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乔迁新居】全站开放中
注册 / 登录
支持我们
浏览分区作品
原创 二创
登录
注册
Wid.9908644
99.99퍼센트의 연인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10 0 2022-5-12 20:39
99.99퍼센트의 연인 1





목차





0.01퍼센트

1퍼센트

17퍼센트





0.01퍼센트





남자는 손에 든 종이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앞에 적힌 이야기는 안 읽어도 뻔하다.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이미 이 짓거리를 백 번도 넘게 했으니까.



그 말인즉, 백 명이 넘는 자와 테스트를 해보아도 만족할 만한 수치를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남자의 시선이 정확한 위치를 찾아 내려갔다. 적힌 숫자를 읽는다.



「2%」



커다란 손안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눈치를 보던 박 비서가 조심스레 상체를 들이민다.



“전무님, 자꾸 낮은 수치가 나오다 보니 테스트 진행한 회사에서도 조금 여유를 두고 진행하는 게 어떠냐고 의견을 보냈습니다. 건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회사 바꾸고, 오메가 샘플은 다시 찾으십시오.”



더 말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터다. 박 비서는 자세를 바로 한 뒤, 허리를 숙여 보이고 돌아서서 나갔다.



남자는 구겨진 종이를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흐트러진 넥타이를 손으로 고치며 사무실 한쪽 전면창을 향해 섰다. 검은 야경에 제 모습이 비쳤다.



문득 그는 다시 돌아서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에 눈길을 주었다. 구겨진 종이 맨 위에 적힌 커다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매칭 테스트 결과」





* * *





「테스트 결과: 당신은 용감한 탐험가!」



화면에 뜬 글자를 보자마자 기분 좋아진 해진이 작게 소리 내어서 헤헤, 웃었다. 역시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테스트다. 굉장히 공신력이 있나 보지.



홈페이지에 덕지덕지 뜬 광고들을 하나씩 닫으며 해진은 그 뒤에 있는 남은 글자들을 마저 읽었다. 테스트가 추천하는 그의 직업은 전문 산악인, 오지탐험가, 생물학자, 구조사람 등이 있었다. 구조사람은 아마 구조요원을 잘못 번역한 것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모두 마음에 들었다.



「당신은 그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탐험을 적극적으로 즐깁니다. 오지로 떠나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즐겨보세요.」



해진은 정말로 오지로 떠나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 채집용 나이프를 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씩씩하게 주먹을 꾹 쥐었다. 아마존이나 로키산맥을 거침없이 누비는 제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뛰었다.



“강해진 씨, 보고서 마무리됐어?”



민 팀장의 물음에 해진은 주먹을 쥔 채로 파티션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민 팀장이 그의 주먹과 조금 상기된 얼굴을 보더니 픽 웃었다.



“네. 어, 얼른 드릴게요.”



대답하고서야 해진은 주먹을 내렸다. 인터넷 창도 내렸다. 깨끗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다시 꼼꼼하게 눈으로 훑었다. 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민 팀장에게 발송했다.



의자에 몸을 기댄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마존도, 로키산맥도 갈 수 없으리란 사실은 누구보다 해진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일 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사는 데다 선천적으로 뼈와 심장이 약한 그는 결코 오지에서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강해진’이라는 이름과 달리 그는 약한 몸으로 늘 고생했다.



강해진은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그해 말에 오메가로 발현했다.



오메가마다 히트사이클 스타일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해진은 특히 그 증세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고작해야 열이 조금 나고 아랫배가 당기는 것이 전부였다. 덕분에 그 흔한 억제제 한 번 먹은 적이 없었다. 가뜩이나 지병이 많은 그로서는 다행인 일이다.



매칭률이 높은 알파를 만나면 히트사이클 증상도 달라진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야 딱히 근거도 없이 오메가들 사이에서 떠도는 게 전부라 해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형질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을 때에는 히트사이클과 러트의 증세를 구분해 열성과 우성으로 나누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의 매칭률이라는 것을 발견한 뒤부터 우성학은 사라졌다. 중요한 건 증세가 아니라 매칭률이니까.



‘알파와 오메가의 매칭률이 높을수록 건강한 아이를 낳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해진은 아직 매칭률 테스트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오메가였다.





점심시간에 회사 건물 밖은 제법 붐빈다. 잘 관리된 조경수 사이로 놓인 벤치는 사람으로 꽉 차고 1층 카페도 줄을 서야 주문할 수 있다.



“내일이지? 출장.”



카페 야외석에서 팀원들과 목을 축이던 중, 민 팀장이 해진에게 물었다. 해진이 빨대를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구, 우리 신입이 이제 다 커서 출장까지 가네.”



한 주임의 말에 해진이 발끈하였다.



“저 이제 신입 아니에요. 다음 달에는 제 후임도 들어올 거거든요.”

“으응, 그래, 그래.”



이번에는 민 팀장이 그를 아이 어르듯 얼러준다. 해진은 다짐했다. 후임이 들어오면 꼭 선배처럼 행동해야지. 그러면 한 주임님도, 민 팀장님도 나를 애처럼 대하지 않으실 거야.



워낙 유순하고 조곤조곤한 성격 덕분에 해진은 회사에서도 이리 예쁨을 받았다. 특히나 체구가 작아서 더더욱 사람들이 쉽게 보는 탓도 있었다.



해진은 제 성격이 싫지 않았다. 좀 마르고 선이 가느다란 편인 얼굴도 딱히 싫지 않았다. 그러나 제 작은 체구는 싫었다. 해진은 좀 더 단단한 몸을 갖고 싶었다. 어딘가 험한 산골에 내던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몸.



‘다음 생에는 천재 산악대원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종교도 없는 해진이지만 오지탐험을 하고 싶을 때마다 그렇게 빌곤 했다.



그는 한국에서 제법 큰 여행사인 ‘마루투어’의 기획팀에 다니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여행사 기획팀에 취직하게 된 것도 제 바람 때문이다. 여행 상품을 만들면서 대리만족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몸이 튼튼해지면 꼭 내가 가야지, 생각하면서 일하면 기분도 좋았다. 일의 능률도 오르고 말이다.



이번 출장은 그런 면에서 좀 시시하긴 했다. 팀에서 기획한 상품의 리조트에 가서 1박을 묵으며 시설이나 서비스를 조율하는 것이니.



“이참에 호캉스 한다 생각하고 편하게 갔다 와. 알았지?”

“호캉스라뇨. 노는 게 아니라 꼼꼼하게 상품 확인하고 체크하는 엄연한 업무인데요.”



해진이 또박또박 말하자 민 팀장이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았다. 감동하는 표정마저 지어 보였다. 한 주임도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우리 해진이. 야무진 것 봐.”



해진은 제게 잘 대해주는 상사들을 위해서라도 처음으로 혼자 가는 출장을 꼭 완벽하게 해내리라 다짐했다.





* * *





리조트에 도착한 해진은 꼼꼼하게 프로그램 동선부터 확인했다. 수영장과 기타 부대시설이 깨끗하게 관리되는지 확인하는 것도 필수였다. 방문객을 위한 시설들에 부족한 면은 없는지, 관리자는 누구인지도 모두 묻고 확인한 뒤 메모했다. 보고서로 정리해서 깔끔하게 올리려면 직원을 귀찮게 해서라도 빠지는 것 없이 체크해야 한다.



해진은 직원에게 양해를 구한 뒤 보란 듯이 휴대폰을 들고 이곳저곳 사진을 찍었다. 협력사의 출장이 있는 날만 깨끗하게 관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일을 끝낸 뒤에는 빳빳한 클립보드에 끼운 서류를 펜과 함께 담당자에게 내밀었다.



“여기 사인 부탁드립니다. 혹시라도 변동 사항 생기면 바로 말씀 부탁드려요. 세부 협의 사항은 월말에 저희 측에서 연락드릴 예정입니다.”



또박또박한 말투로 차분히 말한 뒤 사인한 서류를 돌려받으면서 ‘사원 강해진’이라고 적힌 명함을 내미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도.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숙소는 으리으리한 스위트룸이었다. 해진은 속으로 회사에 감사 인사를 했다.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호화로운 곳에서 머물겠어.



도착하자마자 내내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던 탓에 일단 가방을 내려놓고 약통을 꺼냈다. 늘 먹는 일곱 가지 영양제 및 지병 약이 가지런히 든 약통을 눈에 띄는 곳에 놔둔 뒤 베드벤치에 털썩 앉았다. 맞은편에 놓인 매끈한 장롱 문에 제 모습이 비쳤다. 작은 체구에 볼품없는 정장. 길이 줄이는 걸 잊어서 손등을 덮을 정도로 긴 재킷 소매.



그러나 해진은 주눅 들지 않고 발딱 일어났다.



“객실 시설 체크해야지!”



욕실과 드레스룸의 상태, 카펫과 창문의 청결함, 침대 시트와 토퍼의 탄성까지 모두 메모를 하고서야 해진은 침대 위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하고는 싶은데 사실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잘 논다고, 어릴 때부터 병원 신세나 방구석 신세가 전부였던 해진은 노는 법도 몰랐다.



하지만 당장 억울하다거나 슬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좀 아까울 뿐이지.



해진의 입술이 크게 벌어지며 하품을 뱉었다.



“아으, 피곤해…….”



차도 없이 여기까지 버스며 택시를 타고 온데다가 오자마자 일을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결국 해진은 광란의 밤을 보내는 대신 잠깐 잠을 자기로 했다. 이곳 침대 토퍼가 꽤 마음에 든다는 게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저녁에는 1층에 딸린 식당에서 뷔페를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꼼꼼하게 메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 접시나 해치워서 볼록해진 배를 문지르며 객실에 올라가서는 어메니티를 모조리 써보겠다는 각오로 거품목욕을 두 시간 동안이나 했다. 결국 현기증에 휘청거리긴 했지만 향기 덕분에 기분은 좋았다.



욕조 물을 빼고 몸을 헹군 뒤 머리를 말리던 중, 해진은 문득 욕조 귀퉁이에 놔두었던 렌즈통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 빈 렌즈통은 욕조 개수대 근처에 뒤집혀 있고, 안에 들어 있던 렌즈는 온데간데없었다. 물을 빼면서 휩쓸려 내려간 모양이었다.



“여분도 안 가져왔는데!”



해진은 눈이 나쁜 편이라 렌즈가 없으면 사람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혹시나 싶어 안경을 가져왔다는 점과, 중요한 체크는 다 끝났단 점이었다. 어차피 서울까지는 셔틀버스가 데려다주고, 서울 도착하자마자 새 렌즈를 사면 문제는 없을 터다.



다음 날 아침에는 리조트 측 담당자를 만나서 추가적으로 확인해야 할 부분들을 체크하고, 민 팀장님과 통화도 했다. 민 팀장은 어디 물가에 애라도 보내 놓은 것처럼 해진을 걱정했다. 회사에 청구하면 되니까 서울까지 택시를 타고 오라는 말까지 했다. 그럴 수는 없기에 정중하게 거절하고, 셔틀버스로 서울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택시를 타겠다 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나가려던 해진은 로비의 소란을 보고 멈춰 섰다. 누군가 로비 데스크 앞에 서 있는데, 직원이 무슨 연유인지 쩔쩔매고 있는 게 아닌가. 해진은 캐리어를 고쳐 쥐고 소란이 이는 쪽으로 걸어갔다.



“교육을 정식 이수했는데도 그 모양입니까? 매뉴얼을 안 외운 겁니까, 알고도 대처를 안 하는 겁니까.”

“저, 그게…….”

“그 유니폼, 오늘 중으로 벗고 싶습니까? 일이 장난입니까?”



교육 어쩌고 매뉴얼 어쩌고 하는 말을 들으니 남자가 진상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직원은 젊은 여성인데 벌벌 떠느라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본래 작은 체구인 해진과는 키만 해도 거의 머리통 하나 이상 차이가 나 보였다.



그럼에도 해진은 가까이 다가가서 캐리어 손잡이를 탁! 소리 나게 내렸다.



“저기요.”



남자의 시선이 해진을 향했다.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의 눈매가 눈에 띄게 날카로워졌단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해진은 물러서지 않고 외려 한 걸음을 더 가까이 다가섰다.



“클레임을 거실 거라면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피해를 봤는지, 피해를 입은 때는 언제이며 어떤 식의 보상을 원하는지 말씀하셔야죠. 남의 업장에서 남의 직원에게 해고를 운운하시면 협박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자의 반듯한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남의 직원?”



듣는 사람의 가슴을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눈이 잘 안 보여서일까. 저음으로 한 번 물었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숨이 턱 막힐 정도였으나 해진은 떨리는 것을 꾹 참고 주먹을 쥐었다.



“진상 부리지 마시고 이만하십시오. 엄연한 영업방해입니다.”

“진상?”



남자는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듯이 보였다. 해진은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감추려고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 진상을 부리는 놈이 잘못한 거지. 흐릿하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일부러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쐐기 박듯 말했다.



“멀쩡하게 생기셔서 왜 그러세요.”



직원은 발을 동동 구르며 해진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혹여 이번 일로 사달이 날까 겁이 나는 눈치였다. 해진은 직원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사과하시죠.”

“저, 고객님, 그게 아니라요…….”



두려워하는 직원에게 손을 뻗어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아니, 정말, 그게 아니라요, 고객님…….”



이번에는 옆에서 다른 고객을 상대하던 직원까지 나서려 한다. 해진은 제 앞에 선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더럽게 무서워 보이긴 하지만 제 당당한 모습에 당황했는지 이번에는 별말이 없다. 그래, 할 말이 없기도 하겠지. 진상 놈아.



“잘 들으세요, 또 이렇게 행패를…….”



말을 이으려던 해진은 바깥을 보고 뚝 입을 다물었다. 호텔 건물 밖으로 버스가 막 도착하고 있었다. 저거 타야 하는데!



“안 돼! 버스!”



해진은 그대로 캐리어를 끌고 달렸다. 그의 몸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를 연달아 냈으나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놓치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진상 놈과 상대하느라 괜히 시간을 허비했다.



버스에 올라탄 해진은 출발하고 한참 지나서야 소지품 중 하나를 놓고 온 것을 깨달았다.



‘손거울……. 엄마 건데.’



도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일단 회사 복귀해서 리조트에 전화를 해야 할 터다. 주머니가 어쩐지 허전했다.



반면 호텔 로비의 직원들은 해진이 떠난 뒤에도 여전히 쩔쩔매는 중이었다. 프런트 앞에 선 남자는 해진이 떠난 문 쪽을 빤히 바라보다가, 기척이 사라지고서도 한참 지나서야 직원들을 다시 마주했다.



그의 시선이 닿자마자 직원들이 움츠러들었다. 좀 전까지 남자가 그들에게 보인 행동 때문이 아니다. 남자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매니저 복귀하는 대로 대응 매뉴얼 다시 교육 요청하십시오.”

“네, 전무님.”



직원들이 죄지은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남자는 돌아서서 로비를 걸으며 해진의 시선이 닿았던 재킷을 벗었다. 불쾌하다는 투로, 꼭 쓰레기를 치우듯이 옆으로 내밀자 뒤늦게 달려온 사내 하나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전무님, 차 대기 중입니다.”



사내가 재킷을 접어 들며 말했다. 로비 위를 경쾌하게 걷던 구둣발이 돌연 뚝 멈추었다.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직원들이 지레 겁을 먹었으나 남자의 시선은 제 직원들이 아닌, 해진이 서 있던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냄새지?’



매끈하던 미간이 구겨졌다. 아까와는 또 다른 종류의 불쾌감이 얼굴에 떠오른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았으나 미미하게 느껴지던 향은 다시 맡을 수 없었다.



남자는 해진이 서 있던 곳을 응시했다. 바닥에 낡은 손거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 * *





- ‘키스틸’의 이환 전무 측은 오늘 오전, 사임설을 전면 부인하였으며 이환 전무의 조모인 유창숙 회장과의 불화설 역시 부인했습니다.



환은 잔뜩 신경이 곤두선 채로 TV를 껐다. 빌어먹을. 욕을 나지막이 씹으며 넥타이를 늘렸다. 가뜩이나 화가 나는데 카펫은 또 엉망이다. 전화기 옆의 벨을 누르자 박 비서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전무님, 부르셨습…….”

“당장 여기 치우십시오.”



박 비서는 그가 말하는 ‘여기’가 어디인지 선뜻 찾아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에는 전무실이 완벽해 보였으니까. 책상 위의 필기구와 서류는 한 치 오차 없이 정갈하게 정렬되어 있고, 커튼은 엊그제 빨게 시켰으며, 창틀, 창문, 책꽂이까지 깨끗하게 닦는 것을 분명 직접 감독했다. 그럼 이번엔 또 뭐 때문에 지랄일까.



“뭐 합니까?”



환이 날을 세우며 물었다. 박 비서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엎드렸다. 어떻게든 더러운 곳을 찾아내야 한다. 카펫 위에 뺨을 대고 살피자 다행히 머리카락 한 가닥이 보인다. 제 상사는 저 한 가닥 때문에 저 지랄을 하는 거다. 얼른 기어가 주웠다.



“제가 요즘 눈이 잘 안 보여서…….”



멋쩍은 투로 웃곤 머리카락을 휴지통에 버렸다. 돌아서려던 박 비서는 이환 전무가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잠깐 멈춰 섰다. 얼핏 보니 뒤판이 나무로 된 손거울 같다. 이환 전무가 갖고 다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게 뭡니까?”



조심스레 묻자 이유는 몰라도 이환 전무의 얼굴이 구겨진다. 살벌한 기세에 박 비서는 다시 눈치를 보다가 적당히 뒤돌아 나간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환은 책상 위에 손거울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곤 길게 한숨을 뱉었다.



자리에 앉으려던 그는 책상 한쪽에 놓인 검사지를 보고 멈칫했다. 미간이 사납게 구겨진다.



“갖다 버리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종이를 꺼내 바닥으로 내던졌다. 벌어진 종이에 적힌 퍼센티지를 보니 또 한숨이 난다. 고작 2%의 매칭률이라니.



이환은 알파였다. 그리고 그는 끝도 없이 오메가와의 매칭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이상하게도 오메가와 매칭률 테스트를 할 때마다 낮은 수치만 나왔다. 보통은 30~45%가 평균치라던데, 그는 어떤 오메가와 테스트를 해도 3% 초반이 최대치였다. 하다못해 10%만 되어도 그 오메가를 선택할 텐데.



물론 여기서 ‘선택’이란 ‘생식’을 뜻한다. 오메가와 섹스해서 아이를 낳는 일 말이다.



환은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앉았다. 전무실 창밖으로 햇빛이 부드럽게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알파라는 사실은 곧 생식에 특화된 종족이란 뜻이다. 그러나 아이는 딱 질색이다. 어느 정도로 질색이냐 하면 어릴 적의 제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조차 싫었다.



아이는 더럽다. 침도 흘리고, 먹을 것도 흘리고, 변도 가리지 못하잖은가. 이환은 더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반드시 사무실 청소를 시키고, 바닥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치가 떨린다.



그런데도 그가 끝없이 오메가를 찾아 아이를 낳으려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바로 상속 조건 때문이다.



대기업 ‘키스틸’의 레저 쪽은 그가 실질적으로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조트와 부산에 있는 호텔, 카지노까지 모두 제 손아귀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키스틸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회장 유창숙, 그의 조모는 환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그를 키웠다. 환은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서 경영학을 배웠다.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 부족한 그가 엉덩이를 뗄 때마다 조모는 직접 매질을 했다.



크고 나면 당연히 키스틸 그룹이 제 것이 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유학을 전전하고 어린 나이에 군대를 전역한 뒤 그가 입사한 곳은 키스틸의 생산 라인 쪽, 그것도 일용직이었다.



‘컨테이너에서 단순 작업을 시키실 거면 왜 저를 유학 보내셨습니까? 왜 제게 경영을 가르치셨습니까?’



반발하는 그에게 유창숙 회장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이 배은망덕한 애새끼야, 내 돈 한 푼이라도 받고 싶으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정말 친조모가 맞을까, 의심마저 들었다.



그날부터 이환은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했다. 피로에 찌든 채로 귀가한 곳은 집도 아니었다. 경기도 변두리의 오피스텔이었다. 조모가 그를 집에서 내쫓았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일할 거면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나.



‘너는 참을성이 부족한 게 문제다.’



조모는 언제나 그의 성급한 성미를 꾸짖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격이 그렇게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느린 것을 싫어했고, 갑갑한 것은 더 질색이었다. 그래도 꾹 참았다. 그래야 키스틸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조모가 그랬으니까.



어쨌거나 이환은 그렇게 죽어라 일해서 이 자리까지 올랐다. 참을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가 여태까지 버틴 것만 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한계에 가까웠다. 물론 삼십 대에 전무직까지 꿰찼으니 조모의 입김이 한껏 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는 남들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지, 생각할 때에 조모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애를 낳아라.’



먹던 차를 뿜을 뻔한 이환은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저는 오메가가 아니라 알파입니다, 회장님.’

‘그래. 오메가를 데려와서 애를 낳으라고.’

‘대체 왜…….’



조모는 늘 그렇듯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을 하고, 남을 보듯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낳으면 내 재산을 물려주마.’



입이 떡 벌어졌다. 이환은 애써 웃었다.



‘……아이가 필요하신 거면 보육원을 찾아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네 씨로 낳아서, 네가 키워라. 그 오메가도 내게 데려오고.’

‘대체 이유가 뭡니까!’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네 가정을 만들고 지켜 보여라. 가정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놈이 회사 식구 십만 명을 어떻게 먹여 살릴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다. 제게 대체 왜 이러시느냐며 다과상을 엎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착한 손자답게 경련하는 입꼬리를 한껏 더 끌어 올렸다.



‘손주가 그렇게 보고 싶으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닥치는 대로 매칭률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 빌어먹을 성격 때문인지 지나치게 우월한 유전자 때문인지 매칭률은 2~3%를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의 매칭률이 높을수록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는데, 2~3%는 임신 자체가 힘든 확률이다.



그의 생식 기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침마다 흉흉하게 일어서는 성기는 당장 씨를 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검사 결과, 정자도 팔팔하다고 했다.



아, 물론 직접 섹스를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더럽기는 했다. 타인과 한 침대에서 타액과 체액을 섞으며 뒹굴다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군.’



그가 의자에 앉은 채로 진저리를 쳤다. 남과 같은 침대에서 뒹굴고 살을 맞대는 생각만 해도 병이 옮을 것 같았다. 괜히 찝찝해져서 항균 물티슈를 뽑아 손을 한 번 더 닦았다.



‘할멈에게 아이를 안겨주고 이 회사를 모두 가질 수 있다면야, 못 할 건 없지. 하지만…… 시험관 아기 쪽도 생각해보아야겠군.’



물티슈를 뭉쳐 휴지통 쪽으로 던지던 중, 그의 시선이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손거울을 향했다. 반들반들하게 닳아서 낡은 이 손거울도 분명히 세균 덩어리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진상 부리지 마시고 이만하십시오. 멀쩡하게 생기셔서 왜 그러세요.’



체구가 자그마한 그 남자는 제가 리조트의 실질적 주인인 줄도 모르고 그리 말했다. 겁을 먹었을 텐데 눈을 땡그랗게 뜨고 진상 운운하던 고 얼굴이 이상하게 자꾸 떠올랐다.



이 손거울은 분명히 그 남자의 것이다. 그가 급하게 호텔 로비를 뛰어나갈 때 떨어진 것을 환이 주웠다.



평소라면 세균이 덕지덕지 묻었을 남의 물건을 집지도 않았을 테고, 행여 줍는다 해도 분실물은 직원들이 알아서 처리하게 두었을 텐데 그러는 대신 제 주머니에 넣었다. 환은 아직도 제 충동적인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뒷면이 반들반들하게 닳은 거울을 뒤집자 제 얼굴이 비쳤다. 매끈하게 빗어 넘긴 포마드 헤어, 검은 눈동자, 무표정할 때는 날이 선 듯 보이는 눈빛, 창백한 피부. 그는 제 얼굴을 남의 얼굴 보듯 하다가 시선을 떼었다.



언론에서야 이환 전무의 외모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어 환장하지만, 위압적인 눈빛 탓에 아무리 봐도 제 얼굴은 딱히 편안함을 느낄 만한 모양새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 될 건 없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낳아줄 오메가와 연애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편하게 해줄 마음도 없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아이밖에 없었다.



손거울을 도로 내려놓으려던 그는 문득 코끝에 스치는 어떤 향을 맡았다. 설마. 반신반의하며 손거울을 코로 가져갔다. 깊게 들이마시자 나무 냄새 사이로 낯선 향이 났다. 그의 냄새는 아니었다. 달큼한 이 딸기 향은 저와 천만 광년쯤 거리가 있는 향이었다.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환은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 예…… 또 왜 그러십니까, 전무님.



지친 기색이 역력한 박 비서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으로 울린다.



“지난주 목요일에 키스틸 리조트 호텔에 다녀간 투숙객 중 남성 오메가, 모두 조사해주십시오.”

- 남성 오메가요?



되묻는 목소리에 짜증을 꾹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늘 그렇듯이 환은 제 할 말을 이었다.



“그중 체구가 작고 흰 피부에 동그란 눈을 가진 사람이 분실물 문의를 했을 겁니다. 분실물은 손거울.”



환의 시선이 다시 책상 위 손거울로 향했다. 뒤에 댄 나무판이 반들반들하게 닳은 것을 보니 주인이 얼마나 이것을 아꼈는지 짐작이 되었다.



“DNA 샘플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든 상관없습니다.”



예감이니 느낌이니 하는 소리를 전혀 믿지 않는 환이지만, 이번엔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 남자와 매칭 테스트를 진행해주십시오.”



적어도 이번만큼은 말이다.





* * *





“없다니요? 분명히 그날 객실에 두고 갔습니다.”



해진은 휴대폰을 반대쪽 손으로 바꿔 쥐었다.



- 저희가 여러 번 찾아보았습니다만, 손거울은 없었습니다.



분명 그날 손거울을 객실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리조트 측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한다. 그럼 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걸까.



기억을 되짚던 해진은 문득 그날 보았던, 로비에 서 있던 덩치 큰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기억 속에 어떤 낯선 향이 끼어들었다.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던 묘한 냄새.



해진은 기억을 떨치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



한 마디를 덧붙였으나 정말 그곳에 손거울이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시 모니터를 마주했다. 이상하게도 그날 보았던 남자의 흐릿한 얼굴이 또 떠올랐다.



‘분명히 그 남자한테서 무슨 향이 났는데…….’



향수 냄새나 보통 사람의 체취와는 묘하게 다른 향이 났었다. 뭐였을까. 왜 기억나는지 알 수 없으나 해진은 저도 모르게 기억 속의 향을 다시 맡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리고 이내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며 두 손으로 양쪽 뺨을 찰싹찰싹 쳤다. 손거울을 잃어버렸단 생각이 다시 들자 서러움이 솟았다.



“도대체 어디 놔둔 거야…….”



뒤판이 나무로 된, 오래된 티가 날 정도로 낡고 손때가 반들반들하게 탄 손거울은 엄마한테서 받은 유일한 유품이었다. 그런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꼼꼼한 성격 탓에 뭔가를 잃어버린 적이 드문 그였다. 지갑이나 휴대폰을 잃어버린 적도, 심지어 비 오는 날에 우산을 놔두고 간 적도 없었다. 제 몫은 제가 챙겨야 살 수 있단 사실은 어릴 때부터 알았다. 급식에 나온 소시지를 친구에게 하나 더 양보해줄지언정 모르는 새 뺏기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정신이 없었다. 출장이 처음도 아니고 일도 평소처럼 했는데, 이상하게도 렌즈를 잃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제게 제일 중요한 물건인 어머니 유품까지 잃어버렸다. 해진은 울고 싶었다. 또 오랜만에 편두통이 일 것 같았다. 늘 위염을 달고 사는지라 배도 아리고, 식도염이 도지는지 속도 울렁거렸다.



“일하자…….”



혼잣말하며 마우스를 쥐었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 모니터에 뜬 보고서에 글자를 입력해 넣었다.



그날 오후였다. 점심 먹는 내내 팀원들은 막내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인다는 사실에 깊은 우려를 표했고, 식당을 나와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해진은 초콜릿이며 음료 등을 잔뜩 받았다. ‘먹고 힘내!’, ‘내가 대신 찾아줄까?’ 하는 팀원들의 걱정에 누를 끼치기 싫어서 해진은 그저 괜찮다며 웃어 보여야 했다.



그리고 오후 업무를 처리하던 중,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 안녕하십니까, 강해진 씨.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에 깨끗한 목소리. 꼭 배우처럼 깊은 울림을 가진 음색을 듣자마자 해진은 잠깐 굳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같은데.



“예, 누구십니까?”

- 강해진 씨의 잃어버린 소지품을 제가 갖고 있습니다.



뒤이은 말에 해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팀원들의 시선에 애써 웃어주곤 휴대폰을 쥐고 얼른 복도로 나왔다.



“제 소지품이요? 혹시 손거울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말요?”

- 그래요.



반가움에 다다다 묻자 살짝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목소리가…… 정말 끝내주게 좋다, 고 해진은 생각했다.



- 시간, 언제 됩니까? 장소를 정해주시면 제가 찾아가죠.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스케줄을 되새기던 해진은 뒤늦게 이상함을 느꼈다. 회사 번호도 아니고, 이건 개인 휴대폰인데. 리조트에서 연락처를 받았더라면 회사로 전화를 줬겠지.



“저, 그런데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누구신지, 어떻게 제 번호를 아셨는지 말씀해주셔야 제가 그쪽을 믿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약간 권태로운 듯한 목소리.



- 저는 키스틸 레저의 전무 이환입니다.



이환? 그 이환? 해진의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 리조트에서 강해진 씨가 다녀가신 걸 알고 회사 쪽으로 개인 연락처를 문의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시원시원한 어조다. 해진은 땡그래진 눈을 깜박, 깜박 하며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창가에 기대어 섰다. 여름을 맞은 이팝나무에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었다. 해진은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을 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왜 굳이……. 회사로 전화 주셔도 되셨을 텐데요. 아, 저, 기분 나쁘단 뜻은 아니에요. 그저 좀 의외라서요.”

-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습니다.



키스틸은 해진이 일하는 여행사의 모체 격 회사이며, 전무 이환은 연예인만큼이나 인기가 많은 남자다. 그런 사람이 왜 제게 따로 만나자고 하는 걸까. 할 말은 뭘까. 설마……. 갈팡질팡 표정이 오가던 해진의 얼굴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나 승진시켜주려고?’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갑자기 전무의 눈에 들었다거나. 우연히 그가 올린 보고서를 읽고 이 천재는 누구냐며 수소문을 했다거나. 온갖 상상이 펼쳐져 해진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가볍게 가로젓고는 겨우 진정했다.



- 강해진 씨?

“아, 네, 네!”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대답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해진의 귀가 간질간질해졌다.



- 직접 개인적으로 만나서 돌려드리고 싶군요. 저는 언제든 괜찮으니 강해진 씨가 편하신 시간을 알려주십시오.



상대방이 눈앞에 있지 않은 것을 잊기라도 한 듯, 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제가 이 번호로 메시지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서야 터질 것 같은 가슴을 크게 들썩거리며 휴우, 숨을 내뱉었다. 꽃잎 하나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와 창틀을 쥔 해진의 손등 위에 안착했다. 해진은 어디선가 위스키 향이 나는 것을 문득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금세 향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각, 전화를 끊은 환은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느긋이 기대었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평소라면 박 비서에게 소리를 질렀을 텐데, 이 식어빠진 커피도 오늘은 희한하게 맛이 있었다.



환은 급기야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씨익, 틀어 올려 웃었다. 누가 본다면 사람 하나 잡고 기뻐하는 사이코패스의 웃음 같았으나 그는 지금 진심으로 기뻐하는 중이었다.



“시간?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책상 위에 놓인 강해진의 손거울과 그 옆에 놓인 검사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확률은 나올 수가 없거든.”



검사지를 들추어 나온 확률을 다시 보자 그의 입꼬리가 한껏 더 올라갔다.



「99.99%」





이환 전무와 만나는 날, 해진은 최대한 단정하게 입고 나갔다. 좀 김칫국 같긴 하지만, 혹시라도 면접 자리가 될 수도 있으니 정장을 다 차려입고 나갈까, 하다가 그건 좀 오버 같아서 와이셔츠에 넥타이는 빼고, 정장 바지 대신 일자핏의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수려한 외모의 남자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다가가려던 해진은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라? 혹시 저 사람…….’



분명히 매스컴에서 몇 번 보았던 ‘키스틸 이환 전무’의 모습인데, 이상하게 익숙했다. 바로 며칠 전에 호텔 로비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남자.



“아.”



그 진상이 저를 발견하곤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강해진 씨.”



해진은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바보 같은 해진! 그날 알아봤어야지! 아무리 렌즈를 안 꼈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 얼굴을 못 알아봤을까?



“또 뵙네요.”



그가, 리조트 호텔에서 보았던 진상이, 이환 전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한다. 느긋하다 못해 나른해 보이는 동작이었으나 해진은 숨이 턱턱 막혔다.



테이블 위를 한 번 턱으로 가리켜 보이는 동작에 해진은 우물쭈물하며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제,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날 렌즈를 잃어버려서 얼굴도 못 알아뵙고!”



테이블에 코를 박을 것처럼 허리를 숙이자 낮은 웃음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린다.



“괜찮습니다. 오해하실 만합니다. 제가 직원 교육에 엄격한 편이라.”

“네에…….”



해진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진상 같으셨어요. 깜빡 오해했지 뭐예요?”



환의 얼굴이 문득 굳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하하, 소리를 내어 어색하게 웃었다. 그저 진상을 부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냥 좀 무서운 상사님일 뿐이구나. 그러나 그날 보았던 얼굴과는 달리, 오늘은 어째 정말 다정해 보인다.



“식사하셨습니까? 여기 음식이 제법 괜찮습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같이 드시죠.”

“네, 좋아요.”



해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하게 눈을 휘며 웃는 그를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알파라는 사실은 식사를 시작하고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알파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위압감이나 오만함이 그에게서는 보이질 않았다.



이환 전무는 그 외모만큼이나 젠틀했다. 식사하는 내내 해진이 어색하지 않도록 가벼운 농담도 던지고 편하게 대해주었다. 한 회사의 전무라기보다는 평범한, 아니, 좀 잘생긴 알파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해진이 감동한 부분은 이환 전무가 제 능력을 알아봐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그 패키지를 강해진 씨가 기획했단 말씀입니까?”

“네. 저희 팀장님이 많이 도와주시긴 했지만…… 거의 다 제가 기획했어요.”



해진이 처음으로 맡아 기획한, 키스틸 리조트를 포함한 국내 여행 상품은 아주 인기가 많다. 출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행사의 효자 상품이 될 거라는 말까지 오갔다. 이걸 기획하고 나서 인센티브도 꽤 많이 받았다.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켠 환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이런 인재를 만나다니, 영광입니다.”



해진이 쑥스럽게 웃었다.



“너무 추켜세우시면 저 부끄러워요.”

“그럴 만한 분이니까요. 입사하신 지 이제 2년 되신 평사원이 이런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가느다란 눈매가 휘어지며 웃음을 담아냈다. 그리고 해진은 문득 코끝에 스치는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위스키 향…….’



살짝 스모키한 위스키 향은 분명 그날 리조트 호텔 로비에서 맡았던 그 냄새와 똑같았다.



‘이게 전무님의 알파 냄새구나.’



오메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살짝 향을 흘려내는 솜씨가 대단했다. 꼭 유혹하는 수컷 새의 보드라운 깃털처럼, 살그머니 해진의 코끝을 스쳤다가 이내 사라진 향내에 해진은 갈증마저 느꼈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이렇게 향을 흘리는 것은 명백한 유혹이다. 경험 없는 해진이지만 그 정도는 알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시선을 떨구자 이환의 길게 뻗은 손가락이 보였다. 음식을 자르는 동작이 우아하다.



“제가 탐이 날 지경입니다.”

“탐이요?”



이환 전무는 고기 썰던 손을 잠시 멈추고 해진을 빤히 마주 보았다. 아까와는 또 다른 느낌의 뜨거운 눈빛이 해진을 부끄럽게 했다.



“강해진 씨가 탐이 난단 말입니다.”

“아, 하하…….”



뺨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제가 일을 좀 잘하긴 하죠?



“강해진 씨와 만나게 될 알파는 운이 좋겠군요.”



가슴을 울리는 낮은 톤의 목소리로, 이환이 뒤이어서 말했다. 해진은 달아오른 얼굴을 보이기 부끄러워서 접시에 시선을 박은 채로 고기만 열심히 썰었다. 벌써 조각이 다섯 개나 쌓였지만 하나도 입에 가져가지 못하고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데다가 능력까지 갖춘 짝이라니. 벌써 부럽습니다.”



가뜩이나 달아오른 얼굴이 더 붉어졌다. 해진은 어렵사리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삼킨 뒤, 입을 달싹였다. 제 입술에 이환 전무의 시선이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델 것처럼 뜨겁다.



“전무님이야말로 멋있으세요. 저도 전무님 같은 알파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비록 몸이 약하고 변변한 배경도 없는 오메가지만 말이다. 솔직하게 내뱉고 나니 어쩐지 속이 후련했다. 시선이 여전히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해진은 포크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꽉 주었다.



이환 전무가 표정 없는 얼굴로 저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날 선 눈빛이 꼭…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다. 등줄기에 소름이 쭉 끼쳤다. 반사적인 공포가 해진을 얼어붙게 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놀랍게도 이환 전무의 얼굴이 다시 온화하게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저를 삼켜버릴 듯하던 흉흉한 기세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뭐지?’



해진은 잠깐 어리둥절했으나, 저를 보고 다시 웃는 이환이 너무나도 근사했기에 잠깐 느낀 의아함마저 지워버렸다.



식사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가격이 걱정되긴 했지만 이환 전무가 계산하겠다기에 접시를 마저 깨끗이 비웠다.



밥을 먹은 뒤 해진은 늘 하던 대로 가방에서 약통을 꺼냈다. 매일 먹는 약과 영양제가 칸칸이 빽빽하게 들어찬 케이스를 보이기가 부끄러워 무릎에 놓고 살짝 뚜껑만 열어 약을 꺼내서 입에 밀어 넣었다.



‘나는 몸이 약해서 알파들이 싫어할 거야.’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같이 데이트를 해도 오랜 시간 산책을 하지 못하고, 같이 운동을 하거나 격한…… 애정 행각도 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왜인지 이환 전무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매너 좋은 알파는 왠지 그럴 것만 같았다. 그래도 몸 약한 게 자랑도 아니니 해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후식으로 나온 콩포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였다. 이환 전무가 문득 생각난 듯 재킷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손거울을 꺼내 내밀었다.



“돌려드리지요.”



해진이 두 손으로 손거울을 받아 들었다. 곧바로 주머니에 넣자 안정감이 찾아왔다. 늘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엄마의 유품인 이것을 갖고 있으면 엄마의 바람처럼 튼튼하고 건강한 몸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진에게는 일종의 토템 같은 것이었다.



다시 이환을 마주한 채, 조금 웃으며 고개를 한 번 까딱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할지…….”

“사실 보답을 바라고 돌려드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강해진 씨를 뵙고 나니 한 가지 바람이 생기기는 하는군요.”



아주 정중한 어조, 다정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해진의 얼굴을 조곤조곤 읽듯이 응시한다. 해진은 꼭 뭔가에 홀린 듯이 그의 눈을 마주 응시했다. 연갈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꼭 그에게서 탐색 당하는 것 같았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요?”

“저랑 데이트를 해주십시오.”

“……네?”



콩포트를 퍼먹던 티스푼을 툭, 놓쳐버렸다. 환은 뺨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관자놀이를 살짝 긁는 동작에서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이런 말 부끄럽지만, 워낙 바쁘다 보니 함께 밥 먹을 사람도 없습니다. 이젠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할 지경이고요. 하지만…….”



가느다란 눈매가 다시 해진을 향했다. 해진은 다시 그의 눈빛에 스친 살벌함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다시 사라지지 않았다.



해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잔을 가져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이환 전무는 옷깃을 가다듬었다. 올블랙의 정장이 굉장히 그와 잘 어울린다고, 문득 해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강해진 씨와는 이런 자리를 좀 더 갖고 싶군요.”



말과 함께 그의 눈빛이 좀 더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오메가를 사냥하는 알파의 눈빛이다. 먹이를 앞에 둔 채로 삼킬 시간만 재고 있는 맹수 같기도 하다.



다시 위스키 향이 났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짙었다. 그러나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저를 마주한 눈빛은 이토록 뜨겁고 적나라하게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데 말이다.



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실질적인 그룹 승계자라는, 끝내주게 잘생긴 데다가 피지컬까지 완벽한 이 알파가 왜 제게 호감을 표하는지 해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누가 잘해주면, 일단 받아먹고 그다음에 튀라고.



“강해진 씨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해진은 입을 작게 벌렸다가 닫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고개를 끄덕인 뒤였다.





집에 온 해진은 얼떨떨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강해진 씨와는 이런 자리를 좀 더 갖고 싶군요.’



키스틸 레저의 전무 이환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심지어 데이트 신청까지 받았다. 방금 전까지의 일이 거짓말 같았다.



해진은 물론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평범한 회사원인 자신이 그와 엮이리라 생각해본 적도 당연히 없었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알파들 중에 짐승이나 매한가지인 놈들은 오메가와 억지로 관계를 맞으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환이 그런 놈일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젠틀하고 다정한 사람이…… 말도 안 되지.



‘알파가 오메가 좋아하고 오메가가 알파 좋아하는 거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상대방 향에 눈 돌아가서 들이대다가 눈도 맞고 배도 맞고 그러는 거야.’



언젠가 친구 윤경훈이 해진에게 그리 말한 적 있었다. 경험 없는 해진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더랬다.



물론 살면서 알파를 안 만나본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해진이 베타인 것처럼 행동했다. 체구도 작고 몸이 약한 남성체 오메가는 그들에게 성적 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말하자면, 해진에게 오메가 대 알파로 접근한 사람은 환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제 첫 연애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해진은 젖은 머리칼을 말리는 것도 잊고 침대에 엎드린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강해진입니다^^ 오늘 넘 반가웠어요^^ㅎㅎ]



메시지를 적던 해진은 그래도 상사나 다름없는 분인데(다른 회사긴 해도 어차피 협력사니까) 싶어서 적던 글자를 수정했다.



[강해진입니다. 오늘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편하실 때 연락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너무 딱딱하다.



[강해진입니다. 오늘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편하실 때 연락 부탁드립니다. ^^]



뒤에 이모티콘 하나를 붙이자 좀 적절한 것 같다. 그대로 전송 버튼을 누르고는 천장을 보고 누웠다.



답장이 오길 기다렸으나 밤이 늦을 때까지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해진은 휴대폰을 쥔 채 잠들었다.



이환 전무에게서 답장이 온 것은 다음 날 오전이었다.



[다음 만남 장소를 안내해 드립니다.

일시: 21일 저녁 7시

장소: BC호텔 1층 카페 비하인드]



메시지를 확인한 해진은 조금 놀랐다. 꼭 무슨 워크숍 안내 메시지 같은데. 발신자는 분명 이환이 맞았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셔서 그런가 봐.’



이 정도야 문제도 아니지. 사실 이환의 얼굴을 떠올리면 아무 문제가 생길 수가 없었다. 헤실헤실 웃으며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으나 영 집중이 되질 않았다.





* * *





그 시각, 환은 인수합병 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짜증을 누르느라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저, 전무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박 비서가 피곤 가득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제야 환은 잊고 있던 어떤 존재를 떠올렸다.



“강해진 씨와 스케줄 잡았습니까?”

“예. 좀 전에 메시지 발송했습니다.”



박 비서는 환의 휴대폰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다 올려놓았다. 놓인 휴대폰을 환이 아주 불만스러운 투로 노려보았고, 박 비서는 조금 삐뚤어진 각도를 똑바로 고친 뒤 얼른 재킷 안주머니에서 소독제를 꺼내 위에다 뿌렸다. 그제야 상사의 얼굴에서 불만이 사라진다.



“그래요. 그리고 점심은 패스하지.”



박 비서가 나간 뒤 환은 다시 머리를 싸매고 상대 기업의 부채 현황을 비롯한 각종 사항이 정리된 표를 들여다보다가 미간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 오메가를 떠올렸다.



오메가와 알파의 매칭률은 DNA 샘플을 갖고 진행한다. 물론 두 사람 모두의 동의도 있어야 하지만, 이환 정도 되는 위치의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동의서 따위는 생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오메가와 자신은 99.99퍼센트의 매칭률을 기록했다. 가히 기록적인 퍼센트였다. 아이를 갖기만 하면 그 어떤 유전병 없이 건강하게 태어날 확률인 것이다.



강해진은 약해 보이는 오메가였다. 꼭 생긴 건 주무르다 만 밀가루 반죽처럼 허여멀겋게 생겨서는, 줏대도 없이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 제법 우스웠더랬다.



‘아이만 낳게 하면 된다.’



물론 강제로 낳게 할 방법도 있기는 했다. 좀, 아니, 많이 비윤리적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괜히 멀쩡한 사람 들쑤셨다가 말썽이 생기는 것보다 낫겠지. 그리고 제 조모가 오메가까지 데려오라고 했으니 말이다.



만나서, 아이를 낳게 하고, 보상금을 넉넉히 안겨준 뒤, 조모에게 오메가를 보여주고, 재산을 받자마자 깔끔하게 헤어진다. 그것이 환의 계획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결혼이고 연애고 주기적인 성관계고, 그런 건 말도 안 된다.



그저 처음에 좀 잘해주다가 아이를 낳으면 보상을 해주겠다 말하면 아마 좋아서 침을 질질 흘리겠지. 입고 있는 싸구려 정장과 반들반들하게 닳은 슈트케이스를 보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게다가 조사 결과, 가족도 없이 혼자 벌어서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간다고 했으니. 저렇게 가난한 놈들은 돈이면 환장하지 않나. 흙탕물에서 뒹구는 불쌍한 오메가를 구제해주는 것이다.



환은 책상 위 거울을 보며 넥타이 매무새를 정리하고 깨끗이 빗어 넘긴 포마드헤어를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 인수합병 문제로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 있었는데, 지금은 불쾌감은 온데간데없고 미소가 떠 있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가뜩이나 깔끔한 얼굴을 몇 번이고 점검하던 중, 박 비서가 돌려놓고 간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강해진」



화면에 뜬 글자를 보고 그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 받기 버튼을 눌렀다.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어차피 내 아이를 낳으려면 개고생을 해야 할 텐데.



“강해진 씨, 반갑습니다.”

- 어,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제가 괜히 전화한 건 아니죠……?



알면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지, 하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별말씀을요. 마침 저도 해진 씨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 정말요?

“그럼요. 저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입니다.”



수화기 너머에는 수줍게 웃는 목소리가 들리고, 마주한 거울 속 제 얼굴에는 섬뜩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특히 오메가 앞에서는 더더욱 거짓말을 못 합니다. 알파들이란 원래 그렇거든요.”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왠지 부끄럽네요. 식사는 하셨어요?

“바빠서 못 했습니다. 강해진 씨는 꼭 챙겨 드십시오. 귀한 몸이지 않습니까.”



‘귀한 몸’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방점을 찍었다. 제 아이를 낳아줄 몸이니 당연히 귀한 몸이긴 하지.



- 저, 사실 그날 밤에 한잠도 못 잤어요.

“저런, 제가 혹시 강해진 씨의 잠을 빼앗아간 겁니까?”



걱정이 듬뿍 묻어나는 말투는 진심이었다. 잠을 안 자거나 해서 괜히 몸을 해치면 골이 아파질 테니까.



- 그냥…… 좀 설레서요. 이런 적이 처음이라…….



그래, 동정이란 사실은 환 역시 알고 있었다. 더럽게 여기저기 구멍을 내주고 다니는 것보다야 훨씬 건강하고, 아이 낳기도 쉽겠지. 생각해보면 운이 좋은 편이다. 이런 오메가와 무려 99.99%의 매칭률을 보이다니.



“저 역시 처음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워 마십시오.”



이렇게 매칭률 높은 오메가는 처음이지.



강해진은 귀찮게도 그 뒤로 무려 2분 동안이나 수다를 떨어댔다. 환은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을 참으며 대충 예, 예,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었다.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이 이 밀가루떡 같은 놈보다 몇 배는 더 재수 없고 더러우니까.



아이를 낳도록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만 잘 대해주면 된다. 그뿐이었다.



그러니 다음 데이트를 준비하는 일도 어려울 게 없었다. 더러운 영감들과 미팅을 하는 것보다야 몇 배는 쉬운 일이다.





* * *





친구 윤경훈은 해진이 알파와 데이트를 한다 하니 깜짝 놀랐다.



“야, 네가 웬일이냐? 평생 수절할 것처럼 살더니만.”

“내가 언제? 알파들이 나한테 관심이 없었던 거지.”

“과연 그럴까?”



윤경훈이 눈을 곱게 흘기며 씩 웃었다.



“내 주변에 알파야 많았어. 보통 나를 오메가 취급 안 해서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향도 약하고, 히트사이클도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말하자면 번식에 탈락된 개체처럼 말이야.”



해진은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며 또박또박한 어투로 말했다. 윤경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좀 심한 말이다, 야…….”

“화를 내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오히려 히트사이클로 고생 안 해서 좋지. 좀 서운할 때야 많지만,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걸 어째.”



면구스러워하는 윤경훈의 표정을 마주한 채 해진은 괜찮다는 투로 웃었다.



“너 연애한다니까 좋기는 한데, 조심하긴 해라. 알파들 중에서 오메가 데려다가 나쁜 짓 하는 놈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돈 노리고 덤비는 놈들도 있는 거 알지? 이건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인마.”



돈을 노리고 덤벼들다니. 물론 그런 알파들이 있기는 했다. 알파들이 오메가를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는 항상 있으니 윤경훈의 걱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제 친구의 얼굴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덕분에 그 대상이 무려 키스틸의 이환 전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두 번째 데이트는 미리 약속한 대로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해진은 오래 고민하다가 편하게 입고 나왔는데, 환 역시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편한 차림이었다. 마음이 통했나 싶어 두근거렸다. 물론 그의 니트 핏은 저와 비교할 게 아니었지만.



‘흰 니트를 입었는데 왜 이렇게 몸이 좋아 보여…….’



초여름에 어울리는 얇은 흰 니트는 오히려 티셔츠보다 그의 몸매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가슴 근육이 장난 아니었다. 어깨는 왜 이렇게 단단해 보여. 모르긴 몰라도 전문적으로 트레이닝 같은 것도 받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몸이다.



해진은 괜히 제 자그마한 체구가 부끄러웠지만,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그를 마주 보며 대화를 이었다.



‘나는 당당한 오메가야. 알파인 이 사람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고.’



다행히 해진이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환은 그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렇게 매너가 좋은 알파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또 만나게 되니 즐겁고 영광입니다.”



목소리는 또 어찌나 좋은지. 성우나 배우 뺨치는 음색은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저야말로 영광이에요.”

“오늘, 저랑 저녁 드셔줄 거죠? 전에 약속하셨잖습니까. 저와 함께 식사해주시겠다고.”

“그럼요. 당연하죠. 저, 그런데 점심은…… 자주 거르세요?”



통화 중에 밥을 먹지 않았다는 말이 떠올라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일도 많고 정신도 없어서 말입니다. 제 끼니 하나 챙기기가 쉽지 않군요.”

“밥 안 드시고 과자나 드시고 그럼 안 돼요. 밥 대신 커피랑 디저트 같은 거나 드시는 거 아니에요?”



환은 정곡이 찔린 표정으로 입을 잠시 벌렸다가 닫았다. 해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못 살아.”



그리곤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해진은 당당히 가슴을 펴고 환을 마주했다.



“사무실 여기서 걸어서 20분 거리죠?”



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틸 레저 사무실과 해진이 다니는 마루투어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저랑 같이 밥 먹어요. 제가 도시락 싸드릴게요.”



순간 환의 얼굴에 떠오른 날카로운 반감을 해진은 알아보지 못했다. 해진은 그가 다만 저를 부담스러워한다 생각하며 환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걱정 마세요. 저 요리는 제법 잘해요. 혼자 오래 살았거든요. 맛있는 도시락 매일 싸드릴게요. 같이 먹어요.”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는 눈매에 날이 잔뜩 서 있었으나 해진은 여전히 그가 그저 부담스러워한다고만 생각했다.



“어차피 저 혼자 살아서 식재료도 많이 남아요. 사양하지 말아주세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자 그제야 환은 슬그머니 손목을 빼내며 미소 지었다.



“사실 저는 사업상 약속이 많아서 점심을 같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해진 씨의 이 자그마한 손으로 열심히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기껏 먹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길까 겁이 나는군요.”

“아…….”



해진은 멋쩍게 볼을 긁었다.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래, 전무님은 만나는 사람도 저보다 훨씬 많겠지.



“하지만 해진 씨가 만든 도시락은 언젠가 꼭 먹어보고 싶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먼저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뒤이은 말에 어마어마하게 감동한 해진은 고개를 다섯 번 연달아 빠르게 끄덕였다. 그와 함께 도시락을 먹을 생각에 즐거워진 해진은 환이 테이블 아래에서 냅킨으로 손목을 박박 닦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환은 그날도 종일 해진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해진은 그와 있는 것이 즐거웠다. 여유롭게 지어 보이는 미소도, 커다랗고 곧은 손도, 낮은 음색을 내는 목울대도,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니트도 모두 좋았다.



이렇게 잘생긴…… 아니, 다정한 알파라면 뭐든 다 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사실 이렇게 한 사람의 오메가로서 알파와 데이트를 제대로 한 적도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마주친 알파들은 저를 이렇게 대해주지 않았으니까.



“혹시 커피가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한창 대화를 이어가던 중 환이 물었다. 해진의 앞에는 생크림을 반도 떠먹지 않은 비엔나커피가 놓여 있었다. 이 카페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가 아인슈패너라며 환이 주문해준 것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맛있는데요.”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새로 주문하겠습니다. 이곳의 에스프레소 콤파냐도 괜찮은 편인데, 한번 드셔보시지요.”



뒤이은 말에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주문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단 커피를 오랜만에 먹으니까 잘 안 들어가서요. 제가 입이 짧은 편이라……. 사실 단 걸 많이 먹으면 속이 아파요.”



단 걸 많이 먹으면 탈이 난단 말은 사실이었다. 시그니처 메뉴라면서 그가 추천해주기에 딱히 거절하기도 뭐하고 해서 아무 말 않았었다. 단 커피가 몸에 받지 않다뿐이지 싫어하는 건 아닌데, 돈을 아끼느라 아메리카노만 먹다 보니 쓴 커피 맛에 길들여진 모양이다.



환이 표정을 굳히며 직원을 부르려 들었던 손을 내렸다.



“이런, 제가 멋대로 주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맛은 있어요. 진짜로요.”



그의 얼굴에 정말로 미안함이 묻어났기에 해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환은 스스로를 꾸짖는 표정을 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가지요. 괜찮으시다면 조금 걸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소화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나 해진에게 말을 걸 때에는 다시 지극히 다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해진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를 따라 일어섰다.



둘은 근처 공원을 천천히 오래 걸었다. 환이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꽤 많이 해주어서 해진은 기분이 좋았다. 그도 어릴 때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에 해진은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의 조모인 키스틸 회장이 손자에게 쉽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현장직부터 다니게 시켰다는 말에는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공식 석상에선 꺼낸 적 없는 말이니까요. 창피하지 않습니까. 할머니에게 잡혀 사는 손자라니.”



그가 웃었고, 해진도 따라 웃었다.



공원은 여름답게 눈부셨다. 배롱나무에는 진분홍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펴 있고 분수는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산책 나온 강아지가 해진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해진은 손을 흔들며 “안녕.” 인사해주었다.



얼마 걷지 않아 공원 내부의 작은 매점이 나왔다. 쉬었다 가자는 환의 말에 해진은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가뜩이나 약한 체력에는 이 긴 산책이 힘들던 차였다.



“마실 것 드시겠습니까?”

“아, 저는 그냥 옥수수수염차나 물 같은 게 좋을 것 같아요.”



환은 캔커피와 옥수수 수염차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어쩐지 검지와 중지로 카드를 쥔 모양이 이상했다. 꼭…… 카드를 주목해달라는 듯했다. 크기는 보통 카드와 똑같고 무늬가 거의 없는 새카만 색인데, 번뜩거리는 게 고급스러워 보였다. 부자들은 역시 카드도 좀 특이한 걸 쓰네, 하고 해진은 생각했다.



“2천9백 원입니다.”



페트병을 받아 든 해진은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환의 표정이 어째 조금 떨떠름해 보였지만, 제가 피곤해서 착각했겠거니 생각했다.



음료수를 든 두 사람은 매점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여름이라 나무 사이에 풀벌레들이 꽤 꼬여들었다. 해진은 문득 이 짧은 침묵을 깨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색하지는 않지만, 그와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다.



“환이 씨, 그거 아세요?”



환의 부드러운 시선이 그를 마주 보았다.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 물을 구하려면 저런 나뭇가지 끝에다가 비닐 봉투를 묶어 두면 돼요. 특히 햇빛이 많이 비치는 나뭇가지로 골라서요.”



환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입니까? 처음 안 사실이군요.”

“모든 식물은 물을 갖고 있거든요. 잎 뒷면으로 식물의 수분을 방출시키는 거예요. 신기하죠?”

“신기하군요. 해진 씨는 참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계십니까?”



아는 것이라곤 여행 관련 상식이나 오지탐험과 조난 대처에 관한 것밖에 없는데, 그는 키스틸 레저의 전무이므로 저보다 여행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잘 알 터였다. 그래서 알고 있는 조난 관련 상식을 끄집어냈더니 이환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저를 보고 있었다. 해진은 조금 감동했다.



“저, 사실 오지탐험이 꿈이거든요. 몸이 약해서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말이에요.”

“오지탐험이라면…… 아마존이나 사막 같은 미개척지를 다니는 걸 말합니까?”

“네, 맞아요. 사실 오지라는 말이나 미개척지라는 표현은 서구중심주의적인 표현이지만요.”

“그렇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 용어들은 주의를 해야지요.”



따뜻하게 웃는 이환은 여름 햇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해진은 문득 생각했다. 저런 얼굴을 갖고 살면 어떤 기분일까?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까?



“해진 씨는 정말 용감하시군요.”



실없는 생각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불현듯 파고들었다. 해진은 그의 침범이 싫지 않았다.



“제가……요? 전 그냥 몸도 약하고 해서…… 어차피 이런 상식, 써먹을 일도 없을 거예요. 이런 몸으로 탐험 같은 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환의 목소리가 어쩐지 확신에 차 있어서 해진은 말을 뚝 멈추었다.



“해진 씨, 잘 들으세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사람을 믿게 만드는 듯한 매력이랄까, 혹은…… 위압감이라고 해야 할까?



“해진 씨께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냥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럼 모두 해결될 겁니다.”



해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마주한 채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랑 있으면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세요. 평범한 알파와 저의 차이점이니까요.”



어쩌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이렇게 멋있게 할 수 있을까? 해진은 감탄하느라 입을 벌릴 뻔했다. 뒤이어 씩 웃어 보이는 환의 얼굴을 보자 용기가 용솟음쳤다.



“그, 그럼, 저랑 아마존 탐험 가요!”



불쑥 말을 내뱉자 환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해진은 금세 후회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수습할 말을 짜냈다.



“그러니까…… 워크숍 겸…… 키스틸 레저의 새로운 상품 개발을 위한 협력 워크숍이요. 어차피 저희 마루투어랑 협약 관계니까, 제가 기획서 쓰고 저희 팀장님께 말씀드려서 잘하면…….”



열심히 말하던 해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어느새 시뻘게졌다. 무릎을 보고 있어도 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날 뭐라고 생각할까. 분명히 바보 같아 보이겠지.



“죄송해요……. 이야기를 들으니까 너무 흥분이 되어서요…….”



탐험과 관련된 일은 언제나 그에게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얌전하고 꼼꼼한 성정의 해진이지만, 드물게 탐험 관련 이야기만 들으면 이렇게 들뜨곤 했다. 그를 흥분시키는 유일한 소재였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 막 호감을 얻기 시작한 상대에게 아마존에 같이 가자는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했다.



“저, 제가 방금 드린 말씀은 잊어주시…….”

“같이 갑시다, 아마존.”



돌연 끼어든 환의 말에 해진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농담일까? 헛소리를 한 저를 놀리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기엔 환의 얼굴이 몹시 진지했다.



“저도 해진 씨와 함께 아마존에 꼭 가고 싶습니다.”



그 말이 해진에게는 최고의 고백으로 들렸다. 세상에는 수많은 고백의 종류가 있지만, 이렇게 그를 설레게 하는 고백은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이세요……?”

“정말입니다.”



환이 힘줘서 대답하자 해진은 활짝 웃었다.



“그 말씀, 절대 무르시면 안 돼요!”

“……당연하지요.”



아주 잠깐, 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공원 한 바퀴를 마저 다 돌았을 때 해진은 숨이 차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약한 몸이 고작 산책 좀 했다고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해진 씨? 입술이 파랗습니다. 땀도 흘리고 계시는군요.”



해진은 면구스러움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괜찮기는요. 어서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주차 여기서 멀리 하시지 않으셨어요? 환이 씨 혼자 힘들게 걸어가시는 건 싫은데…….”



근처 벤치에 저를 앉힌 환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미소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해진 씨.”



차가 있는 곳까지 그 혼자 달려가리라 생각한 해진의 예상과 달리 환은 휴대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박 비서님, 여기 공원 천사분수 근처입니다. 동쪽 입구로 차 좀 가지고 오십시오.”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딱 끊어버리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차가워 보여서 좀 낯설었다. 그러나 해진을 마주한 채 보이는 미소만은 여전히 달았다.



환은 그 달콤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해진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지병을 갖고 계시거나 하지는 않으신지요.”

“그건 왜…….”



혹여 제 몸이 약해서 싫다 할까, 돌연 겁이 난 해진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환이 여전히 달콤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뺨이라도 쓸어내릴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손을 대지는 않았다.



‘절대 먼저 손을 대지 않는다니, 역시 매너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해진은 생각했고, 환은 매끈한 입술을 열었다.



“왜긴 왜입니까. 당연히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올곧은 말에 해진은 잠시나마 그를 의심한 것을 후회했다.



“몇 가지 병을 갖고 있긴 한데, 그렇게 심한 건 아니에요. 약한 비염이 있고 알레르기 한 열 가지 정도랑…… 심장이랑 폐가 약한 편이고요. 연골도 선천적으로 약해서 오래 걸으면 안 좋아요. 딱히 큰 병은 없고 그냥 그 정도예요.”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환의 떨떠름한 표정은 알지 못한 채 해진은 혼자 말을 이었다.



“사실 저, 지하철이나 버스 타는 것도 너무 힘들어서 집도 회사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긴 거거든요. 저희 회사 근처에 월세 엄청 비싼 거 아시죠? 저는 그래서 전세 대출 받았는데, 확실히 월세보다 더 이득인 것 같기는 해요. 이자가 월세보다 더 싸니까…….”



한참 조곤조곤 떠들다 뒤늦게야 제 말만 너무 했다 싶어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아, 죄송해요. 환이 씨는 이런 돈 이야기 전혀 관심 없으실 텐데……. 집 걱정 같은 것도 없으시고. 그래도 저 엄청 뿌듯해서 자랑하고 싶었거든요. 제 나이에 자기 힘으로 전셋집 얻는 거, 절대 쉬운 거 아니거든요!”



물론 제 눈앞의 이 남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해진은 또래에 비해 나름대로 모아놓은 돈도 꽤 있는 편이고 형편이 어렵지도 않았다. 회사에서 받는 각종 인센티브만 해도 상당하니까.



“이런 이야기, 재미없으시죠?”



혀를 쏙 내밀고 멋쩍게 웃었으나 환은 불편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외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재미없지 않습니다. 돈이 우리 삶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란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에요. 좀 걱정했거든요. 혹시라도 환이 씨가 저를 속물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절대 아닙니다.”



제법 진지하게 못 박듯 해준 대답에 다시 안심했다.



“사실 어릴 때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로…… 믿을 건 돈밖에 없더라구요.”



아무리 건실한 모습을 보여도,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소용없었다. 혼자 사는 세상은 언제나 무서웠다. 정글에서는 철저한 대비가 생존율을 높이고, 산에서는 조심성이 생존율을 높인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생존율을 확실히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돈밖에 없었다.



“돈이 곧 힘이에요. 특히 저처럼 빽 없는 사람은요.”



조금 씁쓸한 심정으로 말한 뒤 환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다행히도 환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어쩌면 저와 강해진 씨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어 고마웠다. 돈 부족함 없이 살았을 그가 금전적인 문제에서 저와 비슷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해진은 눈을 휘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한 번 살짝, 쥐었다 놓았다.



“환이 씨는 정말 친절하시네요.”



이환은 아주 잠깐 당황하는 듯이 보였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 운전한 환의 차가 도착했다. 한사코 사양했으나 환은 그를 꼭 집에 데려다주고 싶다고 했다.



“박 비서, 오후 스케줄 취소해주십시오. 지금은 강해진 씨를 안전하게 댁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가장 급선무니까요.”

“저, 오후 스케줄 이미 없습니다만…….”

“몇 번을 말합니까! 당장 취소해요!”



운전석에 앉은 박 비서라는 사람이 아주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진은 면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때문에 스케줄을 취소하다니.



“저, 전무님,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저 때문에 스케줄을 취소하시다뇨.”

“괜찮습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요.”



환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졌으나 그 따스한 저음이 해진을 편하게 해주었다.



“참, 그리고 공원에 계단 죄다 없애라고 해요.”

“전무님, 저거 시에서 운영하는 거라서요…….”

“기부금 주면 시키는 대로 할 겁니다. 계단 깨끗하게 없애고 걷기 쉽게 만드십시오. 중간에 벤치도 좀 더 추가시키고.”

“하아……. 일단 통화는 해보겠습니다…….”

“앞으로 강해진 씨와 자주 산책할 곳이니 불편함이 없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이고, 예에, 예에에.”



시의 재산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는 그가 굉장히 멋있다고 해진은 생각했다. 이환은 저와 달리 아주 당당하고 추진력도 강한 사람인 것 같았다.



“정말 멋있으세요, 환이 씨.”



수줍음을 무릅쓰고 말했다. 환이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하고 해진을 마주했다.



“환이 씨는 돈을 쓰실 줄 아는 분 같아요. 그래서 정말 멋있으세요.”



오랫동안 가족도, 뒷받침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해진에게 있어 돈은 곧 권력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환은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막상 말을 꺼내놓으니 속물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됐지만 다행히도 이환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해진 씨의 칭찬을 들으니 제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군요.”

“저야말로 대단한 분이랑 데이트…… 하고 있어서 너무 기뻐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시선을 내린 해진은, 문득 그의 허벅지가 제 허벅지와 닿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와 거의 동시에 환이 닿은 허벅지를 얼른 떼어내는 것이 아닌가. 마치 화들짝 놀란 듯이 말이다. 해진은 속으로만 웃었다.



‘은근히 수줍음이 많으시다니까.’



이렇게 허벅지가 닿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서 움츠리다니 말이야.



불편한 마음이 조금 풀어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미안하기는 했다. 해진은 눈치를 보며 앉은 자세를 고쳤다. 나란히 놓인 다리 굵기 차이에 또 부끄러워졌다.



“전무님.”

“이환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환……이 씨, 여쭤볼 게 있어요.”



해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운전석에 타인이 있는 게 조금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환과 가까운 사람 같아 보이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한테 이렇게 잘 대해주시는 이유가…… 혹시 따로 있으신가요?”



자신은 보잘것없는 일개 여행사 사원이었다. 능력이 제법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곧 그룹 하나를 승계받을 재벌이고, 자기는 평범한 보통 사람 아닌가. 이환이 제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환은 그러나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당신이 힘들지 않길 바라니까요.”



해진은 그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눈을 깜박거리고 있자니 환은 살짝 웃으며 관자놀이를 긁었다. 수줍은 티를 내는 그 동작마저도 해진이 보기에는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저도 설명하기 힘들군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저…… 저와 있는 순간에는 계속 해진 씨가 행복하기만 바랍니다.”



표현 하나하나가 좋았다.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여태 고생한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해진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한 물로 젖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를 더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더 오래 마주하고 있다가는 제 몸이 끓어 넘칠 것만 같았다.



이동하는 동안 노을이 졌다. 집 근처까지 가는 동안 해진은 온몸을 간질간질하게 하는 어떤 감정 속에 푹 빠져 있었다. 옆에 앉은 환의 존재가 엄청 크게 느껴졌다. 아니, 옆에 있는 그가 자신을 삼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옅은 위스키 향이, 환의 알파 향이 코끝을 애무하듯 간질였다. 해진은 숨을 참고 싶었으나 너무나 유혹적인 그 향을 모두 들이마셨다.



차가 멈춰 서자마자 환이 가장 먼저 내렸다. 그는 해진이 내리기 편하도록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혹시 다음 주 주말, 시간 괜찮으십니까?”



설득력 강한 저음으로 묻는 말에는 시간이 괜찮지 않아도 괜찮게 만들겠다 말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해진은 면구스럽게 미소 지었다.



“저…… 다음 주 동안은 아무래도 좀 뵙기가 곤란할 것 같아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한 말에 내포되어 있는 바를 환 역시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믿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오가는 이런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하나로 귀결되니까. 바로 히트사이클.



해진은 히트사이클 증상이 심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면 이런 사실은 알파에게 알리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알파와 만난 뒤로 히트사이클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다곤 하니까 말이다.



역시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몸 추스르시고, 편해지시면 연락 주십시오.”



그의 얼굴이 몹시 덤덤했기에 해진 역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골목 쪽으로 걸어가는 내내 환의 시선은 올곧게 그를 향하고 있었다. 뒤를 흘끔 돌아보자 환이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시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도 나머지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삐딱하게 선 그 모습은 또렷하게 보였다.



돌아서 골목 안까지 걸어가면서도 환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꼭 그가 바로 등 뒤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둑해진 골목에 저 혼자만 빛을 안은 듯했다.



해진은 열감을 간직한 채로 잠들었다.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현란한 꿈을 꾸었다.



깨어났을 때 꿈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열기가 느껴졌다. 해진은 끙끙 앓으며 문득 깨달았다. 히트사이클의 예정 일자가 일주일이나 앞당겨졌음을.



그리고 이번에는 여태까지 겪은 것과 차원이 완전히 다른 증세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도.





* * *





강해진을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동안 환은 그가 잡았던 손목을 소독제로 박박 문질러 닦았다. 맞닿았던 허벅지에도 소독제를 잔뜩 뿌렸다. 그래도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딜 내 몸에 씻지도 않은 손을 대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차가 좀 밀리네요. 정 급하시면 내려서 뛰어가시겠습니까?”



박 비서의 느긋한 대답에 환은 이를 아득 갈았다. 빨리 온몸을 비누로 박박 문질러 닦고 싶었다.



아쉬운 대로 다시 소독제를 손에 뿌리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섹스는 이것보다 더 역겨울 텐데. 어쩐다.



‘빌어먹을…….’



이런 불쾌감은 처음이었다. 강해진과 닿은 곳마다 홧홧하게 뜨겁고 자꾸 몸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하얀 찹쌀떡 같은 얼굴, 특히 동그란 볼과 새카맣고 건방져 보이는 눈동자가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왜 자꾸 그 오메가가 생각나는 것일까. 그는 생각할 것이 많았다. 인수합병 건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강해진 따위에게 쓸 신경머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환은 계속 그를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쾌했다.



솔직히, 오메가를 유혹하는 일이 이렇게 거북할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밀가루떡같이 생긴 오메가가 저를 그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충 호감을 얻은 뒤에 일을 진행하려 했는데, 강해진이라는 오메가는 고작 몇 번 만나놓고 꼭 저를 남편 보듯 하는 게 아닌가. 오메가들은 원래 이렇게 멍청한가? 정말로 저 멍청한 유전자에게 제 씨를 빌려주어도 되는 것인가?



머리가 아파왔다. 들러붙는 것은 질색이었다. 아이고 뭐고 죄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환은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조모가 시키는 대로 손주를 안겨주고 키스틸을 모두 제 손에 넣을 것이었다. 제 손에 들어오지 못한 것은 항상 그를 미치게 했다. 소유욕은 언제나 그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차창 밖으로 불빛들이 스쳤다. 환은 문득 생각했다.



‘골목 안까지 지켜볼 걸 그랬나.’



그 더러운 동네는 골목 안이 꽤 어두웠단 말이지. 밀가루떡 같은 놈을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기껏 힘들게 찾은 오메가에게 흠집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지니까, 그저 그뿐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몸을 박박 닦고 나올 때까지도 환은 자꾸 그 어둑한 골목을 떠올렸다. 몇 번이나 휴대폰을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길 반복했다. 그리고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메시지를 발송했다.



[잘 도착하셨습니까? 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강해진에게서 답은 오지 않았다. 환은 휴대폰을 쥔 채로 침대에서 뒤척였다. 새벽 세 시, 네 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으나 여전히 휴대폰은 묵묵부답이었다.



눈을 감고 누웠으나 강해진의 뺨이, 저를 보던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체구는 또 어찌나 작던지, 그렇게 작은 몸으로 아이를 가질 수는 있을까. 오메가를 잘못 고른 것은 아닐까. 심지어 산책 조금 했다고 입술이 파리해지지 않았던가. 몸이 약해서 회사 근처로 집을 옮겼다고도 했고.



“쯧.”



환은 혀를 차며 한쪽으로 돌아누웠다. 이상하게도 그와 닿았던 허벅지가 다시 저릿해서 혹시 균이라도 묻은 것은 아닌가, 항균 물티슈를 꺼내 다시 한 번 박박 닦았다.



너무 늦은 시간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동이 트고서야 깨달았다. 그답지 않은 실수였다. 심지어 하찮은 놈에게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고 불쾌했다. 그는 찬장에서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랐다. 단숨에 삼켰다. 시간은 벌써 새벽 다섯 시였다. 이렇게 잠을 못 이루고 밤을 새는 것도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젠장…….’



일단은 매일 이어지는 스케줄대로 따라야 했다. 그는 늘 하던 것처럼 건물의 체육관으로 가서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운동을 했다. 평소처럼 가벼운 실내 수영으로 마무리한 뒤 샤워를 하고, 오피스텔 층으로 돌아와 커피를 곁들인 토스트를 먹었다.



그는 휴대폰 액정화면을 확인했다. 아무 알림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감히 내 메시지를 무시해?’



와그작, 토스트를 씹던 그의 눈썹이 사납게 비틀렸다. 가뜩이나 성급한 성미가 불붙었다. 느린 건 딱 질색이었다.



출근해서 일을 하는 오전 내내, 환은 이 건방진 오메가를 어떻게 혼내줄지 고민하였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휴대폰을 빤히 노려보면서 몇 번이나 집어 들었다 다시 내려놓길 반복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무슨 연유든 간에 제 생활이 흐트러지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더러운 바닥이나 불결한 음식만큼이나 싫었다. 그렇기에 환은 종일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보고를 하러 왔던 한 부장은 이유도 모른 채 그의 날 선 시선과 차가운 무시를 받아야 했다.



한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피로가 어마어마했다. 전무실에 있는 소파에서 잠깐 잠을 청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회사에서 흐트러지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그리고 환은 인정하기 싫기도 했다. 그 자그마한 오메가에게 자신이 종일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오후가 지날 때까지도 강해진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했으면 답을 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 예의도 밥 말아먹은 오메가인가?



하지만 환은 상식 있는 알파이므로 전화해서 따지는 대신, 그에게 메시지를 한 번 더 보내었다.



[바쁘신 모양입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스러우니 확인하는 대로 전화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골목 안까지 같이 걸어갔어야 했을까. 간밤에 보았던 그 어둑한 골목이 자꾸 떠올랐다.



메시지를 보낸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결국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말이지 짜증 나는 오메가군……. 감히 내가 먼저 전화를 걸게 만들다니.’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강해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환은 화가 잔뜩 난 채로 액정화면을 노려보았다.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이번에는 마루투어에 전화를 해보았다. 직원과 바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말에 키스틸의 이환 전무라는 사실을 밝히고, 급한 용무가 있으니 당장 바꾸라 명령하자 상담원은 그제야 잠시만 기다리라 말했다. 대기음을 듣는 동안에도 천불이 일어서 넥타이를 잡아 늘였다가 다시 고쳐 매길 반복했다.



- 저,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 강해진 사원은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뒤이은 상담원의 말에 환은 뚝 굳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오늘 병가를 낸 것으로 확인됩니다.



……병가? 얼마나 몸이 아프면 병가를 내는 것이지? 어릴 때부터 감기나 기타 잔병치레는 해본 적이 없던 환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바로 병가였다. 그는 전화를 끊고 처리해야 할 업무 몇 가지를 검토했다.



‘만약 큰 병이라도 있다면…….’



기껏 아이를 갖게 했는데 병이 있어서 못 낳게 되면 어쩌나. 낳다가 변고를 당해서 아이를 못 구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럼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다.



모니터를 노려보던 그는 어금니를 으득, 씹곤 스피커폰을 켰다.



“강해진 씨 자택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귀찮은 것 역시 질색이지만, 연락이 안 되니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사고 치지 말라는 박 비서의 말을 무시하고 그는 차를 끌고 강해진의 집까지 갔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다.



‘내가 제대로 교육을 시켜주지.’



만나서 뭐라고 할지, 뭐라 혼을 낼지 아무 계획도 없으면서 환은 그저 무작정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저 이 하찮은 오메가를 마주한 채로 화를 내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강해진 씨, 문 열어보십시오.”



벨을 누르고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모기만 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오…….”

“이환입니다. 걱정되어서 왔습니다. 문 열어보십시오.”



사실은 짜증이 솟구치다 못해서 온 것이지만, 뭐 중요한 것은 아니니. 문이 빼꼼히 열렸다. 밀가루떡 같은 강해진의 얼굴이 드러났다. 몸이 정말로 안 좋은 것인지 오늘은 빨간 밀가루떡이다.



“환이……씨……?”



강해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묻어난다. 환은 혹시라도 이 자그마한 놈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싶어 얼른 문틈을 밀고 반쯤 억지로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해진은 뒤로 물러났다. 가뜩이나 좁은 방이라 몇 걸음 만에 등이 벽에 닿았다.



“저, 환이 씨, 여기 계시면 안…… 되는데…….”

“제가 있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강해진 씨의 곁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제 입으로 대사를 뱉으면서도 환은 황당했다. 사업상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좀 해야 할 때가 있다지만, 이렇게 하찮은 놈에게도 술술 거짓말이 나오다니.



“괜찮으십니까? 병원은, 다녀오셨습니까?”

“아, 아뇨……. 아픈 게 아니라서…….”



안색을 살피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해진은 가뜩이나 작은 덩치를 한껏 움츠리며 오지 말란 투로 손을 내밀어 보였다. 환은 문득 코끝을 스치는 단내를 느꼈다.



‘이게 무슨…….’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단내다.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이런 향은 처음이었다. 간신히 고개 저어 정신을 차렸다.



“아픈 게 아니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히트사이클이 조금 일찍…… 왔어요…….”



해진이 기침을 쿨럭, 했다. 그제야 환은 이 향기의 정체를 깨달았다. 오메가 향이구나. 그러나 냄새의 종류가…….



‘딸기 향…….’



그래, 리조트 호텔 로비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 남자의 향기는 이런 냄새를 갖고 있었지. 그때는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메가의 향기는 몇 번 맡아보았으나 착향료같이 자극적이고 몹시 달콤한 이런 향은 처음이었다. 꼭 아이들이 먹는 과자 냄새 같았다. 아니, 아이스크림 냄새 같기도 했다. 아니, 아니, 시럽이 들어간 감기약 같기도. 뭐든 확실한 건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정신이 나갈 것 같단 사실이었다.



“……억제제는, 드셨습니까.”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은 것을 참고 겨우 물었다.



“먹었는데 소용이 없어요. 이렇게 히트사이클 증상이 심한 적이 없었는데…….”



해진은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으나, 환은 그 이유를 알았다. 매칭률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면 히트사이클 증상이 갑자기 커지는 경우가 있다고, 매칭 전문 업체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알파의 러트 증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환은 숨을 참으며 금방이라도 끊어지려는 이성을 억지로 버텼다. 당장 눈앞의 저 밀가루떡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만 싶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다.



저 싸구려 티셔츠를 갈가리 찢고 뼛속까지 으득으득 소리 내어 삼켜버리면 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지독한 갈증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으나 그는 꾹 참고 손짓했다.



“괜찮을 겁니다. 일단 누우십시오.”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해진은 그러나 제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따끈따끈해 보이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대었다.



“하지만 손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누워 있어요. 방도 엉망이고, 잠시만요, 이것만 좀 치우고…….”



눈앞에서 갓 구운 딸기 케이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지 못한 환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해진의 딸기 향이 술처럼 자극적이었다.



어깨를 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작은 몸뚱이는 종잇장처럼 딸려왔다. 졸지에 따끈한 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안겼다.



“누워 있으라잖습니까, 내가.”



힘도 없으면서 버둥거리려는 강해진을 찍어 누르듯 침대에 앉혔다. 겁도 없이 저를 젖은 눈으로 초롱초롱하니 올려다보기에, 환은 그의 어깨를 짓눌러 침대에 눕게 만들었다. 졸지에 그의 위에 올라탄 꼴이 되었다.



강해진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이 멍하니 저를 올려다봤다. 해진의 얼굴 양옆으로 손을 짚고 빤히 응시해주었다. 강해진은 아직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 멍청해빠진 눈을 보면 말이다. 감히 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하체를 짓누른 채로 턱을 쥐었다.



“잠자코 계십시오. 제가 지금 참고 있으니.”



뭘 참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말을 알아먹길 바라며 그리 말했다. 그제야 멍청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요리조리 구르더니 포기를 담아낸다.



“죄송해요, 환이 씨……. 기껏 와주셨는데…….”



그리고 뭐라고 더 중얼거렸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어이없게도 해진은 그의 밑에 깔린 채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진 듯했다.



“후…….”



환은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앉았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 듯했다. 그러나 원룸에 가득 찬 딸기 향은 여전했다. 누운 그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고 방을 살폈다.



좁아터진 원룸에 몇 되지도 않는 세간살이, 그마저도 형편없이 낡고 싸구려 티가 나는 것들. 청소는 그래도 나름…… 깨끗하게 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책상 위를 손끝으로 슬쩍 문질러 묻어 나오는 게 없는지 확인하곤 흠, 고개를 끄덕였다.



“우응…….”



잠꼬대를 하는지 강해진이 뭐라 웅얼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냄새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어쩔 수 없이 코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아니, 코를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강한 향도 향이거니와 티셔츠 옷깃 위로 보이는 강해진의 목덜미와 이불 밖으로 꼬옥 말아 쥔 손에 자꾸 시선이 갔다.



꼭, 뭐랄까…… 식욕과 비슷한 욕구가 치솟았다. 언뜻 화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당장 저 옷을 찢고 냄새의 근원을 찾기 위해 그의 몸 곳곳에다 코를 처박고 싶었다. 상상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아주 비위생적이고 아주 야만적인 행위가 아닌가.



‘히트사이클 1일 차가 이 정도라면…….’



1일 차는 가장 증상이 약한 날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로 냄새가 짙다니. 만약 성교라도 하게 되면 도대체 얼마나 이 향이 짙어질지…….



그리고 그 때였다. 환은 제 손목에 닿는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해진이 제 손목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 끌어당기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마치 만져달라는 듯이.



“몸이…… 뜨거워…….”



환의 사고가 뚝 멈췄다. 그다음 이어진 행동은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손이 멋대로 나갔다. 몸이 멋대로 가까워졌다. 오메가를 원하는 알파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지독한 단내는 후각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자극했다. 환은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눈앞의 오메가를, 강해진을 제 입에 넣고 멋대로 빨고 굴리고 삼켜버리고 싶었다.



손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강해진이 직접 입으로 말한 것처럼, 그의 몸은 몹시 뜨거웠다. 손이 델 것 같았다. 환은 숨을 참았다. 잠든, 히트사이클의, 무방비한 오메가에게는 해선 안 될 짓이란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로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하아…….”



강해진이 작게 신음했다. 그 신음마저 귀에 지독히 달았다. 그의 속살은 몹시 부드러웠다. 손끝이 닿는 곳마다 햇빛에 달궈진 고운 모래를 만지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좀 더 그를 만지고 싶었다. 미칠 듯이 부드러운 이 살갗을 입에 넣고 강하게 빨아 맛을 보고 싶었다. 그의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손끝을 더 거칠게 만들었다.



강해진은 괴로워하는 듯도 하고 기분이 좋은 듯도 한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구겼다가 펴길 반복했다. 그 얼굴을 보자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느끼는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손은 점차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강해진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흐읏!”



돌연 터져 나온 그의 신음에 환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폈다. 검지가 그의 유두를 누르고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내가 무슨…….’



손을 빼냈으나 열기는 쥔 듯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도 강해진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나, 미간을 기분 좋게 구긴 채 작게 신음했다.



“으응, 더…….”



신음 사이에 섞인 말에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더 만져달라고 하는 것인가? 그도 그럴 것이 눈 감은 강해진의 표정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젠장……!’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환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뛰쳐나왔다.



차에 도착한 그는 시동을 걸고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핸들을 잡으려다가, 자신이 운전할 상태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기까지 1분이 넘게 걸렸다.



“대체 이게 무슨…….”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본 환은 분노에 가까운 당혹감을 느꼈다. 앞섶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저 싸구려 딸기 향 때문에 자신의 고고한 성기가 이렇게 커졌단 사실에 첫 번째 충격을 받았고, 자는 사람을 함부로 추행 - 물론 요망한 강해진이 제 손목을 끌어당긴 것은 있지만 필경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했다는 사실에 두 번째 충격을 받았고, 이 정도로 흥분한 적이 없다는 데에 세 번째 충격을 받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하군! 정말 불쾌해!’



태어나 처음 느껴본 성욕은 그에게 당혹감과 불쾌감, 그리고 형언하기 힘든 갈구심을 안겼다. 분명 제 것이지만 제 것이 아닌 듯이 끓어오르는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환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하는 내내 제 몸에서 딸기시럽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더더욱 불쾌했다. 뭉개진 자존심을 밟으며 한참 달렸지만 화가 풀리지는 않았다.



그는 회사로 가는 대신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욕실에 틀어박혀 온몸을 비누로 박박 씻었다. 세 번 정도 비누칠을 했을 때에야 그는 터질 듯이 발기한 제 성기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단 사실을 깨달았다.



환이 생각하기에, 자위행위는 성적으로 미숙한 이들만 하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아침에 해면체로 피가 쏠리는 자연스러운 것 말고 쓸데없이 야한 생각 등을 해서 발정이 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환은 당장 회사에 복귀해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었고, 이 몸 상태로는 집중하지도, 효율을 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았다. 결국 그는 제 발기한 성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흣…….”



좀 전 보았던 강해진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자그마한 손이 떠올랐다. 속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열이 오른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후우, 하…….”



강해진을 상상하면서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열여섯 살 이후로 제 몸을 만져본 적이 처음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위행위는 비위생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상상하며 성기를 만지는 일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몸속에 가득 찬 흥분이 마구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 조그마한 오메가를 한입에 삼키고 쪽쪽 빨고 싶었다. 싸구려 딸기 향을 폐부 가득 삼킨 채 숨을 참고 싶었다. 희한한 욕구였다. 그를 온전히 삼키고 싶은 동시에 망가뜨리고 싶기도 하고, 제 밑에 굴복시키고 싶기도 했다.



‘빌어먹을 오메가가!’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이런 비위생적인 행위를 하게 만든 것은 강해진이며 모두 강해진의 탓이다. 그 요망하고 자그마한 손으로 제 몸을 함부로 더듬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 생각하며 환은 분노에 찬 손동작을 더 빨리했다.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사정하고 말았다. 흰 정액이 이리저리 튀었다.



‘더럽군! 아주 더러워!’



한 번의 사정으로는 페니스가 식지 않아서 또 한 번을 흔들었다. 두 번째에는 정액의 양도 많아서 샤워부스 안에 희끗한 얼룩이 이리저리 묻었다. 환은 그것이 제 몸에서 나온 체액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더러운 기분이라니!’



얼른 물로 부스 안을 씻어냈지만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청소업체에 연락해서 특별히 샤워부스 안을 소독해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자위행위를 하고도 화가 풀리지는 않았다. 자그마한 오메가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의 분노는 오후가 되어 강해진에게서 연락을 받고서는 쉽게도 풀려버렸다.



[그ㅡ냐가시게해소 죄성해요ㅠㅠ 담에ㅔ제가 대접핡게오]



오타투성이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하도 하찮고 우스워서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정말 불쾌하군! 감히 나한테 이딴 오타투성이의 메시지를 보내?’



하지만 주제에 잘못한 걸 알고는 있다 생각하니 화가 쥐꼬리만큼 풀리는 것이었다. 환은 휴대폰을 내던지는 대신 답장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전화를 해서 이 찹쌀떡 같은 놈이 밥은 챙겨 먹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는 한 회사의 전무이며 언제나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대신 박 비서에게 일러두었다. 강해진이 끼니를 함부로 거르지 않도록 케이터링 업체에 연락해 강해진의 집에 보내라고 말이다. 물론 알파 직원은 절대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다섯 번이나 덧붙였다. 그리고 박 비서가 ‘아주 황송해하며 먹더라’며 보고를 해오고서야 안심했다.



“사진도 보내십시오.”

- 예? 사진이요?

“확실히 먹었는지, 먹고 있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란 말입니다.”

- 여보세요? 왜 전화가 갑자기 안 들리지. 어? 카메라까지 고장이 났나? 참 이상하네……. 제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전무님.



안타까운 일이었다.





* * *





히트사이클에 알파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 뭐, 그건 처음도 아니었다. 대학교 때도 히트사이클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파들 사이에 끼어서 수업받은 적도 있고, 러트가 온 알파들에게 약을 챙겨준 적도 있고.



하지만 모두 증상이 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방은 대부분 해진이 베타인 줄 알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페로몬을 풀풀 풍기며 한 공간에 있었다. 심지어 옆에서 태평하게 잠들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환은 제게 손끝 하나 대질 않은 듯했다. 자고 있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깨어났을 때 옷도 그대로였고 하니, 자고 있는 제게 손을 대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환은 자고 있는 오메가를 더듬거나 할 파렴치한 놈이 아니니까. 분명히 곁에서 지켜주다가 떠났겠지. 그 얼마나 매너 있는 행동인지!



‘환이 씨랑 정식으로 만나고 싶다…….’



그렇게 잘생기고 매너 있는 알파가 애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한 가지 조금 찝찝한 것도 있기는 했다. 이환 전무가 제게 지나칠 정도로 잘해준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썸 타는 사이라지만…… 이렇게 직접 케이터링까지 보내주시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경호업체까지 와서 집 근처에 경보 시설을 달고, 교대로 한 사람씩 현관 앞을 지키고 서 있기까지 했다. 모두 베타들이었다.



“저, 그런데, 왜 저희 집을……. 저 훔쳐갈 것도 없는데요…….”

“강해진 씨의 히트사이클이 끝날 때까지 알파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입니다. 히트사이클이 끝나시기 전에는 출근하지 마시고 쉬게 하시라는 말씀도 함께 전하셨습니다.”

“그래도 출근은 해야 하는데요…….”

“이미 이환 전무님께서 휴가를 다 처리해두셨다고 하셨습니다.”

“네에? 전 진짜 괜찮은데……. 그리고 이렇게 집 앞을 지키고 계시니까 불편해요.”

“안 됩니다. 이미 비용을 선불 받았으니 경호 서비스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가 부자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보통 이렇게까지 해주나?



‘누가 이렇게 챙겨준 적이 있어야지…….’



원래 가족이 없기도 하고, 친구들도 다들 털털한 성격이라 이렇게 다정다감하고 꼼꼼하게 챙김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알파들도 관심 있는 오메가들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이렇게 주는 대로 받아도 될지 면구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이 사람한테 의지해도 되는 걸까?’



꼭 가족처럼, 연인처럼, 이렇게 기대도 될까?



제게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자꾸 마음이 동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고민은 잠깐이었다. 누워 있자니 졸음이 솔솔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달뜬 몸을 한껏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해진은 그날 밤 이환 전무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이환은 무려 벗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말이다.



‘환이 씨, 벗고 계시면 감기 걸려요.’



비록 알파 앞의 오메가라지만 남의 벗은 몸을 보고 달려들 정도로 분별이 없진 않았다. 그게 꿈속이라고 해도 말이다. 해진은 어른스럽고 당당하게 다가가 제 겉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려 했다. 그러나 꿈속의 이환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나랑 자고 싶지 않습니까, 해진 씨?’



말의 내용은 깜짝 놀랄 만한데, 해진은 이상하게도 놀랍지가 않았다.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네, 자고 싶어요.’



조금도 창피해하지 않고, 얼굴도 붉히지 않고 해진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환이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진은 심지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환이 씨랑 섹스하고 싶어요!’



그리고 옷을 벗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해진 역시 알몸이 되었다. 환이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 해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열일곱 살 이후로 해본 적 없는 몽정을 했음을 깨달았다. 지독한 열기가 방 안을 습하게 데우고 있었다.





히트사이클 내내 해진은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환과 연락을 할 때마다 그날 밤 꾸었던 꿈이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사귀지도 않는 사람을 상대로 그런 꿈을 꾸다니…….’



정말, 정신 나간 게 아니고서야! 스스로를 엄하게 꾸짖었다. 얼굴은커녕 목소리를 들을 자신조차 없었다.



그러나 환은 끈질기게도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늘은 좀 괜찮으십니까?]

[식사를 챙겨 드십시오.]

[걱정이 되는군요. 연락 부탁드립니다.]



열 때문에 조금 답장이 늦는다 싶으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해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전화를 받았다.



“저어, 진짜 괜찮아요, 환이 씨…….”

- 너무 힘드시면 병원에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 안 돼요!”



얼굴 볼 면목이 없어서 얼른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긴 한숨이 흘러들었다.



- 아무래도 제가 무리한 요구를 했군요. 히트사이클 중이신 오메가가 낯선 알파와 함께 있기는 쉽지가 않죠.

“그, 그건 아니에요.”

-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쉬십시오.

“저, 끊지 마세요.”



사실 당신한테 섹스하고 싶다고 소리 지르는 꿈까지 꿨단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꿈에서 한 그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저랑 통화해주세요.”



또한 궁금하기도 했다. 그가 안아주면 어떤 기분일까. 키스는 어떻게 할까. 애무는 어떤 식으로 해줄까.



‘분명히 엄청 매너 있게 해주겠지?’



섹스는 어떨까.



불쑥 튀어나온 생각을 누를 수가 없었다. 해진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곤 몸을 돌아누우며 반대쪽 귀로 휴대폰을 옮겼다. 귀에서는 계속 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저는 해진 씨가 조금 더 편해진다면 뭐든 좋습니다. 그러니 뭐든 불편해 마시고, 제가 필요하시거든 부디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가 보고 싶었다. 통화로는 부족했다. 환의 손길이 제 몸에 닿길 바랐다.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얼마나 뜨거울까.



“후읏…….”



통화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히트사이클 때문에 몸도 뜨겁고, 자꾸 그날 밤 꿈속에서 보았던 환의 알몸이 떠올랐다.



- 해진 씨?



환이 저를 부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람. 해진은 영상 통화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 열 때문에요. 죄송합니다.”

- 많이 심각합니까? 직접 얼굴을 보고 싶은데 영상 통화로 전환해도 되겠습니까?

“절대 안 돼요!”



물론 옷도 다 입고 있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소리 지른 건 너무했나, 후회하던 차에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 해진 씨는 가끔 저를 당혹스럽게 만드시는군요.

“……그런가요.”



옷소매를 말아 쥐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정말 영상 통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 칭찬입니다. 저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별로 없으니까요.



뒤이은 말에 붉어진 웃음을 헤헤, 흘렸다. 해진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저, 환이 씨한테 이야기할 거 있어요.”

- 편히 말씀하십시오.

“저…… 아시다시피 제가 몸이 많이 약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환이 씨랑 데이트도 오래 못 하고……. 입이 짧아서 맛있는 거 사주셔도 많이 못 먹고요.”



수화기 너머 환은 잠시 침묵했다. 말을 이으라는 뜻인 것 같아 해진은 휴대폰을 꾹 쥐고 베갯잇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환이 씨가 저 때문에 갑갑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거든요.”



환의 낮은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해진은 그게 비웃음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환은 저를 비웃을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저는 환이 씨랑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환이 씨랑 있으면 즐겁거든요. 환이 씨도 그러셨음 좋겠어요.”



그리고 다시 짧은 침묵.



- 걱정 마십시오. 우린 더 친밀해질 겁니다. 지금보다 더, 훨씬 더 말입니다.



낮은 목소리가 해진의 귀를 간질였다. 환의 목소리는 정말로 섹시했다. 히트사이클인 그에게 몹시 자극적일 정도로.



“……정말 그렇게 될까요?”



다정하고 멋진 이환과 지금보다 더 친해진다니. 생각만 해도 떨렸다. 그는 제 심장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수화기를 살짝 손으로 가렸다.



-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겁니다.



힘 있게 깔린 목소리가 좋아서 해진은 몸을 더 웅크렸다. 그러면 방금 들은 그의 목소리를 제 안에 저장할 수라도 있다는 듯이.





1퍼센트





둘은 해진의 히트사이클이 다 끝난 뒤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사실 환은 이제 슬슬 인내심이 줄어들고 있던 차였다. 연애고 뭐고, 저 하찮은 오메가에게 도대체 언제까지 맞춰줘야 한단 말인가. 그는 한 회사의 전무였고, 언제나 할 일이 많은데 강해진에게만 신경을 쏟아부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99.99퍼센트의 매칭률을 보이는 오메가를 또 언제 구한단 말인가. 여태 오메가를 찾지 못해서 고생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괜히 겁을 줬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보단 좀 굽히는 게 나을 터다.



두 사람은 일주일에 최소 두세 번 정도 만났다. 그리고 아주 평범한 알파와 오메가의 데이트를 했다. 공원을 산책하고,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환이 씨는 어제 뭐 했어요?”

“그냥 혼자 집에 있었습니다.”

“친구라도 만나지 그러셨어요.”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아, 그때 서점에서 같이 샀던 그 책은 어떠셨습니까?”



이환은 이미 강해진에 대해 대부분의 정보를 파악한 상태였다. 대학 동창들과는 아주 가끔 연락하고,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한 친구는 한 명. 친척은 없으며 회사 사람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



“저, 어제 집에서 그 책 읽으면서 환이 씨 생각했어요! 거기도 주인공 직책이 전무로 나오거든요.”



그리고 제법 저를 좋아하는 듯하며, 다루기가 쉬웠다. 멍청한 얼굴을 마주한 채로 몇 번 웃어주면 껌벅 넘어가는 티가 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해진이 요리를 아주 잘해서 그가 만든 도시락이 먹기에 나쁘지 않다는 것과, 조잘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아주 조금 귀엽기는 하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워낙 몸이 약한 탓에 조금만 걸어도 할딱거렸다.



그리고 강해진은 정말이지 건방진 오메가였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 생각은 점점 더 강해졌다.



“솔직히 돈으로 안 되는 거 없다고 생각하시죠?”



갑자기 뜬금없이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을 꼬집으며 그리 묻질 않나.



“환이 씨는 명령하는 입장에 익숙하신 것 같아요.”



팔짱까지 끼고 저를 평가하질 않나.



“저, 비싼 거 먹어도 돼요?”



심지어는 지갑까지 털어먹으려 했다. 입도 짧은 주제에 식탐은 컸다.



“와, 이거 맛있겠다. 헉, 그런데 진짜 비싸네요……. 아니, 그래도 완전 맛있을 거 같은데…….”



제 눈치를 보면서 꽁알거리는 모습은 꼭 쥐새끼 같았다. ……하수구에 돌아다니는 쥐새끼 말고, 그나마 좀 깨끗한 햄스터 같은 것들 말이다.



가장 괴로운 것은 바로 스킨십이었다. 남의 살갗이 닿는 것은 딱 질색인데, 이 빌어먹을 밀가루떡 같은 놈은 자꾸 손을 은근슬쩍 스치는 게 아닌가.



한 번은 놀라서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친 적이 있었다. 어디서 뭘 만지고 왔는지 모를 더럽고 자그마한 손을 자꾸 제 손에 비비적거리다니. 저도 모르게 손을 빼내며 표정을 굳히자 강해진은 상처받은 밀가루떡이 되었다.



“제가…… 더러워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이 오메가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제가, 제 몸이 더러워서 그런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 손에 소독제를 좀 바르겠습니다.”



애써 웃으며 소독제를 덕지덕지 바르고, 손을 먼저 잡으며 일부러 그의 손에도 소독제를 묻혔다.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할까……. 생각하면 막막해서 한숨만 났다. 조금만 더 친해지면 될 것이다. 그러면 이 더러운 놈에게 적당히 비용을 제시하고 그 대가로 아이를 출산하라 요구하면 된다.



하지만 환은 그 ‘조금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와 진지하게 연애를, 아니, 그 비슷한 것이라도 해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있나.



사실, 환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느라 제대로 된 친우조차 만들지 못했다. 저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모두 경쟁자일 뿐이었고, 저보다 수준 낮은 이들은 상대하기 싫었다. 생판 모를 남을 믿는, 멍청한 사람들이 어떻게 교류하는지 알 턱이 없었기에 연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걱정이 되는 점이 있었다. 이 강해진이라는 놈이 너무나 약해빠졌다는 것이었다. 산책을 조금 하면 숨이 차서 헉헉거리고, 걸핏하면 두통약을 입에 밀어 넣었다.



“괜찮으십니까?”



하고 물으면 강해진은 눈을 휘며 웃어 보였다.



“네. 별거 아니에요. 자주 이래요.”

“……자주?”

“몸이 좀 약해서요. 정말 별거 아니에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심장 좀 약하고 뼈 약하고 폐가 안 좋아서 조심해야 하는 정도밖에 없어요. 큰 병은 없답니다.”



……저딴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는 있을까? 속이 터지는 것도 모르고 강해진은 소리까지 내서 “헤헤.”하고 웃었다.



밀가루떡 같은 강해진은 제 갑갑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끔 이렇도록 그의 속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그에게 절대 필요 없는 물건을 선물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환이 씨랑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귀엽죠?”



환은 휴대폰 케이스에 그려진 강아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개 같다는 건가?



“저도 커플로 샀어요! 짠!”



해진이 내민 휴대폰에는 그가 방금 준 것과 거의 흡사한 디자인의, 그러나 강아지 대신 병아리가 그려진 케이스가 끼워져 있었다. 환은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무해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저를 보며 생글, 웃는다.



“……정말로 고맙군요.”



딱히 이 조그마한 밀가루떡 같은 놈이 좋아서 받는 건 아니었다. 그저 좀 맞춰주면 더 말을 잘 들을까 싶어 받는 것뿐이었다. 해진은 헤실헤실 웃으며 액정필름조차 붙이지 않은 그의 휴대폰에다 강아지 케이스를 씌웠다.



“제가 이런 거, 귀여운 거 잘 찾아요. 앞으로 찾으면 종종 선물할게요. 환이 씨 은근히 귀여운 거 좋아하시잖아요. 그쵸?”

“제가 말입니까?”

“그래서 저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뻔뻔하기까지 하다. 이런 뻔뻔한 밀가루떡은 처음이었다. 환은 강아지 케이스가 끼워진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이가 보이게 활짝 웃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해진 씨는 영특하십니다. 귀엽고 다정한테 영특하시기까지 하다니, 정말로 매력적이시군요.”



영혼을 꾹꾹 눌러 담아 칭찬하자 멍청하게 웃는 꼴이라니. 한숨이 다 났다.



“그럼 빨리 시금치 반찬도 드세요.”



해진이 앞에 놓인 그의 도시락 반찬통 속, 유일하게 남은 시금치 반찬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일도 이제 지겨웠다. 특히 자신이 싫어하는 나물 반찬을 먹는 일은 정말로 지겨웠다. 레스토랑을 하나 사서 이곳 공원에 갖다 놓으면 어떨까. 그럼 둘 다 편할 텐데.



대충 둘러대려고 해진을 보는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다. 조그맣고 무해하던 얼굴이 어느새 엄한 한문 선생처럼 변해 있다.



환은 억지로 웃으며 남은 시금치 반찬을 한입에 밀어 넣었다. 그제야 해진이 다시 만족스레 웃었다.



두 사람의 회사가 가까워서 일주일에 한 번, 점심시간이면 공원에서 만나 도시락을 먹었다. 해진의 팀장이 정기 출장을 가는 날 말이다. 하지만 일개 사원이 이렇게 멋대로 자리를 비워도 되는 것일까? 환은 짐짓 걱정하는 투로 물어보았다.



“저야 물론 해진 씨가 해주신 귀한 음식을 맛볼 기회가 있어 몹시 기쁩니다만, 저 때문에 혹시라도 해진 씨가 회사에서 빈축을 사실까 걱정이 됩니다.”

“어, 환이 씨, 모르셨구나. 저 저희 팀 실세예요.”



당당하기 그지없는 말에 환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해진 씨가, 실세라고요.”

“그럼요. 팀장님 다음으로 저예요. 걱정 마세요.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잠깐 점심시간에만 빠지는 건데, 뭐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죠. 저는 절대로 업무와 일정에 지장이 가는 행동은 하지 않아요.”



강해진이 마루투어의 뛰어난 인재라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났다.



‘그래? 아무리 내가 좋아도 업무와 일정에 지장이 갈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거지……. 아주 건방지군.’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그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환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귀여운 척한다고 다인 줄 아나.



“그리고 사실, 환이 씨가 좋아해주셔서 더더욱 이렇게 해주고 싶어요.”

“하하,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외로워 보여서요.”



뒤이은 말에 환은 그만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얼굴을 굳혔다.



“무슨…….”

“환이 씨, 정말로 외로워 보여요.”



눈앞의 밀가루떡이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틀어 올려 웃으려 했지만 입가에 경련만 났다. 더러운 오메가가 제 손을 덥석 쥐었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제가 계속 같이 있어주고 싶어요.”



지금 장난하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강해진은 절대 장난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는 웃고 있지도, 눈살을 구기고 있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슬퍼 보였다. 아니,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저를 쳐다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환은 불쾌감을 억누르느라 어금니를 앙다물어야 했다. 제 표정이 아주 가관일 텐데도, 강해진은 조금의 놀란 기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그리고 그날 환은 해진이 선물한 강아지 케이스를 세 번이나 소독했다.



케이스를 박박 문질러 닦으며 그는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다.



‘제깟 게 뭐라고.’



어디서 감히, 나한테 외로우니 뭐니 말을 해. 제깟 게 뭐라고.





* * *





해진은 사실 환을 만날수록 한 가지 고민이 깊어졌다.



‘왜 나랑 정식으로 만나자고 하질 않지?’



그렇다고 먼저 고백하기에는 여러 가지 걸리는 면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상사나 마찬가지고, 게다가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으니까.



‘꼭 돈 보고 만나려는 것 같잖아.’



해진은 절대 그의 돈을 보고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환이 진심으로 좋았다. 그리고 그를 챙겨주고 싶었다.



이환 전무는 해진이 보기에 아직 아이 같은 면이 많았다. 물론 대기업의 전무답게 일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프로페셔널하지만, 뭐랄까, 이환이라는 개인 자체는 그렇지 않았다. 어딘가 많이 서툴러 보였다. 저를 대하는 얼굴에 늘 다정한 웃음을 띠고 있어도, 언제나 제게 잘 대해주어도 그런 티가 났다.



애정을 받아본 적 없는 동물은 사람이 손을 내밀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다. 저를 해치려는 줄 알기 때문이다. 환이 딱 그러했다. 마치 한 번도 쓰다듬을 받아본 적 없는 사냥개같이 말이다.



“휴우…….”



한숨을 내뱉고 베개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해진은 환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툰 것은 그도 마찬가지니까.



친구 윤경훈은 그냥 먼저 고백해버리라고 해진을 종용했다. 정말 돈을 보고 만나는 게 아니라면 그도 알 거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고백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가……. 그리고 경훈은 자기가 만나는 상대가 이환 전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던 중, 급기야 올 것이 왔다.





주말 데이트는 보통 드라이브로 시작해서 서울 외곽을 돌아다니곤 했다. 나름 관광레저 회사의 전무라서 그런지 이환은 온갖 경치 좋고 분위기 좋은 곳을 다 꿰고 있었다. 다른 오메가와 데이트를 많이 해본 걸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 정도였다.



그래도 오래 걸으면 힘들어하는 자신을 배려하는지 항상 차를 타고 이동했다. 절대 오래 붙들고 있지 않고, 밤이 늦기 전에 데려다주는 것도 제 몸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날도 이환은 그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환이 데려가주는 곳은 어디든 근사했지만, 그날은 유독 더 근사했다.



남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 루프탑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밥을 먹으러 가자기에 고작해야 레스토랑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호텔의 루프탑을 아예 싹 비워버리고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 단둘이 앉았다. 아예 다른 의자와 식탁까지 치워버린 상태라서 어색함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두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 같았다.



메인디시가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이환이 갑자기 입을 닦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해진은 한창 고기 맛에 심취해 있었기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나이프를 놀렸다.



“저는 해진 씨를 만난 뒤부터 늘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테이크를 씹느라 대답하지 못하고, 대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이환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해진 씨처럼 완벽한 매칭…… 아니, 완벽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행운이니까요.”



저도 부족한 점이 많은데 너무 과찬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답을 선택하기에는 입에 든 스테이크가 너무 맛있었다. 해진은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한 점 더 입에 밀어 넣고 오물오물 꼭꼭 씹었다.



“저는 그래서 이 행운을 더더욱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법적인…… 형태로 이뤄진 약조를 한다면 좋겠지만, 흠, 그건 너무 이르니 차치하고. 오늘은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해진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역시 스테이크는 미디움웰던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씹을 때마다 고소하게 퍼지는 육즙이 침샘을 자극하고, 부드러운 고기는 어금니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데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강해진 씨, 저와 정식으로 교제해주시겠습니까?”



해진이 그제야 오물거리던 입술을 뚝 멈추었다.



눈앞에는 이환이 그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그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언제 꺼냈는지 거대한 꽃다발을 든 채로 말이다.



꿀꺽, 입에 든 고기를 삼킨 해진이 멍하니 그 꽃다발과 이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저…….”



이환이 일어서서 그의 자리로 왔다. 그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해진의 눈에 꼭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야경 불빛 덕분에 환의 주변에 화려한 효과까지 더해졌다.



늘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몸도 약하고, 병치레도 많이 하고, 체구도 작은 나약한 몸뚱이를 지닌 평범한 사람. 그런데 지금, 자신이 마음에 담은 알파가 저를 향해 꽃을 내밀며 고백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며 말이다.



해진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긴장감 가득하던 이환의 얼굴에도 비로소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만나요, 우리!”



해진이 발딱 일어나 무릎 꿇은 그에게 폭 안겼다. 환은 얼떨결에 그를 마주 안은 채로 뻣뻣하게 굳었다가, 어색하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꿇은 자세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편해진 환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서야 해진은 그를 놓아주었다. 상기된 얼굴을 하고 헤실헤실 웃던 그는 환이 도로 앉으라고 손짓하자 힘이 빠진 투로 털썩,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서도 스테이크를 마저 먹겠다는 일념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꼬옥 쥐었다.



“너무 기뻐요, 정말로요. 저, 사실, 많이 고민했거든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환이 씨 같은 분이랑 이렇게 가까이 지내도 될지…….”

“그런 생각 마십시오. 해진 씨야말로 제가 본 사람 중에 가장 특별합니다.”



해진의 선한 눈동자가 감동으로 물들었다.



“어쩜, 환이 씨는 이렇게 말씀도 곱게 해주시고…….”



뿌듯하게 웃은 이환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양팔을 팔걸이에 얹고 야경을 슬쩍 둘러보는 그의 표정에 거만함이 묻어났으나 해진의 눈에는 그조차 멋져 보였다.



“요리, 마음에 드십니까?”



어느새 스테이크를 입에 밀어 넣은 해진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입꼬리를 틀어 웃었다.



“이 레스토랑, 선물로 드리죠.”

“네? 미치셨어요?”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고는 얼른 입을 가렸다.



“아, 아니, 죄송해요. 말이 헛나왔네요. 너무 과한 선물이라서요.”



그가 부자라는 사실이야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 테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귄 지 하루 만에 무슨 호텔 레스토랑을 선물로 준단 말이야. 받을 수 없었다. 해진은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정 선물을 주시고 싶으시면, 저도 환이 씨한테 같은 수준으로 보답하고 싶어요. 제가 보답할 수 있는 것으로 주시면 받을게요.”



환이 픽 웃음을 흘렸다. 졌다는 투였다.



“알겠습니다. 해진 씨께 부담이 가는 선물은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기다란 손가락이 와인 잔을 쥐었다. 잔을 기울이는 동작이 우아하기 그지없다. 해진은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보았다. 이환의 모습이 꼭 명화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의 연인이시라면 높아진 가치에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제게 있어서 돈은 해진 씨보다 더 가치 우위가 낮은 것이니, 그것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해진은 그 말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돈을 버느라 지금도 아등바등하는 자신이었다. 그러니 돈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환의 말은 해진을 감동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거 정말…… 듣기에 달콤한 말이네요.”

“오늘은 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만, 선물은 저의 진심임을 알아주십시오. 해진 씨가 제 돈을 써주시는 것이 저의 큰 기쁨입니다.”



여전히 우아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해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익숙해지도록 노력할게요!”



환이 흐뭇한 투로 웃었다. 해진도 그를 마주한 채 배시시 웃었다. 그는 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 멋진 남자의 넘쳐나는 돈을 펑펑 써주는 데에 꼭 익숙해지고야 말겠다고!





* * *





강해진과 연애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아이를 낳은 게 아니니 안심할 수 없었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던 중, 설상가상으로 사건이 터졌다. 유 회장이 키스틸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키스틸 솔루텍을 매각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환은 회장을 직접 찾아가 반대했다.



“솔루텍은 현재 레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계열 호텔, 리조트, 모든 숙박 시설 냉난방 시스템을 맡고 있지 않습니까. 매각하게 되면 레저에 타격이 옵니다.”



유 회장은 인사도 없이 쏘아붙이는 손자를 슬쩍 쳐다보더니 양쪽 발을 책상에 척척 차례대로 겹쳐 올리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경영을 논하는 거냐?”

“솔루텍은 아니지만 레저는 제 것 아닙니까. 제 계열에 타격이 온다면 아무리 회장님이시라도 저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이런 결정이 저 없이 진행되었는지도 이해 못 하겠습니다. 저는…….”

“너는 솔루텍의 대주주가 아니지.”



유 회장이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었다. 나이에 비해 형형한 빛을 띠는 눈동자로 제 손자를 꿰뚫듯 훑어보았다.



“솔루텍은 지금 파는 게 이득이다. 의논 다 끝난 일이고.”



무심히 말한 그녀는 시선을 모니터로 옮겼다.



“그리고 애초에 내 회사를 내가 어떻게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그렇게 억울하면 합법적으로 절차 거쳐서 물려받든가.”



뒤이은 말에 환은 한 번 더 기가 막혔다.



“……오메가와 아이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물려주지 않으실 거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잘 아네.”



결국 환은 아무 소득 없이 회장실을 나와야 했다. 짜증이 솟구쳤으나 반발할 수가 없었다.



담배나 술이라도 하면 좋겠건만, 평소에 몸을 해치는 것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선 운동 말고 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벤치프레스를 죽어라 하며 땀을 흘렸다.



저 늙은이에게서 정당한 유산을 받아오려면, 결론은 하나였다.



‘서둘러야겠군.’



하루라도 빨리 강해진을 임신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환의 고민은 이제 한 단계를 더 올라섰다. 연인이 되기는 했지만 아이는 어떻게 낳게 한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 보통 연인들이 어떻게 침대에 들어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뭐, 보나 마나 돈으로 대충 꼬셔서 자빠뜨리면 되겠지.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



모호함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바로 돈이었다. 강해진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을 터다. 그래, 강해진 본인의 입으로도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돈이 제일 중요하다고.



99.99퍼센트의 매칭률을 보이는 오메가에게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이를 낳아 조모에게 바치면 몇천 배로 돌려받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강해진이 돈을 써봤자 얼마나 쓰겠나. 먹는 것도 꼭 햄스터가 햅씨 빠는 것처럼 적게 먹는데. 외제 차도 한 번 타본 적 없겠지.



그래서 환이 선택한 첫 번째 미끼는 바로 외제 차였다.



샛노란 바탕색에다 보닛에 검은 줄이 두 개 그려진 이 스포츠카는 가격이나 성능 면에서 ‘최고급’이라고 불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로봇 캐릭터로 몇 번 등장한 데다 눈에 띄는 디자인 덕분에 대중성은 높았다.



다시 말해 강해진이 ‘어, 이 차!’ 하며 알아볼 수 있는 모델이었다. 적어도 환의 계산으로는 그러했다. 하지만 막상 차를 몰고 나왔을 때 해진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와, 이거 무슨…… 꿀벌같이 귀여운 차네요. 장난감 같다.”



일그러지는 강해진의 얼굴 표정은 명백한 ‘민망함’을 나타내었다. ‘어떻게 이딴 차를 타고 다니지? 부끄럽지도 않나?’ 하고 말하는 듯했다.



환은 가슴속에서 불처럼 치솟는 화를 꾹 억눌렀다. 이 유명한 스포츠카를 모른단 말인가? 무식하군. 면구스러움을 감추곤 선글라스를 내리고 웃어 보였다. 첫 단추부터 틀어졌지만 여기서 포기할 환이 아니었다.



“타십시오. 오늘은 특별히 제 차고를 보여드리죠.”



해진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눈치를 보며 옆좌석에 탔다. 환은 일부러 차 루프를 활짝 열고 달렸다. 남들은 없어서 못 타는 차인데, 강해진이 주제를 좀 알고 기뻐하길 바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해진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좀 춥지 않아요?”

“예, 안 춥습니다.”



이제 여름인데 대체 뭐가 춥단 걸까. 얼른 대답하자 해진의 안색이 나빠졌다.



“오늘 낮에도 미세먼지가 많다던데…….”



옷깃을 여미는 건 저 보라고 일부러 그러는 걸까.



“요즘 매연이 아주 심하다던데…….”



꿋꿋이 도로를 달렸다. 행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해진은 조수석에 앉은 채로 스르륵, 몸을 낮추었다. 엉덩이가 좌석 앞쪽으로 하도 빠져서 그대로 차 바닥에 앉을 기세였다. 환이 한쪽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어 일으켰다.



“위험합니다. 안전벨트 잘 매시고 똑바로 앉으십시오.”



해진은 울상이 된 채로 제대로 앉았지만 이마를 긁는 척하며 얼굴을 가렸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나를 창피해하는 건가? 감히 이 나를?



“콜록, 콜록!”



급기야 기침까지 해대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환은 루프를 닫아야 했다. 그제야 해진의 얼굴이 편해졌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환이 씨는.”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할 말이 달아났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둘은 환이 사는 건물의 주차장으로 갔다. 그가 가진 자동차는 모두 열한 대인데, 개중 열 대가 외제 차였다.



“차가 이렇게 많으면 헷갈리지 않으세요?”

“천만에요. 용도에 따라 다르게 씁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며 환이 핸들을 꺾었다. 관리인에게 차 키를 던져주고 주차시킬 수도 있지만, 어디선가 주차하는 남자의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일부러 직접 뒤를 돌아보며 한쪽 팔로 핸들을 움직였다.



“용도요?”

“간혹 대외 활동을 갈 때 휠체어를 실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엔 시설이 갖춰진 저 밴을 사용하지요.”

“오, 혹시 환이 씨 봉사 활동도 하세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곳이 두세 군데 있습니다. 정기후원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사실 거짓말이다. 봉사 활동을 직접 가는 건 환 본인이 아니다. 박 비서를 통해 사람들을 보낸다. 어차피 키스틸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되니까. 몸을 쓰는 힘든 일은 직접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해진은 벌써 제 말에 넘어간 듯이 보였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을 보니.



이 정도면 시작이 괜찮았다. 환은 일부러 한껏 멋을 부리며 핸들을 꺾어 주차를 시도했다. 목선이 드러나게 뒤를 바라보며 어깨는 넓어 보이도록 판판하게 폈다. 한쪽 팔은 해진이 있는 조수석의 등받이를 둘렀다. 해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흥. 마음껏 보고 감탄하라지. 네 녀석이 곧 아이를 낳아줘야 할 몸이니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알파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이 조그마한 오메가는 알까? 환은 속으로만 웃으며 핸들 쥔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주차가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단번에 자리를 찾질 못하고 바퀴를 몇 번이나 헛돌렸다. 세 번 정도 왕복하자 슬슬 핸들 쥔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해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디스플레이 화면을 검지로 콕 가리켰다.



“그냥 후방 카메라 켜세요. 차도 좋은 거 같은데.”



누굴 바보로 아나, 이 조그마한 놈이……. 누구 좋으라고 일부러 이 짓을 하고 있는데. 하지만 환은 스스로를 매너 있는 데이트 상대로 연기 중이었기에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제가 강해진 씨의 매력에 홀려서 잠깐 생각을 놓고 있었군요. 부디 제 부족한 모습에 실망하시지 않았길 바랍니다.”



얼른 궤변을 늘어놓자 밀가루떡 같은 강해진은 좋다고 헤실헤실 웃는다. 하여튼 다루기 쉬운 녀석이다.



환은 후방 카메라를 켜며 문득 차 뒷좌석 쪽을 돌아보았다. 사실, 가능하다면 오늘 이곳에서 일을 해치우기 위해 뒷좌석을 깨끗하게 청소해놓았다. 조수석 앞 서랍에는 소독제와 러브젤도 들어 있었다.



이왕이면 히트사이클에 해치우는 것이 임신 확률을 높일 테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많이 참은 것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짓거리를 끝내고 싶었다.



‘집에서 하는 것보단 차에서 하고 차를 버리는 게 낫겠지.’



그 더러운 짓거리를 자기 집에서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차에서 하고 차를 내다 버리는 게 나았다.



주차를 끝내자 강해진이 안전벨트를 풀려 했고, 환은 계획대로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안전벨트를 쥔 손 위에다 제 손을 겹쳐 쥐었다. 손은 씻고 나왔겠지? 구역질이 났지만 애써 코앞에서 웃었다.



“제가 해드리죠.”



아니나 다를까 강해진이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안전벨트가 톡, 짧은 금속음을 내며 풀렸다. 환은 그를 마주 본 채로 상체를 조금 더 숙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아 참, 환이 씨.”



……빌어먹을 밀가루떡. 환의 바닥난 인내심이 관자놀이로 불거졌다. 애써 틀어 올린 입 끝이 파르르 떨렸다.



“왜 그러십니까?”

“저, 그때 주셨던 넥타이요, 감사하게 잘 쓰고 있어요. 우리 팀장님이 저보고 그 넥타이 어울린대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 환은 여태 안전벨트를 쥔 손에다 힘을 꽈악 주었다.



“그거 정말로 다행이고 기쁘군요.”

“그쵸? 헤헤. 우리 이제 내려요. 차 구경시켜주세요.”

“……구경하고 싶습니까?”



해진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무슨 뜻이냐 반문하는 얼굴이었다.



“저한테 자랑하려고 차고까지 데려오신 거 아닌가요?”



하여튼 발칙하기 그지없는 오메가다. 환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부끄럽게도 들켰군요. 물론 제 컬렉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좀 더 편한 데이트를 위해서라는 것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해진 씨가 제 차 중에서 어떤 걸 제일 편해하시는지 알고 싶으니까요.”

“전 아무거나 타도 괜찮아요. 환이 씨만…… 옆에 있으면요.”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강해진은 아주 조금 귀여웠기에, 환의 뭉개진 자존심이 쥐꼬리만큼 회복되었다.



“저는 해진 씨를 위해서 얼마라도 투자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필요한 것이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가진 건 돈밖에 없습니다. 돈으로 강해진 씨의 편의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지출할 용의가 있지요. 그게 제 기쁨이니까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궤변을 줄줄 늘어놓고 있자니 강해진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감동한 기색을 보였다. 환은 생각했다. 역시 단순한 녀석이라고. 아이가 이 멍청한 놈의 머리를 닮으면 안 되는데.



찰칵,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가 풀렸다. 환은 얼른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걸어와 문을 열어주었다.



“뒷좌석에도 한 번 타보시겠습니까?”

“뒷좌석엔 왜요?”



해진이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차에서 내렸다. 환은 그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해 잠깐 망설였다.



“그야…… 뒷좌석에도 타야 할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전 뒤에 타면 멀미하는데…….”



멋쩍은 대답에 화가 치밀었다. 하여튼 눈치라고는 죄다 말아먹은 놈이로군. 이쯤 되면 신체 접촉 빈도를 늘리자는 의도로 알아들어야 하지 않나? 환은 어색함에 넥타이만 고쳐 맸다. 속 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진은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환이 씨, 그런데 혹시 노란색 좋아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노란색 좋아하는데.”



어쩌라는 거지? 노란 차를 타고 왔다고 지금 아직도 시위하는 건가? 아니면……. 환은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갖고 싶으시다면 이 차,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얼마 하지도 않는다. 강해진이 낳아줄 아기로 벌어들일 돈에 비하면 그야말로 푼돈이다. 이 정도 투자는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환은 자신이 뼛속까지 기업인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해진은 민망한 기색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얼른 손을 내저었다.



“헉,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갖고 싶어서 쫑알거린 주제에 이제 와서 빼기는 뭘 뺀담. 환의 미간이 구겨지기 직전, 해진이 차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이거 말고 저기 저거로 주세요. 이건 타고 다니기 좀…….”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이 굳을 뻔했다. 해진이 가리킨 차는 이 노란 차보다 열 배는 더 비쌌다. 알고 이러는 건가?



‘이런 요망한…….’



다른 의미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해진이 눈치를 보며 머리를 살짝 긁었다.



“아, 제가 너무 앞서 나갔죠? 죄송해요…….”

“아닙니다. 편히 타고 다니십시오. 박 비서를 통해서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그,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적어도 삼세번은 거절할 줄 알았건만. 환은 한숨을 삼키며 활짝 웃었다.



차고에 있는 차에 한 번씩 탑승을 시켜주며 환은 키스틸이 얼마나 튼튼한 재무 구조를 갖고 있고 얼마나 뛰어난 기업체인지 자랑을 늘어놓았다. 당연히 그 키스틸을 책임지고 있는 자가 자신이라는 사실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런데도 강해진은 딱히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 “와, 멋있네요.” 하고 적당히 감탄만 할 뿐이었다.



“참, 그거 아세요? 트렁크에 갇혔을 때, 뒷좌석이랑 트렁크가 연결되어 있을 경우에는 쉽게 탈출할 수 있어요. 뒷좌석 시트를 밀면 되거든요.”



차 트렁크 쪽을 매만지던 해진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건 몰랐군요.”

“네. 그렇지 않더라도 트렁크 안에 야광으로 빛나는 레버가 달려 있으면 그걸 당기면 자동으로 열려요. 일반적인 차에는 거의 다 있어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습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저 원래 그런 데에 관심 좀 많거든요.”



야외 조난이나 탐험 관련으로 상식이 제법 있단 사실은 알았지만 트렁크 탈출법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트렁크에 갇히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아마.”

“환이 씨가 지켜줄 거니까요?”



방긋 웃으며 묻는 말에 환은 순간 말문이 막힐 뻔했지만,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바로 그거죠. 제가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진짜 든든해요!”



다행히도 강해진은 제 망설임을 눈치채지 못한 듯 환히 웃었다.



“해진 씨는 이상형이 있습니까?”



슬슬 갑갑해진 환이 물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뒷좌석에서 열심히 아이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데. 대체 이 밀가루떡 같은 놈은 왜 이렇게 깐깐한지.



“글쎄요, 이상형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우와! 이거 엄청 멋있네요!”



와중에도 강해진은 제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차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환은 재깍재깍 차 문을 열어주고 내릴 때에는 손을 내밀어 잡아주었다. 머릿속은 어떻게 해야 이 밀가루떡을 자빠뜨리고 아이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물론 저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었다. 섹스는 정말로 불결한 행위니까. 남의 살을 물고 빨고, 음부에 성기를 넣는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끔찍한 일일수록 빨리 해치우는 게 낫다.



“이상형이 딱히 없다니 다행이군요.”

“그런가요? 우와, 이것도 엄청 멋있어요!”



열린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은 채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해진은 여전히 차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실컷 시스템을 만져보던 해진이 운전석에서 일어나려다가 멈칫했다. 환의 몸이 시야를 가득 가로막고 있었다. 환은 선 채로 눈만 내리깔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내 즐겁기만 하던 해진의 얼굴에 그제야 의아함이 떠오른다. 환은 문득 깨달았다. 그가 한참 동안 저를 마주 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냥 차고 뭐고 확 다 팔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괜히 들었다.



“하하, 저기 저 차도 보고 싶네요.”



어색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꿍얼거리며 해진이 일어섰다. 그러나 환은 비켜주지 않았다. 시야의 높이 차이가 크게 났으나 허리를 굽히거나 턱을 숙이지조차 않았다.



“환이 씨……?”



강해진의 눈에 두려움이 설핏 비쳤다. 환의 가슴 속에서 어떤 것이 느리게 끓기 시작했다. 그게 무엇인지 환은 알지 못했다. 불쾌감일까? 조급함일까? 아니면…….



환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일어나려던 해진을 도로 앉히고 제 몸도 운전석에 함께 밀어 넣었다.



“자, 잠깐만요!”

“강해진 씨.”



뽀얀 턱을 붙들었다. 손가락 두 개로 잡아도 충분할 정도로 해진의 얼굴뼈는 가늘었다. 두려움 반, 당혹감 반 섞인 해진의 눈을 마주하자 또 정체 모를 무언가가 몸속에서 끓었다.



“우리 관계를 좀 더 돈독하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턱을 쥔 채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환은 제 얼굴이 외부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익히 알았다. 현 사회의 일반적인 미적 기준을 가진 자라면 자신의 얼굴을 그 기준으로 삼으리란 사실 역시 알았다. 그의 눈매가 조금 가느다래졌다. 그러나 눈빛은 타올랐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저는…… 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숨결이 섞였다. 환은 그에게서 나는 옅은 딸기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입술이 맞닿기 직전에 해진이 그의 어깨를 턱! 붙들었다.



“잠깐만요!”



해진이 급작스레 상체를 빼는 통에 딸기 향도 그만큼 멀어졌다. 환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마저 바닥나는 것을 느꼈으나, 지금 와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기에 꾹 참았다.



“저,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벌게진 얼굴로 하는 말에 한숨이 푹 나왔다. 화장실? 이 상황에서? 제정신인가? 환은 애써 화난 표정을 지우고 운전석에서 몸을 빼냈다. 한 걸음 물러난 채로 손을 내밀자 해진은 멋쩍어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잡고 일어났다.





오피스텔 안에 있는 욕실로 안내하면서 환은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소파에 앉았다.



‘어쩐다, 저걸…….’



계획보다 너무 늦어졌다. 유 회장이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이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정말 최악까지 가정한다면 제게 상속을 하기 전에 사망할 수도 있었다. 한시가 급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 밀가루떡 같은 놈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얼굴 들이대는 것만으로도 기겁을 한다. 먼저 손도 덥석덥석 잡아놓고 말이다.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아무래도 작전을 좀 바꿀 필요가 있는 듯했다.



그 시간에 해진은 찬물로 세수를 연거푸 하고 있었다. 그래도 열기가 도통 식질 않았다.



‘어떡해, 미쳤나 봐!’



방금 전, 코앞까지 가까워졌던 환의 얼굴과 그윽한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숨이 차고 얼굴이 자꾸 붉어졌다. 해진은 양손으로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까 분위기 좀 이상했는데……. 꼭……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착각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진짜 입술이 닿을 거리였다.



해진은 연애 경험이 없었다. 그러니 보통 연인들이 사귄 지 얼마 만에 입을 맞추고 얼마 만에 그보다 더한 스킨십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 경훈이한테 그런 걸 물어보기도 민망하고 말이다.



‘괜히 밀어냈나?’



그래도 아깐 너무 부끄러웠다. 괜히 키스를 못해서 그에게 실망이라도 안겨줄까 봐 겁도 나고 말이다. 해진은 조심스레 입을 가리고 킁킁, 숨을 뱉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입 냄새는 안 나서 다행이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아직 필요했다.



손을 닦던 해진은 아까 보았던 환의 눈빛을 다시 떠올렸다. 이유 모르게 어깨가 떨렸다.



‘뭔가 무서웠어…….’



이환은 다정하기 그지없는 사내였지만, 아까는 아주 조금 무서웠다. 아니, 좀 많이 무서웠다.



‘아닐 거야. 그렇게 다정한 분이.’



해진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자기가 아는 이환은 절대 제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야 해진은 욕실에서 나왔고, 다행히도 환은 평소처럼 매너 있고 다정한 모습을 보였기에 해진 역시 마음 놓고 방실방실 웃었다.



그날 환은 해진에게 자기가 사는 건물을 구경시켜 주었다. 선심 써서 넓고 깨끗한 침실까지 보여주었으나 그 침대 위에 해진을 자빠뜨리는 일은 하지 못했다. 좀 전에 놀란 토끼처럼 굴던 강해진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조급하게 굴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요 작은 놈이 겁을 먹고 도망치면 안 되니까.



심지어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니 닭도리탕이 먹고 싶대서 박 비서를 시켜 재료를 사 오게 하고 요리까지 직접 해주었다.



“환이 씨, 이렇게 넓은 집에서 사시면 안 무서우세요?”



닭도리탕을 먹던 중 해진이 물었다.



“무서울 게 뭐가 있습니까? 방범도 잘되어 있고, 제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습니다.”

“너무 썰렁하잖아요. 저라면 자다가 무서울 것 같아요.”



해진은 야무지게 닭고기 살점을 손에 들고 꼭꼭 씹어 먹었다. 그 모습이 좀 비위생적으로 느껴졌지만 환은 별말 않았다. 대신 물티슈를 건네주었다.



“자다가 무서우면 저한테 전화하세요. 제가 와드릴게요.”



살코기를 떼어 먹던 해진이 말했다. 환은 저도 모르게 잠깐 표정을 굳혔다가, 억지로 웃었다.



“그거, 든든한 말씀이군요.”



자그마한 체구에 산책만 해도 헐떡거리는 놈이 와서 뭘 하겠다고. 아이를 만들러 올 거라면 환영하겠지만 말이다.



마음속으로 한껏 비꼬면서도 환은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 한편이 눅눅해지는데 이게 불쾌감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서 더 이상했다. 그런데 화는 나질 않았다.



밥 위를 움직이던 젓가락이 문득 느려졌다. 눈만 들어 맞은편에 앉은 해진을 살폈다. 살코기를 뜯는 데에 집중하느라 콧잔등에 주름이 져 있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나가볼까.



“밤에 제 침실로 찾아오실 수 있단 말은, 저와 한 침대에 드실 수도 있단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환의 물음에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도 당황한 티가 났다.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저, 그게…….”



우스웠다. 평소에는 그리도 맹랑하더니,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쑥맥이 되나. 게다가 먼저 이곳에 오겠다고 말을 꺼낸 건 본인이면서.



“해진 씨.”

“네, 네?”



한 손에 젓가락을 든 채로, 여상한 얼굴을 한 채 환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눈앞의 강해진을 짝으로서 평가하는 듯 다시 한 번 훑은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해진 씨가 제 아이를 낳아주셨으면 합니다.”

“미친……!”



해진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는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욕을 뱉었다는 자각도 없는 듯했다. 꼭 일시 정지라도 시킨 듯이 뚝 멈춘 채로 약 5초 정도 있던 해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한눈에도 어색한 웃음이었다. 들고 있던 닭 뼈를 내려놓은 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농담도 참. 저 깜짝 놀랐잖아요.”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강해진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가뜩이나 약해빠진 녀석이 제집에서 거품 물고 기절이라도 하면 곤란하니 환은 아무 말도 않았다. 강해진은 혼자서 뭐라고 꽁알거리며 고기를 계속 씹었지만 꼴을 보니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제가 원래 닭고기 엄청 가리거든요. 닭 껍질 기름기를 싫어해서요. 그런데 환이 씨는 어쩜 이렇게 맛있게 낳으셨, 아니, 만드셨어요? 하하.”



말을 애써 돌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야기를 잇기가 어려울 듯했다.



해진이 그의 밥그릇 위에 고기 한 점을 툭, 얹어 주었다. 그래도 상식은 있는지 먹던 젓가락은 아니고 국자를 써서 다행이었다.



“환이 씨는 요리도 잘하시고. 정말 완벽하세요.”



충격을 스스로 상쇄하려는 듯 억지로 헤실헤실 웃는데, 그 얼굴을 보니 가슴이 어쩐지 더 눅눅해졌다. 환은 애써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계획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며 말이다.





그날 밤, 환은 박 비서에게 따로 은밀히 연락했다.



“강해진의 사생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해주십시오. 특히 성적 취향 위주로.”

- 성적 취향이요?



박 비서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하드디스크를 털어서라도 조사하십시오.”

- 그거 범죄인 건 아시죠?

“어떤 알파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지, 아니, 어떤 스타일의 상대방과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흥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거사를 치르려면 판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몸뚱이는 있으니 분위기만 잡히면 된다. 그는 제 몸이 강해진의 취향에서 벗어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전문가를 통해 철저하게 관리한 완벽한 몸이다. 이 몸이 취향이 아니라면 애초에 미적관념이 없는 것일 터다.



- 시도는 해보겠습니다만 혹시 걸릴 것 같으면 전 바로 빠질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걸 알아서 대체 뭘 하시게요?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거든요. 제 인내심이 슬슬 바닥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으윽.”하고 질색하는 듯한 박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환은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입가에는 벌써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깟 오메가, 앞으로 열흘 안으로 자빠뜨려줄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 시각, 해진은 마침 샤워를 하고 나온 촉촉한 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달칵, 달칵,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해서 들어간 깊은 경로 안쪽, ‘스페셜 컬렉션’이라고 적힌 폴더를 클릭하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꿀꺽, 침을 삼키며 해진은 폴더 안에 있는 영상 중 하나를 더블 클릭해 열었다. 이 순간은 그가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아마존_999일_생존기_12회.mp4」



바로 외국 유명 탐험가들의 실제 생존일기를 보는 시간이다.



영상을 틀자마자 꼬질꼬질한 남자가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벌레를 어떻게 잡을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진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아니 잔뜩 흥분한 얼굴로 어떤 벌레가 단백질이 많고 잡기 쉬운지 눈여겨봤다.



‘정말 대단해! 진짜 흥분된다!’



탐험가가 독충에 물릴 뻔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몰입했다. 그렇게 약 40분 남짓한 영상이 끝날 때까지 해진은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12회 영상은 편집된 부분이 조금 많아서 아쉬웠다. 이왕이면 그 보라색 애벌레가 무슨 맛인지도 알려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이 탐험가는 장비가 좋아서 분명히 나무를 쪼갤 때 윙택틱이라는 유명한 나이프를 사용했을 것인데, 그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은 것도 아쉬웠다. 뭐, 나중에 나이프 사용법을 따로 검색해보면 되니까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해진은 영상 파일을 조심스레 클릭해서 키보드의 컨트롤+X 키를 눌렀다. 그리고 ‘대흥분’ 폴더로 파일을 옮겼다.



“아, 정말 재미있었다. 다음 편은 내일 봐야지.”



해진의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 그렇게 끝났다. 그는 기분 좋게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 누웠다. 꿈에서는 저도 아마존을 신나게 헤집고 다니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환을 떠올렸다. 제게 고백하던 이환의 모습을.



‘같이 갑시다, 아마존.’



정식으로 교제해달라는 말보다 그 말이 훨씬 더 설렌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진의 심장은 언제나 그런 쪽에 반응했으니까. 아마존, 사막, 절벽등반, 해저 잠수, 조난, 생존 같은 것들 말이다.



‘특수 요원처럼 입은 환이 씨 보고 싶다…….’



딱 달라붙는 티셔츠에다 하네스도 차고, 허리 옆에는 나이프랑 로프도 차고, 군화 같은 부츠도 신고 말이다. 분명히 멋있겠지. 지금도 멋있는데. 그 탄탄한 팔뚝으로 직접 나무를 베고 뗏목 노를 젓는 환을 생각하자 가슴이 뛰었다. 해진은 이불 속에서 몸을 꿈지럭거리며 혼자 숨죽여 웃었다.





호텔 관리자에게 실컷 잔소리를 하느라 지쳐 있던 오후, 박 비서가 지친 얼굴을 하고 전무실로 왔다. 귀찮게 굴면 바로 쫓아내려 했는데, 다행히도 박 비서는 반가운 소식을 들고 왔다.



“강해진의 개인 컴퓨터를 좀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말을 이어보란 투로 눈짓했다.



“좀 위험한 거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조난 상황이라든가, 뭐 그런…….”



심드렁한 박 비서의 말에 환의 눈이 빛났다. 조난 상황,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저, 사실 오지탐험이 꿈이거든요.’



눈을 빛내며 말하던 그 멍청한 얼굴이 떠올랐다. 고작 공원 한 바퀴도 중간중간 쉬지 않고는 다 걷지 못하면서 그딴 꿈을 꾼다고 했지. 주제도 모르는 오메가였다.



그러나 바로 그게 강해진을 흥분시킬 수 있는 포인트였다. 식물의 물을 어쩌고 하며 설명하던 것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흥분해서 떠들어대던 것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시에는 심장 박동이 증가해서 함께 있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으로 착각한단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여태껏 진도가 나가지 않아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이제 슬슬 해결이 될 것 같았다.



환은 제법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다. 데이트 코스를 평소처럼 멋지게 잡아놓고, 마지막은 키스틸 호텔 지하의 영국식 바(Bar)로 정했다. 이곳에는 문을 잠글 수 있는 프라이빗룸이 있었다. 적당히 술을 마시게 한 뒤 문손잡이가 고장 난 것을 알게 되면, 분명 강해진은 흥분할 것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환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참, 해진 씨, 지내시는 원룸 말입니다, 제가 조금 알아보니 여러 가지 안전 문제가 있더군요.”

“안전 문제요?”

“예. 가스 배관도 엉망이고, 방범 시설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건물입니다.”



세큐리티 업체를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사실 배관도 큰 문제는 없고, 방범 시설은 모든 건물이 그렇듯이 기본적인 시설만 갖춰져 있었지만 구태여 강해진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다. 그런데 이 밀가루떡 놈은 상황의 심각성도 모른 채 땡그란 눈을 굴리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닌가.



“뭐, 그게 심각한 건가요? 어차피 원룸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심각하지요.”



환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상체를 좀 더 가까이 가져갔다.



“제 소유의 오피스텔이 하나 있습니다. 마루투어와도 가깝고, 지금 사시는 원룸보다 훨씬 괜찮을 겁니다. 가구도 모두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이사를 오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 물론 그 오피스텔의 마스터키는 환 자신도 갖고 있을 예정이긴 한데, 그 사실이야 뭐 천천히 말해도 될 터다.



“어, 저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직 살고 있는 집 계약 기간도 남았고…….”

“그건 제가 처리해드리지요.”



몇 마디를 더 설득했지만 해진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빌어먹게도 고집이 센 밀가루떡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술이나 더 마시라고 잔이나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날, 환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밀가루떡과 제대로 술을 마셔보는 건 처음이라는 사실을. 그 말인즉 강해진의 술버릇을 처음으로 본단 뜻도 되었다.



“헤헤, 환이 씨, 어쩜 이렇게 잘생기셨어요?”



밀가루떡은 술이 조금 들어가기 시작하자 실없이 웃으며 자꾸 추근거렸다. 세균 가득한 손으로 자꾸 제 팔을 건드리는 게 짜증 나서 슬쩍 밀쳐도 자꾸 들러붙어댔다.



“해진 씨,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슬슬 집에 가시는 게 어떨까요.”

“싫어요……. 난 환이 씨랑 있고 싶은데…….”



입술을 비죽거리며 투정 부리는 게 아주 조금, 쥐꼬리만큼 귀엽기는 했다. 하지만 짜증이 더 났다.



“진정하시고, 일단 일어나시죠.”

“싫은데! 난 환이 씨랑 있을 건데!”



확 그냥 한 대 때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강해진을 들고 안다시피 했다. 문가로 걸어가는 그 잠깐 동안에도 강해진은 꼬물거렸다. 환은 완벽한 방음을 자랑하는 문짝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비장한 투로 문고리를 붙들었다.



미리 다 이야기해두었다. 강해진과 함께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일부러 문손잡이를 고장 내고, 적어도 세 시간 동안은 절대 고치지 말라고. 그리고 그 시간 동안은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관여하지 말라고. 직원들은 다소 떨떠름해했지만 상사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다.



“해진 씨, 제게 편히 기대십시오.”



문손잡이를 쥔 환은 입가에 떠오르는 비틀린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후응, 환이 씨…….”



강해진이 그의 팔뚝에 함부로 얼굴을 비벼댔다. 평소라면 소름이 끼쳤을 테지만 그는 지금 기분이 좋았기에 용서할 수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해진 씨. 제가 댁까지 무사히 모셔다드리지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집은 무슨. 오늘 이 오메가의 몸에 제 유전자를 확실히 심기 전까지는 보낼 생각이 없었다. 한쪽 팔로 그를 안고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혹시 멍청한 직원 놈들이 실수라도 했다면 죄다 해고해버릴 셈이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문은 미동도 않았다. 오케이. 벌써 섹스라도 한 것처럼 뿌듯해졌다.



“아, 진짜, 누구 애인인지 정말…… 잘생겼다!”



와중에 강해진은 옆에 삐딱하게 서서 제 얼굴을 보며 연신 감탄해댔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호들갑인지. 물론 그의 미적 감각이 특이하지 않아 다행이긴 했다. 이 얼굴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재앙이 아닌가.



“환이 씨, 얼굴 만지게 해주세요…….”

“잠시 똑바로 서보십시오, 해진 씨.”

“우으…….”



해진이 억지로 눈을 떴다. 환은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쥔 채 짤짤 흔들었다.



“우리 이제 큰일 났습니다! 정신 차려보십시오. 아무래도 이 방에 갇힌 것 같습니다.”



일부러 과장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해진의 눈이 돌연 커다랗게 뜨였다.



“네? 뭐라고요?”

“문이 밖에서 잠긴 모양입니다. 두드려도 연락이 없군요.”

“정말요?”



해진이 눈을 비비더니 환의 등 뒤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손잡이를 당겨보았지만 역시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뒤이은 해진의 반응은 역시 예상대로였다.



“헉, 정말 큰일 났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빛이 반짝이는 것이 분명 흥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술도 깨고 있는 모양이지.



“큰일이군요. 휴대폰도 마침 배터리가 다 되어서 켤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제 휴대폰을 쓰세요.”



하여튼 눈치라곤 없는 놈이군. 해진이 가방을 뒤졌지만 환은 느긋하게 서 있었다. 그럴 줄 알고 그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휴대폰을 감춰버렸다. 지금쯤 저 바깥 직원 중 하나가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어? 이상하네. 휴대폰이 안 보여요…….”

“화장실 가실 때 떨어뜨리신 것 아닙니까? 나가면 제가 찾아보라고 직원들에게 말하겠습니다.”



해진이 다시 돌아와 문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당연히 꿈쩍도 않았다.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이렇게 갇히다니.”



그가 턱을 쥐고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와중에도 눈은 반짝였다. 누가 봐도 안타까워하거나 겁먹은 기색은 아니었다. 기쁨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환은 슬며시 강해진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강해진 씨와 단둘이, 밀실에 갇히다니.”



허리만 조금 숙이면 얼굴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마침 마감 시간인 데다 이곳은 VVIP 프라이빗룸이라 절대 직원이 먼저 문을 두드리지 않지요.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바깥 출입문까지 잠기겠군요. 우리가 이곳에 있단 사실을 아무도 모른 채 말입니다.”



환은 눈을 그윽하게 내리깔고 강해진의 뒤쪽 벽을 한 손으로 짚었다.



“심지어 내일과 모레는 이 바의 휴일입니다. 지금 갇히면, 꼬박 사흘 동안 여기 있어야 한단 뜻이지요. 이 바의 오픈 시간은 오후 여덟 시이고 말입니다.”



VVIP 프라이빗룸에 들어간 고객을 직원들이 모를 리 없으며, 내일은 휴일이 아니고 네 시 반 오픈이지만 구태여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을 터다. 강해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났으나 오히려 상체를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우린 지금 아주 위험한 상태에 처했다고 봐야겠군요.”



강해진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한 번 꿀꺽, 오르내렸다. 요리조리 굴리는 눈동자를 잡아다 제게 고정시키고 싶었다. 어딜 감히, 나를 앞에 두고 다른 곳을 보는 거지? 환은 갈증을 느끼며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이곳에 갇히게 되다니……. 정말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이 아닙니까?”



환은 제 얼굴과 몸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아는 만큼, 제 목소리도 얼마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리는지 알았다. 대외 인터뷰를 대비해 몇 번이나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으며 발성 연습을 반복했으니까. 일부러 한껏 음색을 낮춰 말한 뒤, 끈적한 적막이 순리처럼 뒤따랐다. 음악마저 끊긴 이 좁은 방에 숨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해진이 발개진 얼굴을 두 번 끄덕끄덕했다.



“네, 진짜로 흥분돼요.”



됐군. 환은 기쁘게 웃으며 다른 한쪽 팔도 뻗어 그의 어깨 위 벽을 짚으려 했다. 이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출구는 죄다 닫혀 있고, 반대쪽으로 난 창문은 열 수도 없는 강화 유리벽이다.



그런데 강해진이 그 발개진 얼굴을 하고 쏙, 그의 팔 아래로 몸을 숙여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이런 상황을 위해서! 늘 갖고 다니는 게 있어요!”

“……예?”



강해진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콧구멍은 넓어지고 눈은 커다래져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환은 당혹스러웠다. 이게 아닌데. 술이…… 덜 깬 건가?



“걱정 마세요! 제가 열 수 있어요!”

“……강해진 씨, 잠깐 진정하시고…….”

“찾았다!”



강해진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코 평수를 더 크게 넓히며 다가왔다. 심지어 어깨를 들썩거리며 씩씩거리기까지 했다. 그의 손에는 다용도 나이프와 비슷한 것이 들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해 보였지만 말이다.



“제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항상 대비를 해왔거든요. 이럴 줄 알았어! 이런 사고가 저한테도 생길 줄 알았다고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 지른 해진이 그를 손으로 밀쳤다. 어찌나 힘이 센지, 환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강해진은 나이프인지 뭔지에서 이상한 기구를 척척 펼쳐 들더니 문손잡이를 꼼꼼하게 살폈다.



“레버형이네요. 아마 이 안쪽에 잠금쇠가 있을 거예요. 여기를 열려면 래치를 빼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지금 이 문을 열 수도 있단 불안감이 파뜩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 빌어먹을 오메가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묶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환은 넥타이를 손으로 늘리며 다른 손으로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동그란 머리통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헛짓을 계획하는 강해진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해진 씨,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취하셨으니 일단 저한테 편히 기대셔서 휴식을…….”

“아 좀, 기다려봐요!”



……심지어 짜증까지 내다니. 환은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냥 확 머리채를 잡고 옷을 찢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정작 강해진은 자신이 화를 낸 줄도 모르는 듯이 다시 문손잡이를 살피는 데에 집중했다. 이제는 아예 기구로 들쑤시기 시작한다. 환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끌어내어 입을 열었다.



“그러다 다치실까 겁이 납니다. 그냥 제 곁에서 좀 기다려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런 기회가 왔는데 그냥 날릴 수는 없어요! 남의 손에 고장 난 문을 직접 딸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요? 게다가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요!”



다시 한숨이 났다. 환은 포기하고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그렇습니까…….”

“네. 여기 레버만 풀면 바로 고칠 수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씩씩하게, 정말 흥분한 듯한, 술이 다 깬 듯이 보이는 해진은 정말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문짝을 뜯어내려 하고 있었다. 환은 테이블 위 남은 와인을 병째로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 해진 씨는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아십니까?”



뭐 어디 풀숲 같은 데서 식물즙 짜는 법이나 아는 것 아니었나. 문 따는 법까지 아는 줄 알았으면 이딴 짓은 하지 않았지.



“저는 언제나 위험에 대비하거든요. 그게 바로 탐험가의 자세예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태에서 늘 긴장하면서 살아야 해요.”

“그렇습니까…….”



한숨이 나왔다. 이 녀석이 정말로 문을 딸까. 아무리 잡지식이 많다 해도 문을 딸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대충 하다 포기하겠지, 생각하면서도 환은 그의 만능 칼인지 무엇인지가 문손잡이를 뜯어내는 것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조금만 기다려요. 래치가 걸렸네요. 이것만 고치면 해결돼요!”

“뭐라고요?”



환이 황망하게 물었다. 강해진은 이미 반 이상 뜯어낸 문손잡이를 멋지게 고치고 있었다. 그럼 아이를 만든다는 계획은 이번에도 실패군.



“정말 고칠 수 있단 말입니까?”

“다 고쳤어요!”



자포자기한 투로 묻자 곧바로 대답이 날아왔다. 강해진은 자랑스럽다는 투로 문을 활짝 열어 보였고, 환은 한숨을 삼키고 미소 지었다.



“제가 환이 씨를 구해드렸어요!”



뿌듯하단 투로 말한 강해진은 칭찬을 바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퍽이나 자랑스럽겠군. 환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정말 흥분되는 시간이었어요.”



헤헤, 소리 내서 웃은 강해진은 그의 팔에 들러붙어 팔짱을 꼈다. 환은 뿌리칠 힘도 없어서 그냥 그가 매달리도록 내버려두었다. 바깥에서 지나가던 직원들이 부서진 문과 예정보다 지나치게 일찍 나온 그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환은 괜히 애꿎은 직원들만 노려보았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매너는 지켜야겠기에 환은 모든 것을 포기한 심정으로 해진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물론 운전은 박 비서를 시켰다.



하필 그날따라 야경이 유독 보기에 괜찮았다. 환은 팔꿈치를 차 문에 기댄 채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과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어두운 곳에 들어섰을 때, 창문에 이쪽을 보는 해진의 얼굴이 비쳤고 눈이 마주쳤다.



환이 고개를 돌리자 해진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차 안이 어둑했지만 그의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왜 시선을 피하지? 내가 꼴도 보기 싫다는 건가?’



건방진 강해진이 제 시선을 피하니 불쾌할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환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뭐랄까…….



환은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한참 전에 마신 와인이 뒤늦게 올라오는지 얼굴이 뜨거웠다.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강해진의 집으로 가는 길이 짧았다. 박 비서는 쓸데없이 운전을 빨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원룸 근처에 도착했다. 먼저 내려서 차 문을 열어주고,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데 문득 강해진이 손목을 잡아끌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위였기에 환은 그대로 끌려갔다.



쪽, 소리가 먼저 들렸고 그다음으로 볼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예상치 못한 것을 싫어했다. 제 계산에서 벗어나는 것은 언제나 질색이었다. 그래서 환은 강해진이 싫었다. 언제나 제 예상과 다르게 구니까. 조금 파악했다 싶으면 다시 색다른 모습을 보여서 저를 당황케 만드니까.



“환이 씨,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어둡고 지저분한, 아주 불결한 골목에 서서 저를 보는 강해진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그란 눈을 순하게 휘어 웃는 모습이 멍청해 보였다.



환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강해진은 바보처럼 “헤헤.” 소리 내서 웃고는 돌아서서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는 그 자리에 한참 서서 건물을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창문으로 불이 켜진 걸 확인하고서야 다시 차에 올랐다.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내내 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그리고 강해진의 돌발행동 탓이었다. 감히 내게 입술을 들이대다니. 그것도 방금 전까지 와인을 마신 입술을 말이다.



‘불결하기 짝이 없군……!’



하지만 귀찮았기에 구태여 뺨을 닦지는 않았다. 괜히 뒤를 한 번 돌아보았지만 강해진이 사는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세큐리티 업체는, 어떻습니까?”

“일전에 말씀하신 대로 베타 요원들만 배치해 뒀습니다. 강해진 씨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감시…… 아니, 근무하고 있고요.”



저 멍청한 밀가루떡 놈이 무슨 사고를 칠지, 발정 난 몸으로 어디를 싸돌아다닐지 모르니 세큐리티 업체를 통해 몰래 지켜보라고 일러두었다. 다행히도 강해진은 굉장히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기에 위험한 곳은 딱히 드나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모를 일이다.



“특별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제게 연락하십시오.”



박 비서는 대답 않고 대신 백미러를 통해 환을 흘끔 바라봤다.



“왜, 뭐요?”

“……아닙니다.”



어쩐지 그가 웃는 것 같았지만 강해진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피곤했기에 환은 잔소리 않고 좌석에 몸을 묻었다.





* * *





환은 언제나 자신이 이성적이고 냉철한 자라고 믿어왔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생식에 문제가 없는 건강한 알파였고 따라서 러트는 주기적으로 왔지만, 그때마다 큰 변화는 없었다. 냉철함을 유지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몸 상태가 이런지 환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젠장…….’



욕을 씹어 삼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현기증에 휘청거렸다. 이렇게 지독한 러트는 처음이었다. 여태껏 증상이 와도 미미하게 열감만 느껴질 뿐이었지, 이렇도록 고열을 동반한 적은 없었다. 고열만 있다면 다행일 터다. 지금 그는 지독한 성적 흥분까지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대체 내 몸이 왜 이런 거지?’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다니. 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육체를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더 환장할 노릇은, 몸이 오메가인 강해진을 찾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태까지 누군가를 이렇게 원한 적도 처음이었다. 그것이 마음이든, 육체이든.



병원에 가면 억제제를 처방해 주겠지만, 몸을 컨트롤하지 못해 약의 도움을 받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어떻게든 버텨볼 요량이었다. 평소의 이환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비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 역시 강한 러트의 부작용이었으나, 그조차 알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컵을 꺼내 물을 따르려는데, 손이 떨려 놓치고 말았다.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흐렸다.



박 비서에게 연락해 몸이 좋지 않아 출근하기 힘들다고 말해두었다. 그리고 환은 저도 모르게 강해진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서 찾았다.



이렇게 비이성적인 상태를 하고 오메가에게 연락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 역시 알았다. 그러나 이미 손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통화연결음이 세 번 울리는 동안 인내심이 바닥났다. 욕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 뭐가 그렇게 귀한 몸이라고 내 전화가 세 번이나 울릴 동안 안 받는 거지?



- 여보세요, 전무님?



마침내 강해진이 전화를 받았다. 속삭이듯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환은 조급함을 억누르며 욕실로 걸어갔다.



“해진 씨, 후우, 접니다. 지금 좀 만나야겠습니다.”

- 네? 지금요?

“예. 지금 당장 말입니다.”

- 무슨 일 있으세요? 괜찮으세요?



만나자면 만날 것이지 조그만 놈이 하여튼 말은 쓸데없이 많다. 환은 욕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눈가는 퀭하고 입술은 말라붙어 있었다. 고작 하루 만에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별일은 없습니다. 다만 만나야겠습니다.”



강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제 몸에 필요합니다. 러트 온 씨를 받아줄 당신 포궁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칼만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 아프신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정말로 귀찮은 오메가군. 환은 휴대폰을 내던지고 싶은 것을 참느라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숨이 몹시 찼다.



“해진 씨, 하아, 지금…….”

- 제가 일하는 중이라서……. 조금 이따 연락드릴게요. 죄송해요!



곤란한 어투로 말을 다다다 뱉어내더니 돌연 전화가 뚝 끊겼다. 환은 황당함에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한참 지나서야 휴대폰을 세면대 옆에 내려두고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강해진이 선물한 휴대폰 케이스의 강아지들이 저를 비웃는 듯했다.



“빌어먹을 놈이, 후우, 감히 내 전화를 먼저 끊고…….”



고작해야 제 아이를 낳는 것 말고는 쓸모도 없을 조그마한 놈이, 감히 제 전화를 먼저 끊었다는 데에 분노가 치솟았다.



‘당장 해결해야겠어. 이대로 계속 이놈에게 휘둘릴 순 없다.’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다. 그는 본래도 인내심이 그리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본래 성질대로라면 지금쯤 벌써 강해진을 임신시키고도 남았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제 성격으로 여태까지 비위 좋게 강해진에게 맞춰준 것만으로도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환은 정말로 그가 필요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 * *





해진은 오늘도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특별히 자기 기획서를 브리핑하기도 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칭찬도 잔뜩 받았다. 팀장은 해진을 보고 ‘그냥 네가 팀장 하라’는 농담까지 했다. 기분이 좋아진 해진은 팀원들에게 커피를 한 잔씩 돌렸다.



오후가 되었을 때, 졸음도 깰 겸 잠깐 쉬려고 복도로 나온 해진은 기겁하고야 말았다. 이환 전무가 복도 한가운데에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어? 환이 씨?”



환은 평소처럼 멀끔한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칼은 빗어 넘기다 말아서 흐트러져 있고, 넥타이도 없이 입은 와이셔츠는 구겨져 있었으며 안색도 파리했다.



“세상에. 얼굴이 왜 이래요? 괜찮아요?”

“……전화를 안 받으셔서 왔습니다.”



다가서려던 해진은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코를 찌르는 위스키 향 때문이었다.



‘알파 향이…….’



러트 기간이구나. 환의 체취는 평소보다 훨씬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아찔했다.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어 왔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늘 당당하고 멋있던 이환 전무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해진의 앞에서 살짝 달아오른 데다 엄청 퀭한 얼굴을 하고,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채로 서 있었다. 러트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다르게 보이게 하다니. 해진은 놀라기까지 했다.



“대체 제 전화는 왜 끊으신 겁니까.”

“그야 일하는 중이어서…….”



변명하는데, 순간 환의 갈색 눈이 사나운 기색을 띠었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해진은 처음 보았다. 제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뭐랄까, 아주 조급해 보였다. 심지어 숨까지 거칠게 몰아쉬고 있지 않은가.



러트란 곧 알파의 몸이 성적으로 흥분하는 시기이고, 그때 알파들이 인내심을 잃기도 한단 사실이야 당연히 해진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해진은 별생각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왼쪽 허벅지쯤을 보고 화들짝 시선을 떼었다. 잠깐 스치듯이 보았지만, 지나치게 커서 어색할 정도였지만, 분명 성기가 발기해 있었다. 세상에, 저게 뭐람. 저 모습을 하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해진 씨.”



정작 환은 자신의 발기한 성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해진은 주변을 살폈다. 그를 저 상태로 복도에 세워둘 순 없었다.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라 주변을 살피는 척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청소 도구들이 있는 창고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이, 일단 따라오세요.”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간 해진은 불을 켜고 문을 잠갔다. 좁은 공간에 그의 알파 향이 가득 찼다. 괜히 데리고 들어왔나, 잠깐 후회했지만 여기 말곤 눈을 피할 마땅한 곳이 없었다. 불뚝하게 선 성기의 윤곽이 어찌나 큰지 눈을 옆으로 돌려도 자꾸 보였다.



“저, 환이 씨, 환이 씨가 제 애인이고, 저한테 중요한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하는데 갑자기 찾아오시면 제가 곤란해요. 아무리 환이 씨가 제 상사나 비슷한 위치이시긴 하지만…….”

“강해진 씨.”



환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가뜩이나 좁은데 몸이 거의 맞닿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몹시 사나웠다. 늘 친절하기만 하던 이환이 아니었다. 해진은 그가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나 저…… 저 살짝 맛이 간 눈빛을 보면 말이다.



‘눈이 이상해……!’



마른침을 꾹 삼키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저, 환이 씨, 제가 보기엔 환이 씨가 지금 좀, 아니, 아주 많이 흥분하신 것 같아요. 일단 제가 러트 약을 사 올 테니까…….”



환이 그의 손목을 쥐었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힘이 너무 셌다. 아무리 봐도 이 눈동자는 진짜 맛이 간 눈동자였다. 이대로 있다간 무슨 일이라도…….



“제 아이를 낳아주십시오.”



환의 말과 함께 적막이 갑작스레 들어찼다. 해진은 그가 내뱉은 말을 곱씹느라 눈을 두 번 크게 깜박거렸다.



“제 정자로 해진 씨의 몸에 아이를 만들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니, 이건 명령입니다.”



해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람? 정자로 뭐? 와중에도 그의 눈빛은 지독히도 짙었다.



‘러트 때문에 그런 거야. 진심이 아니실 거야.’



민망함을 억누르며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꾹 밀어냈다. 그래도 환의 몸은 밀릴 기미조차 없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밀고 다가왔다.



“환이 씨, 일단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요.”

“지금 당장, 해진 씨의 몸에 제 정자를 넣어야겠습니다.”



보통 다른 알파들도 성적으로 끌린단 말을 이런 식으로 하나? 해진은 혼란스러웠다. 환은 막무가내였다. 이제는 아예 손을 제 와이셔츠 안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자, 잠깐만요!”

“거부하지 마십시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참았는지 아십니까?”



거친 숨결이 해진의 귓가를 자극했다. 환이 그의 몸을 상체로 짓누르고 씹어 삼킬 듯이 목을 애무했다.



“자, 잠깐, 환이 씨……!”



그가 돌연 해진의 턱을 쥐었다. 코끝이 맞닿았다. 화난 맹수 같은 눈동자가 눈앞에서 번뜩거렸다. 그야말로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난 짐승 같았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가만히 있어.”



방금 뭐라고……? 해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환이 자신을 협박했다니, 듣고도 믿기질 않았다. 하지만 턱을 쥐고 있는 손힘과 사나운 눈빛에서 매너나 다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해진의 목덜미를 탐했고, 해진은 애무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옆으로 손을 뻗어 더듬었다. 아무것이나 집히는 대로 쥐고 있는 힘껏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환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해진은 방금 그를 후려친 빗자루를 양손으로 고쳐 쥐었다.



“정신 차리세요! 저랑 아이를 만들고 싶으시다면 최소한의 예의와 순서를 지키시란 말이에요. 이건 성폭력이에요. 범죄라고요!”

“범죄?”



환이 엄지로 입가를 쓸었다. 늘 단정하던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고, 방금 해진에게 맞은 탓에 입가가 벌겠다. 입술에 피까지 맺힌 것을 보자 해진은 눈곱만큼 미안해졌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범죄죠! 제 동의도 없이 힘을 이용해서 몸을 맞대고! 애무하고! 그 매너 좋던 환이 씨가 갑자기 제게 성폭력을 행사하시다니, 정말 실망이네요!”

“지금 실망이라고 했나?”



환이 비죽이 웃었다.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리는 옆모습에 해진은 아주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빗자루를 더 꽉 움켜쥐었다.



“그래요! 실망이에요! 하다못해 우린 뽀뽀도 안 했는데! 어? 물론 제가 부끄러워서 피한 건 있지만! 여하튼! 러트가 그렇게 심하면 집에서 요양을 하셔야죠!”



우렁차게 또박또박 소리 질렀지만 환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다시 저를 향한 눈빛이 아까보다 한층 더 사나워서, 해진은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순서라.”



커다란 손이 해진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그렇게 순서를 챙기고 싶다면 순서대로 해주지.”



그리고 환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맞닿았다.



해진은 숨을 멈췄다. 입술을 파고드는 혀의 감촉이 낯설었다. 입속으로 파고든 혀가 치열을 훑었다. 사나운 동작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혀가 환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스치고 피 맛이 돌았다.



겨우 환을 밀친 해진은 들고 있던 빗자루로 다시 그를 후려쳤다. 그도 모자라 곧바로 뒤이어서 복부를 손잡이로 콱! 찔렀다.



“컥……!”



환의 허리가 훅 꺾였다. 그는 배와 허리를 짚은 채로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들고 해진을 노려보았다. 방금 자신이 해진에게서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신 좀 차리라고요!”



해진이 소리를 빽 질렀다. 환은 몸을 세우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완전히 맛이 가 있던 눈동자가 이제야 좀 제정신을 찾았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분노가 묻어났다.



“지금 날 때린 건가?”



짜증 섞인 물음에 해진은 다시 화가 났다. 동의도 없이 덮치려고 한 게 누군데. 심지어 여기는 회사라고! 빗자루를 있는 힘껏 휘두르자 환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 때렸다, 왜! 저 만나고 싶으면 정신 좀 차리고 오세요!”



환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해진은 얼른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냅다 사무실로 달렸다. 설마 일하는 책상까지 따라오진 않겠지.



“해진 씨? 무슨 일 있어?”



팀장이 물었지만 해진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유리벽 너머만 흘끔흘끔 보며 혹시라도 환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눈치만 봤다.



다행히도 그날 퇴근하기 전까지 환이 다시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날만은 말이다.





* * *





동의 없는 스킨십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해진은 솔직히 그가 좀 걱정되었다. 물론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이 가져오는 고통보다야 러트가 좀 덜하다고는 하지만 어제 봤던 환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많이 아프신 걸까…….’



심지어 그때 이후로 연락도 한 번 없었다. 창피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매너 좋은 환이 씨가 도대체 왜 그렇게 변했을까? 아무리 러트라곤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았어.’



그는 조심스레 휴대폰으로 ‘러트 증상’을 검색해보았다. 그러자 여러 가지 러트 증상이 검색 결과로 나왔다. 그중에는 ‘경미한 착란 증세’도 있었다. 알파 중에서 무려 1퍼센트나 이 증상을 느낀다고 하니 꽤 큰 비율이었다.



해진은 사실, 조금 상처받았다. 언제나 매너 좋고 다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렇게 돌변해서 제게 덤벼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놀란 마음은 그대로 충격과 상처가 되었다.



“휴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다음 날, 해진은 퇴근하자마자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찾아가는 데에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전날 그가 제게 덤벼들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그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했다.



정작 문을 두드렸을 때, 이환은 화가 난 듯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뭡니까?”



‘안녕하세요.’도 아니고 ‘웬일이십니까?’도 아니고 ‘뭡니까?’라니. 해진은 하도 황당해서 하마터면 또 한 대 그를 칠 뻔했다.



“이야기 좀 해요.”



화를 억누르며 말하자 환이 들어오란 투로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환의 집에는 온통 위스키 향이 꽉 차 있었다. 어찌나 독한지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해진은 그 자극적인 향에 코를 살짝 가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환은 그에게 차를 권하거나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해진은 속이 상했지만, 그의 모습이 하도 엉망이어서 원망할 수도 없었다. 말끔하고 빈틈없던 평소 모습은 어디 가고, 머리칼은 다 헝클어졌으며 눈 밑이 시커멨다.



조심스레 소파 끝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해진은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환은 표정을 굳히고 있지만, 그답지 않게 불안해 보였다.



“환이 씨가 어제 말씀하신 것 말이에요, 아이를 낳자는 이야기요.”



어렵사리 입을 열었으나 환은 선 채로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조금 무서웠지만, 해진은 용기를 내었다. 어제처럼 또 덤벼들면 주먹으로 때리지 뭐.



“물론 진심이 아니신 걸 알아요. 환이 씨가 그런 말을 하실 분이 아니란 사실도 알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 환이 씨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진심입니다.”



끼어든 환의 목소리에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환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이 거칠어 보였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하지만, 그건 제 진심입니다. 저번에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어제도.”



긴장감 때문인지 입이 말라왔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저는 해진 씨와 아이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니, 해진 씨가 낳을 제 아이가 필요합니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 걸까? 그리 생각하기에는 환의 표정이 하도 올곧았다.



“하지만…….”

“그러니 이제 더 미루지 말고 할 일을 합시다.”



할 일이라면 그렇고 그런 걸 뜻하는 건가? 해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역시 이환과 이런저런 스킨십을 해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아이라니, 임신이라니! 달콤하고 꿈결 같은 첫날밤을 꿈꿨는데.



“저랑 사랑을 나누고 싶으신 거예요, 아이를 만들고 싶으신 거예요?”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차라리 대답하지 않길 바랐다. 그러면 멋대로 생각할 수라도 있으니까.



“……그 두 가지의 차이점은 무엇이지요?”



그러나 환은 퀭한 눈에 의문을 담고 되물었다. 기가 찼다. 몸에 힘이 빠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이것도 러트 때문인가?



“혹시…… 아이를 만들려고 저랑 만난 거예요?”

“말이 빨리 통해서 좋군요.”

“환이 씨…….”



어안이 벙벙했다. 제 앞에 앉은 남자가 정말 이환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환이 튼 입술을 혀로 핥고는 조급함이 묻어나는 투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저는 러트 중이며, 강해진 씨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자극이 됩니다. 솔직히 참기가 힘들군요.”



‘큰 자극’이라는 말에 해진은 저도 모르게 이환의 다리 사이를 슬쩍 보았다. 허벅지 한쪽이 어마어마하게 불룩했다. 도저히 못 본 척을 할 수 없는 크기지만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선택을 하십시오. 저와 이 자리에서 아이를 만들 것인지, 다음 기회에 하실 것인지.”

“제가 준비되면, 아니, 제가 원할 때 진도를 나간다는 선택지는 없나요?”



환은 대답하지 않았고, 외려 무슨 말이냐는 투로 빤히 마주 보았다. 해진은 어이가 없어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신다는 뜻입니까?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미루죠.”



심지어 한술 더 뜬다. 어제처럼 환이 제게 덤벼들까 봐 가방을 가슴 앞으로 가리고 문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정작 환은 덤덤하게, 그러나 며칠 사이에 피폐해진 얼굴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이 척척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아무래도 우리, 환이 씨의 러트가 끝난 뒤에 만나는 것이 좋겠네요.”



그래, 다 러트 때문이다. 해진은 그리 생각하며 문을 나섰다. 밖으로 두 발을 내딛자마자 쾅, 하고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상처 입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다스렸다.





* * *





환의 러트는 일주일가량 지난 뒤 끝났다. 해진은 주말에 혼자 집에서 여행 에세이를 읽다가 그의 전화를 받았다.



- 해진 씨,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배우처럼 멋진 목소리. 해진은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상처가 나은 것만 같았다.



해진은 그가 제게 사과하리라고 생각했다. 무례하게 추행하고 아이를 낳아달라는 헛소리를 한 데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데이트 요청을 받아들였다. 진지하게 사과한다면 용서할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다시 만난 날에 환은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거대한 꽃다발까지 들고 왔다. 해진은 자기 상체만 한 꽃다발을 받으며 무척 감동했다.



“너무 예뻐요! 베고니아는 먹을 수도 있어서 조난 상황에 아주 유용한 꽃이에요! 피로도 회복시켜 주고, 염증에도 좋거든요.”



커다란 베고니아꽃에 코를 파묻은 해진이 신이 나서 말했다. 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이전처럼 너무나 근사했기에 해진은 안심했다.



“저, 일전에는 제가 조금 성급했습니다. 해진 씨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정중했다.



“아니에요. 그냥 러트가 너무 심하셔서 그런 건데요, 뭐. 다음부터 조심해주세요.”



물론 두 번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환이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이를 낳아주시는 대신, 해진 씨께 적절한 보상을 드리고자 합니다.”



뒤이은 말에 해진은 굳고야 말았다.



“……네……?”

“원하시는 게 있으시거든 편히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맞춰드리죠.”



마음이 쿡쿡 아렸다. 제게 이렇게 대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람 많은 카페에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행여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까, 환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평소보다 오히려 더 다정해 보였다. 그래서 해진은 더 상처를 받았다. 왜, 평소와 같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여태까지 다정했던 것도 다 가짜였을까?



“도대체 환이 씨는 우리가 무슨 관계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울음을 참고 묻자 이환은 당황한 듯이 미간을 구겼다.



“그야, 저와 강해진 씨는 아주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환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목을 붙든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달래는 듯한 얼굴이었다.



“해진 씨는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니, 원하신다면 혼인 신고부터 진행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모두 맞춰드리죠. 아이만 낳아주십시오.”



항상 순하고 착하다는 평가만 듣고 살아온 해진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손목을 거세게 뿌리치고 일어섰다. 이환의 당황한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니 새끼는 너 혼자 낳아라, 이 미친놈아!”



들고 있던 베고니아 꽃다발을 잘난 면상에 던져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간 그는 씩씩거리며 거리를 빠져나갔다.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버스 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한참을 걷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페 건물이 작게 보였지만 여전히 이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오래 걸으면 숨이 차고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이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태워준다는 말 한 마디도 않았다. 떠올려보니 오늘 그가 제게 한 말 중에는 사과 비슷한 것도 없었다. 애초에 사과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잡지도 않냐…….”



설움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자꾸 났다. 흐릿해지는 눈가를 주먹으로 연신 훔쳤다.



“나쁜 새끼.”



결론은 그것이었다. 이환은 사실 나쁜 새끼였다. 섹스 때문에 저를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바보 같은 제 잘못이 제일 컸다.



멍청한 강해진 같으니라고. 해진은 스스로를 꾸짖고 또 꾸짖었다. 그럴수록 마음의 상처는 더 커졌다.





17퍼센트





카페에서 개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그날과 그 이튿날에 연달아 환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해진은 일방적으로 받지 않았다. 받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상담이라도 받고 싶지만 그럴 수조차 없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키스틸의 이환 전무가 자기한테 다짜고짜 애를 낳아달라고 했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나도 실감이 안 나는데, 뭐.’



해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누렇게 바래고 얼룩진 원룸 천장이 원망스러워 보였다. 병가를 내고 집에 틀어박혔지만 내일은 또 일을 하러 가야 했다. 그러나 해진은 일상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진은 환이 좋았다. 그의 근사한 미소도 좋고, 저를 보는 갈색 눈동자도 좋고, 그에게서 풍기는 부드러운 향수 냄새도 좋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서러워졌다. 마음은 잘못이 없는데.



“아아…….”



베개를 얼굴 위에 얹고 의미 없는 소리를 내던 중, 머리맡에 놔둔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혹시라도 업무 관련 내용일까 봐 슬쩍 액정화면을 확인했다. 이환 전무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일 제 사무실로 오십시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듯합니다. 다시 설명할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얼굴이 연상되는, 반듯한 문장들을 보며 해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다가 ‘확인’ 버튼 앞에서 멈칫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까?’



아이를 낳자고 하는 것도,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섹스가 아니라 자꾸 아이를 낳자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다.



‘그래, 일단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



한 번 정도는 더 이야기를 들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환과 이렇게 관계를 끝내기 싫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겨버렸다. 하지만……. 해진은 답장 버튼을 눌렀다.



[나중에 제가 연락드릴게요.]



메시지를 보내 놓고 불을 껐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내가 환이 씨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



사실 이환이라는 사람은 다정하지도, 매너 있지도 않고 그냥 좀 많이 이상한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애인 사이라도 다짜고짜 애부터 낳아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러트 때야 잠깐 정신이 나간 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해진은 몸이 약하고 아직 나이도 젊은 편이었지만, 오랫동안 혼자 산 탓에 눈치는 조금 있는 편이었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탐험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존본능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믿고 있었다.



마치 짐승에 비견할 만한 자신의 생존본능은 끝없이 말하고 있었다. 이환을 피하라고. 이환은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나는 환이 씨가 싫지 않은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환이 좋았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살아온 해진이었다. 친구 말고 알파로서 저를 그렇게 대한 사람은 이환이 처음이었다. 한 알파의 오메가 짝으로 데이트를 한 것도 처음이고 말이다. 그가 보여준 다정함에 더 의지하고 싶은데, 이제 와서 경고를 보내는 제 본능이 밉기까지 했다.



심지어 해진은, 그가 그토록 아이를 원한다면 낳아줄 의향까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무언가가 끝없이 해진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와 자는 순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허엉…….”



생각을 잠깐이라도 멈추고 싶었다. 우는소리를 내며 베개에 고개를 묻었지만 이환의 잘생긴 얼굴이 자꾸 눈앞에 동동 떠다녔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이 끝없이 싸우고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침대 위에서 헤엄치듯 허우적거리던 중,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친구 경훈이었다. 이불을 차며 일어나 스탠드 불을 켰다.



“야, 너 오랜만인 것 같다?”



오랜만의 통화인데 경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휴대폰을 반대쪽 손으로 옮겨 쥐었다.



- 해진아.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 나 갑자기 미국으로 발령이 났어.

“뭐?”



하나밖에 없는 친구 놈이 갑자기 외국으로 간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해진과 달리 그에게는 오래 만난 여자친구도 있었다. 놔두고 멀리 떠나야 하니 마음이 영 안 좋겠지.



“지금 만날까? 술이나 사줄게.”



해진은 대충 옷을 껴입고 경훈이 사는 동네까지 찾아갔다. 경훈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술을 따라주는 동안에도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게 아닌가.



“여자친구한테도 할 말이 없다, 진짜. 걔도 회사 다니니까 같이 가자고도 못 하고.”

“진짜 어떡하냐……. 인사팀이랑 이야기는 해봤어?”

“해봤지. 근데 막무가내야. 윗선에서 다 결정났나 봐.”



경훈이 마른세수를 하고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해진은 그의 빈 잔에 술을 반만 따라 주었다.



“천천히 마셔. 근데 너는 발령 안 나는 부서 아니었어? 갑자기 무슨 일이래? 윤경훈 일 잘한다고 소문나서 갑자기 일복 터진 건 아니고?”

“그러면 다행이게? 그게, 여러 가지로 복잡해.”



안주로 나온 야채 튀김을 조금씩 갉아 먹으며 해진은 경훈이 말을 잇길 기다렸다.



“갑자기 우리 회사 주인이 바뀌었거든. 일방적으로 매각이 되었다나 봐. 나야 경영 쪽은 잘 모르는데, 들어보니 뭐 막을 수도 없었던 모양이더라고.”

“세상에…….”

“그러더니 우리 부서 간부들도 바뀌고, 나도 영 알지도 못하는 부서로 배치된 거야.”



술을 단번에 들이켠 경훈이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나더러 미국으로 가라고 하네. 황당하지 않냐?”



억울해하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해진도 화가 치솟았다. 불의를 보면 언제나 참기 힘들던 해진이었다. 갉아 먹던 야채 튀김을 앞접시에 내던지며 핏대를 세웠다.



“야, 진짜 너무한다! 그런 경우가 어디 있냐?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렇게 개판으로 운영을 하는 건데? 너네 회사 먹은 데가 어딘데?”



경훈이 자작을 하며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키스틸 레저라고 하더라.”



친구의 대답에 해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 TV에 자주 나오는 그, 이환 전무 알지?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합병 추진했다던데. 나 미국으로 발령 배치한 것도 그 인간이라고 하더라. 대체 뭘 믿고 날 배치한 건지 모르겠어. 내 경력 보면 그럴 수가 없는데.”



경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씹어 먹던 야채 튀김이 속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왜 하필이면 그일까. 왜 하필이면 자신의 유일한 친구에게……. 겹친 우연에 소름이 끼치는 듯했다.



“씨발, 나 토익도 400점대인데…….”



중얼거리는 경훈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저 우연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미적지근하게 켕기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해진은 남은 야채 튀김을 다시 갉아 먹기 시작했으나,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새 상품 개발 시즌이 맞물려서 회사에서는 복잡한 생각을 이을 새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기획서를 뜯어고치느라 정신이 없어 이환에 대한 생각도, 경훈에 대한 걱정도 출근한 동안에는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퇴근하면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처럼 환을 마냥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확실히 이별을 고하든지, 아니면 대체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어서 애를 낳아달라고 하는지 들어보든지. 그리고…… 하필이면 하나뿐인 제 친구, 경훈을 미국으로 발령시킨 이유는 뭔지.



한숨을 푹 내쉰 해진은 원룸 근처 편의점에서 콜라 1.25리터짜리를 하나 샀다. 보통 사람이라면 맥주캔을 사겠지만, 그는 몸이 약해서 술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콜라를 마시면 조금 취하는 기분이 들었기에,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커다란 페트병을 옆구리에 끼고 빌라 건물로 들어가려던 중, 해진은 문득 남자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어쩐지 얼굴이 좀 익숙했다.



‘저 사람, 예전에 봤던 세큐리티 업체 사람 같은데…….’



아니겠지. 착각일 것이다. 애써 고개를 가로젓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끝낸 해진은 좋아하는 탐험 프로그램을 보며 콜라를 배부를 때까지 마셨다. 카페인이 들어가자 조금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힘든 환경 속에서 열심히 탐험하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페트병을 삼분의 일 정도 비웠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이환인가, 긴장했는데 그가 아니라 집주인이었다.



‘엥? 방세도 제때 냈고, 집에 이상도 없는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 건물이 통째로 넘어가게 되어서요. 허물고 거기다 다른 걸 짓는다나 뭐라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럼 저는 어떡해요?”

- 미안하게 됐어요.



쉽게 말해 당장 방을 빼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집주인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동산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집주인 역시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듯했다.



당장 방을 구하는 것도 문제고, 이사 비용이나 기타 여러 가지 걸리는 게 많았다. 가뜩이나 요즘 일이 바쁜 시즌이라서 집을 보러 다닐 시간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족이나 친척이 있다면 잠깐 얹혀살겠지만 말이다. 유일하게 있는 친구 경훈도 여자친구 명의로 된 집에서 동거 중이라 신세를 지기가 면구스러웠다. 게다가 녀석의 상황도 상황이니.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이 실감 나자 갑자기 해진은 조금 서러워졌다. 나름대로 씩씩하게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하나 없다는 게 쬐끔 슬펐다. 페트병을 손에 들고 그대로 벌컥벌컥 콜라를 들이켰다.



“이게 웬 날벼락이야…….”



부동산 어플을 켜서 이리저리 살펴보던 해진은 한숨을 푹 쉬고 휴대폰을 내던졌다. 일단 당장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 잠부터 자야 했다.



침대를 정돈하며 가글을 하던 해진은 문득 든 한 가지 생각에 잠깐 굳었다.



‘환이 씨가 오피스텔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며칠 전에 바에서 갇힐 뻔한 때 말이다. 그때 환이 자기 소유 오피스텔로 들어오라고 했었지. 하필 시기가 공교롭게 맞물린 게 영 희한했다. 지금 원룸보다 훨씬 넓고 시설도 좋다고 했지. 하지만 우연이 겹쳤을 뿐이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해진은 가글을 뱉었다.



손을 씻고 나온 해진은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환이었다. 메시지도 하나 와 있었다.



[갈 곳이 없으실 텐데, 그냥 제 오피스텔로 들어오시죠. 이사는 내일 출근해 계시는 동안 해놓으라고 하겠습니다.]



경악하며 휴대폰을 내던졌다.



“어, 어떻게 알았지?



설마 우연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문득 든 생각에 집주인에게 다급히 전화했다. 신호음을 기다리는 동안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입속으로 되새기면서도 깊은 본능이 경고음을 빽빽 울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집주인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 어, 그 뭐야, 키스틸 레저라고, 여행사에서 매입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총각도 여행사 다닌다고 했었지? ……여보세요?



인사하는 것도 잊고 그대로 휴대폰을 떨구었다. 해진의 시선은 마룻바닥에 꽝꽝 소리 내며 떨어진 휴대폰을 보는 대신 허공을 멍하니 향했다.



‘환이 씨가 나를 내쫓았다고……?’



설마. 아니겠지. 아니야. 아무리 환이 씨가 좀 미친 것 같기는 해도, 이 정도로 상식이 없지는 않을 거야. 키스틸 레저의 다른 사람이 한 일이겠지. 하지만 이환이 총책임자고…… 내가 이 건물에 사는 걸 뻔히 알잖아?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쫓겨날 상황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이야?



휴대폰을 도로 집었다. 이환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해진은 누운 채로 그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봐도 글자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휴대폰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 잠이 오지 않아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의 탐험가다운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미 범의 아가리 속에 들어와 있으니, 포기하라고.





다음 날, 해진은 일단 평소처럼 출근했다. 다시 몇 번이나 환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고 해도 설마 내 동의 없이 멋대로 짐을 옮기진 않겠지…….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 귀가한 해진을 맞은 것은 텅 빈 집이었다.



“이게 무슨…….”



도어록 비밀번호도 안 알려줬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치솟는 화를 겨우 다스리며 이환에게 전화하려는데, 텅 빈 원룸 창문 너머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보자 이환이 밖에 차를 대고 서 있었다. 저기는 주차 금지 구역인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미치셨어요!”



창문을 활짝 열고 빽 소리를 질렀다. 해진의 고함 소리가 빌라 건물 사이로 쩌렁쩌렁 울렸다. 정작 이환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삐딱한 자세로 서서는 가까이 오란 손짓을 했다.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검지를 까딱까딱하는 동작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팔을 걷고 씩씩거리며 뛰어 내려갔다. 미친놈 아니냐고,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쏘아붙이려던 해진은 환의 얼굴을 마주하자 말문이 막혔다.



“저와 함께 가시죠.”



손을 내밀어 보이는 이환은 재수가 없을 정도로 멋있었다. 핏이 완벽한 정장을 빼입은 모습이 오늘따라 더더욱 잘생겨 보였다. 해진은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어금니만 바득바득 깨물었다. 제 억울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환은 그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눈썹을 한 번 꿈틀하더니 더 재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곳에 계속 계시면 제 사유지를 무단점거하고 계신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니 제 말을 들으세요.”

“도대체…….”



체한 듯이 명치가 갑갑했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환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얼핏 평소와 비슷해 보이지만, 해진은 이번에는 한 가지를 더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집착이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강해진 씨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는데, 그의 무례함에 대한 화보다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화가 더 컸다.



허무함으로 몸에 힘이 빠졌다. 해진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흐어엉…….”



경악에 가까운 황당함과 놀란 마음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이 미친놈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해진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일어나십시오, 해진 씨. 이렇게 우신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진 않습니다.”



이환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조는 이전처럼 다정하기 그지없는데, 눈빛이 이상했다. 정말 미친놈 같은 눈빛이었다.



“어차피 당신은 저를 못 벗어납니다. 포기하고 이만 제 손을 잡으세요.”



뒤이은 말에 다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해진은 그대로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는 척했다가, 앉아 있던 다리를 냅다 뻗어 그의 발목을 찼다.



“컥……!”



그가 고꾸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뒤도 보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어두운 골목이 무서웠지만 해진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 알파에게서 최대한 도망치라고. 지금 잡히면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강해진 씨!”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해진은 더 속도를 내서 달렸다. 심장과 폐가 약해서 이렇게 격하게 달려서는 안 되는데도 그에게 잡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 역시 해진이 가진 본능에 의한 판단이었다.



‘내가 순순히 잡힐까 봐?’



누구보다 더 위험에 대비된 해진이었다. 상대는 저보다 우월한 알파지만 어둠을 이용하면 따돌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는 가장 어두운 골목으로 내달렸다. 이환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려왔다.



다행인 점이라면 이 동네 지리를 이환보다 더 잘 안다는 점이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복잡하게 달리고 있자니 어느새 제 등 뒤로 따라오는 이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해진은 멈추지 않았다. 지쳐서 더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마침내 그가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확신하고서야 해진은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허억, 헉…….”



어릴 때부터 격한 운동은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놀란 몸이 경련하듯 들썩거리고 가슴과 옆구리가 지독히 아팠다. 혹시라도 그가 따라오지는 않았을지, 주변을 한참 살피고서야 해진은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흑…….”



숨이 조금 제 속도를 찾고 나자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해진은 서러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깊이 마음을 주었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족처럼 의지해도 되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는데.



건물 사이로 파고든 어둠이 낯설었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라도 이환이 주변을 탐색할까 싶어, 해진은 건물 속으로 들어가 층계참에 서서 기다렸다. 휴대폰은 껐다.



그리곤 약 20분이 지난 뒤에야 조심스레 건물을 나왔다. 혹시라도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선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지…….’



그는 조난 상황에 대한 정보는 빠삭하게 통달했지만, 도시 안에서 사람에게 쫓길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특히나 제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떼쓰는 알파에게서 도망치는 법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지갑과 휴대폰, 보조배터리는 있어 다행이었다. 내일은 평일이고, 이런 일이 생겼어도 일단 출근은 해야 하니 어느 곳에서든 잠을 자야 했다.



해진은 가장 가까운 찜질방으로 갔다. 수면실에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질 않아 고생했다. 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이환의 얼굴이 눈앞에 동동 떠다녔다.



더 억울한 점은 이런 꼴을 당하고도 이환의 잘생긴 얼굴이 밉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딴 미친놈에게 홀랑 반한 것 같은데, 벗어날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일단 내일 생각하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당장 중요한 건 내일 출근이니까.





다음 날 해진은 입었던 정장 그대로 출근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개인적인 연애사 때문에 일에 지장이 가는 것은 프로답지 못한 일이니까. 회의 시간에는 열정적으로 의견을 냈고, 팀원들 커피 심부름도 했다. 옷을 갈아입지 못해서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었을 때였다. 어딘가 다녀온 팀장이 아주 면구스러운 얼굴을 하고 해진의 자리로 다가왔다.



“저, 해진 씨, 급하게 출장 좀 가줘야겠는데.”

“출장이요? 저 곧 미팅 나가야 하잖아요.”

“윤희 씨가 대신 갔다 올 거야. 출장부터 갔다 와. 급한 일이라면서 해진 씨를 딱 지목했어.”



하는 수 없이 파일을 급하게 백업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저 어디로 가요?”

“키스틸 레저 본사.”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데이트는 항상 밖에서 했으니 그가 일하는 전무실에 찾아간 것은 처음이었다. 이환의 전무실은 그의 오피스텔만큼이나 깔끔했다. 먼지 한 톨 없어 보여서 발 딛기가 면구스러울 정도였다.



“앉으시죠, 해진 씨.”



소파에 어색하게 앉는 동안 환이 커피를 내렸다. 고소한 커피 향이 전무실 가득 퍼졌다. 해진은 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설탕 필요하십니까?”

“아뇨.”



커피잔을 테이블에 둔 환이 넥타이를 손으로 정리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벽 한쪽을 차지하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게 검고 흰 네모만 가득했다.



“제가 설명을 미처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습니다.”

“……무슨 설명이요?”



환이 자세를 고쳤다. 그의 얼굴이 멀쩡해 보여서 사실 해진은 조금 서운했다. 저는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저는 해진 씨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아, 그러세요?”

“그리고 제가 원하는 바를 해진 씨가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시는 분이니까요.”



반들반들한 이마가 환한 불빛에 반사되었다. 해진은 그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원하는 바라고 하시면…… 아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다시 한숨이 나왔다. 해진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생각한 제가 바보였지. 환은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마치 정말로 거래처를 대하는 듯이 말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죠. 해진 씨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편히 말씀하시면…….”

“환이 씨.”



해진이 그의 말을 끊었다.



“지금은 오후 한 시예요. 적어도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니에요?”



그러나 환은 외려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투로 그 잘난 눈썹을 들어 보였다.



“밥은 드셨습니까?”



한숨이 나왔다. 환에게보다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났다. 도대체 난 이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쿡쿡 쑤시는 통증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아이가 왜 필요한데요? 그것부터 좀 설명해주세요.”



묻고 싶은 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제일 궁금한 건 그것이었다. 환은 미간을 조금 구기며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설명 드리기가 곤란하군요.”

“저보고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시면서, 이유는 말 못 하겠다는 건가요?”

“연인 사이에 모든 것을 다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해진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알지 못하는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최대한 그에게 맞춰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보장해드리죠.”



그래, 어디까지 하나 들어는 보자 싶어서 해진은 고개를 들고 그를 마주 보았다.



“……뭘 보장하는데요?”

“아이만 낳아주신다면,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이 다시 쑤셨다.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이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 없는 해진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연인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요구나 조건 같은 것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란 말이다.



마른세수를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모금도 대지 않고 식어가는 커피잔에는 불빛이 동그랗게 앉아 있었다. 단것을 잘 못 먹는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도, 그는 제게 설탕을 넣을 거냐고 물어봤다.



“제가 싫다면요?”

“좋아하실 만한 제안을 드려야겠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조건은 최대한 맞추어서…….”

“됐어요.”



해진이 커피잔을 들었다. 아직 뜨거웠지만 벌컥벌컥 들이켜고 챙강, 소리 나게 내려두었다.



“환이 씨, 아니, 전무님. 저는 당신의 아이를 낳기 싫습니다.”



환의 잘난 눈썹이 한 번 꿈틀, 했다. 맨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해진은 아주 조금 그가 두려웠지만, 티가 나지 않도록 애써 표정을 굳힌 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연인도 그만하고 싶습니다.”



환의 눈이 커졌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해진은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환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사과를 하더라도 절대 받지 않아야지, 꾹꾹 다짐하는데 웬걸, 돌려세우는 손짓이 거칠었다.



“어딜 갑니까? 제 이야기 안 끝났습니다.”



뭐 이런……. 해진은 제 성격이 조금만 더 불같았다면 필경 그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었으리라 믿었다.



“제가 편의를 봐드릴 때 받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강해진 씨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편의요?”



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중에도 그의 모습이, 손짓이 우아해 보여서 해진은 억울했다. 차라리 미워 보인다면 나았을 텐데.



제 흔들리는 마음을 알았을까. 환이 어깨를 붙든 손을 부드럽게 팔뚝으로 쓸어내렸다.



“강해진 씨, 이것만 미리 알려드리고 싶군요. 저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손길이 하도 다정해서, 해진의 화가 어느새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리고 지금 저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당신이 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반발하려던 해진이 입을 다물었다. 팔뚝을 타고 손목까지 내려온 손길 때문이었다.



“저는 정말로 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아주 절실하게요.”



그의 저음이 하도 진지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졌다. 해진은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가, 어렵사리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 아이가 필요하신 거잖아요…….”



자신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 필요한 거겠지. 그가 미웠다. 화도 났다. 뿌리치고 나가면 될 텐데, 그런데 왜 그럴 수가 없을까.



손목으로 내려온 환의 손가락이 그의 손바닥을 살짝 건드렸다. 그저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 찌릿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모두 해드릴 수는 없지만, 저는 해진 씨를 해치려고 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손바닥을 건드리던 손끝은 그대로 벌어져 이번에는 해진의 손을 깍지 껴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주는가 싶더니 해진의 몸이 휘청거리며 끌려갔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꼭 키스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해진은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내가 정말로 당신을 해치려 들기 전에, 내 말을 들으란 말이야.”



코앞에서 숨결과 함께 속삭인 말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이전처럼 그를 후려치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무서워……!’



오늘 이환은, 정말로 무서웠다. 러트 때보다도 더. 그때는 제정신이 아닌 티가 났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환은 맨정신으로 제게 협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멀쩡하게 제정신인 이환이 이렇게 포악하고 위협적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등줄기에 식은땀이 서늘하게 흘렀다. 머리털이 비명을 지르듯 곤두섰다. 그의 생존본능 역시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환이 그의 턱을 쥐고 얼굴을 들게 했다. 키 차이가 실감 났다.



“나는 인내심이 본래 부족한 사람입니다. 당신에 한해서 많이 참았단 사실을 알려드리죠. 더 시간을 끌다가는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 더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눈앞에서 맹수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이런 기분일까. 말문도 막힌 채 해진은 그저 눈만 겨우 깜박였다. 코앞의 이환은 표정 없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꼭 먹잇감의 상태를 살피는 것처럼.



“선택하십시오. 돈을 받고 내 요구를 들어줄 겁니까, 아니면 내 인내심을 바닥나게 만들 겁니까?”



선택의 여지는 사실 없었다. 겨우 입술을 떼었다.



“……돈, 얼마 줄 건데요?”



눈앞에 있는 짐승의 얼굴이 비죽이 뒤틀렸다. 오늘 처음으로 감정을 보이는 듯했다.



“제 조건 맞춰준다면서요. 일단 그쪽에서 먼저 제시해보시든가요.”



해진은 말을 내뱉어 놓고 잠깐 후회했다.



‘너무 나갔나?’



하지만 어차피 저쪽도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라고 헛소리를 못 할 건 없단 생각이 들었다. 돈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니 얼마를 제시할지도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환은 입술을 비틀어 웃은 채로 해진을 놓아주었다. 숙였던 상체가 물러나자 해진의 숨통이 겨우 트였다.



그는 집무실 한편의 찬장 문을 열고 위스키병과 잔을 꺼냈다. 술을 따르자마자 단숨에 들이켜는 그의 옆모습을 해진이 말없이 지켜보았다. 구김 하나 없이 완벽한 매무새의 와이셔츠와 넥타이, 목 끝까지 채운 단추와 커프스는 금욕적이지만 술을 삼키느라 크게 꿀렁거리는 목울대는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탁, 소리와 함께 빈 잔이 책상 위에 놓였다. 환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서 해진을 마주했다.



“임신 진단을 받으면 10억, 출산 후 40억을 드리죠.”



해진의 눈이 저도 모르게 커졌다. 도합 50억. 어마어마한 숫자다.



“……제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죠? 정말 주실 건가요?”

“강해진 씨께서 동의하신다면 계약서를 작성할 겁니다.”



아이를 낳는 대가로 금전을 지불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지만 그래도 해진으로서는 믿기가 힘든 금액이었다. 그가 부른 금액은 전세 대출금을 일시에 갚고도 한참 남았다. 아니, 전세는 무슨, 평생 써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딱 한 가지, 해진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그는 자주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하루는 의사가 그에게 말했다.



‘기능에는 이상이 없습니다만……. 아마 임신이 거의 힘들 겁니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겠군요. 행여 임신에 성공하더라도 유산 확률이 높을 겁니다.’



당시 해진은 의사의 그 말에도 딱히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어차피 몸에서 제 기능을 하는 곳이 별로 없는데,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딱히 충격받을 이유도 없었다.



그 사실이 이렇게 뒤늦게, 아주 뜬금없는 상황에서 제 발목을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해진은 제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을 굳혔다.



“한 번 자는 데에 10억, 그리고 출산 후 50억은 어떤가요?”



이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즐겁다는 투였다.



“섹스는 세 번, 회당 10억, 강해진 씨의 히트사이클과 저의 러트 각각 한 번씩, 그리고 히트사이클과 러트가 겹치는 때 한 번, 도합 세 번으로 하죠. 그리고 출산 후 20억을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의 흥정은 힘듭니다.”



해진은 생각을 잇는 척하며 턱을 쥐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30억을 받고 그대로 튀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하죠.”



대답하자 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해진은 무언가 이상하다 여겼다.



‘만약 세 번 했는데 임신이 안 되면 어쩌지?’



뭐, 어차피 잠만 세 번 자고 튈 생각이니 오히려 제게는 좋은 조건이지만.



“계약서가 준비되면 연락드리죠.”

“대신 섹스 전에는 저와 합의를 해주세요.”



한 마디를 얼른 덧붙였다. 그가 여태 보여온 태도를 보면 꼭 붙여야 할 조건이었다. 환은 미간을 설핏 구겼다. 모르긴 몰라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 정도 배려는 해주시리라 생각해요.”



이제는 그의 연인도 뭐도 아닌 이상한 관계가 되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 배려는 해주겠지. 다행히도 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기꺼이 베푼다는 듯한 투였다.



“뭐, 그렇게 하지요.”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해준다는 듯이 턱을 쳐들고 선언한 이환은 척척 걸어와 해진을 지나쳐 전무실 문을 열어 보였다. 이만 꺼지라는 뜻이렷다.



해진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렸다. 하루 전만 해도, 아니,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제 연인이었다.



“계약서가 준비되면 바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제 앞에서 계약서를 운운하고 있다. 심지어 아이를 대가로 돈을 준다는 내용의 계약서.



‘혹시 애초에 저를 만난 게 이것 때문이에요? 맨 처음에 엄마 거울 돌려준다며 만나자고 했던 것도요?’



묻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해진은 브리프케이스 손잡이를 꾹 쥐며 회사에 돌아가서 팀장에게 외근 보고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 참.”



문이 한 뼘 정도 열렸을 때 그가 해진을 불렀다.



“앞으로 강해진 씨는 저와 함께 생활하게 되실 겁니다.”



하마터면 얼굴이라도 후려칠 뻔했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지내시던 곳이 그렇게 되었으니.”



문이 코앞에서 닫히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리했을 터다. 대신 해진은 닫힌 문을 있는 힘껏 발로 찼다. 쾅! 소리는 경쾌했지만 뒤이어 발에 어마어마한 통증이 찾아와 후회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개새끼…….’



그랬다. 이환은 개새끼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다정하고 매너 있는 알파가 이렇게 미친놈일 줄이야.



“강해진 씨, 저희를 따라와 주십시오.”



복도에 서 있던 시커먼 남자 하나가 해진에게 말했다. 해진의 덩치 두 배는 될 법한, 꼭 조폭 같은 생김새였다.



“저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데요. 데려다주실 건가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해진을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해진은 얌전히 그를 따라가는 수밖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뭐, 어차피 도망칠 생각도 없기는 했다.





시커먼 남자가 해진을 데리고 간 곳은 키스텔 레저 소유의 호텔이었다. 해진도 와본 적이 있는 곳이지만 업무상으로 딱 한 번 와보았고, 그땐 팀원들과 함께 이곳 회의실에서 키스틸의 부장과 미팅을 한 게 다였다.



엘리베이터가 한참을 올라갔다. 해진은 바깥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바깥으로 내려다보이는 서울 시가지가 아득했다. 그는 와중에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멈췄을 때의 대처법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내리시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둑한 복도가 드러났고, 그 앞에는 제법 커 보이는 문이 하나 있었다. 시커먼 남자가 해진에게 말없이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해진은 얼떨결에 받아 들었고, 남자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도로 닫히기 시작할 때 이 카드가 저 문을 여는 카드키란 사실을 깨달았다.



방은 정갈하고 몹시 넓었다. 아니, 방이라고 부르기가 면구스러울 정도였다.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은 바닥에 대리석이 깔린 거실이었다.



‘와, 뭐야.’



함께 지내게 될 거라 해서 그때 보았던 이환의 집에서 살겠거니 생각했는데, 여긴 이환의 집보다 몇 배는 더 넓어 보였다. 물론 그의 집도 으리으리했지만.



해진은 거실에 놓인 검은 소파 위에 슬쩍 걸터앉았다. 가구도 죄다 새것으로 보여서 엉덩이를 대고 앉기가 면구스러웠다.



“휴…….”



앉고 보니 지금 상황이 조금 실감 났다. 아깐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말했을까? 그리고 뒤늦게 걱정도 되었다. 임신을 하기 힘든 몸이란 사실을 들키면 어떡하나.



하지만 당장 회사까지 관두고 그의 괴롭힘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었다. 차라리 당분간은 얌전히 잡혀 있는 게…….



“흑…….”



생각을 잇던 해진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죄를 지은 것도 없고 착하게 살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이환이 좋은 사람이라 착각하고 멋대로 마음을 준 것밖에 없었다.



“흑, 흐윽……. 개새끼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려도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서러움만 더 커졌다. 눈물 젖은 손을 낡은 정장 바지에 쓱쓱 닦았다. 와중에도 비싸 보이는 소파에 눈물을 묻힐까 긴장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하지만 해진은 금세 울음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정이 순식간에 결연해졌다. 이렇게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 지낼 이곳의 구조와 주변을 당장 파악해두어야 했다. 탈출 계획은 빨리 세울수록 유리하니까.





이환이 회사에다가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락이 올 때가 지났는데도 팀장에게서는 문자 메시지 한 통 없었다. 한창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으리으리한 호텔 한가운데 앉아 있자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즐거워야 마땅하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넓은 거실 소파 위에 앉은 해진은 TV 채널을 의미 없이 돌리며 생각을 이었다.



‘설마 회사에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안 했겠지.’



그래도 이환이라는 사람은 대외적으론 그렇게 몰상식하지 않았다. 누가 상상이나 할까. 키스틸 레저의 이환 전무가 오메가에게 돈을 주고 아이를 낳아달라 한다니.



‘……그런데 애를 낳고 싶어도 매칭률이 높아야 하는 거 아닌가?’



뒤늦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해진 본인의 몸이 약한 것을 떠나서 알파와 오메가는 매칭률이 맞아야 임신도 쉬웠다. 그 사실을 이환이 모를 리 없고 말이다.



‘설마.’



해진은 조금 소름이 끼쳤다. 매칭률 테스트에 필요한 DNA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터다. 그렇게 같이 붙어 다녔는데.



이환과 자신의 매칭률이 문득 궁금해진 것은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이었다. 단순히 운이 나빠서 자신이 환에게 붙들린 것은 아닐 터다.



‘저는 정말로 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아주 절실하게요.’



일전 환이 했던 말과 그의 날 선 눈빛을 떠올리자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 해진은 벌떡 일어나 다시 곳곳을 살폈다.



해진이 있는 곳은 거실이 하나, 방이 두 개, 욕실이 두 개, 주방, 발코니가 있는 펜트하우스였다. 높이가 까마득한 창문 밖으론 나갈 수가 없고, 유일한 출구인 현관 밖 복도에는 그를 데려다주었던 남자와 또 다른 남자, 총 두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둘 다 해진의 덩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구였다. 즉, 당장은 나갈 방도가 없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배가 고파왔다. 망설이던 해진은 슬그머니 전화기를 들었다.



‘어차피 내가 돈 내는 것도 아닌데.’



신호가 가는 동안 브로슈어를 뒤적이며 몇 가지 메뉴를 추렸다.



“네, 룸서비스 주문하려고요.”



해진은 무려 5인분이나 되는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주문한 메뉴는 해진의 취향보다는 가격을 철저히 우선시했다. 도착한 음식을 꾸역꾸역 먹었지만 그릇의 반의반도 비지 않았다.



부른 배를 안고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와중에도 ‘일 안 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워 조금 웃다가, 해진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쌓인 피로가 갈아입지 못한 정장 안으로 퀴퀴하게 뭉치는 듯했다.



그는 꿈에서 이환에게 쫓겼다. 약한 몸뚱이는 평소보다 더 느렸다.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을 치는데도 뒤에서 따라오는 이환과의 거리가 점점 더 좁혀졌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미친놈아!’

‘저는 강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꿈속의 이환이 팔을 붙드는 순간, 해진은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눈을 뜨자마자 굳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이환이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이이아아아악!”



해진은 하마터면 기절이라도 할 뻔했다. 눈앞에 있는 이환은 정작 무덤덤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제 몸 위에 올라탄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으나 이환은 대답도 않고 꿈쩍도 않았다. 해진은 내심 살짝 두려웠다. 설마…… 아냐, 그 정도로 양심이 없으려고. 분명히 합의하에 관계를 가지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약속이라는 게 아직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다행히도 이환은 조금 더 해진을 관찰하는 눈으로 쳐다본 뒤에 몸을 일으켰다.



“잡혀 온 와중에도 잘 잔다 싶어서, 구경 좀 했지.”



이젠 존댓말을 할 생각도 없는 건가? 해진은 인상을 설핏 구기곤 함께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몇 시예요?”

“그건 알아서 뭐 합니까?”



이번엔 또 존댓말인 건 둘째 치고 그 대답의 내용 때문에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이 자식이.



“앞으로 강해진 씨는 여기서 생활하면서, 내가 일어나랄 때 일어나고, 먹으랄 때 먹고, 내가 자랄 때 자면 됩니다.”



해진의 눈이 불만을 가득 담고 가늘어졌다.



“회사는요?”

“회사가 지금 중요합니까? 그깟 거, 안 다닌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환은 또라이가 맞았다. 그리고 자신은 이 또라이 놈에게 붙잡힌 것이고. 하지만 해진은 두려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어려운 조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탐험가들처럼, 이 미친놈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다.



“환이 씨의 지금 그 말씀은, 저는 이제 회사도 못 나간다는 건가요?”

“내가 먹을 것과 잘 곳을 주는데 회사가 왜 필요합니까?”



그리 반문하는 이환의 얼굴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해진은 잠깐 망연해졌다.



이환이 방을 나가는 것을 보고 해진은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나갔다. 환은 주방으로 가서 잔에다 식수를 받았다. 조리대처럼 보이는 곳에 이상한 수도꼭지 같은 것이 있더라니, 거기서 식수가 나오는 줄 해진은 처음으로 알았다.



“그럼 환이 씨의 허가 없이는 전 여기서 나가지 못한단 뜻도 되나요?”



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투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감금 범죄인데요.”



뾰족하게 말하자 빤히 마주한 얼굴이 픽, 웃음을 흘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잘 알아둬요, 강해진 씨.”



딸깍, 유리잔이 대리석으로 된 조리대 위에 소리를 내며 놓였다. 해진은 무시하기 힘든 압박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내가 하면 범죄가 아니야. 그게 무슨 짓이든.”



해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뭔 개소리야. 범죄는 범죄지.’



안 잡힌다고 범죄가 죄가 아니게 되나? 하여튼 진짜 개소리 어워드가 있으면 그가 우승하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환은 그를 두고 주방을 나가버렸고, 해진은 그의 뒷모습을 흘끔, 한 번 본 뒤에 새 컵을 꺼내서 그가 한 대로 물을 따라보았다. 그가 물을 마시면서도 하도 폼을 잡기에 얼음같이 찬 냉수가 나올 줄 알았는데 미지근한 정수라서 살짝 김이 빠졌다.



거실로 나가자 복도에 서 있던 덩치들 중 하나가 막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덩치는 해진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캐리어 하나를 바닥에 눕혀 열고는 물건들을 꺼내었다. 사이즈가 조금 큰 가방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이 나왔다. 환의 것으로 추정되는 슈트와 책, 기초화장품 같은 것들이었다.



이환은 거실에 서서 덩치가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나르는 것을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그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풍겨댔다. 이전까지 그는 제게 위압적인 모습을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항상 다정하던 환이 아니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해진은 또 잠깐 서러워졌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저도 제 물건들이 필요해요. 가져다주세요.”



제게 말도 않고 이사를 강행했으니 물건들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적어도 이 스위트룸에는 제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환은 그저 속 모를 얼굴을 하고 해진을 응시하기만 했다. 표정 없는 얼굴에 해진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급하단 말이에요! 저 약도 갖고 다니는 거 다 떨어지면 새로 처방받으러 가야 하거든요?”



몸이 약한 자신은 하루에 먹는 약만도 한 주먹은 되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언제나 하루치 정도의 약은 소지하고 다니지만, 그 말은 곧 내일 아침이 되면 먹을 약이 다 떨어진다는 뜻도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약은 가져다주세요. 안 먹으면 위험하다고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시끄럽게 굴지 마십시오.”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표정이었지만, 무섭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약을 못 먹으면 목숨이 위험해지는데, 시끄럽게 굴지 말라니?



정작 환은 제가 내뱉은 말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인상을 팍팍 써대는 걸 보니 업무 관련이거나, 안 좋은 기사가 떴거나 한 모양이었다. 그와 데이트를 할 때 가끔 저런 표정을 지어서 물어보면 그렇게 답한 기억이 났다.



“환이 씨, 그거 아세요?”



환이 대답 대신 그에게로 시선을 흘끔 주었다.



“알파 - 오메가 사이 부부들 중 무려 17퍼센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절대 낳지 않겠다’고 한대요.”



멀끔하게 굳어 있던 눈썹이 해진의 말에 한 번 꿈틀, 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보통 육아가 힘들어서, 그걸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이 있어서라고 해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생각해보셨나요?”



덩치가 두 사람 옆에서 계속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해진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쪽도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같으니, 뭐.



이환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으며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걸 왜 내가 생각해야 합니까?”



느긋하다 못해 무료해 보이는 얼굴로 그가 물었다.



“아이에게 핏줄을 제공한다고 해서, 내가 꼭 그 아이를 키우고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자기 자식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보호자가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는 것이 아이의 정서에도 좋으니…….”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칼로 자른 듯한 대답에 잠깐 아연실색했다.



“당신에게도 알 바가 아닙니다, 강해진 씨.”



그의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고, 해진은 할 말을 잃은 채로 멍하니 서 있다가 그가 전화를 받는 것을 보며 소파에 힘없이 앉았다. 그래, 그가 아이에게 그렇게 신경 써줄 리가 없지. 그리고 산모인 자신에게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소름이 쭉 끼쳤다.



‘아냐, 아이 낳을 때까지는 함부로 못 대할 거야.’



게다가 매칭률 좋은 오메가가 흔한 것도 아니잖아. 해진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환 몰래 주먹을 꾹 쥐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데려온 걸 보면 둘 중 하나겠지. 나와 매칭률이 아주 높거나, 혹은 매칭률 높은 오메가가 별로 없었거나.’



그러니까 이환이 저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두려움은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지금 바로 가지. 아니, 괜찮아. 바쁜 것 없어.”



어느새 덩치는 밖으로 나갔는지 모습이 보이질 않았고, 환도 전화를 이어 받으며 현관 쪽으로 걸었다.



가느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환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소파에서 반쯤 일어나려던 해진은 다시 풀썩, 힘없이 엉덩이를 주저앉혔다.



“……그래도 좀 더 있다가 갈 줄 알았는데…….”



대체 저 자식에게 뭘 기대했담. 스스로를 꾸짖은 해진은 소파에 모로 누웠다.



‘그나저나 왜 회사에서는 연락이 없지?’



해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 발표도 하려면 팀장에게서 자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아직 퇴근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휴대폰에 저장된, 팀장 직속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고 연결되었다.



“아, 팀장님. 저 강해진입니다. 그, 내일 발표할 이슈 중에서요…….”

- 해진 씨,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네?”

- 오늘 외근 나가서 큰 실수라도 했어? 갑자기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어.

“무슨 지시요?”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해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 해진 씨, 이제 우리 사무실로 출근 못 해. 키스틸 레저 쪽에서 인원충원으로 강력하게 해진 씨를 요구했어.



듣지 않아도 뻔했다. 해진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를…… 요구했다고요?”

- 응. 내일부터 키스틸 전무실로 출근해.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강력하게 항의해봤는데, 알잖아. 사실상 키스틸이 우리 회사 상부나 마찬가지고…….

“하아…….”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회사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 하던 그의 말은 협박조를 떠나 아예 진심이었다. 해진은 다시 한 번 막막해졌다.



소파 위에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가지런하고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에 형광등 불빛이 차게 반사되어 눈이 아렸다. 지나치게 넓은 거실이다. 혼자 있기에는 더더욱 말이다.





인수합병 건은 언제나 머리를 아프게 만든다. 환은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회의를 끝낸 뒤 녹초 상태로 사무실을 나섰다.



“오피스텔로 모시겠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환은 긍정의 의미로 말없이 있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니, 호텔로.”



상관의 말에 기사는 알겠다는 한 마디만 하곤 운전대를 쥐었다. 환은 다시 눈을 감았다.



도착했을 때 스위트룸 복도를 지키고 있는 덩치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보고를 해왔다.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는 성격이기에 환은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은 온통 컴컴했다.



‘불도 켜지 않고…….’



쯧, 혀를 차고 스위치를 눌렀다.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운 작은 인영이 보였다. 침실 불을 켜도 이불 안으로 동그랗게 솟은 형태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환은 괘씸했다. 나와서 재깍재깍 왔느냐고 인사도 하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당한 게 몹시 불쾌했다.



“잘 시간으로는 이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대답이 없기에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제야 해진이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몇 시부터 잔 겁니까?”

“몰라요…….”



말하는 목소리가 어째 힘이 하나도 없다. 환은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기껏 구한 오메가에게 탈이 나기라도 하면 안 되니.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겁니까?”



얼굴 절반까지 덮고 있는 이불을 억지로 끌어 내리고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잠 때문인지 몸이 안 좋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픈 건 아니에요. 그냥 우울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해진이 이불을 끌어당겼다.



“손대지 마세요……. 저 내버려둬요…….”



환은 다시 괘씸한 이불을 당기려다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머릿속으로는 계산식이 빠르게 지나갔다. 몸이 아프지 않다니 뭐, 문제가 없기는 한데, 이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몸까지 아파오면 그땐 좀 귀찮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환은 우울한 사람의 우울감을 어떻게 해소시켜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울은 그와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분노하면 분노했지, 가라앉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결코 아니니. 게다가 이 오메가에게 전전긍긍하면서 봉사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내일이 되면 괜찮아지겠지.’



환은 이 보잘것없는 오메가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낭비한 자신을 꾸짖으며 침실을 나섰다. 오피스텔로 가기에는 시간이 아깝지만, 그렇다고 불결하게 그와 한 침대를 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일단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욕실에 들어가는 순간, 무언가 아주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랫도리가 불룩하게 반응해 있던 것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갑자기 몸뚱이가 반응한 것인지, 환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었다. 호텔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아니, 애초에 제 몸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천박한 몸뚱이가 아니었다.



환은 우뚝하게 솟은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난감함에 한참을 서 있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젠장, 젠장!’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춘기 때에도 몇 번 해본 적이 없는 자위행위를, 더럽고 야만적인 인간들만 하는 짓을 어째서 자신이 해야 한단 말인가.



자존심이 상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기운 좋게,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선 것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욕을 수십 번도 더 퍼부었다. 이 모든 게 강해진의 탓 같았다. 제 몸이 이따위가 된 것도, 자신이 이런 짓을 하게 된 것도 모두 강해진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화가 솟구쳤다. 황당한 것은, 화가 솟구치는 만큼 흥분감도 함께 강해진다는 점이었다.



“하아…….”



심지어 신음까지 내뱉으며 환은 자신의 발기한 성기를 아래위로 빠르게 문질렀다. 머릿속으로는 침대에 누워 있던 강해진의 얼굴을, 그리고 아까 잠깐 스쳤던 그의 체취를 떠올렸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저 오메가가 문제인 거다.’



저딴 음란한 얼굴을 하고 남의 침대에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 꼴이라니.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고 환은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래 봤자 기분만 더 더러워졌지만.



“후우, 하, 하아…….”



환의 상상은 점점 더 음란해졌다. 이제는 아예 제 성기를 강해진의 입에 물리는 상상까지 했다.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가 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건방진 오메가 놈. 히트사이클만 되면 내 좆을 달라며 헐떡거릴 테지.’



그날이 오기만 하면 저 하찮은 오메가를 제 다리 사이에 두고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 수모를 모조리 갚아줄 것이다. 환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집중하였으나 억울하게도 도통 감각이 치솟질 않았다.



“크윽…….”



너무 세게 문질러서 표피가 아플 정도인데, 사정감은 들지 않고 찝찝한 욕정만 그득해 배출될 기미가 도통 없었다. 그는 제 성기를 강해진에게 물리고 머리채를 잡은 채 거칠게 쑤셔 박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조금 반응이 올 듯…….



벽을 짚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리던 그가 뚝 멈췄다. 샤워부스 밖, 막 문을 열고 욕실로 들어온 듯한 강해진이 멍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이, 이…….”



이환의 인생에 이런 수치심은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평생 손에 꼽을 만큼 해본 자위행위를, 하필이면 이 같잖은 오메가에게 들키다니.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이 아주 우습게 일그러지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환은 한 손으로 발기한 성기를 - 그의 성기는 놀랍게도 이 상황이 되어서도 건강함을 자랑하였다 -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해진을 손가락질했다.



“당장 안 나가?!”



멍하게 서 있던 강해진이 그제야 화들짝 놀라 한 걸음을 뛰듯이 뒤로 펄쩍 물렸다.



“제, 제, 제가 왜요! 오줌 누러 왔단 말이에요!”



당돌하게, 제법 똘망한 눈을 뜨고 그리 소리 지르는 강해진을 보자 참고 있던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환은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거대한 살 몽둥이가 퉁, 하고 흔들리는 것에 해진의 시선이 주목되는 것은 개의치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말로 할 때 나가.”

“싫어요! 오줌 누고 나갈 거예요!”



씩씩거리며 변기 쪽으로 걸어가려던 해진은 옆으로 걸음을 떼자마자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거렸다. 환이 반사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이봐.”



발기한 알몸인 것을 잊은 그가 해진을 안아 받치려 했고, 해진은 다급히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등 뒤에 욕조가 닿아 하마터면 또 넘어질 뻔했으나 이번에는 양손으로 욕조를 무사히 짚었다.



“괜찮아요. 그냥 환이 씨 때문에 넘어질 뻔한 거예요.”



시선을 이리저리 헤매며 강해진이 말했다. 와중에도 ‘환이 씨 때문에’라는 말에 힘을 또박또박 주었다.



붉어진 강해진의 얼굴을 빤히 보던 환이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어이.”



이 수치심을 어떻게 떨쳐내야 속이 시원할까. 이 보잘것없는 빵떡 같은 오메가를 앞에 두고 당한 수모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환의 눈매가 일순간 서늘해졌다.



“그쪽이 책임져.”



해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듯, 홍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뭘 책임져요?”



식은 얼굴로 해진이 물었다.



“그쪽 탓이니 그쪽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뭐라고요?”



해진의 황당한 눈길이 그의 알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근육이 빼곡하게 들어찬, 조각도로 세심히 손질한 듯한 완벽한 몸 한가운데에 흉기 같은 것이 아직도 우뚝하게 서 있었다. 완벽한 몸에 어울리게 완벽한 조형을 자랑하는 성기였다. 와중에도 해진은 그의 성기 크기에 놀라고, 그 예쁜 모양새에 놀랐다. 제 것보다 훨씬 예쁜 것 같았다.



그리고 흉흉하게 선 물건과 달리 이환의 얼굴은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멀쩡한 게 아니라 뭐랄까…….



‘완전히 맛이 갔잖아!’



환이 또 한 걸음을 가까이 다가왔다. 바짝 곧추선 성기에 몸이 닿기라도 할까 봐 해진은 기겁하며 이번에는 옆으로 피했다. 이환이 몸을 틀었다. 형광등 아래 그의 눈빛이 사납고 차갑게 번뜩거렸다.



“모두 너 때문이다.”



해진은 더 참을 수 없었다.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발딱 세운 성기나 좀 치우고 말하든가!



‘뭐 이딴 미친 새끼가 다 있어! 이 변태 싸이코 바바리야!’



소리를 질러야 했지만 해진은 그러지 않았다. 덩치 좋은 알파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워서, 겁이 나서, 위협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그는 이 와중에도 아름답기까지 한 이환의 몸에 감탄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진도 성인인 오메가로서 알파와의 뜨거운 밤을 상상해본 적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몇 번이나 혼자 탐을 냈던 바로 그 이환의 몸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심지어 거추장스레 벗길 것도 없이, 성적인 흥분을 명백하게 띤 채로 말이다.



해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곧추선 성기 쪽으로 자꾸 눈길이 갔다. 탐스러운 알파의 성기를 탐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오메가의 본능이었다.



더 다가오려는 환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고,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그, 계약! 계약상으로는! 지금 하면 안 되기는 하는데!”



이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수작이냐는 얼굴이었다.



“그건 너도 싫지 않다는 뜻인가? 잘됐군. 이걸로 합의는 끝났다.”



이환의 손이 뻗어왔다.



“아, 아니, 그건 맞는데, 자, 잠깐만요, 히트사이클과 러트 각각 한 번씩! 그리고 겹칠 때 한 번! 그때가 아닌…… 때에도, 조항을 추가해야 할……!”



미처 말을 끝내기 전에 그가 해진의 손목을 붙들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얼굴이 들이닥쳤다.



“오늘은 네 더러운 구멍에는 안 박을 테니 걱정 말고 입이나 다물어.”



차게 식은 눈동자가 해진을 삼킬 듯했다. 구멍에는, 안, 박는다고? 해진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그가 해진의 바지 버클을 풀며 뒤를 돌게 했다. 이 스위트룸에는 적당한 잠옷이 없었고 가운을 입기는 싫었기에 해진은 여태 정장 차림이었다. 싸구려 정장이지만 나름 아껴 입은 옷이 욕실 바닥에 구겨져 나뒹굴었다.



“잠깐…….”



속옷도 함께 끌려 내려갔다. 양쪽 허벅지가 환의 손에 붙들렸다. 뒤이어 해진은 다리 사이를 침범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맞붙은 허벅지 사이로 굵직하고 뜨끈한 살덩어리가 쑥, 밀려들었다.



“흑!”



구멍에는 안 박겠다더니 이런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해진은 사회생활에 있어 순진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다. 물론 알파와 오메가가 어떻게 결합하고 어떤 식으로 서로에게 성적인 쾌락을 선사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자, 잠깐, 만요.”



욕조를 짚은 채 엉거주춤 엉덩이만 뒤로 뺀 자세가 부끄러워서 해진은 이 행위를 잠깐이라도 멈추고 싶었다. 수치스러웠다. 그에게 엉덩이를 드러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제 페니스 역시 발기하고 구멍은 젖기 시작해서였다.



알파의 몸에 오메가가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해진은 이렇게 제대로 된 관계가 아닌데도 몸이 반응하는 것이 싫었다. 이 미친놈에게 홀딱 넘어가서 벌써 젖기 시작하는 아래가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억지로 몸을 앞으로 빼려 했지만 그런다고 허벅지 사이로 묵직하게 자리 잡은 성기를 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자극하듯이 문지르기만 하는 형국이 되었다. 바르작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가 허벅지 붙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플 정도였다.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사람 돌아버리게 만들지 말고.”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꼭 저를 삼키기라도 할 것 같았다. 익숙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위스키의 스모크 향. 그의 알파 향기. 러트가 아니니 독하지는 않았으나 흥분한 해진에게는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환의 성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살이 맞나 싶게 딱딱하고 뜨거웠다. 해진의 아래 역시 아까부터 젖어 있었다. 그의 성기가 구멍 위를 스칠 때마다 해진은 딱 미칠 것 같았다. 혼자 자취방에서 몰래 아래 구멍을 만지며 자위한 적이야 그도 있지만, 남의 살이 닿는 것은 또 완전히 달랐다.



‘너무…… 자극적이야…….’



딱딱하고 뜨거운 성기 감촉이 여린 허벅지에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된 섹스도 아닌데 이렇게 감각이 드셀 줄은, 그리고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동시에 해진은 속상하기도 했다. 삽입은 아니지만 첫 관계를 이렇게 욕실에서, 갑작스럽게, 소변을 보러 왔다가 맺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환에게 가지는 기대감은 이제 바닥을 치고 있지만, 침대에서 첫 관계를 가지는 정도야 바랄 수 있지 않을까.



환은 해진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부여잡고는 앞뒤로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마찰열 때문인지 욕실 안이 더운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는 살갗 사이로 습기가 차는 것이 이환의 몸에서 나온 선액인지, 혹은 제 몸에서 나온 애액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무게감이 등에 실리는가 싶더니 귓가에 뜨거운 숨이 스쳐 해진은 움찔, 떨었다.



“후우, 다리에 힘 좀 줘봐.”

“주, 주고 있어요…….”



실은 서 있기도 버거웠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넘어질 것 같은데 그는 속도 모르고 허리를 더 빨리 치대기만 하니 해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환의 입김이,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끝없이 간질였다.



“하아, 하…….”



허벅지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살덩어리만도 충분히 자극적인데, 귓바퀴에 연신 닿는 뜨거운 숨은 더더욱 그를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해진은 꼭 그에게 갇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 몸을 붙들고 있는 손 때문이 아니었다. 제 뒤에 바짝 붙은 뜨거운 알파의 몸이, 강건하고 완벽하기까지 한 그 몸이 저를 짓누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쑥, 쑤욱, 허벅지 사이로 그의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것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이 성기가 언젠가 제 몸속에다 정액을 뿌릴 거라고 생각하자 머리털이 쭈뼛하게 섰다.



“흣…….”



결국 해진의 입에서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욕조를 겨우 붙잡은 채 허리를 반쯤 숙이고, 젖은 엉덩이를 내밀며 할딱거렸다. 그의 성기가 제 구멍에 좀 더 스치길 바랐다. 조금 더 자극을 느끼고 싶었다.



“후우, 어디서, 감히, 후. 너 따위가 감히.”



환의 목소리가 귓가에 연신 뜨겁게 퍼졌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 미친놈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이제 해진은 상관없었다.



그는 제 구멍에서 애액이 흘러나와 그의 성기를 착실히 적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축축해진 성기는 해진의 허벅지 사이를 드나들며 그의 다리도 적셨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해진의 몸을 휘감았다.



해진은 어느새 허리를 묘하게 뒤틀어가며 그의 성기가 제 구멍에 조금 더 기분 좋게 닿도록 몸을 비볐다. 흠뻑 젖은 아래로 딱딱한 요철이 스치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환의 성기가 워낙 묵직하게 굵은 터라 그의 구멍뿐만 아니라 회음을 스치고 고환까지 건드렸다.



“하으, 하, 아아…….”



삽입이 없는, 유사 성행위도 이 정도인데 진짜 섹스는 어떨까. 해진은 딱딱한 그의 귀두 끝이 제 구멍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일부러 살짝 허리를 들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벌어진 구멍에 이환의 귀두 끝이 들어갈 듯 들어가지 않을 듯 아슬아슬하게 미끌거렸다. 어찌나 흠뻑 젖었는지 움직일 때마다 찌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애액의 점성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은 해진도 느낄 수 있었다.



“흐응…….”



그의 귀두 끝이 구멍을 쑤시고 들어올 듯 말 듯할 때마다 겁이 났지만 동시에 차라리 그가 구멍에 넣어줬으면 싶기도 했다.



꼭 압박자위를 하듯이 허리를 슬그머니 움직이던 어느 순간, 해진의 시야가 훅, 뒤로 젖혀졌다. 머리채를 잡힌 것이었다.



“히익……!”



몹시 아팠다. 와중에도 멈춘 허리 움직임이 아쉬웠다. 환이 얼굴을 바짝 맞붙여왔다.



“이게 지금, 멋대로 허리를 움직여?”



화가 잔뜩 난, 참을성이 바닥난 목소리다. 해진은 숨을 들이마신 채로 굳었다. 사냥당하는 기분이었다.



환은 그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로 사납게 허벅지 사이를 들쑤셨다. 젖은 아래로 감각이 온통 몰렸다. 환은 다른 손으로 아예 해진의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히익, 잠, 깐!”



누구 손에 성기를 쥐여준 적 없는 그였다. 수치심에 버둥거렸지만 그도 잠시였다. 환의 손은 해진의 손보다 훨씬 컸으며, 손아귀 힘도 몇 배는 강했다. 그의 손이 해진의 페니스를 아래위로 거칠게 쓸어내렸다. 발기한 페니스를 그에게 쥐여주고 있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창피한데도 해진은 몹시 흥분했다.



“으응, 아, 아! 거기, 안, 돼, 흐윽!”



환은 커다란 손으로 그의 발기한 페니스를 강하게 아래위로 쓸어내리면서 엄지로 귀두 끝을 문질렀다. 요도 입구를 압박하는 힘에 해진은 자신이 요의를 갖고 이 욕실로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이 지독한 분출감이 요의인지 사정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으읏, 아, 아, 잠깐, 만요. 흐응, 나, 나올 것, 같!”



환은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외려 그의 페니스를 더 강하게 쥐고 속도를 더 빨리했다. 해진은 저도 모르게 구멍을 움찔거렸다. 젖은 채로 움찔거리는 아래로는 여전히 환의 성기가 느껴졌다. 감각이 잔뜩 예민해진 탓에 이제는 울퉁불퉁한 핏줄까지 다 읽혔다. 해진은 이 충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알파의 발기한 성기에다 애액을 질질 흘리며 성감을 더 끌어내려 용썼다.



“나, 진짜, 나올, 으응! 아!”



결국 정액이 이리저리 튀었다. 남의 손에 사정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해진은 그의 성기에 닿은 구멍을 반사적으로 오물오물 조이면서 욕조에 정액을 마음껏 쏟아내었다.



“하아, 하…… 으으…….”



다리에 힘이 자꾸 풀리자 환이 페니스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그의 엉덩이를 짝! 소리 나도록 후려쳤다.



“허벅지 힘, 제대로 안 줘?”



평소의 그라면 미친놈이 어디서 남의 둔부를 후려치고 명령질이냐며 쏘아붙였을 텐데, 해진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저 헐떡거리며 후희를 만끽했다.



환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진은 몸을 조금 떨었다. 방금 사정하고도 묘한 열감이, 아니, 어마어마한 열감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환의 성기가 그의 구멍 위에 거칠게 마찰되자 해진은 그 열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알파의 씨를 배 속으로 받고 싶은, 오메가의 본능이었다.



해진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경험은 없지만 반사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저 환의 성기를 좀 더 느끼고 싶었다. 안으로 들여서 쥐어짜댄 다음에 몸속에 씨를 뿌리게 만들고 싶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방금 느낀 오르가즘이 무색하도록 쾌감이 진득했다. 해진은 그 감각에 빠져 욕조를 짚었던 손을 앞으로 내밀며 허우적거렸다.



“조, 조금 더…… 해주세요…….”



제 말에 환이 뚝 굳어버리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해진은 그저 뒤로 뺀 엉덩이를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젖은 구멍에 닿은, 뚝 멈춰 있는 그의 성기를 슬슬 문질러댔다.



“흐응, 흠, 뻑, 젖어서…….”



이성이 끊어지는 데에도 소리가 들린다면 그의 귀에 필경 뚝, 하고 크게 울렸으리라. 그러나 해진은 그런 것을 들을 정신조차도 없었다.



“너무 젖어서…… 이상해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해진이 웅얼거렸다. 숨이 차서 할딱거릴 때마다 그는 환의 알파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러트도 아닌데 위스키 향이 독하다. 그 역시 그만큼 흥분하고 있단 뜻이었다. 그 사실이, 그 역시 해진에게 잔뜩 흥분하고 있단 사실이 생소했다.



“흐응…….”



콧소리가 절로 났다. 이젠 어찌 되어도 좋았다. 아니, 부디 그가 제 안에 씨를 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반면 환은 제 성기 위에 옴짝거리는 해진의 구멍 감촉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빌어먹게 음란한 오메가 놈이…….”



어디 손가락이나 후벼 넣을 수 있을까 싶게 좁은 구멍이 그 둘레의 - 체감상 - 열 배는 됨직한 제 성기를 원하는 듯이 꼬옥, 꼭, 오물거리는 것이 같잖았다. 감히 이딴 더러운 구멍으로 내 성기를 먹으려 들다니.



그러나 그럴수록 환은 더더욱 이 건방진 강해진을 확실히 교육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기도 했다. 어차피 이제 계약서만 쓰면 제 소유인데, 초장부터 길을 들여놓아야 하지 않을까.



손을 들어 해진의 머리채를 화악, 잡아챘다. 해진이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놀라서 내는 그 소리마저도 음란했다.



“강해진 씨 때문에 내 성기가 더러워졌지 않습니까.”

“흐으, 으…….”



환은 지독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일전 히트사이클을 겪는 그의 원룸에 찾아갔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충동이었다. 그를 뼈째로 씹어 삼켜 이 음란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은 채로 구멍 위를 페니스로 쓰윽, 쓱, 문질렀다. 젖은 소리가 크게 났다. 비빌수록 더 흥분하는지 물이 아주 흥건하게 흐를 정도였다. 환의 입술이 비죽이 뒤틀렸다.



“이렇게 구멍에서 질질 싸대니, 더럽고 불결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으응…….”



제 불쾌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진은 입으로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구멍을 오물거리기만 했다.



환은 그를 짓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제 아래 짓눌러 놓고 멋대로 주무르고 휘둘러 버리고 싶었다. 제게 꼼짝도 못 하게 만들고 싶었다. 겁박해서라도.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확, 끌어당겼다.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냥 지금 안에다가 확, 싸버릴까. 싶은 생각도 들고.”



속삭이자 해진의 몸이 파르르 떨리며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반쯤은 겁을 주고 싶어서 한 말이지만 나머지 반은 진심이기도 했다.



그는 본래도 인내심이 없는 성격이었으며, 특유의 조급함은 자꾸 강해진의 앞에서 더 도드라졌다. 이 더러운 오메가가 제게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환은 그 사실이 너무나 불쾌했다.



정말로 이대로 몸에 좆을 박고 흔들어버릴까. 환은 이를 으득, 갈며 허벅지 사이에 끼운 페니스를 거의 끝까지 빼내었다가 콱, 다시 박았다.



강해진의 허벅지는 지나치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꼭 함부로 입에 넣어서는 안 되는 불량 식품 같았다. 그래서 환은 더더욱 그를 입에 넣고 삼켜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으면 몸에 넣고 다니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페니스를 쭈욱, 빼내자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해진의 몸에서 나온 애액이 페니스의 귀두 끝까지 적시고 점성을 보이며 길게 흘러내렸다.



“흐으…… 빨리…….”



몸이 잔뜩 달아오른 해진은 천박한 구멍을 꼭꼭 조이면서 자꾸 보채었다. 흥건하게 젖은 환의 페니스가 꿈틀거렸다.



정말로 이대로 성기를 그의 몸에 쑤셔 박을까, 하는 생각이 또 한 번 들었다. 그러나 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강해진이 정말로 자신의 몸을 원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박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대신 해진의 귀를 앞니로, 이번에는 정말로 세게 콱, 깨물었다.



“아…!”



통증으로 인한 비명이 분명한 목소리에 환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물고 있는 앞니를 놓지 않고 일부러 더 세게 깨물었다.



“아, 아파요, 아파요…!”



보잘것없고 작은 구멍에 제 좆이 박히면 이것보다는 몇 배로 더 아플 텐데, 웬 엄살일까. 환은 먹을 것을 씹듯이 그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질척한 다리 사이로 성기를 빠르게 움직였다.



해진의 매끄러운 살결이 그의 페니스를 끝없이 자극시켰다. 허벅지가 이렇게 부드러운데, 이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뭉개지는 것처럼 좋은데, 안으로 들어가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그는 귀두 끝으로 해진의 구멍을 긁듯이 스치고 지나쳤다. 해진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파득거렸다.



“으응! 아! 하으읏!”



과연 신음도 음란했다. 이런 오메가를 밖에 나다니게 하는 것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임이 분명했다. 가둬두고 임신할 때까지, 아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제 시야가 닿는 곳에만 있게 하고 제 좆만 받게 하는 것이 옳을 터다.



젖은 귀두 끝이 그의 구멍을 침범할 듯 침범하지 않으며 젖은 곳을 긁어댔다. 금방이라도 쑤셔 들어갈 것 같은 사나운 기세지만, 절대 들어가지는 않았다.



“후우, 강해진 씨.”



그 역시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해진은 그의 몸에 갇힌 채로 버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만 보고 있으면, 왜, 후, 이렇게, 울화통이 치미는지 모르겠군.”

“흐윽…….”



해진이 우는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허벅지는 착실하게 조였다. 구멍도 이렇게 착실하게 조이려나. 환은 그의 구멍 속으로 제 성기가 들어가는 상상을 하며 희열에 몸을 떨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흡…….”



해진은 이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머리채를 잡힌 채로 바들바들 떠는 동작이 가슴을 통해 전해지자 환은 찌릿한 정복욕을 느꼈다.



“나는 내 손에 들어온 걸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퍽, 퍽, 몰아치는 속도가 점차 더 빨라졌다. 그는 해진의 발기한 페니스를 손에 움켜쥐었다. 앞뒤로 문지르며 흔들자 해진이 숨을 참고 할딱거렸다.



“으응, 아, 흣!”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단 걸 미리 알았음 좋겠군.”



마침내 해진이 토정했고, 환 역시 그와 비슷하게 사정했다. 두 사람의 정액이 사방으로 튀어 욕실을 더럽혔다. 검은 타일 위에 흰 얼룩이 이리저리 번졌다.



“하아, 하…….”



잠시 두 사람의 숨소리만 욕실에 가득 찼다. 환은 그제야 손에 쥐고 있던 해진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해진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욕조를 쥐고 헐떡거렸다.



“흑, 흐으…….”



심하게 헐떡거리는 그가 환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과의 스킨십이 불쾌하다는 건가, 뭔가.



그가 헐떡거리는 동안 환은 인상을 구기며 샤워기를 틀어 더러워진 성기를 씻었다. 미끌미끌한 애액이 손가락에 감기는 감촉에 인상을 썼다.



그제야 환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그토록 이성적이고 철저한 자신이 정신줄을 놓고 오메가의 더러운 구멍에다가 성기를 비비다니.



‘내가 뭘 한 거지?’



생소한 충격은 곧 결벽증의 습관으로 이어졌다. 비누칠을 해서 아직도 발기가 식지 않은 성기를 열심히 문질러 닦았다. 어찌나 물이 많이 나왔는지 아무리 씻어도 미끌미끌한 게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불결함에 화가 솟구쳤다.



해진이 욕조를 쥔 채로 심하게 떨며 헐떡거리는데, 환은 제 성기를 박박 씻어내느라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그는 다만 이 불쾌감을 어서 씻어내고 싶었다. 자신의 실수를, 비이성적인 행위의 흔적을 닦아내고 싶었다.



“나, 어지, 러…….”

“뭐라고 했습니까? 똑바로 말하십시오.”



가뜩이나 더러워서 짜증이 나는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싫어 버럭 화를 내며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욕조를 붙들고 있던 해진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환이 반사적으로 그를 붙들었다.



“뭡니까?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해진의 몸은 방금 전과 다르게 몹시 차가웠다. 아까까지 좋다고 헐떡거려 놓고는 갑자기 몸을 덜덜 떠는 그가 이해 가지 않았다. 해진이 기침을 거칠게 했다.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꺽, 꺼억, 하고 났다.



“강해진 씨?”

“힘, 이 없어서 몸, 이…….”



해진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환의 품으로 쓰러졌다. 환이 상황을 파악하고 의사를 부르기 위해 그를 안고 욕실을 뛰쳐나온 것은 그로부터 몇십 초나 지나서였다.





심각하게 아픈 곳은 없지만 안 그래도 약한 몸으로 무리를 한 탓에 졸도한 것뿐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환은 굳은 얼굴을 끄덕인 뒤 나가란 손짓을 했다.



“저, 아무래도 약한 몸이라 먹는 약들도 있을 테고, 꼼꼼하게 케어를 해줘야 할 분처럼 보이는데…….”



‘닥터 최’라고 불리는 이 영감은 유 회장부터 섬겨온 집안의 주치의였다. 회장부터 자신까지, 혹은 그 주변 사람들까지, 병원에 갈 수 없는 몇 가지 일을 해결해준 나이 지긋한 이 의사가 부리는 오지랖이 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시고 나가십시오.”



조금 강경한 어조로 말하자 그제야 닥터 최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갔다.



환은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해진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인상을 찌푸린 채로 의자를 빼서 앉았다. 눈 감은 강해진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팔자 좋군.’



딱히 걱정이 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환은 짜증이 났다. 내일도 업무 일정이 있는데 이 오메가 놈 때문에 잠을 설친 것도 화가 나고, 저답지 않게 흥분해서 그에게 덤벼든 것도 화가 났다.



이 모든 것이 강해진의 계략 같았다. 이 자그마한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환은 제 손에 들어온 것을 다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 오메가 놈은 제 손에 들어오고서도 자꾸 이렇게 말썽을 부린다.



아, 그래,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이 빌어먹을 오메가 놈이 비실거리다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99.99퍼센트의 매칭률이 나오는 오메가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



“……쯧.”



혀를 한 번 찬 환은 그대로 방을 나섰다. 일거리가 밀려 있으니 이딴 오메가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 * *





해진은 눈을 뜨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대체 몇 시간을 잔 건지.



‘몇 시지? 회사……!’



그리고 자신이 회사에서 잘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변태 사이코 발바리 놈 때문에.



“흐어…….”



기지개와 회한과 슬픔과 두려움이 섞인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래도 호텔이라고, 침대 하나는 끝내주게 푹신해서 좋았다.



협탁 위에 놓인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방전된 상태였다. 창밖으로 흘러들어 오는 햇빛이 아직 차가운 것을 봐서 시간대는 아마 오전인 모양이었다. 누운 채 고개만 돌려 충전기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협탁 위에 익숙한 물건이 하나 보이기는 했다. 엄마의 유품인, 나무 손거울이었다. 해진은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어 손을 뻗어 손거울을 만져보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모르겠다…….’



졸음 때문인지 자꾸 체념이 들어 다시 눈을 감았다. 맨몸에 닿는 이불 감촉이 좋다……고 생각하다가…….



‘알몸?’



감았던 눈을 퍼뜩 떴다. 왜 알몸이지? 생각한 해진은 그제야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제 구멍 아래를 마구 스치던 페니스의 딱딱한 감촉이, 머리채를 움켜쥐었던 사나운 손이, 귓가에 터지던 뜨거운 숨결이 모두 기억났다.



‘아, 세상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환에게 더 해달라며 애원하던 것도 기억이 났다. 진짜 미쳤지, 강해진.



‘하지만…… 너무 좋았어…….’



알파랑 몸을 맞대는 일이 그렇게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진은 제 성기가 다시 발기하는 것을 느끼며 이불 속에서 몸을 배배 꼬았다.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서 뒹굴던 해진은 어느 순간 몸을 발딱! 일으켰다. 이대로 누워 있기만 할 순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해.’



도망칠 수가 없다면 정당하게 문으로 걸어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푹신한 침대에서 억지로 나온 해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고 온 정장을 찾을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가운을 걸치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 *





환이 다시 오피스텔로 왔을 때 해진은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매일 먹을 약을 늦은 오후까지 먹지 못해서 계속 기침도 나고, 아토피 때문에 온몸이 가려웠다.



다행히도 환은 도착하자마자 그가 먹는 약을 거실 테이블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해진은 얼른 달려가 약통을 열고 한 알씩 입에 넣었다. 삼키지도 않았는데 생명줄이라도 찾은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환은 물건을 보듯 해진을 쓰윽 훑어보더니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정작 해진은 심경이 복잡해서 그를 쳐다보기도 힘든데, 환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간밤에 그렇게 몸을 섞어놓고 말이다. 해진은 그것이 화가 났다.



해진은 그의 맞은편에 섰다. 정장을 입은 환과 달리 그는 아직도 가운 차림이었다. 이 빌어먹을 호텔 방에는 자기 옷 한 벌도 없기 때문이었다.



“저랑 이야기 좀 해요.”

“일하는 거 안 보입니까?”

“일하실 거면 왜 굳이 여기 오셨어요? 너네 집에 가서 하시지.”



일부러 못되게 말했는데도 환의 멀끔한 얼굴은 미동도 없었다. 흠집 없는 조각에 무딘 끌을 툭툭 치는 기분이었다.



“강해진 씨가 행여 쓸데없는 짓을 하거나 만에 하나 주제넘게 도망칠 궁리라도 할까 신경이 쓰여서 말입니다.”



해진은 입술을 씹었다. 저 말은, 분명 자신이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저 여유로움과 재수가 없을 정도로 뻔뻔한 표정을 보면 말이다.



그는 자신을 감금하고 있는 이 사태에 대해 논지를 펼치는 대신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무언가를 달라는 투로 내밀어진 손바닥 쪽으로 환이 흘끔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해진을 올려다보았다. 뭘 어쩌란 건가, 하는 눈빛이었다.



“보상 주세요.”



환의 얼굴이 조금 사납게 구겨졌다. 해진은 굴하지 않고 똑바로 그를 마주했다.



“저와 성관계를 맺으셨잖아요. 계약서는 아직 안 썼지만 우리, 그거 대가로 계약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또박또박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런데 웬걸, 환은 입꼬리를 틀어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성관계? 구멍에 좆대가리도 들어간 적 없는 걸 성관계라고 부르나?”

“그것도 성관계거든요? 그리고 좆……대가리는 잠깐…… 들어갔었어요.”



환의 시선은 이제 다시 노트북 화면을 향했다. 해진은 그 화면을 확 닫아버릴까, 고민하다가 참았다.



“하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계약 조항, 추가해요.”



여전히 노트북에 붙박여 있는 시선이 얄미웠다. 노트북이 아니라 목을 접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해진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소파에 앉자 환의 미간이 구겨졌다.



“앞으로 이렇게 돌발적인 성관계를 맺게 될 시, 저에게 보상을 한다고 추가했으면 좋겠네요. 환이 씨도 솔직히 급하게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여전히 환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자존심이 바삭바삭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전날 밤 그런 짓을 해놓고는, 자기는 기절까지 했는데 혼자 가버리고. 이 호텔 방에 내버려두고. 처음 만나서 원나잇 하는 알파도 이것보단 매너가 좋을 거다. 물론 해본 적은 없지만.



그가 제게 감정이 없단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사살 당할 때마다 구멍이 나는 것처럼 속이 상했다. 익숙해져야 할 텐데.



“아, 머리 아파…….”



무심히 혼잣말을 읊으며 해진은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두통은 언제나 달고 사는 습관과 비슷한 것이라 딱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어차피 진통제도 안 들어서 참아야 했다.



그런데 환의 반응이 의외였다. 내내 모니터만 향하던 시선이 어느새 저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내가 아프든 말든 신경도 안 쓸 때는 언제고.’



해진은 의아했다. 밥 먹었느냐 한 마디도 않던 환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유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 없어지면 오메가 새로 구해야 되니까 그러겠지.’



어차피 내 몸뚱이가 고장나면 나도 소용없으니까, 그래서 제 몸 상태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강해진이라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게 아니다.



생각이 그렇게 닿기까지 이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환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노트북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확 파일이라도 날려먹었음 좋겠네, 못된 생각을 해도 개운치 않았다.



해진은 서러움을 꾹 누르고 여태 하고 싶었던 말들을 차례차례 읊기로 했다.



“제가 직장을 잃고 이렇게 호텔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이환 씨?”



환이 씨고 전무님이고 나발이고. 이제는 애인도 아니고 상사도 아니다. 아니, 공식적으로는 키스틸 전무실로 발령이 난 것이니 상사는 상사인가. 뭐, 알 바 아니었다.



그리고 이환은 예상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꼭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옆모습을 보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리고 몇 가지 계약 조항을 좀 더 추가하면 좋겠네요. 아이를 갖는 게 목적이라면 오메가인 저의 생활도 좀 신경을 써주세요. 이런 식으로 갇혀 있는 건 좋지 않아요.”

“안 됩니다.”



내내 개무시를 하던 놈이 이번에는 빠르게도 대답을 한다.



“그럼 이 근방만이라도 나가게 해주세요. 사람이 어떻게 호텔에만 처박혀 있어요!”



다시 침묵. 해진은 참지 못하고 결국 노트북을 밀어 닫아버렸다. 쾅, 제법 큰 소리가 났다. 환은 반으로 접힌 노트북에 여전히 손가락을 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트레스가 산모한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아세요? 비타민D 부족은요? 운동 부족은요?”



다다다 쏘아붙이는 말도 죄다 무시한 채 환은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얼굴에 드러난 무심함이 견고했다. 단단한 턱뼈와 곧은 콧대 때문에 더더욱 불통으로 보였다. 그는 꼭 말 안 통하는 애완동물을 옆에 두고 일하는 사람 같았다.



그래, 제 취급이 딱 그 정도였다. 해진은 결심했다. 그렇다면 네 용도대로 순순히 쓰여줄 생각도 나한텐 없다고.



그는 일부러 오만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최대한 아파 보이도록 눈꼬리까지 늘어뜨렸다.



“아아, 또 머리가 아파오네…….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연기에는 자신이 없지만 이환의 재수 없을 정도로 멀쩡한 저 얼굴을 보니 오기가 생겼다.



해진은 옆으로 쓰러지는 척 슬그머니 몸을 기울이며 곁눈질로 환의 눈치를 보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어설픈 연기이건만 놀랍게도 환의 표정이 변했다.



‘뭐지?’



의아했으나 기회를 놓칠 해진이 아니었다. 그는 아예 신음까지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실내에만 계속 있으니 자꾸 현기증이 나서…….”



그를 물끄러미 보던 환이 휴대폰을 빼 들었다. 해진은 한쪽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귀를 바짝 기울였다.



“가지고 오십시오, 지금.”



딱 한 마디를 하고 환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를 마주했다.



약 3분이 지난 뒤에 누군가 호텔 방으로 왔다. 일전에 해진도 만난 적이 있던, 박 비서라는 사람이었다. 서류 봉투 하나를 내려놓은 남자는 몹시 지친 얼굴을 하고 도로 방을 나갔다.



“확인하고 서명하십시오.”



그의 말에 봉투를 열어 보았다.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봤다면 경악할 내용들이 무슨 사업 내용인 양 조항을 갖춰서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차례대로 읽어 내려가던 해진은 조금 놀랐다. 자신이 그에게 좀 전까지 요구했던 사항들이 적혀 있었다.



[‘을’은 임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 및 협조한다. 만약 2조 4항에서 정해진 3회 이외의 성관계가 돌발적으로 이루어질 시 ‘을’은 ‘갑’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으며 이 보상의 내용은 ‘갑’과 ‘을’의 합의에 따른다.]



그는 감동하려는 마음을 꼬집듯이 참았다. 가만 읽어보면 그럴싸하게 구색 삼아 넣었을 뿐이지, 이환이 합의를 안 한다고 우긴다면 답이 없는 거 아닌가. 뭐, 어차피 앞으로 ‘돌발적인 성행위’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속으로 투덜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혹시 여기 도청 장치라도 달아 놓았나? 누가 24시간 내내 듣고 있는 거 아냐?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어젯밤 그와 했던 행위들이 또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쨌든 계약서의 내용은 일전 합의한 것과 동일했다. 총 세 번의 성관계. 환의 러트와 자신의 히트사이클, 그리고 겹치는 때에 각각 한 번씩, 반드시 체내에 사정할 것. 대가는 각 10억. 출산의 대가는 20억.



체감도 되지 않는 액수이지만 다시 보니 또 입이 벌어졌다. 마른침을 삼키는데, 환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그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다 읽었으면 서명하십시오. 가뜩이나 바쁜데 귀찮게 굴지 말고.”



하여튼 진짜 성격 이상하다. 해진은 손을 뻗어서 그의 재킷 주머니에 꽂힌 펜을 낚아채듯 가져와 계약서에 대고 사인을 했다. 환은 기다렸다는 듯이 계약서 한 부를 가져갔다. 맡겨 놓은 빚이라도 가져가는 것 같았다.



“제 옷도 좀 갖다 줘요. 다른 물건도요. 이대로는 못 살아요.”



환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재킷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카드 하나를 뽑아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그딴 쓰레기들은 다 내버리고, 필요한 건 이걸로 주문하십시오. 카드 값은 50억에 포함시키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해진이 카드를 들어 보았다. 새카만 색의 좀 특이해 보이는 이 카드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생각했다가 기억해냈다. 일전에 이환이 공원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2천 원 결제할 때 썼던 그 카드다.



“……진짜 필요한 건 다 사도 되나요? 한도가 얼마인 줄 알고…….”



그러자 환이 픽, 입술을 틀어 비웃었다.



“강해진 씨가 아무리 써도 한도까지는 못 쓸 겁니다.”



그 순간 해진은 억울하게도, 환이 진심으로 멋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이렇게 돈만 밝혀서는 안 된다. 심지어 아직 받지도 않았잖아.



“그럼 저 나가도 되나요?”

“하루에 최대 한 번, 꼭 필요한 일이라면 제가 확인 후 허용해드리죠. 대신 제 직원을 대동하십시오.”



직원이라면 저 밖을 지키고 있는 덩치들을 말하는 것일 테다. 보아하니 삼교대를 하는 모양이던데,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구분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아예 못 나가는 건 아니네. 이 정도면 괜찮아.’



해진은 저도 모르게 안도하는 스스로에게 잠깐 놀랐다. 미친 알파에게 붙들려서 강제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처지인데, 뭐? 괜찮다고? 물론 돈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받기로 하긴 했지만. 한도가 엄청 높을 것 같은 카드도 받았지만.



그리고 해진은 결정적으로, 아직까지도 이환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미운 감정과 싫은 감정은 별개가 아닌가. 그가 밉기는 하지만, 싫으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에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갑니까?”

“다시 자러요. 회사도 안 가는데, 뭐, 할 게 있나요. 하다못해 노트북도 없는데.”



자조적으로 말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그는 열심히 모아놓은 자신의 컬렉션이 그리웠다. 아마존 탐험가들의 용감한 이야기를 다시 보고 싶었다. 한정판 블루레이를 틀어놓고 팝콘을 먹으며 시간을 때우고 싶었다.



걷던 해진이 멈춰 서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카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저걸로 사면 되겠네. 절판된 건 구하기 어렵겠지만, 아무리 희귀해도 돈이면 될 것이다. 고민이 해결되었다.



좀 더 가벼워진 걸음으로 침실 쪽을 향했다. 작은 몸집에 지나치게 큰 가운이 무겁게 너풀거렸다.



“강해진 씨.”



등 뒤로 좀 묵직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해진은 다시 뒤돌았다.



“도망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환의 말에 다시 마음이 쑤셨지만 내색 않고 돌아섰다.



침실로 들어가 어둑한 침대에 몸을 구겨 넣자 서러움이 더 짙어졌다. 그래도 몸 괜찮냐고, 한 마디 정도는 물어봐 줄 줄 알았는데.



“……나쁜 놈.”



그래, 나쁜 놈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돈이나 펑펑 써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웅크리고 또 웅크렸지만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 2권에서 계속 >





99.99퍼센트의 연인 2





목차





20퍼센트

40퍼센트





20퍼센트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덩치들이 해진에게 휴대폰 충전기와 새 노트북을 갖다 주었다. 인터넷을 켜자 해진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아, 라이브 방송도 못 봤잖아!”



유명한 탐험가가 자기 SNS 계정으로 라이브 방송을 한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놓쳤다. 호텔 방의 TV는 공중파만 나와서 그가 늘 챙겨보는 탐험 관련 채널도 하나도 못 봤다. 일단 업로드 된 영상들을 확인하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영상과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해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에도 룸서비스로 음식 5인분을 시켰다. 대신 특별한 주문 내용을 덧붙였다. 모두 혼자 먹을 수 있게 양을 오분의 일씩 줄여달라고 말이다. 이 개자식의 돈은 쓰고 싶지만 음식물 쓰레기로 환경을 오염시키기는 싫었다.



가격은 그대로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직원은 당황하는 듯했다. 그러나 키스틸 레저의 이환 전무 이름을 대자 금세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트에 층층이 담겨 온 음식들을 먹으며 해진은 문득, 평소였다면 지금쯤 출근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운 차림에 소파에 앉아서 다섯 가지 음식을 한 입씩 맛보던 그는 뭔가를 깨달았다.



‘솔직히…… 완전 꿀인데?’



회사도 안 나가겠다,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겠다, 이제 인터넷도 되고, 개자식이 준 카드까지 있으니 꿀이라고 봐도 되는 거 아닌가.



물론 멋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지만…….



감금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한숨이 나야 하는데, 해진은 아직까지 딱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냥 호캉스라도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었다. 해진의 속에서 어떤 강력한 생존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풀어져서는 안 된다고.



‘과연 환이 씨가 아이 하나로 만족할까?’



해진의 불안감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했다.



일단 계약서는 작성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이환에게 왜 아이가 필요한지, 왜 하필이면 자신인지 알지 못했다.



여태까지 본 환의 모습은 정말로 미친놈에 가까웠다. 아이를 하나 낳는다고 과연 자신이 벗어날 수 있을지 의심이 되었다.



집도 없애고 회사도 관두게 했다. 애초에 제게 접근한 것도 모두 계획적이었을 테다. 절대 보통 사람은 아니다.



‘아이를 낳은 뒤가 문제일지도 모르지. 지금도 이렇게 가둬두고 있는데.’



일전, 그가 러트 중에 회사까지 찾아왔을 때 저를 쳐다보던 사나운 눈빛이 파뜩 떠올랐다. 사냥감 찾은 짐승 같던 눈빛이 생각나자 몸을 떨었다.



‘아마 임신이 거의 힘들 겁니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겠군요. 행여 임신에 성공하더라도 유산 확률이 높을 겁니다.’



의사의 말도 떠올랐다. 대충 돈만 받고 튀어야지 생각했는데 - 아니, 사실 계약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해진 자신의 의지가 딱히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 어쩌면 진짜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벗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혹시 아이를 낳을 때까지 나를 괴롭히면 어쩌지?’



이환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섹스는 총 세 번으로 계약했지만 만약 그때까지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세 번 만에 임신이 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거 아냐?’



그러지 않고서야 계약을 그런 식으로 했을 리가 있나. 그때도 이상하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더 이상했다. 아이가 진짜 목적이라면 임신할 때까지 관계를 갖자고 했을 텐데 말이다.



해진은 다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이환은 제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계약서에는 임신할 때까지 관계를 맺는다는 조항이 없었다. 그저 세 번의 관계에 대한 보상만이 적혀 있었다.



왜일까? 해진 자신이 관계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아니다. 여태 제게 한 행동을 보면 저를 위해서는 절대 아니다.



‘내 몸이 어떻게 되든 상관도 안 하는 사람인데…….’



격한 섹스 등으로 제 몸이 망가지는 걸 그가 걱정했을 리 없다. 게다가 해진의 몸이 약해서 임신이 힘들단 사실을 그가 알고 있을 가능성도 낮았다. 알았다면 계약을 하지 않았거나 다른 조건을 내걸었겠지. 그럼 결론은 한 가지였다.



‘세 번 안에 나를 임신시킬 수 있다고 확실하게 믿는 거지.’



대체 얼마나 매칭률이 높길래? 해진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살짝 소름마저 끼쳤다. 가운 입은 팔뚝을 쓱쓱 문지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어쨌든 의사는 내가 임신하기 힘들댔어.’



예전에 딱 한 번 들었던 의사의 말이 그나마 해진에게는 유일하게 믿을 거리였다. 기능엔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임신이 힘들고, 된다고 하더라도 유산한다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임신이 된다면.



‘아이 가지면…… 몸이 많이 망가지겠지…….’



임신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감기 한 번만 걸려도 죽을 둥 살 둥 끙끙 앓는 해진이니, 아이를 몸에 배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부른 배를 안고 입덧으로 말라가는 자신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임신은 절대 안 돼.’



세 번의 성관계로 임신이 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관계 대가를 받자마자 튀는 것이다.



‘몸이 망가지기 전에 도망치자. 할 수 있어.’



유명한 탐험가들은 아주 험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탈출했다. 그러니 도시에서 도망치는 일이야 쉬울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임신이 되는 경우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임신이 된다 하더라도 초기에 도망치면 괜찮을 거야.’



배가 부르기 전에만 도망치면 된다. 물론 초기에도 많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괜찮을 거다.



‘그리고 일단 아이를 가지기만 하면 함부로 대하지도 못할 거야.’



기껏 구한 오메가가 유산이라도 되면 안 되니까. 그가 느슨해지는 틈을 타서 도망쳐도 되고. 물론 잠만 자고 바로 도망칠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말이다.



“나는 할 수 있어.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못 할 것 없어.”



위대한 탐험가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혹독한 환경에서도 용기를 가졌다.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입맛이 죄다 달아났다. 작은 그릇에 조금씩 담긴 음식들도 다 먹지 못하고 트레이를 밀친 뒤 소파에 웅크리고 누웠다.



누운 그의 시야에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카드가 들어왔다. 해진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 * *





“하아…….”



환은 벌써 10분 동안 다섯 번도 넘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오늘 업무는 효율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젠장. 왜 자꾸…….’



자꾸 해진의 그 말캉하고 촉촉하던 구멍 감촉이 떠올라서였다.



업무 내내 그는 허벅지가 불룩하게 불편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 조그마한 오메가 놈이 제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몰라도, 이렇게 몸이 이상 증세를 보이는 걸 보니 분명 요망하게 자신을 홀려놓은 게 분명했다.



이상 증세, 그래, 환은 강해진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었다. 여태껏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적 없는 자신의 삶을 멋대로 뒤틀려고 하는 이. 환이 얻은 이상 증세.



그저 제 아이를 낳을 몸일 뿐인데, 왜 이렇게 자꾸 휘둘리고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일이고 뭐고, 당장 호텔로 가서 다시 강해진의 그 쫄깃한 구멍을 이번에는 제대로 들쑤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냥 계약이고 뭐고, 달려가서 다리를 벌리고 이 발기한 물건을 쑤셔 넣은 뒤 그득하게 정액을 채워줄까. 어차피 그도 원하는 것 같던데. 제 정액을 머금고 뻐끔거릴 강해진의 구멍을 상상하자 발기한 성기가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하아…….”



또 한숨. 마른세수를 한 환은 모니터를 노려보았지만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전무님, 여섯 시입니다.



책상 위에 놓인 스피커폰이 켜지더니 박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이렇게 되었던가. 강해진 때문에 일과를 망쳤다는 생각에 또 짜증이 치솟았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짜증은 나지만 희한하게도 그 밀가루떡이 밉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 전무님?



목을 가다듬고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퇴근하십시오. 저도 들어가 볼 테니.”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 한편에 부착된 벽거울 앞에 섰다. 평소와 달리 퀭한 눈가가 시야에 들어와 인상을 구겼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환은 몇 번이나 제 모습을 엘리베이터 문에 비춰 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손으로 연달아 빗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강해진에게 보일 제 모습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호텔로 모실까요?”



차에 올라타자마자 날아온 기사의 물음에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명령했다.



“아니. 내 집으로.”



그래, 당분간은 강해진과 거리가 두는 게 좋을 듯했다. 그 요망한 놈이 자신을 또 어떻게 홀려버릴지 모르므로.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환은 그날 밤 잠을 도통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어도 계속 고 조그마한 녀석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에게서 나던 독한 딸기 향의 체취도 코끝에 맴돌았다.



솔직히, 환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호텔로 쳐들어갈까. 그의 다리를 벌리고 구멍에 코를 박고 들이마시며 그를 한껏 괴롭혀주면 이 기분이 나아질까.



환은 결국 벌떡 일어나 발기한 제 성기를 쥐고 흔들어야만 했다. 욕실에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이불 속에서 딱딱해진 것을 마구 흔들었다. 이불 아래에서 손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후…….”



결국 이불에 흥건하게 사정하고야 말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이리저리 정액이 튀어서 잿빛 이불을 희끗하게 적셨다.



파정이 끝나고 후희 대신 현실감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환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더더욱 황당한 사실은, 이렇게 사정하고서도 아직까지 강해진을 원하는 제 몸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는 더러워진 침구를 그대로 두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서 자는 건 딱 질색이지만 더러운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야 나을 터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되었을까. 환은 무언가가 자신의 근간을 긁어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견고한 제 성채가 고작 저 밀가루떡 하나 때문에 위기를 맞았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강해진에게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자신을. 지금도 안달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발정 난 개같이 변해버린 스스로를.





환은 일부러 며칠 동안 해진을 찾지 않았다. 이유를 따지자면 끝도 없이 찾을 수도 있었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었다.



그저 제 몸을 원하는 그 요망한 녀석에게 순순히 얼굴을 들이밀어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절대, 절대로 자신이 강해진의 앞에서 이성을 잃는다거나 또 그때처럼 바지를 내리고 덤벼들까 걱정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호텔로 찾아가지 않더라도 강해진이 무사히 있는지는 그곳의 경호원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요즘 들어서 뭔가를 잔뜩 주문했는지 택배가 계속 오고 있다고 했다. 아픈 곳도 딱히 없어 보이고, 밥도 한 끼마다 다섯 가지 요리를 꼬박꼬박 주문해 먹고 있다고.



‘흥, 내가 없어도 혼자 멀쩡하게 지낸다 이거지.’



건방지게도 말이다. 환은 좀 불만스러웠다. 제 밑에 깔려서 좋다고 헐떡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내가 없어도 멀쩡하게 지낸다니. 역시 한동안 얼굴을 비치지 않는 게 상책인 듯했다.



문제는 이환 본인이었다.



그는 한 번 맛을 보았던 강해진의 몸을 다시 입에 담고 싶어서, 손안에 쥐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해진과 몸을 맞대어서는 안 되었다. 이렇게 중독적일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강해진을 생각하는 일은 꼭 몸에 나쁜 불량 식품의 맛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그만큼 자극적이고 멈추기가 힘들었다.



생각은 몸으로도 이어져서 잦은 두통과 식욕 부진 및 소화 불량을 동반했다. 입맛을 잃은 이환은 끼니를 거르고 일에 매달렸지만, 일을 해도 해진의 달뜬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저…… 전무님, 괜찮으십니까?”



재무팀의 월간브리핑 직후 박 비서가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안색이 영 안 좋…….”

“뭐가 괜찮으냐고 물으신 겁니까? 제가 오메가 하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는 모자란 놈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그깟 조그만 놈에게 휘둘려서 일도 못 할 정도로 정신 못 차리는 멍청이로 보입니까? 제가 박 비서님 눈에는 그 정도로밖에 안 보입니까?”



박 비서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환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돌아섰다. 하여튼 상사에게 건방지기는. 자신은 이렇게나 멀쩡한데 모함을 하고 말이다. 이것도 전부 강해진의 탓이었다. 그러니 어서 일을 해치워야…….



돌아서려는 그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어서 해치우면 될 것 아닌가.



“박 비서님.”

“예.”

“혹시 물건 하나 구해줄 수 있습니까? 약인데.”



박 비서가 짜증과 불안함이 섞인 얼굴을 했지만, 환은 만족스레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되는데. 망설일 필요가 있나.





호텔에는 이환의 카드로 주문한 물건들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블루레이 플레이어와 각종 다큐멘터리 블루레이 디스크, 그리고 만화책까지.



해진은 매 끼니마다 다섯 가지 요리를 주문해서 먹었고, 호텔 요리가 지겨워지자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은 후에는 혼자 산책 대신 넓은 호텔 내부를 걷고, 탐험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잤다.



솔직히 호텔 생활은 ‘개꿀’이었다. 회사도 안 나가고 일도 안 하고,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으니.



‘돈이 좋기는 좋구나.’



평소에는 쇼핑몰 카트에서 백 번도 더 고민하던 블루레이 디스크를 가득 늘어놓고 있자니 기분이, 뭐랄까, 좋다기보다는 묘했다.



‘환이 씨는 연락도 없고…….’



그는 저를 이 호텔 방에 처박아두고 지금 며칠째 연락도 없었다. 해진은 그에 대한 원망을 쇼핑으로 풀기로 했다. 옷장을 가득 채울 옷을 사이즈도 확인하지 않고 샀으며, 당장 보지도 못할 VOD를 하루에 몇십만 원어치 샀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해진은 슬슬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환이 보고 싶었다. 억울하게도 말이다.



늘어져 있던 해진은 문득 든 한 가지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슬쩍 대문을 열자 복도에 서 있던 덩치 두 사람이 해진을 돌아보았다.



“저,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덩치들의 기세에 아주 잠깐 겁을 먹었지만, 해진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덩치들에게서 답변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약 세 시간이 지나서였다.



평소처럼 다섯 가지 룸서비스를 주문해서 배가 터지도록 먹은 뒤 - 주문한 대로 정말 조금씩 양을 주었지만 해진이 먹기엔 많았다 - 트레이를 내놓는데 덩치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해진이 들기에 트레이는 몹시 무거웠지만 그들은 도와주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전무님한테 물어보셨어요?”

“예. 안 됩니다.”



덩치들의 말에 해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네? 왜요? 그냥 쇼핑인데요!”

“전무님께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한숨이 나왔다. 부탁한 것은 별것도 아니었다. 그냥 근처 쇼핑몰로 나가서 쇼핑을 하고 외식을 한 뒤 돌아오겠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환은 그것마저 허용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안 된대요? 이유나 들어보죠.”



덩치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이유 따위 없고 그냥 내가 나가는 게 싫은 거겠지.



“애당초 제가 원할 때는 마음대로 나가도 된다고 했다고요! 이야기만 하면 아저씨들 데리고 나가도 된다고 전무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안 된단 거예요?”



여전히 침묵. 두 경호원은 이제 아예 시선을 돌리고 해진을 무시했다. 바위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어서 해진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도로 들어와야 했다.



소파에 드러누웠지만 기분이 영 풀리지 않았다. 나갈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얼굴 한 번도 안 비치면서, 명령은 명령대로 다 하고. 아주 잘났어, 진짜.’



해진은 이환이 미웠다. 이 정도면 정말 정이 떨어지겠다, 싶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까지도 이환이 보고 싶었다. 우습게도 말이다.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딴 놈이 보고 싶은 걸까.



솔직히 말하면 그날 밤, 환이 제게 안겨주었던 쾌락이 자꾸 떠오르는 게 컸다.



해진은 성적인 경험이 전무했다. 그러니 그렇게 누군가의 손길과 성기를 이용해서 쾌락을 얻은 적도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해진은 또 그 짓거리를 하고 싶었다. 제 구멍을 스치던 이환의 딱딱한 성기 감촉을 떠올리면 아래가 축축해질 정도였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무언가를 갈망하거나 원한 적이 없던 해진이었다. 나름대로 인내심을 갖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환을 생각하면 참을성이 바닥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멍청해지는 것 같았다. 좀 갑갑한 면이 있기는 해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고 믿었는데 말이다.



“진짜, 짜증 나…….”



그는 자기 자신이 낯설었다. 이런 기분은 싫었다. 저를 이곳에 가두고 물건처럼 취급하는 성질 못된 알파 놈 때문에 자신이 망가지는 게 싫었다.





* * *





환은 지지부진한 업무에 짜증을 내면서도 주기적으로 경호원들에게 연락해 해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대답은 늘 비슷했다. 잘 먹고 잘 있다고.



그런데 해진을 찾지 않은 지 닷새째였다. 하루에 몇 번씩 전화해도 비슷한 대답을 내놓던 경호원이 처음으로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 저, 사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긴 합니다.

“뭐지?”

- 설명하기 힘듭니다만……. 직접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귀찮고 짜증이 나지만 하는 수 없이 가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절대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열흘 만에 찾아간 호텔은 엉망이었다. 가장 먼저 그를 맞은 것은 거실을 빼곡하게 채운 공기청정기였다.



“대체 이게 무슨…….”

“어, 환이 씨, 오셨어요?”



해진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TV가 새로 놓여 있고, 그 앞에는 블루레이 플레이어와 디스크가 그득했다. 디스크 상자에는 하나같이 ‘탐험’, ‘어드벤처’, ‘서바이벌’, ‘다큐멘터리’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환이 씨 카드로 샀어요! 잘했죠?”



환은 순간 미간을 구겼다. 주고 간 카드를 마음대로 쓰라고 한 건 맞았다.



블랙카드는 일반 카드와 달라서 카드 결제 내역을 일일이 통보하지 않는다. 상이한 결제 내역이 발생하면 일시 정지가 되거나 카드 주인에게 직접 연락이 가는 방식이다. 물론 해진에게 건네준 뒤 박 비서가 아마 카드사에 따로 연락을 해두었을 것이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문제는 거실에 가득 찬 공기청정기였다. 똑같은 디자인의 공기청정기가 발 디딜 틈이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데, 어림잡아 스무 대는 넘어 보였다. 모두 가동 중이라는 사실도 환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여기 틀어박혀 있으니까 맑은 공기가 너무 그리워서요. 그래도 환이 씨가 카드 주신 덕분에 바깥 공기는 아니더라도 맑은 공기는 실컷 마실 수 있네요! 감사해요!”



해맑게 웃으며 하는 말이 진심인지 저를 욕하는 말인지 바로 구분이 가질 않았다. 돈은 아깝지 않았다. 문제는 저 밀가루떡 녀석이었다.



저는 죽을 맛인데, 그를 보지 못한 그 며칠 동안 이렇게 피골이 상접했는데 심지어 피둥피둥하게 살까지 오른 듯한 밀가루떡을 보자 울화통이 터졌다.



정작 해진은 벌써 환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는 양 다시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까마득한 절벽을 등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해진 씨.”

“조용히 하세요. 저 지금 다큐멘터리 보고 있잖아요.”



해진의 말에 환은 황당해서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밀가루떡이 감히 내게 명령을 했단 말인가?



해진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제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환은 결국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강해진이 건방지게도 제 어깨 너머로 TV를 계속 보려 들기에 환은 테이블을 한 손으로 엎어버렸다. 위에 놓여 있던 블루레이 디스크며 과자 접시, 커피잔이 와르르 쏟아졌다.



난리가 났는데도 강해진은 겁먹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환을 노려볼 뿐이었다. 며칠 사이에 통통해진 듯한 뽀얀 뺨을 보자 갑자기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솟았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왜요?”



해진이 동그란 눈을 깜박, 깜박, 하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악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담긴 눈도 아니었다.



“전 시키는 대로 여기 틀어박혀서 아무도 못 만나고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는데요. 뭐 불만이라도 있으세요?”

“강해진 씨야말로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제게 불만이 상당한 모양이군요.”

“제 불만이야 많죠. 그런데 뭐, 말한다고 들어주시나요?”



환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해진이 그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해진은 사실 화가 나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는 닷새 만에 본 이환이 반가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웠다. 누구 때문에 지금 물건처럼 갇혀 지내고 있는데 그가 반갑다니. 하지만 퀭한 얼굴을 보니 안쓰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뭐야. 왜 핼쑥해.’



돈도 많고 잘난 사람이 왜 저런 꼴일까. 해진은 인상을 구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대신 활짝 웃었다.



“이환 전무님, 지금 되게 기분 나빠 보이시네요. 혹시 저 때문인가요? 에이, 그깟 돈 몇 푼 썼다고 지금 치사하게 그러는 건 아니죠? 돈 많잖아요, 키스틸 이환 전무님.”



환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 했다. 얼굴이 말이 아닌데도 여전히 번듯하게 잘생겨서 또 어이가 없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 꼴로 지낼 겁니까?”

“왜요?”

“나도 이곳에 가끔 들를 텐데, 이딴 돼지우리 같은 곳에는 단 일 초도 있고 싶지 않습니다.”

“아아, 정말요? 저언혀 몰랐네요. 저 여기 처박아두고 코빼기도 안 보이셨잖아요.”



해진은 제 말에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울컥, 표정마저 무너뜨렸다. 울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할 말은 해야 했다.



“……여기에만 갇혀 있기 싫어요.”



이번에는 환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를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아니, 제가 조금이라도 편한 환경에서 아이를 갖길 바라신다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세요.”



그래도 할 말은 마저 해야 할 것 같아서 또박또박 내뱉은 뒤, 해진은 그제야 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환의 표정에 놀라고 말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몹시 사나웠다. 마치 그때, 러트 때처럼.



“강해진 씨,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그 비웃음에 해진의 마음이 또 아렸다.



“당신 대우는 내가 정하는 겁니다. 아직도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엉망으로 어질러진 바닥을 밟고 이환이 그에게 다가왔다. 거침없는 동작과 비웃는 얼굴에서 거친 위압감이 드러났다.



그가 툭, 무언가를 해진에게 던졌다. 해진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았다.



“히트사이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나 해.”



이환이 던져 준 것은 알루미늄 포장지에 싸인 알약이었다.



해진은 한 손으로 알약을 쥔 채 어쩌라고, 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환이 먹으라는 투로 턱짓했다.



“드십시오.”

“이게 무슨 약인데요?”

“우리의 일을 좀 더 빨리 해결해줄 약입니다.”



좀 더 빨리, 해결……? 뉘앙스가 영 이상해서 해진은 인상을 구겼다. 손에 쥔 알약을 내려다보았다. 포장지에는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고, 의약회사 로고 같은 것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알약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이거…….”



해진은 자신의 결론이 너무 비약적이었기를 바라면서, 이환에게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길 바라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히트사이클 당기는 약……은 아니겠죠?”

“맞습니다.”



이환의 뻔뻔한 대답에 해진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지금 이 인간이, 진심으로 말하는 거 맞나?



히트사이클을 당기는 약에 대해서는 해진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히트사이클을 늦추는 약과는 달리 이 약은 시중에서 합법적인 유통으로 판매되지 않고 있었다. 부작용도 만만찮거니와, 범죄에 악용될 우려가 있어서였다.



일명 ‘발정제’라고 불리는 이 약은 고열과 하복부의 심한 통증, 출혈, 호르몬의 이상 등을 부작용으로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해진은 자신이 이걸 먹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환이 제게 이걸 먹이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해진은 손에 든 알약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싫어요! 제가 왜 이걸 먹어요!”

“좋은 말로 할 때 드십시오. 해진 씨도 어서 이 짓거리를 끝내고 싶지 않습니까?”



그 말은 사실이기는 했다. 해진 역시 이딴 짓거리를 끝내고…… 어서 돈이나 받고 튀고 싶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약한 몸에 이런 불법 약을 먹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먹는 약이 몇 가지인지는 아세요?”



해진이 물었고, 예상대로 이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울컥, 서러움이 치솟았지만 꾹꾹 씹어 삼켰다.



“제 체질이 어떤지, 약품과 식품 중에서 어떤 알레르기가 있는지, 제가 먹는 약과 이 약이 충돌해서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다 계산하고 주신 건가요?”



여전히 침묵. 이환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해진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자 기가 막혔다.



“알았어요, 먹을게요. 대신에 이환 씨도 러트 당겨주는 약 드세요.”



러트를 당기는 약 역시 부작용이 만만찮아서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고 있었다. 제게 이딴 것을 먹일 생각을 했으니 그 역시 똑같은 일을 감내해야 하지 않나. 물론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자신과 저 건장한 자식은 패널티가 다르지만.



그러나 이환은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해진은 허망해졌다. 그 정도도 감당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 남자는? 나쁜 건 나한테 다 몰아주고?



해진은 곧이곧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 움츠려 보였다. 너 따위 무섭지 않다는 의사가 최대한 드러나도록 눈썹을 올리고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럼 저도 안 먹어요.”

“좋은 말 할 때, 먹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 음절마다 힘을 주며 하는 말이 아무리 들어도 협박조였다. 해진은 제 두려움이 얼굴로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마른침을 몰래 삼켰다.



“안 먹는다고요! 이런 약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는 해요?”



이환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데, 얼굴은 초췌한데도 그 모습이 재수 없을 정도로 잘나 보여서 해진은 또 울화통이 치밀었다.



“안 먹는다고.”

“그래요!”

“그럼, 밑으로 쑤셔 넣어줄까?”



하도 황당한 물음이라 순간 그 무례함과 폭력성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그보다 ‘좌약도 된단 말이야?’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내내 입가에 비죽이 떠 있던 웃음이 환의 얼굴에서 사라지자 해진도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키 차이가 많이 나서 해진은 여전히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주눅 들지는 않았다.



“넣어봐라, 미친놈아! 내 엉덩이 어디 한 번 멋대로 벌려보기만 해라!”



오히려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이 제대로 자극이 된 건지 환의 눈썹이 화를 담고 비틀렸다.



환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좀 전 쏟아진 음료와 과자로 엉망이 된 바닥 위로 해진의 몸이 무너졌다. 환이 그의 다리를 우악스레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금방이라도 바지 지퍼를 내릴 기세였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이거 놔!”



해진은 지지 않고 버둥거렸다. 커피와 과자 조각으로 몸이 엉망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허우적거렸다. 옷이 엉망으로 젖고 뺨도 더러워졌다. 무언가에 다친 듯 손에 통증도 느껴졌다.



그러나 환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 손길이 우악스러웠다. 양쪽 다리는 그의 무릎 아래 아프게 짓눌렸다.



해진은 주먹을 되는대로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뻗은 동작에 몇 대는 환의 팔뚝에 스쳤지만 기별도 가지 않았다. 결국 바지가 거의 다 벗겨지고서야 해진은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구멍에 알약이 쑤셔 들어오는 수치스러운 일은 피하고 싶었다.



“아, 알았어! 먹을게, 먹으면 되잖아, 미친 새끼야!”



그리고 당연히, 당장의 수치를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이 약을 먹고 정말로 앓아눕게 된다면, 그때 한 가지 기회가 제게 생기는 것이기도 하니까. 물론 정신이 멀쩡할 정도로만 아파야 하지만.



그의 외침에 환은 해진에게서 손을 떼었다. 해진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내가 아프면 당신 책임이야. 알았어?”



환은 여전히 그의 말에 반응이 없었고, 익히 예상한 바였다. 해진은 더러운 바닥에서 알약을 주워들었다. 보란 듯이 포장을 까려고 하는데 환이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제 손으로 포장을 뜯었다.



“입 벌려.”

“내가 먹는다니까.”

“입, 벌려.”



해진이 입을 벌리자마자 환의 손가락이 우악스레 파고들었다. 딱딱한 알약 감촉이 혓바닥을 지나 곧바로 깊은 곳에 닿았다. 자연스레 구역질이 치솟았다.



“컥……!”

“뱉으면 맞을 줄 알아라. 똑바로 삼켜.”



억지로 들어온, 제법 알이 굵은 약을 억지로 삼켰다. 눈물이 찔끔 났다. 이에 닿는 손가락을 마구 깨물었지만 이환은 꿈쩍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안으로 쑤셔 들어왔다.



기어코 알약을 깊숙이 넣어 삼키게 만들고서야 손이 입에서 빠져나갔다. 해진은 쿨럭거리며 입가를 닦아냈다. 턱이 아팠다.



“쿨럭, 흐으…….”

“왜 사람을 꼭 귀찮게 만드는 겁니까.”

“제가 먹으려고 했는데 손 쑤셔 넣은 건 그쪽이거든요.”



해진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어깨로 닦는 동안 이환은 손수건을 꺼내 제 손을 닦았다. 표정이 꼭 못 만질 것을 만졌다는 듯했다. 해진은 어이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제 입보다 그의 손이 더 더러운 거 아닌가?



“내일 오겠습니다. 그 전까지 이 쓰레기들, 다 치워놓으십시오.”



이환은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환이 있던 곳에는 대신 적막이 들어찼다.



해진은 그제야 제 바지가 커피에 엉망으로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긁혔는지 팔뚝에 큰 상처도 있었다. 피가 맺힌 것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대충 손으로 닦아내었다.



상처는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마음이 이상했다. 아픈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었다.



해진은 허망했다. 자신의 첫사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알파가, 다정한 줄만 알았던 이환이 제게 부작용 가득한 약을 먹였다.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미친놈한테서, 내가 정말 무사히 벗어날 수 있기는 할까.



이전에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무리 지독한 놈이더라도 벗어날 구석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목에 남은 이물감을 느끼며 더러운 바닥에 앉아 있는 제 꼴을 의식하고 있자니 문득 그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진은 상처를 치료하거나 바닥을 치울 생각도 않고 엉망인 바닥 위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힘이 점차 빠졌다. 벌써 약 기운이 도는 건 아닐 텐데, 아랫배가 묘하게 아파왔다.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던 해진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아주 심한 복통 때문이었다.



“아, 흑…….”



눈물이 맺힐 만큼 아팠다. 온몸이 축축한데 땀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죄다 곤두서서 아랫배로 쏠리는 듯했다.



해진은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누굴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환이, 씨…….”



유일하게 생각나는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지금 곁에 없었다.



아랫배를 찢어발기는 듯한 통증에 해진은 한참 동안 더러운 바닥에서 뒹굴었다. 이환이 나간 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호텔 거실은 그야말로 쓰레기장 같았다. 깨진 컵과 과자 조각 사이에서 해진은 마구 몸을 뒤틀었다.



“흐으, 윽……!”



꼭 살가죽을 가로로, 세로로 찢는 듯하다가 또 갑자기 송곳으로 뚫는 듯한 어마어마한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해진은 겨우 소파 위로 기어올랐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자신의 상태가 어떨지 추측해보려 했지만, 단지 견디기 힘든 고통만 몸속에 가득했다.



“아……. 흑…….”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해진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짜내려 애썼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애써 끌어 내렸다. 괴로웠지만, 죽을 만큼 아프지만 진짜 죽기는 싫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애써 소파 위를 벗어났다. 어두운 거실을 가로지르는 일조차도 힘들었다. 마치 압정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걷기 힘든데, 자신이 사놓은 공기청정기들이 자꾸 몸에 부딪쳐서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 개새끼의 돈을 조금이라도 쓴 건 후회가 되지 않았다.



고작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실을 마치 불어난 강물이라도 되는 듯이 힘겹게 가로지르던 해진은 결국 무릎을 꿇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배를 힘겹게 움켜쥐었다. 다리 사이가 축축했다.



‘안 돼…….’



죽을 때 죽더라도 그 개새끼 때문에 죽을 수는 없었다. 서러움보다는 오기가 앞섰다. 죽기 전에 이환의 돈 50억은 받고 죽어야 했다. 대체 이 자식은 어디로 간 걸까. 약을 먹였으면 지켜보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것도 이렇게 부작용이 많은 약을 먹여놓고 말이야.



이를 꽉 깨물었다. 옆에 있는 공기청정기 중 하나를 붙들고 일어섰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 손까지 미끄러웠다.



힘겹게 일어선 해진은 다시 발을 내디뎠다. 기어코 걸어가 TV 받침대 위에 놓인 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화면의 잠금을 풀고 통화 아이콘을 누르는 것도 힘들었다. 몇 번을 더듬은 뒤에야 겨우 이환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다행히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고 연결되었다. 이환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을 만큼 해진은 몹시 아팠다.



- 뭡니까.

“환……이 씨……. 저, 몸이…….”



이번에는 통증이 더 강하게 밀려왔다. 마치 내장이 압축기에 짓눌리는 듯했다. 해진은 비명을 삼키며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말을 이으려고 했으나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휴대폰을 놓치고 양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고통이 어마어마한데도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렸다.



“아, 아파요…….”



이미 떨어진 휴대폰에 들리지도 않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차라리 기절했으면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약한 몸뚱이는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바닥에 놓인 휴대폰 수신구에서 “강해진 씨.” 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해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지금 가겠다고 하는 말 역시 들을 수 없었다.



해진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흐른 땀이 입으로 흘러들었다. 휴대폰을 겨우 다시 쥐고 귀로 가져왔지만 이미 전화는 꺼져 있었다.



“개새끼가, 씨발…….”



이번에는 정말로 쌍욕이 나왔다. 사람이 아프다는데, 그냥 전화를 끊어? 그러나 오기도 생겼다. 기필코 살아남아야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진통제…….”



아마 환이 갖다 준 자신의 약 꾸러미에 진통제가 있을 것이다. 히트사이클을 당기는 약을 먹은 상태에서 진통제를 먹어도 괜찮을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아파서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부엌까지 걸어가는 데에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뒤따랐다. 정체 모를 장식품과 함께 선반에 놓인 약통을 집었다. 몇 번 손을 놓치고서야 진통제 두 알을 꺼낼 수 있었다. 입에 넣고 삼킨 뒤 다시 주저앉았다. 물을 마실 힘조차 없었다.



약효가 빨리 돌길 바라며 해진은 바 아래 웅크렸다. 제게 이딴 것을 먹여놓았으니 환이 찾아오기는 할 터다. 그러나 자신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낳을 제 배가 걱정되어서 오는 것이겠지.



해진은 생각했다. 그에 대한 마음을 딱 20퍼센트만 더 지우자고. 그러면 그만큼 덜 서러울 거라고.



다행히도 약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짝 웅크리고 있던 해진의 몸도 점차 풀렸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어지러웠다. 뿌연 이미지들이 눈앞을 둥둥 떠다녔고, 그것들은 모두 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우습게도, 해진은 아직까지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해진은 그런 호의와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게 모두 가짜라는 걸 알고서도 해진은 놓을 수가 없었다.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환이 연기를 지나치게 잘했다. 아니, 해진이 그에게 너무 의미를 많이 부여한 터다.



‘잘해주지나 말지…….’



적당히 잘해줬어도 바보 같은 자신은 넘어갔을 텐데. 하긴, 생각해보면 데이트할 때의 젠틀한 모습은 그저 제게 호감을 사기 위함이었고 케이터링 업체를 통해 식사를 챙겨준 것도 제 몸뚱이가 걱정되어서였겠지.



하지만, 해진은 환이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내내 혼자였던 저처럼 그 역시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진짜 인연이라고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싸온 도시락을 남김없이 먹고 웃는 이환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는 배처럼 해진은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기만 했다. 자신이 바보 같았다.



자조 속에서 깜빡 잠이 들려고 할 때쯤,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겨우 눈만 떴다. 통증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진통제 때문에 몽롱했다.



어둠 속에서 현관 쪽의 센서등이 켜지고, 환의 모습이 드러났다. 작은 불빛도 거슬려서 해진은 눈을 찌푸렸다.



“강해진 씨?”



해진은 그제야 제 몸이 몹시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의 알파 향이 코끝을 스쳤다. 가까워지지도 않았는데 그의 체취부터 코를 찔렀다.



환이 가방을 내던지듯 하고 달려왔다. 해진은 그 모습이 착각이리라 믿었다. 제게 그토록 못되게 군 이환이, 저런 표정을 지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해진의 얼굴을 감쌌다. 저를 보게 했다. 시야가 흐려서 이환의 얼굴이 두세 개로 겹쳐 보였다.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들리지도 않았다.



와중에도 해진은 이상했다. 왜 이렇게 겁먹은 표정을 짓는 거야? 억지로 약 먹일 땐 언제고…….



커다란 손바닥이 제 이마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해진은 몽롱함과 함께 낯선, 아니,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환의 손목에 뺨을 비볐다. 온도 차이가 확연해 소름이 끼쳤다.



“하아…….”



이환의 냄새를 크게 들이마셨다. 매캐한 알파 향이 몸에 들어오자 놀랍게도, 통증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해진은 깨달았다. 약 때문에 히트사이클이 온 것이었다.



아픈 와중에도 해진은 그를 원했다. 그가 저를 만져주길 바랐다. 아프고 달뜬 몸을 벗기고 이전처럼 더듬어주길 바랐다.



이렇게 되고서도 그를 원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싫었다. 스스로가 미웠다. 그러나 본능은 끔찍할 정도로 강했다. 해진은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환에게 매달렸다.



“저, 만져…… 주세요.”



이환의 얼굴이 굳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반면 이환은 지금 해진의 상태를 보며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렵게 구했다고 생색을 내며 약을 내밀었을 때, 박 비서는 그에게 말했었다.



‘부작용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몸이 영 약하지 않는 이상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군요.’

‘그런 애매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증상이고, 오메가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 정확히 말하십시오.’



박 비서는 아주 불편하단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정식으로 출시된 약이면 이런저런 임상 시험을 거쳐서 부작용도 설명서에 다 적혀 나오는데, 이건 그런 게 아니라서요.’

‘지금 그래서, 부작용이 뭔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약을 준 겁니까?’

‘전무님이 구해 오라고 하셨잖아요? 뭐, 싫으시면, 그냥 버리겠습니다.’



도로 가져가려는 약을 억지로 박 비서의 손에서 빼앗아왔다.



그리고 환은 오래도록 그 약을 쥔 채 고민했다. 이걸 밀가루떡에게 먹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물론 히트사이클을 앞당겨 준다면야 바랄 게 없지만, 하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일은 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일만 신경 쓰며 살아온 그였다. 그런데 자신은 대체 왜 지금 그를 걱정하고 있을까.



결국 결정하지 못한 채로 호텔에 왔을 때, 말라가던 저와 달리 강해진은 잘 먹고 잘 자서 살이 올라 있었다. 호텔 거실에 가득 찬 공기청정기는 필경 제게 하는 일종의 시위였다.



‘……여기에만 갇혀 있기 싫어요.’



‘여기 있기 싫다’는 해진의 말에 환은 울컥하고야 말았다. 거기다 제 처지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에는 화까지 났다.



결국 억지로 약을 먹였지만,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매번 이랬다. 강해진과 관련되면 제대로 사고할 수가 없었다. 이 오메가 옆에 있으면 멍청함이라도 옮는 것인지.



일단은 치료를 받아야 할 테니 닥터 최를 불러야 할 터다. 박 비서에게 이야기를 하면 아마 전후 사정을 알릴 것이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며 해진의 눈을 확인했다. 저를 보지 않고 자꾸 눈을 감으려는 게 아무래도 영 심각했다.



“강해진 씨, 정신 차려보십시오.”



몽롱한 눈은 환을 마주하지 못했다. 다만 커다란 손바닥에다가 뺨을 비벼대는데, 그 동작이 마치 보채는 어린아이 같은데도 지극히 음란했다.



“하읏…….”



급기야 소리까지 음란하게 낸다. 해진은 그의 손에다가 뺨을 함부로 비비적거리며 양손으로는 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마치 더 만져달라는 투였다.



해진의 몸은 무척 뜨거웠다. 그리고 익히 아는 딸기 향이 코를 찔렀다. 그의 이 열기가 부작용 증세가 아니라, 약으로 인한 히트사이클의 증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해진이 달뜬 몸을 그에게 순순히 안겨왔다. 방금 구운 빵처럼 따뜻하고 말랑한 몸이었다. 환은 얼떨결에 그를 안아 받쳤다. 보슬보슬한 머리칼이 턱을 스쳤다.



“이, 개새끼야…….”



예상치 못한 상스러운 말에 환은 뚝 굳었다. 방금, 뭐라고?



잘못 들은 건가. 환은 제게 안긴 강해진을 내려다보았다. 따끈따끈한 몸은 그가 조금 움직여도 그 반동에 힘없이 흔들렸다. 와중에도 떨어지기 싫다는 투로 상체를 제게 비벼댔다.



“개새끼, 너는…… 흐읏, 개만도 못한, 놈이, 야…….”



해진이 그의 어깨에다 이마를 비비며 계속 옹알거렸다. 환은 기가 막혔다. 몸은 달떠서 제게 비벼대는데 입으로는 욕을 해대는 것이 같잖았다.



황당함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해진이 이번에는 그의 목을 답삭, 물었다. 제 살을 작은 입술로 물고 끙끙거리는 꼴에 기가 찼다.



“흐으으……. 빨리, 흡, 뭐라도 해봐, 이 개새끼야……. 너 때문이잖아…….”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은 ‘발정기’라는 천박한 언어로 불리기도 한다. 환은 새삼 그 단어가 적절하다고 느꼈다. 제 허벅지에다 어느새 엉덩이를 얹고 비비기 시작하는 해진의 모습은 정말로 발정이 난 꼴이었으니.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건방진 밀가루떡의 험한 입이었다. 와중에도 박 비서는 당최 뭘 하는 것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해진의 머리채를 콱, 잡아당겨 제 몸에서 떼어냈다. 저를 마주 보게 했다.



“어디다 대고 욕지거리야. 상황 파악이 안 돼?”



그런데도 이 밀가루떡은 주눅 드는 기색이 하나도 없이, 외려 몽롱한 눈에 억지로 날을 세웠다.



“할 거면 빨리 끝내라고, 이 새끼야……. 이 개새끼야……! 나도 너랑 몸 섞는 거, 거북하고 싫다고……!”



이번에는 욕지거리보다 뒤이은 말에 더 화가 났다. ‘하기 싫다’는 해진의 말이 그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고작 이딴 조그마한 녀석에게 휘둘린다는 사실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환은 결국 울컥하고 말았다.



그는 제 성기가 단단하게 발기한 것을 느끼며 해진을 번쩍 안아들었다. 체구 작은 몸은 잠깐 버둥거렸으나 환의 품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여전히 개판인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간 환은 그를 침대 위에 내던졌다. 쿵, 제법 큰 소리와 함께 던져진 해진은 몸을 웅크리고 달뜬 눈으로 환을 노려보았다.



“방금 한 말, 제대로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웃기시네……. 대사도 무슨 90년대 망한 드라마 악역 같은 걸 치고 있어……. 흐읏…….”



히트사이클로 정신도 못 차리는 주제에 헛소리는 끊이지 않는 강해진이 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몸으로는 알파를 원하면서 감히 저를 원수처럼 노려보는 그를 짓눌러주고 싶었다.



한여름인데 호텔은 에어컨도 틀지 않았는지 몹시 더웠다. 어쩌면 해진에게서 나는 열기일지도 몰랐다.



환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가죽장갑을 꺼내 꼈다. 아무리 더워도 더러운 물을 질질 흘리는 강해진의 몸을 맨손으로 만지기는 싫었다. 그때 욕실에서야 뭐,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만. 지금은 아니니까.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손으로 늘렸다. 해진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아서 옷이나 벗을 것이지, 또 내가 직접 벗겨야 하나.



장갑을 다시 한 번 단단히 당긴 환이 그의 멱살을 잡듯 티셔츠를 잡아끌었다. 그대로 옷을 찢어버렸다.



“잠, 깐……!”



잠깐은 무슨. 넝마가 된 티셔츠를 내던진 환은 해진의 바지에 손을 대었다. 벨트와 버클을 푸는 손이 급했다. 벌써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습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속옷과 바지를 한 번에 끌어 내려 순식간에 해진을 알몸으로 만들었다.



“흐으…….”



방은 어둡고 습하고 더웠으며, 흰 침대 위에 누운 해진은 무척 희어 보였다. 고작 며칠 전에도 몸을 맞대었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그 농도가 완전히 달랐다. 마치 숙성도에 따라 당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과일처럼 말이다.



히트사이클을 맞은 그의 몸은 이전보다 더 탐스러워 보였다. 볼품없이 비쩍 마르고 허여멀겋기만 한 몸인데, 이상하게도 탐이 났다. 그에게서 나는 지독한 오메가 향 때문일까.



혹은 허리를 틀며 몸을 꼬아대는 그의 꼴이 충분히 음란해서인지도 몰랐다. 그 모습이 우스워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만져달라는 듯이 튀어나온 한 쌍의 유두와 미끈한 가슴은 환의 손을 유혹했다. 어둠에 반쯤 가려진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던 색기가 뚝뚝 흘렀다.



환은 그의 다리를 벌렸다. 해진은 벌써 발기한 상태였다. 성기 끝이 반들반들하게 젖어 있었다. 투명한 프리컴이 아랫배로 거미줄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환은 그의 무릎을 접어 올리게 했다. 구멍이 훤하게 드러났다.



해진의 구멍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홍빛으로 꼭 닫혀 있는데 어디에서 이렇게 액이 흘러나왔는지, 주변이 어둑한데도 젖은 게 확연히 보였다. 그리고 애액에는 핏기가 조금 묻어 나왔다.



‘더럽군.’



더럽고 음란해. 그리 생각하면서도 환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딴 구멍이 뭐라고 거의 넋을 놓고 구경했다. 그 시선을 의식하는지 꼭 닫힌 구멍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풀어졌다. 안쪽이 보일 만큼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뻐끔거렸다.



“마, 만…….”



홀린 듯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데, 돌연 해진의 목소리가 들려 환은 눈만 들었다. 다리 사이로 해진이 고개를 들고 저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갰다.



“거기, 만져, 줘…….”



기어가는 목소리로 하는 요구에 기가 찼다. 지금 이 더러운 구멍을 자기더러 만지라고? 그딴 짓을 내가 왜 해야 하지?



환은 그의 말을 순순히 따라주는 대신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 어떤 애무나 전희 없이, 해진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발기한 페니스를 들이밀었다. 해진이 기겁하며 몸을 뒤틀려 했다.



“잠시만, 그렇게 바로……!”



뭐라 말하려던 해진은 페니스가 쑤셔 박히자마자 뻣뻣하게 굳으며 조용해졌다. 다행인 일이다.



“으윽…….”



해진이 먹먹한 소리로 신음했다. 그의 안쪽은 벌써 흠뻑 젖어 있었다. 전희 따위는 역시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환의 페니스가 들어가기에는 몹시 좁았다. 뻐근할 정도였다.



“후…….”



한 번 날숨을 뱉은 환이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양쪽으로 벌어진 해진의 두 무릎을 가죽장갑 낀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그대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 으……!”



처음 들어간 해진의 안쪽은 축축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몹시 강하게 조였다. 흠뻑 젖은 것이 느껴지는데도 버거울 정도였다. 꼭 손으로 쥐어짜는 것 같았다.



허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질퍽한 것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오메가의 몸에 이렇게 물이 많은 줄 그는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쥐어짜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마치 입으로 빠는 것 같았다.



“……정말 난잡하군.”



그것이 환이 느낀, 해진의 안쪽에 대한 감상이었다. 허리를 앞뒤로 느리게 움직이며 해진이 풍기는 달큼한 향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말이지, 난잡하고, 불결해.”



그런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일까. 환은 그게 의문이었다.



청결을 최우선적인 미덕으로 생각하는 자신이, 체액이 질질 흘러나오는 오메가의 구멍에 성기를 박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그 사실이 오히려 환을 흥분하게 했다.



무릎을 쥔 손으로 해진의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가죽장갑에 닿은 흰 허벅지가 여리게 떨렸다. 골반까지 금세 내려간 손은 이제 아랫배를 더듬었다. 말라빠진 이 아랫배에 정말로 자신의 아이가 들어설 수 있단 말이지. 환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이 안에, 몇 번이나 싸줘야 아이를 가질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때였다. 해진의 안쪽이 그를 조르듯이 꽈악 쥐어짰다.



“……!”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라 해진의 얼굴을 살폈다.



반쯤 풀린 눈과 붉어진 뺨, 땀에 젖어 반짝거리는 미간은 기분 좋게 구겨져 있었고 입술은 살짝 벌어져 안에 있는 붉은 혀를 비쳤다.



“하아, 흐…….”



그가 작게 내뱉는 신음을 환은 그제야 들을 수 있었다.



환의 시선은 그대로 타고 내려와 아래쪽을 살폈다. 발기한 해진의 페니스가 빳빳하게 서서 조금씩 움찔거리고 있었다.



마치 홀린 듯이 가죽장갑 낀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흣!”



그대로 아래위로 두어 번 문질렀다. 그러자 해진의 페니스에서 곧바로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아, 흐으, 으! 으응……!”



해진이 허리를 비틀며 우는소리를 냈지만 환은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희뿌연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환은 사정하는 그를 저도 모르게 관찰했다. 달뜬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어둠 속에서도 티가 날 만큼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벌어진 입술은 안에 뭘 넣어달라고 보채기라도 하는 듯이 보였다.



제 아래 깔려서 사정하는 해진을 보는 순간, 환은 머릿속에 있던 어떤 스위치가 턱, 켜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히 그가 본 광경 중에서 가장 자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광경이었다.



“침대가…… 더러워졌군.”



그 끔찍할 정도로 자극적인 모습을 본 뒤 환이 내뱉은 말은 고작 그것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여기서 잘 건 아니지만 청결에 대한 강박증은 쉽게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오메가들이란 정말 더러운 존재라고, 환은 생각했다. 이렇게 사방에다가 물을 싸대고 흘려대니.



그런데도 왜 이렇게 자꾸만 더 그를 더럽히고 싶은 것일까. 어째서 제 손에 의해 더러워지는 꼴을 더 보고 싶은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환은 허리 움직임을 빠르게 했다. 퍽, 퍽,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몰아쳤다. 촉촉하게 젖은 해진의 안쪽이 제 페니스를 감싸고 쥐어짜는 것을 만끽했다.



“으읏, 그, 만, 그만! 흑!”



해진이 울먹거리는 소리를 냈다. 환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속도를 더 올려 움직였다. 살 부딪치는 소리와 흥건한 물소리가 뒤섞여 났다. 그의 몸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페니스 기둥이 흠뻑 젖어서 애액이 뚝뚝 흐를 정도였다.



“그, 만……! 너무, 느낌, 흐으, 이상…….”



해진이 숨을 할딱거리며 애원했다. 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심지어 저를 때리려고까지 하기에 환은 그의 양 손목을 한 손에 가두어버렸다. 그리곤 머리 위로 손을 올리게 했다. 이대로 묶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흐으, 으…….”



급기야 해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얼굴은 꼭 억울하다는 듯이 훌쩍거리는데, 아래쪽은 반대로 꽉꽉 조여댔다. 가뜩이나 좁은 곳이 있는 힘껏 쥐어짜대는 통에 페니스가 아플 지경이었다.



우는 해진의 얼굴 역시, 사정하는 얼굴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환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치솟는 것을 짓누르며 단번에 페니스를 빼냈다.



“흐읏!”



어찌나 흠뻑 젖었는지, 구멍에서 빼낸 페니스 끝에 투명한 애액이 왈칵 늘어져 흘렀다. 핏기는 아까보다 많이 사라져 있었다. 환은 장갑 낀 손으로 그를 엎드리게 했다. 다소 거친 손길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환이 손대는 대로 엎드린 해진은 뒤를 돌아보려다가 머리채를 잡혔다. 장갑 낀 손이 다소 거칠게 머리칼을 휘어잡고, 얼굴을 베개에다 짓눌렀다.



“으으, 으응…….”



와중에도 엉덩이를 쳐들고 함부로 제게 비벼대려 하는 음란함은 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 더러운 체액으로 온통 젖은 엉덩이를 함부로 들이대지 못하도록 장갑 낀 손으로 한 대를 후려쳤다. 철썩, 젖은 살갗에 가죽이 내려치는 소리가 아주 컸다.



“아!”



해진은 울먹거리며 조금 버둥거렸지만 환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얼굴이 엉망으로 짓눌린 채 우는소리를 내었으나 환은 놔줄 기미가 없었다. 짓누르는 손길이 오히려 더 억세졌다.



“질질 짜지 마. 꼴 보기 싫으니까.”



짓누른 손만큼이나 위압적으로 읊은 환은 다시 그에게 삽입했다.



“아……!”



이미 젖을 대로 젖어서 몇 번이나 그의 것을 받아들였던 구멍인데,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해진은 처음과 똑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아니, 감각이 달아올라서 오히려 처음보다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흐으, 아, 으…….”



신음이 이불 위에 힘없이 흩어졌다. 머리는 짓눌린 채로 엉덩이만 쳐든 해진은 모멸감 속에서 강한 쾌락을 함께 느꼈다.



문득 그는 깨달았다. 얼굴을 파묻고 구멍만 활짝 벌린 이 수치스러운 자세뿐만 아니라, 이환이 저를 대하는 태도 역시 짐승을 다루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얼굴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섹스는 견디기 버거웠지만, 그보다 저를 이렇게 물건처럼, 꼭 씨받이처럼 다루는 환의 태도가 더 상처가 되었다.



뒤에서 박는 환의 허리 움직임이 점차 더 빨라졌다. 해진은 손바닥 아래 닿는 시트를 말아쥐었다. 젖은 안으로 딱딱한 살덩어리가 빠르게 밀고 들어왔다가 미끄러져 나오는 감촉이 견디기 힘들었다.



쾌락인지 고통인지 혹은 폭풍인지 모를 것이 해진의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해진은 어느새 또 울고 있었다.



“아, 흑, 아파, 요. 아……! 아파……! 흐으, 허엉…….”



사실 아픈 감각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그리 애원하며 엉엉 울었다. 그러나 환은 멈추지 않았다.



환은 사실, 해진의 애원을 모두 듣고 있었다. 아프다는 말을 듣고는 이 짓거리를 멈춰야 한단 사실도 이성적으로는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멈추지 않은 것이 아니라, 멈출 수가 없었다.



강해진의 독한 오메가 향이, 이 싸구려 딸기 향이 저를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무언가가 자꾸만 그를 빨아들였다.



“아프, 다고, 개새끼야……! 흐으, 흑…….”



그가 제게 내뱉는 상스러운 욕에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에게 지금 자극을 주는 것은 오직 강해진의 몸밖에 없었다.



단것을 발라놓은 것처럼 축축하고 매끄러운 안쪽과, 발기한 채로 제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강해진의 페니스가 환을 끝없이 유혹했다. 환은 그것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마치 입에 넣은 채 반쯤 깨진 사탕처럼 그를 탐할 때마다 전기가 통하는 듯 찌릿하게 쾌감이 치솟았다. 자꾸만 침이 고이고 혀를 굴릴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발기할 대로 발기한 페니스는 해진의 안쪽을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사납게 움직였다. 환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난잡하게, 더럽게 젖은 구멍을 성기로 탐하다니. 평소의 저라면 생각할 수 없을 일이다.



퍽, 퍽, 살이 부딪칠 때마다 접합부에는 애액이 흘러나와 부옇게 거품이 일었다. 몇 방울은 점성을 보이며 아래로 길게 흘러내렸다.



환은 자신의 페니스가 푹 젖은 것을 보며 일부러 더 깊이, 조금 더 깊이 넣어보았다. 강해진의 구멍은 손가락 하나는 들어갈 수 있을까 싶게 좁아 보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제 성기를 다 받아들이는지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흐, 흐으…….”



해진이 헐떡거렸고, 그 소리와 박자를 맞추어서 구멍 역시 옴짝거렸다. 환은 핏줄이 툭툭 불거진 제 성기가 그 구멍으로 드나드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 때, 얼굴이 짓눌린 채 꼼짝도 못 하던 해진이 어깨를 심하게 떨었다. 동시에 투둑, 툭, 무언가 천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해진이 또 한 번 사정한 것이었다.



“아, 흐으, 환, 이 씨…… 제발…….”



쌍욕을 할 때에는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그제야 귀에 들어왔다. 환은 몰아치던 허리를 뚝 멈췄다.



‘……내가 왜 이러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환은 좁아터진 그의 몸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꼭 정액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애액이 길게 흘러내렸다.



젖은 침대에 해진을 바로 눕혔다. 체액으로 함빡 젖은 몸은 어둠 속에서도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환은 장갑 낀 손으로 홀린 듯이 그 살결을 한 번 훑었다.



“흣…….”



해진이 작게 신음했다. 그 소리마저 환에게는 자극적이었다. 크게 헐떡거리던 해진의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되었다.



목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해진의 다리를 벌리고 다시, 이번에는 좀 더 느리게 삽입했다. 미끄러져 들어가는 감촉이 아까보다는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좁았다. 넣자마자 밀려드는 사정감을 애써 무시하며 환은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 으! 흐읏! 잠, 깐! 흐으!”



‘잠깐’이라는 그의 요구에 응해줄 여력은 없었다. 그는 그저 강해진의 모든 것을 삼키고, 빨고, 제대로 맛을 보고 싶었다.



“아, 안에, 너무, 깊…….”



해진이 우는소리로 뭐라 웅얼거렸다.



“안에, 흐윽, 너무, 깊이 들어, 와서…….”



겨우 말을 알아들은 환이 미간을 구겼다.



“…뭐라고?”



새빨간 얼굴과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 젖은 입술, 강해진의 모습은 한눈에도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닿는 것 같, 단, 말이야…….”



아랫배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어설프게 쿡, 찌르며 웅얼거리는 꼴을 보면 확실했다.



환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누구랑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히 알아야지, 감히 저와 있을 때에 정신을 흐트러뜨린단 말인가? 괘씸했다.



그는 해진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푹 젖은 구멍에 들어갈 때마다 쾌감이 전기처럼 사지로 뻗쳤다. 해진은 반쯤 감긴 눈으로 환을 올려다보며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딱딱해……. 흐으…….”



몸을 어설프게 비틀고 끙끙거리는 꼴이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환은 현기증과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다. 아랫도리로 감각이 쏠렸다. 더 참기 힘들었다.



“흐으, 아, 너무, 꽉, 차서, 흐으, 아……!”

“입 좀, 후, 다물어.”



가뜩이나 참기 힘든데 꽁알거리는 것을 들어주기가 힘들어서 환은 결국 해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이 요망하고 같잖은 오메가는 혀를 내어서 그의 손바닥을 핥기 시작했다.



“크윽…….”



환의 허리가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깊이,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단단히 허리를 붙든 채 강해진의 몸을 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은 그의 안에 사정했다. 포궁 입구에 정액이 그득하게 쏟아졌다. 넣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해진의 내벽이 움찔거리며 그의 것을 쥐어짰다.



“하아, 하…… 이게, 뭐, 야……”



뭐긴 뭐야. 네 배 속에 아이를 만들 정액이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대신 환은 조금 더 깊이 정액을 쏟기 위해 그의 허리를 위로 쳐들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게서 쏟아져 나온 정액이 그의 포궁 안으로 흘러드는 광경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정액을 뱉는 내내 환은 머리털이 쭈뼛하게 설 정도로 강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쾌감 속에서 제 성기가 부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노팅의 전조였다. 몸 안에 깊이 뿌린 정액이 함부로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성기로 틀어막는 알파의 본능이었다.



보통의 알파라면 아이를 가질 마음을 먹었을 때 노팅을 했을 터였다. 물론 피임 기구를 쓰더라도 섹스 중에 너무 흥분해서 노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환은 자신이 두 번째에 속한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젠장…….”



화들짝 놀란 그는 성기를 단번에 빼냈다. 노팅이 시작되던 차에 페니스가 빠져나가려 하자 해진의 내벽은 빼앗기기 싫은 것을 억지로 조르듯 그의 것에 흡착했다.



“아, 아파……!”



해진이 우는소리로 외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아팠다. 노팅 직전의 페니스는 오메가의 포궁을 최대한 단단히 틀어막기 위해 흉기처럼 딱딱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해진의 몸에 들어가기 버거운 크기이니 내벽을 빠르게 스치면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환은 해진이 애원하는 목소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페니스를 단번에 빼어냈다. 해진을 내버려둔 채 일어나 진저리를 치며 침대 옆의 티슈를 한 움큼 뽑아 제 성기를 닦기 시작했다. 그의 정액과 해진의 애액이 뒤섞여 흠뻑 젖은 페니스는 아직도 발기한 상태였다.



알파의 본능이라는 것은 환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만 생각했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제 몸 하나도 조절하지 못하는 머저리들이나 본능 운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환은 방금 전, 그의 몸에다 노팅을 할 뻔했다. 오로지 쾌락으로 인한 본능으로 말이다.



이전에 욕실에서 일을 칠 뻔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만 정신을 놓고 저 더러운 구멍에다가 성기를 마구 비벼댔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도 기함할 일이다.



좀 참을성이 없을 뿐이지, 그는 자신이 제법 이성적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강해진은 자꾸만 제 본래 모습을 부수었다. 그것이 불쾌하고 괘씸했다.



마치 묻어선 안 될 것이 묻었다는 양 환은 제 성기를 여러 번 박박 닦았다. 와중에도 발기가 식지 않아 더 기가 찼다.



“흐으, 아…… 환이 씨…….”



누운 해진이 저를 불렀지만 환은 돌아보지 않았다. 섹스 후에 파트너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도는 그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식 따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히트사이클 중인 오메가와의 섹스는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강한 쾌감을 주었고, 그 쾌감만큼이나 강한 불쾌감 역시 동반했다. 그는 이 감정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제 몸을 닦는 것이 바빠서 해진이 제게 손을 뻗는 것도 알지 못했다.



“흐윽, 저, 배가…….”



기어가는 듯이 작은 목소리 역시 듣지 못했다. 환은 식지 않은 성기를 억지로 넣고 바지춤을 갈무리했다. 티슈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뒤 가죽장갑을 벗었다. 해진의 체액으로 엉망이 된 장갑 역시 쓰레기를 버리듯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도망치는 자들이 모두 그러하듯,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해진은 불 꺼진 방, 축축한 시트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배가 몹시 아파왔다. 고통으로 움찔거릴 때마다 환이 안에 싸 놓은 정액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아파…….”



섹스할 때에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아까와 비슷한 통증이 아랫배를 찔러댔다.



방금 나간 환을 붙잡아야 할 것 같은데, 자존심이고 뭐고 내가 지금 아프다고 애원해야 할 것 같은데 용을 써댄 탓에 팔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온몸이 땀에 젖어 추웠다. 이불이라도 끌어다 덮고 싶었지만 그럴 힘조차도 없었다.



현관문이 닫혔는지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안아주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괜찮으냐고 한 마디는 물어볼 줄 알았는데.



첫 섹스의 마지막은 오한과 통증, 외로움으로 그득했다. 혼자서 환과의 섹스를 몰래 상상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겉으로 다정하게 보였던 만큼 그와의 섹스 역시 다정하고 달기만 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착각이었다. 이런 것일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텐데. 첫 섹스가 이렇게 아프고 서러울 줄은 몰랐는데.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잠든 동안 누군가가 해진을 살피고 갔다. 해진은 그게 환이기를 바랐지만 제 몸에 닿는 손길은 능숙하고 낯설었다.



“……며칠은…… 요양…… 약도 소용…… 무조건 쉬어…….”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자꾸 졸렸다. 팔에 무언가가 꽂혔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링거 주사인 모양이었다.



이환은 이번에도 저를 찾지 않았다. 정체도 모를 약을 먹여놓고, 저를 멋대로 범하고, 아픈 것을 내버려두고는 홀랑 나가버렸다. 꼭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난리를 부려대고 말이다.



이번에도 제가 죽든 말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 몹쓸, 빌어먹을, 개 같은 자식. 해진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나는 욕을 있는 대로 퍼부었다.



“……경과를 지켜봐야겠습니다. 일단은…….”



띄엄띄엄 들리던 목소리가 점차 또렷하게 들렸다. 낯선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의사인 것 같았다.



그럼 여긴 병원인가? 아니다. 그 개자식이 무려 병원까지 데려가줄 리가 없었다. 누운 침대 감촉은 익숙하고 주변에 들리는 소음이 없는 걸 보면 여전히 빌어먹을 호텔 방인 모양이었다. 해진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직 몸에 힘이 없어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경과를 지켜봐야겠다는 건, 지금 당장은 조치를 할 수 없단 뜻입니까?”



뒤이어 들린 목소리에 해진은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분명 환의 목소리였다. 내버려두고 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몸이 많이 약한 분이시다 보니 약이 부담이 간 것 같네요.”

“부작용 때문입니까?”

“약의 부작용 자체가 심한 건 아닙니다만, 현재로서는 상태를 지켜보며 최대한 요양하셔야 합니다.”



해진은 행여 제가 깬 것을 들킬까 싶어 숨소리까지 참았다.



‘설마 날 걱정하기라도 하는 건가……?’



잠깐 떠오른 생각을 얼른 지워버렸다. 에이, 그럴 리가 없다. 이환보다 제 팔뚝에 꽂힌 주삿바늘이 저를 더 걱정하리라고 장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슴이 멋대로 뛰는 것은, 멍청한 머릿속이 자꾸만 기대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좋으니 제 러트 기간이 오기 전까지는 멀쩡하게 만들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뒤이은 말에 해진은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야 말았다. 그럼 그렇지, 이 개새끼. 자기를 물건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최대한 빨리 해결하십시오. 여기다가 더 시간 쓰기 싫으니.”



‘해결’이라는 말 역시 무슨 물건을 고쳐 놓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해진은 이제 속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스울 지경이었다.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의사와 이환은 방을 나갔고, 해진은 문이 닫히고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개자식. 내가 순순히 여기 처박혀 있기만 한 줄 알았지?’



이 호텔에 저를 방치해두고 찾아오지도 않은 일은 그의 잘못인 동시에 실수이기도 했다.



사람을 호텔에다 감금한 일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 엄연한 범죄고, 섹스 후에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버린 것은 아주 나쁜 짓이지만 해진은 일단 그가 우스웠다.



‘나를 바보로 안 거지. 멍청하게.’



해진은 눈을 감았다. 환이 가고 나서 바로 일어나고 싶었지만 무슨 주사를 놓았는지 몹시 졸렸다.



‘두고 봐라, 개새끼야…….’



속으로 야무지게 욕을 퍼부으며 해진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닥터 최가 떠난 뒤에도 환은 거실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동안 직원들이 와서 청소를 했다. 들어오자마자 거실을 빼곡하게 채운 공기청정기에 깜짝 놀란 눈치기에, 환은 한 마디를 명령했다.



“다 내다 버리십시오.”

“네……?”

“이것들 다 내다 버리라고요. 못 알아듣겠습니까?”



괜히 화가 나서 날을 세우고 있자니 직원들은 쩔쩔매며 수십 대의 공기청정기를 하나하나 밖으로 꺼냈다.



거실 청소 중에 환은 슬쩍 침실로 들어가 보았다. 해진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팔자 좋군.’



아프다는 것도 사실 꾀병 아닌가? 아픈데 이렇게 잘 잘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했기에 얼른 생각을 거두었다.



문득 제 몰골은 어떤지 궁금해서 침실 한쪽 거울을 마주했다. 강해진의 몰골과 별 차이가 없어서 우스웠다. 눈은 퀭하고 입술은 꺼슬한 티가 났으며 머리칼도 흐트러져 있었다.



사실 그는 전날 밤,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왔다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도로 돌아왔었다.



딱히 강해진이 걱정되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이상해서, 이유 모를 찝찝함 때문에, 그래, 혹시라도 제가 고른 오메가가 관계 직후에 뭐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그런 것뿐이었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 강해진은 제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알몸이었고, 열이 엄청나게 났다.



욕을 씹어뱉으며 닥터 최를 전화로 부른 뒤에 환은 침실을 나가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서성거리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해진의 코에다 손가락을 대고 죽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닥터 최가 그를 진료하고 나갔는데도 침실로 들어와 강해진을 확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빌어먹게 귀찮은 오메가가.’



어쩌다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놈과 매칭률이 높을까. 환은 짜증이 났다. 걸려도 왜 이런 비리비리한 놈이……. 생각을 잇던 환은 서성거리던 발을 뚝 멈췄다.



‘설마, 아이를 못 낳을 정도는 아니겠지.’



그래, 그 정도라면 닥터 최가 아마 이야기를 했을 터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자.



환은 다시 거울을 마주한 채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거울로 잠든 해진의 모습이 비쳤다. 저 어설퍼 보이는 몸뚱이에 제 씨가 뿌려져 있다 생각하자 또 아랫도리가 뭉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한 번 더 안에 제 것을 싸지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쓸데없는 감정을 떨치기 위해 이리저리 또 서성거리던 환은 별 의미 없이 거울 아래 서랍을 열어 보았다. 비어 있을 줄 알았는데, 해진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맨 위쪽 칸은 포장도 뜯지 않은 옷이 그득했다. 얼핏 봐도 계절감도 맞지 않고, 사이즈도 저 조그만 놈에게 맞지 않을 듯한 옷들이었다.



두 번째 칸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필기구와 책부터 시작해서 소지품용 파우치, 가방 등 역시 절반은 포장도 뜯지 않은 것이었다. 무슨 밀가루 반죽 같은 것도 있었다. 제 친구라도 만들 셈인가.



‘카드를 줬더니 장난질을 치고 있군.’



물건 사이에 손을 넣고 뒤적거려 보았다. 일전 바에서 그가 꺼내었던 것과 비슷한, 요상하게 생긴 휴대용 나이프와 와인오프너 비슷하게 생긴 공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할 테지만, 혹시 모르니 공구들은 끄집어내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던졌다.



“이것도 내다 버리십시오.”



청소하는 직원들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랍에는 다행히도 별게 없었다. 이걸 왜 샀지 싶은 물건들만 그득했다. 수영할 때 쓰는 수경이라든가, 자그마한 손전등, 휴대용 방독면 같은 것들 말이다.



‘이딴 걸 왜 산 거지?’



공기청정기도 그렇고, 고작 이런 필요 없는 물건 몇 개 산다고 내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환은 픽,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는 서랍을 닫았다.



닥터 최는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게 두면 해진이 나을 거라고 했다. 부작용에 대한 조치는 취해놓았고, 당분간은 관계를 갖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환 역시 그 더러운 구멍에다가 또 성기를 처박고 싶지는 않았다. 섹스는 세 번으로 족했다. 방금 전까지도 누운 해진을 보며 그의 안에다 한 번 더 사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기억도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강해진의 목숨은 닥터 최가 알아서 붙여놓을 테고, 히트사이클의 섹스는 끝났으니 환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침실을 나가기 전, 환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해진을 돌아보았다.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을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듯한 이 기분이 무엇인지 환은 알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것이니 알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가 낯설었다.



그리고 그는 제게 낯선 기분만을 자꾸 안기는 저 오메가가 싫었다.





* * *





[키스틸 레저, 유럽 3국 호텔 분점 동시 오픈]



화면에 뜬 뉴스 타이틀을 보며 환은 미간을 구겼다. 기사는 온통 찬양 일색으로 그득했지만 몇 가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혐오와 분노, 기타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드러난 얼굴은 심호흡 한 번에 다시 무표정으로 변했다.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 언론대응팀을 연결시켰다.



상사의 전화를 받은 팀장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이 몹시 나무랐기 때문이었다.



“‘분점’이 아니라 ‘지점’ 아닙니까. 한국말도 모르는 주제에 기자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군요. 언론대응팀에서는 기사 확인 안 합니까? 내 눈에 띌 때까지 뭐 하고 있습니까?”



그 외에 몇 가지를 더 지시하는 내내 환은 계속 심호흡을 해야 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챙겨야 하다니. 도대체 이 빌어먹을 회사는 자신이 없으면 어떻게 굴러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일 안 하는 것들은 죄다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원.’



최근 들어서 해외 지점이다 뭐다 일이 많아진 터라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았다. 효율이 떨어지는 건 딱 질색인데도 밤늦게까지 안 되는 일을 붙들고 있을 때도 잦았다.



평소라면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컨디션 관리에 집중할 텐데, 그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환은 자신의 신경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알았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기사가 뜬 브라우저 창을 끄고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아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인사도 무엇도 없이 다짜고짜 용건부터 내뱉었다.



“뭐 하고 있는지 보고하십시오.”



수신구 너머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 전화를 받는 일이 귀찮을 만도 했다. 그러나 환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래, 사람이 그리 쉽게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환은 종일 해진의 안부를 묻는 일에 제 신경을 할애하고 있었다. 본래는 일에 쓰여야 할 관심이 그에게 가는 것이 달갑지가 않았으나 파리하게 인형처럼 누워 있던 강해진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전화를 받은 경호원은 똑똑, 문을 두드리고는 도어록을 풀었다. 해진이 거실 소파에 앉아 호텔 전화기를 쥐고 있었다.



“아, 진짜요? 원래 유명한 사람들 여기 자주 오나 봐요. 여기서 일하시면 가끔 마주치고 그래요?”



경호원과 눈이 마주쳤으나 꼭 물건을 보듯이 흘끔 바라보기만 하곤 통화를 잇는 모습이 이 침범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몇 번은 제게 사생활도 없느냐, 함부로 문 열고 들어오지 마라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으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그냥 포기한 터였다.



“하하, 그렇죠, 저도 원래 이쪽 일 해서 힘드신 거 다 알죠. 그래도 대단하세요. 아 참, 오늘 점심 진짜 맛있었다고 셰프님께 꼭 전해주시고요.”



경호원은 다시 문밖으로 나가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호텔 전화기로 수다 떨고 있습니다.”



한쪽 손으로 휴대폰을 쥔 채 이메일을 확인하던 환이 손을 뚝 멈추었다.



“뭐? 누구랑?”

- 여기 호텔 직원인 것 같습니다. 식사 메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쓸데없는 놈들과 시시덕거리지 말라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더니, 전화기로 호텔 직원이랑 수다를 떤다고.



다음에 갈 때 상대 직원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내어서 징계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식당 차장과 부장은 뭘 하는 건지. 직원이 근무 중에 고객과 수다를 떨어?



“다른 특이점은 없습니까?”

- 예, 없습니다.



환은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화면을 노려보았지만 메일 내용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한 번 들러야겠군.’



자꾸 얼굴을 비치면 버릇이 나빠질 텐데…….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끝에 싸구려 딸기 향이 자꾸 감도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시각, 해진은 이제 막 친해진 데스크 담당 슈퍼바이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까 경호원이 들어왔을 때 통화한 사람은 식당 쪽 직원이었고, 사실 해진이 좀 더 편하게 생각하는 쪽은 지금 통화 중인 데스크 쪽 직원이었다.



“아하하, 제가 수건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아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편하네요. 예. 아, 그리고, 저 아래층에 엄청 유명한 분 들어오셨다던데?”



통화하는 내내 해진은 메모지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스위트룸 층과 이 바로 아래층의 스위트룸 구조였다.



“아, 맞아요, 아래층은 욕실이 반대쪽이라면서요? 그래서 그런지 밤에 누워 있으면 물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아, 아뇨, 절대 불편한 건 아니고요. 네네.”



메모지 두 장을 연결해서 그리는 구조도는 겉보기에 어설펐지만 기호도 정확했고, 나름 꼼꼼했다.



“아차, 그럼 제 위층에는 아무도 없는 거네요? 스위트룸도 아니고…… 일반객실이라고 하셨던가요?”



밝은 목소리를 이어가면서도 손은 멈추질 않고 바지런히 종이 위에 선을 그어댔다.



“아, 아뇨, 그냥 담배 연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요. 착각이겠죠? 아래층인가……? 아하하. 제가 말했다고 하지 마요.”



웃는 소리를 입으로 내면서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새로 알아낸 사실에 해진은 머리털이 쭈뼛 설 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전화를 끊었을 때, 마침 룸서비스가 도착했지만 해진은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파서라거나 입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드디어 확신할 수 있었다. 준비하고 또 준비하던 일을 실행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 * *





긴 회의를 끝낸 뒤 환은 피로로 찌든 목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복도로 나왔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걸음을 옮겼다.



퇴근 시간을 한참 넘겼지만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대신 제 사무실 의자에 앉은 그는 목줄처럼 갑갑하게 느껴지는 넥타이를 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을 울렸다. 귀찮아서 받지 말까, 싶었지만 최근 들어 해외 사업 때문에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지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휴대폰 액정화면에 뜬 번호를 보는 순간, 환은 미간을 구겼다. 큰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말라던 제 말을 잊었을 리는 없을 텐데.



- 저, 전무님, 어, 없어졌습니다.



강해진을 감시하라고 세워둔 경호원들은 좀처럼 놀라거나 감정을 동요하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을 듣고 환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뭐라고?”



그리고 뒤이은 말에는 정말 놀라고야 말았다.



- 강해진 씨가, 없어졌습니다.





* * *





키스틸 호텔 서울지부의 슈퍼바이저 김수철, 아니, 크리스는 입사 이후 가장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비상사태야. 어서 30층부터 35층까지 점검 먼저 해. 사이렌 울리는 방은 경보기 끄고. 알았지?’



경보기를 끄는 건 불법이 아니냐고 저를 이곳에 보낸 선배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저 혼자 갑니까?’

‘30층부터는 거의 VIP들이잖아. 투숙객도 얼마 없으니까 후딱 갔다 와.’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32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도 이용할 수 없어서 29층부터 계속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32층은 31층보다 연기가 더 자욱했다. 기침을 하며 소매로 코를 가렸다. 욕을 하려던 그는 놀라운 직업정신을 발휘해 입을 다물었다. 복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고객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휴,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요?”



복도에 서 있던 이는 체구가 작은 남자였다. 크리스는 친절을 숨 쉬듯 내보이라던 선배의 말을 되새기며 활짝 웃어 보였다. 비록 연기가 코로 흘러들었지만 말이다.



“별일 아닙니다. 저희 키스틸 호텔에서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비상훈련입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겠어요?”



체구가 작은 남자는 다행히 화를 내지도, 환불 운운하지도 않고 얌전히 저를 따라왔다. 크리스는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게 감사했다.



“고객님, 성함이랑 객실 호수가 어떻게 되시죠?”

“강호진이요. 3103호에 친구가 있어서 잠깐 놀러왔어요. 친구는 간식거리 사러 내려갔고요.”



투숙객 리스트에서 3103호를 체크하며 크리스는 기침을 했다.



“일단 훈련 방침에 따라 비상대피소에 계시면 제가 곧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네에, 네. 고생이 많으시네요.”



뒤이은 말에도 역시나 눈물이 나게 감사했다.



둘은 연기가 침범하지 않는 29층으로 가서 직원 및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스는 그리하려 했다.



본래 화재가 발생했을 시 엘리베이터는 절대 타면 안 되지만 30층 이상을 차지하는 VIP 고객들에게 그 수많은 층을 걸어서 내려가라고 명령했다간 어떤 사달이 날지 몰랐다.



거기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연기 때문에 갑자기 대피를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는 대신 비상훈련 어쩌고 중이라며 거짓말까지 해야 하니.



“고객님, 헉, 헉,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안전한 곳으로 안내를…….”



직원 및 화물용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크리스는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고객님? 어디 가셨…….”



방금 전까지 제 뒤를 따라오던 체구 작은 남자 고객님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크리스는 헐레벌떡 계단문을 열어보았으나 고객님의 기척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쩌지?’



고객님을 잃어버렸다고 했다간 그냥 잘리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친구가 있어 잠깐 왔다고 했으니 우리 고객은 아니지 않나? 내려가서 3103호 고객님께 여쭤보기로 결론을 내린 그는 다른 고객님을 찾으러 이동했다.



그 시각 강호진 고객님, 아니, 강해진은 계단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쿵쿵쿵, 계단을 울리는 발소리에 맞추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씨발, 봤냐? 이환 개자식아, 봤냐고!’



소리라도 한껏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불쌍한 직원이 다시 저를 붙들러 올지도 몰랐다.



몇 칸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차고 힘들었지만, 해진은 하나도 괴롭지 않았다. 도망치는 중이 아니라면 환호성이라도 빽 질렀을 터다.



‘이환 개새끼! 어디 엿 좀 먹어봐라!’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발소리에 섞여 계단을 울렸다.





해진은 며칠 전부터 탈출 계획을 본격적으로 구체화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환풍구의 구조와 위층, 아래층이 비는지, 그리고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데스크와 식당의 직원 몇몇과 전화 통화로 친해져서 근처 방에 사람이 얼마나 머무는지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호텔 내에 있는 연기 감지기를 꼼꼼하게 살폈다. 일을 시행에 옮길 때 감지기가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계획해야 했다. 기회는 두 번 없을 테니.



일단 해진은 연기 감지기를 작동시키기 위해 일부러 음식을 태워보았다. 연기가 어느 정도 차야 감지기가 작동을 시작하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계란 세 개를 새카맣게 태우고 나서야 사이렌이 빼액 울렸다. 덩치들이 놀라서 들어오자 해진은 일부러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새카맣게 탄 프라이팬을 보여주었다.



연기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미리 파악해둔 환풍구로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일도 좀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환풍구는 연기로 가득 차 있었기에 일회용 방독면을 미리 썼다. 눈이 매울 테니 수경까지 썼고, 휴대용 미니 손전등도 챙겼다.



아래층은 해진이 지내는 곳 절반 크기 정도의 스위트룸이 몇 개 있었다. 그중 사람이 없는 호수로 내려간 해진은 창문을 열고 수경과 손전등, 방독면을 저 멀리 다른 층 테라스로 던졌다.



밖에 인기척이 없는지 확인한 뒤 마치 길을 잃은 투숙객처럼 복도로 나갔다. 마침 친절한 직원을 만났지만, 침착하게 투숙객의 친구인 척했다.



‘예상대로 소방대원은 안 보이네.’



어리석게도, 호텔은 자체적으로 진화를 하려 들 것이다. 화재가 난 호텔이라는 멍에를 정말 두려워하니까. 직원을 이렇게 보내서 손님들을 대피시키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해진은 기진맥진한 채로 계단을 한 층 한 층 내려갔다.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고 몹시 아팠지만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끝까지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CCTV에 얼굴이 찍힐 테니까. 계단실에는 CCTV가 없다는 사실 역시 직원들에게서 알아낸 정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엘리베이터를 멈추게 했는지, 저층으로 내려가자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해진은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서 로비까지 내려갔다.



호텔 로비는 분위기가 몹시 어수선했다. 늦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과 그들을 도로 내보내려는 매니저 이상급 간부들, 상황을 파악하려는 손님들과 최대한 그들의 주의를 돌리려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거는 직원들까지. 덕분에 해진은 사람들 사이에 섞인 채로 얼굴을 가리고 대피할 수 있었다.



마침내 호텔을 온전히 벗어났을 때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주먹만 불끈! 쥐었다.



대망의 탈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해진은 어느새 멀어진 호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키스틸이라고 벽면에 적힌 글자를 보니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 들떠 있던 마음을 꾹 누르며, 해진은 차분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되짚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자 이환의 블랙카드가 손에 잡혔다.



‘이 카드, 정지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릴까.’



해진은 호텔에 갇히기 전에 챙겨 왔던 자신의 체크카드를 들고 가장 가까운 ATM기로 갔다. 일전 휴대폰으로 확인한 대로 이환이 입금한 10억이 추가되어 있었다.



일단은 현금을 잔뜩 뽑았다. 여기저기 도망치는 데에 쓸 돈이라고 생각하니 눈물 나게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살고 봐야지.



그대로 가까운 백화점으로 가서 - 백화점의 위치 역시 미리 파악해두었다 - 가방과 갈아입을 옷가지, 그리고 도망 다니며 먹을 수 있을 간편식을 샀다. 물론 값은 모두 이환의 블랙카드로 처리했다.



직원들 중 몇몇은 카드를 알아보는 듯이 해진을 의아하게 살폈지만 해진은 결제가 되는지만 걱정했다. 다행히 빌어먹을 개자식이 아직 카드를 정지시킬 생각은 하지 못한 듯했다.



도망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물건을 많이 사지는 않았다. 이미 상하지 않을 간편식과 중간중간 필요할 생필품을 주문해서 미리 계획한 도주로에 다 주문해놓았기 때문이다. 지하철 택배 보관함이나 예전에 살던 오피스텔 건물의 택배 보관함 등 말이다.



물론 이전에 살던 오피스텔 건물을 이용하는 데에는 좀 어려움이 있었다. 누가 선물을 보냈는데 이사 전의 주소로 발송을 했다고, 그러니 택배 보관함에 호수를 표기하지 말고 넣어 두라는 말에 배송업체 직원은 좀 난감해했다.



분실되어도 절대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약속을 하고, 메시지까지 보내어서 확실하게 못을 박고서야 겨우 원하는 대로 되었다. 호수별로 보관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군데에 모아 두어서 다행이었다.



백화점 화장실로 들어간 해진은 옷을 벗기 전,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여러 장으로 된 메모지는 앞으로 그가 거칠 도주 과정을 꼼꼼하게 메모해둔 것이었다.



휴대폰으로 메모해두어도 되지만, 휴대폰은 도망치다가 잃어버릴 수도 있고 충전을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숙소부터 찾아가야겠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만도 너무 힘들었기에 해진은 당장 눕고만 싶었다.



해진은 새 바지 단추를 채운 뒤 블랙카드를 잠시 노려보았다. 처음 이것을 받았을 때는 돈이나 실컷 쓰면서 엿을 먹여줘야지, 했는데 생각해보니 쓰임이 많은 것이었다.



이 카드가 없었다면 아마 탈출 계획을 세우기 힘들었을 터다. 특히 숙소 쪽은 말이다.



‘이 카드로 호텔 몇 군데를 예약했더라?’



기억도 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수십 군데의 호텔과 모텔에 이 카드로 예약을 해두었으니, 아마 카드 내역으로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끊기기 전까지 야무지게 써주겠어!’



옷을 갈아입은 해진은 백화점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주를 계획하면서, 해진은 이환이 생각보다 허술한 사람이라는 데에 좀 놀랐다.



‘가둬놓으면 뭐 해? 직접 지키지도 않는데. 밖에 지키고 있는 덩치들은 죄다 바보들이고.’



그리고 자신이 뭘 하는지 상관도 않는 이환의 태도도 웃겼다.



그의 카드로 의심을 살 물건을 수도 없이 샀다. 특히 망치 등을 비롯한 공구와 밧줄은 일부러 보란 듯이 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곧바로 도주를 의심할 법한 버스표, 비행기표 등을 예약했는데도 환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답은 두 가지였다. 이환에게 카드 결제 내역이 곧장 가지 않거나, 결제 내역을 보고도 아무 말을 않는 것이거나.



그 사실을 몇 번씩이나 확인한 해진은 숙박업체를 하나씩 예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헷갈리라고 여기저기 예약했지만, 나중에는 돈 쓰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서 닥치는 대로 식사니 뭐니 패키지째로 구매를 했다.



이환이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 카드로 예약된 호텔을 찾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환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자기가 이미 염두에 두고 있는 것조차 알까?



아, 물론 숙박업체나 생필품만 산 건 아니었다. 기껏 얻은 블랙카드로 고작 그런 것에만 쓸 해진이 아니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기사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곤 지하철로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기억해두었던 번호를 찾아 열어보았다. 자그마한 종이가방이 들어 있었다.



‘요즘은 명품도 인터넷으로 살 수 있어서 참 편하단 말이야.’



종이가방을 열자 주문해두었던 명품 시계가 보증서와 함께 무사히 들어 있었다. 여기라면 도난 위험도 적을 테다. 애초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다니는 지하철역에 명품 시계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하겠지.



다시 꼼꼼하게 사물함 문을 닫고 나오면서, 해진은 괜히 자신이 첩보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어린애 같은 기분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님도 알았다.



택시에 올라타며 해진은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휘둘렀다. 기사가 이상하게 보았지만 상관없었다.



“기사님, 주소 불러드릴게요.”



그리고 택시를 타고 그가 도착한 곳은 예약한 호텔 중 어느 곳도 아니었다. 물론 이환이 멍청하게 자기가 예약한 호텔을 헤집고 다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일부러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 맞아요? 노블…… 에스테틱 스파?”

“네, 맞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해진은 ‘에스테틱 & 스파’라고 깨알만 한 크기로 쓰인 간판 아래로 들어갔다.



본래 사우나와 마사지를 합해서 두 시간짜리 코스였다. 그러나 해진은 이 코스의 열 배 되는 가격을 이미 지불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열 시간 동안 개인룸에 있을 테니 방해하지 말 것.



개인실은 아주 호화로운 개인 욕실 같아 보였다. 해진은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마사지 베드에 드러누웠다. 이곳은 이환의 카드로 예약하지 않았으니 아마 수색 후보에 두지 못할 터다.



“아, 피곤해…….”



해진은 얼굴을 구멍으로 내민 채 한숨을 내쉬었다. 마사지 베드는 얼굴 부분이 뚫려 있어서 엎드려도 숨이 막히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일전에도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편했다.



여기서 휴식하며 앞으로 이동할 곳을 다시 체크해야 하지만, 해진은 사실 몸이 많이 지쳐 있었다. 당장 눈이 감기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진짜 죽겠네.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렇다. 이환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지치는 것인지. 지독한 피로가 몸을 노곤하게 짓눌렀다.



일단은 열 시간이라는 휴식 시간이 있으니 활용해야 했다. 앞으로 이렇게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이동해야 하는 때가 많을 것 같으니 밤낮도 바꾸어야 하고 말이다.



해진은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신세를 한탄하기에는 마사지 베드가 너무 편안했다.





* * *





“……그래서 근방은 모두 뒤져보았지만 강해진 씨는 찾지 못했습니다.”



말을 끝낸 박 비서는 환을 마주 보았다가, 저를 노려보는 사나운 눈빛에 슬그머니 시선을 떨궜다. 제 상사의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박 비서는 그런 이환의 성질머리를 능글맞게 넘어가는 데에 익숙했다.



하지만 박 비서는 지금 무척 고전하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이렇게 화를 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환이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트레이가 아닌 책상 위에 펜을 얹어 놓은 적은 없었다.



“못 찾았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오히려 차분하게 들렸으나 그건 그만큼 화가 났기 때문임을 박 비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사라진, 아니, 탈출한 시간을 짐작해보자면 이미 서울을 벗어났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단 목격자를 찾는 것을 중점으로…….”

“나한테 설명하지 마십시오.”



말이 끊긴 박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환이 책상에 손을 얹자 손끝에 닿은 펜이 도르륵, 짧은 적막 속에서 소리를 내며 책상 위를 굴렀다.



“설명하지 마시고, 일 해결한 뒤에 결론만 이야기하십시오.”



박 비서는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예.”



나가보라는 손짓이 있자마자 박 비서는 몸을 돌려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질린 탓도 있지만 제 상사가 시간 낭비를 싫어한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문이 닫힌 뒤에도 환은 앉은 채로 한동안 굳어 있었다.



그는 지금 상황을 사실 이해하기 힘들었다. 강해진이, 그 빌어먹을 오메가가 제게서 도망쳤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어째서지?’



어째서 그가 도망친 거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충분했다. 호텔 스위트룸은 그딴 공기청정기로 채워 놓지만 않으면 녀석의 분에 넘치는 환경이었다. 계약서에 사인한 것은 강해진 본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감히 ‘제게서’ 도망을 쳤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감당을 하려고 그러나.’



놀랍게도 환은 지금 객관적으로 해진의 입장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 이걸 걱정이라 해야 할까. 아니다. 걱정 따위가 아니었다.



환은 굴러간 펜을 집어 들었다. 펜 트레이에 얹는 대신 손에 들고 빤히 응시했다.



문득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누가 봤다면 소름이 끼쳐서 질색할 얼굴을 하고 환은 조금 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랬다. 이건 걱정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궁금했다. 그딴 하찮은 오메가가 자신의 화를 어떻게 감당할지.



펜을 펜 트레이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환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방금 나간 박 비서와 곧바로 연결이 되었다.



“쥐 푸십시오. 지금 당장.”



두 마디를 내뱉은 환은 전화를 끊었다.





* * *





똑똑, 똑똑.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는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해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이 호텔은 방음이 너무 잘되어 있어서 창문을 닫으면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삭막한 곳인데.



비가 오는 날에 빗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해진이었기에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가, 감시하는 덩치들이 그걸 보고 창문을 잠가버려서 억울했던 기억도 났다. 창문도 마음대로 못 여냐고 빽빽 소리를 질렀지만 덩치들은 그때도 해진을 상대조차 하지 않고 나갔었다.



다시 똑똑,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그제야 자신이 호텔에서 벗어났다는 사실과 저 소리는 노크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객니임…….”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안달이 묻어났다. 아마 한참 전부터 문을 두드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해진은 미안해져서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직원은 해진에게 시술을 조금이라도 해주겠다며 몇 번이나 권고했지만, 해진은 극구 거절했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짐을 다시 챙기고 확인한 해진은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맙다며 직원에게 여러 번 인사를 하고 근처에서 몇 군데 가게를 들러 필요한 것을 구한 뒤 콜택시를 불렀다.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긴장감 때문인지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했지만,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택시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밖은 밤이 깊어 있었다. 뒷좌석에 몸을 묻으며 해진은 계획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문득, 꼼꼼하게 짠 계획 대신 이환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물건 보듯 하던 얼굴. 마음이 아직도 아린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제 정은 다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그 미친놈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대로 잡혀 있다간 애 낳는 기계처럼 평생 그 미친 새끼 씨만 받아야 될지도 몰라.’



이환이라면, 그 새끼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저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사람에게 순순히 아이를 낳아줄 수는 없었다.



택시 기사는 다행히도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물건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여러 군데 들렀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해진이 현금을 미리 두둑하게 주어서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모든 물건을 다 챙긴 뒤, 택시는 해진의 요청에 따라 서울외곽순환도로를 탔다. 해진은 아직 잠기운이 남은 눈을 감고 차체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출발하기 전에 멀미약을 먹기는 했지만 속이 좋지 않았다. 잠드는 게 차라리 나을 텐데, 잠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택시는 어둠 속을 민첩하게 움직였다. 운전 실력이 나쁜 기사가 아니었으나 해진은 결국 잠들지 못했다. 잠을 포기하고 눈을 뜨자 도로 옆 펜스 너머로 드문드문 불 켜진 아파트 건물이 보였다.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을까. 늦게 퇴근한 맞벌이 부부끼리 밥을 먹고 있을까. 그들은 알파와 오메가일까.



가족이란 것을 제대로 가져본 적이 드문 해진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그래서 밖에서 보는 아파트의 불빛이 늘 부러웠다. 저렇게 불빛이 켜진 ‘집’을 갖고 싶었다. ‘원룸’이나 ‘오피스텔’ 말고.



그리고 한때는 이환과 그런 ‘집’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아니지만. 그래…… 이제는 아니었다.



그 때였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낸 해진은 액정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까지 휴대폰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환에게서 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서.



해진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휴대폰 액정화면을 손끝으로 밀었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서도 일부러 조금 뜸을 들였다.



- 강해진 씨.



아니나 다를까 성질 급한 이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귀한 오메가가 없어졌는데 전화 참 늦게 하셨네요. 많이 바쁘셨나 봐요.”



수신구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난 번거로운 건 딱 질색이니까. 강해진 씨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만.

“아, 그러세요?”

- 더 일이 커지기 전에 돌아오십시오.



해진은 흥, 하고 일부러 들리게끔 소리 내어 웃었다.



“왜요? 제가 일을 키울까 봐 겁이라도 나세요? 뭐, 신고라도 할까 봐요?”



사실 신고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누가 믿을까. 키스틸 그룹을 물려받을 이환 전무가, 거의 스타급으로 인기 많은 재벌 3세인 그가 오메가를 돈으로 사고 납치해서 아이를 낳게 한다니.



그리고 이환 정도 되는 재벌이라면 경찰 쪽에 손을 쓰는 일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의 조모인 키스틸 회장이 이미 수어 번이나 회계 사기 및 부당합병, 주가 조작 등의 혐의에서 풀려난 것만 보아도 말이다.



유일한 증거물은 바로 계약서였다. 그러나 이 계약서마저 조작으로 몰릴 수가 있었다. 조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면 된다지만 그때까지 이환이 저를 놔두기나 할까?



- 이해를 못 하는군요.



다시 한숨 소리. 해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나는 당신을 용서할 생각이 아직 있습니다, 강해진 씨. 하지만…….



검은 창문에 겁먹은 제 얼굴이 비쳤기에 해진은 시선을 떼고 앞을 보았다.



- 시간이 더 지나면 저도 그때는 장담을 할 수 없군요.



비라도 맞은 듯이 낮게 가라앉은 환의 목소리는 사실 협박보다 밀어에 가깝게 들렸다. 해진은 제 귀를 속으로 호되게 꾸짖으며 휴대폰을 반대쪽 귀로 옮겼다. 네가 뭔데 날 용서하고 자시고 하느냐고 빽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환 전무님.”



제 목소리로 부른 그의 이름이 입에 썼다.



“전무님께서는 제게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하시나 본데, 제가 아무런 대비 없이 그냥 도망 나온 것 같나요?”



이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황했다기보다는 짜증이 났으리라고 해진은 짐작했다.



“더 이상 저 찾지 마세요.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에요.”



그리고 통화를 끊었다. 휴대폰 전원도 끄고, 유심 칩을 빼내어 손으로 부러뜨렸다.



다시 차창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훤해서 얼굴이 비치지 않았다. 해진은 눈을 감았다.



온전히 잠들지는 못했지만 해진은 잠깐 선잠을 잤다. 기사가 저를 불러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 산이 있었다.



“정말 여기서 내리시는 거 맞아요?”

“네, 맞아요. 수고하셨습니다.”

“아니, 산밖에 없는데, 이 밤에…….”

“제가 산을 좀 좋아해서요.”



현금으로 계산을 하고 차에서 내린 해진은 눈앞에 우뚝 선 야산을 올려다보았다. 밤에 본 시커먼 산은 마치 지옥 입구라도 되는 양 음산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한숨이 났겠지만 해진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미친놈아.’



가방을 고쳐 멘 해진은 팻말을 한 번 확인한 뒤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산 절대 금지 - 맹수 출현지역]





* * *





해외지점 오픈 건은 그 후가 더 피곤했다. 이환의 성격상 마무리가 꼼꼼하지 못한 것, 뒷말이 나오는 것을 못 견디기 때문에 더더욱 직원들을 몰아붙이게 되었다.



평소라면 직접 비행기를 타고 다녀올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도 못했다. 뭐,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자리를 비우고 외국으로 나간 그 잠깐 동안 강해진이 잡힌다면 곧바로 혼을 내주어야 할 테니까.



덕분에 그는 날이 잔뜩 선 모습을 내내 보였고, 직원들은 그가 날이 서 있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웠다. 애인과 갑자기 싸웠다, 저런 성격에 애인이 있을 리가 없다, 회장과 또 불화가 생긴 것이 아니냐 등등.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늦은 퇴근 후 차에 오르자마자 기사가 하는 말에 환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

“예?”



주차장을 나오고서야 불쑥 튀어나온 두 음절에 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상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환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이 켜진 빌딩들이 거슬리도록 눈부셨다.



“호텔로.”



기사는 ‘무슨 호텔’이냐고 물으려다가 그의 얼굴이 영 심각한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제 상사가 되묻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 그는 머리를 굴린 끝에 일전 갔던 호텔을 향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아주 늦은 밤이었다. 경호원들은 더 이상 문 앞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지킬 사람이 탈출했으니 말이다.



그는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부터 거실, 주방까지 차례대로 불이 척척 켜졌다.



안은 청소를 해놓아서 해진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났다. 천장 연기 감지기 근처에는 그을린 벽지를 떼어내고 새로 붙인 흔적이 있었다.



다행히 호텔 화재 건은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다. 펜트하우스에서 숙식 중이던 고객 하나가 요리를 하다 잠깐 외출했는데, 불을 켜둔 것을 깜빡해버렸다고. 하지만 호텔의 우수한 내장재와 화재 방지 시스템 덕분에 연기만 나고 끝났다는 스토리로 말이다.



‘불도 안 났는데 연기만 이렇게 많이 난 건 처음입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강해진은 제 생각보다 더 과감한 놈이었다. 호텔을 연기로 가득 채우고 소란을 틈타 탈출할 생각을 하다니. 거기까지 생각하던 환은 미간을 구겼다. 아니, 아니다. 그깟 오메가 놈 하나 지키지 못한 것들이 무능한 것이겠지.



해진도 없는 이곳에 그가 온 이유는 하나였다.



‘왜 도망친 거지?’



환은 진심으로 알 수 없었다. 강해진이 왜 도망갔는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카펫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또각,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침실은 이전과 달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강해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환은 그 사실에 새삼 화가 났다.



그는 침대 위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어째서 이렇게 있던 자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워질 수 있을까. 강해진의 체취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열기와 체액도 쉽게 지워질 것은 절대 아닌데.



침대 위에 걸터앉은 환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다. 쓸데없는 물건들이나 사면서 얌전히 틀어박혀 있는 줄 알았더니.



“쯧.”



혀를 찬 이환은 그의 작은 몸을 떠올렸다. 제 손 아래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힘없이 흔들리던 작은 몸뚱이가.



‘대체 그딴 몸을 하고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종잇장만도 못한 몸뚱이를 가졌으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기나 할 것이지.



‘혹시 임신이라도 하면 그 몸뚱이로 어쩌려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환은 문득 뒷목에 소름이 쭈욱 끼치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번의 관계였지만 확실하게, 끝까지 했다.



그리고 그와 자신의 매칭률은 99.99퍼센트이다. 알고 있던 사실이 새삼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그 말은 곧…….



위잉, 생각을 끊어놓는 진동 소리에 환은 미간을 구겼다. 휴대폰 액정화면에는 ‘박 비서’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 저, 전무님.

“뭡니까.”

-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올 것이 왔나. 만약 회장이 정말로 사망했다면 필경 키스틸은 생판 남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강해진을 데리고 하는 이 장난질 같은 것도 모두 필요가 없어지고……. 마른세수를 하는 동안 수신구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 무슨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아니, 차라리 그런 거면 낫게요!



환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방음이 끝내주게 잘되는 이 호텔의 적막에 숨이 막혔다.



“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하십시오.”

- 회장님께서 알아버리셨습니다. 지금 노발대발하시고 난리도 아닙니다.

“……무엇을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물으면서도 사실 환은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이 복잡해지는군, 짜증을 억누르며 넥타이를 손으로 잡아 늘렸다.



- 아무래도 본사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이요.



환은 전화를 끊는 동시에 침실을 나섰다. 또각, 또각,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거실 카펫에 닿는 순간 사라졌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환은 다시 안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허공을 오래 휘저었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유 회장은 손주가 집무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그가 제게 허리를 굽혀 인사해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가 제 앞에서 각이 잡힌 모습으로 뻣뻣하게 선 채,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저를 빤히 보고 있을 때에도 말이다.



그녀는 들고 있던 신문 한 페이지를 모두 정독하고서야 움직였다. 먼저 창문에 얹은 다리부터 내렸다. 새하얀 정장 바지에는 먼지 한 톨 묻어 나오지 않았다. 유 회장을 곁에서 모시는 이들은 이환의 그 성격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라고들 말하곤 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참을성이 바닥난 이환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유 회장은 느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신문과 쓰고 있는 안경을 차례대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이환은 무슨 말씀이냐 묻거나 반발하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제 조모가 이을 말을 기다렸다.



“오메가를 호텔에 가둬뒀었다고.”



환은 숨을 들이마신 채 빠르게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강해진에 대해 알고 계신 건가?’



그리고 과거형을 쓴 걸 보면 아마 도망쳤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직접 나서서 처리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뒤이은 조모의 말에 환은 내내 지키고 있던 표정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처리, 말씀이십니까.”

“언론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니.”



환의 등줄기에 소름이 쭉 끼쳤다.



그녀는 지금, 해진을 직접 찾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겠다 말하고 있었다.



환은 마른침을 삼켰다. 조모가 제 흐트러진 모습을 싫어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는 제 조모의 성격을 알았다. 유 회장이 혼자 힘으로 키스틸 그룹을 이렇게까지 키울 수 있었던 데는 그녀의 능력뿐만 아니라 성격 역시 한몫을 했다.



사람들은 이환 전무의 성질머리가 모두 조모에서 물려받은 게 아닐까 추측했다. 그 말은 곧, 조모의 성질머리가 원본이라는 뜻도 되었다.



환은 손끝이 저릿하게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강해진이 죽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에게는 가족도, 친지도 없지 않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다면 찾을 사람도 없다. 자신을 제외하고 깊이 연결된 자가 없다는 사실이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저린 손끝에 주먹을 말아 쥐며 환은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자꾸 망상이 떠올랐다.



유 회장이 고용했을 신원 모를 사람들이 강해진의 자그마한 몸뚱이에다가 마구 폭행을 휘두르고, 그것도 모자라……. 그만하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 오메가는, 제가 찾아서 해결을 하겠…….”

“빌어 처먹을 자식아, 정신을 어디다 흘리고 다니는 거야!”



결국 유 회장이 호통을 쳤다. 뒤늦게 정신이 조금 들었다. 환은 가까스로 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언론에 입을 열거나, 그런 일은 절대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 배짱이 없는 녀석입니다. 제가 절대…….”

“그렇다면 더더욱 깨끗하게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나?”



유 회장은 지지부진한 것을 딱 질색했다. 강해진을 처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정말 그리할 터다.



환이 말을 고르는 것을 보며 유 회장이 미간을 구겼다. 옆으로 슬쩍 기울인 얼굴에 의심이 떠올랐다.



“아니면, 문제라도 있는 거냐?”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저는 단지…….”

“똑바로 말해라, 이환!”



또다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채웠다. 일흔 넘은 노인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환은 자세를 고쳤다. 화장기가 없는데도 또렷하다 못해 날이 바짝 선 유 회장의 눈이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제없습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하자 그제야 유 회장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은 그녀가 피곤하다는 투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어릴 때부터 조모는 변명을 싫어했고 책임감을 강조했다. 그 또래 아이들이 로봇을 갖고 놀 때 환은 그녀에게서 경영학을 배웠다. 그녀가 ‘잘못’이라 생각하는 것을 인정하고 수습하겠다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도 유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은 하마터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매듭까지 확실히 지어라.”



‘매듭’이라는 단어에서 환은 위화감을 느꼈다.



“따로 바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유 회장이 의자를 반 바퀴 돌려 창문 쪽을 바라봤다. 밤이 깊었지만 근처 빌딩숲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검은 창문에 유 회장의 모습과 제 모습이 비쳤다.



“약혼해라. 그 오메가 말고, 문제가 되지 않을 사람으로.”



환은 순간 조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약’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단어가 맞는지 의심하던 그는, 창문을 통해서 꽂히는 눈빛을 보고서야 제가 생각하는 뜻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인터뷰도 해라. 거기다 대고 소문을 퍼뜨리는 놈이 악독한 놈이 되도록.”



조모는 지독히도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강해진이 저를 협박할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NX 그룹이 이전부터 선 자리를 제안해왔으니 이참에 한 번 나가봐라.”



NX 그룹은 이전부터 키스틸 건설 쪽과 기술협약을 맺고 있는 곳이었다. 환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조모는 지금 제게 정략결혼을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



환은 고개를 한 번 조아렸다.



“예.”



지금으로서는 한 글자짜리 대답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





몇 시간 걷지도 못했는데 해진은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사지가 부서질 듯이 아프고 관절마다 불이 붙은 듯이 뜨거웠다. 무엇보다 배가 자꾸 아팠다. 히트사이클 약의 부작용이 또 나타나는 것일까.



‘하…….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산에 들어온 지 이제 고작 이틀째였다. 벌써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도주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이 상태로 더 움직이는 것보다는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한 뒤에 움직이는 게 나을 터다. 해진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가 걷는 곳은 인적이 전혀 없었다. 이 산 자체가 입산이 금지된 산이기도 하고, 사람이 갈 수 있게 다듬어 놓은 길은 아예 발도 들이지 않았으니까.



등산길이 아닌 산길은 보기보다 몹시 위험했다. 발을 디뎠는데 아래가 꺼질 수도 있고 독사나 독충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나마 지금이 여름이라 다행이지, 가을에는 썩은 낙엽을 밟고 미끄러지는 사고도 종종 있었다.



‘산으로 오지 말 걸 그랬나. 그래도 여기가 몸 숨기기에는 최적인데…….’



도시는 온갖 카메라가 널려 있고 이환의 사람들이 온갖 곳을 감시하고 있을 터다. 제 유일한 친구를 미국으로 보내버리고, 월세로 들어 사는 원룸까지 빼앗아버린 악독한 놈이니 도시에서 저를 찾는 일이야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해진은 탐험가였다. 길이 없는 야산에서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 위험한 동물로부터 몸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그에게는 상식이었다.



그리고 도시의 건물을 뒤지는 건 쉽지만, 이런 야산을 뒤지는 건 전문 인력 없이는 힘드니까. 탁 트인 시야가 아니니 헬기를 동원해도 찾기가 힘들 터다.



해진은 백팩에서 작은 생수통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통이 거의 다 비어가지만 물이야 구하면 된다. 문제는 지금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제 몸뚱이였다.



미지근한 생수통을 이마에 대었다. 고개를 들자 투명한 물병으로 햇빛이 조각조각 반짝거렸다. 그는 생수통을 내리고 주변을 살폈다. 아직까지 이 산에서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지만, 이환이 분명 수색대를 보냈을 터다.



‘몸이 뜨거운 것 같은데…….’



해진은 온도계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졌다.



주변은 고요했다. 여름 태양은 그가 앉은 그늘을 침범하지 못했으며 풀벌레들이 작게 울었다. 사람 소리나 기타 인공적인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 산에 오래 있어도 안 돼. 수색대가 오기 전에 이동해야지.’



해진이 선택한 곳은 작은 산봉우리가 여러 개 있는 곳이었다. 야생 맹수가 나와서 입산이 금지된 덕에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없고, 수색을 진행한다면 면적이 넓어서 오래 걸릴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가면 절도 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일단 며칠만이라도 버텨야 했다. 돌덩이 같은 몸을 바위 위에서 겨우 일으키며 꺼낸 온도계로 이마의 열을 재었다. 현재 체온은 38.5도였다.



“아, 생각보다는 안 높네.”



게다가 이렇게 더운 날이면 햇빛으로 인한 체온 상승도 고려해야 하고 말이다. 그늘에 앉아 있어도 줄줄 흐르는 식은땀은 물론 별개의 문제인 것 같지만 고작 40도도 되지 않는 열은 그에게 미열일 뿐이었다.



해진은 백팩을 고쳐 메고 앉았던 자리 위에 나뭇잎을 문지르고 바닥도 발로 문대었다. 걸음을 떼려 하자 현기증이 일었지만 이를 앙다물었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바지 안쪽으로 땀이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늘로만 다닌 데다가 그렇게 덥지도 않으니 아마 식은땀일 터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기를 쓰고 걸음을 내디뎠지만 고작 다섯 걸음 정도가 다였다. 해진은 무릎을 꺾으며 바닥을 짚었다. 축축한 흙이 손을 더럽히고 돌이 손가락 사이 여린 살을 찔렀지만 해진은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 짚은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겨우 몸을 도로 일으킨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바위에 걸터앉았다. 사실 아까부터 열만 나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엉망이었다. 특히 제일 고통스러운 곳은 아랫배였다.



‘배가 너무 아파…….’



해진은 바위에 앉은 채로 허리띠를 풀었다. 어차피 사람이 들어오는 산도 아니니 볼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옷을 벗어 확인한 그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바지 안으로 흐른 것은 땀이 아니었다. 속옷과 바지에 피가 흥건했다.



‘어떡하지.’



산에서 내려가 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가는 데만도 아마 한나절은 걸릴 터다. 그 병원에서 이환이 보낸 사람을 만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말이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해진은 벗은 바지와 속옷을 구겨서 비닐 봉투에 따로 담고는 도로 백팩에 쑤셔 박았다. 새 속옷과 바지를 입으면서 생각을 이어보려 했으나 머릿속이 멍했다.



일단은 진통제부터 입에 넣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시는 것도 버거웠다. 약효가 돌 때까지 조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백팩 지퍼를 꼼꼼하게 닫은 해진은 가장 앞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물론 해진의 본래 휴대폰은 버린 지 오래였다. 이건 에스테틱 숍을 나와서 구매한 선불폰이었다. 휴대폰 전원을 켠 해진은 힘없는 팔을 들고 이리저리 뻗어보았다.



“에이, 여기도 신호가 잘 안 잡히네.”



약효가 돌 때까지 시간이나 때우려고 했는데, 아무리 IT강국이라 하지만 근처에 마을 하나 없는 야산까지 신호가 통하지는 않았다. 아쉬움에 휴대폰을 다시 끄려다가, 어느 지점에서 상단 바에 표시된 수신 작대기 표시가 한 칸 켜졌다.



“어, 어어! 잡힌다!”



해진은 얼른 인터넷 브라우저 앱을 열었다. 느리긴 해도 포털사이트가 꾸역꾸역 열렸다. 작은 화면에 한 구역씩 로딩이 되는 것을 보던 중, 눈에 띄는 글자가 보였다. 몸이 아픈 탓인지 글자도 잘 읽히질 않았다. 자꾸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쳤다.



[키스틸 레저 이환 전무, ‘약…]



‘이환’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제대로 읽지도 않고 기사 타이틀을 눌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왜 갑자기 포털 사이트에 이환의 이름이 뜬 걸까. 생각해보면 유명인이라 새삼스럽진 않았다. 뭐, 키스틸 레저 쪽의 일이겠지. 워낙 큰 회사기도 하니까.



절대, 절대로 그 미친놈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도 배가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 누가 누굴 걱정해.



해진은 로딩이 되길 기다리며 희게 바뀐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영 넘어갈 기미가 안 보였다.



“뭐야. 또 안 터지는 건가?”



화면은 흰색에서 아무것도 로딩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었다. ‘뒤로’ 버튼을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았다는 경고 팝업이 떴다.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끄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뭐, 보나 마나 사지 멀쩡하게 내 걱정은 하나도 안 하고 잘 살고 계시겠지.”



원래 그런 놈이니까. 해진 자신을 직접 찾으러 오지도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배가 아파왔다.



“개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아랫배를 찌르는 이 통증은 히트사이클 약의 뒤늦은 부작용이 맞는 듯했다. 하혈을 심하게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울분을 삼키며 아픈 배를 부여잡았다. 땀이 어찌나 많이 나는지 티셔츠도 푹 젖을 지경이었다.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냐?’



덜컥 겁이 났지만 그딴 생각은 하지 않기로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다.



‘웃기지 마. 보란 듯이 살아남을 거야.’



꼭 살아남아야지. 살아남아서 이환에게 엿을 먹여줘야지. 몸을 잔뜩 웅크리며 두 팔로 배를 감쌌다.



약효가 돌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려던 그는 묘한 소리를 듣고 굳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사람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불행인 점이라면 소리의 주인공이 무척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상식이 맞다면, 이 거친 숨소리의 주인공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거대한 멧돼지가 해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NX 그룹 신 회장의 딸 신아연은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베타였다. 즉 다시 말해 결혼을 한다 해도 이환과는 아이를 낳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러나 유 회장은 환에게 말했었다. 제 유전자가 담긴 아이를 데려와야만 회사를 물려줄 것이라고.



그 사실을 적시하자 유 회장은 이환에게 말했다.



‘그것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네 약혼이지 않나?’



즉, 다시 말해서 파혼을 했을 때 기업 간의 여파까지 모두 자신이 책임지라는 뜻이었다. 강해진이 도망친 것도, 그로 인해 생길 여파도 모두 제 탓이니 말이다.



“신아연 씨와 스케줄 잡았습니까?”

“예. 이번 주 토요일 12시, 키스틸 호텔 1층 카페로 정해졌습니다.”



환의 물음에 박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복도를 걸으며 벗어 내민 재킷 역시 익숙하게 받아 들었다.



“우리 호텔 카페라. 괜찮군.”



키스틸 호텔의 1층 카페는 한쪽 벽이 모조리 통유리로 되어서 안이 훤히 비쳤다. 박 비서는 일부러 그곳을 선택한 것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의 만남을 곧 공표할 테고, 그 전에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만남’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두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집무실에 들어온 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따라 들어온 박 비서에게 용건이 있냐는 눈짓을 했다. 박 비서가 조금 뜸을 들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신아연 씨의 프로필을 준비할까요?”



데이트를 하기 전에 미리 상대 쪽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이환은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로 박 비서를 바라봤다.



“밀가루떡 놈이나 빨리 잡아 오십시오.”



그가 말하는 ‘밀가루떡 놈’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데에는 다행히도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권태롭던 이환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박 비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



“근처 산으로 들어간 듯하다고 합니다. 수색대를 보내어서 본격적으로 수색 시작 중입니다.”



기뻐할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도 환의 얼굴은 여전히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고 있었다. 박 비서는 자세를 고치고 고개를 조아렸다.



“……경과 있으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환이 귀찮다는 투로 물러가란 손짓을 했다.



박 비서가 나간 뒤, 이환은 자리에 앉아 절전 모드로 돌아간 모니터를 켰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자 메인 화면에 제 이름이 보였다.



[키스틸 레저 이환 전무, ‘약…]



잘린 제목을 클릭했다. 새로 넘어간 창에서 커다란 글씨로 제목의 뒷글자까지 보였다.



[키스틸 레저 이환 전무, ‘약진을 위해 구조조정 불사할 것’]



최근 키스틸 레저 인사과는 매우 바빴다. 기존에 있던 이들이 모두 물갈이되어서였다. 유 회장의 짓이었다. 그녀는 이환과 친밀한 간부들을 잘라내고 제 사람으로 채울 것을 명령했다. 반발도 하긴 해보았다.



‘그 오메가 때문입니까? 아무 일도 없었고 그 녀석 혼자서 난리 부리는 거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벌써 소문이 퍼지고 있다. 네가 수습할 테냐?’



유 회장의 말로는 얼마 전 모임에서 이환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했다. 요즘 이름 모를 오메가와 호텔에서 동거하는 게 사실이냐는 둥, 그 오메가가 임신한 채로 도망을 친 게 사실이냐는 둥.



평소에 이환이 다른 이들과 교류를 하지 않은 탓도 컸다. 이환 정도 또래에다 비슷한 재력과 명망이 있는 이들은 모두 저들끼리 친분 아닌 친분을 쌓고 있으니.



‘나는 내 손주가 그 정도로 얼빠진 놈이 아니라고 믿지만, 과연 다른 사람들도 그럴지 모르겠구나.’

‘제가 수습하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내 손주지만 나 역시 영 못 미덥구나.’

‘회장님.’

‘일은 직원들에게 맡기고 당분간 몸 사려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그나마 쓸 만하게 키워 놓았던 키스틸 레저의 간부들을 모조리 잃고 말았다. 언론대응팀에 알아서 대강 일을 처리하라 해두었더니 약진이니 뭐니 하는 저딴 기사나 내보내고 있고 말이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



이가 갈렸다. 그 조그마한 오메가 놈 때문에 도대체 손해 본 게 얼마인가.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의자 등받이에다 몸을 깊이 묻었다.



아마존 탐험이니 뭐니 하며 온갖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상한 만능칼 같은 것을 들고 다니는 놈이었다. 겨우 한주먹짜리 몸뚱이라 해도 좀 불안하기는 했다.



특히 산으로 들어갔다면 더더욱 찾기 힘들겠지. 도시에서야 사람만 풀면 금방 잡을 테지만 말이다. 이환은 턱을 매만지며 산을 아예 없애버리려면 무슨 허가가 필요한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허가를 받지 못해도 할 거지만.



‘제 발로 오게 만드는 방법이 없으려나.’



녀석이 알아서 찾아오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회사를 안정화시키는 게 제일 중요했다. 약진이니 구조조정이니 저딴 단어를 함부로 쓰는 기사부터 밀어내야 할 터다.



한숨을 길게 내쉰 환은 책상 위 스피커폰을 눌렀다. 박 비서가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넥타이를 잡아 늘리던 환은 문득 컬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을 구겼다.



- 예에, 또 무슨 일이십니까. 아까 말씀하시지…….

“기사, 최대한 빨리 준비하십시오.”

- 예? 무슨 기사 말씀이십니까?



환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돌아섰다. 벽면 거울에 제 모습이 비쳤다. 흐트러진 구석 하나 없이 완벽한데도 어딘가 묘하게 초췌해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약혼 관련 기사 말입니다.”



만지작거리던 넥타이가 풀려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졌다.





* * *





해진이 즐겨 보는 탐험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외국에서 촬영하고 제작된 것이었다. 때문에 한국의 환경과는 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탐험할 때에 필요할 몇 가지 상식은 그도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야생에서 멧돼지를 만났을 때 나무로 피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일전에 읽었던 책에서 나무 아래 멧돼지가 있고 사람은 굵은 나뭇가지에 겨우 매달려 있는 그림도 설명과 함께 봤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해진은 지금 나무 위에 있었다. 봤던 그림처럼 힘들게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편하게 앉아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물론 등산 장비를 이용해서 나무줄기에다 단단하게 로프를 묶어 놓아서 몸이 떨어질 염려가 없기도 하지만, 공격을 할 줄 알았던 멧돼지가 얌전히 있는 까닭이 더 컸다.



“돼지야, 이것도 하나 더 줄까?”



해진이 사과를 꺼내 보이자 멧돼지가 커다란 코를 들고 궥궥, 소리를 내었다.



“자, 하나 더 줄게.”



그가 사과를 아래로 던지자 멧돼지가 입을 벌리고 잽싸게 받아먹었다.



“오오, 잘 먹네.”



해진은 어느새 멧돼지와 친해졌다. 물론 이 짐승은 처음엔 해진을 죽이려 들었다. 해진이 나무로 잽싸게 올라가자 한참 동안 주변을 맴돌고 씩씩거리다가 나무줄기를 이마로 쿵쿵 받기까지 했다.



화가 잔뜩 난 멧돼지를 달래기 위해 일단 가방에 있던 과일을 던져보았는데, 우습게도 그게 먹혔다. 멧돼지는 심지어 더 달라는 듯이 나무줄기에 매달려 앞발을 긁어대기까지 했다.



“이제 없어! 나도 먹어야지.”



해진이 휘휘 손을 내저었지만 멧돼지는 여전히 해진을 올려다보며 도망칠 생각을 않았다. 해진이 손과 발을 동시에 열심히 내저었다.



“가! 없어!”



멧돼지는 그러나 아예 나무 아래에 철퍽 주저앉아 버렸다. 마치 해진이 사과를 더 던져 주기까지 기다리겠다는 투였다. 해진은 한숨을 쉬며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었다.



“그래, 뭐, 해보자. 넌 거기서 주지도 않을 사과나 기다리고, 난 여기서 낮잠이나 자든가.”



그래도 해열제가 통해서 아까보다는 몸 상태가 나은 게 다행이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당장은 하혈도 그쳤고 말이다.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몸 상태가 이렇게 된 이유를 말하려면 불법으로 제조된 히트사이클 약을 먹었다고 말해야 하고, 그러면 조사가 들어갈지도 몰랐다.



“하, 진짜 개새끼…….”



새삼 또 욕이 나왔다. 눈물도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난 울지 않아. 그 개새끼한테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가방을 힘줘 끌어안는데, 갑자기 멧돼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도망을 쳤다.



“야, 어디 가? 벌써 포기하냐?”



오랜만에 친구라도 생겼나 싶었는데, 조금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서운함은 곧 불길함으로 바뀌었다. 저 멧돼지가 부리나케 자리를 벗어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곳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였다.



멧돼지의 천적은 사람 말고는 거의 없었다. 설마 이 야산에 호랑이나 곰이 있지는…… 않겠지……?



그리고 뒤늦게 해진의 귀에도 작게 소리가 들렸다. 공사 소리 비슷한 것이 멀리서 어렴풋이 울렸다. 가방을 등에 단단히 멘 뒤 나무줄기에 묶은 로프를 쥐고 조금 더 높은 나뭇가지로 이동했다.



아슬아슬하게 선 채로 손차양을 하고 내다보니 저 멀리 크레인 같은 것들이 있었다. 공사라도 하나.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쌍안경을 꺼내었다. 쌍안경 렌즈에 눈을 대는 순간, 해진은 거대한 철망 같은 것을 보았다.



‘저거…… 혹시…….’



믿지 못해 잠깐 눈을 떼었다가, 다시 확인했다. 거대한 철망과 안전모를 쓰고 철망을 철봉 사이에 설치하는 사람들, 그리고 작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키스틸’이라는 글자. 결론은 하나였다.



그 미친놈이, 산 전체에 거대한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미친 새끼가……!’



이환이 자기를 찾기 위해 수색대를 풀 거라고는 당연히 짐작했다. 그러나 산에다 울타리까지 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해진은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쌍안경을 들었다. 장비가 꽤 많았다. 트럭에 키스틸 로고가 박힌 걸 보면 이환이 보낸 사람들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들이 설치하고 있는 건 아무리 봐도 울타리가 맞았다. 고속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석방지망보다 훨씬 더 높고, 전깃줄로 추정되는 검은 선도 보였다.



‘설마 전기울타리?’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닐까? 내가 모르고 손이라도 대면 어떡하려고? 해진은 소름이 쭉 끼쳤다.



일단 나무줄기에 묶은 로프를 풀었다. 혹시 멧돼지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지, 혹은 다른 위험한 야생 동물은 없는지 주변을 여러 번 살핀 뒤에야 조심조심 나무를 내려왔다. 발길은 이미 정해놓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울타리를 쳐서 나를 산에 가두기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참 무식하다, 진짜.’



나갈 길을 차단하고 수색을 하려는 모양이지. 어쨌든 동시에 산의 모든 방면에다 동시에 울타리를 칠 수는 없을 테니, 반대쪽으로는 수색대가 오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가운데로 몰아넣을 계획이겠지만 해진은 쉽게 잡혀줄 생각이 없었다.



“날 너무 우습게 보셨다, 이환.”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 배가 아파왔지만 이깟 것쯤 견딜 수 있었다.



그는 그대로 씩씩하게 산을 이동했다. 몇 시간 동안 쉬지도 않았다. 쉴 시간도 없었다.



날씨가 꽤 더웠다. 걸을 때마다 땀이 줄줄 흘렀다. 건강한 사람이 맨몸으로 걸어도 힘들 날씨인데 무거운 짐까지 메고 상태 안 좋은 몸으로 걷고 있으니 효율이 떨어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찼으나 해진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밤이 되기도 전에 포위당할 거다.



그는 걷고 또 걸으며 주머니에 넣어둔 거울을 한 번씩 만지작거렸다. 어머니의 유품이자 이환과의 인연이 시작된 그 거울이었다.



엄마가 지금 제 모습을 보고 있다면 뭐라고 할까. 그러게 왜 그런 알파를 만났느냐고 나를 질책하실까.



아니, 해진이 기억하는 엄마는 그렇게 모질지 않았다. 아마 자신을 꼭 안아줄 것이다. 엄마에게 말하지 그랬느냐며, 같이 해결하자고 하겠지. 엄마를 생각하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 이 거울을 받으려고 이환을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해진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의 사악함을 알아보지 못한 과거를 꾸짖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도 이환을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을 꾸짖고 있었다.



처음 제대로 마음을 준 사람이었다. 해진에게는 첫사랑이나 마찬가지였다. 내내 혼자 외롭게 살았던 해진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 지경이 되어서도 못 놓는 것이었다.



‘정신 차려, 강해진. 코앞에서 내가 죽어도 눈 깜짝 않을 놈이니까.’



그런데도 해진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내가 그의 아이를 낳는다면.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이 관계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을까?



다시 말해서, 그가 제게 다시 마음을 줄 일은 없을까?



‘자기 아이를 가진 오메가를 함부로 대하진 않겠지.’



그의 목적이 아이를 낳게 하는 거라고 그랬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뿐이겠지. 이환은 자신을 감금하고, 부작용이 많다는 약을 억지로 먹게 하고, 친구와 직장과 집까지 앗아갔다.



아이를 낳은 뒤의 신변을 보장해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마음을 주기는 개뿔. 비밀을 유지한답시고 저를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목표치의 절반은 왔을까. 해진은 숨이 턱 끝까지 찬 채로 드디어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근처를 살폈다. 다행히 인적도 없고, 짐승의 기척도 없는 듯했다.



해진은 한숨을 폭 내쉬고 바위 위에 앉았다. 아까부터 다시 배가 아파오고 있었다. 어쩌면 심상찮은 병에 걸렸는지도 몰랐다. 힘없는 손을 겨우 움직여 배낭에서 진통제를 꺼내려다가 관두었다. 진통제는 움직임과 감각을 둔하게만 만들었다. 적어도 이 산을 벗어날 때까지는 약 없이 버텨야 했다.



땀에 푹 젖은 티셔츠를 갈아입고 싶었지만 어차피 걸으면 또 젖을 거라 꾹 참고 다시 일어섰다. 아니, 정확히는 일어서려 했다. 아랫배를 후벼 파는 듯한 통증에 인상만 구기며 도로 앉았다. 엉덩이에 축축한 감촉까지 느껴졌다. 또 하혈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



그 때였다. 잠깐 쉬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기척이 근처에서 느껴졌다. 여러 군데였다.



‘뭐지?’



멧돼지는 아니었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기척이라면 호랑이처럼 사냥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육식 동물일 텐데, 하나가 아니니…….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던 해진은 나무 사이로 스치는 인영을 보았다. 저를 찾아온 수색대와 벌써 마주친 모양이었다.



‘내가 여기서 잡힐 것 같아?’



그는 뻣뻣한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튀어 오르듯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고통으로 일어서지도 못했지만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도 거의 초인적인 속도로.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잡아!”



해진은 사람들 사이의 빈틈을 찾으며 가방 겉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각기 다른 양쪽으로 던졌다.



던진 물건은 땅에 닿자마자 펑, 하고 꽤 큰 소리를 내며 검붉은 연기를 터뜨렸다. 연기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고, 들이마신 사람들은 괴로워하며 재채기와 기침을 몹시 했다. 후추와 고춧가루 등을 섞어서 해진이 직접 만든 폭탄이었다.



어느새 방독면을 꺼내 쓴 해진은 쓰러진 사람들 사이로 달리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뒹굴던 사람들 중 몇몇이 겨우 일어나 해진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해진은 그 작은 몸으로 거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달렸다.



“사진, 사진이라도 찍어. 빨리!”



쓰러진 사람 중 하나가 외쳤고, 해진이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사진?’



찰칵,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 사이로 플래시가 터졌다. 불빛에 정신이 든 해진이 다시 앞을 보고 달렸다.



해진은 미친 듯이 달리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이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아까 멧돼지가 달려간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물론 이 정도 인파라면 녀석도 도망칠 가능성이 있지만, 일종의 도박이었다.



“돼지야, 형아 왔다!”



일부러 크게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흥분해서 덤벼들기를 바라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멀리서 아까 보았던 멧돼지가 나타났다. 해진은 근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장 높아 보이는 나무를 향해 무언가를 휙, 던졌다. 갈고리였다.



나무에 걸쳐진 갈고리에는 긴 로프가 걸려 있었다. 암벽 등반 장비를 해진이 직접 개조해서 만든 것이었다. 이걸 만드느라 꽤 고생했다. 여러 번 실패하기도 했고, 덩치들 눈에 띄지 않게 매번 환풍구 위에다 숨겨두느라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호텔에 갇혀 있는 동안 제 블랙카드로 이것저것 구매해서 이런 걸 만들고 있었다는 걸, 이환은 짐작이나 했을까? 아마 못 했을 거다. 그러니까 멍청하게 자신이 도망칠 때까지 놔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통쾌했다.



로프를 힘껏 움켜쥔 그가 장비에 달린 손잡이 같은 것을 당기자 로프 길이가 빠르게 줄어들며 해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가는 동안 땅에 남은 대원들은 멧돼지를 보고 혼비백산했다.



“미친, 저게 뭐야! 진짜 멧돼지야?”

“피해, 피해! 나무로 올라가!”



멧돼지가 기겁할 만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수색대원들은 전경들이 쓸 법한 방패 같은 것을 들고 물러나거나 서둘러 나무 위로 올라갔다. 해진은 나무 위에 매달려 그들이 대피하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움직였다.



‘저 정도면 멧돼지한테 죽지는 않겠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저 때문에 멧돼지한테 옆구리를 꿰뚫리거나 하는 모습을 봤다면 죄책감에 시달렸을 텐데, 장비랑 대처하는 법을 보니 그래도 나름 전문가들을 데려온 모양이었다.



“천천히들 오세요. 몸 사리시고.”



그는 가방 겉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다 후두둑, 뿌렸다. 탁구공 사분의 일 정도 되는 크기의 구슬 여러 개가 주변 땅을 채웠다. 별것 없어 보이지만 이런 험한 길에는 제법 위험한 요소로 작용했다. 자칫 밟고 넘어졌을 때 근처의 나뭇가지나 바위 하나도 위협이 되니까. 나뭇잎 아래 깔린 것을 못 보고 밟을 수도 있고 말이다.



멧돼지의 궥궥, 하는 거친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점차 멀어졌다. 해진은 부디 저 사람들이 환에게 전해주길 바랐다. 자신이 얼마나 진심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지 말이다.



도망은 계속되었다. 해진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배는 계속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더위 때문에 땀이 흘러 지쳤지만 결코 쉬지 않았다. 아주 잠깐 서서 바지 위에 다른 바지를 덧입은 것이 전부였다. 하혈한 피가 허벅지를 축축하게 적셨기에 혹시라도 피를 흘려 흔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지를 두 겹이나 입으니 더위는 다섯 배 정도 더해진 느낌이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다시 걸으면서 문득 해진은 생각했다. 이환은 알고 있을까. 이렇게 제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을.



‘내가 아프단 사실을 알면 직접 올까?’



그러나 부질없는 생각임을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그래서 이번 저희 상품개발2팀에서는 랜드오퍼레이터(현지 협력사)와 연계하여 현지의 다양한 콘텐츠를 단시간에 즐길 수 있도록…….”



개발2팀의 팀장이 열을 올리며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강해진이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산을 다 틀어막아서라도 잡아내라 했다. 사기업이 임야에다가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허가가 필요했지만, 그깟 것 이환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목숨만 붙여서 데리고 와.’



그게 이환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강해진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자기 눈앞에 목숨만 붙여서 데리고 오라는 것. 어차피 필요한 것은 녀석의 구멍과 거기 연결된 포궁 말고는 없었다.



환은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강해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에야 신경이 쓰여서 그랬다지만, 그를 생각하는 때가 점점 잦아지더니 이제는 깨어 있는 내내 강해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환은 눈을 뜨자마자 강해진을 떠올렸다. 심지어 제 아래에 깔려서 헐떡거리며 신음하던 모습을 말이다.



아침마다 있는 정직한 몸의 반응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해진 페니스를 느끼며 환은 속으로 욕을 씹었다.



어째서 강해진이라는 놈은 눈앞에서 사라지고서도 저를 괴롭히는 것일까. 지금 당장 머리채를 잡아챌 수도, 그 더러운 구멍을 혼쭐낼 수도 없는데.



원활한 출근 준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위를 해야 했다. 발기한 상태로 출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제 몸의 가장 은밀한 부위를 만져서 무언가를 분출하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 아직 익숙하지도, 달갑지도 않았다.



환은 자신의 페니스를 만지며 강해진의 달뜬 모습을, 그가 내뱉던 신음을 떠올렸다. 딱 한 번 들어가 보았던 그의 젖은 구멍 안쪽을 떠올렸다. 잔뜩 흥분해서 조이던 감촉을, 축축하고 말캉한 그 감촉을 애써 떠올렸다.



‘그를 당장 만지고 싶다.’



한창 페니스를 문지르던 중,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환은 새삼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감정의 프로세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강해진을 안고 싶어 미칠 것만 같은 그 기분을,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피티가 끝나고서도 이환이 아무 말 없자 개발2팀 팀장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무 앞에서 직접 하는 피티라며 야심 차게 준비했는데 정작 전무는 뭐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책상만 응시하고 있으니.



“전무님.”



보고 있던 간부 하나가 결국 조심스레 환을 불렀다. 환은 한참 지나서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돌아버리겠군.”

“예?”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여남은 명의 간부들이 저들끼리 눈치를 봤다. 방금 한 피티가 전무를 화나게 했다면 당장 대책을 세워야 했으나, 그를 화나게 한 원인을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다른 간부가 조심스레 다시 물었지만, 환은 여전히 묘한 표정을 하고 - 간부들의 눈에는 아주 화가 난 듯이 보였다 - 테이블 어딘가를 응시할 뿐이었다.



“정말이지 못 참겠어.”



팀장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몇몇 간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침내 환이 일어섰다. 간부들도 따라 일어섰다.



“발표한 대로 개발 진행하십시오. 자료는 내 메일로 보내고.”



팀장은 그의 말에 기뻐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환은 사람들을 두고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박 비서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전무님, 수색대원 중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진척이 있었다고 하는데, 만나보시겠습니까?”



이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다소 사나운 기세에 박 비서는 잠깐 흠칫하였지만, 이내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



수색대원은 붉은 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을 하고 왔다. 산에서 곧바로 달려왔는지 흙투성이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환을 보자마자 하소연을 했다.



“아니, 무슨 일반인이 최루탄을 갖고 다닙니까? 산길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요? 저희 팀, 진짜 죽을 뻔했습니다.”



후추와 고춧가루로 만든 폭탄을 그대로 맞고 멧돼지에게 죽을 뻔하고서도 수색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곧바로 해진을 뒤쫓아 갔다. 그러나 해진 역시 만만찮았다. 그는 프로급의 수색대원들을 낭떠러지에 가까운 내리막길로 유인하고, 일부러 다른 쪽으로 기척을 내기까지 했다.



한참 설명하다가 환의 눈치를 보던 대원이 머뭇거리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액정화면에는 해진의 사진이 떠 있었다.



박 비서와 대원이 잠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환은 해진의 사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사진 속의 강해진은 방독면을 쓰고 있어 얼굴 반 이상이 가려져 있었지만 놀란 표정은 알아볼 수 있었다.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다래져서 카메라를 쳐다보는 게 꼭 토끼 같았다.



사진을 보는 순간 환은 숨을 멈춰버렸다. 자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사진 속의 해진이 진짜라도 되는 듯이 멍하니 손을 뻗어 액정화면을 더듬었다. 따끈따끈하고 말랑하던 해진의 감촉은 당연히 느껴지지 않았다.



해진이 도망친 뒤로 내내 갖고 있던 감정이 그의 속에서 꿈틀거리며 존재를 알렸다. 억누르려 했으나 마침내 한계점에 다다른 것처럼, 끓는 냄비처럼 덜걱거리며 요란하게 그를 뒤흔들었다.



그 감정은 처음 해진과의 매칭률을 보았을 때 느낀 것과 조금 비슷했다. 반드시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일종의 소유욕 말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건강 상태는 어때 보였습니까?”

“많이 지쳐 보였고…… 어디가 아픈 것처럼 보였습니다.”



박 비서가 대원에게 묻고, 대원이 대답했다.



“어떻게 아파 보였습니까?”

“그, 그게,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바위에 피가 묻어 있더군요.”



환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이 감정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저를 괴롭히는지.



어째서 하루 종일 그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는지.



“역시 내가 직접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내내 듣고만 있던 이환이 마침내 선언했다.





* * *





수색대원들의 기척이 더 느껴지지 않는 때가 지나서도 해진은 계속 달렸다. 배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건 더 이상 그들이 자신을 못 찾는다는 확신이 들 때였다. 잔뜩 곤두선 긴장감이 가라앉으며 그 자리를 대신 통증이 메웠다.



아픈 배를 움켜쥔 채로 비틀비틀 걸으며 해진은 나침반을 확인했다. 방향은 정확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돌덩어리 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행히도 해진이 찾던 것이 나왔다. 저 멀리 기왓장으로 만든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향을 태우는 냄새도 은은하게 났다. 그가 찾아온 곳은 깊은 산속의 작은 절이었다.



“도착……했다…….”



절 뒷마당, 자그마한 텃밭에 도착하자마자 해진은 풀썩 쓰러졌다.





꿈속에서까지 해진은 이환에게서 도망을 쳤다. 자신의 뒤를 바짝 쫓아오는 이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해진은 가방에서 온갖 것을 꺼내 던졌다. 그러나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안 나오고 요상한 것들만 손에 잡혔다. 인형이나 꽃 같은 것들 말이다.



‘미친놈아! 꺼져! 꺼지라고!’



그러나 해진은 개의치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그에게 던졌다.



‘절대 네 새끼는 안 낳을 거야! 미친놈아!’



이환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해진은 울고 싶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위협적으로 뻗어왔다.



‘지금 배 속에 있는 그 아이도 낳지 않겠단 말입니까?’



뒤이은 이환의 말에 해진은 그를 피해야 한단 사실도 잊고 우뚝 굳었다.



‘……뭐……?’



이환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당신, 내 아이를 가졌지 않습니까.’



뭐라는 거야, 이 돌아버린 새끼가……. 내 배에 뭐가 있다고? 해진은 반사적으로 아랫배를 더듬었고, 제 배가 비정상적으로 불룩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돼.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불룩해진 배가 점점 더 부풀었다. 끔찍했다.



이환이 씩 웃었다. 그 잘난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주려 팔을 휘둘렀지만 눈앞의 환은 신기루처럼 형체가 없었다.



마구 주먹을 휘젓던 해진은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낯선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나이 지긋한 남자였다.



“아이고, 좀 괜찮아요? 무슨 꿈을 그리 사납게 꾸셔.”



해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향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법복을 입은 대머리 남자는 아마 승려일 터다. 그 말인즉, 무사히 절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해진은 모른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

“절이에요. 텃밭에 쓰러져 계시던 걸 데려왔어요.”



모두 해진이 지도를 보며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머리를 짚고 혼란스러운 척을 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스님이 그를 부축해주었다.



“좀 마셔요.”



건넨 물을 마시며 해진은 최대한 공손하고 겁을 먹은, 그리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겁을 내는 건 가짜 표정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 미친놈만 생각하면 몸이 떨릴 정도니까.



해진은 아직 멍한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다시 찬찬히 둘러보았다. 스님이 딱히 의심스러워 보이진 않았고, 누가 몰래 지켜보는 기척도 없었다. 들고 온 가방도 벽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하긴, 만약 수색대가 저를 찾았다면 이미 자신은 SUV 뒷좌석 같은 곳에 팔다리가 묶인 채로 누워 있겠지. 아, 이건 좀 오버인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진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승려는 손을 내젓고 쯧쯧, 혀를 찼다. 얼굴에 동정심이 보였다.



“아니, 거참, 병원은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것도 모자라서 몸에다가 글자까지 써 놓았으니, 이건 뭐, 병원엘 데려가고 싶어도 방도가 있나.”



승려의 말에 해진이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몰라서 배에다가 ‘병원에는 데려가지 말아주세요’라고 커다랗게 써놓길 잘했다 싶었다. 정신이 없을 때 병원에 갔다가 혹시라도 이환 쪽 사람이 자기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양손으로 컵을 쥔 채 물을 홀짝거리고 있자니 승려가 이번에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했다.



“산길 따라서 등산 온 것도 아니고, 갑자기 뒤뜰 텃밭에 나타난 걸 보면 저 험한 산을 그냥 걸어왔단 건데…….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는 거요?”



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시선을 떨궜다. 여전히 느껴지는 눈초리에 조금 더 얼굴을 구겼다. 울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자 그제야 승려가 시선을 거뒀다.



“뭐, 말하기 싫으면 말고.”



다행히도 승려는 더 묻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 절을 선택하길 잘했다 싶었다. 예로부터 절이나 성당 같은 종교 시설은 사연 많은 도망자들의 안식처가 아니었던가.



“감사합니다. 저, 혹시…… 여기서 하룻밤만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묻자 승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거, 사연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몸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지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감사한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몸조리 천천히 하시고 배고프면 말해요.”

“저, 잠시만요, 스님.”



해진이 얼른 가방을 더듬어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이환의 블랙카드로 주문했던 명품 시계였다.



일부러 망설이는 척, 아니, 결의를 다지는 척 머뭇거리다가 불쑥 케이스째로 내밀었다.



“이건 제 돌아가신 형님이 아끼던 유품인데…….”



승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진은 때를 놓치지 않고 승려의 손에다 케이스를 쥐여주었다.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희사할 돈은 없지만 이건 드릴 수 있어요.”



새 명품을 그냥 준다면 당연히 의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적당한 스토리가 있으면 갑자기 주어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돌연 닥친 행운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형님 유품을 이렇게 마음대로 줘도 돼요?”

“돌아가신 지 한참 됐는걸요.”



형은 개뿔. 이건 뇌물입니다.



“그래도 귀해 보이는데, 허 참…….”

“받아주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제 돈으로 산 것도 아니거든요.



“저, 대신, 혹시 아주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여기 누가 찾아왔는지 물으면 모른다고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승려는 미심쩍게 해진을 보다가 이내 측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조건을 붙여야 사람들은 의심하질 않는다. 시계가 비싼 것임을 알아봤는지 며칠 더 머물러도 되고 욕실은 어디에 있으니 편히 쓰라는 말도 덧붙였다. 문이 닫히고서야 해진은 안도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해진은 살며시 방 밖으로 나가 보았다. 자신이 좀 전까지 누워 있던 곳은 아마 스님들이 생활하는 곳인 듯했다. 인적도 없고 고즈넉해서 마음이 편해졌지만, 긴장감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 가장 먼저 머리 탈색부터 했다. 대학 다닐 때도 탈색은 해본 적 없었는데, 미친놈한테 쫓겨 다니느라 생전 처음 노란 머리를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물론 산에도 개울이 있었으니 거기서 감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하수 처리가 없는 곳에서 머리를 감으면 물과 그 주변 환경을 심각하게 오염시키니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도망 다니는 처지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은 뒤 수건으로 말리며 거울을 보았다. 젖은 노란색 머리칼이 낯설었다.



어쩌면 머리색 말고 다른 것들도 많이 바뀌어야 할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해진은 딱 하룻밤만 절에 머물렀다. 며칠 더 있어도 될 듯한 분위기였지만 수색대가 금방 절에 도착할 테고, 슬슬 이동할 시간도 되었다. 미리 예약해둔 이동수단도 곧 올 테고 말이다.



스님은 해진이 떠나기 전에 나물전과 강냉이, 삶은 옥수수, 믹스커피 등을 챙긴 보따리를 안겨 주었다. 머문 방을 청소도 하고 밭일도 조금 도와드리며 아주 슬픈 사연이 있는 것처럼 굴었더니 저를 가엾게 본 모양이었다. 의심하는 기색은 이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따리를 품에 꼭 안고 여러 번 허리 숙여 인사하고서 해진은 절에서 내려왔다. 혹시라도 수색대를 만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예약한 곳까지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절에서 내려오는 하산길은 해진이 온 곳과 달리 사람들의 출입이 허가되어 있는 등산길이었다. 등산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인 해진은 등산로 코스 옆에 마련된 간이주차장에 도착했다.



타고 가야 할 차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일반 등산객들의 중형차, 소형차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해진은 리무진 관광버스 쪽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그때 전화드렸던 마루투어 강해진입니다.”



물론 이 버스 역시 해진의 돈이 아닌, 이환의 블랙카드로 미리 예약해둔 것이었다.



마루투어 이름을 팔아먹었으니 왜 다른 관광객이 없느냐고 기사가 물었지만, 해진이 대답하지 않자 더 묻지 않았다. 회사에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단 서울로 가주세요.”



서울로 가는 동안 해진은 가장 뒷자리에 편히 누워 잠을 청했다. 꿈도 없이 실로 오랜만에 청하는 단잠이었다.





* * *





이름 모를 새가 머리 위로 울며 지나갔다. 소리 나는 곳을 올려다보는 환의 얼굴에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손에 권총이 쥐여져 있었더라면 쏘았을 기세였다.



그는 지금 몹시 불쾌했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소리라도 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의 흙먼지가 슈트와 구두에 엉겨 붙고 어디선가 소똥 냄새 같은 것도 났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조급함은 30년을 넘게 이어온 결벽증마저 이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급함을 억누른 채 문명인답게 기다렸다.



이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박 비서가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 비서 역시 상사를 급하게 따라 나오느라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덕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있었다.



시선을 거둔 이환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통 남자보다 크고 각이 져 있는 손은 귀한 도련님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 손으로 수많은 일을 해냈다. 욕을 하고 저밖에 모른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손아귀에 일단 들어온 것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그래, 그뿐이었다. 그저 손아귀에 들어온 제 소유물을 잃어버려서, 그래서 화가 나는 것뿐이다.



“저,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습니다. 여긴 안 왔다는데요.”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던 박 비서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가, 이내 환의 불붙은 눈빛을 피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어조가 없는 목소리. 주변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데다 몹시 더운데 그의 목소리만은 서늘했다. 박 비서는 알고 있었다. 이게 제 상사가 날뛰기 직전 징조라는 사실을.



“저기요, 저희도 지금 개고생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수색대를 맡은 이 젊은 청년은 이환 전무에 대해 잘 몰랐다. 키스틸 이환이라는 사람이야 워낙 연예인급으로 유명하니 알겠지만, 그 성질머리에 관한 소문까지는 들은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환은 생각에 잠겨 있느라 정작 남자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있었다. 박 비서가 말리려 했으나 남자는 뿌리치고 턱을 쳐들며 외려 더 화를 냈다.



“민간인이래서 가격 낮춰서 진행해드리고 있는 건데, 최루탄 쏘고 멧돼지 유인하는 거 보니 민간인 아닌 것 같거든요?”



박 비서는 이제 남자를 말리는 걸 포기하고 오히려 슬그머니 도로 멀어졌다. 괜히 저까지 휘말리기 싫어서였다.



“그 쥐새끼 같은 놈, 제가 잡아드릴 테니 페이나 다시 협상하죠.”



이크. 박 비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환의 시선이 그제야 남자를 향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이환은 키가 몹시 컸다. 어깨도 넓은 편이고, 자세도 곧았다. 그리고 굉장히 사나운 눈매를 갖고 있었다. 똑바로 선 채로 노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겁을 먹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렇잖아요. 그 페이로 어떻게 그런 쥐새끼 같…… 히익!”



멱살이 잡힘과 동시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환의 눈에 순식간에 불이 붙어 있었다.



“서, 선생님, 제가 많이 올려달라는 건 아니고, 진정하시고…….”

“누구더러 감히 쥐새끼라는 거지?”



남자의 얼굴이 혼란스레 구겨졌다. 페이 올려달란 말이 문제가 아니라, ‘쥐새끼’라는 멸칭이 문제임을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환의 기세에 눌린 남자가 입을 벙긋거렸다. 지켜보던 박 비서가 저러다 기절하지 않을까, 걱정할 때가 되어서야 환은 남자를 내던지듯 놓아주었다.



“손끝 하나라도 다친 채로 데려오기만 해봐. 녀석이 입은 상처의 딱 백배로 돌려줄 테니.”

“그제는 목숨만 붙여서 데려오라면서요…….”



한 마디를 덧붙였다가 또 날이 선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저기요, 그런데 그 친구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지켜보고 있던 수색대원 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환에게 물었다. 박 비서는 환이 저 남자의 멱살까지 잡을까 싶어 긴장했지만, 다행히 환은 말 꺼낸 남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눈빛만은 여전히 사나웠다.



“누구인지가 중요합니까?”

“우리도 대부분 특공대 출신이고, 웬만한 의뢰는 다 쉽게 넘기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당하고 찾기도 어려운 경우는 처음이에요.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환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박 비서는 조금 놀랐다. 얼핏 보면 아까와 똑같이 사나운 무표정이지만 오래 그를 모신 박 비서는 환의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설마 저거…… 지금,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인가?’



자기 오메가가 없어졌다고 성질머리를 있는 대로 부리고 요즘은 밥까지 못 먹는 양반이, 그 오메가를 칭찬하는 말 한 마디에 기뻐한단 말인가?



박 비서는 자기 눈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뒤이은 이환의 물음은 박 비서의 짐작에 쐐기를 박기에 충분했다.



“뭐가 어떻게 대단합니까?”

“온갖 방법으로 다 따돌리고, 흔적까지 착실하게 지워가면서 이동하고 있어요. 진짜 환장하겠습니다.”



실제로 강해진은 수색대를 놀라운 속도로 따돌리고 있었다. 흔적과 냄새까지 지워버리는 통에 방향조차 잡기가 힘든 정도였다. 대원들이 우는소리를 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혹시 빨리 찾아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희가 알면 좋을 정보라든가…….”



그의 말에 환은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산 어딘가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이제 노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련하기까지 했다.



“……임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네?”



대원들은 기겁했고 박 비서도 놀라서 기침을 터뜨렸다.



“시간 남아돕니까? 빨리 이동 안 하고 뭐 합니까.”



이환이 밴에 올라타며 재촉했다. 방금 전까지 아련하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다시 성질머리 더러운 이환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제게도 손짓을 했기에 박 비서는 얼른 달려가 밴의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엉덩이만 좌석에 붙이고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슈트를 입은 긴 다리 아래, 흙으로 더러워진 몇백만 원짜리 옥스퍼드화를 제 손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박 비서는 새삼 이 상황이 놀라웠다.



‘더러운 걸 이렇게 질색하는 양반이 어떻게 산길은 이렇게 열심히 다니신대. 발도 아플 텐데.’



박 비서 본인도 지금 구두를 신고 같이 돌아다니느라 발가락이 깨질 것 같았다. 수색대와 보조를 맞춰 다니느라 몸도 지치고, 정장을 입은 채로 이 더위에 산을 다니느라 땀도 뻘뻘 흘렸고 말이다.



그런데도 환은 아프거나 피곤한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들자 무뚝뚝한 얼굴을 한 환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늘 보던 얼굴인데도 희한하게 그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어떤 정체 모를 것이 제 상사에게 덧씌워진 듯했다. 마치 귀신이 씐 것처럼 말이다.



시선을 읽은 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뭘 봅니까?”



성질머리는 여전한 걸 보니 어디 머리가 잘못된 것 같진 않아 다행이라 해야 할까.



이환은 그 뒤로도 몇 시간 동안, 밤이 깊을 때까지 수색대를 따라다녔다. 수색대가 휴식을 하려 들자 지금 앉을 기분이 드냐며 몹시 꾸짖었다.



심지어 야간수색에는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박 비서를 비롯한 이들이 말렸지만 그는 슈트에 옥스퍼드화 차림으로 산길을 걸어 다녔다.



거의 녹초가 된 상태로 박 비서는 문득 생각했다.



자신의 상관이 저렇게 무언가에 매달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새벽까지 수색이 진행되었다. 근처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수색대는 해진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참담한 결과였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아까 여기, 절 아래쪽으로 등산로가 있고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모조리 산입니다.”



야영지에서 지도를 펼쳐 놓고 수색대장이 환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새벽이 지나 벌써 해가 뜨고 있었다.



“그런데 등산로에서는 목격했다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럼 아직 등산로 쪽으로 내려간 적이 없단 이야긴데…….”

“아예 가서 죽치고 있을까요? 벌써 우리가 온 것만 해도 나흘째인데, 슬슬 내려올 거 같습니다.”

“저도 등산로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산에 있을 순 없어요. 뭔 자연인도 아니고.”



수색대원들끼리 의견을 교환하는 동안 환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사찰로 올라오는 등산로 말고는 모두 숲이었다. 환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옆쪽 산으로 갔을 겁니다. 내가 장담합니다.”



환의 말에 수색대원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는 모습에서 자신감이 한껏 드러났다.



“녀석은 제 오메가이기 때문에 제가 잘 압니다. 아직은 서울로 가지 않을 겁니다.”





* * *





“우와, 서울이다!”



해진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매연 냄새가 반갑기까지 했다. 곧바로 기침을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랬을 터다.



며칠 산에서 맑은 공기만 쐬고 왔다고 기관지가 많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쿨럭쿨럭, 요란하게 한바탕 기침을 한 그는 찔끔 나온 눈물을 소매로 닦고는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며칠 산에서 고생한 몸을 쉬게 해줄 시간이었다.



가격대가 좀 있는 에스테틱 숍은 가게만큼이나 직원들 역시 조용한 편이었다.



해진은 ‘피곤해서 잠들 수도 있는데, 그럼 시간 될 때까지 깨우지 말고 그냥 나가달라’는 요구까지 미리 해두었다.



직원들은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제가 야근이 많아서 쉴 시간이 없네요.’라며 지친 기색을 보이자 더 묻지 않았다.



아마 이환은 자신이 아직까지 산에 있을 거라 생각할 터다. 서울로 왔다고는 생각 못 하겠지. 아니, 어디 있는지 짐작조차 못 할 거다.



제 생각을 하고는 있을까? 아마 수색대에게 맡겨두고 일이나 하고 있겠지. 화만 좀 내고 신경도 안 쓸 거다.



심지어 이 에스테틱 숍은 키스틸 레저 건물에서 5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자기 건물 근처를 수색할 생각은 절대 안 할 테니까.



아, 물론 이환이 이 숍에 들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여기로 온 것이었다. 일전 사이가 좋을 때, 그러니까…… 자신과 이환이 아직도 ‘연인’일 때 이환이 피부 관리는 집에서 받는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해진은 전문가가 해주는 경락 마사지를 받으며 그때의 이환을 떠올렸다.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넥타이 없는 와이셔츠에 짙은 회갈색의 헤링본 재킷.



그리고 저를 보고 웃던 웃음. 그 입꼬리와 긴 속눈썹.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는 꾹 참았다. 다 과거 일이었다. 이제는 의미 없는.



‘어차피 다 가짜였어.’



모두 저를 속이기 위해 보여준 가짜 모습이었다. 그러니 기억할 필요도, 그리워할 필요도 없었다.



진짜 모습은 제게 약을 먹이고 자신이 아파도 손끝 하나 돌보지 않던, 섹스 중에도 제 몸이 더럽다는 듯이 장갑을 끼던 모습이었다.



그게 이환이었다. 맨손으로 제 몸도 만지기 싫어하는 놈.



그러나 어떤 진실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되는 법이었다.



해진은 꾹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직원에게 쓰게 웃어 보였다.



“저, 죄송한데 제가 너무 피곤해서요……. 시간 다 될 때까지 혼자 쉬어도 될까요?”



직원은 당연히 그래도 된다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문이 닫힌 뒤, 해진은 마사지 베드에 모로 웅크리고 누웠다. 손으로 배를 감싸보았다. 다행히 통증은 이제 없었다. 히트사이클 약의 후유증이 이제야 다한 모양이었다. 언제 또다시 아플지 모르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그는 금세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산에서는 잠을 잘 때마다 앞으로의 계획과 머릿속의 지도를 떠올리느라 제대로 잠에 들질 못했다. 서울로 온 지금도 아주 안심할 수는 없지만, 한고비를 넘겼으니 자연스레 긴장이 풀릴 수밖에.



그러나 일어났을 때는 생각보다 딱히 몸이 편하질 않았다. 잠도 잘 자고, 방금 전까지 마사지를 받았는데도 말이다. 잠자리가 바뀐 탓일까.



마사지 베드에서 일어나 직원에게 가운을 건네는데 민망할 정도로 큰 하품이 나왔다.



‘왜 이렇게 찌뿌드드하지…….’



몸살이라도 난 걸까? 아니다. 몸살 감각은 아니었다. 해진은 자기 몸이 얼마나 약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도망치는 와중에도 아주 철저하게 컨디션을 관리해왔다.



“고객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조금 더 쉬시겠어요?”



축 처져 있으니 보다 못한 직원이 물었다. 해진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그냥 감기 기운이 좀 있네요. 원래 잘 걸려요, 괜찮아요.”



그제야 직원은 쓰게 웃어 보였다.





에스테틱 숍을 나온 해진은 곧바로 택시를 타고 순회를 돌기 시작했다. 무슨 순회냐 하면, 서울 곳곳 공용 사물함에 미리 주문시켜 놓은 명품들을 회수하는 일이었다.



이환의 블랙카드로 미리 주문해 놓은 명품은 대부분 지하철 사물함이나 편의점 같은 곳에 있었다. 그는 택시를 계속 갈아타며 비교적 가격이 싼 편인 명품들을 하나씩 회수했다. 그리고 회수를 할 때마다 곧바로 전당포에 들렀다.



명품을 취급하는 전당포 중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건만 보는 곳이 제법 있었다. 요즘처럼 위험한 세상에도 말이다.



“어머니 병원비로 써야 하는 돈인데, 글쎄, 형이 이걸 사버렸지 뭐예요……. 보시다시피 한 번도 안 낀 새 제품이에요.”



물론 간단한 인적 사항 정도는 대부분 요구하기 때문에, 적당한 사연을 만들어내어야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이름 안 적고 가도 될까요? 형이 알면 저 진짜 죽음이에요. 형이 깡패거든요.”

“그럼 저희가 보증료를 따로 떼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휴, 당연히 괜찮죠. 얻어맞는 것보다야 낫죠.”



보증료는 개뿔. 가격 떨어진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다. 해진에게는 전혀 상관없었다. 어차피 해진 본인의 돈으로 산 것도 아니니까.



사실 전당포에게는 이득일 것이다. 새 제품을 후려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고, 기록도 남기지 않으니. 물론 그들도 장물일 위험을 감수하는 거지만, 해진은 제 순한 이미지 덕에 딱히 의심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초고가 명품 대신 가격대가 중간대인 브랜드만 골라서 산 것도 오히려 팔기가 비교적 더 쉽기 때문이었다. 이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그게, 전 애인이 사준 건데…… 어디에도 기록 안 남기고 처분하고 싶어서요.”

“아버지 유품인데 삼촌이 조용히 처리하라고 해서요.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해요.”

“두 시까지 방세 입금 안 하면 집주인이 고소한대요. 일단 돈부터 주시면 안 될까요?”



여러 가지 레퍼토리를 짜내다 보니 해진은 자신이 연기를 해도 성공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물론 몸이 약해서 트레이닝을 받고 밤샘 촬영을 하거나 사람들과 부대끼며 연습하기는 힘들 테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도 한여름에 감기 기운 때문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저, 고객님, 괜찮으세요?”

“하하, 네. 괜찮아요. 제가 몸이 좀 약한데 아직 약을 안 먹어서 그래요.”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사실 감기 기운도 감기 기운이지만, 늘 먹는 약들 중 하나가 떨어진 상태였다. 처방을 받으려면 항상 가던 병원에 가야 하는데, 이환이 그 병원에 이미 사람을 심어두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서울 곳곳에 뿌려둔 명품을 돈으로 바꾸는 데에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한군데에서 몽땅 바꿀 수는 없었다. 포장만 뜯은 새 명품을 여러 개 갖고 있으면 의심을 살 테니까.



이동은 주로 밤에 하고, 잠은 낮에 에스테틱 숍에서 마사지를 받으며 잤다. 덕분에 피부는 끝내주게 좋아졌다.



날이 더운데 돌아다니다 쓰러지지 않도록 - 워낙 몸이 약한 탓에 어릴 때부터 여름에 쓰러진 적이 많았다 - 지열이 높은 오후에는 대형상가 서점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해진은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딱 죽을 지경이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감기 기운은 도통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날이 더운데도 계속 으슬으슬하게 춥고 자주 어지러웠다.



‘병원에 가봐야 하나…….’



감기 때문이 아니라 약을 받기 위해서라도 가긴 해야 했다. 물론 늘 가던 병원 말고 다른 병원을 가야겠지만, 약을 쉽게 처방받을 수 있을지…….



해진은 전당포에서 받은 돈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 지하철 화장실을 나왔다. 더운데도 모자를 푹 눌러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깨에 멘 백팩 끈을 양손에 꼭 쥐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중, 해진은 돌연 현기증에 멈춰 섰다. 하마터면 계단을 구를 뻔했다.



‘몸이 자꾸 왜 이러지…….’



이틀 넘게 전당포를 돌아다니느라 피곤하기는 해도 컨디션 관리를 위해 휴식도 충분히 취했는데 이상하게 피로가 풀리질 않았다.



‘설마.’



히트사이클 약 부작용이 그새 또 나타나는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쌍욕이 거의 반사적으로 나올 뻔했다.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이환 개새끼’라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몰랐다.



더위 탓인지 저조한 컨디션 탓인지 모를 땀을 손등으로 닦은 뒤 해진은 다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상황에 걸맞지 않게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아, 순댓국 먹고 싶다.’



와중에도 식탐은 있다니 참 자기 몸이지만 희한했다. 게다가 순댓국은 해진이 잘 먹지 않는 음식 중 하나였다. 너무 뜨겁기도 하고, 소화 기관이 약한 해진이 먹기에 부담스럽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 날이 덥고 피곤해서 몸이 보양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역을 나가자마자 ‘순대국’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해진은 서둘러서 걸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그러나 문 바로 앞에서 뚝 멈춰 섰다. 갑작스럽게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우욱…….”



막상 순댓국 냄새를 맡자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입을 가린 채로 도망치듯 식당 앞을 벗어났다. 걷는 중에도 헛구역질을 했다. 행인들이 저를 쳐다보았기에 해진은 모자 쓴 얼굴을 더 푹 숙였다.



‘무슨 변덕이 이환 성질머리보다 더 더럽냐.’



만난 동안 성질이 옮기라도 했나.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



몸도 쉬게 할 겸, 배도 채울 겸 해진은 가까운 프랜차이즈 카페로 향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가장 구석 자리에 자리 잡은 해진은 에어컨 바람에 오들오들 떨며 가디건부터 꺼내서 어깨에 걸쳤다.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샌드위치를 씹다 말고 해진은 문득 이환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뭐 하고 있긴. 일이나 하고 있겠지. 부하들한테 저 잡으라고 시켜놓고 말이다. 와중에도 그를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이나 때울 겸 그는 선불 휴대폰을 꺼내 켰다. 카페 와이파이를 연결시킨 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며칠 동안 보지 못한 탐험가들의 블로그나 확인할 셈이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 커다랗게 뜬 이환의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미운데, 아직도 억울하고 서러운데, 막상 사진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해진은 홀린 듯이 그의 사진을 검지로 눌렀다. 화면이 바뀌고, 사진에 눈이 팔려 읽지도 않은 기사 제목이 그제야 보였다.



[키스틸 이환 전무, NX 그룹 회장 첫째 딸 신아연과 열애 시작?]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가 툭, 툭, 테이블과 해진의 무릎을 거쳐 바닥까지 떨어졌다.





* * *





지친 수색대원들은 걷는 내내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이환은 그들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전문가가 아닌 것치고는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아니, 속도뿐만인가. 그는 무려 정장에 구두를 신고 지금 산길을 며칠째 헤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면 하지 않을 짓이었다.



벌써 며칠째 수색대원은 이 산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해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색에 실패했으니 이만 철수하자고 했지만 이환은 하산을 거부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그 역시 이성으로는 알았다. 강해진을 완전히 놓쳤으므로 찾으려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강해진을 놓쳤다는 사실을. 강해진을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제 소유인 줄 알았던 그를 손에서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땀에 푹 젖은 슈트를 며칠째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흙먼지 때문에 얼굴은 더러워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눈가는 퀭했으며 머리칼은 떡이 져서 말도 아니었다. 평소의 이환이라면 질색할 꼴이었다.



뿐만 아니라 몸도 몹시 피곤했다. 무리한 무릎은 삐걱거리고 발목은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다. 구두에 갇힌 발가락이 다 부르트고 피가 나는데도, 온몸이 힘든데도 멈추지 않는 까닭은 단 하나뿐이었다. 인정하기가 싫어서.



“……저기…… 전무님.”



박 비서가 그를 불렀다. 평소라면 귀찮다며 화를 내거나 무시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래도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박 비서의 말이 옳기 때문이었다.



환은 억지로 제 이성을 끌어 올렸다. 강해진은 이 산을 벗어났을 확률이 높다. 그를 붙잡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는 지금 철수하고, 그가 갔을 곳을 다시 추려야 했다. 고집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님을 그도 알았다.



흙 위를 걷던 더러운 구두가 뚝 멈췄다. 함께 걷던 수색대원들도 그제야 멈췄다. 환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입이 열리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철수하겠습니다.”



수색대원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환은 넥타이를 풀어 재킷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러나 이환은 강해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그를 잃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99.99퍼센트의 매칭률을 보이는 오메가라서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이환의 마음속에서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를 내면서 덜걱, 덜걱, 구르고 있었다.



이환은 그게 몹시도 거슬렸다. 그러나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안에서 끝없이 소리를 내는 이게 무엇인지, 그 빌어먹을 오메가 놈을 다시 만나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알기 전까지 그는 강해진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40퍼센트





이환은 서울로 돌아가서도 쉬지 않았다. 그는 박 비서에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강해진이 있을 곳을 찾아내라고 했다.



“전무님, 경찰 쪽에서 아무래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 비서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럴 만도 했다. 강해진을 찾는답시고 열흘이 넘게 온갖 곳을 들쑤시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얼마를 써도 상관없으니 찾아내기만 하십시오. 소문 새어나가지 않게 조용히 입막음시키고.”

“예. 아 참, 그리고…… 오늘 약속 있는 거…… 아시죠?”



이번에는 더 조심스레 물었다. 이환은 그가 말하는 약속이 뭔지 짐작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 미룬 약속이라 이번에는 꼭 가셔야 합니다.”



산을 쏘다니느라 신아연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박 비서가 알아서 조정한 모양이었다.



“벌써 기사까지 떴습니다. 제가 검수도 직접 했고요.”



뒤이은 말에 환이 미간을 구겼다.



“무슨 기사 말입니까?”

“신아연 씨와의 기사가 오늘 나왔습니다. 산에 있던 때에 검토 부탁드렸던 그 기사입니다만…….”

“아.”



환은 뒤늦게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강해진을 찾느라 돌아다니던 때 박 비서가 신아연과의 기사가 떴다며 보여준 기억이 났다.



내용은 예상했던 바와 똑같았다. NX의 장녀 신아연과 이환이 열애 중이라는 것. 떡밥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기사를 최대한 빨리 보내는 데에 그도 동의했었다.



기사가 뜬 걸 유 회장이 보면 안심하기도 할 테고 말이다. 유 회장이 안심하면 강해진은 당분간 안전할 것이다.



“……기사 내리라고 할까요? 이미 포털 메인에 다 떴을 텐데요.”

“아니, 아닙니다. 됐습니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고, 박 비서는 그제야 안심한 투로 허리를 숙여 보이고 환의 오피스텔에서 나갔다.



환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뒤늦게 며칠치의 피로가 몰려드는 듯했다.



기사까지 미리 냈지만 그는 신아연을 만나기가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약속 따위에 나가기가 싫었다.



당장 강해진을 찾는 데에 총력을 쏟아도 모자랄 판이었다. 이 넓은 한국에서 그 조그마한 오메가 놈이 어디를 싸돌아다니는지 감도 오지 않는데. 그리고…….



‘……정말 임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강해진을 생각해도 머리가 아파오는데, ‘임신한’ 강해진을 생각하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감히 내 아이를 배에 넣고 멋대로 싸돌아다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채로 함부로 싸돌아다니는 강해진이라니. 잡히면 제대로 응징해주리라 다짐했다.



화를 내면서도 이환은 어쩔 수 없이 더러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제 조모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유 회장은 키스틸 그룹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즉, 다시 말해 강해진이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판단한다면 언제든지 그를 없앨 인물이었다.



NX 그룹의 신아연과 만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강해진이 혹시라도 키스틸 이환 전무가 자신을 감금했니 어쩌니 하는 소문을 퍼뜨릴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환은 문득 의문을 가졌다. 그게, 의미가 있을까.



환은 자신이 그런 추문과는 관계가 전혀 없으며 앞으로 평범한 베타를 만나 가정을 이룰 계획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만으로,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신아연과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주 일시적인 효과만을 보여주는 궁여지책일 뿐이었다.



또한 환의 생각으로는 강해진이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간이 큰 녀석은…….



생각을 잇던 그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넥타이를 매던 손을 뚝 멈춘 채로 환은 거울 속 자신을 응시했다.



‘강해진이 겁이 없던가?’



강해진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철저하게 뒷조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를 하나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유 회장이 강해진을 해치도록 놔두지 않으려면 신아연을 만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환은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단정히 하고 나갔다.



신아연은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고 키가 아주 컸다. 환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그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자기소개는 할 필요 없겠죠?”



다짜고짜 인사 대신 던진 신아연의 말에 이환은 당황하지 않고 그저 입꼬리를 틀어 웃어 보였다.



맞은편에 앉은 이환은 직원이 갖다 준 냉수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앉은 채로 다리를 꼬았다.



“왜 여기 나온 겁니까?”



그리고 신아연에게 물었다. 그의 의도는 명백했다. 유 회장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신아연의 의도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빙긋이 웃고는 몸을 기대어 앉았다. 생김새만큼이나 웃는 얼굴도 시원시원했다.



“저희 회장님은 완고하신 편이세요. 딸에 대한 편견도 심하시죠.”



NX의 회장은 유 회장만큼이나 뻣뻣한 사람이기는 했다. 그리고 신아연은 이환과 달랐다. 그녀는 이환처럼 악착스럽게 반항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더 편견을 가지실 테고요. 그뿐이에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지루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혹시 알아요?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유 회장님께서 정말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실지.”



당신이랑 무슨 관계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다고 말하려던 환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신 표정 관리를 했다.



이곳은 탁 트인 전면창 바로 옆이고,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자들이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혹은 빠르면 오늘 저녁에 기사가 하나 더 뜨겠지. 두 사람의 열애 확인, 키스틸 호텔 1층 카페에서 당당하게 데이트 어쩌고 하는 캡션이 사진 아래에 붙은 채로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신아연이 커피 한 모금을 살짝 들이켜며 말했다.



“이환 씨 역시 저한테 그렇겠지만, 저는 이환 씨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서로 도울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뭘 원하십니까?”



환은 그녀를 마주한 채로 웃어 보였다. 너무 환하지 않게, 데이트를 하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으로 적절하게 보일 정도로만. 신아연 역시 커피잔을 들며 적당히 웃어 보였다.



“회장님께 저, 소개시켜 주세요. 저도 집안만 믿을 수는 없어서요.”

“어렵지 않죠. 잘 맞을 거란 생각도 드는군요.”

“그럼 다행이죠. 저희 집안사람들, 갑갑해서 말이 안 통하는데.”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은 신아연이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봐도 돼요?”



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환 전무님은 왜 나오셨어요?”



뒤이은 물음에 환은 조금 망연해졌다. 유 회장이 시켜서 나왔다고 대강 둘러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말하기가 싫었다.



환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그리고 단어를 오래도록 공들여 골랐다.



“……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구한다’는 단어를 제 입으로 뱉고 나니 위화감이 들었다. 누가 누구를 구한단 말인가?



내가 강해진을? 자신은 그를 가두어두고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 강제로 계약까지 하게 만들었다. ‘구한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러므로 환은 자세를 고치고, 혼란스러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말을 고쳤다.



“아니, 되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 * *





해진은 액정을 밀며 새로고침을 하고 또 했다. 그러나 화면에 뜬 기사는 바뀔 줄을 몰랐다.



혹시나 해서 다른 기사들도 찾아보았다. 신아연과 이환, 열애, NX 그룹과 키스틸 그룹……. 한정된 단어들을 조합해 이리저리 검색하자 몇 가지 기사가 더 나왔다. 처음 보았던 기사와 내용은 별다를 게 없었다.



신아연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다. NX 그룹 회장의 딸이라는 것은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이환과 ‘열애’ 중이라는 이 사실을, 해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꺼진 휴대폰을 휴대용 배터리와 연결시킨 뒤 해진은 머리를 싸맸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하게 생긴 변수이니 대책을 생각해야 할 텐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미처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해진은 화가 났다. 기사마다 꼭 들어가 있는 ‘열애’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가슴이 꽉 막혔다.



그러나 문득 해진은 자신이 화를 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은 이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말이다. 연인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저 혼자의 이야기였다. 이환은 자신을 연인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이환과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와의 기억은, 그가 제게 잠시나마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짧은 시간들은 모두 해진에게만 있었다.



해진은 그 사실이 견디기 힘들도록 버거웠다. 좋은 기억이라는 것이 이토록 버거운 무게를 갖고 있음을 그는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해진은 또한 깨달았다. 이대로 만약 이환이 저를 찾지 않는다면, 만약 자유를 얻는다면, 그리고 자신이 이환을 잊어버리기로 결심한다면.



제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좋은 사람’인 이환이 영원히 사라지는 거라고.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은 해진은 트레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를 나온 해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획에 없던 이동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예약해둔 이동수단이 올 때까지 만화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지금 거기 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제 발로 잡히려고 환장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머리로 알아도 몸이 어쩌지 못하는 감정이 간혹 있었다. 이를테면 ‘사랑’이라거나.



잠시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멀리서도 훤히 보이는 행선지의 간판이 맑은 여름 하늘 아래 번뜩거렸다.



[키스틸 호텔]



키스틸 호텔은 서울에서 가장 이용자가 많다고 알려진 12차선 도로를 끼고 있었다. 서울역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이 호텔은 명실상부한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그 말인즉, 주변 유동 인구도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많고 호텔 주변인만큼 이환의 사람 역시 많을 것이다. 밖을 내다본 호텔 직원이 저를 알아볼지도 몰랐다. 그럼 아마 곧바로 이환에게 보고를 할 터다. 그럼에도 해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보았던 기사를 해진은 혼자 곱씹었다. 호텔로 오는 그사이에 기사가 몇 개 더 떠 있었다. 해진은 그중에서 한 기사를 오래도록 공들여 읽었다.



[키스틸과 NX의 인연, 결혼까지 이어질까.]

[이환과 신아연 둘 다 공개적으로 교제를 밝힌 적이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진지하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추측은 개뿔.’



해진은 휴대폰 액정화면을 끄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까부터 머리가 몹시 아팠다.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해진 몸으로 땡볕 아래를 걸었으니 아플 만도 했다.



내가 도망가서 새로운 오메가를 찾은 걸까. 신아연이 오메가인지 알파인지 해진은 알지 못했다. 기사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이환에게 자신은 필요치 않은 모양이었다.



해진은 문득 배를 만져보았다.



‘……만약 내가 임신이라도 했더라면…… 그 여자랑 만날 일도 없겠지.’



하지만 만약 아이를 가진다면 제 건강이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이환 그 미친놈이 아이 하나로 만족할지도 확신할 수 없고 말이다.



신호가 바뀌었고, 해진은 조금 비장한 마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까 저기, 이환 아냐?”

“그게 누군데?”

“왜, 그, TV에 자주 나오는 키스틸 그룹…….”



횡단보도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이들이 부산스레 말을 주고받았다. ‘이환’이라는 단어에 해진은 거의 반사적으로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그가 마침 근처에 있는 걸까? 자기 호텔에 한 번씩 들르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진은 이상하게도 무섭지가 않았다. 그를 마주칠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 오히려…… 그는 방금 읽은 기사들이 더 무서웠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옆을 보았다. 쇼윈도에 제 모습이 비쳤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칼과 산을 쏘다니느라 약간 그을린 얼굴이 낯설었다.



다시 모자를 푹 눌러쓴 해진은 걸음을 이었다. 목이 몹시 타고 다리도 아팠다. 그러나 다시 걸었다.



12차선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에 숨이 막혔다. 모자 아래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해진은 문득 자신이 뭐 하러 여기에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서 뭐, 그 여자랑 결혼할 거냐고 물어보기라도 하게? 잡히면 어쩌려고.’



만약 그게 사실이면 해진은 진심으로 축하해줄 마음까지 있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요, 돈으로 오메가 살 생각하지 말고 수준에 맞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지내세요.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도 많이 낳으시고.



‘젠장, 왜 이렇게 떨려.’



그러나 몸은 그렇지를 못했다. 호텔이 가까워질수록 손발이 후들거리고 숨이 몹시 찼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해진은 그것이 반사적인 두려움 때문이라고 믿었다. 곰을 몰라도 곰과 마주치면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이환에게 붙잡힐까 봐 무서워서라고 말이다.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이곳을 벗어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아직 저를 따라오는 사람도 없고, 호텔은 조금 더 가야 하니까.



하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 해진은 돌아설 수가 없었다.



그는 제 눈으로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정말 그 개새끼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호텔에 가까워졌다. 날씨가 몹시 덥고 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해진은 한기를 느꼈다. 그는 양쪽 팔을 감싸 안으며 가까운 가게 앞에 섰다. 쇼윈도에 비치된 옷을 구경하는 척하며 옆을 흘끔흘끔 보았다.



키스틸 호텔 1층에는 카페가 있다. 한쪽 면이 전면창으로 되어서 안이 훤히 내다보였다. 마루투어에 있을 때 해진은 그게 좀 의아했다. 호텔 이용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카페인데, 프라이버시를 위해 전면창은 피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리고 해진은 그 전면창 안에서 벌어지는, 결코 알고 싶지 않던 누군가의 프라이버시를 보고야 말았다.



이환이 어떤 여자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해진도 알아볼 수 있었다.



‘……신아연이네.’



그리고 이환이 웃었다. 정말로 환하게.



이환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해진은 본 적이 없었다. 연인인 척하던 그때에도 제게 저렇게까지 웃어준 적은 없었다.



‘…….’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해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 저 남자는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멋진 사람이었지.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모두가 사랑할 것 같은 사람이 저를 그렇게 대했다는 사실이 해진은 새삼 서러웠다. 그리고 또 한 번 깨달았다. 이환은 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걸.



두 남녀는 무슨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지 마주 본 채로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눈빛이 섞이는 모습도, 마주 보고 앉은 자세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환이라는 놈은 본래부터 글러먹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해진은 지금 자신이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이환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선을 이쪽으로 향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숨기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왜 이래, 꼭 처음 상처받는 것처럼.’



이미 다칠 대로 다쳐서 아픈 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이 약해빠진 몸으로 산을 내달리면서 다 내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해진은 눈물을 연신 닦아낸 뒤 다시 호텔 쪽을 돌아보았다. 이환은 이쪽을 쳐다본 적도 없다는 듯이 다시 신아연과 대화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에게 자신이 ‘없는 존재’가 되었을까.



아니, 애초에 ‘강해진’이라는 사람이 이환에게 있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아이를 낳을 오메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 그에게 사람인 적이 있었을까. 아니, 저렇게 웃어줄 만큼 중요한 무언가인 적이 있기는 했을까.



해진은 자꾸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으며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흐읍, 흑…….”



우는소리가 새어 나오자 행인들이 해진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이러다 정말로 들킬 수도 있었다.



있던 정이 정말 다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다칠 곳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이환의 웃음이, 그 환한 얼굴이 자꾸만 해진의 마음을 겁박하듯 때려댔다.



돌아서면서 해진은 결심했다. 자신의 안에만 남아 있는,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좋은 이환’을 완전히 지워버리겠다고.



어차피 환상일 뿐이었다. 제멋대로 좋아하고, 제멋대로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리고…… 제멋대로 모든 마음을 줬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진심으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을 닦고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아팠지만 괜찮았다. 괜찮…….



“……아.”



눈앞이 핑, 돌았다. 머리가 아팠지만 그보다 배가 더 아팠다. 아픈 곳을 손으로 움켜쥐었지만 살이 다 빠진 배는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하필 지금이야…….’



지금은 아프면 안 되는데. 그러나 발이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아, 씨발…….”



어마어마한 통증과 함께 해진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 시각, 이환은 신아연과 대화를 슬슬 마무리해야겠다 생각 중이었다.



신아연과의 대화는 별게 없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키스틸 그룹에 발을 들이고 이득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갖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환은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유 회장과 연결만 시켜주면 제게는 관심도 보이지 않을 여자였다.



“정말, 억지로 웃는 것도 힘드네요. 이만하면 사진도 많이 찍었겠죠?”



그녀가 너스레를 떨며 핸드백을 챙기던 중, 환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상했다. 불길한 기분이 혀처럼 몸을 훑는 듯했다. 그리고 돌연 가슴이 꽉 막혔다.



그는 예감이나 육감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믿을 것은 자신의 몸뚱이, 그리고 몸뚱이로 번 돈뿐이지.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돌연 아팠다. 당혹스럽고 불쾌한 기분이었다. 원인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러세요?”



신아연이 물었다. 눈치는 더럽게 빠르군. 환은 억지로 웃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분 생각하세요?”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듣지 못해 환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아까 말했던, 구해주고 싶은 사람.”



눈치가 빠른 만큼 오지랖도 넓은 모양이었다. 환은 노골적으로 드러나려는 적대감을 억지로 감추고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는 강해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싫었다. 아니, 떠올리기가 싫었다.



서울로 돌아오고부터 강해진을 떠올리기만 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방금 전처럼, 자신이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가 자꾸만 몸속에서 굴러다니는 듯했다.



자신이 파악하지 못하는 낯선 것은 딱 질색이었다. 환은 그래서 강해진을 생각하는 일이 불편했다. 감히 제 손을 떠나고서도 저를 괴롭히는 그가 괘씸했다.



“슬슬 일어나시겠습니까?”

“네, 뭐, 그러죠.”



다행히 분위기는 파악하는 모양이었다. 신아연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밖에서 대기 중이던 박 비서가 뛰어왔다. 어찌나 서두르는지 테이블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경박스러운 그 동작에 환이 미간을 구겼다.



박 비서는 말을 곧바로 내뱉으려다 신아연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입에서 목적어와 주어를 잘라냈다.



“차,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한 마디만으로도 이환은 그가 누굴 찾았다고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유 모르게 거북하던 마음이 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환은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카페를 달려 나갔다.





병원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이 환에게는 몇 시간처럼 길었다. 기사에게는 도대체 몇 시간이나 걸리느냐고 삼십 초마다 한 번씩 화를 냈다.



강해진을 붙잡았다. 그것도 도망치는 걸 잡은 게 아니라 호텔 근처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이환은 그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찾기가 힘들던 강해진이, 어째서 호텔 근처에 있었을까.



‘제 잘못을 알아서 뒤늦게 빌러 온 건가?’



이환은 콧방귀를 꼈다. 이제 와서 용서를 빈다고 내가 쉽게 받아주리라고 생각하나 보군. 정말 미련하기 그지없는 오메가다.



‘제대로 혼쭐을 내주지.’



굳게 결심했지만 어째서인지 손이 자꾸 떨렸다.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이유 모르게 갑갑해져 왔다.



결국 이환은 병원을 200미터 남겨두고 차에서 뛰어내려 8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저를 향해 울리는 클랙슨 소리와 쏟아지는 욕설을 무시하고,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병원 건물 쪽을 향해 일자로 달렸다.



조금이라도, 일 초라도 늦으면 그를 다시 놓칠 것만 같았다. 다시 강해진을 잃을 생각을 하자 눈앞이 깜깜했다. 졸도라도 할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이환이 헐떡거리며 도착했을 때 해진은 응급실 구석 침대에 링거 주사를 꽂고 누워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해진을 보자마자 뚝 멈췄다. 할 말이 많았는데, 제대로 혼을 내주어야 하는데,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웠다’. 그것 말고는 이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강해진이 눈앞에 있는데, 드디어 찾았는데, 그가 행여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어 두려웠다.



멍하니 서 있던 차에 마침 간호사가 해진의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환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렵사리 걸음을 떼었다.



“상태 어떻습니까? 심각합니까?”



간호사가 링거액을 조절하며 그를 흘끔 보았다.



“보호자 되세요?”



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강해진의 보호자일까.



“보호자 모셔오세요.”



미처 대답할 틈을 놓친 사이에 간호사는 말을 툭 던져두고 그대로 사라졌다.



환은 그제야 누운 강해진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고생을 했을 텐데 못난 구석은 보이지 않고 그의 얼굴은 여전히 뽀얬다. 아니, 오히려 더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 새카만 머리칼은 무슨 짓을 했는지 노랗게 탈색이 되어 있었다. 몇 군데는 탈색이 덜 되었는지 얼룩덜룩한 갈색이었다. 옷 꼴도 말이 아니었다.



몇 주 동안 만져보지도 못한 제 오메가가 코앞에 있었다. 그것도 다 죽어가는 상을 하고서. 환은 이 사실이 제게 충격으로 다가왔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가슴에서 어떤 커다란 덩어리가 떨어진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흐려지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강해진을 만나면 알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렇게 뻗어 있어서야.



‘도망을 칠 거면 몸이라도 좀 제대로 챙길 것이지.’



아픈 강해진을 보니 꽉 막혀오는 이 기분이 그저 갑갑함일 뿐이리라 생각하며, 그는 누운 강해진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조심스레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여전히 여려 보이는 뺨에 손끝이 닿기 직전, 눈 감은 해진의 미간이 움찔했다. 동시에 환은 손을 뚝 멈췄다.



빈주먹을 쥐며 손길을 거두었다. 꼭 박물관 같은 곳에서 만져서는 안 되는 귀한 것에 손을 대었다가 들킨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그를 만지려 했던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저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환은 생각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꼴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더 빨리 찾았어야 했는데. 스스로를 책망했다.



마음이 번잡스러웠다. 강해진을 찾을 때에는 감히 도망친 죗값을 치르게 해주겠다고만 생각했는데, 누운 그를 보니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질 않았다.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강해진의 얼굴이 아닌, 이불 옆에 가지런히 놓인 손을 쥐었다. 미미하게 온기가 느껴졌다. 그 희미한 온기에 안도하며 환은 비로소 인정해야 했다.



그는 강해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그리움, 회한, 그런 것은 환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딴 것은 제대로 사는 데에 방해만 될 뿐이다. 혈육도 없이 자랐고 친구를 가져본 적도 없는 그는 누구를 그리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환은 지금 해진의 앞에서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약의 쓴맛을 보고 당혹스러워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말이다.



환은 사실 낯선 것은 싫어하지 않았다. 배우는 일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할 의향이 있었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비효율성과 쓸데없는 군더더기였다.



강해진은 제게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니 이 지독하게 거슬리는 감정 역시 필요하다면 배울 의향이 있었다. 그를 곁에 꽁꽁 묶어두고서라도 말이다.



“……나는.”



환이 조심스레 혼잣말을 꺼냈다.



“두 번 다시는 당신을 잃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까?”



눈을 감은 채 누운 그가 듣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 가져보는 이 감정이 스스로 인정하기 싫을 만큼 커져 있었다. 물이 넘치듯이 그것을 밖으로 꺼내는 것은 제 의지와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환은 누운 강해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핏기가 다 빠진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 입술이 붉었던가?’



환은 자신이 해진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래도 필요한 사람이 아니면 일부러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니까.



몇 주 만에 본 강해진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흐릿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속눈썹은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길고, 뺨은 몹시 부드러워 보였으며 콧대는 오뚝했다. 턱선도, 입술선도 몹시 고왔다.



‘이런 얼굴을 내가 왜 기억 못 하고 있었지?’



그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TV에서 보더라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새삼 제 오메가와 아이를 낳는다면 제법 괜찮은 얼굴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멍하니 해진을 보고 있던 그는 문득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딴 싸구려 병원 말고 대학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아니, 그냥 제 오피스텔로 해진을 데려가도 될 터다. 치료는 닥터 최가 하면 되니까.



겨우 찾은 강해진이 혹시라도 잘못되지 않도록 한시라도 빨리 제 오피스텔에 가두어놔야 했다. 이러다 다시 도망이라도 간다면, 그때는…….



원무과에 가 있는 박 비서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마침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발신자는 박 비서가 아니었다.



미간을 구긴 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꼭 꿈에서 깬 것 같은 불쾌한 표정으로 응급실을 나섰다.



“예, 회장님.”



환의 걸음 소리가 온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해진은 실눈을 떴다.



그는 누운 채로 아주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이환이 없음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키고 링거 주사를 뽑았다.



침대에서 내려오자 현기증이 돌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며 나갈 길을 확인했다.





이환은 전화를 끊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상대방이 유 회장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끊었을 터다.



- 신아연은 잘 만났고? 매너는 잘 지켰니?

“제가 어린아이입니까.”



시큰둥한 말에 수화기 너머 유 회장이 조소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급한 용건이 있으신 게 아니면 이만 끊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 문득 익숙한 등이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

- 듣고 있니?



유 회장이 재촉했지만 더 듣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어떤 이상한 예감이 그의 뒷덜미를 스쳤다.



인사 한 마디 없이 전화를 끊은 환은 익숙한 등이 사라진 곳으로 달렸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속으로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불길함으로 온몸의 신경이 찌릿하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막 환자 하나가 응급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시야가 가려졌다.



‘어디로 갔지?’



그가 사라진 곳에 살짝 열린 계단문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환은 거의 본능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위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환은 계단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해진 씨?”



추측한 이름을 크게 내뱉자 마치 반응하듯 위에서 타박타박 올라가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동시에 이환의 등에도 소름이 쭉 끼쳤다.



강해진이, 다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제 손에서. 단 몇 분 만에.



“강해진 씨!”



그 역시 속도를 내어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5층 정도를 올라갔을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 거리까지 좁혀졌다. 그때서야 올라가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강해진이 맞았다.



도망가지 말라고, 제발, 내 손에서 벗어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환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내가 어떻게 너를 찾았는데.



그리고 그 때 강해진이 무언가를 던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척 맵고 독했다.



“이게 무슨……!”



소매로 코를 가렸지만 기침이 심하게 났다. 해진은 그사이에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환은 뒤늦게 해진을 쫓아갔다. 눈물과 콧물이 나서 엉망이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단순하지만 긴박한 추격전은 계단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환은 어마어마한 바람에 넘어질 뻔했다.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아직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 너머, 헬기 한 대가 옥상에 착륙해 있었다. 그리고 강해진이 그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안 돼.’



발버둥 쳤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이 매워서 제대로 뜰 수도 없었지만 그는 바득바득 바닥을 기었다. 고작 저 오메가 하나를 잡겠다고, 그 이환이 옥상 바닥을 개처럼 기기 시작했다.



“해진, 씨…….”



그러나 해진이 헬기에 올라타기까지 그가 이동한 거리는 고작 몇 미터였다.



아주 잠깐, 문이 닫히기 직전 눈이 마주쳤다. 환의 흐린 시야로도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강해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 어떤 감정도, 심지어 두려움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남처럼 보고 있었다.



본래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환은 멍청하게도, 그가 떠나는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멀어진 뒤에야 그는 분노에 찬 채로 괴성을 질렀다.





해진은 멀어지는 건물 옥상을 내려다보았다. 옥상 위에 선 이환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땅을 짚은 채 망연하게 엎드린 그가 좀 낯설었다.



‘하아…….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다행히도 헬기가 제시간에 정확히 와주어서 도망칠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저 미친놈에게 붙잡혀서 지금까지의 노력이 죄다 허사가 되었을 것이다.



해진은 한숨을 내쉬고는 헤드폰을 꼈다. 헬기 소리가 줄어들자 뒤늦게 긴장이 풀리고 몸에 힘이 빠졌다. 계단을 뛰느라 무리한 다리도 아프고, 배도 은근하게 아파왔다. 몸이 덜덜 떨렸다.



‘개자식. 내가 순순히 잡혀줄 줄 알고?’



내가 어떻게 도망을 쳤는데. 물론 해진은 이렇게 자신이 길에서 쓰러져 붙잡힐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시기가 조금 빨랐지만 말이다.



창밖을 내다보자 서울 시가지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가방을 껴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헬기 렌털 비용 역시 이환의 블랙카드로 미리 결제해둔 것이었다. 민간 회사에서 헬기 렌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해진은 처음 알았다.



결제 내역은 ‘명품 AS 서비스’로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렌털 회사 이름이 남거나 하지 않도록 각별히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렌털 회사를 알게 될 경우 이환이 이동 경로를 조사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예약할 당시에는 키스틸 전무 이환의 이름을 마음껏 팔아먹었다. 전무님께서 조심스레 움직여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 말하면 이 헬기 대여 회사뿐만 아니라 보통 열에 아홉은 목소리를 낮추곤 했다.



쓰러진 직후, 앰뷸런스에 실려 가며 해진은 간신히 헬기 회사에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게 될 병원의 옥상으로 지금 당장 출동해달라 말하고서야 다시 정신을 잃었다.



사전에 ‘긴급 시 즉각 출동 가능할 것’을 조건으로 건 게 다행이었다. 이런 사건이 있을까 봐 대비해서 대여한 것이니.



병원 건물은 이제 손톱보다도 더 작게 보일 만큼 멀어졌다. 이환의 모습도 구분할 수 없었다. 자꾸 아래쪽을 보니 멀미가 날 것 같아서 해진은 똑바로 앉았다. 속이 조금 안 좋기는 해도 아직은 버틸 만했다. 아니, 버텨야만 했다.





* * *





병원이 한바탕 뒤집혔다. 이환이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병원 직원들을 괴롭혀서였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았고 상식이 있는 지성인이지만 그 지성은 잠시 기능을 잃어버렸다. 강해진 때문에 사고가 굳어버린 탓이었다.



“환자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의료진들이 보는 앞에서 제 발로 걸어서 나간답니까? 그것도 ‘응급’ 환자가 말입니다.”



‘응급’에 방점을 찍어 말한 환은 제 말에 다시 속이 터졌다. 그랬다. 강해진은 무려 응급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지금 병원에 처박혀 있지 않고 도망을 친 것이었다.



환이 구둣발로 원무과 데스크를 꽝! 찼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데스크에 쩍, 금이 갔다. 말리려고 달려온 의사를 단번에 제압해 데스크 위에 짓누른 그는 어금니를 갈며 말했다.



“당장 찾아내.”



누구 하나 정말로 잡아 죽일 것 같은 흉흉한 기세에 아무도 감히 그를 말리지 못했다.



한바탕 소동이 일고 박 비서가 뒤늦게 달려와서야 겨우 그를 말렸다. 그러고도 이환은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다.



병원에서는 강해진의 상태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이 환을 더 화나게 했다.



보호자가 아니면 알려줄 수 없다는 말에 자신이 보호자라고, 그냥 제게 다 말하면 된다고 했지만 원무과 직원의 단 한 마디 물음에 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환자분과 무슨 관계 되세요?’



그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강해진과 자신이 무슨 관계인지,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연인이나 그 비슷한, 그런 낯간지럽고 쓸모없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구라 칭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뭐란 말인가.



대답을 망설이는 것을 보고 원무과 직원은 ‘환자분 보호자가 아니면 자세한 말씀을 드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화가 치솟았던 것이다.



‘빌어먹을…….’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도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해 턱이 얼얼하도록 어금니를 깨물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강해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이 있었다. 어이가 없게도, 이 지경이 되고서도 그는 강해진이 밉지가 않았다.



황당한 일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빌어먹을 오메가 놈을 잡아다 제대로 혼을 내주겠다고 벼르고 있었건만.



지금 녀석 때문에 입은 손해만 해도 얼마인가. 쓸데없이 산에 울타리를 쳤다가 벌금을 물고, 수색대를 꾸리고, 일까지 내팽개치고 그를 찾으러 다녔다.



그리고 다시 그를 잃어버린 지금, 환은 강해진 당사자에게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아파서 누워 있던 그 힘없는 모습만, 자그마해서는 한 손에 들어올 것 같던 그 얼굴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렇게 도망치다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는 강해진을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몸이 안 좋다면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무려 헬기를 타고 도망갔다. 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강해진이 쓴 블랙카드의 내역을 직접 샅샅이 훑었지만 헬기 대여와 관련된 목록은 없었는데.



환은 넥타이를 풀어 차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어떻게 해야 그를 찾을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가 제 카드로 예약한 호텔은 진작 연락을 다 취해놓았고, 다른 결제 내역도 다 확인했지만 딱히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프다.’



강해진이 아프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체기처럼 가슴 안쪽이 쿡쿡 쑤셨다.



‘그를 보호해야 한다.’



환은 문득 제 품이 아닌 다른 곳에서 쓰러지는 강해진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했다.



“박 비서님.”



차 앞쪽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박 비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 스케줄, 다 취소하십시오.”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지만 환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강해진을 찾으러 갈 겁니다. 제가 직접.”





* * *





강해진이 쓴 카드 내역서는 딱히 건질 만한 게 없었다. 고작해야 쓸데없는 물건들을 구매한 내역들이었고, 카드로 예약해둔 호텔이나 모텔에서는 전혀 연락이 없었다.



수십 군데의 흥신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강해진으로 추정되는 사진 따위를 보내오기는 했지만 개중 절반은 강해진이 아니었고, 나머지 절반은 찾아갔을 때 이미 강해진의 흔적이 사라진 뒤였다.



물론 다른 결제 내역들도 모두 꼼꼼하게 확인하라고 이르긴 했다. 물건일 경우 배송 주소를 체크하라고도 했다. 대부분은 서울 내 지하철역 보관함, 혹은 편의점이었다. 그리고 환이 직접 찾아갔을 때에는 모두 강해진이 물건을 가져간 뒤였다.



한 가지 바뀐 점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강해진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고 싶어도 화가 나지를 않았다.



불편한 기색 한 번 없이 그저 묵묵하게 해진의 자취를 찾아다니는 제 상사의 모습이 박 비서의 눈에도 낯설었다. 그 성질머리 더러운 그가 병원에서 난동을 피운 이후로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카드 회사를 통해 실제 거래처 목록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보통 카드가 아니다 보니 그쪽에서도 내부적으로 처리해야 할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결국 강해진이 타고 간 헬기 대여 업체를 찾아냈다.



헬기 업체에서 알려준 강해진의 행선지는 경기도 외곽 지역이었다. 박 비서에게는 회사로 돌아가라 이른 이환은 수색대나 운전기사 없이 혼자 차를 끌고 출발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박 비서가 물었다. 제 상관은 구두에 먼지 한 톨 묻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결벽증이 심하고 입맛도 더럽게 까다로운 자가 아니던가. 혼자 낯선 곳을 헤매다가 화병이라도 얻지 않을까 조금 겁이 났다.



그러나 이환의 표정은 여느 때와 별다를 바 없이 멀쩡했다.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는 귀찮게 먼저 연락하지 마십시오.”



성질머리도 여전하고 말이다.





혼자 차를 몰고 강해진이 있을, 혹은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제대로 된 호텔이 없었다. 위생 상태가 의심스러운 모텔에 묵기는 싫었기에 환은 차라리 제 차에서 몸을 구기고 자는 쪽을 택했다.



박 비서의 말대로 다른 사람을 시켜 찾을 수도 있었다. 지난번 수색대는 해진에게 완패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수색대를 시켜도 된다. 혹은 흥신소들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도 될 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직접, 그것도 혼자 나서고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강해진과 마침내 다시 마주치는 순간, 그 순간에 자신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독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와 다시 마주쳤을 때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헬기가 도착한 마을에는 강해진의 흔적이 더 보이지 않았다. 이미 벗어난 뒤인 모양이었다.



이환은 갑갑함을 참고 근처에서 끈질기게 수소문을 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일은 정말로 지겨웠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았던 강해진의 모습이, 저를 무심하게 보던 그 얼굴이 떠오르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고 제 지겨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심지어 아픈 몸을 이끌고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프기만 한 몸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그 남자를 보신다면 이 번호로 바로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까지 덧붙였다.



“부탁드립니다.”



그는 괴로웠다. 강해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몹시 고통스러웠다. 마지막에 저를 보던 그 눈빛을 떠올리면 더더욱 괴로웠다.



어째서 사람 하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숨이 막히고 갑갑해질 수 있는지,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환은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그의 행적을 찾았다. 노란 머리에 덩치가 작고 예쁘장하며 피부가 흰 사내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환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논밭과 축사가 대부분인 이 동네에는 젊은 인구가 별로 없어 보였다.



아픈 몸이니 병원에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이 근처의 병원은 모조리 수소문을 했다. 그러나 환자의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는 말로 쫓겨나기 일쑤였다.



“보호자분이세요?”



그 질문만 들으면 이상하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보호자가 맞다고 겨우 거짓말을 해도 - 그는 그 단어가 너무나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 환자 본인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물러나야 했다.



차에서 지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제대로 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웠다. 성에 차는 스파를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박 비서에게 연락해서 근처에 괜찮은 숙박업체를 찾아내게 하고 새 옷도 보내달라 했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문득 환은 그런 생각을 했다.



강해진은, 이렇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단 말인가? 어째서?



키스틸 호텔의 펜트하우스와 룸서비스는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이 제공한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런 생활을 할 정도로, 자신이 싫은 것인가.



“하아…….”



한숨이 나왔다. 운전석에 앉은 환은 다소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고 운전석 핸들에다 이마를 대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잘못된 관계였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아이를 낳게 하려고 그에게 접근한 것부터, 호텔에 가둔 것까지.



어디가 어떻게, 왜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고칠 방법조차 알 수 없어도 그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머릿속이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삐걱거렸다.



강해진을 되찾아야 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지금 아프니까. 아픈 몸으로 이 빌어먹게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그 약해빠진 조그만 몸으로 말이다.



게다가…… 임신을 했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아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강해진만 무사하다면 괜찮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곰팡이 핀 더러운 모텔 같은 곳에서 끙끙 앓는 강해진의 모습이 벌써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문득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강해진은 저보다 못한 환경에서 고생하고 있으리라. 환은 운전대를 제대로 쥐었다. 시동을 막 걸려던 때, 연락이 왔다. 의뢰를 해놓았던 흥신소 중 한 곳이었다.



- 강해진 씨 선불폰 번호 알아냈습니다.



환의 가슴이 뛰었다.





그 시각, 해진은 푹신하고 깨끗한 이불에 둘러싸인 채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오늘 들어온 펜션은 시설이 제법 호화로웠다. 이동하기가 좀 불편하고 너무 산속 깊은 곳에 있어서 일반인들에게 선호되는 곳은 아니지만, 해진처럼 숨어 다니는 사람에게는 딱 알맞았다.



“몸 좀 담가야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침대에서 일어섰다. 깨끗한 카펫을 맨발로 사뿐사뿐 밟고 걸어가며 벽에 걸린 60인치짜리 TV를 켠 그는 널찍한 방 한쪽에 놓인 월풀에 미온수를 받았다.



방 한쪽을 차지한 전면창 너머로는 숲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 하나,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나무만 아득하게 펼쳐진 광경은 해진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월풀에 몸을 담근 채로 이 아름다운 뷰를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게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마루투어에서 기획을 하며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본 곳인데, 그때는 자신의 월급으로 도저히 갈 수 없어 우울했었다. 이렇게 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이곳을 예약하는 데에 쓴 돈은 모두 이환의 카드로 산 명품을 전당포에서 헐값으로 바꾸고 받은 돈이었다.



광대한 자연을 마주한 채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문한 조식 서비스가 온 모양이었다. 문을 열어주자 직원이 트레이를 들여 주었다.



인사를 하고 직원을 보낸 해진은 트레이에서 토스트와 잼, 우유를 들고 월풀로 갔다. 월풀 옆 선반에 음식을 두고는 가운을 벗고 욕조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아, 좋다…….”



비록 도망 다니는 신세지만 이럴 때는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금방 이동해야 하니 즐길 건 다 즐겨야지, 싶기도 하고 말이다.



토스트에 잼을 바르며 해진은 이환을 생각했다. 사실, 요즘 들어 그를 떠올리는 기간이 점점 뜸해지고 있었다. 도망치는 일에 집중한 탓이겠지.



이환이 더 이상 제게 호의적인 감정이 없다는 사실은 호텔에 갇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우습게도 그가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그 사실이 실감 났다.



‘나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관계이기는 했다. 변변찮게 지내는 고아 오메가가 이환 같은 대기업 전무 알파를 만나서 평범하게 연애를 하다니. 그 사실을 실감하고 나자 오히려 덤덤해지는 것이었다.



원래 불가능한 인연이었고, 원래 틀어질 인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잠깐이나마 이환을 좋아했던 마음도 닦아낸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약혼이고 나발이고 제발 나 더 이상 찾지나 말았으면 좋겠네.’



싸가지 없는 놈. 결벽증이 그렇게 심한데 연애를 제대로 할 수나 있으려나? 그 여자랑도 손잡고 나서 나한테 했던 것처럼 소독제 바르고 그러는 거 아냐?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 월풀 안으로 몸을 깊이 잠갔다. 머리끝까지 들어가기 직전, 휴대폰이 울렸다.



‘……뭐지? 아무도 번호 모르는데.’



본래 갖고 있던 휴대폰은 처리한 지 한참 됐고, 저건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는 선불폰이었다. 불안감 속에서 해진은 욕조를 나와 휴대폰을 확인했다.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환의 번호로.



[접니다.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이야기 좋아하시네.”



에이, 번호가 털렸으니 이제 이 휴대폰도 못 쓰겠네. 콧방귀를 끼고 메시지를 지우려는데 연이어 몇 통의 메시지가 더 왔다.



[지금 어딥니까.]

[몸이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이 안 좋다니? 내가? 아무래도 이 개자식이 수를 쓰는 것 같았다. 더 볼 필요도 없으니 차단하고 휴대폰을 끄려고 했다.



[만나는 게 싫다면 음성통화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어라.”



그 자존심 세고 고고한 이환이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해진은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는 다시 글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바뀌지 않은 글자를 보며 결론 내렸다. 아마 직원에게 시켜서 보냈을 거라고. 지금쯤 그 직원은 아마 엄청 깨지고 있겠지. 그 새끼가 저한테 ‘부탁’이라는 걸 할 리가 없으니까.



빠른 손동작으로 이환의 메시지를 지운 뒤 휴대폰을 끄려는데, 이번에는 전화가 왔다. 해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전화를 받아도 될까. 어차피 밥만 먹고 여기서 나갈 거라 추적한다고 해도 쫓아올 수는 없을 터다. 저 산을 타고 도망칠 거라서 오는 길에 마주칠 리도 없고 말이다.



해진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액정화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전화를 거절하는 빨간 버튼 대신, 연결시키는 초록색 버튼을 밀었다.



“…….”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선뜻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침묵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도 없었다.



예전이라면 겁에 질려서 전화를 끊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급한 건 저쪽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 강해진 씨.



오랜만에 듣는 이환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다. 역시나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해진은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며 다시 월풀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물에서 나왔다고 피부에 닭살이 돋쳐 있었다.



- 몸은 좀 괜찮습니까?



뒤이은 물음에 해진은 월풀로 들어가던 동작을 뚝, 멈췄다. 절대 이환이 물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내 몸이 어떻든 전무님께서 무슨 상관이에요? 이제 그쪽 아이를 강제로 낳을 일도 없는데.”



아이 이야기는 혹시라도 통화를 듣고 있을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일부러 꺼내었다. 경찰이든 누구든, 이환이 자신을 가둬두고 강제로 아이를 낳게 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더라도 말이다.



- 강제로 낳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대답은 해진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제게 접근한 이유가 아이 때문인데, 지금 저를 찾는 것도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서일 텐데, 이제 와서 낳을 필요가 없다니.



그러나 이것 역시 그가 부리는 수작일 뿐이라고 생각하자 다시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환은 그런 놈이었다. 저를 홀리는 연기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놈.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도 믿어서는 안 되었다.



“전화 괜히 받은 것 같네요. 저는 전무님과 할 말 없으니 저 찾지 말고 열심히 사세요. 잘못한 거 부디 벌 다 받으시고요.”

- 해진 씨.



다급하게 부르는 제 이름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 저음으로 듣는 제 이름에 설레었던 적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제 이름도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습니다.”

- 제발, 끊지 마십시오.



뒤이은 말에 해진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다 말고 멈칫했다.



- 부탁합니다. 끊지 말아주십시오.



그 이환이 제게 또다시 ‘부탁’하고 있었다. 해진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화면에 뜬 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옆에서 경찰이나 다른 사람이 대사라도 적어주고 있나? 그러나 그렇다기엔 이환의 목소리가 제법…… 절절했다.



그러나 아무리 절절하다 해봤자 이환은 이환이다. 뉘우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게 아니듯이, 지금 강해진에게 이환은 저를 감금했던 알파일 뿐이었다. ‘좋아했던’ 알파가 아니라.



해진은 욕조 물로 얼굴을 한 번 축였다. 창밖으로 새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느긋하게 욕조 벽에 몸을 기대며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토스트토 한 입 베어 물었다.



“어차피 추적하셔도 소용없어요. 이 휴대폰 버릴 거고, 저 지금 여기서 나갈 거거든요.”

- 그런 게 아닙니다. 추적 중인 것도 아니고, 그저…….

“그저 뭐요?”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해진은 그 침묵에도 개의치 않고 잼 바른 토스트를 먹고 우유를 마셨다. 맛있는데, 하나 싸달라고 할까 생각도 하면서.



- 그저 강해진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힘없는 목소리는 축 처진 어깨와 아래로 떨군 눈빛을 연상케 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진짜 이환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낯설었다. 본래 이렇게 자신감 없이 말할 사람이 아닌데. 잠깐 고심하던 해진은 그러나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이 새끼, 수 쓰네.’



이전에도 이환의 다정한 얼굴과 말투에 속았었지. 그 연기에 한두 번 속았던 거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세 번 속을 거라 생각했으면 오산이었다. 내가 바본 줄 아나.



“저는 만나기 싫은데요? 만날 이유도 없고요.”

- 얼마면 됩니까.



뒤이은 말에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미쳤나, 이 새끼가. 어디서 한 세대는 지난 드라마 대사를 읊고 있어. 먹던 토스트가 체할 것 같았다.



“억만금을 줘도 당신 보기 싫으니까 연락하지 말고, 찾지도 마세요.”



그대로 전화를 끊은 해진은 휴대폰 전원을 끈 뒤 욕조 안으로 빠뜨렸다.



다리 사이 욕조 바닥에 잠겨 있는 휴대폰을 노려보던 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다시 몸을 깊숙이 담갔다.



생각을 떨치려 했으나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자꾸 귀에 어른거렸다. 절절한 목소리로 제게 애원하는 이환은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나 해진은 이내 몸을 감싸는 온기에 집중했다. 너무 뜨겁지 않게 적당히 식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근육이 풀리며 생각도 줄어들었다. 절절하던 이환의 목소리는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전화가 끊긴 액정화면을 환은 한참이나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멘트만 흘러나왔다.



환은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강해진이 자신의 통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원하는 대로 다 주겠습니다. 얼마든 상관없으니.]

[잠깐 대화할 시간만 내주십시오.]

[강해진 씨.]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계약서 수정도 원하는 대로 가능|]



……마지막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왜인지 보냈다간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환은 메시지가 차례대로 발송된 것을 확인한 뒤 차 안에 꼼짝도 않고 앉아 오매불망 강해진의 답장을 기다렸다. 답장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 마지막에 보았던 강해진의 표정이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항상 제 앞에서 바보 같은 표정만 짓던 그가 어째서 저를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았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강해진은 아직 나를 좋아한다.’



조금만 잘 대해줘도 멍청하게 웃으면서 기뻐하던 놈이 아닌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일 터다. 다만 이환은 그를 잡을 방법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를 붙잡을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다루기 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 웃어주고 밥 좀 같이 먹어줬다고 헤실거리면서 제가 남편이라도 되는 듯이 굴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다루기가 힘든 것일까.



환은 운전석에 몸을 깊게 묻은 채로 눈을 감았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리는 듯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강해진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이 휴대폰을 버린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어쩐다.’



막막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를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그가 평생 가지지도 못할 만큼의 돈을 안겨준다 하면 어떨까. 아니, 아니다. 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전만 해도 억만금을 준다 해도 자신을 만나기 싫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눈앞에 돈을 안겨주면 제아무리 강해진이라 해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나 환은 이내 강해진이 도망친 시점은 자신이 10억을 준 이후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더 받을 수 있는데도 도망쳤지 않은가.



‘돈으로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갑자기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여태껏 강해진을 찾기만 하면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돈을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말이다.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게 있다는 사실은 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특히나 강해진 같은 부류는, 돈이나 몇 푼 퍼주면 금세 헤벌쭉해지는 족속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자신이 싫다고 한다. 제 돈도 싫다고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무너지자 환은 다른 방안을 떠올릴 수 없었다.



누군가가, 아니, 도망친 강해진이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살아온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어쩌면 생전 처음으로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젠장…….”



이제 인정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강해진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부정하기 싫었던 명제를 떠올리자 헛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소음이 들렸다. 뒤이어 ‘호박나이트크럽’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트럭 한 대가 요란한 트로트를 울리며 다가왔다. 환은 운전대를 쥐었다. 오늘도 이 빌어먹을 차에서 자야 하니 최대한 조용한 거리로 피신해야 했다.



이 동네는 빌어먹게 무슨 거리마다 술을 처먹고 고함을 질러대는 남자들이 있었다. 몇몇은 환의 차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것을 알아봤는지 대놓고 다가오며 만지려고 들기까지 했다.



혹시라도 저런 놈들이 강해진에게 치근덕거리기라도 한다면. 거기까지 각이 닿자 환의 뒷덜미에 소름이 쭉 끼쳤다.



멍청한 강해진 같으니라고. 제 옆에 딱 붙어 있으면 이런 일은 없을 텐데. 뭐 하러 도망을 쳐서 이런 개고생을 하는지 환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병원은 다니고 있으려나.’



저를 무슨 불한당 보듯 하던 이 동네 병원 직원들에게 강해진의 사진과 인상착의를 알려주기는 했지만, 지금 녀석이 도망친 패턴을 생각하면 병원에도 가지 않았을 확률이 있었다.



‘임신 초기에는 안정이 중요한데.’



어느새 환은 강해진이 제 아이를 배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는 운전을 하며 섹스할 때 보았던 강해진의 배를 떠올렸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와 살이 없어 오목하게 꺼지던 아랫배, 자그마한 배꼽, 그리고 그 바로 아래 투명한 액을 끝에 달고 흔들리던 페니스까지.



그는 아랫도리가 금세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강해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자극이 되었다.



아니, 자극이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로도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차선을 바꾸다 실수를 했다. 상대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온갖 욕을 다 퍼부었으나 환의 귀에는 앵앵거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는 강해진이 필요했다.



대충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 차를 세운 환은 운전석을 뒤로 젖히고 처치 곤란한 긴 다리를 핸들 위로 올렸다. 좁고 불편했지만 강해진은 저보다 더 힘들고 불편한 밤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하자 몸보다 마음이 더 불편했다.



그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내일은 다시 흥신소에게 연락을 돌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디 강해진의 밤이 편하기를 빌었다.





“에취!”



그 시각, 재채기를 한 해진은 새로 옮긴 펜션에 딸린 개인 사우나룸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새로 마련한 태블릿PC로 제일 좋아하는 탐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



“아,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거품을 잔뜩 풀어 놓은 욕조에서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며 이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품목욕도 좋지만 감기에 걸리면 이동하기도 힘들어지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요즘 몸 상태가 이상했다. 갑자기 몸이 춥거나 미열이 생기질 않나, 가슴이 욱신거리질 않나, 소변도 평소보다 더 자주 마려운 것 같고 말이다.



체온이 내려가지 않게 가운을 입고, 꼼꼼하게 머리를 말리는 동안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어쩐지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새로 산 에센스 발라봐야지!”



펜션에서 이곳 특산물로 만들었다며 주인이 강력하게 추천한 바디 에센스도 향이 끝내주게 좋았다.



옛날에는 이런 것도 다 사치품이라고 생각해서 쓰다 남은 로션이나 팔꿈치에 바르고 말았는데, 이건 제 돈으로 산 게 아니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해진은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창문 쪽으로 몸을 젖히자 달이 보였다. 뷰도 좋은 방으로 잘 골랐다.



처음 이환에게서 전화를 받았을 때는 불안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진짜 추적했으면 이동 중에 붙잡혔어.’



해진은 이전에 있던 펜션에서 산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왔다. 솔직히 이번에야말로 잡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죽어라 도망치는데도 쫓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완전 엉뚱한 곳 헤매고 있는 거 아냐?’



뭐, 그러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넘겼으니 다행이고 말이다. 해진은 복잡하게 생각 않기로 하고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환은 며칠이 지나서야 자신이 엄한 곳을 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연락이 온 곳은 흥신소도, 병원도 아니었다. 이곳에서 20km나 떨어진 곳에 있는 펜션이었다.



해진이 갈 만한 숙소는 모조리 연락을 해두라고 박 비서에게 단단히 일러두길 다행이었다.



헬기가 착륙한 곳에서 주변 도시에 있는 모든 펜션, 모텔, 호텔, 기타 숙박 시설에는 다 ‘키스틸 레저’라는 이름으로 연락이 갔을 터다. 한국에서 제일 큰 레저 회사가 ‘협조’를 요청하는데 감히 거부할 숙박업체는 없을 터다.



그리고 뒤늦게야 ‘그분인 것 같다’며 펜션 주인이 연락을 준 것이었다.



환은 연락을 받자마자 그곳으로 튀어갔다. 그리고 당연히 강해진을 찾을 수는 없었다. 펜션 근처는 죄다 숲이었다.



“저는 바로 연락드린 거예요. 그렇게 갑자기 뭐, 사람 찾아내라고 그러면, 저희도 좀 당황스럽죠.”



주인장이 귀찮음과 불편함을 토로하며 눈치를 보는 동안 환은 펜션 밖으로 펼쳐진 숲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다른 숙박 시설이 어디 있습니까?”





* * *





여름에 산을 이동할 때 동물만큼이나 무서운 게 벌레였다. 한국에는 그래도 위험한 독충이 많지는 않지만 조심해야 했다.



때문에 해진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땀이 조금 났지만 그래도 오늘은 해가 맑지 않아서 걷기에 괜찮은 날씨였다.



하필이면 고생을 해도 이런 계절에 고생을 하나, 생각하자 아주 잠깐 서러워졌지만, 억지로 나쁜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걸음을 이었다.



‘그 새끼한테서 도망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해진은 자신감을 갖기로 했다. 이제 이 여정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잊혀질 때까지 어디 시골에 박혀서 지내는 것도 방법이지만, 죽은 사람처럼 지내기는 싫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외국으로 갈 거야.’



그는 조금 더 도망치다가 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 나라에서 언제까지고 불안에 떨며 숨어 살 생각은 없었다.



‘두고 봐라. 이환이 살고 있는 이 땅, 내가 반드시 뜨고 만다.’



해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미리 확인해둔 대로 작은 건물 하나가 보였다.



이번에 선택한 곳은 펜션이 아니라 산속 고시원이었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으면서까지 공부가 절실한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 있다는 사실은 여행사를 다닐 때부터 알았다. 이제 슬슬 돈도 아껴야 하니 매번 개인 욕조가 딸린 방에서 잘 수는 없었다.



꼭 고등학교 때 왔던 수련원처럼 생긴 건물이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깔끔했다. 이 건물에서 사는 듯한 고양이들이 해진을 제일 먼저 맞았다.



해진은 단기간으로 예약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뒤 잠깐 전화를 빌렸다. 본래라면 쓰지 않았을 터다. 숙소의 전화번호를 그대로 띄우는 건 나 좀 찾아오라고 소리 지르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달랐다.



- 여보세요.



차분하면서도 또렷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여인의 목소리. 해진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유창숙 회장님.”



역시나 상대방 쪽에서는 선뜻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 누구시지요?

“저는 강해진이라고 합니다. 손주분과 개인적인 악연이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다짜고짜 꺼낸 말에도 유 회장은 당황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 이름은 모르지만 누군지는 알겠군. 그런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사실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예전에 이환의 휴대폰에 있는 번호를 몰래 본 거니까. 해진은 전화기를 고쳐 쥐며 긴장한 마음을 감추려 몰래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제가 누군지 아신다면, 그게 중요한 건 아닐 텐데요.”



다시 웃음소리. 압박면접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괜히 떠오른 해진은 등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저질렀으니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이렇게 들이대는 이유가 있었다. 유창숙 회장은 지금, 이환과 자신의 관계를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이 사달이 났으면 회사의 높은 분 귀에도 들어갔으리라는 해진의 짐작이 맞았다. 일전에 환이 유창숙 회장에 대해 ‘자신의 조모는 제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든다’ 했던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 계속 말해봐요, 들어줄 테니.



다행히도 유창숙 여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저는 이환 전무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회장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내가 왜?

“당연히 그편이 키스틸 그룹에도 좋을 테니까요. 전무님과 제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회장님께서도 원치 않으실…….”

-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게 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역시나 짐작했던 반응이었다. 명색이 키스틸 회장인데, 순순히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 믿진 않았다.



“지금도 손주분은 저를 찾고 계시는데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는 잠깐의 침묵.



“키스틸 호텔 화재경보기, 제가 울린 겁니다. 회장님께도 보고가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요. 32층이랑 31층 연결되는 환풍로에 연기가 찼을 겁니다. 경보가 울린 곳은 3201호, 펜트하우스 거실에 부착된 차동식감지기고요.”



해진은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귀하게 얻어낸 틈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 방 곳곳에 아직도 제 지문이 찍혀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가요? 제가 지금도 도망치고 있는데 말입니다.”



잠깐 숨을 골랐다. 해진은 TV에서나 보던 키스틸 회장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저는 협박을 하는 게 아닙니다, 회장님. 그저 사소한 도움 하나만 요청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여전히 수화기 너머는 답이 없었다. 전화가 끊긴 건 아닐까, 싶어 전화기 본체에 있는 화면을 확인했다. 다행히 통화 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 그 사소한 도움이 뭐죠?



들리는 목소리에 해진은 겨우 안도했다.



“그냥 이 나라를 뜰 수 있는 비행기표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 이제 전화기를 빌려준 고시원 주인도 해진 쪽을 흘끔흘끔 보고 있었다. 그냥 포기할까, 지금이라도 그냥 비굴한 쪽으로 노선을 바꿀까, 고민하던 중에 뜻밖의 질문이 날아왔다.



- 임신했나요?



해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숨이 막혔다.



“……제 안전을 위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강해진 씨를 가장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잠깐 생각해봤어요.



눈치 빠른 해진은 회장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원한다면 저 하나쯤은 아무렇지 않게 치워버릴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 손 더럽히느니 외국으로 보내는 게 그쪽도 편하지 않을까?



-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으면 도왔을 텐데, 안타깝네요.



……뭐? 반대가 아니라?



해진은 의아했다. 무슨 드라마 같은 상황을 생각한 건 아니지만,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근본도 없는 오메가가 사생아를 낳게 할 수는 없다느니 하는 반응이 나와야 하지 않나?



심지어 이환은 다른 사람이랑 약혼까지 했지 않은가.



“비행기표 하나면 됩니다. 어려울 거 없지 않습니까. 한국에 다시 오는 일 없을 겁니다.”



해진은 울고 싶은 기분까지 느꼈다. 구남친 - 그 개새끼를 구남친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 에게 쫓기면서 구남친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 뭐같은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지난 뒤, 수화기 너머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나한테 와서 이야기를 좀 해보는 건 어때요.

“이야기라 하시면…….”

- 우리 손주가 도통 나한테는 연애 이야기를 안 해서.



이건 또 무슨……. 해진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그래, 순순히 비행기표를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 행차하시는 경우까지는 생각했는데 오라고 하니 당혹스럽기도 했다.



이환은 자신을 찾고 있고, 회장은 둘의 관계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손을 쓰고 있지는 않다는 게 해진의 판단이었다. 유창숙 회장 정도 되는 사람이 직접 개입했다면 자신은 이렇게 도망치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회장은 제게 직접 찾아오라 말하고 있었다.



‘갔다가 잡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거 아냐?’



오라고 한다고 호랑이굴로 직접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해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타깝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요. 회장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 아깝네요. 손주 놈 홀린 얼굴이나 구경하려고 했는데.



……뭐라고? 뭘 홀려? 의문을 갖는 사이에 전화는 끊어졌다. 자신이 잘못 들었으리라고 판단한 해진은 뒤통수를 긁으며 고시원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혹시나 싶어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 왔기 때문에 단기간 머무는 방이라도 찾기가 어렵다며, 주인은 조금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동안 해진은 로비에 앉아 땀을 식혔다.



고시원은 산속의 고요함을 강조하는 만큼 아주 한적했다. 세상에 급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고양이들이 배를 드러내고 그늘에 누워 잠을 청하고, 건물 근처에는 녹음이 깔려 덥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사람도 별로 없어 보였다. 다행인 일이었다.



‘비행기표를 구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는데.’



첫 번째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이제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했다. 마루투어 팀장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위험하긴 했다.



“하아…….”



마른세수를 하던 손이 문득 뚝 멈췄다. 고시원 주인과 눈이 마주쳤는데 티가 나게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해진의 눈치를 잔뜩 보던 직원은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화닥닥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해진의 머릿속에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도망쳐야 한다.



낌새를 눈치챘는지 고시원 주인이 해진에게 진정하란 투로 손을 들어 보였다.



“저,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안내해드릴게요.”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내는 듯이, 카운터 아래로 다급하게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니 분명했다. 이환이 미리 이곳에도 손을 써둔 것이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해진은 주변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누군가 매복한 흔적은 아직까지 없는 듯했다. 그러나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해진은 일부러 환하게 웃어 보이며 다가갔다. 고시원 주인이 흠칫 놀라며 또 휴대폰을 감췄다.



“아무래도 생각을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네? 방 바로 안내해드릴게요, 잠시만요!”



붙잡으려는 걸 보니 보상이라도 두둑이 준다고 했나 보다. 해진은 이를 갈며 백팩을 멨다.



‘이런다고 내가 도망 못 갈 줄 알아?’



저기요, 하고 부르는 주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해진은 밖으로 나섰다. 그대로 길이 아닌 숲으로 내달렸다.



숲속으로 뛰어가며 해진은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이곳에 머물지 못했을 때 갈 곳도 생각해두기는 했지만 사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숲속은 찌는 듯이 덥고, 해진은 목이 말랐다. 고시원에서 물이라도 받아올걸,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한참 걷던 해진은 일부러 고시원에서 온 방향의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이환이나 수색대가 고시원 주인의 말을 듣고 수색을 할까 싶어서였다.



이렇게 뛰쳐나온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서러웠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요 며칠 동안 이렇게 기분이 오락가락한 적이 많기는 했다. 호화로운 욕조 속에 기분 좋게 있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지고, 이렇게 살아남아서 뭐 하나 싶은 생각에 눈물까지 줄줄 흐르기도 했다.



심지어 입맛도 오락가락했다. 갑자기 뭔가가 먹고 싶어서 기껏 어렵게 식당을 찾아내거나 음식을 구해 오면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면서 방금 전까지 먹고 싶던 게 꼴도 보기 싫어지기도 했다.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스트레스 때문이리라고 해진은 짐작했다.



‘다 이환 그놈 때문이야.’



그래, 다 이환 때문이었다. 그 자식만 아니면 제 인생이 이따위로 망가질 일도 없을 테니. 또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흐른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으며 해진은 길을 옮겼다. 물도 별로 없는데 벌써 수분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눈물은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결국 해진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울면서 걸어야 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이런 산길에서는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흑, 흐윽……. 개새끼…….”



이환을 상대로 욕을 해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사실, 이제 이환이 야속하거나 밉지 않았다. 단지 귀찮을 뿐이었다.



그를 떠올리며 미워하려고 해도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제 인생에서 빨리 꺼져줬으면 싶기만 했다.



꺽꺽거리는 울음과 줄줄 흐르는 눈물 콧물에 반해 씩씩한 걸음으로 열심히 숲속을 헤쳐 나가던 해진은 문득, 갑자기 밀려드는 아랫배의 통증에 인상을 구겼다.



‘아, 왜 하필 지금…….’



지금은 아프면 안 되는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흐윽…….”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고, 심지어 병원도 갈 수 없었다. 버텨야 했다. 그러나 해진의 다리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 * *





고시원에 뒤늦게 도착했을 때, 이미 해진은 떠난 뒤였다. 환은 해진이 떠났다는 곳으로 곧바로 내달렸다. 정장에 구두 차림이었으나 아무 상관 없었다.



“강해진 씨!”



숲에 대고 외쳐도 역시나 강해진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이딴 식으로는 그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다니지도 않을 흙길을, 미끄럽고 위험한 산비탈을 미친놈처럼 마구 내달리던 이환은 숨이 턱 끝까지 차서 도저히 더 달릴 수가 없을 때가 되어서야 멈추었다.



주변이 핑핑 도는 듯했다. 강해진이 방금 스쳐 지났을지도 모르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비척거리며 살폈다. 사방에서 강해진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하는데. 사실 이환의 머릿속에는 이제 아이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강해진만 멀쩡히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넥타이를 풀어 숲의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4백만 원짜리 재킷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계속 걸었다. 강해진이 어디로 갔을지 짐작도 못 하면서 말이다.



숲은 무척 더웠다. 날씨도 날씨거니와 열을 내서 더 후끈했다. 와이셔츠는 단추를 풀어 팔꿈치까지 걷고, 그래도 열이 식지 않아서 목 언저리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이런 더위 속에 걷는 것은 평소의 환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땀이 나고, 불쾌하고, 비위생적인 야외에서 감염의 위험까지 무릅써야 하지 않나. 그러나 오늘만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강해진은 지금 저보다 더 고생하고 있을 터다. 이렇게 더럽고 위험한 숲을 혼자서 헤매고 있을 거란 말이다. 자그마한 밀가루떡 같은 놈이 낑낑거리면서 쏘다니는 꼴을 상상하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 걷던 이환은 자신이 너무 숲 깊이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도 떠나온 고시원이 보였다. 길은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해진도 길을 잃거나 하지 않아야 하는데. 산에서 맹수라도 만나면……. 아아!



끔찍한 생각에 환은 스스로를 꾸짖으며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답지 않게 너무 흥분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강해진을 찾으려면 일단 저 혼자 숲을 헤매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어서 흥신소들과 연락을 취하고, 산속을 수색할 수 있는 팀도 다시 불러야 할 터다. 그는 억지로 이성을 유지하며 고시원 건물이 보이는 쪽으로 걸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막막하고 갑갑했다. 강해진은 지금 거의 목숨을 걸고 도망치고 있다. 그 조그마한 몸으로, 심지어 임신을 했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대체 왜?



“내가 싫어서…….”



얼떨결에 혼잣말을 내뱉은 환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에게 빌었어야 했다. 잘못했다고, 당신에게 심하게 대했다고.



아직도 강해진에게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음도 그제야 깨달았다.



불현듯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작은 해일처럼 들썩였다. 몰아치고 휘돌며 이환의 마음을 일그러뜨리고, 잠식했다.



이환은 제자리에 선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막막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런 좌절감은, 처음이었다.



스스로 자랑하던 이성은 사라지고 감당하기 힘들 감정만이 정신없이 그의 속에서 들끓었다.



강해진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성을 놓고 웃긴 몰골을 하고 숲을 헤매게 만들었다. 환은 고통스러웠다. 제 우스운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다시 강해진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그는 가장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그에게 영영 용서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그때 보았던 무심한 눈처럼, 그 밀가루떡 녀석이 앞으로도 저를 그렇게 볼까 봐.



애써 숨을 고른 환은 다시 걸음을 이었다. 그러나 몸속에 들끓는 좌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또다시 숲으로 사라졌을 강해진을 찾기 위해 환은 흥신소들과 다시 연락을 취했다. 수색대는 일부러 고용하지 않았다.



강해진을, 자신의 오메가를 짐승처럼 포획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그의 미움을 있는 대로 다 사놓고, 이제 와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덕분에 수색은 무척 느려졌다.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강해진을 만났을 때, 그의 미움을 더 사고 싶지는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수색에 진전이 없지는 않다는 거였다. 문제는 해진의 이동 속도를 쫓아가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겨우 단서를 찾아서 따라잡았나 싶으면 이미 달려간 곳에는 해진이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이환은 업무도 안중에 없이 강해진만을 찾아 헤맸다.



덕분에 박 비서가 죽을 맛이었다. 그의 옷을 챙겨주려고 서울에서 달려오는 내내 박 비서는 이번에야말로 사직서를 내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상관이 심적으로 불안정하고 개인적인 고통에 시달릴 때에 곁을 떠나는 건 인간적으로 못 할 짓인 것 같긴 하지만, 그에게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나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여태까지 키스틸 레저 전무의 비서로 계속 근무한 이유는 오직 돈 때문이었지만, 최근의 업무과중은 국내에서도 탑 수준에 드는 월급으로 상쇄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자동차 할부가 끝났다는 점도 그의 용기에 한몫을 했다.



품에 안은 사직서를 마치 대검이라도 되는 듯이 든든하게 생각하며 차에서 내린 박 비서는 이환 전무를 만나면 곧바로 사직 의사를 밝히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몰골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버렸다.



“……전무님? 꼴이…….”



평소라면 ‘꼴’이라는 단어는 감히 전무 앞에서 절대 꺼내지 못할 표현일 테지만 그 정도로 박 비서는 충격을 받았다. 이환은 정말로 ‘거지 꼴’을 하고 있었다.



이환은 그에게서 와이셔츠를 받자마자 차 운전석에 들어가 갈아입었다. 박 비서가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뒤이어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들, 양말을 차례대로 척척 받으면서 박 비서는 그래도 제 상사의 성질머리가 바뀌진 않았음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환은 그가 건네준 새 옷을 입고는 차에 달린 백미러를 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박 비서가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며칠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꺼슬하게 오른 수염 자국, 허옇게 부르튼 입술, 헝클어진 머리칼.



지독한 결벽증으로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제 상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결국 조심스레 묻자 이환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투로 박 비서를 노려보았다. 잠도 못 잤는지 흰자위는 시뻘겋게 충혈된 상태였고, 가뜩이나 진한 쌍꺼풀은 세 겹이 되어 있었다.



상사의 몰골에 적잖게 충격받은 박 비서는 품에 고이 넣어 온 사직서를 그만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충격을 상쇄하지 못한 채로 몇 가지 보고를 했고, 환은 그가 가져온 서류들을 읽은 뒤 서명했다. 모두 이메일로 미리 안내를 받았던 사항들이었다. 대충 읽어 넘겼지만 말이다.



박 비서는 중요한 이슈 몇 가지를 설명했지만 이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당장 강해진이 어느 산에 배를 움켜쥔 채로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끔찍한 상상을 스스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강해진이 사라진 지 이제 한 달 하고도 2주나 지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집 없이 지내기에 너무 긴 시간이었다.



흥신소 중 일부는 일을 포기했다. 환이 어마어마한 보상을 제시했음에도 말이다. ‘이거 때문에 다른 일을 전혀 못 한다’는 게 포기의 이유였다. 죄다 쓸모없는 쓰레기들이었다. 어차피 강해진은 제 손으로 찾아낼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아, 씨발…….”



갑자기 튀어나온 욕에 이번 분기 매출을 읊던 박 비서가 뚝 멈추었다. 이환의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저……, 전무님, 조금이라도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댁에도 한동안 안 들어가셨지 않습니까.”

“방금 말한 거, 이메일로 전송해주십시오.”

“……이미 보내드린 건데…….”



작게 변명했지만 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가보라고 손짓을 하려던 환은 문득 든 한 가지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뭐, 별말이 없으십니다. 아직까지는요.”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라면 마음을 먹는 순간 강해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었다. 조모보다는 자신이 먼저 해진을 찾아야만 했다.





* * *





그로부터 몇 주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이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해진을 다시, 만났다.



강해진과의 매칭률을 확인한 뒤로 이미 그에 대한 온갖 사항을 다 조사했다. 당연히 생모에 관해서도 조사를 했었다.



그의 생모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사실은 강해진의 입으로도 들었었다. 그리고 나중에 조금 더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당시 사고는 그의 부모가 같이 당했는데, 모친이 조금 더 오래 살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회생의 가망 없는 모친을 직접 간병한 것도 강해진이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이 정도로 가족에 목말라 있다면 아이를 낳아서 직접 키워주는 것까지 가능하겠군.’ 하는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해진을 찾아다니면서, 그는 다른 생각을 했다. 강해진은 가족이라곤 하나도 없는 고아였다. 친척들도 없어서 부모를 잃은 뒤로는 내내 혼자 지냈다고 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강해진의 가족이었던, 그 여인이 어쩌면 해진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주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비이성적인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녀가 입원했던 병원 근처는 강해진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과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축사가 많았다.



축산농가가 대부분인 듯한 작은 마을에 홀린 듯이 갔다가, 소똥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어느 곳에서 환은 해진을 발견했다.



해진은 축사 건물 옆에서 제 몸뚱이만 한 부대 자루를 나르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로 자루를 드는 모습을 멀리서 보는데도 낑,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뜩이나 마른 편이던 몸은 어쩐지 더 마른 듯하고, 기억 속의 해진보다 훨씬 더 유약해 보였다. 머리칼은 염색을 도로 했는지 다시 검정색이었다. 저를 피하기 위해서겠지.



그토록 찾던 강해진이 저곳에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환은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환은 두려웠다. 그때처럼 강해진이 제게 그런 표정을 지을까 봐. 꼭 모르는 사람처럼, 그런 눈빛을 할까 봐.



당장 달려가서 그의 손목을 잡아채고, 이딴 곳에 있지 말고 나와 함께 돌아가자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환은 스스로를 호되게 꾸짖었다.



‘지금 다가가지 않으면 또 놓칠지도 모른다.’



강해진을 다시 놓치는 일만은, 그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환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용기를 죽어라 쥐어짜낸 적은 처음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살얼음을 내딛듯 다가갔다.



부대 자루를 나르던 해진이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환은 걸음을 멈췄다.



“해진 씨.”



다급했다. 재빨리 한 걸음을 다가서며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도망가지 마십시오, 제발.”



해진은 다행히도 돌아서서 달리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땡그란 눈으로 환을 바라보았다. 환이 도망가지 말란 말을 해서라기보단, 환의 모습을 보고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그제야 환은 제 꼴이 엉망이란 사실을 되새겼다. 꺼슬한 얼굴에 뭐라도 바르고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강해진을 오랜만에 보는데 이런 꼴이라니…….



마른세수를 한 환은 입술을 더듬으며 말을 한참 골랐다. 와중에도 해진의 일거수일투족에 바짝 신경이 쏠렸다.



허벅지 옆으로 늘어져 있던, 먼지가 잔뜩 묻은 손이 움찔, 하고 떨리자마자 환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제발.”



다시 한 번 애원의 말을 내뱉었다.



환은 여태 살면서 누군가에게 애원한 적이 없었다. 비즈니스 관계에서도, 혹은 드물게 다른 관계라 할지라도 그가 ‘애원해야’ 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래서 환은 누군가에게 빌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강해진의 손가락 끝, 발가락 끝이 움직이는 방향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서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그가 또 사라질 것 같아서. 한 번 놓쳤던 그때처럼, 모르는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을 하고 멀어질 것 같아서.



“잠깐만, 잠깐이면 됩니다. 이야기만 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이야기요.”



오랜만에 듣는 강해진의 목소리가 몹시 반가웠다. 그래, 자신은 누군가를 이렇게 진심으로 반가워해본 적도 없었다. 환은 그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강해진 씨에게…….”



제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 말고, 강해진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말을 해야 할 때였다.



“당신에게 내 잘못을 빌 기회를 주십시오.”



시선을 떨구고 싶었으나 강해진을 마주하고 싶기도 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이곳에 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처음 배운 모순이 환의 발목을 당겨댔다. 그는 제 몸이 땅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그거면 됩니다. 진심입니다.”



약 3미터. 두 사람이 떨어진 거리 사이에 적막이 차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축사 안에서 소 한 마리가 ‘음무’ 우는 소리를 내어 적막을 깨뜨렸다.



와중에도 환의 시선은 여전히 해진에게 붙박여 있었다. 그는 허벅지 옆에서 움찔거리는 해진의 손가락과 빠르게 깜박이는 그의 두 눈을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뱉고 살며시 열리는 입술을 보았다.



“……이제 와서 무슨 사과를 한다고요.”



뒤이은 강해진의 말에는 어조가 없었다. 아니, 지친 듯이 들리기도 했다.



“저는 전무님한테서 사과받고 싶지 않아요. 이미 그럴 때는 지났어요.”



‘때가 지났다’는 말에 환의 마음이 바삭바삭 부서졌다. 그는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안달이 나는데, 눈앞에서 쏟아지는 물을 보는 것 같은데 손바닥조차 뻗을 수가 없었다.



“그냥 저는 전무님이 저를 내버려두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찾아오지 마시고요.”



굳건하게 서 있던 해진의 발이 돌아섰다. 환은 덜컥 겁이 나서 한 발자국을 떼었다가, 제 동작 하나가 해진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싶어 다시 바로 섰다.



정작 해진은 무덤덤하게 걸어 축사 안쪽으로 들어갔다. 환은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축사 입구까지만 걸어갔다.



해진은 입구에 선 환을 신경 쓰지도 않고 부대 자루 같은 것을 집어 들고는 여물통에 쏟아부었다. 그 동작이 제법 능숙해 보였다.



축사 안에는 양쪽으로 소가 꽉 차 있었고, 해진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서 얼마 동안 지낸 걸까. 고무장화를 신고 더러운 옷차림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강해진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조리 드러나는 듯했다.



“……해진 씨.”



이름 한 번을 내뱉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환은 빈주먹을 쥐었다 펴며 그가 여물통을 다 채우고 저를 바라볼 때까지 기다렸다.



“아직도 계셨어요?”



무덤덤하니 제 쪽을 한 번 쳐다본 해진은 이번에는 거대한 갈퀴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는 소 우리 안쪽 바닥을 긁어냈다.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해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늘은 몇 명을 데려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지금 당장 납치해서 데려간다고 해도 저는 또 도망칠 거예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역시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또 붙잡으셔도 또 도망칠 거고, 세 번, 네 번, 수십 번이 되어도 저는 계속 도망칠 거예요. 그렇게만 아세요.”

“저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은 정말로, 사과를 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환이 우리 안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해진이 갈퀴를 움직이던 손을 느리게 했다. 환은 그 변화에 긴장하며 아주 느리게 다시 한 걸음을 더 들어왔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정체 모를 물질이 구두에 질퍽하게 밟혔으나 상관없었다.



“말했잖아요. 사과받고 싶지 않다고요.”



이번에는 조금 날이 선 목소리다. 갈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날 선 해진의 반응에 환 역시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갈퀴를 꽉 움켜쥔 강해진은 당장이라도 이 축사를 뛰쳐나가 순식간에 제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환은 강해진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이제 알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무 늦은 말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



설령 그가 다시 제 눈앞에서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 말은 해야 했다.



“미안합니다, 강해진 씨.”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깊은 무게를 담아 한 음절씩 진중하게 내뱉었다.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강해진이 제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를 찾으러 다니는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래서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강해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환은 당황스러웠다. 좋지 않은 징조로 보였다.



“……웃기고 있네.”



그 곱상하기만 하던,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기만 하던 강해진의 얼굴이 독기를 담고 일그러졌다.



“사과? 미안해?”



환은 그제야 깨달았다. 강해진은 지금, 저를 경멸하고 있었다.



“할 거면 내 인생 망치기 전에 진작 했어야지, 이제 와서 뭐? 숨어서 조용히 살려는데 기어코 찾아내서는 미안하다고? 그딴 말은 적어도 그 좆같은 호텔에다가 나 가두기 전에, 아니, 그 좆같은 약 나한테 처먹이기 전에 했어야지, 씨발!”



다다다 말을 쏟아낸 해진이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환은 그가 내뱉은 말이나 저를 보는 독기 어린 눈빛보다는 들썩거리는 저 자그마한 체구가 더 신경 쓰였다. 저러다가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강해진 씨. 잠깐 진정하시고…….”

“씨발, 너나 진정해, 개새끼야!”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기세가 나오는지, 빽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도 그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해진은 혼자서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갈퀴를 반대쪽 손으로 옮겨 쥐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도 가라앉았다.



“내 인생 망칠 대로 다 망쳐놓고 사과 운운하지 마세요. 빡쳐서 돌아버릴 거 같으니까, 그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요.”



이번에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환은 굳은 채로 서서 해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강해진은, 자신이 아는 강해진과 다른 사람 같았다.



저를 보며 멍청하게 웃고, 제게 온갖 마음을 다 주고, 제 몸 아래 짓눌려서 헐떡거리던 그 하찮은 오메가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강해진은 이제 저에 대한 증오마저도 남지 않은, 제 사과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만 제게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그가 환에게는 낯설었다.



문득 환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그와의 관계를, 아니, 강해진이라는 사람을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단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다시 갈퀴를 움직이려던 해진의 눈에 바짝 날이 섰다.



“오지 마세요.”

“해진 씨, 내가 해진 씨의 고충을 이해는 하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저. 임신했어요.”



환은 숨을 멈추었다.



……방금, 뭐라고…….



“가까이 오면 네 애새끼랑 같이 뒈져버릴 거야.”



해진이 갈퀴를 무기처럼 고쳐 쥐었다.



환은 해진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조차도 깜박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해진은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상하다는 생각은 사실 아까 마주쳤을 때부터 했다. 그렇게 자기 관리 철저하고 깔끔 떠는 놈의 꼴이 엉망이잖은가.



‘그래 봤자 하나도 안 불쌍하지만.’



천하의 이환이다. 제 인생을 이렇게까지 조져놓은 놈이다. 저 하나 죽는다고 눈 깜짝할 놈이 아니지만, 아이라면 어떨까.



그가 그렇게 목숨 거는 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해진의 판단은 옳았다.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저 꼬락서니를 보니 말이다.



사실 되는대로 내지르기는 했지만, 정말로 임신을 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지난 얼마간의 제 몸 상태를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해진은 굳은 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환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전에 어서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마침 소 한 마리가 또 ‘무우’ 하고 울었다. 울음이 들린 쪽을 보던 해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어.”



멍한 환을 보며, 한 손으로는 갈퀴를 잡은 채로, 해진은 소 우리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바닥에 쌓인 소똥을 한 움큼 집어 제 몸에 발랐다.



저 개자식은 섹스할 때도 제 몸에 닿는 게 싫어서 장갑을 끼던 놈이었다. 그 정도로 결벽증이 심하니 이 꼴을 보고도 다가오진 않을 터다.



멍하던 환의 눈빛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해진은 짐작했다. 아마 저 자식은 돌아서서 욕을 하며 나가고, 곧 대기 중일 다른 사람들이 뛰어 들어올 거라고.



‘괜찮아. 잡혀도 다시 도망치면 돼.’



몇 번이고 잡혀도 몇 번이고 도망칠 거란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환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해진은 경악했다.



그가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하고.



“오, 오지 말라고!”



해진은 소똥을 한 움큼 더 집어서 이번에는 제 얼굴과 머리까지 치덕치덕 발랐다.



그러나 환은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마짜리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구두로 구정물을 질퍽질퍽 밟아가며 해진을 똑바로 마주한 채 거리를 좁혀 왔다.



이게 아닌데. 그 결벽증에 찌든 미친놈이 저 하나 잡자고 이럴 리가 없는데. 해진은 이제 소똥을 집어다 그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꺼져! 꺼지라고!”



슈트 위에 정통으로 맞은 소똥이 질퍽하게 뚝뚝 흘러내리는데도 환은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이번에는 해진이 고장 난 듯 굳어버렸다.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이환이 저를 껴안았을 때에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아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이게 아닌데.



“나는 그저, 당신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꿈일지도 모른다. 이환이 소똥투성이의 저를 안고 이렇게 절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다니. 그래, 현실이 아닐 거다. 여물을 주다가 잠깐 졸았나 보다…….



해진은 머릿속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축사 일이 힘들어서 며칠 무리를 한 탓일까. 아니면 충격 때문일지도 몰랐다.



뭐가 되었든 지금, 이 자식을 밀쳐내야 하는데……. 생각은 요원하고 몸은 뻣뻣했다.



“흐으…….”

“해진 씨?”



반사적으로 그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쓰러지면 안 돼, 다짐이 무색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해진은 정신을 잃었다.





< 3권에서 계속 >





99.99퍼센트의 연인 3 (완결)





목차





63퍼센트

77퍼센트

90퍼센트

외전 01

외전 02

외전 03

외전 04

외전 05

외전 06





63퍼센트





닥터 최는 제 상사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오메가와 제 상사의 관계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이는 무사하다’고 말했을 때 이환의 반응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강해진 씨는, 어떻습니까?”



아, 하고 작게 깨달은 소리를 낸 닥터 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좀 많이 약해져서 그렇지, 크게 심각한 곳은 없습니다.”

“심각한 곳은 없다면, 심각하지 않은 곳은 있단 말입니까? 똑바로 말하십시오.”



……성질머리하고는. 닥터 최는 그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며 스트레스에 취약한 상태이며, 영양 상태도 좋지 않으니 한동안 케어가 필요하다는 말을 줄줄이 읊었다.



“전에 진찰할 때도 말씀드린 거지만, 본래 몸이 약한 타입입니다. 임신한 상태에서는 각별히 조심해야 할 건 당연하고요.”



그리 말한 뒤 진찰 도구를 챙겨 나가려던 닥터 최는 순간 환의 얼굴을 보고 조금 더 놀랐다. 글쎄, 제 상사가 무려 슬퍼하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찔러도 피는커녕 물 한 방울도 안 나올 것 같던 이환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오메가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닥터 최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방을 벗어났다.



환은 누운 해진의 얼굴을 오래도록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사에서 데려온 뒤로 그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닥터 최는 그에게 심각한 곳이 없다고 한다.



제 얼굴이 보기 싫어서, 제 옆이 싫어서 눈을 뜨지 않는 걸까.



얼마나 싫었으면 몸에 소똥을 바르면서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댈까……. 환은 소똥을 얼굴에 바르던 강해진을 다시 떠올리고 조용히 진저리를 쳤다. 당연히 소똥 때문은 아니었다.



‘강해진이 나를 혐오하고, 경멸한다.’



그냥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 사과도 받지 않을 정도로 그 미움이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강해진을 데려온 뒤로 한시도 쉬지 못했으니 잠을 못 잔 게 아마 스무 시간은 되어갈 터다.



머리가 핑핑 돌고 입에서는 단내가 나는데 환은 쉴 수가 없었다. 쓰러진 해진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떼었다간 그때처럼 도망칠 것 같았다. 아니, 강해진이라면 정말 그리할 터다.



눈을 감은 강해진의 얼굴은 정말로 잠들었는지, 그때처럼 잠든 척을 하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뭐든 상관없었다.



“……당신이 무사했으면 한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그가 듣고 있지 않아도, 마찬가지로 상관이 없었다.



“그게 내 곁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해진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으나 환은 그의 얼굴이 아닌, 침대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곁이 지금 강해진 씨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뱉은 환은 양손을 무릎 위에 깍지 낀 채로 상체를 숙였다. 몸이 몹시 피곤했으나 그보다는 머릿속이 더 어지러웠다.



일단 해진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여태까지 죽어라고 도망친 그가 언제 다시 뛰쳐나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잡히면 도망칠 거라던 해진의 말은 절대 허세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제 손아귀에서 또 벗어났을 때, 그때는 유 회장으로부터 보호해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떨군 시선을 조금 들자 해진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곳곳에 상처가 난데다 부르트고 손톱도 깨져서 엉망이었다. 그 손을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밉고 원망스러운 걸 압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시야에 들어온 해진의 손이 미미하게 움찔거렸다. 의식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반색하며 일어난 환은 차마 해진의 얼굴을 만지지도, 그를 껴안지도 못한 채 눈으로만 바삐 그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말을 꺼내자마자 환은 후회했다. 괜찮기는. 안색이 지금도 다 죽어가는데.



해진은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며 잠에서 깨어났다. 많이 괴로운 듯이 보였다.



“어지러워…….”

“약 기운 때문일 겁니다. 물을 좀 마셔보십시오.”



저를 뿌리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난동을 피우면 어쩌나 걱정한 것과 달리 다행히도 해진은 얌전히 그가 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내 집입니다.”



어디인지 궁금해할 것 같아 말했는데 해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혹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환을 마주했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강해진의 얼굴이 환은 여전히 낯설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해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잡혀 와서 당혹스럽고 제가 여전히 꼴 보기 싫을 텐데도, 가장 먼저 꺼낸 말이 해진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말이라서 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환은 해진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 왜 그에게 접근했는지, 아이가 왜 필요한지. 99.99퍼센트의 매칭률과 그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 털어놓았다.



막상 이야기를 꺼내자 말을 이어가기는 생각보다 쉬웠다. 해진은 덤덤한 얼굴로 조용히 환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아연과 만난 이야기를 할 때 환은 이유를 알 수 없게 잠깐 긴장했지만, 정작 해진의 얼굴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당신 말대로 임신한 게 맞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긴장할 때는 유 회장이 해진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설령 출국하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유 회장은 해진 씨를 찾아낼 겁니다.”



해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역시 예상대로 출국을 염두에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모르는 나라에서 제대로 된 비자도 없이 아등바등 살아갈 강해진을 생각하자 환은 다시 마음이 갑갑해졌다.



“대체 무슨 대책으로 무작정 한국을 나가려 한 겁니까? 제대로 된 비자도 없이 오래 체류할 수도 없을 텐데.”



저도 모르게 울컥 화를 내버렸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해진의 얼굴이 금세 뾰로통해졌다.



“누구 때문에 도망치려는 건데요,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알겠어요. 외국으로 나가도 내가 위험하다는 거잖아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위험하고.”

“방법은 하나입니다.”



유 회장은 키스틸의 이름에 누가 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든 치워버릴 사람이었다. 설령 그게 친손자라 하더라도.



“강해진 씨가 내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로, 내 곁에 있으면 됩니다.”



해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구어졌다. 방금 전까지 뾰족하게 날 서 있던 눈이 힘없이 처진 것을 보자 또 마음 한편이 바삭바삭 부서지는 듯했다.



“미안합니다.”



환이 말했다. 그는 해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지만, 눈을 피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정작 눈을 맞추지 않은 쪽은 해진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만 싶었다. 이 미친놈이 축사까지 찾아오기 전만 해도, 사실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니 바보 같지만 말이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으니 마루투어의 팀장에게라도 연락을 해서 어떻게든 비행기표를 마련해보려 했다. 외국으로 나가서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관광비자가 다 될 때까지만 버티다가 돌아와서 상황을 보고 다시 계획을 짜려 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자식이 기어코 저를 찾아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미안하단다.



해진은 또 그 소리냐고, 어차피 사과해도 받아주지도 않을 거라 말하려고 처져 있던 눈을 들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저를 보는 이환의 얼굴을 마주하자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이 말을 꼭 해야 했습니다.”



그가, ‘그 이환’이 제게 사과를 하고 있다. 진심을 가득 담아서. 받아주지 않으면 눈물이라도 당장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해진은 그 사실이 낯설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지금 제게 사과하는 환의 모습은 거의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이게 정신이 나갔나…….’



원래도 미친놈인데 더 정신이 나가면…… 나는 완전 망한 거 아닌가? 해진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구겼다.



“사과 그만하세요. 보기 싫으니까.”



……보기 싫다는 말은 너무했나, 쥐꼬리만큼 후회를 하는데 웬걸, 이환이 정말로 입을 싹 다무는 게 아닌가.



헛소리를 더 하면 그땐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는데, 헛소리는커녕 이환은 얌전히 앉아서 그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꼭 명령 기다리는 강아지 같네…….’



라고 생각한 해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미쳤나 봐. 강아지는 무슨. 개새끼겠지.



“저, 물이나 좀 더 주세요.”



한술 더 떠서 이번에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물컵을 즉각 갖다 바치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냥 건네주는 것도 아니고, 해진의 입까지 들이밀었다.



“제가 마실게요……!”



한 마디를 하자 이번에는 또 얼른 손을 치운다.



해진은 물을 홀짝이며 슬그머니 환의 눈치를 보았다. 시선은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고, 몰골은 눈이 퀭하고 뺨은 홀쭉해서 말이 아니었다.



아주 조금,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연민이 쥐똥만큼 올라왔다.



“……잠은 좀 잤어요?”



이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주무세요.”



그러나 퀭한 눈에 담긴 불안감은 지워질 줄을 몰랐다. 아마 저 때문이리라고, 해진은 짐작할 수 있었다.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러나 보지.



“도망 안 갈게요. 주무세요.”



물론 이 미친놈의 옆에 있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또 도망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건 더더욱 싫었다. 이환의 말대로라면 유 회장은 충분히 저 하나쯤 없앨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일단은 이환의 말대로 당분간은 여기 틀어박혀 있는 수밖엔 없었다. 물론 이 개자식이 좋아서 붙어 있는 건 절대 아니지만.



여전히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환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를…….”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다.



“나를 마음껏 싫어해도 되고, 내게 욕을 퍼부어도 되고, 나를 때려도 됩니다. 다만 이번만큼은, 이곳에서 나가지 말아주십시오.”



느리게 이은 말투는 명징하고, 그 내용도 명확했으나 자신감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해진은 문득 그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굳은 해진의 얼굴을 의식한 것인지, 이환이 다소 안달이 난 투로 자세를 고쳤다.



“아니, 말을 정정하죠. 당신은 이곳에 갇혀 있는 게 아닙니다. 가고 싶은 곳은 얼마든지 가도 됩니다. 다만 도망치지만…… 말아달란 겁니다.”



힘겹게 말을 뱉은 환이 쩍쩍 갈라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절대 강해진 씨를 또 감금한다거나, 그런…….”

“알아요.”



듣다 못한 해진이 그의 말을 끊었다.



“제가 도망치면 전무님께서 저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뜻이잖아요. 이해했어요.”



그제야 환의 얼굴에 안도감 비슷한 것이 옅게 떠올랐다.



“어차피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도 필요하실 테고, 저도 이 몸으로 나다니긴 힘들겠죠. 걱정 마세요.”



첫 마디에 이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으나 해진은 그것까지는 보지 못하고 도로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당기는 손목이 하도 힘이 없어 보여서 손을 뻗은 환은 미처 그에게 닿지 못하고 빈주먹을 쥐었다.



“……전 좀 더 잘게요……. 걱정 말고 전무님도 좀 쉬세요…….”



작아진 목소리에 뒤이어 숨소리가 느려졌다. 그제야 환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이 숨을 참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강해진이 누워 있는 곳은 그의 침대였다. 다시 말해, 그가 자신의 공간 중에서 가장 청결하게 생각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제집 침대에 타인을 눕히는 행위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호텔이면 모를까.



그러나 지금 제 침대를 침범한 강해진을 보고 있자니 그딴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강해진에게 제 침대가 불편하지는 않을지 따위나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해진은 다시 잠에 빠져드는 듯이 보였다. 저보다 작은 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오래도록 보던 환은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리고 벽에 관자놀이를 대고 졸기 시작했다.



해진이 잠깐 눈을 떴을 때, 이환은 슈트 차림 그대로 - 다행히도, 아니, 당연하게도 자신이 소똥을 던졌던 그 슈트는 아니었다 - 벽에 몸을 기댄 채 졸고 있었다.



‘거참, 편하게 누워서 자지, 궁상은…….’



아무리 보아도 이환의 모습이 좀 낯설었다. 이렇게 저답지 않은 궁상을 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뭐, 사람이 그동안 바뀌어봤자 뭐가 바뀌겠어.’



고작해야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해진은 다시 몸을 모로 하고 누워 눈을 감았다. 방이 어찌나 고요한지, 이환의 숨소리까지 들렸으나 애써 무시했다.





* * *





이왕 환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해진은 이곳에 익숙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건강은 몰라도 적응력에는 자신이 있는 해진이었다. 하지만 ‘이환과 지내는 일’은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이환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때에는 벽에 기대어서 졸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모습이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환은 잠에서 깬 해진에게 다가와 그 커다란 손을 뻗어서는 이마에 손을 얹고 체온을 체크했다.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서늘하고 커다란 손이 닿는 감촉만은 좋았다.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바로 이야기하십시오.”



속삭이듯 낮게 말하는 목소리. 제 배 속에 아이가 잘못될까 봐 그러는 것일 테지. 해진은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 속의 아이를 챙기는 그를 보며 서운해할 필요도 없었다. 서운함은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기대가 남아 있을 때에나 가지는 감정이니까.



이전에 잠깐 왔을 때도 느낀 거지만, 환의 집은 으리으리한 걸 떠나서 썰렁했다. ‘무서우면 전화하라’고 말하던 때가 떠올라서 해진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닭도리탕을 먹으면서 이환이 제게 아이를 낳아달란 말을 처음 했지. 농담인 줄만 알았는데. 개자식.



이환은 깨어난 해진에게 새 옷과 먹을 것을 갖다 주고는 필요한 것이 없는지, 가고 싶은 곳은 없는지 재차 물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원하시는 건 편하게 다 이야기하십시오. 강해진 씨가 바라는 것이라면 제힘으로 모두 해결 가능하니 말입니다.”



오만함은 여전한 걸 보니, 이환은 이환이다 싶었다.



“제가 아마존에라도 같이 가자고 하면 어떡하시려고요?”



곧바로 굳어버리는 얼굴을 보니 조금 웃겼다.



“됐어요. 그냥 먹을 거, 입을 거나 챙겨줘요. 제 블루레이랑 노트북도 돌려주시고요.”



필요한 건 그것밖에 없었다. 즐겨보는 탐험 다큐멘터리와 제 평범한 입맛에 맞는 평범한 음식.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뻔뻔한 자식이 뭐라고?



“……그걸, 다 버렸다고요?”



황당해서 되묻자 이환의 눈썹이 한 번 사납게 꿈틀거렸다.



“다시 사주면 될 것 아닙니까.”

“한정판도 있단 말이에요!”

“그것도 다시 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정말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이환은 며칠 뒤, 해진이 적어준 목록대로 약 세 박스 정도 되는 블루레이 디스크를 가지고 왔다. 한정판을 포함해서 말이다.



일전 키스틸 호텔에 갇혀 있을 때처럼, 해진은 하루 종일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나 책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곁에 이환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몇 번 보았던 박 비서라는 사람이 간혹 찾아와서 이환과 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이환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해진의 곁을 지켰다. 즉, 다시 말해 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남아도나, 했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안경을 쓴 채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계속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거참, 도망 안 간다니까 사람 말 못 믿네.’



물론 두 번이나 도망가긴 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잖은가. 저도 죽고 싶진 않았다.



억울하게도 이환은 여전히 멋있었다. 특히나 은테 안경을 끼고, 와이셔츠 소매를 반쯤 걷은 채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모습은 이전보다 더 멋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팔뚝에 돋은 힘줄과 넓은 가슴, 각진 어깨 라인을 봐도 더 이상 설레지는 않았다. 조각품이나 그림 같은 것을 보고 감탄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일하는 그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시선이 맞닿곤 했다. 그러면 이환은 늘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필요한 것 있습니까? 아니면 나가고 싶은 곳이라도?”



해진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또 ‘아마존’이라고 대답하면 질색할 거면서, 하는 생각을 속으로만 하며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각자의 하루를 보내었다.



이환은 생각보다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데이트할 때의 모습은 그가 꾸며낸 것일 테니, 아마 지금 눈앞에 있는 그의 모습이 진짜 이환에 좀 더 가까울 터다.



그리고 적어도, ‘자신을 감금할 의사는 없다’는 환의 말은 사실처럼 보였다.



하루는 낮잠을 자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맛있는 냄새에 침실에서 나가보니 환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보통 요리사가 직접 와서 밥을 해주고 가거나 완성된 요리가 트레이 같은 것에 담겨 오곤 했기 때문에 그 모습이 조금 낯설어서 주방 입구에 선 채로 등을 구경했다.



와이셔츠 위에 앞치마를 맨 등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조금씩 꿈틀거렸고, 날개뼈의 움직임은 근육의 움직임보다 조금 더 컸다.



요리를 하는 환의 등을 보던 해진은 문득 깨달았다. 이 광경이, 자신이 잠깐이나마 상상했던 그와 자신의 모습에 한없이 가깝다고.



하지만, 그럼 뭐 해. 이제는 그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데.



“일어났습니까?”



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웬일로 직접 요리를 하세요?”

“요리도 오래 하지 않으면 감을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저는 잊는 것을 싫어하고 말입니다.”



이환다운 대답이라고 해진은 생각했다.



“거기, 식탁 위에 있는 양파 좀 집어주시겠습니까?”



해진은 식탁 위에 있는 양파를 집으려 걸음을 내디뎠다. 그 때, 참기 힘들 정도로 강한 구역질이 돌연 올라왔다.



“우욱……!”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꺾자 이환이 국자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해진이 손을 내저어 보였다.



“괘, 괜찮아요. 그냥…… 우욱!”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기다리십시오. 닥터 최를 부를 테니.”



뭘 의사까지 불러. 이 자식은 입덧이 뭔지도 모르나……. 해진은 다시 올라오는 구토를 억지로 참아보려 애썼으나 결국 또 우욱, 소리를 내며 구역질을 했다.



“해진 씨!”



무슨 죽을병 걸린 사람이라도 보듯 기겁을 하며 달려온 환은 해진에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빈주먹을 쥐었다.



‘씨발, 결벽증은 여전하네.’



그럼 그렇지. 사람 안 바뀐다니까. 해진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요……. 휴지나 갖다 줘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환은 얼른 티슈와 물을 가져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손수 해진의 입가를 닦아주는 것이 아닌가. 방금 전까지는 손도 대지 못하더니. 해진은 놀라서 그의 손을 밀어내는 것도 잊었다.



“좀 괜찮습니까?”



코앞에서 묻는 얼굴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해진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괜찮아요.”



구토의 원인이 음식 냄새 때문인 것 같아 일어서서 거실로 나갔다. 주방 쪽으로 시선을 한 번 주자 환이 얼른 달려가 반쯤 열려 있던 주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환이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었다.



“닥터 최를 호출해놨습니다. 금방 올 테니 조금만 버텨보십시오.”

“그냥 입덧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 입덧인 것 같은데, 뭘 이렇게 난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구역질이 밀려드는 걸 보니 좀 심하기는 했다.



“왜 강해진 씨는 아직도 내 말을 안 듣습니까!”



양손에 각각 티슈갑과 물컵을 든 환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해진은 어이가 없어서 빤히 올려다보았다.



“지금 저한테 화내신 거예요?”



딱히 뾰족하게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미친놈이 제게 언성을 높이다니, 양심이 정말로 없는 건가 싶어 놀라움에 물은 것이었다.



환은 해진의 물음과 동시에 뻣뻣하게 굳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늘 날이 서 있던 눈꼬리가 축 처지는 게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라. 해진은 잠시 구역질도 잊고 축 처진 이환을 멍하니 구경했다. 잘난 맛에 사는 놈이 제 한 마디에 끙끙거리는 모습이 제법 봐줄 만했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다시 구토감이 밀고 올라왔다.



“우욱…….”



러그에 토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힘없는 몸을 도로 일으켜 화장실로 가려는데, 환이 그를 소파에 도로 앉혔다.



“그냥 편하게 토하십시오. 내가 치울 테니.”



……아무래도 이환이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요리하던 닭도리탕을 죄다 치우고 환기를 한참 시키고서야 해진은 겨우 구역질을 멈췄다. 금방 온다던 닥터 최가 곧바로 도착하지 않아서 환은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아무래도 잘라버리고 다른 의사를 구해야겠습니다. 이딴 식으로 환자를 능멸하는 놈은 의사 자격도 없지.”

“딱히 능멸한 것 같진 않은데요…….”



정작 토한 내용물도 없는데 힘이 다 빠져서 해진은 소파에 늘어져 누웠다. 환이 앉을 자리가 없었지만 그딴 건 해진이 알 바 아니었다.



이환은 물을 갖다 주겠다, 담요를 더 갖다 주겠다 하며 부산스레 굴었다. 날이 덥지도 않은데 담요를 몇 겹으로 쌓아주고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무언가 찾기라도 하는 듯이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해진과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했고, 말이라도 걸어보려 하면 도망치듯 주방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할 말 있어요?”



참다못한 해진이 묻자 이환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와중에도 날카로운 턱선과 긴 손가락이 제법 근사했다. 속은 몰라도 거죽은 확실히 봐줄 만했다. 그래서 저도 홀라당 넘어간 거 아니겠나.



“……앞으로 강해진 씨의 건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어쨌거나 해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낳아줄 생각이었다. 이전에야 이 미친놈이 저를 애 낳는 도구로 쓸 거라 생각해서 도망쳤지만, 이제는 어쩔 수도 없잖은가.



“물론 강해진 씨의 몸이 워낙 약하니 위험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안을 섬세하게 강구해야 하는 만큼…….”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세요.”



환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해진 씨가 원한다면, 아이를 지우는 게 어떻겠냐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가, 이해하자마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서…… 애를 지우라고요?”



죽어라 도망치다가 결국 붙잡혀서, 이제는 방법이 없으니 낳아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이 개자식이 무슨 헛소리야.



환이 가까이 다가왔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그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갑갑하단 투였다.



“강해진 씨의 몸에 무리가 간다면 고려해볼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란 뜻입니다.”

“내가 이거 때문에 인생 다 조졌는데…….”

“강해진 씨.”



말을 잘못 꺼냈음을 깨달은 환이 뒤늦게 그를 달래보려 했으나 해진의 귀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 여태 제가 한 고생은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제 와서 지우라고……. 이게 무슨 개소리야…….”



보다 못한 환이 결국 담요 밖으로 빼꼼 나와 있는 해진의 손목을 쥐었다. 다소 억센 손길에 패닉하던 해진의 눈이 날을 세웠다.



“해진 씨, 이참에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낮게 깔리는, 쥐고 있는 손만큼이나 힘 있는 목소리. 해진이 동그란 눈을 깜박, 깜박, 하며 제 앞에 몸을 낮추고 앉은 환을 마주했다.



“저는 강해진 씨에게 이제 뭔가를 강요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건강을 생각하면 고려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것뿐입니다.”



……원래 이런 눈빛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하는 말보다는 올곧기 그지없는 눈빛에 홀려 해진은 멍하니 그를 마주했다.



“지금 제게 중요한 건 아이가 아니라 강해진 씨라는 점 역시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낯선 그가 낯선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진짜 연인이었다면 달콤하기 그지없을 말이리라.



“……왜요?”



그러나 해진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축사로 저를 찾아온 뒤부터 이환은 좀 이상했다. 제 몸뚱이가 필요하니까 일단은 숙여주는가 보다, 싶은 짐작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이환이 양손을 해진의 얼굴 쪽으로 뻗어왔다. 무릎을 꿇은 채였다.



뺨을 감쌀 것처럼 다가온 환의 손은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아주 잠깐, 해진은 그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환이 다시 손을 거두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섣불리 결정할 문제가 아닌 만큼 닥터 최와 함께 상의를 해보면 좋겠군요. 저는 전적으로 강해진 씨의 의견을 따를 테니 그리 아십시오.”



오만한 말투는 여전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자세도. 그러나 어째서일까, 해진은 그의 눈빛만은 달라졌다 생각했다. 긴 속눈썹과 날이 선 눈매는 여전히 똑같은데.



“……서재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십시오.”



환은 서재로 들어갔고, 해진은 거실 소파에 누운 채로 몸을 웅크렸다.



바람이 제법 부는지 전면창 바깥으로 멀리 보이는 은행나무 가지가 크게 흔들렸다. 이 오피스텔은 주변이 본래 한적하기도 하고, 방음이 잘되어서 주변 소음은 전혀 들리질 않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었다. 담요를 여러 겹 덮어도 덥지 않고, 선선한 기운이 발끝부터 느껴지는 걸 보니 말이다.



‘처음 도망 다닐 땐 여름이었는데…….’



그동안 배 속에 생긴 무언가가 죽지 않고 여태 버텼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해진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일단은 무사히 아이를 낳는 것만 생각해야지, 싶었다.



끌어당긴 담요에서는 환의 체취가 났다. 어쩌면 여기서 오래 지내야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서재 문을 닫은 환은 의자에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괜히 말했나.’



하지만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하는 저 조그만 몸뚱이를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환은 고등 교육을 받은 성인이며, 임신을 한 오메가의 몸이 어떻게 바뀌는지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있었다. 당연히 그의 구토가 입덧으로 인한 현상임도 알았다.



그러나 알면서도 강해진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이성은 어디로 가고 그 자리를 강해진이 대신 채운 것만 같았다.



“하…….”



한숨과 조소를 섞어 내뱉으며 환은 노트북을 켰다. 메일을 확인하고, 각 부서로부터 온 보고서를 하나씩 다운로드받아 열었지만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행여 기분이라도 상할까 그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해 빌빌거리는 자신이 웃겼다. 이전에는 제가 먼저 더럽다며 닿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다.



강해진이 이대로 영영 저를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이 어린아이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미움받을 짓을 하지나 말지. 멍청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누른 환은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어쨌든 회사는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어야 했다. 강해진과 태어날지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 최상의 조건을 마련해주려면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환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고 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리조트들, 지금 비울 수 있습니까?”





* * *





닥터 최와 함께 온 산부인과 전문의는 해진의 몸을 좀 더 진찰해본 뒤 아이를 지우는 게 많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산모의 몸이 본래 건강하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는 난산이 아닌 이상에야 그냥 출산하는 게 수술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거였다.



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환은 해진에게 의견을 묻는 눈빛을 보냈다. 해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



해진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오래 뜸을 들였고, 환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냥 낳고 싶어요.”



어차피 잡혀 온 거, 해줄 거 해주고 받을 거 받자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사실…… 막상 임신을 하자 아이를 없애고 싶지 않았다.



모성애 같은 감정도 아니고,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세포 덩어리를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해진은 끝까지 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이환 때문에 망친 인생이라면, 아이를 낳는 것만이 망친 인생을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뭘 해도 위험한 몸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이를 낳다가 죽을 수 있다면, 반대로 아이를 지우다가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약해빠진 몸이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인생인데 후회 않을 만큼은 발버둥 쳐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환은 꼼꼼하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해진의 건강 상태나 산모가 주의해야 할 점, 식이관리 등을 물어보고 심지어 어떤 것은 메모까지 했다.



‘내 참, 애가 그렇게 중요한데 뭐 하러 지우니 마니 말을 한 거야?’



이렇게 호들갑을 떨 거면서 말이다. 하여튼 웃기는 놈이다.



의사가 떠나고 해진은 다시 다큐멘터리나 보려고 했다. 이환의 거실은 이제 해진의 차지가 되었고, 가장 큰 소파에 드러누워 제법 큰 볼륨으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어도 환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블루레이 플레이어 전원을 켜고 익숙하게 소파에 눕는데, 환이 가까이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뭐예요?”

“아무래도 도시는 환경이 좋지 않고, 제가 해진 씨를 케어할 시간을 좀 더 벌기 위해 이쪽으로 이동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가 내민 것은 키스틸 산하의 리조트 안내 팸플릿이었다. 해진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



“손님들 많으면 오히려 시끄러워서 정신없지 않을까요? 저야 뭐, 어디든 상관없지만…….”

“이미 다 내보냈습니다.”

“……네?”



키스틸이 운영하는 콘도와 리조트는 전국에 여러 개 있었고, 모두 성수기가 아닌 때에도 예약을 잡기 힘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거기 손님들을…… 다 내보냈다고?



“어디든지 강해진 씨가 원하는 지점으로 고르십시오. 이미 다 깨끗하게 비어 있습니다.”



‘미친놈인가…….’



여름이 이제 끝났으니 성수기는 끝났다지만, 돈 안 벌 건가, 이 사람은. 물론 키스틸 레저가 리조트만 하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있는 호텔이랑 얼마 전에는 해외에도 지점을 내긴 했다지만.



“……제가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요?”



묻자 그 선택지는 생각지 못한 모양인지 눈을 한 바퀴 데굴, 굴린 이환은 이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왜 가고 싶지 않습니까?”

“당연히 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죠. 아무리 천국이라도 내가 싫으면 그만인데.”



해진의 말에 환의 눈이 커다래졌다. 마치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뭔가를 깨달은 표정 같기도 했다.



“뭐, 그래도 지내기에 편할 것 같긴 하네요.”



기껏 손님들까지 쫓아내고 비웠다는데 안 가겠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이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호화롭게 지내보겠나 하는 생각도 사실 있었다. 기분 전환도 될 것 같고 말이다.



“배불러오면 어디 놀러 가기도 힘들긴 할 텐데. 이참에 가죠 뭐.”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돌아서며 휴대폰으로 전화를 거는 환은 어째 조금 들뜬 듯이 보였다.



해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누워 블루레이 플레이어 리모컨을 들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마카로니 펭귄이 뒤뚱거리며 걷는 장면이 82인치 화면에 가득 찼다.





* * *





며칠 지나 해진은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이환이 리조트에 가기 전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자고 해서였다.



물건이야 사람 시켜서 구매하면 되지 않나, 생각했는데 환이 그를 데려간 곳은 마트 따위가 아니라 옷을 파는 부티크였다.



“그동안 옷도 변변찮게 못 입고 다녔을 것 아닙니까. 이참에 새로 몇 벌 장만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네 돈으로 비싼 옷 잘 사 입고 다녔다고, 몇 벌은 아직도 네 방에 있는데 보지 못했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해진은 꾹 참았다.



환은 해진에게 온갖 종류의 옷을 다 입혀볼 셈인 모양이었다. 당장 입을 일이 없을 정장을 비롯해서 구두와 액세서리까지, 매장에 비치된 옷은 죄다 한 번씩 입어보게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몸 곳곳의 사이즈까지 책정했다.



“얼굴이 워낙 희셔서 뭐든 잘 어울리시네. 그런데 누구예요? 나한테 소개는 안 시켜줄 건가? 전무님이 누구 데려온 건 처음이잖아.”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숍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해진과 눈을 맞춘 채 환에게 물었다.



“……제가 보호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래 생각하던 환이 대답을 얼버무렸다. 해진은 그 대답이 어쩐지 이환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적절하다고도 생각했다. 우리는 연인도 아니고, 다만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조금 뒤틀린 사이일 뿐이니.



‘그러고 보니 계약 조항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환의 러트에 맞추어 관계를 갖는다는 조항이 문득 떠올랐다. 계약상 세 번의 성관계 중 이행이 완료된 성관계는 사실상 한 번밖에 없었다.



“코발트블루는 너무 경박해 보이고, 아무래도 이 컬러가 좋을 것 같군요.”



환은 해진이 입을 맞춤 정장을 주문하는 중이었다. 마음에 드느냐, 색은 어떤 색이 좋으냐 하는 물음은 한 번도 제게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판단으로 모든 것을 주문하는 환은 이전에 해진이 아는 독단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환은 확실히 변했다. 최근 몇 주 동안의 행보를 보면 변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이환은 해진에게 무척이나 지극정성이었다. 직접 요리를 해서 갖다 바치지를 않나, 밤새도록 제 곁을 지키지를 않나.



심지어 어느 날에는 자다 눈을 떴는데 이환의 모습이 있었다. 침대에서 - 분명 이 침대도 이환의 침대가 분명했다 - 조금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서 잠든 그의 모습은 해진에게 다소 충격을 주었다.



그 자존심 세고 답 없는 놈이 찌그러진 개뼈다귀처럼 쭈그리고 있는 꼴을 볼 때마다 해진은 조금 우스웠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도망 안 가고 애도 낳아줄 건데…….’



생각을 잇던 중, 주인과 대화를 나누던 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마침 하품을 길게 하던 해진이 입을 딱 닫았다.



“피곤합니까?”

“아뇨, 그냥 조금 졸려서…….”

“안 되겠군요. 집으로 돌아갑시다.”



괜찮은데, 하고 말을 덧붙였으나 환은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인가? 손잡는 것도 싫어해서 소독제까지 바르던 인간이 의외네, 생각하며 손을 내미는 순간 이환의 손은 그의 손바닥을 지나쳤다.



불쑥 밀고 들어온 환의 손은 그대로 해진의 등을 감쌌다. 다른 손은 해진의 허벅지 아래로 파고들었다.



“잠깐……!”



보는 눈도 개의치 않고 해진을 안아 든 환은 그대로 부티크를 나섰다. 거리로 나가자마자 해진은 제 얼굴을 가렸다. 이 자식은 수치도 모르나 봐.



“저 걸을 줄 알거든요?”

“아직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 했습니다.”



안정은 개뿔이. 이렇게 번쩍번쩍 드는 것에 놀라 애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해진을 소중한 짐짝처럼 조수석에 앉힌 환은 곧장 운전석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기사를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게 좀 의아했다.



“먹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해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먹으면 또 입덧이나 할 것 같았다. 환이 상체를 뻗어 해진의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해진의 코끝에 환의 귀가 닿을 듯이 가까웠다. 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해진이 잊고 있던, 익숙한 향이었다.



‘위스키 향…….’



한때는 이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지금은 별 감흥이 없었다. 알파의 페로몬이니 그래도 어느 정도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임신을 한 상태여서 그런가.



“피곤하면 눈을 조금 붙이십시오. 도착하면 깨우겠습니다.”



피곤하지 않다고는 했지만 막상 등받이에 머리를 대니 조금 졸린 듯하여 해진은 눈을 감았다.





집에 도착하자 환은 해진을 태웠던 것처럼 몸소 그를 안고 내렸다. 잠깐 잠들었던 해진은 “제가 걸어도 되는데…….” 웅얼거리며 환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유독 짙은 것은 알지 못했다.



해진을 안고 들어온 환은 조금 머뭇거렸다. 뭔지는 몰라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냥 내려주세요. 제가 침대까지 걸어갈게요.”



말하자 여전히 망설이던 환은 해진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하여튼 웃긴 놈이라니까.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환의 말이 그를 붙잡았다.



“……씻지 않고 그대로 잘 겁니까?”

“뭐, 더러운 곳 갔다 온 것도 아닌데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돌아보니 웬걸, 환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게 아닌가.



‘이 자식, 결벽증은 아직도 못 고쳤네.’



알겠다고, 씻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려는데 이환이 그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제가 씻겨드리겠습니다.”



혼자 씻어도 되는데…… 말할 새도 없이 환이 그를 다시 번쩍 안아 들었다. 이건 뭐, 바닥에 발을 못 딛게 할 셈인가.



환은 욕조를 몇 번이고 닦은 뒤에 물을 받으며 온도를 꼼꼼하게 맞추었다. 해진의 손을 끌고 와서 직접 물에 닿게 하며 뜨겁지는 않은지 재차 물어보았다.



해진은 좀 부끄러웠다. 이미 할 거 다 한 사이에 알몸 보이는 것쯤이야 그렇게 부끄럽지는 않지만, 그 이환이 저를 씻겨준다는 사실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도 아니고, 목욕 시중이라니…….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주시는 거예요?”



속옷까지 모두 벗은 뒤, 물에 들어가기 직전에 해진이 물었다. 손은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가리고 있었다. 이 아이 때문이겠지, 알면서도 묻는 자신이 우스웠다.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환의 대답은 의외였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왜 자꾸…….”



걷은 와이셔츠 소매 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아직도 해진에게는 낯설었다. 제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하는 저 얼굴도.



“왜 자꾸 당신에게 신경이 잔뜩 쏠려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야, 내 약한 몸으로 유산이라도 할까 걱정이 되는 것이겠지.



해진은 그리 대답하는 대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이환은 누군가를 씻기는 데에 몹시 서툴렀다. 해진은 자꾸 얼굴에 튀는 비누 거품을 열심히 손으로 닦아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를 밀치거나 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까지 노력하고 있어서였다.



콧등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보니 그가 참으로 애쓰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평생 목욕 수발을 받았으면 받았지, 절대 누굴 씻겨준 적 없을 이가 제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불안한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제 팔 위를 열심히 오가는 손목을 살짝 붙들었다.



“걱정 마세요.”



환이 무슨 말이냐는 투로 해진을 마주했다.



“아이는 무사히 제 배 속에서 나올 테니까 걱정 마시라고요.”



순간 환의 얼굴이 굳었다. 내뱉을 말을 고민하는지 입을 한 번 벌렸다가 닫은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좁은 욕조에 그의 한숨 소리가 낮게 울렸다.



“내가 지금 아이 때문에 이러는 걸로 보입니까?”

“……그럼요?”



잘난 미간을 꾸욱 구긴 그가 다시 짧게 한숨을 내뱉더니 샤워볼을 내려놓곤 손을 내밀었다.



“됐으니 나와서 앉아봐요. 다리도 닦아줄 테니.”



해진은 순순히 물에서 나와 욕조 테두리에 걸터앉았다. 언제 마련했는지 바닥에는 미끄럼방지 발판이 있었다. 온통 시커멓고 장식 하나 없이 넓기만 한 욕실에 하얀 고무판은 도통 어울리지 않는 소품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환은 놀랍게도 제 정장 바지 위에 해진의 발을 얹게 했다. 비싼 옷 다 젖을 텐데, 나중에 얼마나 저를 탓하려고 이러나 싶어 얼굴을 빤히 보는데, 신기하게도 딱히 불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사이 익숙해졌는지 환의 손길은 조금 능숙해져 있었다. 제 발을 꼼꼼하게 닦아주는 손길이 간질간질해 좋았다. 눈을 살짝 감고 온몸에 힘을 풀고 있자니 무릎까지 올라왔던 손이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멈추어버렸다.



왜 손길이 멈추었나 싶어 반쯤 감았던 눈을 떴다. 이환이 벌게진 얼굴로 손을 멈춘 채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왜요?”



해진이 묻자 심지어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그…… 나머지는 해진 씨께서 직접 닦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요, 뭐.”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지만, 원래도 이환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샤워볼을 받아 들었다. 이환은 엉거주춤하게 조금 허리를 숙인 채로 욕실을 나갔다. 수건으로 하체를 가리는 동작이 어색했다.



‘허리라도 아픈가…….’



고개를 갸웃한 해진은 그가 두고 간 샤워볼로 하체를 마저 닦았다. 밖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싶었다.





* * *





환은 해진을 데리고 약속한 리조트로 갔다. 미리 지시해둔 대로 리조트는 깨끗하고 인적 없이 조용했다.



“우와……. 영화에서 보던 대저택 같은 거 혼자 쓰는 기분이에요.”



여행사에서 일했으니 리조트에 많이 다녔지만 손님 없이 비어 있는 곳은 처음 와보는 해진이었다.



“키스틸 호텔의 음식이 입맛에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해진 씨가 특히 좋아하시던 셰프도 레스토랑에 늘 대기 중일 테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네? 저야 좋긴 한데……. 호텔은요?”

“한국에 셰프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걱정 마십시오. 호텔 레스토랑 따위보단 해진 씨 식사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해진은 속으로 경악했다. 저러다 호텔 말아먹는 거 아닌가, 뭐, 말아먹는대도 이미 평생 먹고살고도 남을 만큼의 돈이야 벌어놨겠지만.



문득 배가 조금 당기는 느낌이 들어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할 때야.’



누구 때문에 이 몸뚱이에 임신해서 개고생하는 나 자신이나 걱정해야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환이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괜찮습니까? 어디 안 좋습니까?”

“아뇨, 그냥 좀 배가 당기는 기분이…….”

“닥터 최!”



해진의 말을 듣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빽 소리 지르는 목소리에 해진은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참 내, 누가 보면 죽을병에라도 걸린 줄 알겠다.



닥터 최와 산부인과 전문의가 몸 상태를 파악한답시고 한바탕 로비에서 난리를 부리고서야 해진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환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곳곳을 꼼꼼하게 살폈다. TV 위며 창틀을 손끝으로 쓸고 확인하는 꼴이 역시 결벽증은 어디 안 간다 싶었다.



해진이 보기에는 깨끗하고 정리도 잘되어 있는데, 기어코 또 직원들을 불러다가 어디를 닦아라 무엇을 치워라 명령하는 통에 해진은 맘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저, 그냥 좀 조용히 쉬고 싶은데…….”



보다 못한 해진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그제야 직원들을 들볶는 일을 멈추었다. 키스틸 레저가 아니라 마루투어에 취직한 게 천만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리조트 생활은 호화롭고 편했다. 블루레이까지 모조리 설치해두어서 해진은 하루 종일 실컷 탐험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해진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늘어져 있는 동안 환은 노트북으로 일을 했다. 가끔 박 비서와 회의를 한다고 로비로 나가기도 했다.



문제는 입덧이었다. 리조트에 오고서도 해진의 입덧은 그치질 않았다. 일반적인 산부들은 슬슬 입덧이 끊길 시기인데, 간혹 이렇게 오래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약한 몸뚱이가 평균치에 미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해진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먹을 것만 봐도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고통은 그러려니 할 수가 없었다. 환은 그가 구역질을 할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며 의사를 욕했다.



그나마 키스틸 호텔에서 왔다는 셰프가 요리한 음식은 조금이나마 먹을 수 있었다. 새 모이만큼이긴 하지만 그거라도 못 먹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스웠다. 갇혀 있을 때 먹은 음식이 저를 살리다니.



“천천히 드십시오. 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초콜릿……. 다크 말고 밀크…….”

“알겠습니다. 바로 가져오라고 하죠.”



이환을 종처럼 부려먹는 일이 아주 조금 즐거워서, 입덧의 고통을 잊을 때도 있었다.



몸이 좀 괜찮아지면 침대에 다시 누워 다큐멘터리를 봤다. 환은 그가 걸어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도 침대에서 마셔야 했다. 산책을 하고 싶다고 하면 번쩍 안고 나가려 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감촉이 끝내주는 토퍼 위에 누워 있다 보면 위통과 식도통이 좀 나아지고 기분도 괜찮아졌다.



‘한량이 따로 없네.’



환은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는 데에만 집중하라 했지만, 그리고 먹는 게 없어서 조금만 걸어도 어지럽고 힘들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하는 것 없이 먹고 누워서 놀기만 하니 좀 면구스럽기는 했다.



‘일거리 도울 거 있음 달라고 할까…….’



급기야는 그런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어차피 자기도 여행사에서 일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회의를 하러 나간 환이 오늘따라 도통 들어오질 않고 있었다.



‘몸이 좀 안 좋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그의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기에 물었더니 감기 기운이 조금 있다고 했었다. 그러게 무리해서 일을 하더니만……. 나쁜 놈이라도 쥐꼬리만큼 걱정이 되기는 했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회의를 한답시고 창백한 안색으로 나가더니, 오후가 다 되었는데 여태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제 곁에 붙어 있지 못해서 안달인 양반이 말이다.



해진은 시간을 확인한 뒤, 보고 있던 만화책을 덮고 일어났다.



가을이 깊어가서 제법 날씨가 쌀쌀했다. 티셔츠 위에 재킷을 걸친 해진은 썰렁한 복도를 지나 로비로 내려갔다.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도 직원은 있었다.



카운터에 멍하니 앉아 있던 직원이 해진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표정이 능숙하게 바뀌는 걸 보니 제법 오래 일한 모양이었다.



“고객님, 필요하신 것 있으세요?”

“전무님 어디 가셨어요?”

“아, 이환 전무님이요? 다이닝룸 쪽으로 가신 것 같던데요.”



해진은 고맙다고 말한 뒤 발길을 돌렸다. 레스토랑 근처도 손님이 없어서 해진의 발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환의 지시가 있었는지, 다행히도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대낮인데도 불을 환하게 켜놓아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레스토랑 쉬는 날이라고 했는데.’



환의 지시 때문에 두 사람이 먹을 것을 만드느라 고생하던 셰프와 레스토랑 직원들이 오늘은 휴일을 맞이했다고 했다. 그럼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에서 이환은 뭐 하는 거람.



“전무님?”



사람이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의 한구석에 환이 앉아 있었다. 이마를 짚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아도 조금 심각해 보였다.



해진은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척을 들은 환이 뒤를 돌아보았다. 해진은 그의 안색을 보자마자 기겁했다. 눈은 퀭하고 입술은 말라붙어서, 아침보다 상태가 훨씬 더 안 좋아 보였다.



“전무님, 괜찮으세요?”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다가가려는 해진에게 환이 손을 들어 보였다. 해진은 반사적으로 멈칫했다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많이 아파 보이세요. 최 박사님 모셔 올까요?”

“오지…….”



환이 말을 잇지 못하고 미간을 구겼다. 멀리서 봐도 그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여전히 이 자식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고, 여전히 밉지만 그래도 해진은 조금 걱정되었다.



“어디가 아파요? 병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얼굴이 말이 아닌데.”



몇 걸음을 더 내디딘 해진은 저도 모르게 소매로 코를 막았다.



‘……위스키 향…….’



며칠 전에 목욕할 때 맡았던 것보다 훨씬 강한 알파 향이 온 레스토랑에 차 있음을 그제야 느꼈다. 아니, 자신이 들어와서 환의 알파 향이 짙어졌는지도 몰랐다.



그때처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임신이 안정기에 접어든 탓인지 해진의 몸도 페로몬에 반응했다. 가슴이 뛰고 아래쪽이 간질간질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해진은 그가 왜 가까이 오지 말라 했는지 깨달았다. 환은 러트를 맞은 것이었다.



환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꼴이었다. 해진은 숨을 참으며 가까이 다가섰다. 어쨌든 사람이 살고는 봐야지. 와중에도 일을 하려 했는지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저한테 팔 두르세요.”



독한 알파 향이 숨 쉴 때마다 해진을 자극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쥐려는데, 외려 해진의 손목이 환에게 붙들렸다.



환의 손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잡힌 손목이 타는 듯했다. 손을 뿌리치면 될 테지만 페로몬에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아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나는 위스키 향도 더 독해졌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환의 말에 해진이 눈을 들었다. 소름이 쭉 끼쳤다. 눈이 완전히…… 맛이 갔는데?



잡힌 손목이 당겨졌다. 해진의 상체가 환을 향해 기울었다. 얼떨결에 환의 목에 코를 묻은 해진은 코끝에 닿는 짙은 페로몬에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꼭 취한 것 같았다. 그의 페로몬이 위스키 향이라 더더욱 그리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환에게 안긴 해진은 정신없이 그에게 몸을 비비고 목에다 코끝을 비벼댔다.



환의 손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손이 뜨거워서 흠칫 놀랐다. 거부감보다는 안달이 났다.



그런 해진을 읽었는지 환의 손길도 점점 다급해졌다. 여기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리조트 내 레스토랑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



매칭률이 높다는 것은 어쩌면 단지 임신과 태아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해진은 문득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개새끼의 페로몬이 이렇게 좋을 리가 있을까.



“하아…….”



연신 들이마시기만 하던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환이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하는 동작에서 미약하게나마 자제심이 느껴졌다.



해진은 그가 저를 이곳에서 덮치기라도 할까, 여기서 옷이라도 벗길까 조금 겁이 났다. 그러나 웬걸, 환은 해진의 옷을 벗기기는커녕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그와 눈을 마주쳤다.



‘동공…… 색깔 옅다…….’



갈색 눈이 예쁘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다. 홀린 듯이 환의 두 눈을 구경하던 중 해진의 한쪽 뺨이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감싸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입술이 다가왔다.



환의 입술이 해진의 입술을 부드럽게 짓누르고 열었다. 이내 혀가 파고들어 해진의 입 안쪽을 부드럽게 훑었다.



혀와 혀가 맞부딪쳤다가 얽히고, 치열을 한껏 유린했다가, 다시 정신없이 얽혔다가, 호흡을 참아가면서 키스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해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온몸이 노곤하게 풀릴 정도가 되어서야 자신이 이환과 키스를 하고 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환의 움직임은 느리지만 집요했다. 호흡을 빼앗기는 듯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머리가 띵했다. 환이 입술을 떼었다.



“하…….”



키스가 본래 이렇게 정신이 없는 스킨십이었던가. 달뜬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데 그 숨마다 환의 알파 향이 묻어나니 딱 죽을 지경이었다.



호흡이 겨우 조금 진정되나 싶을 때 환이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잠깐……!”



해진을 안은 환은 그대로 레스토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 들어가서야 환은 해진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읍…….”



허리는 팔에 단단히 가둬지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손도 붙들렸다. 다시 입속을 파고드는 혀는 아까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뜨거웠다.



일전 이환이 러트를 겪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이 미친놈은 아랫도리를 발딱 세우고서 제 회사까지 찾아와 저를 추행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친놈인 건 마찬가지인데, 이번에는 뭐랄까…….



‘왜 이렇게 안달이 났지…….’



그땐 몸만 잔뜩 달아올라서 저 말고 어떤 오메가든 상관이 없단 투로 덤벼들었었는데, 지금은 좀 달랐다.



갈구심. 해진은 이환의 거듭된 키스에서 느껴지는 낯선 무언가를 그렇게 정의하고 싶었다.



어느새 해진은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 현관까지 오고서도 이어진 입맞춤은 침대에 도착하자 턱을 타고 몸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살갗에 부딪치는 입술도, 옷을 벗겨내는 손길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환의 아래 깔린 채로 할딱거리던 해진이 그 버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겨우 입을 열었다.



“잠, 깐만요…….”



할 거 다 해본 사이기는 해도 지금 이환은 러트가 온 알파였다. 맨 허벅지에도 느껴지는 단단한 남성에 해진은 겁부터 났다. 그와의 첫 섹스가 서럽고 아프던 기억이 있던 것도 컸다. 그런 짓거리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제 애원 따위 무시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환은 동작을 뚝 멈췄다. 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해진을 마주했다.



“저, 씻어야 할 것 같은데…….”



결벽증이 있는 놈에게는 가장 좋은 변명거리이리라. 당장 어젯밤에만 해도 리조트의 위생 상태에 대해 불쌍한 직원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해진의 마지막 기대는 부서졌다. 이환이 다시 그의 몸에 입술을 묻는 것이었다.



“흐으……!”



정말로 체취가 많이 날 텐데, 환은 그딴 것 개의치도 않는다는 투로 해진의 온몸을 물고 빨기 시작했다. 그가 알던 이환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자식이 드디어 머리가 돌아버렸나.



“그렇게 너무, 읏, 세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해진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웅얼거리며 환을 억지로 밀치려 했다. 그러나 환은 꿈쩍도 않았다.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던 환의 입술은 심지어 허벅지 안쪽과 해진의 은밀한 곳까지 스쳤다. 발기한 페니스에 환의 곧은 콧대가 스쳤을 때에 해진은 기겁했다.



“지금 어디 입을 대는 거예요!”



진짜 미쳤나 봐. 그러거나 말거나 환은 그의 페니스 주변에 꼼꼼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심지어 냄새를 맡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기까지 했다. 해진은 경악했다.



“전무님…….”



하체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있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자 환이 그제야 입술을 떼고 상체를 위로 가져왔다.



눈은 여전히 퀭하고 입술은 말라붙어 꼴이 말이 아닌데도 이환은 여전히 잘생겨 보였다. 해진은 그 잘난 모습에 감동하기보다는 조금 억울했다. 왜 이 자식은 러트 중에도 잘났을까.



“안 됩니까?”



다 갈라진 목소리로 환이 물었다.



“당신 몸 구석구석 죄다 입 맞추고 싶은데.”



길고 예쁜 손이 해진의 가슴 위를 쓸었다. 온 신경이 쏠려서 손이 아니라 짐승의 꺼슬꺼슬한 혀끝이 스치는 것 같았다.



“입 맞추게 해줘.”



제게 부탁하는 환의 얼굴은 다소 무고해 보였다. 해진은 그래서 화가 났다.



“제발…….”



덧붙이는 말이 절절했다. 언제 또 이환이 제게 비는 소리를 들어보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갈라진 채로 내뱉는 환의 저음은 제법 섹시하게 들렸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 때문인지도 몰랐다. 혹은 제 몸을 훑어내리는 길고 곧은 손가락의 감촉 때문인지도.



환이 그의 손을 쥐고 입에 가져갔다. 그리곤 해진의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훑듯이 스쳤다. 쩍쩍 갈라지고 다 말라붙은 입술 같은데, 이상하게도 감촉만은 끝내주게 부드러웠다.



멍하니 올려다보는 해진의 시선을 허락으로 읽었는지, 환은 다시 그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깨와 가슴, 옆구리, 그리고 어떤 곳은 유독 오래 머물렀다.



환은 해진의 몸 곳곳에다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해진은 이제 그에게서 벗어나길 포기했다. 아래 깔린 채 몸을 바르작거리며 차라리 코끝에 닿는 페로몬을 한껏 들이마셨다.



“흐으…….”



이전에는 애무고 뭐고 무식하게 들이박기 바쁘던 양반이,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입질을 해댈까.



환의 입술은 해진의 허벅지 사이를 공들여 애무한 뒤, 천천히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손으로는 해진의 허벅지를 슬슬 쓸며 혀끝으로는 그의 다리 사이, 고환 아래 회음부를 핥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혀끝은커녕, 제 손길도 씻을 때 말고는 닿지 않는 곳이었다. 씻지도 않은 몸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는 것도 모자라서 이환은 이제 그의 아래쪽을 핥기 시작했다.



억울한 점이 있다면 그는 손가락만큼이나 혀도 끝내주게 잘 쓴다는 점이었다. 회음을 정성 들여 핥는 촉촉하고 따뜻한 감촉에 해진은 조금씩 몸이 녹았다.



“으응, 으…….”



몸이 꼬이고 민망한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느새 흐트러진 환의 포마드 헤어가 흘러내려 해진의 페니스를 간지럽혔다.



해진은 상체를 살짝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회음에서 고환을 타고 올라온 입술이 결국 페니스를 답삭 물었다.



“흡……!”



혓바닥이 기둥을 부드럽게 얽고 핥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성기만 물렸는데도 온몸이 다 그의 입속에서 녹는 것만 같았다.



이환은 혀끝을 세워 해진의 기둥을 긁듯이 핥아 올리고, 입천장에 힘을 주어 귀두 부분을 강하게 압박했다가, 다시 입 전체를 써서 페니스 전체를 자극시켰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에 싸면 난리를 부리겠지. 욕을 할지도 모른다. 해진은 이 개자식에게 엿을 먹이고 싶기도 했지만, 이 개자식에게서 욕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입에다 쌀 마음은 없었다.



“처, 천천히…….”



애원했지만 환의 혀는 더 사납게 해진의 것을 빨아댔다. 정말로 사정할 것 같았다. 해진은 급기야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콩콩 때리기 시작했다. 환은 꿈쩍도 않았다.



“아, 으…….”



해진은 이제 정말로 참기가 힘들었다. 쾌감이 아래쪽으로 쏠려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정말 빼내야 하는데…… 안달을 내던 중, 급기야 발기한 성기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사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으읏! 흡! 흐으……!”



남의 입에 정액을 싸본 적은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그 상대가 웬수 같은 결벽증 놈이다. 분명히 욕을 퍼붓고 난리를 부리겠지. 그땐 제 몸을 만진 장갑까지 버리고 갔지 않은가.



각오하며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그러나 이환은 욕을 하지도, 난리를 부리지도 않았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다.



‘……꿀꺽?’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몇 초의 텀이 지나고야 깨달았다. 해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미, 미쳤어요? 그걸 왜 먹어요?”

“……입에 들어와서……. 딱히 맛은 없군요.”



환이 여상한 투로 입가를 닦았다.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해진은 그가 완전히 맛이 간 게 아닐까 싶었다. 제가 아는 이환이라면 절대 제 정액을 마실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뭐, 단맛이라도 나는 줄 알았어요? 정액인데.”



놀란 마음을 억누르며 겨우 말했다. 환이 그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서 자세를 고쳤다.



“해진 씨에게서는 단맛이 나니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환이 좀 미친 것 같았다. 원래도 미친놈이지만, 지금은 좀 다른 의미로…….



“아……!”



해진은 또 한 번 경악했다. 그가 제 구멍에 덥석 입술을 가져와서였다.



“흣, 잠깐……!”



환의 입술이 꼭 닫힌, 그러나 젖기 시작한 구멍을 오물거리며 애무하기 시작했다. 해진은 쾌감과 수치심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누군가가 제 음부에 이렇게 입술을 묻은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이환이.



환이 닫힌 구멍 위로 정성스레 입을 맞추길 여러 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만 일어나달라고 말하려 상체를 든 해진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만 치켜뜬 채로 구멍에 입술을 비비는 이환의 갈색 눈과 마주치자 몸이 굳었다. 완전히 맛이 간 눈동자에서 탐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아…….”



그가 해진의 아랫도리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마치 꽃에 코를 파묻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없이 입술과 코끝을 그의 음부에 비벼댔다. 쉴 새 없이 문질러지는 콧날과 입술 때문에 해진도 잔뜩 흥분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해진의 냄새를 들이마시더니 살짝 입술을 떼고 중얼거리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거 봐, 여기서도…… 단내 나잖아.”



낮은 목소리에 숨결이 구멍에 간질간질하게 닿았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음 순간, 해진은 제 아래로 무언가가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이환이 그의 아래에 혀를 밀어 넣기 시작한 것이었다.



“읏……!”



이미 젖은 아래쪽으로 혀끝이 파고들어 조금씩 안을 녹여갔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해진의 몸도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이환의 혀는 무척이나 꼼꼼했다. 제 냄새가 아주 대단한 향기라도 되는 듯이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헐떡거리는 숨결이 아래쪽으로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감각만은 선명할 수가 있을까. 제 아래쪽을 핥고 빠는 환의 부산스러운 숨결이, 미친 듯이 파고들어 안쪽을 헤집는 혀끝이 모두 선명하게 느껴졌다.



“으응, 후으으…….”



해진의 신음 역시 조금씩 짙어져 콧소리를 내었다.



환에게서 제대로 애무를 받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제 밑에 코를 박고 미친 듯이 핥고 빠는 이걸 애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아, 미치겠군…….”



미치겠는 건 내가 미치겠다, 이 자식아. 기분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아랫도리가 죄다 먹히는 것 같아서 창피하고 부담스러웠다. 특히 냄새에 집착하는 게…….



‘왜 이렇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래……. 창피해 죽겠네.’



이런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은 한참 더 코를 묻고서야 얼굴을 떼었다. 얼마나 숨을 들이마셨는지 잘난 얼굴이 시뻘겠다.



‘이제…… 끝난 건가?’



그러나 뒤이어 제 두 다리를 활짝 벌리는 손길에 해진은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깨달았다. 환이 그제야 와이셔츠와 바지, 속옷을 차례대로 벗어 던졌다.



상대는 러트가 온 알파였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자 제 위에 올라탄 이환이 사람보다는 짐승처럼 보였다.



이 인간이 정말로 제 몸에 닿기도 싫어 진저리 치던 놈이 맞나.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을 하고 저를 내려다보는 표정에서 갈구심이 뚝뚝 묻어나는 게, 당장이라도 뭔가를 빌 것 같았다.



환의 손이 그의 아랫배를 살짝 쓸었다.



“안정기에 들었으니 성관계를 가져도 된다고는 했다만…….”



하아, 하고 숨을 내뱉은 환은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래도 네 몸을 생각하면 나 하고 싶은 대로 박아댈 순 없겠지.”



아뇨, 괜찮은데. 해진은 하마터면 그리 대답할 뻔했다. 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에 이미 몸이 절어버린 것 같았다.



환은 바지 지퍼를 내리고 마침내 거대한 성기를 꺼냈다. 해진은 몽둥이 같은 그것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공포와 기대감이 동시에 들었다. 어쨌거나 그는 오메가였고, 발정이 온 알파를 보고 반응하는 것은 당연했다.



흠뻑 젖은 입구에 환의 성기가 제대로 자리했다. 이전과 달리 환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의 입구를 성기 끝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는 동작은 가히 정성스럽기까지 했다.



바짝 안달이 난 성기는 입구를 뭉근하게 밀고 들어왔다가, 다시 슬며시 나왔다가, 또 안을 느리게 침범하며 간질간질하게 성감을 키웠다. 귀두 끝이 스칠 때마다 소름이 쭉쭉 끼치도록 좋았다.



해진은 반쯤 들어온 그의 성기를 저도 모르게 조여댔다. 이것을 당장 제 몸 깊숙이 넣고 흔들어주었으면 했다. 젖은 구멍에서는 벌써 애액이 흥건하게 흘러나와 환의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굵직한 거미줄을 만들어냈다.



“흐으으…….”



애원하는 티를 내며 허리를 조금 들어 올렸다. 각도가 달라지니 기분이 좋아서 아래쪽이 더 꽉 조여들었다.



“하아, 해진 씨.”



이환의 미간이 구겨졌다. 입술을 씹었다가 놓는 동작에서 조급함이 묻어났다.



이전에 급하게 하던 섹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러트를 맞은 환은 페로몬을 아낌없이 내뿜었고, 해진은 그것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잔뜩 흥분했다.



아래쪽이 어찌나 흠뻑 젖었는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찌꺽거리는 소리가 아주 크게 났다. 애액이 회음을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리는 것도 느껴졌다. 귀두로 입구를 자극시키는 것뿐인데도 절정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환이 속도를 조금씩 붙였다. 해진의 몸이 조금씩 더 격하게 흔들렸다. 살살 한다고 하지 않았나……. 달뜬 눈으로 위를 보자 초점 없는 환의 눈과 마주쳤다. ……그냥 맛이 갔구나.



느릿하게 귀두 쪽만 들어갔다가 나오던 기둥도 이제 거의 절반 정도를 들이밀었다가 나오길 반복했다. 젖은 소리는 점점 더 짙어졌다. 해진은 당장 절정에 다다를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았다.



“흐읏, 으응……. 아……! 아!”



느긋함이 조금씩 사라지고 동작이 조급해짐에 따라 해진의 신음도 진득해졌다. 그는 자신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으으응……. 흐읏! 아아! 천, 천히!”



이 빌어먹을 알파 놈은 역시 성격이 이상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 천천히 하라고 하면 더 빨리 움직이지.



이환은 해진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든 채 빠르게 허리를 치댔다. 절반쯤 드나드는 듯하던 페니스도 이제 거의 끝까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버겁고, 어지럽고, 눈앞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 산만했다. 온갖 감각이 아래쪽에서 들끓었다. 해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게 일반적인 오메가와 알파의 정상적인 섹스임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조금 서러웠다. 이 개자식이 그때는 저를 얼마나 막 대했는지 실감이 나서였다.



그리고…… 변덕이 일면 다시 제게 그딴 식으로 대하겠지.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감각이 몇 배는 더 강해진 듯했다.



해진은 언제 이 미친놈이 제 좋을 대로 저를 다룰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제 몸을 물건처럼 내던지고 더럽다며 욕을 할 것 같았다.



와중에도 그의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는 자신이 싫었다.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르고 머리털이 쭈뼛하게 설 정도로 기분이 좋은 게 난감할 정도였다.



그가 또 저를 함부로 다룰까 두려워하는 것과 그의 페로몬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환은 끝내주게 섹스를 잘했다. 물론 다른 사람과 해본 적이 없으니 비교 대상이 있지는 않지만.



한참 움직이던 이환이 돌연 허리를 멈췄다. 후우, 낮게 내뱉는 숨소리가 침대를 타고 해진의 등까지 저릿하게 울렸다.



“……자꾸 이렇게 조이면…… 못 참는데.”



내가…… 조였다고……? 아니, 애초에 그쪽이 참긴 뭘 참았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안쪽으로 뭉근한 쾌감이 들이닥쳤다.



“흐윽……!”



이환의 페니스가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와중에도 쑤셔 박는 동작에서 그가 아직 자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니, 그는 거의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제 양쪽 허벅지를 붙든 손길과 꾹 감았다가 뜨는 눈, 구겨진 미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안쪽을 부드럽게 긁으며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오고, 그 잠깐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곧바로 다시 들어오며 이환의 페니스는 해진의 안쪽을 연신 자극했다.



환의 시선이 해진의 몸을 훑었다. 그가 제 아랫배를 쓸어 손끝을 들어 보이고서야 해진은 자신이 어느새 사정한 것을 깨달았다.



배를 적신 정액이 환에게도 일종의 기폭제가 된 모양이었다. 환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단단한 근육이 자리한 가슴이 곧게 펴졌다.



숨을 들이마신 환은 그대로 몸을 조금 떨었다. 역시 몸 관리는 끝내주게 잘했다고, 와중에도 해진은 그의 상체를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그 감탄은 길지 못했다. 환이 제 허리 아래 팔을 넣더니 상체를 일으킨 것이었다. 졸지에 삽입 각도가 달라지며 안쪽으로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흡…….”



해진의 몸이 환의 무릎 위에 안착했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른 해진은 조금 겁이 났다. 이제 저번처럼 멋대로 굴려고 하는 걸까…….



환의 손이 제 뒤통수에 닿았을 때, 해진은 그가 제 머리채라도 잡을까 흠칫 떨었다. 그러나 웬걸, 커다란 손바닥은 여린 식물을 감싸는 듯이 부드럽게 해진의 머리통을 끌어당겨 환의 어깨에 안착하게 했다.



뒤이어 해진의 귓바퀴에 환의 숨소리가 닿았다.



“……하, 미치겠네.”



아까부터 뭐가 자꾸 미치겠다는 건지. 섹스하다 미치는 사람은 웬만해선 없다고 말하려던 해진은 또 한 번 놀랐다. 제 어깨를 감싼 환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무님?”



살짝 불러봤지만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해진의 어깨를 붙든 채 아래서 위로 천천히 올려 치기 시작했다. 다시 전무님, 하고 부르고 싶은데 말은 나오지 않고 신음만 연신 터졌다.



“흑, 으읏……!”



환은 해진의 팔뚝을 연신 쥐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가 해진이 아픈 티를 내기도 전에 제풀에 놀라 화들짝 놓았다가, 다시 못 참겠다는 듯이 꽉 쥐길 반복하는 손길에서 갈구심이 묻어났다.



“……싶어…….”



환이 그의 귀에 무어라 다시 속삭였다.



“흣……. 네……?”

“더 세게…… 박고 싶어…….”



숨소리 섞인 목소리는 어쩐지 인내심이 바닥난 듯이 들렸다. 해진을 안은 채로 밑에서 위로 올려 치는 동작은 사실 아까보다 훨씬 느리기는 했다. 정말로 참고 있는 건가, 하지만 안정기라서 괜찮다고 하긴 했는데…….



환이 그의 상체를 감싸듯 안고는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와중에도 허리는 계속 뭉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해진의 뺨과 목에 연신 입을 맞추며 조금씩 허리 움직임 속도를 더해 갔다. 딱딱해진 유두에 환의 손가락이 닿았다. 검지와 엄지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굴리자 해진은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며 흥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환의 동작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해진은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이 자식, 드디어 고삐를 놓았구나……. 그럼 그렇지. 제 팔자를 탓하며 밀려오는 쾌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해진의 두려움과 달리 퍽, 퍽,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박아대는 동작은 다섯 번을 이어지지 않고 뚝 멈췄다.



왜 갑자기 멈춘 거지? 해진은 감았던 눈을 뜨고 위를 보았다. 환의 얼굴이 제 코앞에 있었다. 끝내주게 잘나긴 잘난 얼굴을 보자 괜히 더 억울해졌다.



그리고 환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을 내린 채 해진의 몸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씨발…….”



돌연 욕을 내뱉은 환이 다시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해진이 숨을 들이마셨다.



“흡……!”



이번에는 여남은 번 이어졌다. 그 짧은 여남은 번의 동작 동안 해진의 몸은 누가 쥐고 뒤흔드는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쾌감이 온몸을 꿰뚫을 듯이 사납게 치솟았다.



“하아, 하…….”



다시 뚝, 동작을 멈춘 환이 몸 전체를 부르르 떨었다. 해진은 반쯤 반사적으로 아래를 조였다. 고작 여남은 번의 움직임으로 해진은 한 번 더 사정했다. 그 사실이 해진의 자존심을 조금 무너뜨렸다.



움직임을 멈춘 것을 보니 환 역시 사정하려나, 싶었는데 환의 성기는 사정을 하는 대신 부풀기 시작했다.



“잠, 깐만요, 흣, 전무님……. 이게 무슨…….”



해진은 사실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환이 노팅을 시작한 것이었다.



후우, 들이마시는지 내뱉는지 구분되지 않는 숨소리가 해진의 귓가를 뜨겁게 했다. 해진은 제 안에서 부풀기 시작하는 살덩어리를 느끼며 거의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아, 으…….”

“……잠시만…… 후, 미안합니다…….”



안쪽의 압박감이 점점 더 강해졌다. 살을 찢어버릴 기세로 커지기 시작한 환의 성기는 해진의 안에서 조금씩 움찔, 움찔, 떨렸다. 환의 몸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미안합, 니다. 잠깐, 만, 이대로…….”



미안하면 다냐, 이 자식아.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데 그보다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 더 컸다. 아프기도 아프거니와 제 밑에서 커지고 있는 그의 성기가 무서웠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환은 움직이지는 않았다. 다만 온몸을 떨며 해진의 안에서 버티고 있었다. 연신 움찔거리는 걸 보니 참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니, 거의 필사적인 인내심을 짜내고 있는 듯했다.



환의 성기는 조금씩 더 커졌다. 느낌 탓인지 몰라도 더 딱딱해지는 듯도 했다. 아래를 채운 어마어마한 감각에 결국 해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흐윽, 아, 아파요…….”



울먹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환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얼른 해진을 마주하곤 커다란 손바닥으로 뺨을 감쌌다. 어떻게 달래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눈치 없는 아래쪽이 더 부풀었다. 해진은 더 울상을 지었다.



“아, 흑……. 아파…….”



사실 아픈 것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었다. 쾌감이 꽉 들어차서 통증보다는 기분 좋은 게 더 컸다.



그러나 두려움은 별개였다. 일전에 이환이 노팅을 할 뻔하다가 커진 성기를 억지로 빼낸 기억이 있어서 더 겁이 나는 것도 있었다.



이환은 어쩔 줄을 모르며 해진의 몸 곳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지금 거기가 문제가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당황하는 이환이 해진은 조금 우스웠다.



“……미안합니다. 지금, 후, 빼겠습니다.”

“네? 잠깐만요……! 아악!”



안에서 잔뜩 커진 것을 빼려 하니 이번에는 정말로 아팠다. 환은 동작을 멈추고 다시 쩔쩔맸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와중에도 성기는 더 커지고 있었다. 해진은 이제 정말로 울고 싶었다. 흉흉하게 아래를 채운 이환의 성기도 야속하고, 이걸 무서워하는 자신도 우스웠다.



움직이지도, 그렇다고 커진 것을 빼내지도 못한 채 이환은 심호흡을 한 번 길게 하곤 코앞에 있는 해진을 마주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해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해진 씨.”

“흐윽…….”



그리고 해진의 코끝에 쪽, 입을 맞추었다.



“나는 해진 씨를 아프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개소리라고 치부했을 말일 텐데, 진중하기 그지없는 눈을 마주하니 진심으로 들렸다. 해진은 젖은 눈을 깜박였다. 환의 손이 그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가지고, 힘을 조금만 빼봐요.”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무식하게 커다란 걸 쑤셔 박고는 크기까지 부풀려 놓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해진은 뾰로통하게 입을 다물었다.



환이 그의 뺨과 목에 다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느린 동작이지만 무척 섬세했다. 온몸이 녹는 것 같은 애무였다.



일전의 섹스는 해진에게 수치심과 우울만을 주었다. 아무리 성에 무지한 해진이지만, 이환이 저를 함부로 다루었다는 사실 정도야 쉽게 알 수 있었다.



이환에게 제 존재는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냥,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되는 오메가. 그 이상은 아니리라 믿었다.



그래서 해진은 지금 더 화가 났다. 제게 다정한 애무를 퍼붓는 이환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할 줄 알면서 하지 않았던 거니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으면서 제게 상처를 주었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났다. 그가 제게 다정하다는 사실이 너무 서럽고 슬펐다. 진작 이렇게 해주지. 상처는 줄 대로 다 줘놓고.



해진의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고 환이 다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입술을 맞대었다.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혀를 섞으며 환은 해진의 어깨와 팔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울먹거리는 해진이 숨이 차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듯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맞붙이길 반복했다.



거대하게 커진 이환의 성기가 부담스럽던 것도 잠시, 해진의 아래쪽이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아래에서 환이 부푼 성기를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동작 하나마다 정성을 들여 움직였다.



밀착한 몸 사이로 무언가가 전해지는 듯했다. 해진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태까지 환이 제게 주었던 모멸감과 상처와는 완전히 다른 것임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환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저 또한 이환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말로 전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제게 흘러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갈색 눈이 코앞에서 해진을 마주하곤 눈빛의 깊이를 더했다. 이환이 움직임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그는 몇 번이나 제게 미안하다 말했다. 듣기 싫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축사에서 만난 이후로 그의 사과는 모두 진심으로 들렸다.



그리고 지금은 더더욱.



해진은 괜찮다거나 됐다고 말하는 대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성급하지 않은 키스가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환이 다시 느리게 움직였다. 행여 해진을 다치게 할까, 그의 양손은 해진을 만지지 못하고 시트만 찢어버릴 듯이 말아 쥐었다.



노팅한 성기가 마침내 그의 깊은 곳에 정액을 뿌렸고 그와 비슷한 때에 해진도 한 번 더 사정했다.



환은 사정하고서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짙은 키스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섹스가 끝난 뒤 노곤하게 늘어진 해진을 이환이 안아 들었다. 욕실로 들어가는 그에게 매달린 채 해진은 칭얼거렸다.



“그냥 자고 싶은데…….”

“말이 됩니까? 온갖 체액을 다 뒤집어쓰고 그 꼴로 잔다고요?”



내 정액 먹은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하여튼 저놈의 결벽증은……. 해진은 꿍얼거리면서도 딱히 환을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환은 욕조 물을 틀고 해진을 안에 앉혀준 뒤 목욕 용품을 꺼내었다. 이번에도 저만 씻겨주고 가버릴 기세이기에 해진은 욕조 한쪽으로 비켜 앉으며 물을 가리켰다.



“그냥 같이 들어와요. 욕조도 큰데.”



설마 결벽증 때문에 이것도 싫어하려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이환은 조금 망설이다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나란히 겹쳐 앉았다. 해진이 그의 어깨에 뒤통수를 대고 노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감싸는 온수의 감촉도 좋았고, 뒤에 닿는 환의 몸도 좋았다.



문득 해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환의 벗은 상체가 물에 반쯤 잠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알몸을 제대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떡 벌어진 가슴과 단단해 보이는 어깨가 탐이 났다.



기대었던 상체를 아예 돌린 채 대놓고 몸을 감상하자 이환이 그를 보며 픽, 웃었다.



“내 몸이 그렇게 마음에 듭니까?”

“……뭐, 객관적으로 보기 좋은 몸이기는 하네요.”



저 몸에 짓눌려보고 싶다며 몰래 야한 상상까지 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보기 좋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가슴과 어깨를 찬찬히 훑자 이환이 욕조 옆을 쥐고 일어섰다.



“마음껏 감상하시죠, 그럼.”

“아니, 그렇다고 일어날 것까진 없는데, 어우, 부담스럽게…….”



물이 좌악, 쏟아지며 이환의 젖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가운데에서 자기주장을 펼치는 우람한 살덩어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난감하면서도 끝내주는 몸매가 눈앞에 있으니 또 시선을 떼기가 어려워 해진의 두 눈이 요리조리 바삐 굴러갔다.



“그건 왜 또 섰는데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지금 해진 씨가 쳐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쳐다보기 전부터 서 있었거든요?”



투덜거리면서도 해진은 여전히 환의 몸에서 눈을 떼지는 못했다. 복근은 늘씬하고 허벅지는 근육 사이마다 골이 패서 군살이 하나도 없었으며, 각진 무릎마저 깎은 듯이 멋있었다.



흠잡을 곳이 없는 몸이었다. 확실히 제가 보는 눈은 있었구나, 싶어 뿌듯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정신없이 몸을 구경하느라 해진은 이환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슬그머니 몸을 다시 접으며 욕조로 들어왔을 때는 조금 아쉬움마저 느꼈다.



두 사람은 마주 본 채로 잠시 침묵했다. 습기와 열기가 찬 욕조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단둘이 있는 때야 흔하지만 이렇게 지척에서 마주 본 채로 침묵하고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통은 이환이 노트북을 붙들고 있거나, 해진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으니.



해진은 어색함을 무마하려 헛기침을 했다.



“전에 잡지에서 봤는데요, 알파와 오메가 커플 사이에서 구강성교를 경험해본 사람은 63퍼센트밖에 안 된대요.”

“의외군요.”



기껏 생각난 게 섹스와 관련된 이야기라서 좀 난감했는데, 다행히도 환은 무던히 대답해주었다.



“그쵸? 생각보다 더 많을…….”

“더 적을 줄 알았는데.”



뒤이은 말이 엇갈려 환과 해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마주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더러운 오메가 구멍에다 입을 대고 빤단 말입니까.”



정색하며 하는 말에 해진은 어이가 없었다.



“……아까 제 거 빠셨잖아요. 제 거도 더러워요?”

“해진 씨는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요?”



보나 마나 대답 못 하겠지, 했는데 이환은 특유의 뻔뻔한 표정을 하곤 느긋한 동작으로 욕조에 등을 기대곤 잘난 저음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강해진 씨는 내가 선택한 오메가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보통 사람이 아니죠. 일반적인 오메가가 내 짝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와, 정말 개소리를 그럴싸하게 한다, 생각하며 해진은 혀를 내둘렀다. 생각이 얼굴로 드러났을 텐데도 이환은 해진의 반응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투였다.



“그러니 강해진 씨도 좀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 같은 알파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매칭률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말입니다.”



심지어 자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해진은 여전히 그가 개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조금 눅눅해지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오메가가 아니다’라는 말 때문일까.



저는 특별할 것 없는 생을 여태 지내왔다. 고아라고는 하지만 머리가 굵어서 부모를 잃었고, 이후로는 성인답게 제 살길 찾아서 나름대로 잘 지냈다. 이환이 아니었더라도 모아둔 돈도 소액이나마 있고 말이다.



그렇게 평범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이환을 만났고, 여기까지 왔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이환과 매칭률이 높은 오메가이건 아니건 간에 여전히 강해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달라진 건 이환과 저의 관계뿐이지, 해진 자신이 아니었다.



혼자 고개를 숙인 채 생각을 잇는 중, 환의 손이 뻗어와 그의 손목을 쥐었다.



“물론 당신의 그 가치가 내가 한 잘못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해진은 고개를 들었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이환의 갈색 눈이 저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맞닿는 순간 놀랍게도 모든 생각이 다 지워졌다.



이렇게 올곧은 시선을 그가 준 적이 있던가. 주변에 저만 존재한다는 듯이 다정하고, 따뜻한…….



환의 다른 손이 해진의 턱을 쥐었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맞닿았다. 강압적이지도 일방적이지도 않은 키스가 이어졌다.



조심스러운 환의 숨결을 느끼며 해진은 문득 이 입맞춤이 꼭 첫키스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상상했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첫키스 말이다.





* * *





리조트 생활은 편하고 아늑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늦어도 한 시간 안에는 코앞에 대령이 되었고 전면창 밖으로는 가을을 맞아 화려해진 숲이 펼쳐져 있었다.



해진은 숲에서 뛰어놀고 싶었지만 환이 극구 반대했다.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는 환이었지만 숲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절대 금지했다.



“이제 안정기에 들어서기도 했고, 운동도 적당히 해줘야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위험천만한 숲을 들쑤시는 게 어째서 운동입니까? 리조트 내부 공원을 산책하는 것으로도 운동은 충분합니다.”

“아, 그 쥐똥만 한 공원…….”



시큰둥하게 맞받아치는데 순간 환의 표정이 굳었다. ‘쥐똥만 하다’는 말에 상처를 받은 모양인지 그답지 않게 눈썹까지 늘어뜨리며 시선을 떨구는 게 아닌가.



“아, 알았어요. 그럼 대신 앞으로 내가 내킬 때 그냥 혼자 산책할래요. 전무님 일도 많은데 매번 방해하고 싶지 않거든요.”

“하지만…….”



뭐라 말을 덧붙이려는 환의 얼굴에 대고 손을 마구 휘저었다.



“끝, 끝! 이걸로 합의 본 거예요?”



혼자 마무리를 지은 해진은 빠른 걸음으로 토도도, 침대로 달려가더니 이불 속에 쏙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환은 어쩔 수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여전히 입덧 때문에 고생하고 있긴 해도 해진은 건강했다. 아이도 문제없이 자라고 있다고 했다. 리조트에는 산모에게 부족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걱정거리도 없어야 마땅하다만, 환은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축사에서 그를 찾아내어 데려온 이후, 두 사람의 생활은 얼핏 보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본인이 강해진을 제 호텔에 감금하기 전 연인 행세를 하던 예전 말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 점이 찌꺼기처럼 둘 사이에 고여 있었다. 아니, 어쩌면 환에게만 고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심을 다해 그에게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리고 해진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에게 ‘괜찮다’, ‘용서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사과한다고 해서 강해진이 반드시 받아줄 의무는 없다.’



환은 알고 있었다. 제 잘못은 잘못이고, 해진이 저를 이제 와서 받아들이는 게 사과보다 더 어려운 일인 줄도 이제는 알았다.



하지만 욕심이 자꾸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을 하다가 몇 번이고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만 마주치지 않는 눈길을 느낄 때, 혹은 화상회의 때문에 오랫동안 곁을 비웠다가 돌아와도 마치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것과 마찬가지로 저를 대할 때.



강해진은 더 이상 제가 좋아서 헤실거리며 웃던 오메가가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제게 있어 약자가 아니었다. 강해진에게는 약점이 없었다.



그리고 이환의 약점은 어느새 강해진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강해진의 전부가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주 조금이나마 지분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그것조차도 욕심일까.



강해진을 이전처럼 되돌릴 수 없단 사실을 알았다. 둘의 관계 역시 되돌아가진 않을 터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 개인적인 욕심일 뿐인데, 알면서도 욕심을 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꼭 투정하는 어린애 같군.’



부모는 어릴 때 잃었고 외조모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애정다운 애정을 준 적이 없으므로, 이환은 누군가에게서 애정, 혹은 정을 갈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가 낯설기도 했다. 강해진의 눈길 한 번, 손짓 한 번에 애가 타는 자신이.



‘아니, 어린애가 아니라 그냥 개인가.’



아니다, 자신이 개라면 강해진이 예뻐해주기라도 하겠지……. 그는 마음씨가 고운 만큼 동물도 좋아하니까…….



그래,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강해진이 키우는 개가 되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 시시때때로 강해진이 저를 쓰다듬고 예뻐해줄 테니.



환은 침대 쪽을 흘끔 바라보며 노트북을 덮었다. 웅크리고 누운 강해진이 침대 위 자그마한 언덕처럼 솟아 있었다.



박 비서가 간부 화상회의에 참석하라고 닦달한 지 벌써 20분이 지났으니 이제 슬슬 레스토랑으로 내려가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저 사랑스러운 것을 두고 말이다.



방에서 나가기 싫다……. 출근하기 싫어하는 직원들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환은 드레스룸에서 화상회의에 참석하기 적당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파우치에 넣어 옆구리에 낀 뒤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동그랗게 솟은 해진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잠깐 회의하러 다녀오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직원들을 부르세요.”



야무진 강해진은 제가 없어도 알아서 직원들을 잘 부려먹었다. 먹고 싶은 것을 요구하고, 필요한 것을 갖다 달라고 하고 말이다. 물론 고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먹다가 갑자기 입덧이 돋아 웩웩거릴 때마다 안타까워서 미쳐버릴 지경이지만.



환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 방을 나섰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 사람 없는 레스토랑에 도착한 환은 노트북을 켜고 화상회의에 참석했다.



한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회의는 두 시간을 넘겼다. 회의에 잔뜩 집중하다 노트북을 닫고 나서야 환은 해진이 그리웠다.



나가기 전, 레스토랑 주방 한구석에서 할 일 없이 졸고 있는 셰프에게 해진이 좋아할 간식을 몇 가지 주문한 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평소처럼 해진이 방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해진 씨? 욕실에 계십니까?”



욕실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문을 살짝 밀어보니 안은 텅 비고 불이 꺼져 있었다.



‘……어디 갔지?’



로비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보다가 제 모습을 발견하곤 벌떡 일어난 프런트 직원에게 다가갔다.



“강해진 씨 어디로 갔는지 압니까?”

“좀 전에 공원 쪽으로 가셨습니다.”



아, 산책을 간 모양이었다. 혼자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하더니, 그렇게 나랑 걷는 게 싫었나. 입이 쓴 것을 느끼며 그는 공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공원에 들어서도 해진의 모습이 곧바로 보이질 않았다. 환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 또…….’



또 그가 도망쳤을까 봐, 저 숲으로 내달렸을까 봐 덜컥 걱정이 되었다. 그에 대한 원망보다는 걱정이 앞서서 눈앞이 캄캄했다.



“해진 씨.”



목소리도 떨렸다. 손도 덜덜 떨렸다. 막막함에 가슴까지 갑갑해져 올 무렵, 공원 구석에 서 있는 해진의 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을 읽은 해진이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환은 우습게도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해진은 몹시 당혹스러웠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기가 지겨워서 잠깐 산책을 나왔다. 가을이라 쌀쌀하기도 하고 해서 옷도 제대로 챙겨 입고, 편한 신발을 신고 말이다.



정원은 제법 괜찮게 꾸며놓았다. 가을이 되자 온갖 단풍이 색색이 물들어서 굉장히 예뻤다. 일전에 일을 하면서도 키스틸 리조트는 조경이 매우 잘되어 있다는 특색을 기록해두었던 게 기억났다.



‘나무도 종류별로 잘 심어놨고…… 병충해도 없어 보이네.’



해진은 동물만큼이나 식물에 대해서도 나름 조예가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조예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역시 키스틸은 키스틸이다.’였다.



그는 이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 생각 않고 걷기만 했다. 생각을 하지 않고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제법 괜찮은 산책이었다.



대충 10분 정도 걸었을까. 기척이 들려서 돌아보았더니 이환이 서 있었다.



무려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눈을 하고서.



그 이환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납득하지 못해서 해진은 멍하니 몇 초를 서 있었다.



또르륵, 눈물방울이 이환의 잘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또르륵?’



해진은 그제야 제 눈앞의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경악했다.



“헐? 전무님? 괜찮으세요?”



드디어 이환이 미친 건가. 요새 계속 제정신 아닌 듯한 모습을 보이긴 했다. 그런데 제 앞에서 눈물까지 보일 정도라니……. 이거, 심각한 거 아닌가. 해진은 키스틸 그룹의 존망까지 진지하게 걱정하며 한 걸음을 다가섰다.



“왜 울고 그러세요. 사람 무섭게…….”

“아, 실례했습니다.”



이환은 조금 놀라더니 눈물을 쓱쓱 닦곤 돌아섰다. 본인이 운 줄도 몰랐던 눈치였다. 어쩐지 그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해진은 얼른 따라붙어 팔뚝을 쥐었다.



“괜찮으세요?”



웬수 같은 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 배 속 아이의 아빠라는 자각이 있어서일까. 혹은 도통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서일까. 마음이 쓰여서 붙들었더니 환은 새빨개진 눈을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말없이 해진을 응시했다.



“……전무님?”



이전에는 확실히 보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눈물과 함께 눈에 가득 고인 것이 무엇인지, 해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인간이 안타까웠다. 비록 제 인생을 이렇게 망쳐놓은 놈이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앗!”



어쭙잖은 위로라도 건네려는데 이환이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꼬옥 안은 품이 꽤 따뜻했다. 외려 해진이 위로를 받을 정도로 말이다.



환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해진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의 등 위에 얹었다.



‘엄청 떨고 있네…….’



무엇이 이 남자를 이렇게 두렵게 만드는 걸까. 국내의 내로라하는 실력 있는 기업가인 그를.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해진이 그의 등을 손으로 살며시 토닥여주었다. 왠지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괜찮아요.”



뭔지는 몰라도 괜찮다고, 그리 위로를 건네야 할 것 같았다.



“해진 씨.”

“네, 네?”



왜 이렇게 목소리를 쫙 깔고 말을 해. 사람 부담스럽게.



“나를 미워해도 좋습니다. 당신의 미움쯤이야 얼마든지, 내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뒤이은 말은 또 무슨 뜻이람. 해진은 그에게 안긴 채 어깨 위로 내민 눈을 또륵 굴렸다.



“다만 나를 떠나진 말아주십시오.”



목소리가 절절했다. 울음이 섞인 듯도 했다. 환은 그를 안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제발, 떠나지만 말아주십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해진 씨를 위해서입니다. 혹시라도 당신이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땐 나는…….”



환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떨기만 했다. 겁을 잔뜩 먹은 짐승처럼 달달 떨고 있는 알파가 이제는 정말로 안쓰러웠다.



그래서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설령 아직 그에게 가졌던 마음이 돌아오지 않았다 해도.



“……안 떠나요. 걱정 마세요.”



환의 팔이 그를 보듬었다. 해진을 꽉 껴안은 채 그는 오래도록 떨었다. 해진은 새삼 그의 품이 제법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을바람이 제게 닿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고 넓은 품이었다.





77퍼센트





‘너무 사람이 없는 것도 이상하고 어색하다’는 해진의 말을 듣고 오래 고민한 환은 다시 리조트를 개방했다. 다만 임신 중인 제 오메가가 최대한 안정을 취하게 하기 위해서 VIP 고객들에게만 예약을 일부 허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야외 풀에서 헤엄을 치고, 연인들이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해진도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공원에 앉아 있다 보면 손님들이 해진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해진은 특히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그리고 이환은 해진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영 탐탁잖게 여겼다. 귀찮은 손님들을 다시 모조리 내쫓고 싶었으나 해진이 좋아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가을이 끝나가면서 해진의 배도 조금씩 불러왔다. 입덧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고 설상가상으로 허리까지 몹시 아팠다.



이환은 해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는 항상 리조트에서 대기 중이었고, 해진이 좋아하는 셰프도 계속 레스토랑에서 근무했다. 필요한 것은 말만 하면 대부분 몇 분 이내로 대령되었다.



특히 리조트 호텔 루프에서 하는 식사는 끝내주게 좋았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광활한 자연이 펼쳐져 있고, 공기도 맑았다. 날씨가 점점 추워졌기 때문에 이곳에서 식사하기 위해서는 환의 잔소리를 감당해야 했지만 말이다.



조금 걷기라도 하면 호들갑을 떨며 번쩍번쩍 안아대서 해진을 기겁하게 만드는 환 덕분에, 해진은 사람이 하루에 다섯 발자국도 걷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제 옷을 갈아입혀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환의 모습을 보며 해진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람도 꽤 변했는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청결 문제로 직원들을 닦달하고 박 비서에게 성질을 부리는 걸 보면 여전한 것 같기도 했다.



유창숙 회장이 리조트로 찾아온 것은 가을의 막바지쯤, 정원의 낙엽이 거의 다 질 때쯤이었다.



리조트는 발칵 뒤집혔다. 계열사 전무가 상주하는 것만도 돌아버릴 지경인데, 이제는 아예 기업의 오너가 방문한다니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긴장한 건 해진도 마찬가지였다. 유창숙 회장은 그에게 여전히 좀 찝찝한 존재였다. 물론 여태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걸 보면 딱히 저를 해치려고 오는 것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정말 괜찮을까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해진 씨를 지킬 겁니다.”

“아니, 뭐, 그렇게 비장할 건 없고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이환이 몇 배는 더 긴장한 눈치였다. 마치 적장과 대면하기 전의 무장 같은 단호함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창숙 회장을 대면했을 때 해진은 왜 그가 그렇게 긴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올화이트 바지 정장을 입고 나타난 회장은 해진을 보자마자 선글라스를 빼며 씩 웃더니 말했다.



“생각 이상으로 귀엽네.”



해진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마주 웃었다.



“생각 이상으로 실물이 미인이십니다.”



회장은 마음에 든다는 투로 깔깔 웃었지만 이환은 긴장을 풀지 못한 채 뻣뻣하게 앞서 걸었다.



‘손이랑 발 같은 쪽 나가는 거 말해줘야 하나…….’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레스토랑을 폐쇄하고 앉은 세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했다. 회장은 해진을 빤히 관찰하듯 바라보았고, 해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며, 이환은 해진의 옆에 앉은 채로 허공을 보았다. 은은한 쇼팽 곡조만 세 사람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채웠다.



어른과 눈싸움을 하는 것은 아주 버릇이 없는 짓이기에, 해진은 회장과 눈이 마주치는 내내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를 빤히 관찰하는 시선이 너무 적나라하긴 해도 그다지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십시오.”



그러나 의외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이환이었다.



“잘 지내고 있나?”



시선은 여전히 해진에게 고정한 채로 회장이 말했다. 해진은 본인이 대답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환을 흘끔 바라보았다. 이환은 대답하지 말라는 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두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손을 가볍게 깍지 꼈다.



“강해진 씨는 이곳에서 출산 후까지 계속 저와 지낼 겁니다. 의사 표명을 이미 분명히 밝혔습니다. 문제 될 건 없습니다.”



꼭 브리핑을 하는 듯한 말투였다. 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쟤는 말을 못 하나? 왜 쟤가 할 말을 네가 대신 하는 게냐?”



해진이 얼른 끼어들었다.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무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시고요. 그리고…… 아이도 건강합니다.”



말끝에는 방긋, 웃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조금 긴장했다.



이환이 다시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더니 돌연 테이블 아래로 해진의 손을 꾹 쥐었다. 해진은 조금 놀랐지만 겉으로 내색 않았다.



“회장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강해진 씨가 다시 도주하거나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제법 비장하기까지 한 환의 말에 그제야 회장의 얼굴도 조금 풀렸다.



“그거 다행이구나.”

“제 오메가는 제가 책임지겠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든 부디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그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의아함을 표하는 동작마저 우아해서 제스처를 구경하던 해진은 감탄까지 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뭐, 데려가서 어디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기라도 할까 봐?”



정곡을 찔린 환이 뺨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유 회장은 시원스레 소리 내어 웃었다.



유 회장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시원한지, 해진은 하마터면 따라 웃을 뻔했다.



그녀는 한참을 시원하게 웃더니 어느 순간 뚝, 멈추고 다시 환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언제 웃었냐는 듯 근엄함을 순식간에 되찾는 모습을 보고 해진은 유 회장이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다.



“너, 이 할미를 도대체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꼭 없애버릴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환이 억울한 투로 반박하자 유 회장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곤 팔짱을 꼈다. 시선이 다시 해진에게 닿았다. 눈빛에 은근히 힘이 들어가 있어서 해진은 괜히 물을 마시는 척 눈길을 피했다.



“뭐, 통제가 힘든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로 어디 멀리 보내버릴 생각까지는 했다만, 아이를 뱄다는데 어떻게 그러겠나. 사람의 도리가 있지.”



유 회장은 느긋했으나 환은 갑갑해 죽겠다는 투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빌어먹, 아니, 난감하게 엉뚱한 사람과 스캔들까지…… 일부러 냈는데…….”



하아, 묵직한 한숨을 토해낸 환은 앞에 놓인 물컵을 단번에 들이켰다. 제 몫의 물이 모자라자 해진이 쥐고 있던 컵까지 빼앗아가 벌컥벌컥 마셨다.



졸지에 손이 비어버린 해진은 옆에 앉은 그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잔을 빼앗긴 것보다 이환이 제가 마시던 물을 마셨단 사실이 더 황당했다.



“아, 그래, 신아연 그 친구 말이 통하고 시원시원해서 좋더구나.”



정작 유 회장은 느긋하게 앞에 놓인 차를 들이켰다.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놓이네. 이제 신경 끌 테니 묻어버리니 뭐니 하는 걱정은 하지 말고 잘들 지내봐.”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리 말하는 유 회장은 정말로 이환의 할머니처럼 인자하게 웃고 있었기에 해진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놓았다.



“태교 잘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내 손주 놈이 괴롭히면 직통 전화로 나한테 이르고.”

“네, 잘 알겠습니다.”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군.”



유 회장이 입꼬리를 틀어 픽 웃었다. 해진은 와중에도 그녀의 여유로움이 멋있어 보여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해진 씨는 왜 웃습니까? 지금 이게 웃깁니까?”



환이 버럭 화를 내자 해진은 아예 눈까지 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잘 해결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뭐. 저 어디 묻어버리지는 않으신다잖아요.”



진심이었다. 죽기 싫어서 내내 도망쳤고, 죽기 싫어서 이환의 곁에서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했는데 위험요소가 사라지니 순수하게 기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왜요?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하라고 하시잖아요. 전무님도 얼른 이 기회에 말해요.”

“하아……. 천하태평이로군…….”



갑갑한 것은 이환 혼자인 듯했다.



유 회장은 몇 시간 있지도 않고 리조트를 떠났다. 오너가 있으면 직원들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를 들면서도 로비의 소파 위치라든가 외벽의 상태 등을 지적해 이환을 몇 시간 더 늙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회장을 배웅한 뒤 두 사람은 정원을 조금 거닐었다. 환이 재킷을 벗어 주었지만 해진은 춥지 않다며 거절했다.



정원을 걷는 내내 해진은 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들어 그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일이야 많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결이 달랐다. 시선이 느껴져 마주 보면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게 꼭 죄인 같았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해진이 부추기고도 한참 지나서야 환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혹시…… 떠날 마음이 생겼는지…… 걱정을 좀, 했습니다.”

“네? 제가 왜요?”



리조트 밥도 맛있고, 난방도 잘되고, 블루레이도 있고, 부족한 것 하나 없는데 자신이 여길 왜 떠난단 말인가. 해진은 고개를 옆으로 갸웃갸웃 기울였다. 헛기침하는 환의 얼굴이 영 어두웠다.



“이제 강해진 씨가 제 곁에 구태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뒤이은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가, 침울한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유 회장님이 저 어디 묻어버리진 않는다고 하셨으니까, 이제 전무님의 보호가 필요 없지 않느냐, 이 뜻인가요?”



환은 대답하는 대신 다소 뚱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맞구나. 해진은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시침을 떼었다.



“뭐, 회장님이야 그리 말씀해주시니 다행이지만, 앞으로 좀 더 두고 봐야겠죠? 제가 위험할지 아닐지는…….”



농담 삼아 한 말인데, 흘끔 옆을 보니 환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이쯤에서 관둬야 하지만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렇잖아요. 저도 바보 아니거든요. 아이 낳으면 소문 퍼질 수밖에 없고, 그럼 전무님과 제 관계도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인데……. 저는 재벌 집안 아들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요.”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한 말인데, 어쩐지 물꼬가 트이고 나니 괜히 제 신세를 한탄하고 싶기도 하고, 제 처지가 좀 서럽기도 했다.



“워낙 유명한 분의 오메가다 보니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을 테고, 저도 앞으로 어째야 할지 이런저런 걱정이 많네요. 에이, 전무님이랑 연애하는 줄 착각할 때는 이런 생각도 안 했는데.”



괜히 그때가 떠올라 하하, 하고 쓴웃음을 내뱉었다.



“그땐 왜 이런 생각도 못 했나 몰라요. 착각에 빠져서 정신이 영 없었나 봐. 전무님께서 저한테 잘해주시던 거 죄다 연기인 줄도 모르고 마냥 좋아하기만 했지 뭐예요. 바보같이. 하하하.”



걷던 해진은 그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돌아보았다. 환은 아까보다 몇 배는 더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이환의 얼굴로 보기에는 낯선 표정이지만, 어떤 감정인지는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죄책감과 미안함 같은 것들. 와중에도 고개를 숙이거나 하지는 않는 게 지극히도 이환다웠다.



“……전무님?”



이환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성큼, 멀어진 거리를 좁혀오는 기세에도 해진은 당황하지 않고 그를 빤히 마주 봤다. 키 차이 때문에 목을 꺾어야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더 하지 않겠습니다. 해진 씨에게 하는 사과는 지금까지도 모자라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게 있군요.”

“중요한 거요?”



환은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가뜩이나 판판한 가슴이 호흡을 담고 펴졌다. 얼굴은 어찌나 결연한지 해진은 조금 움찔했다. 무어라고 말하려 입까지 벌린 환은 다시 딱, 입술을 닫아버렸다.



“왜요?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할 게 아닙니다.”



내 참, 싱겁긴. 말할 자리라는 게 따로 있나. 입술을 비죽 내밀고 돌아서려는데 환이 그의 손목을 살짝 붙들었다.



“다만 한 가지는 미리 약속드리죠. 해진 씨가 위험할 일은 앞으로 없을 겁니다.”



올곧은 눈을 보니 어쩐지 해진은 그의 말을 또 홀랑 믿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때처럼 설령 속는다 해도 말이다.



“행여 저를 떠나는 일이 있어도, 해진 씨의 안위는 제가 끝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끝까지’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문득 궁금했다. 그가 말하는 ‘끝’이란 언제일까. 아이를 낳을 때까지일까. 해진은 대답 대신 쓰게 웃어 보였다. 괜히 손으로 아랫배를 만져보았다. 이제 티가 날 정도로 볼록했다.



해진이 먼저 걸음을 떼었고, 환은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바람이 불자 단풍들이 부대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낙엽 냄새가 났다.



출산 예정일은 한겨울이라던데, 너무 추운 날은 아니었음 좋겠다고 해진은 생각했다.



“저, 그리고 혹시…….”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해진은 다시 환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는 그답지 않게 표정이 좀 굳어 있었다.



“네?”



이환은 헛기침을 몇 번이나 했다. 얼굴이 벌게져서는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게, 대체 무슨 중대한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해진은 불안하기까지 했다.



“괜찮으시다면, 이전처럼…… 다시 이름을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작 그가 꺼내 놓은 말은 별것도 아니었다. 뭘 이런 걸로 그렇게 뜸 들였나. 하지만 나무라기에는 이환의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알았어요, 환이 씨.”



못 들어줄 것도 아니라 냉큼 불러주었더니 뻣뻣하게 굳어 있던 환의 얼굴이 꼭 불 앞의 얼음처럼 사르르 녹았다. 순식간에 날 선 눈매를 풀고 묘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걸 보고 해진은 픽, 웃음을 흘렸다.



새삼 이환이 많이 변했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더 변할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곤 미움조차 남지 않았다고 믿었는데, 이렇게 제 한 마디에 풀어지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둘은 대화 없이 공원을 좀 더 걸었다. 마침 사람이 없어 낙엽 밟는 소리만 고요했다. 두 사람의 손등이 나란히 흔들리며 서로를 스쳤다.





* * *





배 속 아이와 해진의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들었지만, 해진은 여전히 극심한 피로와 입덧에 시달렸다. 보통 배가 불러오면 입덧도 나아진다는데 몸이 약해서인지 그렇지도 않았다. 배가 불러오니 몸이 힘든 것도 더해져 딱 죽을 맛이었다.



거기다 뒤늦게 온 임신 우울증 때문에 해진은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때도 많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가을이 온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애 낳고 나서는 뭐 하고 사나, 하는 생각들.



그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을 때마다 환은 안절부절못하며 옆에서 이것저것을 갖다 바쳤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를 틀어주어도 해진은 무덤덤했다. 딱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해진 씨, 산책이라도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옷을 따뜻하게 입고…….”

“괜찮아요.”

“그럼 간식이라도 내오겠습니다. 혹시 먹고 싶은 거라도…….”

“괜찮아요.”



강해진은 ‘괜찮아요’ 외엔 말을 못 한다는 듯이 그의 모든 호의를 거절했다. 차라리 이전에 도망 다닐 때처럼 제 돈을 야무지게 쓰면서 스트레스라도 풀면 좋으련만, 돈을 쓰는 일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배는 불러오는데 입덧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얼굴은 말라가고, 환은 그런 해진을 보며 지독한 죄책감을 느꼈다. 제 아이를 안 가졌으면 강해진이 이리도 고생할 일은 없을 텐데. 모든 것이 제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뭘 해주면 좋겠느냐고, 말만 하라고 부추기고 싶었지만 어쩐지 강해진이 ‘당신만 없으면 될 것 같다’는 대답을 할 것 같아 환은 그러지도 못하고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채 발만 동동 굴렀다.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해진의 상태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몸을 씻겨주면서 보이는 흔적들이나 그의 얼굴에서 드러난 기분들 같은 것을 하나하나 메모해 두었다가 나중에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해주곤 했다. 해진 역시 산모 일기를 쓰기는 했지만 기록의 정성도는 환의 것이 더 높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환은 해진의 기분 전환을 위해 따뜻한 물에다가 아로마 오일을 풀고 직접 해진의 앞에 꿇어앉아 족욕을 시켜주었다. 향긋하고 따뜻한 물이 발에 닿으니 기분이 좋은지 내내 침울하던 해진의 얼굴도 조금 활기가 도는 듯했다.



불룩한 배를 감싼 손은 가뜩이나 작은데 이전보다 더 앙상해진 듯해서 마음이 영 쓰렸다. 뺨도 홀쭉하고 말이다. 오동통한 밀가루떡 같던 해진의 뺨이 늘씬해진 것을 볼 때마다 저걸 어떻게 다시 찌우나 하는 생각에 한숨만 푹푹 났다.



환은 정성스레 발을 닦아주며 그의 발목과 복사뼈, 발꿈치를 꼼꼼하게 문질렀다. 해진의 발은 제 것보다 훨씬 작아서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아무래도 발을 맡기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제 손안에서 꼬물거리는 발을 입에 넣고 싶은 충동이 문득 들었으나 환은 꾹 참았다.



“그런 말 마십시오. 체중이 급격하게 늘어난 임산부는 발 관리를 잘해줘야 합니다.”

“딱히 힘들진 않아요……. 별로 걷지도 않고.”



턱을 긁으며 조심스레 말하는 강해진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환은 속으로만 웃으며 그의 발꿈치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어찌 된 발인지 손에 걸리는 각질도 하나 없이 부드럽고 말캉했다. 또다시 이 말캉한 것을 입에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방에만 있는 게 갑갑하진 않습니까? 요즘은 산책도 잘 안 나가려 하고.”

“괜찮아요.”



또 괜찮다는 말. 환은 설핏 미간을 구겼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강해진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주면 될 것을.



“……탐험, 하러 가죠. 출산하고 몸조리 다 끝난 다음에 말입니다.”



그제야 해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요?”

“예.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해진이 일하던 곳 같은, 키스틸 레저 계열사나 협력 여행사 같은 곳에서 대충 패키지여행을 찾아도 될 테지만 강해진이 원하는 것은 아마 그게 아닐 것이다. 이왕 가는 거라면 제대로 가야겠지.



“출산 예정일 이후라면 저도 그때쯤은 시간이 꽤 납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보죠.”

“환이 씨도 가시려고요?”



해진이 조금 놀란 투로 물었다.



“그럼 제가 같이 가야지, 그 위험한 곳에 강해진 씨 혼자 간단 말입니까?”

“완전 생존력 떨어지실 거 같은데…….”



뒤이은 말에 환은 아주 조금 상처를 받았다. 조모 덕분에 밑바닥부터 꾸역꾸역 올라온 제게 생존력이 떨어진다니. 하지만 강해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 결벽증에 하루는 버티시려나…….”



뒤이은 말에 어쩐지 정곡이 찔려 헛기침을 했다. 해진은 그런 그를 빤히 보다가 핼쭉, 웃었다.



“농담이에요. 저도 혼자 가는 것보다 훨씬 든든하죠.”



웃는 해진이 하도 예뻐 보여서, 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었다. 작은 발이 제 손에서 꼬물거리고서야 자신이 해진의 얼굴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괜히 헛기침을 하곤 다시 그의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꾹꾹 누르고 살을 밀며 본격적으로 마사지를 했다. 해진을 위해서 미리 배워둔 것이었다. 애써 습득한 보람이 있게 해진은 눈을 감으며 나른하게 신음했다.



“아, 좋다……. 나른하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족욕과 마사지를 해드리죠. 이래 봬도 제가 악력은 있는 편 아닙니까.”

“진짜요……? 흐아……. 최고다…….”



거의 늘어져서 흐물흐물해지는 해진을 보며 환이 픽 웃음을 흘렸다. 뿌듯하기도 했다.



“그렇게 좋습니까? 매일 해드려야겠군요.”

“으음……. 족욕이 좋은 게 아니라, 환이 씨가 제 발을 만지니까 뭔가…… 나른하게 좋네요……. 충족감도 들고…….”

“충족감이요?”



해진은 반쯤 상체를 기울인 채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으며 고민하더니 조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예전의 환이 씨는 이렇게 제 발을 만져줄 사람으로는 안 보였으니까요?”



환은 해진의 말을 이해했다. 꼿꼿한 저를 이렇게 부려먹는 게 즐겁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였다, 이 요망스러운 오메가가 말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발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다 만져줄 수 있습니다. 해진 씨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을 뱉고 나니 어쩐지 좀 뉘앙스가 이상한가, 싶어 슬쩍 고개를 들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해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환은 속으로만 씩 웃었다. 이렇게 표정을 못 감춰서 어쩌나.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얼굴이 빨개집니까?”

“무, 무슨, 제가 뭘요?”



당황하며 쏘아붙이는 게 꼭 화내는 햄스터같이 하찮고 귀여웠다. 저 새빨개진 얼굴을 한입에 넣고 빨아버리면 싫다고 난리를 부릴까.



“제 말을 듣고 멋대로 상상이라도 했습니까?”

“제가 변태인 줄 아세요? 제가 멋대로 환이 씨가 제 속살 주무르는 상상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여요?”



제 입으로 실토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환은 소리 내서 웃고 싶은 것을 참고 해진의 발을 놓았다.



일어서서 옆에 놓인 수건으로 손을 닦는 동안 해진은 소파 위에 앉은 채로 그의 눈치를 봤다. 요리조리 눈을 굴리고, 제 쪽을 흘끔 봤다가 얼른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니 빨리 저것을 입에 넣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일전에 내가 말했죠.”



그가 해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해진은 끽, 하는 사랑스러운 소리를 내며 얌전히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나는 해진 씨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게 뭐든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해진을 안은 채 환은 침실로 향했다. 만삭의 몸인데도 해진은 여전히 가벼웠다.



“그러니 상상만 하지 말고 입으로 말을 하십시오. 그게 고작 제 몸뚱이에 한한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내어줄 수 있으니.”



나름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해진의 표정이 이번에는 영 좋지 않았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에 난감함마저 드러났다.



“환이 씨는 진짜 손발 오그라드는 말을 어쩜 그렇게 잘하시……!”



뭐라고 더 쫑알거리기 전에 입을 맞췄다. 품에서 얼어붙은 해진을 살며시 침대 위에 내려놓은 환은 키스를 이어가며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바지를 벗기고 허벅지와 허리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던 해진의 몸이 조금씩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다. 굳어 있던 입술도 찬찬히 풀렸다.



긴 입맞춤을 끝내고 입술을 턱으로 옮긴 환은 정성을 들여 해진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턱과 목을 쪽, 쪽, 소리 나게 물고 빨며 반쯤 벗겨진 해진의 바지를 온전히 끌어 내렸다. 그의 몸에서 달큼한 딸기 향이 났다. 아이를 가지고 만삭이 되었는데도 이 향기가 그대로인 게 신기했다.



해진의 드로즈까지 모조리 벗겨낸 환은 몸을 조금 더 아래로 끌고 내려와 이번에는 그의 불룩한 배 위에 입을 맞췄다. 만삭이라 팽팽하게 부푼 배는 곳곳에 살이 트고 핏줄이 돋아 있었지만 환의 눈에는 곱기만 했다.



그다음으로는 허리와 장골을 물고 빨았다. 어느새 빳빳하게 발기한 해진의 페니스가 얼굴에 스쳤다. 그때마다 해진은 화들짝 놀라며 떨었다. 당장이고 이것을 입에 넣고 싶은 제 심정도 모르고 말이다.



몸을 일으켜 해진의 티셔츠까지 벗겨낸 환은 제 드레스셔츠도 벗었다. 벌써 흐트러진 해진을 내려다보자니 만족스러운 웃음이 어쩔 수 없이 흘러나왔다.



“내 손이 어딜 주무르는 상상을 했길래, 아까 그렇게 얼굴이 붉어진 겁니까?”

“……몰라요.”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저 머리통에 든 상상이 엄해봤자 제 욕정보다는 못할 테니 상관없지만, 대답을 않겠다고 하니 괜히 심술이 났다.



그는 해진의 몸 곳곳에 쪽, 쪽, 소리 나게 입 맞추며 손으로도 애무를 이어갔다. 제 아래서 바르작거리는 몸뚱이가 만족스러웠다. 바짝 달아오른 채로 제 손길 하나마다 떠는 그가 귀여웠다.



한참 하던 애무를 멈추고 고개를 들자 새빨개진 얼굴이 보였다. 환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말해봐, 응?”



그러자 가뜩이나 붉은 얼굴이 한층 더 빨개졌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환은 결국 다시 입을 맞췄다.



키스를 하며 손으로 그의 다리 사이를 탐했다. 해진은 조금 떨었지만 그를 밀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달아오른 몸을 살살 꼬며 기대라도 하는 듯이 달뜬 눈을 하곤 저를 올려다보는 게 아닌가.



“말을 안 하니 내 마음대로 추측하는 수밖에 없겠네.”



어디를 만져줬으면 하는지 곧바로 말하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있나. 하지만 이 핑계로 해진의 몸 곳곳을 맨손으로 주무를 생각을 하자 뻣뻣해진 성기에서 선액이 나오는 게 느껴질 만큼 흥분되었다.



환은 제일 먼저 해진의 가슴을 쥐었다. 임신한 탓에 해진의 가슴이 평소보다 조금 더 부푼 것을 확인했다. 며칠 전 씻겨주었을 때도 눈치채긴 했지만, 만져보니 더 티가 나는 것이었다.



가슴을 손바닥 전체로 부드럽게 주무르자 해진이 기분 좋게 미간을 구겼다. 살이 오른 가슴이 환의 손안에서 말랑하게 구겨졌다. 한참 가슴을 주무르던 그는 이번에는 해진의 유두를 검지와 엄지로 부드럽게 쥐었다.



“읏……!”

“여기 만져주는 거 좋아하던데. 여기인가?”



해진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꾹 감았다. 감각을 받아들이느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환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웠다.



환은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을 살짝 떼어 이번에는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마른 몸 아래 뼈의 요철이 그대로 느껴졌다. 배만 나오고 다른 곳의 살은 더 빠진 탓이었다.



안타까움에 쯧, 하고 혀를 차자 아래 누운 해진이 조금 움찔했다. 환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를 놀라게 하다니. 뒤늦게 해진을 달래기 위해 애써 웃어 보였다.



“가슴이 아니라 다른 곳인가? 해진 씨가 말해주지 않으니 알 수가 있나…….”



데굴, 구르는 까만 눈동자에도 할 수 있다면 입을 맞춰주고 싶었다. 그곳뿐만 아니라 몸 안쪽까지 모조리 다.



이번에는 살 없는 옆구리를 쪽쪽 물고 빨았다. 해진은 상체를 뒤틀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손으로는 허벅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인데도 해진은 힘들어했다.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들려서 환은 입술과 손을 떼었다. 그리고 해진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반쯤 풀린 눈이 환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습니까?”

“하아……. 네……. 그냥 숨이 좀 차서…….”



할딱거리며 대답하는 해진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벌어진 입술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몹시도 달아 보였다.



“힘들면 그만하겠습니다.”



환이 진지한 어투로 선언했다. 가뜩이나 만삭이라 힘들어하는 그를 제 욕구 배출을 위해 괴롭힐 수는 없었다. 물론 지금도 제 좆은 딱딱하게 서서 강해진의 안쪽을 원하지만…… 이까짓 것, 혼자 배출하면 될 일이다.



리조트에 온 뒤로 이미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해진은 모르겠지만 잠든 그의 모습을 보고 아랫도리가 반응해버려서 혼자 욕실에 들어가 자위를 한 적이 벌써 여러 번이었다. 이번에도 그러면 될 일이다, 생각하는데 해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고…… 싶어요.”



그리고 뒤이은 말에 환의 인내심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해진의 다리를 벌린 환은 그의 다리 사이에 곧바로 얼굴을 묻었다. 촉촉하게 젖은 구멍에 혀부터 들이밀었다.



“자, 잠깐……! 아흣!”



애원하는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달큼한 맛에 홀려 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그는 해진의 아래를 공들여 물고 빨았다.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은 모조리 삼켜 마셨다. 손으로는 발기한 해진의 페니스를 어루만졌다. 기둥 끝에 흘러나온 선액의 감촉이 좋았다. 그 역시 몸이 달아올랐단 뜻이니.



“흣, 아, 잠깐, 흑……! 그만……!”



구멍을 정신없이 핥던 중, 해진이 내는 소리를 듣고 환은 입술을 떼었다. 오메가의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입술을 혀로 핥은 그가 상체를 일으키고 해진을 내려다보았다.



“싫어……?”



다시 허리를 숙여 젖은 입술을 그의 허벅지에 얹었다. 부드러운 살결을 앞니로 살짝 물었다가 놓자 해진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 빨게 해줘……. 제발…….”



환이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고개를 살짝 들어, 불러온 배 옆으로 해진과 시선을 마주쳤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해진이 살그머니 시선을 피한 뒤 눈을 꼭 감았다.



그것이 허락의 의미임을 눈치챈 환은 다시 그의 구멍을 핥기 시작했다. 혀를 깊숙이 밀어 넣자 해진은 자지러지며 허벅지를 달달 떨어댔다. 흘러나오는 액은 점점 더 짙어졌다. 환은 그것을 기쁘게 모두 삼켰다.



“저, 갈 것…… 같…….”



어느 순간 해진이 그의 어깨를 꼭 붙들며 말했다. 상체를 파닥거리는 통에 침대가 퉁퉁 울렸다. 환은 그가 절정을 맞을 수 있도록 혀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안쪽이 찌르르, 경련하듯 떨리는 게 혀끝으로 느껴졌다. 사정이 없는 절정이었다.



“하아, 하…….”



해진은 늘어진 채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었지만 환에게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바지와 속옷까지 벗고 해진을 모로 눕게 한 뒤 등 뒤에서 껴안듯 나란히 누웠다. 만삭의 몸이니 배를 눕힐 수 있도록 하는 게 그나마 해진에게 부담이 덜 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해진의 다리 사이로 발기한 제 것을 들이밀었다. 젖은 입구 위를 딱딱한 기둥이 스치자 해진은 어깨를 조금 떨었다.



“읏…….”



그대로 성기를 처박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으나 환은 그 대신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젖은 입구 위를 기둥으로 연신 스치자 해진은 기분이 좋은 듯 신음했다.



“아……. 으응…….”



환 역시 성기에 스치는 축축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당장이고 제 살덩어리를 꽂아 넣고 싶지만, 그랬다간 이 사랑스러운 밀가루떡 같은 제 오메가가 놀랄지도 모르니.



축축한 해진의 구멍 위로 환의 성기가 빠르게 오갔다. 딱딱한 것이 스칠 때마다 해진은 딱 미칠 것 같았다. 일전 환의 러트 때 섹스한 뒤로 한동안 몸을 섞지 않았는데, 그 탓인지 구멍에 스치는 이환의 성기 감촉이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젖은 위로 딱딱한 살덩어리가 빠르게 오갔다. 금방이라도 삽입을 할 것처럼 입구를 긁었다가, 속으로 들어오는 대신 그대로 밀고 스치기만 하는 통에 해진은 안달이 났다.



‘그냥 넣어주지…….’



말만 꺼내면 바로 삽입할 기세이긴 하지만 제 입으로 넣어달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웠다. 일종의…… 오메가의 자존심이랄까……. 물론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도 우습지만.



그러나저러나 솔직히 기분은 끝내주게 좋았다. 구멍 위를 스칠 뿐인데도, 입구가 자극되는 것만으로도 간질간질하게 쾌감이 일었다.



“흐으…….”



해진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뒤로 빼고 들썩거렸다. 이환의 것을 더 느끼고 싶었다. 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좀 더 달아오르길 바랐다.



그 심정을 읽혔는지, 환이 그의 허리를 안고 각도를 조금 바꾸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멍 위로 미는 힘이 조금 더 강해지며 환의 귀두 부분이 그의 구멍 입구와 회음을 짓누르듯 뭉갰다.



“아……! 거기, 좋, 아요…….”



저도 모르게 감탄처럼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이환은 기다렸다는 투로 허리를 툭, 툭, 빠르게 치대며 동작을 크게 했다. 해진은 제 아래에서 액이 흥건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질척할 정도로 흐른 것이 환의 성기를 흠뻑 적시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가 좋아?”

“으, 으응, 좋아.”



솔직하게 대답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환의 어깨가 그의 머리통에 닿았다. 머리칼을 비벼대며 할딱거리자 그에 응답하듯 환의 숨결이 해진의 귓가에 뜨겁게 번졌다.



“앞으로 나한테, 다 말해.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구멍은 어떻게 쑤셔주는 게 제일 기분 좋은지.”

“으, 응…….”



평소라면 왜 반말이냐 쏘아붙였을 텐데, 그럴 정신도 없었다. 환이 허리를 더 빠르게 치대기 시작해서였다.



굵직한 것이 구멍을 밀고 들어올 것처럼 아래를 연신 찔러댔다. 귀에 닿는 숨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질퍽거리는 소리도 더 커졌다. 거대한 배가 환의 움직임에 맞추어 출렁거렸다. 해진은 묘한 배덕감을 느꼈다.



그리고 점점 더 참기가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성기를 안에 넣고 꾹꾹 조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구를 스치는 것만으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었다.



“……주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환이 어깨에 얹은 턱을 조금 더 들이밀었다. 위스키 향이 해진의 코를 찔렀다. 페로몬을 짧게 맡는 것만으로도 흥분감이 차올랐다.



“응? 뭐라고 했습니까?”

“넣, 어…… 주세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자 환이 동작을 뚝 멈췄다. 괜히 말했나.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문지르기만 할 건지 알 수 있어야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망설이는데, 환이 그의 뒤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꼭 커다란 짐승이 귓가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는 것 같아서 해진은 쭈뼛하게 굳었다.



“그 말은…… 내가 더 참지 않아도 된단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이 자식이 또 반말이야. 하지만 해진은 당장 그에게 박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얼른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환의 성기가 해진의 안으로 침범했다.



이미 흠뻑 젖은 안쪽으로 살 기둥이 파고들었다. 해진은 구멍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과 지독한 쾌감을 함께 느꼈다. 환은 그의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으읏……! 흡!”



질퍽한 안쪽을 파고들어 멋대로 드나드는 살 기둥에 해진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환은 해진을 단단히 감아 안고는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가 들어오고 나올 때마다 쾌감이 어마어마해서 머리털이 설 정도였다.



“아, 읏, 잠, 깐, 흣…….”



품 안에 갇힌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었지만 팔이 어찌나 강한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해진은 안긴 채로 제 몸 전체를 뒤흔드는 쾌감을 겨우 견뎠다. 눈앞에 플래시가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 아래쪽은 환의 성기를 물고 있느라 찢어질 것 같은데도 액을 흥건하게 쏟아냈다.



해진은 제 허리를 안은 환의 팔을 꼭 붙들고 헐떡거렸다. 벌써 오르가즘인지 뭔지 모를 어마어마한 감각을 하나 지난 통에 이불이 흥건했다. 그러나 환은 이제 막 시작이라는 투로 해진의 몸속으로 바득바득 들어오며 그를 부서뜨릴 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으응, 흣, 너무, 강해요, 느, 낌…….”



애원했으나 환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그는 심지어 해진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이로 꾹꾹 깨무는 힘이 여간 세지 않았다.



“아, 흑, 아, 파……!”



그제야 환은 파뜩 놀란 듯이 그의 귀를 놓아주었다. 빌어먹게 커다란 성기는 여전히 아래에 꽂은 채였다.



“미안합니다. 너무…….”



말을 하다 멈춘 그가 하아, 숨을 내뱉었다. 달뜬 날숨에서 그의 인내심이 묻어났다. 허리를 껴안은 팔 역시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 좋아서, 당신이…….”



겨우 이어진 말에 해진은 마음 어딘가가 찌르르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그것은 오래도록 잊고 있던, 이환이라는 자에 대한 감정이었다.



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훨씬 느리고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그의 성기가 안으로 매끄럽게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쾌감이 진득하게 몸을 훑었다. 불쾌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알파가 오메가에게 선사할 수 있는 다디단 쾌감이었다.



모로만 누워 있는 것을 해진이 힘들어했기에 환은 다시 그를 바로 눕게 했다. 다리를 벌리고 젖은 성기를 도로 삽입하려던 환이 문득 동작을 멈췄다. 시선이 해진의 몸을 훑었다.



“……왜 그래요?”



해진이 묻자 환은 그와 눈을 맞추고 살짝 웃었다.



“그냥, 예뻐서 말입니다.”



해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배는 남산만 한 데다가 땀에 젖어서 엉망인 제 모습이 눈에 선한데 예쁘단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싫지가 않았다.



부드럽게 그의 안으로 들어온 환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아까보다 느긋한 동작이지만 몇 배는 더 진득했다. 해진의 아래가 어찌나 젖었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젖은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으응, 읏…….”



해진은 느긋한 오르가즘을 한 번 더 느꼈다. 찌릿, 찌릿, 구멍을 조일 때마다 가뜩이나 딱딱한 이환의 성기가 안쪽에 아프도록 배겼다. 발기한 해진의 성기에서 정액이 퓻, 퓻, 튀어 만삭의 배를 흠뻑 적셨다. 몇 방울은 시트에 튀었다. 배를 적신 정액은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환이 손을 뻗어 그의 젖은 배 위를 문질렀다. 움직임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허리는 유연했고, 배를 쓰는 손길은 다정했다.



정액 묻은 손가락을 좀 더 위로 옮긴 환은 그대로 해진의 유두를 쥐었다. 이미 딱딱하게 선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누르자 해진이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환은 그의 표정과 가슴을 번갈아 관찰했다. 만삭이 되며 가슴이 커진 것뿐만 아니라 이 유두도 좀 더 탱글해진 것 같았다. 이것도 임신일지에 따로 기록을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두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끝에 환이 힘을 주었다. 그러자 해진의 구겨진 얼굴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으읏……!”



그리고 다음 순간, 환은 제 눈을 믿기 어려웠다. 해진의 유두에서 살짝 노르스름한 색을 띤 모유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해진 역시 축축한 감촉을 느끼고 눈을 떴다가 제 가슴을 보고 경악했다.



“으, 아, 잠깐……! 이게 무슨…….”



그러거나 말거나, 환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유두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대로 흘러나오는 것을 쪽쪽 빨기 시작했다.



“자, 잠깐! 흑! 뭐 하는!”



놀란 해진이 그의 어깨를 팡팡 때려댔으나 꿈쩍도 않았다.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해진의 유두를 빨아대며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기까지 했다.



흘러나온 모유는 환의 입안을 적시다 못해 줄줄 넘쳤다. 환은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투로 게걸스레 삼키고 또 삼켰다. 해진의 가슴까지 죄다 먹어버릴 기세로 입술을 꽉꽉 눌러가며 빨아댔다. 허리는 멈추지 않았다. 질퍽한 안쪽을 여전히 느리게 들쑤셨다.



“그만, 흣! 아!”



‘그만’이라고는 외쳤으나 사실 아프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제 몸에서 흘러나온 것을 먹고 있는 환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너무 큰 자극이어서, 유륜을 누른 입술 감촉과 유두 끝을 눌러대는 혀끝 감촉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그리 말한 것이었다.



모유가 흘러나오는 속도가 조금 느려지고서야 환은 빠는 것을 멈추었다. 가슴에서 입을 살짝 떼자 입술에 모유가 온통 허옇게 묻어 있었다. 환은 혀끝으로 그것을 핥아 삼켰다.



“당신 몸에서 나오는 건 다 먹고 싶어.”



그리고 이번에는 혀만 내밀어서 해진의 가슴을 핥기 시작했다. 퐁, 퐁, 느리게 솟아 나오는 유두를 한 방울씩 혀끝으로 쓸어 삼켰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정욕이 뚝뚝 떨어지는 갈색 눈, 그리고 제 몸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묻히고 있는 입가까지. 환의 모습을 보며 해진은 하마터면 또 오르가즘을 느낄 뻔했다.



다행히도 그가 허리 움직임을 멈췄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환은 해진의 양쪽 무릎을 쥐고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대로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몇 배는 깊었다.



“읏! 아! 아아!”



퍽, 퍽, 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환의 성기가 그의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했다. 해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여태껏 환이 저를 봐주느라 페니스를 끝까지 다 쑤셔 박지 않았음을.



뿌리 끝까지 처박힌 페니스는 곧바로 다시 빠져나갔다가, 틈을 두지 않고 도로 들어오며 해진의 안쪽을 자극시켰다. 해진이 겁이 날 정도로 삽입이 깊었다.



“흣, 태아, 한테, 닿으면 어쩌……! 흡! 으읏!”



겁이 나서 한 말인데, 어째 그게 환을 더 자극한 모양인지 움직임이 한층 더 빨라졌다. 살이 부딪치는 접합부에 질퍽, 질퍽, 애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해진의 몸에 박혔던 환의 페니스가 빠져나갈 때마다 점도 높은 애액이 밖으로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해진은 그가 안쪽 깊숙이 처박을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 쾌감은 요의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요의보다는 훨씬 더 강했다.



“환, 이 씨, 저, 흣, 화장, 실……! 잠깐!”



요의가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라도 말해야 환이 놔줄 것 같았다. 많이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결벽증을 갖고 있으니……. 그러나 웬걸, 오히려 그는 더 빠르게 허리를 치댔다. 해진의 몸이 침대 위에서 뭉개지듯 흔들렸다.



“아으, 아, 아!”



거의 비명 같은 신음과 함께 해진이 다시 사정했다. 이번에는 정액이 아니라, 거의 묽은 물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당황한 해진이 제 몸에 쏟아지는 투명한 액체들을 보고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반면 환은 허리 움직임을 멈춘 채로 그 모습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묽은 물을 쏟아내는 해진의 페니스와, 그의 붉어진 얼굴과, 젖어드는 불룩한 배까지. 마치 관찰하는 듯이 적나라한 시선에 해진은 결국 시선을 피하고 손등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흑, 그만, 하라고 했잖아요…….”



대체 이게 뭐람. 냄새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소변일지도 모른다. 섹스를 하다가 소변을 지리는 오메가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악이었다. 하지만 원인 제공은 이환이 했으니……. 생각을 잇던 해진이 배에 닿는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눈을 떠 보자 이환이 그의 몸에 얼굴을 문대고 있었다. 소변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액체로 흠뻑 젖은 상체에다가 뺨을 대고 비비다가, 입술로 미친 듯이 애무를 하는 게 아닌가.



“하아……. 정말 화가 나는군…….”



정신이 나간 듯한 그 모습에 해진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소똥을 맞고 다가오던 그를 보았을 때의 충격과 비슷했다.



환이 고개를 들었다. 엉망이 된 머리칼과 얼굴을 정리할 생각도 않고, 그는 해진을 내려다보며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대체…… 왜 빨리 찾아내지 못했을까…….”



혼잣말처럼 내뱉으며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치댈 때마다 해진의 젖은 성기가 부푼 아랫배에 툭, 툭, 부딪쳤다.



“한시라도 더 빨리…… 당신을 찾아냈어야 했는데…….”



자신이 도망 다니던 몇 달의 시간을, 그때 저를 빨리 찾아내지 못한 것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해진은 조금 아득해졌다. 대체 이 사람은 얼마나 나를…….



“그 시간이 아까워서…… 후우, 미쳐버릴 것 같아.”



얼마나 나를 원하는 걸까, 싶어서.



환이 느리게 움직이다가 해진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울컥, 울컥, 쏟아진 정액이 아직 활짝 벌어져 있는 해진의 입구를 하얗게 적셨다.



해진은 누운 채로 숨을 한참 몰아쉬었다. 온몸이 노곤하고 허리도 뻐근했다. 눈을 감고 있자니 옆으로 눕는 환의 기척이 느껴졌다.



환의 팔이 해진의 머리 아래를 받쳤다. 해진은 자연스레 그를 향해 몸을 살짝 돌리고 누웠다. 부푼 배 위로 환의 단단한 몸이 닿았다. 해진은 그 감촉에 안락함을 느꼈다.



어쩌면 이환이라는 사람을 잘 알기도 전에 이미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해진은 결심했다. 지금부터라도 제 알파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겠다고. 저를 속이고 이용해먹으려던 이환 말고, 제게 예쁘다고 해주는, 발 마사지를 해주는, 헤어져 있던 시간을 아까워하는 이환에 대해서 말이다.





* * *





날씨가 많이 쌀쌀해지며 해진의 산책도 어쩔 수 없이 줄어들었다. 걷기도 힘들거니와 조금만 앉아 있어도 발이 퉁퉁 붓고 허리가 아파서 환이 마사지를 해주어야 했다.



환은 해진을 극진히 보살폈다. 해진이 명령만 하면 대소변이라도 받아낼 기세였다. 예전이라면 이 미친놈이 역시 아이 때문에 그러는구나, 생각했을 테지만 해진은 이제 그게 아님을 알았다.



이환이 정성을 쏟는 대상은 아이가 아니라 강해진 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변한 눈빛과 진실된 손길, 제게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면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해진은 아직도 두려웠다. 그가 다시 제게 질리지는 않을까. 아이를 낳고 돌변하지는 않을까.



바보 같은 생각임을 알면서도 한 번 겪은 게 있으니 거의 반사적인 두려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이환은 그랬으니까. 제게 연인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다가 갑자기 돌변해 저를 감금하지 않았던가.



저도 사람인지라, 몇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이환을 보니 그간 쌓였던 마음이 녹기는 했다. 아니, 마음이 녹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해진은 자신이 이환의 얼굴에 홀렸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디어에서도 키스틸의 이환 전무를 아이돌처럼 다룰 정도로 외모가 걸출하긴 했으니.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 잘난 얼굴이 띠는 미소에 홀랑 반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배가 불러오고, 제 발을 마사지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며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이환의 속눈썹을 보며 어쩌면 자신이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갈색 눈동자,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 다물고 있으면 단단하게 보이는 턱뿐만 아니라 해진은 점차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의외로 말수가 적네.’



이환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으며,



‘목 긁는 거 제법 귀여워.’



곤란하면 목을 살짝 긁는 버릇이 있었으며,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계속 말해보세요.”



이야기에 집중할 때에는 눈썹을 조금 들어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저는 조금 있다 먹도록 하겠습니다. 곧 회의라서요.”



그는 일을 하기 전에 배가 꽉 차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단것을 좋아했고, 왼손 엄지를 검지에 문지르는 버릇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잘 때 간혹 인상을 구기곤 했고, 구겨진 미간을 살짝 누르면 주름이 좀 더 짙어졌다. 그리고 잘 때에도 손을 살짝 잡으면 손아귀에 힘을 주곤 했다. 마치 떠나지 말라는 듯이.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해진이 다다른 결론은 하나였다. 이환은 의외로 평범한 알파라는 것. 그리고 제게 약하다는 것.



이환에 대해 알아갈수록 어쩌면 그가 저를 버릴 일은 없을지도 모른단 작은 믿음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간신히 싹을 틔우고 커지기 시작한 믿음은 이환이 저를 보며 웃어줄 때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땀에 젖은 제 몸을 닦아주고 하루 종일 신은 양말을 벗겨줄 때마다 조금씩 더 자랐다.



해진은 그것을 더 키우고 싶었다. 배 속의 아이를 낳고 나서도 이환과 지내고 싶었다. 이런 화려한 리조트가 아니더라도, 그가 대기업의 전무가 아니더라도. 그저 그와 조금 더 지내고 싶었다.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환은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해진은 침대에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어째 인상을 구기고 화면을 가만히 노려보는 얼굴이 평소랑 좀 달라 보여서 해진은 호기심이 일었다.



“왜 그래요? 일이 잘 안 돼요?”

“발표회 때 입을 옷을 골라야 하는데, 좀 마뜩잖아서 말입니다. 박 비서가 몇 개 보여주긴 했다만…….”

“어디 봐요.”



그가 노트북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화면에는 정장 사진이 몇 개 떠 있었다. 해진은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환이 씨는 차콜 컬러가 어울려요. 블루톤 아주 살짝 들어간 차콜. 전에도 이거 비슷한 거 입었을 때 멋있던데.”



환이 화면과 해진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놀랐다는 투였다. 해진이 어깨를 으쓱 움츠려 보였다.



“왜요?”

“……그냥, 좀 놀라서 말입니다. 해진 씨가 내 스타일까지 알아주시다니, 좀…… 감격스럽기도 하고.”



고작 정장 하나 골라줬을 뿐인데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를 보니 마음이 조금 쓰렸다. 해진은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아까 가리켰던 화면 속 정장을 다시 보았다.



“음, 역시 괜찮네요. 저거, 저 감색은 너무 가벼워 보이고. 그쵸?”



언뜻 대답이 없기에 머리칼을 그의 무릎에 뭉개며 위를 보자 눈이 마주쳤다.



“지금 나한테 애교부리는 겁니까?”



웃음을 참는 투로 묻자 해진이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묘하게 부끄러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두죠?”

“그럼 기꺼이 넘어가 줘야겠군요.”



이환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살살 헤집었다. 손길이 좋아서 해진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있으니 꼭 기분 좋은 고양이 같군요.”

“고양이치곤 배가 너무 부르지 않아요?”

“뭐 어때. 귀여우면 됐지.”



해진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민망해 죽겠는데, 정작 말한 본인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낯 뜨거운 말을 참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며 그저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환은 노트북을 옆으로 치우고 해진이 좀 더 편히 저를 베고 누울 수 있게 자세를 고쳤다. 해진은 그의 무릎에 자연스레 머리를 비비며 파고들었다. 허벅지에 뭔가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나저나…… 해진 씨 출산 후에 휴가 갈 곳을 생각해뒀는데 말입니다.”

“휴가요?”

“아마존까지는 아직 협력 구축이 안 되었지만 네팔은 충분히 해진 씨가 원하는 여행이 가능하겠더군요.”



해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환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지탐험.”



해진이 누워 있던 상체를 발딱! 일으켰다. 배가 그렇게 부르고도 어떻게 그렇게 날렵할 수 있는지 환이 당황할 정도였다.



“진짜요? 정말요?”

“부서에서 어제 연락이 왔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닦달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좀 오래 걸렸군요.”

“완전 좋아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해진은 환이 신이라도 되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기에 환은 조금 멋쩍어졌다.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정식 상품 개발은 아직 힘들지만, 현지 가이드와 안전 관련 계약 등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출산 후, 몸조리를 하고 나면 그곳은 가을이라 탐험에도 딱 좋을 시기라고 합니다. 장소는 개발되지 않은 숲과 산…….”



말을 잇던 중, 해진이 그의 품에 폭 안겨왔다. 부른 배 탓에 거의 머리만 들이민 형국이었다. 환은 잠깐 굳었다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여주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환이 씨.”



고맙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 해진을 토닥여주며 환은 뿌듯함에 웃었다가, 불편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가 걱정되어 조심스레 상체를 도로 일으켜주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사랑스러웠다. 빛나는 두 눈도 귀여웠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그는 숨까지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당장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일단 무사히 출산하는 것부터 생각합시다. 알겠죠?”



엉망이 된 머리칼을 살살 쓸어주며 말하자 해진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 모습이 하도 예뻐서 환은 결국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가뜩이나 붉던 해진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분위기가 묘하게 달아올랐다. 다시 입술이 가까워지려는 순간…….



“아, 근데 저 진짜 흥분돼요. 탐험할 생각하니까, 막…….”



해진이 불쑥 던지듯 말을 꺼냈다. 콧김까지 뿜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흥분한 듯했다. 환은 묘한 아쉬움을 느꼈으나 잔뜩 달아오른 그가 귀엽기도 했다.



“해진아.”



뺨을 손으로 감싸며 이름을 부르자 해진의 눈이 다른 종류의 놀라움을 담아냈다.



“그렇게 좋아?”



이번에는 눈에 띄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붉어졌다가 다시 식었다가 하는 게 귀엽긴 한데, 몸에 좋지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환은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살짝 대었다가 떼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이뤄줬어야 했는데. 내가 못나서 이렇게 늦어버렸네.”

“아, 아니에요……. 애기 낳고 가도 저는…… 좋아요.”



눈앞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눈동자를 할 수만 있으면 입에 쏙 넣어버리고 싶었다.



“사실 조금 걱정했거든요. 아이 낳고도 환이 씨랑 계속 있어도 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이렇게 빌붙어 있기만 한 것도 영 죄송하니까……. 그리고 환이 씨가 저한테 또 질릴 수도 있는 거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이번에는 환의 눈이 커졌다. 미간을 구겼다가 행여 해진이 겁을 먹을까 싶어 얼른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진짜 갈 곳도 없고……. 정말 혼자라서……. 원래도 혼자이긴 했지만…….”



차라리 그 눈동자가 슬픔이나 서러움을 담아냈더라면 제 마음이 덜 아팠을 텐데, 해진은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으며 무던한 표정을 했다.



“이런 화려한 리조트 아니더라도, 좋은 침대랑 비싼 밥 아니더라도 괜찮아요. 그냥 제가 살던 원룸처럼…… 그런 데라도 좋으니까, 그냥…….”



잠깐 말을 멈추고 오물거리는 입술이 오늘따라 유독 붉었다.



“그냥 같이 지내고 싶어요. 환이 씨가 저를 계속 좋아해준다면요.”



말을 끝낸 해진이 데굴, 눈동자를 굴리며 환의 눈치를 봤다. 환은 그를 다시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당연히 그의 곁에 있어주리라 다짐한 지 오래인데, 정작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해서.



해진의 손이 그의 등에 닿았다. 외려 환을 위로하는 듯이 도닥여주었다.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환은 결심했다. 강해진의 마음에 남은 불신을 온전히 지우지는 못할지언정, 절대 먼저 손을 놓지는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환은 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몹시 까다롭고 예민했다. 제 성장 과정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결과이긴 했다. 가족의 도움 없이 혼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나날 속에서는 남들과 다른 기준이 필요했다.



스스로 세운 원리 원칙들은 이내 이환이라는 사람을 지켜주는 벽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벽 안에서만 평화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강해진은 그 견고한 벽을 깨부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리고 해진에게 놀랐다. 강해진의 존재는 단지 제 아이를 배고 있는 오메가 그 이상이었다.



강해진은 침입자였고, 가장 다정한 적이었으며, 동시에 다루기 까다로운 동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첫 연인이었다.



오랜 시간 저를 지켜온 결벽증도, 남에게 생활을 공유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개인주의적 성향도, 심지어 까다로운 식성까지 강해진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강해진의 앞에 서면 뼛속까지 물러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는 갑옷을 잃고 무기를 내버린 패잔병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이 싫지 않았다.



환은 그가 저를 무너뜨리는 게 좋았다. 무너지는 기쁨이 무엇인지 환은 처음 깨달았다.



“보드게임 좋아하세요?”



어느 날 책 읽는 해진을 구경하던 중, 그가 환에게 물었다.



“보드게임 말입니까?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저는 어릴 때 형제들이랑 보드게임 하면서 지내는 애들이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저는 같이 할 사람도 없는데 게임만 사놓고 그랬어요.”



보드게임이 갖고 싶단 뜻인가? 환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그 뜻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강해진과 함께 지내면서 수많은 것을 배웠다. 임산부 오메가의 건강을 관리하는 법이라든지, 혹은 오지를 탐험할 때 어떤 것을 가장 우선시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의 기분을 파악하고 맞춰주는 것 역시 새로이 배운 것이었다. 남의 기분을 맞추는 일은 사실 환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남들이 그의 기분을 맞춰주면 모를까. 그러나 해진과 지내면서 그는 처음으로 상대방의 의도를 읽고 기분을 헤아리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은 보드게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환은 그가 내민 책을 받아 들고, 바로 다음 권을 침대 아래에서 집어 건네주었다.



“저도 어릴 때 형제 있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운 때가 많았습니다.”

“정말요? 환이 씨도요?”



눈을 동그랗게 하며 묻는 말에 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외아들로 태어나 혼자 지냈으니 말입니다. 해진 씨와는 달리 심지어 친구도 없었죠.”



해진이 작게 웃었다. 환 역시 같이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 한번 저랑 보드게임 같이 하시죠. 인원이 필요하면 박 비서나 닥터 최를 불러도 되고 말입니다.”

“좋아요! 안 그래도 환이 씨가 좋아할 것 같은 보드게임이 생각나서요. 그게 어떤 거냐면요…….”



해진은 재잘거리며 게임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고, 환은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질문을 해가며 그의 손을 가만히 끌어당겼다. 제 것보다 훨씬 작은 손을 감싸듯이 쥐고 조물조물 마사지를 하는 동안 해진은 정신없이 종알거렸다.



제게 몸 일부를 맡겨놓고 수다를 떠는 해진이 몹시도 사랑스러웠기에, 하마터면 그의 말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불충을 저지를 뻔했다.



이렇도록 누군가에게 실수를 할까,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일 역시 그가 최초로 배운 것이었다.



그는 제 모든 최초를 해진과 공유하고 싶었다. 마치 세상을 처음 알게 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강해진과 지내는 일은 마치 자신이 알던 세계를 새로이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셰프님이 밤에 야식 만들어주셨는데 인사도 못 드렸네. 지금 계시겠죠? 전화해야지.”



강해진은 환이 생각하기에 오지랖이 넓고 지나치게 친절했다. 전화기를 건네주자 해진은 식당에 전화를 걸어 헤실거리며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제 음식도 맛있었다, - 심지어 입덧 때문에 두어 술 뜨지도 못해서 환은 그들을 해고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말이다 - 추운데 감기는 안 걸리셨느냐 어쩌고저쩌고 쓸데없는 말을 하느라 셰프와 연결되기까지도 5분은 걸린 듯했다.



“와, 셰프님, 저 진짜 그런 햄버거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봤다니까요! 지금도 군침 도네.”



몇 입 먹지도 못한 것을 극찬하는 해진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불쾌해졌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은 제게만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남에게 잘해주는 에너지를 모두 제게만 쏟길 바랐다.



“……뭘 그렇게 길게 이야기합니까. 그냥 대충 하고 끊지.”



통화가 끝난 전화기를 제자리에 놓으며 뾰로통하게 말하자 해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직원분들께 잘 대해드려야 환이 씨한테도 좋죠.”



그 말에 환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강해진은 셰프뿐만 아니라 박 비서에게도, 프런트 직원에게도, 여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결같이 친절했다. 환 본인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 생각하자 내내 품고 있던 질투심이 한결 풀렸다.



“참, 아까 책에 나와서 찾아본 건데, 이 새 어때요? 진짜 귀엽죠?”



해진이 태블릿PC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조막만 한 새 사진이 하나 떠 있었다. 이딴 새보다 당신이 몇 배는 더 귀엽다고 대답하는 대신 환은 긍정하는 의미로 눈을 휘며 웃었다. 이런 반응 역시 해진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이렇게 귀여운데 완전 포악하대요……. 같은 지역에 사는 다른 새 둥지를 막 부순대.”

“그래요? 이제 보니 해진 씨랑 닮은 것 같은데.”

“잉? 저랑요?”



놀란 눈으로 다시 화면을 들여다보는 강해진이 하도 사랑스러워서 결국 환은 그의 뺨에 쪽,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이 몹시 달콤해 보였다.



환은 해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시 도망칠 가능성이 이제는 거의 없다 한들, 그저 이렇게 지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욕심이 났다. 이렇게 매일 붙어 지내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그와 지내며 매일매일이 찬란했다.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배우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이 수많은 감정을 아끼고 또 아껴서 잊고 싶지 않았다. 행여 해진과 멀어지기라도 하면 이 찬란한 것들을 모두 잊을까 두려웠다.



그는 해진에게서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의 방법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한참 수다를 떨던 해진은 그대로 잠들었다. 환은 이불을 여며주고 방을 나왔다.



내내 기다리고 있던 박 비서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몰골을 하고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뼈가 부딪쳐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환의 귀에까지 들렸으나 그는 무시하고 말을 꺼냈다.



“준비는 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예에……. 시키신 대로 다 했습니다.”



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군, 하는 표정으로 박 비서를 흘끔 훑어보고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박 비서가 얼른 그의 뒤를 따르며 오늘의 남은 스케줄과 업무보고 몇 가지를 읊었다.



“저, 그런데 전무님.”



무감하게 듣고 있던 이환이 옆을 흘끔 보았다. 박 비서는 몇 시간 동안 쭈그리고 있던 다리를 퉁퉁 두드리며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꼭 제가 복도에서 기다려야 합니까?”



이환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내가 이동하는 동안 보고를 받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뒤이은 말에 박 비서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예에, 뭐…… 제 무릎이야 어찌 되든 효율이 제일 최고죠…….”



힘없이 말을 읊으며 따라 걷던 박 비서의 눈이 문득 뭔가를 떠올리곤 반짝, 빛났다.





* * *





화상회의를 끝내고 몇 가지 밀린 업무를 처리한 뒤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자거나 또 시커먼 탐험대들이 나오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해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리 앉아보세요.”



침대 한쪽을 톡톡 두드리며 하는 말에 환은 은근한 긴장감을 느끼며 다가갔다.



“박 비서님이 어제도 복도에서 내내 쭈그리고 계셨다면서요. 화장실도 못 가고, 환이 씨 기다리느라요.”



뒤이은 해진의 말에 환은 조금 당황했다. 박 비서가 설마 해진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한 건가?



“그건, 효율성을 위해서…….”

“사람을 그렇게 세워두는 게 어디 있어요. 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저한테는 잘해주시면서 다른 분들한테는 왜 그러세요.”



나긋나긋한 말투로 제법 단호하게 말하는 그를 보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그야 당연히 강해진 씨는 제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런 겁니다.”



해진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저는 환이 씨가 다른 분들한테도 잘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잘해주시는 것처럼요.”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해가 가지 않아 인상까지 잔뜩 구겼다. 가뜩이나 해진을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몸이 모자랄 지경인데 남까지 챙기라니.



“박 비서님도 그렇고 최 박사님도 그렇고, 다들 환이 씨를 위해서 일하는 분들이잖아요. 그래서 저한테는 중요한 분들이거든요.”



뒤이은 해진의 말은 환이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환이 씨 주변에 계신 분들이니까 저한테도 중요해요. 그래서 제가 잘 대해드리는 거고요. 환이 씨도…… 그래 줬으면 좋겠어요.”



멍하니 있는 환의 팔목을 해진이 쥐고 끌어당겼다.



“하지만 저는 지금 환이 씨도 좋으니까 너무 애쓰시진 마세요.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면 죽는다더라.”



해진이 헤헤, 소리 내어 웃었고 환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쩌면 그에게서는 평생 배워도 다 못 배운 것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 * *





태아는 무사히 자라고 있고, 산모도 건강하다고 했지만 배가 빵빵하게 불러오고도 입덧은 온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해진이 시도 때도 없이 입덧을 할 때마다 환은 같이 말라갔다. 차라리 제가 대신 괴로웠으면 좋았을 텐데……. 갑갑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진은 해맑게 웃곤 했다.



“그래도 예전엔 냄새만 맡아도 토했는데, 지금은 먹다가 토하니까 훨씬 낫네요!”

“그게 할 말입니까? 얼굴 이쪽으로 봐요. 닦아줄게.”



턱을 쥐고 입가를 살살 닦아주는 환의 얼굴이 영 안 좋아 보여서 해진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정작 본인은 이제 익숙한데, 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냄새나요. 제가 닦을게요.”

“안 납니다.”



환은 정색까지 하며 해진의 입가와 손을 깨끗하게 닦아준 뒤 번쩍 안아 들고 욕실을 나왔다. 해진은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무리 못 먹었다곤 해도 애가 배 속에 들어가 있으니 몸무게는 늘어났는데, 어째 저를 드는 힘은 변함이 없었다.



“안 무거워요?”

“가벼워서 걱정입니다만.”



해진은 비실비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비볐다. 몸도 힘들고 입덧도 괴로웠지만 환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좋았다.



행여 그가 다칠세라, 욕실에서 침대까지 오는 것도 제 발로 걷게 하질 않고 침대에 내려놓을 때도 환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제 괜찮아요. 얼른 일 보러 가세요. 아침부터 바쁘신 거 같던데…….”



오늘따라 일이 많은지 환은 아침부터 계속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분주하게 굴며 밖에 나갔다 오곤 했다.



“별로 안 바쁩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으면…….”

“없으니 그런 말 말아요.”



단칼에 잘라내는 대답이 어째 좀 차가웠지만 해진은 개의치 않고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환이 그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발 아래쪽으로 손을 넣어 끌려 내려간 수면양말도 끌어 올려주고, 다시 단단히 이불을 여며주는 동작은 평소와 똑같아서 안심했다.



입덧 때문인지 눈에 열이 오르고 졸음이 밀려왔다. 해진은 풀린 눈꺼풀을 끔벅거리며 환의 모습을 좇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좀 더 자요.”



목소리가 달았다.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



해진은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이 리조트에서 환과 지내면서 해진은 자신이 의외로 다른 사람과 지내는 데에 크게 거부감이 없단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부모님을 잃은 뒤로 쭉 혼자 살아온 탓에 자신이 누군가와 이렇게 깊이 생활을 공유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건 착각인 모양이었다. 물론 이환이 제게 많이 맞춰주는 것도 있지만.



잠이 밀려들었다. 해진은 기꺼이 졸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곁에 있을 거란 말과 달리 해진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환이 없었다.





* * *





눈을 비비며 일어난 해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의 노트북은 있는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박 비서를 만나러 간 모양이었다.



도로 침대에 누워 만화책이나 볼 요량으로 협탁 서랍에 있는 태블릿PC를 꺼내려던 해진은 스탠드 옆에 놓인 메모를 보고 멈칫했다.



[복도로 잠깐 나와주십시오.]



정갈한 글씨체는 환의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슬그머니 일어나 부른 배를 안고 끙,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열었을 때, 해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리조트 호텔 복도 벽이 온통 덩굴 식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은 죄다 진흙을 발랐는지 질퍽거렸다.



해진이 경악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바로 식물의 종류였다. 실제로 열대 지방의 늪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들이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초겨울이니까.



그는 조심스레 다가가 덩굴 식물들의 이파리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또 경악했다.



‘진짜 생화네?’



이번에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진흙이 실내화를 적실 정도로 바닥에 흥건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미끄럽지는 않았다.



‘나 넘어지지 말라고 그런 건가.’



참 귀여운 이벤트네, 생각하며 해진은 걸음을 옮겼다. 덩굴이 뻗어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가면 될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정성 들여 꾸몄는지. 복도 전체가 죄다 덩굴 식물에 뒤덮여 있었다. 벽뿐만 아니라 천장까지 말이다.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차서 건물 전체가 꼭 아마존의 미로 같았다.



와중에도 전직이 여행사 기획팀 직원이라고, 해진은 이런 콘셉트의 상품이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짜 식물들이라 퀄리티가 장난 아니었다. 코를 찌르는 풀 냄새가 정말 아마존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해진은 심장이 뛸 정도로 흥분되었다.



‘환이 씨는 어디 있지?’



도대체 얼마나 넓은 곳을 꾸며놓은 건지, 복도 저 끝까지도 덩굴이 그득하게 덮여 있었다. 그리고 계단 아래까지.



해진은 잠시 고민하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만삭인 그를 배려한 것인지 난간은 덩굴로 덮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본래 은색이던 난간조차 나무처럼 갈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단색도 아니고, 심지어 나무 무늬까지 꼼꼼하게 넣은 걸 보고 감탄했다.



조심스레 로비로 내려간 해진은 다시 감탄했다. 넓은 로비 전체가 늪지대처럼 꾸며져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프런트 데스크가 있던 곳에는 커다란 나무까지 있었다.



“와아…….”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눈에도 얼마나 공들여서 꾸몄는지 티가 났다. 생생한 풀 내음이며 어디서 들리는지 몰라도 작게 벌레 우는 소리까지 들렸다. 해진이 늘 탐험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아마존의 광경과 거의 똑같았다.



아마존을 그대로 구현해놓은 듯한 로비를 정신없이 구경하던 해진은 문득 로비에서 이어진 복도 - 물론 이곳도 덩굴 식물로 벽이 뒤덮여 있었다 - 에서 인기척을 읽었다.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한쪽 손은 부른 배를 쥔 채였다. 미끄럽지 않은 진흙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해진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이환에게 이렇게 귀여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귀여운 수준이 아니잖은가. 이렇게 밀림을 그대로 가져온 듯이 호텔 건물을 꾸며놓는 일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일 터다.



외국에만 있을 식물을 하나하나 들여와서 벽을 장식하게 했을 이환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웃음이 났다. 그 성격에 직접 일은 하지 않을지언정 내내 제 생각을 했겠지. 몇몇 식물은 직접 만져보고 미간을 구기며 불결해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대.’



싱글싱글 웃으며 복도를 한 번 더 꺾자마자 해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침내 화려한 덩굴이 끝나고 매끈하고 넓은 호텔 복도 한가운데, 이환이 서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해진은 부른 배를 쥔 채 천천히 그를 향해 걸었다. 가슴이 뛰고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대박이에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꾸밀 생각을 하셨어요?”



환은 대답 대신 조금 수줍어 보이는, 그러나 뿌듯함이 묻어나는 미소를 띤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걸어 마침내 그의 앞에 도달하자 환이 그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가득 모인 탐스러운 꽃송이에 얼굴을 가져가자 달큼한 향이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때, 환이 무언가를 하나 더 내밀었다. 해진은 제 앞에 내밀어진 것을 보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환이 내민 자그마한 상자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당신이 어디를 탐험하든, 어떤 오지를 걷든 그 끝에는 항상 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해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해진의 마음에 무언가가 찌르르하게 번졌다. 자신이 울고 있음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투둑, 투둑, 꽃다발 위로 눈물이 번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대답했다. 어쩌면 이환이라는 사람을 맨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기다렸던 순간인지도 몰랐다.



그를 피해 도망 다니던 순간들이, 아픈 배를 움켜쥐고 내달리던 그 순간들이 당장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할래요, 결혼. 할게요. 하고…… 흑, 하고 싶어요.”



울먹이며 말하자 환이 몸을 일으켰다. 만삭의 그를 품에 안았다.



환의 어깨에 젖은 얼굴을 대며 해진은 제 꼴이 말이 아니란 생각을 했고,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배는 부를 대로 불러온 데다 자다 나온 탓에 얼굴도 머리도 엉망이었다. 편한 티셔츠와 진흙에 젖은 슬리퍼도 부끄러웠다. 반면 눈앞에 있는 이환은 정장을 빼입고 있어 더 창피했다. 해진은 잔뜩 불러온 배를 손으로 감쌌다.



“나 좀 더 이쁠 때 프러포즈 하시지…….”



울먹거리며 말하자 환이 그를 안은 채 푸스스 웃었다.



“지금이 제 눈에는 제일 예쁩니다.”



낮게 내뱉는 목소리가 지독히도 달았다. 이환이란 놈은 제게 수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님을 알았다.



제게 진심인 알파에게서 나는 페로몬은 무해하고 달기만 했다. 해진은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그것을 깊이 들이마셨다.





90퍼센트





- 그러니 이번 분기에서는 좀 더 새로운 상품 개발에 주력하는 편이 아무래도…….



화면 너머에서 말을 잇던 윤 부장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의 시선은 화면 속, 상사가 들고 있는 연분홍빛의 뜨개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환은 지금 화상회의를 켜놓고 보고를 받는 내내 무언가를 ‘뜨개질’하고 있었다. 덕분에 화상회의에 참여한 키스틸 레저 간부들은 모두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이환에게 취미가, 그것도 자그마한 무언가를 만드는 취미가 생길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터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간부 하나가 마이크를 끄는 것도 잊고 “저거 양말 맞지? 손가락만 한 양말.” 하며 옆자리 직원을 불러다 화면을 들여다보게 시키기까지 했다.



어쨌든 지금은 전무가 참석한 회의 중이니 윤 부장은 대체 들고 계신 게 뭐냐고 묻는 대신 이성을 다잡으며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이환은 지금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대바늘을 잠시 멈추곤 제 손바닥 반의반 크기도 되지 않는 양말의 코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아무래도 이쯤에서 코를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뜨개질 책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 어, 음, 전무님?



윤 부장이 조심스레 그를 부르고서야 환은 들고 있던 바늘과 양말을 내려놓았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알겠습니다. 자료는 제 메일로 보내주십시오.”



회의가 끝나고 환은 뜨던 양말을 조심스레 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일어나려던 그는 문득 양말 크기를 손가락으로 가늠해보았다. 발바닥이 제 검지 길이만도 못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자그마한 크기를 확인하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회의 끝나셨습니까?”



박 비서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와 그의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털실 바구니도 함께 챙겨 들려는데, 이환이 다소 거칠게 그것을 빼앗아갔다.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소중하게 바구니를 품에 안는 이환을 보곤 뭐라 말하길 포기했다. 그래도 요즘은 이전처럼 복도에 저를 세워 놓거나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하지는 않으니 다행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얼마 전에는 세상에, 밥은 먹었냐고 걱정해주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꼭 누가 시켜서 묻는 티가 나긴 했지만 말이다.



환이 방에 도착했을 때 해진은 눈을 감고 명상 프로그램을 듣고 있었다. 등을 침대 헤드에 기댄 채 한쪽 손은 부른 배에 얹고 느긋하게 있는 그를 보자 안도감에 웃음이 나왔다.



들어오는 기척을 읽었을 텐데도 명상에 집중하는 그가 좋았다. 해진은 이처럼 이환 본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야무지게 호흡을 하는 해진을 보고 있자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습니다. 천천히 다시 한 번 들이마셨다가…….



그가 심호흡을 하는 동안 환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털실 바구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양말을 마저 뜨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뜨개질이지만 어렵지 않았다. 그는 뭐든 빨리 배우는 편이었고, 해진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쉽고 즐겁게만 느껴졌다.



명상을 끝낸 해진이 눈을 뜨고 환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가뜩이나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그게 뭐예요?”

“아기 양말입니다. 해진 씨 것과 같이 세트로 뜨는 중입니다.”

“우와…….”



진심으로 놀랐는지 입까지 벌리며 감탄하는 그가 귀여워서 환은 웃음을 픽 흘렸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그냥…… 환이 씨가 이런 거 뜨실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뜨더라도 남들 안 보이는 곳에서 몰래 하실 거 같은데 의외로 당당하셔서…….”

“내 남편과 아이에게 신길 양말을 뜨는데, 나쁜 일도 아니고 왜 감춰야 합니까?”



박 비서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까 윤 부장이 끈질기게 보내던 의아하단 눈길도 말이다.



하지만 환은 구태여 제 오매가를 위해 하는 일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무언가를 감추고 부끄러워하는 일은 스스로를 보호할 권력이 없는 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해진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저 웃음을 위해서라면 양말이 아니라 지붕 덮개도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제 거도 같이 떠주시는 거예요?”

“예. 아이 것은 분홍색, 해진 씨 것은 같은 실 흰색으로 뜰 예정입니다.”

“그럼 환이 씨 거도 세트로 떠주세요.”



능숙하게 움직이던 바늘이 뚝 멈췄다.



“……저는 필요 없습니다만.”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하려면 패밀리룩으로 맞춰야지.”



패밀리룩……. 뜻은 알지만 낯선 단어에 환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흰색 털실 양말은 정말로 제게 필요가 없었다.



“가족이잖아요.”



뒤이은 해진의 말에 환은 무언가로 머리를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족인데 패밀리룩으로 신어야지……. 환이 씨도 하얀 양말로 꼭 신으시기예요. 분홍색도 어울릴 것 같긴 하겠다. 쿨톤이라서.”



태블릿PC를 만지작거리며 종알종알 내뱉는 해진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종처럼 뎅뎅 울렸다.



제게도 가족이 없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방치된 채로 혼자 살아남으려 아득바득 애쓰는 손자를 보며 혀를 차는 조모도 가족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강해진은 달랐다. 어쩌면 남들이 가진 ‘가정’이란 것을 강해진이 제게 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가족…….”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하자 더 실감이 났다. 가족이라니.



식은 출산 후에 올리기로 했다. 신혼집도 함께 찾아보았다. 환은 몸이 약한 그를 위해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고르고 싶었다. 해진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지만, 조금 더 신중히 고르자고 했다. 환은 기꺼이 동의하며 서울 쪽으로도 몇 군데를 물색했다.



앞으로 자신은 강해진과 한집에서 생활을 공유하게 되리라. 식사를 함께하고 어쩌면 출근을 같이 할지도 모르지. 눈을 뜨면 해진의 모습이 늘 있을 테고, 밤에 자다 깼을 때도 옆에 누운 그를 확인할 수 있을 터다.



프러포즈를 하기 전에도 이미 생각했던 바인데 되짚으니 또 마음이 벅찼다. 누군가와 생활을 공유하는 일은 여태까지의 제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끔찍한 일이었건만.



“왜 그래요? 어차피 우리 결혼도 할 건데……. 그럼 가족 아닌가…….”



해진이 장난스레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환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잠깐 놀란 듯하던 해진이 이내 그의 목에다 얌전히 팔을 감아왔다.



숨이 한참 섞이고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해진은 그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먼 산을 보았고, 환은 손을 뻗어 소파 위의 털실 바구니를 가져왔다.



“환이 씨, 제가 생각해봤는데…… 우리 애 이름 말이에요.”



요 몇 주 동안 두 사람은 아이 이름을 고민 중이었다.



환은 작명소에서 지으면 된다 했지만 해진은 직접 짓고 싶어 했다. 그리고 환은 최대한 그의 의견을 존중해 함께 이름을 고민해주기로 약속했다. 제게 작명 센스가 영 없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떠오른 게 있습니까?”



해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바로 뱉지 않고 뜸을 들이는 걸 보니 이번에는 마음에 들거나 혹은 말하기 민망한 이름이거나 둘 중 하나일 터다.



“말해봐요.”



뜨개바늘을 도로 잡으며 보채자 해진이 배시시 웃었다.



“환이 씨랑 제 이름이랑 하나씩 따서, 아명이랑 본명 하나씩 지으면 어때요?”

“그거 괜찮군요. 이왕이면 해진 씨 이름을 딴 게 본명이면 좋겠습니다만.”

“음? 왜요?”



해진이 털실을 가져가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마음에 들었는지 털 뭉치가 두 손 사이를 바삐 오갔다.



“나이 먹고서도 내 이름을 딴 이름으로 부르면 괜히 철이 안 들까 걱정되어서 말입니다.”



진지하게 말했건만 해진이 풋, 웃음을 터뜨린다.



“그 말은…… 환이 씨를 닮아서 철이 안 들까, 겁이 난단 뜻이에요?”



환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 않고 근엄한 표정을 하고선 뜨개질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럼 아명은 ‘환희’, 본명은 ‘해영’ 어때요? 둘 다 성별도 안 타고. 괜찮죠?”



비장하게 이어지던 뜨개질이 잠깐 멈췄다. 환은 해진을 마주한 채 눈을 휘어 진심으로 웃었다. 정말로 기뻤기에. 정말로 마음에 들었기에.



“좋네, 둘 다.”



시원스레 대답해주자 해진이 뿌듯하게 웃었다. 할 말이 남았는지, 털실을 주무르며 환의 눈치를 조금 보던 그가 뜸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근데요, 아까 불러준 거…… 되게 좋은데. 또 불러주면 안 되나?”



환이 눈썹을 슬쩍 들며 그를 흘끔 보았다. 초롱초롱한 눈이 귀여워서 뭘 원하는지 알면서도 선뜻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또 입술을 비죽거리며 토라지겠지.



“남편이라 불러주는 게 그렇게 좋았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환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바로 코앞에서 눈을 마주했다.



“내 남편 해진아.”



발간 얼굴이 이번엔 아예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환은 픽 웃으며 그를 놓아주곤 다시 양말을 뜨기 시작했다. 해진이 옆에서 요란하게 손부채질을 했다.



“와, 진짜…… 이거 임팩트 장난 아니네요.”



뭐가 그리 기쁜지 손부채질을 하다가 심호흡을 하다가 부산스레 굴던 해진은 옆에 앉은 환에게 팔짱을 꼈다. 시선을 슬쩍 틀자 어깨에 매달린 해진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남편 환이 씨.”



부끄러운지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헤헤, 웃는 그를 보니 왜 그리도 난리를 부렸는지 알 것 같았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구태여 감추지는 않았다.



해진의 손에서 정신없이 구르던 털실이 바구니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성인 남자 양말 한 켤레를 더 뜨려면 실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지면서 해진은 병원에 입원했다. 산모의 몸이 워낙 약하니 미리 의료 시설이 갖춰진 곳에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전문의의 의견 때문이었다.



환은 분주하게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강해진이 아껴 마지않는 다큐멘터리 블루레이 디스크도 신줏단지 모시듯 입원실로 옮겨 놓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제 오메가가 아이를 낳는단 사실이 성큼 실감 난 환은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앉아 있지도 못하고 병실을 서성거리다가 해진의 몸 상태를 살피고, 의사에게 갈지 그의 곁에 있을지 결정하지 못해 문까지 갔다가 침대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냥 좀 앉아 계세요…….”



보다 못한 해진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환은 그제야 침대 옆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와중에도 다리 한쪽을 달달 떨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정신없게 굴었군요.”



환을 빤히 보던 해진이 무거운 몸을 옆으로 끙, 옮기더니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려 보였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환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가 명령한 대로 침대에 얌전히 앉았다. 해진이 그의 어깨에 상체를 기대었다. 기대오는 해진의 상체를 팔로 안는 동작이 능숙했다.



“많이 걱정되세요?”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몸에서…… 아이가 나오는 일인데…….”



제 입으로 내뱉고도 끔찍한 모양인지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해진은 웃음을 꾹 참고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저를 보게 했다.



“환이 씨.”



이렇게 처연한 적이 없던 환의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해진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저는 아마존에 버려 놔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해진의 말은 허세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러니 도망 중에도 숲속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것이지.



“그러니 이깟 일로 제가 위험해질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덤덤한 투로 말하는 해진을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그래, 제 오메가는 마냥 연약한 이가 아니었다.



해진은 걱정 말란 투로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까지 했고, 덕분에 환은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뻤다. 이렇게 멋진 오메가가 제 짝이어서. 죄 많은 저를 버리지 않고 곁에 있어주어서.



그러나 해진의 장담과 달리 출산은 지독한 난산이었다.



의사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환에게 상황을 알려주었다. 환은 그들이 말하는 것의 절반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버렸다.



‘산부가 위험하다’는 말 한 마디가 환에게는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어째서 강해진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런 고생을 할 일이 없단 생각에까지 닿자 미칠 것 같았다. 모두 제 잘못이었다. 아프려면 제가 아파야 하는데.



분만실 앞에서 서성거리는 동안 환은 제 삶을 돌아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진을 괴롭힌 것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딱히 피해를 준 일도,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 가끔 이환에게 인성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수군거리는 놈들이 많긴 했지만 죄다 루저들의 비겁한 험담일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잘못한 것은 강해진에게 나쁘게 대한 일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벌로 해진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종교라도 있었다면 당장 기도했을 터다. 하지만 미지의 존재에 운을 맡기는 일은 환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의사의 멱살을 잡는 일을 택했다.



“산부가 잘못되면 그땐 당신이랑 당신 자식도 똑같이 만들어줄 줄 알아.”



언론을 두려워한 박 비서가 목숨을 걸고 만류했으나 딱히 효과는 없었다.



진통이 시작된 지 꼬박 열 시간이 지났다. 그에게는 거의 열흘 같은 시간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의사가 분만실에서 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환이 벌떡 일어나 의사에게 다가갔다. 의사가 길게 한숨을 내뱉는 것을 보고 환은 하마터면 주먹이라도 날릴 뻔했다. 한 마디만 말이 늦었어도 정말 그랬을 터다.



“산부, 아기 모두 무사합니다.”



그날 이환은 처음으로 절대적인 무언가를 믿고 싶어졌다. 해진과 자신을 연결해준, 말과 이성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를 말이다.



다른 사람의 안위가 이렇게 제게 큰 영향을 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강해진은 달랐다. 무사하다는 말 한 마디에 환은 제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온갖 것을 다 알려주다 못해 그는 이제 제 목숨마저 쥐고 흔들어댔다. 강해진은 이환이 겪은 것 중 가장 비논리적이고 멋대로에 통제불능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침대에 누운 채 속도 없이 제게 히, 웃어 보이는 해진을 보는 순간 환은 처음으로 북받쳐 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 처음 느끼는, 그러나 여태 느껴본 모든 감정 중 가장 크고 벅찬, 환희라는 감정이었다.



환은 달려가서 그에게 입을 맞췄다. 땀투성이에 얼굴이 허옇게 질린 데다 환자복이 흐트러진 강해진은 그가 본 모습 중 가장 예뻤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계속 아름다울 것이다. 제 품에서 하루하루 더 예뻐지겠지. 여태껏 그랬듯이 말이다.



“숨 막혀요…….”



입술을 떼자마자 옹알거리는 그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해진에게서 나는 달큼한 딸기 향을 맡자 안도감이 들었다. 오래 떠돌다 집에 온 것 같은 안도감이었다.





* * *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아픈 곳도 없고 우량아로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말에 해진은 크게 기뻐했다.



갓난아기를 안는 해진의 모습이 꽤 능숙해서 환은 조금 놀랐다. 안고 어르는 손길이 꼭 아이 여럿 키워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잘하는군요.”

“그럼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연습 말입니까?”

“환이 씨 없을 때 몰래 쿠션으로…….”



아이도 아직 없는데 연습을 어떻게 했나 했더니 나오는 대답이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동시에 환은 제가 보지 못한 해진의 모습이 있단 사실에 억울하기도 했다.



“왜 내가 볼 때는 안 했습니까?”

“그냥, 부끄러워서…….”



웅얼거리는 얼굴이 조금 붉었다. 환은 그 뺨에다 입을 맞췄다.



“그런데 환희 말이에요, 환이 씨만 너무 빼닮은 것 같지 않아요?”



해진의 말에 환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갓난아기는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져 있었고, 눈도 뜨지 않아서 무슨 빨랫감 같아 보였다. 환의 미감으로 예쁘다는 기준에 철저하게 반대되는 외모였다. 그런 아이가 저를 닮았다니 황당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에이, 봐요. 완전 똑같은데? 코랑 입이랑 턱이랑…… 귀도 닮은 것 같네요. 세상에, 손 큰 것도 똑같다.”



손이 크다고……? 해진의 손가락보다 작아 보이는데……. 하지만 강해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니 환은 아무 말 않았다.



“누가 보면 환이 씨 혼자 낳은 줄 알겠어요. 와, 억울하다.”



농담조로 하는 말임은 알지만 환은 지레 찔렸다. 뭐라 받아쳐야 할지 알 수 없어 눈만 끔벅거리다가, 환은 다시 허리를 숙여 그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수고했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한 채 눈을 휘며 웃어 보였다. 다행히 예상대로 해진은 헤헤, 소리 내어 마주 웃었다.



“환이 씨, 많이 늘었네요.”



환은 뒤이은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가 늘었단 말입니까?”

“그런 게 있어요.”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진 않았다. 대신 아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해진의 말대로 저와 닮은 구석이 아주 조금 있는 듯도 했다.



“해진 씨를 닮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저를 닮아 좋은 건 외모밖에 없었다. 아니, 이 외모조차도 때로는 귀찮을 때가 있었다.



“걱정 마세요. 성격은 절 닮을 거니까.”



해진의 말에 그제야 환은 크게 안도했다. 그래, 성격은 반드시 강해진을 닮아야 했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해진의 모습은 조금 생소했다. 그가 저 말고 다른 이에게 이런 눈빛을 보낸다는 사실이 특히 생소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강해진이지만 애정이 담뿍 어린 저런 눈길은 제게만 주는 줄 알았건만. 제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질투심마저 가졌으리라.



“환이 씨도 한번 안아보실래요?”



돌연한 물음에 환은 잠깐 당황했다.



“저, 저는…….”

“괜찮아요. 오셔서 안아보세요.”



아이는커녕 개나 고양이도 제대로 안아본 적 없던 그였다.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자 해진이 한쪽 팔을 끌어당겼다.



태어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아기는 몹시 작았다. 제 손이 닿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여려 보이기도 했다. 해진은 뻣뻣한 그의 손을 끌어다 아이를 안겨주었다.



“여기, 목을 잘 받쳐주면 돼요. 네, 거기요.”



환은 어설프게나마 아이를 안아 들었다. 갓난아기는 무척 따뜻하고 꼬물거렸다.



그제야 환은 이 아이가 제 딸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해진이 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역시 그제야 실감이 났다.



“환희야, 아빠 좋아? 으응, 좋아.”



어르는 투로 해진이 묻자 아이는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자그마한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환은 이 기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가슴 아래서 느리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 환이 씨…….”



이런 감정을,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귀하디귀한 기분을 알려준 해진에게 어떻게 고마워해야 할까.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울지 마세요. 우리 애기 태어난 날인데, 왜 울고 그래…….”



그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그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먹이 사슬의 정점에 있는, 완벽하고 모자랄 것 없는 알파.



그런 그에게 패배감과 결핍을 알려주고 그리움과 애달픔을 선사한 강해진이 있었다.



그 강해진을 가졌으니 이제 자신은 모든 걸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러는 해진 씨는 왜 웁니까.”



아이를 안고 있던 한쪽 손을 조심조심 뻗어 해진의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몰라요, 그냥 환이 씨가 우니까, 저도 그냥…….”



훌쩍거리던 해진은 아예 소리를 내어 펑펑 울기 시작했다. 환은 한쪽 팔로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 * *





키스틸 그룹 이환 전무의 결혼식 소식에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예식을 기대했다. 하지만 환은 식을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다. 해진의 의견을 따라서였다.



식장에는 유 회장을 비롯해 키스틸의 간부 몇이 참석했다. 그리고 해진의 친구인 경훈도 소식을 듣고 참석했다. 오랜만에 본 경훈은 타국에서 고생을 많이 한 티가 팍팍 날 정도로 초췌했다. 잠깐 귀국한 줄 알았는데, 아예 다시 한국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그래도 이번에 한국 다시 들어오고, 맡은 자리도 전보다 훨씬 좋아서 다행이지. 야, 진짜 고맙다. 네 남편 덕분에 내가 살았다!”



졸지에 갑자기 미국으로 쫓겨나게 된 것도 그 남편 때문인데, 그 사실은 완전히 잊은 듯이 보여 다행이었다.



해진은 식이 진행되기 몇 시간 전까지도 환희를 안고 있었다. 이제 제법 아이 보는 데에도 능숙해진 박 비서가 넘겨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쭈쭈, 삼촌 보고 싶어떠요. 우리 애기, 삼촌이 보고 싶어떠요?”



박 비서가 환희를 제 친조카처럼 예뻐해주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해진은 다시 메이크업을 점검받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무려 키스틸 그룹 이환 전무의 결혼식이라는 어마어마한 직무를 맡은 데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비장한 표정에다 손이 떨리는 게 느껴져 해진은 일부러 편히 웃어 보였다.



똑똑, 대기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이환이 꼭 제 대기실인 듯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들어왔다.



“환이 씨! 여긴 웬일이에요. 환이 씨는 메이크업 안 받으세요?”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환이 눈길을 한 번 보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기겁하며 나가버렸다. 환은 그러거나 말거나 해진의 턱을 부드럽게 당겨 입을 맞췄다.



“아까 아침에도 봐놓고.”

“그래서, 해진 씨는 내가 안 보고 싶었습니까?”

“에이, 그럴 리가요.”



이번에는 해진이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식전에 서로 얼굴 보면 원래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보고 싶은데.”



해진은 저도 모르게 수긍했다. 이환이라면 그 어떤 징크스도 신경 쓰지 않을 터다. 그리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전이라면 두려워하고 피했을 수많은 일들이 이제는 무섭지가 않았다.



다시 입술이 부딪쳤다. 쪽, 쪽, 소리를 연달아 내며 한참 호흡을 섞고 더 뜨거워지기 전에서야 떨어졌다. 아쉬움이 남아 둘은 코끝을 부딪친 채 키스의 여운을 즐겼다.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그럼 나가야죠.”



해진은 아쉬웠지만 환의 손을 답삭 쥐고 먼저 그를 이끌었다.



식장은 꽃이 화려하게 핀 들판이었다. 두 사람이 행진하는 길 양쪽으로 핀 희고 붉은 꽃은 해진의 아이디어였다. 해진은 흰색, 환은 검정색으로 대비되는 턱시도는 이환의 아이디어였다.



서약을 한 두 사람이 반지를 교환했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해진은 문득 이 순간이 꿈같다고 생각했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정말 꿈이었을지 모른다.



제 앞에서 웃는 이환은 꿈이 아니었다. 여태 그가 알던 모습과 똑같았다. 키스틸 레저의 전무이자 오만한 재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와 그에 상반되는 답 없는 성격을 가진 알파.



그리고 자신의 완벽한 짝.



환이 그의 손을 쥐고 함께 뒤돌았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해진은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찬연하게 핀 색색의 기쁨이 둘의 턱시도를 적셨다.





* * *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해진은 잔뜩 들떴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환을 불러다가 조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놈의 조난, 하나만 알면 안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해진이 기억하라면 기억하는 게 맞기 때문에 환은 열심히 메모까지 하며 경청했다.



“말했죠? 제일 중요한 건 체온 유지! 그러니까 옷은 웬만하면 버리지 않는 게 좋아요. 침낭도요.”

“알겠습니다.”

“그 지역이 보호 지역이라서 동물도 한두 종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이 책도 꼭 읽으세요.”



해진이 내민 포켓북을 받아 들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해진은 뭐가 마음에 차지 않는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안겨 있던 환희가 부우, 부, 입술 소리를 내며 손을 휘저었다.



“뭐가 또 걱정입니까?”

“다 걱정이죠. 야생이 얼마나 잔혹하고 변덕스러운지 환이 씨는 몰라서 그래요.”



이환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계속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그쵸, 그렇긴 한데…….”



해진이 환희의 손에다 검지를 쥐여주고 환의 눈치를 조금 봤다. 할 말은 있는데 꺼려지는 눈치였다.



“환이 씨가 혹시라도 너무 힘들어할까 봐요.”



그리고 한다는 말이 제 걱정이어서 환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환이 씨는 조난 상황에서 물도 못 구하실 테고, 야생 동물별로 대처법도 아직 모르시고 응급 처치법은 금방 배우셨지만 그래도…….”



걱정을 조잘조잘 쏟아내던 해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쪽 손으로 환의 손을 덥석 쥐었다.



“가면, 절대로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아셨죠?”



비장하기까지 한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해진 씨는 저를 믿기는 하는 겁니까?”



황당함을 드러내며 묻자 해진은 눈을 한 번 데굴, 굴리곤 조심스레 대답했다.



“한 90퍼센트 정도……?”



90퍼센트라니. 그래도 낮은 수치는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너무 걱정이 많은데.



“걱정 마세요. 제가 환이 씨 지켜드릴게요.”

“……그거참 든든하군요.”



해진이 주먹을 불끈 쥐며 콧구멍의 평수를 넓혔다. 상상만으로도 흥분이 되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즐거울까.



“거기 호랑이들이 사람을 안 두려워해서 가끔 사람을 해치기도 한대요……. 아, 진짜 흥분된다. 식인 호랑이라니…….”



……아무래도 제 남편의 취향이 조금 많이 독특한 게 걱정이긴 했다.



“오구, 우리 환희 배고파? 맘마 먹을까? 응?”



해진이 환희를 안아 들고 주방으로 갔다. 환은 그가 준 포켓북을 펼쳤다. 그가 시켰으니 오늘 안에는 독파하고 달달 외워야 했다.



야생에서의 갖가지 대처법이 적힌 책을 읽어 나가며 환은 그가 말했던 수치를 되새겼다. 90퍼센트라. 뭐, 그 정도면 제법 마음에 드는 수치다.



나머지 10퍼센트는 앞으로 자신이 채워 나가야 할 몫이겠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채워 나가야 할 게 남아 있다니 기쁘기까지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렇게 벅찬데도 앞으로 더 쌓일 게 있단 사실이 즐겁기만 했다.



“저어, 환이 씨…….”



주방 쪽에서 자신 없는 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유식을 만들다 뭔가 또 잘못된 모양이었다. 얼른 일어나 달려갔다.





* * *





인도와 네팔의 경계에 있는 국립 공원은 본래도 관광지로 유명했다. 본래도 1박 2일이나 2박 3일짜리 사파리 체험 프로그램이 있기는 했지만 환은 제 남편이 그런 시시하고 안전한 ‘체험’ 따위는 원치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환희는 박 비서가 보살피기로 했다. 해진은 그에게 업무 외의 일을 떠맡긴단 사실에 몹시 미안해했지만, 박 비서는 오히려 기뻐했다. 사랑스러운 조카를 매일 볼 수 있어 행복하다나.



안전 교육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받았으며, 현지에 가서도 이틀 동안 받았다. 이미 알던 사실도 좀 있었지만 해진은 얌전히 주의사항을 숙지했다.



통역이 가능한 이를 포함해 무장한 현지 가이드 세 명을 대동하고 마침내 숲으로 이동할 때, 해진은 흥분을 숨기지 못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환이 씨, 저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지프차를 타고 가며 하는 말에 환은 깜짝 놀랐다.



“괜찮습니까? 멈추라고 할까요?”

“아, 아뇨, 그 정도는 아닌데 너무 흥분되고 떨려서…….”



화색이 돈 얼굴로 말하는 해진을 보자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프차는 숲속으로 제법 깊이 들어가서야 멈췄다. 해진은 싱글벙글하며 나는 듯이 뛰어내렸다.



좀 더 안쪽으로 걸어간 일행은 코끼리로 이동수단을 변경했다. 야생 동물을 마주쳤을 때 코끼리가 오히려 더 안전하단 게 이유였다.



환은 벌써부터 풍겨오는 온갖 냄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심지어 똥을 바닥에 펑펑 싸대는 저 거대한 짐승을 타라니. 하지만 해진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래, 소똥도 맞았는데.



이곳에서 효과가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소독제를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다가 치덕치덕 바른 환은 또 한 움큼을 짜내 해진의 손에도 발라주었다.



“그거 알아요, 환이 씨?”



해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환은 말을 이어보란 투로 웃어 보였다. 비록 숨을 쉴 때마다 코끼리 똥 냄새인지 뭔지 모를 악취가 파고들었지만 말이다.



“여기 사는 호랑이들요, 점프력이 엄청 좋아서 코끼리를 타도 사실 소용이 없대요. 이 정도 높이는 그냥 뛰어넘어요.”

“그렇습니까?”



호랑이가 덤벼들 수 있다 생각하자 아주 조금 무서웠지만 구태여 티는 내지 않았다.



“네. 그래서 이렇게 코끼리 위에 앉아 있어도 순식간에 공격당할 수 있어요. 호랑이가 얼마나 빠른지 모르시죠? 저기, 저 위치 정도 되는 수풀에 숨어 있다가…….”



환은 저도 모르게 해진의 설명에 집중하며 그가 가리키는 수풀 쪽을 바라보았다. 해진의 손이 휙! 다시 그를 가리켰다.



“확! 덮치는 거죠. 사냥하듯이.”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진지하던 해진의 얼굴이 다시 풀어지며 해사하게 웃음을 담아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등줄기에 맺힌 식은땀은 그냥 더워서일 것이다. 그뿐이다. 절대 무서운 게 아니었다.



“호랑이가 덮치는 상황에서 해진 씨가 어떻게 지켜준단 말입니까.”



까딱하면 그대로 즉사할 텐데. 해진은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헤, 소리 내어 웃었다.



“어쨌든 너무 짜릿하지 않아요? 하, 손발에 피가 도는 것 같아…….”



손발에 피가 안 돌면 그건 시체입니다만, 하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제 남편이 하는 말은 무조건 맞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숲속 깊은 곳으로 이동한 뒤 일행은 코끼리에서 내렸다. 이곳에서부터는 도보로 가야 했다.



몸이 약한 해진이 혹시라도 힘들어할까 환은 걱정했지만 해진은 씩씩하게 숲속을 걸어 다녔다.



신이 나서 못 견딜 줄 알았더니 그는 의외로 진지하고 프로페셔널했다. 동물들을 놀라게 해서 좋을 게 없다며 환에게 발소리를 죽이라고 충고하기까지 했다. 진지하게 주변을 탐사하는 해진의 모습에 환은 한 사람에게 두 번 반한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헉, 환이 씨. 저거 보여요?”



걷던 중 해진이 손가락을 뻗어 보였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사슴 두 마리가 있었다. 제법 가까운 거리인데도 도망치지 않는 걸 보니 사람을 별로 무서워 않는 모양이었다.



“와아, 진짜 신기하다…….”



가까이 가도 된다는 현지인의 말에 해진은 즉각 길을 벗어나 사슴 쪽으로 다가갔다. 환은 주변을 살피며 해진을 뒤따랐다.



대부분의 풀은 허리를 넘길 정도로 키가 컸고 나무가 빼곡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해진은 마냥 신이 나서 앞서 걸었다. 환은 그가 걱정되었지만 그의 말대로 생존력은 해진이 훨씬 뛰어나니 얌전히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숲에는 온갖 동물이 다 있었다. 발 디디는 곳마다 벌레들이 도망갔고, 나무 사이로는 새들이 날아올랐으며 심지어 뱀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환은 딱 죽을 지경이었다. 온갖 더러운 박테리아와 세균이, 짐승의 똥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와, 이게 진짜 표범 똥이에요?”



해진은 힘든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생 동물이 싸질러 놓은 똥을 보고 기뻐했다.



“만져봐도 돼요?”



……심지어 만지기까지 했다.



“들었어요, 환이 씨? 여기 근처에 표범 있을지도 모른대요……!”

“예, 예. 들었습니다.”



소독제를 짜서 해진의 손에 발라준 뒤 얼른 제 손에도 치덕치덕 발랐다. 비누와 물로 박박 씻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앗, 저기도 표범 똥! 맞죠!”



환은 벌레가 제게 달려들지 않도록 손을 끝없이 내저으며 해진의 뒤를 따랐다. 당장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제대로 된 위생적인 욕실과 깨끗한 식사가 그리웠다. 하지만 해진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괴로움도 조금 줄어들었다.



현지인 가이드는 이 숲의 위험성에 대해 몇 번 경고했다. 실제로도 맹수들에게 다친 현지인이 꽤 있다고 했다. 해진도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사건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환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아주 드문 사건이고, 지금은 이 숲에 익숙한 현지인 가이드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 정도로 위험한 지역이면 오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기척이 들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섬은 어쩔 수 없었다.



탐험을 이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잠깐 쉬기로 했다. 해진은 한국에서 가져온 과자를 가이드들에게 선물해 주었다.



다정한 그의 모습을 보자 질투심이 일었으나 일전에 해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게만 잘 대해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그가 해진에게서 배운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환은 당장 씻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오래 걸은 탓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코끼리 냄새가 아직도 코를 찔렀다. 신발 밑창은 무슨 동물의 배설물인지 진흙인지 모를 것으로 질척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환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옷을 억지로 털며 옆을 흘끔 보았다. 해진은 현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동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오길 잘했다 싶었다.



“그…… 용변은 어디서 보면 됩니까?”



곤란함을 감추려 애쓰며 환이 묻자 현지인은 그런 걸 왜 묻느냐는 투로 수풀 한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환은 굴욕을 억누르고 배낭에서 물티슈를 챙겨 들었다.



“같이 가드릴까요?”



해진이 물었지만 환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가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부부라지만 용변을 보는 모습까지 보여줄 수는 없었다.



“얼른 갔다 오겠습니다.”

“하지만…… 진짜 괜찮겠어요, 환이 씨?”



걱정스레 묻는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사실 코끼리도 뛰어넘는 호랑이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겁을 내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기에 환은 제가 생각하는 한 최대한 멋진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괜찮다마다요. 쉬고 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환은 절대 괜찮지 않았다. 어릴 때에도 밖에서 아무 데나 용변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등 교육을 받고 자란 교양 있는 알파에게 그런 짓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술을 마셨을 때도 담벼락 같은 곳에 함부로 일을 본 적 없었다. 만취한 적도 없지만 말이다. 밖에서 선 채로 아무 데나 배설물을 흘리는 짓은 사람이 해선 안 되는 짓에 속했다. 그러니 환은 지금 사람이길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바지 버클을 풀며 해진 역시 이런 고생을 했으리라 생각했다. 제게서 도망 다니며 이보다 더 위험한 생활을 했겠지.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다시 아려왔다.



환은 주변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는 선 채로 지퍼를 내렸다. 당혹스럽지만 지성을 가진 성인답게 일을 처리하고 물티슈로 손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워터리스 세정제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역시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아쉬움과 함께 돌아선 순간 환은 기겁하고 말았다.



처음 보는 거대한 짐승이 환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코뿔소였다.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지만, 환은 다행히도 이 짐승이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가이드가 알려준 대처법을 기억해냈다. 놀란 티를 내지 말고, 등을 갑자기 보이거나 큰 소리를 내지 말 것.



“……나는 널 해칠 마음이 없다.”



사람 말을 짐승이 알아들을 리 없지만 그래도 입 밖으로 내어 말했다. 환은 그대로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코뿔소를 놀라게 하지 않을 속도로 뒷걸음질을 쳤다. 맹수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물론 맹수가 자주 출현하는 지역은 최대한 배제해달라고 사전에 요청해두었지만 말이다.



본래대로라면 이 냄새나고 거대한 짐승은 사람을 무서워하니 돌아서서 사라지거나,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코뿔소가 환에게 한 걸음을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지 마라.”



준엄하게 경고했으나 역시 짐승이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환은 당혹스러워 한 걸음을 더 물러났고, 코뿔소는 또 한 걸음을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심지어 더러운 주둥이를 제게 들이대려 하는 게 아닌가.



“저리 치워! 난 유부남이란 말이다!”



환은 진저리를 치며 옆으로 걸어 움직였다. 코뿔소는 그를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따라붙었다.



‘젠장, 무슨 짐승 새끼가…….’



냄새가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빨리 이 불결한 짐승과 떨어지고 싶단 생각에 환은 걸음을 더 서둘렀다. 옆으로 기다시피 걸어서 일행이 있는 곳까지 가는 동안에도 코뿔소는 졸졸 따라왔다.



“어, 환이 씨!”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해진이 벌떡 일어났다. 현지 가이드들도 기겁하며 다가왔다.



“그, 환이 씨 뒤, 뒤에…….”

“압니다. 저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저 짐승이 왜 자꾸 쫓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코뿔소가 어느새 환의 뒤를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환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데, 정작 현지 가이드들은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코뿔소가 환을 해치지는 않으리라 확신한 모양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좀 떨어지라고 하십시오.”

“저는 코뿔소 말은 못 해요.”



통역을 담당한 현지 가이드가 장난스레 대답하곤 어깨를 으쓱 움츠려 보였다. 보다 못한 해진이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이자 그제야 코뿔소는 더 다가오지 않고 고개를 이리저리 휘두르다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환이 씨는 동물한테도 인기가 많네요. 하하.”



제 배우자의 웃음을 듣고서야 환은 안도했다. 내색 않으려 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해진이 그의 안색을 살폈다.



“우리 환이 씨, 많이 놀랐어요?”



알파가 되어 제 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창피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환은 창피하지 않았다. 놀라기는 뭘 놀랐냐고 시침을 뗄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유순히 끄덕였다.



그는 제 오메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위로받고 보호받는 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제 배우자이니까.



“……예. 놀랐습니다.”

“에구, 우리 남편. 이리 와요. 안아줄게요.”



해진이 까치발을 들고 덩치 큰 그를 품에 안아주었다. 환은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저보다 작은 해진이 저를 마음껏 안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해진의 요구에 따라 현지 가이드는 하루 동안 잠깐 따로 활동하기로 했다.



무전기를 상시 소지하고 있으며 혹시라도 발생할 위기 상황에 상해를 입어도 책임을 지우지 않겠다는 계약 내용은 일전에도 한 번 설명을 듣고 확인한 바 있었다. 그 계약 내용이 환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까운 곳에서 현지 가이드들이 캠프를 하고 있으니 안심을 해야 하는데, 환은 잔뜩 신경이 곤두서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텐트는 고작해야 한 장짜리이고 야수는커녕 비바람도 막아주기 힘들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자야 한다니. 미친 짓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텐트 곳곳을 점검하는 해진을 보니 든든했다.



“환이 씨, 괜찮으세요?”



해진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부터 환의 안색이 영 좋질 않았다.



“……씻질 못해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역시 환이 씨는 연약하고 섬세하시구나……. 해진은 그리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지금 이 숲속뿐만 아니라 이 험한 세상에서도 환을 잘 지켜주어야겠다고.



“손 내밀어보세요.”



해진이 요구하자 또 손은 얌전히 내민다. 꼬질꼬질한 손을 물에 적신 수건으로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저랑 손잡고도 소독제를 쓰던 놈이니 이 상황이 얼마나 괴로울까.



더러워진 환의 손을 닦으며 해진은 새삼 신기했다. 이렇게 예민한 양반이 어쩌자고 여기까지 저를 따라왔는지 말이다.



“……예전에.”



잠깐의 침묵 속에서 환이 운을 뗐다. 그리고 기억을 되새기려는 듯 미간을 구기곤 한참 뜸을 들였다. 해진은 얌전히 기다리며 환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깨끗이 닦아주었다. 대체 무슨 끔찍한 기억이길래.



“해진 씨를 찾아다닐 때에도 한동안 씻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끔찍한 기억 맞구나.



“그 동네는 제대로 된 숙박 시설이 없더군요. 그렇다고 위생 상태가 불분명한 공중 시설에서 몸을 씻을 수도 없고…….”



‘위생 상태가 불분명한’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해진은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무려 이틀이나…… 사흘을 못 씻은 적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정말 끔찍하군요.”



그렇다. 이환에게는 이틀 사흘 못 씻는 일이 거의 재앙일 것이다. 해진은 사흘 동안 씻지 못한 환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자비롭지 않은 부처를 상상하는 게 더 쉬울 듯했다.



“저는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냥 편히 지내신 줄 알았는데…….”



물론 오랜만에 만난 환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기는 했었지만, 목숨처럼 여기는 위생까지 포기하며 저를 쫓아다닌 줄은 몰랐다. 저는 그때 환의 돈을 펑펑 쓰면서 호화로운 리조트를 오갔는데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때는 씻지 못하는 일이 그렇게까지 괴롭진 않더군요.”



해진은 물 적신 수건을 깨끗하게 헹군 뒤 그의 반대쪽 손을 닦아주었다.



“그땐 왜 별로 안 괴로우셨어요?”

“강해진 씨를 그대로 잃을 수도 있단 생각이 더 괴로웠으니까요.”



닦아주던 손길이 조금 느려졌다. 환이 그의 손을 제 손으로 덮듯이 감싸 쥐었다.



“알겠지만 나는 예민하고 거슬려하는 게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피곤하게 살아왔고 말입니다.”



해진이 쥐고 있던 물수건이 아래로 떨어졌다. 환이 그를 끌어당겼다. 저 역시 씻지 못해 더러운데도 환은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하지만 그런 내가 유일하게 피곤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해진 씨입니다.”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렇게 답 없이 오만한 알파가 제게 빠져 이런 애정을 바칠 줄이야.



사실 해진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저를 물건처럼 내려다보던 이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이다.



그를 의심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잠깐 잘해주다가 금세 변덕을 부리고 또 저를 막 대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환은 그러지 않았다.



해진은 이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환의 예외라는 사실을.



저를 안은 커다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환이 씨, 나는요, 환이 씨의 예외가 될 수 있어서 기뻐요.”



저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잘난 이 알파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제 조금은 알 법도 했다.



“그러니까 환이 씨도 저의 예외가 되어주세요. 평생 동안요.”



다시 팔을 풀고 제 남편의 얼굴을 확인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이 그렁그렁한 눈을 마주한 채 해진은 짐짓 장난스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 남편, 안 씻어도 여전히 잘생겼네요?”

“당연한 걸 이제 알았습니까?”



뻔뻔한 게 역시 이환다워서 다행이었다. 해진은 물수건을 텐트 안에 널어놓고는 짐을 살폈다.



“컵라면 드실래요? 잠깐 불 피우는 건 괜찮으니까 얼른 물 끓여서 먹어요.”

“좋습니다.”



평소라면 절대 입에도 대지 않을 음식이지만 배가 고프기도 했고, 해진이 먹고 싶어 하는 눈치기에 환은 얼른 대답했다. 그런데 짐을 살피던 해진의 표정이 삽시간에 나빠졌다.



“무슨 일 있습니까?”

“……어떡하지. 아까 배낭이 바뀌었나 봐요.”



불길했다. 환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해진의 설명을 기다렸다.



“식량 배낭이…… 없네요.”



심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니까, 음식과 물이 들어 있는 배낭을 지금 잃어버렸다는 뜻입니까?”

“음, 그게…… 운이 좋으면 저쪽 가이드분들 캠프에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무전을 해볼게요.”



환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큰일이 아니리라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으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무전기는 헤어지기 전에도 테스트했기에 제대로 갖고 있었다. 문제는 제대로 동작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 왜 이러지……. 아깐 잘됐는데.”

“운이 나쁘면 간혹 수신 상태가 좋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휴. 아무래도 그 운이 나쁜 게 지금인 것 같네요.”



무전기를 툭툭 두드리던 해진이 포기한 투로 내려놓았다. 축 처진 어깨가 보기 안쓰러워 환이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환이 씨, 배고프시죠?”

“아뇨, 하나도 안 고픕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해진 씨가 걱정이죠.”



사실이었다. 유순하게 제 품에 안긴 해진의 체온을 느끼고 있자니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다만 아이를 낳은 지 몇 달 되지 않은 제 오메가가 걱정이었다.



그 힘든 일을 해냈으니 적어도 일 년은 얌전히 요양하는 게 좋지 않을까, 뒤늦게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오기 전부터 기대에 차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럴 수도 없었다.



환은 해진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그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떼었다. 해진이 눈썹을 팔자로 휘며 웃어 보였다. 미안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응급 처치 키트는 있어서 다행이에요! 패혈증이나 과다출혈, 중독으로 죽을 일은 없을 거예요!”

“다행입니다. 그거 정말 안심되는군요.”



현지 가이드들과 약속한 날짜는 이틀이었다. 물은 이곳에서도 구하기 쉬우니 상관이 없고, 먹을 것은 찾아보면 될 터다. 다행히도 해진은 이곳에 있는 식물 중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구별해냈다. 물론 환은 그중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오늘은 이대로 자고, 아침에 다시 무전을 해보죠. 괜찮을 겁니다.”



벌써 밤이 깊어 아마 가이드들도 잠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해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텐트를 단단히 닫고 전등을 끈 뒤 나란히 누웠다. 환은 자신이 잠들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곁에 있는 해진의 온기가, 아직도 들뜬 듯한 제 남편의 기척이 지독히도 사랑스러워 아무래도 좋았다.



“해진 씨.”

“네에.”

“잘 자요.”



달달한 웃음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환이 씨도 잘 자요.”



환은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쥐었다. 해진의 손은 언제 쥐어도 자그마하고 따스했다.



그 때였다. 텐트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환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죠?”

“글쎄요. 별거 아닐 거예요. 누워요, 환이 씨.”



저를 말리는 해진을 두고 환은 밖에서 들리는 기척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맹수일까? 도망쳐야 하나? 매뉴얼대로라면 가이드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지만 무전기가 작동하지 않으니…….



다시 휘익, 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지나친 듯도 했다. 환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해진이 원해서 왔다지만 역시 잘못한 일은 아닐까, 뒤늦게 후회까지 되는 것이었다.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리고 다시 휘익, 하는 소리. 환은 누운 해진을 제 등 뒤로 보호하며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걱정 말고 내 뒤에 계십시오, 해진 씨.”

“환이 씨…….”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해진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환은 주먹을 꽉 쥐며 다시 결의를 불태웠다. 그 어떤 맹수가 덤벼들더라도 제 오메가를 지켜낼…….



“그게 아니라, 이거 그냥 바람 소리예요…….”



……주먹을 차분히 내렸다.



머쓱함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해진의 팔이 그의 허리에 감겨왔다. 뒤로 닿는 온기가 달았다.



“저는 환이 씨가 언제나 진중해서 좋아요. 그래서 늘 든든해요.”



어째서 제 짝은 이리도 다정할까.



“앞으로도 그 진중함으로 저를 지켜주세요. 제가 믿고 따라갈 수 있게요.”



어느새 머쓱함은 잊어버리고 사랑스러움이 그 자리를 채웠다. 환은 돌아앉아 누운 해진을 짓누르듯 껴안았다. 제 품에 감겨오는 온기를 단 한 톨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두 부부의 애정을 읽은 양 조용히 잦아들었다.





불행히도 다음 날 아침까지 무전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환은 현지 가이드들에게 제대로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 이딴 장비를 줘놓고 안전 관련 계약에 서명을 했다니, 그로서는 용서할 수 없었다.



해진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이슬을 채취한답시고 열심히 애를 썼다. 바지런히 텐트 근처를 다니더니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마실 수 있는 물을 한 통이나 구해 왔다.



“……정말 마셔도 되는 겁니까?”



묻는 말에 해진은 어깨를 으쓱 움츠려 보였다.



“싫으면 마시지 마세요.”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얼른 사과하자 해진이 만족스레 웃으며 한 모금 마신 물병을 내밀었다. 물을 마시던 환은 해진이 몸을 숙이고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것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나 채집망 비슷한 게 해진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그건 뭡니까?”

“아…….”



해진이 멋쩍게 웃었다. 채집망에 든 것은 네다섯 마리의 벌레였다.



“이 벌레가 단백질이 풍부하고 해로운 균도 적은데……. 역시 그냥 굶는 게 편하시겠죠?”



환은 기절하고 싶은 것을 참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환이 씨 창백해졌다.”



벌레를 그대로 우르르 쏟아버린 해진은 손을 깨끗이 턴 뒤 소독제를 꺼내 찹찹 바르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생글생글 웃는 그 얼굴을 보자 잠깐 상했던 비위가 금세 나아졌다.



다행히도 무전기는 상대방 쪽 실수로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점심이 되기 전에 환과 해진은 식량이 든 배낭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환의 설득으로 남은 나날은 현지 가이드들과 떨어지지 않기로 약속했다.



며칠간의 탐험 동안 해진은 반짝반짝하게 화색이 돈 채 무척이나 진중한 모습으로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다.



환은 금방이라도 피곤해 쓰러지고 싶었으나 기를 쓰고 해진의 뒤를 지켰다. 사실 진중하게 탐험에 임하는 해진을 보고 있으면 이깟 피로쯤 아무렇지 않았다.



돌아오는 날, 해진은 아쉬움 그득한 얼굴로 몇 번이고 가이드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포옹을 왜 연달아서 하는지 환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해진이 무척 아쉬워하는 눈치기에 어쩔 수 없이 별말 않았다.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에 해진은 숲에서 보았던 것들을 조잘거리며 읊다가 금세 잠에 빠졌다.



전용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브라마푸트라강의 전경은 무척 아름다웠으나, 환은 그를 깨우는 대신 제 무릎에 눕혔다. 그가 원하면 앞으로도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 광경이니까.





이제 생후 5개월에 들어선 환희는 박 비서가 잘 돌봐준 덕에 통통하게 살도 오르고 아픈 곳 없이 건강했다. 박 비서는 해진에게 환희를 안겨주며 못내 아쉬워했다.



“우리 딸, 삼촌 안 괴롭히고 잘 있었어?”

“환희가 삼촌이랑 놀아주느라 고생했죠. 얼마나 착한지 모릅니다. ……그, 안기 전에는 꼭 손 깨끗이 씻었으니 걱정 마시고요.”



환이 허리를 숙여 아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환희가 자그마한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래, 아빠다.”

“부!”



‘부!’ 하고 소리 지른 환희가 환의 얼굴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환은 그대로 굳었다. 박 비서마저 굳었으나 해진은 시원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우리 딸, 아주 아빠를 야무지게 패네!”

“……배구 선수를 시켜도 될 것 같군요. 아주 아픕니다.”



해진이 환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다행히도 환희는 아빠를 더 때리지 않고 얌전히 안겼다.



“아빠들이 너무 오랜만에 얼굴 보여줘서 심통 났나 봐요.”



환희가 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샐쭉 웃어 보였다. 환은 마음이 따뜻한 무언가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이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았다. 그가 앞으로도 평생 안고 지낼, 제 가족에게 오롯이 퍼부을 사랑이었다.





* * *





신혼집은 키스틸 레저 본사 근처였다. 환은 해진의 건강을 생각해 경기도 외곽의 조용한 동네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진은 아무래도 소아과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안심이 되고, 환이 일에 소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저 보살피시느라고 한동안 출근도 제대로 못 하시고……. 그러다 진짜 잘리신다고요.”

“제가 잘릴 일은 영원히 없을 겁니다만, 그래도 해진 씨의 말이 일리가 있으니 그렇게 하죠.”



얼른 대답했는데 어쩐지 해진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환은 그의 뺨을 한쪽 손으로 감쌌다. 부드러운 눈길이 제 남편의 얼굴을 한 번 훑었다.



“또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요.”



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어르자 해진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저도 슬슬 복귀하고 싶어요.”



환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래, 이전에도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사람이니. 좀 더 쉬었으면 싶지만 그가 원한다면야.



“키스틸 레저 내부에 자리를 마련해두겠습니다. 이전에 일했던 것처럼 기획 쪽으로…….”

“아뇨.”



해진이 제 뺨을 감싼 그의 손을 살며시 끌어 내렸다.



“제힘으로 취직하고 싶어요. 환이 씨가 도와주시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해진이 세탁기에서 막 건조가 끝난 아기 옷을 들고 왔다. 환은 그가 가져온 아기 옷을 차곡차곡 개기 시작하며 해진이 말을 잇길 기다렸다.



“사실, 제가 이전에 도망 다니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거든요.”



환이 갠 아기 옷을 해진이 차례대로 가져갔다. 각이 제대로 잡혀서 깨끗하게 접힌 옷가지는 환의 성격을 대변했다.



옷을 서랍에 넣고 돌아와 보니 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마 도망 다닐 때 이야기를 꺼내서일 터다.



“음, 사실 우리나라에도 관광지로 개발하기 좋은 곳이 아주 많은데, 생각보다 안 알려져서 다들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국내 여행 쪽으로 일을 해보고 싶어요.”



환은 남은 아기 옷을 능숙하게 갠 뒤 주방으로 갔다. 해진은 그가 갠 것을 마저 정리한 뒤 주방으로 따라갔다. 환은 냉장고에서 이유식 재료를 차례대로 꺼냈다.



“국내 여행도 키스틸에서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을 텐데요.”

“그렇긴 한데요, 아무래도 대기업은 이미 관행 같은 게 있어서 새롭게 뭘 하기가 좀 힘들거든요.”



이왕이면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싶었다. 승진도 하고, 현장 답사도 자주 가고, 제 이름을 내건 상품을 개발하고 말이다.



환은 해진의 말을 경청하며 이유식 재료를 빠르게 다듬었다. 그의 손이 닿은 재료는 순식간에 형태를 바꾸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달갑진 않습니다. 저도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왕이면 같은 건물에 해진 씨가 있는 게 마음이 놓이기도 하니.”



해진이 등 뒤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환은 손을 멈추고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제 허리에 감긴 해진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환이 씨의 남편으로 지낼 거니까요. 퇴근하면 집에서 만날 수 있고, 아침에 눈뜨면 옆에 있는 남편이요.”



등에 닿는 온기가 달았다. 환은 문득 아득했다. 강해진 없이 여태 자신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변하는 건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변하는 게 없을 거란 해진의 말이 깊은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환은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작은 회사는 야근을 많이 한다던데…….”



망설이다 한 마디 내뱉자 등 뒤에 매달린 해진이 푸스스 웃었다.



“야근은 대기업이 더 많이 하거든요? 걱정 말아요. 매일 칼퇴할게. 집에 와서 우리 남편이랑 놀아줘야지.”



이번에는 환이 웃었다. 더 참지 못한 그가 뒤를 돌았다. 제 허리에 감긴 팔을 풀고 해진을 꽉 껴안았다.



“숨 막혀요, 환이 씨…….”



이제는 해진이 투정을 부리는 것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있었다. 목소리에 웃음이 섞이고 외려 제 품에 파고드는 걸 보면 이건 투정이었다.



환은 있는 힘껏 제 짝을 품에 안았다. 아무리 안아도 모자라고 아쉽고 더 원하게 되는 자신의 강해진을.





* * *





아이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고, 생각보다 즐거웠다. 갓난아기는 그야말로 기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다고 환이 말한 적 있었다. 딸보고 폭탄이 뭐냐며 타박하면서도 해진은 그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하루 종일 얌전한 환희였다. 덕분에 해진은 미뤄두었던 외국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서재에 들어가기 전, 환은 절대 걱정 말라며 혼자서 아이를 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해진에게 이어폰을 꽂고 공부에 집중해도 된다고 했다.



조금 불안하긴 했어도 해진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환이 아직 아이 돌보는 데에 서툴긴 해도 나름 노력하니까 말이다. 아니, 나름이 아니라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환이 변했다. 그 사실은 아이를 낳기 전에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해진도 몰랐다.



신기한 것은 아이 기저귀는 척척 갈면서, 집안일 도와주시는 분이 조금만 청소를 잘못해도 성에 안 찬다며 화를 낸다는 점이었다.



‘뭐, 완전히 바뀌는 것보다야 낫긴 하니까.’



해진은 이어폰을 빼고 책을 덮었다. 서재는 방음이 잘되어서 앉아 있으면 바깥 소리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슬슬 나가볼까…….’



기지개를 켜고 서재를 나와 거실로 간 해진은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발소리를 죽이곤 조용히 웃었다.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켰다. 눈앞 광경을 최대한 담기 위해 이리저리 앵글을 조정한 뒤, 찰칵, 촬영 버튼을 눌렀다.



한 컷으로는 부족해서 이번에는 하반신에 포커스를 맞추어 또 한 번 찍었다. 누운 환의 하얀 털실 양말과 환희의 분홍색 털실 양말은 누가 봐도 패밀리룩이었다.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둔 해진은 살며시 그 광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함께 마주 보고 잠든 자신의 남편과 딸이 있는, 완벽하기 그지없는 광경으로.



느린 햇빛이 들어와 가족의 오후를 비추었다.





< 본편 끝 >





외전 01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햄은 저염 맞습니까? 빵은 모두 호밀빵으로 했고?”



환의 물음에 박 비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재료는 확실히 유기농입니까? 주스도 액상과당이나 설탕 없이 만든 것 맞습니까?”

“맞다니까요…….”



박 비서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다시 대답했다. 그제야 환은 선심 쓰듯 휴대폰을 꺼내어 무언가를 전송했다.



“약속한 것 보내드렸습니다.”



상사의 말에 박 비서는 얼른 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보내온 것을 보자마자 피로를 싹 잊고 활짝 웃었다.



액정화면에는 바로 어제 찍은 따끈따끈한 환희의 사진이 있었다. 카메라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환희의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아이구, 환희야아…….”



박 비서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사진을 저장했다. 오늘 새벽부터 샌드위치와 주스를 구하느라 돌아다닌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고 피곤했지만 사랑스러운 조카의 - 친조카는 아니지만 - 사진을 보니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환은 종이봉투에 담긴 샌드위치와 주스병, 깨끗하게 깎인 과일들을 확인한 뒤 뒤에 있던 차에 올라탔다.



인사를 하고 막 돌아서려던 차에 환이 헛기침을 했다.



“수고 많았습니다. 나중에 같이 식사라도 하죠. ……환희 데리고.”



뒤이은 제 상사의 말에 박 비서는 깜짝 놀랐다. 몇 년 동안 그를 모셔왔지만 대놓고 ‘수고 많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뭐, 새벽부터 고생한 값이야 어차피 휴일 수당으로 하루 근무치 쳐줄 테고, 샌드위치와 주스도 모두 이환의 카드로 결제한 것이니 제게는 손해가 없지만…….



이환 전무가 변하긴 변했나 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특히 아이를 갖고 나서부터 말이다.



가족이라는 게 그에게 꽤 큰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박 비서는 제 상사의 변화가 아주 달가웠다.



차에 탄 그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전무님.”



그대로 떠나는 차 뒤꽁무니를 보며 박 비서는 다시 한 번 흐뭇하게 웃었다.





환은 조수석에 놓인 종이봉투를 흘끔흘끔 보며 뿌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마 저것을 보면 해진이 무척 기뻐할 것이다. 물론 박 비서를 새벽부터 부려먹었다는 사실은 절대 말해선 안 되겠지만 말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세 식구가 밖에 같이 나가는 날이었다. 해진은 요즘 이환보다 더 바빴고, 집에서 육아를 전담한 환은 매일 늦은 밤까지 일하고 지쳐 돌아온 해진을 보며 마음 아파해야 했다.



빌어먹을 스타트업 회사는 쥐똥만 한 주제에 왜 자꾸 사람을 야근시키고 부려먹는 것인지. 마음 같아서는 확 인수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해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이제는 알았기에 그럴 수조차 없었다.



덕분에 환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해진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착하게 기다려요.’



해진이 그렇게 명령했기에 함부로 전화를 거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환을 맞이한 것은 거실에 누운 두 부녀였다.



해진과 환희 모두 티셔츠만 잠옷이 아닌 것으로 갈아입은 것을 보니 나갈 준비를 하다가 ‘잠깐만 환이 아빠 오기 전까지만 자자’ 하며 드러누웠을 두 부녀가 눈앞에 선하게 떠올라서 환은 웃음을 참았다.



‘어쩐다. 박물관 예약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오늘은 환희가 좋아하는 공룡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이제 네 살이 된 환희는 해진의 호기심을 물려받기라도 했는지 공룡이나 거대로봇, 항공기 같은 ‘커다랗고 움직이는 무언가’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공룡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모처럼 해진이 쉬는 날을 맞추어 셋이 공룡 박물관에 가기로 했는데, 이 두 부녀가 일어날 생각을 않으니 어쩐다.



환은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끔 확인한 뒤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깨우기에는 두 사람 모두 너무 곤히 자고 있었다.



‘음. 좀 더 자도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그는 별수 없다는 투로 딸의 등을 감싸듯이 누웠다. 팔을 뻗으니 해진에게까지 손이 닿았다. 조금만 더 누워 있어도 될 것이다. 오늘은 귀한 휴일이니까. 아무도 세 사람을 방해할 수 없는 날이니까.





세 사람은 결국 한낮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공룡 박물관에 가지 못한단 사실을 깨달은 환희는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다.



“흐어엉! 공뇽! 공뇽 내놔! 환이 아빠 미워!”

“울지 마라! 그깟 박물관 내가 사주면 될 것 아냐!”

“아 진짜 이 인간이! 애 앞에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요!”



조그마한 주먹으로 환을 퍽퍽 때리며 울던 환희는 해진이 안고 쓰다듬어주며 한참을 달래고서야 울음을 그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해진의 품에 안긴 채로 환을 노려보았다.



“이해영, 같이 코야코야 한 건 해진 아빠인데 왜 자꾸 나를 노려보나?”



아명이 아닌 본명을 부르자 가뜩이나 심통 난 환희의 얼굴이 더 부어올랐다.



“환이 씨가 깨워줬어야죠. 환이 아빠가 오면 깨워줄 거니까 그때까지 자자, 하고 잔 건데. 그치, 환희야?”

“맞아!”



해진이 대신 대답을 해주자 환희는 혓바닥을 쏙 내밀고 다시 작은 아빠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양 갈래로 묶었던 머리칼이 자느라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허 참. 어이가 없군. 이해영, 그러게 어젯밤에 빨리 코야 하라고 할 땐 하지 않고 붕붕이 가지고 논 것도 환이 아빠 잘못으로 몰아붙일 셈인가?”



‘붕붕이’는 환희가 가장 아끼는 티렉스 인형이었다.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모두 드러낸 이 고무 공룡 모형을 환희는 털 인형보다 더 아끼고 좋아했다.



“그건…… 붕붕이가 놀아달라고 했어…….”



환희가 눈만 빼꼼 내고 자신 없이 변명했다.



“붕붕이가 환희한테 놀아달라고 했어?”



해진이 한 마디를 거들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기 전에 놀자고 했어…….”

“그럼 붕붕이를 혼내주어야겠군.”



환이 환희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환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붕붕이 괴롭히지 마! 내가 조져버릴 거야!”



딸이 내지른 경박한 말에 해진이 경악했다.



“환희야! 너 그 말 어디서 배웠어! 그런 말 쓰면 안 돼.”

“환이 아빠한테서 배웠어.”



이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얼마 전에 박 비서와 통화하면서 얼핏 했던 말을 찰떡같이 기억하고 배운 모양이었다. 하여튼 이상한 쪽으로 머리가 비상해서 걱정이었다.



“애 앞에서 나쁜 말 쓰지 말라고 했죠!”

“그게 아니라…….”

“맞아, 환이 아빠 자꾸 박 비소 삼촌한테 나쁜 말 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환희 너도 조용히 해.”



해진이 엄하게 말하고서야 두 부녀는 조용해졌다.



“흠.”

“힝.”



결국 붕붕이는 혼이 나지 않았고, 오후에 가까운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가 항공기 모형을 사러 가는 것으로 환희는 합의를 해주었다. 고집이 워낙 센 아이라서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소풍을 가서 환희는 잔디밭을 실컷 달리며 놀았다. 박 비서가 사 온 샌드위치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저녁에는 사 온 항공기 모형을 셋이서 함께 조립했다.



환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해진은 환희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역시 제일 좋아하는 공룡 이야기였다. 환희는 아직도 공룡이 이 세상에서 멸종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고 나서 다시 충격받지 않게 잘 설명해주어야겠다고 해진은 생각했다.



환희가 잠에 들고서야 해진은 방에서 나왔다. 환은 노트북으로 업무보고 메일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는 육아를 전담하면서도 이렇듯 아주 중요한 일은 메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대기업의 전무라는 직책쯤 되면 꿀 빨면서 남들 부리기만 할 줄 알았는데, 환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아서 해진은 안쓰러웠고 동시에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일하는 모습은 진짜 섹시하단 말이지.’



은테 안경을 낀 채 거실 탁자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환의 모습은 솔직히 끝내주게 섹시했다.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선을 느낀 환은 해진을 쳐다보고 씩 웃어 보여서 그를 더 설레게 만들었다.



“자러 갈까요?”



환이 안경을 벗으며 물었고, 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 없이 곧바로 노트북을 덮은 환은 해진이 선 곳까지 걸어와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해진은 익숙하게 그의 목에다 팔을 감았다. 그리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환희는 잘 잡니까?”

“아까 공원에서 엄청 달렸잖아요. 완전 곯아떨어졌어요.”

“다행이군요.”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오래 섞인 뒤에야 떨어졌다. 환이 안방 쪽을 향해 걸었다. 그의 얼굴 너머로 환희가 벽에 그려놓은 노란색 티렉스가 보였다.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포악한 모습이 아닌, 먹잇감을 찾아 신이 나서 웃고 있는 귀여운 티렉스였다.



해진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안방으로 가며 생각했다. 행복에 형태가 있다면 바로 저런 노란색의 귀여운 동물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외전 02





육아는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분유를 먹여야 했고, 겨우 잠들었나 싶으면 다시 빼앵 울면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환희는 정말 순하고 고생을 덜 시키는 축에 속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환은 기겁했다.



어린 환희를 키우는 일은 힘들었지만 환은 육아를 기꺼이 떠맡았다. 해진이 새로 취직한 회사에서 편하게 일해야 하니까.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귀찮은 생물을 떠맡게 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환은 그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육아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보람찼다.



환희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컸다. 해진은 조심스럽게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것을 제안했지만 환은 거절했다.



“내 손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나 때문에, 나로 인해서 해진 씨가 힘들게 낳은 아이니까 말입니다.”



나름 진지하게 대답했는데 어쩐지 해진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거 좀 서운한 말이네요.”

“……예?”



해진은 조금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제가 손해만 본 것 같잖아요.”

“손해…….”



환은 그가 내뱉은 단어를 멍청하게 따라 하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꼭 제가 환희를 낳은 게 벌 같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미안합니다.”



얼른 사과하자 해진의 표정이 조금 풀려 안도했다.



“물론 처음에는 저도 낳기 싫고, 무서웠지만…… 어쨌든 제 의사로 낳은 아이잖아요. 우리 가족이고요.”



가족, 그래. 환은 그 단어가 가진 의미를 간과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해진이 손을 뻗어와 그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마치 위로하는 듯했다. 따뜻하고, 작은 그의 손은.



“환희는 제 아이이기도 해요.”



해진이 그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꼭 아이에게 하듯이 달래는 그 동작이 싫지 않았다. 해진의 앞에서는 이렇게 애가 된 듯한 기분을 자주 느끼는 그였으니 말이다.



환은 잡힌 손 하나를 조심스레 빼어냈다. 그리고 제 손을 잡은 해진의 손 위에 살며시 얹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진 씨는 임신한 동안 혼자 고생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뜩이나 작고 약한 몸으로 열 달 동안이나 아이 하나를 배에 넣고 다녔다. 입덧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해진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으면 싶었다.



해진이 눈을 휘며 예쁘게 웃었다. 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웃음을 영원히 보고 싶었다.



“알았어요. 그럼 당분간은 제 일에 집중하고, 이후에 환이 씨도 하고 싶은 거 편히 하실 수 있게 제가 빨리 자리 잡을게요.”

“무리해서 서두르진 마십시오.”

“응, 알았어요.”



해진이 그에게 폭 안겨왔다. 환은 제 품에 닿은 온기를 기꺼이 마주 안았다.



어쨌든 환은 그렇게 육아를 한동안 전담하게 되었다. 물론 휴일에는 해진과 함께 아이를 돌봤지만 빌어먹을 쥐똥만 한 회사는 공휴일에도 출근을 시키기 일쑤였으며 야근은 밥 먹듯이 했다.



혼자 밤늦게까지 아이를 돌보는 일은 괜찮았다. 다만 해진이 걱정되었다.



[언제 옵니까?]



전화를 하려다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답장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일전에 메시지를 받지 않아 전화를 계속했다가 엄청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일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나.



갑갑했지만 제 사랑스러운 남편이 그렇다면 무조건 그런 것이므로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오늘도 하루 종일 환희를 돌보는 일을 무사히 해내야 했다. 해진이 퇴근 후 먹을 저녁밥도 직접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환희가 자꾸 놀아달라고 떼를 써댔다.



“아빠 지금 작은 아빠 오면 먹을 맘마 만들고 있잖아. 착하게 기다려라.”

“싫어! 티티붕붕이 해저!”



평소에는 착하게 말을 잘 듣는 환희지만 가끔 이렇게 고집을 피울 때가 있었다. 대체 누굴 닮은 건지…….



“아빠 맘마 다 만들고 놀아주마.”

“빨리! 티티붕붕이!”



‘티티붕붕이’란 바로 ‘티티붕붕’이라는 가상의 공룡이 되어 환희를 등에 업고 기어가는 놀이였다. 최대한 빨리 기어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제 발아래에서 두 손을 반짝 쳐들고 방방 뛰어대는 환희를 보니 이번에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국자를 내려놓고 불을 끈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알았다. 잠깐만 노는 거다.”

“응!”



환희가 작은 몸을 방방 뛰며 즐거워했다. 환은 딸 앞에 네발로 엎드렸다. 환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아빠의 등에 올라탔다. 환이 네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랴! 티티!”

“……붕붕…….”



‘티티’라고 환희가 외치면 꼭 ‘붕붕’이라고 대답해주는 것도 이 놀이의 법칙이었다. 환은 네발로 열심히 거실을 기었다.



“더 빨리! 티티, 더 빨리!”

“부, 붕붕……!”

“끼햐앗! 하하!”



환희는 아빠의 등에서 소리를 빽빽 질러대며 무척 즐거워했다. 환은 숨이 차서 헉헉댈 때까지 기고서야 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환희의 밥을 먼저 먹인 뒤 TV를 틀어준 환은 거실에 앉아 업무를 처리했다. 박 비서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한 뒤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벌써 여덟 시였다. 미간에 꾸깃하게 주름이 잡혔다.



“아빠, 곰 세 마리 불러저…….”

“아빠 일해야 한다.”



일을 해야 한다는 말에 시무룩하게 돌아선 환희는 조그마한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고개를 러그에다 푹 파묻었다.



“뭐 하나, 이환희.”

“아빠 일 다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머리를 처박고?”

“응.”



한숨이 푹 나왔다.



“알았다, 원하는 대로 실컷 불러주마.”



결국 환은 노트북을 놔두고 환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흠흠, 가다듬은 뒤 근엄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곰 세 마리가…….”

“해진 아빠도 같이하면 안 돼?”

“……기다려라.”



결국 이번에는 해진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긴급한 일이 아니면 일할 때 전화 금지’라는 법칙이 있지만 곰 세 마리를 부르는 것은 긴급한 일에 속했다. 이 노래는 원래 셋이서 같이 부르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 통화가 연결되자 해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 어, 환이 씨? 무슨 일이에요?

“……곰 세 마리, 불러야 합니다.”

- 응?



이번에는 환희가 화면에 쏙 끼어들었다.



“아빠! 곰 세 마리 불러줘!”



해진은 딸의 말에 활짝 웃고는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라 익숙했다.



-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첫 소절은 세 사람이 같이 불러야 하고, 그다음은 차례대로 한 사람씩 불러야 했다.



“아빠곰.”

- 엄마곰.

“애! 기! 곰!”



철저하게 분배된 파트대로 한 곡을 끝마친 뒤에야 환희는 뿌듯한 얼굴로 해진 아빠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환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합니다. 일하느라 바쁠 텐데.”

- 환이 씨가 더 고생이죠. 우리 든든한 남편.

“늘 예쁘게만 말하는 내 남편 덕분에 나는 하나도 안 힘듭니다.”



환의 말에 해진이 씩 웃었다.



“그나저나 언제 퇴근합니까? 밥 안 먹고 기다리고 있는데.”

- 음, 오늘은 늦을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환의 얼굴이 굳었다. 사과하려는 해진을 마주 보지 않고 환은 그대로 종료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알겠습니다. 저녁 챙겨 먹어요.”

- 저, 환이 씨…….



그리고 해진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환희의 방에서는 책을 우렁차게 읽는 소리가 들려왔고, 집은 고소한 찌개 냄새로 가득했다. 저녁때가 한참 지났는데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해진에게 섭섭한가, 누가 묻는다면 그는 아니라고 당장 대답할 수 있었다. 이건 서운한 감정과는 조금 달랐다. 다만…… 뭐랄까…… 그저 좀 슬펐다. 아니, 이 감정은 미안함에 더 가까웠다.



‘얼마나 일을 하고 싶었을까. 저렇게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일 년을 넘게 도망쳐 다니고, 아이를 배고 있었으니.’



하지만 아주 조금,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맛있게 끓여진 찌개가 아깝기도 했지만, 뭐, 아침에 먹으면 될 테니까.



환은 평소대로 환희에게 ‘치카치카’를 시키고 재워주었다. 환의 미니어처 여성 버전처럼 생긴 환희는 잠들었을 때 유일하게 해진의 모습을 닮았다. 그래서 자는 환희의 모습을 보는 것을 그는 굉장히 좋아했다.



사랑스러운 딸이 자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오늘은 기분이 그다지 풀리질 않았다. 환은 그 사실에 화가 났다. 내 사랑스러운 아이가 바로 앞에 있고 곧 있으면 남편이 올 텐데 말이다.



‘정신 차려라, 이환.’



지금 자신은 훌륭한 전업주부이자 남편 역할을 해내야 했다. 해진이 제 남편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듯이 말이다.



[집 근처 오면 말해요. 내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해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처에 온 건가, 지하철역으로 데리러 가야지, 생각하며 휴대폰을 귀에 대는데 흘러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 아, 미안해요, 환이 씨. 저 오늘 철야해야 할 것 같아요.



해진의 말에 일어나려던 것을 자리에 그대로 힘없이 앉았다.



“……철야라니요. 그저께도 프로젝트다 뭐다 하면서 거의 자정까지 일했지 않습니까.”

- 갑자기 팀에 일이 생겨서……. 제가 맡은 프로젝트가 엎어질 수도 있는 일이라서요.



오늘도 혼자 자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해진의 작은 한숨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미안해요.



그 말이 철야를 해야겠다는 말보다 그에게 더 아프게 들렸다.



“해진 씨가 미안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몸 챙기고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 응, 일찍 자요.

“싫습니다.”



오늘만큼은 고집을 조금 부리고 싶었다. 제 남편에게 혼이 날지라도 말이다.



“내가 기다릴게요.”



이번에는 조금 가벼운 한숨이 들려왔다.



- 알았어요. 얼른 끝내고 갈게요.



환은 조용히 소리 없이 웃었다. 영상 통화가 아니라서 웃는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해진도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오랜만에 밀린 업무를 모두 처리하고 소파에 잠깐 드러누워 휴대폰으로 보도된 기사 몇 가지를 확인했다. 출근은 하지 않더라도 그는 여전히 전무였고, 출근할 때 못지않은 양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밥 먹듯이 철야를 하는 남편에 비해서는 적은 양이지만 말이다.



휴대폰을 쥔 채로 잠깐 존 모양이었다. 잠을 자다가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익숙한 딸기 향이었다. 어린이용 시럽약 냄새 같기도 하고, 아주 단 음료에 들어가는 착향료 같기도 한 해진의 냄새.



손을 뻗자 그가 만져졌다. 환은 그것만으로도 안도했다.



“나 왔어요.”



저보다 훨씬 작은 체구를 가진 그를, 재킷도 벗지 않고 품에 파고든 남편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기다렸습니다.”

“많이?”

“응. 많이.”



눈을 뜨고 꽉 안은 팔을 풀자 밀가루떡같이 사랑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해진이 배시시 웃었다.



“상 줘야겠다, 그럼. 우리 남편.”



그리고 입을 맞춰왔다. 환은 덜 깬 졸음 속에서 그의 입맞춤을 달게 받았다.





외전 03





환희는 그토록 소원하던 공룡 박물관에 갔다 왔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제일 좋아하는 삼촌인 박 비서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무려 3박 4일 동안 말이다.



“이렇게 매번 신세만 져서 어떡해요.”



해진은 박 비서에게 환희를 맡기는 일을 굉장히 미안해했지만, 박 비서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휴, 별말씀을요. 저는 환희랑 있는 게 제일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추가 수당도…….”



말꼬리를 슬쩍 흐리다가 환의 눈치를 한 번 보고서야 박 비서는 말을 이었다.



“아주 톡톡히 받거든요. 하하.”

“그래도 애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아휴, 걱정 마세요. 말씀드렸지만 제 여자친구도 아이 정말 좋아합니다! 지금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요. 셋이서 놀면 저희야 즐겁죠.”



해진은 구십 도로 허리를 조아렸다. 옆에 선 환의 눈에 불이 붙어 괜히 박 비서에게 그 불똥이 튀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아휴, 아닙니다. 깨, 깨끗하게 손 씻고…… 철저하게 위생 관리하면서…… 돌보겠습니다.”



상체는 해진에게, 시선은 환에게 둔 채로 박 비서가 말했다. 환희는 이미 신이 나서 주변을 날아다니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환희, 하루에 까까 하나만 먹는지 삼촌한테 전화해서 확인할 거다.”

“알았어!”



환희는 든든한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듯 이미 박 비서의 뒤에 숨어 환에게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해진은 여전히 신세를 지기 미안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른 채 이별을 했다.



“허, 참. 삼촌이 그렇게 좋나.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 제 딸이 해진은 조금 야속하긴 했으나 환이 한동안 쉴 수 있다 생각하니 다행이기도 했다. 그동안 너무 고생했으니까.



“우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환이 씨.”

“오랜만에 데이트입니까?”

“응. 내가 환이 씨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해진의 말에 환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방금 환희를 데리고 간 박 비서가 봤더라면 제 상사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신청을 받아들이죠.”

“네!”

“먹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말씀하시면 바로 리조트 셰프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리조트 셰프가 만든 음식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이후로도 환은 가끔 그를 불러 해진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의뢰하곤 했다. 해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뭐든 이야기하십시오.”

“……정말요?”

“해진 씨가 먹고 싶으신 것은 그게 뭐든 저도 환영이니 말입니다.”



또 이상한 거 말하면 식겁할 거면서 하여튼 말은 잘한다, 생각하며 해진은 조금 더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저, 사실 순댓국이 먹고 싶어요.”



아니나 다를까 순댓국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환의 얼굴에 깊은 근심이 드리웠다.



“저…… 환이 씨한테서 도망 다닐 때요.”



그리고 덧붙인 말에는 표정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



“그때 제가 순댓국이 갑자기 먹고 싶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입덧 때문인지 가게 앞에 가니까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지 뭐예요?”

“……그랬습니까.”



환은 이제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다. 해진은 쯧, 하고 불쌍하다는 투로 혀를 한 번 차고는 걸음을 멈추고 소매로 환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 순댓국이 계속 생각나는 거예요. 자다가도 막 생각나고…….”



어쩔 줄을 몰라 땀만 뻘뻘 흘리는 환이 이젠 조금 불쌍할 지경이어서 해진은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서 꼭 그 집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어요. 그때 못 먹은 게 너무 아까워서요.”



해진은 다시 걸었다. 휴일이라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근처에 공원이 있어 더 북적거렸다.



“하지만 환이 씨는 그런 음식 싫어하시니까……. 그냥 나중에 저 혼자 먹으러 가도 돼요.”

“아닙니다. 저는 해진 씨가 하는 것은 모두 같이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혼자 먹으라고 할 줄 알았는데, 곧바로 이어진 말에 해진은 솔직히 약간 감동했다.



“정말이세요……?”

“그럼요. 당연합니다. 같이 먹고 싶습니다. 순댓국.”



말하는 환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해진은 그에게 와락 안겼다.



“고마워요!”



환은 잠시 당황한 눈치였다가 이내 제게 안긴 남편을 마주 안았다. 표정이 여전히 조금 굳어 있었지만 해진은 그저 감동의 물결 속에서 남편을 꽉 안기만 했다.



두 사람은 결국 해진이 가고 싶었다던 그 순댓국밥집으로 갔다. 해진은 신이 나서 주문했다. 환은 메뉴를 한참 들여다보았지만 이 집은 순댓국 말고는 메뉴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지만 역시나 환이 먹기에는 어려워 보였기에 해진과 똑같이 기본 순댓국을 주문했다.



“환이 씨, 저 당분간 일 쉬려고요.”



환이 챙겨준 수저를 받으며 해진이 말했다. 환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일을 쉬신다는 건, 휴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퇴사하려고요.”



물을 따르던 손이 뚝 멈추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해진은 멋쩍게 웃었다.



“내가 아는 ‘퇴사’라는 그 단어가 맞습니까?”

“네. 회사 그만둔다고요.”

“지금 다니는 곳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좋죠.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해진인데. 환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의아함은 곧 걱정으로 이어졌다.



“혹시 해진 씨를 힘들게 하는 놈이 있다거나, 상사의 괴롭힘이 있다거나…….”

“아, 아뇨. 아니에요. 제가 팀장인데, 제가 팀원들을 괴롭히면 괴롭혔죠.”



그래. 그래도 어디 가서 괴롭힘당할 해진은 아니었다. 순해 보이긴 해도 나름대로 성깔이 있는 편이니……. 환은 안도하면서도 여전히 의아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동안 너무 달린 것 같기도 하고, 환희랑 시간도 많이 못 보낸 것 같아서요.”



환이 전적으로 육아를 담당해준 덕분에 해진은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 순식간에 팀장직을 달고 지금도 회사를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동안 너무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특히 환희가 환을 더 좋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거나, 밤에 해진을 보겠답시고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귀여운 환희를 생각하며 혼자 쓰게 웃던 해진이 앞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나랑도 많이 못 보냈지 않습니까.”



조금 얼굴을 붉히며 환이 말했다. 해진은 당혹스럽기도 했고, 기분이 좋기도 했다. 천하의 이환이 지금 뭐라는 거야.



“애교예요?”

“투정입니다.”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환의 표정이 풀리지 않아서 해진은 조금 머쓱했다. 다시 보니 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나도 해진 씨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습니다. 그러고 싶어서 청혼한 거니까요.”



그래, 생각해보니 드물게 일찍 퇴근하는 날에도 환희와 놀아주느라고 환과는 거의 단둘이 있던 적이 없었다. 팀장을 달고 나서부터는 집에 있거나 환희와 노는 게 전부였다. 갑작스레 깨닫고 나니 면구스러웠다.



“아……. 미안해요.”



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진 씨가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일에 전념하게 도와주겠다고 먼저 제안한 건 나니 말입니다. 다만 이젠 제게도 신경을 좀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몰래 생각하곤 했는데, 일을 그만둔다고 막상 말하니 조금…….”



말을 줄줄 잇던 환이 뚝 이야기를 멈추었다. 해진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제 손을 맞잡아서였다.



“정말 미안해요, 환이 씨.”



이환은 당혹스러웠다. 해진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실,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환은 그에게서 사과를 받을 거라곤 예상하지 않았었다. 그의 말대로 일에 전념하라고 한 건 자신이었고, 해진이 아이를 낳게 만든 원인도 자신이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도 모두 자신이 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해진이 고생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지금 자신이 하는 육아쯤이야 고생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해진은 씻지도 못하며 그 더러운 산길에서 벌레들과 함께 보냈지 않은가.



“나는…… 괜찮습니다, 해진 씨.”



그래서 진심으로 대답했는데도 해진의 표정은 쉽게 풀리질 않았다.



“그래도 내가 미안해요. 환이 씨를 너무 내버려둔 것 같아요, 그동안.”



‘내버려두었다’는 그의 말에 우습게도 환은 알지 못했던 서러움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듯했다. 여태껏 괜찮다고 말한 게 무색하게도 말이다.



투정을 부린 거야 사실이지만 말 그대로 투정일 뿐이었다. 해진이 제게 관심 한 톨을 주지 않는다 해도 환은 개의치 않았다. 지난 잘못에 대한 참회라든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해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환은 좀 이상했다. 저처럼 잘난 알파를 혼자 내버려두고 밖에서 멀쩡히 일하는 해진이 말이다. 자신이 오메가였다면, 그리고 제 남편이 저처럼 완벽한 알파였다면 절대 그냥 혼자 두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저 그뿐이었다. 나 같은 남편을 집에 두고도 일이 되는군. 강해진은 정말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해진이 저를 ‘내버려두었다’고 말하니 정말로 자신이 내버려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외전 04





해진은 맞잡은 그의 손을 가볍게 주물렀다. 이전이라면, 아니, 다른 사람이라면 어디 소독도 하지 않은 손으로 제 손을 만지느냐고 화를 버럭 냈을 터다. 하지만 해진은 이제 그에게 예외가 되는 유일한, 아니, 환희까지 합해 유이한 사람이었다.



“이제 환이 씨랑 데이트도 자주 하고,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싶어요. 그동안 생각해보니 남편 얼굴보다 회사 사람들 얼굴을 더 자주 본 것 같아.”



제 손을 조물조물하는 해진의 자그마한 손을 내려다보며 환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 해요?”



마침 순댓국이 나왔고, 해진이 먼저 그릇을 그에게 내밀어주어 환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해진 씨를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체 없이 하는 말에 해진의 뺨이 붉어졌다. 환은 그가 하는 대로 옆에 있던 작은 그릇에 담긴 붉은 장을 떠서 펄펄 끓는 뚝배기 안에 넣었다. 세 숟갈째가 되었을 때 해진이 그의 손목을 쥐었다.



“그만 넣으세요. 매울 거예요.”



이왕 먹는 것이면 해진과 똑같은 맛으로 먹고 싶었지만 환은 해진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환이 씨가 생각보다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그 말이…… 너무 좋네요.”



순댓국을 저으며 해진이 다소 수줍게 말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흘렀는데도 해진은 아직도 이렇게 수줍어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 그게 환은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오히려 사랑을 더 크게 느낀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아끼고 싶었다. 좀 더 아끼고 아껴서, 강해진에 대한 제 사랑이 넘치고 넘쳐서 견딜 수가 없을 때에 말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내가 퇴근하면 마중해주는 해진 씨를 볼 수 있는 겁니까?”



거의 환희를 보느라 집에 있기는 하지만, 환도 가끔 출근을 하기는 했다. 환희가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에 말이다. 출근이라기보다는 그냥 눈도장을 찍고 나오는 쪽에 가까웠지만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해진이 없어 허전할 때가 몇 번 있었다.



“네! 제가 내조할게요! 환이 씨 이제 하고 싶은 거 하시면서 지내실 수 있도록요.”



숟가락을 든 채로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이며 하는 말에 환은 피식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는 알고 그렇게 말합니까.”



사실 섹스가 이전보다 줄어들기는 했다. 환은 환희를 돌보아도 밤에 그렇게 피곤하지 않았지만, 일에 녹초가 되어서 돌아온 해진을 붙들고 섹스를 보챌 순 없었다.



해진에게 히트사이클 억제제를 먹으라고 먼저 권한 것도 환이었다. 히트사이클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론 달떠서 할딱거리는 제 오메가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해진이 힘들지 않은 게 더 중요했다.



“글쎄요? 우리 남편이 하고 싶은 게 뭘까?”



해진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순진무구한 저 얼굴을 보며 당장이고 차로 끌고 가 엎어뜨리고 바지를 내리고 싶은 심정을 제 순수한 남편은 절대 모를 것이다.



“일단 드시죠. 먹고 싶었던 순댓국 아닙니까.”

“네. 환이 씨도 맛있게 드세요!”



해진은 순댓국을 저어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떠먹었지만 환은 안에 든 것을 하나하나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깃덩어리 비슷한 게 있고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더기가 숟가락을 휘저을 때마다 물컹하게 걸렸다. 그리고 순대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커다란 순대를 밥그릇 뚜껑에 덜어서 야무지게 조금씩 먹는 해진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환은 이 비위생적인 식당과 정체 모를 건더기가 들어 있는 국이 좋았다. 해진이 제 옆에 있으니까.



두 사람은 순댓국밥집을 나와 공원을 조금 걸은 뒤 장을 보러 갔다. 오랜만에 둘이 장을 보는 것이라 해진은 잔뜩 들뜨고 신이 났다.



“와, 저 이거 먹어보고 싶었는데! 앗, 이것도요! 이거 새로 나온 맛인가 봐요!”



성분을 제대로 알 수도 없는 싸구려 과자를 마구 골라 카트에 담는 그를 보니 환도 가슴이 벅차게 기분 좋았다. 물론 해진이 보지 않을 때 몰래 과자 몇 개를 빼기는 했다.



“환이 씨! 이거 어때요?”



주류 코너를 지나던 그가 무언가를 하나 집어 들어 보였다. 와인이었다.



“오늘 밤에 오랜만에 우리 둘만 있으니까…… 이거 하나 마실까요, 우리?”



환은 해진이 고른 와인병을 살폈다. 마트에서 파는 것치고는 그래도 제법 괜찮은 브랜드였다. 역시 제 남편은 안목이 있었다.



“좋습니다. 두 병으로 하죠.”

“앗, 두 병씩이나…….”



해진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처럼 귀 끝을 붉히며 수줍어하기까지 했다. 환은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와인 두 병을 카트에 넣었다.



장을 봐 온 뒤에 환은 잠깐 업무를 처리하고 해진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저녁은 환이 직접 했다.



그는 와인에 어울리는 스테이크와 야채를 굽고 곁들여 먹을 몇 가지 음식을 더 했다. 해진의 입맛에 맞게 간은 약하게 하고 고기는 바짝 익혔다. 환 본인은 레어에 가까운 미디엄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식성도 해진을 따라가는 것인지 바짝 익힌 게 좋았다.



“저 정말 앉아만 있어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해진이 물었다. 환은 웃어 보였다.



“예. 앉아만 있어요. 내가 다 할 테니.”

“그래도 오랜만에 제가 쉬는 날인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 앉아 있어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에 해진은 어쩔 수 없이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 요리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와이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환은 언제 봐도 섹시했다. 움직일 때마다 불끈거리는 등짝과 팔뚝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환이 만든 요리는 늘 그랬듯 무척 맛있었다. 해진은 제 입맛에 완벽하게 맞춘 요리를 배부르게 먹고 디저트까지 먹었다.



두 사람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와인을 마셨다. 안주는 마트에서 같이 사 온 치즈였다. 환은 평소에도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집에서 술을 마셔본 적은 더더욱 없었기에 조금 어색했지만 해진이 아주 기뻐해서 기분이 좋았다.



본래도 술이 약한 해진은 금세 취했다. 와인 한 병을 둘이서 다 비우기도 전이었다. 환은 해진이 몸을 흔들 때에 몰래 잔을 가져가 제 입에다 비워버렸다.



“환이 씨, 제가 안 놀아줘서…… 정말 삐지셨어요?”

“안 삐졌습니다.”

“아깐 삐졌다면서요…….”



투정을 부린 건 저였는데 오히려 해진이 입술을 내밀며 토라지려 하기에 환은 당혹스러워 얼른 손을 내저었다.



“마, 맞습니다. 예, 삐졌습니다.”



대답하니 이제는 한숨을 폭 내쉰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 늘 생각했거든요.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지금도 해진 씨는 충분히 멋있습니다.”



솔직한 마음을 곧바로 말했는데, 해진은 그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는지 발개진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거 말고요…….”

“빈말 아닙니다. 정말로 저는 해진 씨가…….”

“이환 전무님한테 어울리는 오메가가 되고 싶어요, 저는.”



끼어들듯이 덧붙인 말에 환은 그제야 자신이 해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해진은 상체를 좌우로 흔들흔들하며 말을 이었다. 가뜩이나 마르고 가느다란 상체가 부러질 것 같아서 환은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어울리는 오메가라니, 무슨 뜻입니까?”



취해서 따끈따끈해진 뺨을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감쌌다. 해진은 반쯤 반사적으로 그의 손바닥에다 제 뺨을 비볐다.



“저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다가 매칭률이 좋아서 전무님이랑 연을 맺게 된 건데…….”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저는 그냥…… 운이 좋을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환이 씨, 아니, 이환 전무님 같은 알파를 남편으로 둔 게요……. 물론 개고생은 했지만…….”



환은 스스로를 아주 호되게 꾸짖었다. 등신 같은 놈. 해진의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환이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일도 하고, 스펙도 쌓아야죠! 대기업 전무는 못 되더라도…….”



말을 미처 다 잇지 못하고 결국 해진이 풀썩, 상체를 옆으로 기울였다. 환은 제 어깨에 기댄 자그마한 정수리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취한 것도 아닌데 그 역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아이를 잘 보살피고 여태껏 한 대로 해진이 잘 지낼 수 있게 내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환은 한숨을 삼키며 잠든 그를 안아 들었다. 술에 취한 해진은 평소보다 훨씬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했다. 꼭 따끈하게 데운 찹쌀떡 같았다. 그리고 딸기 향이 났다.



그는 해진을 한입에 삼키고 싶다고 생각하며, 이미 반응이 와버린 아랫도리를 원망하면서 그를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주던 환은 문득 깨달았다. 해진이 저를 혼자 둔 이유는 제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님을. 제 남편은 혼자서 죽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이 결혼 생활을 더 완벽하게 만들려고 말이다.



문득 이불 밖으로 해진의 손이 삐죽 튀어나왔다. 환은 그의 손을 이불 속으로 도로 넣어주었다.



“……잘 자요, 해진 씨.”



무해하기 그지없는 얼굴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다.





외전 05





해진은 예정보다 일찍 퇴사했다. 후임이 생각보다 빨리 구해진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계획했던 대로 시간을 더 자주 보냈다. 환희도 태권도 학원과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환은 24시간 육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물론 환은 환희가 처음 유치원에 가는 날에 오히려 섭섭해했다.



“그래도 친부가 교육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것이 환희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더러운 환경에서 혹시라도 감염이 되거나 하면…….”

“환이 씨, 환희 제 딸이에요.”



해진이 그의 얼굴을 돌려 저를 보게 하며 또박또박 힘줘 말했다.



“제 피를 물려받은 제 딸은 어딜 가든 씩씩하게 지낼 거예요.”



뒤이은 말에 환은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른 아이도 아니고 강해진의 딸이라면 자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해진이 퇴사한 뒤에도 환은 곧바로 일에 복귀하지 않았기에 두 부부는 당분간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환희가 유치원에 간 뒤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장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환의 회사에 같이 가기도 했다.



“이러고 있으니 꼭…… 우리 연애할 때로 돌아간 것 같아요.”



어느 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해진이 말했다. 환은 조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연애’ 시절의 자신은 해진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전이라면 또 쭈그러들었겠지만 그는 이제 해진의 화법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절대 저를 다그치거나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 바로 아이를 낳고 육아를 했으니 연애다운 연애를 제대로 못 해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해진은 그 점을 아쉬워하는 것이리라.



“그때 해봤던 것들, 다 다시 해보죠.”



그렇게 말하자 해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어떤 것들요?”

“뭐든요. 전부 다. 갔던 레스토랑들, 공원, 모조리 다.”



그가 해진의 손을 맞잡았다. 영화를 보고 온 식당에는 사람이 많았고, 이전이라면 감염이 걱정되어 오지 않았을 환이지만 해진이 원하는 일이라면 괜찮았다. 물론 손 소독제를 계속 사용하고, 해진과 자신이 앉을 의자를 깨끗하게 물티슈로 닦아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말이다.



“진짜 데이트를 해진 씨께 선사해주고 싶군요.”



해진은 환하게 웃었다.



“지금도 충분히 진짜 데이트 같은데요.”



환이 마주 웃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착한 사람이 어떻게 제게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었다.



“우리 그럼 환희 데리고 바다 놀러 가요. 작년에도 환희가 엄청 좋아했잖아요.”



작년에 세 식구가 바닷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환희와 놀아주느라 해진이 고생했던 기억도 났다.



“좋습니다.”



역시 바닷가에도 리조트를 하나 지어서 해진 혼자 쓰게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 이번 생일 선물은 그게 좋을 듯했다.



“이제 나갈까요?”



입가를 닦고 일어서려던 해진이 문득 동작을 멈추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환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 해진에게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아, 네. 그냥 현기증이 좀…….”



붙잡은 몸도 뜨거운 걸 보니 열까지 나는 모양이었다. 환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저 즐겁겠다고 몸 약한 사람을 데리고 이렇게 돌아다니다니.



“어서 집에 갑시다. 제가 안아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정말 괜찮아요!”



주변에 시선이 많아서 신경 쓰는 것인가. 그런 것 따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단 사실을 아직도 이 귀여운 남편은 모르는 모양이다. 이렇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돌아다니는 등 이런 평범한 일들마저 벌써 기자들이 사진을 오백 장은 찍었을 텐데 말이다.



자신이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박 비서가 이번에도 기사를 막느라 제법 고생하겠군, 생각하며 그는 해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해진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투로 환의 품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그 동작마저도 환에게는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열이 오른 해진은 따끈따끈하기까지 했다.



“닥터 최를 당장 부르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그냥 지병…… 응, 지병 때문에 그래요.”



황급히 내뱉는 말에 환은 한숨을 내쉬며 가게를 나가 그를 조수석에 태웠다. 워낙 가진 병이 많은 해진이어서 늘 걱정이었다. 역시 영화는 집에서 볼 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다.



해진의 열이 내리지 않아 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진은 기어코 해열제만 조금 먹고 버티겠다고 했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남편의 뜻을 존중해야 하니 그럴 수도 없어 갑갑했다.



환희가 유치원 친구네 집에 잠깐 놀러 갔다 온다고 하기에 몇 시간의 여유가 더 생겼다.



박 비서와 잠깐 통화를 한 환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해진은 마침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아, 환이 씨. 셔츠 그거 세탁하실 거면 제 거랑 같이 빨아요.”



벗은 어깨와 팔에 환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저와는 몸선이 많이 달랐다. 단단하고 탄탄한 몸을 가진 자신과는 달리 해진은 몸의 모든 곳이 가늘고 말랑말랑했다. 그리고 오늘은 열이 올라서인지 특히 더 분홍빛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해진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환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목욕, 같이 하겠습니까.”



벌써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발개진 얼굴로 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은 목욕물 온도를 세심하게 맞추었다. 환희를 목욕시키다 보니 이제 목욕물 온도쯤이야 쉽게 맞출 수 있었다.



“아아, 진짜 따뜻해요……. 나 그러고 보니 몸 오랜만에 담그는 것 같아…….”



해진이 하도 기분 좋아해서 환은 고작 목욕으로 이런 뿌듯함을 느껴도 되나 싶었다. 몸을 겹쳐 앉은 자세이기에 환은 아까부터 발기한 성기가 해진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허리를 뒤로 빼느라 고역이었지만 말이다.



“옛날에는 욕조 있는 집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소원 이뤘네요.”

“그랬습니까? 그거 귀여운 소원이군요.”

“혼자 원룸에 살 때는 욕조가 없으니까 몸을 담글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대중목욕탕에 자주 갔거든요.”



대중목욕탕이라는 말에 환은 미간을 구겼다. 정말 얼마나 갑갑했으면 그렇게 더러운 곳에 갔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가여웠다.



“목욕탕 갔다가 바나나우유 마시면 진짜 맛있는데. 아, 바나나우유 사 올 걸 그랬다.”

“제가 사다 드리겠습니다.”

“같이 나가요. 머리 덜 말리고 축축하게 산책하면서 마시는 게 제맛이거든요.”



집에서 마시는 것과 무슨 차이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뭐, 요즘은 날씨도 따뜻하고 하니 괜찮을 터다.



욕조에 그저 몸을 담그고 있는 것뿐인데도 해진에게서는 달큼한 딸기 향이 계속 났다. 환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불편한 아랫도리를 최대한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바로 코앞에 있는 알몸의 해진을 감당하기가 영 어려웠다. 페니스는 커질 대로 커졌고, 이제 해진의 등에 닿는 것은 어쩔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장 이 우뚝 선 물건을 제 오메가의 구멍에 쑤셔 박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환은 그의 어깨에 입술을 살짝 묻는 것으로 제 의사를 표현했다.



“으응…….”



해진이 몸을 기분 좋게 움츠리며 작게 신음했다. 그것만으로도 미칠 지경인데, 순간 진한 딸기 향이 코끝으로 훅 끼쳤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 향이 평소보다 짙었다.



환은 그의 허리와 옆구리를 손으로 애무하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어깨에 묻은 입술을 떼자 해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해진 씨, 혹시…….”



이 정도로 향이 짙은 것은 히트사이클의 증상이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 내내 열이 오른 것도 혹시…….



가뜩이나 붉어져 있던 해진의 뺨이 더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가 대답 전 엉덩이를 뒤로 조금 빼었다. 안 그래도 한계까지 참고 있는데 엉덩이에 발기한 성기가 닿아 곤혹스러운 것도 잠시, 환은 깨닫고 말았다. 해진의 구멍이 젖어 있단 사실을.



“저…… 억제제 안 먹었어요.”



속삭이듯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환의 남은 이성이 뚝 끊겨버렸다.



요란한 물보라와 함께 해진의 몸이 번쩍 들렸다. 뒤이어 환이 그를 제 무릎 위에다 마주 보게 앉혔다.



“흣…….”



해진이 피할 새도 없이 젖은 구멍에 곧바로 그의 페니스가 닿았다. 환은 당장 쑤셔 넣고 싶은 것을 참고 그 위에 제 것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히트사이클이 이제 막 시작된 해진의 몸은 뜨겁고 또 달았다. 환은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유혹을 느끼며 해진을 껴안듯이 끌어당겨 제 페니스를 그의 입구에 거세게 비볐다.



“아, 흑, 처, 천천히…….”



제 오메가의 애원을 들어주고 싶었으나 천천히 할 여력이 도저히 없었다. 환은 그의 젖은 구멍에 빠르게 문질렀고, 해진은 그의 딱딱한 성기가 밑에 스치는 감촉을 감당하지 못하는 듯이 헐떡거렸다.



물속에서도 흠뻑 젖어 미끄러운 해진의 안쪽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해진은 온몸을 떨며 버거워했다.



“흣, 느낌, 너무, 강해서, 읏……!”



저 역시 느낌이 너무 강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고 다만 허리를 더 빠르게 움직였다. 욕조 물은 정신없이 흘러넘치고 두 사람의 팔다리가 뒤엉키며 정신없이 서로를 탐했다.



섹스를 최근에 안 한 건 아니지만 계속 약을 먹고 있던 탓에 히트사이클은 오랜만이었다. 해진은 안에서부터 흠뻑 젖는 것을 느끼며 환에게 매달렸다.



“흐, 아, 아아…….”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해진은 제 몸의 열기를 느꼈다. 환의 딱딱한 페니스가 연신 입구를 스치며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딱 미칠 것 같았다. 그와의 히트사이클이 얼마나 강렬한지 잊고 있었다.





외전 06





해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몸이 잔뜩 뜨거워져서는 말을 듣지 않았다. 입이 벌어지고 아래쪽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서 환의 성기를 원했다.



오랜만의 히트사이클은 꼭 중독 같았다. 온몸이 녹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해진은 끙끙 앓았다. 환과 여러 번 섹스를 해봤지만 이렇게 진득한 쾌감과 함께 정신없이 시작한 적은 처음이었다.



환은 그의 어깨를 잘근잘근 씹다시피 하며 젖은 안쪽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왔다. 딱딱한 성기가 젖은 안으로 들어오며 해진은 거의 자지러질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아, 흐읏, 아……!”



욕실의 습기 때문에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환에게 단단히 매달리고 싶었으나 어지럽고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그의 어깨를 자꾸 놓쳤다. 가느다란 손목은 이내 환에게 붙들려 환의 허리에 힘없이 감겼다.



이상했다. 이토록 정신이 없고 감당하기 버거운데도 더 느끼고 싶었다. 히트사이클이 오랜만이라 그런 것일까. 혹은 욕조에서의 섹스가 오랜만이라 그런 것일까.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환의 성기는 해진의 안으로 더 들어오지 않고 다시 빠져나갔다.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지 못한 해진이 당혹감에 눈을 떴다. 환이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왜 빼냈지……?’



의아함에 흐린 시야만 겨우 뜨고 있는데 환은 허리를 움직여 해진의 바깥쪽을 자극했다.



“하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목을 긁는 소리로 신음한 환은 잠깐 허리를 멈추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해진이 보기에 그 모습은 꼭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 같았다. 그러니까, 사냥감을 씹어 먹고 싶은데 눈앞에 두고 참는 맹수 말이다.



그는 다시 페니스로 바깥을 문지르기만 했다. 해진이 다칠까 봐 긴장하는 듯했다. 잔뜩 힘을 준 팔뚝과 어깨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허리 아래는 멈출 수가 없는지 몸짓이 굉장히 거칠었다.



‘차라리 빨리 넣어줬으면 좋겠어…….’



아래쪽에 비비기만 하고 삽입을 하지 않으니 안달이 나서 더 감각이 커지는 듯했다. 해진은 치솟는 쾌감 속에서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 안에, 넣어줘요…….”



환의 미간이 설핏 사납게 구겨지더니 그가 귀두 끝을 해진의 입구에 밀어 넣었다.



“……조금 거칠게 할지도, 후, 모릅니다.”



동시에 하는 말에 해진은 ‘네! 제발요!’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곧 밀려들 쾌감을 기다리며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대로 몰아치기 시작하는데, 해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이 그가 흔드는 대로 그저 흔들리기만 했다.



“아, 흑, 으응, 아.”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이환이, 제 남편이 알파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가 작정하고 페로몬을 흘리면 이렇게 위압적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떠올랐다.



이환은 해진의 젖은 아래를 사납게 파고들었다. 구멍 안쪽을 무지막지하게 쑤셔대는 살덩어리는 해진에게 거의 무기처럼 느껴졌다.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지독한 쾌감 속에서 해진은 벌써 오르가즘에 다다를 것 같았다.



“자, 잠깐, 흣.”



정말 절정에 다다를 것 듯해 애원하자 환이 정말로 동작을 뚝 멈췄다. 해진은 젖은 눈을 하고 그를 마주했다.



안을 쑤셔대던 페니스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내벽을 긁고 나가는 자극에 흐윽, 하고 다시 한 번 신음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욕조 속에서 몸을 일으킨 환이 욕실장 문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콘돔 하나를 뜯어 발기한 성기에 씌우기까지는 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냥 해도…… 되는데…….’



매칭률 99.99퍼센트의 알파와 오메가의 섹스는 그와 거의 비슷한 임신 확률을 가진다는 사실을 해진은 떠올리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콘돔 씌운 성기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첨벙, 큰 물소리와 함께 환이 그를 바짝 껴안았다.



“흐읏, 아…….”

“후, 미안합니다. 해진 씨. 주체가…… 안 돼서.”



환이 그리 말했지만 주체가 안 되는 쪽은 사실 해진이었다. 그는 오랜만의 히트사이클에 거의 이성이 나갈 것 같았다. 오직 환의 몸만 원했다. 구멍 안쪽에서부터 퍼진 쾌감은 꼭 뜨거운 물처럼 온몸을 적시고 절정으로 이끌었다.



“아, 너무, 좋, 아요. 흣, 으응. 더 깊이 넣어, 흑, 줘.”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해진은 나오는 대로 웅얼거렸다. 거의 비명 같은 신음이 욕실을 꽉 채웠다.



환 역시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그는 해진의 안에다 성기를 난폭하게 쑤셔 박으며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와중에도 해진의 작은 몸이 부서질까 싶어 팔로 있는 힘껏 껴안았지만, 제 팔 힘이 더 셀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환이 해진의 안을 드나들 때마다 질퍽한 애액이 새어 나와 욕조 물을 더럽혔다. 환은 그를 있는 힘껏 껴안은 채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물속이지만 미끄러운 해진의 안쪽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히트사이클을 맞은 해진의 몸이 노곤노곤하게 녹듯이 풀어졌다. 꼭 알파의 몸에 맞춰지듯 그의 몸은 환이 주는 쾌락에 맞추어 점점 더 달아올랐다.



“흐읏, 아, 환이, 씨.”



해진이 결국 오르가즘을 맞았다. 성기에서 쏟아진 정액이 물속을 뿌옇게 만들었다. 오랜만의 히트사이클이라 그런지 쏟아지는 정액의 양도 많았다.



환은 움찔거리는 해진의 안쪽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수축하는 내벽은 꼭 페니스를 쥐어짜는 듯했다. 오메가의 본능에 따라 정액을 제 안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었다.



“해진, 씨, 힘을 조금…….”

“읏, 아, 너무, 너무, 좋아…….”



힘을 조금 빼달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해진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하아…….”



환도 슬슬 정신이 나가고 있었다. 히트사이클을 맞은 해진의 몸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평소의 섹스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자극에 금방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이성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때 콘돔을 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환은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환이 움직일 때마다 욕조 물이 거의 다 넘치다시피 했다. 출렁거리는 물결에 맞춰서 해진의 속 역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한계치를 넘은 쾌감은 해진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지독히도 기분이 좋은데, 너무 좋아서 괴로울 정도였다. 오르가즘이 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해진은 처음 깨달았다.



“환이, 씨, 흣, 처, 천천, 아흣!”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뱉은 말은 출렁거리는 물소리에 다 먹혀버렸다. 해진은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며 몰아치는 두 번째 오르가즘을 겨우 견뎌냈다.



그러나 환은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성기를 연신 안에 쑤셔 박으며 해진의 몸을 부서질 것처럼 쥐고 있었다.



해진은 겨우 눈을 떴다. 아득한 시야 속에서 환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눈빛이 영 이상했다. 초점도 없고 저를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완전 맛이 간 거 같은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조금이라도 비틀어보려고 애썼지만 불가능했다. 안을 가득 채운 페니스가 복부를 뚫기라도 할 기세로 퍽, 퍽 쑤셔 박혔다. 이미 오르가즘을 두 번이나 넘긴 그는 더 감각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 그만, 해, 읏!”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데 환은 그의 말은 전혀 듣지도 않는 듯이 몰아치기만 했다. 해진은 이제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아, 흑, 환이, 씨, 나, 기분, 이상……!”

“하아, 후, 해진 씨, 안쪽이, 꼭, 나를 잡아먹는 것 같습니다.”

“흣, 뭐라는 거야, 미친, 읏!”



환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며 허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꼭 짐승 같은 숨을 거세게 몰아쉬던 그가 성기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아, 아파, 으, 아파요!”



해진이 거의 울며 애원했다. 사실 아프다기보다는 좋은 감정이 더 컸지만, 아픔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어마무시했다. 해진은 제 안쪽에서 부푸는 환의 성기를 느끼며 경련하듯이 파들파들 떨었다.



환은 무지막지하게 커진 것을 느리게 움직였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해진을 눈치채지조차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움직이고 콘돔에 사정했다. 히트사이클을 맞은 제 오메가의 체취를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



“하, 후우, 해진 씨……. 해진…… 씨?”



그리고 환은 기겁하고야 말았다. 해진이 제 품에서 축 늘어진 게 아닌가.



“해진 씨!”



늘어진 해진이 뭐라고 욕을 했지만 미처 듣지 못했다.





* * *





닥터 최는 자다 말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뛰어왔지만 다행히도 해진은 잠깐 기절했을 뿐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환은 스스로를 무척이나 꾸짖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사람을 데리고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해진 씨, 미안합니다. 내가, 짐승 새끼처럼…….”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커다란 덩치를 구겨 침대에 파고들었다. 해진은 잠결에도 끙, 소리를 내며 환의 품을 찾아들었다.



환이 그렇게 제 남편을 안고 잠든 지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환희가 박 비서의 차를 타고 친구네 집에서 돌아왔다.



아이는 거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안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침대에서 꼭 안고 잠든 두 아빠를 보고 자그마한 양손을 허리춤에 짚은 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내가 또 비켜줘야겠네.”



의젓한 맏딸답게 아이는 아빠들의 이불까지 여며주고 안방을 나왔다. 딸아이가 냉장고에 반찬이 뭐가 있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가고 있는 동안에도 두 아빠는 서로를 안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잠결에 해진은 그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제 오메가의 등을 감싸 안았다.





< 외전 끝 >





收藏
文澜德Wland2.4.0 beta

Powered by kumame

hellowland.lofter.com

我们需要你的支持!
帮助中心
服务条款
公告栏
创作辅助工具
浏览器推荐
Keep Writing,Keep Thin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