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988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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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级 大众 无倾向
文集 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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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12 21:05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 1
[목차]
〈1권〉
프롤로그
1.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
2. 2차 생존 시험
3. 드디어 만난 상진
4. 진정한 유레이 1층
5. 진정한 유레이 5층
프롤로그
2015년 04월 11일
[속보, 속보입니다.]
[5분 전, 신도아파트가 붕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파트 10층 높이인 27m 상공에서 폭발사건이 발생한 것인데요.]
[이로 인해 아파트 수십 개가 연속적으로 붕괴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붕괴로 인해 정확한 인명피해를 산출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 수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폭발사고의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으며 계속 조사 중으로 정확한 피해자 확인은….]
재앙이 일어났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사고로 인해서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 수만 무려 수백 명이었다. 모두 출근한 시각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그칠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더 많은 피해자가 나왔을 것이다. 가족도 잃고 집도 잃은 이들로 인해서 한동안 아파트 주변은 온통 울음바다였다. 우연하게 사건을 목격한 이가 폭발 현장에서 초록색 괴물을 보았다고 증언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사고의 충격으로 인한 정신이상으로 진단하고 치료에 들어갔을 뿐이었다.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을 내어 신도 아파트에 들렀다. 아파트 앞은 몇 달 동안이나 온통 하얀 꽃들로 가득했다.
피해자에는 내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휴가를 받아 쉬고 계시던 우리 부모님과 공강이었던 누나가 모두 주검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출하지 않고 몰래 가지고 있던 핸드폰으로 사고 소식을 접하고 나를 붙드는 선생님의 손을 피해 미친 듯이 달려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무너지는 아파트와 주변의 건물들로 인해서 뿌연 먼지만이 가득했다. 우리 집이 있던 곳과 그 주변 일대는 온통 경찰들과 소방대원들로 통제되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한 걸음씩 아파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나는 경찰의 손에 제지되었다. 나는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아파트가 붕괴하고 있는 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경찰관이 무어라 말을 건넸던 것 같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건물의 붕괴가 끝나고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부모님과 누나의 주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가족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의 나는 넋을 놓은 인형일 뿐이었다. 손님들을 맞을 정신 따위는 없었고 가까운 친척들이 나를 대신해 손님들을 맞이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멍하니 영정 사진 세 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자꾸만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을 붙이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각이 커질 뿐이었다. 괜찮으냐고,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 틈 사이로 뛰어왔는지 땀을 뻘뻘 흘리는 소꿉친구 상진이가 보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상진이는 날 발견하더니 뛰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제 옷차림을 한 번 살피더니 바르게 하고는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상진은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는데 그게 괜스레 웃겨서 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뭐하냐?”
“어? 그냥.”
상진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주변 친척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네고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친척들보다는 상진이가 옆에 있는 것이 조금 더 편했다. 내 옆에서 계속 말을 붙여대던 사람들이 잠시 흩어졌고 나는 상진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이거 진짠가? 꿈이 아니고?”
상진이 잠시 나를 내려다보는지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물도 안 나. 진짜가 아닌 것 같아서. 근데 사람들이 혼자가 됐어도 금방 괜찮아질 거래. 시간이 약이라고.”
묵묵히 내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는 상진의 손이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나 혼잔가?”
“아니.”
“…….”
“나 있잖아.”
“계속 같이 있어 줄 거야?”
“어.”
이제껏 조용하더니 그 말에는 곧장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 너머로 옅은 땀 냄새가 났던 것 같다.
검술 신동이라고 불리며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일학 스승에게 검술을 사사하던 나는 그 사건 후로 검을 손에서 놓게 되었다. 검을 배우는 것을 좋아했기에 관두는 것이 힘들었지만 아무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졌다. 대학가 주변의 술집에서 울고 웃는 사람들의 실없는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어김없이 나는 오늘도 견뎌내었다. 무사히 아무 일도 없이.
어제보다 오늘이 견디기 수월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문득 치밀어 올라오는 고독감만 빼면 나름 괜찮게 살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친 눈으로 올려다본 밤하늘은 역시나 불빛에 가려져 별들 하나 보이지 않았다. 터벅터벅 초점이 흐린 눈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야, 강이석!”
언제나 그렇듯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소리라고도 할 수 있다. 흐렸던 시야가 제대로 돌아와 익숙한 얼굴을 담았다. 상진이와 같이 있을 때면 그나마 고독이 수그러드는 것 같았으니까.
“상진아.”
“여기서 뭐해?”
“집에 가지.”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나도 집에 가는 길이었거든.”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얹힌 팔의 무게가 익숙했다. 살짝 몸을 움직여 편하게 자세를 잡고 상진이를 빤히 쳐다보니 그가 입 모양만 동그랗게 말아서 묻는다.
‘왜?’
“아니, 아무것도. 가자. 그런데 가려던 집이 설마 또 우리 집은 아니겠지?”
“맞는데?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간다?”
“허락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이 진상아.”
“너 영광인 줄 알아야 해. 내가 얼마나 바쁜 몸인데.”
“그래, 자칭 바쁜 몸. 너 지금 집에 가는 길 아니냐? 응? 얼마나 바쁘면 매번 수업 끝나고 우리 집에 오냐? 할 일 없어?”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짓던 그가 ‘이 나쁜 놈.’ 하면서 내 머리를 헝클었다. 귀찮은 척 녀석의 손을 쳐냈지만 내심 매번 나를 일 순위로 챙기는 그가 고마웠다. 상진이가 없었다면 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잘재잘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고해바치는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옅게 웃었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다.
1.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
참새가 요란하게 우는 소리에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려다가 나를 꽁꽁 싸매고 있는 무언가 때문에 그대로 누웠다. 환한 색상의 커튼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 인상을 찡그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악몽을 꾸는 바람에 푹 자지 못해 피곤했다. 괜히 잘 자는 상진이가 얄미워 소리도 질렀다.
“야. 일어나! 네가 이 집 주인이야? 난 한숨도 못 잤는데.”
간밤에 꾼 꿈에서 알 수 없는 곳에 갇혀있느라 죽는 줄 알았다. 온몸이 꽁꽁 묶여서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눈앞에서 괴물들이 나를 향해 죽어라 달려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악몽을 꾸고 일어나 가뜩이나 기분이 찜찜한데 상진이 내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꽁꽁 껴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어제 같이 마신 술 때문인지 술 냄새까지 폴폴 풍기는 중이었다. 얄미워서 등짝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악몽을 꾼 이유는 순전히 상진의 술주정 때문이었다. 게다가 슬쩍 잠투정까지 하고 있었다.
“우으응. 이석아.”
“우으응은 무슨!”
웃통까지 홀딱 벗고서 남의 침대에 누워있는 모양이 아예 제집에 있는 것 같았다. 넓은 어깨와 탄탄하게 자리 잡힌 근육을 보자 은근슬쩍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운동을 했어도 나는 덩치를 키우는 게 쉽지 않았다. 근육이 잘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준이 헬스장에 있는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그렇지, 나도 그렇게 작은 덩치는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우고 탄탄한 몸을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비해, 상진은 나에게 지기 싫다며 운동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어깨부터 넓고 탄탄해졌다. 그때는 그런 상진이가 부러웠었다. 그래서 앞에서 근육을 가지고 으스대는 상진에게 신경질을 부렸었다.
상진의 훌륭한 몸을 보며 가만히 추억에 잠겨 있던 나는 손을 움직여 찰싹찰싹 상진의 등을 때렸다. 다시 생각해도 앞에서 으스대던 상진이는 얄미움의 극치였다. 맨살이라서 그런지 때리는 느낌이 아주 찰졌다. 빨갛게 손자국 모양으로 달아오른 등을 아주 만족스럽게 쳐다보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야. 이상진. 안 일어나!”
“조금만 더 자자. 이리 와. 너도 자.”
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에 인상을 쓰면서도 상진이는 길고 굵은 팔을 들어 나를 잡아당겼다. 방심하고 힘을 풀고 있었던 터라 나는 너무나도 쉽게 상진이 누워있는 곳 옆으로 쓰러졌다. 나란히 침대 위에 눕게 된 내 허리 위로 상진이 양손을 감아왔다. 상진이 잠에 취한 듯이 웅얼거리며 내 쪽으로 더 다가와 붙더니 나를 꼭 껴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상진의 숨결에 소름이 돋았다.
“형아 조금만 더 잘게? 응? 착하지.”
그가 말할 때마다 목에 닿아오는 숨결에 팔에 돋은 소름이 더욱 도드라졌다. 어느새 상진은 자연스럽게 한 팔로 소름이 돋은 내 팔을 지분거리며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소름 돋았네? 형아 때문에 그런 거야?”
그 말에 나는 상진이의 팔을 강하게 때리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아는 무슨! 상진이의 손바닥은 체온이 얼마나 높은지 뜨끈하다 못해서 뜨거울 지경이었다. 상진이는 언제나 그랬다.
“이 자식이, 안 일어나!”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상진이 몸을 일으키면서 중얼거렸다. 까치집이 진 머리를 쓰다듬는 품새가 어쩐지 백수 같았다. 잘생기기만 한 백수.
“하여튼, 부끄럼은.”
그 말을 듣고 고개가 뒤로 넘어갈 뻔한 나는 다시 소리쳤다.
“씻고 나와! 옷도 입고. 장 보러 갈 테니까.”
혼자 갔다 오면 안 되냐고 했다가 나에게 등을 한 번 더 맞은 상진이 아픈 등을 문지르려 손을 뒤로하며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장을 보러 가는 이유가 순전히 저 때문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대 더 때려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상진이의 준비는 한참이 지나서야 끝났다.
“내가 장 보러 가는 게 나 때문인 줄 알아? 너 속 쓰릴까 봐 해장국 해주려고 그런 건데!”
“네, 네, 이 형아 속 쓰릴까 봐 그랬어요? 아유, 예뻐라.”
답이 없는 상진의 말에 일방적으로 잔소리를 들어놓으며 대형 마트로 향했다.
다가오는 2022년을 몇 시간 앞두고 우리는 그렇게 평상시처럼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내 반응을 보며 웃느라 상진의 눈은 곱게 휜 채였다. 그렇게 마트 입구에 들어서고 이내 지하에 있는 식품 코너를 향해서 내려갈 때였다.
후우웅!
지하를 향해서 내려가던 에스컬레이터가 멈추지도 않았는데, 에스컬레이터가 멈출 때나 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 모든 불이 꺼졌다.
“뭐야?”
“정전이야?”
그 소리가 들리며 불이 꺼졌을 때 별다른 이상을 감지하지 못한 우리는 왜 하필 지금 정전이 일어났냐고 투덜거리며 불평했다. 보통 때 같으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라든지 놀라서 지르는 비명이 들려야 했다. 그러나 주위는 온통 침묵이었다.
“잠깐만.”
“뭐? 왜?”
“뭔가 이상한데.”
나는 순간 강하게 드는 불안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뭐가 이상해?”
“정전치고는 너무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다른 사람들 소리도 안 들리고….”
심지어 바로 옆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상진의 모습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불안한 예감에 내 어깨 위에 올려진 상진의 손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위이잉.
모기 소리인지 날파리 소리인지 귓가에 애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벌레를 잡는 동시에 귓가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유레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레벨이 생성되었습니다.]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황당함에 넋이 나가서 중얼거렸다. 환청이 이렇게나 확실하게 들릴 수 있는 건가. 누군가 바로 귀 옆에서 또박또박 문장을 읊어주는 것 같았다.
[2레벨이 되면 특성이 생성됩니다.]
[‘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타이틀을 얻어 보상이 제공됩니다.]
“상진아. 너도 저 소리 들….”
당연하게도 나는 상진이 있던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옆에 있어야 할 상진이는 보이지 않고 이상한 것들만 시야에 담겼다.
“…려?”
반사적으로 소매를 끌어내려서 두 눈을 비볐다.
내 옆에는 그저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을 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던 상진이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상진아?”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제한시간: 24시간]
무엇 때문인지 이유도 모른 채, 대형 마트에 있던 나는 순식간에 알 수 없는 장소에 홀로 서 있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와 젖은 흙 내음, 알 수 없는 비린내가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눈앞에는 밀림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울창한 숲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나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그저 황망하게 앞을 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도 파악할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던 내 앞머리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마가 간지러워 무심코 손을 들어 긁던 나는 너무나도 생생한 감각에 놀랐다.
어렴풋이 꿈이라고 생각했던 이 상황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볼을 꼬집어보고는 너무나 아픈 감각에 소리를 질렀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대로 자리에 누워서 잠을 자려고도 해봤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기다려 봐도 내게 일어난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문제는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핸드폰도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돌을 모았다. 그리고는 들판에 ‘SOS’라고 크게 표시해놓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이거… 진짜 뭐지?”
나는 애써 무시하려 했던, 눈앞에 떠 있는 투명한 홀로그램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벌써 한 시간이 흘렀는지 24시간이라고 했던 제한시간이 23시간으로 줄어있었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과 약간의 호기심으로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라고 적힌 부분에 손을 가져갔다. 기대와 달리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보상받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앞에 황금빛이 일렁이더니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도무지 현실적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뭐야….”
[기력의 팔찌]
[효과- 남들보다 기력을 2배 빨리 회복합니다.]
[능력치- 체력+5 근력+3]
게임에서나 보던 능력치를 가진 팔찌였다. 마치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5분 뒤 몬스터가 생성됩니다.]
[몬스터에 대비해 무기가 주어집니다.]
처음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 들렸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에다가 대고 직접 말하는 것처럼 선명한 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린 후 눈앞에 홀로그램이 생기더니 무기들이 죽 펼쳐져 늘어졌다. 단검에서부터 장검, 죽도처럼 생겼으나 날이 서 있는 검, 도끼, 활 등등 별의별 무기가 다 있었다.
“뭐야, 이게 뭐야. 이거 진짜야?”
나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당연했다.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무기선택에 주어진 시간은 2분입니다.]
[서둘러 무기를 선택하고 몬스터에 대비하십시오.]
[무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랜덤으로 지급됩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무기를 훑어보았다. 혹시나 하는 가정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지금 정말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일까. 마트에서 게임기를 홍보하기 위해서 손님들에게 무작위로 게임을 시키고 있는 걸까. 이대로 꿈에서 깨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게 혹시 현실이라면 몬스터에게 죽는 순간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걸까. 몬스터는 게임에서나 보던 흉악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몇 년 전에나 잠깐 하던 RPG 게임에 나오던 몬스터를 떠올리던 나는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선택시간이 30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초씩 줄어드는 시간을 바라보면서 나는 제일 익숙한 장검을 선택했다. 검을 배울 때 쓰던 것과 제일 비슷한 모양으로 선택하자 손 위로 검의 손잡이가 나타났다. 손에 쥐어진 검의 차가운 감촉이 선연하게 다가왔다. 팔에 끼워진 팔찌의 느낌도 생생했다. 한참 동안 놓았던 검을 다시 잡으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뜻밖의 상황에 이렇게 잡게 되었다.
“이게 진짜면 상진이는 어디에 있는 거지? 같이 떨어진 게 맞는 건가? 왜 나 혼자 여기 있는 거야.”
평소라면 거의 하지 않던 혼잣말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계속해서 꿈이길 바라던 나는 손가락을 칼날에 살짝 가져다 대었다. 칼날이 잘 벼려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손가락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꿈에서도 피가 날 수 있기는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주변이 너무 생생하고 아까 꼬집었던 볼도 아직 아렸고 손이 베어 살짝 따끔한 느낌까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기묘한 감정에 휩쓸려서 한참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쿵! 쿵!
두두두두두!
커다란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들판 한가운데에 있으면 위험할 거라는 감이 느껴졌다. 나를 숨길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둘러 숲으로 뛰었다. 그냥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SOS 표시를 해 놓았던 것이 죄다 쓸모없어졌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몬스터가 생성되었습니다.]
[퀘스트- 몬스터를 처치하고 살아남으세요.]
“으아아아악!”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마구잡이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나는 굳어서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혼자만 이곳에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상진이도 이곳에 같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와 같았다. 그리고 비명 소리를 들어보니 몬스터도 한 마리가 아니었다. 몇 마리나 이곳에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악! 살려줘! 뭐야! 너 뭐야!”
“안 돼! 제발!”
나는 가장 선명하게 들리는 비명을 쫓아갔다. 사박사박, 발아래로 풀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여러 명이 뭉쳐있는지 비명은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순간 굉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멈췄다. 눈물이 날 뻔한 순간을 잘 참아 넘긴 나는 서둘러 발을 옮겼다.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달려 도착한 곳은 이미 조용해진 상태였다. 그렇지만 완벽한 고요는 아니었다.
쿵! 스르륵. 쿵! 스르륵.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발소리가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사람의 발걸음이라기엔 너무 무거운 소리였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무 뒤에 숨어서 슬쩍 내다본 곳에는 진녹색 피부의 괴물이 사람 하나를 질질 끌고 가는 중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쿵!
괴물이 동굴 앞에서 멈춰서더니 끌고 온 사람을 안으로 던져 넣었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박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놀란 상태였다.
‘저게 말이 돼? 이게 꿈이 아니라고? 그럼 나도 저렇게 잔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거야?’
괴물, 아니 몬스터라 칭하는 그것은 진녹색 피부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덩치나 키도 인간의 두 배가 넘었다. 근육도 인간보다 더욱 많이 발달해있는 것이 보였고 입에는 커다랗고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동굴에 사람을 던져 넣은 몬스터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아까 걸어온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발소리가 육중하게 울려 퍼졌다. 잠시 놀라 굳어있던 나는 몬스터를 몰래 따라갈지, 아니면 계속 이렇게 홀로 숨어있을지 마음속으로 치열하게 갈등했으나 결국 몬스터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역시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악!”
“살려줘!”
“저리 가! 저리 가!”
여자 둘에 남자 하나, 세 사람이 같이 모여 있는 그룹이었다. 그들은 아직 몬스터가 덮치지도 않았는데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여자 한 명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두려움에 삼켜져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마구잡이식의 공격은 당연히 몬스터의 몸에 생채기만 낼 뿐, 전혀 위력이 없었다. 몬스터는 가죽도 쇠처럼 단단한 모양인지 검이 닿을 때마다 챙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뒤에서 몬스터를 몰래 따라가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갈등했다. 공포심에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 혼자 살자고 사람들의 위험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검을 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나는 검을 꽉 움켜쥐고 결심을 굳혔다. 결심이 서자마자 곧바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몬스터에게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퍽-
“아윽!”
내가 잠시 고민하던 사이에 남자가 몬스터가 휘두르는 방망이에 맞아 날아가다가 나무에 부딪혀 쓰러졌다.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스치듯 시선을 준 나는 다시 땅을 박차고 달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순간 몬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몬스터가 나를 발견한 것이다. 순간 발치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크허어엉!”
몬스터의 커다란 포효 소리가 울렸다. 조금씩 느려지는 발걸음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바닥을 박차고 몬스터에게 몸을 날렸다. 내 무릎이 정확하게 몬스터의 눈을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뒤로 휘청거렸다. 나는 다시 바닥을 박차고 위로 높이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오랜만에 휘두르는 검인데도 비교적 내 의도대로 잘 따라 움직여주었다. 이번에는 몬스터의 반대편 눈에 검이 박혔다.
“크헝!”
아까와는 다르게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던 몬스터는 몽둥이를 마구잡이로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박아넣은 검을 회수하지도 못하고 서둘러서 몬스터와 거리를 벌리며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절대로 두 손에서 검을 떨어트리면 안 된다고 배웠지만,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그 말을 지키기란 무리였다. 이제 무기는 내 손에 없었다. 몬스터에게 다시 달려들어 무기를 빼내어 공격해야만 했다. 버둥거리던 몬스터가 눈에서 칼을 뽑아 옆으로 던지더니 나에게 달려들었다. 내게는 무기를 되찾을 기회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드는 몬스터의 옆구리 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나는 그대로 달려 검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분노에 찬 녀석의 포효가 강하게 울렸다. 이어서 사람의 비명 소리도 들렸다.
내 뒤쪽에 있던 남자의 몸이 몬스터의 손에 들려있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으, 으아아아!!”
그 비명 소리는 정말 끔찍했다. 내 몸과 두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리기 시작하며 평정심을 잃어갔다. 목 아래로 덜렁이는 몸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피가 꿈이길 바라는 내 마음을 짓밟고 있었다.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이 죽은 것이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눈을 한 번 꾸욱 감았다 떴다. 몬스터를 죽이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마저 죽을지도 몰랐다. 몬스터는 남자의 목을 한 손에 쥐고 내 쪽으로 휘두르며 뛰어왔다. 뚜두둑, 하는 잔인하고도 징그러운 소리가 났다. 서둘러 검을 집은 나는 그대로 앞구르기를 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있던 자리에 몬스터의 몽둥이가 날아와 박혔다.
온몸의 근육이 조여들며 혈관이 수축했다. 몬스터가 손에 들고 있던 사람을 던져버리고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때 놈의 목 부분과 몸통의 색이 다른 것을 발견했다. 검을 찔러 넣었던 눈두덩이의 색이 목의 색과 비슷했던 것이다. 저기가 바로 몬스터의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목에 검이 박힌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팔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놀란 나는 검을 회수하고 몬스터에게서 몇 발짝 물러났다. 몬스터가 아무렇게나 휘두른 주먹이 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옷과 함께 살갗이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절로 신음 소리가 입 밖으로 뱉어졌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쿵!
이내 몬스터가 쓰러졌다.
[몬스터를 처치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레벨이 되어 특성이 생성됩니다.]
“말도 안 돼….”
내가 쥐고 있는 검에서 몬스터의 피가 흘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휘잉.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주저앉았다. 레벨이 어쨌다느니 하는 소리도 무시하고 주저앉아 손에 튄 몬스터의 피를 바라보고 있는데, 계속해서 귓속으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성 ‘영웅’이 생성됩니다.]
[특성 ‘민첩’이 생성됩니다.]
[특성 ‘동체 시력’이 생성됩니다.]
[특성 ‘직감’이 생성됩니다.]
[특성 ‘약점간파’가 생성됩니다.]
“몬스터를 죽이고 레벨이 올랐다고… 레벨이 올랐… 레벨….”
나는 녀석의 약점이 다른 곳과는 다른 색으로 보이던 것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왜 목이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달려들었던 것일까. 몬스터와 싸우면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이곳이 게임의 시스템이 적용된 곳이라면 도대체 왜…? 왜 하필 내가 이곳에 떨어지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다물고 이를 악물었다. 검을 쥐고 몬스터를 베었던 손이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현실이라면 반드시 상진이를 찾아야만 했다. 상진이는 살아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2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능력치 확인?”
나는 의아함에 중얼거렸다. 그러자 눈앞에 홀로그램 창이 펼쳐졌다. 이것까지도 게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lv. 2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10퍼센트]
[체력: 13(+5)]
[근력: 12(+3)]
[마력: 1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특성: 민첩- 민첩이 1.5배 증가합니다.]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point: 1(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돼. 도대체… 이게 도대체….”
게임처럼 특성에 포인트에 능력치까지 존재했다.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진 것도 그렇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도 비현실적이었다. 정말로 내가 게임에 들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흐으으… 허으….”
그때까지 꿋꿋하게 서 있던 여자가 눈물을 쏟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엎어졌다. 도망가지도 않고 쓰러진 일행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용감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여자의 울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몬스터가 또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몬스터가 또 나타나면 곤란하니까 따라와요.”
나는 쓰러져 있던 여자를 업고 이동하려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간 남자의 사체 앞으로 갔다. 경악과 공포뿐 아니라 온갖 감정으로 점철되어 부릅뜬 눈을 감겨주고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혀주었다. 아까도 사람의 시체를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잔인하게 죽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애써 떨리는 손과 몸을 감추면서 다친 여자를 다시 어깨에 들쳐 메고 숲으로 들어갔다. 몸에 힘이 풀리며 다친 상처가 계속 고통을 알려왔지만 무시했다. 엎어져서 눈물을 쏟던 여자가 딸꾹질하며 제 무기와 쓰러져 있던 여자의 무기를 챙겨 따라왔다. 이 상황에서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고 계세요?”
안전한 곳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 보이는 장소를 찾아서 걸음을 옮기며 여자에게 물었다.
“아뇨. 집에 정전이 났는데 밝아지니 여기였어요. 그쪽, 아, 구해주시기까지 했는데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강이석입니다.”
“저는 김혜진이에요. 업혀있는 사람은 한지연이고요.”
“네, 친구인가 봐요.”
“아니요, 여기 떨어지고 나서 돌아다니다가 만난 사람이에요. 뭐, 친해졌으니까 친구 맞네요. 지연이는 운동하고 집에 가다가 눈떠보니 여기였다고 했어요.”
“아, 네. 저도 장 보려고 나갔다가 여기에 떨어졌네요.”
한동안 침묵한 채로 걷다가 계곡 같은 곳을 발견했다. 나는 계곡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큰 나무 기둥에 쓰러진 여자를 기대어놓고 김혜진이라는 여자에게 물었다.
“출구는 당연히 모르시겠죠.”
“네…. 출구가 과연 있기나 할까요? 아니, 출구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렇네요.”
나는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옷이 터져나간 옆구리가 쓰라렸다. 쓰라림에 인상을 쓰며 상처를 내려다볼 때였다.
“저… 그… 사람들이요.”
“네?”
“몬스터에게 죽은 사람들.”
정말 죽은 걸까요, 하고 물어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나도 믿고 싶지 않았지만 몬스터와 싸우면서 느끼지 않았던가. 이것은 정말 현실이라고. 상처가 나면 아프고 피가 나고 또 죽을 수도 있는.
“처음 본 사람들이었지만, 죽었다고 하니까 믿기지 않아요. 우리랑 대화도 나누고 농담도 하고 그랬었는데… 정말, 정말로 죽은 걸까요?”
“상처를 입고 나니까 그제야 느껴지네요. 진짜 죽었을 거라는 게.”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면서 다시금 뚝뚝 눈물을 떨궜다. 믿고 싶지 않은,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 참 잔인했다. 나는 거칠거칠한 풀 위에 주저앉았다. 눈앞의 여자도 엉거주춤하게 따라 앉았다.
“그런데 혜진 씨도 레벨업 하셨습니까?”
“아, 아까 목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믿고 싶지는 않지만, 상태 창도 확인이 되고 게임 안에 들어온 것 같아요.”
“네?”
“포인트로 체력이나 근력, 마력을 올릴 수 있던데 혜진 씨는 근력을 올리는 게 좋겠네요. 체력은 좋은 것 같으니까.”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만 끔뻑거렸다. 조금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확인이라고 중얼거리면 창이 하나 뜰 거예요. 그런데 한 번밖에 안 열리나 봐요. 저는 그 창이 다시 안 뜨더라고요. 능력치 올릴 거면 지금 올리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살 테니까요. 작게 중얼거리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없어서 그 당시에는 확인 후 창을 바로 닫아버렸다. 하지만 그 뒤로 다시는 창이 뜨지 않았다. 능력치를 올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잠시 후 능력치를 확인했는지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거 진짜 현실이에요? 게임 속이라고요? 말이 되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꿈이라면 정말 좋겠네요.”
나는 이미 체념한 상태였다. 벗어날 수 없다면 어서 빨리 상진이를 찾아야 했다. 이곳에 떨어진 게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이곳에 떨어졌다면 그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꿈이라면 언젠가는 깨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꿈에서 깨면 상진을 한 번 꼬옥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흐읍, 어떻게 이렇게 덤덤할 수 있어요?”
“덤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덤덤해 보여요. 혹시 아시는 게 있다면 꼭 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혜진이 그렇게 내게 질문해올 때 마침, 쓰러져있던 여자가 일어났다.
“으으음….”
“지연아!”
“아악! 너무 아파. 흐으윽. 죽을 것 같아. 흑.”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눈물을 터트렸다. 뼈라도 부러진 거라면 큰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몬스터로부터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 혜진이 달려가 그런 지연을 끌어안아서 달래고 있었다. 그런 혜진의 행동에 지연이 다시 비명을 질렀고 혜진이 다시 부드럽게 지연을 껴안았다. 혹시라도 잘못될까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부둥켜안고 서로를 위로해주는 모습에 코끝이 찡했다. 계속해서 상진이가 떠올랐다. 상진이가 내 옆에 있고 내가 다치거나 상진이가 다쳤더라면 우리도 아마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혜진의 말과는 달리 나는 덤덤하지 않았다. 무섭고 끔찍했고 외롭고 서러운 기분이었다.
자세히 확인해보니 다행히도 지연이라는 여자는 등에 어마어마하게 큰 피멍이 들기는 했지만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었다. 지연이라는 여자도 처음에 몬스터를 공격해서인지 레벨이 올라있었고 혜진의 반응처럼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이던 것도 잠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 상황에 적응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의 죽음이 진짜 죽음이라는 것이 강하게 와 닿은 것 같았다. 우리는 계곡에서 목을 축이고 머리도 적시고 손도 닦고 하면서 짧은 휴식을 취했다. 여기가 가짜 세상인지 진짜 세상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물은 시원했고 깨끗하게 씻은 몸은 개운했다. 아주 가끔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잠시간의 평화를 맛보면서 다들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무기력함에 빠져 조용히 있었다. 정신적으로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게 있기를 한참, 몬스터의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듯했다. 조그마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빠르게 그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탕!
총소리였다. 우리는 허리까지 자란 거친 풀들을 헤집으며 빠르게 뛰어서 그곳으로 향했다. 총을 가진 사람이 있다. 군인일 가능성과 경찰일 가능성이 제일 컸는데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고 있지 않을까. 국가적 재난이라든지, 우리가 알 수 없는 실험의 대상으로 뽑힌 것이라든지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총을 가진 사람이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주길 바랐다.
우리는 몬스터와 마주치는 것을 대비해서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이동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도한 곳의 상황은 굉장히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몬스터 근처에는 벌써 세 사람의 시신이 흐트러져 있었고 남은 사람들은 총 5명이었다. 그중 한 명은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찾던 사람이 저 사람인 것 같았다.
“으악!”
제일 앞에서 용감하게 검을 휘두르던 남자 하나가 몬스터의 몽둥이에 제대로 맞아 머리가 함몰되었다. 파팟 하고 주변으로 피가 튀었다.
“뒤로 물러나세요!”
몬스터가 들고 있던 몽둥이에는 이미 다른 사람의 피까지 눌어붙어 있는 채였다.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옆에서는 이미 구역질이 시작된 상태였다. 혜진 일행과 마찬가지로 저들도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공격으로 몬스터를 잡는다는 것은 턱도 없는 일이었다. 몬스터는 굉장한 기세로 사람들 앞에서 날뛰고 있었다. 한 번 겪은 일인데도 이 상황이 현실임이 크게 체감되지 않았다. 남은 사람은 이제 4명밖에 없었다.
군인이 뒤에서 다시 한번 총을 겨눴다. 벌벌벌 떨리는 손이 이곳에서도 잘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떨면서도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이 용해 보였다.
타앙!
“크하아아아!”
목에 탄알이 스쳐 지나가면서 진누런 피가 튀어 흘러나왔다.
몬스터가 크게 포효하며 화가 났음을 알려왔다.
“목이야!”
누군가가 소리쳤다. 몬스터의 옆에서 슬쩍슬쩍 공격하고 있던 여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몬스터의 뒤편으로 다가갔다. 남아있는 두 사람과 총알이 다 떨어졌는지 몬스터에게 총을 던진 군인이 필사적으로 몬스터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혜진이 말했고 지연 역시 동의하는 것 같았다.
“지금 나가면 오히려 방해되지 않을까요? 놀라기라도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에게서 석연치 않아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것은 말을 꺼낸 나도 마찬가지였다. 뒤로 돌아가 빈틈을 노리던 여자가 결국 몬스터의 목에 칼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미처 검을 뽑지 못해 대롱대롱 그 검에 매달려있었다. 여자가 검을 놓치고 몬스터에게서 떨어졌다. 몬스터가 곧 쿵 하고 쓰러졌다. 사람들은 몬스터가 쓰러지고 나서도 계속 주변을 경계했다. 경계하는 분위기 탓에 다시 한번 밖으로 나갈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다시금 수그리고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조금씩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보며 허둥지둥하는 사이 그들이 바로 눈앞에까지 다가왔다.
“으아악!”
“뭐야!”
“사람? 사람이에요!”
“사람이라고?”
그들과 마주한 우리는 총성을 듣고 달려왔다고 말하며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기 위해서 애썼다. 우리의 말을 들은 이들은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라면서 좋아했다. 우리에겐 참으로 행운이었다. 재난영화를 보면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경계하다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던데 이곳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낮은 것 같았다.
“살아있는 사람이 더 있어서 다행이네요.”
“맞아요. 이런 상황일수록 뭉쳐야 살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지 않겠어요?”
그들은 지친 듯이 말하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두가 아직 정신이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그들은 지친 몸을 쉬면서도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시체는 저기에 그대로 두는 거예요?”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내가 슬쩍 질문했다.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그들도 편한 마음은 아니었던 거다.
“어쩔 수가 없어요. 시체를 묻어주려고 땅을 파고 있으면 몬스터가 나타나서 공격하는 걸요. 벌써 그렇게 4명이나 잃었어요.”
“그렇죠.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다들 역시 출구는 모르시겠죠?”
나는 눈만 감겨 나무에 기대어놓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남자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말에 얄팍하게도 마음에 위안이 찾아왔다.
“네. 여기에 출구 아는 사람이 있으면 벌써 다들 출구 찾아서 나갔겠죠.”
“네, 그렇겠네요.”
군복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의 말에 수긍하면서 할 말을 더 찾지 못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각자의 일을 하던 중에 갑작스러운 정전과 함께 이곳에 떨어졌다고 했다. 도대체 이곳이 어디고 얼마나 넓은 건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동된 것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혜진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했던 것인지 전에 내가 품었던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냈다.
“저희를 대상으로 국가가 실험을 하고 있다거나, 국가적인 재난이라던가 뭐 그런 건 아니겠죠?”
“저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상황이 그런 것들로 설명이 되면 좋을 텐데요. 그래야 살 가망이 조금이라도 높을 것 아니겠습니까?”
군인이 단칼에 잘라 말했다. 그가 자리에서 조용하게 일어서면서 우리를 향해 말했다.
“뒤에서 몬스터가 한 마리 오고 있습니다. 조용히 일어나서 뒤로 갑시다. 소리 내지 마세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조심조심 아까 몬스터를 상대했던 곳으로 움직였다. 문제는 거기서 일어났다. 그곳에도 몬스터 한 마리가 몸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안 우리는 이미 몬스터의 사정거리에 들어가 버린 바람에 공격을 받게 되었다. 뒤에서 다가오던 놈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빠르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모두 특별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도망가더라도 계속 쫓아와 결국 체력이 다해 잡혀 죽을 것이었다. 놈이 울부짖으면서 발을 움직여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뒷덜미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섬뜩한 공포감이 몰려왔다.
“젠장!”
모두 입을 열어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커다란 발소리가 공포스럽게 귀에 와 박혔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공포 섞인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오금이 저리는지 다리를 덜덜 떠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싸우기보다는 도망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강하게 검을 붙들고 섰다. 약하게 떨리는 손은 숨길 수가 없었지만 이대로 도망간다면 결과는 뻔했다. 결국 잡혀서 모두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못 죽이면 우리가 죽어요. 다들 무기 꽉 잡아요. 내가 앞을 맡을 테니까 뒤에 오는 놈 잘 맡아주세요.”
“혼자서 어떻게!”
혜진과 지연이 뒤에서 외쳤지만 나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가는 중이었다. 약점도 파악했고 아까의 움직임으로 보아 빠르게 끝낸다면 내게 승산이 훨씬 높은 상대였다. 이쪽으로 달려오던 놈이 점프를 하며 공중에서 내려찍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더욱더 빠르게 달려 무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안으로 짓쳐 들었다. 등에 살짝 스친 녀석의 몽둥이에 알싸한 고통이 스몄다. 이를 악물고 참으며 더욱더 녀석의 안쪽으로 접근했다. 녀석의 초록색 살결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대로 검을 들어 녀석의 약점인 목을 향해 찔러 올렸다. 공중에 떠서 떨어져 내리던 녀석이 미쳐 내 검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목을 내어줬다. 운이 좋았다. 녀석의 무게가 실려 단번에 목이 반쯤 떨어져 나갔다. 뒤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곧 몬스터의 포효소리가 들렸다.
뒤쪽에 있던 몬스터가 벌써 사람들 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내 앞의 몬스터는 반쯤 떨어져 나간 목으로도 마지막 발악인지 무기를 휘두른다.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저것을 맞았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생겼다. 서둘러 녀석의 뒤로 구르듯이 다가간 내가 다시 검을 휘둘러 녀석의 목을 노렸다. 녀석이 몽둥이를 버리고 뒤를 향해 휘두른 손으로 인해 아까 터져나갔던 옆구리에 더욱 큰 상처가 생겼다.
“커헉!”
동시에 쾅 하고 녀석이 앞으로 쓰러졌다. 나는 서둘러 아직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의 상황을 살폈다. 다들 몬스터의 공격을 막으며 아까 발견했던 약점인 목을 공략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슬쩍 상처가 난 옆구리를 살펴본 나는 그 부위를 손으로 눌러 피를 막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싸한 고통이 전해졌다. 잘게 떨리는 손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몽둥이를 번쩍 든 몬스터의 뒤로 다가갔다. 빠르게 뛰어나가 검을 그대로 몬스터의 목에 던져 넣었다. 명중이었다. 그러나 얕게 박힌 것인지 녀석이 흥분하여 주변에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사람들이 놀란 눈을 하면서 녀석에게서 서둘러 몇 발자국씩 떨어진다. 녀석이 검이 날아온 곳을 향해 몸을 돌린다. 어쩐지 화나 보이는 몬스터의 얼굴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몬스터를 정면에서 마주했다. 문제는 내 손에 아무런 무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석 씨! 여기!”
그때 혜진이 제 검을 나에게 던졌다. 근처로 검이 떨어졌다. 몬스터가 그 장면을 보더니 마구 달려왔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려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그대로 앞구르기를 하며 그 장소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돌리니 녀석이 이쪽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몸을 있는 힘껏 비틀어 간신히 몽둥이가 닿지 않는 공간 범위에 몸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머리 위로 몽둥이가 지나가는지 바람이 불어닥쳤다. 한계까지 비틀어진 몸에서 강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쉴 틈이 없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평상시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온몸에 피를 내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마구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대로 바닥에 누워 옆으로 굴렀다. 아까 억지로 한계치까지 비틀었던 몸이 아우성치며 고통을 토로한다. 내가 피한 자리에 그대로 녀석의 몽둥이가 박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대로 녀석의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내 얼굴을 향해서 날아오던 녀석의 왼쪽 주먹이 닿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 * *
쿵!
“크흑. 허억. 허억.”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서 자리에 허물어졌다. 사람들이 숨소리조차 죽이고는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정적을 깨고 혜진이 입을 열었다.
“이석 씨는 도대체 뭐하던 사람이에요?”
어째서 이곳에서 이렇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혜진의 물음과 동시에 저 멀리서 화살이 하나 날아와 몬스터의 목에 얕게 박혔다. 사람들이 동시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믿을 수 없게도 화살이 한 번 더 날아와 앞에 서 있던 남자의 허벅지에 적중했다.
“아악!”
비명이 터져 나오고, 사람들은 허벅지에 화살이 박힌 남자를 부축해서 서둘러 뒤쪽으로 달렸다.
쉬이익!
화살 하나가 더 날아와 도망가는 사람들의 뒤쪽 땅에 박혔다.
“뭐야! 뭐야! 또 몬스터야?”
“화살을 쓰면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이런 좆같은!”
사람들이 패닉에 빠져서는 화살이 날아온 곳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혜진과 지연이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챙겨서 그들과 함께 달렸다.
“빨리 달려!”
서로 놀라 비명을 지르던 그때 화살이 날아오던 방향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높은 톤의 목소리였으나 여자의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조금 어린 남자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아까 혜진과 지연, 내가 숨어 있던 곳으로 일단 몸을 피했다.
“뭐야. 재미없게 그냥 도망가는 거야? 싸우지도 않고? 겁쟁이들처럼!”
그가 내뱉는 말의 내용에 모두 놀라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도망가면 재미없잖아. 안 그래요?”
삐쩍 마른 몸의 키가 작은 남자였다. 제법 어려 보이는 얼굴이나 목소리와는 달리 회사원이었는지 널널한 품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 안에 스카프까지 찬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우리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람이 우릴 공격한 거예요?”
“정말로? 사람이 어째서?”
몬스터가 아닌 사람임을 알고도 공격한 것이다. 몬스터의 앞까지 다가간 그가 몬스터의 목에 꽂혀있던 화살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몬스터의 목에서 진누런 색의 피가 뿜어져 나와 그의 옷을 적셨다.
“아이씨, 기껏 뺏어 입었는데 또 묻었잖아!!”
그는 화를 내면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눈빛이 흉흉한 것이 날이 바짝 서 있어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양복 정장을 벗어버린 그가 이내 셔츠까지 뜯듯이 벗었다. 바지도 훌훌 벗더니 옆에 쓰러진 시체에 다가가서 멀쩡한 옷만 뺏어 입었다. 옷 크기가 맞지 않았는지 그는 비명을 지르듯이 화를 내며 바짓단과 소매를 접었다. 그 행태를 보니 회사원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의 옷을 뺏어 입은 모양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멍청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악! 짜증 나! 짜증 난다고! 다 너희 때문이야. 아무도 움직이지 마.”
그는 다시금 화살을 활에 걸고 우리를 겨눴다.
핑-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장내에 적막이 흘렀다. 사람들이 도망치던 모습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린 듯 섰다. 날아온 화살은 다행히 아무도 맞히지 않고 나무에 박혔다. 나는 화살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칼로 그 화살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이곳에 떨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 원래 미친 사람임이 확실했다. 난폭한 성향을 가진 정신이상자가 이런 곳에 떨어지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재밌네?”
그가 웃는 낯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웃는 낯이 흉측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 안이 분노로 가득 찼다. 분노로 가득 차서 고통을 잊을 지경이었다. 저 새끼가 차고 있던 스카프는 같이 장을 보러 나가면서 내가 상진이의 목에 직접 둘러준 것이었다.
“그래? 나는 하나도 재미없는데. 넌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내 말에 그 새끼가 몸까지 젖혀가면서 웃었다. 그리고 정색을 하며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우리가 있는 쪽으로 몬스터가 한 마리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들 안전한 곳 찾아서 도망가요. 나는 저 녀석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사람들이 미쳤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리에 화살이 박힌 남자를 쳐다본다. 혜진과 지연이 옆에서 어떻게 나만 혼자 두고 가냐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손에 든 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고개와 팔을 한 번씩 돌려 상태를 확인한 내가 다시 놈에게 시선을 옮겼다.
‘상진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 새끼야.’
다행히도 그 녀석의 화살이 5개밖에 없는 것을 확인한 상태였다. 화살에 맞지 않고 저놈 근처로 다가가기만 한다면 내가 이길 가능성이 더욱 클 것이다. 그리고 방금 쏘아진 화살을 보고 녀석의 화살이 그렇게까지 정확하지 않다는 것도 확인했다. 아무래도 녀석은 계속 몬스터와 싸우는 사람들을 기습해온 것 같았다. 도망가는 사람들을 뒤쫓지 않는 것을 보면 그다지 강한 것도 아닐 것이다. 저 녀석이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보았다. 설마 사람을 죽여도 레벨이 오르는 건 아니겠지? 저 녀석이 벌써 사람들을 여럿 죽인 거라면…. 그것만은 제발 아니기를 바랐다. 그때 녀석이 저쪽에서 큰소리로 외치면서 먼저 화살을 날려 왔다.
“죽어!”
나는 서둘러 나무 뒤로 화살을 피해 숨었다. 숨으면서 순간적으로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몬스터와 싸우면서 정신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피를 본 흥분에 취한 건지 내가 지금 사람과 싸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퍽-
아까와는 달리 화살이 나무에 꽂힐 때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잠깐 사이에 힘이 세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그사이 포인트를 사용했나. 나는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화살이 나무에 박히자마자 바로 녀석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이미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녀석이 다시 한번 내 쪽을 향해서 화살을 날렸다. 아무렇게나 겨냥하는 것처럼 보였던 화살이 내가 있는 쪽으로 정확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바닥을 구르며 화살을 피했다. 그럼에도 녀석의 얼굴이 기세등등했다. 그리고 등에 느껴지는 묵직한 고통에 내가 화살을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지만 화살이 몸에 박히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돋아났다. 미칠 듯한 통증이 일었지만 나는 용케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어떻게…?”
“하하하! 멍청한 새끼! 보여? 여기서 난 신이야!”
나는 가만히 있을 새도 없이 급하게 일어서서 다시 내 쪽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화살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서 얼마 있지 않아 둥글게 회전하더니 다시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날아오는 화살을 한 번 더 피하자 그제야 화살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선택을 받은 거야! 그렇지? 너도 이 능력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나는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녀석의 능력은 이 빌어먹을 목소리가 알려준 특성 중의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질긴 새끼네, 이거. 왜 안 죽어? 네가 감히 신에게 반항하는 거야!”
나는 떨어진 화살을 발로 밟아 부러뜨리고 다시 날아오는 화살을 아까처럼 피했다. 그렇게 피한 화살을 다시 부러뜨리고 그를 쳐다보자 표정이 굳어있었다.
“아아아악! 너 죽을래?! 이 새끼가 귀한 화살을 다 부러뜨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그는 활에 화살을 얹고 시위를 당긴 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저 화살이 진짜로 마지막인지 함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화살을 칼로 쳐내고 나서가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화살이 박혀 뻐근한 등짝을 살짝 움직여보던 나는 빠르게 녀석에게 달려갔다. 눈앞의 녀석이 분한 표정으로 마지막 화살을 내게 날리고는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신이라며 으스대던 것이 우스워 보일 정도였다. 한 번이다. 나는 칼날을 세워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고는 그대로 달렸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든지 말든지 저 녀석에게 스카프의 주인에 대해서 물어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다리가 풀리기 직전에 팔을 뻗어 녀석의 등에 상처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손을 뻗은 후에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사고할 수 있었다. 아, 내가 사람을 공격했구나.
“아아악! 아파! 아악!”
녀석은 바로 바닥에 넘어져서 웅크렸다. 등에는 사선으로 칼자국이 나 있었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에게 이렇게 상처를 입혀본 적이 없었던 나는 손이 벌벌 떨려왔지만 애써 양손으로 칼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마치 호일을 씹은 것 같은 날카로운 고통이 순간 머리를 울렸다. 온 신경이 곤두섰다.
‘괜찮아. 괜찮아.’
속으로 되뇌던 나는 입을 열었다.
“네가 갖고 있던 스카프 주인은 어떻게 됐어?”
“아아아악! 아파. 아파!!”
나는 그를 돌려세우고 주먹 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 상진이 죽었을까? 이 녀석이 날린 화살에 맞아서 다쳤을까?
“말해. 죽였어?”
“아아, 하지 마. 아파요. 아파요.”
나는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상진의 안위를 묻기 위해서 무작정 주먹을 든 나를 향해서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눈앞의 상대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무조건 힘으로 해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스카프 주인. 어떻게 됐어.”
“때리지 마세요. 아파요. 잘못했어요.”
그러나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상진이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그래도 상진이는 절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 평생을 함께해온 친구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죽었을 리가 없다. 지금쯤 몬스터를 흠씬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대답해! 빌지만 말고 말을 하라고!”
내가 다시 한번 그에 대해서 물으며 멱살을 흔들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녀석 때문에 자꾸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지랄하지 마! 난 신이야! 신이라고! 하늘이 날 위해서 힘을 준 거야!”
그때 녀석의 눈이 번뜩이더니 소리를 지르며 손을 휘둘러왔다. 단검을 숨겨뒀었는지 그 검이 내 심장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파악-
순간 녀석의 머리가 내 눈앞에서 터져나갔다. 내 심장을 향해 오던 단검이 그저 옷을 찢는 것에 그치며 떨어져 나갔다. 나는 온통 시뻘게진 시야 때문에 잠시 소매로 눈을 닦아내다가 소매마저도 축축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떨리는 몸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 으아….”
충격을 받아 잠시 모든 시야가 하얗게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아까 몬스터의 몽둥이에 맞아 머리가 함몰되었던 남자가 떠올랐다. 현실이었지. 현실.
“죽었어? 현실이지. 맞아, 현실인데… 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상태였다. 자꾸만 짧은 신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크르르….
바로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의 소리였다. 한 명을 죽인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내 주변을 맴돌면서 상황을 살피는 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보았던 몬스터와는 다르게 생긴 녀석이었다. 갈색의 갈기와 단단해 보이는 날카로운 발톱을 제외하면 커다란 대형견처럼 생긴 몬스터였다. 순간 보이는 샛노란 눈동자는 동공이 잔뜩 커져 있었고 질질 흘러나오는 침으로 인해 기다란 주둥이 주변의 털은 온통 젖어있었다. 녀석은 바닥에 있는 풀을 밟으면서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 아….”
그런 몬스터가 앞에 있는데도 내 머릿속에서는 눈앞에서 사람의 머리가 터져나간 장면이 계속해서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몬스터를 죽이고 사람이 죽는 장면도 목격했지만, 바로 앞에서 머리가 터져 그 피와 뇌수까지 뒤집어쓰니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피가 들어갔는지 눈이 따끔거렸고 눈물이 고여 앞이 흐렸다. 그 와중에 눈앞의 몬스터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옆으로 몸을 굴려서 그 자리에서 벗어났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저 망연자실하게 앉아있었다.
“상진이를… 찾아야 하는데.”
멍하니 중얼거리듯 나온 소리와 동시에 몬스터가 다시 한번 내게로 짓쳐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습관처럼 입술을 한 번 강하게 물고서 칼을 들어 올렸다. 공중에 떠 있는 몬스터에게서 약점 같은 곳이 보였던 것이다. 나는 주저앉아 있던 몸에 힘을 주고 거의 눕듯이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눈앞에 보이는 약점에 검을 박아넣기 위해서였다.
파악-
약점에 제대로 검이 박혀 들어갔다. 하지만 힘이 부족했는지 몬스터는 비틀거릴 뿐 죽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제 나는 무기도 없이 맨 몸뚱이뿐이었다. 그때 옆에 떨어진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단검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 때문인지 몬스터는 내게로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이를 악물었다. 빠르게 달려가 몬스터에게 단검을 휘두르려는데 녀석이 재빠른 몸놀림으로 피했다. 그리고 옆으로 빠져 내게 커다란 입을 벌려왔다. 날카로운 이빨이 반짝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주저앉은 다음에 아래쪽으로 한 바퀴 굴렀다. 바로 피했다고는 하나 팔과 등에 녀석의 이빨이 스쳐 피가 배어 나왔고 박혀있던 화살까지 뽑혀 나갔다. 정신을 놓을 것만 같은 강렬한 통증이 몸을 뒤덮었다. 역시나 현실에서는 겪어볼 일 따위는 없는 그런 통증이었다. 하지만 약점에 박아넣은 검을 보는 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죽여야 해.’
알 수 없는 본능이 머리를 지배했다. 거의 반자동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단검을 던지듯 버리면서 검을 다시 한번 강하게 찔러넣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누르자 손잡이 부분만 빼고 검날이 모조리 안으로 박혀 들어갔다. 살을 가르는 느낌이 생생하게 손을 타고 전해졌다. 그 촉감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래, 이건 현실이었다. 녀석이 뒷발을 휘두르면서 자리에서 빠져나갔고 아슬아슬하게 그 뒷발을 피했지만 이미 내 온몸은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였다. 등에 있던 화살이 빠지면서 피도 잔뜩 흘렸다. 그냥 인정하자.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앵. 끼잉.”
녀석은 나와 거리를 벌리더니 신음을 내뱉으면서 연신 상처를 혀로 핥고 있었다. 단검을 던져놓았던 곳으로 가서 또다시 단검을 움켜쥔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과의 거리를 좁혔다. 녀석이 그런 나를 보면서 이를 드러내며 경계했다. 그리고 입을 벌려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 순간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단검을 던져 넣었고 단검이 입안에 박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녀석의 날카로운 이에 긁혀 팔목에 큰 상처가 생겼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를 처치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특성 ‘영웅’이 강화됩니다.]
[특성 ‘민첩’이 강화됩니다.]
[특성 ‘동체 시력’이 강화됩니다.]
[특성 ‘직감’이 강화됩니다.]
[특성 ‘약점간파’가 강화됩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눕다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몬스터와 싸우면서 두 개나 박혀있었던 화살이 빠지기는 했지만, 상처는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뇌를 강타하는 아픔에 나는 저절로 눈물을 흘리면서 앞으로 드러누웠다. 그러나 여전히 아픔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앉아있을 만한 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포기하고 그대로 누워있었다. 피를 많이 흘러서인지 어지러웠다. 드러누운 곳에서 흙내음이 났다. 순간적으로 계속해서 나던 이 흙내음이 진짜일지 가짜일지 궁금해졌다.
[3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능력치 확인.”
나는 힘없이 목소리를 내뱉었다. 마치 다 죽어가는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진짜 딱 죽기 직전만큼 힘들었다.
[lv. 3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0퍼센트]
[체력: 13(+5)]
[근력: 12(+3)]
[마력: 1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특성: 민첩- 민첩이 1.6배 증가합니다.]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point: 2(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나는 창을 열자마자 곧바로 포인트를 체력과 근력에 하나씩 투자했다. 이런 내 행동은 살기 위한 몸부림 중의 하나였다. 창을 닫으면 다음 레벨업을 하기 전까지 포인트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몬스터에게 머리가 터져 죽은 남자가 생각났다. 그래서 상진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일까.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다. 죽지는 않았다. 절대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계속해서 아까 보았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끔찍한 기분을 잊고 싶어 나는 애써 상진을 생각했다. 되도록 빨리 상진을 찾아야 했다. 아까의 일은 잊어버리자. 머리 깊숙한 곳에 박아넣고 문을 닫아버리자고 다짐했다.
잠시 누워있던 나는 이대로 더 있다가는 몸에 긴장이 풀려서 아예 움직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똑바로 걸을 수 없어 비틀거렸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체력과 근력에 포인트를 투자해서일까, 아니면 기력 2배 회복능력이 있는 팔찌 때문일까. 이렇게나마 움직일 수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잠시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몬스터가 시체를 집어넣던 동굴을 떠올렸다.
“하….”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도 살기 위해서 이러고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분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래도 살자. 살 이유 따위 없지만, 상진의 안위를 확인할 때까지는 살자. 터덜터덜 아무 생각 없이 바로 동굴로 향하려다가 피로 절여진 몸을 씻고 싶어서 계곡물에 들어갔다.
“으으윽….”
하지만 온몸이 쇠꼬챙이로 관통당하는 느낌에 서둘러 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상처 부위를 씻지 않으면 덧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들어가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고통 때문에 눈물이 자동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상진이에 대해서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같은 곳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소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상진이는 분명히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은 게임과 똑같은데도 한번 다친 상처는 레벨업을 하고 나서도 낫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물을 머금었다. 그렇지만 현실과는 다르게 미미하게나마 계속해서 상처가 회복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위안 삼으면서 힘겹게 다시 동굴로 향했다. 몬스터가 시체를 버리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않았으니 동굴이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서서히 해가 기울고 어둑어둑한 밤이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아픈 몸 상태와 아까 그 이상한 남자 때문에 나는 사람과 몬스터 둘 다 피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다만 상진이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지나가며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은 몰래 숨어서 확인했지만, 상진이는 없었다. 몬스터와의 싸움 때문인지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이 허기가 졌다. 동굴로 향하던 도중에 운 좋게도 나무 열매를 발견해,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먹고도 모자라 양 주머니에 가득히 넣어올 수 있었다.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무작정 입에 넣고 봤다. 다행히 먹을 수 있는 열매였다. 열매는 새콤달콤하니 맛도 좋았다. 신기하게도 열매를 먹고 나서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고 계속 조금씩 흘렀다 말았다 하던 피도 완전히 멈췄다. 열매에 회복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힘들 때마다 열매를 하나씩 꺼내먹으면서 힘겹게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혹시나 안에 몬스터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으나 시체들만 쌓여있을 뿐이었다. 몹시 거부감이 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시체들 뒤로 들어가서 벽에 등을 기대었다. 몬스터가 어째서 이곳에 시체를 가져다 놓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아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잠이 몰려오는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잠들지 않으려 허벅지를 꼬집어봤지만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 * *
나는 상진이 계속 목을 매만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스카프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그의 목에 둘러주고 꼼꼼하게 매듭까지 지어주었다.
“술 먹고 나면 목부터 붓는 애가 왜 브이넥을 입었어.”
걱정하느라 까칠하게 나가는 말에도 상진은 맑게 웃었다. 늘상 상진이 나를 보면 짓는 미소였다.
“자기 내 걱정했어?”
“누가 네 자기야. 소름 끼치게 하지 말고 저리 가.”
“밤새 살결까지 부대낀 사이에 왜 그래? 내외해?”
상진이 그대로 나를 힘주어 껴안고는 귀에 바람을 불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징그럽게 굴지 말고 저리 가.”
“후우. 싫은데?”
상진은 계속 귀에 바람을 불어넣다가 그대로 등짝을 한 대 맞고 나서야 나를 놔주었다.
“우리 자기. 손이 참 매워.”
“하지 말랬지!”
“하하. 너 사실 내 쇄골 보고 너무 섹시해서 스카프로 가린 거 아니야? 다른 사람 못 보게 하려고! 그렇지? 내가 딱 맞히니까 당황했구나.”
“야!!”
그렇게 선잠에서 깨어난 순간 눈을 뜨고 죽은 시체와 눈이 마주쳤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나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시체에게 다가가 눈을 감겨주었다. 시체를 전부 묻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체들의 눈을 하나하나 감겨주었다. 내게는 그것도 엄청난 일이었다. 심적으로 무척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순간 시체들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으으으….”
나는 시체 눈을 감겨주던 상태 그대로 놀라 굳어버렸다.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눈만 데구르르 굴리고 있는데 깨어난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정말 살아있는 사람인가? 나는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안녕하세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 튀어 나갔다.
“하아… 어떻게 된 거지?”
“아, 그게 여기는 몬스터가 시체를 가져다가 버리는 곳…인데요.”
그 사람은 그대로 다시 기절했다. 죽은 줄 알고 놀라 달려갔으나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냥 다시 기절한 것 같았다. 저 사람을 시체더미에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덩치가 상진이와 비슷하게 커서 나는 그의 어깨 아래쪽으로 손을 넣어서 시체 더미에서 질질 끌어내 힘겹게 눕혀놓았다. 그 후에야 나는 다시 동굴 벽에 등을 기댔다. 꿈에서 본 상진이가 너무 그리워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진짜로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기절했던 남자가 다시 눈을 떴다. 주변을 살피는가 싶더니 아까와 똑같이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아…. 몬스터…들이 시체를 집어넣는 동굴이요.”
“네?”
동그랗게 뜨인 그의 눈과 내 눈이 한참 동안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였다.
“꿈인 줄 알았는데.”
“저도 꿈인 줄 알았어요. 그랬으면 정말 좋았겠네요.”
얘기를 들어보니 그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몬스터 여러 마리와 싸우다가 빗맞는 바람에 기절했고 눈을 떠보니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상황이 꿈인 줄 알고 그대로 다시 눈을 감은 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몬스터는 아무래도 그가 죽은 줄 알았던 모양이다. 심지어 이 남자는 나와 같은 3레벨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사정을 말하다가 문득 정적이 찾아왔다. 단정하게 잘생긴 상진이와는 다르게 이 남자는 화려한 느낌으로 잘생긴 남자였다. 왠지 후광이 비추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잘생긴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어색한 공기가 멋쩍어 괜히 여기저기 터져나간 옷만 만지작거렸다.
“몬스터한테 맞아서 다친 겁니까?”
그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옆구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고는 대답했다.
“아, 네. 이 상황이 다 꿈인 줄 알았는데 한 대 맞으니까 정신이 들더라고요. 꿈이 아니구나 하고.”
“저는 그래서 더 꿈인 줄 알았습니다.”
“아… 네.”
어색한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문득 아까 주머니에 넣어놓은 열매가 생각났다.
“이거 드실래요?”
주머니에서 한 움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아….”
나는 짧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뭉개져서인지 열매가 붉은 과육을 마구 흘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목을 따라 흘러내리는 과육을 나도 모르게 혀로 핥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빤히 보는 그의 눈이 멋쩍어서 나는 괜히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조금 더럽죠? 그냥 제가 먹을….”
“주세요. 감사하게 잘 먹겠습니다.”
열매를 가져가는 그의 손이 어쩐지 불필요하게 손목 안쪽까지 닿았던 것 같았지만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흘려 넘겼다. 그의 손이 닿았던 팔목에 있는 상처는 거의 나아 있었다. 나는 괜히 그 상처를 손으로 더듬어 흔적을 매만졌다. 그는 가져간 열매를 하나하나 집어 입에 넣고 있었다. 한 움큼 집어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던 나와는 다르게 우아한 손짓이었다. 그렇게 열매를 집어먹던 그가 입을 열었다.
“열매가 회복능력이 있는 것 같네요? 아픈 게 사라지는데.”
“네, 그런 것 같더라고요.”
[1차 생존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잠시 후 보상이 지급됩니다.]
[24시간 후 1차 시험 장소가 사라집니다.]
“뭐라고?”
우리 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며 놀랐다. 사라지다니.
[2차 시험 장소를 찾아 이동하세요.]
[2차 시험 장소를 찾지 못할 경우 죽게 됩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23:59:59]
“정말, 이게 꿈이 아닌 걸까요?”
“저는 꿈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나갑시다.”
“예?”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같이 나가고 싶어도 몸이 아직 말썽이어서 나는 조금 더 쉬고 싶었다.
“저는 조금 쉬다가 나갈게요.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털썩-
그가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볼 때였다.
“이름.”
“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하지 않았습니까.”
“강이석이에요. 스물네 살입니다.”
“최태경입니다. 나이는 스물여섯이고 잘 부탁드립니다.”
“뭘요?”
그의 입가에는 상황에 맞지 않는 아주 멋들어진 미소가 걸려있었다.
“우리 같이 다닙시다. 난 그쪽이 너무 마음에 들거든요.”
“처음 보는 제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말끝을 흐리는 나에게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운명임을 느꼈습니다.”
“예? 운명이요?”
황당함에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그가 내 옆에 앉아서 동굴 벽에 같이 등을 기대었다.
“우리 같이 다니는 것 아닙니까?”
“절 뭘 믿고 같이 다녀요?”
“왜 날 믿을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 같이 다니면 안 되나? 응?”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계속 웃어 보이는 그는 역시나 근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그가 재촉했다.
“허락 안 해줄 겁니까?”
그는 초조했는지 바닥에 둔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로 돌조각을 툭툭 두드려대는데 그게 시계 초침 소리 같았다. 그렇게 계속 뚫어져라 내 입술을 쳐다보는 통에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제가 사람을 하나 찾는 중인데요.”
“사람? 이곳에서?”
뜬금없는 나의 말에 그가 입을 열어 반문했다.
“그래도 괜찮으시면 같이 다녀도 상관없어요. 그것 때문에 위험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알고 계실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생존이 우선이겠지만 나는 상진을 찾는 일이 생존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그에게 같이 다니는 조건으로 상진을 같이 찾아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줄 리도 만무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상진을 찾아야 했다.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으음… 가족인가? 아니면 연인?”
잠시 턱을 쓸며 무언가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오묘한 빛을 띤 그의 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친구예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친구요.”
대답을 들은 그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폈다. 의아함이 감도는 표정이었다.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압니까?”
“제 친구의 물건을 가지고 있던 사람하고 만났거든요.”
저절로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표정이 굳은 것도 잠시 그는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좋아요. 나도 돕죠, 뭐.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고 사람들은 몇 명이나 떨어졌을까요.”
[보상이 정산되었습니다.]
[생존자 전원에게 포인트 +3이 지급됩니다.]
[생존자 전원에게 경험치 100퍼센트를 지급합니다.]
[생존자 전원에게 방어구 하나를 지급합니다.]
[방어구의 지급은 랜덤으로 결정됩니다.]
그 목소리와 함께 보상이 정산되었다. 그리고 레벨이 올랐다. 매번 전투가 끝난 후 만신창이인 몸 상태로 레벨업을 해서인지 모르지만 레벨업을 하자 어쩐지 몸이 조금 더 튼튼해진 기분이 들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4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4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와, 보상이 크네요. 포인트도 3개나 주고 레벨업까지.”
태경도 몸이 조금 튼튼해진 기분이 드는지 이리저리 팔다리를 흔들면서 게임 같다고 중얼거렸다. 나도 그의 말에 백 번 동의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상태창을 열었다.
“능력치 확인.”
[lv. 4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0퍼센트]
[체력: 14(+5)]
[근력: 13(+3)]
[마력: 1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특성: 민첩- 민첩이 1.7배 증가합니다.]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point: 4(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 당장 필요한 것은 역시나 체력과 근력이었다. 나는 체력과 근력을 하나씩 올리고 마력을 올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영웅이라는 특성이 어쩐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마력이라는 능력치가 존재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살을 마음대로 움직이던 살인자도 생각났다. 팔찌 덕분에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나는 마력에 포인트 2개를 사용했다. 그러자 곧 손에 손바닥만 한 상자가 생성되었다. 위에 떠 있는 정보창에는 랜덤방어구 상자라고 쓰여 있었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상자를 돌려보고 있는데 태경은 이미 ‘사용’이라고 외치고 가죽 상의를 얻었다. 그를 따라서 나도 상자를 사용했는데 검은색 가죽 바지가 나왔다. 몸매가 다 드러나게 생긴 쫙 붙는 바지였다. 나는 잠시 굳어서 그 방어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로 교환할까요? 이석 씨는 상의가 찢어지고 저는 바지가 찢어졌는데.”
나는 그의 말에 반색하며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죽 상의도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는 디자인이라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쫙 붙는 불편한 바지보다야 나을 것 같았다. 두 개 모두 체력이 +1씩 붙어 있는 방어구였다. 그렇게 우리는 동굴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조금 쉬다가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태경은 바지를 벗으면서 내가 옷을 갈아입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지 옷 바깥으로 머리를 빼내며 돌아본 곳에는 번뜩이는 그의 두 눈동자가 있었다. 눈빛이 참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옷 갈아입는 남의 등을 보면서 눈을 빛내고 있었는지를 고민하던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혹시 옷을 빼앗을 타이밍을 잡으려던 것은 아닐까. 나는 절대로 그를 완전히 믿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옷은 입자마자 체형에 딱 맞게 줄어들었고 심지어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옷을… 굉장히 천천히 갈아입으시네요?”
아직까지 맨다리를 드러내고 있는 그를 보니 혹시 내가 그의 눈빛을 착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훔치려면 빠르게 갈아입고 덮쳤을 테니까.
“피 때문에 바지가 잘 안 벗겨져서요.”
아랫입술을 핥는 그의 혀가 참 뱀 같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시선을 동굴 벽으로 빙빙 돌렸다. 이제야 깨달았다. 태경은 계곡에서 씻고 와서 깨끗한 내 등짝을 보고 불쾌했던 거였다. 자기는 찝찝해 죽겠는데 나 혼자 깨끗하니까. 아니면 왜 같은 남자에게 저런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낸단 말인가.
“계곡 가서 씻고 오실래요?”
“이석 씨도 같이 가서 씻으실 겁니까?”
“네? 저는 씻고 와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됐습니다.”
“아, 네.”
태경은 계속해서 내 눈을 바라보면서 바지를 갈아입었다. 그런 그의 눈빛이 참 부담스러웠지만 뭐라고 말하기도 애매해서 관뒀다. 태경은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음에도 멋있었다.
“안 불편해요? 너무 딱 붙는 것 같은데.”
“이석 씨는 옷이 참 잘 어울리네요. 예쁩니다.”
나는 그의 말에 말문이 턱턱 막혔다. 그래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데 태경이 은근하게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안 불편합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안 입은 것 같아서 느낌이 조금 그렇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손으로 제 허벅지를 슬쩍 훑어 보였다. 그 모습이 같은 남자가 봐도 참 섹시하다는 생각을 한 것도 잠시 나는 황당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태경이 피식 미소를 흘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운이 좋구나.’
웃통을 벗고 돌아다니는 건 괜찮지만 바지를 벗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서 앉아서 쉬세요. 아니면 제가 옷 갈아입는 거 구경하다가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예?”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리에 묻은 피를 씻지 못해서 기분이 많이 상했나 짐작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라도 그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은 깔끔해졌다. 마냥 우울한 생각만 파고들던 것도 잠시 멈췄다. 그거 하나는 참 긍정적이었다.
“찾는 친구가 여자? 남자?”
“남자인데요.”
그렇지만 다시 물어오는 질문은 엉뚱해서 대화의 흐름이 전혀 이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얼떨떨한 내 표정을 보고 그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아, 진짜 친구 찾는 거였나 보네.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좋은 일도 있기는 하네요.”
“무슨 말이에요? 그럼 제가 태경 씨에게 거짓말했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좋은 일이라니요?”
“아뇨, 그런 뜻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석 씨를 만난 게 좋은 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태경이 내게 사과했다.
“그런데 안 쉬세요? 벌써 30분 흘렀습니다. 제가 보초를 설 테니까 푹 주무세요.”
[23:31:06]
그의 말대로 벌써 30분이나 흘러있었다. 나는 털썩 드러누워서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인지 몸이 피곤해서인지, 옆에서 계속 말을 거는 태경은 신경도 못 쓰고 그대로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침대에서 편하게 쉬고 싶었다. 술을 먹었을 때처럼 누워있는 바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씩 생각을 비웠다. 그리고 이내 수마가 덮쳐왔다. 보초를 서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더욱 깊게 잠이 든 것 같기도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태경이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매일같이 꾸는 꿈도 꾸지 않고 잤다. 그렇지만 오래 잔 건 아닌지 머리가 띵하게 아파오면서 시야가 뿌옇게 보였다. 눈을 비비면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태경이 입가에 손가락 하나를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쉬- 몬스터가 들어왔습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이 동굴에 시체를 집어넣던 놈들과 똑같이 생긴 몬스터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괜스레 머리가 더 아파서 나는 잠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리고 옆에 대충 던져놓았던 무기부터 확인하고 소리 나지 않게 집어 들었다. 한참을 놓고 살았던 검을 이제는 매일같이 목숨처럼 챙겨야만 했다. 이런 세상에 떨어질 것을 미리 알았다면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까? 나는 멍하니 검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아니다. 나약한 나는 그러지 못했을 거다.
태경이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태경을 바라보았다. 태경도 이미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의 무기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검이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한 마리씩 맡아서 공격할까요?”
나는 조심조심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나를 잠깐 바라보던 태경이 입을 열었다.
“한 마리 혼자서 잡을 수 있습니까?”
“한 마리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저도 계속 혼자 다녔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계속 혼자 다닌 건 아니었지만 설명하기 귀찮았기 때문에 대강 말했다. 그가 또다시 멋들어진 미소를 보였다.
“그럼 간단하네요. 한 마리씩 잡죠.”
태경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땅을 박차고 근처에 있는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몽둥이를 피하는 모습이 아주 능숙해 보였다. 어떻게 하루 만에 저런 몸놀림을 보이는지 정말 신기했다. 그의 직업이 뭐였을지 궁금해졌다. 구경하는 사이에 내가 맡기로 한 몬스터가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빠르게 달려가 몬스터를 공격했다.
“허억, 허억.”
그와 나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기는 했지만, 바닥에 주저앉거나 드러누울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다.
“와, 능력치 올린 게 바로 티가 나네요.”
“정말 그렇네요.”
그와 나는 잠시 신기해하다가 다시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할 일은 아니죠?”
“아뇨, 좋아할 일이죠. 조금이라도 더 살 가능성이 커지니까.”
“친구를 찾을 가능성도 커지고?”
“네.”
“그런데 혹시라도 친구가…… 아닙니다. 제가 말이 헛나왔습니다.”
그가 삼킨 뒷말이 무엇인지 내게 정확하게 와 닿았다. 아마도 상진이의 죽음에 관해서 얘기하려다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진이 살아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상진이는 살아있어요. 평생 같이 있기로 했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상진이도 분명 절 찾고 있을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반드시 다시 만날 거예요.”
“우정이 참 보기 좋네요.”
“평생을 같이 지냈으니까요.”
그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레벨이 오를수록 몬스터를 많이 잡아야 하나 봐요. 레벨이 안 오르네요.”
“그것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2차 시험 장소를 찾는 거죠.”
“네, 못 찾으면 죽으니까.”
[21:15:10]
거의 3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동굴 밖으로 나왔다. 밖은 깜깜했다. 동굴에 들어올 적에 해가 저물기 시작했으니까 지금은 한밤중일 것이었다.
“정말 괜찮겠죠?”
“최대한 조심해서 이동하든지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밝을 때 움직여도 찾는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렇겠죠.”
“가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결단력이 필요한 때였다. 우물쭈물하다가는 그대로 죽음에 한 발 가까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굴이라고 안전하지는 않다는 것도 확인했으니 조금씩 몸을 움직여서 2차 시험 장소를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둠은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감춰줄 수도 있으니 잘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이어서 그런지 곤충들이 우는 소리 말고 다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용해서 몬스터의 울음소리나 움직이는 소리가 잘 들렸다. 시야가 어두워서 싸우는 건 무리였기 때문에, 몬스터가 여러 마리 있는 곳은 피해서 지나갔다. 가는 길에 열매가 있으면 일단 따서 먹고 가끔 혼자 다니는 것들만을 상대하면서 숲을 돌아다녔다. 한참을 그렇게 돌아다니자 드디어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15:46:32]
“이럴 땐 시간이 참 빠른 것 같네요.”
거의 6시간을 숲에서 헤맸는데 아직 2차 시험 장소를 찾지 못했다. 살면서 항상 궁금했던 게 왜 꼭 급박한 순간에만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르냐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는 굉장히 불친절해서 2차 시험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망연자실해서 중얼거렸다.
“혹시 정말 게임처럼 포탈 같은 걸로 이동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 가능성도 생각은 해둡시다.”
태경이 잠시 멈칫거리다가 대답했다. 그 확신 없는 목소리에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더 강해졌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15:30:00]
[2차 시험 장소 최초 발견자가 나타났습니다.]
[최초 발견자로 인해 카운트 시간이 10시간 감소합니다.]
“뭐라고?!”
나는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태경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05:29:59]
[두 번째 발견자가 나타났습니다.]
[카운트 시간이 30분 감소합니다.]
[힌트가 공개됩니다.]
[포탈을 찾아가세요.]
[04:59:13]
“말도 안 돼!”
시간이 5시간밖에 남지 않았을 때가 돼서야 목소리가 멈췄다. 나와 태경은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석 씨. 우리가 찾아보지 않은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딘데요?”
“들판. 제가 여기 떨어진 날에 돌아다니다가 들판을 봤습니다.”
“아! 저는 거기에 혼자 떨어져 있었어요. 사방이 전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와 나는 눈을 마주치고는 서둘러 달려나갔다. 왜 2차 시험 장소가 꼭 숲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또 언제 다른 발견자로 인해서 시간이 줄어들지 모를 일이었다. 달려가다가 몬스터를 만나면 최대한 피해서 달아나고 그래도 안 된다면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몬스터를 처치하고 들판에 다다라서야 레벨이 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5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5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상태창은 나중에 확인하고 일단 빨리 나가요.”
그렇게 말하고 달려나가려던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들판이 온통 시체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동굴에서 본 시체들은 장난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수였다. 적어도 수백 명은 되어 보였는데 대부분이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시체의 산에 나는 나무를 붙잡고 잠시 구역질을 하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 태경은 비위도 좋은지 미간을 조금 찌푸린 것 외에는 멀쩡해 보였다.
“사람이 이런 건 아니겠죠?”
그렇게 물어오는 태경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만났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 떨어진 지 불과 하루 만에 수백 명을 학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빠르게 뛰는 내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태경과 나는 들판으로 나가기 전에 상태창을 먼저 확인하고 능력치를 올리기로 했다. 세 번째 발견자가 나타났다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는 2차 시험 장소로 넘어간 사람 중에 범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한 짓이 아닐 수도 있다. 저곳에 무언가 함정이 있거나 들판으로 나가는 순간 몬스터가 마구잡이로 달려들 수도 있는 것이다. 태경과 나는 긴장으로 인해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상태창 확인.”
지금은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올릴 때였지만 남아있는 포인트는 단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눈을 꾹 감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몬스터를 잡고 레벨을 하나 더 올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면서 총 12마리를 잡아서 레벨을 올렸고 다음에는 그 수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음만 조급할 뿐이었다.
[lv. 5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0퍼센트]
[체력: 15(+5)]
[근력: 14(+3)]
[마력: 12]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특성: 민첩- 민첩이 1.8배 증가합니다.]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point: 4(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한참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원래 레벨업을 할 때마다 얻는 포인트는 1개였다.
“포인트가 4개네요?”
“네. 왜 그런 걸까요?”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받은 포인트는 이미 다 사용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사용하기 전과 같은 포인트가 모여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운은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죠?”
“네. 그렇네요.”
그 순간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안 돼! 오지 마!”
우리는 동시에 그 방향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떤 사람이 시체만 밟아가면서 폴짝폴짝 뛰어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밑으로 알 수 없는 녹색의 줄기가 꿈틀거리며 그 사람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그 줄기가 들판 위를 온통 꿈틀거리면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줄기들을 피해 시체를 밟아가며 들판 가운데에 있는 포탈 근처에 이르렀다. 그러나 포탈에 들어가기 전에 발목을 줄기에 붙잡혀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그 뒤는 정말 참혹한 광경의 연속이었다. 들판에 퍼져있는 모든 줄기가 그 사람에게로 향했고 곧 줄기에 둘러싸였다.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무줄기가 그 사람의 입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으걱, 으거걱!”
그 틈을 타서 숨어있던 다른 사람들 몇이 들판을 향해 뛰어나왔다. 순식간에 사람 하나를 잡아먹은 줄기가 퍼렇게 변한 시체를 바닥에 던지고 들판에 있는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운이 좋은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 줄기에 잡혀서 순식간에 형체를 감췄고 살아남은 둘은 다시 숲속으로 도망쳤다. 멀쩡한 시체가 별로 없던 이유는 바로 저것 때문이었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다행히 사람이 사람을 죽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행인 걸까요?”
“사실 아까 우리가 운이 좋은 것 같다는 말, 취소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을 잃고 포탈이 있는 들판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까 사람들이 당한 것만 보더라도 일반적인 무기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기를 지나간 두 명은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 레벨이 높아서일까,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일까.
“저길 지나갈 수 있게는 해 놓은 거겠죠?”
“그렇죠. 그러니까 그 두 명이 지나간 거 아니겠습니까.”
“일단 조금 더 다가가서 들판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뭐라도 알아보기는 해야죠. 상진이도 여길 찾아서 근처에 있을 수도 있고….”
잠깐 멈칫하던 태경이 이내 수긍했다. 그리고는 먼저 발을 옮겨서 들판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나도 이내 주변을 살피며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6m 정도를 이동하자 시야가 트이며 들판이 아까보다 훨씬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근처에 숨어있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으나 상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하나하나 살핀 후에야 들판으로 시선을 돌리던 내 귀에 또다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옆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다시 심장이 벌렁거리며 떨려왔다.
“하지 마세요! 도와줘요! 아무나 도와주세요!”
“안 닥쳐?!”
폭력을 가하는 소리까지도 적나라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 태경과 나는 시선을 교환하고는 바로 그쪽을 향해서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이동했다. 제발 사람을 죽이던 그 나쁜 놈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이동해서 도착한 곳에서는 내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폭처럼 험악하게 생긴 남자 하나가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하얗고 순하게 생긴 남자의 바지를 막 벗겨내던 참이었다. 이미 남자아이의 윗옷은 벗겨져 있었고 폭행을 당했는지 배에는 여기저기 멍이 들어있었다.
“저런 쓰레기 같은….”
태경이 욕 비슷한 말을 하는 걸 처음 듣게 되었다. 그만큼 우리 눈앞의 광경은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비명을 듣고 달려왔는지 반대쪽에서도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강해 보이는 남자의 험악한 인상 때문인지 아무도 선뜻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암담한 현실이었다. 나와 태경은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덮칠 타이밍을 쟀다.
“허어윽… 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하도 울고 비명을 질러서인지 남자아이의 목은 잔뜩 쉬어있었고 남자가 한 손으로 입을 막는 바람에 이제는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알아듣기 힘든 말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험악한 남자가 막 바지를 벗고 제 흉물스러운 것을 드러낼 때였다. 나는 빠르게 달려가 그 험악한 남자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이런! 넌 뭐야! 이 새끼야!”
차마 다 벗지 못한 바지에 걸려 넘어진 남자가 다시 바지를 추켜올릴 때였다. 태경이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긴 뭐겠습니까. 쓰레기 처리하고 사람 구하는 거지.”
“뭐… 뭐야!”
“고작 조그만 미더덕 하나 가지고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있었습니까? 대단한 용기로군요.”
태경이 그를 향해 모욕적인 언사를 강행했다. 넘어져서 목에 칼이 닿아있는 상태에서도 남자는 그 말에 흥분해 온갖 욕을 뱉어대다가 “너는 어떤지 보자!”하고 태경의 딱 붙은 바지의 어딘가로 시선을 보내더니, 입을 다물고는 분노에 찬 숨만 씩씩댔다.
“비교도 안 되지 않습니까?”
태경이 미소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울고 있는 남자아이를 부축했다. 남자아이는 심하게 놀랐는지 나를 꽉 끌어안고는 놓아주지 않고 울고만 있었다. 원래 그렇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나는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괜찮다는 의미로 등을 계속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이제 괜찮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려줬다.
[03:38:48]
5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남자아이는 훌쩍대면서 나를 놓아주었다. 숭숭 뚫린 가죽옷으로 남자아이의 눈물과 콧물이 들어와 묻었지만 찝찝함을 차마 티 낼 수는 없었다.
“이제 진정이 됐니?”
“네. 훌쩍…. 감사합니다.”
그제야 근처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빼꼼히 얼굴을 드러냈다. 그 사람들 중에도 상진은 없었다. 물론 그가 있었다면 나보다 먼저 튀어나와 상황을 정리했을 것이다. 이쯤 되니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죽었을 가능성을 마음 한구석에 생각해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상진의 시체라도 찾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상진이라면 저 포탈 너머로 들어간 생존자 중의 하나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
사람들이 험악한 얼굴의 사내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이제 이 장소가 사라지기까지 3시간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어서 이 혼란을 수습하고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포탈로 이동할 방법을 찾아야 할 때였다. 내 입에서 작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이를 구해줄 용기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뒤늦게 사내를 향해서 온갖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품어온 모든 감정을 눈앞의 남자에게 쏟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무기까지 들고서 금방이라도 남자를 향해서 달려들듯이 날을 세우는 사람들이 어쩐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남자가 아이에게 저지른 행동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험악한 인상의 남자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적반하장으로 사람들을 향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좆같은 곳에서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죽기 전에 실컷 즐기겠다는데 뭐가 나빠! 그러는 너희는 뭐가 다른데! 뒤에서 비겁하게 숨어 있기만 했던 주제에!”
“뭐, 뭐라고?”
“저 미친 새끼가!”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뭐, 그래서 어쩔 건데. 날 죽이기라도 할 테냐? 날 죽여봤자 네놈들도 저 빌어먹을 나무줄기에 괴롭게 뒤질걸!”
“그래! 죽일 거다!”
“혼자라면 겁나서 덤비지도 못할 놈들이 조금 뭉쳐있다고 기세등등하기는!”
흥분한 사람 몇몇이 제 무기를 손에 들고 남자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태경이 입을 열었다.
“그만!”
사람들은 그제야 사내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는 태경을 바라보았다. 다들 분에 차서인지 얼굴이 발갛게 되어 숨을 거칠게 내뱉고 있었다.
“다들 이 사람을 죽이는 게 답이 아니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뭐야! 저놈 편을 드는 거야?”
“이제 보니까 한패 아니야?”
“지금 둘이서 쇼하는 거야? 아니지, 저기 나자빠져 있는 놈팡이 둘까지 한패야?”
“너네들도 살인마지! 사람 잡아먹는 놈들! 쳐 죽일 놈들!”
“지금 당신들이 뱉는 말이 어떤 뜻인지나 알고 말하고 계신 겁니까?”
태경이 황당한 얼굴을 하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들은 고작 사람 죽이는 걸 말렸다고 태경과 나, 심지어 피해자까지도 같은 패거리로 몰아가고 있었다. 몇몇 사람은 그렇게 몰아가는 사람들에게 놀랐는지 뒷걸음질 쳤다. 제정신을 차리기 힘든 극한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너무 쉽게 흥분해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다. 그저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할만한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고작 하루 만에 쉽게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금 떠오르려는 끔찍한 기억의 문을 다시 잘 잠그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를 해요!”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처음 보는 화난 표정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던 태경도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나도 봤어요. 여기 떨어지고 첫날부터 아무렇지 않게 사람 죽이는 새끼, 나도 봤다고.”
“그…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지금 당신들도 그 살인마 새끼랑 똑같이 사람을 죽이겠다는데,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상황인데! 말리는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몰아갈 수가 있어요?”
모두가 입을 다물고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떤지 정확히 알고는 있는 거예요? 힘을 합쳐서 출구로 가려는 노력은커녕 지금 서로 싸우고 있잖아요. 다 죽자는 거예요?”
“그래, 말 한번 잘했다. 저 포탈로 가려는 사람들 지금까지 다 어떻게 됐는지 못 봐서 하는 소리야? 세 명 빼고 다 죽었어! 알아?!”
“맞아, 그 세 명도 피 흘리면서 거의 죽어가는 상태로 통과했는데 지금쯤 죽었을지 어떻게 알아!”
“맞아! 우리라고 저기에 가고 싶지 않은 줄 알아?”
“우리가 살던 곳으로 다시 안 돌아갈 거예요? 살인자가 되어서 돌아갈 거냐고요, 네?”
“네가 알아? 우리가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닌지 네가 아느냐고!”
“맞아! 네가 방법을 찾아낼 거야? 어? 알지도 못하면서 큰소리를 치는 거야, 지금?”
“우리가 모두 돌아갈 수 있다고 네가 보장할 수 있어?”
사람들은 다시금 동조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가슴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참았다. 명치가 체한 듯이 답답해 숨 쉬는 것도 고역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고함을 뒤로하고 바로 뒤에 펼쳐진 널따란 들판 가운데에 있는 포탈을 바라보았다. 두 번째 발견자까지만 알고 있었는데 벌써 세 명이 넘어갔다고 하면 앞으로는 사람들이 들어가도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
그때였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태경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그를 밀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판사판인지 무기도 챙기지 않고 들판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사체들을 짓밟으면서 뛰는 사내는 정말 미친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던 그가 중간쯤 갔을 때 사체에서 발이 미끄러져 들판으로 떨어졌다. 그와 말싸움을 했던 이들까지도 모두 짧게 비명 소리를 내며 긴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들판에 잔뜩 퍼져있는 줄기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밟고 있는 땅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그 주위로 퍼진 무언가 위험한 기운들도 말이다. 그가 몇 걸음을 옮겨 위험한 기운으로 가득한 곳으로 달리자, 곧바로 줄기가 쫓아가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그의 눈동자가 뒤로 돌아갔다.
“어거걱, 어걱, 그억….”
끔찍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토악질이 치밀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었으나, 그것으로 비로소 확실해졌다. 나는 곧바로 내가 가진 특성을 떠올렸다. 위기를 감지하고 약점을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나는 내 옆으로 다가와 저 사람을 놓친 것에 대해서 사과하는 태경에게 작게 속삭였다.
“나,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발요.”
바로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내 말을 듣고 매달려왔다. 나와 태경이 하는 말을 아이가 들을 줄 몰랐다. 당황해서 쳐다보니 아이가 간절하게 애원했다.
“저, 저 짐이 되지 않게 노력할게요. 저는 그 특성도 세 가지나 있어요. 그리고 어, 학교에서 매번 전교 10등 안에 들었고 머리도 나쁘지 않아요. 제발 데리고 가주세요.”
대화 내용은 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우리에게 매달리는 아이를 보고 사람들이 의아한 눈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죽음에 조용해지기는 했지만 언제 또 어디서 사람들의 싸움이 시작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미심쩍어하면 또다시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아이를 진정시킨 후에 커다란 나무 아래로 가서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와 태경은 특성을 5개씩 가지고 있었다. 그 특성이 무엇인지까지 자세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이 특성을 5개씩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에게 들어보니 특성을 1개나 2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했다. 그들이 자신을 시기해서 따돌릴까 봐 아이도 특성을 2개만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구해주지도 않고 상황만 살피던 사람들하고 같이 다니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저 좀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지금 저 사람들 조금 무서워요.”
남자아이의 이름은 이서하였고 19살이었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정전이 됐는데 눈을 떠보니 여기였다고 했다. 나는 괜히 안쓰러워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태경의 눈이 내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서하가 그런 태경의 눈치를 살폈다.
서하에게 유용한 정보를 얻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 특성 중 하나를 밝혔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무작정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믿어주었다. 우리는 언제 빠져나가야 할지에 대해 상의했다. 그리고 그제야 포인트로 능력치를 올리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02:55:47]
이제 이 공간이 사라지기까지 미처 세 시간도 남지 않았다. 즉, 살 수 있는 시간이 세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과 같았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게 있었다. 우리끼리만 가야 할지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빠져나가야 할지 여부였다.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저들 중 누군가가 나를 믿지 못하고 돌발행동을 한다면 포탈을 향해서 가던 사람들과 나 역시도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나가지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른 이들의 죽음을 방관하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결심이 섰다.
우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포탈로 이동하기로 했지만, 내 특성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기로 합의했다. 다만 비밀 힌트를 얻었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이곳에는 몬스터를 포함해서 무서운 것들이 정말 많았지만, 그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었다. 그게 내 특성을 밝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변에 숨어 있는 이들을 데리고 왔다. 그중에는 혜진과 지연, 그리고 전에 스치듯이 만났던 군인도 있었다. 우리를 믿지 못해서 따라오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은 그냥 두었다. 한참을 그렇게 사람을 모으다 보니 이곳에 살아남아 있던 이들이 백 단위를 넘어갔다. 생각보다 더 많은 숫자에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침착해졌다. 이 많은 사람 속에서도 상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중간중간 심호흡을 하는 나를 태경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조차도 내가 괜찮은지 아닌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친구는… 먼저 포탈로 넘어가 있을 겁니다.”
“네, 맞아요. 죽었을 리가 없어요. 살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었다. 위험하지 않은 곳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내가 들판으로 다가갔다. 바로 한 걸음 앞에서 줄기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징그럽게 생긴 줄기에는 올록볼록 이상한 기포들이 올라와 있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살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험이 느껴지지 않는 땅이 있었다. 나는 곧장 그곳으로 가서 땅에 발을 디뎠다. 나를 따라오던 사람들이 놀라서 숨을 들이마셨지만 모두 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저마다 환호하기 시작했다.
“살아나갈 수 있어!”
“와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멀쩡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희망을 얻은 것이었다. 말로 할 때는 의심하다가 몸으로 보이니 그들은 극도로 안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걸음을 디딘 곳에서 세 걸음 이상 벗어나면 안 된다는 주의를 주고서 서하와 태경 그리고 내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해했지만 먼저 걸음을 옮기는 우리를 보고 안심하며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우리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뒷사람들을 확인하고 정보를 뒷줄로 전달하게 했다. 그런 우리를 보더니 따라오지 않겠다던 사람들도 뒤늦게 합류해서 줄이 더욱 길어졌다.
“으아악!”
“밀지 마!”
“잡아당기지 마!”
“저리 가란 말이야!”
중간에 다리를 다친 사람이 넘어지는 바람에 나무줄기에 끌려가자 사람들이 흥분했고 그 때문에 함께 이탈한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모두가 긴장해서 걸음을 옮겼고 안전하게 포탈에 도착했다. 중간에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했지만, 다행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도착했네요.”
“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우… 우와.”
포탈은 푸른빛을 내뿜으며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꽤 큰 크기였다. 우웅거리면서 미세한 진동을 하고 있는 포탈을 보니 약간의 공포심이 느껴졌다. 포탈 앞은 계속해서 미세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형. 들어가기 무서워요.”
“괜찮아. 들어가자.”
내 소매를 붙잡고 말하는 서하를 한 번 쓰다듬고 손을 맞잡아주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태경이 저도 무섭다며 남은 한 손을 가져다 잡았다. 깍지까지 껴오는 통에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 역시 속으로는 무서웠나보다 싶어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어서 들어가요! 빨리요!”
“뭐,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죠? 빨리 들어가요!”
“맞아! 뭐 잘못된 거 아니야?!”
뒤에서 재촉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들어가지 않자 초조한지 사람들이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내가 태경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들어가도 시간이 줄어들지는 않겠죠? 다 들어와야 하는데.”
[01:55:46]
“괜찮을 겁니다.”
그는 잠시 시간을 확인하는지 시선을 잠깐 돌렸다가 대답해왔다.
“이, 이제 들어가요.”
그렇게 우리는 2차 시험 장소로 향하는 포탈에 발을 내디뎠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지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눈을 감고 서 있다가 눈을 떴다.
“아….”
“여기는 또 어디죠?”
“형….”
2. 2차 생존 시험
[2차 시험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2차 시험 장소를 발견한 이들에게 잠시 후 특별 보상이 주어집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던 우리 세 명은 암담함을 느꼈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2차 시험 장소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의 황무지 같은 곳이었다. 잠시 후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특별 보상 ‘아공간 주머니’가 지급됩니다.]
[깜짝 보상으로 아공간 주머니 안에 1리터 생수 하나와 빵 3개가 지급됩니다.]
[퀘스트- 2차 시험 장소에서 살아남으세요.]
“하, 산 넘어 산이네요.”
“괜찮습니다. 이번에도 살아남을 거예요.”
한참을 그곳에 가만히 서서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1차 시험처럼 여기에서도 각자 다른 곳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우리 셋은 손을 맞잡고 들어왔기에 같은 장소에 떨어진 것 같았다. 상진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버텨왔는데 점점 상진이가 내 눈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힘이 탁 풀리고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상진이가 보고 싶었다. 그때 모래바람으로 시야가 가려지면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스스슥-
우리는 모두 긴장한 상태로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고 등을 맞댄 상태로 사방을 경계했다. 서하가 물어왔다.
“몬스터일까요?”
“글쎄.”
“몬스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뭐예요?”
태경의 말을 들은 서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서 나도 밑을 바라보니 큰일도 이런 큰일이 없었다.
“우… 우리 죽어요?”
서하의 그 말이 끝이었다.
“아악!”
“흡!”
“으아아악!”
우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모래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2차 시험 장소에서 생존하라는 말이 이런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살아남자마자 죽을 위기에 처한 이 현실이 끔찍하고도 황당했는데, 어쩐지 마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모래 때문에 입을 다물고 눈을 꾹 감을 수밖에 없었는데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서하가 잔뜩 입을 벌리고 바둥거리는 모습이었다. 입을 벌린 서하가 모래에 숨이 막혀 질식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남의 걱정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거칠거칠하고 버석한 모래가 얼굴을 쓸고 지나가자 피부에 생채기가 날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포탈을 통과하자마자 모래 밑으로 완전히 빨려들었다.
“하앗!”
희미한 의식 속에서 사람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기절을 한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니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도 기억났다.
“아, 밑으로 떨어졌었지.”
입을 벌려 혼잣말을 하자 얼굴에 붙어 있던 모래가 스르륵 떨어지면서 입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켁켁거리면서 모래를 뱉어내기 위해 애쓰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누워있던 곳은 벽에 이상한 그림이 잔뜩 그려진 복도 같은 곳이었다. 옆을 보니 모래가 잔뜩 쌓여있었다. 이 위에 구멍이 뚫려서 미끄러져 떨어진 듯싶었다. 생존하라는 말이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아 나가는 것이거나 아니면 목숨을 위협하는 몬스터에게서 끝까지 살아남으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잠시 2차 시험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화들짝 놀라 후다닥 일어나 모래를 헤집기 시작했다. 서하와 태경이 옆에 없는 것을 보니 서로 다른 곳으로 떨어진 게 아니라면 모래 속에 깔려 있을 수도 있었다. 이미 아까 들었던 기합 소리는 머리에서 떠난 지 오래여서, 그게 누구였는지 확인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안 돼. 안 돼.”
모래 밑으로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타이머가 있는 것이 그렇게도 끔찍했는데 지금은 타이머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제발 살아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두 레벨업으로 능력치를 올렸으니 살아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모래를 헤집다 보니 사람의 팔로 추정되는 부분이 얼핏 보였다. 그렇게 발견한 팔을 잡아당기다가 잘 나오지 않자 나는 다시 손으로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거칠거칠한 모래가 손바닥과 손끝에 생채기를 내며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고 손톱 깊숙하게 모래가 박혀서 아릿아릿했다. 아픈 것보다도 파내면 위에서 모래가 떨어지고 파내면 다시 모래가 떨어지는 게 더 문제였다.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정말 처절하게 움직여 그 사람을 꺼냈다. 내가 발견한 사람은 바로 서하였다. 나는 서둘러 코에 손을 대 보고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기절하고 깨어나기까지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태경을 찾을 차례였다.
미친 듯이 모래를 헤집어대면서 태경을 찾았지만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두려움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안개처럼 내 주위를 감쌌다. 고작 하루 동안 같이 있었을 뿐이지만 위기를 함께 했던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상진이도 어떻게 되었을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모래를 헤집다 보니 저 구석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삐걱이는 몸과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그곳으로 다가가서 모래를 치웠다. 역시나 예상대로 태경이 맞았다. 숨을 쉬고 있는지부터 확인한 나는 그의 어깨까지 모래를 걷어내고는 질질 끌어당겨서 결국에는 모래에서 구출해냈다. 내가 조금만 늦게 깨어났어도 이들은 모래 속에서 숨이 막혀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둘을 무사히 구해내고 기진맥진해서 벌러덩 뒤로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동을 한 것처럼 모든 힘을 다 써버린 기분이었다.
“하아앗!”
다시금 잠결에 들었던 기합 소리가 들렸다. 꽉 막힌 실내에 기합 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크고 확실한 소리였다.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이 가까이에 있었다. 게다가 둔탁한 소리가 지속적으로 울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잠시 쓰러져 있는 서하와 태경을 바라보고는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혹시 상진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렇게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는 이들을 두고서 확인하러 갈 수는 없었다. 이 안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이 저 기합 소리와 함께 확실해졌으니까. 하지만 심장이 펄떡이면서 상진일지도 모르는데 확인도 해보지 않을 거냐고 나를 다그쳐왔다. 몬스터와 싸운 것도 아니고 뛴 것도 아닌데 어느새 목까지 숨이 차올라 헐떡였다. 손과 발이 차갑게 식으면서 땀이 배어 나왔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자꾸만 몸이 앞으로 수그러졌다.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경과 서하를 구석의 벽에 기대어 앉혀놓고는 걸음을 옮기려다가, 모래에 박혀있는 검을 뽑아서 그들의 앞에 놓아두고 나서야 빈손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래에 박혀있던 무기가 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잠깐만, 확인만 하고 올게. 정말 미안해요.”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만이었을까. 기합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몬스터가 여러 마리였는지 가까이 다가갈수록 몬스터의 시체가 하나씩 흩어져 놓여있었다. 나는 두고 온 태경과 서하를 떠올리다가 애써 올라오는 불안감을 내리눌렀다. 그 순간이었다.
“아악!”
커다란 비명과 함께 사사삭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러나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갈색 전갈처럼 보이는 것이 나타나는 바람에 기겁한 나는 서둘러 옆으로 몸을 피했다. 갈색 전갈이 집게로 사람의 몸뚱이를 집어 들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상진아!”
설마설마하면서도 정말로 상진이를 만날 줄은 몰랐던 내가 놀라 소리쳤다. 상진이도 놀랐는지 큰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처럼 꼬질꼬질하고 모래가 잔뜩 묻어있었지만 잘난 얼굴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상진이가 분명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상진이 놀란 것도 잠시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전갈이 상진을 벽으로 던졌다. 상진이는 그 상태로 힘겹게 입을 열어 몇 마디를 하더니 쓰러졌다.
“이석아. 오지 마. 도…망… 새끼가… 있…….”
전갈이 정신을 잃은 상진을 다시 들어 올려 내가 지나왔던 복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전갈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다리가 자꾸만 풀렸지만 나는 전갈을 놓치지 않고 쉼 없이 따라 달려갔다.
그리고 곧 문제가 생겼다. 전갈이 내가 벽에 기대어놓았던 서하와 태경을 발견한 것이었다. 전갈은 집게로 들고 있던 상진을 저 멀리 반대쪽으로 던지더니 태경과 서하에게로 향했다. 나는 쓰러진 상진 쪽으로 떨리는 시선을 두었다가 고개를 돌리고 태경과 서하 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 앞에 놓아두었던 검을 들어 아슬아슬하게 집게발을 막을 수 있었다.
전갈의 공격은 생각보다 느렸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나는 그마저도 힘에 겨운 상태였다. 뒤에 있는 태경과 서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욱더 힘에 부쳤다. 그래서 놈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긁히고 찢겨 금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강하게 달려드는 집게발을 연신 튕겨내느라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몇 번 공방을 주고받던 나는 전갈의 약점을 발견했다. 특성의 힘이란 게 참 놀라웠다. 약점은 집게발이 몸통과 이어지는 부근에 있었다. 딱딱한 갑옷 같은 껍질 사이로 속살이 비치는 곳이었다. 나는 타이밍을 보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빠르게 검을 그었다.
“키에엑!”
전갈이 몸부림을 치더니 상진을 던져놓은 곳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으음…. 이석 씨?”
막 깨어났는지 태경이 몽롱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내가 온몸에 피칠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지만 나는 곧장 상진이 쓰러져있는 곳으로 달렸다. 그리고 막 전갈이 상진을 집게발로 집어 들려는 순간 다시 한번 약점에 칼을 던져 넣었다. 정말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 순간만큼은 내 몸놀림이 바람 같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상진아! 안 돼!”
전갈 몬스터가 다시금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전갈의 발이 닿을 곳에 상진이 무방비하게 쓰러져있는 것을 본 나는 그대로 상진에게 달려가 그 위를 막았다. 그저 상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나지 않았다.
“커헉.”
“이석 씨!”
그런 내 뒤로 태경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전갈 몬스터의 날카로운 발이 내 등에 박혔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려고 했지만, 비명과 함께 입 밖으로 피가 터져 나왔다. 내 아래에 깔려 있는 상진이의 평온한 표정으로 봐서 상진이의 몸까지 뚫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상진…아.”
나는 전갈 다리가 등에 박힌 채로 상진이를 불렀다. 아무 대답 없는 상진이가 걱정되어 코에 귀를 대어 보니 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언제나 수다스럽던 상진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조용했다. 다시 한번 그를 흔들며 불렀다.
“상진아.”
그러나 몬스터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등에서 전갈의 다리가 빠져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전갈의 집게발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상진을 범위 밖으로 밀어냈다. 전갈의 집게에 몸이 잡혔다. 상진이가 옆쪽으로 데구르르 구르다 형편없이 널브러졌다.
“크흡!”
정말 순식간이었다. 전갈의 집게가 닫히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 나를 뒤덮었다. 반사적으로 앓는 소리가 내뱉어지며 입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는데 문득 침이 아니라 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갈은 상진이 대신에 나를 부여잡고는 빠르게 그곳에서 벗어났다. 굳이 상진이가 아니어도 괜찮은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내가 대신 잡혀갈 수 있었으니까.
집게발에 붙들려가면서도 나는 상진이를 쳐다봤다. 상진이의 옆으로 다급한 표정의 태경이 검을 들고 달려 나오고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 상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 대신에 목에서 무언가가 울컥 흘러나왔다. 태경은 내 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는지 경악한 표정으로 비명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나는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이석 씨!”
그래도 상진이를 구했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태경이 내 표정을 보고 나는 괜찮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다.
찰캉!
태경의 손에서 힘없이 검이 떨어져 내렸다. 아무래도 태경은 내 미소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석아! 강이석!”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여서 그런지 환청이 들려왔다. 지금, 이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야, 강이석! 눈 안 떠?”
“허억!”
“뭘 그렇게 놀라면서 일어나? 악몽 꿨어?”
놀리듯이 말하기는 했지만 내 상태가 걱정되었는지 상진이 조심스럽게 이마의 체온을 확인하며 물었다. 눈에도 걱정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열 있나? 너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니야? 병원에 가야 하나….”
“상진아….”
나를 걱정하는 상진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내 모습에 급속도로 당황하기 시작하던 상진은 이내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물었다.
“왜 울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나는 말 없이 그대로 상진의 허리춤에 달려들어서 껴안았다. 생전 이런 적 없던 내가 안겨 오자 놀라 꿈틀거리는 근육과 함께 주춤하는 상진이의 몸이 느껴졌다. 상진이는 언제나처럼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손을 올려 다정하게 마주 껴안으면서 등도 토닥토닥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상진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울지 마. 왜 우는지 도통 모르겠네. 누가 괴롭혔어?”
“응.”
“뭐? 누가! 어떤 새끼가 널 괴롭혀. 아주 죽을려고!”
“네가.”
“…내가? 아니, 내가 뭘 했길래.”
흥분해서 혼자 한참을 욕하며 주먹을 들어 보이던 상진이 이어진 내 대답에 잠시 굳었다가 풀어졌다. 그리고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울상을 지었다. 한참을 울면서 상진이의 배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떼어내자 옅은 회색 옷이 온통 짙은 회색으로 변해있었다. 그것을 보고 상진이 개구지게 웃으면서 말했다.
“울다가 호수 생기는 줄 알았네. 눈물이 아주 강처럼 흐르더라. 가슴까지 다 젖었네. 너 젖어서 달라붙은 티셔츠 위로 내 단단한 가슴 엿보려고 그런 거지? 맞지?”
“이상진.”
놀리는 말에 평소처럼 소리 지르며 등짝을 때릴까 봐 습관처럼 내 손을 피해 움찔하던 상진이 멈춰 섰다.
“아, 나는 강이석이 그렇게 진지하게 내 이름 부를 때가 제일 무섭던데.”
“이리 와. 앉아.”
“네네. 분부대로 합죠, 마님.”
그는 내가 앉아있는 벤치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한 뼘 정도 떨어져 앉은 것을 옆으로 조금 움직여서 한 치의 틈도 없게 만들었다.
상진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이석아?”
“아무 데도 가면 안 돼. 네가 그랬잖아. 나 혼자 아니라고.”
“응. 안 가. 너 혼자 아니야.”
“진짜지? 나 죽기 전에는 죽지도 마.”
“와, 강이석 너… 그래. 알겠어.”
상진이 어이없다는 듯 말끝을 흐리다가 결국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절대 아무 데도 가지 마.”
당연한 말을 한다며 상진이 나를 타박하다가 피식 웃는지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오구구, 악몽 꾸고서 갑자기 그게 불안했어? 그래서 운 거야? 완전히 아가네. 우리 아가.”
일부러 더 오버스럽게 놀리며 내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상진을 잠깐 바라보던 나는 상진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남은 어깨를 양손으로 둘러 껴안았다.
“다 울었어? 꿈은 그냥 꿈이야. 나 어디 안 가. 다른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반팔을 입고 있어서인지 손바닥에 옷의 감촉과 함께 늘 따듯한 체온을 가진 살결도 만져졌다.
나는 슬쩍 손을 내려서 그 살결을 만지작댔다. 알 수 없는 그 세계에서 이게 그렇게도 그리웠다.
“아무리 내가 좋아도 여기는 공공장소입니다. 마님. 이러시면 곤란해요. 이거 성희롱입니다?”
“씁! 가만히 있어.”
“너 지금 우리 수업에 지각했다는 자각도 없지?”
“무슨 소리야?”
“2시 양 교수님 수업이잖아. 정각 딱 맞춰서 출석 부르고 5분 만에 피피티 5장을 나가는 공포의 스피더.”
“아…?”
“빨리 일어나! 나는 하도 서럽게 울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했더니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상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손목을 잡고 강하게 당겼다. 벤치 바로 앞에 있는 학생회관이 새삼 생경했다. 그 주변의 푸르른 나무들도, 그 옆으로 펼쳐진 시멘트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세상에 떨어지기 전까지 익숙했던 주변 풍경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달리는 나를 상진이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서둘러서 뛰어간 우리는 꽉 찬 대강의실을 살피다가 어쩔 수 없이 교수님의 눈총을 받으며 앞자리로 향했다. 지각자들의 슬픈 운명이었다. 게다가 이미 수업은 10분이 넘게 흘러서 진도는 피피티 10장이 넘어가 있었다. 다행인 점은 피피티 수가 엄청나게 많은 대신 겹치는 내용이 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즐겁게 상진과 같이 수업을 들었다. 들을 때마다 매번 불평을 하던 교수님이었지만 지금은 사랑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강의실의 풍경도 익숙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상진이 뽑아온 프린트물에 글씨를 끄적였다.
‘진짜 지루해.’
‘왜 재밌는데.’
‘와, 강이석 오늘 진짜 이상해.’
‘왜, 뭐. 왜.’
‘아냐. 너 예쁘다고. 때리지 마세요, 마님. 근데 진짜로 재밌다고?’
‘응.’
상진은 장난스럽게 울고 있는 이모티콘까지 그려 넣었다. 평소라면 짜증을 냈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웃음만 비식 새어 나올 뿐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상진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에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상진은 오늘 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슬슬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와 상진은 평소처럼 겹치는 수업을 같이 듣고 맛없는 학식을 피해서 정문으로 나가 음식점에서 밥을 먹었다.
“맛있어? 오늘따라 진짜 잘 먹네.”
“응. 맛있네. 네 것도 먹을래. 내놔.”
상진은 웬일로 자신의 것까지 뺏어 먹냐면서 돈가스 하나를 집어 직접 입에 넣어주었다. 평소라면 소름 돋게 하지 말라면서 팔뚝을 때려주었겠지만, 지금은 마냥 좋아서 넙죽 잘 받아먹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하면 큰일 난다던데…. 먹여주는 거 싫어하더니 먹여줘도 넙죽 받아먹고… 생전 안 울던 놈이 안겨서 울기까지….”
상진이 조금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지만 무시했다. 어깨에 올라와 있는 상진이의 팔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오늘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갈 거지?”
“응. 사실 오늘은 집에 가려고 했는데 불안해서 안 될 것 같다.”
“그래.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 침대에서 같이 자도 돼.”
“매일 이 진상! 하면서 쫓아내더니… 진짜 이상하네. 그럼 딱 달라붙어서 껴안고 잔다?”
그때 갑자기 상진이 거친 손으로 나를 횡단보도 밖으로 밀쳐내고 커다란 트럭에 대신 치였다. 끼이익 하는 마찰 소리가 시끄럽게 귓가로 넘어왔다. 상진의 주위로 빨간 피가 흘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불이 난 건물 위에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석아. 오지 마. 도…망….”
그의 말에 나는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지면서 몸이 어딘가로 빨려들었다.
“흐읍. 콜록! 콜록!”
더운 공기가 입안으로 들어와 나는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몸은 계속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곧 바닥으로 철푸덕 소리가 날만큼 세게 던져졌다. 바닥에 부딪히면서 느껴진 둔탁한 고통에 나는 신음을 흘렸다.
스스슥-
어디선가 들어본 소음이 귀를 스쳐 뇌까지 전달되었다.
“하… 꿈이었어?”
꿈에서 벗어나 현실을 마주한 나는 몸을 비척비척 일으켜 앉으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절로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미친….”
스스슥- 스스슥-
커다란 전갈 한 마리와 수십 마리의 작은 전갈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작다고 해도 내 허리 높이보다 큰 놈들이었다. 위기감이 들었다. 상진이를 찾자마자 또 다른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상진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마냥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주변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 없는지 살피던 나는 전갈 몬스터의 약점에 박아놓았던 검을 발견했다. 저걸 뽑아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전갈의 날카로운 다리에 찔려 구멍이 나 있던 상처는 반쯤 아물어 피가 멈춰 있었고 아득하기만 하고 아무 힘도 없던 아까와는 다르게 힘이 어느 정도 돌아온 상태였다. 레벨이 오를수록 몸이 회복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회복이 빠른 걸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었으나 이곳에 떨어진 이상 내 몸에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한 나는 상처가 난 등을 살짝 움직여보고는 빠르게 내달렸다. 그래도 레벨이 조금 올라서인지 능력치를 올려서인지 전에 화살이 박혔을 때보다는 조금 나은 상황인 것 같기도 했다. 이미 다 잡은 먹이라고 생각했는지 커다란 전갈은 자리에 가만히 있었고 작은 전갈들만 내게로 돌진해왔다. 사사삭 하는 징그러운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나는 전갈에게도 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심지어 입속에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아무래도 어미 전갈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기 위해서 상진을 사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의문스러웠던 상진의 마지막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상진이 새끼를 보았다는 건 그쪽에도 새끼 전갈들이 여럿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쪽에는 태경이 일어나서 검까지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일단은 여기서 살아남아서 다시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집게를 뻗으며 이빨을 드러내는 새끼 전갈들을 피해 뒤로 굴러서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것들의 집게를 피한 나는 빠르게 달려나가 바닥에 박힌 집게 하나를 타고 올라가 아까 보았던 약점 부위를 공격했다. 새끼들은 커다란 전갈보다 방어력도 약하고 껍질도 연했다. 주먹으로 약점을 공격한 것뿐인데도 집게발이 달랑거리면서 반쯤 떨어져 나갔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을 기다리는 꼴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키엑!”
전갈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물러서면서 덜렁이는 다리를 휘둘러 와서 급하게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범위에서 벗어났다. 다친 전갈이 뒤로 빠지고 다른 새끼 전갈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 다가왔다. 아무래도 커다란 전갈에게 박혀있는 검을 회수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대신 나는 새끼 전갈의 집게를 잘라서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기로 했다. 아쉽긴 하지만 검 대용으로는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뭐라도 쥐고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새끼 전갈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기회를 살피던 나는 다시금 땅에 박힌 집게를 발견하고 그대로 달려들어 양손을 약점에 박아 넣고 잡아당겼다.
콰직-
진득한 피가 쏟아져 내렸다. 힘에 부치기는 했어도 전갈의 다리가 뽑혀 나왔고 나는 집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키에에엑!”
다리를 하나 잃은 새끼 전갈이 뒤로 물러나고 다른 새끼 전갈들이 또다시 자리를 채웠다. 그 와중에도 나는 놀란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퍼렇게 전갈의 피가 묻은 곳만 상처가 눈에 띄게 회복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등에 난 상처도 상진을 지키기 위해 그 위에 엎드렸을 때 전갈 피가 상처 위로 떨어져서 회복된 건지도 모른다. 게임에서도 낮은 레벨일 때에는 도움을 주는 무언가가 존재했었다. 이것도 그런 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란 것도 잠시 계속해서 다가오는 전갈을 손에 넣은 집게로 쳐내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전갈들의 다리를 뽑아댔다. 집게가 눈앞으로 날아오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안쪽으로 파고들어 약점을 공격했다. 장기전이 될수록, 또 몸을 계속 움직일수록 숨이 차오르고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이대로 쓰러지면 전갈들의 밥이 될 것이 뻔했다. 그중에 두 다리를 모두 뽑힌 전갈들은 파란색 체액을 뱉으면서 천천히 쓰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새끼 전갈이 열댓 마리에서 어느덧 6마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잠시 대치상태를 이루면서 서로 경계하고 있는데 커다란 전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위험을 감지하고는 눈앞에 있던 새끼 전갈을 공격하기 위해 살피던 것을 멈추고 한 바퀴 굴러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안도인지 좌절인지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앞에 있던 새끼 전갈이 커다란 전갈의 꼬리에 잘려 두 동강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 꼬리가 다시 내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나를 살려서 데려오기 위해 지금껏 꼬리를 사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는 꼬리의 검고 오돌토돌한 표면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옆으로 허리를 꺾고 뒤로 구르며 간신히 피했으나,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다. 노력했지만 뾰족한 꼬리의 날카로운 부분이 볼을 스쳐 상처를 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녀석의 집게발이 날아와 나를 강타했다.
퍼억-
“커헉!”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쉬지 못했다. 그만큼 강한 공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전갈 독에 감염되었습니다.]
[1초마다 일정 체력이 감소합니다.]
[기력회복이 느려집니다.]
[독을 해독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전갈의 피로 인해 독이 미약하게 해독되었습니다.]
[서둘러 해독약을 찾아 복용하세요.]
커다란 전갈의 빠른 공격이 새끼 전갈을 두 동강 내는 바람에 입안까지 튄 피를 뱉어내지 못하고 삼킨 것이 내게는 천운이었다. 나는 고통으로 얼얼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뒤로 조금씩 걸음을 옮기며 커다란 전갈과의 대치상태를 유지했다. 갈비뼈가 뻐근하고 움직임이 살짝 불편했다. 새끼 전갈들은 커다란 전갈의 등장과 함께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아직 독이 완벽하게 해독된 것이 아니어서인지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을 끌수록 죽음에 가까워질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꼬리가 날아왔다. 전갈의 꼬리는 집게발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고 눈 바로 앞에 전갈의 꼬리가 박혔다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특성의 힘이 없었다면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꼬리에 두 동강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강하고 빠르게 공격해오는 꼬리를 피해서 벌써 몇 번이나 엉망으로 바닥을 굴렀다. 갈비뼈가 계속 둔탁하게 아팠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처에 들어간 모래 때문에 쓰라렸다. 피가 묻은 부위에는 버석버석한 모래가 달라붙어 찝찝했다. 체력은 계속해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꼬리로 공격해대는 통에 칼이 박혀 있는 곳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전갈의 꼬리를 피하면서 나는 다른 약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저기다!’
마침내 나는 또 다른 약점을 발견했다. 저곳을 공격하면 몬스터를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전갈이 강하게 내리꽂다가 바닥에 박힌 꼬리 때문에 주춤했다. 그 순간 강하게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꼬리 위쪽에 올라타서 달렸다. 1초가 1분 같았다. 주변이 온통 느리게 보였다. 녀석의 약점까지 불과 한 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조그마한 구멍 같은 곳에 있는 힘껏 손을 박아 넣었다. 얼마나 깊숙이 넣었는지 어깨까지 전부 그곳에 박혀, 고통에 몸부림치는 전갈의 몸짓에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반대편 주먹까지 강하게 안으로 박아 넣었다. 안에서 돌 같은 것이 만져졌다. 나는 죽기살기로 그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키엑! 키엑! 키에에에엑!”
어마어마한 소리를 지르던 녀석의 몸부림이 점점 잦아들면서 소리도 작아졌다. 이내 녀석이 완벽하게 쓰러졌다.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마구잡이로 뱉어지며 단내가 났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6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6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전갈의 변이 몸 안으로 흡수되어 독이 해독되었습니다.]
[체력이 회복됩니다.]
체력이 회복되는지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했으나 나는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게다가 전투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새끼 전갈이 제 부모의 복수를 위해 집게발을 날려 왔다. 내 팔은 아직 전갈의 몸에 박혀있었다. 헛구역질을 하며 급하게 손을 빼내자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워낙 급하게 떨어진 터라 제대로 된 낙법도 사용하지 못해서 충격이 컸다.
전갈에게 꽂아 넣었던 칼이 마침 눈앞에 보여서 나는 그것을 뽑아 들었다. 욱신거리는 몸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나마 지금 살아있는 몬스터가 새끼라 다행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으나 결국 남아있는 새끼 전갈을 모두 죽일 수 있었다.
나는 회복 효과가 있는 전갈 피를 손에 묻혀 상처 여기저기에 발라댔다. 그 일련의 과정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벽에 등을 기대고 설 수 있었다. 외상은 거의 치료된 것처럼 보여도 몸 안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멀쩡하지는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이제는 다시 상진이를 만나기만 하면 끝이었다.
[전갈의 내단을 획득했습니다.]
[내단을 복용하면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아… 하아….”
“와, 대단한데?”
갑작스럽게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급하게 벽에 기댄 등을 일으키며 주변을 경계했다. 저쪽 기둥에 가려진 곳에서 사람 하나가 손뼉을 치면서 나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심지어 능글맞게 웃고 있었는데 샛노란 머리를 하고 있어 몹시 눈에 띄었다. 귀에는 화려한 피어싱이 여러 개 달려 있었고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와 말투는 양아치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흥미로운 빛이 가득했다.
나는 그를 경계하면서 칼을 들었다. 위험에 처한 나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고 뒤에 숨어 구경하던 사람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고 얼굴도 본 기억이 없으니, 아마 피투성이로 포탈을 통과했다는 세 명의 발견자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서운하다. 왜 그렇게 경계하세요? 대단하다고 칭찬까지 해드렸는데.”
그의 표정은 정말로 서운한 듯이 잔뜩 울상이었다. 사람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던 그 나쁜 놈이 떠올랐다. 어쩐지 저 사람과 광기를 뿜어내던 그놈이 겹쳐 보였다.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오르자 절로 인상이 써졌다.
“하아… 누굽니까.”
나는 최대한 숨을 고르며 멀쩡한 것처럼 굴기 위해 노력했다. 지쳤다는 사실을 들키는 순간 그대로 싸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남은 정신력을 모두 쏟아부어야 했다. 다행히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이서호. 삐약삐약 귀여운 대학교 새내기입니다. 선배님.”
“뭐?”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몇 번 인사를 나눠본 후배들을 떠올려봤지만 저런 얼굴은 기억에 없었다. 내 반응에 녀석이 고개까지 뒤로 젖히며 웃었다.
“하하하! 그 바보 같은 표정 뭐예요? 아, 진짜 웃겨!”
갑작스럽게 큰 소리로 웃는 녀석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가 폈다. 녀석이 그런 나를 보고 다시금 소리 내며 웃었다.
“너 뭐야. 나 알아? 같은 과 후배야?”
“아뇨. 모르는데요. 그냥 곧 입학할 새내기라는 거 티 내고 싶었어요. 진짜 개고생해서 합격했는데 이런 개 같은 곳에 떨어져서 열 받았거든요.”
나는 녀석의 대답에 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녀석의 심리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으나 위험한 기운이 계속 맴돌고 있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선배. 아, 선배 맞죠? 나보다는 나이 많을 것 같은데….”
항상 어려 보인다는 말을 들어왔던 나는 그것이 콤플렉스였으나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얘기도 썩 듣기 좋지는 않았다. 나는 함부로 외모나 나이 얘기를 꺼내서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왜 얘기해줘야 하는데?”
“음… 싫으면 말고. 그런데 선배. 레벨이 몇이에요? 너무 잘 싸워서 저 소름 돋았잖아요.”
녀석은 굳이 선배라는 말을 꼬박꼬박 붙여서 물어왔다. 선배라는 단어에 한이 서린 듯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왜 나타난 거야.”
녀석이 씨익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괜히 뒷골이 오싹하고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아, 강해 보여서 죽이면 도움이 될까 했는데요. 선배.”
녀석의 말에 나는 검을 꽉 움켜쥐고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게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녀석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손까지 같이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이미 내 신경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 그건 아까 생각했던 거고 지금은 아니에요. 공격할 거였으면 전갈 똥구멍에 팔 박아 넣을 때나 새끼 전갈이 선배 공격할 때 나가서 쳤겠죠.”
“그럼 뭐야.”
“화났어요? 아, 진짜 화내는 것도 예쁘다.”
“하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죽일까 고민했다고 해서 화내는 거예요? 아! 제가 안 도와주고 구경만 해서 화났구나. 그런데 어떡해요. 선배가 피 흘리면서 구르는 게 너무 예뻐서 계속 보고 싶었는걸. 그래도 죽기 직전에는 구해주려고 했는데 이겼잖아요.”
“지금 무슨 개소리야.”
“하하하! 어떡해! 선배 화내는 거 너무 귀여워요.”
“누가 네 선배야. 왜 나타난 거냐고!”
“그럼? 이름 알려줘요. 형이라고 부를게요.”
말이라고는 전혀 통하지 않는 녀석 때문에 나는 골치가 아팠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죽겠는데 뭘 하자는 건지 도무지 나를 놔주지 않았다.
“나 지금 좀 열 받으려고 해요. 난 이름하고 나이까지 다 밝혔는데 왜 선배는 이름도 말 안 해줘요? 짜증 나.”
“그럼 날 죽이려고 했다는 놈에게 그런 걸 친절히 밝힐까.”
“아, 역시 그 말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거 때문에 화난 거였구나? 잘못했어요, 응? 근데 안 죽였잖아. 그러니까 나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죽이려고 뒤에 숨어있다가 몬스터 다 죽이니까 나타난 이유가 뭐냐고.”
“후우… 화 안 풀어줄 거구나? 알겠어. 내가 양보하지 뭐.”
“대답 안 해?”
“으음… 왜 몬스터 다 죽고 나타나서 말 걸었을 거 같아요?”
“수수께끼 하자는 거야?”
“와! 수수께끼! 좋아요! 그거 할까요? 나랑 게임하고 싶었어요?”
“미친 새끼.”
대화를 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욕설을 내뱉었으나 녀석은 더욱 밝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와. 욕하는 거 듣기 좋네요. 이런 적 처음인데!”
“너 지금은 나한테 용건 없는 거지? 그럼 난 이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디 가요? 나도 따라갈래.”
“오지 마.”
녀석은 내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쪽으로 발을 옮겼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검을 들어 올리면서 주의를 주었다.
“오지 말라고 했어.”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요?”
“오지 말라고 하면 오지 마.”
“싫은데?”
녀석이 다시 한 걸음 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로 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판사판으로 미친 듯이 뛰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등을 돌리는데 바로 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등 보이지 마요.”
“허억!”
나는 놀라서 옆으로 칼을 휘둘렀으나 녀석이 가뿐하게 거리를 벌리며 범위에서 빠져나갔다. 놀란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는데 녀석이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선배, 나 약해 보여요? 나도 그렇지만 여기선 방심하면 바로 죽어요. 알잖아요. 선배도.”
여기선 또라이들이 가장 먼저 스킬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 같았다.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신호도 없이 이렇게 바로 옆으로 이동할 수 있는 스킬이라니. 나는 달려서 도망가기로 한 것을 취소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찝찝했다. 정말 녀석이 나를 죽일 거였으면 벌써 죽이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나를 따라 녀석도 나를 마주 보고 똑같이 주저앉아서 마냥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는 그거 뭐예요?”
녀석이 전갈한테서 꺼낸 내단을 쥔 손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검을 쥘 때도 그거 안 놓길래 궁금해서요. 안 알려주면 뺏어서 볼지도 몰라요.”
녀석의 말에 나는 냉큼 입에 내단을 집어넣고 삼켰다.
[전갈의 내단을 복용했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할지는 몰랐던 건지 놀란 눈을 하고는 경악성을 뱉었다. 그 반응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똥 먹었어!”
“뭐?”
“그거 전갈 똥 아니에요? 아까 전갈 똥구멍에 손 넣어서 꺼낸 거잖아요.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나를 보면서 다시 생글생글 웃는 그 모습에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헛구역질을 애써 참으면서 녀석의 눈을 외면했다.
“그거 똥이 아니었구나. 똥이었으면 내 말에 그렇게 서둘러서 입에 넣지도 않았겠지.”
“알아서 뭐할 건데.”
“여기 그 커다란 전갈 한 마리 더 있거든요. 나도 잡아서 빼먹어야지. 아, 근데 똥꼬에 손 넣기는 싫으니까 껍질 부숴서 꺼내먹어야겠다. 나 진짜 뒤에서 보면서 놀랐잖아요. 거기에 손 집어넣어서 몬스터를 잡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녀석이 웃으며 하는 말에 머리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곳에 손을 넣어서 내단을 꺼내 죽인 건 맞으니까. 녀석이 벌떡 일어나 내게서 멀어졌다.
“어디 가?”
“선배가 먹은 그거 나도 먹고 싶어서 전갈 죽이러 가는데? 왜? 가지 말까요?”
가랄 때는 언제고 가니까 아쉽냐면서 다시 내 쪽으로 오려는 녀석을 제지했다. 내 쪽으로 오던 것은 장난이었는지 녀석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서 사라졌다.
“나중에 또 봐요, 선배! 죽지 말고!”
한바탕 폭풍이 불어 닥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머리를 흔들고 일어나 성진이와 태경, 서하를 찾기 위해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아공간 주머니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안에서 생수와 빵을 꺼내 먹었다. 빈속이 꾸르륵거리며 먹거리를 반겼다. 쓰러진 채로 집게에 들려온 덕분에 나는 상진을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뒤늦게 그곳에 가만히 있었으면 그들이 벌써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침울해졌다. 그러다 아직 능력치도 확인하지 않고 포인트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상태창을 열어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lv. 6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15퍼센트]
[체력: 19(+5)]
[근력: 19(+3)]
[마력: 19]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특성: 민첩- 민첩이 1.9배 증가합니다.]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여러 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성: 독 내성- 1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9(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저번에 포인트를 사용하지 못해서 남은 것이 4개였으니 원래대로라면 한 개가 더 늘어있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포인트가 5개나 늘어있었다. 아마도 몬스터를 잡다 보면 무작위로 포인트를 하나씩 얻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내단의 효과인지 체력과 근력은 4씩 오르고 마력은 무려 7이나 오른 상태였다. 특성도 하나 더 생성되어 있었다. 이 상태라면 아까 그 전갈을 또다시 만나도 싸워볼 만했다. 독 내성까지 생겼으니 더욱 이길 자신이 있었다. 어쩐지 내단을 먹은 후부터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더라니, 능력치가 많이 올라서 그런 거였다. 나는 간만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까지 간단히 채웠으니 이제 다시 상진을 찾으러 이동할 때였다. 나는 서둘러서 포인트를 체력에 4개 근력에 3개 마력에 2개를 투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력이 일정 수치를 넘어서 두 번째 영웅 특성 스킬이 개방됩니다.]
[첫 번째 영웅 특성 스킬이 조금 더 강화됩니다.]
첫 번째 스킬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두 번째 스킬이 개방되었다. 얼떨떨한 상태로 일어난 나는 칼을 몇 번 휘두르면서 스킬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곧 포기하고 다시 상진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능력치가 아니라는 게 확실히 밝혀졌으니 앞으로는 마력에도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서호라는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스킬을 깨달은 건지 궁금증이 일었다.
3. 드디어 만난 상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살아남으라는 퀘스트만 던져준 목소리를 원망하고 또 원망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식량과 물도 다 떨어져서 회복 효과가 있는 전갈의 피를 마시면서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다였다. 전갈의 피도 계속 먹으니 슬슬 물려왔다. 제대로 된 밥을 입에 넣고 싶었다. 상진이네 아버님이 해주시던 김치찌개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계속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김치찌개가 떠올랐다.
상진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 도와주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레벨을 두 개나 올릴 수 있었다. 마력에 능력치를 투자할수록 몸에 흐르는 마력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위험한 순간 기적적으로 마력을 검에 실을 수 있었고, 그게 내가 갖고 있는 스킬이라는 걸 깨달았다. 스킬의 이름은 마력 방출이었다. 칼에 마력을 실어서 공격하거나 그 마력을 날리는 기술이었다. 나머지 스킬 하나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나는 상당히 강해진 상태였고 자신감도 많이 늘어나 있었다. 이제는 상진을 다시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상진의 인상착의를 묻기도 했지만 보지 못했다는 대답이 대다수였다. 상진과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이미 한참이나 전에 본 것이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상진과 태경, 서하까지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외모가 잘난 것에 대해서 나는 처음으로 감사함을 가졌다. 그 덕에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했고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히 지나던 길에 전갈이 땅에서 솟아나 사람들을 덮치고 있기에 도와준 적이 있었다.
“찾는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근처에 사람이고 몬스터고 마구잡이로 죽이는 놈들이 있어요. 찾는 사람이 그 사람들에게 걸렸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같이 다니지 않겠냐고 제안해오는 그 무리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 돌아서면서 최악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인간이고 몬스터고 상관없이 거슬리면 죽이고 보는 무리가 형성된 것이었다. 어디를 가나 미친 사람 한 명쯤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 미친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아직 그들을 마주친 적은 없지만, 그들을 만나면 나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직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같은 사람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식사 대신 손에 쥔 내단 하나를 막 입에 넣을 때였다. 정말 오래간만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2차 생존 시험이 곧 종료됩니다.]
[마지막 평가를 위해서 2차 생존 시험의 공간이 축소됩니다.]
[줄어들었던 몬스터의 숫자가 다시 증가합니다.]
[공간의 변형이 일어납니다.]
[힘을 합쳐서 몬스터들을 막아내세요.]
[마지막 시험을 견뎌내는 자들만이 진정한 유레이에 발을 디딜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작은 진동이 울리며 머리 위에서 모래가 쏟아졌다. 내가 지나왔던 길이 모두 모래로 들어차 돌아갈 수 없게 막혀있었다. 곧 내가 있는 곳까지 빠르게 모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내가 엄청난 판타지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젠장!”
빠르게 차오르는 모래 탓에 미끄러지는 발을 애써 다잡으면서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신경질이 났다. 모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차오르고 있었고 벌써 허벅지 반 정도 높이까지 들어찼다. 나는 스킬을 사용해 마력을 방출해가면서 앞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애썼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중 눈앞에 갈림길이 나왔다. 선택 한 번에 내 목숨줄이 달리게 된 것이다. 잠시 어디로 나가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오른쪽 길에서 모래가 조금씩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다잡았다. 그때였다.
“빨리 뛰어!”
오른쪽 길에서 사람들 여럿이 다급하게 소리 지르면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내가 있는 곳은 허벅지를 거의 덮을 만큼 모래가 차 있는 상태였다. 나는 왼쪽 길로 겨우 빠져나와서 모래로 막혀가고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상진이?”
크게 뜬 눈으로 막혀가는 길에서 달려오는 이들을 바라보는데 떨어지는 모래 빼고는 전부 익숙한 모습이었다.
“태경 씨, 서하야.”
상진과 태경, 서하였다. 그쪽에서도 나를 보았는지 크게 뜨인 두 눈이 보였다.
“이석아!”
“이석 씨!”
“혀엉!”
나는 서둘러 남은 마력의 양을 가늠해보았다. 두 번 정도는 더 마력을 방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눈앞에 들이칠 몬스터들에 대한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외치면 이쪽으로 달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모래로 막힌 길에 마력을 방출했다. 모래가 쌓이던 가운데에 길이 뚫렸다. 잠시 놀란 눈을 하던 셋이 미친 듯이 뛰어왔다.
“뛰어!”
정말로 미친 듯이 달렸으나, 반 정도 왔을 때 이제는 가슴팍까지 올라온 모래에 갇혀버렸다. 손에 땀이 차올랐다. 나는 그들의 바로 옆쪽으로 다시 마력을 방출하면서 소리 질렀다. 몸이 갇힌 곳 바로 옆의 모래가 터져나가며 작게 길이 뚫렸다. 세 사람은 서둘러 몸을 빼 그곳을 통해 내 쪽으로 달려왔다.
“빨리!”
그들이 이쪽에 도착함과 동시에 길이 모래로 전부 막혀버렸다. 신기하게도 이쪽 길로는 모래가 전혀 넘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목소리가 말하던 공간 변형이었다. 세 사람은 이미 한참 전부터 뛰어온 것인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거친 숨을 뱉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씨, 드디어 만났다.”
온통 모래에 범벅이 되어 바닥에 드러누운 상진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그를 바라보면서 마주 웃어 보였다.
“그러네. 드디어 만났네.”
“저기요, 형. 저희도 있는데요?”
“저희는 아예 안 보이십니까? 이석 씨의 마지막 모습이 전갈 집게에 끼어서 피를 토하는 모습이라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아십니까?”
“미안해요.”
서하와 태경이 불만 어린 듯 볼멘소리를 냈지만 나와 상진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더 밝게 웃을 뿐이었다.
“근데 다들 진짜 더러워졌네요.”
내 말대로 그들은 온몸에 모래를 뒤집어쓰고 얼굴은 때가 묻은 것처럼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를 것은 없었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진짜 웃겨요.”
“아니! 지금 누가 누구한테 더럽다고!”
발끈하면서 양 주먹을 움켜쥐는 서하의 말에 다들 웃음이 터져서 한참을 그렇게 웃어대었다. 이 지옥 같은 곳에 떨어진 뒤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로움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웃으며 오랜만의 해후를 나누었다.
“태경 씨도 서하도 상진이도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너무 보고 싶었어.”
어쩐지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랜 시간 혼자 돌아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이들을 찾아다니던 것이 떠올랐다. 보상으로 받은 빵 3개와 생수는 다 먹은 지 오래였고 전갈의 피를 식량 대신 먹어가며 지냈다. 하지만 전갈의 피만으로는 허기지고 갈증이 나는 것을 백 퍼센트 완벽하게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지낸 것이었다.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이들도 모두 그랬겠지만 새삼 서러움이 몰려왔다. 익숙한 사람을 만났기에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모두 힘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그 투정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저도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이석 씨.”
“형.”
서하는 울면서 내게 안겨 왔고 상진은 늘 그랬듯이 내 옆에 서서 어깨로 손을 올리고 내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포근함이 몰려오며 마음이 편하게 풀어졌다.
“익숙한 냄새난다.”
상진과 서하가 그렇게 내게 계속 붙어있자 태경이 눈을 살짝 치켜떴다.
“정말 서운하다. 이석 씨. 나는 보이지도 않습니까?”
그제야 나는 서하와 상진을 떨어트리고 태경에게 다가가 살짝 껴안고는 등을 두드려주었다.
“고생했어요.”
“마지막 모습이 아른거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찾아다녔습니다.”
“고마워요.”
태경이 슬쩍 내 허리를 양손으로 감아 강하게 껴안아 왔다. 그리고 서하와 상진 쪽을 바라보면서 씨익 웃어 보였는데 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걸 본 서하와 상진이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느덧 우리는 넷이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이 되어 그 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된 내가 정신을 차리고는 그들을 서둘러 떼어냈다. 주책바가지들이었다.
“강강술래도 아니고… 이제 그만하죠.”
“형은 우리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다니까.”
나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묻고 얼마나 강해졌는지에 대해 다투는 그들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우리 중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사람은 상진이었다. 놀라울 것도 없는 게 1차 시험 장소에서 2차 시험 장소로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이 상진이라고 했다. 상진의 레벨은 무려 10이었고 태경과 서하는 나와 같은 8레벨이었다. 하지만 8레벨인 나의 능력치가 상진과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것을 듣고는 모두 놀랐고 전갈의 내단을 먹게 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전갈의 항문에 손을 넣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공간 변형이 완료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의 총 생존자 수는 9,194명입니다.]
[나뉜 공간에서의 각 생존자 수는 500명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4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공간에서도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는 같습니다.]
[15분 뒤 몬스터가 등장합니다.]
[첫 몬스터는 새끼 전갈 1,200마리입니다.]
“여기에 구천 명이 넘게 있었다니, 놀랍네.”
“여기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 거지?”
태경이 놀랐는지 중얼거렸고 그에 다들 수긍했다.
“이제 안쪽으로 들어가야겠네요.”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상진은 슬며시 내 손을 잡아끌고 강하게 쥐었다.
“그래도 처음은 새끼 전갈만 나오나 봐. 그렇게 어렵지는 않겠다. 그렇지?”
“그래.”
혼자 있었더라면 암담한 심정이 더 컸을 텐데 이들과 함께하니 아무런 걱정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우리가 194명만 있는 곳에 있는 건 아니겠죠?”
“500명이나 있다면 2, 3마리씩 맡는 거고. 아니면 6마리씩 죽이는 거고. 그렇죠, 이석 씨?”
“태경이 형 말이 맞아요. 문제는 전부 6마리씩 상대할 수 있느냐겠지만. 간단하게 생각하죠.”
“이석 씨가 형이라고 부르니까 듣기 좋네요. 누구랑 달리.”
형이라는 호칭에 놀랐는지 태경이 슬쩍 나를 돌아보더니 씨익 웃어 보이고는 다시 앞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말에 상진이 움찔하고 태경의 옆에 있던 서하가 열을 내며 분개하기는 했지만, 몬스터가 1,200마리나 나온다는 사실에 긴장했는지 곧 조용해졌다.
나는 6레벨이었을 때 포인트를 올리지 않아서 5레벨 정도의 능력으로 커다란 전갈과 새끼 전갈을 상대했던 것을 떠올렸다. 새끼 전갈까지는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새끼 전갈의 옆에 붙어있던 커다란 전갈이 1,200마리씩 나온다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우리야 비교적 쉽게 버티겠지만 지금 다른 사람들의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이석아. 조심하기로 나랑 약속해.”
“조심할 거야. 걱정 마.”
“분명 네가 그랬다. 혼자 두지 말라고. 그러니까 너도 나 혼자 두면 안 되는 거야.”
“응.”
“저도 혼자 두지 마세요. 이석 씨.”
그렇게 말하는 태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슬쩍 웃음을 내뱉었다. 그 뒤로 서하까지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내게 약속을 강요했다. 그리고 끝까지 내 새끼손가락을 가져가 약속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나를 놔주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쭉 가자 커다란 공터 같은 곳이 나타났고 그곳에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애써 티 내지는 않았으나 안 좋은 예감은 비껴가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특성 때문이겠지만, 이곳에 와서 불안한 예감이 들면 언제나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다. 딱 봐도 500명에 턱없이 모자란 텅 빈 공터가 보이는 걸 보니 우리가 194명만이 있는 공간에 당첨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겁을 먹은 사람들도 있고 새끼 전갈쯤은 자신 있다는 듯이 몸을 푸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엔 내가 구해주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작전을 짜는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들 중 내게 살인마 무리가 있다는 정보를 전해준 여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같은 곳에 배정됐네요? 잘 부탁드려요. 일행분 찾으셨나 보네. 축하합니다.”
그녀는 인사를 건네고는 내 옆의 일행을 발견했는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네. 겨우 찾았네요. 그… 쪽도 그때 다쳤던 일행분들 모두 살아있네요.”
“이상아입니다. 덕분에 모두 살았죠. 레벨도 오르고 포인트도 꽤 얻어서 이제 새끼 전갈은 문제없어요. 문제는 다음이겠죠. 새끼 전갈이 끝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죠.”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상아라는 여자는 웃으면서 밝게 말해왔다.
“어쨌든, 같이 운 없는 처지지만 우리 살아서 다시 보면 좋겠네요.”
“아….”
“빈말이라도 그러자고 해주면 좋을 텐데.”
“다시 볼 겁니다. 꼭.”
“고마워요. 악착같이 몬스터 잡아서 레벨업 해야겠네요. 살아서 보죠.”
“커다란 전갈이 있는데 그건 7레벨 이상 되어야 수월할 거예요.”
나와 악수를 하더니 쿨하게 뒤돌아 일행들에게로 돌아가던 상아가 뒤에서 외치는 내 말에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해 보였다.
“누구야?”
“내가 도와줬던 사람. 고맙다고 인사하더라.”
상진이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왔다. 그 사이로 모래가 우수수 떨어져 나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데 태경이 잽싸게 상진의 손을 잡아 내렸다.
“이석 씨가 인상 쓰잖아요, 상진 씨.”
상진이 황당한 표정으로 태경을 바라보는데도 불구하고 태경은 고개를 숙여 내 눈을 바라보다가 ‘후’ 하고 눈에 바람을 불었다.
“이런, 눈에 모래가 들어갔네요.”
“아… 괜찮아요.”
내 말에 상진이 태경을 툭 하고 밀치더니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이석이가 괜찮다고 하네요. 대신 제가 바람 불어줄게요.”
그리고는 제가 내 눈에 바람을 부는 것이었다. 그런 그 둘의 어이없는 행태에 나는 살짝 짜증을 내며 서하에게 다가가 말했다.
“둘이 싸웠어? 언제?”
“걱정 마요. 안 싸웠어요.”
“진짜야?”
내 말에 서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내 어깨에 기대 웃어 보였다. 심지어 허리에 손까지 감아왔다. 나는 긴장한 서하가 애교를 부려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서하의 손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네, 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전혀요.”
서로 말싸움을 하다가 내 쪽을 바라본 둘이 분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였다.
[1분 뒤 몬스터가 등장합니다.]
스스스슥-
목소리와 함께 미약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서 서로 등을 맞대고 섰다. 1분이 지나자 바닥에서 전갈들의 집게가 튀어나오며 몬스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너무 많잖아! 이건 불공평하다고!”
나와 일행들은 새끼 전갈이 모래 밖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처리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두 번에서 세 번 정도만 무기를 휘두르면 새끼 전갈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모래에서 나오는 전갈을 발견하자마자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떼로 덤벼드는 녀석들은 새끼 전갈이라고 해도 위협적이었다.
“죽어! 사라져! 사라지라고!”
“안 돼, 저리 가! 악!”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집게를 보지 못하고 몸통을 잡힌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갈의 집게에 잡힌 사람들이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집게에 들려서 전시품처럼 위로 솟구친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금방 정신을 차리고 집게에 잡힌 이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 인원이 적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다행히도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은 소수였다.
모래에서 나오기 전에 죽인 새끼 전갈이 몇 마리인지 세지도 못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자 모래 밖으로 나온 새끼 전갈들의 수가 어마어마해졌다. 194명의 사람이 모이고도 공간이 남았던 곳이, 이제는 꽉 들어차서 빈 공간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바로 옆에 있지 않은 이상, 사람의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으아아아!”
“이런 좆같은 놈들!”
사람들은 저마다 악을 지르며 새끼 전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래도 살기 위해서 몬스터와 싸운 경험이 많은 이들이었고, 그래서인지 새끼 전갈 정도에는 쉽게 당하지 않았다. 우리도 마구잡이로 새끼 전갈을 죽이면서 주변에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얼마나 악착스럽게 전갈들을 상대했는지, 어느덧 언뜻언뜻 사람들의 형체가 보일 정도로 새끼 전갈의 수가 줄어있었다. 이 정도라면 인원이 500명인 곳들은 벌써 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쉬운 난이도에 자신감을 얻은 사람들은 지치는 줄도 모르고 싸우고 있었지만, 우리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처리되는데….”
“이놈들 다 나온 거 맞아요?”
내 중얼거림을 들은 서하가 내게 물었다. 순간 드는 불안한 예감에 나는 서둘러 바닥을 살폈다. 위험하다며 적색 신호가 깜빡이는 곳들이 아직도 잔뜩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바닥 조심해요! 아직 놈들 다 안 나왔어요!”
“뭐?”
“이석 씨도 조심해요!”
나는 서둘러 바로 앞에 있는 모랫바닥에 검을 박아 넣었다.
“키에에엑!”
역시나 아직 연약한 껍질 덕에 검에 상처를 입은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땅 위로 솟구쳤다. 나는 주변을 살피다가 사람이 제일 많이 뭉쳐있는 곳으로 달렸다. 역시나 그곳에서 위험신호가 제일 많이 감지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일행들이 포위하듯이 지키며 이동했다. 나는 서둘러 아까처럼 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푸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며 몬스터가 죽어 나갔다. 잠시 후 이상함을 느낀 몬스터들이 땅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람들과 몬스터가 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아악!”
“살려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상처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직까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도움도 받지 못해 죽은 사람 몇을 제외하고는 죽을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사람들이 없었으나, 언제 그런 이들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급격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역시 한 사람당 6마리씩 처치하면 된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무작위로 등장해서 공격하는 몬스터들은 뭉텅이로 뭉쳐서 나타나기도 하고 싸우고 있는 도중에 뒤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6배라는 수적 차이는 어마어마한 압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악! 으윽!”
신음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상아 씨가 검을 놓치고 새끼 전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상아 씨의 옆에는 의식을 잃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는데, 그 사람을 구하려다가 당한 것 같았다. 나는 일단 검에 마력을 씌워 상아 씨 앞에 있는 놈에게 날려 보냈다. 갑자기 쓰러지는 몬스터를 보고 놀라던 상아 씨는 주변의 놈들이 주춤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 있던 칼을 집어 들고는 다시금 열렬히 싸우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몬스터 시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바닥에 누워있었다.
[첫 번째 몬스터를 막아냈습니다.]
[보상으로 생수 한 병과 미약한 내상 회복 효과가 있는 열매 하나가 지급됩니다.]
[두 번째 몬스터는 지금부터 1시간 뒤에 등장합니다.]
[00:59:59]
“말도 안 돼! 고작 1시간 뒤에 몬스터가 나타난다고?”
“젠장할.”
“그래, 생각보다 쉽다 했어.”
사람들은 저마다 화를 내거나 울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모두 체념하고는 자리에 앉아서 쉴 뿐이었다. 자신들보다 6배는 많은 몬스터를 상대한 터라 힘들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면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과 다음에는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스러운 표정들이 얼굴에 다 드러나 있었다. 우리는 잠시 후 손에 쥐어진 물과 열매를 기계적으로 입에 넣었다.
“형. 이 열매 1차 생존 장소에서 먹었던 거랑 비슷하네요.”
“응. 맛도 비슷한 것 같아.”
“이석 씨와의 추억이 생각나네요. 이 열매를 먹을 때 처음으로 손을 잡았었는데.”
“네?”
“형만의 착각이신 것 같네요.”
당황해서 새된 소리로 내뱉어진 내 짧은 의문사 다음으로 상진의 단호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서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물병을 열어 제 입에 가져다 대며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냐고 혼잣말을 했다. 가끔 태경은 나를 당황하게 할 만한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주어진 보상을 다 먹고 난 후에 나는 일행들과 함께 새끼 전갈의 피를 받아 다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상처에 발라주었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 몇몇은 우리가 행동하기도 전에 제 온몸에 전갈의 피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천천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수를 세어본 나는 속으로 내심 안도했다. 시체를 구석에 잘 모셔두고 돌아온 나는 불안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죽은 사람이 별로 없어. 처음에 죽은 4명이 다야.”
“수는 많았어도 약한 몬스터였으니까. 게다가 이제는 노련한 사람들만 살아남았잖아.”
“그렇지만 다음에 나오는 몬스터가 커다란 전갈로 1,200마리라고 생각해보세요.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설마. 그렇게 나올까요?”
서하가 태경의 말에 겁을 먹고 앉아있는 나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다니느라 배는 더 힘든 상태였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생생했다. 거기다가 보상으로 주어진 열매를 먹어서 거의 원래의 체력을 회복한 상황이었다. 레벨을 올린 사람들의 수가 꽤 되는지 여기저기서 상태창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안도감이 들기도 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지금은 능력치 하나하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레벨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은 주변을 살피면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눈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체력을 보충하려는지 짧은 잠을 청하며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었고, 새끼 전갈의 사체를 의자 삼아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시체가 사라지지 않기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체를 분해해봤지만, 새끼 전갈에게서는 내단이 나오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분해한 시체를 보고 있었는데 태경이 뒤에서 슬쩍 다가왔다.
“새끼 전갈에는 없나 보네요.”
“네. 있었으면 사람들이 먹고 능력치를 좀 더 올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태경이 형 말대로 정말 다음에는 커다란 전갈이 1,200마리나 나올까요?”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설마 그렇겠습니까.”
“커다란 전갈은 독이 있잖아요. 그거 전갈 피를 마시면 해독이 돼요. 그 정보랑 내단의 정보라도 알려야 할까요?”
“이석 씨가 원하면 그렇게 하죠. 전 이석 씨 말이라면 무조건 찬성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전갈 피가 해독 효과랑 상처 치료 효과가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네?”
“지금까지 살려고 뭘 먹었겠어요. 이석 씨도 전갈 피 먹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저희는 전갈을 구워 먹는 사람도 봤었습니다. 내단에 대한 건 저도 처음 듣지만.”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상진이 슬쩍 다가오더니 내 어깨에 얼굴을 올리고 물어왔다. 귓가에 가깝게 들리는 목소리에 귀가 가려워 손을 들어 올리는데 태경이 또다시 상진의 얼굴을 자기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내 어깨에서 떼어냈다. 상진이 상당히 불쾌해하면서 태경의 손이 닿은 얼굴을 털어냈다.
“이석 씨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안 불편한데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상진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다시금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왔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즐거운 목소리로 태경에게 말했다.
“이석이랑은 원래 이렇게 지내서 괜찮아요. 이런 게 뭐 거의 일상생활에 녹아있어서.”
“이석 씨.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지금 해야 하지 않을까요? 미리 전갈의 피도 물병에 받아놓고 하려면. 시체가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잖아요.”
“아! 네, 그래야겠어요.”
나는 어깨에 올라와 있던 상진의 볼을 손으로 밀어냈다. 잠시 그 손에 제 볼을 부비던 상진은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피는 왜?”
“전갈 독을 해독하려면 그걸 마셔야 하니까.”
“그걸 마실 시간이나 있을까?”
태경이 대신 대답하며 재빠르게 뒤돌아서자 상진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나는 잠시 침울해져 있다가 알리지 않는 것보다는 알리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에 저기 떨어진 곳에 앉아서 쉬고 있는 상아 씨를 불러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상아 씨 덕분에 쉽게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 마신 물병에 전갈의 피를 담았고 물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마저 마시고는 전갈의 피를 담으며 다음 싸움을 준비했다. 모두 눈이 퀭한 것이 이 상황이 힘든 것 같았다.
[00:05:00]
[몬스터가 등장하기까지 5분 남았습니다.]
[새끼 전갈의 사체가 사라집니다.]
[두 번째 몬스터는 아비 전갈 700마리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어미 전갈인 줄 알았는데 커다란 전갈은 새끼 전갈의 아빠였다.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 사람들은 서로 모여서 둥글게 자리를 잡았다. 걱정스러운 것은 아비 전갈과 싸워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건데, 이들이 과연 아비 전갈을 견뎌낼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그렇게 5분의 시간이 지나갔다.
“키에에엑!”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비 전갈은 모래에서 솟구쳐 나왔지만, 이번에는 아까와 다르게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땅에서 솟구치기 전에 아비 전갈을 처리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녀석들은 제 등장을 숨기지도 않고 당당히 모래 위로 올라왔다. 땅으로 다 솟은 놈들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우리에게로 돌진해왔다. 우리는 아비 전갈이 땅으로 올라오기 전에 서둘러서 시체를 갈라 내단을 꺼내 들었다.
“먼저 먹을 사람?”
4. 진정한 유레이 1층
우려했던 것처럼, 아비 전갈이 등장함과 동시에 잘 버티는 것 같던 사람들이 새끼 전갈 때와는 다르게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다. 여기저기서 잔인하고도 징그러운 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의 뼈가 전갈의 집게에 의해 무참하게 부러져나갔다.
“사, 살려줘!”
“안 돼! 내 아들 내놔! 안 돼!”
우리는 아비 전갈로 꽉 들어찬 공간을 무리해서 움직이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애썼다. 처음에 죽인 전갈의 내단을 사이좋게 하나씩 섭취한 우리는 그래도 비교적 수월하게 아비 전갈을 상대할 수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놈들은 가볍게 스스슥 움직였지만, 워낙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어서인지 땅이 흔들거리는 착각까지 일어났다. 몇몇 사람들이 온통 겁에 질려 울음을 내보였다.
“흐어어엉! 제발 살려주세요!”
“어어엉. 엄마. 보고 싶어!”
“잘못했어요. 이제부터 착하게 살게요.”
도망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사방이 모두 전갈이었고 길이 막혀있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악을 지르며 무기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움직임은 둔탁했고 상처 입는 자의 수도 죽은 사람들의 수도 점점 늘어만 갔다.
위험경보가 정신없이 여기저기서 울려댔다. 그만큼 내 몸도 정신없이 움직였다. 눈앞에 사람의 잘린 다리가 아무렇게나 휙 하고 날아왔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내단을 모으기 시작했다. 살아남고 싶었고, 살아남게 해주고 싶었다. 다 같이 살고 싶었다. 한참 급박하게 손을 움직이던 내 눈가에 어느덧 눈물이 차올라서 시야를 뿌옇게 흐렸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억지로 손을 들어 올려 눈가를 훔쳤으나, 방금 내 옆에서 전갈의 집게에 의해 두 동강 났던 사내의 피로 인해 시야가 빨갛게 변했다. 그 남자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오열하며 그 반 토막 난 시신을 부여잡았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멈췄다. 먼 기억 속에서 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빠! 누나!’
플래시가 터지듯 빨간빛이 번쩍였다. 전갈의 꼬리가 한 번 더 그 시신을 향해 들이닥쳤다. 여자가 미친 듯 소리 지르면서 꼬리를 검으로 쳐내며 전갈에게 달려들었다.
“어, 어…?”
애써 막아두었던 머릿속 댐이 무너져 내렸다. 캉캉거리며 무기와 전갈의 집게가 맞붙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 욕설과 잘못을 비는 소리가 윙윙거리면서 점점 멀어졌다. 그 소리 사이에 아비 전갈들의 끔찍한 소리도 섞여 있었다. 빨갛게 변한 시야가 빙빙 돌면서 어지러웠다. 나는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건만 사방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공격하던 앳된 얼굴의 사내아이가 보였고 그 뒤로 늑대처럼 보이는 징그럽게 생긴 몬스터가 나타났다. 눈을 마주치고 있던 상태에서 터져나가던 사람의 머리, 그 안에서 터져 나오던 새빨간 피와 그것에 섞여 진득하게 얼굴을 뒤덮던 뇌수의 감촉도 느껴졌다. 나는 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헛구역질을 뱉어냈다. 아비 전갈의 꼬리가 몸을 스치면서 독에 중독되었다는 목소리가 울렸지만, 그것조차 웅웅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시야가 변하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 때문에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던 사람들의 환영이 보였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여기에요! 도와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살려주세요!’
‘꺄아악! 어떡해!’
‘꺄아아아!’
비명 소리와 함께 둔탁한 아픔이 느껴지면서 몸이 뒤로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나는 아릿하게 저린 등의 통증을 느끼며 다시 제대로 돌아온 시야에 적응하지 못하고 누워있었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무기를 휘두르며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눈물을 흘리고 악을 지르면서도 그들은 검을 쥐고 휘둘렀다.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강이석!”
상진이 급하게 내게 다가와 주변 전갈들을 막으면서 소리쳤다. 땀과 사람들의 피와 전갈의 피가 섞여 상진의 얼굴과 온몸이 온통 진득하게 젖어있었다. 제대로 보이는 거라고는 단단한 눈빛 하나였다. 그 뒤로 거친 숨을 뱉으며 상진과 비슷한 몰골의 태경이 다가와서 나를 일으켰고 그 옆에서 서하가 상진이 미처 보지 못했던 전갈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아주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나만 빼고 어느새 모두 이 상황에 적응한 것이었다.
“형! 괜찮아요?”
“이석 씨? 괜찮으십니까?”
“아….”
“정신 차려요! 이대로 죽을 겁니까? 저 사람들하고 다 같이?”
“강이석! 정신 차리고 빨리 일어나.”
“형! 다친 곳 있으면 빨리 전갈 피 발라요.”
“강이석, 일어나!”
마지막으로 상진이 소리치는 소리에 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으면 무기 들어! 어서!”
언제 떨어트렸는지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으나, 옆에 누군지 모를 잘린 팔에 쥐어져 있는 검이 보여 급하게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 올렸다. 잠시 그 팔을 보면서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나는, 어깨를 아플 정도로 강하게 잡으며 눈을 맞춰오는 태경으로 인해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잘 들어요, 이석 씨. 정신 차려요. 정신 차리고, 살아. 죽지 말고 살라고. 알겠어?”
다시금 눈가에 들어차는 눈물을 눈을 강하게 감았다 뜨면서 떨어트린 나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다 같이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태경은 강하게 한 번 나를 안았다가 놔주고는 다시금 아비 전갈들에게 뛰어갔다. 그걸 보던 나는 급하게 주변에 있는 전갈들의 껍질을 부수고 내단을 꺼내서 모았다. 중독을 해독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와 내단 하나를 입에 넣고 삼킨 나는 다시 빠르게 주변의 내단을 수거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서둘러 양손에 가득한 내단을 들고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나를 향해서 내리 찍히는 꼬리를 반 바퀴 몸을 돌려 피하고 그대로 빠르게 달렸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꼬리와 집게들이 위협적으로 몸 근처를 스쳤다.
“하아앗!”
“부상자들 빨리 안으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이었다. 등을 맞대고 둥글게 원을 만들어 부상자는 잠시 안에서 치료할 수 있게 하고 멀쩡한 이들은 다시 싸웠다. 독에 중독된 사람들이 신음을 뱉으면서 전갈의 피를 삼키는 중이었고 허리가 절반쯤 끊어진 이의 허리에 전갈의 피를 무작정 들이붓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안정적으로 싸우게 되기까지 많은 사람의 희생이 필요했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내단을 건네고 힘들어 보이는 이를 대신해 자리에 들어가 싸우기도 했다. 그 후로는 지루한 싸움의 반복이었다.
“아비 전갈 죽었어? 빨리 안으로 시체 끌고 와서 피랑 내단 빼내!”
“서둘러!”
“어어! 조심해! 대형 무너지지 않게 하란 말이야!”
“실수하지 말고 빨리!”
“전갈이 안으로 들어오잖아! 막아!”
“죽고 싶은 거야? 다들 정신 차려! 누구는 안 지친 줄 알아!”
사람들은 온 기력을 담아서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으나, 강한 몬스터에 절망한 사람들 중 하나는 제 목에 직접 검을 박아 넣어 자살하기도 했다. 그 끔찍한 장면을 마주한 사람들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울음을 삼키거나 구역질을 해댔지만, 삶의 의지를 버리지는 않았다.
내단을 먹은 이들이 조금씩 수월하게 전갈을 처리하자 내단으로 인해 내분이 일어나 죽어 나간 사람의 수도 꽤 되었는데, 이런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우리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것이 제 살 깎아 먹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었다.
그때쯤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죽고 비교적 강한 이들만이 살아남아 있는 상태였다. 내단으로 인해서 올라간 능력치 덕분에 버티는 것이 수월해질 무렵에는 이미 남은 사람의 숫자가 100명에도 훨씬 못 미칠 정도로 줄어있었다. 대충 50명가량 되어 보였는데 정확한 숫자를 세고 싶지 않아서 그저 그럴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 안에는 이상아와 그 일행들도 있었다. 그들은 잠시 여유가 생길 때는 원 밖으로 나가 직접 전갈에게서 내단을 빼내어 삼키기도 했다. 우리도 벌써 셀 수 없이 많은 내단을 섭취한 후라 속이 더부룩해서 더 이상 내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레벨도 5개나 올랐다.
우리는 그때가 되어서야 아비 전갈을 칼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우리의 서포트 속에서 사람들도 한숨 돌리며 비교적 편하게 전갈의 내단을 빼내어 순서대로 삼키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지쳤음에도 휘두르는 검의 속도가 전보다 빨랐다. 아직 아비 전갈은 반 정도밖에 줄어있지 않았으나, 강해진 사람들의 눈은 희망으로 빛나는 중이었다. 다행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게 강해진 것은 나와 상진, 태경, 서하였다. 그러나 강해졌다고는 해도 많은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녹초가 된 몸으로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신력도 점점 고갈되어서 종종 비틀거리기도 했다. 더 버티기 힘든 것 같으면 전갈에게서 내단을 빼내서 삼켰다. 정신력에도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 잠시나마 체력이 회복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 무리하게 움직인 결과였으나 그 누구도 후회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 온 지 3주 정도 된 것 같은데 우리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쩌정!
“크흡!”
마지막 전갈의 집게와 검이 맞부딪혔다. 하지만 튕겨 나가는 것은 사람이 아닌 전갈이었다. 그렇게 전갈을 처리한 사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자신과 같은 모습의 사람들만이 보였다. 드디어 그렇게나 많던 아비 전갈들이 모두 쓰러지고 사람들만이 비틀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와아! 이겼다!”
“해냈어! 우리가 해냈다고!”
“다들 잘했어!”
살아남은 사람들이 옆에 있던 사람들을 얼싸안고 기쁨에 제자리 뛰기를 해댔다. 우리는 지친 몸 때문에 그저 손에 남아있던 내단 몇 개를 애써 입에 밀어 넣으며 가까스로 서 있을 뿐이었다. 몇몇 부상이 심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왜 기뻐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대로 검을 쥐고 사방을 경계하고 서 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몇 차례나 이겼다는 말을 해주자 그제야 그들은 검을 내리고 자리에 주저앉아 멍한 눈을 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적은 수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이상아의 옆으로 그녀의 일행이 주욱 늘어서서 인사를 건네 왔는데, 5명밖에 되지 않았다. 잠시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자 그녀가 애써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일행은 거의 살았잖아요. 혼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힘들 거예요.”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로 고정되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제 앞에 놓인 시체를 끌어안으며 오열하는 사람이었다.
“아빠! 아빠! 죽지 마! 거짓말이지? 거짓말!”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기뻐하며 환호하던 사람들이 조용해지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 옆에는 제 아들의 시체를 흔들며 조용히 소리죽여 우는 사람도 있었다.
“아가, 우리 아가. 제발… 제발 눈을 뜨렴…. 이 엄마를 두고 혼자 가면 어쩌니. 오래 살지도 못하고. 우리 아들 아직 고등학교도 가보지 못했는데… 아아, 제발… 민하야. 어흐흐흑.”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서 이렇게 잔인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걸까. 차마 계속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눈을 돌렸지만, 소리는 계속 뚜렷하게 귀를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떨어진 사람들도 수가 꽤 되더라고요. 처음엔 갓난아기도 있었어요. 나중엔 보지 못했지만, 정말 안타깝죠. 차라리 혼자 떨어지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열하는 사람과 같이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상아와 그 일행은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나가 붉었다. 상아의 일행과 내가 조용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자 뒤에서 상진이 나를 껴안아 왔다. 그런 사소한 움직임에도 나는 놀라서 몸을 잘게 떨었다. 다시 몬스터가 나타나는 환상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석아.”
“뭐?”
“그래도 우리는, 아직 살아있어.”
상진의 말에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 말만 잊지 않으면 되었다면서 상진은 내 볼에 제 볼을 부볐다.
“아직 사람들, 57명이나 살아있어. 다 죽은 거 아니야. 우리는 잘못한 거 없어. 살아남은 걸 충분히 감사하고 기뻐해도 돼.”
“숫자… 다 세어봤어?”
“그럼. 다 세어봤어. 죄책감 갖지 마. 우린 최선을 다했어. 그럼 된 거야. 그렇지?”
한 손을 올려 상진의 볼을 쓰다듬던 나는 눈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흠흠… 저, 감사합니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상아와 그녀의 일행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나와 상진을 번갈아 보다가 감사 인사를 내뱉고 자리를 옮겨갔다. 나는 상진과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가 꽤 묘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빠져나왔다. 상진이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웃었다. 사람들 앞에서 무슨 민폐인지 나는 괜히 상진의 팔뚝에 매서운 손바닥을 날렸다.
“태경이 형이랑 서하는?”
“저기 누워서 숨 고르고 있어.”
상진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눈을 감고 잠이 든 서하와 누워서 고개만 들고 사나운 시선을 던지고 있는 태경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디가 아픈가 싶어서 나는 서둘러 태경에게 달려갔다.
“어디 아파요?”
“상진이 품 따뜻합니까?”
“네?”
“내가 더 따뜻하지 않았습니까? 아까의 그 뜨거운 열기가 떠오르시죠?”
태경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의 팔뚝을 짝 소리 나도록 찰지게 때렸다. 상진이를 때리던 습관이 반사적으로 나온 것이다.
“아야!”
태경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상처 입은 환자를 때렸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해지는데, 태경이 그런 나를 알아챘는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환자를 때리는 겁니까? 이제 제가 편한가 보네요.”
“이석아, 태경이 형 안아주지 마. 그러면 자기 바람피우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이어 들리는 상진의 말에 나는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을 느끼며 손을 올려 상진의 팔뚝을 짝 소리 나게 내리쳤다.
“상진 씨. 그건 이석 씨 마음이죠.”
“아파. 이석아.”
나는 아프다고 소리치는 상진을 무시하고 태경의 옆에 말없이 누웠다. 그러자 몸부림치던 것을 가만히 멈추고 내 옆에 붙어 눕는 상진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까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마워요.”
“왜 그랬던 겁니까?”
“그냥, 옛날에 있었던 사고가 떠올라서요.”
딱딱한 바닥에 누웠는데도 푹신한 침대에 누운 것처럼 노곤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상진이가 그런 내 가슴 위에 손을 올리더니 토닥토닥 두드려왔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 모두가 숨을 죽이며 집중했다.
[두 번째 몬스터를 모두 막아냈습니다.]
[보상으로 피로회복제 한 병과 내상 치료 열매 하나가 지급됩니다.]
[잠시 후 진정한 유레이로 이동됩니다.]
목소리가 들리자 설핏 감은 눈을 뜨고 서하가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손에 나타난 보상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우리는 서로서로 손을 모아 잡았다. 혹시라도 떨어져서 이동된다면 다시 처음부터 찾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드디어 끝났다.”
“그러게.”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가 검어졌다가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진정한 유레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생존 시험에 통과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특별 보상 포인트 10개가 지급됩니다.]
[랜덤 방어구 상자가 지급됩니다.]
“여긴 또 어디야?”
“진정한 유레이에 발을 들인다는 게 우릴 집에 보내준다는 말이 아니었네요. 형.”
“산 넘어 산이네요.”
“지금 여기 동굴…인 거 맞죠?”
눈앞에는 키가 큰 수풀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드문드문 크게 자란 나무에 열매들이 맺혀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곳이 동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천장이 막혀 있어 하늘은 전혀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빼곡한 수풀과 나무들만 시야에 가득했다. 비정상적인 광경이었다.
그때 손에 랜덤 방어구 상자가 생겨났다. 우리는 즉시 그것을 사용했다. 나는 신발이 나왔는데 조금 더 빠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신발이었다. 나는 곧장 그 신발로 갈아 신었다. 역시나 아무것도 신지 않은 것처럼 가볍고 편했다. 상진은 장갑을 얻었는데 마력의 사용을 조금 더 유용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스킬을 깨닫지 못한 상진은 조금 아쉬운 얼굴을 했다. 상진도 나처럼 스킬을 깨닫지 못해서 물음표로 유지되는 중이라고 했다. 태경은 조금 단단한 가죽 상의를 얻었고 체력 +2의 효과가 있다고 했다. 서하는 나와 같은 신발이었다. 태경이 상의를 갈아입은 후 걸음을 옮겨 나무에 열린 열매를 하나 땄다. 그런데 태경이 딴 열매가 맺혀 있던 가지 부위가 검게 변색되더니 뚝 하고 부러져서 떨어졌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겠죠? 보상으로 받은 열매랑 비슷해 보이는데.”
“글쎄요. 한 번 따면 끝인 건가?”
“형. 먹지 말아요!”
“음….”
잠깐 고민하던 나는 슬쩍 태경에게 다가가서 그의 손에 들린 열매를 한입 베어 물었다. 턱을 타고 과육이 흘러내렸다. 나는 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입안이 온통 달콤한 과즙으로 가득 찼다.
“흡!”
“이석 씨!”
“강이석! 그걸 왜 함부로!”
“혀엉…?”
태경과 상진이 크게 소리치고 서하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맛있는데?”
웃는 내 얼굴을 보며 그들이 안심하다가 다시 야차 같은 표정으로 변하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고 뒤로 주춤했다. 맛있어서 저절로 나온 감탄사였는데, 놀란 그들에게 미안해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여는 순간 커다란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걸음 소리는 아니었다.
쿠웅, 쿠웅-
“미안해. 맛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조잡한 철판을 덧댄 갑옷을 입고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곳에 갓 떨어지자마자 보았던 초록색 피부를 가진 몬스터와 비슷했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가 더욱 강해 보였다. 모두 한마음이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무기를 들고 몸을 긴장시켰다. 그 와중에 태경이 슬쩍 내 턱에 묻은 과육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스윽 닦아내었다.
“또 시작이네.”
누군가 뱉은 그 말이 도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5층마다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곳만이 몬스터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일정 층마다 보스 몬스터가 자리해 있습니다.]
[몬스터를 통해 강해지세요.]
빌어먹게 아직도 게임 같은 시스템이 적용되고 있었다. 죄를 지었다고 나를 지옥에 박아 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렇다 쳐도 상진이처럼 착한 놈이 지옥에 떨어졌을 리는 없었다. 애써 머리를 흔들며 쓸모없는 생각들을 지워냈다. 5층. 우리들의 목표가 정해졌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순간은 조금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음…?”
우리는 한동안 당황해서 멈칫거렸다. 몬스터가 휘두르는 도끼를 막기 위해서 휘두른 검이 도끼를 가르고 더 나아가 단칼에 몬스터의 목을 갈랐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손쉬웠다. 몬스터를 죽이는 것이 이렇게까지 쉬웠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우리가 강해진 것이었다. 강해진 만큼 점점 우리가 현실과 동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 레벨업을 하고 확인했던 내 상태창을 떠올려보았다.
[lv. 12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45퍼센트]
[체력: 152(+5)]
[근력: 151(+3)]
[마력: 25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특성: 민첩- 민첩이 2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성: 독 내성- 6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0(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전갈의 내단을 한참이나 주워 먹은 덕분인지 능력치가 말도 못 하게 올라간 데다 추가로 얻은 포인트까지 모두 투자한 결과였다. 전갈의 내단은 레벨을 올리고 몬스터를 잡아서 얻은 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상진과 태경, 서하도 나와 비슷하게 내단을 섭취했기 때문에 상태창이 엇비슷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럼 우리 열매 몇 개 더 따서 식량 확보하고 2층 출구 찾아서 올라갈까요? 동의하십니까?”
“네, 그렇게 해요.”
“저도 동의!”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한입 먹은 것뿐인데도 금방 배부르네요.”
의견이 일치한 우리는 2층 출구를 찾아 나섰고 그동안은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몇몇 장소에 사람 시체와 몬스터의 사체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다른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상대인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가 있던 장소를 제외하고는 내단의 정체를 알지 못했거나, 알았더라도 많은 수의 사람이 나눠야 했기 때문에 얼마 섭취하지 못해서 강해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전갈의 내단을 발견하게 된 것도 우연이었으니까.
그러는 동안 나무에 열리는 열매 2개 정도면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밥을 먹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동굴인데도 밤과 낮이 있네…. 신기하다.”
서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의 천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서하의 말대로 동굴의 천장은 막혀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어두워져, 밤이 된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이 고요한 평화는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많은 것에 대한 궁금증을 떠올리게 했고 그동안 살아남는 데 급급해서 하지 못했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모닥불이라도 피울까요? 여기는 나무랑 풀도 있으니까.”
“아니, 불빛을 보고 이상한 사람들이나 몬스터들이 꼬일 수도 있으니까.”
“아, 참. 그렇지.”
우리는 잠시 말없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다가 긴장을 풀고 저마다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상진이 제일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하늘 보고 싶다.”
“형들. 그런데 우리 진짜 덤덤한 것 같지 않아요?”
“뭐가?”
“평생을 살아오던 곳에서 이상한 장소에 떨어졌잖아요. 평생을 알아 온 상식들이 산산조각 나서 혼란스러운데, 이제 몬스터를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고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것들을 아무런 제지도 없이….”
그 말을 들으면서 서하가 1차 시험 장소에서 겪은 일과 사람이 사람을 공격하던 것을 다시금 떠올린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덤덤하지 않아. 그런 척하는 것뿐이지. 전부 그렇지 않을까? 실제로 여기 오기 전에 나도 전갈이랑 싸우다가 정신 놔서 죽을 뻔했잖아. 그런 나를 네가 살렸고. 그렇지? 사실 그 순간이 꿈같더라. 잔인하게 죽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니까 정신이 아득해지고.”
“사실은 나도 처음에는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어. 대국민 몰래카메라인 줄 알고 이석이 찾아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돌아다니다가 다른 사람이랑 시비가 붙기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상진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상진을 쳐다봤다.
“정말이야?”
“근데 그 미친놈이 나한테 화살을 쏘는 거야. 그 덕에 목덜미에 상처가 났는데, 목에서 피가 흐르니까 그제야 느껴지더라. 아, 이건 진짜구나.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때부터 이석이 찾아다니면서 죽어라 몬스터를 잡았어. 그런데도 꿈이거나 몰래카메라이길 바랐어. 문제는 몬스터를 죽이는 것도 너무 생생한 거야. 살을 가르고 목에 검을 찔러 넣는데 내가 누군가를, 무언가를 죽이는구나 하고 얼마나 끔찍하던지. 당장 이석이를 찾아서 움직여야겠구나 하고 미친 듯이 찾아다녔어.”
이제서야 그 당시에 상진의 스카프를 하고 있던 놈이 어떻게 스카프를 손에 넣은 건지 알게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사실, 이석 씨 말대로 모두가 힘들고 괜찮지 않겠지. 그리고 그게 정상이야. 이상한 게 아니야. 나는 기절했던 건데 몬스터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시체 더미에 파묻어놨잖아.”
“정말이에요?”
“응. 끔찍했어. 이석 씨 없이 혼자 일어났으면 더 끔찍했겠지.”
“다들 그랬구나.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는 어땠어요?”
이구동성으로 셋이 같은 말을 내뱉었다.
“꿈같았지.”
“나도 처음에 죽을 뻔했었어요.”
서하가 이내 훌쩍이면서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은 척, 밝은 척하면서 애써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 하던 것이 서하였다. 나와 같이 속으로는 많이 힘들고 무서웠을 것이 분명했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에게 당했던 일들도 트라우마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어요. 무서워요. 언제라도 내가 그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있을 수도 있잖아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내가 애써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하가 고개를 들어서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죽을 때마다 너무 무서워요. 몬스터들을 죽이고 그놈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는 현실감이 하나도 없는데 사람이 흘리는 피를 볼 때면, 진짜….”
서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러운 눈물만 토해냈다. 서하의 말에 공감한 우리는 눈물을 보이는 서하를 차마 토닥여주지도 못했다. 모두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하와 같은 심정이었다. 사람이 죽을 때마다 무섭고 고통스럽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는 사람들처럼 될까 항상 곤두서있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들리는 거라고는 서하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어두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지 태경이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이곳에서 하나 좋은 점을 찾는다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태경의 말에 다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보이던 서하까지 작게 웃자 우리는 엉덩이에 뿔나겠다면서 서하를 놀렸다.
“나는 공부 안 해도 된다는 거요! 매일 학교에 갔다가 도서관에 갔다가 방학에는 학원만 다녔는데 여기서는 공부가 필요 없어요.”
“나도 그 지겨운 과제들에서 해방돼서 좋다.”
“나도. 방학까지 과제를 내주시는데 얼마나 치가 떨리던지.”
“사실, 저는 제가 사고로 죽은 걸까 생각도 해봤어요. 저를 덮치던 그 아저씨에게 잡혀서 옷이 벗겨지는 순간에 막연하게 죽은 건 아니구나, 그렇게 깨달았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게임 같다고 생각하면서 버텼었는데,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에 너무 힘들었어요.”
“응,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옷이 다 젖었었지. 콧물도 이렇게 주욱 흐르고.”
안 좋은 기억에 휘둘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장난스럽게 내뱉은 내 말에 서하가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 정도로 서럽게 울지는 않았어요!”
“정말? 서하 네가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나도 같이 울 뻔했는데?”
“태경이 형!”
“이야, 서하 이제 보니 울보였네.”
“상진이 형도! 놀리지 마요! 내가 얼마나 무서웠었는지 형이 알아요?”
서하의 재미있는 반응에 우리는 한동안 계속 그런 서하를 보면서 놀려대었다.
“어쨌든! 저는 여기에 와서야 남자도 성폭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거의 매일같이 뉴스 기사에 누가 성폭행당했다고 올라왔잖아요? 이제야 그들이 얼마나 괴롭고 억울하고 슬펐을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이제라도 알면 됐어.”
“서하도 나쁜 놈이었어. 그걸 이제야 알게 됐단 말이야?”
“형! 너무해요.”
서하는 한동안 우울한 눈을 하다가 이내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울음을 그친 뒤라 코맹맹이 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웃겨서 또다시 놀림감이 되었지만 그래도 서하는 씩씩하게 웃었다.
“우리 내일은 2층에 갈 수 있겠죠?”
“응. 제일 빨리 5층에 도착해서 쉬자.”
“제발 눈 감고 이석 씨를 껴안고 푹 잤으면 좋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이석이를 껴안고 잔다는 거예요?”
“제 마음입니다.”
“다들 조용히 하고 빨리 자요. 아니면 불침번 댁들이 서던가.”
“잘 자요. 형.”
내 말에 서하가 제일 먼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태경과 상진도 잠시 말씨름을 하는가 싶더니 피곤했는지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옮겨 잘 자란 나무를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나무였다. 잊고 있었으나 다시금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는 것이 실감 났다. 꽉 막힌 천장을 보면서 나는 문득 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석아! 저거 봐! 카시오페아야!’
‘그게 뭔데?’
‘별자리 말이야! 멍청아. 누굴 닮았는지.’
‘누구긴 누나 닮았지.’
‘엄마나 아빠 닮은 것도 아니고 왜 나야? 꼭 이런 것만 나 닮았다지. 어휴! 징그러워.’
‘동생한테 말하는 거 봐라.’
‘흐흐흐. 나 아니면 너한테 누가 이렇게 말하겠어. 이 징그러운 놈.’
‘상진이 있잖아.’
‘그놈 시키가 감히 너한테 그렇게 말한다는 거야? 데리고 와! 감히 누구 동생한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지? 그럼, 잘생기고 착한 상진이가 너한테 그런 막말을 하지는 않겠지.’
‘와, 태세 전환하는 것 좀 봐. 누나가 한 말이 막말인 건 아나 보네?’
‘야.’
‘응?’
‘죽는다!’
‘어? 누나! 이석이 왜 때려요! 때리지 마세요!’
‘넌 또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나 말리지 마, 상진아. 아니면 너도 맞는다?’
‘이석이가 불러서 왔죠. 누나 그만! 아야!’
‘말리지 말랬지! 강이석 이리 안 와?’
잠시 옛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피식 서러운 웃음을 지었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제법 서늘한 온도 때문에 몸에 뭐라도 덮을 것이 없나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방향을 바라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쳐 뒤에 있던 일행들을 깨웠다. 잠에서 제대로 깨지도 못한 채로 그들은 옆에 놓아두었던 무기부터 챙겨 들었다. 몸이 바짝 긴장해 힘이 들어갔다.
“쉿! 누가 있어.”
작게 속삭인 나는 그들이 각자 무기까지 챙겨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다시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모두 긴장한 눈으로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쳐다보는데 쿵쿵거리는 몬스터의 발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소란스러운 기색이 일더니 바로 앞 수풀에서 누군가 우리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나도 그 비명에 숨이 넘어갈 정도로 놀랐다.
“꺄악!”
그러나 나는 치켜들고 있던 검을 내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연 씨?”
“어!”
“무슨 일이야! 누가 있…? 이석 씨?”
“여기서 또 뵙네요. 오랜만입니다. 혜진 씨.”
잔뜩 긴장한 상태로 내 뒤쪽에 서 있던 상진과 태경, 서하가 아는 사람이냐고 물으며 검을 내렸다. 혜진의 뒤에 있는 이들도 그때 보았던 군인을 포함해 한번 마주쳤던 사람들이었다. 이쪽을 살펴보던 혜진이 말했다.
“검 다시 들어 올리세요. 저기에 몬스터가 아주 우글우글해요. 열 마리가 넘어서 몰래 돌아서 이동하고 있었는데 하필 우리가 이동하는 쪽으로 오고 있어요.”
“이쪽으로 열 마리 넘게 모두 이동 중입니까?”
“네. 저희 일행만으로는 5마리밖에 상대 못 해요. 이석 씨 일행은요?”
그녀가 내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희는 5마리 넘게 상대 가능합니다.”
“이석 씨는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서로 돕는 게 어때요?”
“좋아요! 도와드릴게요.”
“어머, 고맙다. 꼬마야.”
“꼬마 아니에요.”
“그래? 몇 살인데?”
“이제 열아홉이에요.”
“그래, 꼬마가 아니었네. 멋있는 사내였는걸?”
서하의 나이를 듣고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녀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죠. 올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먼저 습격하는 게 빠를 것 같네요. 통성명은 그 후에 하죠. 이석 씨에게는 또 도움을 받게 되네요. 이것도 운명인가 봐요?”
그렇게 말하는 혜진은 처음에 충격받아 울면서도 저와 제 동료의 무기를 챙기던 것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슬쩍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어?”
“아니, 저 사람 전에 만났을 때랑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이석 씨가 웃는 걸 보니까 괜히 질투나네요.”
“형이 왜 질투를 해요?”
“내 마음도 마음대로 못합니까?”
“제발 둘은 조용히 있어요. 싸우지 말고.”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괜히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서하가 놀리듯이 상진과 태경을 바라보았고 둘을 발끈하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혜진과 지연의 안내를 따라 이동한 곳에는 총 13마리의 몬스터가 뭉쳐있었다. 이렇게 단체로 이동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원래 이렇게 무더기로 다녔나?”
“가끔 그런 것 같더라고요.”
“아, 그런가요?”
“그럼 시작할까요?”
“네. 그러죠.”
모두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가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몬스터 사냥에 익숙해졌다. 몬스터를 베어낼 때 뼈가 검에 걸려 덜걱거리는 감각도 별것 아니었다. 몬스터를 만났을 때 주춤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놈들의 목을 베어내고는 확인사살까지 마쳤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도와 나머지 몬스터들까지도 말끔히 처리했다. 싸움이 끝나고 혜진과 지연 일행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실력을 일부 감췄음에도 그들은 그런 표정이었다.
“그때랑 똑같이 정말 강하시네요. 이석 씨도 일행분들도.”
“아뇨, 뭐.”
“저희도 이제는 나름 한가락 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네요. 역시 이석 씨는 따라갈 수가 없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김혜진이에요.”
그들 일행은 총 5명으로 김혜진과 한지연, 성혜연과 이환, 그리고 한동훈이라고 했다. 그렇게 서로 통성명을 마친 이들이 우리가 쉬던 나무 밑으로 와서 함께 주저앉았다. 그리고 사전에 얘기라도 한 듯이 모두 나무에 있는 열매를 따 먹었다.
“안 드세요?”
“네?”
“열매 먹으면 피로도 풀어주고 상처도 치료해주잖아요.”
“아….”
“맞다. 참, 안 다치셨구나.”
열매를 먹고서 활기를 찾은 게 단지 배불러서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멋쩍게 어색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서하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입을 우물거리며 주저하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지연이 서하에게 다가가 상냥하게 물었다.
“왜? 뭐 궁금한 게 있니?”
“저… 누나는 전갈 잡을 때 500명이나 있는 곳에 있었죠?”
“응? 응.”
“마지막에 사람들 얼마나 살아있었어요?”
“그게 궁금했구나? 우리가 있던 곳은 대부분이 살아남았어. 아마 백 명도 안 죽었을 거야.”
그렇게 말하던 지연은 슬쩍 서하의 표정을 살피더니 물었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우리 쪽도 사람이 많았으면 대부분 살아있었을까요? 우리는 57명밖에 못 살았거든요. 죽은 숫자로 치면 비슷하기는 하려나?”
“아….”
서하의 말에서 우리가 있었던 곳을 알아챈 지연이 말을 흐리다가 서하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그런 지연을 보던 서하는 아까처럼 몸을 웅크리고는 새우잠을 청했다.
“뭐 나타나면 깨워주세요.”
그런 서하를 뒤로하고 한참 얘기를 주고받던 우리는 또다시 사람이나 몬스터나 가리지 않고 죽이고 다닌다는 무리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혜진과 지연의 일행도 그들 무리를 마주쳐 겨우 도망쳤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아무래도 사람을 죽여도 레벨이 오르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모두가 잠시 침묵하며 무거운 분위기가 생성되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우리는 그 말을 끝으로 조금이라도 잠을 청하기로 했다. 아까 내가 불침번을 섰으니 이제는 자신이 서겠다고 자처한 상진을 빼놓고는 전부 얕은 잠이나마 청하려 바닥에 몸을 눕혔다.
잠에서 깨어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낀 나는 슬며시 눈을 뜨다가 옆에 누워 잠든 상진을 보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우스꽝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를 발견한 혜진이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이제 불침번 제 차례에요. 걱정 말고 자요.”
그러나 이미 잠이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다시 잠들기 힘들어진 나는 그녀의 옆에 가서 주저앉았다.
“불침번 제가 설게요. 가서 누워요.”
“아뇨, 잠이 달아나서.”
“저도요. 그럼 같이 불침번 설까요?”
“그러죠, 뭐.”
그렇게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혜진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석 씨, 그 새끼 어떻게 됐어요?”
“누구요?”
“그때 그 활 쏴재끼던 놈이요.”
“아….”
“괜찮아요. 그런 놈은 죽어도 싸니까. 다들 눈에 보이면 자기가 먼저 죽이겠다고 난리였는걸요.”
“아뇨, 제가 아니라 몬스터한테 죽었어요.”
“정말이에요?”
“네. 갑자기 늑대 같은 몬스터가 나타나더니 머리를 부숴버리더라고요.”
“그렇군요. 차라리 잘 되었어요.”
“눈앞에서 그런 장면을 본 게 처음이라서 많이 놀랐어요. 무섭고. 그 뒤로 잠을 깊게 못 자겠더라고요. 이런저런 끔찍한 것들하고 섞인 악몽을 꿔서.”
“저도 몬스터한테 터져나간 사람들 시체가 계속 꿈에 나와요. 제가 죽인 것도 아닌데 죄책감이 들고 무섭고 미안하고 그렇더라고요.”
“네, 아마도 대부분이 그렇겠죠.”
“맞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 모두 되뇌어야 해요. 우리 탓이 아니라고.”
혜진이 내게 시선을 맞춰오며 강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우리 때문이 아니니까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그런 그녀와 한참을 시선을 맞추던 나는 옅게 웃었다.
“위로가 되는 말이네요.”
“위로가 아니에요. 이게 사실이니까.”
“그렇죠. 고마워요.”
“별 말씀을.”
풀벌레 우는 소리가 한번 들리더니 이내 주변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마주쳐오는 혜진의 눈동자는 강인함을 담고 있었다. 저 강인함은 그녀의 마음가짐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눈빛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
“질투 나게 왜 그렇게 서로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어?”
상진이 내가 옆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눈을 비비며 이쪽을 보고 말을 걸어왔다. 혜진이 상진이의 말을 듣고 큰 눈을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상진의 한쪽 머리에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다. 꾀죄죄한 몰골에 까치집까지 있으니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다만, 화보를 찍는 거지였다. 어쩜 저 모습도 추하지 않을 수가 있지. 내 지금 몰골이 어떨지 생각하니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보나 마나 나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따로 없을 터였다.
“얼마 자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어났어요?”
“혜진 씨 덕분에 조금이라도 눈 붙인 거죠, 뭐.”
“더 자지. 왜 일어났어.”
“네가 옆에 없잖아.”
“어머.”
상진의 말에 혜진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그런 쪽에 편견이 없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혜진이 호탕하게 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다가온 상진이 익숙하게 내 어깨에 팔을 걸쳐오며 혜진에게 말했다.
“이석이가 부끄러움이 많아서요.”
“네. 그런 것 같아 보이네요.”
“어어, 이석 씨랑 상진 씨 그런 사이 아닙니다. 절친한 친구일 뿐이에요. 이석 씨가 저한테 그랬거든요. 절친한 친구일 뿐이라고. 그렇죠?”
태경이 뒤늦게 눈을 떴는지 이쪽으로 비척비척 걸어오며 말했다. 혜진은 그런 우리를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았는데 묘한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내가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오.”
그 모습을 보던 혜진의 입에서 작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괜히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깨운 것 같아서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괜히 사람들만 다 깨웠잖아요.”
“이석 씨가 깨운 거죠. 이석 씨가 소리 질렀잖아요. 엄한 사람 탓하기 있기에요?”
당당하게 말하는 혜진을 보면서 나는 괜히 억울해져서 입술을 삐죽 내미는데 상진이 그런 내 입술을 잡아당겼다.
“억울해?”
“아니….”
어쨌든 내가 내지른 큰 소리 때문에 사람들이 일어난 거라서 달리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새 상진의 곁으로 다가온 태경이 내 입술을 잡고 있는 상진의 손을 탁하고 쳐내더니 제 손으로 내 입술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옆에선 여전히 혜진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팠죠? 호 해줄까요?”
“하아….”
상진의 무시무시한 눈빛이 와 닿고 있었다. 유별난 하루의 시작이었다.
“다들 준비되셨죠?”
“네!”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고 일단 같이 다니는 것으로 합의를 본 우리는 내려놓았던 무기만 주섬주섬 챙겨 일어났다. 바닥에 누워 잠만 잤으니 치울 것도 없고 챙길 것도 무기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금방 떠날 준비가 끝났다. 아침으로 열매까지 하나 든든하게 챙겨 먹었으니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되었다.
언제 친해졌는지 서하가 이환이라는 군인과 장난을 치며 웃고 있었다. 스물한 살이라는 그가 서하와 가장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에 잘 맞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서하의 귓속말을 듣더니 나를 큰 눈으로 쳐다보다가 웃으며 다시 서하에게 귓속말을 했다. 신경이 쓰였지만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일단 혜진과 지연 일행의 레벨을 올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능력치를 조금이라도 올려야 위층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레벨을 올리는 것은 비교적 수월했지만, 입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입구를 찾는 과정에서 저절로 혜진과 지연 일행의 레벨이 하나씩 오를 정도의 몬스터를 잡았다. 이로써 그들의 레벨은 9레벨인 한동훈을 빼고는 모두 10이 되었다.
“크학!”
그때 몬스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쉬려고 하는 찰나 튀어나온 몬스터였다. 도끼를 내리찍다가 순간 발이 엉켜 넘어져 비명을 지른 것이다. 그렇게 무방비상태가 된 몬스터의 머리에 한동훈이 검을 박아넣었다.
“레벨업 했다!”
한동훈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서하가 옆에서 한동훈을 놀렸다.
“아저씨.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요! 엄청 무서워!”
“뭐야? 이놈이! 내가 어디가 어때서!”
“아저씨는 형들처럼 안 잘생겼어!”
서하의 잔인한 말에 한동훈은 잠시 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슬쩍 숙이고는 긍정하며 슬퍼했다. 심지어 이환까지도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른여덟 살인 그는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다들 아저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금 서러워하기는 했지만, 한동훈은 그 호칭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나이 차 때문에 나와 상진, 태경은 한동훈에게 조금은 거리감을 가지고 대했는데, 그런 우리와 달리 제일 어린 서하가 아저씨 하면서 제법 친근하게 대하자 그는 허허 웃으며 서하를 예뻐라 했다.
“이 미운 입! 미운 입!”
“아! 아파!”
지금도 서하의 양 볼을 꼬집으면서 흔들고 있었다. 흉악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상황에서도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이제 입구만 찾으면 되는데 도통 보이지가 않네요.”
“그러게요. 이러다가 계속 레벨만 올리고 입구는 못 찾는 거 아닐까요?”
“혜진아! 부정적인 말 하지 마. 그러다가 진짜로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러면 그런 거지. 뭘 어떻게 해.”
“뭐야?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자자, 혜진 씨, 지연 씨, 그만!”
이환이 익숙하게 투닥거리는 그 둘을 말렸고 성혜연은 옆에서 그 모습을 즐거운 듯이 구경하며 오히려 이환을 말리고 있었다. 서하는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았다. 사람이 많아서 조금 소란스러워지자 서하는 조금 더 밝은 웃음을 찾은 것 같았다. 혜진과 지연은 생각 외로 상진과 태경처럼 자주 투닥거렸다. 그런 둘을 보면서 살짝 놀라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혜진이 던진 말이 있었는데, 그 뒤로 나는 혜진과 지연이 그러거나 말거나 절대 시선을 두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다투는 것보다 상진 씨하고 태경 씨처럼 질투에 눈멀어 투닥거리는 게 더 재밌는데. 그렇죠?’
‘크흐, 둘이 이석 씨를 두고 눈을 막 이렇게. 막!’
‘에이, 장난이에요. 삐졌어요? 응?’
‘안 삐졌습니다.’
‘에이, 말투를 보니까 완전히 삐졌는데? 상진 씨하고 태경 씨가 이석 씨 비위 맞춰주기 진짜 힘들겠네.’
‘그 둘이 제 비위를 맞추긴! 제가 오히려 둘 비위 맞추느라 죽겠습니다!’
‘어머! 정말? 그게 정말이야, 이석 씨?’
‘하아….’
‘흐흐흐. 아 재밌다.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결국, 한참이 지나도 위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발견하지 못한 우리는 동굴의 구석진 곳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잠시 그렇게 앉아서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우리가 있는 곳에 부자연스럽게 자란 나무가 계속 신경 쓰였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태경이 슬쩍 내 옆으로 와서 말을 걸었는데 상진이 세트처럼 따라와 붙었다.
“그러게. 뭘 보는 거야?”
“저 나무, 조금 부자연스럽지 않아?”
내 말에 그 둘이 시선을 돌려 내가 말한 나무를 쳐다보았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진짜 이상하네.”
그 말에 나는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나무에 가까이 다가갔다.
“어?”
“왜요?”
“왜?”
부자연스럽게 자란 나무의 뒤로 좁은 틈이 하나 있었고 그곳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거였다. 지금 이곳에서 입구가 있을 만한 곳은 저곳이었다.
“찾았다!”
“찾았어요?”
“입구예요?”
“와, 이석이가 해내는구나!”
내 말을 듣고 일행들이 우르르 몰려와 푸른 빛이 나는 좁은 틈새를 보고는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틈새가 너무 좁아서 그 앞에 있는 나무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는데, 나무를 잘라내자 나무 전체가 달려 있던 열매들과 함께 검게 변해서 사라졌다.
“설마설마했지만 열매가 진짜 한정적인가 봐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불을 켜고 입구를 찾겠네요.”
“위층에 열매가 또 있겠죠?”
서하의 말에 불안함을 느낀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머니에 넣었다. 그마저도 길어봤자 사흘 정도밖에 버틸 수 없는 양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이제 다 준비됐죠? 들어갑니다.”
나와 상진, 태경, 서하가 먼저 푸른 빛이 나는 입구에 발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하얗게 변하더니 곧 원래 상태로 돌아오며 목소리가 들렸다.
[유레이 2층입니다.]
“하. 도대체 여긴 왜 만들어진 거고 우리는 왜 여기에 오게 된 걸까요.”
아래층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에 사람들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실망감을 드러냈다. 무엇을 기대했든 간에 우리가 노리는 것은 5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자,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위로 올라가는 입구를 찾죠. 5층까지는 올라가 봐야죠.”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는데 상진이 내게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저기 올 때랑은 다르게 초록빛인데. 저기로 다시 나가면 밑으로 내려갈 수도 있는 건가?”
혜진이 별말 없이 그 빛에 다시 몸을 실었다가 나타났다. 우리는 그 잠깐 사이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네요.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올라올 수 있어요.”
“혜진 씨는 참, 대단하시네요.”
태경이 중얼거리며 내뱉었다. 옆에서 지연이 저게 무모한 거지 뭐가 대단한 거냐고 비꼬았고 간만에 혜연도 지연의 말이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쳤다. 그 말을 무시하고 혜진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뭐, 살아남으려면 정보가 중요하니까요. 그래도 그쪽 일행들만 하겠어요? 자, 확인도 했겠다. 3층 입구 찾으러 가죠.”
혜진은 정말 대담한 사람이었다. 이 상황에서 과연 누가 저렇게 대담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 * *
2층도 1층과 마찬가지로 별반 다를 것 없는 동굴이었다. 수풀들이 빽빽했고 나무들이 군데군데 위치해 있었다. 다만, 열매가 열리는 나무의 수가 1층보다는 확연히 줄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우리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걱정을 애써 무시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걸으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우리가 제일 처음 2층에 진입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가끔 사람의 흔적이 눈에 띄어 먼저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아마 그 수는 극히 소수인 것 같았다. 2층의 몬스터는 1층과 같은 녀석이었다. 몬스터에게도 레벨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1층보다는 더욱더 빠르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레벨이 더 높은 녀석일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까다로운 점은 이 녀석들은 대략 7마리씩 뭉쳐 다닌다는 것과 기습공격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허억!”
“흩어지지 마요! 근처에 있는 사람끼리 뭉쳐!”
지금도 일곱 개의 도끼가 바닥에 타다닥 내리쳐졌다. 나와 상진, 태경, 서하는 아직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몬스터를 잡을 수 있었고 다른 일행들은 조금 힘겨운 상태였다. 그러나 여러 번 습격을 당하고 거의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몬스터들과 마주치다 보니 모두 레벨이 하나씩 오른 상태였다. 그 결과 상진은 14레벨, 나와 태경, 서하는 13, 나머지 일행은 11레벨이 되어 몬스터를 상대하기가 조금 더 수월해졌다.
처음 습격을 당했을 때는 모두 당황해서 서로 여기저기로 흩어져 큰일이 날 뻔했지만, 지금은 능숙하게 놈들을 하나하나 처리했다. 서로를 도와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이 1층에서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익숙하게 바닥을 구르면서 몬스터의 발목을 하나씩 끊어서 녀석들의 움직임을 막아냈고 상진과 태경, 서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혜진 일행이 위험하지 않게 돕고 있었다. 일행들의 레벨을 안정적으로 올리고 싸움에 대한 감각을 길러주기 위함이었다. 단연 눈에 띄는 실력을 가진 것은 혜진이었다. 1층에서 제일 필사적으로 몬스터를 잡던 사람도 그녀였다.
혜진은 막 몬스터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고 그 몬스터의 무기를 뺏어 들더니 옆에서 자신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던 놈의 목에 그 무기를 던져 명중시켰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그녀의 공격을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싸움이 끝나있었다.
“아! 좀 쉬고 싶다!”
“나도!”
“저도요!”
여기저기서 쉬고 싶다고 난리가 났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잠이 들만하면 습격을 받으니 잠은커녕 제대로 쉬는 것도 힘든 판이었다. 아직 주머니 안에 피로회복제가 남아있었지만 2층이 이 정도라면 위층은 더욱 견디기 힘든 상황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껴두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피로회복제를 마신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쯤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멀쩡한 사람들은 아껴둔 피로회복제를 마신 사람들뿐이었다.
“피곤해 죽겠다.”
“많이 피곤해?”
상진이 앓는 소리를 내며 뒤에서 내게 기대어왔다. 벌써 이틀이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사람들의 건강이 걱정스러웠다. 지금도 막 이곳에 올라와서 싸웠을 때보다도 더 많은 상처를 입어가면서 싸웠다. 아무래도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른 게 분명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몬스터들에게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일 것이었다. 그렇다고 편히 쉬게 해줄 수는 없었다. 습격을 받을 때를 대비해서 어느 정도 몸을 긴장시키고 있어야 했다. 무방비상태로 적을 만났을 때 그때의 피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아, 업어줘, 이석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왜 말이 안 돼?”
“조용히 해.”
“너 술에 취하면 매번 내가 업어서 집에 데려다줬던 거 잊어버렸어? 아, 강이석, 진짜 매정해.”
“내가 언제?”
“그랬어.”
“안 그랬어.”
“그랬다니까? 마님, 매번 이 머슴이 마님을 마님의 저택까지 데려다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정녕 모르셨단 말입니까?”
“이 진상. 저리 가. 나는 너 술 취하면 우리 집 데려와서 재워줬거든? 침대 좁아서 얼마나 불편했는 줄 알아?”
“마님, 참으로 매정하십니다. 흑흑.”
“저리 가, 저리 가.”
“마님! 이 돌쇠를 버리지 말아주셔요! 마님! 흑흑. 우리의 뜨거웠던 밤을 부디 잊지 말아주셔요!”
“너 정말!”
등짝을 때리는 내 매서운 손길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가면서 상진은 우는 척까지 해가며 열연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혜진과 서하가 배꼽을 잡고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혜진은 눈물까지 훔쳐 가면서 웃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가 하며 다가온 태경도 그런 상진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라도 분위기를 바꿔주는 상진이 고마웠다.
“만약 우리가 돌아갈 수 있다면 상진 씨, 배우 한 번 도전해봐요. 잘할 것 같은데.”
“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인 정도 아닙니까?”
“어머, 태경 씨도 참. 상진 씨는 얼굴이 잘났잖아요. 잘 먹힐 거예요.”
“그 논리라면 제가 배우를 해도 성공하겠네요.”
“태경 씨도 배우 하시려고요? 저는 좋아요! 둘이 찐한 로맨스 영화 한 편 찍으면 좋겠다. 이환 씨도 나름 얼굴이 되니까 조연으로 질투를 유발하는 역할! 동훈 아저씨는, 그냥 방해물인 조폭 카메오!”
“이왕 쓰는 거 조폭 두목까지는 해주지?”
동훈이 섭섭하다는 듯 슬픈 목소리를 냈고 질색하는 태경의 옆에서 지연과 혜연은 방방 뛰어가며 그 둘의 로맨스 영화를 지지했다. 둘은 태경의 양팔을 흔들어가면서 영화를 꼭 찍어달라며 성화였다. 멀리서 상진을 보며 웃고 있던 이환은 그런 혜진과 지연, 그리고 혜연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지친 걸음을 옮기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3층 입구다!”
3층 입구는 나무가 3개 겹쳐있는 교묘한 위치에 숨어 있었다.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구를 바라봤다. 그러나 모두 지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망설였다.
“여기서 조금 휴식을 취하고 올라갈까요? 아니면 그냥 올라가는 게 좋을까요?”
“아무래도 모두 지쳤으니까 여기서 조금만 쉬다가 올라가죠.”
“제발 쉬는 동안 몬스터가 눈앞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모두가 근처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앉으며 짧은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당한 게 있다 보니 한 손은 무기 위에 올린 상태였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상황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만약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멀쩡하게 잘 살 수 있을까. 돌아가는 시기가 지금보다 훨씬 나중이라면 멀쩡하게 잘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평생을 살아오던 곳이라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다가 돌아간다면 다시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이 두려웠다.
그렇게 짧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정말 운이 좋게도 아무런 습격을 받지 않았다. 태경과 상진의 자잘한 장난들이 귀찮았지만, 화를 낼만큼 짜증 나는 것은 아니어서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금방 투닥거리면서 자기들끼리의 싸움에 열을 올렸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나와 서하는 어이없는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혼자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 둘이 들었다면 당장 화를 내면서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잠시간의 휴식을 취하고 모두들 조금이나마 개운해진 표정으로 3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발을 들였다.
2층에 올라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환해지며 다시 눈앞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3층도 1, 2층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바닥에 노란 모래가 전체적으로 깔려있었다. 역시나 2층보다도 열매의 수가 더 적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아아아앙!”
고양이 울음소리와 비슷하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지친 표정이 잠시 얼굴에 떠올랐지만, 금방 사라졌고 무기를 들어 올리며 방어태세를 갖췄다.
“올라오자마자 몬스터라니.”
“말도 마세요.”
“이번에는 조금 다른 몬스터인가?”
두두두두두두
저 멀리서 무언가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네, 다른 몬스터네요.”
“세상에… 저게 뭐야.”
“우리 괜찮은 거 맞아요?”
“다들 옆으로 피해!”
우리에게 그대로 돌진해 오는 몬스터를 피해서 모두 일제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쿵.
강렬한 충돌음과 함께 몬스터가 그대로 벽을 들이박고 멈추어 섰다.
푸스스-
몬스터가 들이받았던 동굴의 벽 부분이 가루가 되어서 밑으로 떨어졌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제대로 마주한 몬스터는 고양이와 비슷한 얼굴이었지만, 고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가 거대했다. 게다가 마치 멧돼지를 연상케 하는 몸을 가지고 있었으나 멧돼지의 2배는 되어 보였다.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몬스터를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다. 녀석이 한쪽 발을 구르며 다시 돌진할 준비를 했다. 녀석의 발밑이 푹푹 파였다.
“미쳤어….”
“정신 차려요!”
작은 목소리가 내 정신을 깨웠고 나는 크게 소리쳤다. 그제야 일행들이 급하게 대형을 수습하며 싸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아아아앙!”
녀석이 다시금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그런 몬스터를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겠다고 피하지 않고 제 자리에 서 있던 이환의 몸이 붕 떠오르며 날아갔다.
“이환아!”
“억!”
그는 큰 소리조차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입가에 얇은 선혈을 흘리며 날아가 나무에 부딪혀 기절했다. 등 뒤로 오소소 작은 소름들이 쭈뼛 돋아났다. 2층보다도 훨씬 강한 몬스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2층 출입구로 달려가 일행들의 레벨을 올리고 다시 올라오고 싶었으나 이환이 쓰러진 상태에서는 도망도 불가능했다.
상진과 태경이 손짓으로 혜진 일행을 이환이 날아간 쪽으로 물러나게 했고 나는 몬스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내 능력치 정도면 상대할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가 나를 피해서 다시금 혜진 일행을 향해서 돌진했다. 서둘러 검을 휘두르면서 녀석을 막아내는데 어느새 몬스터의 뒤로 돌아간 상진이 녀석의 뒷다리에 검을 꽂았다. 검이 깊숙하게 박힌 것은 아니었지만 몬스터가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뱉으면서 몸부림쳤다. 그 사이 서하가 녀석의 반대편 뒷다리에 검을 꽂아 매달렸다. 이번엔 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는지 몬스터가 산불 맞은 멧돼지처럼 제자리에서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더욱 거칠어지는 움직임 탓에 계속해서 제대로 된 공격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상황만 살피고 있는데 순간 태경이 틈을 발견했는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그대로 높이 점프했다. 몬스터가 눈치채고 뒤를 돈 순간 태경은 이미 몬스터의 뒷덜미에 검을 박아넣은 뒤였다. 순식간에 행해진 공격이었다. 나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력을 방출해 녀석을 두 갈래로 갈랐다. 태경이 제 옆으로 몸통이 두 갈래가 되어 쓰러지는 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나를 쳐다봤다. 하마터면 태경의 몸까지 잘릴 뻔했다. 나는 그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몬스터를 처리하고 나자 뒤에서 작게 울음이 묻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서둘러 이환이 쓰러진 곳으로 향했다.
“괜찮아요?”
“뼈가 부러진 것 같아요.”
이환의 상처를 보기 위해서 옷을 들쳐놓은 것이 보였는데 갈비뼈 부위에 시퍼렇고 빨간 멍이 들어있었다. 멍든 부분이 살짝 부어있었고 손으로 누를 때마다 이환이 신음을 흘렸다. 그를 옮기기 위해서 들어 올리자 이환은 기절한 상태에서도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어떡하죠? 갈비뼈가 부러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 전갈의 피 아직 가지고 있는데.”
“전갈 피는 외상만 치료가 되잖아. 뼈가 붙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결국 우리는 다시 2층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같은 몬스터가 또 나타나면 환자가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밑으로 내려와서도 몬스터에게 한차례 습격을 받고 나서야 우리는 이환을 바닥에 안전히 눕힐 수 있었다. 일단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은 전갈의 피를 상처 부위에 바르는 것이었다. 이환이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열매를 입에 넣어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환이 눈을 뜨고 일어났다. 정신이 들자마자 몸을 일으키려던 이환이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몸을 뉘었다.
“아! 아, 아파서 못 일어나겠어요.”
“이환 씨, 어서 이거 먼저 먹어.”
혜연이 이환에게 급하게 나무에서 딴 열매를 건넸다. 이환은 그것을 받기 위해서 팔을 크게 움직였다가 다시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받아든 열매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하, 죽는 줄 알았어요. 무슨 힘이 그렇게 세냐.”
“그래도 다행이에요.”
“네. 정말 다행이죠. 열매를 먹어서인가 그나마 덜 아프네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환이 완전히 멀쩡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우리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혜진은 위층에서 강한 몬스터를 만나고 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말했다. 염치없지만 이환이 조금 더 괜찮아질 때까지만 신세를 부탁한다고 고개를 숙여왔는데 우리는 당황해서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저, 이번에 진짜 정신 번쩍 들었어요. 우리가 이곳에서 비교적 사냥을 쉽게 했던 것도 이석 씨 일행 덕분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고요.”
“아니에요. 다들 잘 싸우시는데요.”
“맞아요. 누나 진짜 잘 싸우는데.”
혜진이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고맙다며 웃었다. 상진과 태경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에 수월하게 싸울 수 있었던 건 부정할 수 없죠. 이환이가 나으면 먼저 올라가세요.”
“네?”
“우리가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이환이 상처가 낫고 사냥해서 레벨을 올리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도 같고요.”
“짐이라니요.”
“그것도 그렇지만 여기서는 레벨을 올려야 하잖아요. 그래야 강해지니까.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도움을 받아서 같이 위로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런 거 싫어요. 저희는 저희 스스로 강해지고 살아남을 거예요.”
“하지만….”
“그거 알아요? 솔직히 저희가 살던 곳에서 저는 여자라는 이유로 제약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여기는 아니더라고요. 제가 강하다는 이유로 저와 일행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무시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 마음껏 하면서 지낼 수 있더라고요.”
“아….”
“재수 없는 말을 하거나 나한테 허튼짓을 하려고 하면 힘으로 눌러서 혼쭐을 내줄 수도 있고. 솔직히 말하면 아주 가끔씩은 여기가 더 살기 좋다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는 강해질 거예요. 강해져서 올라갈 테니까 5층? 10층? 위에서 보죠. 정상에서 만나요.”
혜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밝게 웃었다.
“우리 일행들도 모두 저랑 같은 생각이에요. 늘 저랑 그런 얘기 했거든요. 이석 씨 일행한테 폐를 끼치는 것 같다고, 더 강해져야겠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짐이 되는 것 같은 때가 오면 미련 없이 보내주자고. 우리끼리도 할 수 있다고.”
“혜진 씨는 참, 멋있네요.”
태경이 그런 혜진을 바라보면서 마주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서하는 혜진의 손을 잡고는 슬쩍슬쩍 흔들어 보였고 상진도 그런 혜진을 보면서 웃었다.
“우리 일행 모두가 멋있는 거죠. 지연이도, 혜연이도, 이환이도, 동훈이 아저씨도. 다들 강한 사람이거든요.”
“네, 강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우리보다도.”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분은 좋네요.”
“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혜진과 나는 마주 보며 웃었다. 혜진은 서하와 태경, 상진 앞에 가서 한 명씩 손을 맞잡아가며 인사했다.
“이제 이환이 나으면 한참이나 후에 보겠네요. 그래도 정상에서 만날 거니까, 울지 말기!”
그런 혜진의 말에 모두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곳에 와서 본 웃음 중에서 가장 예쁘고 여운이 남는 웃음이었다.
이환의 상처가 거의 나아갈 즈음 서하가 끝까지 혜진 일행과 남겠다고 자원했지만, 혜진 일행은 그 의견을 받아주지 않았다. 서하는 하도 울어 벌겋게 부어오른 눈을 문지르면서 혜진 일행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 모습이 참 안쓰러워 보였다. 서하도 혜진도 모두 이해가 되는 상황이라 딱히 누구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 엄청나게 부었다. 눈만 찐빵 같아.”
“많이 부었어요?”
서하가 창피해하며 얼굴을 수그렸다.
“서하야. 형은 네가 그래도 귀여워 보여.”
“태경이 형. 거짓말하면 안 돼요.”
그런 서하를 보던 태경이 웃으며 말했고 상진이 그런 태경의 말을 맞받아치며 서하를 약 올리듯이 쳐다봤다.
“태경이 형 말처럼 저는 눈이 부어도 귀여워요.”
“아니, 서하야. 내가 잘못 생각하고 말했던 것 같아.”
“태경이 형!”
“이것 봐. 서하야. 네가 인정해.”
상진이 서하를 계속해서 놀렸다. 우리는 그렇게 혜진의 일행과 떨어져 다시금 위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강렬했던 첫 만남에서와는 다르게 3층의 몬스터는 허무하리만치 우리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공격이 단순했기 때문이다.
“이아아아앙!”
무식하리만치 돌진만 하는 녀석이었다. 근력이 받쳐주기만 한다면 비교적 쉽게 제지하고 가죽을 갈라 잡을 수 있는 몬스터였다. 약점을 파악할 수 있는 내 능력도 필요 없었다. 이 몬스터의 거의 모든 부분이 약점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상처 입었을 때 발버둥 치는 것만 조심하면 되었다. 우리는 빠르게 녀석들을 처치하고 입구를 조사했다.
3층에 올라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4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고 드디어 4층에 진입했다.
[유레이 4층입니다.]
비슷한 풍경을 가진 4층이었지만 어딘지 적막함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운 좋게도 입구 근처에는 몬스터가 없어서 우리는 안쪽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근처에 1, 2층에서나 보던 녹색 피부를 가진 몬스터 5마리가 보였다. 4층이다 보니 얼마나 강할지 약간 긴장했으나 2층에 있는 몬스터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수준이었다. 각자 한 마리씩 처리하고 마지막 남은 녀석의 도끼를 손쉽게 피하며 팔을 베어버리고 뒤로 돌아가 심장에 검을 찔러넣었다. 몬스터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뭔가 이상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형.”
서하에게 우리 셋의 시선이 모였다. 서하는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검을 먼저 휘두르며 앞으로 내질렀다.
“저거!”
서하가 검을 내지른 곳에 피가 튀더니 땅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3층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깔려 있던 노란 모래에 빨간 피가 자국을 남기며 제 존재감을 뽐내는 것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그 옆부분이 움푹 파였다. 어두운 공간에 무언가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고양이의 눈처럼 연두색 빛을 반짝거리는 두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높이가 일반적인 사람의 눈높이보다 훨씬 높은 곳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검을 뻗어 그 공간을 갈랐다.
“케엑!”
온몸이 노란색으로 뒤덮인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더니 모랫바닥으로 쓰러졌다. 꿈틀거리는 몬스터의 몸짓에 상진이 반사적으로 녀석의 목에 검을 찔러 넣어 마무리를 했다. 정확하게 약점을 노린 빠른 손놀림이었다.
시체의 모습은 기괴했다. 2미터는 훨씬 넘는 것 같은 몬스터는 온통 노란 가죽으로 뒤덮여있었고 팔다리와 몸통이 온통 비상식적으로 가늘었다. 양손 끝에는 검신이 조금 휘어진 모양의 단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 단검을 들어 올려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가지고 싶은 사람 있어?”
“형, 그거 가지려고요?”
“던질 때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챙겨 넣죠, 이석 씨는 검을 잘 던지시니까 도움이 될 겁니다.”
“다른 몬스터들 잡으면 다들 비상 무기로 하나씩 챙기죠.”
그렇게 다들 허리춤에 녀석들의 단검이 두 개씩 달랑거리며 매달리게 될 즈음이었다. 모두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입구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경계가 느슨해져 있었다.
“크흡!”
급작스럽게 뒤쪽에서 나타난 녀석 때문에 그쪽에 서 있던 서하를 밀어내다가 몬스터의 단검이 팔에 박혔다. 이 징그럽게 생긴 몬스터는 몸도 날렵하지만, 힘 또한 강했다. 뒤쪽에서 상진과 태경이 단검을 날려 녀석의 시야를 돌렸고 그사이 나는 팔에서 단검을 빼냈다. 둘은 아직 단검을 던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공격은 빗겨나갔다. 그 사이에 서하가 몬스터에게 다가가 목을 날려 처리했다. 단검에 찔린 팔이 시큰거리면서 아렸다. 나는 서둘러 근처에 있던 열매를 따 먹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죄송해요. 형. 제가 방심하는 바람에… 저 때문에.”
“네가 방심해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방심해서 그런 거야.”
“열매 하나 더 드세요. 제가 더 따왔습니다.”
태경이 품 안에 한 아름 따온 열매를 내 옆에 내려놓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해 보였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요?”
일행의 걱정 어린 눈들을 바라보며 나는 열매를 하나 베어 물었다. 다친 상처에 필요한 양보다 많이 과한 양이었지만 배를 채울 겸 몇 개 더 먹으며 생각에 빠졌다. 생각보다 쉬운 상대에 우리는 너무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막 떨어졌을 때 긴장해서 늘 주위를 살펴보던 때와는 한참 다른 태도인 것 같았다. 상처는 나아가고 있지만 고통을 기억하는지 팔이 계속 작게 떨리고 있었다. 제대로 공격하면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몬스터인데도 그런 몬스터에게 상처를 입었다.
“빨리, 빨리 5층 입구 찾죠.”
“괜찮아?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상진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만류하듯이 말했다. 태경과 서하도 내가 조금 더 쉬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여기서 열매 더 먹는다고 완벽하게 안 나아. 빨리 5층 올라가서 편하게 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형 말이 맞아요. 빨리 찾아서 올라가서 쉬어요!”
“그래요. 이석 씨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죠.”
“그래. 방심하지 말고 안전하게 입구 찾자.”
“응. 걱정시켜서 미안.”
혜진 일행과 다르게 몬스터를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몬스터들이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6층은 또 어떨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큰 불안감을 느꼈다. 혜진 일행은 4층을 무사히 통과해서 5층에 오를 수 있을까. 그들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처럼 방심하다가 상처 입는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향한 걱정스러운 눈빛을 애써 털어내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머니에 열매 좀 따서 넣어놓고 갈까?”
“좋아요!”
서하가 내 말을 반기면서 다치지 않은 손을 잡고 나무쪽으로 이끌었다. 그 뒤를 상진과 태경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우리는 왜 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층을 오르고 있는 것일까. 나는 괜히 서하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머리칼을 흩트렸다. 이대로 쭉 층을 오른다면 우리가 살던 곳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벌써 몇 달째 씻지도 못한 머리는 잔뜩 때가 껴 더러웠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이것이 기본이었다. 몬스터의 피와 바닥의 모래, 먼지 등으로 잔뜩 더러워진 몰골이 이곳에서는 별 이상할 것 없는 것이었다.
“이석이 형. 5층에 올라가면 씻을 수는 있겠죠? 나, 형이 내 머리 쓰다듬을 때마다… 흠흠.”
“더럽다고 느끼지 않으니까 괜찮아.”
“형은 뭐 맨날 다 괜찮대.”
“뭐야. 강이석, 나만 더럽지 않다고 한 게 아니었어?”
“배신감이 듭니다. 이석 씨, 저한테도 같은 말 했으면서….”
“아니, 나는 진짜 더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그런 건데? 더럽다는 말이 듣고 싶어?”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런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세 사람의 농성이 벌어졌다. 잠시 피곤한 표정을 지은 내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래, 그럼 다 더럽다고 생각할 테니까 아무도 내 옆에 오지 마.”
“뭐? 그런 게 어딨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럼 형. 이제 나 안 쓰다듬어 줄 거야?”
“응. 5층 올라가면 뭐 씻을 곳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씻기 전까지는 아무도 나 건드리지 마. 건드리기만 해봐라. 다들 속으로는 내가 더럽다고 싫어하고 있었던 거였어.”
“세상에. 형! 누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아니라면서 손사래를 치던 그들은 자신들을 외면하는 나를 보며 모두 풀이 죽어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추욱 늘어졌다.
“빨리 5층을 찾아야겠어.”
“그래요. 우리 빨리 입구 찾으러 가죠.”
“나는 이제 제발 씻고 싶어요.”
[레벨이 올랐습니다.]
[14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14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lv. 14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15퍼센트]
[체력: 164(+5)]
[근력: 165(+3)]
[마력: 258]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
[특성: 민첩- 민첩이 2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성: 독 내성- 8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21(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하아, 레벨업 했다.”
나는 마력에 2를 투자하고 10개는 근력에 나머지는 체력에 투자했다. 내가 부상을 입은 후부터 우리는 조그마한 것까지 신경 써가면서 이동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4층에 올라온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두 레벨업을 한 상황이었고 그동안 입구를 찾지 못한 것이 억울해져 각자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서 한탄하기 시작했다.
“언제 5층 올라가요?”
“입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하아, 자고 싶다. 이석아, 그렇지?”
“음….”
아무리 찾아도 입구가 없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다가 문득 녀석들의 키가 몹시 크다는 것까지 떠올린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설마….”
“뭔데?”
“설마, 나무 위라던지 둥굴 벽 위쪽에 입구가 있는 건 아니겠지?”
말을 마치자마자 무언가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솨아아아.
머리칼이 흔들리고 나뭇잎도 바람이 부는 쪽으로 잠시 기울어졌다 원상태로 돌아왔다.
“동굴에 바람이 불어?”
모두 시선을 들어 자신들이 기대어 앉은 동굴 벽 위쪽을 바라보았다.
“어?”
모두 짧은 신음을 뱉으며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진짜네. 벽 위에 입구가 있었어.”
벽을 올려다본 우리는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구멍을 보았다. 다른 곳은 대부분 찾아보았으니 입구가 있다면 저곳일 것이다.
“어떻게 올라가죠?”
“방법이 있어요.”
나는 몬스터에게서 구한 단검을 벽 깊숙이 박아넣었다. 손잡이만 남을 정도로 최대한 깊게 벽에 박아넣기 위해서 힘 조절을 하면서 계속 단검을 박아 넣으며 위로 올라갔다.
“조금 부족한데?”
촤아악!
노란 가죽을 가진 몬스터가 쓰러지고 양손 끝의 단검을 뺏어 부족한 부분의 벽에 마저 박아넣었다. 부족한 단검을 채우기 위해서 몇 번 더 몬스터 사냥을 하고 나서야 우리는 손쉽게 동굴 벽에 위치한 구멍 속으로 몸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드디어 5층이다.”
서하가 신나 하며 먼저 달려나갔다. 우리도 얼결에 서하를 따라 급하게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5. 진정한 유레이 5층
[유레이 5층입니다.]
[이곳은 몬스터들로부터 안전한 장소입니다.]
[최초로 5층에 도착했습니다.]
[보상으로 예지안 30초가 주어집니다.]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제한시간: 24시간]
[23:59:59]
“우와….”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 아닙니까.”
“하….”
모두들 저마다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5층을 구경할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건가?”
5층은 동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하늘엔 해가 서서히 뜨고 있는지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고 그 아래 5층 한가운데에는 깊고 맑아 보이는 호수가 하나 있었다. 그 주변은 수풀과 나무들이 빼곡했고 그 뒤쪽에는 새벽이슬을 머금은 잔디들이 가득했다. 햇빛이 호수 위에서 반짝이며 반사되고 있었고 아직 숨지 못한 반딧불이가 호수 위를 지나다니며 빛을 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유레이라는 곳에 갇혀있다는 것을 몰랐으면 그저 캠핑하러 놀러 왔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가 살던 세계와 비슷한 풍경에 지구로 돌아온 게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였다.
“밖은 아니겠지. 유레이 5층이라잖아.”
“그 소리는 6층도 있다는 소리죠.”
“6층… 꼭 올라가야 해요?”
“아니, 일단 쉬자. 그냥 푹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자. 보상 수령할 기운도 없어.”
“근데 어디서 자요?”
“왜 그래, 서하야. 이제껏 바닥에서 노숙해왔잖아.”
“아 참, 그렇지.”
“하아아….”
나는 아주 잠시 모든 걸 잊고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새벽녘 특유의 향이 코끝을 스치며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향 같은 것도 함께였다. 쓸데없이 이곳은 이런 것까지 현실감이 있었다. 몬스터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긴장했던 몸이 마구 느슨하게 풀어졌다. 우리는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잔디에 몸을 맡기고 누웠다.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오며 노곤하니 잠이 쏟아졌다. 이상한 사람들이 올라와서 해코지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잠시 내 정신은 긴장이 풀린 몸과 수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자꾸만 풀어지게 했다. 이렇게 잠들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몸과 정신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는지 떠오르는 해와 상관없이 모두 새근새근 숨을 내쉬면서 깊은 수면에 빠져들어 갔다. 이곳에 온 지 세 달, 몬스터도 없고 상쾌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이며 피곤함에 굳어져 있던 얼굴을 미세하게 풀어버렸다.
“허억!”
불이 붙은 채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쳤다. 번쩍 눈을 뜨니 새빨갛게 물든 저녁노을이 보였다. 벌써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나보다. 나는 멍하니 일어나서 주변을 돌아봤다. 잠이 달아나지 않아서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뜬 나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직 다들 잠에 빠져서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나다니 긴장이 완전히 풀렸나보다. 오랜만에 깊게 잠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일까 몸이 개운했다. 악몽을 꾸기는 했지만 나는 애써 악몽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옆에서 곱게 잠들어 있는 이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악몽이 악몽이 아니게 된 것에 대한 자조적인 웃음도 흘려보냈다.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려 손을 올리자 때가 잔뜩 낀 손과 축축한 이마가 느껴졌다. 그런 내 시야에 널따란 호수가 잡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 앞으로 가서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호수에 뛰어들었다. 물에 잠시 비추어 본 내 모습은 시커멓게 때가 묻은 몰골이었다. 첨벙 소리가 나며 여기저기로 물이 튀었다.
“푸하!”
시원한 강물에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뒤로 넘기면서 나는 저물어가는 빨간 해를 쳐다보았다.
해가 저물면 저 하늘에도 별이 떠오를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잠시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손을 움직여 더러운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청량한 물의 감촉이 온몸을 감싸는 것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대충 몸을 다 씻고 수영을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리고 머리를 안으로 집어넣었다가 물 밖으로 나오며 어느 잡지에서 보았던 모델을 따라 물을 촤아악 뿌리며 머리를 뒤로 젖힐 때였다.
“아….”
작은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본 곳에는 태경이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옆에 없길래 찾아다녔습니다.”
모델을 따라 하던 것이 들켜 멋쩍어진 내가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태경을 쳐다보았다. 태경과 내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태경의 눈이 순간 번쩍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처럼 이석 씨 옷을 훔쳐 가면 평생 같이할 수 있을까요.”
“네? 무슨 소리예요.”
태경의 어이없는 말에 나는 웃음을 흘려보내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냥 실없이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오래간만에 취한 휴식 덕분인지 조금 과한 것 같은 태경의 장난도 기분 나쁘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방금이요.”
“태경이 형도 들어와서 씻어요. 세 달을 못 씻었는데 찝찝하잖아요.”
“음, 지금은 조금 곤란하네요.”
곤란한 일이 뭐가 있는지 생각하던 나는 태경이 지금 씻기 싫은가보다 할 뿐이었다.
“나중에 씻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다른 애들은 일어났어요?”
“아뇨, 아직 꿈나라 삼매경입니다.”
“그럴만하죠. 그동안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는데.”
“이석 씨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습니까? 아, 일찍이 아닌가요?”
“…그냥, 일어나져서요.”
“그렇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네.”
악몽을 꾸었다는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아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더 이상의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태경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다시 수영을 했다. 태경의 시선이 계속 뒤에서 따라붙었지만 오랜만에 하는 수영을 포기할 정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풍덩-
태경이 마음을 바꿔 호수 안으로 들어왔는지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이석 씨.”
“형. 지금 씻기 싫다더니 들어왔네요?”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은 태경의 몸이 보였다. 문득 저 근육이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 아니면 여기에 와서 생긴 것일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러나 처음 만났던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면서 원래부터 운동을 열심히 하던 사람인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 시합할까요?”
“시합?”
“수영시합이요.”
태경이 얼굴에 멋들어진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는데 태경의 양 볼에는 예쁜 보조개가 푹 파여 있었다. 상진은 저렇게 미소지으면 오른쪽 볼에만 약하게 볼우물이 패였다. 잠시 다른 생각에 잠긴 나를 보던 태경이 다시 물어왔다. 그렇게 물어오는 태경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깔려있어 뒷덜미가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어때요?”
“뭐가요?”
“네? 수영시합 말하는 건데. 이석 씨. 무슨 생각하신 거예요?”
“아뇨. 안 했어요.”
태경의 말에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태경은 매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경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럼 내 탄탄한 몸을 보고 감탄한 건가?”
“하아….”
한숨을 쉬는 나를 보며 태경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이석 씨, 그래서 저랑 할겁니까?”
“수영시합 하겠다는 거죠? 콜.”
나는 씨익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태경의 시선이 내 가슴팍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어쩐지 나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이상하게 부끄러움이 드는 것 같아서 나는 더욱 어깨를 펴며 지지 않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자신만만하네요.”
“제가 이길 것 같아서요.”
“어딜 봐서요?”
“음, 제가 수영을 잘하니까요.”
“수영선수였습니까?”
“아뇨. 그냥 운동 삼아서 했었어요.”
“그럼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거 어떻습니까.”
“좋죠.”
“시합 후에도 이석 씨의 얼굴이 웃는 얼굴이어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시죠.”
“참고로 저 청소년 때 수영선수였습니다.”
“그건 반칙 아니에요?”
그의 걱정과는 달리 시합이 끝나고도 내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커다랗게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웃는 중이었다. 호수의 수면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치니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며 노을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냥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서 계곡에 놀러 온 것 같았다. 시합에서 졌더라도 유쾌한 기분이었다.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경은 답지 않게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숨기면서 나를 슬쩍 흘겨보았다.
“이제 그만 웃으시죠?”
“아니, 하하하! 수영하는 주변에 검은 물이 너무….”
나는 말을 하다말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태경은 다시금 제 몸에 물을 끼얹으며 서둘러 몸을 닦아내었다. 깨끗한 몸이 되었지만 그런데도 태경은 연신 자신의 몸에 물을 뿌리며 빡빡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나는 그런 태경을 보며 먼저 호수에서 나가 옷을 걸치려다가 다시 호수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호수 안으로 들어온 나는 들고 있는 옷을 물에 담갔다.
“너무 더러워서 못 입겠네요. 형도 빨리 와서… 형?”
“아, 네. 네.”
태경의 얼굴은 내가 그를 쳐다보며 웃을 때보다 더욱 붉어진 상태였다. 물 안에서 태경이 어기적거리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가 자신의 옷을 호수에 담가 빨기 시작했다. 귀까지 달아오른 태경을 보다가 나는 다시 옷을 집어 퍽퍽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래서 소원이 뭐예요?”
“네?”
“소원이요. 태경이 형이 시합에서 이겼잖아요.”
“나중에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조금 나중에 말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너무 늦으면 그 소원 무효로 해버릴 거예요.”
“네. 너무 늦지 않게 말하겠습니다.”
“네.”
조금 진지한 어조가 된 태경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고함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둘이 뭐해!”
상진이었다. 우두두 뛰어오는 상진의 옆으로는 서하가 아직도 졸린지 눈을 비비며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 상진은 옷을 벗지도 않고 호수 안으로 첨벙첨벙 걸어들어오더니 내 앞에 서서 요리조리 나를 돌리며 살펴보았다.
“뭐하냐? 남의 알몸을 왜 그렇게 봐?”
“왜긴! 네가! 네가….”
“내가 뭐.”
“아니, 네가 너무 예뻐서.”
“이상진. 죽을래?”
“미안해. 일어났는데 네가 없어서 너무 놀랐어.”
“그런데, 상진아.”
“응?”
“옷 벗고 빨리 씻어.”
내 시선을 따라 구정물이 잔뜩 나오고 있는 제 옷을 보던 상진이 기겁하며 서둘러 옷을 벗어 내렸다. 그런데도 상진의 몸에서 나오는 구정물은 멈추지 않았다. 나도 처음에 먼저 들어와 몸을 씻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창피한 상황을 맞았을 것이다. 일찍 일어나길 다행이었다. 태경이 그런 상진을 보며 슬며시 걸음을 뒤로 물렸다. 이제야 제가 아까 어떤 몰골이었는지 알게 된 태경은 다시 나를 보며 얼굴이 붉어졌다. 상진이 뒷걸음질 치는 태경을 발견하고는 씩씩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런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서하도 옷을 벗고 호수에 풍덩 뛰어 들어오더니 태경과 상진의 뒤를 쫓았다.
“나도 끼워줘요!”
“끼긴 뭘 껴!”
“그래, 이거 장난치는 거 아니야. 저리 가서 먼저 씻고 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연속이었다. 젖은 옷 말고는 입을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 옷을 걸치고 호수 밖으로 나온 나는 그들의 놀이를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서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젖은 앞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휴식과 평화가 너무 소중했다. 동시에 이렇게 평화롭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더 뼈저리게 와 닿았다. 동시에 잊고 있던 보상이 떠올랐다.
[11:00:02]
“아 맞다. 보상 수령.“
[예지안 30초가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변하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떡해? 어떡해! 빨리 신고해. 119, 112 다 불러!”
“부르긴 뭘 불러! 빨리 도망가!”
“어, 어! 또, 또야! 빨리 뛰어!”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서울 도심을 벗어나기 위해 뛰어다니는 중이었고 높이 솟아있던 빌딩들이 마구잡이로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중이었다. 도망가려던 차들이 서로 들이박아 도로가 막혀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붉은 불이 여기저기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불이 붙어 온통 새빨간 높은 건물의 창문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창문을 힘겹게 연 그들은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서 도와달라고 비명을 질러대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잠시 뒤를 바라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 앞으로 달렸다.
“안 돼!”
그러나 사람들은 내 몸을 통과해 바닥에 떨어졌다. 수박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수박이 깨지는 소리보다 훨씬 잔인하고 끔찍한 소리였다. 불과 함께 주변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폭발들로 서울 도심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그런 폭발의 중심지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유레이의 1, 2층에서 보았던 녹색의 피부를 가진 괴물이었다. 놈이 징그럽게 큰 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는 것 같은 얼굴로 내가 있는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상이 완료되었습니다.]
“아아! 아아아! 안 돼! 안 돼! 아아아악!”
환영에서 벗어난 나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있었다. 숨이 가빠지면서 현기증이 몰려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서 비틀거리며 제자리에 넘어졌다. 고개가 자꾸 고꾸라졌다. 울고 싶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생리현상으로 저절로 눈가에 눈물이 고이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속에서 물놀이를 즐기던 상진과 태경, 서하가 그런 나를 보고 허겁지겁 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온몸이 덜덜덜 떨리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내 앞에 와 있는 상진의 손을 맞잡을 때도 흐린 시야 때문에 몇 번이고 헛손질했다. 심장이 죄어오면서 몸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그대로 내 귀를 지나쳐 빠져나갔다.
“이석아!”
“정신 차려요!”
“왜, 왜 그래요…. 형!”
놀라서 소리치는 소리가 옆으로 흩날렸다. 붉은빛이 가득한 무너지는 건물들, 그 사이로 하늘하늘 끈 떨어진 연처럼 떨어지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흐리게 남은 허상의 이미지가 눈앞을 가득 채워갔다. 아닌가. 허상이 아닌 현실인가. 아니야. 예지안이니까 미래인가. 아닐 거야. 그래, 꿈이다.
“이거 꿈이야. 꿈이지? 거짓말이지?”
내 말에 상진이 등을 토닥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아아… 아….”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자꾸만 눈물이 눈가를 비집고 흘러나오려고 했다. 마음이 멍든 것처럼 아팠다.
“이거 때문이었어? 이거 때문에. 이 빌어먹을 것 때문에? 왜! 왜!!”
나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마구 질러대었다. 놀란 상진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나를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이미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상진이 그런 내 몸을 강하게 안아왔다. 나는 그런 상진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내 팔이 상진의 몸 여기저기를 강하게 치며 상처를 냈다. 심지어는 상진의 얼굴 여기저기에도 자잘한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이석아, 괜찮아. 괜찮아. 이석아.”
“왜! 왜! 아아악! 아…아… 엄마… 아빠, 누나… 나 왜, 나 왜 여기 있어?”
“이석아. 쉬, 쉬.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으니까. 그만, 이석아….”
“왜 죽었어? 왜, 왜? 왜! 다 이것 때문이야! 이 말도 안 되는 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흥분한 나를 처음 보았기 때문인지 상진은 몹시 놀란 것 같았다. 뒤에서 나를 껴안아 오는 상진의 몸도 나와 같이 떨리고 있었고 목소리는 습기가 가득하니 축축했다. 태경과 서하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몰라고 하고 있었다. 심지어 서하의 양 볼에는 눈물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하아… 왜… 흐으… 흐으윽….”
빠르게 내쉬고 있는데도 숨이 부족했다. 숨이 막혔다. 점점 시야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석! 어떻… 까….”
태경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던 것 같다. 그 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뜨니 한밤중이었다. 나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났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정신이 몽롱했다. 얼굴 위로 손을 가져가자 푸석해진 살결이 느껴졌다. 옆을 바라보니 모두 누워서 잠이 들어있었다. 나는 떫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비쳤다. 밤이라고 제법 서늘한 공기에 절로 어깨가 떨려왔다. 어느덧 내 주변은 온통 숨 막히는 서늘한 고요가 내려앉은 채였다. 순간 작은 숨소리와 함께 그 정적이 산산이 조각나면서 비산했다.
“이석아. 일어났어? 좀 괜찮아?”
나는 시선만 그대로 돌려 목소리의 주인인 상진을 바라보았다.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 잠시 죄책감이 얹혔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고장이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진이 그런 나를 보면서 옅은 미소를 비쳤다.
“상처는 열매 먹으면 금방 나아. 걱정 안 해도 돼.”
“응.”
“이석아. 나 기다려야 돼?”
“그렇다면?”
“박자 맞춰서 기다려야지.”
까만 눈동자가 올곧게 내 눈을 마주쳐왔다. 잠시 동안 눈을 꾸욱 내리감았다가 뜬 나는 상진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기절한 사이 저들 모두 목소리가 말한 보상을 받았을 테고, 내 사정을 아는 상진은 내가 왜 그런 반응을 했는지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어두운 가짜 밤하늘에는 언젠가 누나가 내게 설명해주었던 카시오페아 별자리가 밝게 떠올라 있었다.
나는 호수 앞에 가장 큰 나무 앞으로 걸어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상진도 내 옆으로 와서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그런 상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나는 하늘에 밝게 떠 있는 별자리를 외면했다. 어쩐지 내 마음을 농락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상진의 커다란 손이 자연스럽게 내 머리 위에 얹히더니 앞뒤로 슬슬 움직였다.
“괜찮아.”
“아니, 아니 상진아. 나 안 괜찮은 것 같아.”
목이 쉬었는지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상진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것을 느끼면서 나는 상진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상진아. 나 이제껏 내가 괜찮은 줄 알았어. 그래서 울지도 않았어. 시간이 지나고 그 사건에 대해서 무뎌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어.”
어느새 내 목소리는 온통 축축하게 젖어 흔들리며 나오고 있었다.
“그냥 익숙해진 거야. 아픈데, 나는 아픈 게 익숙해져서 아픈 줄 몰랐던 거야.”
“응.”
“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상진의 손이 있던 내 머리 위로 상진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고르게 들려오는 상진의 숨소리가 어쩐지 위안이 되었다. 나는 마음 놓고 상진의 어깨에 눈물을 흘렸다. 토닥토닥 어깨 위로 상진의 따뜻한 손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계속 같이 있으면 돼. 굳이 뭘 할 필요 없어.”
눅눅하게 젖은 숨결이 다시금 내게 와 닿았다. 눈물이 흐르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보통 사람보다 높은 그의 체온이 점점 내게 번져왔다. 잠시 상진의 어깨에서 떨어져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넋을 놓고 달빛에 은은히 빛나는 상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혹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장례식에서 상진을 본 순간부터 상진이 나를 구하러 온 구원자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그냥 봤어. 기분 나빴어?”
“그럴 리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상진의 얼굴에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가슴 위에 슬며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중학교 때 스쳐 지나갔던 짧은 풋사랑의 내음과 비슷했다.
“진짜로 이 미친 유레인지 뭔지 때문에 우리 가족이 죽은 걸까?”
“…이석아….”
“우리는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왜 층을 올라가야 해? 올라가면 나갈 수 있을까? 나가면, 그러면.”
“내일부터 다시 올라가자. 10층, 30층, 100층 어디까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응.”
“빨리 올라가서 막자. 우리가 다 구하면 돼.”
“나갈 수 있어?”
“응. 나갈 수 있어. 그럴 거야.”
“나 쓰러져서 놀랐지?”
“놀란 것보다 걱정이었지. 오히려 너 옮기고 커다란 사내 셋이서 홀딱 벗고 마주 앉아있는데, 거기서 놀랐어.”
“풋, 상상하니까 웃기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나는데….”
강하게 상진의 팔뚝을 내리쳤다.
“아야!”
“조용히 해.”
“알겠어. 자기야.”
“또.”
“아! 강이석, 손 진짜 매워.”
“푸흐흐.”
마지막에는 둘이 마주 보고 웃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것이었다.
“빨리 가서 자자.”
“자기, 저 둘은 저기에 두고 우리 둘만 여기서 자면 안 돼? 아야!”
상진은 끝까지 매를 벌었다. 그러나 그런 상진 덕분에 무거워 숨도 쉬기 힘들었던 기분은 조금 가셨다.
“고마워.”
“뭐가.”
“그냥. 가만히 생각해보면 힘들 때마다 네가 내 옆에 있었더라고.”
“당연한 걸 가지고.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이석아.”
상진이 부드럽게 웃었다. 약하게 볼우물이 팬 웃음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우리를 여기에 끌고 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뜻대로 두지 않을 거다. 강해져야 했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 2권에서 계속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 2
[목차]
〈2권〉
6. 유레이 9층 보스 몬스터
7. 진정한 유레이 10층
8. 유레이 14층 보스 몬스터
9. 사라진 동료
10. 몬스터 노름판
11. 마주한 살인자집단
12. 던전의 발견
6. 유레이 9층 보스 몬스터
푸슉!
은회색 검신이 외눈박이 원숭이의 머리를 관통하여 빠져나왔다. 나는 그런 원숭이를 발로 밀어내며 검을 빼내고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나무에 꼬리를 말고 매달려 있는 또 다른 외눈박이 원숭이를 공격했다.
촤아아악!
검이 녀석의 목을 가르며 초록색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것을 피해 뒤로 한걸음 옮겼지만 결국 온몸에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썼다. 9층까지 오르는 동안에도 우리는 별다른 위험 없이 싸울 수 있었다. 아직 전투에 대한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어쩐지 나는 그것이 너무 불안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6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16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
[lv. 16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15퍼센트]
[체력: 181(+5)]
[근력: 185(+3)]
[마력: 26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
[특성: 민첩- 민첩이 2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성: 독 내성- 9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18(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포인트를 많이 못 모았네.”
나는 근력에 10을 투자하고 나머지는 체력에 투자하며 중얼거렸다. 서하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우리 언제 내려가서 쉬어요? 형, 나 힘들어요.”
우리는 한 달 반째 내려가지도 않고 쉼 없이 층을 오르는 중이었다. 운이 좋게 8층에 폭포수가 떨어지는 계곡이 있어서 몸을 씻을 수 있었지만 잠은 늘 부족했다. 언제 몬스터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곳에서 잠을 자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9층이니까 한 층만 더 올라가면 쉴 수 있어. 내려가는 것보다 그게 빠를 거야.”
“그… 네, 형.”
서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무 아래로 가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런 서하를 바라보던 태경과 상진이 내 옆으로 와서 말을 건넸다.
“조금만 마음을 편하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괜찮지만, 층을 오를수록 조급한 마음이 위험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요. 탓하는 게 아니라 이석 씨를 위해서요.”
“네, 고마워요.”
“우리 쉴 때, 넌 쉬지도 않고 몬스터 잡잖아. 그러다간 정작 중요할 때 몸이 아니라 정신이 피로해서 못 견뎌. 이석아.”
“서하는 혜진 씨 일행이 5층에 올라왔을까 봐 투정 부리는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잘 달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태경은 서하에게 다가가 조금만 힘내라면서 격려하며 가벼운 농담을 걸었다. 상진은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나뭇잎을 가져와 바닥에 깔아주었다.
“나뭇잎이 생각보다 푹신하더라고.”
“고마워.”
서하에게는 미안했지만 10층으로 가는 입구를 찾으면 그때 밑으로 내려갔다 왔으면 싶었다. 어느덧 이곳에 온 지 다섯 달이 흘렀다. 9층에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도 위로 올라가는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동굴 벽이나 다른 곳에 입구가 있을까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도통 입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은 조급해졌고 나는 쉬는 틈에도 주변을 둘러보며 입구를 찾아다녔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충분히 무리하는 것처럼 보일 만했다. 한참을 쉬면서 입구의 위치를 추측해볼 때였다. 커다란 몬스터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크허아아앙!”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을 정도의 위험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게다가 9층에 있는 외눈박이 원숭이는 보통의 원숭이와 같은 소리를 내니, 저 소리는 분명히 다른 몬스터의 소리가 분명했다.
[9층의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아직까지 1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원이 있습니다.]
[층을 오르십시오.]
[강제적으로 한 달마다 유레이가 한 층씩 폐쇄됩니다.]
[9층에 도착한 인원이 5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난이도가 조정됩니다.]
[난이도가 다섯 단계 상승합니다.]
[보스를 잡기 전까지는 9층의 모든 입구가 폐쇄됩니다.]
“5명?”
“우리 말고 한 명 더 있다는 건데.”
“혼자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거잖아요.”
“형들, 그것보다 보스 몬스터 난이도가 상승했다잖아요. 난이도를 내려줘야지 올린다니 말이 되는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외눈박이 원숭이가 미친 듯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어, 어? 뭐야?”
“이것들 지금 도망가는 것 같은데?”
외눈박이 원숭이들이 도망가다 말고 우리를 발견했다. 호전적인 녀석들은 도망가다가도 우리를 발견하고 멈춰 섰지만, 그렇지 않은 녀석들은 우리의 뒤쪽으로 도망갔다. 이 동굴 안에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있었는지 우리는 정신없이 검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이었다.
쿠웅.
커다란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녀석들은 우리가 검을 휘두르든지 말든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버렸다. 자기들끼리도 넘어진 녀석들을 밟고 넘어가기도 하며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끽끽끽! 끼이익!”
외눈박이 원숭이 몇 마리가 우수수수 우리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살아남은 몇 마리는 우리 뒤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고 죽은 녀석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이게 말이 돼?”
“보스 몬스터가 이런 거였어요?”
저 멀리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스 몬스터의 반짝이는 머리가 보였다. 나무 위로 머리가 하나 불뚝 솟아있어 그 몬스터가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의 입에는 외눈박이 원숭이 꼬리들이 잔뜩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으드득으드득.
녀석이 입안에 든 외눈박이 원숭이를 씹어먹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돌연 보스 몬스터가 두 손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크허어어엉!”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포효소리가 들리며 녀석이 들어 올렸던 두 손을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콰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는 착시가 일었다.
“가자.”
“후읍.”
내 말에 태경과 상진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고 서하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내뱉었다.
“후아. 우리 살아남아요, 꼭.”
“응.”
그런 서하에게 대답하며 녀석에게 다가가는 동안 녀석은 다시 한번 포효하며 땅을 내리쳤다.
콰아앙!
근처까지 다가가자 이미 누군가가 녀석과 싸우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무식하리만치 몸을 내던지며 보스 몬스터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새끼야. 너보단 내가 강해!”
그 사람이 다시 한번 보스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은 녀석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왔다.
“커헉!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 한 대 때렸다고 으스대지 마라. 켁켁. 어?”
그와 우리의 눈이 딱 마주쳤다. 아픈 배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쓰고 있던 그가 우리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여어. 지원군 등장!”
그렇게 말하며 그 사람은 우리에게 윙크까지 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선배. 역시! 난 선배가 살아있을 줄 알았다니까?”
“너는….”
“속상하게 벌써 나 잊은 거 아니죠? 그렇죠? 잊은 거면 나 좀 화날 것 같은데.”
잊을 리가 없었다. 말 안 통하던 또라이였으니까. 이서호,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뒤에!”
서호가 능숙하게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내고는 다시 이쪽을 보고 놀란 표정을 해 보였다.
“오랜만이네. 내 동생.”
“동생?”
서호가 쳐다보는 곳에는 서하가 서 있었다. 이서호, 이서하. 성도 같고 이름도 비슷하다지만 설마 형제일 줄은 몰랐다.
“설마 했는데. 너까지 여기 떨어졌냐? 운도 더럽게 나쁜 녀석.”
“그러는 형은.”
놀란 눈으로 서하를 바라보던 나는 연신 내리쳐지는 보스 몬스터의 공격에 정신을 차렸다.
“인사는 나중에 해!”
나를 따라서 상진과 태경, 서하가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보스 몬스터를 잠시 살펴보던 내가 외쳤다.
“눈!”
모두 내 말을 알아듣고 급하게 움직였다. 녀석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지만 녀석은 끈질기게 서호만을 노리고 있었다.
“와, 이 새끼 봐라. 내가 너 한 대 때렸다고 나만 쫓는 거야? 근성 있는 놈인데?”
서호가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싸울 때조차도 저런 태도일 줄 몰랐던 나는 황당하기만 했다.
“쟤가 서하 형이라고? 너무 다른데?”
황당한 녀석의 언행을 마주한 상진이 나를 향해 물었지만, 대화만 잠깐 해봤던 내가 서호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서하에게 물어볼 것이지 왜 나에게 묻는단 말인가.
“옆에 조심해! 목도 약점이야!”
보스 몬스터는 거대한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색은 녹색이었고 울퉁불퉁한 뾰루지 같은 것들이 잔뜩 붙어있었다. 입안으로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잔뜩이었다. 몸은 울퉁불퉁한 근육들로 가득했는데 녀석이 내리친 바닥은 구덩이처럼 움푹 팬 채였다.
“호우! 오랜만에 진짜 재밌는데! 지원군도 왔겠다. 제대로 놀아보자.”
보스 몬스터의 주먹을 피해 다니는 서호는 신이나 보였다. 간간이 검을 휘둘러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그런 서호를 미끼로 쓰면서 우리는 몰래 보스 몬스터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이제 뒤에서 약점을 발견하고 급습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문제는 갑자기 보스 몬스터의 패턴이 변했다는 것이다.
“크허어어엉!”
“아프지? 아프지? 아플 만하지 그럼. 하하하!”
서호가 녀석의 급소를 공격한 것이었다.
쿵쿵쿵쿵쿵!
녀석이 땅에 발을 구르며 주변 일대를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발이 닿는 곳은 무조건 땅이 깊게 파이면서 멀쩡한 상태로 버티질 못했다. 그 주변에 있던 우리는 기겁하면서 몸을 뒤로 피했다.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거리는 바람에 뒤로 빠지는 것이 배는 어려웠다. 녀석이 두 발을 들어 서호 쪽으로 점프했다. 그 큰 덩치로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모두 서호를 보며 눈을 크게 뜰 때였다.
“나 여기 있지롱~”
어느새 우리 옆에 선 서호가 보스 몬스터를 보면서 약 올렸다.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한 것이었다. 서호의 목소리가 들리는 이쪽을 쳐다본 보스 몬스터가 화난 듯이 포효하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미친듯한 속도로 서하와 우리가 있는 쪽으로 내달려오기 시작했다.
“이 멍청이가 우리 쪽으로 오면 어떡해!”
서하가 서호에게 크게 화를 냈다. 서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태연하게 말을 할 뿐이었다.
“선배가 보고 싶었으니까 그렇지. 나한테 따지기 전에 도망가.”
그리고는 재빠르게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땅이 요동쳤다. 보스 몬스터가 두 손을 넓게 벌려 목표 구분 없이 손을 휘적거리며 땅에 처박았다. 땅이 흔들려 멀리 피하지 못한 내 코앞으로 녀석이 빠르게 짓쳐 들었다. 정말 덩치에 맞지 않는 빠르기였다. 하지만 녀석과 가까워진 만큼 녀석의 약점인 눈이 나에게 더 가까이 노출되었다. 나는 익숙하게 검을 들어 녀석의 눈에 마력을 방출하고 곧 닥쳐올 고통에 대비하며 보스 몬스터의 주먹을 검으로 막아내었다.
쾅!
“큽!”
어마어마한 고통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보스 몬스터가 제 눈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미처 쓰러지는 녀석을 피하지 못한 나는 녀석의 몸통에 맞고 멀리 뒤로 날아갔다.
“컥!”
“크아아아아학!”
놀란 상진이 내 쪽으로 달려왔고 서하와 태경이 동시에 쓰러진 녀석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보스 몬스터가 그들을 피해 몸을 굴려 옆으로 빠져나갔다. 공격을 하던 이들이 녀석의 몸에 부딪쳐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우리가 보스 몬스터의 장난감도 아닌데 우리는 녀석의 공격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지금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은 서호 하나뿐이었다. 우리의 검에 자잘한 상처를 입고 있기는 하지만 보스 몬스터의 몸은 정말 단단했다. 그래도 피해는 입은 것인지 보스 몬스터의 몸이 어느 순간에 진한 진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뭐냐? 너 지금 진화하냐? 더럽게 매력적이네.”
서호가 또 상황에 맞지 않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눈동자는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긴장은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점점 색이 진해지는 녀석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마력을 마구잡이로 방출하며 녀석에게로 달렸다. 마력 방출에 맞은 녀석의 몸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녀석이 나를 돌아보며 팔을 휘둘렀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발을 돌리는 순간 녀석의 팔이 교묘하게 휘더니 예상치 못했던 방향에서 나를 덮쳤다. 특성 덕분에 녀석의 움직임이 보였고 민첩도 2배였지만 녀석을 피하려던 자세로 저 공격을 완벽하게 회피하기란 불가능했다.
“아악!”
나는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며 녀석의 손에 잡혀 위로 들렸다. 쥐고 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앞에 녀석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위험하다는 직감이 마구 피어올랐다. 뒤쪽에서 상진과 태경, 서하 뿐 아니라 서호까지 나를 불러대며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무슨 방법이. 이걸 막을 방법이, 마력을 방출하면…. 검이 없는데 어떻게….’
녀석은 자신을 공격하는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나만 바라보았다. 나를 먼저 죽이려는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모든 장면이 느리게 보이며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두 번째 스킬을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 스킬 영웅의 기운을 사용합니다.]
[두 번째 스킬을 깨달아 세 번째 스킬이 열립니다.]
파아아!
마력이 충만하게 느껴지며 회색이 섞인 흰 기운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내 몸을 둘러쌌다. 보스 몬스터가 갑작스럽게 고통스러워하며 나를 잡고 있던 손을 폈고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강력한 둔통이 몸에 퍼질 것을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버틸 만할 정도의 고통만 있을 뿐이었다. 의아함에 몸을 내려다보는데 내 몸에 퍼진 하얀 기운이 장미의 가시처럼 여기저기 돋아나 있었다.
“이게 뭐….”
“이석아!”
“대박! 미쳤다! 선배 존나 예뻐.”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다시 보스 몬스터의 손바닥이 내 위쪽에서 땅으로 내려꽂히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그 손을 막았다. 보스 몬스터가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뒤쪽으로 한발 물러났다. 그 뒤로 상진의 검이 날아와 보스 몬스터의 손에 상처를 입혔다. 검은 그러고도 한참을 내 주변에서 맴돌며 떠 있다가 떨어졌다. 상진도 자신의 스킬을 깨달은 것이다.
“하아아!”
태경이 녀석의 굽혀진 다리를 밟고 녀석의 멀쩡한 반대편 눈을 노렸다.
후웅!
바람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빠르게 검이 움직였다. 그때 그 뒤에서 검 하나가 더 날아들어 태경의 검과 함께 녀석의 눈에 박혔다. 상진이 다시금 검을 움직여 보스 몬스터에게 날린 것 같았다.
푸욱!
“크하아아아앙!”
녀석이 괴로워하며 두 눈을 부여잡았다. 마침 녀석의 약점인지 급소 부분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달랐다. 이미 검은 떨어뜨린 지 오래였고 내 손에는 하얀 마력만이 감싸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서하의 비호와 함께 바닥으로 착지해 뒤로 빠지는 태경을 보면서 나는 다시 보스 몬스터의 급소 쪽으로 달렸다. 코앞에서 휘둘러지는 다리를 보면서 나는 그것보다 반 박자 빠르게 앞으로 몸을 들이댔다. 그렇게 녀석의 다리를 통과해서 급소 쪽에 다다른 나는 그대로 손을 위로 찍어 올렸다. 손에 맺힌 가시 모양의 흰빛이 그대로 푸욱 박혀 들어갔다.
“캬하아악!”
아까와는 다른 비명 소리가 들리며 녀석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쿠웅!
커다란 덩치가 넘어가는 바람에 뒤에 있던 나무들이 우수수 뿌리가 뽑혀 나오거나 쓰러졌다.
“더럽게 아프겠네. 저번도 그렇고 역시 선배! 와, 나 진짜 소름 돋았어. 진짜 죽이잖아!”
몬스터가 뒤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머리가 핑글 도는 느낌이 들었다. 하얗게 피어올랐던 마력이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탈진한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괜찮습니까!”
태경이 바로 내 쪽으로 뛰어와서 쓰러지려는 내 몸을 붙잡았다. 서하와 상진, 서호는 아직까지 꿈틀거리는 보스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마침내 녀석의 목이 몸에서 떨어졌다.
“서하. 내 동생이지만 여기 일행들 중에서 제일 쪼렙이네. 이래가지고 살아남겠어?”
“뭐야!”
[9층의 보스를 잡았습니다.]
[폐쇄되었던 9층의 입구가 다시 열립니다.]
[10층으로 가는 입구가 개방됩니다.]
[9층 보스를 잡은 5명에게 보상이 지급됩니다.]
[랜덤 무기 상자, 랜덤 방어구 상자, 능력치 30개, 레벨업 구슬(랜덤 포인트),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 중에서 선택 가능합니다.]
[선택은 지금 즉시입니다.]
목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우리가 보스를 죽였던 장소에 떡하니 10층으로 가는 입구가 열렸다.
7. 진정한 유레이 10층
[레벨이 올랐습니다.]
[17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17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는 레벨이 올랐다는 목소리까지 듣고는 오랜만에 또 한 번 기절했다.
[보상이 랜덤으로 선택되어 지급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이 선택되었습니다.]
[아공간 주머니에 지급됩니다.]
기절하기 직전 목소리가 들렸다. 치사하게 보상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보상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와서는 너무 자주 쓰러지는 것 같았다. 보상 선택도 하지 못했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10층에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5층과 약간 다른 형태일 뿐 크게는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띵하게 아파오는 머리를 붙잡고 나는 일어나 앉지도 않고 누워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으.”
“이석아. 일어났어?”
나는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대답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몸살이 난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두통도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앓고 있었을까. 조금 버틸 만해져서야 나는 일어나 앉아 주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태경과 상진은 나를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서하와 서호는 저들끼리 말다툼을 하느라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이석이 너 반나절이나 누워있었어.”
“그렇게 오래?”
“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형! 일어났어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인 줄 알았다니까요. 제가 뽀뽀해서 깨워주려고 했는데 셋이서 어쩜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막는지. 진짜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사람이 쓰러져서 깨워주겠다는데 그렇게 서슬 퍼렇게 쳐다보면서 검을 드는 게 어딨어요. 그렇죠? 네? 선배.”
“조용히 해! 형 아직 머리 아파하잖아.”
“선배, 병약미도 매력 있어요. 아, 진짜 쓰러져 있는 것도 예쁘네. 어떡하지. 아까 하얗게 변했을 때도 나 미치는 줄 알았어요. 막 없던 것도 설 것처럼, 아. 난 있긴 하지만. 오해 마요. 그만큼 장난 아니었어.”
순간 모든 시선이 서호에게 향하며 날카로워졌다. 서호는 그런 이들 중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리가 다시 띵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무의식중에 상진의 손을 잡아 이마에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뜨거운 손이 이마에 닿자 오히려 더 안 좋은 것 같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태경이 재빨리 자신의 손을 내 이마에 얹었다.
“제 손이 상진이보다 시원해서 더 도움이 될 겁니다.”
태경의 말대로 그의 손이 시원해서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서 눈을 떴다. 옆에서 날 선 눈초리를 보이는 상진의 얼굴이 보였다. 눈치를 보면서 나는 슬쩍 태경의 손을 떼어냈다. 그런 나를 보고 상진이 만족스럽게 슬쩍 웃었다. 그 뒤로 서호의 양 눈동자가 빛을 받은 듯 마구 반짝였다.
“와우. 으응? 으응? 어? 그런 거야? 와, 내 라이벌들! 장난 아니네!”
서호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서하를 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서하가 그런 서호를 끌고 내게서 멀어졌다.
“아, 왜! 왜! 재밌는데. 왜! 놔봐. 안 놔? 어? 놓으라고 했다. 나도 저기 끼어 있어야 한다고. 선배 곤란해하는 거 엄청 귀엽다고!”
“이석이 형이 왜 네 선배야! 조용히 하고 따라와.”
“아 왜, 그게 불만이야? 그럼 이석이 형아라고 할게. 됐어? 놔봐. 좀!”
“왜 이석이 형이 네 형아야! 조용하고 따라와.”
“나보고 뭐 어쩌라고! 야. 나 지금 좀 열 받으려고 한다? 나 선배랑 놀고 싶다고! 아! 이서하! 야!”
나는 그런 그들을 모두 무시한 채 능력치를 확인했다.
[lv. 17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15퍼센트]
[체력: 189(+5)]
[근력: 195(+3)]
[마력: 26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마력에 담긴 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영웅의 기운의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
[특성: 민첩- 민첩이 2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성: 독 내성- 9.5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32(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아, 이렇게까지 아팠던 이유가 있었다. 스킬 사용의 부작용이었다. 아무리 게임 같은 현실이라지만 스킬을 사용하는 데 부작용까지 있는 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능력치를 마저 올렸다. 마력에 10개 근력과 체력에 11개씩. 체력은 200 근력은 206으로 드디어 체력과 근력도 모두 능력치가 200이 넘어갔다.
[능력치에 맞춰 몸이 조정됩니다.]
안 그래도 아픈데 뼈가 어긋나는 것 같이 잠시 삐걱거리면서 움직이더니 온몸이 뻐근해졌다. 한동안 온몸의 뼈가 그렇게 움직이다가 다시 원상태로 우두둑하면서 맞춰졌다. 뼈 어긋나는 소리에 상진과 태경이 슬쩍 내 옆에서 멀어진 것을 보며 물었다.
“큭! 다들 능력치 200 넘었어?”
“네. 이석 씨랑 똑같이 겪었습니다.”
“응. 서하는 아직 못 넘겼는데 레벨 하나만 더 오르면 넘길 것 같아.”
더 높은 층으로 올라갈 기반이 탄탄하게 마련되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 지급되었다는 보상도 꺼내 보았다. 구슬 위에 작게 설명창이 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
[설명: 정체를 알 수 없다.]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설명에 미간에 슬쩍 주름이 생겼다.
“뭐야, 이거.”
알 수 없는 구슬에 대한 것은 뒤로하고 우리는 몸부터 깨끗이 씻어냈다. 언젠가는 제 쓰임새를 찾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여기저기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에 그대로 옷을 입은 채 씻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씻는 탓에 개운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위층으로 올라갈지 말지 고민하던 우리는 결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11층으로 향했다. 서호는 몸을 씻고 난 후 내 몸을 보지 못해서 아쉽다며 한바탕 난리를 피우다가 휴식을 취하는 우리를 보고는 먼저 11층으로 올라간 지 오래였다. 혼자서 겁도 없는지 거칠 것 없이 움직였다. 서호를 따라가지 않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서하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원래 저래요. 그냥 가만히 있다 보면 나타나서 얼굴 잠깐 보여주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그래요.”
“그래도 여기는 몬스터도 나오는데….”
“괜찮아요. 위험 하나는 기똥차게 알아채니까 자기가 알아서 잘 피해 다닐 거예요.”
“너도 참 힘들겠다.”
“그러게. 서하 네 형 참.”
상진과 태경이 어쩐지 지쳐 보이는 서하를 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제 가족의 생사를 알아서인지 그래도 이제껏 서하의 얼굴 한구석에 남아있던 그늘이 조금은 가신 것 같았다.
“우리도 11층으로 올라갈까요?”
“그래.”
[유레이 11층입니다.]
11층으로 발을 들인 우리는 조금 놀랐다. 9층까지는 동굴 같은 장소였는데 11층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11층은 2차 시험 장소와 비슷하게 사막의 형태로 되어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걸음을 옮겨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모랫바닥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솟구쳐오르더니 우리를 공격했다. 그것들은 해골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살점이 붙어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9층의 몬스터들보다 배는 강하게 느껴졌다. 해골들의 양손은 길쭉하고 뾰족하게 잘 벼려져 있었다. 녀석들은 검 대신 그것으로 우리를 공격해왔다.
200이 넘은 근력 때문일까. 우리는 비교적 쉽게 공격을 막아내며 녀석들의 뼈를 잘라낼 수 있었다. 서하만이 아직 부족한 능력치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지만, 뼈를 가르지 못할 뿐 녀석들의 갈비뼈 사이에 붙은 심장은 잘도 조각내고 있었다. 녀석들은 아무리 자르고 공격해도 쓰러지지 않았는데, 갈비뼈 사이에 숨겨져 있는 심장을 공격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끼야아아아악!”
녀석들의 듣기 싫은 비명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녀석들은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래 속에서 마구잡이로 솟구쳤다. 먼저 출발한 서호는 이런 녀석들을 잘도 처리하며 움직이고 있구나 싶었다.
푸욱!
막 마지막 녀석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고는 가볍게 땅에 발을 내딛는 태경을 보고 우리는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와, 진짜 징하다.”
“언제까지 나오려고….”
“나 진짜 해골 노이로제 걸릴지도 몰라요. 형.”
태경은 좀처럼 보기 힘든 한숨을 내쉬었고 상진과 서하는 혀를 내빼고는 헥헥거리고 있었다.
그 꼴이 꼭 더위에 지친 강아지 같았다. 더운 사막의 날씨 속에서 가죽 방어구를 찬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사막이라서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려서 다시 돌아갈 입구를 찾지도 못하고 우리는 며칠째 이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다행히 이곳에도 나무에 열매가 종종 열려있어서 굶지는 않아도 되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목에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다가 묘한 눈으로 나를 보는 상진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 너, 땀이. 아니, 어, 언제쯤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풉!”
상진이 삐걱거리면서 어색한 말투로 대답하자 옆에 있던 서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상진이 그런 서하에게 화를 내며 토라졌는지 뒤로 돌아앉았다. 그 옆에서 태경도 다리를 꼬더니 그 위에 손을 얹으며 내 쪽을 살짝 외면했다.
“왜? 뭐야?”
서하는 그 둘을 보면서 잠시 경멸의 시선을 보내다가 내 쪽으로 와서 나를 끌어당겼다. 앞머리 끝에 달랑거리는 땀을 얼굴을 흔들어 떨어트린 나는 서하를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짐승은 상대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누군데?”
“와, 이석이 형. 눈치 더럽게 없네?”
“너, 형한테!”
“아, 몰라. 몰라. 시간 좀 걸릴 거 같으니까 나 좀 눕게 다리 좀 빌려줘요. 형.”
“시간이 걸리다니?”
배시시 웃으면서 애교를 부리는 서하에게 더운데 무슨 다리 베개냐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래도 다리를 내어주었다. 서하가 귀엽기는 참 귀여웠다. 그것과는 별개로 서하가 계속 무언가를 숨기는 기색이길래 물어봐도 도무지 대답을 해주지 않아 가슴이 답답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상진과 태경이 벌떡 일어나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서하와 나도 일어나서 그 뒤를 따랐다.
“찾았다!”
여전히 발아래에서 튀어나오는 해골들 때문에 좀처럼 속도가 나지는 않았지만 얼굴은 밝았다. 입구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신이 나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댔다. 우리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뼈만 남은 해골들이 마구잡이로 쓰러졌다.
“드디어 탈출이구나!”
다들 기뻐서 얼굴에 함박미소가 가득이었다.
[유레이 12층입니다.]
“여기는 아예 대놓고 있네.”
“우리 빨리 15층 올라가서 쉬어요.”
“아자. 아자!”
무기를 고쳐 쥐고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수백 개는 됨직한 붉은 눈을 향해 달려나갔다.
* * *
“허억, 허억.”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부닥친 건지 모르겠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우리는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삐걱이는 다리를 재차 채찍질하면서 미친 듯이 달렸다. 온몸이 쉬게 해달라며 아우성쳤다.
철퍼덕.
땅 위로 솟아있던 나무줄기를 미처 보지 못했는지 내 옆에서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연아!”
지연이었다. 나는 달리던 걸 멈추고 넘어진 지연의 옆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응. 빠, 빨리. 가자.”
“여기 있었네? 예쁜이들.”
그 잠깐 사이에 따라잡혔다. 아슬아슬 유지되던 균형이 조각났다.
“퉷, 좆까. 새끼야.”
“입이 그렇게 험해서야. 어디 예뻐해 줄 맛이 나겠어?”
“형님! 제가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아서라, 그러다가 또 당해서 나만 곤란하게 하려고.”
“그, 그게.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모가지 날아가기 싫으면 닥치고 뒤로 가 있어. 거기가 네 자리야.”
“네, 넵!”
녀석의 동료가 잔뜩 쫄더니 딱딱하게 굳어 뒤로 향했다.
“혜진 씨! 지연 씨!”
나머지 일행들이 달려가던 와중에 사라진 우리를 눈치채고 돌아왔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눈앞에 있던 사내가 커다란 도끼를 제 어깨에 얹고는 툭툭 움직였다. 그러더니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다.
“캬, 눈물겨운 동료애. 멋있네.”
옆에서 지연이 내 팔뚝을 강하게 잡아 왔다. 그 뒤로 이환과 한동훈, 성혜연이 차례로 다가와 서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에 온 뒤로 늘 함께했던 터라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흔들리던 마음이 곧게 섰다.
“그래, 새끼야. 넌 경험도 못 해볼 동료애다. 멋있지?”
나는 눈앞의 사내를 비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비아냥거리며 말을 내던졌다. 사내의 눈썹 한쪽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래, 멋있어. 자. 박수도 쳐줄게. 근데 그거 알아? 그것도 여기서 마지막이야.”
“글쎄….”
“부정해도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곧 말이야.”
“아, 그거 알아? 지금 네가 한 대사, 악당이라면 꼭 빼먹지 않고 하더라? 그것도 곧 죽어 나자빠질 그런 되도 않는 악당이 하더란 말이야. 두고 보자.”
지연이 마지막 ‘두고 보자’라는 말을 과장하며 씹듯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어때, 네 목소리랑 좀 비슷하게 들렸나?”
8. 유레이 14층 보스 몬스터
푸슉!
회색빛 섞인 새하얀 검이 검은색 갑옷 같은 껍질을 입은 개미의 배를 뚫으며 아래로 톡 튀어나왔다. 나는 등껍질을 박차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거꾸로 쭉 섰을 때 손을 뻗었다.
촤아아악!
개미형 몬스터의 몸이 절반으로 쭈욱 갈라지며 파란 피가 분수처럼 마구 뿜어져 나왔다. 새하얀 검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개미굴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내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8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18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
[lv. 18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5퍼센트]
[체력: 200(+5)]
[근력: 206(+3)]
[마력: 27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마력에 담긴 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영웅의 기운의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
[특성: 민첩- 민첩이 2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손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성: 독 내성- 10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30(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모두 공평하게 10포인트씩 배분한 내 양쪽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12층을 지나 13층에 오르면서 수확이 있었다. 이제 영웅의 기운을 아주 조금은 내 뜻대로 쓸 수 있었다. 아직도 10초 이내였지만 위험한 순간에 쓰기에는 충분했다.
“서하도 그렇고 다들 레벨 올랐으니까 이제 14층으로 가자.”
우리는 미리 찾아놓은 14층 입구로 향했다.
14층은 이외로 사막이 아닌 숲이었다. 수많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만큼 열매도 풍부했는데 밑에 있던 사막과는 다르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형. 진짜 살 것 같아요. 나 진짜 밑에서는 먹고 싶은 것도 참아가면서 버텼는데.”
“나도. 진짜 배부르다. 근데 맥주 마시고 싶어.”
상진이 마지막으로 남은 열매 하나를 입에 한가득 욱여넣으면서 서하의 말에 맞장구쳤다. 태경은 그런 상진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고상하게 하나씩 꼭꼭 씹어먹고 있었다.
“형, 나 진짜 억울한 게 뭔 줄 알아요? 난 맥주 맛도 못 봤어!”
“에이, 거짓말하지 마. 몰래 마셔봤을 거 아니야.”
“진짜 몰래 마시려고 숨겨놓으면 서호 형이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가 다 처마셨는걸요!”
“하아, 한 모금이라도 좋으니까 맥주 마시고 싶다.”
“전 치킨 먹고 싶어요. 치킨이 진리죠. 여기 오기 전에 치킨 신메뉴 나왔던데 못 먹었네.”
“치맥. 치킨에 맥주. 와, 진짜 대박이다. 죽을 것 같아.”
“태경이 형이랑 이석이 형은 뭐 먹고 싶어요?”
“나? 나는… 치킨, 탕수육, 짜장면, 짬뽕, 소곱창, 육회, 꽃등심, 산낙지, 회. 아, 마라탕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이석이 형, 이제 보니 우리보다 더하네. 태경이 형은?”
“나? 나는 이석이.”
“…농담이죠? 저 맛 없어요.”
나는 살짝 경계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충분히 맛있어 보이는데. 확 잡아먹고 싶게.”
“와, 진짜 저질. 쌍팔년도에도 안 통할….”
“이석아, 듣지 마. 귀 썩어.”
“뭐, 뭐 그런 농담을 해요!”
서하와 상진의 반응에 그제야 그의 농담을 제대로 알아들은 나는 기겁을 하며 서하와 상진의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언젠가부터 상진에게 느끼기 시작한 오묘한 감정으로 인해 남자끼리의 사랑도 가능하다고 인지한 뒤로 태경과 상진이 조금씩 신경 쓰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만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아야 강해질 수 있고 그래야 층을 오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니까. 그렇게 잠시 수다를 떨던 우리는 주변을 살피며 크고 높은 나무를 찾았다. 어느덧 노하우가 생겨 나무 위에서 자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나무는 모두 크고 단단하여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근력이 늘어 맨손으로 나무껍질을 찍어가며 우리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각자 제법 괜찮은 나뭇가지를 찾아서 누웠다. 가지 하나하나가 사람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굵었다. 다들 만족스럽게 나무에 누워 잠시간의 휴식을 취했다.
뼈가 다시 맞춰진 이후로 키도 조금 큰 것 같았고 몸이 전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지고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신체 능력도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올랐다. 점점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생각했다. 지금보다 레벨과 능력치가 더 오르면, 더욱 강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 이 상태로도 아마 일반인을 실수로 한 번 친다면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잠에 빠진 서하와 상진을 보며 나는 움직이려던 몸을 멈추고 다시 가지에 기대어 누웠다. 조금 더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얌전히 숨만 새액거리면서 잠든 상진의 얼굴에서 어렸을 적 장난기 많고 얄궂었던 상진이 보였다. 간질간질하게 추억이 몽글거렸다.
‘강이석! 이거 봐!’
‘아악! 뭐야! 놀랐잖아!’
‘하하하! 휴지 심지로 만든 똥!’
입가가 실룩 실룩 절로 올라갔다. 그 당시에는 몹시 짜증이 나는 장난이었으나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것 하나하나가 전부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가끔 생각합니다. 이석 씨와 내가 이런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던 평범한 곳에서 만났다면 그곳에서도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그치지 않고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태경이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떻게 만났는지에 따라 다르지 않았을까요?”
“나는 어떻게 만났든 이석 씨가 눈에 담겼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태경이 형을 만난 건 행운이에요. 진짜로.”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태경이 잠시 멈칫했다가 부드러운 웃음을 내보였다. 어쩐지 씁쓸한 것 같기도 했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까 달려볼까요? 서하랑 상진이는 잠까지 잤으니 아주 날아다니겠네요.”
“좋습니다. 가죠.”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나무 아래로 몬스터들이 지나갔다. 열을 맞춰 움직이는 모습이 참 기괴했다. 척척척 하는 발소리까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몬스터 하나는 더럽게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세계는.”
“저건 해골 전갈인가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어디로 가는 거지?”
몬스터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어딘가 목적지가 있는 듯 열을 지어 움직이는 것도 그랬다.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상한 냄새가 났다.
끼긱. 끼긱.
이곳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녀석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눈치채자마자 공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변하는 게 느껴졌다. 휴식 끝, 전투 시작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몬스터가 움직이는 경로를 몰래 뒤따라 갔다. 녀석들을 따라 작은 언덕을 몇 개 넘어가니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흐읍.’
우리는 숨을 집어삼키며 그 자리에 조심스럽게 엎드렸다. 눈앞에 또다시 어려움이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까 하는 순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14층의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14층에 도착한 인원이 4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난이도가 조정됩니다.]
[난이도가 여덟 단계 상승합니다.]
[보스를 잡기 전까지는 14층의 모든 입구가 폐쇄됩니다.]
“이게 뭐야. 난이도 실화야? 서호 형도 아직 안 올라왔네.”
“이거 잡으라고 설정한 거 맞아?”
“못 잡으면 죽는데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쳤다. 진짜….”
우리는 저마다 경악하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슬퍼했다. 눈앞에 펼쳐진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파도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의 몬스터들이 이미 눈앞에 가득했다. 그 옆으로 계속해서 녀석들이 같은 방향으로 이동해서 걸어오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무리의 가운데 지름 3m 정도가 비어 있었는데 그곳에 보스 몬스터가 자리해있었다. 보스 몬스터는 느긋하게 주변을 걸어 다녔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까지 보스 몬스터가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으흥흥. 피를 모아서 마시자. 으흥흥. 새빨간 피가 진득하게 달라붙은 시체의 머리를 아그작. 아그작. 으흥흥. 맛있겠다!”
보스 몬스터는 검은색의 근사한 슈트를 입고 있었다. 몸집은 평범한 인간의 3배쯤 되었지만, 전과는 다르게 그 형태는 분명한 인간의 것이었다. 보스 몬스터의 주변을 40여 마리의 인간 형상을 한 남자들이 역시 시커먼 슈트를 입고 둘러싸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보스 몬스터가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짜증 나게 굴지 마!”
보스 몬스터가 돌연 팔을 휘두르며 제 근처를 맴돌던 부하 몬스터를 밀어냈다. 가볍게 밀어낸 것뿐이었지만, 그 효과는 어마무시한 결과를 낳았다. 인간 형상을 한 몬스터 십여 마리와 함께 뒤에 있던 죄 없는 해골 전갈들이 잔뜩 죽어 나간 것이다.
“허억!”
서하가 놀라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보스 몬스터의 고개가 순식간에 우리 쪽으로 향했다. 온몸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보스 몬스터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새빨간 눈과 마주쳤다. 공포영화를 본 것처럼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그 녀석이 손을 들어 우리를 가리켰다. 동시에 몬스터들의 행군이 멈추었다. 기이하면서도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모두 몸에 힘을 주며 진한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눈빛만으로 이 정도라면 정말 사기 아닌가. 가까스로 압박감에서 벗어났을 때였다. 우리의 시야에 잡힌 것은 수천 마리의 해골 전갈들이 마치 쓰나미처럼 우리에게 몰려오고 있는 장면이었다.
끼긱. 끼긱.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칠 것 같은 긴장감이 몸을 쓸었다. 14층에 올라와서는 몬스터와 싸워본 적이 없어서 해골 전갈은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모른다. 그 말은 즉 해골 전갈의 심장을 찾기 전까지 녀석들은 죽지 않고 움직일 거라는 말과 같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급하게 마력을 방출해 해골 전갈 한 마리를 반으로 갈랐다. 녀석이 몸을 퍼덕이는가 싶더니 그 상태 그대로 계속 움직였다. 심장이 보이지 않았다.
“진짜 더럽게 많네.”
“응. 징그러울 정도로 많네.”
상진이 침을 꼴깍 삼키며 한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며 얼마 남지 않은 평화를 누렸다. 지쳐서 쓰러지기 전에 이 몬스터의 파도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고 싶었지만, 그 방법이라는 것이 묘연했다. 이대로라면 지쳐서 쓰러져 죽을 것이 뻔했다.
생각하는 사이 해골 전갈들이 미친 듯이 우리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수가 어마어마한 탓에 녀석들은 서로의 몸을 밟아 넘기며 우리에게 달려들기도 했다. 사방에서 퍼부어지는 공격에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공격을 하며 아무리 찾아봐도 심장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잘게 부수어진 녀석들의 뼈까지 우리를 공격하며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했다. 긴장으로 차게 식은 몸이 평상시와 달리 삐걱거렸다. 나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서 애썼다.
“으흥흥. 맛있는 인간. 으흥흥. 죽지 않고 팔딱팔딱 신선한 인간의 피를 뽑아서! 으흥흥. 아 맛있겠다. 아! 맛있겠다!”
보스 몬스터가 흥분해 팔을 마구 휘둘렀다. 운 나쁘게 그 팔에 맞은 주변 몬스터들이 한 뭉텅이씩 사라졌다. 심장이 없는 해골 전갈들이 보였다. 보스 몬스터는 살아있다. 이 세상에 답이 없는 문제는 없었다. 심장을 가진 건 보스 몬스터뿐이다. 답은 보스 몬스터였다.
“보스 몬스터야!”
“무슨 말입니까?”
“심장!”
내 말을 기똥차게 알아들은 이들이 모두 길을 뚫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방법을 알고 있어도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뚫고서 보스 몬스터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었다.
“강이석!”
상진이 커다란 소리로 나를 불렀다.
“내가 너 옮겨줄게. 잡을 수 있겠어? 네가 안 된다고 하면 나 너 안 보내.”
“안 됩니다! 난이도 8배나 올랐어요!”
“형! 형! 안 돼요.”
상진은 그 순간 바닥에 잘게 부수어진 뼈에 의해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옆에서 서하와 태경이 버거워하면서도 꾸역꾸역 해골 전갈들을 상대하는 모습까지도 눈에 담겼다.
“할 수 있어.”
“믿어.”
상진이 씨익 웃어 보였다. 미소짓는 상진의 오른쪽 볼이 옅게 패였다. 내가 늘 좋아하던 상진의 미소였다.
“이석 씨! 안 됩니다! 이석 씨!”
태경과 서하가 안 된다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애써 그 목소리를 뒤로 넘기며 나는 상진의 염력에 몸을 맡겼다. 죽을 정도로 훈련한 걸 여기서 써먹는다며 마지막까지도 상진이 웃음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마지막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걱정하지 마요! 할 수 있을 거니까.”
나는 공중에 떠서 이동하면서도 보스 몬스터를 잡을 방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공중에 뜬 상태로 힘을 주어 보스 몬스터에게 검을 던졌다.
후웅.
끼긱. 끼긱.
동시에 해골 전갈들과 보스 옆에 서 있던 인간형 몬스터가 움직였다. 해골 전갈이 꼬리로 내 검을 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내 검은 해골 전갈의 꼬리를 통과해서 그 뒤에 있던 인간형 몬스터의 몸통에 박혔다. 상진의 염력의 힘이 다했는지 몸이 서서히 땅과 가까워졌다. 나는 몬스터들 사이로 지상에 무사히 착지했다. 그리고는 해골 전갈들의 몸을 밟아가며 무작정 보스 몬스터가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래, 해보자.”
우득.
발밑에 깔린 해골 전갈의 몸통과 목이 분리되었다. 나는 다시 점프하여 해골 전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녀석들을 넘어야 보스 몬스터에게 갈 수 있었다. 녀석들의 날카로운 꼬리가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검이 없는 나는 교묘하게 움직여 그것들을 피했다. 다시 한번 더 다른 방향에서 녀석들의 꼬리가 날아들었다. 피하기 위해서는 몸을 트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도 꼬리가 여러 개 튀어나왔다.
“이런, 젠장!”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몬스터 밭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영웅의 기운은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 남겨야만 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중에서도 한 녀석의 꼬리가 더 깊숙하게 뻗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순간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내 쪽으로 더욱더 깊숙하게 뻗어진 그 꼬리를 밟고 뛰어올랐다. 중간에 공중으로 뻗어오는 집게발이 보였다. 나는 뜀틀을 넘듯이 집게발을 손으로 짚고 그 뒤쪽으로 넘어갔다. 아직도 눈앞에 남은 녀석들을 미친 듯이 피해 가면서 달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바로 앞에 보스 몬스터가 눈에 담겼다. 막 해골 전갈의 공격을 피하며 녀석의 위에서 뛰어내리던 나는 아래로 떨어져 내리면서도 보스 몬스터를 향해서 영웅의 기운을 사용했다. 손끝에 흰 기운이 요동치며 검의 형상을 그려내었다. 나는 그 손을 그대로 뻗으며 공격했다. 옆에 있던 해골 전갈들과 인간 모습의 몬스터들이 제 몸으로 방어막을 세우면서 내 공격을 막아냈다. 그것들을 뒤로 넘기며 땅에 착지한 나는 재차 기운을 두른 손을 휘둘렀다.
“하압!”
채앵!
유리창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보스 몬스터를 막고 있던 이상한 기운이 사라졌다.
공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느낄 수조차 없는 기운이었다. 투명한 막이 깨져서 바닥으로 흩어졌다. 녀석에게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휘이익.
흰색의 검이 녀석의 볼을 스치며 작은 상처를 냈다.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것이 보였다. 보스 몬스터는 마치 인간처럼 피도 붉었다. 그게 끝이었다. 10초가 지났다. 영웅의 기운이 사라졌다. 어이없게 그 기운을 모두 사용해버렸다. 그런 내 눈에 바로 앞에 떨어져 있는 검이 들어왔다. 아까 내가 던진 검이었다. 나는 검을 주워들고 언제라도 다시 뛰어나갈 자세를 취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싸워야 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로 보석처럼 새빨갛게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온몸에 있는 털들이 쭈뼛하고 일어났다. 위험신호가 삐용삐용하고 알림을 보냈다. 거의 숨을 참듯이 얕게 내쉬던 숨마저 멈췄다. 급하게 뒤로 구르며 내가 있던 장소에서 벗어났다.
쿠아아앙!
폭발하는 것 같은 소리가 강하게 울려 퍼졌다. 강한 흔들림에 다리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계속 휘청거렸다. 결국,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소리여서일까.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가 싶더니 주변의 소리가 웅웅거리며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주변에 있던 모든 몬스터가 박살이 나서 흩어져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몬스터들에게 공격당한 내 몸이 성치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꿈틀거리면서 나를 공격하려 달려들고 있었다. 따끔한 고통에 제정신을 차린 내 귀로 보스 몬스터의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으흥흥. 으흥흥. 인간, 맛있는 인간! 피를 내놔. 피!”
나는 아직까지 먹지 않고 남겨놓았던 피로회복제를 꺼내 삼켰다.
“안 돼!”
그때 뒤에서 절규와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뒤를 쳐다보았다. 태경의 몸은 하나였는데 그 몸에 수십 마리의 해골 전갈 꼬리가 파고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기괴했다. 뒤로 넘어졌었는지 서하가 주저앉아서 태경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를 토하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서하도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깊은 상처를 입은 게 분명했다. 상진이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태경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곧 그들의 모습이 무시무시하게 들이닥치는 해골 전갈들의 모습에 의해서 가려졌다. 순식간이었다. 내 몸이 위로 붕 떠 올랐다. 강력한 둔통이 몸을 강타했다. 눈앞에 폭죽이 터지듯이 번쩍거렸다.
“아악!”
눈앞에 보스 몬스터의 크게 벌어진 입이 보였다.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 같더니 잠시 후 녀석이 크게 웃었다.
“이히히! 이히히! 맛있겠다. 강한 인간. 맛있겠어!”
그런 녀석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태경과 서하, 상진의 몸 위로 해골 전갈들이 계속해서 올라탔는지 탑 세 개가 커다랗게 보였다. 몬스터로 이루어진 탑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보스 몬스터의 얼굴을 마주했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모두가 살 수 있었을까. 나는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너무 큰 고통에 머리가 굳어만 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을 사용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모두 몬스터에게 당해버렸는데. 나만 살기 위해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기력하게 힘을 풀고 보스 몬스터의 손에 늘어질 뿐이었다.
“이히히! 빨리 가져와! 빨리! 이히히. 다 같이 한입에 넣고 씹어 먹어야지.”
보스 몬스터의 말이 무슨 뜻일까. 여전히 느릿하게 눈만 깜빡이던 나는 보스 몬스터가 흥분해서 흔드는 팔에 잡혀 너덜너덜 흔들거렸다. 내 몸이 터져나가지 않게 힘 조절을 하는 것 같았다.
‘왜? 왜 지금 당장 날 죽이지 않는 거지?’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보스 몬스터의 말과 함께 몬스터로 이루어진 탑 세 개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상진과 태경, 서하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중에 큰 덩치를 가진 몬스터의 등에 얹혔다. 말이 얹힌 것이지 던져지듯이 내팽개쳐진 것과 같았다. 순간 안도감과 함께 강한 분노가 치달았다. 보스 몬스터의 눈동자에 눈에 실핏줄이 터졌는지 붉어진 눈을 한 내가 비쳤다.
“너는 내가 죽일 거야. 내가.”
분노에 삼켜진 나는 영웅의 기운을 마구잡이로 방출했다. 그 기운을 어떻게 사용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보스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끄아아!”
놈이 힘을 주고 있던 손을 펴 나를 던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 아아!”
“죽일 거야, 너.”
저 몬스터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데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어느덧 인간형 몬스터를 죽인다는, 마음 한구석에 눌러놓았던 죄책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죄책감은 인간형 보스 몬스터에게 느낄 게 아니라 상진이와 태경이 형, 서하에게 느껴야 했다.
[세 번째 스킬을 깨달았습니다.]
[네 번째 스킬이 개방됩니다.]
[세 번째 스킬 순백의 버서커를 사용합니다.]
[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배 상승합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온몸이 화끈거리며 붉어졌다. 몸이 개운해지며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바로 땅을 박차며 보스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이 겁을 먹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쿵!
평소와는 달리 내 공격에 땅에 작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마구잡이로 휘둘러온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이 휘두르는 팔은 패턴이 있었다. 그것을 파악한 나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렸다.
“지금!”
나는 몬스터의 팔을 피해가며 녀석의 배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녀석의 배에 영웅의 기운으로 만든 검을 박아넣었다.
“끄아아아악!”
나는 비명이 울리는 것도 상관없이 놈의 몸에 박힌 검을 반 바퀴 돌리고는 배를 가르듯이 검을 꺼냈다.
촤아악!
길이가 모자랐다. 놈의 심장에 검이 닿지 못했다. 빨간 피가 내 온몸을 적시고 눈 안까지 튀었다. 한쪽 눈의 시야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몸에서 뚝뚝 흘러내렸다. 녀석의 팔에 맞아 뒤로 날아가면서도 나는 마력을 방출하며 녀석에게 끈질기게 공격을 퍼부었다.
퍼억!
익숙하게 자세를 잡아가며 바닥에 떨어진 나는 다시 녀석에게 달렸다. 심장을 노려야 했는데 심장 부위는 녀석이 너무 단단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1분이 지났다. 남은 시간은 2분이었다. 놈의 시선을 돌릴 방안이 필요했다.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다가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피해 바로 바닥을 박찼다. 미처 다 피하지 못해 나는 뒤에 있는 나무 하나를 뚫고도 계속 날아가 그 뒤의 나무에 이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녀석이 나를 따라 달려왔다.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퍼버벙!
순식간에 십여 합의 공방이 벌어졌다. 옆의 커다란 나무를 급하게 타고 올라간 나는 그대로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온 무게를 실었다. 보스 몬스터가 그것을 피해 뒤로 훌쩍 물러섰다. 나는 그 추진력을 이용해서 빠르게 바닥을 구르며 녀석이 거리를 벌리지 못하도록 했다. 30초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이로 연약한 안쪽의 볼살을 깨물었다. 볼에서 아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뜩이나 비릿했던 입안에 피가 흘러 더욱 비릿해졌다.
‘정신 차려. 강이석.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15초. 보스 몬스터의 뒤에서 뭔가 느껴졌다. 녀석이 재빠르게 뒤를 돌았다.
‘상진이?’
퍽!
녀석이 검을 쳐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 녀석의 등으로 향했다.
“죽어!”
푸우욱!
뒤에서 심장이 있는 부위를 향해서 칼을 박아넣는 것에 성공했다. 전갈 해골들을 포함해서 이곳에 있던 모든 몬스터가 부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하얀 가루 때문에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순백의 버서커 사용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14층의 보스를 잡았습니다.]
[폐쇄되었던 14층의 입구가 다시 열립니다.]
[15층으로 가는 입구가 개방됩니다.]
[14층 보스를 잡은 4명에게 보상이 지급됩니다.]
[포인트 65개, 레벨업 구슬(랜덤 포인트), 마력의 팔찌, 근력의 반지, 고급 회복제 중에서 선택 가능합니다.]
[선택은 지금 즉시입니다.]
“회복제. 회복제를 줘.”
[고급 회복제가 지급되었습니다.]
“커헉!”
풀썩.
상진과 태경, 서하가 있는 곳으로 가려던 나는 한 발을 떼기도 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놈을 혼자 잡겠다고 생각한 것은 내 만용이었다. 모두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 내 죄책감을 마구 건드려왔다.
“쿨럭! 쿨럭!”
저 멀리서 태경이 입 밖으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서하는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고 상진은 여기서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온몸에 커다란 바늘을 박아넣는 듯한 고통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필사적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안 돼. 안 돼. 아, 아… 안 돼. 빨리 가야 하는데. 큽.”
피까지 토해가면서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까끌까끌한 입안으로 먼지 더미들이 마구 들이닥쳤다. 그래도 계속해서 기다 보니 점점 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죽지만, 제발. 허억, 허억.”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태경의 배는 절반이 구멍이었다. 허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천운일 정도였다. 바닥이 온통 진득한 피로 가득했다. 어떻게 살아있나 싶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급 회복제를 손에 쥐었다. 바닥에 흐른 피가 손에 묻어 미끈거리면서 자꾸만 손에서 병이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태경보다는 훨씬 작지만 배가 뻥 뚫린 상진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역시나 그 주변도 피투성이였다. 서하는 다행하게도 아무런 상처 없이 평온하게 누워있을 뿐이었다. 놀라서 숨을 쉬는지 아닌지 확인했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아무도 죽지는 않았지만, 눈이 혼란으로 가득 차서 위태롭게 타는 촛불처럼 잔뜩 흔들거렸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 회복제가 하나밖에 없는데.’
이 와중에도 둘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능력치를 올렸으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죄를 짓는 사람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쳐댔다. 몬스터를 상대할 때보다도 더 강하게 뛰는 것만 같았다. 뒷골이 띵하고 아렸다. 몸에 한기가 들이닥치며 얼마 안 되어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눈을 꾹 감고 미친 듯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회복제의 뚜껑을 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죄책감이 온몸을 저몄다. 내 몸은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요.’
[설명- 마시거나 상처 부위에 부어주세요.]
꼴꼴꼴 작고 둥그런 병에 담겨 있던 푸른 액체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허연 연기가 상처 부위에 솟구치더니 서서히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크으윽.”
상처 부위가 아린지 연신 입 밖으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상진의 아물어가는 상처를 바라보며 이마를 쓰다듬다가 옆에 여전히 창백한 낯으로 쓰러져있는 태경에게로 다가갔다. 죄책감에 흐르는 눈물이 연신 태경의 볼에 닿고 다시 땅으로 톡톡 떨어졌다. 손을 들어 올려 태경의 얼굴을 감쌌다. 처음 만났던 날에는 결이 좋아 보이는 피부였건만 그렇게나 고왔던 볼이 거칠거칠했다. 슬쩍 손을 올려 태경의 머리칼을 살살 만졌다. 머릿결은 아직도 부들부들하니 착하고 손에 감겨왔다.
“나는, 나는 어쩔 수가.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는데, 내가 죽인 거겠지? 내가 죽인 거야. 그렇지?”
밖으로 뱉어지는 내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상황과 상반되게 태경의 표정은 점차 편안해지고 있었다. 미칠 것 같은 감정이 마구 솟구쳤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예요. 형. 다 괜찮을 거야.”
나는 울컥 치미는 감정에 괜찮을 거라는 말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태경과 이곳에서 겪었던 그 시간을 혼자 곱씹어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태경의 눈이 슬쩍 떠졌다. 그의 눈을 보고 나는 다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텅 비어 흐려진 눈동자는 선명하고 올곧게 나를 바라보던 그 눈이 아니었다. 죄책감이 심장을 조여왔다.
“웃는 게… 예쁜…데 왜 웁니까.”
“형. 태경이 형.”
“하아… 울지, 마.”
“어떻게, 어떻게 하지. 형. 형.”
“제발… 울지, 마요.”
태경의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들리다가 다시 떨어져 내렸다. 내 심장도 그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떨리던 몸이 이번에는 로봇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형? 태경이 형? 무슨 일이에요? 이석이 형?”
서하가 정신을 차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질문했다. 그리고 눈물 젖은 내 얼굴을 본 서하가 무언가 불안함을 감지했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태경이 형이랑 상진이 형은 어떻게….”
“형. 형.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내가, 형!”
서하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태경의 얼굴을 붙들고 우는 나를 보며 서하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서하가 몸이 쑤시는지 일어나면서 신음성을 내뱉었다. 상진의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고 태경의 앞으로 다가온 서하가 그 앞에 무릎 꿇었다.
“형….”
“내가, 내가 포션이 있었는데. 그런데 상진이. 상진이한테.”
“형! 일단 진정하고. 이게 왜 형 잘못이야? 이 이상한 세계 탓이지! 형 탓 아니야!”
“나 때문에 태경이 형이. 서하야, 어떡해? 나, 나.”
“형 탓이 아니라니까!”
나는 서하의 앞에서 횡설수설하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서하가 내 어깨를 두드려 진정시키면서 입을 열었다.
“바보. 태경이 형, 안 죽어. 운 좋은 줄 알아.”
서하가 태경의 손을 잡았다. 서하의 손이 고급 회복제와 같은 푸른색으로 빛났다. 조금씩 태경의 배에 있던 구멍이 서하에게로 옮겨갔다. 그 구멍을 온전히 가져갔을 때 서하가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몸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태경이의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고 고른 숨을 내쉬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한꺼번에 벌어지는 일들에 내가 반쯤 멍해져 서하를 불렀다.
“서하야? 서하야!”
“나 괘, 괜찮, 헉!”
“이게, 이게 무슨, 아니….”
서하가 정신을 잃고 추욱 늘어졌다. 숨이 막혔다. 울음이 울컥울컥 뱉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버텨냈다. 서하의 상처가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안도감에 힘이 풀린 고개가 뒤로 홱 젖혀졌고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나를 뺀 모두가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정신을 놓고 그대로 바닥에 뻗고 싶었다. 그러나 코를 찌르는 피 냄새와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자꾸만 내 정신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대로 자면 안 돼. 여기서 전부 죽을 작정이야? 너마저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계속해서 내 안에서 내게 질문해왔다.
‘이석아. 강이석.’
나를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와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결에 듣는 것처럼 나직하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 작고 가는 소리 하나가 내 팔목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언덕 너머로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재생성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만은 결코 바닥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흰 덩어리들이 뭉쳤다가 흩어지면서 해골 전갈의 형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지 않을 것이다. 비굴하고 처절하게라도 살아남아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일어난 내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보스 몬스터와의 전투가 예상보다 뛰어났습니다.]
[난이도 조정으로 인한 특별보상이 제공됩니다.]
[포인트 60개가 지급됩니다.]
[보스 몬스터가 잃어버린 무기가 지급됩니다.]
[2레벨이 올랐습니다.]
[20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20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
아공간 주머니에서 열매 하나를 꺼내 먹으면서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쓰러진 저 셋을 지킬 사람은 나뿐이었다. 서둘러 체력을 회복해 무기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계속해서 무방비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lv. 20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9퍼센트]
[체력: 210(+5)]
[근력: 216(+3)]
[마력: 28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독 내성- 11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96(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마력이 능력치가 제일 높았지만, 마력의 부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영웅의 기운, 순백의 버서커는 강력한 만큼 너무 많은 마력을 잡아먹었다. 나는 과감하게 70개를 마력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13개씩 올렸다. 마력이 300이 넘어가면서 몸에 알 수 없는 기운이 미친 듯이 회오리치면서 격렬하게 움직였다.
“어억!”
예상하지 못했던 몸의 변화였다. 체력과 근력이 200을 넘어가면서 미세하게 이루어진 몸의 변화는 그저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지금 이 고통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몬스터들이 주변에 마구잡이로 생성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몸 안의 기운이 폭주했다.
파아아아앗!
몸 밖으로 기운들이 강렬하게 방출되면서 반경 3미터가 환하게 물들었다.
[몸이 마력에 맞게 조정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이 조금 더 수월해집니다.]
“콜록! 콜록!”
나는 기침을 하며 새우처럼 말았던 등을 펴고 일어났다. 바늘로 찌르는 듯했던 고통도, 힘이 들어가지 않던 몸도 원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상진이와 태경, 서하를 15층 입구로 밀어 넣었다. 드디어 길고 긴 전투의 끝이었다.
[유레이 15층입니다.]
15층으로 들어간 나는 안전하고 푹신푹신한 곳을 확보해 다친 사람들을 옮겼다. 그리고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서 울컥 새어 나오는 울음을 참았다. 아니, 참고는 있었지만,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것을 보니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살았네. 다 같이.”
살았는데, 다 같이 살아남았는데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무언가 억눌린 것처럼 이상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9. 사라진 동료
“어?!”
잠에서 깨어나니 서하와 태경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상진이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15층에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지는 않았나 살펴보고 태경과 서하를 찾아 나섰다.
“어딜 간 거야?”
몸을 씻을 수 있는 호수 앞에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도 가보았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알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자극했다. 결국 나는 14층으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서하와 태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태경이 밑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몸을 실었다. 마지막 순간에 잠깐 태경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어쩐지 그의 눈빛이 가라앉아있었다.
“서하야.”
“이석이 형?”
서하가 밑으로 내려가는 태경을 바라보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뒤돌았다. 크게 어깨까지 들썩이며 숨을 내쉬는 모양새를 보니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
“태경이 형, 어디 가?”
“아, 그 열매가 떨어졌다고 열매 좀 구해오겠다네?”
“무슨 말이야. 환자를 그냥 보내면 어떻게 해! 내가 따라가야겠다. 상진이 좀 부탁할게. 서하야.”
“아니!”
“응?”
“태경이 형이 몸이 찌뿌둥하다고 혼자 몸도 좀 풀고 싶고, 열매도 따오고 싶다고 그랬어요.”
“아무리 그래도 환자잖아.”
“내가 이미 다 고쳐줬어. 걱정하지 마요.”
“그래도….”
“내가 같이 간다고 해도 형이 고집부려서 혼자 간 거야. 그냥,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좀 이해해줍시다! 형. 우리는 가서 좀 앉아있을까요?”
눈을 가늘게 뜨고 서하의 모습을 바라보자 서하가 안절부절못하면서 내 눈을 자꾸만 피했다.
“너 갑자기 반말도 섞어서 한다?”
“아니! 나이가 얼마나 차이 난다고 반말도 좀 할 수 있는 거지! 치사하네!”
“5살 차이면 많이 나는데?”
“아! 네, 네. 앞으로 꼬박꼬박 존댓말 할게요!”
“아니야. 반말하니까 더 친해진 것 같고 좋네.”
“그럼 계속 반말해도 돼?”
서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
“예스~ 우리 상진이 형 혼자 두면 어떡합니까. 어서 갑시다. 어서.”
“태경이 형은 얼마나 있다가 올라올 거래?”
“응? 아, 기다리지 말고 그냥 편하게 쉬고 있으라고 했어.”
“그래? 언제 다시 올 거라고 말 안 했어?”
“응. 아이참. 태경이 형이 알아서 하겠지. 제일 큰 형님인데.”
서하가 태경을 입에 올릴 때마다 퍼덕이며 어색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영 이상했지만,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태경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하의 스킬로 치료했으니 태경은 멀쩡할 것이다.
“아, 그냥 태경이 형 따라서 14층 내려갈까?”
“아, 형!”
역시 서하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그런데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찝찝한 감정이 가슴 한구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상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던 나는 차마 상진이를 두고 태경을 찾으러 밑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너무 늦다 싶으면 그때 찾으러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상진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서하와 함께 이동했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어쩐지 날카롭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석아.”
서하와 대화하는 도중에 상진이 일어났다.
“상진아!”
“상진이 형!”
서하와 나는 상진의 몸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면서 그가 멀쩡한지를 한참 확인했다. 상진이 그런 우리 모습이 웃긴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기다고!”
내가 버럭 소리치자 상진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좀 봐줘.’ 하면서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렸다. 그런 상진의 모습에 나는 또 마음이 풀렸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서하가 그런 상진의 모습을 보면서 징하다는 표정을 했다.
“형은 다 죽어가다가 일어났는데도 똑같네.”
“그럼, 사람은 변하면 죽는 거야.”
나는 상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상진이 조금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런데 태경이 형이 안 보인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태경이 형은 잠깐, 어, 그, 몸도 좀 풀고 열매도 찾고 그러려고 14층 내려갔어요.”
“혼자서? 그 일을 겪고도 대단하네.”
작게 중얼거리는 상진의 목소리를 듣고 서하가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런데 형. 이제 아프거나 이상하거나 한 곳은 없어요?”
“맞아. 아직 배가 조금 뻐근하다든지, 약간 아프다거나 불편한 곳 없어?
“응. 괜찮은 것 같아.”
상진이 잠시 내게서 떨어져 일어서더니 손발 이곳저곳을 움직여 보였다.
“정말 없어요? 팔 하나가 잘 안 움직인다든지.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오래 못 서 있겠다든지. 몰랐는데 손가락이나 발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가 있다든지.”
“서하야.”
“응?”
“너 지금 나 저주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서하가 얼굴과 양 손바닥까지 휘저어가며 상진의 말을 부정했다. 입도 벙긋벙긋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부정해?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진짜 아니야!”
“이제 말까지 막 놓고, 이서하.”
“아니! 이석이 형이 말 놔도 된다고! 상진이 형이랑도 친구니까 괜찮잖아!”
“이석이 네가 허락해줬어?”
“어? 응.”
서하를 보면서 잠시 생각에 젖었던 나는 상진의 말에 대충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나도 괜찮아.”
“형, 그러니까 진짜 이상한 곳 없는 거지?”
“응, 손가락 발가락 다 멀쩡해.”
양말과 신발까지 벗어가며 상진이 제 말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순간 서하와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는 상진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서 손으로 코를 막았다.
“아, 형. 냄새가….”
“상진아. 가서 씻자.”
상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아, 진짜. 너희가 나 멀쩡한지 보여달라며!”
“그냥, 물어본 거였는데. 보여달라고 안 했는데.”
“일단, 가서 씻어. 상진아.”
상진이 호다닥 호수로 뛰어갔다. 엉성한 포즈에 비해서 빠른 속도였다. 그 모습에 서하와 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상진이 형. 진짜 웃기다.”
“서하야.”
“네?”
“태경이 형. 진짜 멀쩡한 상태 맞지?”
“그렇다니까요? 내가 치료도 해준 다음에 떠난 건데….”
역시나 서하의 대답이 약간 느리게 흘러나왔다. 또 불안한지 계속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서하야. 태경이 형. 정말 멀쩡한 거 맞아?”
서하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역시나 태경은 멀쩡한 상태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 몸으로 도대체 왜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곳으로 내려간 것일까. 태경이라면 우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자신의 발로 사라진 것일 테다. 그런데 왜? 회복이 느리게 되더라도 기다려줄 수 있는데 그런 거라면 태경이 혼자 떠났을 리가 없었다. 회복될 수 없는 상처라던지.
“설마,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서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부자연스럽게 눈을 여기저기 굴리던 서하가 로봇처럼 어색한 말을 내뱉고 내게서 벗어났다.
“아, 나도. 상진이 형이랑. 같이. 씻어야겠다. 하. 하. 하.”
나는 그런 서하의 등을 눈으로 좇았다.
* * *
11층 깊숙한 곳, 피투성이의 무리가 숨을 죽이고 앉아있었다. 그들의 피는 아니었고 다른 사람의 피인 것 같았다. 해골 몬스터에게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고 11층까지의 몬스터들 중에서 빨간 피를 가진 종류는 없었다. 그들의 눈은 살의에 가득 차 번뜩이는 채였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누군가 작게 중얼거리며 앞을 향해 튀어 나가려는 듯한 자세를 했다.
“그만. 그래봤자 달라지는 거 없어. 조금만 참아.”
“하지만!”
“그만. 너도 죽고 싶어?”
제가 단호하게 말해오는 여자의 눈과 마주친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아랫입술만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저만큼이나 살의로 번뜩이는 눈빛이 말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기기 위해서 잠깐 웅크리고 있는 거라고. 뒤에 있던 다른 여자가 그런 남자의 어깨를 슬쩍 토닥여주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심정이야. 그렇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야.”
그 말 뒤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을 그렇게 깊숙한 곳에 숨어서 눈앞의 상황을 정찰하던 무리는 한참 뒤에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들의 입에서 아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 안 둬.”
* * *
모두 가볍게 몸을 씻고 모여앉았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손가락 하나로 둥글게 문지르던 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나를 향한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도 밑으로 내려갈 거야.”
“네?”
“그러지 뭐.”
“왜, 왜요?”
“인원수가 적을수록 보스 몬스터가 몇 배씩 강해지는데 우리 셋이서 올라갈 수는 없잖아. 태경이 형도 없는데.”
“흠, 흠.”
“태경이 형 다시 올라올 거라며?”
“안 올 것 같아서. 내려가면서 찾아보려고.”
내 말에 서하가 괜히 저 멀리 있는 호수로 시선을 두고는 딴청을 피웠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표정에서 서하가 입을 열지 않으리란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왜?”
상진이가 의아해하며 내게 물었다. 그러나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어물쩍 대답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몰라. 만나면 알게 되겠지. 그렇지?”
나의 서하를 살피며 눈치를 보는 상진이 어리둥절해 보였다.
“일단 상진이 너랑 서하 몸이 괜찮아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오늘은 푹 쉬어. 내일 출발할 거야.”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잘 준비를 마쳤다. 상진이 내 옆에 모로 누워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를 잠시간 지켜보더니 상진이 손을 들어 머리칼을 살살 만졌다. 상진의 손을 따라 내 머리칼이 연신 뒤로 넘어갔다.
“살아서 좋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계속 움직이는 상진의 팔에만 시선을 주었다.
“이렇게 계속 너 볼 수도 있고.”
머리를 만지던 손이 밑으로 내려와 내 볼을 스쳤다. 그제야 나는 시선을 돌려 상진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나 봐주네.”
상진은 재차 손을 움직여 내 볼을 살살 어루만졌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미안해.”
“이석이 네가 뭐가 미안해?”
“그냥, 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터지기 일보 직전인 눈물 때문에 강제적으로 입이 다물어졌다. 상진을 살리고도 태경에게 포션을 쓰지 못해 죄책감을 가진 것도 미안했고, 온전히 그의 생존에 기뻐할 수만 없었음이 죄스러웠다. 아니, 이런 일에 왜 죄책감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곳에 오고 나서 무언가 빠져나간 것처럼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층을 오른 건지도 몰랐다.
“안 미안해도 돼. 네가 다 옳아. 나한테는 네가 하는 선택, 행동, 생각 다 맞아.”
상진의 손이 아쉽게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눈을 뜨고 감는 행위가 조금씩 느려졌다.
“잘 자. 이석아.”
그렇게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상진의 모습은 어둠에 잠겨있는데도 전혀 어둠에 묻혀있지 않았다. 내가 올빼미가 된 것만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상진의 얼굴이 이렇게 선명하게 잘 보일 수가 없었다. 상진이 바스락거리면서 몸을 요리조리 뒤틀 때마다 상진이 잠에서 깰까 봐 괜히 내가 조마조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둠 속에서 잠에 빠져 새액 새액 숨을 내뱉는 모습마저도 멋있었다. 한참을 그런 상진의 자는 모습을 보다가 잠들었다.
* * *
“허억! 허억!”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에 상진과 이석이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의 마지막 기억은 몸속으로 미친 듯이 파고드는 해골 전갈들의 꼬리였다. 미칠듯한 고통이 물러간 뒤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아무런 감각도 소리도 느낌도 그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가 더듬더듬 손을 들어 제 몸을 확인했다.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손등에 자꾸만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
그가 짧은 의문사를 내뱉었다. 남자의 시선에 180도 뒤집힌 자신의 손이 담겼다.
“이게 뭐지?”
눈만 끔뻑끔뻑 떴다 감았다 하던 남자는 멍청하게 중얼거리다가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태경이 형.”
서하가 태경의 뒤집힌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경이 서하에게 눈짓해서 장소를 옮겼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보다시피 손이 이렇게 됐네.”
“제가, 제가 깨달은 스킬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서하, 좋은 스킬 얻었네. 축하한다. 네가 날 치료해 줬구나.”
태경이 서하의 말을 듣고 멀쩡한 왼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그런 태경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서하가 태경의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곧 손이 푸르게 빛나며 태경의 손을 덮었다.
“끄응.”
서하가 신음을 내뱉으며 집중했지만, 태경의 손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태경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서하에게 한 번 더 사형선고를 받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해도 돼. 서하야. 충분히 도움 됐어.”
“왜, 왜 안 되지? 손이 아니라 어깨가 아픈데, 형 어깨도 다쳤어요? 제가 아직 스킬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서 형 상처를 다 치료하지 못했나 봐요.”
서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태경을 보며 말했다. 태경이 슬쩍 말을 돌렸다.
“이미 나은 상처라서 그런가. 손목을 한번 잘라볼까? 그럼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형….”
“농담이었어. 그런 표정 짓지 마.”
“형… 저 한 번 해볼게요!”
“뭐?”
“손 한 번 잘라보세요.”
잘랐다가 서하의 스킬로 다시 붙은 태경의 손은 그대로였다. 태경이 저 멀리로 시선을 두며 다시금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앞에 선 서하는 태경의 상처가 옮겨와 아물어가는 제 손목의 아픔과 태경의 상태로 인한 걱정으로 엉엉 울고 있었다.
“이미 나은 상처는 그 상태로만 돌아가나 봐요. 형, 미안해요. 내가, 내가 고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형 아픈 거 내가 다 고친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죠? 그렇죠?”
“네 잘못이 아니야. 이런 부탁을 한 내가 미안하다. 날 살려준 것도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그냥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형… 훌쩍.”
“서하야, 이 일은 이석 씨랑 상진이한테 비밀이야.”
“왜요?”
서하의 질문에 잠시 주저하던 태경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다가 태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짐이 되기 싫어서. 떠나려고.”
“네?”
“너만 알고 있어.”
“어디로, 어디로 가려고요.”
“위로는 못 올라갈 것 같고, 밑으로 내려가서 혜진 씨 일행이나 만나볼까?”
“우리가, 우리가 형 지켜줄 수 있는데!”
“나 지키려다가 다 죽어.”
“아니에요!”
“아니, 너도, 이석 씨도, 상진이도 나 하나 지키자고 신경 써가면서 싸울 수는 없어. 그러다가 모두가 죽어. 어제 잡은 보스 몬스터를 한 번 더 만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같이, 같이 내려가서… 같이….”
“이석 씨 발목 잡고 싶지 않아. 네게도 마찬가지야. 네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 서하야.”
“이석이 형도 상진이 형도 오늘 다 깨달았을 거예요. 같이 내려가면, 그러면….”
“내가 괴로울 것 같아. 짐이 되는 내가 너무 괴로울 것 같아 무섭다. 서하야.”
“겨우 손 하나잖아요. 겨우 그거 하나뿐인데… 그런데… 흐어어엉.”
“그래, 겨우 그거뿐인데. 그렇지? 그거 때문에 네가 죄책감을 가지게 됐네. 미안하다.”
태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서하가 태경의 품으로 파고들며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고 웅얼거리는 서하를 토닥여주면서 태경은 저 멀리 이석이 누워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있는데도 모든 것이 허상처럼 느껴졌다. 현실임에도 전혀 현실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 번도 제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태경이었다. 이석은 곁에서 떨어져 걸음을 옮기다 보면 이제 다시는 만나기 힘든 사람이 되어버릴 사람이었다. 태경은 못내 그 상황이 눈앞에 그려져 빨개진 눈을 서하에게 들키지 않으려 내리감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이석의 곁에서 떠났을 것을. 상처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석의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처럼 찝찝한 존재가 되기 전에 떠날 것을. 항상 당당하고 남을 위하던 자신은 이곳에 없었다. 손 하나 잃은 것이 무어 대수라고, 서하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서하의 회복 스킬을 받았음에도 다 낫지 않고 아직까지 찌릿찌릿 아리는 왼쪽 어깨가 무어 대수라고 나는 이렇게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왼쪽 어깨도 오른쪽 손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다. 서하의 치료에도 완벽하게 낫지 않은 것을 보면 필히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원래 우리가 살던 세상이었으면 달랐을까? 많이 달랐겠지….”
저보다 심한 몸을 하고도 희망을 가지고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가득인데. 그런데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지금 태경이 처한 상황은 참 복잡했다. 대한민국 서울에 살던 자신감 넘치던 최태경이었더라면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이석에게 매달렸을까? 지금 자신이 내린 결정은 이기심 속에서도 희생이 포함되어있는 것이 맞는가? 한 번 경험한 죽음의 공포가 그리 컸나. 전부 다 부질없는 물음이었다. 미리부터 겁을 먹은 제 마음이 더욱 크겠지. 그저 이기적인 것일 뿐이겠지. 태경도 알고 있었다.
“죽지 마요.”
현실적인 서하의 작별 인사를 들으며 태경이 작게 웃었다.
“그래.”
태경은 그렇게 대답하며 14층으로 향하는 입구에 발을 올렸다. 놀란 듯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오고 있는 이석이 보였다. 얼핏 이석과 시선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태경은 14층에 도착했다. 눈앞에 해골 전갈이 있었다. 어색하게 왼손으로 검을 들고 선 태경이 해골 전갈을 향해 달렸다. 태경이 새로 깨달은 스킬을 시전했다. 두 다리가 단단하게 땅 위에 버티고 섰다. 태경은 몬스터의 돌진을 훌륭하게 막아내는가 싶더니 조금씩 흔들렸다. 성치 않은 왼쪽 어깨와 오른쪽 손이 문제였다. 균형이 흐트러진 태경은 저 뒤로 날아갔다.
10. 몬스터 노름판
15층에서 내려와 13층까지 도착하는 동안 태경과는 코빼기도 마주칠 수 없었다. 14층에서 태경의 흔적을 찾기는 했으나 이미 태경은 그곳에서 떠난 후였다. 그 뒤 우리는 빠르게 13층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이제 막 13층을 다 둘러보고 12층으로 내려와서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12층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12층 중간지점이었다.
“아아아악!”
“에이, 거기서 뒤지면 어떡하냐!”
“퉷! 돈만 잃었잖아! 이봐, 쟤가 제일 잘 싸우는 놈이라며?”
“제일 잘 싸우던 놈 맞아. 저놈 덕분에 어제는 2배나 벌었는데. 오늘은 쪽박이군. 젠장, 체력이 떨어진 줄 알았으면 다른 놈한테 거는 거였는데.”
“그러게 이번 한 번은 나처럼 몬스터한테 걸지 그랬나. 관람하다가 적절히 유도리 있게 움직여야 열매가 따라오는 거야.”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나름 강해 보이는 사람들이 원으로 띄엄띄엄 둘러서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관람하는 사람들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가끔 한 마리씩 몬스터를 유인해서 원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군데군데 열매가 한 무더기씩 쌓여있었다. 아마 열매가 화폐 대신 거래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안쪽 원에서는 벌거벗은 맨몸의 사람들이 몬스터와 싸우는 중이었다. 벌거벗은 사람들은 팬티 하나만 입은 상태에서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채였다.
“하아아앗!”
그들은 살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얼굴에 절망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살기 위해 맨몸으로 몬스터와 싸웠다. 차마 같은 인간에게 할 수 있는 행위로는 보이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일까. 목적이 무엇일까? 단순히 흥미와 재미를 위해서?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까지….”
말을 잃은 내가 눈앞의 장면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상진과 서하도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머릿속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무작정 공격을 해야 할까? 공격한다면 같은 인간의 피를 손에 묻혀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한참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갑작스럽게 귓가에 들이닥치는 작은 바람에 나는 화들짝 놀라 옆으로 몇 걸음 움직였다. 옆에서 내 귀에 바람을 불어넣던 서호가 그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선배,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서하는 눈치채고 있었는지 이마를 손으로 짚고서는 서호를 바라보고 있었고 상진은 무의식적으로 나를 끌어당기며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서호의 등장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서 지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스킬 진짜 짜증 난다. 뭐 하고 있다가 여기서 얼굴을 들이미는 거야?”
“형 스킬 죽이지? 부러워? 충분히 그럴만해.”
“서호야. 지금은 좀 조용히 하고 있어. 제발, 부탁이야.”
“선배 지금 나한테 부탁 처음으로 한 거 알아요? 나 진짜 너무 기뻐요!”
서호가 내 손을 잡고는 위아래로 방방 흔들었다. 골머리가 아팠다. 서호가 내게 물어왔다.
“내가 저 새끼들 처리해줄까요? 선배 저 새끼들 때문에 인상 쓰고 있었잖아.”
“…어떻게 처리할 건데.”
나는 서호의 말에 잠시 텀을 두고 말했다.
“다 죽여버려야지 뭐.”
“뭐라고?”
“왜 그렇게 놀라요? 저런 새끼들은 갱생의 여지도 없는 놈들이에요. 살려두면 또다시 저런 말도 안 되는 몬스터 노름판 만들어서 사람들 계속 죽일 텐데?”
“다른 방법이….”
“다른 방법? 어떤 거요? 선배, 여긴 법도 없고 질서도 없고 그냥 강함이 법이에요. 와, 내가 본 일 그대로 말하면 여기 세 사람 전부 다 기절하겠네. 무슨 도덕책이세요? 정신 차려요. 나는 선배 죽는 거 싫단 말이야!”
“다른 일이 또 있어? 무슨 일인데?”
상진이 인상을 쓰며 서호에게 진지하게 묻자 서호가 상진을 쳐다보더니 내 손을 더욱 꽈악 잡으면서 말했다.
“아니, 다들 살면서 나쁜 짓 한번 안 해본 것처럼 착한 척만 하려고 하네. 상상력이 부족한 건가?”
말투가 꼭 나를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서호는 얼굴 근육을 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이석이 선배랑만 말할 건데. 메롱. 상진이 형 약 오르죠? 그렇죠? 하하하! 표정 진짜 웃기다.”
서호가 상진의 찌그러진 얼굴을 보며 웃었다.
“다른 일이 뭔데? 그것 때문에 위로 안 올라오고 내려간 거야?”
“음, 비밀. 진짜 기절들 할까 봐 못 말하겠는데요. 일단 위로 올라가지 않은 이유! 14층 올라가려고 하는데 입구가 막혀서 다시 내려왔죠. 씻으려고 다시 10층에 내려갔다가 쉬고 싶어서 거기서 계속 지냈고. 선배가 보고 싶어서 다시 층을 오르다가 마주쳤고.”
내 진지한 어조의 물음에 서호도 웃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 머리가 아팠다. 그 와중에 눈앞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버티지 못하고 몬스터에게 당한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도 들려왔다.
“그렇지! 잘했어!”
“와, 이번 판 꽤나 짭짤한데?”
서호가 그쪽을 보며 물어왔다.
“어떻게 해요. 도와달라면서. 여기 말고 내가 아는 곳만 네 군데나 더 있는데.”
“네 군데나 더 있다고?”
“말도 안 돼.”
“형, 거짓말하는 거지? 그렇지?”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어? 난 나쁜 짓 해도 사실대로 말하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랬…지.”
서호의 목소리에 서하가 대답했다.
“선배. 아마 이런 노름판 더 많이 있을걸요? 11층에도 또 있으니까.”
“11층도?”
“혹시 그 아래층도 다 이런 거야?”
서호가 나와 상진이 하는 말을 무시하며 자신과 함께 나쁜 놈들을 처치하자며 졸라댔다.
“선배랑 서하가 도와줘야 좀 더 빠르고 수월하게 처리하죠. 저놈들은 인간말종 쓰레기들이라 죄책감 안 가져도 돼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나는 서호의 말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서호는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대답을 기다리던 서호가 훌쩍 스킬을 사용해서 눈앞의 노름판에 다가갔다. 서호가 멀어지자 상진이 다가와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어이! 재미들 있으신가? 뭐, 열매는 많이들 버셨고? 에이, 당신은 열매 다 잃은 것 같은데. 왜 계속 있어?”
난데없는 서호의 등장에 사람들이 잔뜩 굳어서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다들 입이 없어? 아니면 말을 할 줄 모르는 건가? 아닌데, 아까는 잘만 나불거렸는데. 이상하다?”
“너 뭐야, 새끼야!”
서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 하나를 아랫입술에 가져다가 댔다.
“뀨우? 유레이의 귀염둥인데요?”
“이 미친 새끼. 뭐야!”
“가드들 뭐 하고 있어! 저런 미친놈 안 잡고!”
“나 꽤 귀엽지 않았어? 반응이 격렬하네. 안 귀여웠나? 그럴 리가 없는데.”
의아한 듯 말하는 서호의 모습이 참으로 여상스러웠다. 사람들의 외침에 원 가장자리에서 몬스터들의 접근을 제지하던 사람 하나가 서호에게 다가갔다.
“출입증.”
“출입증?”
“이곳에 참여할 수 있는 출입증이 없으면 넌 죽음이다.”
“아하, 그래?”
“그래. 보아하니 너는 출입증이 없는 것 같군. 죽어줘야겠다.”
“아하하하하하!!! 보아하니 너는 출입증이 없는 것 같군. 죽어줘야겠다. 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아저씨.”
서호가 우스꽝스럽게 남자의 말을 따라 하면서 비웃었다. 그런 서호의 행동에 남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바로 서호에게 검을 날렸다. 서호는 가뿐하게 그 움직임을 피하더니 남자의 목에 검을 집어넣었다.
“하아아… 와, 다들 이 기분에 살인을 저지르는 거구나? 엄청 황홀하네! 힘이 죄다 나한테 빨려들어 오는 것 같은데?”
서호가 황홀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호에게 다가간 가드가 꽤 강한 편이었던 것인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그곳에서 벗어나 도망쳤다. 그 와중에도 제 열매를 챙기려고 노름판 앞에서 벗어나지 않고 열매를 집어 드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나 같은 꽃미남이 뭐가 무섭다고 도망을 갈까? 그렇죠? 이석 선배.”
서호의 눈이 나를 향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여기는 우리가 살던 한국이 아니고 저 사람들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살인마집단일 뿐이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빠르게 도망가던 사람들을 처리했다. 이미 몬스터에게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학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드들을 제외하면 12층에 어떻게 올라온 것인지 의문스러운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서호가 벌거벗고 있는 남자 네 명을 구해내 죽은 이들의 옷을 입히고 무기를 쥐여주고는 내 쪽으로 왔다.
“짜란, 어때요. 이석 선배. 백마 탄 왕자가 등장했습니다. 나한테 좀 반했나?”
우리가 구해준 것도 아니건만 그 남자 넷은 서호뿐만이 아니라 나와 상진이, 서하에게까지 감사 인사를 건넸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은혜를 지키겠다고 말하는 남자들의 눈에는 눈물이 잔뜩이었다. 한참을 서러운 눈물을 뱉어내던 남자들이 서호가 지루해하는 모양새를 보더니 씩씩하게 눈물을 훔쳐내고는 말했다.
“형님! 형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니겠습니다.”
“엑! 누가 형님이에요! 나 아직 파릇파릇한 20살이에요! 누가 봐도 아저씨가 나이가 더 많은데.”
“그래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님!”
사내 넷이 서호에게 형님! 하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질색하던 서호가 그 모습을 보고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아, 진짜! 너무 웃겨! 다들 영화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아 배야!”
나와 상진, 서하는 복잡한 심경을 숨기며 서호를 따라서 이동했다. 또 다른 노름판이 있다는 소식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째 몬스터 노름판에 도착했다.
이곳이 더 큰 판이었는지 우리가 마주했던 노름판보다 열매나 가드, 노름꾼들의 수가 두 배가량 많아 보였다. 그들은 광기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딘지 생각도 하지 않고 이런 노름판을 벌이고 있었다. 자신이 투자한 곳에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 같자 사람들이 방방 뛰었다.
“하하하! 조금 더 힘내봐! 그래! 옳지!”
“그거야! 와, 방금은 진짜 최고였다.”
“아씨! 또 잃었어!”
“이봐, 최 씨. 그렇게 잃기만 하면서도 어떻게 그리 꼬박꼬박 오슈?”
“내 맘이다. 왜!”
“아이고, 참 징하다 싶어서 그러지.”
“뭐야!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새끼가!”
“뭐, 덤벼봐. 레벨도 코딱지만 한 게 어디서 덤벼?”
그들은 몬스터와 싸우는 사람을 내버려 두고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들을 다시 둥그렇게 둘러쌓았다. 또 다른 내기가 시작된 것이다.
“저 미친놈들.”
상진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서호가 처리했던 곳의 사람들보다 더욱 악질인 놈들이었다. 이곳은 몸이 성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팔 하나가 잘린 사람, 다리 하나가 잘린 사람, 기형적으로 몸 어딘가가 꺾여있는 사람, 얼굴 한쪽이 알아볼 수 없게 짓무른 사람 등 온갖 사람들이 줄을 서서 몬스터와 싸울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담한 심정이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건 내 옆에 서 있는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악마가 되었다. 서호가 당장 나가서 사람들을 처리할 것 같은 기세였기에 내가 의견을 냈다.
“일단 몬스터를 끌어모아서 데리고 온 다음에 몸 불편한 저 사람들 먼저 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왜요?”
“여기는 아까보다 판도 크고 가드들이 아까보다 많잖아. 사람들 안전하게 구하려면 난장판일 때 가서 구하는 게 피해가 없을 거야.”
“선배, 아직 사람 죽이는 거 거부감 들어서 그렇죠? 저놈들 그냥 몬스터라고 생각해요. 아주 흉악한 몬스터. 크아앙!”
서호가 양팔을 들더니 맹수 흉내를 냈다. 서하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반박했다.
“형은 그게 어떻게 그렇게 쉬워?”
“미치면 돼. 정상적인 거 하나 없는데 왜 나까지 정상이어야 해?”
서호의 답은 간결했다. 어쩌면 서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미친 세상에서 왜 나 홀로 멀쩡하게 살아가야 할까.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오히려 나는 더욱 그것을 놓고 싶지 않았다.
“선배, 선배는 내가 저놈들 죽였다고 살인마로 보여요? 막 이 사람 저 사람 다 죽이고 다니는 그런 미치광이로 보이나?”
서호는 처음 보는 눈으로 내게 말했다. 순간 서호의 눈동자가 마치 블랙홀 같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미쳐야 살죠. 응? 여기서 안 미치고 배기겠어? 아니면 혼자 고고하게 서 있고 싶어요? 뭐, 선배는 그것도 예쁘긴 할 것 같은데.”
“너 적당히 해.”
상진이 내 앞으로 나서며 서호에게 경고했다. 우리의 말다툼 아닌 말다툼에 옆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남자 넷이 눈치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이 그런 나를 보더니 더욱 불안해하며 몸을 가만히 놔두지를 못했다. 복잡한 심경을 애써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서호에게 말했다.
“일단, 몬스터 모아올게.”
“아, 싱거워라. 선배 의외로 겁쟁이구나? 흥, 재미없어. 그렇지만 그거 알아둬요. 몬스터 데리고 와서 죽이는 것도 죽이는 거야.”
서호가 바닥을 발끝으로 툭툭 차며 투덜거렸다. 상진이 발을 옮기는 나를 따라왔다.
“서하 너는 서호 지키고 있어. 사고 치지 못하게. 난 이석이랑 같이 몬스터 모아올게.”
“응.”
서하가 눈동자만 슬쩍 굴려 서호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상진과 나는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이곳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맞닥뜨리는 것이 몬스터였기 때문이었다. 8단계나 뻥튀기된 난이도의 보스 몬스터를 잡고 난 후라서 그런지 눈앞에 있는 몬스터들이 별 볼 일 없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몬스터들을 최대한 유인하면서 상진에게 물었다.
“진짜로,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면 말이야. 아니, 죽여야 할 때가 오면.”
“응.”
상진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상진의 스카프를 하고 있던 사람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살갗이 갈라지며 나던 감촉이 손에 따라붙었다.
절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모르겠어. 서호의 말처럼 정말 적당히 미친 상태로 살아야만 할까?”
“음, 그 선택이 절대 나쁘지 않으리란 건 내가 장담할게.”
“넌 매일 내 편만 들잖아. 됐어. 서하한테나 물어봐야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네가 이상한 선택을 할 리가 없잖아.”
상진의 올곧은 검은 눈동자에 내가 단단히 박혀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을 보고 쑥스러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괜히 상진의 팔뚝을 한 대 때리고 우리는 몬스터를 이끌며 몬스터 도박장 쪽으로 향했다. 너무 많은 수의 몬스터를 끌고 왔는지 우리 뒤로 모래 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저쪽에서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 군단을 이끌고 사람들에게 향하는 우리가 어쩐지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 못된 악당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해내는 용사.
“이거, 영화로 찍으면 진짜 어마어마하겠는데?”
상진이 웃으며 내게 농담을 건넸다. 조금 가라앉은 내 기분을 풀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상진의 의도야 뻔하지만 모른 척 웃음 지어 보였다. 그래,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악마가 되기도 하지만 그만큼이나 쉽게 영웅이 되기도 했다.
* * *
14층 몬스터들을 피해서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앉은 남자가 숨을 얕게 내쉬었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지 이틀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한쪽 팔을 들어 힘을 주어 보았다. 팔꿈치에서부터 전해지는 힘에 부르르 떨리기만 할 뿐 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간신히 이어져만 있을 뿐 제 오른손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힘없이 떨어트렸다. 힘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제 일행에게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에게 버거운 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에 떨어지기 전까지 포기란 것을 모르고 지내온 남자였다. 하는 일마다 성공적으로 해냈고 사는 데 별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서도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한 것은 남자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왼손으로도 제법 몬스터를 상대할 수는 있었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그간 얻어온 많은 능력치로 나름 버틸 수는 있으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더 이상 무리였다. 지금의 현실이 남자의 목을 옥죄었다. 처음 느껴보는 끝없는 절망에 남자는, 태경은 그 자리에서 천천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와 같이 있고 싶어?’
머릿속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그와 같이 층을 오르고 싶어?’
새벽이슬을 머금고 잔뜩 차가워진 수풀 안에서 태경은 목소리와 마주했다.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도 않는 곳에서 흐릿한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내가 도와줄까?’
귓가에 숨결이 맞닿아오는 것처럼 짜릿한 전율이 등을 타고 흘렀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소리였다. 태경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면서 멀쩡한 왼손으로 자신의 귓가를 매만졌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무엇일까? 태경이 허무한 웃음을 내뱉으면서 되는대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할 수 있다면 도와보십시오.”
최태경이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 모르겠다. 손 하나 잃은 게 뭐 대수라고, 자신보다 더한 장애를 가지고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생각처럼 그렇게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 태경이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좋아, 내가 도와줄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선명한 목소리에 태경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바로 눈앞에 검은 머리를 한 남자아이가 쪼그려 앉아있었다. 태경을 관찰이라도 하듯 고개를 갸웃하며 태경을 살피던 남자아이는 덥석 태경의 다친 손을 마주 잡았다. 놀란 태경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남자아이와 태경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남자아이가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눈을 반짝였다. 새빨간 눈, 검은 머리카락, 검은 슈트.
“너는….”
남자아이는 양쪽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려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를 돕겠다고?”
남자아이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대신 너를 내게 줘.’
“나를… 달라고? 너를 뭘 믿고? 날 이렇게 만든 게 너면서!”
‘그럼 그렇게 살다가 죽을 거야? 그는 보지도 못하고?’
“널 어떻게 믿지?”
‘이상하다.’
남자아이가 다가와 태경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상체를 살짝 기울이며 고개를 갸우뚱한 채였다.
‘뭘 고민해? 그와 함께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그렇지만 널 믿을 수는 없지.”
‘난 거짓말 못 해. 영혼의 상태가 되었거든. 나는 진짜 순수하게 널 도와주려고 온 거야.’
남자아이를 믿을 수는 없었지만 태경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아,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다친 네 손을 잘라내.’
“뭐?”
‘지금 당장.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태경이 꿀꺽 침을 삼켰다. 손이 벌벌벌 떨려왔다. 아무리 무디거나 용감한 사람이어도 스스로 제 팔을 자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다짐이 필요했다. 서하의 스킬로 인해 손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와는 달랐다. 태경은 주저하다가 검으로 제 오른 팔목을 내리쳤다. 서하와 있을 때는 알지 못했지만, 검의 감촉이 몹시도 차갑다는 것을 태경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끄윽!”
‘좋아. 맛있겠다.’
남자아이는 떨어진 태경의 손을 들고 태경의 얼굴 바로 앞에서 아그작 아그작 씹어먹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쩐지 황홀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남자아이의 입가에 흐르는 피가 침과 섞여 반들반들했다.
‘계약은 완료됐어. 너 진짜 맛있는 사람이구나?’
태경은 눈앞에서 아이가 자신의 손을 맛있게 씹어먹는 장면을 그저 멍하니 초점이 풀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무리 각오하고 손을 잘라냈어도 누군가 잘린 제 손을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크나큰 정신적 충격이었다. 아이의 몸이 검은 연기로 화하더니 태경의 손이 잘린 부위로 몰려왔다. 그것은 둥근 원처럼 모였다가 안개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기를 반복했다. 굉장히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태경은 그렇게 여기지 못했다. 이내 검은 연기는 손 모양으로 변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아니, 흡수되었다.
파아앗!
잠시 검은 연기가 온몸으로 퍼지는가 싶더니 다시 손으로 되돌아갔다. 태경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왼손을 들어 오른손에 가져다 댔다. 오른손의 얼음같이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왼손은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으나 오른손은 아니었다. 슬쩍 오른손을 움직여보았다. 차가운 온도를 빼고는 태경의 손은 원상태로 돌아와서는 멀쩡하게 제 의지대로 움직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태경은 고개를 들었다.
“왜 날 도와주는 거지?”
‘난 죽었잖아. 빌붙어서라도 살아야지 않겠어?’
“뭐?”
‘네 덕에 살게 되었으니 힌트를 하나 줄까? 우리에게 인간은 굉장히 맛있는 간식이야. 그래서 당장 그곳에 있는 모두를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그때 딱 나타난 거지.’
“뭐가 나타났지?”
‘유레이가.’
태경이 입술이 어그러졌다. 태경의 표정은 알 수 없는 오묘한 것이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이석 씨.”
아직 남자아이가 정말로 저를 도와주려고 한 것인지 일행을 위험에 빠트리기 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혼자 다니다가 정말 괜찮다고 생각되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태경은 일단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걸음이 어쩐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대로 걸어 밑으로 향하는 입구에 몸을 실었다.
11. 마주한 살인자집단
서정수는 안 그래도 레벨업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간 데다 특성이 민첩이기에 남들보다도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거의 2배에 가까운 몸놀림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레벨도 꽤 오른 덕에 유레이에 오고 나서 자신보다 빠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11층에 있는 몬스터들도 혼자서 처리할 수 있었다. 제 일행들도 자신을 향해 종종 부러운 시선을 던졌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도 자신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스킬을 깨닫지는 못했지만 웬만한 스킬보다는 이 민첩 특성이 도움이 많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스킬 중에서는 작은 불씨만 뿜어낸다든지 그저 잠깐 주먹을 단단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몬스터를 잡는 것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자신감이 붙어서 홀로 12층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살인자집단이 11층과 12층을 몬스터 노름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강한 몬스터를 잡아 조금 더 강해지고 싶은 욕망이 그런 못된 놈들에게 잡힐 수도 있다는 걱정보다 더욱 앞섰다. 게다가 요즘 무슨 일인지 몬스터 노름판의 수도 전에 있던 것의 삼 분의 일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 들어있었다. 또한 살인자집단의 우두머리 격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모두들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서정수는 일이 벌어지기 전이 강해지기 위한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정수는 최대한 살인자집단을 피해서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결국 녀석들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 강해지고 싶은 욕심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는구나 하고 좌절과 공포, 미약한 분노와 체념 등의 온갖 감정이 마구 뒤섞인 서정수의 얼굴을 녀석들이 비웃었다.
“하하하! 진짜 웃기는 녀석이네. 잔뜩 겁먹은 거 보여? 근데도 살려달라고 안 할 거야?”
“그래도 이 새끼 이거 쓸만하겠는데?”
“그러게, 겁은 잔뜩 집어먹어서는 살려달라고 비는 척도 안 하네? 저거 봐. 눈에 살기 도는 거.”
“네가 뭘 어쩔 건데. 너 우리만큼 강해? 우리 죽일 수 있어?”
“에베베베베. 약올라? 어? 이 새끼야. 약오르냐고!”
“커헉! 악!”
“적당히 패. 등신 만들지 말고. 이런 걸 써먹어야 오래간다고.”
“알겠어. 잔소리 그만해. 같은 동료끼리 어디서 명령질이야.”
“네놈 새끼가 오죽해야지.”
“뭐야?”
녀석들이 서정수를 놀리며 잔뜩 조롱했다. 서정수는 마지막 순간이 원래 제가 살던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슬픔이 몰려왔다. 그러나 놈들은 서정수를 죽이지 않았다. 죽이기는커녕 옷과 무기를 모두 빼앗고는 팬티만 입은 상태로 몬스터와 싸우게 했다. 노름판의 장난감 말로 삼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세운 가드에 의해서 레벨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몬스터 노름을 즐기다가 사라졌다. 노름을 즐기는 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서정수였지만 노름판을 관리하는 관리자에 비하면 턱도 없이 약했다. 그래서 그는 몬스터에게 죽지 않기 위해서 군말 없이 싸웠다. 이때만 해도 그는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곳에서 버틴 지 일주일이 지나자 계속해서이기는 탓에 수익이 적어졌다는 것을 이유로 그들은 서정수의 왼팔을 잘랐다. 오른팔을 자르면 몬스터에게 한 번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노름을 즐기는 이들이 재미없어한다며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마구 떠들어댔다. 두목이 알 수 없는 던전으로 떠나서 이들이 대장격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으스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좆같은 이상한 세계에 또 다른 좆같은 던전이 있다는 사실을 들으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곳의 끝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생각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
심적으로 굉장히 지친 상태에서 일어난 이 일들을 그는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렇게 심신이 지친 그는 차라리 몬스터에게 죽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창백한 낯에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을 한 남자였다. 그가 서정수의 생명을 구해내었다. 말도 안 되는 일들로 가득한 살인마집단의 소굴에서 꺼내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게는 영웅이세요. 구원자이십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서정수는 감격하며 말없이 눈물을 흘려댔다. 수도 없이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를 구원자라고 영웅이라고 지칭했다.
“이런 비슷한 곳이 또 있습니까?”
“네, 네? 물론입니다! 제가 아는 곳만 두 곳입니다.”
“안내해 주십시오.”
“네! 제가 구원자님을 무사히 다른 노름판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남자의 눈빛이 싸늘해서 서정수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빠른 몸짓으로 남자를 자신이 아는 다른 노름판들로 안내했다. 노름판의 가드들과 싸우는 남자의 손속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도 이기지 못했던 가드들을 그는 한 방에 죽였다. 사방에서 튀어 오른 피가 남자의 얼굴에 묻어 흘러내려도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서정수는 살짝 떨리는 몸을 남은 한쪽 팔로 감싸 안으면서 그 장면을 두 눈 뜨고 똑바로 지켜보았다. 자신의 원수들이 죽는 것임에도 남자의 알 수 없는 스킬에 몸이 편육이 되어 살점들이 떨어지며 머리가 베어져 날아가는 모습은 심히 구역질이 치미는 장면이었다. 서정수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구역질을 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며 그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제 옆에 있는 몇 사람들은 이미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거나 구역질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만은 제 원수들이 죽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리라 생각하며 버텼다. 그렇게 남자의 구원이 아니, 학살이 끝났다. 노예처럼 굴려지던 사람들은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음에도 몸을 벌벌 떨면서 두려워했다. 아무래도 남자의 자비 없는 손속이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음이 분명했다. 잠시 주변의 사체들을 살펴보면서 입맛을 다시던 남자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서정수는 순간 마주친 남자의 얼굴을 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의 눈빛은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의 그것이었다.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진심으로 저 시체들을 먹고 싶어 했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피가 남자의 입으로 굴러 들어갔다. 남자는 혀를 내어 그 피를 받아마셨다. 온몸이 굳어지며 구역질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서정수가 그대로 토했다. 그런 서정수를 잠시 지켜보던 남자는 별말 없이 서정수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배려심 없는 빠른 걸음에 사람들은 서로서로 부축해가며 남자에게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서정수도 그런 사람들을 도와가며 아까와는 달리 말없이 침묵으로 남자의 뒤를 따랐다.
우리 일행은 두 번째 노름판에서 구해낸 사람들과 함께 움직여야만 했다.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다녀야 해서 힘에 부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들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힘들다고 고통을 호소하면 자리에서 잠깐 쉬면서도 다른 곳에 잡혀있는 사람들이 걱정되어 오래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다른 곳들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구해서 움직인다면 필시 인력난은 물론이고 많은 환자들 때문에 한 걸음 옮기는 것도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안전하게 10층까지 데리고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걱정을 하며 세 번째 노름판 앞으로 갔을 때였다. 이미 노름판이 박살 나서 여기저기 흩어진 시체들이 보였다. 놀라서 달려가 확인해보니 노름을 하던 사람들과 가드들만이 죽어있고 노예처럼 부려지던 사람들의 사체는 몇 구 없었다. 게다가 시체의 상태를 보니 굉장히 강한 상대가 일방적으로 학살한 것처럼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 말고 이 짓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이 있었나 봐요.”
“아니면 밑에서 토벌이라도 하러 올라왔나 보지. 와, 근데 시체 상태 좀 봐봐. 쩐다. 진짜 멋있어. 그렇죠, 선배?”
“토벌이라니?”
처음 듣는 얘기에 나와 상진, 서하의 고개가 재빠르게 서호 쪽으로 돌아갔다. 서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아, 말 안 했나? 내가 위로 올라오기 전에 10층에서 착한 쪽, 나쁜 쪽 편 나눠서 싸우고 있었는데.”
“편을 나눠 싸우고 있었다고?”
“선배는 분명히 착한 쪽, 나쁜 쪽 중에 정하라고 한다면 착한 편에 서겠죠? 그럼 나도 따라서 착한 편에 서야지! 그리고 사람들의 영웅이 되는 거지! 진짜 멋있죠! 선배는 공주, 나는 영웅!”
“더 말해봐.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자, 자네에게 공주를 주겠네! 큰 공을 세웠으니 당연하지! 음하하하. 그렇게 나랑 선배가 결혼을 하는 거죠! 아이는 셋 정도가 좋으려나? 아니야. 나는 선배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요. 아이는 하나가 좋겠다. 그렇죠?”
“공주가 물건이야? 왜 그렇게 말해? 장난하지 말고 10층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말해보라니까?”
“말하면? 뽀뽀해 줄 거예요? 응? 나 이석 선배가 뽀뽀해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내 마음에 안 드는 짓만 했잖아요. 응? 뽀뽀해줘.”
“저, 제가 10층에서 지내서 잘 알고 있는데요….”
한 남자가 손을 들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서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남자를 노려보길래 내가 그런 서호의 앞을 가로막으며 남자에게 계속 이야기해보라고 말했다. 내 옆으로 상진이 따라붙었다.
“10층에 길드가 하나 있어요.”
“길드가 있단 말이에요?”
“이상아 님이 길드장이시고 부길드장으로 김혜진 님이 계셔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남자의 말을 계기로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며 정보가 모였다. 10층에 있는 길드가 사람들을 모아서 살인자집단과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부길드장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참 익숙했다. 우리는 서둘러 10층으로 내려가기로 합의했다. 일단 위급환자들만 우리가 업기로 하고 빠른 속도로 밑으로 내려갔다.
11층도 12층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일단 다른 노름판들이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박살 나 있는 것을 확인했다. 더 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사람들을 애써 독려하며 서둘러서 10층으로 내려갔다. 10층은 난장판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마구 움직이고 있었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보는 내가 더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위, 위층에서 내려온 사람이 또 있잖아!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막아야지. 빨리 막아!”
“길드장님께 상황을 먼저 알려야 하는 거 아니야?”
“빨리 한 명이 가서 알려! 서둘러!”
사람들이 우리를 보더니 겁을 집어먹고는 저들끼리 흥분해 소리쳤다. 나는 멍청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우리를 보고 저렇게 경계하는 거지?”
굉장히 얼떨떨했다. 사실 지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가 않았다. 눈앞의 풍경은 지금까지 우리가 버텨왔던 세상과는 동떨어진 세상 같았기 때문이었다. 곳곳에 작은 통나무집들이 서 있었고 몇몇 집은 아직도 공사 중인지 사람들이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대장간도 만들었는지 뜨거운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칼을 캉캉거리면서 손보는 곳도 있었다. 물론, 우리가 등장한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나르던 것을 바닥에 던지고 무기를 집어 들고 있기는 했다.
“딱 봐도 우리를 살인마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선배 혹시 바보예요? 괜찮아요. 나는 선배가 바보라고 해도 선배를 사랑할 자신이 넘치니까. 역시 아이는 하나죠?”
서호의 말에 상진이 내 어깨를 잡고서 나를 제 쪽으로 끌더니 옆에 세워두었다. 그래, 지금은 서호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고 싶었다. 남자인 나에게 아이를 낳으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진이 내 귀에 귓속말을 했다.
“너는 저놈한테 뽀뽀도 못 하고 저놈하고 결혼도 못 해. 명심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황당한 말에 나는 괴상한 표정을 하며 상진을 쳐다보았다. 상진은 그저 나를 보며 작게 웃을 뿐이었다. 팔뚝을 한 대 때리려다가 상진의 잘생긴 미소에 간신히 충동을 참아낼 수 있었다.
“저….”
뒤에서 주춤거리면서 사람들이 말을 붙였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사람이 당할 짓이 아닌 것들을 당했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무척이나 하락해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네, 말씀해보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문제는 없는데 저분들이 오해를 하는 이유가 우리인 것 같아서 죄송해서….”
“아, 아닙니다. 이야기로 잘 풀어가면 될 문제니까요. 미안해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제야 저희들 때문에 우리가 오해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는 저마다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놈들에게 잡혀서 모진 고문을 받은 탓이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풀려난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위에서 내려온 사람이라 오해를 받는 거지 여러분들 때문에 오해받는 게 아니에요.”
“네, 맞아요. 어서 일어나세요.”
상진이 사람들 앞으로 가서 사람들이 일어나도록 도왔고 서하도 같이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는 것은 오직 서호뿐이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를 모르는 저쪽 사람들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모습에 오히려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넘치는 대치상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찰나에 저쪽에서 총알처럼 빠르게 무언가가 튀어나와 공격을 해왔다.
캉!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어?”
그렇게 공격한 사람과 공격당한 내가 서로 놀라서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이석 씨? 이석 씨가 왜….”
“저야말로 혜진 씨가 갑자기 공격해서 놀랐습니다.”
“아! 죄송해요! 어제 태경 씨가 다른 사람들도 구해서 내려왔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놈들이 복수하러 온 줄 알고… 제 불찰이에요. 사과할게요.”
“누나! 태경이 형 지금도 여기에 있어요?”
“서하야. 오랜만이네. 상진 씨도요.”
“네. 잘 지내셨어요?”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태경 씨가 여기에 혼자 내려왔다는 것도 몰랐던 것 보니까 그쪽 일행들도 많은 일이 있었나 보네요.”
혜진의 미소가 씁쓸했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뒤에서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니 답답한 표정을 지어왔다.
“혜진 님! 아는 사람입니까?”
“그놈들 아닙니까?”
“네, 어제 내려온 사람과 일행인 분들이에요. 남아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구해서 내려왔나 보네요. 인사하세요. 이석 씨랑, 상진 씨, 서하랑… 누구죠?”
“와, 나 있는 거 이제 알았어요? 진짜 너무하다. 나 완전 서운해. 삐졌어! 말 안 할 거야! 흥이야! 흥!”
“응?”
서호의 반응에 혜진과 그 뒤에 있던 일행들까지도 모두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서하가 이마를 짚으며 제 형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상진이 내 어깨에 팔을 얹으면서 입을 열었다.
“서하 형입니다. 이서호라고.”
“아, 서하 형이구나… 네? 서하 형이라고요? 형도 있었니, 서하야?”
“네. 조금 창피한 형이라 말을 안 했는데, 이서호라고 제 형이에요. 보다시피 조금 모자라요.”
“아, 그렇구나. 혹시 주의해야 할 점이라도 있니?”
서하의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한 혜진을 보며 나와 상진이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서호의 모습이 정말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서호가 화를 내며 혼자 저 멀리 있는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혜진이 놀라서 서호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는 스킬까지 써가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마지막 말까지 참 가관이었다.
“다들 미워! 특히 이석이 선배 진짜 실망이에요! 나중에 내 서방님으로 안 받아줄지도 몰라!”
그런 서호를 바라보며 혜진이 한마디 내뱉었다. 정말 재밌는 구경을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와우, 여전히 이석 씨 인기 좋네요?”
얼굴이 홧홧거리며 달아올랐다. 창피해서 제대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겠네요.”
혜진이 의미 모를 웃음을 지으며 상진을 쳐다보았는데 상진은 도도한 표정으로 내 머리 위에 고개를 묻을 뿐이었다. 창피한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이제 안쪽으로 들어가죠. 할 이야기가 많겠네.”
“저… 사람들은?”
“아, 걱정 마세요. 하민 씨, 사람들 좀 잘 챙겨주세요. 치료도 잘 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혜진이 자신의 뒤쪽에 있던 사람에게 부탁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분주히 몸을 움직여 사람들을 데려갔다.
“아 참, 상아 씨에게는 이분들 제가 데려갔다고 말 좀 전해줘요!”
혜진이 그렇게 외치자 사람들이 알겠다며 대답해왔다. 그제야 서하가 기쁨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를 내면서 혜진에게 가서 안겼다.
“누나!”
“그래, 그래. 일단 가서 얘기할까? 그 후에 태경 씨한테 데려다줄게.”
우리는 혜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우리를 눈치챘는지 혜진이 입을 열었다.
“놀랍죠? 이런 곳에 떨어졌는데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집도 지어서 살고.”
“네. 그렇네요. 저희는 층을 올라갈 생각만 하느라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어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이렇게 마을처럼 만들어서 사는 게 가끔은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어주기도 하나 봐요. 사실 5층에서는 이렇게 마을을 만들 생각도 못 했죠. 5달 지나면 사라질 층이니까요. 그래도 아직 5층에 머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벌써 내일모레면 2층이 사라질 날이네요. 그 사람들도 곧 위로 올라오겠어요.”
“이곳엔 대장간도 있는 것 같던데….”
“맞아요. 저쪽에 있어요. 그쪽과 관련된 특성을 가진 사람도 있더라고요? 신기하죠? 온갖 종류의 특성이 다 있어요. 물에 들어가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잠시지만 날아다닐 수도 있고 빠르게 움직인다거나 저처럼 다른 사람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거나.”
혜진이 대장간이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모든 것을 손에서 놓고 우리를 경계하던 사람들이 제 자리를 찾아 다시 일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부길드장님. 안녕하세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니에요. 수고하세요.”
혜진이 우리를 경계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안심시키려는 듯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혜진이 인사를 해오자 기쁜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마주 인사했다.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요?”
“네. 확인할 수 있죠. 그런데 내가 남의 속사정을 다 읽어내면 불쾌하잖아요? 그래서 딱히 사용하지는 않고 있어요.”
“그래도 대단한 능력이네요.”
“전투계열이 아니라서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딱히 불만은 없어요. 그 개새끼의 특성을 볼 수 있었으니까.”
“개새끼요?”
“있어요. 살인자집단의 쳐죽일 놈. 자, 여기가 나랑 일행들이 사는 집이에요.”
혜진이 멈춰선 곳은 숲으로 들어가는 곳의 초입에 있는 통나무집이었다. 주변은 다른 통나무집을 만드는 중인지 나무 자재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공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들어와요.”
혜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우리를 먼저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는 우리가 자리에 앉자 나뭇잎으로 만든 컵을 건네주더니 알 수 없는 액체를 그곳에 따라주었다.
“이게 뭐예요?”
나와 상진이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이미 목구멍 안으로 그 액체를 집어넣은 상태였고 서하만이 주저하며 혜진에게 액체의 정체를 물었다. 서하의 걱정과는 다르게 액체는 달콤한 맛이 났고 꽤나 맛있었다.
“맛있네요.”
“주스에요. 열매로 만든. 어때요? 주스로 마시니까 좀 색다르죠? 사실 지금은 이걸 발효시켜서 술로 만드는 방법도 연구 중이에요. 아직까지는 번번이 실패지만요.”
“대단하네요.”
“먹고 살려고 하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도요. 몬스터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은 없는지도 찾고 있다니까요? 이석 씨 말처럼 다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위층에서 뭐 이상한 사람들 만난 적은 없나요?”
혜진의 두 눈동자가 살의로 가득 차 번쩍였다. 나는 혜진이 저런 눈빛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조금 놀란 상태였다. 혜진이 놀란 우리를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 녀석들한테 죽을 뻔했거든요. 동훈 아저씨는 손가락을 3개나 잃었어요. 녀석들이 단검으로 손가락 사이를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게임을 한답시고 그렇게 만들었어요. 혜연이도 배에 큰 상처가 생겼고요. 상처 때문에 죽을 뻔했죠.”
생각보다도 녀석들의 행패가 심각했던 것 같았다. 상진이와 내가 시선을 교환했다. 곧 상진이 입을 열었다.
“서호에게 들어보니 이곳에서 살인마 녀석들하고 대립 중이라고 들었는데 놈들이 단 한 명도 없네요? 어떻게 된 겁니까?”
“아, 그것 때문에 이야기하려고 이석 씨랑 상진 씨, 서하를 부른 거예요. 녀석들이 10일 전에 갑자기 전부 사라졌거든요. 흔적도 남기지 않고요. 이상하지 않아요? 이석 씨 14층에서 보스 몬스터 잡고 바로 내려온 것 아닌가요?”
“그걸 혜진 씨가 어떻게 알아요?”
“아, 보스 몬스터가 잡히면 사람들 모두에게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보스 몬스터가 잡혔다고. 이석 씨는 직접 잡았을 테니까 몰랐겠네요.”
“아니, 그게 우리란 걸 혜진씨는 어떻게 아셨어요?”
“음, 살인마 녀석들을 미행해서 따라갔는데 14층으로 못 올라가고 녀석들이 그대로 밑으로 내려오더라고요? 그런데 위에서 이석 씨 일행이 사람들 구해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더 확신했죠. 아니면 달리 보스를 잡을 사람이 없잖아요. 제가 아는 이석 씨 일행들이라면 충분히 강하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리고 그게 사실이잖아요?”
“그렇…죠?”
“어쨌든 지금의 문제는 그거예요. 녀석들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그러게요. 위층은 숨을 만한 곳도 없을 텐데요.”
“녀석들이 사라졌다. 숨을 곳도 도망갈 곳도 없는 이곳에서. 수상한 냄새가 나요. 노름판 관리를 하는 가드들 몇 명을 제외하고 전부 사라졌어요.”
우리는 모두가 심각한 얼굴이 되어 말을 잃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예상 가는 상황이 그 무엇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심각함이 인지되었다.
“근데 녀석들이 없어진 틈을 타서 태경 씨와 이석 씨가 가드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구해 온 거죠. 아시겠어요? 녀석들이 다시 나타나서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전쟁이 시작되는 거예요. 아슬아슬 유지되고 있던 균형이 깨진 거죠.”
“이길 가능성이 높겠죠? 녀석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요? 이 많은 사람이 긴장할 만큼 녀석들이 강한가요?”
“강하죠, 보통 사람들보다는.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강해진 사람들이에요. 웬만한 사람들보다 빠르게 강해졌고 자기 힘에 취해서 다들 정상이 아니죠. 다들 미치광이들이라고 보면 돼요. 게다가 그놈들이 보스라고 따르면서 지지하는 그 남자는, 말도 안 될 정도예요.”
혜진이 다시 살벌한 눈빛을 해 보이며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몸도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일행들은 어디에?”
한참을 무언가 바라보듯 허공을 응시하던 혜진이 한 박자 느리게 대답을 해왔다. 어느새 표정도 멀쩡하게 돌아온 상황이었다.
“다들 사냥 나갔어요. 아직 레벨이 낮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을 번갈아 가면서 도와주고 있어요. 녀석들에게 맞서려면 레벨이 높아야 하니까. 사실 지금 정신이 없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 때문이죠. 언제 전쟁이 시작될지 모르니까요.”
똑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기는 다 나누셨나요? 백사 길드의 길드장 이상아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백사 길드요?”
내 물음에 혜진이 문을 열면서 답했다. 문 안으로 한 여성이 걸어들어왔다.
“아, 내가 길드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네? 인사해요. 백사 길드의 길드장 이상아 님이에요. 참고로 백세지사(百世之師)라는 고사성어를 줄인 거예요. 우리는 인간으로 백 세가 지나도 모든 사람들한테 본보기가 되어 전해질 만큼 훌륭하게 살자고.”
“반갑습… 어? 여기서 또 뵙네요? 오랜만이에요. 살아서 또 보니 좋네요.”
“아, 안녕하세요.”
“서로 아는 사이야?”
우리가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자 혜진과 상아는 서로 놀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굉장한 인연이라며 쾌활한 웃음을 보였다.
* * *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 찬 동굴에서 빠져나온 남자가 감탄사를 터트리며 흥분한 것처럼 소리쳤다.
[최초로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A구역과 B구역이 통합됩니다.]
[확장을 위해 유레이의 동기화를 진행합니다.]
남자는 목소리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남자가 놀란 건 단순히 눈앞에 펼쳐진 몬스터 노름판의 광경 때문이었다.
“와우! 대단한데? 완전히 깽판을 쳐놨어!”
그 말을 들은 그의 부하들은 온통 사색이 되어서 뒤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 가드들을 뽑아 관리했던 남자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밑 사람을 뽑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러더니 땅에 제 이마를 강하게 박으며 연신 잘못을 빌었다.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던 남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뒤에서 그 장면을 보던 사람들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가 몸을 갑자기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넘어갔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렇지?”
“사… 살려….”
“난 너 같은 개새끼는 필요가 없어서. 미안하게 됐어.”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목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입을 움직였다.
“아, 역시 피 냄새가 제일 달콤하다니까. 재밌는 일이 끝나서 걱정했는데. 재밌는 게임이 하나 더 나타났네? 으흥흥.”
남자가 기분 좋은 듯이 콧노래를 부르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로 겁에 질린 그의 부하들이 애써 몸에 힘을 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자, 멀쩡했던 우리 동료가 죽었으니 복수를 하러 가볼까? 다들 피가 들끓어 오르지? 오랜만에 인간사냥이다!”
“와아아!”
“우와!”
그의 부하들이 모두 그 말에 호응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꼭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한 명은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범인이 아니라 그냥 혼자 다니는 놈이 이렇게 만든 것이라면 어떡합니까?”
“그게 궁금한가?”
“궁금한데요.”
멀뚱멀뚱 서서 눈치 없이 남자를 바라보던 그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손을 쓴 것이다.
“흠, 괜한 호기심은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는 법이지. 어때? 멋있었나? 내가 이 대사를 꼭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거든. 이 기회에 해보네? 다른 사람 또 뭐 궁금한 게 있나? 없어? 그럼 그냥 쳐들어간다?”
그렇게 말한 남자가 혼자 궁시렁거렸다. 그 말을 들은 그의 부하들이 몸을 움찔했다.
“아니, 이 많은 수의 사람을 혼자 다니는 놈이 처리하기는 머리가 붙어 있기는 한 건가? 아, 내가 날려버렸지. 큭큭큭.”
그렇게 그들은 곧바로 10층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계속해서 미세하게 땅이 울렸다. 유레이는 그렇게 계속 동기화 작업을 계속했다.
“그나저나 이런 곳이 여러 곳이면 죽일 사람이 더 많아진다는 거잖아? 끝내주네.”
* * *
살인자 길드원들이 없어지고 태경과 우리 일행이 몬스터 노름판까지 모두 없애자 10층에 있던 사람들은 11층으로 사냥을 나갔다. 우리가 혜진 씨, 상아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태경은 사람들을 도와 11층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태경을 만나지 못하고 10층에서 휴식을 취하며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서하는 혜진 일행에게 달려간 지 오래였고 나와 상진만이 입구 근처에 앉아있었다.
“태경이 형은 우리를 만나고 싶지 않은 걸까?”
“그러게.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도 얼굴도 안 비추니까 좀 서운하네.”
“매일 형이랑 다퉈놓고는 지금은 얼굴 안 보인다고 서운해?”
“그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렇다고 내가 형을 미워하기라도 했어, 아니면 싫어하기라도 했어.”
“싫어는 했잖아.”
“그래, 조금 싫어하기는 했어.”
상진이 너무 쉽게 수긍하는 바람에 내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쩐지 그런 상진이 귀엽게도 느껴졌다.
“왜. 내가 너무 쉽게 수긍해서 웃겨?”
“조금.”
“이석이 너도 태경이 형이 떠난 이유 모르는 거 맞아?”
“응. 나도 몰라.”
“짐작 가는 건?”
“있기는 한데.”
“그게 뭔데?”
“그날, 몬스터랑 싸운 날 말이야.”
“응.”
“…아니야. 형이 오면 듣게 될 거 내가 뭐라고 해봤자.”
“그래도 난 네 말이 듣고 싶은데.”
“됐네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앞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대로 상진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형체를 확인한 적은 없지만 짹짹 새소리가 들려오고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목소리들도 들려왔다.
“어어! 나무를 거기에 두면 어떡하나! 넘어질 뻔했잖아.”
“아니 그럼 어디에 두라고? 이거 당장 쓸 거라 가까이에 놓은 거야.”
“그래도 사람이 다치지는 않게 놔야지!”
“거 참. 엄살은. 다쳤으면 열매나 먹어!”
오랜만에 맞이하는 평화였다.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어깨에 닿는 상진의 체온이 따뜻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두근 뛰었다.
“언제쯤이면 집에 갈 수 있을까. 너희 부모님은 무사하시겠지?”
“괜찮을 거야. 걱정 마. 곧 돌아갈 수 있겠지.”
상진이 내 머리 위로 입술을 맞춰왔다. 나는 괜히 심통이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은근슬쩍 주둥이 가져다 대지 마.”
“이런, 들켰네. 이석이 너는 어쩜 이렇게 민감하냐.”
“네 행동이야 안 봐도 뻔하지.”
“맞아. 내가 하는 행동이 다 너를 향한 거라서 그래.”
“얼씨구? 그렇게 말해도 안 봐줄 거거든?”
애써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내가 상진의 어깨에 기댔던 얼굴을 떼고 그의 팔을 찰싹 소리 나게 때리던 순간이었다. 차게 식었던 손바닥에 상진의 뜨끈한 체온이 닿았다.
[최초로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A구역과 B구역이 통합됩니다.]
[확장을 위해 유레이의 동기화를 진행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여기가 한 곳이 아니고 여러 곳이 있었다는 말이야?”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졌다. 길드장인 상아 씨가 긴급회의를 하려는지 간부급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혜진 일행과 놀고 있던 서하가 그들과 떨어져 우리에게 오는 중이었다.
“형들! 목소리 들었어? A구역이랑 B구역이랑 통합된대! 여기랑 다른 구역이랑 통합된다는 거지? 어, 어? 땅이 흔들리는데!”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이곳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데… 던전이라는 건 도대체 뭐지?”
“게임에서 보면 잔챙이들 잡고 마지막 보스 방에 들어가서 보스 잡는 그런 거 아니에요?”
“하, 진짜 게임처럼 운영하겠다는 거야? 도대체가 어떻게 되어먹은 곳인 거야!”
사람들이 한참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11층에서 이곳으로 오는 입구가 웅웅거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토해냈다. 위로 몬스터 사냥을 나갔던 길드원들 같았다. 그들이 입구로 마구 들이닥치면서 알 수 없는 비명 섞인 말들을 내뱉었다. 땅이 흔들리고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들은 이쪽으로 마구 뛰어오며 두서없이 소리를 질러대었다.
“급습! 급습이야!”
“다들 무기 들어! 다들 나와서 진열 가다듬고 서!”
“전투 준비해! 전투 준비!”
“살인자 길드가 나타났어! 빨리 무기 들고 대비해!”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잔뜩 긴장한 얼굴들로 통나무집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10층으로 들이닥치는 사람들 틈에서 태경의 얼굴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태경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우리는 뒤쪽으로 뛰어가는 사람 한 명을 붙잡고 태경의 위치를 물었다.
“태경, 태경이 형 못 봤습니까? 어제 여기에 사람들 구해서 내려온 사람이요!”
“아, 그, 그분이 지금 위에서 살인자집단을 막아주고 계세요. 그분 말고도 우리 중 강한 분들 몇몇 분이 남아서 막고 있어요. 서둘러서 사람들 준비시켜서 위로 올라가야 해요!”
그렇게 랩을 하듯 속사포로 말을 끝낸 남자가 다시 우리의 뒤쪽 통나무집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회의를 하러 들어갔던 길드의 간부들이 모두 나와서 위층에서 내려온 사람들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먼저 위로 올라가겠다는 말을 하기엔 그들이 너무 바빠 보였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우리는 곧장 11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몸을 실었다. 위로 올라가서 살펴본 곳은 정말 가관이었다. 여기저기 몬스터와 사람들이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 제일 가운데에 태경이 피를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흔들거리는 땅에서 사람들이 죄다 엉켜서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펼치고 있었다. 순간 내 호흡이 가빠졌다. 그것을 눈치챈 상진이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상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벌써, 벌써 왔네.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시기가. 나는 조금 더 늦을 줄 알았는데.”
“형을 데리고 올라왔어야 했어요. 형이라면 분명히 지금 아무런 생각도 없이 뛰쳐나가서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을 텐데.”
“그러게. 그런데 지금은 태경이 형이 서호 역할을 하고 있네.”
이곳에서 보이는 태경은 살육의 신 같았다. 전혀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그의 손이 스치는 대로 사람들이 마구 죽어 나갔다. 어쩐지 태경을 보았던 마지막 날보다 훨씬 강해져 있는 것 같았다. 걱정과는 다르게 몸도 멀쩡해 보였다.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런지 태경은 온통 붉게 젖어서는 바닥으로 그 붉은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눈빛 또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와 같이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피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상진이 우리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서하가 그런 태경을 보고 제일 놀랐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손을 덜덜 떨었다. 그런 서하의 손을 맞잡아준 나는 바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태경의 옆에 있던 사람 하나가 죽을 위기였다. 마력을 방출하면서 미친 듯이 뛰어나가자 태경이 내 쪽으로 시선을 한 번 두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시선을 돌리고 눈앞에 있는 살인자 길드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에 집중했다. 나도 최대한 마음을 다잡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내 손속은 모질지 못했다. 그런 내 공격은 사람들에게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내 뒤에서 외쳤다.
“어정쩡한 마음가짐으로 싸울 거면 뒤로 꺼져! 그런 사람이 강하다고 해봤자 도움 하나도 안 되니까!”
내가 차마 목을 베지 못한 살인자 길드의 사람을 죽이면서 그가 나를 뒤로 밀었다. 말은 거칠었지만 걱정이 잔뜩 묻은 말투였다.
“죽기 싫으면 뒤로 꺼져. 그렇게 싸우면 죽을 수도 있어!”
알 수 없는 감정이 마구 솟구치고 있었다.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도 같고 손에는 땀이 배어 나왔다. 가슴이 울렁거리다가 잠잠해졌다. 결심이 섰다. 그제야 나는 살인자집단과 제대로 맞붙었다. 내게 모진 소리를 내뱉었던 남자가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는 거야. 이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나는 더욱 악을 지르며 사람들을 베어냈다. 끈적끈적한 피가 검을 타고 흐르고 검에서 튄 그 피가 또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내가 베어낸 사람들의 목에서, 가슴에서, 등에서 마구잡이로 피가 튀어 올랐다. 자꾸만 눈앞을 막아오려는 환영을 애써 털어내고 외면하면서 나는 쉴 새 없이 검을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1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21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능력치를 확인했다.
[lv. 21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18퍼센트]
[체력: 223(+5)]
[근력: 229(+3)]
[마력: 35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독 내성- 11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47(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정말 엿 같은 상황이었다.몬스터를 잡을 때는 많아봤자 30개를 넘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사람을 잡으니 15개가량 더 많은 능력치를 얻었다. 능력치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지만, 사방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마력에 17개 체력과 근력에 15개를 투자하고 창을 닫았다. 갑자기 녀석들의 가운데에 길이 열리더니 남자 하나가 등장했다. 제법 큰 키에 굉장히 잘생긴 얼굴을 한 흑발의 남자였다.
“와, 진짜 대박인 놈들이 있잖아? 너희 진짜 잘 싸운다. 혹시 이쪽으로 넘어올 생각은 없어?”
그 말에 잠시 싸움이 소강상태가 되었다. 살인자집단이 싸움을 멈추고 그 남자가 있는 쪽으로 뒷걸음질 쳐 돌아갔다. 그들보다 적은 인원으로 버티고 있는 덕분에 사람들이 잠시 숨을 몰아쉬면서 휴식을 가졌다. 그때 입구에서 사람들이 올라왔는지 소란스러워졌다.
“오, 지원군이 드디어 왔나 보네? 왜 이렇게 느려? 너희들 제물이야? 우리한테 바쳐진 제물?”
잘생긴 얼굴에 맞지 않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굉장히 기분이 나쁜 것들이었다. 그가 농담이었다며 크게 소리 내서 웃더니 다시 물어왔다.
“거기 너랑 너. 이쪽으로 넘어와라. 내가 팍팍 밀어줄게. 특히 너는 내 이거 어때? 생각 있어?”
상진과 태경을 각각 가리킨 그가 한 손으로는 원을 만들고 한 손은 검지만 펼쳐 왔다 갔다 해 보이며 내게 눈을 맞췄다. 상진이 화난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그가 들고 있던 끝이 뾰족한 가시로 뒤덮인 몽둥이가 상진의 검을 가볍게 튕겨냈다. 상진은 뒤로 튕겨 나갔지만 그는 제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는 상황이었다. 상진이 다시 달려들지 못하고 잔뜩 긴장해있었다.
“뭐야. 네가 쟤 애인이야? 야, 양보 좀 해. 너는 지금까지 충분히 많이 해봤을 것 아니야. 나는 여기 와서 완전히 공쳤다고.”
“개새끼야. 입 닥쳐. 더러운 주둥이를 어디다 대고 놀려.”
상진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그 말을 받아쳤다. 얼굴까지 붉게 달아오른 것이 상진이는 열이 머리까지 뻗쳐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상진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가 나를 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너 애인 잘 만났다? 나랑 실력 차이 엄청 나는 거 느꼈을 텐데. 배짱이 아주 좋아. 진짜 멋있어. 그런데 사람을 잘 봐가면서 입을 열어야지. 네 남자친구가 사람을 좀 잘못 봤어.”
그가 빠른 속도로 상진에게 달려들었다. 상진이 잔뜩 긴장한 상태로 그 공격을 막아내었다. 순식간에 공방이 잔뜩 오갔지만 허탈할 정도로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 후 상진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내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런 상진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살펴보았다.
“상진아? 상, 상진아.”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그러나 몽둥이에 맞은 배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얼른 열매를 꺼내 그 상처 위에 즙을 짜내었다. 기절한 그가 열매를 직접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 배달 완료. 너 어떻게 할래? 이리 올래, 남자친구랑 같이 죽을래?”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분노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놈에게 뛰쳐나갈 듯 몸을 움직였다. 그때 말없이 조용히 서 있던 태경이 갑작스럽게 그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잠깐 본 그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태경을 보면서도 남자는 큰 소리로 웃으며 여유롭게 태경을 맞이했다.
“뭐야, 너도 쟤 남자친구야? 와, 남자친구 많네. 하긴, 여기서 이런 놈들 밑에다 두는 것만큼 안전한 게 어디 있겠어? 쟤가 강해 보이는 이유가 있었네. 강한 놈들 꾀어서 맛 좀 보여주고 레벨업 했구나? 어때, 내가 딱 맞췄지? 너 쟤 싸우는 거 보면서 발기한 적도 있지? 그렇지? 내가 지금 그렇거든.”
“입. 닥쳐!”
“태경 씨!”
뒤에서 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목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석 씨! 잠시만!”
혜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태경과 마찬가지로 녀석에게 뛰어들었다. 상진은 옆에 다가온 서하에게 부탁했다. 서하가 상진을 업고 뒤로 향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온전히 눈앞의 녀석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협공하는 거야? 치사하게 그런 게 어디 있어? 뭐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여 줘 볼까?”
태경이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게 파고들어 근접 거리까지 다가간 태경이 검을 휘둘렀다. 검은 안개가 태경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그 검은 안개를 보며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도 잠시 녀석은 간단하게 몇 걸음 물러선 것만으로 태경의 공격을 무로 되돌렸다. 입가에는 미소까지 지은 채다.
“야. 겨우 이거야? 이래 가지고 네 남자친구나 지킬 수 있겠어? 내가 네 남자친구랑 눈앞에서 일 벌여도 어버버하고 있을 것 같은데?”
“닥쳐! 닥쳐! 닥쳐!”
태경의 몸에서 알 수 없는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에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태경에게 반격을 시도하려던 녀석이 방향을 바꿔 내 검을 막으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순간 느껴지는 살기에 나는 좌측으로 몸을 빼내었다. 내가 원래 서 있던 자리에 녀석의 몽둥이가 깊게 박혔다.
퍼억!
“집중해야지!”
녀석의 발이 날아왔다. 발길질에 정통으로 맞은 왼쪽 팔이 찌르르하고 고통을 호소해왔다. 팔을 타고 어깨까지 고통이 올라왔다. 팔이 잠시 마비된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나는 애써 그 고통을 무시하며 검을 뿌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력 방출을 마구잡이로 사용했다. 그러나 놈이 가지고 있는 스킬이 있는지 녀석에게 내 공격이 닿기도 전에 모든 마력들이 공중에서 증발하듯이 사라져버렸다.
“개자식아!”
마력 방출은 별 효과가 없음을 깨달은 나는 그대로 검에 마력을 씌우고 달려들었다. 내가 가까이 달려가기도 전에 태경이 녀석을 먼저 공격했다. 그러나 검과 몽둥이가 마주친 순간 태경이 뒤로 주르륵 밀러났다. 땅에 태경의 발자국이 깊게 패어 있었다. 녀석이 태경에게 후속타를 날리기 전에 내가 휘두른 검이 부웅, 하고 쾌속으로 녀석에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녀석은 뒤로 빠르게 몸을 움직여 내 검을 피해내고는 뒤에서 날아오는 태경의 검 또한 옆으로 몸을 비틀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움직임으로 피해내었다.
“어! 와! 너 진짜 나한테 올 생각 없어?”
“그럴 생각 없어. 이 새끼야.”
“얼굴도 섹시하게 생겨서 욕 내뱉는 것도 진짜 섹시하다, 너. 죽는 것도 그렇겠지? 네가 죽는 거 진짜 보고 싶어. 물론 내 품에서. 너도 홍콩에서 죽고 싶지? 큭큭큭.”
“헛소리!”
믿고 싶지 않지만 아주 강한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움직임도 굉장히 빨랐다. 나는 다시 한번 그 남자에게 검을 휘둘렀고 그가 자신이 쥔 몽둥이로 내 검을 맞받아쳤다. 두 손이 덜덜덜 떨렸다. 엄청난 충격이 손을 타고 팔 전체로 번졌다. 마치 몬스터를 상대할 때처럼 강한 힘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강한 거지? 스킬이 뭐지? 근력에 모든 포인트를 투자한 건가?
“내가 던전을 공으로 다녀온 건 아니라서 말이지. 사람이 많이 죽은 만큼 아주 엄청난 걸 얻었어. 환장할 만큼.”
녀석에게 마력 방출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순백의 버서커를 사용했다. 잠깐의 이질감이 느껴지더니 곧 온몸에 힘이 넘치고 가벼워졌다. 3분의 시간이 카운트되고 있었다. 나는 바로 녀석에게 달려들어 폭포수처럼 공격을 쏟아내었다. 녀석은 그런 내 공격을 모조리 튕겨내거나 피해내고 있었다. 태경이 우리의 움직임을 쫓아오지 못하고 뒤에 멈춰서 있었다.
“뭐해! 빨리 쳐! 공격해!”
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내가 녀석을 잡아 놓는 동안 최대한 승기를 잡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이 녀석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승기는 순식간에 살인자 집단에게로 넘어갈 것이 뻔했으니까. 나는 이를 악물며 녀석에게 상처입히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는 녀석의 심장을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 어느덧 내 검에서 망설임은 사라져있었다. 내 일격은 망설임이 없었고 정확했으며 마력까지 덧씌운 상태였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가면 녀석의 심장에 검이 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녀석이 몸을 살짝 틀고 자신에게로 가까워지는 나를 번뜩이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 자세에서 빈틈을 발견한 것인지 진한 미소까지 얼굴에 걸린 채였다. 이미 빠른 속도로 녀석의 품 안으로 검을 집어넣는 중이었다. 몸을 틀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그렇다고 공격을 멈추는 것은 더욱 멍청한 짓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조차 녀석과 나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녀석이 교묘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이 스치는 순간 순식간에 녀석이 내 뒤로 돌아갔다. 불과 모든 것이 5초 안팎의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눈을 옆으로 돌렸다. 흑발 남자의 턱선이 눈에 담겼고 그는 내 목에 몽둥이를 가져다가 대었다. 태경이 몸을 뻣뻣하게 굳히는 것이 보였다. 잔뜩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도 나는 틈을 노렸다. 그러나 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녀석이 내 몸을 은근하게 압박했다.
“입술 부드럽네. 마음에 들어.”
“개자식!”
“네가 어마어마하게 빠른 건 알겠는데, 미안하지만 나도 그렇거든. 혹시 너만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가 입술을 계속 음파음파 하면서 내게 진한 미소를 내비쳤다. 그리고 혀를 밖으로 내어 내 귀를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며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의 행동이 구역질이 치밀도록 역겨웠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짭쪼롬하니 맛있네.”
“그렇겠지. 안 씻었거든.”
“뭐? 하하하하! 너 재밌다.”
이 모습을 본 태경이 바닥을 박차고 다시 녀석에게로 뛰어들었다. 태경은 아직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안개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녀석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있었다. 힘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면 필시 화가 잔뜩 나 흔들리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남자가 나를 핥던 혀를 멈추고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아주 서늘한 목소리였다.
“너 그거 휘두르면 얘 죽어.”
어느덧 내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태경을 보며 남자가 다시 혀를 빼내 이번에는 내 볼에 가져다 대었다. 그만큼 몽둥이의 끝에 달린 뾰족한 가시가 내 목을 찔러왔다. 피가 주르륵 목선을 타고 밑으로 흘러내렸다. 말 그대로 피는 찔끔 흐르는 것이 아니라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가 그런 내 피를 흡혈귀마냥 빨아먹었다.
[극독에 감염되었습니다.]
[특성 독 내성에 의해 극독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미 죽일 생각 아닌가?”
“벌써 들켰어?”
“무기에 독까지 발라놓고 안 들키길 바랐어?”
“아, 목소리가 알려줬어? 어때? 죽이지? 마약한 것처럼 막 의식이 흐릿흐릿하고 몽롱하니 기분 좋지 않아? 어때? 기분 더 좋아질 만한 게 있는데. 할래? 응?”
“이석 씨!”
“이런, 혜진 씨. 너무 늦었잖아. 눈물겨운 동료애 또 볼 수 있으려나? 이번엔 동료 손가락 몇 개로는 안 될 텐데. 하하하하! 내가 훨씬 더 강해졌거든. 여기 인질도 있네!”
놈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호쾌한 웃음소리와는 다른 살기가 넘치는 눈빛이었다.
“지연 씨는 어디 있나? 아! 저기에 있군! 싸우는 중이라 아쉽네. 전에 지연 씨가 한 말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싶었는데.”
“뭐?”
“자, 때가 왔다!”
“무슨 개소리야!”
“곧 죽어 나자빠질 악당이 돌아왔다는 말이야. 그것도 아주 화려한 복수로 가득한 신고식과 함께!”
혜진의 두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뜨였다. 내 입에서는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미친 새끼야.”
“응. 나 미쳤지. 아주 제대로.”
그가 내 귓가를 핥으면서 귀에 입을 집어넣을 듯 가까이 대고 대답했다.
“더러운 새끼.”
“그것도 맞지. 아주 더러운 새끼야, 내가. 그래서 끌리지 않아?”
은근한 그의 목소리에 다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레이 동기화가 50% 진행되었습니다.]
[동기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집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흐릿한 잔영들이 저 멀리서 언뜻언뜻 비치고 있었다. 그 흐릿한 잔영들은 여기저기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 잔영들이 사람처럼 보였다. 진득하게 혀로 나를 핥던 녀석도 잠시 그쪽에 시선을 두며 방심했다. 사탕이 된 것처럼 핥아지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타이밍이 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팔을 들어 올려 녀석의 명치를 가격하고 빠르게 품에서 벗어나 물러섰다. 가시에 목덜미가 찢어져 아까보다 더욱더 많은 피가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고통 섞인 신음이 튀어나왔다. 순백의 버서커는 이미 제한시간이 끝나있었고 마력 방출과 영웅의 기운을 한계까지 사용한 몸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나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웁스! 놓쳐버렸네! 아까워라.”
“이석 씨! 네놈이 감히!”
그가 그런 나를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경이 잠시 나를 살펴보다가 다시 검은 안개를 녀석에게 뿜어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그 안개가 녀석에게 마구 달라붙었다. 녀석이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랐다. 아무래도 태경이 깨달은 새로운 스킬 같았다.
“오, 이런 것도 있어? 신기하네.”
그는 자신의 팔에 달라붙은 검은 연기를 보며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그러고는 태경을 향해 싸늘한 눈을 해 보였다.
“그런데 이거론 안되지. 응? 남자친구 지키려는 네 노력이 가상하기는 한데 말이야. 네가 지금까지 두 발 뻗고 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 네 남자친구 때문이었어.”
“뭐?”
본격적으로 그가 몸을 움직였다. 몸이 온통 피로에 절어있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더 순백의 버서커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가 내뻗은 공격이 태경의 다리를 향해서 짓쳐 들고 있었다. 태경이 손에 알 수 없는 막을 만들어내더니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무언가 충격을 받은 듯이 기침을 내뱉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녀석의 공격이 다시 이어졌다. 그의 몽둥이가 대번에 태경의 어깨를 향했다. 태경의 옷자락이 찢어지며 피가 솟구쳤다. 그를 향해 내달리고 있지만 벌어진 거리가 멀었다. 가까스로 태경의 얼굴로 향하는 그의 몽둥이를 막아낸 내가 거친 숨소리를 뱉어내며 태경의 앞을 막아섰다. 태경이 어깨를 잡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나는 태경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못했다.
“이석 씨……. 아직도, 아직도 나는…….”
“네 상대는 여기 있는데. 왜 한눈을 팔아.”
“음? 그만한 독이면 웬만한 사람은 벌써 죽고도 남았는데. 역시 넌 특별하네. 욕심나게.”
“그 욕심도 여기서 끝이야.”
“아니, 아니. 그럴 리가. 내 자기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욕심을 안 내? 내가 한눈팔아서 화났구나? 알겠어. 다시는 한눈 안 팔게. 자기만큼 맛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나는 깨달았다. 저만한 놈이 집단을 이끈다면 사람들을 죽이는 이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서로 뭉쳐 다니면서 더욱 큰 살인과 범죄를 저지르고 다닐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은 없었다. 저만한 놈을 여기서 죽일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나는 한번 말한 거는 꼭 지키거든. 이제 평생 한눈 안 팔아. 이석 씨. 각오해야 할 거야.”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우리 아직까지 통성명도 안 했네. 자기. 내 이름은 백두진이에요. 하하하!”
점점 구겨지는 내 얼굴을 봤는지 남자가 배를 잡고 웃었다. 눈꼬리에 달린 눈물도 걷어낸 남자가 매혹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내게는 전혀 매혹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방심한 사이 내 뒤에서 빠져나와 녀석을 공격하는 태경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남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속도로 나를 향해 짓쳐 들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살기가 흐르는 곳에 가져다 대었다.
챙!
몽둥이와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답지 않은 소리와 함께 시퍼런 섬광이 일었다. 막지 못했다면 녀석의 몽둥이가 향했던 곳의 뼈와 살이 온통 으스러지고 터져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강한 일격이었다. 어떻게든 그의 몽둥이를 막기는 했지만, 충격 여파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녀석의 몽둥이가 마구잡이로 날아오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했다. 시종일관 녀석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녀석이 길게 눌러 친 공격에 왼쪽 어깨가 탈골된 것 같았지만 운이 좋게도 녀석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내 검이 녀석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검을 바닥에 떨어트리기는 했지만 영웅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기에 상관없었다. 한 번 들어간 공격에 나는 몸을 사리지 않고 녀석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바닥에서 모래 한 줌을 쥐어 녀석의 얼굴에 뿌린 나는 주춤하는 녀석의 명치를 무릎으로 찍어 올리고는 영웅의 기운을 사용해 만들어낸 검을 그대로 녀석의 배에 박아넣었다. 그때 녀석이 내 멱살을 잡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왼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아 비틀려던 나는 탈골된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 위로 녀석의 몽둥이가 내리쳐졌다.
“커헉!”
“이석 씨!”
혜진과 태경의 목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지며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내 입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갈비뼈가 부러진 듯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녀석이 공격을 성공시키고는 급하게 뒤로 걸음을 물렸다. 쓰러진 내 앞쪽으로 태경과 혜진이 달려와 막아섰다.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동훈과 이훈, 혜연, 지연이 바짝 다가와 섰다. 잔뜩 긴장한 모양새였다. 모두 호흡이 거친 것이 흥분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섰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통에 자꾸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지연이 그런 나를 부축해주어서 가까스로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쿨럭! 쿨럭! 와, 여기서 만난 사람 중에서 최고였다. 진짜.”
입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은 그는 고통 속에서도 웃으며 말했다.
“젠장, 동기화되면 죄다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대단하신 내 자기 때문에 오늘은 그만해야겠네. 쿨럭! 좆같게 진짜.”
그가 비틀거리면서 기침을 하자 계속 피가 흘러나왔다.
“어딜 도망가려고.”
“하하하! 이봐. 내가 지금 이 상태라고 너희들한테 당할 줄 아는 거야?”
“그래? 그럼 한판 떠보던가. 꼬랑지 빼고 도망갈 거야?”
혜연이 강한 어조로 도발했다.
“네가 그랬잖아. 화려한 복수로 가득한 신고식과 함께 악당이 다시 돌아왔다며. 그런데 영, 폼이 안 사네? 꽁지 빠져라 도망갈 궁리만 하는 것 같고.”
“하하하하하! 내가 자비를 베풀어 줄 때 받았어야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혜연 씨. 내가 말했잖아. 오늘은 동료 손가락에서 안 끝날 거라고. 내가 저기 비틀거리는 자기랑 싸우는 거 못 봤어? 네가 그런 싸움이 가능할 것 같아?”
“커허흑. 헉. 어?”
순식간에 동훈에게 다가간 녀석이 그의 목에 몽둥이의 가시를 박아넣고 물러났다. 동훈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환이 무릎을 꿇고 앉아 그런 동훈을 계속 흔들었다. 나를 부축한 지연의 팔에 강한 힘이 들어가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부축을 받고 있는 나까지 덜덜덜 떨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동훈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화, 환아. 커헉. 조심. 조, 조심. 커억!”
이환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을 들고 녀석에게 달려갔다. 이환의 소매를 단단하게 잡고 있던 동훈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동훈의 눈에서는 눈물이 입에서는 거품이 섞인 피가 흘러내렸다.
“화, 환. 안, 돼. 안. 커헉.”
“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드는 이환의 검을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몽둥이로 받아내더니 검을 떨어트린 이환을 발로 차 뒤로 넘어트렸다. 그리고 이환의 가슴 위에 제 발을 얹더니 웃었다. 녀석이 가슴을 강하게 짓밟자 순간 이환의 몸이 활어처럼 퍼덕였다.
“어때? 계속할까? 혜연 씨 아직도 나랑 맞짱 뜨고 싶어?”
그가 주저앉아서 이환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피 묻은 제 손을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고 닦아냈다. 자신을 잡아채는 손들을 뒤로하고 혜연이 그런 그를 향해서 검을 박아넣으려고 달렸다. 그러자 녀석이 이환의 얼굴 위로 몽둥이를 가져다 대더니 물었다.
“이 녀석 죽일 거야? 저기 저 나자빠진 새끼처럼?”
녀석에게로 달려가던 혜연이 무릎을 꿇으며 자리에 고꾸라졌다. 얼굴은 온통 눈물로 가득 차 엉망이었다. 동훈은 이미 덜덜덜 떨리는 몸으로 게거품을 물다가 움직임이 멈춘 상황이었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모두가 동훈의 죽음을 보면서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동시에 그의 죽음을 보면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에 무력감을 체험했다. 혜연이 남아있던 전갈의 피를 입에 넣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동훈의 입에 전갈의 피를 흘려 넣었다. 가지고 있던 전갈의 피를 전부 사용하고 나서야 혜연이 눈물 섞인 목소리로 크게 소리치며 악을 질렀다.
“그만, 그만해. 그만! 이만하면 됐잖아!”
“뭐가 이만하면 됐다는 거야? 시작도 안 했는데. 혜진 씨. 왜 말이 없어. 싸우자고 하던 사람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갔나?”
“그냥, 보내줄 테니까. 가.”
“뭐? 하하하하! 쿨럭! 야. 너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 너희가 날 봐주는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봐주는 거야. 응?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만해. 그만하라고!”
“어이. 그게 어디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부탁을 할 거면 정중하게 하란 말이야. 무릎도 꿇고 양손은 파리처럼 싹싹 빌면서. 그럼 혹시 알아? 내가 이놈 무사히 돌려보내 줄지.”
혜연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과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하며 혜진이 무릎을 꿇으려고 할 때였다. 녀석의 발에 깔려있던 이환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누나! 혜진 누나! 안 돼! 그러지 마! 무릎 꿇지 마! 나 죽어도 되니까 이 새끼한테 무릎 꿇지 마! 동훈 아저씨 죽인 놈한테 비굴하게 굴지 말라고! 싸워! 무릎 꿇지 말고 싸워서 죽여!”
이환의 말에 참고 참았던 혜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르륵주르륵 둑이 터진 거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마치 그것이 피눈물인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보던 녀석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야. 진짜 못 참겠다. 너희 지금 영화 찍는 거 아니야? 카메라는 어디에 있어? 응?”
그 모습들을 보며 느리게 돌아가던 머리가 드디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모 아니면 도였다. 온몸을 휘감는 분노가 전신을 타고 휘돌았다.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다시 한번 순백의 버서커를 사용해 몸을 바로 하고 섰다.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숨이 가빴지만, 스킬 덕분에 참을 만한 고통이 되었다. 죽어도 상관없었다. 인간형 몬스터를 죽일 때와 별다름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서호가 한 말처럼 여기서 착하게 굴다간 모두가 죽을지도 몰랐다.
녀석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녀석에 대한 분노가 온몸에 치솟아 올랐다. 상처투성이의 태경이 내 옆에 섰다. 그도 온통 실핏줄이 터져 빨간 눈을 하고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경에게서 터져 나오는 살기가 나에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그 살기가 어쩐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몬스터에 가까운 듯한…….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에 태경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녀석에게 달려갔다. 태경의 기세가 변한 것을 느낀 놈이 이환에게서 떨어져 무기를 들어 올려 태경을 막았다. 아까와는 달리 태경이 아니라 녀석이 뒤로 밀려났다. 녀석도 상처 입은 상태였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나도 태경을 도우려 달려나갔다. 뒤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온전히 녀석에게 집중해야 할 시기였다. 미친 듯이 공격해대는 태경이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 녀석이 무섭게 반격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에게서 작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좆팔. 너 약했어? 갑자기 뭐야!”
“약을 한 건 너겠지, 이 개새끼야!”
녀석이 우리의 공격에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순식간에 녀석의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늘어났다. 검은 연기가 녀석의 팔을 온통 휘감았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내가 공격을 멈추고 잠시 뒤로 물러났다.
“태경이 형?”
막 지금의 공격으로 녀석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베어낸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틈을 타고 녀석이 뒤를 돌아 미친 듯이 도망갔으나 나는 차마 그 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태경이 무언가 이상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태경의 새빨간 눈이 내게 무언가를 알려오고 있었다.
“새빨간 눈?”
드드드드드.
땅이 갑작스럽게 미친 듯이 흔들리다가 멈추었다. 태경이 잘라낸 놈의 새끼손가락이 모랫바닥을 형편없이 굴러다녔다. 태경의 시선이 그런 손가락에 가 닿았다.
“으흥흥. 으흥흥. 인간, 맛있는 인간.”
태경이 자신이 베어낸 새끼손가락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입에 가져다 넣었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함께 그 손가락은 입 밖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새끼손가락이 다시 입안으로 들어가더니 오도독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붉은 선혈 한줄기가 침과 섞여 태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게 뭐지? 왜 태경이 형이 14층에서 만났던 보스 몬스터같이 행동하는 거지? 머리가 온통 의문사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순백의 버서커 유지 시간이 끝나고 나는 바닥과 그대로 충돌하며 쓰러졌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에 눈물과 침을 질질 흘려가면서도 태경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혜진이 내게로 달려오다가 그런 태경을 보고서 멈춰 섰다. 그녀는 충격으로 인해 표정이 엉망이었다.
“아, 아? 그만! 그만!”
태경이 머리를 움켜쥐고 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가락의 잔해가 지저분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구역질을 하다가 괴로운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움켜쥔 머리를 마구 흔들고 있었다. 억지로 의식을 붙잡고는 있지만, 삐 하는 이명 소리와 함께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유레이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A구역과 B구역의 통합이 완료되었습니다.]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웅성웅성!
서로 마주 보게 된 수백 명의 A구역과 B구역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서로를 보며 어리둥절하게 서서 소리쳤다.
“잠깐! 잠깐! 저희는 적이 아닙니다! 칼 내리고 차분히 얘기하죠?”
“사람 시체가 가득한데 적이 아니라고?”
백사 길드의 길드장 상아가 나서서 사람들을 차분히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저희는 백사 길드입니다. 이곳에서 서로 도와서 살아남기 위해서 만든 길드입니다. 이곳에 있는 시체들은 살인자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몬스터 노름판으로 인해서 다툼이 벌어진 것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입니다!“
그러나 상황을 진정시키기는 절대 쉽지 않았다. 특히 몬스터들뿐 아니라 사람들과도 싸워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곳 이상한 세계에서는 더욱 그랬다.
* * *
“태경이 형! 그러지 말고 이석이랑 얘기라도 하고 가세요.”
“맞아요. 형. 제발.”
“내가, 내가 어떻게 이석 씨를. 이런 몸 상태로 어떻게. 몬스터가 되었는데 어떻게 이석 씨를.”
“형! 형은 몬스터가 아니라고요!”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조금씩 의식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무언가가 강하게 내 몸을 얽매고 있는 것처럼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난도질당한 것처럼 삐그덕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의식이 돌아오는 것과 함께 고통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다.
“흐윽!”
엄청난 통증이 몸을 강타하고 별이 핑그르르 도는 기분이었다.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일순 조용해지더니 다시금 커졌다. 떨리는 손길 하나가 내 볼에 닿았다. 통증에 꽉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온통 눈물범벅으로 나를 보고 있는 태경과 걱정이 잔뜩 묻은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상진이 보였다.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서하까지도 함께였다. 나는 고통 속에서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다 모였네.”
내가 잠든 사이에 살인자집단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갔지만, 대부분이 죽었으며 유레이가 통합되었다고 했다. 다른 구역의 사람들은 다행히 우리 구역과는 달리 살인자집단처럼 나쁜 놈들은 없다고 했다. 그 사람 중에서 길드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느라 정신이 없어 혜진과 그 일행들이 내 옆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소속을 두고 조금 더 안정적으로 층을 오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구역이 통합되면서 땅이 두 배로 커졌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도 2개가 되었다.
나쁜 소식 하나는 한 달마다 사라지던 층이 이제는 20일 간격으로 줄어든다는 거였다. 밖으로 나가서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삐걱거리는 몸 탓에 포기해버리고 태경과의 자리를 먼저 가지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태경과 나란히 마주 앉아 있는 상태였다. 내 뒤로 서하와 상진이 나란히 섰다. 태경은 계속해서 땅만 쳐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태경이 형. 어떻게 된 거예요?”
“몬스터를, 받아들였습니다.”
“몬스터를 받아들이다니요? 그 검은 연기가 그럼.”
“네, 사람의 기력을 뽑아먹는 스킬입니다. 아직 효과는 별 볼 일 없지만.”
태경은 자신이 어째서 우리와 떨어져 층을 내려왔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몬스터를 몸에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까지 보인 적 없던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자책과 후회, 무기력감이 그의 눈빛을 통해 전달되었다. 한참 복합적인 감정들이 떠오르며 태경이 지금까지 참고 있던 꾹꾹 저 아래 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도 슬쩍 붉어지는 눈시울을 가리기 위해 애썼다. 나에게까지 그의 처참했던 감정들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태경은 멍한 눈으로 자리에 앉아서 내 뒤의 어딘지 모를 곳에 시선을 두고만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위로해주기 위해 그의 오른손에 내 손을 가져다 댔을 때 태경이 거칠게 내 손을 뿌리쳤다. 나는 놀라 크게 뜬 눈으로 태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차가운 감촉이 아직도 손에 남아 얼얼했다. 상진과 서하도 놀란 눈으로 태경을 바라보았다. 태경이 제 손을 덜덜 떨면서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쳤던 손이라 아직 예민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형 혼자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 동료 아니었어요?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가족이랑 마찬가지인. 고작 그걸로 우리가 갈라질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이대로 형 혼자서 다닐 생각이에요? 말없이 이렇게 사라지면 우리가 걱정할 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요? 서하는 또 혼자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어요. 자기 잘못이라면서 자책하고.”
태경이 말없이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온갖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한 눈빛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태경이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소원 지금 써도 됩니까?”
“소원? 무슨 소원?”
옆에서 서하와 상진이 의아해하는 것을 뒤로하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경이 말없이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온갖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한 눈빛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태경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석 씨와 계속 함께 다녀도 되겠습니까? 계속 저의 동료가 되어주실 수 있습니까?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이석 씨. 버려질까 봐 무섭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태경의 말에 나는 밝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서하와 상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태경을 쳐다봤다.
“당연하죠. 왜 형을 버리겠어요. 내가 형을 그렇게 만든 죄인인걸요. 동료들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한 거나 다름없었잖아요. 죄송해요.”
“와, 우리 의견은 필요 없는 거야? 이석이한테만 말하네.”
“태경이 형 진짜 나쁜 사람! 내가 형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가 그렇게 만든 것 같아서, 그래서.”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들이 우수수 안으로 넘어졌다. 혜진 일행이었다. 뒤에서 나를 껴안아 오던 상진이 그 소리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제일 밑바닥에 깔린 혜진이 멋쩍은 웃음을 살살 흘리고 있었다.
“태경 씨답지 않게 애원하는 것도 보기 좋네요. 잘생긴 게 최고예요. 짜릿해. 상진 씨는 무슨 일로 방어전을 안 펼치고 있을까?”
그 뒤로 지연과 혜연이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자기가 물건도 아니고 버리지 말아달래!”
“미쳤어. 미쳤어!”
그 모양새가 우스워서 웃음이 다 났다. 태경도 그런 그들의 행태에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는 사이에 혜진이 가까이 다가와 슬쩍 나를 껴안았다. 급하다는 일들이 대충 해결이 된 것인지 내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인지는 몰랐지만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나도 그런 그녀의 등을 마주 안고 토닥였다.
“바쁘다면서요? 사람들이 꽤 많은가 봐요?”
잠시 그렇게 있던 그녀가 담백하게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렇죠. 뭐, 아직 10층까지 안 올라온 사람도 많을 테고. 더 바빠지겠죠. 20일마다 층이 사라지니까 밑에 사람들도 급하게 올라올 것 같고.”
“그렇네요. 힘들지는 않아요?”
“길드장님이 대부분 다 하시니까 우리는 괜찮아요. 참, 상아 언니가 감사 인사 좀 대신 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바빠서 못 찾아와 미안하다고. 그나저나 식겁했잖아요. 잘못된 줄 알고. 동훈 아저씨처럼 이석 씨도 가버릴까 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죄송해요. 제가 그 녀석을 잡아야 했는데.”
“어쩔 수 없죠. 여기는 그런 게 일상이잖아요? 우리가 원래 살던 세상도 죽고 죽여야 살아남는 세상이었어요. 그게 목숨이 아니었다뿐이지. 이제는 죽음에 조금은 무뎌져야죠. 이석 씨도 혹여나 죄책감이 느껴진다면 그만두세요. 여기는 원래 그런 세상이에요.”
정말 이곳은 원래 그런 세상일까. 과연 원래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녀의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공감하면서도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그렇죠.”
“여기서는 그냥 그 사실을 그대로 맞이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해요. 덤덤하게. 대신 동훈이 아저씨가 웃는 모습으로 우리 옆에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하려고요.”
“우리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동훈 아저씨도 마냥 슬프지는 않을 거예요. 오히려 우리가 쓰러져서 좌절하고 슬퍼하기만 한다면 그게 더 슬프지 않을까요?”
지연이 혜진 대신에 말을 이었고 그 뒤를 이환이 우는 듯 웃는 얼굴을 하고서는 정작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는 아무도 죽지 않고 서로 도우면서 층을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태경을 잃을 뻔도 하고 심지어 동훈 아저씨는 잃었다. 그 외에도 우리와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이 시체로 주변에 나뒹굴었고 밑에서 우리가 구해주었던 사람들이 살인마집단에 들어가 무분별한 살인을 일삼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꿈꿨던 그것이 헛된 꿈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좌절과 실패,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거니까 지금 우리가 그 과정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상진이 눈물을 보이는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연, 혜연, 이환, 혜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멀쩡한 척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 분명했다.
“전에 놈들이 전부 사라졌다고 한 말 기억나죠? 알고 보니 녀석들이 던전인지 뭔지에 들어간 거였잖아요. 그 위치를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네?”
“저희는 놈들이 14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까지밖에 확인을 못 했는데 놈들한테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이 끝까지 놈들을 추적했었나 봐요. 이석 씨한테 할 말이 있다고 찾아왔는데 만나볼래요?”
“지금 밖에 있어요?”
“네. 앞에까지 찾아왔더라고요. 같은 피해자로서 외면할 수만은 없어서요. 부탁 좀 할게요.”
“만나볼게요. 왜 저를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오세요.”
내 말이 끝나자 지연이 문을 열어 안으로 사람들을 한 무리 들인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의아한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그들 중의 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종훈입니다.”
“아, 강이석입니다.”
“그놈을 죽여주세요.”
그의 눈은 분노로 강렬하게 물들어있었다. 다짜고짜 놈을 죽여달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고통과 분노로 점철되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놈 좀 꼭 죽여주세요. 이석 씨가 싸우는 모습 봤어요. 유일하게 이석 씨만이 그놈하고 대적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요. 저는, 저 같은 건 복수한다고 달려들어봤자 개죽음이라는 것도 알았어요.”
“잠깐, 도대체 무슨.”
“지금 당장 죽여달라는 건 아니에요. 레벨업 하셔야 하는 것도 알고 당장 그놈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모른다는 것도 알아요. 그냥, 제가 그놈들이 들어갔던 던전까지 안내해드리는 대신에 언제든 그놈을 보면, 다시 마주친다면 반드시 죽여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 *
“허억, 헉. 헉.”
힘든 숨을 헐떡이면서 한 남자가 등에 다리가 없는 남자를 업고 움직이고 있었다. 두 다리가 멀쩡한 남자는 잔뜩 지쳐 움직임이 둔한 상태였다.
“키에엑!”
몬스터들이 달려들 때도 남자는 등에 업힌 그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이 지났을까. 아니, 몇 달이 지났을까. 남자에게 조금씩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등에 업힌 남자로 인해서 제대로 된 동료로 받아주는 무리도 없었다. 어쩌다가 끼워주는 무리도 자신과 등에 업힌 남자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 이상한 세계를 둘이서 다니기를 한참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둘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쯤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과 등에 업힌 남자를 두르고 있던 덩굴을 풀어내었다.
“제발. 제발 나 좀 살자. 제발……. 제발…….”
그는 계속해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등에 업혀있던 남자가 땅에 떨어지며 눈에서 눈물을 마구 흘렸다.
“미안해. 미안해, 아들, 우리 아들. 착한 우리 아들. 아빠는 괜찮아. 괜찮아. 그냥 가. 그냥 혼자서 가.”
“아아악!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남자는 그런 그를 보면서 괴로운지 한참 소리를 지르면서 눈물을 쏟아냈다. 혼자 뒤돌아 가려고 해보지만, 결국 남자는 다시 아빠에게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미안해. 미안해. 아빠.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그랬어. 미안, 아빠. 흐윽.”
다리가 없는 남자는 웃는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부스럭 소리가 들리며 수풀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뭐 하는 거야?”
“누구, 누구세요?”
“나? 나 살인마.”
“네?”
“살인마 처음 봐? 큭큭큭.”
그렇게 말한 살인마가 잘생긴 얼굴로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빠르게 다가와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실력 차이로 인해서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몸 이곳저곳에 생채기가 나고 결국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가 되었다.
“안 돼!”
그때 두 팔로 기어 왔는지 다리가 없는 남자가 살인마의 다리를 꽈악 움켜쥐었다.
“어라? 이건 또 뭐야?”
“아, 아빠.”
“아빠? 와, 미친. 같이 떨어진 거야? 가족끼리? 운 좋네. 으흠, 재밌는 게 떠올랐는데.”
“뭐?”
“야. 너 살고 싶어?”
“살, 살려 주실 거예요?”
“그럼. 당연하지. 나는 한번 말한 거는 꼭 지키거든. 대신 나랑 약속 하나 하자. 어때?”
“야, 약속이 뭔데요?”
“여기서 아빠 죽는 거 보고 가.”
“네?”
놀란 듯 크게 뜨인 눈으로 남자가 살인마의 다리를 잡고 있는 아빠를 쳐다보다가 다시 살인마를 바라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얼굴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살인마가 재미있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며 진득한 웃음을 흘렸다.
“아빠 죽는 거 구경하고 가라고. 그럼 살려줄게.”
남자가 멍한 눈으로 입을 헤 벌리고 멈췄다. 살인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살기 싫어?”
“저, 저는. 저는.”
다리가 없는 남자가 살인마의 다리를 더욱 꼭 잡으며 눈물이 흐르는 눈을 감았다.
“살고 싶어요. 저 살고 싶어요. 저 살래요. 살고 싶어요. 죽이지 마세요.”
남자가 오열하며 살인마의 앞에 엎드렸다. 살인마는 진한 웃음을 흘리면서 마구 몸을 흔들어댔다.
“좋아! 살려준다니까? 조건만 지키면.”
살인마가 말을 마치고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 주먹은 남자를 향하는 것이 아닌 제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아들, 아빠는 괜찮아!”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끔찍한 구타의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제 양 귀를 막고 고개를 숙였다. 살인마가 다가오더니 끈적한 피가 묻은 손으로 그런 그의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눈에 온통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는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입을 벙긋벙긋하며 자신을 보는 남자에게 말을 전했다.
‘아빠는 괜찮아. 아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다.’
“약속, 지켜야지. 아니면 너도 죽는다니까? 구경하라고 말했잖아. 너 바보야? 왜 말을 못 알아들어?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라고.”
“허윽, 헉. 흐어어.”
남자는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다. 다리 사이로 축축한 물이 흘러내렸다. 끔찍한 광경에 몸이 절로 떨리며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지독한 죄책감이 남자를 좀먹었다. 남자는 차라리 그와 같이 죽을 것을 하고 후회했다. 그렇지만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끊지 못했다. 죽음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살인마가 사라지고 남자는 자리에 주저앉아서 덜덜 떨면서도 훗날을 기약했다. 강해져서, 강해지지 못하면 남에게 기생해서라도 살아남아 꼭 복수하겠다고.
* * *
“여기까지가 제 이야기에요. 다른 사람들도 나랑 별반 다를 것 없는 것 없는 피해자들이고요. 혹시 사연을 더 들어야겠다면….”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눈을 꾸욱 감고서 말을 뱉어냈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약속할게요.”
나는 그렇게 그들에게 살인을 약속했다. 차마 피해자들 앞에서 거절의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잔인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은 그 녀석의 목숨이었다. 그 녀석이 죽는다고 이들의 고통과 슬픔, 좌절이 끝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녀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 발생할 피해자들이니까. 빌어먹을.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는 것이 다시 한번 실감났다.
지독하게 가라앉은 침묵은 깨질 줄 몰랐다.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사람이었다.
“몸이 안 좋다고 들었으니까 내일 정오에 다시 찾아올게요. 푹 쉬세요.”
그들이 모두 나가고 태경과 서하, 상진만이 오두막 안에 남았다. 뒤에서 상진이 나를 강하게 안아왔다.
“내가, 조금 더 강했어야 하는 건데.”
“나도, 나도요. 형. 우리가 조금만 더 강했으면.”
그렇게 말하는 상진과 서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태경은 고개를 바닥으로 둔 채 입을 열었다.
“그놈 탓입니다. 우리 탓이 아니고. 스스로를 탓할 필요 없어요.”
“강해지자. 하루라도 빨리 위로 올라가자. 레벨도 올리고 능력치도 올려서 강해지자.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살아남자.”
나는 악에 받쳐 말을 내뱉었다. 절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소중한 사람들을 희생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흔들리지 말고 독하게 마음먹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굳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우리 가족을 죽게 만든 이 유레이라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복수해야만 했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 서종훈 일행이 찾아왔다. 그들을 따라서 12층에 있다는 던전에 가보았지만 우리는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사실에 모두 시무룩해졌다.
[이미 완료된 던전입니다.]
몇 번을 들어갔다가 나와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서종훈은 침울한 기색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어깨를 작게 두드려 위로를 전한 우리는 먼저 층을 오르기로 결정했다. 놈을 잡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만 했다. 문제는 사람의 수가 적을수록 높아지는 보스 난이도였다. 층이 통합되어서 저쪽의 강자가 위층에 있을 수 있다지만 아직 보스가 나타났다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14층 이후로의 보스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길드원들은 임시거처를 15층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위쪽에 혹시라도 살인자집단의 무리가 남아있을 수도 있어 혜진 일행이 우리와 먼저 15층까지 살피기로 했다.
“잘 부탁해요. 우리 오랜만에 같이 다니는 거네요?”
“우리 이번에는 이석 씨 일행 덕분에 편하게 올라가겠네!”
그렇게 말한 것과 다르게 그들은 굉장히 잘 싸웠다. 밑에서 봤을 때의 실력이 머리에서 지워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우리도 더욱 자극받아서 열심히 몬스터를 죽였고 우리는 독기를 가득 품은 채로 계속 몬스터들을 잡았다. 그렇게 15층까지 오르는 동안 레벨도 하나 더 올릴 수 있었다.
[lv. 22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18퍼센트]
[체력: 238(+5)]
[근력: 244(+3)]
[마력: 367]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독 내성- 11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32(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15층에 도착해서 몸을 깨끗하게 씻은 혜진 일행은 둘로 나뉘었다. 밑으로 내려가 사람들을 데려올 혜연과 이환, 우리를 따라 층을 올라서 보스를 잡을 혜진과 지연의 두 팀이었다.
“놈들이 발견한 던전 같은 거 하나라도 걸리면 좋을 텐데요.”
“그러게요. 좀처럼 찾기 힘드네요.”
남아있는 다른 던전을 녀석이 찾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녀석은 분명 이곳에서 새로운 무기와 능력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 녀석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도 던전을 하나 발견해서 아이템과 능력을 얻거나 아니면 지금보다도 훨씬 강해져야만 했다. 내가 녀석에게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걸음이 나도 모르는 새에 빨라졌다. 그렇게 서둘러서 우리는 16층으로 올라갔다.
16층에 올라온 우리는 화려한 색채의 곤충을 보게 되었다. 이 곤충은 나비의 날개를 단 개미의 형태였다. 거기다 이마에는 울퉁불퉁한 뿔까지 달려 굉장히 징그럽게 생긴 모양새였다. 날아다니는 바람에 상대하기 까다로웠지만 그만큼 체력이 약한지 죽이기는 쉬웠다. 그래서인지 전처럼 빠르게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경험치를 많이 주는 몬스터가 아닌 것 같았다.
휘이이잉!
녀석이 공중에서 날개를 마구 휘두르며 알 수 없는 가루를 뿌려댔다. 독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입을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독 내성이 있는 몇몇 사람들만 인상을 찌푸리며 칼을 휘두를 뿐이었다.
[몬스터의 마비독으로 인해 시야가 마비됩니다.]
[특성 독 내성에 의해 마비독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독에 내성이 있는 사람 중에서도 내가 항상 제일 앞으로 나서서 녀석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조금씩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독 좀 그만 먹고 싶은데. 쓸데없이 왜 배는 부르게 만들어 놓아서는.”
독을 하도 들이마시다 보니 배가 너무 불렀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내 고충을 알 수 없었다. 독이 뿌려지면 계속해서 내가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마비독이 그치자 녀석이 잠시 땅 위로 내려오고 뒤에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른다. 몬스터가 힘없이 자리에 쓰러진다. 이렇게 녀석들을 잡기를 한참이었지만 지금까지 잡은 녀석의 수가 만만치 않았음에도 레벨이 오르지 않고 있었다. 녀석의 날개를 찢고 몸에 박힌 검을 빼내면서 서하가 불만을 내뱉었다.
“레벨 진짜 안 오르네요. 너무한 거 아니야?”
“그냥 위로 올라가야겠어.”
우리는 미리 찾아놓은 17층 입구에 발을 올렸다. 사람들은 쉬고 싶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몸을 착실하게 움직였다. 어느덧 모두 운명을 받아들여 가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예요?”
17층에 제일 먼저 올라와서 앞을 멍하니 보고 있는 내 뒤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그의 심정과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놀라서 가만히 멈춰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는 16층에서 보았던 곤충형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딱정벌레의 몸을 하고 있으나 옆에 달린 다리는 지네의 형상을 한 곤충형 몬스터까지 있었다. 입 밖으로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 뒤로 일행들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진짜 너무 싫다.”
“저도요. 형.”
“나도 마찬가지야.”
“진짜 끔찍하게 생겼네요.”
뒤늦게 올라온 길드원들이 몬스터를 발견하고는 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몸통보다 커다란 모습을 한 몬스터들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울퉁불퉁한 껍질 표면과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지네의 모습을 한 다리들이 말이다. 혜진이 처음 보는 울상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난 진짜 다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건 진짜 못 참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우욱.”
지연은 혜진의 말에 대답하며 옆에 다른 길드원들과 함께 헛구역질을 했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싸울 의지가 꺾이는 건 얘네가 처음이야. 18층도 곤충형 몬스터는 아니겠지?”
“제발. 아니기를 바라야지.”
혜진이 그 말을 끝으로 제일 먼저 놈들에게 달려가 화려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 뒤를 따라 나와 서하, 상진, 태경이 뒤따랐다. 구역질하던 사람들도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다리를 움직였다.
“으아아! 죽어!”
그렇게 우리가 힘들게 곤충 몬스터가 있는 층을 오르는 사이 20일이 지나 4층이 폐쇄되었다. 짧은 시간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층을 올라야 했다. 얼마나 더 징그럽고 끔찍한 몬스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 * *
[유레이 22층입니다.]
“케헤헥…….”
바람이 새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옆으로 털썩하고 쓰러졌다. 파란색의 몸에 치타처럼 검은 점이 점점이 박힌 짐승형 몬스터였다. 놈의 배에는 내가 박아넣은 하얀 검이 꽂혀있었다. 보상으로 받고 까맣게 잊고 있던 검이었다. 나는 이 검을 사용하기로 하고 내가 쓰던 검은 상진이에게 넘겨준 차였다.
[보스 몬스터가 잃어버린 무기]
[능력치- 체력+10 근력+10 마력+10]
나는 검을 뽑아내고는 가만히 그 하얀 검신을 바라만 보았다. 이곳은 죽을 위기를 견뎌내고 받은 방어구나 무기의 능력치가 형편없었다. 방어구나 무기 따위에 의지하지 말라는 의도인가 싶었다. 상진과 태경이 얻은 마력의 팔찌와 근력의 반지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의 팔찌]
[효과- 마력 사용을 1.5배 원활하게 해준다.]
[능력치- 마력+20]
[근력의 반지]
[효과- 남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근육까지 조금 더 잘 쓸 수 있게 해준다.]
[능력치- 근력+20]
나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내가 있던 자리에 뿌리가 뽑힌 나무가 쓰러졌다. 그 나무의 몸통을 그대로 타고 달려 이를 드러내며 달려오는 녀석의 목을 향해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촤아아악!
목이 쩌억 갈라지며 파란색의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상진의 뒤를 노리고 달려드는 녀석의 몸에 마력을 방출하고서 나무 몸통 위에 가만히 서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얼추 싸움이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대충 닦아내고서 나무 몸통에서 내려왔다.
콰앙!
태경이 달려드는 녀석을 방패를 들어 막았다. 그리고 바로 검을 휘둘러 몬스터의 몸을 베어냈다. 검은 안개가 몸을 감싸자 몬스터가 비틀거렸다. 태경이 그런 몬스터의 목에 검을 넣으며 마무리를 했다. 상진은 공중으로 뛰어 놈의 뒤로 넘어가며 검을 던졌다. 염력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검이 몬스터의 몸을 두 갈래로 갈랐다. 몬스터의 몸이 두 방향으로 묵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서하도 마찬가지로 몬스터의 목에 검을 넣으며 마지막 마무리를 하며 싸움을 끝냈다.
상진과 태경이 싸움이 끝나자마자 칭찬을 해달라는 듯이 내 쪽으로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대열에 서하도 함께였다. 작은 한숨을 내쉰 나는 대충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개를 3마리나 기르는 기분이었다. 백두진에게 처참하게 당한 후로부터 강해질 때마다 와서는 서로 경쟁하듯이 칭찬해달라고 성화였다.
혜진과 지연은 일찌감치 싸움을 끝내고 나무에 열린 열매를 하나씩 따서 먹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잘생긴 남정네들이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낙이라면서 매번 필사적으로 먼저 싸움을 끝내고서는 영화를 보듯이 팝콘 대신 열매를 먹으며 우리를 구경했다. 게다가 결코 우리를 도와주는 법도 없었다. 매번 그녀들은 혜연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 모습을 보는 우리는 딱히 할 말도 없고 매번 그런 그녀들을 보며 어이없어할 뿐이었다.
“오늘도 보기 좋았어요.”
“진짜 아깝다니까? 이런 걸 영화로 찍어야 하는데.”
“팝콘도 있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
그녀들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싸움이 끝난 곳으로 다가왔다. 그녀들의 말만 들으면 우리는 걸어 다니는 조각상 같은 거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어졌다. 나는 우리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 그녀들을 향해서 걱정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벌써 21층인데도 보스가 안 나타나네요.”
“다행인 거죠. 20층까지의 안전은 확보됐으니까. 보스만 잡고 나면 내려가서 임시거처를 20층으로 올려야겠어요.”
“가요. 이것만 잡고. 지독하게 나타나네. 레벨업은 잘 시켜 주지도 않으면서.”
나는 어느새 뒤에 나타난 몬스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 * *
수백 명의 사람이 수백 마리의 해골 전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심장이 공격당하지 않은 해골 전갈들이 불사신처럼 계속 진득하게 일어나 사람들을 괴롭혀대었다.
“이제 14층입니다! 한 층만 더 오르면 15층이에요! 힘냅시다!”
“심장을 노려요! 쓸데없는 곳 공격하지 말고!”
“아악! 팔이 부러졌어요!”
“부상자는 뒤로 빠지세요!”
“뭐해! 빨리 안 도와주고! 빨리빨리 움직여!”
“여기에 입구가 있습니다! 15층 입구 찾았어요!”
“어어! 순서 지켜! 순서 지키세요! 같은 길드원끼리 이기적으로 굴 겁니까!”
몇 사람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을 제지하고 명령하며 움직였다. 필사적으로 몬스터들의 심장을 노리면서 사람들은 점차 앞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차례대로 천천히 이동하며 움직이니 부상자도 적었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마지막 조 들어가세요. 천천히 몬스터들 안전하게 다 잡고 들어가는 겁니다!”
“혼자 단독행동 금지입니다! 한 번 더 걸리면 불이익이 있습니다!”
“다 잡았어요!”
“올라가세요.”
마지막 조의 사람들이 자신의 주위에 있던 마지막 몬스터들을 잡고 환호성을 질렀다.
“레벨업 했다!”
“나도!”
“에이. 나는 아직 못 했는데.”
“네가 열심히 잡아야 오르지. 뺀질거리는데 레벨이 오르겠어?”
사람들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15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발을 올렸다. 이미 먼저 들어온 선발 대원들이 나무를 베어내 차곡차곡 쌓아둔 것이 보였다. 이제 오두막을 짓고 대장간과 회의실을 만들어 사람 사는 곳답게 만들 차례였다. 사람들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당분간은 걱정 없겠어.”
“그러게. 살인자집단도 다 흩어졌고 살만해지겠네.”
“통합돼서 사람도 늘어났잖아. 배당된 일도 조금 줄어들겠지.”
“안 들어가고 뭐 합니까? 일하기 싫다고 농땡이 치면 안 되죠.”
“아니! 상아 님! 그냥 잠깐 떠든 거예요. 농땡이라뇨.”
“자자, 어서 갑시다.”
“네. 그런데 저희 먼저 몸 좀 씻고 일하면 안 될까요?”
상아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여기 사람 부려먹는 곳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알아서 하세요.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시간 안에만요. 남는 시간에 레벨 올리는 것도 잊지 마세요.”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상아를 향해 소리쳤다.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놀란 상아가 빠르게 달려갔다.
“무슨 일이에요!”
“술! 술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네?”
상아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급격하게 느려졌다.
“진짜 죽여준다니까요? 길드장님 먼저 드시라고 저희가 따로 빼놨어요. 어서 오세요.”
“어어, 그거 저희도 맛볼래요!”
“저도! 저도요!”
“어허! 제일 고생한 사람이 먼저 맛봐야죠. 제법 양이 되니까 오늘은 다 같이 한잔하고 또 만들죠.”
“와아!”
“이게 몇 달 만에 먹는 술이냐!”
사람들이 신나서 그 사람을 따라 뛰어갔다. 그런 그들을 뒤에서 바라보면서 상아가 미소지었다.
“이제 진짜 사람 사는 곳 같네. 저기요! 제 몫은 따로 남겨놔야 합니다?”
“아이참, 길드장님 거는 따로 빼놨다니까요? 그래도 늦으시면 없을지도 몰라요!”
“네네, 갑니다!”
[lv. 27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경험치: 18퍼센트]
[체력: 298(+15)]
[근력: 299(+13)]
[마력: 429(+10)]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독 내성- 11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point: 0(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25층에 다다를 때까지 보스를 만나지도 던전을 찾지도 못했다. 다만 레벨은 5개나 올라서 27이 되었고 체력과 근력이 300을 넘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달 반 만에 도착한 휴식층에서 우리는 잠시 물이 흐르는 호수로 가 몸을 담갔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개운함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25층까지 올라오는데 총 한 달 하고도 2주가 걸렸다. 그동안 층이 2개나 더 닫혀 6층까지 사라졌다. 백두진 놈은 넓어진 필드 탓에 숨을 장소가 많아져서인지 머리끝이라도 스친 적이 없었다.
“아니, 왜 아직까지 보스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거죠?”
“제가 몬스터를 받아들이면서 뭔가 달라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벌써 6층까지 없어졌으니 빨리 사람들 거주지를 20층으로 올려야 할 텐데.”
“걱정되시면 내려가 보셔도 괜찮아요.”
“이석 씨는 우리 내려가더라도 계속 위로 올라갈 거잖아요. 그러다가 또 난이도가 8배나 높아지면 어쩌려고요? 우리라도 있어야 그나마 덜하지.”
“어차피 곧 나타날 것 같아요.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어요.”
“특성입니까?”
“아뇨? 그냥 제 감인데요?”
그녀의 말에 기운이 쭉 빠졌다. 나보다 상위 등급의 특성인 줄 알았건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지연아. 내 경험으로는 네 직감이 맞았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맞은 적이 없긴? 태경 씨 만날 것 같다고 한 거 맞혔는데!”
“그거 한 번 우연히 맞춰놓고는.”
“뭐야!”
“저희는 저기 나무 그늘 아래서 한숨 자고 일어날게요. 쉬고 계세요. 조금만 쉬고 바로 올라갑시다.”
“네.”
“그렇게 해요.”
그녀들이 저 멀리 나무 그늘 아래로 사라지고 오랜만에 넷이서 남게 되었다. 나는 호수에 발을 담근 채로 그대로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에 노곤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있는데 그 구름을 가리면서 상진과 태경의 얼굴이 나타났다.
“왜요. 뭐요.”
그런 그들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서하가 옆에서 소리 내서 웃었다.
“하여튼 틈만 나면 이런다니까. 누나들 있었으면 난리 났겠다.”
서하의 말처럼 틈만 나면 들이대는 상진과 태경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다. 이제는 모른 척하려야 할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되는 일이었다. 태경이 몬스터를 받아들이고 나서 조금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상진이 내게 해오는 스킨십을 볼 때면 태경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애써 모른 척하고는 있지만, 이 외면이 얼마나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좀 상진과 태경의 얼굴을 피해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여전히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자리에서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다.
“좀 비키지? 나 일어나서 앉고 싶은데.”
“싫습니다.”
“싫어.”
내가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니 둘의 노골적인 시선이 더욱 강해졌다. 상진은 내 입술 근처에 있는 점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기까지 했다. 태경은 몬스터를 받아들인 후로 별다른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 그저 상진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석이는 이 입술 옆 조금 아래에 있는 점이 진짜 매력적이라니까.”
“심지어 눈썹도 콧구멍도 예쁩니다.”
그들의 말에 속에서 열불이 나서 얼굴이 뻘게지고 콧구멍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난리였다. 상진과 태경은 그 모습까지도 예쁘다고 난리였다.
“수줍은가 봅니다.”
“이석이가 조금 순진한 데가 있죠. 귀엽게 얼굴까지 붉히고.”
“그만 안 해!”
내 비명에 멀리서 혜진과 지연이 자다 말고 놀라서 달려오고 있었다. 하도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곳에서 지내다 보니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 멀리서도 내 소리를 듣고 일어난 것이다. 아이고 골이야. 그 모습을 본 서하가 옆에서 배를 잡고 굴러다녔다. 가까이 다가온 혜진과 지연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서하 옆에 쭈그려 앉아 우리가 하는 양을 훔쳐봤다. 서하가 더욱 크게 웃음을 흘렸다. 내가 구경하는 입장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아. 그만 쉬고 올라가죠.”
“왜요? 조금만 더 쉬어요!”
“됐어요. 빨리 무기 챙겨요.”
잔뜩 신났던 혜진과 지연이 추욱 어깨를 내리고 무기를 주섬주섬 들어 올렸다. 상진과 태경은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12. 던전의 발견
[유레이 26층입니다.]
몬스터 수십 마리가 몰려 있었다. 26층부터는 몬스터의 덩치와 수부터가 달랐다. 있는 힘껏 몬스터를 밀치고 안으로 파고들어서 힘을 주어 검을 수직으로 올렸다.
“크하악!”
고통에 겨운 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하마처럼 생겼으나 악어가죽을 뒤집어쓴 몬스터는 가죽에 슬쩍 생채기가 나는 것이 전부였다. 스킬을 사용해 검에 마력을 둘러 휘두르고 나서야 놈의 가죽을 가르고 가슴께에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힘을 주어 녀석의 안쪽 살에 검을 박아넣은 나는 그대로 더욱 강하게 힘을 주어 손잡이까지 푹 집어넣으며 검을 위로 올리듯이 꺼내었다. 얼굴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한 마리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옆에서 협동해서 놈들을 잡고 있던 일행들도 한 마리 처리했는지 놈이 쓰러지는 굉음이 흐른다. 뒤에서 찌릿한 느낌이 오며 위험이 감지되었다. 고개를 숙여 옆으로 한 바퀴 구르자 발을 휘두르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마력을 씌운 검을 그대로 던져 녀석의 얼굴에 박아넣고 달려가 몸으로 녀석을 후려쳤다. 중심을 잃은 녀석이 뒤로 넘어가고 그사이 녀석의 이마에 꽂힌 검을 강하게 눌러 집어넣었다가 꺼냈다. 또 한 마리가 처리되었다.
타다다닥.
뜨거운 햇살이 비추는 곳에서 우리는 빠르게 달렸다. 몬스터가 그런 우리를 향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덩치가 남산만 했다. 이곳에 와서 만난 녀석 중에 가장 큰 녀석이었다.
자신의 힘을 믿는지 녀석은 하나였다. 옆에 나란히 가깝게 붙어있는 나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들 흩어져!”
그렇게 소리친 내가 바닥을 박차고 옆에 있는 나무 기둥을 타고 달리며 녀석의 뒤를 노렸다. 상진의 검이 떠올라 내 옆으로 다가온다. 나는 나무를 밟던 발을 옮겨 상진의 검을 밟고 공중에 도약해 그대로 검을 녀석에게 박아넣었다.
“크하아악!”
몬스터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흔들어댄다. 끝까지 몸에 박아넣은 검을 쥔 나는 그 상태 그대로 마력을 방출해 녀석의 몸 안에 마력을 흩뿌렸다. 녀석의 초록색 가죽 안이 순간 팽창하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터져나간다. 졸지에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쓰게 된 내가 어안이 벙벙해 그대로 자리에 떨어져 내렸다.
탁.
땅에 발을 딛고 서자 온통 비릿한 냄새가 가득했다. 어디선가 쿱쿱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모두가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서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이에 상진과 태경이 끼어있다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 둘이 뒤로 물러날 리가 없을 텐데.
“왜? 다들 왜 나를 그런 표정으로 봐?”
“이석아. 똥.”
“몬스터의 똥을 뒤집어썼습니다.”
“뭐?”
전갈 똥이 마지막일 줄 알았건만. 원망스러운 똥 같으니.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있는 아무 물웅덩이에 풍덩 하고 몸을 담갔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물웅덩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보글보글 공기 방울이 내 입에서 시작되어 위로 올라갔다. 놀란 내가 발버둥을 치며 위로 올라가려고 애쓰지만,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다. 웅덩이가 이렇게 깊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일행들이 위에서 내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나를 구하기 위해서 웅덩이로 뛰어들었다. 서로 목숨이 위험할 때는 버리고 가라더니 정작 말뿐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들.
[26층의 던전을 발견하셨습니다.]
[시련이 주어집니다.]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던전을 클리어하세요.]
[총인원은 6명입니다.]
이런 식으로 던전을 발견하다니. 전갈의 내단도 그렇고 나는 똥과 인연이 깊은 듯했다. 새하얀 빛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또다시 어두운 동굴 내부였다.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주변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구조는 모두 보였다. 작은 공동 같은 곳에 떨어진 우리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길은 앞에 보이는 길 단 하나였다. 나는 서둘러 발을 옮기려는 사람들을 막았다. 상진이 내딛던 발을 멈추며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서둘러 상진의 팔목을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상진이 내 품에 가볍게 안겼다. 그리고 그가 발을 내디뎠던 곳에 커다란 창 하나가 옆에서 쑤욱 튀어나왔다.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다.
다들 갑자기 튀어나온 창에 놀라서 새된 소리를 내뱉었다. 상진이 놀랐는지 강한 힘으로 내 몸을 꼬옥 껴안아 온다. 처음은 내가 상진을 안는 폼이었으나 어느새 상진이 나를 안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숨이 막혀서 상진의 팔을 퍽퍽 치니 그제야 조금 느슨하게 팔을 풀었다. 나는 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문제가 심각했다. 사방팔방이 전부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함정이 잔뜩 설치되어 있는 듯싶었다.
“전부 다 함정이야.”
“뭐?”
“던질만한 것 뭐 없어?”
상진이 몬스터에게서 챙겨두었던 단검을 하나 꺼내 보였다.
“저 길을 통해서 쭈욱 던져봐.”
내 말에 상진이 염력을 이용해 길이 난 곳을 향해 단검을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동굴 천장에서 미친 듯한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단검이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다들 입을 벌리고 화려한 화살 세례를 바라봤다.
“저길 어떻게 지나갑니까?”
화살이 떨어진 자리를 바라보니 텅 비어 있는 것이 위험신호가 사라진 것이 보였다. 상진이 건드렸던 함정도 빨간 신호가 사라진 채였다.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거라면 간단하지.
“방법 찾은 것 같아.”
그렇게 대답한 나는 미친 듯이 위험신호가 울리는 곳을 향해 마력을 방출했다. 늘어난 마력의 양에 이제는 마력을 한참 써도 버틸만했다. 옆에서 상진과 태경이 나를 응원하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혜진과 지연이 팔불출이라면서 자리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기고 살아남아서인지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함정이 하도 많아서 마력이 다 떨어질 때쯤이 되어서야 함정이 대부분 사라졌다. 문제는 동굴이 무너져 길이 좁아졌다는 사실이었다.
“이석 씨. 힘이 넘치시네요.”
“멋있는 남자 두 명한테 응원받아서 힘이 솟아나셨나 봐요.”
“잘했어. 강이석.”
“맞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상진은 웃으며 염력을 이용해 돌무더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조금 붉어진 얼굴을 한 내 눈이 억울함으로 가득해졌다. 함정이 벽 안에 박혀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 눈을 본 상진이 다가와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어쩐지 그 행동으로 인해서 더 억울해진 기분이었다.
“함정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조심히 따라오세요. 이상한 곳 밟지 말고 제가 밟은 곳만 따라서.”
그렇게 말한 나는 위험신호가 아예 없는 곳이나 위험신호가 약하게 감지되는 곳만 골라서 밟아나갔다.
팟!
위에서 구슬이 날아와 바닥에 박혔다. 뒤로 슬쩍 몸을 빼 그것을 피한 나는 다시 앞으로 향했다. 여기서는 민첩이라는 특성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 자신 있게 내 뒤만 따라오겠다고 말한 사람들이 위험신호가 강하게 오는 이상한 곳을 밟는 바람에 중간에 부서지지 않은 화염방사기가 작동되어 큰일이 날 뻔했지만, 무사히 통과했다. 화염방사기가 작동되는 순간에는 심장이 놀라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으아아. 큰일 날 뻔했네요.”
“조심하세요. 아직 파괴되지 않은 함정도 많아서 위험해요.”
“그, 너무 좁아서 실수로 발을 헛디뎠어요. 죄송해요.”
혜진이 놀라고 미안했는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우리는 무사히 함정을 통과해서 동굴을 벗어났다. 밝은 햇빛이 우리를 비추고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담겼다.
“뭐야, 던전이 왜 이렇게 쉽지? 잠깐! 우리 밖으로 나온 거예요?”
“뭐야?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던전 아니었어요?”
“말도 안 돼.”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횡단보도 건너에 있는 상가와 그 상가 뒤에 줄지어 있는 아파트들이 익숙했다. 사고가 나기 전 가족과 함께 살던 아파트가 멀쩡하게 눈앞에 서 있었다. 무너지고 불이 붙어 그 자리에 새로운 아파트가 지어졌었는데, 이건 새로 지어지기 전의 아파트였다. 그 앞에 조그마한 분수대가 있는 것도 그대로였고 그 분수대 옆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나무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말도 안 돼.”
필사적으로 멀쩡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금씩 호흡이 가빠졌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나는 눈앞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온통 빨간 화염에 휩싸이던 그때와 지금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내 이상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역시 상진이였다. 소꿉친구였기 때문에 그도 내가 아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다. 상진이가 잽싸게 내 팔꿈치를 잡아 왔다. 서 있는 것이 조금 수월해졌다. 상진이 아니었다면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변을 살피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하던 이들의 시선이 나를 응시해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왜 그래요. 이석 씨.”
“형, 뭐가 이상해요?”
“살릴 수, 살릴 수 있어. 내가 지금 가면. 지금 가면 돼.”
“이석아!”
나는 달렸다. 나를 잡고 있는 상진이의 손을 뿌리치고 정말 미친 듯이 달렸다.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도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냥 미친 듯이 내가 살던 아파트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귓가로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뚝뚝 끊겨나갔다. 2동 803호. 아무도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아마도 일행 중 민첩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도 지금의 나를 따라오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뛰지 않으면 죽을 사람처럼 광인 같은 모습으로 달리는 나를 따라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폐에 공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뻐근하게 고통을 호소해왔다. 마주 오는 바람을 그대로 견뎌내는 눈이 건조해졌다. 이마에 땀이 흐르다가 바람에 식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다 왔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빨리.”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단추를 누르다가 맨 꼭대기 층에 가 있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계단으로 올라갔다. 거의 다 왔는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이대로 터져버릴 것처럼 강하게 심장이 박동했다.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 들면서 명치 끝이 찌릿거렸다.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빨리.”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첩이 한계치를 벗어나 성장합니다.]
802호 문 앞에 멀뚱히 선 나는 고개를 올려 문의 잠금장치에 손을 올렸다. 평소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지는 이러한 알림을 반겼을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것이 현실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떨리는 손이 잠금장치 위를 한참 배회했다. 이건 현실이 아닌 거지? 꿈이거나 던전에 불과한 허상인 건가. 이렇게나 생생한데 이게 환상일 리가 없잖아.
삐삐삐삐삑.
다섯 자리의 현관 비밀번호가 눌렸다. 차라락 하면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벌컥 연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내가 등교하고 난 마지막 모습과 똑같았다. 학교에 가기 전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는 것이 신경 쓰여서 정리해둔 모습 그대로 신발들이 놓여 있었다.
“이석아?”
“야. 너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야? 뭐냐. 너 꼴이 왜 그래?”
“이석아. 혹시 친구들이 괴롭혔어? 아니, 네가 당할 놈이 아닌데.”
문 열리는 소리만 들리고 아무도 집에 들어오지 않자 엄마와 누나, 아빠가 의아한 표정을 하며 차례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꿈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선명했다. 이제는 사진을 보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을 가족의 얼굴에 있는 점의 위치나 여드름의 흉터 같은 것들까지도 선명하게 눈에 보였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이게 꿈일 리가 없잖아?”
“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서 들어와.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강이석! 솔직히 말해봐. 너 진짜 친구들이 괴롭혔어?”
옆에 바짝 달라붙어서 팔짱을 끼며 말하는 누나의 감촉이 너무나 사실 같았다. 내가 싫어하던 누나의 버릇 중의 하나였다. 이게 만약 환상이라면.
“새로운 고문 방법인가.”
“야! 내가 팔짱 끼는 게 무슨 고문이야! 너 솔직하게 말해. 누나한테 하듯이 친구들한테 해서 따돌림당하는 거 아니야?”
“야! 강유리! 아무리 동생이라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니!”
“그래, 유리야. 이번엔 네가 너무했다. 이렇게 잔뜩 흙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온 애한테 무슨 말을.”
“흐어. 흐으.”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절로 눈물이 흘렀다. 장례식장에서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었다. 그냥 가족을 보는 것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회오리쳤다. 지금까지 무덤덤하게 묻어놓고 있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표면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오열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소리도 참지 못하고 잔뜩 흘리면서 울었다.
“야. 야. 너 울어? 정말 누나 때문에 그렇게 우는 거야? 누나가 미안해. 잘못했어. 응? 이석아. 엄마! 아빠! 어떻게 좀 해봐! 얘 울잖아.”
“네가 울렸잖아! 아이고. 일낼 줄 알았어. 이석아. 그만 울어. 뚝 그쳐. 뚝.”
“허허. 이석이가 우는 것도 다 보고 별일이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진짜로.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
“잠깐 떨어져 있었는데 그렇게 보고 싶었어?”
“이게 무슨 일이래?”
가족은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나를 보다가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누나는 그런 나를 와락 껴안아 왔다. 평소라면 그런 누나를 뒤로 밀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누나의 품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 알지 못했었다. 전에는 그렇게나 귀찮고 싫기만 했던 닿아오는 누나의 체온이 햇살처럼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서 지내면서 살갗이 따끔거리며 떨어져 나갈 것 같기만 하던 평상시와는 달랐다.
“나 너무 무서웠어요.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
“아! 너무 귀엽잖아! 우리 이석이 봐봐. 이것 봐. 우는 것도 귀여워!”
“강유리. 다 큰 사내놈한테 그만 안 해?”
엄마가 뒤에서 누나의 등짝을 소리 나게 때렸지만,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는 나를 껴안고 이리저리 물고 빨고 하는 중이었다. 그래, 누나는 나를 이렇게 좋아했는데 나는 왜 매번 누나를 밀어내기만 했었을까. 엄마랑 아빠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따스하고 부드러운데 나는 왜 그렇게 무뚝뚝해서 제대로 대화할 시간도 가지지 않았던 것일까. 눈물만이 미친 듯이 볼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킁. 이석이 킁!”
누나가 휴지를 가져와 내 코앞에 대고는 되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마냥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성을 냈다.
“야! 이 모질아! 킁 하라니까? 네가 코 푼 휴지라도 돈을 주며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내 주변에만 해도 한 트럭이야! 네가 뭐가 멋있다고 난리인지 모르겠다니까? 귀엽다면 모를까. 검 조금 휘두르는 게 뭐가 멋있다고. 이석아. 누나 돈 좀 벌게 킁!”
“얘가 진짜!”
엄마가 그런 누나를 보면서 소리쳤다. 진짜 누나였다. 진짜 누나고, 엄마고, 아빠였다. 나와 누나를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의 웃음을 머금은 그 눈빛은 다정함 그 자체였다.
뒤흔들리던 마음이 진정되자 눈물이 거짓말처럼 말라버렸다. 의아하게 나를 보며 왜 울었는지 물어보는 가족의 얼굴이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창피함도 뒤늦게 몰려왔다. 가족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까 너무 기뻐서 울었어요.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서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지내다 보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그 세계에는 몬스터가 나타나는데요. 그래서 휴식층이 아니면 편하게 쉬질 못해요. 방금만 해도 제가 몬스터 똥을 뒤집어썼는데 그걸 씻으려다가 던전에 떨어져서 이곳에 왔어요.
죄다 미친놈처럼 보일 만한 말들이었다. 우리 가족이라면 당장 짐을 챙겨서 나와 함께 정신병원으로 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곳은 분명 던전 안일 텐데 어째서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되돌아온 것이라면 내가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초인종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이 쿵쿵쿵 두드려진다. 문을 열려고 나가는 가족들을 제치고 내가 가장 먼저 문으로 달려갔다. 허리춤에 있는 검을 꺼내 들어 현관문 앞으로 향하자 가족들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엄마가 내게 물었다.
“이석아. 집에서 웬 검을….”
쾅쾅쾅.
설마 몬스터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석 씨!”
“이석아! 너 여기 없어? 문 좀 열어봐!”
“상진이다!”
잽싸게 문 앞으로 다가간 누나가 현관문을 연다. 상진이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와 아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일행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치는 내 일행들과 누나가 눈을 마주치고는 서로 비명을 질렀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으아아악!”
“어억!”
“누구세요?”
한참 비명만 질러대다가 진정한 누나가 일행들을 향해 물었다. 내 복장과 일행들의 복장을 살펴보는 표정과 눈초리가 괴상했다. 온통 가죽으로 된 옷이나 바지를 입고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는 우리는 누가 봐도 당황스러워할 만했다. 심지어는 머리에서 몬스터의 피와 함께 눌어붙은 버석한 흙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엄마랑 아빠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석이랑 친구들…이니?”
“허허허. 요즘 애들은 참… 재밌게도 노는가 보네.”
“유투브에 올릴 영상 찍고 있는 건 아니지? 이석아. 안 된다. 우리 가족 얼굴은 지워서 올려.”
황당한 적막감이 민망하게 흘렀다. 누나가 슬쩍 몸을 돌려 일행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서서 놀란 표정만 짓고 있던 이들이 조심조심 어깨를 웅크리고 들어온다. 내 옆을 지나 들어오는 혜진과 지연이 입 모양으로 묻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 이석 씨 집이에요?’
태경은 내 옆을 지나가며 슬쩍 귓속말을 해왔다.
“나중에 다 설명해주세요.”
사실 나도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이곳이 현실인지 던전에 의해서 되살려진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이곳이 과거라면 내가 과거를 바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석이도 그렇고 다들 고등학생처럼 안 보인다?”
누나가 뼈를 때리는 한마디를 해왔다. 그랬다. 우리는 서하를 빼고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이었다. 모두 뻣뻣하게 굳어 누나를 바라보았다.
“고, 고등학생이요?”
“우리가 지금 고등학생?”
“저는 고3 맞는데요? 나 아직 고등학생인데!”
혜진과 지연이 어벙벙한 얼굴로 말을 내뱉고 서하가 억울해 울상인 얼굴로 소리친다. 알 수 없는 이들의 반응에 놀란 누나가 슬쩍 내 뒤로 숨으면서 멋쩍게 웃는다.
“아니, 아니. 나쁜 의미로 말한 건 아닌데. 하하. 그, 흙이 좀 많이 떨어지는데 다들 씻어야 하지 않을까?”
“제가 좀 더럽기는 하지만 진짜 고등학생 맞다니까요?”
누나의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을 보니 우리가 선 곳이 흙으로 난장판이었다. 서하는 그것이 신경 쓰이지 않는지 억울해하며 누나에게 호소했으나 아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들도 흙을 가지고 노나보네. 하하하.”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회의를 해야 하건만 더러운 몰골에 모두 화장실로 쫓겨났다. 혜진과 지연은 누나 방에 있는 화장실로 향해서 씻었고 태경과 상진, 서하와 나는 거실 쪽에 있는 화장실에서 둘둘 나눠 씻기로 했다. 몬스터가 몸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나와의 접촉을 꺼리던 태경과 아무나 상관없다는 서하가 먼저 화장실로 들어갔다. 엄마와 아빠는 도망치듯 방에 들어갔고 누나와 나 그리고 상진이만 뻘쭘하게 거실에 남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너희 옷이 다 왜 그래?”
“아, 그게, 어.”
나와 같이 상진이도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을 내뱉지 못했다. 우물쭈물하고 있자 누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번갈아 바라봐온다. 우리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누나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계속 피했다.
“진짜 이상하네.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누나. 우리 뭐 잘못한 거 없어요.”
상진이 답답한 듯 말을 꺼냈다.
“그래.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내 말에 대답을 못 해?”
“아니. 그러니까. 아, 진짜 답답하네.”
“야! 답답한 건 우리 가족이야! 엄마랑 아빠도 말만 안 했다 뿐이지 얼마나 놀라셨겠어! 나도 이렇게나 놀라서 심장이 벌렁벌렁한데.”
상진이 그 말에 찔렸는지 몸을 움찔하면서 대답한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는 모양새였다.
“그, 학교에서 축제는 아니고 그 행사가 조금 있었어요.”
“학교에 행사가 있었다고? 무슨 행사인데?”
역시 누나도 그것을 알아채고는 상진이에게 더욱 얼굴을 들이밀면서 추궁한다.
“도대체 애들한테 뭘 시켰길래 이렇게 괴상한 옷들을 입고 나타나? 게다가 이석이는 집에 오자마자 울지를 않나. 애들 몸에서는 흙이 우수수 떨어지지를 않나. 냄새는 뭐가 이렇게 고약해?”
마지막 누나의 말에 상진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순간 발끈해서 상진이에게 손을 올릴 뻔했지만, 무사히 참아냈다. 아니 이 자식이 지금! 계속되는 상진이의 시선에 점점 열이 피어오를 때였다.
“후우. 안 물을 테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 배고프지? 누나가 김치찌개 끓여줄게. 애들이 많으니까 양을 얼마만큼 해야 하려나.”
“누나 요리 못하잖아.”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에 누나가 점프를 하더니 손바닥으로 내 뒤통수를 때렸다.
“아!”
매서운 누나의 손까지 모든 게 너무 과거와 똑같았다. 알싸하게 아파오는 뒤통수에 손을 올리려는데 상진이 익숙하게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대신 내 뒤통수를 문질문질한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상진의 입꼬리가 보였다. 절로 입 밖으로 짜증이 튀어나왔다.
“이씨.”
“죽을래? 어? 죽을래? 누나가 김치찌개 하나는 잘하거든! 해준대도 난리야! 알았어. 안 해!”
“누나. 저는 누나 김치찌개 먹고 싶은데. 진짜 완전 배고파요.”
“그래? 상진이 너는 먹고 싶어?”
“네. 누나. 전에 누나가 해준 김치찌개 먹었을 때도 맛있었는데. 벌써 군침 돌아요.”
상진이의 애교 어린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애교 있게 휜 눈꼬리를 보면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상진이 슬쩍 내 뒤로 가더니 내 머리 위로 제 고개를 얹었다. 누나가 기분 좋아진 듯 웃으며 상진을 보다가 나를 째려봤다.
“그렇지? 야. 강이석 봐봐. 상진이 말 들어봐. 어떻게 너는 친동생이 돼가지고 못돼 처먹었어. 잘해줘도 너는 잘해주는지도 모르지. 흥. 넌 먹지 마. 상진이랑 친구들 것만 해줄 거야.”
“누나!”
“뭐!”
“나도 먹을래.”
“싫어. 먹지 마. 안 줄 거야.”
“누나.”
“저리 가! 어서 가서 씻기나 해. 냄새나!”
딱 맞춰 태경과 서하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누나의 눈이 하트모양으로 변해 태경을 향했다.
“어머머.”
“아, 그 이석 씨 옷이 맞지 않아서요.”
떡 벌어진 어깨에 잔근육이 꿈틀거리는 몸으로 태경이 내 티셔츠를 들고 멋쩍게 웃었다. 바지는 대충 가죽 바지를 빨아서 입었는지 벗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옆에서 서하가 시기 어린 눈으로 태경의 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나의 눈이 계속 태경의 멋들어진 몸을 훑고 있다. 사람 몸을 저렇게 쳐다보는 건 실례가 아닌가. 노골적인 시선에 황당하게 누나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상진만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 방에 들어가더니 방에 몇 개 가져다 놓은 자신의 옷을 건넨다. 정말 신기하게도 상진이 내 방에 가져다 놓았던 옷까지도 과거와 똑같았다. 의심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형. 이거 입어요. 제 옷이라 맞을 거예요.”
“왜 이석 씨 방에 상진이 옷이 있습니까?”
“와, 이석이 형이랑 상진이 형이랑 진짜 친했나 보네.”
서하는 그저 신기한 듯 말했고 태경은 상진의 옷을 받아들며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인다. 상진이 의기양양하게 그런 태경을 바라보며 웃는다. 서하가 슬쩍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누나와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슬쩍 눈동자만 돌려 누나의 눈치를 보려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이런. 이미 누나는 눈과 입과 콧구멍 등 얼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잔뜩 벌어진 채였다. 누나의 입술이 움직였다.
“대박.”
누나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무시하며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상진은 끝까지 태경과 기 싸움을 하더니 화장실에 들어오기 전에 웃통부터 벗어 보였다. 상진이의 몸을 보며 누나의 눈이 더욱 황홀하게 변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거의 누나를 피해서 피신을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씻고 나가서 질문세례를 퍼부을 누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가 막막했다. 그렇게 옷을 벗고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을 맞고 있을 때였다. 등 뒤로 미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내 걱정도 모르고 상진이는 뻔뻔한 얼굴로 손에 묻힌 바디워시를 내 등에 마구 문질렀다.
미끈거리는 바디워시와 따뜻한 손의 체온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등 닦아 주려고. 넌 손이 안 닿잖아.”
“괜찮으니까 그만해.”
“내가 해준다니까?”
“샤워 타올이 있는데 왜 네가 내 등을 닦아준다는 거야?”
상진이 시무룩해졌다. 꼬리와 귀가 축 처진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절로 시선이 갔다.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하면 안 돼?”
“안 돼.”
그런 상진이를 보면서 마음이 약해지려는 찰나였다. 잔인한 목소리가 울렸다.
[몬스터 웨이브까지 3시간 남았습니다.]
목소리와 함께 나와 상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나는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서 애써야만 했다. 그래. 이곳은 던전 안이었다. 현실처럼 만들어진 환상이었을 뿐 결코 원래 내가 살던 곳이 아니었다. 아무리 똑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결코 내가 살던 곳이 될 수 없었고 지금 내 가족처럼 보이는 이들도 내 가족이 아닌 거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생각처럼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죽음의 위기를 겪어가면서 조금 무뎌진 것일지도 몰랐다. 한번 크게 울어서인지 눈물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괴롭지만 그때를 조금 더 자세히 떠올려보았다. 아파트 주변은 온통 경찰들과 소방대원들로 통제되고 있었다. 번쩍거리며 위협적으로 불타던 건물과 그 안에서 도와달라고 손을 흔들다가 결국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까지. 잠깐만 어째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진 거지? 혹시 뒤에서 뭔가가 나타났던 건가?
이상한 초록 괴물을 보았다고 진술했던 목격자는 사고의 후유증으로 환상을 본 것이나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예지안에서 보았던 것처럼 어째서 몬스터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봤던 그 미래의 사건보다 우리 가족이 겪었던 사건이 먼저 일어난 일이다. 3시간 뒤에 발생한다고 하는 몬스터 웨이브와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었다. 지금 이 던전은 예행연습일까.
이것이 비록 던전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가족이 또다시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모조리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고통을 주었던 몬스터를 흔적도 없이 죄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상진이 마주 안아왔다.
“괜찮아. 이석아. 지금은 우리가 같이 있어 드릴 수 있잖아.”
뜨거운 상진이의 체온이 맞닿아왔다. 바디워시를 잔뜩 묻힌 몸이 미끌거리며 문질러졌다. 고개를 들어 상진이의 얼굴을 쳐다볼 때였다. 힘들 때마다 옆에 있는 것은 늘 상진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진이 갑자기 파드득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를 밀치고 샤워기 아래에 서서 급하게 몸을 닦은 상진은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고 옷을 집어 입고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천천히 씻고 나와.”
“응.”
고개를 젖혀 몸에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몸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물과 함께 이 찜찜한 기분까지 같이 쓸려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다 씻고도 나는 일부러 물 아래에 한참을 서 있었다. 입에 침이 고일 만큼 맛있는 냄새가 욕실 안으로 솔솔 들어오고 상진이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을 때까지 계속 나는 그렇게 서 있었다. 엄마와 아빠, 누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들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도망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상황을 마주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기회이기도 했다.
어쩌면 하늘에 있는 가족이 내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갈 행운을 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얼굴을 한번 가볍게 두드리고 나는 애써 얼굴에 미소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웃으면서 마주하고 싶었다. 빌어먹을 몬스터들을 죄다 쓸어내기 위해서는 나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나는 애써 미소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식탁에 앉아서 몇 달을 굶은 사람들처럼 우걱우걱 밥과 김치찌개, 그 외의 각종 반찬들을 집어 먹던 이들이 그런 나를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일행들을 위해 누나가 냉장고에 들어있던 모든 반찬을 총동원한 것 같았다.
“이석 씨! 목소리 들었어요?”
입에 음식물이 가득해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며 내 대답을 기다리던 혜진과 지연이 다시 자리에 앉아서 밥을 퍼먹는다. 앞에 앉아 있는 누나는 그런 그들의 기세에 제 앞에 놓여 있던 몫까지 넘겨주고 있었다. 따지자면 몇 달이나 굶은 것이 맞다. 거의 6개월 만에 열매가 아닌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이들이 음식에 이렇게 달려드는 것이 당연했다.
“학교 행사가 진짜 힘든 거였나 봐? 며칠, 아니 몇 달은 굶은 애들 같네.”
화장실에서 늦게 나와서인지 상진이 식탁 끝에서 밥을 먹다가 기침을 하며 밥알을 뱉어냈다. 위치상 졸지에 그 밥알을 죄다 뒤집어쓴 누나가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상진을 쳐다봤다. 서하가 그 모습을 보고 웃다가 밥을 잘못 삼켰는지 컥컥거렸다. 그런 서하의 등을 두드려주면서도 혜진은 다른 한 손으로 계속 밥을 입에 집어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태경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 상황이 불쾌한 듯 몸을 뒤로 조금 빼내다가 휴지를 집어 들고 누나에게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상진이 급하게 식탁 위에 있던 휴지를 한 움큼 꺼내 누나의 얼굴을 닦으며 사과했다.
“누, 누나. 미안해요.”
“아니야. 괜찮아. 나, 그… 들어가서 좀 씻고 나올게. 잘 먹고 그릇만 싱크대에 좀 넣어줘.”
“네. 누나. 당연하죠.”
상진 덕분에 겨우 우리끼리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나는 슬쩍 누나가 앉아 있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상진과 태경이 나를 향해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며 나도 슬쩍 밥과 김치찌개에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먹는 추억의 맛에 찡하니 감동이 느껴졌다.
“이제 2시간 30분 정도 남았네요.”
“그전에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가 이석 씨 집이에요?”
“형 집에 몬스터가 나타나는 건가? 그럼 어떻게 하죠?”
“뉴스에서 이 아파트에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어떻게 아파트가 이렇게 멀쩡하죠?”
“맞아요. 그 사고로 저 빼고 우리 가족이 다 죽었어요.”
“네?”
내 말에 다들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당연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환상인 것 같아요. 일종의 예행연습이죠.”
“예행연습?”
“휴식층에 처음 도착해서 보상을 받았었어요. 예지안이라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그런 거였어요.”
“그걸로 뭘 본 건가요?”
혜진과 지연을 뺀 나머지가 침묵했다.
“우리가 살던 세계에 몬스터가 들이닥치는 걸 봤죠.”
혜진과 지연까지도 조용해졌다. 온통 침묵만이 전부였다.
“정말 끔찍했어요. 처음의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거든요. 그놈들한테.”
“우리가 유레이에 떨어져서 층을 오르는 것이 그것 때문일까요?”
“알 수는 없죠. 그저 다 추측일 뿐이니까요.”
“그나마 층을 오를 동기는 부여해주네요. 이석 씨 가족이 겪은 일은….”
“괜찮아요. 전 이것도 가족이 제게 준 기회라고 생각해요. 정면으로 제 안에 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라고 만들어 준 상황이 아닐까요?”
“멋있네요.”
“자! 그럼 우리 이제 뭘 준비해야 하죠?”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밝게 말했다. 그에 다들 숟가락을 위로 치켜들며 말했다.
“우리 딱 5분만 더 먹자.”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내가 무너질 이유가 없다. 가볍게 생각하자. 곧 나타날 녀석들이 환상의 가족을 건드리지 못하게 쓸어버리는 생각만 하기로 했다. 나도 이들을 따라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전보다 조금 더 강해졌으니 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좌절하지 말자. 나는 할 수 있다.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잔인한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입안이 썼다. 그래, 지금의 상황이 현실일 수는 없었다.
[몬스터 웨이브까지 1시간 남았습니다.]
다들 배부르게 배를 채우고 거실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누나가 그런 우리를 보고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몬스터가 등장하기 전에 모두들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온 누나를 발견한 일행들이 눈치가 보였는지 다들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켜 놀고 있었다는 듯 어색한 연기를 시작했다.
“유레이 1층에서 나오는 놈은 말이야. 목이 제일 큰 약점 맞지?”
“아니, 거시기가 직빵이야. 그냥 정신을 못 차리던데?”
“네에?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뭐가 잔인해. 그렇게 잡는 게 제일 죽이기가 편하니까 그렇게 잡는 거지.”
태경과 서하가 슬쩍 혜진과 지연에게서 멀어졌다. 지연과 혜진이 누나의 눈치를 보면서 소리까지 내면서 어색하게 손을 움직여 몬스터를 잡는 시늉을 했다. 상진이 실실 웃으면서 누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잔뜩 당황해서 거실 가운데에서 방황하는 중이었다. 그런 우리를 보는 누나의 표정이 점점 더 괴상해졌다.
누나는 나를 향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분명 엄마, 아빠와 함께 우리들의 뒷담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잠시 후 누나가 안방 밖으로 얼굴을 살짝 꺼내더니 나를 불렀다.
“이석이. 잠깐 들어와 봐.”
“누나, 이석이 혼내시려고 그러죠.”
상진이 일어나는 내 앞을 슬쩍 막아섰다. 누나가 도끼눈을 하고 상진을 쳐다보았다.
“너도 같이 들어와.”
“네….”
주눅이 든 상진이 누나의 눈치를 살피면서 대답했다. 누나가 얼굴에 상냥한 미소를 달고 다른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이석이 잠시만 빌려 갈게. 놀고 있어.”
다들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만족한 듯 웃던 누나가 나와 상진이를 재촉했다.
“고, 고등학생 때 이러고 노는 거 맞지? 게임 얘기 같은 거 하고.”
혜진이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애들이 노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나 때만 해도 게임 얘기 엄청 했어.”
지연이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태경과 서하가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졸업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하하.”
“일단 방어구 먼저 챙겨입고 기다리죠.”
태경이 건조기에 넣어놓았던 옷을 꺼내며 말했다.
안방으로 들어간 나와 상진은 부모님과 누나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부모님과 누나에게 더 이상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곧 몬스터가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터였다.
“너 미쳤니?”
누나가 제일 처음 내뱉은 말이었고,
“우리는 이석이가 게임 하는 걸 도통 못 본 것 같은데… 언제 그렇게 게임중독이 된 거니?”
“잔뜩 더러워져서 들어온 것도 밖에서 구르면서 놀다가 들어와서 그런 거야? 아니, 그런데 왜 울었대? 게임에서 졌어?”
부모님이 걱정스럽게 나를 보며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그래, 나 같았어도 못 믿을 얘기다. 도통 어찌해야 할지 머리가 뻑뻑하게 굳어 돌아갔다. 가까이 있음에도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 그렇지만 허상이라도 가족이 죽는 모습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어두웠다. 곧 몬스터 비가 내릴 것이었다. 나는 빨개진 눈을 들키지 않으려 눈을 내리감았다. 상진이 옆에서 내 손을 단단하게 잡아주었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슬쩍 옆에 선 상진을 쳐다보았다. 수려한 얼굴선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걱정하는 눈동자까지도 선명히 보였다.
“사랑해요. 엄마, 아빠.”
뜬금없는 내 고백에 다들 벙찐 표정을 지었다. 상진이 조금 더 강하게 맞잡은 내 손을 쥐는 바람에 손이 살짝 찌그러졌다.
“우리도 사랑한다. 이석아.”
“강이석. 나는, 난 왜 빼?”
“누나도 사랑해.”
흡족하게 웃던 누나가 다시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너 지금 말 돌리려고 이러는 거지? 뭐야, 도대체. 하루아침에 애가 180도 변했잖아.”
“상진이도 사랑하고.”
입을 떡 벌린 누나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저 말없이 웃으며 나를 볼 뿐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우리 앞에서 상진이 사랑한다고 고백한 거야?”
“이석이 다 컸네.”
“엄마!”
상진이의 커다랗게 뜨인 눈이 나를 향했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진짜냐고 물어오는 표정이 들떠 보였다.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양새가 수줍어하는 새신랑 같았다.
한참 실랑이가 벌어지고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하기까지 1분 정도 남은 시점에 나와 상진이는 다시 거실로 나올 수 있었다. 납득하기 힘든 표정을 한 가족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에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00:01:58]
우리가 밖으로 나오고 다들 원래 입고 있던 방어구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나와 상진이도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방어구를 챙겨입었다. 6명이나 뭉쳐 앉아 있는 거실에는 적막함만이 흘렀다. 다들 내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애써 웃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들 그런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사고에 대해서 본 것이라고는 뉴스에 나오는 단편적인 영상이나 사고 끝 무렵에 본 무너지는 아파트뿐이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뛰고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안방 문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이잉.
창문 밖으로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00:00:01]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쿠쾅쾅콰콰쾅!
폭발이 일어났다.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석해진 얼굴 위로 손을 올려 쓸어내렸다.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비쳤다. 안방 문이 열리고 놀란 가족이 달려 나왔다.
“엄마. 아빠. 누나. 우리 옆에 꼭 붙어있어요. 절대로 떨어지면 안 돼.”
“이게 대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리창이 깨지고 몬스터들이 들이닥쳤다.
“크아아하악!”
“꺄아악!”
유레이 1층에서 만난 조잡한 철판을 덧댄 갑옷을 입은 몬스터였다. 초록색 피부에 도끼를 들고 있는 몬스터를 본 엄마와 아빠, 누나가 비명을 질렀고 몬스터의 눈이 그런 가족에게 꽂혔다. 육중한 무게를 가진 녀석이 움직이자 바닥에서 쾅쾅쾅 소리가 났다. 바닥에는 어느덧 자잘한 실금이 잔뜩이었다.
“누굴 노려.”
강하게 검을 휘둘렸다. 몬스터의 비명 소리와 함께 푸른 피가 튀었다. 몬스터의 목이 댕강 잘려 바닥을 굴렀다. 일행들이 죽인 몬스터까지 합하면 벌써 열 마리 가량의 몬스터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지금 이거, 진짜야?”
“눈, 감고 있어요.”
패닉에 빠진 가족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때 창문 앞에 둥그런 원이 그려지며 알 수 없는 포탈 하나가 생겨났다. 그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모든 호흡이 멈추고 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커다란 구멍 안으로 내 키만 한 눈동자 하나가 보였다. 느릿하게 감았다 뜨는 그 눈이 내 기력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한쪽 눈이 내 키만큼이라면 녀석의 본체는 도대체 얼마나 크다는 말인가. 다른 일행들도 그 눈을 본 것 같았다.
“진짜 좆같다. 이게 말이 돼?”
혜진과 지연이 입 밖으로 상스러운 욕을 마구 뱉어내면서 주변의 몬스터를 처리했다.
“이곳에 와서 말이 되는 경우는 손에 꼽힐 정도였습니다. 싸워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죠.”
“태경이 형, 그렇기는 한데 몬스터가 너무 큰 거 아니에요? 나 이번엔 좀 무서운 것 같은데.”
“너는 다 무서워하잖아.”
“상진이 형!”
“걱정 마. 너는 머리랑 심장만 날아가지 않으면 안 죽잖아?”
“아, 진짜! 고통은 다 느낀다고요!”
다른 일행들이 떠드는 소리가 내 귀에는 와 닿지 못했다. 슬쩍 눈동자만 돌려 가족이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다시 시선을 돌린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구멍 안에서 도르륵 굴러가는 눈동자가 나와 눈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그 눈이 계속해서 끔뻑끔뻑 감겼다가 떠졌다. 순간 그 눈동자가 웃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직 싸움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온통 하얗게 타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기계처럼 주변에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이쪽을 보고 있는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귓가에는 내 숨소리 외의 모든 소음이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내 거친 숨소리 말고는 지독한 정적이었다. 숨 막히는 고요가 내 몸을 감쌌다.
구멍 안에서 녀석이 튀어나오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몸이 저절로 덜덜 떨리며 눈알이 안으로 말려들어 가듯이 아팠다. 일행들과 가족이 보였다가 말았다가 하면서 감각의 혼란이 왔다. 주변 일행들은 멀쩡했던 것 같은데 왜 나만?
[악의 기운에 영웅의 힘이 반응합니다.]
[각성이 시작됩니다.]
[기운에 맞게 몸이 변형됩니다.]
궁금증은 목소리가 해결해주었다. 내 몸에서 새하얀 기운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나를 지켜보고 있던 눈이 즐겁다는 듯이 반짝였다. 몬스터의 수가 갑작스럽게 증가했다. 사방이 폭발로 뒤덮이고 지진이라도 발생한 듯 아파트가 이리저리로 휘청거렸다. 그것은 우리 일행이 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과 우리 일행은 구석으로 몰렸다. 가족들이 벽에 바짝 달라붙어 덜덜 떨고 있었다.
“이석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뭐야, 이 징그러운 것들은!”
“이석아! 괜찮은 거니? 다치지 않게 조심해!”
구멍이 갑자기 조금 더 커지고 눈동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커진 구멍 사이로 시커먼 팔이 하나 튀어나왔다. 오돌도돌한 돌기가 잔뜩 돋아나 있는 온통 검은색으로 된 시커먼 팔이었다. 기다란 팔은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며 구멍에서 뻗어 나오며 아파트의 반절을 부수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우리가 있는 쪽을 빗겨나갔다.
한쪽 벽면이 사라지면서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드러났다. 날아간 아파트의 파편이 옆에 있던 아파트를 휩쓸고 떨어져 내렸다. 아주 잠깐의 시간, 아파트가 크게 휘청이며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구멍 난 벽면으로 미끄러진 가족들이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경악한 표정으로 떨어져 내리는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경악과 공포로 가득한 가족들의 표정이 그려진 영상이 재생되었다.
“아!”
“이석…아.”
떨어지는 가족들을 향해서 손을 뻗는 일행들이 보였다. 상진이 빠르게 제힘을 사용하는가 싶더니 당황해서 표정이 굳어졌다. 웅웅 주변이 소란스럽게 빙글빙글 돌았다. 구멍 안에서 다시 나타난 눈이 흥미롭게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흥미롭게, 흥미롭게? 어째서? 나는 상황을 미쳐 파악하기도 전에 가족들이 떨어져 내리는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상진이 스킬을 사용하지 못한다. 왜? 가족이 8층이나 되는 높이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이어서? 가족은 환상일 뿐인데, 나는 어째서? 구멍 안에 보이는 눈이 또다시 어떤 행동을 할 줄 알고 일행을 내팽개치고 가족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 몸은 구멍 밖으로 가족과 함께 흙바닥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내가 했던 모든 다짐은 허망한 것이었다. 나 때문에 가족이 한 번의 죽음을 더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가족의 죽음을 한 번 더 보더라도 몬스터 때문에 죽지는 않을 거라고, 한 번의 죽음을 더 보더라도 내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
“이석아!”
그런 나를 보고 상진이 같이 몸을 날려 왔다. 안에서 일행들이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몬스터들을 잡으며 우리의 이름을 소리 질러 불렀다.
“꼭 구해요!”
“형! 여기는 걱정하지 마!”
“꼭 지키세요!”
그러나 순식간에 다시 등장한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팔로 인해서 상진은 제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 힘내라는 말도 다 부질없었다. 일행들의 경악 어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니 울음이 잔뜩 섞인 절규인가. 미지근한 피가 내 볼에 튀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며 주변의 모든 것이 흐려졌다.
“아아. 아?”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가족의 표정이 보였다. 반짝이는 눈물방울이 공중에서 잘게 흩어졌다. 이 와중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방울이 참 예뻤다.
“이석아.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나를 사랑한다는 엄마의 말.
“강이석. 층을 올라. 너는 할 수 있어.”
층을 오르라는 누나의 말. 층을 오르라고?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
“구슬을 써, 이석아. 우리가 아닌 동료들을 구해 위로 올라가렴.”
“어떻게?”
구슬?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가족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눈앞에서 잔인하게 찌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도 도저히 더는 찌푸려질 수 없을 만큼 찌푸려졌다.
“아악! 제발! 제발! 제발요! 허으. 허으으어. 죄송해요. 죄송해요. 다 나 때문이야. 제발 이러지 마. 이러지 마요. 하으으으.”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볼에 묻은 상진의 피와 함께 흘러내렸다. 숨이 차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꺽꺽거리듯 듣기 싫은 소음처럼 뚝뚝 끊겨 뱉어질 뿐이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아니 숨을 쉴 수 없었다.
“아아… 아.”
상진이가, 가족의 목숨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무리 다짐을 했어도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했어도 안 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 안되던 것이 갑자기 될 리가 없었다. 망할, 트라우마를 극복하라고 주어진 기회? 개나 주라고 해. 제발 죽지 마요. 내 앞에서 죽지 말아요. 두 번씩이나 내 앞에서 죽지 마. 제발. 상진이는, 상진이는…….
언젠가 보스를 잡고 얻었던 알 수 없는 구슬. 왜 아빠가 나한테 구슬을 쓰라고 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 빠르게 심장에 퍼졌다. 뛰어내린 아파트 위에서 소란스러움이 강해졌다. 뒤를 도는 그 시간이 느리게 감기를 한 듯 천천히 흘러갔다. 내가 완전히 뒤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느릿하게 정지했던 시간이 흐르며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휙휙 눈앞을 날았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을 사용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일행들의 몸이 온통 갈기갈기 찢겨 부서진 아파트의 단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이곳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구멍 안에서 일부분이나마 주둥이처럼 보이는 것이 나타났다. 나를 비웃는 듯이 입이 크게 벌어지고 날카로운 이빨이 반짝였다.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넌 도대체 뭐야? 다시 뒤를 돌아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몸 여기저기가 잔뜩 비틀린 채 있는 가족을 바라보았다. 가족이 떨어져 내린 아래에서 노란빛 구슬 같은 것 세 개가 위로 올라와 내 손안으로 스미듯 흡수되었다.
“이석아. 넌 할 수 있어.”
가족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어느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이 내 손 위에 올려져 있었고 노란빛 세 개는 거기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자세히 보니 사방에서 노란빛을 띤 구슬들이 잔뜩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구슬이 떠오른 곳 밑에는 처참한 시신들이 하나씩 자리해있었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차근차근 심장에 쌓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절규했다. 아무리 토해내도 갈기갈기 찢어져 비산한 내 심장 조각은 다시 모이지 않았다. 모일 리가 없었다. 절규하는 내 귀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나는 실핏줄이 전부 터져 새빨간 눈으로 어금니를 짓씹으며 단어를 하나하나 뱉어냈다. 목소리가 다 쉬어 버석하게 튀어나왔다.
“사용할게. 저 새끼를 죽일 수 있다면 뭐든.”
[5분 전으로 시간이 되돌아갑니다.]
동시에 공중에 둥둥 떠 있던 노란빛이 내 몸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우리가 도와줄게.”
누구야? 퉁퉁퉁.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노란빛이 닿은 부분이 경련이 온 것처럼 마구 떨려댔다. 끔찍한 고통이 몸을 강타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으아아아아악!”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너는 내가 죽인다. 구멍 안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끝까지 기절하지 않고 녀석을 응시했다. 너는 내가 죽여.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통증이 온몸을 저미는 것 같았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며 고통을 견뎌냈다. 주먹을 꽉 쥐고는 몸을 이리저리로 비틀었다. 그러나 참기 힘든 고통은 계속되었다. 결국 입 밖으로 비명이 터져나갔다.
“으아아아악!”
온몸의 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장기는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뼈는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등은 척추뼈가 뽑혀 나가는 통증으로 가득했다. 수만 마리의 개미 떼가 살점을 떼어먹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으으아!”
뿌드득. 콰드득.
내 전신에서 사람에게서 나지 않을 소리가 들려왔다. 팔과 다리, 등과 목뼈가 괴기하게 꺾였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아가면서도 내 몸은 충실하게 기운에 맞춰 변형되고 있었다. 극악의 고통 속에서도 나는 꿋꿋하게 정신을 놓지 않았다. 마침내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5분 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아직 녀석이 눈동자만 나와 마주치고 있을 그 시점으로. 사고가 느릿하게 정지했고 나는 숨 쉬는 방법도 잊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변형이 완료되었습니다.]
[변형된 몸에 맞게 능력치가 조정됩니다.]
[영웅 스킬들을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순백의 버서커 능력의 최대치가 조금 늘어납니다.]
[악의 기운에 대적할 스킬이 추가됩니다.]
[아직 스킬을 사용할 만큼의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스킬이 봉인됩니다.]
[악의 기운에 영웅의 힘이 반응합니다.]
[영웅의 힘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 다 살아있었다. 내 몸에서 하얀 기운이 줄기줄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즐겁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도 그대로였다. 나는 그제야 다시 제대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몬스터의 수가 갑작스럽게 증가하며 사방이 폭발로 뒤덮이고 지진이 발생한 듯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울컥하며 눈물이 온 얼굴을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머릿속이 댕하고 망치를 맞은 듯 웅웅거렸지만 나는 멀쩡하게 돌아온 목소리로 소리쳤다.
“구석으로 몰리지 마! 가운데로 가! 구석에 가지 마! 다들 붙잡고 균형 유지해!”
벅차오르는 감정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아냈다. 나는 애써 미간을 좁히며 눈앞의 상황을 눈에 담았다. 여기저기 몬스터들의 피로 사방이 온통 더럽게 도배되어 있었다. 이전의 아늑하고 평안한 분위기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이석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뭐야, 이 징그러운 것들은!”
패닉에 빠진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멍이 더 커지고 눈동자가 사라지며 팔이 튀어나오는 시점이 바로 이다음이었다. 나는 강하게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손에 핏줄이 우둘투둘 올라왔다.
“우리 가족 좀 꽉 잡아줘!”
“무슨 일, 이석아!”
“형!”
“태경이 형! 방패 최대한 크게!”
“네!”
“다들 죽지 마. 제발.”
나는 온 힘을 다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몸이 가벼워지고 조금 더 빨라졌다. 몸이 변형을 마쳤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바닥이 작게 파이며 돌조각이 날렸다.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이번엔 아니야. 눈동자가 사라진 구멍에서 거대하고 시커먼 팔이 하나 튀어나왔다.
“순백의 버서커.”
나는 영웅의 기운을 두르고 마력을 방출하면서 그 팔을 막아섰다. 거대한 굉음이 들리면서 먼지가 가득히 날렸다. 폭발에 휩쓸려 근처에 있던 몬스터들이 산산조각나며 터졌다.
콰아아아앙! 쿠웅!
실루엣이 뭉개지면서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결과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쪽 벽면이 사라지면서 뭉게구름이 떠다니던 하늘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해는 훨씬 적었다. 아직 버티고 선 벽이 존재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먼지구름이 걷혔다. 태경이 방패로 보호하던 주변만이 그럭저럭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파트는 충격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했다. 서서히 아파트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도망가!”
“하지만 너는!”
“이석 씨를 두고 그럴 수는!”
“방해하지 말고 가! 당장 나가!”
나는 피를 토해내면서도 거대한 팔을 막아내고 있었다. 팔이 잘못된 것 같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는 상태였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나는 가까스로 팔의 방향을 비튼 것이 전부였다. 나는 악에 받쳐 짧은 욕설을 내질렀다.
“젠장, 젠장. 젠장!”
팔이 다시 구멍 속으로 들어가더니 눈동자가 다시 나타났다. 일행들이 내 모습을 보더니 이를 악물고 내 가족들을 챙겨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몬스터들로 인해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상진아. 우리 가족 잘 부탁해.”
상진이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고 하다가 내 말 한마디에 거칠게 뒤돌아섰다.
“죽지 마. 약속했잖아, 우리.”
“너도 약속했잖아, 안 죽기로. 어서 가!”
흥미롭게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여전했다. 눈동자에도 상처를 낼 수 있을까. 녀석이 구멍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거라면 내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걸까. 우리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저 녀석을 처리해야만 했다. 이를 악물고 빨개진 눈으로 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살기가 가득 담긴 상태였다. 죽인다. 내 마음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조명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눈동자에 집중된 것만 같았다.
후우. 후우.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는 낮게 가라앉은 얼굴로 녀석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내가 살아남는 것보다 남을 지키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나는 생존의 원리를 이제야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상황이 종합적으로 나에게 왜 계속해서 강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다. 나는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을 떠올렸다.
‘우리가 도와줄게.’
끔찍한 고통이 몸에 스며들고 나서 들리던 목소리.
‘너만이 할 수 있어. 층을 올라 강해져야 해. 우리가 살던 세계를 지켜!’
나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너였어. 이 좆같은 세계가 만들어진 이유.”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렇지?”
녀석이 내 말을 알아듣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었다. 대답은 저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녀석을 죽일 것이다. 내가 서 있던 곳의 바닥이 무너졌다. 가뿐하게 아직 멀쩡한 바닥을 밟고 다시 섰다. 그렇게 잠시 시선이 살짝 돌아간 사이에 눈동자가 다시 사라지고 팔이 다시금 튀어나왔다.
쐐애액!
거대한 손이 떨어져 내리면서 나에게 가까워졌다. 하도 거대해서 손을 피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많이 움직여야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손을 피하면서도 마력을 모아 그 손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앙!
손이 살짝 비켜나가 그대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구구구구구구.
녀석의 손이 바닥을 내리찍고도 한참을 내려가 멈췄다. 아직 일행들이 아파트를 무사히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뿌옇게 올라오는 먼지 사이로 보이는 손을 향해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손이 다시 위로 빠르게 올라오면서 나를 공격해왔다. 스치듯 맞은 공격에 나는 아파트에서 튕겨 나가 옆에 있는 아파트를 뚫고 떨어졌다.
쉬이이익!
쩌엉!
콰아앙!
다시금 나에게 날아오는 손을 막아내며 또다시 나는 벽을 뚫고 밖을 날았다. 그런 나를 따라서 팔이 다시금 휘둘러지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마력을 방출하며 내가 날아가는 방향을 아래로 바꿨다. 거대한 손이 아슬아슬하게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내 눈에 아파트 창문 안으로 작은 꼬마 아이가 들어왔다.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아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손이 그 아이가 있는 아파트 쪽을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제기랄!”
머릿속에서 마력을 방출하는 것을 응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 뒤섞여서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발 쪽에 마력을 방출하면서 허공답보를 하듯 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아이를 껴안자마자 등 뒤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일면서 나는 다시 하늘을 날았다. 내게 안긴 아이가 내 몸에서 느껴지는 충격을 같이 느끼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무너져 내리다가 번뜩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구하지 말고 저 녀석을 처리할 기회를 노렸어야 해.”
“뭐?”
“세계를 지키려면 강해져. 그게 뭐든.”
아이의 눈이 스르륵 감기며 노란 구슬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구슬은 다시 나에게 흡수되었다. 나는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비틀어진 웃음이 한쪽 입가에 살포시 걸렸다. 이상하게 계속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감당해야 되는 건데?”
새하얀 기운이 내 몸을 완벽하게 감쌌다.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 눈 돌리지 말고 끝까지 나만 봐.
녀석을 죽여야겠다는 분노는 그대로였으나 점차 의식이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앞이 흐려지면서 어느 순간 동공이 탁 하고 풀렸다. 꼭두각시 인형의 관절이 움직이듯이 몸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나는 분명히 앞을 보고 있고 상황이 어떤지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내 몸은 내가 아니었다. 몇 번 몸을 움직이던 내 의식을 밀어내고 내 몸에 자리 잡은 그것이 내 얼굴 근육을 움직여 씨익 웃었다. 심지어는 입을 열어 내 목소리까지 빌렸다.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냐고? 전부지. 저 녀석을 죽일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 목소리를 듣고 어두운 곳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있는 내가 소리 질렀다.
‘내가 왜? 너 누구야?’
“이유는 없어. 네가 칭호를 얻었잖아. 그럼 책임을 져야지.”
나는 어이가 없다 못해 미칠 노릇이었다. 제멋대로 부여된 칭호를 가지고 책임을 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악에 받친 어마한 고동 소리가 무의식에 울려 퍼졌다.
‘그런 거 원한 적도 없었어! 마음대로 칭호를 부여한 건 이 세계라고!’
“원한 적 없었어도 가지게 되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 세계를 만든 일부분은 네 가족의 영혼인데 그대로 원망만 하고 화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그대로 혀가 굳었다. 도대체 저 녀석이 말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 세계를 만든 게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영혼들이라는 거야.”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게 내 가족이었다는 말이야?’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차마 움켜쥘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아니. 목숨을 잃은 영혼들이라니까? 나는 그 모든 영혼이 합쳐진 결과물일 뿐이야. 네 가족이면서 또 그렇지 않은 애매한 존재라고 할까.”
내 몸을 차지한 것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 나는 멍청하게 그 목소리에게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너 혼자만 피해자인 게 아니야. 너도, 네 가족도, 네 친구들도 우리도 모두가 피해자야. 심지어 미래의 지구인들도 전부. 봤잖아? 예지안에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나는 내 의식이 가라앉아있는 곳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분노하는 것도 몬스터들에게 분노하는 것도 지쳤다. 더 이상 버티고 싶지 않았다.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가만히 쉬고 싶었다. 더 이상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죽이면 죽일수록 내 영혼이 생기를 잃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상진이와 일행들을 보면서 버티고 또 버텼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눈을 감고 자리에 눕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쿠아아아앙!-
그때 내 몸이 멋대로 움직이며 나를 향해서 날아오는 커다란 손을 피했다. 심지어 엄청난 속도로 반격까지 가했다. 도무지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손의 비늘이 벗겨지며 피가 솟구쳤다. 구멍 안에서 녀석의 성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쿠어어어! 캬아악!”
몬스터의 손이 도로 안으로 들어가고 구멍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녀석이 구멍의 크기를 키우려는지 양손이 이리저리 튀어나와 구멍의 외각을 마구 벌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도 나는 애원했다. 이미 지쳤다. 지치고 또 지쳐서 이미 만신창이였다.
‘알아. 모두가 피해자라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나 더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아. 제발, 제발 나 좀 내버려둬. 제발.’
“네가 저 녀석을 죽여야 해. 이 힘을 받은 이상 너밖에 없어.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영웅이 되어보는 것도 좋잖아?”
그렇게 말해도 나는 전혀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힘들고 지쳐서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힘이 빠져 잔뜩 시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하지 않겠다면? 아니, 할 수 없다면?’
“너 멍청하지 않잖아. 지금까지 네 동료들을 살려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조금 멍청했던 것도 같고.”
입에 딱풀을 칠한 듯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아무런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일행들이 죽지 않았던 게 내가 영웅의 힘을 받아서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영웅의 힘을 받지 않으면 일행들을 죽이겠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내게 협박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이게 내 가족의 목소리가 속해 있는 것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넘어오는 울음을 참느라 목이 따끔거렸다.
“협박하는 게 아니야. 우리는 네가 무너질까 봐 그들의 죽음을 막은 것뿐이야. 물론 모두를 살릴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네가 그렇게 오해하면 우리도 마음이 아파. 아니, 영혼이 아픈 건가?”
자신을 영혼들이 모여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녀석이 턱에 손을 얹고 고민하듯 갸웃거렸다. 겉가죽이 터져나가 질척한 피로 뒤덮인 손에서 턱으로 피가 옮겨붙었다. 기분 나쁜 감촉이 턱에 미끌거리며 느껴졌다. 그때 몬스터의 비명 소리가 딱 멈추더니 커다란 손이 갑자기 팍 튀어나왔다.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몬스터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와 그 손이 스치는 곳마다 땅이 터져나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밖은 그렇게 계속해서 시끄러운 소리를 만들어냈고 복잡한 내 속도 만만치 않게 시끄러웠다. 눈을 꽈악 감고 시끄러운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애를 썼다. 문제는 내가 왜 시끄러운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영웅이 되면 뭐가 좋은 거야? 꼭 내가 세계를 지켜야 하는 거야?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는데. 더 이상의 고통 없이 그저 상처받지 않고 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상한 세계에 떨어지게 되고 이곳에서 영웅이 되어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모든 힘이 너에게 흡수되었으니 네 일행은 네가 지켜야 해. 이것만으로도 영웅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쉽게 할 수 있지 않겠어? 듣기에는 멋있잖아.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 사람들에게 존경도 많이 받게 될 거야. 물론 질시도 많이 받겠지만 그 정도는 영웅이 감내해야 할 몫 아니겠어?”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 참으로 듣기 좋은 허울이었다.
“아니, 듣기 좋은 허울이라니? 너는 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거라고.”
나는 영웅이 될만한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든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조차도 지친 상황이었다.
“이석아. 네가 영웅이 되지 않겠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야 해.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둘러야 하지. 게다가 그 영웅은 너만큼의 힘을 얻지는 못할 거야. 우리의 힘이 약해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네가 영웅의 특성을 포기하겠다면 너와 네 일행들은 앞으로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를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과연 너는 이 힘이 없어도 이곳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일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해봐. 이석이 너 이곳에서 살아남으면서 이 힘의 덕을 본 적 없어? 이 힘 덕에 네가 남들보다도 훨씬 강해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내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영웅이 되어야만 했다. 거대한 몬스터의 손이 내 몸 위를 덮쳤다.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순식간에 시야가 전부 어두워졌다.
“이것 봐. 네가 힘을 기르면 이렇게 강한 놈도 상대할 수 있어. 일행들을 구해야지. 안 그래?”
‘너는, 왜 네가 세상을 구하지 않는 건데?’
“영혼의 힘은 그 정도밖에 안 돼. 우리도 참 슬퍼. 저 몬스터를 직접 죽일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랬겠지. 우리만큼 저 녀석을 쳐 죽이고 싶은 사람도 없을 거야. 지금은 잠시 네 몸을 빌려서 힘을 내고 있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 네가 길을 정하는 순간, 이 던전은 완료될 거야. 아직은 네 몸이 저 녀석을 견디지 못할 테니까. 우리의 도움도 여기까지고. 네 성장을 돕느라 힘을 많이 쏟았거든.”
그 말과 동시에 몬스터의 손을 받치고 있는 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거대한 손을 버티고 있던 내 양손에 하얀 영웅의 힘이 퍼졌다. 그리고 환한 빛을 발하며 폭발이 일어나 몬스터의 거대한 손 가운데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 속에서 녀석의 비명 소리가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아까와는 다르게 지금은 고통에 울부짖는 것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이런 놈들에게서 내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영웅이 아니라 괴물이라도 되어야 했다.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 나는 타의에 의해 영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럴 줄 알았어. 넌 옳은 선택을 한 거야.”
과연 정말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지금의 선택을 나중에 가서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 이 던전에 손을 넣고 있는 저놈이 마지막 층의 보스야. 이석아. 우리는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반드시 저놈을 죽여. 그리고 세상을 구해. 우리 같은 피해자를 더 이상 만들지 말아줘.”
지독하게도 세상은 나에게 잔인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나에게는 잃을 것이 남아있었다. 그것 때문이라도 나는 계속해서 일어나 싸워야만 했다.
- 3권에서 계속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 3
[목차]
〈3권〉
13. 유레이가 생긴 이유
14. 다시 시작된 생존 시험과 서하의 실종
15. 진정한 유레이 41층
16. 다시 찾은 서하
17. 유레이 46층 보스 몬스터
에필로그
13. 유레이가 생긴 이유
그 후로는 무기력하게 앉아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만 바라보았다. 몸이 제멋대로 미친 듯이 움직였다. 어찌나 빠른지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이는 탓에 귀에는 바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또 몬스터의 손과 부딪히면서 나는 그 커다란 굉음에 고막이 찢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풍선이 터져나가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몬스터와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주변의 땅이나 건물까지도 같이 파괴되었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마구잡이로 형체를 잃고서 부서지는 것이다.
철벅, 주르륵-
핏물이 흘렀다. 연약한 인간의 살결은 거친 바람의 고동을 이기지 못하고 잔뜩 터져나갔다. 넘쳐나는 힘을 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강해지려면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잡고 던전을 돌고 층을 올라야 하는 것일까. 내가 나아갈 길이 절대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너에게 내가 끔찍한 존재인 것 같겠지만 누구보다도 너를 위하는 게 우리라는 걸 잊지 마. 우리도 너를 사랑하고 있어.”
“쿠아하아아아!”
공격을 주고받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검이 몬스터의 손을 베어냈다. 거친 울음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손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에 놀란 몬스터가 구멍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고 그 순간부터 서서히 구멍이 작아졌다. 녀석이 포기하지 못했는지 구멍으로 다시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구멍이 완전히 닫혔다.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던전을 완료해 보상이 주어집니다.]
[던전 클리어 성과를 확인합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보상의 등급이 올라갑니다.]
“이석아!”
“이석 씨!”
“형!”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쪽으로 오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갑자기 투명한 막이 쳐지는 바람에!”
영혼이 입을 열었다.
“잊지 마. 영웅이 되어서 세상을 구해.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해내.”
그리고 급격하게 심연으로 가라앉아있었던 내 의식이 끌어 올려졌다. 어지러움에 구역질을 하며 잔뜩 터져나간 팔을 늘어뜨리고 몸을 휘청거렸다.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며 고통이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내 앞에 와있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잔뜩 풀어진 동공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행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준 내 가족이 울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들은 정말 나를 걱정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들은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데 상진이 자신의 가슴에 내 얼굴을 묻으며 끌어안아 왔다. 순간 설움이 폭발해 소리를 내며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그렇게 울었다. 상진이 말없이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걱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내 옆에서 잔뜩 들려왔다.
“울지 마. 울지 마, 이석아. 이제 끝났어. 미안해. 내가 이렇게 약해서 미안해.”
걱정이 잔뜩 밴 목소리로 상진이 토닥토닥 내 등을 두드리는데 그것조차도 너무 서러워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가 겪은 고통과 설움을 눈물로 쏟아내고 싶었다. 강하게 상진이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직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엉망이 된 팔에서 따끔한 고통이 올라왔다. 더욱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 왜, 왜 울어요. 많이 아파요? 아니면, 뭐가 잘못됐어요? 아프면 내가 치료해줄게요!”
서하가 조심스럽게 잔뜩 터지고 부러진 내 손을 건드렸다가 지레 놀라 손을 뒤로 잡아빼었다.
“아프죠? 아팠구나. 형. 세상에 손이 죄다….”
“이석 씨, 죄송합니다. 저희가 지켜줬어야 하는 건데.”
서하가 내 손을 잡고 치료를 시작하고 태경은 내 뒤에서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혜진도 내가 걱정이 되었던지 옆에서 알짱거리다가 서하가 치료를 마치자 뒤로 빠져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하의 스킬로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기 전에 상처들이 치료되었다. 통증이 가시고 마비된 것처럼 무뎌졌던 감각도 조금씩 돌아왔다. 혜진은 언제나와 같이 뒤에서 흐뭇한 표정을 한 채였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울음이 멈추지는 않지만 웃음도 덩달아 튀어나오는 이상한 상태였다.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기뻤다. 안도감도 찾아왔다. 뒤늦게 지연이 내 가족을 챙기며 함께 앞에 도착했다. 지연이 엉엉 우는 나를 보고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멈춰 섰다.
“이석아! 괜찮아? 이게 뭐야! 어? 이게 뭐냐고!”
누나가 온통 피로 젖은 나를 보며 소리 지르고 오열했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온통 뒤집어진 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자 이리저리 작게 생채기가 생기며 피가 고였다. 양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나처럼 엉엉 울었다. 누가 가족 아니랄까 봐 우는 모습이 나와 판박이였다. 엄마와 아빠도 이리저리 내 몸을 살피며 둘러보더니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이놈의 자식아! 네 몸부터 잘 챙겨야지! 우리만 그렇게 보내고 혼자 남으면 이 부모 마음이 어떻겠어!”
“엄마 말이 맞다! 차라리 나를 죽이지 왜 너 혼자 남아! 이 나쁜 놈의 자식! 당장 이리 오지 못해!”
“누나가 나보고 층을 오르라고 했잖아! 아빠가 나보고 구슬을 쓰라고! 나는! 나는 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 고통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더욱더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울음을 멈추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서러운 물을 토해냈다.
“미안해. 이석아.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이석아. 너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어.”
“흐, 진짜 우리 엄마랑 아빠 맞아? 진짜 우리 누나 맞지? 가짜 아니지? 그렇지?”
울면서 말하느라 잔뜩 끊기고 뭉개지는 발음 때문에 일행들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바로 앞에 있는 상진이와 내 가족만큼은 내가 한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그러나 우리 대화의 내용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럼! 진짜지, 가짜가 어딨어!”
누나가 울면서도 화를 냈고 엄마와 아빠는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계셨다. 나는 상진이의 품에서 벗어나 엄마와 아빠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포옥 품에 안겼다.
“나, 나. 엄마가 담근 오이소박이도 먹고 싶고 아빠가 해준 된장찌개도 먹고 싶었는데. 근데 못 먹었어요.”
“그래, 미안해. 엄마가 우리 이석이 오이소박이 담가줬어야 했는데. 엄마가 미안해.”
“야! 그래도 누나가 김치찌개 해줬잖아!”
“응, 너무 맛있었어. 진짜 너무 맛있어서 나 먹으면서 정말 행복했어.”
“짜식. 이제 와 그렇게 말하면 뭐해. 그땐 나 요리 못한다고 뭐라고 했으면서.”
“응. 미안해. 그래서 너무 미안해. 사랑한다는 말도 별로 못했고 감사하단 말도 많이 못 했는데, 그런데, 이제, 흐으, 이제 끝이에요? 정말 이게 마지막이에요?”
“우리는 계속 이석이 너와 함께할 거야. 이석아. 마지막이 아니야.”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더욱 힘을 주어 엄마와 아빠를 껴안았다. 그런 내 뒤로 누나가 두 팔을 벌려 안아왔다. 온 가족이 똘똘 뭉쳐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일행들이 그런 나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던전 완료 보상이 지급됩니다.]
[기본보상으로 능력치 100개, 최상급 회복포션이 지급되며 성장 한계치가 2 오릅니다.]
[특별보상으로 능력치 50개와 특별한 무기 상자가 지급됩니다.]
[10초 후 던전에서 벗어나 유레이로 돌아갑니다.]
“엄마. 아빠, 누나. 사랑해요. 내가 정말 사랑해요.”
“우리도 마찬가지란다.”
엄마와 아빠, 누나의 몸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노란 구슬이 되어 내게로 날아왔다. 모두 놀라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지만 나는 침착하게 그 구슬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구슬이 내 손 위로 올라왔다.
삐용삐용-
“어?”
손바닥 위에서 노란 구슬이 복슬복슬한 원형 모양의 생명으로 바뀌었다. 엄지손가락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손바닥 위에서 방방 뛰던 그것이 내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올라와 앉더니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제야 눈물을 멈추고 입에 슬쩍 웃음을 띨 수 있었다.
[유레이로 이동됩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숲에서 눈을 떴다. 분명 자기 전까지 마감일이 코앞까지 닥친 논문을 정리 중이었는데 숲속에서 눈을 뜨자 문득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 뭐야. 집에 어떻게 가.”
두려움을 애써 감추기 위해서 입을 열었지만, 등 뒤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예민해진 귓가를 타고 울렸다. 화들짝 놀라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지만, 시야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들리는 소리도 매미가 우는 소리밖에 없었다.
맴, 맴-
제자리에 서서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원래의 시야를 찾은 나는 불안함에 손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하고 애꿎은 팔뚝만 연신 쓸어댔다. 새벽 특유의 눅눅하고 서늘한 냄새가 코에 들어왔다. 게다가 반팔을 입은 탓에 숲속의 서늘한 온도가 더욱 선명하게 와 닿았다.
“상진아!”
내 옆에 같이 있던 상진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는 잔뜩 굳어서 연신 눈동자만 도로록 굴려댈 뿐이었다. 바람이 불어와 긴 앞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순간 지금의 내 처지를 완벽하게 이해한 나는 몸에는 공포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상진아? 태경이 형! 서하야! 어디 있어!”
애타게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누구야. 누구지?”
나는 연신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애타게 부르던 사람 중 상진이를 빼고는 아무도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잊은 기분에 찜찜함이 느껴졌다. 몸을 앞뒤로 흔들며 고민하던 나는 손톱까지 딱딱 깨물며 인상을 썼다. 번뜩이며 어떤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귓가에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잡혔다.
“누구야!”
재빠르게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며 소리쳤으나 역시 들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떠오르려던 기억이 다시 지워진 것이 느껴지자 신경질이 났다. 나는 다소 거친 걸음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했다.
“빵 부스러기?”
동화에서나 봤을 법한 상황이었다. 빵부스러기가 숲속에 쪼르르 떨어져 있던 것이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설마, 아닐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그 빵 조각들을 따라 더욱더 깊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은 굉장히 어두웠기 때문에 발아래에 걸리는 돌조각이나 나무뿌리를 몹시 조심해서 이동해야 했다. 쥐같이 작은 생물이나 벌레들도 많아서 중간중간 팔과 다리를 털어내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빵 부스러기만큼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숲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강하게 올라오는 불안감에 조급함과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팔다리에 달라붙는 징그러운 벌레들도 그것에 한 몫을 더했다. 나는 벌레를 쫓아내기 위해 팔을 털면서 다시 발을 돌렸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는데 그때 커다란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 옆에는 작은 표지판도 함께였다. 의심해볼 여지도 없이 나는 서둘러 걸음을 빨리했다. 표지판 앞에 우뚝 선 나는 표지판을 읽어내렸다.
“주의하세요. 뭘 주의하라는 거야?”
혹시 몰라 주변을 살피던 나는 고개를 동굴의 입구로 돌렸다. 바닥에 흩어진 빵 부스러기들이 끝을 모르고 동굴 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다시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서 고민하던 나는 결정을 내린 후 걸음을 옮겼다. 몹시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빵 부스러기를 따라 동굴 안으로 계속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결정을 내렸지만, 막상 동굴 앞에 서자 다시 강한 고민이 들었다.
“뭐, 별거 있겠어?”
나는 천천히 심호흡한 뒤 뚜벅뚜벅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이 워낙 조용한 탓에 발을 옮기는 소리만 커다랗게 메아리치며 울렸다. 한참을 그렇게 동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는데 일순 주변의 배경이 바뀌면서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묘한 상황에 눈을 돌릴 틈도 없이 나는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있었다.
“이게, 뭐야?”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부모님과 누나를 잃었던 장소였다.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얼굴과 머리를 쓸어내리며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분명 사방이 막힌 동굴이었는데 어느덧 고등학교 때 살던 아파트로 돌아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제자리를 빙빙 돌던 행동을 멈추자 사방이 빨갛게 물들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아파트는 사방이 불바다였다. 불을 피해서 아파트 아래로 뛰어내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으며 그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쿠웅.
그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주위에 사방을 통제하는 경찰과 소방관들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이 달랐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있는 힘껏 뛰었다.
그렇게 내가 살던 아파트 동으로 들어온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양손에 사람들을 들고 뜯어먹고 있는 괴물이 있었다. 나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가 옆에 있는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8층, 8층은!”
간절한 마음으로 2층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구역질이 치밀려는 것을 참으며 3층으로 내달렸다. 3층, 3층도 아비규환이었다.
“살려줘!”
“아악!”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가지 마! 가지 마!”
괴물에게 잡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끔찍한 모습에 절로 숨이 막혔다. 간절하게 뻗어지는 손끝에서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덜덜 다리가 떨려왔다. 억지로 그들을 외면하며 나는 4층으로 올랐다. 4층에 도착했다. 커다란 전갈 모양을 한 괴물에게 두 동강이 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끔찍한 광경에 비명을 내뱉지도 못할 정도로 놀랐지만 나는 눈을 감고 그 자리를 외면했다. 그렇게 5층으로 내달렸다.
‘잘했어!’
귓가에 알 수 없는 소리가 스쳤다.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코에서는 콧물이 잔뜩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가에서 계속해서 짠맛이 느껴졌다. 쉬지 않고 계단을 뛰어서 오르자 점점 체력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는 엉엉 서러운 눈물을 터트렸다. 그렇게 서럽게 울면서도 6층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너는 강해져야만 해.’
계속해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것이 이미 경험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목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7층에 도착했다. 나는 드디어 괴물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내 몸의 서너 배는 될듯한 덩치를 가진 괴물이었다. 귓가에 다시 소리가 울렸다.
‘네가 살던 곳이 이렇게 돼버렸으면 좋겠어? 강해져야지. 그렇지 않아?’
나는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잔뜩 부서지고 불이 붙어 엉망인 계단에 쇠파이프 같은 것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곧바로 그것을 움켜쥐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괴물을 향해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녀석의 가죽이 터져나가며 끈적한 파란 액체가 흘렀다.
“으아아아아!”
마구잡이식 공격에도 괴물은 크기에 비해서 시시할 정도로 쉽게 죽어 나갔다.
‘이제 네 일행은 네가 지켜야 해.’
“내가? 내가 지켜야 해? 어떻게?”
힘이 풀린 나는 두 손과 다리를 이용해 기다시피 해서 8층으로 올랐다.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과 상진, 태경과 서하, 혜진 일행, 백사 길드의 사람들이 보였다. 몸에서 완벽하게 힘이 빠져나가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태경과 서하를 비롯한 서호, 백사 길드원들이 떠올랐다. 이상한 세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주저앉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그들이 자기들 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엄마와 아빠는 양팔을 가득 벌리며 나를 보았고 그 옆에 서 있는 누나는 입술을 쭉 빼 뽀뽀하듯 내밀고 나를 보며 눈웃음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조금 전까지 겪은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양 밝게 웃었다.
‘영웅이 돼. 네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
“그래. 내가 지킬게. 내가 지켜야 해. 지켜줄 거야.”
‘그래, 넌 옳은 선택을 한 거야.’
“옳은 선택?”
‘세상을 구해.’
“허억!”
‘이석아. 네 사람들을, 세상을 구해.’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사방이 꽉 막힌 동굴 속이었다.
“아, 머리야…. 방금 뭐였지?”
온몸이 쑤셨다. 나는 간신히 몸에 힘을 주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굉장히 식욕을 자극하는 고소하고 향긋한 향이 눈앞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향을 따라 고개를 들자 과자로 지어진 듯한 아주 예쁜 집이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과자 집?”
홀린 듯 걸음을 옮겨 과자로 지어진 집 앞에 섰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코로 느껴졌다. 꿀꺽 목울대를 울리며 군침을 삼켰다. 식욕이 돋았다. 그 순간 벌컥 하고 문이 열리며 사람이 하나 등장했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내 몸을 가리키니 그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네. 이석 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나온 아름다운 남자가 내 주변을 사르르 돌더니 다시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들어오세요.”
나는 그 아름다운 남자를 따라 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자, 여기 앉아서 대화를 좀 나눌까요?”
“대화요?”
“네. 그러려고 기다린 거니까요.”
아름다운 남자가 먼저 의자에 앉아서 내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촉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어색하게 자리에 앉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과자로 만들어진 바구니에 들어있는 쿠키를 한 아름 움켜쥐더니 내게 건네었다.
“아?”
얼떨결에 그 쿠키들을 잔뜩 받아든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입에 집어넣었다.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쿠키가 부드럽게 입안에서 부서졌다.
“맛있네요?”
“그렇죠?”
쿠키를 맛있게 집어 먹고 있는데 남자가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그런 그를 보자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곱게 휘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냈다.
“당연히 그래야죠. 내가 만든 거니까.”
그가 직접 만든 줄 몰랐던 나는 쿠키를 먹느라 볼록해진 볼을 하고 놀란 듯 말했다.
“직접 만드신 거구나. 정말 맛있어요.”
“응. 많이 먹어요.”
나는 아름다운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안을 가득 채우던 쿠키가 목구멍 안으로 꿀꺽 넘어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고요.”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요? 아니, 그, 어째서?”
남자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대꾸하다가 그의 표정을 본 나는 헛기침을 하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유가 있죠.”
“그러니까 그 이유가….”
“궁금해요?”
“네?”
“어떻게 할까. 그냥 알려주는 건 너무 시시하잖아.”
체리마냥 예쁜 남자의 입술에서 나온 말에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손도 잠시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가 움직이다가 가지런히 무릎 위로 되돌렸다. 날 기다렸다면서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까닭이 무엇일까.
“왜요? 황당해요?”
“…네.”
“하하하. 귀엽네요, 이석 씨는. 이래서 사람들이 이석 씨를 좋아하는 건가 봐.”
“누가 저를 좋아한다고요?”
“저요. 저랑 이석 씨의 소중한 사람들이? 이석 씨 인기 많은 거 스스로도 알잖아.”
남자가 말끝을 올리면서 나를 향해 달콤한 웃음을 뿌렸다. 잠시 그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던 나는 슬쩍 고개를 모로 돌렸다.
“왜. 이석 씨 눈에도 내가 예뻐 보여요?”
“네. 굉장히 미, 남이시네요.”
“방금 미인이라고 말하려고 한 거 아닌가요? 내가 왕년에 그런 얘기 많이 들었었죠.”
“그렇, 죠.”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죠. 왜 바꿔서 말해요. 이석 씨 진짜 귀여운 거 알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나는 떨떠름한 어투로 남자의 말에 호응했다. 남자가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배를 잡으며 허리를 수그렸다.
“하하하! 감사하다고 했어요? 귀여워서 좋겠다. 진짜.”
나는 남자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의자를 뒤로 반쯤 밀고 앉았다. 남자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더욱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남자는 한참을 더 웃고서야 허리를 펴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남자가 손에 쿠키를 들어 올리고 강하게 움켜쥐었다. 바스라져 버린 쿠키 안에 새빨간 장미가 빛을 내고 있었다.
“이석 씨가 귀여우니까 말해줄게요. 미안하기도 하고.”
“절 기다리신 이유요?”
“네. 제가 이석 씨를 기다린 이유 말이에요. 그게 이석 씨가 제게 궁금한 거였잖아요.”
“그렇죠.”
“흐음. 여기서는 정말 아무런 기억도 없나. 그렇게 힘들었어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손으로 턱을 괴면서 나와 눈을 맞춰왔다. 남들이 보면 남자가 나를 유혹하는 줄 알았을 정도로 그 포즈와 표정이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은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뭐가 힘들….”
“우리가 너무 이석 씨를 괴롭게 한 것 같아서 사과하고 싶어서요.”
“네?”
남자가 진한 웃음을 흘리면서 나를 더욱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순간 기억이 순식간에 강물이 범람하듯이 머릿속으로 짓쳐 들었다. 찌릿찌릿 뇌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번쩍 고개를 들고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도 영혼이었어?”
“어, 내가 기억을 되살려주자마자 바로 반말하는 거예요?”
“내가 굳이 말을 곱게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아쉽다. 좀 전의 이석 씨는 정말 귀여웠는데.”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우리도 이석 씨가 던전에서 겪은 일을 안타깝게 생각해요. 그 던전에서 이석 씨를 맡은 영혼은 꽤나 강경한 태도를 가진 영혼이어서 이석 씨를 전혀 배려하지 못했죠.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어요.”
“뭐?”
“그 영혼의 주인이 몬스터에게 아주 잔인하게 죽었거든요. 아마도 자세히 말하면 헛구역질을 할 테니 자세히 말하지는 않을게요.”
“그래서? 그렇게 잔인하게 죽었다면 지금 내게 한 짓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것이었는지 더욱 잘 알 텐데?”
“네. 그래서 사과를 하려고 잠든 이석 씨의 꿈에 나타난 거죠. 제가.”
“왜 일을 저지른 사람, 아니 영혼이 사과를 하지 않고 네가 하는 건데?”
“그 영혼이 저고 제가 그 영혼이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하나에요. 결코 떼어서 볼 수 없죠. 아시잖아요?”
“그럼 아까 동굴에서의 그 환상도 네가 만든 거야?”
“네. 조금이라도 이석 씨가 편하게 영웅이 될 수 있도록요.”
“하!”
나는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우습게도 남자는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어요. 이석 씨. 이석 씨가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요. 이석 씨가 현실로 돌아가 일행들과 평생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에요.”
나는 입을 앙다물고 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예쁜 미간에 주름이 살짝 지어진 상태로 올려다보는 모습이 안쓰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미안해요. 저희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단지 당신들이 살아갈 미래를 지키고 싶었어요.”
“그랬다면 나에게 이래서는 안 됐지.”
“네. 우리도 잘못을 인정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석 씨는 제일 처음 던전을 발견한 남자를 아시나요?”
“그건… 왜 묻는 건데?”
나는 머릿속으로 백두진을 떠올렸다.
“처음엔 그 사람으로 결정할까 우리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특히 이석 씨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더욱 많이 고민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좋은 스킬도 주고 좋은 아이템도 줬지만 영웅감은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살인마였죠.”
“그래서?”
“딜을 할까 해요.”
“뭐?”
“이석 씨의 일행들에게도 특성을 부여해드릴게요.”
* * *
“이석아!”
“이석 씨!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형! 흐어엉!”
나는 눈을 뜨자마자 내게로 달려드는 일행들 때문에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의 눈물에 또 한 번 놀랐다. 어안이 벙벙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자 그들 눈에 고이기 시작하는 눈물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왜 울어? 무슨 일이야?”
나는 몸 위에 덮여있는 나뭇잎으로 된 이불을 젖히고 상체를 벌떡 일으키다가 핑하고 도는 머리에 다시 뒤로 드러누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미열이 느껴졌다.
“허윽.”
그 모습을 보며 일행들이 더욱더 굵은 눈물을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 눈만 계속 깜빡였다. 나를 보며 복잡한 얼굴을 하는 일행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삐용, 삐용-
침대 구석에서 무언가가 통통 튀어 올라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생명체였다. 노란색의 둥그런 생명체를 바라보던 내 입가에 설핏 슬픔을 품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힘들었지?”
손바닥 위를 통통 뛰어다니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삐용 하고 우니까 이름 삐로 하자. 어때?”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삐는 손바닥을 벗어나 내가 누워있던 침대 위를 마구 굴러다녔다. 재롱을 부리는 모습을 보던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누나가 침대 위를 마구 굴러다니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한심하다는 듯 누나를 쳐다보면 두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들어 올리던 모습도 생각났다. 그것을 이르듯 엄마와 아빠에게 달려가면 누나가 뒤에서 베개를 던져왔었다.
‘야! 내가 뭘 했는데! 야! 어디 가는데! 이르지 마라? 어?!’
그렇게 과거 생각에 한참을 웃다가 나는 문득 주위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왜?”
소리를 참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양새를 보니 걱정을 많이 끼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들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름다운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이들이 자신처럼 불행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한 말이 거절하려던 내 마음을 움직였다.
‘일행들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굉장히 높아질 거예요. 칭호를 받으면 이석 씨만큼 강해질 테니까.’
나를 바라보는 내 사람들은 내가 끝까지 지켜야지. 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지.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술에 걸친 채 그들을 향해 물었다.
“많이 걱정했어? 나 이제 괜찮아. 나 얼마나 누워 있었지?”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일어나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열흘이 넘게 누워 있었습니다.”
“열흘이 넘게?”
“이석아. 난, 네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줄 알고….”
“형! 나는 또 나 때문에, 태경이 형 때처럼, 내가 미숙해서. 나 때문에 못 일어나는 줄 알고!”
“다들 미안해. 걱정 끼쳐서….”
서하가 눈물을 흩뿌리며 내게 달려와 안겼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잠깐 사이에 가슴팍이 축축해졌다.
“흐엉, 형 미워요. 미워요. 왜 이제 일어나요!”
“일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이석아.”
태경은 말없이 눈시울을 붉히고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었고 상진도 피곤한 얼굴을 애써 숨기며 붉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서하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주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임시거처가 지어져 있는 휴식층인 것 같았다.
“여기 몇 층이야?”
“30층.”
“뭐?”
“30층이야. 이석아.”
이석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람들이 벌써 30층까지 올라왔어?”
“이석아 우리가 던전을 깨고 나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어.”
“무슨 상황?”
“사람들의 성장 속도랑 층을 오르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15일마다 층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어요.”
“문제는 몬스터들도 강해지고 있어.”
“몬스터가 강해지다니?”
“말 그대로야. 몬스터들이 전보다 2배는 강해졌어. 우리도 너 잠든 동안 퀘스트를 얻어서 더 강해졌지만.”
“퀘스트?”
“잠들어 있는 영웅을 보호하라.”
셋의 시선이 내게로 닿아왔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나는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퀘스트를 깨고 특성을 얻었습니다.”
“아, 그.”
영혼 그 자식이 부여한 퀘스트임이 분명했다. 망할 놈. 나는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
“영웅의 수호 기사.”
“이제 형은 우리가 지켜줄게요!”
“이석아. 이제 우리도 강해졌어.”
“이석 씨 혼자서 모든 걸 떠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보고 웃는 이 얼굴들이 아마도 평생토록, 아니, 죽는 순간까지 가족의 얼굴과 함께 떠오를 것 같았다. 잠시 숨을 참고 그들을 보던 나는 슬쩍 미소지었다.
“그런데 혜진 씨랑 지연 씨는 어디에?”
“아, 길드원들이랑 사냥 갔어요. 형만큼, 아니 형보다 더 강해지려면 지금이 기회라면서. 그래서 우리도 형 잠들어 있을 때 번갈아 가면서 사냥 갔다 왔지롱. 이제 우리가 형보다 레벨이 더 높을걸요?”
서하가 씨익 개구진 웃음을 보였다. 태경과 상진도 내 양옆에 서서 부드럽게 내 어깨와 등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면서 서하를 놀렸다. 마음이 조금이지만 평안해졌다. 삐가 날아와 어깨 위에 살포시 앉았다.
* * *
[유레이 31층입니다.]
굉장한 열기가 끼쳐왔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바로 흐물흐물 바닥으로 녹아 내릴만한 열기였다. 저 멀리서 붉은 빛을 품은 돌덩어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31층의 몬스터인 모양이었다.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눈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시퍼런 불꽃을 뿜어내며 달려왔다. 양손에 있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 주먹처럼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녀석이 높이 점프하더니 우리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가뿐하게 몸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 녀석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고 녀석을 반으로 잘라버리기 위해 칼을 그대로 밑으로 그어내렸다.
카캉!-
단단한 녀석의 피부에 검이 살짝 막혔다. 던전 보상으로 받은 특별한 무기 상자에서 뽑아낸 검인데도 그랬다.
[질 좋은 명검]
[효과- 아주 드문 확률로 검에 찔린 생물체가 독에 중독된다.]
[능력치- 체력 +35, 근력+35, 마력 +35]
뜻대로 되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면서 나는 칼을 쥔 손에 더욱 강한 힘을 주었다. 그제야 매끄럽게 검이 내리그어지면서 녀석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 후에 나는 검을 다시 내 쪽으로 가져온 뒤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대로 녀석의 목에 검을 찔러넣었다. 그대로 목을 관통한 검 때문에 녀석의 목이 댕강하고 잘려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톡, 토로록-
녀석의 머리가 조금 묵직한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그대로 녀석이 죽은 줄 알고 시선을 뒤쪽으로 돌리는데 상진이 내 쪽으로 검을 던졌다. 무슨 일인지 몰라 두 눈을 살짝 크게 뜨는 순간 내 뒤에서 몬스터의 몸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쿠우웅!-
바닥에 잘게 먼지가 흩어지는 것까지 눈에 보였다.
“저 녀석 가슴 쪽에 있는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죽어. 놀랐잖아, 이석아.”
상진이 가까이 다가와 내가 괜찮은지 확인을 먼저 하고는 제가 던진 검을 회수했다. 태경도 빠르게 내게 다가와 걱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이석 씨, 조심하세요. 우리가 던전에 가기 전의 몬스터들이 아닙니다.”
서하만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 섞인 말을 던졌다.
“형. 감각 너무 잃어버린 거 아니에요? 그러나 큰일 나요!”
“응. 그런가 보다.”
나는 내 어깨 위를 방방 뛰며 나를 나무라는 듯한 삐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서하의 말에 대답했다. 서하가 그런 삐를 만져보고 싶은지 열심히 옆을 얼쩡대었으나 삐는 제 몸을 내어주지 않았다. 서하가 시무룩한 표정을 해 보였다.
“진짜 치사하다. 안 만져!”
“서하야. 공손하게 대해야지! 어디 삐한테 버릇없게!”
상진이 서하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태경도 그런 상진을 거들었다. 삐를 내 부모님과 누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서하야. 예의를 지켜.”
나는 그 모양을 보고 미소를 짓다가 몸을 흠칫 떨었다. 열흘이 넘도록 나무 침대 위에만 누워있던 탓인지, 아니면 부상 탓인지 아직 몸이 뻐근했다. 서하가 치료를 해줬지만 완벽하게 치료가 된 느낌이 아니었다. 순백의 버서커를 쓴 후유증일지도 몰랐다. 아직도 자근자근 잘게 부러지고 터져나갔던 부분들이 아파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가끔씩 놀라 몸을 움찔대었다.
또한 던전에서 민첩이 한계를 깨고 성장한 덕분에 몸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어째서 민첩에 한계치가 있었는지 알만했다. 한계를 벗어난 내 빠르기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쉬는 것 없이 층을 오르려고 했지만 내가 속도를 제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휴식층에서 30분 정도 적응 훈련을 가진 후에야 내가 원하는 대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며칠 간은 층을 계속 오르기보다는 쉴 때 휴식층에 내려오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영웅이 되기로 했지만 아직은 영웅이 되기를 주저하는 내 마음이 빠르게 층을 오르는 것을 거부하는 탓일지도 몰랐다.
생각에 빠져 대충 휘두르는 검이었지만 영웅의 기운을 두른 탓에 몬스터들은 빠르게 죽어 나갔다. 어느덧 레벨이 올라 상태창을 확인했다. 확실히 전보다 몬스터를 많이 잡지 않았는데도 레벨이 쉽게 올랐다.
[lv. 32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성장한계치+2]
[경험치: 59퍼센트]
[체력: 591(+40)]
[근력: 588(+38)]
[마력: 792(+35)]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2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
[특성: 민첩- 민첩이 2.3배 증가합니다.]
[특성: 독 내성- 15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최대)]
[point: 69(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몬스터를 잡고 얻는 포인트도 전보다 많이 늘어나 있었다.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토록 괴로운 시간을 버텨 힘겹게 깬 던전에서 얻은 포인트의 반을 너무 손쉽게 얻었다. 억울함에 강하게 움켜쥔 주먹에서 뿌드득 소리가 들렸다. 망할 영혼 놈.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데.
성장 한계치는 어디에 써먹는 건지도 모르겠고, 엄청난 고통을 겪고 각성을 한 탓인지 능력치가 많이 올라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지금 얻는 포인트 수에 비하면 그 고통을 겪고 얻은 능력치가 너무도 화딱지가 나게 적었다. 스킬들을 조금 더 쉽고 빠르게 사용하게 되긴 했지만 내가 겪어야 했던 몸의 고통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 멀쑥한 얼굴을 들이밀며 웃던 것이 떠오르자 더더욱 울분이 솟구쳤다. 나는 그 울분을 내 눈앞의 몬스터들에게 토해냈다.
쿠웅, 쿠웅-
몬스터들이 하나둘 쌓여 작은 언덕이 될 때까지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나를 향해 내리쳐지는 화염에 쌓인 주먹을 피해 나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가오는 녀석의 주먹에 나는 림보를 하듯 허리를 젖히고 공격을 피해냈다. 근력이 붙은 탓인지 허리에 무리가 느껴지진 않았다. 허리를 다시 바르게 세운 나는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투둑. 몬스터의 몸이 삼등분이 되어 바닥에 떨어져 잘게 부서졌다.
치이익-
강하게 타오르던 불이 땅에 닿아 허무하리만치 쉽게 꺼졌다. 가만히 그 모양새를 지켜보고 있는 내 뒤로 태경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습니까? 몬스터가 잔뜩인데 멍하니 서 있다가 다칩니다.”
“아, 형. 저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여서 말을 건 겁니다.”
“제가요? 괜찮은데요. 형, 저 진짜 괜찮아요.”
“네.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입을 일자로 다물고 약간 굳은 표정을 지은 태경이 다시 몬스터들의 한가운데로 사라졌다. 잠시 그런 태경을 지켜보다가 상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걱정 어린 상진의 표정에 나는 다시 강하게 쥔 검을 들어 올렸다. 난 괜찮은데 다들 내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내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심기가 더 안 좋아 보이는 태경이 신경 쓰였다. 괜찮아 보여야 하는데. 괜찮아야 하는데 계속해서 걱정을 하는 일행들이 눈에 들어와 마음이 무거웠다.
눈앞에 거슬리는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한 후에 나는 서하를 바라보았다. 전보다 더 능숙한 몸놀림이었다. 공격도 전보다 확실히 강해진 것이 눈에 확 띄었다. 그 옆에서는 상진이 염력으로 검을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전보다 염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검의 수가 늘어서 8개나 되는 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상진은 손에 든 검과 염력으로 움직이는 검들을 굉장히 잘 활용해 놈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스킬을 사용하는 능력과 감각이 말도 못 하게 좋아져 있었다. 너무나도 손쉽게 녀석들을 처리하고 있었고 그 속도 또한 서하보다도 2배는 빨랐다. 그 옆으로 검은 안개를 흩뿌리며 움직이고 있는 태경도 마찬가지였다. 전보다 더 능수능란하게 검은 연기를 움직이며 재빠른 몸놀림을 보이고 있었다. 상진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성장을 한 것이 보였다.
‘이석 씨 혼자서 모든 걸 떠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문득 태경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옆에서 기쁘고 뿌듯하다는 듯이 해맑은 얼굴을 한 상진과 서하의 얼굴도 떠올랐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그들에게 나와 같이 무거운 짐을 맡기기가 쉽지 않았다.
“이석 씨!”
멀리서 뛰어오던 혜진이 그대로 내 품속으로 그대로 안겼다. 지연도 함께였다. 삐가 어깨에서 급하게 내 머리 위로 올라가 불만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삐이!”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는 없죠?”
오랜만에 보는 이환과 혜연이 그런 혜진과 지연을 바라보며 내 앞에서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철없는 가족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아니, 저 둘은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갈수록 애가 되어 간다니까?”
“카리스마가 다 사라졌어.”
“카리스마는 다 사라졌어도 나 한 성질 하는 건 알지?”
혜진이 으르렁거리면서 이환에게 경고했다. 이환이 그런 혜진의 뒤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내 품에 안긴 그 둘에 잔뜩 당황해 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공을 휘저으며 방황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마음을 조금 진정한 내가 손을 혜진과 지연의 등에 올리려는데 상진과 태경이 그런 내 양손을 하나씩 잡아버렸다.
“어, 어?”
그렇게 나는 혜진과 지연에게 안긴 꼴로 양팔은 항복하는 자세를 취한 것처럼 어정쩡하게 들려서 우스운 꼴이 되었다. 혜진과 지연이 안겨있는 탓에 그런 상진과 태경의 손을 거칠게 뿌리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 혜진과 지연이 내 팔이나 손에 맞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런 우리를 보던 이환과 혜연이 푸하하 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짜증이 난 나와는 다르게 언제나와 같이 재밌는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어쩜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아직도 그 삼각관계 진행 중인 거예요?”
혜연의 말에 이환이 불쑥 질문해왔다. 말문이 막힌 내가 침을 잘못 삼키는 바람에 사레가 들렸다. 목이 따끔따끔하니 얼얼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환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지만 다 들렸다.
“아직 진행 중이구나.”
“아니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한참 됐죠. 여기서 일주일이 얼마나 긴 시간인데요….”
혜연이 애써 뒤로 넘긴 말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와 같은 말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얼굴에 씁쓸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징하다. 징해. 이쯤 목숨 걸고 서로 지키고 지켜주고 있으면 결실을 맺을 때도 되지 않았나?”
안겨있던 혜진이 주제를 돌리기 위해서 장난처럼 말을 꺼냈다. 지지 않고 지연도 연달아 입을 열었다.
“삼각관계잖아. 여기서 한 명 선택했다가는 어? 어떻게 되겠어. 그대로 이 파티는 와해되는 거야.”
“그건 그렇지. 음. 그럼 둘 다 선택하면 되잖아?”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판에 확 질러요. 이석 씨! 둘 다 잡아먹어 버려! 나는 이석 씨 응원해요! 아니, 잠깐 셋인가? 아니다, 넷이잖아?”
이환이 마지막 대답에 놀라 혜연의 등짝을 짝하고 때리면서 화제를 돌렸다. 어색하게 웃는 모습에서 그가 혜연에 대답에 얼마나 놀랐는지가 보였다. 슬슬 눈치를 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길드원들이 선물을 준비했어요.”
“선물이요?”
“아, 그 살인자집단 있잖아요. 그때 도와줘서 고맙다고요.”
“아….”
“이석 씨가 우리들의 영웅이 되어줄 거라나 뭐라나. 아무튼 난리예요. 감당 못 할 놈 유일하게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이석 씨뿐이니까.”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심각하게 굳은 내 얼굴에 이환이 자신이 말실수를 했는지 곱씹는 모습을 보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나무로 된 병을 넘겨주었다. 나는 애써 얼굴을 펴려고 노력했다. 상진과 태경이 옆에서 그런 내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둘과는 다르게 서하는 술이라는 말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거 술이에요. 열매로 만든 건데, 드디어 성공했다니까요.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술이기는 한데 도수는 거의 없어서 취하지는 않을 거예요.”
“술? 이거 술이에요? 저도 마셔도 되죠? 네? 저도 마시면 안 돼요?”
서하가 이환에게 매달리면서 초롱초롱한 눈을 빛냈다. 발까지 들린 것을 봐서는 팔을 강하게 쥐고 정말 말 그대로 이환에게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이환이 난처하게 웃으면서 우리 쪽을 바라보며 팔을 흔들었지만, 서하는 이환의 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뭐 어쩔 수 있나. 나한테 매달려봤자 떨어지는 거 없어.”
휙 서하의 얼굴이 이환을 따라서 같이 우리 쪽을 향했다. 잽싸게 서하에게서 떨어진 이환이 멀쩡한 모습을 봤으니 됐다며 눈에서 멀어졌다. 서하가 혜진과 지연 사이를 비집고 내 품 가운데에 안착했다. 그런 서하를 황당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양옆에서 상진과 태경이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목에 손 두르지 마.”
“서하야. 그건 안 된다.”
내 양어깨에 수줍게 놓였던 서하의 손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멱살을 잡아 왔다. 다른 곳도 많고 많았는데 양옆에 선 보디가드들이 허락한 선이 멱살이었던 탓이었다. 황당한 그 모습에 내가 서하의 이름을 불렀다.
“서하야?”
“형. 나도 그 술 마시면 안 돼요?”
“잠깐, 멱살 좀 놓고….”
“와, 우리 서하 많이 컸어!”
“그러니까 말이야. 이제 형들 제치고 이석 씨를 쟁취할 정도가 되었네. 서하야 그대로 입술 박치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상진이 그런 서하를 내 품에서 떼어내고 술을 마셔도 된다고 허락했다. 서하는 그 말에 헤벌레 입을 벌려 웃었다. 서호에게 술을 뺏겨 마시지 못한 것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더니 기회가 생기자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경이 투닥투닥 혜진과 지연을 보내고 우리는 그제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석 씨. 괜찮습니까?”
“네.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 침대에 그대로 허물어졌다.
“태경이 형은 괜찮아요?”
“네, 저는 괜찮지 않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다행이네요. 상진이 넌, 괜찮아? 안 피곤해?”
“나야 당연히.”
서하에게도 안부를 물으려 했건만 서하는 식탁 위에 놓인 술을 들여다보느라 거의 혼을 반쯤 내놓고 있는 상태였다. 한 번도 술을 마셔보지 않은 탓에 계속 술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우리 지금 술 마실까?”
서하의 얼굴이 잽싸게 내 쪽으로 돌아왔다. 하마터면 입술이 닿을 뻔했다. 신난 듯 목소리가 잔뜩 커져 있었다.
“네! 마셔요! 지금!”
태경과 상진도 긍정의 표시를 해왔다. 창밖으로 노을 진 하늘이 보였다. 흰 구름도 노을 색으로 물들어 온통 주홍빛으로 보였다. 잠시 그 풍경을 눈에 담던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깨어나자마자 술을 마셔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나마 스쳤다. 그러나 잔뜩 기대하는 눈들을 보니 차마 뺄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니 절로 침이 고이기도 했다.
테이블 위에 밖에서 따온 열매가 놓이고 열매로 만든 술과 나뭇잎으로 만든 술잔이 놓였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29층의 물소의 모습을 한 몬스터의 살점을 굽고 말려 만든 육포처럼 생긴 안주였다. 다들 맛있게 즐기는 간식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몬스터 고기라고 해서 손도 대고 싶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준 혜진 덕분에 거부감은 조금 사라진 상태였다. 유레이에서 열매를 빼고 음식다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이 음식이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환호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한잔 술로 위로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자, 이제 마실까?”
당연히 제일 먼저 씩씩하게 대답한 사람은 서하였다. 서하는 잔에 술을 따르자마자 목구멍 안으로 꿀꺽꿀꺽 잘도 넘겼다. 상진과 태경이 그런 서하를 보면서 귀엽다는 듯 가볍게 웃고는 자신들도 술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잠깐만요! 나 술잔 다 비었는데!”
태경이 웃으며 서하의 잔에 술을 한잔 더 따라주고 우리는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크으!”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는 알코올의 느낌이 오랜만이었다. 도수가 낮다고 했는데도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서 그런지 그다지 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잔을 주고받았다. 술은 양이 꽤 많았는데도 금방 비워졌다. 서하는 술에 약한 체질인지 어느 순간부터 상진이의 어깨에 기대어 실실 웃고 있었다. 상진이 그런 서하의 머리를 떼어내기 위해서 애썼지만, 술에 취한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력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서하를 바라보던 태경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턱을 괴고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술이 강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석 씨.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형 취했어요?”
“아뇨, 안 취했습니다!”
태경의 말에 상진이의 시선도 내게로 닿아왔다. 역시나 걱정이 담긴 눈이었다. 태경이 내 쪽으로 조금 더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기다릴게요. 저희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황해서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태경과 상진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자 상진이 슬쩍 웃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모두 네 편이니까.”
“맞아! 형! 내가 형 차암, 좋아하는 거 알지? 응? 알아? 서호 형보다도 형들이 더 좋다니까!”
상진에게 기대어 있던 서하가 우다다 달려와 내게 안겼다. 얼떨결에 서하를 안아 토닥여주는데 잠시 뒤 몸을 흔들어 내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내 앞에 당당히 서 어깨를 강하게 붙들며 진지한 표정을 하던 서하가 그대로 쿵 바닥으로 떨어져 쿨쿨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상진이 그 모습을 보며 크게 웃었다. 태경도 작은 소리를 내며 웃다가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려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잘까요?”
“이석아, 이리 와. 내가 밖에서 푹신한 나뭇잎 발견해서 침대에 잔뜩 깔아놨어. 전보다 조금 더 편할 거야.”
“고마워. 모두.”
삐가 내 머리와 어깨를 번갈아 가며 방방 뛰어다녔다. 기분 좋은 듯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 내일도 사냥 나가려면 빨리 자고 일어나야지.”
뒤로 나자빠져서 잠든 서하는 어느새 뒷전이 되어 잊혀졌다.
“흐으, 추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음에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거미줄처럼 얽혀 복잡하고 속이 답답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양쪽에서 내 몸을 끌어안고 있는 손과 발들을 풀어냈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서하가 안쓰러워 자리를 옮겨주려고 할 때였다. 잠꼬대인지 미미한 신음을 흘리며 제 몸을 주무르던 서하의 눈이 게슴츠레 뜨이며 서로 눈이 마주쳤다.
“헤헤, 이석이 형이네.”
“깼어? 침대에 가서 자야지. 일어나.”
서하를 부축하기 위해서 서하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때였다.
“형. 이석이 혀엉.”
아직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았는지 잔뜩 늘어지는 말투로 서하가 나를 불렀다. 계속해서 눈웃음을 치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뻤다. 나는 서하를 옮기려던 생각을 바꾸고 서하에게 제안했다.
“같이 산책하러 갈까?”
“좋아요. 형이 간다면 같이 가야지!”
서하가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서 잠들었음에도 틈만 나면 노숙을 하며 다니던 탓인지 익숙하게 몸을 풀고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열린 문으로 찬 공기가 마구 새어 들어왔다.
“형! 빨리.”
서하가 내 뒤쪽을 살피며 소곤소곤 말했다. 어깨 위에 있는 삐도 서하처럼 방방 뛰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서하가 열어준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와 바라본 하늘은 참 검었다. 검은 만큼 아름다운 별들이 잔뜩 떠 있었다. 내가 살던 서울에서는 보기 힘들 만큼 많은 별들이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뜨거운 한숨이 만나 흩어졌다. 서하와 자리를 잡고 나무 둥치에 걸터앉았다. 서하가 계속해서 나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손은 계속 자신의 손과 팔을 주무르는 채였다.
“어디 불편한 곳 있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져진 말이었다. 몸을 주무르는 서하가 정말 어디 한 곳이 불편한 것 같아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다. 웃는 얼굴이던 서하의 얼굴이 찰나의 순간 설핏 굳어졌다가 다시 웃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석이 형.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기분 좋다.”
“당연히!”
내 말을 끊고 서하가 말을 이었다.
“아파서요. 형, 나 너무 아파요.”
“뭐? 어디가!”
“나 아픈 거 너무 싫은데, 진짜 아파.”
“아픈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당연한 거야.”
“가끔 생각해요. 왜 나한테 이런 스킬이 생긴 걸까 하고. 진짜 너무 아파서 아, 이러다 진짜 죽겠다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어요.”
나는 입을 열 수 없어 굳게 다물었다. 서하에게 고통을 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니까. 상처의 고통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도 잘 아는 사람이 나였다. 그 고통을 느껴본 사람이 나니까. 서하가 지금껏 치료를 하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시에 생각해요. 아, 형들은, 사람들은 이 고통을 느끼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겁이 났을까 생각하다 보면 먼저 몸이 움직이고 있더라고요. 특히, 형을 치료할 때 내가 얼마나 약한지 깨닫게 돼요.”
내가 얼마나 약한지라고 중얼거리며, 서하가 자신의 양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머리를 묻었다. 서하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울음이 묻은 목소리는 아니었고, 조금 딱딱하다 싶은 정도의 그런 목소리였다.
“아픈 게 너무 싫고 힘든데, 정말 진짜 죽을 만큼 힘든데요. 나도 처음에 이상한 사람한테 큰일 날 뻔했는데 위험에 처한 사람을 어떻게 외면해요. 또 내 스킬이 숙련도가 부족해서 태경이 형이 저렇게 됐다고 생각하면 멈출 수가 없어요. 형도, 다 내가 약해서 구해주다가 다치는 거니까.”
“서하야.”
“내가 스킬을 사용하지 않으면 나는 사람을 죽인 게 되니까. 그게 사람 죽이고 다니는 사람들이랑 뭐가 다른 걸까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형 잠든 사이에 다친 사람들을 조금 무리해서 치료해 줬더니 그냥, 계속 아픈 것 같은 착각이 드네.”
“그랬구나.”
“치료 스킬을 가진 사람의 마음이 이래서야. 그렇죠?”
“아니, 그럴 수 있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야.”
“헤, 형 미안해요. 횡설수설해서. 형이 지금 제일 힘든 사람인데. 투정 부렸네. 술이 아직 안 깨서 그런가 봐.”
“아니야. 여기가 이상한 세계여서 그렇지. 네 나이는 원래 한참 투정 부리고 화내고 짜증 내고 하는 게 맞아.”
“형도 그렇게 나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형도 좀 투정 부리고 화내고 짜증 내요. 항상 속으로 꽁꽁 감춰두니까 보는 우리는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한데.”
나도 양 무릎을 끌어안고 서하 쪽을 보며 머리를 그 위에 기댔다. 너도 나와 같구나. 아니, 우리 모두가 같았구나.
“나도 그래. 무섭고 싸우기 진짜 싫은데도 죄책감에 움직이게 돼. 아직 내가 너무 약해서 다들 다치고 죽어간다고 생각하면 몸이 무거워져. 가족을 잃었을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 전에 한 번씩 굳는 내 모습도 죄책감이 돼.”
“또?”
서하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려졌다. 우리는 같이 무릎을 끌어안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모두 눈에 설풋 고여있는 눈물이 별빛을 받아 반짝였다.
“또, 이번 일로 인해서 그게 더 심해졌을까 봐 무서워. 정말 중요한 순간에 환상에 허우적거리다가 너희를 잃을까 봐.”
서하가 벌떡 일어나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형이 솔직하게 말해줘서 기뻐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서하의 얼굴 너머로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얼굴 하나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나는 선배 엄청 보고 싶었는데. 선배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느닷없는 서호의 등장이었다. 뜬금없는 말도 서호다웠다.
“선배. 잃기 싫으면 지키려고 노력해야죠. 우리 서하 조만간 큰일 날 수도 있을 텐데.”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자꾸 들더니 그것의 정체는 서호였나보다. 앞으로는 사소한 느낌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환한 달빛 아래에서 보이는 서호의 얼굴에는 흉측한 상처가 자리해있었고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너!”
나는 그 상처에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너! 얼굴이 그게 뭐야?”
서하가 자신의 어깨로 떨어지는 무언가를 손으로 쓸어 눈앞에 가져다 대고 놀라 서호에게로 시선을 돌려 소리쳤다. 서호는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서하를 보며 웃었다.
“서하야. 형 좀 고쳐줘라. 아! 아프다고 울지는 말고. 우는 건 질색이라서. 아 참, 선배는 제외. 오히려 예쁘게 울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며 서호는 내게 윙크를 해주지 못해 아쉽다며 쉰 소리를 해댔다.
“이서호!”
그런 서호를 보던 서하가 열불이 나는 속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음, 내가 지금 여유롭다고 해서 상황이 여유로운 건 아닌데… 긴장하는 모습이 하나도 안 보이네. 나도 웬만하면 서하 너한테 치료해달라고 안 할 거라는 걸 생각하란 말이야.”
서호의 그 말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무슨 말이야?”
“궁금해?”
인상을 찡그리며 묻는 서하를 보며 서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얼굴에 잔뜩 묻은 피가 그 장난스러운 모습을 아주 무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무슨 일인데? 형은 꼭 한 번에 말을 해주는 법이 없다니까!”
그 말에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냥 말해주면 재미가 없잖아, 재미가. 선배, 안 그래요?”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선배. 재미없게 서하 편들 거예요? 진짜 너무하다.”
“서호야.”
“뽀뽀해주면 말해줄게요. 응? 볼에만 살짝. 아니, 나 눈 아프니까 눈에 호 해주세요. 그럼 말해줄게요. 오랜만이잖아요.”
“헛소리 말고 이리 와.”
서하가 서호의 손목을 잡고 자신이 앉았던 나무 둥치에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곧바로 손을 들어 스킬을 사용했다. 방금 전까지 스킬을 사용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서하의 말을 들은 터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흐으윽!”
“아, 선배가 호 해준 다음에 치료해 줬어야지! 이서하 진짜 눈치 없어! 야. 근데 술 냄새 난다? 술 마셨어? 어디서! 뭐야! 나 치료 잘 된 거 맞아?”
고통스러움에 눈을 부여잡고 주저앉는 서하의 앞에서 멀쩡해진 서호가 소리쳤다. 그래도 슬쩍 동생의 안색을 살피며 이리저리 둘러보는 모양새가 걱정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런데도 입은 계속 툴툴거렸다. 그런 서호의 모습에 내가 서하의 옆에 가서 나무 둥치에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자세를 잡아주었다. 서하가 신음 소리를 흘리며 정신을 잃으며 추욱 늘어졌다. 눈을 부여잡은 서하의 손 틈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흐르다가 서서히 멈추고 있었다.
“네 대신 아파하는 동생 앞에서 뭐야? 그만해. 정말 무슨 일이야?”
“내 마음이에요. 그런데 술은 어디서 마셨어요? 아니, 그걸 둘이서 마시는 게 말이나 되나! 날 불렀어야지!”
“그만해.”
“뭐, 선배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럴게요. 그런데 선배.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네요? 하, 선배 정말 팔색조 같아요. 지금 이 모습도 좋아. 역시 내 안목이란. 칭찬해주고 싶네.”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는 서호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렇게 계속 장난만 칠 거야? 무슨 일이야?”
“음, 아주 지독한 게 등장했죠.”
“아주 지독한 거?”
“네. 존나 짜증 나는 거.”
갑작스럽게 서호에게서 살기가 일어났다. 잠시 생각에 빠진 그 얼굴은 생전 처음 보는 모습으로 굳어 있다가 금세 웃음을 지으며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선배한테만 말해줄게요. 지금 31층 입구 앞에 그 지독한 놈들 쫙 깔렸어요. 입구 앞에서 방심한 순간에 놈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데 당해낼 수가 있나. 그래서 눈도 이렇게 된 거죠. 그 새끼 치졸하게 눈부터 노리더라고.”
“뭐?”
“그 새끼들 돌아왔다고. 탐나는 스킬 가지려고. 생각 없이 떠들어대던데, 내 앞에서. 아마 내가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서호가 삐딱하게 웃었다.
“탐나는 스킬?”
서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서호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 잘생긴 거 아는데, 그만 봐요. 그럴 때가 아니잖아? 아니다. 기분 좋으니까 그렇게 계속 봐줘요.”
서호가 꽃받침을 하고 방싯 웃었다. 그러나 굳어진 내 표정에 금세 꽃받침을 풀고 똑바로 섰다.
“그 새끼들이라는 게 설마….”
“선배 생각이 맞아요.”
“왜, 왜 서하를….”
“내 동생 놈이 더럽게 멍청해서 대놓고 사람들을 치료해준 탓에 지금 A구역뿐만이 아니라 B구역까지 유명인사인 거 몰라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서하가 말해준 그간의 행적이 주르륵 머릿속을 스쳤다. 서하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원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치유 스킬이었다. 길드 내에서 치유 스킬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충분히 사람들이 탐을 낼 만했다.
“저 녀석이 멍청하게 그러고 있으면 주변에서 말렸어야지. 안 그래요, 선배?”
“나는, 난.”
“내가 아무리 선배를 좋아해도 서하는 내 가족이거든. 잘 좀 챙깁시다. 서로서로.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렇죠?”
서하가 사람들을 치료하며 유명해지는 순간에 쓰러져 있었다는 건 핑계가 되지 않았다.
진작부터 서하에게 경고를 해줬어야 했다. 서하가 다른 사람들의 타깃이 되리란 것을 미리 알고 얘기해줬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서하를 서호에게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호야. 서하 저기 보이는 통나무 집에 데려다줘.”
내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생각이었다. 다시는 아무도 내 사람을 건드려서 다치게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선배? 아무리 멍청해도 혼자는 아니죠! 진짜? 진짜야? 아니, 선배!”
“괜찮아. 나 강해졌거든.”
“아니, 지금 내 말 오해한 거 같은데 난 이게 선배 탓이라고 말한 게 아니… 선배!”
서호가 이미 멀어진 내 뒷모습을 보면서 길어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올렸다. 그 손길이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서하를 한 번 쳐다본 서호가 서둘러 서하를 들추어 매고는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하필 이럴 때만 마력이 부족하지. 강해지기는 개뿔이. 그놈들 수가 얼마나 될 줄 알고….”
혼잣말 속에 담긴 한숨 소리가 깊었다.
“아니, 좀 달라졌나 싶었더니 더 무모해졌네. 아씨! 이서하 생긴 거랑 다르게 개 무거워!”
[유레이 31층입니다.]
31층으로 올라온 나는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함정이라도 준비한 건지 주변에 군데군데 위험이 감지되었다.
“나와. 다 보이니까.”
그럼에도 그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 숨었는지 훤히 보이는데도 그렇게 꼭꼭 숨어들어 있는 모습이 참 우스웠다.
“그렇게 숨어서 안 나올 거야? 아쉽네. 시시하게 끝날 것 같은데?”
여러 곳에서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중 한 곳으로 몸을 날리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진짜 안 나오면 그냥 몰살이야.”
어느새 내 눈앞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이 둘이나 놓여 있었다.
“이제 알겠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곳에서 여러 명이 튀어나왔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며 살펴본 그들은 언젠가 슬쩍 얼굴을 본 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직도 남아있었구나.”
복잡한 심경이었다. 눈앞에 놓인 사람들도 익숙한 행색이었다. 살인자집단. 그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그렇네. 정말 서호의 말이 맞았네. 갱생의 여지도 없는, 살려두면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거.”
“뭐라는 거야! 죽어!”
이번엔 끝내고 싶었다.
“이번엔, 끝내자. 나도 마음을 다잡았거든.”
순식간에 눈앞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고 다른 곳에서도 마구잡이로 살인자집단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석아!”
나를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고 도망가는 놈들부터 마력을 날려가며 처리했다. 멀리 도망가는 이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서야 뒤에서 나를 부르던 소리를 제대로 귀에 담을 수 있었다.
“와우! 선배, 진짜 대박 섹시해. 진짜 엄청나게 세졌잖아?”
“이…석아.”
“이석 씨!”
그러나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온통 피칠갑이 되어 엉망진창일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본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상상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아직도 숨어 있는 사람이 있다고 머릿속으로 경고를 보내오던 장소 하나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아악!”
“대, 대장! 살, 살려. 컥!”
“살려달라는 말이 지금 입에서 나와? 일을 이따위로 진행시켜 놓고? 사람이 말이야. 이렇게 양심이 없을 수가 있나.”
콰앙!
백두진이 부하의 목숨을 뺏고는 피로 물든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남은 그의 부하들이 잔뜩 겁을 먹어 움츠러들었다.
“하, 진짜 죄다 쓸모없는 새끼들뿐이네. 진짜. 잠깐 다른 데 갔다 온 사이에 우리 자기 경험치 어지간히도 많이 올랐겠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백두진이 안녕, 예쁜아. 오랜만이지? 하며 인사해왔다. 뻔뻔한 그 모습에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그래, 오랜만이네.”
“오! 예쁜이 이번엔 내 인사도 받아주고.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
“그래. 많이 보고 싶었지.”
“예쁜아. 진짜 많이 컸다. 덜덜 떨면서 상, 상진아. 상진아! 상진아!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녀석이 손을 덜덜 떨면서 내 흉내를 냈다.
“그래, 그때는 그랬지.”
“개새끼가!”
뒤에서 상진과 태경이 발끈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녀석이 그런 상진을 보며 크게 폭소했다. 백두진에게 달려들려는 상진과 태경의 기척에 서둘러 손을 들어 말렸다. 내 손짓에 억지로 몸을 멈추는 상진과 태경이었다. 백두진 녀석도 전과 달라졌다. 느껴지는 느낌부터가 묵직하니 피부를 따끔하게 찔러왔다. 상진도 태경도 강해졌지만 섣부르게 싸움을 걸다가 다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남자친구들도 여전히 살아있고. 예쁜이가 지켜주느라 힘들었겠네. 게다가 새로운 애도 하나 더 늘었고. 참 능력도 좋아. 우리 예쁜이는. 하긴, 그때 마주친 입술도 참 달았지. 솜사탕처럼. 아! 솜사탕 먹고 싶어! 못 먹은 지 벌써 반년이 넘었잖아? 예쁜아. 다시 솜사탕 맛 좀 보여주면 안 될까?”
“내가 듣다가 기분이 나빠서 그런데 말이야. 선배가 왜 네 예쁜이야. 미친놈아.”
“와, 멋쟁이네. 예쁜이 너. 진짜 어린놈 하나 골라잡았구나? 그래도 새파랗게 어린 것보다는 내가 더 낫지. 낮이든 밤이든.”
“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성질을 돋우는 데는 탁월한 놈이었다. 기가 막혀 코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대꾸하고 싶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왜? 늙다리보단 새파랗게 젊은 게 낫지 않나? 너 같은 늙다리는 낮이든 밤이든 한참 움직이다가 골골거릴 거 같은데?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는 하겠어? 아직 귀는 잘 들려요?”
백두진의 눈썹 한쪽이 삐쭉 치켜 올라갔다. 요것 봐라? 하는 표정이 훤히 드러났다.
“뒤를 봐. 예쁜이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있는 남자친구들 안 보여? 지금 네 말에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무시하며 서호가 더욱 노골적으로 백두진에게 시비를 걸었다.
“평생 선배가 네 예쁜이가 될 일은 없으니까 아가리 다물어, 늙다리 새끼야. 선배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랑 핑크빛 미래가 계획되어 있거든.”
백두진이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말버릇이 고약하네. 아가야? 버릇 좀 고쳐야겠다.”
순식간에 백두진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내 눈에는 훤히 보였다.
“말버릇은 서호보단 네가 먼저 고쳐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와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세찬 바람이 볼을 스치며 흘러내리던 핏방울들을 조금 날려주었다.
“나이스! 선배 감동이에요! 내 편 들어주는 거 너무 좋아!”
내 말을 듣고 기분 좋아 방방 뛰는 서호는 역시 서호였다.
쿠아앙!
검과 몽둥이가 맞닿은 곳의 땅이 커다랗게 패여 나갔다. 동시에 백두진이 미세하게 뒤로 밀려났다.
“없어진 새끼손가락이 좀 치명적이었나 봐? 내 상대로는 좀 부족한 것 같지 않아?”
내 말을 들은 백두진이 크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하하! 예쁜아. 내 말솜씨를 좀 배웠나 보네. 깜찍하기는. 근데 그 정도 도발엔 내가 안 넘어가지. 사람을 자빠뜨리려면 말이야. 다다다 밀어붙여야 한다고. 그래야 딱 침대 위로 골인하는 거야.”
“미친 새끼.”
“그때도 말하지 않았나? 미쳐서 더 매력적인 거야. 내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
“아니, 예쁜이 앞에서는 늘 부끄러운데?”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녀석의 얼굴에 재빠르게 검을 들어 올렸다.
쿠앙!
다시 한번 땅에 깊게 상처가 새겨졌다. 녀석이 내 눈앞에서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간 손을 들어 올리더니 탈탈 털었다.
“아야, 아야. 진짜 아프네. 침 묻히면 상처가 빨리 낫는다던데. 어때? 빨아줄 의향은 있나? 그렇다면 난 예쁜이한테 기꺼이 나자빠져 줄 텐데. 어때? 좀 끌려?”
쉬이익!
쾅! 쾅! 쾅!
움직인 적이 없건만 백두진을 향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뒤에서 두고 보고 있던 상진과 태경, 서호가 나선 것이었다. 생각보다 강한 그들의 위력에 놀라 잠시 멈춰 있을 때였다.
“콜록! 컥! 하, 와, 남자친구들도 이렇게 강해졌어? 대단한데? 그때 어지간히도 분했나 봐. 귀엽긴.”
“그래, 다시는 이석이 혼자 싸우게 두지 않으려고.”
“하하! 우리 예쁜이는 늘 혼자 싸웠나 보네? 얼마나 남자친구들이 못 미더웠으면 그랬을까.”
“더러운 입에 이석 씨 이름 올리지 마.”
“그냥 죽어 새끼야. 선배가 착해서 봐주는 건 줄도 모르고 까부네.”
백두진과 충돌하는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셋이 합공하자 백두진은 그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어느새 백두진에게 밀리지 않고 싸우는 셋의 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영웅의 수호 기사라는 특성이 생각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듯싶었다. 마음이, 생각이 복잡했다. 던전에서 마주쳤던 그 괴물을 잡으려면 결국 혼자로는 부족하리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강해지고자 했지만 결국 마지막 그 순간을 함께할 사람들도 결국 그들이었다.
“삐야. 어쩌면 짐을 떠맡기고 싶지 않다는 말로 내가 상처를 주고 있었던 걸까?”
삐가 어깨에서 머리 위로 자리를 옮겨 통통 뛰었다.
삐- 삐이-
“내 동료고, 내 소중한 사람들인데. 그렇지?”
삐-
삐가 정말로 내 말에 대답을 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검을 들고 한참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리려고 할 때 조금씩 도망치는 살인자 길드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망설이고 있는 순간에 포탈에서 빛이 나며 휴식층에 있던 사람들이 올라왔다. 백사 길드의 사람들이었다.
“돌격!”
“살인자 길드 사람들이다! 놓치지 말고 따라가!”
혜진이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고 양옆과 뒤를 지연과 혜연 이환이 보조해주고 있었다.
챙! 채앵!
순식간에 살인자 길드의 사람들과 백사 길드의 사람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쇳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도망가는 놈들이라고 해도 놓치지 마!”
“돌격!”
“돌격!”
“돌격!”
“돌격하라!”
백사 길드의 길드원들이 큰 소리로 복명복창했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몸놀림이 아마도 백사 길드에서 꽤나 강한 편인 사람들이 모인 인원인 것 같았다. 혜진 일행과 내 눈이 마주쳤다. 혜진이 슬쩍 윙크를 날리며 주변 상황은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그 옆으로 백두진에게 상처받은 피해자들이 도망가는 살인자집단의 사람들을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고민하던 것을 내려놓고 백두진과 싸우고 있는 일행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혜진의 목소리가 빠르게 스쳤다.
“또 다른 희생자들 만들기 싫으면 빨리 움직여!”
“알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살인자집단은 사라진다!”
“와아아아아!”
유레이 31층의 후끈한 열기가 더더욱 달아올랐다.
“훠우! 축제구나! 신나는데!”
백두진은 겁을 먹거나 조급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휘파람을 불며 잔뜩 흥분하고 신이 난 얼굴을 해 보였다. 그 반반한 얼굴이 보기 싫어 팔꿈치로 세게 후려쳤다. 갑자기 싸움에 끼어든 내 탓에 백두진이 그대로 얼굴을 맞고 뒤로 멀리 날아갔다.
쾅!
“이석아!”
“선배 잘했어요! 완전 통쾌해!”
뒤에 위치하고 있던 몬스터에게로 정확히 착지한 백두진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레벨업! 고마워. 예쁜아. 이 형아 도와주려고 뒤로 던졌구나?”
나는 조심스럽게 능력치 창을 열어 포인트를 분배했다. 포인트가 183개나 있어 이제 체력과 근력도 포인트가 600을 넘어갔다. 500을 지나 600이 되는 순간 몸이 시원해지면서 가벼워졌다. 몸의 능력이 한 단계 더 상승한 것 같았다.
[lv. 33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성장한계치+2]
[경험치: 59퍼센트]
[체력: 650 (+40)]
[근력: 649(+38)]
[마력: 770(+35)]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2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4배 증가합니다.]
[특성: 독 내성- 15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최대)]
[point: 0(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야! 선배는 내 편이라고!”
“그래, 선배는 네 편이고 예쁜이는 내 거고.”
“저 새끼가!”
동시에 백두진을 향해 달려들려는 서호와 상진, 태경을 말리며 나는 그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자신 있어 보이는 내 얼굴에 그들이 무기를 내리고 뒤로 물러났다.
“믿어, 이석아.”
“무리하지 말고 필요하면 불러요. 아시겠습니까? 이기세요.”
믿는다는 말과 함께 상진과 태경이 길드원들을 도우러 달려나갔다. 서호만 남아 입술을 삐죽이며 멀리 떨어진 돌덩이 위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혼자 해결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서호에게서 시선을 돌려 백두진을 바라봤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나도 조금 전에 레벨이 올라서 말이야. 내기 한 번 할까? 누가 더 강한지? 난 자신 있는데.”
웃으며 놈을 도발하자 그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하, 우리 자기는 늘 내 살심을 돋군다니까? 도발하는 모습도 아주 좋아.”
“대답해. 내기하기 싫어?”
“아니, 좋아.”
혀를 내밀어 입술을 쓰윽 핥는 백두진의 모습은 마치 뱀 같았다. 눈도 서늘하게 빛나는 것이 아마도 스킬을 사용하거나 특성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너는 꼭 내 품에서 죽는 모습을 봐야겠거든.”
그의 목이 삐죽 뒤틀리더니 우두둑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내기 시작?”
파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공격을 시작했다. 눈앞으로 드리워지는 녀석의 몽둥이를 뒤로 쳐내며 웃었다.
“글쎄, 죽는 쪽은 내가 아니라 네 쪽 같은데.”
거칠게 내뱉은 마력이 백두진을 향해 날아가고 녀석이 뒤쪽으로 처박혀 기침 소리를 냈다.
“와, 자기! 갑자기 박력 있어졌네? 기분 좆같게.”
피가 고인 침을 바닥에 퉤 뱉은 백두진이 다시 달려왔다.
“난 네 얼굴이 보일 때부터 좆같았어!”
콰앙!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속도로 백두진과 맞붙으며 마구 뒤엉켰다. 빠른 속도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녀석도 아마 민첩 한계를 돌파한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들러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랜만에 온 힘을 다해서 싸워볼 기회였다. 나는 주변의 감각을 닫고 오로지 싸움에 집중했다.
백두진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에게서 당황한 기색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아마 그는 자신이 나에게 밀릴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일 테다. 새끼손가락이 잘렸으니, 단단히 마음을 먹고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만큼 강해진 후에 들이닥쳤을 테니까.
“뭐야. 자신만만하던 이유가 있었네? 예쁜이.”
“이번엔 목을 내줄까 봐 겁나나 봐? 그렇게 당황한 걸 보니까.”
녀석이 침을 삼켰다. 잠시 긴장한 기색이던 백두진은 그러나 다시 웃음을 입에 걸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인자집단은 백사 길드원들과 싸우느라 주변은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르며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그거 알아? 여기 최상층에 이놈들 보스 몬스터가 있다는 거?”
“뭐?”
“왜 사람들이랑 싸우는 거야? 왜 죽이고 빼앗는 거냐고. 몬스터로 모자라서 왜 사람까지 적으로 두는 거야?”
“그게 중요해?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이만큼 쉽게 강해지고 쉽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어? 지금 나한테 네가 하는 건 잘못됐어! 하면서 설교라도 할 참인가? 응? 그래?”
“사람을 죽이는 게 재밌어? 죄책감 하나 들지 않아?”
“글쎄. 너는 어때? 너도 충분할 만큼 사람을 죽여봤잖아. 어땠어? 검으로 사람을 베어낼 때 그 느낌. 죽여줬지?”
녀석이 고개를 살짝 꺾으며 되레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내뱉으려던 단어가 목구멍을 그대로 틀어막아 단단히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살을 가르는 그 느낌이 생생하게 손을 타고 올라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방금 전까지도 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이었다. 결국 나도 저놈과 다를 바 없는 살인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살인은 그 무슨 이유가 붙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무서웠지. 근데, 하다 보니까 재밌더라고? 마치 내가 신이 된 것 같잖아. 이들 위에 서서 내가 최고가 되는 기분이 죽이잖아! 뭐, 이런 얘기 듣고 싶었어?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런 이유는 재미없고. 나도 살려고 사람들 죽이는 거야. 이봐, 예쁜아. 이 세상에서 너만 옳은 게 아니에요. 정신 좀 차려. 사람은 여러 유형이 있잖아? 난 너랑 다른 유형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녀석과 나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절대 녀석과 나는 같을 수 없었다.
“맞아, 너는 구제 불능의 쓰레기였지. 내가 잠깐 그걸 간과했네. 살인의 이유를 들을 생각을 한 내가 잘못이었어.”
“이야, 우리 자기 진짜 대단해졌네. 많이 컸어.”
“이죽거리지 마.”
“이죽거리는 것 같았어? 이런, 나는 그냥 감탄한 거였는데. 다시 물어보는데. 너 내 쪽으로 올 생각 없나? 잘해준다니까? 네 남친들 때문이야? 그런 거면 내가 충분히 잊힐 수 있게 해줄 수 있는데.”
기대하지 말 것. 이곳에 떨어진 후로 그 무엇도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제발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기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발 다치지 않기를… 상처받지 않기를… 하루라도 빨리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그 무엇도 내가 원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딱히 기대한 것은 없었다.
쿠와아아앙!
“커헉!”
녀석 몰래 은근하게 내보낸 마력이 둥글게 돌아 녀석의 등 뒤를 가격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맞고 녀석은 내 앞으로 날아오는 중이었다. 칼을 들고 녀석에게로 달렸다. 어떻게든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녀석이 몸을 뒤틀고 있었다. 하지만 달려드는 내 속도로 인해 온전히 공격 범위에서 도망가지 못한 녀석은 내 공격을 온전히 피하지 못했다.
촤아악!
툭.
녀석의 왼팔이 형편없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 미안. 깨끗하게 목을 잘랐어야 했는데. 많이 아파?”
“으아아아! 이 새끼가! 악! 내 팔! 내 팔이!”
“이번엔 제대로 목을 잘라줄게.”
녀석이 분에 잔뜩 차 비명을 지르며 분노를 표출하다가 순식간에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한쪽 손에는 잘린 자신의 팔을 들고 있는 채였다.
“네 뜻대로 될 줄 알아!”
나는 충분히 녀석의 공격을 감당할 수 있었고 충분히 방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나를 덮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눈 돌리지도 않았던 내 뒤편을 노렸다. 백두진과 나는 싸우다 보니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빠른 민첩 때문에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순식간에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녀석을 향해 마력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녀석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공격이었기 때문인지 너무나도 쉽게 내 공격을 뚫고 사람들에게로 달렸다.
사람들은 자신에게로 빠르게 달려드는 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살인자집단의 사람들만이 환호하며 백사 길드원들을 피해서 뒤로 도망치고 있었다. 문제는 백두진이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살인자집단이든 백사 길드원이든 구별하지 않고 학살하며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석이 형!”
포탈을 타고 서하가 올라왔다. 포탈의 앞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서하를 놈이 발견하고 광기에 찬 웃음을 흘렸다.
“찾았다!”
녀석이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다 이긴 줄 알았지? 그럴 리가. 내가 그렇게 쉽게 끝나겠어? 나도 비장의 무기가 하나쯤 있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봐.”
백두진의 표정을 그대로 마주한 나는 머리가 시키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속도를 가진 백두진이었기에 시간 내에 녀석을 잡을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서하야! 안 돼! 돌아가!”
내 외침에 비교적 서하와 가까운 곳에 있던 태경과 상진이 서하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그 둘은 민첩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백두진의 속도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서하야!”
서하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포탈 앞에 서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외침이 들리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잠시 파악하던 서하가 상황을 알아채고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서호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야! 이서하!”
상진과 태경보다 더욱 가까이 있던 혜연이 몸을 날려 서하를 포탈 쪽으로 밀쳤다.
“서하야! 도망가!”
그러나 서하는 포탈 안쪽으로 밀려나지 못했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아!”
서하가 순식간에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순식간에 백두진이 그 앞으로 당도했다. 미처 방비할 시간조차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백두진이 그대로 들고 있던 몽둥이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앙!
바로 앞에 도착한 서호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뒤로 튕겨 나갈 만큼 강한 한방이었다.
“커헉!”
돌덩이들이 비산하며 튀어 오르고 흙이 먼지처럼 피어오르는 탓에 시야가 가려졌다. 서하의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서하를 부르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먼지 바람이 피어오른 곳은 마치 태풍의 눈과 같았다. 바싹 마른입에서 단내가 흘렀다. 쿵쾅거리는 심장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숨이 자꾸만 거칠게 내뱉어졌다.
“백두진 이 개새끼야!”
“어딨어! 나와!”
연달아 울려 퍼지는 소리의 메아리가 가라앉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백사 길드원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키며 사태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 사이로 백두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쁜아. 미안하지만 내 목표는 원래 얘였거든.”
나는 먼지 바람을 뚫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뚜렷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하야?”
슬쩍 서하를 불러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서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서호가 덜덜 떨리는 몸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서호답지 않게 많이 놀란 기색이었다. 마침내 먼지가 가라앉았고 보이는 건 피를 흘리며 쓰러진 혜연의 모습과 목에 몽둥이가 대어진 채 백두진에게 붙들린 서하였다.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지독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놈은 정말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을 건드린 것이었다.
“이 미친 새끼야. 좋은 말 할 때 내 동생 놔줘라.”
“아하! 얘가 네 동생이었어? 어떡하나. 놔줄 생각일랑 하나 없는데. 동생 간수 좀 잘하지 그랬어. 이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러니까 나 같은 놈까지 네 동생을 노리는 것 아니겠어?”
백두진이 혀를 차며 안됐다는 듯 서호를 보았다. 발끈한 서호가 빠르게 놈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백두진이 크게 웃었다.
“형!”
“동생 죽이고 싶어서 움직이려는 거지, 지금?”
백두진이 몽둥이를 서하의 목에 더욱 가까이 들이댔다. 매사에 거침이 없고 순간의 기분으로 행동하던 서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입술을 꽉 깨물며 주먹을 움켜쥔 서호가 날카롭게 백두진을 노려보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노려보는 것뿐이라서 어쩐다? 안타깝게 됐어.”
“나 괜찮아. 괜찮아요. 그냥, 그냥 공격해도!”
“이서하, 입 다물고 있어!”
서호가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백두진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서호에게 들릴 정도로 작게 입을 열었다.
“서하 내가 꼭 구할게.”
그렇게 말한 나는 바로 순백의 버서커를 발동시켰다.
“백두진. 네가 그랬지? 숨겨둔 비장의 무기 하나 없이 여기 왔겠냐고. 기억 안 나? 전에 너랑 싸울 때 내가 쓴 비장의 무기.”
“움직이는 순간 네 동료가 죽는데도 나랑 싸우려고? 움직이는 순간 치유 스킬이고 뭐고 네 동료 그냥 죽는 거야.”
뻔뻔하게 웃으며 말을 내뱉는 백두진을 보면서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순백의 버서커로 인해 내 능력치는 모두 2.2배 증가한 상태였다.
“아니, 내 동료가 죽을 일은 없어.”
녀석이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녀석의 옆에 다가선 나는 그대로 녀석의 옆구리를 발로 차냈다. 녀석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나를 보고 몽둥이까지 놓치며 저 멀리로 날아가고 서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커어, 그륵.”
목의 반절이 녀석의 몽둥이에 찢긴 상태여서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잔인하게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서하는 제 몸을 스스로 치료하고 있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서하야.”
그런 서하의 곁에 서호와 상진, 태경, 그리고 백사 길드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서호야. 동생 챙기고 있어. 상진이랑 태경이 형은 나랑 같이 가요. 저 새끼한테 복수해야죠.”
서호가 서하의 손을 강하게 한 번 쥐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인간쓰레기 새끼 죽이는데 내가 빠져서야 되겠어요? 동생이 제 손을 꼭 잡으면서 복수해달라고 말하네요. 동생 소원 들어줘야지. 야, 이서하. 너 다 나으면 이 형님한테 은혜 꼭 갚아라?”
이번을 마지막으로 같이 싸우겠다는 다짐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같이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먼저 빠르게 달려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백두진 앞으로 가 배에 주먹을 한 번 더 날려주었다. 백두진이 뒤에 있는 단단한 벽에 반쯤 박혀서 온통 피범벅이 된 얼굴과 몸을 한 채 쿨럭이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내 말이 맞지? 내 동료가 죽을 일은 없다고.”
“그래. 네 말이 맞았네? 그래서 만족해?”
“어. 너만 찾아서 헤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어?”
“크크큭, 예쁜아. 나만 죽이면 다 끝날 것 같아?”
“아니, 네 동료들도 하나하나 다 찾아서 처리해야겠지. 그래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가엾게도 우리 예쁜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백두진. 죽을 때가 오니까 겁나? 무슨 헛소리야?”
“이런, 내 얼굴이 겁먹은 것 같아 보이나? 그냥 눈에 피가 들어가서 그런가 빨갛게 보이는 네가 너무 섹시해서 발정 난 표정인데.”
피에 떡이 된 얼굴로 녀석이 불쑥 얼굴을 내밀어 내가 피하지 않았다면 녀석과 입술이 맞닿을 뻔했다.
“넌 끝까지 똑같네.”
“말해 뭐하겠어. 네가 내 품에서 죽는 게 보고 싶었는데 내가 네 품에서 죽게 생겼네. 이것도 나름 멋진 엔딩 같아서 마음에 들어.”
“이 개새끼는 끝까지 지랄이네.”
서호가 스킬 때문인지 가장 먼저 도착해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검을 쓸 필요도 없게 곤죽이 됐네. 넌 지금 이 모습이 제일 잘 어울린다. 개새끼야.”
씨익 웃는 서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서하의 말에도 백두진의 시선은 올곧게 나를 향했다. 그 안에 담긴 광기 어린 것이 무엇인지 나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다만 온몸에 솟아오른 소름으로 인해 주변의 온도가 내려간 느낌이었다.
“예쁜아. 기억해. 끝나지 않았어.”
“뭐?”
“너도 봤을 거야. 분명해. 너도 봤지? 그 커다란 눈동자.”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췄다. 내 반응에 만족한 듯 백두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예쁜이도 봤구나.”
“그게 어떻다는 거야.”
뱀처럼 혀를 내밀며 입술을 핥던 백두진이 행동을 딱 멈췄다.
“그 눈동자를 또 누가 봤을 것 같아? 응? 누가 봤을까? 나랑 같이 다니던 놈들도 보고 예쁜이 너랑 같이 다니던 놈들도 봤을 거야.”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에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냥 말하면 재미없잖아. 진한 키스라도 한 번 어때?”
“이 미친 새끼가!”
우리의 대화를 듣던 서호가 참지 못하고 거침없이 검을 날렸다. 백두진이 재빠르게 검을 피해내며 내 뒤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과연 그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눈동자를 본 약하디약한 인간들은 무슨 선택을 했을까? 예쁜이 넌 상상이 가?”
“개소리하지 마!”
이번엔 참지 못한 내가 거센 마력을 날렸다. 부상 때문인지 내 공격을 완벽하게 피하지 못한 백두진의 옆구리가 터져나갔다. 백두진이 고통에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나는 그런 백두진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들어 올렸다.
“나도 하지 못한 걸 너는 막을 수 있을까?”
마지막임을 아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는 백두진의 목에 거침없이 검을 날렸다.
“멈출 수 있을….”
빠르게 내질러지는 내 검에 무어라 말을 하려던 백두진의 목이 허망하게 떨어져 나갔다. 온통 화려했던 백두진에게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최후였다. 끝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제야 살인자 길드가 사라졌다. 이렇게 되기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에게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자리에 주저앉아 보는 사람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오열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더욱 잘 알기에 차마 나는 위로의 말을 건넬 수조차 없었다. 아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8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38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역시 사람을 죽이면 몬스터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백두진의 레벨은 결코 낮은 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무려 레벨이 5개나 올랐다.
“와 씨. 레벨 엄청 올랐어. 선배, 어쩌죠. 나 막 흔들리는데. 선배가 잡아주면 잡혀줄게요. 응?”
“이서호.”
“선배. 화내지 마요. 무섭단 말이에요. 응? 사랑으로 바로잡아야지. 분노 어린 눈으로 쳐다보지 마요!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녹아버릴 것 같잖아요!”
“와아아아!”
“이겼다!”
“이석 님 만세!”
뒤편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엄청난 환호 소리에 서호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선배 이름만 불러요? 와 씨, 완전 억울하잖아! 나도 고생했는데!”
백사 길드원들이 서로 얼싸안고 신이 나 웃고 소리치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옮기고 있던 사람들도 다를 건 없었다. 다들 웃는 얼굴로 더욱 기운 넘치게 부상자들을 옮겼다.
부상자들도 백두진이 죽었다는 소식에 아픈 와중에도 실실 웃음을 흘렸다. 서하는 진작에 휴식층으로 옮겨졌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31층에 그대로 있던 지연이 다가와 소식을 전해줬다.
“서하는 밑에 옮겨놨어요. 문제는 다친 사람들이 전부 서하에게 치료받고 싶어 해서 줄을 서 있다는 건데… 서하도 많이 다쳐서 치료 중이라고 둘러댔어요.”
“뭐? 아니, 이 새끼들이 돌았나? 다쳐서 쓰러진 걸 보고도 치료해달라고 줄을 섰다고?”
서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연신 비명을 내질렀다. 분을 참지 못하고 서호는 계속해서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동생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던 서호였지만 역시 그는 그 나름대로 동생을 챙기는 형이었던 것이다. 백사 길드원들이 두려운 눈빛으로 서호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칠세라 금세 고개를 돌려 서호를 외면했다. 서호의 또라이 기질은 이미 백사 길드 내에서도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서호에게 당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좀처럼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서호를 피하는 쪽으로 타협했다.
“아니, 좀처럼 제정신인 사람들이 없어! 선배. 제가 혼쭐 내주고 올게요.”
내가 보기에는 서호가 제일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서호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인상을 팍 쓰더니 스킬을 사용해 눈앞에서 사라졌다.
“생명이 위급한 사람들이 없어서 열매로 먼저 치료하라고 해도 서하가 더 믿을만하다면서 좀처럼 말을 듣질 않네요. 서하가 항상 웃는 낯으로 자잘한 상처들도 치료를 해줘 버릇해서 그런 것 같아요.”
“하아….”
“그래도 서호가 가서 한 번 난리 치면 잠잠해질 거예요.”
아픈 게 싫다는 서하의 말이 머리를 맴돌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연이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진짜예요. 서호가 가서 말 한마디만 해줘도….”
서하는 아픈 게 싫다면서도 자잘한 상처들까지 모두 제가 떠안고 있었다. 태경이 내 어깨를 수고했다는 듯 툭툭 두드리더니 포탈 쪽으로 향했다. 조금 지쳐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서호는 이미 포탈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죄송해요.”
“아뇨. 지연 씨 탓이 아닌걸요.”
고개를 살짝 끄덕인 지연이 다시 부상자들을 옮기는 백사 길드원들에게 합류했다.
“괜찮아. 서하 깨면 몰래 위층으로 도망가자. 위급한 사람들은 없다고 하니까.”
상진이 내 어깨 위로 고개를 묻으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이제 보스 잡아야 하니까 서호 도망가지 못하게 네가 잡아. 사람이 적을수록 난이도가 오르니까.”
“응. 수고했어. 이석아.”
“너도 수고했어. 상진아.”
어깨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린 상진과 눈을 맞췄다. 오랜만이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상진과 태경, 서하의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동료로서 같이 다니고 있었지만 이제야 온전히 그들과 동료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제일 강하니까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서로 아끼고 의지하고 믿어주는 이런 동료는 어디에 가서도 보기 힘들 것이다. 나를 보는 상진의 따뜻한 눈빛과 오른쪽 볼에 약하게 팬 보조개에 심장이 두근두근 기분 좋게 고동쳤다.
“이제야 좀 강이석 같네. 기다렸어.”
“뭐?”
“던전에서 나오고부터 나 너 강이석 아닌 줄 알았잖아. 표정부터가 달라서.”
“내가 그랬었나?”
“어. 말도 못 하게 무서웠는데. 꼭 내 등짝 때리기 전에 화난 표정이었어.”
“야!”
짝 소리가 찰지게 허공을 빙빙 돌고 사라졌다. 등짝을 맞아도 상진은 좋은 듯이 웃었다.
“이래야 강이석이지. 안 그래?”
“어. 안 그래! 이리 와!”
“아! 그만! 아야! 이제 그만 때려!”
“싫어! 싫어!”
“진짜 아파! 마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쇤네가 잘못했어요!”
“장난 좀 그만해!”
“싫어! 싫어!”
“따라 하지 마라?”
“싫어! 싫어!”
“야!”
“빨리 가서 씻자. 먼지랑 피 때문에 찝찝하잖아. 어때 알몸수영 내기! 내가 진짜 얼마나 서운했는 줄 알아? 왜 태경이 형하고만 내기해서 소원 들어주기 하냐? 빨리 와! 내기해야 하니까!”
상진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포탈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던 지연이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올렸다.
“지연 씨!”
내 입에도 지연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곧 지연의 입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난 후엔 그 웃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표정이 굳어졌다.
‘구경 가도 돼요?’
나는 지연을 외면한 채 그대로 포탈에 몸을 실었다. 지연이 제발 따라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이석의 머리 위에서 삐가 방방 뛰었다. 마치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크르르.
쿠아아앙!
흡혈귀처럼 길고 뾰족한 이빨을 단 곰처럼 생긴 몬스터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손톱을 달고 사람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제 몬스터를 잡는 데 제법 능숙해진 사람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서로 협공하며 녀석들을 하나둘 쓰러트리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떨어졌던 초반처럼 처음 보는 몬스터의 모양새를 겁내지도 않았다.
“어이! 제발 뒤 좀 확인하라니까? 죽고 싶어?”
“사람이 참, 말을 해도 그렇게 하면 어째!”
“아휴, 나는 왜 그게 안 될까. 나도 답답하다 답답해!”
“40층에 도착하면 제대로 훈련하자. 도와줄 테니까 지금은 최대한 노력해봐. 알겠지?”
“오케이! 고마워.”
층을 오를수록 사람들의 몬스터를 잡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강해지는 속도도 빨랐지만 사람이 강해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조금이나마 다행인 부분이었다.
“치사하게 나랑은 내기도 안 하고 수영도 안 하고. 진짜 서운하다, 강이석. 나한테 너무 소홀해졌어. 힘들어 보여서 참았었는데, 참기만 하니까 날 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제발 좀 그만해. 내가 언제 널 신경 안 썼다고 그래? 누구보다 신경 쓰고 있어!”
“조금 서운합니다. 이석 씨. 저도 더 신경 써주세요.”
“형! 지금은 나를 가장 많이 신경 써주고 있는 거죠?”
멀리서 몬스터를 잡고 있던 태경이 어느새인가 가까이 다가와서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서하는 내 당부대로 내 옆에 꼭 붙어있었는데 태경의 말에 슬쩍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니, 형! 형이랑 서하는 또 왜!”
“나랑은 내기도 안 하고 수영도 안 하고… 태경이 형을 더 신경 쓰는 거지? 내가 널 더 오래 알았는데. 누구보다 내가 가장 너를 많이 아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상진이 몬스터의 공격에 뒤로 한 발짝 밀려났다. 순간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제발! 알겠어. 40층에 도착하면 수영하자. 내기 걸고. 됐어?”
나는 몬스터의 목을 가르면서 상진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고구마 한 개를 입안에 모두 넣고 씹다가 삼키는 것만큼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아무리 강해졌다지만 사람들이 잔뜩인 곳에서 제대로 싸우지 않고 투정을 부리니 그렇게 서운했나 싶다가도 억울했다. 혜진과 지연, 혜연이 이환까지 데려와 앞에서 구경 중인데 도대체 누가 알몸으로 수영시합을 할 수 있었겠냐! 잔뜩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어리둥절해하는 이환을 빼고 잔뜩 시무룩해하던 그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내 확답에 상진이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밝아진 목소리를 냈다.
“좋아! 약속한 거다?”
“어.”
상진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발톱을 달고 공격하는 몬스터를 피해 빙그르르 돌면서 웃었다.
“약속?”
“알았다니까! 약속! 새끼손가락까지 걸어야겠어? 지금 이 상황에?”
“걸어주면 안 돼? 잠깐이잖아.”
“야! 빨리 안 싸워! 사람들한테 몰려가는 거 제대로 안 막으면 죽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다 잘 잡고 있었어.”
상진은 그 후로도 몇 번씩이나 되물어 등짝을 얻어맞고서야 제대로 몬스터를 잡았다. 설렁설렁하던 상진의 팔이 힘을 되찾고 휘둘러지니 뭉쳐있던 몬스터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흐느적거리며 상진의 주위를 날아다니던 검들도 힘을 되찾고 쌩쌩하게 움직였다. 그 뒤에서 서하가 상진에게는 들리지 않을만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끼워줘야 해요?”
“선배. 나도 잊으면 안 돼요. 내가 또 한 수영하지! 내가 이기면 아주 어마어마한 소원을 빌 거니까 각오해요. 선배!”
어떻게 들었는지 멀리서 스킬까지 써가며 다가온 서호가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간지러움에 목을 웅크리며 서호를 피했다. 상진이 몬스터를 잡으면서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딱히 큰일이 없어도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43레벨이 되어 특성이 강화됩니다.]
[43레벨이 되어 능력치 확인이 가능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37층까지 오르면서 이미 레벨이 많이 오른 상태였다.
[lv. 43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성장한계치+2]
[경험치: 66퍼센트]
[체력: 834(+40)]
[근력: 830(+38)]
[마력: 978(+35)]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2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5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독 내성- 15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최대)]
[point: 0(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 레벨은 좀 어때요? 이제 위로 올라가도 될까요?”
“네. 올라가도 될 것 같아요. 이제 레벨이 제일 낮은 사람도 32레벨이니까요. 이석 씨 능력치는 잘 분배했어요?”
“네. 레벨이 올라서 능력치를 올리니까 개운하네요.”
“그럼 서둘러서 올라가죠.”
이제 막 25층이 사라졌다. 75일 후면 30층도 사라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층을 올라야만 했다. 우리가 살인자집단과 싸운 후 층을 오르기로 결정한 날, 누군가 34층의 보스를 잡아서 35층의 휴식층이 확보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35층을 지나 39층의 보스를 잡고 40층까지 쭉 오르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항상 보스를 처음 잡았던 것은 나와 내 일행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스를 잡았다는 것이 어색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기도 했다. 같이 싸울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죠!”
우리는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층을 올랐다. 이대로라면 다 같이 보스가 있는 맵에 도착해 낮은 난이도로 보스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두진이 사라지고 어쩐지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만 같았다. 마음의 결정도 내렸으니 이제 다 같이 폭풍 성장을 해서 꼭대기 층의 보스 몬스터를 잡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아!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숲속에서 사람이 한 명 튀어나왔다. 거친 숨을 내쉬며 커다랗게 뜨인 눈이 그 사람의 현재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놀라 두 눈만 크게 뜨고 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인 그 남자가 정확히 내 앞에 엎어졌다. 사람이 보여서일까 기절한 것 같았다. 그 뒤로 나타난 몬스터가 쓰러진 사람의 허벅지에 손톱 하나를 박아넣었다.
“끄으으!”
쓰러진 사람이 고통에 신음하며 눈을 떴다.
“으아아아! 아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당황한 것도 잠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의 목소리에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촤아악!
몬스터가 정확히 두 갈래로 갈라져 아슬아슬하게 밑에 쓰러져있던 사람의 양옆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쿠웅!
“헉! 허억, 헉.”
놀란 듯 크게 뜨인 눈과 내 눈이 딱 마주쳤다.
“가, 감사….”
툭.
나를 향하던 그의 고개와 손이 형편없이 툭 하고 바닥에 그대로 떨어졌다. 얼떨떨했지만 부상을 입은 사람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대화하던 혜진과 함께 그 사람을 부축했다.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14. 다시 시작된 생존 시험과 서하의 실종
“이상한 세계가 왜 자꾸만 더 이상해지냐고!”
빠르게 움직이는 나와 몬스터가 충돌하며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이 저마다 손을 들어 귀를 막을 정도였다.
투아아앙!
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몬스터의 뱃가죽이 곧 떨어질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붙어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음에도 사람들은 동그랗게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검은 안개가 내 몸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물론 그 사실만으로 사람들이 나를 경악한 눈으로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살갗이 울룩불룩 제 모양을 잃고 요동치고 있었다. 그 느낌이 몹시 이상했다. 내 뒤에 있는 몬스터는 검은 안개에 둘러싸여 피거품을 내뿜으며 쓰러졌다.
쿵!
몬스터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렸다.
[독의 등급을 파악하는 중입니다.]
[등급을 알 수 없는 독 기운에 둘러싸였습니다.]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등급을 알 수 없는 독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예외였다. 갑자기 모든 것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기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태경이 형, 저 연기, 형이 쓰는 스킬이랑 같은 거 아니에요?”
가만히 굳어 있는 사람들 틈에서 서하가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런 것 같은데….”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태경의 목소리 사이로 내 목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그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동요가 잠시 일었다.
“목소리 말로는 이 안개가 등급을 파악할 수 없는 독이라는데.”
“등급을 파악할 수 없는 독?”
“태경이 형. 형이 사용하는 검은 안개가 독이었어요?”
“나도, 나도 몰랐습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게 독인지 아닌지. 안개가 그냥 기력을 뺏는 거라고만….”
태경이 자신도 의문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제 밝혀졌네요. 그러니까 내 선배 옆을 둘러싸고 있는 저 연기 좀 어떻게 해보시죠? 우리 예쁜 선배 피부를 망치고 있잖아요!”
서호가 태경을 바라보며 소리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경이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겨왔다. 자신이 사용하는 안개와 같은 독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태경은 너무도 쉽게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급하게 입을 열었다.
“형.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혹시 모르니까.”
그 모습을 보던 상진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연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몬스터한테서 나온 거 아니었어요?”
“자기가 내뿜은 연기에 자기가 죽을 리가 없잖아.”
“그렇기는 한데….”
“도대체 뭐야. 이거?”
문제가 발생했다. 내 몸과 몬스터의 주위에만 잔뜩 흩어져 있던 연기가 급속하게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 어! 안개가 퍼지잖아!”
“어떻게 된 거야!”
“다들 뒤로! 안개에 닿지 않게 조심해!”
사람들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안개에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거나 뒤로 달아나고 있었다. 상진이와 서하, 서호도 연기가 자신에게 닿지 않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며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았다. 독에 중독된 탓인지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 근처까지 다가와 있던 태경은 이미 한참 전에 안개에 둘러싸인 채였다.
“태경이 형. 형이 스킬 사용한 거 아니죠?”
“사람의 기력을 빨아먹는 스킬은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됐습니다.”
“형은 안개에 닿아도 중독되지 않네요?”
“이상하게도 그렇네요.”
태경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안개를 보며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관통하는 생각에 나는 크게 소리쳤다. 태경이 형에게는 소용이 없고 힘이 빠져나가는 효과가 있는 독이라면.
“위로 올라가는 입구! 빨리 입구 찾아요! 어서!”
태경이 형의 스킬이 사람의 기력을 뽑아먹는 것이었으니, 이 안개 또한 다를 것이 없었다. 상진이가 말한 것처럼 몬스터가 스스로 사용한 스킬로 인해 죽을 리가 없었다. 태경이 이 안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면 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뼈저린 체험을 통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태경이 형, 아까 그 기절한 남자는 지금 어디 있어요?”
“기절한 남자는 아까 혜진 씨가 데리고 있었는데.”
혜진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지시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주변 어디서도 그 기절한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혜진 씨! 그 남자 어디 있어요? 지금 누가 데리고 있어요!”
내 말에 혜진도 당황한 듯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가 몹시도 당황한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깨어난 거라면 안개를 피해서 도망간 것 같은데. 어어!”
“으아아아아!”
“끄아악!”
“안 돼! 안 된다고!”
혜진의 목소리 뒤로 산발적으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의 주인은 빠르게 퍼지고 있는 안개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피부가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오며 징그럽게 요동쳤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은 더욱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괜찮아요. 중독된다고 바로 죽지 않으니까!”
그런 그들을 향해 소리쳐도 아무도 듣지 않았다. 아니 공포에 빠져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서하가 이를 한 번 악물더니 안개에 갇힌 사람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상진이 그런 서하를 말리려고 했지만, 서하는 고개를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웃었다.
“나는 괜찮아요.”
사라진 남자를 찾느라 그런 서하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아픈 게 싫다던 서하는 그럼에도 언제나 사람들을 위해 나섰다. 그런 서하를 신경 쓰지도 못하고 남자를 찾아 나섰지만, 한참이 지나서도 남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안 보이잖아!”
“이석 씨는 이 안개를 그 남자가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 말고는 달라진 게 없잖아요. 그것 말고는….”
“그 남자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럼 그 남자는 왜 사라진 거예요? 말이 안 되잖아! 형도 알잖아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 사람 말고는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당장 그 사람을 찾아서!”
“이석 씨. 나도 알아요.”
“아니면 형이 그런 거예요?”
조급한 마음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쏟아내 버리고 말았다.
태경이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석 씨가 너무 흥분해있는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 흥분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 이석 씨도 잘 알잖아요.”
“미안해요.”
내 사과에 태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레이의 생존 시험이 시작됩니다.]
[해독제를 찾아 복용한 후 위층으로 올라가세요.]
[시험을 견뎌내는 자들만이 진정한 유레이에 남을 자격이 주어집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11:59:59]
“시험, 시험이라고? 어째서 37층이나 올라와서 다시 시험이….”
“일단 해독제부터 찾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지만 카운트다운이 있는걸 보니 안개에 중독되면 12시간 후에는 죽는다고 보면 됩니다.”
“네. 해독제부터 찾죠. 일단 애들이랑 같이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우리는 상진이와 서하, 서호가 같이 있던 장소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형. 아까는 정말 미안해요. 내가 흥분해서….”
“괜찮습니다. 그래도 그 남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네요. 이석 씨.”
“그러네요.”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의문이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모든 것이 의문 속에 있었다. 그 남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안개 속을 걸었다. 얼마간 말을 걸던 태경도 조용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걸으면 걸을수록 안개가 더욱더 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쯤 상진이와 서하, 서호가 있는 장소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보네요. 이석 씨.”
“너….”
“보고 싶었어요. 이석 씨는요?”
답이 없는 나를 향해 그가 아주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빨간 입술을 열었다.
“이석 씨 반응이 너무 서운한데요? 내 얼굴은 좋아했잖아요. 이석 씨.”
아름다운 남자가 나타나자 삐가 푸다닥 날갯짓을 하며 남자에게로 날아갔다. 남자는 웃는 얼굴로 삐의 안부를 물으며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삐가 그에 대답하듯 삐삐하며 울었고 남자가 삐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아름다운 남자와 삐는 서로 대화가 통하는 듯한 모습에 무언가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삐가 참 잘 지내고 있었나 보네요. 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에요.”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있기를 잠시 아름다운 남자에게 물었다.
“뭐야. 또 날 만나려고 꿈에 들어온 거야? 난 지금 안개 속에 있다고! 안개 속에서 잠을 재운 거야?”
“아뇨. 재운 건 아니고 잠깐 이석 씨만 제가 있는 쪽으로 불러낸 거예요. 걱정 마세요. 여기서 나가면 다시 일행들이랑 다 같이 만날 수 있을 거니까.”
능글능글한 웃음을 짓는 녀석이었지만 일행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오랫동안 같이 있게 되는 것은 사절이었다.
나는 삐를 다시 돌려받으며 조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용건이 뭐야?”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해서요.”
아름다운 남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일?”
“네. 미쳐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대비책이 없거든요.”
“본론이 뭐야.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이석 씨가 그놈과 너무 일찍 만난 게 문제였을까요.”
아름다운 남자가 하얀 손을 들어 턱 끝을 손으로 문지르다가 이내 가는 손가락을 움직여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전혀 급한 기색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손짓에 가슴이 답답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졌음은 알 수 있었기에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목이 탁하고 막혔다.
“무슨 말이야! 그냥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고 끝냈으면 좋겠는데.”
“흐음….”
“무슨 일인지 그냥 좀 말해달라고!”
“…놈이 점점 밑에 있는 층까지 영향력을 늘리는 중이라고나 할까. 확인된 문제는 그거 하나가 아니지만. 어쨌든,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없어요. 이석 씨.”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아름다운 남자에게서 언뜻 살기가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켜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그때 본… 그 눈을 말하는 거지?”
“그럼 뭐겠어요.”
“지금 나타난 안개가 설마….”
“네. 이석 씨가 생각한 대로 그런 것 같네요.”
“그럼 시험은 뭐야? 시험은 밑에서 끝난 거 아니었나? 그놈이 만든 안개라면 왜 갑자기 시험을!”
“사실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급하게 만든 시험일 뿐이에요. 겸사겸사 조금 더 강해지라고 손을 쓴 거죠. 지금 상태라면 층을 오르다가 전멸할 테니까.”
“유레이를 만든 건 너희잖아! 몬스터 하나 관리 못 하는 거야?”
“아뇨. 유레이라는 공간과 시스템을 만든 거지 몬스터까지 저희가 만든 건 아니죠.”
“뭐?”
“몬스터는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들이었어요. 다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유레이를 만들어 잠깐의 시간을 번 것뿐이에요.”
“잠깐의 시간을 번 것뿐이라니?”
“우리가 약해지면 저들의 힘이 강해지겠죠. 그리고 이석 씨에게 힘을 전달하면서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최소한의 힘만 남겨뒀거든요.”
“시간은 얼마나 부족한 거야?”
“대략, 여섯 달 조금 넘게 남았었죠. 그런데 이 시간도 지금 급하게 시험을 만드느라 줄어들었어요. 이제 정확히 넉 달 남았네요.”
“그 뒤는? 저놈들이 우리가 살던 곳으로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답을 알잖아요. 이석 씨.”
“하! 그 환영이 정말… 정말로….”
“이제는 정말 모든 게 이석 씨와 유레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달렸어요. 남은 시간 동안 있는 힘을 다해 싸우고 강해지세요.”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지금까지도 내가 얼마나!”
“아뇨!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이석 씨에게 삐를 만들어 준 이유는 목표를 가지고 더욱 노력해서 강해지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내 예상이 빗나갔네요. 이석 씨는 그 이후로 너무 여유로웠어요!”
아름다운 남자가 소리치는 내 말을 끊고 흥분한 듯이 말을 다다다 내뱉었다. 처음으로 남자가 흥분에 차 침을 튀겨가며 얘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항시 침착한 모습을 보이던 사람이었기에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게 되자 그의 조급함이 느껴져 절로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러라고 우리가 영혼을 걸고 이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이석 씨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지키지 않으면? 다 죽는 거죠.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물론 이석 씨 일행도 전부 몰살이에요. 한두 명의 목숨이 아니라 모두의 목숨이 달린 일이죠. 다 죽으면 그 죄책감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석 씨는 죽어가면서까지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몸부림치면서 죽어갈걸요?”
“나에 대해서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 네가 안다고 생각하는 나는 네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니까! 게다가 넉 달 동안 강해져 봤자 내가 그놈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때 팔 한쪽도 네가 힘을 빌려줘서 상대할 수 있었던 거잖아!”
“할 수 있어요. 이석 씨. 할 수 있다고요. 이석 씨가 가장 큰 희망인 걸 모르겠어요?”
아름다운 남자가 내게로 한걸음 다가왔다. 그의 표정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그가 영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아름다운 남자에게서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이석 씨!”
아름다운 남자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소리로 내 이름을 외치며 억지로 어깨를 부여잡고 눈을 맞췄다. 생각보다 강한 악력에 몸을 빼내지도 못한 채 고통에 가득한 신음을 흘리며 아름다운 남자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던전에서 겪었던 그때의 끔찍한 감각과 감정들이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조건! 이기라고요.”
“어떻게….”
“우리가 도와주고 있잖아. 안 그래요? 이석 씨?”
“하지만 그때 팔 하나 감당하는 것조차도 힘들었다고. 너도 알잖아….”
아름다운 남자가 쥐고 있는 어깨가 그때의 고통과 겹쳐지며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의 일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외면하고 있었던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극복했지만 그때의 고통이 너무 커서 초장부터 겁을 집어먹은 건가. 지금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제대로 인지가 되지 않았다.
“무조건 해독제를 찾아서 위로 올라가요. 급하게 만든 시험인 만큼 보상도 어마어마하니까요.”
“난… 나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 탓에 언어를 잊은 것처럼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아름다운 남자가 입을 다물고 더욱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댔다. 삐가 날갯짓을 하며 남자를 말리듯 움직였지만, 전혀 도움이 되진 않았다. 남자는 오히려 삐를 손에 움켜쥐고 조용히 하라는 듯 으름장을 놓았다. 남자와 나의 서로의 입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가 되자 남자는 입을 열었다.
“이석 씨. 가족을 생각해요. 이석 씨를 위해서 영혼까지 바친 가족을 떠올리라고요. 괴물보다는 먼저 이석 씨 가족을 생각하면 고통이 조금은 덜하지 않겠어요? 이대로 삐가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동훈 아저씨의 죽음이 헛된 것이었다면 좋겠어요?”
“뭐?”
“이석 씨. 이석 씨가 강해지지 못하면 그냥 이석 씨 가족이나 나나 개죽음당하는 거예요. 응? 유레이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데려오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지 알아요?”
“윽!”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뒤쪽에서 뻗어온 손에 나는 그만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거기까지 하지? 미주알고주알 이놈한테 다 떠들 셈이야?”
“난 분명히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랬지. 그런데 지금 네가 하는 꼴을 봐. 내가 안 나타났으면 어쩔뻔했니?”
나자빠진 상태로 올려다본 곳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아름다운 남자에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같은 영혼인 것 같았다.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까지 찌푸린 상태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야. 네가 들을 수 있는 건. 이제 네 일은 돌아가서 일행들과 함께 해독제를 찾아서 위로 올라가는 거야. 알겠어?”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대로 이석 씨를 돌려보내겠다고?”
“그럼 뭐 어쩌자고. 자기 확신도 없는 상태로 설득당해서 억지로 층을 올라가봤자 거기서 끝이야. 어찌어찌 올라가기는 하겠지. 근데 그다음은? 개죽음이야. 네가 지금 뭐라고 얘기해봤자 씨알이나 먹힐 것 같아? 천만에. 이 꼴을 봐. 가여운 이석 씨.”
여자가 내가 불쌍하다는 듯 눈썹을 잔뜩 늘어트리며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남자가 날 한번 보더니 분에 받친 듯 숨을 크게 몰아쉬며 여자를 노려봤다. 하지만 여자는 전혀 동요하는 모습 없이 계속해서 내게 시선을 보냈다. 순식간에 늘어트린 눈썹을 정리하고는 날카로운 모습으로 돌아서서 입을 여는 여자는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너도 진짜 웃겨. 꼭대기까지 층을 올라서 다 이겨버리겠다고 마음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겁이 나나 보지? 네 가족의 개죽음을 봐놓고도?”
숨이 턱하고 막혀 목구멍 끝까지 찬 문장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여자를 노려보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여자와 아름다운 남자가 서서히 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네가 해결하겠다며? 퍽이나.”
여자가 뒤돌아서 사라지고 홀로 남아서 분을 참던 아름다운 남자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석 씨. 이석 씨는 틀리지 않았어요. 조심해요. 전부 다.”
“…언제는 이 세계에서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게 있었나? 너부터가 나한테 위험인물인데.”
“강해져야 해요! 무조건! 사람들을 지켜요!”
“하아….”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내 몸은 원래 있던 안개 속으로 돌아와 있었다. 영혼들끼리도 마음이 맞지 않아 싸우나 보지. 생각에 잠겨있는 찰나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과 해독제를 찾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절로 입 밖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젠장.”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라며 심호흡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상황이 꿈일 리는 없었지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상진이와 태경, 서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는 아까 미처 여자에게 말하지 못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겁나는 게 당연하잖아.”
아직도 층을 오르면서 처음 보는 몬스터를 만나면 무서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음이 오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무섭지 않은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리고 던전에서 마주쳤던 그 커다란 눈동자는 그중에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그때의 고통이 떠올라 손을 덜덜 떨자 삐가 나를 응원하듯 수선스럽게 어깨 위를 돌아다녔다. 영혼만 만나고 오면 이렇듯 가슴속에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는데 이 기분은 욕으로밖에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별로였다. 떨리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석아!”
어느덧 눈앞에 상진이와 태경, 서호가 보였다. 그들의 심각한 얼굴을 보니 이곳에도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문제가 없는 나날들이 더 이상한 거였다. 나는 복잡한 심경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이석 씨. 서하가 없어졌습니다.”
“어떤 새끼인지 몰라도 내 동생 손끝 하나 건드리면 죽여 버릴 거니까 이번에는 말리지 말아요. 선배.”
서호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름다운 남자가 했던 말이 귓속에 메아리쳤다.
‘이석 씨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지키지 않으면? 다 죽는 거죠.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물론 이석 씨 일행도 전부 몰살이에요.’
바로 옆에 있는 일행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마당에 모두를 지키라는 부탁을 받았다.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가 되고 싶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다시금 떨려오는 손 때문에 양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세상을 지킬 각오로 강해지겠다고 마음먹어야 주변 사람이나마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기가 더 쉬울 텐데.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 강해져서 모두를 지키자고 결심했을 때가 얼마 전인데 막상 세상을 지키라는 말을 들으면 절로 겁을 먹었다. 내가 무슨 세상을, 사람을 지킨단 말이야. 하면서 겁을 먹고 웅크리고 있다.
“이석아?”
상진이의 말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은 일단 서하부터 되찾아야 했다. 서하부터 지켜줘야 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서하 본 곳이 어디야?”
“아까 처음 중독된 사람들이 발생했을 때 거기서 본 게 마지막이에요. 서하가 워낙 사람들한테 의지가 되다 보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제가 말려도 말을 잘 듣질 않아서….”
내 뒤쪽에서 나타난 혜진이 잔뜩 가쁜 호흡으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서하를 찾아다닌 것 같았다.
“그놈들이 치료해달라면서 서하한테 매달린 건 아니겠지? 그놈은 좋다꾸나 하고 연신 사람들을 치료하고?”
서호가 흥분한 모습으로 혜진 앞으로 나섰다. 혜진이 그런 서호를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땅을 보며 사과했다.
“미안해, 서호야. 내가 사람들을 잘 통제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하다.”
서호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나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크게 말했다.
“서두르죠. 지체할수록 서하가 위험해지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혜진이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애써 그녀를 외면하며 혜진과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하가 사라진 것이 혜진 혼자만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혜진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연신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에게 내 죄책감을 모두 덜어내고 싶은 추악한 마음이 드러날 것만 같아서였다. 상진만이 그런 그녀에게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게 어떻게 쉽겠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서하는 강한 아이니까 잘 버텨주고 있을 거예요. 분명히 우리가 찾아낼 때까지 잘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죠?”
“네. 상진 씨.”
혜진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서둘러 움직였다. 그렇게 대답하는 혜진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내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옮기는 내 발걸음을 따라 혜진이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혜진을 따라왔던 백사 길드원들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상진이 내 뒤로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말하지 않아도 날 알아주는 친구는 상진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 새끼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잡히면 가만 안 둬. 가요! 선배.”
* * *
“악!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 새끼 정말 서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입구 찾아서 올라간 건 아니겠지? 돌겠네. 진짜.”
서호는 중독되어 능력을 사용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자신의 능력을 쉬지 않고 사용하며 서하를 찾고 있었다. 무심한 척해도 동생을 걱정하는 형이기는 했던 것 같았다.
[09:00:59]
벌써 3시간이나 흘렀지만 서하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조급함 때문인지 안개 때문인지 호흡이 조금 가빠지고 시야가 흐렸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서하의 흔적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미세한 흔적조차 안 보여.”
“안개 때문에 시야가 좁아서 더욱 흔적 찾는 게 힘든 것 같습니다.”
상진과 태경이 번갈아 얘기했다. 서호는 아직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곁에 없었다.
“만약 서하를 데려간 놈이 해독제를 찾아서 위로 올라간 거라면… 아니, 그러면 다행이지만 서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위로 데려간 거면 그러면 어떻게 해? 서하니까 당연히 치료할 수 있겠지? 그런데 만약에 치료가 안 된다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해?”
내 말에 상진과 태경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그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길드원들 몇 명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일단 저희는 해독제를 찾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지금 발견한 해독제에 비해서 길드원 수가 월등히 많아요. 이대로라면….”
나와 상진, 태경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우리의 침묵이 자신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그것으로 생각한 듯 다른 길드원이 가까이 다가와 우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해독제가 생각보다 발견이 어렵자 점점 조급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오리란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우리가 살아야 위에서 서하를 찾을 기회라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서하를 찾고 있는 길드원들을 해독제를 찾는 팀에 합류시키려고 해요.”
그렇게 말한 길드원들은 자기합리화를 하듯 잠시 우리에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다가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침통한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우리가 층을 올랐을 때 정말 서하가 거기에 있을까요?”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그들의 말처럼 서하 때문에 그들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지키라는 영혼의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 메아리쳤다. 나는 결국 그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일단 해독제를 찾아요. 해독제를 찾아야 서하를 찾든 말든 할 테니까.”
“선배!”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서호가 배신당한 비련의 주인공처럼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서호의 표정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지금 저 사람들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 서하는?”
돌덩어리를 달아놓은 듯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서호에게 말을 꺼냈다.
“서하를 데려간 사람. 분명히 서하가 필요해서 데려간 걸 거야. 그럼 서하 해독제까지 찾아서 같이 올라가지 않겠어? 일단 길드원들을 위해서 먼저 해독제를 찾고….”
“선배. 내가 말했잖아요. 착한 것도 정도 것이어야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 처음으로 선배 얼굴이 안 예뻐 보이네?”
“서호야. 장난하는 거 아니야. 우리는 계속 서하 찾아다닐 거야. 안 찾는다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길드 사람들이 서하만 찾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서하한테 도움받을 때는 언제고 지금은 자기 목숨 챙긴다고 해독제만 열나게 찾고 있어요. 시늉만 내고 있었다고. 알아요?”
“서호야.”
“아, 선배도 지금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구나? 그렇죠? 와! 우리 선배 이렇게 여우 같을 줄 몰랐는데 대박이네요? 역시 선배는 존나 매력적이네요.”
길드원들이 눈치를 보다가 서호를 피해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서호가 흥분해 계속해서 거칠게 몸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서하 데려간 새끼가 서하만 있으면 해독제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위로 올라갔는데, 이 독이 만약 서하가 해독할 수 없는 거라면요? 우리가 서하를 너무 늦게 찾아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뒤엔 지금 선배가 한 말 책임질 수 있겠어요? 최소한 길드원들이 서하 찾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돌아다니게는 해야죠!”
상진이 내 앞으로 나서며 흥분한 서호를 막아섰다.
“당연히 우리는 서하 먼저 찾을 거야. 서하를 찾으면서 서하가 복용할 해독제도 추가로 찾을 거고.”
“지금 그 말 후회하지 마세요. 저 길드 사람들은 서하가 치료해준다고 할 땐 얼씨구나 하면서 달려들더니 제 목숨 위험하니까 길가에 쓰레기 버리듯 버리네요? 선배는 사람들 구해줘야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서하한테는 미지근하고. 그렇죠? 선배.”
서호가 거칠게 뒤돌아서며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이석 씨.”
태경이 옆에서 내 어깨를 잡아 왔다. 상진도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내가 걱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은 서하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서호의 말이 맞았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의 나는 서하를 찾는 것을 너무 미적거리고 있었다. 최대한 서둘러서 37층 전체를 꼼꼼히 뒤져봐야 했다.
“난 괜찮아. 서하가 걱정이네. 너희도 빨리 해독제 찾아서 복용해야 할 텐데. 지금까지 찾은 해독제는 다 길드원들 줬잖아. 다음에 찾은 건 일단 태경이 형이랑 상진이 너부터 복용하는 거로 하자.”
“저는 독에 중독되지 않았습니다만…. 이석 씨가 걱정해줘서 기쁘네요.”
“아,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형. 그럼 다음에 발견한 해독제는 상진이가 복용하는 걸로 하자.”
“영광이네요. 이석 왕자님. 이왕이면 이석 왕자님께서 입으로 먹여주셨으면 좋겠는데.”
“실없는 소리하지 마. 지금 그럴 상황 아닌 거 알잖아.”
“네가 너무 울 것 같은 표정이라서 장난 좀 친 거야. 이석아. 알잖아. 네 잘못 아니야. 서하 반드시 찾을 수 있어. 그렇게 쉽게 안 잃을 거야.”
“빨리 찾자. 나는 저쪽으로 가볼게.”
상진이의 말에 대답을 회피하며 입을 열자 잔뜩 갈라진 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든 나쁜 생각처럼 잔뜩 일그러진 목소리였다. 정말 내 잘못이 아닐까.
“저쪽이 우리가 아까 살펴보려다가 못 본 곳인 것 같습니다. 상진이와 저는 저쪽으로 가보겠습니다.”
“네.”
여전히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듣기 나쁘게 끼익거리는 채였다. 시간이 흘렀다. 점점 진해지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미아가 되는 기분이었다. 서하도 서하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살던 곳이라면 전화 한 번으로 해결될 일이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생사의 문제까지 달려 있다 보니 더욱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남아있는 시간을 보니 더욱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02:33:43]
“어떻게 해! 해독제 시간 맞춰서 다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턱도 없을 것 같은데.”
“미치겠네. 남은 사람들 어느 정도나 돼?”
“삼 분의 일이나 남았어. 문제는 해독제를 찾는 것보다 지금은 마시기 전까지 지키는 게 문제야.”
해독제를 복용하지 못한 사람들이 조금씩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직 길드원들은 싸움까지는 나지 않았지만, 길드원이 아닌 사람들은 벌써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 중이었다. 해독제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발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발! 제발 해독제 하나만 주세요! 제 아이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제발요!”
사람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저마다 해독제를 가진 사람을 붙들고 늘어졌다.
“내놔! 내놓으라고!”
“아악! 이거 놓지 못해!”
“뺏어! 뺏으라고!”
해독제를 들고 있는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거나 억지로 그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로 온통 난리였다. 그중에는 해독제를 여러 개 찾은 사람이 장사하고 있기도 했다.
“어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검, 좋아 보이는데 어때? 이거랑 바꿀까?”
“이리 내놔!”
“어어! 이 새끼가!”
하지만 그 장사도 해독제를 폭력적으로 뺏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녹록하지는 않았다. 길드원 중 몇 명도 그런 이들에게 당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안개 속은 점점 아수라장이 되기 시작했다.
길드는 결국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해독제를 복용한 사람 중에서 약한 일부의 사람들만 이미 발견해두었던 입구로 올려보냈다. 해독제를 찾아야 해서 소수의 인원만 올려보냈을 뿐인데도 그 수에 따라 해독제를 발견하는 속도가 더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급해져 조금씩 불안에 떠는 사람 중에는 나도 있었다.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서하 때문이었다. 해독제는 진작에 찾아서 복용하고 서하의 몫까지 찾았지만, 서하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그렇게 계속 초조하게 흘러갔다.
[00:59:21]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길드원들이 해독제를 찾아 복용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찾은 해독제는 길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줄 수 있었지만, 이제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서하의 것 하나는 남겨놓아야 했다. 그때 안개 속에 어린 소녀의 형체가 보였다. 서럽게 울고 있는 엄마의 품에 안겨서 오히려 엄마를 위로하고 있는 소녀였다. 나는 그쪽의 상황이 보일 만큼 조금 더 다가갔다.
“엄마. 괜찮아. 들키기 전에 엄마부터 빨리 마셔.”
“서이나! 어서 마셔. 이러다가 이것도 뺏기겠어. 빨리. 엄마는 곧 하나 더 찾을 거니까 괜찮아.”
“엄마. 빨리 마셔!”
아이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아이의 엄마 뒤에서 험상궂은 인상을 한 남자가 나타나 웃음 지었다.
“해독제 가지고 있지?”
그런 남자에 맞서 아이가 엄마를 보호하며 앞에 섰다. 아이는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노려보았지만, 남자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아이의 뒤에서 엄마가 서둘러 해독제 뚜껑을 열고 자신의 입에 집어넣었다.
“어어! 저년이 어디서!”
남자가 그 모습을 보고 아이에게 무기를 휘두르며 서둘러 공격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가 해독제를 다 마실 때까지 필사적으로 남자를 막아내고 있었다. 화가 난 남자가 결국 아이의 목에 검을 겨누는 순간 나는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 하세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요? 이제 50분밖에 안 남았는데.”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한 손으로 검날을 쥐고 이야기하자 남자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뒷걸음질 쳐 도망갔다. 아이가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아이에게 해독제를 건넸다. 아직 50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태경과 상진도 있으니 해독제 하나 정도는 더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앞에 있을 때 빨리 마셔. 다른 사람들이 뺏기 전에.”
“오빠는요?”
“난 이미 마셨어. 괜찮으니까 빨리. 시간 없어.”
“감사합니다.”
고맙다며 내게 연신 허리를 굽히는 엄마를 보던 아이가 서둘러 해독제를 입에 넣었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애써 못 본 척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고맙다고 말하는 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그 뒤로 서호의 화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선배는 사람들 구해줘야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서하한테는 미지근하고. 그렇죠? 선배.’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그게 아닌데. 정말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데. 일행이 그 누구보다 소중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이제야 영혼이 날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어정쩡한 내 모습이 그들의 구미를 사로잡았으리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해독제를 구하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한가득 남아있었다.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00:31:45]
남은 시간이 30분가량 남았을 때까지도 우리는 해독제를 찾지 못했다. 이게 아닌데. 손에 땀이 차올랐다. 주변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전염되어 나까지 손에 식은땀이 차오르며 덜덜 떨렸다. 태경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모두 흥분해 태경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안도감과 함께 죄책감과 무서운 마음이 공존했다.
“서하 흔적 찾았습니다!”
태경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자 태경이 손에 서하의 옷가지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호가 흥분한 채로 옷가지를 태경의 손에서 가로챘다. 그 뒤로 내가 물었다.
“어디서 찾았어요?”
“여기 나무들 틈에서 찾았습니다. 운이 나빴으면 못 찾을 뻔했어요.”
태경이 말한 곳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입구 뒤에 있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뒤엉켜 있는 곳의 사이었다. 주저앉아서 살펴보지 않으면 모를만한 그런 곳이었다.
“이 자식 숨어 있다가 몰래 위로 올라갔나 본데? 뒤졌어. 선배. 저 먼저 올라가요!”
밝아진 목소리로 서호가 말릴 새도 없이 위층으로 향하는 입구에 몸을 날려서 사라졌다. 한 손에는 이곳에서 찾은 해독제 한 병이 들린 채였다. 멍하니 서호의 손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데 혜진이 다행이라며 옆으로 다가왔다. 혜진은 아직도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들 해독제 복용했어요? 그럼 어서 서호 따라서 올라가 보세요.”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포즈에 내가 의아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그녀의 팔뚝이 울룩불룩하게 뒤틀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해독제 복용 안 했어요?”
“저는 괜찮아요. 이제 찾아서 복용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아직 길드원들이랑 찾을 시간 있어요.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남은 시간을 확인해봤지만 그렇게 많은 시간은 아니었다.
[00:22:34]
“지연 씨랑 이환이는 해독제 복용했어요?”
“네. 둘은 이미 복용했어요. 길드원들도 이제 거의 다 복용했어요. 괜찮으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올라가 봐요. 서호 난리 치겠네. 그럼 위에서 봐요. 알죠? 정상에서 보기로 한 거.”
혜진이 급하게 등을 돌려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따라가려는 날 붙잡은 건 상진이었다.
“이석아.”
“상진아.”
“괜찮을 거야. 혜진 씨가 결정한 일이야.”
“하지만.”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올라가자.”
혜진 씨가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던 나는 결심을 내리고 위로 올라가는 입구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38층입니다.]
“이석 씨!”
“아, 네?”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에 38층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형. 저는 괜찮아요.”
과연 내 목소리가 맞는지 잔뜩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 내 목소리를 들은 상진이 태경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데리고 옆쪽 나무 둥치로 빠져나왔다. 태경은 망을 보듯 옆으로 빠져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서하 찾아야 하는데.”
“이석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상진이 내 팔을 잡아 오며 자신의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런 그의 팔을 빠져나오며 대답했다. 그러자 상진이 더욱 강하게 나를 자신의 앞으로 잡아당겼다. 억지로 상진이와 눈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상진이 처음 보는 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강이석. 좀 더 이기적으로 굴어. 넌 좀 더 이기적이어도 돼.”
“무슨 말이야?”
“난 네가 다른 사람보다 널 더 생각했으면 좋겠어. 네가 날 생각하는 것보다 널 더 생각하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난 지금도 충분히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 충분히 이기적으로 굴고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기 싫으니까 사람들을 구하라는 말에 겁부터 집어먹는 것이다.
“네가 이기적이면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너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야. 이석아. 넌 더 이기적으로 굴어도 돼.”
“그렇게 얘기하는 저의가 뭐야? 지금 나한테 서하는 포기하고 해독제 찾아서 복용하고 위로 올라가자는 거야?”
“이석아. 네가 도저히 못 하겠다면 힘들다면 그런 결정 내려도 된다는 거야. 물론 지금 서하를 포기하자고 말하는 건 아니야. 당연히 찾아야지. 우리 동생이고 가족이고 동료인데 어떻게 그냥 내버려둘 수가 있겠어?”
“그럼 왜 그렇게 말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뭘 해야 하는데!”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쳤다. 머리가 아팠다.
“강이석. 서호가 어떤 애인지 알잖아? 서호도 다른 사람 죽이거나 죽는 걸 봐도 꼼짝 안 하는 애야. 그런 애가 자기 가족 사라졌다고 날뛰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상진아. 나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가, 이해를 못 하겠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상진이의 목소리에 마음속에 있던 조그만 불씨가 크게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몸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그런 나를 보던 상진이 다시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야. 서호도 마찬가지고. 나도 그렇고 태경이 형도, 혜진 씨도, 지연 씨도. 그리고 이환 씨도….”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 자기 해독제도 안 찾고 서하 하나 찾겠다고 돌아다녀? 그럼 동환 아저씨는? 아저씨는 얼마나 이기적이길래 죽은 건데?”
“이석아!”
“서하 찾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잖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이석아 조금 내려놔. 어쩔 수 없었다고. 그때는 누구나 그런 대답을 했을 거라고. 합리화 조금 하면 뭐 어때.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면 된 거야.”
“아니, 아니야. 상진아. 난 지금 누구보다, 그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서하나 서호 때문이 아니야. 그냥, 이건….”
지금 이 일이 부수적인 문제라고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 불씨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꺼졌다. 고개를 푹 수그리자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서하의 문제는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사람들을 지켜주는 영웅이 될지 고민하기 이전에 서하의 목숨이, 서하의 안전이 더욱 중요했다. 그래, 그게 더욱 중요한 사실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메고 있는 돌덩이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고 있지 못했던 거였다. 내가 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짓눌려 정작 코앞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또 잃을 뻔했다.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내가 강해지지 않는다고 이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게 아니었다. 모두 같이 강해져서 힘을 합쳐야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조금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아팠던 머리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상진아. 사실 나 영혼들을 만났어.”
나는 상진이에게 내가 지금껏 짊어지고 있었던 짐을 털어놓기로 했다. 내 얘기를 들은 상진이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아 왔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껴안고 있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상진은 그렇게 계속 나를 껴안고는 귓가에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언제나 문제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쉽게 풀리기도 했다. 그렇게 있던 중 문득 궁금했다. 그래서 상진이의 품에 안긴 채로 질문했다.
“네가 누구나 이기적인 생각을 한다고 말했잖아. 너는 무슨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
“비밀인데.”
“그래. 더 물어보지 않을게.”
“뭐야. 시시하게. 난 네가 더 물어봐 주길 기다렸는데.”
“그럼 말해줘.”
“그냥, 네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만 생각해줬으면 하는 생각 같은 거랄까.”
“뭐야, 그게.”
상진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빠르게 뛰는 상진이의 심장 소리 때문에 웃음이 튀어나온 것도 같았다.
“겨우 그 정도로 이기적이라고 한 거야?”
“세상을 구할 힘을 가진 사람이 오직 나만 생각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게 이기적인 게 아니야?”
상진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과장되게 말하며 예쁜 보조개를 피워내면서 웃었다. 나도 그런 상진을 마주 보며 웃었다.
“충분히, 이기적인 것 맞네.”
잠시 상진의 품에 안겨 안정을 찾던 나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물론 뒤쪽에서 느껴지는 태경의 뜨거운 시선 때문이었던 것도 맞다.
“태경이 형한테도 말해야겠지?”
“네가 원한다면.”
상진을 잠시 보던 나는 태경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완벽한 동료가 된 것만 같았다. 얘기가 모두 끝난 내 옆으로 상진이 다가와 깍지를 껴왔고 나는 그런 상진이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서하 찾으러 가야지.”
“그래. 빨리 가자. 서하 찾으러.”
[시험에 통과하여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능력치 300개, 최상급 회복포션 하나와 성장 한계치가 3 오릅니다.]
[경험치가 지급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특별 보상으로 위치 찾기 아이템이 지급됩니다.]
“이것 봐. 보상 들어온 것도 우릴 도와주는 것 같네.”
상진이의 목소리를 이어 태경이 나를 보챘다.
“빨리 갑시다. 늦으면 서호가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요.”
그래, 지금은 서하를 찾아야 할 때였다. 심장이 고동쳤다. 다른 생각보다 지금은 서하를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혜진은 혜진의 말대로 정상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가죠.”
조금은 숨통이 트인 나는 손에 쥐어진 네모난 주사위 모양의 물건을 바라보았다. 최상급 회복포션도 전에 받은 것을 사용하지 않아 2개나 되었다. 이곳에서는 목숨을 2개나 가지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것만 있으면 서하를 찾을 수 있겠지?”
“일단 그 전에 회복포션은 잘 챙겨두고 능력치 먼저 분배하죠. 서하를 데려갔을 정도면 만만치 않은 놈일 테니까요.”
“자! 서두르자. 시간이 없어.”
[lv. 46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성장한계치+5]
[경험치: 91퍼센트]
[체력: 934(+40)]
[근력: 930(+38)]
[마력: 1,078(+35)]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3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5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독 내성- 15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최대)]
[point: 480(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체력과 마력을 1,000으로 맞추고 나머지는 모두 마력에 투자하기로 했다. 체력과 마력에 투자한 136개의 포인트를 제외하니 344개의 포인트를 마력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이제 마력의 능력치가 1,000을 넘어 1,500에 다다르고 있었다. 강력한 힘이 몸 안을 휘도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세 자리 숫자를 유지하고 있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마력을 움직여보았다. 안전하게 서하를 찾아 데리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발생했다.
[위치 찾기 아이템- 누군가 한 번 찾은 것은 다시 찾을 수 없다.]
위치 찾기 아이템에 적힌 설명은 당연히 서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상진과 나, 태경까지 우리는 모두 3개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만 가진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해결되기도 했다.
[39층의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보스를 잡기 전까지는 39층의 모든 입구가 폐쇄됩니다.]
언제나처럼 꽉 막힌 동굴 속에서 몬스터 특유의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39층의 입구가 폐쇄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39층으로 향하는 입구 먼저 찾아놓기로 했다. 위로 올라가서 아이템을 사용해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자.”
38층에서는 파란 몸을 한 인간형 몬스터가 나왔다. 모두 커다란 나뭇잎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저마다 생김새도 달랐으며 덩치도 성별도 모두 달랐다. 하나하나 공격하는 방식도 달랐기 때문에 밑에서 일정한 패턴으로 공격하던 몬스터들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이 밑에서 만난 놈들보다 훨씬 강했다. 전보다도 더 급격하게 난이도가 오른 느낌이었다. 먼저 올라왔던 길드원들도 다른 사람들을 마주친 적도 없어 걱정이 컸다. 그저 그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쾅!
방금 마주친 녀석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녀석이었다. 녀석이 번쩍 치켜든 주먹을 내리칠 때마다 바닥이 푹푹 파였다.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영웅의 기운을 검에 두르고 빠르게 녀석에게로 달려갔다. 제법 날쌔게 공격을 피하는 모습에 나는 조금 더 속도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녀석이 더욱 빨라진 내 속도에 우왕좌왕하며 침착함을 잃었다. 그 옆으로 녀석의 동료들이 달려와 나를 막으려 했지만, 내게 달려드는 다른 녀석들은 태경과 상진이 처리하고 있었다. 눈앞의 녀석의 주먹에 검이 부딪치며 폭발음이 퍼져나갔다.
털썩.
자신들을 이끄는 대장이 쓰러지자 녀석들이 주춤거리면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녀석들까지 처리할 생각이 없었기에 우리는 가던 방향 그대로 앞을 향해 달렸다. 눈앞에 38층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모든 인원이 30층 높이 이상을 올랐습니다.]
[29층까지 층이 제거됩니다.]
[29층까지의 제거가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층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속 층을 오르지 않을 시에는 다시 층 제거가 시작됩니다.]
“꺄아악!”
목소리와 동시에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직 39층으로 오르는 입구는 열리지 않았다. 태경이 입구 앞에 남아 있기로 하고 나와 상진이만이 비명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먼저 올라와 있던 길드원들이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포위되어 있었다.
“어, 어떻게 좀 해봐!”
“이놈들이 함정까지 파서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다고!”
“진정해! 흥분한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다들 무기 들고 경계 유지해.”
“서하는 지금 혼자 잡혀갔잖아! 우리보다 더 무섭고 위험한 상황일 거라고. 우리는 여럿이니까 이길 수 있어.”
“맞아 지금까지처럼만 하면 된다고.”
그때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들의 경계심을 더욱 바짝 끌어올렸다.
“염병. 드라마는 서하부터 찾고 찍어요. 언제부터 당신들이 서하 걱정했다고 그러세요?”
서호였다. 39층으로 올라간 줄 알았지만, 한발 늦었던 것 같았다. 서하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몬스터를 죽이고 있었다. 부쩍 능숙해진 스킬 응용이 눈에 띄었다. 길드원들도 서호의 도움에 악을 지르며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말은 화딱지가 나게 해도 길드원들을 도와주고 있는 서호를 보면서 나와 상진, 태경도 피식 웃으며 달려나갔다.
“서호 많이 자랐네.”
상진의 말에 서호가 상진을 발견하고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상진이 그런 서호를 보고 허허 웃었다. 서호가 몬스터를 잡으면서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냥 그런 서호를 애써 모른 척 몬스터를 잡을 뿐이었다. 방패로 몬스터를 내 앞으로 밀어낸 태경이 일어서고 내가 그 몬스터들을 다 베어버리자 싸움이 끝났다. 그때까지도 39층은 열리지 않았다. 길드원들은 서하를 찾기 위해서 위로 올라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서호도 그런 길드원들을 발견하고 몰래 슬쩍슬쩍 도와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39층의 보스를 잡았습니다.]
[폐쇄되었던 39층의 입구들이 다시 열립니다.]
[40층으로 가는 입구가 개방됩니다.]
길드원들과 대화하던 우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서호는 이미 입구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저희가 먼저 올라가 볼게요. 여기 몬스터도 위험하니까 37층 입구로 가서 길드원들 데리고 같이 올라와요. 알았죠?”
상진과 태경도 이미 서호를 따라 입구에 몸을 날리고 있었고 나도 재빠르게 말을 끝내고 그 뒤를 따랐다. 길드원들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이 서둘러서 이동을 지시했다.
“빨리 37층 입구로 가야지! 정신 차려.”
“가자!”
그렇게 길드원들과 우리는 반대쪽을 향해서 달렸다. 길드원들은 어느 때보다도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뚫어놓은 길에 몬스터들이 다시 함정을 설치하기 전에 37층 입구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39층입니다.]
환한 빛과 함께 39층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39층의 몬스터는 하얀 뼈다귀 가면을 쓴 파충류였다. 두껍고 긴 꼬리가 위협적으로 휘둘러지고 있었고 서호가 꼬리를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중이었다. 거기다 두 발로 선 파충류의 손에 들린 장창이 빠른 속도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장창의 끝에서 끈적하게 떨어지는 액체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무기 끝에 독을 발라놓은 듯했다. 서호가 그런 몬스터의 빈틈을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츄아악!
순식간에 꼬리가 날아간 몬스터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서호가 그런 녀석의 주위를 돌아다니며 약 올리듯 미소지었다. 녀석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방어는 생각하지 않고 무식하게 공격만 하기 시작했다. 서호가 그것을 노린 듯 수없이 생겨난 빈틈을 파고들며 공격했다. 순식간에 온몸이 갈라져 피를 흘리던 몬스터가 그르륵 하는 소리를 내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서호가 검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냈다. 땅에 떨어진 피가 흙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자연스럽게 바닥을 향했던 시선이 들리고 눈앞에 마치 군대처럼 대열을 이루고 선 몬스터 군단이 눈에 보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광경인데.”
“보스 몬스터 죽은 거 맞겠지?”
그 광경을 눈에 담길 잠시,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나는 손에 있는 검을 강하게 움켜쥐고 영웅의 기운을 둘렀다.
“시간이 없으니까 빠르게 해치우자. 독 조심해.”
앞으로 달려나가며 몬스터를 향해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여러 마리의 몬스터가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상진과 태경, 서호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만큼 몬스터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보스 몬스터가 사라졌는데도 이 정도 숫자의 몬스터가 남아있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저 밑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때와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힘이 있었다.
휘익.
촤아악, 쩌저정!
독이 묻어 있는 탓에 무기에 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날아오는 무기를 피하고 검을 휘둘러 쳐내고 녀석들의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척 봐도 수십 마리가 넘어가는 몬스터 군단의 공세는 거대한 쓰나미 같았다. 계속해서 위험신호가 울려대었고 앞과 뒤, 옆 할 것 없이 공격이 날아들었다.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어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다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눈앞에 장창이 날아들었다. 급하게 장창을 쳐내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날아온 검에 목이 꿰뚫린 몬스터 한 마리가 이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는 동시에 급하게 몸을 피해 검이 날아온 방향을 스치듯 바라보니 몬스터들과 싸우는 태경과 상진의 모습이 몬스터들 사이로 얼핏 보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살랑이는 바람이 슬쩍 심장을 스쳐 가는 순간 귀 옆으로 무기가 날아왔다. 한눈을 팔 시간은 아주 잠시만 허락되었다. 지독하게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달려들던 몬스터 셋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뒤에 있던 놈들이 그것에 발이 걸려 우수수 넘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마력을 방출해 놈들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 모습을 본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판타지 같은 장면들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현실이었다. 게다가 서하까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납치된 상황이었다. 서하의 치료 스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서하의 치료 스킬이 목적이 아니라면 아주 위험한 상황일 것이 뻔했다.
“후.”
서하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조급함이 몰려왔다. 혜진이 무사히 층을 올랐을까 하는 걱정도 거기에 한 몫 더했다. 덕분에 평소 몬스터를 잡을 때보다 몸이 굳어지고 호흡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능력치가 모두 1,000이 넘어가면서 전과는 몸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었다. 무언가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낸 듯 몸이 아주 가볍고 개운했다. 무기를 휘두르는 팔도 무기를 잡고 있는 손도 이제는 검과 하나인 듯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서하가 우리의 옆에 없었다.
몬스터의 몸에 박혀 있던 검을 빼내기 위해 발로 놈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나는 다시금 한숨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나의 발길질에 날아간 몬스터의 몸뚱어리가 다른 몬스터를 덮쳤고 그대로 상진의 검이 날아와 녀석의 목숨을 빼앗았다. 검을 뽑아내다가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나는 다시 앞으로 달려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몬스터 하나하나는 보잘것없어도 숫자의 힘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멀쩡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서하를 데려간 놈과 싸울 때쯤에는 지칠 것이 뻔했다. 그때까지 내가 멀쩡하다고 해도 상진과 태경은 어떨지 몰랐다. 빠르게 놈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한 번도 시도한 적 없었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잡으며 마력을 있는 힘껏 방출했다. 순식간에 마력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퍼엉, 펑!
후두두두.
마나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 그 자리마다 몬스터의 팔이나 몸통, 머리 같은 파편이 하나씩은 꼭 떨어져 있었다. 둥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마력은 반경 5미터 정도를 그렇게 쓸어버렸다. 아릿아릿한 손에는 아직도 마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심지어 마력을 이렇게나 방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력이 줄어든 티조차 나지 않았다. 몬스터들의 시체 사이에서 놀라 하얗게 된 얼굴로 나를 보는 세 명 말고는 살아있는 생명체는 이제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후아. 이제 좀 위로 올라갈 수 있겠지?”
“너… 언제 또 그렇게 강해진 거야?”
“선배. 진짜 선배는… 진짜 짱이야. 와, 나 지금 또 반한 것 같아요.”
상진과 서호와 달리 태경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던 태경은 힘을 풀며 점점 넋을 놓고 있었다.
“태경이 형?”
내 말에 내게 집중되어있던 시선이 옮겨갔다. 태경은 혀로 입술을 핥고 있었다. 입에 고여있는 침이 얼마나 많은지 그의 혀가 침으로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옆에 서 있던 상진이 그런 태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태경이 그런 상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으흥흥, 으흥흥.”
상진이 그의 표정과 콧노래에 당황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고 태경을 불렀다.
“형! 지금 뭐예요?”
“와우, 지금 몬스터 손가락이나 먹으려는 건 아니죠? 아니면 상진이 형이 먹고 싶어요? 선배는 양보 못 해. 알죠?”
서호의 말에 문득 새끼손가락을 입에 넣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콧노래를 부르다가 그다음에 손가락을 입에 넣었었다. 희미한 검은 안개가 태경에게서 새어 나왔다.
“오랜만이네. 맛있는 인간.”
서호를 제외한 나와 상진의 몸이 굳었다. 14층 보스 몬스터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잖아. 이 인간이랑 나는 이제 한 몸이니까 말이야. 으흥흥. 그렇지? 인간.”
우리는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녀석이 그런 우리의 반응을 보며 적잖이 실망했는지 눈썹을 추욱 늘어뜨렸다.
“재미없어. 재미없어! 그 반응은 도대체 뭐야?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상황이 돼서 놀러 나왔는데. 다시 재미없어졌어.”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상황?”
“으흥흥, 맛있는 인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아무것도 모르네. 정말 모르는 거야?”
14층 보스 몬스터는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재미가 없다며 눈썹을 늘어트리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역시 재밌어.”
“도대체 무슨 말을….”
“조심해. 진짜 진짜 조심해야 할 거야. 이제 점점 강해지고 있거든. 흐흐흐.”
그 말을 끝으로 태경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몸이 이리저리 비틀리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혼돈이었다. 14층 보스 몬스터가 우리에게 말해주려던 것이 뭔지 들었는데도 들은 것 같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던 우리는 뒤에서 우리를 몰래 습격하려던 몬스터들로 인해 정신을 차렸다.
“빨리 40층 입구 찾자. 빨리.”
“아씨, 서하 빨리 찾아야 하는데. 아이템이 서하가 39층에 있다고 했는데 이제 또 어떻게 찾아!”
“서호야. 너 아이템 벌써 사용했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선배는 누가 사라졌는데 찾을 수 있는 아이템이 손에 들어오면 바로 사용하지 않겠어요?”
“그거 한 번 찾은 건 다시 찾을 수 없는 거 알고 있지?”
“…네. 하지만 아이템을 썼는데 딱 39층에 보스 몬스터가 나타나서 문이 닫혀버린 걸 어떻게 해요. 선배. 그러면 어떻게 해요. 서하 못 찾아요? 서하 어떻게 해요!”
“후우… 일단 40층으로 올라가는 게 중요해. 그 위에 서하가 있는 건 분명하니까.”
다 자란 것 같아도 서호는 아직 어린 나이었다. 불안한 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딱 철없는 애였다. 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제 도대체 무엇으로 서하를 찾아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고민이 머리를 휩쓸었다. 일단 40층으로 오르는 입구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14층 보스 몬스터의 말을 곱씹을 새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입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40층 입구에 몸을 욱여넣었다.
화아악!
눈앞에 풍경이 변하고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휴식층의 풍경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석아! 여기!”
상진이 태경을 부축한 상태로 나를 불렀다. 아직도 태경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태경의 회복이 중요했기에 그가 조금이라도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나뭇잎을 깔고 자리에 눕혔다.
“선배, 이제 어떡해요?”
평소의 서호답지 않게 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 정말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태경이 형이 좀 괜찮아지면 위로 올라가야지.”
“하지만….”
“일단 서하가 혼자만 가지고 있을 물건이나 옷가지 같은 걸 찾으면 서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나랑 상진이, 태경이 형이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하만 가지고 있을 만한 게 뭘까요? 스킬?”
내가 골몰히 생각에 빠져있을 때 서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까지 반짝거리는 채였다.
“선배, 삐가 안 보이는데. 옷 속에 넣어놨어요?”
“어?”
나는 서호의 말에 옷 속을 뒤적여보았지만 삐는 보이지 않았다. 워낙 존재감 없이 내 머리나 어깨 위, 혹은 내 옷에 들어가 잠을 잤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분명 어깨 위에 있었는데… 매일 나한테 붙어있어서 신경을 못 썼어. 도대체….”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다가 서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서호가 한쪽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렸다. 서호의 표정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를 따라간 걸 거예요. 분명히.”
서호가 확신하는 목소리로 말해왔다.
“삐가 보통 새예요? 아니잖아요. 그렇죠? 확실해요. 삐는 지금 분명 서하랑 같이 있는 거라고요.”
태경을 눕히고 그 옆에서 열매를 으깨 즙을 입에 넣어주던 상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내 생각도 그래. 삐가 이석이 네 품에 없으면 그게 제일 확실한 것 같아.”
상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을 꺼냈다. 손에 올려져 있는 돌에서 붉은빛이 나며 번쩍였다. 그 위에는 작은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45층 서호 고등학교]
“미친. 어떻게 벌써 45층까지 올라간 거야? 말이 돼?”
“이석아.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서호 고등학교라니?”
상진의 말대로 무언가 이상했다. 태경이 형의 몸에서 갑자기 나타난 14층의 보스 몬스터. 39층의 보스를 처리하자마자 45층에 도착해있는 서하를 납치한 사람. 무언가 강해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던 14층 보스 몬스터의 말. 안갯속에 있던 나를 불러냈던 영혼이 말한 예상치 못한 일. 놈이 점점 밑에 있는 층까지 영향력을 늘리고 있다던 말. 모두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모두 관련이 되어있었다.
‘아, 형들은, 사람들은 이 고통을 느끼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겁이 났을까 생각하다 보면 먼저 몸이 움직이고 있더라고요.’
예전에 서하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서하는 지금도 자기보다 자신을 찾으러 올 우리를 더 걱정하고 있을까.
‘내 스킬이 숙련도가 부족해서 태경이 형이 저렇게 됐다고 생각하면 멈출 수가 없어요. 형도, 다 내가 약해서 구해주다가 다치는 거니까.’
또다시 자신이 약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면서 자책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자신이 약해서라고 죄책감을 가지고서 겁나도 애써 무섭지 않은 척. 그렇게 버티고 있을까.
사라진 서하와 태경이 형의 몸을 차지한 14층의 보스 몬스터. 내 사람들을 위협하던 살인자집단과 백두진. 이제야 명확해졌다. 영혼이 왜 나를 골랐는지 알 것 같았다. 이미 동굴 속에서 가족을 마주했을 때부터, 그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친 때부터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걸 나는 지금 알았다.
“그래. 이미 시작된 건데.”
“선배?”
감히 내 사람들을 건드려? 내 목소리에 서호가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보았다. 상진의 표정도 서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 태경의 신음이 들리고 모두의 시선이 태경에게로 옮겨갔다.
“으윽, 하. 더럽게 아프네.”
태경이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어쩐지 위로 올라갈수록 몸이 말을 잘 안 듣는 것 같더니 결국 이렇게….”
“형. 형은 이제 위로 올라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이석아?”
“무슨 말입니까? 혹시 몬스터가 제 몸을 차지한 것 때문이라면, 이제는.”
“보스 몬스터가 점점 밑에 있는 층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층이 사라지는 것도 멈추고 몬스터가 형 몸을 다시 차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혼이 날 불렀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고 있다고, 보스 몬스터가 아래층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는 말을 했었어요. 위로 올라갈수록 태경이 형은 더더욱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형 몸속에 사는 그것 때문에.”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유레이의 층이 줄어듭니다.]
[현재 꼭대기 층은 55층입니다.]
[줄어들기 전 꼭대기 층은 60층입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 놀라 행동을 멈췄다. 가장 먼저 다시 입을 연 사람은 서호였다.
“진짜 이게 말이 돼? 갑자기 뭐지? 선배. 영혼 어쩌고 도대체 그건 무슨 말이에요?”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호를 바라봤다. 검은 돌덩이가 가슴에 얹힌 듯 숨이 딱딱 끊기듯 뱉어졌다.
“나도, 지금, 이건. 빨리 올라가야 할 것 같아.”
내 입 밖으로 나오는 말도 문장보다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불안함이 내 몸을 좀먹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예감이 안쪽에서 마구마구 솟구쳐 올라왔다.
41층으로 향하는 포털에 몸을 날리다시피 던졌다. 그런 내 뒤를 서호가 뒤따랐다. 상진이 태경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 뒤이어 41층의 입구로 몸을 날렸다. 입술을 한 번 깨물며 주춤하던 태경도 그런 우리를 뒤따랐다.
15. 진정한 유레이 41층
[41층입니다.]
익숙한 빛이 사그라들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서하의 생각으로 인한 불안함을 잠시나마 잊게 할 정도였다.
높은 빌딩이 좌우로 솟아있었고 바닥은 지금까지와 달리 시멘트로 된 도로와 인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진이와 자주 놀러 가던 서울 시내의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자주 가던 맛집이 바로 오른편에 보였다. 거짓말 같은 모습이었다. 밑에서 봤던 환영이 되살아나는 듯 생생했다.
“여기 진짜 서울이야?”
상진이 입을 열었지만,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닐 거야. 그러면 안 되잖아. 이건, 그건 다 환영이었어.”
“네. 그렇죠. 이게 현실일 리가.”
태경이 목이 메는지 살짝 갈라진 목소리를 냈고, 서호는 계속 욕을 내뱉을 뿐이었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짜증 나게 진짜.”
그 후로 우리는 침묵을 유지하며 주변을 살폈다. 건물 사이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촉수가 우리를 위협하듯 흔들거렸고 그 주변으로 파란빛의 불같은 것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불빛에서 강한 마력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마도 파란 불같은 것들이 몬스터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한 색다른 몬스터였다. 멍하니 서 있던 우리는 그것이 빠른 마력의 잔상을 남기며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무기를 들고 몸을 긴장시켰다. 순식간에 전신의 근육이 바짝 조여들며 싸움을 대비했다.
풍경은 같다고 해도 이곳은 서울이 아니다. 유레이의 41층일 뿐이다. 입으로 계속 되뇌며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애썼다. 짙은 바다 빛의 마력 잔상을 남기며 코앞에 다가온 파란 불을 검으로 내리쳤다. 하지만 그것은 반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모이며 내 어깨를 공격했다. 강한 충격과 함께 나는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바닥에 쓸려 따끔한 얼굴을 느끼며 눈을 뜨자 익숙하지만 낯선 회색빛의 시멘트 바닥이 시야에 잡혔다.
“강이석!”
상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란스러웠지만 그것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서호는 이리저리 스킬을 써가며 파란 불을 피하기 바빴고 상진은 검을 이용해 공격하다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태경만이 검은 안개를 이용해서 녀석들과 싸우고 있었다. 칼은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저 파란 불에서 느껴지는 마력밖에 없었다. 마력만이 녀석들에게 유효했다. 검에 마력을 실어 녀석들을 내리쳤다. 녀석이 반으로 갈라지며 다시 합쳐지지 못한 채로 내게 다시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검에 마력을 실어서 공격하는 것은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력을 잔뜩 모아 여러 개의 마력의 구를 만들었다. 순식간에 20개가 넘는 마력구가 만들어졌다. 나도 이렇게 많은 마력구를 만들어낼 줄 몰랐지만 조금 더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처럼 마력이 흘러넘쳤다. 그렇게 만든 마력구를 녀석들에게 날렸다. 마력이 1,500에 가까워진 후로부터 조금 더 내 마음대로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여러 개의 마력을 만들어 방출하는 건 처음이지만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별것 아닌 듯 느껴졌다. 그렇게 쏘아 보낸 마력은 파란 불에 닿으며 마력의 폭풍을 만들어냈다. 파란 불이 손쉽게 터져나가고 촉수들이 조금씩 쪼그라들며 작아졌다가 커지며 출렁였다. 다시금 검에 영웅의 기운을 실었다. 검이 웅웅거리며 떨려왔다. 나는 그대로 검을 들어 눈앞에 보이는 촉수들을 향해 가로로 길게 휘둘렀다. 영웅의 기운이 방출되면서 그 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눈이 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야 할 정도였다.
쿠르르르-
폭발하는 굉음도 들리지 않았는데 건물들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가득했다. 눈앞에 발생한 믿지 못할 상황에 놀랄 법도 하지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이곳의 최상층에 있는 놈을 잡기 위해서는 이것도 부족했다.
“선배, 강해진 건 알고 있었는데. 와, 선배 사람 맞아요?”
서호의 놀란 소리가 들렸다. 하얀빛이 사라지고 나니 눈앞에는 서울이 망해서 한 100년간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아 방치된 것만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간혹 꿈틀거리는 촉수를 빼고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만이 잔뜩 쌓여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자.”
어쩐지 조금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기분에 서둘러 걸음을 옮겨 42층으로 향하는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 내 뒤로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따라붙었다. 상진과 태경은 무언가 생각에 잔뜩 잠긴 것처럼 말이 없었다. 어쩌면 나처럼 영혼이 왜 나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몇 번 더 마력을 방출하고 난 후에 4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자 층을 오르는 것이 정말 수월해졌다. 이런 게 정말 가능할까 싶던 것이 웬만하면 다 가능했다. 내가 내 능력을 훨씬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력이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42층 입구에 발을 올리기 전 레벨이 하나 올랐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모두 레벨이 올랐다. 그 수많은 몬스터를 잡은 것을 생각하면 레벨이 오르는 것이 더뎌진 것이 느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46레벨에서 벽에 마주했습니다.]
[성장한계치가 1 줄어듭니다.]
[lv. 47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성장한계치+4]
[경험치: 91퍼센트]
[체력: 1,000(+40)]
[근력: 1,000(+38)]
[마력: 1,422(+35)]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5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5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독 내성- 15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최대)]
[point: 288(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체력과 근력에 100씩 투자하고 난 후 나머지 88을 마력에 투자해 마력이 1,510이 되었다. 능력치가 천 단위가 넘어가자 그 전보다 더욱 큰 단위로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마력은 1,500이 넘어가는 순간 새로운 세계를 맛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의문의 성장한계치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서하는 이제 레벨이 43이었고 상진과 태경은 44가 되었다. 벽에 도달한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모두가 같은 한계치를 가졌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레벨에 상한치가 있다는 것은 알아냈다. 모두 내 말을 듣고 실망하는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애써 수긍했다. 애초에 거부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42층입니다.]
42층도 여전히 서울 시내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다만 가장 커다란 건물 한가운데 거꾸로 세워진 십자가가 강하게 눈에 와 박혔다.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가죽의 몬스터들은 마치 악마를 형상화한 것처럼 빨간 뿔 두 개가 이마에 치솟아 있었고 피라냐처럼 강해 보이는 하얗고 뾰족한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기다란 꼬리 끝에 붙은 하트 모양은 강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 몬스터를 보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거꾸로 세워진 십자가 위. 그곳에 43층으로 향하는 입구가 보였다.
“여기도 뭐, 어렵지 않겠네.”
“왜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선배가 어렵지 않을 거라니까. 빨리 끝내죠.”
“갑자기 나도 조금 무섭다. 특성이란 거 정말 부럽네.”
“저도 그 능력이 정말 부럽습니다.”
나는 살풋 웃으며 태경과 상진의 어깨에 한 손씩 올려 토닥이고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아직 힘을 더 시험해봐야만 했다. 어느 정도의 힘까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 커다란 눈을 마주했을 때, 영혼의 힘을 빌려 싸우고 나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살짝 튕긴 손가락 끝에서 마력구가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지며 눈앞에 있던 악마 몬스터의 몸이 폭발해 뒤로 날아갔다. 몸 푸는 건 끝났다. 시작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마력구를 만들어 방출하면서 영웅의 기운을 사용했다. 악마 몬스터의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나는 오른손을 바닥에 짚으며 공격을 피하고 그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피하는 와중에도 공격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아주 수월하게 통과했던 아래층보다는 이곳이 조금 더 난이도가 높은 것 같았다.
서걱-
섬뜩한 소리가 나며 결국 악마 몬스터의 날카로운 손톱에 옷가지 끝이 잘려나갔다. 서호가 그나마 제일 양호한 편이었고 상진과 태경은 이미 옷이 넝마처럼 변한 지 오래였다. 그들의 거친 호흡이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쉼 없이 마력을 사용하다 보니 마력이 절반가량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악마 몬스터를 베어 넘기면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옆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일행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나는 다시 그들에게로 향했다. 이 마력을 한 번에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옛날과는 다르게 이제는 일행들을 그 누구보다도 믿고 있었다. 한 번 시도해보아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가까워진 상진의 등에 내 등을 맞대고 섰다.
“상진아.”
“응.”
상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염력을 사용해 여러 개의 칼을 사용하는 상진은 집중력이 중요하기에 긴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그편이 더 좋았다.
“나 너랑 서호, 형 믿어도 돼?”
“당연한 이야기를.”
상진이의 앞에서 악마 몬스터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맞붙은 상진이의 등이 들썩이며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그의 숨소리가 한층 더 가빠진 것 같았다.
“그럼 나 조금 미친 짓 좀 시도해볼게.”
“뭐?”
“잘 부탁해.”
그리고 절반가량 남아있던 마력을 모두 내 앞의 몬스터 군단을 향해 방출시켰다. 몸에 있던 모든 마력이 빠져나가다 못 해 몸속에 숨어 있던 마력들까지도 빨려 나가는 것 같았다. 상진이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뒤돌려고 했지만 달려드는 몬스터로 인해 뜻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마력을 모두 방출해 낸 탓에 탈력감이 들었다. 명치가 텅 빈 것이 느껴지며 알싸하게 아려왔다. 속이 울렁거렸다가 다시 잠잠해지고 숨이 잔뜩 차올랐다가 멀쩡해졌다. 잔뜩 더러워진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올리려고 했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아 슬쩍 볼을 쓸고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만족감이 뒤따랐다. 무언가 한 꺼풀 벗어던졌다. 그냥 알 수 있었다. 눈앞의 풍경이 그 증거였다.
“이석아.”
“와.”
“이석 씨.”
상진과 서호, 태경의 목소리가 차례로 이어졌다. 아직 그들의 앞에는 꽤 많은 수의 악마 몬스터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내가 있는 쪽은 높게 서 있던 건물들과 몬스터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無)였다. 그것을 본 몬스터들이 겁을 먹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아공간 주머니에 있는 열매라도 꺼내서 먹고 싶었지만 손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내 고개가 상진이에게로 돌아갔다.
“나 힘이 없어서 그런데 열매 좀 먹여줘.”
“이석, 뭐?”
다시금 내 이름을 부르려던 상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힘이 없어. 다 썼어.”
조용하게 이어지던 침묵이 악마 몬스터의 작은 목소리로 인해 깨져나갔다.
“끄룩? 깍!”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으며 상진을 올려다봤다. 숨을 훕 들이마신 상진이 빠르게 열매를 꺼내며 내게 다가오고 서호와 태경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서호가 잔뜩 삐진 음성으로 툴툴거렸다.
“아니, 왜 상진이 형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선배. 내가 더 잘 먹여줄 수 있는데! 나는 입으로 꼭꼭 씹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줄 수도 있다고요!”
“서호야.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무기나 휘둘러.”
“쳇.”
상진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받치고 열매를 입에 가져다 대주었다. 힘은 없었지만 기분이 좋았던 나는 갑작스럽게 장난기가 발동했다.
“상진아.”
“왜 안 먹어. 빨리 먹어.”
“너는 입으로 꼭꼭 씹어서 못 전해줘?”
무슨 생각인지 입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못한 말이 빠져나왔다.
“너, 뭐. 응? 뭐, 뭐라고 했, 아니. 응?”
나는 무언가 잘못 들었다는 듯 굳어서 삐걱거리는 상진이의 반응에 웃으며 눈만 깜빡깜빡하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상진이 곧 결심했다는 듯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열매를 제 입에 집어넣고 꼭꼭 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급해진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상진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그리고 상진이 꼭꼭 씹던 열매의 과즙이 상진의 혀와 함께 내 입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 순간에도 서호와 태경은 악마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우리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상진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당황할 때는 언제고 상진은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서호와 태경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나만 그쪽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내 모습에 상진이 여유 있는 모습을 되찾았다. 내 양 볼을 꼭 잡고 무슨 숭고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구는 상진의 행동에 내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서호와 태경이 들을세라 나는 작게 속삭이듯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장난이었어. 진짜 그렇게 안 먹여줘도… 으븝.”
상진이를 밀어내려고 해도 힘이 모두 빠져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든 지금의 나는 무리였다. 그런 나를 두고 상진이 뻔뻔하게 웃으며 물었다.
“자기. 내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지?”
나는 상진의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몬스터들을 상대하던 서호와 태경이 질색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상진이 꼭꼭 씹어서 넘겨주는 과육을 꿀떡꿀떡 받아먹었다. 어미 새가 된 것처럼 열매 하나를 그렇게 다 먹여주고 나서야 상진이 내 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자상하게 물어왔다.
“열매 하나 더 줄까?”
몬스터들의 피를 뒤집어써서인지 유독 촉촉하게 젖어 번들거리는 예쁜 핑크빛 입술에 자꾸 시선이 갔다. 나도 모르게 상진의 입술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상진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하나 더 줘.”
“먹여줄게.”
“이제 괜찮으니까 그냥 줘.”
“아니, 먹여주겠다니까? 우리 아기가 혼자 어떻게 이 딱딱한 열매를 먹어.”
“헛소리를! 됐어! 나도 열매 있어. 치사해서 네 거 안 먹어.”
상진이 계속 자신이 먹여주겠다며 열매를 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열매는 나도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획 돌려 주머니를 열어 열매를 꺼내 입에 욱여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상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서호의 화가 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그만하고 이리 안 와? 어디까지 꽁냥대나 보고 있었는데. 진짜! 선배. 나라면 상진이 형처럼 손으로 안 먹여줄 거에요. 나는 무조건! 입! 다음엔 나한테 부탁해야 해요. 알았죠?”
드디어 뒤를 돌아본 서호가 나를 향해 윙크를 날리고 다시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상진이 슬쩍 내 눈치를 보다가 이마에 뽀뽀를 날리고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너 때문에 진짜 걱정돼서 못 살겠다, 강이석.”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크게 벌어지는 입을 막지 못했다. 입안에 있던 열매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물론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금세 추한 모습을 깨닫고 손등으로 턱을 훔치고 붉어진 얼굴을 애써 수습했다. 이건 친구끼리의 애정표현을 넘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느껴져야 할 거부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전부터 애써 부정하던 감정이 떠오르는 것에 머리를 흔들었다.
“미쳤어. 아직 서하도 못 찾았는데.”
아직도 찾지 못한 서하를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유레이의 목소리는 무거운 마음에 돌산 하나를 더 얹는 듯했다. 몬스터를 상대하던 모두가 그 목소리에 움칫 몸을 굳혔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유레이의 층이 줄어듭니다.]
[현재 꼭대기 층은 50층입니다.]
[줄어들기 전 꼭대기 층은 55층입니다.]
서호의 입에서 큰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가 몬스터들의 소리에 묻혔다. 가방에서 열매를 하나 더 꺼내 베어 물었다. 아직도 채워지려면 한참 남은 마력을 생각하다가 다시 검을 집어 들어 태경을 공격하던 놈의 가슴팍에 던졌다. 그대로 악마 몬스터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레벨이 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벽에 마주했습니다.]
[성장한계치가 1 줄어듭니다.]
[lv. 48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성장한계치+3]
[경험치: 0.3퍼센트]
[체력: 1,100(+40)]
[근력: 1,100(+38)]
[마력: 1,510(+35)]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5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5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독 내성- 15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최대)]
[point: 372(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41층에서보다도 더 많은 포인트를 얻었다. 나는 체력과 근력에 100포인트씩 투자하고 마력에 172포인트를 투자했다. 일단 내 목표는 보스 몬스터를 만나기 전까지 체력과 근력은 1,500포인트, 마력은 2,000포인트를 넘기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전에 서하를 찾고 서하를 데려간 놈은 가만두지 않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줄어드는 층보다도 빠른 속도로 45층 서호 고등학교까지 올라가야 했다. 계속해서 들던 불안감은 줄어드는 층수 때문인 것 같았다. 보스가 있는 층이 밑으로 내려와 45층이 된다면 서하의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울 테니까. 상진에게로 슬쩍 향하던 시선을 애써 돌려 붙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또다시 태경이 몬스터에게 틈을 내어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태경의 몸이 조금 굳어 있는 것 같았다.
“형. 괜찮아요? 혹시 몸이 이상한 거라면.”
“아뇨. 아직은 괜찮습니다. 아까 옆구리에 놈들 손톱이 스쳤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말이에요, 형?”
마지막 몬스터를 처리하고 나는 태경을 돌아보았다. 태경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아직 괜찮아요. 이상 없습니다. 그냥….”
태경의 시선이 싸움을 끝내고 검을 회수하는 상진에게로 가 닿았다가 떨어지며 자신의 손을 지나 내게로 돌아왔다.
“그냥, 조금 지쳐서요.”
“우리 몬스터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 입구 앞에서 조금 쉬다가 올라가요. 지친 상태로는 위험하니까.”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들 괜찮지?”
“와! 솔직히 내가 좀 완벽해서 쉽게 지치는 타입이 아닌데 지금 조금 쉬고 싶었거든요. 한 5분만 쉬면 다시 회복되니까 걱정 마요. 선배. 나 잠깐 졸아도 선배가 지켜줄 거죠? 난 선배 믿어요. 그러니까 선배도 나 믿고 나한테 와요. 응?”
요즘 조금 줄어들었던 서호의 너스레를 보니 얼마나 쉬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켜줄 테니까 지금 좀 자둬. 벌써 한참을 못 잤잖아.”
서호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오래간만에 가지는 평화로운 휴식이었다. 마음속은 그렇지 않아도 적어도 보이는 모습은 그랬다.
“선배. 나 선배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좋다. 지켜준다는 말이 이렇게나 로맨틱한 거였어요? 나 진짜 자요. 응? 진짜 잔다?”
“응. 그래. 제발 지금 좀 자둬. 서하 찾기 전까지 또 언제 쉴 수 있을지 모르니까.”
조잘조잘 내 옆에서 떠들어대던 서하가 몸을 누이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많이 고되고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동생이 납치까지 되어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속이 썩었을 것이 분명했다. 보기와는 달리 동생을 몹시 챙기는 것처럼 보였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상진과 태경이 내 양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앓는 소리가 가득한 것을 보니 정말 강행군이기는 했다. 쉬는 시간을 가지지도 않고 층을 올랐으니 그럴만하기도 했다.
“난 아직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상진이 반쯤 감긴 눈으로 내게 말해왔다. 태경이 옆에서 상진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석 씨도 그렇게 생각한 적 있으십니까?”
“나도 그래요. 그런데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했을 거잖아요? 이미 일어난 일인데 후회하지 않기로 했어요. 더 강해져서 모두를 지켜주기로 이제는 그렇게 다짐하기로 했어요.”
태경이 내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이 섞인 말을 내뱉었다.
“이래서 안 좋아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이석 씨를.”
그렇게 말한 태경은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는 듯 한쪽 무릎을 올리고 편한 자세를 잡더니 눈을 감았다. 나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태경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옆에서 상진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쳐다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내 머리 위로 상진의 손이 머리칼을 흩트리고 다시 멀어졌다. 털썩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상진도 서호처럼 바닥에 드러누운 것 같았다. 괜히 시선을 저 멀리 돌리며 상진과 태경, 서호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꿀맛 같던 휴식은 아주 잠시 잠깐이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열매를 먹어 고픈 배를 채우고 체력을 끌어올린 후 우리는 다시 층을 올랐다.
[43층입니다.]
“여기는 조금 다르네.”
42층은 서울의 또 다른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국내 최고 높이 타워가 눈앞에 보였고 주변 풍경도 우리가 살던 곳과 똑같았다. 층을 오를 때마다 반가움과 약간의 좌절감이 섞여 피어올랐다. 모든 것이 어그러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감상에 젖기도 잠시, 알 수 없는 위험한 예감이 온몸을 둘러쌌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서호의 팔목을 세게 쥐고 당겼다. 서호가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뎠다면 함정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호가 발을 옮기려던 그곳은 빨간빛으로 둘러싸여 함정이 있음을 알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서호는 박력 있는 모습도 멋있다며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내 손 위에 제 반대편 손을 얹어 간질간질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슬쩍 서호의 팔목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함정이 있어.”
“함정?”
“응. 꽤 어려운 함정인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서호가 열매 한 개를 꺼내 그곳에 툭 던졌다. 순식간에 바닥에 검은 구멍이 뚫리면서 열매가 그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언뜻 본 그 구멍에 새하얀 이빨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은 이빨이었다.
“와우. 이건 또 처음 보는 거네.”
“이석아. 이게 저거 하나만 있는 거야?”
그 말에 나는 주변을 빙글 돌아보았다. 절로 입술을 이로 꽉 물었다.
“아니, 온 사방이 함정으로 가득한데.”
“얼마나 가득합니까?”
“음, 서너 걸음마다 하나씩?”
커다란 한숨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나도 그들의 심정과 똑같았다.
“바닥에 숨어 있는 걸 무슨 수로 잡지?”
내 물음에 그들의 한숨 소리가 한층 더 깊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도 그것에 동조했다. 꽤 귀찮은 일이 될 것이 뻔했다. 우리는 일단 녀석들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다. 지금은 위로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몬스터들을 잡아 레벨을 하나씩이라도 올려야만 했다. 그래야 보스 몬스터와의 싸움에서도 서하를 찾는 것에서도 승산이 있었다.
“일단, 다시 한번 열매를 저기에 던져봐. 구멍이 생기는 순간에 내가 마력구를 날려볼게.”
서호가 다시 함정 위로 열매를 던지고 검은 구멍이 생겼다. 나는 열매가 미처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전 마력구를 그 구멍으로 방출해 넣었다. 그 순간 몬스터의 비명인 듯 커다란 소음이 퍼졌다.
끄이에에에이엑-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들어온 몬스터의 비명 중에 제일 끔찍한 소리였다. 그리고 땅 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멘트로 된 바닥이 조금씩 갈라지고 그 사이로 주황색의 몸의 애벌레가 엄청난 속도로 솟구치고 있었다. 당황한 태경이 방패를 만들어 우리 앞을 막았다. 애벌레의 모습이었지만 몬스터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몸이 땅 위로 모두 솟구쳤을 때 그것의 크기는 20m가 넘어가고 있었다. 태경의 방패가 사라지고 우리는 가볍게 몸을 튕겨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본 애벌레는 더욱 거대한 몸집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꿈틀꿈틀-
애벌레처럼 생긴 그것이 징그럽게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작은 애벌레를 볼 때와는 달리 느껴지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그렇게 꿈틀거리던 놈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곧바로 우리 쪽으로 입을 위치하더니 커다랗게 벌렸다. 눈앞이 컴컴해졌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검은 동그라미가 다였다.
“입 한번 엄청 크네.”
서호도 입을 벌리고 그 모양새를 구경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말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 애벌레의 벌어진 입을 관찰했다. 그런 서호를 상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밑에서 한 것처럼 마력을 많이 사용해 공격하면 쉽게 잡을 수 있겠지만 그 수가 문제였다. 이렇게 하나씩 끌어올려서 몬스터를 잡는다면 분명 모두 처리하기 전에 마력이 고갈될 것이 뻔했다.
나는 녀석의 몸을 쓱 훑었다. 보통 몬스터들이라면 한군데씩 보이는 약점이 있었으나 이것은 그것마저 보이지 않았다. 43층이 이 정도라면 보스는 어느 정도일까. 최종 보스는 심지어 지금 나타난 놈보다 컸다. 지금 생각해봤자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겉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안에 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저 거대한 몸에 마력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유효타를 날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해서 방법을 궁리했다.
“될까?”
“방법이 생각났어?”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41층. 파란 불과 싸울 때 마력끼리 충돌하며 폭발이 일어났었다. 생각보다 큰 마력의 폭풍이었다. 녀석의 몸 안에 두 개의 마력구를 날려 충돌시키면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충돌을 일으켜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앞으로 쏘아내는 듯한 마력의 방출밖에는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마력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슬슬 몸을 꿈틀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몸짓을 보였다. 땅 밖으로 솟구치던 속도를 보면 분명 녀석은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는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역시나 녀석이 빠르게 몸을 움직여 다가왔다. 피할 시간이 없었다. 녀석의 입이 우리를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그대로 우리는 녀석의 입안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온통 검은 녀석의 입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어!”
“으악!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빠르게 두 개의 마력구를 만들어 깊숙한 안쪽으로 던져넣었다. 다행히 녀석이 입을 닫으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력구로 인해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고 잠시 주변을 살피니 태경이 녀석의 이빨을 피하지 못하고 스쳤는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 개의 마력구 중 한 개의 마력구는 그대로 직선으로 날리고 나머지 하나의 마력구에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에는 비틀거리며 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으려던 마력구가 이내 내 의지에 따라 둥글게 돌아 직선으로 날아가는 마력구 옆에 이르렀다. 그리고 충돌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퍼엉-
폭발음이 들리고 안쪽에서 뜨거운 바람이 훅 불어닥쳤다. 또다시 커다란 녀석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탓에 중심을 잡을 수 없어 입안을 데굴데굴 구르며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끄에에에이엑-
“아악! 선배! 경고는 미리 좀!”
들고 있던 검을 녀석의 내벽에 박아넣으며 소리쳤다.
“아무 곳이나 무기 꽂아 넣고 버텨!”
녀석의 거대한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무서운 무기로 변했다.
쿠릉쿠릉-
녀석의 몸이 거칠게 흔들릴 때마다 우리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가 아래로 처박히며 계속 고통받았다. 녀석의 침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몸을 뒤덮어 미끈거렸다. 여차하면 검을 놓칠 것 같았다. 다친 태경이 걱정되었지만, 아직 잘 버티고 있었다.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약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씩 웃음 지었다.
“찾았어! 떨어지지 말고 버텨! 떨어지면 안 돼!”
“뭐? 야! 강이석! 위험해!”
“이석 씨!”
“선배! 나이스! 힘내요! 빨리 끝내야 해요!”
이리저리 구르며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나는 검을 뽑아내며 녀석의 몸 안 더욱 깊숙한 곳으로 굴러 들어갔다. 작은 구멍이었는데 아마 숨을 쉬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또 그것과 별개로 몸 밖과 연결된 곳인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다른 곳과 다른 색으로 빛나며 나에게 약점을 알려오고 있었다. 순간 녀석이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급격하게 몸의 기울기가 달라지며 새어 들어오던 빛이 사라졌다. 애써 버티지 않고 나는 흔들리는 것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약점에 다가갔다.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 도달한 순간 검에 영웅의 기운을 실어서 강하게 내리꽂았다. 손잡이 끝까지 박힐 정도로 깊숙하게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녀석의 끔찍한 비명 소리를 들으며 검 손잡이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녀석의 몸은 마치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깊게 꽂힌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흔들리는 놈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버티면서 반대 손을 그 옆에 위치시키고 마력을 방출했다. 놈의 살갗이 터져나가며 내 온몸을 뒤덮었다.
끄엑-
녀석의 마지막 단말마가 들리고 슬금슬금 움직임이 멈췄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고요에 잠겼다. 얼굴에 엉망으로 묻은 녀석의 살점을 손으로 긁어 떨쳐냈다. 그리고 슬쩍 눈을 뜨자 주홍빛의 미미한 빛이 내가 뚫어놓은 녀석의 몸통 밖에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내뱉어졌다. 긴장했던 몸이 살짝 풀리며 어깨가 뻐근하게 느껴졌다. 잠깐 그대로 늘어져 있을 때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다시 몸을 굳히는 순간 다시 팔을 늘어트렸다.
“선배. 나 진짜 비명횡사하는 줄 알았어요. 아니, 솔직히 지금 이건 너무했다. 인정하죠?”
“강이석.”
서호의 목소리 뒤로 상진의 음산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멋쩍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하하.”
“나 무서운 놀이기구 못 타는 거 알아 몰라. 이건 진짜.”
“우엑.”
태경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구명 옆을 붙잡고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구역질을 내뱉으면서도 멀쩡한 척 말은 잘했다.
“아, 저는 무서운 놀이기구도 잘 탑니다. 다만, 이건 좀 어지러워서. 진짭니다. 이석 씨. 후우.”
“그래서 이제 여긴 또 어딜까.”
“녀석들이 숨어있던 땅 구멍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그때까지도 태경은 구역질을 했다.
“형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멀쩡합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럽네요.”
한참 실랑이 끝에 우리는 애벌레 몬스터의 몸 밖으로 나왔다. 펼쳐진 풍경은 아주 거대한 동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벽에서 미미한 불빛을 내뿜어 시야가 어렵지 않게 확보될 정도였다.
“아, 진짜 미로는 싫은데. 이거 미로 아니겠죠? 아니, 44층 입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거야.”
“일단 녀석들부터 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렇게 계속 잡아야 하는 겁니까?”
“아니. 약점 찾았어요. 머리 위에 있는 숨구멍. 그게 이놈들 약점이에요.”
우리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제 놈들을 마주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마주치더라도 우리가 먼저 놈들을 발견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이놈들은 밑에서 만난 몬스터들과는 달랐다. 약점을 이용하면 잡는 것은 쉬웠지만 그 약점까지 다가가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일단 커다란 크기가 그랬고 다가가더라도 약점에 칼을 박아 넣는 것만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심히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애벌레 몬스터의 벌어진 입처럼 동그란 검은 구멍이 벽에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앞장서서 걷고 있던 나는 뒤로 신호를 보내고 벽에 바짝 달라붙어 몸을 숨겼다. 처음에는 검은 구멍이 애벌레 몬스터의 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 구멍에서 말소리와 함께 사람이 여럿 튀어나왔다. 대충 열댓 명가량 되는 것 같았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들은 이곳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큰소리로 기침을 하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이동하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곳으로 올라오는 입구가 하나 더 있는 걸까요?”
태경이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43층으로 오는 입구가 하나 더 있다고 하더라도 저런 검은 색을 띠고 있을 리는 없었다. 우리가 보아오던 입구는 늘 빛이 일렁이는 것이었다.
“아, 진짜. 나는 왜 매일 이런 일에만 배정되는 거냐고. 나도 밑에 층에 가서 능력치 좀 올리고 싶다.”
“야, 장난하냐? 너 전에 내려갔다 왔잖아. 운도 좋지. 그 뭐냐 시험까지 쳐서 얻은 거 많았잖아. 나야말로 내려간 지 한참 됐어. 불평하지마.”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요.”
“아니, 이 새끼가!”
“거기. 그만 조용히 하고 일이나 해. 이곳에 배치된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 거. 쉬다 간다고 생각해. 아무도 없겠지만 이곳에 올라온 사람이 있으면 만만치 않은 놈들일 테니까.”
“아니, 저 새끼는 선비야, 선비. 저런 놈이 어떻게 우리 집단에 들어온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건 나도 인정.”
놈들이 하나씩 흩어져 사라졌다. 그만큼 동굴은 갈라지는 길이 많이 있었다. 운 나쁘게도 한 사람은 이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면서 최대한 들키는 시간을 지연해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놈이 우리를 발견했다.
“다들 이리 와! 여기 쥐새끼들이 있었네!”
겁을 주려는 것인지 원래부터 건들건들하게 다니던 사람들인지 선비 같다며 놀림당하던 사람을 빼고는 양아치처럼 걸어왔다. 그리고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도 마찬가지로 불량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이. 형씨.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대? 대단한데? 여기 올라온 사람은 댁들이 1등이야. 축하해.”
그렇게 말하며 놈들은 손뼉까지 치고 있었다. 그런 놈들 틈에서 정갈한 자세를 하고 있던 사람이 제 옆에 있던 사람의 어깨를 치고 무어라 속삭였다. 잔뜩 구겨진 표정을 하며 이야기를 듣던 남자가 검은 구멍을 만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남자는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제일 먼저 올라온 걸 보니 너희들이구나. 그놈 일행이.”
충격적인 그 말에 서호가 흥분한 채 내 옆으로 튀어 나왔다.
“서하를 알아? 서하는 괜찮은 거야? 지금 서하 어디에 있어! 네놈들이 데려간 거지!”
“서하? 아, 이름이 서하였나.”
놈이 재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한쪽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모양을 보니 심사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나한테 물어봤자 아무것도 안 알려 줄 건데.”
“하하하!”
그 말에 놈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굳은 표정을 한 건 우리밖에 없었다. 싸늘하게 머리가 식었다. 내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을 용서해줄 생각은 없었다. 웃고 있는 놈 중 한 명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우리를 제일 먼저 발견한 놈이었다. 그놈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잔뜩 꺾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듯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놀란 눈을 한 놈들이 보였다. 잡고 있던 놈의 목을 옆으로 크게 비틀었다. 끄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 꿈틀거리던 몸이 잠잠해졌다.
“안 알려줘도 돼. 왜냐하면 우리가 금방 올라가서 구할 거거든. 우리 힘으로.”
놈들이 싸울 태세를 갖추기 전 다시 바로 앞에 위치한 놈의 목을 노리고 검을 들이밀었다. 놈이 몸을 뒤로 빼기도 전 놈의 목에 가는 선혈이 그어지고 그대로 위에 달려 있던 것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의 있는 사람?”
툭, 뎅그르르-
“으아아아아!”
놈들이 분노에 찬 소리를 내며 무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뻔히 겪던 패턴이었다.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그 소리와 함께 몸을 움직였다.
방심한 탓인지 두 명의 목은 쉽게 베어낼 수 있었지만, 나머지 놈들의 목을 베어내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생각인지 절반 정도는 우리를 향해 달려들어 싸우고 나머지 절반은 뒤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순간 이상이 감지되었다.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사람들의 팔을 보는 순간 우리는 모두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싸우던 와중에 잠시 흐트러졌다. 놈들이 틈을 발견하고 빠르게 파고 들어왔다. 계속해서 약하게 울리던 위험신호가 크게 다가왔다. 방심한 틈을 노린 놈들 때문이 아니었다. 뒤에 서 있던 놈들의 팔이 하나같이 몬스터의 그것처럼 보이기 시작해서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층을 오를 때마다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우리가 살인자집단이라고 부르던 놈들인 것 같았다. 백두진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끝나지 않았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한 말이 이런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그때부터 이런 사람들이 존재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팔을 넘어 놈들의 몸까지도 몬스터의 그것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저절로 태경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태경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저는, 아직 이상 없습니다.”
태경의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저들도 태경처럼 몬스터의 힘을 얻은 것일까. 하지만 태경은 한 번도 몬스터의 몸처럼 변한 적은 없었다. 저들은 태경과는 다른 방법으로 몬스터의 힘을 얻은 것일 터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 사이 완벽하게 몬스터로 변한 놈 하나가 앞으로 나오고 우리와 싸우던 놈 하나가 뒤로 몸을 숨겼다. 다른 놈들처럼 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저절로 조급함이 들었다. 몬스터처럼 변하지 않은 놈들을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나와 싸우던 놈 하나가 검을 비트는 순간 미세한 공간에 빈틈이 생겼다. 검을 휘두르지 않는 손에 모아놓았던 마력구를 그 틈에 밀어 넣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력구가 놈의 몸속을 진탕 시켜놓았다. 허물어지는 그놈의 몸을 발로 차올려 내게 다가오던 놈의 공격을 쳐내고 당황한 표정을 한 놈의 손목을 검으로 베어냈다.
“끕!”
그래도 제법 싸움을 할 줄 아는 놈인지 곧바로 반대편 손으로 땅을 짚고 옆으로 굴러 이어지는 내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직 몬스터로 변하지 않은 몸은 인간의 연약한 살로 이루어져 있었다. 검이 가슴에 박힌 놈이 그대로 목숨을 잃고 아무렇게나 땅바닥을 굴렀다. 태경과 상진의 앞에 뒹굴고 있는 두 놈까지 총 6명의 시체가 바닥을 굴렀다. 남은 놈들은 9명. 서호는 잔뜩 흥분한 상태여서 그런지 평소와 다르게 몸이 굼뜬 느낌이 났다. 무조건적인 공격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이놈들의 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서하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가는 검을 보고 마력구를 날려 빗겨나게 만들며 싸움에 끼어들려는 찰나였다. 몬스터로 변한 놈이 내 쪽으로 달려와 손을 휘둘렀다.
“넌, 내. 상대.”
몬스터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할 수 있는지 놈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놈의 팔이 스친 곳이 따끔따끔했다. 단지 놈의 공격에 살갗이 벌어진 탓만은 아니었다. 녀석의 공격에 마력이 실려있는 것 같았다. 평범한 몬스터로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조금씩 깨우치고 있는 내 상대로는 부족했다. 등 뒤로 수십 개의 마력구를 만들어냈다.
“그, 건.”
놈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들렸다. 물론 그 순간에도 나는 계속해서 마력구를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막을 수 있어? 인간이길 포기했으면 그만한 힘은 얻었겠지?”
막 몬스터로 변신을 완료한 놈들 셋이 아직 변하지 못한 사람들 앞을 막아섰다. 삼분의 일 정도의 마력을 쏟아부었으니 막아내더라도 어느 정도의 피해는 입힐 수 있을 것이다. 내 앞에 있던 놈도 그쪽으로 달려가려는 것을 앞을 가로막으며 섰다.
“네 상대는 나라고 하지 않았어?”
“비, 켜!”
“순순히 그 말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
횡으로 휘둘러지는 놈의 팔을 검을 들어 올려 막아냈다. 찌릿찌릿하게 마력이 충돌하는 충격이 손을 타고 팔 전체로 전해졌다. 연습 상대로 충분할 것 같았다.
푸슈욱-
몬스터로 변하기 위해 뒤쪽에 서 있는 놈들에게 만들어 낸 모든 마력구를 던졌다.
“너는 저거 말고 내 공격 한 번 막아봐.”
마력을 덧씌운 검 위로 영웅의 기운을 둘렀다. 파지직 하며 전기가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로 변한 놈이 긴장한 채 마력을 더욱 끌어올리고 있었다.
콰앙!-
놈의 팔과 검이 마주쳤다. 엄청난 충격파가 주변으로 퍼졌다. 동시에 내가 쏘아 보낸 마력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공격을 막아낸 녀석이 옆으로 빠져 다시금 내게 반격을 가하는 중이었다. 공격을 막아낸 한쪽 팔이 탈골되었는지 다른 쪽 팔이었다. 나는 그 순간 있는 힘껏 위로 뛰어올랐다. 녀석의 공격이 애꿎은 땅에 처박히고 지진이라도 난 듯 동굴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녀석의 뒤로 돌아간 내가 다시 놈의 등에 검을 꽂아 넣으려던 때였다. 놈의 등이 벌어지며 또 다른 팔 하나가 튀어나왔다. 최대한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완벽하게 막아낼 수 없었다. 왼쪽 어깨를 내주고 만 것이다. 나는 그대로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둔탁한 고통과 함께 부스러진 벽에서 떨어진 먼지가 코와 입안으로 들어와 기침이 났다.
“콜록, 콜록. 컥!”
오랜만에 느껴보는 커다란 고통이 배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뒤로 날아간 나를 쫓아온 놈의 공격을 또다시 허용하고 만 것이다. 살을 가르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은박지를 씹은 듯한 찌르르한 격통이 이어졌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놓치지 않은 검을 녀석의 손목을 향해 그대로 휘둘렀다. 아까 전보다 많은 마력과 영웅의 기운을 실은 검에 녀석의 팔목이 덜걱이며 부러졌다. 당황한 녀석이 뒤로 물러나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배가 뚫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얕은 상처도 아니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치명적인 부상을 불러왔다. 피가 흘러나오는 배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숨을 크게 뱉어냈다. 앞으로 한걸음 옮기자 뜨거운 피가 왈칵 새어 나오는 것이 그대로 손바닥에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겪은 일들이 이제는 고통에 조금 무디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걸음 물러선 녀석의 뒤로 마력구를 막아내고 3명이 더 다가왔다. 그리고 나머지 2명은 상진과 태경, 서호의 앞에 있었다. 내가 마력의 삼분의 일을 사용하면서 내보낸 마력구에서 5명이나 살아남았다. 마지막 보루로 남겨놓은 스킬을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방심하지 않는다면 승리는 내게로 기울겠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테고 일행들도 완벽하게 무사하기는 힘들었다.
순백의 버서커를 사용하자 몸에 힘이 넘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상처가 아문 것도 아닌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3분. 3분 만에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나는 앞으로 달렸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저놈들이 서하를 아는 것 같은 기색을 보인 거로 보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버서커를 쓴 후의 후유증만 잘 관리해서 올라간다면 이제 금방 볼 수 있을 것이다.
놈들이 팔을 들어 올리며 같이 충돌해왔다. 나는 방어보다는 공격에 치중하기로 했다. 공격이 스쳐 지나가 살이 갈라지며 피가 튀어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녀석들은 몬스터로 변하기는 했지만 고통은 느껴지는지 유효한 공격을 날릴 때마다 주춤거리며 틈이 조금씩 생겼다. 처음 내가 상대하던 녀석은 한쪽 팔은 탈골되었고 한쪽은 손목이 부러져 뒤로 빠져 슬쩍슬쩍 공격하는 소심한 패턴으로 변했다. 아직은 저쪽 편도 잘 견디고 있었다. 태경이 검은 기운을 생각보다 더욱 많이 사용하는 것이 보였지만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더욱 빠르게 이놈들을 처리해야 했다.
사용하고 남은 마력은 전처럼 절반. 지금은 이 힘을 다 사용할 수 없었지만 스킬로 인해 2.5배 강한 기운을 낼 수 있었다. 녀석들을 향해 마력을 분출했다. 강해진 힘 때문일까, 뱉어내는 마력의 뜨거움이 느껴졌다. 쓰러진 녀석은 총 셋. 이제 남은 건 내 앞에 있는 두 놈과 일행들의 앞에 있는 두 놈이 전부였다. 놈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쩌적-
땅이 갈라지고 깊은 구멍을 만들었다. 놈들의 눈이 빛나며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내가 날리는 마력구와 비슷한 것이었지만 그에 비하면 굉장히 조촐한 수준이었다. 살짝 뛰어 뒤로 가볍게 피한 나는 놈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겨우 조그만 힘 하나 얻으려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었다. 손에 손속을 둘 필요도 없거니와 사라져도 마땅한 자들이었다. 나는 위로 높게 점프해 떠올랐다. 공중에 떠 있어 공격을 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공격이 날아들었다. 검을 쥐지 않은 내 팔 한쪽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대로 주먹을 움켜쥐고 그것을 힘껏 뻗었다. 검을 든 손은 어깨 뒤로 손이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그 추진력을 이용해 앞에 있는 놈에게 던졌다.
쿠르르르-
얼핏 보면 불처럼 보이는 듯한 마력이 내 뒤를 노리며 달려드는 놈에게 뿜어지고, 내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의 심장에 검이 꽂혔다. 마력에 적중한 놈의 가슴팍이 녹아내려 내부의 흉측한 모습이 드러났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제 가슴을 내려다보는 녀석을 발길질로 넘기고 바닥에 떨어졌던 검으로 녀석의 목을 그었다. 2분 10초가 막 지났을 때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벽에 마주했습니다.]
[성장한계치가 1 줄어듭니다.]
“아악!”
비명 소리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이서호!”
“서호야!”
다급한 상진과 태경의 외침이 이어졌다. 둘이 서호에게 달려가려고 하지만 앞을 막고 있는 놈이 있어 쉽지 않아 보였다. 서호가 공격에 적중당해 벽에 파묻히고 그런 서호를 향해 다시 공격을 날리는 녀석이 보였다. 나는 달리기도 전에 마력구를 내보내고 움직였다. 녀석의 팔에 적중한 마력구 탓에 각도가 틀어지긴 했지만 아래로 떨어진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듣고 싶지 않은 비명 소리가 울렸다.
“커헙! 끅!”
“아, 안 돼.”
서호의 앞에 도착한 나는 놈을 밀어내고 서호를 안에서 꺼냈다.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서하를 구하지도 못했는데 서호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아득한 감정이 몰려왔다.
“서호야. 서호야?”
“허윽. 허억.”
서호는 대답을 내뱉지도 못하고 가빠진 호흡을 내쉴 뿐이었다.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하. 으아. 아. 아아아! 아아아아!”
뻥 뚫린 배 사이로 흘러내리는 내장이 보였다. 순간 턱 막혀오는 숨에 잠시 머리가 어질했다.
“이석 씨!”
“뒤! 뒤에!”
-쾅!
이런 틈을 녀석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서하를 안고 있던 나는 뒤에 있던 놈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옆으로 날아갔다. 그 와중에도 서호를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여기서 서호를 놓치면 더욱 믿고 싶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괜찮았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회복포션이 남아있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남겨놓은 것이니 서호는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머리 위로 후두두 떨어지는 돌덩이를 서호가 맞지 않도록 내 몸으로 막아내고 옆에 서호를 뉘었다. 뒤따라 온 녀석을 처리해야 서호에게 포션을 먹일 수 있었다. 눈에서 실핏줄이 터지는 느낌이 났다. 있는 마력을 모두 쏟아부어 커다란 마력구 하나를 만들어냈다. 이미 많이 줄어든 마력 탓인지 크다고는 해도 전에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그 크기는 조금 작았다. 하지만 위력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14초
13초
12초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마력구를 던지며 검을 들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마력구를 피하려고 움직이던 녀석이 같이 날아오는 검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것이 녀석의 마지막이었다. 녀석은 몸이 녹아내리며 다른 녀석들과 달리 다리만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상진과 태경이 이기고 있는 상황을 확인한 후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포션을 꺼냈다. 혹여 조금이라도 새어나갈까 봐 서호의 상처 앞에 다다를 때까지 뚜껑을 제대로 열지도 못했다.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포션에 닿은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숨소리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서둘러 열매도 꺼내 손에 들었다. 하지만 이미 정신을 잃은 서호가 그것을 제대로 입에 넣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진이 내게 해줬던 일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열매를 베어 문 나는 서호가 삼킬 수 있을 때까지 꼭꼭 씹은 후 서호의 입에 내 입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흘려 넣은 열매의 과육이 그대로 밖으로 흘러나왔다. 다시금 똑같이 씹어 서하의 입에 넣고 혀까지 집어넣어 최대한 서호가 과육을 삼킬 수 있게 도왔다. 꿀꺽 목 넘김이 느껴지고 나는 그대로 서호의 얼굴을 무릎 위에 올려 끌어안았다.
‘와! 선배가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죠? 맞죠? 와, 이 모습도 진짜 장난 아닌데! 나 또 한번 선배한테 반했잖아.’
깨어 있었다면 얄궂은 말들을 내뱉어왔을 텐데 눈을 감고 있는 서호는 숨소리만 미약하게 들릴 뿐 너무나 조용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버서커의 유지 시간이 끝나고 후유증이 찾아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지친 몸이 계속해서 휴식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상진과 태경이 막 놈을 처리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걱정이 되는지 빠른 걸음걸이였다. 가까이 다가온 둘의 몰골은 장난이 아니었다. 온통 자잘한 상처들로 인해 피범벅이었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곳도 심상치 않게 보였다. 아직도 잘게 떨리는 손을 움직여 가방에 든 열매를 모두 꺼내 상진과 태경에게 건넸다. 이제 마음을 다잡고 이들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싸우기로 결심했는데 벌써부터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아직 내가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죄책감에 숨이 가빠졌다. 하지만 전과 달리 포기하고 싶다거나 왜 내게 이런 운명이 주어졌는가에 대해 혼란스러운 것은 없었다. 강하지 않은 나에 대한 화와 죄책감이 들 뿐이었다.
가빠지는 숨소리가 상진과 태경에게까지 들렸는지 아니면 내 표정이 처참하기 때문인지 그 둘은 내가 내미는 열매를 한 아름씩 받아들고는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이석아. 괜찮아.”
“살았으니까 된 겁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어요.”
“빨리 먹어. 온몸이 상처투성이잖아.”
내 말에 상진과 태경이 옆에 털썩 주저앉아 열매를 들어 입에 넣었다. 상진이 애써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역시 건강이 최고야. 그렇지?”
상진이 열매를 들어 올린 손을 내 눈앞에 빙글빙글 돌리며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상진은 오른손잡이였는데 지금은 왼손에 열매를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상진의 오른쪽 손목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흐르는 중이었다.
“많이 다쳤어?”
목이 메어 목소리가 흉하게 들렸다. 상진이 슬쩍 손을 뒤로 감추며 허허 웃었다.
“싸우다 보면 다 다치는 거지. 괜찮아. 열매 먹고 조금 쉬면 괜찮아지는 정도야. 저놈들 상대로 이 정도인 게 어디야.”
“이석 씨. 제 걱정도 좀 해주세요. 서운합니다?”
태경도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형은 괜찮아요? 몬스터가 준 스킬, 한계 이상으로 사용한 건 아니죠?”
“네. 아직은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몸이 이상해지면 그때는 혼자서라도 다시 밑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이석 씨야말로 지금 배에서 피가 흐르잖아요. 어디 봐요.”
태경의 말에 내가 상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점점 더 힘이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어디 봐.”
상진도 굳어진 얼굴로 내 상처를 살폈다. 태경이 열매를 으깨 다친 내 배에 발랐다. 살점이 흉측하게 떨어져 나간 자리여서 그런지 끔찍한 격통이 몸을 휩쓸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내 무릎 위에 있는 서호의 얼굴이 땅으로 곤두박질칠세라 주먹을 쥐며 고통을 참았다.
“서호 머리 바닥에 잘 눕혀줘. 떨어트릴 것 같아.”
“서호는 내가 잘 챙길 테니까 네 걱정을 먼저 했으면 좋겠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석 씨. 벽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아요.”
그렇게 말한 태경이 서호를 챙기던 상진의 손목에도 내 상처에 바르고 남은 열매를 발랐다.
“뼈가 다친 건 아니지? 그냥 상처만 난거지?”
벽에 기대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보고 상진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그런 상처가 나도 나 포션 하나 있어. 그거 마시면 돼.”
“형은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을 꽉 감았다 뜬 나는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놓기로 했다. 혼자 생각할수록 자꾸 그것을 파고들어 더 답답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초조해져. 과연 내가 그때 그 몬스터를 이길 수 있을까. 아직도 이렇게 약한데 자꾸 놈은 가까워져.”
“이석 씨. 이석 씨는 충분히 강합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서하가 사라지고 서호는 이렇게, 다치고. 나는.”
“이석 씨. 사람 아닙니까?”
“네?”
태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태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인데 어떻게 실수 한 번 안 하고 또 잠 한 번 안자고 긴장 한 번 안 놓을 수 있습니까.”
태경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눈을 맞췄다.
“그렇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던 태경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그 모습이 무척 단단해 보여 믿음이 갔다.
“제가 제일 멀쩡하니까 망을 볼게요. 빨리 회복하고 교대합시다.”
잠들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는데 몸을 흔드는 손 탓에 눈을 떴다. 이렇게 긴장을 놓고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벌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강이석. 애벌레 몬스터야.”
“어디? 서호는?”
상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땅 위로 머리를 올리고 있는 애벌레 몬스터가 보였다. 이렇게 가까워질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잠을 잤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태경의 말처럼 내가 인간인 이상 휴식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상진이 내 옆을 가리켰다. 서호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서호를 확인하고 나서야 내 상처를 확인했다. 완벽하게 아물지는 않았지만 절반 이상 아문 상처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위에 사람이 있나?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이석 씨 말대로 위에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설마 또 그놈들이.”
“아뇨. 이곳에 큰소리를 내면서 돌아다니던 것을 보니까 아마 몬스터들이 그놈을 공격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네. 밑에서 올라온 생존자들 같습니다.”
생존자. 태경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이상 모두가 생존자였다.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들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도와줘야겠어요. 아마 저 사람들은 몬스터의 약점을 모를 테니까.”
하지만 도울 새도 없이 애벌레 몬스터가 입을 벌리고 위로 솟구쳤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순식간에 먹이활동을 마친 것이다. 태경과 상진이 미처 하지 못했던 대답을 뒤늦게 내뱉었다.
“네. 도와주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살아있을 테니까.”
“나랑 형이 가서.”
“아니. 내가 갈게.”
[lv. 49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성장한계치+2]
[경험치: 0.3퍼센트]
[체력: 1,200(+40)]
[근력: 1,200(+38)]
[마력: 1,682(+35)]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5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동체 시력, 직감, 약점간파…]
[특성: 민첩- 민첩이 2.5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독 내성- 15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최대)]
[point: 1,082(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서일까. 지금까지는 보지도 못했던 수치의 포인트가 주어져 있었다. 절로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덕분에 내가 목표했던 능력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내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없게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 정도의 능력치도 부족했다.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며 올라간 능력치로 인해 가벼워진 몸을 테스트해본 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상진과 태경에게 웃어 보였다. 나름 나는 괜찮다는 의미였다.
아직 남아있는 상처에도 몸에 활기가 넘쳤다. 다행이었다. 아프다고 싸움을 피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팔이 잘려나가고 다리가 잘려나가는 순간에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애벌레 몬스터의 밥이 된 사람들을 구해야 할 때였다. 살짝 허리를 틀어 달려갈 준비를 하니 배에 난 상처에서 찌르르한 아픔이 몰려왔다. 아직 다 나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이보다 더한 상처를 입은 서호도 있었다. 고작 이런 상처로 엄살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내 생명줄과 마찬가지인 검의 감촉을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앞으로 내달렸다. 원래 내가 낼 수 있는 속도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였다. 눈앞에 또 다른 먹이를 발견한 놈이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갔다. 입안으로 들어온 나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깊숙하게 더 들어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뭐야! 어떻게 나가지?”
“죽지 않은 게 어디야.”
“부길드장님! 그렇게 낙천적으로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그럼 뭐. 지금 비명 지른다고 뭐가 달라져? 사내자식이 그렇게 유약해서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았나 몰라.”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렇다. 나에게는 좌절할 시간도 죄책감을 느껴 괴로워할 시간도 없었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빠르게 달리면서 참고 있던 숨을 뱉어내며 어두운 시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낯선 소리에 길드원들이 잔뜩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이를 악물고 바닥에서 발을 떼고 도약했다. 그대로 마력구를 먼저 날리고 검을 들어 횡으로 그었다.
콰광, 쩌어억-
마력구가 몬스터의 몸에 부딪혀 폭발하는 소리 뒤로 검에 의해 갈라지는 소리까지 이어졌다. 확실히 이전보다 더 수월하게 몬스터를 제압할 수 있었다. 마력이 더욱 풍만해졌고 검에 전달되는 양도 늘어났다. 검날을 한 번도 갈아낸 적 없었지만, 예리하게 벼려진 것처럼 날이 바싹 서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구멍을 통해 그대로 솟구쳐 밖으로 빠져나왔다.
끄이에에에이엑-
비명을 지르던 몬스터의 몸체가 발악하다가 힘을 잃고 나뒹굴었다.
쿵-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비명이 사방으로 퍼졌다.
“아.”
나는 멋쩍게 턱을 긁었다. 벽에 반쯤 가려진 내가 만들어낸 상처가 들썩이더니 이내 그 안에서 사람의 얼굴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놈의 몸 안에서 끈적한 액체를 뒤집어쓴 혜진이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얼굴에 이어 몸까지 밖으로 내밀었다. ‘끙’하는 신음을 들으니 미안한 감정이 치솟았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환한 미소로 물들었다가 오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이네요. 이석 씨.”
“네. 오랜만이에요.”
안부 인사 뒤 그녀는 무언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사이 길드원들이 모두 몬스터의 밖으로 탈출했다. 헛구역질하는 사람도 있고 거친 기침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서하는, 서하는 찾았어요?”
“아뇨.”
바로 이어지는 내 대답에 혜진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져 갔다. 그 옆으로 반가운 기색을 내뿜던 지연과 이환의 낯빛도 대번에 바뀌었다. 지연의 입에서 짧은 탄성만이 내뱉어졌다.
“아.”
“그럼 상진 씨랑 태경 씨랑 서호는?”
혜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웃으며 뒤쪽을 눈짓했다. 혜진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며 빠르게 내 뒤편으로 이동했다. 지연과 이환도 그 뒤를 따랐고 멀쩡해진 길드원들 몇몇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자리에 그대로 서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길드원들 앞을 지켰다. 고개만 돌려서 살펴보니 혜진이 반가운 얼굴로 상진과 태경에게 인사하고 아직 쓰러져 있는 서호 앞에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손을 뻗고 있었다. 잔뜩 더러워진 얼굴과 여기저기 찢어진 옷을 보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상진과 태경, 나도 물론 그녀와 별반 몰골이 다르지 않았다. 누가 봐도 우리가 동료라는 것을 알 정도로 비슷했다. 나는 이제야 조금 진정했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나머지 길드원들을 추스르고 우리가 쉬고 있던 곳으로 발을 옮겼다.
생각보다 길드원들이 층을 빠르게 올랐다. 우리도 상대하느라 애를 먹은 몬스터들이었는데 이들도 많이 성장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쉬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가 대부분의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올라오면서 그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어 빠르게 층을 오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군단 단위로 줄지어 있던 놈들이었는데 혜진 일행은 그런 몬스터 군단을 만난 적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혜진의 레벨이 상당히 많이 올라있었다. 45레벨이면 나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레벨이었다. 다만, 혜진의 레벨은 45레벨보다 높게 오를 수 없었다. 그녀의 한계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단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혜진은 이곳에 와서도 계속해서 성장했다. 좌절해도 다시 일어났고 포기할 줄을 몰랐다. 그녀는 아마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도 큰일을 해낼 사람이었다.
혜진은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을 쉽게 처리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성장의 초점을 잡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낮은 레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투능력을 보여주는 길드원들이 많다고 했다. 단순히 능력치에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마치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스카악, 촤악!-
길드원들에게 애벌레 몬스터를 사냥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는 조금 더 동굴 안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잡았다. 상처를 회복하고 눈을 떴지만 충격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는 서호가 걱정되는 것도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서하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전의 그 몬스터로 변한 놈들과 얼마나 더 싸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최상의 몸 상태는 아니더라도 최악의 몸 상태로 층을 오르는 것은 목숨을 하나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았다. 서호에게도 서하를 구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랬다. 아마도 그놈들보다 강한 녀석들이 서하의 주위에 널려 있을 것이 뻔했다. 혜진과 길드원들은 그 말을 듣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밑에서 층을 오르면서 몇 번 사람에게 습격을 당한 적이 있었지만 살인자집단의 잔챙이들이 남아있다고만 생각했지 그들이 몬스터로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23명이나 되었던 길드원들은 혜진, 지연, 이환을 포함해 10명만 남고 밑으로 돌아가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밑으로 내려가는 길도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많은 수의 길드원들이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보스 몬스터의 존재에 관한 것도 내게 전해 들은 혜진은 밑으로 내려가는 길드원들을 배웅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는 치열했던 어제를 떠올리는 것도 치열할 내일을 떠올리는 것도 너무 힘드네요.”
“그리고 힘들어하는 것도 이제는 지치죠. 지키지 못한 사람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약해빠진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까지도요.”
덧붙인 내 말에 혜진이 살짝 놀란 눈을 해 보였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지켜야 하니까 강해져야 하고 강해져야 하니까 층을 올라야죠.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시간도 아깝잖아요?”
“그렇네요. 아직도 힘들다고 투덜대는 저는 이석 씨만큼 지치진 않았나 봐요. 더 열심히 해야겠는데요?”
“혜진 씨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뭔가 변한 것 같네요. 이석 씨.”
“사람이니까 실수도 하고 변하기도 하고 그러는 거죠.”
혜진이 내 말에 동조하며 웃었다.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잠시 고민하듯 걸음을 옮기던 혜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사실 포기할까 생각도 많이 했어요. 특히 서하가 없어졌을 때 너무 미안하고 힘들어서 정말 포기할 뻔했어요. 내가 과연 이런 사람들이 믿을 만한 사람인가 하고요. 근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주위를 보니까 나를 의지하고 믿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가 포기하면 저 사람들도 다 나를 따라서 포기할 것 같고. 그래서 다시 결심했어요. 이제는 나를 위해서나 남보다 강해지기 위해서 올라가지 말고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올라가자. 이석 씨도 그랬나요?”
“네.”
혜진이 우린 참 많이 닮았다며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참 아팠다.
“그래서 다들 포기하더라도 나만은 포기하지 말자. 그런데 사람이 그렇잖아요. 아무리 그렇게 다짐해도 꺾일 때가 있으니까. 그때 이석 씨랑 한 약속을 생각했어요. 정상에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도 지켜야 하는구나. 아, 나는 복 받았다. 이런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는데도 주위에 믿을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이석 씨랑 저는 정말 비슷한 점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아직 내가 이석 씨를 따라가려면 먼 것 같기는 하지만.”
“혜진 씨는 저보다 멋진 사람이에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석 씨 우리 약속 하나 더 할까요?”
“네. 좋아요.”
“무슨 약속인지는 안 물어보네요?”
“혜진 씨와의 약속이라면 물을 필요도 없죠.”
“아, 나 지금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진 것 같은데. 상진 씨랑 태경 씨가 질투하는 거 아닌지 몰라.”
“걱정 마세요.”
“벌써 질투의 눈길을 보내는 이석 씨의 낭군들이 뒤에 주르륵 서 있는데요?”
혜진이 장난스럽게 뒤를 흘겨보며 말했다. 짓궂은 말투가 혜진다웠다. 혜진과 눈을 마주친 상진이 싱긋 웃음을 보냈다. 같이 마주 웃어준 혜진이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처음 보는 표정에 절로 긴장감이 들어 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펴며 손장난을 쳤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실까.
“이석 씨. 정상에 우리 중 하나는 누구라도 올라가서 복수해야지 않겠어요? 만약 층을 오르다가 내가 이석 씨의 발목을 잡게 되는 일이 온다면.”
“그럴 일은 없어요.”
“그렇죠. 하지만 여기는 이상한 세계잖아요?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와서 내가 목숨을 잃어도 죄책감 느끼지 말아요. 선택은 내가 내린 거고 성인인 이상 더군다나 이런 이상한 세계에서 목숨을 걸고 내린 선택이라면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스스로가 져야 하잖아요?”
“혜진 씨.”
“우리 약속하기로 했죠? 약속이 뭔지 묻지도 않고 하기로 한 이석 씨 탓이에요. 무르기 없기.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지쳤다고 말하지만 이석 씨는 너무 착한 사람이라, 계속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거든.”
혜진이 다시 웃는 표정으로 돌아와 약 올리는 말투를 했다. 그런 그녀를 따라 나도 작은 웃음을 보이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는지 손톱이 파고들어 약한 고통이 느껴졌다.
“서하가 납치된 것도 혜진 씨가 죄책감 느낄 필요가 없는 일이에요. 혜진 씨도 너무 착한 사람이라 계속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혜진 씨를 의지하는 한 사람으로서 감사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웃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혜진이 이를 악문 듯 볼이 씰룩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그녀도 힘들었겠지. 강하게만 보이던 혜진이 이 순간만큼은 조금 작아 보였다.
“고마워요. 길드원들 올라갈 준비시킬게요.”
혜진이 애써 붉어진 눈을 감추고 길드원들을 모아 위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내려가는 길드원들을 데려다주는 길에 44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도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는 저벅저벅 말없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살짝 멍한 것 같은 서호가 걱정되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44층입니다.]
“여기는?”
익숙한 장소였다. 상진이와 매번 장을 볼 때마다 이곳으로 와서 장을 봤었다. 이곳은 상진이와 자주 가던 마트의 안이었다. 그리고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유레이로 떨어지기 전에 서 있던 에스컬레이터의 위였다.
후우웅!-
지하의 식품 코너를 향해 내려가던 에스컬레이터가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멈추더니 곧 모든 불이 꺼졌다. 유레이에 떨어지기 전과 너무나도 비슷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은 유레이였다. 우리가 원래 살던 세계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확실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뭐야?”
“정전이야?”
사람들이 놀라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것은 같이 올라온 사람의 수에 비해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마치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같은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상진아?”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서호야! 태경이 형!”
역시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희미한 형체가 앞에 일렁거리자 나는 그대로 그 사람을 돌려세웠다.
“혜진 씨?”
“꺄악! 뭐야! 누구세요?”
“거짓말. 거짓말!”
위이잉-
모기소리인지 날파리의 소리인지 귓가에 애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벌레를 잡았다. 동시에 마트의 불이 다시 켜졌다.
“무슨, 도대체 이게 무슨….”
수많은 사람이 정전에 당황했다가 불이 켜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44층에 같이 올라온 일행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밀치며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갔다. 사람들이 욕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상진아! 형! 서호야!”
이름을 부르면서 미친 사람처럼 마트 안을 뛰어다니는 나를 보며 사람들이 저마다 핸드폰을 들어 올려 사진이나 동영상들을 찍기 시작했다.
“아니야. 거짓말이야. 돌아왔을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어떡하지. 서하는, 서하를 아직 못 찾았는데.”
잔뜩 흥분해서 돌아다니던 나는 조금씩 패닉에서 벗어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행동을 멈춘 나를 두고 저마다 흩어져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생각. 거짓말이지? 설마 다 꿈이었던 건?”
혼자서 중얼중얼 모든 가능성을 펼쳐놓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익숙한 체온이 어깨에 얹어졌다.
“이석아! 형아 많이 기다렸어? 미안. 많이 늦었나? 과제 제출하고 교수님한테 붙잡혀서 이야기를 좀 하느라.”
“상진아?”
“무섭게 왜 그래. 자기야. 화났어?”
그렇게 말하던 상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어? 안 때려? 원래 이러면 네 손이 날아와서 내 등짝을 때려야 하는 건데.”
“너 누구야.”
상진의 표정이 황당한 것처럼 변했다. 그리고는 당황한 것처럼 입을 오물오물하다가 짧은 숨소리를 뱉어냈다.
“이석아. 진짜 많이 화났어? 나 진짜 교수님한테 잡혀서 늦은 거라니까? 야. 진짜 너무하다. 너도 교수님한테 잡히기 싫어서 네 것까지 같이 내달라고 한 거잖아! 이 형아한테 고맙다는 말은 안 하냐?”
상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눈앞의 상진이 내 이상한 상태를 눈치챘는지 자리에서 일으켰다. 걱정이 한 움큼 뭍은 그 눈빛은 내가 아는 상진이의 것이 맞았다.
“일단 집에 가자.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간다? 걱정돼서 안 되겠어. 너 갑자기 왜 그래?”
익숙한 도로와 높은 빌딩들, 매번 타던 초록빛의 버스와 익숙하게 꽉 찬 좌석들이 오히려 내게 강한 이질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도착한 집도 환한 색상의 커튼이 달린 창문과 싱글 크기의 침대, 상진이가 언제 올지 몰라 둔 2개의 베개까지 그대로였다. 집에 와 자연스럽게 웃통을 벗고 남의 침대에 눕는 상진이까지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원래 살던 세계와 같았다.
“이석아, 안 들어오고 뭐 해?”
상진이 자기 집인 양 자연스럽게 나를 불렀다.
“이상진. 이거 진짜야? 거짓말이잖아. 그렇지? 이거 다 환상이잖아.”
심각한 표정이 된 상진이 내게로 다가와서 침대로 이끌었다.
“이석아. 너 진짜 이상해. 깨워줄 테니까 좀 자고 일어나.”
“거짓말이잖아. 응? 이거 가짜잖아.”
“조금 자자. 이리 와.”
나는 인상을 쓰면서도 상진이의 길고 굵은 팔에 따라 침대로 이끌렸다. 나를 침대에 누인 상진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옆에 누워 팔베개를 해줬다. 남은 한 팔은 얌전히 내 허리 위로 올라왔다.
“형아가 재워줄게? 자자. 응? 착하지.”
그가 말할 때마다 목에 닿아오는 숨결에 오소소 솟아오르는 소름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좀처럼 내가 잠들지 않자 상진이 내 위로 올라타 짓궂은 얼굴을 해 보였다.
“우리 이석이. 잠 안 오면 뭣 좀 먹고 잘까?”
놀리기 위해 한 행동이었음에도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상진이 재미없다며 다시 옆에 누워 나를 안아왔다. 도대체 뭐지.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걸까. 머리는 복잡했지만 허리 위에 토닥토닥 닿아오는 상진의 손에 긴장이 풀리고 조금씩 잠에 빠질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정말 잠에 들려는 찰나였다.
[유레이 45층입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유레이의 층이 줄어듭니다.]
[현재 꼭대기 층은 45층입니다.]
[줄어들기 전 꼭대기 층은 50층입니다.]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현재 꼭대기 층은 46층입니다.]
16. 다시 찾은 서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번뜩 눈이 떠졌다. 주변의 배경이 순식간에 바뀌고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멍청하긴.”
내가 생각해도 지금의 나는 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굴이 내 의지를 벗어나 마구 움직이고 있었다.
“이젠 조금 달라졌나 했더니. 여전히 똑같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내가 말했잖아요. 놈이 점점 밑에까지 힘을 뻗어온다고.”
피곤한 듯 아름다운 남자가 제 이마를 매만졌다. 나는 주섬주섬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곤란해졌어요. 이석 씨.”
“곤란?”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오던 놈을 막아내기는 했는데. 이석 씨가 아직 자신의 힘을 모두 각성하지 못한 것 같네요.”
나는 다급하게 일어나 아름다운 남자에게 물었다. 아름다운 남자가 내 물음에 비웃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내 일행들은? 내 일행들은 어떻게 된 거야?”
“모두 이석 씨 옆에 나란히 누워있기는 하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죠.”
“뭐?”
“이석 씨가 잠들려고 하던 곳. 거기서 잠들면 그대로 죽는 거예요.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고 신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기는 한데. 뭐, 모르는 거죠.”
“나는, 나는 어떻게 여기에?”
“이석 씨가 죽으면 모든 게 끝인데 제가 이석 씨를 죽이겠어요? 이석 씨 때문에 또 힘이 줄어들었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아름다운 남자가 힘이 드는 듯 지친 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겼다. 여유가 넘치던 아름다운 남자는 없었다. 모든 행동과 말투에 신경질적인 기색이 묻어나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강해지라고 말했잖아요. 강해지라고. 강해져서 보스를 죽이라고.”
“나도 노력했어! 노력했는데!”
“노력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란 걸 알잖아요. 이석 씨. 아직 레벨도 전부 올리지 못한 걸 보고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아요?”
“녀석이, 녀석이 층을 낮추는 바람에.”
“생각보다도 놈이 빠르게 밑에 있는 층까지 힘을 뻗치더라고요. 놈이 우리 눈을 가리고 사람들을 꾀어냈어요. 보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놈의 수족 역할을 하고 있던데. 알죠, 이석 씨. 사람을 죽이면 더 많은 능력과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것.”
“알고 있어.”
“그들을 모두 죽여요. 마지막 기회에요. 46층에 올라가기 전까지 레벨을 올리고 힘을 깨달아야 해요. 힘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요.”
“나는.”
“이석 씨가 그랬잖아요. 죄책감을 느낄 시간도 부족하다고.”
“맞아. 그랬지.”
“그런데 그 속에서 그렇게 편하게 잠이 들려고 해요?”
“내가 멍청했어.”
“보스 몬스터를 잡기 전까지는 절대 끝나지 않아요. 끝난 것 같아도 끝난 게 아니라고요. 살인자집단을 모두 죽이고 그래도 부족하면, 이석 씨가 선택해야 할 건 하나에요.”
아름다운 남자의 눈에서 광기가 묻어났다. 몸이 굳어서 그의 눈빛을 그대로 받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목울대가 절로 울렁거리며 침을 삼켰지만 마른 입안으로 인해 따끔한 통증만이 일어날 뿐이었다. 분노가 일어났지만 표출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의 방심이나 실수는 안 돼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실수. 그거 해도 괜찮은 건 이석 씨가 원래 살던 세상에만 해당하는 말인 거 알죠. 거기선 목숨이 걸려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실수 한 번에 사람 목숨이 달렸어. 아니지, 세상 사람들의 모든 목숨이 달렸죠. 앞으로 이석 씨의 인생은 이석 씨가 만드는 거예요. 조그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요. 넘어가지 말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이 번쩍 떠졌다. 주위에서 옅은 알코올 향이 맡아졌다. 이곳이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에 살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익숙한 배경이었다. 학교 양호실이었다. 위치를 파악한 나는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다들 잠에 취한 듯 추욱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분노와 공포, 슬픔이 머리를 스쳐 가며 공놀이하듯 튕겨 나갔다.
“제발, 제발 일어나.”
가만히 누워 잠든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다들 행복한 듯 미소짓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상진과 태경, 서호도 마찬가지였다. 그 표정을 보니 다시금 마음이 아렸다. 이곳에서 볼 수 없는 평온한 그리고 행복한 미소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 탓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약한 공격이라면, 몸에 위기가 느껴진다면 잠에서 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그들을 계속 흔들어 깨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숨을 참고 있던 사람이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듯 거친 숨소리가 하나둘 늘어났다. 결국 길드원 중 한 명은 끝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환상 안에서 잠들어 결국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너무 사실 같았어.”
환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행복한 시간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에 대한 절망감에 빠졌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길드원을 바라보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혜진과 지연만큼은 달랐다.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며 이런 개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 놈에게 복수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서하가 여기에 있어.”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주섬주섬 무기를 들어 올리며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친구를 되찾아야지.”
혜진이 밝게 말하고 길드원들이 검을 쥔 손을 들어 올리며 화답했다. 그들은 서하가 힘들어하면서도 자신들의 상처를 돌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 떨어진 거, 몬스터에게 죽더라도 동료 지키다가 떠나는 게 훨씬 낫지. 안 그래?”
상진과 태경도 굳은 얼굴로 검을 꽉 움켜쥐었고 서호의 얼굴에는 그동안 보지 못한 진지함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를 살폈다. 희한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휑한 복도가 드러났다. 아무런 위험신호도 울리지 않았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건물 안에 크게 울렸다. 모두 3층인 학교를 모두 살핀 우리는 조금 허탈한 상태였다. 그 어디에도 흔적이 보이질 않았던 탓이었다. 몬스터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텅 빈 학교 건물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지연이 운동장 옆 다른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학교에 있던 체육관인 것 같았다.
“저기, 방금 문이 열렸다가 닫혔는데.”
그 말에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너무 과한 긴장은 좋지 않았다. 길드원 중 한 명이 입을 열어 그런 분위기를 조금 풀었다.
“새끼들에게 한 방 먹여주죠. 세상 무서운지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적당히 분위기가 풀어졌다. 우리는 지연이 말한 곳을 향해 검을 겨누며 조금씩 전진했다. 조금씩 전진한다고 하지만 그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입구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으, 으아아아악!”
서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 옆으로 웃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서호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서호가 빠르게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콰앙!-
문이 열리고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처참한 광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광기로 가득 찬 표정을 한 남자가 체육관 무대처럼 보이는 곳에 서서 빨갛게 물든 검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건 빨갛게 젖은 사람의 몸뚱이였다. 서호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저, 인간의 몸통과 몸통에 붙은 얼굴이 전부였다. 잘린 다리와 팔이 바닥에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우리에게 시선을 던지던 남자가 다시금 검을 휘둘러 서호의 배를 꿰뚫고 비틀었다. 귀를 막고 싶은 비명이 다시 울렸다. 비명은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 가래가 섞여 끄르륵 하는 이상한 소리까지 흘렀다.
“으아아악!”
인간이라면 마땅히 팔 2개 다리 2개가 있는 것이 맞았으나 밑에는 그 수보다도 많은 팔다리가 뒹굴고 있었다. 서하의 회복력을 시험하기 위함인지 서하가 회복하면 잘라내고를 반복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서하는 살아있었다. 참혹한 광경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서하야!”
서호가 잔뜩 흥분에 차 스킬을 사용해 이동했다. 하지만 중간에 무언가에 가로막혀 다시 뒤쪽으로 튕겨 나오며 다시 원래 있던 땅에 처박혔다.
“콜록, 콜록.”
가쁜 기침 소리가 울렸다.
“도대체 왜….”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 꽤 떨어진 거리인데도 들렸는지 대답이 들려왔다.
“아, 위대하신 분이 이 힘이 도대체 뭔지 궁금해하셔서 말이야. 실험을 좀 하고 있었지. 그런데 도통 뭔지 모르겠네. 내가 배움이 좀 모자라서 말이야.”
“이, 좆같은. 개자식들이!”
흥분한 서호의 앞으로 서하를 고문하는 남자를 호위하듯 서 있던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많은 수의 몬스터가 체육관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몬스터들 모두가 남자의 지시를 따르는 듯 남자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몬스터가 남자의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으아아아!”
불에 몸을 던지는 불나방처럼 우리는 눈앞의 몬스터에게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나도 함께 넘치는 분노에 몸을 실었다. 차마 그들을 말릴 수 없었다. 나조차도 분노에 눈이 멀 정도였는데 누군가를 막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몬스터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검을 눈앞에 있던 놈의 가슴에 박아넣고 놈이 떨어트린 무기를 던졌다. 내가 던진 몬스터의 무기가 빠른 속도로 몬스터들 사이로 날아갔다. 다시 몬스터의 가슴팍에 박아 넣었던 검을 빼내 들고 휘둘렀다. 근처에 있던 방해물들이 내 검에 의해 우수수 바닥으로 쓰러졌다.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남자는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거리를 짧게 이동해 무기를 피해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다시 몸을 날렸다. 몬스터들의 대장을 먼저 잡기로 했다. 몬스터들이 흐트러지면 조금 더 놈을 잡기 쉬워질 것이다. 두근두근 분노에 피가 빨리 도는지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볼이 발갛게 익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촤르르르-
순간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굴러 자리를 이동했다. 몬스터 하나가 웃음을 흘리는 듯 그르렁거리며 쇠사슬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 대장 몬스터의 옆에 있던 놈이었다. 그놈도 나를 제거 대상 일 순위로 놓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잘됐네.”
나는 단숨에 몬스터들을 뛰어넘어 녀석에게 덤벼들었다. 내 손이 놈의 목 옆으로 뻗어졌다. 놈이 사슬을 들어 올려 마력이 담긴 내 손을 쳐냈다. 손이 쇠사슬에 부딪쳤는데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채앵!-
녀석의 쇠사슬이 옆으로 비켜나며 내 몸의 중심이 순간 뒤로 밀려났다. 그런 내게 그대로 놈이 몸을 던져오고 있었다. 나는 발에 마력을 실어 바닥에 내리찍었다. 놈의 중심이 흔들리며 밀려났다. 그대로 나는 검을 든 손을 강하게 휘둘렀다.
뚝-
검을 잡고 있는 손에서 피가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놈의 목도 함께였다.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대장 몬스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뻐근한 목에 슬쩍 목을 돌려 풀던 나는 다시 앞으로 달려나갔다. 사방에서 금속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쳤지만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때 혜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주위로 눈을 돌렸다. 혜진이 서하 근처로 힘겹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몬스터들에게 당할 듯 당하지 않으면서 혜진은 끈기 있게 서하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혜진에게 한눈을 판 사이 대장 몬스터의 공격이 내 눈을 향해 날아왔다. 그 공격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던 나는 아슬아슬한 순간, 고개를 젖혀 피해냈다. 이어서 놈의 주먹이 아래로 내리쳐져 왔다. 검을 들어 올려 그 공격을 막아내고 이번엔 내가 공격하며 몸의 방향을 틀었다.
쉬익, 쉭-
검과 주먹이 빠르게 움직였다.
퉁, 퉁-
북을 치는 것 같은 묵직한 소리가 체육관 전체를 울렸다. 그 순간이었다. 서하의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내 주변으로 검은 구멍들이 생겨났다. 물론 나뿐만이 아닌 일행들 모두의 앞에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기다렸잖아!”
조급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남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살아남으려면 뭐든 해야지. 비겁한 일이라도.”
동시에 그 남자가 서하의 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빼냈다.
“끄륵, 그륵.”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서하의 몸이 그저 몸이 펄떡이며 잘게 움직이는 것이다였다. 그런 서하 대신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
비명은 서하의 제일 가까이에 있던 혜진의 입에서도 튀어나왔다. 혜진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조급함 때문인지 조금씩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서하에게 거의 다 다가간 혜진의 뒤로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그것을 본 남자는 웃으며 굳이 혜진을 공격하지 않고 방치해두었다. 서하에게로 손을 뻗는 혜진이 보였다.
“서하야! 누나가! 누나가 왔어! 조금만 버텨! 알았지? 누나가, 누나가 미안해! 서하야!”
혜진은 자신의 뒤에 나타난 검은 구멍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구멍에서 막 나온 녀석이 빙그레 웃음 지으며 그런 혜진의 뒤로 다가섰다. 나는 빠르게 마력구를 만들어 쉼 없이 그쪽을 향해 날렸다. 순식간에 마력이 훅 빠져나갔다. 그제야 이상한 기척을 감지한 혜진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때 다시 남자의 검이 서하에게로 향했다. 그것을 본 혜진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공격을 막지도 않고 서하에게로 몸을 날렸다. 남자의 검과 혜진을 공격하려던 놈의 손이 혜진의 등에 박혀 들어갔다. 멀리서 그런 혜진의 동태를 살피던 지연의 비명 소리가 퍼져나갔다.
“혜진아! 아아! 안 돼! 아! 혜진아!”
그리고 그렇게 한눈을 판 것에 대한 대가는 몹시 컸다. 지연이 옆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몬스터에 의해 왼팔을 잃은 것이다. 뒤에 있던 이환이 달려와 비틀거리는 지연을 보필하며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그녀를 질질 끌다시피 길드원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마력이 온몸에 들끓고 있었다. 내 통제를 벗어나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울컥 입 밖으로 죽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대장 몬스터의 공격을 위로 튕겨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장 몬스터에게 발이 묶인 나는 혜진과 서하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었다. 대장 몬스터가 끝까지 나를 따라 한 걸음 앞으로 움직이며 주먹을 휘둘렀고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옆으로 굴러 빼냈다. 검은 구멍에서 나오던 인간 하나가 대장 몬스터의 공격에 그대로 머리가 날아갔다. 몬스터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그 순간, 나는 대장 몬스터의 품으로 파고들어 빠르게 마력구를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녀석의 뒤를 점하고 위로 뛰어올라 그대로 검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녀석의 머리가 수박 쪼개지듯 갈라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시 혜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서하의 몸 위로 몸을 던졌던 혜진이 그대로 바닥으로 힘없이 낙하하고 있었다. 조금씩 감겨가는 혜진의 눈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눈물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사방에서 검은 구멍에서 나온 인간들이 몬스터로 변신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변신하지 못한 놈들도 있었다.
“개새끼들, 죽어! 으아아아악!”
변해서 나오면 좀 더 쉬울 것을 왜 구멍에서 나와서 변신을 하는지 몰랐다. 몬스터로 변신한 놈들의 공격을 피해 아직 인간의 형상을 한 놈들을 노렸다. 전부 죽일 거야. 녀석들의 손톱이 내 살을 찢고 파고들어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수만 마리의 개미 떼가 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가려울 뿐이었다. 서하는 저렇게 될 때까지 고문을 당했는데 고작 이 정도 상처가 아플 리가 없었다.
상진이 염력을 이용해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보조하고 태경이 심하게 다친 사람을 방패로 막아주며 열매를 건넸다. 다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열매를 입에 욱여넣으며 회복해 다시 검을 들어 싸우고 또 싸우고 싸웠다. 한 편의 지옥도 같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분노가 파도처럼 나를 휩쓸어갔다. 간신히 통제하던 마력이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온몸과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알이 뜨겁다 못해 빠질 것처럼 아팠고 감각이 크게 증폭했다가 줄어들며 말을 듣지 않았다. 내 주변으로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바닥이 깊게 패었다. 전신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비틀어졌다가 돌아왔다. 안쪽에서부터 살이 터져나가 피가 튀었다.
“이석 씨!”
지연이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을 보조하느라 상진도 눈물이 고인 눈을 하고 애써 나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태경도 마찬가지였다. 서호는 이미 이성을 놓고 검을 휘두르는 채였다.
공격해오는 놈들을 막아내기 위해 한 발씩 움직이지만 틀어졌다가 돌아오는 뼈로 인해 우스꽝스럽게 휘청였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내며 고통이 극한으로 치달을 때였다.
[영웅의 힘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봉인된 마지막 스킬이 개방됩니다.]
[힘에 맞춰 몸의 변형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마에 세 번째 눈이 열렸다. 열린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줄기줄기 하얀 빛이 퍼져나가 내 몸을 온통 새하얗게 둘러쌌다. 싸움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누가 어떻게 행동할지 그 사람보다 내가 한발 먼저 알았다.
[삼안- 영웅의 힘]
하얀빛이 사방으로 터져나가고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눈을 감았다. 귓가에 이명이 흐르고 감은 눈을 떴을 때 내 주변의 몬스터는 형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서하를 고문하던 남자의 머리채를 쥔 채로 검을 남자의 목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네가 고문하던 애가 누군지 알아?”
“뭐, 뭐, 무, 뭣?”
남자가 두려움에 잠식되었는지 두 가랑이 사이로 물이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동생이야. 네가 죽인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흐.”
“내 누나야. 여기서 다친 사람, 죽은 사람 모두가 내 가족이라고.”
남자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목이 잘려나갔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의 눈이 풀려 있었다. 너무 놀라 주저앉은 사람도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 쪽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의지에 따라 마력이 반응해 하얀 불꽃처럼 일어나 순식간에 일행들 사이를 휘저었다.
“으악!”
놀란 비명 소리 뒤로 이곳에 살아있는 것은 오직 내 일행뿐이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벽에 마주했습니다.]
[성장한계치가 1 줄어듭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벽에 마주했습니다.]
[성장한계치가 1 줄어듭니다.]
[벽의 한계가 높아졌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lv. 52 강이석(최초의 몬스터 토벌가)]
[체력: 1,200(+40)]
[근력: 1,200(+38)]
[마력: 1,682(+35)]
[특성: 영웅- 영웅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최초로 몬스터를 잡은 이에게 부여되는 특성)]
[-스킬: 마력 방출(마력을 검에 두르거나 방출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영웅의 기운(영웅의 기운을 몸에 두를 수 있습니다. 형태는 시전자가 마음대로 변형 가능하여 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맞지 않게 오래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스킬: 순백의 버서커(3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5배 상승합니다.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성: 민첩- 민첩이 2.5배 증가합니다.(최대)]
[특성: 동체 시력- 빠른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성: 직감- 위험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성: 약점간파- 상대방의 약점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성: 독 내성- 15레벨의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최대)]
[point: 3,000(능력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체력과 근력, 마력에 능력치를 1,000개씩 투자했다. 새롭게 변형된 몸이 새로운 힘에 반응해 요동쳤다. 이 정도라면. 보스 몬스터를 만날 시간이 다 되었다. 이제야 마지막이 보였다. 눈물 한 방울이 왼쪽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서하에게 다가가 마지막 남은 포션을 사용했다. 정신을 잃고 늘어진 서하의 팔, 다리, 눈에 포션을 흘려 넣었다. 내 여분의 생명보다 가족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끄으, 흐.”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서하는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잘렸던 팔과 다리, 뽑혔던 눈알이 조금씩 다시 생성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만든 놈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입 밖으로 얕은 숨소리가 새어나갔다. 조금 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뱉어냈다. 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의 희생자 없이 지켜주고 싶었다. 체육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운동장 중앙에 마지막 46층으로 가는 입구가 있었다. 나를 따라 나온 상진과 태경이 이름을 불러왔다.
“이석아!”
“이석 씨!”
“나 믿어?”
상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태경은 내게로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그 손길을 피하며 다시 물었다. 태경이 뒤늦게 처음 보는 눈물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구보다도. 하지만 같이 올라가면.”
“이제,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요.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아. 나한테 주어진 거니까. 그러니까….”
“아니, 네가 그랬잖아. 우리, 가족이라고. 가족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 아니겠어?”
한번 눈을 꾸욱 감았다가 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진과 태경이 환하게 웃었다. 상진과 태경의 웃음은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종류였다. 그래서 더 슬프게만 느껴졌다. 혜진과의 마지막 약속이 떠올랐다가 저 뒤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이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환한 빛이 우리의 몸을 감쌌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지연이 우리를 부르며 뒤늦게 달려 나왔다. 이환이 그런 지연을 말리며 뒤에서 끌어안았다. 왼팔을 잃은 지연은 이환을 떨쳐낼 수 없었다. 길드원들이 저마다 크나큰 상처를 입고 죽은 제 동료들을 한 명씩 끌어안고 나왔다. 빛이 더욱 강해지며 시야를 뒤덮었다가 사라졌다.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었다.
17. 유레이 46층 보스 몬스터
[유레이 46층입니다.]
크허어어어엉!-
엄청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분명 몬스터의 소리였으나 그 뜻을 알아들을 수도 있었다. 태경과 상진이 내 옆에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앞을 응시했다.
{드디어 왔구나.}
“그래. 드디어 왔지.”
전에 봤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크기의 용일 줄 알았지만 놈은 전에 봤던 것만큼 커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녀석이 나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보았던 그 눈동자가 보았다. 그때는 저 눈동자를 보고 숨도 쉴 수 없을 만큼의 위압감을 느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만큼은 아니었다. 녀석의 눈이 그때처럼 웃고 있었다.
{제법 건방지구나. 전과 달리.}
거대한 녀석의 발밑에 자리한 수많은 시체가 보였다. 녀석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짓밟고 유린하고 있었다. 아직 몸 안에 남아있는 분노가 들끓고 한참 전부터 실핏줄이 터져 새빨간 눈으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다 쉬어 빠진 목소리가 버석하게 흘러나왔다.
“말은 됐고.”
순식간에 세 번째 눈이 열렸다.
[삼안- 영웅의 힘]
막 얻은 힘이었지만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던 것 같은 편안함이 오히려 더욱 컸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부웅-
쩌억!-
발을 한 번 구른 나는 그대로 녀석의 머리 위로 점프했다.
“흐압!”
{감히.}
놈이 커다란 손을 슬쩍 휘두르는 것만으로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오돌도돌한 돌기가 잔뜩 돋아난 징그러운 팔이었다. 상진의 도움으로 나는 그가 날린 검을 밟고 다시 땅에 발을 붙였다. 다시 땅에 선 나는 팔운동을 하듯 슬쩍 팔을 돌리고는 다시 놈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게 녀석에게 파고든 나는 거대한 턱을 발로 찬 후 그 조금 아래에 있는 목에 검을 박아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놈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슬쩍 옆으로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내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놈의 눈이 즐거움에 물들었다.
부우웅-
쾅!-
다시 한번 포기하지 않고 점프한 나는 놈의 복부를 횡으로 베어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으나 단단한 녀석의 몸에 부딪힌 검은 어마어마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옆에서 휘둘러져 오는 녀석의 손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 발톱 사이로 비늘에 덮이지 않은 연약한 살이 있는 곳을 발견했다. 연속해서 이어지는 놈의 공격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힘겹게 움직여 피했다. 놈의 약점과 거리가 멀어졌다.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건가? 몸을 일으키지 못해 결국 놈의 시커먼 팔에 의해 엄청난 충격과 함께 나는 또다시 바닥을 굴렀다. 바로 깨져버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태경이 만들어낸 방패가 녀석의 공격을 한 번 분산시켜주었다. 한 번 맞은 것뿐인데 저릿저릿한 느낌이 온몸에 들끓었다. 나도 모르게 뼈는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하려 팔목을 매만질 정도였다. 연이어 공격이 날아왔다. 분명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방향으로 다시 공격이 날아들었다.
파앙!-
아슬아슬하게 공격이 빗나갔다. 하지만 빗나갔음에도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후욱!”
나는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손에서 하얀 줄기가 뻗어 나가며 전기가 튀듯 파지직거리는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녀석의 거대한 손이 날아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연약한 살이 드러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타이밍이 어긋났다. 나는 바닥을 형편없이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놈은 그런 나를 보며 비웃음을 보였다. 녀석의 몸이 살짝 돌아가더니 태경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태경이 형!”
상진이 필사적으로 태경 앞에 검을 날렸고 태경은 방패를 만들어 앞을 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커허억!”
공격에 직격당한 태경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가듯 뒤로 밀려났다.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상진을 향해 팔이 다시 휘둘러졌다.
“으아아아아!”
나는 미친 듯이 놈을 향해 마력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녀석은 가뿐하게 내 공격을 피해냈다. 상진이 결국 놈의 손에 형편없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제야 놈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형편없구나.}
나는 녀석을 마주 보며 검을 움켜쥐었다. 분노가 온몸을 잡아먹듯 휘몰아쳤다. 바닥을 박차고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쾅!-
쿠콰콰쾅!-
놈과의 충돌로 인해 그 주위로 먼지 바람이 일어났다. 손에 쥔 검에 하얀 기운이 휘몰아치는 것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지금이었다. 녀석의 손가락 사이로 연약한 살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한 나는 거침없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당황한 녀석이 공격의 궤도를 틀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녀석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냈지만 분노한 녀석의 오돌도돌한 다른 손가락을 피해낼 수 없었다. 녀석은 손가락이 하나 잘렸음에도 아무런 고통이 없는지 작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녀석의 손에 붙잡히면서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잠시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그렇게 녀석의 손 안에 잡혀 고통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나는 잡고 있던 검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어금니를 악물어가며 마력과 영웅의 기운을 마구잡이로 퍼트렸다. 몸 안 어딘가에 막혀있던 댐이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뿌드득, 콰드드득-
쿠아아앙-
녀석이 내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손을 풀었다.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빠르게 아까 발견한 녀석의 발톱 아래에 검을 박아넣었다. 제대로 박혀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분노한 녀석의 소리가 크게 울렸다.
{네가 감히!}
발을 들어 올린 녀석이 내가 있던 바닥을 내리찍었다. 힘이 얼마나 강한지 바닥이 모두 부서져 녀석의 발목까지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거대한 녀석의 크기에 공격을 피하지 못한 내가 깔려 있었다. 우둘두둘한 녀석의 발바닥 껍질이 느껴졌다. 시멘트에 얼굴과 온몸이 갈리는 듯 착각이 일었다. 강한 압력에 입과 귀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가만히 발밑에 깔려 있음에도 공중에 떠올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녀석의 발이 들리는 듯싶더니 다시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쿠웅!-
“커헙!”
그제야 녀석의 발이 치워졌다. 제대로 직격타를 맞은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시선이 움직이는 곳을 확인하자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잡으며 그대로 녀석의 눈동자에 마력구를 날렸다. 그런 내가 우습다는 듯 녀석의 손이 나를 뒤쪽으로 날려버렸다. 또다시 나는 다른 쪽 바닥을 부수고 쑤셔박혔다.
“크허, 헉.”
벌써부터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에 이명이 흘러가고 녀석이 정신을 차린 상진과 태경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상진과 태경이 엉망이 된 몰골로 검을 들어 올려 녀석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알아도 투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채였다. 태경이 안개를 흩뿌리며 공격을 시작했다.
{오호.}
“네 상대는 여깄어!”
녀석의 거대한 눈동자가 반짝이며 내게 돌아왔다.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고통을 고통으로 상쇄시키며 순백의 버서커를 사용했다. 녀석이 움직이면 상진과 태경은 순식간이었다. 막아내야만 했다.
{꽤 재밌구나.}
던전에서 영혼이 내 몸에 들어와 싸울 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마나가 몸속에서 요동쳤다. 엄청난 속도로 몸이 움직였다. 마력의 반을 쏟아부어 녀석의 등에 검을 던졌다. 세 번째 눈을 통해 녀석의 움직임이 담겼다. 어떻게 움직일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콰앙!-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녀석이 빠르게 몸을 옆으로 돌려 피하려고 했으나 조금 늦었다. 녀석의 옆구리를 스치며 내 검이 녀석의 옆구리 비닐을 모조리 뽑아버린 것이다.
쿠어어어어!-
녀석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렸다. 살이 죄다 터져나가 온통 질척한 피로 뒤덮였다. 피 맛이 느껴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전과 달랐다. 녀석을 이겨낼 수 있었다. 피로 뒤덮여 미끌거리는 손위에 새하얀 기운이 모이며 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녀석의 손이 주위에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며 그 손이 스치는 곳마다 땅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 상진과 태경이 있었다.
{이 녀석들이!}
“으아아아아아!”
또다시 내 사람을 잃을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더, 더! 태경이 방패를 만들어내고 상진이 염력으로 태경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철벅, 주르륵-
땅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핏물이 고였다. 엄청난 속도에 바람이 일렁였다. 잔뜩 터진 살갗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더 찢어져 나갔다. 아마 지금 나를 보는 상진과 태경은 내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었다. 손에 쥐어진 새하얀 기운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녀석이 더욱 필사적으로 상진과 태경을 향해 손을 날리고 있었다. 녀석의 목을 향해 점프했다.
파앗-
상진과 태경을 향해 날아가던 공격이 갑자기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미 빠르게 녀석과 가까워지고 있는 나는 그것을 막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태경의 방패가 내 앞에 생성되었다.
쿠아앙!-
이번에는 태경의 방패로도 공격의 충격을 상쇄할 수 없었는지 지금까지의 고통은 장난이었다는 엄청난 고통이 몸을 뒤덮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아니, 검을 놓지 못했다. 온몸에 남은 마력을 쥐어짜 내어 검에 담았다. 녀석의 반항이 거세게 이어질 때였다.
스걱-
쿵-
[유레이의 보스 몬스터를 처리했습니다.]
[유레이의 시험을 완료했습니다.]
됐다. 거친 울음소리가 마지막 단말마처럼 울려 퍼지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엉망으로 넝마가 된 몸을 애써 이끌며 상진과 태경이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아, 아….”
녀석이 반항할 때 휘말린 것인지 곤죽이 된 상진이 저 멀리 날아가 있었고 녀석의 손이 짓눌렀던 자리에 태경이 피를 뒤집어쓴 채 눈을 감고 얌전하게 누워있었다.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어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고가 느릿하게 정지했다. 간신히 내뱉고 있는 얕은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았다. 걸음을 옮겨 상진에게로 다가갔다.
“상진아.”
사라질 듯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쉬고 갈라져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소리였다. 상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그의 양손을 배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겁이 나서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목숨을 잃어도 죄책감 느끼지 말아요. 선택은 내가 내린 거고 성인인 이상 더군다나 이런 이상한 세계에서 목숨을 걸고 내린 선택이라면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스스로가 져야 하잖아요?’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지쳤다고 말하지만 이석 씨는 너무 착한 사람이라, 계속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거든.’
눈앞에서 혜진이 환한 웃음을 보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는 게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들까요?”
눈앞에 있는 혜진은 그저 싱글 생글 웃을 뿐이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살갗이 모두 벗겨진 얼굴이 고작 눈물 한 방울이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다.
“허으흑, 흑. 으으으읍.”
입가가 제멋대로 흔들리며 울음소리가 마구 새어 나왔다. 허무할 정도였다. 그대로 상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좋아하던 상진의 심장 고동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상, 진아? 상진아!”
배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던 그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쿨럭! 쿨럭!”
더 이상 커질 수도 없을 것 같은 눈으로 나는 뒤돌았다. 숨을 멈췄던 태경이 잔기침을 흘리고 있었다.
“태경이 형?”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 찬 태경의 눈동자가 보였다.
“형?”
내 목소리를 들은 태경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서 태경의 분위기가 묻어나지 않았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때였다. 유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46층에 원래 세계로 가는 입구가 생성됩니다.]
태경이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나 이상한 몸짓을 하다가 묘한 미소를 흘리며 보스 몬스터의 사체 앞에 생긴 입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후웅-
36층으로 올라오는 포탈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삐이.”
“세상에! 이석 씨! 괜찮아요? 어떻게 해! 여기 열매가 조금 있는데….”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삐가 45층에 있던 길드원들과 함께 46층에 나타났다. 그들도 46층에 원래 세상으로 가는 입구가 생겼다는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감격에 가득 차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장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도 한 귀로 흘러나갔다. 지연이 보이지 않는 태경을 찾으며 주변을 살폈다.
“태경 씨는 어디에 있어요? 빨리, 빨리. 이환아! 여기, 여기 열매! 어서!”
태경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먼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진을 챙겼다. 멍한 표정으로 그런 그들에게서 떨어져 태경이 사라진 원래 세계로 향하는 입구 앞에 섰다. 어깨에 앉은 삐에게서 아름다운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의 방심이나 실수는 안된다고 했잖아요. 이석 씨.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나는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태경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된 거지? 나를 걱정하며 달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담기지 않고 흩어졌다. 눈앞이 검게 침잠했다. 손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기회가 다시 한번 주어지길 바랐지만, 내 바람은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허물어졌다.
에필로그
입구 앞에 주저앉아 눈물만 흘리는 내가 이상했던지 지연이 피를 많이 흘려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대답할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입구로 다가가는데 뒤에서 언제 온 지 모를 이환이 강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일단 다친 사람들 다 수습하고 같이 나가죠. 밑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데려와야 하잖아요. 상진이 형을 언제까지 저렇게 둘 수도 없고. 태경이 형을 잃어서 제정신이 아니겠지만 우리 모두 다 소중한 사람 한 명씩은 잃었잖아요.”
이환의 마지막 말에 나는 거칠게 그의 손을 쳐냈다. 아니야. 태경이 형은 죽지 않았다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고 뒤에 쓰러져 있는 상진이를 바라봤다. 옆에 곱게 누워있는 서하도 눈에 담겼다.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서호도, 온통 엉망진창인 몸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길드원들 몇 명도 보였다. 대부분 아래층에서 죽어 얼마 남지 않은 인원이었다. 죽은 혜진의 얼굴도 서하를 향해 내뻗던 그 팔과 손가락까지도 눈앞에 펼쳐졌다.
‘서하야! 누나가! 누나가 왔어! 조금만 버텨! 알았지? 누나가, 누나가 미안해! 서하야!’
쓸모없이 그녀가 내뱉었던 문장도 그대로 기억이 났다. 왜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걸까. 괜히 마음만 괴롭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지쳤다고 말하지만 이석 씨는 너무 착한 사람이라, 계속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거든.’
나보고는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면서 정작 혜진은 자신 때문에 서하가 잘못된 것일까 봐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늘 앞에 서서 사람들이 낙오되지 않도록 지키던 것도 혜진이었다. 이기적으로 살라던 혜진은 그 누구보다 사람들을 먼저 생각했다. 그런 혜진이 느끼는 죄책감의 한가운데에 내 행동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을까 두려웠다. 나 때문에 혜진이 죽은 것 같았다.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유레이에서 만난 새로운 가족들이었다. 피로 가득한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에도 진득하게 묻은 피가 손바닥에 쓸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층에서 봤던 환영이 눈앞을 스쳤다. 높이 솟아있던 빌딩들이 무너지고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뛰어다니던 사람들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건물 여기저기에 붉게 붙은 불들이 새빨간 노을과 어우러지던 그 풍경이 현실이 될 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다. 끔찍한 현실을 품에 안고 이렇게 생생한 고통을 느끼며 유레이에서 살아남았다. 이렇게 살아남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상진과 서하의 옆에 앉아 몇 날 며칠을 지새웠고, 서호도 이때만큼은 말없이 이환과 지연을 도와 밑에 있던 사람들을 위층으로 데려오는 데 힘썼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제야 정말 지쳤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 상진이 눈을 떴고 또 하루가 지나 서하가 눈을 떴다. 상진이는 제가 더 힘들 텐데도 멍하니 제 옆을 지키고 있던 나를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 나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늘 상진이는 자기보다 나를 더 생각해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진이는 언제나 그랬었다. 서하는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차마 소리도 내지 않고 서하는 그렇게 한참 눈물을 보였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야 우리는 우리가 살던 세계로 향하는 입구에 발을 내밀었다. 모두 당연하다는 듯 내게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갈 기회를 주었다. 일행과 함께 밖으로 나가기 전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무기는 챙겨 나가요.”
무기를 바닥에 내버리고는 잔뜩 들뜬 얼굴을 한 사람들을 향해서 할 말로는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눈치 빠른 몇 명은 표정을 굳히고 다시 무기를 주워들기도 했다. 지연과 이환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하가 입술을 깨물며 나를 올려다봤다.
“태경이 형 안 죽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연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환은 동그래진 눈으로 입을 벌렸다.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태경이 형, 몸 안에. 혹시, 그, 그거, 설, 설마?”
그리고 차마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마구 흩어졌다. 지연의 표정도 이환과 같아졌다. 이환과 지연이 길드원들에게 다가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말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그들을 등지고 서서 입구에 발을 올렸다. 내 옆에 서 있던 상진과 서하, 서호도 모두 내 얘기를 들었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게 분명했다.
눈앞이 검게 물들고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몸이 하늘에 붕 떠 있는 기분이 한참이나 지속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내 몸이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몸이 멈춰 섰다고 느껴질 때 익숙한 겨울바람 냄새가 났다. 특유의 비릿한 겨울의 냄새였다. 삐가 작게 울며 내 머리 위를 포르르 동그랗게 날았다.
어두웠던 시야가 회복되면서 하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잔뜩 무너져 내린 건물들과 피가 말라붙은 검붉은 자국들이 여기저기 퍼져있었다. 차들은 잔뜩 찌그러지고 불에 타 제대로 된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곳곳에는 사람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딱 몬스터에게 당한 형상이었다. 바람 소리 말고는 사람의 소리라곤 전혀 들리지 않는 이곳은 적막뿐이었다. 그때 콧잔등에 하얀 눈이 내려앉아 차가움을 선사했다. 순간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멍한 표정을 한 내게 상진이 말을 걸어왔다.
“소원 빌어야지.”
가만히 상진을 바라보자 그가 작게 웃어 보였다.
“원래 첫눈이 코에 내리면 소원 비는 거잖아. 아니었나?”
서하도 고개를 열렬하게 끄덕이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오랜만에 보는 서하의 밝은 얼굴이었다. 서호만 입을 삐죽였다.
“이 눈이 첫눈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무슨. 그래도 첫눈일지도 모르니까 소원은 비는 게 좋겠어요. 선배.”
나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그래도 몰래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그 순간이었다. 서늘한 겨울바람을 타고 비릿한 피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모두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현실 세계로 돌아왔음에도 우리의 능력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콰앙!
거친 갈색 가죽으로 둘러싸인 육중한 덩치를 가진 몬스터였다. 그래, 분명히 몬스터가 맞았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몬스터를 마주하니 심장이 발치까지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도끼를 들고 있는 몬스터가 막 사람의 머리를 찍어 내리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몬스터보다는 내 검이 훨씬 빨랐다. 녀석의 몸이 두 갈래로 갈라져 눈을 감고 있던 사람의 양옆으로 넘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그 사람을 눈을 떴고 우리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으아! 아아아아! 아아아! 어?”
그리고 짧은 의문사를 내뱉었다.
“사람, 사람 맞죠? 그, 그 복장은 뭐예요? 어디 정글이라도 다녀왔어요?”
그의 말에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가죽옷과 바지, 그리고 검을 든 우리의 행색은 평범한 옷과 바지를 입고 있는 그와는 분명하게 달랐다. 사람이었다. 우리가 살던 곳의 사람임이 확실했다. 우리는 정말 돌아온 것이었다.
“와, 무기 좀 봐. 이거 어디서 났어요? 지금 무기 구하기가 아주 하늘에 있는 별 따는 것보다 어려운데! 그래서 몬스터를 쉽게 잡은 건가? 아닌데! 이렇게 몬스터를 쉽게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데. 아무리 능력자라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몬스터를 두 갈래로? 허억!”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깝게 다가섰다. 그가 그런 내 움직임을 오해했는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실수했다고 자책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기, 말 좀 물을게요.”
“시, 시비 거는 게 아니었는데! 저, 저 돈 없어요. 진짜예요! 돈 없어서 돈 구하러 나왔다가 죽을 뻔한 거라고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능력자를 무시한 게 아니고! 그, 저. 으아!”
그는 우리가 마치 강도라도 되는 것처럼 기겁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 겁이 이렇게 많아서 어떻게 살아남았대? 선배. 쟤 완전 겁쟁이 중의 겁쟁인데요?”
“으으으!”
나는 애써 웃는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갔지만 이미 그에게 우리는 몬스터만큼 무서운 존재였는지 몸을 벌벌 떨며 아까와는 다르게 겁먹은 모습이었다.
“여기 사람이 모여서 사는 곳이 있습니까?”
“네?”
“아니, 사람들 많이 살아남았어요? 우리가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몰라요.”
“저기, 저쪽에. 지, 지금 나 꿈꾸는 건가?”
그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내 뒤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마구 생겨나고 있었다. 유레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멍한 표정을 한 그를 달래며 우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안내받았다. 그의 의지가 아니라 겁을 먹어서 억지로 안내하는 모양새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중요한 정보도 들을 수 있었다. 경기도 일부는 초반 대응에 성공해 아직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몬스터는 두 달 전부터 등장했다고 했는데 일주일 전부터 그나마 버티고 있던 도시들이 점점 무너져 내려 이제 남아있는 곳이 얼마 없다는 것까지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태경이 형이 검은 눈이 되어 이곳에 도착한 후인 것 같았다.
우리는 가는 길목마다 보이는 몬스터를 전부 죽이면서 이동했다. 사람들 모두 분노에 휩싸여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유레이에 있던 놈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막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의 목을 잡아채 놈을 바닥에 내리꽂은 참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죠?”
“아, 그 하루가 넘게 꼬박 걸어 나온 거라서 아마 내일쯤에 도착할 것 같은데. 죄, 죄송해요.”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발로 몬스터의 머리를 밟아 부쉈다. 대가리가 완전히 터져나가며 피가 튀었다. 그는 몬스터를 아무렇지 않게 학살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더더욱 겁을 먹고 작아졌다.
“사람은 해치지 않아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겁이 왜 이렇게 많아요! 네?”
서하가 계속해서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그렇게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사실 몬스터에게 겁을 먹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너무 익숙해진 우리가 조금 다를 뿐이었다. 우리는 잔뜩 지친 그를 위해 달이 높게 떠올랐을 때 잠자리를 준비했고 그렇게 원래 세계에서의 첫날을 맞이했다. 그러나 정말 원래 세계로 돌아온 것일까. 다음날 우리는 높게 쌓인 콘크리트 벽을 마주하고 섰다. 고개를 뒤로 한참 젖히고 봐야 그 벽의 끝을 볼 수 있을 만큼 높게 쌓인 벽이었다. 시선을 바로 해 벽 앞을 보니 몬스터들의 공격으로 인해 잔뜩 파인 외벽이 보였다. 길드원들의 들뜬 목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잔뜩 모여든 사람을 보며 벽 위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후 군모를 쓰고 총을 든 군인들이 성벽 위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잠시 후 확성기를 통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구리시에서 오신 건 아니죠? 혹시 구리시도 무너졌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뒤편을 보며 물었다. 혹시라도 몬스터들이 다가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안전이 확인된 후에야 투박하지만 두껍고 커다란 철문을 열어 우리를 안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버티고 있었다.
“지금까지 밖에서 살았다고요?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다는!”
그들은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을 한 우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각자 손에 쥐고 있는 무기들도 한번 훑었다.
“혹시 능력자입니까?”
“능력자?”
“몬스터들이 나타나고 인간이 낼 수 없는 힘을 보이는 이들도 하나둘 등장했습니다. 이곳에도 두 분 계시고요. 그리고 그들 덕분에 이렇게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죠. 능력자가 아니십니까?”
“아뇨, 맞습니다. 다들 이상한 능력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요. 혹시 우리도 이곳에서 지낼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런 일이 생기면서 영혼이 이 세계에 힘을 쓴 것 같았다. 나는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는 삐를 슬쩍 바라봤다. 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눈을 맞췄다.
“당연히 환영합니다! 이, 이렇게 많은 능력자가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이 정도의 수를 받을 만큼의 자리가 남아있질 않지만. 하, 하지만 제가 능력을 발휘해 보겠습니다!”
그는 능력자들을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인지 말이 끝나자마자 정장을 입은 그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라졌다. 군인들이 우리를 이끌고 건물 복도로 이끌었다. 그들을 따라 걸어가니 커다란 강당이 나왔고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서 신상정보를 등록했다. 몬스터들 때문인지 분위기가 날카로웠다. 정보를 등록하고 우리는 헐레벌떡 다시 나타난 정장을 입은 남자를 따라 아파트 건물로 들어섰다. 콘크리트 벽 내부는 우리가 살던 그때와 아주 똑같았다. 대형 마트도 하나 있었고 그 주변에 펼쳐진 아파트와 아직 개발이 덜 된 경기도 외곽지역이었던 탓에 넓게 펼쳐져 있는 밭도 그대로였다.
“콘크리트 벽만 빼면 여기는 전하고 똑같네.”
“그러게.”
상진이 내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대답했다. 정말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눈 끝이 찡하고 울렸다. 그를 따라 아파트 7층의 집을 하나 배정받아 나와 상진, 서하, 서호 넷이 사용하게 되었고 나머지 길드원들도 적게는 다섯, 많게는 열 명씩 조로 나뉘어 방을 배정받았다. 얼떨떨하게 방을 구경하고 있는 우리 뒤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듯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남아있었다. 그를 멀뚱히 바라보자 주머니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우리에게 하나씩 주었다.
“이게 능력자라는 증표니까 잘 가지고 계시고 음식 배급은 정해진 시간이 있으니 잘 지켜주세요. 이게 그 설명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나가고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예전으로 돌아온 기분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예전과 달라진 세상이 너무나 확연했다. 불안한 감정이 순식간에 훅 치고 올라왔다가 가라앉으면 또다시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온몸에 퍼졌다. 초조함이 가시면 어쩐지 들뜨는 기분, 그리고 안도감과 같은 감정들이 피어올랐다가 다시 몬스터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며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허탈함이었다. 정말 나는 유레이에서 나온 것이 맞을까. 아니면 또 다른 유레이에 갇힌 것일까.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거실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나와는 다르게 서호는 잔뜩 신이 나서 집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방을 고르기 여념이 없었다. 서하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상진은 묵묵히 내 옆에 서서 나를 이해한다는 듯 등을 토닥여주었다. 방은 총 세 개였다. 신이나 집안을 뛰어다니던 서호가 제일 먼저 방을 고르고 서하에게 방을 양보하자 남는 방은 나와 상진이 쓰게 되었다. 서호는 잔뜩 들떠있던 탓에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한 듯 절대 안 된다며 마지막까지 떼를 썼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먼저 방 안에 들어간 상진이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내 팔을 당겨 껴안고는 그대로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며 푹신한 침대 위로 엉덩이를 내렸다. 푹신한 매트리스와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앉았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함정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편안함이 몸에 느껴지면 유레이에서 경험한 바로는 백 퍼센트 함정이었다. 그것도 목숨이 위험할 만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을 게 분명했다. 유레이에 있던 사이 이런 것이 너무나 생소해졌다. 어색했다. 낯설었다. 무언가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상진이 그런 내 얼굴을 끌어당겨 안았다. 내 얼굴이 상진이의 가슴에 푹 파묻혔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상진이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나도 너무 어색한데. 이게 원래 우리가 누리며 살던 삶이잖아. 다시 익숙해져야지. 안 그래?”
“다시 익숙해지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불안해.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유레이에서도 빠져나왔잖아. 이 상황도 곧 다 정리될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응.”
상진이의 심장 소리를 듣다 보니 점점 몸이 나른해졌다.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던 침대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싶어졌다. 그런 나를 알았는지 상진이 방에 딸린 화장실로 나를 이끌더니 옷을 벗어젖히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씻어야지.”
잠깐 주춤했던 나는 상진이의 말에 훌렁 옷을 벗었다. 유레이에서도 허구한 날 보던 것이 서로의 맨몸이었다. 이제 와 창피해할 필요는 없었다. 어렸을 때 상진이와 함께 목욕하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 매일 온몸에 흙을 묻히고 들어와 둘이 발가벗겨져 씻겨지고는 했었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때만큼은 불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옛날에는 매일 같이 씻었는데. 몸에서 흙이 막 떨어져서 현관부터 화장실까지 쭉 이어졌잖아. 엄마가 흙에 빠졌다가 오는 거냐고 화냈었는데 우리 진짜 흙에서 수영하면서 놀았잖아. 수영장에 가고 싶은데 안 데려가 준다고 심술부린 거였는데. 기억나?”
무심코 고개를 돌려 상진이를 쳐다보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직 벗지 못한 바지춤을 부여잡고 있는 상진이가 보였다.
“상진아?”
유레이로 인해 몸이 강해진 뒤로는 좀처럼 밖에서 자도 감기에 한 번 걸린 적이 없다는 걸 알지만 얼굴부터 몸이 전부 빨갛게 달아오른 상진이를 보니 걱정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는데 상진이 화들짝 놀라 내게서 멀어졌다.
“어디 아파?”
“아, 아니. 그, 저 있잖아. 먼저 씻어. 나는 너 씻은 다음에 씻을게.”
“어? 왜? 어렸을 때 얘기해서 창피해서 그래?”
“아니, 그. 저기.”
상진이가 곤란한 듯 가까워지는 나를 피해서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나는 잔뜩 약이 올라 멀어지는 상진이를 향해서 계속 다가갔다. 결국, 상진이의 등에는 문이 닿았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어진 상진이가 곤란한 듯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나 안심시켜줄 때는 언제고 왜 피해?”
상진이의 몸 옆의 문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댈 때였다. 달그락하는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상진이의 몸과 내 몸이 같이 넘어갔다. 유레이에 있을 때라면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순식간에 바닥에 넘어졌다. 그리고 나는 입술에 닿는 말캉한 느낌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런 내 눈동자에 나와 같은 표정을 한 상진이가 담겼다. 그리고 서호의 비명이 온 아파트를 울릴 기세로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어! 아아아악! 선배! 선배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이상진! 배신이야!”
서하는 이상한 자세로 넘어져 있는 우리를 보며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서로 바지만 입은 채로 부끄러운 자세가 된 우리는 누가 봐도 오해할만한 소지가 다분한 모양새였다. 나는 애써 담담하게 일어났다. 말캉했던 감각이 사라졌다. 괜히 어색해져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오해야.”
그리고 내가 뱉은 말은 누가 들어도 오해가 아니야, 그렇게 들릴 것 같았다. 나는 상진이를 째려본 후에 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아직도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런 감정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원래 누렸어야 할 내 것이라는 상진이의 말이 맞았다. 이 상황에 적응하면서 태경이 형을 찾아야지. 꼭 그렇게 해야지. 다짐했다. 그리고 오해가 발생한 그 날 상진은 서호의 손에 붙잡혀 빠져나오지 못해 나는 홀로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푹신한 이불과 침대는 너무나 편안했다. 이렇게 편하게 자도 괜찮을까. 몬스터가 튀어나오지는 않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걱정은 많았지만 잘 나오지 않던 미소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역시 유레이보다는 살던 곳이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푹 잔 것 같았다.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하다가 물을 마시고 있던 상진이와 딱 마주쳤다. 상진이의 얼굴이 어제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쩐지 나까지 덩달아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벌겋게 얼굴을 물들인 상진이 조금은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았다. 물론 눈에 뭐가 쓰였나 그 생각 뒤에 소매로 눈을 문지르기도 했다.
“눈에 뭐가 들어갔어? 불어줄까?”
그런 내 행동에 상진이 언제 얼굴이 빨개졌었냐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눈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그런 상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진이 커다란 손가락으로 눈을 조심스럽게 벌리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가까이 다가온 상진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아직 이런 생활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계속 지낼 수 있다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선배!”
물론 서호가 곧바로 나타나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것은 당연했다. 집을 따로 얻었어야 했나. 그런 생각이 아주 잠깐 스리슬쩍 스쳐 지나갔지만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선배! 이게 말이 돼요? 아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있는데 왜 대학교는 없냐고요!”
“어쩔 수 없잖아. 보니까 학교 건물도 엄청 작던데. 초중고등학교도 모두 같은 건물을 쓰잖아.”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내 대학 생활이 통째로 날아갔다고요! 선배! 대학생 선배의 모습은 얼마나 섹시했을까요? 네? 같은 대학생이 되어서 그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매일 같이 술도 마시고 놀러 다니고!”
“난 잔뜩 봤는데. 그 모습 말고도.”
“이상진!”
“유치원부터 대학생 때 모습까지 다 봤지. 같이 술도 마셔보고. 술 취해서 같은 침대에서 누워 자고. 이석이 처음 술 마시고 술주정하는 것도 보고.”
내 눈치를 살피고는 픽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상진의 모습에 약이 오르는지 서호는 흥분해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서하는 시끄럽다며 그런 서호의 입을 막으려고 난리였고 둘은 초등학생처럼 주변을 내달리면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서하는 생각보다 금방 고통을 떨치고 일어났다. 아직도 종종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지연과 이환이 많이 도와준 덕분에 서서히 괜찮아지고 있었다. 서호도 뒤에서 몰래몰래 계속 서하를 챙겼다. 아마 평생 지금까지 겪은 일을 잊을 수는 없겠지만 서하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상진이도 마찬가지였다. 보스에게 당한 상처로 인해 많이 걱정했는데 후유증도 전혀 없이 건강했다. 나도 걱정과는 다르게 평온한 생활에 익숙해졌다. 계속 죽은 혜진의 환영과 검은 눈의 태경이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근처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가끔 나타나는 한두 마리를 제외하고는 전부 별것 아닌 것들뿐이어서 걱정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서 길드원들이 조를 짜서 매번 근처를 순찰 나가기도 하고 주변 도시들을 도우러 원정을 나서기도 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던 사람의 자리가 얼마 없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주변 곳곳에는 텐트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텐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수용시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며칠에 한 번씩 밖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오고 있었고 우리가 사람들을 구해 데려오기도 했다.
나는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서호와 서하를 피해 논밭 앞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진이 그런 내 옆에 자리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가만히 머리를 쓸어주는 손이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오늘도 아주 약하게 눈이 내렸다. 유레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겨울이었다. 유레이는 비정상적으로 아름답고 맑은 하늘 아니면 동굴 천장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내리는 눈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곳에 정착해 지내면서 상진이와 내 관계도 많은 것이 변했다. 우연히 입술이 맞닿는 사고가 벌어진 그 날을 기점으로 얼마 후에 상진이에게 고백을 받은 것이다.
‘우리 친구 말고 연인은 어때.’
‘뭐?’
‘내가 너 좋아해. 옛날부터 계속 좋아했어. 지금 아니면 평생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며칠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나도 결국 내 감정을 인정하고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상진이가 나를 좋아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는데. 내 대답에 환하게 웃던 상진이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서호의 반응이 두려워 아직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모두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상진이의 고백을 떠올리며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순간 상진이 주변을 살피더니 몰래 볼에 뽀뽀를 해왔다. 놀라서 상진이를 밀쳐내려는 그때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삐빅! 삐빅! 삐빅!
“몬스터다! 각자 제자리로! 무기 챙겨!”
“수가 많아! 모두 불러 모아! 빨리! 능력자분들도 모셔와!”
“민간인은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텐트에서 지내고 계신 분은 중앙 건물의 강당으로 들어가세요!”
사람들은 공포에 찬 얼굴을 하고도 질서를 지켜 움직였다. 건물 밖 텐트에 머무르던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몸싸움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군인들의 빠른 대처로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높다란 벽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마어마한 규모의 몬스터 군단이 몰려오고 있었다. 부서진 건물 잔해를 밟고 움직이는 탓에 날리는 흙먼지가 시야를 상당 부분 가리고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수의 몬스터였다. 총을 들고 벽 위에 대기 중인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공포에 질려 하얗게 떠 있었지만, 누구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서면 우리의 유일한 쉼터가 무너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이상 몬스터를 피할 길도 존재하지 않았다.
“허, 허억!”
누군가 숨을 들이쉬며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아직 건재한 높은 빌딩 위에 있던 누군가가 바닥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었다. 상진이 옆에서 걱정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석아.”
-콰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그가 착지한 바닥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그 먼지 속에서도 나와 상진이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태경이 형이었다. 커다란 인간의 목소리가 몬스터 군단 쪽에서 흘러나왔다.
“오랜만이네!”
“네. 형. 오랜만이에요.”
시원하게 웃어 보이던 예전 그의 얼굴이 시꺼먼 색으로 가득한 눈동자를 한 지금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우리의 행복과 태경의 형을 되찾을 마지막 기회였다. 드디어 그를 마주할 순간이 왔다.
“으아아아아아!”
“죄다 죽여버려!”
나와 함께 원래 세계로 돌아온 길드원들이 분노에 차 몬스터 군단에게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몬스터 군단과 길드원들의 충돌이 일어났다. 커다란 굉음이 연속적으로 들리고 악에 받친 사람들의 목소리도 계속해서 들려왔다. 덜덜덜 몸을 떨고 있기는 했지만, 군인들은 총구에 손을 올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나도 상진이도 서하도 서호도 길드원들과 함께 벽 아래로 내려와 태경이 형에게로 달려나갔다. 어깨에 있던 삐의 입에서 아름다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요.”
-콰앙!
동시에 나는 이를 악물고 태경과 충돌했다. 이번엔 실수 따위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