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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이상적인 삼각형을 찾아서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文集 220512

10 0 2022-5-12 20:27
가장 이상적인 삼각형을 찾아서





알람 소리가 울리지 않아 침대 속에서 꿈틀거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탁상 위를 봤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건전지가 닳았는지 3시에서 멈춘 시계를 보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씻고 면도하고 옷 갈아입고 튀어 나갔다. 뚜벅이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더니 고장이란다. 11층에서 지하 주차장까지 달렸다. 리모컨으로 자동차의 잠금 해제를 하며 출근길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러나 주차장 출구에 차를 세워두고 사라진 주인 때문에 또다시 몇 분을 허비해야 했고 회사로 달리기 위해 도로에 진입했을 때에는 이미 출근차량으로 길이 꽉 막힌 상태였다.

오늘은 입사 3년 이래 최초로 지각하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도로를 가득 메운 승용차들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빠-앙- 뒤에 오는 택시가 성을 낸다. 이봐요 아저씨. 나도 죽을 맛이야.

지옥의 교통체증을 뚫고 나와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며 겨우 회사 주차장에 세이프 했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출근시간을 10분 남겨두고 있었다. 늘 30분전에 와서 준비했기 때문에 제 시간에 맞춰 와도 제 시간에 출근 한 것 같지가 않다. 아침식사를 굶은 위장이 소리를 내며 아우성을 친다. 그래도 지각은 면했기에 한숨 돌리고 업무를 시작했다. 시작하려니 아침부터 콜센터로 들어가야 할 전화가 자꾸 내 전화로 연결된다. 짜증스럽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는 시끄럽고 담당자들은 외근 뛰느라 정신없고 ppt작업 일부가 날아갔다. 어제 저장해 둔 파일이 있어서 큰 문제는 안 되지만 똑같은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니 어깨에 힘이 빠진다.

바쁜 와중에 아침식사를 거른 위장이 통증을 호소한다. 싸구려 햄버거라도 끼니를 때워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거늘 항상 들어오던 아침 식사가 공급되지 않으니 위장이 요동칠 만하다. 그러나 빈속을 채운답시고 자판기에서 뽑아든 음료는 지나가던 과장이 툭 쳐서 떨어뜨리고, 청소하는 분께 미안해서 내가 직접 대걸레를 들고 밀고 있자니 지나가는 여직원들이 호호호 하고 웃는다. 같이 웃어 주었지만 이마위의 불거진 힘줄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른다. 오늘은 일진이 안 좋다.

“김대리님 사수자리 A형이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여유를 찾은 내게 잡지를 들고 지나가던 이미희씨가 말을 걸었다. 그 옆엔 미희씨의 동료직원 두 명이 같이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미희씨가 대뜸 내게 말을 걸자 둘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는가 싶더니 까르르 웃으며 미희씨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때린다. “뭐 어때 괜찮잖아.” 미희씨는 친구들에게 웃어 준 후 들고 있던 월간지를 좌악 펼쳐 보였다.

“이런 거 잘 안 믿으시죠? 그래도 말이죠. 이 잡지 꽤 잘 맞는다구요.”

그녀가 내보인 페이지는 ‘월간운세’코너였다.

-사수자리 A형. 고달픈 한달. 새로운 만남이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힐 수 있으니 주의할 것.
업무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 올수도 있으나 인생사 새옹지마.
금전운 좋음. 학업운 좋음. 업무운 나쁨. 연애운 최악.
이달의 포인트: 17일은 각별히 조심할 것.

17일이면 오늘?

“대리님 오늘 왠지 일진이 사나워 보여서요. 아까도 유광석씨가 나르던 박스에 머리 부딪히셨죠? 과장님은 음료수를 쏟고 가시질 않나...안색도 안 좋아 보여요. 이 코너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쁜 말을 싣는 편이 아닌데 오늘 대리님 보니까 진짜 조심하셔야겠어요.”

그럼 세상의 모든 사수자리 A형은 모두 오늘 마가 낀 날이란 말인가? 소박한 의문이 들었지만 별자리 운세와 타롯점과 동물점이며 혈액형별 타입 같은 걸 좋아하는 미희씨 일행 앞에서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어서 애매하게 웃었다. 나름대로 걱정해 주는 건데 말이다. 내 반응이 긍정적이자 그녀들도 기분 좋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솔직히 따져보면 한창 성장 중인 우리 회사가 안 바쁜 달이 없다. 연애야 뭐, 하룻밤 상대야 종종 구하러 다니긴 하지만 특정한 애인이 없으니 연애운은 이미 논외. 어차피 점이라는 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서 좋은 점괘가 나오면 기분 좋은 거고 나쁜 점괘는 잊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을 꼽은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 버렸다.
그런 우연의 일치도 있어야 세상사는 재미가 있는 것 아닌가.





정신없던 오전과 달리 오후 업무는 그럭저럭 평상시의 페이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달에 며칠 정도는 일진 사나운 날이 있는 법이다. 그게 오늘 늦잠이라는 형태로 발현되어서 아침을 거르게 되고 교통체증을 겪고 지각의 위기로 연쇄작용을 불러 일으켰을 뿐. 다행히 지각은 안했고 업무에 다소 지장을 주는 사소한 트러블도 그리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즐거운 주말이다. 시작은 초라했지만 그 끝은 성대하리라.

시간에 맞춰 퇴근하기 위해 급한 업무는 빨리 끝냈다. 남은 일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지만 저것들은 하루 이틀 안에 끝나는 게 아니니 일단 보류. 오늘은 한 달 만에 단골집을 갈 것이다. 원래는 내일쯤 느긋하게 옷을 차려 입고 나가려 했지만 아침부터 쌓인 스트레스가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왼쪽 머리를 쳐대고 있었다. 아으~ 두통이야.

“김서경씨 벌써 퇴근이야?”

성대리가 힐끔 본다. 힐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요즘 바쁘니까 웬일로 일찍 가냐는 의미다. “민석씨도 주말에는 애인도 만나고 그래요 좀.“하고 능청을 떨었더니 피식 웃고는 다시 서류더미에 얼굴을 묻는다. 나도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이미 퇴근시간은 지나 사무실은 잔업 하는 몇몇을 빼고는 한가하다. 리드미컬한 컴퓨터 자판 소리를 뒤로 하고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                *                *





저녁을 먼저 먹을까 하다가 혼자 레스토랑에서 칼질하는 것도 청승맞은 것 같아 바로 단골집으로 향했다. 폴리곤의 오너가 볶음밥은 잘하는데...허기진 배에 볶음밥을 떠올리니 입안에 침이 고였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거기까지 가서 볶음밥이나 시켜 먹다니 웬 추태냐. 하지만 정말 배가 고팠기 때문에 가는 도중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를 사먹었다. 오늘 식단이 왜 이 모양이야. 아침은 굶고 점심은 회사 식당(맛도 더럽게 없었다! 그렇게 배가 고팠는데도!), 저녁은 샌드위치라니...아니, 샌드위치는 에피타이져라고 해두자. 오늘의 진짜 저녁은 파트너와 함께하는 근사한 레스토랑이라고.

“오랜만에 오시네요.”

오너가 드물게도 직접 바를 보고 있었다. 그동안 꽁지머리가 많이 기른 오너와 간단히 바빴다는 둥 오늘은 웬일로 바에 나와 있냐는 둥 형식적인 인사를 하면서 맥주를 시켰다. 오너가 직접 만드는 칵테일도 좋지만 지금은 목이 말라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다.  

목을 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길 봐도 커플, 저길 봐도 커플. 개중에 솔로로 온 사람도 있지만 곧 솔로끼리 붙어 어느새 짝이 되어 있다. 테이블 구석에서 몇 년 사귄 연인처럼 뜨거운 애정표현을 하는가하면 솔로 더하기 솔로가 커플 하나로 탄생하자마자 계산하고 가게를 나서는 경우도 있다. 일단은 후자 쪽이 많군. 그러나 곧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감상할 여유가 없어졌다. 바에 앉아 있는 나에게도 잘 보일만큼 가까이 있는 테이블에 유난히 신경 쓰이는 커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커플이 아니라 한 남자가.

볼 때마다 느끼지만 취향이란 말이야.

이지적인 얼굴에 스타일이나 키도 평균점수는 넘는다. 안경이 조명을 받아 때때로 반짝 반짝. 젤을 발라 앞머리를 넘긴 탓에 훤칠한 이마가 시원스럽다. 원래 취향이 그런 모양인지 주말임에도 상당히 깍듯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옷맵시도 꽤나 마음에 든다.

여기는 게이바고 나는 게이고 내가 찍어둔 저 남자도 게이다. 아니, 어딘가에서 여자라도 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아무튼 게이바 현장취재라도 하러온 기자나부랭이가 아닌 이상 저 남자도 게이 맞을 게다. 그리고 그 앞에서 얼굴이 하얘졌다 파래졌다 안절부절 못하는 청년도.

“어째 둘이 분위기가 안 좋은데요?”

오너가 호기심을 보이며 내 곁으로 왔다. 이 사람은 내가 저 안경의 남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왜 접근을 안 하냐고 묻는 그에게 “깔리기 싫어서.”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한바탕 웃어젖힌 오너는 그 후로 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히 나에게 들려주곤 했지.

“흐음. 꽤나 사이좋은 커플이었는데 무슨 일까요?”

궁금해 하는 오너의 목소리를 한귀로 들으며 ‘그’의 파트너라는 청년 쪽을 유심히 살폈다.
제법 험악한 인상에 염색과 귀걸이까지 해서 반항아 컨셉을 잡은 것 같긴 한데 그래 봤자 내 눈엔 애송이로 보였다. 요즘 애들이 다 저런 모양인지 팔다리가 길고 스타일이 좋다. 그래, 저 정도 외모에 연줄과 돈만 있으면 틴에이져 잡지의 모델 정도는 가능 할 것 같군.

아아 하지만 그의 취향은 점점 더 다양해지는 거 아닌가. 마지막으로 폴리곤에 온 게 지난달이었으니까...그 때는 대학생 또래로 보이는 풋풋한 예비역이 파트너였다. 머리를 짧게 친 게 귀여웠지. 그 전에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양아치 같은 애랑 함께 있었고 또 그 전에는 나랑 비슷한 나이 대에 완전 느끼한 스타일의 남자였다. 외모도 나이도 스타일에도 공통분모가 없는 그의 파트너 선별법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지만 내심 내가 접근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에 혼자 기뻐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은 있었다.   

그의 남자취향에 대해 잠시 회고하는 사이, 안절부절 못하던 청년이 드디어 화를 내며 그에게 따지는 모습이 보였다. 대화는 잘 들리지 않지만 일부러 엿듣기 위해 몸을 기울일 바보는 아니다. 그리고 엿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청년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죽어 버려!”

날카로운 파열음이 그의 뺨에 작렬했다.
그의 얼굴을 때린 청년은 대뜸 그렇게 소리 지르더니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손님들이 웅성대며 그를 쳐다봤다. 뭐야 치정싸움이야? 그런가봐. 웅성거림은 소곤거림으로 바뀌었다가 그마저도 잦아들고 곧 신경을 꺼버렸다. 내 입장에서야 마음에 찍어둔 ‘그’가 파트너와 헤어져서 쌩큐지만 따귀라니, 저 꼬마 왠지 괘씸하잖아.

그렇게 한동안 가게 내의 구경거리가 된 그는 따귀의 충격이 컸던지 가만히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덕분에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그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인물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순정파는 아니다.
그가 몇 달 동안 거쳐 간 파트너의 수만큼 내가 거쳐 간 파트너의 수도 상당하다. 어차피 진짜 연인을 구하러 여기에 오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스트레스 해소 겸 육체의 욕구도 풀 겸 오는 곳이라 지난주에 잤던 연인과 지지난 주에 잤던 연인이 이번 주에 커플이 되어 가게를 나가는 것을 보아도 손을 흔들며 멋진 밤을 보내라고 격려해주는 게 미덕인 곳이다. 아 너무 문란한가? 걱정마라. 콘돔은 꼭 한다.

그래서 그럴까. 이렇게 입맛에 맞는 상대를 거의 몇 달 전부터 보기만 하면서 이상하게 내가 먼저 대쉬할 생각은 안 들더라. 아마 너무 취향이라 하룻밤, 아니, 한달 연인 정도론 맘에 안 찰지도 모른다. 나만큼이나 자주 파트너가 바뀌고 나보다 더 다양한 타입을 추구하는 저 사람은 내가 반한만큼 나한테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난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사귀어 보고 싶은데 저쪽에서 날 원나잇스탠드, 다음날 빠이빠이 상대로 본다면 그것참 가슴에 기스 나는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웠고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점심은 맛없는 회사식당 밥이었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방금 먹은 건 편의점 샌드위치였단 말이다. 저녁은 근사한 곳에서 우아하게 만찬을 즐기고 싶었고 가능하면 상대도 내 맘에 쏙 드는 상대였으면 좋겠다고.

지금 주위를 둘러보아도 다들 쌍쌍이고 홀로 남은 다른 몇몇에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이거다. 솔직히 맘에 찍어둔 상대가 저렇게 처참하게 바람맞아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다른 상대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나도 그도 오늘은 스트레스 만땅. 그래서였을까. 테이블에서 일어나 바(Bar)로 자리를 옮긴 그에게 진토닉을 전달해 달라고 오너에게 부탁 한 건.

오너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곧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옆의 손님께서 드리는 겁니다.”라는 말도 잊지 않고. 맥주잔을 들며 그에게 웃어보이자 그도 희미하게 웃는다.

“......창피한 모습을 보였군요.”

그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와 나의 거리는 의자 하나 차이. 오오 이런 분위기라면 옆자리에 은근슬쩍 앉아도 되겠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싸우셨나봐요? 그분 귀엽던데”라며 능청을 떨고 있었다. 그 덩치에 따귀라니 나름 귀엽지 않은가.

가까이서보니 얼굴에 손바닥 자국이 났다. 단정한 얼굴과 너무 안 어울려서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겨우 막았다. 아아 진정하자 진정해. 아무리 좋아도 이 사람은 방금 채인 사람이라고. 주책없이 헤실 거리지 말자.

“싸운 게 아니라......제가 일방적으로 잘못한 거죠. 맞아도 할 말 없습니다.”

순순히 시인하는 그를 보며 다소 놀라움을 느꼈다. 대체 이 단정하고 지적이며 어른의 성숙함을 물씬 풍기는 그가 새파란 꼬맹이에게 무엇을 잘못했을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파트너에게 혼이 속 빠질 정도로 잘해줘서 그가 결별 선언한 상대들이 눈물 한바가지 펑펑 쏟는다는데, 그런 그가 대체 무슨 실수를 했을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난 궁금하다고 해서 바로 물을 만큼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고 옆자리에서 같이 술을 마셔줄 뿐.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내가 들고 있던 맥주잔을 다 비우는 사이 그는 진토닉을 한모금만 마셨을 뿐이다. 아까 그 청년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바로 옆자리라서 뻔뻔하게 그의 얼굴을 훔쳐보진 못했지만 그의 존재감을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의미하게 느껴지는 향수 냄새 같은.

고요함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처음으로 대화가 성립했다는 것을 큰 수확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실연당한 남자에게 대뜸 작업 거는 것도 너무 속 들여다보이지 않은가. 나는 끝까지 「연인에게 따귀 맞고 풀이 죽어있는 남자를 위로하는 지나가는 30대 샐러리맨」정도의 역할만 고수하려했다.

“......방금 채인 사람이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우습지만......”

다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도 줄지 않은 술잔을 천천히 흔들며 머뭇거리던 그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다면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브라보.

하루의 끝이 화려하게 장식 될 예감이 든다. 재수 없는 점괘 따위 생각의 쓰레기통 속으로 날려버리고 오늘의 마지막을 즐기는 거다. 비록 지금 당장은 애인이 없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 사람이랑 한달정도는 열정적인 연애를 할 수 있을지도.





*                *                *





둘 다 차를 가져왔기 때문에 누구 차를 타고 가느냐는 다소 난감한 문제가 발생했다. 각자 따로 차를 타고 레스토랑까지 가서 만난다는 것도 웃기고 남의 차에 얻어 타자니 에스코트 받는 기분이라 묘하게 간질거린다. 나는 주로 파트너에게 차를 태워주는 입장이었고 그걸 더 좋아하는 편이라 내 차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운을 띄워 보았다. 그러나 남자의 안색이 흐려지면서 난처해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아아 당신의 그 어색한 기분 이해해. 난 맥주도 마셨고 이 사람이라면 에스코트 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결국 내 차는 폴리곤의 주차장에 하룻밤 얌전히 모셔지게 되었다. 가게에서 매상 올려주고 있지도 않은데 주차비가 무료라니 이것이 단골의 메리트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오랜만에 조수석에 앉아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편안하게 가자니 하루의 피로가 몰려올......줄 알았다. 이런, 내가 맘에 드는 남자와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긴장하다니. 내부 공간도 널찍하고 편안하니 카섹스하기에도 좋......
너무 앞서 갔다. 김서경.  





무난하게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입가심으로 차도 마시고 나니 그럭저럭 10시가 다 되었다. 막 실연당한 남자와의 저녁 식사라면 어느 정도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신문에 난 기사에 대해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말도 잘 통해서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남자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차분하고 자상했으며 지적인 매력도 충분했다. 다만 평소 습관 때문인지 자동차의 문을 열어주고, 의자를 빼주고 냅킨을 준비해주고 고기를 썰어주는 등의 부담스러운 친절이 닭살 돋을 뿐. 게다가 내가 화장실 갔다 오는 사이 멋대로 계산해버려서 나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남의 차에 얻어 타고 맞선보러 나온 아가씨마냥 에스코트 받는 것도 어색하고 쑥스러운데 식사비용까지 선수를 치다니.

“이곳 라운지에서 한잔 괜찮겠습니까?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야경 감상하기에는 그만이지요.”

남자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앞서 걷는다. 파트너를 이끄는 데에 익숙해 보이는 저 모양새가 왠지 얼마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래, 나도 맘에 드는 파트너와 함께 여기저기 맛 집을 골라 다니고 경치 좋은 곳이라면 일부러 차 끌고 찾아가서 자연스럽게 스킨쉽을 유도 했었지. 만날 내가 하던 일을 막상 내 상대에게서 받으니 것 참, 거울을 보는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뭐, 이런 거 싫지는 않아. 나도 새파란 나이 때는 파트너에게 끌려 다니기도 했었고 그런 걸 더 즐겼던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금 찝찝하더라 이 말이야.   
   
“혹시 예약해두셨나요?”

“물론입니다. 창가 자리가 아니면 의미 없으니까요.”

그가 웃으면서 말했고 나의 얼굴은 석고처럼 굳어졌다.
레스토랑은 예약석이 아니었기에 즉흥적으로 결정한 코스라 생각해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호텔 라운지는? 내가 알기로 이 호텔의 삼면 유리로 된 라운지는 유명해서 주말이 되면 예약하고 올라가지 않을 경우 좋은 자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라운지 중앙의 바(bar)나 소파로 된 테이블도 운치 있고 야경 감상하기에 나쁘진 않지만 대부분은 창가자리를 선호하니까.
그는 오늘저녁 나와의 만남이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았을 텐데 대체 어느 새에 예약을 해뒀다는 거지?

“......아까의 그분과 함께 오시려고 준비한 자리이겠군요.
제가 함부로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장난처럼 말하자 이번엔 그의 얼굴이 찰흙 빛으로 굳었다. 우리 둘 다 뭔가 잊고 있었나 본데...그래, 당신은 방금 당한 실연당한 사람이고 나는 그런 실연남을 위로 하는 척하면서 하루를 즐기려는 음흉한 30대 화이트칼라입니다요. 하지만 아무리 내가 뻔뻔해도 다른 사람과 즐기려고 준비한 코스를 좋다고 따라가는 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실례했습니다. 미처 거기까지는......”

남자가 시선을 피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조금 귀여워졌다. 반듯하게 빗어 넘긴 앞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려주고픈 충동을 참으면서 “그럼 제가 좋은 곳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하고 웃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며 어색하게 미소 짓는 남자의 눈은 안타깝게도 조명을 받아 안경이 반짝거리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                *                *





“김서경씨. 여기는......”

남자가 당황하며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쭈뼛거리는 어린애를 이끌 듯 그의 손을 잡아채어 끌어 당겼다. 환하게 웃으며 침실로 데려가자 단정하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면서 흐트러진다.

“어떻습니까. 호텔라운지 만큼은 아니지만 벽하나가 통유리로 된 이곳의 야경도 꽤 볼만하죠?”

내가 그와 함께 온 곳은 식사를 했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또 다른 호텔이었다. 그는 아마도 레스토랑이나 카페로 들어 갈 것이라고 예상했던지 처음엔 “이곳의 지하 바(bar)도 멋진 곳이지요.”하고 중얼거렸지만 내가 대뜸 체크인을 하자 그제야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너무 노골적이었나? 침실이라지만 거실만큼이나 넓어 소파도 테이블도 있다. 이곳에서 비즈니스협상이라도 하거나, 혹은 동료들과 함께 프로젝트 준비를 하며 하룻밤의 정력을 쏟아 부을 수도 있겠지만 연인과 함께 분위기 즐기기에도 딱 안성맞춤 아닌가.

그러나 아직도 머뭇거리는 그를 보며 난 내가 너무 빨랐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물론 몇 달이나 지켜보기만 했던 떡을 이제야 손에 넣게 되어서 기뻐하는 마음이야 이해가 간다. 그래도 그렇게 천천히 보기만 했으면서 기회가 왔다고 갑자기 술술 진도를 빼는 건 너무 속 들여다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아차 했다.
엘리트 젠틀맨 흉내 내던 김서경이. 몸이 많이 달기는 달았구나.   

“저는 그저 대화나 했으면 했는데......”

아악. 왜 자꾸 잊어버리는 걸가. 저 남자는 실연남이라는 걸.
하지만 당신 정말로 위로나 받으려고 온 거야? 그동안 폴리곤에서 보아온 이 남자의 패턴으론 볼 때 실연 당했다고 해서 풀죽을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토닉을 권한 내게 같이 식사나 하자고 했던 건 완전 그런 의미로 이해했었다. 여성을 대하는 듯한 조심스런 행동들도 그렇고 대화할 때는 무척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이미 나를 오늘의 파트너로 인식하고 그런 꼬맹이 따윈 벌써 잊었을 줄 알고 있었다. 오늘 처음 데이트 하는 나를 그 꼬맹이와 같이 가려던 라운지에 데려가려고 했던 것도 실연의 아픔 따위 깡그리 잊었기에 가능한 거 아닌가.

내 계산에 미스가 있었다면 맘에 드는 먹이가 손에 들어오자 어쩔 줄 모르고 양념도 치지 않은 채 날로 먹으려 했던 내 섣부른 행동일 뿐. 그의 심리에 꼬맹이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 죄송합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사람을 갑자기 이런 곳에......
하지만 대화라면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조금 지나치게 취해도 기분 좋게 휴식할 수도 있죠.“

어색한 분위기에 물들지 않기 위해 애썼다.
호텔은 남녀가 부둥켜안고 자는 곳만은 아니라고요. 능청을 떨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그리고 당황하는 내 모습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맥주와 얼음이 든 박스를 꺼냈다. 와인을 시킬까? 아니다. 오늘의 컨셉이 「실연당한 남자와 그 남자를 위로하는 지나가던 30대」라면 분위기 타는 와인보다는 맥주가 낫다.

“아, 아닙니다. 그...흠흠...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맥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남자가 답지 않게 말을 주저한다. 그리곤 통유리로 되어 바깥의 야경이 환하게 보이는 창가로 걸어가며 목을 죈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각 잡힌 정장만큼이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는 한숨을 쉬며 어깨 힘을 뺐다.

“요란하게 채인 주제에 금세 또 다른 사람에게 와버리는 제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그거 주말마다 파트너가 바뀌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습니다요?

“솔직히 서경씨에게 위로 받아서 기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욕심내지 말자고, 조용한 곳에서 적당한 알콜과 적당한 대화만 있어도 멋진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나 역시 적당한 알콜과 대화는 대환영이다. 바라보기만 하던 상대가 알고 보니 성격도 좋아, 말도 잘 통해. 잘하면 스테디한 연인은 불가능해도 생각 날 때 한번씩 만나는 파트너 정도는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마저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죽이 잘 맞는 남자를, 왜 그 동안 몸 사리며 보기만 했을까 하고 후회할 만큼.

저 남자의 머뭇거림은 아마도 자신이 가벼운 남자로 보이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봐요 당신. 당신이 수많은 파트너를 갈아 치우는 동안 그 옆에 나도 있었다고. 설마 몇 달 동안 폴리곤에 다니면서 내 얼굴 한 번 못 봤다는 건 아니겠지?
     
“푸후후...”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통유리 앞의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하고 이쪽을 돌아본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는 동작 그대로 잠시 멈춰 서서. 동요하는 입가는 할말을 찾지 못한다.

“새삼스럽게 뭘 그래요. 설마 내가 그쪽의 연애편력을 모르고 있는 줄 아는 건 아니겠죠?
우리, 폴리곤에서 얼굴은 많이 봤잖습니까.“

패를 던졌다. 나도 당신을 알고 있고 당신도 나를 알고 있어. 그 예로 당신은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진 마치 폴리곤에서 처음 만난 사람처럼 데이트 코스를 즐겼지만 연인에게 뺨맞고 풀 죽어 있는 당신보다는 곧바로 새 연인을 구하는 당신이 더 어울리니까 이제 그만 평소대로 하라고.

“흠...그렇군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을 추켜올린다. 몸짓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실연 당하자마자 서경씨한테 접근했을 땐 어디까지 성공할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아마 진토닉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대로 우울한 하루를 보내거나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섰겠지요. 오늘 서경씨와 보낸 저녁은 즐거웠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그 만남을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다음을 기약하려고 했는데......아무래도 그런 내숭은 이미 들킨 것 같군요.“

남자가 보기 좋게 웃었다. 주저함을 떨쳐낸 모습은 여유로움 마저 느껴졌다.

“일부러 제 옆에 앉은 거였습니까?”

맥주잔에 얼음을 넣으며 웃었다. 오 그런 거였군. 이 남자, 처음부터 나를 꼬실 생각이었어? 내가 남자를 정탐하고 있듯 상대도 그랬다고 생각하니 괘씸하기도 하고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만남을 유지하고 싶다니 원하는 바다. 어차피 남자도 나도 서로가 자주 파트너를 갈아 치운다는 것은 알고 있을 터, 이제 서로를 재며 탐색하는 시간은 끝났다.

“나는 서경씨와의 인연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가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맥주를 따르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빙긋 웃으며 잔을 권하자 역시 보기 좋은 미소로 답례한다.“서경씨 생각은 어때요? 우리, 꽤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룻밤으로 끝내기엔 아깝지 않습니까?”안경을 벗으며 느끼하게 속삭이는 것도 가슴 근처가 간질간질하니 나쁘지 않다. 나는 내 몫의 맥주잔을 들어 그가 들고 있는 잔을 향해 건배의 몸짓을 해보였다.

“글쎄요. 침대 위에서 대화해보고 판단해야겠는데요.”

음흉한 눈짓을 교환하며 두개의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리고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맥주잔이 카펫 위로 떨어졌는지 쏟았는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한번 부딪힌 입술을 닭이 모이 쪼듯 콕콕콕 찍어대다가 뽑아 먹어버리려는 기세로 서로의 입술을 삼켰다. 혀를 감싸 올렸다가 굴렸다가...치아가 아프게 부딪히는 것도 무시하고 제가 먼저 상대의 입안에 들어가려고 혓바닥을 놀렸다. 부드러운 애무도 점막을 두드리는 유희도 없었다. 입술을 뜯어먹을 듯이 격렬하게, 그러나 마음껏 비음을 내며 상대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또 유혹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연인처럼, 몇 달 동안 섹스에 굶주린 건달처럼 서로의 몸을 안고 주무르고 끌어당기면서 방해가 되는 상대의 옷을 잡아 찢듯이 벗겨내었다. 들러붙은 입술은 떨어지지 않은 채 서로의 와이셔츠 단추를 푸느라 정신없었다. 다 벗겨진 줄 알고 그의 셔츠를 활짝 젖혔더니 투둑-하는 소리와 함께 단추가 떨어졌다.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만큼 안달인 그도 내 단추 서너 개는 이미 뜯어버렸다.

참지 못하고 침대 위로 넘어졌다. 누가 먼저 넘어뜨렸는지 누가 먼저 밑에 깔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마치 레슬링선수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며 짐승 같은 신음을 내었다. 질척이는 점액질의 마찰음이 귀를 지배하고 맨살에 닿는 뜨거운 감촉이 정신을 지배했다. 그에게 깔려서, 혹은 그의 위에 올라타면서 상대의 버클을 풀고 바지를 벗겨낸다. 무릎께에 걸쳐진 각 잡힌 정장 바지가 거추장스러워서 어린애가 누운 채 바지 벗 듯 구겨진 옷을 발로 밀어내어 걷어 차버렸다. 끌어안은 그의 등이 단단하고 부드럽다. 우악스럽게 그의 허리를 움켜쥐면 귓속으로 녹아버릴 것 같은 신음이 스며든다. 브리프도 벗어버리고 완전히 알몸이 된 우리는 환한 형광등 아래 드러난 서로의 몸에 취해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흐으으...”

등줄기에 전율이 달린다.
그가 귀 뒤에 불어 넣은 숨결도 허벅지를 어루만지는 손길도 몸의 털이란 털이 쭈뼛쭈뼛 솟아오를 만큼 전신의 신경줄이 긴장한다. 신음성을 참지 않았다. 마음껏 신음하고 그의 유두를 애무하며 목덜미를 콱 깨물자 그가 허리를 튀며 경련한다. 양손 가득 그의 엉덩이를 쥐어뜯으면서 하체를 비볐다. 서로의 배에 이슬을 찔끔찔끔 흘리는 그와 나의 양물은 불거진 힘줄이 마찰하는 감각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움찔거린다.

너무 빨리 달아올랐다. 그도 나도, 몸이 부딪힌 순간부터 발기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속옷을 벗고 서로의 물건을 확인할 때에는 이미 반쯤 서서 까딱거리고 있었다. 부끄러워하며 내숭떨 나이는 지났다.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고 내 치부도 솔직히 드러낸다. 두개의 다리가 교차하고 비비고 서로를 물어뜯으면 쾌락은 끓는점을 향해 가속도를 내며 올라간다. 미치도록 황홀하다. 오랜만의 섹스이기 때문에? 그것은 부수적인 이유일 뿐, 눈앞의 맛있는 남자를 먹어버린다는 희열이 환희에 환희를 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도 나도 행동을 멈추었다.

“......”

“......“

이런 난처할 데가 있나. 우리는 서로의 엉덩이를 쥐고 그 구멍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                *





간과하고 있었다. 그와 나는 성격도 잘 맞고 이미지나 분위기도 같은 취향이라 포지션마저 같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동안 바라보면서 섹스를 한번이라도 상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상상속의 그는 언제나 내 밑에서 우아하게 신음하고 있었기에 포지션의 문제는 심각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오늘의 상황은 즉흥적인 전개였기 때문에 데이트에 온 신경을 쏟느라 섹스에 대해 고민한 여유는 없었다고.

“음...이거 조금 난처하군요.”

나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정말로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열기로 뜨거워진 그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붉은 눈꼬리를 그리고 있었다. 안경을 벗은 눈은 저렇게나 섹시하구나 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다.

“저는 탑만 고집하는 편이라서요.”

거짓말이다. 나도 한때 바텀 경험 많이 해봤다. 폴리곤의 오너에게는 그에게 접근하지 않는 이유가 ‘깔리기 싫어서’라고 했지만 그에게라면 뒤를 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깔리는 것 이상으로 깔고 싶다는 욕구가 더 크단 말이지.

아차차 깔린다는 둥 깐다는 둥의 저속한 표현은 그만두자. 그러니까 난 이 남자를 안고 싶은 거다. 이 단정한 얼굴과, 잘 관리 된 몸과, 엘리트의 껍질을 쓰고 있는 눈동자를 쾌락으로 흐트러지게 하고 신음하게 하고 내 밑에서 울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 정도로 테크닉에 자신 있다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Yes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탑이다. 게이 세계에 외모로 포지션을 나누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는 경력 10년차인 내 안목으로 볼 때 자신의 포지션을 양보할 인상은 아니다. 그런 사람이 오늘 처음 관계하는 나 때문에 취향을 바꾸는 불쾌한 체험을 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실은 이런 속셈이다.

“즐기는 데에 항문섹스가 전부는 아니지요. 오히려 다칠 위험이 없는 손이나 입이 안전하지 않습니까.
당신이라면 펠라치오도 기꺼이 해드리겠어요.”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가 허용할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내가 대주면 대준만큼 받아내고 싶어질 거란 말이다. 그리고 또, 이런 식으로 하다 만 섹스를 하면 그도 나에게 미련이 남아 좀 덜 질리지 않을까하는 치사한 계산이라고나 할까.

아까 그는 분명 나와의 관계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지만 섹스 직전의 상대한테 무슨 말을 못할까. 그 다정함에 홀라당 넘어가 버리면 나는 저 쫄깃쫄깃한 엉덩이 한번 맛보지 못하고 채이게 될지도 모른다.
후...생각하고 보니 비참하네.

“펠라치오...말입니까?”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다. 설마 상식적인 성생활을 추구하는 타입은 아니겠지? 항문섹스자체가 상식과는 멀지만.

“저는 당신과 처음으로 맞는 절정을 허무하게 보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일부러 낮게 목소리를 깔며 속삭였다. 나만큼이나 신음하던 그였기에 목소리가 반쯤 쉬어 있다. 아...숨이 막히도록 안달하는 그의 표정을 보니 한번정도 대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앗! 넘어갈 뻔했다.

“허무하다니요. 후후후...삼켜드릴까요?”

그의 안색이 변한다. 너무 놀던 티를 냈나? 하지만 새빨개진 얼굴을 보니 야한 걸 상상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작게 웃으며 그의 몸에 좀 더 밀착했다. 땀으로 끈적한 몸이라 짠맛이 낫지만 섹스 중에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아들내미가 실망한다. 난 이런 짭쪼롬한 맛도 즐기는 편이고.

유두를 빨고 있어서 보이진 않지만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나를 안으려고 움찔하는 저 손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다. 혀끝을 뾰족하게 해서 오른쪽 옆구리 근처를 길게 핥아 내리자 허리가 튄다. 몽글몽글 액을 흘리는 그의 것을 바라보며 골반에 혀가 이르자 좀더 은밀하게 가랑이의 골을 따라 이빨을 세우고 입술로 오물거렸다.

갑자기 그가 내 몸을 억지로 떼어냈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것을 보니 기분 나빴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눈만은 번들번들하게 젖어 있었다. 얼굴표정이 너무 정색을 하고 있어서 나도 같이 표정이 굳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눈에 진의를 알 수 없는 폭력성이 엿보인다. 문득 덮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와락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을지도 모를 만큼 그 순간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폭력적이고 날카롭고 무자비한.

그러나 착각이었는지 고개를 털어낸 그는 한숨을 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다음번엔 서경씨가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제 쪽에 맞춰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아무리 그러셔도 내키지 않습니다.”

짐짓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여전히 번들거리는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지만 안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나는 여유마저 생겼다. 아까의 위협은 착각이었나? 아니면 나름대로 자존심 상하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화가 났던 걸까.

거절을 하는 내가 야속한지 남자가 한숨을 쉰다. 빙글 돌아눕고 이마에 손을 짚는 걸 보니 정말 큰 맘 먹고 한 제안이었나 보다. 이거 괜히 뻗대서 좋은 기회 놓치는 거 아냐? 오늘만 얌전히 그에게 맞춰주면 다음번엔 내가 그를 안을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을 번복하기도 적절치 않다. 나도 다시 돌아누워 천정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옆에서 부시럭대며 일어나는 소리가 난다.
가려는 걸까? 어지간히도 고집 센 사람이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침실에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 스며드는 빛은 유리로 된 벽면에 투과되는 야경이 전부였다.

“알겠습니다. 우리 둘 다 같은 요철이라면 지금은 제가 반대쪽 요철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음번엔 서경씨도 반대쪽 역할을 선택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얼굴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진지함과 체념이 묻어났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이스!’

더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건 절호의 찬스, 하늘이 내린 기회, 넝쿨째 굴러들어 온 호박이다. 나는 행여나 좋아하는 티를 너무 낼까봐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말끝을 흐리고 침대 맡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안았다. “약속하신 겁니다. 다음번에 매정하게 외면하지 않기에요.”라고 귓가에 중얼거리는 것 마저 어린애의 칭얼거림처럼 들려서 귀엽기 짝이 없다. 티내면 안 되는데...자꾸 목구멍에서 기분 좋은 웃음이 올라온다.

인생사 새옹지마. 낮에 본 점괘에서 그런 말을 본 것 같다.
만일 내가 오늘아침 일진이 사납지 않았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폴리곤에 가는 것은 토요일인 내일로 미뤄졌을 테지. 그랬다면 그가 따귀 맞는 것도 못 보고 진토닉을 건넬 기회도 없었을 거다. 내일쯤 어슬렁어슬렁 폴리곤에 나타났을 때 그는 이미 새로운 파트너와 희희낙락하고 있었을 테고 나 역시 다른 파트너의 허리를 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암 그렇고 말고. 아침에 일진이 나빴던 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액땜이었던 거다!

“뒤로는 처음입니까?”

목덜미를 핥으며 부드럽게 안마하듯 애무해 나갔다.“......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몇 년 만인 것 같군요. 이런 위치는 별로 선호하지 않아서.”남자의 체념한 듯한 한숨이 뜨겁게 내 귓가를 간질였다. 흐음...좋아...그의 굳어버린 몸을 안으며 피부를 쓰다듬고 가슴을 가볍게 깨물었다. 완전히 경험이 없길 바란 건 아니었기 때문에 몇 년 만이라는 말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 남자의 뒷부분은 처음이나 다름없을 테고 시간을 들여 풀어주지 않으면 둘 다 힘들어질 게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어색하게 굳은 그의 몸을 풀어주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전희다. 어깨의 둥근 부분을 주무르며 안마하듯 쓸어내렸다. 아아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그에게 키스를 했다. 부드럽게 안고 상체를 쓰다듬으면서 서로가 서로의 몸을 적나라하게 느꼈다. 방금 전 뜨겁게 불타올랐던 것과는 달리 우리 둘 다 몸의 쾌락이 더디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대신 화약통의 심지를 야금야금 먹어가는 불꽃처럼 저 발끝에서부터 아슬아슬한 전율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내 귓불을 물고 허리를 쓰다듬고 오늘은 들어가지 못하는 내 입구를 아쉬운 듯 더듬거린다. 솔직히 그의 손가락이 입구의 주름에 닿는 순간 항문 안쪽이 화끈화끈해졌다. 티내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는데 어쨌든 덕분에 앞쪽의 기운도 거세어져서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흔들어 그의 배에 비비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준비완료인 나에 비해 아직도 서다만 그의 것을 만지며 다른 손으론 엉덩이를 주물렀다.

“힘...빼십시오.”

원치 않는 포즈를 해야 된 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어깨가 움찔거리고 남자의 불만 섞인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보였다. 그 모습마저 얼마나 귀엽게 느껴지는지. 다 큰 남자를 두고 귀엽다는 말도 우습지만 봐라. 내게 어정쩡하게 안겨서 어색한 포지션에 어떻게든 적응해보려고 노력하는 저 사랑스러움을.

익숙하지 않을테니 아무래도 후배위가 편하겠지. 그의 등을 끌어안아 뒷덜미를 깨물며 가슴을 주무르고 조금씩 반응하는 그의 기둥을 쓸어내렸다.“이렇게 되면 나는 당신을 만질 수 없잖습니까.”하고 투정부리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미소가 지어진다.

넓고 매끄러운 등을 열 개의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흣-하는 신음을 내며 척추를 떠는 그의 허리를 마사지하듯 애무하며 귓불을 깨물고 엉덩이를 세게 잡아 쥐었다. 양 볼기를 한 손씩 가득 움켜쥐고 쥐었다 폈다 하며 항문의 수축을 유도했다. 낯선 감각이 불쾌했던지 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귓불을 핥고 있어서 표정은 잘 모르겠지만 어금니를 꽉 깨문 뺨의 움직임을 보니 어지간히도 참기 힘든가보다.
가운데손가락이 엉덩이의 골을 따라 미끄러져 뜨겁고 습한 기관에 침입했을 때였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내가 행동을 멈추고 그렇게 물어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밀실 입구와 맞닿은 내 손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경련이 이는 어깨가 안쓰럽다. 그렇게 싫다면 굳이 항문섹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순 ‘내가 양보할까?’ 하는 유혹도 들었지만 왠지 이 남자와의 섹스만큼은 우위를 점하고 싶다는 묘한 정복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삽입만이 섹스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당신이 그렇게 하기 싫은 것을 나는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아요. 서로가 즐거워야 하는 것이 기본 아닙니까.”

잘게 떨고 있는 남자의 등 근육에 키스를 하며 그렇게 말했다. 달래듯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그의 손을 이끌어 내 것을 만지도록 유도했다. 서로의 손에 사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흥을 깨트렸군요. 다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어서......”

우물거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 이렇게나 자상한 침실매너라니.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요. 꼭 그렇게......”

“아니오. 괜찮습니다. 서경씨와의 다음을 위해서라도.”

어쩐다. 점점 더 빠져 들것만 같아. 이러다 다음날 아침 “어젯밤은 즐거웠습니다. 그럼 이만.”하고 헤어진다면 나는 몇 주 동안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져 폴리곤 근처에도 가지 못할 거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다음을 기약할 ‘거리’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도 어지간히 내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렇게 싫은 것도 감수하는 것이겠지. 아아...입가가 실룩실룩 주체를 못하고 있다.

한계치에 다다라 울끈불끈 하는 내 아들놈은 무시하고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민감한 성기를 손으로 애무하고 섣부르게 그의 입구를 열기 보다는 엉덩이 근처의 성감대를 어루만져 주는 것에 더 정성을 들였다. 내가 애쓰는 것이 느껴지는지 그도 집중을 하며 조금씩 신음을 흘린다. 성기에 콘돔을 씌우는 자극을 겨우 참았더니 숨이 거칠어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손끝이 덜덜 떨린다. 발끝까지 저릿저릿 울리는 쾌감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아랫도리가 호소한다.

천천히 그의 뒤로 손을 움직였다. 움찔거리며 겁을 먹고 있는 음습한 주름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오싹하다. 꽉 오므린 구멍은 손가락 하나마저도 허용하지 않으며 버티고 있었다. 윤활제를 듬뿍 담아 입구를 문질러도 움찔움찔 떨고 있는 근육은 좀처럼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큭...”

손으로 감싼 그의 성기의 뿌리를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그의 허리가 미약하게 떨리고 뒷문이 잠시 방심한 사이 손끝이 머리를 들이밀 수 있었다. 순간 강하게 수축한 근육은 손가락 한마디를 먹고 격하게 맥박치고 있었다. 좁다. 하지만 이미 한마디가 들어간 상태에서 윤활제의 도움을 받으니 손가락 하나정도는 쑤욱-하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다.

“어때요. 괜찮습니까?”

얼핏 본 그의 뺨과 귓불은 새카매 보일 정도로 익어 있었다. 나는 눈을 휘며 그 까맣게 불타버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손가락 끝을 휘고 부드럽게 돌리면서 앞쪽의 성기를 애무했다. 그의 목구멍에서 낮고 쇳소리 섞인 신음이 비어져 나온다. 그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익숙지 않은 내 행위에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그것은 최고의 섹스였다.

길들어져 있지 않은 그의 몸에 테크닉을 과시할 만한 여지는 없었지만 상냥함과 배려로 처녀지와 같은 길을 열어주고 무리 없이 삽입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눈이 핑 돌만큼 아프게 조이는 그의 근육과 낯선 중량감에 허덕이는 그의 가쁜 호흡. 그리고 나에게 맞춰주기 위해 안쓰럽게 움찔거리는 허리는 나를 정신적인 엑스터시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아아 최고다. 이 남자는 딱 내 이상형이다.

허리를 천천히 밀어 올리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괜찮습니까...하아......저는 미칠 것 같습니다.” “그런 말씀...하셔도..윽....” 몸의 움직임은 박자를 맞추듯 리드미컬해지고 한숨과 함께 이따금 터져 나오는 탄성은 누구의 음성인지, 누구의 야하고 새된 신음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어졌다. 끈적이는 땀과 근육이 마찰하고 뇌가 하얗게 점멸하고 절정으로 절정으로.....
그렇게 치솟아 올라 정상을 마주한 순간 발끝까지 저며지는 눈부신 쾌락에 이성을 토해내며 온몸을 휘었다.   





그 뒤 정상 체위로 두 번을 더 했던 것 같다.
몇 년 만이라는 그도 나중엔 완전히 내 페이스에 동화되어 상당히 흥분했다. 베테랑은 다른 포지션에도 적응이 빠른 걸까. 서로가 상당히 노력한 부분도 있지만 그는 상당히 유연하게 나를 받아 들였고 우려했던 것만큼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내가 그의 안에서 오싹오싹하게 조여 오는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오히려 나보다 더 격렬하게 안으며 애무를 한 것은 그였다.

이런 파트너, 십 몇 년을 굴러먹어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세 번째 사정 후 엄청난 충만감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 그가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직도 지치지 않은 그를 보며 혀를 내둘렀지만 처음에 보였던 어색함이 사라진 모습은 성적 매력이 더욱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당신, 바텀으로 전향할 생각은 없습니까?”

  내 말에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뺨에 키스했다.

“다음번엔 그런 말이 쏙 들어가도록 해드리지요.”

다음?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나는 그와의 결합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나머지 앞으로도 계속 내가 그의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었나보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얼굴에도 나타나 그에게 읽혀 버렸다. 일순 그의 안색이 차갑게 굳었다. “비겁하게, 약속을 잊진 않으셨겠지요?” 그 말에 하하 웃었다.

“제가 만족스럽지 않으셨나 봐요? 벌써 자기 차례를 생각하시다니.”

물론 약속한 이상 다음의 섹스는 그에게 맡길 참이었다. 전공포지션도 아닌데 이 정도로 만족스럽다면 그의 본래의 테크닉은 어느 정도일지 기대된다. 하지만 막 행위를 끝내고 나서 다음 번 운운 하다니, 나름 테크니션이라고 자부하는데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얼굴이 잠깐 흐려졌다. 그러나 다시 피식하고 웃는다.

“오늘의 섹스는 귀여운 수준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드리지요.”

“흠, 그렇게 자신 있으십니까?”

“저는 이 정도에 만족하는 남자가 아닙니다.
아마 서경씨 쪽에서 포지션을 바꾸겠다고 애원할 걸요.”

순간 울컥했다. 아까 그렇게 헐떡이고 흥분했으면서 참 얄밉게도 말한다. 하지만 호언장담하는 것도 콩깍지 쓰인 내 눈엔 다 귀여워 보여서 그저 목으로 큭큭 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거 무섭군요. 그런 위험한 것이라면 알고 싶지 않은 걸요.”

후희를 나누며 오가는 대화치곤 귀여운 맛이 없지만 이런 줄다리기도 꽤나 오랜만에 해 보는 거라 나는 상당히 즐기고 있었다. 있는 거 없는 거 다 경험해 보고 새삼 창피할 것도 없는 남자 둘이 부둥켜안고는 내 테크닉이 더 낫네 어쩌네 하는 것도 우스워서 계속 실실 웃고만 있었다.

격렬한 섹스는 더 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고 기분은 안정되어 졸음이 몰려온다. 그러다가 우리 둘 다 씻지도 않고 이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 몸은 피곤해도 샤워를 하고 싶었다.

“그럼 저 먼저 씻을......”

“약속을 피하시는 겁니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팔을 그가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생각 외로 아파서 내가 인상을 쓰자 그가 깜짝 놀라며 손을 뗀다. 이 남자, 그렇게 자기 테크닉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정말로 내 솜씨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거야? 나야 말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다음이 아니라 다다음도, 다다다음도 계속 하고 싶은 건 당신 못지않은데 마치 내가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바라보다니......

......그렇게 쳐다보면 놀리고 싶어지잖아.

“그럴 리가요. 다음엔 당신의 솜씨도 보고 싶군요. 그래요. 다음, 다~~음에 말이죠.”

그렇게 웃으며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





*                *                *





어깨가 뻐근하다.
격렬한 섹스 때문인가? 분명히 뜨거운 물로 근육을 풀어주고 시트도 정리해서 산뜻한 기분으로 잠들었는데... 그래, 우리 둘 다 개운하게 몸을 씻고 편안하게 수면을 취했더랬지. 자기 전에 이마에 키스를 해주던 그의 행동이 참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답답함은 무어란 말인가.

숨을 쉬기가 거북하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도 마치 올가미에 옥죄여 있는 듯 움직일 수가 없다. 시트가 몸에 말려있는 건가? 옆자리에 누워 있을 그의 몸을 더듬어 보려 해도 팔이 욱신거리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전 걸려보지 않던 가위에 눌린 건지도 모른다. 잠 속으로 깊이 침전해 있던 의식이 육체의 불편함 때문에 점점 수면 위로 부상하려하고 있었다.
쓰디쓴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깨어나셨습니까?"

환하게 켜진 형광등에 눈이 부셨다.

다시 눈을 감아도 눈꺼풀 위로 찌르듯이 느껴지는 불빛 때문에 고개를 모로 돌리고 실눈을 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벌서 잠이 깼는지 와이셔츠에 바지까지 챙겨 입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담배 피웠었나? 담배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었는데. 어지간히도 급한 일이 생겨서 벌써 가려나 보다. 아, 시간이 새벽 2시가 다 됐는데......

“많이 불편한 것 같진 않군요.”

담배를 비벼 끄며 그가 다가온다. 어디 가냐고 물으려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제야 생소한 천의 느낌을 깨닫고 한꺼번에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재질은......빌어먹을 내 넥타이. 위로 치켜 올려진 두 팔은 부드러운 끈에 의해 결박되어 침대 한쪽 모서리에 매여 있었고 두 다리 역시 발목이 무언가에 매여 침대 양 사이드에 묶여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자기 전에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이 아슬아슬하게 풀어지기 직전이다. 침실 안의 공기마저 싸늘하게 내려가는지 공기와 닿는 피부에 오한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렇게 표정 없이 바라보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놀라셨죠? 저도 이럴 생각은 정말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영영 못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안경이 형광등에 반사되어 표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이제 와서 새삼 벌거벗고 있는 알몸뚱이를 그에게 보인다는 게 부끄러울 건 없지만 무슨 정육점의 고깃덩어리를 감상하듯 훑어보는 시선에 소름이 끼쳤다.

당신, 이런 플레이가 취미였어?

나는 자상하던 그가 변한 것에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래서 재갈이 물린 입으로 억지로 소리를 내고 의문 가득 담은 눈으로 애원했다. 으읍! 읍! 하고. 그는 원래 상냥하니까 내가 이렇게 불쌍하게 쳐다보면 곧 측은한 마음이 들어 나를 풀어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를 묶은 건 잠깐의 변덕일 뿐이라고, 섹스에서 포지션을 뺏긴 것에 대한 사소한 보복이라고...

“겁을 먹은 겁니까? 벌써 그런 표정을 지으면 곤란합니다......”

그의 손끝이 뺨을 쓸었다.
고개를 흔들어 그의 손을 뿌리치며 인상도 쓰고 비굴한 표정도 지으며 온 몸을 뒤틀었다. 이봐요. 이봐요. 지나친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둬요.

침대의 한쪽 모서리가 기울어졌다. 침대에 앉은 그는 내 바디랭귀지를 무시하고 뺨이며 목덜미,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이 가슴에서 옆구리로, 옆구리에서 골반으로 내려가면서 가운의 끈이 풀어진다. 천천히 어루만지는 손길은 간지럽고 또 거부감이 들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몰려왔다. 그는 이런 놀이를 좋아하나? 하지만 보통 이런 놀이는 상호간의 합의하에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재갈을 풀어 줄 생각은 없어요. 그러면 당신은 그 아이스크림 같은 입술로 나를 기만하고 나를 유혹하고 혹은 조각조각 난도질 하겠죠. 저도 말장난은 즐기는 편입니다만 지금은 그런 소모전으로 정신적 쾌락에 취할 기분이 아닙니다.”

눈을 휘며 덜렁거리는 내 성기를 쥐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남자는 단순히 장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으으으읍--!!!!”

이럴 순 없다. 이런 비굴한 자세로 남한테 애무 받고 지배당하고 저 이죽거리는 눈 아래에서 약자의 포즈를 취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내 의사는? 내 취향은? 내 의지는? 변태 놀이 같은 건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하는 게 기본이라는 걸 모르냐--!!

손과 다리에 묶인 끈 따위 끊어 버리겠다는 오기와 악으로 발버둥쳤다. 아까의 ‘풀어주세요~’ 하던 표정과 몸짓은 ‘너 죽여 버린다. 빨리 안 풀어!’로 바뀌었다. 이 새끼, 이래도 안 풀어?!!      

내 몸을 멋대로 주무르던 그는 내가 작심을 하고 버둥거리자 침대에서 아예 한발자국 떨어져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그리고 제 풀에 지쳐 허덕거릴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나는 지치고 숨이 차서 침대 위에 늘어져버렸다.

“분은 어느 정도 풀리셨습니까?”

점심메뉴를 묻는 말투로 빈정거리는 얼굴을 보자니 속이 뒤틀린다. 게다가 아까부터 다물지 못한 탓에 입술이 바싹 말라 괴롭다. 물을 마시고 싶지만 저 작자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기도 싫고 부탁할 수단도 없다. 재갈(정확히는 나의 안쓰러운 넥타이)이 침에 젖은 것이 불쾌했고, 멀거니 내려다보는 저 치의 태도는 열이 받고, 무력하게 늘어진 자신에게 화가 난다.

남자는 내가 진정 됐다고 생각했는지 상체를 구부려 내 얼굴 위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허리께를 톡톡 두드리며 한다는 소리가......

“사실은 말입니다. 아직도 당신이 이 안에 들어 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복이라도 할 참이냐?! 라고 마음은 소리치고 있었지만 다소 낯 뜨거운 이야기라서 그를 죽어라 노려보던 눈가에 힘이 풀렸다. 남자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것은 부드럽고 유연해요. 모양도 매끄러워서 귀두 끝이 울퉁불퉁하거나 구슬을 박은 성기에 비하면 항문 내벽과의 마찰도 적은 편이지요. 그래서 작은 사이즈가 아닌데도 부드럽게 삽입할 수 있었나봅니다.”

얼굴이 불타올랐다.

“손가락이 들어왔을 때의 거북함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더군요. 과연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뜨겁게 잘 익은 말캉말캉한 분신이 제 입구를 두드리며 울고 있더군요. 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하면서.
문이 열리고 제가 준비한 길로 당신이 들어왔을 때, 희열에 몸부림치며 부르르 떠는 그것이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안에서 맥박치고 광란하다가 끝내 오열하는.”  

다, 다, 다, 다, 닥쳐-----!!!!!
대체 어떻게 되먹은 상판 이기에 저 딴 소리를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할 수가 있는 거지?!!!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자꾸만 뒤로 숨고 싶다. 아무 짓도 안했는데 가랑이 사이를 잡힌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대체 남의 아들내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저의가 뭘까. 나를 창피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확실히 성공이다.  그는 옷을 입고 있고 나는 알몸이라는 것이 갑자기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 느낌을 처음 알았습니다.”

목소리에 심상찮은 진중함이 느껴져서 시뻘게진 얼굴을 들고 그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제길 저놈의 안경, 눈이 안보여.

“괜히 오기가 생겨서 삽입 당하는 것은 몇 년 만이라고 거짓말 했습니다.”

......어?

“상대가 당신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백버진을 잃은 것 치고는 좋았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것도, 나를 묶은 그에게 화를 내는 것도 잊었다. 처음? 처음이라면 설마 뒤로는 내가 처음?

허---? 진짜?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간사해서 ‘당신이 내 첫남자였어‘ 따위의 말을 듣고 있으니 입가가 풀어지고 응어리가 슬슬 사라진다. 바텀 경험도 없고, 포지션은 오로지 탑인 그가 나 때문에 위치를 양보해주고 게다가 좋았다고 말하는 건가. 그런 거 나였다면 자존심 상해서 말 못한다. 눈을 깜빡깜빡 뜨며 여전히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를 올려보았다.

......그런데 그거랑 묶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의 부드러운 흉기의 느낌도 그러할진대 좀 더 깊은 곳의 미개척지는 어떤 기분이 들까......라는.”

“......”

표정이 없던 그가 드디어 웃었다.
뻗어오는 손을 피해 몸을 움츠렸지만 묶여 있는 내가 도망 갈 곳은 없었다. 그의 손이 내 턱을 잡고 재갈이 물려 있는 입술을 쓸더니 턱 선과 목줄기를 따라 쇄골로, 그리고 겨드랑이로, 가슴으로......한 손으론 부드럽게 가슴을 주무르면서 묶여 있는 내 팔목에 키스했다.

“저는 참을성이 많은 편입니다. 당신이 나와 또다시 섹스 할 기분이 들 때 까지 기다릴 의향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때야말로 당신을 녹여주겠다고,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쾌락의 길로 인도하겠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벼르고 있었지요.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당신을 너무 쉽게 봤나봅니다.
오늘의 섹스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하면서도 당신은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죠. 하루가 멀다 하고 연인을 갈아 치우는 당신을 보고 질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막상 내 자신이 갈아 치워질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더군요. 당신이 섹스 할 때 하는 약속 같은 건 입 발린 거짓말 따위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목소리가 변했다.
낮고 듣기 편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저 느끼하고 숨넘어갈 것 같은 은근함이 귓속을 파고들어 귓바퀴 주변의 신경이 오싹해진다. 내 몸 위로 겹쳐오는 몸에선 은은한 바디샴푸 냄새와 쓴 담배냄새가 섞여 있었다. 매끈한 손바닥이 차가운 몸을 어루만지고 담배향이 쓰디쓰게 묻어나는 혀가 목덜미를 농락한다.      

“일년 동안의 금연이 당신 덕분에 깨졌어요. 지난 번 파트너가 놓고 간 담배를 제가 꺼내 피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손이, 입술과 혀가 음습한 의도를 담고 피부와 접촉한다. 하지만 이렇게 묶여 있어서야 전혀 기분 좋지 않다. 나는 몸을 뒤틀며 그를 노려보았고 그런 내 눈을 유리알너머의 진한 눈동자가 마주 바라봤다.

좋아. 괜히 심술이 나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처럼 말한 것은 내 잘못이라는 걸 인정하겠다. 그리고 남자의 얘기를 듣고 보니 그가 내게 화가 난 기분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번 사귀면 적어도 며칠씩 가는 그에 비해 나는 말 그대로 원나잇스탠드 상대만 찾아 다녔다. 연인이 아니라 파트너를 원했으니까. 일종의 스포츠, 스트레스 해소용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아니라고. 당신은 내가 스테디하게 사귀고 싶다고 생각한 몇 안 되는 케이스란 말이야. 내가 장난친 거 미안해. 지금이라도 당신한테 깔릴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이것 좀 풀고 하자고--!!  

내 의사를 표현 할 수 없다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을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아무리 몸을 뒤틀고 눈으로 말을 걸어도 그가 독심술을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내 뜻을 알 리 없을 것이다. 이대로 묶여 관계를 가지는 것은 마치 강간 같아서 굉장히 불쾌하다. 난 내 의지로 당신에게 몸을 주는 것이라는 걸 확실히 해둬야 한다. 이렇게 억지로 묶지 않아도--!!

“이걸 풀어주길 원하시죠?”

“......”

“굳이 이렇게 안 해도 내게 안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아 희망이 보인다. 이 남자에 대해 조금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딴에는 내가 자신을 차버리고 갈까봐 조바심을 낸 게 아닌가. 이 정도에서 멈춰준다면 봐주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눈동자를 빛냈다.  
남자가 웃었다.

“그리고 내일은 바이바이겠지요.”

희망을 가득담은 눈 그대로 얼어붙은 몸뚱어리의 중심이 강하게 붙들렸다. 아픔을 호소할 여유도 없이 자극당해 하체가 경련했다. 매만지고 달래는 손길은 싸늘하게 내려보는 눈과 대조된다. 나는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알았다. 아니 처음부터 협상 따위는 없었다. 이 남자의 일방적인 통고였고 나는 그에 따라야 하는 무력한 입장이다. 다시 화가 치밀어 올라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비비꼬는 알몸은 우스꽝스러울 뿐이고 그의 눈요기가 될 뿐이다. 분했다. 배려 깊고 자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긴장하는 것도 귀엽군요. 내가 얼마나 이 몸을 원했는지 당신은 짐작도 할 수 없겠죠.”

침대에 편하게 앉아서 한 손으로 남의 아들을 주물럭거리는 변태가 내가 아는 그 남자가 맞는 건가. 무기력하게 꿈틀대는 내 육신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시선이 내가 알고 있던 상냥한 눈빛이 맞느냐고!

“혹시 착각할까봐 말해둘게요. 나는 당신이 도망갈까 봐 묶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데, 나는 이런 플레이를 꽤나 즐기는 사람이라서요. 다른 연인들을 안을 땐 며칠동안 탐색도 하고 상대의 취향을 고려해가며 플레이의 여부를 정하지만 당신은......당신은 어차피 내일이면 사라질 사람이니까, 이렇게 내 손안에 들어와 있는 동안이 마지막일테니까.“

성기를 주무르던 손이 구슬을 주무르고 더 아래로 내려가 항문과 이어진 회음을 긁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느끼고 있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허리를 틀고 숨을 들이켰다. 엄지와 검지로 항문으로 가는 길을 문지르면서 다른 세 손가락은 구슬을 잡고 굴린다. 재갈을 꽉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내 표정을 즐기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변태로 돌변한 그는 왼손으로 하체를, 오른손으로 상체를 유린하며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목덜미까지 화끈거리고 참을 수 없는 민망함이 전신을 핥듯이 기어 다녔다.

“음낭이 묵직해서 손안에 들어오는 느낌이 좋습니다. 주름은 곱지만 색은 많이 짙군요. 이것이 아까 우리가 관계 했을 때 제 항문 입구를 끊임없이 자극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항문의 주름과 음낭의 주름이 비벼지고 제 음낭과 당신의 음낭이 마찰하는 기분. 당신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계셨을지."  

“숨이 차는지 배꼽이 헐떡이고 있군요.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의 유두는 꼿꼿이 서서......핥아달라고 조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화내지 말아요. 당신의 성기가 애처롭게 떨고 있잖아요.
좀 더 풀어달라고, 좀 더 만져달라고 눈물 흘리는 이 사랑스러움을 보여 드리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누가, 저 새끼 입 좀 막아 줘---------!!!!!!!!!!

굴욕스럽게 당하면서 피어오르는 쾌락의 연기를 꺼트릴 방도가 없었다. 처음엔 분명 눈곱만치도 기분 좋지 않았지만 성기를 자극하는 스트레이트한 느낌에 몸이 반응하기 시작하자 다른 감각들도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분하다. 분해! 나도, 나도 묶여있는 상대를 발가벗겨서 싸게 하라면 10분, 아니 5분 만에 정액을 받아낼 자신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몸의 반응은 저 작자가 테크니션이라서가 아니라 남자의 당연한 반응이고 내 몸이 이런 자극에 너무 익숙한 탓이라고!  

허벅지가 경련했다. 허리가 뒤틀리고 묶여진 다리는 오므릴 수가 없어 움찔움찔 떨었다. 빌어먹을빌어먹을빌어먹을!!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신음은 간신히 삼키고 있지만 너무 화가 나서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저 자식이 오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엉덩이의 근육이 반사적으로 실룩거린다. 내가 보이는 꼴사나운 모습이 재밌는지 저 작자는 빙그레 웃고만 있다. 씹새끼야 셔츠라도 벗어라. 상대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할 것 아니냐!     

“아직 손 밖에 쓰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되면 버티기 힘들 겁니다.”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저 자식이?
벌려진 다리 사이로 들어가 앉은 남자는 두 손으로 마사지 하듯 성기를 주무르고 음모며 가랑이며 안쪽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발딱 일어나 있는 성기를 보며 피식 웃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귀여운 말을 하시더군요. 펠라치오라......원한다면 삼키시겠다고요.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흐읏--!!”

참고 있던 비음이 튀어나왔다. 남자의 입술이 귀두 끝을 가볍게 물고 천천히 내 것을 삼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치 입으로 콘돔을 씌우는 느낌이었다. 입안의 점막과 마찰하면서 미끄러지는 감각에 양 다리를 떨며 허리를 휘었다. 이 작자, 목구멍까지 삼킨 것 같다. 남자가 숨을 쉴 때마다, 침을 삼킬 때마다 꿀꺽꿀꺽 빨아들이는 아찔한 펌프질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제기랄 비위도 좋지. 항복이다. 이제는 창피고 뭐고 없이 마음껏 신음을 지르며 절정에 도달할 테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직. 아직이에요. 혼자 멋대로 가시면 곤란합니다.”

터지기 직전의 고무호수 끝을 억지로 메어둔 것과 같았다. 무엇으로 막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기의 압박감은 눈앞이 새하얘지는 고통을 주었다. 사정은 할 수 없었다. 아슬아슬한 감각이 요도 안에서 맴돌고 아랫배가 욱신욱신 경련하는데 말이다!

시뻘건 힘줄이 돋아 당장이라도 불구가 되어버릴 듯한 성기의 고통 때문에 그가 내 항문 입구를 건드리는 것도 그 곳에 차가운 액체를 잔뜩 쏟아 붓는 것에도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부림쳤다. 요도 속에서 정액이 역류하는 느낌이다. 완전히 넋이 나가지 않은 것은 남자가 “이제 시작일 뿐인데, 벌써 정신을 잃으면 곤란합니다.” 따위로 울화를 돋우었기 때문일 거다. 이 작자는 항문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더니 또 한바탕 남의 구멍 품평회를 하고 손가락으로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만일 성기가 이런 상태만 아니었다면 뒤만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를 만큼 굉장히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남자가 내 몸 위로 겹쳐왔다.
젤 한통을 퍼부은 항문으로 그가 들어오기는 쉬웠고 이 작자는 그 때서야 묶인 성기를 해방시켰다. 뒤에 가득 찬 이물질이 버거웠지만 그 이상으로 절정은 피크를 달렸고 어느 때보다 오래, 그리고 진하게 사정했다. 그 쾌감이라니! 미칠 듯이 창피한 비음과 신음을 내지르면서 울컥울컥 토해내고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땐 그 자식이 귓가에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굉장하군요. 내 걸 와작와작 씹어 삼킬 것 같은데요?”

으아아아아악-------!!!!!!!!
탈진 해버린 몸은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데 마음속은 팔짝팔짝 뛰면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정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란 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일 게다.

완전 속았다! 자상하고 친절한 신사의 껍질을 쓰고 이 작자는 뇌수까지 변태였던 거야! 아까의 그 꼬맹이가 당신 따귀를 때린 이유를 알겠어. 보나마나 이런 저질스런 플레이를 하려 했다가 호되게 맞았겠지! 아아 분하다 분해! 내가 저 눈 속의 음흉함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아침부터 점괘가 최악으로 나온 것은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몇 달 동안 바라만보면서도 저 남자에게 접근하지 않았던 이유는 위험을 감지한 나의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피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 후로도 언어와 육체로 농락당하면서 원치 않는 사정과 원치 않는 신음을 흘려야 했다. 악몽 같은 새벽이었다. 몸은 쾌락의 한계까지 도달하고 정신은 그의 말에 지배당해 수치와 모멸감을 느꼈다. 나는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놀아났고 몇 번을 사정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다만 몇 번이나 강제에 의해 부른 그의 이름을 저주라도 퍼붓듯 외쳐댔던 것은 기억난다. 그리고 도저히 피로를 이기지 못한 몸이 천근과도 같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 갈 때 내 귀에 속삭인 그의 목소리만이 환청처럼 머리 한 구석에 남아 맴돌고 있었다.
  
-당신, 지금에서야 내 이름을 처음 알았지요? 내 이름. 권이도 말입니다.





*                *                *





  다음 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햇빛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스모그 잔뜩 낀 도시의 대기를 통과하느라 그 찬란함이 많이 흐리고 퇴색된 정오의 태양빛이 통유리 너머로 침실을 비추고 있었다.

그 작자는 이미 사라졌다.
머리맡에 연락처 하나 달랑 남겨 놓긴 했지만 열이 받은 나는 메모지를 갈가리 찢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씻으려고 침대에서 내려와 발을 디디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통증이 몰려와 끙끙대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빌어먹을, 이 나를 잘도 이렇게 만들다니. 엉금엉금 기어 겨우 욕실에 도착했고 한 시간을 물줄기 아래에 있었다.

격렬한 섹스는 종종 즐겼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이를 갈았다. 왜 내가 그때 좀 더 반항하지 않았을까. 왜 그딴 자식의 손에 제멋대로 놀아났을까! 그러나 이성이 돌아온 지금이나 후회하지,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그 자식에게 당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비겁하게 사람을 묶어두고 그 따위로 농락하다니. 사람을, 사람을 뭘로 아는 거야? 내가 사정에 환장한 인간인 줄 알아? 사람을 장난감처럼 손아귀에서 굴리면서 갖고 노니까 즐거워? 제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자식! 그 기름칠한 혓바닥으로 사람의 존엄성 따위 깡그리 무시했었지! 제기랄제기랄제기랄, 좋았었는데. 딱 내 타입이었는데. 나는 당신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는데에에에에에--------------!!!!!!!!!

욕실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정수리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의 도움을 받으며 앙금이 쌓인 눈물과, 욕설과, 치밀어 오르는 안타까움을 흘려보냈다.





*                *                *





다시 시작된 한 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며칠간 사내교육 프로그램에 갔다 오고 밀린 일거리를 눈알 빠지게 정리하다보니 폴리곤에 가기는커녕 술 한 잔 제대로 할 시간이 없었다. 짬이 생기면 그 때의 치욕이 생각나 자꾸만 괴로워지고 배신감과 분함으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더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일주일하고도 며칠을 보내고 나자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와 좀 더 냉정한 판단을 하게 되었다.

다음에 만나면 한 대 갈겨주겠노라 벼르고 있었지만 그 작자가 진단서 끊어와 고소하네 어쩌네 하면 오히려 분통터지는 것은 이쪽이 된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란 게 결국 요약하자면 섹스 할 때의 플레이가 맘에 안 들었다는 얘기 아닌가. 누구한테 하소연이라도 했다가는 웃음거리 되기 딱 좋다. 그 자식이 나를 때린 것도 아니요, 욕 한마디 하지도 않았다. 묶어놓고 억지로 사정시켜서 열 받는다...로 간단히 정리되는 그날 밤의 일은 솔직히 내 쪽이 백배 천배는 창피한 일이다.

일거리에 치이면서도 틈틈이 그 생각을 하면 이가 갈렸다. 그래, 어설프게 주먹질 따위를 해선 안 된다. 이빨 까는 거라면 나도 자신 있다. 세치 혀로 사람 하나 인간쓰레기로 만드는 데에는 5분도 안 걸릴 것이다.

권이도라고 했나. 주둥아리는 너만 놀릴 줄 아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지.

그렇게 벼르고 벼르며 나는 녀석을 위해 스물일곱 번째의 욕설(물론 상욕이 아니다)을 준비하며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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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폴리곤 근처에서 유턴을 했다. 지금 시간은 12시가 다 되어 가는데 이 시간까지 그 작자가 있을 리도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피곤에 지친 몸으로 입씨름에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야근이 끝나고 겨우 폴리곤까지 와서 되돌아가기를 서너 번, 아무래도 그 자식에게 한방 먹이는 것은 적어도 지금 하고 있는 일 중 하나가 마무리 된 다음에나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도 주말이라고 무거운 몸을 끌고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지니 답답한 마음이 들어 신호대기를 틈 타 창문을 조금 내렸다. 그런데 저쪽 골목에서 시비 붙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이 두 명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강도인가 싶어서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시비 당하는 쪽은 사방으로 뻗친 머리에 키도 훌쩍 큰 모습이 젊은 애로 보였고 그 중 시비 거는 두 명은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혹시 큰 싸움으로 번지면 경찰을 부르려는 생각에 차를 서행하며 다가가 보도블럭 옆에 정차해두었다. 어깨를 툭툭 치며 시비 걸던 두 명이 드디어 주먹을 내뻗으며 삐죽 머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고를 할까, 아니면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이 좋을까......잠시 고민하는 사이 혼자 공격받던 녀석이 제법 대차게 반격을 한다. 오, 텔레비전을 보고 연습한 것 같은 폼이다. 아무리 술에 취한 상대라고 하지만 두 명인데 꽤나 분전하는군. 그래도 역시 머릿수엔 장사 없다. 삐죽 머리가 슬슬 얻어맞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싸우는 세 사람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골목 가까이로 왔을 때, 나는 혼자 싸우는 청년의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긴 팔다리에 성질 사납게 생긴 그 얼굴은 이런 저런 상처로 더욱 터프해져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폴리곤에서 보았던 애송이, 언젠가 권이도에게 시원하게 따귀를 날린 청년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좋다고 깨갱거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앙탈이야!!”

“씨발 아가리 찢어지고 싶냐?”
  
도와줘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가까워진 덕에 들리는 육두문자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치정문제인 듯 싶은데 그런 거라면 끼어들기 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게다가 저 권이도와 연관된 애송이에게 얼굴 들이밀기도 마뜩찮다. 마침 꼬마는 용케 술 취한 두 녀석을 때려눕히고 있으니......괜히 참견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새끼 너 다음에 만나면 가만 안 둬!"

“썅, 어디서 저런 성질 더러운 새끼가 걸려가지고 너 담에 보자!”

두 사람은 도망가면서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 뒤에 대고 애송이도 걸쭉하게 욕을 했지만 쫓아갈 힘은 없는지 그대로 골목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버렸다. 골목 바깥에서 안의 상황만 대충 파악하고 있던 나도 고개를 돌리고 이만 가던 길을 가려했다. 그래, 별 사고 없이 끝났으니 나는 이만 사라져야겠다.

“와, 치사하게 보고만 있냐?”

차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췄다.

“씨발, 싸움 구경하는 게 재밌어? 아니면 도와주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일찍 끝내버려서 김 샌 건가?”

그렇게 말하고 키득거리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술에 취한 듯싶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대로 가버리기도 찝찝해서 골목 안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애송이는 고개 들 힘도 없는지 내 바짓단만 흘끗 보고는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거린다.

“뭐야, 양복쟁이 아저씨잖아. 그런데 도와주려고 했으면 끝까지 도와주는 거 어때?
내가 지금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지. 한남동 방향으로 택시 태워 보내만 주면 당신 복 받을 거야. 저 새끼들 조금 있으면 지네 패거리 끌고 우르르 나타날 게 뻔하거든. 솔직히 거기까진 자신 없어.“

나는 말없이 청년을 부축했다. 힘이 없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는지 물 먹은 듯 축 늘어진 몸은 일으키자마자 맞은 곳이 어지간히도 아픈지 끙끙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거의 안다시피 해서 내 차 까지 데려와 조수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승용차 안에 타게 된 것이 뜻밖인지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제야 내 얼굴을 바라본다.

“댁이 어디십니까. 가는 데 까진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이런 친절을 베풀 생각은 없었지만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는 표정이 꽤나 어린애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청년이 갑자기 미간을 구기며 귀엽지 않은 목소리로 대뜸 내 이름을 불렀다.

“당신, 김서경이지.”

부드럽게 차로에 합류하면서 애송이를 바라보았다. 싸움한 흔적이 남은 입가를 훔치며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는 눈은 그 나이가 누릴 수 있는 반항적 젊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재수 없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지만 어리니까 봐줄만하다는 의미다.

“이런 빌어먹을. 차 세워. 내릴 거야.”
   
“저를 아십니까?"

나야 폴리곤의 단골이지만 이 청년은 따귀 사건 외에는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만약 폴리곤에서 보고 내 얼굴을 알 정도라면 청년도 상당한 단골이어야 할텐데 나는 이 꼬마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아마 타이밍이 안 맞았거나 이 꼬마가 폴리곤 초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폴리곤이 아닌 다른 곳에서......

“폴리곤 최고의 바람둥이를 모를 리가 있나.”

역시 폴리곤에서 본 거로군. 하지만 바람둥이라니 처음 듣는 말이다. 내 비록 원나잇스탠드를 즐긴다고 하지만 폴리곤에 채이는 게 그렇고 그런 사람들인데 나에게만 한정되어 바람둥이라고 매도하는 건 공평하지 못하다. 그런데 이 꼬마는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하는 거지?

“그런데 초면부터 말을 놓다니 기분이 안 좋군요. 제가 훨씬 연장자일텐데요.”

“우와 재수 없어. 그 새끼랑 말투가 똑같잖아.”

반사적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행동거지로 보아 예의 운운할 인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이건 예의의 문제를 떠나 비상식적으로 적대적이다. 원래 성격이 이런 건가, 아니면 내가 특별히 싫은 건가. 갑자기 애송이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기특한 마음이 사라져가려 하고 있었다.

“무례하군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기분 상한 것이 즐거운 듯 못된 장난을 치고 나서 기뻐하는 악동처럼 씨익 미소 짓는다. 아니, 미소라기보다는 비웃는 것 같다. 그 느낌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꼬마는 어깨에 잔뜩 준 힘을 빼더니 의자에 거만하게 파묻혀서는 빈정대기 시작했다.   

“졸라 예의바른 척하는 주제에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애인을 바꿔치는 것도 참 놀라워~
요즘은 어째 폴리곤에 잘 안 나타난다 싶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꼬시고 있었잖아?“

“......내리십시오.”

이죽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이 꼬마가 뭣 때문에 나한테 화가 나 있는지는 몰라도 굳이 집까지 태워다 주면서 욕먹을 생각은 없다. 게다가 뭐? 내가 누굴 꼬셔? 요 애송이가 보자보자니까 말을 함부로 하는군.  

청년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를 세웠다. 내리라고 말은 했지만 탔을 때와 달리 친절하게 문까지 열어 줄 마음은 없다. 그런데 요 꼬마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 자기 머리를 감싸는 것이 아닌가.

“제기랄......제기랄 제기랄!!”

자기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의자 등받이에 쾅쾅 머리를 받는다. 별로 자학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보아하니 무언가 풀지 못하는 짜증을 나한테 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미안해. 내가 술이 좀 취해서 말이 막나갔어.”

허어...미안한 줄 알면 그 말투부터 고쳐야지 아가야.
희미하게 느껴지는 술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내릴게. 세워줘.”라고 꼬맹이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풀죽은 어린애 같은 표정에 다시 한번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운전만 하자 꼬마도 얌전히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내쉰다.

밤이 깊었지만 도로에 차량의 수는 적지 않았다. 붉은 하향등이 내는 빛의 꼬리가 궤적을 그리며 도로 위를 달렸다. 차의 엔진소리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꼬마와 나 사이의 고요한 침묵을 채우고 있었다.

“......김서경. 당신 정말 대단해.”

또다시 빈정거리는 줄 알았지만 룸미러로 표정을 보니 상당히 진지했다. 청년은 멍하니 앞 유리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내 쪽은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상처투성이긴 하지만 눈에 힘 풀고 얌전히 있으니 여름의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얼마나 귀엽느냔 말이야.

“당신에겐 그 권이도마저 하룻밤 상대였던 거지.
아, 나쁘게 말하려는 뜻은 아니야. 그저 여유 있는 사람의 연애란 그런 건가 싶어서. 그 잘나고 콧대 높은 자식에게도 어쩔 수 없는 상대가 있구나 해서....순수한 감탄이야.“

거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씨바...그 자식이 말이야...세상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이 오만하고 건방떠는 그 새끼가......와, 난 그런 사람도 청승 떨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분명 일이 바쁠텐데도 당신하고 같이 잤던 날부터는 거의 매일 폴리곤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고. 그러고선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아. 꼭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내가 옆에서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대꾸조차 해주지 않는다구. 권이도 그 새끼가......“

그렇게 말하며 꼬마는 잠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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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가 제 집을 알려 주지 않고 곯아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잠실에 있는 내 아파트로 와버렸다. 꼬마의 부모님이 걱정하시겠지만 다 큰 남자 녀석이니 하룻밤정도 외박한다한들 크게 문제는 없겠지. 그 증거로 녀석의 핸드폰은 잠잠하지 않은가.

벌써 한시가 다 되어 간다. 파트너를 집에 끌고 들어 온 일은 거의 없는데 이 녀석아, 호강한 줄 알아라. 하나뿐인 침대에 꼬마를 뉘여 놓고 옷가지를 벗겨 잠들기 편안하게 해줬다. 술 냄새가 그리 심하지도 않은데 이리도 정신을 못 차린 걸 보면 어지간히도 피곤했나보다. 위아래 속옷 한 장씩 달랑 걸친 몸을 슬쩍 훑어보니 역시 젊은 사람이 좋긴 좋다. 그러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리려는 것도 잠시, 손목의 흉터를 보고 얼굴 근육이 이지러졌다.

이건......무언가에 묶인 자국이다.

혹시나 해서 몸을 이리저리 굴려 뒤져보았다. 얼씨구. 발목에도...그리고 자세히 보니 목에도 희미한 흔적이 위험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어린애의 몸에서 폭행 자국을 발견한 것처럼 기분이 급락한다. 혹시나 해서 녀석의 런닝셔츠를 위로 걷어 올렸다가 움직임이 멈췄다. 한쪽 유두에 고리 모양의 피어싱. 그리고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가느다란 회초리 자국이 쇄골 근처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대로 이불을 꼬마의 목 까지 끌어다 덮어주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타닥. 타다다닥. 타다닥. 타다다다...

고요한 침실 안에 키보드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리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샤워를 한 나는 잠옷에 가운을 걸치고 회사에서 처리하지 못한 일거리를 손보는 중이었다. 침대에서 꼬마가 불안하게 몸을 뒤채는 것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다보니 어느새 노트북에 정신을 쏟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놔......이거 놓으라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침대 위를 바라보니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어쩌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꼬마의 모습이 보인다. 나쁜 꿈이라도 꾸나.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 해 주기 위해 침대 곁으로 다가갔는데 꼬마의 중얼거림이 거친 신음으로 변하고 상당히 괴로운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제발...제발...권이도...이제 그만......”

이불을 정리해주려던 움직임 그대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부자리를 다듬어 주었다. 그래. 손목의 묶인 자국을 봤을 때부터 상대가 권이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분명 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자국이 남을 정도로 해대는 자식이었던가? 나 역시 밤새 묶여 있었지만 어찌나 재주도 좋은지 묶인 흔적도 없었다.
빌어먹을 변태새끼, 애 몸에 흉이 남을 정도로 해대다니 완전 미친 놈 아니야? 어찌 이렇게 잘 빠진 몸에 흠집을 낼 수가 있어?  

그렇게 권이도에 대한 분노를 키우고 있을 때 꼬마의 뒤척임이 더 심해졌다.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오오....이건 상당히 귀엽잖아. 입술은 터지고 광대뼈에 멍자국도 있지만 찡그린 표정이나 헐떡이는 입술 모양 같은 게 상당히......내가 권이도 같은 변태는 아니지만 게이로서 상당히 끌리는 표정이란 거 인정은 하겠다. 게다가 묘한 신음소리. 슬쩍 이불을 들춰 꼬마의 분신을 확인해보니 괴로움만 느끼는 꿈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꼬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괜히 심술도 나서 일부러 흔들어 깨웠다. 잘 일어나지 않는 녀석의 뺨을 살짝 두드려 “이봐요, 이봐 정신 차려요.”하고 소리 질렀더니 꼬마주제에 섹시한 신음을 내며 반항한다. 그리고 귀여운 섹시함을 감상할 짬도 없이 갑자기 사나운 두 눈을 번쩍 떴다.
  
“우와아악! 당신 뭐야!!”

전력으로 밀어내는 두 팔의 힘에 뒤로 나자빠질 뻔한 걸 겨우 면했다. 역시 젊은 것이 힘은 좋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나쁜 꿈을 꾸는 것 같아서 깨워드린 것뿐입니다.”

한창 좋을 때 초쳤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말은 그럴듯하게 했다.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기 차림을 보고 펄쩍 뛴다.“이 새끼 내 옷 어쨌어!”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성질을 바락바락 내는데 것 참 귀엽다가도 얄밉다.

“주무시는데 불편하신 것 같아 벗겨드렸습니다.”

“거짓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술에 취한 주정뱅이를 집까지 업어오고 침대도 양보해드렸는데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그......!”

애송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속옷 차림인 자신의 처지를 보고 오해한 건 이해하지만 방금 전까지 업무를 보고 있던 사람을 변태 치한 취급하다니 억울한 일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낯선 사람을 내 방에 데려오기까지 했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이거야 말로 도와주고도 욕먹는 다는 거로군.   

나는 말없이 찬 물을 한 컵 떠서 애송이에게 주었다. 술 먹고 잠든 후이니 아마 목이 굉장히 마를 거다. 숙취에 시달리는 것 같지는 않으니 약은 필요 없겠지. 내가 내미는 컵을 빤히 바라보는 애송이의 눈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당신...되게 친절하네.”

뭘 이정도 가지고.
꼬마가 물을 마시는 사이 옷걸이에 걸려 있던 청바지와 점퍼를 가져다주었다. 이 새벽에 어린애를 집밖으로 내모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리지만 저 꼬마는 나를 잔뜩 경계하고 있고 우리는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터라 무척이나 서먹서먹하단 말이지.

“제가 멋대로 여기로 데려왔으니 택시비는 드리겠습니다.
늦게라도 들어가는 쪽이 효도하는 거에요.”

“......”

꼬마는 말없이 물컵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문득 싫어도 손목에 눈길이 갔다. 꽤 굵직한 자국을 보아 빨래줄 같지는 않은데...등산용 로프일까? 대체 뭘로 묶었기에 저런 자국이 남는 건지 순수한 의문이 드는 사이 꼬마는 내가 자신의 손목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화급히 손을 숨겼다.

“제가 남의 취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래도 몸을 상하게 하는 플레이는 지양하라고 말하고 싶군요.”

“상관할 것 없잖아!”

딴에는 연장자라고 잔소리 좀 했더니 대뜸 빽-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래 너도 창피한 걸  아는 어른이라는 거냐. 나는 팔짱을 끼고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꼬마를 내려보았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눈은 뭐라고 더 욕을 퍼부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옷 갈아입고 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다. 아아 하지만 정말 귀엽네. 골목에서 깡패처럼 싸움질하던 기세등등한 반항아 청년은 어디가고 장난치다 부모에게 들킨 악동마냥 고개 숙인 애송이가 껍질까지 벗겨져서 내 침대 위에 고이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괜히 장난치고 싶어지잖아.

“설마 권이도. 그 사람이 한 짓입니까?"

뻔히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물어 보았다. 역시나 꼬마가 펄쩍 놀란다. 어떻게 아냐는 눈초리에 “당신이 잠꼬대로 그 이름을 부르더군요.”하고 재빨리 선수 쳤다. 나 역시 비슷한 변태 플레이에 당했다는 건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그런 걸로 동질감 느끼는 건 더욱 최악이고.

“내, 내가 잠꼬대로 그랬어?”

“굉장히 괴로워 보이더군요.”

꼬마는 잘 익은 얼굴을 푹 숙이더니 갑자기 나를 노려보았다. 그 태도의 변화는 어린애가 남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상처투성이 얼굴에 적개심 가득 담아 바라보는 눈초리는 괜한 승부욕을 불러 일으켰고 저런 눈으로 시비 걸면 육체적 폭력을 싫어하는 나라도 주먹다짐을 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 새끼는 아니니까 신경 꺼.”

어금니를 뿌득 깨물고 시선을 돌린다. 청년은 자신의 손목을 감추듯이 잡으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권이도가 아니라면 누구? 설마 강제로? 강제로 당해서 손목에 자국이 남은 것 치고 몸의 다른 부위는 너무 멀쩡하다. 가슴의 피어싱과 회초리 자국은 애교스럽다고 할까.
......설마 이 꼬마, 생긴 것 답지 않게 묘한 취미가 있는 거 아니야?

“왜? 그래도 내가 권이도 전애인 이었다고 신경 쓰이나 보지?
하긴, 그 자식이 당신한테는 신사적으로 대했을 테지. 그 새끼 처음 만날 때는 존내 노골노골 하게 잘해줘서 사람 혼을 쏙 빼놓으니까.  
씨바 당신도 조금만 있어봐. 그 자식 본성 알고......에이 씹......”

“그 말은 그 손목 자국의 원인이 결국 권이도씨라는 소리로 들리는 군요.”

“......아니...뭐 그런 건 아니야. 그 새끼가 변태긴 하지만 허술하게 눈에 띄는 곳에 자국 낼 녀석은 아니거든.”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리게 되는 결론은 안타깝게도 꼬마의 취향이 그쪽 인 것 같다는 거다. 아아 이럴 수가 세상은 좁고 변태는 많구나. 권이도 그 개자식이야 변태는 신사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했으니 그렇다 치지만 이 반항아 기질이 풀풀 날리는 젊은 피가 SM의 세계에서 무려 마조히스트라니!

“그, 그런 눈으로 사람 무시하지 마! 난 그냥 호기심에 다른 녀석들이랑 딱 한번 놀아 본 것뿐이라고! 결코 그딴 플레이가 좋아서 하는 건 아니야!”

“그럼 다음부터는 하지 말라고 하고 싶군요. 손도 그렇고 목에도 자국이 있어요. 위험한 것 아닙니까.”

“누가 이딴 것! 약에 취해 있지만 않았어도 목을 졸라맸던 자식들 다 한 방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는지 청년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코로 ‘흐음...’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요즘 애들은 약이 무슨 감기약인 줄 안다니까. 약에 취해서 위험한 플레이 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렇게 호기심만 많아서 쾌락만 추구하는지. 쯧쯧.

속으로 노인네 같이 혀를 차고 있자니 청년은 그런 내가 자기를 경멸한다고 오해했나보다. 뿔이 잔뜩 난 표정으로 “제길!”하고 소리 지르더니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옷을 벗길 땐 몰랐는데 바지를 꿰어 입는 뒷모습을 보니 엉덩이 근처에 브리프 밖으로 비어져 나온 회초리 자국이 날카롭게 나 있다. 저건, 꽤 아팠을 것 같은데?

“아윽!”

옷 갈아입는 청년에게 다가가서 상처 자국을 힘주어 쥐어보았다. 역시 생긴지 얼마 안 된 상처가 맞는지 딱지가 다시 벌어졌다. 욕설을 퍼부으며 청년이 성급하게 주먹을 뻗기에 반사적으로 손목을 붙잡았다. 꽤 강한 힘이다. 제대로 맞으면 정신이 얼떨떨할지도.

“뭐하는 짓이야!!”

“엉덩이의 상처...알고 계셨습니까?”

“씨, 씨발, 알아! 안다고! 그 자식들이 멋대로 낸 상천데 나보고 어쩌라고!
당신이 약이라도 발라줬어? 신경 쓸 거 없잖아!”

“약 발라 드릴까요?”

청년은 기가 질린 듯 했다. 그리고 난 진심이었기 때문에 구급상자를 가져와 침대 위에 놓았다. “죄송합니다. 제 실수로 상처가 터졌습니다.”라고 말하자 청바지를 반쯤 입다 만 청년은 헛웃음을 내쉴 뿐이었다.

“권이도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 것 같아.”

여기서 그 작자 이름은 또 왜 나오는 건데.
청년은 지퍼를 마저 채우며 그렇게 중얼 거렸다. 정말로 가버릴 채비를 하는 애송이의 표정은 굉장히 우울해 보였는데 부어터진 얼굴에 표정까지 그 모양이니 없던 동정심도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이리 오세요. 얼굴의 상처만이라도 치료해야 하지 않습니까.”

청년의 뒤에서 양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눌렀다. 청년은 거부하지 않았다. 내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앉아 얌전히 얼굴 치료를 받는 표정은 매우 복잡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잘 되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꽤나 싸움질 한 흔적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잘생긴 얼굴로 아깝게 스리...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머님께서 걱정 많이 하시겠습니다. 집에 가면 우선 얼음찜질로 붓기부터 빼는 게 좋겠어요.”

“쳇, 엄마 얼굴 못 본지 오래됐는데 무슨.”

“......아직 어린 나이인데 벌써 독립한 겁니까?”

“독립은 개뿔. 호모라는 거 꼰대한테 걸려서 골프채로 죽도록 맞았다가 서울로 쫓겨난 거지 뭐.”

나는 입을 다물고 상처에 연고 바르는 것에 열중했다. 정말이지 이런 주제의 대화는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자신이 없다. 이런 건 형식적으로 대화했다간 오히려 상처만 줄 뿐이니까.

꼬마는 꼬마대로 우울한 표정이 되었고 나는 나대로 할말을 잃고......이런 식의 침묵만큼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주무시고 가겠습니까.”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게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인지 꼬마는 모를 거다. 그동안 많은 파트너를 갈아 치웠지만 집까지 데려온 경우는 극히 드문데 섹스가 아닌, 순수하게 쉰다는 차원에서의‘수면‘을 권유한 것은 이 꼬마가 처음이다. 아마 상처 입은 몸을 끌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갈 꼬마가 딱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나의 제안을 이상하게 해석한 꼬마의 표정이 의심으로 가득 찼다.

“당신 너무 능숙해. 다른 사람도 이런 식으로 꼬시는 거야?
우와~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 넘어갈 뻔했다고.“

기분이 상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꼬마의 머릿속에서 나는 무슨 카사노바쯤 되는 인물로 정해진 것 같으니 말이다. 쓰게 웃으며 “그렇게 느끼셨습니까?"하고 되묻자 꼬마도 미안한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한다.

“아니, 아니야. 정말로 자고 가도 되는지 의외여서 그랬어.
난 당신한테 나쁜 말만했는데 이렇게 잘해주니까 적응 안 되네.“

꼬마는 내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                *





침대를 내주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잤다. 꼬마는 안 그래도 된다며 미안해했지만 나는 손님에게 소파에서 자라고 할 정도로 박정한 사람이 아니다. 나야 꼬마를 옆에 끼고 자는 것도 상관없지만 그랬다간 저 어린애는 긴장으로 밤을 꼴딱 세우겠지. 내가 저를 잡아먹는 것도 아니요, 힘 싸움에 자신 없는 것도 아니면서 말야.

소파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긴 했지만 푹 잠들어서 몸이 가뿐해졌다. 꼬마는 어지간히도 피곤했는지, 그리고 이부자리가 편했는지 늦잠을 잤는데 그래도 식사는 같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꽤나 늦은 아침식사를 준비하며 꼬마를 깨웠다.

꼬마는 아침을 누군가와 함께 먹는 게 몇 년 만이라면서 잠이 덜 깬 얼굴로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누군가와 같이 먹는 것은 몇 개월 만이란다. 비록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밥을 먹고 꼬마가 사는 동네까지 태워다 주었는데 친절이 조금 과했는지 원래 날카롭던 꼬마의 얼굴이 오늘은 아침부터 멍청하게 풀어져 있었다.

“......내, 내 이름은 남치현이에요. 형, 서경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집 근처까지 와서 차에서 내린 꼬마가 문을 닫을 생각을 안고 한참을 차 앞에서 우물쭈물 거리더니 꺼낸 말이었다. 갑자기 존댓말을 하는 게 우스워서 속으로 한참 웃었지만 겉으로는 “물론입니다”하고 대답하며 그냥 조용하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표정관리 하나는 나이스다.

머뭇거리며 골목 안으로 사라지는 꼬마의 뒷모습을 보며 그 동안 권이도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어리고 귀여운 것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건가보다. 무엇보다 꼬마를 대할 땐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계산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잔뜩 경계하던 짐승을 주워와 친해졌을 때의 기분이 이런 거구나. 동물을 기른 적은 없지만 그런 기분을 얼핏 느꼈다.

꼬마에게 권이도에 대한 것을 묻고 싶었지만 결국 그런 변태는 잊기로 한 것도 잘한 일이지 싶다. 그리고 어느새 내 머릿속엔 권이도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다음 달에 있을 기업설명회에 관한 사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유가증권 신고서 제출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K신문사 빌딩에서 기업설명회가 개최되었다.
작년부터 IR(기업설명)팀을 구성하여 실무를 담당하고,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잦은 미팅과 연수 프로그램으로 사원들에게 의욕을 고취시킨 최이사는 투자자들에게 경영에 대해 비전을 제시했고 이번 거래소 상장을 계기로 해외사업 확장과 서비스부분으로의 사업 다각화 계획을 소개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기업설명회에서 기관투자자들과 애널리스트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보인 그들의 활발한 관심은 설명회의 성공을 예감하게 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마음으로 성대리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던 중 무언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각 증권, 금융업계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 저 곳에서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고 더구나 그 역시 내 얼굴을 발견했다는 것이 최악인 부분이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주변 동료에게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나 낌새를 눈치 챘는지 그도 슬그머니 일어나 따라온다. 그 표독한 눈을 보고 기가 찼다. 지금 화를 내야 할 쪽은 나라고.

서울 한복판 18층의 복도는 길고 적막했다. 탁 트인 창 아래로 비죽이 솟은 건물들과 장난감처럼 도로 위를 오가는 차량의 행렬이 개미처럼 이어지고 있었지만 등 뒤에 뱀 같은 눈초리를 받고 있는 탓에 전망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화장실에 가는 척 밖으로 나왔지만 실은 그의 독기 어린 눈이 당장이라도 내 이름을 외치며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할 말이라면 이쪽이야말로 잔뜩 있다. 비록 예상치 못한 상황이지만 지금이야말로 K.O.펀치를 날려줄 때라고 생각하며 그동안 일하느라 잊고 있던 인격모독성 발언을 하나하나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좋아, 지금이야. 에피타이져로 10여 문장을 쉼 없이 퍼부어줄 준비가 되었을 때, 아무도 없는 복도 끝 휴게실로 들어가서 한 호흡 길게 들이 쉬고 그를 향한 언어폭격의 신호탄을 날리려고 했다.

“그동안 왜 저를 피하신 겁니까?"

들이킨 숨에 사래가 들릴 뻔했다. 말도 꺼내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는 정말로 괴로웠다는 표정으로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연락처를 드렸는데 아무소식 없더군요.
화가 나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폴리곤에 한번도 오지 않다니 당신답지 않습니다. 당신이라면 그 다음날 바로 저를 찾아와서 따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폴리곤에 발길을 끊을 정도로 괴로우셨던 겁니까? 그렇게 제가 무서웠습니까?"

이게 무슨 개미 삽질하는 소리야?
내가 그를 두려워해서 피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남자를 보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그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에피타이져 10문장이 깡그리 포맷되어 버렸다.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내 상태도 모르고 남자는 앞에서 주절주절, 제 딴에는 심각한 어조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간혹 플레이가 거칠면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당신이 그 정도의 자극에 겁을 먹을 줄은 몰랐습니다. 단지 무척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요. 지난 몇 주 동안 폴리곤에서 얼마나 당신을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아까는 안경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까지 했었습니다.”

바꿔야 하는 건 당신 머릿속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폴리곤에 가지 않은 것이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 이 사람아 당신도 회사일 하다보면 한두 달 정도는 단골집에 못 오는 경우가 있었을 거 아니야. 바빠서 파김치가 된 몸으로 당신이랑 입씨름 했다가는 승산이 없을게 뻔하니까 안 갔지!  

“잠깐만요 권이도씨. 지금 대단히 착각하고 계시는데. 왜 제가 당신을 일부러 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동안 상당히 바빴고 그날의 일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는 우스운 일에 불과했어요. 왜 내가 당신을 찾아가 따져야 하는 거지요? 오늘 보셨다시피 저는 그동안 무척이나 바빠서 그런 일에 신경 쓸 틈은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 때의 일을 꺼내는 거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군요.”

신경 쓸 겨를이 없긴. 속으로 이를 북북 갈다가 겨우 그 꼬맹이를 만나서 진정됐을 뿐이지. 어쨌든 바빴던 건 사실이니까. 저 작자의 멍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 후련하다. 아, 조금 세게 말할 걸 그랬나? 아니야 괜히 자극하는 말투를 쓰면 내가 그 때 일을 신경 썼다는 게 되니까 최대한 공격적인 말투는 피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무척이나 안도감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제 이름, 기억해주셨군요.”

으아악! 이 자식아 그게 중요하냐? 속으로 뜨끔하고 있는 걸 겨우 아닌 척 속이고 얼굴은 미소를 지었다. 아 제길, 그날 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기 이름을 가르쳐줬는데 어느 찐따가 잊어 먹냐.

“이래봬도 기억력은 좋습니다.”

“그렇죠. 밤새도록 제 이름을 부르면서 울부짖었는데 잊어먹으면 곤란하죠.”

안경너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는 동요하는 마음을 숨기는데 실패하고 어깨를 움칫 떨었다. 빌어먹을. 남자는 방금 전의 초조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워버리고 느물느물한 낯짝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사실 이번 설명회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습니다. 회사일이 바빴으면 폴리곤에 못 온 것도 이해는 가지요. 하지만 그날의 일이 생각할 가치도 없이 우스운 일이라니 이거 실망스럽습니다. 저는 최대한 제 스킬을 발휘했고 당신도 만족했다고 생각 했는데 말입니다. 역시 당신은 그 정도의 자극으론 성이 안 차는 겁니까?”
  
“사람을 핀치에 몰아넣고 즐기는 것이 당신의 스킬입니까?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자극이 만족이라고 착각하는 게 당신의 방식이라니 딱하군요. 자신이 범죄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을 하루빨리 본인 스스로가 알아채야 할텐데요.”

“그 날의 자기 모습을 인정하기 싫으신 기분은 압니다. 제가 섣불리 행동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당신 스스로 적극적으로 되었다는 것까진 부인하지 않으시겠지요.”

얼굴에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이것이 분노인지 부끄러움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제기랄 독한 놈한테 걸렸구나.

“처음엔 약을 탈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그 와중에도 당신은 몸의 반응에 솔직하더군요.
간혹 진심으로 혐오해서 성기가 쪼그라드는 경우도 있고 공포와 쾌감을 착각해서 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신은 아니었죠. 몸이 묶이고 당하는 행위까지 섹스로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무리 남자가 하체의 자극에 약하다고들 하지만 내심 끝까지 반항하는 쪽이면 어쩌나 고민했거든요.”

“그럼 내가 그날 끝까지 저항해야 옳았다고 하는 말씀 같군요. 당신은 저항하는 나를 보고 즐기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가 더 발버둥쳐야 했다는 겁니까?!!"

나는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이건 부끄러움도 뭣도 아니다. 지금 이 작자가 성추행해놓고 ‘너도 즐기지 않았느냐‘의 성범죄자 논리를 펴는 건가?

“아니, 아닙니다. 끝까지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양손을 펴 보이며 진정시키는 제스츄어를 취한다. 그 뻔뻔스러운 낯짝을 시원하게 후려갈기고픈 충동이 들었지만 여기가 아무리 사람 없는 복도의 끄트머리의 휴게실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보면 굉장히 곤란해진다. 대화 내용이야 가까이 오지 않으면 들을 수 없지만 주먹질은 멀리서도 보이니까.
   
“당신이 그렇게 솔직히 반응해준 것이 상당히 기쁘기도 했지만 놀란 것도 사실입니다. 내 테크닉이 그렇게 좋았나 자화자찬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테크닉이나 당신 스스로에게 마조히스트적 기질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더군요.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습니다. 김서경씨, 당신은 그렇게 묶여 있는 와중에서도 나를 신뢰하고 있었지요?”

“......”

“아무리 묶여 있고 그런 부끄러운 짓을 당해도 내가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지요?”

말문이 막혔다. 이 뻔뻔한 남자를 어떻게 굴복시켜야 하나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다른 한편으론 남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자신이 있었다. 믿었다고? 하하 믿기만 했냐? 내가 그런 일을 당하기 직전까지 얼마나 당신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을 거다. 묶이기 전까진 살살 녹아내리도록 잘해준 상대가 아닌가. 사람의 마음에는 미련이란 게 있어서 배신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마음이 약해지는 데에는 저녁에 느꼈던 그의 따뜻한 내벽도 한 몫을 했다. 그래서 종내에는 그가 두 다리만은 자유롭게 해줬는데도 발로 차버릴 생각도 못한 채 끙끙대며 안겼었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이미 지난 일을 이야기해서 무엇이 당신에게 득이 되는 지 궁금해지는군요.”

어금니를 꽉 깨문 뺨 근육이 실룩거린다. 그는 탐색하듯이 내 표정을 바라보며 눈동자에 어리는 음험한 빛을 안경으로 숨기고 있었다.

“분하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당신이 그렇게나 믿었던 상대에게 실컷 능욕 당한 것 말입니다.”

이 작자가 정말!

“이보십시오 권이도씨. 당신이 하는 말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능욕이란 말입니까? 당신과 내가 그 호텔에서 한 일의 절반은 합의에 의해 일어난 일이고 그 때 당신이 한 짓을 이제 와서 추궁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물론 그 날 일이 불쾌하고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서 무척이나 실망하긴 했지만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둘 만큼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작자를 위해 준비된 ‘인간쓰레기 만들기 32문장‘은 소각 된지 오래고 남은 건 빨리 이 독한 변태와의 입씨름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서서히 회의장에서 사람이 하나 둘 씩 빠져나오고 있었다. 더 이상 대화를 하다가는 내가 질 것 같다. 빨리 자리를 뜨려는데 이 남자, 끝까지 물고 안 놔 줄 생각인가 보다.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지나가려는 내 팔을 붙잡고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내게 복수할 기회를 주고 싶은데, 관심이 전혀 없습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적을 확실히 말씀하십시오.”

“당신이 느꼈던 굴욕감, 분함...내 몸에 되갚을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은 다시 한번 나와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맞습니다. 당신 때문에 지난 몇 주간 다른 파트너와는 도무지 섹스가 되질 않더군요.”

“본인이 뻔뻔하다는 생각은 안하십니까?

“그런 얘기 많이 들어서 이제는 칭찬 같습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패배했다. 회의장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 나오는 그 복도 끝에서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이 돌아가고 안경이 휴게실 벽으로 튀었다.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와 내가 있었던 휴게실은 외진 곳이라 운만 좋으면 내가 그를 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구둣발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뛰어 온 부장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김서경씨 이따가 나 좀 봅시다”라고 했을 땐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다 났다. 설마 저 많은 투자자들이 이 꼴사나운 모습을 본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투자자들을 리셉션 회장으로 안내하기 위해 먼저 밖으로 나와 있던 부장과 과장과 성대리는 아무래도 그 모습을 본 듯했다. 나는 부장의 경고성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모든 원흉인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권이도는 꼿꼿이 서서 안경에 스친 뺨을 훔치며 히죽이고 있었다.





*                *                *





즐거운 금요일 아침부터 시말서를 붙들고 한숨을 쉬고 있는 나를 보며 성대리가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리 옛날 친구라고 해도 그런 자리인 만큼 참지 그랬어.”

졸지에 권이도와 고등학교 동창이 된 나는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욱해서 주먹질이 먼저 나간 걸로 둘러댔다. 성대리의 경우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주먹질까지 오가려면 맞은 상대도 그만큼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윗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해준 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과장, 부장, 전무에 이은 상사 라인에게 한번씩 불려가 깨지고(오히려 이사님은 아무 말씀 없는데 그게 더 불안하다) 직장 동료들도 수군수군, 부담스러우리만치 호기심을 보이며 눈을 반짝거린다.

“김서경씨 은근히 터프한 데가 있네요? 그 분 얼마나 말을 얄밉게 하셨으면 서경씨가 화를 다 내고 그랬을까”

“그런데 그쪽에선 뭐래요? 보니까 안경도 부러졌던데 보상금 어쩌고 안 그래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끼리 그런 건데 쪼잔하게 그러겠어?”

“아냐, 아냐, 유환씨가 그 사람을 직접 못 봐서 그래. 얼마나 독하게 생겼는데.”

주위의 입방아에 그저 허허실실 웃고만 있었다. 사람들은 조용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이 기회에 시말서 한번 정도 쓰는 것도 경험이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게다가 성대리는‘정신 안정을 위한 워크샵 프로그램’ 따위를 권하는 것이 아닌가.

설명회의 끝부분을 나 때문에 망칠 뻔했다고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동료들은 아무 일도 아닌 척 위로하고 장난을 걸지만 어디 그게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날 일인가. 자칫 십수 명은 될 투자자들 앞에서 기업 이미지를 깎아 먹을 뻔했다. 당시에는 누구도 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나름 계산 하에 휘두른 주먹이었지만 이성이 제대로 회전했다면 아예 주먹질 자체를 하지 않는 쪽이 백번 옳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도 소용없지만 권이도, 그 자식의 태도 역시 수상쩍다. 그 자리에서 얻어맞는 모습을 보여 봤자 물의를 일으킨 대가로 나만큼이나 깨지고 추궁당할 게 뻔한데, 피차 손해 볼 걸 알면서 나를 도발하고 그가 얻는 소득이 무엇이기에?

아아 그 자식에 관한 건 이제 신경 쓰지 말자. 오늘은 폴리곤에 가서 이 스트레스를 풀어 줄 다정하고 상냥한 파트너를 찾는 거다. 왜 하필 폴리곤인가 하겠지만 피한다는 둥 무서워 한다는 둥의 말까지 들었는데 내가 굳이 단골집을 버리고 다른 가게로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설령 그 작자를 만나더라도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절반도 채우지 못한 시말서를 바라보며 당분간은 여유도 있으니 이번 주말에는 괜찮은 파트너를 구해 빈둥대야겠다고 잠시 현실도피를 했다.   





*                *                *





거의 한달 만에 찾은 폴리곤은 늘 그렇듯이 조용하고 음습하다. 놀러오는 사람들이 거기서 거기다 보니 정체된 느낌도 들어서 비유하자면 고인 물 같다. 내가 여기에 오는 사람들 전부의 얼굴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가게 안의 삼분의 일은 면식이 있는 얼굴이다. 그 중에는 가볍게 대화를 하거나 패팅까지 간 사람도 있고 물론 섹스파트너였던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내 집에 데려 갔으면서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은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도.

나이가 든 탓인지 굳이 어린애를 고르라면(물론 청소년 보호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개인적인 취향은 단정하고 예의바른 쪽을 선호한다. 그에 비하면 꼬마는 흙냄새 땀냄새 풀풀 나는 공사판 청년과 같지만 덩치만 큰 아이 같아서 나름 귀여운 구석이 없지도 않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꼬마에게 말벌이 날아들고 있었다. 귀찮은지 훠이 훠이 손을 저어도 말벌은 날아갈 줄을 모른다. 게다가 두 마리가 동시에 쏘아대니 꼬마의 표정이 슬슬 험악해지려 한다.

“일이 바빠서 조금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괜히 아는 척 곁으로 다가갔다. 기다랗게 찢어진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꼬마의 험상궂은 얼굴도 상당히 어려 보인다. 놀란 것은 꼬마뿐만 아니라 말벌들도 그런 모양인지 “뭐야, 일행이 있었어?”하면서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본다. 그제야 분위기 파악이 된 꼬마는 다시 인상을 쓰면서 자기 또래로 보이는 말벌 두 마리에게 “빨리 꺼지기나 해.”하고 거칠게 말했다.

“씨발, 저 새끼는 재주도 좋아. 권이도를 꿰어 차더니 이번엔 김서경이냐.”

말벌 중 하나가 내 얼굴을 쏘아보더니 툭 말을 던지고 가버렸다. 기세등등하던 꼬마가 얼굴색이 변해서 “뭐?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하고 큰 소리를 냈지만 내가 어깨를 지그시 누르자 다시 잠잠해졌다.

“제가 방해 한 것은 아니죠? 곤란하신 것 같아 조금 참견 했습니다.”

꼬마가 어울리지 않게 내 얼굴을 살피며 머뭇거린다. 그 모양이 답답해서 “혹시 방해한 겁니까?”하고 물었더니 “아, 아니요!”하고 고개를 흔든다. 꼬마의 존댓말은 언제 들어도 신선하다. 나는 웃어 보이며 바텐더에게 칵테일 두 잔을 주문했다. 신입으로 보이는 바텐더는 어린 얼굴과는 달리 능숙한 손놀림으로 칵테일을 섞기 시작했다.

“저기......그런데 왜 연락 안했어요? 기다렸는데.”

우물쭈물하며 입을 연 꼬마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는 모습이다. 처음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꼬마를 데려다 줬던 날 집에 돌아와 거실 탁자 위에 놓여진 연락처를 발견했던 것을 떠올렸다. 맞아, 직접 연락처를 주는 것도 아니고 소심하게 전화번호랑 자기 이름 하나 달랑 적어 놓은 것이 너무 꼬마답지 않아서 괜시리 웃음이 났더랬지. 하지만 그동안 무척 바빴고 정말로 연락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해서 아직까지 테이블 한 구석에 방치해둔 상태였다. 언젠가는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이제 와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흐음...저를 기다리셨습니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니 꼬마가 볼을 긁적이며 쑥스러워한다. 아까의 말벌들에게 대하던 거친 태도와는 확연히 다르다. 특별 취급 받는 것 같기도 하고, 꼬마의 첫인상에서 느꼈던 와일드함과는 너무 매치가 되지 않는 모습에 슬그머니 웃음도 나오려고 한다.

“사례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날, 덕분에 집에도 잘 들어갔고......”

“잘 들어 가셨다니 다행이군요. 상처는 아물었습니까.”

아아 빨개지는 볼이 귀엽다. 피부가 가무잡잡해서 어두운 조명아래 붉어진 얼굴이 별로 티가 안 난다는 점이 유감일뿐.

“워, 원래 그런 짓 안 좋아 해요. 이제 상처도 다 나았고 그런 녀석들이랑 어울리는 건 관뒀어요.”

기특하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칵테일이 나오고 나는 꼬마에게 한잔 건네었다. “제가 사야 되는데...”하고 말끝을 흐리는 꼬마의 뺨을 꾹꾹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신세졌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폴리곤의 술값은 만만찮으니 연하에게 감당하게 하는 건 오히려 제게 실례입니다.”

칵테일잔에 입술을 대며 꼬마가 우물쭈물한다. 동생은 없지만 만일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있다 해도 이런 귀여움을 남자애한테서 찾기는 힘들었을 테지. 성질 나쁜 사냥개를 길들인 느낌? 들판의 망아지를 살살 구슬린 느낌이 이러할까.

“그런데 왜 갑자기 존대를 하게 된 겁니까. 처음엔 안 그랬잖아요?”

꼬마는 펄쩍 놀라더니 “아, 그게....”하고 머리를 긁적인다. 저 말주변 없는 꼬마가 뭐라고 얼버무릴지 기대가 되면서 또 무슨 대답이 나와도 기분 좋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 원래 안 그러는데......보셨다시피 그날 싸움질로 컨디션도 안 좋았고 술도 좀 취해서....그때 일은 말 함부로 해서 정말 미안해요.“

저어기 지하철역에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하나 꼬나물면 딱 어울릴 것 같은 건들건들함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존댓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다 어색해진다. 그래서 말 놓아도 좋다고 했는데 “나이차이도 많이 나는데 예의가 아니죠!” 라며 펄쩍 뛴다. 꼬마 입에서 예의라니, 웃겨서 얼굴에 티가 날 것 같다.

“이거 서럽군요. 벌써 아저씨 취급 받는 겁니까?”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형이라고 부른다면서요. 그럼 좀 더 편하게 대하세요.”

“기, 기억하셨어요?”

그 날 귀엽게 더듬거리던 꼬마의 모습을 어떻게 잊겠는가. 꼬마는 뭔가 기쁘기라도 한지 조금 상기 된 얼굴로 “형...”이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헛헛 고놈 참, 내가 다 무안해지게 곱씹는군.

“그래도 말은 형이 먼저 놓으세요.”

“전 이쪽이 편합니다.”

“제가 불편해요. 동생한테 존대하는 형이 어딨어요?”

친동생도 아닌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는 것 같아 “그럼 그러지.”하고 말을 놓았다. 폴리곤에서 만난 상대한테 말을 놓는 건 처음이다. 오래 사귀어야 한달을 넘기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친분이 생기고 뭐고 할 것도 없었고 애당초 이렇게 어린 애와는 상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서로 말을 놓기로 했지만 꼬마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 사이를 바에서 흐르는 오래된 팝송이 메우고 있었다. 나른한 흑인 여배우의 목소리는 어색한 침묵을 자연스러운 묵언으로 변화시켰고 달콤한 칵테일은 말하는 것만이 입술이 할 일은 아니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솜털 보송보송한 청년도 음악과 알코올에 젖어 처음과 달리 여유가 생긴 모습이다.

처음엔 권이도 그 자식을 만나도 무시해 버릴 요량이었지만 이제는 그 자식과 마주치면 곤란하게 될 상황이다. 그 작자가 꼬마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문제고. 꼬마는 한 때 권이도의 파트너였으니까.

“나갈까? 바람이나 쐬러 가지.”

반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꼬마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꼬마는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주저했다. 부끄러운 건가....어이없는 생각도 해봤지만 상기된 얼굴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꼬마의 의중을 헤아리기가 힘들다. 설마 나가자는 것을 그렇고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나를 거절하려는 건가?  

“따로 기다리는 사람 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태도가 영 시원치 않다. 계산을 한 후 폴리곤을 빠져 나오는데 주차장으로 향하는 꼬마의 걸음이 느릿느릿, 무언가 주저하고 있다. 음흉한 의도로 나가자고 한 건 아니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내심 꼬마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꼬마의 태도를 보니 자신감이 지나쳤나 싶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아아, 야생 망아지가 손안에 굴러 떨어진 줄 알았는데 내 손에 얌전히 끌려 올 생각은 없던 망아지였단 말인가.

“혹시 억지로 끌고 나온 거야? 내가 요즘 좀 답답해서 드라이브나 하려고 하는데...
내키지 않으면 따라 나서지 않아도 좋아.”

“아니, 그게 아니라. 형한테 자꾸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신세는 무슨.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청승맞아서 널 끌고 가는 것뿐인데 뭘.
가서 강바람이나 쐬고 야경도 구경하자고.“

넉살 좋게 웃으며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꼬마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차에 올라탔고 나도 운전대를 잡았다. 칵테일을 다 비우긴 했지만 무알콜이었기 때문에 음주단속에 걸릴 염려는 없다. 한강변을 따라 달리다가 강변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쉬는 것도 좋고 그대로 잠시 한강 둔치에 차를 세워둔 채 바람을 쐬는 것도 좋겠지. 아무리 한강 물이 더럽다 해도 강은 강인 모양인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시원해지는 기분이니까.

꼬마의 미온적인 태도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단순한 거부인지는 잘 모르겠다. 꼬마가 나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말이다. 조수석에서 창밖만 바라보는 꼬마의 얼굴은 꽤나 복잡해서 섣불리 호텔로 데려갔다가는 이제까지 얻은 신뢰가 무너질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고 조그마한 머리로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는 꼬마를 두고서 나는 차량통행이 빠른 8차선 대로를 제한속도 안에서 마음껏 밟았다.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와 꼬마와의 대화주제에 접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띠 동갑에 가까운 나이차이도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 관심분야가 전혀 다르다. 꼬마는 신문을 거의 보지 않고 나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다. 각자의 인터넷 서핑 영역은 서로 링크되는 경우가 드물고, 알고 있는 연예인도 제한되어 있다. 대화의 맥이 드문드문 끊기고 어색한 침묵만 감도는 상황이 반복되자 결국 사소한 신변잡기가 대화의 주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꼬마가 현재 한남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으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챙겨주시는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통장으로 얼마간 넣어주신 걸로 생활비에 보태 쓴다고 한다. 한달에 두세 번은 홍대의 클럽이나 라이브 공연장에서 스트레스를 푸는데 폴리곤에 다니게 된 건 아는 형의 소개로 두 달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아직 젊은 사람이 무슨 비싼 바에 오냐고 농담처럼 던졌지만 꼬마는 그게 정곡이었는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 나는 괜한 농담을 던졌다고 후회했다. 꼬마가 풀이 죽어서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나 한심하지?”

덤덤하게 내뱉는 꼬마의 말이 가시처럼 따끔거렸다.

“부모님 실망시키고 쫓겨난 주제에 완전 까져서는 개날나리 짓만 하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뒷골목의 그렇고 그런 새끼들과 어울려 다니고 싸움질이나 하지. 남들 대학다니며 공부할 때 발정난 개새끼마냥 여기 저기 전전긍긍하며 남자나 찾아 헤매고.
......쓰레기가 따로 없어...“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꼬마가 중얼거렸다.
어두운 실내 때문인지, 아니면 밤의 야경과 강물에 비친 서울의 불빛 때문인지, 꼬마는 어딘가 모르게 감상적이 되어서는 아직 어린 주제에 긴 한숨을 쉬었다. 나도 조금은 분위기에 동화되어서 내가 그 또래에 가졌었던 고민을 떠올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중학교 때 졸업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클럽에 다녔으며 대학에 가서는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을 했으니 꼬마의 고민은 이에 비하면 얼마나 순수한가.  

“무슨 일 있어? 왜 그렇게 자학을 해.”

꼬마는 겨울철의 비둘기처럼 목을 제 어깨 속으로 파묻듯 움츠리고 시트 바닥에 허리가 닿을 만큼 몸을 늘어뜨렸다.

“아니...그냥. 요즘 내가 얼간이 같아서.”

고뇌와 한숨으로 시선을 떨구는 꼬마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굳이 캐내려고 하면 귀찮아 할 것 같아서 나도 말없이 운전만 했다. 목적지 없는 드라이브는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차라리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찍 잠을 자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형은 대학생 때 어땠어?”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의 상향등이 꼬마의 얼굴과 내 얼굴에 빛의 바퀴자국을 남기고 스쳐 지나갔다. “흐음...나?” 어색한 침묵을 메우기 위해 던진 질문치고는 꼬마의 얼굴이 상당히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학생시절이라......그 때가 좋았지. 나는 운전대를 위를 리듬을 타며 손가락으로 톡-토독 두드렸다. 지나간 기억을 꺼내려고 머릿속의 키보드를 두드리듯이.

“워낙 방임주의이신 부모님 덕에 내 멋대로 놀러다녔지. 꽤 잘나가던 집안이라 등록금과 용돈 걱정은 하지 않았고 과외 수입도 짭짤해서 방학 때는 해외로 가거나 콘도를 빌려서 놀기도 했고. 해외 카지노에서 놀다가 돈만 왕창 잃기도 하고 별장에서 열리는 문란한 파티에 초대되면서 철없이 놀던 시절이었어.
그땐 뭐하나 무서울 게 없었거든. 게다가 학교에선 공부 잘했다고 장학금도 주더군.
한 때는 몇몇 상위 기업체를 놓고 어느 회사를 들어갈까 재보기도 하고 고시를 볼까 어학연수를 갈까 하는 게 그때의 내 고민이었는데 말야.“

“......우와, 형 되게 재수 없어.”

조용히 듣던 꼬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루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런 꼬마에게 잠깐 눈웃음을 보내었다. 차선변경을 하며 무리하게 추월하려는 뒷차를 앞으로 보내고 나는 느긋하게 옛일을 끄집어내었다. 접점 없는 꼬마와 나 사이의 공간을 메우려는 듯, 꼬마 나이대 김서경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군대에 갔다 오고 나니 IMF라더군.”

“......”

“졸업하고 나서 아무데도 갈 데가 없더라.
입맛대로 골라놓았던 회사는 매각되고 내 성적과 능력에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믿었던 회사는 엄청난 경쟁률 덕에 서류전형에서 탈락. 그 와중에 집안 분위기도 기울어져서 한동안 용돈이 끊기고 과외비로 생활했지만 꼴에 졸업하고 취직 못해서 과외 한다는 소리가 듣기 싫다고 딱 끊어버렸더니 정말로 주머니가 텅 비더군. 해 놓은 저축은 없고 그렇다고 과외 이외에 아르바이트는 해본 적이 없고.
그러면서 졸업 후 1년 좀 넘게 여기 저기 돌아다녔어.
집안의 가재도구에 빨간딱지가 붙고 친척들이 비리에 연루되어서 마땅히 갈 데가 없었거든. 게다가 자존심만 세서 차라리 막노동을 할지언정 성에 안차는 회사는 들어가기 싫었지. 그때는 왜 한번 들어간 회사에서 평생 일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몰라.”

마치 누구 집에 초상 당했다는 얘기를 듣는 것처럼 꼬마는 조용하고도 엄숙하게 듣고 있었다. 분위기를 이렇게 무겁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얘기만 들으면 내용만 어둡지 그 당시의 나는 전혀 고생하지 않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한 일이지만 방황하던 그 시절, 나를 재워주고 먹여준 건 내 파트너 들이었다. 이른바 기둥서방이었달까. 지금 생각해도 한심한 시절이었지만 내 게이라이프 중 가장 화려하던 때가 그때가 아닌가 싶다. 나이 이십대 후반의 볼 것 없는 청년을 그들이 왜 귀여워 해줬는지는 미스터리지만 아무튼 그들은 내게 파트너 이상으로 고마운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어서 그중 몇은 지금도 가끔 만나고 있다.
아니, 그런데 어쩌다가 얘기가 이렇게 새 버린 거야?

“사람 사는 게 참 우습지?
그 기세등등하던 김서경이 남의 집을 전전하면서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었던 거야. 주제에 콧대만 높아서 그래도 세상은 내 아래에 있다고 비웃고 있었지.
그러니 학벌이고 학점이고 다 무슨 소용이야. 정신머리가 글러 먹었는걸.”

창문을 조금 내렸다. 한강에서 물비린내가 불어왔지만 더럽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 시원한 강바람에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날려도, 뺨을 세차게 때려도 오히려 상쾌하다.

“너는 아직 어린데 독립해서 생활비까지 벌고 있잖아. 남한테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나야말로 너에 비하면 인간 쓰레기였어.
무슨 일이 있기에 그렇게 자신을 비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너는 그저 네 나이 때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싸움도, 섹스도. 넌 혼자 세상을 살고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있는 거지. 그러니 자신에게 당당해지라고.”

결국 요지는 이거다. 청년이여 어깨를 펴라.
자칫 훈계처럼 들리진 않을까 걱정한 것과 달리 꼬마는 진지하게 듣고 또 놀라워하고 있었다. 덕분에 괜히 말했다는 후회는 들지 않는다.

그나저나 내가 이런 얘길 다 하다니 어린애란 건 이렇게 사람을 방심하게 만드나보다. 광고에서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뛰어난 효과가 3B라고 했던가. Beauty, Beast, Baby.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 꼬마는 그 3B를 모두 갖춘 것 같다. 잘생긴 야생 망아지.

“위로해 줘서 고마워. 형.”

꼬마가 쓰게 웃었다.
별로 위로하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우울한 과거사를 얘기해 준 것이 꼬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이것 참, 선생님이 된 기분이네. 나는 길가로 차를 잠시 세우고 꼬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꼬마가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어두운 분위기를 돌려보기 위해 나는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다.

“머리 물들인 거야? 굉장히 새까맣네. 잘 어울려.”

꼬마가 어색하게 웃었다. 비죽비죽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손끝에서 굴렸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꼬마의 귀를 향했다. 시원스럽게 생긴 귀 끝에서 반짝거리는 가느다란 은색의 고리가 왼쪽 귀에만 세 개 걸려 있었다. 귓바퀴에 두개, 귓불에 하나. 그러고 보면 꼬마는 체인형의 악세사리를 좋아하나보다. 허리띠나 손목에 맨 팔찌 같은 것도 비슷한 계열의 디자인인 걸 보니.
문득 꼬마의 가슴에 있었던 피어싱이 떠올랐다.

“피어싱 좋아해?”

손을 뻗어 꼬마의 귀에 걸린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꼬마의 얼굴에 난감해 하는 기색이 어린다. 내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아...심플한 디자인은 괜찮던데... 그, 그래서 입술에 피어싱 한번 해볼까 하려고. 잡지에서 어떤 모델이 한 걸 봤는데 멋지더라구. 그래서......”

몸을 가까이 하자 꼬마가 말을 더듬거린다. 내가 가만히 보기만 하는 게 어색한지 몸을 꿈틀거리는 게 귀엽다. 옆에 두고 쓰다듬어 보고 싶은 작은 동물처럼. 역시 그날 보았던 유두의 피어싱은 꼬마 본인의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묘한 감각이 일어서 다시 한번 그 가슴팍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음...입술에 피어싱은 좀 곤란한데...”

“어? 왜?”

귀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으로 턱 선을 그리며 훑다가 꼬마의 얇은 입술 막을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키스할 때 아플 것 같잖아.”

목적이 분명한 의도를 담은 말투와 표정과 동작으로 꼬마의 얼굴에 내 얼굴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꼬마는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순간 나는 상처받았다. 이렇게 노골적인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긴장하고 쑥스러워할지언정 거부할 줄은 몰랐는데...예상치 못한 배신감은 나로 하여금 입술을 들이밀던 동작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밖에 나가서 담배 좀 피울게.”

꼬마가 나간 차 밖에서 하얀 담배 연기가 마치 꼬마의 알 수 없는 속마음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꼬마가 나를 따라 나서면서 이런 상황이 나오리란 걸 예측하지 못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어차피 우리가 만난 곳은 폴리곤이었고 그곳에서 만나 이 밤중에 같이 드라이브를 한다는 것은 특정한 행위에 대한 가능성을 예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리고 대부분의 폴리곤 단골들이 그 예견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아무리 나이차가 많이 나고 형, 동생 한다지만 그걸 정말로 형, 동생사이로 인식할 정도로 꼬마가 순진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처음 꼬마를 집에 데려 갔을 때의 호의는 순수한 인정에 의한 것이었지만 오늘 내 행동은 명백한 ‘작업’이었다. 설마 그 신호를 못 읽었단 말야?   

가만히 차 안에 있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럴 땐 연장자가 한 수 굽혀야겠지.
  
“......내가 너무 주책 맞게 굴었군.
그렇게 경계하지 마. 네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건드린 내 잘못이지.“

차에서 나와 서성이는 꼬마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오히려 나보다 불안해하는 저 꼬마의 모습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닌데...혹시 오늘 컨디션이 안 좋나? 아니면 또 몸에 그 이상한 자국이라도?

“아, 미안해. 그...그 뭐랄까..그러니까......”

내가 나오자 꼬마는 입속에서 말을 고르더니 이내 으아악 소리를 내며 담배를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어댔다. 멋 내서 컷트 친 헤어스타일이 다 망가졌겠다. 꼬마가 진정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차 문에 기대어 섰다. 낡고 찢어진 청바지에 슬림한 면티가 잘 어울리는 꼬마의 몸은 차분히 기다리며 감상하기에는 그만이었다.
......앗, 나한테 중년 아저씨 변태끼가 있었나...

“그냥 요즘 내가 그래. 폴리곤에 가도 다른 사람 만날 기분도 들지 않고 혼자 술이나 마시고 앉아 있고.
하...왜 하필이면 술값 비싼 폴리곤인지 모르겠어. 거기 있으면 아까 같은 자식들도 꼬이는데...“

꼬마가 연신 담배를 피워댄다. 코끝을 오염시키는 쓰디 쓴 냄새. 문득 그날 권이도에게서 나던 담배냄새가 떠올라 기분이 다운되었다. 차가운 밤바람에선 젖은 걸레 냄새가 난다. 담배 두개피를 다 태우며 말없이 흐르는 물만 바라보던 꼬마는 내게 뒤통수를 보인 채 들릴락말락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왜 권이도를 찼어?”

잠시 꼬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멍하니 비워 두었던 머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다지 유쾌한 질문은 아니다. 나와 꼬마사이의 접점이 하필 그 인간이라 것을 상기시켜주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 둘 다 모두 권이도의 전 파트너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우스운 조합이 아닌가. 나 역시 그날 왜 권이도의 따귀를 때렸냐고 물을 수도 있었지만 이유는 뻔했기에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또한 어째서 꼬마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날 나와 권이도가 폴리곤을 나서던 걸 본 사람은 많으니까.

“무슨 소리야?”

“권이도가 형이랑 같이 폴리곤을 나갔다는 얘기 들었어. 그리고 다음날부터 형은 폴리곤에 나타나지 않는데 권이도는 계속 누군가를 기다리며 바에 앉아 있었고......아, 캐묻는 건 아니야. 그냥, 그냥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그래.”

꼬마는 여전히 내게 등을 돌린 채였다. 그래, 나라도 한때 내 파트너였던 사람이 나랑 좀 싸웠다고 냉큼 다른 사람이랑 호텔에 들어가면 기분 나쁠 거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질문을 하다니, 그동안 계속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걸까.

“찼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군. 내가 그날 권이도씨와 잤던 건 인정해. 하지만 새삼스럽게 한 번 잤다고 스테디한 관계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

“정말 그뿐이야?”

꼬마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군.”

나도 모르게 얼굴표정이 굳어서 차갑게 대꾸했다. 꼬마는 더욱 더 날 신기하다는 눈, 아니 뭔가 괴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권이도 정도면 매너도 좋고 성격도 좋을 텐데...나는 그 놈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지만 형은 아닐 거 아니야. 그 새끼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지 잘해주잖아...그런데....  
형을 모르겠어. 형은...한번 자고 나면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야. 다만 권이도씨와 나와의 연은 그날까지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강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주변은 어둡고 도로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선 가로등의 행렬이 보이지 않는 길의 끄트머리까지 이어진다. 옆 차선을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과 차가운 흙먼지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어지럽게 흩날렸다. 다시 고개를 돌린 꼬마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하아...미안해. 괜한 소리를 했어.”

꼬마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어조는 상당히 풀이 죽어 있었다. 어쩌다 이런 분위기가 돼버렸나. 나는 너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남치현. 꼬마와 나 사이에 찌꺼기처럼 침전 되어 있는 권이도의 그늘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하며 강바람을 맞고 있는 꼬마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꽃들도 지고 연녹색의 새싹들도 짙게 우거져 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태양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푸른 산등성이가 싱그럽게만 느껴지는 동안에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만한 정신적 전환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 교외로 소풍을 나가보는 것도 좋겠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를 한가하게 빈둥거리는 거다.  

“내일 시간 돼? 이번 주말은 좀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 어디 교외로 드라이브나 갈까 생각 중인데.”

꼬마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놀란 표정이다. 어두워서 세세한 변화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 응...”하고 제법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에 담겨진 떨림 까지는 어둠으로 숨기지 못했다. 꼬마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차에 올라탔고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간단히 야식을 먹었으며 꼬마의 자취집이 있는 동네까지 바래다 준 후 다음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                *                *





면바지에 스웨터 차림인 내가 생소한지 꼬마가 놀라워한다. 오늘따라 머리도 단정하고 구두에 캐쥬얼 정장을 입고 나온 꼬마는 저녁에 다른 약속이라도 있는지 상당히 멋을 낸 차림이다. 다른 약속이 있다면 시간 맞춰 보내줘야 하기 때문에 물어 봤더니 그건 또 아니란다. 정말로 풀밭에 소풍갈 줄은 몰랐나보다.

서울 내에서도 잘만 찾아보면 편하게 뒹굴 거릴 수 있는 공간은 많다. 하지만 주말이고 오늘처럼 날씨도 좋은 날엔 사람이 많다. 하긴 어딜 가도 사람들이 산책하기 좋게 만들어 놓은 곳은 남자 둘이 돗자리 깔아놓고 김밥 먹기엔 무리일 거다. 일단 한남대교 남단으로 달려 경부고속도로를 탔다. 어디로 가냐고 묻는 꼬마에게 “임금님의 무덤”이라고 짤막하게 말하며 웃었다. 가는 데에는 1시간이 약간 넘을 것 같다.  





울창한 숲의 공기가 머리를 짓누르던 스트레스를 사각사각 날려 보내는 것 같다. 날씨는 더울 정도로 맑았다. 한적하게 산책할 요량이었지만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과 가족들로 능은 꽤나 활기에 차 있었다. 입구에선 아저씨 같다며 놀리던 꼬마도 지금은 조용히 내 옆에서 걷고 있다. 젊은 아이에겐 지루한 코스가 아닌가 고민했는데 무언가 깊이 생각에 빠진 꼬마를 보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아버지가 좋아 아들이 좋아?”

“어?”

뜬금없는 내 질문에 꼬마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갈림길에는 팻말 두개가 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쪽은 아버지 무덤, 저쪽은 아들 무덤.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 귀신이 더 젊다는 정도.”

꼬마가 웃었다. 어차피 무덤인데 아무려면 어떠냐고 아버지 무덤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무성한 길을 따라 가니 넓게 트인 거대한 무덤이 파란 하늘 아래 솟아 있었다. 아늑하고 평온한 능의 모습에선 그 주인의 비참한 죽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만큼 고통스러웠으면 한이 남아 귀신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능의 주인,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반대편에 잠들어 있던 아들 정조는 11세였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내가 11살이었을 때 네가 태어났었군.”

별로 연관성 없는 연상이었지만 아무래도 꼬마와 함께 있다보니 나이라는 숫자놀음에 민감해지나 보다. 내가 교복을 입고 입시공부에 치어 있었을 때 꼬마는 막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가나다라를 배우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나이의 갭이 너무나도 아득하게 느껴진다. 내가 백수였을 때 나를 거둬준 사람들은 주로 나이 차이가 많아봐야 대여섯 살 정도였다. 아 참, 마흔이 넘은 파트너도 있었구나. 그런데 이혼남이 아니라 유부남이란 걸 알고 며칠 못가 내 쪽에서 깨버렸지.

그때 그 마흔 넘은 유부남을 나는 어떻게 생각했더라?

당시의 나는 백수 주제에 꽤나 콧대가 높았고 나이 많은 게이도 단순한 섹스 파트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 입장에선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려고 꽤나 노력했던 것 같다. 아니, 생각해보니 마흔 넘은 게이가 그 유부남만 있었던 건 아니군. 섹스를 같이 하지 않아도 가끔 클럽에서 만나는 사람 중엔 그 정도로 나이 지긋한 사람이 몇몇 있었다. 역시 공통점은 자신의 부를 과시한다는 점이었나. 나중엔 그게 아니꼬워서 클럽에 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까지 떠올리고 머릿속의 기억을 지웠다. 별로 떳떳한 기억은 아니다.      

능 앞의 연못으로 발걸음을 돌리니 어디 초등학교에서 글짓기대회라도 나왔는지 색색깔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좋다. 종종 민폐를 끼치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착하고 대체로 순수하다. 보고 있으면......말썽만 부리지 않는다면야 귀엽지 않은가.

“헤헤 형, 결혼하고 싶은 가봐?”

한참동안 말없던 꼬마가 놀리듯 은근슬쩍 말을 던졌다. 나는 쓰게 웃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가 네 입에서 나올 줄이야.

“내가 결혼하면 상대에게 실례야.”  

연못을 지나 다시 소나무 숲을 거닐었다. 소풍 나온 가족들이 한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아장아장 걷는 어린애의 웃음이 해맑다. 덩달아 내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꼬마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형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청첩장 돌릴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폴리곤에서 만난 누구하고도 오래가지 않으니까.
금방이라도 정상인의 무리에 끼어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할 것 같아.”

그거 내가 굉장히 비겁한 놈처럼 들리는군.
꼬마에게 내 인간관계를 지적 당할거라곤 예상치 못했지만 나를 카사노바로 여기고 있는 아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실제로 주변에서 정상인인척 결혼하는 사람도 보았고 아내가 있으면서 게이바에 오는 중년도 많이 보았다.  
  
“그런 일은 없길 바래야지. 이 나이되면 결혼 안하는 게 불리하긴 하지만 안하고 버틸 자신은 있어.”

“식구들이 구박하진 않아?”

“말했다시피 방임주의 부모님들이라서. 형이랑 누나도 결혼에 대해 묻기는 하는데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나 다를 바 없어. 그리고 난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래도 아까 보니까 어린애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던데...
결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혹시 음흉한 속셈이......”

“나를 범죄자로 만들 셈이냐?”

요녀석 하면서 알밤을 먹이는 시늉을 했다. 꼬마와 나의 작은 웃음소리가 푸른 소나무 숲에 울린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상수리나무가 곧게 뻗어 올라간 길을 따라 이번엔 아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을 향해 걸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야기, 웃긴 이야기, 요즘 취미로 하고 있는 사소한 일거리......어제 폴리곤에서 꼬마와 이야기를 했을 땐 왜 우리사이에 접점이 없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유통기한이 한달 지난 우유를 먹고도 멀쩡했던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는, 다 똑같은 사람 얘기인데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스스럼없어진 서로를 느끼며 2km정도의 산책로를 돌다보니 배가 출출해졌다. 가까이 있는 사찰에 가면 국보와 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을 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젊은 아이에겐 따분한 코스가 아닐까 싶어서 관두기로 했다. 여기까지 따라와서 싫은 내색 안한 것도 용한 일이니 말이다.

점심은 근처의 식당에서 갈비해장국을 시켜먹었다. 꼬마가 또 다시 아저씨 같다며 놀렸지만 이곳 해장국은 꽤 유명하다고. 아니나 다를까 밥 두 공기를 먹어치운 걸 보면 맛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날 이런데 데려온 건 형이 처음이야.”

돌아가는 차안에서 음료를 마시던 꼬마가 말했다.

“흠. 미안하군. 아저씨라서.”

“아하하 그런 얘기가 아니야. 아직도 삐쳐 있어?”

아침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꼬마는 좀 더 잘 웃고 말투도 다양해졌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에서 국도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들이 바람과 함께 타넘어 왔다.

“지루했지?”

“아니. 고등학교때 같았으면 질색을 했을텐데 이제 와서 보니까 이런 것도 좋네.
생각도 많이 하고 머릿속도 정리하고.”
  
“아까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데...그래, 고민거리는 정리된 거야?”

“정리는 무슨. 고민이란게 그렇게 쉽게 잘라낼 수 있나. 뭐. 계속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포기해 버리거나 받아들이는 거지.
어 그런데 혹시 내가 요즘 심란하다고 한 것 때문에 그런 곳에 간 거야?”

“아니, 그냥 내 스트레스 풀러갔어. 난 아저씨라서 그런 한적한 곳에서 머리 식히는 걸 좋아하거든.”

“...형 은근히 집착한다. 그거.”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속도로 위를 신나게 밟았다.





*                *                *





제품 판매에 따른 재무상태 보고서와 해외지사 확장에 필요한 자금 확충 방안을 놓고 씨름하며 잦은 출장과 잦은 미팅 소집에 눈 돌아가게 바쁜 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 와중에도 짬이 생기는 주말에는 꼬마가 자주 간다는 홍대 앞 라이브 하우스에서 어린 아이들 틈에 부대끼기도 하고 한밤중에 바다로 내려가 갓 잡은 생선회를 먹기도 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자주는 못 만나지만 늦은 퇴근 후 꼬마와 함께 잠시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일종의 휴식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제야 이전에는 아무리 간단한 식사라 해도 파트너에 대한 배려와 그날 밤의 계획 따위를 생각하느라 몸도 정신도 약간은 긴장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란 인간에 대해 재미있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삼남매 중 막내이다. 중 고등학교 때는 또래 친구들 밖에 몰랐고 대학에 와서는 모든 인간관계가 동기, 혹은 선후배로 갈라졌다. 꽤나 어렸을 때부터 바(bar)나 클럽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상대는 연상이었고 내 나이가 좀 들고 나서는 3~40대들이 선호하는 곳이 취향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형’이라고 불리울 기회가 거의 없었던 셈이다.
생각해 보면 대학 때 나를 선배라 부르지 않고 형, 형 하면서 친하게 굴던 후배 녀석들이 유달리 예뻐 보였던 것 같다.(물론 오빠라고 불러주는 귀여운 여자 후배도 있었지만)

......오호라, 남자들이 여자들의 ‘오빠’에 사족을 못 쓰는 심리가 이거렸다?

웃음이 나왔다. 그 거칠고 사나워 보이는 꼬마가 나한테는 휴식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재밌는 일인가. 예의바른 척 상대에겐 항상 존대를 하던 김서경이란 인간도 알고 보면 누군가에게 형이라고 불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꼬마가 나를 따르는 것에 흐뭇해하면서 게이바에서 만난 사람과 섹스 파트너가 아닌, 형 아우 하는 사이로 지내는 것도 괜찮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또 다시 폴리곤에는 발길이 뜸해졌다.





사내 메신저로 이사님이 호출했다.
무슨 일일까 생각해봐도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이사가 직접 관여할 만한 사안은 없었다. 설마 지난번 기업설명회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와서 추궁하려는 건 아닐텐데. 이사실 앞까지 가서도 감이 잡히지 않아 그냥 머릿속을 비워두기로 했다. 업무에 실수한 것도 없는데 뭐.
그러나 이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기대를 저버렸다.

“김서경씨. 권이도씨와는 잘 아는 사이인가요?”

잊고 있던 인물의 이름을 깐깐한 이사가 거론하자 나쁜 예감이 들었다. 이 칼 같은 사람이 일개 사원의 고등학교 동창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부르진 않았을 거다. 뒤늦게 그날의 해프닝에 화내는 것도 평소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이사의 날카로운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땐 오랜만에 만났다가 그만 안 좋은 기억을 꺼내는 바람에......”

나는 과장과 부장과 전무에게 했던 사과 문구를 또 한번 읊으며 허리를 숙였다. 젠장, 시말서도 다 썼는데 왜 이제 와서......그러나 이사의 용건은 다른 부분에 있었다.

“음, 지난 일은 됐습니다. 그보다 얼마 전 권이도씨에게서 김서경씨와의 개인 면담자리를 놓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얼굴에 표정관리가 안 되고 있다. 나는 멍청이 같이 놀란 표정으로 이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권이도씨는 D증권 사람이지만 이번 우리 회사의 상장과 관련하여 자기 소속과 상관없이 따로 의논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것이 대표이사나 담당부서의 팀장이 아니라 김서경씨를 따로 지목한 거에요.“

“이상하군요. 저는 그날 이후 권이도씨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않았습니다.
회사일을 저와 상의한다는 것도 이해 안 되는 일인데 어째서 그런 사적인 얘기를 이사님을 통해 하는 거지요?“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 자식, 이번엔 무슨 속셈이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권이도의 의중도 이사의 심경도 파악할 수 없었다. 뿔테 안경 속의 이사는 마치 딴청을 부리는 것처럼 서류를 뒤적거렸고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거리를 찾으려고 해도 대체 무엇에 대한 변명을 한단 말인가.

“김서경씨가 우리 회사에 들어 온지 올해로 삼년 째죠?”

“네. 그렇습니다.”

“우리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G캐피탈에서 1년 정도 여신관리를 했었군요.
입사한 뒤로 근무 태도도 성실하고 무엇보다 업무 능력이 매우 좋아요. 김서경씨 같은 인재가 우리 회사에 입사하게 된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젠장, 마치 잘리기 직전에 용기를 북돋우는 듯한 멘트는 뭐냐.

G캐피탈은 IL에 들어오기 전 1년 정도 일했던 사채회사다. 내 게이라이프의 파트너 중에는 조직 폭력배도 있었는데 그 폭력배가 억지로 집어넣은 직장이긴 했지만 일은 꽤 재밌었다. 다만 업체의 생리와 맞지 않아 나오고(음, 꼭 폭력배 파트너와의 불화문제도 한몫 했다) 내 힘으로 입사해서 여기까지 경험을 쌓은 것이 IL이다.

내가 이 회사를 선택한 것은 순전히 비전을 보고 들어온 거다. 당시엔 경쟁사에 흡수 합병된다는 둥의 소문이 돌았고, 사장이 정치인 비자금에 관련되어 억류되는 등 상황이 나빴지만 재무구조가 튼튼하고 사업계획이 잘 짜여 있었기에 나름대로 괜찮은 기업이라고 평가했던 거다. 그때는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없었고 월급은 적지, 야간업무는 빈번하지. 어느 회사나 다 힘들다지만 그렇게 사람을 부려먹는 일터에서 업무환경까지 꽝이었으면 정말 뛰쳐나갈 만큼 많이도 일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남들이 들으면 일개 직원 주제에 우습다고 하겠지만 나름대로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큰 편이다. 그런데 이사님, 설마 이런 인재를 내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아냐. 이사의 멘트가 하 수상하여 잘린다는 생각까지 해봤지만 권이도 그 작자가 무슨 힘이 있어서 일개 증권회사 직원이 다른 회사 직원을 마음대로 자른단 말인가.

“......서경씨와 함께 하기엔 리스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쪽에서 서경씨를 특별히 지목한 만큼 이유가 있겠지요.”

그리고 이사가 내민 복사본은 수십 개의 그래프로 표현된 시황분석표와 재무재표가 두툼한 뭉치를 이루고 있었다.

A4로 수 십장이나 되는 프린트물을 보는 동안 나는 처음에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이사 앞이라 집중력이 떨어진 것도 있지만 분량이 너무 많다는 이유도 있다. 일단 펜으로 동그라미 쳐진 곳을 중심으로 훑어보았는데 눈에 띄는 점은 외국인 매수량이 상당하다는 거다. 우리 회사를 높게 평가한다는 점에서야 반가운 일이지만 이렇게 이사가 표시를 해 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회사의 주가가 오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사의 의도가 무엇인지 점점 의중을 알 수없게 되어버렸다. 왜 이사는 다짜고짜 주식차트를 내게 내미는 걸까? 게다가 이사의 말에서는 권고사직이 아니라 무언가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겠다는 뉘앙스도 느껴지는데 아무리 봐도 나를 신뢰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저쪽에서 저를 지목하다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외부 업체와 협력해서 새로운 일이라도 계획 중이신 겁니까?”

“모르고 계셨습니까? 저는 권이도씨와 다 얘기가 된 줄 알고 있었는데요?”

하아......빌어먹을 그 자식이 대체 이사한테 뭐라고 이빨을 까댄거냐. 설마 같이 자폭하자고 나를 아웃팅 했을 리는 없고...나는 뱀 같은 이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했다.
이사는 서류 한철을 내게 보여주었다.

“아직 확정 된 것은 아니지만 그 포트폴리오를 참고하면 어느 정도 감은 잡힐 겁니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바인더를 받아 들고 안의 내용을 확인하던 내 얼굴에 점점 핏기가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이제야 조금씩 이사의 의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최이사......다짜고짜 나에게 이런 걸 보여줘도 되는 겁니까?
포트폴리오에는 어떠한 것도 구체적인 사안을 나타내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도만은 분명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주가조작?

“이거...증권거래법 위반 아닙니까?”

“......”

“저쪽 팀이라는 건......세력이겠군요.”

이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깡마르고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했던 이사다. 회사에 대한 욕심은 사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라서 사장도 혀를 내두르고 간 일벌레다. 그런 그가 설마 회사에 해가 될 일을 할 것 같지는 않다. 돈 앞에서 사람일은 모른다고 하지만 고작 몇 천 만원을 먹자고 이런 일을 꾸미는 것 같지는 않은데......경영권을 굳히려는 생각인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나.
  
“아직 양 팀이 제대로 접촉하지는 않았습니다. 조만간에 자리를 마련하면 권이도씨와 서경씨가 두 팀 사이의 다리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그쪽도 만만치 않은 요구사항을 들고 나오겠지요. 서경씨가 이 일을 같이 하신다면 수일내로 우리측 입장을 파악하기 쉽도록 교육에 들어가야 할 겁니다.”

물론 성공함에 따라 내게도 어마어마한 수익이 돌아올 것이다. 어쩌면 내 몇 년 치 연봉이 될 수도. 하지만 실패하면 운이 나쁠 경우 쇠고랑 찰지도 모른다. 이런 중대한 사안을 쉽게 보여주다니......이사는 내가 이미 권이도쪽으로부터 언질을 받은 줄로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저에게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시는 이유가......”

최이사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아냐는 눈초리다. 대체 권이도가 무슨 말을 했기에 이사가 나를 저렇게 보는 건지. 다행히 이사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우리 측에서 필요한 인재를 저쪽에서 추천받았습니다. 서로의 신뢰가 가장 기본인 프로젝트인 만큼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지요.
김서경씨, 서경씨는 미리 권이도씨에게서 언질을 듣지 못했습니까?“

“듣지 못했습니다.”

이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허공을 쳐다보았다. 꽤나 오랫동안 그 자세였던 이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무언가 수긍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저쪽 의도를 잘못 파악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직접 들은 게 아니라 박부장을 통해 전해들은 얘기라 상호간에 이야기가 어긋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흠, 역시 영어는 어렵군요.“

아니, 갑자기 웬 영어타령이야? 엉뚱하게 맺어 버린 마지막 한마디를 곱씹으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최이사는 일을 아주 간단하게 마무리 지었다.  

“뭐, 서경씨가 몰랐다치고, 이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았겠지요?
어때요, 한 번 같이 해볼 생각은 없습니까?"

그걸 갑자기 결정할 수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봐요 이사님, 이거 불법이라구요! 내가 이 일을 거절하고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여유만만한 겁니까? 아아 일개 직원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회사의 비리를 밝히진 않을 거라는 계산인가요? 아니면 신고 당해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아요. 다음주까지는 생각을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심경이 복잡하다. 복잡한 머리를 안고 이사실을 나가려던 중 등 뒤로 이사가 차가운 물을 끼얹는 말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권이도씨는 미국에서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석사학위까지 땄는데 말입니다. 제가 본 김서경씨 이력에는 어디에도 미국 하이스쿨을 다녔다는 기록이 없거든요.”

그제야 알았다.
이사는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                *                *





오랜만에 찾은 폴리곤의 바에는 권이도가 앉아 있었다.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낯짝은 능글맞기 짝이 없다. 바에는 지난번에 들어온 신입직원이 익숙하게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고 오너는 주방에서 나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 무척 반가워했다.

“요즘 일이 바쁘신가 봐요? 안색도 나빠 보이는데 어디 아파요?”

“뭘요. 회사일이 다 그렇죠. 게다가 오늘 골치 아픈 일까지 생겨서 스트레스가 말이 아닙니다.”

“저런, 역시 직장인은 힘들군요.”
 
능청맞게 권이도와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앉으며 오너와 잡담을 주고받았다. “아무거나 무알콜로 만들어 주시겠어요?“ ”서경씨가 특별히 주문한 거니까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보죠.“ 건너 건너 건너 자리에선 권이도가 혼자 큭큭 대고 웃는다. 과일과 시럽이 시원스런 소리를 내며 오너의 손안에서 섞여갔다. 얼음이 띄워진 후르츠 칵테일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목구멍이 얼얼할 정도로 시원하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샐러리맨의 고충이라면 역시 상사에게 쪼이는 일이지요.”

머릿속까지 차가워진 나는 마치 오너에게 하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아 글쎄, 상사가 저를 의심하고 있지 뭡니까.”

오너가 저런...하고 혀를 찬다. “거래처 사람이 저한테 앙심을 품고서 이상한 얘기를 했거든요. 이것 참, 무슨 사람이 그렇게 공사 구분도 못한답니까?” 옆에서 오너가 계속 맞장구를 쳤고 나는 순식간에 거래처 사람으로 돌변하게 된 권이도를 속 좁고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것 참 힘들겠군요. 저도 요즘 거래처 사람 때문에 속을 썩고 있는데 말입니다.”

옆에서 권이도가 은근슬쩍 다가오며 참견한다. 오너는 눈을 빛내며 분위기를 눈치 채고 자리를 비켜줬다. 저 기가 막힌 눈치라니, 저 사람은 뭘 해도 잘 살 거다.   

“그래요? 그쪽도 거래처 사람이 상사한테 이상한 얘길 합디까?”

“글쎄요...어느 쪽이 더 스트레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얻어맞기까지 했는걸요. 그것도 제 상사와 동료 직원들이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중요한 자리였는데 하마터면 시말서 쓸 뻔했어요. 싸움이란 건 연대책임 아닙니까.”

입가의 근육이 실룩거린다. 이 작자, 해보자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서 이쪽 분위기를 살피는 오너의 표정에는 주체하지 못하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물론 이 거리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들릴 리는 없지만 그 호기심 어린 표정이 내 기분을 더욱 상하게 했다. 당신, 눈치가 너무 빨라도 문제 있어.
나는 꿈틀거리는 입가를 애써 다잡고 권이도에게 웃어보였다.     

“우리 둘 다 거래처 사람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군요. 나가서 천천히 이야기 해 볼까요?”

“좋습니다.”

요즘은 폴리곤에 들어와도 30분 앉아 있기가 왜 이리 어렵나. 계산을 하고 나가는 등 뒤로 아쉬운 표정의 오너가 또 오세요~하고 답지 않게 인사까지 했다. 다행히 오늘 꼬마는 폴리곤에 안 온 모양이다.





유흥가가 몰려 있어 밤에도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거리의 뒷골목에는 가로등의 빛마저 을씨년스럽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음식 쓰레기보다는 났다고 생각하며 그 골목의 한 귀퉁이에서 권이도를 마주보고 섰다. 나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차안이나 카페 같이 연인이나 친구끼리 둘이 있을 만한 곳엔 있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주면 더 좋다.

“너무 무드 없군요. 이런 곳에서 섹스하는 것도 색다른 맛이긴 하지만요.”

“이봐요!”

안경너머의 눈이 내 반응을 기다렸다는 식으로 휘어졌다. 무척 화가 나지만 내 화를 풀기 전에 궁금증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래, 화는 삭일 수 있지만 궁금한 건 못 참는다. 그것이 회사 일에 관한 거라면 더더욱.

“......대체 무슨 꿍꿍이 입니까?”

“뭐가요?”

“이사님께 무슨 얘기를 한 거냐고 묻는 겁니다.”

이사는 내가 당신과 한패인 줄 알고 있단 말이다! 나를 이사에게 지목해서 곤란하게 만드는 이유가 그때의 앙갚음이라면 솔직히 억울한 건 이쪽이다. 그러나 권이도는 쉽게 대답해주지 않을 모양이다.

“그보다 전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

“김서경씨, 설명회 날 제가 했던 이야기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날 밤 당신의 행동을 저에 대한 신뢰라고 분석한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듣고 싶군요.”

권이도는 느긋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맘에 안 들어. 하지만 확실히 얘기해주지 않으면 저 작자는 이 소재로 계속 우려먹다가 나중엔 내게 마조히스트적 기질이 있다고 나불댈지도 모른다. 마침 바람이 분다. 시원하게 잡념을 날려주는 바람은 아무리 먼지 냄새를 담고 있어도 상쾌하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호오?”

“이제 와서 이런 얘기하기 참 그렇습니다만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당신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런 괴상한 플레이를 했을 때도 마음속 한구석에서 당신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솔직하게 반응한 것이겠지요.”

이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다. 나는 당신이 맘에 들었었다고. 믿었다고. 그래서 배신감도 컸다고.

“그 실망감을 당신이 압니까? 당신의 고약한 플레이에 무척이나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실망이 더 컸습니다. 사람이 하는 짓 중에 남의 신뢰를 가지고 농락하는 것이 제일 최저입니다. 그리고 난 그런 사람을 가장 혐오합니다.”

“......”

“그런 일을 예상치 못한 저도 잘못이겠지요.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어떤 취향인지도 모르고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일회용 파트너를 너무 쉽게 생각한 제게도 문제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일을 잊고 다음부터 주의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너무 끈질기군요.
대체 이사님께는 뭐라고 말한 겁니까? 아니 왜 그런 제안을 한 겁니까?”
  
권이도는 말이 없었다. 노려보는 건지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일회용 파트너라는 말에 화가 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능글능글한 미소가 사라진 것만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당신은 완전히 잊고 나와의 연을 없는 걸로 하려 했군요.”

“불쾌한 기억입니다. 뭐 하러 마음에 담아 둡니까?”

권이도를 위한‘인간쓰레기 만들기 32문장’을 준비했다는 것은 넘어가기로 하자.

“역시 이번 일을 추진시키길 잘 한 것 같습니다.”

잠시 동안 말을 못하던 그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당신을 만날 수 없겠더군요. 폴리곤에서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연락처는 어떻게 했습니까?...보나마나 버렸겠군요. 김서경씨. 당신은 나와 더 이상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어쩌지요. 나는 당신과 이대로 헤어질 생각은 없는데 말입니다.”

기가 막혔다. 설마 나 때문에 이번 계획을 세운 거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일개 증권회사 직원이 무슨 권한으로?

“제정신입니까? 당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나요?
아아, 이제야 진짜 묻고 싶은 주제로 돌아왔군요. 그래, 당신들이 제안한 포트폴리오는 잘 봤습니다. 우리 회사를 가지고 장난 좀 쳐보겠다는 건 알겠는데 왜 하필 나를 언급해서 이사의 주의대상에 들게 한 겁니까?“

“이렇게라도 안하면 당신은 나를 안 만날 것 아닙니까. 덕분에 오늘 직접 폴리곤까지 오지 않았나요?”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어. 프로젝트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권이도에게도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같은 팀 동료들이 있을 거 아닌가. 그들이 다 승낙했단 말인가? 새파랗게 젊은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에?
혼란스러운 내 표정을 읽고 권이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지난번 설명회로 우리팀 내에서 서경씨네 회사에 대한 호응도가 높아졌으니까요. 거기에 제가 약간 바람을 넣었을 뿐이지요.
서경씨가 저희와 같이 일하도록 하는 것엔 동료들을 설득하는데 꽤 애를 먹긴 했지만요.“

문득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사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느꼈던 의아함이면서 확신하지 못해 머릿속 한구석에 찜찜한 상태로 놓아두었던 의심.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권이도에게서 한발자국 물러났다.

“......이 프로젝트 하는 그쪽 팀 구성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아직 참가여부가 불투명한 서경씨가 알 부분이 아닌 것 같군요.
듣자하니 시간을 달라고 했다고요?”

빌어먹을, 언제 또 그런 것까지 확인했어?
나는 눈에 힘을 주어 내가 예상하고 있는 것을 일단 찔러 보기로 했다.

“작전세력입니까? 외국인 계좌를 이용하면서......”

“작전이라고 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투자를 할 뿐입니다.”

이거 함부로 발을 집어넣어선 크게 곤란 할 것 같다.
이사는 대체 무얼 믿고 이런 집단과 팀을 이루려 한 걸까. 아냐, 최이사를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 그가 우리 회사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대표적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해. 그러니 그의 판단에는 어떤 확실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내 결정이다. 이사는 내가 권이도와 연계되어 저쪽 팀의 스파이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나를 가까이 두고 지켜보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권이도가 나를 지목했다 하더라도 이사 입장에서 “이제 겨우 3년차인 직원을 팀에 합류 시킬 순 없습니다.”라고 거절해버리면 끝이니까.

지금의 내 입장에선 아직 이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파악할 순 없지만 대충 감은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요약컨대 어떤 자금 세력과 우리 회사가 손을 잡고 일종의 주가조작을 통한 자본 확보와 차익을 얻으려는 것이다.

현재 사업확장을 하고 있는 우리 회사에서 거대 자본을 가진 투자자를 보유하고픈 이사의 마음이야 이해가 간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것이 아닌가? 정당하게 우리 회사에 투자하려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자본으로 천천히 사업을 확장하여도 향후 2~3년 안에 목표 수익률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칫 큰 손에게 놀아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금융감독원의 의심을 받아 회사 얼굴에 먹칠 할지도 모르는 일을 왜?

게다가 저쪽의 의중은 더욱더 모를 일이다. 보통 작전세력들은 주가 조작을 통해 단기간에 높은 수익률을 남기는 것이 목표 아니었던가. 물론 우리 회사의 주가가 올라가면 그들이 받을 이익도 높아지겠지만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작전주를 잡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작전도 그 케이스별로 천차만별이라고 하지만 아직 계획의 구체적인 사항을 모르는 나로서는, 찝찝한 부분이 너무 많다.  

돌 굴리는 소리가 저쪽까지 들리는지 권이도는 연신 느물거리며 참을성 있게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에 부는 밤바람도 더 이상 과열된 머리를 식혀주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권이도가 내 고민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신 말입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성격 굉장히 나빠요.”

좁은 골목에 그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좀처럼 크게 웃는 모습을 보일 것 같지 않은 그였기에 목젖을 울리며 소리 내는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자식, 웃는 모습한번 호쾌하네. 하지만 아무리 웃는 얼굴에 정든다 해도 지금 내 기분 같아선 한대 갈겨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저는 당신이 우리 프로젝트에 합류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결과는 다음주에나 알게 되실 겁니다.”

무뚝뚝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더 이상의 입씨름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저 인간에게 뭘 더 물어봐도 알려줄 리가 없다. 작전세력이란 건 비밀유지가 필수인데 아직 팀에 합류하지도 않은 나한테 이만큼이나 정보를 줬다는 것도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아니, 솔직히 저들이 작전 세력인지 아니면 단순한 투자가 집단인지도 나는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지고 정말로 모르겠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나를 가로막고 권이도가 느물거렸다. 히죽이는 입술은 즐거움으로 가득했고 새로 맞춘 안경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 빛났다.
   
“섭섭하게 여기서 그냥가시는 겁니까? 나를 만나러 왔으면 뭔가 다른 것도 예상하셨을 텐데요.”

음흉하게 다가오는 손가락이 목 끝을 스치며 어깨에 닿았다. 일부러 귓가에서 소곤거리는 모습이 같잖아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 어디서 유혹을 하는 거냐. 내가 그럴 정신이 있을 것 같아?

“피곤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한숨을 쉬며 권이도의 손을 쳐버렸다. 그의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어둠 속에서 몸이 움찔하는 것을 보니 상당히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힐끔 돌아본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 너머로 손을 흔들며 잘 가라는 제스츄어를 취해보였다. 빨리 사라지라는 감정을 가득 담고서.  

“그럼 미팅 때 봅시다.”

음산한 목소리가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                *                *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회사일은 손에 안 잡히고 이사는 마주칠 때마다 눈으로 무언의 독촉을 한다. 아직 결정을 못 내렸습니까? 하고. 권이도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와 이사의 의심 가득한 눈과 무난한 상승세를 기록하는 회사의 주가를 보며 한숨 한번 쉬고 머리를 감쌌다.

“김서경씨 사내에서 주식 매매는 금지야.”

성대리의 말에 급히 HTS프로그램을 껐다. 이온음료 하나를 뽑아 주면서 “특별히 쏘는 거니까 잘 마셔.”하고 무덤덤하게 말한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음료수를 받았다. 성대리의 얼굴에 질책하는 기색은 별로 없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무덤덤하다. 아니, 조금 맹하다고 해야 할까.

“요즘 어딘가에 넋 놓고 있다 했더니 주식에 관심 있어?”

“아니요. 그냥, 요즘 우리 회사 주식이 잘 오르잖아요. 괜히 기분이 좋아서 계속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정말 허접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성대리는 또 진지하게 그 얘기를 받아주고. “음. 그래, 나도 회사일이 잘 되니 기분이 좋아.”하고 맞장구까지 친다.

“그런데 너무 잘 되니까 또 불안한 것 같아요. 상장하려고 했을 때 우리 회사 공모가가 높다고 여기저기서 말들 많았잖아요. 그런데 벌써 150% 상승했다구요.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성대리의 의견은 어떨까 해서 슬쩍 떠보려 했지만 “왜? 주식 오르면 좋잖아?”하고 당연하게 말한다. 하긴, 차트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지. 그래프가 계속 상승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소폭 등락하면서 올라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느 한도 이상으론 오르지 않을 거야. 작년 실적이 좋았으니 이번 상장과 동시에 투자자들이 몰린 것뿐이지. 솔직히 우리 회사만한 우량기업이 어딨어?”

그렇게 말하고 성대리는 초코우유를 마시며 자리로 돌아갔다. 직장 1년차 선배인 저 사람을 보면 가끔 정말로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성대리의 얘기를 듣고 차트를 보면 내 고민이 쓸데없어 보일뿐이다. 하아. 이것이 쓸데없는 고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꼬마가 보고 싶어졌다.





언제나 치현이를 데려다 주었던 골목길에 차를 주차해 두고 한번도 찾아가보지 않았던 주소를 찾고 있었다. 생각보다 골목은 길고 높았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길이라 입구에서만 만나고 헤어졌기 때문에 나는 치현의 집이 바로 근처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거다.
음침한 가로등은 다 깨져서 깜박깜박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있었다. 치현의 핸드폰은 전원이 꺼진 상태이다. 평일 이 시간이면 집에 온다는 것을 알고 찾아 온 건데 혹시 오늘 어디로 놀러간 거라면 헛걸음 한 셈이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만 그래도 꼭 얼굴을 보고 싶었다. 요 며칠간 계속 보고 싶었다. 지금은 마치 안보면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충동이 든다.

주소지는 비탈의 중턱에 위치한 연립이었다.
501호를 찾아 벨을 누르니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우편함에는 이번 달 전기세와 수도세 고지서가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녹슨 문 옆에는 쓰레기 수거일을 놓친 까만 쓰레기 봉투가 굴러다녔다.

다시 벨을 눌러봤지만 역시 반응이 없다. 분명 밖에서 봤을 땐 불이 켜져 있었는데? 덜렁거리다가 불 끄고 나가는 것을 잊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보고 싶은데......다소 신경질적으로 벨을 누르고 슬슬 기다림에 지쳐갈 때였다.

“씨발, 벨 좀 그만 눌러. 아래층 영감이 쫒아 온단 말이야!”

벌컥하고 문이 열리고 그렇게도 기다리던 귀여운 꼬마가 트레이닝 바지에 나시티 차림으로 더벅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꼬마의 등장과 함께 느껴지는 그 따스한 온기라니.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확 부둥켜안으려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경 형? 형이 이 시간에 웬일......으악! 자, 잠깐 기다려! 방 좀 치울게!!”

문이 쾅 닫히고 바깥은 다시 어둠과 추위로 잠겼다. 안에서 허둥대고 있을 치현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법도 하지만 나는 입술이 마비 된 것 마냥 미소조차 지을 수 없었다.

엉망으로 부어터진 얼굴. 시퍼렇게 멍든 몸. 나시티 사이로 보이던 폭행의 흔적과 거친 놀이의 흔적이 망막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치현을 마지막으로 본 게 지난 주였다.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다시 머쓱한 얼굴로 나타난 치현은 긴팔을 걸치고 부스스한 머리도 조금은 정돈된 상태로 나타났다. “좀 지저분하지?” 하며 바보처럼 웃는 치현의 안내를 받으며 처음으로 들어간 집은 허름한 겉보기완 달리 내부 벽지나 장판 상태가 깔끔했다. 가구도 별로 없어서 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랬지? 미안. 그냥 보고 싶었어.”

“우와, 형한테 그런 얘길 다 듣다니. 무슨 일 있어? 회사일이 많이 힘든가 봐?”

웃으며 쥬스를 내미는 손목에 희미한 자욱이 지워지지 않은 채 소매 바깥으로 비어져 나와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쥬스를 받아 마시며 웃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선 조금씩 화가 나려 하고 있었다.

“요즘 폴리곤엔 잘 안가니? 나도 시간이 없어서 못가기는 하지만...”

“거기 분위기도 좋고 주인아저씨도 좋은데 술값 비싸서 못 가겠더라구.
역시 늘 가던 데가 익숙해서 좋아.“

“흠...주로 어딜 가는데?”

“뭐 홍대나...폴리곤 길 건너편 쪽의 헤븐이라고 알아? 거기도 괜찮아.
그런데 너무 젊은애들 분위기라 형한테는 안 맞을 걸?“

장난치듯이 낄낄거리며 웃다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 한쪽을 부여잡는다. 밥 먹기도 힘들 정도로 입술이 찢어지고 눈은 붕어처럼 퉁방울만하다. 내가 일부러 상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아는지, 치현은 쭈뼛대면서 제가 먼저 말한다.

“엊그제 싸움이 붙었거든. 아 그 새끼들, 혼자로는 안 되니까 꼭 패거리를 부르더라고.
난 말이지. 싸울 때는 뭘 해도 다 좋은데 연장 쓰는 새끼들이랑 패거리로 몰려서 한 놈 조지는 새끼들이 제일......아, 말이 좀 험했지?“

“치료는 했어? 병원은 가봤고?”

“병원까지 갈 것 있나 뭐. 약국에서 약사다가 발랐어. 그래도 많이 나아진 거야 이거.”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치현은 내가 무엇에 대해 묻고 싶어 하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치현은 그것에 대한 언급을 피했고 나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흐르고 결국 참지 못한 것은 나였다. 유리잔을 내려놓으면서 치현아......낮게 꼬마이의 이름을 불렀다.

“플레이는 강제로 한거니? 아니면 이번에도 호기심으로 한거니.”

“아, 아니야! 이건 그 자식들이 어설프게 흉내만 내려다가......”

치현이는 손사래를 쳤다. 물론 그 말을 믿었지만 오랜만에 머리를 식히러 만난 꼬마가 이렇게 엉망이 된 모습으로 앉아 있으니 무척이나 불쾌하고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해 화가 났다. 내가 꼬마의 성적 취향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 그저 싸움질이나 거친 플레이는 몸에 나쁘다고 충고하는 게 고작인 입장이니까.

아아...하지만 왜 이렇게 화가 치솟는 걸까.

“상처 좀 봐도 될까?”

“돼. 됐어! 기분 나쁘게 뭘 봐. 내가 혼자 치료 잘했으니 그냥......”

치현이의 말을 무시하고 위에 걸친 트레이닝복을 강제로 제쳤다. 치현이 반사적으로 몸을 숨기려 하지만 나는 힘을 주어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기고 나시티도 강제로 걷어 올렸다. 힘으로라면 충분히 밀쳐낼 수 있었겠지만 내 표정이 진지했고 워낙 완강한 자세였기 때문에 꼬마도 어쩔 줄 모르고 버둥대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상체엔 고약한 밧줄흔적이 불그스레한 자욱을 길게 남기며 목에서 배꼽 아래로 한 줄, 가슴을 가로지르는 선이 세 줄, 그리고 목과 어깨 근처를 뱀처럼 동여매고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거무튀튀한 멍자국과 무언가에 찢긴 자국에 눈살을 사납게 찌푸렸다.   

“형, 형...저기 이건 말이지......”

“한 가지만 말해다오. 강제냐. 아니면 합의냐.”

치현을 벽에 몰아붙이고 몸을 살피던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성난 음성이 흘러나갔다. 녀석은 시선을 떨구고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할 말을 찾았지만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처음은 합의였어.”

“처음만?”

자꾸 목소리에 노기가 섞인다. 제길, 이렇게 화내면 할말도 못하잖아. 화내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자꾸 목소리는 떨리고 얼굴에 피가 오르기 시작한다. 아니 내가 왜 화를 내는 거지? 강제도 아니고 합의였다잖아 합의! 빌어먹을!!

나는 주저앉은 치현이를 끌어 앉았다.
그렇게 해서 다그치려는 내 마음을 다스리고, 내가 너를 혼내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면서 아이에게 안정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다 개소리다. 안정을 찾고 싶은 것은 나다. 이 떨리는 분노와 치현이에 대한 야속함과 그동안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를 진정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미안해 형......”

치현이 내 어깨에 자기 고개를 묻었다.

“혼내지 않을게. 네가 그런 걸 좋아한다면 비난하지 않아.
난 그저, 네 몸에 상처가 있는 게 싫을 뿐이야. 얼굴은 또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치현은 한동안 나를 끌어안고 말이 없었다. 나도 품속에 느껴지는 온기를 언어라는 것으로 깨고 싶지 않았기에 계속 침묵을 지켰다. 결국 평온을 깬 것은 치현이였다.  

“......나 이상해.”

“......”

“진짜 변탠가 봐. 형 어떡하지? 원래 안 이랬는데 점점 이런 플레이를 하는 녀석들과 어울리게 돼.
그런데 더 웃긴 건 처음에는 녀석들이랑 합의 봐서 시작하는데 나중에 가면 꼭 거부감이 들어. 그 새끼들도 순한 녀석들은 아니라서 내가 중간에 싫다고 하면 주먹을 쓰고 억지로 약을 먹이려 들어.
씨발, 미쳐버리겠어!”

자학을 하며 치현은 등에 기댄 벽에 자신의 뒤통수를 박았다. 쿵. 벽을 울리는 소리는 마치 심장 떨어지는 소리 같다. 나는 자꾸 벽에 박으려는 치현의 뒷머리를 한손으로 감싸며 자기혐오에 치를 떠는 꼬마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엊그제 술에 잔뜩 취해서 이런 거 좋아하는 녀석들이 꼬시기에 따라 갔거든. 그런데 그 자식들 안 아프게 해준다면서, 잘해준다면서 살살 꼬드기는 걸 정말 믿었단 말이야.
처음엔 좀 질펀하게 놀다가....뭐...말해봤자 형 귀만 썩으니 관둘게. 암튼 그 새끼들 병신같이 요령도 없는 주제에 어디서 본건 많아서 로프로 묶는데....술이 확 깨더라구. 그 이후로는 완전 개지랄을 떨었지. 그 새끼들도 황당했을 거야. 어디서 만만하게 가지고 놀만한 새끼가 굴러왔다 싶었는데 갑자기 날뛰니 대판 싸움이 났지 뭐.”

욕설을 섞어가며, 남 일 말하듯이 낄낄거리며 치현은 동네 깡패들과 싸운 무용담 이야기 하듯이 떠들었다. “손에 뭐가 잡히기에 닥치는대로 집어 던졌는데 그게 또 바이브레이터였어. 졸라 웃겨서, 그래서......” 그렇게 중얼중얼 하던 치현의 설명은 점점 횡설수설 하더니 이내 씨발, 씨발 거리다가 목소리가 잦아들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울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흥분 때문인지 혐오감 때문인지 잘게 떨고 있는 몸은 한참동안 내게 기대어 있었다.     

묶이는 순간에 정신이 들어 난리를 피웠다고 말했지만 엊그제 묶인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면 묶인 상태에서 상당한 시간동안 시달렸을 거다. 패거리를 불렀다고 했으니 아마 한두 명에게 얻어맞은 것도 아닐 것이고.

그런 곳에서 혼자 빠져 나오진 못했을 거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거나....그보다, 놈들이 실컷 치현을 두들겨 팬 다음 흥이 빠져 그대로 버려두고 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이 애는 엉망이 된 몸을 끌고 혼자 집으로 왔겠지.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 이렇게 많이 다쳤으면서.”

꼬마가 이런류의 플레이를 한 것이 내가 알게 된 것만 해도 벌서 두 번째다. 그런 질 나쁜 무리들과 어울려 노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면 단순히 색다른 플레이가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질 나쁜 놈들만 걸리는 걸까? 사람의 몸이 그리웠으면 왜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나를 섹스 상대로 보지 않아서?

“그러고 보니 네가 먼저 연락한 적은 없는 것 같아. 늘 내 쪽에서 만나자고 했지.
혹시 만나고 싶지 않은데 겨우 만나고 있는 거야?“

“아니야! 형은 바쁘니까, 그러니까 일하는데 방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치현이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물먹은 것처럼 까만 눈동자는 안타깝게도 부어터진 눈두덩이에 절반이 가려져 있었다.

“잠깐 시간 내는 정도는 할 수 있어. 방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 이렇게 얻어맞고 집에는 대체 어떻게 온 거야? 나한테 전화했으면 하다못해 내가 데리러 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뒷북이나 치게 하고...!“

잠시 흥분을 멈추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부모곁을 떠나 혼자 자취하고 있는 어린애가 이렇게 맞고 돌아다니며 혼자 방구석에 누워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그렇다. 평소의 나라면 해괴망측한 플레이를 하다가 그렇게 된 거니 자업자득이라고 비웃었을 텐데 왜 이 꼬마는 측은해 보이는 걸까.

“이런 쪽으로 즐기고 싶으면 아직 젊은 녀석들보다는 좀 더 노련한 쪽이 좋을 것 같은데...
아무나 만나서 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어. 내가 좀 알아봐 줄까? 이쪽 방면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그동안 쌓아온 인맥이 있어서 믿을만한 사람들로 소개시켜 줄 수는......“

갑작스레 치현의 몸이 나에게서 떨어졌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해석하기 불가능한 표정을 담고 있었다. 원망? 배신감? 아니야, 무언가에 상처받은 표정이다. 뭔지는 몰라도 그 얼굴을 보고서야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아니야. 혀, 형이 그런 것 까지 신경써줄 필요는...나는...나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 씨발, 미안해. 내가 미쳤지. 다시는 그런 데 안 간다구!“

벌떡 일어나더니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들이마신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치현의 입가로 물이 뚝뚝 흘러 바닥에 적셨다. 그을린 몸은 근육으로 뭉쳐있었고 그 위를 구렁이 기어가는 듯한 밧줄 자국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물을 마실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에도, 젊어서 부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짜여진 복근에도 타락의 흔적을 남기는 흉터들이 여기저기 치현의 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흉터를 달기엔 정말 아까운 몸이다.
이참에 나도 잠깐 섹스 스타일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아이는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꼬마가 나를 잠자리 상대로 보지 않는 것도 서로의 취향이 달라서 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런 정신 나간 생각도 나름대로 일리 있어 보였다.

정신차려. 김서경.

한숨을 쉬었다. 그런 쪽으로 소개시켜준다고 했다가 치현이를 상처 입혔다. 그런데 「내가 마스터가 되어 줄게 컴온베이비~」 따위로 행동했다가는 이런 평온한 인간관계마저도 유지하지 못하겠지. 내 머릿속이 복잡한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꼬마의 머리가 복잡할 게다. 대체 나의 성정체성은 뭐냐...라는 걸로.

“오랜만에 만났는데 기분 나빴지? 미안해. 집에 먹을 것도 없고.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형도 집에 가봐야지. 난 좀 쉬고 싶어.“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괜히 바쁜 척 주방에서 부산하게 움직인다. 설거지를 하는 건지 청소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찬장을 여닫고 그릇들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꼬마가 어색해 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꼬마의 얼굴이나 보면서 안정을 찾으려고 온 건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저녁은 먹었어?”

주방으로 들어가며 말을 걸었다. “시간이 몇 신데. 당연하지” ”그럼 간식 사먹을까?“ ”이 밤중에 뭘 먹어. 조금 있다 잘 거라니까.“”음...나는 아직 저녁도 못 먹었거든. 라면이라도 있으면 좀 끓여줘. 배고파 죽겠다.“

계속 치근덕대자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던 치현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괜히 웃으면서 배고프다고 엄살을 부렸고 치현은 그런 내게 뭔가 할말이 있는지 입술을 물어뜯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기분 나쁘지 않아?”

“뭐가......”

멋대로 찬장을 뒤져서 라면과 냄비를 찾아냈다.
우물쭈물 하는 꼬마를 내버려 두고 물을 앉힌 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라면에 이것저것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계란은 생략. 실제로 배가 무척 고프기 때문에 라면에 말아먹을 찬밥을 발견하고 속으로 오케이~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잖아. 변태 같고...”

“호모는 뭐 정상인가.”

태연하게 식사 준비를 하는 나를 보고 꼬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은 일부러 이인분을 올려놓았다. 꼬마는 먹었다고 말했지만 저 부어터진 입으로는 분명 아무 것도 안 먹었을 것이 뻔하니까. 몸에 좋은 밥 놔두고 왜 하필 라면이냐면 이 부엌엔 국이나 찌개가 전혀 없었고 냉장고에도 다 쉬어 빠진 김치와 마른안주 뿐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야, 야 젊은 애가 대체 뭐 먹고 사냐? 부엌 꼴이 말이 아니다. 내가 혼자 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

“다음에 올 땐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올게. 오늘은 좀 봐 줘.”

넥타이를 풀며 웃어 보였다. 약복 상의도 벗고, 흰 와이셔츠에 라면 국물이 튀면 곤란하기 때문에 앞치마도 걸쳤다. 남자애 혼자 사는 부엌이라 앞치마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자세히 보니 「원조 할머니 닭갈비 집」이라는 상호명이 쓰여 있다.

끓는 물에 두 개의 스프를 넣고 면을 넣었다. 보글보글 끓는 라면 냄새가 집안에 진동한다. 꼬마는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렇게 서 있기도 뭐한지 식탁에 앉아 찬 물만 마시고 있었다. 내가 라면을 끓이는 게 신기한지 뒷통수가 따끔거릴 정도로 뚫어져라 바라본다.

“혼자 두개 먹을 거야?”

“아니, 하나는 네 것.”

“아까 저녁 먹었다고 그랬잖아.”

“또 먹어.”

“엑, 나 입 아파서 매운 거 못 먹는단 말이야!”

“누가 얻어맞고 다니래?”

꼬마는 그 부어터진 입을 내밀더니 라면엔 계란과 파를 송송 썰어 넣어야 한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나는 라면은 국물의 참맛으로 음미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꼬마는 인스턴트 식품에 신선한 재료라도 썰어 넣어야 화학조미료 냄새가 덜 난다며 맞받아쳤다. 그렇게 식탁 위에서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라면은 순식간에 바닥났고 매운 건 못 먹는다던 꼬마도 국물에 찬밥까지 말아 먹었다.   

“오늘 잘 먹었다. 다음에 우리집에 와봐. 내 진짜 요리 실력을 보여줄게.”

“알아 알아. 형 요리 잘하는 거. 그리고 그 앞치마 진짜 잘 어울린다.”

치현은 키득거리며 내 차림을 보고 놀리며 웃다가 부어터진 얼굴이 아파서 아이구...하고 인상 찌푸렸다. 이번엔 내가 웃었다. 그렇게 별 것 아닌 걸로 몇 마디 주고 받은 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기에 그날은 그렇게 집으로 왔다. 그리고 며칠 간 꼬마네 집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                *                *





결국 나는 그 일을 거절했다. 당연히 권이도와 얘기가 다 되어 있는 줄로 알고 있었던 이사는 나를 의심 가득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진심입니까?”라고.

솔직히 엄청난 유혹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게다. 몇 달 동안 수 천 만원정도는 우습게 벌겠지. 하지만 일단은 불법인데다가 무엇보다 권이도가 꾸민 일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고 이 일을 넙죽 승낙해 버리면 권이도와 내가 한통속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오히려 이사의 눈 밖에 난 것 같지만.

“이제 와서 빠지다니, 이익 분배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아 이사님 전 아직 시작도 안 했다구요.
이사를 설득 하려면 나와 권이도의 관계부터 설명해야 한다. 또한 권이도가 나를 지목한 이유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어야 하겠지. 하지만 내가 그 작자 속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렇다고 게이바에서 만난 사이라 말할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돈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이 일은 저와 맞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알게 됐으면서 이번 일에 합류할 수 없다고 하면 저쪽의 부담이 상당할 것이다. 아무래도 이것은 불법이니까. 탐색하듯 바라보는 이사의 얼굴은 불신과 의아함으로 가득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는 권하지는 않았다. 잠시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알겠습니다. 그럼 서경씨에게 제안했던 건은 없었던 일로 하지요.”

이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따위의 당연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꼬마네 집으로 행하는 도중 권이도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사에게서 내 핸드폰 번호를 알아낸 것 같다.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이렇게 바로 전화가 올 정도면 상당히 당황한 모양이다. 그는 직접 만나자고 했지만 내가 선약이 있다고 거절해 버렸다. 권이도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나는 동요하는 권이도의 반응을 즐겼다.

[......거절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당신에겐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을텐데요.]

“처음부터 그쪽이 멋대로 나를 팀에 끌어들이려 한 것입니다. 나는 주식엔 관심 없어요.”

[상당한 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를 쉽게 차버릴 정도로 당신이 도덕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군요.]

“자신이 그 이유라고는 생각 안하십니까?”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대꾸하지 못하는 권이도를 보며 속으로 코웃음쳐줬다.

[이사에게서 의심 받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 일을 거절하면 이사는 불안해서라도 당신의 행동을 감시할 겁니다. 사내에서 위치도 불확실해 질 수 있습니다. 이번 건은 회사 경영진들과의 유대도 돈독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닙니까? 당신은 그 정도의 야망도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호오~ 회사 경영진이라...최이사만 가담한 것이 아니었군요?”

이번엔 침묵이 상당히 길었다. 운전 중이라 핸즈프리를 쓰고 있는데 침묵이 긴 틈을 타서 차를 도로 한 켠에 세워두었다. 권이도와 대화하면서 운전은 무리다. 나는 은근히 권이도가 이대로 전화를 끊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이길 테니까.
내 예상대로라면 권이도 측 팀은 아마 나 때문에 자신들의 계획을 통째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외부자에게 알려진 작전은 98%실패하니까. 그러니 억지로 나를 팀에 가담시키려 했던 권이도가 받을 지탄은 말 안 해도 상상이 간다.
아하하 고소하다!

[......김서경씨.]

“네 말씀하십시오.”

[잠깐이면 되니까 지금 폴리곤에 와 주실 수 있습니까.]

“거절합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힘이 없다. 풀죽은 목소리를 즐기며 나는 좀 더 그를 몰아붙였다.

“나를 끌어들인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습니다. 게이바에서 겨우 하룻밤 잔 상대를, 그것도 최악으로 끝나고만 상대를 비밀유지가 필수인 일에 가담시키려 하다니 당신 머리라는 게 있기는 합니까?
내가 이 제안을 덥석 승낙할 거라고 믿는 당신도 바보 같군요. 내가 당신의 무엇을 보고 믿어야합니까? 아무리 회사 상사와 함께 하는 일이라지만 불법인 일에 순순히 승낙할 것 같아요? “

“양심 때문인가요?”

“아아 내가 그렇게 도덕적인 인간이 아닌 건 맞습니다. 하지만 신뢰가 중요한 일 아닙니까. 그런 일에 당신처럼 신용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겠어요? 나중에 뒤통수를 맞을지 누가 압니까? 권이도씨 당신은 일도 섹스도 파트너로선 실격이에요!”

잔뜩 퍼부었더니 속이 다 후련하다.
권이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그렇습니까......]하며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 당당하고 뻔뻔스러운 인간이 이렇게 주눅 드는 모습을 보니 조금 씁쓸했지만 기분만은 통쾌했다.

결국 권이도는 우물쭈물하다가 다음에 또 보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끊자마자 나는 차안에서 크게 웃었다. 아아 후련해라. 권이도를 K.O시키고 이제 귀여운 꼬마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유쾌해졌다. 오늘은 카레다. 아주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                *                *





치현의 얼굴 상처는 많이 가라 앉아 있어서 겨우 인간의 형상으로 되돌아 와있었다. 기분도 좋은데 카레 말고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가는 건 어떨까.
넌지시 얘기를 꺼내보니 아직 흉이 덜 아문 얼굴로 피식 웃는다.

“기껏 재료 사와 놓고 나가서 먹자고? 에이~ 그냥 집에서 먹어.
어? 카레 재료네. 나도 카레는 만들 줄 알아.”

주황색 마트 봉지를 받아들며 부엌으로 가져간다. 이 몸의 특제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이려던 생각에 사온 거지만 꼬마가 해주는 카레도 먹어보고 싶어졌다.“만들 줄은 알아?”하고 물어봤더니 치현은 자신에 찬 얼굴로 걱정 말라고 한다.

통통통 울리는 도마 소리가 딱 숙련자의 솜씨다.
치현이 감자와 당근, 양파와 고기 등을 달달달 볶는 사이 나는 카레가루를 물에 개어 놓았다. 비좁은 부엌에서 덩치 큰 남자 둘이 왔다갔다 하니 답답스럽지만 마치 소꿉장난 하는 기분이다. 식탁 위에 김치와 숟가락 젓가락을 셋팅해 놓고 뿌듯한 마음으로 꼬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면바지에 반팔티를 걸친 치현은 새로 예의 그「원조 할머니 닭갈비 집」앞치마를 매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카레에 모든 재료를 다 넣고 팔팔 끓이는 일 뿐이다. 나는 치현이 냄비 뚜껑을 덮는 순간 목에서 어깨가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에 턱을 괴어 놓았다.

“혀, 형?”

“이러니까 우리 신혼부부 같다. 그치?”

뾰족한 턱 끝으로 승모근을 꾹꾹 누르자 얇은 반팔 티 너머 치현의 근육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더 장난 칠 요량으로 등 뒤에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세게 끌어안았다. 나도 작은 키는 아니어서 꼬마의 목에 얼굴 묻기에는 딱 좋은 위치다. 음...그런데 요녀석 운동했나...역시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은 아니구나.

“더, 더워!”

치현이 당황하며 나를 뿌리쳤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과장되게 두 팔을 펼쳐보였다. 알았어 알았어 안 건드릴게 하는 포즈. 그 덩치 큰 꼬마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직 끓지도 않은 카레를 휘적휘적 대는 모습이라니. 아아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귀여울 거냐. 그러니 내가 너를 꼬마라고 부르는 버릇이 안 고쳐지는 거야.
  
카레야 누가 해도 맛있는 거라지만 밖에서 사 먹은 것이 아닌, 남의 손을 탄 요리는 가히 몇 년 만이다. 카레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서 집안에 매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면서 맛있다고 칭찬해줬더니“뭘 이런 걸가지고...”하면서 쑥스러워 한다.

“참, 새로운 일자리는 구했어?”

“아니 아직. 요즘 아르바이트 구하기가 힘드네.”

한 솥 가득담긴 카레를 접시에 떠 넣으며 치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치현은 얼굴이 그 모양이라 잘렸다고 한다. 뭐야 얼굴 좀 다쳤다고 사람을 매정하게 자르다니 그 주유소 다시는 안 갈 거다.
요녀석을 보면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늘상 달고 다니는 흉터도 그렇고 썰렁한 주방 꼴도 그렇다. 꼬마를 만난지는 얼마 안 되지만 이렇게 챙겨주고 싶은 상대는 처음인 것 같다.

동생 같은 마음에 문득 치현이를 내 집에 들어와서 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우리집에서 살래?”

맛있게 카레를 퍼먹던 꼬마의 행동이 멈췄다.

“나도 혼자 사는데 아침이랑 저녁 같이 먹으면 좋잖아.
남는 방이 하나 있으니까 어때? 근처에서 일자리도 새로 구하고.“

꼬마는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다가 억지로 꿀꺽 삼키고 어색하게 웃는다.

“형 은근히 사람 좋은 거 아니야? 내가 형네 집에서 뭐라도 훔쳐가려면 어쩌려고 그래.
에~이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야.“

꼬마가 내 물건을 훔쳐 달아난다니 그런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평소의 나라면 누군가를 집으로 들일 때 내 물건의 안전에 가장 먼저 신경 썼을 텐데 말이다. 꼬마에게 그런 부분을 지적당하다니, 내가 어지간히도 이 아이에게 방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왜 꼬마는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너니까 이런 말 하는 거지. 우리집엔 훔쳐갈 만한 것도 없다고.”

치현은 쓴 웃음을 짓더니 방금 전만해도 왕성하게 퍼먹던 카레를 깨작깨작 숟가락으로 긁어대고 있다. 덩달아 나도 입맛이 떨어진다. 혹시 내가 추근대는 것으로 보였나? 그동안 꼬마와 나의 관계가 꽤나 건전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은 고마워 형. 하지만 남의 집에 신세지기가 좀......”

“물론 방세 받을 거야. 전기세도 수도세도 반반씩.
밤늦게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는 기분, 너도 알잖아. 이렇게 매일 너네 집에 왔다가 다시 우리 집으로 가는 것도 힘들고.”

말하고 보니 나도 모르게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매일 피곤에 절어 집에 오면 아무도 없는 썰렁한 집 대신 꼬마가 기다리고 있다는 흐뭇함 같은 게 느껴진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소싯적엔 여러 파트너 집에 얹혀살기도 했으니까.
누구와 동거 한 것도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사생활을 간섭받는 것은 싫어하지만 꼬마라면 괜찮을 것 같다. 방도 따로 쓸 건데 뭐. 생각하다보니 마음이 들떠서 손님방에 침대를 하나 들여놓을까, 스페어 키를 준비해야겠군. 하며 혼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동정하지 마.”

카레를 모래처럼 씹으며 치현이 말했다. 나는 놀랐다. 너무나도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은 금방이라도 욕설을 내뱉으며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았다.
설마 그런 의도로 볼 줄은...

“나는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쌍한 놈이 아니야.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형의 성에는 차지 않겠지만 나한테는 힘들게 모은 돈으로 구한 전셋집이고, 그동안 살면서 나름대로 정도 들었다고. 지금 아르바이트에 잘려서 돈이 없긴 하지만 내가 그렇게 재주 없는 놈도 아니고! 나는 그렇게......!“

“동정 받으면 또 어떠냐.”

치현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모르겠지. 저렇게 사납게 치뜬 눈 안에 물기 어린 새까만 눈동자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저런 표정을 보면 무언가 참기 힘든 기분이 들고 만다.

“네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남한테 동정 받아서 그걸 너한테 유리하게 이용한다 해도 뭐, 그게 어때서. 나는 너보다 몇 살이나 더 많았을 때도 여기저기 남의 신세 지고 다니면서 온갖 빈축과 동정을 샀다. 그래놓고 그걸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뻔뻔함도 지녔었지.
그런 내가 너를 동정해? 나는 동정 때문에 손해 볼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야.“  

오기와 자존심으로 화난 꼬마의 고개가 수그러든다.
고개를 숙인 꼬마는 다 식어버린 카레를 입에 퍽퍽 집어넣으며 말없이 그릇을 비우고만 있었다. 나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아아 그 좋았던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되었담. 혹시 꼬마와 나 사이에는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에서 핀트가 어긋난 게 아냐?

“......미안해. 괜히 화내서.
그냥 형이 너무 잘해주니까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래.
말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놀러갈 때도 형이 다 돈 내고 만날 얻어먹기만 하는데 여기서 더 신세를 질 순 없어.“

부담된다는 말에는 한숨을 쉬었다.

“자식, 넌 아직 어린애가 뭘 그리 생각이 많냐?
그래그래 할 수 없지. 나도 그냥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해본 소리야. 내가 원래 남의 집에 잘 얹혀살아서 말이지...”

솔직히 엄청나게 서운했지만 확고한 꼬마의 태도를 보니 더 권유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치현아, 이 형은 상처받았단다. 내가 뭘 해준다고 했을 때 싫다고 한 녀석은 처음이란다.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실례라는 거 모르니?
고개를 숙이고 먹는 꼬마의 고운 가마가 눈에 들어온다. 어딘지 모르게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 분위기가 어둡다.  
침묵이 불편해서 시답잖은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고 억지로 웃긴 이야기를 해봤다. 꼬마도 나름 노력하는 내가 안쓰러운지 처음에는 묵묵히 밥만 퍼먹다가 피식피식 웃으며“와, 아저씨 개그”하며 놀린다. 아아 그래도 분위기는 바뀌었으니 다행이구나.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을까.





*                *                *





최이사의 호출이다. 요즘 들어 상사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아주.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책상 앞에 다가서자 이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었다. 잠시 숨을 고르는지 눈을 감던 이사는 의자에 기댄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직원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아닌데...나는 이사의 거만한 태도에 기분 상하기보다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지난번 제안했던 이야기 말인데요. 이미 끝난 일이지만 다시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며 이사가 말했다. 안경너머의 눈 밑은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서 매서운 눈동자만 아니라면 상당히 초췌한 인상이다. 한번 거절한 일이 자꾸 이사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때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제 와서?

“김서경씨. 나에게 거짓말을 했더군요.”

검은 뿔테 안경너머의 두 눈은 찌를 듯 매서웠다.
제기랄, 앞으로 안경 쓴 인간은 정나미가 떨어질 것 같다.  

“지난번에 제안한 프로젝트 말입니다. 제가 얘기했을 때 처음 듣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그랬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는데도 눈치 못 채겠느냐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본다. 나는 묵묵히 있었다. 그 일에 관해서라면 이미 의사를 밝혔고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내가 아무 말 없자 이사는 손가락을 깍지 끼고 오른 손 검지손가락을 까딱까딱 거렸다. 저것은 버릇인가? 한참동안 골똘히 생각하던 이사는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본론부터 말하지요. 권이도씨가 제게 연락했습니다.”

또 권이도다. 그 자식은 대체 포기할 줄을 모르는 거냐? 그만큼 망신살 뻗쳤으면 순순히 물러날 것이지 왜 또 수작이야 수작은? 나는 권이도라는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이사의 낌새가 수상하다. 가늘고 긴 눈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고 나는 그 순간 굉장히 불쾌해졌다. 이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번 일에 김서경씨가 빠져선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도무지 모르겠군요.”

끈질긴 놈. 나한테 수작부리는 게 안 되니까 회사를 이용해 먹으려는 건 알겠지만, 똑같은 수법을 자꾸 쓰면 오히려 지루해진다는 걸 왜 모르나. 제 딴에는 이번 계획이 나를 향한 회심의 일격이었나 본데 내가 너무 쉽게 차버려서 분했나 보다. 꼴사납다 권이도.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시지.

“김서경씨와 권이도씨, 게이바에서 만난 사이라고 하던데요.”

에?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서 자세한 사업구상까지 하게 되었고, 애초에 타겟기업을 찾고 있던 상대팀은 마침 잘됐다 싶어서 저희 IL과 손을 잡게 된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제 로비가 먹혀든 줄로만 알았는데 뒤에서 그런 협의가 오고 간 줄은 몰랐지 말입니다.”

잠시 귀가 멍했다.
에어컨이 미친 게 분명하다. 등줄기로 싸늘한 한기가 치닫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산소가 부족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부서진다.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이해를 잘못했나? 저거 한국말 맞는데, 이사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제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는지 상상이 가십니까?”

노려보는 이사 앞에서 허탈하게 웃었다. 기가차서 말도 안나 온다. 나는 어깨로 한숨을 쉬며 이사에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연기해보였다. 속으로는 심장이 쾅쾅 울렸지만 여기서 당황하면 나는 정말 동성애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이것 참, 그 친구 어이없군요. 저를 호모로 몰다니...그건 권이도씨의 거짓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상대팀도 이번 일을 하면서 기업선정에 신중할 텐데 겨우 게이바 같은 곳에서 만난 말단 대리의 말만 믿고 IL과 손잡기로 하다니 말도 안되잖습니까. 그런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하는 걸 보면 제게 어지간히도 쌓인 한이 많았나봅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심기를 어지럽게 해서......”

“물론 저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정말로 황당한 친굽니다.”

“처음에는 저쪽 팀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권이도씨는 믿기 싫으면 폴리곤이란 게이바에 가서 서경씨의 사진만 보여줘도 다 알거라고 하더군요.“

문득 가슴에 차가운 비수가 꽂히는 느낌을 받았다. 위가 쓰리다. 점심으로 먹은 갈비탕이 역류할 것 같은 구토감이 들었다.

“부하직원의 결백을 확인하기 위해 게이바에 찾아가야 한다니,
......김서경씨, 내가 그런 짓까지 해야 합니까?!"

소름이 죽 끼쳤다.
뱀 앞의 쥐처럼 꼼짝도 못한 채 오금이 저렸다. 당장이라도 이사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집념이 강한 사이코 변태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최이사에게 직접 커밍아웃 할 정도로 또라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얗게 얼어버린 나를 이사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피가 통하지 않아 얼굴 근육이 마비되어 버렸는지 입술을 움직이기가 힘들다. 저렇게 확고한 표정의 이사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도 씨알이나 먹힐까?
실제로...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이사님! 정말로 지난번 이사님께서 저를 불렀을 때 이번 일을 처음 안 겁니다!”

등 뒤로 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사실엔 에어컨도 켜져 있지 않은데 마치 한여름처럼 땀이 흐르고 한겨울처럼 오한이 들었다.
김서경, 정신 차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안고 어떻게든 저 끔찍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이제 와서 노말 인척 하는 건 소용없을 것 같다. 최이사는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필요하다면 폴리곤에 가서 확인할 사람이다. 그날 폴리곤에서 나와 권이도가 같이 있었다는 건 오너가 알고 점원이 알고 폴리곤의 게이 모두가 안다. 이러나저러나 이사에게 신임을 잃는 것이 마찬가지라면 적어도 내가 회사의 주식을 가지고 장난치려고 했다는 계획을 꾸몄다는 의혹만은 풀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권이도와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 그건 차마 같은 게이로서 만났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나는 게이바에서 만났지만 안 좋게 헤어졌습니다. 이건 단지 그자가 제게 앙심을 품고 고의로 의심을 덮어씌우기 위한 겁니다!”

설마 아웃팅 당할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권이도 자식, 대체 뭐하자는 짓인가. 같이 죽자는 거냐? 대가리는 이성적인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새끼는?! 나는 회사에서 잘리고 너는 팀에서 퇴출당하면 그것참 보기 좋겠구나 이 망할 자식아--!!!

“일단 동성애자임을 부인하지 않는군요.”

눈꺼풀 위로 피곤함이 드리워진다.
이젠 이사와 눈 마주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나 스스로의 피곤함 때문에라도 눈을 들어 시선을 맞추기가 힘들다. 우습다. 일개 증권회사 직원이 나를 회사에서 쫓아낼 방법이 아주 없지만은 않았구나.

“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어금니를 깨물고 테이블 위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탁자에는 「대표이사 최 현 욱」이라고 한자로 쓰여 있는 명패가 있다. 이 사람, 어떤 사람이더라? 제길, 깐깐한 완벽 주의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호모포비아인지 인권주의자인지 알게 뭐냐.
최이사의 표정엔 동요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 했을 뿐이라 별로 놀라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이사의 침묵이 상당히 길었다. 나에 대한 처분 때문에 고민하는 걸까. 아니면 열 받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걸까.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김서경씨의 성적 기호가 아닙니다.”
  
오랜 침묵 뒤에 이사가 말문을 열었을 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설령 권이도씨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저쪽 팀에서 우리 회사와 손을 잡은 것에 서경씨가 일조한 셈이니 크게 징계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김서경씨, 일의 윤곽을 알고 있는 사람이 외부로 새면 매우 곤란하다는 거 알지 않습니까. 서경씨 때문에 계획을 수정할 순 없습니다. 서경씨는 몰랐다고 말하지만, 그걸 제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

“김서경씨는 한번 이 일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권유가 아니라 강요가 되겠군요.”

내가 멋대로 이 일을 인터넷에 흘리기만 해도 이 계획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요주의 인물인 셈. 잘라서 후환을 남기느니 내막을 알고 있는 나를 팀에 합류 시켜서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속편하겠지.

“서경씨, 비즈니스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입니다. 그렇죠?”

“네.”

“영어를 몰라도 외국인 바이어들을 상대하고, 때로 싫은 사람과도 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여야 할 때가 있어요. 안 그렇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이사가 안경을 치켜 올렸다. 나를 바라보는 눈은 절대 「게이 부하직원을 인정하는 포용력 넓은 상사의 눈」이 아니다. 쓸만한 도구를 보는 눈. 혹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어야 할 물건을 보는 눈.

“어느 쪽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이 같은 게이이고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군요. 권이도씨가 서경씨와 일을 꾸몄다는 말이 거짓이라도 어쨌든 그가 서경씨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 같습니다.   
그렇다면 서경씨가 저쪽 팀의 정보를 권이도씨에게서 얻을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사님, 그거 상당히...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인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서경씨를 굳이 우리팀에 들이는 메리트가 없습니다. 필요한 인력이야 다른 쪽에서 구해오면 그만이니까요. 서경씨는 자신이 권이도씨와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한 이유야 이해는 가지만...솔직히 나는 아직도 서경씨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어요.
그 잃어버린 신뢰를 찾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나요?“

이건 마치 여직원에게 미인계를 이용하여 저쪽 업체의 정보를 빼오라는 것과 같다. 어지간히도 신용을 잃었거나, 어쩌면 이사의 마음속에선 이미 나를 관계자 외로 치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치겠다. 이사는 권이도가 내게 앙심을 품고 저지른 일을 나에 대한 관심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 원수를 대체 어떻게 갚아야 내 속이 풀릴까 권이도 응?

“나쁘게 생각 마십시오 김서경씨.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팀에 괜한 분열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까요.
이번 일만 성공하면 과정이야 어떻든 서경씨에게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만일 서경씨가 영 내키지 않아 거절한다면, 안타깝지만 어떤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에 손을 대시는 겁니까......”
  
참아라, 지금 이사한테 화내서 어쩌겠다는 거야?

“이런 수작 부리지 않아도 외부에서 자금 들어올 구멍은 충분합니다. 이사님께서 호언장담하셨듯이 향후 2~3년 내에는 동종업계에서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시는 일은 개인 돈주머니만 채우는 일 아닙니까? 제가 이사님을 잘못 본 건가요?”

아아 이노무 주둥아리, 곧 죽어도 지는 건 싫어서 멋대로 질러버렸다.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다. 이미 부하직원으로의 공손함은 사라진지 오래, 자를 테면 잘라 봐 하는 심정이었다. 검은 테 안의 눈은 뱀처럼 가느다랗고 쌍꺼풀이 없다. 그 안의 작은 눈동자가 나를 위 아래로 훑더니 얇은 입술이 한쪽 위로 치켜 올라간다.

“그렇군요. 서경씨는 아직 자세한 사항을 모르지요.”

버럭 화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번 주말에 교육에 들어가도록 하지요. 다음 주에 저쪽과의 미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우리 사정을 알아야 하니까요. 혹시 선약이라도 있나요?”

마치 내가 팀에 들어오는 게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이사가 말하자 나도 모르게 없다고 대답해버렸다. 당장 모가지가 날아갈 각오를 하고 있던 터였는데 갑자기 일이 술술 진행되는 바람에 적응하지 못했다고나 할까...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니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주말에 봅시다.”

이사는 더 이상 나를 추궁하지도 않았고 힐난하지도 않았다. 매우 화가 났을 줄 알았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어쭙잖게 이사에게 큰 소리 쳐댄 것 치고는 결말이 나쁘지는 않지만 이렇게 두루뭉수리 넘어갈 줄은 몰랐다. 내 성적 취향까지도 이용해 먹으려는 이사에게 약간 정이 떨어졌을 뿐.
  
고작 몇 분 동안 지옥을 오락가락하던 나는 이사실을 나와서 허공 한 번 보고 바닥 한 번 보며 한숨을 쉬었다.





*                *                *





헤븐은 폴리곤과는 큰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클럽이다. 이곳이 폴리곤과 다른 것은 여성들의 출입이 많고 비교적 젊은 애들이 자주 오는 곳이며 노는 물도 더럽기로 유명하다는 점이다. 그런 곳에 오늘 찾아온 이유는 내 기분도 더럽기 때문이다.
몇 주 동안 금욕한 몸은 잔뜩 쌓였고 최이사에게 망신살이 뻗친 스트레스는 드라이브나 간단한 산책으로 풀기에 턱 없이 부족하다. 격렬한 운동, 격렬한 섹스.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이 지저분한 기분을 날려버릴 만큼 화끈한 무엇이었다.

“혼자 오셨어요?”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어린애가 작업을 걸어왔다. 몸매는 좋은데 역시 너무 어린애는 좀...애매하게 웃으며 일행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벌써 몇 번째 작업이 걸려오고 있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어서 나이도 잊고 스테이지에서 몸을 흔들었다. 내가 추는 춤이래야 바닷물에 흐느적거리는 해초 같은 춤이지만 다들 파트너에게 신경 쓰느라 그런 걸 흉 볼 사람은 여기에 없다. 명멸하는 라이트,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음.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감각과 함께 스트레스도 부숴버리는 착각을 심어 주는 것이 폴리곤에서 얻을 수 없는 이곳의 장점이다.

꼬마가 자주 오는 곳이기도 하지.   
이런 곳에서 치현과 마주치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내가 하룻밤 상대로 꼬마를 찾아가지 않은 것은 꼬마와 형 동생 하며 오순도순 노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의 나는 기분 최악. 원나잇을 하자고 꼬마를 찾아갈 순 없는 노릇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왔다는 것은 은근슬쩍 꼬마와의 만남을 기대했던 걸지도.

아아 모르겠다. 성질나 죽겠는데 여기까지 와서 이것저것 생각하며 내 심리상태에 대해 고찰할 여유는 없다. 난 그냥 난잡하게 놀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 내 비록 30이 넘어가는 나이지만 아직 젊은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는 체력과 얼굴이라고 자부한다. 헤븐의 나이대가 낮아봐야 20대 중후반도 자주 오는 곳이다. 그 정도 나이는 커버 가능한 몸이라 이 말씀이지.

사람들 틈에 파묻혀 춤을 추고 있자니 누군가가 뒷덜미에 대고 치근덕댄다. 이것저것 따지다가는 아무래도 공칠 것 같아서 이번에 작업 거는 녀석은 얼굴이나 나이를 따지지 말자고 생각했다. 질척한 혀가 목줄기를 훑고 지나간다. 그 짜릿한 기운에 하체가 벌써 푸르르 떨린다.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양 옆구리로 기어들어와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하아....”한숨이 탄성처럼 흘러나왔다.

“이층으로 올라갈까요?”

팔을 올려 뒤에 있는 상대의 고개를 슬쩍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얼핏 본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꼬마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어린애. 입술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평일 밤인데도 사람들은 흥에 취해 있었고 나는 쾌락을 찾고 있었다.
   




어두운 실내에선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이제 20살이 넘었을까 말까한 아이는 어딘가의 센터에서 곱게 선탠한 몸과 일부러 만든 몸을 하고 있었고, 그런 덩치와 맞지 않게 매우 유순했다. 룸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기며 헬스장에서 단련했음직한 가슴 근육을 손으로 주무르고 온 몸을 밀착시켰다. 꼬마보다 덩치가 큰 그는 내 키스에 어설프게 응수하다가 이내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비틀거린다. 아가야, 벌서부터 힘 빠지면 안 되지. 소파에 눕히지도 않고 벽에 밀어붙여 스판 재질로 몸에 달라붙는 상대의 티를 벗겨 올렸다. 상대의 가슴에선 강한 체취가 났다. 짙은 갈색의 유두를 이빨만으로 애태우고 혀끝을 세워 복근 라인을 따라 배꼽 밑까지 핥아 내렸다. 머리 위에서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 버클을 풀지도 않았는데 내 숨결이 배꼽근처에서 느껴진다는 것만으로 상대는 빳빳이 서 있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상대의 지퍼를 내리며 브리프 위로 불쑥 솟아 오른 그 것을 입술로 오물오물 마사지했다.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손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흐으응...흐으으......”

비음이 심한 상대다. 우는 것처럼 간헐적이고, 때론 거칠고 낮은 신음은 등줄기를 오싹오싹하게 했다. 나는 만지는 대로 반응해주는 상대가 좋다. 이 청년은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아앗, 하앗, 빨리, 빨리 어떻게든......”

좀 더 브리프 위에서 혀로 장난질 치고 싶었지만 안달을 하며 하체를 내 얼굴에 비비려는 어린애의 조급함에 혀를 찼다. 그래, 나도 급하단다. 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더 즐거울 것 같지 않니? 그러나 흘끗 바라본 표정은 느긋하게 전희를 즐기기엔 무리가 있어보였다. 안되겠다. 일단 한발 뽑아 줘야지.
브리프를 벗기고 징그럽게 크기만 한 성기를 한입 가득 물었다. 그리고 강하게 입안을 조이면서 빨아들이던 순간 상대의 하체가 탁 튀었다. 아차, 할 틈도 없이 사정한 상대 때문에 입안도 얼굴도 엉망이다. 이런, 이런, 이게 무슨 짓이니 아가야?

“미, 미안해요. 미안. 저기..정말......”

당황한 청년은 제 바지가 무릎에 걸려 있는 것도 모르고 테이블 위의 휴지를 가져오려다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엇차, 하며 그 몸을 겨우 받아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받은 김에 그대로 소파 위로 눕히고 녀석의 다리를 구속하는 바지와 브리프를 전부 벗겨버렸다.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저는 시작도 못했는데.”

얼굴과 입에 흘러내리는 정액을 티슈로 닦으며 청년을 내려보았다. 덩치와 맞지 않게 새빨갛게 익은 얼굴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앞으로의 행위에 기대를 가득 담고 있었다. 몸만 커다랗지 크고 순한 눈이다. 빙그레 웃으며 상대의 나머지 옷가지를 벗겨내고 내 옷도 마저 벗으려 했다.

“저기......옷 벗지 말아달라고 하면 이상한가요?”

큼지막한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며 쑥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 맨 상대는 드물어서요...그냥 그대로 입고 있어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알몸은 이렇게도 탄탄하면서 뺨을 붉게 물들이고 수줍게 바라보는 표정이라니...17세 소녀도 저런 표정 짓지는 않을게다. 나는 다소 흥미로움을 느끼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넥타이는 거슬리니까 풀어도 되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부끄러워하는 상대의 상체를 쓰다듬었다. 맨살이 공기 중으로 노출된 몸은 미약하게 닭살이 돋아 있었다. 가슴을 애무하고 옆구리와 훌륭한 복근을 마사지 하면서 천천히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를 움칠 떨며 “아...”하고 신음을 내는 상대의 표정은 이미 쾌락에 열중한 상태다. 가능하면 맨살과 살을 부대끼고 땀을 흘리고 싶었는데......상대가 이다지도 좋아하니 그 정도는 감수 할 수 있을 것 같다. 방금 한 발 빼내고도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드는 흉기는 역시 젊은 애다.
꿈틀거리는 복근의 굴곡을 혀로 확인하며 등줄기의 척추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었다. 손가락이 척추와 척추의 마디를 훑어갈 때 허리를 튀며 가늘게 경련하는 튼튼한 몸은 끊어질 듯 말 듯한 신음을 흘리며 점차 두 번째 사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엉덩이의 단단한 근육을 두 손으로 잡아 뜯으며 게걸스럽게 그 탄탄한 몸에 탐닉했다. 오랜만의 섹스다. 저 권이도와 불쾌하게 끝낸 뒤로는 바빠서 제대로 풀지도 못했다. 마침 이렇게 솔직하고 튼튼한 상대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조금 기분이 격해져서 거칠게 상대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짓이겼다. 허리가 바들바들 떨고 있다.

“아하앗.....아흣....흐으응..으응.....”

익숙하게 손가락 두개를 삼킨 항문엔 네 개까지도 끄덕 없이 넣을 수 있었다. 비음은 너무나도 리얼했고 한껏 벌린 다리와 온 몸의 근육이 움틀거리는 상대의 몸은 저질스러워서 오히려 음탕한 기분을 부채질한다. 섹스할 땐 이성을 버리고 온갖 추한 모습을 보여야 더 불타오를 때가 있다. 이 어린애에게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해 거칠어지기엔 딱 맞는 상대다. “단번에 넣어주세요...” 울먹거리면서 조그맣게 말하는 청년의 대담함에 놀라면서도 등줄기부터 짜릿짜릿해져 오는 오싹한 전율에 탄력을 받아 그대로 밀어붙였다.

“아아아~~~!!! 아아아아앗!!!!!”
      
요란한 비명. 하지만 욱신욱신 조이는 내부는 엄청나게 뜨거웠다. 미간을 찌푸리며 호흡을 고른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린다. 그래, 이런 걸 원했단 말이다. 잔뜩 휜 가슴에는 유두가 뾰족하게 돋아 있었다. “흐으읏! 더! 더 세게! 더 거칠게 해...아읏!!”하고 소리를 지르는 청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유두를 이빨로 씹고 허리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꺄아아아-하는 새된 비명소리는 포인트에 적중한 듯싶다. 나도 모르게 열중해서 퍽퍽 치대고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한 채 그를 끌어안아 행위에 열중했다. 상대는 그래도 부족한지 더...더...를 외치며 내 허리에 두터운 다리를 감고 자신의 엉덩이에 내 것을 마찰시켰다. 깊숙이 넣고 뺄 때마다 마치 새로운 부분을 건드린다는 듯 청년은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튀었다. 그리고 드디어 상대가 두 번째 사정을 했을 때, 성기가 통째로 저며지는 아찔한 감각을 느끼면서 참고 있던 욕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웨이터를 불러 술과 안주를 시키고 룸 입구에서 내가 직접 받아와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아직도 알몸으로 누워 있는 상대를 웨이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섹스의 여운으로 나른하게 눈을 감고 있던 청년의 얼굴을 감상하며 임페리얼의 마개를 열었다. 이 대중적인 위스키가 그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면서 술잔을 권유하자 눈을 반짝 뜬다.

“자상하시네요.”

술을 권유한 게 자상한 건가? 나는 애매하게 미소 지으면서 장난치듯 안주도 집어서 입에 넣어줬다. 킥킥 웃더니 내가 넣어준 감자튀김을 오물오물 씹는다. 천천히 입술 안으로 사라져가는 감자튀김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다 빠르게 덮쳐 이빨로 끊으며 내 입 안으로 넘겼다. 눈을 휘둥그레 뜨는 청년을 보며 우물우물, 나도 같은 감자튀김을 씹었다.

“줬다가 뺏어 먹어도 자상하다고 말할 겁니까?.”

웃으며 말했다. 청년은 나를 위 아래로 훑으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은근하게 다가와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큼지막한 손바닥이 위스키를 넘기는 내 목 젖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가슴팍을 주무른다. 그리고 귓가에 한숨을 불어 넣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래쪽 구멍으로도 먹을 수 있는데......그 때도 입으로 끊어서 드실 건가요?”
   
  갑자기 얼굴에 피가 몰려왔다. 어린애 주제에 굉장한 말을 하잖아? 목덜미까지 붉어졌지만 낮게 웃으며 벌거벗은 상대의 엉덩이 살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아...”하는 탄성소리가 숨 넘어갈 듯 묘하다. 이렇게나 건강한 몸을 하고 있으면서 애교도 상당하다. 더구나 은근슬쩍 비벼오는 몸은 벌써 2차전을 준비하는 듯 달아올라 내 쪽이 더 당황스러워졌다.
  
“급할 것 있습니까.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천천히 하지요.”

아쉬운 듯 술잔을 받아 들고 내 얼굴을 살핀다. 포크로 사과도 찍어 주었다. 홀짝홀짝 술을 마시던 그는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형, 남치현이랑 사귄다면서요?”

의외의 이름에 마시던 자세 그대로 잠시 멈췄다.

“하지만 이런데 오실 정도면...싸웠나 봐요?
그 녀석이 좀 내숭을 많이 떨긴 해요. 은근히 매달리는 것도 있죠.
그런데 정말, 둘이 사이 안 좋아 진거에요?”

“치현이를...아십니까?”

“에~이 노는 물이 다 거기서 거긴데 왜 모르겠어요. 형은 오늘 헤븐엔 처음 인 것 같은데...
아까 스테이지에서 형 봤을 때 내가 관심 가졌더니 친구들이 그러더라구요. 형이 남치현 깔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청년에게 악의는 없는 것 같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치현이와 나 사이를 단정 짓는 것을 보니 단순히 아는 녀석의 애인이 이런 곳에 혼자 와있다는 사실에 대한 궁금증, 그 이상은 아닌 걸로 보인다. 그보다 나와 치현이가 그런 관계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우리 둘이 함께 헤븐에 온 적도 없고 폴리곤에서 만난 것도 한 번 뿐이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런 헛소문이 퍼진 거야?

“혹시, 치현이랑 그 친구들 많이 친한가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말도 마요. 사이가 얼마나 나쁜데요.
남치현이 좀 변덕이 심하다면서요. 침실까지 가서 그대로 난투극이 된 적이 한두 번 아니라던데.....
아, 이런 얘기해도 되나 몰라. 근데 정말로 깨진 거예요?“

깨지긴,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것을 자기 멋대로 해석했는지 청년은 알몸뚱어리 그대로 늘어져 “흐음...“하고 혼자 수긍해버린다. 어딘가에서 내가 치현과 놀러다닌 것을 목격한 건지도 모른다. 꼬마가 잘 가는 홍대 라이브 하우스에서 봤을 수도 있고 폴리곤 옆동네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다. 이것 참, 서울은 좁다니까.

“남치현의 상대라기에 꽤나 거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의외로 친절하시네요.”

탄탄한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위스키를 홀짝이는 그는 내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자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내가 적당히 응수해준 탓도 있을 것이다. “거칠게 해주기를 바라나요?”하고 능글맞게 웃기도 하면서.

“아, 나 거친 거 좋아해요. 남치현보다는 튼튼할 걸요. 걔랑은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치현이에 대해 잘 아나 봐요?”
   
“그냥 애기 몇 마디 해본 정도? 다른 건 친구들한테 듣기만 했지 잘은 몰라요..”

말은 잘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몰랐던 꼬마에 대한 사실을 몇 가지 건질 수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유혹에 넘어가고, 일단 유혹에 넘어가면 간도 쓸개도 다 빼주는 녀석이라는 걸. 그리고 요즘 들어 SM에 관심을 보인다 했던가......
치현이 다른 이들과 얽히는 모습을 상상하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직 어리니까 자극적인 것에 끌리는 건 당연하다며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그렇다고 나 역시 이렇게 난잡하게 놀아나면서 훈계하는 꼴도 우습다.

복잡하게 얽힌 잡념의 실타래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이 애교만점의 친구가 원하는 대로 거칠게 안았다.


  


*                *                *





주말동안 프로젝트에 대한 집중 교육을 받은 나는 이 일에 사장과 최이사 그리고 박전무가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비로소‘서경씨는 아직 자세한 사항을 모르지요.’라고 했던 이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경쟁사인 마크 플랜이 우리 회사를 인수합병하려 하고 있었다.
마크플랜은 동종업계에서 비교적 연혁이 오래 된 회사로 우리 IL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얼마 전 태성그룹에서 이쪽 분야에 뛰어 들면서 많은 업체들이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회사이기도 하다. 우리 회사는 대기업에 대항하기 위해 신상품 개발과 서비스영업의 확대, 해외 사업을 확장하고 있지만 덕분에 부채비율이 상당히 늘었다. 그리고 마크플랜은 그런 우리를 먹는 쪽으로 결정을 본 듯하다.

몇 년 전에도 모 회사에게 공격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최이사 및 기타 경영진들의 대처로 경영권이 넘어가는 것은 겨우 막았는데 최이사는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이번엔 아예 마크플랜을 우리가 인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 사장이 자금적으로 무리라고 했지만 그 때 최이사가 끌고 들어온 게 권이도 측이다.

몇 명의 외국인으로 이루어진 저쪽 팀의 대외적인 신분은 외국계 사모펀드 워레스. 여기에 D증권사 연구원인 권이도와 증권사 브로커, 펀드매니저, 그리고 외국인 사업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영어엔 젬병인 사장 대신 최이사와 박전무가 주로 그들과 접촉하면서 역M&A(인수합병)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버린 것이 나였다.





박전무와 함께 서울 시내의 어느 고급 호텔을 찾았다.
예약한 방에는 이미 권이도와 그 일행이 와 있었다. 보자마자 ‘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음흉하게 비웃을 줄 알았지만 권이도는 나보다는 부장에게 먼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권이도와 함께 온 외국인도 부장에게, 그리고 내게 악수를 청했는데 권이도 보다는 오히려 이 쪽이 더 나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아닌가.
  
“Mr.김?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같이 일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은 두툼했고 홍채가 고스란히 보이는 엷은 파랑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외국인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눈앞이 암담해진다. 내가 영어회화를 해본 지가 언제더라?
애매하게 웃으며 경직된 분위기에서 룸서비스로 저녁식사를 시켰다. 외국인과 권이도는 간단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고 나와 박전무는 예, 예, 하면서 대화에 이끌려갔다. 권이도 자식, 전무 앞임을 감안해서인지 내 쪽엔 눈길도 안 준다. 다행이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느물대면 어쩌나 고민했었다.
체구가 190에 달하는 금발 외국인을 앞에 두니 후덕한 박전무가 어린애로 보일지경이다. 대화에 꽤나 애 먹을 줄 알았는데 Mr.앨런은 한국어를 잘하는 편이었다. 전무 말로는 일상 대화는 한국어로 하다가 본론에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영어가 섞여서 튀어 나온댄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회의로 들어갔다.





노트북 두 대가 현란한 차트를 액정에 뿌리고 있었다. 우리 회사가 기업설명회 때 제시했던 자료들은 통째로 재검토 되었으며 주식회사 마크플랜의 과거 3년간의 손익계산서, 대차대조표, 현금흐름, 자본지출내역, 부채상황에 대한 보고서가 테이블 위를 메웠다.   
권이도는 IL의 주식이 상장 이후에 보인 투자자들의 반응을 분석하여 필요한 정보를 지적했고 Mr.앨런이 워레스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Mr.앨런과 박전무는 끊임없이 충돌했으며 박전무를 거들기 위해 나는 서류의 산에서 필요한 부분을 골라내어 근거 자료로 제시했다.

“상장이후 공모가의 150~180%선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주가는 마음대로 시세조종하기에 만만한 액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표치까지 주가를 올리려면 초반의 자금압박이 너무 큽니다. 지금 IL의 지분은 너무 분산되어 있고 일반 투자자들의 비율이 높습니다. 먼저 그쪽의 지분을 우리에게 양도하면 1차 매집시기에 어느 정도 물량을 확보해서 시세조종하기에 좀 더 용이할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기엔 때가 일러요. 우선은 마크플랜의 지분을 매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쪽 지분이야 언제든 거래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직은 저 쪽에서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공개매수를 시도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이 먼저예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타협을 보고 있지만 사실 오늘의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다. 최종 결정은 최이사와 저쪽 팀의 우두머리가 만나야 하는 거고 우리는 그저 쌍방의 입장을 전하는 것뿐이다. 나는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권이도에 대해선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그것은 권이도 역시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시간은 새벽 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거의 4시간 동안 계속된 입씨름은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고 결국 상호간에 양보할 수 있는 한계를 설정 한 뒤 끝이 났다. 어지럽다. 박전무는 결과가 만족스러운지 핸드폰으로 최이사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최종 결정은 이번 주말에 다시 한번 모이는 걸로 하지요.
장소와 시간은 차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 집에 가면 3시, 고작 서 너 시간을 잘까 말까다. 파김치가 된 몸을 일으키다가 슬쩍 권이도를 바라보니 이 작자에게선 지친 기색을 찾아 볼 수 없어서 조금 분했다. 하지만 미팅을 진행하면서 권이도의 안목에는 많이 놀랐다. 새삼 사람이 달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봤자 변태다.

“이곳에서 주무실 분은 없습니까? 전 여기서 좀 쉬었다 가려고 합니다만.”

권이도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전무의 눈치를 살폈는데 박전무가 한숨을 푸욱 쉰다.

“말도 말게. 허구한 날 늦게 들어가니까 마누라가 두 집 살림 차린 거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어...”

농담 덕에 권이도는 물론 Mr.앨런까지 빙그레 웃는다. 박전무는 인격 넘치는 배를 출렁이며 양복 상의를 챙겨들었다. 그러다가 나를 보더니 “아!”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김대리도 한숨 자고 가지 그래. 자네 집보다는 여기가 회사에서 가깝잖은가.
마침, 권연구원과는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이야~ 이거 정말 굉장한 우연 아닌가.
지난번 싸운 것은 사내대장부답게 훌훌 털어버리고 오랜만에 회포라도 풀어.“

껄껄 웃으며 악의 없이 말하고 있지만 나는 예의 바른 척 미소 짓고 있는 얼굴에 금이 가는 줄 알았다. 박전무야 나와 권이도의 관계를 모를 뿐만 아니라 아직도 내가 저 인간과 고등학교 동창인 줄 알고 있다. 아 빌어먹을, 얼굴에 화끈 열이 오른다.  

“그럴까요? 집에 갔다가 다시 회사 올 생각하니 차라리 여기서 쉬는 게 낫겠군요.”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전무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동창을 만났으니 사소한 지각은 봐주겠노라고 호언을 한다. 회식이나 사내 단합대회 같은 것에 열을 올리는 전무이니 만큼 사업 파트너와의 친밀도 유지를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장과 전무는 내가 이 일에 합류하게 된 것이 권이도와의 인맥을 통한, 양 팀의 친밀도 생성으로 알고 있다. 아주 돌아버릴 일이다.

박전무의 순진하고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먼저 복도 밖으로 보내자 이번엔 Mr.앨런이 가방을 챙기며 떠날 준비를 한다. 나는 예의상 쉬고 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러자 이 외국인, 눈이 함지박만큼 커다래지더니 오우 노우~ 하며 양키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Mr.권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요.
깍쟁이 같은 Mr.김 때문에 그가 얼마나 속 썩었는지 알기나해요?”

......뭐시라고?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요.
그가 반한 사람이라기에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역시 억지로 따라오길 잘한 것 같아요.”

“그만둬 네트.”

권이도는 저 덩치 큰 외국인의 어깨를 가만히 손으로 누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Mr.권~”

오 마이 갓.
저게 190의 거구한테서 나올 만한 감탄사냐? 당신 한국말 어디서 배운 거야?
할말을 잃고 멍청이처럼 서 있는 내 눈치를 보며 권이도가 Mr.앨런에게 영어로 속닥거렸다. 영어로 속닥거려도 다 들린다. 적당히 하고 그만 가 봐...그 말에 Mr.앨런의 표정이 느물거리며 웃는다. 알았어, 나중에 꼭 뒷이야기 해줘. 이런 대화를 주고받더니 Mr.앨런은 씩씩하게 손을 흔들며 나가버렸다.

남은 것은 하얗게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나와 난감한 듯한 미소를 짓는 권이도 둘 만 남았다.





*                *                *





“아주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셨더군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음산한 소리로 으르렁대었다.
호텔 자체는 고급이지만 업무를 위해 잡은 방이었기 때문에 내부 인테리어는 편안하고 모던하다. 빈틈없이 조여진 넥타이를 풀며 권이도를 노려보자니 새삼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퍼부어 줄 말도 많고 욕할 거리도 잔뜩이다.
뻔뻔스러운 면상을 보며 제정신이냐고 쏘아 주었다.

“뭐 어떻습니까. 아웃팅 되어도 결국 서경씨의 직장 생활에는 변화가 없지 않습니까?"

“변화가 없다고요? 사람을 회사에서 매장시킬 뻔 해놓고 아주 당당하시군요!
그래, 나를 기어코 이 자리에 끌어내서 즐겁습니까? 좋아요? 아주 신났겠군요. 당신이 공과 사를 구별 못하고 감정대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제대로 실망입니다. 권이도씨!“

권이도는 팔짱을 끼고 안경 중간의 테를 중지로 밀어 올렸다. 그렇게 해서 은근슬쩍 감추는 것은 작은 한숨.

“최이사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김서경씨.”

얘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우리 쪽에 먼저 접촉해온 것은 최현욱 이사 쪽이었습니다.
투자할만한 몇몇 기업을 놓고 마지막 판단을 유보할 때 쯤 최이사가 M&A에 관한 제안을 해 왔고 그 탐색전으로 기업설명회에 갔었죠. 그리고 나는 거기서 당신을 봤고, 이건 기회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동료들을 설득했습니다.
동료들이 IL을 선택한 건 제 권유도 있었지만 최이사의 대단한 열의가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갑자기 사업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가 흐르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집중 할 수밖에 없었다. 권이도가 하는 이야기는 내가 이사로부터, 전무로부터, 사장으로부터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개 대리고 친목도우미에 불과하니까 경영진들이 이런 얘기까진 해주지 않는다.(친목도우미라니 내 입으로 말하고도 민망하다.)

“그런 최이사라면, 직원 중 하나가 동성애자라도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 경우 당신을 무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당신네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마크플랜을 먹으려다 자신의 회사와 마크플랜, 둘 다 우리에게 먹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죠?”

이사들의 고민 그대로다.
철저히 이해득실 관계에 의해 맺어진 이 두 팀은 이익이 더 낫다 싶으면 순식간에 서로를 배신할 수 있다. 우리는 저쪽이 행여나 다른 속셈을 품지 않을까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으며 돈을 대주는 워레스 쪽에선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는 만큼 성과를 낼 수 있을지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거다. 그러니 박전무가 친목에 연연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최이사 입장에선 나를 자르는 것보다 권이도 측과의 연결 끈으로 쓰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몰론 내가 권이도에게 넘어가 우리 IL을 배신할 가능성도 염두하고 있겠지만.

“그것이 멋대로 아웃팅 한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회사에서 잘릴 일은 없을 거란 판단 하에 한 일입니다.
김서경씨, 잘 생각해 보십시오. 도덕적인 측면을 무시했을 때, 이 제안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경씨는 나에 대한 사감정으로 기회를 걷어차려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권유를 한 것이 내가 아니었다면 서경씨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당연히 승낙하지. 설령 불법이더라도.
하지만 이건 이득을 보느냐 아니냐의 차원이 아니야. 이 사람아.

“당신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있습니까?”

권이도가 고개를 숙이자 안경의 광원이 이동한다.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이사를 통해 압박했잖습니까. 남의 프라이버시를 멋대로 부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남을 사회에서 매장시켜버릴지도 모를 일을 하고서도 자기 잘못을 모르고 있습니다.
최이사에 대해 알면 얼마나 잘 아나요? 한국의 50대 남성 중 이익을 위해 호모와 함께 손을 잡을 정도로 합리적인 사람이 몇이나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깨를 씨근덕대며 몰아쳤다. 피곤해 죽겠는데......바짝 곤두선 신경은 흰자위에 돋아난 핏발처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시계의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모던한 인테리어의 룸에 울리고 있었다.
권이도는 시선을 비낀 채 팔짱을 끼고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노려보다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 회의로 혹사를 당한 성대는 약간 쉬어 있었다.

“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최이사가 오히려 당신을 이용할 거란 생각은 안했습니까?”

권이도가 최이사에게 나를 아웃팅 시키면서 본인의 커밍아웃도 한 셈이다. 그걸 최이사가 가만히 놔두었을까? 내가 최이사였다면 나를 팀에 합류시키기보다 커밍아웃한 권이도를 협박해서 워레스의 정보를 빼오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워레스 쪽과 D증권사에 권이도의 성정체성을 알려봤자 이익이 없거나, 아니면 손해라는 거다.

“제가 회사에서 잘리면 최이사는 다른 투자자를 찾아야 할 겁니다.
그 점을 최이사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대단한 자신감이다. 자신이 팀에서 그렇게나 중요한 인물이라는 건가? 고작해야 일개 증권사 직원이잖아. 일단 내가 부르기 편하게 저쪽을 워레스 팀이라고 멋대로 정하고 있긴 하지만 멤버 전부가 워레스의 운영진인 것도 아니다. 결국 이익을 위해 모인 집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데, 전부 미국인인 그들과 권이도 사이에 대체 어떤 유대관계가 있다는 거야?
그런데 문득, 아까 Mr.앨런의 닭살스런 말투를 떠올리고 불안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당신네 팀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네?”

“Mr.앨런씨의 태도를 보니...당신과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뭐? 속을 썩여요? 그쪽 팀한테도 게이바 운운했습니까?”

“아아 그 친구들......”

친구들? 그렇게 허물없이 불러도 될 사이라는 거냐.
그냥 돈 때문에 모인 팀이 아니었어?

“재미있는 친구들입니다. 게이인 친구도 있고, 스트레이트지만 우리와 뜻이 맞아 같이 일하는 친구도 있지요. 그 친구들은 이것이 그냥 제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힘내라고 격려까지 해주던데요.”

잠시 권이도와 교전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입을 멍청하게 벌리고 있었다.
사모펀드라는 게 소수의 투자자들이 모여 만든 사설 펀드이긴 하지만 운영진 일부가 게이와 우호적 노말들로 구성되었다고? 내 일만 아니었으면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어떻게 이런 조합이 탄생할 수 있나. 아니, 그보다 이 자식은 어떻게 그런 놈들과 알게 된 거야? 아아 맞다. 미국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쳤다고 했으니 그쪽 물 좀 먹었다 이건가.

얼이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최초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속된 말로 ‘좆됐다.‘

내 쪽은 최이사에게 언제 깨질지 몰라 전전긍긍 하고 있는데 저 인간은 팀 동료들한테 응원까지 받으면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잖아? 이건 불공평하다! 왜 똑같이 호모라는 게 밝혀졌는데 나만 이래야 되냐구!!!
빌어먹을, 이사가 이 사실을 알면 기염을 토할 일이다.
권이도가 이렇게 술술 부는 것은 이사에게 알려도 상관없다는 의미이겠지만 이걸 정보랍시고 알려주는 것도 우습다. 아무리 최이사가 합리적인 인간이라해도 가뜩이나 나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것 같은데, 마크플랜에게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기 위해 접촉한 투자자들이 그런 웃기는 집단이란 것을 알게 되면 정말 호모포비아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외국인 상대로 성정체성을 가지고 협박할 수도 없고 말이야.

피곤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두덩이를 손으로 주무르며 소파에 앉았다.

“.....굳이 이런 방법을 쓰셔야 했습니까.”

이제 악을 써댈 기운도 없다.
무엇보다 전의를 불태워야 할 권이도가 저렇게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고 비꼬거나 화를 돋우지도 않으니 의욕 상실이다. 이렇게 얌전한 권이도는 첫 데이트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나를 끌어들이고 싶었다면 다른 관계....하다못해 인터넷 동호회에서 만났다거나...
...그런 식의 많은 관계 설정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아웃팅입니까?”

“이미 고등학교 떄 친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얼굴에 민망함이 달린다. 그래, 그건 내 실수였다고. 어설픈 거짓말은 애초에 하지 않는 건데 누가 이렇게 꼬일 줄 알았나.

“최현욱 이사라면 당신과 내가 동창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박전무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만......
최이사란 사람,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꿈쩍도 안할 것 같더군요. 게다가 당신은 그렇게 완고하게 이번 제안을 거절했지요. 그 상황에서, 최이사가 재차 당신에게 권유하게 되고 당신도 결국은 승낙할 수밖에 없을 만큼 임팩트가 커다란 관계설정이 이것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는 새삼스레 권이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의도적으로 표정을 가리는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이제야 그가 초조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람, 안 그렇게 봤는데 은근히 급한 성격일지도. 순간, 장난기와 심술기가 동시에 찾아왔다.

“.....이보세요 권이도씨...”

“......”

“나와 잔 것이 그렇게 좋았습니까?”

안경을 만지던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떨었다.
나는 가능한 거만하게, 턱을 치켜 올리며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다리를 꼬았다. 깍지 낀 두 손은 무릎 위에, 시선은 권이도의 눈동자에 맞추며 비웃었다.

“맺고 끊는 게 확실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봤군요.
굳이 최이사에게 커밍아웃하면서까지 나를 만나려 하다니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까지 저에게 집착하시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 몸뚱어리 때문 같군요. 당신의 이성이 허리 아래에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아니면, 만나주지 않는 것에 대한 앙심입니까?“

“앙심이라니요. 당치않습니다.”

권이도는 내게 가까이 오면서 피로한 동작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매끈한 이마가 드러나도록 앞머리를 바짝 넘겼지만 오랜 시간의 피로 탓에 머리카락이 힘을 잃고 몇 가닥 흘러내린다. 지친 눈동자는 빛을 잃고 흐릿했으며 못 본 사이에 피부도 많이 가칠해졌다.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문득 제안을 거절했던 날 핸드폰으로 들었던 풀죽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아 그 때 저 자는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구나. 지치고 피곤한 얼굴 위에 드리워진 안타까움과...그리고 포기를 모르는 눈동자.

“사과하면...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점점 가관이로군. 이 작자 왜이래?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오늘은 굉장히 저자세다. 사업이야기를 할 때도 내 눈에 모날 짓은 하지 않았고 지금의 대화에서도 무언가 독기가 빠진 느낌이다. 이 자와의 설전을 위해 바짝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고분고분 대답하더니 끝내는 사과를 하시겠다고?
나는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해봐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진지한 얼굴로 시키는대로 한다. 이거 멍멍 짖으라면 짖을 분위기로구나. 어이가 없어서 “별로 진심이 느껴지지는 않는군요.”라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장시간의 미팅에도 쌩쌩하던 그가 몇 분간 많이도 지쳐보였다. 목이 답답한지 하얀 와이셔츠의 단추도 하나 풀고 있는 흐트러진 모습의 그가 내 앞에서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동정이 일기 시작하면서 내가 요 몇 개월 동안 느꼈던 호감이 되살아났다. 아직은 괘씸하단 기분이 가라앉지 않지만 얼굴하나는 확실히 내 취향이라서 저런 표정을 지으면...으음 마음이 약해진다.

“......알겠습니다. 권이도씨. 나와 사과하고 싶은 기분은 충분히 알았어요.”

아직은 화가 덜 풀렸지만 일단은 씻고 싶고 쉬고 싶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며 말했다.

“우선은 우리 둘 다 휴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벌써 새벽이군요. 저는 지금 매우 피곤하기 때문에 한 숨 자야겠습니다.“

마네킹 마냥 침묵하고 있던 권이도는 갑자기 곁을 스쳐 지나가는 내 팔을 움켜잡았다. 미처 숨기지 못한 초조함을 가득 드러내고서 쓰고 있는 안경을 뚫어버릴 듯이 매서운 눈으로 쏘아본다. 그 박력에 긴장한 것도 잠시, “아...”하는 작은 놀람의 탄성과 함께 내 팔에서 얼른 손을 떼는 권이도는 아무래도 스스로의 행동에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대충 훑어보고서 별다른 반응 없이 욕실 안으로 들어  갔다. 뒤에 남아 있을 권이도가 무슨 생각을 하며 내 등을 노려보는지는 알 바 아니다.





호텔에서 밤새 미팅을 한다는 얘기를 전무한테 들었을 때는 올 나이트를 할 각오였기 때문에 미리 갈아입을 속옷을 준비해 오긴 했지만 잠옷까지 가져 온 건 아니다. 호텔에 비치된 가운을 걸치고 물에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니 아직도 와이셔츠 차림 그대로인 권이도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저는 곧 회사 출근이기 때문에 잠시나마 눈을 붙이겠습니다.
그쪽도 이제 그만 씻고 주무시죠.“

이마를 짚은 자세 그대로 눈만 뜬다. 가운차림의 나를 보고 얼굴의 근육이 긴장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린다. “지금 그 차림으로 저를 말려 죽일 생각입니까?” 이를 갈 듯이 내뱉는 어조에 대꾸할 가치도 못 느끼고 침대 위로 몸을 뉘였다. “이 차림이 꼴 보기 싫다면 이불 속으로 사라지죠.”하고 능청을 떨면서.

“씻고 그만 자라니...침대는 하나뿐인데요.”   

“소파에서 자든지 옆에서 얌전히 눕던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 몇 시간 뒤에 출근입니다.”

“......옆에 누워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같은 남자끼리 무슨 내외 합니까? 대충 누워 주무십시오.
그리고 침대가 넓으니 자는 도중 이상한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딴 생각 말고 잠이나 자라는 소리다.
이런 태도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권이도가 과연 어떤 식으로 나오는 지 떠보고 싶었다. 저 자가 나와 화해하고자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사과 한마디에 껄껄 웃으며 잊어버릴 만한 문제가 아니다. 네 녀석이 정말로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으면 자고 있는 나를 건드릴 생각은 않겠지.

등을 돌리고 있지만 뒤에서 대가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아......당신을 모르겠습니다......”

작은 한숨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무심코 침대가 주는 안락함에 녹아 진짜로 잠들어 버렸다.





*                *                *





알람소리도 울리지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새벽까지 회의하느라 피곤하긴 했지만 늘 비슷한 시간에 깨던 신체는 평소와 달리 울리지 않는 알람 소리에 의문을 느끼고 스스로 깨어난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평소 보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조급하지 않다. 호텔에서 회사까지의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도 있지만 전무님이 지각해도 된다고 호언장담한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 그나저나 최이사에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소지를 주고 말았군.
  어차피 이런 걸 예상하고 나를 보냈으니 자기 생각대로 되었다고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른다. 워레스의 운영진들이 게이 및 우호적 노말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사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지만 말이다.

어디선가 쓰디 쓴 냄새가 후각을 불쾌하게 자극했다.

“객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주세요. 비흡연자에게 실례입니다.”

아침부터 맡는 담배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창가에서 손가락에 장초를 하나 끼우고 있던 권이도가 해가 스며드는 유리창을 향해 마지막으로 하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 선 내 말투에 담배를 비벼 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조금 쉰 목소리와 초췌한 얼굴에선 자고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밤을 새셨어요?”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고 난 뒤라 가운이나 이불이 흐트러져 있지만 몸에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지난번처럼 묶고서 이상한 짓을 하지는 못할 거란 예상은 했어도 저렇게 잠 한숨 안자고 담배나 태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다못해 열 받아서라도 호텔 방을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멍청한 물음을 듣자 팔짱을 끼며 창가에 기대어 있던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설마, 제가 잘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이마에 드리워진 피로함은 보고 있는 내가 다 눈가가 뻑뻑해질 지경이다. 어이 이봐, 괜히 미안해지잖아.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여유 되시죠? 룸서비스를 시키겠습니다.”

“눈은 좀 붙이셨습니까? 많이 피곤하실텐데요.”

목소리가 누그러들었다.

“그냥 이것저것 소일거리를 하다보니 시간이 잘 가더군요.”

환한 햇살이 그의 얼굴에 떨어지자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반짝인다. 그제야 나는 이 사람이 방금 씻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다. 증권사는 다른 회사보다 출근시간이 훨씬 이르다. “출근시간은 괜찮습니까?”“사실은 좀 위험합니다.”어깨를 으쓱하는 권이도는 내게 아침 메뉴를 묻더니 호텔 전화로 룸서비스를 시킨 후 양복 상의와 서류가방을 챙겨들었다.

“식사를 같이 못해서 아쉽군요. 그래도 서경씨에게 인사를 하고 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서경씨가 시간 맞춰 일어난 덕분에 지각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장난 아니건만 농담까지 친다. 저 사람 아직 머리도 다 안 말랐다. 언제나 올백으로 넘긴 헤어스타일만 봤는데 덜 마른 앞머리가 이마 위에서 찰랑거리는 건 꽤나 사람을 어려 보이게 만든다. 혹시 내가 깰까봐 드라이기를 쓰지 않은 거야? 미묘한 뭉클함이 가슴을 간지럽게 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요. 운전하지 마시고 택시를 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네. 걱정 마세요. 하룻밤 정도 날 새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안한 마음에 호텔 복도까지 나가 권이도를 배웅하려 했다. 곤란한 표정의 그는 막 면도한 턱을 쓰다듬으며 “그런 차림으로 나오지 마세요.”하고 중얼거린다. 방금 일어나서 세수도 안한 탓에 꼴이 말이 아니지만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얼른 회사나 가보라고 재촉했다.

룸 입구를 나서면서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권이도는 배를 벅벅 긁고 있는 나를 보며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아 늦겠어요. 빨리 가 봐요.”

손을 흔들며 그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지켜보았다. 고작 4시간밖에 못 잤지만 컨디션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곧 룸서비스가 온다고 했으니 천천히 아침식사를 하고 씻고 체크아웃해도 출근시간에는 무리 없다. 여유롭게 객실 안으로 들어오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다녀오겠다고?
그제야 권이도가 잠시 신혼놀이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괘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웃어 넘겼다.  





*                *                *





주말에 있을 워레스의 운영진과의 모임에 나는 나가지 않았다.
M&A를 추진하는 주체는 경영진이지 일개 사원인 내가 아니다. 자료수집이나 기업분석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교섭이나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내 본분 밖의 일이다. 양 팀간의 중요한 자리인 만큼 두 톱니바퀴가 맞물린 사이에 낀 이물질 같은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았다. 가봤자 내가 할 일은 없으니까.
박전무는 팀의 단결을 위해서라도 그럴 순 없다고 했지만, 내가 회사 일에 대해 너무 깊숙이 아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최이사는 내심 당연하다는 눈치이다. 그 태도에 잠시 울컥하긴 했지만 역시 그 자리에 참석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라고......게이와 우호적 노말들로 구성된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어떻게 감당하겠냔 말이다.

내가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권이도가 나중에 따로 연락했지만 초조해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억지로 팀에 합류한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분위기만 망칠 겁니다. 이건 지난번 미팅과는 성격이 다르잖습니까.”하고.
앞으로도 중요한 사안이 결정되는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다. 박전무에게 차후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뜩이나 애매한 위치이기 때문에 몸 사리는 것이 먼저다.

요즘 업무량이 배로 늘어서 야근이 계속 되었다.
매일 출근도장을 찍던 치현이의 집에도 못 가고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했다. 가끔 치현이 한테 전화해서 안부를 묻곤 하지만 요 매정한 녀석은 “요즘 직장인은 다 힘들잖아요. 형도 힘내세요.”라는 깜찍한 소리를 하고 통화를 끝내는 것이다. 보고 싶어 형. 언제 한번 식사라도 하자. 뭐 이런 소리 좀 하면 안 되겠니?

회사 내에서는 벌써 심상찮은 소문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들 윤곽은 모르고 있어서 대부분 헛소문에 불과 했지만“오늘 아침 H경제 봤어? 우리 회사 주가 상승에 대해 공시요구를 했더라고”“웃긴 사람들이야. 주가가 올라도 딴지 거네.”“요즘 주식시장이 다 그렇지. 코스닥시장 봐라 허구한 날 올라오는 게 공시요구다 뭐"
......가끔 날카로운 지적들이 있어서 내 등줄기가 다 서늘해질 때가 있다.
  




슬슬 쌓인 것을 풀어 줄 때가 되어가고 있었다.
성욕이란 놈은 끝없이 차오르는 샘과 같아서 한번 퍼내 줘도 계속 솟아오른다. 대부분의 동물이 일정한 시기에 짝짓기를 하는 발정기가 있는 반면, 인간만이 언제라도 준비태세 완료다. 인류가 이렇게 번창할 수 있었던 건 인간특유의 만년발정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지적 생명체? 사유하는 동물? 아무리 그래도 머릿수 앞에 장사 없다. 약간의 잔머리와 시도 때도 없는 번식과 무한한 욕망으로 지구를 정복한 거다. 인간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주 5일제 회사임에도 즐거운 토요일에까지 회사에 나와야 하는 내 신세가 우울하지만 같이 우울해진 동료 직원들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11시쯤 늦은 출근을 한 성대리가 방울  토마토 화분을 들고 온 것이 화제가 되어 늘어져 있던 사무실 분위기가 한 결 쾌활해졌다.

“성대리님~ 이 화분 웬 거예요?”

“여자친구 줄 거야. 오늘 귀국하거든.”

나른한 토요일 오전, 암울하게 사무실에 앉아 눈 빠지게 모니터를 들여다 본 사람들이 건수를 발견하고 몰려들었다.“어머! 성대리님 애인 있으셨어요?!”“우와 이 사람, 이제까지 그렇게 능청을 떨고 있었던 거야?”“뭐야. 난 일만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할 건 다하잖아.”
나도 성대리가 애인에게 줄 화분이라기에 목을 쑥 내밀고 바라보았다. 가게나 인터넷에서 파는 것처럼 앙증맞고 예쁘지 않은 걸로 보아 직접 키운 것 같다. 여자친구 주려고 키웠다니 역시 애인이 좋긴 좋나 보다.

“그런데 왜 하필 토마토 화분이에요? 꽃다발 같은 것도 좋을 텐데.”

“음, 예전에 장미꽃을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 안 좋은 습관이 있더라고.”

주변 사람들이 성대리의 이야기에 흥미진진해 하고 있다. 꽃가루 알레르기? 안 좋은 습관이라면 꽃다발을 그냥 방치해서 썩게 만든다든가? 라고 서로 한마디씩 하면서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먹어버려.”

“예?”

“한창 바쁠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주변에 있는 걸 아무거나 먹어버린대. 그래서 연구소에 늘 간식을 상비해 두는데 마침 딱 음식이 떨어졌을 때 내가 준 꽃이 보이더래.
배고픈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

그렇게나 소란스러웠던 직원들이 할말을 잃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런 동료들을 내버려 두고 성대리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그 때의 일을 회상하듯 말을 이었다.
  
“별 탈은 없었나봐. 하지만 기왕 먹을 거면 꽃잎보다는 토마토가 낫지 않겠어?”

성대리의 얘기는 무슨 만담 같다. 성대리를 둘러싸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 못한 동료 직원들은 결국 “아하하하 대리님 애인도 참 재밌으시다.”하고 웃어넘긴 듯 하다. 나도 피식 웃었다. 애인이라...만날 원나잇만 찾지 말고 나도 주변에서 하나 골라잡아 진득하게 연애나 해볼까......

문득 권이도와 남치현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에비, 꼬마야 그렇다 치더라도 권이도는 대체 왜 생각난 거냐. 아무래도 지나치게 쌓였나보다. 그 날 밤의 일을 떠올리면서 뒷목이 오싹해지는 것이......아아 안 되겠다. 오늘은 폴리곤에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하던 일을 정리 하던 중 저쪽에선 여전히 만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성대리님, 화분이 좀 크지 않아요?”

“이거 밑에 감자를 심었거든.”

“예? 감자를 왜 심어요?”

“여자친구가 생명공학 연구소에서 일해.
감자뿌리에 토마토 열매는 유전공학의 로망이잖아.”

성대리의 대답에 이미희씨는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고 하이톤의 괴성과 함께 감자 재배법에 대해 짧은 강의를 했다. 졸지에 수강생이 된 성대리는 진지하게 감자 키우는 법을 받아 적고 있었다. 아아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본의 아니게 성대리와 같이 퇴근을 하게 되었다.
성대리는 한손에는 서류 가방을, 한 손에는 덜 익은 방울토마토가 두어 개 달린 화분을 들고 있었다. 그 언밸런스한 모습에 갑자기 레옹이 떠올랐지만 도회적으로 생긴 성대리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쓸데없는 상상을 지웠다. 같이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직접 기른 것 같은데, 차라리 예쁘게 포장 된 선물이 편하지 않아요?”

“음...그런가...”

진지한 성대리는 화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냥, 그 친구가 내가 키운 토마토를 먹고 힘내서 연구에 몰두했으면 좋겠더라고.“

그러면서 뿌리에서 감자가 자라면 더 좋을텐데...하고 혼자 중얼거린다.
하고 많은 먹거리 중에서 하필 토마토를 고른 것은 그녀의 직업을 반영한 것이리라. 말은 안하지만 저 화분은 먹고 힘내라는 의미보다 연구에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겠지.

괜히 부러워졌다.





*                *                *





폴리곤을 향하고 있는데 박전무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에 단합대회 겸 사우나를 가기로 했다는 거다. 이 사람들, 나이 사오십이 되어서 정말 지치지도 않는다. 아니, 신이 난 건 전무와 사장뿐일지도. 아무튼 그 두 분은 팀의 단결을 위해선 술 먹고 속 까지 다 까발리는 추태를 보여야 서로 간에 의리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며칠 전엔 워레스 팀들과 회식을 하며 4차 까지 갔다고 해놓고서는 오늘은 한국인들끼리 몸 좀 불리자는 거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런데 박전무는 “어어? 김대리 온다고 해서 권연구원까지 꼬드겼단 말일세. 자네가 안 오면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니야.”란다. 속에서 악 소리가 났지만 몸이 안 좋아서 사우나는 무리라고 진땀을 빼며 둘러대었다. 최이사의 뱀 같은 눈초리를 받으며 권이도와 누구 갑빠가 더 잘났나를 따지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전무가 못내 아쉬워하며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렸다.

“그런데 어떡하지? 권연구원은 벌써 와 있는데......
솔직히 우리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 틈에 권연구원 혼자 두기도 미안하지 않은가. 싫다는 걸 억지로 불러낸 거란 말일세.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자네가 와서 식사도 하고 잠깐 말상대나 해주라고.”

전무님 일 좀 벌리지 말아요!
할 수 없이 핸들을 꺾어 네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다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사장님과 이사님과 전무님과 권이도, 이 네 사람 틈에 섞여서 모래알 같은 밥알을 씹어 삼켰다. 사장님과 전무님의 흐뭇한 배웅을 받으며, 이사님의 불편한 눈총을 받으며 권이도와 나는 동창끼리 술이나 한잔하러 간다며 자리를 떴다. “몸도 안 좋다며 무리는 하지 말게.”손을 흔드는 박전무님이 이렇게 야속해 보일 줄이야.

“미리 말씀드리지만 오늘 일은 제가 꾸민 게 아닙니다.”

째려보는 나를 향해 권이도는 정색을 하며 양 손을 들어 보였다.
안다. 알아. 사우나라니, 이 작자라면 그런 아이템은 안 써먹을 거다. 박전무가 사우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 나로서는 오늘의 단합대회가 단순히 단합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박전무 개인의 취향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도 당신이다. 아무리 그래도 배나 온 아저씨들 틈에서 사우나 할 생각을 다 하다니.

“용케 박전무님의 제안에 응하셨군요. 사우나 좋아하시나요?”

“솔직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운동도 아니고 왜 일부러 몸을 혹사해서 땀을 뺍니까?”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을 보니 헛말은 아닌 것 같다. 나도 예전엔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피식 웃었다. 이 사람아 나이 먹어봐. 뜨끈뜨끈한 바닥에 허리를 지지면 피로가 그냥......
아니, 저치가 나보다 나이는 더 많지 않나?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권이도는 입을 딱 벌리면서 어떻게 그것도 모를 수가 있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고. 우리는 서로의 나이에 대해 한 번도 얘기 한 적이 없잖아.

“한국 나이로 35살입니다.”

“아, 저는 32예요. 형이네요.”

“알고 있습니다.”

무뚝뚝하게 말하는 그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니, 이건 화도 아니라 그냥 삐친 거다. 뭐 나이 정도야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어깨를 으쓱 하며 말없이 걸었고 차를 주차해 둔 곳으로 와서 작별 인사를 했다.“그럼 나중에 또 뵙죠.”형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자동차에 올라타려는데 권이도가 다급하게 팔을 붙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시는 겁니까?”라니, 어차피 나는 박전무의 부탁 때문에 온 거라고.
봐, 당신들 때문에 폴리곤에 가서 귀여운 파트너와 보낼 시간을 이렇게나 낭비하고 말았잖아.

“착각하지 말아주세요. 권이도씨. 나는 당신과 비즈니스 때문에 얽힌 것이지 사적으로 엮이고 싶은 생각은 습니다.
어쩌다보니 사장님들에게는 우리가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오해 하게 만들었지만 그것도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입니다. 더 이상 피곤하게 굴지 맙시다.”

“그날 새벽에 제 사과는 받아 주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직도 화가 덜 풀리신 건가요?
제가 어떻게 해야,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의 기분으로 돌아 갈수 있습니까?!“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호텔에서 한 짓만 놓고 본다면 그건 차라리 나아. 그런데 나를 멋대로 아웃팅한 것은 꽤 큰 실수라고.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만은 용서할 수가 없어. 나름대로 선을 긋고 사회와 타협해 가는 사람에게 그런 행동은 치명적이잖아.

안달하는 권이도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 얼굴로, 저 목소리와 몸으로 이렇게나 나를 화나게 한 상대는 당신이 처음일 거다. 아니, 그래서 더 화가 나는 지도 모른다. 차라리 영 내 취향이 아니었다면, 내 관심을 끌만한 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면 지나가는 미친개에게 물린 셈치고 말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이렇게나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 내 기분은 어떻겠냐고.

후...이러는 중에도 폴리곤의 이쁜이들은 하나 둘 제 짝을 찾아 떠나겠지. 시간이 이러니 만나자 마자 무드도 못 잡고 바로 베드인 해야 하나? 오늘 밤은 꼭 쌓인 아들내미를 달래주리라 결심했건만 내 손으로 달래야 하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앞에는 나와 자지 못해 안달인 남자가 있다. 권이도는 내가 뭐라고 대답해주길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할까. 하룻밤 상대로 나쁘지 않지만 뒤끝이 더러운 상대다.
문득 장난기가 치밀어 올라 입 끝으로 비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제 몸이 마음에 드신다니, 뭐 좋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제가 원하는 대로 즐기실 수 있겠습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권이도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                *                *





“예? 지금 뭐라고......”

번갈아 샤워를 하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권이도는 내 말에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잘못 들은 거 아니냐는 표정이다. 아아 나도 당신이 날 묶었을 때 딱 그 심정이었어. 하지만 나는 적어도 행위를 하기 전에 동의를 구하니까 그래도 양반 아니야?

“말 그대로예요. 나는 주말인 오늘도 근무를 했고 사장님들과 식사를 하느라 소화도 잘 안 되서 별로 할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섹스는 많은 운동량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피곤해서 손 하나 움직이기 귀찮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소립니다.
단, 내 페니스 이외에는 손대지 말아 주세요.“

눈 아래의 근육이 경련하는 게 보인다. 어지간히도 굴욕스럽겠지.
그 표정에 사악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 정도로 피곤하시면 꼭 오늘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당신과 섹스만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그저......“

“아아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마음이 바뀔지 몰라요. 할 겁니까 말 겁니까?”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침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었다. 등에 커다란 쿠션을 받치고 가운차림으로 늘어진 나는 팔짱을 끼며 인상을 썼다. 빨리 해치우라는 표정으로. 얼어붙은 권이도는 잠시 말을 못 잇더니 더듬더듬, 내가 말한 요구사항을 확인하듯 되씹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입술에 키스도 못하고 가슴의 심장 소리도 듣지 못한 다는 겁니까?
만지고 입 맞출 수 있는 것도, 맥박 치는 고동을 느낄 수 있는 것도 페니스 뿐?”

“하나 더 추가 할게요. 입도 다물어요.”

절망에 빠진 권이도는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막으며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는 그를 무심한 눈동자로 대응했다.

“불쾌하십니까? 내키지 않다면 강요는 안 하겠습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빗어 넘길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하는 권이도를 보면서 속으로 비웃어 주었다. 이런 모욕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나름 복수랄까, 호텔에서 당한 일도 생각나고 어지간히도 나랑 섹스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머릿속에 퍼뜩 하고 든 생각이다.
당연히 그가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운과 안경을 벗으면서 다가오는 권이도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만 내쉴 뿐이다.

허어...진심인가.

권이도는 천천히 침대 위에 올라와 내 다리 사이에 앉았다. 그의 나신이 적나라했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고 얼굴 표정만을 자세히 살폈다. 가운아래 가려진 내 몸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곤혹함을 담은 눈동자가 하소연처럼 바라본다.

“마치...섹스 돌 취급이시군요.”

웃으면서 미간을 찡그리는 묘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권이도가 조심스럽게 가운의 끄트머리를 젖히고 다리 사이의 물건만을 가만히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가 내 성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볼 때마다 민망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약 맘에 든 파트너가 내 걸 본다면 흥분을 동반한 부끄러움이 들겠지만 권이도의 시선에는......으악, 갑자기 그날 밤 저 자식이 떠벌거렸던 아들내미의 묘사가 생각나서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불을 끄라고 할 걸 그랬나.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말해서도 안 된다니...”

페니스에만 손대라던 내 요구대로 권이도는 수풀 속에 얌전히 누워 있는 그것을 양 손으로 감싸듯이 덮었다. 첫 느낌은 따뜻하다. 이어진 손놀림은 안마에 가까울 정도로 담백하고 편안했다. 오랫동안 금욕했던 성기라 약한 자극에도 조금씩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나른할 정도의 전류만이 미약하게 하체에 흘렀다. 나는 팔짱을 끼며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금 지루할 정도로 마사지를 하던 손은 성기의 뿌리와 음낭의 사이를 꾹꾹 누르며 은밀한 자극을 꾀하고 있었다. 슬슬 훑어 내리기 시작하는 손길은 이제 어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씩 액이 비어져 나오는 입구를 엄지로 문지르고 네 손가락으로 기둥을 주무른다. 다른 손은 음낭을 모아 쥐고 천천히 좌우로 굴리며 주름과 주름을 손톱 끝으로 간질이고 있었다. 그렇게 손장난을 치던 권이도는 말없이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내 하체에 얼굴 묻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권이도의 목줄기를 따라 둥글게 휜 척추라인이 마디마디 도드라져 보였다. 얼굴을 묻고 성기의 끝을 혀끝으로 장난질 칠 때마다, 음낭을 쥔 손의 움직임이 바뀔 때마다, 견갑골이 움푹 꺼졌다 나오기를 반복하고 등의 근육들이 잘게 꿈틀거린다. 등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척추뼈을 따라 내려가면 미끈한 허리와 허리 끝에 톡 튀어나온 꼬리뼈. 그리고 꼬리뼈의 양 옆으로 둥글게 굴곡을 그리는 엉덩이의 골짜기.

오싹하는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달렸다. 그것이 혀끝으로 장난하던 권이도가 귀두부터 삼키기 시작해서인지 아니면 망상을 부추기는 엉덩이 라인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뜨거운 동굴 안에 들어간 내 하체는 무섭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끼고 있던 팔짱은 이제 몸을 감싸듯 꽈악 힘을 주고 있었다. 어금니를 악물며 다가올 흥분에 태연하려 애썼다. 벌어져 있는 두 다리는 미약하게 바들거리고 있었고 발끝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온다. 음낭의 뿌리 끝에서부터, 아니 그 보다 더 깊은 안쪽의 어느 기관으로부터 오랫동안 참아왔던 번식의 씨앗이 덧없이 배설되기 위해 솟구쳐 올랐다.

“훅...”

짧게 숨을 들이켰다.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미간을 찌푸리며 온 몸에 퍼지는 여운을 음미했다. 절제된 전율. 무언가에 억눌려서 완전히 해방된 느낌은 아니지만 아랫도리는 확실히 풀렸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내쉬자 아까까지의 흥분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몸은 쾌락보다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표정도 보여주지 않을 셈입니까”

눈을 감고 권이도가 뭐라고 지껄이든 내버려두었다.

“굉장한 자제력이군요. 제 머리카락 한 움큼은 움켜잡을 줄 알았습니다. 잔뜩 성을 내는 페니스를 보고 당신이 갑자기 머리를 잡고 억지로 치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대단한 김서경씨는 손 하나 까딱 않는군요.

멋진 등 근육으로 눈을 즐겁게 해주던 걸 감안해서 지금의 빈정거림은 참기로 했다. 목소리를 들으니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 나는 몸의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에 만족하며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고 권이도를 보았다. 남의 다리 사이에 무릎 꿇듯이 주저앉아 있는 그의 입가엔 내 것으로 추정되는 하얀 액체가 일부 묻어 있었다.
입가를 훔치는 그는 손등에 묻은 내 것을 길게 핥았다.
......꼬마식대로 표현하자면 욕 나올 정도로 꼴린다.
순간 오버랩 되는 유혹적인 미골과 골짜기 라인에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아직 모자라다는 듯 바라보는 권이도의 욕망어린 시선과 잘 꾸며진 가슴을 따라 이어지는 복근라인이 이미 식어가는 몸에 열기를 부채질 하고 있었다.     

“권이도씨,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몸과 달리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편안한 휴식과 건강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고 계속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약한 간질거림을 느끼기 시작한 내 육체와 권이도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너무하는군요.”

그만두자는 뉘앙스가 풍겨 나오는 말에 표정을 찌푸린다. 자존심에 상처 입은 얼굴에는 모멸감과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고 팔에 힘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한 쪽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게 싫습니까...만지기도 싫을 만큼...

권이도는 사납게 노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적절한 대답은 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덮치는 줄 알고 살짝 긴장을 한 것도 사실이다.

“어디, 그 자제심이 어디까지 가나봅시다.”

입가의 근육이 경련하면서 말하는 것을 보니 단단히 약이 오른 모양인데 분위기가 안 좋아. 잘하면 몸싸움이 일어날지도. 주먹싸움이라면 저쪽이 체구로 보아 유리하지만 나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그러나 그가 한 행동은 조금 의아하고 예측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예상 외로 그는 손에 콘돔을 들고 왔다. 그리고 긴장한 탓에 완전히 꼬리를 내린 내 물건을 권이도가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재차 발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른하게 늘어져 있지 말고 기운 좀 차려보십시오.
검은 풀밭에 누워서 형광빛에 일광욕이라도 할 셈입니까? 아까처럼 실룩실룩 움직여보란 말입니다.”

“입 다물라 했습니다.”

“.....네에 그러셨죠. 제 유일한 즐거움마저 뺏으려하다니...”
  
그것이 잘 서지 않자 권이도는 한숨을 쉬며 다시 입안으로 삼켰다. 뜨거운 내부는 안락함을 준다. 그가 엎드리는 바람에 드러난 너른 등 너머의 오목한 골짜기가 무척이나 내 입맛을 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라도 가만히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흠...내 자제심을 시험한다더니 이런 방법이었나. 펠라치오는 능숙했지만 정작 내 흥분을 유도한 건 저 엉덩이. 저 미골. 그리고...으으윽...그 너머의 입구를 생각하니 머리에 피가 오른다.

다시 머리를 치켜드는 성기를 바라보며 권이도의 표정이 진지해 졌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무안하게스리 남의 가랑이 사이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할 필요는 없잖아. 내 것이 어느 정도 발기가 되자 콘돔을 씌우고, 또 언제 가져왔는지 하얀 튜브에서 내용물을 짜서 내 물건 위에 쏟아 붇고 있었다. 엄청나게 미끌미끌한 그것이 기둥은 물론 음모까지 적시며 흘러내렸다. 차가운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액체가 음낭을 타고 흘러내려 회음을 지나 항문 입구까지 스며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어이...설마?

나도 모르게 끼고 있던 팔짱이 스륵 풀렸다. 눈동자가 휘둥그레지게 놀란 광경에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저 작자가, 저 자존심 세고 뻔뻔한 인간이 내 앞에서 자기 뒤를 적시고 있는 거 맞지?  

억센 팔을 등 뒤로 돌리고, 다른 한 팔로 침대를 짚어 몸을 지탱하고, 시선은 차마 나와 맞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적시는 육체를 바라보며 경이와 전율로 입을 떠억 벌렸다. 단단히 뭉쳐있는 근육 뒤에 있는 뜨거운 계곡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손가락을 떠올리니 아랫배가 경련한다. 저런 모습의 권이도에게서 이렇게나 몸이 달아오를 줄은 몰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아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곧추서기 시작했고 입안에 단 침이 고였다.

“재미있군요. 혼자 일어서는 당신의 귀여운 그것은...”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내 주니어가 주책 맞게 벌떡벌떡 서는 것보다 당신이 스스로 그런 모습보이는 게 난 더 경이로워!!  

사실상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몇 십 분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항문이 그다지 풀리지도 않았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대충 바르고 손을 뗀다. 그리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나의 주니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꽉 움켜쥐어 그 위에 내려앉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어이, 어이, 아직 덜 풀렸어! 당신 거기 윤활액만 잔뜩 쳐 바른다고 다가 아니란 말이야!

성난 내 것과 달리 완전히 풀죽어 있는 권이도의 중심이 그가 전혀 흥분하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주니어의 끄트머리와 닿은 항문 입구는 들이밀 구멍이 있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좁아서 권이도는 상당히 힘들어하며 억지로 요철을 맞추었다. 기어코 비집고 들어간 입구는 주름이 오물오물하면서 귀두를 씹어대는 바람에 눈앞이 핑 돌았다.

“......!”

도저히 팔짱끼고 구경만 할 수가 없어서 권이도의 가슴을 밀쳐내었다. 그러나 힘이 들어가지 않은 팔은 그 가슴 위에서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 시트를 움켜쥐어 몸을 지탱하였다.
   
“뭡니까. 아직 시작도 안했습니다.”

제기랄, 얼굴은 하얗게 질린 주제에 말은 능청스럽게 잘한다.
식은땀이 흘렀다. 몸과 성기를 분리할 셈인 지 엄청난 조임으로 끊어먹으려는 괄약근의 수축운동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려 하고 있었다. 내가 이정도면 권이도가 느끼는 압박감은 몇 배나 될 텐데 무식하게 꾸역꾸역 억지로 처넣으려 하고 있다. 당신 테크니션이라면서...이럴 땐 충분히 풀어줘야 된다는 거 몰라? 나한테 맡겼으면 내가 충분히 풀어주고 만져주고 핥아주고 빨아 줬을텐데......! 젠장, 맞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겠다고 여유 부렸던 것은 나였지...

잠시 방심한 틈에 권이도가 체중을 실어 내렸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튀었다. 눈앞에서 별이 반짝반짝 했지만 이어서 느껴지는 것은 고통만이 아닌 엄청난 열기. 입구의 고집스러운 근육 안에는 뜨겁고 끈적끈적한 내장이 정액의 한 방울까지 짜내려는 기세로 성기를 통째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쾌감에 허리를 떨었지만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바라본 권이도의 표정은 참담했다.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에 침대를 짚어 몸을 지탱하는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어금니를 깨물었으면 뺨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그의 성기에 어떠한 흥분의 기미는 없었고 하얗게 질린 이마 위로 땀이 흘러내렸다.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픕니다. 페니스 잘리겠어요.”

“속에서 점점 커지지만 않으면 잘릴 일도 없을 겁니다.”

말이나 못하면.   
문득 왜 이 남자가 이렇게 까지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나에게 반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라면 얼마나 좋을까. 설령 반했다 해도 이런 걸 감수할 만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이제 프로젝트도 제 맘대로 돌아가겠다, 나도 끌어들였으니 아무 때나 느물대며 원하는 대로 내 속을 뒤집어 놓을 수 있겠다......이만큼이나 괴로워하면서 몸을 바칠 정도로 내가 좋은 거야?
......라고 생각하면 괜히 가슴 한쪽이 간지러워진다.

“당신, 왜 이렇게까지 합니까...”

하체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제 느긋해질 수 없는 나는 시트를 주먹으로 움켜쥐며 흥분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이성을 겨우 다잡고 있었다. 권이도는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Shit......지금 후회 중입니다.”  
  
참을 수 없는 전율이 뒷덜미를 오싹오싹하게 했다.
가장 먼저 폭발을 느낀 것은 뇌. 그리고 척추. 페니스보다 정신적 희열감이 몇 배는 컸다. 무슨 꿍꿍이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일을 저질러서 내 것 위에 꽂혀버린 저 권이도. 그러다 계산착오에 의해 후회를 하고, 온 몸의 근육이란 근육이 아우성치고, 굵직한 혈관들이 새파랗게 돋아 목덜미를, 양 팔을, 허벅지를 기어가는 것을 보며 이 남자를 완전히 발밑에 두었다는 정복감이 정신과 육체와 이성을 고양시켰다.
충혈 된 눈 안에 고인 맑은 물기.
자제심이 달아나 버렸다. 김서경이란 이성을 상실했다.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났을까. 그대로 권이도를 찍어 눌러서 아직 들어가다 만 내 것을 완전히 밀어 붙였다. 당황한 그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내 귀에 닿지는 않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유두를 빨았다. 이빨로 세게 잡아 당겼다. 얼굴에 키스를 퍼붓고 끊임없이 말하는 입술을 그대로 눌러 막았다. 독사 같은 혓바닥을 뽑아버리려는 기세로 빨아 당겼다. 이 사악한 혓바닥, 이 사악한 목구멍, 이 사악한 입술. 그 요사스러움에 치를 떨면서도 나는 그의 입안을 갈구하며 먹어치워 들어갔다. 하체의 펌프질에 온 몸의 뼈가 삐그덕삐그덕 부대낀다. 빡빡한 권이도의 입구는 거칠어진 내 행동에 놀란 듯 잔뜩 움츠러들었고 그 탓에 아들래미는 아프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미치겠다. 끊어질 것 같이 아프다. 아아 하지만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것이, 소스라치도록 오싹한 어떤 덩어리가 심장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와 육체를 향해 한계를 내보이라고 정신없이 채찍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권이도의 얼굴도, 맞닿은 육체의 움직임도, 땀의 미끌거림도 잊고 오로지 욕망의 배출을 위해 혼자만의 질주를 하고 있었다.

“크으으윽....!!!”

한동안 사람의 몸에 굶주렸던 만큼 찾아온 사정은 아찔한 쾌감을 주었다.
울컥울컥 토해내는 양도 양이거니와 좀처럼 가시지 않은 여운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전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몇 번을 훑어 내린 다음에야 숨을 내 쉴 수 있었다. “흐아아아아......”바람 빠진 한숨이 성대가 아닌 기도로부터 올라온다. 그대로 완전히 엎어져서는 아직도 긴장한 육체에 휴식을 주며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그러나 내 밑에 깔려 있는 육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아뿔싸, 당황했다.

“아, 권이도씨, 괜찮습니까?”

움직임은 없었지만 정신을 잃을 남자는 아니다.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송글송글 배어 나왔고 눈은 꾹 감겨 있었다. 일부러 꽉 감고 있다는 것이 티가 나는 건 그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알았다.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고, 손 하나 까딱 않겠다고 한 주제에 이렇게 격렬하게 해버린 자신이 조금 쪽팔렸다.

“김서경씨......”

갈라진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린다. 또 무슨 수식어로 나를 쪽팔리게 할지, 뭐라고 이죽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 참아줄 거다. 다 용서해주고 다 봐줄 거다. 어떤 모욕을 받아도 맞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얌전히 찌그러질 참이었다.

“......찢어졌습니다.”

응?
잠시 동안 이해를 못했다. 권이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시선을 돌려 허공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에 몸을 일으키자 권이도의 몸이 움찔거리며 별안간 시트를 잡고 괴로워한다. 그러고 보니 그와 나의 맞닿은 자리에 흘러내리는 윤활액이 너무 흥건하다고 느꼈다. 무심코 풀이 죽은 페니스를 그의 몸에서 빼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전사한 아들래미를 보고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이, 이봐요! 괜찮습니까!!!!!”

침대 시트에서 새빨간 핏자국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고 그걸 본 내 정신세계는 패닉상태에 다다라 있었다. 피다! 게다가 양도 많아! 이 내가, 인간 김서경이, 게이인생 15년차인 베테랑이! 성욕을 주체 못하는 새파란 어린애도 아닌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상대에게서 피를 본 경우가 아주 없진 않았지만 이렇게 나 혼자 흥분하다가 상처 입힌 것은 처음이었다. 몇 년 전, 조직의 형님이랑 사귀면서 남의 의견은 아랑곳 않는 무식한 섹스에 말 그대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던 적이 있었다. 원래도 피를 보는 건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그 이후로 상대 몸에 상처 내는 것은 어린애나 하는 짓이요, 미숙자의 자제력 부족이요, 특히나 혼자만 즐기다가 피를 보는 것은 개쓰레기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되새김했었다.
......나는 개쓰레기였어......

내가 정신적 공황을 겪는 사이 권이도는 기어코 몸을 일으켜 욕실로 걸어갔다. 단단하게 치켜 올라간 엉덩이와 근육이 꿈틀거리는 허벅지 사이로 맑은 핏줄기가 흐르는 것을 보고 식겁했다. “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부축해드리겠습니다!”하고 달려갔지만 권이도는 괜찮다며 내 손을 밀어내었다. 이봐, 절뚝거리는 걸 억지로 참고 있는 게 다 보이는데 정말 괜찮은 거야? 한동안 그가 사라진 욕실을 망연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콘돔을 처리하면서 오지게 많은 정액의 양에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렇게 싸놓고 저 치에게선 피를 보다니, 아무리 사람이 얄미워도 이러는 게 아닌데...피 묻은 시트를 치우며 또 한숨, 멋대로 박아댄 주제에 가운차림으로 있는 것도 뻔뻔하게 느껴져서 다시 양복을 꿰어 입으며 한숨. 호텔의 창가에 서서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박으면서 길게 한숨. 유리창에 희뿌연 습기의 막이 동그랗게 퍼졌다가 사라졌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신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던 권이도가 내 차림을 보더니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설마 도망치려던 참이었습니까?”

목소리에 노기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말한다. 아니,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내빼버릴 정도로 내가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나는 손을 흔들어 강하게 부정하면서 몸은 괜찮냐고 물었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쏘아보던 권이도는 가운을 걸친 뒤 벗어둔 자신의 양복 재킷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시다시피 항문이란 곳이 조금만 터져도 요란하게 피가 나는 곳이잖습니까.
상처 자체는 대단치 않습니다. 며칠 잘 관리하고 치료하면 금방 아물 겁니다.
......아, 담배 냄새 싫다고 하셨죠?“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부터 갑자기 담배냄새가 좋아졌어요. 요즘 저도 한대 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니까요. 아하하하”

오늘부터 맹꽁이가 되었구나 김서경.
권이도는 담담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가 너울너울 내 쪽으로 날아왔지만 짜증내며 손사래를 칠 입장이 못 된다. 아아 미안해서 어쩌지, 상처는 괜찮을까? 많이 아팠을까? 조금만 상처 나도 요란하게 피가 나는 만큼 조금만 잘못 해도 자꾸 찢어지는 게 항문이란 말이야.

“저기...지금이라도 치료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호, 혹시라도 잘못 되서 염증이라도 생기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권이도는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의아하다는 눈으로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오. 그 정도의 상처는 아닙니다.”라고 태평하게 말하다니, 이봐 다친 사람은 당신이라고!
답답한 침묵이 불안함을 부추겼다.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머리 터지게 고민했다. 너무 좋아서 그만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었습니다? 권이도씨, 당신 테크닉 최고예요? 용서해주십시오 다음엔 제가 댈게요? 제기랄 무슨 말로 이 상황을 타파한단 말이야. 그나저나 또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느긋하고 어울리지도 않게 말이 없나. 평소였다면 저 치한테 쪼여도 잔뜩 쪼였을 텐데. 혹시 나를 어떻게 씹어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 거 아냐? 맙소사 암담해지는군.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무심코 권이도의 손에 시선이 갔다.
한가롭게 담배를 태우고 있는 그의 마디 굵은 손가락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대로 조용히,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것이 나았다.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지금의 권이도는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좋을 것이다.   

서로가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니코틴의 혼령만이 음울하게 객실을 배회하고 있었다.





*                *                *





그날 권이도와 어떻게 체크아웃을 했는지 모르겠다. 일단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지긴 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평범하여 도무지 대처방안이 떠오르지 않는 거다. 차라리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이 원수는 꼭 갚아주겠노라고 으름장이라도 놓았으면 마음이 편할텐데. 오히려 불안해진 나는 다음날 전화해서 안부를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어쩐 일이십니까 서경씨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아니, 그게...몸은 좀 나아지셨나 해서요......”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습니다만 너무 그렇게 안절부절 않으셔도 됩니다.

어, 어라 뭐지 내가 좀 오버해서 걱정했기로서니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이 차가움은. 이 사람에게서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것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지은 죄가 있다보니(그보다 후환이 더 두려웠다) 차마 이대로 네 그럼 다행입니다. 하고 끊어 버릴 수는 없었다.

“다음에 언제 밥이라도 한 끼 사죠. 이거 원,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근사하게 한 턱 쏴야 내 마음이 풀리겠다. 남에게 빚지고 사는 성격은 못 되어서 내가 끼친 민폐도 꼭 갚아야 성이 풀린다. 상대가 권이도라면 더더욱. 수화기 너머의 권이도는 잠시 대답에 뜸을 들이더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거 데이트 신청입니까?

그게 왜 그런 식으로 연결 되냐고.

-데이트 신청이 아니라면 안 받겠습니다.

수화기를 붙들고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 사람과의 데이트라면 식사하고 커피나 마시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을 거다. 뻔히 보이는 의도에 얼떨떨하면서 아직도 나랑 잘 마음이 남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는 저랑 그런 관계는 안 맺을 줄 알았는데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요. 제가 즐길 차례도 남겨 주셔야지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거 은근한 협박인 거야 아니면 사심 없는 진심인 거야? 역시 어제 일로 꽁해 있는 거 맞지? 아아 제기랄 일반적인 관계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사내가 어쩌다가 금단의 영역에 빠져서는 이다지도 나를 번뇌에 빠지게 하는 걸까. 당신 어젯밤엔 정말 눈 돌아가게 괜찮았다고. 그런데 꼭 그런 이상한 플레이를 해야 해?

-너무 겁먹지 마십시오. 부드럽게 하겠습니다.

“누, 누가 겁먹었다는 겁니까!”

다음 섹스가 당연하다는 말투의 권이도에게 반발해서 발끈했다.
하지만 나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정말이지 괴상한 취미만 아니라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상대인데 말이야...

“......묶는 것은 안 됩니다.”

-네?

“입을 막아서도 안 되고요. 사정 못하게 묶어 놓는 것도 안 됩니다.
채찍 금지, 촛농도 금지! 이상한 코스츔도, 밧줄도 수갑도! 몸에 상처 나는 어떤 종류의 것도 불허합니다. 물론 약을 하는 것도 절대 금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아는 모든 SM 지식을 동원하여 금지, 금지, 금지를 연발했다. 또 위험한 게 뭐가 있을까, 그래 바이브레이터도 안 된다 로터도, 모조성기도...아니 아예 도구자체를 금지하자. 제기랄 그런데 저 주둥아리는 어떻게 통제하지?
수화기 너머로 조그맣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아무리 그래도 가죽부츠 신고 채찍질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아예 저와 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나보군요.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여는가 했더니 웃음을 머금으며 놀리는 목소리에 수화기를 붙잡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통화중이기에 망정이지 직접 얼굴을 보고 있었더라면 단박에 약점 잡혀서 놀림거리가 되었을 거다.      

“만사불여튼튼 아니겠습니까.”

당황한 나머지 뭔가 핀트가 어긋난 한자성어를 섞어 쓰긴 했지만 다행히 목소리는 떨림 없이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완벽한 음성 관리라니. 뜨거워진 뺨과 눈가를 누르며 들키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럼, 서경씨가 말씀하신 방법만 아니라면 어떤 플레이든 괜찮습니까?

어떤 플레이든지? 내가 상상 못할 무언가를 준비하겠다는 의도인가?
수상함이 느껴지는 말투에 잔뜩 경계했다.   

“거 좀, 평범하게 놉시다. 우리.”

-평범한 게 질릴 때도 됐지요.

꼬박꼬박 지지 않는 그에게 익숙할 때도 됐지만 울컥 치밀어 오르는 이유 없는 패배감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좋아, 당신하고의 섹스는 좋아. 첫날 안 좋은 꼴을 당하긴 했지만 묶어놓고 재갈 물리는 플레이도 만일 나를 살살 꼬드겨서 동의하에 했다면 그렇게 까지 반발하진 않았을 거니까.
일단 ‘내가 거부할 경우 어떤 플레이도 금지다!’라는 사실을 못 박아 둔 후 통화를 끊었다. 권이도는 매우 즐거워하는 것 같았고, 대화가 통화의 목적과는 전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렸다는 것을 핸드폰의 폴더를 닫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젠장, 원래는 그 인간의 몸 상태가 걱정 되서 전화했는데 왜 다음 데이트 약속을 잡아버린 거야. 그것도 권이도가 준비한 코스라니. 애초에 섹스를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말려들었지?
차가운 복도 벽에 머리를 기대며 마른 한숨을 쉬었다.
      




퇴근하자마자 인터넷을 맹렬히 뒤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검색했다가는 변태 취급 받다가 직장 내 왕따로 전락하기에 딱 좋은 사이트들을 전전 하면서 SM의 세계에 대한 무한한 망상을 키워가는 중이다. 넓고 광대한 네트워크의 세계는 가히 우주에 비견할만하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느 공간, 어느 행성에 착지하면 접하는 것은 지구의 대기가 아닌 95%의 이산화탄소, 산소 1%, 질소 2.5%, 기타 1.5%의 별천지가 나타난다. 아아 이 곳은 내가 숨 쉴 공간이 아니야! 라며 절규하다가도 눈길을 끄는 키워드를 발견하고 어느새 클릭하고 마는 내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나와는 취향이 안 맞는다. 나는 맞는 것도 싫고 때리는 것도 싫다. 하물며 그 상대가 사랑스러운 파트너임에야 어딜 손대겠는가. 때리는 것은 물론, 밧줄로 묶는 것도, 관장도, 피스트 퍽도, 수치플레이도...얘기는 들어봤지만 흥미 없어서 신경 끄고 있었던 단어들이다.   

나도 어지간히 문란하게 놀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독특한 걸 즐기는 사람들과는 그다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신기한 일이다. 가끔 파트너 중에는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지만 나에게 권유를 하거나 보여주거나 하는 경우도 없었다. 내 경우, 일단 도구를 이용한 흥분 유발은 본인의 테크닉 미숙이라는 것이 전제로 깔린 탓에 흥미를 못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성인용품 조차도 콘돔과 젤 이외에는 써 본적이 별로 없고.

비슷비슷한 내용의 사이트들을 둘러보면서 내가 놀았던 가장 난잡했던 파티를 떠올렸다. 대학교 때, 모 별장에서 약에 취해 난교를 했던 적도 있었고 해외까지 나가서는 가면 놀이를 하는 이상한 취향의 모임에도 나갔었더랬다. 그러고 보니 가터벨트의 아가씨가 우람한 청년을 채찍으로 때리는 쇼도 있었지. 한 때 진동기구가 실제 성기가 주는 것보다 더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궁금하여 실험해본 적이 있지만 사용법이 미숙해서인지 그다지 유쾌하진 못했던 기억이 남는다.
아아 어쩌다가 지난 추억에 잠겨버렸군.

확실히 SM포르노 영상은 자극적이어서 보는 것만으로 튼튼한 아들래미가 움찔움찔 반응을 하지만 그저 그것뿐, 어떤 지적 유희도, 감정적 싱크로도 없는 플레이에 지루함을 느꼈다. 적어도 섹스라 함은, 부대끼는 살과 살. 서로에게 싱크로하는 감정적 교류. 따뜻한 온기. 뭐 그런 것이 있어야 할 맛 나는 거 아닌가.

한참을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게 내가 뭐하는 짓인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뭘 하든 내가 싫다고만 하면 그만이니 굳이 이럴 필요 있나. 권이도가 무슨 짓을 할지 미리 알면 쇼크를 덜 받을 거라는 생각에 뒤지긴 했지만(그 인간이라면 내가 놀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취향에 없는 가터벨트를 입고 채찍질할지도 모른다) 미련 없이 창을 닫고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cpu 팬 돌아가는 소리가 잠잠해지면서 방안에는 편안한 고요가 찾아왔다.
  




*                *                *





마크플랜이 IL의 지분 11.3%를 취득했다는 공시가 올라왔다.
사장도 6.5%정도의 지분밖에 없고 아직까지 워레스는 투자 목적의 지분매입이라며 5.1%만을 공시했을 뿐이다. 때문에 마크플랜이 최대 주주가 되었다. 마크플랜은 본격적인 경영권 참여 의사를 밝혔고 우리 회사 임직원 중 일부가 그에 가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장 후 상한가를 치는 회사 주식을 공개매수로는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마크플랜에서 꺼낸 카드는 위임장이었다. 주주들로부터 의결권을 부여받은 이 위임장으로만 따지면 20%가 넘는 지분을 마크플랜이 취득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장은 진저리를 치며 주식의 의결권을 넘긴 임직원들을 해고한다고 난리를 쳐댔지만 그걸 말린 것은 최이사였다. 임직원들의 말도 일리는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몇 년 전 사장의 비리 의혹이 풀리지 않는 중이잖습니까.” “사장의 경영스타일이 회사의 투명성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마크플랜은 오래되고 안정적인 기업이지만 정체되어 있습니다. 그런 회사와 우리 회사가 합쳐지면 대기업 태성이라도 이 업계에서 함부로 굴지는 못 할 겁니다.” 등등...
사장에게 경영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아직도 5공 시대를 못 벗어난다는 점이 답답할 뿐이다.

사장이 날뛰는 사이 최이사 측은 마크플랜의 주식을 약 23%의 프리미엄을 붙여서 사겠노라고 투자자들에게 공고 했다. 마크플랜이 주식으로 우리 회사에 대해 의결권을 가진다면 우리도 그쪽의 지분을 매집하여 의결권에 제한을 두겠다는 계획이다. 물론 워레스의 자금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공개매수 공고가 나가고 마크플랜의 M&A의도가 알려지면서 마크플랜과 우리 회사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차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서울 정도다.
돈 욕심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 정도가 되면 없던 욕심도 슬그머니 싹을 띄우게 된다. 그래봐야 개인인 내가 구할 수 있는 금액은 얼마 되지 않지만 M&A설이 있기 전부터 IL과 마크플랜의 지분을 사들였으니 그 차익은 엄청나다. 회사 내부사정을 알고 있는 내가 이 기회를 썩히면 바보 아닌가.

“김대리는 좀 어때?”

이사실에서 박전무와 머리를 맞대고 모여 마크플랜의 우리 회사 주식 매집과정에서 불법은 없었나 눈에 쌍심지를 키고 찾는 중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박전무 때문에 순간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른다. 설마 최이사가 나와 권이도의 관계를 박전무한테 떠벌떠벌 말했을 리는 없고...다행히도 박전무의 음흉한 표정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에~이 솔직하게 말해봐 몇 주정도 사놨어?”

아, 주식 이야기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얼마 안 된다고 얌전을 뺐다. 박전무는 요즘 주식매매프로그램만 들여다보는 게 낙인 것 같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하이고 요 모양새 봐라 꼭지가 이쁘게도 올라갔네~ ”하고 중얼거리다가 지나가는 여직원이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 있다.

“지금 좋아할 땝니까? M&A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반 투자자들이 좀처럼 마크플랜의 지분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요. 마크플랜이 최대주주가 된 마당인데다, 지금 그쪽의 주가 역시 요 근래 가파르게 오르고 있으니 공개매수로 얼마나 매집이 가능할지는 굉장히 비관적입니다.”

최이사가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마르고 까만 뿔테안경이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인상인데 요 근래 초췌해진 몰골은 사람을 더 지쳐보이게 했다. 일처리에 빈틈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너무 일에 몰두하다보니 주위에도 완벽을 요구하기 때문에 피곤한 스타일이기도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불똥은 나에게로 떨어졌다.

“김서경씨, 서경씨 쪽에선 아무런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습니까?”

“네?”

박전무가 고개를 반짝 든다.
정보라니, 내게는 박전무가 떡고물처럼 던져주는 M&A진행과정과 워레스와의 작전회의 내용 일부가 전부다. 물론 이것도 회사 내부기밀이기 때문에 일개 사원치곤 많이 알고 있는 거지만 최이사가 물어볼 만한 정보는 없단 말이다.

“그래, 그래, 자네 고등학교 동창 말일세.
가끔 술도 한잔하고 그러지? 뭐 술김에 무슨 얘기 흘린 거 없어?
아, 워레스 그 친구들 좀 까탈스러워야 말이지. 얼굴은 웃고 있는데 영 속을 모르겠어.“

박전무까지 한 수 거든다. 어차피 최이사가 나를 팀에 넣은 것이 그럴 목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큰 기대를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정작 굵직한 정보는 내게 알려주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나한테 스파이 흉내를 내라는 겁니까.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전무와 이사를 바라보았지만 곰 같은 얼굴에 먹이를 발견한 여우처럼 눈을 빛내는 박전무나, 비쩍 마른 해골 같은 얼굴에 눈만 살아 움직이는 뱀 같은 최이사나, 표정만은 무척 진지하다.

“아시지 않습니까. 서로 바빠서 따로 만날 시간 내기도 쉽지 않은 거.
그리고 그 친구, 빈틈이 없어요.“

전무가 한숨을 쉬며 “그렇겠지...”하고 중얼거린다. 어차피 전무와 사장은 나에 대해 별 기대를 않는다. 다만 최이사만은 정말로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지금 워레스 측은 수백억의 자금을 금융감독원의 눈을 피해 잘 운용하고 있어요.
M&A에 관련 된 자금은 정확하게 보고 되고 있지만 일의 진척사항만 보면 워레스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 우리의 요구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본디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모 펀드가 마치 우리 회사의 고유한 자금줄처럼 착실히 움직이고 있다고요. “

“그야 지들도 이번 일이 끝나면 얻는 게 많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외국인들은 가치투자를 선호한다구우~“

그런 편견은 또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박전무님.
낙관적인 전무의 태도에 최이사는 입을 다물고 한 손으로 턱을 감싸 쥐더니 검지로 톡, 토독 하고 자신의 뺨을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흠, 저 까다로운 성격만 아니라면 꽤 괜찮은 상대인데. 아무리 잘생긴 얼굴이면 뭐하나, 나이 들면 그 까다로움이 얼굴에 드러나는 법이다. 왁스로 바짝 넘긴 이마에 사감 같은 뿔테 안경, 그리고 미간에 굳어진 잔주름과 만성피로로 굳어진 눈 밑의 다크서클이 다가가기 힘든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0년만 젊었어도 좀 더 괜찮은 얼굴이었을텐데......아깝다.   
넋을 놓고 이사에 대한 평을 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어깨가 떨릴 정도로 엄청나게 놀랐다.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아, 저 여자 얼굴은 예쁜데 몸매는 좀...하며 평하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의 기분이랄까. 하물며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는데 누가 안 놀라겠냐고.

“김서경씨, 나는 서경씨에게 꽤 큰 기대를 걸고 있어요.”

사실은 나를 믿지 않으면서. 그렇게 감시하는 눈으로 말해봤자 하나도 설득력 없어요 이사님.
한숨을 쉬는 순간에 전무가 껄껄 웃으며 내 등짝을 쳤다. 덕분에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럼, 김대리야 말로 우리 두 팀의 든든한 연줄 아닌가.
자고로 인간관계란 뭔가 오가는 정이 있어야지~”

제기랄,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 분명한데 어째 핵심만 집어내는 것 같단 말이야.




   
*                *                *



   

치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자도 아니고 직접 전화를 하는 건 처음이라서 나는 근무시간이라는 것도 잊고 옥상으로 달려가 치현의 전화를 받았다. 게다가 전화하기 전에 업무시간을 배려해 문자로 [지금 전화해도 돼?]하고 묻는 예의바른 센스라니, 은근히 섬세하다니까.

사원들의 휴식공간을 위해 준비 된 옥상 한쪽에는 몇 개의 대형 파라솔이 놓여 있었고 자판기와 쓰레기통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후 6시라 해가 어느 정도 기울어 있지만 뜨거운 여름의 뙤약볕을 잔뜩 머금은 시멘트 바닥이 복사열을 내뿜고 있었다. 에어컨이 풀 가동하고 있는 사무실에서 나온 참이라 더위에 적응하기 힘들 법도 하지만 치현이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무슨 일일까. 혹시 안 좋은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요즘 너무 소홀히 해서 그런가?

-응? 아니야. 별일은 무슨. 그냥 형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오라 이게 웬일이냐! 전화로 ‘아빠 보고 시퍼쪄요~’라고 말하는 아들을 둔 부모의 심정이 이러할까. 꼬마야,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해준 건 처음이라는 거 아니?

-요즘 날씨 많이 덥잖아. 그렇게 만날 야근이다 뭐다 하면서 주말도 못 쉬는 거 같던데.
복날에 몸보신 좀 해야 되는 거 아냐? 내가 한 턱 쏠게. 삼계탕이나 먹으러가자.

-응? 아, 나 월급 받았어. 지난번 말했던 치킨 집. 집에서 멀지만 주인아저씨가 친절해.
만날 얻어먹었는데 이럴 때 한 번 쏴야지. 혹시 삼계탕 싫어하는 건......뭐? 보신탕? 우와 형 진짜 아저씨 같아.
   
-여행? 아르바이트 구한지 한달밖에 안됐는데 여행은 무슨.
그럼 그냥 지난번처럼 소풍이나 가자. 한강도 좋고 형 시간 나는 날짜로 잡아.
나야 형 시간대에 맞추지 뭐. 이번엔 내가 근사한 도시락도 만들어 줄게. 나 요리 잘해.
어? 요리대결? 뭐야 그거 아하하하하

꼬마의 호쾌한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꼬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사람이 나른해지는 기분을 받는다.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 하지만 가끔 한숨을 내뱉거나 탄식조의 말을 하면...으음 뭐랄까, 방금 전까지 늘어져 있던 신경이 갑자기 바짝 긴장하며 아랫배가 당기는 느낌이랄까. 웃음소리는 고등학생처럼 밝고 명랑한데도 말이다.
  
날씨는 덥고, 회사는 뒤숭숭하고, 내가 가진 전 재산을 털어 쏟아 부은 주식은 오싹할 만큼 뛰어올라 심장은 벌렁벌렁하고...게다가 이사의 압박과 권이도에 대한 생각 때문에 튼튼하다고 자부했던 몸과 마음은 지쳐 있었다. 누구를 상대해도 신경이 곤두서는 나날이다. 하다못해 동료 직원들과 회식을 갈 때에도 행여 말실수할까봐 긴장상태. 주위에선 경영진들과 접촉이 잦은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벌써 과장급들은 경계의 눈초리마저 보내고 있다. 가끔 화장실 거울로 살펴 본 얼굴은 충혈 된 눈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너무 피곤하다.
꼬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가 피곤하다는 걸 느꼈다. 바짝 긴장하던 신경이 풀어지면서 믿기 않을 정도로 몸이 느슨해진다. 나른하다. 아무 계산 없이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말에 책임지지 않아도 될 말상대가 필요했다.

“소풍은 지난번에도 갔는데 시시하잖아. 바다 어때? 그래, 남해로 가자.
새파랗게 뻗은 바다를 보면서 헤엄도 치고......
아니, 아예 해외로 갈까? 동남아? 하와이?”

-됐어. 또 무슨 돈을 쓸려고 그래. 혼자 사는 샐러리맨이 벌면 얼마나 번다고.

“독신을 우습게 보지마라. 쓸 곳은 없고 쌓이는 게 돈인 인생이 독신이야 인마.“
  
-와하하 그런 게 어딨어.

“해외여행은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요즘 회사가 좀 어수선한데 이번 일만 끝나면 한 몫 두둑하게 생길 거거든.
놀러 가고 싶지만 혼자 사는 샐러리맨이 같이 갈 사람도 없다니, 나 너무 비참하지 않냐? 응?“

-가족들 있잖아. 아니면 친구들이나...

“아아~ 드라이하기가 아이스 같은 우리 가족들? 갓 옹알이하는 자식 보는 재미에 칼 퇴근 하는 친구들? 아니면 만날 때마다 여자 없다고 신세 한탄하는 노총각들?
치현아,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아아~~“

수화기 너머로 웃는 목소리가 기분 좋다. 웃음소리가 그친 뒤 이어진 짧은 침묵은 꼬마가 고민 중이라는 표시. 치현아 알고 있냐? 나 지금 너한테 은근히 어리광 부리고 있다.

-형, 바쁘긴 바쁘구나. 사람이 너무 일에 치이거나 공부에 치이면 현실도피하려고 여행을 꿈꾼다더라.
일도 좀 쉬엄쉬엄 해. 행선지는 형 시간 나면 그때 가서 정하지 뭐.

어른스럽게 말하는 치현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맹랑하게 느껴진다. 귀여운 자식, 현실도피랬다? 꽤나 정확한 표현에 수화기를 잡고 크게 웃었다. 이렇게 웃어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이렇게 한가로운 잡담을 나누며 옥상 위에서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형 보고 싶다. 시간 나면 연락해.

코끝이 찡하다.
이미 통화가 끝난 수화기를 붙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                *                *





며칠 뒤부터 부재중 수신전화가 늘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전부 남치현. 무슨 일이냐고 나중에 문자를 보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물쩍 넘어가 버린다. 그런가 하면 정말로 필요해서 전화를 한 것이었는데 내가 바빠서 치현의 러브콜을 못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치현의 부재중 전화가 늘수록 나도 꼬마가 점점 보고 싶어졌다. 조만간에 치현이네 집에 들러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시간이 맞질 않는다. 치킨 집이지만 호프도 겸하고 있어서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치현은 출근한다. 특히나 주말은 일찍 가고 새벽 늦게 집에 오기 때문에 오전 중에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기도 미안하다.

......아니, 아니다. 이건 핑계야.
치현이를 만나면 분명 어리광 부릴 거다. 마음이 약해져서 녀석에게 엉겨 붙을 거라고. 게다가 요즘 바쁘면서도 욕구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 어린 것을 데리고 음흉한 마음을 먹었다가 이 건전한 형 동생관계에 금이 가고 싶지 않다. 치현이를 다른 원나잇 상대와 같은 선에 놓고 싶지 않았다. 그냥 돌봐주면서 쑥쑥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달까.   

치현도 나도 전화통화는 길게 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얼굴을 안 보면 그야말로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만다. 자꾸 문자 보내는 것도 유난스러워서 잘 안 했더니 어째 점점 더 소홀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아 치현아 조금만 기다려라 곧 새파란 태평양이 하얀 포말을 그리면서 우리를 맞이하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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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매수는 실패로 돌아갔다. 두 배가 넘게 뛰어버린 마크플랜의 주식을 고작 23%의 프리미엄을 먹고 팔겠다는 투자자는 없었다. 그래도 워레스의 조작과 우호지분을 바탕으로 공개매수 기간에 몇 십 만주를 획득할 수는 있었지만 목표치에는 한참 못 미친다. 최이사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 갔고 언제나 축제분위기인 박전무도 점점 표정이 심각해져 갔다. 사장은 최근 회사에 안나오는 날이 더 많아 졌다. 들리는 말에는 골프를 치러 간다는 둥 온천에 간다는 둥 말이 많지만 정치권에 로비하러 갔다는 추측이 강하게 들었다. 박전무는 “사장님도 다 생각이 있으신 게야.”라며 두둔한다.

“워레스가 보유한 우리 회사 지분이 이제 13%대로군. 역시 워레스도 자금압박이 심한 거 아니겠나. 나는 너무 외국인들만 믿고 있는 것도 좀 찜찜해.
사장이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있으니 최이사도 너무 초조해 하지 마시게.“

“아니오. 사장님의 기분도 이해는 하지만 방법이 틀렸어요. 후환이 큽니다.
가뜩이나 마크플랜 쪽에서도 우리 동향을 감시하고 있는데 이런 때에 로비라니 당장 그만두라고 하십시오!“
  
일처리야 깐깐하지만 목소리만은 차분하던 최이사가 언성을 높였다. 사장은 외국인에게 의지하려는 최이사가 답답하고 최이사는 아직도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인 사장에게 분통터져 하고 있다. 주가조작도 정치권로비도 불법임에는 매 한가지지만 정치로비는 들킬 위험도 더 큰데다 사장에겐 예전에 의혹을 받은 전례가 있다.

언제 불똥이 튈까 눈치를 보던 나는 박전무가 떠넘기고 간 일거리를 얌전히 내려놓고 슬그머니 일어섰다. 시킨 일은 다 해 놨다. 인사를 하고 이사실을 나가려는데 다행히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김서경씨, 당신이 우리 팀에 있는 이유가 뭔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따위로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웃긴 건 안 그런척하던 박전무가 은근히 나에게 압박을 강요한다는 거다. “자네 권이도랑 동창이었다면서,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해줘?” 혹은“그때 싸운 거 때문에 권이도 그 친구 딴 맘먹은 거 아냐?”라고. 제기랄 사장까지 있었으면 둘이 번갈아가며 나를 들들 볶을 거다. 회사 사정이 불안하게 돌아가니까 온갖 연줄을 잡아서라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하고픈 경영진의 마음이야 이해는 가지만 말이다.
차라리 권이도와 자주 만나기라도 하면 무언가 노력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텐데 그것도 아니니 박전무는 술이라도 한 잔 하라면서 법인카드를 찔러 넣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지갑이 들어있는 안주머니가 묵직하다 아주.





권이도와는 얼떨결에 데이트 약속을 해버렸지만 그쪽은 나에 비해 훨씬 바쁘다. 본래 증권사 업무량도 만만치 않을 텐데 두 회사의 주식가지고 장난치려니 머리털 빠지도록 힘들 거다. 하긴, 우리 회사에 애널추천리포트 하나 써주는데 최이사한테 5천 받기로 했다니 돈 버는 재미는 쏠쏠하겠구나.
그렇게 바쁘신 몸께서 오늘은 웬일로 전화를 다하셨다. 지난번에 했던 약속 지키라고.

-얼마 전 생각지도 못한 귀한 물건이 손에 떨어졌습니다.
혼자 즐기기에도 매우 좋은 재료지만 서경씨와 꼭 함께 즐겨보고 싶더군요.
이건 보통 기회가 아닙니다. 상당히 깐깐하게 굴던 진품이거든요.

“도구를 이용한 어떤 행위도 금지한다고 했습니다.”

-걱정마세요. 도구는 서경씨에게 쓰지 않을 겁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설마 자기 자신한테 쓴다는 거야? 순간 가터벨트를 입고 초를 들고 있는 장면이 상상되어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전 서경씨가 경험이 풍부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까?

이 자식 은근히 경쟁심 부추기네. 결국 어떤 플레이인줄은 몰라도 내가 중간에 싫다고 하면 그만두는 걸로 합의를 보며 통화를 끝냈다.

뭐 괜찮겠지.
요즘은 폴리곤이나 헤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본의 아니게 금욕 중이었다. 자진해서 토요근무를 서고 야근을 하는 부지런함에 내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건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라는 건 일단 제쳐두고......그러니 하루저녁 근사하게 즐기는 것도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법인카드도 받았겠다, 회사카드 긁으면서 한번 기분 내 보자고.





생각 같아서는 서울 외곽으로 달리고 싶었다.
이 좋은 주말, 뭐가 아쉬워서 공해에 찌든 하늘 아래 차들이 주차장처럼 즐비한 도로 위를 기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떠나고 싶어 하는 내 맘과 달리 권이도는 그리 멀리 나갈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벌써 호텔도 예약해 뒀단다. 으이그 내가 말을 말지.
아쉬운 대로 주말임에도 한가한 레스토랑을 찾아 가기로 했다. 서울시내 데이트 코스라면 꽉 잡고 있는 우리들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곳을 골라 내 차로 움직였다. 출발이 좋다. 우선 내 차로 에스코트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고 품질 좋은 와인을 마시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정식 코스라니,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아아, 이제야 알겠어. 내게 쌓여있던 욕구는 원나잇스탠드로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간과의 대화, 온기, 은은한 긴장감을 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상대가 권이도라도 말이다.

“몸은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어느새 권이도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봄날 아직 다 녹지 않는 차갑고 단단한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애널 말입니까?”

직접적인 표현에 얼굴이 열로 달아올랐다. 머릿속에 희미하게 그리고 있던 것을 확실한 단어로 일깨워주어서 예전의 미안한 마음이 되살아났다.
  
“예. 생각해보니 제대로 사과를 못한 것 같더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 실수였어요.”

와인을 한모금 머금어 입안에서 굴리며 권이도는 생각에 잠겼다. 요즘 일이 많이 바쁜지 확실히 피곤한 티가 난다. 눈가에 그늘이라던가...문득 이루 말할 수 없는 연민과 안쓰러움과 사랑스러움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저 치가 바쁜 이유 중 하나가 불법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음...하루 종일 앉은 자리가 불편하긴 했습니다.
매일 아침 화장실 가는 습관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지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와인이 역류할 뻔했다.
요조숙녀마냥 하얀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닦은 권이도는 자못 걱정이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솔직히 그날 상당히 쇼크가 컸습니다.
애널리스트인 제가 애널 관리도 못하고 매일 아침 애널에서 피를 봐야 했으니 충격은 제곱수로 다가오더군요

애, 애널리스트는 그 애널이 아니잖아!
얼굴이 와인색으로 변하는 줄 알았다. 식은땀과 함께 민망한 웃음이 나오면서 “그것참 힘들었겠네요...“따위의 멍청이 같은 말이나 내뱉다니 이제까지 파트너들을 홀려먹던 유려한 말솜씨는 어디로 말아 먹었나. 또 뭔가를 생각하는 권이도에게선 분명 엉뚱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하시는 일은 많이 바쁘십니까.”

“IL에 대한 애널리포트 말입니까? 기업분석은 다 끝난 상태이니까 M&A관련 시세 변동 추이나 기타 변수를 유리하게 포장해서 그럴듯하게 작성하는 일만 남았지요.
아직 보고서를 올릴 때가 아니라 시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냥 직장일은 괜찮냐는 뜻으로 물은 건데 권이도는 내 이야기를 그쪽으로 해석했나보다. 하긴, 우리의 연결고리이며 핵심 관심사이기도하지. 나는 한숨을 쉬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이 사람과 둘만 있을 때 회사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회사 얘기를 하면 마치 최이사의 사주를 받아 권이도와 만나는 기분이 들어서 불쾌하기 때문이다. 박전무가 흘려주는 내용만 잘 분석해도 충분히 돈방석에 올라앉을 수 있으니 회사 기밀에까지 기웃거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다. 야심이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주제넘게 나대다가 인생 종 친 사람을 살면서 종종 보아왔다.

“어쨌든 힘들겠군요. 뭐, 저는 당신과 그런 얘기나 하고 싶진 않으니까 회사 얘기는 접어두죠.”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권이도는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사실은 말입니다. 서경씨, 제가 진짜 쓰고 싶은 리포트는 따로 있습니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은밀한 음성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만 같았다. 권이도는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최근 제가 발견한 종목입니다. 아직 아무도 눈치를 못 채고 있어요. 접근성이 까다롭고 정보가 비공개인 곳이라서 저로서도 아직 한번 밖에 접촉하지 못한 곳입니다.
하지만 애널리스트인 제 피를 끓게 만드는 곳이지요. 돈 따위 바라지도 않습니다. 분석 자체에 대해 희열을 느낄 수 있거든요.“

권이도는 일에 대해 프로페셔널한 부분에서만큼은 굉장히 열정적이다. 언젠가, 박전무와 Mr.앨런과 넷이서 수 시간 동안 진행했던 미팅에서도 느꼈지만 열정과 능력과 욕망을 동시에 가진 친구였다.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최이사가 권이도만큼은 인정하면서 은근히 경계를 보내고 있을 정도로. 어쩌면 사장보다 IL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정말 힘이 넘치는 사람이다.
본업인 증권사 업무도 만만치 않을텐데 주식작전에...언제 또 새로운 기업을 물색했단 말야?

“권이도씨의 흥미를 끌다니 상당히 좋은 곳인가 보군요.
요즘 튼튼하고 오래 가는 곳이 드문데 말입니다. 다른 곳에 먹혀버릴 수도 있고요.”

“비교적 튼튼하고 질긴 곳입니다.
게다가 만만하게 보고 먹으려 하다간 자칫 먹혀버릴 소지가 있을 정도로 내부는 공격적이에요.”

오, 꽤나 마음에 드는 경영진이군.

“그런가하면 부드럽게 포용하는 능력도 있어서......그걸 모두 흡수해 버리더군요. 사실 처음엔 제가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었는데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게다가 어찌나 경계가 심한지, 더 이상 접근을 못하게 하더군요. 그 후로 제 관심종목 1순위입니다.”

그래, 그래, 요즘은 작은 회사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얼마나 밉보였기에 기업에서 애널리스트를 경계한단 말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권이도가 저렇게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니 안 들어 줄 수 없지. 자아, 그럼 어느 회사인지 좀 물어봐도 될까? 나중에 HTS(주식매매시스템)를 켜고 관심 종목에 추가 시켜야지. 혼자만 재미 보지 말자고 애널리스트씨.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궁금해지는 데요? 그곳이 어딘지......”

진지하게 이야기 하던 권이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빙그레 웃었다. 넉넉하고 시원스러운 미소였다.

“서경씨의 애널 말입니다.”

“예?”

뜬금없이 무슨 얘기란 말인가. 나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미소 위에 기름기가 슬슬 돌기 시작하더니 능글맞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권이도는 내 어깨를 슬쩍 누르며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제가 진짜 쓰고 싶은 건 당신의 애널 보고서라는 말입니다.”

완전히 질려서 얼굴이 화이트 와인색으로 변해버렸다.
눈만 껌벅껌벅,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내가 의자에 꼿꼿이 앉은 채로 얼어붙어 있는 사이 권이도는 멋대로 계산해 버렸고 결국 품속의 법인카드는 써 보지도 못했다. 방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냐. 하얗게 질린 얼굴에 이성이 돌아오면서 토마토소스를 뿌린 것 마냥 시뻘겋게 익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봄인 줄 알고 언 땅을 비집고 나온 여린 새싹은 북풍한설에 얼어 죽어버렸다.





농담이다. 농담. 이 사람은 그런 식으로 나를 놀리면서 즐거워하는 거다.
서울시내의 야경을 즐기면서 찬바람이 흥분된 머리를 식혀주길 바랐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옆에서 권이도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정말 미남이고 매너 좋은 인간인데 너무나도 치명적인 옥의 티다. 백년 사랑이 식을 만큼.
권이도를 보며 안타까움에 혀를 쯧쯧 차는 중이었다. 핸드폰의 진동이라도 느꼈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전화의 수신자를 확인한 권이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하고 전화를 받은 권이도는 상당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통화했다.

“꽤 늦게 끝났군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많이 피곤하실 텐데 힘들 것 같으면 말씀하십시오.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좋으니까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망설임이 있다면 지금 그만두는 것이 좋아요. 아무래도 막상 닥치고 보면 겁이 나는 법이니까.”  

몇 발자국 떨어져서 통화하고 있지만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 통화 내용은 다 들린다. 사무적인 대화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목소리가 저렇게 느끼하나? 순간 양다리 걸치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직감이 치고 올라왔다. 울컥했다. 동시에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지금 권이도가 양다리든 문어발 다리든 내가 그거 가지고 울컥할 자격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에, 물론 알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저를 이용해 주세요. 저도 그쪽을 이용하고 있는 거라고 편안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걱정 말아요. 뒤끝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 조금 이따가 전에 말한 호텔, 1012호실에서 뵙죠.“

통화를 끝낸 권이도가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왔다. 아주 입이 찢어지겠구나 그냥. 그런데 조금 이따가라니, 나랑 선약이 있는 거 아니었어?

“물건이 도착했답니다.”  





*                *                *





호텔로 향하는 내내 물건이 뭐냐며 끈질기게 추궁했다.
고민을 하던 권이도는 호텔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면서 겨우 한마디를 했다. 얼마나 엄청난 물건이길래 저리도 주저 한단 말인가. 아까 얼마든지 이용해주세요? 애용해 주세요? 뭐 그랬던 걸 보니 성인용품 가게 주인이랑 통화라도 한 건가. 목소리에 버터 바른 걸로 보아 성인용품 가게 주인과 양다리 중이라거나...으음....가게를 자주 들락거리다가 눈이 맞는 스토리라, 그럴듯하긴 하다.

“......서경씨, 쓰리섬 괜찮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인용품 샵 마스터와 쓰리섬이라고?

“폴리곤에서 들은 서경씨 소문으론 난교파티도 즐긴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는 커버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습니까? 상대의 동의도 얻었습니다. 얼굴과 몸은 보장하지요.”

엘리베이터가 10층을 가리켰다. 복도로 나와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었다. 내가 난교파티를 즐긴 다는 건 어디서 돈 헛소문이야? 마다하지 않을 뿐이지 즐기는 건 아니라고. 뭐 얼굴과 몸이 보장된다니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단지 가슴 한 구석에서 아까 울컥한 감정이 또 치고 올라오는 것이......

뭐야 섭섭한 거야 김서경? 권이도가 정말 내 몸만이 목적이었구나 하는 것 때문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새삼스럽게 무슨 짓이야 이게. 권이도에게 순정이라도 바랐어? 내가 섹스를 스포츠로 알 듯 저치도 마찬가지다. 섹스를 무슨 게임으로 아는 인간이다.

“좋지요. 뭘 그런 걸 뜸들이면서 이제야 말하는 겁니까? 별 것도 아닌 것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자 권이도의 표정도 밝아진다. “아, 다행입니다.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라니, 그 해맑은 얼굴을 보자 괜히 이마에 힘줄이 돋는다.

“사실은 상대를 어렵게 설득했거든요.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르는 친구라 미리 말하기도 상당히 껄끄러웠습니다. 기껏 서경씨에게 쓰리섬을 제안해 놨다가 도망가 버리면 곤란하잖아요.“

“허어 도망?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폴리곤에 몇 번 들락날락거린 적은 있는 친구입니다. 아마, 서경씨도 얼굴 정도는 봤을 거에요.”

그렇게 말하는 권이도의 얼굴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서경씨와 그 사람이라면 제겐 최고의 밤이 되겠지요.”

권이도는 1012호실 앞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준비할 것이 있으니 잠시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마음이 착잡하다. 이거 권이도 자식, 양손에 떡을 쥐고 주무르려는 속셈이렷다? 하긴, 어차피 오늘은 내가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라면 마음껏 하게 해줄 생각이다. 사람 하나 느는 거야 그리 낯선 일도 아니고 뻑적지근하게 놀아 볼 수 있을 거다. 저렇게 자신 있어 하니 괜찮은 상대겠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권이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왔다. 이제까지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최이사가 5천을 준다고 했을 때도 저러진 않았겠다. 나는 권이도의 안내에 따라 1012호실로 들어갔고 권이도가 힘들게 구했다는 그 성인용품 샵 마스터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봐주마 하고 속으로 코웃음 쳤다.

“원치 않으면 서경씨 이름을 밝히진 않겠습니다. 상대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걸 꺼려했고, 자진해서 눈을 가렸으니 서경씨 얼굴도 모를 겁니다.
어때요 괜찮습니까?“

귓가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 이쪽 세계에서는 아예 자기 가명을 정해놓고 즐기는 사람도 종종 있다. 어차피 원나잇 상대에게 자신을 알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겠지. 서울은 좁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름을 속이고 얼굴을 속이는 유흥에 열광한다. 나는 눈을 가렸다는 말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또 다른 삼자를 만나러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입을 다물고 숨을 멈출 뻔했다.

침대 위에는 눈이 가려지고 손은 등 뒤로 돌려져 묶여 있는 한 청년이 청바지에 윗옷은 벗은 채로 앉아 있었다. 청년은 소리가 나는 문가로 고개를 돌린다. 검은 천으로 가린 눈 아래 매끈하게 뻗은 코와 얄팍한 뺨이 여름의 태양에 그을려 있었다. 고집스러운 입술과 길고 균형 잡힌 팔다리. 보디빌딩이 아닌, 막일로 다져진 실용적인 근육의 상체.
남치현이었다.

“자아, 그렇게 떨지 말아요. 괜찮습니다. 저분은 당신도 좋아할 거예요
나를 믿어요. 절대 거칠게 하지 않아요. 우리를 한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몸에 힘을 빼세요.“

끔찍스러우리 만치 달콤한 목소리로 권이도가 남치현의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드러난 어깨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주무르며 상대의 긴장을 이완 시킨다. 종종 어깨의 동그란 부분과 귓가에 입술을 비비며 그 어떤 연인보다 상냥하고 자상하게 매혹시킨다. 치현의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괜찮습니까?” 낮게 묻는 권이도의 질문에 치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눈물이 나는 줄 알았다.

비틀거리며 침실 벽에 몸을 기대었다.
내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낀 권이도가 ‘맘에 안 드십니까?‘ 라며 사인을 보내왔다. 나는 손을 흔들어 그 질문에 애매한 대답을 했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마치 귀찮은 파리 쫓아 버리듯 허공에 손을 훠이훠이 젓는 내 모습을 거절의 의미로 해석한 권이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묶은 건 이 청년의 요구였습니다. 혹시 그 점에 맘에 걸리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치현이는 내 존재를 알아차릴 것이다.

동생처럼 아끼던 녀석이었다. 다소 난폭한 녀석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아이였다.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주말 이 시간에 치킨집은 피크다. 쉬는 날도 평일로 정할 수밖에 없는 업종 특성상 이 시간에 치현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되었다.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노여움. 그리고 자기혐오가 찾아왔다.
일하고 있어야 할 치현이 여기 있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했다. 치현의 취미가 여전히 고약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고 원인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상황이 권이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가장 나를 경악케 했던 건, 눈을 가리고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고개를 여기저기 돌리는 치현의 모습에 아랫도리가 반응한 내 몸이었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습게도 내 남성은 양복바지 위로 모양새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 반응을 지켜본 권이도가 빙긋- 음흉한 웃음을 짓는다.

“먼저 씻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먼저 씻는 동안 이 아이와 잠깐 친분을 쌓는 것도 좋겠군요.”

권이도가 치현의 귓바퀴에 입술을 스치며 말했다. 작은 행동에도 그을린 어깨가 움칫 떨린다. 다소 불안해하고 있지만 권이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저 남치현이, 저 꼬마가, 내 앞에서 강한 척하던 그 녀석이 권이도에게는 힘없는 약자의 모습을 하고 온전히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왜?
나는 홀리듯 치현에게로 걸어갔다.
권이도가 자리를 비켜 주며 빙그레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개자식은 아마 내가 치현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한 나머지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로 앞섶은 발기했다고 믿고 있겠지. 그런데 빌어먹게도 그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 꼬마에게서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형, 동생 놀음하면서는 깨닫지 못했던, 절대로 실행할 수 없었던 어떤 폭력적인 욕구가 이유모를 배신감과 함께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올랐다.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듯 꼬마의 양 어깨를 손으로 꽈악 잡아 눌렀다. 낯선 사람의 손에 놀랐는지 꼬마의 몸이 경련한다. 그러나 이내 결심했다는 듯 몸에 힘을 뺀다. 망연히 고개를 들고 있는 얼굴에는 검은 천으로 그 눈이 가려져 있다. 꼬마의 얼굴이 비록 나를 향하고 있어도 나를 보는 것이 아니다. 하룻밤으로 끝날 상대, 권이도의 권유에 못 이겨 오늘 밤만 즐기고 말 상대. 지금의 나는 치현에게 그 정도 가치였다.
그리고, 만일 권이도가 나에게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나보다 더 마음에 든 상대를 만났다면, 이 자리엔 내가 아니라 다른 이가 서 있었겠지.

“치현아......왜......”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치현에게서 호흡이 멈췄다. 긴장하며 떨고 있던 근육이 일제히 굳었다. 그대로 몸이 시체가 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체온이 식는다. 맥박이 멎는다. 혈관이 움직임을 멈춘다. 실제로 치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니지만 어깨를 맞잡고 있는 양 손바닥 밑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놔!”

갑자기 치현이 몸부림 쳤다. 나와 권이도는 그 서슬에 놀라 잠시 치현의 몸에서 떨어졌다. 치현은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턱이 덜덜 떨릴 만큼 동요하고 있었다.

“권이도 이거 풀어! 빨리!”

영문을 모르는 권이도는 일단 치현의 손을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끈이 풀림과 동시에 치현은 거칠게 눈가리개를 잡아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던 치현의 눈동자는 나를 보는 순간 세상의 절망이라도 만난 듯 빙점 이하로 내려갔다.

“사, 상대가 서, 서경 형 이었어?”

“폴리곤에 자주 오는 분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설마 두 분이 아는 사이일 줄은......”
  
꼬마가 괴성을 질렀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른다. “아아아아아---!!!”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자신의 셔츠를 찢듯이 잡아채어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비명을 지르면서.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나는 치현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가려 했다.

“따라 오지 마--!!!!”

충혈된 눈동자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앞머리 사이로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에 비친 건 분노도, 배신감도 아니다.
미안함.
물기가 어려 있었다.

치현을 잡으러 가는 나를 등 뒤에서 권이도가 붙잡았다.
쫓아가야 한다며 소리를 질었다. 이미 꼬마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간 상태였다. 위험하다. 오늘밤 꼬마는 어디서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

“권이도씨 놓으십시요! 치현이를! 치현이를 잡아야 합니다!”

“잡아서 뭘 어쩌려고요!”

“나 때문에 상처 받았어요! 그런데 저렇게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구요!

“지금의 치현에겐 무슨 말을 해도 상처 일 겁니다! 그냥 놔둬야 해요!“

“제기랄, 놔! 당신이 저 아이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데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권이도와 실랑이를 하다가 지금 나가 봐야 꼬마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몸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권이도 자식, 왜 말려! 애가 저렇게 눈물 그렁그렁해서 뛰쳐나가는데 왜 잡지 말라고 말리는 거냐고!

“대체......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숨을 몰아쉬며 권이도가 노려보았다. 나도 마주 노려보았다.
아주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다.





*                *                *





언젠가 치현과 이런 비슷한 분위기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서울은 좁으니까, 자주 가는 게이바도 비슷하니까, 우연찮게 서로의 파트너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던지, 클럽 화장실 뒤편에서 오럴하고 있는 모습을 들킨다던가 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유도한 것이 권이도라는 점에서 꼬마도 나도 입장이 우습게 되어버렸다.

치현도 나도 이른바 권이도의 전 파트너 아닌가.

꼬마가 완전히 권이도에게 질렸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이 자와 종종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업상의 이야기라서 꼬마에게 말해봤자 재미도 없고 처음 권이도와 얽혔을 때는 불쾌한 일 투성이라 말조차 꺼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치현이 나와 권이도 사이를 신경 쓰는 것이 싫었다.
언젠가 물비린내 나는 한강 둔치를 드라이브 할 때 왜 권이도랑 헤어졌냐고 묻는 치현이 생각나서 더욱, 우리사이에 그 자를 개입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권이도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섹스이미지 때문에 어설픈 소꿉장난의 좋은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어이가 없다.
고의든 아니든 치현도 나도 서로를 속이고 있었던 꼴이 되어버렸으니까.

내 경우는 그렇다 치고 치현이는? 그동안 나를 만나면서 권이도 역시 만나고 있었나? 나는 그냥 정말로 옆집 형 같기만 한 존재였던 거야? 섹스취향이 맞지 않는 남자와 같이 어울리면서 권이도를 생각했단 말이지--?

......제기랄...나는 또 뭘 잘했다고 괜히 비약하고 있는 거냐.

권이도는 아주 맛없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치현과의 관계에 대해 대충 설명하자 듣고만 있던 권이도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품에서 담배를 찾는 일이었다. 어쩌면 정작 가장 열 받는 사람은 저 사람일지도 모른다. 잔뜩 기대하며 준비한 쓰리섬 플레이는 엉망이 되고 기껏 귀엽게 주무르고 있던 아이가 알고 보니 양다리 비슷한 거였는데 그 상대가 나였으니 얼마나 스타일 구겨지는 상황이란 말인가.  

......하긴, 저 자식은 남치현이 양다리든 말든 그것보다 쓰리섬 플레이가 산통 깨진 것에 더 분노할 인간이구나.

“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야 할 치현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나는 방금 전까지 치현이 있던 침대에 걸터앉아 권이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잘못 아니라는 거 알긴 아는데, 왜 하필 치현이냐고. 왜 하필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치현이와 나를 마주치게 하냐고. 그 생각을 하면 말투도 행동도 눈초리도 곱게 나가질 않는다.
한동안 말없이 있던 그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남치현은 아르바이트에서 잘렸습니다.”

가늘게 노려보던 눈이 일시에 동그래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잠시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언제? 왜? 주인아저씨도 친절하다면서?

“안 좋은 패거리들이 남치현에게 앙심이라도 품고 있었나봅니다.
기어코 치현이 일하고 있는 치킨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더니 보다 못한 주인이 미안하다며 나가달라고 했답니다.“

“그게 대체 언제......”

“아마 보름 전 일겁니다. 그때쯤 폴리곤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남치현을 만났으니까요.
그리고 아직까지 일정한 아르바이트를 못 구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보름이라니, 첫 월급 탔다고 자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럼 대체 그동안 왜 이야기를 안 한 거야? 다른 아르바이트도 없었다면서 왜 만나자고 하지도 않았지? 분명 보고 싶다고 깜찍한 소리도 했던 것 같은데...그것도 모르고 나는 주말에도, 평일저녁에도 못 만난다고 혼자 투덜대고 있었는데, 아무리 내게 먼저 연락하는 녀석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나는 그 녀석이 정말 바쁜 줄로만 알고......!

문득 등으로 한기가 달렸다.
그런데 수도 없이 오던 그 부재중 통화는 뭐였지?
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척, 바쁜척했지?

“폴리곤 근처를 배회하던 남치현은 굉장히 불안정해 보였습니다.
저를 보면 화만 내던 사람이었는데 장난처럼 유혹했더니 너무 쉽게 넘어오더군요.
게다가, 분위기가 괜찮은 것 같아서 제 취향에 맞게 플레이를 했는데도 잘 따라와 줬지요. 이게 웬 일인가 했습니다.“

이제 권이도에게 원망을 보낼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 입에서 나오는 남치현에 대한 이야기를 꿈결에 들려오는 소리마냥 멍하게 듣고 앉아 있었다. 분명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고 싶은 이야기들인데 머릿속에서는 차곡차곡 저장되는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일련의 연산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치현과 관계를 할 때 조금 거칠게 대합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요즘의 치현은 자신을 잊고 싶어 하는지 저를 자주 찾더군요. 생활이 넉넉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서 오는 불안감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그 아이, 자학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연산작업이 끝났다. 답은 나왔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바보다!
부재중 통화는 꼬마의 SOS표시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주가에 넋이 빠져 바쁘다는 핑계로 꼬마의 신호를 눈치 채지 못했다. 눈치 9단 김서경이, 파트너의 눈짓만 보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자부하던 김서경이 수없이 울리던 꼬마의 전화만은 왜 그렇게 쉽게 외면했던가!

“셋이 하는 섹스를 하자고 했을 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아아, 제가 얼마나 기대했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모처럼 특등급의 물건을 손 안에 넣고 마음껏 주무르게 되었는데 산통 다 깨졌어요.   
오늘을 제가 얼마나 기대했는지 당신이......“

권이도가 하는 말을 듣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의식중에 멱살을 잡아 올렸지만 멱살을 잡고도 나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전화할 때도 좋은 물건이 어떻고 귀한 재료가 어떻고 떠들었더랬다. 그것이 성인용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었어?

“물건이라니...치현이를 물건이라고 하신 겁니까?”

“아, 기분 상하셨군요. 이건 제 버릇입니다. 파트너를 종종 상품에 비유하곤 하지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허, 그래서 나도 물건입니까? 그래, 나는 몇 점짜립니까?”

“음, 판단하기가 곤란합니다.
제가 말한 파트너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관계일 때의 경우거든요.”

“뭐라고?”

“치현과 나는 그런 사이입니다.
우리는 합의하에 이뤄진 관계입니다. 마치 거래하듯이, 일정한 선을 두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죠. 나는 내 취향의 섹스를, 치현은 요령 좋게 학대해줄 상대를 찾았던 거죠. 누구처럼 맘씨 좋은 형 노릇을 하는 거 말고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권이도가 내려본다. 이 자식, 목소리에 높낮이 없이 태평하게 말하고 있지만 잔뜩 꼬였다. 심사가 뒤틀린 기분은 알겠지만 나 역시 남 입장 생각해 줄 때가 아니다.

“남치현이...몸은 나한테 맡기면서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겠군요.
다음에 만나면 혼 좀 내 줘야 하겠습니다.“

멱살을 잡은 내 손을 털어내고 느긋하게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다. 그 얄미운 태도에 어금니를 깨물며 권이도를 노려봤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화를 삭이며 핸드폰을 꺼내 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는다. 수십 번의 신호음을 들으며 전화를 해봤지만 반응이 없다.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다. 괜찮다고 짧은 메시지 정도는 보낼 수 있을 텐데...
호화로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어깨를 구부리며 핸드폰에 매달린 내가 한심했던지 권이도는 자기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자기도 문자를 보내더니 잠시 후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디십니까......”

나는 문자를 보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설마 권이도가 통화하고 있는 상대가 치현이? 내가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도 안받더니 권이도 전화는 받는다고?
그러나 곧 권이도는 미간을 찌푸리며 수화기에서 귀를 떼어야 했다. 통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엄청나게 커다란 목소리였다. 너무 울려서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욕설이 섞인 고함이었다.

“치현씨, 화를 내야 할 쪽은 저입니다.
서경씨와 아는 사이일 줄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나는 치현과 통화하는 권이도를 향해 수화기를 넘기라는 제스츄어로 다급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치현에게 따지고 드는 권이도는 느긋함을 보이면서 내 손짓을 못 본척한다. 제기랄 확 뺏어 버릴까보다. 급기야 수화기를 잡아채는 시늉까지 하자 권이도가 피식 웃는다.

“서경씨가 걱정 많이 하시는 군요. 바꿔드리겠습니다.”  

[뭐야? 안돼!]하는 소리가 울리는 권이도의 핸드폰을 잡아채고 뱃속으로부터 나오는 소리로 외쳤다.

“너 어디야-!!”

아까는 그렇게 욕도 잘하더니 묵묵부답이다. 나는 걱정 반, 화난 마음 반이 뒤섞여 화내다가 따지다가 기어코는 살살 달래었다. 소리쳐서 미안해. 하지만 그렇게 가버리면 형이 걱정 안하겠니? 오늘일은 정말 나도 놀랐어. 권이도는 회사일 때문에 그동안 계속 만났는데, 아, 얘기하면 길어. 일단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 응?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치현은 풀 죽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형. 아, 나 지금 너무 꼴사나워서 쪽팔려 죽겠어.

아악!! 이 자식아 그렇게 말하고 끊어버리면 내가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있겠냐!!  
패잔병이 무기를 반납하듯 끊겨버린 핸드폰을 권이도에게 돌려주는 내 표정은 처참했다. 권이도가 끌끌 혀를 차며 이죽인다.“그것하나 대화를 이어가지 못합니까? 요령이 없군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치밀어 올라와 권이도를 쏘아 보았다. 그래, 당신은 얼마나 요령이 좋아서 띠동갑보다 한참 어린애한테 존대까지 하면서 욕이나 들어먹는 거냐?

“대체 뭐라고 했기에 치현이가 전화를 받은 겁니까?”

“문자를 보냈습니다. 서경씨는 아직 남치현을 다루는 법을 모르는군요.
달래는 것보다 신경을 돋우는 편이 더 다이나믹한 반응을 보이지요.”

“뭐라고 보냈는데요?”

“[지금 제 전화를 받지 않으면 다음번엔 글리세린을 준비 하겠다]
...고 했습니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 어디에 화가 날만한 부분이 있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모르겠다는 결론이 나오자 괜히 짜증만 났다. 권이도는 내가 이해 못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팔짱을 끼며 비웃고 있다. 저 인간, 갑자기 뻔뻔 모드로 들어간 것이 기분 나쁘다.

“너 어디야...라니, 마치 외박한 딸한테 소리 지르는 아버지 같군요.
이야, 두 사람이 그렇게 화목한 사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대놓고 빈정거리는 구나.

“그래, 당신 앞에서 남치현은 어떻습니까? 고분고분하던가요? 아니면 앙탈을 부리던가요?
그나저나 당신도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그 맹랑한 꼬마와 내 관계를 뻔히 알면서도 나와 그 아이 사이를 오갔던 겁니까?“

“뻔히 알긴 뭘 압니까! 당신들은 이미 끝난 사이인 줄 알았습니다!”

“하~아 그렇습니까? 네에 그렇겠죠. 어제 밤의 커플도 오늘과 내일로 나눠서 잘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니까요. 처음엔 저와 사이도 안 좋았으니 그 사이 치현과 만나서 재미있는 데이트라도 한 모양이군요. 친절한 당신이라면 섹스도 친절하겠지요. 그러니 치현이 만족 못하고 밖으로 나도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빈정모드 부활이다. 나는 화를 내며 소리 질렀지만 역효과였다.

“무슨 소립니까! 섹스고 뭐고 나와 치현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설마 폴리곤에서 만난 주제에 플라토닉이라는 겁니까?”

짐짓 놀란 척 하는 권이도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제기랄, 이 얘기는 안하려고 했는데 내 입으로 실토해버렸다. 시근덕대며 노려보자니 권이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혀를 찼다.“정말입니까?”하고 반문하는 표정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다.

“당신이, 그렇게 까지 치현을 아끼는 줄은 몰랐군요.

“빈정거리지 마십시오. 나야말로 잔뜩 화가 났습니다. 그러는 당신이야 말로 나를 꼬드기는 동안 치현에게 몹쓸 짓이나 하고 있지 않았나요? 대체 저 애가 왜 저렇게 된 겁니까!”

“제 탓으로 돌리는 겁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치현은 엉뚱한 곳에 빠졌을 겁니다.
보름 전 폴리곤에서 헤매는 치현을 거두면서 웬일이냐고 물어 본 제게 그 꼬마가 뭐라고 말했는 줄 아십니까?
나라면 상처 안 남게 할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다른 사람을 찾는 수고도 덜 수 있으니 서로 좋은 거 아니냐고 혼자 웃더군요. 그런 치현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권이도와 말 할수록 입을 다물게 된다. 치현은 내가 아닌 치현이 되고 만다. 대체 왜 저런 자식에게 빠지는 거야. 섹스 취향이 나와 맞지 않아서? 제기랄, 그런 류의 플레이를 하려면 숙련된 사람이랑 하는 것이 몸에 좋다고 충고까지 한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가만, 이러는 순간에도 치현은 어디를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산성 없는 입씨름을 하는 사이 치현을 찾는 게 낫다. 나는 권이도를 노려보던 것을 관두고 호텔 방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내 뒤에서 헛웃음을 흘리며 기가 막혀하는 권이도의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또 어딜 가십니까?”

“치현이 찾으러 갑니다.”

“이거 두 사람 다 나를 한 방 먹이는 군요. 나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어야겠습니까?”

그렇게 웃는 얼굴로 이죽거려봤자 하나도 비참하지 않지만...꼴이 우습게 된 건 그도 마찬 가지니 기분 나쁜 것도 이해는 간다. 나는 다짜고짜 권이도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짓입니까?”

“당신이 그렇게 치현에 대해 잘 아는 척을 하니 어디 한 번 같이 찾아봅시다.”

“예에?”

등 뒤에서 어이없어 하는 권이도를 이끌고 호텔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권이도는 이래봐야 필요 없다는 둥, 일부러 찾아내는 것보다 혼자 있게 하는 게 낫다는 둥 말이 많았지만 지금 치현을 눈앞에서 보지 못하면 내가 미쳐 버릴 것만 같다. 대체, 왜 애를 내버려 둬야 한다는 거지? 사과를 하고 위로를 하고 네 잘못이 아니라며 얼러줘야 한다. 치현의 취향이야 내가 이러쿵저러쿵 할 게 못 되지만 넌지시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권유도 하고......억지로 권이도를 조수석에 집어넣으면서 문득 치현을 설득할 때 이 자가 옆에 있어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치현에 대해 착각하고 있어요. 그 애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닙니다.”

아니, 저 잘난척하는 자신감의 근원이 뭔지 알기 위해서라도 이 작자를 데려가야 하겠다. 혹시 내가 모르는 치현의 행동반경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                *                *





나한테 자기 집 열쇠가 있으니 치현이 집으로 갔을 리는 만무하고, 우선은 헤븐이나 폴리곤 근처를 뒤지기로 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꼬마가 또 다시 환락가에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는 데라곤 그런 곳뿐이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권이도는 비웃으며 “이런 델 뒤져봐야 소용없지요.”라고 말하는데 그럼 있을 만한 곳을 대보라니까 자기도 모른단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도끼눈을 뜨며 권이도를 흘겨봤더니 옆자리에서 느긋하게 몸을 기대어 있는 권이도는 룸 미러로 내 얼굴을 살피며 빙긋 웃기만 한다.

“남치현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여기까지 온 김에 치현에 대해 물어보기나 해보시죠.
헤븐의 정키들이 당신보다는 치현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화가 나서 급정거를 했다. 안전벨트를 맨 권이도의 몸은 가볍게 출렁 거렸을 뿐 오히려 내 몸이 심하게 요동쳐서 핸들에 코를 박을 뻔했다. 쯧쯧 혀를 차는 그의 태도가 밉살스럽다. 식식거리며 차에서 내리고는 권이도의 말 대로 헤븐을 먼저 들러보기로 했다. 언젠가, 헤븐에서 만났던 그 애교만점의 꼬맹이라면 좀 더 치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아 그때 자세히 얘기를 들어 둘 걸.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린 치현에 대한 정보가 새삼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주말의 헤븐은 그야말로 광란의 축제다.
이맘때쯤이면 폴리곤에도 어느 정도 끈적한 분위기가 조성되지만 어디까지나 분위기의 차원이지 저렇게 흥청망청하지는 않는다. 홀의 한 가운데에선 흥에 겨워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간 손님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푸릇푸릇한 애송이들이 광란을 벌이는 참이다. 개중에는 여자들도 섞여 있다. 나는 무대 위에서 스트립을 하는 손님의 근육질 몸매를 감상할 여유도 없이 고개를 돌리며 아는 사람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지... 사이키 조명이 쏘아대는 난장판에서 그 애교 덩어리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골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권이도씨? 히야 정말이네? 당신이 이곳엔 어쩐 일이에요?”

여유롭게 헤븐을 둘러보던 권이도가 샛노랗게 탈색해서 끊어지기 직전의 머리카락을 가진 말라깽이에게 미소를 지으며 반긴다. 그래봐야 내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비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저 말라깽이의 표정은 황홀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요. 한유빈씨지요? 그날 몸은 괜찮으셨습니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이 현란한 조명 아래에서도 확연했다. 이제 보니 뺨이 통통하고 피부색도 하얀데다가 표정변화가 무척 다양한 애송이였다. 나이는......맙소사 설마 미성년자?

“괘, 괜찮았어요. 그때 뒤처리를 잘해주셔서....“
   
안절부절 못하며 수줍어하는 저 모습이라니, 설마 미성년자한테까지 마수를 뻗친 거냐!

“그런데 정말 이런 곳엔 웬일이에요? 싫어했잖아요. 이런데.”

“음, 누굴 좀 찾으려고요. 혹시 남치현씨 아십니까?”

말라깽이의 얼굴이 대번에 벌레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야야, 말라깽이라고 만만하게 봤는데 상당히 깡다구 있는 인상도 지을 줄 아는구나. 애송이는 볼을 부풀리더니 권이도를 노려본다. “걔는 왜요?”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는 모습이 나름대로 귀엽다.

“쓰리섬 플레이를 하기로 했는데 도망가 버렸지 뭡니까.”

자, 잠깐! 당신 그런 걸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거야?!
권이도가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 발언을 해버리자 당황한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 행동을 눈치 챈 말라깽이는 그제야 나에게 눈길을 주더니 남의 얼굴과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핥아 내리는 시선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씨발, 그 새끼는 인기도 많아 좋겠네. 근데 남치현 그 자식은 또 도망간 거에요?
폴리곤의 킹카도 하나 꿰어 차고 있다면서 뭐가 부족해서 그 모양이래?”

“아마 그 킹카가 생각보다 밤일은 부실한가봅니다.”

“헹~ 꽤 유명하던데 밤일도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긴 30대랬으니 치현이 자식 체력을 따라가긴 힘들 거야.
아, 같은 30대라도 이도씨는 예외에요 예외.“

“감사합니다. 예외로 쳐줘서.”

둘이 아주 잘 노는구나. 말라깽이와 권이도는 한동안 문제의 ‘폴리곤의 킹카’를 두고 고자네 조루네 잔뜩 씹어대기에 바빴다. 이 몸을 킹카로 불러줘서 감읍하기 그지없다만 지금 그런 장난하고 놀 시간 없다고.

“한유빈씨라고 하셨지요.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정말 치현이가 갈만한 곳을 모르십니까?”

말라깽이는 내 쪽을 힐끔 보았다.

“그자식이 어디로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헤븐에서 남치현이랑 그나마 자주 어울리는 패거리들은 지금 여기 어딘가에서 취해 제정신이 아닐 걸요. 걔네들도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남치현이 도망갔다면 아무도 모를 거에요.”

“......치현의 인간관계가 별로 안 좋은가봐요?
유빈씨도 치현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묻자 애송이가 아하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사이키 조명과 고막이 터질 듯한 음악 속에서도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얼간이 같은 질문이란 걸 알지만 급한 마음에 해본소린데 또 저렇게 청아하게 웃어버리니 제기랄,

“헤븐에서 인간관계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요? 어차피 왔다가 떠나는 뜨내기들 뿐인데.
나는 그냥 녀석의 행동이 맘에 안 든 것뿐이지만, 뭐 그녀석이 몸 하나는 죽이니까 그렇게 싫어하는 것도 아니에요.
남치현만 보면 이를 가는 친구들이 있긴 한데 그 녀석들도 치현이 새끼한테 몇 번 얻어 터지더니 요즘은 잠잠한가 봐요.“

말라깽이는 춤을 추며 광란하는 사람들 틈을 비집으며 나와 권이도를 안내했다. 치현의 친구라는 패거리들은 이미 구석에서 약에 절어 있다. 말라깽이가 그들을 발로 차며 겨우 정신을 차리게 해서 몇 마디 치현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어어 혼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흉내 내는 그 자식?
몰라, 요즘 우리랑 어울리지도 않고 혼자 SM이니 뭐니 이상한데 빠졌다가 무슨 패밀리한테 잔뜩 물렸대나 어쨌대나.“

“그래도 걔가 한번 자고나면 분위기가 사근사근해지는 게 꽤 괜찮다고 하더라고. 그 소문 듣고 남치현이 노리는 새끼들도 많아.
근데 문제는 지한테 맘이 있어서 접근하는 줄도 모르고 깽판 내버리는 그 성격이란 말야.
초면부터 대놓고 시비 거는 그 버릇 좀 어떻게 안 되나. 헤븐에 오는 새끼들이 다 그렇고 그런 거 기대하고 오는 놈들인데 말 걸었다가 욕만 직싸게 얻어먹으면 어느 새끼가 좋아하겠냐고.”

“맞아맞아. 고놈 그렇게 눈 치켜뜨고 시비 걸면 아랫도리 묵직한 것이, 바로 깔아 눕고 싶게 만드는데....우리야 기껏 좆질이나 생각하지만 일반 길거리 깡패들이 고 눈깔에 얼마나 야마 돌겠냐고.
그 새끼 얼굴에 반창고 안 떨어지는 날이 드문 것도 다 이유가 있어.”

“근데 SM은 왜 했대? 원래 바텀은 잘 안하는 녀석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묶이기를 자처했다는 거야? 남치현이 매저키스트? 상상만해도 싸버릴 지경이다. 아주”
   
“야이 씨바들아 그래도 친구인데 무슨 개소리냐~~~~”

음탕하게 낄낄거리며 저들끼리 얽혀서 남치현을 씹어대나 싶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치고받으면서 욕설을 뿌린다. 나를 안내하던 말라깽이는 어깨를 으쓱했고 권이도는 뒤편에 가만히 기대어 내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에 힘이 빠져 버렸다.





별 소득 없이 헤븐의 문을 나섰다.
말라깽이는 여전히 나와 권이도 주위에서 알짱거렸지만 그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헤븐의 입구에 서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방실방실 웃는 애송이는 살살 눈웃음을 쳤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생각에 마주 봐 줬더니 하얀 뺨을 가진 얼굴을 내 눈 앞에 쑥 들이댄다.

“이봐요 아저씨, 그렇게 쓰리섬이 하고 싶으면 나는 어때요?
언제든 찾아와요. 폴리곤의 킹카라면 서비스 잔뜩 해줄테니까.“

나는 당황했다. 말을 못하고 굳어 있자 아이는 키득거리며 권이도에게 손인사를 하고 헤븐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요즘 애들은 다 맹랑한가 보다. 나도 나이를 들어버린 건가. 요즘 애들한테 왜이리 맥을 못 추나. 헛웃음을 지으며 차가운 밤공기에 몸을 맡겼다. 옆에서 권이도가 묵묵히 밤길을 같이 걸어주고 있었다. 기대고 싶게 만드는 어깨다. 남자인 나조차도.

“같이 동행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머리가 많이 식었습니다.”

남치현과의 뜻하잖은 만남에 흥분해버려 여기까지 달려온 것 치고는 이제 많이 진정이 되었다. 권이도의 말대로다. 나는 치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뛰쳐나가는 치현을 잡아서 다독여 줘야 했을지 아니면 권이도처럼 혼자 있게 내버려 둬야 했는지, 어느 쪽이 옳다고 확신을 못하게 되었다. 흔히들 남자가 고민이 있을 때는 혼자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던가.

“저는 치현의 집에 가서 기다려보겠습니다. 녀석도 밖에서 헤매다가 지치면 집에 돌아오겠지요.
둘 다 차가워진 머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해봐야 하겠습니다.”

“치현의 집 앞에서 밤이라도 새실 작정이십니까?”

“아니오. 스페어키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권이도는 약간 당혹스러워했다.

“스페어...키요? 남치현의 집 열쇠를 당신이 가지고 계신 겁니까?”

오호라, 표정을 보니 권이도는 아직 열쇠를 못 받은 모양이군. 나는 묘한데서 우월감을 느끼며 웃었다. 아아 그래. 우리는 가족놀이를 하고 있었으니까. 권이도는 내게 졌다는 분함 보다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보고는 빈정거림이 아닌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치현이 당신에게 상당히 의지하고 있군요.
그 아이는 며칠 밤 놀고 말 상대에게 열쇠까지 주면서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거야 누구나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권이도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내 말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아십니까? 남치현은 예전에 사귀던 사람한테 통장과 신분증을 도둑맞아 큰 사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다행이 금방 잡아서 몇 백으로 해결을 봤다고 들었습니다만 덕분에 집안과는 아예 인연을 끊은 것 같습니다.”

밤거리를 걷다말고 숨을 멈췄다. 뭐라고?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 권이도를 바라봤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은 복잡했고...또 착잡했다.

“아마도 당신은 생활이 넉넉하니까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이거 섭섭한데요. 제가 그렇게 달라고 해도 주지 않던 스페어키를 그리도 쉽게 가지고 있었다니.“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당신과 만나기 전, 치현과 사귀고 있었을 때 알았습니다.
남치현을 내 집에서 살게 하려고 한참 설득 중이었지요. 한사코 거절하기에 그럼 집 열쇠라도 달라고 했더니 그런 얘기를 해주더군요.
내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 일 이후 남의 집에 들어가 사는 것도, 자신의 집에 누가 멋대로 들락거리는 것도 싫다고 하더군요.
뭐 반쯤은 치현이 울며 매달린 상태에서 얻어낸 이야기입니다만...“

그제야 다시 차가운 밤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권이도가 나보다 치현을 알고 지낸 게 더 오래 된 건가...아니, 나와 치현의 관계도 비교적 오래가는 편이었지만 우리는 만날 때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나는 치현이 쫓기다시피 집에서 나와 혼자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개인사를 화제로 삼는 건 꺼려했고 서로 즐거운 이야기를 하기에도 바쁜데 우울한 과거 얘기나 하는 것은 시간 아깝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것이 남치현의 기분을 풀어주는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밝은 화제만 찾은 것이 그저 내 직장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건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문득 부끄러움이 치솟아 올라왔다.

“그건 그렇고 서경씨 당신도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스페어키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남치현과는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요?
혹시 오럴섹스는 섹스가 아니라는 어디의 전대통령 흉내라도 낸 겁니까?“

  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런 거 아닙니다!”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권이도는 정말로 진지한 얼굴로 졸졸 쫓아와 “그럼 패팅까지만 한 사이? 키스도 안 해 봤다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저 폴리곤의 킹카께서 스페어키까지 가지고 있는 상대를 가만히 놔뒀다는 걸 믿으라는 겁니까?”라며 신경을 긁어 놓고 있다. 저것이 빈정거림이 아니라 순수한 의문이라는 것이 더욱 낯 뜨겁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내 조만간에 치현이랑 만리장성을 쌓고 말리라. 그래서 권이도 당신의 테크닉보다 내가 한수 위라는 걸 보여주고 치현을 밝고 건강한 섹스의 세계로 인도할 테다!
젠장! 나는 또 무슨 헛생각을 하는 거야!  

“......서경씨, 당신도 치현에게 진심인겁니까?”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거리의 한 가운데에서 창백한 빛이 권이도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빨강, 파랑으로 빛나는 간판의 불빛, 가게에서 새어나오는 형광등의 희미한 Lux. 그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갖가지 조명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지저분한 거리에서서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신다. 진심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포괄적이다. 나는 대답을 멈추고 빛에 반사되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권이도의 안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아이를 가까이 한 건이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연인이고 싶은 건지, 그냥 형 동생 사이로 있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장난은 아닙니다. 권이도씨가 치현에게 미련이 남아 그 아이에게서 떨어지란 말을 한다면, 치현을 두고 경쟁을 벌일 용의가 있을 정도로요.“

몸에 힘을 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 남자의 음흉한 속셈보다는 내 쪽이 더 치현에게 나은 감정이라고 자신이 있었다. 내가 권이도보다 꿀릴 것은 딱 하나다. 섹스로 연결되지 않은 어정쩡한 관계. 그런 차이도 단숨에 좁힐 자신이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나, 언제부터 치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거지?

“호오~ 그럼 우리는 사랑의 라이벌입니까?”

으응? 반사되는 안경을 보고 흠칫했다. 무슨 라이벌? 뭐, 뭐야 그거! 그런 닭살 돋는 호칭은 관둬! 내 비록 화려한 연애편력을 자랑한다지만 구차하게 한 사람 놓고 싸우는 짓거리는 사절이라고! 차라리 이쪽에서 에이 드럽다 잘 먹고 잘 살아라 했으면 했지 그런 체력소모적인 삼각관계 같은 건......!!!   

“이거 흥미롭군요. 서경씨와 라이벌이 되다니.”

빙그레 웃는 입매에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기색이 비쳤다. 나는 얼떨떨한 심정을 겨우 추스르는 게 고작이었고 뭔가 핀트가 어긋난 것 아니냐고 항의하려고 하는데 권이도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리고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와 대등하게 겨루려면 우선 그 어쭙잖은 플라토닉부터 집어치워야 할 겁니다.
남치현은 생각보다 많이 꼬인 아이거든요.“





*                *                *





그날 밤 치현의 집에서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야 잠시 집에 들러 옷가지와 노트북을 들고 다시 돌아 왔다. 아예 주말 내내 치현의 집에 뿌리를 내릴 생각이었다. 아무도 없는 치현의 집에서 혼자 보내는 토요일은 조용했고 이따금 어린애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좁은 골목을 쿵쿵 울리곤 했다.
적막하다.
방 하나에 가뜩이나 작은 거실은 부엌을 겸하고 있다. 식탁은 이 집의 소파대신이기도 하다. 화장실이 딸려있는 게 용할 뿐이다. 혼자 사는 남자아이의 집이 쓸데없이 클 이유는 없지만 서경의 집의 두토막, 아니 세토막 정도밖에 안되어 보인다.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에서 시큼한 총각냄새가 난다.
빨아도, 아무리 환기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냄새. 제법 깔끔함을 떨어 구석구석 청소도 되어 있지만 미처 치우지 못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속옷, 츄리닝 바지, 두루마리 화장지......곳곳에 사람의 때가 묻은 집이 꼬마의 작은 세상 전부였다.  
멍하니 누워 천정의 벽지를 세었다. 머릿속은 치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진심인지도 모른다. 나는 치현이와 스테디로 사귀고 싶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고민을 하며 결론을 내리나. 하지만 생각 외로 엉뚱한 부분에서 난관에 부딪힌다.  
아아 치현아 너의 취향은 어찌 그리도 마이너하단 말이냐.
권이도의 충고에 따르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어지간해선 힘들 거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역시 정상적인 플레이는 무리가 있나? 그럼 자극적인 거? 나는 권이도처럼 느끼한 대사를 쏟아 붓는 건 절대 못한다. 그렇다면......으으음...내가 할 수 있으면서 매우매우 자극적인 거......일단 테크닉엔 자신 있으니까 문제는 상황만 자극적으로 만들면......
치현의 집에서 하루 종일 굴러다니며 그런 생각만 했다.  

행여나 내가 있으면 들어오지 않을까봐 밤에는 불을 끄고 장승처럼 부엌의 식탁에 앉아 있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이도 들만큼 든 아저씨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도 꼴사나운 일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치현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오늘도 안 오고 내일도 안 오면 여기서 출근할 각오도 하고 있다. 낮 동안에 하도 잤더니 밤에는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가고 있었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나는 몸에 긴장을 하며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비틀거리는 몸, 나지막이 뇌까리는 욕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치현은 술에 취해 있었다. 일행이 없어서 다행이다. 나는 손에 든 과도를 조심스럽게 등 뒤로 빼며 문 뒤에서 기다렸다.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웃옷을 벗으며 방문을 열어젖힌 치현은 앗- 하는 순간 내게 허리가 붙들리고 목덜미에 칼이 대어졌다.

“어떤 개새-!”

술 냄새가 확 끼친다. 그러나 소리 지르면 죽인다라는 무언의 협박을 담아 과도에 힘을 주었다. 칼집이 씌여져 있으니 베일 염려는 없다. 그러나 술에 취한 치현은 거기까지 판단할 여력이 못되는 듯 싶었다.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한다. 등 뒤에서 치현을 끌어안는 기분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녀석의 몸을 옭죄었다. 치현과 진심으로 몸싸움을 했을 경우 이길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과도를 무기삼지 않았으면 진즉에 발에 채여 나갔을지도 모른다.   

거친 숨소리가 좁은 방안을 메웠다. 치현의 몸이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미약하게 경련한다. 순간 무진장 미안해졌지만 이래봬도 오늘 하루 종일 방구석을 뒹굴며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치현이 떨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두 번째 서랍 안쪽에 카드 있어. 비밀번호는 1362
현금도 그 서랍에 다 있으니까 가져가. 지갑은 내 바지 주머니 뒤쪽에 있고“

침착한 건 좋지만 말투가 그게 뭐냐?
나도 모르게 목 안으로 웃었나보다. 치현의 몸이 눈에 띄게 경련한다. 등 뒤에서 끌어안기에 폭 들어오는 사이즈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린애. 아직 덜 익은 과일냄새를 맡으며 그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식은땀이 베어 나오는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이, 이 자식!” 약한 벌레의 날개짓마냥 파르르 떨리는 근육이 혓바닥 밑에서 느껴진다. 몸서리를 치고 있다. 닭살이 돋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목에 겨눈 과도를 치우지 않은 채 하체를 더욱 밀착하며 나머지 한 손으로 허리께와 가슴을 더듬었다.

“죽고...싶냐...”

주먹을 떠는 폼이 심상치 않다. 내 손이 가슴을 쓸고 유두를 잡아당기며 명백한 의도를 보이자 치현은 목에 칼이 대어져 있다는 것도 있고 꿈틀 몸부림을 쳤다. 그럴 때마다 더욱 강하게 끌어 당겼다. 치현의 인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진도를 뺏다가는 아무리 과도에 칼집이 씌여 있대도 위험할 것 같아 부드럽게 선수를 쳤다.

“납니다. 김서경.”

치현의 몸이 일순 정지했다.

“이런 것도 좋군요. 어두운 방안에서 괴한 흉내를 내는 것도...꽤나 자극적이지 않습니까?”

갑자기 격하게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오히려 바들바들 떨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고 한다. “왜, 왜 형이 왜......” 덜덜 떨리는 턱과 흔들리는 목소리는 안도감에서 오는 근육의 이완 탓이다. 나는 쓰러질 듯 말 듯한 치현의 몸을 지탱하면서 귓가에 작은 웃음을 흘려 넣었다.

“어때요...난 이 놀이가 꽤 재밌는데...”

부드럽게 귓바퀴를 깨물었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복근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목에 겨누던 과도로 쇄골을 지나 천천히 옆구리 선을 따라 내려 그으며 청바지 위로 미끄러트렸다. 치현의 하체를 감싼 질긴 재질의 천안에 숨어 있을 그것을 노골적으로 겨누어 과도의 끄트머리로 지퍼 부근을 빙글빙글 덧그렸다.  

“형!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자기 존댓말은 뭐고!
난 진짜 강도인 줄 알고 깜짝 놀랐......!”

치현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 깊게 입을 맞추었다. 흡-하고 숨을 들이쉬는 치현은 버둥거리다가 내가 머리카락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악-하고 신음성을 낸다. 나답지 않은 난폭한 키스였다. 어두운 방안이, 무력하게 몸을 맡긴 치현이, 나도 모르는 격한 성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느긋하게 참을 수 없어서 치현의 바지 버클을 풀고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했다.

“가, 갑자기 왜그래 진짜-!!!”

내 행동의 의도를 파악한 치현은 온 힘을 다해 나를 밀쳐냈다. 씨근덕대며 나를 바라보는 눈은 맹수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또 순박한 강아지마냥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랑 사귀자 치현아.”

“뭐?”

“사귀자고. 진심이다.”

어둠 속에서 과도를 들고 할만한 말은 아니지만.
치현이는 망연히 서 있었다. 사납고 표독스럽지만 때때로 물기가 있다고 착각이 들게 하는 치현의 눈이 멍청하게 열린 채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줍음도 놀라움도 아닌, 묘하게 슬픈 기분이 드는 얼굴이었다.

“우리... 사귀는 거 아니었어?”

어?
나는 무언가에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난...우리가 사귀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럼 그동안 그렇게 잘해준 거...뭐야.....그냥 심심해서 그랬던 거야?
아 쪽팔려. 괜히 나 혼자 착각하고...난...그래서 형이 훈영이 자식이랑 잤다는 얘기 듣고 나도 욱하는 마음에......
아...하하...이제 보니 나 혼자 삽질한 거였네...그렇구나 서경 형한테 그건 데이트가 아니라...그냥 심심해서...아니면 내가 불쌍해서......씨발...“

술에 취한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방금 뭐라고? 훈영이라면 헤븐의 그 애교만점 친구?
치현이 비틀거리며 벽을 짚는다. 다섯 개의 기다란 손가락이 갈퀴처럼 구부러지며 벽지를 쥐어뜯듯이 긁어모아 쥐더니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주먹을 쥔다. 내게 시선을 주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치현의 입술을 윗니가 아프게 깨물고 있었다. 불이 꺼진 방안은 어둡지만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이 치현의 얼굴을 비추었고 그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다.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대신해 멀리서 시끄러운 경찰차의 사이렌이 울린다. 이 동네 어딘가에서 싸움이라도 난 모양이다.

그동안 내가 형, 동생 관계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치현이가 그런 의미로 인식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치현이가 그런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김서경이 잘 익은 육체를 놓고 염불만 외운다니 얼마나 넌센스인가.
치현이를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분명 저 몸에 눈독들이고 있었다.
역시 회사일 때문인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안식을 찾고 있었고 그게 꼬마였나.

나는 오른 손에 들고 있는 과도를 바라보며‘죽어라 김서경’을 외치고 있었다.

“그래, 우리가 사귀는 사이가 맞긴 맞는데...이렇게 정식으로 얘기 해 본적은 없잖아.
뭐랄까 절차를 밟는 다고나 할까? 저기...너무 비약하지 마.“

식은땀이 쪽 흘렀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억지로 웃는 얼굴도 지어 보았지만 치현의 표정은 못 볼 것 봤다는 얼굴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얼굴에는 해석하기 힘든 감정이 어려 있다. 무언가에 상처 받은 표정....언젠가 저것과 비슷한 표정을 본 일이 있었는데......
......생각났다. 거친 플레이는 노련한 사람이랑 하는 게 좋다며 뭣하면 내가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을 때도 저런 얼굴을 했었다.

“가끔 형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어.”

가만히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치현의 얼굴은 사나웠지만 그러나 다시 풀 죽은 어린애의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푹 숙였다.

“형한테는 정말 미안해. 다시는 그런 놀이에 빠지지 않겠다고 했는데...
아르바이트도 잘리고 형은 훈영이랑 잤다고 하고 그런 와중에 권이도가 나타나서 시비 걸고...
어제는 또 꼴사납게 도망이나 치고....
요즘 내 정신이 내 정신 같지가 않아......“

치현이 커다란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며 한 숨을 쉰다. 나는 조금 얼빠진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다시 자상하고 친절한 형의 모습을 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손엔 과도를 들고....아, 그런데 이거 어디다 올려놓아야 되지?

“아르바이트에는 왜 잘렸는데? 형한테 말해 줄 수 있어?”

“술집 손님이랑 시비가 붙었거든. 나란 새끼가 그렇지 뭐.”

과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녀석은 왜 권이도한테는 술술 불면서 나한테는 거짓말 하는 걸까. 나쁜 패거리들이 깽판 놓고 간 것 때문에 잘린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 왜 나한테는 마치 자기 잘못인 것 마냥 숨기는 걸까.
그러다 퍼뜩, 역시 나한테는 마음을 열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꼈다. 권이도와는 다른, 권이도에게는 있지만 나에게는 없는 것.
......역시 섹스인가.
하지만 이 녀석도 정말 못 말린다. 어째서 섹스 때문에 사람한테 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단 말이지? 권이도한테는 반말에 욕설에 온갖 심통은 다부리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자기 얘기를 솔직하게 하잖아. 그런데 나한테만은 이렇게 사근사근한 꼬맹이가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거짓말을 하고, 내게 거리감을 두는 건지.

“치현아.”

“왜.”

“안 되겠다. 우리 진짜 사귀자.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그런 연인처럼 지내자.”

아가씨에게 했다간 당장에 채여 버릴 프러포즈였지만 무언가 핀트가 안 맞는 꼬마와 나 사이의 화법은 직설적인 게 제일이다. 괜히 돌려 말했다가 동상이몽을 꾸느니 말이다.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거야? 이제까지는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잘 지내왔잖아.”

목소리에서 왠지 심통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인가?
치현은 모로 꼬나보며 얼굴 전체에 불신이라는 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사실 이것이 연애 감정인지는 나도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일하다 지치면 치현이 보고 싶고 같이 있으면 안심이 되고 뭐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치현에 대해 심장이 타들어 갈 것 같은 열망을 느낀다거나, 치현이 다른 사람과 잠을 잔다거나 해서 맹렬한 질투가 피어오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만지고 키스하고 싶다는 부분만큼은 연애의 감정에 포함되어도 좋지 않을까.
나는 양 팔을 휘두르며 열심히 나의 서툰 감정을 표현했다.

“너랑 자고 싶어.”

치현의 눈이 어둠 속에서 동그래진다. 당황하는 두 뺨, 그러나 견고한 녀석의 가드는 여전히 풀어질 줄 모른다. 이상하다. 방 안이 어두운 탓인지, 아니면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얼굴에 음영을 강하게 드리운 탓인지는 몰라도 치현이 다른 때보다 조금 달라 보인다. 뭐랄까, 멀게 느껴진다. 마치 다른 사람 같이.

“섹스 상대라면 얼마든지 돼 줄 수 있어. 하지만 연인은 관둬.”

차가운 목소리는 정말로 꼬마 남치현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몸은 벽에 기대어 있지만 눈초리만은 곧장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저런 눈의 치현은 첫날, 우리 집에서 입씨름을 하면서 쏘아보던 때 이후로 처음이다.

“무슨 소리야. 나는 너를 그런 일회용 파트너로 생각하는 게 아니야!”

“연인이 되면 섹스가 추가 된다는 것 빼고 지금이랑 뭐가 달라지는데?”

시니컬한 미소는 꼬마답지 않다. 자조하는 눈동자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나를 꿰뚫을 듯이 쏘아보고 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어도 형은 나한테 잘해줬어.
그럼 굳이 애인관계란 틀에 묶여 있지 않아도, 그냥 같이 즐길 수 있는 놀이에 섹스가 추가 된 것일 뿐이잖아?”

“달라. 나는 더 이상 헤븐에도 폴리곤에도 가지 않을 거니까.”

연인이라는 확실한 자각을 한 다음에도 그러면, 그건 바람 피는 거니까.

“헤에~ 역시 나랑 사귀고 있는 거 아니었네 뭐.”

일순 얼굴이 화끈해졌다. 자승자박이 되어버렸다. 치현이 답지 않게 허점을 찾아 공격하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어서 나는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치현은 말을 고르는 듯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만다. 긴 한 숨을 내쉬면서, 치현은 내 손을 보고 또 내 얼굴을 보며 여전히 낯선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깐 왜 강도 흉내를 낸 거야?”

“......”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그땐 나랑 사귀던 녀석의 친구들이었지만, 아니, 이런 얘기는 집어 치우고.
하여간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거야?“

“네가 좋아하니까.”

“응?”

나는 다소 낯부끄러운 말을 지껄였다.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나 연구 많이 했어.”

매너리즘에 빠진 부부가 강도놀이로 새로운 자극을 찾아 권태기를 극복했다는 글을 모 SM사이트 게시판에서 읽은 적이 있다. 도구도 약도 영 내 취향에 맞지 않지만 일종의 역할 플레이는 꽤 재미있지 않을까 해서 오늘 하루 종일 연구한 건데......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보라구 저 롤러코스터를 타고 몇 바퀴 회전하고 난 듯한 표정을.

“형, 정말....미치겠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
벽에 기댄 치현의 몸은 금방이라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사귀자고 이야기 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내 얼굴 한 번 보고 오른 손을 한번 보더니 뚫어져라 응시한다. 아, 그러니까 이건 역할 플레이를 위한 소품이라고.

“그래도 안돼.”

“왜?”  

“......권이도가 있으니까.”

응? 여기서 그 작자 이름이 왜 나오는 건데?

“권이도가 그랬어. 내가 그를 버리지 않으면 그도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자기를 거부하지 않으면 누구랑 놀아나든 상관없다고.
그치만 형이랑 사귀면 더 이상 권이도를 만나면 안 되는 거잖아.“

당연히 안 되지! 그런 작자를 꼭 만나야겠냐!
나는 여기서 권이도가 태클이 될 줄은 몰랐다. 치현은 진지했고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버리고 자시고...권이도 그 자식은 너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야. 너를 물건처럼 여기면서 지배자니 피지배자니 뭐니 그딴 헛소리를 지껄였단 말이다!

“권이도씨랑...사귀기로 한 거야?”

“아니, 아니...우린 사귀고말고 그런 관계가 아니야.”

망설이던 꼬마는 허공을 행해 고개를 들며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나 지난 며칠간 진짜 생각 많이 했어. 아르바이트에서 잘리고 주변에선 자꾸 못살게 굴고 형은 왠지 멀게 느껴지고......
음, 그런데 형은 우리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으니까 완전 나 혼자 헛다리  짚고 쇼 한 거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고민하다가 덕분에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

침을 꿀꺽 삼키며 “뭘 깨달았는데?”하고 물었다. 치현은 흐릿하게 웃으며 자신을 비웃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소용없다는 거.”

“......”

“형, 이런 얘기하면 날 미친놈 취급할지도 모른다는 거 알아.
하지만......아, 모르겠어 나는 말을 잘 못해. 설명을 잘 못하겠지만.....
그래, 권이도는 내 몸을 좋아해. 그러니까 내가 떠나지 않는 한 그 자식은 변하지 않아. 그것이 나한텐 가장 안심이 돼. 그거 하나만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확실한 사실이더라구.“

“권이도는 너를 가지고 놀 뿐이야!”

“알아. 나를 그냥 재미있는 장난감처럼 보는 거. 하지만 나도 다를 바 없어.
손 하나 까딱 안하고 그 자식한테 맡겨버리면 오히려 몸도 마음도 편해져. 그래서 나도 권이도를 이용하는 거야.
이상하게 그 자식한테는 못돼먹은 행동을 해도 거리낌이 없어. 가끔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자식이 이끄는 대로 쓸려 가버리고 싶어.
......이런 내가 누군가와 사귄다니, 말도 안돼.“

어둠과 술기운이 치현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나는 나약하고 그래서 단단한 반석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고. 그것이 권이도라도, 오히려 그가 변태이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건방을 부릴 수 있다고.

나는 권이도와 치현의 관계를 이해하느라 애썼다. 하지만 기어코 이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면 되잖아. 친구나, 하다못해 권이도 보다는 너를 따뜻하게 아껴주는 사람에게 의지하면 되잖아. 그런데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기대는 게 더 편하다니, 정말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야?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거냐.
나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미안해 형.”

더 이상 치현을 이해하는 걸 관뒀다.
내 식대로 편하게 생각해보자. 그래, 치현이는 아직 어린 나이에 권이도의 음모에 넘어가 그의 손아귀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상한 플레이도 어린 아이에게는 자극이 되었을 거고, 한번 자극에 익숙해지면 그보다 더 큰 자극이 생기기 전에는 시큰둥해 지는 법이지. 오호라~ 이제야 이해가 간다. 권이도의 테크닉이 그렇게도 좋았단 말이냐. 그래서 차마 내가 사귀자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지? 그렇지?
아악, 난 또 뭘 혼자 납득하고 마는 걸까.

“그까짓 섹스테크닉 따위, 나도 그 자식 못지않게 잘할 수 있다고.”

“어?”

“내 말을 거절하겠다는 뜻은 알겠어.
권이도가 테크닉하나는 죽이는 인간이란 거 나도 인정하겠어. 그럼, 나는? 내 테크닉은 알고 싶지 않아?”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한 손으로 두통이 생길 것 같은 이마를 꽉꽉 눌렀다. 손에 쥐고 있는 과도가 칼집이 씌워진 채 임에도 제법 날카로워 보인다. 화가 치미는 것을 눌러 참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손을 떨고 있었고 그 진동을 따라 칼집의 끄트머리도 미약하게 떨린다. 아, 과도. 이거 빨리 치워버려야지 왜 들고 있어서 공포분위기를 조장한담.   

“형, 나는 그런 의미가 아니야......”

치현이의 마음도 알 수 없고, 내가 갖고 있는 마음도 딱 부러지게 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리기 힘들지만 아무튼 지금 실연당한 것만은 분명하다.

오오 실연이라, 정녕 이 단어가 김서경 인생에 존재하는 단어란 말이냐.
실연의 슬픔에 빠져 있을 틈도 없이 나는 어둠 속에서 치현에게 다가갔다. 녀석이 몸을 사리는 게 느껴진다.

바깥의 사이렌 소리가 다시 한번 울린다. 이번엔 좀 길다. 방안의 침묵을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방해했다. 어둠 속의 우리 둘은 아무 말도 안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치현에게로 다가갔다. 백 마디보다 한번의 키스가 더 나으리라. 폴리곤의 킹카, 폴리곤의 바람둥이, 프리섹스주의자 김서경의 스타일대로 하자.

내가 아무 말 없이 접근하자 벽에 기대어 있던 치현이 흠칫 놀라며 옆으로 몸을 피한다. 나는 진지했다. 약간의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몸을 사리는 치현에게 팔을 뻗어 단단한 턱을 손끝으로 핥았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고 목줄기까지 훑어 올렸다. 훑어 간 손은 그대로 턱을 지나 귀까지 기어 올라갔고 귀 뒤로 손을 밀어 넣어 머리카락 사이를 손가락이 헤집었다.

“......형...”

부드럽게 끌어당겨오는 얼굴은 그을린 뺨과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과 고집스러운 입술이 잘 정돈되어 자리 잡고 있다. 얇은 입술에서 외마디 음절이 새어 나오고 나는 그 단어를 삼키듯 숨을 들이마시며 소리의 동굴을 막았다.

바닥으로 과도가 떨어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부드럽게, 어느 연인보다도 달콤하게, 단단한 몸을 품에 안고 달래는 듯한 키스를 했다. 방안의 사물은 정지했고 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멈춰버린 착각이 들었지만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소리만은 격했다. 거칠게 부르튼 치현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마르고 갈라진 그곳을 촉촉이 적셨다. 간지러운지 어깨와 턱이 움찔움찔한다. 얼떨결에 입술은 열어주었지만 긴장으로 굳어버린 치현의 입술과 혀는 내 교활한 혓바닥에 의해 농락당하고 때로는 위로 받는다.

내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지 치현의 눈은 깜박거리지도 않았다.
나 역시 치현의 속이 궁금하다.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우리 둘은 입술이 부벼지고 있는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의 눈 속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데, 빛이라곤 작은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뿐인데 속눈썹 개수라도 세려는지 그 까만 눈동자는 나를 까발려 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듯하다.  유난히 새까매 보이는 것은 역시 어두워서 이겠지.   

까맣게 느껴지던 눈동자를 눈꺼풀이 부드럽게 닫자 속눈썹이 내려앉는다. 등 뒤로 둘러진 기다란 팔과 커다란 손을 느끼며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입술과 혀를 멈췄다. 멈추어진 혓바닥 위로 타인의 혀가 미약하게 꿈틀거린다.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수줍게 다가오는 움직임은 눈물이 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키스가 서툴 리가 없음에도 치현의 혀는 앳되고 부끄러워하는 몸짓이다. 능수능란하다고 자부하던 혓바닥이지만 테크닉 따위 구사하지도 못하고 치현의 서툰 스텝을 따라가는 것만도 벅찼다.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며 그 움직임에 맞추었다. 환희로 등줄기가 떨리면서 치현의 등을 열개의 손가락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격해지는 심장소리가 엇박으로 뛰고 있고 가빠지는 호흡이 얽히고설킨다. 서로의 몸이 흥분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눈을 감고 있는 치현의 얼굴이 점점 쾌락으로 젖어갔다. 낮은 비음이 심장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   
순간 타들어갈 것 같은 열망이 무엇인지 느꼈다.     





*                *                *





“대체 왜 당신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겁니까?”

날씨가 죽이도록 좋은 일요일 오후였다.
활짝 열린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트리고 있었지만 머리카락에 뺨을 얻어맞는 것이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의 실타래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만큼이나 엉켜있다. 나는 옆자리의 권이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자동차의 속도가 100km를 주파할락 말락 하고 있었다. 그래 밟아라 밟아. 시원하게 달려서 내 머릿속도 후련히 날려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서경씨보다는 제가 더 매력적인 모양이죠.”

“그거 진심입니까?”

룸미러로 흘겨보았다. 권이도는 크게 웃으면서 드디어 시속 100km를 넘겼다. 언제나 단정하게 넘어가 있던 그의 머리카락도 지금은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의 광란에 못 이겨 사방으로 흩날리는 중이다. 머리카락이 뒤엉켜서 폭소하는 권이도라니 어지간히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바람의 희생양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권이도는 오전에 무슨 세미나에 다녀오느라 와이셔츠 차림이었는데 목에 맨 넥타이가 바람에 흩날려 어깨 뒤로 훌쩍 넘어갔다.

어제 저녁 치현에게 채인 나는 달리 속을 풀 곳이 없어 권이도에게 전화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올 줄은 몰랐지만(나는 전화로만 따질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니 조금 반갑기도 하고 또 내 전화에 바로 달려오는 것이 기특하기도 했다. 물론 그 속에 숨겨진 꿍꿍이가 금요일 날 하지 못한 쓰리섬에 대한 미련이란 것은 알고 있다.
다짜고짜 차를 끌고 온 권이도는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드라이브나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성난 바람한테 두들겨 맞고 있는 중이다.

“나와 치현이는 이래봬도 꽤 친하다고요.
당신도 제게 스페어 키가 있는 걸 보고 놀랐잖습니까. 그런데 왜 연인은 안 된다는 겁니까? 섹스는 되는데 연인은 안 된다니 그게 말이 되요? 대체 그 어린애에게 무슨 바람을 넣었길래 애가 그렇게 베베 꼬였냐고요!“

바람의 괴성 속에서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 위해 악을 썼다. 이것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화를 눌러 참기위한 고함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치현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치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권이도에게 화풀이를 했다. 아니, 화풀이가 아니라 정당한 추궁이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뭐 그렇게 거창한 사건이 발생한 건 아니다. 우린 그렇게 황홀한 키스를 했고 부드럽게 서로의 몸을 안으며 푹신한 이불 위로 같이 스러졌다. 아래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는 치현의 옷가지를 벗기며 나는 내 손이 긴장으로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닥에 누운 치현의 얼굴은 창밖의 빛을 받아 각도에 따라 다른 얼굴 같다. 아기처럼 유순하고 청년처럼 불꽃같으며 짐승처럼 사나운. 그러나 그 육체만큼은 내 손아귀에 든 얌전한 어린새끼였다.
......고 믿었다.      
  
-치현아, 우린 이제 사귀는 거야. 그렇지?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그런 팔푼이 같은 대사만 하지 않았어도 우리들의 분위기는 참말로 좋았단 말이다.

-섹스는 좋아. 서경 형도 좋아해. 근데 그건 아냐.

그 말을 듣고 다음 진도를 어떻게 뺀단 말야!
이대로 덮치고 싶다는 욕망과 그랬다가는 정말로 치현과는 섹스 파트너 이상은 못될 거라는 이성의 소리가 번뇌로 점철된 육체와 정신을 거세게 잡아 흔들었다. 충격인지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초라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던 것 같다. 나를 잡지 않고 멍하니 누워있던 치현의 몸이 지금 생각할수록 안타까워서 그때 그냥 안아버릴 걸 그랬나, 아니면 옆에서 얌전히 손만 잡고 잘 걸 그랬나, 치현이 자식은 왜 그 모양인가, 오만가지 걱정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잔뜩 비틀어진 치현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고 내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안달나기도 해서 밤새 침대 위를 뒤척거렸더랬다.

양 뺨이 날뛰는 바람에게 사정없이 얻어맞는다. 푸르게 녹음이 우거진 산비탈을 바라보며 권이도에게 투덜댄다. 치현을 놓아 줄 수 없다는 인간에게 이런 얘기 하는 내 꼴도 우습지만 혼자서만 치현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 했다가는 무언가 핀트가 맞지 않는 치현과 나 사이는 더욱 더 어긋날지도 모른다.
매우매우매우 유감이지만, 권이도가 나보다는 치현과 스타일이 맞는 다는 점은 인정하기로 했다.   

“사랑의 라이벌에게 연애 상담이라니 굉장히 모순 되는 거 아닙니까?”  

“지피지기니까요.”

“아하하 라이벌에서 이제는 적인가요? 점점 살벌해 지는데요?”

“장난치지 마시고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 당신에게 치현은 어떤 의미 입니까? 또 치현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구요. 치현이가 누구와 섹스하든 상관 안한다면서 사랑의 라이벌 운운 하는 건 뭡니까?”

웃고 있는 권이도의 모습은 유쾌해 보인다. 대답에 시간을 들이는 모습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속도계는 어느새 90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화원 농가를 달리고 광활한 공터를 지나고 그물망이 쳐진 산비탈을 지나 이제는 비닐하우스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제가 치현을 아끼는 것은 맞지만 서경씨와는 다른 감정입니다.”

중의적인 표현이군.
치현을 아끼지만 내가 치현을 아끼는 것과 다르다는 건가. 아니면 치현을 아끼지만 나에 대한 감정과는 다른 의미란 거냐.
둘 다 라는 생각을 하며 나도 꽤나 자뻑기질이 있다고 자조했다.
권이도가 나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거 당연히 알고 있다. 그것이 감정적인 문제인지 육체적 문제인지 아직도 헷갈리지만. 나도 은연중에 그런 권이도의 마음을 이용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진심인 것 같고 치현에게도 진심인 것 같은 권이도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면에서 치현과 권이도는 동류다.   

“뭐가 다릅니까?”

속도계가 조금씩 더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한속도 70km를 유지하며 쭉 뻗은 고속도로를 시원스레 달리고 있다. 권이도는 잠시 동안 말없이 정면만을 바라보며 운전했다. 표정은 매우 평화로웠고 콧노래라도 부르기 직전의 한가로운 얼굴이었다.

“서경씨, 이번 프로젝트하기 전에 주식투자 해보셨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없다고 대답했다. 권이도는 빙그레 웃더니 역시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꺼냈다.

“자아, 여기 A회사와 B회사의 주식이 있다고 합시다.
A사는 우량기업이지만 그 주가의 변동을 예상하기 힘들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경기가 악화되더라도 주가가 오르는가하면 다른 회사들이 상한가를 치고 있을 때 곤두박질치기도 하지요. 그 변동폭도 무척이나 커서 잘못 투자했다가는 망하기 십상이지만 시기를 잘 타면 말마따나 대박을 건질 수 있는 기업입니다. 국내외 정세, 경기변동, 정부의 금융정책 등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독자적으로 주가가 움직입니다. 그래서 무척이나 예측하기 힘든 주식이며 아무리 우량기업이래도 언제 부도가 날지 모릅니다.“   

그런 회사가 있을성 싶지만 나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바람이 쏟아져오는 창문을 닫았다. 일순 바깥과 내부가 단절되면서 소음이 뚝 멈추었다. 부드러운 소음만이 간간이 들리는 차 안에서 권이도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B회사는 부실기업입니다. 온갖 악재를 안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주가는 높은 편이지요. 그러나 경제성장률에 비해 상승률은 낮습니다. 경기가 어려울 땐 같이 곤두박질치지만 사소한 사건으로 들쑥날쑥하지도 않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의 80% 예측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곧 주가가 떨어지겠다 싶으면 정말 떨어지고 좀 올라가겠는데 싶으면 올라가는, 하지만 그 폭이 미미하기 때문에 단기성 투기용으로는 부적합한 주식입니다. 대신 아무리 부실해도 절대로 망하지 않는 기이한 회사이기도 하지요.
자아, 서경씨는 어느 회사의 주식을 사겠습니까?”

“A회사요.”

“왜죠?”

“우량기업이라면서요.”

“이 두 기업의 핵심은 예측 가능한가 그렇지 못한가 입니다.”

“그래도 우량주는 쥐고 있으면 언젠가는 오르지 않나요?‘

권이도가 웃으면서 어깨 뒤로 넘어간 넥타이를 돌려놓았다.
뭔가를 가르치려는 것으론 안 보이는데.....그 얼굴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웃음 대신 원인을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자리를 잡는다. 시선을 앞에 둔 그의 눈은 저 멀리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의 끄트머리를 향해 있다.

“남치현에게 있어서 서경씨는 A회사입니다.”

엥?

“남치현도 처음에는 A회사를 더 매력적으로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우량기업인 줄 알았는데 결국엔 부도나고 상폐 되는 회사를 여러 번 겪은 그는 예측 불가능한 주식에 진절머리가 낫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투자성향을 바꿉니다.
상승률은 낮지만 비교적 안정하게 이익을 낼 수 있는, 무엇보다 예측한대로 움직여주는 그런 주식으로요. 그리고 치현에게 나는 B회사이지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A사의 주식은 흔히 말하기를 연애라고 합니다.”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권이도를 바라보았다. 연애라......예측불가능하다는 점을 A사와 연애간의 공통점으로 본 모양이다. 그렇다면 치현은 연애에 치여서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나?

“B주식은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지만 친구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치현의 경우는 감정싸움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편리한 섹스파트너겠지요. 연애의 밀고 당기기는 사람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니까요.“

나는 팔짱을 끼고 꽤나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권이도가 말하는 바의 의미가 정확히 와 닿지는 않는다. 아마 일부러 나를 곯리려고 어렵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본인이 인정했듯이 우리는 사랑의 라이벌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어제의 대화가 떠올랐다.

-가끔 형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어

이유 없이 전류가 등골에서부터 오싹하게 흘러내렸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그 재미에 연애를 하는 거 아니겠냐마는 어제 그 말을 하는 치현은 매우 힘들어 보였다. 이제까지의 우리 관계도 치현과 나는 해석을 달리했다. 혹시......혹시 내게 섹스파트너라면 얼마든지 되어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어젯밤 나에게 실망해서 그런 걸까? 계속 마음이 안 맞는 내가 힘들어서 귀찮은 연인사이보다는 감정소모가 필요 없는 단순한 관계를 선택한 거야?
모르겠다.
이 추측마저 틀릴지도 몰라.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깊숙이 몸을 묻는 대로 감싸주는 시트가 포근하지만 마음은 거친 황무지에 내던져진 기분이다. 생각하는 것이 힘들었다. 머리를 기대다가 그 자세 그대로 빙글 고개만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옆얼굴이다.
하얀 살결과 가지런한 눈, 코, 입에 은테 안경까지 어우러진 얼굴은 은근히 차가운 인상이다. 지금은 바람에게 희롱당한 앞머리가 이마를 가린 탓에 좀 더 부드러워 보이지만 한 때 저 지적인 얼굴에 두근거렸던 때도 있었다. 못 볼꼴 다 본 지금에서야 새삼스러울 일도 없지만 이렇게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걸 보면 가슴 어디선가 시큰시큰 통증이 울린다.

권이도는 내가 빤히 바라보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한마디 참견하지 않고 운전했다. 입을 다문 그는 내게 최고의 이상형이다. 이상형의 옆얼굴 배경으로 서서히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머리를 기댄 채로 뚱하니 질문했다.  

“그럼, 이도씨에게 치현이는 A회사입니까? B회사 입니까?”

치현이 권이도를 단순히 섹스파트너로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말이나마 미묘한 감정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 때문에 나에게도 말 못할 것들, 나에겐 숨기는 것들을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것을 권이도는 ‘편리한 섹스파트너’라고 표현하며 줄을 긋고 있다. 그런 사람이 치현에게 동거를 권유했다는 것도, 내게 사랑의 라이벌 운운했다는 것도 의아하다. 나는 종잡을 수 없는 치현의 마음을 살피는 걸 뒤로하고 물으면 묻는 대로 대답해주는 권이도에게서 추측이 아닌 정확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B회사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석연치 않다. 나는 여전히 머리를 등받이에 기댄 채로 물었다.

“당신에게 B회사는 어떤 의미죠?”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내 손안에서 마음대로 주가가 조작 될 수 있는 회사지요.
물론 변수는 다양하지만.“

“그거 치현에게 굉장히 모욕적인 말로 들리는데요. 치현이는 당신이 자신을 장난감으로 여긴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단순히 장난감처럼 여기는 아이를 두고 사랑의 라이벌 운운한 겁니까?”

권이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는다.

“호오~ 남치현은 자학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거라곤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장난감은 너무했는걸요. 최소한 애완동물 정도는 돼야죠.“

“우와, 점점 화날라고 해요.”

“하하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건 상당히 실례겠지만 때론 애완동물이 사람보다 더 소중한 인간도 있는 법이니까요.”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에 진심이 어린다.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되지 않는다.  

“당신과 치현이 어떻게 만남을 유지할 수 있는지 신기하군요.”

반은 빈정거림을 담아 정색을 하고 말했다. 권이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긍정했으나 이내 입가를 끌어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와 남치현이 섹스하는 모습을 한 번 보시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입에서 좀 더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었지만 “바다가 눈앞이군요. 잠시 들렀다 가시겠습니까?”하며 딴청을 피우는 것이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문득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처음 남치현을 봤던 날, 권이도의 따귀를 때리고 사라졌던 그날, 그날까진 분명 치현과 권이도는 사귀고 있었다. 그것도 폴리곤 오너의 말에 의하면 꽤나 사이좋게.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고 생각한 건 나였을 뿐 어딘가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와 사귄다고 생각하면서 치현은 권이도를 잊으려 했을까. 부실기업은 관두고 우량기업에 좀 기대 보려했는데 우량기업이 바람이나 피우니까 홧김에 다시 부실기업으로 모든 자금을 몰빵한 건가.

모양이 우습다.
나는 권이도가 나와 치현이 사이에 끼는 것이 싫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권이도와 남치현 사이에 끼어 든 건 나일지도 모른다. 아까부터 시큰거리는 가슴이 간지러울 정도로 저릿저릿하다. 이유 없이 부아가 치민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김서경의 위치는 대체 어디쯤이란 말인가.

“이 근처에 근사한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가서 저녁이라도 한 끼 할까요?”

“권이도씨.”

대답 없이 그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멀리 바다를 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우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미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반응을 기다렸다. 권이도는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으면서 금방 대답했다. 얼굴에 시원한 미소를 그리면서.

“당연히 A회사지요.”





*                *                *





해물이 푸짐했던 저녁식사를 하고 바닷가를 걷다가 조개구이집에 들어가서 술도 몇 잔하고 그랬다. 운전해야 되는 권이도는 음료만 마셨고 객기로 시킨 소주 두 병은 나 혼자 다 비웠다. 머릿속이 복잡한 탓에 또랑또랑한 정신은 소주 두 병으론 좀처럼 취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오니 새파랗게 뻗어 있던 바다는 주황색으로 눈부시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일몰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근심이 많은 마음은 어지간한 것에 감흥을 느끼기 힘들지만 그래도 자연의 경관 앞에서는 조금 뭉클한 기운이 생긴다. 주황으로 물든 바다와 군청으로 빛나는 구름과 붉게 부서지는 태양을 보면서 나는 잠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거세게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에 권이도의 넥타이가 짧게 휘날렸을 때였다. 그것은 마치 승리자의 깃발처럼 느껴졌다.

“가지요.”

내일은 월요일이다. 호텔을 잡고 권이도가 원하는 섹스를 해주려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나는 그에게 한번 빚을 졌고 원하는 대로 몸을 대주겠노라고 약속했으니까 오늘 아니면 따로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미련 없이 권이도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운동화에 모래가 잔뜩 묻어 탈탈 털었다. 면바지에 남방차림인 나는 지갑하나 달랑 들고 나온 맨 몸이다. 핸드폰도 물론 없다. 혹시나 치현이 연락하면 어쩌나 걱정되지만 반대로 문자한통 없으면 나는 또 다시 답답해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예 가져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치현에게 화가 난 모양이다.





“분당 근처에 괜찮은 러브호텔을 알고 있습니다. 러브호텔이지만 호텔급으로 애쓴 흔적도 보이고 인테리어가 비교적 모던해서 맘에 드는 곳이에요. 무엇보다 야경이 매우 좋습니다.”

하루 종일 운전을 시키고 밥값, 술값까지 부담시킨 터라 호텔비만은 내가 내자고 마음먹었다. 권이도는 고개를 갸웃 하면서“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겁니까.”라고 말한다. 답지 않게 내숭은. 나는 비릿하게 웃으면서 “어차피 그러려고 나를 만나러 온 것 아닙니까?” 따위로 응수했다. 데이트 코스의 마지막 대사 치고 상당히 재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난 지금 기분도 나쁘고 우울하고 술까지 들어갔다.

“얼떨결에 한 약속이지만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잔뜩 기대하고 쓰리섬까지 준비했는데 오만 산통 다 깨져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겠어요?“

술기운 때문에 턱주변이 그대로 마비된 모양인지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는다.   

“얼마나 급했으면 세미나 후 옷도 안 갈아입고 달려 나왔나요.
그래도 용케 잘 참고 하루 종일 여기 갔다 저기 갔다 공을 들였으니 인내심 하나는 칭찬해 드리죠.”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십니까?”

날이 어두워져서 운전에 집중을 하는 건지 아니면 내 꼴이 보기 싫은 건지 권이도는 내 쪽을 쳐다보지 않으면서 탁상용 거울을 내밀었다. 작은 쟁반 마냥 동그란 거울에는 창백하게 질린 남자가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은 앞머리가 엉키어 이마에 마구 헝클어져서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기도 했다.
꼴 보기 싫어서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기며 던지듯 거울을 핸들 옆에 올려놓았다. 등과 머리를 시트에 푹 기댔다. 술기운이 이제야 도는지 어질어질 하다. 권이도는 아무 말 없었고 자동차는 흔들림 없이, 소음 없이 부드럽게 굴러가며 서울을 향한다.

눈을 감았다. 그래도 끓는 속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눈을 뜨고 옆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거울 속에 있던 남자가 얼굴이 반쯤 풀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 너머로, 새까만 어둠에 휩싸인 고속도로 멀리 깜박거리는 불빛이 손짓한다. 여기로 오라. 여기가 그대들의 종착지이다.
아직 서울은 멀다. 등대처럼 목적지를 제시하는 불빛의 깜박거림에 따라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술기운이 돈다. 머리가 어질어질 하다. 언젠가 처음 이 차를 탔을 때 ‘카섹스하기에 좋군...’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치솟는다. 술기운에 하체가 저릿저릿하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권이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하고 묻는 얼굴로 권이도가 흘끔거린다.
나는 여전히 눈이 풀린 채로 그의 옆얼굴을 주시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내 허락도 없이 그의 뺨을 훑고 있었다. 권이도는 당황했고 나는 누가 괘씸하게 나보다 먼저 저 남자의 뺨을 만지는가 싶어서 손가락의 주인을 찾아 시선을 옮겼다.
내 손이군.
시트에 늘어져서 팔만 뻗고 있었다. 손가락이 뺨을 쓸어내리다가 턱에 닿을락 말락, 그러다 밑으로 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 목덜미를 검지와 중지로 지분거리고 있었다. 권이도가 운전 중에 뭐하냐는 무언의 항의를 하지만 별로 싫은 기색은 없다. 내 다섯 손가락은 피아노를 치듯 권이도의 목덜미와 어깨 위에서 뛰놀았다. 손가락 네 개로 목 아래에서 귀뒤까지 쓸어 올렸다. 흠칫. 태연한척 운전에 열중하던 권이도가 온 몸을 떨었다. 당황한 기색이 엿보인다. 미소를 지으며 놀려줄 기운도 없어서 그냥 아무 표정 없이 다시 손가락 장난을 시작했다. 이번엔 어깨에서 옆구리로 다섯 개의 악당들이 영역을 이동하고 있었다.   

직선으로 뻗은 길을 하염없이 전진 할 것 같던 권이도가 핸들을 꺾였다.  
국도로 접어들어 한참을 안으로 들어갔다. 어딘지 알고 운전 하는 걸까? 인적이 없고 오가는 차도 없다. 한쪽은 드넓은 논, 한쪽은 산을 끼고 서행을 하던 차는 어느새 갓길에 세워져 엔진소리를 멈추었다.
핸들을 양 손으로 움켜잡은 권이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사이 내 손은 허리를 지나 그의 허벅지 라인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던 중이었다.

“취하셨습니까?”

“응, 조금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 많이 취하셨군요.”

“그래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압니다.”

날카로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마음에 든다. 손장난을 관두고 번민하는 권이도를 보며 즐겼다. “차안에서 하면 불편할 겁니다.”“자신의 차가 그렇게 못 미덥습니까?”“혹시 호텔로 가면 내가 저지를 지도 모르는 변태적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이런데서 유혹입니까?”“그렇게 깊게는 생각 안 해봤는데요.”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나는 흐느적흐느적 몸을 일으켜 권이도의 위로 기어 올라갔다. 적이 당황한 표정이다. 그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긴장하는 것이 엉덩이 아래로 느껴진다. 마주본 권이도의 얼굴에서 안경을 빼내고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직 엉덩이가 다 낫지 않은 것 같은데요.”

권이도가 너스레를 떨자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먹히는 것은 당신 쪽이니 걱정 마십시오.”

둘 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키스만으로 몸을 달아오르는 것은 술기운 탓인지 내가 그의 몸에 올라탔다는 일탈적인 행동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를 열어 그의 속살을 매만졌다. 그가 내 남방을 열어젖히고 똑같이 속살을 애무한다. 목구멍까지 삼켜 버릴 만큼 열정적으로 키스를 하고 서로의 맨살을 쥐어뜯으며 가슴의 돌기를 한껏 잡아 비튼다. 아픔에 새어나오는 낮은 신음소리도 상대의 입속에 먹혀버린다. 남방의 앞섶이 죄다 열리고 속옷이 벗겨졌다. 상반신 누드가 된 나도 권이도의 셔츠를 벗기려 했으나 권이도는 웃으며 협조를 안 한다. 어느새 바지도 팬티도 벗겨진 알몸이 되었다. 그 사이 내가 건진 성과라곤 권이도의 와이셔츠 앞섶만 푼 게 전부였다. 당신도 얼른 벗지 않으면 내 정액으로 옷이 엉망이 될 거라고 귓가에 대고 키득거렸더니 능청을 떨며 속삭인다.

“당신의 정액을 듬뿍듬뿍 짜내서 내 온 몸을 적셔 준다면 이쪽이야말로 영광입니다.”

느끼한 대사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변태”라고 읊조리며 그 어깨를 이빨로 꽈악 깨물었다. 와이셔츠가 침으로 축축이 젖어 들어간다. 이미 발기한 내 것은 권이도의 벌거벗은 배에 부딪혀 꺼떡대고 있다. 들썩들썩하는 엉덩이에 닿은 것은 정장바지 속에서 불룩 튀어나온 권이도의 앞섶이었다. 바지의 재질이 연약한 허벅지 안쪽 살을 쓸며 민감하게 자극 한다. 옷이 더러워질 거라고 엄포를 넣으며 엉덩이를 비볐다. 끄응- 신음이 권이도의 목구멍에서부터 흘러나온다. 나는 거의 절정에 다다라 있었다. 일부러 빠른 흥분을 유도한 탓이다. 평소 같으면 긴장을 유지하며 사정을 참았을 텐데 그냥 내 몸이 원하는 대로 맡겼다. 거기에는 권이도의 거칠고 부드러운 애무도 한몫했다. 망설임 없이 주물러대는 손에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희롱하며 목덜미에 이빨을 박았다.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면 자국이 보이지 않는 장소다. 권이도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허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상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등을 잔뜩 굽혔다. 양 허벅지 사이에 들어온 권이도의 둔부를 한껏 조였다. 그의 옆구리를 잡아 뜯으며 하악-하는 신음과 함께 권이도의 손과 배에 정액을 뿌렸다.

“하아......”

어깨에 머리를 묻다가 나른한 탈력감이 몸을 한바퀴 회전하고 빠져 나가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티슈로 사정액을 닦아 낸 권이도는 내 몸을 받치며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고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문득 창피함이 몰려온다. 그렇게 많이 취하지도 않았건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술버릇입니까? 덕분에 오늘은 눈이 호강하는군요.”

“......”

“실내등의 조명을 받아 빛나는 당신의 몸을 이렇게 가까이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단단하고 자그마한 엉덩이도, 가슴의 유실도, 쾌락에 나른해 지는 얼굴도 영영 못 보는 줄 알았습니다.”

등의 척추뼈를 세듯 꾸욱꾸욱 누르던 손이 어느새 꼬리뻐를 간질이고 양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몸 위에 늘어져 있는 탓에 엉덩이를 주무르기엔 딱 좋은 상태다. 권이도는 좀 더 편한 자세를 위해 아예 시트를 뒤로 젖혔다. 완전히 눕지는 않았지만 기울기 상 밖에서 봤다면 내 엉덩이가 정면으로 보일 자세이긴 하다.  

쪽팔렸지만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동안 정열적인 섹스에 목말라있던 나는 대범해졌고 민망함 따위 무시해버렸다. 이성이 살짝 마비가 된 사이 몸의 감각도 둔해지는지 엉덩이를 잡아 벌리는 느낌에도 감흥이 없다. 한번 뿜어낸 몸의 열기는 급속도로 식어버리고 나른한 탈력감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권이도에게 몸을 맡긴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내가 한 번 갔으나 이 작자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 삽입 전에 나를 한 번 더 흥분시키려는 듯 자꾸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며 항문의 골을 쓰다듬었다. 숨을 고르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목덜미를 입술로 핥으며 엉덩이에 집중하는 그는 그곳을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온갖 정성을 들여 매만지고 있었다.

“하얀 엉덩이가 자극적이에요. 굳게 오므린 주름도 때때로 경련하는 허벅지도...내 손이 움직이는 대로 자국이 남고 주물러지는 당신의 몸은 오늘따라 매우 유순하군요.”

“......”

“......입 다물라고 구박하지 않습니까?”

고개를 들어 권이도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눈동자 속에 배인 짙은 욕망은 그러나 나에 대한 불안함으로 얽혀 있었다. 쪽팔린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나는 쿡쿡 웃으면서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마치 잠이라도 드는 양 몸을 늘어뜨렸다. 술에 취하고 사정까지 한 몸은 움직일 의사가 없었다. 마음은 온갖 귀찮은 것들을 거부하며 어제 새벽부터 고민하던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선 머릿속으로 생각할 여지를 주어선 안 되었다. 마음대로 벗겨먹어라 그래. 나는 권이도가 내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그를 이용했다.
권이도는 내 몸을 좀 더 자신에게 기대게 하고 엉덩이만 들게 해 손가락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아 진짜, 차 안은 밝지, 바깥은 어둡지...누가 지나가면 내 엉덩이만 동동 보이겠구만. 그렇다고 권이도의 차가 매직미러인 것도 아닌데......
에라 모르겠다. 기분은 좋아.
귓속을 파고드는 권이도의 낯부끄러운 음성도 그냥 저치의 취향이 저러니 조금 봐줘야지 하는 기분으로 내버려두고 있다. 나는 나와 섹스하는 사람에겐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김서경이라고 암.  

“당신의 엉덩이가 빠끔빠끔 갈색 주름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어요.”

“......”

“지금 손가락 하나가 들어가는데 괜찮습니까? 아, 굉장히 긴장하나봅니다. 심하게 벌름대는군요. 겨우 검지손가락 한마디 들어갔을 뿐이에요. 그렇게 조이지 말아요. 움찔움찔 떠는 이 주름에 내 것을 흘려 넣어 잔뜩 마시게 한 다음 질질 싸는 게 보고 싶어요. 어떡하죠? 그래도 됩니까? 예? 주정뱅이 김서경씨?   

뭐라는 거야...아주 신이 낫다 신이 낫어. 나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내 엉덩이를 그리워하며 그동안 노심초사했을 권이도를 생각하니 실소가 새어나온다. 저 괘씸한 말들은 대범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권이도의 손가락이 엉덩이를 주무르고 구멍 안을 비집고 들어오면서 다시 한 번 슬금슬금 쾌감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니까.
  
지난번엔 강제였으니 자진해서 뒤로 받아 보는 것은 실로 몇 년 만이다.
그동안 잊고 있던 감각을 되새기면서 등허리를 떨었다. 권이도는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더 탄력을 받아 오랜만에 마음껏 그 혓바닥을 놀렸다. 제기랄, 어지간해선 봐주려고 했는데 참 듣기 무안하네 그려. 그래 봐주자. 제 앞섶 처리할 생각은 안하고 이렇게 길고 진탕하게 서비스에 몰두하는 것도 나름 귀엽지 않은가.

“손가락 하나를 물고 부들부들 떠는 당신의 소담스런 엉덩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십니까? 하얗고, 동그랗고, 작지만 균형 있게 올라간 엉덩이 사이로 제 손이 무례하게 침입하는 것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기대로 흔들리고 있군요.
엉덩이를 이렇게 활짝 잡아 벌리면 복숭아를 쪼갤 때 드러나는 속씨처럼 수줍게 오므린 열매가 숨을 쉬고 있어요. 손가락을 넣어 마음껏 휘저어 주고 싶은 충동을 어찌 해야 할까요.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당신의 엉덩이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짙은 갈색의 항문을 상상하며 오싹한 쾌감에 몸을 떨어도 되겠어요?
아아 그렇게 오물거리지 말아요. 한입가득 베어 물고 저 안의 씨앗을 이빨로 긁어내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미칠 지경이니까요.“

아, 이거 어지간한 내공으론 버티기 힘드네.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보이는 것처럼 지껄이는 걸 보니 그동안 어지간히 참았나 보구나. 벌거벗고 있어서 몸이 추울 법 하지만 하체에서 치고 올라오는 열기와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 탓에 오히려 더울 지경이다.
빌어먹을, 손으로 만져주는 건 노곤노곤하게 달콤한데 저 입은 왜 이다지도 저주스러운 거냐. 그런데 이렇게 쪽팔리면서도 슬금슬금 일어나는 아들내미는 또 뭐고! 아들아, 네가 진정 저 작자의 세치 혓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이냐? 아니면 항문을 휘젓는 손가락에 굴복하고 만 것이냐!
그렇게 번민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차가운 액체가 발라졌다.

“윽......”

“...젤입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군요.”
     
그제야 권이도의 상태가 매우 안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흥분으로 바르르 떠는 것은 그도 나 못지않다. 얼굴에 탁한 기운이 어려 있다. 시선은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초점은 제대로 맞추고 있는 모양이다. 무얼 보는 걸까? 핸들이라도 보면서 내 궁둥이를 상상하는 거야? 열심히 젤을 짜 바르자 찌걱찌걱거리는 마찰음을 내기 시작한다. 침묵이 찾아든 차 안에는 항문 안에서 녹고 있는 젤과 그의 손가락이 일으키는 마찰음 때문에 백 마디 부끄러운 말보다 훨씬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아 뱉어내지 마세요. 다 삼켜요 삼켜.
오늘은 아주 힘들 거에요......당신의 입구는 너무 좁고 깊어요. 손가락 따위론 바닥을 알 수 없군요. 그래요, 그렇게 씹어 삼켜요. 거품을 뿜으며 녹아내리는 젤 한 방울 남김없이 담아 드릴테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권이도가 슬쩍 내 귓가를 물었다. 권이도는 자신의 바지 앞섶이 높게높게 텐트를 치고 있는데도 내 엉덩이에서 손을 뗄 줄 모른다. 어지간히도 내 궁둥짝이 맘에 드는 모양이지. 빨리 달래주어야 이 자의 혓바닥 운동이 끝날 것 같아서 내가 그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려 팬티 안에서 잔뜩 성이 난 그것을 끄집어냈다. 손으로 물건을 꺼내는 것이 심한 자극이 되었는지 그가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을 주었다. 내가 아프다고 신음을 내뱉었더니 권이도는 당황하면서 꼬집혀진 엉덩이를 다시 부드럽게 주무르며 살살 달랜다.   

“...아직 덜 풀어졌습니다만...“

이미 풀어질대로 풀어져서 흐물흐물한 구멍을 만지면서 뭘 더 풀겠다는 거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봤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핸들을 향하고 있다. 점점 흥분한 권이도가 잔뜩 쉰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다.
   
“계속 보고 싶군요.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아니 비디오로 찍어서 언제라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젤을 다 삼키지 못한 구멍이 뻐끔뻐끔 액체를 흘리면서 주름을 촉촉이 적시고 있는 이 경이로운 광경을 당신이 보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그제야 나는 이 작자가 뭔가를 보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앞 유리에 내 엉덩이가 비쳐서? 하지만 밖은 어둡고 내부가 밝은 탓에 비쳐도 잘 안 보일텐데...항문의 주름은 더더욱 보일 리 없다.
슬쩍 뒤를 돌아 본 나는 경악으로 몸을 굳혔다.

아까 내가 집어 던지듯이 놓았던 탁상 거울이 내 납작한 엉덩이를 권이도에게 낱낱이 비춰주고 있었다!

“큭-!!!!”

열이 받고 쪽팔리고 당황한 나는 이를 빠득 갈면서 권이도의 물건을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아마 최고의 흥분 상태에서 내 엉덩이에 집어넣겠다는 계산이겠지만 남의 쪽팔린 꼴을 잔뜩 봐 놓고서 혼자만 여유로운 척하다니 괘씸죄도 정도가 있지!

얼굴이 더 이상 익을 수 없을 정도로 삶아진 나는 높게 치솟은 그의 것을 두 손으로 맹렬히 흔들고 사정시키는데 성공했다. 액체가 얼굴로 튀어서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까짓 거 티슈로 닦아내면 그만이다. 갑작스런 자극에 토정해버린 권이도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털었다. 몸 안에 들어 있던 세 개의 손가락이 사정 때문에 갑자기 오그라들며 남의 귀한 항문을 찢어버릴 듯 움켜쥔다. 그 자극에 허리가 튀었다. 이런 망할, 아랫도리가 욱씬욱씬 한 게 다시 장전 모드다.   

“푸...푸크크크크크......”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권이도가 웃었다. 이어서 차가 떠나가도록 아하하하하-!!!하며 광소를 터트리는 권이도의 모습에 나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내가 지금 뭐한 거냐.

“노, 놓으십시오! 이, 이제 서로 한발씩 뺏으니 그만 갑시다. 놓으라니까요!”

권이도가 내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웃어 젖혔다. 이 인간이 이렇게 크게 웃는 것은 처음 본다. 그냥 호탕하게 하하하-정도도 아니고 아주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도록 웃는 것이다. 작정하고 뿌리치면 권이도의 품에서 못 벗어날리 없건마는 쪽팔려 죽을 것 같은 나는 한숨을 쉬고 권이도의 어깨너머 자동차의 시트에 이마를 박았다.
술에 제대로 취했구나 아주.





“안경은 폼이었나요? 안경을 벗고도 그게 보입니까 그래?”

“시력이 심각하게 나쁜 건 아닙니다. 이 정도 거리는 보여요.”

나는 아직도 권이도의 다리 위에 걸터앉아 씨근덕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거울은 뒷좌석으로 던져 버렸다. 이제 그만 옷을 챙겨 입으려는 나를 붙들고 “이걸로 끝내려는 건 아니겠지요?”하는 바람에 아직도 요모양 요자세다. 호텔로 갈까 했지만 이제와 호텔로 2차 뛸 생각도 안 들고 권이도가 카섹스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우리는 또다시 총알이 장전되길 기다리는 중이다.
사실 나는 아까부터 장전대기 상태였지만.
너무 정력이 좋은 것도 피곤하다니까.

“눈 가려요. 안 그러면 안합니다.”

사정 후 장난처럼 내 어깨에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권이도에게 으름장을 놓듯 협박했다.  

“눈을요?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눈이라도 뜬......”

그 주둥아리를 손가락으로 튕겨주고 권이도의 목에 걸려있는 넥타이를 잡아챘다.

“아주 눈보신 단단히 하신 모양이더군요. 이제 그 눈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니, 제 즐거움 중 하나를 왜 뺏으시려는 겁니까?”

“그 빌어먹을 취향 때문에 페니스 쪼그라들 것 같습니다. 내말 들어요!“

남의 엉덩이를 빤히 보며 잔뜩 희롱한 것에 대한 보복이다. 나는 권이도의 넥타이로 그의 눈을 가리고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씨익 웃었다. 이렇게 눈을 가리고 보니 그날의 치현이가 생각나서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가학심이 슬슬 고개를 디밀기 시작한다.

그래, 그날 밤은 권이도가 내 넥타이로 입을 막았지. 어디 너는 눈을 막혀봐라.

묘한 복수감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눈이 가려 불만이라는 듯 잔뜩 주름이 진 미간에 키스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시각을 차단당한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느껴졌다. “흠, 하긴 눈을 감으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죠.”라고 응수하는 거 보니 별로 겁을 먹은 모양은 아니지만......그래도 나는 볼 수 있고 상대는 불 수 없다는 것이 묘한 우위감에 젖게 만드는 것이다.
이 맛에 눈을 가리나.
내가 뭘 하든 상대는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그 정복감, 그리고 지배감.

얌전히 시트에 기대어 있는 권이도를 내려보았다. 완전히 누운 것은 아니지만 잠자기엔 딱 적당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는 시트 위에 앞섶을 풀어헤친 와이셔츠차림의 남자가 자신의 넥타이에 눈이 가려 무방비하게 누워 있다. “서경씨?” 아무런 행동도 안하는 내가 의아한지 손을 뻗어 나를 잡으려 한다. 내 얼굴을 만지기 위한 듯 했으나 일부러 그 손을 피했다. 손가락은 장님처럼 허공을 움켜쥔다. 그렇게 허공을 휘저은 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길게 내뻗어 손끝으로 내 가슴을 건드리는 데에 성공했다.
중지가 유두 끝에 살짝 닿았다. 손끝에 닿는 기관의 정체를 눈치 챈 이도가 흠칫 동요한다. 나는 그 손가락이 완전히 내 몸을 쓸지 못하도록 몸을 점점 뒤로 뺐다. 아마 내 입가는 싱글싱글 웃고 있을 거다. 목말라하며 권이도가 상체를 일으켜 내 몸을 끌어안으려 하자 나는 그의 가슴을 세게 떠밀어 도로 눕혔다.

잠시 눈을 감아보았다.
빌어먹을 거울 때문에 잠깐 정신이 들었나 싶지만 아직 덜 깼는지 분위기 때문인지 조금 더 어질어질 하다. 고작 소주 2병인데...나는 이 정도로 취하지 않는다. 아까 마실 때만해도 오늘은 술이 안받는 날이라며 투덜대지 않았던가. 어째서 이제야 취기가 도는 건지 모르겠다. 몸이 둔한건지 예민한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까부터 장전 완료를 외치고 있는 한심한 주니어의 존재뿐이었다.

얌전히 누워서 내 처분만을 기다리는 권이도의 가슴 위로 얼굴을 숙였다. 셔츠를 젖히고 하얀 속살과 수줍게 드러난 짙은 갈색의 유두를 물었다. 이빨 끝으로 부드럽게 깨물다가 혓바닥으로 유륜주위를 핥았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차 안의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 눈이 막힌 권이도는 입까지 막혔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침묵마저도 나에 대한 복종의 뜻으로 알고 자신감과 정복욕에 더 불타오르고 있었다.

풀죽어 있는 그의 하체 위로 엉덩이를 눌러 앉았다. 그의 아들과 내 아들이 만나면서 인사를 한다. [안녕, 나는 준비 완료야. 그런데 넌 아직도 그렇게 조그맣구나]건방진 김서경의 아들이 비웃자 권이도의 아들이 열 받는다. 나는 두 아들들이 격하게 몸싸움을 하도록 하체를 밀어붙이고 가슴에 꼿꼿이 솟은 두개의 유실을 희롱했다. 하나는 입으로 하나는 손으로.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론 단단하게 약이 오른 권이도와 나의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그의 몸이 튕긴다. 그의 하체가 들썩거리며 좀 더 나를 조른다. 가슴에서 목울대로 혀를 길게 핥아 올리자 그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젖힌다. 오오 끊어질 듯한 신음이다. 이래봬도 수많은 파트너를 애간장 녹였던 실력이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으윽! ...서경씨......”

아들끼리의 싸움을 말릴 때가 되었다. 콘돔의 얇은 막 안에서 난동을 부리는 그의 성난 아들을 깊은 골짜기 안으로 유인했다. 골짜기 안의 어두컴컴한 동굴이 귀두부터 삼키며 천천히 늪처럼 끌어당긴다. 권이도의 몸이 출렁거리면서 동요했다. 나를 안고 싶어서 안달 난 두 팔을 매정하게 잡아 누르고서 넥타이로 가려진 얼굴이 쾌락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아 즐거워라. 그의 얼굴을 보는 내 얼굴도 반쯤은 풀려 있다. 천천히 허리를 내려 성난 아들을 완전히 늪으로 밀어 넣었을 때, 나는 익숙지 않은 중량감에 경련을 일으키며 거부감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을 골랐다. 하아...복근이 심하게 경련한다. 엉덩이 근육에 쥐가 날 것 같다. 하지만 뇌세포가 다 죽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고 그 기분은 끝내줬다. 하체에 몰리는 쾌락의 혈액은 마약처럼 전신을 달궜다. 고개와 등을 젖히고 한동안 아찔아찔한 감각에 몸을 맡겼다.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다.
권이도의 눈이 가려져 있지 않다면 절대로 이런 쪽팔린 모양새는 하지 않았으리라.

눈이 반쯤 풀린 채 천천히 허리 운동을 시작했다. 눈앞이 새하얗고 입가가 풀어진다. 아아아- 내 입에서 나도 모르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간다. 권이도의 두 손이 내 둔부를 단단하게 틀어잡고 절구질을 돕는다. 위아래로 움직이다가 때로 옆으로 돌리기도 하고 짓이기기도 하면서 아래에서 우뚝 솟은 페니스로 나의 내부를 잘게잘게 빻고 있었다. 중력이 끌어당기는 성인남자의 무게만큼 권이도와 나의 요철이 맞물려 누가 먼저 부서지는가 경쟁이라도 하듯 격렬하게 움직였다. 나의 한숨과 권이도의 탄성이 공기 중에 뒤섞였다. 마침내 서로의 호흡이 멈췄을 때 나는 권이도의 양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고 등을 휘며 절정에 몸을 떨었다.

와......최고.

예전 바텀을 주로 했을 때도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아마 한 남자를 내 손아래에 두었다는 정복감에 더해, 쾌락에 떠는 우스운 꼴을 상대가 볼 수 없다는 미묘한 심리 탓에 더욱 흥분한 것이기도 하리라. 참으로 오랜만에 이성이고 뭐고 제쳐둔 채로 미친 듯이 쾌락에 열중했던 것 같다. 다른 때였다면 파트너를 위해 소진했을 정력도 나를 위한 서비스에 쏟아 부었다. 권이도에게 해준 서비스는 정복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저 시끄럽던 주둥이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만일 두 눈 또랑또랑 하게 뜨고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까지 멋대로 가버릴 순 없었을 거다. 눈을 가린 권이도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대고 사정의 여운으로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켰다.

권이도가 슬며시 벌거벗은 등을 안아온다.
그도 어지간히 길게 사정한 느낌이다. 나는 기분 좋은 나른함에 취해 그에게 가벼운 키스를 하려했다. 고개를 들어 권이도의 턱 끝에 베이비 키스를 했다. 그리고 반달처럼 휜 내 눈 안에 들어온 것은 그의 빌어먹게도 높은 콧날에 넥타이가 들린 틈 사이로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두 개의 눈동자였다.

끄아아아아아악--!!!!

권이도의 눈은 비웃지도 놀리지도 않은 진중한 눈이었다. 그 날카로움에 심장까지 후벼 파지는 듯하다. 차가운 겨울 눈 내리는 벌판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다. 제기랄! 낮게 욕설을 뇌까리며 몸을 일으켰다. 권이도의 물건이 쑤욱 빠져나가는 것에 혐오감을 느낄 새도 없이 옆에 있던 남방을 잡아채 급하게 팔을 꿰었다. 쪽팔려쪽팔려쪽팔려어어어----!!!!! 뇌 속까지 익어버릴 듯한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때문인지 눈이 뻑뻑하다. 내가 허둥대며 옷을 찾아 입자 권이도는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난폭함으로 나를 잡아채고 눈을 가리고 있던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시트 위에 억지로 눕혔다. 얼떨결에 자세가 역전이 된 나는 남방을 채우다 만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서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다.

“복상사하는 줄 알았습니다.”

넥타이를 치운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아니......위험했다.
한손으로 나를 짓누르고 다른 한손으로 시트를 완전히 눕히면서 내 몸 위로 겹쳐 올라온다. 허둥지둥 단추를 여미다가 지금 단추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저 자식, 술 취한 건 난데 완전히 눈이 갔어! 여차하면 무릎으로 낭심을 걷어차고 이 성능 좋은 차 안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리와 다리가 얽히고 위에서 짓눌려지는 상황이라 진심으로 힘을 쓴다한들 벗어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다.

“저기, 힘들지 않습니까? 벌서 두 번이나 뺏는데 슬슬 활기찬 월요일을 위해 재충전할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친 섹스는 스테미너의 소모를 불러오며 다음날 다크서클의 원인이 되는......”
  
“그런 얼굴을 보여줘 놓고 여기서 그만두란 말입니까?”

내가 보여준 게 아니야 내가! 이 여우같은 자식아 그걸 다 보고 있으면서 안 본 척 엉큼을 떨다니! 아아 난 왜 그걸 눈치 채지 못 했을까아아아!!!

그의 손에 정액을 잔뜩 싸놓은 콘돔이 벗겨져 나갔다. 권이도는 자신의 죄다 풀어 헤쳐진 와이셔츠와 바지며 팬티를 벗어버리고 실내등까지 껐다. 모든 빛이 사라진 차안에는 이제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으로 서로의 실루엣만을 확인 할 수 있는 어둠에 잠겨들었다. 찌륵찌륵-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창 너머 멀리 도심의 불빛이 한들한들 신기루처럼 흔들리고 있다. 컴컴한 국도에는 지나가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이 적막해서 이 자리를 벗어날 주변 환경적 여지는 없었다.
차라도 한대 지나가면 당장에 다른 데로 가자고 우기겠건만.
“이젠 진짜로 안 보입니다. 마음껏 울부짖고 마음껏 쾌락에 떨어 주세요.”

“이, 이, 이...!!!!”

분하고 쪽팔리고 자존심 상해서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다. 산처럼 덮쳐 오는 그의 몸은 위압적이었다. 대상을 알 수 없는 짜증이 솟구쳤다. 이 여우같은 자식!!  
      
“빌어먹을! 언제부터 봤습니까? 분명히 잘 가렸던 것 같은데!”

“처음부터 다 보였습니다.”
     
권이도는 몸에서 풍기는 기운과 달리 침착한 목소리로 화를 돋우더니 다시 괴성을 지르려는 내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아 버렸다. 진심을 담아 옆구리에 펀치를 먹이려 했다. 당장에 그만두지 않으면 이제 끝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내가 초래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괜히 눈 따위 가려가지고, 아니 그 전에 괜히 술 먹고 어설픈 유혹 따위를 해대서 이런 쪽팔린 꼴이 되어버린 거냐고!!

“미칠 것 같습니다. 서경씨, 당신이란 남자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예?
아아 정말...정말......당신이 그런 얼굴을 하다니, 진심으로 경이로웠습니다!“

권이도는 아예 맛이 갔다. 부드럽게 시작한 키스는 아주 혀째 뽑아 먹어버릴 것처럼 난폭해졌고 살갗을 주무르는 손가락 탓에 몸에는 멍이 들 지경이다. 이 작자가 정말로 미쳤나. 뭐라고 헛소리를 궁시렁궁시렁 대는 것을 들으며 나는 쥐어뜯긴 허벅지가 아프고 깨물린 목덜미가 신경 쓰여서 와이셔츠로 안 가려지면 어쩌지 고민하고 있었다. 술은 완전히 깬 것 같았다. 두 번의 사정 뒤라 이성도 완전히 돌아왔다. 그런데 나와 핀트가 어긋나게 흥분한 이 남자는 술 한 모금 입에 대지도 않았건만 거의 최음제를 원샷한 수준이다.     

이성이라는 놈이 돌아오자 쪽팔림은 두 배가 되었지만 그와 함께 오늘의 섹스는 권이도의 것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헐떡이며 내 몸을 어떻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권이도를 보자니 아까의 상했던 자존심이 조금 보상 받는 느낌이다. 나는 섹스에 있어서 체력도 발군이다. 기왕 망가진 거 어디 네 녀석도 망가져 보라는 심보로 권이도의 발정을 느긋이 지켜보려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제야 진짜‘권이도 타임’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눕혀진 시트와 뒷좌석을 엉금엉금 기면서 제발 이제 그만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바닥을 구르고 시트 위를 기어도 권이도는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삽입을 했고 조수석의 시트마저 완전히 뒤로 젖혀 무슨 침대칸처럼 만들어 버렸다. 엉덩이가 얼얼하고 귀두가 새빨갛게 닳아 더 이상 사정이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몰아 부쳐졌다. 그래도 멈추질 않는다. 널찍한 자동차 안이 좁다고 기어다녔다. 쪽팔려 죽을 것 같았지만 저 자식의 손을 피하지 않으면 남은 정액은 죄다 쪽쪽 빨려서 오늘밤내로 씨가 다 마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공포감이 나를 기고, 기고 또 기게 만들었다. 그 뒤를 기어코 덮쳐와 땡땡 부어버린 유두를 꼬집고 손자국으로 퍼렇고 벌겋게 되었을 엉덩이를 깨무는 것이다.  
권이도의 페이스에 맞춰주기로 한 이상 나도 어지간하면 협조하려 했다. 근데, 아 근데! 사람이 좀 쉬고 해야 할 것 아냐 이 새끼야!!!!  
      
치현의 기분을 아주아주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이 자식한테는 아무리 화를 내고 욕을 해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                *                *





악몽의 일요일 밤이었다.
집 주소를 그에게 알려주는 것이 탐탁치 않았으나 어차피 최이사나 박전무한테 물어보면 권이도가 모를 리도 없고, 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가 묻는 대로 아파트 동호수를 불렀다.
짐승처럼 뒤엉켰던 우리는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몇 년 치 섹스를 다 소진해버린 것 같았다. 다리가 풀려서 움직일 수 없는 나를 부축해서 권이도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고 기어코 안으로 들어오겠다는 것을 내 생애 최고의 험악한 얼굴로 인상을 쓰며 쫓아냈다. 인간 김서경의 체력이 바닥난 만큼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권이도의 걸음도 술에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린다. 두 사람 다 양기를 쪼옥 빨렸지만 서울까지 운전 하고 나를 집까지 부축해준 권이도 쪽이 조금 덜 빨린 게 분명했다.

아마 권이도는 자동차의 시트와 카펫을 죄다 갈아야 할 것이다. 땀을 한 바가지 쏟은데다가 콘돔도 다 떨어져서 그와 내가 질질 싸고 다닌 정액으로 카펫과 시트는 앞자리 뒷자리 할 것 없이 엉망이었으니까.

오자마자 욕실에 떠밀리듯 들어가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기로 몸을 헹구었다.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욕조에 물이 차오른다. 샤워기의 물줄기가 몸을 때릴 때마다 예민하게 부풀어 오른 유두와 성기가 쓸린다.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마 한동안은 발기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리라. 신경질을 내며 샤워기의 호스를 끌어내려 엉덩이를 적셨다. 아직 항문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이물질을 말끔히 제거하기 위해 물을 미지근한 온도로 맞추고 손가락으로 긁어내었다.
콘돔이 다 떨어지고 그 자식이 내부에 사정을 했을 때 기염을 토하며 몸서리치던 게 생각났다.  

사실 나는 체내 사정을 싫어하는 편이 아니다. 다만 뒤처리가 귀찮을 뿐이지. 욕실이 가까운 곳이라면 씻어내기도 편하니까 분위기 따라 허용하는 경우도 있고 또 내가 상대에게 요구한 적도 있다. 하지만 주변이 허허벌판인 차안에서 채내 사정을 하다가 배라도 아파오면 어쩌려고!

빼라고, 어딜 맨대가리로 들어오냐고 욕했다. 그 후 뒤로 흐르는 뜨뜻미지근한 감촉이라니. 그때의 감각이 살아나자 욕실 타일에 머리를 박았다. 권이도 그 자식은 또 뭐라 했던가. 나중에 탈이 날지도 모르니 닦아야 한다면서 가뜩이나 헐어서 늘어진 그곳을 손가락으로 긁어내고 자기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내는 생쑈를 하지 않았던가.
앞뒤로 줄줄 흘리면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던 것은 주름을 라이브쇼로 보여줬던 것 보다 더 쪽팔린 일이었다.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 다니느니 오르가즘으로 맛이 가는 얼굴 한번 보여주는 게 차라리 낫지. 현대 문명의 결정체인 자동차 안에서 원시시대의 교미마냥 얼마나 해괴망측한 꼴을 저질렀던가!

어지간해선 자국도 잘 남지 않는 내 몸에 이빨자국이며 손톱자국이 난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목덜미의 키스마크는 다행히 보이지 않을 것 같았고 이빨자국이나 멍자국은 금방 없어지겠지만 당장 내일의 업무가 걱정이다.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화끈거리는 엉덩이와 부서질 것 같은 허리는 어찌한단 말이냐.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뉘였다.
저절로 끄응-하고 앓는 소리가 난다.  
속으론 오만가지 욕을 해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피어올랐다.

서른이 넘어서 이만큼이나 열정적인 섹스를 해보리라곤 기대하지 못했다. 짐승처럼 네발로 기었지만 그 행위에 느끼고 질질 흘리던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발기한 상태가 가능했던 건 술기운이라고 우겨보지만 재충전에 걸리는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짧았던 건 내가 술을 먹은 게 아니라 비아그라라도 먹은 게 아닐까 생각하며 놀라울 따름이었다.

뭉친 근육을 풀기위해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몸을 담갔다.  
찰랑거리는 뜨거운 물이 피로한 몸을 부드럽게 감싸며 이완을 시켜준다. 은은한 입욕제의 향이 기분 좋다. 나는 그대로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치현에 대한 문제를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침대 위에 내던져져 있던 핸드폰을 발견했을 때였다. 아직도 삐걱거리지만 개운해진 몸을 닦으며 침실로 들어섰을 때 나는 카드빚 독촉장이라도 발견한 것 마냥 우뚝 서버렸다. 푹신한 침대위에서 하루종일 주인을 기다렸을 검은 핸드폰이 어서 확인하라고, 어서 메시지가 왔나 안 왔나 확인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리 의도적으로 치현에 대한 일을 잊으려 했다지만 이렇게 까맣게 잊을 수가!

불안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수신전화가 잔뜩 쌓였으면 어떡하지? 만약 치현이 문자를 보냈다면 하루 종일 답이 없는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집에서 나올 때는 호기 좋게 핸드폰 따위 집어 던지고 나왔지만 막상 하루 동안 쌓인 메시지를 확인하려니 불안한 마음이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것이다.

급히 폴더를 열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치현에게선 한통의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                *                *





“김대리님 어디 아파요?”

“얼굴 많이 상했네. 주말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까맣게 타들어가 쪼그라든 내 얼굴을 보고 동료 직원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나는 웃으며 몸살기운이 있다고 둘러댔는데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밤새 한숨으로 뒤척이다가 수면부족과 근육통이 겹쳐 죽을 지경이니까.

그런 와중에도 회사 소식은 속속들이 귀에 들어온다. 마크플랜과의 협상이 결렬 됐다는 소식과 마크 플랜에게 의결권을 넘겼던 주주들이 최이사의 설득에 우리 쪽으로 많이 넘어왔다는 이야기 등이다. 마크플랜이 가지고 있는 의결권은 결과적으로 15.6%에 달했으나 외국계 기업들이 지분을 넘긴 덕에 결국 최대 주주는 김한곤 외 2인이 되었다.(김한곤은 사장이름이다)
최근 상장과 M&A설에 이끌려 개미 투자자들과 외국자본이 많이 들어와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저 외국계 기업들은 이름만 그럴듯하지 대부분 워레스의 손을 거친 기업들이다. 워레스는 IL의 지분을 사장들에게 넘기며 4%대로 내려와 앉았다. 5% 이상의 지분을 가지게 되면 몇 주를 가지고 있는지 공개해야 할 의무를 지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어진 거다.
마크플랜과 우리 회사의 반목은 슬슬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어느 한쪽이 적당한 손해를 보고 손을 떼던지 아니면 아예 먹히던지 해야했다. 임시 주주총회가 열린다 만다 의견도 분분했고 박전무 말에 의하면 아직 뚜렷한 임시총회의 날짜가 잡힌 것은 아니라했다.
M&A가 자꾸 미뤄지자 요즘들어 주가가 주춤하고 있지만 때 맞춰 올라온 권이도의 매수추천 리포트가 투자자들을 부추겼고 결과적으로 주가는 상장가의 300%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직도 오를 여지가 있다고 보는 투자자들은 높은 가격을 부르며 매수하려고 한다. 나는 더 이상 살 돈도 없어서 그대로 묶어두고 있지만 어느 새 잔뜩 불어난 잔고를 바라보면 오늘이라도 당장 팔아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충동이 드는 것이다.

때론 그런 생각도 해본다.
내가 이 팀에 끼어든 것은 어디까지나 권이도와의 인맥 탓이다. 워레스 쪽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집단이라지만 김사장과 최이사, 박전무가 기대하는 일을 나는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생판 도움이 안됐나 하면 가능한 한 사장들을 위해 본 업무까지 뒤로 미루며 열심히 했노라고 강력히 반발하겠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고.
그래서 치현에게 신경을 못 썼나보다.





“진성빌딩 301호요?”

나는 서류봉투를 들며 망연히 박전무에게 물었다.

“그래그래, 약도는 거기 나와 있는대로야.
중요한 서류인데 믿을 만한 사람이 자네 밖에 있어야지.”

어깨를 툭툭 치며 은밀한 웃음을 보이는 박전무에게 나는 질려 버렸다. 지금 이걸 들고 워레스의 사무실로 가라는 건가? 왜 하필 내가? 서류가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런 건 언제나 본인들이 직접 나섰던 박전무와 최이사가 왜 내게 이걸 떠맡긴단 말인가?

“최이사는 지금 자리에 없고 나도 급하게 나가봐야 하거든.
게다가 아 글쎄 워레스 그 친구들이 자네 얼굴을 꼭 봐야한다고 성화이질 않나. 같은 팀원인데 자네 얼굴만 모른다면서 원성이 자자해.“

그건 핑계다!
게이 및 우호적 노말로 이루어진 집단이 권이도와 쿵짝쿵짝하는 내 얼굴을 그저 궁금해 하는 것뿐이라고!!

“오과장한텐 김서경씨 오늘 내가 외근 보낼 거라고 말했어. 봉투만 전해주고 일찍 퇴근해버려도 상관없다 이거야. 물론 워레스 친구들하고 좀 안면 익혀두는 게 좋겠지만 말일세. 참, 김대리 영어 회화 괜찮지? 이야~ 지난번에 봤지만 나보다 훨씬 잘하던 데 뭐~”

가뜩이나 경영진과 접촉이 잦은 나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오과장이다. 오과장에게 따로 그런 소릴 했다고? 전무님 누굴 잡으려고 그러십니까! 오과장은 벨이 꼬이면 보고서의 오탈자나 편집 상태 가지고도 트집 잡는 사람이라구요!
  
속사정도 모르는 박전무는 껄껄 웃으며 등을 떠민다.“워레스 사무실은 최이사조차도 가보지 못한 곳이야. 잘 구경하고 와야 해~” 하며 은근슬쩍 보이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마음에 걸린다. 나는 이제야 잘못 걸렸구나 생각하며 서류 봉투를 들고 오과장의 눈총을 받으며 주차장으로 향해야 했다.  





*                *                *





약도를 따라 찾아간 진성 빌딩은 강남의 번화가에서도 유흥업소 주변의 골목길로 한참을 들어가 구질구질한 골목길에 새워진 다 낡아 빠진 구식 건물이었다. 빌딩 겉에는 [임대분양]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철지난 전단지가 부분부분 뜯겨진 채 달라붙어 있었다. 도둑고양이가 검은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적막한 골목은 대낮임에도 사람이 적고 스산했다.
이런 곳에 임시 사무실이 있다고?
아무리 정식 사무실이 아니라지만 이건 좀 너무했잖아. 자린고비 근성이 한국인한테 옮았나... 따위로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끈적끈적한 날씨에 땀이 셔츠를 적신다. 설마 선풍기는 아니겠지...하면서 3층에 하나 밖에 없는 사무실, 301호의 문을 두드렸을 때였다.

“누구세요?"

순간 바짝 긴장했다.
얼어붙은 혀를 겨우 움직여 이름을 말했더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심호흡을 한 후 손잡이를 돌렸다. 쇠로 된 육중한 철문은 뻑뻑해서 힘을 주어 당겨야 했다. 실례한다고 가볍게 인사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등줄기의 땀까지 날려버릴 듯 불어오는 시원한 에어컨의 바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층 전체를 개조해서 하나의 사무실로 만들어 놓은 301호 사무실은 8대의 컴퓨터와 4대의 노트북이 돌아가고 있었고 컴퓨터 앞에 놓여진 커다란 테이블에는 막 회의하다만 흔적인 듯 서류더미와 머그컵이 굴러다녔다. 벽에는 화이트보드에 마크플랜과 IL관련 오늘의 목표가 등이 적혀있고 화이트보드 옆의 흑판에는 몇 달간의 스케줄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대부분의 메모들은 휘갈겨진 영어 필기체라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나를 맞이하며 방긋 웃는 Mr.앨런은 비교적 여유로워 보였다. 사무실엔 상황판을 주시하며 바쁘게 어딘가로 전화 거는 사람, 모니터를 바라보며 쉴 새 없이 마우스를 따각 거리는 사람,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들 겨우 5명이 모여 마크플랜과 우리 회사를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고 있었다.  
나는 작전상황실을 방불케 하는 사무실의 모습에 잠시 얼어버리고 말았다. Mr.앨런이 다가와 “뭣좀 드시겠어요?”하고 한국어로 물었는데도 Water라고 대답했으니까.

“아직 장마감이 안 되서 다들 바빠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Mr.앨런이 유창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한국말로 미소 지으며 물을 건넸다. 저쪽에서 모니터 두 대를 동시에 보고 있던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면서 인사를 한다. 윙크를 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호들갑스럽게 다가왔다가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때문에 짜증을 내며 전화 받느라 정신없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저들과 오래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신들의 사무실, 굳이 따지자면 수천억이 오가는 본부, 작전사무실, 그 중추에 나를 불러들인 이유를 모르겠다. 나를 눈 뜬 장님으로 아는 건가? 조금만 신경 써서 살펴보면 저들의 기밀이 이렇게 눈에 훤히 잡힐 듯한데, 게다가 테이블 위엔 놓인 이 기사는 우리 사장이 비리 혐의를 받으면서 경찰에 출두한 몇 년 전 신문기사 아닌가.

“이거요? 그래도 파트너인데 서로에 대해 모르면 안 되잖아요.
우리들 나름대로 IL에 대해 조사하다보니 재미있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새삼 비밀도 아니지요?“

“......”

“하지만 요즘 김사장님이 정치권 로비에 열심이라는 소식을 들었어요.
최이사님은 우리를 안 믿는 건가요? 아니면 김사장님의 단독행동?“

애매하게 웃으며 그런 건 직접 물어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그에게 떠넘겼다. 서류를 받아든 Mr.앨런은 밀봉된 부분을 뜯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싱글싱글 웃는다.

“최이사님의 전폭적인 지지에는 감탄하고 있습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죠.”

웃고 있는 Mr.앨런의 얼굴은 피에로 같다. 웃기지도 않는데도 일부러 웃고 있는 모양새다. 저 사람이 그때 ‘어머’라는 어휘를 구사했던 금발벽안의 거구가 맞단 말인가. 유창한 한국어 덕분에 박전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Mr.앨런은 박전무의 표현에 의하면 호남아 중의 호남아, 유럽인 보다 더 유럽인 같은 미국인이었다. 그런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웃는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어디서부터 말할까 고르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Mr.권과는 어떻게......”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과장님께서 기다리시거든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의도적으로 대화를 피하며 억지로 웃으며 이 사무실을 떠나려 했다. 바깥으로 나가면 끈적끈적한 습도가 전신을 녹여버리겠지만 이곳에 있다가는 쾌적한 에어컨 바람에도 꽁꽁 얼어버릴 지경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벌써 가시게요?”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저 장단에 맞춰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요, 우선은 저희 사무실을 본 소감부터 듣고 싶어요.
어때요? 꽤 그럴듯하지요?“

“......”

“가끔은 여기서 잠을 자기도 한답니다. 저쪽 방에 숙박 시설도 되어 있죠.
저기 저 친구는 요즘 이방에서 계속 살고 있어요. 다우존스지수도 확인해야 하거든요.“

“......고생이 많습니다.”

겨우 한마디를 했지만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음성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내 한마디에 탄력 받은 Mr.앨런은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뭘요. 고생한 만큼 보람도 있겠지요.
참, 곧 임시 주주총회가 열린다면서요? 그에 대해 최이사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요즘 이사님이 많이 바쁘신지 연락이 좀 뜸해요. 박전무님이 자주 연락하지만요.“  

“주주총회 건은...저도 잘 모릅니다.”

“아, 그런가요? 아직도 정해진 게 없나요?”

아 글쎄 난 모른다니까.
박전무도 최이사도 나한테 그런 얘기는 안 해준다고.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Mr.앨런의 표정이 묘하게 변화했다. 그러나 다시 만면에 웃음을 띠며 사무실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동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기도 하고 상황판을 가리키며 간단하게 동료들과 대화를 주고받더니 나를 향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박전무님과 최이사님은 우리가 보유한 지분이 고작 4%대라고 걱정하시는데요.
사실 우리는 20개 정도의 펀드와 유령기업체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스윈더 파이낸셜, 보거스 코리아, NNSK펀드, walrus컴퍼니......
이건 비밀인데 Mr.김이니까 말하는 거예요.“

“예?”

갑자기 엄청난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당황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기업이다. 하지만 walrus컴퍼니는 알겠다. 얼마 전 5.2%지분을 취득하면서 투자목적의 지분 매입이라고 밝혔던 회사다. 잠깐, 그러면 워레스가 현재 가지고 있는 주식은 4%를 훨씬 넘는다는 소리잖아? 그것도 최이사와 박전무 모르게.
  
“동남아시아나 바하마군도 등 세금이 면제되는 곳에 유령펀드를 세우는 거지요.
사람들은 IL에 외국 자본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만 생각할 겁니다.“

옆에서 HTS프로그램을 뚫어져라 보던 붉은 머리 외국인이 내게 윙크를 하며 웃어 보인다. 그러자 Mr.앨런은 그 치의 어깨에 팔을 기대며 ‘쯧쯧 Mr.권의 남자라고. 함부로 손대면 혼 나.‘라고 영어로 속닥거린다. 누가 누구의 남자라고?                     
아니, 지금은 그런 것에 발끈할 때가 아니다.
왜 의도적으로 내게 정보를 흘리는가!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최이사에게 보고하라고 종용을 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워레스의 편을 들 것인지 최이사의 편을 들 것인지 시험하는 장소였던가?
당황한 것이 내 얼굴에 드러나자 앨런이 말을 멈추고 싱글싱글 거린다. 그러더니 손목시계를 보고 “오, 시간이 됐군요.”하며 너스레를 떤다.

“Yeah~!"

그 순간 장이 끝남과 동시에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큰 소란은 아니었지만 서로 눈을 찡긋하며 하이파이브를 해댄다. “오늘 목표치도 달성했군요. 마크플랜은 정확히 13.5%끌어올렸습니다.”하며 옆에서 앨런이 참견했다. 나는 아, 그런가보다 하고 멍하니 있었지만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일이 끝난 그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웃으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과 대화한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짧은 사이 그들은 내게 많은 것을 물었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권이도와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어떤 사이냐, 언제부터 알았느냐 따위의 굉장히 개인적인 문제였다. 그들의 호기심은 마치 전투와도 같았다. 내게서 권이도의 약점이라도 찾을 것처럼, 혹은 내 약점을 찾으려는 것처럼 서슴없이 질문했다. 질문의 태반은 영어였고 나는 거의 다 알아들었음에도 못 알아들은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솔직히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bondage플레이에 대해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면 나더러 어쩌라고?

그러나 식은땀이 흐르는 등줄기와 달리 나는 잘도 웃었던 것 같다. 가능한 예의바르게 사무적으로 대하면서 개인적인 질문 일체를 거부했다. 어색한 용어가 나오면 모른다는 듯 능청을 떨었고 영어도 서툰척했다. Mr.앨런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사무적으로 굳어버린 나를 보면서도 그들은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들의 달갑지 않은 호기심을 받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권이도에 대한 화제는 미끼구나.

이들이 진짜 듣고 싶은 것, 그리고 앨런이 알고 싶어하며 내게 큰 먹이를 던져줬던 이유는 곧 열릴 주주총회에서 최이사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수다스럽게 떠드는 척 하면서 기밀을 던져주면 나는 움칫 굳으면서 그들이 내미는 한마디에 잔뜩 위축된다. 왜 저런 말을 내게 하는 거지? 알고 있나 모르고 있나 시험하는 건가? 단순히 내 반응을 즐기기 위해서? 긴장하는 내 모습을 눈치 채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은 성공한 것 같았지만 글쎄......저들의 포커페이스도 나 못지않다. 워레스 사람들이 얼굴은 웃고 있지만 대체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박전무의 말에 동감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 대화였다. 대충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어쩌면 저들도 이미 눈치 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서 알아낼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로 통하는 사무실 301호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면서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분자와 회색 구름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태양이 내뿜는 열기에 감사했다. 에어컨이 지나치게 강했던 사무실에선 등줄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기 때문에.

찌뿌듯한 하늘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번호는 알고 있으되 한번도 먼저 연락해 본적 없는 최이사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                *                *





이사실에는 오랜만에 들어오는 기분이다. 그동안 주위의 눈도 있고 해서 의도적으로 이사실에 들락거리는 것을 피했는데 오늘은 부득이했다. 어제 내가 보고 판단한 것들이 제발 틀렸기를 바라면서 최이사 앞에 섰을 때 나는 그의 뱀 같은 눈을 보고 또 한번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눈도 많이 지쳐있다.
밤을 샌 게 분명한 눈 밑은 피로가 거멓게 쌓였고 깊게 패인 주름은 그를 더 화나보이게 했다.

“어제 서경씨의 전화를 듣고 이쪽도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서경씨 말대로라면 워레스가 소유한 IL의 지분은 40%에 육박합니다.“

“......”

“그렇게 되면 워레스가 소유한 주식과 우리 경영진들이 소유한 주식, 그리고 마크플랜이 소유한 주식을 제외하면 일반 투자자나 기관이 들고 있는 IL의 주식은 고작 20%가 조금 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 됩니다.”

최이사가 시선을 내리깔며 왼쪽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토옥-톡 두드리면서 마치 자기에게 하는 말처럼 읊듯이 말을 이어간다.

“뿐만 아니라 워레스가 51%까지 소유할 경우 마음을 바꿔 경영에 태클을 걸어와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은 달리 없어집니다. 최악의 경우 법적대응도 불사하겠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이사의 말을 들으면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 워레스가 비교적 싼 가격에 IL과 마크플랜의 주식을 매집한 후 조금씩 경영진에게 푸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그 단계에서 박전무는 워레스가 자금을 아끼려고 우리 회사 지분을 매수하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불만을 표시했는데 그게 워레스의 눈속임이었던 모양이다. 작전의 막바지에 온 지금, 계획은 여러 번 수정되었지만 크게 빗나간 것은 없다. 다만 시간을 점점 끌면 마크플랜과 우리 회사 둘 다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워레스가 내게 그런 정보를 준 것 즉, ‘우리는 이만큼이나 당신들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라는 것을 일부러 알린 것은 대체 어떤 의도였을까. 나는 어제 전화로는 미처 하지 못했던 얘기를 마저했다.

“Mr.앨런은 사장님의 단독행동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순간 최이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최이사님의 기대에 부응하겠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일단은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다 불었다.
최이사는 끄응-하는 신음을 내며 “역시 그 부분이 문제인가 보군요.”하고 중얼거린다.

“사장님과 워레스 사이에 이익분배 문제로 조금 마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장님과의 문제도 있고 워레스와 우리들 간에 의견도 조금 빗나가서 요즘 사이가 소원해진 상태입니다만 박전무는 그걸 단합대회로 풀려고 하고 사장님께선 좀처럼 고집을 굽히지 않으시니......”

말을 하다말고 최이사가 입을 다물었다.
깊게 패인 미간의 주름을 보니 저 사람 속으로 ‘아차’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오늘은 웬일로 최이사답지 않게 내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구나. 저 얼음장 같은 최이사가 동요하다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주식은 오를 대로 올라있고 만일 마크플랜과 IL이 통합되는 사태가 벌어져도 우리 회사의 가치가 현재 주식시장에서 훨씬 더 크게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기실 흡수합병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니 일개 직원인 내 입장에서 보면 회사 사정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내가 더 이상 여기에 있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이만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이사가 나를 빤히 보며 내게서 더 캐낼 것이 없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 눈이 불편했다. 나이 많은 사람을 어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은 어렵다. 딱히 내가 게이라는 것이 들켜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냥 벌거벗겨져서 놓인 기분이랄까.

“권이도씨와는 아직도 사이가 나쁜가요?”

갑자기 울컥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스파이 흉내를 내는 생쑈를 하는데!
솔직히 최이사와 워레스 사이에서 이리치는 공에 맞고 저리 치는 공에 맞은 느낌이라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애당초 나를 믿지 않는 최이사가 박전무를 시켜 워레스의 사무실에 보낸 것도 수상하고 워레스 쪽에서 나를 불러 놓고 빤히 자기들의 기밀을 보여 준 것도 불쾌하다. 양 쪽에서 나는 시험당하고 있는 거다. 서로의 심중을 떠보는 도구로 쓰는 것이 싫다.

“뭐 그냥 그렇습니다.”

나와 권이도의 사이를 짐작하고 있으면서 그런 프라이버시에 관한 걸 묻는 저의가 불쾌하다. 나는 다소 최이사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최이사의 검은 뿔테 안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조금 놀라울 뿐이다.
  
“권이도씨는 유능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해도 금융계에선 한번 떨어진 신용은 되돌리기 어렵지요.
...한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인재군요.“

얼핏 최이사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게 걸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하며 되물었다. 그러나 최이사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표정으로 나가보라고 한다. 확실히 아웃팅 당한 시점에서 내가 권이도를 신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하지만 금융계라니?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일이 있나?

“아무튼 서경씨도 수고했어요. 박전무가 일부러 법인카드까지 찔러줬는데 전혀 쓰지 않았더군요. 가끔은 기분도 좀 내고 그러세요.”

나는 최이사가 더위 먹었나 했다.





*                *                *





집에 오는 길은 우울하다.
권이도와 원시인 같은 카섹스를 끝낸 후유증이 아직도 근육통으로 남아 있는 요며칠, 치현에게서는 문자도 하나 없고 연락도 없다. 물론 그 날 이후 권이도는 또 권이도대로 바빠서 정신없고 나도 야근만 점점 늘어나다보니 서로 연락할 짬도 없다. 회사 다닐 맛도 안 나고 취미삼아 즐겼던 게이라이프도 영 신통찮고 꼬이는 것은 권이도 같은 변태뿐. 그나마도 바빠서 못 만난다니.

어둡고 적막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면 가슴이 갑갑하다. 애완견이라도 하나 기를까. 이제까지 내 신경안정제 역할을 해주던 치현이가 다시 떠올라서 머리를 흔들었다. 몇 번이고 전화했지만 받지도 않고 문자도 없다. 집 앞까지 찾아가려고 마음먹었다가 야근을 핑계로 미루기 일쑤. 이렇게 아무 반응 없는 치현이가 불안하다. 치현이와 나는 정말 깨진 건가. 그것도 이렇게 찜찜하게.   

엘리베이터의 벨소리가 울리고 나는 한숨을 쉬며 복도로 발을 내딛었다. 복도의 센서를 일부러 피한 듯 계단 근처에 기대어 있는 시커먼 물체가 눈에 띈다. 물체는 나를 보더니 주춤 한다. 나는 설마...하면서 성큼 성큼, 그러다가 걸음을 빨리하여 검은 덩어리에게 달려갔다.

“치현아?”

행여나 도망갈까 봐 얼른 팔을 뻗어 잡았다. 하지만 기우였던 듯 검은 그림자는 내 부름에 놀랐을 뿐 도망 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센서가 발동하며 등이 켜진다. 붉은 조명아래의 얼굴은 싸움질한 흔적들로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너 또 싸웠구나!”

“아,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형.”

“어떻게 허구한 날 싸움질이냐? 기분 나쁘면 지나가는 사람한테 시비 걸고 막 그래?”

“무슨 소리야 형. 그런 거 아니래두. 아 씨 진짜. 누군 싸우고 싶어서 싸우고 다니나.
그 자식들이 자꾸 시비 거는데 어쩌라고 좀-“

“그 자식들? 너 깡패들한테 찍힌 거야? 아! 생각났다 혹시 그 골목에서 싸우던 놈들?”

너 잘리게 만든 녀석들? 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겨우 말을 삼킬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 골목의 깡패와 치현이를 아르바이트에서 잘리게 만든 녀석들이 동일 집단일지도 모른다.

“어. 새끼들이 끈질겨서 원......“

입가의 상처를 훔치며 치현이 인상을 썼다.
나는 우선 들어가자고 얘기하며 치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탁- 차갑게 뿌리치는 손에 제법 힘이 실려 있었다.

“치현아?”

“할 얘기가 있어서 왔지만 그렇게 긴 얘기는 아니야. 금방 끝낼게.”

안 좋은 예감이 스쳤다.
치현은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쉬고 입안으로 몇 마디를 삼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 있어서 상당히 버라이어티한 표정변화였다. 언뜻 체념의 빛도 보이고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무엇? 복도의 주황색 불빛 아래 비친 치현의 얼굴은 묘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우리 이제 만나지 말자.”

뭐?

“형이랑 비교하면 나는 그냥 어린애고 나이차이도 많고 말도 안 통하는 거 같아.
그니까 이제 전화 좀 하지 마. 일 바쁘잖아? 하도 울려대서 진동으로 해놓는데 이건 뭐 다른 전화 하려고 폴더 열기가 무서우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야.””

치현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한다.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다. 나는 하얗게 얼어붙어서 낯선 치현이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머릿속이 진공상태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집도 이사할거야. 그러니까 이제 찾아올 필요도 없고...
음...나도 참 생각해보면 형을 많이 이용했던 것 같아. 같이 잔 것도 아닌데 얻어먹기도 많이 얻어먹었지.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너...갑자기 왜 그래?”

어색하다. 무진장 어색해! 치현아 넌 연기력은 정말 빵점이다 그거 알고 있니? 시선도 못 맞추면서 뭐가 이제는 찾아오지 말라는 거야? 그렇게 불안한 눈을 하고 대체 나에게서 뭘 숨기는데...!

무심코 치현의 팔을 잡아 거칠게 끌어 당겼다. 험악한 인상을 쓰며 억지로 턱을 잡아 당겨 내 눈을 보게 만들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똑바로 보고 말해.” 내가 화내는 걸 처음 보는 치현은 잠시 당황했지만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어느새 불안함이 사라진 눈동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어딘가 모르게 체념의 빛도 섞여있었다.

“미안해. 이제 형이랑 있으면 왠지 피곤해져.”

혈압이 땅 밑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얘기해야 될 것 같아서 오늘 찾아 온 거야.
이제 끝내자. 나, 그동안 형이랑 다니면서 세대차이랄까 성격차이랄까...그런 거 많이 느꼈거든. 그러니까......“

“권이도, 혹시 그 사람 때문에 그래?!”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얄미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급하게 내뱉었다. 그러나 치현은 그 이름을 듣고 놀라지도 않는다. 어깨를 으쓱하는 표정엔 일말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문제는 권이도가 아니야. 그 자식한테는 아직 아무 말도 안했지만 뭐 연락 없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형한테는 그래도 신세진 게 많아서 직접 얘기하러 온 것뿐이고.
나 이제 내 나이 애들과 놀래. 나이차이 많이 나는 사람이랑 있으니까 확실히 좀 피곤한 것 같아. 형도 나 같은 어린애보다 형 나이대의 남자가 더 어울리는 것 같고.
형이 왠지 부담스럽고 그래. 뭐랄까, 맞아 그래. 좀 질렸어.“

충격이었다.
저 고집스러운 입에서 한마디의 주저함도 없이 나를 질렸다고 말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무심코 치현의 팔을 잡은 팔에 힘이 빠진다. 약간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나한테 질렸다고? 내가 부담스러웠다고?  

“그러니까 전화 좀 하지 말고 집에 찾아오지 마. 그 말 하려고 왔어.
어...그럼 이제 갈께...“

머뭇거리며 그렇게 말한 치현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기다려 치현아.”

어깨를 잡아 돌렸다. 슬픈 표정이길 바랐던 건 내 마음이었을 뿐 나를 돌아본 치현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치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이해하기가 힘들어. 갑자기 그런 말해도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형 진짜 답답하네. 생각해봐. 내가 권이도랑 호텔에 있었을 때부터 우리는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솔직히 말하면 난 그런 짓 하려다 들킨 거 쪽팔려 죽겠어. 뭐 형도 그런 짓 하려고 왔으니 피차일반이지만.”

“......”

“아, 그리고 형 헤븐에는 오지 마. 연령대가 다르다구 연령대가.
내 친구들이 형보고 노땅이라고 수군대는 거 솔직히 좀 그래.
쪼...쪽팔리다구.“

이번에야 말로 카운터 펀치였다.
내가 아무 말 못하고 얼어있자 슬쩍 물러난 치현은 내 얼굴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미련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버렸다. “잘 있어.”하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힌다. 나는 당황해서 기다리라고 외쳤지만 엘리베이터는 아래층으로 내려 갈뿐이었다. 그러나 쫒아갈 생각도 못했다.

나 김서경이 이런말까지 들으면서 구차하게 쫒아가야 하는가 하는 자존심의 소리와, 꼬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이성의 소리와, 지금 잡아서 억지로라도 먹어버리라는 본능의 소리가 머릿속에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며 합창을 거듭했다.   

그러나 노땅이라는 단어의 중압감에 쇼크를 받은 몸은 단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                *                *





한 쪽 머리에서 노땅노땅노땅 하면서 딱따구리가 노래 부른다.
아침부터 뚜닥거리는 두통은 참으로 오랜만이었지만 두통을 동반한 무기력증은 참말로 세상 살맛 안 나게 만들었다.

“으악! 김대리 어딜 정신 놓고 다니는 거야?!”

뜨거운 커피를 지나가던 오과장의 양복바지에 쏟아 부을 뻔했다. 그렇잖아도 눈에 거슬리던 상사였는데 아예 확 부어버릴 걸. 두 눈이 퀭하게 들어간 얼굴로 “아, 과장님. 죄송합니다.”하며 전혀 성의 없이 입을 뻐끔거리자 오과장의 바코드 머리에 퍼런 정맥이 돋아난다. 한 소리 크게 하려다가 간부 회의가 바쁜지 “이따가 봅시다” 하며 빠르게 회의실로 향한다. 지나가는 청소 아줌마가 혀를 차며 “젊은이가 술 좀 적당히 마셔야지” 하고 헛다리를 짚는다. 이미희씨는 다크써클의 절정이라 놀리고 유석환 씨는 여름 타냐고 묻는다. 그러나 성대리의 한마디만큼 결정타는 없었다.      

“김서경씨 오늘따라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데?”

김서경호 침몰되다.
짙은 갈색의 커피가 일회용 컵 속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며 머릿속으로 시시껄렁한 문구가 지나갔다. 오늘따라 더욱 상큼해 보이고 뽀득뽀득 윤기 나는 성대리의 얼굴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요즘 여자친구와 엄청 잘되고 있는지 사무실에서는 조만간 국수 얻어먹는 거 아니냐는 분위기다. 성대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덤덤한 얼굴이었지만 “식사는 역시 뷔페가 좋겠지?” 하는 모양새를 보니 염장을 질러도 아주 제대로다.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한 내게 오과장의 잔소리는 꿈결속의 멜로디처럼 들렸다.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다보니 업무에 실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의욕이 나질 않는다. 그런 내가 겨우 정신을 차린 건 점심시간도 다 끝나갈 때쯤 낯선 전화번호가 찍히며 핸드폰 벨이 울렸을 때의 일이었다.
발신자표시 번호를 보니 공중전화로 걸려온 듯했다. 누굴까 의아해 하며 전화를 받았더니 상대는 권이도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런, 벌써 용건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너무 차가운데요.

능글지수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목소리가 회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웃팅 건에 대해 엄청나게 열이 받아 있을 때는 그렇게 꼬리를 말더니 내 기분이 풀어졌다는 걸 알고는 의기양양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왠지 이 사람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기분도 들고 아무튼 심경이 복잡하다.
...그래도 통장의 잔고를 보면 아웃팅은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왜 공중전화로 통화하시는 겁니까? 핸드폰 잃어버리셨나요?”

-시간과 공간을 제약받는 공중전화로 통화하는 것도 꽤나 로맨틱하지 않습니까?

아니, 이 작자 왜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거지?
시간이 곧 돈인 사람한테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내 웃음소리를 저쪽에서도 들었는지 우리는 같이 실소를 흘렸다. 상대가 권이도라고 해서 긴장했지만 맥 빠지는 대화에 기분이 느슨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권이도는 뜸을 들이며 잠시 말 꺼내기를 주저했고 나는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볼 요량으로 느긋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경씨, 그저께 워레스 친구들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을 불러내 이것저것 시험하는 눈초리의 그 외국인들에겐 아무래도 호감이 가지 않는다. 그들과 권이도가 친분이 있다니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이다.

“네. 만났습니다. 솔직히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어요.
앞으로도 그런 일로 나를 불러낼 거라면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질책하듯이 말했지만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좀 기분 나빴다...는 이야기일 뿐이었는데 수화기 너머의 저쪽에선 답이 없다. 권이도의 침묵을 의아하게 느끼며 무슨 일 있냐고 물으려던 차, 타이밍 좋게 권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친구들은 확실히 재미있고 유쾌한 친구들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다소 무모한 면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나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 입니까?

-......

“신뢰성이 없다는 소리입니까?”

-......신뢰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친구들은 상대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면 먼저 배신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이번엔 내 쪽에서 침묵했다. 이어지는 권이도의 이야기는 자칫 협박으로 들릴 소지도 있어서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만......상대에게서 수상한 기미가 보일 경우....
그 대처는 신속하고 무모할 정도로 엉뚱합니다.

옥상에선 점심시간의 휴식을 즐기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몇몇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땡볕을 피해 건물 안 휴게실을 이용한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옥상 위의 그늘진 구석에서 바람을 맞으며 벽에 기대어 있었다. 조금만 그늘을 벗어나면 지글지글한 콘크리트 옥상이건만 등과 맞닿은 그늘진 벽은 매우 차갑다.

그렇게 옥상 위의 풍경을 보며 머리를 식히고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나 잘 살핀 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IL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겐 그렇게 들리는데요. 솔직히 일개 대리인 제게 그런 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최이사는 워레스와 IL간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 권이도가 워레스의 대변으로 말하는 거라면 내가 아니라 최이사나 박전무, 아니면 사장한테 직접 말하는 게 정당했다.

-서경씨에게 아무런 정보도, 실권도 없다는 것은 압니다. 경영진들이 정작 중요한 말은 해주지 않는 다는 것도요.

이, 이자식이 누구 놀리나. 가뜩이나 콤플렉스인데 일부러 건드리는 거냐!
수화기 너머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권이도의 진짜 의중을 몰라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점심시간은 끝났다. 이제 슬슬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하는데...하고 생각할 때 쯤 목소리가 들렸다.

-이틀 후부터가 매도 타이밍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서경씨.

“네?”

-일주일 정도는 고점에 물려 있을 겁니다. 그러니 늦기 전에 털고 나오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런 소리, 이사님들한테서는 못 들었는데요.”   

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가 바보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건 내 입으로 ‘나는 아무 정보도 받지 못하는 신용도 제로의 일개 대리입니다.’라고 이실직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던가. 저쪽에 들리지 않게 끄응-하고 작게 신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권이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 그분들은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연락한 겁니다.

아아 이런 곳에서 말단직원의 서글픔이 드러나는구나.
잠시 어정쩡한 내 위치에 대해 신세한탄을 해보았지만 뭔가 꺼림칙한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마크플랜과 우리 회사의 공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량을 풀기엔 아직 이른 시점 아닌가?

“그런데 주가를 하락 시키는 건 마크플랜인가요? 아니면 IL 과 마크플랜 둘 다입니까.”

-......

권이도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디 회사의 주식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매도하라는 것은 역시 그 두 회사 전부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걸로 봐도 되나? 권이도가 굳이 말을 하지 않는 걸로 보아, 나는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 조만간 워레스 쪽에서 물량을 풀어낸다는 것일 텐데 갑자기 떨어지는 물량은 누가 받아 주지? 이사님들이 받아주는 건가?

두 회사가 합병할 때 합병비율은 당시 주가와 순자산가치로 평가된다.
워레스의 조작으로 현재 IL은 마크플랜의 3배에 달하는 주가를 유지하고 있어서 만일 이번 주주총회에서 합병이 결정되면 우리 회사가 3배는 유리해진다. 물론 마크 플랜이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주가가 떨어지더라도 합병 이후여야 한다. 우리쪽 경영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크플랜은 서서히 이번 M&A에서 손을 떼고 싶어 하는 눈치다. 적어도 신문 상에 나타난 내용으론 그렇다. 사실상 지금 손을 뗀다 하더라도 서로의 주식은 오를 대로 올라 마음 독하게 먹고 지분을 팔아치운다면 엄청난 차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지 않는 것은 두 회사가 지분경쟁에 있기 때문이고 법적인 이유도 있겠지.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에 워레스가 쏟아낼 주식을 이사님들이 받아주는 것으로 미리 얘기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번 이사님의 말을 생각하면 워레스는 40%이상의 지분 소유하게 되는데 그 부분이 잘 해결 되어서 이런 결정에 도달한 건지도 모른다. 워레스가 시장에 내놓은 주식을 경영진이 받는다....미리 가격 협정이 된 사이니까 거래가 체결되는 건 순식간일거다. 하지만 일반 투자자들의 개입도 무시할 수는 없는데......

아, 정보가 너무 없다.
머리를 굴리고 싶어도 뭘 알아야 좌로 굴리든가 우로 굴리든가 판단하지.   

권이도는 말이 없었다.
내 얄팍한 지식으로는 지금 워레스가 보유한 주식을 내놓으면 안 되지만 상황에 따라 계획이 수정된 걸로 보인다. 나는 권이도가 매도하라는 타이밍에 매도만하면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이사님들이 직접 얘기 하지 않는 것은 주위의 눈 때문인가?
이번일로 금융감독원의 눈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 궁금한 게 없으시면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제야 내가 한참이나 침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알겠습니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며 인사치레를 하다가 점시 머뭇거렸다. 갑자기 머릿속에 할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권이도씨”

-네 말씀하세요.

“.....치현이에게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습니까?”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혹시 저쪽에 들렸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글쎄요. 요즘 서로 연락을 안 하고 있습니다만......
서경씨가 있는데 왜 제가 치현과 만납니까? 아아 혹시 질투?

“쓸데없는 소리마시고! 정말로 치현이랑 무슨 얘기 한 거 없냐구요!”

권이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거짓말 할 거리를 찾는 건지 아니면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치현이 권이도에게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서경씨는 우리 사이에 대해 뭔가 오해하고 있군요.

오해는 무슨. 게이 두 명이 만나서 그렇고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 관계란 건 뻔하잖아.

-이대로 서로 연락 없다가 몇 달 뒤 갑자기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면 그날 당장 만나 호텔로 갈 수 있는 게 우리 관계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오랜 통화로 인해 핸드폰은 과열되어 있었다. 덩달아 옥상 위로 올라온 나도 상당히 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덥다. 그리고 짜증난다. 나도 일반인과 다른 섹스편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둘은 대체......

-물론 연락했을 때 스테디한 상대가 있다면 거절 할 수도 있겠군요.
저로선 그 상대가 서경씨였으면 좋겠습니다만......

“......”

-서경씨는 그런 적 없습니까?
일주일 동안 관계를 가지다가도 어느 순간 흥이 사라져 깨지면 몇 달 전 만났던 사람과 다시 자기도 하고 실연의 아픔에 울적해 있을 때 섹스로 달랠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

“......그거 굉장히 지조 없고 난잡하게 들리는 데요.”

-하하하 맞습니다. 그리고 지조 없기로 따지면 우리 셋, 어느 쪽도 만만치 않지요.

그렇다. 그리고 나도 상당히 난잡한 인간이지.
맞는 말이기에 별다른 대꾸도 못하고 통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치현에게 전화 오면 서경씨가 많이 걱정하더라고 얘기해 놓을까요?’하고 자존심을 긁는 바람에 울컥했지만 치현이 전화 해봤자 노땅소리나 들을 권이도를 생각하니 쓴웃음과 함께 한숨이 새어나온다.
   
여름바람이 상쾌하게 옥상 위를 훑고 지나갔다.
나 혼자만이 남은 콘크리트 건물의 꼭대기에는 작열하는 태양의 세례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나는 새파랗게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구름이 유유하게 흘러가면서 혼자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나도 상당히 모순 된 인간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생활대로라면 권이도가 치현과 자든 말든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야 마땅하다. 이제서 권이도에게 타박하는 것도 우습고 치현을 옭아매려는 것도 나답지 않다. 음...물론 연인이 생기면 바람은 피우지 않는 다는 주의지만 그런‘틀‘을 스스로 만들기 전까지는 상당히 난잡하게 살면서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어 왔단 것도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걸까.
그 두 사람 모두가.


  


*                *                *





결국 권이도와 통화한 날부터 가지고 있는 주식을 조금씩 처분하기 시작했다. 권이도가 말한 타이밍보다는 조금 이르지만 그렇잖아도 너무 올라버려서 팔 기회만 노리던 차,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하다. 차명계좌만 몇 개인지 모른다. 조직 폭력배들이 운영하던 G캐피탈에서 일하던 시절, 계좌 조작하던 짓을 이럴 때에 써먹을 줄은 몰랐다.
들키면 곧바로 구속감이다.

회사 소식을 신문이나 사내 소문으로 듣는 게 고작인 요즘은 최이사나 박전무를 만나러 가는 것도 꺼려진다. 무엇보다 경영진들은 바빴다. 비록 M&A를 방어한다며 불법을 저지르고 있지만 기업세계에서 모럴을 기대할 정도로 나는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저 무탈하게 일이 잘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주주총회 날짜가 잡히고 이 지겨운 공방전도 이제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내가 끼여들 여지는 전혀 없으니 회사 일에 대해선 경영진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하며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보다 치현이 때문에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노땅이라고? 내가 헤븐에 찾아와서 창피하다고?
그 말에 잠시 침몰 상태였지만 나는 그렇게 무딘 인간이 아니다. 어쩌다보니 치현과는 무언가가 어긋나 버렸지만 아무튼 조금만 생각하면 그날 밤 치현의 행동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수상쩍다 생각하면서도 쪽팔리다는 말을 들은 충격에, 그리고 원망스런 마음에(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일부러 치현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연락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통장에 들어온 비상식적인 금액을 바라보며 허허로이 웃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 돈으로 혼자 뭘 한단 말이지? 하며 혼자 허무함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혼자서 얼마를 벌어봐야 같이 즐거워해 줄 친구 하나 없으면서. 멋진 남국여행 따위 혼자 가봐야 전혀 즐겁지도 않는데.

-바다 어때? 그래, 남해로 가자. 새파랗게 뻗은 바다를 보면서 헤엄도 치고......
아니, 아예 해외로 갈까? 동남아? 하와이

그 말을 하며 꼬마와 통화하던 나는 정말 즐거웠었다.


  


*                *                *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야근에 불타올라 있을 때 혼자 퇴근을 했다. 눈치 보일 건 없다. 지난 몇 주간 나보다 더 열심히 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으니까. 며칠간 짱돌을 굴리며 나름대로 센티멘탈한 기분에 빠져 있었지만 그야말로 지나가던 개가 사색에 빠지는 것과 다름없다.
안 어울리게 웬 고민이냐 김서경.
연애에서 미적대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로 접어버린 주제에 새삼 갓 고졸하고 사회 경험 2년차 될까 말까한 녀석을 두고 이 무슨 청승이냐고. 고양이가 생선뼈 앞에 두고 명상하는 거 봤냐?

우선 정말로 이사했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고시원이라도 들어가면 모를까, 치현의 경제적 사정으로 미루어 보건데 아무 조건 안 따지고 무작정 방을 구하는 게 아니라면 아직은 쉽게 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사흘 째 치현이네 집에 출근도장을 찍으면서 만난 집주인 101호 할아버지와 얘기 해보니 역시나 아직 이사를 가진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사할 생각은 정말이었는지 조만간 방 뺀다며 보증금 준비해 달라고 했단다.

스페어 키로 치현이의 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 동안 기다려 보았지만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메모를 놓아두어도 다음 날 와 보면 메모가 그대로에 방 모습도 변화가 없는 걸로 보아 요즘 집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다. 핸드폰은 전부터 계속 받지 않는다. 전원을 꺼놓은 것도 아니고 신호는 계속 가는데 받지 않으니 이건 일부러 받지 않는 게 아니라 밧데리가 강제로 나간 건 아닐까. 불안감이 점점 상승한다. 치현의 경고를 무시하고 헤븐이나 폴리곤에서도 찾아 봤는데 소득은 없었다. 운 좋게 요전번 파트너였던 애교만점의 친구를 만났지만 “남치현이요? 걔 요즘 여기 안 온지 한달도 더 됐어요.”하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오늘은 치현의 집 앞을 낯선 청년들 두 명 지키고 있었다.
101호 집주인 할아버지가 거기 서서 뭐하냐며 호통을 쳤더니 남치현의 친구랜다. “그 자식 얼마 전에 이사 가고 없어!”하고 할아버지가 거짓말을 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 눈치다. 머리를 요란하게 물들이고 옷차림도 곱지 않은 주제에 남의 집 앞에서 쭈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며 살벌한 눈빛으로 버티고 있으니 주인 할아버지가 못마땅해 하는 심정이 이해갔다. 치현의 방에 있는 모습이 들키면 곤란 할 것 같아서 커텐을 쳐두고 함부로 창가에 가까이 가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몰래 방을 빠져나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5층사는 젊은이 친구들입니까?”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어내며 물었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초리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까이서 보니 고등학생쯤 되었을까? 청년이 아니라 완전 애다. 애.

“아저씬 뭐야? 이 동네 살아?”

초면에 반말은 요즘 유행이냐? 치현이도 그렇고 이 아이도 그렇고...치현이는 귀엽기라도 했지. 너는 기준 미달이란다 얘야.

“전 여기 4층 사는 사람인데요. 그런데 5층 청년 친구들 맞습니까?“

“그건 왜 물어?”

“얼마 전에 돈 빌려 줬는데 며칠째 집에도 안 들어와서 좀 걱정이 되더군요.
큰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빌려준 사람 마음이 그게 아니죠.“

“뭐야, 아까 영감탱이는 이사했다던데?”

“예에? 이사를 했다고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능청을 떨었다. 마치 나는 몰랐다는 액션을 취하니 어린애들이 자기들끼리 눈치를 본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에 조금씩 화가 나지만 얼굴에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연락이 안 될까요? 사실 그렇게 작은 돈은 아니랍니다.
새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월급 받을 때까지 방세 좀 빌려달라기에 빌려 준건데...“

아아 이런 풋내기들한테까지 비굴해져야 하나. 억지로 초조한 표정을 짓자니 얼굴 근육이 당긴다. 면상에 경련이 날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노란 머리를 한 어린애가 침을 찍 뱉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그 새끼 지금쯤 우리 아지트에 있을 걸.
어디로 도망갈지 모르는 새끼라 집 근처에서 대기하라고 선배가 그랬거든.”

“아니? 그 청년이 무슨 말썽이라도 부린 겁니까?”

“아, 그 새끼가 겁도 없이 우리 선배들한테 개겼다잖아.
한번 손봐준다 봐준다 하다가 언제부터더라? 암튼 선배들이 끝장 본다면서 쫓아 다녔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지금쯤 박 터지게 깨졌을 걸?“

노란머리 어린애는 낄낄대며 말했지만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내 반응이 상당히 즐거웠던 모양인지 옆에 있는 레게머리 꼬마는 껌을 씹으며 나를 향해 씨익 쪼갰다. 노란머리 보다 한참이나 질이 떨어지는 어린애였다. 두 애송이들은 안색이 질린 내가 만만하게 보였는지 겁을 주려는 듯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우리선배님들이 어느 조직하고 연줄이 닿아 있어서 말이야. 뭐 아르바이트? 지랄하네. 이 구역이 다 그 조직 형님들 구역인데 지가 토껴봐야 벼룩이지.”

“그 새끼 쌩까고 날라버리려던 모양인데 아저씨 돈 떼먹힌 거야. 근데 아저씨 표정 죽인다? 신경 꺼. 우린 남치현 그 새끼가 집으로 도망 오나 안 오나 하고 감시하는 중이니까. 아저씨한테 나쁠 일은 없을 거야. ”

새끼 깡패 두 마리가 거드름을 피우든 말든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치현이 어딘가에서 죽도록 얻어맞고 있을 거라는 애송이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조직? 구역? 그런 얘기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권이도로부터 치현이 아르바이트에서 잘린 이유를 들었을 뿐.

아니야. 아주 몰랐다곤 할 수 없다.
나한테 노땅이라고 대못을 박은 날도 치현의 얼굴엔 얻어맞은 흉터가 남아 있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치현과 그 깡패들도 상당히 질긴 사이가 아닐 수 없다. 뭐야, 나와 치현이 만나기 전부터 치현은 그런 자식들한테 찍혀 있었다는 소리가 되잖아. 그것도 게이들간의 지저분한 플레이가 연관된 관계라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레게 머리의 애송이가 키들키들 댄다. 생각 같아선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리며 치현이 어디에 숨겨놨냐고 난리 치고 싶지만“이 아저씨 표정 보니까 돈이 급한 것 같은데 우리가 데려다 줄까?”라는 말에 추태를 부리는 것은 상상에만 그치도록 했다.

“우리라고 여기서 죽치고 있으란 법 있냐?
사람이 돈을 꿨으면 갚아야지 안 그래?”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비굴한 얼굴에 보인 화색이 우스웠는지 어린애들이 나를 잔뜩 비웃으며 위 아래로 흘겨본다.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치현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기에 꾹 참고 그 뒤를 따랐다. 심사가 뒤틀리지만 얌전히 치현이 있는 곳까지 바래다준다면 가다가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으라고 용돈정도는 쥐어 줄 의향이 있었다.

“근데 아저씨 그거 알아?”

“예에?”

노란머리가 의미심장한 눈을 빛내며 음흉하게 웃는다. 옆에서 레게 머리는 “아 그거?”하며 우웩-하고 토하는 시늉을 한다.

“남치현이 그 새끼 호모야 호모.”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내 표정은 그들이 원하는 딱 이상적인 표정을 짓고 있음이 분명했다. 저렇게 재밌어하는 얼굴들이라니. 노란머리와 레게머리는 더욱 신나서 떠들어댔다.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면 화자는 즐거워지는 법이다.

“아저씨 게이바 알아 게이바? 우리 선배님들이 관리하는 업소 중에 게이바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변태 짓하는 데가 있거든. 남치현도 그 짓 하려다가 선배님들한테 찍힌 거야. 호모 짓도 모자라서 SM까지 한다던데 그런 새끼는 좆을 잘라버려야 돼.”  

“믿을 수 없습니다.”

“아 씨발, 내가 직접 들은 얘기라구! 그 새끼가 지발로 겨 들어왔다니까! 근데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려는데 이 새끼가 도망갔다잖아. 그 후로 벼르고 있다던데...남치현이 그런 쪽 호모들한테 인기가 꽤 있나봐? 왜 다들 그 새끼 못 잡아서 안달하는지 모르겠어.”

“야 근데 솔직히 남자새끼 묶어봐야 꼴리냐? 난 선배님들 좀 이해가 안돼.
명수 선배들은 진짜 게이 같던데...”

“아 몰라. 요즘은 개나 소나 다 호모잖아.”

어느새 자기들끼리 사담처럼 되어버린 대화를 들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당신들도 호모입니까?”라고.  

“뭐?!! 이 아저씨가 누구보고 호모래 죽고 싶어?!!!”

게이형님들 밑에서 구르는 주제에 이렇게 격렬한 거부반응이라니.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미안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애송이들은 이어 자기네 파가 얼마나 대단한지 일장연설을 했는데 겁을 줘서 호모 건을 억지로 무마하려는 모양이다. 육두문자가 남발하는 그들의 허풍을 대충 추리고 가려서 들으니 덕분에 대충 상황파악이 됐다.

이 녀석들이 속한 깡패집단은 그냥 시정잡배들이구나.

조직폭력배가 뒤에 있다는 둥 허풍을 떨고 있지만 치현이 하나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 집단이다.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고 자기네 패거리를 불러 혼쭐을 내주려다 실패하니까 쪽팔린 게지. 어쩌다 조직인지 뭔지에 연줄이 있어서 손을 빌린 모양인데...

내가 겪은 조직폭력배들은 호모를 싫어했다.
그들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 애송이들이 연줄로 잡고 있는 조직이 게이에게 호의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말하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연줄이란 것도 꽤나 얄팍한 줄인가 본데 솔직히 치현이 하나 잡는데 조직이란 놈들이 손을 써준다는 것도 의문이다. 단순한 허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로 보였다.

짐작컨대 어쩌면 치현은 아직 도망 중일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보였다. 어쨌거나 이 두 사람이 치현의 집 앞을 지킨다는 것은 언제 도망 올지 모르는 그 아이를 잡아 가기 위한 일, 벌써 잡혔다면 이들이 이러고 죽칠 이유도 없겠지.(원래는 몰래 숨어서 감시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애들은 미처 거기까진 생각 못했나 보다)
그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두 애송이들은 ‘지금쯤 치현은 잡혀서 묵사발이 되어 있을 거다. 돈 못 받아도 우리책임 아니다.‘ 라고 내게 힘을 주어 강조하는 것이다. 그건 마치 협박처럼 들렸지만 하도 가소로워서 속으로만 웃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양복 아래는 땀으로 눅눅해졌다.
이제 더 이상 애송이들로부터 들을 만한 얘기가 나오지 않자 나는 초조해졌고 이렇게 느긋하게 꼬맹이들 뒤나 따라가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차에 올라타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으로 몸을 식히고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을 텐데.....골목의 끄트머리에서 은색의 승용차를 본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아, 내 차!
그래, 이 싹수 노란 어린애들을 태워주는 건 썩 내키지 않지만 차로 가는 편이 훨씬 더 빠르고 잘하면 치현이 잡히기 전에 먼저 손을 써둘 수 있을지도......

“헤에~ 이런 동네에 웬 렉서스냐. 누군지 몰라도 주제 모르고 꼴갑 떠네.”

  레게머리가 내 애마를 발로 차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순간적으로 혈압이 올라 버럭 화를 낼 뻔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                *                *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으며 도로를 달렸다.
어린애들의 두서없는 설명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간이 없으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소는 헤븐과 폴리곤 등 유흥가들이 모여 있는 지역의 옆동네로 아직 임대가 덜 된 오피스텔 301호. 왠지 기분 나쁜 호수다.





삼 십분 전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요 꼬맹이들, 치현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준다고 할 때부터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는 폼이 심상치 않더라니, 감히 나를 때려눕혀서 지갑을 훔쳐가려 했겠다?

점점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는 어린애들의 행동에 의문을 느낄 때쯤 석양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뒤에서 나를 덮치려는 인영을 친절하게도 크게 확대해주었다. 그 다음은 엎어치기 한판.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건 약간 버겁지만 나보다 한 뼘이나 작은 녀석들이고 아직 어린애들이라 그런지 한 놈만 잡고 팼더니 금방 기가 죽었다.
이러니 너희들이 겨우 치현이네 집 앞이나 지키는 거다 아가들아.

얼굴이 퉁퉁 부은 노란머리를 붙잡고 한참 다그쳤다.
남치현을 붙잡아서 어디로 데려갈 건가, 몇 명이 움직이고 있나...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화를 내며 물었지만 노란머리도 레게머리도 어지간해선 입을 열지 않고 오히려 내게 빈틈이 생기는 순간 치고 달아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 안하면 너네가 자리 이탈했다는 거 너네 선배들한테 일러버린다.

-구라까지 마! 선배들을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

양팔이 등 뒤로 비틀려 있어 찍소리도 못하는 노란머리 대신 멀찍이 서서 주춤거리는 레게머리가 소리를 질렀다.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며 경련이 인다.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이 자식들이 누구보고 아저씨라고?

-나도 호모거든. 호모세계는 좁기 때문에 끼리끼리 잘 알아.
명수는 요즘 헤븐에서 재미 좋은가 보지?

그 후,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버린 레게머리와 퉁퉁 부은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노란머리에게서 이런저런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명수가 누군지 알게 뭐냐마는 효과는 좋았다. 어쩌면 내가 헤븐을 알고 있다는 것에 더 놀랐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녀석들의 핸드폰 밧데리를 압수하고 지갑속의 돈이란 돈은 죄다 뺏은 뒤 쫒아냈다. 행여 맘이 바뀌어서 명순지 뭔지하는 녀석들에게 전화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분명 내가 아는 조직 폭력배들은 호모를 싫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그들도 이익만 생기면 게이포르노든 변태비디오든 상관 않고 찍고 팔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아무리 그 게이똘마니들이 허접한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돈이 된다고 생각하면 조직 단위로 움직이는 거, 가능할지도 모른다.

-벼, 변태 SM비디오 찍어서 일본인가 미국으로 돌린다고 했어. 그거 수입 졸라 짭짤하다며...

노란머리는 더듬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가슴 한쪽이 싸늘하게 저렸다. 이제껏 느긋하게 여유나 부리던 자신이 바보 같이 여겨졌다.

도대체 이 꼬마는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지.

운전을 하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놈들 손은 빌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 사는 건 모르는 일이라 연락처 정도는 챙겨뒀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전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연락하면 돈도 많이 깨지고 운 나쁘면 내 정보도 세고 더 운이 나쁘면......
제기랄 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업체명 때문에 종종 택배회사로 오해를 받는‘GOGO 익스프레스’는 사채업에서 사업영역을 확장한 G캐피탈의 또 다른 상호명이다. 아직도 옛날 번호가 바뀌지 않는 것에 안도랄지, 불안감이랄지 모를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손님인척 전화를 걸었다. 공중전화로 걸어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 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다.

-안녕하십니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GOGO 익스프레스입니다.   

자동 녹음된 인사메시지를 들으며 아연해 하는 것도 잠시, 상담원 연결의 9번을 누르고 기다렸다. 달칵 소리가 들리면서 젊은 아가씨가 전화를 받는다. 이번에도 허를 찔린 나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라 핸즈프리를 꽂은 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고객님, 전화로 말씀하시기 어려운 일이라면 저희 회사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상담을 받아보시는 방법은 어떠십니까?

요즘은 깡패들도 홈페이지를 만드는구나.

“아니, 저기 급한 일이라서 그런데요. 혹시 거기 안재현씨라고 계십니까?”

-안재현 주임님 말씀이십니까?

아가씨는 상냥한 목소리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말하면서 내선을 돌리는 듯했다. 기다려 달라는 안내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운전에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게 노력하면서 목적지인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퇴근시간대가 약간 지난 유흥가의 도로는 복잡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긴 하지만 곧 어두워질 시간이다.

-김서경씨 되십니까?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몇 년 만에 듣는 과거 직장동료의 목소리에 들키지 않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저쪽 전화기에 당연히 발신자 표시가 되어 있겠지만 핸드폰 번호 바뀐 지가 언젠데 어떻게 내 번호를 알고 있지?

-놀랄 것 없어요. 형님이 우리 회사 그만둔 뒤로 신상정보는 6개월에 한번씩 갱신하고 있으니까.

으악! 이래서 조폭 따위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게 싫었다고! 어쨌든 개인 정보 유출에 대해 분노하는 것보다 지금은 다른 문제가 더 급하다. 안재현은 나를 싫어 하지만 G캐피탈의 똘마니들 중에선 그래도 제일 안면 있고 상대하기 편한 녀석이었다. 일단 간략하고 다급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의뢰를 신청했다. 녀석은 대뜸 전화해서 애들 빌려달라는 내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더니 콧방귀를 낀다. 아, 이정도 반응은 예상했다.

-형님, 우리가 깡패로 보입니까?

“다를 건 또 뭐냐?”

-아 진짜, 구역싸움 같은 거 안한지 오래 됐다구요.
근데 피라미, 아니, 피라미 새끼도 못돼는 얼라들 잡으려고 애들 풀라고요?

“내가 좀 급하다. 후하게 쳐 줄 테니 어찌 안 되겠냐.

-거 월급쟁이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그러십니까? 그냥 속편하게 경찰에 신고해요.

너, 너 명색이 조폭이 할말이냐 그게.
경찰에 신고해서 될 일 같으면 내가 뭣하러 아쉬운 소리까지 하면서 이런 전화를 걸었는데. 치정(?)과 변태행각이 조직폭력배와 얽힌 지저분한 일에 아무리 피해자라 할지라도 경찰의 눈총을 안 살 수 있을까? 3류 신문 가십란에 「불법 게이변태 포르노를 찍으려던 일당 검거. 피해자는 같은 게이바에 다니던 김철수 군(가명 20세) 」 따위의 기사가 나는 것은 절대 사절이란 말이다.

일의 특성상 해결되어도 말썽의 소지가 다분한 경찰에는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경찰이 개입한다고 해서 그놈들이 앞으로도 치현을 안 건드린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조서를 쓰는 과정에서 치현이 부모님도 아시게 될지도 모르는데 가뜩이나 가족의 의가 상해 혼자 사는 애를 나락으로 등 떠밀란 말이냐.

“부탁한다. 지금 당장 필요해. 의뢰비는 아쉽지 않게 줄게.
거창하게 구역싸움 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죄 없는 사람을 잡아다가 구타하고 변태 비디오 찍는 걸 좀 막고 앞으로 그런 일 없게 잘 좀 타일러 달라는 것뿐이지.“

이제 곧 노란머리와 레게머리가 말한 오피스텔이 있다는 동네에 도착하게 된다. 제발 아직 치현이 안 잡혀 있기를. 나는 안달하면서 재현에게 부탁했다.

-서경 형님. 그 위기에 빠진 청년이란 건 또 이번에 사귄 애 입니까?

나는 말문이 막혔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아무튼 눈치는 빠른 놈이다. 하긴, 나랑 연결 되는 남자는 다 연애관계에 얽혔다고 생각하는 녀석이니까.

-진형 형님이 아시면 고달파지는 것은 제 쪽이라구요.

“그러니까 진형이 모르게 좀 처리해주라. 네 선에서 끝내주면 안되겠냐.
의뢰비는 서운하지 않게 해주마.“

끄응-하고 앓는 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린다.
진형이 얘기만 나오면 골머리를 앓으며 질색을 하는 게 안재현이다. 내가 조폭들은 게이를 싫어한다는 선입관을 갖게 된 건 저 안재현 덕분이지만 이런 부탁할 수 있는 것도 안재현 뿐이다.

“휴...할 수 없구나. 그럼 나도 내키지는 않지만 진형이 한테......”

-아 됐습니다. 됐어요! 우리 애들 아닌 척 하면서 몇 명 풀 테니 형님은 그냥 구석에서 구경이나 하다가 백마탄 기사 흉내나 내요.

불만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로 승낙한다. 속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곧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의뢰비는 제시하는 녀석한테는 질려버렸다. 여전히 계산은 치밀한 놈이다. 바가지를 씌우고서도‘아는 사이니까 선불금은 안받고 해주는 겁니다. 나중에 떼어먹으면 국물도 없어요.’하고 으름장까지 놓는 걸 보니 혹시 처음부터 이럴 속셈으로 튕겼던 건 아닌가 의심도 들었다.

진형이는 4년 전 사귀었던 녀석으로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린 애다.
내가 피 보는 섹스를 싫어하고 바텀을 잘 하지 않게 된 주 원흉이랄까. 처음에 클럽에서 만났을 땐 깡팬 줄도 모르고 사귀게 된 케이스인데, 어쩐지 그때 주위에서 다 말리던 걸 들었어야 했다. 젊은 혈기 때문에 하드하게 노는 스타일인 줄 알았더니 웬걸. 자기 눈 돌아가면 배려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상깡패가 아니던가. 게다가 남자경험은 내가 처음. 처음인 주제에 자기가 리드해야 직성이 풀리는 오만함. 그래도 무뚝뚝한 성격으로 나한테 바치는 순정이 귀여워서 한동안 어울려 주고 억지로 G캐피탈에 입사시킨 것도 참고 봐줬지만 딱 1년만 일하고 그만 둬 버렸다. 그 뒤 헤어지는 과정은 또 얼마나 시끄러웠던가. 안재현이 호모에 질색하는 심정도 이해는 간다.   

아무튼 안 좋게 헤어진 만큼 진형이한테 걸려봐야 좋을 것 없다. 나는 안재현을 믿기로 하고 먼저 노란머리, 레게머리 어린애들이 말한 오피스텔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차는 조금 떨어진 블럭에 주차해두고 팔자에도 없는 탐정 흉내를 냈다.





건물밖에는 젊은 애들 서너 명이 담배를 피우며 지키고 있었다.
혹시 벌써 치현이 잡혀있으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지만 아직 재현이가 보낸 애들이 습격해올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유흥가이지만 골목 안쪽에 있어 커피숍이래야 동네 다방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동네다. 나는 치현이가 있을지도 모를 오피스텔의 맞은편 골목에 숨어 몰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작은 트럭한대가 오피스텔 앞으로 도착했다. 트럭에서 촬영장비로 보이는 것들을 끌어낸 건장한 남자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오싹했다. 역시 치현이는 벌써 잡혀 있는 건가! 재현이가 보낸 애들이 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그때까지 늦지 않을 수 있을지 초조해졌다.

그렇게 골목의 쓰레기 냄새를 맡으며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촬영장비를 옮기는 것에 시선이 쏠려 주변에 누가 가까이 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말이다.

“당신, 김서경?”

뭐?
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뒤통수로 둔탁한 충격을 느끼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정신이 든 것은 눈보다 귀가 먼저 반응했을 때였다.
누군가가 맞고 있었고 아주 익숙한 이름이 귀에 들려왔기 때문에...어쩌면 이름에 먼저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내 이름은 아니지만 아주 익숙한 이름이었다.

“남치현 이 독한 새끼, 얌전히 안 굴면 저기 아저씨들까지 굴려버리는 수가 있어.”  

“그런데 이 아저씨들은 뭐냐? 둘 다 이 새끼랑 사귀던 사이라며?
어이 남치현, 너 인기 많아 좋겠다?“

“야, 야, 얼굴은 때리지 마. 하드한 컨셉도 좋지만 스너프 찍을 거 아니면 너무 기스 나는 것도 고객들이 안 좋아해.”
   
“이거 안 놔-!!!”

흐릿한 시야를 바로하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골이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웠다. 어딘가 모르게 몸이 불편했다. 아직도 멍멍한 머리를 주무르고 싶었지만 양 손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옆에서 한숨소리가 들린다. 누구야, 지금 한숨쉬고 싶은 사람은 나라고.
   
“왜 당신까지 여기에 있는 겁니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내 옆에서 사이좋게 묶여 나란히 앉아 있는 권이도를 보고 경악에 치를 떨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어 눈에 들어온 살벌한 풍경에 입도 벙긋 못했다.

어둡고 음침한 오피스텔엔 아무런 칸막이도 없이 그저 휑하게 뚫려 있었다.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는데 아직 내부수리 중이던 모양인지 건축자재가 굴러다녔고 낡은 소파나 깨진 텔레비전 등 버려진 가구들도 보였다. 그리고 한쪽에 덩그마니 놓인 대형 침대 주변에는 어설프나마 촬영장비가 세팅 되어 있었고 침대 위에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치현이가 울긋불긋한 멍을 달고 양 손목과 발목이 묶여 뒹굴고 있었다.

“치-!”

이름을 부르려다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치현의 눈과 마주쳤다. 옆에서 권이도가 눈치를 주며 말린다.“조용히 있어요. 괜히 저들을 자극하지 맙시다.”라고 소곤거린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여기에? 혹시, 혹시, 당신 치현이 구하려고 사투라도 벌이다가 같이 끌려온 거야? 조금은 찡-한 마음이 들어 머리를 돌려 권이도를 바라 봤다. 그러나 그의 매끈한 얼굴과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깨끗한 양복에서 사투는커녕 반항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음...이 사람도 나처럼 뒤통수를 한방에 맞았다던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목소리를 낮춰 소곤댔다.
치현이를 둘러싼 몇몇의 무리들 중 일부는 굉장히 신이 나서 치현을 갈구고 있었고 나머지 무리는 카메라 세팅에 정신없다. 어림잡아 열 댓 명. 안재현에게 지불할 금액이 아까워지는 인원이지만 밧줄에 묶인 30대 두 명이 상대하기엔 버거운 숫자다.

“보시다시피 입니다.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치현이네 집 앞을 어떤 어린애들이 지키고 있었어요.
그 애들을 닦달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러는 당신은?”

“저기 있는 아이들이 제게 전화를 했더군요. 치현이를 붙잡아 두었다면서 재밌는 거 보여줄 테니 올 생각 없나구요. 제 번호도 치현의 핸드폰을 뒤져 알아낸 모양입니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권이도를 바라보았다.
그 전화 한통에 바로 달려왔단 말야? 홀홀 단신으로?

“미쳤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들어와요!”

“그러는 당신도 혼자 어슬렁거리다가 잡혔잖습니까.”

“거기 뭘 속닥속닥 대는 거야?”

한 뚱보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한참 치현을 갈구던 무리 중 키가 크고 비쩍 마른 한명이 나를 보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치현이 나를 보며 또 노려본다. 화내고 있지만 걱정이 물씬물씬 묻어나는 눈을 보니 비록 붙잡히긴 했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무슨 헛생각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지나가는 사람을 납치해 놓고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당당하게 대꾸하자 옆에 있던 뚱보가 인상을 찌푸린다. “야 명수! 너 사람 제대로 데려온 거 맞아?”하고 신경질을 내며 소리 지르자 명수라고 불린 멀대같은 녀석이 건들거리며 이쪽으로 온다.

“맞아요 맞아. 마침 요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더라고.
촬영장비가지고 들어가는 거 보니까 연예인이라도 나오는 줄 알았던 모양이야? 아주 입 헤-벌리고 구경하던데?“

얼굴만 보고 그럭저럭 중간치의 점수를 메겨주려다 말투와 건들거리는 태도 때문에 호감도가 마이너스로 급하락했다. 방금 전까지 치현을 갈구고 있던 것도 마이너스. 버릇없던 노란머리 레게머리의 선배라는 것에서 또 추가 마이너스다.

하지만 바보라서 다행이다. 내가 엿보고 있던 걸 완전히 곡해했구나.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작자가 남치현의 깔이라는 거지 안 그래?”

“누가 그런 노땅이랑 사귄데? 나도 눈 있어 새끼야!”
  
저만치 침대위에서 아등바등 거리는 치현이 다시금 가슴에 못을 박는다.
아 그나저나 이제 상황판단이 좀 되네. 치현아 너 이것 때문에 나한테 그렇게 굴었던 거야? 이런 일 때문에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내린 결론이 그렇게 어설픈 이별선언이었어?

“야, 야, 남치현. 너랑 이 아저씨랑 레스토랑 가고 드라이브 가고 그러는 걸 우리 애들이 다 봤는데 시치미 뗄 거냐?
지난번엔 너 찾는다고 헤븐을 들쑤셔 놨었다고 이 아저씨가.“

“씹새야, 물주랑 애인도 구별 못하냐? 세대차이 나서 맞춰주기 얼마나 힘든데?
하긴 넌 그렇게 생겼으니 연상 하나 잡은 적 없지.”

으...일부러 저런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가슴이 쑤시는구나.

“이 새끼가 진짜-!”

  치현의 도발에 명수란 아이가 주먹을 배에 찔러 넣는다. 치현이 기침을 하며 거품 섞인 침을 흘리는 걸 보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한 순간 옆에 있던 뚱보가 어깨를 지그시 내리누른다.

“나쁘게 생각마쇼 형씨. 버릇없는 애새끼 잘못 가르친 어른 잘못이야 안 그래?”

씨익 웃는 뚱보의 얼굴은 어림잡아 서른. 외모로 보나 심상찮은 목주변의 흉터로 보나 명수라는 아이의 패거리로 보긴 힘들다. 그러고 보면 열이 잔뜩 올라 시근덕거리는 것은 고작 대여섯 명 정도로 다들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거나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뿐이다. 그 주변에서 느긋하게 카메라와 조명을 손질하며 이 우스꽝스러운 무대를 관조하는 것은 적어도 내 또래, 혹은 나이와 상관없이 세월의 잔뼈가 묻어나는 얼굴들. 아마도 진짜 폭력배로 추정되는 인물들이다.

“호오~ 같이 레스토랑에도 가고 드라이브도 했다고요...재미 좋았겠군요.”

게다가 뒤에서 이죽대는 권이도.
당신 지금 나랑 똑같은 입장이라는 거 알아? 지금 그런 걸로 신경 쓸 때냐고!

“이야 게이들 치정 싸움도 재밌네. 카메라 준비 됐어? 소품은 ok?"

“뭐 완벽히 준비해 놓고 할 거 있나 대충 대충하자고.
근데 저렇게 팔딱대서야 원, 우선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시작할까?“

“근데 여기 형씨들은 왜 끌고 왔대?”

“거 그런 거 있잖아. 애인들 잡아와서 눈앞에서 강간하는 거.
어디서 본건 있어서 흉내 내고 싶은가 보지. 나이 든 새끼들은 뒤처리가 좀 귀찮긴 한데...호모새끼니까 회사에 확 불어버린다고 겁주면 알아서 길 테고......
근데 놈들 신분 확인은 했어?“

“허여멀건한 형씨는 무슨 회사 대리인 모양인데?
근데 저 안경씨는 지갑에 카드도 신분증도 없고 핸드폰도 없어.   
일단 잡아두긴 했는데....저 새끼 진짜 명수 전화 한 통화에 혼자 온 거 맞아?”

“경찰에 연락했을 가능성은?”

“없어없어. 새끼들 옷 입은 거 봐라.
돈 처발라 입고 다니는 아저씨들이 게이포르노비디오사건에 연루되고 싶겠냐?”

저들끼리 낄낄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폭력배 무리의 시선이 일시에 우리들에게 떨어졌다. 검은 쫄티에 머리를 짧게 친 거구가 다가와 권이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확실히 명수들과는 다른 위압감이 있다. 나는 뚱보가 쥔 어깨가 아프다는 것도 잊은 채 이번만은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형씨는 무슨 배짱으로 혼자 왔어?”

“옛 애인이 끌려갔단 소리를 듣고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 명수가 그러는데 너 게이SM쪽에선 꽤 유명하다며?”

“과찬의 말씀을. 그저 아마츄어 수준을 조금 벗어난 것뿐이죠.
프로 앞에서 어찌 잘난 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검은 쫄티는 재밌는지 씨익 쪼갰다. 권이도도 같이 씨익 쪼갰다.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따귀를 올려친 남자의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는 권이도가 쓰고 있던 안경이 깨지는 소리는 아닐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열음을 내었다. 은테 안경이 날아가 벽에 부딪혀 떨어진다. 권이도를 몸 전체가 기우뚱할 정도로 중심을 잃도록 후려친 남자는 권이도의 고개가 돌아오자 다시 씨익 쪼갰다.

“역시 나이 든 것들은 혓바닥이 매끌매끌해서 밥맛이란 말이야.”

입술이 터진 얼굴로 권이도가 싱긋 웃었다.“아프군요.” 나는 또 얻어터지나 조마조마했지만 검은 쫄티는 콧방귀를 뀌더니 권이도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를 보더니 권이도와 나를 번갈아 가며 훑어본다. 기분 나쁜 눈초리는 우위에 있는 자의 여유로 가득했다.

“흐음~ 이 형씨들도 찍으면 꽤 괜찮게 나오겠는데? 어이 규태야 2라운드는 이 아저씨들로 어떠냐? 좀 하드한 SM으로다가.
요즘 나이든 녀석치고 제대로 된 모델이 없는데 마침 잘 됐다.”

저쪽에서 촬영맨들 중 하나가 OK를 보낸다. OK는 누구 맘대로 OK야? 나를 찍으려면 계약서와 계약금을 보따리로 싸 들고 와서 사흘 밤낮을 읍소하란 말이다!

“놓으라니까 이 개자식들아--!!!!
누가 그런 퀴퀴한 아저씨 냄새나는 비디오를 보고 싶어 하냐?”

충격을 받은 치현이 날뛰었다. 나를 위한 말이라는 건 아는데 가슴에 조금 스크래치가....

“관둬. 이런 아저씨들이 고소다 뭐다하면 귀찮아져. 우리를 잡지도 못하겠지만.
어쨌든 직접적으로 터치 안하면 지들도 굳이 아득바득 대들겠어?“

깡패들 중 하나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참 생각한번 잘했다고 말하고 싶지만......그럼 치현이는? 치현이는 후환이 안 두렵냐? 부모랑 연을 끊고 혼자 나와 사니까, 사회적 기반도 없는 아이니까, 이렇게 멋대로 취급해도 된다는 거야? 겁만 줘서 쫓아낸다고? 나를? 권이도를?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놈들이 치현의 몸을 잡아 누르고 입에 테이프를 붙여 버렸다. 치현의 상반신을 끌어 올리다가 묶여 있는 팔에 걸리니까 가위로 잘라낸다. 나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참지 못하고 일어나려 했지만 어깨를 잡아 누르는 뚱보의 힘이 막강하다.

“천천히 구경이나 하라고.”

손아귀의 관절을 뚜두둑 꺾으며 뚱보가 말했다. 치현의 몸을 누르는 손이 늘어났고 침대의 양쪽 끝에 묶인 손과 다리 탓에 몸통을 뒤틀며 버둥거리는 것이 겨우였다. 위험하다. 왜 아직 재현이가 보낸 애들이 안 오는 걸까. 화가 나는데, 내가 시근덕대는 거친 숨소리에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열이 받는데, 이렇게 무력하기만 하다니!

권이도와 나는 양 손목이 등 뒤로 돌려져 수도관에 묶여 있지만 다리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이 자유로운 다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급한 마음에 권이도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에 달리 의지되는 사람은 아니지만 무심코 그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저런 눈으로 사람을 노려보는 권이도는 본 적이 없다.

“뭘 그렇게 뜨겁게 바라보는 겁니까. 이렇게 묶인 당신도 무척 섹시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닌 만큼 즐기지 못해서 유감이군요.”

무섭도록 쏘아보는 눈매라고 생각한 순간 버터 바른 음성이 부어터진 입술을 비집고 느끼하게 흘러내렸다. 허세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여유작작해서 진심으로 화가 난 눈을 하고 있지만 않았으면 난 권이도가 저들과 짜고 일부러 이런 연출을 한 건 아닐까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치현이 앞에서 참 얼굴을 들지 못할 일이다.
어른이랍시고 돈은 뿌려댔지만 이런 순간에는 도움 안되는 양복쟁이 아저씨 두 명. 우스꽝스럽게도 도와주기는커녕 같이 묶여버리다니, 얼마나 실망스러운 모습인가. 권이도도 나도 자존심이 박살나는 일이다.

아무튼 믿을 건 재현이 밖에 없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돈으로 흥정할까? 차라리 나를 먼저 찍으라고 할까? 치현이 다치는 것보다 그 편이 시간 벌기엔 나을지도 모른다.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청바지 하나만 아슬아슬하게 걸친 치현이를 폭력배들 중 한명이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만지지마! 어디에 손 넣는 거야! 이것들아 죽고 싶냐아아아!!!!   

“그만둬-!!”

“그만 둡시다!”

나와 권이도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러나 녀석들은 무시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귀나 후비고 있다. 빌어먹을, 곱슬머리의 남자가 치현의 상체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대고 소곤거린다. 치현이 몸서리를 치는 게 이만한 거리에서도 보일정도다.

“경찰이 오면 단순한 사건으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감금, 폭행, 납치, 공갈협박 등 죄목이 수도 없는데 목록이 더 추가 되고 싶습니까?“

“이봐들 돈이 필요해? 필요하면 줄 테니까 멀쩡한 애하나 잡지 말고 우리 좋게 해결합시다. 이러면 서로 안 좋은 일이 생길거야!”

녀석들이 낄낄거린다.“저 녀석들 여유로운척하더니 이제와 똥줄타나보지? 호모들의 눈물겨운 사랑이야 안 그래?”“내비 둬, 조금만 겁주면 알아서 기겠지.”“나이 많은 것들이 원래 자존심만 세잖아.”
이것들이, 사람 말이 개소리로 들리냐?!

“이 자식들아 차라리 나를 먼저 찍어!!!”

말하고 나니 얼굴이 따갑도록 이쪽에 시선이 쏠린다. 특히 권이도는 목에서 뚜둑 소리가 날정도로 얼굴을 홱 돌리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멀리서 치현이 고개를 바짝 쳐들고 나를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자 치현은 격렬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형 엉뚱한 짓 하지 마!’라는 텔레파시.....일리는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폭력배 몇몇이 내게 다가왔고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명수네 패거리들은 아예 콧김까지 뿜어가며 흥분하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꼬맹이들, 앞으로 폴리곤에는 발도 못 붙여 놓게 해주마.

“저 형씨 저거 자기 입으로 해달라고 하는 거 맞지? 이야~ 벌써부터 몸이 그렇게 달아서 어쩌나? 진짜 찍어버릴까? 고소니 뭐니,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 괜찮지 않아? 저렇게 애원하는데 말야~”

카매라맨들도 뚱보도 쫄티도, 헤븐의 애송이들까지도 나를 비웃었다.
나는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어디선가 목구멍으로부터 울리는 괴로운 신음성이 터져 나온다. 치현이다. 곱슬머리의 남자는 청바지만 아슬아슬하게 걸친 게 마음에 드는지 바지도 다 벗기지 않고 치현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치현의 몸을 더듬거리던 곱슬머리는 내게 보이도록 일부러 혀를 길게 내밀어 치현의 살덩어리를 톡톡 건드린다. 치현이 머리를 침대에 부딪히며 자해를 했다. 그래봐야 푹신한 매트리스라 위협의 효과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고 싶은 내 몸을 등 뒤로 결박당해 수도관에 매어진 손목이 가로 막았다.

“형씨 너무 그렇게 안달하지 마. 정 원한다면 우선 팔딱팔딱 튀어 오르는 생선 좀 재어 논 다음에 느긋하게 홍콩 보내줄 테니까.“
   
빌어먹을 깡패새끼들, 일부러 우리들의 반응을 즐기려고 느긋하게 놀고 있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오피스텔 안에 울려 퍼진다. 깡패 두어 명이 다가와 내 몸을 정육점 고기 감상하듯 툭툭 건드리며 아래위로 훑어본다. “쓸만하겠어?”“일단 얼굴은 괜찮은데 몸이 중요하지. 나이 들면 배나오잖아.”“이 정도 얼굴이니 똥배정돈 봐 주자구.”그런 놈들의 틈 사이로 검은 쫄티가 다가왔다. 그의 목적은 권이도인 듯했다. 어딘지 모르게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내리깔아보던 그는 시선을 돌려 권이도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저 안경잽이의 말은 그냥 넘겨들을 수 없군.
왜, 경찰한테 신고라도 하게?”

권이도는 고개를 숙여서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이미 신고접수는 됐습니다.
제가 1시간 안으로 연락하지 않으면 출동하라고 해두었거든요.”

“뻥 치네. 아까 명수가 전화했을 때 허튼 수작부리면 직장에 소문 다 퍼트린다고 했잖아? 머리 좀 쓴다고 일부러 신분증 안 가져온 모양인데, 요즘 핸드폰 번호 하나면 모르는 게 없어. ”

검은 쫄티가 싱긋 웃는다. 사람이 웃으면 복이 온다지만 저 얼굴이라면 그냥 인상 쓸 것을 권유하겠다. 고개가 서서히 들리면서 역시 싱긋 웃는 권이도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 별로 상관없습니다. 당장 잘려도 생계가 막막한 것도 아니니까요”

검은 쫄티는 잠시 동안 같이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표정이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씨발, 지랄하고 있네. 야 카메라 이쪽으로 돌려!”

좀 전까지 여유를 두고 비디오를 찍던 일행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갑자기 밖으로 몇 명이 뛰어 나가더니 고래고래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안으로 험악한 인상의 무리가 몇 명 더 들어왔다. 명수란 아이들은 돌변한 분위기에 겁을 먹어 당황했다. 장비가 위치를 바꾸고 나와 권이도가 있는 곳으로 조명이 쏟아진다. 욕설이 들린다.“야 이 새끼야! 뭐? 경찰에 신고할 리는 절대 없어? 씹탱아 사람을 잡아 오려면 확실하게 해야지!”명수와 그 일행의 머리 위로 주먹이 난무했다.   

“카메라 돌리고 이 새끼부터 조져! 돈이 그렇게 처 많다 이거지?
어디 니 가랑이 찍힌 필름 살 때도 그런 얘기 하나보자!!“

장정 서너명이 달려들어 권이도의 양복 상의을 젖히고 와이셔츠를 잡아 뜯었다. 여러 사람에게 붙들려 이리저리 휘둘리는 권이도는 반항하지 않았다. 검은 쫄티는 상대가 얌전하자 재미없다고 생각했는지 벗기다 말고 권이도와 수도관과 연결된 줄을 끊었다. 그리고 바닥에 굴리며 구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치현을 깔고 누르던 손길은 모두 이쪽에 쏠리게 되었지만 상황은 악화된 느낌이다.“이 자식들아 그만둬! 그만 두라니까!!!” 그 소란 속에서 내 고함은 아예 무시당하고 있었다. 시끄럽다고 몇 대 치는 놈들까지 있다. 묶여 있는 수도관이 흔들흔들 거린다. 권이도의 몸 위로 구둣발이 짓밟고 지나간다. 모욕을 줄 생각인지 구둣발로 유두나 사타구니를 문질러대는 놈도 있었다. 나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머릿속의 회로가 끊길 것 같다. 지금 이 새끼들이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거야-----------!!!!

-드르르르르르르

오피스텔 안이 상당히 시끄러운데도 목제 책상위에 올려져 있는 핸드폰의 진동소리는 엄청난 소음을 냈다. 녀석들이 어느새 빼앗아간 내 핸드폰이다. 옆에 지갑도 보인다. 어찌나 컸는지,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괴음이었는지 깡패들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뚱보가 욕설을 내뱉으며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왔다!!
재현이 보낸 애들이 이 근처까지 와서 나한테 연락을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굼벵이들 같으니 왜 이제야 온 거야! 제발 눈치 까고 그냥 쳐들어 와라. 사전에 나와 먼저 연락하기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의뢰자가 감감무소식이면 대충 알만한 상황 아니냐?!!

화가 난 폭력배들은 구타하는 데에 정신이 쏠려 있었다. 아니, 화가 났다기보다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사진 찍어 협박해야 하니까 얼굴 못 알아보게 조지지는 마.” 하고 누군가가 한마디 했다. 한쪽에선 서로 전화를 주고받고 하는 걸 보니 경찰의 동향을 살피는 모양이다. 경찰차는 눈에 띄니 일단 찍을 건 찍고 여차하면 튀겠다는 생각인가? 아니면 권이도의 말을 단순한 허세로 받아들이는 걸까.

권이도는 작신 두들겨 맞고 있고 치현이는 묶인 걸 풀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다행히 치현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명수라는 아이들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나? 나는 목청 터져라 고함치는 것을 관뒀다. 어차피 씨도 안 먹히는 일, 내가 안달복달하는 것을 신나하는 깡패들에게 즐거움을 더 줄뿐이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주변의 소음조차 멍멍하게 들릴 만큼 화가 끓어올랐다. 내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깡패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분노를 삭혔다. 수도관과 연결된 밧줄을 아무리 잡아 뜯어도 손목만 조여 올 뿐이었다.
이 놈들......죽었어.

“야 대충하고 이제 찍어.
경찰은 안 보이는 모양인데? 이 새끼 뻥친 거 아니야?“

“저기 형님 그런데 수상한 애들이 있는 것 같은데요.”

“무슨 애들?”

“아까 준섭이 말로는 마스크 쓴 애들이 트럭타고 이쪽으로 온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다시 전화해보니까 안받네요.”

“다른 조직 녀석들이야? 구역 협정한 게 언젠데.”

흐흐흐흐흐흐
나는 작게 웃으며 이를 갈았다.
떡이 되도록 얻어맞아 늘어진 권이도를 보면서 생각했다. 권이도씨 도움이 못 되서 미안해. 대신에 이 허접쓰레기 같은 졸개들은 오늘 무사히 집에 가지 못할 거야. 내가 재현이 한테 돈을 두 배로 줄 거거든.  





밖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욕설, 고함, 비명과 부서지는 소리. 검은 쫄티와 촬영맨들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몇몇이 구석에 굴러다니는 건축 자재를 한 손에 쥐고 상황을 살피러 문을 열었다. 순간 몽둥이가 날아와 문 앞의 장정들을 개잡듯이 두들겼다.

“너네 뭐하는 새끼들이야!!!”

당황한 폭력배들은 아무거나 집어 들고 오피스텔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남자들에게 흉기를 휘둘러댔다. 문 안으로 하얀 마스크의 무리가 수도관 봇물 터지듯 우르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내부는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고 촬영기기는 박살이 났다. 아싸, 잘 부순다. 부수는 김에 아주 자근자근 밟으려무나.

마스크들이 설쳐대는 것은 좋지만 한 가운데에 묶여 있는 치현이 걱정되었다. 자칫 잘못해서 이 무식한 놈들이 휘두르는 연장에라도 맞았다간 큰일인데.... 날아오는 카메라를 피하며, 얽히고설키는 마스크와 검은 쫄티 일당의 다리에 채여 가며, 나는 치현을 살피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빼어보았지만 사람이 하도 많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 뻗어 있는 권이도는 찢어지고 터진 몸을 일으키려고 꿈틀대고 있었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얻어맞은 얼굴은 그리 끔찍한 몰골은 아니었지만 이마가 찢어졌는지 출혈이 꽤 크다.

그때, 하얀 마스크를 쓴 장정들 틈에서 야구방망이를 든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나와 권이도는 몸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남자가 품에서 번뜩이는 칼날을 뽑아 들고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서경 형님 무사하십니까?!”

남자는 마스크를 슬쩍 내려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곤 밧줄을 끊기 시작했다. 젠장, 십년감수했네. 질기게도 묶인 밧줄이 끊어지자 그제야 피가 통하는 느낌이다. 나는 손목을 쓰다듬으면서 녀석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늦어!”

“죄송합니다. 진형 형님 모르게 애들을 모으다 보니...”

안재현은 신속한 동작으로 권이도의 밧줄도 끊어주었다. 눈짓은 ‘이 남자가 이번의 새로운 애인입니까?’라고 묻고 있었다. 나는 그 눈짓을 무시하면서 권이도를 부축했다. 권이도도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지만 역시 대답해줄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 왜 네가 직접 왔어? 애들만 보내면 되잖아?”

“애들은 형님 얼굴 모르잖습니까. 녀석들한테 전화번호만 달랑 알려주고 보내는 게 불안해서 와봤더니....역시나 군요. 그새를 못 참고 뛰어들어 이런 꼴이나 당하고......“

낸들 이렇게 될 줄 알았겠냐.
투덜댈 짬도 없이 옆에서 몽둥이가 날아든다. 재현은 다시 마스크를 쓰며 야구방망이를 휘둘러댔다. “빨리 안 나가고 뭐해요?”“저기 꼬마도 데려가야 돼!” 재현이가 핀잔을 줬지만 무시하고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치현이는 재현이 데려온 애들이 언제 풀어줬는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순간 한 남자가 치현이를 덮쳤다. 앗-소리지를 여유도 없이 남자는 치현이의 주먹을 맞고 비틀거리다가 다른 녀석들이 휘둘러대는 각목에 얻어맞아 쓰러졌다. 치현아, 그렇게 맞았는데도 아직 힘이 남아있더냐.  

“진짜, 형님 너무하십니다. 미성년자는 범죄라구요.”

그렇게 말하고 앞장을 서는 재현의 목소리에 한심하다는 뉘앙스가 잔뜩 묻어 있었다. 오냐 비웃어도 좋으니 실컷 날뛰어다오.

“괜찮습니까? 움직일 수 있겠어요?”

옆구리를 움켜쥐며 인상을 쓰는 권이도는 말도 하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보였다. 손목은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너덜너덜 헤어졌고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코끝이 찡하다. 세상에 두려울 것 없이 엘리트의 길을 걸으며 자랐을 남자가 이렇게 엉망이 되다니. 나는 부상을 입어 축 늘어진 그의 몸을 깊게 안으며 치현이 있는 곳까지 가려했지만 나보다 큰 덩치다 보니(쬐끔, 아주 쬐에끔 나보다 크다는 거다) 할 수 없이 질질 끌다시피하며 걸어야 했다. 고작 몇 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재현이 길을 뚫고 있지만 사방에서 흉기가 날아다녔고 주먹질과 발길질이 오가는 와중이라 녀석은 싸움패에 휩쓸려 가버렸다.

아니다.“호모새끼들! 다 뒈졌어!”라고 소리 지르는 걸로 보아 일부러 휩쓸려 가버린 모양이다. 재현이 알아서 날뛰고 있으니 굳이 두 배 수당 어쩌고 할 필요는 없겠군.  

촬영팀 폭력배들이 우리를 보고 덤벼들려 했지만 흰 마스크들의 방해로 제 몸 하나 건사하기가 바쁜 아수라장이다. 치현이도 주변에서 덤벼드는 폭력배들을 떨어뜨리느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떨쳐내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인가?

“치현아!?”      
  
시선이 마주친 순간 치현이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형 뒤!!”
어? 하는 순간 골골대며 내 팔에 매달려 있던 권이도가 어느새 발길질로 뒤에서 덤비는 녀석을 차 버렸다.“왼쪽에도 옵니다.”

조건반사적으로 옆에서 달려드는 그림자를 넘어뜨렸다. 이미 몸 어딘가가 터져 있는 깡패들이라 좀비를 상대하는 것 마냥 쉬웠다. 그런데 권이도는? 당신 그 몸으로 괜찮아? 화급히 뒤돌아본 곳엔 막 한 녀석을 골로 보낸 권이도가 숨을 몰아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저기........혼자 움직일 수 있었어요?”

“아쉽군요. 좀 더 서경씨 품에 매달리고 싶었는데.”

속았다! 고 생각한 것도 잠시, 코피를 질질 흘리는 녀석이 치현에게 각목을 내리쳤다. 치현의 등을 맞은 각목은 부러져 튕겨나갔고 머릿속으로 생각할 짬도 없이 나와 권이도는 코피로 범벅이 된 깡패를 내리찍고 발로 차버렸다. 어라, 이거 꽤 손발이 잘 맞는데? 뭔가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상하게 오피스텔이 북적거린다는 느낌이 들어 금방 지워졌다.

인원수가 더 늘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엔 하얀 마스크들이 유리하게 보였지만 언제 연락을 받았는지, 본격적인 깡패로 보이는 검은 양복들이 등장해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흰 마스크들을 족치고 있다는 것을. 이럴 수가, 이젠 재현이네 애들이 숫적으로 열세다.

“치현아 괜찮냐!”

“형이야말로 대체...으윽...
제기랄, 왜 둘 다 그렇게 무모한 도발을 하는 거야!”

치현이 화를 냈지만 그것에 대해 진득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감동의 상봉도 재회의 인사도 없이 대충 눈으로 상대의 몸 상태만 파악하고 문밖으로 빠져 나가기 위해 길을 뚫었다. 대체....몇 십 명의 인원들이 지지고 볶고 하는 건지, 그 넓던 오피스텔이 비좁아 보였다.

출구로 보이는 문이 두세 개 있었지만 도망치고 쫒고, 또 새로운 녀석들이 연장을 들고 꾸역꾸역 들어오는 바람에 문으로 나가기는 그른 것 같다. 창문 밖으로 도망치는 놈들도 있다. 여기 3층인데...저 놈들이 저렇게 당당하게 뛰어내리는 거보니 그리 높지 않은 모양이다. 원래 층과 층사이가 낮은 낡은 건물이니까 가스관 같은 걸 잘 타면 무사히 도망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 치더라고 두 사람은 많이 다쳤는데 어떻게?
치현이는 얌전히 뒤에서 따라왔으면 좋을 것을 바닥에 떨어진 쇠파이프를 들고 엄호를 한다. 그런데, 그 엄호가 상당히 쓸모 있다. 음, 이정도로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창을 깨서 뛰어내리자는 생각도 진지하게 고려해 볼만했다.

“저 흰 마스크들은 서경씨의 친구들입니까?”

달려드는 깡패좀비A(피투성이에 행동도 느려서 진짜 딱 좀비였다)를 넘어뜨리며 출구를 찾아 사방을 살피는 내게 권이도가 물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돈 주고 고용한 거죠.” 지나가는 깡패좀비B를 밀어뜨리며 대꾸했다. 권이도는 낮게 신음했다. 상처가 아파서 그런가... 괜찮냐며 부축하려 했는데 권이도는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다.

“곧 경찰이 올 텐데, 그래도 언질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

“예? 경찰?”

“아까 불렀다고 말했잖습니까.”

끄아아아아-!!!!
그거 허세 아니었어? 진짜 경찰을 불렀던 거야???

“아니 경찰을 왜 불렀습니까!”

썩은 생선이라도 씹은 표정을 지었더니 권이도가 뭐 잘못됐냐는 얼굴이다.
가만, 그럼 혹시 달랑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만 믿고 저 놈들이 오라는 대로 온 거였어?
  
이 사람, 은근히 무모한 거 아닌가! 첫 데이트 날 다짜고짜 묶어놓고 변태짓을 하지 않나 함부로 아웃팅을 하질 않나, 그 뿐인가 자진해서 나한테 뒤까지 내주고 출혈까지 일으켰잖아! 오늘도 그래! 물론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제일 정석이긴 하지만 말이야, 당신 한국에 온지 몇 년이나 지났으면서 우리나라 공권력이 그렇게 파악이 안 돼? 난 말이지 G캐피탈에서 별 더러운 꼴을 다 봤기 때문에 경찰은 국민의 봉, 취객들의 시다바리 정도로 밖에 안 보인다고!
평소엔 다 계산해서 행동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쉽게 울컥하는 스타일이었던 거야?!

경찰이 개입하면 단순한 「불법변태포르노비디오」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으아악! 또 재현이한테 옴팡 욕을 뒤집어 먹겠구나! 나는 흰 마스크와 검은 양복과 촬영맨들이 한데 어우러져 뒤엉키는 아수라의 현장에서 재현이를 찾으려 했지만 턱도 없다.

이렇게 된 바에야 재현이한테 알리는 건 포기하고 일단 우리 셋만이라도 튀자는 얍삽한 생각이 떠올랐다, 도망치는 것 같아서 재현이에겐 미안하지만 어차피 민간인들은 가만히 사라져 주는 게 도와주는 거다.

“경찰이 오기 전에 얼른 튑시다! 치현아, 이도씨! 3층이지만 요령껏 뛰어내려 봅시다!”

치현이도 경찰이라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권이도는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도망가는 건 좋은데 우리가 왜 경찰을 피해야 합니까?”

썩은 생선을 씹은 것도 모자라 꿀꺽 삼켜버린 듯한 나와 치현의 얼굴을 보며 권이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당신의 당당함엔 엄지를 치켜 올려주고 싶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죄 없는 자, 꿀릴 것도 없다]는 사고를 가지게 된 거야? 갑자기 두뇌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틀린 건가? 잘못한 게 없으니 경찰 앞에서도 당당해야 되는 게 정상이 맞긴 한데, 아 그렇구나 내가 왜 경찰을 피해야 하지? 어차피 우린 피해자고 기껏해야 게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게 고작인데......

“잔말 말고 튀라니까요!!”  

치현은 벌써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태세였다. “형 빨리!” 그렇게 소리치면서 창문 밖을 내려다 본 치현은 갑자기 멈칫한다. 그 뒤를 덤벼드는 검은 양복에게 몸통박치기를 선사하며 외쳤다.“왜 그래? 너무 높아?”그러나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경고음이 소란을 비집고 희미하게 귀에 잡힌다. 이어서 누군가의 멱따는 소리가 돼지처럼 꽥꽥댔다.  

“경찰이다-----!!!!!!!!!!”





*                *                *





서울 강남의 모 경찰서는 주말도 아닌 평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굴비처럼 줄줄이 엮어 들어오는 청년들의 행렬로 번잡했다. 불철주야 고생하는 경찰들은 피곤과 담배에 절은 얼굴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고 심심하면 경찰서에 시비 걸던 철없는 취객들도 오늘은 조용히 꼬리를 말고 서를 빠져나갔다.

경찰의 손에 인도된 폭력배들은 어림잡아 서른 명. 용케 도망을 쳤는지 그 중 재현이가 데려온 애들은 열명 남짓에 불과하다. 막판에 우르르 몰려들어 온 검은 양복들이 좀 더 요령이 없는 듯 많이 잡혀왔지만 우리 편이 덜 잡혔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안재현이, 저승에서 왕림한 염라대왕의 표정을 하고 나를 갈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피라미들 족치면 되는 거라면서요......”

“아니, 저 그게......”

“무성파 똘마니들이라는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하셨잖습니까....”

“......”

나도 몰랐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지만 재현의 절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몰랐다는 말이면 다입니까, 적어도 조직과 연관 되어 있다는 건 알고 계셨다면서요. 어떻게 그런 중요한 것을 언질도 안 해준 겁니까. 경찰 안 부른다면서 왜 친구 분은 경찰에 신고한 건데요. 니미럴 이래서 치정싸움 따위에 끼어드는 게 아니었어, 호모 따위 죽어버려 등등등...연륜 있는 경찰관이 책상을 내리치며 조용하라고 할 때까지 재현의 절규는 계속되었다. 녀석의 호모 불신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버린 듯했다.

재현이 그렇게 주절주절 읊어대도 워낙 주변의 소음이 커서 이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미 서는 도떼기시장마냥 우글우글, 지나가는 민간인 행패꾼은 명함도 못 내밀어보도록 험악한 인간 군상들이 아직도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갈고 있었다.

게다가, 이 시장판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저쪽에 있었다. 아주 제대로 된 볼거리였다.

“한섭아! 이게 웬일이니 응? 너 학원 간다며 왜 여기 있어!!”

“김호병 이눔쉬키 너 일루와! 오늘 너랑 나랑 아주 죽어 보자!”

“어휴!!! 너는 정말! 내가 너 때문에 속이 끓는다 끓어 이 망할 자식아!!”

내가 미쳐, 명수 패거리들 중엔 아직 졸업장도 안 나온 고딩도 포함되어 있었던 거다.
아아 노란머리 레게머리가 선배, 선배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구석에 찌그러져서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던 폭력배 무리들도 허탈해하는 게 눈에 보인다. 검은 쫄티는 그새 튀었는지 없었지만 빨간 모자나 뚱보는 고등어들을 끌어들인 명수를 눈알 튀어나올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명수와 미성년자가 아닌 청년들은 표정만 봐도 이미 황천구경한 얼굴이다.

저 고딩들이 명수를 따라 헤븐까지 들락거렸다면 헤븐 영업정지는 따 논 당상이다. 헤븐 쪽에서 경찰 로비로 무마하려해도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벌금으로 무마하는 꼴은 못 본다. 그러나“업종이 그런 만큼 헤븐이 민증검사는 되게 깐깐해.”라는 치현의 대답에 혀를 찼다. 에잇- 치현이가 들락날락거리지 못하도록 만들 만한 아주 좋은 기회였는데.

아무튼 경찰서 구석에서 난리 치는 학부형들 때문에 아주 진상이다. ‘우리애가 그럴 리가 없어요‘부터 시작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죄하며 허리를 연신 굽히는 어머니에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아들 혼내느라 정신없는 아버지까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당장 여기서 재현이가 내 모가지를 쥐고 짤짤 흔들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왜...부러워?”

멍하니 소란의 진원지를 바라보는 치현을 보며 물었다.“꼴사나워서 구경하는 거지. 부럽긴 누가” 손사래를 치며 질색을 한다. 좌우로 흔드는 손에 양복소매가 달랑달랑 거리는 게 귀엽다.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그 난장판에서 빠져 나올 때 내 양복 자켓을 걸쳐 놓았는데 조금 큰 모양이다. 어디에 긁혔는지 복부에 난 가늘고 기다란 상처에선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상체를 노출하고 있는 탓에 뻘겋고 푸르게 얼룩덜룩한 옆구리가 많이 아파 보인다. 얼굴도 반창고와 밴드로 대충 이어 놨다. 하지만 상처보다 아파보이는 건 학부형한테 혼나는 고딩들을 바라보는 표정........
...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바인가?

“거, 눈꼴시어 못 봐주겠네.”

치현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더니 옆에서 재현이 헛웃음을 쳤다. 녀석은 모든 걸 초탈한 얼굴로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경찰의 포위로 모든 것이 종료됐다는 거다.
질색을 하며 도망치려는 치현을 억지로 붙들고 권이도는 당당하게 경찰의 보호를 받았으며 경찰 쪽에서도 큰 욕봤다며 위로를 해주었다. 오오 이것이 진정히 대한민국을 지키는 경찰의 참된 모습이로구나. 게다가 나와 권이도와 치현에게는 신원조회니 뭐니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고 상처치료에 따끈한 커피까지 무상제공 받았다. 정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짭새, 아니 경찰을 다시 봤고 감격에 겨워했다.

그러나 그 감동은 권이도의 어깨를 두드리는 검사 나으리 및 검찰 관계자 몇 분의 등장으로 얄팍한 금이 가버렸다.
연줄의 힘은 무섭다. 젠장할 대한민국.

하지만 진심으로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진 건 사실이다. 치료를 해준 형사님은 친절했고 커피를 타준 우락부락한 아저씨도 비록 인상은 험악했지만 정성이 느껴지는 커피맛이었다.(비록 자판기 커피라 할지라도) 지갑을 돌려주는 여경의 손길에 환호했으며 지갑속 내용물이 온전하다는 것에 감사했다. 다만, 그 난장판에 박살이 난 핸드폰만은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내게 돌아왔다.

문제는 일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는 거다.
차라리 내가 재현이를 부르지 않았다면, 권이도가 연줄이 없었다면 이렇게 일이 엉망진창으로 흐르진 않았을 거다. 우리들은 무사히 구출되고 명수네는 찍소리도 못했을 테고 치현이도 구해내서 아싸 해피엔딩. 그래야 했는데!

단순한 납치, 구타, 공갈협박이 아우러진 「불법변태게이포르노비디오제작」 사건은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고광철파가 원정공격으로 무성파와 구역다툼을 벌인 사건이 되어버렸다. 검사는 쾌재요, 양 조직의 똘마니들은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래서 지금 나와 치현이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쉬고 있고, 부하들과 함께 취조를 받아야 할 안재현도 내 옆에서 취조대기 중인 것이다. 권이도는 경찰서에 온 뒤부터 상처 치료만 받고는 걱정 말라고 우리를 위로하더니 검사 나으리 및 검찰관계자로 추정되는 안경무리들과 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경찰서 밖에서 하는 대화라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흥분한 목소리를 내던 회색 정장의 말이 귀에서 떠나질 않는다. “권이도씨 덕분에 큰 건수 잡았는걸요!”

아아 미안하다 안재현 미안하다 이진형.
내 비록 조폭 따위 양쪽이 같이 싸우다 공멸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나름 친분 있는 사이인데 이런 식으로 꼬이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특히 재현이는 현장 검거된 몸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제껏 용케 별 하나 안 달고 살아온 모양인데 나 때문에 큰집구경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재현이 입에서 나온 담배 연기가 녀석의 혼령처럼 느껴진다.





*                *                *





권이도와 검사, 그리고 검찰인지 어딘지 정체를 모르는 안경맨 두 명이 경찰서 안으로 들어왔다. 검사로 추정되는 회색양복은 서장과 면담하러 갔고 안경들은 권이도와 몇 마디 더 나누더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권이도씨, 적어도 내일까진 소환에 응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007가방이라 불리는 서류가방을 들고 서를 빠져나가는 안경맨들의 어깨는 무거워보였다. 검찰인지 어딘지 모르겠지만 이 밤중에 당신들도 수고가 많구려.

“일이 잘못됐나요?”

“아니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내일 찾아가서 천천히 해명하면 되지요.”

하긴, 우리가 꿀릴 게 뭐 있겠나.
그래도 몸은 몸대로 고생하고 내일까지 이 골치 아픈 일을 끌어가야할 권이도를 생각하니 동정심이 솟아오른다. 저 치랑 나랑 손발이 안 맞아서 일이 이렇게 커져 버리긴 했지만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그저 서로가 가지고 있던 인맥이 충돌한 바람에 일어난 일인 것을.

“몸은 괜찮으십니까.”

권이도가 치현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 중에 내가 제일 경미한 피해자다. 권이도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앞섶이 죄다 뜯어진 와이셔츠와 양복을 어쩔 수 없이 걸친 모양새다. 옷 속으로 어깨를 동여맨 붕대와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상체가 보인다. 알록달록한 멍은 결코 치현에게 뒤지지 않는다. 손목을 감싼 붕대에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어. 형도 그리고 권이도 당신도!
나 때문에 그런 꼴을 당하면 내 마음은 편하겠냐구.”

치현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나도 권이도가 쓸데없이 깡패들을 도발한 것에 대해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때 권이도가 도발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치현이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제길, 자신이 한심해서 괴로워 죽겠다. 그때 그렇게 멍청하게 골목에 숨어 있다가 들키지만 않았어도 좀 더 빨리 재현이네 애들을 데리고 나타날 수 있었을 텐데!

“나 때문에.....미안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치현이 작게 중얼거린다. 권이도는 치현의 상처가 괜찮은지 어쩐지 여기저기 얼굴을 살펴보다가 내 손목과 치현의 손목을 각각 한 쪽씩 잡고 들어 올렸다. 저기혐오에 빠져 있던 나는 뭐하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더니 권이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우리들의 손목을 보고 있었다.

“셋 다 손목에 붕대로군요. 으음, 뭔가 의형제 맺은 기분 안 납니까?”
     
“......”

“거 썰렁합니다...”

분위기 쇄신하려고 하는 말이라면 영 꽝이다. 치현은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고 있었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재현은 헛참, 아, 미치겠네...이러면서 기가 막혀했다.  

그때였다.
이 도떼기시장마냥 북적북적 거리는 좁은 서 안에 갑자기 얼음장 같이 차가운 침묵이 찾아왔다. 자식을 닦달하다 지친 어머니도,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식식대는 아버지도, 명수를 갈구던 촬영 패거리도, 기계적으로 경찰의 취조에 답하던 재현이네 부하들도, 서류더미를 들고 가던 여경도, 사무처리 하던 경찰 아저씨도, 지나가던 개새끼도......
그 놈의 등장에 일제히 경찰서 입구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 내가 조폭이 싫다. 국민경제에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온갖 후까시는 다 잡으며 괜히 불안감만 조성하는 저 뻔뻔함이라니. 양 옆에 제법 정장이 어울리는 부하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녀석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차이라면 조금 마르고, 넥타이가 무진장 안 어울린다는 정도?  

“오셨습니까.”

재현이 일어나서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경찰들의 표정이 충치를 앓는 것 마냥 대번에 구겨진다. 한숨이 나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재현의 옆자리에서 일어나 어거지로 웃어보였다. “이야 오랜만이다. 이진형”

“헉!”

누군가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아니다. 나는 놈에게 멱살을 잡혀 외마디 소리는커녕 숨도 못 쉬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숨 막히는 일은 양 옆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손이 내 멱살을 잡고 있는 진형의 손목을 와락 움켜쥐었다는 거다-!

“무슨 짓입니까.”

“너 뭐하는 새끼야?”

좌 권이도 우 남치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여전하구나 김서경.”

얌전히 손을 놓으면서 진형이 말했다. 멱살을 잡을 때도 그랬지만 표정만 보면 나에게 아무 유감도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권이도와 치현을 흘끗 바라보는 시선조차 소 닭 보듯, 웬 파리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멱살이 잡혀 있던 내 입장으로 말하자면, 짧은 순간이었지만 죽는 줄 알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성질 드러운 놈.

“하지만 나는 많이 변했다.”

의미불명의 말을 남기고 녀석은 시선을 돌려 내 옆에서 잔뜩 얼어 있는 재현에게 입을 열었다.

“얘기는 들었다. 재현아.”

불쌍한 안재현. 이마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다. 네가 있으면서 일이 이 지경이 되다니 실망이라는 둥, 당분간 근신하라는 둥......불과 삼사년 전만해도 재현이 위치에 있던 녀석이 어느새 양 옆에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타날 정도가 되다니, 동생을 바라보는 이 형의 마음은 뿌듯.....하고 싶지만 출세해봐야 깡패다.
재현이 그만 쪼아라,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해야지.   

“형, 누구야 저 열 받는 새끼?”

권이도는 침묵으로 노려보고 있고 치현이는 열이 받아서 펄펄 뛰고 싶은 걸 눌러 참는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말했다.

“옛날 애인.”





*                *                *





진형이가 데려온 변호사와 권이도와 면식 있는 검사가 만나자 서내의 분위기는 점점 나락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었다. 진형이와 같은 공간에 있다간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권이도와 치현까지 그 험악한 분위기에 일조를 하게 될 것 같아서 그만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취조할 내용도 없고 집에 들어가서 푹 쉬는 게 최고인 우리들 피해자 세 명이 굳이 경찰서에 오래 붙어 있을 이유는 없다.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집까지 보호해준다는 친절한 경찰관들의 호의를 사양하며 서를 빠져나오는데 등 뒤에 바늘구멍이 나도록 따가운 시선이 와서 꽂혔다. 짐작되는 인간이 너무 많아서 누가 저렇게 대바늘로 콕콕 찌르듯이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아, 어쩌면 폭력배 전부가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젠장, 밤길 조심해야겠다





밤공기는 시원했다. 바람은 미지근했지만 뜨거웠던 한낮에 비하면 청량하다 할 수 있겠다. 권이도는 정말 작정을 하고 왔는지 차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했다. 몇 블럭 떨어진 곳에 주차된 내 차로 걸어가면서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번화가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마치 우리 셋만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의 소음이 멀게 느껴진다. 등 뒤로 따라오는 치현과 이도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금 한적한 곳에 왔다 싶을 때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 본 나를 권이도가, 남치현이 쳐다본다.
나는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래, 이제야 풀린다. 긴장감이, 온 몸의 근육이, 걱정으로 돌아버릴 것 같은 머릿속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기대듯이 그들의 몸을 감싸 안았다. 권이도의 머리를 어깨에 묻게 하고 치현의 얼굴을 가슴에 품었다. 당황하는 두 사람의 긴장된 근육이 느껴진다. 눈을 감고 정말로 이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했다. 안도감으로 전율이 달렸다. 아아 이제야 안심이 된다.

“다행이야. 둘 다 무사해서.”

품안에 한꺼번에 들어오지 않는 두 사람이라서 몸의 절반밖에 끌어안지 못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들이 나를 끌어안음으로써 해결되었다. 얼싸안은 우리들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쳐다본다.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대판 싸우다가 화해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숨을 쉬며 나는 잠시 동안 그들에게 기대어 의지했다. 그것은 어리광이었다.
   



  
*                *                *





“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일이 꼬이는 거냐. 꼭 걸려도 그런 놈들로만 걸려?”

“미, 미안...”

“이제서 하는 말인데, 너 형한테 노땅이라고 했겠다?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 아냐? 그런 일이 있었으면 솔직히 얘기해줄 것이지 갑자기 찾아와서 대뜸 헤어지자고 하면 순순히 납득할 줄 알았어?”

“지, 진짜 미안해 그건 본심이 아니었...”

“그리고 또! 위험한 놈들한테 걸렸다고 도망만 치면 일이 해결 돼?!
왜 숨기고 있었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그런 상담도 못 받아줄 정도로 못난 사람으로 보여?!”

차 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화를 냈다.
권이도는 조수석에서 얄밉게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고 치현은 뒷좌석 시트에 누워 얼음찜질을 하는 중이다. 마음이 안정되자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은 섭섭함과 안타까움과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치현이 나름대로 걱정해준 것은 안다. 그런데 나를 전혀 의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바보취급 당하는 것 같아서 괜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당신도 웃을 일이 아닙니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면 얌전히 경찰을 기다릴 것이지 자기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거기가 어디라고 혼자 쳐들어갑니까?!
아아 좋아요,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갔다고 칩시다. 그럼 왜 나한텐 연락 안했습니까? 내가 치현이 걱정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 놈들한테 전화 왔을 때 왜 나한테는 말 안하고 혼자 갔냐구요! 사전에 얘기라도 했으면 오늘처럼 엉뚱하게 일이 커지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조폭한테 사주하는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가뜩이나 회사일로 힘들 텐데 더 골치 아플 일 만들게 하고 싶지는......”

“둘 다, 내가 그렇게 물렁하게 보입니까---?!!!”

폭주하면서 운전하다보니 어느새 적정 속도를 넘고 있었다. 권이도가 양 손을 들어 보이며 “서경씨 릴렉스, 릴렉스”하고 넉살을 떠는 게 아닌가!

“서경 형, 엄마 같아...”

속도계에 주의 하면서 룸미러로 뒷좌석을 째려보았다. 편의점에서 사온 얼음주머니로 눈가를 덮은 치현이 잔뜩 화가 난 나를 보고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권이도가 손바닥을 탁 치며 “그러게 말입니다. 서경씨가 초등학생 아들을 둔 어머니처럼 잔소리가 많은 사람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지금 둘이 장난하는 거냐!

표정은 퉁명스러웠지만 사실 나는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농담을 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하나 씹히는 걸로 분위기가 좋아진다면 얼마든지 안주거리가 되어주마.

“그런데 형. 아까 그 사람과는 아직도 연락하고 있었던 거야?”

치현이 슬쩍 눈치를 보며 묻는다.
그 사람? 누구를 말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상당히 불편해 하면서 진형이 얘기를 했다. 옛날 애인이라고 말했는데 추가설명이 필요한 건가. 옆좌석의 권이도는 얼굴을 굳히며 룸미러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경찰서안에서는 누가 들을까봐 간단하게만 얘기 했었는데 그게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그 녀석한테 연락한 게 아니야. 원래 재현이...내 옆에 있던 녀석한테 연락한 건데 일이 커지는 바람에 재수 없게 그놈까지 나타난 거지. 한 3년만인가, 예전에 대판 싸우고 끝낸 사이라 별로 뒤끝이 좋진 않아.”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멱살이라니 그 자식 앙심 품은 것 같던데...
형 위험한 것 아냐?“

“진형이 걔가 욱한 게 있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소심한 녀석이거든.
설마 쫌스럽게 보복이야 하겠냐. 요즘 바쁘신 몸이 된 것 같더만, 나한테 앙심품어봤자 제 꼴만 우스워지지 뭐. 예전에도 호모니 뭐니 그런 것 때문에 조직에서 얼마나 구박받았는데.”

다행히 권이도와 치현이는 더 이상 캐물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세 사람 모두 과거를 시시콜콜 따지자면 옛 애인이 한 다스는 나올 사람들이다. 조폭 애인이 있었다는 게 신기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라이트의 불빛이 꼬리를 그리며 가로등 사이를 달렸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부드러운 소리 외에는 달리 소음도 없이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우선은 권이도의 원룸이 있는 여의도로 향했다. 한강다리 위를 달리자 몽롱한 야경이 마음을 잠시 빼앗아간다. 차 안은 편안한 고요함으로 조용했다. 다리를 다 건넜을 무렵, 그 고요함을 깨도 권이도가 입을 열었다.

“치현씨, 그런데 말입니다.”

잠시 허공을 보며 뜸을 들인 권이도의 표정은 무진장 진지하고 심각했다. 치현이 얼음주머니를 슬쩍 들어올리며 “응?”하고 되물었다. 길지 않은 침묵이 지나고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바라본 권이도가 진중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경씨가 엄마면, 전 아빠해도 되겠습니까?”

끼이이이이익---!!!!!!!

핸들을 꺾으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뒤에 오는 차량이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간다. 크게 휘청거린 몸을 안전벨트가 위험하지 않게 고정시켜주었다. 권이도는 차 문 천정 쪽에 있는 손잡이를 잡으며 겨우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었지만 치현이는 굴러 떨어졌다.

“오늘 살아서 집에 가고 싶으면 쓸데없는 소린 하지 맙시다.”

끄응-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시트위로 기어 올라가는 치현의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직장인을 위한 원룸형 오피스텔은 평수는 넓지만 요즘 여러 가지 옵션이 붙어서 나오는 물품에 비하면 낡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여기라면 직장이랑 가깝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처음 와보는 오피스텔 건물을 두리번거리며 정차를 하기 위해 서행을 했다.

“제가 없다고 치현씨를 덮치면 안 됩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말하곤 차에서 내린 권이도는 손인사를 했다.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가 되고만 치현과 나는 서로 마주보며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심술부리기는.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혼자 걸어가는 권이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내키지 않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권이도가, 정확히 말하면 이 컴컴한 밤중에 하얀 빛을 내는 머리와 손목의 붕대가 눈에 밟혔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며 뛰어 나왔지만 딱히 용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나와 치현을 두고 혼자만 빠지는 게 불쌍해서......아, 이거 무슨 어린애 편 가르기 같은 것도 아니고 암튼 유치하고 우스운 기분이긴 했지만 어쨌든 괜히 잡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별달리 용건이 없었기 때문에 “아...몸조심해서 들어가시라고......”싱거운 소리를 했다. 내가 말을 못하고 쭈뼛대니까 혼자 다른 생각을 했는지 잠시 고민을 하던 권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량은 다 털어내셨습니까?”

자연스럽게 화제를 그쪽으로 꺼낸다.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단번에 감을 잡고 “아주 깨끗하게요. 훌훌 털어내니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라고 말하며 그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다행입니다.” 싱긋 웃는 그에게서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니 턱을 긁적이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워레스 쪽 움직임을 묻는 거라면 저도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그 이야기인가. 딱히 그걸 묻는 것은 아닌데 이렇게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 권이도는 내가 그 일에 대해 궁금해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회사 이야기를 하다니 왠지 껄끄러워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들어도 모른다.
여기저기서 얻는 부스러기에 불과한 정보로 골치 아프게 머리 굴리는 것은 그만 둔지 오래다.

“최이사님들이 그렇게 호락호락 한 분들은 아니니 회사 일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 경우 친구들 편을 들어야 하겠지만 연락을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군요.“

“예? 연락이 안돼요?”

봐라, 또 전혀 몰랐던 얘기가 나오질 않는가.

“......모르셨습니까?”

이 기분, 또다. 나만 빼고 이사들이랑 권이도랑 워레스들이 북 치고 장구 치는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기분. 상한 기분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님들은 제게 신경 쓰지 않은지 오래됐습니다.”그러나 권이도의 표정은 오히려 밝았다.

“그럼 맘 놓으셔도 될 겁니다.
안 그래 보여도 최이사님이 서경씨를 많이 챙기고 있더군요.”

싱긋 웃으며 말하지만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은 호모포비아라고. 그런 건 옆에서 본 내가 더 잘 알아. 하지만 이런데서 직장 상사 흉보기는 모양새가 나빠 이 화제는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헤어질 타이밍을 못 잡겠다. 대충 인사도 끝냈으니 치현이가 기다리는 차 안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아까부터 느껴졌던 위화감 때문에 시간만 질질 끌고 있었다.

말이 없는 나를 그가 맨 눈으로 빤히 쳐다본다.
평소 같았으면 유리로 한차례 걸러졌을 그 시선이 다이렉트로 와 닿는 것이 부담스러워진다. 만날 젠장맞을 안경이라며 빛을 굴절시키고 반사시키는 유리알 때문에 심중을 읽을 수 없다고 투덜대왔거늘, 하필 이런 때에 안경이란 가면이 벗겨진 권이도의 눈을 마주보게 되는 것은 고역이었다.  

“안경 새로 맞춰야겠네요.”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고작 그 한마디를 한 뒤 말을 잇지 못하고 어색한 침묵에 빠졌다. 권이도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손목에 감긴 하얀 붕대가 도드라져 보인다.

“아까 놈들에게 붙잡혔을 때 말입니다.”

그 일을 떠올리니 다시금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머리를 붕대로 친친 감고 얼굴 여기저기에 울긋불긋 찍힌 상처를 훈장마냥 단 권이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 훈장이 부럽기도 했다. 셋 중에 내가 제일 멀쩡해서 민망할 정도다. 차라리 내가 저렇게 다쳤더라면 이런 찝찝한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당신이 자진해서 찍히겠다고 했을 땐 굉장히 화가 났었습니다.”

“......”

“나한테는 그렇게 매섭게 대하고서는......
치현씨 때문에 시간을 벌려던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쉽게 몸을 내준다는 것이 분하고, 화가 나고, 서경씨까지 눈독을 들이는 녀석들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권이도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내 몸 중 유일하게 부상다운 부상을 입은 손목을 들어 올렸다. 힘없이 권이도의 손에 맡겨진 내 손이 내 손 같지가 않다. 손바닥을 위로 하고 권이도의 코앞까지 끌려간 손가락에 숨결이 느껴졌다.   

“그런데, 서경씨의 SM비디오......생각할수록 자꾸 보고 싶어지는 겁니다.”

그리고는 하얀 붕대가 감긴 손목에 쪽.
하얗게 화석으로 변한 나는 등 뒤로 소름이 오스스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 느끼함이라니, 이 뻔뻔함이라니, 이 닭살 돋는 행동이라니!!!!!  

“미, 미쳤습니까? 그런 긴박한 상황에도 당신은 그런 것밖에 생각 안 해요?”

“아아...그치들이 안했으면 언젠가 제가 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위험한 생각까지 했는걸요.”

“정신 차려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떠들어 대는 우릴 보고 저만치서 경비가 주의를 주었다. 할 수 없이 목소리를 낮추며 씨근덕거렸다.“모, 몸이나 추스르고 그런 말 하시죠. 내일은 아마 지옥의 근육통일 겁니다.”“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감동인데요.”“아, 됐어요 엘리베이터 왔네요. 빨랑 들어가서 잠이나 자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위로 올라갈 때까지 뻔뻔한 낯짝에 싱글싱글 미소를 그리며 손을 흔드는 권이도 때문에 흥분한 것도 잠시, 내가 이게 무슨 짓인가, 자괴감에 빠졌다. 얄미운 자식, 내가 어색해 하는 줄 알고 일부러 능청을 떤 거다. 변태인 주제에, 남을 함부로 아웃팅한 주제에...거기까지 생각하자 더 복잡해져서 머리를 감싸며 끙끙 앓았다.

“회사 일 때문에 할 얘기가 많았던 거 아니야?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썩은 얼굴로 돌아오자 치현이 차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 치현이는 나와 권이도가 업무관계로 얽힌 것에 놀라워했지만 벌써 적응해버린 눈치다. 하지만 권이도와 나 사이의 껄끄러움을 알면서도 의심할 만한 순간에 회사이야기를 꺼내주는 녀석은, 어린애답지 않달까. 그런 것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는데. 둘이 뭐했냐고 의심해도 되는 상황인데 말이다.

엘리베이터의 위치는 건물 안에서 꺾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나와 권이도가 뭘 하든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꿇릴 짓을 한 것도 아니지만 왠지 치현이 볼 면목이 서지 않았다.
  
“회사 얘기는 무슨. 내 변태 비디오가 보고 싶었댄다. 나 원...”

운전석으로 들어가면서 내뱉듯이 말하자 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러더니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기며 한다는 소리가...

“......그거 나도 보고 싶다......”

아, 진짜! 오늘 둘 다 상태가 왜 이래!!!





*                *                *





“형, 이건......”

“딴 소리 하지 말고 따라와.”

차 안에서 내내 불안해하던 치현이 집 앞까지 와서도 머뭇거린다.

“방금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네 집은 너무 위험해. 아직 보복 가능성도 남아 있잖아.”

권이도를 데려다 주고 바로 내 집으로 왔다. 중간에 행선지가 이상하다고 느낀 치현은 감을 잡고 내려달라고 했지만 턱도 없는 소리. 오늘 그 난리를 치고도 혼자 집에 들어가겠다고? 노란머리 레게머리 애들이 아직 눈 시퍼렇게 뜨고 거리에 있을 텐데, 명수네들이 무슨 지시를 내렸을 줄 알고? 운이 좋다면 기가 죽은 명수네들이 알아서 꼬리를 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쨌거나 일이 잘 풀렸을 때의 경우고, 오늘밤은 주소가 노출 된 치현의 집보다는 내 집이 훨씬 낫다.

내말을 이해한 치현이 고분고분 따라온다. 문을 열며 치현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을 때는 잠시 갈등한 흔적이 보였다. 이내 체념한 치현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고 “먼저 씻을래? 옷은 내 걸 입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어어”애매한 대답을 흘리며 욕실로 들어가는 치현의 뒷모습은 축 쳐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빙글빙글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렸다.





“배고프지? 이 시간에 라면은 좀 그런데...간단하게 토스트 먹을래?”

치현이 씻은 다음 나도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내가 준 트레이닝복과 면 티를 입은 치현은 마치 처음부터 이 집에 사는 사람마냥 편안해 보였다. 텔레비전을 보며 멍하니 있다가 느닷없는 밥 얘기에 치현의 눈이 반짝거린다.

“응. 토스트 내가 만들까? 부엌 써도 돼?”

당연하지 라고 말하자 치현이 신이 나서 주방으로 간다. 냉장고를 열어 우유와 달걀 몇 개를 꺼내더니 후라이팬을 가열시켰다가 기름을 두른다. 치이이-기름이 튈까봐 살짝 물러난 치현은 주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언가를 찾는다. “앞치마 없어?”

“없는데. 그냥 대충 먹자. 금방 자야 되니까.”

몇 개 남지 않은 식빵을 꺼내며 말했다. 식빵을 굽고 달걀 후라이를 그 사이에 끼운 매우 단순한 샌드위치였지만 배가 고팠던 나와 치현은 생각보다 많이 먹어치웠다. 음식냄새를 맡으니 더욱 배가 고파지는 모양이다. 아까만 해도 어색했던 분위기가 식빵 몇 조각과 달걀 후라이 덕분에 완전히 사라졌다. “형, 나 이걸론 모자라. 더 먹을 거 없냐.”하고 입맛을 다신다. 어이구 잘 먹는다. 난 요 얼마간 치현이네 집에 출근도장을 찍고 다니느라 늘 저녁은 외식이었기 때문에 밥통에 밥은 없고 라면 사다놓은 것도 다 떨어졌다.

“치현아, 내가 편의점 다녀올까?”

“에이 됐어. 뭐 그 정도는 아니고.”

“근데 내일 아침 먹을 것도 없거든. 미리 사놔야 하지 않을까.”

“쌀은 있어? 쌀만 있으면 아침밥은 대충 냉장고에 있는 거 추려서 먹으면 되지.”

우유를 마시느라 입주변이 하얗게 변한 치현이 후아-한숨을 쉰다. 그러고 보니 치현은 놈들한테 잡혀 있었을 시간까지 합치면 적어도 반나절은 굶었다는 얘기가 된다. 배도 고플만하다. 컵을 씻고 식탁을 치우고 하다가 아직도 입가가 하얗게 되어 있는 치현을 보며 웃었다. “입가 좀 닦아. 여기 칫솔 새 거 있으니까 양치질도 하고.”“어 고마워.“ 아무 생각 없이 욕실로 들어가는 치현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늑대처럼 입이 길게 찢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차차, 표정관리 해야지.





다른 곳의 상처는 가벼운 찰과상이나 타박상으로 끝났지만 등을 보니 눈살이 찌푸려진다. 각목이 부러지도록 맞았던 곳은 붉고 푸르게 터진 멍울이 마치 은하수처럼 촘촘히 박혀 치현의 등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약을 처덕처덕 바르면서 혀를 찾다. 손가락으로 문지를 때마다 통증을 느끼는지 등 근육이 움찔거린다. 병원에 안 가도 될까 걱정을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고 또 호기를 부린다. 허튼 소리 말고 내일은 병원가보라고 구박하며 멍든 상처를 꾸욱꾸욱 눌렀더니 아흐~하는 요상한 신음을 내며 허리를 비튼다.

“형, 손가락에 너무 감정을 싣지 말아줘.”

“......”

“형?”

농담을 하던 치현은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의아했던지 고개를 비틀어 뒤를 바라보았다. 멀쩡한 살 위에 무심코 약을 바르며 나는 한참 후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내일 당장 이사해라.”

“뭐?”

“그 집은 놈들이 알고 있어서 위험해.
어차피 나 혼자 살기엔 넓은 집이야. 집세에 일조 좀 해 주라. 설거지나 청소도 좀하고......아, 그래 따로 아르바이트 할 필요 없이 네가 입주 가정부로 들어오면 되겠다. 너 요리도 잘하니까.”

“무슨 소리야 형. 나 동거 같은 건......”

항의하는 치현의 등판을 짝 소리 나도록 때리며 단호하고 호쾌한 음성으로 “시끄러워. 내말대로 해.”라며 명령했다. 이 녀석 사정대로 봐주다간 끝이 없을 것 같다. 치현이 날 싫어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면, 녀석처럼 거취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동거를 하게 되면 이꼴저꼴 다 보게 되고 서로 부딪히는 일도 생기겠지만 바깥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어느 날 덜컥 사고소식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집세는 7:3정도로 할까? 집안일 해주는 조건으로.
입주가정부가 싫어? 하긴 어감이 좀 안 좋다. 그래, 잘 알아보면 우리 회사에 아르바이트 거리도 있을 거야. 내가 소개시켜줄게. 호프집 야간 아르바이트보다는 급료가 적겠지만 안정적이고 몸도 편할 테니 훨씬 낫지 뭐.”

손으로는 부지런히 반창고를 길게 뜯어 약 바른 곳을 덮으며 기워 붙이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치현은 묵묵히 치료를 받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고요함이 조금씩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치현이 얼굴을 찡그린다. 또 무슨 말을 해서 나를 포기하게 만들 심산인지 입술을 물어뜯으며 제 머리를 벅벅 긁는다. 아직 습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이 새까맣게 반짝거린다.

“형한테는 늘 고마워하고 있어.”

어, 어라 갑자기 이런 풀죽은 목소리라니...마음 약해지게스리.

“형이 이젠 내 얼굴 안 볼 줄 알았어.
심한말도 했고, 정떨어지게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까만 뒷통수가 아래로 떨어졌다.

“형은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거실이 침묵에 휩싸였다. 째깍째깍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이렇게 크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베란다 바깥으로 보이는 아파트단지의 밤은 아직 잠들지 않아 환하게 불이 켜진 창문들과 불이 꺼진 창문들로 퍼즐을 이루고 있었고 그 퍼즐의 한 칸이 이집 창문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가로세로가 교차하는 퍼즐 속에서 나와 치현의 마음이 교차하는 날은 과연 언제가 될까.

나는 치현의 등을 감싸 안았다. 약이 옷에 묻겠지만 반창고로 잘 붙여놨으니 조금 묻는 정도야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겠냐.”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목덜미에 턱을 괴었다. 뒤에서 바라보는 치현의 귓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더 숙이기에 힘을 줘서 끌어안았다. 약 냄새가 콧속을 톡 쏘지만 그에 못지않은 체온이 심장을 따뜻하게 한다. 머뭇거리며 치현은 미약하게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모르겠어. 뒷치기도 많이 당했고. 정말 죽고 못 살 것 같이 좋아하며 살던 아이랑 싸우다 헤어진 적도 있었어.
그런데......형이랑 사이가 나빠져서 헤어지면 정말 못 버틸 것 같아.“

한손으로 그 몸을 끌어안으며 다른 한 손으론 머리를 쓰다듬었다. 촉촉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사이에 찰지게 감겨든다. 나는 턱을 약간 눕혀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새빨갛게 불타오른 치현의 뺨을 바라보았다.

“겁쟁이구나. 시작도 해보지 않고 벌써 포기하면 어떡해?”

“계속 안 좋은 일만 생기다보니 정말로 내가 원래 잘못된 인간 인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돼. 나는 정말 자신이 없어. 이러다가 또 일이 꼬이면 어쩌지? 오늘 행복해도 이게 내일까지 이어질까? 그런 불안함이 싫어. 기대했다가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허무함이 너무 무섭단 말이야.”  

자신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 쥐고 한숨을 내뱉는 치현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나는 그 어깨를 더 깊게 안으려 몸을 일으켰다. 소파 위에서 무릎을 세운채 등 뒤에서 가슴으로 손을 늘어뜨렸다. 매끈매끈한 머리카락이 목을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턱을 녀석의 정수리에 꾸욱 찍어 눌렀다.

“어차피 영원히 지속되는 애정은 없어. 이렇게 말 하면 너는 더 불안하겠지.
하지만 헤어지는 게 무서워 사귀지도 않는다는 건 미련한 일이잖아?
치현아, 다른 건 몰라도 나는 먼저 너를 버리거나 하지 않아.
사랑한다는 말이 불안하다면 믿어달라는 말로는 안 될까?“

치현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치우자 드러난 반듯한 이마를 보며 말했다. 무심코 녀석과 내 눈이 마주쳤고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좀 더 가까이 했다. 치현의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진다.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숨결이 코끝에 와 닿는 순간 나는 고개를 숙여 녀석의 입술을 깊숙이 물었다.

녀석의 턱이 내 이마에, 내 턱이 녀석의 이마에 닿아 위아래가 뒤바뀐 키스였다.
아랫입술을 물고 윗입술을 핥으며 치아를 가르고 혀끝만 살짝 건드리며 감질난 장난을 쳤다. 녀석과 내 혀가 공기 중에서 만나기도 하고 서로의 입안에서 포옹하기도 한다. 키스에도 69체위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 지도 모른다. 깊숙이 빨아들이지만 코와 턱이 부딪히는 것에 안달 난 느낌이 든다. 나는 천천히 치현의 몸을 소파에 눕히며 눈가에서 뺨으로, 뺨에서 턱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녀석의 몸 위로 체중을 실었을 때 한숨과 긴장과 다가올 행위에 대한 예상으로 곤란해 하는 치현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괜찮아. 형 믿지?”   

의도가 노골적이었던 모양인지 치현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긴다. 하지만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인상써봐야 설득력이 없다. 나는 음흉하게 목구멍으로 끌끌거리면서 치현의 몸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렸다. 금세 턱이 바르르 떨리며 한숨을 짓는다.

그러다 문득 녀석의 유두에 시선이 갔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피어싱은 없었다. 조그맣게 튀어나온 돌기를 어루만지면서 왠지 아쉬워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링모양이었다면 분면 잡아당기는 재미도 쏠쏠......
......정신 차리자. 나까지 권이도과로 편입하면 어쩌란 말이냐.

잡생각을 떨치며 다시 키스를 했다.
입술에서 턱으로, 턱에서 쇄골을 핥아 내리며 섹스의 수순을 밟듯 자연스럽게 혀와 손을 움직였다. 아직도 불안하게 망설이는 치현은 내버려 두고 나 혼자 진도를 나갔다. 이 녀석이 따라와 주길 기다리다가는 오늘 밤이 새도 모자랄 게다. 꿈틀대는 근육을 은근히 짓누르고 약한 곳을 자극한다. 몸의 반응에 당황하면서도 쩔쩔매는 치현의 우유부단함에는 이제 익숙하다.

“그, 그런데 형, 약냄새 않나? 냄새 독할 텐데......”

치현은 제 품에 코를 처박고 기껏 바른 약들을 핥아 먹어버리는 나를 만류하면서 이리저리 몸을 뒤튼다. 맛은 쓰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다. 입안에 들어오는 단단하면서도 물컹한 살점은 코를 찌르는 약냄새와 함께 희미한 사람냄새가 느껴졌고 그 사람냄새는 꽤 중독성이 있었다. 씹히는 감촉도 쫄깃쫄깃하달까. 한껏 빨아올리면 입안에 한입가득 머금어지는 말랑말랑한 살이 아니라 이빨로 깨물어도 끄떡없을 것 같은 튼튼한 근육이 난폭하게 굴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역시 약을 다 먹어버리면 곤란하겠지.
나는 치현의 가슴에서 입을 떼고 귓가를 입술로 더듬었다. 약을 바르느라 벗겨져 있던 옆구리를 쓸어내리면서 부르르 전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의 반응을 즐겼다. 아직도 고민하는, 아직도 결정을 망설이는......우유부단하고 답답한 녀석이지만 약한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그와 동시에 자신만의 둥지에서 웅크리고 있는 녀석을 불쑥 잡아 끌어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내게 의지하고 내게 손을 내밀어 애원하게 만들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구가 치밀어 올라와 나 자신도 흠칫 놀라고 만다.
그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아닌, 정복욕이라는 이름의 쾌감이다.

이렇게 상반되는 욕구가 공존하는 것은 역시 내게도 변태끼가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나를 충동질하는 무언가가 치현에게 있는 걸까. 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겨우 손안에 들어 온 몸뚱어리의 솔직한 반응은 은근한 자만심을 부추기며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치현의 바지버클을 풀었다. 바지를 끌어내리자 면 재질의 속옷이 흥분한 성기를 감싸고 불룩이 솟아올라있었다. 끝이 살짝 젖어 있는 걸로 보아 서두르는 모양새다. 치현은 내 얼굴을 보곤 웃지 말라고 말을 더듬거렸지만 점점 능글맞은 중년 아저씨가 되어가는 표정은 나도 주체가 안 된다.

그나저나 상당히 묵직한 모양새다. 젊어서 좋구나..
혼자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골반께에 걸쳐진 팬티의 밴드 끝자락에 걸고 이빨로는 배꼽아래 팬티의 끝부분을 물었다.

"으윽..."

이빨과 손가락으로 녀석의 속옷을 천천히 벗겨내었다.
몸이 달아 허리를 들썩들썩하도록 느릿한 동작으로 애를 태웠다. 골반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의 미묘한 움직임. 속옷을 끌어내릴 때마다 턱과 입술에 묵직하고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그것의 열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퉁-소리가 나나 싶을 정도로 벌떡 곤두서며 내 얼굴을 때리는 그것과 만났을 때, 나는 그저 귀엽다며 웃고 있었다.

치현의 성기를 제대로 눈앞에서 확인 한 것은 처음이다. 전에 잠깐 치한 흉내를 내었을 때 건드려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땐 물건크기에 대해 어쩌고 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치현의 성기도 오히려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처음 마주본 녀석의 것을 보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녀석, 크다-!!

나보다, 권이도 보다 크다!  
젠장, 이건 사기야! 고작해야 스물 한살짜리가 이런 흉기를 가지고 있다는 게 말이 돼?
아니, 꼭 나이가 많아야 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전혀 아닐 것 같이 생겨가지고 왜 이렇게 크냔 말이야 이 녀석은!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쪽팔리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더니 치현이 어설프게 하체를 가리며 몸을 꼰다.
나는 녀석의 것을 한손으로 슬슬 문지르며 놀렸다.

"이거이거 대물이었잖아?"

"......놀리지 마."

요놈요놈, 이런 걸 이제까지 숨기고 있었더란 말이냐.
어차피 여자가슴과 남자 거시기는 크면 클수록 좋다는 잘못된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괜히 내가 다 뿌듯해지는, 큰아들의 거시기 털을 보았을 때의 아버지가 된 듯한 묘한 심정은 무에란 말이냐.

장난하듯 손바닥으로 슬슬 문지르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녀석의 액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한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던 치현은 아예 포기를 한 듯 얼굴을 양팔로 가리고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이따금씩 짧게 튀어 오르는 허리가 경련하며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어차피 지금 내 뒤에 넣을 것도 아니니 사이즈는 일종의 색다른 유희다. 이만큼 크면서 균형적인 모양새라는 것도 신기하다. 한쪽으로 휠 법도 한데...수풀을 쓰다듬고 허벅지를 간질이면서 조물조물 가지고 놀고 있는데 양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치현이 들뜬 얼굴로 흘끔 동정을 살핀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빙그레 웃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행동에 의미모를 희열을 느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요도를 마사지 하고 기둥을 훑으며 뿌리를 자극했다. 숨을 고르며 긴장을 참으려 하는 게 역력하게 느껴진다.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긴 마사지가 이어지고 있지만 잔뜩 부푼 녀석의 것에선 아직도 사정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에이... 펠라는 침대에서 해주려고 했는데......

한입에 물기엔 버거운 사이즈라 혀끝으로 선단을 건드려보았다. 치현이 소파의 등받이와 손잡이를 움켜쥐며 몸을 웅크린다. 잇새로 새어나오는 신음은 무척 괴로워 보인다. 찡그린 얼굴이 관능적으로 보이는 것은 내 눈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혓바닥이 농밀하게 녀석의 중심을 쓸어 갈수록 가빠지는 호흡과 꿈틀거리는 가랑이 안쪽의 허벅지 근육을 보고 있으려니 나 역시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다.

“형......그런 얼굴.....하지 마......”

좀처럼 항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대물의 귀두만 삼킨 채 오물오물거리고 있는데 치현이 혼탁한 눈으로 중얼거린다. 무슨 뜻인지 이해는 못하겠는데 쿠퍼액은 잔뜩 흘리면서 마지막 고지에 도달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녀석 때문에 미간에 주름 좀 만든 것 같긴 하다. 나는 치현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불알을 쓰다듬던 손가락을 미끄러트려 회음을 꾹꾹 눌렀다. 탁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녀석의 고개가 꺾인다. 조금 더 대범하게 더 안쪽 깊은 곳까지...항문근처의 조밀한 주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핫! 아윽!”

엉덩이와 허리가 동시에 튕겼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라고 생각했던 치현의 주니어는 아직도 울끈불끈 장전완료만 외치고 있다. 독한 놈일세...라고 생각하며 혀를 뾰족이 세워 요도 끝을 넓혔다. 뜨끈하고 축축한 혀가 신경의 예민한 안쪽을 건드리고 치현의 몸은 쾌락으로 벌벌 떠는데 이 대물이란 놈은 이렇게 끈적하게 젖은 주제에 끄덕도 하지 않는다.      

“형, 입 떼. 이제 힘들어.....”

“입에다 해도 돼.”

녀석의 것을 핥으면서 말했다. 치현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서 고개를 젓는다. 이제는 상대의 반응을 즐기기보다 오기가 생겼다. 입으로 기둥을 훑어 내리고 두 개의 알을 지나 회음을 깊게 빨아 들였다. 기어코 치현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그러나 제 주인을 닮아 고집이 센 성기는 혈관이 튀어나오도록 아파하는데도 꿋꿋하다. 헛 참. 발기하는 것은 이리도 빠르면서 사정은 끈질기게 참을 수 있다니. 기특하다고 해야 할까 나이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 성급하게 쏟으면 잔뜩 약올려줄 요량이었는데 말이다.

“알았어 알았어. 이제 그만 참아도 돼.”

성기에서 입을 떼고 살며시 끌어안으며 녀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티슈를 잔뜩 뽑아 멍석을 깔아주자 그제야 토정한다. 절정으로 떠는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녀석이 사정의 쾌감에 떠느라 꽉 끌어안는 바람에 얼굴 보는 것은 실패다. 대신 맞닿은 심장의 맥박이 어떤 달콤한 표정보다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녀석은 사정의 나른함에서 벗어나고 나서도 계속 그렇게 나를 안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을 주어 마주 안아오는 치현의 팔 힘이 어쩐지 절박한 느낌이 든다. 갈비뼈가 좀 아프다 싶을 정도로 우악스럽게 조이더니 품에 얼굴을 묻는다. 어리광을 부리듯 가슴에 얼굴을 비비던 치현은 떨어지는 동아줄을 움켜쥘 듯한 악력으로 등에 손가락을 박아 넣고 우악스럽게 그러모았다.

눈을 꾹 감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안고만 있을 것 같은 녀석이 어딘지 안쓰러워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달래었다. “침대로 가자.”





*                *                *





끈적끈적한 체액이 오가고 온기가 섞이고 살내음이 후각을 마비시킨다.
아기에게는 아기의 냄새가 노인에게는 노인의 냄새가 있듯이 치현에게는 치현의 냄새가 난다. 어른이 되다만 청년의 냄새인지 발정난 숫짐승의 냄새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단순한 사람 냄새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 순간 내가 치현이 고유의 냄새라고 느끼는 것에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아찔함이 있으니까. 정복하고 싶고 울리고 싶고 깔아 누르고 싶은 그런 욕망이 이성을 흐릿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칠어지려는 마음을 참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했다. 권이도가 주지 못한 자상함을, 헤븐의 망나니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따뜻함을. 다시는 이상한 놀이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치현의 세포 하나하나에 김서경 식의 섹스를 새겨 넣었다. 지루하다고 느낄 정도로.  

“형은 지나치게 다정해.
......그래서 왠지 무서워.”

뒤를 오랜 시간 풀어주고 천천히 허리를 밀어 넣으려고 할 때 치현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녹아내릴 듯이 녀석의 다리를 터치하면서 깊게 하체를 밀어붙였다. 그 불안감을 녹여주마.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자신했다.   

녀석의 안은 뜨거워서 눈물이 쏙 빠질 정도였다.
부드럽게 하자고 마음먹은 상태였지만 하반신을 삶아버릴 듯한 용광로 속에서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서비스에만 몰두하느라 내 욕구를 참는 데에 급급했다가 이렇게 직접적인 자극이 가해지니 심호흡을 하면서 진정시키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났다. 애초에 삽입이란 행위는 받아들이는 자보다 넣는 자의 쾌감을 위한 일이니 말이다. 나는 치현이 불편하지는 않나 녀석의 안색을 살폈다.
분명 열에 달뜬 얼굴임에도, 욕망으로 흐려진 눈은 나를 곧장 주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안심하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하체를 부딪쳤다. 근육으로 뭉쳐 있지만 한손에 꽉 잡히는 작은 엉덩이를 느끼며 몸을 더욱 더 밀착한다. 녀석과 나의 거친 호흡이 얽히고 체취가 설킨다. 절정으로 치닫는 두 사람은 박자를 맞추어 빠르고 느리게 상대의 내부를 휘젓고 감싸고 뜨겁게 역동하며 교차하는 퍼즐을 향해 달려갔다. 눈부신 랑데부. 이성까지 부서지는 희열을 느끼면서 나도 치현이도 비로소 욕망의 해소를 이루었다. 미련을 토해내고 불안을 토해내고 한숨과 걱정과 의심도 함께 배출했기를 바라면서 나는 땀에 젖은 치현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                *                *





구수한 밥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이 집에 이사 온 뒤로 밥 냄새에 잠에서 깨는 아침드라마 같은 시츄에이션은 한번도 없었다.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치현이구나. 고개를 들어 시계를 찾았다. 눈이 뻑뻑해서 좀처럼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어제 그 난장판을 겨우 빠져나와 섹스까지 했으니 몸이 남아날 리가 있나. 나도 나이 생각을......

눈이 번쩍 떠졌다.
  
제일 먼저 식은땀이 흐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봤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한다. 하지만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 어젯밤, 아니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 비로소 떠오른다. 몸을 움직이기가 두렵다. 목 아래로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다. 그러나 눈치 없는 치현이 녀석은 부엌에서 크고 쾌활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형 일어나! 아침 먹고 출근해야지!”

“어, 그, 금방 씻고 갈게....”

나는 막 잠에서 깬 척 억지로 큰 소리를 내었다. 열려진 문을 통해 부엌에서 이쪽을 빠끔히 바라본 치현은 다시 쏙 하고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그게 꼭 숨어버리는 것 같아서 기가 막혔다. 지금 숨고 싶은 건 나란다 얘야.

어쨌든 큰소리는 쳤으니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런데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지옥의 근육통은 권이도가 아니라 내가 겪어야 할 모양이다. 온몸이 쑤시고 저리고 결정적으로 진짜, 힘이 하나도 없다!
     
으아악! 저건 대물이 아니야 괴물이었어--!!!

몇 시간 전, 치현이와 몸을 섞고 뿌듯한 마음으로 잠을 자려 했다. 그러나 아직도 욕망이 덜 풀어진 치현의 상태를 깨닫고 “젊구나....“하고 웃으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충전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나와 달리 금방금방 분기탱천하는 녀석의 물건에 슬그머니 질투도 느끼면서 또 다시 친절봉사 서비스를 하고 나니 서서히 체력이 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녀석이 잔뜩 탁해진 눈으로 “형..내가 해봐도 돼?“ 라고 물었을 때는 양초가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몸을 불사르며 환한 빛을 내듯 불끈 달아올라버렸던 것이다.

치현이 내 몸을 더듬고 핥으며 적극적으로 나왔을 땐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계속 나한테 끌려 다닐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따라와 주었다. 기특하기도 하고 내가 치현에게 성적 매력이 전혀 없는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지쳐있던 신경을 몇 배로 집중해버렸다. 이미 한국인의 사이즈가 아닌 그것을 내 뒤로 넣게 될 줄은 몰랐지만 치현이 원한다면 그 정도 서비스야 해줄 수 있다고 마음먹은 터이다. 상당한 부담이 들었지만 공을 들여 뒤를 풀고 또 치현이도 성급하게 밀어 넣지 않았기 때문에 그럭저럭 절반정도는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녀석의 몸은 예상 그대로 젊고 탄력 있고 튼튼했다. 치현이 뛰어난 테크니션인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내게 열중한 모습을 보자 흥분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거짓말을 하며 요리조리 나를 피하기만 하던 녀석이 형...형...하면서 달뜬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내자 뿌듯한 충만감이 정신과 육체를 고양시켰다.

적어도 분위기에 넘어온 것은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정신적인 엑스터시가 상당했고 덕분에 완전히 기력을 소진해 넉다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녀석의 참을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내가 절정으로 갈 때까지 녀석은 먼저 사정하는 일 없이 끈기 있게 기다렸다. ‘형 벌써 자?‘ 이 소리에 오기가 생겨서 녀석의 행위에 응해주었지만 내가 봉사하는 것은 무리. 종국에는 치현이 리드하고 치현이 삽입하고 치현이 혼자 무어라고 속삭이는 것을 고스란히 받고만 있었다. 나는 말의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웃는 척, 응응, 그래그래 따위로 한심한 대꾸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저히 못 버티겠다고 항복하던 네 번째의 삽입 때, 녀석은 기어코 자신의 것을 끝까지 내 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그것도 조금의 고통 없이.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리카락을 벅벅 문지르며 자신의 한심함에 혀를 찼다. 솔직히 내 나이대가 되면 한번에 몇 번씩 사정하는 것은 힘들다. 나도 꽤나 정력 좋다고 생각하는 몸인데 이 녀석의 페이스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거실에서 “형 빨리 와! 콩나물국 식어!”라고 외치며 치현이 이쪽으로 온다. 방안으로 들어온 녀석은 침대에 겨우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코끝을 문지르며 어색해한다. 젠장 저 매끈매끈한 뺨이라니, 초롱초롱한 눈이라니!! 눈 아래가 퀭하게 죽어간 나와 달리 생기가 제대로 도는 녀석을 보자 왠지 억울하다. 일어 설 엄두를 못 내고 그렇게 앉아 있자니 치현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많이 힘들어?”

치현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나이가 드니 체력이 딸리는 구나.”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 녀석,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말로 안절부절못하면 어쩌란 말이냐 내가 더 쑥스러워지잖아!!

“저, 저기 미안해...그러니까...나는 끝까지 넣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데....형이 자꾸 괜찮다고 해서...그래도 찢어지지는 않은 것...”

“됐다. 밥이나 먹자.”

가만히 내버려두면 무슨 말이 더 나올까 두려워서 담담함을 가장하며 녀석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제기랄, 얼굴은 연기가 가능하지만 이 몸뚱어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치현이는 내 몸을 시트로 둘둘 말아주며 부축을 하려다가 파자마를 가져 오기도하고 “머, 먼저 씻는 게 좋을까?”하며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멍하니 녀석이 허둥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괜찮아. 옷은 놔두고 밥 먼저 먹자. 조금 도와줄래?”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팔을 내밀었다. 그제야 녀석이 새빨개진 얼굴로 팔을 잡으며 몸을 부축한다.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팔에 힘을 주는 걸보니 아예 안아 올릴 기세다. 나는 그저 허허허 웃으며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다음부턴 자꾸 놀아달라고 보채지마라. 이 형님 허리 나간다.”

그러자 치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한다. 에헤헤헤 하면서 웃는 게 꼭 바람 빠진 풍선 같다. 전에는 저렇게 웃는 게 개구쟁이 같아서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는데 지금은 그 사심 없는 함박웃음이 조금 무섭다.

“헤헤헤... 내가 좀 끈질겨.”  

아...하늘이 노랗다.





용케 밥을 먹고 씻고 출근하는 게 가능했다. 운전은 무리라서 택시를 잡았지만 출근길에 꽉 막힌 도로에서 택시라니 내가 미쳤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몸은 지치고 늘어진다. 밤새 정기를 쪽쪽 빨린 느낌이다. 이 상황에서 대중교통은 무리요 자가용으로 가다간 사고라도 낼 게 뻔하니 택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오죽하면 기사아저씨가 밤새 일했냐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가뜩이나 몸도 정신도 지친 몸인데 지각 걱정까지 하는 것은 용량 초과다. 거북이걸음을 하는 차량의 행렬을 느긋하게 지켜보면서 이 참에 잠깐 쉬자고 생각했다. 창밖을 보며 조금씩 생각나는 몇 시간 전의 편린들을 돌이켜 보았다. 치현이 내게 수없이 중얼거렸던 말들, 형 진짜 괜찮아? 나 조금만 더 들어 갈게. 아아...뜨거워, 너무 뜨거워...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낯부끄러운 망상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진짜 마음에 걸리는 말을 곱씹어 보았다.
   
-......고마워 형. 이제 나는 형이 권이도를 마음에 두어도 상관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어.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것은 내 마음의 한쪽 구석에 단단하게 묻어 놓았던 권이도란 씨앗의 존재를 들추어내는 말이었다. 그 씨앗은 이미 씨앗이 아니라 어느새 커다랗게 자라고 있음을, 내 턱 끝까지 자라 있음을, 턱 밑을 보지 못한 나대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치현이 먼저 발견해낸 모양이다.  

치현을 안으면서 권이도의 생각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노력했다.

그 자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 내 차에서 내리면서 허튼 소리를 빙자한 진심을 내뱉었던 거였겠지. 치현이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겠다? 그자가 치현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적어도 장난감 수준은 아닌 것이 확실해졌다. 연애감정이든 성욕이든 일단은 진심.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두 사람에게 동시에 진심이 될 수 있다니 그게 가능해? 라고 혼자 비난했지만 그 비난의 화살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나는 권이도 역시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것을, 그 예민한 치현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다.

그래서 녀석과 관계할 땐 녀석만을 보고 녀석만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다른 생각을 하면 들킬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녀석은 이미 내 마음의 갈등을 알아채고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상관하지 않겠다고.

길게 늘어지는 한숨을 쉬며 택시의 낡은 쿠션에 머리를 기대었다.
새로 시작하는 연인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출발 아닌가. 나란 놈도 그렇게 안달복달 하며 치현이를 꼬드길 때는 어제고 이제와 다른 사람이 마음에 걸린다니 이 얼마나 간사한 심보인지.

권이도와는 슬슬 끝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엔 조금, 아니 많이 미련이 남는다. 그래도 당신은 딱 내 취향이었는데. 당신과의 섹스는 끝내줬는데......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괜히 가슴께가 뜨끔해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                *                *


     


회사에 도착했을 때 지각은 하고 말았지만 내 지각에 대해 잔소리를 하는 상사는 아무도 없었다. 과장 이상 급은 긴급회의에 호출되어 간 상태고 남은 직원들끼리 신문을 보며 수근대고 있었다.

“김대리님 오늘 아침 신문 보셨어요?”

유석환씨가 호들갑을 떨며 오늘자 일간지를 내민다. 나는 신문을 받아들고 녹아나는 허리 때문에 끄응-하는 소리를 내며 겨우 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신문기사에는 별로 관심 없었지만 유석환씨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가 펼쳐 보여준 페이지를 보았다.

“이것 때문에 지금 분위기가 뒤숭숭해요. 아 진짜 회사가 잘나가다가 갑자기 불안해지는 거 순식간이네요. 그렇잖아도 최근 주가가 내리막길이던데. 이유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더라구요.”

피로가 싹 달아나고 대신 한기가 들어섰다.
정치면을 장식한 모 의원의 비리 사건에 IL의 사장이 연루되며 구속. 게다가 외국계 사모펀드 집단이 우리 회사와 마크플랜의 주식을 놓고 불공정매매를 하다가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해외로 도피했다는 기사까지 연계되어 신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최이사와 마크플랜 대표이사의 인터뷰가 신문의 경제면에 나란히 실리며 관계자들의 긴장감을 조성시킨 것이 바로 엊그제다. 그러나 이제 불명예스러운 일로 신문 한구석을 차지하게 되어버렸다. 며칠 뒤 열릴 주주총회에서 IL은 마크플랜에게 압승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제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황급히 총회에서의 전략방안을 수정해야 했다.

사장의 구속 기사와 주가조작 기사가 실리면서 주가는 폭락했다.
외국계 펀드 집단이 IL의 지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던 것은 내부자와 협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최이사를 비롯한 경영진까지 시세조종에 참여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시가 총액이 수천억에 달하는 조작이다. 감사팀이 회사에 들락날락거렸고 총회는 연기 되었다. IL은 물론 마크플랜까지 조사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마크플랜 쪽에서도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차익을 챙긴 임원이 발각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신문을 확인하면서 한숨과 막막함으로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이번 외국인 펀드집단의 조작의혹에 모 증권사 애널리스트 권모씨도 포함되어 조사중이라는 기사 때문이었다.

권이도가 출두한 날짜는 하얀 붕대의 그를 홀로 집으로 보낸 바로 다음날이었다.





*                *                *





파트너가 아닌 남자와 단 둘이 바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더구나 상대는 대하기 껄끄러운 최이사. 이사실이 아니라 외부, 그것도 이런 주말에 단 둘이 술집이라니 매우 부담스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불러준 최이사에게 감사할 지경이다.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주위에서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도 이사실에 쳐들어 갈 뻔했으니까.  

회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그러나 최이사의 단골로 보이는 와인바에서 우리 둘은 마치 일행이 아닌 것 마냥 아무런 대화도 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침묵을 버티는 데에는 나보다 최이사가 한 수 위인 듯했다. 잔을 앞에 놓고 고사를 지내던 나는 한숨과 함께 품에서 금색 카드를 꺼내며 이사의 잔 옆으로 밀어 놓았다.

“이제 필요 없으니 돌려드리겠습니다.”
  
잠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던 이사가 와인 한 모금 마시고 법인카드를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언제나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것을 떼어버리니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카드 사용내역이 없더군요. 일부러 그런 겁니까?”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말이라 손님수가 꽤 되었다. 그러나 바에 앉은 사람은 몇 없어서 대부분 일행과 함께 테이블을 채우고 있었다. 평소엔 혼자 술 마시러 오는 손님이 많은지 창가에도 벽 쪽에도 바 형태로 되어 있다. 내부 인테리어는 조금 어둡고 음악은 우울하다. 비 오는 날 혼자 앉아 청승 떨기 딱 좋은 곳이지만 최이사의 취향이 이런 곳일 줄은 몰랐다.  

“묻고 싶은 게 많지요?”

“여쭈면, 알려주실 겁니까?”

나도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이 튀어 나갔다. 일순 뜨끔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이사도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얇은 입술을 잠깐 치켜 올렸을 뿐이다. 와인글라스에 담긴 무색투명한 액체를 바라보며 최이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먼저 시작한 것은 사장입니다.”

오른 손이 나도 모르게 경련했다.

“사장이 워레스를 고발했습니다.
우리 경영진이야 전부터 조작 의혹을 받고 있었지만 워레스 쪽은 금융감독원 쪽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단체였거든요.
그에 따른 보복으로 워레스가 사장의 비리를 터트린 겁니다. 덕분에 사장이 로비를 하던 정치인의 뇌물수수 내역이 줄줄이 밝혀져 일이 커져버린 것이지요. 워레스는 자신들이 사장의 뒷조사를 하고 있노라고 그때 서경씨를 통해 경고를 했지만......내 책임도 있습니다. 사장에게 경고를 미처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바텐더는 저만치서 여성손님들의 말상대를 하고 있었고 주말인 와인바는 다소 소란스러워서 조용한 클래식이 소음에 묻혀 있었다. 의자 한 칸 건너 앉아도 옆 사람의 얘기는 들리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는 누가 들을세라 식은땀을 흘렸다.

“워레스 쪽과는 당분간 서로 연락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권이도씨도 그 친구들의 소재를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아마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타나 무혐의라고 맞고소 할지도 모를 사람들입니다.
권이도 그 사람의 경우는......우리가 감시기관들을 너무 얕본 모양입니다.
아직 검찰에 정식 고소된 것은 아니지만 직업상 신뢰도에 금이 갔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말없이 빈 잔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자기들끼리 온갖 술수를 꾸미고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줄은 몰랐다. 권이도의 문제는 권이도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D증권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권이도가 정식으로 기소되면 검찰의 수사는 D증권까지 부정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의혹으로 확대된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쉬며 내뱉듯 말을 꺼냈다.

“왜 저는 멀쩡합니까?”

“......”

“이사님도, 박전무님도, 그리고 다른 분들도 한차례씩 조사를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 제가 이사님들과 가깝게 지내는 걸 못마땅해 하는 상사도 있습니다. 의심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제게는 수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겁니까?”

“서경씨도 조사하면 처벌대상이지요.
하지만 검찰의 조사에 걸릴 만큼 중요한 부분에 서경씨가 참여한 적이 있었나요?”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참으며 빈 잔을 꽉 움켜쥐었다.
   
“권이도씨와의 인연은 완전히 프라이버시에 관련한 부분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서경씨와 워레스와의 접촉은 단 두 번. 첫 번째는 호텔에서 이루어졌으니 수사하기가 요원하죠. 두 번째 접촉 역시 공식적으로 워레스들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었으니 기록에는 남지 않습니다.”

검찰도 금융감독원도 바보는 아닐 게다.
권이도가 조사대상에 포함되었다면서 그와 데이트 했던 내가 조사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이 애널리스트의 파트너가 알고 보니 주가조작의혹을 받고 있는 회사의 직원이더라......충분히 의심받을 상황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성적취향까지는 조사 범위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너무 앞서 생각해서 지레 겁먹은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특별한 이유 없이 최이사와 박전무의 관심을 받고 이사실을 들락거린 건 사실이다. 다른 직원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겠지만 오과장 같은 사람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가 회사에 감사 나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주목했을 사항이다. 지금 이렇게 최이사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도 충분히 의심대상 아닌가.

죄짓고는 못산다고 했던가.
나도 어지간히 모럴해저드가 심각한 사람이지만 지난 며칠간은 불안해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치현이와 갓 동거를 시작하며 녀석의 짐을 정리하고 나란히 핸드폰도 커플로 맞추면서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잠자리가 사나워서 밤마다 뒤척였다. 내부정보이용거래, 시세조종가담, 실명법위반....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잔속의 액체를 입안에 머금으며 일부러 쓴맛을 오래 음미했다.
결국 나란 인간은 회사의 위기나 권이도의 신변 보다 내 한 몸의 안전을 위해 이렇게 안달하며 최이사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다. 최이사로부터 ‘괜찮다’ 혹은 ‘이렇게 해라‘는 방향을 제시받기 위해. 애초부터 찜찜했다고, 안하겠다고 하지 않았냐며 화를 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웃팅이든 뭐든 이런 식으로 일이 커질 줄 모르고 이익을 챙긴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자기혐오가 쓴웃음과 함께 비어져 나왔다.
   
“......지금의 회사가 마음에 드십니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최이사의 건조한 음성이 자장가처럼 흘러들어왔다.

“무슨 말씀이시죠?”

음악을 듣는 건지 생각에 빠져 있는 건지 모를, 허공을 응시하는 최이사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다. 가뜩이나 길게 찢어진 편인데다가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작아 보이는 눈이다. 아예 감고 있는 게 아니란 건 그 안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 순간적으로 빛났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기억하십니까? 몇 달 전 기업설명회 때 해외부분으로의 서비스확장을 야심 차게 발표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었지요. 나는 상장 전에 일시적인 호응을 얻으려고 오랫동안 기업설명회를 준비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날 발표했던 내용들은 전부 근시일내에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실적은 어떻습니까?
경영진들은 전작 중요한 사업에는 신경을 못 쓰고 인수합병에 대해 방어하고 역공격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나부터도 작전세력을 끌어들이는 일에 힘을 소진하며 애초에 목표로 하던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요. 물론 우리의 방법이 최선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때문에 더욱 더 부진한 실적이 못마땅한 겁니다.“

“......”

“나는 여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습니다. IL은 좀 더 커야 합니다. 고작 동종업계에서 ‘모 회사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기업’ 따위의 타이틀로 안주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안이한 사고를 가진 경영진이 IL에 있어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번 인수합병 건은 아마 흐지부지 끝나겠지만 이후부터 내 싸움은 시작인 겁니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최이사를 돌아보았다. 꽤나 열정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의 표정은 메뉴판이라도 읽고 있는 얼굴이다. 그래서 처음엔 이야기의 내용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요지를 파악한 찰나, 식은땀이 흐르면서 어떤 가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야 설마. 말도 안돼.  

“......최이사님?”

“말씀하세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아마 뚫어져라 이사를 노려보고 있을 거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이 말도 안 되는 의심이 자꾸 나를 괴롭힌다. 나는 입을 열어 의심을 구체화했다.  

“그날 박전무님께서 제게 심부름을 시켰던 그 때,
그 봉투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었던 겁니까?”

“......”

“이사님께선 워레스의 경고를 사장에게 알리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 아닙니까?
혹시, 혹시 말입니다. 워레스가 사장님을 신고한 자료의 출처가......”

“김서경씨 휴가는 언제죠?”

“......네?”

이사가 피곤한 듯 뿔테 안경을 벗으며 미간과 콧잔등을 주물렀다.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을 못했다. 일부러 질문을 차단한 것을 눈치 챈 나는 입을 다물고 이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렌즈까지 닦은 최이사는 안경을 다시 걸치며 내 얼굴을 보았다. 진지하지만 내가 껄끄러워하는, 어딘가 인간미가 떨어지는 그런 표정이었다.

“슬슬 휴가철이지요. 날짜는 제가 임의로 잡아놨는데 어떠십니까. 동남아라도 나가서 푹 쉬다 오세요.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겁니다.”

품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내게 내민다. 영문을 모르고 봉투 안을 들여다본 나는 얼굴이 굳어버렸다. 얇은 봉투 안에는 백만원권 수표 세 장이 들어 있었다.

“내가 큰 돈을 뽑을 여유가 없어서 그 정도밖에 못 해주게 됐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벌떡 일어날 뻔했다. 멱살을 잡아 이게 무슨 수작이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단순히 그동안의 팀워크(그걸 팀워크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에 대한 보상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잘라낸다는 느낌이 강했다. 빌어먹을 내가 핵심을 찌른 거 맞지? 대답해 주기 싫다면 그렇게 말할 것이지 이게 대체 무슨 수작입니까 이사님? 설마 이거 작별인사인 겁니까? 이제 쓸 만큼 썼으니 자른다는 뜻입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사실 오늘 만나자고 한 진짜 목적은 이거였으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제가 짐작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최이사가 웃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웃는 얼굴은 처음 본다. 그래봐야 여전히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부디 그 웃음이 나를 향한 비웃음이 아니길 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일종의 입막음료라고 해두지요.
이번 일...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워레스와 사장 사이에 의견이 틀어지면서 새로운 해법을 찾다가 결국 워레스 사람들의 제안에 넘어가버린 거지요. 나도 상당히 욕심 많은 인간이었나 봅니다.”

희미한 자조. 이사는 누구를 향한 쓴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막간의 침묵 속에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워레스에게 접근한 것은 최이사였다. 최이사와 워레스가 짜고 사장의 비리를 폭로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장을 배신할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그땐 사장이 정치인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마크플랜과의 공방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고 하던 때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건 지금 워레스와 최이사는 한통속이라는 거다. 어쩌면 워레스의 해외 도피설도 위장인 걸까? 그럼 권이도는? 권이도는 왜 조사를 받고 있는 건데? 최이사는 권이도를 버릴 생각인가? 워레스는 자신들의 친구인 권이도를 버리면서까지 최이사와 손을 잡은 거야?

두뇌가 회전하는 속도를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엉킨 실타래를 망연히 놓아버리면서 이사를 바라보았다. 사장을 고발하자고 부추긴 것은 워레스 쪽인 것 같은데 최이사가 워레스에게 끌려 다니는 것 같지도 않고...

이사님, 대체 당신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들어 있습니까?

“김서경씨.”

“......네”

“나는 결과가 뚜렷이 나오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미리 말하지 않는 주의에요.
그렇지만 걱정 말아요. 김서경씨에게 나쁜 일은 없을 겁니다.

이사는 다시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질리는 사람이다. 내가 무슨 억측을 해도 상관없다는 자세. 아니면, 내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거라고 생각 하는 건가. 나는 마음속에 고인 앙금을 털어버리듯 잔에 남은 소량의 알콜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식도로 넘겼다. 얼추 상황은 파악되었다. 꼬치꼬치 캐묻는다 해도 이사가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르쳐줄 것 같진 않다. 나는 바텐더를 불러 좀 더 독한 술을 시켰다. 쓰고 뜨거운 액체가 복잡한 속을 깨끗이 씻어내려 줬으면 좋겠다.

지루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최이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계산 준비를 한다. 처음부터 일행이 아닌 것처럼 술을 마셨고 계산도 더치페이다. 카운터로 향하는 최이사가 등 뒤를 지나가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권이도씨는 곧 의혹이 풀릴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아아 정말 얄미운 사람이다.
내가 그 말을 기다리느라 이렇게 뜸을 들였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야 이야기를 해주다니.





*                *                *





저녁을 먹고 소파위에 늘어져 있었다.
마침 뉴스에선 모정치인의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장은 그 정치인의 비리에 연루된 인물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다른 기업체 CEO 혹은 판검사 중에서도 수사대상이 되는 인물들이 줄줄이 딸려 나왔으니까. 다만 우리 회사의 경우 좀 더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버렸다고나할까 뉴스에 나와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고 목소리 변조되어서 인터뷰하는 누군가는 박전무다. 어이구 정말 일이 어떻게 돌아가려나.

“어? 저거 형네 회사 아니야?”

설거지를 끝낸 치현이 내 옆으로 걸어오며 텔레비전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하면서 손짓으로 치현을 불렀다. “왜?”하고 다가오는 녀석을 다리사이에 앉히며 바싹 끌어안았다. 등 뒤로 안긴 치현은 당황하며 젖은 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듯했지만 상관 않고 나는 그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아이는 권이도가 조사를 받는 줄 모른다.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함구하고 있었다.

따끈한 체온이 허전한 앞가슴을 채운다. 두 팔 가득이 들어오는 녀석의 몸은 딱딱하고 듬직하다. 답답한지 몸을 이리저리 뒤틀 때마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근육의 움직임이 간지럽다. 평소 같았으면 심란한 마음을 안고 폴리곤으로 직행해서 거친 섹스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을 테지만 그것으로 근본적인 마음의 정리는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어...형?”

“가만히 있어봐라.”

꿈틀대는 녀석을 진정시키려고 가슴을 톡톡 두들겼다. 뉴스는 이미 다른 기사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를 음악으로 삼으며 품에 치현을 안은 채로 좌우로 흔들흔들 거렸다. 늘어진 고양이를 안고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어 쉬고 있는 할머니가 된 기분이다. 그래도 마음은 안정된다. 치현이도 내 기분을 느꼈는지 얌전하다.

아늑한 냄새.
혼자 고민하고 안달하고 걱정했을 때보다 누군가에게 몸을 기댄다는 것이 이렇게 안심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최이사의 말대로 다 잘 될 거다. 좀 수상쩍긴 하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물론 자기 입장 나빠지면 나 하나 팔아먹는 거야 식은 죽 먹기겠지만 나를 팔아서 최이사가 이득 볼 일은 지금으로선 전무하다.
어쨌거나 오늘은 즐거운 금요일 저녁이다. 주5일제여 만만세.

손안의 몸을 음미했다. 목덜미를 물고 빨고 핥았다. 손바닥으로 가슴과 배를 쓸어내리며 양 허벅지로 녀석의 몸을 조였다. 상체를 예민하게 어루만지고 바지버클을 푼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손을 티셔츠 안으로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닭살 돋은 피부가 울렁인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면 허리가 짧게 튄다.

“윽......저기 형... 작은방 치우는 거 아직....안...끝났......”

치현의 숨이 거칠어지며 귀여운 소리를 낸다. “응? 요 며칠 동안 계속 청소만 했잖아 아직도 안 끝난 일이 있어?”하며 능청을 떨었다. 같이 살기로 한 날부터 일주일도 넘었지만 그동안 치현은 꽤나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삿짐을 꾸리고 앞으로 자기 방이 될 작은 방을 치우는 일도 혼자 했다. 회사 다니느라 낮엔 시간을 낼 수 없던 나는 도와줄 수 없었다. 천천히 같이 하자고 했지만 치현은 작은 방을 치우는데 상당히 열심이었고 며칠 전부터는 고깃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부족한 살림에 혼자 사는 게 몸에 익은 모양인지 치현이는 나이답지 않게 매우 알뜰했다. 거의 창고처럼 쓰고 있는 작은 방의 온갖 잡동사니 중 버릴 것은 버리고 쓸만한 것은 고쳐서 내게 자랑하곤 했다. 그러니 작은 방 청소가 늦어질 수밖에. 이사할 때도 ‘몸만 오라‘고 큰 소리를 쳤다가 잔소리만 잔뜩 들었다. 왜 멀쩡한 물건 놔두고 새로 사려고 하느냐고. 의외로 빠릿빠릿한 데가 있잖아?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끌어안으면 영문도 모르고 놀림 받았다고 생각한 치현은 이마에 주름을 그리는 것이다.   

나른하게 풀어지는 긴 팔과 다리는 눈요기가 된다.
반쯤 풀어진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한숨이 귓가로 녹아들면 나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트레이닝복의 허리밴드를 슬쩍 들어올리고 슬금슬금 용감한 오형제들을 보낸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낮은 포복을 하며 브리프의 끝자락에서 맴돌 때에 불룩 솟아오른 하체의 튼실한 물건이 고개를 치켜들며 무기모드로 돌변하려한다.

속옷 안의 음모를 결과 반대로 쓸어 올리기를 반복했다. 늘 한 방향으로 향하던 음모가 갑자기 반대편으로 쓸어 올려지는 것이 꽤나 감질나는 쾌감을 주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만질 때의 기분 좋음과는 또 다른 아슬아슬함. 금방 달아오르고 또 좀처럼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 치현의 몸을 페팅하며 며칠간 학습한 결과다. 녀석도 다음날 출근인 나를 생각하느라 그동안 섹스의 ABC에서 B단계만으로 만족해주었다. 품안에서 끼잉 거리는 녀석을 보는 것만으로 즐거워서 최근 매일, 녀석을 품에 안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흐으...윽..”

턱이 떨리고 입술을 깨문다. 나는 녀석의 입술이 다칠까봐 손가락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딱딱한 치아가 손마디를 간질이고 물컹한 구강의 혀와 점막이 손가락에 얽혀든다. “으......짜....”작게 반항하는 녀석을 괴롭히듯 입안을 휘저었다. 작은 콧소리가 등줄기를 찌릿하게 만든다.

“참지 마”

지난 며칠간 달랜 단어다. 녀석은 힐끔 눈치를 몇 번 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며 방출한다. 입이 열려 있는 탓에 신음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저도 자기 신음 소리에 놀랐는지 힉-하고 몸을 움츠렸지만 사정의 해방감은 녀석의 몸을 어눌하게 만들었다. 품안에 늘어진 녀석을 안고 다시 좌우로 흔들흔들, 흐흐흥~하는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왠지 불공평해.”

“뭐가?”

“나만 우스운 꼴이 되잖아. 형은 하나도 안 흥분하면서.”

“무슨 소리야. 방금 거 아주 자극적이었다고.”

놀리면서 볼을 꾸욱 눌렀더니 제법 화가 난 듯이 손을 쳐낸다. 사정액을 티슈로 닦아내고 옷을 추스른 치현은 삐친 표정 그대로 거실 구석에 주저앉았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씻으러 가는데 구석에서 웅크린 치현이 무언가 집어 들고 꾸물거린다. 흘끔 봤더니 작은 방에서 나온 고물 청소기다. 콤팩트 사이즈의 진공청소기로,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고 구석구석의 먼지를 흡입하는 용도이지만 예전에 고장 났던 걸 작은 방에 그대로 방치해 둔 물건이었다.

“그런 거 버려. 뭐에 쓰게?”

“나 참, 버리긴 뭘 버려! 멀쩡한 물건을!”

아직도 삐쳐있는지 치현이 성질을 내며 드라이버로 청소기를 분해했다.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씻고 나오니 거실에 위잉-하는 기계음이 시끄럽게 울린다. 정말로 고쳤네?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는 치현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방금 사정한 놈이 무드 없게 뭐하는 거냐?”
  
“아직 작은 방에 치울 거 많다고 그랬잖아.”

입을 비죽 내밀며 이마를 감싸 쥔 치현이 오늘따라 쌓인 게 많은지 물러나지 않으며 노려본다. 호오? 그 눈빛은 불만투성이렸다? 나는 으하하 웃으면서 부루퉁한 치현의 얼굴을 품안으로 감싸 바닥을 굴렀다. “형! 다 큰 어른이 무슨 추태야!” 레슬링 시합에서 항복을 의미하듯 바닥을 팡팡 치는 치현을 끌어안으며 거실이 떠나라 웃었다.

마음속의 불안함을, 권이도에 대한 걱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다쳤던 권이도의 상태가 걱정 된 치현은 내 눈치를 보며 전화 한번 해야 하지 않겠냐고 묻곤 했다. 그동안 자기한테도 나한테도 연락이 없다는 게 이상한 모양이다. 권이도가 끼어 버리면 우리 셋이 묘한 관계가 되기 때문에 치현이도 차마 내가 없는 곳에서 연락 하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누구 하나 개인적으로 전화하면 마치 바람피운다는 느낌이 강해서일까.
  
나는 결국 치현에게 권이도가 조사 받는 중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함부로 전화했다가 치현이까지 조사대상이 되면 굉장히 곤란해질 거라고 한숨을 쉬며 말하자 치현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기랄,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면서 걸리기나 하고!”라고 말하는 걸 보니 아직 혐의가 인정된 것도 아닌데 확신하는 모양새다. 차마 나도 그 범죄에 가담했다는 소리는 못했다.

“잘됐지 뭐. 그런 자식 콩밥 좀 먹어야 돼.”

치현이는 내 품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녀석의 몸이 살짝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하여간, 언젠가 범죄를 저지를 것 같더라니”“그런데 그 자식 백도 있으면서, 생각보다 시원찮은 백이었나 보네”하고 중얼중얼 투덜투덜......나는 치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걱정해도 돼.”

치현의 중얼거림이 사그러들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손이 멈추었다. 맥이 빠진 채 길게 숨을 내쉰 치현은 등을 좀 더 내게 기대었다. 아, 이 자세 편하다. 치현이가 내게 기대고 나는 소파에 기대고...서로가 서로에게 깊게 묻히는 느낌.  

"...바퀴벌레 같은 자식이니까 괜찮을 거야.“

치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혼자 살기에 넓은 이 집은 내가 막 입사해서 정신없던 신입사원 시절, 원룸을 구할 시간도 없이 일에 쫓겨 있는데 부모님께서 집 좀 알아봐 주겠다며 나섰다가 대뜸 아예 신혼집으로 쓰라며 떠넘겨준 집이다. 집을 받고 이 큰 집을 나 혼자 뭐에 쓰냐고 항의했지만 이참에 정착하라는 말만 하고 해외로 나가버리셨다.‘이걸로 부모노릇 다했다~‘하고 시원해 하시는 걸 보면 부글부글 끓는 달까. 하지만 이 집이 부모님 나름대로의 결혼준비금이라고 생각하니 팔기도 뭐했고 또 그럴 시간도 없어서 줄곧 살았는데 나름 익숙해지자 몸이 편해서 오늘 이날까지 짊어지고 온 마이스위트 홈이다.  
이전엔 몰랐는데 막상 둘이 살려고 하니 깨달았다. 이 집은 역시 혼자살기엔 너무 넓었다고.

옆자리에 누워 있는 치현을 내려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내 페이스를 되찾았다. 며칠 전 치현과의 첫날은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 있던 데다가 녀석의 체력을 간과한 탓에 K.O.되어버렸지만 어제는 작정을 하고 제 실력을 발휘했더니 천국이 따로 없다. 아주 끝내주게 좋았다. 특히 제일 좋은 것은 정상위로 했을 때 호흡을 따라 움직이는 치현의 복근이었고 후배위로 했을 때 피스톤질에 맞추어 움직이는 등줄기의 리드미컬함. 간밤을 생각하니 온 몸이 다 노곤노곤하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제가 먼저 넣겠다고 유혹하지도 않아서 내심 안심했달까. 나야 치현이라면 바텀도 환영이지만 그 크기는 좀......솔직히 펠라할 때도 힘들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 때 내가 어떻게 이걸 뒤로 받았을까 하고 오싹한 소름까지 돋을 때가 있다.

머리가 까치집이 된 녀석의 자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려보았다.
웅얼대며 몸을 돌려 눕는다. 돌린 등에는 자잘한 흉터가 창을 타고 넘어오는 아침햇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을린 갈색의 등. 아직 어린나이에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녔길래 이렇게 몸이 탔냐고 했더니 작년 여름 해변에서 아이스바 장사를 하며 살았다는 얘기를 듣고 미안하지만 웃어버렸다. 저 험악한 인상으로 장사라니, 얘기를 듣자니 아는 형들과 같이 했다는데 처음에는 웃다가 나중에는 그 중 한 형이 아이스바 판 돈을 들고 날랐다는 얘기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의 불운이 나를 만나기까지의 액땜이기를 바라며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흐물거리는 두 다리를 겨우 일으키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오니 시계는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시간에 전화를 받을까? 토요일인데 그 녀석들도 주5일제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출근시간은 몇 시? 그래도 9시가 넘었는데 상담전화는 받고 있겠지?

마음을 굳히며 수화기를 들었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침실에서 핸드폰을 가져왔다. 핸드폰 번호가 노출된 판국에 집 전화번호라고 모를 리 없겠냐마는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후...뭐하나 정보가 누출되면 어쩌나 노심초사해야 하다니 역시 조폭은 싫다.

상담원 연결의 9번을 눌렀지만 아침이라 그런지 한참의 신호가 간 뒤에 전화를 받는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대기음악이 멈추고 예의 그 예쁜 목소리의 아가씨가 경쾌하고 발랄한 음성을 날렸다.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GOGO 익스프레스입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재현 주임님 부탁합니다”

잠시간의 침묵. 나는 발랄하던 아가씨의 반응이 늦어지자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곧 ‘아...안재현 주임님 말씀이십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하는 멘트와 함께 내선번호 돌리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연결이 너무 늦네.

앗, 혹시 지난번 일이 잘못 되서 정말로 구속된 거 아니야? 나는 진형의 놈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등장한 걸로 봐서 잘 해결된 줄 알았는데? 오오 아직 우리나라에 법과 정의가 죽진 않았구나!......라고 생각하기엔 재현이한테 너무 미안한데......

재현이가 내색만 안했다 뿐이지 전과 몇 범은 될 놈이다. G캐피탈 시절, 녀석이 무슨 수를 썼는지 돈 없다고 버티는 사장님들에게서 잘도 수금해온 것을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그 때 콤비가 진형이었는데......아이고 녀석을 생각하니 다시 머리가......

-서경이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양반은 못될 놈. 아니, 그것보다 왜 네가 재현이 전화를 받는 건데?

“재현이는? 드디어 구속된 거야?

-아직 근신 중이다. 왠지 구속되길 바라는 사람 같군.

아하하 설마....웃으며 얼버무렸더니 왜 전화했냐고 따진다. 그보다 왜 재현이한테 걸려온 전화를 네가 받는 건데? 너 재현이랑은 같은 사무실 쓸 군번 아니잖아. 아까 상담원이 연결했을 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도 수상해. 젠장, 혹시 나한테 전화 먼저 오는 거 벼르고 있었나.

“......안재현이랑 거래한 거야. 너는 빠져.”

-그 녀석 근신기간이 더 늘어날 것 같군.

끙-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은 재현이가 편한데.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불만이 입에 줄줄이 달렸지만 뒤끝 없는 놈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됐으니 할 수 없군.

“계좌번호 불러.”

-뭐?

“일이 그 모양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거래는 거래니까. GOGO 익스프레스 의뢰비 입금할 금액이랑 계좌 부르라고.
그동안 정신없어서 빨리 연락은 못했지만 절대로 떼어먹을 생각은 없어.
난 재현이가 정장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한손엔 007가방, 한 손엔 잭나이프 들고 우리 집 찾아오는 거 사양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풋-하는 비웃음이 들린다.

-고작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에이 아는 사이에 바가지 씌우기냐?”

녀석들의 고질적인 바가지요금은 나도 눈앞에서 본 바 잘 알고 있다. 거래상대가 만만한 일반인이면 더욱. 내 비록 힘없고 백 없는 일반인이지만 수틀리면 G캐피탈 시절 저질렀던 비리 몇 개 정도는 경찰에 찔러 넣어 줄 의향이 있다.
......그럴 용기는 없지만.

-애들 서른 명이 동원됐다. 재현이까지 구속될 뻔했고 변호사 고용비랑 윗분들 구워삶느라 들어간 돈만 해도 얼마라고 생각하는 거냐? 무성파와의 협정비용은? 미성년자가 조직 간의 싸움에 휘말린 기사가 언론에 새어나가 신문 가쉽란에 실려 버린 건? 권이도란 형씨가 데려온 검사랑 협상에 실패해서 아직도 검찰의 주시를 받아야 하는 보상은? 펄펄 뛰는 형님들을 설득하느라 내가 치러야 했던 대가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침만 꿀꺽 삼켰다.
고저 없는 목소리지만 내용만으로 충분히 어마어마하다.

-그걸 돈으로 환산해서 네가 보상할 수 있나?

“미, 미안하다......”

-......어차피, 너는 조직 폭력배 같은 건 자폭 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할 테지.  

암담해진다. 돈은 공짜로 얻는 게 있으면 그만큼 잃는다더니 주식이고 뭐고 고스란히 날리게 생겼다. 아니, 돈도 돈이지만 한때 사귀던 사이에 안 좋게 헤어진 놈에게 피해만 잔뜩 끼쳤으니 녀석이 폭력배인 것을 떠나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의가 아니었건만 일이 이렇게도 꼬일 수 있구나. 오히려 그동안 연락한번 안 한 진형이의 참을성에 경의를 표할 정도다.

-그리고 네 옆에 나란히 있던 두 놈에 대해 조사 좀 해봤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는데 진형이 잠겨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잘못한 건 나다. 보복을 하고 싶다면 나한테 해야지 그 두 사람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건 말도 안 된다!

-특히 그 중 한 녀석이 아주 웃기는 프로필이더군. 지방 유지의 아들 주제에 객지에 나와...

“스토---옵!!!!”

-......

“미안해. 나 때문에 피해본 건 알겠어. 그런데 왜 네가 그 두 사람 뒷조사까지 하는 거야?
저기, 있잖아. 나 하나로 끝내자. 돈은 내가 구할 수 있는데 까지 준비할 게. 우리 아무 죄 없는 시민까지 피해 입히지 말자고. 너네 사장이 월요일 아침마다 했던 말 있잖아. 불법으로 등을 처먹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합법적인 대가를 주고받는 지능적인 사업을 해야 할 때라고. 그런 포부를 갖고 시작한 G캐피탈이 GOGO 익스프레스로 성장한 거잖아? 그러니 우리 초심을 잃지 말고......

-지금 내 앞에서 그 두 놈을 감싸는 거냐?

이런 말귀 어두운 놈. 지금 핵심은 그게 아니잖아!

-별로 보복할 생각 같은 건 없다. 그런데 쓸 돈도 시간도 여유도 없고.

“......”

-너 답지 않게 새파란 어린애를 데리고 있기에 흥미가 생겼던 것뿐이야. 여전하더구나. 아니 더 심해졌어. 양손에 하나씩 꿰어 차다니, 오히려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양다리는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슬프다.

“내가...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내 집에 한번 들러라. 이사했으니까 나중에 주소 가르쳐주마.

끄응-하는 신음 소리를 목구멍으로 삼키며 머리를 북북 긁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냐. 이거야말로 너 답지 않다. 이진형.

“아래애들이 불만 가질 텐데. 호모형님 싫어하잖아. 너네 애들.

-그 정도 불만에 흔들릴 자리 아니다. 사생활정도는 보장되니까.  

으아아....이거 곤란하다 곤란해. 이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래도 이런 일은 미리 못 박아 두는 게 좋다. 나는 눈을 꾹 감고 밤거리에 뒷치기 당할 각오를 하며 빠르게 내뱉었다.

“확실히 말하지만 난 너한테 미련 없다. 예전의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어.”

-알아. 이건 거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너한테도 편하겠지.

뜨거워진 핸드폰을 슬쩍 귓가에서 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몸으로 갚으라는 소리로 들려서 기분이 찜찜하긴 하지만 잔뜩 폐를 끼친 주제에 한번 찾아가서 공치사라도 해야 이 찜찜함이 풀릴 것 같아 알겠노라고 승낙을 했다.‘그래‘라고 말한 내 목소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넌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가보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나?

“뭘 말이야.”

-네 옆에 있던 꼬마.

“뭐가 문젠데?”

-기가 막히게 운 나쁜 놈이다.
어린놈이 사채 끌어다 쓴 흔적도 있고 명의 빌려줬다가 사기당한 전적도 있군. 오래 해본 아르바이트도 없지만 안 해본 일도 없어. 그만한 부모님을 두고도 그렇게 고생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그 문제라는 건 대부분 녀석의 애인 때문에 생긴 거지?

-알고 있었나?

“지금은 괜찮아. 내가 그녀석의 애인이니까.”

아차, 말해놓고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권이도의 프로필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늘 자신만만한 작자니까 뒤에 뭔가 백이라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던 중이다. 진형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무덤덤한 소리로 말했다.

-그 꼬마에 비하면 재미없는 프로필이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석사를 밟은 뒤 한국 D증권에 입사. 유학파들과의 연줄은 제법 되는 것 같지만 집안도 한국보다는 미국에 적을 두고 있어서 한국에서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아. 그렇지만 요령은 좋은 모양이더군. 이번 사건에서 딱 구속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케 무혐의처리가 되었어.

응?

“자, 잠깐 무슨 소리야 무혐의? 벌써 결과가 나온 거야?”

-오늘 아침 신문, 안 봤나?

그제야 현관의 우유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오늘자 신문에 눈이 갔다. 재빨리 달려가 신문을 뒤적였지만 마음이 급한 탓인지 얇은 토요일자 신문에서 그에 관한 기사를 찾기 힘들었다. 아, 사장님기사다. IL 대표이사 김한곤에 대한 검찰의 조사가 계속되는 가운데....에......어 여기? 여기다!

신문을 읽고 있는 손이 나도 모르게 떨렸다. 「......D증권 권모(34)씨에 대해서는 주가조작에 공모한 사실이 없다고 보고 무혐의 처리......」이 부분의 활자만이 20포인트 고딕체로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권이도가 무혐의 처분을 받는 것과 동시에 소속사인 D증권 역시 면책을 받게 됐다. 이야 권이도 잘됐잖아. 나이도 한살 어린 만 나이로 나오고 말야.

“......하...”

다리가 풀어진다.
나 이만큼 걱정하고 있었나. 최이사의‘잘 될 거다’라는 말을 믿고 있긴 했지만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이사의 말이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말이네. 방금 확인했어. 알려줘서 고맙다.”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핸드폰을 들고 진형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아아 이제야 상쾌한 기분이다. 건너편의 진형이가 수상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별로 무섭지 않다. 이제 진형에게 볼일이 없어진 나는 좀 더 밝아진 목소리로 “그래, 언제 어디서 만날까?”하고 물었다.  

-......너 정말......

“어...왜?”

-...아니다. 시일과 장소는 나중에 따로 연락하겠어.

나는 소파에 늘어져서.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녀석, 용건이 끝났으면 전화를 끊을 것이지 계속 수화기를 붙잡고 있다. 나야 폐를 끼친 입장이라 먼저 끊기 뭐해서 녀석이 먼저 끊자는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상대방이 아무 말 없이 수화기만 들고 있으니 슬슬 답답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놈이라 마치 수화기 건너편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진 않다.

침묵이 버거울 때쯤 한 가지 진형이에게 따져볼 것이 생각났다.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만 말할 타이밍을 못 잡고 있었는데 이렇게 오랜 침묵이 이어지니 번뜩 생각나는 것이다.
맞아 맞아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진형아.”

-왜

“너 지난번부터 왜 계속 너, 너 그러냐? 내가 너보다 두 살 위인 거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입을 못 열던 수화기 너머의 이진형은 조용히 한마디만 하고 끊어버렸다.

-그럼 다음에 연락하지.

나이 얘기 나오니까 도망가는 거냐. 어린애 같은 놈.





*                *                *





“형 일어났네? 밥 먹을까?”

머리를 긁적이며 방에서 나온 치현이 세수도 안하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며칠간 녀석의 패턴을 파악한 결과 먹을 것을 엄청 챙긴다는 결론이 났다. 예전에 레스토랑이며 맛집 따위로 데리고 다닐 때도 잘 먹는 다고 생각했지만 '맛있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많이 먹는 것‘, ’꼬박꼬박 먹는 것‘에 중점을 두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 음식의 질이 아니라 양에 중점을 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드는 것이다. 혼자 사는 자취생은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둔다더니 완전 동면을 앞둔 곰이 따로 없다. 그렇게 먹으면서 저 몸이 유지되는 게 신기하지만 아무튼 녀석의 먹성은 알아줘야 한다.

나는 방금 진형이 말한 지방 유지의 아들 어쩌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고장 난 청소기를 고치고 득의양양한 모습에선 부잣집 도련님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부잣집이면 뭐하나. 장남이 저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연락한번 안하는 부모면 뻔한 거 아냐?

치현인 자기 집안 얘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드문드문 흘리는 얘기를 더듬어 보면 게이라는 게 들켜서 골프채 맞고 쫓겨났다고 그랬다. 그러고 보니 애인한테 통장과 신분증을 도둑맞고 사기 당한 전적도 있다. 그 길로 집에선 완전히 내 놓은 자식이 되었다던가. 하지만 어머니하고는 연락하는 것 같던데....다달이 생활비 하라고 아버지 몰래 돈을 넣어주신 다고 했던가.

가스렌지에 불을 올리고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가 나는 걸보니 정말 씻지도 않고 밥부터 먹을 생각인가 보다. 대충 세수하고 양치질 한 후 부엌에서 생선을 굽고 있는 치현에게 갔다. “먼저 씻기나 해.”아직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욕실로 들어가는 치현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침은 된장국에 조기구이. 마트에서 사온 김치와 어제 해놓은 두부무침. 혼자 살 때 아침을 이렇게 챙겨먹는 일은 흔치 않은데 먹성 좋은 녀석이 같이 있으니 이 정도면 아침 식단치고 푸짐한 편이다.   

“권이도 무죄래.”

“뭐?”

“무혐의 처리 됐다더라. 다행이야.”

두부를 씹고 있던 치현의 눈이 동그래진다. 입까지 쩌억 벌리려다가 음식을 씹고 있던 중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는지 황급히 입을 막는다. “정말이야? 언제? 언제 풀려났대? 이제 감방 안가도 되는 거야?”입을 가리며 속사포처럼 내뱉는 녀석을 보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녀석은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는지 잘됐다잘됐다를 연발하며 밥을 먹다가 내 얼굴 보다가 웃음을 참으려다가 물을 마시느라 정신없었다. 그동안 내색은 안 해도 치현이 많이 걱정했다는 걸 안다. 물 먹다 사래들려 켁켁 거리는 녀석의 등을 두들기며 나도 같이 잘됐다고 중얼거렸다. 하여간 권이도 당신 안 보이는 곳에 있어도 우리둘 신경 쓰게 만드는 것은 타고 났어.
마음속으로 타박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럼 형, 한 번 찾아가봐야 되는 거 아냐?”

그래, 나도 생각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그냥 전화나 한통 넣지 뭐....이런 식으로 얼버무렸더니 치현이 그러면 안 된다고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짭새들한테 시달렸으면 위로를 해줘야 한다면서 전화로는 너무 무성의하다는 것이다. 경찰이 아니라 금융감독원인데....그 구분을 알려줬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어쨌든 시달린 건 맞지 않냐고 항의한다.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럼 이따가 같이 나갈까?”

그동안 걱정했으니 얼굴도 볼 겸 한번 찾아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치현이와 함께라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데 치현이가 머뭇거리며 곤란해 한다.   

“아...나는 좀...”

“왜? 너도 걱정 많이 했잖아. 참, 아르바이트 때문에?”

“아니 그런 아니고. 오늘은 주말 근무하는 애들이 하긴 하는데...”

그러고 보니 치현이 일하러 가는 시간대는 내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에 맞춰져있다. 게다가 평일 알바라...... 내 일정에 따라 짠 게 분명하다. 퇴근하고 들어오면 막 씻고 나와서 저녁 차리는 치현이를 보는 것이 요 며칠간의 큰 즐거움이었던 걸 떠올리니 괜히 흐뭇한 마음이 몽실몽실 일어난다.  

“그럼 더 잘됐네. 같이 가면 권이도씨도 반가워할 거야.
오후쯤에 미리 연락하고 같이 나가자.”
  
꾸물꾸물 핑계거리를 생각하는 듯 하던 치현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오늘 짐오는데...”

“응?”

“어제 얘기 했잖아. 오후에 이삿짐 오기로 했다고......”

엥? 아니?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치현이 눈을 말똥말똥 뜨며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어제 최이사 만나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가 저녁 먹고 뉴스보고 치현이 끌어안고 빈둥대다가...에...그 뒤로 베드인해서...음......

“생각 안 나? 세 번째 한 후에 내가 형한테 말했는데. 혹시 그때 자고 있었던 거야?”

움찔.

“그때 알았다고 말하면서 도와준다고 했는데...그거 그냥 잠결에 대답한 거였어?”

“아아, 생각났다. 생각났어. 잠깐 깜박했나 봐”

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니까 권이도한테는 형이 갔다와. 난 정리하고 있을 게.“라고 말한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 그래“ 하고 대답해 버렸고 억지로 웃으면서 다 먹은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치현이도 마저 남은 밥을 먹느라 고개를 숙였을 때 내 이마는 일그러진 주름을 그리며 찌그려졌다.

기억 안 나!

나는 세 번째였지만 치현이는 다섯 번? 여섯 번? 인가 그랬다. 분명 둘 다 지쳐서 만족스럽게 잠이 든 것 같은데 또 언제 그런 얘기를 했다는 거지?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으면서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설마 내가 치현이 체력을 못 따라 가는 건 아니지?

입기가 실룩실룩 거리면서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치현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부지런히 식탁을 치우는 치현이의 얼굴을 보면서 마냥 웃고 싶다. 아침에 느꼈던 끝내주게 좋았던 기분이 왠지 울적해지려한다.
  




*                *                *





오후에 이삿짐이 온다기에 치현이 전에 살던 집에서 짐 옮기는 거나 거들려고 했더니 포장이사라서 신경 안 써도 된단다. 이사 비용도 자기가 지불하고 이사업체랑 계약하는 것도 전부 치현이 혼자서 해버려서 나는 할 일이 없었다. 회사 다니느라 발품 파는 일을 할 짬이 없었다지만 그래도 왠지 어색하다. 나는 하나하나 내가 다 해줘야 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이삿짐이 오기 전까지 비는 시간을 이용해서 권이도네 집으로 방문할 겸 차를 몰고 나왔다. 치현이는 무슨 꿍꿍이 속인지 기어코 나를 혼자 보냈다. 나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권이도와 놀아나도 상관없다는 건지.....묘한 아쉬움과 씁쓸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거의 보름 만에 찾아온 오피스텔 근처에 잠시 차를 주차 해 두고 눈여겨 봐두었던 공중전화부스를 찾았다. 요즘 핸드폰 때문인지 고장 난 채 방치 된 공중전화가 한둘이 아니지만 다행히 내 눈 앞의 전화는 비록 먼지에 가라앉아 있을지언정 고장 나진 않은 듯했다. 게다가 고맙게도 동전전화기다. 나는 수화기의 먼지를 대충 손으로 털어내며 권이도의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무리 혐의를 벗었다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기 때문에 굳이 내 핸드폰은 쓰지 않았다.

이러고 있으니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실없던 농담이 떠올랐다.

‘시간과 공간을 제약받는 공중전화로 통화하는 것도 꽤나 로맨틱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게 매도 타이밍을 알려주기 위해 전화했던 날이었다. 일부러 공중전화를 이용한 건 자신이 조사를 받게 될 거라는 걸 눈치 채고 그랬던 걸까. 제멋대로에 뻔뻔한 주제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배려를 해준다. 예측하기 힘든 작자...느물느물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좀 덜 구박했을 텐데.

-여보세요.

반가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목소리 못 들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괜히 코끝이 시큰해진다. 권이도는 내가 말이 없자 목소리에 의아함이 어렸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접니다.”

수화기 너머의 권이도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다행히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좀 만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러지요. 한 시간 뒤에 잠실 근처로...어떠십니까?

“지금 권이도씨 집 앞입니다.”
   
-......

“802호지요? 올라가 봐도 되나요?”

-...집이 많이 어질러져 있는데....

“괜찮습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원래 어수선한 거지요.”

-그럼 30분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꼴이 말이 아니라서...

“그러지요. 30분 뒤에 올라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수화기를 얌전히 내려놓고 임시로 세워둔 차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주차했다가 10분 정도 라디오를 들은 뒤...차에서 내려 오피스텔로 향했다.

30분만 기다려 달라고? 딴소리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집 앞까지 와서 전화한건데  어떤 몰골인지 몰라도 이 기회를 놓치면 섭섭하지.





벨을 누르자 역시나 반응이 없다.
일부러 성급한 티를 내며 다시 벨을 눌렀다. 한동안 끈기 있게 기다리자 철컥-잠금쇠를 푸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얼굴은......
......당신 누구야?

“왜 이렇게 빨리 올라 온 겁니까? 아직 다 씻지도 못했습니다.”

투덜거리며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는 남자는 한숨을 쉬며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렸다.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위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안경도 안 쓰고 머리는 뒤죽박죽에 눈 밑은 시꺼멓게 죽어서 까칠한 수염까지 난 권이도는 굉장히 생소하다.

“아직 정리가 안 되서 상당히 지저분합니다. 뭐 마실 거라도 드릴......
하아 냉장고가 텅 비었군요.”

권이도가 주방으로 사라진 사이 나는 천천히 원룸을 둘러보았다.
낡은 오피스텔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배를 새로한 모양인지 벽지도 깨끗하다. 현관 쪽에서는 잘 안 보이도록 배치된 커다란 더블베드 침대는 내 침대의 두 배는 될 듯했고 원목으로 된 책상과 책장이 벽 한쪽을 죄다 차지한다. 옷장도 프로젝션TV도 시원하게 컸지만 소파는 무난한 사이즈에 모던한 디자인. 있을 건 다 있지만 무언가 허전해 보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액자나 화분 같이 작은 소품이 없는 탓일 게다.
  
방 두 칸은 나올법한 원룸은 권이도가 말한만큼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수선하다고 해야 할까? 바닥으로 하얀 프린트물이 굴러다녔고 작은 탁자 위에는 며칠 치 신문이 한꺼번에 쌓여 있었다. 전공서적으로 보이는 두툼한 책과 아직 전원이 꺼지지 않은 노트북 한대. 자세히 살펴보면 한동안 청소를 하지 못한 흔적도 보이지만 최근 조사를 받느라 바빴던 그의 일상을 생각하면 매우 양호한 청결상태다.

“얼음을 좀 많이 넣었습니다. 바깥은 상당히 덥지요?”

그가 내민 컵에는 방금 만든 아이스티가 찰랑찰랑 담겨 있었다. 목이 마르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제야 갈증을 느끼고 단숨에 마셨다. 시원하다. 머리를 대충 말린 권이도는 하얀 면티를 걸치고 주변에 쓰레기처럼 널린 종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늘 보던 정장이나 와이셔츠 차림이 아니다 보니 딱딱한 이미지가 많이 옅어진 기분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얄미운 작자 같으니라구. 불시에 찾아왔으면 좀 당황이라도 해봐라.
허둥댈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올라온 나는 김이 새는 것을 느끼면서 입맛을 다셨다.

“......혐의가 풀렸다고 들었습니다.”

“소식이 빠르군요.”

“오늘 아침 신문 보고 알았습니다. 권이도씨에게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저도 생각 못했습니다. 조사 받기 시작한 날짜가 경찰서에서 귀가한 바로 다음 날이던데 상처 치료는 잘 하고 계셨는지......”

종이들과 신문지들을 주워서 한 구석에 쌓아 놓고 노트북은 전원을 끄고 책도 제자리에 꽂는다. 순식간에 거실을 정리한 권이도는 소파로 돌아와 앉으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걱정하셨습니까?”

나는 턱을 긁적이며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많이 걱정했습니다. 의심이 풀어져서 다행입니다, 힘드셨겠습니다......안부나 살펴보려고 들른 것인데 모든 위로의 말이 목구멍 밖으로 못 나오고 있다. 이 작자, 고생한 흔적이 얼굴 가득한 주제에 너무 태연하다. 위로의 말을 꺼내는 것이 오히려 오버하는 것 같아서 왠지 무안하달까.   

“최이사님께 얘기 다 들었습니다.
그동안 그런 일들이 있었으면서 한마디도 언질을 주지 않다니 너무합니다.“

권이도는 난처한 듯이 웃었다. 그런 얘길 할 수 있는 만큼 자주 만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만 소외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정 얘기할 여유가 없었다면 그때 치현이와 함께 경찰서를 빠져 나온 날 슬며시 말해주었어도 괜찮았을 텐데...내 비디오를 보고 싶었다는 둥 능청이나 떨면서 이야기를 돌리다니 나를 뭘로 보는 거냐고.

“이번일이야 자업자득이지요.
그래도 죄짓고 처벌을 안 받은 걸 보면 세상은 아직 불공평한가봅니다.”

탁자에서 안경을 집어 든 그는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듬성듬성 수염이 난 얼굴에 안경을 걸치면 굉장히 언밸런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거기에 담배한대 물고 있으면 멋진 폐인 하나 탄생이다.

“D증권 쪽은 어떤가요? 위에서 뭐라하진 않습니까?”

“그만두랍니다.”

“네?!!”

“아직 사표수리가 되진 않았지만 이쪽은 신용이 생명이니까요.
이번 일에 제 과실이 없는 것만도 아니라서 책임을 지라는 군요.”

나는 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놀란 얼굴로 담담한 권이도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만 두라니! 당장 실업자 되게 생겼는데 그렇게 초탈한 표정 짓고 있을 때야?! 아니면 혹시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래? 이참에 아예 개인 사업을 한다거나?

“직장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잘리기엔 억울할 것 같은데......이번에 생긴 수익을 발판 삼아 무슨 계획이라도 세우신 겁니까?

“아, 뭔가 오해가 있었군요. 저는 이번에 주식 투자로 돈을 번 건 없습니다.”

“예?”

“직업이 이렇다보니 마크가 철저해서요. 일부러 매매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최이사로부터 애널보고서에 대한 금액도 받지 않았고요.
대가는 최종적으로 일이 끝난 후 Mr.앨런을 통해 분배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그 친구들의 앞날도 아직 불투명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수확이 전혀 없는 셈이지요.”
  
이번에야말로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글쎄요, 전업 데이트레이더라도 해 볼까요?”

저 긴장감 없는 얼굴이라니! 데이트레이더라면 매일매일 단타 치는 주식쟁이들을 말하는 거 아닌가? 그런 폐인짓을 하겠다고?

화를 내고 안달하는 것은 나이고 정작 당사자는 저렇게 태연히 웃으면서 말하다니 무언가 입장이 뒤바뀐 것 같다. 열을 올리는 내가 바보 같기도 하고 또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으면서 안 가르쳐주는 게 분명하다는 의심도 들었다. 나는 인상을 구기고 조그맣게 말했다.

“또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라면 이번엔 정말로 화 낼 겁니다.
남을 걱정시켜놓고 그걸 즐기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능글맞게 싱글거리던 얼굴에 점차 쓴웃음이 번졌다.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점점 다가온다. 탁자를 앞에 두고 나란히 마주 앉은 위치라 가뜩이나 가까운데 이렇게 정색을 하고 다가오니 가슴이 철렁했다. 권이도는 한손으로 내 턱을 잡고 다른 손으론 허리를 감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어 하는 남자의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턱을 감싼 손가락이 뺨을 간질이고 허리를 매만지던 손이 옷 속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온다. 오싹하고 한기가 느껴진다 싶더니 권이도의 안경이 욕망을 표출하듯 번들 거렸다. 정작 유리알 너머의 까만 눈동자는 건조하고 그윽하기 한이 없는데도.

“내 집에서 단 둘이 된 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예상은 하고 계셨겠지요?”

코끝으로 은은하게 맡아지는 치약의 민트냄새, 거침없이 들어와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바닥을 느낀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그대로 권이도의 멱살을 낚아채 소파 위로 메다꽂았다. 그 충격으로 안경이 튕겨져 나갔고 불시의 기습을 받은 권이도는 놀란 얼굴로 반격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다 죽어가는 얼굴로 허세를 부려봐야 하나도 효과 없습니다.”

나는 인상을 쓰며 권이도를 위에서 내리 눌렀다.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방식엔 당할만큼 당했다. 나는 곤란해 하며 시선을 피하는 권이도의 얼굴을 내게 고정시키면서 확실한 답을 요구했다.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직장에서 잘리는 겁니까?
다른 직장이나 사업을 시작할 여유도 없이요? 당신은 이렇게 손해만 보고 끝나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닌 걸로 압니다. 사람 걱정 시키지 말고 계획이 있으면 어디 한번 불어 봐요!”

망설임을 담고 있던 눈동자가 나의 다그침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한동안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던 권이도는 한숨을 쉬며 목에 힘을 뺐다. 소파 위로 늘어진 그의 머리카락이 한숨을 따라 흔들리는 듯했다.

“......방법은 여러 가지 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좋고 학위를 따러 다시 대학으로 복귀해도 좋지요. 친구들이 전부터 권유해왔듯 워레스에서 근무하는 조건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 제가 말하는 워레스는 고작 대여섯 명이 모인 작전팀이 아니라 미국 현지에 법인을 두고 있는 정식 사모펀드를 말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뱉어 버리는 말 같지만 그것이 현재 권이도가 선택 할 수 있는 선택지인 것이다. 한국 사정에 밝지 않은 권이도가 사업을 할 것 같진 않고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를 하러 가든 친구들이 있는 워레스 펀드로 이직을 한든......그렇게 되면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된다.
......떠나 버린다고...

“하지만 명확히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가 난처했던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서경씨가 걱정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 점은 반성하겠습니다.”

권이도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와 소파에 앉으며 애꿎은 컵을 집어 들었다. 컵에 남아 있는 아이스티의 바다 위에 얼음이 빙산마냥 떠 있다. 그것들을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한숨과 답답함을 속으로 삭혔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온 몸에 끈적끈적한 거미줄로 옭아매어진 기분이다.

“제가 왜 결정을 망설이는지 아십니까?”

마지막 남은 얼음을 씹어 삼키며 늘어져 있는 권이도를 내려다보았다. 침묵과 함께 무거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그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 둘은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권이도는 거실 바닥을, 나는 비어버린 유리컵 바닥을 응시할 뿐이었다.

“당신 때문입니다. 김서경씨.”

천천히 고개를 내게로 향한 그가 낯선 얼굴로 직시해 온다. 안경을 벗고 양복도 없고 앞머리를 바짝 넘긴 단정함도 사라진 권이도는 그저 평범한 30대 게이일 뿐이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그리고 어딘가 힘들어 보이는 얼굴의 남자. 가식이 사라진 얼굴이 내게 더욱 부담이 되어 다가왔다. 이런 분위기 숨이 막힌다. 감당하기가 힘들어.

권이도가 내게 진심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능청스러움과 뻔뻔함의 뒤편으로 도망치는 자신이 있었다. 저 자는 나를 가지고 놀리는 것 뿐이야...이 생각이 얼마나 편안한 도피처인지, 얼마나 달콤한 핑계인지 나는 아주 잘 알고 또 그것을 이용해 왔다. 버리기엔 아까운 사람이지만 그에게 얽매이는 것이 싫었다. 곤란했다. 난처했다.

치현이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안주하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른다.
치현이와는 설령 연애관계가 흐지부지 되더라도 녀석이 나를 버리지만 않으면 그냥 친한 형으로서 존재해도 좋다. 녀석에게 다른 애인이 생긴다면 무척 슬프겠지만 이상하게도 치현이라면 웃으면서 응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모순 된 감정이다. 어쩌면 연인보다는 자식이나 형제를 향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가족에게 성욕을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치현이를 안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다.

이것은 정인가.
단순한 소유욕인가.

그렇다면 권이도는 뭐지?

“......권이도씨...당신에게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초가 십분 같았던 어색한 공기를 깨며 메말라 갈라진 내 음성이 고막에 울렸다. 진지한 표정의 권이도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길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한마디가 왜 이렇게 그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저, 치현이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떨어트렸다. 권이도에게 만큼은 왠지 우리의 동거사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한숨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온다. 언젠가 권이도가 사랑의 라이벌 운운하던 장난대로라면 승자는 바로 나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착잡한 걸까.

“......그 때 두 사람이 함께 돌아가고부터 이겠군요.”

“......”

“어렴풋이 감은 잡았지만 설마 함께 살기 시작했을 줄은...”

“......오늘...
치현이의 이삿짐이 우리 집으로 옵니다.”

“그렇군요.”

무덤덤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다. 화내지도, 빈정대지도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불안할 줄이야. 나는 슬그머니 권이도의 표정을 살폈다. 천정을 향하고 있는 그의 표정은 조금 외로워 보였다. 가슴이 답답하다. 괴롭다. 차라리 능글맞은 목소리로 농담을 하라고. 항상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를 장난처럼 대했잖아. 무장해제된 그런 차림으로 포커페이스까지 벗어버린 당신은 정말로 어울리지 않아. 그냥 둘 수 없게 된다구!

권이도의 마음을 알면서 치현이를 뺏은 게 미안하고, 권이도에게 이런 마음을 품어서 치현이에게 미안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꼴은 우습기 짝이 없다. 이미 치현을 손에 넣었으면서 권이도를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내 아무리 연애편력이 화려했다지만 양다리는 없었다. 이래 뵈도 한사람한테 올인 스타일이었다고.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원나잇으로만 몇 년 버티다보니 연애감각이 다 죽었나? 오랜만에 연애하려니까 헷갈려서 갈팡질팡 하는 거야? 양 손에 쥔 떡 어느 쪽도 버리지 못하고 쩔쩔매다니, 내가 원래 이렇게 우유부단한 인간이었나?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과열되자 한계치에 다다른 나의 뇌는 제멋대로 입을 움직였다. 그것이 무슨 파장을 불러올 줄도 모르면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본능이 원하는 대로...음성은 단어가 되고 말이 되어 쏟아졌다. 말하고 나서도 스스로 움찔했지만 티는 내지 않으려 애썼다. 표정연기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우리 집에 갑시다. 치현이도 당신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권이도의 손을 덥석 잡아끌고 밝게 웃었다.“예?”하고 반문하는 권이도의 표정은 볼만했고 그 앞에서 쾌활하게 웃는 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                *                *





치현이에게 권이도와 함께 가고 있노라고 전화하는 내 마음은 무거웠다.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내리며 지난 주 치현이와 함께 커플폰을 맞추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블랙, 치현이 화이트로 맞추고 요금도 커플 요금제로 하던 그 날의 두근거림은 아직도 가슴 한쪽에 남아 있다. 상처가 덧나진 않았나 병원도 가보고 저녁엔 같이 장을 보고 집에서 푸짐한 요리를 해 먹으며 이것이 동거의 묘미라고 행복에 몸서리치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다.

엊그제 같은데!

고작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나란 놈은 벌써 다른 남자를 집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냐!!!!!
  
게다가 걱정했던 치현이는 별로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의 반응은 이제 권이도에 대해선 깨끗이 마음을 정리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위해 배려를 해주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작하는 연인 어쩌고 하면서 장밋빛 동거 생활에 들떠 있던 주제에 권이도를 데려가다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어쩌면 권이도가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 하얀 붕대를 머리에 두르고 사라지던 뒷모습이 끊임없이 괴롭혔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다시 권이도와 헤어지면 이번에야 말로 접점이 사라진다. 더 이상 그와 얼굴 대할 일이 없다. 쓸쓸한 표정의 권이도가 치현이와 동거하는 중에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시달릴 것이 뻔하다. 그러니까 이건 내 마음이 안심하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다. 다시 자신만만한 권이도의 모습을 보고 그래 당신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어...하며 안정을 얻기 위해 권이도를 우리 집으로 초대하는 것뿐이다.  

......아니야, 그건 핑계다.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있고 싶은 거야.

운전하면서 조수석을 곁눈질 했다. 창밖을 보고 있는 권이도는 깔끔하게 면도한 상태지만 옷차림은 루즈한 느낌의 캐쥬얼이다. 젤 한 방울 손질하지 않은 앞머리는 안경에 닿아 거추장스러운지 자꾸만 머리카락을 넘긴다. 양복을 입은 깐깐한 스타일도 좋지만 이건 이거대로 신선하다. 몇 개월 동안 찍어둔 얼굴이니만큼 뭘 입어도 내 취향이다. 그래, 나는 이 얼굴을 다신 못 본다는 것이 섭섭한 거다. 마음의 안정이니 뭐니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내가 이 남자에게 마음이 있는 거야. 치현을 아끼는 주제에 이미 마음의 절반은 권이도에게로 넘어간 거다.

한숨을 쉬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나와 권이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현관문 앞에서 권이도와 마주한 치현이의 얼굴은 깡패가 시비 거는 표정, 딱 그것이었다.

“헤에...잘 살아 있었네.”

빈정거리는 말투에 뜨끔했다. 치현이는 그렇게 걱정해놓고선 마음이랑 말이 영 딴판이다. 권이도는 슬쩍 비웃음 같은 걸 짓더니 현관에서 엉거주춤하는 나를 제치고 먼저 집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이 좋아 보입니다. 나 없는 새에 귀여움을 많이 받았나보군요.”

“그러는 넌 못 본 사이에 얼굴이 아주 맛이 갔잖아? 뭘 좀 먹고는 있어?
네 나이가 되면 관리가 필요하다구.”
  
“걱정해주시니 기쁩니다.”

만나자마자 시비 걸고 빈정거리는 두 사람 사이를 바라보며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아 여기까지 와 버렸다.
권이도를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치현이와 만나게 해서 대체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데려 왔단 말인가. 그렇다고 거짓말하고 바깥에서 따로 만나는 건 도저히 성격에 안 맞고...... 이거 치현이를 볼 면목이 없다. 눈치를 보며 치현이를 흘끗 살펴보니 팔짱을 끼며 권이도를 노려보는 중이다. 그러나 노려보는가 싶더니 조그맣게 한숨을 쉰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제야 안심이 된 모양이다. 치현이 정말로 권이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그건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멋대로 권이도를 데려와도 치현이 크게 화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스스로의 이기심에 대해 쓴물을 삼키고 있을 때, 집안을 가볍게 둘러보던 권이도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호오~ 저기가 치현씨의 새로운 방입니까?"

“응. 부러워 죽겠지? 오후에 이삿짐 올 거야.”

실소를 흘리며 치현이 대꾸한다. 하지만 자신만만하다기 보다는 어딘가 서글픈 듯 혹은 씁쓸한 듯한 얼굴이었다.

“예예 미치도록 질투 나는군요. 나없는 사이 감쪽같이 서경씨를 차지해버렸잖아요?”

권이도가 예의 그 비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괜히 움찔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원망이 스친다. 가슴한쪽이 뜨끔했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건데?
   
“그래서......나를 데려 온 이유는 이걸 보여주기 위한 겁니까”

권이도가 천천히 다가오며 내게 손을 뻗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한쪽발이 현관 아래로 빠져서 비틀 중심을 잃을 뻔했다. 그 덕에 권이도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고 헛손질한 오른 손을 바라본 그의 표정은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얼굴이었다.

“이게 대답입니까.”

그게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권이도의 시선이 치현에게로 향한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치현은 권이도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런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다. 권이도에게 일부러 상처 주려고 이곳에 데려 온 게 아니다. 나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저 충동적이었다. 어리석은 충동이란 것을 알면서도 끝내 권이도를 이곳에 데려오고 말았다. 알고 있다. 이런 행동이 권이도에게, 치현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그러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내 행동은 나로서도 이해불가.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는 정신은 내 행동을 변명하려고 가증스러운 입을 놀리고 있었다.

“계산이 있어서 권이도씨를 이 집에 데려온 게 아닙니다...”

“믿기 힘들군요. 제 마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치현씨가 있는 당신의 집에 절 끌고 오다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더러 보라고 하는 행동 아닙니까?”

힐난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부드럽고 차분한 음성이지만 나는 뒤늦게 내 충동적인 행동의 결과를 깨닫고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야 권이도. 나는 그렇게 빙 돌려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야. 당신을 떨쳐버리려고 했다면 말로 거절하지 치사하게 이런 모습 보여줘서 상처 주려던 게 아니라고...   

“......그저......당신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입술을 깨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치현이 앞에서 이따위 소리라니, 그 녀석이 다시 한 번 인간불신에 걸려도 할말 없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권이도와 단둘이 얘기하는 것은 치현을 속이는 기분 같아서 더 싫다.

“왜죠? 새삼스럽게, 이제와 나를 혼자 두기 싫었다니...”

권이도와 치현이 동시에 바라본다. 나는 우물쭈물 말을 못 잇다가 치현의 멀거니 바라보는 얼굴을 보고 그만 실토하고 말았다. 보기 좋은 말로 둘러대는 것은 오히려 들킬 게 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냥......당신이 자꾸 거슬려요. 내 눈 밖에 있으면 불안합니다. 당신이 친 사고만 해도 벌써 몇 개입니까. 안심이 안 된다고요. 하지만 오늘 여기로 데려온 건 정말 충동적이었어요. 결코 당신에게 상처를 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치현이와 권이도 둘 다 침묵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은 거실은 에어컨 소리만 웅웅 들릴 뿐이었고 서늘한 공기는 등에 흐르는 식은땀까지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난 비즈니스 관계상 당신과 친분이 쌓이게 되었고 그걸 외면하지 못한 것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비겁하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뭐라고 물어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뭐랄까, 그날 당신을 혼자 보낸 이후 안 좋은 사건이 터져서 계속 불안했거든요. 그래서......”

마른침을 삼켰다.
뭐라고 말해도 바람 피는 남자의 변명이다. 나는 더 이상 말하는 것을 관두고 치현과 권이도의 얼굴을 판결을 구하는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어깨를 으쓱한 치현이 뭘 그리 고민하냐는 투로 말을 내뱉었다.

“형답지 않게 왜 그렇게 풀 죽어 있어? 나는 신경 쓰지 마.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치현아......”

“권이도가 마음에 든 거잖아? 나 때문에 망설일 필요 없어. 나는 형이 원하면 언제든지......”

“치현아!”

그런 게 아니다. 내가 권이도를 맘에 들어 한 건 사실이지만 너를 상처 주면서까지 그를 갖고 싶지 않아. 목소리 톤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매끄럽게 말하는 치현이가 진심으로 멀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말을 끊고 말았다.

읽고 있다.
치현이는 나를 읽고 있던 거다.
어린애라고, 꼬마라고, 내가 돌보아야 할 아이라고 생각했던 녀석은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무엇 하나 가진 건 없지만 눈치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녀석이다. 생각해보면 녀석은 언제나 내게 도망갈 구실을 만들어주었다. 내가 권이도에게 마음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한 적도 있지. 그리고 지금, 상관없다고 말해준다. 마치 언제 내가 떠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내가 자신을 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방어막을 친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한 남치현의 방어막이다.

나는 그제야 왜 나와 치현이의 사이에 핀트가 어긋나는지 알게 되었다.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엄지와 중지로 짓눌렀다. 마른 침이 삼켜진다.

어긋날 수밖에, 연애로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못한 내가 여러 연인에게 배신당해 본 어린 아이의 기분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눈치만 빨라서는 자기 보호에 급급해진 꼬마와 섹스는 엔조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연애를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녀석은 언제라도 나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던 거다. 내가 치현이 누구와 연애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치현이는 차라리 권이도가 더 편했던 거다.
권이도는 허튼 기대를 심지 않으니까.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참을 수가 없어졌다. 치현이가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에만 들떠서 권이도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외면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치현이를 맘 고생만 시킬 뿐이다. 잘 해주겠다고, 이제까지 사귀어 왔던 너의 연인들과는 다르다고 어깨를 부풀리며 뽐내고 있었는데 권이도를 버리지 못하는 내가 치현이의 과거 남자들과 뭐가 다르단 말이야?  

나는 이마를 누르고 있던 손을 풀고 권이도를 올려 보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권이도와 치현이는 차분히 내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치현이는 발아래를 응시하며, 권이도는 내 얼굴을 직시하며.

제기랄.
이 자를 어떻게 버린단 말야.

이대로는 뇌 내 세포가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은 채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배째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결정 못한다. 그저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원을 그리며 같이 있고 싶었다.  
차라리 이게 우정이었다면 친구라도 될 수 있을 텐데.

“서경씨 답지 않게 우유부단하군요.”

“정말이야. 형이 이렇게 고민하는 건 처음 봤어.”

어느 순간 답답한 고요를 깨고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마치 나를 제 삼자처럼 두고 하는 대화는 두 사람이 멀게 더욱 멀게 느껴져서 보이지 않는 통유리가 가로막혀 있는 것만 같았다.

“저는 서경씨를 포기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설령 서경씨가 치현씨와 사귄다고 해도요. 그런데 치현씨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냥, 서경 형의 생각이 먼저라고 말했을 뿐이야.”

“당신의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 겁니다. 서경씨의 마음이 바뀌면 당신은 그렇게 쉽게 포기 할 수 있습니까?”

치현의 말문이 막혔다. 통유리안의 사람을 바라보듯 나를 잠시 흘끗거린 치현은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은 없어”

권이도가 입 모양을 오므리며 “호오~”하고 길게 야유를 했다.
치현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적어도 쉽게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 안 나온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나는 재판정에 앉은 심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와 치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권이도가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요. 치현씨, 뭔가 괘씸하지 않습니까?”

나를 향해 웃으며 권이도가 치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입술을 치현의 뺨에 가까이 대고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러나 결코 작은 음성은 아니었다.  

“서경씨 말입니다. 우리 둘을 놓고 저울질하고 있잖아요? 우리 둘 다 서경씨를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은 같지만 뭔가 억울하지 않아요?”

“무슨 꿍꿍이야? 권이도.”

어깨에 얹은 손가락이 치현의 뺨을 간질인다. 뜨악하는 얼굴로 권이도를 바라보는 치현이지만 몸을 슬쩍 뒤로 뺐을 뿐 적극적으로 떨쳐내지는 않는다. 웃으며 나를 보던 권이도의 시선은 치현에게로 옮겨가 뜨겁고 은밀하게, 열정을 담아 말했다.

“......치현씨가 나를 버리지 않으면 저도 버리지 않겠다는 말은 아직도 유효 합니다.”

뭐라고?

“서경씨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치현씨의 매력도 외면하기엔 너무나도 아깝거든요. 당신이라면 기꺼이 서경씨의 한쪽 옆자리를 양보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마저도 싫으시다면 할 수없지만... 어떻습니까?”

치현이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눈동자가 나와 권이도 사이를 쉼 없이 오가며 바쁘게 움직인다. 조금은 울상을 짓고 있던 얼굴은 심각하게 고려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걸 보는 내 심장은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저기 두 사람? 지금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건데?

“헤에...그거 무슨 뜻인지 조금 감이 잡히는데.”

고민하던 치현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죠? 서경씨를 저와 함께 나눠 가지는 겁니다. 덤으로 저도 드리지요.
라이벌이 되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협력하자는 겁니다. 꼭 한쪽을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까?“

점점 더 노골적으로 치현에게 달라붙는 권이도를 바라보며 참다못한 나는 보이지 않는 통유리를 깨고 나와 소리를 질렀다. 호기 좋게 한 소리 하려 했지만 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사, 사람을 앞에 두고 뭘 마음대로 결정하는 겁니까?”

권이도와 치현이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표정은 똑같이 무덤덤하고 태연해서 마치 형제처럼 보일 정도였다. 잠시 오싹한 전율이 지나가는 사이 권이도가 빙긋 웃으면서 말도 안되는 소릴 하기 시작했다.

“김서경씨, 우리는 그런 남자들이었지요? 원나잇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가벼운 연애나 즐기는 게이들끼리 뭐 그렇게 복잡하게 머리 굴릴 일 있습니까? 평소대로 하세요 평소대로.
꼭 두 사람 중 하나를 버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다 같이 사귀어 보다가 호감을 잃는 쪽이 지는 겁니다. 서경씨는 우리 둘 다 얻고 싶지요? 그럼 그렇게 해요.“

옆에서 긍정적인 표정을 짓는 치현과 달리 나는 입을 열고 멍청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인을 공유하다니, 그런 거 이상하다. 뭔가 비정상이야. 내 입으로 비정상이라는 소리 하기 민망하지만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어떻게 그렇게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거지?

“...그것도 괜찮겠네......”

머릿속으로 권이도의 정신체계에 대해 의심을 하던 나는 중얼거리듯이 흘러나오는 치현의 말을 듣고 턱이 빠지도록 놀랐다. 치현아! 너까지 권이도과로 편입되면 어쩌란 말이야!

두 사람 말을 듣고 있으니 나까지 정신이 어떻게 되려 하는 것 같다. 셋이 함께, 셋이 함께 라고? 그런 게 가능해? 누구도 버리지 않고 누구도 슬퍼하는 사람 없이 그렇게......
  
아니야, 우리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간과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면 생기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 말이다. 나는 마음을 굳혀버린 치현에게 이성이 외치는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하지만 치현아, 넌 내가 권이도와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 난 네가 권이도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지는데?”

“흐음...기분이 이상합니까?”

권이도가 참견하고 나섰다. 나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턱을 긁적였다. 그래 이상하다. 아까도 권이도가 치현을 품에 안았을 때, 그것은 질투라기보다는 묘한 감정이었다. 소외감? 조금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치현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아 둘 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잖아.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권이도는 안경을 벗어든다 싶더니 재빠르게 치현을 낚아 채 깊게 키스했다.
눈을 부릅뜬 치현이는 처음에만 움찔했을 뿐 거부하지 않았다. 다만 나와 권이도 사이를 쉴 새 없이 바라보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가 불안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권이도는 치현의 몸을 깊게 끌어안고 가늘게 뜬 눈으로 치현이만을 열렬히 바라본다. 키스가 점점 더 노골적인 색을 띄고 깊어졌다. 내 눈치를 보던 치현이 눈을 질끈 감고 기어코 권이도의 목에 팔을 감았다. 등골 어딘가로 전율이 달리는 것 같았다. 끈적한 공기가 실내를 채우고 열기로 흐물흐물해지는 공기와 반비례하여 내 심장은 박동 수를 올려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저 두 사람을 똑바로 쳐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엄청난 자괴감과 충격이 밀려온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이 키스했다는 것에 충격 받은 게 아니다.
숨이 막히도록 두근거렸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런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언젠가, 권이도를 따라갔던 호텔에 눈이 가려진 치현이 있고, 그 치현에게 수작을 부리던 광경을 보고 느꼈던 자기혐오가 이제야 기억의 문을 비집고 기어 나와 나란 인간을 조롱했다.

우아 미치겠네.

“기분이 어떻다고요?”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게 권이도가 악마의 음성처럼 낮게 속삭였다. 숨이 가쁜지 가볍게 헐떡이는 치현의 숨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어 뇌의 중추 신경을 자극한다. 아아 진짜 돌아 버릴 일이다. 내가 이정도로 육체적 본능에 충실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질투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고작 부럽다......요 따위로 생각하며 두근거리고 있었다니, 아무래도 몇 년 동안 원나잇만 즐긴 부작용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끄응-하고 신음을 흘렸다.

“질투 납니까? 화가 나나요? 그렇다면 그 상대는 누구에게 입니까?
방금 전의 행위에서 분노를 느꼈다면 이 제안은 잠시 보류하는 걸로 해도 좋습니다.
자아 말해보세요. 제가 치현씨에게 함부로 키스해서 화가 나셨습니까?“

차라리 느물거리면서 말하면 나를 갖고 놀리는 거냐고 화라도 내겠다. 저 진지한 목소리는 대체 뭐란 말야. 시뻘개진 얼굴을 들어 권이도와 치현의 표정을 봤을 땐 딱 쥐구멍에 숨고 싶다 그 생각만 들었다.

두 사람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행여나 내가 어느 한사람에게만 감정이 치우쳐 있고 그것이 자신이 아닐까봐.

도박이었나. 방금 전의 키스는 내 마음을 떠본 거였나.
그래서 권이도 당신도 치현도 그렇게 불안한 얼굴을 하는 거야? 겨우 발견해낸 해답이 내 말 한마디로 무너질까봐?

아...진짜 미치겠다고.

“그...그게 말입니다.”

마른 침을 삼켰다. 시선을 들지 못하고 포기하듯, 그리고 체념하듯 말을 털어냈다.

“......알겠습니다.”

차마 내 대답에 대한 두 사람의 표정은 확인하지 못했다.





*                *                *


     


소유욕이 없는 연애도 있을까? 연인을 누군가와 나눈다면 그 연인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쾌락을 즐기기 위해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벌이는 그룹섹스가 아니다. 섹스 파트너도 아니고 셋이 손잡고 나란히 소풍가는 친구관계도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꼬여버린 관계에서 우리 셋이 공존이 가능할까?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보고서도 웃을 수 있어?

이제야 알 게 된 거지만 내가 바로 그런 인간이었나 보다.





치현의 이삿짐도 모으니 꽤 되었다. 낡은 세탁기나 냉장고는 버렸지만 대번에 젓가락 숟가락이 두 배로 늘어났다. 컴퓨터와 책장, 옷장 들이 차곡차곡 채워지자 손님방이자 창고였던 작은 방이 슬슬 주인이 있는 방으로 바뀌어 간다. 이삿짐센터에서 온 사람들이 알아서 짐을 옮겨주었고 가구배치를 지시 하거나 자신의 짐을 푸는 것은 치현이 도맡아 했기 때문에 나와 권이도는 할 일 없어 베란다에 나와 있었다.

두 남자는 메마른 한숨조차 짓지 못하고 침묵을 삼키고 있었다. 베란다의 난간에 팔을 걸치고는 깊게 깊게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아까의 흥분과 감정적 동요를 진정시키고 겨우 차가운 머리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치현을 너무 어리게 봤습니다.
옆에 두고 잘 대해주면 행복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입술을 깨물었다. 이성이 돌아 온 후 냉정하게 생각하자 미처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이제야 권이도의 의도마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방금 전의 뻔뻔함이 사라지고 조용히 내 말을 듣는 권이도의 얼굴은 말쑥하지만 여전히 초췌함이 묻어났다.  
그래, 일차적인 문제는 내 잘못이다.

“어중간한 태도만큼 나쁜 것도 없는데 내가 딱 그 꼴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제가 지금까지처럼 어중간한 태도를 계속 취하는 한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권이도의 제안에 응하겠다고는 했지만 아직 이성이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셋이 사귄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치현을 사랑하고 있는 연인이라면 당장 기각하며 화를 냈어야 했는데 나는 그저 처음에만 울컥했을 뿐 어쩔 줄 모르고 그 말에 넘어가 버렸다. 치현의 반응에 당황했고 권이도의 설득에 잠시 이성이 마비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마음의 갈피도 못 잡고 있는 판국에 두 사람이 날린 카운터펀치로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말았던 거다.

“그런데 이제야 생각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뭐죠?”

잠시 말을 쉬고 권이도를 돌아보았다. 바람을 맞은 그의 머리카락이 살랑 거렸다.  

“집에 오기까지 권이도씨 당신과 나는 그저 비즈니스 파트너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여러 번 몸도 섞었고 조금은 특별한 마음도 있었다고 봅시다. 하지만 정식으로 사귀자는 제안을 주고받은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까의 혼란스런 상황에서 당신은 내게 사귀자고 말 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비록 치현이와 함께라는 단서가 붙어 있긴 했어도요. 이런 상황에서 보통은 셋 중 어느 두 명이 남느냐 하는 문제로 가기 마련인데 당신은 그걸 셋이 함께 가느냐 아니냐의 상황으로 몰고 갔죠.
결국 이득보는 것은 당신이군요.
그대로 놓아 두었으면 나와 치현인 비록 불안한 관계이나마 따뜻한 연인이 되었을텐데, 순식간에 나와 치현이를 차지해버렸잖아요?“

그는 멋쩍은 듯 턱을 쓰다듬는다.

“나도 나지만...당신도 너무합니다. 저를 시험한 거지요?”
   
권이도가 치현과 나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심술을 부린 건지, 아니면 완전히 탈락되어 버리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상황을 유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권이도는 불안하게 시작하는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부분을 헤집었고 그것은 적중했다. 나는 격침했다. 권이도가 속으로 기뻐하고 있을지 아니면 안달하고 있을지는 본인만 알 일이다.

“저를 원망하십니까?”

위로하듯 자상한 음성이 귓가에 와 닿는다.

“아니오. 당신을 비난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12층에서 내려다본 아파트 단지는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산책을 하는 주민들로 시끌벅적했다. 아직 한 낮인 시각, 햇빛은 뜨겁게 내리 쬐이는데 정작 마음속은 구름이 시커멓게 끼어 어둡기만 하니 환하게 밝은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다만, 정말로 우리들이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솔직히 나 자신을 신용할 수가 없습니다. 치현이의 생각도 모르겠어요.”

나야 권이도와 남치현의 키스를 보고 두근거린 인간 말종이라서 승낙했다 치자. 권이도 역시 뭔가 알 수 없는 정신세계를 가졌다고 쳐. 그럼 치현이는? 치현이가 권이도의 제안에 응한 이유는 뭐지?         

“치현씨도 필사적인 겁니다.”     

“......”

“서경씨를 신뢰 할 수 없으니까요.”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고막까지 닿는 듯했다.

“이제까진 늘 뒷통수만 맞는 연애만 해 온 아이잖습니까. 서경씨가 계속 고민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일이 벌어져도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길 바랄 겁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나는 끝까지 그 아이에게 믿음직한 어른이 못되는 구나. 이것은 내가 나인 이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암울한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저를 놓치기 싫은 걸지도 모르지요.”

권이도가 목소리에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한다.
그건 또 무슨 왕자병 같은 말이냐고 비웃으려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리고 말았다. 나는 놀이터에서 모래집을 지으며 놀고 있는 세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이야 말로 나와 치현이 함께 있어도 괜찮은 겁니까? 우리들 사이에서 그렇게 자신 있어요?”

“서경씨를 보는 것은 즐겁습니다. 그런데 당신과 치현이 함께 있으면 더욱 즐거워요.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는 것은 묘한 긴장감을 이끕니다. 자신 있냐고요? 오히려 그 말은 제가 서경씨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당신은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어요.“

빙글빙글 웃는 얼굴은 알아맞춰 보라는 듯 말을 끊었지만 그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다가 치현의 마음이 내게로 올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요?”

아?
허를 찔린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권이도를 바라보았다.“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치현이도 나와 당신을 동시에 가지는 거니까요”라고 부가 설명을 하는 권이도의 얼굴은 나 역시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심술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약 올리며 즐거워하는 악동 같기도 했다. 얼떨떨한 정신을 수습한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우리는 긴장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서로에게 연인을 빼앗길지도 몰라요. 동시에 연인을 두 사람이나 잃게 되는 거니까 바짝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걸요. 우리는 경쟁자이자 협력자입니다.
......그러니 혼자 두 사람을 가진다는 미안함에 괴로워할 필요 없어요.”

달콤한 유혹 같은 음성이 눈두덩이 위로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냥...우습게도 그 말이 상당한 위로가 되었다. 얼핏 도전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내게는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의미로 들렸다. 아아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남자다. 위로인지 경쟁하자는 건지 모르겠잖아.

“당신 얘기를 듣고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같이 이상해집시다.”

부드러운 그의 미소를 보면서 나도 피식 웃어버렸다.





*                *                *





주말을 낀 휴가를 줄 때만큼 회사가 얄미운 적이 있을까? 나는 최이사가 멋대로 잡은 내 휴가 날짜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동남아에서 일주일 정도 푹 쉬다 오라기에 넉넉하게 잡아 줄줄 알았더니 주말 끼어서 겨우 5일이다. 짠돌이 같으니라구.

내가 치현이와 권이도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이 회사와 마크플랜의 관계는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 갔다. 사장은 정식으로 쇠고랑을 찼고 검찰이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땐 감감 무소식이던 워레스는 뜬금없이 나타나서 명예훼손이라며 반박했다. 최근 해외 법인들이 금융시장에 물 흐리는 사건들이 속속 터지면서 불법 행위시 해외 자본도 예외 없이 처벌하겠다는 방침이 확산 되어 가는 와중에 워레스의 반격은 또 다시 한국 시장의 폐쇄성 운운 하면서 신문에 뜨거운 감자로 오르고 있었다.

워레스의 뻔뻔스러움은 가히 권이도를 능가했다.
한때의 공범자로서 걱정해줄 법도 하지만 IL사장의 비리와 마크플랜에서 적발된 내부거래 등의 문제점을 들먹이면서 한국 기업의 투명성에 의문을 갖는다며 큰소리치는 거 보면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구나 하며 감탄마저 하게 된다.  
주주총회에서 사장은 잘렸고 마크플랜과의 인수합병설은 흐지부지, 오히려 우호업체로서의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마크플랜은 마크플랜대로 정신없고 우리 회사 이사회는 사장을 갈아 치워버렸다.

놀랍다고 해야 하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해야 하나.
김한곤 사장의 뒤를 이어 대표 이사로 선출 된 건 최현욱 이사였다.





“김대리님 곧 휴가시죠? 바캉스 갈 곳 정해 놓으셨어요?”

이미희씨가 지나가면서 관심을 보였다.

“바캉스는요 뭘.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빈둥거리려고요.”

“에이~ 재미없어라.”

서류철을 안아들고 종종 걸음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이미희 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여직원들은 피서 계획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회사가 뒤숭숭하긴 했지만 모처럼의 휴가를 흐지부지 보내고 싶어 하지 않은 마음은 백번 이해된다. 들떠 있는 것은 여직원뿐만이 아니다. 저만치서 성대리를 둘러싸고 부러움과 질투의 눈길을 주고 있는 남자 직원들도 마음이 반쯤 서울을 떠난 상태다. 휴가도 휴가지만 성대리의 결혼 날짜가 잡혔기 때문이다. 결혼 당사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앉아 있건만 주위의 총각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저들끼리 신이 났다.

바캉스라......
한숨을 쉬며 문자를 확인했다.

-내 집에 한번 들르라고 한 것 기억하나?
이 삼일 푹 지낼 거 생각하고 와라. 날짜는 네가 편한대로 정해.

진형이의 주소가 적힌 문자와 함께 담긴 메시지였다.
이번 휴가는 글렀다. 치현이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머리를 짜내야 하는 게 어깨에 내려앉은 과제다. 권이도와 그런 괴상망측한 조약 아닌 조약을 맺은 게 엊그젠데 또 이 모양이다.

최근 화려한 게이인생을 반추하라는 듯 자신을 돌아 볼 것을 강요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내 비록 방탕한 생활을 해왔다 하나 남자관계만은 깔끔했거늘 요즘 왜 이리 한꺼번에 꼬이고 꼬여버린 거냐.

한숨을 내쉴 때마다 서까래가 가슴에 쌓여가는 기분이다.





*                *                *





어디까지나 ‘거래’상의 문제라는 것을 진형에게도, 내게도 주지시키기 위해 일부러 정장차림을 했다. 깔끔한 안내데스크에서 미소 짓고 있던 아가씨는 맑고 경쾌한 목소리로 나와 진형의 예약을 확인 한 후 엘리베이터까지 몸소 안내해 주었다. 상호는 바뀌었지만 건물은 G캐피탈 시절 그대로다. 건물은 예전 그대로이되 내부 인테리어는 많이 변해서 옛날 생각에 잠겨 회상할 요소는 눈 씻고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대리석 바닥이 반짝반짝 빛나는 GOGO익스프레스의 1층 로비는 화려했지만 그 본질은 숨기지 못한다고 깍두기 머리의 덩치 몇 명이 할일 없이 오가고 있었다. 조직폭력배 주제에 서울 한복판에 이만한 빌딩을 세워놓고 사채업이나 하고 있으니 국가적 낭비요 겨레가 통탄할 노릇이다. 나는 민간인을 등쳐먹고 배부르게 성장한 옛G캐피탈의 화려함을 보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구역질나는 화려함의 중간쯤에 진형이가 앉아 있는 것이다.

-7층입니다.

안내음을 들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는 조용했다. 간혹 조폭인지 일반인인지 모를 직원 몇몇이 오가기는 했지만 나를 수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한숨을 뒤로 하며 구둣발 소리가 뚜벅뚜벅 울리는 긴 복도를 걸어 기획팀을 찾았다.

“......왔군.”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딱딱하게 굳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사무실에는 서류를 들고 있던 이진형이가 나를 돌아보며 무덤덤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이리 앉지.” 아저씨 같은 말투로 자리를 권하기에 나는 엉거주춤 소파로 걸어갔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네?”

“다 외근 나갔다.”  

시간은 오후 3시에 불과했고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은 눈부셨다. 나는 어색하고 불편한데 진형은 “커피? 녹차?”하며 여유를 부린다. “커피.”라고 짧게 대답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꿀리는 건 이쪽이니 알아서 기어야겠지.

“오랜만에 본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차분히 얘기 할 기회도 없었지.”

커피를 받아 들며 말했다. 진형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보더니 “그래, 정말 오랜만이야.”하며 자기도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이렇게 둘이 마주보고 있으니 마치 4년 전으로 돌아 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자신감에 가득차있던 철부지 백수가 아니며 진형이도 미련스러울 만치 순수한 열정이 앞서던 새파란 신출내기 건달이 아니다. 고작 몇 년 사이 우리는 세상의 찌든 때를 안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노인마냥 마주보고 앉아 서로의 빈틈이나 살펴보는 속물이 다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 의뢰 말이다...”

머뭇거리며 운을 떼었다. 표정을 파악하기 힘든 진형이 말없이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잡히는 반듯한 흰 봉투가 진형의 심기를 해치지 않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예상외로 일이 커져서 폐 끼친 건 미안하다. 약소하지만 우선 이거라도 넣어 둬.
이건 내 성의다.”

최이사가 준 삼백만원이다.
진형이의 턱이 약간 기울어지며 나를 바라본다. 액수가 맘에 들기를 바랐으나 녀석은 봉투에 손도 안대고 있었다. 내리깐 가느다란 눈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녀석은 나더러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했지만 나는 사무실 쪽을 택했다. 몸을 거래로 내주는 것보다 우선은 GOGO익스프레스 상의 서류를 깔끔하게 해놓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돈 한두 푼을 우습게 아는 건 아니다. 그러나 조직 폭력배에게 빚을 지는 것은 후환이 골치 아픈 문제다. 진형이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못 믿는 건 녀석의 회사. 서류로 남겨두지 않으면 진형의 위치가 약해지거나 감옥에 갈 경우 꼬투리를 물고 협박해 올 수 있다. 어쨌거나 내가 재현에게 한 의뢰는 기록에 남았을 테니 대금을 치렀다는 기록도 남겨야 했다. 비록 사채업자들 입장에선 성에 차지 않는 액수라 해도.

“의뢰금이 얼마가 될지, 알고는 있나?”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 전화로 언뜻 들은 내용을 떠올리니 무시무시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설마 등골까지 다 빼먹을까......싶지만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 진형이가 자신의 명패가 있는 책상 쪽으로 가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기, 이번 건으로 인해 벌어진 손해액의 내역서가 있다. 네가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진형의 손에서 팔랑팔랑 거리는 서류 뭉치를 보니 아득한 느낌이 든다. 아아 대체 얼마나 나온 거냐. 역시 돈이란 건 쉽게 들어오는 만큼 쉽게 나가는가보다. 주식 따위로 희희낙락해 있을 때가 아니었어. 나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일어나 진형이가 흔드는 서류 뭉치를 보기 위해 몸을 디밀었다. 어라? 그런데 백지다. 의문을 품는 순간, 머리가 어지럽다 싶었다. 진형이 내 멱살을 틀어쥐며 책상위로 넘어뜨렸고 하얀 서류 뭉치가 공기 중에 흩날렸다.

“김서경이 김서경이......애초에 내역서 따위는 없었어.”

허공에 흩날리던 종이가 팔랑거리며 가라앉는다. 책상의 바로 뒤에 붙어 있는 커다란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의 커튼에 하얀 먼지가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잠시 눈을 깜박 깜박거리자 그제야 차가운 눈으로 입꼬리를 치켜 올리는 진형이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등으로 느껴지는 책상의 딱딱한 느낌과,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진형이의 허벅지와, 멱살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가슴을 짓누르는 악력을 깨달았다.

“고작 월급쟁이인 네 지갑 털어먹을 만큼 GOGO 익스프레스는 궁하지 않아.
단지 넌 돈보다 더 쓸모 있는 몸을 가지고 있고 난 그것을 며칠 동안 빌리고 싶을 뿐이야. 몇 푼 안 되는 돈 같은 건 화대로 쳐주지.“

“말버릇이 나빠졌구나.”

꾸짖는 어조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진형은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을 굳히더니 버릇없이 허리와 골반을 느릿느릿 더듬기 시작했다. 책상위로 상반신을 걸치게 된 바람에 불편한 허리를 뒤척이며 인상을 썼지만 녀석은 그것이 반항의 표시인 줄 알았는지 더욱 세게 조여 왔다.

“착각하지 마라. 김서경.
이 거래에 선택권은 없어. 네 놈이 내 사무실에 온 이상 이 정도는 각오하고 왔을 텐데?“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와이셔츠의 깃을 헤치고 들어오는 축축한 살덩어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몸서리쳤다. 멱살을 잡고 있는 반대쪽 손이 셔츠를 구기며 가슴을 매만졌고 튼튼한 허벅지로 다리사이를 밀어붙인다. 허리부터 어깨까지 근육이 당긴다. 나는 허공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귓가에 느껴지는 숨은 전혀 흥분하고 있지 않다. 어떤 흥분도 느끼지 않은 채 그저 형식적으로 만지고 더듬는 녀석의 애무는 나에게 수치감을 주려는 의도,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시 마주 본 진형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선 서류부터 청산해 주었으면 하는데. 계산은 깨끗해야 하지 않겠어?”

“아직도 지껄일 여유가 있나 보군.”

냉담한 얼굴로 내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다. 불시의 기습에 낮은 비명을 냈지만 눈가를 조금 일그러뜨렸을 뿐 표정을 바꾸지 않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불알을 터트릴 듯 주무르는 고통보다는 자존심이 상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녀석이 멱살과 사타구니를 동시에 잡고 생기 없는 자신의 얼굴을 점점 가까이 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눈을 감아 피하지도 않았다. 빤히 속이 들여다보이도록 눈을 마주한 기계적인 키스였다. 메마른 입술이 부딪히고 혀와 혀가 얽히며 타액이 섞이지만 녀석과 나 사이에는 어두운 무게감만이 짓눌러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의 근육이 단단해져 가는 것이 옷감 위로 느껴졌다. 사타구니를 문지르는 손길은 어느새 부드러워지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까만 동공이 참지 못하고 뜨거운 열기를 품어 올리고 있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고 옷 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문지르는 손은 한없는 욕망에 차 있었다. 처음과 달리 점점 안달하기 시작하는 진형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 이진형, 너는 예전부터 나한테 못 이겼어.     

녀석이 냉정함을 유지 못하고 흥분한 거 까지는 좋은데 장소가 문제다. 해가 아직 남쪽에서 꾸물대는 이 시간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라니 스릴만점.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사무실이다. 아무리 내가 인간말종이라도 그렇지 사무실 책상 위에서 갈 데까지 가고 싶진 않다. 그런데 이 자식, 왜 바지버클까지 푸느냐고! 여기 네 직장이란 말이다! 야 너 진짜 여기서 끝까지 할 셈은 아니겠지?

이제 급해진 건 나였다.  
녀석을 이겼다고 좋아한 것은 한 순간, 와이셔츠가 가슴까지 풀어지고 바지는 발목 아래로 내려가기 일보직전, 이제까지 유지한 포커페이스고 나발이고 풀어헤쳐지는 옷을 추스르기에 정신이 없었다. 야야 진형아, 좀 TPO를 생각해서......!!

“형님!! 무성파 새끼들이 말입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시커먼 양복들이 기세 좋게 우르르 들어왔다가 서리 맞은 늦가을의 풀잎 마냥 하얗게 굳어 버렸다. 나는 비디오의 정지버튼을 누른 듯 일제히 멈춰 있는 깍두기 머리들을 확인하고 책상 위로 벌러덩 눕고 말았다. 내 살다살다 이런 망신살도 다 뻗치는 구나. 그래도 나를 덮치고 있는 진형이에게 가려 어디 속살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위안이랄까. 진형이는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이를 갈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죽고 싶냐...”

“죄, 죄, 죄, 죄송합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합창을 하며 일제히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인다. 새카만 무리들은 꽁지에 불붙은 소 떼처럼 우당탕퉁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가더니 문을 닫을 때는 여느 여염집 처녀의 옷깃 나부끼는 소리마냥 조신했다.





*                *                *





결국 흥이 다 깨진 녀석은 사무실에서의 정사를 포기했고 이제야 제대로 거래할 맘이 생겼는지 서랍을 뒤져 도장과 서류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명치끝을 조이는 압박감에서 겨우 해방되자 맑아진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속으로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녀석은 이제 단순한 근육바보가 아니었다. 전에는 그나마 귀엽게라도 생각했는데 고작 몇 년 사이에 더 음울하게 업그레이드됐구나. 진형아.

“계약서라 이 말이지.”

“그래, 아무리 조폭이 운영하는 GOGO익스프레스라도 약관은 있지? 바가지 씌우지 말고 룰대로 하자고.”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금세 영업용미소로 돌아왔다. 진형이는 그런 내 모습에 기가 차하면서 반문했다.“약관? 약관대로 하면 갚을 수 있다 이거냐?”“아~아~ 최선을 다해 돈을 구해 보지.”

이래봬도 G캐피탈에서 일할 때 이 되먹잖은 사채업의 약관을 모조리 꿰고 있었던 몸이다. 지금은 거의 잊어 버렸지만 대충 계산해 보면 의뢰한 사항에 한해서 지불해야 할 액수는 적어도 내 수비범위 안. 하지만 나중에 일이 커져서 수습을 해야 했던 비용까지 지불할 생각은 없다. 경찰의 개입은 나도 예측 못했던 것이기에 저쪽의 일처리 미숙으로 돌리며 입씨름 하면 고광철 사장이 직접 나선다 해도 그 부분은 책임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여차하면 G캐피탈 시절의 비리를.......아니, 이건 관두자고 지난번에도 생각했지.     

머릿속으로 계산하기에 바쁜 나를 보며 진형은 코웃음 비슷한 걸 쳤다. 깔보는 눈초리가 맘에 들지 않아서 뭐라고 한 소리 하려는데 녀석이 내 말을 가로막듯 테이블 위의 흰 봉투에 손을 대고 액수를 확인한다.

“인사치레로 가져온 돈이라 이건가? 좋아. 그럼 이건 선금이라고 치지."

선금? G캐피탈은 선불계약금을 통상 20%정도로 약정해 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총액은 천오백......내가 고광철 사장을 만나봐서 아는데 그 쪼잔돌이가 절대 이 액수에 만족할 인간이 아니다. 진형이 내 형편을 봐주는 건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오백이면 할만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진형이 호오~하고 야유를 보낸다.

“정말로 괜찮겠나?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이 3억을 준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뭐? 3억?

“그동안 우리 조직의 약관도 많이 바뀌어서 말이야. 선금을 받지 못할 정도로 시급을 요하는 일일 경우 그만큼의 리스크를 감수하기 위해 일반 의뢰금의 10배를 적용하지.
대신 금액이 크기 때문에 선불로 계약금의 1%를 받은 뒤 차액에 한해서는 일정 기간의 유예를 주고 있어. 돈을 지불할 능력은 되지만 당장 현금화하기 힘든 고객의 편의를 위해서. 물론 유예기간 동안도 이자가 붙지. “

책상에 기대어 두터운 파일철의 서류를 뒤적이며 녀석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폭리에 경악한 나는 녀석이 보고 있는 파일철을 뺏어들어 내용을 살폈다. 마치 보험회사의 약관처럼 빼곡하게 나열된 활자들을 보니 대낮부터 눈이 빙빙 돈다. 게다가 이거 유형별로 돈 갚는 방법이 다섯 가지나 되잖아!

“네 경우 아이들을 동원하는데 드는 비용은 그리 크지 않지만 뒤처리 비용까지 합치면 억대가 넘어가. 하지만 그건 이쪽의 과실로 인정해서 의뢰 이외의 비용은 네게 물지 않겠어. 그러니 지금 네가 준 삼백은 총액 3억에 대한 1%의 선불금이 되는 거야.”

진형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긴급의뢰 유형B] 항목을 보며 나는 치를 떨었다. 이렇게 주절주절 약관으로 만들다니 고광철 사장의 입버릇이‘법대로 합시다.’였다는 게 떠오른다. 앞이 까마득하다. 3억이면 이번에 주식 불법거래로 얻은 돈을 다 들이 붓고 적금을 깨도 마련할까 말까다. 진형이 비웃었다. 네까짓 게 별 수 있냐는 표정으로.

-탕

나는 두터운 파일철을 책상 위로 내리 꽂았다. 목재와 부딪힌 파열음이 텅 빈 사무실에 에코를 남긴다. 파일철을 잡고 있는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나는 녀석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조, 조금만 깎아주라......”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HTS의 차트 너머 개미투자자들을 울린 벌이 이것이구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녀석은 한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서 있더니 이내 침묵을 깨고 웃음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지.”
      
결국 그거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진형이를 따라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진형이가 나타나자 로비에서 동료들과 떠들고 있던 깍두기들이 허둥지둥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구부리며 인사한다. 이런 풍경도 오랜만이구나. 그때는 진형이 저렇게 허리를 숙이는 입장이었지...하며 해쓱한 얼굴로 잠시 옛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옛 추억에 젖은 노인네 모드는 0.5초를 지나지 못했다.
합죽이가 되어서 허옇게 얼굴이 뜬 깍두기 들을 보니 대충 분위기가 딱 아까 그놈들이라는 게 티가 났다. 빌어먹을, 제대로 뻗친 망신살이 수습이 안 되서 눈가가 시큰해진다. 쪼, 쪽팔려!
......아니야, 이럴수록 뻔뻔해야 해.
나는 다 죽어가던 어깨를 당당히 펴며 죽을상을 하던 얼굴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진형이 보다 앞서 걸었다. 어찌 보면 진형이보다 상관으로 보일 정도로 근엄하고 당당하게. 놈들이 내 얼굴을 봤을 리 만무하고, 행여 봤다 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기억을 하며, 기억을 했다 하더라도 솔직히 이 넓은 서울 땅에서 제 놈들이 내 얼굴을 다시 볼 일이 있겠느냔 말이다. 지금도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내 얼굴을 알아볼 일도 없으며 나와는 아예 인연이 없는 놈들인 거다. 그러니 기죽지 말고......   

“기, 김서경?”

오 마이 갓.
검은 정장의 떡대들 중 한 명이 날 알아보고 경기를 일으켰다. “김서경 너였냐!” 경악의 목소리를 내지르는 녀석은 비리비리한 체구에 제비처럼 한껏 멋을 낸 놈이다.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G캐피탈로 종종 커피 심부름을 오던 나이트 삐끼였다는 게 생각났다. 사이가 좋진 않았다. 고삐리 같이 새파란 어린애였는데 세월이 지나자 양아치가 다 된 걸 보니 지나간 세월이 실감났다. 그리고 곧 녀석이 입 싼 놈이라는 게 생각나자 눈앞이 노래졌다.

“형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이미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진 나완 달리 침착한 목소리로 진형이 조용히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내게 손가락질을 하려다 말고 “죄송합니다!”하고 큰 소리로 복창했다. 에어컨이 추울 정도이건마는 녀석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다. 그리고 방금 전의 우렁찬 목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처량하게“서경 혀, 형님 오, 오래간만입니다.” 라며 말까지 더듬으면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나도 한마디 해주었다. “그래 수고가 많구나.”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여유롭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었던 것은.

아악! 내가 이진형의 정부 같잖아! 난 이제 고광철파하고는 상관없다고!

어서 여기를 나가고 싶었다. 호기심어린 시선도 어색한 분위기도 사양이다. 걸음을 빨리하여 회전문을 통과하자 서울시내의 텁텁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뒤에 남겨진 진형이가 부하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는 지 늦게 나오고 있었다. 나는 시근덕거리며 로비를 나서는 녀석에게 강하게 못 박았다.

“조직에서 이상한 소문 퍼지지 않게 해라.”

“왜? 어차피 넌 이제 우리랑은 상관없잖아.”

아무리 평생 얼굴 안보고 살 놈들이라도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퍼지는 건 싫다! 그건 당연하잖아? 내 말의 뜻을 알고 있을 텐데도 진형은 해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즐거워 보인다. 나는 펄펄 뛰며 조직폭력배 사회에서 호모가 갖는 열악한 입지를 피력했다. 아래로 부하들을 다스리고 위로 보스를 모셔야하는 중간관리자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소문으로 퍼지면 조직에게도 네게도 손해라며 어울리지 않게 진심으로 충고를 해주었던 것이다. 입에 침을 튀겨가며 떠드는 일장 연설을 했건만 가만히 들으며 차의 시동을 걸고 있던 진형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내뱉었다.

“알만한 형님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이제와 새삼 뭐.
특히 고사장님은 예전에 너 사표 냈을 때 무척 아쉬워 하셨던 분이니까 너랑 소문이 돌아도 별로 크게 나무라시진 않을 거다.“
   
너 인마, 그렇게 태평할 때야?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지만 녀석은 태연스레 차를 출발시켰다. 정말, 되는 일이 없다.





*                *                *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면서 한참동안 샤워기 아래에 서 있었다.
진형이가 나한테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우리 사이의 골이 너무 깊다. 설령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걸 다시 받아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세월동안 침전 된 아쉬움의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을 뿐이다. 녀석은 너무 오랜만에, 그것도 갑자기 만나게 되서 그저 몸이 동한 것이다. 내가 테크닉하나는 죽여줬으니까. 약관대로 하자고 큰 소리 친 주제에 깎아달라고 비굴하게 굴었으니 이건 자업자득. 몸으로 갚아서 조금이라도 금액이 줄어든다면 이제와 새삼 몸 사릴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뒷덜미를 잡아채는 이 찜찜함은 무엇일까.

욕실 밖을 나오니 바깥의 시원한 공기가 폐부로 들어온다. 원래 식사를 하고 진형이의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내가 부득부득 우겨서 호텔로 왔다. 집이라니, 여차하면 도망치지도 못할 조폭 소굴에 미쳤다고 고개를 들이밀겠냔 말이다. 시계는 5시를 향해가고 있었고 벌써부터 침대 위 레슬링을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막 통화를 끝낸 진형이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내리며 “무슨 샤워를 그렇게 오래하나?”하며 혀를 찬다.  
가만, 그런데 저거 내 핸드폰이잖아?
나는 당황해서 진형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낚아챘다.

“뭐야, 왜 내 핸드폰을 네가......”

“아까부터 진동소리가 시끄럽기에 대신 받은 것뿐이야.”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발신자 확인을 했다. 하긴, 저 놈이 핸드폰비 아깝다고 내 전화로 장시간 해외통화를 했을 리도 없으니......그런데 누가 전화를......
응?
치현이?

막 욕실에서 나와 뜨끈뜨끈한 뺨이 마비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얼어붙은 나를 진형이 재밌다는 얼굴로 바라본다. 나는 목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녀석에게 물었다. 상대하고 무슨 얘길 했냐고.

“무슨 얘길 하긴? 네가 샤워중이라 통화가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이야.
누구냐고 묻기에 이름도 가르쳐 주고, 상처는 다 나았냐고 안부도 물었지. 발신자 이름을 확인해보니 그때 같이 경찰서에서 본 꼬마더군.”

진형이 빙그레 웃었다. 순간 돌처럼 굳었지만 금세 머릿속이 새까매질 정도로 화가 솟구쳐 올랐다. 이 자식, 일부런 그런 거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진형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손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팔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형이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눈을 내리깔았지만 녀석의 그런 표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화가 났고 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녀석에게 분노했다.
가뜩이나 불안한 관계다. 그렇잖아도 치현이에게 신뢰를 못 얻고 있는데 예전 애인이란 놈이랑 있으면서 전화도 안 받고 샤워 중이라니 이미 상황파악은 하고도 남았을 거다. 치현이 무슨 생각을 하며 원망을 하고 있을지, 어떤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도 안 된다. 이 일은 권이도도 치현이도 모르게 내 선에서 해결하려 했는데 다 망쳤다. 나는 뇌가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진형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돌덩이 같이 꿈쩍도 안하는 녀석이었지만 그 옷깃에라도 화풀이 하고 싶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알아? 왜 남의 전화를 네가 받는 거야?

“그렇게 뒤가 켕기면서 이런 자리에 졸랑졸랑 따라왔나?”

“그건 네가...!”

“나 때문이라고? 거래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웃기지마. 나를 동네 고등학교 일진들보다 더 무서워하지 않고 있는 주제에. 먹고 떨어지라는 생각으로 나와 sex할 생각이었다는 걸 모를 줄 알았어?”

녀석은 내가 멱살 잡은 손의 엄지손가락 아래 급소를 눌렀다. 오른 손이 떨리면서 힘이 빠졌고 녀석의 손아귀에 잡힌 곳에 통증이 달렸다. 짧게 신음을 지르는 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본 녀석은 천천히 내 손을 제 멱살에서 떼어 냈다. 손가락이 부서지도록 아팠다. 무릎이 후들거리는 걸 겨우 참고 녀석을 노려보았지만 반사적으로 눈물샘이 자극된다. 젠장, 무식한 근육바보 같으니라고! 이를 갈며 숨을 내뱉었지만 녀석에게 퍼부어 줄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움직이기에는 손이 너무 아팠다.
  
“으윽!”

팔이 뒤로 꺾이고 녀석은 날 벽으로 밀어붙였다. 거친 손이 가운 안으로 헤집고 들어왔다. 등을 압박하는 녀석의 가슴은 또 다른 벽이 있는 것 마냥 착각하게 만들었다. 허벅지를 할퀴고 꼬집고 쥐어짜던 손은 엉덩이를 주무르며 다짜고짜 항문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이진형-!”   

“넌 이런 걸 싫어했지. 하지만 어차피 대가를 받는 것은 나니까 거래는 내가 원하는 걸 주어야 하지 않겠어? 닭살 돋게 애무하고 키스하고 몇 시간동안 물고 빨고 하느니 한번에 꿰뚫어주지. 나중에는 울며불며 매달리도록 해주겠어.”

“야 이 미련한.....!”

입이 막혔다.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혀 때문에 욕지기가 치민다. 나는 머리를 털어 녀석에게 박치기를 했다. 우습지도 않은 저항이 어이없던지 녀석이 동작을 멈추었고 그 틈을 놓칠세라 나는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그만둬!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아진 게 없냐! 이 머리에 근육만 들어찬 바보 놈이!”

귓가에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서비스 정신이 엉망이군.”항문으로 들어오는 굵은 손가락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안된다. 지금은 이 녀석이랑 이따위 일로 실랑이 할 때가 아니야. 의심하고 있을 치현이에게 해명해야 한다고. 해명? 무엇을? 몸으로 떼우기로 한 거? 그건 이미 해명 운운할 여지없이 명백한 내 잘못이다. 치현이 얼마나 화났을지 생각하면......

“왜 네가 여기서 샤워하고 있는지 꼬마는 묻지 않더군. 음, 아주 기특하게 교육 시켜놨어. 보통은 화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네 귀여운 꼬마 애인에게는 거래를 위한 일이라고 설명해 두었지.“

오싹하는 한기가 들었고 그제야 나는 이 찜찜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거래라니, 내가 이런다는 거 알면 치현이는 자학할 게 분명하다. 자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에 내가 몸 팔았다고.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그깟 돈 때문에 자존심 버릴 필요가 있어? 아는 사이라고 봐달라기 싫어서 약관대로 하자고 큰소리 친 거잖아! 돈 같은 건 마음만 독하게 모으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것을, 3억이라는 액수에 당황해서 비굴해지고 말다니!

“제길, 놔! 이진형 이 거래는 끝이다! 그깟 3억, 집을 팔아서라도 갚아주지! 이자도 똑똑히 치르겠어! 그러니까 이 손 놔줘!!”

“웃기는 소리 하는 군. 계약이라는 게 네 맘대로 그렇게 들었다 놨다 하는 건 줄 알아? 아까는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깎아달라더니 이제와 갚겠다고?  

어깨가 송곳을 박아 넣은 듯이 아파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녀석의 악력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벽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리고 서서히 놈이 꺾어 버린 팔에 힘을 주어 억지로 풀어내려 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라 김서경. 어깨 빠진다.”

진형이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항문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내부를 휘젓다 말고 머뭇거린다. 나는 얼굴가죽이 핏기가 돌지 않아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팔이 빠지더라도 치현에게로 가야 했다. 전화해줘야 한다. 날뛰던 내가 조용해지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진형이 뒤로 물러난다.“야, 너 함부로...!”
으득-하고 관절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밍 정확하게 진형이 손을 풀었기 때문에 탈골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무리하게 뒤틀린 어깨뼈를 붙잡고 나는 한동안 신음해야 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끙끙대는 나를 진형은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머리 위로 음울하게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다치는 것을 감수하면서 저항하다니 너답지 않아.”

“......”

“그렇게 싫었나? 내가?
아니면 아까 그 꼬맹이의 전화 때문에?”

나는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주본 진형의 얼굴은 어두운 그늘이 음산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멍청했어. 깎아 달라니, 무심결에 너한테 떼를 쓰고 말았다.
이제야 정신이 확 들었을 뿐이야.“

진형의 눈이 흔들렸다. 약간의 침묵 뒤에 흘러나온 녀석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그래서, 네 멋대로 말을 바꾸겠다는 거냐? 여기까지 와서?"

“......”

“사람을 멋대로 가지고 노는 거냐 김서경. 네 장단에 맞춰 이리저리 춤을 추라고?
지금 네가 채무자라는 입장을 알고 있나?“

녀석이 턱을 잡아채어 자신의 눈을 보게 한다. 나는 기가 죽은 얼굴로, 그러나 목소리는 확고하게 진형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렇기에 더욱 이런 식의 흐지부지한 방법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
처음엔 놀래서 어떻게든 돈을 덜 내려고 꾀를 부렸지만 이건 아니야. 너와 나는 이미 끝났고 남은 감정의 찌꺼기 때문에 질질 늘어지는 거 서로를 위해서도 좋지 않아.“

녀석이 잡고 있는 손이 턱을 부수려는 듯이 움켜쥐었다. 아프다. 하지만 턱이 아픈 만큼 녀석이 나를 보는 눈이 더 아프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보는 거냐. 그렇게 화가 나고 경멸스럽다는 눈으로, 하지만 언뜻 보이는 초조함과 슬픔이 어리는 눈으로......

“......완전히 흥이 깨는군.”

차가운 말을 내뱉는 진형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턱을 쥔 손에 힘이 빠지면서 미련을 끊듯이 손을 뗀다. 그리고 한발자국 뒤로 물러난 녀석은 험악한 얼굴을 들이대며 내게 이를 갈았다.

“일주일 주겠다. 그 안에 준비해 놔.
이번에야 말로 번복하면 진짜 조폭이 뭔지 가르쳐주마.“

녀석이 잡았던 턱을 매만졌다. 아직도 욱신거린다. 으름장을 놓은 진형은 내게서 완전히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김서경이, 꼴도 보기 싫다. 앞으로는 얼굴 볼 일 없으면 하는군.”

나는 옷을 주워 입고 호텔 룸을 빠져 나왔다. 문이 닫히는 등 뒤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진형이 내게 어떤 미련이 남아 있어서 이런 거래를 제안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결국 놓아준 마음의 변화도 짐작이 잘 안된다. 하지만 나는 녀석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                *                *





치현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지를 않는다. 혹시나 해서 권이도에게도 전화해봤지만 안 받는다. 차를 주차 시키자마자 급히 올라와 현관의 도어락을 해제했다. 설마 이대로 떠나가 버린 건 아닐까?! 급한 마음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치현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도 잠시 베란다 쪽에서 치현이 튀어 나왔다. 짙은 담배냄새와 함께.

“형!!”

녀석의 표정은 울상이었다. 다짜고짜 옷깃을 잡더니 내가 어디 이상은 없나 이리저리 살피고 안도의 숨을 쉰다. 그리고 절망적인 눈으로 올려다본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모, 몸은 괜찮은 거야?”

우선 치현이 집에 있다는 데에 안심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라 곤란해 하는데 베란다 쪽에서 또 다른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의외로군요. 한 이삼일은 얼굴 못 볼 줄 알았는데.”

권이도였다. 내가 진형이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상담할 사람이 필요해서 치현이 부른 게 틀림없다. 제기랄 낭패다. 권이도까지 알아버리다니.

“왜 당신이 고광철파 이진형과 호텔에서 있었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권이도 그만둬!“

치현이 옷깃을 잡아 쥐었다. 녀석은 목이 메는 듯 말을 삼키더니 두려움에 가득한 눈을 돌린다. 하고 싶은 말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형, 미안해.”라고 사과할 뿐이다. 차마 녀석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외면하려는 순간 갑자기 굵직한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아직도 형이 그때 일 때문에 그딴 자식한테 잡힌 줄 모르고......”

두 손을 떨며 주먹을 움켜쥔다. 녀석이 자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현아 그런 거 아니야.” 이렇게 울다니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순간, 뒤에서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치현의 눈을 가렸다.

“진정해요 치현씨.”

치현의 눈을 한손으로 덮고 다른 한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은 권이도는 따뜻한 목소리로 달래며 등 뒤에서부터 힘껏 끌어안았다. 눈을 덮고 있는 손 밑으로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다리에 힘이 풀린 치현은 이도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서경씨가 어떤 이유로 그 사람하고 함께 있었던 간에...
일단은 돌아왔잖습니까. 안심하세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달래는 이도의 말에 치현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뭐라도 말해보라는 눈으로 권이도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머뭇거렸다.

“저기...진형이가 전화로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잘 마무리 됐어. 그러니까 치현아 너무 그렇게......울지 마.“

나는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풀죽은 소리로 말했다. 말이 길어져봤자 구차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녀석을 달래주고 싶었지만 권이도의 품에 안겨 있는 녀석이 왠지 멀어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겁니까?”

“......”

“이진형이 아무 대가 없이 당신을 놓아주었다고 보기는 힘든데요. 조직의 중간관리직인 만큼 오히려 더 주변에서 압박 받는 것도 있을 겁니다. 이번 사건, 제삼자가 보기에도 꽤 큰 건인데 대체 어떻게 마무리 되었을지 궁금한걸요.”

사무적으로 말하는 권이도를 보고 나는 조금 의문을 느꼈다. “중간관리직?” 마치 진형이에 대해 잘 안다는 듯한 태도에 의문을 품자 권이도가 작게 웃더니 한마디 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뒷조사는 폭력배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경찰에게는 고광철파 이진형의 기록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거든요. 구속할 만큼의 결정적 단서는 아직 없지만.“

“......”

“하기야, 서류상으로는 상대의 성격까지는 모르는 거니까 아는 사이라고 너그럽게 봐줬을지도 모르지요.”

권이도가 진형이에 대해 한마디씩 할 때마다 치현의 표정이 수시로 변한다. 매고 있던 넥타이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품에 들어 있는 계약서가 천근이라도 되는 듯이 무거웠다. 나는 한숨을 쉬며 간단히 설명했다.

“다소의 금전적 거래가 오가긴 했습니다.
치현이 전화했을 때만해도 분명...녀석과 나는 관계를 맺기 직전이었습니다만......
흔한 이야기 입니다. 게이끼리 섹스하기 전에 흥이 깨진 것이지요. 원래 진형이와 나는 험한 꼴 다보고 정 떨어진 사이입니다. 녀석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그걸 즐기기 위해 제 몸을 요구한 것뿐이니까요.“

권이도가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몸이 움츠러들었던 것도 잠시, 거칠게 와이셔츠가 잡아 당겨졌다. 목덜미를 확인하는 권이도에게 뭐하냐고 소리칠 새도 없었다. 다짜고짜 끌어안고 팬티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엉덩이 사이의 골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들어오는데 허리가 튕겼다.

“으, 으악! 무슨 짓 입니까!”

버둥거렸지만 꿈쩍도 안한다. 항문 안으로 들어온 한마디 정도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느낌에 몸서리치는데 권이도의 어깨 너머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치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얼굴이 화끈해져서 몸에 달라붙은 권이도를 떼어내려 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걱정했습니다. 정말로. 휴가날짜에 맞추어 연락한건데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치현씨도 서경씨가 휴가인 줄 몰랐다는 군요. 그래서 확인 차 치현씨가 당신에게 전화한 건데 이진형이란 작자가 전화를 받질 않나......억지로 경찰을 대동해 GOGO익스프레스 본사를 덮칠까도 생각해봤습니다.”

귓가에서 권이도의 한탄은 끊이지 않았다. 남의 말을 믿지 않고 대뜸 몸을 확인한 무례함에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할말을 잃은 나는 끄응-하고 작게 신음을 내었다. 난처하게 되었다고 속으로 한숨을 쉬는 사이 권이도가 슬금슬금 몸을 어루만지며 대뜸 목을 핥는다.

“......그런데 뭐하시는 겁니까?”  

축축하게 질척이는 목덜미가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유난히 질척이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간지럽고 오싹오싹하게 소름이 끼쳐서 뒤로 물러났지만 거실 벽이 등에 닿았다. “저기, 잠깐만요, 지금 때와 장소를 생각해야죠. 이봐요?” 가슴을 더듬는 손도 밀어붙이는 힘도 물러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는 이 자를 한번에 밀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당황한 건지 어설프게 옷자락만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우리들의 관계가 깨어지기 쉬운 유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대로는 항상 불안에 빠져 살 겁니다. 이제 참을 수 없어요. 신사적인 척 해봤자 서경씨 당신은 또 어딘가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겠죠.”

그렇게 말하고는 목덜미를 콱 물었다. 이맛살을 찌푸릴 짬도 없이 권이도의 손이 앞섶을 풀어헤치고 들어와 맨살을 쓸어내린다. 녀석의 품안에서 버둥거리는 내 꼴이 우스꽝스러워서 얼굴에 불이 났다. 치현이는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금세 어쩔 줄 몰라하며 시선 둘 곳을 못 찾고 있었다. 권이도의 등을 팡팡 치며 발로 차보려고 노력하자 몸이 밀어붙여진 나는 권이도와 벽 사이에서 납작하게 눌려버렸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야! 치현이도 보고 있는 앞에서!

“저기...저......”

얼굴이 붉어졌다 하얘졌다 파래지기를 반복한 치현은 점점 새카말 정도로 빨갛게 얼굴이 익어가고 있었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자기 방으로 달아날 기세다. 문득 치현이가 느껴버렸을 소외감을 깨달았다. 이렇게 적극적인 권이도와, 말로는 싫다하지만 매섭게 내치지 못하는 나. 구구절절이 권이도와 나와 너와 셋이 함께 잘 지내보자고 약속했지만 결국 현실은 이런 거다. 누구 한사람은 외로움을 느끼고 그대로 뒤돌아 가버린다. 아아 가지마 치현아. 그렇게, 우리 둘과 너 사이에 벽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어느새 앞섶이 풀어지고 바지 버클이 풀어졌다. 나는 일부러 몸에 힘을 빼고 권이도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것을 본 치현이 포기하고 고개를 돌린다. 뭔가 가슴 한쪽이 아프다. 손가락 세 마디 중 한마디가 잘려나가는 느낌이 들어 몸에 힘이 빠진다. 안타까운 마음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쿵쿵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내 팔을 꽉 움켜쥐는 또 다른 사람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나, 나만......”

치현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권이도와 내 팔을 꽉 움켜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현이가 고개를 들며 노려본다. 덜컹, 심장이 내려앉으면서 동시에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나만 어린애 취급하지 마!”

치현이 소리치는 순간 권이도가 치현이를 와락 끌어당겼다. 빙글빙글 웃으며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머리를 헤집는다. 어안이 벙벙한 치현에게 권이도는 말했다.

“잘 왔어요. 치현씨.
걱정 많이 했죠? 우리 같이 걱정시킨 서경씨를 혼내줍시다.”





상황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거실 벽에 밀어붙여져 치현이에게 격렬한 키스를 받았다. 옆에서 팔짱을 끼며 구경하는 권이도가 못내 거슬렸지만 꼬마가 이렇게 절박하게 매달리니 나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는 게 전부였다. 권이도의 도발에 넘어간 건지 아니면 이제야 자기주장을 할 마음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내 입장에선 환영할 일이다. 왠지 모를 희열마저 느껴지고 슬그머니 아랫도리가 회동하기 시작한다. 숨이 막힐 듯이 파고들어오던 혓바닥이 빠져나가고 거친 숨소리가 얽혔다. 충동적인 행동에 스스로도 놀란 모양이지만 후회는 없는 듯하다. “아...형...그러니까....난....” 더듬거리는 녀석을 끌어안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미안해. 다시는 그 녀석과 만날 일 없을 거야.”      

아직도 걱정이, 혹은 의심이 남아 있는 표정이지만 천천히 끄덕이는 얼굴에 약속했다. 그래, 아무리 거래라고 해도 딴 눈 안 팔게. 너무 오랫동안 원나잇으로 살아왔더니 도덕관념이 희박해져서 잠시 정신을 못 차린 것뿐이야. 이번만 봐주라.

“그 말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니, 이게 웬 초치는 소리냐.

“당신이 만나고 싶지 않다 해서 만나지 않을 상대가 아닐 텐데요. 사채업자는 끈질깁니다.
설령 당신이 모든 빚을 갚았다 해도 나중에 무슨 꼬투리를 잡고 찾아올지 몰라요.“

“걱정 마세요. 이제 정말 만날 일 없어요. 찾아온다면 녀석의 부하겠지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내 얼굴도 보기 싫다고 했으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치현이를 안은 채로 입을 다물었다. 녀석과 나 사이의 일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더니 “그렇다면......”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약속을 어기면 벌을 받는 겁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지만 나는 기가 막혔다. 벌이라니 애도 아니고.

“뭐 그런 유치한.....아아 좋습니다. 좋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흔쾌히 승낙하자 권이도가 씨익 쪼개고 치현이 흠칫 놀란다. 어? 둘 다 왜이래? 내가 잘못 말했어?

“승낙한 겁니다? 나중에 말 돌리기 없어요.
아아 치현씨, 우린 잘하면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죠? 약속을 어긴 대가는 당신과 내가 언제나 그랬듯 좀 더 재미있는 놀이로......“

“시, 시끄러!”

갑자기 내 품에서 튀어나간 치현은 권이도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허우적댔다. 비명을 지르며 입을 막으려 드는 치현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권이도는 얄밉게 웃고 있었다. “바이브레이터가 좋을까요? 달걀모양의 로터는? 치현씨는 작은 걸로 여러 개 들어가는 걸 좋아했죠.” 하고 이죽거리는 소리에 나는 적나라하게 상상해버렸다. 아랫도리의 뻐근함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건만 권이도랑 치현이 대체 어떻게 관계를 맺었을까 생각하니 온갖 망상이 난무해서 무서운 생각에 빠져 들고 만다. 나는 긴장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것을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대체, 두 사람은 어떤 식으로 섹스를 하고 있었던 겁니까?”

치현과 권이도가 동시에 정지했다. 이윽고 호를 그리며 휘어지는 얇은 입술을 열어 권이도가 물었다.

“보고 싶습니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현이 경악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                *





타인의 행위를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빨간 비디오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 그룹섹스니 파티니 하는 광란의 현장에서 잠깐 눈살을 찌푸리고 온 기억이 있다. 그때 같이 갔던 파트너가 강하게 원해서 룸에 들어가 네 명인가 같이 했던 기억이 나지만 감상은 별로였다. 하지만 그때 만약 내가 행위의 중심에 있지 않고 느긋이 구경하는 입장이었어도 별로였을까? 나는 내게 관음증이 있는 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리 내도 괜찮습니다.”

와이셔츠차림의 남자가 상체가 발가벗겨진 청년에게 속삭인다.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청년은 자꾸 내 쪽을 힐끔거렸고 목덜미에 남자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움츠러들었다. 이거야 완전 S급 배우들이 출현하는 AV비디오를 생으로 보는 기분이군. 아직 옷도 다 갈아입지 못한 나는 책상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다소 건방져 보이는 자세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양 팔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집중하세요.”

치현을 다독이는 권이도가 끈질기게 유두를 매만지며 말했다. 치현이 작게 웅얼거린다. “이래도 되는 거야......?”“괜찮아요 괜찮아. 당신의 섹시한 모습을 서경씨에게도 보여줘 봐요.”닭살 돋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치현이 어금니를 깨물며 오기가 담긴 눈을 치뜨지만 내 쪽을 힐끔 보고는 다시 곤란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버렸다. 아아 나한텐 저렇게 사나운 얼굴 잘 안 보여주는데......권이도의 이빨이 치현의 목덜미에 박혔다. 나를 향해 눈을 빛내는 권이도는 마치 치현은 자기 거라고 주장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나를 부추기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걸 보고 뭐라더라...방치 플레이랬던가? 아니 시간 플레이? 어딘가의 SM사이트에서 본 것 같지만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알았다. 나는 관음증인 게 확실해......맙소사.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쭈삣거린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봤다. 저 세계는 저 두 사람만의 세계이고 처음부터 제 삼자는 나였다고. 공연히 둘 사이에 끼어들어 훼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수도 없이 가져왔다. 독특한 취미의 두 사람, 으르렁대며 갈구지만 결국 치현이가 쾌락의 한계에서 바닥을 드러내는 상대는 내가 아니라 권이도였다. 나와는 그냥 예쁜 연인놀이를 하는 건 아닐까, 내 멋대로 서운해 한 적이 있었다. 권이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치현이 앞에서 뿐이다. 나와 있으면 권이도는 확실히 긴장한다. 비록 느물대는 그 순간일지라도 내게 반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성으로 중무장한다. 내가 권이도 앞에서 긴장하듯이.
하지만 치현이 앞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 권이도는 그래서 치현이에게 엘리트 가면을 벗고 변태의 정욕을 그대로 내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치현이 원한다 해도 나는 그렇게 대할 자신이 없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저들 식의 섹스는 확실히 자극적이지만, 나라면 저렇게 안한다. 나라면 차라리......

“큭!”

잠시 한눈판 사이 나지막한 비명이 울렸다. 깜짝 놀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권이도가 치현의 얼굴을 침대로 처박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은 등줄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한 지배욕을 내뿜고 있었다. 안경이 제거된 그의 표정은 좀더 적나라했고 날카로운 시선도 그대로 노출된다. 치현의 청바지가 아슬아슬하게 골반 끝에 걸려 있지만 얼굴이 처박혀 엉덩이만 내뺀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져 있다. 욱씬-아랫배가 아릿했다. 치현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권이도가 등을 어루만지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치현씨답지 않습니다. 서경씨 앞이라고 어울리지 않게 내숭입니까?
좀 더 광포하게 굴어도 상관없습니다. 평소의 치현씨는 늘 사나웠잖아요.
저질스럽게 침실이 떠나가도록 신음하던 망아지는 어디로 갔습니까?“

“이 새끼가-!”

치현의 발이 권이도의 얼굴을 찼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보다 빨리 발목을 움켜쥔 권이도가 팔을 크게 뒤로 빼자 치현이 주룩 미끄러지면서 다시 시트에 얼굴을 박았다. 언뜻 입꼬리가 잔인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 것을 본 것 같다. 뻔뻔한 낯짝이라고만 생각하던 얼굴이 저런 식의 서늘하도록 재수 없는 표정을 짓는 건 낯설어서 눈만 껌벅껌벅 거렸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치현의 발목을 움켜쥔다. “야, 야 그만둬!”치현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발목을 가지고 놀던 권이도가 싱긋 미소를 짓는다. 긴장으로 숨을 몰아쉬던 치현이 식은땀을 흘린다. 권이도가 발바닥 한가운데를 검지로 긁어내리자 치현의 한쪽 눈이 일그러졌다.  

“좀 더 집중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거칠어질 겁니다.”

권이도는 한손으로 엎드리고 있는 치현의 허리를 들어올리면서 갈색으로 그을린 등줄기에 혀를 길게 빼어 핥아 내렸다. 치현이 소리를 내다말고 이빨을 악다문다. 골반에 걸쳐진 청바지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손가락이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질긴 청 재질임에도 도드라져 보였다. 바지위로 솟아오른 손가락의 모양만으로, 꿈틀하고 경련하는 치현의 몸짓만으로, 권이도의 손가락이 어디를 어떻게 만지고 있는지 상상해버렸다. 나는 몸을 감싸던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엉덩이의 한 가운데에서 느릿느릿 손가락이 위 아래로 꿈틀거릴 때마다 유연해 보이는 치현의 허리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치현은 제 얼굴을 시트에 부비며 모욕스럽다는 듯이 어금니를 깨문다.

“손가락으로 어디 되겠습니까?
감질나지요? 이 정도론 모자라겠군요. 말해보세요. 더 굵고 크고 화끈한 것을 달라고“

“누, 누가...!”

“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의 욕심 많은 씨앗이 달걀모양의 로터를 품고 꽃잎처럼 열리던 순간을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역시 로터나 딜도가 아니고선 성에 차지 않나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이 좋아하던 장난감들은 이곳에 없군요.”

새빨갛게 익은 치현이 우왓! 하고 작은 비명을 터트리며 권이도의 입을 막으려 몸을 뒤틀었지만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히이이-하는 괴상한 음성을 지르면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 때문에 바지 속을 농락하던 권이도의 손이 쑥 빠져버렸다. 양손을 들고 항복자세를 취하던 권이도를 치현이 시근덕거리면서 노려봤다.

“야! 너 진짜 서경 형도 있는데-!!!”

“너무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정액과 소변을 함께 흘리며 울부짖던 치현씨가 훨씬 솔직하고 귀여웠습니다. 온몸이 밧줄에 묶여 피부가 조여 오는 쾌감에 훌륭한 페니스를 떨며 몇 번이고 내뱉었지요. 저질스런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욕설의 끄트머리는 자지러지는 신음으로......“   

치현이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흥분 탓에 헛주먹질을 했고 이런 일이 종종 있었던 모양인지 권이도는 쉽게 그 주먹을 피하며 치현의 몸을 덥석 안으며 아까부터 거슬렸던 청바지를 벗겨버렸다. 약이 오른 치현이 팔꿈치로 이도의 뒷통수를 가격할 찰나였다. 얼굴을 아래로 미끄러뜨린 권이도가 치현의 허벅지를 꽉 끌어안고 브리프 위로 드러난 모양 좋은 것을 한가득 입에 물었다.   

“......”

신음도 지르지 못한 치현은 권이도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우물우물 입을 놀리는 뺨만 보아도 아랫배가 뜨끔뜨끔하다. 하물며 당하는 본인이야.....
치현이 기어코 권이도의 뒷통수를 내려쳤다. 권이도의 눈썹이 찡그려진다 싶더니 치현이 비명을 질렀다. 브리프를 헤집고 들어간 입술이 다이렉트로 성기와 마찰한 모양이다. 팬티 밖으로 비어져 나온 성기가 권이도의 혓바닥 끝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어깨에 걸쳐져서 권이도의 목줄기를 내리 누르고 있는 치현이지만 상당히 자극이 컸는지 한 손으론 권이도의 뒷목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입을 막고 있었다.

“내가 당신과 했던 행위들을 서경씨가 알게 되는 것이 창피합니까?”

혀로 장난치고 있던 권이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야 따분한 플레이만 계속하느라 욕구불만이 쌓일걸요”

그리고 허벅지를 감고 있던 팔을 옮겨 브리프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양 손으로 탄력 있는 엉덩이를 마음껏 주무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 청바지 때문에 방해받은 것만큼 보상 받으려는 듯, 팬티 위로 보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거칠었고 훨씬 더 적나라했다.  

“서경씨는 자상하게 해줬나요? 부드럽고 상냥했을 겁니다. 그리고 치현씨는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다른 생각을 하며 적당히 기분 좋은 척 했겠지요. 아, 실제로 기분 좋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좀 더 극한의 쾌감을 아는 당신에게는 시시한 오르가즘이었겠지만.”

듣고 있는 내가 다 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다. 소름이 돋는다. 상상속의 치현은 울부짖고 신음하며 몸을 붉게 물들이고 애원하고 있었다. 내 품안에서 한숨과 함께 절정을 느끼던 치현의 얼굴은 외설스럽다기보다는 편안해보였다. 나는 그것으로 치현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당신은 내방식이 틀리다고 말하는 건가.

손가락이 팬티 안에서 질척이는 소리를 낸다. 권이도는 치현을 거의 어깨에 둘러메다시피 하며 마음껏 엉덩이를 희롱했다. 그렇게 치현의 엉덩이와 성기를 침묵으로 애무하던 권이도가 평온하던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내 얼굴을 힐끔 바라 보았다.

“어때요? 서경씨도 함께 할 마음이 생기나요”

아?
권이도는 치현의 몸을 끌어내려 자신의 앞에 주저앉혔다. 등 뒤에서 치현의 어깨를 감싼 그가 향하는 것은 내 얼굴이었다. 얼떨결에 나와 마주 보게 된 치현이도 권이도의 시선을 따라 이쪽을 향한다. 두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된 나는 갑자기 객석에서 무대위로 떠밀려진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갑작스런 시선에 반사적으로 신경이 긴장한다. 다리를 꼬고 앉아 바싹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나는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몸의 근육이 삐걱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치현씨는 아무래도 당신이 신경 쓰이나 봅니다. 좀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멍청하게 입을 벌리며 쳐다보자 권이도가 품안의 치현을 어린애 다루듯이 살살 쓰다듬으면서 미소 지었다. 치현이는 빈말로도 품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가 아니거늘, 기분 탓인지 매우 작아보였다. 의미를 파악한 치현이 당황했지만 그래봐야 권이도의 팔 안. 팬티 한 장 달랑 걸친 치현의 앞섶은 상당한 중량감을 가지고 부풀어 있었다.

“관람은 재밌었나요?”

그런 건 내 몸의 상태만 봐도 대답할 필요 없다. 이미 내 바지 안쪽은 부풀어 있고 온 몸이 간질간질 거리니까. 나는 붉어진 얼굴을 애써 숨기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속사정 다 안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이 작자가 얼마나 얄미운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순간에도 치현이는 굉장히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복잡하게 굴며 주저하는 녀석을 정신 못 차리게 몰아붙이고 싶다는 생각을 때때로 해본다. 보호해주고 싶다는 부성애 비슷한 감정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종종 부딪히긴 했지만 아직 난폭하게 굴어본 적은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아...그렇게 생각한 순간 권이도의 목소리가 유혹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공범이 됩시다.”

의자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면서 망설임도 같이 버렸다.
답답하게 목을 조르던 넥타이도 손가락을 걸어 느릿하게 풀어 버렸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도와 치현에게 다가가면서 소매를 천천히 걷어 부치고 목을 죄는 와이셔츠의 단추도 두어 개 풀자 그제야 숨이 좀 트이는 것 같다. 맑은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까처럼 의자 위에 웅크려 남의 행위나 보며 움찔움찔하는 것도 나름 재밌었지만 역시 에피타이져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긴장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치현의 몸을 훑어보았다. 주관을 배제하고 이제까지 놀던 다른 파트너들과 비교해보아도 젊고 싱싱한 몸은 매끈해서 시각적으로 즐겁다. 물건 보듯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치현의 목이 움츠러든다.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얼굴을 건드렸다. 뒤로 물러나려하지만 권이도에게 막혀 달아날 곳을 잃는다. 치현의 얼굴너머 나를 응시하는 권이도의 표정은 흥미로 가득 차 있다. 그가 나를 올려보는 건 묘한 호승심을 불러일으킨다. 두 사람이 동시에 올려 본다는 사실에 아릿한 기분에 사로잡혀 중심에 뻐근한 신호가 올라왔다. 치현의 표정이 ‘형까지 왜 그래?’ 하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기왕 한 무대에 올라 온 거, 제대로 어울려주자는 생각을 했다.
내 식대로.

“나는 난폭한 건 별로 안 좋아합니다.”

두 사람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나는 조용히 눈을 깔고 무릎을 꿇었다.

“평범한 섹스가 시시하다면......”

끈질기게 치현의 다리에 걸려 있는 청바지를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손바닥을 펴서 녀석의 종아리를 훑으며 대퇴부로 올라갔다. 골반근처에서 손에 닿은 브리프를 정중하게 벗겨내며 치현의 얼굴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작게 웃어보였다.

“시시하지 않게 해줄까? 치현아.”

누군가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들으며 치현의 발등에 키스했다. 움찔하는 발을 공손히 받아들고서 엄지발가락 위에 키스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발가락 위에 계속해서 입 맞추다가 새끼발가락의 라인을 따라 툭 튀어나온 복사뼈까지 입술로 뜨거운 숨을 퍼부으며 부드럽게 더듬어 올라갔다. “아, 아..!”거부의 음성을 내지르며 치현이 발을 빼려 하지만 나는 공손한 태도와는 별개로 녀석의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 있는 힘껏 발로차면 나를 떼버릴 수도 있겠지만 망설임이 가득한 녀석의 움직임은 굉장히 다루기 쉬웠다. 녀석의 종아리에 얼굴을 비비며 무릎을 이빨로 긁었다. 녀석의 몸이 튕겨 오른다. 정좌한 다리가 벌써부터 저려오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치현의 다리를 들어 내 중심부에 가져다 대었다. 여름용의 얇은 정장바지 위로 느껴지는 치현의 발은 생각보다 크고 묵직하다. 내 것이 발기해 있다는 것을 안 치현이 발가락을 꽉 오므리며 놀랜다. 주저하는 발바닥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바지의 지퍼를 열고 안으로 녀석의 발가락을 밀어 넣었다.

“저기, 형...형......”

발가락이 얇은 속옷 위로 발기한 그것과 닿아 움찔움찔 거리는 것을 느꼈다. 종아리를 핥아 올라가며 나른한 얼굴로 위를 바라보았다. 치현에겐 언제나 어른인 척 감싸주는 흉내만 내던 내가 자신의 종아리에 매달려 있는 폼이 적이 충격인 듯 눈동자가 크게 벌어져 있다. 그리고 치현의 뒤편으로 보이는 권이도는 무언가 사악한 희열에 빠진 표정이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욱 음흉해 보인다. 아아 이 사람아, 너무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표정 짓지 말라고.

“형, 그러니까 난, 이런 건......”

“좀 더......”

  발가락을 브리프 안으로 잡아끌었다. 치현이 자꾸 발을 빼려 했기 때문에 나는 허리를 들어 도망가려는 다리를 양팔로 휘어 감아야 했다. 엄지발가락이 맨살에 닿는다. 민감한 성기와 굳은살 박힌 발가락이 내 악력에 의해 억지로 비비어지자 치현의 다리 전체가 부르르 경련했다.  

“좀 더 세게 밟아 봐......”

치현이 입을 쩌억 벌린다. 어깨 뒤의 권이도의 얼굴에 광기 같은 미소가 그려지며 눈이 번들거린다. 나는 백치 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명백한 유혹의 뜻을 담아 바라보며 치현의 가장 억센 곳에게 내 귀중한 급소를 내주었다.
주저하는 발바닥에 아직은 말랑말랑한 성기를 짓이겼다. 발끝으로 음모의 숲을 헤집고 발가락으로 고환을 부드럽게 꼬집었다. 그 모두 치현의 발을 농락하는 내 손에 의한 것이었다. 불편해하는 치현의 표정과 달리 발에 닿는 감촉이 꽤 맘에 드는지 녀석의 심상찮은 아들놈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나른한 표정 위에 비웃음을 담아 넋 나간 표정의 권이도에게 중얼거렸다. 치현의 목덜미 근처에서 뜨거운 숨이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터졌다. 민감하게 달아올라 있던 치현이 어깨를 떨며 그제야 등 뒤의 존재를 눈치 챈다. “이런 이런......”낭패스러운 목소리엔, 그러나 즐거움이 묻어 있었다.

“서경씨, 은근히 그쪽으로 소질 있는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릴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면서 눈웃음을 쳤다. 치현의 발이 계속 내 중심을 누르고 있도록 유도하면서 녀석의 각진 무릎과 허벅지 위를 고개 숙여 핥았다. 단단한 근육질이지만 허벅지 안 쪽살은 여리디 여려서 입술로 강하게 흡입하면 부드러운 살이 혓바닥에 감겨든다. 치현이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흘끔 바라보니 권이도가 치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아 질척이는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치현의 허벅지 사이에서, 그리고 권이도는 목덜미 사이에서 서로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웃었다.





나는 치현의 어깨위로 몸을 걸쳐 충동적으로 권이도의 뒷통수를 잡고 입술을 덮쳤다. 반동으로 권이도의 몸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안고 있는 치현을 놓지 않아서 치현은 키스하고 있는 나와 권이도 사이에 끼어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치현의 몸에 기댄 채로, 권이도의 입술에 달라붙은 채로, 권이도의 입술 위에서 낮게 속삭였다.
유리알 없는 다이렉트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도전하듯, 그러나 유혹하면서.

“벗겨줘 치현아.”

권이도의 입술 위에서 치현의 이름을 불렀다. 키스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던 권이도의 입가가 움찔한다. 그 입술을 날름 핥으면서 나는 모든 체중을 치현에게 기대고 녀석의 두 손을 바지 위로 이끌었다. 두 사람분의 체중을 받는 권이도는 말이 없었지만 눈빛이 사납고 눈가가 젖어 있다. 치현이는 숫제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다. 나는 망설이는 녀석의 두 손을 정장바지 위의 중심에 문질렀다. “혀, 형...” 치현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치현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내가 스스로 바지를 벗는 건지 치현이 벗기는 건지 구분도 가지 않을 만큼 끈질기게 달라붙어 마치 조종이라도 하는 듯 다루었다. 그 손은 나의 부추김에 이끌려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린다. 덜덜 떠는 주제에,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표정 같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짓는다.

헐렁한 바지는 다리를 타고 훌렁 내려갔고 아직도 내게 잡혀 있는 치현의 손은 팬티 안으로 이끌려졌다. 골반을 지나 둔부를 활강하는 거친 손바닥의 느낌에 나는 약하게 몸을 떨었다. 조심스럽게 도착한 습하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조종당하듯 비행하던 손은 경기를 일으킨다. 나는 손을 빼려는 치현의 손을 움켜쥐었다. 새삼스럽게 왜 이럴까. 더한 짓도 했으면서.

“형, 그래도 오늘 그런 일이 있으면서 괜찮아? 정말 몸은 괜찮은 거야?”

“괜찮은지......확인해 볼래...?”

푸쉬식, 귓속에서 김이 나온다면 저런 얼굴일까. 망설이는 손가락이 주춤주춤 움직이더니 내가 이끌지 않아도 알아서 기어들어온다. 치현이의 손이 더듬거리며 입구를 찾고 따뜻한 감촉에 부르르 떨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찔러 넣어본다. 나는 양 손을 벌려 치현과 그 뒤의 권이도를 함께 끌어안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권이도의 등은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아 당신 정말 잘 참고 있어. 지금은 치현에게 양보하라구.

균형을 잡기 위해 침대에 한쪽 무릎을 걸치자 둔부가 저절로 벌어지면서 좁은 주름 앞에서 서성이던 치현의 손가락이 수월하게 안으로 침입한다. 손가락 하나가 안으로 말려들어오는 감각에 허리가 떨렸다. 나도 모르게 작은 숨이 흘러나온다. 뒤에 이물질을 허용한 것은 치현이와 처음 자던 난 이래로 없었다. 오랜만에 드는 전율이 허리와 엉덩이 근처를 간질인다. 손끝이 내벽을 긁으며 자극을 줄때마다 을 줄때마다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과도 비슷한 쾌감이 호흡을 거칠게 한다. 치현의 얼굴에 점점 망설임이 사라져간다. 남은 것은 나를 원하는 남자의 눈. 너무 앳되어서 망아지 냄새가 풀풀 나지만 어린만큼 거칠고 또 격렬하게 반응하는 귀여운 놈.

“형, 형...”

녀석이 드러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부빈다. 가슴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다. 녀석의 한숨과 체온이 심장을 간질인다. 엉덩이를 움켜쥐고 가슴을 빨며 매달리는 치현의 어깨에 턱을 걸치자 권이도와 눈이 마주쳤다. 권이도. 이게 내 방식이다. 나는 치현을 지배하는 것보다 치현이 내게 끌려오도록 할 거다. 설령 이상한 플레이를 하더라도 비록 수위는 한참 약하겠지만 원한다면 역할쯤은 얼마든지 바꿔줄 수 있어. 이게 당신과 나의 차이야.

권이도는 양손을 다 떼고 항복이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양키 같은 저 제스츄어도 자꾸 보니 귀엽다. 권이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치현의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녀석의 몸이 경련한다. 그 위에 걸터앉으며 공기 중에 드러난 치현의 등을 쓸어내렸다. 성을 내는 치현의 페니스 위로 음낭의 주름이 스친다.

성급한 치현의 아들놈 위로 무게를 실어 앉자 음낭끼리 부딪히고 치현의 기둥이 내 아들놈과 비벼졌다. 오싹오싹하는 한기가 든다. 치현이 몸서리를 치며 내 등을 끌어안았다. 목덜미가 훑어지고 어깨에 이빨이 박힌다. 마주 안은 가슴 위로 녀석의 배가 경련한다. 볼록 튀어나온 꼭지가 맨 가슴에 쓸린다. 등을 옭죄고 있는 완력이 숨이 막히도록 강하다. 달래듯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자 끄응 하는 신음소리가 강아지의 처량 맞은 소리 같아서 목구멍 안쪽으로 웃었다.
   
“형, 내가, 내가......”

엉덩이를 움켜쥐는 악력을 느끼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내가, 맘대로 굴어도 될까? 형한테 좀 더 욕심 부려도 돼?”
그래도 나 싫어하지 않을 거지? 그럴 거지?“

긍정의 뜻을 담아 녀석의 이마에 이마를 비비며 웃어주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달리 눈동자가 흔들린다.“너라면 멋대로 굴어도 봐줄게. 가끔은 형한테 땡깡도 부리고 그러는 거야.” 키득거리며 녀석의 턱에 손을 넣어 간질였다.

고집스럽게 다문 얇은 입술이 뜨거운 숨과 함께 열린다. 벌어진 입은 어둡고 습한 동굴 같았고 안에서 빨간 혀가 꿈틀거린다. 손가락을 넣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날름거리는 붉은 혀가 구강을 통해 나온 음성과 결합하여 언어를 뱉어 내었을 때, 나는 치현의 표정에서 확고한 결심을 읽었다.

“괜찮아 권이도. 이제 안 참아도 돼.”

치현의 한마디와 함께 갑자기 몸이 선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권이도가 치현에게서 나를 낚아채듯이 떼어 침대 위로 밀치고 내리눌렀던 탓이다. 사람의 체온이 사라진 피부에 오톨도톨한 살갗이 올라온다. 어? 하는 사이에 침대에 대자로 눕게 된 나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권이도의 거만한 눈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보다말고 쌀까봐 혼났습니다.”   

몸 위로 그늘이 진다. 빙그레한 미소에 광기가 어려 있다. 팔과 다리가 기둥처럼 몸의 양 사이드에 버티고 있다. 나를 가둔 권이도는 얼굴을 점점 가까이 댄다 싶더니 이빨을 드러내었다. 영화에서 본 흡혈귀가 이빨을 드러내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그리고 그 이빨은 콱 하고 내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아플 리도 없건마는 마치 살점이 물어 뜯기기라도 한 듯 나는 몸을 크게 출렁였다. 히이익-하고 추태를 부리며 비명을 지른 것은 순간 보였던 그의 송곳니가 너무 아파보였기 때문이리라.   

“버릇없는 몸입니다. 도도하게 내려다보며 상대의 난잡함을 비웃는 주제에 누구보다도 음탕한, 거만하고 교활한 사람이에요.”

목덜미와 어깨를 물어뜯으며 스스로 와이셔츠를 벗은 그는 손바닥으로 내 양 옆구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음험하게 웃었다. 순간적인 기 싸움에 진 것이 분했다. 울컥하는 기분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머리맡에서 가만히 가만히 뺨을 쓰다듬는 치현이의 빤한 시선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있지. 나도 가끔은 형이 어떻게 우는지 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

가슴이 따끔거렸다. 애꿎은 젖꼭지를 톱질하듯 잘근잘근 씹어대는 통에 소름 끼치는 혐오감이 들었다. 따뜻하지만 습기를 머금은 끈적한 손이 골반을 지나 둔부로 내려간다. 일깨워지는 아슬아슬한 감각에도 정신이 산만하다. 이미 암묵적으로 동의했음에도 치현의 앞에서 권이도의 손에 흥분하는 자신을 보여도 되는 건가 걱정이 앞선다. 가만히 뺨과 코와 입술을 스치던 치현이 중얼거렸다. 권이도의 손이 허벅지를 쓰다듬었고 입술은 음모의 숲을 아슬아슬하게 헤치고 있었다.

“형이랑 섹스하면 굉장히 기분이 좋고, 형의 신음소리도 좋고 다 좋은데......”

반쯤 성이 오른 아들놈을 살살 약 올리면서 혀가 주변 살갗을 배회한다.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손이 점점 거칠어진다. 입술 안으로 치현의 손가락이 살며시 비집고 들어왔다.   

“왠지 나랑 하고 있을 때의 형은 무언가 의무감에 차 있는 사람 같았어.”

짭쪼름한 맛이 느껴지는 검지가 혓바닥을 지그시 눌렀다. 부드럽게 입안을 휘휘 젓는 검지  손가락을 따라 중지 손가락이 들어오고 두 손가락은 물컹물컹한 혀의 양 가장자리를 살살 문질렀다. 입천장을 긁기도 하고 양 볼을 간질이기도 하면서 얇디얇은 점막을 자극한다. 미처 두 손가락을 다 빨지 못하고 침이 흘러내렸다. 멍하니 치현이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하체에서 애간장을 태우던 혀가 고환부터 혀를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숨결이 가랑이 사이에 닿는다. 반사적으로 허리가 들렸다. 좁고 습한 구강 안으로 페니스가 빨려 들어간다.

미간을 찡그리며 하체의 자극에 의연하려 애썼지만 허벅지에 힘을 주고 시트를 부여잡는
게 겨우였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맛이 가서 헤롱거리는 걸 치현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다. 절정에 이르는 모습도 좀 점잖게, 그래서 나를 더 믿음직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치현의 달뜬 얼굴이 가까워 졌다. 손가락이 세 개로 늘어나자 입안에 꽉 들어차 침을 삼키기도 힘들다. 더운 숨결이 뺨에 닿으며 치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형, 가버려도 돼...”

음낭과 기둥이 몇 번이고 길게 핥아 졌다. 상체가 휜다. 가쁜 숨을 내쉬고 고집스럽게 참고 있자 치현이 손가락을 뺀다. 호흡이 뻥 뚫린다고 생각한 순간 젖은 손가락이 가슴을 간질였다. 타액으로 잔뜩 젖은 치현의 손끝이 가슴의 돌기를 문지르고 꼬집고 꾸욱 눌렀다가 빙글빙글 돌린다. 어린애가 장난하는 것처럼. 그러나 순간, 축축한 치현의 입술이 살갗에 닿아 배를 타고 한없이 미끄러지며 배꼽을 지나 아랫배로 내려간다. 나는 설마...하는 생각을 하며 경악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아래에서 기둥을 핥던 권이도가 서서히 내 하체를 위로 들어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겨우 어깨까지만 일으켰을 뿐이다. “자, 잠깐 두 사람! 두 사람 다 기다......!!”다급하게 소리질러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다리사이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과 강한 흡입뿐이다. 치현의 머리가 점점 내 가랑이 사이에 가까워지자 권이도가 고개를 들며 자리를 양보한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뜨겁고 습한 치현의 구강 속 동굴로 성기가 빨아올려지고 있었다.

맙소사.
하체가 허공에 들린 채로 경련에 떨었다. 눈앞으로 별이 번쩍했지만 기대했던 사정감은 찾아오지 않았다. 뿌리를 꽈악 틀어쥔 권이도의 손이 내뿜으려는 성기를 구속한 탓이다. 동시에 권이도가 고환과 항문 사이의 얇은 점막을 못 견디게 빨아댄다. 그곳은 빌어먹게도 약한 곳이어서 나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그만, 그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질척이는 마찰 소리가 모든 소리의 전부였다. 아니, 내 가쁜 숨소리가 전부였다. 물 속에 잠긴 듯 멍멍한 귓속에서 호흡소리와 간간히 숨을 멈추듯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권이도의 혀가 회음을 지나 더 뒤로, 뒤로 후퇴한다.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주름을 문지르며 문이 열리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긴장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서 입구는 더욱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끈적거리는 혀가 촉수처럼 젖은 손가락과 함께 얽히고설키어 앙다문 주름을 끈질기게 두드렸다. 권이도의 어깨에 들려있는 허리가 아프다는 생각도 못했다. 기둥은 치현의 뜨거운 구강 안에서 펌프질 당하고 있었고 고집스럽게 다문 애널은 당장이라도 백기를 들고 싶어서 움찔움찔 겁에 절어 떨고 있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화살 과녁의 정가운데를 관통하듯 들어왔다. 꿈틀-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분명히 가고 싶은데, 꽉 막힌 입구 때문에 정액이 역류했다. 고통을 닮은 쾌감이 척추를 달고 정수리까지 달렸다. 목줄기가 오싹오싹하다.

미칠 것 같다. 딱 그 기분이었다.

허리를 비틀며 못 견뎌하는 동안 권이도의 길고 매끈한 손가락이 안으로 침범했다. 무의식적으로 힘껏 물었다. 이 조심스런 침입자는 좀 더 깊게 들어갔다가 살짝 빠져나왔다가, 다시 부드럽게 돌리며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기 시작했고 이내 두개로 늘어난 기둥이 끈질기게 이곳저곳을 탐색한다. 그리고 깊은 안쪽의 어느 기분 좋은 지점을 건드린 순간 이빨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식은땀이 흐른다. 눈치를 챈 권이도가 뿌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아아악! 빌어먹을---!!!

가마득한 하늘 위에서 알몸으로 뛰어내리는 감각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며 허리도 목도 힘껏 비틀며 휘었다. 전기충격 같은 강렬함이 사타구니에 지져지는 것 같다. 몇 번이고 울컥울컥 뱉어내며 부들부들 경련하는 엉덩이와 허벅지에 진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목구멍 밖으로 누가 내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신음소리가 새어나갔다. 진동하는 기구위에 올려진 것 마냥 전신이 덜덜덜덜 떨고 있었다. 엄청난 사정감이다. 속으로 욕설을 하며 꾹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악마 두 마리를 내려다보았다.

망할......  

미처 피하지 못한 치현이 얼굴에 묻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혀를 내어 핥고 있었다.





멍청히 누워서 천정의 벽지만 바라보던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당황하고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았다. 치현이 때문이다. 그제야 내가 어지간히도 치현이를 애 취급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녀석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다정하지만 상당히 일방적인 섹스만을 해왔다. 녀석을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은 즐겁지만 녀석에게 봉사 받는 것은 마치 순진한 어린애를 꼬드기는 나쁜 아저씨 같아서 무의식중에 피해왔던 모양이다. 그래 이 녀석은 너무 어리다. 11살이나 차이난다고. 어린애취향은 질색을 하던 내가 갑자기 맘에 드는 꼬마를 만났으니 취향과 본능의 괴리감 사이에서 방황할 만도 하지.

“나는 어린애가 아니야.”

얼추 정액을 닦아낸 치현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이 눈이, 처음 관계를 가진 날 치현이 지친 나를 붙들고 밤새 열락으로 젖어 갔었다는 것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 동안의 섹스에서도 늘 모자라 했던 것을 애써 외면하려 했었다. 권이도와 한통속이 되어선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통감했다.

“하지만 역시 서경 형한테는 상대가 안돼. 형하고 있으면 나는 안 그러고 싶어도 그냥 꼬맹이가 된 기분이야. 연인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 하다못해 섹스파트너란 기분도.
그래서 권이도를 이용하는 내가 나쁜 걸까?“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허공에 흩어진다. 몸을 쓰다듬는 따뜻한 손바닥이 사정후의 나른함을 부드럽게 다독인다. 치현이의 한숨과 권이도의 낮게 깔린 은근한 목소리가 늘어진 몸 위로 흘러내린다.

“저야말로 바라는 바입니다.
치현씨에게 항상 말했잖아요. 얼마든지 이용해달라고.”

“난 네 속을 모르겠어. 권이도.”

“아아, 저의 순수한 호의를 이렇게 몰라주십니까?”

능청을 떠는 권이도를 향해 치현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내 머리 위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너는 서경 형이랑 혼자만 하고 싶은 생각 없어?”“왜 없습니까? 언젠가 치현씨가 방심하면 제가 슥싹 먹어버릴 겁니다.”치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나랑 경쟁하자는 거야?”“제가 제안한 것을 받아들인 순간 우리들은 경쟁자라는 거 잊으셨습니까?”

한마디도 안지고 꼬박꼬박 대꾸하는 권이도도 그렇지만 씁쓸해 하는 치현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논리에 수긍해버린다. 그러나 늘 보여줬던 체념 섞인 얼굴이 아니라 좀 더 편하게 훌훌 털어버린 모습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안 져. 체력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아아
내가 들인 것이 강아지나 망아지가 아니라 늑대새끼였구나.

몸을 쓸어내리는 손이 두개에서 세 개, 네 개로 늘어났다. 동의를 구하듯 두 사람에 얼굴을 내려다본다. 알몸이 된 세 남자. 에어컨 바람이 춥다고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열락을 느꼈던 좀 전의 사정으로 완전히 넉다운이 되었지만 피곤하다고 혼자 돌아누울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시트에 녹아버릴 것 같은 몸과 달리 머리는 또렷해지고 에어컨의 냉기를 느끼는 순간 몸의 나른함도 식어간다. 권이도가 턱 끝에 키스하며 눈을 가늘게 휘었다.
거만해 보이던 그 눈초리가 이제는 눈웃음으로 느껴지다니 완전히 K.O.패다.

“서경씨, 아직 초저녁 밖에 안됐는데 각오는 되어 있습니까?”

표정 없이 허공을 보던 눈에 힘을 실었다. 굳어 있던 입가의 근육도 조금 비틀어 보았고 물에 빠져 해초에 걸린 듯 힘없이 누워 있던 팔을 흐느적 들어올렸다. 치현이와 권이도가 기대와 흥미를 동반하며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나는 몸은 그대로 뉘인 채로 두 팔을 들어 두 사람에게로 뻗었다.  

“이리 와. 두 사람 다.”





말주변이 없는 치현이는 그렇다 쳐도 입에 기름칠한 권이도 마저 한마디를 제대로 못 한다. 고작해야 나오는 소리는 탄성과 신음과 때때로 퍼붓는 경탄의 목소리. 짐승처럼 한데 얽혀 으르렁대고 헐떡이고 간헐적인 울음소리가 난다. 목덜미에 퍼부어지는 권이도의 거친 키스와 유두에 집착하며 매달리는 치현이, 그리고 두 사람의 어디를 어떻게 만지는지도 모르는 내 손과 입술과 비벼지는 하체. 누구의 손가락인지도 모르겠지만 항문을 드나드는 손가락은 서로가 경쟁하며 자리싸움을 한다. 아야야 그렇게 잡아 벌리면 아프다고.   

“쳇, 먼저 선수를 치다니.”

낭패라는 듯 혀를 차는 치현을 향해 나는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엉덩이엔 이미 권이도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젤이 잔뜩 묻은 손가락이 쿨쩍쿨쩍 불길한 소리를 내며 입구를 풀어주고 있었다. 미끌미끌한 점액질과 손가락의 단단한 감각이 몸의 열기를 더해준다. 치현의 중심을 잡은 손을 빨리하고 엄지로 귀두를 비비며 다른 손으론 음낭을 움켜쥐었다. 어깨를 거세게 잡아 뜯으며 못 견뎌하던 치현이지만 굉장히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와 등 뒤의 권이도를 향해 시선을 번갈아 준다.

“나도 나도...넣고 싶은데...”

개미소리처럼 흘러나오는 가련한 목소리. 나는 항문을 뚫고 들어오는 권이도를 느끼며 웃음과 신음, 그 중간 사이의 이상한 탄성을 내질렀다. 등 뒤를 덮어오는 따뜻한 가슴에서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귓가로 내뿜는 권이도의 숨결은 적이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이제껏 한마디도 안한 채 봉사한 권이도에게 상을 주기 위해 고개를 돌려 키스를 하려 했다. 하지만, 표정을 보고 나는 고개를 다시 돌려버렸다.

반칙이다. 그렇게 색기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지 마.

귓뒤에서 얼굴을 슬며시 문지르는 권이도가 한숨을 불어 넣었다. 몸을 숙이자 귀두부터 천천히 밀고 들어온다. 느린 속도에 감질남을 느낄 짬도 없이 치현이 나를 덥석 안아 온다. 치현의 팔이 권이도의 팔과 엉킨다. 두 사람 사이에 끼인 모양새인 나는 이제껏 내 손에 의해 농락당하던 대물이 하체에 비벼지는 것을 깨달았다. 위에서 짓누르는 압력과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자극에 나는 무릎이 꺾여 치현이를 깔고 엎드린 채로 침대 위에 이마를 박았다. 앗, 앗.....치현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녀석의 땀을 닦아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실현하기도 전에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온 권이도의 축축한 음모가 치골에 닿았다. 비벼지는 치현의 음낭이 내 음낭을 밀어 올린다. 귓바퀴를 깨무는 건 치현이 같았다.

“두 사람이 들어가기엔 무리일 것 같군요.”

권이도가 항문의 주름을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치현이 역시 권이도와 맞물린 항문입구의 주름을 어떻게든 늘려보려 애쓰지만 이미 성기로 꽉 차 있으니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치현이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얼굴이 새하얘졌다.

“서, 설마요... 안돼요 안돼...어떻게 그걸 두개나 넣습니까. 그게 사람입니까?”

“걱정마세요. 충분히 풀어주고 준비하면 안 될 것도 없......크윽...”

끈적끈적하게 젖어 있는 치현의 물건이 항문 쪽으로 기어가며 자기 자리가 없나 요리조리 문질러보고 있었다. 찰지게 달라붙는 귀두와의 마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꿈틀거렸고 덕분에 내장이 권이도를 압박한 모양이다. 나와 권이도가 아슬아슬하게 사정을 참아내고 있는 와중에 치현이의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틈이 안 나네...너무 조여. 근데 둘이 표정이 왜 그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치현의 물건을 살살 달래주었다. 지금도 검붉게 발기한 녀석의 사이즈는 표준형이 절대 아니다. 아서라, 네 물건 하나도 벅차 죽겠는데 권이도거랑 같이 넣겠다고?  “치현아, 네 건 너무 커.”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치현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진다. 등 뒤에서 내쉬는 한숨은 떨리고 있었다.

손을 치현의 엉덩이로 뻗었다. 평소랑 같은 포지션이라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내 것으로 입구 주변을 두드렸더니 얕은 숨을 뱉으며 간지러워한다. “담번엔 내 차례야. 응?” 다짐을 받아내려는 녀석에게 그러마 하고 웃어주었다. 콘돔을 끼우고 젤로 치현이를 충분히 적셔주는 동안 권이도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천천히 치현의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나는 눈앞이 명멸하는 아찔함을 느꼈다.
     
“아...형...서경 형....”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는 치현이 좋다. 등 뒤에서 말없이 끌어안아주는 권이도가 좋다. 서로가 서로를 안고 당기고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인 순간 쾌락은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포인트만을 딱딱 골라 짚는 그런 쾌락은 아니었다. 우습게도 우리 셋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서로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엇박자를 이루면서 원하던 부분만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간다. 충족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갈구. 그래서 더욱 격렬하게, 더욱 안타깝게 몸부림쳤다. 닿지 않아. 하지만 닿을 것 같아. 좀 더, 좀 더......

그렇게 몸부림치자 미묘하게 어긋난 우리는 셋이 포개어져서 누가 누구와 키스하고 있는지 누가 누구의 몸을 더듬고 있는지 경계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내 다리와 허리가 어떻게 비틀리고 있는지 몰라도 관절이 내지르는 비명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거친 피스톤질과 질척이는 신음과 물기 머금은 교성이 짐승처럼 뒤엉킨 우리의 행위 전부였다. 심장이 뻐근하도록 섹시한 권이도가 신음하며 내 이름을 부른 것 같다. 아니, 치현이의 이름도 부른 것 같다. 고개를 도리질 치는 치현이 절정에 올라가며 허리를 퉁긴다.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나락에 가까워지는 감각.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구석구석을 훑으며 지나갔다. 나는 두 사람을 얼싸안고 숨을 멈췄다.





*                *                *





거기가 아파 죽을 것 같다.
아파 죽을 것 같은데, 등 언저리가 간질간질한 이 감각은 무어란 말이냐.

“저기 치현아 이거 좀...뭔가......윽...”

애초에 저 녀석의 것을 넣고 이런 자세를 하는 것이 무리다. 그냥 들어와도 절반밖에 안 들어가는 놈의 물건인데 객기를 부린답시고 녀석의 위로 털썩 내려앉았던 것이 실수였다. 그것은 권이도가 나를 약 올렸던 탓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지쳐 쓰러진 나보다 좀 더 빨리 회복한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서로 얽히며 염장을 지르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물을 마시고 돌아오는데 침대 위에서 치현을 끌어안고 녀석의 항문에 중심을 밀어 넣은 권이도가 빙글빙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더랬다. “벌서 포기입니까? 우리는 아직 안 끝났다고요.”

어설픈 도발에 넘어간 나도 나다.

“그거 깊숙이 들어가면 위험할텐데요......”

치현을 뒤에서 안으며 마주본 권이도가 진심으로 걱정 어린 말을 한다. 나도 안다. 이거 깊어. 너무 깊다. 주름이 죄다 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꽉 들어찬 기둥이 몸의 무게에 힘입어 한계치 넘어 깊숙이 미끄러지자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나중에 안 빠지는 건 아니겠지. 조금만 가늘었어도 어찌어찌 내 맘에 드는 곳으로 유도해서 비벼보겠지만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일이니 비비기는커녕 제일 굵은 귀두가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막힌다. 식은땀이 흘렀다. 무릎으로 지탱하고 있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하지만 치현이 아직도 모자라모자라 하는 표정 가득히 하고 올려다보니 이제와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아버리겠구나 아주.

“형 많이 아파? 지난번엔 다 들어갔었는데......”

“아니 그게...좀 힘든 것 같아...너 그새 더 커졌냐?”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괜찮을 거야.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

뒤에서 키득키득 웃고 있는 권이도가 얄밉다. 저 작자는 분명 치현이 자기 것을 물고 움찔 거릴 텐데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다. 방금 전의 섹시한 표정은 다 어디로 가고 다시 밉상으로 되돌아왔단 말인가. 치현아 너도 그렇다. 너 권이도 거 안 불편해? 아니면 저 작자가 네 포인트를 잘못 골라 찔러서 별 감흥이 없는 거냐?  

혼자 키득거리던 권이도의 손이 슬쩍 치현의 물건과 내 항문이 맞물린 사이로 끼어들어왔다. 살살 문지르는 손끝은 얄미울 정도로 감질나게 잔뜩 팽창한 주름을 자극했다. 윽...낮은 신음을 내며 권이도의 어깨를 짓눌렀다. 다른 팔을 내 등으로 둘러 꽉 끌어안은 권이도가 치현을 사이에 두고 귓가에 중얼거렸다.  

“도와드리지요. 힘 빼세요.”

뭐라고 말 할 틈도 없이 엉덩이가 잡아 벌려졌다. 양 손으로 둔덕을 잡고 쥐락펴락 하는 근육의 움직임에 입구가 개폐를 반복한다. 치현은 자신의 기둥을 물었다 놓았다 하는 자극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허리에 감아오는 치현의 손이 성급하게 짓눌러 내리려 한다. 안돼, 위험해, 아무리 천천히 공을 들여도 이 자세에서 무리인 건 무리인 거라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프고, 무섭다. 한번 찢어지면 회복되기 힘들단 말이다. 사정하는 표정으로 치현과 권이도를 바라보지만 이마에 땀을 뚝뚝 흘리며 집중하는 두 사람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권이도가 엉덩이를 주무르고 치현이 골반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안돼, 하지 말라니까. 조금씩 조금씩, 골반을 움켜 쥔 치현이 좌우로 돌리면서 내 허리를 아래로 끼워 맞추고 있었다.

이거 미치겠네...
아파 죽겠는데, 분명 한계인데, 치현의 물건이 닿아 들어가는 내벽이 욱씬욱씬 쑤시면서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치달린다. 항문의 반복되는 개폐운동으로 치현의 성기에 거의 들이 붓다시피 한 젤이 찌걱찌걱 소리를 내며 빨려 들어갔다. 부은 듯 화끈거리는 곳이 민망할 정도로 쑤신다. 제기랄, 찢어져서 상하게 되면 두 사람에게 한동안 탑은 꿈도 꾸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을 거다.

“좀 더...허리를 들어봐요...”

허스키한 목소리, 절정을 참기 위해 들이키는 숨소리. 나를 달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들은 허리를 매만지고 등을 쓰다듬으면서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삽입을 유도한다. 숨이 막힐 듯이 꽉 들어차는 치현의 것을 느끼며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차라리 콘돔이라도 벗겨버리면 부피가 좀 덜할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지만 엉덩이에 닿은 음모와 낭심을 느끼자 지루하고 긴 삽입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아......깊게 내쉰 한숨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 우아...형 움직이지...마...”

내 양 허리를 잡고 있던 녀석이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푹 숙이고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어째 대물을 삼킨 나보다 더 괴로워하는 것 같다. 가만히 고개를 숙여 치현의 얼굴을 들여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란 치현은 눈가에 물기마저 맺혀 있었다.

미치게 귀엽다.

“궈, 권이도 너, 너 이 새끼 너도 움직이지..마.....!”

허리를 들썩이려던 권이도가 치현의 일갈에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멍하니 치현을 보다가 아래의 통증도 잊고 그만 흥분해버렸다. 치현은 턱이 덜덜 떨면서 앉은자리가 불편한지 뒤척이다가 어디를 잘못 찔렸는지 윽-하고 경련한다. 고개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려 노력도 해본다. 우와우와 귀여워. 내가 자꾸만 쳐다보려고 하니까 한 팔로 얼굴을 가리고 내 어깨를 밀었다.“뭘 그렇게 뚫어져라...” 어깨가 밀린 반동으로 아래에 통증이 달렸다. 얼굴을 찡그리며 아프다고 말하려는데 치현이 몸을 경직시키며 눈을 크게 홉뜨고 있었다.

피 보는 게 처음도 아니고 진형이랑 할 때는 더 심하게도 했다. 설령 찢어진다 하더라도 약 잘 바르고 며칠 몸조리 잘하면 되지 않을까? 뒤가 다친다고 섹스를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 치현이가 저렇게 느끼고 있는데 그거 조금 찢어지는 것쯤이야......

치현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거야?

하지만 한번 괜찮다고 생각해버리자 몸은 본능대로 움직여 아래 가득 들어찬 치현의 성기를 물고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여 보았다. “아아앗...형, 잠깐...“ 눈을 부릅뜬 치현의 표정이 완전 뻑가게 죽여줘서 나는 이마의 식은땀도 무시하고 허리를 돌렸다. 너무 집중해버려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너무 귀엽잖아 저런 표정, 이제까지 숨기고 있었던 거야?

“악당 같아요. 방금 그 표정.”   

코끝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치현의 몸이 쓰러지지 않게 지탱하면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권이도가 놀리듯이 말을 걸었다. 그러나 눈이 풀려 있다. 권이도의 미묘하게 경련하는 턱 주변이나 금방 녹아내릴 듯 흐물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엉덩이는 화끈하게 아프지만 땡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움직이는 진동이 제게도 느껴집니다.
치현이 얼마나 꽉꽉 조이는지......당신이...알까요......”

점점 느려지는 권이도의 음성은 이내 작은 탄성으로 이어졌다. 헤에...점점 탄력을 받은 나는 눈썹을 실룩거리다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치현의 음낭에 엉덩이를 치받기 시작했다. 눈에 별이 번쩍하도록 아팠지만 인상을 찡그리는 권이도의 표정은 일품이었고 음악처럼 치현의 비명이 울렸다. 악, 윽, 형! 그만해! 나 가버린다고! 너무 빨라, 이건 못 참을 것 같......

부둥켜안은 치현의 몸이 잔뜩 수축했다. 그리고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이윽고 꿈틀-꿈틀-길게 경련하는 녀석의 근육이 잘게 떨기 시작했을 때 풍선의 바람 빠지는 소리가 치현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아아아아......듣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쭈뼛쭈뼛하다.

문득 어깨가 아프다는 걸 깨달았다. 권이도가 내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고 나와 치현의 목덜미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버린 건가. 아마 치현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안쪽이 엄청나게 수축했을 테니 이해는 간다.

괘씸해라. 둘 다 내가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먼저 가버리다니.

하지만 주체할 수 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아 너무 좋다. 두 사람 다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낭패한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는 권이도와 온몸이 새빨갛게 물든 치현이 욕설을 뇌까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둘을 얼싸안고 유쾌하게 웃었다. 웃을 때마다 하반신을 자극한 내벽 때문에 치현과 권이도는 더욱 더 곤란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게 더 즐거워서 내 웃음은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                *                *





5일밖에 휴가를 주지 않았다고 최이사를 욕했던 것 취소다.
대체 이렇게 바쁜 시기에 휴가를 5일이나 주다니 말이 돼? 응? 최이사님! 저 같은 인재를 5일이나 내버려 두다니 말도 안 됩니다!(이미 그 중 2일이 주말이라는 것은 잊었다) 지금이라도 불러 주시면 회사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열심히 일하겠......

“형, 집중해...”

“대체 치현씨한테 집중하란 소리까지 듣게 되다니 그 서경씨도 이게 한계입니까?”

조르는 치현의 목소리, 빈정대는 권이도의 목소리. 나는 두 괴물을 바라보며 경악으로 몸을 떨었다. 아직도 힘이 남아있어? 지금이 몇 신 줄 아냐고!!!

“밥.....밥 먹고 합시다...”

나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밥은 아까 먹었는데...” 이미 죽어버린 내 똘똘이를 안타깝게 쓰다듬으며 치현이 중얼거렸다. 하늘이 노래진다. 벌써 사흘째다. 사흘째 먹고 마시고 텔레비전도 봤지만 거의 헐벗은 채로 줄곧 이 짓만 했다. 삽입자체는 별로 하지 않았던 대신, 입으로 손으로 엄청 빨려서 이제 더 이상 나올 정액도 없다. 정기를 쪽 빨린 기분이다.

“하긴, 저도 좀 출출하군요. 간단하게 간식이라도 먹을까요?”

“그럼 그저께 마트에서 장 봐온 소시지 구워올까?”

“부탁합니다. 치현씨.”

치현이 알몸으로 주방에 달려갔다. 나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서 퀭하게 들어간 눈으로 권이도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이제 슬슬 노후를 생각할 나이인데 치현이에 버금가는 저 체력은 대체 뭐냐!   

“치현이야 젊어서 그렇다지만 당신은 뭡니까?”

내 질문의 의도를 안 권이도가 쿡쿡 웃었다.

“백인애들하고 경쟁하려면 체력은 필수입니다. 학위는 머리로 따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따는 거거든요.”

이유모를 억울함을 느끼며 한숨쉬었다. 중간 중간 쉬긴 했지만 몇 시간 째 이러고 있으니 말할 기운도 나지 않는다. 휴지통에 가득한 휴지와 콘돔이 정말 질펀하게 놀았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뭐라 해도 세 사람분의 콘돔이다. 콘돔회사에서 감사패라도 주지 않을까.

휴가 첫날 그렇게 걸신들린 듯이 섹스하고 한밤중에 장을 보던 중이었다. 권이도한테 휴가기간 동안 아예 우리 집에 와서 머물라는 얘길 했던 내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

-감당하기 힘들텐데요.

그 말을 비웃어 넘겼던 것이 죽도록 후회가 된다.

“그런데 회사는...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정하셨습니까.”

잠시 숨을 돌리던 나는 현실로 돌아와 실질적인 질문을 했다. 사실 한국에 계속 있을 거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대놓고 물어보지 못하겠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권이도가 허공을 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가 고개를 돌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고 말하면......잡아 주실 겁니까?”

“가지 마십시오.”  

고민할 짬도 없이 바로 나온 대답에 권이도는 놀라는 듯했다. 하지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요즘 취업난이 심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문직이니 어딜가든 뭔가 일거리는 있지 않을까. 정 안되면 그래, 내 집에 들어와서 전업 데이트레이더가 되어도 좋다. 이제와 권이도가 떠난다니 말도 안돼. 당신 벌려놓은 일은 책임져야 할 것 아니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농담입니다. 아무렴 제가 서경씨와 치현씨를 두고 어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나와야 당신답다.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권이도는 곤란한 듯 자신의 턱을 긁적였다.

“......D증권과는 합의의 여지도 없는 건가요?”

좀 더 확실한 대답을 원해서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쉽게 답하지를 못한다. 일이 잘 안 풀리는 걸까. 나는 머뭇거리는 권이도의 태도에 더 추궁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높은 자존심을 괴롭히는 것이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래서 “그건......”하고 권이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던 것과 동시에 나는 화제를 돌려버렸다.“아, 저기 치현이가 오네요.”군침 도는 냄새가 모락모락 나는 쟁반을 들고 치현이 신나는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권이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잠깐 궁금했지만 너무 파격적인 치현의 등장에 그만 내가 이제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고 말았다.

알몸에 앞치마, 그것도 「원조 할머니 닭갈비 집」이라고 써있는 앞치마다.

“뭡니까, 그 무드 깨는 앞치마는?”

“어? 기름 튀지 말라고 입은 건데.”

권이도의 얼굴이 실망으로 이지러진다. “아아 유혹을 하려면 제대로 하세요. 제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권이도가 한숨을 쉬자 치현이 인상을 구기면서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던졌다. 나와 권이도는 엉겹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펼쳐보니 치현이 던진 것은 각각 「아지매 삼겹살」「소주에 닭발하나」라는 상호가 적힌 앞치마였다.

“허튼 소리 말고 그거나 걸치고 먹어. 먹다가 흘리면 뜨거우니까.”

멋대가리 없는 앞치마를 하나씩 들고 권이도와 나는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번갈아보았다. 요 며칠간 우리의 식탁이 되어버린 탁자 위에 쟁반을 올려놓은 치현이 탁자를 탕탕 치면서 “안 먹어? 다 식는단 말이야.”하고 재촉한다. 끄응...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치현이의 알바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앞치마를 목에 걸었다. 세 남자가 오순도순 모여 앉아 알몸에 앞치마를 걸치고 소시지를 먹게 되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다음에 장을 볼 땐 새 앞치마도 사옵시다.”

“세 개나 있는데 뭐하러 또 사?”

“레이스와 하트무늬가 잔뜩 달린 걸로, 신혼부부용의 앞치마를 사놓고 치현씨의 알몸에 입혀볼 겁니다.”

“죽고 싶냐...
......하지만 서경 형한테 입힐 거라면 괜찮을지도...”

“나는 좀 빼주라.”

소시지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치현과 권이도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열개가 넘는 소시지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지막 남은 소시지를 입에 넣고 있는 데 치현이 입맛을 다시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왜? 더 먹고 싶어?“ 고개를 저으며 얼굴이 새빨개진 걸보니...쓸데없는 생각했구나...그새 앞치마의 앞섶이 불룩해졌다. 옆쪽에서도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기에 고개를 돌렸더니 자기 몫의 소시지를 다 먹은 권이도가 물을 마시면서 은근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아 겨우 몇 분이나 쉬었다고......나는 와그작와그작 소시지를 씹으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먹고 씻을 겁니다. 그 다음은 잠깐 컴퓨터를 하고 잘 거예요.
치현아,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어.”

“에이......”

김이 샜다는 듯 투덜거리는 치현와 실망한 표정의 권이도를 보면서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기운이 남아도는 것 같으니 둘이서나 잘 해봐요. 난 좀 쉬어야겠습니다.”

권이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치현을 바라본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중 하나는 슬쩍 미소를 짓고 하나는 화들짝 놀라며 뱀을 만난 설치류인 양 몸을 움츠린다. 웃고 있던 권이도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아직 집에서 가져온 장난감들을 시험해 보지 않았어......”장난감? 의미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을 향해 궁금하다는 표정을 보내고 있는데 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릴 질렀다.“설마! 너!”

“기구는 오랜만이죠? 어떻습니까 서경씨 앞에서 당신의 진동하는 엉덩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쓰, 쓸데없는 짓 하면 죽어! 이 변태자식, 왜 그딴 걸 가지고 다니는 거야?”

“선견지명이라고 해주세요. 서경씨의 체력이 당신을 따라오지 못할 것은 자명한 사실. 치현씨의 주체할 수 없는 정력을 받아 들여 줄 귀여운 바이브레이터, 딜도, 모조성기, 회초리, 구속구.....그리고......”

“다, 다, 다, 닥치고 입 다물어!!”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상상해보았다. 구속구를 물고 신음하는 치현이라...잊고 있던 가학심이 스물스물 고개를 쳐들면서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권이도는 엊그제 장보고 나서 잠시 집에 들른다고 하더니 세면도구나 옷가지만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나보다.   

“너 그걸 죄다 가져왔어?”

치현이‘변태새끼 나가뒈져!’라는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뭘 가져왔는지 보고 싶습니까?” “아, 됐어!”“너무 하십니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창피함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치현이도 귀엽고 치현이를 살살 가지고 놀며 즐기는 권이도의 모습도 멀리 떨어져서 보니 꽤나 재밌다. 내가 당사자였으면 열이 바싹 올랐겠지만......이래서 남의 싸움은 돈 주고 구경하는 거랬던가...

나는 앞치마 입고 으르렁대는 두 남자의 희극을 식후의 여유를 즐기듯 관람하고 있었다. 아직도 밤은 길다는 듯 창밖은 컴컴했고 세상은 평화로웠다.





*                *                *





“이야~ 성대리 축하해!”

“어머, 신부가 너무 예쁘다아~~”

“행복하게 사세요!

“드디어 성대리도 가는 구만, 어이구, 우리부서에 총각만 몇 명이야 이거.
성대리도 제 짝을 찾았으니 다른 사람들도 분발해야지~”

가을초입에 들어섰지만 한 낮은 아직도 여름마냥 뜨거운 어느 토요일 오후, 예복을 입고 하객들과 인사하는 신랑 성민석씨에게 우리는 부러움과 질투와 혹은 형식적인 인사를 한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맞아 김대리! 김대리는 어디 좋은 사람 없어? 은근히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성대리처럼 우리 몰래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짠~ 하고 청첩장 돌린다던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회피하는데 꼬치꼬치 캐묻는다. 나는 만날 사람도 없다며 넉살을 떨었는데 다들 어깨를 과장되게 늘어뜨리면서 통탄한 표정을 짓는다.

“성대리님이~ 새끼 좀 쳐봐요. 김대리님 일만하다가 좋은 청춘 다가겠어요~~~”

타인의 결혼식장에 들어서니 결혼 적령기에 들어 선 내 나이가 다시금 일깨워진다. 현실 은 애써 외면하고 있어도 어느 날 갑자기 그 냉정함을 드러낸다.‘이제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하지 않겠어요?’악의 없는 말들은 굴레가 되어 등에 무거운 짐을 씌운다.

이성간의 결합만을 인정하는 결혼은 동성애자에겐 자기부정이다. 그것은 곧 자기기만이며 배우자에 대한 사기행위다. 과연 나는 언제까지 노말을 위장하며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젊음을 즐길 수 있을까. 이렇게 날카로운 사회에서 언제까지 가면이 벗겨지지 않고 몸 사리며 조용히 내 본성대로 살 수 있을까.

“너무 부담 갖지 마. 때 되면 다 가는 거지.”

하객들과 인사하느라 정신없던 성대리가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내 얼굴이 그렇게 어두워 보였나. 나는 성대리의 말에 쓴웃음을 흘렸다. 결혼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고 있진 않다. 어차피 안 할 거니까. 하지만 결혼하지 않을 나를 향해 차가운 눈을 던질 사회에 대한 부담은 상당히 무겁다.

“...... 전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어이구 성민석씨 축하드립니다.” 어딘가의 전무님처럼 배 나온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성대리를 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렇게 복잡한 식장에서 예비신랑이 얼마나 정신없는지는 여러 번 보아왔기에 투덜거리듯이 내뱉은 말이었다. 설마 들었으리라곤 생각 못했기에 배나온 아저씨를 보내고 돌아온 성대리의 말에는 흠칫 놀랐다.  

“아, 김서경씨라면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예?”

“남의 눈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자기 일만 하는 사람들 중엔 독신자도 많더라고. 요즘 싱글족이 늘고 있잖아. 세상은 점점 변하는 거고 독신이 이상할 것도 없지.
그래도, 연애는 해보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고 새신랑은 나이든 어른의 무리에 쓸려가 정신없이 악수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깨를 치여 가면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직장 1년차 선배, 은근히 이 사람의 한마디는 나를 기운 나게 한다. 덕분에 난 세상의 통념에 스스로 짓눌려 괴로워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 사회는 무섭지만 결국은 변한다. 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하는 것은 나고 그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열심히 살면 된다. 사회가 아무리 내게 일반적인 잣대를 들이대어도 태연스럽게 핑계를 늘어낼 넉살은 얼마든지 있다. 게이란 것을 속이고 거짓 결혼을 하느니 일에 치여 혼기 놓친 노총각소리 듣는 게 훨씬 낫다.

그나저나 졸지에 성대리에게도 일벌레로 찍힌 모양이다. 오죽하면 연애는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다니 이거 뒤로 호박씨 까고 있는 내 입장에선 민망하기 그지없는 격려가 아닌가. 나는 신랑 대기실로 들어가는 성대리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성민석씨, 연애라면 이미 흐물흐물할 정도로 빠져 있는 걸요.





*                *                *





성대리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M&A의 실패와 경영권방어전으로 인한 자본 손실, 그리고 지속되는 검찰의 조사로 인해 회사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지만 최이사, 아니 최사장은 오히려 기업 설명회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해외 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IR팀을 정비하였고 최사장의 권유에 의해 나는 그 쪽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 회사의 IR팀은 사장 직속부서라서 사장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잦다. 우려와는 달리 최사장은 나를 아직 쓸만한 사원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새로운 팀이 된 사무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고 대부분 나이가 많고 직급도 높다. 전에 있던 부서에서는 동기도 있고 직장 선배, 후배들도 있었지만 대리급 이상으로 구성된 이 팀에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허허허 오늘은 회식이야! 먹고 마시다 죽어 보자구!”

박전무가 팀원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검찰조사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지만 투실한 뱃살도 요란한 웃음소리도 여전하다. 오늘 회식 자리를 무슨 핑계로 빠지나 고민하고 있는데 사무실 입구가 술렁거렸다.
최이사, 아니 최사장이 한 남자와 함께 나타났다.

“소개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된 권이도씨입니다.”





인사가 끝나고 각자 배치 받은 자리로 돌아갈 무렵에 나는 권이도에게 “저 좀 잠깐 볼 수 있을까요?” 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최이사가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마 위로 힘줄이 솟는 것을 느끼며 “자, 이리로...”하고 권이도를 꾀어 낸 나는 인적이 뜸한 복도로 나오자마자 소매를 붙잡고 비상계단으로 다짜고짜 끌고 들어갔다.
복도로 통하는 문을 거세게 닫았다. 벽으로 그를 밀치고 그의 몸을 가두듯 양 벽에 손을 짚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높아지는 언성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최이사, 아니 사장님한테 헤드헌팅 된 겁니까?”

“앞으로 무엇을 할지,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말씀 드렸었죠.”

태평스러운 말투가 얄밉다. 나는 기가 막혀서 앞머리를 연신 쓸어 올렸다가 몸에 열이 나는 것 같아 양복 앞섶을 털며 부채질 하다가 웃고 있는 안경 속의 권이도에게 따졌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이야기가 오갔던 겁니까?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걱정하는 게 그렇게 재밌었습니까? 사람을 우롱해도 유분수지......!”

“얼마 전 이 제의를 받고 신변을 정리하느라 좀 바빴습니다. 그리고 최이사에게 IL에서 일하겠다고 최종 통보를 하던 날, 겨우 서경씨의 휴가 날짜를 들을 수 있었지요. 전화보다는 직접 알려 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휴가 첫날에 댁에 찾아갔던 건데.....”

화를 내는 내게 권이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안경을 추어올리며 내려보는 눈동자가 차가운 건지 흔들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에서 막 돌아 온 치현씨는 혼자 청소나 하고 있고 당신은 그 사람 집에 가 있더군요.”

그제야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머릿속이 반짝였다.

“굉장히 심술이 났다는 거 아십니까?”

갑자기 무안해진다. 그러니까, 휴가 첫날 잔뜩 기대를 하고 달려왔지만 내가 진형이한테 가 있어서 배알이 뒤틀렸단 얘기구나. 쪼잔하긴. 불만이 많았지만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나는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휴가기간 내내 같이 있었으면서 언질도 안 해 주다니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괜히 말했다가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싫었습니다.”   

제기랄, 말은 잘한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땅을 노려보았다. 나를 속였던 것에 대해 따지려고 이런 곳에 끌고 들어왔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이유 없이 부글부글 끓지만 딱히 할말이 마땅찮다. 따지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더 물어보라는 권이도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나는 저가 이제 실업자가 된 줄로만 알고 어디 가서 재취업을 하나 걱정해 줬는데......권이도가 그렇게 여유부리고 있던 건 역시 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건가. 하지만 증권사에 있다가 우리 회사로 오는 게 과연 성에 찰까?

“D증권에 비하면 IL은 아직 중견기업에 불과한데......만족하십니까?”

“사장님께서 좋은 보수를 약속하셨습니다. 대우도 부장급이고요. D증권에서 잘린다는 형태로 떨어져 나온 게 아니라 표면상으로는 헤드헌팅된 걸로 일처리가 되었으니 제 이력에도 나쁠 게 없지요.”

“....그렇게 된 건가요....”

이 사람과 앞으로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최사장의 꿍꿍이도 알 수 없다. 최사장이 권이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뻔히 눈에 보이는 두 남자를 같은 부서에 두어서 뭐하려고? 설마 한번 호흡을 맞추었던 팀이니 IR부서에서도 잘 해나갈 거라는......우리가 호모관계라는 것을 배재한 지극히 객관적인 판단은......아니겠지?
설마, 만일 그런 거라면 최사장 너무 순진한거다.

“전 사장님을 모르겠습니다.”

  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 분 생각은 도통 읽을 수가 없어요.”권이도 역시 그렇게 말했지만 그다지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다. 최이사와 권이도라면 죽이 잘 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엔 IL과 권이도 사이에는 여러 방향으로 꼬여 있다. 아직도 뉴스에 오르내리는 워레스 때문에라도 권이도가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친구들이......화 많이 내겠군요.”

그것이 워레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권이도는 눈치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같은 놈이라고 욕하더군요.”

말문이 막힌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친구들한테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 까지 IL로 오다니 갑자기 간지러운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오려한다. 그래, 권이도라면 미국 본사에 있는 워레스 펀드로 정식 입사했을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굳이 IL을 택한 건 역시 역시 나 때문......

“아직도 파트너를 조교하지 못했다면서 그동안 쌓은 경험도 다 헛거라고 어찌나 놀려대던지 식은땀이 다 흐르더군요. 남의 연애담에 목숨을 거는 친구들이라서 얼마나 곤란한지 모릅니다.”

엥?

“지금은 제게 신경 쓸 경황이 없지만 아무래도 조만간에 워레스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흐지부지 될 것 같습니다. 그 친구들, 제가 IL에 들어가서도 파트너 교육에 실패한다면 사태가 안정 된 후 잔뜩 비웃어주겠다고 벼르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워레스 입장에서 보면 당신은 친구들을 배신한 게 되지 않나요? 자기들은 검찰에 시달리는데 워레스를 배신했던 IL에 입사한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워레스를 배신한 건 김한곤씨지 IL이 아니에요.
새로 부임한 사장은 잘하고 있냐고 안부까지 묻던 걸요.”

순간 한기가 들었다.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구나. 역시, 최현욱 이사는 워레스와 손을 잡고 전 사장님을......

“거기까지.”

권이도가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갖다 대면서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아-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거야 원 최사장의 그 피로하고 깡마른 얼굴 어디에 이런 능구렁이가 숨어있나 싶다. 아니, 지금은 이게 문제가 아니야. 파트너의 교육이 뭐가 어떻다고?

“그래서, 당신이 IL에 온 이유는 고작 친구들에게 보일 성과를 위해선가요?”

“아무렴 직장을 그런 이유로 쉽게 옮기겠습니까.
친구들의 농담을 너무 깊게 받아들이지 말아 주세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힐끔거렸더니 권이도가 손을 흔들어 보이며 부정한다. 난처한 웃음 뒤에 무슨 꿍꿍이속일지 알게 뭐냐. 나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침묵했고 권이도는 안경 뒤에 표정을 숨기며 가만히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회사 건물의 아무도 없는 밀폐된 비상계단, 둘 만 남은 남자. 나는 앞으로 이 자와 같은 부서에서 일한다는 것에 묘한 긴장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호모 두 명이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상사의 밑에서 같은 일을 하다니 재밌는 일 아닌가.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간지러움처럼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자꾸 올라와 팔짱을 끼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것 참, 처음엔 그렇게 재수 없어 했는데 당신이랑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저는 일에 관해선 봐주지 않을 거에요.”

피식피식 웃고 있는 내가 한심했던지 권이도가 으름장을 놓았다. 이번 부서에서 하는 일엔 확실히 그가 더 경험이 많으니 실수라도 하면 저 인간의 얄미운 미소를 받으면서 엄청 깨질 각오도 해야 하겠지. 성과가 시원찮으면 최사장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도 감수해야 한다. 권이도와 내가 한 부서에서 일하면서 과연 얼마나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최이사는 우리 둘을 같은 장소에 모아 놓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듯하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하겠지?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우리는 서로 악수를 하며 거만하게 웃었다. 비상계단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중에도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멀찌감치에 서서 권이도를 기다리며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사장을 봐도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그저 반갑기만 하다. 사장에게 인사하고 나는 내 자리로, 그리고 권이도는 사장실로 불려간다.     

찐득하고 뜨겁던 여름은 끝났다. 나는 서서히 높아지는 하늘을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높아지는 저 하늘만큼 나도 높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                *                *





어두운 방 안에 모니터의 푸른 불빛만이 얼굴에 음영을 그렸다. 침대에서 곤히 잠든 치현이를 깨우기 싫어서 방안의 불을 전부 끄고 몰래 야동 보는 중학생마냥 모니터 앞에 앉아 핏발 선 눈으로 집중한다. 일거리를 집까지 가지고 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황금 같은 주말 밤에 달디 단 잠의 유혹을 떨치고 매달려야하는 일이라니 끔찍하다. 이래서야 원, 주위 사람들 말대로 정말 일벌레 같지 않은가. 난 원래 범생 부류의 호칭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빌어먹을 권이도 팀장님, 이 원수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
권이도는 이번 주말에 최사장과 함께 미국으로 출장이다. 치현이와 단 둘이 남아 깨소금을 쏟아 낼 것이 그리도 보기 싫었던지 아주 일거리를 산처럼 쌓아두고 가버렸다. 오자마자 팀장이 된 것도 눈꼴 시리지만 나만 가지고 닦달하는 통에 주위에선 격려와 위로의 목소리가 한가득이다. 권이도에겐 벌써 내부에 적도 생겼다. 젊은 나이, 게다가 사장과의 잦은 접촉이 시기를 살만한데 말투까지 그 모양이니 어디 쓰겠나. 연구직이라 그래프와 수치만 들입다 팠는지 조직관리가 영 아니올시다이다. D증권에선 어떤 분위기였는지 몰라도 우리 회사에선 그렇게 딱딱하고 논리적인 화법은 반감만 산다고.
다행히 몇 달 전 기업설명회 때 내가 주먹질을 했던 모 증권 모 연구원이 권이도란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최사장과 박전무외에는 없었다. 최사장의 무표정에 흠칫 놀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쓸데없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박전무 때문에 짜증나고(이 사람은 아직도 나와 권이도가 고등학교 동창인 줄 알고 있다), 쪼아대는 권이도 때문에 스트레스니 하루하루가 아주 버라이어티하다.

뿐인가. 이제는 보너스에 목숨 걸어야 할 판이다.
진형이에게 탈탈 털어주고 남은 것은 빚뿐이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 한방이라고. 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나간다더니 망하는 것도 한 방인가 보다. 원래 씀씀이가 헤픈 편이어서 모아 놓은 돈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번에 날리고 보니 정신이 확 든다. 치현이와 같이 살게 되면 여행도 다니고 인생을 즐기겠노라고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건만 죽어라 일만 하다가 가뜩이나 꺾어지는 나이, 좋은 시절 다 버리게 생겼다.

하지만 파김치가 되어 집에 오면 나의 오아시스, 파라다이스 치현이가 기다리고 있다. 녀석을 끌어안고 텔레비전을 보며 소파 위를 뒹굴다가 스르르 잠들어 버리는 게 요즘 나의 버릇이 되었다. 가끔은 내가 애완견이냐고 치현이가 항의했지만 결국 투덜대면서도 제 몸을 쿠션대용으로 기꺼이 내준다. 치현이는 매일 파죽이 되어 들어오는 나를 보고 그 자식은 뭐하는 놈이냐고 같이 화를 내주었고 덕분에 집에 와서 권이도의 뒷담화나 하는 게 하나의 낙이 되어 버렸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피 같은 주말에 집에 오자마자 한 일이 컴퓨터를 켜는 일이라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일주일 동안 쌓인 걸 풀어내려고 벼르고 있던 치현이를 달래 일에 매달려 보았으나 그동안 쌓인 건 나도 마찬가지, 결국 참지 못하고 저녁내도록 치현이를 안았다. 지쳐 쓰러진 건 내 쪽이 먼저였지만 요즘은 치현이의 체력을 감당하는 것에 요령이 생겨 페팅만으로 두세 번은 가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녀석을 잠재우고 나도 잠시 쉰 다음 비로소 꾸물거리며 일어나 책상 앞에 앉은 것이다.  

한숨이 나온다. 내 사전에 워커홀릭이 웬 말인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팔짱을 끼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말은 못된 상사라고 권이도를 욕하지만 이번 주말을 기다렸는데 출장이라니 조금 서운하긴 하다.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정나미 떨어지게 싸워도 어쩌다가 휴게실에서, 화장실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로 은근슬쩍 성희롱 같은 짓도 한다. 내가 권이도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지나가거나, 권이도가 나한테 야한 말을 던지는 걸 사무실 사람들이 안다면 기함을 토할 거다.

- 낮에는 권이도랑 지내고 밤에는 나랑 있는 거네?

권이도와 내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처음엔 그저 놀라기만 하던 치현이가 가만히 생각한 후 내뱉은 말이었다. 예리한 지적을 한 치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괜히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별다른 말은 못하고 있자 치현은 “그래도 내 쪽이 훨씬 유리한데?”하고 웃어준다. 어른인 척 하는 녀석의 태도가 못내 안쓰럽다.

나는 때때로 내가 이 아이의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곤 한다.
치현이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신뢰, 깨어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나와 권이도는 그 어떤 것도 치현에게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애정이라면 충분히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권이도와 나, 둘 사이에서 치현이 소외감을 느껴버리면, 이 아이는 또 다시 배신감을 맛보는 건 아닐까. 치현이와 권이도를 동시에 붙잡고 싶다는 내 욕심 때문에 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지 늘 미안하기만 해서 자꾸 잘해주고 싶어진다. 그런 반면에 권이도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자는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를 믿고 있기 때문일 거다. 사실 나는 권이도에게 심적으로 상당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두 사람도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에게 해답을 내려주었듯이, 그 해답이 잘못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 했는지도 모른다.
   
독점욕이 배제된 연애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들의 소유욕은 묘하게 비틀어져서 서로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타협해버렸다. 언제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 관계가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 될 수 있을까. 게이들에게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울타리가 없다. 믿을 거라곤 봄날의 얄팍한 얼음장 같은 서로의 마음뿐이다. 둘이서 등을 맞대며 기대고 있어도 언제 상대가 떠날까, 언제 등의 온기가 사라질까 두려운 세상인데 셋이 등을 맞대고 있으니 그 온기가 온전히 전해지지도 않고 세 사람의 등과 등 사이는 붕 떠버리게 된다. 그 안타까움, 그 쓸쓸함. 맞대고 있는 등줄기의 공백을 우리는 견딜 수 있을까?

갑자기 모니터가 팍 꺼져버렸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터라 깜짝 놀랐지만 전원이 나간 것은 아니고 화면보호기가 실행되는 것뿐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마우스도 키보드도 손대지 않고 있었나 보다. 새까만 화면에는 여러 겹의 선으로 만들어진 다각형이 꼬이고 뒤집히고 굴러다니며 어지럽게 회전하고 있었고 나는 멍청하게 그 화면보호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넋 놓고 있으니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 눈이 풀리고 다각형이 두개 세 개 네 개로 늘어나 보인다. 사각형이 삼각형 같기도 하고 찌그러진 사다리꼴 같기도 한 도형들의 현란한 움직임은 그렇게 이지러지고 비틀리면서도 끊어지지는 않는다. 화면 안에서 좌충우돌 하는 다각형이 마치 우리들 같아서 쓴웃음이 나왔다.

컴퓨터를 끄고 침대로 돌아왔다. 자고 있는 치현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걱정도 불안도 이 순간만은 치현의 얼굴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나는 녀석의 뺨에 살며시 입술을 대어보았다. 저녁에 권이도가 미국에서 보낸 [치현씨 손대지 말 것. 잘 자요] 라는 문자가 생각났지만 이미 섹스까지 마친 뒤다. 얄미운 팀장님, 미국에서 몸 달아 보라고요.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변해갈지 모르지만 어떤 방향으로 변해가도 마주 닿은 세 사람의 등이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손을 단단히 붙잡을 생각이다. 아무리 모양이 회전하고 변하여도 그 형태만은 유지하는 다각형의 몸부림처럼, 우리의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매 순간마다 좋아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줄 거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이별 때문에 현재를 불안해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외로움 따위, 쓸쓸함 따위, 느낄 틈도 없이 사랑해주고 사랑 받으면 되잖아? 비틀리고 찌그러져도 세 사람이 공존해 가는 최선의 길을 찾아가다보면 우리들의 불협화음은 상당히 오래, 그리고 비교적 아름답게 연주될 수 있을 것이다.

침대 머리맡의 할로겐 등을 끄고 푹신한 이불 속에 몸을 담근다.
시간이 잠과 함께 눈꺼풀 위로 고요히 내려앉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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