리마냥 입을 벙끗거리는 나를 보는 블리스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진 것 같았다. 어깨에 놓여져 있던, 좀 전까지 만해도 억세게 잡고 있던 오른손에 서서히 힘이 풀어지며, 힘없이 늘어진 밧줄처럼 떨어졌다.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점점 잦아드는 팔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블리스의 눈을 마주쳤다.

눈을 마주친 순간, 움찔하며 반응하는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감 조차 잡을 수 없었다. 과연 지금 이런 상황에서 모든 상황을 명쾌히 종료할 수 있는 말이 있을 수 있을까?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너… 게이였어?”

상황을 종료하는 말을 찾지 못한 채, 머리 속에서 어지럽게 맴 돌고 있는 수십, 수백 가지 말들 중에 되는 대로 내뱉고야 말았지만, 녀석이 나에게 고백을 한 이상 확인 할 필요는 있었다.

“블리스.”

“……”

“그러니까, 너 지금 나한테 커밍아웃을 한 거냐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 질문은 적절하지 못했던 건지, 나를 보던 블리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간다.

“지우”

“응.”

“너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돼?”

“……그러니까 네가 게이란 얘기잖아.”

그러니까, 날 사랑한다는 말이잖아.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말이었기에 속으로 삼키며 태연스러운 척 애를 썼다. 하지만, 후들거리는 다리가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것 같았다. 다행히도 이런 나의 감정적 동요를 녀석은 자기 자신의 흥분으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던 블리스는 내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지금 내가 게이인지 아닌지가 중요해? 꼭 그런 게 설명이 돼야 해? 그게 이 상황에서 꼭 튀어나와야겠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이 블리스 아이언사이드가!”

“……”

“내가 널 사랑한다 말 하는 거잖아!!”

이를 악 물며, 악에 받친 듯 사랑고백 하는 녀석에게 낭만이란 걸 찾아볼 수 없다는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차라리 낭만적인 고백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안도해야 하는 걸까. 혼란스러움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 여태껏 진짜 게이랑 섹스했던 거네. 진짜 게이 섹스.”

“그렇게 냉소적으로 웃지마.”

“염병할! 나보고 어쩌라고! 감동해서 울어주리?!”

사랑이라니. 화가 나 돌아버릴 것 같았다. 울렁거리는 감정이 홍수를 이루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아니야, 왜 그래. 지우. 단지 내 감정을 고백한 거야. 물론 이런 식으로 화장실에서 고백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싫어. 인정할 수가 없어. 사랑이 뭐야. 뭔데 나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건데!”

손을 내밀어 어깨를 잡으려는 블리스를 뿌리치며 악을 질렀다. 어색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블리스가 의심스럽고, 당혹스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널 보면 키스하고 싶고.”

“나도 널 보면 키스하고 싶어.”

“널 보면 섹스하고 싶어.”

“나도 그래. 네가 내 뒤를 뚫어줄 때마다 돌아버리게 좋다고. 블리스. 성욕이랑 사랑이랑 헷갈리는 거 아냐?”

지난 일년 여간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할 뿐 그 이상의 감정의 교류 따윈 없었는데 갑자기 궤도를 벗어나려 하는 블리스가 괴로워서, 혹시나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말했다.

“아니.”

단호하게, 나의 모든 반박을 거부하려는 듯 녀석은 강한 어투로 말했다.

“널 보면 괴로워서 심장이 울어. 이런데…… 사랑이 아니야?”

녀석이 말을 내뱉은 순간, 짧은 숨을 들이쉬고 말았다. 감정이 폭주하는 저질스런 글을 읽다가 충격적인 선언을 마친 주인공의 대사 뒤로 글자 하나 없는 여백을 끝도 없이 넘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 새하얀 여백 위를 넘실거리는 감정들이라니.

“착각했나 보네. 섹스 할 때는 보통 때 보다 심장 박동수가 높아지거든.”

“지우!!!!”

나도 모르게 절로 눈을 감고 말았다. 어찌나 크게 말 했는지 화장실 내부가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른 블리스는 놀라서 얼어붙은 나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악문 이사이로 거칠게 말 했다.

“네가 날 사랑하도록 만들겠어.”

“너…너! 머리에 총 맞았어?”

“난 이기적이라서. 나 밖에 몰라서. 짝사랑은 안 해.”

잔뜩 경직 돼있는, 신경에 날카로워진 콧날에 짧은 키스를 한다. 질끈 눈을 감자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굳게 닫힌 입술 끝을 매만진다. 나를 사랑하게 만든다니. 기가 막힐 정도로 이기적이고 단순한 논리에 잔뜩 질려버릴 것 같았다.

“사랑해. 지우.”

“……”

“너도 날 사랑하게 될 거야. 내가 너에게 빠졌듯이.”

블리스의 얼굴은 다시, 예전의 그 자신 넘치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좀 전의 긴장마저 느껴지는 초조함은 느껴지지 않아 기괴한 연극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불 같은, 생각 없이 소중한 것이든 경멸하던 것이든 뭐든지 태워버릴 것 같은 이 소년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니. 이 기가 막힌 사실에 나의 생각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수업이 모두 끝난 방과 후의 화요일은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이다. <10학년 초기에는 블리스를 따라 농구부를 들었었지만 천장에 닿을 듯이 커다란 백인 녀석들에 질려 농구부를 그만 두고 테니스 부로 오게 되었다. 한 여름에 시원한 실내가 아닌,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실외 코트에서 운동을 해야 했지만, 커다란 녀석들 사이에서 운동하는 것 보다는 나았다.

야구부 녀석들의 코트와 분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파란 색의 펜스 앞 의자에 앉아서 여자애들이 팀을 나누어 테니스를 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사실, 보고 있다는 표현은 단순히 시선이 여자애들의 빠른 동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의미일 뿐, 머리 속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엄청난 일들을 벗어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몇 시간 전, 벌써 과거가 된 일이지만 상담실이 있는 서관 화장실에서 블리스가 나간 지 한참 되도록 나는 나갈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 나를 덮쳐왔던 감당할 수 없는 충격들에 머리 속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었었다.

테니스를 칠 의욕도 없었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테니스를 치는 행동은 너무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테니스를 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뭔가를 절박하게 하고 싶은 의욕조차 생기질 않았다.

칼릭스에 대한 죄책감, 선생님의 오해, 그리고 견디기 힘든 사랑고백의 원흉이 블리스 아이언사이드라는게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녀석은 고장난 브레이크가 달린, 내리막길을 달리는 자동차와도 같다. 욕구를 배출 할 수 있는 편한 친구. 이런 편한 관계에서 어떤 불편한 감정을 이끌어 내려 했다. 가슴에 뭔가 잔뜩 맺히는 기분에 크게 한숨을 내쉬고 또 내쉬며 맺힌 무언가를 끌어내려 했다. 아무런 의욕 없이 펜스에 머리를 기댄 채로 한숨을 내뱉지만, 속 안의 응어리는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갑자기 머리를 기대고 있던 펜스가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테니스 코트 바로 옆에서 야구부원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 공이 날라와 펜스를 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칼릭스 다올린도 야구부였다. 화요일, 테니스 부 모임을 위해 운동장에 나오면 테니스 코트 옆에서 칼릭스가 글러브를 끼고 야구공을 던지던 모습을 봤던 것 같기도 하다.

혹시나 하는 기분에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인영 하나가 그 기다란 육신을 기대고 있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는 거야?”

하얀색, 야구부 유니폼을 입은 칼릭스가 등을 펜스에 기댄 체로 서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펜스에 기댄 머리를 떼어내고야 말았다. 그 직후 과민반응을 했다며 속으로 욕을 퍼붓긴 했지만, 칼릭스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언제 왔어?”

내 놀란 목소리가 이상하다. 우습게 들리진 않았을까 걱정하는데 다행히 녀석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아무런 미동 없이 펜스에 등을 기대고 있을 뿐이다.

온 몸의 힘을 빼고 펜스에 체중을 실었는지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이 펜스 사이로 어지럽게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네가 한숨을 내쉬기 시작한 때부터.”

낮게 끌리는 듯한 목소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웅얼거리는 속삭임이었다.

말을 마친 후 등을 그대로 기댄 체 천천히 고개를 돌린 칼릭스의 옆모습에서 음울함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별로 좋은 타이밍은 아니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한숨쉬어도 돼.”

“농담하지마.”

흘러내리던 앞머리가 신경 쓰였는지 칼릭스는 자신의 머리 색 보다 짙은, 검은 색의 얇은 헤어밴드를 하고 있었다. 방금 전 까지 야구를 하고 있었는지 턱 끝에 맺혀있는 땀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내 말에 웃으며 녀석은 다시 고개를 돌려 뒷모습만을 보여주었다.

“고마워. 덕분에 시험 잘 봤어.”

어제, 아니 정확히 오늘 있었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떠올랐는지 녀석의 어깨가 뻣뻣하게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는 어깨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밤에 블리스랑 있었던 일은 말야…”

“조이.”

펜스에서 뒤 돌아선 칼릭스는 멍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웃었다. 펜스 사이로 그 기다란 손가락을 집어넣어 내 콧날을 잡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여기서 얘기하기는 좀 그렇지? 거기서 나올래?”





싱싱한, 생기마저 느껴지는 잔디가 손가락 마디 사이로 뻗어 나온다. 그 부드러운 줄기는 고목나무의 강인한 생명력과는 달리 조금만 힘을 주어도 짓이겨질 정도로 연약했다. 단 하나의 개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 독립되어서는 살 수 없는 마치 인간과도 같은 존재.

가만히 드러누워 빼곡히 솟아난 잔디를 쓰다듬는 손가락 사이로 자그마한 개미가 올라온다. 손등을 타고 손목 위로 올라온 개미가 세 쌍의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감각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간지럽다. 개미가 소매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나머지 손으로 기어 올라오던 개미를 떼어내 버렸다. 개미는 그 부지런한 다리를 놀려 다시 무성한 잔디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저 이 모든 사소한 행동을 지켜보기만 하던 칼릭스는 시선을 돌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고 싶었던 것은 단지 침묵의 공유였는지도 모른다.

여태 야구를 했는지 녀석의 새하얀 야구 유니폼은 흙먼지에 지저분해져 있었다. 뱀파이어 가 현대의 청소년으로 자라나 야구부의 일원이 되었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굳게 닫힌 녀석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얇지만, 모양새가 나쁘진 않다. 오래된 고서적 같은 낭만이 느껴지는 얼굴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저 입술의 분위기는 대체로 우아하다. 저 우아한 입술에서 내뱉어지는 독설은 못 견디겠지만.

이 낯설기만 한 백인은 나의 치부를 두 번이나 보았다. 그것은 동시에 블리스의 치부이기도 하다. 이 낯선 소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생각을 읽을 수도, 추측할 수도 없다.

“저기… 조이.”

저 멀리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칼릭스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응”

“어제, 아니 오늘 있었던 일은… 미안해.”

“뭐가?”

“그냥, 내가 네 방에 들어왔을 때 있었던 일 모두 다. 너네 둘이 헉헉대고 있을 때 내가 눈치 없이 들어갔잖아.”

녀석의 말에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녀석의 점잖지 못한 사과에 갑자기 친밀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속으로 녀석의 진지하지 못한 사과에 안도했다.

“나 때매 사정도 못하고.”

“칼릭스.”

“네 걸 보니…… 사정 직전이었는데.”

“그건 또 언제 본거야!”

“동양인 사이즈는 모르겠지만, 네 한도 내에선 최고로 부풀어 있었……”

“집어 치워!”

녀석도 나도 배를 들썩거리며 별로 우습지 않은 얘기로 웃음을 흘려댔다. 오늘 새벽부터 내 어깨를 짓눌러온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는 기분에, 웃음에 긴 안도의 숨을 섞어 녀석 모르게 내쉬었다.

“아무튼 내가 화낼 이유는 없었어. 그건 너희 둘의 문제인데. 이성적이지 못했지.”

“나 화 안 났어.”

“……”

“진짜야. 내가 화낼 이유가 없잖아. 단지, 좀……”

“단지 좀?”

되물어오는 녀석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딱히 느낌을 설명할 말은 없는데, 상대방을 향한 의구심과 신뢰가 서로 어지럽게 혼동된 느낌을 받았다. 녀석의 청록 빛 맑은 눈을 마주하며 한숨과도 같은 숨을 크게 내쉰 후 말했다.

“네가 날 싫어하면 어떡해야 하나 걱정했어.”

그런 걱정에 초조하기까지 했지.

“왜 그런 걱정을 하지?”

“경멸 할까봐. 그걸 두 번이나 봤잖아.”

얼굴에 열이 오르려 한다. 블리스 이외에 애널 섹스에 대해, 직접적인 묘사는 하지 않더라도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은밀한 수치가 열꽃처럼 올랐다.

“경멸 하지 않아.”

“그럼 날 싫어하진 않는 거야?”

너무 유아기적인 발언이었나 싶었지만, 오늘 하루 종일 블리스의 고백이 있기 전에 골머리를 썩였던 문제였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그건.”

역시나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었는지 대답이 곤란한 것 같았다. 난처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칼릭스는 손을 뻗어 나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별로, 널 싫어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오히려 난 널 좋아하는 편이지.”

“왜?”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나? 너 의외로 짓궂은 편이구나.”

“아…… 별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좀 궁금했어.”

내가 칼릭스의 사상에 얼마나 열광했는지, 녀석이 블리스와 엉켜있는 걸 발견 했을 때의 그 허탈감을 안다면 별로 짓궂다는 생각은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비대칭으로 올라가는 입술이나, 죽었다 깨어나도 주류 미국인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순수하고 강렬한 호기심을 일게 하는 침울한 우아함, 신중하면서도 비겁하지 않은 행동, 70먹은 영국의 노인네 같은 말투, 짙은 밤색의 결 고운 머리카락 그 모든 것들이 열광을 하게 한다는 걸 말해주고 싶진 않았다.

“내일, 시간 비워놓을래?”

기다란 손가락으로 조금 전부터 시야를 가리던 앞머리를 넘겨주며 칼릭스는 예의 보여주던 비대칭의 미소가 아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서로 오해를 풀었으니까… 좀 더 친해지는 계기를 갖는 거지.”

“어디… 갈 건데?”

“가브리엘이 운영하는 언어센터에 가보자.”

“언어 센터?”

“뭐… 솔직히 자격증 없는 치료사이긴 하지만.”

녀석의 내부에 어떤 변화가 왔던 것이기에, 이렇게 친근함을 표현하는 것 일까. 단순히 녀석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어서 나 역시도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 감동의 전이로 인해 나 역시도 행복해졌다는 사실에 충실히 반응하고 싶었다.





*





수요일 아침, 지리멸렬한 화요일의 고비를 넘긴 시간. 아침 급식의 메뉴는 포테이토 요리였다. 반으로 갈라진 감자 사이에 고구마, 마카로니, 베이컨이 올려진 음식으로 이번 학기에 벌써 몇 십 번을 먹는지도 모르겠다. 제인 에어가 갇혀있던 로이드 자선학교의 급식보다는 나을 테지만 수십 번을 먹게 되면 고문과 다를 바가 없다. 급식을 위탁운영 했으면 이렇게까지 성의 없는 메뉴가 반복되진 않았을 텐데. 탄원서라도 내야 할 것 같았다.

우유와 콘프레이크를 울부짖게 만드는 아침의 급식메뉴를 먹는 블리스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 마주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녀석의 기숙사 방을 지나쳐 급식소로 온 보람도 없이 블리스는 내 맞은 편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 둘씩 블리스와 나 사이를 둘러싸는 녀석들은 평소의 풍경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들은 블리스와 나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기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먹기 싫어?”

내가 먼저 절대 말을 걸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블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어왔다. 충격적인 고백 뒤에 저런 뻔뻔한 행동을 취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화난 척 녀석의 말을 받지 않는 것은 계집애들도 하지 않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너는 먹고 싶냐?”

“한입만 더 먹으면 토하고 말 걸?”

“내가 먹어줄까?”

벌써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포크로 두드리는 조쉬 폴슨은 거의 비워지지 않은 블리스와 나의 그릇을 보며 말했다.

“너네 먹던 부분만 좀 떼어내고 줘. 그러면 먹어줄게.”

“나도 좀 먹어줘.”

“나도.”

이 고문과도 같은 식단에 적응하는 것은 조쉬 뿐인 모양으로 아고스와 레이 역시 채 반도 처리하지 못한 그릇을 조쉬 앞으로 내밀었다. 저 불가사의할 정도로 대단한 식욕이라니… 아무리 조쉬라 하더라도 아침에 5인분을 해결하지 못 할 거란 생각이 들어 됐다는 말과 함께 식판을 들고는 일어나버렸다. 음식물 쓰레기를 담당하는 신경질적인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먹어줄게”

“됐어. 한입만 더 먹으면 토할 것 같다며.”

“네 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지랄.”

옆에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녀석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블리스의 태도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며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곳으로 와버렸다. 걸어오면서 힐끔 본 녀석들이 앉은 테이블은 블리스의 의뭉스런 말에 대한 격렬한 논쟁 중인지 거의 심문하는 분위기다. <아무리 블리스의 뇌가 근육으로만 조직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관계에 대한 추측을 가능하게 할 정도의 위험스런 발언을 하지 않을 거라 애써 생각했다.

“조이… 지금 그걸 다 버리려는 거니?”

음식물 처리 담당 아주머니가 모든 학생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별로 이 학교 학생들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이유는 내가 이 학교의 유일한 동양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만 버리는 거 아니잖아요.”

“네가 제일 안 먹었어.”

“저번까진 먹을 수 있었지만, 진짜… 이번에는 정말 못 먹겠는데요.”

“근성 좀 길러라.”

음식 하나가 남의 근성을 운운할 근거가 되는 건 아니다. 거만하고 냉소적인 아주머니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포크로 그릇의 음식들을 통 안에 밀어 넣자 그녀의 표정이 더욱 구겨진다. 이 노란 이방인이 미국의 축복과도 같은 음식을 취급하는 태도가 화가 난 것이다.

“메뉴가 좋아지면… 근성 기르는 것도 생각해볼게요.”

“웬 근성?”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높은 톤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애나가 남은 음식을 버리기 위해 서 있었다. 여전히 다리가 낫지 않았는지 불안정하게 서 있는 모습이 조금 위태로워 보였다.

“너처럼 음식을 비우는 근성을 기르라고 하셔서.”

애나의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보며 말하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인다.

“내가 감자요리를 좀 환장하게 좋아하잖아. 오, 아주머니. 조이는 쌀 요리에 미친다고요.”

“미국 애들을 위해 일본식 식단을 차릴 순 없잖니?”

“쌀이 얼마나 다이어트에 좋은데요. 애들 살찌는 거 안보이세요? 그리고 조이는 코리아-아메리칸이라구요.”

굳어있는 표정의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비워진 그릇을 올려놓은 애나는 들고 있던 내 그릇마저 뺏어 올려놓으며 말했다.

“업어달란 말은 안 할게, 기숙사 입구까지만 좀 데려다 줘. 오는 길에 도서관에서 책 빌렸는데… 들고 가기가 좀 힘들어서.”

좀 전까지 곤경에 처한 왕자를 구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던 애나의 부탁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또 뭔 책을 빌렸어.”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작품이야. 정신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들, 백인 우월주의를 비판하는 글이지.”

아주머니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하는 애니 때문에 나는 조금 통쾌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저런 여자와 하리라. 애나 머피를 기숙사 방에 대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땅의 부모들은 딸에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절, 언어와 행동에 관한 복잡한 규칙, 형식, 상하관계의 의사소통 방식을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좀 전의 일로 인해 감정의 성숙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기숙사로 들어가 교복으로 갈아입으며 콧노래를 불러댔다. 일종의 도취와도 같은 유쾌한 감정에 휩싸였다. 백인을 통해 백인 우월주의에 물든 자를 조롱했다는 사실이 흥겨운 것이다. 나는 내가 분명히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으며-가끔 버크셔 고등학교 내의 99%를 차지하는 백인들에 둘러싸여 있을 땐, 태어나서 거울을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나도 백인과 같은 긴 팔다리를 가졌다는 착각에 휩싸이기도 하지만-그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백인들, 특히 미국인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나 자신의 종족 정체의식을 확립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나의 부모조차도 알지 못했다. 부모의 곁을 떠나 학교라는 사회를 접하게 되었을 때 학교는 가정 내에서 배워왔던 한국식의 가치관을 가르치지 않았다. 백인 사회의 주류적 가치관을 가르쳤으며, 그것은 곧 내가 가지고 있던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과의 충돌을 의미했다.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생긴다는 것. 인생에 커다란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드는 것들.





*





엑셀 물리는 일반 화학 과목보다 어렵다. 더럽게 진도도 빨리 나가고, 시험 점수도 짜게 준다. 게다가 일반 과목보다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물론,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만 없다면 물리란 과목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같이 분명히 다음주에 기말고사를 치를 것이라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도를 보통 때보다 1.5배는 빨리 나갈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 엄청난 식욕 때문에 뚱뚱할 거라는 오해를 받는, 단지 거구일 뿐인 조쉬 폴슨은 수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 하얀 피부가 시체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말 하지 않아도 녀석이 블리스를 따라 화학을 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도 그 순간은 정말 절실히 화학을 듣고 싶었으니까.

웬만해서는 같이 다니는 편이지만, 물리보다는 화학을 더 좋아하는 블리스는 엑셀 화학을 들었기에 나는 녀석과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지 않았다. 아니, 오늘 들어있는 수업 중 대부분이 녀석과 겹치는 교차점이 없다. 라틴어에는 쥐약 먹은 생쥐처럼 골골대는 내가 택한 수업은 스페인어1이고 어렸을 때부터 돈 많은 집 아들내미답게 가정교사를 끼고 산 블리스는 당연하단 듯이 라틴어를 택했다. 돈으로 처발라져 자란 블리스 자식이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이유는 단지 어렸을 적 교육의 산물일 뿐, 근육으로 조직된 뇌로 인한 선천적 기질은 거의 없을 거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오늘만큼은 신이 축복을 내린 듯 녀석과 마주 칠 일이 거의 없었다. 이게 축복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과 마주칠 때 그 넘쳐나는 감정들을 감당할 자신이,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사실, 예전의 우리 관계에 바이바이를 외치는 녀석의 태도 자체가 이해 불가인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니, 나를 사랑한다니. 왜 고요한 웅덩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려 하는가. 겁에 질린 소녀처럼 도망치려 하는 내 태도 자체도 이해 불가이다. 도망치지 말고 녀석을 제 정신으로 돌려놓아야 할까? 이 상황에 맞서 싸워? 그렇다면 나의 적은 무엇이지?

“너 블리스랑 뭔 일 있어?”

물리 진도 때문에 죽을상을 짓던 조쉬가 말을 걸어왔다. 험악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다정하고 남 참견하기 좋아하는 조쉬는 생김새 때문에 마초맨으로 오해를 받곤 했다. 나 역시 이 학교에 처음 전학 와서 블리스와 어울리는 조쉬를 봤을 때 인종차별 주의자에다가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소년일 거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었다. 하지만 실상은 이렇게 다정하고 때론 소심하다.

“무슨 일?”

“너희 오늘 이상해. 아니, 블리스가 이상해.”

“갠 늘 정상이 아니었어.”

정상인 흉내를 내긴 하지만. 회의적인 기분에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너도 이상해.”

“내가?”

“그래 너도.”

“내가 뭐가 이상한데?”

“블리스와 얘기할 때 날이 서 있어. 건들기만 해도 베일 것 같아.”

그럼 그 자식이 그딴 말을 하는데 날이 안서고 베기겠니. 조쉬에게 진실을 까발리는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이상한 말을 지껄여댔다.

“동양인들은 블라블라 신이 지구에 강림하신 후 666일이 되면 그 신을 받들기 위해 정말 예민한 상태로 변하지. 오늘이 바로 삼천 번째 주기가 반복 되는 날이고.”

“그 말 지금 나 웃으라고 한 얘기야?”

“……재미없었어?”

“한번더 그런 농담하면 널 죽일지도 몰라.”

심각하게 몸을 부르르 떠는 조쉬 녀석이 귀여워서 녀석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배고프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블리스와는 뭐, 녀석이 라틴어로 쏼라 거리는 데 재수 없어서 그랬어.”

별로 믿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까닥이는 조쉬를 보며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안 믿으면 블라블라 신이 시험을 망치게 할 걸?”





*





주말 동안 타 주에서 온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숙사에 머물렀지만 학교와 집이 가까운 몇몇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럼에도 걸어가기에는 무리였기에 자전거나 차를 이용하곤 했다. 동관 뒤에 일렬로 진열돼 있는 수 십대의 자전거 중에서 서로의 자전거를 찾아낸 칼릭스와 나는 감겨져 있던 자물쇠를 풀었다.

칼릭스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학교정문 밖에 있는 편의점에서 생수 두 통을 샀다. 한 개를 나에게 건네며 봉사활동을 가는 곳이 여기서 조금 먼 곳이기 때문에 물은 필수라는 말을 했다. 이미 정오는 한참이나 지난 시간이었지만 지열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기에 후덥지근했다. 칼릭스는 이미 흰색의 교복에 매여 있던 넥타이를 풀고 목을 갑갑하게 조르던 단추를 두어 개 풀어놓은 상태였다. 나는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버리는 대신 조금 느슨하게 당기며 끝까지 잠겨있던 단추 하나를 풀었다.

학교의 정문으로부터 한참이나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양 사이드에 심어진 가로수의 그늘 덕분에 지열이 올라오지 않았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내려가는 내내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칼릭스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페달을 밟았다. 녀석의 긴 짙은 밤색의 머리가 바람에 어지럽게 날려댔다. 호탕한 웃음소리에 때문에 덩달아 즐거워졌다. 페달을 밟아 가속도를 내다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 마치 서부의 카우보이가 된 것 마냥 소리를 질러댔다.

“나 좀 봐, 손놓고 내려가!”

위험할 정도로 가속도가 붙는 내리막길을 달리는 자전거에서 손을 뗀 채, 속도를 더 붙이기 위해 페달을 밟는 기분은 굉장히 짜릿했다. 하지만 바람에 날린 넥타이가 양 미간 사이에 달라붙은 바람에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휘청거리는 자전거의 핸들을 간신이 잡아채며 고개를 흔들어 달라붙은 넥타이를 떼어냈다.

“너 죽으려고 작정했냐?!”

“넥타이 때문에 그래!”

한 손으로 넥타이 끝을 잡아당겨 풀어내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으며 칼릭스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짙은 밤색의 머리를 흩날리는, 집중을 한 녀석의 옆모습이 보였다.

“우리 나중에 올라올 땐 어떡하지?!”

이렇게 내려가는 건 좋은데, 나중에 올라올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뭘 어쩌긴 어째! 앞이나 보고 달려!”

페달을 밟아 속도를 높이며 조금씩 앞서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역시, 대책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걱정은 나중에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이 순간에는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속도를 느끼며, 피부를 거칠게 쓸고 지나가는 바람을 즐기면 될 뿐.





자전거 페달을 밟지 않아도 달릴 수 있던 시원한 내리막길은 잠시 뿐이었다. 다행히 평지가 이어지는 깔끔하게 구획된 길을 달려서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 같은 체력의 소모는 하지 않았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쓸어내며 페달 밟는 것을 쉬지 않은 채 물을 마시고 있는 칼릭스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돼? 너무 더워.”

“거의 다 왔어. 이 골목만 돌면 돼.”

구식 자동차들이 어지럽게 도로를 차지하고 있는, 세입자용 공동주택 단지가 즐비한 골목이었다. 이런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치료센터의 가브리엘 선생은 빈민지역의 위대한 테레사 수녀같이 뭔가 계시적으로 다가왔다. 워싱턴 D.C의 65%를 차지한 흑인들을 대변해주는 천사 내지는 인도자 같은. 그 이름에서 풍겨오는 기독교적 이미지에 금발의 백인 내지는 마틴 루터킹 목사 같은 이미지를 상상했다면 너무 미국 영화를 많이 본 탓 일까.

“다 왔어. 더웠지?”

이마에 흐르던 땀을 넥타이로 훔쳐내던 칼릭스는 더위에 지쳐 헉헉거리는 내게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땀을 닦던 손으로 멀지 않은 곳의 이상한 간판을 가리켰다.

대문자로 쓰여진 ‘천사 가브리엘’이란 간판이었다. 요즘 유치원 애들이 만들어도 저 보다는 미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 조악하기가 이루 말 수 없는 간판에 놀라는 내가 우스웠는지 옆에서 칼릭스가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진짜 저기야?”

물론, 자격증 없는 치료사라고 해서 올 때부터 근사한 곳을 바랬던 것은 아니지만, 저건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폐차에서 분리해 낸듯한 녹색의 범퍼에 ‘ANGEL GABRIEL’이라고, 하얀색의 페인트로 쓰여있었다. 그 글씨가 알파벳을 갓 배운 어린아이의 것 같아서 황당한 한편 웃음이 나왔다.

“응. 진짜 천사의 집이야.”

“진짜?”

웃는 건지 아니면 찡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칼릭스가 의심스러워 물었다. 최악의 시설일 거라는 편견마저 가지게 하는 간판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들어가자. 세수라도 하고 싶어.”

멍하니 간판을 보고 서 있는 내 등을 두드린 칼릭스는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녀석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철조망에 둘러싸인 좁은 공터 안에 들어섰다. 세입자용 공동주택 단지가 주변을 둘러싼 이 건물은 간판만큼이나 조악했다. 중간 중간 시멘트가 떨어진 철근이 그대로 드러난 이 건물은 단층이긴 했지만 약한 지진에도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어린 아이들의 언어 치료를 도울 수 있는지, 정부의 지원조차 닿지 않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오히려 망쳐놓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이런 나의 염려를 모르는지 나무색 페인트가 칠해진 문을 연 칼릭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브리엘! 나 왔어!”

밖에서 본 것보다 내부는 넓었다. 현관 문을 열어 거친 솔에 발을 비벼 닦으며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벽을 따라 늘어선 액자들이었다. 액자에는 그림 대신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 곳을 거쳐간 어린아이들을 찍은 듯 적게는 세 명 많게는 열다섯 명씩 모여 한 남자와 사진을 찍은 모습이었다.

“가브리엘 나 왔다니까.”

“린 왔어?”

“코라손, 가브리엘 어디 있어?”

“가브리엘 이미 없어. 조수아 할머니 지금 있어.”

방금 본, 네 명의 소년들이 찍혔던 사진 속에 있던 소년이었다. 사진 속 보다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의 옅은 갈색 얼굴은 천진난만 했다. 선천적으로 설소대가 지나치게 짧은 탓인지, 아니면 소년을 낳은 부모의 언어가 영어를 말 하기에 무리가 있었던 탓인지 소년의 영어는 혀 짧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말의 내용 역시 어색하기도 했고.

거실 안으로 들어와보니 내부에는 현관에 걸려있던 사진들보다 더 많은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액자의 재질은 손수 손으로 만든 듯 정확한 규격으로 재어지지 않고 비뚤어져 있었다. 사포질을 소홀히 여긴 듯 면 역시 거칠었다.

그 액자를 손수 만든듯한, 사진 속의 남자는 생각했던 것 보다 가브리엘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인상은 아니었다. 레게 머리는 아닌, 단지 지저분하게 기른 곱슬머리를 붉은 줄로 동여맨 남자의 인상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사진 속의 그는 잘생기긴 했지만, 결코 곱상하지 않았다. 여러 인종의 피가 섞인듯했다. 흑인 고유의 피부는 아니지만 흑인에 가까운 피부 결, 마른 듯하면서도 굴곡 있는 근육의 짜임새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허리에도 오지 않는 어린 아이들과 마주앉아 발음 교정을 하고 저 커다란 손으로 어린아이들이나 쥐는 연필로 A, B, C, D 알파벳을 가르친다니.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눈…신기하지?”

멍하니 사진 속의 남자를 바라보는 나를 뒤돌아본 칼릭스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저 남자의 전체적인 외형을 볼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눈동자의 색이 파란 색이었다. 단지 그를 흑인만으로 단정 짓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자신은 흑인이 아닌 좀 더 총체적인 인류의 집합이라 말하는 듯한 바다와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





부자연스러운 언어들. 스타가토 같은 경계가 느껴지는 영어. 아마도 아이들의 부모들 중 태반은 불법 체류자일 것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어린 아이의 옹알이를 해석하는 것만큼이나 영어를 듣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그것은 그대로 아이들에게로 전해졌을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가난만큼이나 끈질기고 질긴 언어의 벽을 물려받는다. 그 벽을 넘기 위해서 아이들은 원어민 가족의 아이들과 달리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붉은 색, 주황색, 노란색, 갈색이 섞인 고대 문양을 떠올리게 하는 기묘한 무늬의 시트가 깔린 침대, 작은 원탁의 테이블, 너저분한 옷가지가 널린 쇼파. 아이들은 앉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앉아 노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사인펜, 연필, 색연필 등 적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하얀 노트에 글을 적었다. 정확히 말해 노인의, 세월이 녹아있는 언어들을.

눈썹마저도 새하얀 백인과 그 백인의 말을 듣고 있는 아이들의 갈색, 옅은 갈색, 노란색 피부의 대립을 보면서 흑과 백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나는 뭔가 종교적인 분위기마저 풍기는 분위기에 문가에 기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런 나와 반대로 칼릭스는 아이들이 받아 적는 노인의 영어를 킥킥거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표정 없이 집안을 걷는다……라뇨. 동화책을 읽어주지는 못할망정, 폭풍의 언덕은 애들 교재로는 영 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야? 얼마나 재미있는데.”

“애들이 이해를 못하잖아요.”

“애들 읽어줄 동화책이 있어야지.”

힐끗 책장을 가리키는 노인의 시선을 따라 책장을 보니 유아용 책들은 거의 없었다. 사진의 이해, 인종의 편견, 자아의 굴레와 같은 듣기만 해도 어려울 것 같은 책들이 책장 안에 빼곡히 정렬되어 있었다. 노인이 저 책들 사이에서 폭풍의 언덕을 골라낸 것이 탁월한 선택일 정도로.

“집에서 적당한 책 있으면 좀 가져와봐. 가브리엘이 요즘 얼마나 형편이 어려운데.”

“집에서 나와 혼자 사는데 책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가브리엘은 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그래도 가져올 수 있으면 가져와봐.”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칼릭스는 어색하게 서 있기만 하던 내 손을 잡아 노인이 앉아있던 소파 근처로 잡아당겼다. 노인과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마주하며 든 생각은 잔인하게도 지극히 속물적인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토록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나를 떼어놓으려 노력했었지, 부자연스러운 언어, 하얗지 않은 피부,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

“조이라고 했나?”

소파 위에 앉아 있던 그녀는 나를 보기 위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치켜 올려진, 고집으로 뭉쳐진 것 같은 부드럽지만 강해 보이는 턱에는 지나간 세월을 상징하듯 늘어진 살이 붙어있었다.

“네. 조이 장이라고 합니다.”

조수아..라고 했던 그녀는 이런 지저분한 방 안의 분위기는 견디지 못할 종류의 사람처럼 보였다. 늘 깔끔하게 정돈된,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와 먼지 하나 없는 고급 가죽 소파, 고급 원목의 테이블과 같은 고급 가구에 어울릴 법한 노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런 지저분한 장소에, 백인이 아닌 아이와 혼재한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너도 책 있으면 가져와도 괜찮단다.”

“찾아볼게요.”

“고맙구나, 근데 저 버릇없는 녀석이랑 친구라고?”

“음… 버릇이 없는 건 모르겠지만, 일단은 친구에요.”

“그래, 어디서 왔니?”

그녀의 돋보기안경 너머로 보인 연한 갈색 눈은 인자했다. 하지만 그런 인자한 얼굴로 묻는 질문은 내가 가장 듣고 싶어하지 않는 질문이다. 마치 내가 미국인임을 부정하는듯한, 근본으로부터 차별당하는 느낌에 몸서리치는 질문. 하지만 노인은 차별로 점철된 의도의 질문을 하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이요. 정확하게는 남한.”

“오, 한국? 멀리서도 왔구나. 태어난 건 미국에서였겠지?”

“네. 부모님 때부터 미국에서 살게 됐죠.”

“그래… 축복받은 아이구나.”

마치 너는 앞으로 무한한 행복에 둘러싸인 인생을 살 것이라고 말하는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 축복받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일방적인 믿음에는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눈에는 저 까만 피부의 어린이들의 부모가 미국에 왔기 때문에 행복해 보이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네게 능력이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거야.”

“…….”

“그러니까, 한마디로 아메리칸 드림이지.”

그녀가 새하얀, 꾸준한 관리와 치과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서 여태 유지되고 있는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때문에 나는 조금은 비위가 상했고. 조수아의 뒤에 서 있던 칼릭스가 아래 입술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눈 앞의 노인이 1950년대 절정을 누리던 자본주의의 향수에 빠져있는 것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그런데 여기 사세요?”

저 백발의 노인은 이 슬럼가의 잡초 같은 사람들과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조금은 괴짜이고 편견 덩어리인 부유한, 여행이나 즐길법한 분위기의 노인이 슬럼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니. 신문기사의 미담으로나 나올법한 얘깃거리지만, 일단은 표면상으로의 얘길 것이다. 아마도 저 노인은 자신의 자비로움에 대해서 감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왜 이렇게 비뚤어진 방향의 생각만하게 될까? 고민하면서 계속 궁금했던 것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아니, 메릴랜드에 사는데… 가브리엘이 오늘만 좀 봐달라고 해서 좀 위험하지만 오게 됐지. 너희들 겁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이 동네에 왔구나.”

“올 때 별로 무서운 건 없었는데요?”

“올 땐 낮이었으니까 좀 괜찮았겠지. 갈 때는 밤이니까… 위험하단다. 이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내 차를 타고 가렴. 데려다 주마.”

표적이 될 만큼 돈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모는 차를 타는 게 위험한지,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는 게 위험한지 판단이 서질 않았지만 칼릭스는 수긍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것보다 자전거를 두고 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티비 틀어줄게, 보고 있어라.”

읽지 않고 무릎에 올려놓기만 하던 책을 TV 위에 올려놓은 노인은 리모컨으로 어린이 채널을 틀었다.아이들은 아무런 말없이 옹기종기 TV 앞에 모여 브라운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별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런 일상이 아이들에겐 흔한 것인 듯 했다.

“저녁 해줄게. 콘플레이크 먹을래 아니면 빵이랑 스크램블 먹을래? 샐러드는 만들어 놓은 게 있지만, 드레싱 맛은 좀 별로야. 요즘 혈당이 높아져서…”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려는 듯 부엌으로 들어간 조수아는 냉장고에 봉지 채로 넣어뒀던 계란이 들은 종이 박스와 과일, 우유와 콘플레이크를 꺼냈다.

“콘플레이크 먹을게요. 쵸코맛 빠진 걸로.”

“저두요.”

익숙한 듯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 콘푸레이크를 부은 칼릭스는 수푼을 앞에 놓아주고는 우유를 부었다. 하얗게 잠겨간다 생각될 즘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언어 치료는 이렇게 해? 좀 심하게 어설픈데?”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의심쩍은 이 어설픈 교육방법도 그렇고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도 거슬렸다.

“설마… 조수아식 교육법은 좀 어설픈 구석이 많아. 그리고 여기에 있는 애들은 듣는 건 별 문제없어.

조수아는 그냥 받아쓰기를 한 거지. 발음 교정은 가브리엘이 해. 그 쪽으로 지식이 해박하거든.”

“그 가브리엘이란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겠지만, 좀 미심쩍은데?”

“사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시설로 애들을 보낼 수가 없어. 여기 있는 애들 대부분의 부모가 불법 체류자거든.

솔직히 가브리엘이 애들을 돌보는 이유 중 하나가 집안에서 방치되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돌봐주는 것도 있거든.”

문이 달칵, 열리고 방안에서 조수아와 아이들이 나왔다. 오늘 처음 본 나란 존재에 대한 경계 어린 눈동자들과 눈을 마주쳤다.

“린 친구야?”

남미계 여자아이였다. 총명해 보이는 귀여운 눈망울을 가진,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한.

“응. 내 친구야. 조이라고 해. 잘생긴 오빠지?”

“안녕. 이름이 뭐야?”

“제이미.”

스푼을 든 채로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아이를 향해 어설프게 손을 흔들어 보았다.

“예쁜 이름이로구나. 제이미.”

식탁에 앉아있는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똑똑해 보이는 제이미는 미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같은 이유로 뿌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이는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옆에 앉아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말했다.

“쟤는 가비고, 여기 있는 애는 코라손, 쥬디, 룽윈이야.”

“전부다 예쁘고 잘생겼네.”

“제이미, 오빠 귀찮게 하지 말고 기도해야지.”

엄한 목소리로 꾸짖는 조수아의 목소리에 작은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 제이미는 그 짧은 기도를 마치자마자 말했다.

“조이도 중국인이야?”

“아니. 부모님이 한국인이셔서…… 코리안-아메리칸이야.”

“한국말도 잘해?”

“그럼, 영어만큼은 못하지만….”

그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어려운 받침과 띄어쓰기, 복잡한 언어 예절의 체계는 아직도 완벽하게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제이미는 내 말에 상큼할 정도로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이미는 어디서 왔는데?”

“멕시코. 가브리엘은 처음 만났을 때 나랑 말 하자마자 알아 맞혔어.”

“음… 나도 스페인어 발음이랑 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스페인어?”

“멕시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야.”

아직 어려서 멕시코의 말이 스페인어와 비슷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혹은 스페인이란 나라 자체를 모르거나. 아이의 울렁거리는, 부드러운 영어발음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태양의 느낌을 받았다면 너무 비약된 느낌일까.

“제이미. 콘이 다 불었잖아. 조용히 좀 하고 먹으렴.”

“네, 조수아 할머니.”

샐러드를 푸던 커다란 스푼으로 제이미의 그릇을 치며 조수아는 말했다. 그릇에 남겨진 드레싱 자국에 어린아이다운 투정을 부릴 만한데도, 제이미는 이미 조수아의 엄격한 태도는 익숙하다는 듯 조용히 우유에 말아진 콘플레이크를 퍼먹기만 했다.

“근데, 칼릭스.”

“응?”

“네가 왜 린이야?”

칼릭스는 이미 다 비워져 가는 그릇에 콘플레이크를 다시 채워 넣으며 말했다.

“아… 애들이 잘 발음을 못해서, 다올린에서 ‘린’만 딴 거야.”

“나도 린이라 불러도 돼?”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칼릭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간다. 아니, 의외의 말에 당황하고 있다.

“린이라니… 아주 예쁜 이름이야. 그 커다란 골격에는 좀 안 맞지만. 쿠쿡”

비식거리며 웃는 내 말에 얼굴을 붉히는 칼릭스의 모습이 재미있다. 철저하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어떤 상황에도 당황할 줄 모를 것 같은 난공불락의 녀석이 가벼운 농에 무너지는 모습이 의외면서도 즐거웠다.

아이들은 칼릭스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의아한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스푼으로 음식을 뜨는 것도 잊은 채 쿡쿡거리며 웃는 나와 당황한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다. 나는 그저 여운이라고는 남지 않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즐거워할 뿐이었다.





*





조수아의 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간다는 것은 또 다시 자전거를 가지러 그 곳 가브리엘씨가 운영한다는 센터에 들려야 함을 의미했다. 어렸을 때 아직 아버지가 미국에서 자리를 잡기 이전에 주변을 둘러쌌던 환경보다 더욱 더 열악한 그곳의 환경이 꺼림칙하게 느껴져 기숙사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 불편함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칼릭스는 왜 그런 곳에 나를 데려갔을까.

의도로 점철된 행동 같지는 않았다. 단지, 봉사활동 때문에 나를 데려갔는지도 모른다. 봉사활동이란 말에 걸맞게 우리는 그곳에서 내내 쓸고 닦았으며, 집 뒤에 쌓여있던 냄새나는 오물들을 처리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동양인이 아니었으면 그 곳이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곳에 있던 아이들이 거울처럼, 내 존재에 대해서 더욱 극명하게 말해주는 기분이었다. 그 애들과 같은 처지라고, 단지 시민권자의 자녀와 불법 체류자의 자녀라는 종이 한 장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미국인이 아닌 코리안-미국인.

난 왜 이리도 꼬였을까.

멍하니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들어와.”

별로 크지 않은 소리로 말 했는데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역시나, 버크셔 고등학교의 기숙사 방음 시설은 문제가 있다.

간편한 사복으로 갈아입은 블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갑작스럽게 호흡이 막히는 기분에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지만 눈치채지 못할 미묘한 변화였는지 블리스는 별 내색이 없었다.

“오늘 어디 갔었어?”

강압적인 말투는 아니었지만, 오늘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는 상황 보고를 명령하는 말처럼 들렸다. 문을 닫고는 느슨하게 벽에 기대 침대에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눈이 살짝 충혈되어 있다. 여태 공부를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눈이 피곤해서 그런지 이유를 알 순 없지만.

“봉사활동 갔었어.”

그저, 단순히 봉사활동일 뿐이었다. 너 아닌 새로운 친구와 함께한.

“ADH 센터?”

“아니, 가브리엘씨가 운영하는 곳인……”

“가브리엘?”

“거창하게 말하자면 언어 치료사.”

“언제부터 그런 델 갔었어? 봉사활동 갈 때는 꼭 나랑 같이 갔잖아.”

웃으며 말하지만 별로 즐거워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블리스는 말했다.

“칼릭스랑도 섹스했어?”

사고가 멈춘다.

“뭐?”

“됐어. 농담이야. 너한테 냄새나.”

“지금 뭐라고 했어?”

“농담이야.”

“젠장,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농담이라니깐.”

“블리스!”

침대에서 나도 모르는 새 일어나 벽에 느슨하게 기대어 서 있던 녀석의 멱살을 잡아 코앞으로 잡아당겼다. 녀석은 분노한 내 얼굴과는 다르게 희미하게 웃고 있다.

“하하, 농담이라니깐. 화내지마.”

“…미친놈.”

“요즘 칼릭스랑 잘 놀더라. 그 자식 재수없어. 어딜 데려갔기에 이렇게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거지?”

멱살 잡힌 그대로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블리스는 코로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킁킁거리며, 마치 후각이 발달 된 동물처럼 원시적인 행동을 취하며 한참을 고개를 묻던 블리스는 조용히, 나직하게 속삭였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 희미한 먼지 냄새, 곰팡이 냄새.”

“너 개였냐?”

“재수 없는 자식. 널 어디로 데려간 거야?”

“덥지도 않아? 좀 떨어져.”

멱살을 잡던 손으로 녀석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하자 블리스가 손으로 허리를 둘러 안았다.

“더워.”

“좀 있으면 여름이잖아. 이쯤에는 원래 더워.”

“너 때문에 더 더워. 냄새난다며.”

“잠시만 이러고 있자. 잠시만.”

내 말에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쉰 블리스는 킥 하고 웃으며 작게 구역질하는 소리를 냈다. 느슨하게 풀어진 긴장. 녀석에게 어울리지 않는 고압적인 침울함의 원인이 나일까봐,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





*





집 앞 정원의 푸른 잔디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하늘색 유광의 굵은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로 잔디밭은 물론 어머니가 정성스레 심어 놓았던 유황색의 해바라기, 붉은 색의 담을 타고 자라던 넝쿨장미에도 물을 주었다.

이슬비처럼 뿜어지는 물줄기가 태양에 반사되어 무지갯빛을 내는 환상적인 모습을 본다. 언제나 태양 가까이에 존재할 것 같던 무지개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어머니가 그 각 없는, 형체 없이 흐물거리는 영어를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했던 것과 같았다. 영어는 어머니에게 닿을 수 없는 무지개와 같았지만, 이것 봐요 어머니. 그것은 단지 공기중의 물방울이 태양에 의해 굴절과 반사 운동을 일으킨 것에 불과해요. 결국,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금요일의 늦은 오후, 집 앞의 정원에서 물을 주다 보면 인도 앞의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들의 행렬을 보게 된다.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안전 할 것 같은 같은 철갑의 전차, 아우디와 BMW, 페라리 그리고 메르세데스 벤츠를 본다. 집 앞의 작은 도로에서 이런 고급 차들을 볼 확률이 대도시의 10차선 도로에 나가서 볼 수 있는 확률보다 높다.

나의 아버지가 피곤으로 뭉친 어깨로 이루어낸 것들. 아버지가 LA에서 떠나 뉴 햄프셔주로 이사 왔을 때, 아버지가 반드시 이루어내리라고 다짐했던 것들이다. 워싱턴에 와서야 완성된 꿈들. 아름다운 이층집과 정원. 고급 세단을 끌고 다니며 자식들을 사립 학교에 보내는 것. 흑인과 유태인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사는 그것이 평생의 아버지의 꿈이었다.

그런 것이 한 인간의 평생의 꿈이 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야망, 혹은 즐거움이 그게 다인 것 일까. 이민 1세대의 가슴 아픈 꿈을 들여다보는 기분에 아버지의 뒷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 멀리서 속도를 내며 달려오던 은색의 캐디가 집 앞으로 올수록 속도를 줄이는 것이 보였다. 은색의 캐디에 문신처럼 아라베스크 문양의 검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저 요란한 디자인의 차는 다올린의 차다. 5시 30분쯤 도착할 거라고 전화를 했었는데 시계를 보니 20분, 10분 더 일찍 도착했다.

집 앞의 공터에 주차를 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뱀처럼 부드럽게 주차를 한 칼릭스가 차 문을 열어 정원의 나를 발견하면서 반갑게 인사한다.

“와, 두 시간 만에 보니까 또 반가운데?”

“흥. 웃기네.”

“물주고 있었어?”

“보다시피.”

“물은 오후보다 아침에 주는 게 좋은데.”

차가 오는지 좌우를 살피며 품 안 가득 무언가를 안고 녀석이 걸어온다. 가까이서 보니 칼릭스는 품 안 가득 책과 복사된 종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 주 후에 있을 기말고사를 대비하기 위해 공부를 할 목적으로 가져왔겠지만, 오늘과 토요일, 일요일을 합친다고 해도 저 많은 프린트 물을 공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설마 이걸 다 공부할 생각은 아니지?”

“요약해 놓은 게 없어서… 일단 다 가져왔어.”

멍하니 녀석이 가져온 엄청난 양의 인쇄물을 바라보다 내가 계속해서 물을 틀어놓은 것을 깨닫고는 호스를 잠갔다. 잔디가 물로 흥건하게 젖어있다. 어지럽게 널려진 호스를 정리하고는 문을 열어 녀석을 집 안으로 들였다. 녀석이 무겁게 들고 있는 집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내밀자 됐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신발 벗어야 돼. 우리 집에 오면.”

“신발?”

“우리 집에선 신발 못 신어. 그러니까 들고 있는 거 주고 신발이나 벗으라고.”

다시 손을 내밀자 그 무게에 미간 사이를 좁히며 인쇄된 종이 뭉텅이를 넘겼다. 아닌 게 아니라 받자마자 허리가 굽혀질 정도로 무거웠다.

“무거워”

투덜거리면서 현관 앞에 놓여져 있던 슬리퍼를 턱 끝으로 가리키자 녀석이 슬리퍼를 신고 들고 있던 짐을 반으로 덜어 들었다.

“신발이 이상해. 뾰족해.”

“지압되는 신발이라 그래. 일단 내 방으로 옮겨놓자.”

고개를 숙여 신발의 모양새를 살피는 녀석을 끌고 이층 방으로 데려가자 뾰족하게 마찰되는 슬리퍼가 아픈지 살짝 얼굴을 찌푸린다. 평범한 슬리퍼를 준비할 것을, 녀석의 건강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불편하기 그지없는 슬리퍼를 준비한 게 후회가 되는 한편 우스웠다. 칼릭스가 유리 위를 걷듯 소리 죽여 신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녀석이 나의 집에 오게 된 건 목요일, 어젯밤 녀석의 갑작스런 제안 때문이었다. 그 때의 나는 블리스 녀석이 여느 때와 같이 이번 주 자신의 집에서 섹스를 하자고 제안할 것만 같아서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 부탁을 거절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거절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녀석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뭐란 말인가. 블리스는 예전에도 나를 좋아하는 상태에서 안았으며 이제는 블리스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안길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언제라도 섹스하자고 내뱉을 것만 같던 블리스는 성적인 의미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바닷물에서 소금기가 제거된 것 같은 블리스와 나 사이에 중요하게 이어져 있던 어떠한 것이 끊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녀석이 다시 섹스를 하자고 하면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순간에 나는 어떤 감정으로 녀석의 말에 대응할 것 인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칼릭스가 이번 주말에 같이 공부를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블리스와 함께 일지도 모르는 주말에 대한 모든 걱정에 도피처를 제공해 왔고 나는 기꺼이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너네 집 좀 더 동양적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아니네?”

등 뒤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는 칼릭스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일반 미국인 집과 다를 바가 없어.”

“동양식 고 가구라도 생각한 모양이지? 아니면 일본식 다다미라도?”

“둘 다 생각했었어.”

“아니라서 실망했겠네.”

“뭐… 별로.”

문을 열어 휑하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한 내 방에 들어와 책상 위에 프린트 물을 내려 놓았다. 연한 하늘색의 벽지에 파란 색의 옅은 파스텔톤의 가구. 이런 가구에서 동양의 느낌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동양적인 것은 뭐든 좋아하던 블리스가 내 방을 보고 실망하던 것이 생각났다.

“나가서 우리 어머니한테 인사하자. 집 안은 이래도, 사고방식은 꽤 동양적이거든.”

부엌 안에서 어머니께서는 벌써부터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셨다. 몇 달 전에 아버지의 회사 동료에게서 받았던 전기 압력 밥솥에 넣을 쌀을 불리고 있었다. 각종 야채들, 한국식과 미국 음식의 재료가 혼재된 식탁. 부지런하게 음식을 만들던 그녀의 작은 어깨에 손을 얹으니 부드러운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물 다 줬어? 한국어로 그녀가 말한다. 네. 근데, 친구 왔어요. 아까 말했던 칼릭스 다올린이라고. 그녀의 말에 내가 영어로 대답한다.

뒤 돌아보면서 칼릭스의 인사를 받는 어머니의 긴장으로 뻣뻣해진 어깨가 안쓰러울 정도다.

늘상 이런 식이다. 그나마 좀 편하게 받아들이는 게 능청맞은 블리스 아이언사이드이고. 어머니는 내 백인 친구들을 좋아하지만, 그 좋아하는 마음을 잘 표현하질 못했다. 아들에게, 어머니의 뭔가에 걸린듯한 발음이 미안해서일까. 뭐가 그렇게 미안한 게 많은 것일까. 나의 어머니는.

“조이와 같은 반이니?”

어색하게 발음하지 않으려 애쓰는 어머니의 굳어있는 혀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괜찮은데, 더 이상은 어머니의 발음을 창피해하지 않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애를 쓴다.

“네, 조이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어요. 듣던 대로 굉장한 미인이시네요.”

내가 언제 너에게 내 가족 이야기를 했던가? 능청맞게 말하는 녀석을 멍하니 쳐다보다, 녀석이 어머니의 긴장을 풀기 위해 말을 한 것이란 걸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그럼. 마미가 좀 아름다우셔.”

“하하… 애도 참. 오늘 자고 간다고?”

“네. 같이 시험 공부 하려고요. 기말고사 대비 겸.”

“어머 기특해라, 과일 깎아 줄게. 올라가서 놀고 있으렴”

옥같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답지만 부자연스러운 음성으로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 칼릭스 다올린의 눈에 나의 어머니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그녀를 따라 웃으며 다시 내 방으로 녀석을 이끌었다.





“여기선 순서에 상관없이 반복 적분하면 돼.”

“그러니까 여기선 부분 적분부터 해야겠네?”

“응. -(π/6)cos(y + π/6) + sin(y+π/6) – sin y이니까……”

“이제 ∫{-(π/6)cos(y + π/6) + sin(y+π/6) – sin y}dy이겠고,”

대학 과정에서나 나오는 미적분 문제를 고등학교 때에 미리 완료해 놓게 된다면, 그만큼 이점이 많다. 대학에 갈 때 많은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대학에 가서도 빠른 졸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문제가 어렵고 많은 반복을 해야 풀 수 있는 문제가 많다. 그럼에도 칼릭스는 확실히 이해력이 빠른 편이다. 한번 풀어주면 그 유형의 문제에 대해서 거의 막힘 없이 풀어낸다. 그 놀라울 정도의 이해력에 감탄을 할 정도로. 이런 녀석이 왜 벅이 내주는 수학문제를 풀지 못하고 나에게 묻는지 솔직히 의아하기만 했다. 결코 나는 잘 가르쳐주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머리 속에 있는, 우주처럼 광대한 공간에서 핵심처럼 뭉쳐있는 행성과 별들, 즉 요즘들을 잘 끄집어내는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다올린은 내 말을 듣기만 하면 이해를 하는 것이다.

“잠깐, 우리 너무 심화된 문제 푸는 거 아냐?”

“네가 가르쳐 주니까 안 어려워”

내 방의 책상은 두 개였기에 하나는 집에 와서 공부를 하는 용도로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내가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 주기 위해 내 방에서 같이 공부를 하는 용도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서로에게 굉장히 충실한 부자지간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두 개가 이어져있는 책상의 왼편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녀석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나는 말했다.

“야, 솔직히 그건 말도 안돼. 내가 가르쳐 주는 수학 문제를 이해하는 건 이 세상에 딱 둘 뿐인데 그 중 하나가 너야.”

“그 하나는 누군데.”

“내 동생.”

내 동생 지은은 아예 모르는 상태에서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의심쩍은 부분이 있을 때에야 물어왔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엉터리로 가르쳐 줘도 아무 불만 없이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곤 했었다.

“동생 있었어?”

“내가 말 안 했었나? 세 살 아래 동생인데 갠 나한테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수학을 잘 해.”

“너랑 닮았어?”

“별로. 갠 쌍꺼풀이 있거든.”

양 손 검지로 내 찢어진 눈을 가리키며 말하자 녀석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예쁘겠네.”

“응. 진짜 예뻐. ……근데 그 말은 나랑 안 닮아서 예쁘다는 말이냐?”

“……누가 너 못생겼대?”

“그렇게 들려.”

사소한걸 가지고 신경질 내는 군. 말이 사람을 판단하게 한다 했는데, 너무 속 좁은 말을 내뱉은 건 아닐까 싶었다. 수상쩍게 마른기침을 내 뱉으며 목을 가다듬은 칼릭스는 미간 사이를 좁힌 내 얼굴을 양손의 검지를 사용해 피면서 말했다.

“너도 예뻐.”

“……”

“진짜야.”

“……린, 그럴 땐 잘생겼다고 하는 거야.”

멋대로 볼을 잡아 늘리는 녀석의 손을 떼어내면서 일부러 굵은 목소리로 말하자 녀석이 킥킥거리면서 웃는다.

“잘생긴 네가 가르쳐 주는 거 진짜 이해 잘 돼.”

“별로, 내 말에 너무 잘 이해하는 네가 좀 미심쩍어.”

“별걸 다 미심쩍네. 그리고 너.”

샤프펜슬의 지우개에 턱을 고정시킨 채 옆에 앉은 나를 힐끔 쳐다보던 녀석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면서 말했다.

“왜 그 때부터 계속 린이라고 불러.”

“실용적이고 무엇보다 예쁘잖아.”

“뭐? 예뻐?”

“예쁜 여자애 이름 같잖아.”

내 말에 다올린은 코웃음을 쳤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녀석의 표정이 이 사내다운 내가? 그런 예쁘다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나 가지고 있겠는가…라는 표정이다.

“차라리 실용적이라는 핑계를 대.”

중지와 검지를 사용해 내 코를 잡아서 흔들면서 녀석은 말했다.

“린이라는 이름은, 전에도 말했듯이 가브리엘씨가 돌보는 아이들이 내 이름을 발음하지 못해 사용하는 이름일 뿐이야.”

“알아.”

“그 애들은 내 이름을 멋대로 지어 불러.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좀 웃기거든.

생각해봐, 칼릭스를 카리스 혹은 리스, 다올린을 다어린, 달링이라고 부르는데 너 같으면 안 그랬겠어?”

“사실 나도 네 이름 발음하는 게 어려워.”

장난스럽게 녀석의 말을 받아 치자, 거짓말 하지 말라는 듯 얼굴을 찌푸려 보인다. 녀석이 나에게서 린이라는 말을 듣는 게 거북하다는 강한 거부의 표현을 하지 않아, 내 멋대로 녀석을 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모두가 아는 칼릭스 다올린이 아닌, 녀석과 내가 공유하는 뭔가가 생긴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서로의 좀 더 내밀한 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 진짜 친구.

“네가 네 이름 말하는 게 어렵다는 걸 물론 믿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갑자기 이런 게 생각났어.”

블리스와 칼릭스와 같은, 영어권 국가에 태어나 세계 어느 곳을 가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은 모르는 기분. 모르는 사실. 아니, 안다 하더라도 실감하지 못하는 사실이 생각났다.

“네가 가브리엘씨가 운영하는 센터에서 이 미국에 불법으로 이민 온 아이들의 부모를 통해 느꼈을 기분과 관계가 있어.”

이러니 친구가 집에 찾아오면 공부는 어느새 뒷전이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손에 들려있던 펜슬을 책상에 내려 놓았다. 휘어진 활처럼 굽혀진 허리를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기대면서 말을 하자 녀석도 샤프펜슬을 내려놓으며 좀 전보다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말을 정정할게. 꼭 네가 느꼈을 거란 건 아니고. 대부분의 미국인이 느끼는 건데.”

“……”

“외국인이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버벅거릴 때 있잖아.”

“그래.”

”영어라는 건 말야. 때론 외국인에게 그 외국인에게 있는 내밀한 감정 혹은 지금 느끼고 있는 단순히 표현할 수도 있는 감정들을 토로하지 못하게 하는 벽이 되기도 해.”

“그럴 수도 있겠지.”

내 말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놓아두었던 펜슬을 다시 집어 하얀 연습장 위에 무의식적으로 작은 점들을 찍어대면서.

“그러니까 이민을 온 사람들에게는 제 2의 언어란 말이지?”

“그래. 그런데… 그 모습이 멍청하게 느껴지지. 이 미국에 조상의 뼈를 묻어왔던 사람들은.”

“그건 그래. 그런데 너희 한국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걸? 미국인이 한국말을 한다고 버벅거릴 때. 바보같이 느껴져. 그런 희열 같은 건 누구나 느껴.”

녀석이 말에 거센 악센트를 넣으면서 말했다. 태어난 이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같은 언어에 대한 우월의식이 야만적이라고 비판하는 내 말에 반박하듯 녀석이 말했다.

“그래… 내가 말을 잘못했네. 그런 건 누구나 다 느끼는 기분인데.”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길 꺼내는 건데?”

칼릭스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여태 연습장을 낙서로 채우던 펜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진지하게 반짝거리는 청록색의 맑은 눈동자를 덮어버릴 듯 확장된 검은색의 동공을 마주하면서 나는 이 얘기를 통해서 부탁하고 싶었던 사실 하나를 털어놓기로 했다.

“너도 느끼다시피 어머니의 발음이 좀… 네가 듣기에는 우스울 거야.”

“어색하긴 하지만 웃기진 않은데?”

“다행이네. 한 때 난 엄마의 혀를 포르말린 속에서 퉁퉁 불어있던 시체의 혓바닥과 바꿔 치기 한 거라고 생각했었어.”

끔찍한 상상이지. 덧붙이는 내 말에 칼릭스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염병할 자식이었구나.”

전혀 농담 같지 않은 진지한 말투로 말하는 녀석의 말에 킥,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른 애들 엄마는 안 그런데 왜 우리 엄마만 유독 이럴까. 치기 어린 생각이지. 내가 언어 치료사에게 이년 가까이 붙들려 살았던 과거가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거든. 모든 책임을 엄마한테 돌리면서 많이 괴롭혔지.”

“아무튼 너 나쁜 새끼네.”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녀석이 말했다.

“영어로만 말할 때… 우리 엄마는 바보 같았어. 나이가 좀 더 들고나서야 나의 어머니에게 우주처럼 광대한 감수성과 지식이 있다는 걸 깨달았지. 물론 어머니의 모국어를 사용할 때에만 표현할 수 있었고 난 그게 못 마땅했거든. 왜 미국에 온지 이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이 때 까지도 저런 완벽하지 못한 언어를 구사할까.”

“너보다는 사회에서 부딪히는 미국인이 적어서 그런 게 아닐까.”

이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녀석에게 부러, 나의 어머니의 우스운 영어를 듣고 속으로 비웃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제멋대로이고, 제정신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물없는 블리스 녀석에겐 워낙 어머니께서 마음을 놓고 편하게 대했기에 이런 종류의 얘길 꺼낸 적이 없었지만, 뭔가 치밀하고 철저할 것 같은 칼릭스에게는 이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선입견이 없는 녀석이었기에 나의 어머니를 철저하게 자로 재듯이 평가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괜히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지금 아래에서 채소의 껍질을 까고, 육수를 우려내고, 밥을 짓는 나의 어머니는 아들이 이런 일로 인해 조바심을 내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





공부를 하고, 농담을 하고, 어머니께서 가지고 올라오신 과일을 먹다가 다시 또 수다를 떤다. 녀석이 노란색 고무줄로 묶은 짙은 밤색의 머리에서 삐죽 흘러나온 머리카락이 녀석의 하얀 피부 위를 어지럽게 만든다. 더워 보이는 뒷목을 건들이자 끈적이면서 피부가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열심히 선생이 나눠준 프린트를 살피던 녀석이 갑작스런 자극에 어깨를 움츠린다. 송글 맺혀진 땀이 손 끝에 묻은 것 같아 면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왜 모르는 게 있어?”

사실, 프린트를 보고 있진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너무도 더워 보이는 녀석에게 나는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던 걸 말했다.

“아니, 에어컨 틀어줘? 더워 보인다?”

“진작 좀 틀어주지.”

라면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녀석은 정말로 더워 보였다. 오른손으로 책상 옆의 리모컨을 집어 에어컨을 약하게 가동시키기 시작하자 얼마 안 있어 방 안에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창문은 닫혀 있고 등 뒤에는 침대가 있다. 눈앞의 상대가 블리스 아이언사이드였다면 공부 아닌 다른 것을 상상했겠지만, 이 건전한 친구가 눈 앞에 있는 이상, 그러한 종류의 것은 상상해서도 안 되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얗게 표백된 것 같은 피부 결에 가닥가닥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고 싶은 충동은 새하얗게 청소된 바닥에 떨어진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을 집어 올리는 것 같은 충동과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겠지만, 직접 실천에 옮긴다면 그 두 가지는 다른 의미로 해석될지도 몰랐다.

칼릭스가 블리스와 내가 섹스를 하는, 이성간의 섹스가 아닌 동성간의 섹스를 하는 사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는 사소한 행위 하나를 어떻게 해석 했을까. 칼릭스에게 행하는 나의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 녀석에게 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사소한 행동 하나가 녀석에겐 경멸스런 행동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녀석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6시 17분으로 칼같이 지키곤 하는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40분 가까이나 남아있었다.

시계에서 눈을 떼 여전히 책상 위에 놓여진 프린트에서 눈을 떼지 않는 칼릭스를 힐끔 보았다. 아무런 미동 없이 공부에 빠진 녀석 때문에 들어오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녀석의 공부를 방해하는 기분이 들어 조심스레 일어나 닫힌 문고리를 비틀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문 밖에 있는 것을 보았다.

좁게 열려진 문틈으로 하늘색의 그라운드 티를 걸친 소년이 서 있었다. 마치 퇴역한 장군처럼 조금은 느슨하지만, 결코 긴장을 풀지 않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블리스였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흥분된 표정으로,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녀석의 표정이 한없이 거만해 보여서 하마터면 열었던 문을 다시 닫을 뻔했다.

짜증으로 날카로워진 높은 콧날의 각도가 틀어진다. 녀석이 방안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모습이 걱정스럽다. 예상했던 대로 책상 위에서 공부하고 있던 칼릭스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나를 쳐다본다.

마피아 대부의 정부가 그의 젊은 수하와 바람을 피다 그 현장을 마피아 대부에게 들킨 기분이다. 맙소사.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기분이 들어야 하지?

매섭게 노려보는 눈길과 그 눈빛에서 떠올린 상상에 어이없어서 녀석에게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녀석이 문 틈으로 나를 밀어내며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몰라 조바심에 문을 닫자마자 녀석이 칼릭스의 어깨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요즘 둘이 너무 잘 다니는 거 아냐?”

“뭐?”

“질투나 죽겠다고. 둘이 계집애들 마냥 붙어서 다니는 게.”

블리스는 정말로 화가 날 때, 그 넘쳐나는 감정들을 토로할 때 녀석은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상대방을 압도하곤 했다. 그 무례하기 그지없는 폭언을 내뱉으며, 상대방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파괴 시킬 것처럼 녀석은 얻는 것 없는 무모한 싸움에 불을 지폈었다.

지금 역시도 넘쳐나는 분노를 폭발시키듯 칼릭스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이사이로 거칠게 말을 내뱉은 블리스는 곧바로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 내 고백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맙소사. 칼릭스 앞에서 고백이라니! 이젠 남 앞에서 대놓고 커밍아웃이라도 할 생각인 거냐! 일그러진 내 얼굴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녀석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에 대한 반응이 고작 이거냐? 나랑 더 이상은 호모 짓도 못하겠다 이거지?”

“블리스……”

녀석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최대한 웃음을 지으려 애를 썼지만, 이 상황에서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질 않았다. 녀석은 계속 흥분에서 말을 지껄여댔다.

“개자식아. 니 똥구멍이나 핥으니까 내가 그렇게 우스워? 내 마음을 이렇게 짓밟아도 돼?!”

이젠 알아서 남에게 약점을 드러내 보이는 녀석의 말은 둘째 치고, 이 방에는 너와 나 단둘이 아니란 말이다. 얼어붙은 칼릭스의 시선이 부서지는 모래 탑처럼 이성을 잃어가는 블리스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차라리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뇌에 근육밖에 없는 머저리가 없는 세상으로 나를 보내달라고, 젠장할.

블리스의 흥분과는 반대로 방안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녀석의 말 뒤로 일순간에 찾아온 정적에 나는 현기증마저 일 것 같았다. 녀석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이렇게 뒤틀린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감정에 아무런 제제도 가하지 못하는 것 인가. 숨이 막히는 기분에 아직도 칼릭스의 멱살을 잡은 채 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블리스의 시선을 외면하며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버렸다.

“내가 우스워?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무시하냐고!”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무슨 말이라도 내뱉겠지만, 어떤 말을 내뱉어도 최선의 대답은 나오질 않겠지. 네가 계속 머저리같이 네 감정만을 강요하고 이렇게 날 수치스럽게 만든다면……

“야!”

나란 존재의 어떤 것이 저렇게 녀석을 흥분으로 몰아가는 걸까. 지긋하게 올라오는 짜증을 인내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지만, 상황을 어리석게 몰아가는 블리스 녀석을 생각하니 다시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조이!”

“하나도 안 웃겨.”

“…….”

“지금, 니가 아주 저질스런 코미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긴 해.”

그렇게 생각하고 허허… 웃고 싶어. 분통이 터질 것 같은 마음과는 반대로 아주 차분하게 말을 내뱉었다.

“넌, 왜 그래?”

“뭐?”

“날… 왜 이렇게…….”

수치스럽게 만들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드냐겠지만. 녀석을 미친 사람 보듯 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나는 마지막 말을 삼켰다. 칼릭스와 내가 함께 있었다는 그 이유하나 만으로 저토록 흥분을 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녀석은 뒷말을 기다리는지 이미 말을 속으로 삼킨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칼릭스의 멱살을 잡은 그대로이다. 칼릭스의 표정이 굳어있을 까봐 감히 쳐다볼 엄두가 안 났다.

“후우….…칼릭스.”

아직도 블리스에게 멱살을 잡혀있을 칼릭스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블리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체 작게 뇌까리듯 말했다.

“잠깐만 좀 나가줘……”

아직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이 미친 자식을 좀 정리해야 하니까.

“알았어.”

블리스의 멱살 잡은 손을 거칠게 뿌리쳐 내며 칼릭스는 말했다. 무미건조할 정도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의 주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내 앞으로 걸어 온 녀석은 고집스럽게 블리스만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나갈게.”

“…….”

“근데 너무 오래 얘기 하진 마라.”

무슨 표정인지…… 읽을 수가 없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자신이 낄 때를 알고 빠질 때를 아는 이 눈치 빠른 자식은 내 속은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이런 중요한 순간에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질 않는다. 우리 둘을 경멸한다던가, 아니면 블리스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나를 동정한다던가, 감정의 조각들, 사소한 불쾌함도 발견할 수 없는 얼굴로 녀석은 말했다.

“문 잠그지 말고.”

“그래.”

조용히 대꾸하는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 자식이 심한 짓이라도 하려고 하면 나 불러.”

이런 상황에서도 녀석은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놀라 녀석을 바라보는 나를 보던 칼릭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심한 짓이라니, 폭력을 말하는 거냐, 아니면 성적인 어떤 무엇을 말하는 거냐. 내 몸 하나는 내가 지킬 수 있는데, 블리스 앞의 나란 존재를 녀석은 어떻게 봐왔던 걸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생각이 아니다. 지금 눈 앞에서 못마땅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녀석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니까.

“블리스 아이언사이드….”

“……”

“아이언사이드.”

처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실 어떤 얘기를 해야 하는지, 녀석과 단 둘이 남는 것이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블리스란 이름 대신 녀석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두기 위해 녀석의 성까지 부르자 블리스의 표정이 전보다 더 굳어졌다.

“아이언사이드.”

“……”

“잠깐 여기 좀 앉아봐.”

침대 맡을 손바닥으로 쳤다. 그 놀라울 정도로 푹신한 감각에 순간적으로 위험한 상상이 들었지만 그걸 내색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저 머저리의 머리 속을 들여다 봐야 하는 시점에, 왜 하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지만.

냉혹할 정도로 차갑게 말하는 말투에 녀석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다.

“……블리스라고 불러. 네가 그딴 식으로 날 부르는 건 참을 수가 없어.”

벽에 기다란 장신을 기댄 체 거만하게 나를 내려다 보며 말한다. 설마 어르고 달래주길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녀석의 말대로 블리스라고 말하자 그제야 침대로 걸어온다.

침대에 앉은 녀석은 손발을 부산하게 움직여댔다. 평소 긴장이란 걸 모르고 살기에 잘 볼 수 없는 긴장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지금 내가 하려는 말 중 어떤 것이라도 녀석에겐 일종의 선언과도 들릴까. 단지 나를 좋아한다는 그 소름 돋는 이유 하나로?

칼릭스가 알아버렸다. 물론, 블리스와 내가 몸을 섞는 것을 알고 있는 와중에 블리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것은 바닷물에 소금 한줌을 뿌리는 것처럼 칼릭스에게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아니, 아니다. 단순히 몸을 섞는 것과 그 속에 감정이 추가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옆을 돌아보자 블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래 입술을 지그시 물고 있는 녀석은 흥분으로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숨을 쉬고 있었다. 내 친구, 내 친구인 너는 나를 지금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 거냐.

“하아…… 우리 둘 선에서 끝내면 안됐을까? 다른 사람 앞에서…… 너무 모욕적이었어.”

“미안해. 내가 말이 좀 심했어.”

녀석에서 사과를 받아내려 한말은 아니었는데, 녀석은 너무나도 손쉽게 사과를 했다. 그 사과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칼릭스 다올린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녀석은 좀 전의 일을 회상하듯 눈을 수 초간 감았다 느리게 떴다. 네 입에서 나온 저 더러운 말, 감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말. 기억이 난 듯 신음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다올린 그 자식이 떠벌리고 다닐까?”

“……”

“젠장,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너와 나 지구를 떠나야 할지도 몰라.”

“……”

“어머니는 또 어떻고. 칼릭스 자식 떠벌리고 다니면 죽여 버릴 거야.”

일부러 녀석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블리스 아이언사이드는 이기적인 자식이었다. 여기, 너의 심한 말에 상처받은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냐. 분노로 조금씩 열이 오르는 걸 참아내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처음부터 저 새끼가 맘에 안 들었어. 난.. 그 자식이랑 네가 안 다녔으면 한다고. 너…… 공부나 봉사활동이라면 우리랑 할 수도 있었잖아.”

“……”

“이번에 우리 스터디 만들까? 화학이랑 영어는 내가 할게. 물리나 수학은 네가 맡아서 하면 되겠네.”

“……”

“사회 과목은 조쉬가 하면 되겠다. 저녁 식사 후 8시 마다 내 방에서 모여서 공부하는 거 어때?”

굳어있는 나를 뻔히 알면서도 녀석은 말을 이었다.

“싫어?”

“……”

“그럼 네 방에서 할까?”

“……”

“네 방도 싫어? 조쉬 방에서 할까?”

침대 시트의 단순한 무늬를 보면서 녀석의 시선을 외면했다. 옆에서 어떤 말을 지껄이는지, 듣고 싶지 않았다. 녀석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서, 소리가 너무 커져서, 내 귀를 완전히 막아버렸으면, 그래서 차라리 녀석에게 어떤 말도 듣지 않길 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우.”

녀석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신음을 흘렸다.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르는 녀석을 무시한 채.

“지우야.”

“……”

“야.”

“……”

“……나 돌아버리는 게 보고 싶어?”

“……”

“야!”

조금씩 숨을 몰아쉬던 녀석의 마지막 말엔 짜증이 짙게 베어있었다.

“말 좀 해봐. 너… 왜 그래!”

흥분하는 녀석에게 너무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한 뒤 쏘아붙였다.

“네가 날 좋아하는 방식은 너무 이기적이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이미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다. 몇일 전 나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소름 돋는 이유에서였겠지.

“너야 말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아, 이건 내 수비 범위를 넘어선 대답이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토하듯 말하는 녀석은 여전히 흥분해있었다.

“왜 자꾸 나를 미친놈으로 만들어.”

“네가 미친 건 잘 알고 있구나.”

“너 때문에 미친 거지. 원인 제공은 네가 했어.”

“내가 뭘? 칼릭스랑 봉사활동하고 시험 공부한 게 그렇게 널 미치게 만들었어?”

“그래. 그 자식이랑 한 공간에서 웃고 있는 널 보기만 해도 미치겠어.”

“하! 그래서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의 관계, 그 더러운 속살을 보여주고 싶었어?”

“뭐? 더러워? 더러운 속살?!”

목소리가 너무 커져가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께서 아래층에 계신데. 이런 걱정을 하는 나와는 반대로 광분한 블리스가 튕기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아 흔들며 말했다.

“더러워? 어떻게 네가…… 여태 더럽다고만 생각해왔던 거야?”

적어도 깨끗하진 않았지. 너와 몸을 섞는 게 즐거운 한편, 괴로웠던 것은 너의 이 넘쳐나는 감정들 때문이었나?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모르겠어? 내가 무슨 더러운 벌레야? 내가 널 사랑하는 게 죄가 돼? 내가 널 사랑하는 게 너한테 그렇게 상처가 돼? 그래서 고백한 날 이후로 날 피하는 거야? 그 날 이후로 왜 칼릭스랑만 있는 건데! 이 개 자식아!”

…믿을 수 없게도. 녀석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왜 날 피하는 건데.”

“피한 적 없어.”

“피했잖아. 더러운 벌레 보듯.”

“하! 너 무슨 피해망상증 있어? 정신과에서 상담 좀 받아봐. 아는 의사 있는데 소개시켜 줘?”

유치하기 그지없는 이유로 이렇게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단 말인가. 녀석의 말대로 그게 블리스에게 큰 상처가 될만한 이유였는가. 그게 블리스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더 이상 이런 식의 논쟁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생각했는지 블리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닫혀있는 유리창 밖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녀석의 어깨가 깊은 숨을 내쉬기 위해 몇 번이나 들썩거렸다. 뒤 돌아 나를 바라본 녀석은 다른 사람이 되어, 조금 울먹이긴 했지만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정신과 의사 좀 소개시켜줘. ……나. 이상해…….”





식탁 위에는 육수를 우려내 맑은 국에 가득 담겨진 면과 각종 해산물, 김치, 각종 반찬, 따듯한 보리차와 수프가 놓여져 있었다. 워싱턴의 본사에서 뉴욕으로 출장을 가게 된 아버지의 부재로 테이블에는 나와 블리스와 칼릭스, 어머니와 동생 지은만이 앉아 있었다. 저녁 식사의 분위기는 부산하지도, 어머니가 어색해서 견디지 못할 만큼 적막하지도 않았다.

짐승의 촉수같이 얇고 기다란 젓가락. 거미다리같이 길고 가느다란 칼릭스의 손가락이 잡은 한 쌍의 젓가락의 움직임은 간단한 김치조각 하나를 집는 것에도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더듬거리며 먹기 좋게 잘려진 김치조각을 집는 별 의미 없는 동작 하나를 바라보는 나의 가족들은 낯선 대륙에서 찾아온 백인을 맞이하게 된 원주민이 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이런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이 내 가족들이라니.

“……좀… 맵네요.”

당연히 맵지.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물을 찾는 손길은 느긋해 보였지만, 칼릭스의 얼굴은 조금씩 붉어져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즐기는 건 나의 가족들뿐인 모양으로 김치를 집어먹은 칼릭스를 바라보는 블리스의 눈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좀 전의 일로 발갛게 충혈 된 눈으로 칼릭스를 쏘아보는 눈빛은……

아… 정말이지 쓸데없는 소모전이다.

“……먹을 만한데요?”

“그래? 내일 모레 갈 때 좀 싸줄까?”

칼릭스의 말에 반색을 하며 말하는 엄마의 태도나 말투가 들떠있는 소녀 같아서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는 녀석의 얼굴에 희미하게 나타난, 혀를 얼얼하게 만드는 매운 맛에 대한 경악의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뇨. 사실 좀 매워요.”

“좀이 아니라 많이 매운 거겠지.”

킥, 하고 웃으며 녀석의 말에 대답했다. 내색하진 않지만 엄마는 분명 아쉬워하고 있을 것이었다. 코를 자극하는 신 냄새와 매운 자극을 둔감한 우리 가족이야 잘 모르겠지만, 저 소년은 김치의 강한 냄새와 매운 맛에 대해 놀랄 만큼의 예민한 미각을 가졌단 말입니다.

“블리스는 여전히 잘 먹네. 좀 싸줄까?”

“엄마. 냄새 베여. 일부러 그럴 필요 없어.”

블리스는 좋아할지 몰라도 녀석의 부모님이 김치 냄새에 경악하는 건 곤란했다.

“아, 그렇겠구나. 집에 냄새가 배는 건 곤란하니까. 음… 오늘 블리스도 자고 간다고 그랬지?”

“네. 폐가되지 않는다면…….”

“어머, 아니야, 다 내 자식 같은데 뭘. 간이침대를 좀 가져와야겠구나. 창고에 있는데 나중에 잘 때 지우 너가 좀 가지고 올라가라. 너희도 놀러 왔는데 객실에서 자는 건 재미없겠지?”

“네. 같이 노는 게 좋죠. 그리고 간이침대는 저희가 옮길게요.”

좀 전의 일은 블리스의 눈에 자국을 남겼지만, 녀석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녀석이 태연한 척 어머니를 대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칼릭스 녀석은 문 밖에 서서 우리의 대화를 들었을 것이다. 방 안을 넘어 문 밖까지 넘실거리는 블리스의 감정들을.

“이번에 대학원서 어디에 넣을 거야?”

여태 조용히 밥을 먹던 지은이, 수저를 내려 놓으며 단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생은 나이는 어렸지만 분명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블리스와 칼릭스를 관찰하고 탐색했을 것이다. 이 덩치 큰 백인들의 생김새를 관찰하고, 식사중의 사소한 버릇들을 예리하게 발견해내고, 그들의 말하는 모습, 표정에서 성격을 발견해 낼 것이었다. 고작 중학교 3학년짜리 여자애가 가진 두뇌 치고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면이 없잖아 있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칼릭스와 블리스의 시선이 한 여동생에게 향했다. 블리스는 지은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을 테지만, 칼릭스는 아마도 이 어린, 삭막해 보이는 소녀에 대해 내색은 하지 않지만 놀라는 듯 했다.

“예일이나 하버드, 프린스턴도 생각하고 있어. 일단 원서는 가능한 많이 쓸 거야. 너도 아이비리그 가고 싶다면 많은 경험을 쌓는 게 좋을 걸?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궁금한 건 없어. 그런 뻔한 거야 나도 다 들어서 알고 있어. 뭐, 대학마다 원하는 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게 있잖아. 그런 것들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어.”

“구체적으로 어떤 걸?”

“외국어는 기본이고… 1학년 2학기 때 프랑스로 교환학생 식으로 해서 갈 생각이야. 블리스도 교환학생 가지 않았었어?”

“일본으로 갔었어.”

교환학생이나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얘기는 블리스에게서 처음 들은 얘기였다.

“정확히 중학교 2학년 1학기에 다녀왔지. 말 알아듣는 데만 4개월 걸렸어. 여기서 좀 공부하고 갔었거든. 뭐, 결국엔 공부라기 보다는 언어연수 갔다 온 식이 됐지만.”

“……난 너한테 처음 듣는 얘긴데?”

녀석에 대해 모두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일본이라니, 녀석이 환장하는 아시아인들이 득실거리는 나라 아닌가. 녀석이 아시아인들에 대한 성적 환상을 품은 계기가 됐다면, 그것은 적어도 나랑 관련되는 일인데. 여태 입도 뻥끗 안하고 있었다니.

“……별로 말 해주고 싶지 않았어.”

스푼으로 양송이 스프를 떠 넘기는 얼굴이 태연했다. 여전히 벌건 눈으로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스프를 넘기느라 목울대를 움직인 후 말했다.

“…궁금하다면 물어봐.”

“별로… 궁금한 점 없어.”

궁금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저녁 식사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난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되나?”

여태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칼릭스가 끼어들며 말했다. 머리를 묶는 대신, 귀 뒤로 넘겼는데 앞으로 계속해서 흘러내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거기서 사귄 애도 있어?”

“……무슨 소리야.”

블리스는 태연을 가장하며, 가장 평이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 눈 속에 어린, 짙은 짜증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야. 쿡”

칼릭스는 피식거리며 웃고는 조용히 국수를 마저 먹는다. 포크로 스파게티를 먹듯 젓가락으로 돌돌 돌려 입안에 집어 넣는 모습이 젓가락질을 처음 배운 어린아이 같이 뻣뻣하고 어색하다.

여전히 비릿하게 웃고 있는 칼릭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저 사자같이 사나운 블리스의 분노를 들쑤셨다. 갑자기 왜 이 무모한 감정 싸움에 칼릭스 녀석도 끼어들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의문의 눈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





창 밖으로 비가 내려 더위는 한결 가셨지만, 방안은 습한 냉기가 흘렀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슬릴 만큼 크게 들렸다. 옆에 누워서 잠에 든 두 소년의 존재로 인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기에 저 작은 빗소리가 신경을 긁기 위해 귓가에서 속삭이는 작은 웅얼거림으로 들렸다.

음침하기 그지없는 하늘에서 새까만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밤이기 때문이다. 주름이 가득한 노파가 길거리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부짖어도 어둠과 빗소리에 모두 잦아들 만큼 음침한 날씨였다. 비가 올 줄 알았으면 낮에 정원에 물을 줄 필요도 없었을 텐데, 갑작스런 날씨의 변화였다. 저녁 식사 후 공부할 때부터 내리기 시작하더니 모두가 잠에 든, 방 안의 전자시계가 2시를 가리킬 때 까지도 퍼붓고 있었다. 잠깐 내리고 그치는 소나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런 날씨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어서 나는 좋아하질 않았다.

12시가 다 돼서야 창고에서 비닐로 꽁꽁 씌워진 간이 침대를 방 안으로 가져왔다. 먼지가 가득 쌓인 비닐을 벗겨내고 깨끗한 시트로 갈아낸 후에야 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내 양 옆에 긴 장신을 뉘인 소년들로 인해 나의 넓고 쾌적한 방안이 소인국의 방처럼 느껴졌다. 두 명의 걸리버 사이에 누운 소인은 칼릭스를 향해서도, 블리스를 향해서도 어느 곳을 향해 눕지 못한 채 천장만을 마주하며 잠에 빠지려 노력했다. 하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머릿속에 범람하는 각종 공식과 예문, 시험에 대한 걱정, 내 옆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가는 이 두 소년들에 대한 생각으로 잠이 오질 않았다. 내 방인 동시에 내 방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내 방이 이질 적인 공기로 가득 찼던 적은 없었다.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이 쓸데없는 소모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단지 죽음 같은 침묵 속에 빠지는 잠 속으로.

두 녀석은 이미 잠에 빠져들었는지 뒤치락 거리지도 않고 평온해 보였다. 나는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서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차가운 바닥에 맨발이 닿는 느낌이 소름 돋는다. 문을 조심이 열고 카펫이 깔린 바닥을 걸어 화장실 안에 들어가 소변을 보고 나서야, 몸 안에 팽배하게 남아있던 긴장의 잔재들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손을 씻으면서 본, 오렌지 빛 조명 아래 거울 안의 나는 한없이 무표정했다. 아니, 부석부석해져 있었다. 푸른 느낌을 주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커다란 한숨을 내쉰 후, 손을 닦기 위해 타올을 잡는 순간 화장실의 문고리가 돌아갔다. 누군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 잠이 깬 모양이었다. 그 누군가가 내가 생각한 녀석이 아니었으면 했지만, 바램과는 다르게 그 녀석이 문 밖에 서 있었다.

“잠이 안 와.”

그럼 여태 잠이 든 척 했던 거냐. 두 시간 가까이 침대 위에 누워있던 주인공의 목소리 치고 너무나도 맑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잠이 오질 않았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블리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달칵거리며 잠기는 소리에 녀석을 바라보자, 평정을 유지하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다.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다가온 녀석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맞은 편 벽에 몸을 기댔다.

“…나갈게. 화장실 써.”

“키스하자.”

나의 입술에서 또 한번 무거운 한숨이 내쉬어졌다.

“…이러지 말자. 블리스.”

“키스하자. 전에는 이런 거 아무 일도 아니었잖아.”

“키스하면, 만지고 싶고, 만지면 섹스하고 싶고. 그렇잖아. 아니, 이런 건 문제가 안돼. 아무튼 너와 더 이상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순 없어. 제발 좀 이러지 마.”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이 빨라지려는 것을 억제하려 애 썼다. 나의 이 새벽을 훼방 놓으려 하는 녀석의 질긴 감정은 나를 질식 시킬 것 같았다.

“나는 너 평생 사랑할 일 없을 거야. 알겠어? 너 이렇게 나오는 거 구질구질하다고.”

“알아, 네가 그딴 식으로 나오니까 내 기대도 점점 줄어든다고.”

녀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대 안 해. 안 하니까… 예전처럼 섹스하고 키스도 하자. 넌 내 감정만 모르면 돼.”

“이미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몰라. 난 그런 거 덮어두기 싫어.”

“내가 괜찮다는데 왜 이래!”

버럭 화를 낸 녀석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에 열이 돌기 시작하는지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아래층에 있는 가족들이 녀석의 흥분한 목소리를 들었을까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자존심이 어디까지 무너져야 만족할거지?”

“…내가 널 망가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 하지마.”

“지우야. 이보다 더 내가 무너질 수 있을 것 같아?”

이마의 손을 치운 뒤 드러난 녀석의 눈이, 전처럼 조금씩 충혈 되고 있었다. 녀석이 간청하며 말했다. 이젠 키스하자도 아닌 섹스하자고. 울먹이며 여차하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이렇게 나약한 모습의 블리스는 견딜 수가 없었다.

녀석의 젖은 눈이 보였다. 조금씩 습기를 드러내는 저 나약한 시선.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이 넘쳐흐르던 녀석이 고작 나 하나 때문에 무너져 내리는 건 원하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내 앞으로 그 긴 다리를 움직여 걸어온 블리스는 굳어있는 내 표정을 보면서 말했다.

“섹스하자.”

잠옷의 옷소매로 눈 끝에 매달린 습기를 닦아내면서 말했다.

“전처럼.”

“……”

“제발.”

새된 목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애원하는 목소리에서 넘쳐나는 감정의 조각들. 어떠한 공감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저 혼자 걸어가는 감정들. 저 감정에 반응하는 나의 무감각함에 나 자신이 괴로울 지경이었다.

“지우야.”

“……”

“견딜 수가 없어. 나 좀 달래줘어.”

내가, 이런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괴로운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녀석을 외면하자 블리스는 차가운 타일 벽에 붙어있던 오른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잔뜩 열이 오른, 미약한 떨림마저 전해지는 얼굴은 조금씩 나의 손바닥 안으로 기울어졌다. 뜨거운 날숨을 손바닥 안으로 쏟아내며, 자신의 모든 의지와 희망마저 쏟아내는 기분이 들어 손을 녀석의 뜨거운 얼굴에서 빼내고 싶었지만 손바닥 안으로 녀석의 눈물이 흘러내려 그럴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녀석이 두 손으로 나를 안았다. 뜨거운 블리스의 품과 차가운 타일 벽 사이에 끼인 채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녀석을 받아들이면 녀석의 진심까지 받아들이게 되는 건 아닐까. 지레 겁을 먹으면서도 녀석을, 녀석의 축축한 흔적을 남기는 입맞춤을, 목덜미를 핥아 올리는 까칠한 혓바닥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녀석의 흔적이 남을 때마다 가슴에 통증이 남는 것 같았다.



페니스가 천천히 들어옴과 동시에 녀석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끝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애를 태우듯 간질거리며 서서히 들어오는 녀석의 그 길고 굵은 페니스에 가쁜 탄식을 내뱉었다. 내부를 채우는 페니스의 자잘한 주름과, 힘줄, 혈관마저 섬세하게 내벽 안에서 인식되는 간지러움. 거의 일주일 만에 녀석과 몸을 섞게 됐지만, 그 일주일만의 섹스는 그 전과는 조금 다르게 더 끈적거리고 더 부드러웠다. 마치 타인과 섹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블리스의 무릎 위에 앉아 섹스를 하는 동안 녀석의 배와 내 아랫배 사이를 끈적이며 달라붙는 정액덩어리가 불쾌했지만, 그것은 내가 지금 느끼는 감각중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었다. 해방되지 않는 감각에 나는 헐떡이고 있었다.

길어봤자 20분 내에 사정을 마치곤 했던 블리스는 조금씩 동작이 급해지려 하면 사정 감을 억누르려는 듯 가만히 내 안에 머물러 내 안에 있는 시간을 더 길게 유지하려고 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삽입했는지도 모를 만큼 오랜 시간 몸을 섞는 동안 나는 이미 한번의 사정을 마친 뒤였다. 결코 급하게 쳐올리지 않고, 힘없이 녀석에게 기댄 나를 안은 녀석은 엉덩이를 좌우로 벌려 꽉 잡은 채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이며 섹스의 시간을 컨트롤 하고 있었다.

천천히 빠져나가면서 녀석은 부드럽게 유두를 앞니로 살짝 깨물었다. 나는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녹여먹듯이 거칠한 혓바닥 아래로 유두를 굴리면서 빨아들이는 쾌감에 신음을 아끼려 노력해야만 했다. 비록 나의 가족이 아래층에서 잠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나의 집이었다. 적어도 부모님이 나를 낳아 키워줬다는 양심이 있는 이상, 집 안에서 남자와 몸을 섞으며 쾌락에 비명을 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페니스의 첨단이 전립선을 지긋하고 강하게 눌러오는 느낌에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이를 악 물자, 그 반동으로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지금 들리는 건 단지 녀석과 내가 신음을 참아내기 위해 목 안으로 잠겨 드는 흥분의 소리와 살 비벼지는 소리, 쿨쩍 거리며 접합 부분에서 들려오는 소리뿐이었다.

한참이나, 얼마나 그렇게 살과 살이 맞물려 있었을까. 갑자기 엉덩이를 잡은 녀석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곧 페니스 끝에서 따듯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몸을 부르르 떨어대며 녀석은 사정을 했다. 사정을 하는 가운데도 끊임없이 들락거리면서 아주 오랫동안 사정을 했다. 녀석의 정액이 흘러 넘쳐 항문이 질척해질 만큼. 내 안을 모두 채워버릴 만큼 사정을 한 녀석은 가만히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급한 숨을 몰아 쉬었다. 블리스의 만족과는 다르게 해방되지 않은 사정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의 허리를 블리스는 그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었다.

들어올 때만큼이나 천천히 페니스를 빼낸 녀석은 나를 천천히 무릎 위에서 내려 차가운 타일 위로 눕혔다. 다리 사이를 벌려 페니스를 입에 문 녀석은 입안을 진공으로 만들어 오럴을 하기 시작했다. 그 극심한 간지러움에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그 커다란 손으로 허벅지 안쪽을 잡아 다물지 못하게 한 채로, 녀석은 계속해서 페니스를 훑어 내렸다.

다다른 사정감에 녀석의 머리를 잡아당겼지만 녀석은 정액이 흘러나오는데도 계속해서 페니스를 애무했다. 사정이 끝나고 고개를 처들은 녀석은 경악하는 나를 보면서도 정액을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너 미쳤어?”

새하얀 정액이 묻은 혀로 아랫입술을 핥아 내린 녀석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안에 사정해서 미안해.”

“……”

“긁어줄게.”

점점 새 빨개지는 내 얼굴을 끝까지 모른 채 하며 녀석은 태연하게 말했다. 콘돔 없이 섹스 했을 때 정액 긁어주기 위해 항문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 일은 흔히 있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정제되어있는 듯한 분위기의 블리스는 너무나도 낯설어서 녀석에게 항문 안을 긁어 내리게 하는 차마 부끄러운 일을 맡기고 싶지가 않았다.

“블리스. 내가 할게. 씻고 들어가 자. 곧 들어갈 테니까.”

“같이 씻고 바로 들어가자.”

“……싫어.”

“금방 해줄게.”

내 말을 듣지 못한 척 온수를 튼 블리스는 하얗게 표백된 자신의 페니스를 물로 훑어낸 후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 어색한 표정의 빨개진 내 얼굴을 보고서도 주저하는 내 무릎을 세운 후 가랑이를 벌리게 했다.

좁디 좁은 내벽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구부리는 행동은 얼핏 보면 성행위 전 내벽을 이완시켜주려는 행동과 같아 숨이 찼다.

정액을 긁어내는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전립선 부근을 건들이자 몸이 꿈틀거렸다. 모르는 척 그 부근을 계속해서 긁어대자 부르르 떨려온다. 입술을 물어 겨우 참아내지만 어쩔 수 없는 작은 신음이 이사이로 흘러나왔다. 손 끝으로 집요하게 긁어대서 괴로움에 몸을 들썩이며 도망가려 하자, 허리춤을 잡은 채 녀석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긁어댔다. 중력에 의해서 정액은 계속해서 아래로 끈적한 흔적을 남기며 바닥으로 흘러내렸지만 블리스는 계속 중력을 거스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헉,… 브…블리스. 그,그만.”

“다 아직 안 나왔어. 내가 너무 많이 싸버려서……”

“블리스. 윽… 제발. 좀…… 그만.”

녀석의 옅은 갈색 머리를 잡아당기며 애원하듯 말하는 목소리가 새되게 높아져있었다. 참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그 부분을 눌러대는 통에 참을 수가 없었다.

“블리스으으으……”

턱까지 숨이 차 올랐다. 신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내고 있으려니 녀석이 배꼽아래에 얼굴을 묻고 날숨을 뱉어내며 말했다.

“널 가득 적셔버렸으면 좋겠어.”

“흡… 으…읍… 블..블리스.”

“이렇게 긁어도… 긁어도 내 정액이 계속해서 흘러나왔으면 좋겠어. 하아……”

조금씩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녀석의 움직임에 녀석을 밀어버리려는 찰나, 녀석이 페니스를 입에 담아버렸다. 녀석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손 끝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강하게 페니스를 훑어내며, 항문 안을 긁어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해도… 되지? ”

손가락을 뽑듯이 빼내자 해방감에 흠칫. 몸이 크게 떨려왔다. 대답이 필요해서 질문의 형식을 띈 것이 아니었기에 내 몸을 바닥으로 눕히며 단번에 뚫고 들어왔다.

하아…

모든 감각의 인식이 불가능한, 거대하고 섬세한 말초적인 감각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뱉어졌다. 내가 녀석의 페니스를 압박하고, 녀석이 나를 내벽을 압박하는 숨막히는 감각에 숨을 쉬는 것 조차 힘들 정도였다. 단순히 연결되어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숨 조차 쉬는 게 힘겨운 걸까. 이 말초적인 감각이 두려워서, 자신의 한계를 범람하는 이 감각, 블리스의 감정을 알면서도 쾌락이 느껴지는 자신이 두려워서 눈물을 흘렸다.

“흑…으..ㅇ…”

신음을 안으로 삼키며 전립선을 스치는 감각에 괴로워하며 몸부림 치자 녀석이 허리를 감싸 안고 움직이던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극단을, 끝을, 어디까지 이 감각이 도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고통과 맞닿아 있는 쾌락을 향해서 심장이 뛰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허리에서 항문 안쪽으로 이어지는 둔한 통증이었다. 항문 안이 얼얼했다. 이물감은 없었지만, 아직도 녀석에게 박혀있던 그 때의 느낌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감은 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밝은 빛을 무시하며 푹신한 이불에 온 몸을 감고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내 양 옆에 누워있는 저 기다란 장신의 소년들은 아직도 길고 긴 잠의 여로에 있는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잠을 청할까, 아니면 잠긴 목이라도 채우기 위해 물을 마셔야 할까. 계속해서 고민하다 결국 눈을 떠 책상 위에 놓여진 물을 찾기 위해 허리를 일으켰을 때, 칼릭스가 누워있던 침대가 비어있음을 깨달았다.

화장실이라도 간 걸까, 아니면 아래층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얘기라도 나누는 걸까. 칼릭스는 사교성이 좋으니까 내 친구들에게 어색한 미소만 짓는 어머니와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렇다면, 칼릭스에게 감사하다. 책상 위에 놓여진 물을 마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몸을 떨며 물 컵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

녀석이 가져온 프린트 물과 책들이 모두 치워져 있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감각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니, 아니다. 이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 마음을 달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일어났니? 피곤했나 보구나.”

부엌에서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자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블리스는 아직도 자?”

“엄마… 칼릭스는?”

화장실에 갔을 수도 있는데, 급한 마음에 화장실을 체크해보지도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칼릭스?”

“응. 칼릭스 어디 있어?”

“칼릭스 오늘 아침에 일찍 나갔어.”

“뭐?!”

“어머, 깜짝이야.”

국의 간을 맞추기 위해 수저를 입에 가져다 대던 엄마가 깜짝 놀라며 숟가락을 바닥으로 떨어트려 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국과 수저에 얼굴을 찡그리는 그녀에게 다그치며 물었다.

“너 뭐 화난 거 있니?”

“아니, 없어. 칼릭스가 왜.”

“…아침에 표정이 안 좋더라. 몸이 안 좋다고 하면서 새벽같이 나가버렸어. 음… 쌀 앉히려고 6시에 일어났는데 그 때 짐 챙겨서 나가고 있더라.”

“…….”

“아프면 좀 쉬다 가라고 했더니, 기필코 집에 가겠다고 해서. 걱정 됐지만 그러라고 했지.”

“…….”

“지우야. 너 표정이…….”

내 표정이 어떻다는 거야 엄마. 의아해 하는 엄마를 두고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가방 위에 놓여진 핸드폰을 찾았다. 짐작은 갔지만, 그래도 녀석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방 안을 거칠게 뒤적거려 책 사이에 끼인 핸드폰을 발견해냈다. 이름을 검색하기 위해 C를 눌렀지만, 녀석의 이름은 없었다. 젠장 맞게도 나는 녀석의 핸드폰 번호도 알고 있지 못했다.





*





비가 그친 아침은 선명했다. 너무도 선명해서 창 밖의 모든 사물에 뚜렷한 윤곽이 보일 정도였다. 창문을 열고 문틀에 팔을 기대어 서자, 밤새 내린 비로 먼지가 가라앉은 청명한 공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희미해진 정신을 정돈하는 아침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창가에 서서 옆집에 살고 있는 유명한 베스트셀러 소설가의 아내인 토머 부인이 개를 산책시키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소설가가 살고 있는 그 집은 저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조지타운에서도 호화로운 축에 든다.

저택은 붉은 벽돌과 하얀 벽돌을 쌓아 올린 유럽식의 오래된 전통적인 유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토머씨가 썼던 소설만큼이나 특별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그 건물을 둘러싼 정원은 토머 부인의 부지런함에 비례해 아름답게 가꿔져 있었다. 아름다운 활엽수의 꽃잎과 울타리를 따라 피어있는 붉고, 새하얗고, 노란 넝쿨장미는 봄과 여름이 되면 그 향기를 내 방 창문까지 날리곤 했다. 화려한 꽃들은 물론이고 채소와 약재까지도 그들의 정원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봄과 여름이 되면 아름다운 정원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의 팔랑거리는 날갯짓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의 집 정 가운데 튀어나와 있는 테라스였다. 2층에서 4층까지 테라스가 있었는데 가장 높이 위치한 테라스는 정제되어 있는 건물의 분위기와 달리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아마도 커다란 테라스의 바닥은 밤새 내린 비가 고여 햇빛에 반짝이고 있을 것이었다. 저런 테라스에 서서 워싱턴의 전경을 보면 어떨까,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아버지는 눈을 빛내며 말했었다. 단지 우리 집의 테라스보다 조금 더 넓게 보고, 조금 더 멀리 보 수 있을 뿐인데도. 아버지가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나도 저 집의 테라스에 서 보고 싶긴 했다. 테라스에 흔들의자를 가져가 그 곳에 앉아 소설의 내용을 구상하면 장소의 특별함만큼이나 황홀한 그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봐?”

문틀에 기대 벌려진 팔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나를 감싸 안으며 블리스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등 뒤로 닿은 녀석의 가슴이 기분 좋은 울림을 내며 뛰고 있었다. 머리에 입술을 대 짧은 키스를 하며 녀석은 더 이상 붙을 수 없을 정도로 나를 껴안았다.

“창 밖.”

너무 당연한 대답인 것 같았지만, 블리스의 입술이 닿은 머리 위에서 녀석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프레드릭 토머씨의 정원이 아름답긴 하지. 장미가 아름답게 폈구나.”

“사실 정원이 아닌 테라스를 보고 있었어.”

“맨 위에 있는? 건물에 비해 너무 화려하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멋지잖아.”

뒤를 돌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입술을 가르고 키스를 해왔다. 키스를 나눌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혓바닥을 지분거리는 느낌은 단지 아침에 자고 일어난 직후의 키스를 나눈 텁텁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고개를 숙여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로 나의 턱 아래를 물으며 밋밋하게 서 있는 내게 말 했다.

“너도 너희 아버지처럼 좋은 집과 행복한 가정이 목표야?”

“나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난 네가 목표야.”

턱 물고 있는 입안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녀석이 말했다. 아침부터 진지하게 고백하는 이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칼릭스 전화번호 알아?”

“그건 왜.”

“칼릭스가 가버렸어. 이번이 세 번째지. 섹스 하는 걸 들킨 건.”

침울하게 말하는 나를 바라보는 블리스의 눈빛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형태로 반짝였다. 녀석과 눈을 마주보는 날 의식해 고개를 숙이며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는 녀석의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녀석의 파란 눈동자를 풍성하게 가렸다. 고개를 숙여 시선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모습이 금욕적인 느낌이 들게 했다. 블리스 아이언사이드가 금욕적이라니…… 이런 황당한 느낌은 다분히 아침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감수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갈색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사르락 거리며 시야를 가리는 걸 손으로 쓸어 올린 블리스는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며 한숨을 쉬었다.

“전화번호 몰라. 걘 언제 간 건데.”

“새벽 여섯 시쯤이래.”

쥐어짜듯 말하며 녀석을 밀어내자 블리스가 순순히 팔을 거둬 나를 풀어주었다. 출렁거리는 침대에 앉아, 손바닥 안에 얼굴을 가두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젠. 정말 우리 관계는 뭐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어제 녀석의 유혹을 거절했다면, 지금쯤 늦은 아침을 먹고 공부나 하고 있을 텐데. 이건 블리스의 잘못이 아닌, 나의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일어난 상황이다. 누구를 탓 할 수도 없다. 단지 나의 태도만이 문제였으니까. 빌어먹을 장지우.

“변한 건 없어. 일주일 전의 상황과 다르지 않아.”

“뭐?”

“그 때도 칼릭스는 없었어. 너와 나 그리고 우리 패거리들뿐이었지. 어제처럼 우린 늘 섹스를 했었고. 단지 조금 변한 게 있다면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네가 알고 있다는 거지…… 물론, 괴롭지만 그건 어제로부터 덮어두기로 했잖아. 왜 그렇게 칼릭스에게 연연하는 거야.”

“칼릭스는 친구니까. 당연히 연연해야 해.”

얼굴을 가린 손을 거칠게 잡아 챈 커다란 손이 손목을 감아왔다. 손 끝으로 턱을 들어올린 블리스가 시선을 맞추었다. 한 없이 무기력해진 나란 존재가 녀석의 동공 속에 있었다.

“그 친구가 섹스하지 말란 말을 했어?”

선명한 시선이 물어왔다. 왜 그렇게 녀석에게 연연해 하냐고. 녀석은 입이 가벼워 떠벌리며 다니는 녀석도 아닌데, 왜 그렇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냐고.

“아니.”

“칼릭스가 있는 곳에서 섹스 하면, 아버지 앞에서 섹스 하는 엿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래?”

“미치겠군. 하필 왜 거기에 비교해? 이 손 놔.”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몸을 옆으로 숙여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른한 침대에 고개를 파묻고 한숨을 내쉬자 따듯한 입김이 얼굴을 뒤덮었다. 이대로 질식해서 죽어버리면, 찰나의 순간은 괴롭겠지만 그 끝은 얼마나 평안 할까. 그 길고 긴 안식이 나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극단적인 생각이 들만큼 가슴 안을 무언가가 뜨겁게 들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힘겨운 숨을 쉬는 내 오른쪽 옆으로 블리스가 앉았다. 그 무게감에 충실하게 출렁거리는 시트의 흔들림, 그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목을 옥죄여오는 것 같았다.

그 커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애무하듯 쓸어 넘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우린…… 새벽에 섹스를 한 거야.”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너 죽을래?”

“다시 생각해 보니까.”

“……”

“나 널 못 놔주겠다.”

“……”

“말 했잖아. 난 이기적이라 짝사랑은 못한다고.”

녀석의 얼굴을 쳐 내기 위해 손을 들어올린 순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을 밀치며 벌떡 일어나 불편한 걸음으로 문으로 걸어가자 녀석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불쾌한 기분으로 문을 열자 여동생 지은이 서 있었다.

“셋이 싸웠어?”

“아니, 왜 올라왔어.”

차갑게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기분이 더러워서 나도 모르게 날이 서 있는 목소리로 대답해버렸다.

“……싸운 거 같은데 뭐.”

“왜 올라왔는지 용건이나 말해.”

본의 아니게 차갑게 말하는 내게 삐진 듯 아래 입술을 내민 지은이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 먹으라고!!!”





*





이틀 동안 죽어라 공부만 했다. 블리스가 앞에 있으면 신경이 예민해질 것 같았는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그렇지도 않았다. 녀석은 나를 건들지도 않았으며, 내가 가장 거북해 하는 사랑 고백을 하지도 않았다. 일주일 동안 칼릭스와 함께 다녔던 기억은, 갑자기 블리스 녀석의 존재로 희미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블리스와 그렇게 일요일 저녁까지 삼 일간 공부를 하고 나서 내 심경에 어떠한 변화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둔한 블리스 만큼이나 둔해져서, 이 모든 걸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칼릭스의 전화번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인데도, 나는 막연한 두려움에 전화를 섣불리 걸 수가 없었다. 월요일 아침, 오늘 아침에 눈을 뜨면서도 막연하게 녀석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걱정을 할 뿐.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이나 사과할 계획조차 짜놓질 않았다. 아니, 짜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녀석은, 칼릭스는 나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전거를 봉사활동 갔던 언어센터에 두고 왔기에 할 수 없이 부모님의 차를 타고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현관에 놓인 신을 신는 순간이었다.

-딩동

아침부터 잡상인이 올리는 없고-이 동네는 잡상인의 기를 죽여놓을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기에 잡상인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월요일 아침, 그것도 한참 출근할 시간대인 이 시간에 방문을 하는 무례한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해 하며 문을 연 순간이었다.

“워!!!!!!!!!”

“깜…짝이야!”

문이 열림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며 소리를 지른 이 무례한 자식 때문에 엉덩방아를 찔 뻔 했다. 놀라며 뒷걸음치는 나를 보더니 허리를 숙이며 큭큭 거리며 웃는 녀석은 여느 때와 같은 블리스 아이언사이드였다.

“블리스!!”

“어… 놀랐어? 아침이라 졸릴까봐.”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녀석이 괘씸해서 화를 내자 말도 안 되는 변명이나 지껄여댄다.

“졸려? 놀래 죽는 줄 알았잖아. 내가 아니면 어쩔 뻔 했어.”

“여기 틈으로 보이는데 뭐.”

녀석이 손끝으로 문 밑 부분의 신문 넣는 틈을 가리켰다. 그럼, 그 신문 넣는 틈으로 현관을 보기 위해 여태 엎드려 있었다는 얘기? 녀석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녀석의 예의 짓곤 하던 뻔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전거 없지? 내 거 같이 타고 가자.”

“엄마 차타고 갈 거야.”

아침부터 네 자전거를 타고 그 지옥 같은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싶진 않다구. 단호하게 말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은 녀석은 안방에서 막 차 키를 가지고 나오는 엄마를 발견하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나의 어머니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 할 리가 없다는 말투였다.

“어머니, 지우 제가 데려가도 되죠?”

젠장, 엄마가 블리스의 말을 거절할 리가 없다. 팍 구겨지는 내 얼굴을 본체만체 하는 엄마는 저 자신만만한, 귀하게 자라난 백인녀석에게 엄청난 호감과 신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괜찮겠어?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럼, 지우 데리고 갈게요. 토요일에 봬요.”

“그래. 시험 잘 봐라. 블리스, 지우도 힘내서 잘 봐.”

차 키를 손가락에 건 채 손을 흔드는 그녀를 뒤로하고 블리스는 내 오른손을 잡아당겨 현관을 나섰다. 편하게 갈 수 있었는데 녀석 때문에 뒤틀어진 아침 계획에 짜증을 내며 잡혀진 손을 뿌리치려 하자 순순히 팔목을 잡았던 손을 풀어주었다.

“뒤에 타. 너처럼 뚱뚱한 애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가 뒤에 타. 내가 앞에 탈 테니까.”

“안장을 내 다리 사이즈에 맞춰서 좀 높여놨는데… 괜찮겠어?”

과장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말하는 녀석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자전거의 핸들을 잡아 안장에 엉덩이를 댔다. 녀석의 기다란 다리에 맞춰진 높은 안장 바 때문에 발끝으로 땅 끝을 지지하며 설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은 팔짱을 낀 채 나의 다리 길이를 평가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짜증나는 자식.

홧김에 녀석을 태우지도 않고 자전거로 달리기 시작하자 소리를 지르며 녀석이 뒤따라 왔다.

“야! 나 태워야지!”

“몰라, 뛰어와!”

녀석과 최대한 떨어지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전거는 녀석의 체격에 맞춰진 고급 수제자전거였기에 확실히 내 체격으로 녀석의 자전거를 타기엔 무리가 있었다. 평균적으로 21~24인치하는 핸들 바의 길이도 녀석의 넓은 어깨에 맞춰져 28인치 가량 되었고 안장 바도 높게 설정 되어 있어서 페달을 최하부로 밟았을 때 무릎이 팽팽하게 펴져서 페달을 돌리기도 힘들었다. 무식하게 키만 큰 자식.

최대한 내색하려 하지 않았지만, 최대로 속력을 내지 못한 채 달리는 자전거를 녀석은 너무도 당연히, 금방 따라잡았다. 갑작스럽게 핸들과 가슴 사이로 팔이 들어와 몸을 움켜잡는 녀석에게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자 녀석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꽤 멀리 뛰어왔는데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녀석은 말했다.

“나 태워줘야지.”

“……”

“싫으면 네가 뒤에 타야지 뭐.”

얼굴을 팍 구기며 째려보자, 녀석이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그 커다란 손으로 쓸어 올렸다. 아기를 대하는 듯한 태도가 기분이 나빠 머리를 흔들자 순순히 손을 떼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려와. 이러다 학교 늦겠다. 최대한 빨리 모실게.”

“……”

“안 내려오면 뽀뽀해버린다.”

“너 미쳤냐? 헛소리 좀 작작해.”

투덜거리면서 그 높다란 안장에서 내려오자 녀석이 핸들 바를 잡으며 한쪽 다리는 지면에, 한쪽 다리는 페달을 밟으며 섰다. 내가 앉았을 때와는 상이하게 다른 그 안정감에 녀석과 나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신체구조의 차이에 대해 실감했다. 원인이 인류학적, 고차원적인 곳에 있다 하더라도 자존심 상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존심 상했다는 게 뻔히 보였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입을 다물고는 안장에 앉자 천천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빠르고 안정되게 달리는 녀석의 커다란 등에 오른쪽 뺨을 기댔다. 아침의 선명한 바람이 녀석의 단정하게 잘려진 머리카락과 넥타이를 날리는 것이 보여 왔다. 녀석의 커다란 등에 가려 바람이 얼굴을 스치진 않았지만, 넓게 벌린 다리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만은 느껴졌다. 타운의 호화로운 집들이 들어선 진입로를 벗어나 포토맥 강을 옆으로 끼고 있는 인라인, 자전거용 도로로 진입했다. 지면의 쿠션 때문인지 달리는 자전거의 타이어는 조금의 출렁임도 없이 조용히 잘 돌아갔다.

백악관 주변의 전경보다는 포토맥 강 주변의 전경을 좋아한다. 특히 노을이 지는 강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걸 우리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면 최소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포토맥 강가의 포토맥 공원을 끼고 달리면 30분 가까이 시간이 소비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가거나 돌아오는 길에는 꼭 강을 끼고 달리곤 했다. 아버지의 포토맥 공원과 워싱턴 운하, 포토맥 강에 대한 감상의 대부분은 이 일대의 땅값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게 하는 주요인이라는 것이 다였지만, 적어도 나와 블리스는 이 운치를 사랑하는 정도의 감수성은 가지고 있었다.

강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부지에 들어선 포토맥 공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녀석이 핸들을 꺾었다. 공원의 벤치에는 이른 피크닉을 온 연인들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대부분은 백인들로 인라인을 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이 운동하는 곳을 벗어나 공원의 좀 더 깊숙한 길로 들어섰다. 이 길로 꺾여야 버크셔 고등학교와 연결되는 도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십오 분 이상은 달려야 하지만, 이 길이 공원에서 버크셔 고등학교로 들어갈 수 있는 최단거리이다.

강변을 끼고 있는 공원의 전나무 숲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가지가 하늘로 솟아 있었다. 새파란 침엽수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직선으로 뚫고 들어오는 모습은 어딘가 웅장하고 신비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신의 계시를 받는다면 분명 이런 특별한 장소에서 일 것이리라… 전나무 숲 옆의 강변에서는 아침 햇살이 물살에 산란되어 시선을 어지럽혔다. 녀석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엔도르핀이 체내를 돌아다니는 기분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침부터 녀석에게 투덜거리며 짜증냈던 것도, 녀석의 사소한 행동이 짜증을 불러일으키던 것도 모두 잊게 할 만큼의 위력이었다.

녀석이 자전거용 도로를 벗어나 전나무 숲 사이의 잔디밭으로 핸들을 돌린 건 거의 순간적인 일이었다. 아름다운 광경에 넋이 나가있는 사이 녀석은 빠른 속도로 전나무 숲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의아함에 녀석의 등에서 얼굴을 떼어냄과 동시에 속도를 줄이며 자전거의 핸들이 급하게 꺾였다.

“으왁!!”

자전거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축축한 잔디가 얼굴에 팍, 하고 닿아왔다. 잔디가 길게 자라나 있어 아프진 않았지만, 갑자기 일어난 일에 정신이 없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 앞에 쓰러져있는 저 어이없는 자식이 무슨 일을 꾸미려나 싶었다. 축축하게 달라붙은 잔디를 떼어내며 일어선 블리스가 몸을 누르고 있는 자전거를 근처에 크게 자라나있던 전나무에 세웠다. 아직도 어이없음에 쓰러진 그 자세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는 내 앞으로 와 녀석이 허리를 숙였다.

“뭐 하자는 거야. 학교 안가?”

“갈 거야. 8시까지만 가면 되는데 뭘.”

허리를 숙인 녀석의 얼굴 아래로 옅은 녀석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듯 쏟아졌다. 빽빽한 침엽수림을 뚫고 곧게 퍼지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녀석은 옆으로 누운 내 어깨를 잡아 바로 뉘였다. 슬슬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짐작이 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 커다란 손으로 양손의 팔목을 잡아 머리 위로 잡아 올린다. 찝찝하게도 팔에 이슬에 젖은 잔디가 축축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떼어 내고 싶은데, 개미가 올라오는 것 같은 축축함이 싫다.

“……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냐.”

“응. 일주일 동안 넌 내 거라고, 너한테 도장 찍으려고.”

“여기서 안 된다고 그러면, 또 울면서 애원할거냐?”

얼굴을 찡그리면서 묻자, 녀석이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심각한 표정을 보면서도 녀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 땐 강제로 할 거야.”

녀석이 실실 웃으며 얼굴을 내려 입술을 묻었다. 조심스럽게 간지럼 태우듯, 아침 이슬의 촉촉함만큼이나 달큼하게. 아침 햇살이 뚫고 들어오는 전나무 숲에서의 키스는, 그래서 뭔가 몽환적인 느낌이 들었다.





녀석의 핸들바에 달린 룸미러를 통에 본 입술은 발갛게 부어있었다. 검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젖어있는 아랫입술을 건드렸다. 확실히, 느껴질 정도로 부어있다.

“학교 가자. 너 잘생긴 거 아니까 거울 그만 봐.”

“다음부턴 진짜 엄마 차타고 가야겠다.”

짜증스럽게 말하는 나를 모르는 척 자전거를 탄 녀석은 핸들의 종을 건들이며 뒷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녀석의 허리대신 옷을 쥐어 잡자 구겨진다며 투덜거리기에 허리를 안자 그제야 녀석이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십여 분간 달리다가 지옥의 언덕 같은 버크셔 고등학교 정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언덕이 나왔을 때, 모르는 척 녀석의 등에 코를 박았다. 녀석이 힘들어서 낑낑거리며 페달을 밟든 말든 녀석을 골탕 먹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7시 50분. 수업을 10분 남겨둔 아슬아슬한 시간에 남관에 위치한 2층의 교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긴 건 세 명의 덩치 정신 사나운 소년들이었다.

“블리스랑 같이 공부했다며. 왜 우린 안 불렀어!”

“너, 동생이 그렇게 예쁘다며, 왜 자꾸 숨기는 건데!!”

“의리 없는 자식들!”

세 명이 한꺼번에 말해서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도 모르겠다. 녀석들과 친하다는 걸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봤다면 백인들에게 협박당하는 불쌍한 동양인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한 명씩 말해. 진짜, 아침부터 귀아프게.”

“내가 먼저 말할게. 너 왜… 우린 안 불렀어. 나 집에서 게임하고 놀았단 말야!”

조쉬가 억울하단 표정으로 호소하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커다란 곰이 포효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내가 부른 거 아냐. 블리스 지가 온다는 얘기도 없이 온 거지.”

“그래도 블리스가 왔으면 자동으로 우릴 불렀어야 하는 거 아냐.”

“아 몰라, 지가 공부 안하고 논 걸 왜 나한테 그래. 저기 블리스 들어오니까 나한테 그러지 말고 저 녀석한테 말해.”

사물함에서 책을 가지고 오는 녀석을 가리키며 자리에 앉자, 그제야 조쉬가 나에게서 떨어져 블리스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차례로 아고스와 레이가 블리스에게 달려드는 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창가에는 몇 명의 여자애들과 칼릭스가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웃고 떠드는 그 속에 끼어들어 섞이고 싶진 않았다. 어색할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칼릭스에게 어디가 많이 아파서 갔냐고 물어보는 게 예의인 것 같아 내키진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과연 예의를 차린 행동인지는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나오질 않았지만. 이대로 모른 척 녀석과 멀어지는 것 보다 나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

“안녕.”

창가에 서 있는 여자애들과 칼릭스를 향해 인사를 하자 녀석이 입술을 작게 움직이며 대답했다. 일단 얘기를 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칼릭스와 눈을 마주치며 안부를 물었다. 빌어먹게도 내 목소리는 지독하게 긴장해 있었다.

“많이 아팠어?”

창가에 선 녀석의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 선명한 아침 햇살의 역광을 받아 갈색으로 윤기나게 반짝거렸다. 역광으로 극명하게 그늘진 녀석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그러니까… 토요일에 말이야. 아파서 갔다고……”

“쿡, 무슨 소리야. 칼릭스 나랑 어제 영화 봤어. 전혀 아픈 것 같지 않던데? 칼릭스, 너 어디 아팠어?”

칼릭스의 옆에 있던 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녀석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하… 재미있었겠네.”

“……”

“공부.. 많이 했어? 수학 모르는 거 있었잖아.”

“다 알아. 내가 가르쳐 줬거든.”

셀리 옆에 서 있던 진이 말했다. 창가의 문틀에 팔을 기대고 다리를 내민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반쯤 웃는 얼굴로. 조금은 거만해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거슬렸지만, 신경을 거스르기 위해 그런 표정을 지었다고 확신 할 수는 없었다.

“너만큼은 모르지만, 나도 수학 잘 하잖아. 안 그래 칼릭스?”

“……”

“왜 이래. 갑자기 벙어리가 됐어?”

진이 칼릭스의 팔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며 얘기했다. 칼릭스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어색해진 걸까. 나는 무안한 듯 웃으며 칼릭스의 팔 등을 쓰다듬는 진의 새하얀 손을 보았다. 초조할 정도로 반응이 없는 녀석의 근육이 경직되어 보였다. 이상하게 흐르는 경직된 기류에 견딜 수 없어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녀석이 말을 했다.

“얘기 없이 가서 미안해.”

낮은 한숨을 쉬며 말을 하는 녀석은 걱정했던 것만큼 불쾌해 보이지도, 화가 나 보이지도 않아서 다행이었다. 단지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뿐. 그래. 그건 언제나 그랬으니까.

“아,… 괜찮아. 아프다고 해서 걱정했어.”

“……”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네.”

내 시선이 불안정하게 움직이진 않을까. 말 하는 꼴이 교과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형편없이 들리진 않을까, 말을 하면서도 걱정이 됐다. 나는 녀석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생각들이 몰려와 너무 조심스러워져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칼릭스와 나의 어색한 기류를 느낀 여자애들이 녀석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칼릭스는 이런 날 더 이상 이해해줄 어떤 마음도 없는 것 일까. 그 때의 그 섹스로 나를 다르게 보는 시선이 생긴 것일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져서 비통한 심정으로 말을 했다.

“수업 시작하겠다. 자리에……”

“입술이……”

“……”

“부었어.”

라고 말한 녀석은 나만이 알 수 있는 눈빛으로 저 뒤에서 세 명의 무리와 티격태격 거리는 블리스를 힐끗 바라보다,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자체의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건지 몰라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던 녀석은 입술을 벌려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아 올렸다. 아랫입술이 건조하게 갈라져 있긴 했지만, 단지 갈라진 입술이 따가워 핥아 올린 행동으로 보이진 않았다.

본래 냉소적인 녀석인 건 알았다. 하지만, 그 냉소적인 녀석에게서 부드럽고 달콤함을 맛 보았던 이유로, 지금의 칼릭스는 자신을 평소보다 훨씬 더 사납게 비틀어 짜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려는 한숨 대신 궁색하기 그지없는 변명을 내뱉었다.

“어디에 좀 부딪혔어.”

이렇게 나를 변호할 필요가 있을까.

내 말에 녀석은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변을 둘러싼 여자애들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키스에 부어 오른 내 입술, 아니, 모호하기 그지없는 나의 결단력을 향한 조롱만큼은 녀석은 숨기려 하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던 칼릭스의 시선이 잠시 내 뒤를 향하는 걸 느낀 순간, 어깨에 커다란 무언가가 닿아왔다. 갑작스럽게 어깨를 감싼 커다란 손의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 블리스 녀석이 서 있었다.

“안녕 블리스.”

창가에 서 있던 여자애들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녀석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주말 잘 지냈어?”

블리스는 칼릭스 쪽은 보지도 않고 말을 했다. 주말에 잘 지냈냐고, 주말에 뭘 하고 지냈냐고, 시시껄렁한 얘기들이 오갔다. 가끔 잊곤 한다. 블리스 녀석이 그 잘생긴 외모로 여자애들에게 가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녀석이란 걸.

“무슨 얘기했어?”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내려놓지 않은 채, 옆으로 고개를 돌린 내 얼굴에 시선을 두며 녀석이 말했다. 표정은 웃고 있지만,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싫어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애써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는 녀석의 목소리 톤은 흥분으로 높아져 있었다.

“뭐, 별 얘기 아니었어.”

“그래? 수업 시작하겠다. 자리에 앉.아.”

점잖게, 그러나 명령형으로 말 하는 녀석에게 딴지를 걸기엔 시기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칼릭스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경계가 없어진 나의 생각을 경멸하는 것 같아 감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블리스의 갈고리 같은 손에 어깨를 잡힌 채 자리로 걸어가는 순간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이보다 더 내가 무너질 수 있을 것 같아?”

걸음을 멈추었을 때 관성적인 움직임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속에서 피가 솟는 것 같아. 나 좀 달래줘어…”

돈키호테의 대사를 외우듯 진중하게, 그러나 한껏 과대망상에 휩싸인 목소리로 녀석이 크게 외쳤다. 불에 댈 것처럼 한껏 달아오른 목소리로, 나의 치부를 들쑤시려는 듯이. 녀석이 블리스가 그날 욕실에서 내게 했었던 말들을 내뱉음을 알고 신음을 토했다.

블리스가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내뱉는 그 목소리가 학교 천장을 뚫고 저 하늘로 붕붕 떠 올라갈 것 같이, 기괴하게 들떠있었다.

뻣뻣하게 몸을 돌려 칼릭스의 눈을 마주 보자, 녀석이 아주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넘치지 않는, 회를 뜨는 칼로 잘라낸 듯 깔끔한 웃음 덩어리들을 흘려대며. 녀석은, 나의 굳어진 얼굴에 윙크를 하며 말했다.

“최고였어. 너의 달래주는 솜씨는.”

어깨를 잡고 있던 블리스의 손아귀가 어깨를 부셔버릴 듯이 잡아 비틀었다. 칼릭스의 비웃음에 반작용처럼 튕겨져 나가려는 블리스를 거세게 잡은 오른손이 부들거리며 떨려왔다. 블리스의 흥분이 이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부러 성급하게 녀석의 말을 받았다.

“고마워, 칼릭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에너지를 모두 끌어내어, 녀석의 말이 내게 별일이 아니라는 투로 말을 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공황상태에 빠져 신경질적으로, 반복적으로 그리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녀석은 나를 싸구려 취급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행동을 비열한 어떤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내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것일까, 그 생각에 저항할 수 없었다.

성난 소처럼 앞으로 달려나가려던 블리스가 나를 돌아보는 것을 느꼈다. 묘하게 신경을 긁어대는 공기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여자애들, 아니, 이젠 반 안에 모여있던 아이들이 우리를 돌아보는 것을 느꼈다.

숨통을 옥 죄이는 것 같은 공기. 즐거워 보이는, 아니,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 칼릭스의 시선 앞에 나의 거짓 위신을 세우기 위해. 녀석의 말에 나 자신을 옹졸하게 변호하기 위한 싸구려 증언을 내뱉어버렸다.

“너도 슬프거나 괴로우면 말해. 내가 우는 아이들을 잘 달래주거든.”





*





나는 직선이다. 블리스는 싸인 코사인 곡선이고.



나는 홀로 전진할 뿐이지만 블리스는 스스로 몸을 부딪혀 접점을 만든다. 그러나 칼릭스는 수직선이다. 단 한번의 접점만 있었을 뿐, 다시는 마주하지 않는다. 다시는…… 마주하지 않는다.

이번 주 시험을 마친 후에 곧 있으면 방학이 된다. SAT 준비와 에세이 준비, 대학 원서를 쓰느라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정말 이대로 녀석과의 접점이 생기지 않는다면, 정말 이 대로 그 녀석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대로 나는 녀석을 잃어도 상관 없겠는가, 정말 심장의 아주 작은 부분도 반응하지 않을 것 인가. 녀석에게 모욕을 받은 뒤로 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멍하니 새하얀 크림과 치즈가 뒤섞인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아 입에 넣으면서, 레이가 이번 주 시험이 끝나고 자신의 집에서 홈커밍 파티를 열겠다는 말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면서.

“근데 아까 무슨 얘길 한 거야? 칼릭스 그 자식은 또 왜 그래?”

오늘 받은 이 모욕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나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 책임을 칼릭스에게로 뒤집어 씌우지 않는 이상 부서질 것 같았다. 녀석은 왜 그렇게 나를 비난 한 걸까. 과연 녀석은 나를 비난할 자격을 가지고나 있는가. 녀석은 왜 그랬을까?

나는 이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대체시켰다.

블리스의 아버지인 프레드 아이언사이드가 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자금을 모으고 두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는가에 대해. 그런 아버지의 아들인 블리스에게서 정치적인 모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에 대해.

“야, 조이 너 무슨 생각해. 계속 묻잖아.”

레이가 어깨를 툭, 치며 물어왔다.

“응?”

“너 무슨 생각하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하고.”

“아…. 블리스의 아버지가 시장이 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생각하고 있었어.”

“에??”

정치적인 거라면 질색을 하는-오죽하면 정치가 집안의 자식인 블리스마저 질색을 한다- 녀석들의 반응에 조용히 웃자, 레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어디 아파? 갑자기 정치에 관심이 생겼어?”

또래의 녀석들보다 조금 더 조숙한 정신세계를 가진 레이는 평소에는 대단히 유머스럽고 이것 저것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었지만, 우리 패거리에 있는 녀석답게 정치만은 예외였다.

블리스의 선대 유전자를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 프레드 아이언사이드의 생김새, 매카시즘류의 포스터에 사용될 법한 얼굴이 떠올랐다. 블리스와 꼭 닮은 얼굴을 가진,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높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은근한 과시를 풍기는 남자. 블리스 보다 더 단단하고, 각이 잡혀있는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어깨를 가진 남자. 그는 블리스의 할아버지의 재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일으킨, 상당히 성공한 사업가였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그가 크게 일으켰던 사업의 CEO에서 물러나 집안의 전통대로 정치에 입문한 상태였다.

“아니, 그 아버지를 따라 블리스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가설을 세우고 있었어.”

“가설?”

“응. 거창하진 않아.”

“어떤 가설인데?”

조쉬가 입안에 넣은 스파게티를 오물오물 거리며 물어왔다. 그 옆에 앉은 블리스가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라가 망해.”

입안에 넣은 스파게티를 내 뿜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막은 조쉬가 콜록거렸다. 조용히 포크를 내려 놓는 블리스를 보며 아고스와 레이가 휘파람을 불어댔다.

“이봐, 그거 진담으로 한 얘기야?”

웃음을 지으면서 아마도 라고 말하자, 녀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난 정치가 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 나라 망할 거 걱정 안 해도 돼.”

“에? 진짜?”

“난 연방수사국에서 일할 거다. 내 능력으로는 연방수사국 국장도 가능하겠지. 온갖 곳에서 찬사가 쏟아질 거야.”

“하아……FBI가 망할 테니, CIA의 권력 독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하는가?”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레이에게 입술을 이죽거리며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블리스가 말을 이었다.

“너 먼저 철장에 집어넣어줄게.”

“오~ 그런 친절은 싫어. 마리화나와 술이 없인 시들어버리는 인생인걸.”

“미친 인생이지.”

옆에 있던 조쉬가 냉수를 들이키며 말했다.

“고마워 조쉬, 인생 조언 해줘서. 아, 이 얘기가 아니었지. 이 얘길 하려는 게 아니었어!”

호들갑을 떨면서 말 하는 녀석의 발음이 허공 위를 통,통 거리며 뛰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칼릭스랑 너랑 왜 그런 거야.”

울상을 짓던 레이가 표정을 바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때까지 레이의 농담에 실실거리며 웃고 있던 난 표정이 일순간 굳어버렸다.

“달래주다니? 누굴 달래줬길래 그런 건데?”

내 굳어진 표정을 보고서도 자신의 호기심을 감추려 하지 않으며 레이는 다그쳤다. 아고스와 조쉬를 돌아보니 녀석들의 표정에도 호기심이 가득하다. 그 모습이 다그치는 레이와 똑같았다.

“그런 일이 있어. 묻지마.”

한숨을 푹 내쉬며 묻지 말라고 레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지만 녀석은 굴하지 않았다.

“칼릭스랑 한동안 사이 좋은 것 같더니, 너 걔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몰라, 모른다니까.”

“이 자식 진짜 이상하네? 야, 뭔데. 아까 그 새끼가 너무 재수없어서 그래.”

“블리스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스파게티를 돌돌 만 포크를 입에 가져다 대며 아고스가 말했다.

“맞아, 아까 칼릭스가 말했던 속에서 피가 솟는 것 같아. 이 거 너 얘기 아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빌어먹을 자식아.”

빠른 속도로 스파게티를 비워낸 블리스가 포크를 내려놓고 양 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건들거리며 말하는 모습에서 진지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레이는 의심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금요일 날 조이랑 칼릭스가 같이 집에 갔었잖아? 너도 금요일에 조이의 집에 갔었고.”

“그래서.”

“그 날 조이와 칼릭스와 싸웠다면, 너도 같이 있었을 거 아냐.”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무슨 일인지 알려달라는 거지.”

“말 해줄게 뭐가 있겠어. 그냥 공부밖에 더 해?”

“숨겨야 하는 일이야?”

레이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물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진실 토크 쇼에 나가 블리스 아이언사이드와 거의 일년여간 섹스를 해왔다는 사실을, 그것도 처음 관계 맺었던 장소가 레이가 홈 커밍 파티를 열었던 녀석의 집인 걸 안다면? 경악하는 레이를 두둔하고 관계를 맺어왔던 블리스와 나를 비난하는 군중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환청을 들었다. 녀석이 아무리 의심을 해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숨길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별 일 아냐, 칼릭스가 우리 노는데 안 끼워줬다고 삐진 거지 뭐.”

“헛소리 하는 구나. 뇌에 곰팡이라도 핀 거냐? 진작에 사용 좀 하지 그랬어. 뇌가 망가져서 다음 수업 못 들어간다고 대신 말해줄게.”

블리스의 횡설수설 하는 말을 깔끔하게 씹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레이가 냉정하게, 그러나 설득하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이 거머리 같은 자식.

“친구로서 지나친 월권이야.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것보단 심각하지 않은 일이니까 그만 좀 물어봐.”

“왜?”

“왜냐하면, 너와는 상관 없는 일이니까.”

“블리스와는 상관 있고?”

집요하게 물어오는 레이를 의식해 스파게티를 포크로 마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노력했다. 당장이라도 입안에 스파게티 면을 집어넣어 오물거리지 않으면 얼굴 근육이 모두 굳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녀석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조용히 냉수를 들이키자 녀석은 다 알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군.”

그렇긴 뭐가 그렇다는 거야. 신경을 거스르는 말을 하는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지만, 녀석은 차가운 물이 담긴 컵을 굴려 이마를 문지르기만 할 뿐 그 이외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는 나에게 어깨를 으쓱 이며 남은 스파게티를 말아 입에 넣는 녀석은 더 이상의 궁금함도, 더 파고들 이유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이미 예전부터 블리스와 나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면, 저 참견 잘하는 자식이 말을 안 했을 리가 없었을 텐데. 멋대로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했다.

짜증을 내며 스파게티를 입안에 집어넣는데 갑자기, 레이 녀석 때문에 생각나버렸다.

늘 아주 얇은 무의식의 껍데기로 포장만 해 두었을 뿐, 실상은 뚜렷한 의식의 이야기. 블리스와 처음으로 섹스를 했던 날이 생각났다. 내 생애 가장 형편없는 실수를 저지른 날이었다.





그날은 금요일 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날도 지독히도 더웠던 여름이었고, 여름방학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였다. 레이는 아버지, 형인 마티와 이렇게 셋이 살고 있었다. 레이의 아버지는 잦은 출장을 다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 형제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파티를 열곤 했었다. 어른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레이의 집은 홈 커밍 파티를 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고, 레이보다 한 살 더 많은 마티는 파티의 모든 것을 주관하곤 했다. 어른의 눈을 피해 몰래 피우곤 하던 담배야 말 할 것도 없었고 마리화나, 코카인 등을 공수해 즐기곤 했었다. 말이 즐기는 거지 마티의 여자친구는 한번에 코카인을 들이키다가 병원에 실려갈 뻔한 적도 있다고 했다.

두 형제의 홈커밍 파티에 처음 초대 된 날이었다. 환각 상태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로 빈 방을 찾아 헤매는 커플들의 은밀한 데이트를 보며 나는 잔뜩 질린 채로 2층 레이 아버지 방의 서재에서 술이나 홀짝이고 있었다. 중독성이 있는 거라면 뭐든지 싫어해서 담배조차 피지 않았던 난 약에 취해 해롱거리는 남녀들이 굉장히 꼴불견으로 보였던 것이다.

도수가 높은 위스키 때문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서 서재에서 나와 비틀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본 뒤에, 멍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나왔을 때였다. 안주거리를 이층의 각 방으로 나르던 레이와 마주쳤다. 최대한 알코올의 작용을 의식하려 애 쓰면서 수고한다고 말을 건네는 나를 녀석이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자신의 3층 방으로 끌고 간 녀석은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서 녀석이 자신의 책상 서랍을 꺼내 샅샅이 살피는 걸 지켜보았다. 한참을 뒤적거리던 녀석이 네 번째 서랍에서 엄지손가락 만한 우표를 발견해내고는 환호성을 질러댔다.

“와우, 겨우 찾았다!!”

“뭘 찾았는데 그렇게 요란을 떨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골이 울리는 것 같아 얼굴을 찌푸리자 녀석이 사심 없는 미소를 띠며 우표를 내밀었다.

“우표?”

“응. 그거 우표야.”

라면서 킥 웃은 녀석은 어이없는 눈으로 녀석을 보는 내게 우표를 뒤로 뒤집으라고 했다. 녀석의 말 대로 별 의심 없이 우표를 뒤집자 녀석이 접착되어 있는 부분을 혀로 핥으라고 했다. 이 한밤중에 편지 쓸 일은 없어 보이고 저 서랍 속에서 먼지들과 꽤 오랫동안 뒹군 것으로 보인 이 우표의 뒷면을 핥는 게 꺼림직해서 고개를 흔들자 녀석은 웃으면서 계속해서 혀로 핥는 시늉을 했다.

“네가 해 이 자식아.”

“이봐, 내 장단에도 좀 맞춰줘. 왠 애가 이렇게 까칠해서야.”

파티를 연 주인이기도 한 녀석의 말이 조금 거슬려서 어쩔 수 없이 혀로 우표의 뒷부분을 핥자 그제야 녀석은 만족한 미소를 띄었다. 우표라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좀 의심스러운 건 접착력이 없는지 전혀 끈적거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우표가 워낙 오래돼서 그런 걸 거라며 별 의심 없이 손목을 잡아 1층 거실로 이끄는 레이를 따라 내려갔다. 1층의 고급스런 수제 가죽 쇼파 위는 떨어진 감자칩과 찌그러진 맥주 캔으로 난장판이었다. 테이블은 말 할 것도 없었다. 다른 반의 여자애들 몇 명과 블리스, 마약을 팔고 돌아다니는 위험한 부류로 분류되는 동급생 파렐이 쇼파 위에 앉아있었다.

나를 1층 쇼파에 대려다 준 레이는 그대로 부엌으로 가더니 안주거리를 안고 계단으로 올라가버렸다. 나는 약간 술에 취하기도 했고, 그 흥분으로 스스럼이 없어져서 의도적으로 맘에 드는 여자애 옆에 앉아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난 조이야. 일년 전에 전학 왔고…… 나 알지?”

아마 술기운을 빌어 인사를 했던 것이겠지만 여자애 역시 스스럼 없이 자신의 이름이 조안나라고 밝혔다. 여자애 역시 술 기운으로 약간 들 떠 있었고 약은 한 것 같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멋지다고 말 하는 조안나의 말이 빈 말인 것 같지 않아서 기분이 좋아진 난, 알코올로 인해 꼬이려 하는 혀를 의식하며 술에 취한 사람 치고는 굉장히 또박또박 말을 했던 것 같다. 난 여자애의 진한 하늘색에 가까운 눈동자 색이 굉장히 아름답다는 말을 어딘가에 비유해서 말 했었고 그 말을 들은 조안나가 깔깔거리며 너 참 재미있는 애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조안나와 그녀의 친구와 한참이나 수다를 떨다, 갑자기 머리가 굉장히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몸이 붕, 하고 떠오르는 기분에 고개를 좌 우로 크게 흔들었지만 그 기분은 나아지지 않고 더욱 심해졌다. 아까 우표를 핥을 때 거기에 뭔가가 칠해져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녀석이 나에게 뭔 짓을 한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휘청거리는 몸으로 그녀들에게 잠시 위에 좀 다녀오겠다는 말을 했다. 그 때부터 점점 정신이 오락가락 해지기 시작했다.

3층의 계단에 거의 다 올라갔을 때 몸이 휘청거려 난간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뒤로 넘어질 뻔 한 순간이었다. 뒤로 고꾸라지는 나를 잡는 단단한 품이 느껴져서 멍한 정신으로 뒤를 돌아보자 블리스 녀석이 얼굴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약했냐? 미치겠군.”

“몰..라. 아까…… 레이 자식이 우표 핥으래서… 핥았..는데……”

“LSD로구만.”

“….그거 중..독 되….는 거야?”

이런 위급한 순간에도 중독 걱정을 하고 있는 내가 황당했는지 녀석이 나를 특이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뭐, 별로 중독성은 없어. 좀 들어가서 쉴래?”

“응.”

녀석이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집어 넣어 거의 끌다시피 해서 어느 작은 객실 안에 들어갔다. 들뜨고 즐거운 기분과 함께, 정신이 멍해져 이래서 마약을 하나 싶었다.

블리스 녀석은 이 학교에 처음 전학 왔을 때 나에게 말을 걸어 준 최초의 인물이었고, 평소에 스킨쉽이 많은 녀석이긴 했지만, 자신의 무리에 나를 끼워준 나로선 일종의 고마운 친구였었다. 약에 취한 나를 챙겨주는 게 고마워서 헤실 거리는 나를 블리스가 묘하게 내려다 보았다. 침대 맡에 나를 앉혀두고 블리스는 객실의 문을 닫고는 주머니에 담겨 있던 담뱃갑에서 쿠바에서 직수입했을 법한 시가를 꺼내 물어 불을 붙이며 한 모금 깊게 빨았다. 오른쪽 치아로 불량스럽게 시가를 문 채, 독한 담배 연기를 뱉어 내며 녀석이 물었다.

“기분은 안 나빠?”

“응. 너..무…… 좋아.““술에다가, LSD에다가 너 잘 못 되면 황천행인 데 그래도 기분 좋아?”

“이 세상! 염병할 세상 따위 죽으면 그만이야!”

“돌겠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킥킥거리며 웃는 나를 바라보는 블리스의 표정이 녀석답지 않게 난감해 보였다. 사실, 그건 어느 누가 보더라도 참담한 풍경일 것이었다. 술과 약에 취해 평소의 그답지 않게 들떠있는 소년을 보는 것은.

“…담배라도 필래? 맛이 간 사람에게는 직빵이지.”

발작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쉰 녀석은 내 뒷목을 잡아 더 이상 고개를 흔들지 못하도록 고정 시키며 입에 물려있던 시가를 입가에서 빼냈다. 입가에 시가를 물려준 녀석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피우라고 말 했다.

“블, 블리스.”

“왜.”

“이런 게… 해방이야아?”

분명 독하디 독한 쿠바산 시가였을 텐데도 고통에 가까운 자극은 전혀 없었다. 멍청한 말을 해대는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블리스는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피우지는 않고 필터 부분을 잘근 거리며 초조하게 씹어대던 녀석이 말했다.

“그래 해방이지. 마약, 섹스, 폭력, 술과 담배. 해방이지. 해방되니까 좋아?”

“아아아……너무 답답했어.”

“뭐가?”

“모, 모든 것이.”

블리스의 얼굴이 여러 개로 보였다. 블리스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여러 개가 되었다가 하나가 되었다. 다시 블리스가 여러 개로 분산되었다. 귀신이 장난을 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 녀석의 얼굴을 잡기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것 같았는데, 갑자기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날 수 있을 것 같아.”

“뭐?”

“뛰..어내리면…… ㅅ..슈퍼맨처럼.”

필터가 타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시가를 빨아대는 나를 저지하기 위해 녀석이 내게 다가 왔을 때. 녀석의 배에 무거워진 머리를 박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타 들어가는 시가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구고, 중얼거리는 내게 귀를 기울이기 위해 녀석이 몸을 낮추었다. 녀석이 내 말에 뭐라 말했던 것 같은데 그 말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떤 대화였는지, 비밀이었는지. 어떤 고백이었는지도.

멍하니 눈을 뜨고 있다가 다시 한번 느리게 눈을 깜빡였을 때였다. 녀석이 앓는 소리를 내며 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어대는 녀석의 입술이 부어있었다. 낯설었다. 왜 이 녀석이 내 위에서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의아한 기분이 든 순간 끊임없이 엉덩이 사이로 뭔가가 들락거리는 것을 느꼈다. 커다랗고 뜨거운 것이었다. 분명히 나는 계속해서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다시 한번 느리게 눈을 뜨자 모든 게 어렴풋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블리스와 내가 섹스를 하고 있었다.

저항을 해야 하는 건가. 합의하에 일어난 일인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해본 섹스는 약 기운을 빌려 통증도 없었다. 블리스의 페니스가 전립선을 짓이길 때 쾌락만 느꼈다. 둔하고 지릿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전율하는 순간에도 내 위에서 허리를 흔들고 있던 블리스 너머의 천장은 빙빙 돌고 있었다. 너무 빠른 속도로 돌아 눈이 어지러워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자 깜깜한 우주 속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순간에, 우린 서로의 육체가 탐이나 섹스가 하고 싶어진 거였을까.





새까만 우주. 헐떡이는 신음, 물고 깨물고 터트리던 서로의 육체. 생각해보면, 그 모든 원흉이 내게 LSD가 처발라진 우표를 핥게 했던 저 레이 녀석이다. 그 우표가 아니었다면, 블리스와 내가 이런 관계까지 오긴 했을까? 이제 막 마지막 면발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는 녀석이 갑자기 미워져서 이야기의 모든 흐름과 관계없이 녀석에게 이상한 말을 해버렸다.

“너 때문이야. 너가 그 때 그 짓만 안 했더라면!!”

레이에게 삿대질을 하며 흥분하는 나를 당황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녀석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혼자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버렸다. 네가 그 때 그 우표로 장난만 치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렇게 골치 썩을 일은 없을 것 아냐!!





*





어머니의 차를 타고 레이의 홈커밍 파티에 왔을 때, 파티는 한창 무르익은 상태였다. 어머니에게 내일 데리러 오지 말란 말을 하고 녀석의 정원 안으로 들어 오자마자 처음으로 본 것은 정원을 환하게 밝힌 조명이었다. 밤을 환하게 밝히는 자극적인 조명에 눈이 시려 살짝 찌푸릴 정도였다. 검은 하늘을 밝은 빛으로 뒤덮는 조명등 아래에서 바비큐를 굽는 마티와 그의 여자친구가 보였고, 그 뒤로 마치 급식을 받는 것처럼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이 보였다. 들떠서 요란하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녀석의 집 뒤에 있는, 작년 가을에 집 뒤에 있는 정원을 개조해 조그맣게 만들어진 수영장으로 걸어갔다.

수영장 주변엔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조명등 아래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클럽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리듬에 맞춰 춤추는 사람은 없었지만 흥겨움에 머리를 까닥이며 사람마다 바비큐가 담긴 접시를 손에 들고 있었다. 보나마나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나올 것이었다. 쓰레기 처리나, 파티의 뒷정리 담당은 레이와 레이의 친구인 우리들 몫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조금 속이 쓰렸다. 게다가 속이 좋질 않아서 바비큐 냄새가 역겹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요 근래 기분과 함께 소화 능력도 같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시험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화불량에 조쉬가 임신을 한 게 아니냐고 농을 걸어 안 그래도 바닥을 기던 기분이 지하를 뚫고 들어갔다.

집 앞의 정원보다 수영장 근처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이웃집 어른들의 눈을 의식해 눈에 띄지 않는 수영장 근처로 몰려온 것이었다.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도 있었고, 반바지를 입고 수영장 난간에 앉아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이 레이의 동기와 마티의 동기였지만 개중에는 이미 졸업을 한 사람들이나 9학년짜리 여자애들도 보였다. 모두 레이가 초대한 여자애들이었다. 파티를 워낙 자주 여는 녀석이지만 녀석이 불러들이는 여자애들은 매번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확실히 레이 녀석은 비뚤어진 면으로 조숙한 자식이다. 우리 다섯 중에서 가장 여자경험이 많은 녀석이었고, 우리학교 전 학년 학생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는 녀석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내 신문의 어설픈 기자 노릇을 하고 있는 녀석은 자신만의 특정 코너에 교내 학생들의 확인되지 않은 루머들을 이니셜을 이용해 싣곤 했다. 스니퍼의 페니스 사이즈에 대한 소문이 전교에 퍼지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레이 자식의 신문 기사의 영향이 컸다. 아고스와 블리스, 조쉬는 이 점잖지 못한 코너에 대한 선생들의 태클이 없는 것에 신기해했지만, 난 레이가 여태 소송 한번 당하지 않은 게 더 신기했다.

“왔어?”

오늘은 또 누구의 뒷담화를 얘기하는 건지, 수다에 열을 올리던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척 손을 벌려 인사를 했다.

“응. 파티 여느라 애썼겠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근데, 아직도 속이 안 좋은 거야? 마티가 바비큐 안 줬어?”

“아니, 그냥 먹기 싫어서. 속도 안 좋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수영장 스탠드에 앉아 스니커즈를 벗어 옆에 놓고 맨 발을 물 속에 담갔다. 옆에서 여자애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하며 손을 허리 뒤로 짚으며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발에 차갑게 닿아오는 차가운 물 때문에 그제야 역겨운 바비큐의 냄새가 조금은 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프기 시작할 때는 별게 다 역겨워지는데, 파티에 오지 말고 그냥 집에서 쉴 것을…… 후회가 됐다.

눈을 감고 물 속에 담근 발을 계속해서 휘적거리자, 레이 녀석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곤 다시 여자애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승마클럽에서 사귀게 된 여자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우아함이나 고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레이 자식이 말을 탈 줄 안다는 것은 블리스 자식이 문학에 소질이 있는 것처럼 굉장히 의외이고 위화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승마클럽을 다닌 모양인데, 걸핏하면 열살 무렵에 있었던 그녀와의 일에 대해 떠들곤 했다.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와 꾸밈없는 얘기엔 과장이 없어서 녀석이 꾸며낸 얘기로 들리진 않았다. 녀석 나름대로 순수했던 첫사랑 이야기겠지만 그걸 열 번도 더 넘게 들었던 나로선 지겹기 그지없는 얘기였다.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어필하려는 것이었겠지만, 그걸 지겹게 들은 나로선 사람 마음을 휘어잡으려는 불순한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뭐해? 안 놀아?”

갑작스럽게 손가락으로 꾹 이마를 눌러 오는 바람에 고개가 팍 뒤로 젖혀졌다. 블리스 자식이었다.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갈 뻔 한 것을 두 손으로 겨우 지탱했다. 몸의 중심을 잡고 있던 두 손 중 하나로 녀석의 손을 쳐내면서 눈을 떠 녀석을 노려봤다.

“목 디스크 걸리면 어떡할 뻔 했어.”

“내가 책임져야지 뭐.”

마치, 내가 평생 책임져 주마라고 말 하는 것 같아 녀석을 샐쭉 노려보자 녀석이 피식하며 웃었다. 허리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던 녀석은 슬리퍼를 벗어 물에 발을 담그며 내 옆에 앉았다.

“아직도 소화 잘 안돼?”

“응. 시험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끝났는데도 계속 이래. 신경 쓰이는 게 많아서 그런 가봐.”

그 신경 쓰이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는 녀석은 이 신경 쓰이는 화제에 대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피하려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번 방학에 특별한 계획 있어?”

“6월 SAT준비하고 나서 잡은 계획은 없는데? 아, 계절학기 들을 생각이야.”

“삭막하긴… 난 시험 치르고 나서 캔자스주에 갈 건데. 재미있겠지?”

“그렇겠지.”

시큰둥하게 블리스의 말을 받자 녀석의 표정이 난감한 듯 미묘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녀석이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나 보다. 블리스는 작년처럼 함께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작년에 겨울 방학 중 이 주간 녀석의 고모가 사는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갔었다. 그 이주의 기간 중 사일 동안 겨울의 우기에 겹쳐 계획했던 대로 관광지를 돌아다니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아주 즐거웠었다. 안개가 잔뜩 낀 아침에 크루저를 타고 금문교 앞에서 찍었던 사진이나,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 버클리 대학과 스탠포드 대학 건물 밖에서 찍었던 사진은 지금도 내 방 책상 위의 액자에 걸려있다. 차이나타운에서 먹었던 중국 음식의 맛과, CD로만 듣던 MTT의 관현악단 연주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블리스는 친척이 많은 편이었기에 나와 달리 방학을 이용해 자주 여행을 다니곤 했었다. 미국에는 친척이 없는 까닭에 방학 기간에는 고작 해야 캠프에 다녀오는 나로서는 녀석이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잘 다녀와.”

하지만, 작년 겨울의 기억이 아무리 즐거웠어도, 올해에는 여행을 가고 싶지 않았다. 녀석의 뻔히 보이는 의도에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블리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같이 가자고 말하는 거야.”

“싫어. 계절학기 듣는다고 했잖아.”

“외할아버지 농장인데, 말도 탈 수 있고, 비행기도 탈 수 있어. 나 자격증 있는 거 알잖아. 즐겁게 해줄게”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녀석의 귓가에 레이가 들을 수 없도록 조그맣게 속삭였다.

“즐겁게 해줘? 애인이 된 것처럼 말하지 좀 말지 그래.”

녀석의 집요한 눈을 피해 눈을 감으며 상반신을 지지했던 두 손을 머리에 받치며 드러누웠다. 물이 튀었는지 등에 축축한 기운이 닿아왔다. 오늘같이 기분이 나쁜 날에는 블리스가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걸 견딜 수가 없다. 헤어지기 직전의 권태기에 다다른 연인도 이런 식으로 말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말 하지 않으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짜증스럽게 말 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태연히 눈을 감고 차가운 물에 담근 발을 흔들어댔다. 화풀이로 내 얼굴의 볼 살을 잡아 늘리려는 듯, 얼굴의 솜털에 닿은 블리스의 따듯한 손끝이 느껴졌다. 머리를 받치던 두 손 중 오른손으로 녀석의 손끝을 쳐냈다.

“하지마아.”

노려보며 분명히 말하자 얼굴을 찌푸리며 녀석이 말했다.

“너 또 그거 하냐?”

“그거?”

“……피나오는 거 있잖아.”

“……”

“아래로 피 나오는 그거 말이야.”

아, 진짜 참을 수가 없다. 물에 담갔던 발을 물 속에서 빼내 장난스럽게 얼굴을 찌푸린 녀석의 아랫배를 발로 차버렸다. 수영장 스탠드 끝에 아슬아슬하게 앉아있었기에 당연하게도 첨벙 소리를 내며 물 속으로 떨어졌다.

깊진 않았지만, 갑작스런 충격으로 물 속에서 허우적대던 블리스를 보는 내 입 끝엔 사악하게도 미소가 걸려있었다.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던 레이가 의자에 앉아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놓친 것도 모르고 배를 잡고 웃는 걸 들으면서, 갑작스런 소란에 나와 물에 빠진 블리스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된 걸 느끼면서 나도 따라 웃었다.

멍청하게도, 웃느라 물 속에서 정신 없는 척 하며 음흉한 계획을 짜는 녀석을 예상하지 못했다. 큭큭거리며 웃느라 정신 없는 나의 나머지 발을 잡아당긴 블리스의 손 끝을 느낌과 동시에 물속으로 첨벙, 하고 빠져들었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끌려간 난, 손 쓸 순간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물을 잔뜩 마시며 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복수를 하겠다는 듯 왼 발을 잡은 채로 물 속에서 걸어 다니는 녀석 때문에 허리를 물 속에서 일으킬 수가 없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물과 수영장 바닥에 설치 된 스피커에서 빠른 비트로 울리는 클럽음악에 정신이 없었다. 녀석에게서 자유로운 오른 발로 녀석의 어깨를 마구 차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겨우 몸을 굽혀 오른 발을 잡고 있는 녀석의 손을 풀려고 허우적거렸다. 물 속에서 눈이 마주친 녀석은 잔뜩 질려 있는 나를 보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잡아채듯 허리를 잡은 블리스의 손아귀가 느껴지고 곧이어 물 밖으로 상체를 내밀 수가 있었다.

“헉, 허억… 쿨럭…. 헉…”

녀석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듯이 안겨 쿨럭거리며 물을 뱉어내며 녀석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제야 녀석은 나의 반응이 과장된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허리를 강하게 잡았던 손에 힘을 풀며 말했다.

“어…… 미. 미안.”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아무렴 내가 널 죽이겠냐.”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었기에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녀석에게 화를 낼 수는 없어 씩씩거리며 수영장 주변을 살펴보자, 맙소사 수영장 가운데까지 와 있었다. 아무리 작은 규모라고 해도 적어도 열 발자국 이상 걸어야 할 텐데. 갑작스럽게 차가운 물에 빠진 위기감으로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코 속에서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아 코를 훔치며 여전히 허리를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며 레이가 앉아있는 편의 반대 편으로 걸어갔다. 따라오려는 블리스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소리치며 여전히 큰 소리로 웃고 있는 레이 녀석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스니커즈도 챙기지 않은 채 씩씩거리며 맨발로 녀석의 집 뒷문으로 들어가버렸다. 철벅거리며 달라붙는 바지와 티셔츠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레이 녀석은 당해도 싸다.

카펫이 깔린 거실을 피해 광택이 나는 반질반질한 원목 위를 물을 질질 흘리며 걸어갔다. 레이의 드레스 룸이 있는 삼층까지 걸어 가는 내내 사람들이 왜 그런 꼴이 됐냐고 물어왔지만, 귀찮은 내색을 내며 대충 대답해버렸다. 입고 있던 속옷까지 젖어 레이의 속옷이라도 빌릴 셈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삼각만을 고집하는 자식이었다. 녀석이 빌려준다는 얘기도 안 했지만, 홀딱 젖은 채로 마르기를 기다리는 수는 없었다. 삼각 브리프라도 입어야 했다.

드레스룸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고는 문 뒤에 달린 전신 거울을 봤다. 청바지가 무겁게 물에 젖어 찝찝하게 다리 위에 달라 붙어 있었다. 검은 색의 티셔츠도 마른 몸의 윤곽을 뚜렷하게 드러나게 할 정도로 달라 붙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있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 브리프와 함께 청바지를 함께 벗어버렸다. 살에 달라붙듯 축축하게 젖어있어 벗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티셔츠도 아무렇게나 벗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녀석의 방안을 돌아다니며 뭔가 젖은 몸을 닦아낼 만한 것을 찾았다. 흰 색의 그라운드 티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땀 냄새 나는 그것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고 젖은 몸을 닦아냈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부모님에게 속옷이 없다는 이유로 데릴러 와달라는 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레이의 속옷이 아무리 수영복을 떠올리게 하는 타이트한 삼각 브리프라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은 상태였기에 녀석의 브리프를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속옷을 안 입은 상태에서 바지를 입으면 성기의 모양이 여실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정리 정돈도 제대로 되지 않은 드레스룸의 구석 구석을 뒤졌다. 마침내 속옷을 담아 둔 서랍을 발견해 냈을 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변태인 자식.”

대부분의 브리프는 다리와 허리선이 이어지는 이음새 부분이 굉장히 얇은 야한 삼각 모양새였다. 게다가 간혹 가다 형광색으로 반짝거리는 브리프와 망사로 만들어진, 속옷의 구실을 하긴 하는지 의심스러운 속옷이 뒤섞여 있었다. 내 친구이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개 중 가장 평범한 검은 색의 타이트해 보이는 재질의 브리프를 골랐다. 녀석이 입던 속옷을, 그것도 야해 보이는 속옷을 입는 건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혀를 차면서 허리를 굽혀 브리프 사이에 오른 쪽 다리를 꿰어 넣었다. 내가 레이와 비슷한 체격이었기에 망정이지 조쉬 폴슨 같은 자식이 입었다면 그 두꺼운 허벅지가 들어가는 순간 속옷이 찢어질 정도로 타이트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속옷을 입는 걸까? 힘겹게 오른쪽 다리를 집어넣고 나머지 다리를 꿰어 넣기 위해 왼 발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곧 이어 문이 열리며 남자와 여자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돌처럼 굳어지려는 정신을 추슬러 급하게 왼 발을 브리프에 끼워 넣고 속옷을 끌어올리려고 낑낑대는 순간,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 밖에서 들어오려는 여자와 마주보는, 익숙한 뒷모습이 작게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떨고 있었다. 욕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브리프를 힘껏 끌어 올린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젠장……

당황한 나와 마찬가지로 남자, 아니, 칼릭스도 당황한 듯이 보였다.

서로 멍 하니 얼굴을 마주보는데, 민망함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직 문 밖에 서 있는 여자애가 문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막아선 녀석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벙끗 했지만, 그다지 상황이 적절하지 않은 걸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 오…옷 갈아입고 있었어.”

칼릭스의 시선이, 타이트하게 페니스를 감싼 브리프를 향한 것이 느껴졌다. 이 , 브리프에 대해 설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녀석과 내가 이런 상황에 대해 부연설명을 덧붙질 정도로 친근한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전신을 훑는 시선이 민망함에 젖어 있어 녀석도 나만큼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딱딱하게 굳은 녀석이 안을 들여다 보려는 여자애를 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아, 그래…… 미안.”

그 한마디를 내뱉고는 녀석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여자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쾅 소리를 내며 닫혀진, 녀석이 나간 문 뒤에 걸려있는 전신 거울의 나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돌처럼 굳어있었다.





젠장! 염병할!

역시, 이 파티에 오지 말 것을. 레이 녀석이 가장 아끼는 티셔츠와 바지만을 골라 갈아입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민망한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문을 잠글 것을. 뒤늦은 후회를 하며 나는 소리를 지르며 흥분으로 방 안을 거칠게 방방 뛰어다녔다. 레이의 서랍에 있는 속옷을 모두 찢어버리고 모두 새로 사주고 싶은 충동에 서랍을 열었다가 모두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쾅! 하고 서랍을 닫아버렸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마주치게 되는 칼릭스와 나, 그걸 어색해 견디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났고, 이런 민망한 장면을 더 이상 웃으면서 넘기지 못하는 녀석과 나 사이도 화가 났다. 블리스가 나를 물에 빠트린 것과 레이의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의 속옷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분노가 분노를 불러 일으켜 온 정신이 화로 가득 차는 느낌에 씩씩거리면서 나는 바닥에 털썩 앉아버렸다.

민망해, 쪽팔려 죽겠어. 거울 속의 나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왜 하필 그 자식이지?

좀 전에 흘렸던 물이 차갑게 엉덩이를 적셔왔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앉아있었다. 왜 이 즐거운 파티에 나만 이렇게 분노로 이성을 잃어가는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몸이 좋지 않은데 파티에 온 것부터 잘못이었다. 차라리 생각을 하지 않으면, 화도 나지 않을까 싶어 차가운 바닥에 앉아 급하게 몰아 쉬던 숨을 길게 쉬려 노력했다. 몇 분 동안 주먹을 꽉 쥐고 억지로 숨을 천천히 내쉬고 들이쉬기를 반복하자 안에 덩어리져 있던 화가 스르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숨을 내 쉴 때마다 화가 함께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기에 계속해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내 쉬며 머리를 흔들어 좀 전에 병적으로 화를 내는 나 자신에게 의문을 품었다. 왜 그렇게 분노가 치밀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도 이렇게 폭력적으로 분노를 발산하는 면이 있었나,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나의 취향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될 칼릭스를 염려해서? 그렇다면 블리스와 잠을 자는 나의 취향에 대해서 진작에 염려를 했어야 한다.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에 스스로 달래며 결론을 내린 것은 결국엔 화가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화가 나지만 진정해야 한다. 솔직히 별 일도 아닌데 괜한 흥분을 하고 있지 않는가.

정신이 조금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좀 전에, 방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칼릭스와 여자애에 대한 생각이 났다.

아마도, 방 안에 들어오려 했던 여자애는 진이었던 것 같다. 좀 전에 제 정신이 아니어서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목소리가 기억을 더듬자 떠올랐다. 허스키하지만 높고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기분 좋은 울림을 내며 웃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 들떠 있었다. 그 들뜬 이유가 술 때문인지 아니면 칼릭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왜 그 둘이 비밀스럽게 3층의 드레스룸으로 들어왔는가는 생각을 거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오해 일 거라는 염려를 할 필요도 없다. 둘이 사귀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같이 밤을 즐기는 진지한 관계가 됐을지도 모르고.

생각해보니, 칼릭스가 여자애들과의 관계를 즐기지 않는 녀석은 아니었다. 파티에서 여자 파트너 없이 등장했던 적도 없는 녀석이다. 보수적인 녀석이었다면 진작에 블리스와 내가 섹스하는 걸 보고 엄청나게 경멸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었겠지. 전에, 블리스의 집에서 섹스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칼릭스를 만났을 때도 여자와 ‘그 짓’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라며 남자와 ‘그 짓’을 하는 나를 조롱하지 않았던가.

갑작스럽게 칼릭스가 자유분방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해졌다. 녀석이 여자를 안는 것은 당연한 얘긴데, 나는 마치 섹스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듣는 아이처럼 그 사실이 굉장히 낯설고 민망하고 조금은 두렵게 느껴졌다. 칼릭스가 여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그 동안 너무 남자와 섹스 하는 것에 길들여져 그런 걸까, 아니면, 칼릭스가 블리스와 같은 식으로 여자를 안을 수도 있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서 그런 걸까. 칼릭스도 일그러진 얼굴로 흥분을 종용하고, 여자의 벗을 몸을 상상하며 자위를 할까.

그 벗은 여자애는 방금 손을 잡고 들어올 뻔 했던 진이라는 여자애고. 둘은 은밀한 시선을 나누며 점심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언제나 서로의 몸을 쓰다듬을까. 칼릭스와 진이 벌거벗고 엉켜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좀 전부터 좋지 않던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와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혐오스런 느낌이 지워지질 않았다. 칼릭스도 나처럼, 블리스와 내가 엉켜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구역질이 치밀었을까.





1층에서 브랜디를 한 병이나 비운 뒤, 휘청거리며 3층 가장 구석의 객실로 들어갔다. 누구의 간섭도 받고 싶지 않아 문을 잠그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어둠을 밝힌 조명이 환하게 비취는 창문의 틈으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들떠있는 소리가 기분 나빠 커튼을 쳐버리자 한결 소리와 빛이 줄어들었다.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도 계속해서 브랜디를 비웠던 탓에 속이 울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잠을 자버리면 한결 기분이 괜찮아질 것 같았지만 잠은 오질 않았다. 취기에 빠진 상태일수록 잠이 오질 않았다. 이대로 계속해서 이상한 생각에 잠길까 봐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분이 나쁘거나 눈물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줄곧 해왔던 ‘한국말 생각하기’를 했다.

예전에 한국어와 영어를 한참 혼용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물집을 영어로 워터하우스라고 생각했던 난 아버지의 라이터를 가지고 장난치다 데여서 생긴 물집을 보며 워터하우스가 났다고 옆집에 살던 히스패닉 소년에게 계속해서 말했던 것 같다. 그 애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고 답답해진 난 영어도 못 알아듣는 멍청이라고 욕을 했었다. 당장은 내가 옳았던 것 같지만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엄마에게 말 했을 때 엄마는 물집은 waterhouse가 아니고 blister라며 옆집에 사는 소년에게 사과하고 오라고 그 애의 집 앞에서 벨을 눌러줬다. 사실은 네가 멍청이가 아니고 내가 멍청했다며, 나 자신에게 화가 난 상태로 사과를 했었다.

나는 조금씩 잊어간다. 몇 일 전에는 ‘Triangle’이 한국어로 뭐라고 말하는지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가끔씩 언어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 필요성마저 가끔 잊어버린다. 가족과 영어로 대화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면서-어머니와는 여전히 한국어로 대화하지만- 나는 너무도 쉽게 잊어버린다. 거센 비바람에 거친 산이 서서히 풍화되듯이 나의 언어는 조금씩 뭉뚱그려진다.

한국어 낱말을 계속해서 생각하다가 방 안에서 점점 빛이 사그라져가는 형광시계를 봤다. 취기 때문에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1시가 넘은 것 같았다. 이 시간쯤 되면 차를 끌고 집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 경우는 정상의 범주에서 파티를 즐겼을 경우이다. 술을 즐긴 사람은 비밀스런 파티의 동맹을 위해 아래층에서 떠들고 있을 것이고, 약을 즐기는 사람은 좀 더 비밀스러운 지하실에서 파렐 녀석이 공수해 온 온갖 약들을 즐길 것이다. 어떤 남녀는 아무 방에나 들어가 술이나 약에 취해 혹은 맨 정신으로 지금쯤 한참 섹스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칼릭스와 진처럼.

속이 쓰린 느낌에 몸을 태아처럼 웅크렸다. 취기가 미친 듯이 올라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 기분이 나빠져서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녀석이 여자의 얇은 발목을 좌우로 벌려 잡고 허리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상상됐다. 위액이 목 끝까지 넘어와 머리를 흔들자 이번에는 칼릭스의 발기한 페니스가 떠올랐다. 녀석의 페니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떠올랐다. 페니스의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 획기적이지 않은 이상, 그게 그 모양 아니겠는가, 그게 그거지. 별 볼일 없을 텐데. 페니스가 한국어로 남근이었던가? 빌어먹을, 이젠 별의별 생각이 다 나는구나. 술 기운을 빌려 떠오른 상상이 혐오스러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제발, 제발, 다른생각을 하고 싶어.

밀물처럼 밀려드는 생각에 예민해질 까봐 TV를 틀었다. 새까만 방 안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TV를 틀어 놓은 모습은 평화적이었다. 텔레비전 속의 풍경은 고즈넉하고 적막했다. 난해해 보이는 예술 영화였다. 이 저조한 새벽 시간대에 방영해도 돈이 아깝지 않을 영화. 보통의 경우에는 에로영화 따위나 방영할 텐데 특이한 케이블이었다.

취기가 올라 거친 숨을 내 쉬었다. 숨결에서 독한 알코올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토 할 것 같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볼륨을 높이고 배우들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들이나 배우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장식 품을 보는 것 같은 소유욕을 일게 했다. 마티니를 음미하는 청년의 도발적인 눈빛. 혈색이 도는 건강해 보이는 피부와 짙은 금발의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반 곱슬로 귀 밑으로 아무렇게나 구부러져 있었다. 부유해 보이는 청년은 블리스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단 한가지 다른 게 있다면 텔레비전 속의 주인공은 진하고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블리스의 눈은 색소가 옅었다. 산호섬을 둘러싸고 있는, 육지로 향할수록 옅어지는 바다물의 색과 같았다. 그래서 바닷가에 홀로 떠있는 섬처럼 녀석의 검은 동공은 스쳐 지나가는 시선에도 확연히 눈에 띄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녀석의 동공이 확장 되는지, 섹스를 하는 중에 마주 볼 때면 동공 안에서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거울을 마주 보며 섹스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있는 나를 마주 본다는 것은 거울을 보며 섹스 하는 것 보다 덜 음란하며 더 계시적인 느낌이 든다. 공중에서 부양하는듯한 극명한 오르가즘. 그 촉촉하고 충만하게 살아있는 느낌은 비록 기숙사 안의 좁은 일인용 침대에서 맞는 답답할 정도의 고독감이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극명하게 확인 시켜주는 기분을 선사한다. 마약과는 다른, 두 사람이 함께 붙어있을 때에야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그런 것을 지금 칼릭스와 진은 함께 느끼고 있겠지.

빌어먹을, 원점으로 돌아왔다.

목구멍까지 솟아오르는 토기에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으며 침대에서 뛰어 내려왔다. 토기를 참느라 눈가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었다. 둑이 터지듯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목구멍에서 위액과 음식물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바닥을 토사물로 더럽히며, 올라오는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에 다시 한번 구토를 했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계속해서 구토를 했다. 탈진 할 것처럼, 모두 비워 내버릴 것처럼.

뭔가가 안에서부터 물컹하고 샘솟아 올랐다. 흥분한 육체처럼 달아오른. 마치 마약처럼 몽매한 두뇌는 잊어버리게 되는. 아아, 숨이 막혔다.

속에서 피가 솟는 것 같아. 나 좀 달래줘어.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녀석의 얼굴에서 내 뱉어지는 따듯한 숨결과 눈물. ‘숨결’이 한국어로 뭐였지. 한국어로 백인들과 얘기하고 싶어. 블리스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괴하게 들뜬 그 목소리가 말했다. 최고였어. 너의 달래주는 솜씨는. 화가 난 목소리가 말했다. 너도 슬프거나 괴로우면 말해. 내가 우는 아이들을 잘 달래주거든.

블리스가, 아니, 칼릭스가 울면서 애원했다. 속에서 피가 솟는 것 같아. 나 좀 달래줘어. 내가 대답했다. 내가 우는 아이들을 잘 달래주거든. 내가 우는 아이들을 잘, 아주 잘 달래주거든.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생각에서 해방되고 싶다.

왜 이렇게 가슴이 타는 걸까. 그만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때 속은 조금 쓰렸지만 모든 것이 평안했다. 내 심장의 파동이, 그 편안한 파동이 뚜렷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신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 되는 느낌이었다.

잠을 못 자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기분이었다. 내가 침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어제 브랜디 한 병을 비웠음에도 내 육체가 이렇게 가벼워진 것에 의아함을 느끼고 내가 지금 죽어있는 걸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창에 쳐진 커튼으로 인해 지금이 아침인지, 오후인지 분간이 가진 않았지만, 방안에 남아있는 서늘한 기운으로 보아 아침인 것 같았다.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7시 34분. 생각보다 이른 아침이었다.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몽환적인 기분이 들었다. 둔하게 올라오는 속이 쓰린 느낌에 물을 마시고 싶어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발 바닥에 차갑게 닿는 매끄러운 원목의 감촉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얼굴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평안한 꿈에서 깨는 기분이다.

바닥이 토사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위액의 쓴 맛이 입안에서 느껴졌다. 술을 마신다고 해도 이렇게 구토를 할 정도로 마셔본 적이 없었는데, 게다가 남의 집에서 바닥을 어지럽힐 정도로 이성을 잃은 적도 없었는데. 어지럽혀진 바닥을 보자 갑자기 숙취가 밀려왔다.

어떤 친구가 집안을 이렇게 토사물로 더럽혔는데 괜찮다며 등을 두들겨 줄까. 빈혈까지 오는 느낌에 머리를 좌우로 흔들자 지잉- 하고 골이 울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치워야 했다. 이 더러운걸 모두 화장실 변기에 넣어 물을 내리든, 쓰레기봉투에 담든, 어떻게든.

집의 주인장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황급히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뭔가 쓸어 담고 닦을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집안에서 헤매는데 집 안이 굉장히 조용했다. 하긴, 어제 밤에 그 난리들을 쳤을 텐데 지금까지 잠을 안 잔다면 말이 안 된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으며 1층에 있는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이곳 저곳을 뒤지다가 겨우 쓸어 담을 만한 걸레와 아크릴판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밖으로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뭐해?”

“으악!”

갑자기 앞을 막는 커다란 인영에 놀라 아크릴판을 떨어트려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아크릴판과 소리를 지른 나에게 오히려 놀란 블리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이렇게 놀래.”

“…소리 좀 내고 다녀! 진짜 놀랬잖아.”

“네 반응에 내가 더 놀랬다.”

무표정하게 땅에 떨어진 아크릴판을 주워 든 블리스가 말했다.

“이건 뭐 하려고.”

“뭐 좀 주워 담을게 있어.”

“벌써 청소하려고? 애들 깨거든 하지?”

“아, 그런 게 있어. 빨리 줘.”

“그런 게 뭔데.”

아침부터 청소한다고 이상한 도구를 들고 나가는 내가 수상했는지, 블리스 녀석이 아크릴 판을 허리 뒤로 숨기며 내 눈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라봤다. 뭔가 캐내고 말겠다는 듯 의지마저 느껴지는 눈빛이 맘에 들지 않았다.

“…토했다. 네가 치울 것도 아니잖아. 빨리 줘.”

“토? 너 어제 술 마시고 있었어? 계속 찾았는데도 없더니… 술 마시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혼자?”

“어쩌다가… 혼자 좀 마셨어. 빨리줘. 레이가 보면 지랄한단 말야.”

짜증을 내며 녀석의 허리 뒤로 감춰진 팔을 움켜잡자 녀석은 의외로 순순하게 아크릴판을 넘겨주었다. 아침부터 조바심으로 짜증을 내는 것 같아 블리스에게 미안했지만, 레이가 토한 걸 보고 나를 괴롭힐 때 울궈 먹을 소재로 사용할 걸 생각하면 어쩔 수가 없었다. 녀석에게서 아크릴판을 뺏듯이 잡아 채어 다용도실 문을 나가려는 순간, 블리스가 어깨를 강하게 잡아왔다.

“왜. 지금 빨리 치워야 한단 말야.”

“같이 치워줄게. 근데….”

“왜.”

“너… 울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엉뚱한 소리를 하는 녀석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술 마시면서 눈물 따위나 흘리는 청승맞은 감성이 내게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지. 심각하게 나를 바라보는 녀석이 우스워 피식 웃으며 어깨를 짚은 손을 떼어냈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청소나 도와줘.”

“헛소리 아냐. 너 눈 엄청 부었어. 거울 보여줘?”

“……됐어. 나중에 볼게.”

구석에서 거울을 가져오려는 녀석을 말리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용도실을 나섰다. 우선 아크릴판으로 토사물을 담은 다음에 화장실에 갖다 버리고, 걸레로 닦아낼 생각이었다. 블리스 녀석에게 지저분하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토사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녀석은 나의 불편한 기색을 신경 쓰지 않은 듯 삼층으로 올라가는 내 뒤를 따라왔다. 나 조차도 역겨운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블리스가 착한 척 하지 않고 잠이나 자러 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구석에서 잤던 거야?”

“응. 그냥 좀 방해 받고 싶지 않았나 봐.”

가장 구석지고 그늘진 곳으로 걸어가는 나를 따라오는 블리스가 의아한듯 물었다. 내가 평소에 그늘지고 구석진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녀석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려 있었기에, 안의 처참한 전경이 밖에서도 모두 보였다. 살짝 굳어지는 블리스를 보는 내 표정도 민망함으로 조금씩 굳어져갔다. 아침에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몸 안의 모든 것을 게워낸 듯 방안에 어지럽게 토사물이 널려있었다. 블리스가 너저분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지 않아도 되는 상대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짜.. 더럽네. 블리스… 그냥 내가 다 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아.”

열려진 문고리를 잡으며 민망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녀석이 뒤에서 어깨를 짚어왔다.

“이렇게 토했으면 아프지 않아? 너 얼마나 마신 건데.”

“….브랜디 한 병.”

“뭐?!”

“처음에 마실 때 별 생각 없이 마셨는데, 마시다 보니까 술이 술을 부르더라. 속 쓰려 죽겠어.”

알코올 중독자나 내뱉을 말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피식 웃었지만, 블리스는 웃지 않았다. 농담으로 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을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내가 섬세한 감수성으로 이루어진, 마치 유리공예품과도 같은 성정을 지녔다면 모를까, 블리스의 반응은 과장된 감이 있었다.

“……술 좀 마신 거 가지고 심각한 표정 짖지마.““브랜디, 그 독한걸 한 병이나 마셨는데 그게 술 좀 마신 거야? 무슨 일 있어? 왜 울었는데.”

“안 울었다니까.”

“너 울었어. 얼굴에 이렇게 묻어난 소금기는 뭔데.”

뒤에 서 있던 블리스가 손으로 턱 끝을 잡아 자신에게로 눈을 맞추며 물었다. 계속해서 부정하는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녀석과 눈을 맞추는 나를 녀석은 그저 똑바로 보기만 했다.

“……진짜야. 내가… 왜 울겠어.”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녀석이 의아해서, 얼굴을 더듬었지만,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 좀 놔. 청소 해야지.”

턱 끝을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녀석이 부담스러워 눈을 내리 깔며 고개를 틀었지만, 녀석이 다시 얼굴을 잡아 자신에게로 눈을 맞췄다.

“울지마.”

녀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낮게 속삭였다. 적응할 수 없는 분위기에 굳어진 얼굴 위로 녀석의 혀가 조심스럽게 닿아왔다. 마치 눈물자국을 핥아내리 듯 느릿하게 쓸어 올리는 감각에 소름이 돋아 녀석을 밀어내자, 더욱 더 안아오며 턱 끝부터 눈 아래까지 까슬한 혀로 쓸어 올렸다. 그 진득한 느낌에, 심장을 직접 쓸어 올리는 느낌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소름 돋아. 왜 이래…”

“울지마, 왜 이렇게 엉망으로 울어 버린 거야.”

“네가 이렇게 구는 게 이상해. 왜, 멀쩡한 사람을 가지고 그래.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게 다야.”

녀석의 혀가 얼굴 위를 쓸어 올릴수록, 심장이 욱신거렸다.

“왜 울었어?”

끈질기게 물어보는 블리스를 내치고 싶었지만, 녀석이 너무도 강하게 허리를 안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의 집요한 눈을 마주친 순간 심장에서 끈적한 점액질의 피가 흘러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끈적한 피가 정신을 엉망으로 만드는 기분에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갑자기, 토기가 밀려왔다.

몰려오는 토기에 녀석을 강하게 밀어내고는 허리를 숙였다. 우욱, 하고 속을 게워내듯 구역질을 했지만, 끈적한 타액 외에는 올라오질 않았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 쉬며 내게로 다가오려는 블리스를 물리쳤다. 눈가로 피가 몰리는 느낌과 함께 어제 마셨던 브랜디의 짙은 알코올 향이 느껴졌다.

“헉, 허억…. 헉… 헉…..”

짧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내려다보는 블리스를 느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제, 내가 정말 울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엉망으로 취했던 것도, 눈물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던 것도 생각났다. 진의 질 속으로 파고드는 칼릭스의 페니스를 생각했던 것도, 그 모양새를 상상했던 것도, 내가 구토를 하며 울었던 것도, 모두 다 생각나버렸다. 나는 눈물이 맺힌 벌게진 눈으로 걱정스레 나를 내려다보는 블리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아.”

“……”

“아무 것도 묻지마.”





*





손 안을 벗어난 자그마한 돌멩이는 발랄하게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처럼 물 위를 통통거리며 튕기다 이내 가라앉았다. 수면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경쾌한 소리를 듣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공원에서 손에 잡히는 돌멩이들을 주워 다가 강가의 수면위로 던지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행동을 하며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포토맥 강변의 바닥에 돌멩이를 한 아름 가져다 놓고 수면 위로 돌멩이를 던지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오른손을 혹사시키는 행동의 반복에 피로를 느껴 돌을 바닥에 던지고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물렀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블리스가 보였다. 블리스는 팔 가득히 돌멩이를 안고 있었다.

바닥에는 아직도 돌멩이가 쌓여있었고, 나는 조금씩 이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지루한 행동에 질린 표정을 짓는 나를 내려다 보던 녀석은 조용히 강둑의 끝으로 걸어가 품 안 가득 안고 있던 돌들을 강으로 쏟아버렸다. 수면 아래로 잠겨가는 돌멩이들이 익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블리스와 나는 아침 8시가 채 되기도 전에 레이의 집을 나섰다. 바닥에 앉아 숨을 몰아쉬는 나를 대신해 아크릴 판과 걸레를 이용해 화장실의 변기에 토사물을 쏟아놓고 바닥을 걸레질한 블리스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나를 포토맥 공원으로 데려왔다. 레이의 집에서 공원까지 30분 가까이 되는 거리를 녀석의 자전거 뒤에 앉아있었다. 녀석의 자전거 위에 앉아 있는 동안 불편하게 엉덩이를 감싼 레이의 브리프가 생각났고 레이의 집에 두고 온 속옷과 옷가지가 생각났다. 파티의 뒷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돌아가 술에 취한 사람들을 깨우고 먹다 남은 음식물을 처리하고 그릇을 정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기분이 좋질 않았다.

집에 가서 한숨 자고 싶었지만 블리스는 핸들의 방향을 집 근처로 돌리지 않았다. 뭔가 기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매 년 봄이 되면 찾곤 하는 벚꽃이 흩날리는 강변의 벤치에 나를 앉혀놓고 녀석은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왔다. 이젠 여름이라 벚꽃 대신 나뭇잎만이 무성했지만, 그걸 보여주며 위안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한 손에는 콜라를 들고 공복의 뱃속에 채워 넣었다. 포만감에 한층 누그러진 난 옆에서 뭔가 말을 걸고 싶어하는 블리스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강변에 돌멩이를 던져댔다. 이젠 그것 마저 질려서 뭘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지열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벚나무 그늘에 앉아있지만, 햇빛에 눈이 부시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아직도 바닥에 많이 남아있는 돌멩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블리스가 그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의 손이 흙먼지로 깨끗하진 않을 텐데, 생각만 할 뿐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았다.

“나 시 외운 거 있는데, 들려줘도 되지?”

온순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만히 녀석이 쓰다듬는 걸 방관하는 내게 녀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레인 파슨즈 시인데… 너도 잘 아는 시겠지만…”

“……”

“그냥, 어제 좀 외워봤어.”

무표정하게 녀석을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내려다보던 블리스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달아오르려는 목소리를 흠흠 거리며 가다듬었다. 좀 전 보다 더 낮고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말했다.

“때로는 내 인생에서

그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대가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할 때가 있지요.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이해와

그리고 조금 더 많은 그대의 시간까지도.

제발 이해하여 주시기를……”

마지막 구절에서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은,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정서가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는 블리스에게서 스스로의 가슴을 쪼는 듯한 감정이-평가보다는 이해를, 혼자보다는 공유하기를 바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여전히 무표정인 나를 향해, 한숨을 섞어 녀석은 말했다.

“나는 그대를 조르거나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겠어요.

나는 그저 그대가 조금 더 마음을 열고

그대 생각을 조금 더 나누고, 그대 느낌을 조금 더 나누며,

그대의 두려움을 조금 더 나누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내가 녀석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녀석은 내 눈을 보며 머뭇거렸다. 마치, 나에게 이런 고백을 하는 순간이 시기 적절한지, 그 반대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겠다는 듯.

아무 반응 없이 녀석을 보고 있는 나를 보는 녀석은 얼굴을 조금 굳히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무엇보다도

내게 그대 사랑을 주어도 좋다는 것을

그대가 언제나 기억해 주길 바래요.

그리고 그대가 내게 사랑을 더 많이 줄수록

그대는 내 미소를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며

나는 오로지 좋은 것만을

그대에게 되돌려 주고자 소망한다는 것을

그대가 알아주길 바래요.”

녀석이 죽는 한 이 있어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아주 평범하게 일어났다. 팔뚝에 소름이 돋는 기분에 녀석의 또렷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새삼스러운 고백 뒤에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너그러워져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별로 적절하지 못한 순간의, 적절하지 못한 고백인가?”

녀석이 웃었다. 물론 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종류의 얘긴 걸 녀석도 알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얘기가 부담이 된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다 녀석과 녀석이 한 얘기와의 갭이 생각나서 말했다.

“미안한데…… 진짜로, 너한테 무척 안 어울리는 거 알지?”

“모르겠는데.”

“맙소사…… 모른다니.”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자, 블리스가 키득거리며 커다란 손으로 뒷목을 잡아 눌렀다. 녀석의 입이 웃고 있는 게 느껴진다. 부드럽게 애무하듯 주무르던 녀석은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않는 내 허리를 세워 눈을 맞춰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네가 조금 더 마음을 열고, 네 생각을 조금 더 나누고, 네 느낌을 조금 더 나누며, 네 두려움을 조금 더 나누길 바라는 것뿐이야.”

“내 두려움?”

“그래. 너의 두려움.”

확고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다.

“내 두려움이 구체적으로 뭔지도 모르는데, 너에게 말하라고?”

“그래.”

“내 두려움에 대해 말하면, 넌 틀림없이 상처받을 거야.”

“괜찮아.”

녀석의 말이 뻔뻔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감정 상태가 지극히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조금 더 안정된 상태에서 저런 말을 들었으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지극히 혼란스럽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두려움이라… 내 두려움에 대한 원인제공의 반이 블리스라는 걸, 녀석에게 말해야 하는가. 내가 너무 잔인하게 녀석에게 말 하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됐다. 사랑 고백 뒤에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솔직히……몰라.”

“내가 널 어떻게 생각 하냐면,…… 아니야. 됐어. 이런 얘긴 하지 말자.”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나를 잡아챈 블리스가 손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말 해줘.”

“됐어. 아주 나중에 생각이 좀 더 정리가 되면.”

“괜찮다니까.”

말을 자르며 다그치는 녀석의 얼굴이 심각해져 있었다. 내 말을 듣고 나면 저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질 거라는 생각에 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녀석의 표정은 확고했다. 저 얼굴이 상처로 일그러질 텐데, 하지만 거짓말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 해줘. 다… 괜찮으니까.”

“……”

“지우야….”

팔목을 잡은 손이 강하게 옥죄였지만, 정작 손목을 쥐고 있는 본인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하려 흥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난 널 좋아해. 너의 그 자신감이나, 추진력, 남자다움 모두 다 동경해. 하지만.”

“……”

“넌 아주 고압적이야. 일방적이고. 전에 우리가 처음으로 섹스 했던 그 다음 날 생각나?”

“……그래.”

그 때를 회상하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린 녀석은 마주친 두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약을 한 다음 날, 모든 사물이 움직이고 있었어. 침대가, 창문이, 책꽂이의 책들이. 모든 게 다.”

“……”

“네 가슴 위에 흘렸던 정액까지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 같았지. 허리가 둔하게 아파왔고 항문 안에 내내 박혀있던 네 페니스의 느낌도 생생했어. 약에서 깨지 않아 움찔거리고 있을 때에 너는 잠들어 있는데도 애널 안으로 계속 페니스가 들락거리는 기분이 드는 거야. 아아, 지금도 생생해. 내 옆에 벌거벗고 누워있는 널 봤을 때 참 기분 더럽더라. 내 기분이 얼마나 처참했겠어. 계집애처럼 훌쩍거렸지. 거기가 닳는 것도 아닌데 훌쩍거렸어.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그런데 네가 날 사랑한대. 내 두려움? 내 두려움이 뭐겠어. 너와 섹스했던 그 다음 날부터 한결같아. 게이가 되는 것? 너와 나 사이가 까발려지는 것? 네가 날 사랑한다는 그 사실? 아니면! 아아… 모르겠어. 난 지금… 극도로 혼란스러워.”

칼릭스에 대한 고민은 속으로 삼키며 녀석에게 긴 얘기를 내뱉었다. 신경이 예민해지면 멈출 수가 없어 말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한번 내 뱉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녀석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보며,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상황에 적절한 말을 내뱉은 건지, 아니면 상황을 악화시키는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난… 네가 무척 싫어.”

“……”

“물론, 내가 널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와 같아. 이해 돼?”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는 블리스를 보면서 호흡이 가빠지려는 걸 의식해 숨을 천천히 몰아 쉬었다., 또 다시 구토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옆에 놓여 있는 얼음이 녹아 내린 잔에 담긴 물을 마셨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괴로울까.

“넌 늘 나와의 관계 속에 피해의식이 저변에 깔려있다는 얘기냐.”

아랫입술 깨물며 블리스가 말했다. 그 표정이 너무도 간절해 보여서 나는 눈을 내리 깔 수 밖에 없었다.

“그만하자. 그런 얘길 하는 건 괴롭거든.”

“내가 너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진 않았을 걸?”

어깨를 움켜 잡으며 블리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녀석의 동공이 잔뜩 팽창되어 있었다.

“착각하지마. 네가 밑에 깔린다고 여자가 된 착각에 빠질 필욘 없어..”

“쉽게 말하지마!”

“내가 남자라서 무서워? 그리고 네가 남자라서 무섭니? 유황불에 떨어질까 오줌이라도 쌀 것 같아? 지우야. 난 네가 우주인이라도 사랑했을 거야. 진드기라도 사랑했을 거야. 절대 널 여자처럼 대하는 게 아니야.”

조금씩 충혈 되어가는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녀석이 말했다. 좀 전의 흥분과 달리 녀석은 담담히, 너무도 담담하게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조용한 목소리는 커다란 외침같이 들렸다. 맹세를 하듯, 결의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기에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저렇게 흔들리는 걸까.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는 나를 끌어안은 녀석이 귓가에 속삭였다.

“죽을 것 같이 사랑해. 그러니까 제발, 그 마음의 짐을 덜어.”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비가 내렸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였기에 정류장에서 내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의자에는 빗물이 조금 튀어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피곤했기 때문이다. 엉덩이에 닿아오는 차가운 느낌과 팔목의 여린 살에 튄 물방울에 몸을 떨며, 오늘의 수업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은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나서 처음으로 계절 학기를 듣기 위해 학교에 간 날이다. 신청한 과목은 AP 생물학과 문학뿐으로 일주일에 화, 수, 금 하루씩 3주간 가면 됐다. 반나절 가까이 무서운 속도로 진도를 빼는 선생의 수업에 반 안의 분위기는 생기를 잃어갔지만,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걸 꾹 참고 들었었다.

12학년이 졸업했기에 사람 수는 적었다. 수강을 미리 해놓기 위해 신청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점수가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있었기에 수업 분위기는 그다지 열기를 띠지 않았다.

점심은 다른 반의 녀석들과 함께 먹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블리스와 레이, 아고스, 조쉬와 함께 했었는데 올해에는 달랐다. 주변에서 늘 복작거리며 떠들던 녀석들은 6월 SAT을 치른 후에 모두 워싱턴 DC를 떠났다. 블리스는 외할아버지의 농장이 있는 캔자스 주로 떠나버렸고 레이와 아고스는 뉴욕에 있는 대학의 썸머스쿨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에 갔다. 조쉬는 교내 봉사동아리와 함께 멕시코로 이주간 봉사활동을 간다고 했다. 나 혼자 워싱턴에 남아있는 씁쓸한 기분에 하늘을 쳐다봤지만 잔뜩 흐려져 있어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소나기라고 생각했는데, 비가 오랫동안 내릴 것 같았다.

나와 녀석들, 다섯이 늘 꼭 붙어 다니는 건 아니었다. 나는 블리스와의 유대관계가 깊긴 했지만, 내가 나머지 세 녀석들과 아주 깊은 유대관계를 맺은 건 아니었으니까. 블리스를 통해 나머지 세 녀석과 친해졌지만 블리스라는 매개체가 빠진 나와 레이, 조쉬와 아고스의 관계는 바닷물에서 소금기가 제거 된 것 같은 허전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넷 중에서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는 녀석들과 나 사이에 얇은 유리 벽처럼 분명히 존재했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그 유리 벽은 서로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얘기할 수도 있었지만 반대편으로 건너가지는 못하게 막는 실존하는 벽이었다. 그 벽을 구성하는 것들이 각종 오해와 편견과 오만 덩어리가 아니길, 나는 단지 바랄 뿐이었다.

레이와 블리스는 굉장히 어렸던 시절부터 함께해온 사이라고 했다. 워싱턴 근교의 랭글리 타운의 대 저택에서 자고 나란 녀석들은 부모들끼리의 파티에서 만나 친해졌다고 했다. 그 악동 같은 녀석들이 저지른 장난과 어린아이다운 음모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보다 좀 더 키가 작았고 좀 더 짓궂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며 하루 종일 장난 칠 생각에 들떠 있었겠지. 늘 모든 걸 공유하던 두 사람의 사이에 내가 공공연히 끼어든 것이다. 나는 내심 불편하다고 생각했지만 레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레이에게 블리스를 대신할 친구는 없었겠지만 녀석은 교내 이곳 저곳에 친구가 많았다. 레이 로만은 어설픈 신문기자로 활약했으며 교내 신문의 편집에 열을 올리느라 늘 바빠 보였다. 늘 사람들의 중심에 서서, 자신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사람들 틈에 있느라 내가 자신의 친구를 가로챘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이기심에 가려진 생각이라고 할지언정.

지금은 그런 녀석들이 그리웠다. 지긋지긋한 수업을 듣고 난 후, 쉬는 시간이었을 때 그런 생각은 간절해졌다. 녀석들의 실물을 마주하게 되면 생각이 또 다시 바뀔게 뻔하지만. 유별난 친목을 다졌던 것도 아닌데 다른 반의 아이들과 섞여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녀석들이 보고 싶어졌다. 단지 익숙지 못한 부재로 인한 혼란이라 할지라도.

비는 그치질 않는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프린트된 종이가 비에 젖을까 봐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 안에 있지만, 이 비가 언제 그칠지 몰랐다. 소나기라 생각했지만,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는 느낌에 가방 안의 종이 사이를 뒤적거렸다. 번쩍거리며 울리는 핸드폰의 창을 보니 익숙한 번호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집이야?

블리스였다. 녀석이 워싱턴을 떠난 지 삼일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빗속에서 들려오는 녀석의 낮은 목소리는 감상적으로 잠겨있었다.

“아니, 수업 듣고 집에 가는 중이야. 비가 와서… 정류장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어.”

-비 많이 와?

“응. 조금씩 줄고 있긴 한데, 집에 가면 다 젖겠어.”

-사실 넌 젖을 때가 섹시한데.

“끊는다.”

-매정한 새끼.

키득거리며 핸드폰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정류장 밖으로 손을 뻗자 차가운 빗물이 손에 닿아왔다. 토독 거리며 손바닥 안에 퍼지는 차가운 물방울의 느낌이 좋아 계속해서 손을 뻗은 채 핸드폰 너머의 소년과 얘기를 나눴다.

블리스는 캔자스 주 내의 외할아버지 목장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공부할 것을 챙겨갔기에 새파랗게 자란 밀 밭 근처의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공부도 하고 있다고 했다. 어제는 비행기를 타고 할아버지의 밀밭 위를 날았다고 했다. 자동차 운전보다 훨씬 더 스릴 있고 즐겁다며 내게도 기회가 된다면 태워주고 싶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블리스는 직접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내심 내가 오기를 바라는 투였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길들여져 있던 블리스에게 속내를 숨긴 채 돌려 말하는 건 고문과도 같을 일일 거였다.

“언제까지 있어?”

-8월 초까지는 있을 것 같아. 너도 7월 중순에는 계절학기 끝나지?

“응. 집에서 쉬려고.”

녀석의 다음 말을 예상하며 이야기의 흐름을 예리한 칼로 잘라내듯 얘기했다. 아마도 할아버지 목장으로 나를 초대하려는 모양이었다. 나의 말에 녀석은 할 말을 찾아 머뭇거리는 듯 침묵했다.

“캔자스 주는 너무… 멀잖아.”

-비행기 표 보내줄게.

“됐어. 레이나 아고사와 조쉬를 부르지 그래?”

-…차라리 이구아나와 놀래.

“잘 생각했네. 네 아이큐랑 똑같아서 놀기도 편할 거야.”

-농담 아니야.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녀석의 말에 할말을 잃었다. 덤덤한 말투는 자신을 모두 통제하려는 것 같았지만, 녀석이 말 하는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반복되는 하루 일과에 대한 얘기를 하듯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보고 싶다는 얘길 했다. 감정의 소모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나를 귀찮게 하려는 생각은 없다는 듯.

-기다릴게.





비를 맞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현관에 걸린 전신 거울 속의 나는 완전히 젖어있었다. 새하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살이 연하게 비쳐왔다. 추위에 떨며 현관에 걸린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들어서자 거실을 걸레질하고 있는 엄마와 마주쳤다.

“다녀왔어요.”

“어머, 비 맞고 올 줄은 몰랐네. 엄마 부르지 그랬어.”

“귀찮을까 봐 그랬죠.”

블리스가 젖은 모습이 섹쉬하다고 그랬거든요. 씩 웃으며 젖은 양말을 벗는 나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던 엄마를 지나 이층의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가지를 챙겨 나왔다. 방 옆의 욕실로 들어가 찰박거리는 젖은 소리를 내는 교복을 벗어 세탁물을 담아놓는 바구니에 던져 넣으며 온수를 틀었다. 차갑게 얼어있던 육체를 덥히는 물줄기를 받으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플라토닉한 사랑. 블리스가 내게 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런 종류의 사랑은 아닐 것이다. 내가 녀석의 사랑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해도, 블리스와 나는 섹스로 이어진 끈의 두께가 너무도 굵어서 쉽사리 끊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블리스는 왜 날 좋아할까. 나의 무엇이 녀석의 마음에 가시가 박히듯 박혀있게 한 걸까.

거울 속의 굳게 다물어진 일직선의 입술은 휘어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웃음이나 눈물에 면역이 된 사람의 얼굴, 아버지를 꼭 닮은 얼굴이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없는 정제된 내 얼굴에서 블리스는 무얼 발견하고 정욕에 들끓었던 걸까. 절대 여자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조금 곱상하긴 했지만, 나는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풍기지도, 섹시하지도, 일본 포르노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깔아버리고 싶을 만큼 순종적으로 생기지도 않았다.

주름 없는 목으로 이어진 쇄골은 블리스처럼 일자로 이어지지 않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어졌다. 뼈의 윤곽이 뚜렷해 쇄골이 움푹 파이지도 않았다. 적포도 빛의 자그마한 유두와 조금의 근육만 붙어있을 뿐인 밋밋한 배, 풍성하지 않은 거뭇한 음모와 평범한 사이즈의 페니스. 페니스와 애널이 이어진 부분에 솜털만 나 있을 뿐인 분홍에 가까운 깨끗한 애널.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움찔하고 반응했던, 나의 외적인 그 모든 것을 블리스는 좋아했다.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나를 안기 좋아했던 녀석을 단지 그 때는 이국적인 취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녀석의 내부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취향이 사랑으로 변했던 걸까.

아까부터, 빗속을 뛰어오는 그 순간부터 페니스는 반쯤 발기해 있었다. 뜨거운 물줄기를 받으며, 조금씩 열이 오르는 기분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뭇거리며 반쯤 서 있는 페니스를 손으로 감쌌다. 손으로 페니스를 잡아 흔들수록 내 몸은 더 큰 자극을 요구했다. 내 허리를 잡고 애널을 뚫는 남자의 페니스를 상상하지 않기 위해 오른손의 움직임을 더 빠르게 했다. 하지만 뭔가 조금 부족하고,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 과격하게 뚫고 들어오는 기분을 맛보고 싶었다. 난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녀석과 몸을 겹치는데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요 근래 금욕을 하고 있었던 탓에, 블리스와 섹스를 하던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그 기억에 의지하지 않기 위해 오른손의 움직임을 더욱 더 급박하게 했다. 지리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사정을 함과 동시에 입안에서 쓴 내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 정액이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린 물과 하수구로 빨려가는 것을 바라봤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바라보면, 정욕에 찌든 추악한 얼굴을 발견할 것 같았다. 내겐 분명히 잘못된 구석이 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엄마의 차를 빌려 막상 나왔지만, 잘 기억나질 않았다. 그 때 집에서 출발한 게 아니고 학교에서 출발했던 탓이다. 가브리엘의 언어센터에-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금 낯 뜨겁지만? 자전거를 찾으러 가기 위해 막상 도로로 나왔지만 몇 주 전에, 그것도 칼릭스를 따라갔었기에 잘 기억나질 않았다.

흑인들이 사는 슬램가로 들어서자 건물들이 그로테스크하게 늘어서 있었다. 백인들이 살던 부촌이었지만 흑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흑인 게토가 된 곳인 듯 했다. 한 도시가 개발되기 시작하면 전국 각지에서 투기꾼들과 함께 몰려오는 극빈자들-아무런 생계 수단 없이 무작정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몰려 워싱턴의 흑인수가 70%가까이 치솟았다.

알스트리트로 들어와 한참을 헤매다 세입자용 공동주택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까지 다다랐다. 반복적으로 구획된 도로를 헤매다 보니 혼란스러웠다. 운전 역시 서툴러서 빽빽하게 주차된 차들을 긁고 지나가지 않을까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구식 자동차가 즐비한, 방치된 분위기는 내가 살던 곳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워싱턴 DC의 대부분이 이런 곳인 걸 알고 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광경은 탄식마저 나오게 했다. 좀 전에 왔던 길로 또 다시 들어온 것 같아 잠시 멈춰있는데 한 무리의 흑인들이 차 앞을 지나갔다.

약을 했는지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남자를 좌우에서 잡아끌듯이 걷고 있었다.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에 허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아버지는 유태인보다 흑인을 더 싫어했다.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전에 LA에 살 때 우리 집 근처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조영식이라는 사람과 아버지는 꽤 친했던 것 같다. 물론 조씨와만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슈퍼를 운영하는 사람이나 노점상을 하는 사람들과도 아버지는 친분이 있었다. 그 사람들과의 접점이 생긴 이유는 한국에서 이민을 온 1세대라는 유대감도 적용했겠지만 더 큰 유대감의 형성은 아마도 같은 교회를 다녀서 일거라고 생각된다.

사랑의 교회라는 곳이었는데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북적거리던 사람들 중 백인이나 흑인은 거의 없었다. 한국어로 설교하는 예배를 드리러 오는 백인은 자신의 부인이나 남편을 한국인으로 둔 사람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어렸던 나는 백인이나 흑인, 히스패닉은 교회를 안 다니는 줄 알았었다. 폐쇄적이고 민족성이 짙게 묻어나는 교회는 일주일간의 지친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몰리고 몰리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조씨와 아버지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안수집사이던 조씨는 유아부의 교사였는데 내가 그 사람과 일주일에 한 번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조씨는 교회 장로의 둘째 아들로 교회봉사에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버몬트 가에 사는 사람들 중심으로 구역 예배를 드렸고-그 중에 우리 가족도 포함되었다- 가끔은 구역 내 사람들과 함께 공원에 피크닉을 가기도 했었다. 조씨는 아버지보다 한 살 더 어린 사람이었지만 그의 자식은 나보다 두 살 더 많은 여자애였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여자애는 굉장히 뽀뽀를 좋아했던 여자애였다. 늘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잡고 뽀뽀를 하곤 해서 나는 그 앨 무척이나 싫어했다. 애정표현이 진하던 여자애와 나를 두고 같이 예배를 드리던 어른들은 굉장히 즐거워했지만, 나는 무척이나 싫어했던 걸로 기억한다.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가 회사를 옮기게 되면서 그 사람들과 연락이 자연스럽게 끊기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가 조씨를 다시 기억하게 된 건 1992년 4월 29일 로드니킹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서이다. 그렇게 흥분을 하며 리모컨을 찾던 아버지는 처음이었다. 심장을 움켜지던 아버지가 TV를 켰을 때, 브라운관 안에는 건물들이 불타고 있었고, 장갑차가 유령의 도시 같은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지역의 방위군이 흑인들을 끌고 갔고 지친 얼굴의 동양인들이 울먹이고 있었다.

리모컨을 부서트릴 듯 쥐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충혈 된 이유를 알 수 없어 엄마에게 달려갔을 때, 엄마는 울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TV 사망자 명단 중에 조영식이란 이름이 선명하게 씌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 조영식이란 사람이 조씨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것은 그 순간에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TV 속에서 넘실거리며 흘러나오는 한국인에 대한 흑인의 인종적 적의만큼이나 나의 집안에서도 흑인에 대한 인종적 적의가 흘러 넘쳤다.

발단은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증오였지만 결말은 한인과 흑인의 갈등으로 끝을 맺은 초토화된 한인타운에 다음 날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갔던 아버지는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낙심한 얼굴을 하고서,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을 했다.

조그만 골목으로 들어가는 흑인 무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한인이 운영하는 흑인 빈민구제 단체가 생겨나고 친선을 위한 축제가 열리면서 흑인과 한인간의 긴장이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전에 칼릭스와 왔을 때 무슨 정신으로 이 곳엘 왔었나 신기하기까지 했다. 오후 3시 20분을 조금 넘어가는 시간. 아직 밤은 멀었지만 조금도 이 곳에서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골목 골목의 모퉁이를 돌다 보니 익숙한 조악하기 그지없는 간판이 보였다. 녹색의 범퍼로 만들어진 간판에는 흰색 페인트로 천사 가브리엘이라고 적혀있었다.

이 험악한 동네에서 정말 천사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집을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초록색의 펜스 옆에 주차했다. 단층의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은 갈라진 구석 구석을 시멘트로 감싸고 있었다. 물이 새는지 밖으로 빠져 나온 파이프에선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전에도 오긴 했지만, 정말 최악의 시설이라는 편견마저 들게 하는 곳이었다. 펜스 사이로 조악하게 만들어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멘트가 깔린 바닥이 드러났다. 건물의 한 구석에 적갈색의 파이프에 자물쇠로 묶여진 내 자전거가 보였다. 그 바로 옆에는 익숙한 자전거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분명 칼릭스의 자전거였다.

심장이 불편하게 욱신거렸다. 불쾌하게 심장이 뛰는 기분에 심호흡을 하고는 철제 문을 두드렸다. 전에 봤던 백발의 조수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안에 칼릭스가 있을지도 몰랐다. 껄끄러운 기분과 함께 두려운 기분에 자전거를 몰래 가져갈까도 싶었지만 자물쇠를 끊지 않는 이상 가져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누구세요.”

문을 두드리고 한참 뒤에 목소리가 들렸다. 철제문이 열릴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문은 열리지 않고 뿌옇게 보이는 창문 너머로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목소릴 들어보니 칼릭스는 아닌 듯 했다. 체구가 크고 굵은, 마치 성우 같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내 예상이 벗어나지 않는다면 가브리엘이란 사람인 듯 했다.

“아, 자전거 주인인데요. 늦었지만 찾으러 왔습니다.”

창이 희뿌예서 내 표정이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잔뜩 긴장한 체 말했다. 가브리엘이란 사람에 대한 얘기는 들어봤어도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라 신문 기사에 나온 특정한 인물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 특정한 인물에 대한 기사는 그 사람의 일부분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지만, 어쨌든 읽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이름과 그가 이룬 행적에 대해 조금을 알게 되는 법이니까. 사진 속의 인상은 강렬했지만 실제 분위기는 그의 행적처럼 선한 느낌이 들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음… 그래요?”

나른할 정도로 반응이 느리다 싶은 목소리가 말했다. 곧 이어 철제문이 안으로 열리면서 그의 커다란 체격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의 높이가 지면보다 높기도 했지만 그의 키가 크기도 한 탓에 그의 얼굴을 올려다봐야 했다.

“조이 장? 아니, 지우 장이랬나?”

“조이라고도 부르고 지우라고도 부릅니다.”

문간 사이를 두 팔로 지탱하며 허리를 숙인 남자는 두 눈을 내 눈과 맞추며 물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걸까. 얼굴의 간격을 좁히는 남자의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자 그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좋은 자전거더군.”

“감사합니다.”

“이 더운 날 얼어있지 말고 들어와서 커피라도 한잔 해.”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현관 안으로 슬리퍼를 끌고 들어가버렸다. 남자에게 그냥 자물쇠 열쇠를 달라고 말 해야 하나, 고민하며 서 있자 집 안에서 남자가 외쳤다.

“들어와. 열쇠 찾으려면 좀 걸리니까.”





전에 들어왔던 적이 있는 집안은 그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소파 위에 어지럽게 옷가지가 널려져 있지 않다는 것뿐. 남자가 건네 준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후끈한 방 안의 온도에 손등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집 밖보다 안의 온도가 더 높은 것 같았다. 집 안에는 에어컨도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가브리엘인건 알지?”

“네. 간판에 써 있잖아요.”

질문에 당연한 답변을 하자 남자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 그래. 너무 이상한 질문이었군.”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한번에 들이킨 남자, 가브리엘은 커피를 마시고도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기만 했다. 나는 그저 그가 열쇠를 찾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도 더운지 슬리브리스 셔츠를 입은 그의 움푹 파여 있는 쇄골 선에서부터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회색의 추리닝을 입고 슬리브리스 셔츠를 입은 그는 단순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세련되어 보이는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키가 크고 골격이 좋긴 했지만, 근육만으로 만들어진 몸매는 아니었다. 블리스보다 좀 더 단단해 보이는 선을 가진, 어른이었다.

그리고 완벽히 검다고는 할 수 있는 흑인 고유의 피부색은 아니었다.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완벽한 흑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부모나 부모의 부모 중 백인의 피가 적어도 한 명은 섞여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네. 정확히는 제가 아니고 저희 부모님께서 건너 오셨죠.”

“아,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한 소리는 아니야. 나 역시 우리 조상들은 아프리카에서 건너 오셨거든.”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남자의 얼굴은 피부색만 빼면 백인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흑인의 특징인 도톰한 입술은 그의 얼굴에 남아있긴 했지만, 그는 서양식으로 매우 잘생긴 얼굴이었다. 특히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눈은 회색과 파란 색을 섞어 놓은 듯 보였다. 나이는 많아 보이진 않았다. 많아 봐야 서른 중반 혹은 그 이하. 이미 30대라고 해도 30대의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어 그의 나이를 예측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전에 그의 집 현관에 걸린 사진에서처럼 곱슬거리는 긴 레게 머리를 붉은 줄로 동여매고 있지는 않았다. 머리를 자르고 레게 머리를 풀어낸 머리는 여전히 곱슬거리긴 했지만 사진에서 보다 훨씬 더 단정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 야성의 느낌은 여전했지만.

테이블 위의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은 남자는 바지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다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내 눈을 보더니 물었다.

“아… 담배 연기 별로 안 좋아하나?”

“아뇨, 그냥. 피세요.”

“고마워.”

입 꼬리를 한쪽만 올리며 그는 피식거리며 웃었지만,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불을 붙여 한 모금 깊게 빨아올린 그에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를 아세요?”

“응?”

“저를 아는 식으로 얘기 하시길래.”

“칼릭스가 가끔 얘기해. 네 얘길.”

연기를 푸욱, 하고 뱉어낸 그는 담배를 든 오른손으로 손사래 치듯 연기 사이를 풀어헤치며 말했다. 나에 대해 무슨 얘길 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게 별 관심 없어 보이는 남자의 분위기 때문에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언어 치료사라고 들었어요.”

“뭐, 나름대로.”

“저도 치료를 받았었거든요.”

“그래? 좋은 사람에게 치료 받았나 봐. 무척 좋은 발음이야. 목소리가 좋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 근데 너 정말 목소리가 좋구나. ”

“어떻게 치료를 하시나요.”

남자의 치료 법에 대해 불신의 눈을 하지 않으려 태연히 말 했지만, 가브리엘은 내 말 속에 숨겨진 뜻을 이미 간파하고 있는 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도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나에게 몇 개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여.”

“네?”

“내가 몇 개의 인종이 섞여있는 것처럼 보여.”

“아…… 백인과 흑인.”

“그 밖에 히스패닉이 섞여있어. 내가 이런 얘길 하는 이유는, 그래. 난 솔직히 제대로 된 언어 속에서 살아온 적은 없었어. 멕시코인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살았지. 나중에 나이가 든 무렵에는 늘 자원 봉사자로 활동하는 언어 치료사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어.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고 내 발음이 엉망이었기에. 제대로 말 하고 싶고, 제대로 쓰고 싶고, 제대로 읽고 싶었거든. 자격증 없는 치료사이긴 하지만, 너도 알지? 설리번 선생처럼 아이들 목울대를 손으로 잡고 입가에 손을 대고 말을 시키는 것 말야. 이렇게. ‘F’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하게 해. ‘flower, forgotten, February’ 같은 단어들을 윗앞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문 후, 아랫입술을 밖으로 내밀면서 발음하게 하지. 해봐. ‘forgotten’이라고.”

경직되어 있는 내 얼굴에 몸을 바짝 들이민 그가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로 나의 목울대를 잡고, 왼손으로는 입 앞에 손바닥을 펼친 채 말했다.

“말 해봐.”

“……fo…”

“forgotten!”

“forgotten!”

얼떨결에 따라서 발음하는 나를 기특하다는 눈으로 바라본 남자가 잔뜩 굳어있는 내가 재밌다는 듯 얼굴을 떼지 않은 채 웃었다.

“방금 있었던 일은 그 말처럼 잊어버려.”

유쾌하게 웃는 남자의 입가에서 커피냄새와 함께 담배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남자의 분위기에 압도 돼 굳어있는 나를 두고 그는 방 안으로 큭큭 웃으며 들어갔다. 짤랑 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쇠를 들고 나온 가브리엘은 소파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는 내게 눈을 맞추며 털썩, 먼지를 내며 소파에 앉았다.

“미안,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내가 너무 애같이 굴었군.”

“……”

“자동차 타고 온 거야?”

“네. 어머니 차에요.”

“올 때 무서웠겠네. 이 동네가 좀 험하잖아.”

“무섭지는 않았어요.”

어린애 취급 하는 게 기분 나빠 남자의 말에 대꾸했지만, 사실 이 동네로 오는 게 무섭긴 했다. 칼릭스가 이런 동네에 사는 남자와 어떻게 아는 사이가 되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무서워하지 않으면 안돼. 이 동네는 험하거든. 근데… 오늘 바빠?”

“아뇨, 그다지……”

말을 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뭔가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는 가브리엘이란 남자에게 조금 호감이 가긴 했지만, 이 동네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애들 교제 만드는 것 좀 도와줄래? 나 혼자 크레파스로 색칠하기에는 양이 좀 많아서.”

“색…칠이요?”

“보통 칼릭스가 도와줬지만, 오늘은 못 온다고 했거든.”

“칼릭스가 그런 걸 해요?”

눈 앞의 덩치 큰 남자가 자신의 손가락의 반만 한 크레파스를 들고 아이용 교제를 만들기 위해 색칠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됐지만, 칼릭스가 크레파스를 들고 색칠 하고 있는 것도 가브리엘 이상으로 상상이 안됐다.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한참이나 나를 보던 남자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넌, 칼릭스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구나.”

“……”

“물론 네가 아는 칼릭스도 녀석의 일부분이겠지만.”

담배를 마지막으로 빨아들인 그는 후우, 하고 길게 연기를 내뱉은 후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 앤 자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길 하는걸 좋아하는 녀석이 아니거든. 그래도 네가 꾹 차고 직접 알아보는 게 좋을 거다.”

내 얼굴에 알려달라고 써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가브리엘은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내가 칼릭스와 싸운 걸 알면서 말하는 걸까, 아니면 모르면서 말 하고 있는 걸까. 알았다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싸운 이유가 남에게 말 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고. 알았다면 내 얼굴을 봤을 때부터 미간 사이를 좁혀야 했을 테니까.

내가 칼릭스에 대해 알게 될 날이 과연 있기나 할까. 녀석과 그런 식으로 싸우고 난 후 레이의 집에서 마주친 뒤로 다시는 칼릭스를 마주할 일이 없었다. 아니, 마주칠 일은 있었다. 칼릭스도 계절학기를 듣는지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두꺼운 책을 한 장씩 넘기던 모습은 점심을 먹는다기 보다 책을 읽는 다는 느낌이 강했다. 칼릭스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옆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전의 일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레이의 집에서 술을 마셨던 그 날밤 떠오른 망상 때문에 녀석의 눈을 마주치는 것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근데 왜 인쇄하지 않고 그걸 다 색칠하려는 거죠?”

원치 않는 생각이 떠오를 까봐 일부러 다른 화제로 돌리려 긴 대답이 나올만한 얘기를 꺼냈다.

“왜 번거롭게 인쇄하지 않느냐는 얘기지?”

“네. 그리고 왜 꼭 컬러로 해야 하는데요.”

집안의 푹푹 찌는 더위에 손등으로 땀을 닦아내자 남자가 주머니에 구겨져있던 손수건을 건냈다. 추리닝의 바지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 않는, 깔끔하게 다림질 된 오렌지색의 배경에 갈색의 수가 놓여진 손수건을 받아 이마와 콧잔등의 땀을 닦아냈다.

가브리엘은 이미 다 마셔서 텅 비어버린 머그컵을 볼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돈도 없는데다가 인쇄된 걸 좋아하지 않아.”

“네?”

“일종의 강박관념이지. 내 손으로 만드는 게 좋아. 복사본 보다 원본을 좋아하거든.”

특이한 버릇 때문에 몸이 고생한다 싶어 어깨를 으쓱 이자 가브리엘이 한쪽 입 꼬리를 올려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남자의 버릇인 듯 했다.

“그러면서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나 봐요. 사진이란 것도 필름의 복사에 가깝지 않나요?”

“사진을 좋아해?”

“현관이며 거실을 가득 채운 사진들… 사진 찍는 분인가 했죠.”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죽 둘러보았다. 작게는 세로가 3~4인치 되어 보이는 사진에서부터 크게는 20인치는 되어 보이는 사진까지 다양했다. 단지 취미 생활로 남자가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프로의 느낌이 나는 사진들이 많았다.

사진을 천천히 둘러보다, 거실의 가장 모퉁이에 걸려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주의 깊게 살펴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석에 가려져 있었다. 지금 보다 훨씬 작고, 단정하게 귀 위로 잘려진 머리를 해서 못 알아볼 뻔 했지만 칼릭스였다. 6~7살로 보이는 어렸던 칼릭스가 누군가의 손에 옆구리를 잡힌 채 번쩍 들려 있었다. 남자의 팔로 보이는 커다란 손과 칼릭스의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파란 색 하늘을 배경으로 찍혀 있었다. 남자의 뒤통수 조차 나오지 않은 사진이었지만, 칼릭스는 안고 있는 남자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칼릭스가 어렸던 만큼 저 사진을 찍었을 가브리엘도 어렸었는지 사진은 전체적으로 부연 느낌이 강했다. 의도적인 연출이 아닌 실수가 명백해 보이는 초점이 정확하지 않은 사진. 초점이 흔들린 사진 때문에, 부옇게 나온 사진은 조금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사진을 찍긴 찍지. 어렸을 때부터 찍어왔거든.”

사진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내 뒤통수를 향해 가브리엘이 말했다. 내가 무슨 사진을 보고 있는지 그도 알고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멋쩍은 기분에 씩 하고 웃자 그도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 소년을 들고 있는 강인한 손이 누군지 궁금해? ”

가브리엘이 눈을 빛냈다. 자세히 쳐다보지 않으면 그 아름다운 눈동자를 느낄 수 없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자 묘한 색의 눈동자가 굉장히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가브리엘은 기분 좋은 상상에 잠기듯 눈웃음을 지으며 조금은 과대망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두 남자야. 자세히 보면 아이를 안고 있는 손이 각각 다른 팔이란 걸 알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가브리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이, 칼릭스의 유년 시절이 가브리엘이란 남자에게서 행복한 향수에 젖게 할만한 무언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왼손과 오른손으로 아이를 들고 있는 손은 두 사람의 손으로 보였다. 칼릭스의 시선 역시 한 사람을 향해 있다고 하기엔 모호해보였다. 행복해 보이는 광경에 기분이 좋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얘기했다.

“그 두 분이 아이를 무척 사랑하셨나 보네요.”

“그럼. 무척 행복한 세 사람이었지.”

감상에 잠기듯, 평온한 향수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가브리엘이 말했다.

“그 두 사람이 아이의 부모였거든.”





*





알파벳이 그려진 검은 선 안을 파란 색의 크레파스로 채운다. 도중에 닳는 크레파스가 있어 모든 알파벳의 색이 같지는 않았다. 가브리엘이 건넨 원본은 윗부분에는 그림을, 아래에는 각종 예문을 적어놓은 교재였다. 교재라고 하기에는 컴퓨터로 인쇄된 말끔한 글자도, 화려한 사진도 없어 많이 어설퍼 보였지만 어린 아이들의 수준에 맞게 제작된 듯 했다. 페이지는 모두 10장으로 같은 그림을 6장씩 그리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조금씩 손목이 아려오고 시계 바늘이 오른 쪽으로 돌아갈수록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아니, 불만이 생겼다.

가브리엘씨는 내게 일을 부탁한 뒤 집안 구석의 암실에 들어가서는 한 시간째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게 본업인지, 아니면 단순한 취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일을 남에게 맡긴 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게 기분이 나빴다. 감정이 하향 곡선을 그릴수록 그림 역시 미묘한 차이로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6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이 곳에 온지도 3시간 가까이 되었다. 조금 더 있다 보면 저녁 시간이 다가올 텐데, 이 집에서 저녁까지 해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험한 동네를 깜깜해진 밤에 운전까지 서투른 내가 무사히 빠져나갈 자신도 없었고.

다섯 장을 남겨두고 손놀림은 더더욱 급해졌다. 글씨체는 엉망이었고 그림은 검은 선을 삐죽 튀어나온 크레파스로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엉망인 그림에 내 기분까지 같이 엉망이 되는 것 같았다. 오른손이 얼얼해서 손을 털고 있을 때,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좀 오래 걸렸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만 표정이나 말투는 별로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어린 아이처럼 투덜거리고 싶지는 않아 그저 남은 4장의 종이를 그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완전 청소년 노동력 착췬데요.”

“미안, 보답으로 저녁 해줄게.”

“미안하지만, 집에서 먹고 싶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그가 맞은 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지금 여섯 신데 배고프잖아. 저녁 금방 되니까 먹고 가지?”

“아뇨. 그냥…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데려다 줄게.”

“제 차 가지고 왔어요. 그림은 네 장만 더 그리면 되요.”

어렸을 때 극심했던 예절에 관한 강박 관념의 잔재는 지금도 남아있다. 나 보다 나이 많은 사람의 권위에 도전하는 느낌이 들어서 가브리엘의 권유를 거부하는 것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어색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진 네 장의 종이를 가브리엘의 앞으로 밀었다.

나머지 네 장을 내가 그렸어야 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그리면 완성되는 거였는데. 게다가 후반에 그렸던 그림이나 글씨체는 엉망이다. 조금만 더 수정하고 갈까. 네 장을 완성하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어느새 6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림을 그리느라 이곳에 더 눌러앉아 있으면 저녁까지 해결하고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가야 할 것 같아요. 온 이유도 자전거를 가져가는 거였으니까.”

무심한 표정으로 내가 그렸던 종이를 살펴보던 그는 엉망으로 그려놓은 그림에 대해 힐책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런 마음이 있다고는 해도 남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던 이상 그 정도는 감수 할 수 있는 어른임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열심히 해줬는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뭘요. 그런데…… 자물쇠 키 아직 안주셨거든요.”

“아, 그래. 그게 목적이었지. 그리고 너에게 줄게 있어. 암실에 들어간 것도 이것 때문이었는데.”

그 커다란 손으로 허벅지를 탁, 치며 일어난 가브리엘은 그 기다란 다리로 거실을 가르듯 걸으며 작은 골방 안으로 들어갔다. 열쇠꾸러미를 담아놓는 통을 뒤적거리는지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손가락에 열쇠꾸러미를 걸고 나온 가브리엘은 소파로 곧장 걸어오지 않고 반대편의 암실의 문을 열었다. 암실 문 앞의 철저하게 빛이 투과되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검은 색의 미닫이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문 틈새로 보이는 내부는 암실인데도 안이 환해 보였다.

안에서는 출렁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뭔가가 팔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휘파람으로 악기를 대용하듯 꽤나 현란한 연주였다. 귀에 익지 않은, 대중가요와는 거리가 먼 민속음악 종류의 음악이었다. 쿠바음악처럼 민족성이 느껴지지만 결코 낯설지 않았다.

둘러본 집 안은 오락거리가 될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TV가 있긴 했지만 DVD나 비디오가 설치되어 있지도 않았고 읽을만한 책도 없었다. 사람의 손을 타긴 하지만 관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방치된 느낌이 강했다. 커다란 남자 하나와 가끔씩 들리는 아이들이 생활하는 정형화된 이미지. 그 느낌 그대로였다.

커다란 오디오가 있긴 했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구식 모델 같았다. 오래됐지만 고전적인 우아함은 없고 단지 조잡해 보이는 오디오 옆으로 각종 음반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칼릭스가 두고 간 듯한 락 앨범도 있었지만, 대부분 영어 교육을 위한 교재용 테이프와 씨디, 제 3세계 음악이었다.

이런 곳에서 일주일만 지내게 되면 알지도 모른다. 인생이 생각만큼 유쾌하고 즐겁지는 않다는 걸. 여기, 아무것도 없는 곳을 칼릭스는 무얼 바라고 드나들었던 걸까.

한참을 내부에서 작업하며 불던 가브리엘의 휘파람이 빛이 점멸하듯 조금씩 잦아들었다. 미닫이문이 열리며 무언가를 감싼 듯한 보송보송한 타월을 들고 가브리엘이 거실로 걸어왔다.

“뭐에요?”

“사진.”

“사진이요?”

의아함에 반문하는 나를 보던 가브리엘은 피식, 웃더니 대꾸했다.

“암실에서 이 필름을 찾느라 좀 오래 걸렸다. 네가 맘에 들어 하는 것 같길래.”

보송보송한 타올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펴자 가로 세로로 두 뺨은 되어 보이는 사진이 드러났다. 추억처럼 희미하게 번져있는 칼릭스의 사진이었다.

“이건 왜요?”

“갖고 싶어하잖아.”

웃으며 내 눈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확신으로 차 있다. 어떤 근거로 이 사진을 가지고 싶어했다고 확신을 하는지, 가브리엘의 태도가 의뭉스럽게 느껴졌다.

“제가… 그런 말을 했었나요?”

“아니. 그냥 느낌이 그랬어.”

느낌이 그랬다 라…… 사진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네로가 루벤스의 명화를 바라보던 시선과 비슷하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내 감정은 동경과는 다른 좀 더 복잡하고 이리저리 얽힌 실타래 같은 것이다.

“이런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칼릭스의 과거를 뒷조사 한 기분이 들것 같은데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칼릭스의 부모가 모두 남자였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편견이 생기는 일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각종 가판대에 꽂혀진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는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칼릭스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호기심을 갖게 되겠지. 하지만 녀석과 어떤 접촉도 없는 상태에서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싫었다.

두 남자 사이에서 자란 아이에게 동정심을 느껴야 하는 걸까. 칼릭스의 부모가 게이였다고 해서 그 사실이 녀석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는 아닌데도 나는 유년시절이 불행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고 있었다.

무광택의 인화지에 인화된 사진 속 소년의 얼굴 위로 손가락을 가져가 쓰다듬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입술 라인을 쓰다듬자 어린 시절의 칼릭스와 직접 대면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모든 것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아이의 말랑말랑 거리는 묽은 자아. 그 존재만으로 생명력이 넘쳐나는 아이. 사진 속의 아이 뒤로 역광이 비쳐 온통 따듯한 빛이 아이를 감싸고돌았다. 이 매끄럽고 포근한 사진이 나의 어긋난 동정심을 나무라는 듯 했다.

“왜 그 사실을 저한테 말씀하신 거예요?”

“입이 근질거려서.”

황당함에 얼어있는 나를 두고 그는 열쇠를 짤랑거리며 문 밖으로 나갔다. 특이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예측할 수 없는 남자였다. 가브리엘을 따라 밖으로 나왔을 때 집 안 보다 밖이 더 시원한 느낌에 크게 숨을 내 쉬자 그가 웃었다.

“자물쇠 풀었으니 가져가. 사실, 네 자전거가 너무 좋아서 이 동네 녀석들이 훔쳐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거든.”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에요.”

“알보네사 자전거에 티타늄 재질이 비싼 게 아니라면 어떤 게 비싼건 줄 모르겠군요. 도련님”

웃으며 말하는 그의 말에 머쓱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전거의 큐알레버를 빼내 자전거를 반으로 접었다. 일반 자전거 보다 가벼웠기에 반으로 접어 차의 트렁크에 넣을 때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칼릭스도 올 텐데…… 같이 먹고 가면 좋잖아.”

지금으로서는 저 가브리엘씨에게 시간이 늦어서요.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섹스하는 것을 들켰거든요. 게다가 싸우기까지 했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가브리엘은 칼릭스와 내가 절친한 우정을 쌓은 사이라고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녀석과 내가 신뢰, 서로에게 거는 기대, 우정과 관련된 모든 부분에서 부딪히는 사이란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저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개미 같은 작은 미물 하나라도 밟지 말고.”

특이한 배웅인사라는 생각에 웃자 그가 이를 드러내 웃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지만, 연장자로서의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차 안으로 들어가 차창을 열어 인사를 하며 집 앞 골목을 벗어나는 동안에도 그는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짚 앞의 도로에서 직각으로 꺾이는 골목에 가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그는 계속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식당 안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관통하는 획일적인 분위기 없이 소모적인 술렁임이 계속되는 분위기였다. 여자애들의 수다와 소년들의 고함 소리. 테이블에 앉기 위해 철제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 테이블 위에 식판을 내려놓는 소리. 그리고 음식을 씹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나 역시도 그 소음들 중의 하나였다.

“좋아?”

그린 샐러드를 아삭아삭 소리 내 먹으며 아벨이 물었다.

“뭐가?”

“생물학이 좋으냐고. 너무 열심히 듣고 있길래.”

“전혀. 점수 미리 매 꿔 놓으려고 하는 거야.”

샐러드 사이 사이에 있는 닭 가슴살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나는 푸석 거리는 가슴 살 보다는 지방과 단백질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닭다리 살을 좋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이 큰 탓일 수도 있지만,

닭 가슴살을 먹을 때에는 목이 건조해지는 느낌이 드는 탓도 있었다. 그래서 닭 가슴살만으로 요리 된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다.          가슴살 조금과 야채를 잔뜩 포크에 찍어 입안에 넣어 씹자, 사막에 단비가 내린 듯 청명한 느낌이 몰려들었다. 이런 기분에 샐러드를 먹지.

“연구원이 되고 싶은 거야?”

“그다지… 난 경영학과 생각하고 있어.”

“의외네. 난 과학과 관련된 직업을 모색할 줄 알았지.”

“난 늘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긴, 좀 고지식하긴 하지.”

아벨이 픽, 웃으며 옆에 놓여있던 물을 들이켰다. 녀석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샐러드를 뒤적이던 포크를 내려 놓았다.

음식을 남기는 건 찝찝했지만 욕심껏 너무 많이 퍼왔던 탓인지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불렀다.

“여자친구는 어때?”

“잘 적응하고 있어.”

“뭘?”

“섹스 말이야.”

내가 어색한 눈으로 쳐다보았는지 아벨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 여자친구에 대한 얘기가 어째 당연히 성적인 것으로 흘러가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무안을 주고 싶지는 않아 옆에 있던 물을 들이켰다. 아벨의 여자친구는 나도 잘 아는 여자애였다. 같은 테니스부에서 활동하는 늘씬하고 키가 큰 소녀였다. 호박을 깎아 만든 듯 그을린 피부에 반짝반짝 거리는 여자애였다.

“사귄지 넉 달 만이었어.”

“레이가 들으면 기절할 소리군.”

“쿡, 그렇지?”

레이 로만이 모든 여자에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녀석은 플라토닉한 사랑은 정신적, 육체적 미숙아나 하는 것이라는 말을

즐겨 하곤 했다. 육체의 행복이 곧 구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까.

“사실, 나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애가 잘 하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서로 노력하고 있긴 해.”

“…부부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

“마음은 벌써 그래. 하지만, 어떨 때는 내가 너무 요구만 하는 게 아닌가 싶다니까. 여자들은 너무 섬세해서.

처음에 했을 땐 우는 걸 달래주느라 혼났다고. 나 역시도 첫 경험이었지만,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거든.          아주 조그마한 손이 뇌를 꼬집는듯한 그런 따끔따끔한 기분.”

동양인 소년의 뒤를 따먹은 블리스와는 다른 기분을 느꼈겠지.

“뭐든지 처음을 상실한다는 건 고통을 동반하는 거야.”

내가 생각해도 멋진 말이다 싶어 자랑스럽게 웃자 녀석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가 다 그렇다고, 일반적으로 그런 과정을 거친다는 걸 핑계로 여자들을 울리고 다니는 녀석도 있지만 말이야.”

아벨의 말에는 대상은 없었지만 누군가를 지칭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버크셔의 악동 레이 로만을 말하고 싶은 거겠지. 아벨이 레이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은 교내에서도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벨 앞에서 그 녀석의 얘기를 꺼내는 경우는 욕하기 위해서일 때 밖에 없었다. 두 사람 간에 주먹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레이를 아벨이 일방적으로 싫어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교내 돌아가는 사정에 어두운 사람들의 얘기였다.

아벨이 레이를 싫어하게 된 사건의 발단이 있었다. 레이 로만이 버크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벨의 누나가 소속되어 있는 승마 클럽에 가입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주말 동안 승마클럽의 학생들은 워싱턴 DC 근교의 메릴랜드 주에 있는 승마장에서 연습을 하곤 했다. 타 주에서 학교에 진학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승마장까지 스쿨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워싱턴 DC 근교에 사는 소수의 학생들은 그네들의 기사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승마장에 가곤 했다. 불행의 시작은 남들 보다 편하게 기사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다니던 레이 로만의 레이더망에 스쿨버스를 타던 그녀가 포착되면서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레이는 그녀를 배려 한다는 차원에서 스쿨버스 대신 자신의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게 했다고 한다. 이 신사적인 신입생에게 호감을 갖게 된 그녀에게 레이는 수월하게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레이가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녀는 레이의 호의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문제는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기 시작하면서였다. 서로 사귀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아벨의 누나에게 레이 로만의 외도를 목격한 일은 분명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고 믿어왔던 친구와의 키스는. 게다가 아벨은 누나의 친구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이 복잡한 사각 관계가 들통 난 뒤 절친했던 두 여자는 갈라서게 되었고 짝사랑으로 앓고 있던 아벨은 고백도 못해보고 사랑을 접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레이 로만은 나 몰라라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섰다.

아벨이 가장 열 받아 하는 것은 레이가 건드리고 다니는 여자는 많은데, 그 죄의 대가를 치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벨은 레이 로만이 주일 마다 교회에 나가 회개를 하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사랑의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의 내용이 꽤 구체적이고 절절 하다는 것도.

“언젠가는 크게 당하겠지.”

아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은 해 본적이 있었다. 존재 자체가 타인 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레이는 사람들 사이를 봄 철의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녀석이었다. 달콤한 꿀을 가진 꽃에 다가갔다가 꿀만 취하면 아무런 미련 없이 달아나 버리는, 아무도 잡을 수 없고 어떤 것도 구속할 수 없는 자유로운 방탕아. 그런 레이를 잡아 둘 수 있는 아주 촘촘하고 정교한 모양의 덫을 가진 여자가 이 세상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할 거라는 바램이 있었다.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남자의 인생에 있어서 여자란 존재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남자의 일생에 있어 여자란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커다란 섭리인지. 그리고 더더욱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사실. 나란 인간에게 여자가 줄 수 있는 감흥과 설렘이 얼마나 적은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부자연스런 감흥이 레이와 얼마나 대조적인지도.

“나 도서관 갈 건데 너도 들릴 거야?”

쓸데없는 상념에 잠기려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이-물론 본인은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아벨이 말을 걸어왔다. 식판을 정리하는 모양새를 보니 음식을 남기려는 모양이었다.

“응. 책 반납해야 하거든.”

의자 깊숙이 밀어 넣었던 몸에 힘을 넣어 진작 정리해뒀던 식판과 가방을 들었다. 몇 주 전에 빌렸던 존 스타인백의 소설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릴 생각이었다. 처음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책들을 읽을 때는 별 감흥 없고 지루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질수록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연민을, 분노를, 애정을 불러 일으켰다. 척박한 대지를 일구는 마디가 굵은 손. 강인하지만 연민을 불러일으키던 그 손. 소설의 감동이 깊었던 까닭에 존 스타인백의 다른 소설을 찾아볼 예정이었다.

도서관은 동관 급식소의 반대편인 서관에 위치해 있었다. 기숙사에서 걸어갈 경우 30분도 더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보통 동관 기숙사생들은 거리가 멀다는 불편함 때문에 부근의 작은 도서관을 이용하곤 했다. 물론 소규모의 도서관에는 없는 서적이 많아 아벨과 나처럼 일부러 서관까지 책을 빌리러 가는 경우도 있었다.

정규 규모의 극장, 하키 경기장, 인류학 박물관과 더불어 버크셔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서관의 대 규모 도서관에는 읽는 사람도 없을 텐데 한국어 서적이 5000여권가량이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쓰인 책도 다양했다. 영어로 쓰인 책까지 합한다면 도서관의 장서 수는 어마어마했다. 진열대에 꽂힌 이래 사람의 손길 타본 책 보다 그렇지 못한 책들이 더 많을 것이었다.

동관에서 서관으로 가는 도중, 학교 정 중앙에 있는 건물 안에서 볼 일을 해결한 뒤 서관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발걸음을 재촉할수록 저 멀리서 유령의 성처럼 솟아있는 건물들이 드러났다. 나는 서관에 있는 건물들의 15세기 적인 풍경이 맘에 들었다. 세속적이고 낭비가 심한, 장엄한 숨결이 느껴지는 첨탑들. 일개 도서관과 박물관을 짓는데 굳이 고딕양식을 따를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서관의 건물들은 크고, 높고, 화려했다. 고등학교 건물을 짓기 위해 화려한 조각과 아치형 첨탑, 황홀한 무늬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용하는 것은 아무리 돈이 많았던 카네기라도 심사숙고 할 만큼 재정적으로도 규모가 방대했을 것이다.

실용을 위해서 지어진 건물이 아닌, 압도하기 위해 지어진 듯한 도서관 내부로 들어서자 깐깐해 보이는 사서가 우리를 맞았다. 안경을 쓸어 올리며 얼굴의 모든 근육을 긴장시킨 듯한 경직된 표정으로 책을 반납하는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곧 아벨과 나에게서 어떤 위해의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했는지 다시 읽고 있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서관 내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원래도 복작거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방학을 한 뒤 기숙사의 학생들이 썰물처럼 미국의 각 주로 빠져나간 뒤에는 더 한산해졌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대부분 혼자서 커다란 테이블에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아벨과 나 역시 문제집과 교과서로 무거워진 가방을 아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벨은 4층의 과학 자료실로 나는 2층의 영미 문학 자료실로 책을 찾기 위해 걸어갔다.

도서관 곳곳에 구비되어 있는 컴퓨터와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백색의 형광등, 전자식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15세기에 떨어진 착각에 빠질 것 같았다. 존 스타인백의 소설을 찾기 위해 John으로 시작하는 작가의 소설들이 모여있는 진열대를 찾았다. 흔한 이름답게 작가의 이름도, 진열대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다섯 번째 진열대에서 겨우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에덴의 동쪽과 불만의 겨울을 끄집어냈다. 삼 주 가량은 이 두 권의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책을 꺼낸 진열대의 반대편은 책이 꽂혀 있지 않았다. 여섯 번째 진열대가 보일 정도로 휑하게 비어있었다. 에덴의 동쪽과 불만의 겨울, 두 개의 책을 빼낸 공간 너머로 익숙한 제목의 책이 보여왔다. 모자 수집광 사건이란, 전부터 보고 싶었던 추리 소설이었다.

이왕 눈에 들어온 김에 전부터 보고 싶었던 추리 소설도 놓치고 싶지 않아 여섯 번째 진열대 사이로 들어가려는데, 커다랗고 거뭇한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하얀색, 나 조차도 읽을 수 없는 획수가 많은 한자가 쓰여진 단정치 못한 그라운드 티. 붉은 색의 하드커버가 씌워진 두꺼운 책. 검은 색의 이어폰을 귀에 꼽은 채 까닥거리는 고개. 부스럭거리는 얇은 종이로 씌워진 고른 치열의 자국이 남은 샌드위치. 진열대와 진열대 사이에서 무법자처럼 자리를 잡고 책에 무아지경으로 빠져 있는 소년은 너무도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칼릭스 다올린.

녀석은 버크셔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늘 도서관의 무법자 같은 태도로 책을 보아왔음이 틀림없다. 한산한 도서관의 어느 진열대 사이에서나 혼자만의 세상 속에 빠져들어 음악의 풍요로움 속에서 책을 읽어왔겠지. 진열장에 기댄 몸이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은 나른한 자세로. 책과 음악,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소설을 진열대에서 빼 내기 위해서는 녀석을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녀석이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어 한쪽 뺨만을 크게 부풀려 씹어 먹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도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책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 녀석과 눈을 마주칠 것인가 말 것인가.

심장이 뻐근해지는 기분에 숨을 천천히 내 쉬며 책이 꽂혀 있는 진열장을 향해 걸어갔다.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녀석의 옆으로 걸어가 진열대에 꽂힌 소설책을 꺼냈다. 시선의 사각으로 어렴풋이 칼릭스가 고개를 올리는 게 보였다. 내 그림자에 시야가 어두워졌던 까닭일 것이다. 나는 최대한 내 태도에 어떠한 인공적인 동선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 애를 썼다. 난 널 신경 쓰고 있지 않다. 옹졸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눈을 질끈 감았다. 책을 품에 안고 뒤 돌아 나오려는데 칼릭스가 바지를 잡아당겼다.

“해피앤딩을 좋아한다면… 그 책은 안 읽는 게 좋아.”

녀석의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의 여파 때문인지, 녀석이 낮은 허밍으로 말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멍하니 녀석을 내려다보는 나를 올려다보며 녀석이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소설은 도덕적 해이가 드러난다고 생각해. 애거서 크리스티의 보수적인 도덕성에 반(反)하거든.”

녀석의 의도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었다. 그 감정 조차도. 녀석은 내게 왜 말을 걸은 걸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칼릭스는 우리 둘의 상한 감정의 치유라도 원하는 것일까? 마치, 친구도 적도 아니던 그 때의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걸까?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던 녀석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넌 이미 추리 소설의 결론을 말해버린 거야.”

긴장으로 목소리가 우습게 갈라졌지만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날 올려다보던 녀석이 고개를 돌려 옆에 놓여져 있던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수십 장의 인쇄된 종이 뭉치가 서걱거리고 가방 안의 용도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칼릭스 녀석이 꺼낸 것은 익숙한 모양의 아디다스 후드조끼였다.

“가브리엘의 집에 이걸 두고 갔더라고.”

그의 집에 갔을 때 더워서 벗어뒀던 옷이었다.

“네가 다시 올 것 같지 않다면서 나한테 전해주라는 얘길 했어. 나 역시도 널 언제 만날지 알 수 없긴 했지만.”

“…고마워.”

녀석이 건네준 옷을 받으면서 본 것은 녀석의 검은 색 반팔 티 안에서부터 시작해 팔 등까지 이어진 아라베스크 문양의 타투였다. 내 시선이 팔 등에 가 있다는 걸 보곤 녀석이 말을 했다.

“두 달도 채 안 갈 거야. 방학동안만 하려고 한 거거든.”

“멋지네.”

“그래… 제법 공들여 했던 거니까.”

공들인 티가 나는 무늬였다. 섬세하게 인체 위에 그려진 구불진 무늬는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직선을 거부하는 곡선의 유려한 아름다움에 한동안 빼앗겼던 시선을 돌려 녀석을 마주보며 말했다.

“집에…가지 않아?”

“집?”

“다른 주에서 왔다고 들었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왔지. 하지만 워싱턴 근처에 집을 얻어놔서 괜찮아. 그리고 사실… 집에 가고 싶지 않거든.”

녀석답지 않게 자신에 대한 말을 많이 한다 싶었다. 녀석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말의 어렴풋한 내막도 알 것 같았지만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지금 화해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완전한 타인이 되어서 감정조차 교류하지 않은 채 얘기를 나누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녀석이 말을 한 뒤로 내 대답이 없자 대화는 단절 되었다. 대신 어색한 침묵만이 그 빈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여기서 우리의 대화가 단절 되어서는, 내가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지만 어색함이 더 컸다. 칼릭스와 나는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닿아있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바늘 구멍처럼 좁아진 듯 말이 나오질 않았다.

가볼게 라는 말을 하고 뒤돌아 나오는 길에 단지 등이나 몇 번 때려주고 화해를 할 수 있는 사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사이로 되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뿐이었다.





*





침대에 멍하니 누워 바닥을 내려다보자 시계가 보였다. 성급하게 옷을 벗느라 책상 위를 건드렸는지 바닥에는 탁상 시계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온통 새까만 방안에서 홀로 붉은 빛을 발하는 전자시계는 새벽 두 시를 한참이나 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 기상시간은 늦어도 7시 반이 될 텐데.

잠이 왔다. 느릿하게 귓불을 핥아 올리는 축축한 입술의 애무에도 잠이 왔다. 둔부 사이에 여태 단단한 경도를 유지하고 있는 콘돔에 싸인 매끄러운 페니스가 느껴지는데도, 이미 한번의 유희로 인해 밤을 잊은 줄 알았는데도 잠은 쏟아졌다.

“자야 돼. 내일 일어나려면……”

장난치며 웃고 있던 말캉한 입술이 귓불을 물었다. 소름 돋는 기분에 어깨를 움츠리자 닿아있던 녀석의 땀에 젖은 가슴이 진동을 하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자자.”

잠에 취해가는 내 목소리와 다르게 조그맣게 속삭이는 녀석의 낮은 목소리는 장난기가 느껴졌다. 이제 그만 자고 싶어 하는 나와는 다르게 정액을 토해낸 체 가만히 항문 속에 머물러있는 페니스를 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블리스는 아주 느리고 미약하게 삽입을 반복했다. 소름이 돋았지만 반응 없이 눈을 감고는 온 몸의 힘을 뺏다. 애널을 빨던, 손가락을 집어넣든 녀석이 뭘 하든 이대로 잠에 들 생각이었다. 좀 전의 섹스로 인해 온 몸이 노곤했다.

축 늘어져 잠에 취해 가는 와중에도 둔부 사이를 빠져나가는, 페니스는 생경하게 느껴졌다. 영원히 그 은밀한 곳에 묻혀있을 것만 같았던 녀석이 빠져나가자 허전함이 밀려왔다. 까칠한 음모가 엉덩이 사이에서 느껴지는가 싶더니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 감겨있던 땀에 젖은 허벅지가 마찰을 일으키며 침대 위로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잠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뜨자 보이는 것은 어둠에 물든 짧게 잘린 옅은 갈색머리였다. 곧이어 녀석의 이마, 눈썹. 잠을잊은 눈이 보여왔다. 끈적이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녀석의 고른 치열.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비틀즈의 노래였다. Across the universe. 유리구슬처럼 영롱하고 투명한 가사 때문에 좋아하던 노래였다.





끝없이 내리는 비처럼 말들은 종이컵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앞을 다투어 미끄러지면서 우주의 끝으로 사라져 버려

슬픔과 환희의 물결이 열린 내 마음 속을 떠돌아 다니며

나를 지배하고, 나를 애무하네

선지자시여, 진정한 깨달음을 주소서

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수많은 눈동자처럼 내 앞에서 깨져 버린 빛의 모습이 춤을 추며

우주의 끝으로 가는 길로 오라고 계속해서 내게 손짓하네

생각은 들뜬 바람처럼 편지함 속을 정처 없이 헤매이고

눈먼 사람처럼 뒹굴며 우주의 끝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어

선지자시여, 진정한 깨달음을 주소서

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웃음 소리와 대지의 그림자가

열린 내 귀를 통해 울려 퍼지며 나를 자극하고, 나를 유혹하네

끝없는 영겁의 사랑은 수백 만개의 태양처럼 내 주위에서

우주의 끝으로 가는 길로 오라고 날 유혹하고 있어

선지자시여, 진정한 깨달음을 주소서

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블리스는 계속해서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를 흥얼거렸다. 속삭임처럼 옅어진 음색이었지만, 자신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듯한 단호함마저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녀석의 낮은 저음이 내 귓가에서 자장가처럼 정처 없이 헤매고 우주의 끝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사실 꿈인 것을 알고 있었다.

블리스는 Across the universe의 반소절도 외우지 못한다. 가끔 허밍으로 부르는 나를 따라 몇 번 불러 봤을 뿐이다. 누구나 부르고 다니는 최신 유행하는 노래의 가사 역시 외우지 않는다. 녀석은 노래의 음을 외울지언정 음악의 좀 더 내밀한 감성을 공유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녀석의 앞머리가 이마의 반도 오지 않던 시절은 지금으로부터 반년도 더 된 옛날 얘기이다. 지금은 많이 길어져 조금만 고개를 앞으로 기울여도 시야를 가리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꿈은 반년 전 학교의 기숙사에서 가졌던 수 많은 관계 중 하나의 기억에 나의 환상이 더해진 것일 터였다. 맹목적으로 서로의 몸을 통해 몽매한 꿈을 꾸던 시절. 왜 하필이면 녀석과 섹스 하는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겠다. 블리스와 나 사이의 문제를 그 기원에서 찾아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잠이 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꿈에서 깨어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꿈 속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반신반의하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는지 눈 뜨자 마자 보이는 것은 깜빡 깜빡이는 핸드폰 액정의 램프였다. 무지개 색으로 빛나는 빛은 조금의 늘어짐도, 조급함도 없이 일정한 박자로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최면을 걸 듯, 끊임없이 동공을 자극하는 어둠을 가르는 직선의 빛들. 잠에 취해 녹아 내린 듯 힘이 없는 팔을 들어올려 핸드폰에 손을 뻗었다. 슬라이드를 열자마자 보이는 새하얀 화면에 눈이 시렸다. 눈 앞으로 수 많은 타원형의 빛들이 명멸하며 사라져가는 지루한 시간을 인내하며 핸드폰의 액정에 다시 눈을 돌렸다. 순백의 액정화면 속에 알파벳이 나열되어 있었다.





-자는 게 아니라면… 전화통화 할 수 있을까?

2시경에 블리스에게서 온 문자였다. 지금 시간이 새벽 3시 38분. 이른 새벽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 반 가까이 답장이 없는 나를 기다리다 끝내 포기하곤 잠에 들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었다. 중부 지역이 동부보다 한 시간은 이르지만, 시골에서 새벽 두 시 반까지 혼자서 열중할만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통화 연결음을 듣는 와중에도 비몽사몽이었다. 뚜렷한 목적은 없었다. 블리스 녀석의 잠을 방해하던가 어떤 분별없는 말을 지껄이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여덟 번의 신호음이 흐른 뒤에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반대편의 전자시계는 새벽 3시 0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전화기의 폴더를 열어놓은 상태로 전화 건너의 녀석은 말이 없었다. 대신, 녀석은 숨을 쉬고 있었다. 새벽의 조용한 시간대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핀이 떨어지는 것 같은 작은 소리로.

“나야. 네가 문자 보내서 전화해봤다.”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잠에 들어가는 녀석에게 말을 했다.

-……아… 그래.

비몽사몽 한 상태의 숙면을 취했던 목소리. 잠에 취한 신음을 내뱉던 녀석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한참을 뜸을 들인 뒤에야 말을 했다.

-으음…… 여태… 안자고 있었어?

“아니, 자다 깼어. 졸리면 내일 아침에 할까?”

-아니야. 아니…… 좀… 내가 다시 걸게.

일방적으로 전화 끊은 뒤 몇 분 후에 다시 녀석이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 잠에 취해있었다는 사람 같지 않은 잠을 잊은 목소리였다.

-세수하고 왔어.

“나 때문에 잠은 다 잤겠네.”

-아니야. 네 목소리야 말로 졸린 것 같아.

“사실… 좀 졸려.”

-아주 부드러워졌어.. 나무의 가장 안쪽의 나이테처럼 오래된 느낌이야. 이런 새벽엔 네 목소리가 어울려. 알고 있어?

“웬 헛소리야.”

진지한 블리스의 말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하자 녀석이 큰 소리로 웃었다. 청명한 웃음소리는 파열음이 나는 것만 같았다.

-전화로만 얘기 할 때는, 아니. 너와 길게 통화 한적도 얼마 없지만 너와 통화를 하고 난 뒤에는 뼛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간지러움이 올라오는 기분이야. 지워지지 않거든. 너의 목소리는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심장으로 흘러가 고이지. 그래서 내 심장이 뛸 때마다 너의 목소리도 함께 내부에 울려. 절대적으로 내게 속삭이지. 날 휘어잡고 날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어. 천에 꽁꽁 감겨진 미라가 된 기분이야.

내가 너의 존재를 언제부터 인식했는지 알아? 네가 처음 이 학교에 전학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지. 내 인생 마지막으로 인정머리 없는 아버지에게 대들다가 얻어터졌던 날. 뺨을 14대나 맞았던 날이었지. 아니, 너와 처음으로 레이의 집에서 술을 마셨던 날이기도 했어. 퉁퉁 부은 뺨 때문에 아픈 내게 레이 녀석이 다가와서 깐죽거리는 데도 한대 줘 팰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빠졌던 날. 아, 정말 울고 싶어 미치겠는데 울 수가 없는 거야.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복받쳐서 그냥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씩씩거리고만 있었어. 그 때까지만 해도 너는 내게 마음을 열고 있지 않았던 상태라 너의 위로 따윈 기대하지도 않았지. 술에 취한 네가 내 옆에 다가왔을 때도 얘가 술에 취해서 어지러운가 보다 싶었지. 근데 네가 내 옆에서 노래를 불렀어. 한국어로 된 이상한 노래였지. 다시 네가 불러준 적이 없어서 어떤 음이었는지 어떤 말이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됐지만. 그 목소리가 나를 지배하고, 나를 애무했지. 내 분노가 새로운 감정을 방출해내었어. 그 노래는. 아니, 너의 목소리가 부른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너무 예뻤거든.

내가 별 말이 없음에도 녀석은 초조해하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녀석 답지 않게 감상에 잠겨있었다.

-그거 알아?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얼마면 충분할까?

“…글쎄.”

-3초에서 4분 사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게 결정된다고 해. 나의 경우라면 네가 너의 노래를 모두 끝내기 전에. 나 진짜 멍청하게 널 보고 있었다니까? 침까지 흘렸던 것 같아.

블리스의 말에 별 웃는 기색 없이 잠자코 듣고 있는 내게 녀석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파고들려 하지 않는 나의 소극적인 태도도 전혀 걸릴 것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녀석은 내 목소리를 들으며 자위하고 싶다며 내게 벗고 있다는 말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전화를 끊어버릴까 싶었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끊는 대신 말을 하지 않고 있자 녀석이 힘 빠진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릴 중얼거렸다. 자위 중인지 단순히 침대 위에 누워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구는 체념하기로 결심한 듯 녀석은 다시 다른 말을 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레 요 근래 있었던 일들로 흘러갔다. 좀 전에 꿨던 꿈 내용에 대해 얘기할까 싶었지만, 블리스가 너무 좋아할 것 같아 생각을 접었다. 방 안의 전자시계를 보니 어느새 3시 40분이 넘어있었다. 좀 전의 선명했던 정신에 부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날씨가 너무 좋았어. 그래서 충동적으로 할아버지 차를 빌려 타고 레바논으로 달렸어. 도로의 주변은 굉장했어. 온통 초원, 새파란 밀밭뿐이었거든. 말 그대로 대평원이었지. 191번 도로로 들어선지 얼마 안돼서 조그마한 표지판이 보이더라. 너무 작아서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어. 위의 뾰족한 부분을 잘라낸 피라미드 모양의 탑이었는데 성조기가 달려있었지. 그 탑의 맞은 편 흰색의 나무 판자엔 미국의 중심에 온 것을 환영한다 라고 적혀있었어. 레바논이 미국의 지리상의 중심이거든. 솔직히 호사가적 감상에 젖어서 레바논을 찾았던 거라서 미국의 중심이 아닌 세상의 중심에 선 기분이었지. 뭐랄까, 세상의 모든 것을 거머쥔 기분이었어. 물론,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전혀 볼만한 곳은 아니었어. 맥도널드도, 편의점도, 인적도 없는 조용한 곳이었거든. 엄청 조용해서 들판 한 가운데서 섹스를 해도 아무도 모를 정도더라.

마지막 말에 피식 하고 웃자 전화기 너머의 블리스가 웃어왔다.

미국의 중심에 다녀왔다는 블리스의 말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나는 말로 들렸다. 미국 주류사회에 속한 채로 모든 것을 다 거머쥔 어린 소황제 같은 말투였다.

-물론, 길을 찾느라 좀 헤매긴 했어도. 좋은 추억 만들고 왔지.

“그래?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초원뿐인데도?”

-응. 거기 있는 게 모두 다 내 것 같았거든. 이 땅을 창조하시고 심히 보기 좋았더라…

잠자코 녀석의 말을 들으며 아랫배를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발로 걷어버렸다. 너무 덥지도 않은, 살에 달라붙는 끈적임이 없는 방안의 온도는 적당히 쾌적했고 다리와 다리 사이에 끼여 있는 기다란 배게는 푹신했다. 잊고 있던 잠이 몰려왔다.

-대평원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 들더라.

나른한 기분에 다리 사이에 갇힌 베개를 지분거렸다.

-근데, 네 생각이 나면서 다시 또 가슴이 꽉 차버렸어.

녀석의 심장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드는 고백을 들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꽃 향기가 나는 것 같은 기분. 나른한 기분에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





여동생 지은은 반년이 넘게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 블리스와 공원에서 보드를 타기 위해 놀러 갔던 날, 남자친구와 잔디밭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여동생의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추워지는 날씨에 두꺼운 점퍼를 권해주는 어머니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몸에 붙는 얇은 가디건을 입고 나갔던 여동생의 미숙한-자라나는 몸 위에는 함께 있는 남학생의 것으로 예상되는 커다란 점퍼가 둘러져 있었다. 커다란 앨범 같은 것을 넘기는 얼굴이 홍조로 물들어있는 여동생의 모습에 나는 보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아버린 것처럼 근처의 나무 뒤에 살짝 숨었다. 밤에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것을 가끔 봐왔기에 남자친구가 있구나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여동생이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자라나있는 동생에게, 나와 같은 핏줄로 이어진 그녀에게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낯선 소년에게.

지은은 그 또래의 여자애라면 자기의 남자친구에 대해서 시끄럽게 떠들 법도 하건만 집에서 좀처럼 내색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자신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자신의 세계를 꽁꽁 동여맨 체로 인생의 일부분만을 보여주는 그런 느낌의 여자애였다. 부모도 아닌 오빠가 동생의 생활에 간섭할 수 있는 부분은 적었고-사실 그것은 핑계다. 동생의 고민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오빠의 치졸한 변명- 나 역시 나 나름의 학교생활이 바빠 같은 핏줄로써 느낄 수 있는 애정과 동질감 외에는 다른 불순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동생 역시 나에게 살갑게 구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연애를 목격하는 것은 동생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동생의 남자친구는 히스패닉계열의 소년이었다. 나의 순진하고 점잖은 동생에게 어울리지 않는 정열을 가진 것 같은 소년이었다. 소년의 풍부한 표정과 손짓, 듬직한 어깨, 커다란 눈망울에서 묻어 나오는 애정. 냉막할 것만 같던 내 동생에게도 저런 열정을 받아들일만한 감정이 있었나. 새삼스레 놀랐다.

좀 더 지켜보는 대신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동생을 아는 척 하지 않는 나를 외동아들로 자란 블리스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설명해주는 대신 블리스의 말을 묵묵히 씹으며 보드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좀 더 다른 상황이라면 나 보다 나의 부모님이 좀 더 복잡한 고민에 빠져있다는 거지만.

아주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공연장을 찾았다. 클래식을 주제로 한 소규모의 콘서트는 아버지의 취향이었지만 가족 중 누구도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와 취향이 비슷한 어머니는 환영했고 클래식 보다는 팝을 좋아하는 여동생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가사가 좋은 음악을 가끔 들을까 말까 한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세월에 풍화되어 가지만, 아직은 말끔한 아버지의 옆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회에 집중하고 있었다. 좁은 시야 속으로 온 정신을 집중한 채로, 아버지는 몽롱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내가 만약 여자였다면 저런 재미없고 성실하기만 한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콘서트 장에서 예약해 두었던 조지워싱턴대의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 한동안 이어지는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며 생각했다.

기도가 끝나고 음식을 먹기 시작할 무렵 동생의 핸드폰이 울렸다. 번화가를 걸을 때마다 들을 수 있는, 여동생이 요즘 한참 빠져있는 대중가요였다. 전화기의 발신번호를 확인한 동생이 부모님과 나의 눈치를 보았다. 받아도 되겠는가 상황을 가늠하는듯했다. 곧 전화기의 폴더를 열어 전화를 받은 동생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남자친구인 모양인지 오렌지 빛 조명 아래 동생의 얼굴은 더 붉어져있었다.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동생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는 척 음식을 먹고 있었지만 사실 부모님과 나의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 뻗어있었다.

지은의 모든 통화가 끝나고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 찬 공기를 엄마의 청명하고 가냘픈 웃음 소리가 갈랐다.

“지은아… 남자친구는 잘 생겼니?”

사실 어리던, 젊던, 늙었던 간에 사람을 평가하는 첫 째 조건은 생김새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의외의 질문에 웃음을 터트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네. 그리고 저한테 잘해줘요.”

다행이 내 동생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타입은 아닌가 보다. 지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적으로 딸의 전화하는 장면을 목격한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별 말이 없었다. 바싹 익힌 스테이크를 한동안 입안에서 오물거리고 있던 아버지는 크리스탈잔에 담긴 냉수를 한 모금 삼킨 후에 동생과 어머니의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아버지는 분명 남자친구의 나이나 출신 학교보다 어느 나라에 뿌리를 두었던 사람인지를 더 궁금해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애도 저랑 같아요. 브라질에서 이민 온 2세거든요.”

“너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네. 저랑 나이가 같아요. 성실하고, 공부도 잘하고 착해요.”

히스패닉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건지 아버지는 지은의 얘기를 들으면서 별 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찌푸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는지 지은도 별 불만이 없이 남자친구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잠잠히 듣고만 있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던 내게 질문을 했다.

“너는… 없는 거냐?”

“예?”

“여자친구 말이다.”

아버지의 말에 입가로 가져가던 스테이크 조각을 접시 위에 내려 놓았다. 아버지의 눈에 별 다른 기대가 실려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말했다.

“절 좋아하는 애는 있어요.”

물론, 아버지도 잘 아는 애에요. 여자가 아니고 남자이긴 하지만. 뒷말은 삼간 채로 나는 다른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가 가장 궁금해할 만한 내용으로.

“백인이에요.”

영국계 아일랜드이민자의 순수한 혈통이기도 하고요. 보수적이고, 강철처럼 단단할 것만 같은 붉은 피가 흐르는 민족이지요. 내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침묵 뒤로 어색해져 쓸데없는 말을 꺼냈나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단지 아버지가 궁금해하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의도였을 뿐이었다. 말을 하고 난 뒤에는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감정적인 이야기가 아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의도를 띈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너희 학교에 동양인은 너뿐이라고 했지?”

“정확히 저희 학년에 동양인이 저만 있을 뿐이에요. 다른 학년은 그 정도 까진 아니에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아버지는 아무런 말 없이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입안에 넣으며 꼼꼼히 오물거렸다. 아버지의 얼굴엔 나를 좋아한다는 그 애가 백인이어서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전혀 드러나질 않았다. 표정 없는 그 모습은 외부에 드러난 감정을 지우개로 모두 말끔히 지워낸 것 같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마도 단둘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면 말 했을지도 모른다.

아시아 여자를 백인 남자가 사랑하는 건 쉬울지 몰라도, 아시아 남자를 백인 여자가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을.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감정은 마치 백인 여성이 동양의 도자기를 보면서 느끼는 이국의 감흥과 같은 것이라고, 겉 피부의 새하얀 그녀와 겉 피부의 색이 노란 나는 기본적으로 아주 다른 것이라는 말을 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아버지가 속 마음을 모두 드러냈을 때에야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아버지는 이 땅 위에 살아가면서 섞일 수 있는 부분과 섞이지 못하는 부분의 모호한 경계를 잣대로 꼼꼼히 재어가며 늘 고민해왔을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부분과 한국인의 삶을 놓아야 하는 부분 같은 걸 말이다. 그리고 동생과 나, 둘의 선택을 보며 가슴을 졸이고 있겠지.





*





녀석이 뉴욕에서 돌아온 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가 된 기분을 느낄 만큼 무더워진 날씨였다. 가능한 몸에 닿을 수 있는 천의 면적을 줄이고 이온음료를 몸에 달고 다니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내게 되는 무더운 오후.

나는 이 숨막히는 날씨에 밖으로 나가는 대신 에어컨이 틀어진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케이블 방송에서는 뇌의 변연계만을 사용하고도 이해가 가능한 진실토크쇼가 방영되고 있었다. 이런 프로그램을 싫어하면서도 보게 되는 것은 프로그램 속 출연자들의 희로애락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까발려져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욕을 하고, 분노하며, 저주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 그들은 발가벗은 채 브라운관 안에 드러난다. 비겁하고 저질스런 호기심에 가득 찬 시청자들 앞에 수치도 모르고 모든 것을 드러낸다. 아이의 생부가 밝혀지고 촌극의 관객들이 밝혀진 진실 앞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나 역시 비겁한 시청자에 지나지 않아 경박한 상상을 하며 볼에 가득 담긴 팝콘을 비워나갈 때였다. 다소 경박스러울 정도로 높고 커다란 현관의 벨이 울렸다.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문을 열어주게 만드는 위력이 있는 벨 소리였다. 부모님과 동생 모두 늦게 들어오는 날이었기에 현관의 벨을 누르는 이는 현관의 비밀번호를 알지 못하는 예상치 못할 인물임이 틀림 없었다. 외판원이거나, 택배 회사의 직원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집안 사람 중 하나에게 볼일이 있는 손님이거나.

팝콘이 담긴 볼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기름이 묻은 손을 바지에 스윽 닦아내고는 현관으로 미적미적 걸어갔다. 인터폰의 전화기를 들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보였다.

일반적인 손님의 모습은 아니었다.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더위에 지친 얼굴의 레이 로만은.

“돌아 온 거야 아니면 쫓겨 난 거야?”

문을 열기 위해 인터폰을 끊으려던 나는 생각을 고쳐 인터폰의 렌즈에 눈을 맞추며 물었다. 정말 더웠던지 내 말에 황당한 표정도 없이 전자라고 작게 중얼거린 녀석이 손을 뻗어 벨을 지긋하게 한번 더 눌렀다. 고막을 괴롭히는 벨 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며 도어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축 쳐진 어깨로 걸어 들어오던 레이는 거실의 냉기에 가까운 싸늘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 물 좀 줘. 공항 리무진버스가 내려준 곳부터 여기까지 계속 걸어왔더니 죽을 것 같아.”

터덜터덜 신발을 신고 거실로 들어가려는 레이를 제지하며 슬리퍼를 건네자 녀석이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신발을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봤자 이십 분도 안 걸리잖아.”

“네가 밖에서 이십 분 돌아다니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

옷을 펄럭이며 소파에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은 그렇게 땀이 많은 체질도 아닌데 티가 땀으로 적셔져 있었다. 녀석에게서 풍기는 땀냄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엄청 덥나 봐?”

“…최악이야. 몇 십 분만 걸어 다니면 뇌수가 녹아 내릴 지경이지. ”

소파에 털썩 앉으며 내가 마시고 있던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들이킨 레이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란 지 머그컵을 내밀며 시원한 냉수한잔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집안의 구조를 뻔히 알면서도 부탁하는 레이의 뻔뻔함을 참아주는 것은 녀석이 정말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얼음이 띄워진 냉수를 가져다 주자 한번에 반 컵 이상을 들이켰다. 그제야 더위에 짓눌려있던 생기가 조금은 돌아오는 듯 소파에 묻듯 축 늘어져있던 몸을 반쯤 일으켰다.

“계절학기가 어제 끝났거든. 오후 비행기타고 왔어.”

“재미있었어?”

머그잔을 볼에 대어 열이 오른 얼굴을 식히며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운 날씨나 추운 날씨, 음식에 대해 24시간 경보시스템이 작동하는 녀석은 지독하게 예민했다.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언제나 판단하고 평가하는 인간답지 않게 혈색이 도는 건강한 녀석이긴 했지만. 시원한 에어컨바람에 산뜻함이라도 느끼는 모양인지 전보다 얼굴 표정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너도 별 수 없네.”

한동안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가 싶더니 레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도 저런걸 보는구나.”

소파 위에 다리를 당겨 무릎에 턱을 기댄 자세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 코웃음 치자, 내게 이죽거리며 말했다.

“어이쿠. 혼자 잘나셨습니다.”

“알면 됐군요.”

“잘나신 분께서 집에서 이런 쇼나 보고 계시고. 이제 계절학기도 끝났으니 집에서 텔레비전만 볼 생각인가 보군요? 되게 재밌겠다아.”

시비를 거는 녀석에게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 던졌다.

“아씨! 너 왜 왔어. 빨리 너네 집에 가.”

“싫소만? 해가 좀 지면 가련다. 지금 나가면 바비큐 통 구이가 돼버릴 걸?”

옆에 있던 팝콘을 한 움큼 쥐고는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더위가 싹 가셨는지 빨갛게 익어있던 피부가 본래의 혈색 좋고 발그레한 피부로 돌아와 있었다. 생기를 찾은 녀석이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걸어갔다. 누가 집주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주인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녀석을 따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레이 로만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이 집안의 장소,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틀에 위험천만하게 다리를 걸친 채 녀석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리 집에선 창틀에 이렇게 앉으면 절대 정원 이외에는 안보여. 집이 너무 커서 짜증난다니 깐.”

“배부른 투정하고 있네.”

창틀에 엉덩이를 걸친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녀석을 밀어 버리고픈 욕망을 투덜거림으로 간신히 참아냈다. 정문에서부터 건물까지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버지니아의 랭글리 타운에 사는 레이 로만의 눈엔 워싱턴 DC 내 조지 타운의 집들은 장난감들이나 사는 곳으로 보이겠지만, 조지 타운 역시 이름이 알려진 부촌이긴 했다. 단지형 주택의 개념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개별적으로 토지를 매입해 건축주가 직접 개발을 하기 때문에 이곳의 집의 형태는 상식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다른 지역이나 DC보다 개성이 있었다. 유럽의 주택가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이곳은 아침 산책을 하는 것 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지는 곳이다.

대체로, 마당을 가진 정원들은 사람의 손을 많이 탄 듯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취미생활로 여기기엔 꽤 많은 양의 자본과 노동력이 들어간 타운의 정원들은 개인이 관리하기도 했지만 경우에 따라 조경사나 정원사가 관리를 하곤 했다. 블리스의 집만 해도 일주일에 많아야 두 번 적게는 한번 들리는 정원사를 따로 두고 있었다. 듣기로 연봉을 11만 달러나 주고 정원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집은 정원사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대신 전업 주부인 어머니가 시간이 날 때마다 꽃을 심고 모종을 가져와 나무를 심어 만들어놓은 정원이었다. 시공 전부터 설계해 놓았던 뒤뜰의 작은 연못에는 백사 홍백의 비단 잉어와 함께 수중 식물들이 살고 있었다. 낭만이란 것을 모르고 살아온 각박한 아버지도 가끔 토요일 아침 부지런하게 일어나 제초기를 가지고 정원의 잔디를 정리하곤 했다. 전에 살던 뉴욕과 지금 살고 있는 워싱턴 DC 모두 각박한 도시 생활이란 건 다름 없었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존재했다. 빽빽한 아파트가 늘어선 맨하튼에서는 이른 아침 정원의 꽃에 맺힌 이슬을 바라볼 수 있는 낭만이 없었지만 이 도시에서는 그런 여유를 즐길 만큼의 축복은 주어졌다. 물론, 레이의 정원에 비하면 규모 면에서 비교도 안되겠지만.

“내일 모레 캔자스씨티에 있는 공항에서 다 모이기로 했어.”

“캔자스씨티? 누구랑 만나기로 한 건데?”

“너, 나, 조쉬와 아고스. 그리고 블리스.”

“나?”

“그래 너!”

황당함에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빼지 좀 마. 네 비행기 표도 이미 끊어놨다고.”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었잖아.”

“따지려면 블리스한테 따져.”

귀찮은 듯 손을 내저으며 창틀에 몸을 기댄 레이가 창 밖으로 나온 다리를 흔들어댔다. 그 아슬아슬한 광경에 녀석의 등을 힘껏 밀어버리고 싶었다.

“뉴욕에 있을 때도 계속 전화가 왔었다고. 너한테 안 통하니까 나한테 그랬던 거겠지. 빌어먹을 블리스 자식. 너 좋아하는 거 아냐?”

레이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면, 나의 하얘진 얼굴을 보고 한번쯤은 의심을 해봤을 것이다. 나의 변화를 민감하게 발견해내곤 하이에나처럼 목을 물고 드러난 뼈까지 오독오독 먹어버렸겠지. 숨을 헐떡이지 않기 위해 깊은 호흡을 삼키며 억지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좀 매력적이긴 해.”

긴장한 목소리가 조금 떨리긴 했지만, 어색함을 발견하지 못한 녀석이 소름이 돋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 약 먹었냐?”

“사실 너도 나를……”

“미친! 진짜 소름 돋았어!”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쓸며 상상만으로도 토기가 밀려오는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냈다. 정도 넘치는 반응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자 녀석이 팔을 쓸며 창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섰다.

“이봐. 호모는 변태나 되는 거라고.”

“너 변태잖아.”

“이런, 변태와 카사노바는 다른 거야.”

레이가 신음을 토하듯 내뱉었다.

“변태는 방안의 어두운 자폐아 이미지지만, 카사노바는 화려한데다가 매력적이라고.”

“그러니까 네가 매력적이란 얘길 하고 싶은 거지? 너야말로 약 먹었냐?”

심각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나를 보던 녀석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사실 그래. 너무 더워서 물을 사먹었는데… GHB를 타서 먹었거든.”

“맙소사. 너 진짜 미쳤구나.”

“사용량이 적어서 별 느낌이 안 와. 미친놈 취급 받을 정도로 갈려면 알코올에 넣어서 먹었어야지. 그건 그렇고… 계속 먹었더니 내성이 생기나 봐.”

“그만 복용해. 그러다 못 끊으면 어떻게 해”

마약을 복용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전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정상적인 상태였다. 혈색 좋은 얼굴에 약간의 홍조만 있을 뿐, 호흡이 가파르지도 부자연스런 움직임도 없었다. 평소의 레이와 너무 똑같아서 오히려 더 불안했다. 복용을 한 이후에도 몸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몸이 경고의 총성을 울린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르는 새 자신의 몸이 더 큰 자극을 원하는 비극적인 상황 앞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아아… 이미 늦었어.”

자신의 몸을 실험체로 각종 주사를 놓으며 재미난 실험이라도 하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레이가 웃었다.

“이젠 자제가 안되거든.”





이 자리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앉아봤을까? 호사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은색의 시트가 깔린 좌석에 앉아 최신 유행하는 비트가 빠른 음악을 듣고 있자니 의문이 들었다. 우선은 농담으로 여자의 방어적인 태도를 허물고, 스타일로 시선을 끈 다음 멋진 스포츠카로 여심을 사로 잡는다. 그다지 세련된 기술도 아닌 고전적인 방법에 걸려든 수 많은 여자들이 스포츠카의 조수석에 앉아왔겠지.

녀석의 페라리는 새빨간 차는 촌스러울 거라는 나의 생각을 비웃고도 남을 만큼 세련되고 뚜렷한 조형감이 돋보였다. 붉은 야생마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차는 레이의 호사스러운 취향에 걸맞게 튜닝 되어 있었다. 페라리를 튜닝하는 녀석이라니. 페라리만의 단순성에 기인한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몇 가지 디자인을 더 추가했지만, 그런대로 멋은 있었다. 같은 나이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노는 규모가 다른 레이 녀석은 여성들의 요구, 여자들만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철저하게 계산된 감정적인 계략을 꾸며대면서.

레이는 차 내부에서 큰 소리로 울리는 멜로디보다 리듬이 강한 음악을 들으며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다. 고개를 리듬에 맡기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도 어느새 흥겨움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포토맥 강변을 끼고 있는 도로는 험했지만, 연인들이 찾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곳이었다. 많은 차량이 몰리지도 않고 주변 전경이 아름다운 까닭이었다. 정오의 햇살에 산란되는 물줄기를 보면서 좀 전의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제 오후, 갑작스레 방문을 해 캔자스주로 같이 가자 했던 레이 로만의 요구의 배경이 블리스라는 걸 알고 있기에 고민될 수 밖에 없었다. 레이는 블리스와 나 사이의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가지 않으려는 나를 속이 좁으며 참여하려 하지 않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으로 매도했다. 결국 레이의 계략에 넘어가 홧김에 간다는 말을 해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성취할 수 있는 녀석인 것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또 어느 정도는 녀석의 태도에 질린 까닭이다.

저녁까지 얻어먹으며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레이는 친구끼리의 여행에 대한 허락을 너무나도 쉽게 얻어냈고 옷과 세면도구 여행에 필요한 잡다한 것을 여행 가방에 집어넣는 것을 모두 지켜본 뒤에야 기사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녀석의 집요함도 대단하지만, 레이 로만에게 나와 함께 캔자스주로 올 것을 주문했던 블리스 아이언사이드의 집요함이 더 대단했다. 다른 사람 챙기는 것에 눈곱만큼의 집중력도 보이지 못하는 레이 로만이 인내심을 갖고 쉴새 없이 투덜거리는 나를 달래다니. 어제 녀석이 복용한 GHB의 여파일지도 모른다.

옷이 가득 담긴 여행 가방을 트렁크에 밀어 넣고 녀석의 성능 좋은 스포츠카에 앉아 돈이 넘쳐나는 자식이라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분은 나아졌다. 버지니아주의 하이타운과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페어팩스스톤 두 곳에서 발원한 포토맥 강은 애팔래치아의 산과 계곡, 남북전쟁터, 수도 워싱턴 D.C 등을 거쳐 메릴랜드의 포인트룩아웃에서 대서양의 체서피크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버크셔 고등학교의 남관 일대도 포토맥강과 맞닿아 있어 카누나 카약, 레크레이션 장소로 이용되곤 했다. 워싱턴 D.C와 메릴랜드 주의 경계부인 강이었기에 가끔씩 드라이브를 위해 차를 타고 포토맥강을 도하하기도 했다. 버지니아 주의 하이타운에서 흐르는 원류에 가까운 강의 물은 워싱턴에서 보는 것보다 한결 맑고 깨끗했다. 낚시 도구만 있다면 당장 내려 물고기라도 잡고 싶었다.

한참을 달리자 랭글리에 위치한 NASA연구소가 길옆으로 보여 왔다. 바다에 인접해 있는 어마어마한 평야 위에 세워진 건물들은 보는 이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나사 연구소와 인접한 도로를 벗어나 흘러나오는 비트가 강한 음악이 여러 번 바뀔 무렵, 랭글리 타운 펫말이 보였다.

거대한 대 저택이 모인 이 곳에는 아버지가 미국에 도착했을 무렵 활동하던 전 한국인 회장도 살고 있다고 했다. 넓고 정비가 잘 된 도로를 달리다 보니 저 멀리서 블리스의 할아버지가 사는 건물이 보였다. 버지니아주의 전 상원의원이었던 그를 교회에서 몇 번 실제로 본적이 있었다. 아이언사이드가의 진한 피의 원류인 그는 나이가 들어 옅어진 은발이었지만 늙음 보다는 젊음의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블리스의 아버지인 프레드 보다는 좀 더 온화하고, 블리스 보다는 덜 야만적인 인상의 그레이 신사. 그와 그의 식솔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저택을 지나 조금만 더 달리면 레이 로만의 집이 보였다. 건물은 레이 로만과 같은 특이한 개성은 눈곱만큼도 없고 무식하게 커다랗다는 인상을 주며 보는 이를 압도하곤 했다.          “열어줘요. 케빈.”

차를 세운 뒤 정문에 고정되어 있는 LCD 액정의 비밀번호를 누르자 경비를 서고 있던 검은 색의 양복을 입은 남자가 씨익 웃으며 잘 다녀왔냐는 인사를 건넸다. 3교대라고는 해도 8시간 동안 저렇게 마네킹처럼 서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 질리는 기분이었다. 정문과 잘 정돈되어 있는 조경수와 정원, 몇 개의 작은 건물을 지나서야 레이가 살고 있는 건물이 나왔다. 시동이 꺼지며 그 때 머리를 어지럽히던 시끄럽던 음악소리도 함께 꺼졌다. 트렁크에서 낑낑거리는 녀석을 도와 여행가방을 꺼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호텔도 아닌데 사람이 나와 짐을 받아 들었다. 정말이지 규모가 다른 부자로군. 어색하게 가방을 건네며 그런 생각을 했다.

감시의 차원에서 데려왔다고는 하지만, 레이는 나를 구속시킬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방을 안내하자마자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근데 하필이면 안내한 방이 블리스와 내가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던 방이다. 약을 먹었던 데다가 일년도 더 된 일이긴 하지만, 워낙 강렬했던 인상이었기에 생생하게 기억났다. 변한 것도 거의 없었다. 블리스의 얼굴 너머로 보이던 낭비가 적은 단정한 모양의 샹들리에와 테이블 위의 전화기, 벽에 걸려있는 장식품까지. 커튼의 색과 시트의 컬러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침대에 앉을까 했지만 어색한 기분에 테이블 옆의 흔들의자에 앉았다.

방은 서재로 쓰이는 것도 아닌데 책장에는 책의 종류가 많았다. 빨간 벨벳에 금테가 둘러진 앨범으로 보이는 책도 있었다. 단순히 손님방으로 쓰였던 방보다는 휴식의 의미가 큰 방인듯했다.

손에 잡히는 아무 앨범이나 꺼내 펼치자 레이의 유년시절이 찍힌 사진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가정 교사를 두고 집에서 곱게 자랄 것 같은 인상의 도련님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를 경험하기 위해 많은 곳을 돌아다닌 듯했다. 일본이나 유럽에서 찍은 사진들도 다양했다. 사진 속에는 레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던 녀석의 어머니도 활짝 웃고 있었다. 레이의 붉은 금발과 녹색 눈, 혈색이 도는 새하얀 피부는 그녀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 했다.

그리고 이미 예상했던 것이지만, 사진 속에서는 블리스의 유년시절도 함께 찍혀있었다. 부모님들의 파티에서건, 유치원에서건, 밖에서건 두 녀석은 늘 상 붙어있었다. 지금 블리스의 옆에 내가 있는 것이 미안할 만큼. 버지니아의 악동들은 정말이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가늘고 유약해 보이는 팔뚝과 장난기로 가득 찬 얼굴. 특히 블리스는 앞에 있다면 한번쯤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어 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한참 앨범을 넘겨 녀석들의 초등학교 시절이 찍힌 사진들을 넘겨보는 찰나, 문이 달칵 열렸다.

“누가 앨범 보래.”

“왜. 부끄러운 과거라도 있어?”

“아니? 난 늘 잘생겨 왔기에 상관 없어.”

건방진 말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진을 넘기자 녀석이 악동같이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약을 복용했는지 약간 눈이 풀려있었다. 통통거리며 하늘로 튀어 오르는 고무공처럼 분위기가 가벼워져 있었다. 눈살을 찌푸렸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았다.

“그만 복용해.”

“진짜 조금밖에 안 했습니다. 좀 봐주슈.”

키득키득 웃은 레이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나 대신 앨범의 페이지를 넘겼다. 재미있는 추억이라도 기억이 났는지 맨 아래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11살 때였나? 병원에서 찍었던 거야.”

“병이라도 있었어?”

“아니, 알레르기는 있지. 블리스랑 심하게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 엿 같은 자식이 내 간식에 계란 노른자를 으깨서 집어넣은 거야. 알잖아. 나 계란 노른자 알레르기 심한 거.”

그 때만 생각해도 온 몸이 간지러운지 팔뚝을 벅벅 긁은 녀석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좀 회복단계에 들어섰을 때 찍은 건데, 보이지? 얼굴에 붉은 반점. 나 그 간식 먹고 나서 바로 기절했어.”

웃으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주일도 넘게 병원에 입원해있었는데 의식을 찾았을 때 블리스가 내 앞에서 울고 있더라. 침대 밑의 휴지통에 그 자식이 눈물을 닦고 코를 풀어낸 휴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거야. 사실 바이러스 감염으로 날 죽이려 했는지도 몰라. 여튼 내가 진짜 죽을 줄 알았나 봐. 그 소심한 자식이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아버지에게 맞을까 봐 벌벌 떨고 있는데, 안쓰럽더라. 그래서 블리스의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해줬지.”

“맙소사, 너도 절대 안 지는구나.”

“당연하지. 근데 블리스가 아버지에게 혁대로 맞았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좀 미안하긴 하더라.”

우리들 사이에서 블리스의 아버지인 프레드 아이언사이드의 무지막지한 아들 사랑은 공공연히 알려진 얘기였다. 본인이 굳이 말 하지 않아도 아버지에게 잘 맞는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굳는 블리스의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블리스에게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이 프레드 아이언사이드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블리스에게 직접 듣기 전까지 점잖은 인상의 정치인의 아들에 대한 단호하고 무지막지한 처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 때 찍은 사진이야. 녀석이 할아버지 댁에서 분가해서 조지타운 그 좁은 동네로 이사 가기 전까지 가끔 집에서 도망 나와 나한테 오곤 했어. 사실 블리스녀석 오른쪽 새끼손가락의 끝 마디는 전혀 통증을 느끼질 못해. 신경이 끊어졌거든. 전혀 티가 안 나서 너 몰랐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맞았던 건지 알고 싶은데도 녀석이 말 안 해. 블리스 그 자식이 멍청하긴 해도 그렇게까지 매를 벌 녀석은 아닌데.”

심각한 표정으로 꽂혀진 다른 앨범을 꺼내든 레이는 특정한 사진을 찾는 듯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이거야. 웃기지 않아? 머리를 아예 밀어버리다니. 내가 그 집의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녀석이 일본에 갔다 온 이후에 문제가 있긴 있었나 봐. 그래도 저렇게 머리를 밀어버리다니. 완전 학대 수준 아니야? 스타일이 이게 뭐야. 가발이라도 맞춰줘야 하는 거 아냐. 장난으로 녀석에게 포니테일 스타일의 가발을 선물했지만… 사실 내 마음도 좋지는 않았어.”

사진의 블리스 녀석은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비죽 웃고 있어 전혀 심각성이 드러나진 않았다. 머리를 민 사진 옆에는 레이가 선물했다는 금발의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인 가발을 쓴 블리스가 소녀처럼 수줍게 웃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블리스가 모든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한 변덕쯤으로 생각할 일이었다.

“…블리스가 즐기는 거 아닐까?”

“맙소사. 너 미쳤어?”

“아, 진정해. 농담이야.”

하지만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은 듯 앨범의 블리스의 사진을 보면서 말했다. 약 기운을 빌린 탓일까. 녀석답지 않게 흥분하고 있었다. 노려보는 건지, 그 속에 연민을 숨겨둔 건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어.”

나를 흘끗 쳐다보곤 고개를 숙여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웃긴 건 녀석이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진짜 뇌가 근육으로 조직되어있는지도 모르지. 그 폭력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몰라. 안 그러면 어떻게 아버지를 증오하고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어. 복수심에 끓어올랐다가도 하룻밤 우리 집에서 지내고 나면 밤새 아버지에게 저주를 내린 자신에 대해 자책을 하고 있는 거야. 멍청한 자식. 왜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

내부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려 무진 애를 썼다. 여태 쌓아왔던 블리스의 분노가 모두 자신에게로 달아난 것처럼 그렇게 흥분하고 있었다. 가발을 쓰고 있는 우스운 블리스의 사진을 보던 녀석의 눈은 노동과 차별에 혹사당한 가여운 흑인 소년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자식 착한 척 하는 건지 미련한 건지, 정말 단순한 자식인데도 그것만은 모르겠어. 아니면 이제 곧 성인이 되니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모든 재산과 권력을 양도받을 거라는 생각에 참고 있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그 자식은 그 정도로 교활하지 않단 말이야.”

손만 대면 애정이 묻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피붙이를 보는듯한 눈으로 사진을 쓸며 레이가 말했다.

“그 자식은… 내가 알고 있는 인간 중에 가장 멍청한 새끼라고.”





방 안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침묵을 흔들어놓는 음악소리. 냉막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활공하는 리듬의 날갯짓. 방 안은 녀석이 틀어놓은 음악으로 적막함이라곤 없었다.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잔잔하지만 잔잔하지 않은 기억에 있는 노래였다. 그 기억이 맞는다면, 예전에 뉴욕에서 지낼 때 친구의 차를 타고 파티에 가던 도중 들었던 노래였다. 파티라는 설렘에 취한 듯 들떠있던 분위기에서 들었던 노래는 각별하게 가슴속에 와 닿았었다. 지역방송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탓에 곡명과 가수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내 엄마 노릇을 하려고 했던 촌스러운 여자가 있었지.”

방안의 시계는 이미 자정을 지났음에도 레이는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거렸다. 나 역시 여행에 대한 설렘과 그 이면에 감춰진 복잡한 마음에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이른 새벽의 어둠은 사람을 예민하고 감정의 증폭을 커다랗게 만들므로.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아버지 고향인 오클라호마 주에서 지냈었는데… 오클라호마가 워낙 덥잖아. 건조하기도 하고. 매일 들려 생수를 사먹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여자가 있었어. 편의점에서 일하던 여자였지. 잠깐이지만 사귀었었어. 아직 운전면허증이 없었던 때라 그 여자 차를 타고 매일같이 놀러 다녔어. 돈이야 물론 내가 많았지만 대부분 그녀가 계산을 했어. 나보다 나이가 많았거든. 서른을 넘긴 노처녀였지. 비명 지르지마. 난 아직도 여자나이 묻는 게 제일 무섭단 말이야. 착했어. 진짜야. 어린애 가지고 노는 그런 여자 아니었다니까. 콧대가 남자처럼 너무 높은 것만 빼면 괜찮은 여자였어. 아니, 피부도 좀 칙칙한 편이었어. 선크림 바르는 걸 제일 싫어했거든. 입술도 무척 커서 키스할 때면 입술이 빨려 들어갈 것 같았지. 아… 지금 생각해보면 예쁜 편이 아니었다. 너무 착해서 예쁘게 보였나 봐. 내가 매일 짜증내고 그래도 다 받아줬었거든.

그녀와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섹스를 요구하는 나에게 그녀는 오럴만 해주고 맹랑한 꼬맹이의 아쉬움을 달래주었지. 절대 그 뿐이었어. 아쉬웠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 나는 여자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거든. 강요하진 않아. 우린 일주일에 한번은 영화나 음악회에 가곤 했어. 계산은 그녀가 다 했는데… 그 당시 나는 그녀의 주머니사정이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별로 인식하지 못했었어. 내가 부유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이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지. 내가 낼 수도 있었지만 그것만은 여자가 절대 양보하지 않았지. 로맨스든, 액션이든, 클래식이든, 락 콘서트든 그다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던 것 같아.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도 몰랐기 때문에 함께 공유할 만한 것을 만들어야만 했거든.

어느 날 그녀가 내게 티켓을 선물했어. 모리시라는 영국 가수였어. 미국에서 유명한지 유명하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어. 지금 나오는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야. 가사 들어봐. 맞아. 이 부분이야. 눈을 감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의 외모를 떠올려봐. 그리고 내가 너에게 키스할 수 있게 해 줘. 하지만 너는 곧 눈을 뜨고, 혐오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게 되겠지. 하지만 내 심장은 열려 있어. 내 심장은, 너에게 열려 있어. 애틋하지? 그 여자가 사준 앨범이야. 이 콘서트가 끝나고서 그녀의 집에 가서 섹스를 했지. 콘서트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녀도 할 마음이 들었나 봐. 그녀의 방에 들어가서 옷을 벗으려는데 극구 어두운 곳에서만 섹스를 하겠다는 거야. 너무도 간절히 원해서 달빛도 없는 곳에서 섹스를 했지.

그녀가 그날 콘서트에서 사준 앨범을 틀어놓고 섹스를 했어. 그녀의 가슴은 실리콘이었어. 웃지마. 그 당시에는 심각한 일이었어. 웃지 말라니까 빌어먹을 자식아. 맙소사, 어쩌겠어. 나쁘진 않았거든. 하는데 그녀가 너무 아파했어. 그녀에게서 윤활액이 안 나왔거든. 어쨌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섹스를 했지. 질 내 사정을 요구하는데… 사실 그런 여자 없잖아. 너무 좋아서 한번 더 했지. 그날 이후 우리는 윤활제를 이용하면서 섹스를 했어. 할 때마다 지금 흐르는 이 노래를 틀면서 했어. 그녀가 그러는걸 좋아했거든. 노래가 좋아 죽을 것 같다고 했어. 섹스도 아닌 노래가 좋다니. 섹스 하면서 노래에 귀 기울이는 여자는 그 여자밖에 없었을 거야. 빌어먹을 조이. 웃지마. 내 실력이 모자란 게 아니야. 내 테크닉은 훌륭하다고. 확인시켜 줄 수 없는 게 유감이군.

아무튼. 우린 늘 달빛도 없는 곳에서 섹스를 했지.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상한 거야. 왜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섹스를 하려고 할까. 비겁하지만 밝은 곳에서 하지 않으면 그녀와 헤어지겠다고 했어. 사실,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거든. 그녀가 극구 어두운 곳에서 하겠다고 하면 정말로 헤어질 생각이었지. 한참 설득을 하는데… 막 우는 거야. 그러면서 얘기를 했어. 사실 자기는 트렌스젠더래. 윤활액이 나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고, 가슴이 실리콘인 이유도 그 때문이고, 자기가 섹스를 하면서 느끼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어두운 곳에서 섹스 하는 이유는 수술할 때 생긴 흉터 때문이라고.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지. 그날, 콘서트 장에서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용기가 생겨서 섹스를 하게 된 거야. 눈을 감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의 외모를 떠올려봐. 그리고 내가 너에게 키스할 수 있게 해 줘. 하지만 너는 곧 눈을 뜨고, 혐오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게 되겠지. 하지만 내 심장은 열려 있어. 내 심장은, 너에게 열려 있어. 그녀는 어둠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여자가 되고 싶어했던 거지. 이기적인 건 알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 섹스를 할 수가 없었어.”

녀석은 멈칫멈칫 하면서도 끝까지 말을 해나갔다. 가끔 리듬을 타는 듯이 말을 해서 말을 못 알아 듣는 부분도 있었지만 얘기는 아주 구체적이었다. 레이의 말이 끝나고 우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차례 노래가 더 반복 되었을 때 녀석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레이와 여자가 섹스를 하는 모습이 상상됐다. 변태적이지도 성적인 느낌도 없었다. 단지, 어둠 속에서 애처로운 몸짓으로 꿈틀거리는 여자의 모습이 연상됐을 뿐이다. 높은 코, 칙칙한 피부, 커다란 입술. 한참을 침묵하던 녀석은 노래가 한 번 더 반복 되었을 때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그녀가 남자로 보였지. 내게 있어 트렌스젠더란 게이의 하위 범주일 뿐이었거든. 그 사람 앞에서 토했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사람을 내버려두고 그 곁을 떠났어. 그대로 끝이었지. 가끔 생각하곤 하는데… 엽기적인 추억인지, 아니면 애틋한 추억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어. 내 길지 않은 인생에서 그런 별난 일은 처음이었지.”

“좋아했어?”

“그 사람을?”

“그래 그 사람을.”

레이의, 비가 내리지 않아 단단해진 척박한 땅을 뚫고 들어갈만한 실마리들. 녀석의 감정적 실마리를 알아내려 하는 나의 과민한 반응이라 할지라도 궁금했다. 녀석은 약간 웃음을 터뜨린 다음에 대답했다.

“남자란 걸 몰랐다면. 좋아했을 거야.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용서할 수가 없었지.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좋은 기억이 있다면 그건 여자인줄로 알고 있을 때일 뿐이었어.”

자로 각을 잰 듯 잘라낸 깔끔한 대답에 질리는 기분이었다.

“남자와 트렌스젠더는 다른 거야.”

“나는 그런 건 잘 몰라. 다만, 중요한 건 내가 그런 것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뿐이야. 그건 생리적인 반응이야.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지.”

몸을 뒤척이며 녀석이 대답했다.

”문화에 의한 세습일수도 있어.”

“아니, 난 그리스시대에 태어나 플라톤이 동성애에 대한 플라토닉 한 사랑에 대해 떠들고 있을 때도 그런 걸 혐오했을 거야. 잠깐 잠깐. 조이. 너는 그런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야?”

가만히 자리에 누워있던 레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나를 내려다 보았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 녀석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은 달빛에 의지해 나의 미묘한 표정하나하나를 발견해내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건……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어떤 분명한 내 생각을 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어떤 확고한 생각의 정리를 해놓은 데이터가 없었다.

무섭도록 적절한 타이밍으로, 꼭꼭 숨은 채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블리스의 사랑한다던 고백이 떠올랐다. 물 아래에서 공기가 가득 채워진 풍선을 놓아버린 것처럼 빠른 속도로 튀어 오른 기억들. 파노라마처럼 녀석이 웃는 모습과, 화장실에서의 고백, 키스를 할 때의 감은 눈, 녀석의 등 뒤로 펼쳐지던 광대하고 고독한 우주, 녀석의 차 안에서 나눴던 섹스, 전화기로 속삭이던 낯뜨겁던 밀어, 커다랗던 손, 도드라진 날개 뼈, 산호 섬처럼 옅은 하늘색 눈동자, 도톰한 입술, 빨고 핥고 터뜨리던 키스의 촉감이 떠올랐다.

녀석과의 섹스. 어느 순간부터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쓰던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부분. 어떤 이들에게는 문화적으로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 부분. 실제 하긴 하지만, 실제로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것들이었다. 키스하고, 만지고, 섹스 하는 것들. 부인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동성애라는 것. 블리스와 나. 친구끼리. 남자끼리.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에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말문이 막혔다.

“……잘 모르겠어.”





버크셔 학교로 전학을 오기 전, 뉴욕에서 다니던 학교에서는 풋볼 선수와 같은 방을 썼었다. 필립이라는 이름처럼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소년은 기숙사 안에 도착하자마자 하루 종일 강도 높은 훈련에 혹사당한 몸을 침대에 누이곤 했다. 뽀송뽀송하게 말린 머리카락에서 샴푸 냄새를 풀풀 풍기며. 풋볼 선수 치고는 왜소한-그래 봤자 6피트는 넘지만-데다가 교내의 풋볼 선수들과는 반대로 말수가 적고 침착한 녀석이었다. 룸메이트라고는 해도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곯아떨어지는데다가 시험기간이 돼서야 모르는 것을 가끔 물어보는 녀석이라 친해질 만한 접점은 별로 없었다. 물론, 친해질 기회야 만들면 얼마든지 있었지만 녀석이나 나 둘 중 누구도 먼저 다가서서 친근하게 구는 성격이 아니었다. 육 개월 뒤 기숙사 룸메이트를 바꿀 때도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필립과 같은 방을 쓰면서 내 주변으로 많은 소문들이 들려왔다. 녀석이 호모잡지를 본다느니, 첼시23가의 동성애자 카페에서 나오는 걸 목격했다느니, 밤에 몰래 나가 남자와 키스하는 것을 봤다는 느니, 갖가지 확인되지 않은 괴소문들이었다. 그런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만들어지게 된 원인은 내가 알기로는 녀석의 단 한 가지, 남들과는 다른 습관 때문이었다. 시합을 위해 저녁 훈련까지 마치고 난 풋볼 선수들은 단체로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곤 했다. 샤워 뒤에 물기를 대충 닦아낸 녀석들이 옷을 입고 빠져나가기 바쁜 와중에도 필립은 혼자 라커에서 로션과 스킨, 에센스등을 꺼내 얼굴에 꼼꼼하게 바르곤 했다. 단순히 그런 이유로 필립을 게이라고 의심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필립이 풋볼 선수들과 몰려다니는 것을 목격한 일은 일년도 안 되는 시간 그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도 없었다. 카페테리아에서 누군가와 함께 점심을 먹는 일도 본적이 없었다. 녀석이 정말 게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게이처럼 보이기 때문인지 친구들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지 알 수 없었다. 늘 이어폰을 끼고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으며 새벽같이 일어나 혼자 안개 낀 운동장을 달리던 녀석은 외로운 연습벌레였다.

워싱턴 DC로 이사를 온 후 가끔 뉴욕에서 친해진 녀석들과 연락이 닿을 때마다 필립에 대한 얘기가 들려오곤 했다. 풋볼팀 주장이 필립에게 호모라고 놀리는 바람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는 일이나 녀석이 유명 대학의 풋볼 팀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등의 일들. 거짓과 마찬가지로 진실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쉽게 오르내렸다.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는 만큼 거짓과 진실이 복잡하게 엉키고 부풀려져.

10학년 때부터 유일하게 교내의 특정코너를 맡아 기사를 실고 있는 레이 녀석 역시 수 많은 소문의 온상이었다. 소문의 주인공이기도 하면서 타인의 소문을 만들어내는 인물. 격주에 한번씩 발행되는 신문에 실린 교내의 학생들을 다룬 기사들은 확인되지 않은 개인적인 내용들이었다. 물론 이름이 아닌 이니셜을 따고 내용 역시 모호하기 그지 없었지만, 기사 때문에 사이가 좋아지는 사람도 있었고 나빠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레이가 썼던 글들 중 ‘L과 B 교내에서 위험한 연애’라는 유치한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그 유치함에 웃을 수 없었던 것은 거론된 두 사람이 남자인데다가 전 학교의 필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가 레이에게 가장 궁금한 것 역시 그 것이다. 여태 블리스와 내가 육체적 관계를 맺어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각종 가판대 위에 올라갈만한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쓸 수 있겠느냐는 것.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자극적인 기사거리를 찾아냈을 때 모든 것을 까발리고 웃을 수 있을까? 여태 그래왔던 방식으로?





*





동부의 워싱턴 D.C에서 중부의 캔자스시티까지 비행기로 꼬박 5시간이 걸렸다. 이륙과 착륙을 할 때 귀가 멍해지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자극도 없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창가자리에 앉아있을 때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즐거웠던 것도 이륙 후 몇 분 동안뿐이었다. 잠을 청할까 싶었지만, 기내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보는 것으로 지루함을 달랬다. 간단한 기내식이 나온 뒤 틀어준 두 번째 영화는 요즘 한참 티브이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는 십대 소녀가 나온 영화였다. 가수로 데뷔를 한 뒤 인기를 얻자 영화까지 진출한 모양인데 솔직한 얘기로 음악만 파는 것이 그녀의 연예계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길일 것 같았다.

옆의 레이는 계속 골아 떨어져 있었다. 어젯밤 잠을 뒤척이더니 선잠을 잔 모양이었다. 게다가 블리스가 아침 7시 비행기를 예매해뒀던 탓에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해야 했다. 잠을 쫓으려 아침 샤워를 하고 난 뒤 녀석은 여전히 잠 기운이 남은 목소리로 캔자스에서 블리스를 죽여 버리겠다는 살벌한 말을 했다. 기내를 돌아다니는 지적인 미녀들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잠에 빠져있는 걸 보니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캔자스시티가 가까워졌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곧 이어 착륙하겠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활주로에 비행기가 닿는 섬뜩한 느낌이 지나간 후 안정적인 착륙과 함께 지루한 비행이 마무리 되었다. 시계를 보니 12시 22분. 정오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막 잠이 깬 레이는 자신이 자는 동안 캔자스시티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지 창 밖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캔자스에서 지낼 동안 필요한 짐은 무릎까지 오는 크기의 여행가방 하나에 담았다. 상하 옷다섯벌을 비롯한 사소한 짐이 다였다. 그에 비해 레이는 루이비통의 로고가 잔뜩 새겨져 있는 커다란 여행가방 두개에 옷을 꽉꽉 담아왔다. 녀석은 이사라도 가는 것처럼 짐을 꾸렸다. 게다가 하나같이 값비싼 것들이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켈빈 클라인 로고가 새겨진 삼각 브리프, 흰색의 디올옴므 그라운드티, 검정색 폴앤조 셔츠,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미소니 셔츠. 아디다스체코져지, 돌체 앤 가바나 슬리브리스. 가방 안에 집어넣는 옷 마다 명품인 녀석을 보자 질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녀석은 상표 별로 정리된 옷장에서 맘에 드는 옷들을 꺼냈다. 디자인도 아닌 상표 별로 옷을 정리한다니, 어지간히 옷이 많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녀석의 씀씀이는 우리 패거리 중 가장 낭비가 큰 데다가 세속적이었다.

레이의 여행가방 안에는 캔자스 주의 농장에서 전혀 필요할 것 같지 않은 검정색의 스트라이프 정장바지와 같은 색의 슬림 넥타이까지 들어있었다. 시커먼 남자애들을 앞에 두고 패션쇼라도 벌리려는 모양이었다.

옷과 잡다한 물건이 가득 담긴 여행가방을 트레일러 위에 올려놓고 출구를 빠져 나올 때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한꺼번에 빠져 나오는 인파들 속에서 레이와 나를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빨간색의 야구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블리스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레이에게 녀석이 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자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의 재회는 나 혼자만 불편했던 것인지 녀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흰색의 슬리브리스셔츠와 카고군용바지의 옷차림처럼 녀석은 느슨하게 풀린 느낌이었다. 한달가까이 농장에서 생활하는 동안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적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 자식!”

아침 7시에 비행기를 예매한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레이가 블리스에게 달려들어 헤드락을 걸었다. 반가움의 표현 치고는 너무 과격했다.

“염병할… 컥! 야!.. 왜 이래!”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하긴 했지만 팔꿈치로 격하게 밀어내는 블리스 역시 레이 못지 않은 사나운 기세였다. 레이와 블리스의 반경 5미터로 사람들이 피해가는 모습이 창피해 멀찌감치 떨어져 두 사나운 맹수의 싸움이 그치길 기다렸다. 빌어먹을.

오랜만에 만난 적수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두 맹수의 싸움은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았다. E번 출구로 나가면 되겠지. 모두가 우리를 돌아보는 느낌에 창피해서 트레일러를 끌고 빠르게 걸어갈 때,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잖아. 반갑지 않아?’

열에 물든 뜨거운 손이 어깨를 강하게 잡아챘다. 전력질주를한 한 마리 커다란 육식동물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 쉬는 블리스의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잘 지냈지?”

어깨를 쥔 손아귀에 힘을 준 채로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거의 한달 만이었다. 햇빛에 시달렸는지 하얬던 얼굴이 많이 그을려있었다. 내가 알고 지내던 이의 느낌보다 더 마르고 거칠어진 느낌이었다. 녀석에게서 정제되지 않은 갈급하고 강렬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블리스 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땅에 넘어져있던 레이가 투덜거리며 무릎을 터는 것이 보여왔다.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있잖아.”

녀석이 아래 입술을 혀로 훔치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공항의 화장실은 비좁았다. 다 큰 소년 둘이 들어가기엔 턱없이 비좁았다. 화장실 안에 사람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화장실 입구까지는 태연스레 걸어왔지만,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자 블리스에게 인내란 없어진 것 같았다. 녀석은 끊임없이 빌어먹을 이라고 중얼거렸다.

얼굴이 다가왔을 때 나의 이마에 걸린 녀석의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둘 중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녀석이 무례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각도를 틀어 입술을 물어뜯는 녀석의 머리를 감쌌다. 그새 머리는 많이 자라 귓가를 덮고 있었다. 풍성한 금빛 이끼, 머리를 잡아당겨 각도를 틀자 녀석이 나의 입술 안에 혀를 모두 집어넣었다. 오심이 순간적으로 올라와 목 안에서 잦아드는 기침을 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걸신 들린 사람 같았다.

내가 입술을 떼어낼수록 녀석은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내 안에 들어오고 싶은 듯 나를 잡아먹고 싶은 듯. 머리를 움켜진 손을 풀어 녀석의 목덜미에 오른손을 둘렀다. 팽팽해진 현악기처럼 날이 서 있었다. 녀석의 두 손이 등 뒤로 둘려져 깍지를 꼈다. 더 이상 강하게 안을 수 없을 만큼 힘주어 안았다.

녀석의 입술은 나의 인내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 익숙한 기억. 기억의 언저리에 있던 자극 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쏟아져 내렸다. 마침내 공기를 찾기 위해 서로의 입술을 떼어냈을 때, 거친 날숨들이 쏟아졌다.

“빌어먹을”

녀석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면서도 작은 욕 짓거리를 중얼거렸다.

깍지를 푼 손을 바지에 집어 넣어 엉덩이를 힘주어 움켜쥐는 바람에 하체에 강렬한 자극이 왔다. 힘 주어 녀석의 손을 잡아 채 녀석의 가슴께로 밀어붙이자 녀석이 멍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욕구를 들어주지 않는 주인을 바라보는 굶주린 개 같았다. 고개를 좌 우로 흔들며 마지노선을 정하는 나를 내려다보던 녀석이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굶주린 개처럼, 인중과 눈, 귓불과 턱, 목덜미, 머리카락, 눈썹 녀석의 입술이 달려들었다. 맛 볼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라도 핥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끈적하고 말캉거리는 살아있는 근육으로, 맛보지 못한다면 죽을 것처럼.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환한 조명아래에서 마주친 녀석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감정의 파도에서 울렁거릴 뿐. 혼탁하게 물드는 정신을 차릴 생각도 못한 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제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입안에 물고 있는 새빨간 색의 막대사탕보다 더 끈적하게 늘어지는 날씨였다. 차창 밖 아스팔트도로 위로 아지랑이가 시야를 어지럽히며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불꽃처럼 아른거리며 공기를 흐르는 아지랑이는 신기루처럼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았다.

그에 반해 지프 내부는 들이쉬는 공기조차 사막의 모래처럼 건조하게 버석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코 안의 점막이 차갑게 굳어갈 것처럼 건조했다. 소리 없이 조용하게 돌아가는 고성능의 에어컨이지만 건조한 공기만큼은 어떻게 하지 못했다. 안구가 건조해지는 느낌에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떳다를 반복했다.

“졸려?”

새빨간 막대사탕을 물고 있는 블리스의 발음이 어눌했다. 녀석의 입술도 나처럼 조금은 부풀어 있었지만, 식용 색소가 잔뜩 묻어나는 막대사탕을 물고 있었기에 그다지 티가 나진 않았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 새빨간 색의 체리 맛 사탕은 서로의 부푼 입술을 어색하게 바라보면서 생각해낸 조잡하기 그지없는 생각이었다. 지프의 화물칸에 짐을 옮겨 놓고 있던 레이에게 태연하게 보이려 나는 무던히도 노력했다. 다행이 사탕을 입안에서 천천히 녹여먹는 우리를 바라보는 레이의 눈은 유치한 놀이를 하는 어른을 보는듯한 눈초리일 뿐, 별 다른 의심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졸려도 좀만 참아. 쇼핑센터에서 살 목록이 있거든.”

“졸린 게 아니라 좀 건조해서 그래.”

운전을 하다가도 녀석은 가끔씩 룸미러를 보며 눈을 마주쳐왔다. 지금도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마사지 하는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건조하면, 침 발라.”

“헛소리 좀 작작해.”

블리스의 헛소리에 네비게이션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레이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초행길이라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네비게이션과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을 번갈아 가며 보던 녀석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이 블록에서 우회전이잖아! 잠깐! 야야! 갑자기 삼 차선이나 추월하면 어떡해!”

“우회전 해야 한다며.”

빠른 속도로 옆 차선의 차들을 추월하는 차 뒤로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가 들려왔다. 곡예에 가까운 운전에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쓸어앉는 우리와는 반대로 블리스는 덤덤해 보였다.

“젠장! 넌 네비게이션은 폼으로 달고 다니냐?”

“네비게이션은 조수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봐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게 기본 매너지!”

“누가 그런걸 기본 에티켓이라고 말해? 난 처음 들어봤어.”

“무식한 거 티 내?”

“무식해? 지금 내가 블리스 아이언사이드에게 무식하다는 소릴 들은 거야?”

“네. 무식한 양반.”

한 달 만에 만난 녀석들이라고 해도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싸우면서 우정을 쌓는 류의 호전적인 소년들. 연년생 형제처럼 끊임없이 다투는 녀석들에게 신경을 차단한 채 메트로 노스 몰이라고 불리는 KCI 공항 근처의 화려한 거리에 시선을 두었다. 미국의 각 지역에 지부를 두고 있는 몽고베리 워드 백화점을 비롯해 수 십 개의 상점들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대부분 흠잡을 데가 없었다. 통장 안에 든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자신을 위해 멋진 투자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류의 사람들만이 갖출 수 있는 옷차림이었다. 내딛는 발걸음은 과감했다. 조금의 위축됨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안주하고 안도하는 것들이었다. 시멘트의 첨탑 사이를 오가는 대도시의 사람들은.

딜라즈 백화점의 지하에 차를 주차시킨 후에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다퉜다. 싸우는 주된 내용은 레이가 가져온 여행용가방의 크기와 무게에 대한 것이었다. 여행가방이 세 개였기 때문에 일반 세단일 경우에 트렁크에 담기지도 않았겠지만 지프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좌석의 뒤에 있는 화물칸에 짐을 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화물칸에 실린 여행가방을 주차를 해놓은 사이 누군가 가져 갈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벤 가져오라고 전화했었잖아.”

“지프 가져온 걸 어쩌라는 거야. 그리고 누가 이렇게 커다란 가방 두 개나 가져 오래?”

“벤 가져왔으면 이렇게 번거롭게 일 처리를 할 필요도 없잖아.”

화물칸 대신 내가 앉아있던 뒷 자석에 소형사이즈의 여행가방 하나와 커다란 루이 비통 여행 가방 두 개를 집어넣은 후에도 녀석들은 끊임 없었다.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주차장은 차 내부와 달리 후끈거리는 열기가 올라왔기에 녀석들의 짜증은 나에게까지 전염될 것 같았다. 유치한 내용의 싸움이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려 화제를 돌려보려 했다.

“살 목록이 뭔데?”

더위와 짜증에 손으로 부채질하며 채근하자 그제야 싸움을 멈췄다. 얼굴에 담긴 불만은 그대로였지만.

“음료수랑 안주 될 만한 거. 그리고……”

“알아서 사.”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레이가 블리스의 말을 잘랐다.

“난 살게 따로 있으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사.”

“뭐 살건대.”

말문을 자른 것에 대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블리스가 대답했다. 레이의 말 하는 방식에 조금의 협조도 없는 것이 기분 나쁜 모양이었다.

“PMP 살 거야.”

레이의 말에 팔짱을 낀 블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이것저것 뒤지느라 한 시간 넘게 걸리면… 캔자스까지 걸어오던 날아오던 기어오던…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거야.”

블리스의 말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하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레이는 식품관인 지하 1층과 전자제품관인 7층의 버튼을 눌렀다. 침묵하는 것을 보니 몇 시간이고 전자제품 관을 돌아다닐 생각인 모양이었다. 녀석답게 절대 자신에게 불리한 것에는 화제를 두지 않았다. 한숨을 내 쉬는 블리스와 달리 레이는 엘리베이터 내부의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틀며 모델처럼 포즈를 잡는 모습이 혼자 있을 때 조차 거울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 나로선 어색하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내부를 감싼 유리 벽은 사람이 지문 하나 묻어있지 않은 채 깨끗했다. 손을 대면 지문이 잔뜩 묻어나올 것 같은 청결함이었다. 엄지 손가락만 닿아도 묻어 나오는 지문에 죄책감을 느낄 만큼. 신경질적으로 깨끗한 유리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왼손을 가져다 대고 나머지 손으로 머리를 다듬던 녀석이 거울을 통해 블리스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전화할게.”

“뭐?”

반 토막짜리 말에 반문을 하는 순간 띵- 하고 엘리베이터 내부의 스피커에서 소리가 울렸다. 전광판이 지하 1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화한다고.”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밖으로 걸어나가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던 레이가 거울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다 끝나면 전화할 테니까. 멍청아.”

“빨리 안 끝내면 먼저 가버릴 거야.”

블리스가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는 걸 보니 아주 더러운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잠기기 직전 거울 속의 레이 로만은 비식 웃고 있었다.

백화점의 식품 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았다. 전원에서의 삶 보다 빠르게 돌아 가는 도시의 삶을 택한 늙고 노쇠한 시민들. 그들 대부분 자신의 관심 외에는 시선을 남용하지도 않았다. 백화점에 처음 들어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고 자신이 목표한 것에만 시선을 허락했다. 흰 머리가 지긋한 부유한 시민들의 카트 안은 건강을 위한 제품 일색이었다. 유기농 야채와 곡물, 좋은 사료를 먹고 자라난 가축의 붉은 살덩어리들, 체지방을 제거하고 칼슘을 높인 우유, 열대의 과일들이 카트에 담긴 채 계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육체를 혹사시키기 위해 음식을 먹는 사람 같았다. 유전자변형 옥수수를 사용한 팝콘, 과자, 오래 된 기름에 튀겨진 포테이토칩, 설탕이 잔뜩 발린 사탕, 젤리, 캬라멜. 탄산 음료. 이 주 동안 먹을 몸에 해로운 간식거리를 두 개의 카트 안에 잔뜩 집어 넣으면서 몸에 나쁜 실험을 하는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또 뭘 사야 하지?”

블리스가 과자가 수북하게 쌓인 카트를 보며 커다란 손으로 콧잔등을 긁었다. 카트 안에 담긴 과자들을 내려다 보는 얼굴은 식품 관을 모두 정복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많이 샀는데 또 살게 있나?”

“아마 안 산 게 있을 거야.”

녀석은 가만히 서서 머리 속으로 목록을 헤아리는 듯 했다. 곧 번뜩이는 생각이 떠오른 듯 카트를 밀며 말했다.

“맞아. 우유 사는걸 잊었네.”

“우유? 농장에서 우유 짜서 마시는 거 아니었어? 젖소 같은 거에서 말이야.”

웃음거리가 될만한 얘긴지 생각지도 못했지만, 블리스가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카트에 뻗고 있던 두 손 사이로 고래를 푹 숙이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댔다. 어째서 웃음거리가 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자, 녀석이 두 팔 사이에 묻은 얼굴의 각도를 틀어 나를 쳐다보았다.

“왜 웃어?”

“그냥. 귀여워서.”

웃음의 잔 기운을 떨쳐내려 애를 쓰며 말했다. 어색한 표정을 짓는 나를 올려다보며 블리스가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했잖아. 넌 가끔 바보짓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마다 귀여워서 미치겠다고.”

어색함에 진저리 치는 나를 보던 녀석이 숙였던 허리를 곧게 세우며 환하게 웃었다.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로 빨강보다 적갈색에 가까운 모자를 머리에서 떼어내며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어느새 길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 다시 모자를 쓴 녀석이 나를 내려다봤다. 녀석은 갑자기 웃음의 낭비가 심해진 느낌이었다.

“이상한 말 좀 하지마.”

로봇처럼 딱딱하게 말을 내뱉고는 곧바로 카트를 끌고 유제품이 정렬된 코너로 걸어갔다. 뒤에서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계산대로 걸어가는 우리를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산처럼 쌓아 놓은 과자와 음료수를 보는 눈들은 마치 독약을 잔뜩 싣고 가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블리스는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가장 줄이 한산한 곳을 찾아 차례를 기다리며 허리에 차고 있던 힙쌕에서 카드를 꺼냈다. 우리 차례가 되어 카트에서 물건을 꺼낼 때 녀석이 계산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네가 내려고? 됐어. 좀 나눠 내.”

“좀 철 없는 소리 같지만, 부모님이 내는 거니까 괜찮아.”

“됐어. 금액이 클 것 같잖아.”

“어차피 이 카드로 계산해야 돼. 딜라즈 백화점 VIP회원 전용이거든.”

아무리 간식거리라고는 하지만, 짐이 많은 이상 금액이 적지 않을 것이었다. 집에서 받아 온 백 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녀석에게 내밀자 손을 내저으며 받기를 거부했다. 쌓아놓은 짐을 계산하느라 정신 없는 계산원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우리를 힐끔 쳐다봤다. 괜히 소란을 일으키는 것 같아 녀석의 주머니에 돈을 밀어 넣으려 하자 녀석이 어쩔 수 없다는 눈을 했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주머니에 돈을 밀어 넣지 못하게 내 팔목을 잡은 채로 나머지 손으로 진열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것만 계산해줘.”

녀석이 가리킨 진열대는 물건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 진열된 상자들을 보는 순간 숨이 턱하고 멈출 것 같았다.

“네가 그것만 계산해. 나머지는 내가 계산할 테니까.”

블리스의 손 끝이 가리킨 곳에 진열된 상자 위에는 딸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만 보면 츄잉 검 내지는 젤리를 생각할 테지만 상자 위에 표기된 회사 로고는 나의 순진한 사고를 방해했다. 파란색의 배경 위에 흰색의 알파벳으로 듀렉스라고 쓰여 있었다. 듀렉스는 섹스를 해보거나 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최소 한 번쯤은 들어본 성인용품 제조 판매로 유명한 회사였다. 차마 손을 뻗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콘돔 두 상자를 집어 든 녀석은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태연히 말했다.

“엑스트라 세이프가 좋잖아. 크고 안전하고. 두꺼운게 맘에 안 들긴 했지만. 요번에 스킨레스 타입이 새로 나왔어.”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못하고 계산대의 반대편을 보고 있는 내게 블리스가 짓굳게 속삭였다.

“전부터 써보고 싶었거든.”





그 많은 짐을 지프의 뒷 자석에 옮겨 놓고 퓨얼리 데카던트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 반을 비워냈을 때도 레이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전자 제품과 옷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돈을 과감하게 투자하는 녀석이니 전자제품 관에서 한참 이성을 잃고 돌아다닐 만 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세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으로 허기를 해결하긴 했지만, 이미 소화가 다 되어 허기진 상태였다. 매장에서 샀던 쿠키를 꺼내 한입 베어 물던 블리스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 녀석이 먹던 쿠키를 내게 내밀었다.

“먹을래?”

아무 말 없이 쿠키의 반대편을 베어 물었다. 남은 쿠키를 내밀자 녀석이 반을 부러 트려 두 조각 중 하나를 내 입안에 집어넣었다. 아무런 짜증 없이 순종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블리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머지 쿠키를 자신의 입안에 넣어 씹어 먹으며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모자를 쓰고 있던 탓에 귀 뒤로 넘겼던 금발머리가 땀에 젖어 짙어져 있었다.

“머리 많이 길었다.”

“시골 동네라 적당히 자를 만한 곳이 없어서 그냥 방치했지 뭐. 앞머리가 눈을 가려서 불편해. 돌아가면 자를 거야.”

“헤어핀 사줄까?”

내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 녀석이 말했다.

“너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당장 잘라야겠군.”

“미니마우스가 새겨진 거 좋겠지?”

“네가 지금 웃고 싶은 모양이구나. 난 자신을 학대하면서 웃기는 스타일이 아닌데. 근데, 우리 둘만 여행 온 기분이지 않아?”

“뭐?”

물음에 바로 대답하기 보다 뜸을 들이는 편을 택한 블리스는 가만히 오른손에 쥐여진 녹색의 플라스틱 스푼을 바라봤다. 깔끔하게 입 안에서 닦여진 스푼은 블리스의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옅은 오렌지 빛의 조명을 불투명하게 반사됐다. 스푼 속의 구불진 빛에 경외감이라도 느끼듯 스푼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블리스가 말했다.

“이렇게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서 연인처럼 음식을 먹고 있는 거 말이야.”

“지금 먹은 거 체하란 소리야?”

무심하게 말을 받으며 녹차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자 오싹할 정도로 싸늘한 기운이 입안을 맴돌았다. 무심한 말에 블리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너 그렇게 비위 약한 녀석 아니니까 계속 할게. 찡그리지 좀 마. 진지하게 들어보라고. 이렇게 일상적인 게 좋아.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이런 곳이 좋아. 가끔… 일상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너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거든.”

“……”

“그러니까. 좀 전처럼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화장실에서의 키스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러고 보니… 너. 아까 키스할 때 무슨 생각했어?”

블리스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당한 권투 선수처럼 마음이 휘청거렸다.

“너답지 않게 정열적이어서 희망이 생길 뻔 했어.”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목이 탔다. 앞에 놓여있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지만 전처럼 청명할 정도로 시원한 느낌이 없었다. 녀석의 눈을 마주 보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입안에서 녹이며 투명한 테이블 아래의 신발을 쳐다봤다. 캔자스에서 오랫동안 신고 있었는지 녀석의 신발은 흙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캔자스의 대평원에 돋아난 풀 위를 밟았을 크고 섬세한 발. 엑셀레이터를 밟았을 발. 내게 달려왔을 발.

“좀… 제정신이 아니었어.”

사실, 나는 아직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일들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후각을 자극하던 냄새와 입술과 얼굴에 남아있는 촉감, 자제하지 못한 인내심에 대해서도.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 생기리라는 보장도 없고.”

무슨 생각으로 허기에 시달린 개처럼 녀석에게 매달렸던 걸까. 녀석도 나의 이런 반응이 쑥스러움에서 오는 행동이 아닌,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행동임을 알고 있는지 재촉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던 것뿐이야.”

“……”

“그러니까…… 그 일 때문에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끔 묻고 싶어.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녀석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있었지만 가을 단풍이 떨어져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았다. 상심한 가을단풍.

“알잖아. 좋은 친구란 거.”

그 위를 잔인하게 걸어간다. 바스락거리는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좋은 섹스 친구?”

“블리스.”

“하! 빌어먹을. 원점이군.”

긴장할 때 나타나는 버릇대로 블리스는 손을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시선이 녀석의 떨리는 손에 가 있는 것을 보자, 녀석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나 그 행동이 녀석의 커다란 손에서 드러나는 불안을 감출 수는 없다. 불안의 변형에 불과했다.

“가끔 넌 이기적이야. 게다가 고집도 세고. 뚜렷하게 생각을 밀고 나가는 대신 어떤 정의를 내리는 걸 거부하는데 고집이 세지. 나에 대해 계속해서 유예하려고만 해. 태연한 널 보면 가끔씩 짓누르고 싶어져. 심장을 토해낼 때까지 짓누르고 싶어. 날 향해서 뛰기는 하나? 난 널 생각하면서 늘 자위만 하는 멍청이가 아니야. 널 생각하면서 쓴 잠을 자는 때가 훨씬 더 많다고.”

심장이 듣기를 거부하는 이야기들. 블리스는 쉬지 않고 말했다.

“넌 왜 나와 섹스를 할까. 왜 너의 일부분만 보여주면서 살까. 난 다 보여주는데 왜 넌 아무것도 까발리지 않을까. 넌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흥분을 가라앉히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말투와는 다르게 속 안으로 잠겨가듯이. 블리스는 반쯤 녹아 내린 커피 맛 아이스크림을 크게 떠 입안에 넣었다. 녹이는 시간만큼 뜸을 들였지만,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초조할 때 드러나는 녀석의 습관대로 손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넌 내가 어떻게 보여?”

“그만하자.”

“빌어먹을. 너다운 대답이군. 절대로 파고들지 않아!”

“그만하자니까.”

“넌 뭐가 그리 복잡해!”

“그만해!”

“그래 그래. 구체적으로 묻는 내가 병신이지. 사랑을 구걸하는 내가 병신이야.”

블리스는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 동선이 크고 감정이 울렁거릴 것만 같은 미국식 제스처였다. 혼란스러워 하는 나를 바라보며 녀석이 웃었다. 마지못해 짓는 쓴웃음이었다.





*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로 짙은 초록 바다가 파도치고 있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물을 잔뜩 먹은 습기 찬 대기 사이로 밀이 술렁거리며 흔들렸다. 그 생명력 넘치는 속삭임은 차창을 열어놓고 빠른 속도로 국도를 달리는 지프 안에서도 섬세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도시의 콘크리트 첨탑과 대조적인 끝없는 광활한 대지 위에는 열매를 맺은 밀이 푸른 바닷물처럼 빼곡하게 돋아나 있었고, 습기를 머금은 대기와 젖은 땅은 축축하기만 했다.

캔자스시티에서의 모든 것을 말려버릴 것 같던 더위와 달리 캔자스에서는 모든 것을 적셔주듯 비가 내렸다. 습기 찬 대기를 움켜쥐면 손 안에 물기가 묻어나올 것 같은 날씨였다. 라디오에서는 낯선 펑키 음악이 흘러나왔다. 1970년대의 모던 펑키 스타일이었다. 주유소 근처의 편의점에서 산 미지근해진 콜라와 식은 핫도그를 먹던 조쉬만이 낯익은 노래였는지 음식을 삼키는 중간중간 따라 불렀다.

조쉬와 아고스는 각각 5시 20분 비행기와 45분 비행기로 KCI 공항에 도착했다. 녀석들이 합세하자 넓고 여유로웠던 지프의 공간은 아무런 낭비 없이 비좁게 느껴질 만큼 꽉 찼다. 한 달 만에 만난 조쉬는 맥시코 봉사활동을 하느라 고생을 했는지 조금 말라있었다. 그래 봤자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위협의 정도가 조금 덜 할 뿐, 풍기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에 비해 아고스는 살이 올라있었다. 일상에서 한발 짝 물러나 여유를 부리는 남부인 특유의 기질이 녀석에게도 발현된 것처럼.

초반에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피곤함으로 물들어갔다. 운전을 하는 블리스를 제외하고 지프 안의 우리들은 긴장이 풀려 있었다. 캔자스 시티에서 수십 개도 더 보았던 맥도널드의 골든 아치도 캔자스주의 경계선을 지나자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수가 줄어들었다. 화려한 건물 대신 소박한 건물이 눈에 띄었고 도로 옆의 가로수는 광대한 경작지의 초원으로 바뀌어갔다. 새로운 풍경에 흥미를 보이던 반짝이던 눈들은 점차 게임기와 만화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로 산 PMP에 내장된 카메라로 계속해서 사진을 찍어대던 레이도 곧 질렸는지 이어폰을 꽂고는 잠들어 버렸다.

옆에서 조쉬가 춥다고 창문을 닫아달라고 투정을 부렸지만, 입고 있던 얇은 난방을 벗어 녀석의 몸 위에 덮어주었을 뿐이다. 창턱에 팔짱을 낀 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그 사이에 묻은 채 정신 없이 얼굴을 휘갈기는 바람을 맞았다. 모든 불순한 것들을 날려버릴 것 같은 그 청량함이 좋았다.

캔자스는 전에 블리스와 통화를 나누었을 때 들은, 미국의 중심 레바논이 있는 주였다. 젊은 이들이 도시로 떠나가는 와중에 남은 조잡하고 개발이 덜 된 관광지. 블리스의 조상들은 펜을 무기처럼 들고 동부에 그들의 발을 반쯤 묻고 살아가는 류의 사람이었다. 결코 손에 흙을 묻히고 사는 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로 캔자스의 농장도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곳은 아닐 터였다. 블리스의 외할아버지는 사람이라곤 없는, 빈 껍데기만 남은 이곳의 땅을 사들여 자신만의 별장으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도시에 사는 자신의 후손들이 가끔씩 도시의 먼지를 털어내고 시골의 흙을 밟아볼 수 있는 혜택을 주기 위해.

차가운 빗물이 이마를 톡 치고 튕겨나갔다. 그 뒤로 한 두 방울이 더 팔뚝과 눈 밑의 여린 살갗을 치고 달아났다. 좀 전에 내렸던 비의 연속인듯했다. 비가 올 것 같아 창문을 닫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방울들이 방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차체를 요란하게 두들겨댔다.

이차선의 기다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국도에는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비가 내려 반짝거리는 도로 위로 헤드라이터를 킨 지프만이 흐릿하게 비칠 뿐이었다. 내리기 시작한 비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문득 모든 것과 차단 된 기분이 들었다. 블리스와 나, 조이와 레이, 아고스만이 차 안에 갇혀 세상에서 격리된 것 같았다. 빗소리와 고요하게 공기를 흔들어놓는 숨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피곤과 빗 줄기로 인해 공기 중을 부유하는 이온의 작용으로 녀석들은 잠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잠에 든 척 일부러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운전 중 룸미러를 통해 가끔씩 나에게 집중하는 블리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눈을 뜨면 운전에 집중하고, 눈을 살짝 감으면 내게 시선을 집중하는 형식이었다.

블리스는 한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통제 받는 군인처럼. 그러나 온기만큼은 느낄 수 있는 거리에. 내가 반발자국만 움직여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숨결에 솜털이 떨릴 수 있는 그 곳에 있었다. 살짝 감은 두 눈 사이로 블리스의 시선이 온 몸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시선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참 동안 달리자 경작지가 아닌 사람이 사는 집이 몇 채 드러났다. 집 역시 옹기종기 모여있는 형태가 아니었고 길가에 보이는 집들의 절반이 버려진 흉가였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어느새 깜깜해진 밤거리를 운전하는 블리스의 목소리만이 날이 서 있었다. 차 내부의 녀석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블리스 역시 일방적인 통보를 하기 위한 것인지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오른편 너머로 오렌지 빛의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보여왔다. 캔자스 주 소유가 아닌 개인 소유로 보이는 건물의 진입로에 설치된 가로등이었다. 불빛이 보이자 블리스가 속도를 높였다. 일직선으로 대지를 횡단하고 있는 도로의 오른편으로 차의 핸들을 꺾자 곧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철문이 드러났다. 비가 내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블리스는 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녀석이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모습과 지문인식을 위해 손바닥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철컹 하고 철 문이 열리자 블리스가 차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에도 온 몸을 흠뻑 적실 만큼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녀석의 머리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비에 젖은 등이 냉기에 떨리고 있었다.

띄엄띄엄 도로의 옆을 차지하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농장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밤이었기에 전체적인 인상이 모호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인상이 강했다. 개인의 소유물보다 작은 마을 같은 인상이었다.

“일어나. 도착했어.”

차 내부의 램프를 키며 블리스가 말했다. 녀석의 말에 차 내부의 숨소리가 거친 신음 소리로 바뀌었다. 잠에서 깨어난 조쉬가 몸을 풀기 위해 양 옆으로 팔을 뻗자 무방비하게 밀려 찌푸려질 것 같았다.

“아아! 진짜 지겨웠어.”

“벌써 밤이야? 아 나 진짜 피곤해. 들어가서 그냥 잘래.”

“밥은 어떻게 해?”

순식간에 빗소리 이외의 녀석들이 떠드는 소리가 차 내부를 채웠다. 좀 전에 쥐 죽은 듯이 잠들어있던 녀석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요란스러웠다.

“차고 안으로 차 집어넣을 거니까 짐은 거기서 옮기면 돼.”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목조건물 옆의 차고로 차를 집어넣은 후 블리스는 차에서 키를 뽑아냈다. 암전된 차 밖으로 나가 익숙한 듯 벽을 더듬거리던 녀석이 뭔가를 달칵, 하고 올리자 차고 안이 환해졌다. 농장의 주인이 대부분 부재중에 있는 관계로 관리 안 된 차고의 모습일거라는 생각과 반대로 안은 굉장히 깨끗했다. 거미들의 서식처로 전락할 수 없다는 듯 천장 역시 말끔했다.

지프에서 내려 지면에 발을 디뎠을 때 거의 3시간 만에 밟은 대지에 대한 감동이 밀려오기도 전에 온 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차 밖으로 나와 노인처럼 굳어진 몸을 푸는 우리를 향해 블리스가 총 사령관으로서 지휘를 하듯 명령을 내렸다.

“각자 짐을 들고 나를 따라오도록. 그리고 레이 네 짐은 네가 들어.”

“야! 관리인 부르면 될거 아냐!”

커다란 루이 비통 가방을 두 개나 옮길 생각을 하니 진저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레이의 말에 블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건물 관리인이 총 3명인데 둘은 집으로 돌아갔고 칠십이 넘은 관리인 하나가 지금 남아있어. 게다가 관리인과 계약을 했을 때 계약서에 손님의 짐을 들어줘야 한다는 내용은 없었을 거야. 난 백화점에서 산 물건 들고 가는 것만해도 두 손이 모자라니…… 네가 알아서 해.”

온 몸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레이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블리스는 화물칸을 덮고있던 반쯤 젖어있는 방수 천을 떼어내기 위해 지프 위로 올라갔다. 방수천을 고정시키기 위해 감싼 크로로프렌 재질의 고무줄이 지나지게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였기에 고무줄을 끌러 내리는 녀석의 팔뚝에 핏줄이 돋아났다. 간신히 고무줄을 풀러 내고 조쉬와 나 아고스가 밑에서 비에 젖어 무거워진 방수 천을 끌러내는데도 레이는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뻔뻔한 녀석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치아를 닦는 대신 딜라즈 백화점 로고가 잔뜩 적힌 종이 백에서 과자를 잔뜩 꺼냈다. 대부분의 십대 소년들이 건강에 대해서는 무심한 것처럼 우리가 꺼낸 것들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칼로리가 높다고 기피하거나 뉴스의 앵커가 몸에 해롭다고 외쳐대는 것들도 관심 밖의 일들이었다. 물론 유전자 변형 식물의 확인되지 않은 유해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설탕, 무염, 제조 과정에서 최소 한번의 공정을 덜 거친, 유기농 밀로 만들어진, 버터가 적게 들어간 푸석푸석한 빵이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자제력을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처럼 인내하지 못했다.

커다란 벽걸이 형 텔레비전에 집에서 가져온 일제 게임기를 연결시키며 아고스가 앞에 놓여있던 크래커를 입안에 집어 넣었다. 저 한 움큼이 최소 200Kcal는 되겠지. 답지 않게 그런 생각을 했다. 비계 덩어리를 집어먹는 모습이 연상됐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말 하지 않았다. 연결을 마치자마자 아고스는 게임팩이 잔뜩 든 상자에서 여행의 첫 날을 기념할만한 게임을 골랐다. 하지만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쏟아 넣을 수 있는 게임은 쉽사리 찾을 수 없는 듯 한참이나 고민하고 있었다.

“술은 안 샀어?!”

방 한 켠에 놓인 커다란 종이팩을 곰처럼 뒤지며 조쉬가 소리를 질렀다. 꿀단지 대신 맥주병을 찾는 푸 같았다. 하지만 순한 푸의 표정 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던 나를 보는 얼굴이 험악하다.

“당연한 거 아냐. 백화점에서 어떤 간 큰 고등학생이 술을 살 수 있겠어?”

“그럼 술 없이 놀라고?!”

마치 주당이 된 것 같은 말을 하지만, 조쉬 폴슨은 우리 다섯 중에서 가장 자제하는 것에 익숙한 녀석이었다. 인내를 반복적으로 훈련해온, 다섯 중에 그나마 인격이 제대로 형성 된 청소년. 일탈에 가까운 것을 불편해하고 경계하던, 늘 어른스러운 척 행동하던 조쉬였지만 여행의 첫날 밤에 대한 설렘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다.”

거실과 연결 된 샤워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욕실에서 샤워를 하며 우리의 얘기를 엿들은 듯 했다. 문을 열어놓고 듣는 대신, 문에 귀를 대고 듣는 방식으로. 레이 로만은 그런 것이 어울렸다.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열에 들뜬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은 술에 관한 잠언의 한 구절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 화장실에서 흡입을 한 모양이었다. 손으로 코를 훔치지만, 코 근처에는 흰색의 가루가 물에 젖은 먼지처럼 떨어지지 않고 들러붙어 있었다. 게다가 녀석의 걸음걸이는 비틀거렸지만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거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 인간은 술을 만들어냈지.”

“미친 새끼.”

“그 자유는 마약으로 완성되었어. 완전해진 기분이지. 자신을 조각 조각 나누어 분자, 원자의 단위로도 나는 다른 세상으로 갈 수가 있어. 그 곳에서 나는 빗줄기가 되어 맨발로 뛰고 있는 소녀의 발등 위로 떨어져 내리지. 그 피부는 달콤하고 매끄러워. 보드라운 발등에 입맞추고 싶어. 그러고 나서…… 아아……하하, 생각이 너무 빨라 잡을 수가 없네.”

웃음을 터트리며 레이는 몸을 소파에 묻듯이 앉았다. 녀석의 모습은 불안정해 보였다. 그러나 레이는 지금 비밀스럽고도 경이로운 자유를 경험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봐! 신세계의 티켓이 남았어!”

레이의 손 안에는 아주 소량만 남은 흰색의 가루가 투명한 랩 안에 쌓여 있었다. 그 양은 새끼 손톱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양이었다.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못할 것 같은 극히 소량.

“내가 자제를 못해서 그만…… 선택 받은 자의 가루에 손을 뻗고 말았지만.”

다리를 벌리고 앉는 바람에 다리 사이의 속옷이 보였다. 보기만해도 갑갑해 보이는 타이트한 속옷 위로 녀석의 성기가 반쯤 발기되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코카인을 흡입할 시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에 대해 떠올랐다. 전에 뉴욕에서 다니던 학교로 출강을 나온 연방수사국 청소년 마약 담당 부서에 있던 요원이 지루하게 떠들어댄 말이었다. 코카인은 비점막을 통해 뇌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에 다른 약물에서 볼 수 없는 신속하고 지속적인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약물이라는 것.

레이는 랩핑 된 코카인의 끄트머리를 잡고 조쉬를 향해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 했다. 조쉬가 랩핑 된 비닐 속의 코카인 가루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아멘.”

조쉬의 말을 받으며 레이가 키득거렸다. 조쉬는 길에서 구걸을 하는 팔다리 멀쩡한 젊은 동냥 객을 보는 듯이 연민과 혐오가 뒤섞인 눈으로 레이를 쳐다봤다. 조쉬는 자기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부류에 대해서 혐오하는 편이었지만, 자신의 친구가 그런 부류라는 것에는 연민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던 조쉬는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레이의 머리카락을 한껏 흔들어주고는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조쉬가 욕실로 들어간 이후에도 녀석의 손에는 랩핑 된 코카인 가루가 들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금방이라도 낙상할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히나 인형? 히나도 해보고 싶어?”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손 끝에 걸려있던 코카인을 손바닥 안에 올려놓으며 힘주어 주먹 안에서 비닐을 구겼다. 유쾌한 장난을 치듯 가벼운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일년도 더 된 일이지만, 우표를 내밀어 핥아보라며 웃고 있던 모습과 같은 표정이었다.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녀석에게 대답 대신 느리게 고개를 좌 우로 흔들자 레이가 아이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인형은 거부하면 안돼.”

“이상한 말 좀 하지마.”

“히나 아니, 조이 네 이름처럼 놀아봐아.’’

“엿 같은 새끼. 이름 갖고 놀지 마.”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를 타고 비탈길을 달려가는 자전거처럼, 자제를 잃은 채 계속 떠들어댔다.

“해 봐. 담배랑 똑같아. 처음 접한다고 다음에 또 생각 나라는 법은 없어어. 아고스도 뉴욕에서 섬머 스쿨 같이 다닐 때도 한 번 줬는데 중독 안됐단 말야.”

“술 마시는 거랑 비슷해. 좀 더 분열되고 좀 더 과하게 취한 기분이긴 하지만.”

아고스가 맘에 드는 게임을 골랐는지 게임팩을 본체에 꽂아 넣으며 무심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게임팩이 든 종이 박스 안에서 헤드폰을 찾아 내어 본체에 선을 꽂았다. 스틱을 조정해 게임을 플레이 시키자 중무장한 군인들의 3D영상이 커다란 텔레비전의 화면을 가득 채웠다. 능숙하게 무기와 군인을 고르고 전쟁의 지역을 골랐다. 녀석은 게임의 주인공으로 이라크전의 미군을 선택했다. 자신에게 있는 무기의 개수를 확인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근데, 게임 보다는 재미없어.”

“거 봐!”

아고스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듯 레이가 소리를 질렀다. 웃음을 터트리며 미끄러지듯이 소파에서 내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걸어온 녀석이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레이는 뇌의 일정 부분이 뻥 뚫려버린 듯 계속해서 웃음을 흘려댔다. 제정신일 때의 그토록 예민한 녀석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약은 자신을 해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냐.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지.”

“나참. 그런 궤변은 처음 듣네.”

“왜. 약을 하려니까 어머니의 울고 있는 얼굴이 생각나? 이렇게 하려고 날 공부시킨 게 아닌데. 엄마. 엄마. 엄마아. 엄마 밖에 모르는 멍청한 새끼.”

“헛소리 좀 하지마.”

녀석의 얼굴이 창백했다. 백지장 같이 하얀 얼굴 위로 기분 좋은 미소가 번들거렸다. 나는 커다랗게 부푼 자신의 세계에서 과대망상에 잠긴 얼굴들을 알고 있었다. 뉴욕의 뒷 골목에서 쓰레기 더미에 숨어 현실이 아닌 망상 속에서 행복을 찾는 얼굴들.

“한 번만 해도 중독 돼.”

“절대 아니야. 아니라니까아.”

녀석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감성적으로, 육체적으로 기이할 정도로 흥분한 녀석이 낯설었다.

“중독 되는 게 무서운 거야? 멍청한 자식. 엄마 젖이나 빠는 새끼. 로마 교황 레오 13세는 코카인이 인류에게 은혜를 가져다 주었다고 했어. 멍청한 인간들은 관심도 없겠지만.”

“말도 안돼.”

“진짜야! 스티븐슨이 코카인을 마시고 몇일 만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를 써낸 건 아주 유명한 얘기잖아.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20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강정제로 음료에 코카를 타서 먹었다고. 옛날 사람들은 황홀경에 다다르는 방법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요즘은 멍청하게도 그걸 막고 있어. ”

새하얀 손바닥 안에 갇힌 극히 소량의 가루는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 같은 순백의 색이었다. 레이의 말에 의하면 순백의 그것은 단지 사람을 지극히 편안하고 들뜬 상태로 만들 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 했다.

무릎 걸음으로 내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녀석은 손안에 들어있던 흰색의 코카인 가루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다. 천장의 창백한 조명에 비친 투명한 비닐 안의 코카인은 그 새하얀 빛에 의해 의미심장해 보였다.

“해봐.”

“……”

“해보라니까아.”

코 근처로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녀석이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천국에서 예수님의 발등에 키스하고 오라고.”





아무런 무늬 없는 검은 색 일색의 옷차림으로 아래 층의 계단을 걸어 올라온 블리스는 새하얀 타올을 손에 감고 있었다. 성의 없이 말린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어깨를 적셨지만 타올로 머리를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야를 가리는 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온 녀석은 방안의 한번 더 둘러본 뒤에 말했다.

“분위기 왜 이래.”

방 안의 분위기를 지적하는 녀석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약간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블리스의 지적에 흘끗 시선을 준 조쉬는 다시 과자로 눈을 돌리며 간단히 이유를 도출해 냈다.

“술이 없어서 그래.”

“술?”

한쪽 눈썹을 올리며 블리스가 대답했다.

“이 산만한 분위기를 통합할 만한 게 있어야 하는데, 지금 전혀 그런 게 준비되어 있질 않잖아. 아고스는 게임에 빠져있고. 레이는 코카인에 빠져있고. 나와 조이는 시간 때우기에 빠져있고.”

레이와 아고스를 향해 한움큼의 과자를 던지며 조쉬가 투덜거렸다. 아고스는 등을 때린 과자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게임 속에 빠져 있었다. 녀석이 끼운 헤드폰에서 게임 속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에 반에 바닥에 누워 있던 레이는 얼굴에 던져진 과자를 손 안에서 가루로 만들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블리스는 슬리퍼를 불량스럽게 직직 끌고 레이에게로 다가갔다. 살짝 고개를 숙여 실실 거리고 있는 레이를 내려다보자 물에 젖어 짙어진 금발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레이의 얼굴에 튀었다.

“차…가워.”

속으로 찌부러드는 비명을 듣던 블리스는 아무런 표정 없이 오른 발로 레이의 옆구리를 밀어버렸다. 동작에 강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레이는 마찰력이 적은 얼음 위를 굴러가듯 웃음을 터뜨리며 떼굴떼굴 굴러갔다.

“미친 놈.”

옆에서 같이 레이 로만을 밀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블리스가 다시 한번 옆구리를 미는 것을 볼 뿐이었다. 이 중에서 웃는 것은 오직 조쉬 폴슨 뿐과 몸이 굴러가는 것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해 두 팔을 위로 뻗은 레이 뿐이었다.

“녹화해두고 나중에 약이 깨거든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저 녀석 약 한다고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잖아. 나중에 다 기억하고 그 만큼 처절한 복수를 할걸?”

블리스의 말에 조쉬가 웃음기 띈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한번 더 발로 밀어버리려던 것을 멈춘 블리스가 전보다 더 굳은 얼굴로 조쉬를 쳐다봤다.

“하긴. 더럽게 집요하지.”

그제야 어깨를 적시는 물방울이 신경 쓰이는지, 오른손에 감고 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물이 밑에까지 튀는지 레이가 얼굴 위로 튀는 물방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닦아냈다. 슬리퍼를 끌며, 내 옆으로 걸어온 녀석의 거친 동작에 살갗으로 차가운 물방울이 튀었다. 메마른 손바닥으로 팔을 쓸자 촉촉하게 젖어 오는 느낌에 둔중한 정신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케이스 안에서 갈색의 두껍고 커다란 시가를 집은 블리스는 시가 끝을 비스듬히 물고는 내 옆의 빈 자리에 앉았다.

“이게 뭐야.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조쉬는 이 기념할만한 여행의 첫날을 엉망으로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조쉬의 말에 낮은 웃음을 흘리며 시가의 끝에 불을 붙였다. 끝이 빨갛게 타 들어 가는 것을 보며 시가의 연기를 빨아들이는 표정이 영화 대부의 알파치노처럼 담배의 쓴 맛을 느끼며 짓는 쓸쓸한 표정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 같았다.

“그럼 남자 다섯이서 두고두고 기억해낼 만한, 생각만 해도 미소를 짓게 되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거라 생각했어?”

“조금.”

조쉬의 말에 블리스가 피식 웃었다.

“우리끼리라도 술 마실래?”

“술 있었어?”

“술이야 있지. 별장 끄트머리에 있긴 하지만. 차 타고 가야 하는 데. 갔다 오지 뭐.”

순식간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조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레슬링 할까? 방에서 침대 가져올까?”

유치하게도 조쉬는 술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레슬링이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객실에서 가져와.”

“객실에 침대 몇 개 있는데?”

“방마다 있어. 더블도 있고 싱글도 있고.”

환호하는 조쉬 폴슨의 여가 생활에 대해 심히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걸 내색하며 빈정거릴 생각은 없었다. 서부에서부터 중부까지의 여행시간과 지프 안에서 보낸 시간, 그리고 게임과 약에 취한 두 녀석을 인내해야 했던 시간까지 합치면 조쉬의 인내심은 높이 사 줄만 했기 때문이다.

“아고스랑 내가 침대 옮겨 놓을게. 더블 침대 두 개만 가져다 놓으면 되는 거지?”

“왜 둘만해. 난 앉아서 놀라고?”

“설마.”

블리스의 말에 조쉬가 잠깐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웃음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블리스를 보던 눈이 내게 돌려졌다. 그저 모든 일들을 조용히 방관하고 있던 나를 향해 커다란 손이 들려졌다. 아무런 선한 의미도, 악한 의미도 없이 보육원의 선생이 아이들에게 각자 할 일을 일러주듯 녀석이 친절하게 덧붙였다.

“너네 둘이 술 가져와야지.”





*





헤드라이트의 불빛은 어디가 끝인지조차 알 수 없는 암흑 속으로 퍼져나갔다. 옅어지는 불빛 너머의 세상은 온통 어두웠다. 그 어둠 사이를 난자 하며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통해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과 빗줄기, 길 옆의 목조 울타리, 우거진 풀 숲 사이의 흔적만이 작게 남은 길이었다. 땅을 파면 잘린 손이 나올 것 같은 으시으시한 밤이었다.

반복적이고 끊임없이 미묘하게 곤두서 있는 신경을 긁어대는 와이퍼 소리, 물비린내와 함께 오래된 톱밥 가루 냄새, 귓가를 때리는 굵직하고 음울한 빗소리. 할리우드의 잘 나가는 십대들이 출연하는 그저 그런 호러 영화를 촬영하기에 알맞은 날씨였다.

뒷 자석에는 값비싸 보이는 각종 술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처음으로 도착했던 흰색의 목조 건물에서 차를 타고 십분 거리에 있는 회색 벽돌 건물의 지하실에서 옮겨 놓은 것이었다. 지하실은 주류를 보관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창고에 가까웠다. 격자 모양의 주류 보관 함과 냉동고가 마련되어 있긴 했지만, 공간이 부족해 값비싼 술들이 나무 박스 안에 담긴 채 방치 되고 있었다. 개중의 박스는 모서리 사이로 쥐가 들락거렸는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그 안에 죽은 쥐의 사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추워.”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며 블리스가 운전대에서 떼고 있던 왼손으로 오른손의 팔뚝을 쓸었다. 너무 어두워 녀석의 팔뚝에 돋아난 소름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미세한 떨림만은 내게도 전해졌다. 추위에 떨고 있는 온순한 초식동물 같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 같은 빗줄기를 가르던 차를 세우고 몸을 틀어 뒷 자석의 술병을 집어 든 블리스는 상표도 확인하지 않고 병의 코르크 마개를 치아로 뽑아냈다. 코르크 마개를 어딘가에 올려놓는 대신 차 바닥으로 뱉어낸 후 술병을 꺾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천천히 세 모금을 삼킨 후 손등으로 알코올로 적셔진 입가를 닦아냈다.

“마시면 좀 더워져. 너도 마실래?”

“난방 키면 되잖아.”

“눅눅해져서 싫어.”

녀석에 손에 들린, 넘실거리는 투명한 액체가 헤드라이트의 역광에 비쳐 반짝거렸다. 녀석의 침이 묻어 있는 술병의 입구를 의식하는 게 이 순간에 중요한 일인지, 아니면 의식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인지 가늠 할 수가 없었다.

술병 안에 갇힌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헤드라이트 역광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 술을 마시면 오후의 싸움으로 인해 꽁꽁 묶여 있던 내가 조금은 해방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술병을 바라만 보는 나를 응시하던 블리스가 다시 입가로 술병을 가져갔다. 한 모금 깊숙이 쓴 술을 삼킨다.

“무슨 술이야?”

아무런 표정 없는 어두운 옆모습이 입가에 묻은 술을 훔쳐낸다. 헤드라이트의 역광에 비친 옆모습은 새까만 도화지에 금빛의 유려한 선으로 그린 그림 같다. 이마와 콧날의 이음새, 도드라진 입술의 윤곽과 아름다운 각도의 턱만을 비출 뿐 눈매를 드러내지도, 살짝 패인 얕은 둔덕의 볼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술병을 꺾어 한 모금 천천히 삼키며 녀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류주.”

“보드카?”

“아마도.”

손을 뻗자 건넨 술병을 받아 들자 손바닥에 냉기가 전해졌다. 냉동고에서 보관된 술인 듯 했다. 병을 코 끝에서 흔들어 보았다. 무색 무취의 술. 작은 거품이 입구로 올라오는 것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보드카가 맞네.”

가만히 술병 입구로 올라오는 술을 쳐다보던 블리스가 말했다.

“어떻게 알아?”

“흔들었을 때 거품이 올라오면 보드카야. 꼬냑과 다르게 향기도 아무런 맛도 없지. 아버지가 보드카를 좋아하거든. 보드카가 정신 멀쩡한 상태로 미치기에는 좋으니까.”

낮은 웃음 소리를 흘리며,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녀석의 눈을 피하며 병을 꺾어 술을 마셨다. 무색, 무취. 차갑게 물처럼 흘러가는 보드카는 소주처럼 알코올 냄새를 풍기지도, 포도주처럼 단 뒷맛을 남기지도 않았다.

“쓰잖아. 아무런 맛 없다며.”

툴툴거리면서도 몇 모금을 더 들이키자 곧바로 속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왔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물 같다는 말은 아니잖아.”

“아… 좀 더워지는 것 같아.”

순식간에 열이 올라왔다. 차가운 유리창에 얼굴에 가져다 대어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혔다. 조금만 더. 전보다 가빠진 숨을 천천히 고르며 목 안으로 그 쓴 것을 들이부었다. 술병을 내려놓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내게서 보드카가 담긴 병을 가져간 블리스는 병을 꺾어, 아무런 표정 없이 삼켰다.

“아아… 속 쓰린 것 같아. 보드카가 몇 도지?”

“잠깐만. 어두워서 잘 안보여.”

블리스는 투명한 술병의 겉에 쓰여진 인쇄된 글자를 읽기 위해 차 내부의 램프를 켰다. 술병을 이리저리 돌려 숫자를 찾던 녀석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48도.”

“맙소사.”

“뭐, 어차피 취할 거였으니까 지금 취한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잖아.”

녀석은 좌석을 뒤로 당겨 느슨하게 앉아 그 독한 술을 한 모금 더 삼켰다.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취할 것 같았다. 술을 처음 마시는 어린 소년처럼 찡그리는 표정도, 쓴 신음도 없었다. 녀석은 깊이 술을 들이키며 한탄과도 같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좀 추워서 마시려고 했던 건데. 이젠 너무 더워.”

“나는 좀 졸려.”

“우리 정말… 얼마나 마셨다고.”

웃음을 터트린 블리스는 고개를 옆으로 숙여 나를 쳐다봤다.

“도수가 높잖아.”

말을 하는 와중에도 술은 이미 혈관을 따라 온 몸을 돌며 의지를 조금씩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알코올이 내 몸에 일으키는 작용은 의식하기 위해 두 손바닥을 관자놀이 옆에 대고 신발을 신은 채로 좌석 위에 웅크려 앉았다. 조금 작아진 느낌이었다.

“안 가?”

“조금만 더 쉬었다 가.”

한숨 섞인 말을 내뱉는 녀석의 목소리가 지친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지쳐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하듯이.

한숨을 내 쉬며 블리스가 운전대에 얼굴을 기댔다. 몸 안의 열기와는 반대로 내 쉬는 숨의 온도가 더 낮아 진 것 같다. 아니면 술에 취해 느려지는 사고처럼, 심장의 박동이 느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심해의 가장 차갑고 낮은 곳에서, 몇 만년에 한번씩 튀어 오르는 심장처럼. 전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일 텐데도, 빗물을 훔쳐내는 와이퍼의 속도가 좀 더 느려진 것 같다.

“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어.”

운전대에 얼굴을 돌려 기댄 채로, 술병을 꺾어 독한 술을 삼키며 말했다. 입안으로 채 들어가지 못한 보드카가 입가를 적시고 운전대를 적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한 채였다.

“첫 번째는 공을 들여 풀어내는 거야.”

목이 마른 사람처럼 독한 술을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한 시간이 걸리든, 한 달이 걸리든, 일년이 걸리든 십 년이 걸리든, 아니면 평생이 걸리든. 풀다 보면 이 실이 엉키게 된 이유를 알게 돼. 전체적으로 어떻게 잘못이 시작 되었는가. 최초의 원류로 흘러가지.”

블리스는 손을 뻗어 얼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거의 힘이 느껴지지 않게 미간 사이에서 속 눈썹까지. 가닥가닥 흩어지는 속눈썹의 결이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두 번째는 잘라내는 거야. 조각조각. 더 이상 엉킨 부분이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아주 금방 끝나버리지. 하지만 조각난 그것은 더 이상 실이 아니야.”

검지와 중지를 이용하던 쓰다듬음이 점차 범위를 확장해갔다. 엄지와 약지, 손 마디, 손바닥이 차례로 얼굴을 감싸 훑어 내렸다. 온기로 가득 찬 덩어리. 숨 막힐 것 같은 온기. 아주 기분 좋은 따듯함이었다.

“엉킨 실타래 같아 넌.”

“……”

“널 그대로 이해하는 건 내게 인내를 요하거든.”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녀석의 손바닥 안으로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 따듯한 온기가 얼굴의 전체로 퍼져나갔다. 녀석의 손바닥은 솜털을 간질이며 미끄러져 내려가 턱의 윤곽을 매만졌다. 최소한의 통점을 건드리겠다는 듯이 얇은 면사포가 얼굴을 감싼 느낌이었다. 그 뒤로 블리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 온기에 안주하는 나를 보면서도 녀석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편한 기분이었다. 내 피부의 위로 놓인 그 온기가 내 무게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네 손 뜨거워.”

웃음을 흘리면서 말하자, 블리스의 손이 내 턱 끝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그 손이 잠시 주먹을 움켜 쥐었다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지금 달아 올라있어서 그래.”

녀석이 바람 빠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녀석의 말에 웃으며 무릎에 얼굴을 기대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대로 창가에 어깨를 기댔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소극적인 자세로, 그 편안함에 안주하기 위해. 술에 취한 난 너그러워져 있었다.

“난 어느 정도 각오하고 나왔어.”

운전대에 기댄 상체가 흔들리 정도로 헛기침을 하더니, 바닥에 내려놓았던 술병을 꺾어 입안에 흘려 넣었다. 절반은 마시고, 절반은 운전대를 적시며.

“너도 그랬을까?”

“뭘?”

내 말에 녀석이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거친 바위 위에 그려놓은 그림처럼 드러난 윤곽은 메마르고 거칠었다.

“뭘 말이야?”

거칠어진 숨을 천천히 가다듬으며 술을 들이킨 블리스는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 빛에 반사된 녀석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제야 녀석이 말 하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끈적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것들. 순식간에 주변의 온도가 내려갔다.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랐다.

“지우……”

거친 신음 소리와 함께 술병이 손 안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몸이 내게 기울여졌다. 문이 먼저 열린 건지, 아니면 녀석이 거칠게 내 목덜미를 낚아 챈 것이 먼저였는지 구분 지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차 밖으로 상체가 밀려나왔다. 뭉툭한 바늘로 얼굴을 찌르듯이 비가 얼굴을 적셨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게 너무 빨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차가운 풀에 등이 닿으며 떨어졌다. 블리스가 지프의 내부의 턱에 걸린 다리를 벌려 그 안으로 들어와 무릎 걸음으로 날 위로 밀어냈다. 손안에 잡히는 풀을 잡아 버텨봤지만, 뜯겨진 풀의 잔재만이 손에 남을 뿐이었다.

손바닥으로 녀석의 어깨를 밀어내자 녀석이 양 손을 잡아 채 머리 위로 내리 눌렀다. 깎지가 껴진 서로의 손바닥 안에서 풀 더미가 짓눌렸다. 마주 닿은 사타구니 사이에 녀석의 단단해진 페니스가 느껴졌다. 조금씩 움찔 거리며 단단한 것이 노골적으로 비벼왔다.

“미칠 것 같았어.”

녀석의 혀가 귓속을 파고 들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오금이 저린 감각에 어깨를 움츠리자 턱으로 목덜미 사이를 파고들었다. 귓가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숨결과 축축한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사타구니 사이에서 짐승처럼 비벼지는 페니스 때문에 쏟아지는 빗물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열에 들뜬 것 같았다.

“으으…”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비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감은 눈 위로 빗물이 고였다가 계속해서 귓가로 떨구어져 내렸다. 혀와 말캉한 점막으로만 이루어진 생물 같다. 떨어진 물방울 조차도 모두 핥아버릴 것처럼 혓바닥과 귀를 이용해 거칠게 훑어 내린다. 고막의 바로 옆에서 선명하게 숨을 몰아 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탄식과도 같은 거친 숨이다.

마주 잡은 오른손을 풀러 턱을 부여잡고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길고 커다란 손가락이 혓바닥을 비튼다. 손가락과 혀, 빗물이 진득하게 엉켰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몸을 떨며 손가락을 핥자 녀석의 숨이 거칠어졌다. 손을 떼어내자마자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녀석의 손이 혀가 더 들어올 수 있도록 턱을 벌렸다. 숨쉬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그 따듯한 덩어리는 들러붙듯이 혓바닥과 끊임없이 마찰했다. 모두 먹어버릴 것처럼 혓바닥 전체를 이용해, 최대한 느낄 수 느리게 쓸어 올렸다.

코로 숨을 들이 쉬면 물이 들어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 몸을 움찔거렸지만 블리스는 봐주지 않았다. 결박하고 있던 왼손을 풀러 머리카락 사이로 집어 넣어 강하게 감쌌다. 서로의 혀를 꼬아버릴 것처럼 들러 붙었다. 심장이 크게 요동치는 순간 녀석이 입술을 떼어냈다. 하체를 강렬하게 비벼대며 너나 할 것 없이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거칠어진 호흡 사이로 블리스가 으르렁거렸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비벼대던 하체를 떼어내고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엉덩이를 살짝 들어올렸음에도 물에 잔뜩 젖어 피부에 달라붙은 바지를 벗겨내는 게 쉽지 않은지 초조해 보였다. 힘을 주어 당겨내자 다리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깨에 힘을 주어 밀며 엎드리게 한 블리스는 허리를 잡아 당겨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얇은 면 사이로 느껴지는 블리스의 얼굴은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웠다. 얇은 천 위에서 혓바닥을 뾰족하게 세워 둔덕 사이를 쓸어 올렸다.

“아… 아아!”

물에 젖은 천 위에 느껴지는 적나라한 감촉에 온 몸을 떨자 숨을 몰아 쉬며 브리프를 엉덩이의 낮은 둔덕까지 끌러 내렸다. 커다란 손으로 양쪽의 둔덕을 잡아 벌려 드러난 구멍에 혀를 뾰족하게 세워 집어 넣었다. 빗속에서 녀석의 따듯하고 물컹한 덩어리만이 온기를 전하고 있었다. 파고 들듯이, 생경하고 두려운 감각을 전하면서. 그 존재 만으로 살아 움직이는 짐승처럼 항문 내부의 아주 여린 속살을 건 들인다. 불규칙한 호흡을 내 뱉으며 주먹을 그러모아 쥐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녀석의 혀가 주는 감각에 집중했다.

“…좋아?”

엉덩이 살을 아플 정도로 깨문 블리스가 항문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빗물과 함께 추위에 차갑게 얼어있는 손이 항문 안 속살을 얼려버릴 것 같았다. 한동안 섹스의 용도로 블리스를 받아들였던 적 없었던 항문이었지만, 녀석의 두 번째 손가락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칠게,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가벼운 푸삽질을 시작했다.

숨을 거칠게 조절하며 가만히 녀석의 손가락이 주는 감각에 집중했다. 블리스는 세 번째 손가락을 집어 넣으며 조금 전 보다 더 부드럽게 내부를 헤집었다. 익히 기억하고 있던 그 곳으로 손 끝이 닿아왔다.

“윽.”

전립선에 닿은 기다란 손가락은 최소한의 접촉만을 허락하겠다는 듯 감질 맛이 났다. 풀을 그러모아 쥐며, 짧은 신음을 삼키자 모았던 세 개의 손가락을 펴며 부드럽게 전립선 부근을 미끄러져 내렸다. 모자라기만 한 쾌감이 힘들어 앞으로 도망치려 하자 녀석의 왼손을 뻗어 허리를 강하게 감쌌다. 움찔거리는 항문의 근육에 웃음을 흘리며 여전히 천천히, 집요하게 전립선 위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뇌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녀석의 손톱 끝이 전립선의 점막을 가볍게 긁어 내렸다.

“악! 아.. .누…”

“응?”

“ㄴ..눌러줘!”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손끝이 지긋하게 그 곳을 눌러왔다. 격한 신음이 터졌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원했던 감각을 뛰어넘는 쾌감에 괴로움이 더 커 앞으로 도망가려 무릎을 움직이자 녀석이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전립선을 더 지긋이 내리 눌렀다. 터트려버릴 것처럼 강하게. 수치도 모르고 엉덩이를 흔들자 계속해서 꾹꾹 내리 눌렀다.

“ㄱ…그마아아안……”

블리스의 손 안에 든 장난감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느껴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괴로움에 녀석의 손을 끊어낼 듯 죄어 보이는데도 녀석은 봐주지 않았다.

“아… 하…하..하아…… 블리스으….”

“지우…”

“…ㅎ..힘들어… 그..만.”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얇은 면으로 아슬아슬하게 감싸고 있던 페니스를 강하게 잡았다. 비에 젖은 브리프 위에서 윤곽을 따라 거칠게 애무하는 바람에 페니스의 첨단 부위의 맨 살이 드러났다. 드러난 첨단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끄럽게 유린하는 바람에 폐에서 진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정감이 다가오기 직전, 페니스를 애무하던 손도, 전립선을 짓누르던 손도 모두 거두어갔다. 고문을 받은 것처럼 기운이 없어 온 몸의 힘을 빼고 풀 위로 누워버렸다. 비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전신이 차가워지는데도 계속해서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빗소리와 함께 바지의 버클을 끌러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참한 일을 목격한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앞으로 있을 일이 좀 전보다 더 강하고, 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몰아간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블리스가 무릎으로 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맨 살이 무릎 아래에 닿아왔다. 곧 바로 무릎이 허공으로 띄워졌다. 엉덩이를 잡아 높이 들어 떨어지는 빗물과 함께 손가락을 집어넣어 내부를 적시며 허벅지 안쪽의 살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단단한 그것이 항문의 입구에 닿아왔다.

찌이익, 소리가 난다면 분명 그런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천천히, 내부를 잔인하게 벌리며 단단한 블리스의 페니스가 들어왔다. 오랜 만의 출입에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녀석은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그 감각과 통증에 턱이 절로 꺾였다. 배가 볼록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창자를 가득 매우며 그것이 들어왔다.

“아…흐윽!”

길게 자라난 풀을 잡아 버텨보았지만, 턱이 덜덜 떨렸다.

“으읏!”

블리스가 단 번에 모든 것을 끝맺듯이 허리에 힘을 주자 애널에 차가운 고환이 닿아왔다. 일그러진 얼굴과 애널과 연결된 자신의 페니스를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던 녀석이 숨을 거칠게 내 쉬며 아랫입술을 핥아 올렸다. 그 거친 모습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어진 그대로 허리를 숙인 녀석이 손을 뻗어 풀을 쥐어 잡고 있는 내 손목을 감쌌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을 아래로 잡아당기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으응… 아아…”

“알아? 일그러진 네 표정을……”

손목을 감아 아래로 끌어당기며 허리를 밀어 붙이는 바람에 등이 공중에 붕 떴다. 계속해서 허리를 밀어 붙일 때 마다 손목을 잡아 당겨 강한 삽입을 반복했다. 아랫배가 녹아 내릴 것 같았다. 전립선이 짓눌릴 때부터 느껴지던 사정감에 숨이 찼다.

“아! 블리스. 하… 하아!”

깍지를 낀 손이 팔을 계속해서 잡아 당겼다. 속도를 높여 애널 안으로 맞물리는 페니스가 전립선을 자극해왔다. 너무 강한 자극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흑, 아아.”

울음을 터트리자 녀석의 허리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온 몸이 흐물흐물 해 질 때까지 반복되는 삽입에 페니스 끝에서 정액이 배 위로 떨어져 내렸다. 거칠게 애널 안을 짓이기듯 삽입을 반복하는 움직임에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내부의 모든 것을 뽑아낼 듯이 사정을 했다. 온 몸의 열기가 그 곳으로만 몰린 것 같았다.

삽입을 멈추지 않은 채 배 위로 흘러 내렸던 정액이 빗물에 씻겨 풀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블리스가 깍지를 꼈던 오른손을 잡아 입가로 가져갔다. 혓바닥으로 느리게 팔 안의 여린 살부터 손바닥까지 쓸어 올리는 감각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끊임없이 애널 안을 들락거리던 페니스의 움직임이 조금씩 둔해졌다. 발목을 잡아 양 옆구리에 끼워 넣으며 겨드랑이 사이를 잡아 힘을 주어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런 체위 변화에 놀라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으로 블리스의 목을 꽉 끌어 안았다. 페니스를 애널에 연결시킨 채로 일어나 자동차의 본네트로 걸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애널을 수직으로 찌르는 단단한 페니스에 앓는 소리를 내며 울자 녀석이 탄식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아래 입술을 깨물어 왔다.

탁한 숨을 몰아쉬며, 본네트 위에 내 등을 기대게 했다. 녀석이 옆구리에 끼웠던 다리를 구부려 어깨 위에 얹게 한 후 몸을 강하게 밀어 넣었다. 발작적으로 가슴이 들썩였다.

“아흑!”

“너… 하아… 너무 예뻐. 예뻐서 죽을 것 같아!”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허벅지가 당겨왔다. 바들바들 떨며 녀석의 옷깃을 그러모아 쥐자 두 손을 모아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강하게 감싸며 숨이 막히게 입을 맞춰 왔다. 끊임없는 꿰뚫림에 신음이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읍!”

단번에 귀두만을 걸친 채 끝까지 밀어 넣은 블리스의 움직임에 녀석의 입 안에서 비명을 흘렸다. 끝까지 집어넣은 페니스를 허리를 움직여 내부 안에서 빙글 돌리는 바람에 허벅지 안쪽이 당겨왔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허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허리가 움직여졌다. 조금이라도 그 단단한 것이 내 안에 가득 머물러 있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흑, 아아…… 좋아. 블리스… 흐윽.”

단단한 페니스를 찔러 넣을 때 마다 온 몸이 들썩거렸다. 그 엄청난 통증을 동반한 쾌감 때문에 눈물이 비오 듯 흘러내렸지만, 빗물에 씻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블리스가 아래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힘을 주어 깨물지만, 힘을 놓쳐 풀리고 다시 입술을 깨물기를 여러 번, 애널을 짓이기던 속도가 빨라졌다. 오르가슴이 다가오는지 골반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강하게 페니스로 꽂아 넣었다. 움직임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단지 녀석의 옷을 꽉 잡아당기며 그 급박한 움직임을 견디어 낼 뿐이었다.

“ㅇ…흐윽!”

“큭!”

단발마의 비명을 지른 블리스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내 위로 쓰러져 내렸다. 심장이 매질을 하듯이 서로의 가슴을 두들겼다. 연결 된 애널 안으로 뜨겁고 끈적한 정액이 흘러 내렸다. 한참 동안, 끊임없이 페니스에서 정액이 흘러 나왔다. 오래 동안 참아 왔다는 듯이 내부를 가득 적시는 뜨거움에 온 몸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배 속을 충만하게 적셔오는 그 뜨거움은 온 몸 위로 쏟아져 내리는 차가움 속에서 유일한 뜨거움이었다.





우리는 벽난로 앞에 쌓인 물건들을 치운다. 오래되어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책을 묶어 놓은 꾸러미, 가죽이 너덜너덜해진 소파,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축음기, 기다란 안테나가 달린 텔레비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모두가 오래되고 쓸모가 없어져버린 것들이다. 주인이 버리고 도시로 가 버린 것들. 오랜 시간 함께 했지만, 제명되어 버린 것들. 눅눅한 공기 속으로 그것들이 비명처럼 먼지를 뿜어냈다. 숨이 막혀 콜록거리자 블리스가 뒤를 돌아봤다.

“그냥 있어. 내가 치울 테니까.”

녀석의 말에 거실 안을 둘러 봤다. 벽난로 앞에 쌓인 물건은 혼자서도 들 수 있는 가벼운 것들이 다였다. 누더기 같은 영수증, 80년대 촌스러운 성인 잡지. 페인트칠이 벗겨진 의자. 멍하게 그것들을 바라보다 피로를 느껴 소파의 모서리 부분에 엉덩이를 걸쳤다. 빗물에 잔뜩 젖은 옷에서 물이 떨어져 마루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전구의 수명이 다해 방 안을 비추는 불빛이라곤 오래 된 석유램프의 고요하고 초라한 작은 빛이 다였다. 블리스의 몸을 비추는 불빛이 녀석의 몸에서 커다란 그림자를 뽑아냈다. 벽을 타고 움직이는 그것은 거대한 거인 같다. 모든 어둠을 삼켜버린 거인.

블리스는 자신의 상의를 벗어 바닥을 닦아 냈다. 녀석이 닦아 내는 바닥이 손길이 닿지 않은 바닥과 대조적으로 윤기로 반짝거렸다. 물에 잔뜩 젖은 상의를 벗어 녀석에게로 다가가자 손을 들어 제지했다.

“흰색 옷이잖아.”

“뭐 어때. 어차피 엉망인데.”

“놔 둬. 내 옷으로도 충분하니까.”

녀석은 무릎을 꿇은 채로 허리를 숙여 바닥을 걸레질 했다. 마치 엄마가 거실을 쓸고 닦는 모습처럼. 물건들에 쌓인 먼지를 볼 때도 가늠했던 거지만, 바닥엔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어차피 거실 전체를 닦는 것이 아닌, 벽난로 근처만을 닦을 생각이었기에 한 벌의 티만 있어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벽 난로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걸레질을 마치고 나서 내게 눈을 맞춘 녀석이 씩 하고 웃었다.

“좀 먼지가 나도 참아.”

녀석이 거실과 이어지는 계단 근처로 걸어갔다. 계단의 아래에 놓인 한쪽 다리가 없는 사각의 테이블을 벽면으로 끌고 가더니 발로 차 다리 부분의 나무를 떼어 냈다. 벽면에 테이블의 커다란 나무 판을 대각선으로 세워놓고 힘을 주어 반으로 쪼개며, 그런 식으로 벽난로에서 태울 것들을 만들어갔다. 모서리가 정리되지 않은 나무판자들을 소중하다는 듯이 팔 안 가득 담아 벽난로 근처에 가져다 놓았다. 그 중 반을 벽난로 안에 집어넣고, 좀 전에 정리했던 책 꾸러미 중 한 권을 꺼내 종이를 찢어 손 안에서 뭉쳤다. 종이를 구기는 블리스를 대신해 벽난로 위에 걸린 램프의 불꽃에 종이 끄트머리를 대어 불을 붙였다. 벽난로 안으로 넣어진 종이는 그 밑에 수북이 깔린 종이와, 더 밑에 깔려있는 나무와 함께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냉기로 가득하던 거실 안에 따듯한 온기가 감돌았다.

“추웠지?”

“그래.”

블리스가 잔뜩 젖어 있는 신발을 벗어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버클을 풀러 잔뜩 젖어 있는 바지 역시 힘겹게 벗어냈다. 축축하게 젖은 양말. 그리고 브리프도.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바닥에 앉아 머리카락에서 떨어져 고인 물웅덩이로 그림을 그렸다. 동그라미에 눈 코 입. 찡그린 얼굴과 웃고 있는 얼굴. 그리고 물결치는 선 하나.

“너도 벗어.”

“춥잖아.”

“추우니까 벗어야지. 옷 말려야 할 거 아냐.”

내 앞으로 걸어온 블리스가 바지 버클로 손을 뻗었다. 마치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젖먹이 어린 아기처럼 블리스가 바지 버클을 풀러 내는 모습과 바지와 함께 브리프를 끌러내는 모습을 지켜 볼 뿐이었다.

“엉덩이 들어봐. 그래. 이런, 너 아까는 꽤 컸는데 좀 많이 작아졌다?”

“미친.”

내 말에 웃음을 흘리며 녀석은 바지를 끌러냈다. 양말과 물에 잔뜩 젖어 발가락을 짓무르게 만들던 스니커즈도 함께. 벽난로 근처로 옮겨 놓은 나무 의자에 옷을 걸어 놓은 블리스가 내 옆으로 걸어왔다.

“왜 그리 뚱 해져있어. 옷 벗고 있는 거 어색해?”

“그래. 어색해 미치겠어.”

“왜? 난 좋은데.”

“넌 변태잖아.”

녀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쳤다. 웃음을 터트리며 블리스가 팔을 등 뒤로 폈다. 녀석은 느슨하게 늘어졌다. 두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어 온 몸을 길게 폈다. 녀석의 복근 주위로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 아래 옅은 음모에도 이슬처럼 물기가 맺혀 있었다. 벌거벗고 있다는 것. 아무것도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인데도 녀석의 몸은 단단해 보였다. 어떤 위험 속에서도 안전할 것 같았다. 불길 속에서도, 살벌한 추위 속에서도.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추웠다.

“벗고 있으니까 추워.”

“벽난로 있잖아.”

“등이 추워. 뭐 덮을 거 없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려봤지만 등을 덮을만한 천이라곤 없었다. 창가에 기다랗게 늘어져 있는 커튼이 있긴 했지만 가벼운 흔들림 하나에도 먼지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 전에 사람이 살았다는 인가의 흔적만이 느껴질 뿐, 온기를 느끼게 할만한 것이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것을 포기하고 벽난로 쪽으로 몸을 더 붙였을 때, 블리스가 등 뒤로 다가와 앉았다.

“이러면 좀 따듯하겠지?”

단단한 가슴과 복근이 느껴질 정도로 등 뒤에 밀착해 앉았다. 추위에 민감하게 떨고 있던 등 뒤로 다가온 온기를 거부할 생각은 없었지만, 조금은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벌거벗은 두 동물이 몸을 겹친 채 온기를 나누는 행위는.

“따듯해?”

“아니.”

“그럼 덮을 거 찾아볼까?”

“아니.”

“춥다며.”

”따듯한 게 아니라 뜨거워.”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 때문에 후끈 달아올라서 그래.”

“페니스는 그대론데?”

내 말에 녀석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닿은 등이 들썩일 정도로 커다란 웃음이었다.

“아까 덕분에 너무 잘 빼내서 그래. 한동안 생산 과정에 몰입해야겠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두피 위로 녀석이 쪼는 듯한 키스를 했다. 녀석이 입술이 웃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 때문에 애들 못 자고 있겠지? 우릴 찾아나오 진 않았을까?”

“이 빗속에 그럴 리는 없을 걸? 내일 가서 신나게 우릴 줘 패면 몰라도.”

킥킥거리며 웃자 녀석의 뻗은 다리가 무릎의 바깥 살을 천천히 비벼왔다. 온기를 찾아 움직여야만 하는 짐승들의 외로운 마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좋아?”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 안으로 느껴지는 가벼운 입맞춤과 온기. 추위에 민감해져 잔뜩 움츠린 두피를 감싸는 그 온기에 온 몸이 나긋나긋 해지는 것 같았다. 녀석이 숨을 내 쉴 때마다 그 느낌이 더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샤워 후에 벽난로 앞에서 젖은 몸을 말리는 것 같은, 보송보송한 부드러운 건조함.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뭐가 그리 웃겨?”

숨을 들이쉴 때 마다 허리에 단단한 복근이 닿아왔다. 어느새 물기가 말라있는지 닿아있는 피부가 온기만을 전했다.

“그냥 웃겨.”

“뭐가 그렇게 웃긴데?”

나의 다리 옆으로 펼치고 있던 다리를 오무려 녀석은 자세를 편하게 잡았다. 등 뒤로 뻗어있던 손을 앞으로 뻗어 배를 감싸 안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뭘?”

“내 생각을.”

블리스가 말 했던 것처럼 잔뜩 엉켜있는 실타래. 한 번씩, 아니면 수 없이 실을 헝클어놓고 저들의 세계 속으로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손이 실을 헝클어 놓는 것이 눈이 보이는 듯 했다. 필립의 투박하고 거친 풋볼을 들고 있는 손, 풋볼 주장의 경멸이 담긴 가운데 손가락을 든 손, LA 타운의 조씨의 노동으로 굳은살이 박힌 손, 한인 타운의 목사가 설교를 하며 하늘로 뻗은 두 손, 레이의 연인이었던 트렌스젠더의 방 안의 전등을 끄는 손, 뉴햄프셔 주의 두 손으로 눈을 찢어 내 눈매를 흉내 내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의 손, 블리스 아버지의 혁대를 든 손, 약이 발린 우표를 내미는 레이의 손, 내 어깨를 두드리는 뉴요커들의 손, 악수를 하기 위해 뻗은 애니의 손, 히스패닉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있던 여동생의 손, 불법체류자의 아이들의 발음을 교정할 가브리엘의 손, 폭풍의 언덕을 넘기던 조수아의 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멕시코 소녀의 손, 찌푸린 채 흑인 게토 지역을 가리키고 있는 아버지의 손, 한국 케이블 방송을 찾기 위해 리모컨을 든 어머니의 손, 칼릭스를 안고 있는 두 남자의 손, 칼릭스의 손등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진의 손,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던 칼릭스의 손, 날 안기 위해 겨드랑이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던 블리스의 손. 실타래를 풀어내지 못한 채로 내가 기억하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날 울게 하고, 날 웃게 했던 많은 정리되지 않은 기억들.

“미안, 너와 자고 나서 더 복잡해졌어.”

“네가 더 복잡해지면 난 어떻게 하라는 거야. 가뜩이나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녀석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곧 숨이 턱 막혔다. 진이 빠진 사람처럼 목의 긴장을 풀어 녀석의 어깨에 뒷머리를 기대었다.

“네 뇌를 반으로 쪼개면 나처럼 단순해질까?”

“아니. 난 그래도 과민할 것 같아.”

“괜찮아. 난 네가 십 초마다 한번씩 시계를 쳐다보는 인간이라도 사랑했을 거야.”

“내가 동양인이라서?”

블리스가 가볍게 귓불을 깨물었다.

“아니, 너라서.”

속이 쓰린 느낌에 몸을 웅크리자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대하듯이, 가장 조심스러운 마찰로 손바닥이 따듯하게 배 위를 감쌌다. 따듯하고 가벼운 면사포가 배 위를 쓰다듬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등과 가슴이 밀착하며 블리스가 턱을 어깨에 걸친 채 가벼운 숨결을 내뱉었다. 솜털처럼 가벼운 숨결이었다.

“네게 가장 행복한 게 뭐야?”

내 말에 블리스가 귓불을 살짝 깨물어 왔다. 정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벼운 접촉이었다. 귓불에서 목덜미로, 다시 머리카락 속으로 입술을 천천히 옮기며 가벼운 날숨을 내뱉었다.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껴 안은 녀석의 두 팔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녀석이 속삭였다. 네가 되는 것. 녀석이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앞으로 웅크렸다. 순간, 속에서부터 뜨거운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숙여 이마를 차가운 바닥에 대었다.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자세로, 안의 열을 식히기 위해 날숨을 뱉어내며.

내부에서 단단한 형태의 이름 없는 어떤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 속이 보이지 않는 단단한 것을 삼키려 애를 쓰며 말했다. 갈라진 목소리가 이상했다.

“사귀자.”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다. 등을 쓰다듬던 손길도, 내 숨소리도, 허를 찔린 블리스의 숨소리도, 방 안의 흔들리는 램프의 불빛, 비 소리조차도.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정지된 공간을 메우듯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침묵의 표면 안으로 수만 가지의 생각이 오갔다. 어느 것 하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넓은 우주를 떠돌아다녔다. 시끄럽게 속닥거리며, 침묵의 공간을 채워나간다. 기념할만한 침묵과 방황이었다.

등 위로 허리를 숙인 블리스의 가슴이 닿아왔다. 삶을 향해 뛰는 심장의 일정한 리듬이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빠르고 격하게, 고요한 정적과 대비되는 움직임. 오랜 시간, 나의 리듬과 녀석의 리듬이 같아질 때까지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날 좋아해?”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래.”

“……그럼, 사랑해?”

두 팔이 웅크린 가슴을 감쌌다. 그 따듯한 온기는 가능한 것들을 가늠하듯 섬세하고 끈질기게 심장 근처를 더듬는다. 나의 심장에서 어떠한 기록이라도 찾아내려는 듯이.

“그래.”

녀석은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은 채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습기에 찬 눅눅한 온기. 블리스는 긴장해있었다. 삶에 대한 어떠한 최종 판결을 받는 것처럼.

“하지만 네가 바라는 것만큼은 아냐.”

내 말에 블리스는 고개를 숙여 불에 살짝 입을 맞춘다. 덧붙인 말에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르지도, 어떤 말을 하지도 않는다. 단지 볼에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댈 뿐이다. 어떤 필사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온 몸의 혈관에 그 간지러움이 흐른다. 그 모든 감각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커다랗게 한숨을 내뱉었다. 안이 보이지 않는 단단하고 둥그런 형태의 응어리가 목구멍 안에서 튀어나와 바닥을 굴러다닌다. 그 노출된 감정들.

“그게 어디야. 빌어먹을 자식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허탈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때 마다 블리스에게 감싸인 몸이 함께 들썩거렸다.

“그래. 그런 식으로 한 조각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

녀석이 귓불을 깨물고는 말을 잇는다.

“넌 내게 사귀자는 말을 할 정도로 너그러워졌으니까. 배가 고플 때 마다 나는 네게 응석을 부리면서 한 조각씩 더 달라고 보채는 거야. 아직도 많이 배가 고프다며,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며 보채. 야금야금 빼앗아 가면, 결국에는 넌 내게 다 주는 거야. 멋지지?”

“그래… 멋져.”

블리스는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내게 입을 맞춘다. 맛있는 사탕을 핥듯이 광대뼈 위로 혀를 내어 핥으며. 볼에 닿는 녀석의 볼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이 느껴진다. 웃고 있는 녀석의 입가도. 마치 새로 시작하는 연인의 흉내라도 내듯이 가슴을 감싼 손에 힘을 주고 몸을 천천히 앞뒤로 흔든다. 어떤 결말도 모르는 채로. 나를 향해 항해를 시작하는 선원처럼, 그러나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사귄다. 너와 내가 사귄다. 그것도 연인으로서. 여태 질질 끌어왔던 것은 거짓말인 것처럼 너무도 간단하게. 동성간의 관계에서 한쪽 발 만을 지면에 약간 묻은 채로 언제라도 달아날 준비를 해왔던 내가 거짓말인 것처럼.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난 그런 종류에 대해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외줄을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너무나 위험한 것들이다. 내가 너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래서 너를 받아들이면서도 내가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유기할 것이다. 그 작은 믿음이 마치 나를 구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 이후로 두 소년은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백설공주와 왕자님처럼 행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우둔하고 과민하고 멍청한 두 어린 소년이 치기 어린 청년이 되고, 이기적인 중년이 되고, 한 물 간 퇴물이 되고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지긋지긋하게 오래도록 진득하게 붙어서. 건조해지고, 부석부석 해지고, 생기라곤 전혀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그러니까 더 이상의 로맨스는 없을 때까지.

그런 것이 가능할까? 아버지, 당신의 며느리는 남자에요. 그런 말을 내 뱉는 순간부터 찾아올 파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





“이건가?”

소책자 형식으로 만들어진 자동차 수리 안내서는 자동차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사진 대신 간단한 흑백의 그림이 그려진, 자동차 내부의 모식도와 각 부품에 대한 설명이 인쇄된 손바닥보다 작은 책이었다. 사용한 적이 거의 없었던 듯 책자에는 손 때 하나 묻지 않은 상태였다. 흑백의 대비가 뚜렷한 깨끗한 종이 위에 갈색의 기름때를 묻히며 블리스가 책을 잡아 벌렸다. 뻣뻣한 종이가 벌어질수록 블리스의 손 안에서 갈색의 폐유 기름이 묻어 나와 종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지저분해진 소책자와 퓨즈박스 안을 번갈아 살펴보는 녀석의 얼굴이 살짝 굳어 있었다.

“아니면… 이건가?”

엔진 룸 배터리 주변의 퓨즈 박스 안에서 사각의 블레이드를 건들이며 블리스가 중얼거렸다. 와이퍼용 퓨즈를 찾아내기에는 퓨즈의 종류가 너무 많았다. 결국 소책자에서 와이퍼용 퓨즈와 관련된 설명을 찾아내지 못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소책자를 뒤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이거… 빨간색 맞겠지? 이거 뺄 테니까 시동 좀 걸어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변명이라도 해야 하니까.”

조쉬의 험상 굳은 얼굴이 생각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블레이드 안에서 붉은 색의 박스를 뽑아냈다. 차 안으로 들어와 시동을 켜고 와이퍼를 작동시키기 위해 스틱을 당기자 블리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와이퍼가 유리에 묻어있는 빗자국을 닦아냈다.

“빨간 박스는 아닌 것 같은데? 시동 끌 테니까 다른 걸로 해봐.”

“알았어. ……이번엔 노란색.”

“아…. 이런, 이번엔 아예 시동이 안 켜져.”

내 말에 블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제 밤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해 해명할 거짓 변명거리를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그냥 가자.”

“안돼. 와이퍼 고장 나서 밤중에 갈 수가 없었다고 변명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러다 정말 차 고장 나면 어쩌려고.”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툴툴거리자 녀석이 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의 퓨즈 박스로 내 머리를 살짝 건들이며 말했다.

“뭐… 이번 여행 망치는 것 밖에 더 하겠어?”

“내가 해볼까?”

“그러던지.”

차에서 키를 뽑아내 주머니에 집어 넣고는 차 밖으로 나와 본네트 앞으로 걸어갔다. 밤새 내린 비로 인해 땅이 많이 물러져 있었다. 스니커즈의 밑창을 반 이상이나 덮는 진흙에 얼굴을 찌푸리자 블리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할 수 있겠어?““너보다는 낫겠지.”

“뭐야. 연인에게 할 말이 아니야.”

툴툴거리며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 참담한 표정을 짓는 블리스를 밀어냈다. 보닛에 손을 올려 몸을 기댄 채로 몸을 숙여 본네트 안의 부품들을 살펴보았다. 퓨즈 박스 안의 블레이드는 어렸을 적 많이 가지고 놀던 레고 블록과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크기가 훨씬 더 크고 색은 단순했다. 블레이드 박스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지만 표면에는 자동차 각 부품과 관련된 퓨즈에 대한 내용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대신, 여태 고민했던 것이 한심할 정도로 간단한 설명서가 퓨즈 박스 뚜껑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것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에.

“덤 앤 더머 같아.”

“뭐?”

“설명서 있었잖아!”

“뭐? 말도 안돼!”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녀석이 내 등에 가슴을 기대어 섰다. 내 어깨에 턱을 올려 고개를 숙여 퓨즈 박스 안을 살폈다.

“뚜껑에 있잖아. 이 바보야.”

“에? 말도 안돼!”

“왜 이걸 못 봤지?”

“아.. 정말 있네? 바보 같아.”

미련하게 헤매던 자신이 우스운지 블리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녀석이 웃음을 흘릴 때 마다 등에 닿은 가슴이 들썩거렸다. 여태 헤맸음에도 기분이 고조되어 가는 듯 했다.

“우측에서 세 번째, 밑에서 네 번째.”

“검은색 이거?”

“응.”

블리스는 등에 기대었던 몸을 틀어 오른손으로 블레이드를 들어 올렸다. 커다란 손에 들린 그것을 내 눈 앞으로 들어올려 흔들었다. 그러니까 이 작은 상자를 찾기 위해 바보처럼 헤맸단 말이지. 녀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웃음이 묻어 있었다.

블레이드 상자를 임의로 열어 그 안의 전선을 라이터 불로 녹여 끊어내고는 원래의 자리에 끼워 넣었다. 와이퍼가 고장이 났다는 말을 둘러대며 건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지껄여봤자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파고들어올 것 같아 불안했다.

시동을 켜고 스틱을 당겨 와이퍼의 전원을 켜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만족스럽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블리스는 기어를 변속시킨 후 엑셀을 밟았다. 구불진 길을 따라 핸들을 돌리며 녀석은 알 수 없는 곡조의 휘파람을 불었다. 밤새 내린 비로 인해 길 위의 진흙이 타이어가 돌아갈 때마다 차 바닥에 튀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녀석은 여전히 상의를 벗은 채였다. 어제 먼지투성이인 바닥을 닦아내느라 벗었던 검은 상의는 먼지에 잔뜩 절어있었기에 도저히 입을 수가 없어 보였다. 블리스의 단단해 보이는 육체는 밤새 벌레에 물린 듯 이곳저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간지럽지?”

“응? 뭐가?”

“벌레에 물린 것 같은데.”

핸들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벌레에 물린 자리를 확인한 블리스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뭐, 가서 연고 바르지. 너야말로 많이 안 물렸어?”

“손가락 끝에 물렸는데 간지러워 미치겠어.”

“손가락 좀 줘볼래?”

벌레에 물린 손가락을 눈앞으로 가져가자 녀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 지금 엿 먹으라는 거야?”

“물린 손가락 내밀라며.”

가운데 손가락으로 콧망울을 내리 누르자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우스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자 곁눈질로 녀석이 나를 흘겨봤다. 그대로 자세를 고쳐 블리스는 콧망울을 내리 누르던 가운데 손가락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물컹하고 뜨거운, 타액에 잔뜩 젖어있는 혀가 손끝을 감쌌다. 혀가 손톱과 살의 연한 경계를 파고 \들었다. 부드럽고 끈적 하게 지분거리며 볼록하게 튀어나온 살 속의 독소를 모두 가져가겠다는 듯이.

젖을 빨듯이 오므린 아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지자 자잘한 주름의 결이 느껴졌다. 블리스는 입을 크게 벌리며 엄지손가락마저 혀로 감쌌다. 그 은밀하고 감각적인 느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안 더러워?”

“사실 좀 찝찝해.”

입안에 들어있는 손가락 때문에 혀의 움직임에 통제를 받아 발음이 불분명했다. 치아로 살짝 깨물며 웃음을 흘리는 녀석의 입안에서 손가락을 빼 냈다. 투명한 실이 끈적하게 이어졌다. 침이 잔뜩 묻은 손가락을 블리스의 배꼽 근처에 문질러 닦아냈다. 중지로 녀석의 얕은 배꼽을 파고들자 앓는 소리를 냈다.

“이봐. 난 지금 작은 자극에도 달아오른다고.”

그렇게 말은 했지만 슬쩍 바라본 녀석의 하체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금만 더 달리면 목적지가 보이는 곳에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 손을 거뒀다.

농담을 하며, 시시덕거리다가 우리는 곧 잠잠해졌다. 블리스는 운전에 열중하는 대신 오른손으로 나의 허벅지를 지분거렸다. 미묘한 각도로 페니스를 건들이면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 블리스가 펠라티오를 해준 탓에 끈적한 열기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정액이 묻은 입술로 키스하려 달려들었을 때는 정말 살의를 느꼈지만.

“그런 게 좋아?”

“응? 갑자기 뭘?”

룸미러를 통해 블리스가 나를 힐끗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정액… 같은 거 말야. 펠라티오 할 때 그런 걸… 더럽잖아.”

허벅지를 감싼 청바지 위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블리스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길고 가느다랗지만 연약하지 않은 손마디, 손등 위로 불거져 나온 힘줄을 느리게 쓸어 올렸다.

“어차피 네 몸에서 나온 거야.”

블리스는 허벅지 위로 얹었던 손을 돌려 그 위에 얹어진 내 손바닥과 자신의 손바닥을 겹치게 했다. 스며 나온 땀 때문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넌 네 몸에서 나온 거면 다 먹냐?”

“으… 더럽게 무슨 소리야.”

“거봐!”

소리를 지르며 발로 바닥을 쳤다. 발로 바닥을 구르며 정말 싫은 티를 내자 블리스가 힐끗 쳐다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간만의 정제되지 않은 모습이 즐거운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정액은 노폐물이 아닌데. 맛이 이상할 뿐이지. 게다가 네 거잖아. 네 거라고 생각하…”

“됐어! 이런 얘길 하는 것도 낯부끄러워.”

손을 들어 녀석의 입을 막아버렸다.

“키스할 때 내 정액 맛이 나잖아. 얼마나 끔찍한데.”

“비위 상해?”

“그래. 좋을 리가 없잖아.”

“그래? 난 미치게 좋은데.”

블리스는 마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입술 위에 내 손등을 가져다 대며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이 취향 특이한 녀석의 입술을 눌러주기 위해 손등에 힘을 주어 밀어내자 녀석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블리스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헤퍼진 느낌이었다.

“네가 변태라 그래.”

내 말에 녀석은 앞니로 손등의 얇은 살갗을 깨물어 당겼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당겨진 피부를 자근거리며. 녀석 나름의 분노의 표현이었다. 블리스는 나와의 모든 소통에 입을 사용하기 좋아했다. 입술, 혀와 고른 치열을 사용해 시도하는 대화는 유아기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법이었다. 허기진 사람처럼. 그것 외에도 블리스가 내게 소통을 시도할 때에는 어떠한 방식이 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모두 드러낸 채로 두 팔을 벌려 달려오는, 모든 포장을 벗겨낸, 아무런 신비도 남아있지 않은 덩치만 커버린 남자 아이.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지프의 바퀴를 물에 잔뜩 절은 진흙 위로 미끄러트렸다. 마치 물 위를 항해하는 소형 선박을 탄 기분이었다. 지프는 단단한 아스팔트 위를 달릴 때와는 달리 한참이나 더 미끄러지며 진흙 위를 굴렀다. 마침내 더 이상의 움직임 없어져 운전을 위해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없어지자 블리스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등의 얇은 피부를 치아로 잘근거리는 대신 입술로 잡아당겼다.

나의 손과 마주 닿아 있는 녀석의 손 위로 나 역시 입술을 묻었다. 두꺼운 유리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우리의 입술은 두 손의 따듯한 체온 위로 갈려있었다. 키스를 하기 위해 힘을 주어 손을 끌러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블리스의 입술이 닿아왔다. 곧 촉촉한 온기가 온 입안을 감쌌다. 우리는 목이 마른 사람처럼 키스를 했다. 허기와 갈증을 채우려는 듯이 서로를 착취했다.

나를 보고 있는 소년. 감은 눈 때문에 오직 입술만이 느껴지는 이 뜨거운 소년. 내가 사귀자는 말을 내뱉었을 때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실제 연인이 되긴 했지만, 연인 흉내를 낸다는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서로에게만 충실해야 한다는, 보통의 연인들이 속삭이는 밀어를 내 뱉을 자신도 없었다. 그 어떤 낯 뜨거운 표현도 좁디좁은 목구멍에서 새어나올 것 같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나만을 향한 블리스의 연한 하늘색의 눈동자, 그 안의 검은 동공에 비친 나를 볼 때의 그 숨막힘.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감정을 통제 받는 느낌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조쉬와 아고스의 엎드린 모습이 보였다. 레슬링을 하기 위해 깔아놓았던 네 개의 매트리스 위에서 녀석들은 이불도 걸치지 않고 제멋대로 잠들어 있었다. 텔레비전 속에는 게임의 엔딩 장면이 대형 사진처럼 화면을 가득 차지한 채 정지해 있었다. 두 손 가득 들고 있던 술이 담긴 나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거실의 불을 밝히는 대신 창가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어내자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던 방안의 분위기가 환해졌다.

“깨울까?”

커튼을 리본으로 고정시키며 블리스가 반대편에서 리본을 묶고 있던 나를 돌아봤다. 낮고 작은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창가의 유리를 통해 투영된 아침 햇살에 산란된 블리스의 금발은 풍부한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손으로 만지면 빛의 조각을 만지는 것처럼 포근할 것 같았다.

“술 같이 가져오자고 할까?”

“됐어. 한번만 더 가면 되는데 뭐.”

“그래. 그럼 갔다 온 다음에 옷을 갈아입던가 하자. 덜 말랐는지 찝찝해.”

건물 바로 앞에 세워둔 지프의 뒷좌석에서 술이 담긴 박스를 가지고 계단을 올랐다. 블리스의 외조부가 캔자스 주의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기 전부터 지어져 있던 건물 같지는 않았다. 높은 천장 위에 매달려있는 낭비가 적은 세련된 샹들리에와 펄 화이트 벽지, 장식품, 난간은 모두가 80년대식이었다. 토지를 매입 하면서 건물 자체를 리모델링 했거나 새로 지었을 것이었다. 계단의 마지막 층계에서 왼쪽으로 돌아 복도를 걷자 끝에 이어진 거실에서 아고스와 조쉬가 잠들어 있는 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구석에 치워진 소파 위에서 레이의 옆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술을 가지러 간 사이 거실로 걸어 온 모양이었다.

담배 끝을 손가락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끼운 채 레이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새파란 눈과 햇빛에 산란된 붉은 금발이 원색적인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녀석의 안색만은 창백했다. 저혈압인 탓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이 없어 대신 아침 식사 명단에 체크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녀석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오늘만큼은 일찍 일어나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슬쩍 불안함이 올라왔다.

“일찍 일어났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슬쩍 쳐다보며 블리스가 말했다. 시계는 6시 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행객이 맞은 아침 치고는 지나치게 이른 감이 있었다.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는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눈 밑이 부석부석한 것이 피곤해 보였다.

가운을 여매던 벨트는 어제보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어 가슴과 속옷이 드러난 채였지만, 레이는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레이의 신경은 닿을 수 없는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자지 그랬어. 피곤해 보이는데.”

블리스가 레이의 근처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자 담배를 끼운 손으로 손목을 밀어내며 찌푸렸다.

“12시까지 안 들어오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어.”

찌푸리는 얼굴과는 반대로 사무적인 말투였다. 아직 블리스를 올려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설마, 이 덩치로 납치당했겠어? 비가 오는데 와이퍼가 고장 나서 올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

“빌어먹을. 별의 별 상상을 다했던 내가 병신이지.”

“혼자서 왜 그래? 조쉬랑 아고스는 마음 편히 잠이나 자고 있는데.”

그 말에 레이는 나를 흘끔거리더니 곧바로 블리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의 방관자처럼 한발자국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레이는 약이 오른 사람처럼 씩씩거리긴 했지만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끝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담뱃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어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병신들.”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담배를 재떨이 위에 떨어뜨렸다. 레이는 말릴 새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향해 걸어가 버렸다. 분을 삭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늦은 수면 을 취하기 위해선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죄책감과 같은 종류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애써 만들어 놓은 변명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바로 깨어난 조쉬와 아고스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당했다. 아고스의 팔에 헤드락이 걸렸을 때 목을 삐었는지 고개를 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복수는 하지 못한 채 발 걸음이 닿는 대로 들어간 객실에서 얼마나 잠을 잤는지 모르겠다. 어젯밤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에 들었다. 내내 상념 속을 차지하고 있던 블리스에 대한 고민은 거짓말처럼 그림자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물러난 채 나의 수면을 방관했다.

거실로 모두가 모인 시간은 늦은 수면에서 깨어나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정오를 한참이나 넘긴 시간, 술을 마시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취한 정신으로 해야만 더 즐거운 레슬링을 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새로운 일정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계곡 근처에서 야영을 할까 싶었지만, 어제 내린 비로 인해 물이 불어나 있어 그 계획 역시 불가능했다. 남자 다섯이 모여 수다를 떠는 것도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아 그나마 가장 실현 가능한 경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블리스와 조쉬가 창고에 들어가 경비행기를 꺼내 오는 동안 남은 셋은 활주로의 노면 위를 어지럽힌 돌멩이를 활주로 밖으로 던지는 일을 했다.

보통, 남 말하기 좋아하는 녀석답게 레이와 함께 있으면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 더 많았다. 자신의 기억 속 작은 치밀한 부분까지 자유자재로 기억해낼 수 있는 이 영민한 소년은 현상을 단순히 지켜보기 보다는 관찰할 때가 더 많았다. 관찰을 바탕으로 쌓아놓은 영상에 논평을 더해 자신의 대뇌 속 해마에 데이터로 남겨놓고 필요할 때마다 불러내곤 했다. 함께 풋볼게임을 보고 나서 몇 주 뒤, 모두가 경기에 대해 모호한 인상과 감상에 젖어 있을 때도 레이는 선수의 등 번호까지 기억해내며 특정 선수의 플레이까지 말 할 수 있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가 말이 많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여태 살아오면서 쌓아놓은 잡다하고 우스운 데이터가 바탕이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침부터 이어져오는 저조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듯 레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안색 역시 어두웠다. 레이 로만을 지켜보며 나는 말을 거는 대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녀석을 보면 느껴지는 막연한 불안감에 일정한 거리를 남겨놓을 수 있는 완충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완벽한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어딘가에 허점을 남겨놓았을 지도 모른다. 블리스가 나를 바라보았던 시선에서, 블리스와 내가 풍기는 어떤 부주의한 분위기에서 무절제하게 흘려놓았을 감정의 조각들을 주웠을지 모른다. 이 막연한 두려움의 정체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싸늘하게 내가 머무는 세계를 무너트릴 것들. 레이 로만이라면 웃는 얼굴로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50야드 활주로 위를 돌아다니며 이륙과 착륙을 방해하는 돌멩이들을 모두 치운 뒤 우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조쉬와 블리스가 경비행기를 가져오는 것을 기다렸다. 정오가 지난 시간이긴 했지만 햇볕은 여전히 내리쬐고 있었다.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열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지열에 피부가 끈적거렸지만 어제 내린 비로 인해 공기만큼은 상쾌했다. 공기 중에 어떠한 불순물도 섞여있지 않은 것처럼 공기의 밀도가 가볍게 느껴졌다.

“놀이기구 잘 타?”

이름 모를 풀을 뽑아 앞니 사이에 끼워 가느다란 줄기를 흔들며 아고스가 말했다. 치아 사이에 끼운 줄기 때문에 불분명하게 새는 발음이 우스웠다.

“못 타는 건 없어. 즐기지 않을 뿐이지.”

“그래도 경비행기는 재미있을 걸?”

“타봤어?”

치아 사이에 끼워 넣었던 풀을 노면 위에 아무렇게나 뱉어내며 말했다.

“관광 코스로 한번 타보긴 했지. 조종사 포함해서 삼인용이었는데…… 놀이기구 보다 최소 열 배는 무서워. 조종사가 좀 포악해서 공중에서 회전하고 막 그랬거든.”

“오! 그런 거라면 재미있긴 하겠다.”

“재미있긴! 죽는 줄 알았어. 미친 듯이 비명 질렀더니 조종사가 비행시간보다 십분 일찍 끝내주더라. 사촌 누나랑 같이 탔었는데 아직도 그날 비행기 타면서 질렀던 비명을 흉내 낸다니까.”

아고스는 다시 근처의 풀을 뽑아 얇은 줄기를 검지손가락에 감으며 그 날의 일을 회상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계집애. 짜증스런 말투였다. 하지만 미국에 친척이 없어 사촌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나로서는 녀석의 짜증은 배부른 투정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육 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일하게 도미를 한 탓에 미국에서는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촌들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일년 하고도 반년쯤 전 마지막으로 찾았던 한국에서 내 또래의 사촌들을 만났었다. 서울의 답답할 정도로 좁은 아파트에서 이 주간 머무르는 동안이었다. 조부의 칠순 잔치를 맞아 전국의 각 지역에서 올라온 친척들을 만났다. 일사불란한 느낌의 급작스런 만남 투성이였다. 내가 아주 어렸던, 그들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 없는 나이에 만났었던 사람들과의 재회는 대부분 아무런 감흥을 남기지 못했다. 같은 또래 그리고 피를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기 그지없는 사촌들과 친숙함을 느끼려 애를 쓰느라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최대한 한국어로 말하려고 했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한국적 정서를 최대한 이해하는 척 했다. 불안하고 새는 발음 투성이인 한국어로 내가 아는 단어를 최대한 동원해가며, 모서리가 확실한 한국어를 둥글게 가공해 입 밖으로 쏟아냈다. 물론 세분화되어 있는 호칭이나 정교하게 세공 된 듯한 위계질서를 모두 이해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느낌을 자아내려, 친척들로 하여금 이방인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개중에는 쑥스러운지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사촌도 있었고, 미국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짓궂은 사촌도 있었다. 대형 쇼핑몰로 나를 데려가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려는 사람, 박물관으로 데려가 그네들도 사용하지 않는 한국의 옛 문화를 보여주려는 사람, 나로서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일본인에 대한 반일감정을 드러내는 사람, 경복궁이나 인사동으로 데려가 아기자기한 선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식 농담을 걸지도, 나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산만하고 모두가 통일되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네들이 보여 줄 수 있는 반응일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있어 정서적으로 반(反)외국인 이었다.

그런 것에 대해 서글프다거나 속상하다는 느낌을 갖지는 않았다. 물론, 아무런 아픔과 아쉬움이 없다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미국에서 둥지를 틀고 있는 아버지의 대학 동문들은 한국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들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생활은 한국식일지언정 사고는 미국화를 지향하는, 대부분 알고 있는 교포들의 생활이 그러했다. 그러니까… 어떠한 아쉬움도 없다는 것은 아버지가 나를 미국의 주류 사회로 편입시키려는 의도와 맞물려진 자부심이었다. 그 은밀하게 밑에서부터 곪아버린 싹들.

“그래서. 경비행기 안타겠다는 거야?”

조그만 한숨을 내쉬며 거친 바닥의 노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렸다. 땀이 난 손바닥에 박히는 콘크리트 조각들.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아고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겠다니?”

“경비행기 타는 게 무섭다며.”

생각에 잠겨 대화의 부재였던 탓에 대화의 줄기가 끊어졌던 모양이다. 아고스는 좀 전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듯 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안타겠다는 얘기가 아니잖아. 블리스는 뭐… 자격증이 있다고는 해도 공중에서 회전할 정도는 아닐 테니까. 좀 탈만하지 않을까? 이륙할 때와 착륙할 때는 견딜 만하거든. 고도를 유지할 때는 속도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로 주변을 서성이던 레이가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한쪽 어깨로 기울인 불량스러운 자세로 아고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태 피고 있던 담배를 노면 위로 던져 발로 비벼 끄며 말했다.

“블리스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데?”

“그럼 아니야?”

“블리스랑 면허를 같이 따봐서 아는데…… 그 새끼 한동안 비행에 미쳤었어.”

아고스가 코웃음을 쳤다.

“미쳐 봤자지.”

“14살 때 사막 횡단을 한다고 난리를 친 적이 있었어.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 호주로 떠나버렸지. 같이 비행했던 무리 중에서는 가장 어렸을 거야. 지 말로는 18일 동안 2500마일을 날았대. 비행시간까지 포함하면 50시간이고. 솔직히 아고스 네 말대로 아마추어 수준은 아니지.”

점점 굳어가는 아고스의 얼굴을 보며 레이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한쪽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어 짧게 잘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덧붙였다.

“특별히 블리스에게 말 해줄게.”

“뭐?”



“넌 이제 죽었어.”

레이의 말에 아고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경비행기를 탄다는 것이 어떤 공포와 흥분을 조장하는지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느끼는 여유일지 몰라도 그저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런 내게 레이의 무심한 시선이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도 비행면허증이 있었어?”

불편하다고는 해도 말을 아끼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레이를 대하고 싶진 않았다. 내 말에 레이는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오전의 작은 소동으로 인해 상한 기분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녀석은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대로였다. 그런 일을 가지고 너무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몸이 없는 게 뭐가 있겠어?”

“잘난 척은.”

“사실을 말하는 건데 왜?”

손사래를 치며 레이는 평소와 같은 말투로 얘기를 하고는,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노면 위의 어떠한 먼지의 들뜸도 허락하지 않는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푸른 느낌의 미소니 셔츠를 가슴까지 풀어헤쳐 체모가 없는 새하얀 속살이 드러난 모습이었지만 야성미 보다는 짓궂은 소년의 인상이 더 강했다. 몸은 다 자랐지만 그 속에서 풍기는 소년의 티는 벗어날 수는 없다는 듯이 강렬한 느낌은 없었다. 레이는 활주로 옆의 민들레처럼 생긴 이름 모를 풀을 꺾어 풍성한 갓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전용 경비행기도 있다고. 이름도 지어줬는걸. 섹시 걸이라고.”

“섹시 걸?”

“탈 때마다 짜릿하거든.”

웃음을 터트리자 이름 모를 들꽃을 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언제나의 녀석처럼 농담을 하기 위해 입가와 눈가의 근육을 재정비한 모습 그대로.

“게다가 1인용이라 나밖에 그녀를 탈 수가 없지. ”

“너라면 여자 하나쯤은 끼고 탈 것 같았는데?”

“여자가 같이 타면 섹시 걸이 샘내. 어떤 짓을 할 지 모르거든.”

레이는 비행기가 마치 소중한 여자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녀석을 알아온 지난 일 여년간 한번도 경비행기 조종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녀석의 관심이 다른데 기울여진 것을 말하는지도 몰랐다. 녀석의 말투엔 열정의 대상을 말할 때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흥분의 기색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갓털을 훅 불어 공기 중으로 날리는 레이를 보며 물었다.

“한번도 비행기 얘기를 안 해서 너한테 그런 여자친구가 있는지 몰랐었지.”

“내가 언제 내 여자친구에 대해서 너희들에게 말한 적 있었어? 연애의 심오함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에게 말해 봤자지. 연애를 하고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여자의 마음을 읽는 게 더 중요한 거지. 아무튼 섹시 걸에 대해서 별로 얘기 하고 싶지 않았어. 뭐, 사실상 애정이 식어서 기억도 안 나긴 했지만. 비행도 신나지만 섹시 걸이랑은 섹스를 할 수가 없잖아. 사실, 섹스보다 신나는 건 없잖아.”

“변태새끼, 언제는 마약이라며.”

아고스가 끼어들며 빈정거렸다. 그제야 레이의 언제까지 열려 있을 것만 같던 입술이 다물어졌다. 이윽고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말한 건 대외적인 얘기고. 나도 체면이 있잖아.”

아고스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피고의 변호를 들은 판사처럼 구겨진 얼굴로 점잔을 떨며 말했다.

“섹스와 마약의 대외적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것 같소만?”

“섹스는 합법이지만 마약은 불법이잖아. 그걸 말해줘야 알아?”

불법인걸 알긴 아네. 레이의 말에 아고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레이는 생소한 얘기를 듣는 표정으로 밤새 내린 비로 인해 노면 위로 튀어 오른, 햇빛에 굳어 부석거리는 흙덩어리를 집었다. 갈색의 덩어리를 오른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나머지 손바닥을 마찰시켜 안의 덩어리를 가루로 만든다. 녀석은 손바닥의 흙을 탁탁 털어내며 내게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 보니 조이.” ”

“응?”

“내가 준 거 어쨌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인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자 한숨을 푸욱 내쉰다. 얼어있는지 불타오르고 있는지 아니면 메말라 있는지, 젖어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얼굴로 레이가 지긋한 시선을 보냈다.

“코카인.”

“아… 코카인?”

한 박자 느리게 이해하는 내가 맘에 들지 않는지 한쪽 눈썹을 올린다. 하지만 재촉하지는 않는다.

“안 했어. 그냥… 주머니에 넣어뒀어.”

“왜?”

“중독되니까.”

“교육 하나는 끔찍하게 받았구만.”

코웃음을 치며 녀석이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조금 전에 흙을 만지던 손으로 머리카락 속을 파고드는 게 기분이 나빠 피해보려 허리를 움직였다. 몸을 뒤로 움직여 손을 피하려 하자 녀석이 손에 힘을 주어 머리를 잡아당겼다.

“뭐야?”

“아퍼?”

“당연하지.”

“아픔을 느끼네?”

“뭐?”

거슬리는 소리로 녀석이 웃었다.

“나 지금 엿 먹이려는 거야?”

“아니.”

가끔 녀석이 웃는 모습을 보면, 아무런 악의 없이 곤충을 불로 태워 죽이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원죄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웃음. 양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짝 치열을 드러낸 모습. 녀석이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넌 어떤 자극에도 담담할 것 같거든.”

“무슨 헛소리야. 장난치지 말고 이거 놔.”

“핀으로 찔러도 피하나 나올 것 같지 않아서 말이지. 머리 속에 바른 생각 밖에 안 들어있지?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되는 관용적인 표현들 말이야. 미안해.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거 말이야.”

손에 잡힌 머리카락을 더 잡아당기며 녀석이 말을 이었다. 머리카락이 뽑혀나갈 것 같았다.

“아! 그 밖에도 다른 생각도 있긴 하겠지. 그런 행동은 좋지 않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좀 더 좋은 아들이 되고 싶어요. 빌어먹을, 이런 생각밖에 없지? 지루한 녀석.”

“이거 안 놔?”

“착해서 좋겠어. 난 늘 나쁜 생각밖에 안 드는데.”

“두들겨 맞아야 정신 차리겠어?”

주먹을 날리면 싸움이 될 것 같아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 녀석의 손을 잡아챘다. 좀처럼 머리카락을 놓지 않는 녀석의 손바닥을 비집고 깍지를 껴 가까스로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어냈다. 녀석과 나의 손바닥 안에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강제로 분리되어 버린 검은 색 뭉치. 얼굴을 찌푸렸다.

“주먹 날린다며.”

가만히 손바닥의 검은 머리카락들을 들여다보며 아랫입술을 자근거리자 레이가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기로 번뜩이는 녀석을 노려보자 녀석이 눈을 내리깔았다. 풍성한 옅은 색의 속눈썹이 푸른 눈을 가린 채였다.

“나랑 싸우려고 시비 건 거야?”

“아니. 좀 맞고 싶어서.”

“정신 차리도록 맞아볼래?”

“하하하!”

내 말에 배를 부여잡고 녀석은 한참 동안 바닥을 뒹굴었다. 어제 약을 잘못 복용해 정말 미쳐버린 걸까? 바닥을 구르는 레이를 심각하게 바라보던 아고스가 곁으로 다가왔다.

“미치려면 곱게 미쳐.”

손으로 레이의 뒤통수를 가격하며 아고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레이의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에 녀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당겨진 부위가 욱신거려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장난치곤 심하잖아.”

“미안. 내가 오늘 좀 기분이 더럽잖아.”

“한번더 그러면 네 머리 삭발시켜 버릴 거야.”

“푸하하. 그래 그래.”

녀석은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댔다. 물렁한 자세로 웅크려서 어깨를 떨어대며 가여울 정도로. 뭔가를 짓누르고 싶어 웃음을 터트리는 것 같았다. 녀석이 웃음을 터트리는 대신 뭔가를 말해주길 바라지만, 상상 이상의 비극적인 이야기 일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아고스는 미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레이를 보고 있었다. 녀석이 즐거워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레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귀여워. 웃음 띤 목소리였지만 사납게 다그치는 경고조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어버렸다.





*





남풍이 불고 있었다. 어제 밤새 내렸던 비는 거짓말인 것처럼 구름 하나 끼지 않은 하늘은 맑기만 했다. 시계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처럼 빌딩숲과 부연 공기가 시야를 가리지도 않았다. 남풍에 굽이치는 밀밭의 물결, 간간히 보이는 목장과 주택이 모두 장난감처럼 작아져 있었다. 이대로 지상에서 멀어져 구름 위를 날고 싶었다.

“재미없어?”

프로펠러의 소리가 요란했지만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블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냥 지켜보는 거야. 작아진 풍경들을.”

“신기하지?”

“응.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네.”

미소를 짓자 블리스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예상했던 것처럼 1950년대 전쟁영화 속 파일럿이 쓰던 비행안경이 달린 가죽 모자를 쓰지는 않았다. 옅은 색의 비행고글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강화 유리를 뚫고 들어오는 저물어가는 붉은 빛의 태양에 반사된 녀석의 금발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파란 눈을 가리는 옅은 색소의 근사한 속눈썹이 고글의 옅은 렌즈를 통해 드러났다. 녀석은 나완 다르게 모든 것이 색소가 옅었다. 하다못해 잇몸의 색소조차 연했다. 조종을 하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영화에서 흔히 그렇듯이 엄지를 세워 보이자 웃음을 터트렸다. 영화 속에서 양식화되어 더 이상 신선할 것도 없는 행동이었지만 블리스는 즐거워했다.

한동안 평범한 비행이 계속되었다. 난기류가 가끔 있었지만 블리스는 별 어려움 없이 그 사이를 통과했다. 비행기자체가 흔들리는 탓에 어지럼증이 밀려왔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비행을 시작한지 이십 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서늘한 기운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내리 쬐는 직사광선 때문에 온 몸은 오히려 열기에 휩싸인 것 같았다.

활주로 근처에 지어놓은 경비행기 창고 안에는 총 세대의 비행기가 있었는데 셋 중 하나가 블리스의 것이고 나머지 둘은 사촌의 것이라고 했다. 블리스의 비행기는 이인용이었기에 둘씩밖에 탑승을 할 수 없었다. 레이는 첫 번째로 태워주겠다는 블리스의 말을 거부하고 사촌의 비행기를 타고 단독으로 비행을 떠났다. 아고스와 조쉬 각각 삼십 분씩 비행을 하고 돌아오는 동안 활주로로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오랜만의 비행에 푹 젖어있는지도 몰랐다. 굳이 녀석의 섹시걸을 고집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한참 동안 날이선 웃음을 흘리던 레이는 어느 순간 조용해졌었다. 억지로 끊어내듯이 갑작스런 변화였다. 녀석에게선 간신히 잘라낸 절삭 면이 보이는듯했다. 연마되지 않아 우둘투둘한 표면을 드러낸, 나약한 속살들이. 그 순간의 우리들은 마치 억지로 건네받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어린아이처럼 어색했다.

“너 레이한테 무슨 말 했었어?”

“뭐?”

“나에 대해서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블리스가 되물었다.

“레이한테 네 얘길?”

“그래.”

“아마… 했겠지.”

“어떤 얘길?”

블리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을 했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얘긴 안 했어.”

“……”

“왜. 불안해?”

불안함에 과묵해진 나를 돌아보는 블리스의 시선은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났다. 어떠한 의심이나 비관적인 상상도 허락하지 않는 단단한 시선이었다. 나의 불안함이 무색하리만치 견고한 얼굴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뭐라 그랬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단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블리스는 여전히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냥.”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지마.”

“넌 불안하지 않은 거야?”

불안하지 않은 거야?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블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째서 이런 비관적인 이야기를 이제 막 시작한 연인들이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걱정하는 건 좋지만, 그게 우리가 사귀는데 영향을 끼치는 건 싫어. 걱정 때문에 감정을 통제 받고 싶지는 않거든. 넌 늘 나와 만나면서 우리가 사귀는 걸 들키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할 거야?”

“하지만 어느 정도는 염두 해야 하지.”

블리스는 대답을 하는 대신 입술을 다물었다. 녀석도 내 말을 괜한 기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좀 더 긍정적인 미래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꼭 죄짓는 것 같잖아.”

한숨과도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녀석이 말했다. 대답을 하는 대신 녀석을 따라 쓰게 웃었다.

어디서부터가 배덕인지, 저울질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까발려진 뒤에 박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선에 가까운 관계는 아닌 것이다. 연애를 하는 것이 배덕이 될 수도 있다니, 묘한 일이다.

녀석이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무게까지 숨겨지진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서로 사귀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파고들수록 서로의 상처를 긁어내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떳떳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진작 원인은 파악하고 있었다. 떳떳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는 핑계가 전제된 연애.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상처를 헤집을 뿐이다.

“꼭 어떤 결론을 만들어놓고 연애를 할 필요는 없어. 미리 걱정부터 할 필요도 없고.”

“그래.”

“이제 겨우 사귀게 됐잖아. 사귄지 오늘로 이틀째라고. 장황하게 미래에 대해 얘기할 필요성, 아직은 없어. 잠깐, 느끼고 있지? 우리가 사귄다는 거.”

“어느 정도는.”

어깨를 으쓱이며 반은 긍정은 반응 부정도 뭣도 아닌 모호한 대답을 했다. 연애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더더군다나 동갑내기 소년과의 연애는. 비정상적인 관계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이제 좀 제대로 된 관계가 된 걸 수도 있다. 녀석과 내가 사귄다니. 이보다 더 어색한 일이 있을 수도 있나 싶었다.

“죽어도 사랑한다는 말은 못할 것 같아.”

블리스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뒷말을 기다리는 듯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

“뭐… 내가 더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블리스는 조종대를 잡았던 두 손 중 오른손을 뻗어 내 머리 위에 가볍게 얹었다. 가벼운 스킨십을 통해 단단한 유대를 만들기라도 하듯, 접촉을 통해 녀석의 기분이 전해지는 듯 했다.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 녀석의 커다란 손을 잡아 조종대 위에 올려놓았다. 대신 그 손 위에 나의 손을 얹어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녀석의 손등위로 솟아난 힘줄이 손바닥의 통점을 최소한으로 자극하도록 가볍게 미끄러져 내렸다.

녀석과의 스킨십에 있어 어떠한 방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낯선 생명체를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접촉을 시도하는 것은 좀 더 특별한 느낌을 자아냈다. 접촉이라는 본래의 의미에 부여되는 관능적이고 충동적인 유혹과 동떨어져 단순히 한 인간을 감싸 안는 느낌.

“불안해. 네가 헤어지자는 말을 할까봐.”

“뭐야. 너답지 않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녀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밀어내자 웃음을 터트렸다.

“헤어지지 않을 거지?”

“좀 전에 내가 불안한 소리 한다고 뭐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긴. 내가 그냥 널 놔 줄리가 없지. 내가 보기보다 좀 집요하잖아. 안 그래, 자기?”

키스를 해달라는 듯 입술을 비죽이 내미는 녀석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쳤다.

“비행에나 좀 신경 써.”

내 말에 녀석은 허허허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난 이 비행기 안에서 섹스를 하면서도 조종이 가능하다고.”

“키스든, 섹스든 비행기 안에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앞 좀 보라고.”

“허공인데 뭐 어때. 앞에 아무것도 없는데.”

“섹스 하다가 추락사하는 건 좀… 너무 쪽팔리잖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블리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이 평소보다 들떠보였다. 그제야 블리스가 그토록 원한다고 말하던 단 둘이 데이트를 하는 중임을 깨달았다. 사귄다고 해서 그 전과 달라진 건 아니지만 마음 한켠에 두려움인지 아니면 즐거움인지 알 수 없는 부담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핏 본 고도계의 침은 3,000피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발밑의 얇은 철판 밑으로 까마득한 허공이 펼쳐져 있다는 생각에 오싹했다. 그에 반해 계기판 옆에 붙여놓은 지도와 챠트를 보는 블리스는 이런 상황에는 너무도 익숙한 듯 편안해보였다.

“사막 횡단했었다며.”

“응?”

“비행기로 사막 횡단 했다고 들었거든.”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인다.

“레이가 또 나불거렸지?”

“어. 으하하. 잘 아네.”

“그 자식 밖에 나불거릴 애가 없잖아. 입이 얼마나 가벼운데. 덕분에 지루한 틈이 없긴 하지만. 레이는 반 학기만 배우고 그만뒀지만 나는 방학동안 이년에 걸쳐서 배웠어. 나 이래봬도 상업용 면장도 있어. 비행기로 먹고 살 수 있다고.”

블리스는 낄낄거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 그 때 생각하니 또 그립네.”

“재밌었나봐?”

“당연하지. 사나이라면 그런 모험은 한번쯤 해줘야해.”

“어땠는데?”

고도를 더 상승시키자 비행기의 기체가 살짝 들리며 몸의 중심이 살짝 뒤로 기울여졌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주 천천히 상공을 향해 상승했다. 계속해서 계기등을 체크하며 블리스는 말했다.

“이인 일조로 비행을 하지. 한 사람이 피곤하거나 갑자기 아플 때를 대비해서야. 비행이 끝나면 대부분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잠을 자. 대부분 씻지도 못하고 그냥 곯아떨어지는 거지. 씻는 거는 비행장의 활주로에 착륙했을 때에나 가능하거든. 조리해서 먹는 음식보다 통조림에 들어 있는 음식을 먹어. 어떤 날은 너무 추워서 시동이 안 걸리는 날도 있고, 바퀴축이 부러져서 몇 시간동안 수리해야 하는 날도 있지. 한 명이라도 낙후되면 전체 팀이 출발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해놨거든. 완전 개고생이지.”

“그런 걸 왜 해?”

“왜 하겠어. 하늘을 나는 게 좋으니까. 아니, 모든 익스트림 스포츠가 그래. 짜릿하잖아.”

“하긴, 하다보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하다.”

“완전 개고생이라니까. 그래도 너, 해보고 싶지?”

흥미 있는 대상에 대해 말할 때 숨길 수 없듯이 들뜬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고 말이 빨라졌다. 녀석의 분위기에 덩달아 기분이 들떠 말했다.

“색다르긴 하겠다. 재밌을 것 같아.”

“너도 자격증을 따면…… 둘이 동부에서 서부로 한번 가볼까? 내가자는 동안에 네가 조종하고, 네가 자는 동안에는 내가 조종하고. 너도 한번 비행시작하면 미칠걸? 잠 잘 때도 온 몸이 붕 뜨는 기분이야. 익숙해지고 나서도 한동안. 돌아버릴 정도지.”

“사실 그 정도까지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당연히 직접 조종하는 것 보다는 못하지. 너도 꼭 자격증 따? 같이 미국을 횡단해보는 거야. 비행하다가 섹스 하고 싶으면 착륙해서 섹스하고. 껴안고 싶으면 껴안고. 키스하고 싶으면 키스하고. 아! 제일 중요한거. 별 보면서 비행하는 것도 꽤 멋져.”

“별 보면서?”

당장이라도 서쪽 방향으로 틀고 싶은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했다. 모든 감정을 개방하는 녀석을 보며 들뜨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방방 뜬 목소리로 대답하는 나는 내가 보기에도 좀 유치했다. 우리는 한참동안 비행에 대한 수다를 떨었다. 내가 비행에 대해 아는 지식이라고는 활자를 통해 얻은 단편적인 지식뿐이었다. 생떽쥐베리의 야간비행이나 리차드 버드 소장이 쓴 말도 안 되는 비행일지, 혹은 읽었지만 흥미가 닿지 않아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다였다. 그에 비해 블리스는 실제의 이야기를 했다. 건조한 붉은 모래 언덕 위를 날아가던 오후, 새벽의 뼈를 얼릴 듯한 추위. 호주의 사막에서 보았던 각종 야생동물들. 서쪽으로 서쪽으로… 끝없이 날아가던 날들의 이야기.

“아…… 또 하고 싶어졌어.”

비행에 대한 회고록을 읊듯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토해내던 블리스는 이야기의 맥을 끊으며 중얼거렸다.

“사막횡단이?”

“아니.”

“그럼 뭐가.”

“뭐긴 뭐겠어. 비행보다 더 즐거운 거 말이야. 모르겠어, 자기?”

라면서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음흉한 눈 꼬리를 보며 녀석의 코를 잡아당기자 큭큭 거린다.

“짐승. 좀 자제하자?”

“노력해보마.”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정말 우리 둘만 왔으면 좋았을텐데.”

“왜 또.”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 계획이었거든.”

“……같이 오길 잘했네.”

내 회의적인 반응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녀석은 웃기만 했다. 내가 애초에 여기에 오지 않을 계획이었던 것은 녀석과 나 둘 중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블리스는 가장 너그러울 수 있는 만큼 너그러워진, 어떤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녀석과 사귀기로 한 후부터 줄곧 느껴지던 여유였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나를 알면서도 여유로울 수 있는 걸 보면 녀석이 생각하는 우리의 상태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좀 전보다 높아진 고도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귀가 멍해지는 기분이다. 고도판을 보니 지상으로부터 6,000피트가랑 떨어져있다. 열개도 넘는 각종 계기판 중에서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수치였다. 두 배 이상 높아진 고도만큼 시계도 두 배 이상 밝아졌다. 시력의 한계 때문에 초원 위에 지어진 건물들은 작고 흐릿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경치 좋지? 호수 있는 곳으로 날아볼까? 호수 근처에서 착륙해서 좀 쉬자.”

“호수? 호수 근처에 활주로 있는 곳 있어?”

“호수 근처에 국도가 있거든. 195번 도로 따라가면 돼. 그냥 일반 국도 위로 착륙해도 돼. 이 동네는 워낙 차가 안다녀서 괜찮아.”

“자주 갔었나봐?”

“전에 두 번 갔었어. 물론 처음 가는 곳이라 관제탑과 교신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익숙해서 안 해도 될 것 같아.”

“산도 없고 초원뿐이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야간비행을 해야 할 테고.”

“야간비행이 진정한 경비행의 매력이지. 너는 이 수많은 계기판과 구간 차트가 뭐에 쓰이는 거라고 생각 하냐.”

계기판을 툭툭 건들이며 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을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하지만 아무리 녀석이 비행에 익숙하다고 해도 야간비행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태양이 지평선너머에 걸쳐져있는 지금 호수까지 다녀온다면 암흑을 뚫고 다녀와야 할지도 모른다.

“나만 믿으라니까.”

“……”

“뭐야. 그 침묵은. 맘에 안 들어.”

아무말도 안하고 있자 녀석이 툴툴거렸다. 겸연쩍은 내 태도에 궁시렁 거리는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져 빤히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본다. 불만스런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왜 보냐고 묻는다.

“흐음……죽기야 하겠어?”

내 말에 녀석이 코웃음을 친다.

“너 날 너무 못 믿잖아. 네 남자친구한테 그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그 남자친구란 말이 상당히 거슬리는데.”

“어쩌겠어. 그렇다고 여자친구가 될 순 없잖아.”

“…하긴.”

녀석이 나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이지만 어색하게 느껴지는 말에 흠,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물렁한 자세로 몸을 좌석에 묻었다. 지도와 차트를 번갈아가며 보던 블리스가 내 쪽을 돌아본다. 물렁한 자세에서 자신의 뜻에 별 불만이 없다는 걸 느꼈는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곧 능숙한 자세로 구식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계기판과 비슷한 것을 조절하더니 비행기의 방향을 남서쪽 방향으로 돌렸다. 급회전에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속도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조종을 하는 블리스에 비해 방향에 대한 어떠한 예상도 할 수 없는 나로서는 방향을 바꾸거나 갑작스럽게 하강을 할 때마다 속이 더부룩해져왔다.

“자, 그럼. 호수 위를 날아볼까?”

불편한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리스는 카우보이처럼 소리를 질렀다. 황야의 무법자가 아닌 하늘 위의 무법자처럼 다소 불량스런 미소를 지으며.





비행기의 엔진음과 프로펠러 소리가 죄스러울 만큼 고요하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함께 나누는 침묵이 어색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고도를 최대한 낮추어 비행을 하지만 암흑 속에 잠긴 대지는 더 이상 지형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간간히 보이는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외에 사방은 온통 어둠뿐, 도시의 밤과 달리 어둠에 익숙한 대지였다. 그에 비해 하늘은 별들이 대기에 걸러지지 않은 채 머리 위로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은하수 속을 비행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맑은 밤이었다.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 걸까. 대지의 암흑과 하늘의 별빛 사이로 비행하는 기분은 우주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적막한 우주 속을 블리스와 나 둘만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야시장비를 끼고 있는 블리스의 옆모습은 비행에 집중하느라 굳어져있었다. 야간 비행이 익숙하다고는 하나 쉽지만은 않은 듯 비장한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그에 비해 나는 너무도 물렁한 자세로 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콘돔에 둘러 쌓인 채 들락거렸던 페니스로 인해 엉덩이 사이가 얼얼한데다가 진한 감각에 나른함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인적 없는 도로 한켠에 비행기를 세워놓고 우리는 호수가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손을 잡아오는 블리스가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풀어내지 않았다. 먼지가 잔뜩 쌓이고 페인트칠이 벗겨져 엉망이 된 기다란 벤치에서 쓸데없는 농담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입을 맞추었고, 능글맞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내는 블리스의 등짝을 발로 차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일부러 바닥까지 떨어트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기에 고꾸라진 녀석에게 사과하다 투덜거리는 녀석을 달래기 위해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좋던 싫던 간에 자연스런 절차로 몸을 겹쳤다.

녀석이 수도 없이 들락거렸던 그곳이 아직도 얼얼하다. 언제나 익숙하지 않은 생경한 감각이지만 즐긴 후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리 싫은 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섹스 후의 나른함과 야간 비행이라는 두려움과 설렘에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심장이 크게 뛰었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해본 야간 비행은 한껏 성숙한 밤의 마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별이 너무 많았다. 쏟아져 내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그것은 끝이 없었다. 더글라스 애덤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되어 한없이 망상에 빠져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좌표를 잃어 헤매긴 했지만 우리는 아무런 사고 없이 무난하게 별장의 활주로로 착륙했다. 백열등이 켜져 있는 창고 안으로 비행기를 집어넣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걷는 내게 블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을 것인가 고민하며 내려뜨린 내 손을 잡아 손안에 가두며 녀석은 걸음을 옮겼다. 흰색 건물이 가까워 올 때 자연스럽게 서로가 맞닿은 손을 풀어 주머니 속으로 거두긴 했지만.

숫자에 연연하는 게 어색하고 웃기지만 어쨌든 블리스와 사귀게 된지 이틀째가 된 저녁. 섹스와 비행, 마주 닿은 손에 대한 후유증이 길게 남을 것만 같은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





무수한 먼지를 풍기며 베개가 바닥으로 튕겨나간다. 곧이어 조쉬의 얼굴이 확 구겨진다. 좋지 않은 신호다. 역시나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집어 들어 가격할 준비를 한다. 베개가 아닌 망치를 들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때릴 건 다 때려놓고 도망치는 건 좀 치사하지만, 저 베개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하자 조쉬가 험악하게 악을 지른다.

“너 죽었어!!!”

베개 좀 맞은 걸 가지고 죽인다고 까지 하다니, 너무 감정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냐. 능청맞게 말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저 베개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기다란 소파 뒤로 뛰어가자 녀석과 소파를 사이에 두고 대치상황이 된다.

“난 한손으로 때렸잖아! 넌 두 손으… 으악!”

라텍스 베개였던 탓에 일반 오리털 베개 아니라 무슨 돌덩이로 얻어맞은 것 같다. 온 몸이 휘청 이는 걸 소파를 잡고 버텨내자 또 한번 공격을 한다. 놀이가 아닌 폭행 수준이다.

“너… 나한테 감정 있지.”

으르렁거리며 묻자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아직도 베개는 녀석에게 있기에 도발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순식간에 소파위로 뛰어올라 반대편에 있던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바닥으로 쓰러질 거라 생각했는데 나를 대롱대롱 매단체로 낑낑거리고 있다.

“베개 내놔 임마!”

“미쳤냐? 나 때린 것만큼은 맞아야지.”

산 속에서의 야영, 계곡에서의 수영, 비행, 농구 등 하루도 쉬지 않고 몸을 부딪치며 노는 내내 머리가 굳어버릴 것 같았지만, 학교를 다니며 받았던 스트레스가 비로소 모두 풀리는 기분이었다. 따분히 앉아서 머리 쓰는 게임은 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지금만 해도 다소 폭력적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인원은 다섯. 베개는 넷. 베개가 없는 사람은 술래가 되어 베개를 뺏을 때까지 맞는 것. 뭐 이런 유치한 게임을 하냐고 투덜대던 내가 지금은 가장 열중해서 하고 있다. 조쉬를 가장 많이 때린 것도 나였다. 베개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지만.

저 멀리서 적군들이 몰려온다. 조쉬를 신나게 베개로 때리던 녀석들이 눈에 선하다. 다급해진 난 녀석의 허리에 매달린 채로 온 몸을 흔들어 녀석을 쓰러트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녀석은 바닥에 누운 상태로 끝없이 베개로 나를 가격했다. 지금 뺏지 않으면 다른 녀석들에게 얻어터질 것이 자명하다. 조쉬 녀석은 골리앗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베개를 놓지 않았다. 무슨 게임에 목숨을 건 녀석 같았다.

“윽!”

등 뒤에서 아고스의 베개가 허리를 직격한다. 천연소재의 라텍스였기 망정이지 자칫 잘못하면 골로 가게 생겼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아파서 소리를 질렀는데도 녀석들은 더 신이나 베개를 높이 들었다 내리쳤다. 진짜 미친놈들.

“진짜 아파!”

“누가 제일 신나서 때렸는데?”

내 말에 레이가 짜증난다는 듯 맞받아쳤다. 저 창백한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나에게 맞았던 것에 앙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블리스는 가장 둔한 몸놀림으로 때리는 시늉만 내고 있었다. 좀 전에 조쉬의 등을 내리치던 악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놀 때 만큼은 화끈하게 놀아야 다른 녀석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텐데 블리스는 주저주저 하고 있었다. 가슴을 내리치는 아고스의 베개를 끌어안고 놓지 않자 녀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 사이에도 왼쪽에서 레이 오른쪽에서 조쉬가 베개로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백인들에 의한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다 죽은 불쌍한 동양인 소년으로 기사가 나갈지도 모른다. 기자들의 과대망상에 부풀려지고 부풀려진 원색적인 기삿거리가 신문의 작은 페이지 정도는 차지하겠지. 하지만,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윽!”

아고스와 힘겨루기를 하며 베개를 빼앗으려는 순간, 뒤통수를 레이의 베개가 가격한다. 이번 건 좀 타격이 컸다.

“하, 항복할게. 아 진짜 아파!”

“항복이 어디 있어. 억울하면 니가 뺏어야지.”

“항복이 왜 없어!”

“내가 아까 맞은 건 뭐야!”

요란한 레이스가 달린 베개가 안면을 강타한다. 이것들이 진짜. 레이의 베개가 온 몸을 갈기는 사이 손에 땀이 고여 베개를 잡기가 여의치 않은지 조쉬가 자세를 고쳐 잡는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땀으로 젖은 얼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 몰라도 파괴하기 위해 태어난 마초 같았다. 순간적으로 어쩌면 원할지도 모르는, 조쉬의 만족을 채울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생각했다. 세달 전쯤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유가 그녀가 조쉬보다 훨씬 더 잘생긴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서였다지 아마.

“조쉬. 너, 진,짜 잘생겼,다.”

등을 타격하는 통증에 호흡이 짧게 끊어졌다.

“그래? 얼만큼?”

해볼 수 있는 만큼 해보라는 듯 녀석이 악랄하게 웃었다. 키가 크고 몸이 멋지긴 했지만 개성 있는 얼굴에 가까운 조쉬가 잘생겼다고 생각한적 사실 한번도 없다. 딱히 비교할 대상이 생각나지 않아 눈을 굴리고 있자 녀석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말을 잊지 못하는 나를 보더니 야구공을 던지듯 투구자세를 잡는다.

“블, 블리스보다 더!”

순간적으로 조쉬의 움직임이 멎는다. 지켜보던 블리스가 뒤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왜 하필 비교대상이 실제로 있는 인물이어야 하지?”

“그, 그…러니까 블리스가 여기서 제일 잘생겼다고 방금 전 까지 생각하고 있었거든. 근데 지금 보니 네가 더 잘생긴 것 같아.”

이 말에 조쉬는 물론 레이와 아고스 녀석까지 분노했다. 괜한 말을 꺼낸 탓에 좀 전보다 폭력의 강도가 더 세졌다. 좀 전까지 잘생겼다는 말에 웃고 있던 블리스가 휘청이며 쓰러지려는 나를 뒤에서 잡았다. 무지막지한 폭력에 시달리는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의 얼굴에 얼핏 안타까움이 어렸다.

“너희들 안 피곤해?”

제 체력의 절반도 소모하지 않았으면서 블리스는 이 끝없고 목적없는 게임이 지루하다는 듯 얘기했다.

“체력 바닥 날려면 아직 멀었어.”

조쉬가 마귀처럼 웃었다. 녀석의 짙은 갈색의 앞머리가 땀에 젖어 이마에 아무렇게나 붙어있다. 나 역시 땀으로 온 몸이 젖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에어컨을 틀어도 격렬한 운동으로 인해 흘러나온 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블리스는 아고스와 베개를 가지고 힘겨루기를 하는 나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만하자. 내일 야구 보러 가야지.”

“경기 늦게 있잖아.”

아고스의 배에 발을 대어 지지하며 빼내려고 하자 비명을 지른다. 정말 독한 놈이다.

“…그래도 일찍 출발하기로 했잖아. 언제 잘 거야 다들.”

“아직 11시 밖에 안됐어!”

“얼른 자. 죽어도 점심은 캔자스시티에서 먹고 싶거든?”

“이 새끼가 얼마나 때렸는데! 나 맞은 거 억울해서라도 지금 못자!”

레이가 빽하고 소리 지르며 힘껏 베개로 뒤통수를 갈겼다.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외홈런을 날린 것처럼 엄청난 타격음이 울리며 차가운 바닥으로 넘어졌다. 좀 전에 레이에게 뒤통수 맞았던 건 애교수준이다. 뇌가 곤죽이 되버린 것처럼 한동안 눈 앞이 아득했다. 겨우 정신을 차려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원흉을 노려보자 레이 역시도 이렇게 쌔게 때릴 생각은 없었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무식하게 때린 건지 레이 녀석의 손에 들린 라텍스 베갯잇의 레이스가 찢어져 너덜거렸다. 블리스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이 벌어졌다.

“자라니까!”

블리스의 고함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숨이 텁 하고 막혀왔다. 녀석은 마치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간 것처럼 벌개 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아…아프긴 하지만 그 정도…”

“빌어먹을, 난 그만하겠어.”

내 말을 잘라내며 블리스는 손에 쥐고 있던 베개를 소파 위로 던져버렸다.

“정말이지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 그만할 셈이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는 블리스를 모두가 의아한 듯이 쳐다봤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이나 레이가 들고 있던 베개를 노려보던 블리스는 방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표정이 짜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순간, 나는 몸을 일으켜 주려는 아고스를 밀쳐냈다. 카펫이 깔리지 않은 바닥으로 발라당 넘어진 아고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졌다. 내 등 뒤로 욕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소파 위로 뛰어 올라갔다. 블리스가 짜증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순간 베개를 집어 들었다. 녀석의 얼굴이 멍해졌다.

“젠장! 그만하는 게 어디 있어! 지칠 때까지 하는 거지!”

들고 있던 베개를 높이 들어 블리스의 얼굴을 강타했다.





녀석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려 4층의 작은 서재로 올라왔다. 오랫동안 방치되었음에도 관리인들이 관리를 잘 한 탓에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섹스보다는 단순히 얘기를 나눌 생각으로 올라왔기에 심장 떨리는 긴장감 같은 건 없었다. 시시껄렁한 쓸데없는 얘기나 내일 보러 가기로 한 캔자스시티 로얄스의 형편없는 전력에 대해 농담을 했다. 그리고 키스를 하기 위해 블리스가 입술위로 살짝 자신의 입술을 눌러왔다. 그대로 입을 벌려 혀로 입술을 문지르자 녀석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 머리를 고정시켰다. 두피를 가볍게 짓누르며 움직이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결박한다. 블리스가 더 깊은 입맞춤을 위해 얼굴을 움직일 때 마다 끈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 밖으로 낸 혓바닥을 입술로 잡아당기며 귓불을 만지작거리자 기분 좋은 따듯한 한숨을 내쉰다. 영혼의 일부분을 나누는 기분이다. 엉덩이로 뻗어가는 손을 잡아채자 녀석이 키스를 하던 입안에서 웃음을 흘려댔다.

블리스는 입술을 떼어 턱을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앓는 소리를 내자 턱에서 이어진 귓가로 혀를 미끄러트렸다. 귓가에 뜨거운 숨을 내쉬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좋아?”

“응, 좋아.”

천천히 공을 들여 드러난 목덜미를 핥자 목울대가 아래로 움직였다 다시 상승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던 탓에 샤워코롱의 냄새가 향긋한게 기분 좋았다. 치아로 살짝 깨물고는 다시 키스를 하기 위해 녀석이 얼굴을 마주했다.

“풉!”

아, 웃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터져나가는 웃음에 키스를 하기 위해 감겼던 눈이 떠진다. 옅은 하늘색의 눈동자 가득 의아함이 가득하다. 웃음을 참고 있는 내 얼굴을 보더니 좀 전 까지만 해도 나른함에 잠겨있던 얼굴이 찌푸려진다.

“니가 그런 거잖아.”

“알아 알아. 미안하다고 했잖아.”

“난 너 생각해서 그런 건데 너 정….”

“알어. 미안하다니까. 일부러 코피 내려고 그런 거 아니잖아.”

“야, 너 진짜 웃지마.”

탈지면 끝을 만지작거리며 블리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양쪽에 꽂아 넣은 탈지면 모두 붉은 핏 기운이 어려 있었다. 하필이면 강하게 가격한 베개가 얼굴의 정중앙을 강타하는 바람에 피를 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코피에 모두가 당황해서 베개를 집어던지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구급상자를 찾아냈었다. 탈지면을 찾아 적당한 크기로 말 때 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냉랭했었다. 하지만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 탈지면을 코 안으로 밀어 넣는 순간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프지? 너도 나 때려라.”

아무리 봐도 우스운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블리스의 얼굴이 구겨진다.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블리스의 손을 잡아 코 근처로 가져다 대었다.

“아 저걸 진짜…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려야하는데.”

검지와 중지 사이에 콧망울을 집어놓고 살짝 비트는 바람에 코끝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화끈거릴 정도로 감정이 실린 복수였다.

“아! 그만해.”

“때려도 된다며.”

“차라리 때려! 비틀지 말고.”

아프다고 우는 소릴 하고 나서야 분이 풀린 듯 코끝을 비틀던 손을 풀었다. 별 힘을 주지 않고 비틀었음에도 코끝이 화끈거렸다.

“솔직히 그 상황에서 내가 널 안 때렸으면 더 험악해졌어.”

“네가 그렇게 맞는데 화가 안 나겠냐.”

“내가 화내는 게 아니고 네가 화를 내니까 이상한거지.”

“뭐, 그래도 네가 더 이상 안 맞았으니까 괜찮아.”

블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속 편한 소리를 했다. 상황에 대한 해석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려는 녀석을 향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늘 반복하는 조심하자는 얘기밖에 안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마치 감정을 견제하듯 사귀는 동안 지금까지 매일 다짐하듯 그런 얘기를 해왔으니까.

“레이 화났을까?”

내 무릎 위에 얹어진 블리스의 손등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커다랗고 섬세한 손, 뜨거운 온기를 가진 손등 위에 손바닥을 얹어 느리게 애무했다. 내가 레이에게 부당할 정도로 얻어맞았다고는 하지만, 얻어맞은 본인도 아닌 블리스가 친구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어떤 불신의 근거를 마련한 기분에 좀 전부터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화났겠지. 그 성격 더러운 새끼가 그냥 넘어 갈리가 없지.”

“걱정 안돼?”

“뭘?”

“어쨌든 다 느끼고 있을걸. 네가 나를 감싼다는 걸.”

무릎을 감싼 녀석의 손이 강하게 오므려졌다 펴졌다. 아무 말도 없이 난감한 듯 미소를 짓는 녀석을 보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끔씩 생각해. 너희 둘은 십년도 넘게 사귄 친구인데… 그 사이에 내가 끼어들어서 불편하진 않은지.”

“맙소사! 너도 레이와 친하잖아. 뭐야, 누가 누구와 더 친하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맞는 말이었기에 아무 말도 안하고 있자 블리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저것 재지 좀 마. 레이는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할 만큼 남에게 집중하는 인간이 아니야.”

맞는 말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었다. 레이는 남에게 집중하는 인간이 아니긴 했지만 서로 간에 갖는 영향력에 대해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물없는 사이에 내가 벽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네.”

“아… 자기, 제발 맨틀까지 파고들지 말아줘.”

느끼한 말을 하며 블리스는 내 팔을 잡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기다란 팔을 둘러 등을 감싸 가슴을 맞대게 한 후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담백할 정도로 건조한 포옹에 오히려 안도가 되었다. 단단한 품이 좋아 녀석의 허리 뒤로 팔을 둘러 강하게 껴안자 마냥 좋은지 블리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맞닿은 가슴이 들썩거린다. 그렇게 한참동안 가슴을 맞대고 서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있었다. 다 큰 사내자식끼리의 포옹은 낯간지러운 일이겠지만 연인끼리 하는 행동이라면 아주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체온도 감정도 심장의 박동수까지 모두 같아질 때까지 서로를 껴안고 있는 것은. 낯 부끄러운일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분간하지 못해 골몰히 생각에 잠겼을 때 귀를 깨물으며 블리스가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말해봐.”

“뭐?”

“나를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말해봐.”

몸을 살짝 떼어 쳐다본 녀석은 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살짝 벌린 채였다. 잡지에서 모델이나 취할법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보며 이상한 표정을 짓자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윙크한다.

“왜, 너무 섹시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이봐, 너 지금 코에 뭐 끼고 있거든?”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얼굴이 새빨개지는 블리스를 보며 바닥을 굴렀다. 너무 웃어서 머리가 울릴 정도였다. 배가 아파 몸을 웅크리고 웃어대자 녀석은 오히려 화를 내를 냈다. 하지만, 그 정도에 사그라질 웃음이 아니었다.

“아하하… 아… 미치겠어. 배아파.”

“웃겨? 어? 누가 이렇게 해논건데 웃겨?”

“으하하… 섹시해서 미쳐버릴 것 같냐니. 거,거울보고 말해봐. 푸하하!”

“아 웃지마!”

녀석이 코에서 탈지면을 빼내 티슈에 감싸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도 나는 계속해서 킬킬거리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코끝에 검붉게 묻은 핏자국이 미안하긴 했지만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웃어 웃을 기운조차 없어 헉헉 거릴 때, 바닥에 쭈그려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블리스가 말했다.

“다 웃었냐.”

“어. 으흐흐흐.”

“그만 좀 웃어.”

블리스의 검지가 이마를 누르는 바람에 고개가 뒤로 넘어간다. 좀 전보다는 점잖게 어깨를 흔들며 웃음을 참자 녀석의 표정이 누그러든다. 언제라도 찌푸릴 준비가 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양옆으로 최대한 밀어 올려 웃자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다. 어른의 얼굴을 한 아이 같은 모습이다.



그 때, 서재의 문이 삐걱하며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얼핏 바라본 시계의 분침은 30분.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크게 웃었다 하더라도 서재는 사층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층에서 자는 녀석들을 깨웠을 리는 없었다. 스스로 잠을 깨어 유령처럼 새까만 복도를 걸어 다니다 적막함 속에서 유일하게 말소리가 들려오는 이곳을 알아냈겠지. 혹은 정말 귀신이거나.

조금씩 문이 열리며 새까만 어둠 속으로 서재의 밝은 빛이 새어나간다. 문의 맞은편에 걸려있는 음산한 초상화가 흐릿하게 빛에 반사되었다. 젊은 어머니가 아기를 팔에 안고 있는 유화로 그려진 꽤 사실적인 인상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 문가에는 새하얀 팔이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그 뒤로 서서히 드러나는 육체는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새하얬다.

“놀랬잖아.”

우리를 내려다보는 눈이 냉막 할 정도로 무심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진 얼굴에 잠시 우울한 표정이 머물다 사라진다. 왼손에 들린 버드와이저는 이미 반 이상 비워져 있었다.

“하아……”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네 뒷담.”

블리스의 말에 레이는 웃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이며 방안으로 걸어오는 녀석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거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였다. 창백해진 얼굴과 충혈 된 눈이 알비노 같았다.

“약했냐?”

“응. 조,좀 했어.”

땀이 나는지 이마를 손등으로 쓸어내며 레이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이에 있었다면 단내를 맡을 것만 같은 숨이다. 새빨갛게 충혈 된 두 눈을 검지로 두어 번 누른 녀석은 그래도 눈이 간지러운지 눈을 감은 채로 손으로 꾹꾹 눌러댔다.

“눈에 뭐 들어갔어?”

“코카인… 들이쉬다가 좀 튀었어. 하루 지나면 괜찮아지긴 하는데… 비,빌어먹을. 대신 잠이 안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걸어와 몸을 굽혀 우리 둘을 살피며 말했다.

“열쇠 어디 있어?”

“열쇠? 열쇠는 왜 갑자기?”

“영화 좀 보려고.”

“너 눈 지금 무진장 빨간데? 그냥 잠이나 자라. 이 시간에 무슨 영화야.”

“프..프랑켄 슈타인과 노틀담의 꼽추가 보고 싶어서.”

블리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레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꾸만 생각나. 요즘 계속해서 보고 싶었어.”

“여기 프랑켄슈타인은 없을 걸?”

“아니, 아니야. 전에 와서 봤었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웃었다. 아주 오래된 고서적의 모서리처럼 마모되고 닳은 느낌이었다.

“너도 기억하잖아. 낱말은 그림의 일부분이고 문장은 하나의 그림이야. 눈을 감고 상상해 봐. 그리고 상상한 것을 연결해 봐. 기억 안나?”

녀석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녀석의 발음은 평소의 악센트와 달리 시처럼 운율이 느껴졌다. 그리고 녀석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담배냄새가 풍겨왔다. 공기 대신 니코틴과 타르를 내내 들이마쉰 듯 숨결마다 담배 냄새가 쏟아졌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불안했지만 어떤 비극적인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나쁜 상태는 아닐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약에 취해 자신을 극으로 몰고 가는 느낌은 있을지언정. 블리스가 가만히 레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다물고 있자 레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기억 안나? 저 남자애는 뇌가 없다. ”

“……”

“하, 기억 못해?”

“무슨 말이야.”

“너의 상상의 나래를 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니. 역시 넌 뇌가 없는 맥스야.”

레이는 짧게 웃고는 막연히 멍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레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동일인물로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상태를 캠코더로 녹화한 뒤에 제정신일 때 보여주면 마약을 끊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나뿐인지 블리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레이는 느릿느릿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태도에는 안정감이 없었지만 사납게 갈린 날카로운 날은 없었다.

“하아, 열쇠 있는 곳이나 알려줘.”

“……”

“영화 보고 싶다니까.”

“2층 복도 끝에서 두 번째 방 서랍 뒤져봐. 거기 모아놨으니까.”

레이는 조금 권태롭고 차분한 음성으로 알겠다는 말을 했다. 문을 향해 걷다 잠시 멈춰 병을 꺾어 한 모금 마시고는 음악도 없는데 침묵 속에서 음악을 찾아낸 듯 몸을 천천히 흔들며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녀석 답지 않게 지독한 황홀에 잠겨있었다. 고독한 독거노인의 외로운 왈츠를 보는 기분에 한동안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저 미친 자식은 얼마나 오래 전에 본건데 어떻게 그걸 대사까지 기억하는거야.”

잠자코 닫힌 문을 보던 블리스가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의아한 눈으로 블리스를 쳐다보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든다.

“마이티라는 영화 봤어?”

“마이티?”

“응. 샤론 스톤이 키 작은 꼬마 엄마로 나오는 영화.”

기억의 끄트머리를 잡아채듯 블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그 영화? 보진 못했는데 재밌다 고는 들었어. 엄마랑 여동생이 그거 영화관에서 보고 나서는 눈이 새빨개져서 왔더라. 근데 난 눈물을 유도하는 그런 영화 별로 안 좋아하잖아.”

“나도 울었어.”

“뭐?”

의외의 말이었지만 장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그대로 바라본 채로 블리스는 심각하게 말했다.

“아, 이제 기억나. 그거였구나.”

“뭐가?”

“그러니까… 그 영화 내용이.”

“뭔데.”

“마이티는 우정에 대해서 다룬 영화야. A라는 머리 좋은 소년이 어느 마을로 이사를 와. 이름이 기억 안 나니까 편의상 A라고 부를게. 음… 아마도 그 애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몸 안의 장기는 자라는데 몸이 안자라는 그런 병. 키가 아주 작은 꼽추였지. A의 옆집에는 살인자의 아들인 남자애가 살고 있었어. 이름이 맥스였지. 매일같이 놀림 받는 그 애가 생각하는 세상은 지옥이었고 유일한 도피는 잠자기였어. 그 애는 말도 제대로 할줄 모르고 생각도 할줄 모르는 애야. 아무튼 둘 다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지.

학교에서 선생님이 A에게 맥스의 공부를 가르치라고 부탁해. 덩치큰 바보와 꼽추인 천재는 어쨌든… 금세 친해졌지. 맥스에게 A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줘. 비행기 만들기, 원탁의 기사와 아더왕에 대한 이야기. 더 있었는데 기억 안나지만… 아무튼 그랬어.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말도 할줄 모르고 글조차 쓸줄 모르던 맥스가 점점 변해가지. 의사를 표현하고 조금은 또래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해.

마을에서 불꽃놀이가 있던 날, 키가 작은 A를 위해 맥스는 무등을 태워서 A가 볼 수 있도록 해줘. 훗날에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웠다 회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불꽃놀이였어. 영화를 보고 있던 나도 가슴이 떨릴 정도였지. 그 이후로 맥스는 몸이 불편한 A를 위해서 자신의 어깨에 무등을 태우고 다니지. 그래서 프랑켄슈타인과 노틀담의 꼽추라는 별명을 얻게 돼.”

그제야 레이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됐다. 레이가 보고 싶다고 한 이야기는 프랑켄 슈타인과 노틀담의 꼽추라는 별개의 영화가 아닌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마이티라는 영화였다는 걸.

“무슨 일인가… 기억나질 않는데 맥스가 위험에 처하게 됐을 때 A가 아픈 몸으로 기어와서 맥스를 구해줘. 그 어둡던 날 밤에 덜덜 떨면서도 맥스를 구하기 위해 혼자 걸어가는 A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 그날 밤 A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노트 한권을 맥스에게 선물해. 그 안의 내용은 맥스가 채우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그 날 밤 A는 하늘나라로 올라가. 그러고보니…… 이 영화는 맥스가 자신과 A에게 있었던 일을 그 노트 속에 적어내는 데서부터 시작했던 것 같아.”

나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그 이후로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블리스는 마른 기침을 하고 난 후 입을 열었다.

“그게 레이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야.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지만 녀석이 슬퍼하는 건 아무리 둔한 나라도 알 것 같았어.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오히려 이상한 말만 해댈 것 같아서 둘이 놀러가는 걸 택했지. 대형 쇼핑몰을 돌아다니다가 우정을 다룬 영화랍시고 그걸 봤던 거지. 영화를 보는 내내 펑펑 우는 나 때문에 집중도 못 했을 거야.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앉아있었지. 겨우 눈물을 멈추고 티슈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찾을 수가 없더라고. 더럽지만 손등으로 훔치려는 내게 녀석이 티슈를 내밀었어. 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끝나고 나서도 별 말이 없더라.”

블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손을 뻗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 넣어 쓸어 올렸다. 블리스가 하고 있을 생각들이 귀에 들리는듯하다. 연민에 가득 차 있는 따듯한 목소리들이.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자 웃음을 짓기 직전의 입술을 내 입술에 묻어 짧은 키스를 했다.

“어쩌지?”

“……”

“레이가 삐졌나봐.”





*





주말 오후 경기임에도 관중석엔 사람이 적었다. 로열스가 안타를 칠 때마다 환호하는 우리가 눈에 띌 정도였다. 로열스의 방어율에도 불구하고 홈런이 나오지 않는 경기는 그 이유뿐만이 아니더라도 밋밋하게 흘러갔다. 로열스에서 선발 선수가 안타를 칠 때 마다 환호하는 우리가 바보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블리스는 땀을 쥐게 하지도 과격한 몸싸움이 일어나지도 않는 로열스와 디트로이트의 경기가 지루한 듯 계속 시계를 쳐다봤다. 블리스가 응원하는 팀은 오직 보스턴뿐으로 뉴욕에 있을 때부터 주욱 양키즈를 응원해왔던 나와는 반대였다. 게다가 블리스는 야구를 좋아하긴 했지만 미식축구와 농구, 레슬링 등 과격한 스포츠를 좋아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오늘 있었던 경기는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블리스의 관심 밖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디트로이트와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야구 경기는 디트로이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오클랜드를 상대로 14연패의 부진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번 경기에서는 방어율이 5점대도 채 나오지 않았다. 캔자스시티 로열스 팀이 위치한 캔자스시티주가 중소도시 수준에 머물기 때문에 자본 문제로 선수 영입에 대해 소극적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경기는 기대 이하였다. 결국 참다 못해 8회 말에 경기장을 나왔을 때가 14: 3. 어떠한 기적도 바랄 수 없는 이렇게 비참한 경기였다.

경기 도중에 나와 이틀 동안 묵을 호텔에 짐을 풀고 나서 곧장 밖으로 나온 우리는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계획에도 없는 쇼핑을 했다. 나는 나이키 매장에서 편하게 신고 돌아다니기 위해 샌들하나를 구입했고 아고스와 블리스는 전자매장을 돌아다니며 최근에 발매됐다던 게임 시디들을 구매했다. 레이는 의류매장을 돌아다니며 워싱턴 DC로 돌아가 입을 옷을, 조쉬는 지면광고를 통해 많이 들어본 제목의 자기관리 서적을 샀다. 그나마 가장 생산적인 구매였다.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들린 Rainforest Cafe는 가족단위로 외식을 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예약을 해놓지 않아서 걱정스러웠지만 다행이도 자리는 있었다. 입구로 자리를 안내하려는 스텝에게 블리스가 5달러짜리 지폐를 건내자 스텝이 웃으면서 내부의 모형 Rainforest Zone 옆의 테이블에 자리를 안내했다. 이 레스토랑에는 블리스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갔을 때 가보고는 처음으로 오는 것이었다. 형광색의 개구리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하며 동전을 받아먹는 악어, 얼굴을 움직이는 나무가 시선을 끌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매장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깜깜한 내부로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풍겨왔다. 저녁임에도 폭염에 휩싸인 건물 밖과는 달리 정말 열대 우림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가장 눈에 띄이는 것은 커다란 모형 악어였다. 악어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하며 관광객들의 동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잔돈 있어?”

다른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는 것을 보고 자극받았는지 블리스가 레이의 어깨 위에 턱을 얹으며 말했다.

“없어.”

손으로 블리스의 이마를 때리며 쌀쌀맞게 말하는 바람에 주변에 있던 우리는 웃음을 삼켜야했다. 무안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녀석은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왜 하려고?”

고개를 돌려 어깨 위에 팔을 걸친 블리스를 돌아보자 녀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10센트짜리 동전을 한개 건네자 눈을 빛내며 받아든다.

“뭐, 상술인걸 알면서도 소원을 들어준다니까 하는 거지.”

“무슨 소원 빌 건데.”

“비밀.”

제법 근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블리스는 내 코를 잡아당겼다. 코를 푸는 시늉을 내자 더럽다고 소리를 지르며 낄낄거린다. 한참동안 웃어대더니 사람들이 돌아보는 것에 뻘쭘 했는지 재빨리 페니를 던지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옆에 가 섰다. 이 모든 모습을 블리스를 제외한 녀석들이 바보를 보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거기 열라 멍청한 애. 내 여자친구가 아무데도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 빌어줘.”

“닥쳐.”

좀전에 비웃음 당한 것에 대한 뻘쭘함에 되려 화를 내며 블리스는 몸을 숙여 던질 자세를 취했다. 입을 크게 벌린 타이밍에 맞춰 동전을 던지기 위해 집중하던 녀석은 어느 순간 악어의 입을 향해 동전을 던졌다.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동전은 푹신해 보이는 악어의 혓바닥 위로 떨어졌다. 소원을 빌듯이 잠시 두 눈을 감았던 블리스는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와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뛰어난 운동 신경이라니.”

“저 바보를 어쩌면 좋아.”

차갑게 코웃음 치는 레이를 향해 블리스가 이죽거렸지만 레이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아 진짜 배고파. 레스토랑 구경은 조금 있다가 하고 일단 좀 뭐 좀 시키자고.”

레이는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반대편으로 고쳐 메면서 말했다. 짙은 청색의 스키니진과 거친 소재의 셔츠, 특이한 모양의 작은 베스트 속에 녀석의 마르고 호리호리한 몸을 감추고 있었다. 아이보리색의 카우보이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신경질적이었다.

안내 받았던 대로 내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온갖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레스토랑이 아닌 놀이공원에 들어온 것 같았다. 공기방울이 뽀글거리며 올라오는 수족관 안에는 각종 희귀한 열대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물고기가 신경 쓰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손등으로 수족관의 유리를 건들이고 있자 빨리 따라오라며 블리스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커다란 수족관이나 물을 뿜어대는 조형물, 움직이는 동물들 앞에서 호기심을 참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들뜨지 않는 건 레이 뿐인지 녀석은 안내받은 자리로 차분히 걸어가기만 했다. 여러 조형물을 보며 웃고 떠드는 우리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녀석은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전에 자주 와봤어?”

침미-차-차라는 이상한 이름의 요상한 메뉴의 에피타이져를 시킨 레이는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먹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식욕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녀석이라 여겼는데 그게 언제나 해당되는 건 아닌듯 했다. 식욕의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특이한 레스토랑에서 음식 먹는 것에만 열중할 수 있다니. 내 물음에 보라색의 콩을 찍어 입안에 넣으려던 레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그다지. 딱 두 번 와봤어.”

“마티랑?”

옆에서 치즈스틱을 먹고 있던 조쉬가 끼어들었다.

“하, 미쳤냐. 형이랑 이런 데를 왜 와. 당연히 여자들이랑 오지.”

뭐 그리 황당한 질문을 하냐는 듯 레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쉬의 질문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남자 둘이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기 위해 오는 것도 어색한 일인데 하물며 레이 로만이 형과 같이 올 리가 없다. 당연히 레이가 그런 대답을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반응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말투나 행동은 그대로였지만 그 안의 날은 한층 더 날카롭게 갈린 느낌이었다. 아주 미묘한 어감차이였기 때문에 넘어갔지만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보통 이런 특이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늦은 밤 함께 나누었던 섹스보다 더 각별하게 여기거든.”

“네가 못해서 그런 거겠지.”

피자 크러스트를 아삭거리며 블리스는 한쪽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말에 발끈할 줄 알았던 레이는 웃으며 말했다.

“몇 년 째 방치되는 너의 칵(cock)보다는 내 형편이 더 낫지.”

포크를 입에 문채로 레이는 키득거렸다. 비꼬는 내용일지언정 예상 밖의 달콤한 느낌이 나는 말투였다. 그 말에 블리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나의 칵이 방치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뻔하지. 지우랑 붙어 다니는데 언제 그걸 쓸 시간이 있었겠어.”

마침, 웨이스트리스가 주문했던 주 요리를 들고 오는 바람에 대화의 맥이 끊겼다. 친절하게 인사하며 음식을 내려놓는 그녀의 신중한 몸놀림에 우리는 입을 다문 채 각자 앞으로 나온 메인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이탈리안식 씨푸드였다. 갈릭소스가 얹어진 파스타는 묘한 냄새를 풍겼다. 각자의 잔에 물을 부어주며 즐거운 식사를 하라는 말을 남기고 간 웨이스트리스 뒤로 침묵이 남겨졌다.

의도된 도발인지, 아니면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건지 알 수 없어 심장이 근질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레이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작은 새우를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어 꼼꼼하게 씹었다.

“지우. 안 그래? 저 자식이 언제 연애를 했겠냐고.”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녀석은 덧붙였다. 완곡하고 모호한, 의도된 도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굳어지는 얼굴을 재구성하며 나도 따라 웃었다.

“모르지. 샴쌍둥이도 아닌데. 블리스가 여자애들과 안 친한 것도 아니고.”

파스타를 느리게 감아 입안에 넣었다. 느끼하고 자극적이고 고소한 복잡미묘한 맛이 혓바닥의 미뢰를 느리게 쓸어 올리며 자극한다. 나는 멈칫거리며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니가 뭘 오해하는 모양인데. 네 말처럼 우리가 매일 붙어 다닌 것도 아니었잖아.”

스스로를 다그치며 말한 내용이 효과가 있든 없든 나는 태연히 목이 마른척 물을 들이켰다. 레이의 낮은 시선이 미묘하게 나의 동선을 따라온다. 물컵을 내려놓고 좀 전보다 빠르게 파스타를 감아 입안에 넣는 것 역시 빠지지 않고 살핀다. 허기진 개 같았다. 어떤 감정적 실마리를 찾기 위해 한없이 예민해진 메마른 개. 레이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했다.

파스타를 감은 포크로 새우를 찍어 입안에서 오물거리며 레이가 말했다.

“사실 내게 접근하는 여자애들 중에서도 블리스와 친해지고 싶어서 접근하는 애들도 있어.”

“소개시켜주지 그랬냐.”

무심한척 말을 받아내며 블리스는 조금 웃었다.

“진지하게 사귈 마음은 있어?”

“나야 모르지.”

“그러지 말고 나는 어때?”

잠자코 듣고 있던 조쉬가 끼어들며 말했다. 녀석이 시켰던 음식은 이미 반 이상 비워지고 난 뒤였다. 씹어 먹는 것이 아닌 입 안에 털어놓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너 좋아한다는 애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해볼게. 그나저나…”

“아고스.”

어깨를 으쓱이며 블리스는 좀 전의 이야기에서 도망가기 위해 아고스를 끌어들였다. 레이는 뭔가 더 말하기 원하는 눈치지만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갑작스럽게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는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고 있는 것일까. 갑작스레 피곤이 몰려오는 기분이다. 쓴 침을 삼키며 나는 겨우 파스타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좀 전에 샀던 게임시디 12번째로 나왔던 거 맞아? 내가 알기론 발매일이 7월 30일이거든. 가짜인건 아니겠지?”

퍽퍽한 닭 가슴살로 만든 요리를 먹다보니 목이 멨는지 아고스는 물을 들이키고는 겨우 말했다.

“아무렴 백화점에서 불법복제물을 들여놓겠냐.”

“근데 왜 이렇게 일찍 나온 거지? 일본에서도 발매 안 됐을 텐데.”

“그거 원래 발매일이 5월 30일이야. 나온 지 좀 됐어.”

“아… 나 그거 일본판으로 사고 싶은데. 너 있어?”

게임 시디 내용에 대해 떠드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셋은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기에 묵묵히 먹기만 바빴다. 모두가 게임 하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게임팩을 시리즈별로 모으는 사람은 우리 중 블리스와 아고스 밖에 없었다. 블리스야 음모론을 비롯 온갖 것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었지만 아고스는 블리스에 비해 관심이 구체적이고 편중적이었다. 아고스는 게임관련 회사를 차리고 싶어 할 정도로 게임광이었다.

우리는 대화 속으로 끼어드는 대신 그 속에서부터 점차 빠져나와 음식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계속해서 꾸역꾸역 음식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내 또래의 소년들이 보일 수 있는 엄청난 식욕을 발휘하며 메인 메뉴 한 개씩을 더 비운 후 디저트까지 먹었다.

식후에 본 영화는 소년들의 취향을 모두 고려한 액션 영화였다. 흑인 반장과 백인 경찰관이 범죄 조직을 소탕해가는 뻔한 내용이었지만 시간을 때 울만 했다. 영화관을 나서는 즉시 영화의 화려한 액션만이 머리 속에 남았지만. 게다가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즐겁게 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를 돌아보는 블리스와 눈을 마주치느라 영화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살짝 무릎을 꼬집고 나서야 녀석은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영화를 보고난 시간은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사람들이 우르르 영화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영화관의 스텝들이 문을 닫을 준비를 했다. 편의점에서 호텔에서 먹을 과자와 음료를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주차장으로 갔을 땐 거의 모든 차가 빠져 나간 뒤였다.

“후우…”

주차장내의 창백한 형광등은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레이를 음침하게 보이게 했다. 마치 화이트 트레시에 대해 다룬 독립영화 속 창백하고 거친 갱스터같았다. 세상에 대한 적의까지 느껴지지 않았지만 레이의 표정만은 지독히도 썼다. 연기를 들이 마시는 레이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가 다시 온화하게 변한다. 니코틴을 흡수하면서 느끼는 포만감일 것이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땀이 흘러내리는지 레이는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카우보이 모자를 든 채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담배 줘?”

빤히 쳐다보고 있자 피고 싶다 느꼈는지 레이는 앞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개를 건넸다.

“뭐 피는데?”

“말보로 레드.”

레이가 건네는 담배 대신 베스트의 작은 앞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희미한 형광불빛에 비쳐 타르와 니코틴 양을 확인했다.

“맙소사. 타르가 8.0에 니코틴이 0.70.”

경악으로 물든 내 얼굴을 보더니 레이가 피식 웃었다.

“좀 독하긴 하지.”

“하루에 얼마나 피는데?”

“삼일에 두 갑 비워.”

“폐가 썩겠군.”

내 말에 레이는 깊게 담배를 빨아 들였다가 숨을 모아 내 얼굴위로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콜록거리는 대신 숨을 참고 있자 웃으며 한 번 더 뱉어냈다. 쓴 연기에 눈이 매워 고개를 돌리자 웃음을 흘려댔다.

“폐 썩히려면 너 혼자 썩혀.”

“알았어. 혼자 일찍 죽어줄게.”

삐딱하게 말을 받아내며 레이는 조금 웃었다. 한 모금 더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레이는 허공을 보며 연기를 쏟아냈다. 한참이나 멍하니 형광등의 불빛을 바라보던 레이는 고개를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손목에 차고 있는 단순한 디자인의 메탈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좀 놀다 가느라 늦을 거야. 먼저 들어가 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돌아봤다. 레이는 이런 반응쯤은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레이디가 고팠거든.”

“하! 언제 또 꼬셨데?”

“영화 볼 때 내 옆에 바로 앉아있던 아가씨. 하하!”

녀석이 눈을 초승달처럼 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때마침 주차장 입구를 통해 검은색의 아우디가 들어왔다. 차는 들어오자마자 주차할 공간도 많은데 우리쪽을 향해 직진했다. 점점 속도를 줄이며 다가온 아우디가 클락션을 울렸다. 아우디 속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가 타고 있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레이가 말한 그 여자인 모양이었다. 달려오는 차를 보며 녀석은 담배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발로 비벼 껐다.

정확히 우리 앞으로 멈춰 선 차 문을 여는 레이에게 야유를 보내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건방지게 엿 먹으라는 말을 한다.

“차 번호 외워도. 너무 끝내줘서 낸시가 날 꽁꽁 묶어두고 두고두고 해댈지도 모르니까.”

안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문이 닫혔다. 화려하게 유턴을 하며 주차장 입구로 사라지는 차를 보며 우리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여자의 허공으로 날아갈 것 같은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에,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레이의 비뚤어진 조숙한 정신세계에.





길은 역시나 한산하다. 이렇게 주말이 끝나는 일요일 저녁의 도로라면 더더욱.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기다란 도로만이 뻗어있는 도로를 달리는 것은 지루하고 또 고독했다. 어쩌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헤드라이터의 불빛이 보이기라도 하면 이 끝없는 고독을 함께 공유하는 기분에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기까지 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도시는 황혼의 문턱에 잠겨 있었다. 지금은 온통 암흑뿐이었다. 도로는 가로등조차 없었기에 헤드램프를 하향등에서 상향등으로 조정해 가시거리를 확보했다. 공포 영화에서처럼 헤드라이트의 빛이 닿는 거리에 창백한 안색의 히치하이커가 서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잠을 자다가 불규칙하게 시작되는 수다에 잠 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차례 영양가 없는 시시껄렁한 얘기가 끝나고 다시 각자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레이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채였기에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따금씩 라이터에 불을 붙이긴 했지만 담배 끝에 갖다 대지 않았기에 냄새는 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라이터를 켰다 껐다를 반복하던 레이는 결국 차 문을 조금 연 후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독한 연기를 빨아들이는 표정이 첫 맛은 쓰고 뒷맛은 매우 단 열매를 먹듯이 점차 변해갔다. 천천히 눈을 감으며 담배의 연기를 음미하던 레이는 눈을 떠 열린 창문 사이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너희들은 쌓인 거 어떻게 푸냐?”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담배를 입에 문 레이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 했다.

“…마스터베이션”

“……”

“아니 뭐, 여자친구가 있을 때는 할 때도 있지.”

뜸을 들여 말하는 목소리에 레이가 피식 웃었다. 이 어린 방탕아에게는 소년들의 방법이 너무도 애처롭고 유치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비웃는 입 모양새를 유지하며 레이는 담배 한 개피를 아슬아슬하게 태워 없앴다.

“어제 좋았어?”

조쉬와 블리스 아니 우리 모두 레이와 아우디 속 여자와의 짜릿한 관계를 어렴풋이 상상하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오후 4시가 넘어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그 동안 우리는 난잡한 놀이라도 했을까 어두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조쉬가 입을 열었다. 룸미러를 통해 레이가 필터가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담배를 창 밖으로 던지는 것이 보였다.

“흐음.”

계속해서 담배가 생각나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치아로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언제나 말하지만, 섹스가 싫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니까.”

“어제가 좋았냐고 묻는 거잖아.”

“당연한거 아냐?”

치아 사이에 담배를 문 채로 레이는 연기를 쏟아냈다. 문을 열어놓긴 했지만 연기를 창 밖으로 뱉어내지 않은 탓에 차 안 가득 냄새가 가득 찼다.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레이는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리곤 말을 이었다.

“가슴이 커서… 얼굴을 묻을 때 좋았어.”

“오오!”

“가슴에 얼굴을 묻었을 때, 푹신하면서도… 숨막히 게 하는 그 온기가 좋거든. 내가 좀 여자 가슴에 집착하잖아.”

좀 더 노골적인 얘기를 바라는듯 조쉬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여태 지켜본 바로는 레이는 바람둥이일지언정 여자와의 잠자리에 대해 노골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우스운 말이긴 하지만, 신사적인 변태였다.

“여자란 유일하게 남자를 변하게 할 수 있는 존재지.”

“너한테 해당되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블리스가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지만, 레이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왜 아니야? 난 헤어질 때는 진심으로 마음아파 한다고.”

“퍽이나. 여자들이나 맨 날 울리는 주제에.”

“몇 년 째 방치되는 너의 칵(Cock)보다는 내 신세가 더 낫다니까.”

그 말에 블리스는 미간 사이를 좁히며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숨을 참고 있는 동안 녀석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가 곧 허물어지듯 긴장이 풀렸다. 뭔가 말하고 싶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참아내는 모습에 나는 안도했다. 입을 열어 봤자 어설픈 거짓말로 레이에게 어떤 확신을 줄지도 몰랐다. 한숨을 내쉬는 블리스를 거만하게 쳐다보던 레이는 더 이상 반응이 없자 계속해서 담배를 태워댔다.

“오늘이 몇일이지?”

“22일”

“이런, 삼일 뒤면 돌아가네?”

블리스의 한숨에 모두가 얼굴을 찌푸렸다.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되면 원서를 집어넣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에세이 작성과 9월에 있는 SAT도 준비해야했다. 원서를 쓰고 나서 한동안은 여유롭겠지만 그 때는 모든게 우리의 손을 떠나고 난 뒤다.

블리스는 좀 전보다 엑셀을 밟는 발에 힘을 주어 속도를 높였다. 얼른 별장으로 돌아가 남은 삼일을 미련 없이 보내야겠다는 각오라도 다진 모양이었다. 일반 고속도로에서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속도에 지면이 닳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차안에 틀어놓은 조용한 음악의 트랙이 네번쯤 반복 될 무렵 오른쪽 도로 너머로 농장의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수 십개의 가로등을 지나 별장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 녀석들은 곯아떨어져 있었다. 광란의 밤을 위하여 잠시 짧은 숙면을 취하던 소년들을 깨워 방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 같이 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편한 옷을 걸치고 각자 역할을 정해 파티를 준비하기로 했다.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샀던 나쵸와 프링글스를 볼에 가득 담는 동안 레이는 과일을 깎았다. 껍질을 깎기 귀찮아서 껍질 채로 접시에 담아내고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 계속해서 주워먹었을 뿐이다. 아무리 깎아도 늘지 않는 과일에 레이가 신경질을 냈지만 굴하지 않았다.

부엌에서 나와 안주를 들고 테이블로 걸어가자 술자리를 준비해놓은 녀석들이 환호했다. 개선장군을 반기는 꽃을 든 처녀 같은 태도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투명한 볼에 얼음 한 가득, 생수 다섯 병과 맥주 캔이 열개, 보드카가 세 병, 위스키가 두병, 그리고 브랜디가 두병. 적당히 즐기는 선에서 끝낼 줄 알았는데 취할 수 있는 대로 취해보자고 객기를 부려 놨다. 다 마실 수 있을 리도 없지만, 다 마셨다가는 다섯 중 둘은 골로 갈 거다.

“자, 일단 숙취 해소 음료부터 마시고.”

파란 색의 투명한 병에 담긴 음료를 건네며 조쉬가 눈을 빛냈다. 숙취 예방에 대해 생각할 정도로 이것저것 머리를 굴렸을 조쉬의 치밀함에 웃음이 나왔다. 검지 손가락만한 길이의 병에 든 음료는 끈쩍끈적 하고 달짝지근하면서도 뒷맛이 약간 씁쓸했다. 기능성 음료가 아니었다면 절대 입도 대지 않았을 맛이었다.

“으…... 진짜 이상해.”

“이게 너의 위를 코팅해줄 것이니라.”

조쉬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곧이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맥주 캔을 따는 청량한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꿀꺽꿀꺽하고 맥주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밋밋하면서도 씁쓸한 음료를 마실 때의 그 목 넘김이 기분 좋았다. 단지 그 뿐이었다. 맛으로 치자면 콜라나 아이스티가 훨씬 나았다.

누구도 어른 흉내 내는 것에 대해 어색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생각을 하며, 조숙했고, 상상 이상으로 발랑 까져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녀석들이 지금 이 순간 뭘 느끼고 있을까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건 늘 조숙한척 하며 우리들 보다 더 많은 것을 경험했다고 자부하는 레이 역시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게다가 오늘 같은 밤에는 이성 따위는 날려버리고 충동적으로 어떤 일이라도 저지르고 싶었다. 체면을 생각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어서 생각나는 대로 얘기를 내뱉었다. 상식에서 벗어난 것들이 화두에 올랐다. 가장 형편없었던 영화 내용이나 황당했던 일, 누구는 알고 또 누구는 모르는 인물에 대해 과장을 덧댄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하하! 생각난 게 있어.”

맥주 한 캔을 다 비워낸 조쉬가 손아귀의 힘으로 캔을 찌그러트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녀석의 얼굴에 심술궂은 웃음이 어린 걸로 보아 누군가가 숨기고 싶어하는 이야기임이 틀림 없었다.

“나 진짜 웃긴 일 있었어.”

“뭔데?”

“내가 어렸을 때 좀… 그래도 지금 보다는 순진했잖아. 알지? 나 고등학교 들어와서 여자친구 사겨본 거.”

“응.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잠깐 보스턴에서 학교를 다녔어. 아직 몽정도 안 해본 나이였지. 같은 학교 다니는 여자애 중에서 좀 예쁘게 생긴 애가 있었어. 이름이 베시였는데… 개랑 나랑 계절학기 듣다가 어쩌다 좀 친해졌어. 근데 어느 날 둘만 있을 때 날 부르더니 분필같이 생긴 걸 보여주는 거야.”

얼만한 크기였는지 보여주려는 의도였겠지만 중지 손가락을 펴 조쉬는 여자애가 보여줬다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새하얗고 딱딱하고 그 끝에 뭔 실이 달려있었어. 고리 같은 것도 달려있었고. 이게 뭐나고 물으니까 탐폰이라더라. 아버지가 월경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사준거래.”

“으엑?!”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을 치는 우리들을 보며 조쉬는 비열하게 웃었다.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묻지도 않았는데 말해주는 거야. 여자의 아래에는 구멍이 세 개가 있는데, 두개가 배출을 위한 거고 나머지 하나가 아이를 낳거나 섹스를 하거나 생리를 할 때 사용하는 구멍이래. 이 탐폰은 그 중 가운데 구멍에 넣는 거고.”

“최고다!”

“그래서 보답하는 의미로 다음 날 편의점에서 콘돔을 사서…”

“맙소사, 미쳤어!”

“내 가운데 손가락에 요렇게 껴서… 보여줬지.”

비명을 지르는 건지 환호하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소년들을 보며 조쉬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 월 초에 멕시코 갔다 왔잖아. 돌아온 날 공항에서 그 여자애 만났었어.”

“아는 척 했어?”

목이 마른지 새로운 캔을 따 마시며 말했다. 급하게 맥주를 삼키는 바람에 사레가 걸릴 뻔 했다.

“어. 푸하하. 근데 개가 그 때의 일을 후회하는지 안색이 파래져서는 피하더라.”

“네 얼굴을 보고 피했던 거야.”

“좀 닥쳐봐.”

빈정거리며 자신을 모욕하는 레이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짜증을 냈다. 킬킬거리며 나른한 자세로 소파에 거의 쓰러지듯이 기대어 레이는 테이블 위에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거 알아? 그… 탐폰이 얼마나 흡수를 잘 하는지.”

라이터를 돌려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는 레이는 담배를 문체 웃었다. 나태할 정도로 나른해 보이는 입술을 열어 천천히 보랏빛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여기 안주 담은 볼만한 크기에 담긴 물도 그냥 흡수 한다더라.”

“와우, 실생활에서 사용해도 괜찮겠네.”

“음…… 변태 취급 받아도 괜찮다면.”

웃고 금방 잊어버리는 얘기들뿐이었지만 분위기는 계속해서 달아올랐다. 여자애들이 끼여 있어 점잔 떨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야한 농담을 통해 사나이의 결의를 맺듯 얘기는 자꾸만 호색성이 짙어졌다. 데카메론 속 10일간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물론, 데카메론처럼 그 속에 숨은 귀족들의 새침한 우아함 대신 소년들의 노골적인 과격함만이 있었지만.

야한 농담으로 유대를 쌓을 수 있다니, 팀으로 뭉쳐 승리를 위해 경기에 참여 하거나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대가 나서는 것처럼 폼 나진 않지만 어떤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두고두고 회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기억이라도 나름의 방식으로 우정이 성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주워듣긴 했지만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얘기가 오갔다. 오이로 자위하다 오이가 부러지는 바람에 구급대에 실려 갔던 여자아이, 위험한 기구로 자위를 하다 고자가 되어버린 소년에 대한 얘기, 콘돔 없이 섹스를 할 경우 성병에 관한 얘기, 여자친구 펠라치오 해주다가 입안이 감염되는 바람에 일주일동안 고생했다는 어떤 소년에 대한 얘기 등 전부 다 야한 얘기뿐이었다. 안전한 섹스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를 하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인 얘기도 흘러나왔지만 곧 호색적인 이야기로 분위기가 돌아갔다. 그러다 아고스가 이상한 취향의 비디오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는 모두가 몸을 뒤틀었다. 생리 혈에 밥을 비벼먹던 사람들이나 변을 먹던 소년들, 신체를 절단하는 스너프 필름에 대해 얘기 했을 때는 모두가 헛구역질을 해댔다. 앞으로 절대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고스는 쫓겨나는 않았다.

그 다음에는 블리스가 일본의 길거리에서 봤던 포르노 촬영에 대해 얘기했다. 태어나서 남자와 여자가 실제로 섹스하는 걸 본 건 처음이어서 충격이 대단했다는 얘기였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나라 망신이라며 빨개진 얼굴로 보채는 바람에 보지 못하고 태연한 모습으로 가야 했지만 속으로 울고 있었다고, 그 이후 한 다섯 번쯤 같은 장소에 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우울해 했다.

그렇게 야한 농담으로 시간을 때우다가 브랜디 두병, 보드카 한병 반을 모두 비워냈을 때 모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큰하게 취해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자리의 변동이 몇 번 있었고 어느새 자정을 넘어가자 블리스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아하하… 진짜 웃겨.”

여자애들에게 하던 식으로 재치가 넘쳤지만, 그 보다는 더 과격한 발언을 하며 레이가 우스운 얘기를 했다. 스니퍼의 페니스 사이즈에 대한 얘기였다. 배가 심하게 당겨오는 느낌에 몸을 앞으로 숙여 킬킬거리며 웃어대자 비장의 카드를 꺼내듯 말을 이었다. 교내 신문에 녀석의 페니스 사이즈에 대한 기사가 실린 이후로 여자애들이 스니퍼의 옆을 지나갈 때마다 새끼손가락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웃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안주를 더 가져오기 위해 부엌으로 가 과일을 썰어내고 있자 어느새 블리스가 따라 들어왔다. 알코올로 인해 초점이 흐려져 과일을 거의 난도질 하다시피 썰고 있자 칼을 쥐고 있던 손을 비집고 칼을 가져갔다.

“위험하잖아 멍청아.”

“손가락 잘린다고 죽지는 않아.”

내가 생각해도 경솔하고 이상한 말이었다. 나의 조심성 없는 태도에 투덜거리며 파인애플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내는 녀석을 느슨하게 풀린 눈으로 지켜보며 말했다.

“블리스, 그거 진짜 웃기지 않아? 새끼손가락 들고 다닌다는 얘기.”

술과 분위기에 흥분해 명랑해진 나는 말이 많아졌다. 녀석이 잘라내는 과일을 접시에 아무렇게나 담아내며 좀 전에 들었던 얘기에 대해서 주절거렸다.

“꼭 말라비틀어진 샐러리처럼 흐물흐물 할 거야.”

“샐러리라니… 너무한다.”

“발기는 될까? 결혼했는데 그것 때문에 이혼하면 억울하잖아.”

내가 한 말이지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입안에 물고 있던 파인애플 조각이 바닥으로 튀는 바람에 민망함에 또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한심한 상황이란 걸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깨를 떨어대며 웃는 날 지켜보던 블리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입술을 겹쳐왔다. 그럼에도 웃음을 참아낼 수 없어 배가 아프게 당겼다. 한참이나,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쪽쪽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찐득하게 입술을 빨아댄 후 입술을 떼어낸 블리스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기분 좋아?”

“어, 오늘 죽여줘.”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자 녀석이 침으로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이마에 살짝 데었다가 뗀다.

“이제 술 조금만 마셔.”

녀석이 양 입술 끝을 끌어올려 웃었다.

“있다가…. 애들 다 자고 나면 우리 둘이 남아야할 거 아냐.”

“우리 둘이?”

“왜?”

“같이 있고 싶으니까.”

열이 오른 볼에 차가운 볼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선명한 차가운 온도에 기분이 좋아진다.

“잊지마? 조금만 마셔야 돼?”

블리스의 말 대로 조금만 마시기 위해 노력했다. 얼음을 잔뜩 집어넣은 잔에 보드카를 아주 소량 넣어 충분히 희석 시킨 것을 홀짝거리며 마셨다. 이미 충분히 알코올로 인해 흥분된 상태였기에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소변을 배출해내는 사이 점차 취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블리스가 캔자스에서 지내던 내내 가방에 보관하고 있던 캠코더를 들고 왔다. 이 엉망진창인 술자리를 기념할만한 추억거리로 만들 촬영을 하기 위해서였다. 녹화버튼을 누르고 나서 조쉬가 먼저 카메라 렌즈를 자신에게로 돌려 쓸데없는 말들을 지껄였다.

“안녕, 미래에 애 아빠가 되어 있을 중년 여러분. 지금 캔자스의 블리스네 할아버지 별장에서 파티를 열고 있습니다. 파티라고는 하지만 여자애들은 없고 시커먼 남자애들뿐이죠. 올해 17살이 된 녀석도 있고 아직 16인 녀석도 있지만… 암튼 지금 200X년 7월 23일 1시가 좀 넘었군요. 만약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있다면 당장 TV의 전원을 끄도록 하세요. 앞으로 어떤 얘기가 나올지 모르니까요. 당신은 지금 감탄을 하고 있군요! 자신이 저렇게 태양처럼 빛나는 소년이었다는 사실에 감동에 젖어있을 거라고 봐요.”

“미쳤어!”

“좀 닥쳐봐. 아, 네 제 소개를 하도록 하죠. 조쉬 폴슨이라고 하며 세인트 버크셔 고등학교 11학년에 재학중입니다. 아, 이제 곧 12학년으로 진학하겠네요. 지금의 저는 사회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하는데… 미래의 당신은 그런 일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지금은 공화당을 지지하고 있지만 별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브릿팝 매니아이고, 또 노트를 수집하는게 취미인데… 미래에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하고, 아무튼 미래에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 돌아버리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아이는 몇이나 나았죠?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 와이프는 예쁜지, 얼마나 큰 집에서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저는 보다시피 술에 잔뜩 취해서 헤롱거리고 있지만 늘 이런 상태는 아닙니다. 이 기념할만한 여행의 밤을 기리기 위해서 좀… 살짝 흥분한 것뿐이에요.”

조쉬는 흥분해서 계속말을 지껄여댔다. 카메라 앞에서 비키지 않는 바람에 결국 블리스가 조쉬를 구석으로 밀어내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커다란 덩치를 카메라 앞에서 밀어내느라 흘린 땀을 손 등으로 닦아냈다. 앞머리를 넘겨 비교적 얼굴을 말끔하게 만든 후 녀석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안녕. 미래의 친구들. 이런 비디오를 남기는게 좀… 창피하다고도 느껴지지만 음…… 나중에 보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하네. 뭐, 그 때 쯤이면 결혼 한 사람도 있겠고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 분명한 건 이 세상에 대해 지금보다 더 큰 짐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 거란 거. 한 가지 바라는건 비디오를 보고 있을 당신들이 너무 힘들지 않은 상태였으면 해. 그리고 인정받는 사람이었으면 해. 그럼, 이만!”

블리스의 말에 모두가 팔뚝에 돋은 소름을 긁어내자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 녀석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분위기는 잠시 가라앉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녀석들도 허풍처럼 부풀어나던 즐거움 속에 잠시 진지한 얘기를 해보는 것도 괜찮았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블리스를 이어 레이와 아고스가 미래의 우리들에게 진지한 얘기를 했다. 진지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장난스런 멘트를 남겼던 조쉬가 다시 찍으려 끼어들었다. 억지로 녀석을 밀어내고 겨우 카메라를 차지하고서는 미래의 나, 그리고 녀석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미래의 친구들… 아니, 늙은 또라이들. 한참이나 어린 내가 건방진 말투로 얘기한다고 해서 화 내지마. 술에 취하기는 했지만 내가 있었기 때문에 미래의 네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지금의 나는 너무 좋아. 어쨌든, 지금은 행복해. 네가 힘들 때마다 이 비디오를 꺼내봤으면 좋겠어. 목이 말라서 죽을 것만 같을 때 물 한잔을 건네는 추녀가 사랑스러워보이듯 지금의 건방지고 치기어린,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보면 힘을 얻을지도 몰라. 아니, 얄미워 보이려나? 근데, 어떤 횡설수설이라도 미래의 네가 보는 내 소년 시절은 아름다워 보일 것 같거든.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래의 너는, 여전히 행복하지? 딱 지금의 나만큼만 행복했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이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들떠 있는 모습이 너무 감상적이라 해도 언제까지나 이런 순간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먼 훗날 아련하게 기억해낼 추억에 불현듯 행복함이 밀려왔다.

옆에 앉아있던 조쉬가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나의 좋은 친구들, 입 안에서 그 말이 맴돌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주량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서일지도 모르지만 파티는 예상 밖에 일찍 끝났다. 처음에 준비했던 술의 3분의 2가량을 소비하고 나서야 하나 둘씩 자리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조쉬는 막판에 브랜디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더니 여태 먹었던 것들을 모두 게워냈다. 주량을 과도하게 넘기면 알코올을 분해해준다던 기능성 음료도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레이는 화장실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코카인을 흡입하려고 했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레이를 말려 겨우 잠을 재우고 나서야 길었던 하루가 마감되는 기분이 들었다. 바닥과 소파 위에 널브러진 녀석들의 몸 위로 얇은 홑이불을 덮어주고 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12분이었다. 두 시간만 지나면 동이 터올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녀석들은 내일 정오가 넘어야 일어날 것이었다. 4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블리스는 기분이 좋은지 목덜미 위로 쪼는 듯한 키스를 했다.

복도 끝 모서리 부분에 위치한 객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창가로 걸어갔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 위치한 방이었던 탓에 창문은 양쪽의 벽에 한 개씩 모두 두개가 달려 있었다. 3층과 4층 사이에 전등을 달아놨음에도 방 안의 불을 켜자 벌레 몇 마리가 창문에 달라붙었다. 우리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과 함께 방충망을 열어 창틀에 나란히 몸을 기대었다.

밤이지만 화창함이 느껴지는 날씨였다. 달이 저물어가는 새벽, 그럼에도 반짝이는 별들은 너무나 멀리 떠 있어서 우리를 밤의 풍경 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미풍에 술렁이는 숲 속의 나무들이 보였다. 무섭기는커녕 그 모든 것들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초원의 이슬이 맺힌 풀, 나뭇잎이 쌓인 흙, 산 속의 오래된 고목에 낀 이끼, 이 곳의 풍경이 부서지고 씻겨가며 바람에 실려 코끝에 머물다 사라졌다. 그 감동적인 새벽의 찬 공기가 몽롱했던 정신을 선명하게 깨웠다.

달과 별이 환해 멀지 않은 곳의 야간 비행을 위해 사용된 활주로와 물고기를 잡아 그대로 방생했던 작은 냇가도 보였다. 우리가 야영했던 계곡 사이도 보고 싶었지만 숲과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지형 자체가 초원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은 높은 둔덕이나 동산도 눈에 띄었다. 이 별장도 아주 낮은 산을 끼고 있는 건물들을 매입해 새로 꾸미놓은 곳이었기에 건물에서 건물 사이, 정원으로, 숲 속으로 산책하기에 좋았다. 산책을 하던 중 곳곳에 숨어 있던 날짐승들이 발걸음에 놀라 푸드덕거리며 날아갈 때 돌을 던지던 녀석들이 떠올랐다.

“아아… 졸업하고 나서 꼭 같이 다시 오고 싶다.”

“해마다 같이 올 수도 있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블리스가 웃었다. 창틀에 기댄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래된 연인을 바라보는 듯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 나의 어떠함이 녀석에게 확신을 주었을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녀석에게서 느낀 건 어떠한 불안함도 없는 단단한 시선이었다. 예전의 치기어린 불안함은 하나의 노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기억나? 버크셔 고등학교로 전학 온 동양인 소년에게 공을 던졌던 사건.”

“맞진 않았잖아.”

“근데 난 그날 집에 가서 괴롭힘을 당할 경우를 대비해 공격하는 방법에 대해 밤새 생각하고 있었어. 웬 덩치 큰 무섭게 생긴 애가 공을 던지는데 이 학교생활이 쉽지만은 않겠구나… 생각이 들었었지.”

“무섭게 생긴 애?”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닌 듯 했다. 오히려 내가 어떤 느낌을 갖고 있었는지 알고 싶은지 눈을 빛냈다.

“뭐… 사실 내 입으로 말하긴 싫지만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었어. 그래서 오히려 정이 안갔지.”

“남자라면 느낄…… 나의 외모에 대한 위기의식이군.”

“뭐 그랬던 것 같아. 근데 굳이 그런 얘길 입 밖으로 꺼내야겠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자 블리스가 킬킬거렸다.

“뭐 어쨌든, 그만큼 네가 잘난 애랑 사귄다는거잖아.”

이마에 살짝 입술을 묻어 베이비 키스를 했다. 그리고 이마에서 미간 사이로, 콧대와 콧망울 위에 짧은 키스를 남기며 ‘베이비’라는 말을 속삭였다. 달콤한 밀어에 가까운 그 단어가 주는 느끼한 부담에 나는 그저 웃었다. 그리고 불현듯 녀석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어 녀석의 도톰한 입술에 입술을 대었다가 뗐다.

“사랑한다고 말해봐.”

“왜?”

“그냥… 들어보고 싶어.”

귓가에 딱 다섯 번의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인 후 자신도 민망했던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녀석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역시, 사랑한다는 말이 주는 어감은 너무 느끼해서 거북하긴 하지만,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

“다른 단어는 생각해봤어?”

“너를 수학해, 김치해, 에이플러스해, 농구해, 레슬링해… 뭐 서로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만들어보긴 했는데, 너무 웃기지?”

“평소에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 거야.”

엉뚱한 말을 하는 나를 보며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던 블리스는 코를 잡아 흔들었다. 나는 대답대신 조금 웃어보였다. 녀석이 커다란 손을 뻗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단단하고 곧은 직모는 계속해서 흘러내렸지만 블리스는 아이의 머리를 정돈하듯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체온을 확인하듯 아주 조심스럽게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떼어냈다. 그 온유함이 행복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것 같았다. 거의 충동적이긴 했지만, 나는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말을 막지는 않았다.

“너를 김치해.”

사실 그건 친구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며 사랑의 미완성인말이기도 했다. 나는 그저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따라 웃을 줄 알았던 블리스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고 숨을 쉬지도 않았다. 갑자기 큰 숨을 몰아쉬더니 나를 세게 껴안았다.

“나도 너를… 레슬링해.”

바보 같은 고백에 우린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블리스가 눈을 살짝 감으며 입을 맞췄다. 천천히 파고들며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키스가 달콤한 이유를 알려주기 위한 사명을 띤 것처럼 그렇게 움직였다.

옷을 벗기 위해 입술을 떼어내고 서로의 윗옷을 차례대로 벗겨냈다. 그대로 다시 입술을 겹쳤을 때 녀석은 입안의 점막으로 아랫입술을 끈적하게 물어왔다. 닿았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단 숨이 토해졌다. 아슬아슬하게 닿아있던 입술을 크게 벌려 서로의 입술을 모두 맞물리고 나서 소리가 날 정도로 서로의 혀를 빨아 당겼다. 흥분되는 감각에 입안에서 신음을 삼키자 녀석의 손이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남은 한 손을 브리프 속으로 집어넣어 페니스를 애무하는 바람에 코로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신음을 흘려댔다.

숨이 막혀 심장이 요동칠 때에야 입술을 떼어냈다. 헉헉거리는 숨을 내쉬며 몸을 내 아래로 낮춘 블리스는 바지와 브리프를 한꺼번에 무릎 아래로 내리고는 그대로 페니스를 입안에 넣었다. 요동치는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골반을 꽉 잡고 힘주어 빨아댔다.

“읏! 하아… 읏…….”

허리가 뒤로 빠지려 할 때마다 강하게 골반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움직이지 못하는 골반대신 허리를 휘며 목을 계속해서 목을 꺾자 불편함을 느꼈는지 페니스에서 입술을 떼고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허벅지 안쪽에 손을 넣어 넓게 벌리며 혀로 페니스의 귀두 부분을 살짝 핥았다. 그 감각에 흐물거리며 녹아내릴 것 같았다. 애널과 고환 사이의 밋밋한 부분을 혀로 쓸어 올렸다. 축축한 바람을 뿜어내며 더운 혀가 감질나게 핥아 올릴 때 마다 몸이 뒤틀렸다.

“움직이지마.”

무릎 안쪽에 손을 집어넣어 침대 바닥으로 미는 바람에 엉덩이가 공중에 뜨게 되어 좀 전보다 수월한 자세가 나오자 본격적으로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고환과 애널 사이의 살을 모두 빨아들일 듯이 입안을 진공으로 만들어 입안에 들어온 여린 살을 혀로 콕콕 눌러댔다. 생소하면서도 강렬한 쾌감에 허벅지 안쪽이 강하게 당겨왔다.

“윽! 블, 블리스으… 으으아…….”

끄는 듯한 단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애널도, 고환도 아닌 그 사이를 빠는 블리스의 입술에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 블리스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위로 끌어올리며 녀석의 입술에 키스 했다. 입을 더 크게 벌릴 수 있게 볼을 눌러 드러난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혓바닥 밑의 설소대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타액을 빨아들이며 녀석의 혀를 깨물고 핥고 빨아당겼다.

“하아… 바지 벗겨줄게.”

몸을 덮고 있던 블리스의 몸을 일으켜 밑에 눕히며 그 위에 올라탔다. 블리스의 쇄골에 이를 박아 깨물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녀석의 유두를 꼬집듯 비틀었다. 날씨가 후덥지근했던 탓에 녀석의 몸은 축축하고 뜨거웠다. 바지를 골반의 아슬아슬한 부분까지 내리고 손바닥으로 느리게 녀석의 복근을 쓸어 올렸다. 손이 버릇없이 스칠 때마다 녀석의 가슴이 들썩였다.

배꼽에 혀를 집어넣어 끈적하게 핥아 올리며 바지와 브리프를 한꺼번에 벗겨내자 녀석이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바지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후 반쯤 발기 되어 있는 녀석의 페니스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주 천천히 입을 맞추듯 머금으며 혓바닥으로 페니스를 부드럽게 감쌌다. 꿈틀거리며 맥박 치는 녀석의 페니스를 머금었다 빼냈다를 반복하며 한 손으로 녀석의 고환을 손안에 넣어 주무르자 으르렁거리며 낮은 신음 소리를 뱉어낸다.

“아아, 빌…어먹을… 너무 좋아.”

입안에 페니스를 머금은채로 눈을 들어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허리가 당장이라도 집어넣고 싶은지 잘게 떨렸다. 목젖까지 집어넣어도 입안에 다 들어가지 않아 오심을 참아내며 계속 빨아대자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춘다.

“하자, 응? 넣고 싶어.”

몸을 잘게 떠는 녀석의 무릎 위로 올라가 다리를 벌려 앉았다. 눈을 가늘게 떠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은 마른 침을 삼키며 참기가 힘든지 계속해서 아랫입술을 혀로 적셨다. 본능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짐승 같았다.

“콘돔 가져왔어?”

“응.”

콘돔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놨었는지 내 몸을 일으켜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낚아챘다. 침대 위로 올라온 블리스는 주머니에서 일회용 윤활제 튜브와 콘돔을 꺼냈다. 내 손에 콘돔을 쥐어주고 침대에 누워 그 위에 나를 올리며 엉덩이를 자신의 얼굴로 향하게 했다. 혀로 끈적하게 둔덕 사이를 쓸어 올리며 한 손으로 고환을 문지르는 감각에 허리가 떨렸다. 윤활제가 든 튜브의 비닐을 찢어내며 그 안에 든 끈적끈적한 윤활제를 엉덩이의 애널 속으로 집어넣는 손길에 히익, 하고 급한 숨이 삼켜졌다. 두개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들락거리는 감각에 숨을 몰아쉬며 비닐을 뜯어 콘돔을 꺼낸 후 콘돔 끝의 정액받이 부분을 입술에 물었다. 그대로 천천히 입을 이용해 페니스의 귀두 부분을 감싸듯이 콘돔을 씌웠다. 탄성을 지르며 블리스는 애널 사이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기억자로 만들어 긁어댔다.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자, 녀석의 손이 몸을 앞으로 돌려 입을 맞췄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무릎 위에 날 앉히며 턱을 깨물고 빨며, 처음 섹스를 배우는 사람처럼 조금도 충동을 참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넣고 싶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녀석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읏, 엉덩이 들어봐.”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켜 엉덩이 사이로 솟아있는 페니스 위에 입구를 맞췄다. 양 손으로 땀에 젖어 미끄러운 녀석의 어깨를 잡고 집어넣기 위해 허리를 내렸지만, 좁은 입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페니스의 선단이 미끄러졌다. 흥분으로 참을성이 없어진 블리스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다시 한 손으로 페니스 기둥을 손으로 잡고 천천히 천천히, 엉덩이를 잡은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흐으으…”

아주 천천히 몸을 내리며 커다란 것을 집어넣어 갔다. 질척하고 미끄럽게 안을 가득 채우는 질량감에 힘들어 녀석의 목을 껴안고서는 천천히 허리를 낮췄다. 긴장으로 허벅지 안쪽이 단단해지자 블리스가 그 중압감에 힘이 들었는지 페니스가 조금씩 모습을 감출 때마다 짐승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 때였다.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문 밖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황급히 몸을 블리스에게서 떼어 속옷을 입을 새도 없이 바지를 꿰어 입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 문을 열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른손이 너무 심하게 저려와 바지가 끌어올려지지 않았다. 손이 긴장으로 덜덜 떨리고 다리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울 수 있다면 울고 싶었다. 상황의 심각성에 블리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 달칵거리며 문이 열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문고리를 잡고 있는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 모든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시간의 흐름이 눈앞에서 멈춘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물 속에 빠진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레이의 눈 안에 얼어있는 내가 보일 것만 같았다.

녀석의 왼손에 들려있던 열쇠 꾸러미가 처량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통제된 뇌가 아주 작은 부분 돌아간다. 아, 그렇구나. 그랬던 거구나. 늘 장난기가 가득했던 녀석의 녹색 눈이 어떠한 생각도 읽을 수 없는 유리구슬로 변한 것 같았다. 천천히 녀석의 눈동자가 움직인다. 나의 전신을 훑던 시선은 방안의 구석구석에 떨어진 속옷과 겉옷으로, 잔뜩 구겨진 시트로 옮겨졌다. 시선이 블리스의 페니스로 향한 순간 알코올로 인해 발개졌던 레이의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갔다.

“빌…어먹을.”

레이의 입에서 묵직하고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맙소사……..”

“…….”

“내가… 내가 지금 뭘 본거야!”

얼굴로 몰린 피로 인해 녀석의 얼굴이 새 빨개졌다. 이마에 솟은 혈관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뭔가 해명을 해야 했지만, 상황이 이미 사실을 말 하고 있기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수록 지저분해 질뿐이었다.

“언제부터야!”

비명을 지르며 레이는 잡고 있던 문을 발로 걷어찼다.

“언제부터냐고!”

악을 지르는 레이의 모습에 우리 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레이가 방안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을 볼 뿐이었다. 저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인내할 자신이 없었다. 입을 열어 뭔가를 말 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대신 쓴 신음을 삼키며, 방안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레이를 바라 볼 뿐이었다.

블리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침대헤드에 걸린 바지를 꿰어 입고는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망치에 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에 힘이 없었다. 레이가 던진 책이 블리스의 어깨를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리를 지르며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집어던지는 레이를 앞에서 껴안았다.

“더러워! 안 놔?! 더러워!”

“레이. 참아봐. 다 얘기할게… 레이!”

“놔아! 더러워! 더러워어어!”

끔찍한 덫에 걸린 것처럼 레이는 몸부림 쳤다. 한마디 한마디 뱉어낼 때마다 증오가 느껴졌다.

“더러운 것들! 가증스러운 것들!”

“레이… 제발!”

“이거 놔아!”

레이는 온 힘을 다해 책장의 모서리 부분을 향해 돌진했다. 등을 강하게 타격하는 나무 모서리에 블리스가 신음을 토하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책장 위에 올려져있던 화병이 블리스의 머리 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히 조각난 화병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웅크리는 블리스를 보면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이 방에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어떠한 고통이라도 인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리스에게서 떨어져 더럽다는 듯이 팔로 어깨를 쓸어내리는 녀석의 몸이 떨렸다.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 레이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증오로 녀석의 턱이 씰룩거렸다.

“난, 난 처음부터 네가 맘에 안 들었어.”

숨을 몰아쉬며, 레이는 나를 쏘아봤다. 그 증오의 크기가 느껴졌지만 인내하려 했다.

“내가 왜 너 따위와 친구가 되어야하는지 이유도 몰랐어. 단 한순간도 너를 친구로 인정하지 않았어. 친구라는 말… 평생 너 따위와 쓸 일이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었어. 왜냐고?”

“…….”

“네 몸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았으니까. 넌 우리와 다르니까!”

“.…….”

“니깟게 뭔데 친구 흉내를 내?”

“…….”

“네 주제를 알아야지.”

주먹이 뻗어나가려는 걸 왼손으로 겨우 팔을 잡아 감싸 안았다. 인내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참아야했다.

“하, 네 노란 피부로 블리스를 꼬셨어? 어?”

“…….”

“엉덩이를 흔드니까 넘어왔어? 그 주둥아리로 신나게 빨아줬어?”

나는 그저 조용히 숨을 몰아쉬려 했다.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으려, 레이가 흥분으로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려 했다. 저 비웃는 입술이 잘게 떨리며 만들어내는 모욕을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이 더러운 창녀.”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레이를 쓰러트려 그 위에서 주먹을 내리 꽂았다. 녀석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레이 역시 얼굴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녀석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녀석의 모든 것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레이의 손도 나의 모든 것을 향해 뻗었다. 녀석의 손이 나의 몸에 강하게 닿을 때마다 강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심장에 비하면 아픈 것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눈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흐느낌이 심장을 뚫고 흘러나왔다. 이 수치는 평생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흐윽, 뭐… 윽! 라고? 창녀? 창녀?!”

“윽!”

“창녀라고? 흑!”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 레이가 위아래가 바뀌었다. 강하게 가슴을 가격하는 주먹에 숨을 헐떡이며 우는 날 향해 레이는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가슴 위로 떨어진 침이 마치 독처럼 심장으로 파고들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더…윽! 더러운 창…!!”

“그만해!”

블리스가 달려와 내 위에 앉아있던 레이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 레이의 표정도 블리스의 표정도 볼 수가 없었다.

“만지지마!”

“…….”

“너도 저 자식한테 오염돼서 더러워.”

“말 함부로 하지마.”

“왜? 저 새끼 똥구멍이 미치…..”

강한 가격음이 들리고 레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닥으로 쓰러진 레이를 발로 차는 모습이 악마에 들린 것 같았다. 절제하지 못하는 분노와 괴로운 감정이 온 방안을 넘실거렸다.

“하지마아!”

갈라진 목소리가 이상했다. 레이가 죽을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두려웠다.

“제발 하지마아!”

비명과도 같은 처절한 목소리에 그제야 블리스가 발길질을 멈추고 몸을 웅크린 레이를 내려다봤다. 악에 받친 독기가 느껴지는 눈이 새빨갰다. 녀석의 옅은 금발머리 가운데서부터 이마로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고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녀석에게선 오직 분노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레이가 신음을 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백지처럼 새하얘진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피 묻은 입술을 떨리는 손등으로 훔쳐내는 레이의 얼굴 잔뜩 질려있었다. 겨우 무릎을 손으로 지탱해 몸을 일으켜 블리스에게 눈을 맞춘 레이는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말…….”

“…….”

“말하겠어.”

“…뭐?”

“네 아버지에게… 말 하겠어.”

들썩이던 블리스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볼 수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공들여 쌓아놓았던 흙더미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말해봐.”

억눌린 목소리가 떨렸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울지 않기 위해, 블리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눈에 힘을 줬다. 습기에 쌓인 녀석의 얼굴은 악마를 품은 것 같았다.

“말해봐. 레이.”

“……”

“…그 땐 널 죽여버릴 테니까.”

레이는 눈코입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멍한 얼굴로 블리스를 쳐다봤다. 레이의 멍든 얼굴은 생소한 언어를 듣는듯이 따라하기 위해 입모양을 달싹였지만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를 들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죽… 죽여?”

“…….”

“네가… 나를 저 새끼 때문에 주,죽일 수도 있다고?”

“그래, 죽일 거야.”

멍하게 블리스를 올려다보던 레이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하하하!”

진심으로 즐겁다는듯, 레이의 가슴이 들썩였다. 그 공허한 웃음소리가 울렁거리며 공기를 무겁게 짓눌러내렸다. 아주 어두운 곳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 순간만 아니라면 그 모든 침묵과 어둠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여봐.”

“…….”

“죽여봐아!”

소리를 지르며 레이는 블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레이의 웃음소리는 점차 흐느낌으로 바뀌어갔다. 아주 천천히, 흐느낌은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나는 멍하니 천장의 작은 샹들리에를 쳐다봤다. 저 샹들리에가 나에게 떨어져 나를 억눌러 주기를, 내 숨을 끊어놓기를, 나를 구원해주기를 바랬다.

“맙소사. 블리스가 미쳤어.”

울음을 삼키는 레이의 어깨가 들썩였다.

“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

“네 아버지에게 말해서 너희가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꼭 봐야 되겠어.”

“……”

“너 만으로 안 끝나. 어? 흐윽, 저 조이 자식의 부모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할거야. 흑, 자식이 창녀라…”

짝 소리를 내며 레이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천천히 독한 눈을 치켜 뜬 레이가 블리스를 노려봤다.

“저 자식 똥구멍에 네가 놀아났…”

레이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공허하고 우스운 희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주인공 한 명은 창백하게 질린 채 이 모든 광경을 방관하고 있고 또 다른 주인공은 뺨을 때리며 분노를 삼키고, 뺨을 맞은 주인공은 서럽게 울어대고. 레이의 서러운 울음소리만이 방안에 가득 찼다. 내가 들었던 레이의 목소리 중 가장 큰 소리로 서럽게 악을 쓰며 울었다.

복도를 통해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잠에 깬 조쉬와 아고스의 발걸음일 것이다. 단단하다 생각했던 유대도, 친구를 흉내내던 놀이도 이제 모두 끝났다.

“무슨 일이야! 레이! 너 왜 울어!”

서러운 울음을 삼키는 레이의 어깨를 흔드는 조쉬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더, 더러운 창녀… 창녀.”

“뭐?”

“아하하. 호모래 흑, 호모!”

조쉬와 아고스는 반 이해하고, 반은 이해 하지 못한듯 멍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봤다.

“블리스가 날 주…죽여버리겠데.”

“뭐?!”

“저 더러운 호모들이!”

악을 쓰며 레이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 했다. 웃음이 나오는 걸 들킬까봐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는 계속해서 울먹였다. 조쉬와 아고스는 상황을 얼핏 이해한 듯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

“일단 진정이 되면 이야기하자.”

레이의 어깨를 부축하며 아고스와 조쉬는 거의 끌다시피 하며 레이를 밖으로 데려갔다. 조쉬와 밖으로 나가기 직전 눈을 마주칠 뻔 했지만, 녀석이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 볼 것 같아 눈을 감아버렸다.

발걸음 소리와 레이의 꺽꺽거리는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방 안에 싸늘한 냉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눈을 감은 그대로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쉬기를 반복했다. 온 몸의 피가 가라앉아 더 이상 아무런 순환이 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고갈 되어 지독하게 피로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불과 좀 전 까지만 해도 우리 모두가 웃고 떠들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미래의 우리들에게 인사를 하고, 야한 농담을 하던 우리였는데. 그 모든게 꿈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블리스의 마음이 내게 향한 것을 모르던 그 때로. 아니, 블리스와 몸을 겹치지 않았던 그 때로. 슬픔에 잠긴 마음이 과거를 떠올렸지만 블리스와 내가 어떤 이야기들을 했더라. 어떻게 미소지으면서, 무슨 주제의 이야기를 어떤 마음으로 이야기 했더라.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슬픔에 잠긴 그리움은 결국 두려움으로 흘러갔다.

앞으로의 괴로운 시간을 어떻게 인내 할까. 숨이 막혀왔다. 격양되는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신음 같은 흐느낌이 흘러 나왔다. 겨우 잡았다 느꼈던 모든 것들이 손 안의 모래처럼 사라져갔다. 단지 등을 돌린 사람들의 잔영만이 남았다.

두려워 미칠 것 같았다.



“헤어지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 했다.

“못… 견디겠어.”

“…….”

“알잖아. 더 이상은… 안돼.”

울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손목으로 눈을 가렸다. 밝은 빛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무서워….”

“…….”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아.”

블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녀석의 잦아드는 숨이 느껴질 뿐이었다. 아주 천천히 내 곁으로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은…….”

내 옆으로 앉은 블리스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그 손길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은… 못해.”

이마에 가볍게, 최소한의 감촉만을 남기고 녀석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 감각에 몸서리치며 거부하자 더욱 더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묻기라도 할듯이 파고들었다.

“그만 끝내자.”

녀석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

“미친 소리 하지마.”

“안 돼 지우야.”

“우리 부모님이 아는 거 난 죽기보다 싫어. 너도 너희 아버지가 아는 건 무섭잖아. 버려질거야”

“그래. 그런데 안돼.”

참지 못하고 녀석의 손을 쳐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화가나 몸을 일으켜 앉아 녀석의 얼굴을 봤을 때, 숨이 막혔다. 순간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잘 알아.”

“……”

“지우.”

블리스는 조금씩 흐느낌을 참아내고 있었다. 억지로 울음을 참아내며 흐르는 눈물도 닦아내지 않았다.

“잘 알고 있어.”

“…….”

“매일 같이 고민했던 거니까.”

“…….”

“근데, 내가 너 없이 못 살아.”

결정적인 그 한마디에 녀석이 말 하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녀석의 가장 약한 부분을 모두 드러낸 채 발버둥쳐대고 있었다. 감각이. 가슴에 통증처럼 남았다.

“지우야,”

“…….”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도 네가 너무 좋아서. 네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

“…….”

“흑, 네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

“…….”

“네가 아프지 않게 할게. 자신 있어. 지금은 힘이 들겠지만.”

“…….”

“우리 일년만 더 버티면 되잖아.”

내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블리스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그 울음 소리가 심장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갔다. 터질 듯, 처음부터 무너짐을 예감이라도 했다는 듯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심장을 방망이질 쳤다.

“아니야. 블리스.”

블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애써 무너지지 않으려 턱 끝에 힘을 준채로 말을 이었다.

“헤어져야해.”

“싫어.”

“억지 부리지마. 이젠 끝났어.”

“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며 블리스는 악을 썼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사랑을 믿을 수 없어.”

“상관없어.”

“아니. 견딜 수 없을 걸.”

“아니야 난 괜찮아.”

아이처럼 억지를 부리며 우는 블리스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내가 못 견뎌.”

블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눈물을 왈칵 쏟아냈을 뿐이다. 블리스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녀석이었는지 진작 알지 못했다.

“손가락질 받으며 사는 것을 상관하지 않을 만큼 나는 강하지 않아. 아니, 너 역시도 강하지 않아.”

“…….”

“공부도 해야 하고 대학도 가야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에 적응할 필요도 있어. 지금이야 이렇게 열렬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서로의 손만 잡는다면 나중에 뭐가 남을까. 난 그런게 무서워. 그걸 후회하지 않을 만큼 강하지도 않아.”

블리스는 나를 외면한 채 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습이 비에 젖은 어린 아이처럼 애처로워서 나는 꿈을 꾸듯이 녀석의 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마치 패잔병처럼, 블리스의 울먹임에 저항 할 수 없었다. 블리스의 충혈 된 눈이 나를 향했다.

“!”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눈이 갑작스런 움직임에 커다랗게 떠졌다.

“보고 싶을거야.”

“뭐?”

“얼굴은 더 이상 보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아.”

“무, 무슨 소리야.”

“차 좀 빌릴게. 아고스와 같이 타고 갈 거니까 올 때는 아고스가 차를 가져올거야.”

“제발 이러지마. 왜 이래!”

소리를 지르며 악을 질렀다.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블리스의 얼굴을 보며 끝내 삼키려 했던 말을 뱉어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무엇보다… 당신의 며느리가 남자에요. 난 이딴 말… 이 딴말 할 수 없어. 나를, 나를 어떤 눈으로 보겠어.”

“빌어먹을, 그딴 게 다 뭔데!”

악을 지르며 바닥에 널부러진 책을 복도 밖으로 던졌다. 난폭하게 소리를 지르는 블리스가 걱정이 됐는지 2층 계단에서부터 조쉬와 아고스가 걸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마침내 방 안으로 들어온 어두워진 얼굴이 난폭해진 블리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조쉬, 얘 좀 막아줘.”

“뭐?”

“그 동안 고마웠다.”

“가지마! 가지말라니까아!”

몸부림치는 블리스를 얼떨결에 안은 조쉬를 뒤로 하고 아고스의 손을 잡아 급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위층에서 블리스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이 터져라 블리스는 악을 지르고 있었다. 상황을 설명할 새도 없었지만, 살인이라도 할 것 같은 비정상적인 블리스의 상태에 조쉬는 어떤 의무감이라도 느꼈는지 모른다.

아고스에게 상황을 설명할 새도 없이 웃옷과 지갑, 차 키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밖은 빌어먹게도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 모든 아픔에 내린 그림자를 몰아내듯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블리스의 비명이 들려와 눈을 질끈 감으며 시동을 걸었다.

차를 출발 시키고 나서 백미러로 별장을 돌아봤을 때 블리스가 맨발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녀석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엑셀을 밟아 한참을 달렸을 때 블리스는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져버렸다. 블리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달려왔을 때 새 하얀 별장이 작은 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고스의 눈이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진다. 초조한 듯 입술을 물어뜯었다. 검은 색의 곱슬머리, 그리고 옅은 갈색의 눈. 괴짜긴 했지만 재밌는 녀석이었지. 아아, 나의 소중했던 친구. 그래도 우리는 꽤 괜찮은 친구였어. 고통으로 복받쳐오는 감정을 삼켰다.

191번 도로에 들어섰을 때 백미러를 통해 캔자스 별장의 전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시선을 주지 않으려 끝없이 펼쳐져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도로만을 바라봤다. 그마저도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제 그만 울어.”

아고스는 고맙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미 많은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는 나를 알면서도 묻지 않았다. 대신 녀석은 나를 천천히 살피며 휴지를 꺼내어 내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녀석의 휴지를 받아들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나는 비애에 가득 찬 표정 대신 웃었다.

빌어먹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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