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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보통 십대 소년들 2

作者 : acema

分级 大众 无倾向

原型 미국의 보통 십대 소년들

文集 220512

10 0 2022-5-12 20:11
미국의 보통 십대 소년들


2부





장목단, 2007





*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있었다. 차분하고 푸르스름한 새벽의 여명이 아닌, 격동하는 뜨거움에 끓어오르는 오후였다.

축축한 이슬에 젖은 새벽의 어스름을 기대했던 졸음에 잠긴 두 눈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정오가 지난 지 오래였다. 어제 취침에 들 때 확인했던 시간은 열한시였는데 하루의 반나절을 눈꺼풀 아래의 어둠 속에서 헤매었던 것이다.

밤새 에어컨을 꺼놓은 탓에 머리카락 속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머리를 베고 있던 팔뚝도, 펼쳐놓은 종이들도 모두 축축했다. 물을 끼얹은 듯 내 몸이 닿아 있는 모든 곳이 젖어있었다. 에세이를 쓰다 나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는지 책상 위에서 불편한 수면을 취한 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 물기가 느껴지는 손을 그러모아 쥐었다. 더운 물속에 갇힌 것처럼 지나치게 습하고 열기가 느껴지는 날씨였다.

그럼에도 나는 잔뜩 움츠린 채로 샤워를 하기 위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위에 지쳤다고 보기에는 지나친 땀이었다. 축축한 팔등을 보면 나도 모르게 밤새 앓았는지도 모른다. 땀을 흘린다는 자각을 할 새도 없이 도피와도 같은 숙면에 빠져들었으니까. 어쩐지 머리가 아픈 것 같기도 하다. 둔하게, 명치끝으로 올라오는 고동엔 쇄미한 아픔이 실려 있다.

슬랫이 중간쯤 열려있는 블라인드를 통해 햇살이 새어들어 왔다. 밤새 켜두었던 스탠드 불빛이 무색하리만치 눈부신 햇살이었다. 책상 위로 곧장 떨어져 내리는 햇살은 부연 먼지를 감싸 안고 있어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무색의 그것들이 공기 속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블라인드 살에 따라 퍼져나가는 햇살 속으로 주먹을 뻗었다. 잔잔히 떠다니던 수많은 입자들의 움직임이 현란해진다. 손가락을 펴자 내 몸에 닿지 않기 위해, 그 사이로 달아난다. 바쁘게 달아나는 무색의 먼지를 잡기 위해 손을 다시 한 번 그러모아 쥐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마주 닿은 손가락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멍하니 창 밖에서 새어나오는 햇빛을 보다, 그 밝음이 참을 수 없어 몸을 일으켜 블라인드를 닫았다.

빛이 차단되었다고는 하나 밝음마저 차단시킬 수는 없었다. 짙은 오렌지 빛으로 물든 방안을 밝히는 스탠드가 가리키는 것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에세이였다. 두 페이지 넘게 끄적인 글의 말미에는 ‘Odd’라는 단어가 몇 글자나 휘갈겨져 있었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는 기이한 회색분자. 기억에도 없는 순간에 나는 잠에 취해 저런 단어나 끄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에는 잠에 취하면서 눈을 뜨면 1세기가 흘러있기를 기도했다. 나만이 바쁘게 시간을 추월해 홀로 잠들어있기를. 그런 희망을 가지다니 ‘Odd’답기도 하지.

쓰게 웃으며 책상 옆의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살폈다. 약지로 살살, 눈과 코의 윤곽을 훑었다. 세수 할 때 조금만 닿아도 쓰라렸던 엉망이던 얼굴은 많이 나아있었다. 얼굴이 잔뜩 망가진 채로 공항에서 한참 떨어진 구석진 여관에 들어서자 경찰에 신고하려던 주인을 말리던 때가 생각났다. 그 때의 나는 어떤 잔혹한 인간에게서라도 동정심을 자아낼만한 불쌍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은 양심을 헤집은, 물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숙박을 하겠다던 동양 꼬맹이. 나는 그런 식으로 막다른 길에 몰려 나 자신의 나약함을 누설해버린 셈이다.

생각할수록 우스워 거울을 치워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고통 속에 갇혀 감상적이 되지 않으려면 우중충한 내 방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곧장 세수를 하고 번들거리는 연고를 상처 난 부위에 고루 펴 발랐다.

2층에는 지은이 키우는 고양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파묻고는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나비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녀석은 늘 지은의 방에 콕 박혀 있었기에 눈에 띄지도 않았다.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먹이를 줘본 적도 화장실을 치워준 적도 없었기에 별다른 애정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 자그마한 생명체가 신기하긴 했었다.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에도 눈을 뜨지 않는 녀석을 무심이 바라보다 1층 현관으로 내려가 신발장을 열어보자 눈에 익어야 할 신발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교회로 동생은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적막한 거실에 앉아,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몸을 기울였다. 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나태한 고양이처럼 소파의 등받이와 시트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잠을 이미 잘 수 있는 한계까지 취한 터라 수면에 들기 위해 애를 쓰는 대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뇌를 비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 채널을 돌렸다. 빠르게 채널을 바꿔가며 찾은 것은 액션 영화였다. 폭발하고 부서지고, 다치고 죽고, 자욱한 연기가 화면을 가득 매우는 것으로.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것이 보고 싶었다. 너무 심각한 전쟁영화는 싫었고, 로맨스 영화는 더더욱 싫었다.

자세의 변화 없이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라져가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B급 영화인 걸 알고 있었기에 애초에 신선한 만족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익숙한 클리셰의 연속이었다. 그런저런 수준의 감흥을 남기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크레딧의 기다란 꼬리가 사라지고 현란한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내가 숨을 쉬고는 있는지, 멍청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온전히 나에게로 집중한 채 손바닥을 천천히 얼굴로 가져갔다. 따듯한 날숨이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사실 캔자스에서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나를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는 심정으로 아주 간단하게 검지로 걸쇠를 잡아당기듯이. 어렵지만, 동시에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벌거벗은 채로, 차가운 시선 앞에 맨 몸을 드러내 나는 샅샅이 나의 모든 것을 훑어 내는 것은.

캔자스의 방향제 냄새가 잔뜩 나는 여관에서 나는 화가 나서 미친 듯이 벽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쥐어짰다. 텅 빈 가슴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두려움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아픔이 가시질 않아서 바닥에 엎드린 채로 숨죽여 멍청하게 울었다. 얼간이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담담해져가며 나는 고갈되어갔다. 마치 오래된 폐광처럼, 아무것도 내게서 얻어낼 수 없도록. 하지만 고작, 내가 그 몇 일간 극복해낸 것이라곤 뻔히 예상되는 학교생활의 두려움뿐이었다.

벨이 울렸다. 텔레비전의 볼륨을 아주 낮은 소리로 낮추었다. 지난 몇 일간 줄곧 나를 찾아왔다가 나의 부재에 그대로 돌아가야 했던 블리스 일지 몰라 숨을 죽였다. 녀석을 마주치면 어떻게 반응해야하는지, 웃어야 하는지 아니면 울어야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피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죽은 척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대로 울리는 벨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뜻밖에도 신문을 넣는 작은 문의 돌쩌귀가 움직이며 들려온 목소리는 낯선 목소리였다.

“안에 아무도 안계십니까?”

내가 아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살짝 가래가 끓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는. 이 시간에 뻔히 없을 아버지를 찾아오기 위해 들린 손님도 아닐 터였다. 나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낯선 방문자를 맞이하기 위해 미적미적 현관으로 걸음을 떼었다.

문을 열었을 때, 중키의 남자가 서 있었다. 카멜색 정장에 짙은 남색의 넥타이를 매고 있는 신사였다. 얼굴은 자작나무를 섬세하게 조각해 만든 목각처럼 미색빛을 하고 있었다. 우아해 보이는 피부빛에 자잘한 주름이 있는 중년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의도로 이 집을 찾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이 조이군이죠?”

“그런데요.”

“레이 도련님이 이걸 전해드리라 하더군요.”

레이가 보냈다는 중년의 신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건을 가리켰다. 그가 가지고 온 것은 익히 알고 있던 물건이었다. 캔자스 주에 있는 블리스에게 가기 위해 꾸렸던 가방이었다. 이걸 챙겨올 새도 없이 도망치듯 그 곳을 벗어났던 것이 떠올랐다.

허리를 숙여 물건을 받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

그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 나이의 사내가 보일 수 있는 웃음이란 대부분 빈틈이 없기 마련이다. 일견 갑갑해 보이는 가면 같은 웃음을 보며 나는 밖이 매우 덥다는 것을 느꼈다.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아니 됐습니다.”

남자는 거절의 의미로 손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과 그의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무슨 심경엔가 좀 바보처럼 웃었다. 한 번 더 권할까 했지만, 그는 무슨 이유에서든 거절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에 맺히는 땀을 바지에 닦아내며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다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는 끝까지 반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딱딱한 껍질 안에 몸을 숨기는 달팽이처럼,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의기소침해지는 이유는 값싼 자학의 욕구 때문이다.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레이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란 존재의 처량함을 과시하며 동정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죽어가는 척. 너 때문에 내가 죽어가는 척 말이다. 하지만 보여줄 관객 없는 촌극은 존재의 가치가 미비할 뿐이다. 쓰게 웃으며 문을 걸어 잠궜다.

트렁크를 이층의 내 방으로 끌고 가 지퍼를 움직여 열어보았다. 안에는 캔자스에서 입었던 옷들이 엉망으로 처박혀 있었다. 캔자스의 흔적이 남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늘 입고 지내던 익숙한 옷들이 낯설게 변한 기분이었다.

잔뜩 구김이 가 있는 옷가지는 땀 냄새까지 베여 엉망이었다. 엄마가 오기 전에 세탁물을 처리해놔야겠다는 생각에 구석에 처박힌 양말까지 모조리 꺼내었다. 그러다 문득 검은 카고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작은 비닐 봉투가 생각났다. 한참을 망설이다 가장 구석에 몰려있던 바지를 찾아내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매끈매끈한 비닐의 감촉이 느껴졌다.

반 뼘도 안 되는 봉투 안에 담긴 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너무 고와서 입자조차 느껴지지 않는 분말의 느낌이 비닐에 감싸인 채로 느껴졌다. 밀가루처럼 고운 흰색의 분말은 캔자스에서 지내던 밤 중 어느 날 레이가 내게 건네줬던 코카인이었다.

녀석의 대담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생각들이 손안에 잡힐 듯 아른거렸다.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빨라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말 따위를 지껄이던, 기이하고도 음란한 얼굴을 했던 레이. 잔뜩 약에 취한 채로 교황 레오 13세까지 들먹이며 나를 설득하던 레이의 악마같이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천천히 손안의 비닐을 짓이겼다.

그 날, 녀석이 말한 해방을 느껴보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쉬이 허락을 할 뻔했다. 코카인을 쓰레기통 대신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걸 보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탈에 대한 욕구는 정제된 결정처럼 고형화 된 나에게도 있는 모양이었다. 뜨거움에 의해 쉽게 와해될만한 가능성을 무던히도 감춰왔건만.

숨이 차오르는 느낌에 가만히 흰 가루를 내려다봤다. 지금의 나는 뇌를 점령해줄 무언가가 절실한지도 몰랐다.

갑갑한 숨을 내쉬며 비닐봉투를 바지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엄마는 나를 보는 순간 굳어버렸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귀중한 것을 움켜쥔 듯 뻣뻣해진 엄마의 손을 펴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나하나 말려있는 꽃잎을 펴듯 손가락을 떼어내 쇼핑백을 건네받은 뒤 부엌으로 향하며 테이프로 봉해져있는 가방을 열었다. 땅콩 잼이 들어간 리세스 초콜릿은 지은의 취향이었고 오가닉에서 나온 도우는 내가 좋아하는 거였다.

“엄마 치즈는?”

종이백 안의 물건을 모두 꺼냈는데도 도우와 함께 먹곤 했던 체더치즈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왜 잘랐어?”

치즈를 찾는 내 물음에도 엄마는 혼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선뜻 짧아진 머리를 향해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허공에 붕 떠있는 손을 잡아 내 머리 위에 얹어놓자 얼굴을 찌푸린다. 손바닥으로 짧아진 머리를 쓸어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엄마의 주름진 손을 천천히 뒤통수로 이끌어 쓸어 올리게 하자 천천히 한숨을 쉰다. 화를 내지 않는걸 보면 반항의 의미로 보지는 않는듯하다. 머리를 자른데 있어 어떤 의미를 두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냥. 덥잖아.”

“.....”

“엄마 아들은 참… 두상이 예쁜 것 같아.”

점점 굳어가는 얼굴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단지, 더위를 참을 수 없었다는 충동으로만 보아주었으면 했다. 머리를 자르게 된 연유를 찾기 위해 감정적인 추궁을 하지 않길 원했다. 엄마의 요즘 힘든 일 있니 라는 다정한 말에, 화를 낼지도 몰랐다.

들떠있는 기분에 어떤 결론을 유출해냈는지 엄마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비켜가 식탁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냉장고 속에 넣기 시작했다.

“치즈는… 깜빡 잊었어. 또 마트에 들리기도 힘드니까 그냥 먹어.”

“치즈랑 먹어야 맛있는데. 차 끌고 잠깐 마트 좀 다녀올게.”

“애처럼 굴지 말고 그냥 먹지 그러니.”

“그냥, 차 끌고 다녀올 데가 있어.”

“조금 있다가 아버지 오시고 나면 저녁 먹을 거야. 운전도 못하는 녀석이 가긴 어딜 가.”

“아주 잠깐만 다녀올 거야. 저녁시간 맞춰서.”

엄마는 아주 약간 날이 선 것 같았다. 결국에는 마음이 약한 척 아들의 부탁을 들어줘야한다는 생각에 조금 초조해졌는지도 모른다. 거절의 말을 하려는 굳어있는 뺨에 얼른 입을 맞추자 허탈한 듯이 웃었다. 무뚝뚝한 아들의 갑작스런 변화에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한듯했다.

그 틈을 노려 선반위에 올려놨던 차키를 잡아챘다.

“다녀올게요. 엄마.”

“...마트 말고 어디 가는 건데.”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주는 손끝에는 미련이 남아보였지만.

“공원.”

“공원? 공원에는 또 왜 갑자기.”

“볼일이 있어서. 말해도 모를 거야.”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얼굴을 뒤로한 채 얼른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운전 조심하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쾅, 하고 말을 덧붙이는 목소리를 잘라 내버렸다.





헤어 클리퍼가 윙, 하는 시끄러운 소음을 냈다. 창고에서 찾아낸 1inch도 안 되는 빗살모양의 캡이 달린 클리퍼였다. 은색의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클리퍼는 십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느라 긁힌 자국과 손때로 지저분했다. 노인의 주름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낸 그것은 집안의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미용실에 가는 돈이 아까워 아버지가 마련했던 기계였다.

한 달에 한번. 저녁식사를 마친 토요일 밤에는 늘 머리를 자르곤 했다. 아버지는 그 기계를 바리깡이라는 촌스럽고 이상한 이름으로 불렀다. 어깨에 보자기 같은 것을 얹고 두 모자는 나약한 목을 드러낸 채로 가만히 앉아 저 이상한 기계가 머리를 따라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마치 잔디를 깎는 것처럼 어머니가 손으로 기계를 움직이면 그 부분이 단정해졌다.

그 숨죽이는 순간이 지나고 나면 두 부자는 똑같은 모양으로 잘린 깔끄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머리를 감았다. 그는 자신을 반만 닮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음, 하고 낮은 웃음을 흘리곤 했다.

바리깡은 아버지의 경제적 위치가 바뀌면서 돈을 아끼기 위해 굳이 군인처럼 짧게 쳐올린 머리가 필요하지 않게 되자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사할 때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챙겨오곤 했다. 자신의 역사의 증거가 될 만한 것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겨우 몇 백 달러를 쥐고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부터 썼던 이십년 가까이 된 가계부나 십이 년 가까이 몰았던 자동차의 엔진 부품, 상사에게 처음으로 받았던, 이제는 나오지도 않는 만년필, 미국에 와서 처음 맞췄던 구두에 달렸던 끈 따위가 그랬다. 저 바리깡 역시 오래된 오합지졸과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 역사로 오는 이정표라도 되는 양 오래된 그것들을 아꼈다.

중학교 입학 이후에는 머리를 짧게 밀어본적이 없었다. 다른 녀석들처럼 머리를 염색하거나 붙이는 요란한 일을 벌여 본적은 없지만 일부러 얌전한 인상을 주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길었던 머리를 자를 것을 결심하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건전지를 넣고 전원을 눌러 머리를 밀어내는 건 정말 금방이었다. 모양을 내기 위해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둥그런 두상을 따라 헤어클리퍼를 움직일 때마다 반 마디도 안 되는 짧은 길이의 머리카락이 남았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은 뭉텅이를 바라보며 오싹한 즐거움을 느꼈다. 내안의 무언가를 떨구어 내는 의식을 치루는 기분이었다.

어깨 위에 떨어진 뭉텅이를 털어내며 거울을 바라봤다. AYM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양날이 선 검처럼 날렵해 보이는 쌍꺼풀 없는 내 눈이 만족스러울 지경이었다.

시원하게 느껴지는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매만지며 차 문을 열고 나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이 시간에 방황할 곳이 D.C에 얼마든지 있었지만 고리타분하게 박물관 따위나 돌고 싶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며 정신을 비울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포토맥 공원에 깔린 잔디밭에 앉아 부랑자들 사이에서 홀로 외떨어져 강이나 바라볼까 했지만 학교 남관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학교로 방향을 틀었다.

포토맥 강 운하 근처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방학 기간이기도 했지만, 기숙사 건물과 운하 근처 남관 사이가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이었다. 남관에 위치한 스쿼시 코트 옆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편의점에서 산 스넥을 들고 넓은 잔디밭에 앉았다. 오후의 작렬하는 태양빛을 받았던 터라 잔디밭은 건조하게 말라있었다. 그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을 때의 청량함은 그대로였지만.

나는 그대로 몸을 뻗어 누워버렸다. 저물어가는 태양과 떠오르는 달이 혼재해있는 하늘은 세기말적인 느낌을 풍길 만큼 혼란스러웠다. 손가락을 뻗어 구름의 모양을 따라 그리다가 멍청한 짓인 것 같아 눈을 감아버렸다.

가장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캔자스 공항 근처의 좁은 여관에서 얻어터진 얼굴에 약을 바르던 불안한 시간들을 버텨내며 생전 안하던 기도까지 했었다. 신이 호모소년의 기돌을 들어줄지는 의문이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절박하게 신을 찾았다. 레이 녀석이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아주기를, 막연한 희망까지 품었다.

그리고 감성적으로 굴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마음을 추스르고 공중전화를 붙잡았을 때였다. 집에 도착하는 일이 늦춰질 거라는 말에도 엄마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상상은 최악을 달렸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불안은 현실이었다. 내가 아무리 피하려 해도 결국에는 마주하게 될.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허벅지에 커다란 종기가 붙은 것 마냥 그 부위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오므렸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펴 비닐을 쓰다듬었다. 그냥, 왠지 모르게 그것이 내 몸을 감싼 무엇과 닿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이를 태면 부적처럼 영적 존재로 인한 보호를 받는 기분이었다. 언뜻 보면 샤머니즘과 코카인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듯 보였다. 신비적 경험과 태고로 돌아간 원시의 세계를 맛볼 수 있으니까.

가만히 비닐에 싸여있는, 너무 고와 만져지지도 않는 분말들을 느껴보려 애썼다. 마음만 먹으면 아주 위험한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아담이 이브가 건네준 선악과를 먹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선악과를 혐오하면서도 새로운 종류의 쾌락을 느껴보고 싶은 욕구만큼은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자신의 세계가 아닌 걸 알면서도 그 속에 어울려보고 싶은 허영만큼은.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비닐을 꺼내 그 안에 든 분말들을 흡입하지 않았다. 흡입을 하려 사람이 적은 남관을 찾았지만, 막상 시도하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약을 흡입하는데 용기라는 단어를 쓰는지는 의문이지만 선뜻 흰 분말을 손바닥 안에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좀 더 미쳐버릴 것 같은 시간을 위해 아껴두자. 차갑게 식어가는 머리로 다짐을 했다.

미련처럼 남아있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고 강이 흐르는 둑으로 걸어갔다. 수위가 조금만 높아져도 발바닥이 닿을 듯이 넘실거렸다. 신발을 벗은 발을 차가운 물속에 담그기 위해 아슬아슬할 만큼 엉덩이를 턱에 걸쳤다. 운송의 용도로 만들어진 강이기 때문에 대도시 속에 자리한 강 치고는 폭이 넓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가 드나들었던 운하답게 깊이는 있는 편이었다.

학기 말에나 학기 초에는 카누나, 카약플레이트 선수들이 이 일대를 차지하곤 했다. 형광색이 가미된 주황빛 구호조끼를 입고 힘찬 구호를 외치며 노를 젓는 모습은 남관을 생각하면 의례적으로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방학이 되어 모두가 돌아가고 나니 정적만이 남아 쓸쓸했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풍경이 거슬렸지만 입고 있던 티와 양말을 벗어 둑 위에 올려놓고 주머니에 있던 차키와 코카인이 담긴 비닐도 그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긴 청바지를 입었으면 결심을 망설일 수도 있었겠지만, 얇은 면바지를 걸치고 나온 이상 거슬릴 것은 없었다.

천천히 둑에 기대었던 몸을 떼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온 몸을 뒤덮던 여름의 열기가 희미해지며 싸늘한 냉기가 온 몸을 감쌌다. 발끝에는 흐르는 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공기와는 다른, 느린 유속으로 흐르는 물의 묵직함이 좋았다. 흐르는 강의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한 팔로 둑을 지지하며 헤엄쳤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계산하며 둑을 잡고 있던 왼 손을 놓아버렸다. 순식간에 몸이 가라앉을 듯이 무거워졌지만, 침착하게 숨을 가라앉히자 몸이 다시 떠올랐다. 머리가 흠뻑 젖어버렸다. 하지만 짧게 잘린 머리는 여름의 열기에 금방 메말라버릴 것이다.

찰랑거리며 살결을 희롱하고 도망쳐버리는 강물을 갈고리 같은 손으로 헤쳐 냈다. 숨이 찰 때까지 강을 거슬러 올랐다가 힘들어지면 몸을 뒤집어 하늘을 쳐다보며 온 몸의 힘을 뺏다. 이 대로 포토맥 공원을 지나 메릴랜드의 포인트록아웃에서 대서양의 체서피크만으로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낭만을 바라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어둔 여자애처럼, 그 병이 누군가에게 닿길 기도하며. 나 역시도 누군가에가 닿기를 기도하며.

요즘 여자애들도 이렇게 까지는 감상적이지 않을 거였다. 큭큭 거리며 눈을 떴다. 옷을 포개놓았던 자리에서 한참이나 지나쳐 내려와 있었다. 몸을 돌려 다시 헤엄쳐 올라가다 생각이 바뀌어 맞은편으로 헤엄쳤다.

지쳐있던 터라 맞은편의 둑이 닿자마자 힘을 주어 올라가 털썩 누워버렸다. 등에 닿는 잔디의 감촉이 생생했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 왔다. 지휘자가 사라져 난장판이 된 오케스트라처럼 정리정돈 되지 않은 소리는 공기를 흔들어놓았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학기 중에 켜놓던 가로등 개수의 반도 켜놓지 않은 지대는 어두웠다. 옅은 어둠에 가려진 운하가 두렵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밤의 생생함이 마음에 들었다.

작년 이맘때엔, 녀석과 함께 이곳에서 수영을 하다 녀석이 목을 잡고 물속에 처박은 탓에 물을 잔뜩 먹기도 했었다. 엎드려 태양 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을 때, 목 위에 사마귀를 올려놓은 블리스 때문에 싸웠던 기억도 났다. 정말 우린 지독하게 유치했다.

녀석과 함께 했던 유치하게 투닥거리던 시간들이 어딘가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들의 감정만은 생생했다.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과거가 애써 가라앉아가던 마음속에서 분탕질을 칠 정도로.

지난 시간동안 인내해온 고통 덕분에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둑이 갈라져 피가 솟아나는 심장이 다시 상처를 감출 때까지 참아내는 방법을. 속이 쓰려올 때는 어떻게 감당해야하는지.

몸을 둥글게 말아 심장 앞으로 손을 둘렀다. 더 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슴을 진득하게 눌렀다.

손바닥의 틈새를 타고 피가 새어나오는 것 같다. 이를 악 물었다. 눈물이 나올까봐 눈을 질끈 감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집으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핸드폰을 부러 두고 왔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집에 들어가기로 한 약속 시간은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이미 취침시간이 가까웠다. 몇 일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물어가긴 하지만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는 얼굴을 바라보던 엄마의 질린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불한당에게 당했다는 거짓말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아니, 내 말에 허술함을 발견했다 해도 별다른 추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집밖에 내놓기엔 세상은 너무나 험하다는 일반론을 좀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다듬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집 밖에 내놓기에 겁이 나는 일곱 살이 아닌 열일곱 살이다. 제대로 된 구석 하나 없는데다가 정신상태가 좀 불안정하긴 하지만.

축축하게 젖은 바지가 신경 쓰여 벗어둔 티셔츠를 의자에 깔았다. 그럼에도 시트가 젖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은 일부러 활짝 열어두었다. 상체를 거칠게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좋았다. 라디오의 전원은 키지 않았다. 엄마의 차에서 늘 흘러나오는 한국 찬송가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볼타 플레이스를 지나 삼십 사번가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체다 치즈와 손바닥만 한 샌드위치를 샀다. 차안에서 샌드위치의 포장을 뜯을 때에야 우유가 없다는 걸 알았다. 허기진 대로 입 안에 샌드위치를 처넣고 입가에 묻은 샌드위치를 닦지도 않고 집 근처의 블록으로 차를 몰았다.

마을은 어두웠다. 주택가인 탓에 불야성을 이뤄야 할 도시의 늦은 밤은 적막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몇몇 건물에서는 불빛과 함께 속닥거리는 소음도 들려왔지만 달리는 차안에서 소리들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헤드라이트는 도시를 달리던 습관대로 하향등에 위치해 있었고 가시거리는 멀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도 쉽게 노출당할 뻔 했다.

거뭇한 인영이 수명이 다해 명멸되어가는 정원등의 불빛을 마주한 채 서성였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정원의 일부로 알고 지나쳤을 것이다. 마치 거인상처럼 커다랗고 메말라 있는 뒷모습이 이따금씩 어슬렁거리며 펜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푸른 펜스의 차가운 철장을 매만지며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 각이진 어깨는 조금 움츠려있었다. 장송곡을 부르는 사제처럼 우울한 의식을 치루듯 힘이 없었다. 들려진 고개는 어딘가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불이 꺼진 창문 너머 나의 흔적들일 터였다.

자세히 바라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블리스 아이언사이드라는 건.

바로 내 앞에 녀석이 있는 것처럼, 숨소리에도 뒤돌아볼 것 같은 느낌에 호흡을 참았다. 아니, 숨이 막혔다. 소리를 내는 차 시동 소리가 신경 쓰였다. 녀석이 내게로 뛰어온다면 막다른데 몰린 것처럼 뒷걸음쳐 달아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태 불 꺼진 집 앞에서 저렇게 쓸쓸히 서성였을 지도 모른단 사실에 순간이나마 미칠 것 같았다. 녀석이 그렇게 해서라도 견뎌냈다는 생각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천천히, 녀석에게 내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며 헤드라이트 불빛을 껐다. 차가 있는 맞은 편 건물 옆의 도로는 블리스가 볼 때는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선의 사각에서,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블리스를 살폈지만 녀석은 그대로였다. 투두둑, 여물었던 심장이 다시 쩌억 거친 아가리를 벌리기 전에 오른 손으로 욱신거리는 심장을 짓눌렀다.

아주 간단한 생각을 하려 눈을 감았다. 블리스는 시간이 지나면 돌아갈 것이고,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나면 또 다시 얄팍한 평화로 가려진 불안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은 반복 되겠지. 그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결국에는 우스웠던 사랑 놀음도 잊혀 질 거다.

입 닥치고 눈감고 귀를 막고 지내면, 그 누구도 모르는 퇴색한 추억이 되겠지.

생각을 반복하자 좀 전보다는 많이 편해졌다. 심장이 두근거림 의식하려 애써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온해졌다. 커다란 한 숨을 내쉬며 눈을 떴을 때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온기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





우울한 월요일이 시작됐다. 주일날의 회개로 인해 하얗게 닦여진 양심 위에 새로운 죄가 퇴적되는 한 주의 시작. 시작의 처음을 장식하는 거짓말은 새벽이 되기가 무섭게 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의 도서관으로 간다는 말이었다. 사실은 공원으로 향할 심산이었다. 어머니의 미심쩍은 눈을 뒤로하고 집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대신 편의점으로 향했다. 즉석으로 편의점에서 만들어주는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 줄 서 있는 비즈니스맨의 기다란 행렬에 끼어 내 차례를 기다렸다.

다가온 한 주를 준비하는 그들의 얼굴은 일에 대한 부담으로 옅게 그늘져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편의점 밖에서 줄을 서 있는 동안 아버지의 차가 내 옆을 지나갔다. 아는 체를 하기 위해 경적을 울릴 만도 하건만 발견하지 못한 듯이 내 옆을 그대로 지나쳤다. 맞은편에서 느린 속도로 달려오던 아버지의 얼굴은 이른 출근에 대한 부담으로 피곤에 절어 있었다.

핸들 앞에 달린 은색의 자전거용 바구니 안에는 샌드위치와 탄산음료, 조금만 더 풀면 끝이 나는 문제집과 수학 교과서 그리고 J M 쿳시의 불명예를 넣었다.

공원의 분위기는 적막했다. 홈리스들은 얇은 홑이불을 덮은 채 벤치에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일찍 일어난 부랑자들은 새벽의 공원을 배회했다. 나 역시 그들 사이에 끼여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이따금씩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지만 시선에선 단순한 호기심 외에는 위협적인 어떤 난폭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물다 이내 사라지는 시선들을 의식하며 방황하듯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다 비어있는 벤치에 앉았다.

의자에 맺힌 차가운 이슬이 얇은 면바지를 적셨다. 브리프를 넘어 맨살에 닿아오는 촉감이 불쾌했다. 배가 고팠기에 손바닥만 한 샌드위치를 다섯 입 만에 해치워버렸다. 무식하게 빠른 속도로 음료수가 담긴 캔을 비워냈다. 꺼억, 하고 만족스러운 트림도 뱉어냈다. 포만감에 날카롭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느슨해졌다.

문제집을 풀까 아니면 소설을 읽을까 고민을 하다 결국에 집어든 것은 J.M 쿳시의 불명예다. 어제 도입부를 조금 읽다 잠들었다. 잘 읽혀지지 않는데다가 이 소설은 나를 당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불안전한 부사가 활용되고 현재시제로만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지만 문장이 아름답다는 것은 느껴진다.

그는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를 진행해나간다. 잘은 모르겠지만 신문이나 대중매체에서 왜 이 소설을 최고라고 일컫는지 어렴풋이 이해는 할 수 있다. 끝없이 우울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서 냉소를 읽는다. 어려운 책이지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삼일 뒤에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학교 도서관을 들려 남아공과 관련된 정치도서를 읽어 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에세이를 쓰면서 또 다시 글 쓰는 훈련을 해야지.

글쟁이가 될 것도 아닌데 글 쓰는 훈련을 해야 한다니, 유쾌하지 못한 일이지만 이 나라 교육방법에 대해 개인감정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릴 한심한 이유는 없다. 개인적인 취향은 공부를 하는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이렇게 공부 때문에 끙끙거리는 나를 돌아보면 변한 건 없어보였다. 여럿이 함께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된 것에 불관했다. 단지 내 처지가 좀 처량해졌을 뿐.

내 미래에 관해서 적게는 오년 뒤의 모습을 그려본다. 현재를 의식하며 우울함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현재를 주제로 삼는 것은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약해빠진 정신으로 무얼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청년의 모습을 한 내가 보이는듯하다. 그 곳에는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온통 낯선 것들. 하지만 그 곳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겠지.

나는 정말 궁금했다. 그 때도 나는 남자와 사귀고 있을까. 나는 정말 남자가 좋은 것일까. 블리스와의 섹스가 좋았고 또 내가 녀석과 사귀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해서 내가 꼭 게이여야 하는 걸까.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는 것뿐이다.

한 가지 재미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에, 아주 만약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하는 가정이다.

더 먼 훗날, 워싱턴 D. C가 아닌 외떨어진 곳에서 생활하는 아들의 방을 찾은 어머니가 발견하는 것은 아들이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커다란 치수의 옷들이다. 말끔하게 다려진 커다란 양복들과 아들의 취향이 아닌, 멋을 부린 평상복들이 옷장에 걸려있다. 어머니는 이상함을 느끼지만 아들이 남자와 동거하고 있다는 의심을 애써 떨쳐버린다. 그러한 날들이 반복된다. 이번에도 어머니는 그 옷들을 보고 만다. 결국에는 의심을 끝내 놓을 수 없어 어설프게 감쳐진 단서들을 하나하나 찾아낸다. 단서들을 신중하게 맞춰가다 퍼즐의 그림이 맞춰질 때쯤이면 그녀는 갑자기 초조해진다. 완성직전의 퍼즐을 엎어버리고 눈을 돌려버린다. 아들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여자들을 소개해주기 위해 그녀는 애가 탄다. 결국에 아들의 입에서 결국에 나는 게이에요 라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다. 삶의 통제력을 잃고 마는 것이다.

뒷담화의 소재로는 괜찮은 주제였지만 그게 내 얘기가 된다면 끔찍했다. 또다시 상처를 짓밟는 느낌에 가슴이 텁, 막혔다.

블리스와 내 사이가 소원해진 것을 어머니는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녀석의 얘기만 꺼내면 나도 모르게 어색한 연기를 하고 있다거나 평소라면 가지 않을 어난데일에 있는 한인 교회를 따라가는 것에서 어떤 단서를 발견했을 것이다. 내 얼굴에 남은 상처를 보고 블리스 녀석이 남겼다는 추론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또래친구끼리 의례적으로 한번쯤은 겪는 감정적인 충돌이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복잡한 일이 얽혀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을 들키고 나면 살아 숨 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내 생애 이렇게 긴장 속에서 살아 본적이 있던가. 그 날 이후로 잠에 드는 매 순간마다 편안한 숙면을 취해본적 없었다. 웃는 데는 이골이 났다. 평안함을 가장하기 위해 입 꼬리에 힘을 주어 미소를 연출했다. 강박증에 걸린 환자처럼 나의 모든 삶이 제자리에 맞춰져 있나 끊임없이 확인하고 비뚤게 삐져나온 모서리를 맞추고 잘라내면서. 그리고는 밤에는 숨죽여 헐떡이는 것이다.

미친 짓이지.

고통을 통해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란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모래로 만들어져있었는가를. 가벼운 바람만으로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흐트러지고 마는 것이다.

약해 빠진 새끼, 욕을 지껄이며 등받이 뒤로 팔을 뻗었다.

갈수록 주머니에 들러붙어있는 코카인을 하고픈 욕구를 참기가 힘들어진다. 몇 번이가 없애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 때마다 다시 마음을 고쳐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추하게도 보물처럼 귀히 여겼다. 벌써부터 마약 중독자가 된 기분이지만 하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일종의 극기였다. 여기서 더 무너질 수 있는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여직 참아내는 걸 보면 난 그렇게 맛이 간 인간은 아닐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더니 비닐 주머니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자 흰 가루가 묻어있다.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냄새는 없었다. 냄새를 맡으며 아주 조금 흡입된 모양인지 코가 간질거렸다.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왜 다들 코카인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고 폐인이 되는 걸까 궁금함에 눈을 감고 기다렸다. 하지만 하나에서 백을 셀 때까지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더 이상 책에 집중 할 수가 없어 책을 덮어 바구니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몇 분간 망설이다 주머니에서 비닐을 꺼냈다. 비닐의 모서리를 잡고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을 가렸다. 태양빛을 받은 비닐 안에서 코카인 가루가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다.

그 빛은 아주 특별한 느낌을 자아냈다. 아주 순결한 빛이었다. 달콤하고 따듯한 황금빛 꿀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느리게 흘러내리는 듯한, 포근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빛은 병원 복도에서 느낄법한 을씨년스런 황량함을 갖고 있기도 했다.

어떤 기분일까. 얼마나 행복할까. 또 얼마나 불행해질까. 강렬한 충동이 일어, 나는 가만히 그것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안녕?”

불쑥 손이 솟아올라, 나는 거의 기절하듯이 놀랐다. 손 안에 있던 비닐이 풀썩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 졌다.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까무러칠 것 같은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며 얼른 바닥에 떨어진 비닐을 주워 감추려했다.

“조이도 이런 거 하는구나.”

하지만 연약해 보이는 작은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마시는 거 이런 거 하는 거 좋지 아나.”

비닐을 집어든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낯선 얼굴이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런 거 하면 많이 아파져.”

“…….”

“아파져도 병원에 갈수 없어져.”

빌어먹을, 심장의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데다가 기억에 없는 얼굴이 나에게 말을 걸며 웃었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키가 작은 여자아이가 다리를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봤다. 커다란 눈이 예쁘다고 생각됐지만 지금은 아이의 귀여움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노려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땠다.

“이리 줘.”

“안 돼.”

“…….”

“아파지고 시퍼?”

자못 심각한척 아이는 목소리를 낮췄다. 어이가 없었다.

“……너… 나 알아?”

“응. 조이 잖아. 머리가 많이 짤바져서 못 알아볼 뻔 했지만.”

여자애는 재미나는 듯 까르르 웃었다. 내 이름까지 알고 있지만 기억에는 없는 소녀를 기억해내기 위해 여자 아이 나이만큼의 과거의 일들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내가 쉽게 지나쳤던 알지 못하는 순간들까지 닿지는 않았다.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 머리 많이 짧아. 그러니까 얼른 줘. 어린 애는 이런 거 신경 쓰는 거 아니야.”

“우리 언니도 늘 그런 얘길 하지만, 엄마는 그런 거 아니랬는 걸.”

“…….”

“엄마는 거짓말 가튼 거 안해.”

특이한 어감의,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한 어조로 아이가 심각하게 속삭였다. 여자 아이의 또래가 떠들만한 영어는 아니었다. 완벽하게 다물어지지 못한, 잔뜩 발음이 새어나오는 울렁거리는 영어는.

게다가 여자애는 올리브유처럼 진하고 약간의 갈색 빛이 도는 피부였다. 워싱턴의 흑인만큼은 아닐지라도 흔하디흔한 히스패닉계 중의 하나일터였다. 하지만, 그 중에 내가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사람은 적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맙소사, 고작 몇 달 전의 일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성능 나쁜 머리라니.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아마도 칼릭스와 함께 들렸던 센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하지만)에서 만났던 여자애인 모양이었다. 기억이 틈을 비집고 나오자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졌다. 낯설었다 생각했던 얼굴도 어둠이 걷히고 빛이 드러나듯 서서히 떠올랐다. 하지만, 여자 아이의 이름까지 떠오르진 않았다.

가브리엘의 집안을 청소하는 동안 내내 옆에 붙어서 말을 걸던 제이미와 달리 여자애는 구석에서 가만히 칼릭스와 내가 치우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이름이 뭐랬지? 기억이 안 나서.”

“쥬디라고 불러. 집에서는 미겔이라고 부르지만. 조이는 미겔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아이는 천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활짝 웃었다. 그 나이 또래가 으레 그렇듯이 치아 사이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하지만 미운 느낌은 아니었다.

“알았어. 미겔. 나 그런 거 안 해. 믿어도 되니까 이리 줘. 내가 버릴 테니까.”

“언니도 늘 그런 식으로 말해. 하지만, 엄마한테 안 이르면 나도 혼나는 걸.”

원치 않게 남의 가족사까지 알게 됐지만 미겔은 의식하지 못한 듯 했다. 그 나이 또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군가로부터 주의를 받지 않는 이상 재미난 얘기를 하듯 가족의 사소한 버릇까지 떠벌리곤 하므로 자신의 가족 중 하나가 마약에 손을 대고 있다는 얘길 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되는 얘길 들은 듯해서 주의를 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가 누구 처지에 대해 주의를 줄 입장이 아니었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을 가렸다.

“난 괜찮아. 난 그냥… 그냥 그게 신기해서 쳐다만 봤던 거야.”

“……진짜?”

“응. 내가 버릴 테니까 이리 줘.”

“진짜지?”

“응. 그래. 착하지 미겔.”

의심스런 눈빛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미적지근한 태도로 내게 비닐을 넘겨주는걸 보니 아이는 아이었다. 어린 아이한테까지 훈계를 들을 정도로 내가 정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하아, 미치겠군.”

“뭐가?”

“그냥… 그런게 있어. 넌 이해가 안 되겠지만, 지금 상황이 무척 우스운 상황이거든.”

“왜?”

“아마 말해줘도 이해 못 할 거야. 그냥 별것도 아닌 일에 웃는 미친 오빠가 하나 있다 라고만 생각해줘.”

킥킥거리며 긴 머리를 고무줄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있는 미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겔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웃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또 귀여워서 킥, 하고 웃음이 나왔다.

손목의 시계를 보니 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왜 이런 이른 시간에 어린 여자애가 혼자 공원을 돌아다니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옆에 찰싹 붙어서 땅에 닿지 않는 다리를 붕붕 흔들고 있는 미겔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내색을 비추지도 않았다.

“넌 이 시간에 안자고 뭐하는 거야.”

“나 원래 일찍 일어나.”

“근데 왜 이렇게 공원에 나왔어? 이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잖아.”

“혼자 아닌데. 아빠 저기 이써.”

한 손은 엉덩이 밑에 깐 채로 나머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벚꽃 나무가 줄을 지어 심어져있는 강 부근의 둑 근처였다. 여태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남자였다. 미겔과 내가 앉아있는 곳에서 한참 떨어져있기도 했지만, 서 있는 남자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D.C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은색의 망으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을 비우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내가 앉아있는 벤치를 쳐다보면서 미겔과 나를 쳐다보는 듯 했다.

“아빠구나.”

“응. 여기 공원에 있는 쓰레기통이랑 베네커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쓰레기를 주워. 나는 냄새나고 지저분해서 잘 모르겠는데 아빠는 멋진 일이래.”

미겔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내가 생각해도 멋진 일인 것 같아. 미겔의 아빠 덕분에 공원이 깨끗해지잖아.”

실제로 공원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 뱉고 보니 사회 정의적 차원에서 근사한 일이긴 했다.

우리는 열심히 떠들었다. 완연한 아침의 태양에 잠들어있던 부랑자들이 홑이불을 걷고 어디론가 어슬렁거리며 사라지는 것과, 미겔의 아버지가 자리를 옮겨 루즈벨트 기념관 뒤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갑작스런 두 번째 만남에 대한 낯설음은 없었다. 미겔은 친근한 아이었고, 나는 어린 소녀에게 빠져들듯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미겔은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을 지은 바비 인형과 유치원에서 사귀게 되었다는 남자아이, 미겔을 구박하는 못된 언니 그리고 가브리엘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아이는 노래하듯이 말을 했다. 일정한 음률을 타는 듯 언어를 표현해냈다. 에스파냐어가 가진 특색답게 미겔의 영어는 유려하게 들렸다.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말은 단어와 단어 사이의 구분이 불분명해서 한 덩어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r’을 남용한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이것은 단지 내가 어감에 예민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추측하건데, 가브리엘이 가르치고 있다는 일반 아이들과 달리 미겔의 가족은 불법체류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미겔의 아버지의 직업에서 유출해낸 결론이었다. 미겔이 시민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기도 했고, 물어보는 것은 어쩐지 실례라는 기분이 들어 들추어내진 않았지만 영주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십년도 전에 어렴풋한 기억 속에 시민권을 따기 위해 인터뷰를 준비하던 아버지의 긴장된 얼굴이 떠올랐다. 요란스런 일이긴 했는지 퇴색한 기억 속에서도 그 날의 일만은 조금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렇게 말 많은 아버지는 또 처음이었지.

웃음이 나왔다.

“왜 다시 안와?”

“뭐?”

가만히 웃고만 있는 내가 맘에 안 들었는지 신경을 자신 쪽으로 돌리기 위해 미겔은 내 무릎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그 작은 손을 꼼지락 거리며 아이는 나를 올려다봤다.

“가브리엘도 조수아도 조이 기다려.”

“그래?”

“응.”

“하긴, 나만큼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해줄 인간도 없겠지.”

청결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화장실을 철 수세미로 박박 닦아대던 나를 흐뭇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조수아가 생각났다. 그 노인은 아직도 도도한 목소리로 폭풍의 언덕을 아이들에게 읽어줄런지. 웃음을 터트리는 나를 바라보며 미겔은 말을 덧붙였다.

“오늘 가치 갈래? 나 오후에는 늘 아빠 차타고 가브리엘한테 가거든. 아빠한테 말하면 오빠도 데려다 줄 거야.”

나는 웃고 있던 그대로 거절의 말을 생각해 내야 했다. 미겔을 다시 만난 건 반가웠지만, 다시 그곳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아이는 덧붙였다.

“린이.”

“…….”

“린이 있자나… 그러니까 조이는 다시는 안 올 거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청소하는 거 힘들어서 안 오는 거면 이번에는 내가 도와줄게. 그저께 린랑 가브리엘이랑 가치 다 치워나서 힘들지도 않을 거야.”

“…….”

“응? 가자아. 가서 놀자.”

처음에는 린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 이름이 누구를 뜻하는지 떠올랐다. 언제나 기억에 있지만,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껄끄러운 존재였다.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는 미겔의 눈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천진하게 반짝거렸다. 그 눈을 보며 한숨을 쉴 수가 없어서 목구멍 끝으로 넘어오려는 덩어리를 눌러 삼켰다. 당연한 얘기지만, 칼릭스가 나를 반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입을 통해 듣는 녀석의 거절이 묘한 느낌을 주어서 나는 잠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저기 미겔.”

“응?”

“오늘은 오빠가 약속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말 한마디에 미겔의 이마가 금세 찌푸려진다. 아이다운, 표정을 감출 줄 모르는 미숙함을 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대신, 내일 또 일찍 나올게. 내일도 여기 오는 거지 미겔?”

“응. 내일도 아빠 따라서 나올 거야.”

“다행이다.”

“조이, 그런데 진짜 오늘 안대?”

“응 그래.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대신, 내일 여기서 오늘처럼 재미나게 놀자.”

입술을 비죽 내밀고 우는 얼굴을 하며 투정을 부리는 아이가 귀여워 나도 모르는 새에 손을 뻗어 볼을 쓰다듬었다. 따듯한 볼에 손이 닿자 미겔은 베시시 웃었다. 정말이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때 맞춰 미겔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트럭을 끌고 벤치 근처로 다가왔다. 차종은 짙은 녹색의 피터빌트 트레일러였다. 엄청난 크기의 위압적인 트레일러가 멈춰 서자 시큼한 냄새가 풍겨왔다. 하지만 미겔은 얼굴하나 찌푸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트레일러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트레일러에서 내린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느낌이 풍기는 제국의 식민지에서 사용되던 원색적인 에스파냐어였다. 미겔의 손짓에 따라 아이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중년이 되어가는 남자의 얼굴은 나의 아버지와 비슷한 종류의 피곤으로 절어있었다. 어쩐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익숙한 얼굴을 보는 기분에 하마터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할 뻔했다.

학교에서 배웠던 익숙한 단어가 몇 개 들리긴 했지만, 대화의 내용을 추측할 수는 없었다. 멀뚱히 서 있는 나를 곁눈질로 보던 남자가 마침내 미겔과의 대화를 끝내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미겔이 하는 말이 당신이 너무 멋지다는 군. 자기 남자친구보다 더.”

남자의 말에 미겔은 빠드레라며 소리 질렀다. 빨개진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를 귀여운듯 쳐다보던 남자는 당황한 나를 보더니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동양인 친구. 내일 또 보자구. 나는 빨리 다음 구역으로 가봐야 해서.”

한 손을 번쩍 들어 끊어내듯 흔들며 미겔의 아버지는 여전히 발을 동동구르는 미겔을 번쩍 안아들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으며 얼굴이 빨개진 녀석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창피함에 아버지의 원망하듯 어깨를 두들기던 미겔도 마지못해 내 인사를 받았다. 아이는 한참을 입술을 오물거리다 새침하게 다짐을 받듯 입을 열었다.

“조이 내일 꼭 나와.”

“그래 알았어. 일찍 나올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해, 꼬마 소녀에게 무례가 되지 않도록 입술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미겔은 얌전히 트레일러 속으로 들어갔다.

차가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 까지 미겔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쳤다. 커다란 눈의 반짝거리는 피부를 가진 미겔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손을 흔들었다. 이미 만성이 되어버린 우울을 떨쳐준 재밌는 아이였다.





미겔이 돌아가고 난 후 얼마 안 있어 공원 속으로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박물관 내지는 기념관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몰려와 줄을 서는 모습은 워싱턴 D.C에서는 흔한 모습이었다. 벤치 주변의 소란스런 소리는 마틴 루터킹 목사 기념관에 들리기 위해 줄을 선 내 또래 소년 소녀들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그들의 옷차림은 바지는 제멋대로였지만 티셔츠는 단체로 같은 옷을 맞춰 입은 듯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다. 벤치에 엎드려 공부를 하려했지만, 집중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들고 내 또래의 소년소녀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마도 교회에서 주최한 어느 캠핑에 초댄 사람들인 듯 했다. 나도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많이 소홀해지긴 했지만,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나는 억지로 저들 틈에 끼어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렸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소홀해지는 믿음에 대해 어머니와 아버지는 큰 유감을 표했지만 나에게는 왠지 신앙이란 어울리지 않는 짐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형식적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자애와 희생, 너를 향한 사랑을 알게 될 거라며 끊임없이 어머니는 나에 대해 기도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별 느낌이 없었다. 신앙에 대해 소홀해진 계기는 딱히 없었지만 믿음이 오래된 바늘의 끝처럼 무뎌져가던 중 블리스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손톱만큼 남아있던 신앙심 역시도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믿게 될지도 모른다. 내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다가와 내가 도저히 가망이 없는 구원의 밧줄을 기다리게 될 때쯤에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아직 허세를 부리는지도 모른다. 죽을 만큼은 아니라고, 현실을 외면하면서 까지.

우울한 생각을 하지만, 좀 전처럼 가슴 묵직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게 다 미겔 때문이다. 빨개진 얼굴로 화를 내던 모습이 생각나 기분이 좋아졌다. 녀석과 약속했던 대로 코카인을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미겔 덕분에 흡입을 할 뻔한 또 한 번의 위기는 넘긴 셈이다. 느슨해진 비닐을 감싸기 위해 샌드위치를 쌌던 종이로 꼼꼼하게 둘러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이제는 그 것에서 신경을 끄고 공부를 해야지. 쓸데없는 생각이 거듭 반복되기에 의식적으로 교과서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만 가득할 뿐이다. 좀처럼 차분해지지 않는 생각, 입장을 기다리며 떠드는 또래의 소년 소녀들 그리고 입장을 지휘하는 인솔자들의 커다란 목소리. 애초에 이런 곳에서 공부 하는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미적지근하게 망설이긴 했지만, 나는 곧 책을 정리하고 자전거에 앉아 페달을 밟았다.

유령의 성처럼 웅장하고 낭비가 심한 건물이 드러나기 시작한건 페달을 밟은 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대지는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정문으로 들어서기 위해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숨이 턱까지 찼다. 마침내 정문까지 다다랐지만 도서관이 있는 서관까지 가기에는 역시나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미치도록 더웠다. 급하게 근처의 수돗가로 페달을 밟아 수도꼭지를 가장 끝까지 돌려놓고 머리에 물을 뿌렸다. 소름끼치게 차가운 물줄기를 받고 나서야 살 것 같았다. 뇌가 끈적거리며 녹아내리는 돌아버릴 것 같은 더위도 한결 가셨다. 티셔츠를 잡아당겨 아무렇게나 물을 훔쳐냈다. 옷에서 물이 뚝뚝 흘러 내렸지만 서관 건물이 보일 즘에는 어느 정도 말라있었다.

자전거를 보관하는 곳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자 눈에 익은 풍경들이 나를 반겼다. 스테인글라스를 통해 알록달록한 빛무리를 뿌리는 태양이라던가 안경을 낀 사서의 깐깐한 시선 같은 것들이었다.

방학의 중반을 넘어서인지 도서관 내에는 마지막으로 들렸던 때 보다 한산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미 졸업을 한 선배들, 혹은 같은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낯선 동기들이 다였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며 낯선 그들 사이에서도 가장 외진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태양빛은 느낄 수 있도록 창가의 바로 위치한 탁자 위에 가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 갈색의 원목 테이블을 짚자 땀에 젖은 손바닥과 미끄덩거리며 마찰음을 냈다. 이정도의 소음은 괜찮겠지, 조금 과감해진 난 의자를 평소보다 시끄럽게 끌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우선은 조금만 잠을 취할 생각이다. 창가를 통해 은은하게 새어 들어오는 햇볕도 좋았고 너무 덥지도 또 너무 춥지도 않은 쾌적한 도서관 내의 온도도 좋았다. 팔을 괴어 그 안에 얼굴을 묻으며 나는 정신을 비우려 노력했다. 아니,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노곤했던 몸에 몽마는 쉬이 달라붙어 의식을 앗아갔다.

내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의식할 새도 없이 잠에 들었던 만큼 내가 언제 의식을 찾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은 서서히 스며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잠이 사라지고 정신이 온전히 들었을 때 엎드린 그 상태로 조금씩 눈을 떴다. 부르르 몸이 떨리는 기분이다.

괴었던 팔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리자 밝은 빛이 눈가를 자극했다. 갑작스런 빛에 놀라 눈을 질끈 감자 눈꺼풀 안에 갇힌 빛들이 요란하게 명멸되며 사라져간다. 한참을, 그 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찰나의 순간에 눈 안에 갇힌 빛들이 잔물결을 그리다 소멸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눈이 부시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기를 기다려 눈꺼풀 위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는 피곤을 들어올렸다.

하마터면 나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눈앞에서 온 신경을 집중한 채로 하얀 백지 위에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소년은 귀에 익은 검은 색의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한 달 전에 봤던 진한 검은색의 타투는 많이 흐려져 희미해져 있었다. 이어폰 속의 음악을 따라 입술을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적고 있는 에세이를 읽고 있는 건지 녀석의 입은 소리 없이 흥얼거리고 있었다.

내 눈앞에 왜 이 녀석이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채로 녀석을 가만히 바라봤지만, 녀석은 종이를 쳐다보던 그대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에 참았던 밭은 숨을 내뱉고 나서야 나란 존재를 느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은 그대로였다. 커다랗게 동공이 확장된 청록색의 뚜렷한 시선이 표정 없이 나를 바라봤다.

아마도 녀석은 내가 진작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나의 놀란 시선을 화가 날 정도로 능청스럽고 태연하게 마주할 타이밍을 노렸을 것이다.

“안녕.”

선명하게 바라보던 시선 그대로.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남긴 채 칼릭스 다올린은 인사를 건넸다.





괴었던 팔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리자 밝은 빛이 눈가를 자극했다. 갑작스런 빛에 놀라 눈을 질끈 감자 눈꺼풀 안에 갇힌 빛들이 요란하게 명멸되며 사라져간다. 한참을, 그 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찰나의 순간에 눈 안에 갇힌 빛들이 잔물결을 그리다 소멸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눈이 부시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기를 기다려 눈꺼풀 위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는 피곤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하마터면 나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눈앞에서 온 신경을 집중한 채로 하얀 백지 위에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소년은 귀에 익은 검은 색의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한 달 전에 봤던 진한 검은색의 타투는 많이 흐려져 희미해져 있었다. 이어폰 속의 음악을 따라 입술을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적고 있는 에세이를 읽고 있는 건지 녀석의 입은 소리 없이 흥얼거리고 있었다.

내 눈앞에 왜 이 녀석이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채로 녀석을 가만히 바라봤지만, 녀석은 종이를 쳐다보던 그대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에 참았던 밭은 숨을 내뱉고 나서야 나란 존재를 느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은 그대로였다. 커다랗게 동공이 확장된 청록색의 뚜렷한 시선이 표정 없이 나를 바라봤다.

아마도 녀석은 내가 진작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나의 놀란 시선을 화가 날 정도로 능청스럽고 태연하게 마주할 타이밍을 노렸을 것이다.

“안녕.”

선명하게 바라보던 시선 그대로.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남긴 채 칼릭스 다올린은 인사를 건넸다.

“오래간만이다.”

“…….”

“머리카락 잘라서 못 알아볼 뻔 했어.”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녀석은 이어폰 한쪽을 귀에서 빼냈다. 한쪽을 남겨둔 이유는 언제라도 나와의 대화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아니, 굳이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녀석이 나와 긴밀한 대화를 나눌만한 이유는 없었다.

당연하지만, 녀석이 나에게 갑자기 다정하게 굴 이유는 없었다. 내 앞에 자리를 맡은 것은 좀 의외였지만.

“많이 짧아졌어.”

가만히 하얀 종이 위에 놓인 이어폰을 바라보다 녀석과 눈을 맞췄다.

“더워서 잘랐어.”

“숨이 막힐 만큼 덥긴 했어.”

“그래. 작년보다도 더.”

손끝으로 개미가 올라오는 듯 간질간질했다. 절여오는 손끝으로 책을 꾹 누르자 손마디 끝이 하얗게 변했다.

“자르니까 시원해?”

“길렀을 때보다는.”

“보는 사람은… 굉장히 낯설어 보여.”

“그럴지도.”

“네가 아닌 것 같아.”

“내가 머리 빨이 좀 있었나보네.”

손바닥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웃는 시늉을 했다. 아직도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은 어색했다. 머리를 잘랐던 첫 날 보다 얼굴의 흉측한 상처들이 아물어 덜 했지만, 거울 속의 나는 메마르고 강팍해 보이는 인상이 강해졌다. 나의 묽은 피에 야만적이고 걸쭉한 검은 피가 섞여들어 내 몸 어딘가에서 흐르고 있진 않나 생각될 정도였다.

칼릭스는 등을 굽혀 손바닥으로 턱을 괴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네가 아닌 게 되어버린 것 같다는 뜻이었어.”

나도 내가 예전의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개인에 따라 그 체취가 다르듯이 각자 고유의 느낌을 갖고 있지만 그 느낌이 변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하지만 내가 겪었던 일들로 인해 나는 변해있었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메말라버렸다. 연단의 과정이 길었다면 나는 고난을 이겨내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강철검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의 나는 종잇장도 베지 못한 채 일그러져 버릴 것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녀석은 내 표정에 드러난 침묵의 의미를 읽었을 것이다.

“여전히 열심히 공부하네.”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칼릭스는 목소리를 꾸며냈다.

“……뭐 그런 편이지.”

입술을 달싹이며 뚜렷하게 눈을 마주쳐오는 것이 부담스러워 나는 살짝 녀석 너머의 비어있는 테이블을 쳐다봤다. 녀석이 이제 그만 흰 종이로 눈을 돌려 끼적이던 걸 마저 해치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피하는 나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한참을 침묵하던 녀석은 다시 귀에 이어폰을 꼽았다. 그러고는 펜을 집어 글자를 적어내려 갔다. 나 역시 책 속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시선의 사각으로 녀석의 행동을 관찰했다. 무언가를 끼적거리던 녀석의 움직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귀에 있는 이어폰을 빼는 대신 녀석은 mp3의 전원을 껐다.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네가 여기로 들어왔을 때.”

“…….”

“새로운 동양인이 이 학교로 전학을 왔나 싶었지. 그것도 아니면 D.C에 사는 주민이라던가. 자세히 보니까 너였지만.”

아주 조그맣고 낮은 목소리로 얘길 했기에 녀석이 낮은 허밍으로 노래를 하는가 싶었다. 얼핏 중얼거림과도 같았다.

눈을 들어 녀석과 다시 마주했을 때 칼릭스는 아주 조금 웃고 있었다. 꽃잎을 만지작거리면 짓물리며 옅은 꽃물을 뱉어내는 듯 희미한 흔적의 미소였다. 나는 그 미소를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미소 중에 가장 매력적이었으니까.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매력이란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종류의 감각은 아주 기묘한 느낌을 부여한다. 자신의 평범함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그런 기분을 느꼈을 때가 언제였었나 하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샤워하고 나서는 편하겠네.”

대답하는 대신 나는 후, 하고 짧게 웃었다. 그러자 녀석은 자신의 길게 자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장난을 치듯 손가락으로 한 바퀴 꼬았다가 그대로 풀어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짙은 밤색의 덩어리들은 결 따라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모자 수집광 사건은 어땠어?”

나의 침묵에 동조하는 대신 녀석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녀석이 나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도서관의 책장들 사이에 비스듬히 기대어있는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법자처럼 방만한 자세로 책속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녀석의 고개 숙인 모습. 그리고 나의 바지를 잡아당기며 내가 짚은 소설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보수적인 도덕성에 반(反)한다고 말했던 녀석의 얼굴역시.

“네 말 대로였어. 결말 부분에서는 도덕적 해이가 드러났지. 덕분에 우울해졌고. 결말을 예상하고 봤더니 시시했어.”

“미안.”

“뭐가?”

“그렇게 해서라도 너에게 말을 걸 필요가 있었거든.”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고 묻는 대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냐면.”

녀석은 뜸들이지 않았다.

“사과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좀 멍하게 녀석을 쳐다봤던 것 같다. 돌아가던 사고회로가 막다른 길을 만나 멈춰 섰다. 게다가 기름도 떨어진 상태. 시동조차 걸리지 않는다.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하는 녀석의 가슴이 보인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반복되는 움직임에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얼굴을 마주해도 마찬가지일 테지. 자, 이제 어떡한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사과 같은 거 필요 없어.”

“…….”

참담한 일을 목격한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아 미간사이를 꾸욱 눌렀다.

“멍청한 짓이란 걸 나도 알았으니까.”

애초에 시작이란 걸 하지 않았다면, 블리스 녀석과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리는 없었겠지. 뒷말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나는 곰곰이 그 말을 곱씹었다. 나의 경솔함을 미리 알려준 너에게 고마워하기라도 해야 하나. 그 때의 나는 내가 어떤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지도 몰랐으니까 말야. 철로 밖으로 이탈한 기차가 끝도 없는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저 추락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남은 한 손으로 손을 저으며 갈라지는 목소리를 감춘 채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 얘긴 하지 말자.”





벌렁 드러누운 채 러시아식 흑빵을 씹었다. 시큼한 맛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맛은 있었다. 버터라도 발라져있었으면 했지만, 얻어먹는 처지가 할 말은 아니었다. 공부를 하다 배가 고프다며 밖으로 같이 나가자고한 녀석이 종이봉투에서 꺼낸 빵은 사내 녀석 둘이 먹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라보였다. 그래서 부러 작게 뜯어진 것을 집었다.

칼릭스는 여전히 뭔가를 보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오늘자 신문이었다. 깨작깨작 먹어대는 나와 달리 녀석은 금세 먹어치우고는 신문 속에 빠져들었다. 이란 핵 안보리 회부에 대한 내용이었다. 레포트 작성 때문에 수없이 접해왔던 것들이었다. 첼시가 가르치는 과목은 열흘에 한번은 시험을 치는데다가 주말에는 신문을 스크랩한 내용에 대한 에세이를 써야 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공포정치 시절로 되돌아가 자코뱅당의 일원 중 하나가 되어 일주일간의 일기를 쓰라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기에 그가 수업을 마치는 시간이 되면 오늘은 또 어떤 주제로 일주일간 학생들을 괴롭힐까 하는 걱정에 온 반이 긴장으로 조용해졌다.

첼시에게 시달렸던 지난 11학년을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기억하기로 녀석은 첼시의 세계사 과목에서 늘 두각을 드러냈었다. 난 언제나 첼시에게 B학점을 받았었고.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읽는 것처럼 신문에 푹 빠져든 녀석을 바라보다 피곤해지는 기분에 등을 돌려 누웠다. 여전히 남아있는 빵을 한 입에 우겨넣어 씹다가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밖은 더웠지만 잔디밭에 몸을 누인 채로 꼼짝도 하고 있지 않아서 견딜만했다. 좀 전에 짧은 잠을 청했었지만 여전히 피곤한 채였다. 조금만 눈을 붙이자.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종이가 펄럭거리며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 페이지로 넘기려는 건가 생각하고 있는데 얼굴 위로 팔랑거리며 뭔가가 닿아왔다. 신문지 중 한 장을 빼어 내 얼굴 위로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태양 때문에 화끈거리던 얼굴 위로 서늘한 기운이 어렸다.

“이불 덮고 자야지.”

그 말에 난 킥, 하고 웃어버렸다. 부스럭 거리는 소음이 들렸고 곧이어 잔디가 짓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녀석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신문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살짝 들춰보니 녀석은 엎드린 채였다. 팔등을 베개 삼아 그 안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전보다 더 길어진 짙은 밤색머리가 햇볕에 윤기 나게 반짝거렸다.

“아직도 내가 어색해?”

목소리가 웅웅 울리며 들려왔다. 마치 내가 보고 있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러는 너는.”

“나?”

“그래 너.”

내 말에 녀석은 몸을 옆으로 뉘였다. 한 팔을 머리 위로 올려 턱을 받친 채 나를 내려다봤다.

“글쎄.”

“글쎄라니?”

“네 앞에서 편해본 적이 없어서.”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칼릭스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녀석이 한 말과 어울리지 않아 한동안 지그시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를 곧바로 응시하던 녀석은 곧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이 그래?”

“글쎄.”

“나 엿 먹이는 중?”

강한 악센트로 묻자 칼릭스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웃음의 흔적이 남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고개까지 끄덕이며 녀석은 치열을 드러내 환히 웃었다. 뒤돌아 누운 채로 돌아보기가 힘들어 신문을 걷어내고 녀석과 마주보며 드러누웠다. 아직도 눈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의 재회였다. 칼릭스의 웃음은.

“난 좀 편해졌어.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녀석의 눈앞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이밀며 흔들었다. 너 역시도 엿먹어보라는 의미였지만 녀석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을 펴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밀어냈다.

“어디 살아?”

“듀폰써클.”

“혼자?”

“응. 놀러올래?”

“생각보다 가깝네. 그런데 거기 게이 많이 살지 않나?”

낄낄거리며 웃다 곧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칼릭스에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 스트레스 때문에 지능이 떨어진 건지도 몰랐다. 굳어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펴 웃는 척 했지만 얼굴은 이미 뜨거워져있었다.

“음, 그냥… 마지막 말은 잊어줘.”

녀석은 좀 전에 내가 했던 방식대로 얼굴을 밀어냈다. 붉어진 뺨에 순간적으로 와 닿는 손의 시원함에 나는 왠지 안도가 되었다. 나는 좀 전에 나 자신의 우둔함에 대해 떠든 것에 대해 픽, 하고 웃어 넘겼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필요 없는 제스처를 취해본다. 어색함에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려 입을 열 때였다.

“많이 흐려졌지?”

녀석은 눈앞에 팔등을 들이밀며 말했다. 색이 옅어져 희미한 갈색으로 남은 타투가 보였다.

“여름이라 샤워를 하루에 몇 번이고 했더니.”

색이 옅어졌다고는 하나 새하얀 팔뚝 위에 새겨진 무늬는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팔뚝 위로 돋아난 혈관 위를 덮고 있는 무늬는 아름답고 단순했다.

“이런 짓을 하고 있으니까 겉멋 든 반항아처럼 보이지?”

“잘 아네. 문신에 평화라고 쓰면 더욱 완벽할거야.”

“아니지. 사랑과 평화겠지.”

덧붙인 말에 우리는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다 칼릭스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옷을 걷어 어깨를 드러내며 말했다.

“팔등에서부터 계속 이어져있어. 아무 의미 없는 무늬가.”

어깨 안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져 있는 무늬는 쇄골에서 끝이 나 있었다. 목 부분을 잡아당겨 끌러 내리자 쇄골 아래로 동그랗게 소용돌이 치고 있는 옅은 갈색의 무늬가 선명하게 보였다.

“거울 앞에서 벗고 있을 때 몸에 새겨진 이것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좀 묘해져.”

가슴께까지 옷을 잡아당긴 탓에 티셔츠는 힘을 잃고 죽 늘어져버렸다. 하지만 녀석은 의식하지 않았다. 잠시 정지된 상태였다. 뜸을 들였다. 하지만 녀석은 곧 고민의 흔적 없이 말을 단정하게 뱉어냈다.

“내가 좀 비뚤어져 보이거든.”

“…….”

“반항의 의미이긴 했어. 누구에게 보여줄 반항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무슨 뜻으로 얘기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 보다 혼잣말에 가까운 것 같아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칼릭스는 기억을 떠올리듯 생각에 잠긴 눈을 했다. 멍한 눈을 했던 녀석은 잠시 한쪽 입술을 올려 웃어보였다. 반만 짓는 미소. 칼릭스 다올린에겐 흔한 것이었다.

녀석의 타투를 바라보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름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뱉었다.

“조수아가 눈살 찌푸리지 않아?”

내 입에서 나온 이름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칼릭스는 손을 턱에 가져다 댔다.

“그 할머니 성격 완고해보이던데.”

“한 소리 듣긴 했지. 뱀처럼 징그럽다며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더군.”

“그 사람. 말을 약간 직설적으로 하는 것 같아.”

“소문난 독설가지.”

“그런 것 같아.”

“그래도 잔정은 많아. 가브리엘에게 하는 걸 보면.”

흠, 하고 목을 풀며 칼릭스는 조수아와 가브리엘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것은 여느 지역신문의 한 귀퉁이에 실릴법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문맹자들을 위한 구호 센터에서 자원봉사자로 일을 하던 조수아에게 대통령의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문맹 청소년이 접근하고 그 불행한 청소년의 삶이 조금씩 방향을 바꾸었다는 이야기였다. 시작은 빛이 났지만 이 이야기는 반짝거리는 특별한 것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가브리엘의 방랑벽 때문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섞였다. 필요가 있다 느끼면 해외로 나가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워싱턴으로 자리를 잡아 불법이민 자들의 자녀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새로운 아이들을 들이지 않는 걸 보면 언젠가는 그 일도 정리할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방황하던 청소년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도 아니었고 사회가 환영할만한 일원이 된 것도 아니니까. 이를테면 낙오자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칼릭스는 가브리엘의 삶의 방식을 존경한다고 했다.

“가브리엘에게 직업을 묻는 것처럼 멍청한 짓도 없어. 듣기로는 히피처럼 살아도 봤고 태국의 어느 시골에서 낯선 외국인들과도 지내봤데. 뉴욕에서 프리건으로 생활도 해봤고.”

“프리건이라면 그… 쓰레기통에서 음식 주워 먹는 사람들?”

“정확하게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재활용하며 사는 사람들이지. 환경구호단체에서도 그런 일은 안하는데 말야. 독특하지? 나에겐 가브리엘은 가족이라는 개념 보다 상위에 존재해. 이를테면 멘토지. 아버지는 가브리엘의 그런 점을 좋아하면서도 무척 싫어했어. 내가 가브리엘 같은 종류의 인간이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나를 캘리포니아로 불러들이려고 하기도 했지.”

“그럼 켈리포니아에서 가브리엘을 따라 워싱턴 D.C까지 학교를 온 거야?”

“아니, 도망친 거야.”

의외의 말을 하며 칼릭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망이라니?”

“그 곳에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어.”

그리고 칼릭스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나의 과거를 들춰낼 생각을 하지 마라. 그것은 마치 성을 둘러싼 거대한 여러 겹의 견고한 성벽과도 같으니까. 표정이 없어진 얼굴은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과감하게 눈을 맞춘 녀석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의미가 있는 눈길 같지만 그 의미가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지 내가 알 리가 없다. 멋쩍은 웃음을 흘릴 때 까지 빨려가는 듯 시선 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익숙해졌다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녀석은 가끔, 아주 가끔 이런 식으로 낯설어 졌다.

무릎을 접어 그 위에 턱을 괸 칼릭스는 생각에 잠긴 눈을 하고 입을 열었다.

“집 안이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어.”

“어떤?”

“필요 없어진 물건들을 잘 버리지. 쓰레기가 되지 않게.”

아직도 생각에 잠긴 녀석의 말을 자를 수가 없어 나는 잠잠히 듣기만 했다.

“행복한 사람도 마찬가지야.”

“…….”

“불필요한 감정을 버리는데 익숙하거든.”

흠, 하고 목소리를 풀어낸 칼릭스는 멍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던 나를 보며 웃었다. 뱉어낸 이야기들을 그저 한낮의 신비로만 남기고 잊어버리라 하는 것 같다. 이상한 얘기를 꺼냈지만, 곰곰이 생각하지 못하게 안심시키려는 듯이 웃어 보인다. 그래서 너의 고민이 뭐야 라고 묻지 않았다. 내가 녀석에게 말 할 수 없는 고민이 있듯이, 속살을 갈라 그 안의 진실들을 볼 필요가 없을 때도 있기에.

까끌하게 잘린 내 머리에 손을 얹어놓더니 쓱쓱 비벼댔다. 손바닥에 묻어있던 잔디가 머리카락 속에 들러붙었을 것이다.

“예전에 이렇게 하면 막 헝클어졌는데.”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네 머리 만져. 잔디 묻히지 말구.”

“재밌는 촉감이라.”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자 낮은 소리로 웃는다. 녀석의 얼굴 위로 길어진 앞머리가 쏟아져 내렸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넘기자 하얀 얼굴이 드러난다. 심해 속에서 유유히 해엄치는 심해어처럼 발광기관을 갖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켈리포니아에서 살았다던 녀석이 저렇게 하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칼릭스가 풍기는 분위기에는 언행이라던가 사소한 버릇에서 비롯된 것도 있겠지만 외모가 주는 인상이 더 컸을 것이다. 녀석은 정말로 고전적으로 생겼다. 처음 녀석을 봤을 때 동유럽인과 뱀파이어의 피가 섞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떤 신비함도 흥미가 당기지 않는 나였지만, 그 순간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바보같이.

게으른 아이처럼 다시 드러누워 눈을 감는 내게 녀석은 또다시 신문을 덮어씌웠다. 이젠 정말 조금만 자고 공부를 해야겠다. 굿나잇이라고 말하자 녀석이 웃었다. 가물가물한 잠이 몰려왔고 그제야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





워싱턴 D.C에는 강수량이 적긴 하지만 비가 자주 내린다. 태양을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화창하다가도 갑자기 몰려오는 구름에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도시다. 어제의 낮 역시 화창했지만 자정을 조금 넘은 시간부터 비가 쏟아져 내렸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빗줄기가 약해지긴 했지만, 집 밖으로 나설 때까지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미겔이 비오는 오늘 공원에서 나를 기다릴지도 의문이었고 우산을 쓰고 자전거를 타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기 때문에 나는 창고의 구석에 처박힌 우비를 입고 우산을 자전거 바구니에 담아 출발했다.

빗물이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름이긴 했지만, 빗물을 맞고 있으니 으슬으슬 몸이 떨려왔다. 공원 초입으로 들어섰을 때 바람에 흔들린 벚나무가 잎 속에 고여 있던 빗물을 뿌려댔다. 그 밑을 지나던 나에게로 빗방울은 거세게 몰아쳤다. 우비를 입긴 했지만, 바지가 반 이상이 젖어 버렸다. 미겔과 만났던 벤치에 다다랐을 때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물이 고여 있는 벤치에 철푸덕 앉아버렸다.

손목에 달려 있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7시 10분 이었다. 미겔 아버지의 연락처라도 알았다면 미리 전화를 해봤겠지만 모르는 이상 무작정 기다려야했다. 8시까지만 이 곳에 있다 오지 않는다면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멍하니 벤치에서 떨고 있을 때 낡은 녹색의 트레일러가 근처에서 멈춰 섰다. 차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익숙한 얼굴의 여자애가 뛰어내렸다.

“조이! 안녕!”

미겔이 생글거리며 소리쳤다. 손을 흔들며 뛰어오기에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고인 빗물을 찰박찰박 밟으며 트레일러로 걸어갔다. 피곤한 듯 머리 받이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던 미겔의 아버지가 나를 보고 웃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크게 고여 있던 비 웅덩이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 한 미겔을 얼른 감싸 안자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놀라진 않았나 얼굴을 살펴보자 다행이 미겔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미겔 잘 잤어?”

“응. 비가 와서 조이랑 못 만나까바 걱정했어.”

“걱정까지 했어? 후후. 근데 비 오는 날도 아버지 일하시네.”

“원래는 어떤 아저씨랑 가치 일했는데 사고가 나는 바람에 다쳐서 얼마간은 아빠 혼자 할 거래.”

미겔 역시 우비를 입고 있었지만 조금은 젖어 있었다. 형광분홍의 바탕에 엘모가 그려져 있는 우산을 든 미겔을 바라보던 아이의 아버지는 트레일러를 시야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우리는 걸음을 옮겨 어제 앉았던 벤치에 앉아 이제는 가랑비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뭐했어?”

“언니랑 드라이브했어.”

“언니가 잘 해주네 뭐.”“절대 아냐! 계속 졸라댄다고 나한테 화 엄청 냈단 말야.”

활짝 펴져있는 우산을 손안에서 돌리며 미겔은 작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작은 우산 안에서 몸을 꼭 붙인 채 어제와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화제 삼아 떠들었다.

미겔의 말에 따르면 아주아주 못된 그녀의 언니는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며 부모님을 화나게 한다고 했다. 조수아와의 사이도 나빠서 미겔의 언니가 알스트리트에서 건들거리며 돌아다닐 때에는 워싱턴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미겔은 몰랐다.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말 한마디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효과들에 대해 파악하기에는 미겔은 너무 어렸다. 말을 돌려 얘기를 흘려볼까도 생각했지만 잠잠히 그것들을 듣고 뇌 한구석에서 가둬놓고 잠근 뒤에 꺼내지 않기로 했다.

시선을 돌렸을 때 미겔의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빗물에 젖어있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트레일러 안으로 집어 던져 넣고 있었다. 물에 젖어 두 배는 무거워졌을 악취 나는 그것들을 들고 있는 그 모습이 지독히도 피곤해보였다.

미겔의 손을 잡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을 때 그는 조금 놀라보였다. 미겔을 차에 태우고 그가 들고 쓰레기봉투를 나누어 들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했다.

“오늘 비가 와서 그래요. 오늘만 도와드릴게요.”

“됐대도.”

손바닥으로 나를 슬쩍 밀어내지만 피곤에 지친 그의 얼굴은 두 번째의 호의적인 말에는 쉽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동정이 일어서도 아니었다. 나답지 않게 적극적인 태도로 그의 일을 거들겠다고 한 것은 야망이 아닌 의무로 인해 일을 해야만 하는 그런 지친 얼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말을 받아내며 오늘만 돕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지근한 태도로 어물쩍 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올려놓으면 되죠?”

시계추를 흔들듯이 중간크기의 쓰레기봉투를 좌우로 움직인 뒤 오픈되어 있는 트레일러에 던져 넣었다. 남자는 난감하고 미안하다는 듯이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더러워진 손으로 얼굴을 긁지 못하고 어깨로 볼을 비비고는 뜸을 들여 말을 한다.

“그건 둘이 할 때 하는 방법이고……. 음. 괜찮겠어? 힘든 일인데.”

“둘이 하면 빠르잖아요. 해도 되죠?”

“뭐… 정 그러고 싶다면 해. 미안해서 그러지.”

그는 얼굴이 간지러운 듯 계속해서 어깨로 볼을 비벼댔다.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라며,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보이자 미안함에서인지 한숨을 내 쉰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트레일러 위로 올라가며 하프백처럼 자세를 취해 보였다. 미겔과 닮은 얼굴이 미겔과 닮은 울렁거리는 말투로 내게 말을 했다.

“내가 위에서 봉투를 받아 넣을 테니 밑에서 좀 던져주겠나.”





걸쇠가 걸린 현관 문틈 사이로 나를 내려다보던 얼굴이 당황한 것도 같다. 한쪽 눈썹을 올리며 찡긋거린다. 상상했던 반응과 너무 닮아서 같아서 가만히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녀석이 말했다.

“잠깐 기다려.”

걸쇠로 막혀있는 문틈으로 좁은 거실을 지나 어느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바닥에 끌리는 검은색의 기다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흰색의 몸에 달라붙은 슬리브리스셔츠를 입고 있는 뒷모습이 익숙했다. 기숙사에서 몇 번이고 봤던 모습이었다. 브리프 혹은 허리에 수건만을 두른 채로 온 홀을 돌아다니는 소년들 사이에서도 녀석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칼릭스는 커다란 타올을 들고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걸어왔다. 걸쇠를 풀자마자 방안으로 들어가려는 내 위에 덮어씌우더니 앞이 보이지 않아 버둥대는 내게 헤드락을 걸었다.

“하지 마!”

버둥거리는 나를 무작정 어딘가로 끌고 가며 녀석은 숨죽인 웃음을 흘렸다.

“왜 이래! 하지 말래두!”

“네가 홀딱 젖어서 그래.”

“내가 말릴 테니까 응? 하지마아.”

“다 왔어. 욕실까지만 갈 거야.”

슬쩍 힘을 주어 문턱이 낮은 어딘가로 밀어 넣으며 녀석은 타올을 확 걷어냈다. 정신이 없었다. 녀석의 말 대로 나는 욕실에 들어와 있었다.

“좀 씻어.”

“뭐?”

“옷 줄 테니까. 우비는 닦아서 수건걸이에 걸어놓고.”

내가 뭐라 대답을 할 새도 없이 녀석은 문을 닫아버렸다. 녀석이 꽉 눌러 안았던 탓에 목에서 미약한 오심이 생겼다. 몸에서 그렇게 냄새가 났나 싶었지만 냄새 역시 빗물에 씻겨 내려갔을 테니 문제가 되진 않을 터였다. 아니면 내가 단순히 악취에 익숙해져 맡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남의 집에서 씻는데다가 옷까지 빌리는 상황이 맘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전 내내 쓰레기와 뒹굴었으니 씻긴 씻어야했다.

우선은 우비를 벗어냈다. 비에 씻겨가긴 했지만 각종 오물들이 들러붙었던 옷이다. 비누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정리가 잘 되어있던 탓에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욕조 안에 약간의 물을 받아 물비누를 섞고 우비를 집어넣을 때였다.

“옷은 여기에 둘게. 라임주스 한잔 준비해둘까?”

문을 벌컥 연 칼릭스가 등 뒤로 걸어왔다. 욕조 근처의 선반위에 옷을 올려 넣으며 어깨에 손을 짚었다.

“응.”

“옷은 빨지 마. 세탁실에 가져갈 테니까.”

“그게 더 번거로운 것 같은데?”

“그럼 너 편한 대로.”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자 살짝 말은 주먹으로 내 볼을 가볍게 툭툭 쳤다. 큰 키의 칼릭스가 내 위에 서 있자 시야가 어두워질 정도였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몸이 가까이 붙어있으니까 알겠다. 칼릭스는 그새 키가 더 큰 것 같았다.

“또 컸어?”

“글쎄다.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 아무튼 씻고 있어. 피자 주문해놓을게.”

어깨를 두드리며 반쪽만 웃어 보인 녀석이 욕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옷을 벗어 우비와 함께 빨래를 했다. 한 개씩 하기보다 세벌을 한 번에 빨려다 보니 옷의 부피가 커서 한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대충 비눗물을 묻히고 물로 헹궈 낸 후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이 다시 들어오지 않을 걸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방 천과 덧댄 비닐을 욕조 밖으로 둘렀다. 하얀색의 불투명한 천 밖으로 보이는 욕실의 모습이 흐릿했다. 일일이 몸을 가리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은밀한 모습까지 드러낼 정도로 우리가 친한가 하는 확신이 들지 않기도 했고, 녀석에게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아직은 꺼려졌다.

몸이 견딜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온도로 물을 틀었다. 떨어져 내리는 뜨거운 물줄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자 허파로부터 따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런 노동으로 놀란 온 몸의 근육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하수구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았다. 한참을 서서 물줄기를 받아내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아 욕조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노곤했다. 그래서 샤워를 하고 있는 이 순간이 더 만족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샴푸도 아닌 샤워 젤을 머리에 뿌려 머리에서 이는 거품을 온 몸에 발라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하지만 거품이 배수구로 사라진 이후에도 한참이나 욕조 안에서 몸을 늘어트린 채 물줄기를 받아냈다.

하, 하고 허파에서 바람을 뽑아내자 옅은 김이 서린다. 노방천이 덧대어진 불투명한 비닐에도 온통 뜨거운 증기가 어려 손을 대면 뽀드득 소리가 났다. 자기로 만들어진 욕조 턱에 얼굴을 기대자 미지근한 서늘함이 피부 속을 파고들었다. 처음 몸을 뉘일 때만 해도 거부감이 들 만큼 차가웠는데, 욕조가 덥혀질 만큼 오래 있긴 했나보다.

몸을 말아 발끝에 있는 샤워꼭지를 잠갔다. 이대로 계속해서 있다가는 잠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반에 있는 타올로 몸을 꼼꼼하게 닦아내고 욕조 안을 대충 정리한 뒤 녀석이 올려놓은 옷들을 들추어 보았다. 고맙게도 포장을 뜯지도 않은 브리프까지 챙겨 넣었다. 내심 안 넣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었는데 말이지.

옷을 입는데도 온 몸이 따듯한 물속에 풀어진 휴지조각처럼 노곤 해져 힘이 없다. 욕조 턱에 앉아 겨우 바지를 꿰어 입었다. 옅은 갈색의 아무런 무늬도 없는 단순한 디자인의 반바지. 그리고 내가 입기에는 큰 회색의 티셔츠였다.

욕실 밖으로 나갔을 때 칼릭스는 카펫에 묻은 물을 닦아내는 중이었다.

“문 앞에 슬리퍼 있으니까 그거 신고 나오면 돼. 주스는 테이블 위에 있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던 탓에 실내로 나오자 몸이 조금 추웠다. 팔뚝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아 손으로 쓸어내렸다. 슬리퍼는 푹신했다. 발바닥이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의 슬리퍼를 신고 걸음을 옮겨 무릎 꿇고 바닥을 닦아내는 녀석의 뒤에 섰다.

“네 방 구경해도 돼?”

대답 대신 묵묵히 카펫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칼릭스를 바라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넘칠 듯이 부어져 있는 옅은 녹색의 액체를 홀짝거리며 아무 방에나 들어갔는데 서재였는지 여러 종류의 책들, 음반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마릴린 맨슨의 음악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하나를 꺼내 펼쳐 보았다. 기괴한 분장이 눈을 어지럽힌다. 세상의 가장 구석에서 기어 올라온 이름 없는 영물들이 형체를 부여받은 것 같다. 그 외에도 내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온갖 종류의 앨범이 꽂혀 있었다. 그 중에는 대중매체에서 떠들어대는 요란한 가수들의 이름은 없었다. 좀 더 머리를 굴려야 하는, 의미심장한 문구들을 쉰 목소리로 외치는 록커들이 진열장에는 가득했다. 녀석의 평범하지 않은 취향을 알 것 같았다.

구석에는 야구방망이와 상처투성이인 일렉 기타가 보였다. 둘 다 손때가 묻은 오래된 것들이다. 그제야 녀석이 야구부인 것이 떠올랐다. 기타까지 칠 줄은 몰랐지만 버크셔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악기 한두 개쯤은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가끔은 잊어버리지만 나 역시도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다룰 줄 안다는 것도.

“너한테 재밌는 건 없을 텐데.”

어느새 방안으로 들어온 녀석이 등 뒤에 서서 말했다.

“집이 놀이동산이 아닌 이상 모든 집이 다 그렇지 뭐. 앨범도 많은데 노래 좀 틀어 줄래? 내 취향도 좀 고려해서.”

“네 취향이 뭔데.”

“평범한 거. 아, 시끄러운 거 빼고.”

내 말에 녀석은 피식하고 낮은 웃음을 흘렸다. 시선을 끄는 앨범을 골라내어 그 안을 살펴보며 무엇을 들어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녀석이 내가 골라낸 앨범의 바로 옆에 꽂혀있던 것을 꺼냈다.

“너무 유명하고 너무 흔해빠진. 너무나도 특별했지만 너무나 평범해져버린 노래를 틀어줄까?”

“뭔데?”

“너바나.”

어린 아이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앨범을 눈앞에서 흔들며 칼릭스가 웃었다. Nevermind 앨범은 지은이 갖고 있는 앨범이기도 했다. 몇 곡을 제외하고는 취향이 아니어서 동생에게 빌렸다가 다시 돌려주었지만, 그 독특한 감성 앞에선 평범한 나조차도 감정이 전이되어 울렁거릴 정도였다.

칼릭스는 망설이지 않고 오디오에 CD를 넣어 재생시켰다.

칼릭스의 말대로 너무 유명하고 너무 흔해빠진. 너무나도 특별했지만 너무나 평범해져버린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일종의 전설이 되어버린 노래였다. Smells like teen spirit 이 노래를 들으면 한 없이 위험해지고 한 없이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지. 이렇게 방안에 쪼그려 마약 따위나 하면 딱이겠구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어이없으면서도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점점 멜로디가 반복될수록 나는 진지해졌다. 닫혀있던 귀가 열리며 멜로디가 심장 안으로 파고들어 대기로 다시 빠져나갔다. 음악을 느끼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이지. 정말 제대로 음악을 듣게 될 때, 유형의 형체가 손끝에서 만져지는 기분이 드니까.

눈을 감고 들으니 멜로디와 가사가 손 끝을 희롱하고 달아나는 착각에 빠질 것 같다. 노래 속에서 그렇게 외쳐대는 어리석은 전염성 까지. 마약을 하지 않고도 유일하게 마약을 한 기분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 음악이라고 떠들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마약이란 건 지독하게 감성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 드는 것일 것이다. 음악은 감성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통제하려 드니까. 음악이 연주되는 순간이 끝날 때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도.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고 또 다음 트랙이 넘어갈 때 까지도 우리는 꼼짝하지 않았다. 감성이 나를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공기가 부풀어 오르고 아주 먼 곳에서부터 소리가 울려 퍼지는 느낌을 받는다. 전자기타 음이 온 몸을 타고 흐르도록 잠시 정신을 놓아본다. 마치 신비를 경험한 것처럼, 감각이 미세한 소리를 놓치지 않도록 극도로 섬세해진다.

눈을 뜨면, 새까만 밤하늘에 붉은 빛의 불덩이가 춤을 추고 있을 것 같다. 원시적인 불덩이가 날아다니는, 매력적인 새로운 차원으로 떨어진 상상을 한다. 확실히 너바나는 너바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던, 그들 자체가 마약이다.

우린 계속해서 웅크려 앉아 음악을 돌려들었다. 7번째 트랙이 재생되었을 때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켜 음악을 끈 칼릭스가 나를 돌아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팔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훌륭하지?”

손을 뻗어 나의 까끌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칼릭스는 웃었다.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지만, 나는 아직 거기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방안에서는 옅은 퀸스 향기가 났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이라곤 공기와 그것뿐이었다. 욕실 옆으로 붙어 있는 방 안에는 소파와 침대 기능을 합쳐놓은 싱글 침대와 옷장 겸 신발장이 다였다. 새로 가구를 들여놓고 사람 사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벽지를 새로 바르거나 감각적인 샹들리에라도 달아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뜻 냉기마저 돌 것 같지만 피부에 닿는 공기는 따듯하고 습하다. 방은 잠을 잘 수 있는 제 기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떠한 온기도 기대할 수 없어 보였다. 대신 거실이 넓었다. 물론 이 집의 규모에 비해서라는 단서가 붙지만.

녀석의 집은 온갖 종류의 락 포스터로 벽이 뒤덮여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을 깨고 거의 텅 빈 상태다. 그 흔한 액자 하나 걸려있지 않았다.

“집이 너무 휑해.”

재생이 끝난 DVD를 케이스 안에 집어넣는 칼릭스를 거들어 DVD 플레이어를 정리하며 말했다. 무릎을 꿇고 몸의 중심을 앞으로 기울여 CD 케이스를 살펴보던 녀석이 나를 돌아봤다.

“필요한 것만 가져다 놓은 거니까. 어차피 기숙사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혼자서 지내면 좀 쓸쓸하지 않나?”

“그럴 때도 있지. TV던 음악이던 적적한건 못 참아서 늘 뭔가를 틀어놓기도 하고. 근처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어서 심심하진 않아. 플레이어도 대여해줘서 따로 살 필요도 없었고.”

손바닥을 바닥에 집고 일어난다. 녀석이 성큼성큼 걸어간 곳은 냉장고였다. 피자 한 판의 반 이상을 해치운 지 얼마나 되지도 않았지만, 껍질을 벗겨놓은 오렌지를 들고 소파로 걸어왔다.

“먹어. 미리 손질해놨으니까 먹기도 편할 거야.”

“나 진짜 배불러. 여기에 더 들어가면 체할걸.”

“입안이 답답할 거 같아서.”

“으… 알았어. 한 조각만 줘. 너 근데 보기보다 정말 많이 먹는다.”

“적게 먹게 생기지도 않았지.”

검지와 엄지로 오렌지 조각의 끄트머리를 잡아 입안에 넣고는 한 조각을 더 집어넣는다. 녀석의 뺨이 볼록해졌다. 입안의 그것들을 짓무르자마자 터져 나오는 과즙의 신 맛에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녀석은 플레이어와 DVD를 품에 안고 선반 옆에 내려놓았다. 흐음, 한 숨을 쉬고는 칼릭스는 볼에 담긴 오렌지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오렌지 좋아해?”

“과일은 뭐든지. 냉장고 열어보면 절반이 과일이야.”

소파에 털썩 앉으며 녀석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바로 옆에 앉았기에 어깨가 닿았지만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깨가 닿아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닿아있는 부분을 곁눈질하자 옅은 갈색의 타투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의 맨들맨들한 어깨를 쳐다보고 있자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직도 신기해?”

“응?”

“타투 쳐다본 거 아니었어?”

후, 하고 웃으며 녀석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숨결에 진한 오렌지 냄새가 난다. 어쩐지 네 어깨가 닿아있어서 보고 있었다는 대답을 하기가 저어된다. 얼마나 바보 같고 낯 뜨거운 대답인지. 단순한 접촉 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대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칼릭스의 눈에 그런 식으로 비추고 싶지는 않았다.

“…맞아. 언제쯤 지워질까 하고.”

“방학 전에는 지워지겠지. 한두 달 가는 거거든.”

손바닥으로 팔등을 주물럭거리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었다. 소파의 턱에 뒷목을 기대자 결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긴 목에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그 것은 선악과를 먹다 목에 걸린 아담 을 연상시켰다. 이브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마침내 선악과에 제 영생을 팔아버린 영혼.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지만 불모의 땅에서 종신토록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게 된 최초의 인류. 왜 그랬어 칼릭스. 잘만하면 무위도식하며 평생 동산에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바보 같은 상상이지만, 난 정말 그 생각을 하면 속이 쓰렸다. 믿음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내가 그런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에덴동산의 한 가운데 서서 선악과나무를 전기톱으로 베어내는 상상을 한다. 안녕 선악과여. 자유의지 대신 나는 안개속의 영원한 안식을 택하겠네. 선악과를 불사른 나는 그 열매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어떠한 불안과 고통을 허락지 않는다는 단호한 표정을 짓는다. 가치 없는 망상을 하지만 표정만큼은 진지한 내게 칼릭스의 눈길이 닿았다. 그럴 리 없음에도 녀석은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의 글자 하나하나를 읽는 듯하다. 속이 뜨끔한 느낌에 숨을 죽이고 있자 한참이나 표정 없이 내려다보던 얼굴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 또 비가 많이 온다.”

녀석이 느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블라인드 혹은 그 흔한 커튼하나 달려있지 않은 창가에 고정된 두 눈이 살짝 찌푸려진 채였다.

“집에 갈 때 차로 데려다줄까?”

“자전거 타고 왔잖아.”

“차에 어떻게든 실어보지.”

“시트 더러워질 텐데.”

굳이 거절의 말 대신 날 데려다 주게 될 때 겪을 불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녀석이 데려다주는 것이 싫지 않기 때문이다. 우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로 비 오는 도로를 뚫고 긴 거리를 달려가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그 정도는. 있다 집에 가야될 때 말해.”

“알았어.”

고맙다고 말하려다 나는 그냥 머리를 벅벅 긁어버렸다. 세계만국의 공통어. 고맙다는 말을 하기에는 어색함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그 뻔뻔한 언어. 칼릭스는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끄는 소리를 내며 낮게 웃었다.

리모컨을 누르자 팟, 하고 TV가 감춰뒀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처음 보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스토리의 중반이었던 탓인지 드라마는 별 흥미를 끌지 못했다. 물렁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며 초 간격으로 채널을 순회하며 볼만한 것을 찾았다. 버튼을 누르던 손끝이 멈춘 것은 영화채널이었다. 지옥의 묵시록. 좀 전에 녀석과 봤던 아가씨와 건달들에 나왔던 말론 브란도가 나오는 영화였다. 녀석의 취향일 것 같아 소리를 높이자 역시나 화면 속에 시선을 집중한다.

TV 속의 말론 브란도는 스카이 역을 맡았던 1950년대의 모습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물론, 늙었다는 말이 세월 앞에 풍화되고 스러지는 허약함을 드러내는 단어로 쓰인다면 적절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가씨와 건달들에서의 물렁물렁한 젊은이의 자신감이 드러난 스카이와는 달랐다. 영화 속의 커트 대령은 광기와 깊은 우수에 가득 차 있는 중년의 남자였으니까. 문득 지은이 들고 있던 ‘암흑의 핵심’이 떠올랐다.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라는 그 소설을 지은은 무슨 재미로 읽었을 지가 궁금했다. 칼릭스가 저토록 집중하고 있는 것은 훌륭한 영화이긴 하지만 결코 쉬워 보진 않았으니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머리를 탓하라지. 리모컨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볼에 남아있는 오렌지를 집어 들었다. 입안에서 터져 나오는 신 맛에 눈을 찌푸리는데 녀석의 커다란 손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재미없지? 다른 거 할 까?”

TV화면을 가리며 나를 들여다보는 칼릭스는 지루함의 흔적을 꼼꼼하게 찾기라도 하려는 듯 나를 살피며 물었다.

“됐어. 너 보고 싶은 거 봐.”

“나는 재미없었거든.”

녀석의 손이 나에게로 뻗어올 듯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앞으로 흘러내린 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수리 너머로 고정되어있나 싶던 짙음 밤색의 뭉텅이가 다시 한 번 흘러내렸지만 이번에는 쓸어 올리지 않았다.

“다행이네. 실은 잠 잘 뻔했거든.”

그 말에 녀석은 흠, 하고 코로 웃었다.

“그럼 드라이브나 하자.”

“드라이브?”

또 다시 허공으로 녀석의 손이 뻗어왔다.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릴 거란 예상을 깨고 그 손은 나에게로 닿아왔다.

“오하이오에서 제퍼슨으로. 그러니까… 도시가 어두워질 때까지.”

짧아진 머리카락을 비비던 손으로 뒷목을 잡아 부드럽게 누르며 녀석이 웃었다.

물론, 오하이오에서 제퍼슨까지 달리기로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계획은 어느새 수정되어 워싱턴 D.C 밖으로 나가 버지니아 주의 알링턴 국립묘지 근처 드라이브 도로를 달렸다. 그러니까 배부름에 터질 것 같았던 배가 꺼지고 주변이 어둑어둑 해질 때까지 우리는 차안에 있었다.

비에 젖어 반진반질해진 도로 위를 은색의 캐디가 부드럽게 달렸다. 녀석의 말대로 오래 사용한 구식 모델이긴 하지만, 길이 잘 들어있어 승차감이 편했다. 서 있기만 해도 흠뻑 젖을 듯이 내리던 비는 어느새 가랑비로 바뀌어 가끔 한 번씩 움직이는 와이퍼에 깨끗이 닦여나갔다.

깔끔하게 구획된 도로 옆으로는 정리된 가로수와 아름다운 조경이 늘어서 있었다. 운치 좋은 장소였지만 비가 내리는 화요일이었기에 도로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D.C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외출의 경험이 적어 국립묘지 근처에 이런 드라이브 코스가 있는지도 몰랐던 나로서는 즐거운 일이었다. 칼릭스는 운전이 능숙한데다가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근방의 지리를 나의 아버지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는 칼릭스는 남자와 단둘이 남는 것 보다 여자와 함께인 것이 더 익숙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단 둘이 남는 그 은밀한 순간에 녀석이 무얼 하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도 보통의 남녀들에게 일어나는 범주 외의 일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문득, 레이의 집에서 열렸던 파티가 떠올랐다. 레이의 민망한 속옷을 입고 어쩔 줄 몰라 했던 날 보던 칼릭스의 놀란 얼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기막힌 찰나의 순간에 칼릭스는 진과 함께 있을 은밀한 시간을 위해 방을 찾고 있었다.

늘 여왕처럼 도도한 얼굴을 하던 진이 칼릭스를 바라 볼 때 해사하게 바뀌곤 했던 것도 같다. 두 사람이 사귀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칼릭스의 손등을 진이 쓰다듬을 때의 그 풍경에서 은밀하게 노출되는 감정들은 달큰한 사탕냄새가 나는 것들이었다.

칼릭스는 몸을 곧게 편 채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브릿팝을 이따금씩 흥얼거리면서 박자에 맞춰 손끝으로 핸들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손끝을 바라보다 문득 궁금해진 그것을 물었다.

“진 브롤린과는 어때?”

스위치를 껐다 킨 메트로놈처럼 녀석의 손끝이 일시 정지했다. 순간적으로 잘게 떨리는 녀석의 기다란 손끝이 다시 운동을 재개할 때까지 왠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진?”

“응. 진 브롤린.”

까딱 까딱, 다시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느리지만 일정한 속도로 두드리는 손끝을 보다 녀석을 돌아봤다. 앞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진과는 봄이 끝나갈 무렵에 헤어졌지.”

“사귀긴 했던 거네?”

“그렇지. 딱히 비밀일 것도 없는 사이었으니까.”

흐음, 한 숨을 쉬고는 녀석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네가 찼어?”

나는 구태여 멍청한 질문을 했다.

“아니. 차였어.”

“왜?”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 녀석에게 나는 또다시 멍청한 질문을 했다.

“…내가 너무 무관심하다고 느꼈나봐.”

녀석은 다시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룸미러를 통해서 슬쩍, 훔쳐보는 정도였다.

“여자들은 가끔 뇌의 대부분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굴 때가 있거든.”

손가락 총 모양을 만들어 뱅, 하고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모양을 만들며 말을 이었다.

“자신이 전부가 되길 바라는 욕심도 끝이 없고.”

“누가 그러는데. 사랑은 구속하는 거래.”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내뱉고 보니 비꼬는 듯한 능청스러운 말이 되어 있었다. 총을 만들었던 손을 펴 턱을 쓸며 녀석이 나를 바라봤다. 천연덕스럽게 내뱉은 소녀 같은 말에 낯을 붉혔지만 어두웠기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후, 그래… 그럴지도.”

반박 할 줄 알았던 칼릭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인정하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예외일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듯한 쓴 웃음이었다. 나는 예상과는 다른 녀석의 연애 방식에 대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귀는 사람에게는 무심한 편이었구나.”

“글쎄. 그건 사귀어 봐야 알지 않을까.”

혼잣말치고는 컸는지 바로 대답이 들렸다. 녀석 답지 않게 목소리가 부풀어 있었다.

“그러니까.”

“…….”

“빌어먹을 사랑에 빠진 뒤에 얼마나 열정적인 인간으로 변할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낯간지러운 얘기를 들은 것처럼 으아아 소리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칼릭스 네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지는 몰랐다는 듯 떠들썩하게 소리 내어 웃는 나를 돌아보며 녀석도 웃었다. 배신이야. 우리에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몽울져 공중으로 떠올랐다 퐁, 하고 사라지는 비눗방울 같은 웃음을 흘리며.

하지만 깔깔거리며 웃는 내가 미안할 만큼 칼릭스의 웃음은 조금씩 사그라졌다. 마치 뜨거운 대지 위에 아주 천천히 이슬비가 내리듯이, 차가운 비가 열기를 나무라듯이.

냉기에 젖어 열띤 웃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미소가 남은 그대로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확신할 수가 없어.”

정원에 켜놓은 등이 깜빡거렸다. 여전히 빛을 내지만, 희미해진 그것은 전보처럼 신호음을 내듯 깜빡, 까암빡 거렸다. 지금 이 곳은 안전합니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자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드라지게 드러난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등은 희미한 불빛으로 보고를 해왔다.

블리스는 이제 이곳에 들리지 않았다. 불 꺼진 창가에서 커튼 틈으로 녀석의 모습을 기다려 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들릴 이유를 찾지 못한 거겠지. 그럼에도 왔으면 하는 마음과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중적인 욕심에 진절머리 치며 나는 끝내 창가의 커튼을 살짝 들추어 정적에 휩싸인 정원을 훔쳐보곤 했다. 하지만 녀석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오늘 나는 집 근처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칼릭스를 돌려보냈다. 천천히 마을을 걸으며 먼발치에서 집 주변을 살폈다. 일상에서 비극은 시작되므로. 발견하지 못한 아주 조그마한 틈의 아가리가 벌어지며 시꺼먼 비극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블리스를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녀석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 저녁은 먹었다는 말로 대신하고 방안으로 들어온 나는 또 한 번의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깜깜한 실내를 유일하게 밝히는 빛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희미하게 반짝이는 천장의 야광별이었다. 창가에서 들어오곤 하던 희미한 적빛은 더 이상 없었다. 깜빡이던 빛을 끝으로 수명이 다한 듯 했다. 멍하니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끝도 없는 피곤이 몰려왔다. 이 시간. 세상과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되어 나 홀로 남아있는 이 시간. 요 며칠간 이어진 꿈만 같은 즐거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으로 차단되어 있는 이 순간만큼은 온 전신이 우울함에 잠겼다.

녀석의 생각으로 온 정신에 마비가 오기 전에 몸을 일으켜 서둘러 책상에 앉았다. 오전에 풀다 책꽂이에 그대로 집어넣었던, 엄마가 교회 집사님에게 부탁해 구해온 SAT 교재를 꺼냈다. 어지러운 수학기호 속에 정신을 빼앗기면 이 온몸이 절여오는 듯한 피곤함도 덜 하겠지.

스탠드의 스위치를 켜 책상 위를 비추며 방안을 물들이던 무기력한 어둠을 몰아내버렸다.





우리는 그 때와 달리 자동차를 타고 있었다. 출발점이 학교가 아닌 것이 그 때와는 달랐으나 목적지는 같았다. 알스트리트에 위치한 어느 흑인 빈민가. 천사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낙후된 시설이지만 겉모습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곳이 목적지였다. 우린 잠시만 그곳에 들릴 예정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나서 즉흥적으로 결정된 일이었다. 되던 안 되던 간에 간단한 레시피를 준비해 그곳에서 저녁을 차려보자는 얘기였다.

해가 길어진 덕분에 저녁시간이 가까웠음에도 주변은 온통 태양이 남긴 밝은 빛 무리에 감싸여 있었다. 눈에 익은 세입자 공동 주택이 보이고 기억에 희미하게 남은 상호를 가진 가게 역시도 보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고 삭막해서 우리가 하는 행동이 저녁을 차려보자는 소년들의 유치한 작당이 맞는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으슥한 음지 속으로 마약 거래를 하러 가는 딜러라도 된 기분이었다. 주변에 산재해있는 위협과 불안을 끊임없이 감시하며. 여차하면 품안의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면서.

“거의 다 왔네?”

“응. 저 골목만 꺾으면 돼.”

하지만, 녀석의 기분은 좋아보였다. 주변에 산뜻한 고기압이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녀석 특유의 정적인 우울함을 대신한 생기에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오늘 종일토록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유쾌함이었다. 우리는 야채가 잔뜩 들어가는 스튜와 샐러드를 만들 생각이었다. 도서관에 있는 요리 서적 중에서 가장 간단한 레시피를 노트에 베껴 적었다. 그대로 만들어질지는 의문이지만 집에서도 안하는 요리를 하겠다고 설치는 내 모습이 웃겼다.

핸들을 능숙하게 꺾어 골목 안으로 들어서며 센터 앞으로 진입한 뒤 녀석은 차에서 내려 조악해 보이는 작은 펜스 문을 열었다. 양쪽을 모두 열자 차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겨우 만들어졌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파트들이 늘어선 주변과 달리 비교적 너른 공터를 가진 천사 가브리엘 센터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집 옆의 농구코트 옆에 차를 주차시키고 우리는 각자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나눠들었다. 삭막함을 풍기는 드문드문 갈라진 회벽과 뿌연 유리가 달린 녹슨 철제문도 오랜만이었다.

“들린 지 한 일 년은 되는 것 같아.”

“두 달이 조금 안됐을걸.”

씩, 웃으며 녀석은 긴 허리를 슬쩍 굽혔다. 양손에 짐을 들고 있는 녀석을 대신해 내가 문을 열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소설 속 소녀가 옷장을 열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던 기분처럼, 문을 열면 낯선 세계가 펼쳐질 것 같았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세계가.

노크를 하기 위해 손으로 철제문을 두드리려는 순간이었다. 희뿌연 유리의 한가운데가 검어졌다. 방어할 새도 없이 문이 거칠게 열렸다. 다행이 안으로 열리는 문이었기에 문이 나를 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달려 나온 누군가와 강하게 부딪쳤다.

“아…….”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손에 들려있던 종이백을 놓쳐 시멘트 바닥 위로 안에 들었던 내용물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갑자기 안에서부터 뛰쳐나온 사람은 나와 부딪히자마자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였다. 내 또래는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이…런.”

“…….”

“괜찮아요?”

누구의 실수이던 간에 넘어진 소녀를 일으켜 줘야 할 것 같아 손을 내밀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갑작스런 충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여자애가 몸을 일으켜주려 뻗은 손을 올려다봤다.

“아프지 않아요?”

손을 주춤주춤 뻗어 내 손을 잡으려던 소녀가 갑자기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퀴기라도 하듯이 손을 강하게 쳐냈다. 황당함에 굳어있는 나를 째려보며 몸을 일으킨 여자애는 서둘러 눈에 맺혀있는 눈물을 닦아냈다. 언제 울었냐는 듯 입술을 앙 다물고 나와 내 뒤에 서 있던 칼릭스를 번갈아보던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재수 없어.”

너무 황당하면 따지려는 말도 안나오는가보다. 가만히 여자애를 쳐다보자 눈물로 새빨개진 눈을 찌푸리며 입술을 씰룩였다.

“빌어먹을.”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어깨를 부딪치며 펜스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편 블록으로 사라진 여자애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봤다. 귓속에서 소녀의 거친 목소리가 반복됐다. 빌어먹을이라니, 재수가 없다니. 아무리 여자라고는 하지만 이런 무례에 너그러울 필요가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화가 났지만, 어쨌거나 소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런.”

화를 달래려는 듯이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칼릭스가 허리를 낮춰 나를 쳐다봤다. 참담한 일을 당한 것처럼 녀석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 얼굴을 피며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웠다. 다행이 상자로 감싸고 있던 계란은 깨지지 않았다. 식재료에 들러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절로 나오는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누구야?”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져있는 토마토가 담긴 비닐을 집어 봉투 안에 넣었다. 어차피 갈아낼 거라지만 과즙을 흘리며 터져있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베베 꼬인 불량소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말투에서 묻어나는 희극적인 느낌에 녀석을 쳐다봤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미안해. 이런 일 당하게 해서.”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별걸 다…….”

이런 일에 화를 내 봤자, 내 인내심이 짧다고 증명하는 꼴이 될 것 같아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런 일쯤 별 일 아니라는 말을 하는 대신 어색하게 웃으며 팔꿈치로 녀석의 옆구리를 슬쩍 쳤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계획한 모든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화를 삭이며 나는 문이 열려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칼릭스가 불량소녀라 지칭한 소녀가 뛰쳐나올 때부터 묘하게 거슬렸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안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밖에서 일어난 일이 큰 소음을 동반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는 안은 너무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역시나 눈에 익은 액자 속의 사진들을 지나쳐 거실로 들어섰을 때 안은 텅 비어있었다.

“아무도 없나?”

두리번거리는 나와 달리 곧장 부엌으로 향한 칼릭스는 짐을 내려놓고는 내가 들고 있던 종이백 역시 받아들었다. 식탁에 재료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늘어놓고 종잇조각에 적어두었던 레시피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펼쳤다.

“너무 조용한데?”

“그러게.”

“요리 해도 되나?”

“우리가 신경 쓸 수 있는 별다른 문제는 없는 상태야. 우린 그저… 음식 준비만 하면 돼.”

의심스러운 눈길로 주변을 살피는 나를 안심시키듯이 녀석은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침묵에 잠겨있는 공간에 감염되기라도 한 듯이 녀석 역시 조용해졌다. 칼릭스의 말에 별다른 토를 달 필요가 없었기에 녀석을 도와 재료들을 꺼내고 손을 깨끗하게 닦았다.

가장 먼저 페타치즈와 야채를 넣은 그리스식 샐러드를 만들었다. 샐러드야 썰고 섞으면 그만이니 쉬웠지만 스튜는 아니었다. 일단은 스튜를 끓일 커다란 그릇을 찾아 물을 올렸다. 따로 육수를 준비할 필요도, 수고로운 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분담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나란히 서서 음식을 만들었다. 이 집안에 누가 있을까 의심부터 들었지만 칼릭스는 묵묵히 재료를 썰었다.

“월계수 잎은 몇 개를 넣고 끓여야 하나?”

녀석의 눈이 나를 내려다보며 깜빡였다. 녀석에게 고전적이고 우아한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선명한 색의 눈동자와 숱이 많은 속눈썹, 둥근 코끝. 그럼에도 남자다운 얼굴 때문일 것이었다. 흑백사진으로 남기기에 좋은 얼굴이었다. 색이 사라져도 그 자체의 음영만으로 인상에 강하게 남을 만큼.

“열개 정도?”

칼릭스의 선명한 얼굴을 마주하며 나도 잘 모르는 레시피를 마음대로 지껄였다. 적어도 월계수 잎의 개수 때문에 음식을 망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녀석은 그대로 비닐 안에서 월계수 잎 열개를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

“됐지?”

눈을 휘어 부드럽게 웃으며 녀석이 나를 내려다봤다. 같이 앉아있을 때 마주보는 감각과는 다른, 녀석이 나를 내려다 볼 때만 느끼는 부담감에 시선을 피했다. 서 있을 때 절실하게 느끼는 거지만, 칼릭스는 정말로 컸다. 작은 편이 아닌 내가 녀석을 올려봐야 할 정도니까. 좁은 부엌 안에서 어깨가 거의 닿을 듯이 서 있었기에 녀석을 올려 볼 때마다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우러나오는 동안 채소들을 볶을까?”

“내가 볶을게. 근데 올리브유가 어디 있지?”

“거기 찬장 뒤져봐. 아니, 잠깐 내가 꺼낼게.”

녀석이 내 뒤로 다가와 내 바로 앞에 있던 선반의 열었다. 굳이 녀석이 열어 꺼내지 않아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올리브기름은 자주 쓰는 용도일 텐데도 선반의 뒤편에 있는지 선반 속에 집어넣은 손이 한참을 뒤적거렸다. 그 동안 다올린의 몸이 나를 뒤에서 감싸 안듯이 아주 가깝게 밀착되었다. 엉덩이에 녀석의 단단한 허벅지가 닿았다. 키가 정말 크긴 크구나. 생각하는 와중에도 접촉이 주는 묘한 느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포장도 안 뜯은 새 거네.”

선반에서 꺼낸 기름의 라벨을 확인하며 녀석은 몸을 떨어트렸다. 조금 몸이 닿았다고 해서 어색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굳은 표정을 정리했다.

“이리 줘. 내가 할 테니까.”

입구를 감싸고 있는 비닐을 떼어내던 녀석의 손이 순순히 기름이 담긴 유리병을 순순히 나에게 넘겼다. 어쩐지 손이 떨리는 기분이 들어 유리병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손끝에 힘을 주었다.

기름을 두르자 녀석이 도마 위에 있던 야채들을 커다란 손에 담아 그릇 안에 넣었다. 묵묵히 그것들을 뒤적이며 반 이상 익기를 기다려 끓는 물을 부었다. 케첩과 소금을 넣고 간을 본 뒤에 계란을 깨트려 넣었다. 여섯 개의 계란이 풀어지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뭉쳐있는 것을 확인하고 칼릭스는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국자에 반을 담아 맛을 봤다.

“음, 맛있는데?”

뭔가 스파게티 소스를 국물채로 우려낸 것 같은 맛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사람도 없는데 터무니없이 많은 양이었다. 내가 먹었던 국자의 끝에 묻은 작은 흔적을 검지로 훔쳐내어 손가락 끝을 부드럽게 핥은 칼릭스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행동이 평범하진 않았지만 의식할만한 것은 아니라고 애써 생각했다.

우선은 만든 음식을 넣어둘 그릇을 찾는 것이 급했다. 이대로 두고 가면 상할 것이 분명한데 적어도 냉장고에는 넣어둬야 할 것 같았다.

“담을만한 그릇이 있을까?”

“싱크대 옆에 엎어놓은 그릇들에 나눠서 담으면 될 거야.”

“그것 말고 큰 통으로. 스튜를 담아서 보관해야 할 것 같아서.”

내 말에 칼릭스는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듯이 소통되지 않는 대화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 말 안 해서 몰랐나본데.”

슬쩍 눈을 휘며 녀석이 웃었다.

“사람들 안에 있어.”

흐흥, 콧소리를 내며 웃은 녀석이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꼴사나운 풍경을 피해 숨어있었을 뿐이지.”

가만히 국자를 든 채로 서 있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녀석은 거실로 나갔다. 마치 사냥감을 찾듯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던 녀석은 성큼성큼 닫혀진 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노크도 없이 문을 활짝 열었다.

“저녁 해놨어 가브리엘!”

이윽고 끄는 듯 낮은 알아들을 수 없는 궁시렁 거리는 소리와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쇠잔한 듯 걸걸거리는 신음소리와 연약한 울음 소리였다. 문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던 소리였다. 정말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죽은듯 조용하던 공간에 들린 이질적인 신음소리가 낯설 지경이었다.

열린 문 사이로 천천히 어슬렁거리며 나온 남자의 모습은 눈에 익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곱슬 거리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

“웬일이야. 독이라도 타놨나?”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로 거실의 소파 위에 털썩 앉은 그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으으음,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말했다.

“안젤리카. 이제 제발 그만 울어요.”

그 말에 연약한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끊어지다 다시 크게 이어졌다. 다그침과 위로만큼 눈물을 짜내는 것을 돕는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로사리오는 제가 잘 타이를 겁니다. 칼릭스도 들렸으니 이제 그만합시다.”

하지만 그만하자는 가브리엘의 바람과 달리 훌쩍이는 소리와 팽, 하고 휴지로 코를 푸는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담배를 찾으려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그를 화나게 하는 모양이었다.

“젠장. 내가 그 계집애를…….”

하지만, 뒷말이 이어지지 않은 것은 가브리엘이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번쩍 고개를 드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 봐도 새파란 눈이다. 계시적 느낌의 아름다운 눈동자. 그 눈이 전혀 껌뻑이지 않았다. 입술이 씰룩이긴 했으나 친근함보다도 낯섦에 가까운 나를 보고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늘 마주하던 흔한 풍경을 보는 것만큼이나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어, 뒷말이 흐린 끄는 말을 뱉어냈을 뿐이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군.”

뒤적뒤적, 보는 사람이 안달이 날 만큼 온 몸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져 찾아낸 담배를 입에 물고 달칵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여냈다. 깊게 한 모금을 빨아낸 후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오른 손을 번쩍 들어보였다.

“칼릭스의 좋은 친구. 조이 장이 등장하셨군.”

그 말대로 해석해야하는지 아니면 비꼼의 의미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가 이를 모두 드러내며 웃고 있었기에 나쁜 뜻은 없어보였다.

“자주 좀 들리지 그랬나.”

“바빠서요.”

“하긴, 젊음을 불사르느라 바빠야 할 때지.”

히죽, 미소에도 소리가 있다면 꼭 그렇게 소리 내어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어디, 요리를 했다면서?”

무릎을 탁 치며 그 반동으로 힘차게 일어난 그가 성큼성큼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가 담긴 큰 통을 보는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휘유, 진짜 요리군.”

“그럼. 진짜 요리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릇에 스튜를 담아내며 칼릭스가 말했다.

“몇 그릇에나 담아야하지?”

“너희까지 포함한다면 여덟 그릇에 담아야겠는걸.”

“모자라진 않겠네.”

슬쩍 웃으며 그릇에 담아내는 녀석을 도와 식탁 위에 옮기며 스푼과 포크를 나란히 늘어놓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가브리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곤 문이 꼭 닫혀있는 방으로 걸어가 역시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오늘은 저녁 먹고 가라. 다들 늦으시는구나.”

열려있는 문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방안에서는 작게 TV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태 아이들은 저 방 안에서 낯선 언어들이 쏟아지는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나보다. 마치 미국에 와서 가장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만화영화 속 영어에 귀 기울이던 나의 모습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상상으로 매워 넣으면서 TV가 주도하는 일반적인 대화를 통해 영어에 귀를 틔우게 되겠지. 결코 친절하지 않은 친구가 말했던 뒤죽박죽 반복되지 않는 영어를 우둔하게 발음하며. 친구들이 내 발음이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놀리는 것에 수치감을 느끼며.

부모가 가르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최초의 선생이 된 TV에 대한 기억. 멋도 모르는 유행어를 시시껄렁하게 지껄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에게 자랑을 하던 기억. 그 반들반들한 표면 속에 어떠한 진실도 없다는 것을 모른 채 지껄이던 나의 영어. 우둔한 나의 혀. 마치 녹이 슨 기계처럼 고장이 난 것 같던 나의 혀. 빌어먹을 나의 혀. 이방인의 혀. TV에 대한 최초의 단상은 그러했다.

창백한 백인 아이들의 웃음을 준비가 되어있는 일그러진 얼굴 말고는 아무도 나에게 엉터리 언어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빼꼼,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미겔이 나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앞에 서 있던 작은 남자애를 슬쩍 밀쳐내며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 작고 가느다란 팔로 허벅지를 둘러 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나 보러 온 거야?”

“응. 미겔 맛있는 거 해주려고.”

그 이유가 목적의 일부분이나 마치 전체가 된 것처럼 허파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우웅. 지우 너무 조아”

허벅지에 묻은 얼굴을 비벼대며 미겔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이 미치도록 귀여워서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높이 들어올렸다. 아이가 헤실헤실 웃었다.

“오빠 보고 싶었어?”

“응!”

공중에 붕 뜬 채로 다리를 동동 구른다. 매끈한 볼에 슬쩍 입술을 묻었다. 따끈하게 덥혀진 광택이 도는 마시멜로우 같다. 그대로 품에 안고 테이블로 걸어가자 가브리엘이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겔, 나밖에 없다며.”

“내가 언제!”

꽥! 하고 소리를 지르며 품에 안긴 미겔이 버둥댔다.

“기억 안나?”

“몰라 한적 업써!”

“흠, 명랑하단 말이야.”

진지한 얼굴로 그는 농담을 했다. 진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일종의 유머로 받아들였다. 내가 가만히 웃고 있자 그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거실에 가만히 서 있는 아이들을 테이블에 나란히 앉혔다. 아이들은 대개 명랑하지만 순종적이다. 반항보다는 순종을 먼저 배웠을 것이다. 어릴 적의 나처럼 다루기 쉬운 아이들이다.

스튜를 하나하나 아이들의 앞으로 밀어놓고는 그는 거실로 걸어가 좀 전의 방문 앞에 섰다.

“안젤리카 이제 그만 울어요.”

여자가 남겨진 방안으로 들어간 가브리엘이 부드럽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울음소리는 이미 예전에 멈추었지만 굳이 그는 여자를 안심시키듯이 그런 말을 했다. 방안에서 아주 조그마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탄식 같은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지. 안 그래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어깨를 두드리며 안심시키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천천히,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는 그녀를 인내한다. 어서요. 보채는 소리가 들리고 후우,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곧, 그녀가 한숨의 주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있어요 말을 하듯 여자가 가슴을 치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녹색의 촌스러운 티를 걸쳐 입고 물이 빠진 청바지를 입고 있는 여자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무척 닮아 있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미겔이 손짓하며 그녀를 불렀다. 내가 아는 짧은 스페인어로 굳이 해석을 하자면 이리 와서 밥을 먹으라는 뜻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녀가 미겔의 어머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긴 속눈썹을 가진 큰 눈, 두툼한 입술과 햇볕에 그을린 진한 올리브색 피부를 가진 따듯한 남쪽 나라에서 건너온 또 하나의 이방인.

키가 작은 그녀는 가브리엘의 어깨에도 오지 않는다. 등을 두드리는 가브리엘을 가만히 보던 여자는 이윽고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다. 눈에 맺혀있는 눈물을 닦아내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칼릭스와 가브리엘, 그리고 아이들은 여자의 눈물이 익숙하다는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칼릭스 네가 만들었다고?”

“네. 제 앞에 앉아있는 친구와 같이요.”

“아, 처음 보는 친구네? 정신이 없어서 못 알아봤어요. 칼릭스와 동갑이죠?”

“네.”

“그럼 우리 딸이랑 동갑이겠네.”

그녀가 코를 훌쩍거리며 헤실 웃었다. 놀라울 정도로 미겔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연습한 것처럼 똑같이 웃고 있었으니까. 나는 대답대신 조용히 웃었다. 딸이라면, 방금 전에 무례하게 나를 치고 달아난 여자애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안 좋았던 첫인상에 대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호감이 가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난 안젤리카 우리베라고 해요. 그쪽은?”

“조이 장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마주 잡은 손을 아주 꽉, 힘을 주어 살짝 흔들었다. 마주 닿은 손이 자신의 것을 힘주어 잡아주길 기대하면서. 그 안에 공기가 남아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두 이방인이 나누는 미국식 인사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요 조이. 초면에 내가 이상한 꼴을 보여서 웃겼죠?”

“앗… 그건 아니에요.”

“가끔 속상해서 울긴 하지만 이상한 여자는 아니랍니다.”

안젤리카는 빨개진 코를 매만지며 치아를 드러내 웃었다. 생각보다 그녀는 말이 많고 유쾌한 여자였다. 이국의 억양이 남은 유음이 들어간 영어와 수다스러운 말투, 귀염성이 짙은 생김새. 안젤리카는 어디를 봐도 미겔을 위 아래로 늘려놓은 것 같았다. 더불어 잔인한 세월과 함께.

“이게 진짜 두 사람이 만든게 맞단 말이지?”

“맛있어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턱을 괜 칼릭스가 물었다.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녀석이라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비평받는 순간에는 긴장을 하는 모양이었다.

“맛있어. 무척. 다음에도 또 해줄 거지?”

“안젤리카가 재료 사오면요.”

“어머 나 돈 없어 얘. 왜 그래 너. 부자잖아.”

손바닥에 턱을 괜 그대로 칼릭스는 피식 웃었다.

“얼굴도 그 정도면 준수하고, 부잣집 자식에다가 공부도 잘하고. 내 딸 사위 삼을까?”

“오, 절대 그것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칼릭스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완강한 거부에 약이 오른 안젤리카가 부루퉁하게 부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못써. 로사리오 얘가 원래는 똑똑하고 착했는데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그렇게 된 거야. 콜롬비아에서는 늘 장…….”

“장학금을 받았고 우등상은 늘 로사리오 차지였다고 말하려는 거죠?”

“그래.”

라이트 훅을 한방 맞은 것처럼 숨을 멈추고 씩씩거리던 그녀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성격하곤.”

그 말에 가브리엘과 칼릭스가 동시에 클클 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늙고 꾸미지 않은 볼품없는 외모였지만, 처녀 적에는 무척 아름다웠을 얼굴이었다. 처녀시절부터 버릇처럼 사용했을 것 같은 애교 섞인 말투는 그래서 어색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희생해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여자. 비극적인 촌극에서 하나뿐인 희극 캐릭터를 맡은, 불행을 보고도 웃음이 나오는 사람 같았다. 왜인지, 그녀를 안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런 류의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브리엘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로 사람들을 지그시 응시하면서.

말이 많은 사람일 거라는, 수사적인 태도로 이야기를 집행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그는 묵묵히 들으며 간간히 웃어댔다. 지난 초여름 빠르게 뱉어내던 이야기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데 미숙한 사람처럼 굴었다. 입을 열다가 곧 다물기를 여러 번, 막 입을 열려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열었던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문득, 그가 얘기했던 칼릭스를 키운 부모가 남자들이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입이 근질거린다고 나에게 비밀 얘기를 해주던 그 은밀한 표정까지도.

“자, 안젤리카.”

“네?”

“그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가 나를 보던 시선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자신의 잠버릇에 대해 얘기하던 안젤리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양손의 깍지를 껴 그 위에 턱을 얹은 그가 흠, 하고 목을 풀었다.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듯 좌중의 시선을 모은 그가 천천히 끄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저 친구와의 인연을 축하하는 의미로…….”

목소리가 낮아진다. 공기가 잔뜩 들어간, 딱딱한 초콜렛처럼 매혹적으로 변한다. 눈이 마주하고 있었기에 그의 눈이 아주 잘 보였다. 그의 피부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세상의 것 같지가 않은 새파란 눈동자가 아주 잘 보였다.

사람을 여러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의 눈동자 속에는 가브리엘이란 존재의 팔 할이 담긴 것 같았다.

뒷말을 흐리며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쯥, 치아 사이로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뒷말을 기다리느라 조용해진 좌중을 휘 둘러보곤 그는 클클거리며 웃었다.

“이런.”

“…….”

“해줄 수 있는 게 없군.”





잠결이다. 이건 분명히 잠결이야. 그것도 잠이 막 깨어나기 시작할 무렵. 정신은 깨어 있으나 육체는 잠에 취해있는 상태지.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게 기분이 좋아. 음악을 듣기 위해 몽마에게서 정신이 도망쳤나봐. 평소에는 아름다운 음악이라 생각하지 않아도 가끔, 이렇게 잠결에 틀어놓으면 무척 멜랑콜리 해지잖아. 이 음악이 이런 감성을 갖고 있었나, 무척 놀라면서 말이지.

이런 기가 막힌 순간에 듣는 노래는 말이지, 뭐랄까 진정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인류가 편의를 위해 만들어내기 이전에 태초부터 사용했던 진정한 언어. 난 훌륭한 발견을 한 셈이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유일하게 태초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그걸 듣는 우리들은 그 말의 반도 못 알아먹지만. 하지만 어떤 얘길 하려 했는지, 그 감성만은 조금 알 것도 같아.

지금 이 노랜 사랑 노래를 하고 있어. 가사는 우스워. 감성을 표현할 만한 어떤 적절한 말도 찾지 못하고 있지. 그러나 음들만큼은 아니야. 춤추는 악보위의 음계들은 그걸 말하고 있어. 사랑, 사랑에 대한 걸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랑과 비슷하지만 모양은 전혀 달라서 탐이 나는 것들이야. 너무나 완벽해보여서, 단단해보여서 자꾸만 갖고 싶어지지.

이 기분은 마치 커다란 녹색의 라임소다 속에 빠진 소인이 톡 쏘는 이산화탄소 방울을 붙잡고 소다 밖으로 나오기 위해 그 속을 헤쳐 나오는 느낌이야. 그 깊은 물속에서 그는 환한 태양을 보고 말았거든.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이야. 눈을 감으면 너도 느낄 수 있을 거야. 탄소 방울을 잡고 라임소다 밖으로 나온 소인이 손을 뻗어 태양을 잡으려 했지만 그것은 물속에 잠겨있을 때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어. 하지만 그는 슬프지 않았어. 굴절된 물속에서 바라보던 태양과 달리, 진짜 태양은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거든.





어느새 잠이 들었나보다. 녀석 답지 않게 잔잔한 브릿팝을 틀어놓은 차 안에서 나는 잠에 취하는 줄도 모르고 무방비하게 뻗어버렸나 보다. 그래서 눈을 뜰 때도 집인 것처럼 낯선 느낌이 없었다. 분명 짧은 수면이었을 텐데도 한참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었다. 꿈을 꾼 것처럼, 잔재해있는 멍한 느낌에 한숨을 쉬었다.

“일어났어?”

차가운 손바닥이 이마를 살짝 내리 눌렀다. 칼릭스의 손이었다. 그 청명함에 나는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뜨거운 태양아래 익어가던 대지 위에 내린 단비보다도 더 청량한 것 같았다.

“으응.”

잠의 여운이 남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축 늘어진 몸을 쫘악 폈다. 마치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전신에 남은 잠을 쫓아내려 온 몸을 뒤틀었다.

“피곤했나봐.”

“그건 아닌데… 차 안이 편해서 그랬나봐.”

뒤로 낮춰놓았던 좌석을 앞으로 당기며 눈가를 비볐다. 한참을 자고 일어난 것 같은 만족감에 웃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녀석도 웃었다.

“집에 다 왔어.”

“…그래.”

녀석의 말 대로 주변을 둘러보자 집 앞에 도착해있었다. 온통 암흑에 잠겨있는 우리 집. 이런 어둠은 처음이었기에 낯설어 보였다. 많이 늦긴 했는지 부모님 방에서 켜놓은 작은 조명등의 불빛만이 미약하게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

“하아, 정말 도착했네.”

손바닥으로 볼을 쓸며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멍한 느낌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집에 들어가서 좀 자. 피곤해 보이는데.”

“그래야겠어. 근데 넌 집까지 다시 갈려면 귀찮을 텐데.”

“나야 뭐… 한 번 더 드라이브 한다 치면 돼.”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쓸어 올린 녀석은 뒷좌석에 놓여있던 가방을 챙겨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잊혀진 물건들은 없나 꼼꼼하게 챙기는 녀석의 손을 바라보다 이젠 정말 가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그럼 나 갈게. 조심히 들어가.”

“그래.”

품에 가방을 안고 차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손을 들어 흔들려는 날 보며 녀석이 지잉, 차문을 내렸다.

“오늘 고마웠어.”

“뭐가.”

“그냥.”

“뭐가 그냥이야.”

“여러 가지로.”

부드럽게, 녀석이 웃었다. 입 끝을 살짝 휘는데 그치지 않고 청록색 눈을 덮은 눈꺼풀까지 살짝 휘면서. 생화처럼 생생한 미소였다.

“싱겁긴.”

“암튼 나 간다.”

“응. 잘 가, 칼릭스. 데려다줘서 고마워.”

지잉, 열려있던 창문을 닫으며 천천히 엑셀을 밟은 녀석의 캐디는 희미한 하향등 빛을 남기며 블록을 꺾어 도로로 사라져갔다. 그 빛이 사라져 도로가 다시 암흑이 될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다.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혼란이 아닌, 생각 할수록 웃음이 나오는 북적거림이었다. 미겔 보다 더 유쾌한 안젤리카와 두 모녀를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것 같은 가브리엘. 가브리엘에게서 발견한 의외의 짓궂음도 유쾌했고 아이들의 순진함도 유쾌했다. 모든 의식과 겉치레가 사라진 원시적인 즐거움만이 남은 고갱의 타히티처럼 내게도 그런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런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원의 등은 갈아놓지 않은 채였다. 어머니가 하곤 하던 일이었지만, 정원의 잔디를 깎는 것만큼이나 결심하기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마트에 들러 전구를 사는 것 자체가 다 쓴 샴푸를 새로 사야하는 것만큼이나 잊기 쉬운, 사소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정원의 어둠이 싫다. 내일은 내가 꼭 사서 달아놓아야겠다 결심하며 낮은 펜스가 둘러쳐져 있는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텐데 굳이 벨을 울려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물론 깨어있겠지만, 내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뿐이므로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얼굴을 비추면 그만이다.

그래서, 딴 생각을 하느라 그냥 스쳐지나갈 뻔 했다. 시선의 사각으로도 감지할 수 있는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불현듯 어떤 느낌이 왔다. 마치 벼락처럼 순식간에 내려치는 느낌이.

천천히 마른 입술을 훔치며 장미 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는 뜰로 걸어갔다. 따가운 가시를 헤치며 그 안으로 걸어가자 어둠에 휩싸인 정원 끄트머리의 정원석이 눈에 들어왔다.

쿨럭이며 피를 토해내던 심장이 비쩍 말라 오그라들었다. 혈액의 순환이 모두 멈춰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끝조차.





블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원석 아래에 털썩 주저앉은 채 꽃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이 남은 장미 넝쿨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내가 이대로 녀석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이라도 할 듯이. 오랜 시간 풍파를 견뎌온 단단한 조각상처럼 무뎌보였다.

간신히, 발을 움직여 장미가시로부터 벗어나 녀석의 근처로 걸어가도록 녀석은 내게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녀석은 내게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이다.

“블리스.”

“…….”

“블리스.”

녀석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꽃이 져버린 장미넝쿨의 참혹함만을 응시한 채로 묵묵히 침묵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녀석의 발밑으로 걸어가 주저앉아 있는 녀석을 내려다 봤을 때 눈이 마주쳤다.

“아직 생각 중이야.”

“뭘?”

“할 말을.”

블리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우리는 그대로 서로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귓속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먹먹해졌다. 오직 녀석의 말에만 반응할 것처럼. 심장이 뛰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한참이나 미동 없이 주저앉아있던 녀석은 오른 손을 들어 천천히 심장 부위를 매만졌다. 상처를 쓰다듬듯이, 미친 듯이 행동하지 않기 위해 심장을 통제하려는 듯이. 이윽고 녀석이 입을 열었을 때는 이상하게 갈라져 그 틈새로 피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멍청하게…….”

“…….”

“울 뻔 했거든.”

천천히, 쥐어짜듯이 녀석의 손이 얇은 면 옷을 움켜잡았다. 마치 심장을 움켜쥐듯이. 블리스는 그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녀석과 나의 시간을 침묵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블리스와 나 사이를 검은 여백이 둘러싼 것 같았다. 먹먹한 진공 속에서 어떠한 소리도 전달될 수 없게 매질이 모두 제거된 것처럼. 마주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서로에게 닿음을 허락지 않는다는 듯이.

움켜쥔 손을 떼어내 얼굴을 그 안에 묻었을 때 녀석의 셔츠는 일그러진 구김이 가 있었다. 수십 개의 칼이 꽂힌 심장처럼, 서럽게만 보였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생각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굴려 애 썼다. 녀석의 판단이 그릇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 감정의 남용이 이 상황을 얼마나 어리석게 몰아가는지 알려주기 위해서. 신중하게 온 세상의 언어 속에서 단어를 골라내어 아이를 타이르듯이 그 아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애를 쓰려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

“알고 있어.”

하지만 블리스는 말을 자르며 손을 내저었다.

알고 있지. 나는 알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알 수밖에 없어.”

잠긴 목소리가 말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자신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듯이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공명하며 울렸다.

“내 머리 속에 뻔히 들어있는 오해에 대해서 네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

“난 알아.”

“…….”

“그건 너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의 문제거든.”

후, 코로 웃으며 무릎 속에 파묻은 얼굴을 들어 올려 등을 정원석에 기댔다. 탈진한 사람처럼, 기댈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뻗어버릴 것처럼 힘이 없었다. 어딘가를 응시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녀석은 너무도 담담히 얘기했다.

“그래서. 너희 둘의 만남에 대해 과대평가 하지 않으려 애 쓰고 있어. 넌 너무 똑똑하게 굴어서 어떤 남자도 사랑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바보가 아니니까. 네가 내게서 떠나갔던 것만… 봐도. 적어도 너는 이성적으로 굴 줄은 알지.”

“…….”

“그런데도 화가 나는 건 내가 이성적이지 못해서겠지.”

녀석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제 내가 너희 둘을 갈라놓는 미친 악당 역할을 맡으면 되는 건가?”

“미친 소리 하지 마.”

“그냥.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녀석은 짧게 웃고는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가만히,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샅샅이 뒤지고 뒤적거리며 긁어낼 것처럼 나를 응시했다. 그 긴 시간을 인내하며 녀석은 어떻게 변해버린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그만 눈을 돌려버렸다.

녀석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석부석해져 후, 불면 스러질 것 같은 건조한 동작으로 내게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바로 눈앞으로 언제나 서로 간에 유지해왔던 그 거리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지만 온기는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녀석이 섰다.

“머리 잘랐네.”

녀석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볼을 감쌌다. 입을 맞추려는가 싶어 몸을 움츠렸지만, 녀석은 예상과 달리 나를 빤히 쳐다봤을 뿐이다.

“얼굴이 더 쪼끄매 진 것 같아.”

“…….”

“그리고… 너 안에 있던 나까지 싹둑 잘라낸 것 같다.”

“맞아.”

볼을 감싼 손엔 힘이 없어졌다. 이런 얘긴 녀석을 시험하는 한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좀 전부터 주문처럼 되새기고 있었다. 꼭꼭 씹어 탈이 나지 않도록 미친 듯이 되새김질을 했다. 미련을 두지말자. 무너져 가는 것들을 그리워하여 소금기둥이 되버린 롯의 아내처럼, 앞으로 가야 할 곳과 버려야 할 곳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어버린 소금기둥 되지 말자고. 너를 바라보게 되는 건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뒤돌아보는 짓과 다를 바가 없어.

“맞아. 널 지워낸 거야.”

“…….”

“물론 너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건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냥, 내가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야.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어서 잘라 내버렸어. 머리카락을 잘라낸 그 시간부터 그 전시간과 이별을 고한 분깃점이 되버렸어. 블리스 이제 돌아가. 난 할 말이 없어. 이런 식으로 질질 끈다는 게 서로에게 득이 될게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너에게 할 말이 없어. 난 말을 할 수가 없어. 돌아가 제발. 그리고 오지 마.”

고조되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비명이 되어 새어나가는 신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녀석의 손안에 갇힌 채로 나는 이딴 얘기나 지껄였다.

흥분할 줄 알았던 녀석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고개를 숙여 씩씩거리는 나를 손 안에 가둔 채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얼굴을 흔들어 녀석을 떼어버리려 할 때 녀석이 허리를 숙여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 물고 있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있잖아.”

“…….”

“머리카락은 다시 자란다.”

낮췄던 몸을 일으켜 녀석은 손으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뜻밖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바라보며 녀석이 말했다.

“끈질기게 자라나.”

“…….”

“나도. 이런 내 사랑이 너무… 어이가 없다.”

녀석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공동의 유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 가슴이 떨려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부럽다.”

조금 더 나에게로 다가오며 내 눈을 살폈다. 너무 가까워서 내가 방어할 수 없는 공간 속으로 파고 들 것 같아 불편해졌다. 굳어가는 내 얼굴을 보며 블리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감촉과 온기를 기억에 담듯 녀석의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볼을 훑었다. 가만히 두 눈을 응시한 눈에 팽팽한 긴장이 어렸다. 울렁거리는 감정이 손끝에 만져지는 듯 했다. 그 파도의 물결에 휩싸이듯 어질어질했다. 거친 파도가 나를 삼켜버릴 것처럼 일렁였다. 위태롭게 버티고 있지만, 끝내는 잠식 되어버릴 것처럼 나는 지쳐버렸다.

불안한 공백이 우리를 감쌌다. 이 지긋지긋한 삼류 감정으로 둘러싸여진 공백.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지우.”

“…….”

“신기하지. 누군가를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다니.”

탄식하듯이 신음을 토했다. 녀석의 손이 참담한 표정을 감추려 얼굴을 감쌌다.

“빌어먹을. 진짜, 진짜, 진짜 괴롭다.”

“…….”

“나도 이 사랑을 관둬버렸으면 좋겠다!”

“…….”

“그럼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할 텐데. 그지?”

녀석은 쉬이 진정되지 않는 들썩이는 가슴을 잠재우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피며 난폭해지는 자신을 경계하듯 팔짱을 꼈다. 감정을, 그 틈으로 드러나는 날카로움을 숨기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녀석은 도저히 감정의 응고를 견딜 수 없어보였다.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그걸 아는데도…….”

둑이 터지듯 녀석의 목소리에 물기가 베여 나왔다. 다시 한 번 자신을 재정비하려 침묵했지만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입을 달싹이며 숨을 고르던 녀석이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넌 이제 태연해지는데… 난 아직도 이래.”

“…….”

“진짜, 정말…. 미친놈처럼 굴어.”

“…….”

“돌아버린 것 같아 아주!”

분을 삭이듯 부푼 가슴을 부여잡은 녀석의 손끝이 떨려왔다. 굳게 다문 입술 역시도. 한참이나 녀석은 숨죽인 신음을 토해냈다.

“그런데 다시 이렇게 보니까아….”

“…….”

“기막혀. 하아.”

“…….”

“너무 좋다.”

이를 악문 녀석이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 매 맞은 어린 아이처럼 이를 악물어 참아내려 하지만,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쏟아진 흔적들을 보며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보는 것뿐인데도, 나 안 만나겠다고 하는 건데도 왜 그렇게 예쁘냐.”

“…….”

“왜 이렇게 예쁜 거야. 응?”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블리스는 미친놈처럼 흐흐 웃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다가오는 녀석에게, 그리고 그것을 저지하지도 못하는 멍청하고 한심한, 나에게.

“그러니까 보지 말자고, 나 피하고 그러지 마라. 응?”

나는 잠자코 멍청한 표정으로 녀석의 말을 들었다. 꿈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묵묵히 흘러가는 시간을 인내하고 있을 때 블리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이 어둠이 고맙기만 했다. 내 얼굴을 숨겨줄 이 질척한 어둠이.

가만히 서서 호흡을 고르고 있는 나를 녀석의 손이 붙잡았다. 턱을 들어 올리며 살짝 벌어져 떨리는 입술의 표면을 만졌다. 녀석의 얼굴을 밀어내는 손을 잡아채며 입술을 묻었다. 그 안에 순식간에 갇혀버렸다. 미끄러운 근육덩어리가 혀를 내리누르는 감촉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더운 입안에서 강하게 빨아들이는 감촉의 선연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마리 뱀이 얽히듯 끈적거리며 살을 부비는 감촉이, 블리스의 헐떡이는 소리가, 녀석의 뜨거운 체온이 나를 흥분으로 몰아갔다. 언제고 이런 종류의 불장난을 기대해왔던 것처럼. 뜨거운 욕조에 누군가 나를 강제로 밀어 넣은 것 같았다.

온 힘을 다해 녀석의 가슴을 밀어냈다. 끈적이며 침이 녀석의 입술에서 흐르는 것이 보였다. 눈앞에서 강한 번개가 떨어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울지마.”

녀석의 잘게 떨리는 손을 뻗어 볼을 쓸며 탄식했다. 빌어먹을, 나는 병신같이 우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울지마.”

“으…으으….”

“제발.”

“으… 블리스!”

녀석의 손을 강하게 쳐내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질렀다.

“오지마. 제발!”

“…….”

“제발! 제바알!”

“…….”

“정말 나는. 아아… 나느은!”

고장 난 TV 화면처럼 블리스는 일시 정지했다. 녀석의 눈물 맺힌 얼굴이 침침해졌다. 얼룩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눈물에 가려 안 보이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한 방울의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나서 드러난 녀석의 얼굴은 나보다 천배는 아파보였다.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하아, 그러니 제발.”

“…….”

“다가오지 마.”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





습한 바람이 불었다. 실내였지만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촉은 옅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좁고 지저분한 쓰레기가 쌓인, 빛이 통하지 않는 골목에서 불어오는 물비린내도 함께.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음울함을 풍기는 이곳의 정취는 요 몇 주간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야만을 품은 슬럼과 미국의 경건한 심장을 품은 도시의 조화. 구름을 잔뜩 머금은 잿빛 하늘 아래 공존하는 수도의 양면성은 야릇했다.

방안에서는 끊어질 듯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올린의 현이 활에게 학대받는 소리. 그 비참할 만큼 괴로운 신음은 우중충한 창밖의 하늘로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펜스 옆을 지나가던 흑인남자가 그 신음소리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금방이라도 품에서 총을 꺼내어 창문 안으로 쏠 것 같은 위기감. 기막힌 날씨에 어울린 바이올린 연주는 참담했다.

“창문 닫을까요.”

“더운데.”

“방금 어떤 남자가 이 집을 노려보고 지나갔어요.”

그 말에 그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한숨을 쉬고는 드르륵, 나무 바닥 위로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무기력하게 엎드려있는 나를 지나쳐 창문 밖으로 몸을 내어 밖을 살피던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잘 닫히지 않는 미닫이문을 걸어 잠갔다.

“이봐 바이올린 선생. 저렇게 내버려둬도 되나?”

그는 손가락으로 닫혀있는 방문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방 안에서 연주에 심취해있는 아이들을.

“피아노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애들이 기본 음계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러니까 계속 그냥 두자는 소리?”

“아마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니까.”

“여기서 조금만 살다보면 부처가 되겠군.”

그 말에 나는 조금 웃었다. 크크크 속으로 잠겨드는 웃음을 흘리며 테이블 위에 다시 엎드렸다. 조금 전부터 읽고 있던 책 위에 무기력하게 얼굴을 기대고 닫혀버린 창문을 바라봤다. 뿌연 창문에 비친 흐린 하늘은 그대로였다.

그는 깨질 듯한 소리가 나는 방문을 힐끗 쳐다보더니 자리에 앉아 책을 펴들었다.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니체의 책이었다. 그가 읽는 책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 일반 대중을 위한 책은 없었다. 파티에서 쓰일법한 수다를 위한 정보가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늘 성경책을 손에 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만큼이나 그 길고 지루한 것들을 읽는 가브리엘의 모습은 인자 같아보였다. 모든 정념을 벗어버린 투명한 객체는 머릿속에 쓰레기를 집어넣지 않았다.

한참을 책을 읽어내려 가던 그는 갑자기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지루해 보이는군.”

아뇨. 말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칼릭스는 짐 꾸리느라 안 온다는데.”

“상관없어요.”

“우울해보여.”

“조금은.”

“왜?”

“내일부터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니까요.”

코로 웃으며 손을 뻗어 단단한 테이블이 피아노라도 되는 양 손가락을 움직였다. 토독, 토독, 특별한 음계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라서 의미 없는 박자로 손가락 끝을 놀렸다.

“악기 연주 잘하나봐.”

“잘은 아니고 교회 찬송가 반주해줄 정도는 되요.”

“언제 배웠는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직접 가르치셨어요. 바이올린은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서 가르쳤지만.”

엎드린 채로 대답을 하다 뭔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굽혔던 허리를 펴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기실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나로서는 무례를 범한 기분이 들었다.

“피아노는 요즘도 계속 치나?”

“요즘 한인교회도 반주자 경쟁이 치열해서. 기회를 안주네요.”

말하고 나서도 어쩐지 우스운 말을 한 것 같아 혼자 킬킬거렸다. 나를 실없는 사람으로 봐도 어쩔 수 없었다.

“아까 바이올린 켜는 걸 보니 아주 잘하던데.”

“전혀. 아부하지 마요.”

“이런, 정확히 자신을 알고 있군.”

샐쭉 노려보자 그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흐흐, 앞으로 연주자가 될 생각은 없나봐?”

“내 연주 들었잖아요. 가브리엘.”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쁘지 않았어. 더운지 아동 구호센터에서 나눠준 커다란 티셔츠를 잡아당겨 펄럭거리며 말했다. 그는 도처에서 나눠주는 티셔츠를 활용하는 편이었다. 그가 내게 준 셔츠도 벌써 두벌이나 됐다. 슈퍼마켓에서 나눠준 것과 이년 전에 들어섰다는 대형서점에서 나눠준 옷이었다.

“그럼 앞으로 뭘 하고 싶은데?”

커다란 머그컵에 담긴 물을 들이키며 물었다. 얼음조각만 넣어둔 것인데 더위에 잔뜩 녹아내려 물이 되어 있었다.

“모르겠어요. 아직은.”

“왜?”

“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요. 하지만 어느 정도는 계획해두고 있어요. 여느 미국인이 겪는 평범한 삶을 살아야겠다. 평범함에 생활의 풍족을 더하면 더 좋고.”

“무척 어렵고 애매한 장래희망이군.”

“그럴 지도요. 한심하죠.”

“음. 그렇게 나쁘진 않아. 네 또래 때 나는 글도 잘 못 읽었으니까. 네 나이 때 나는 오직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거든. 네가 나 보다는 몇 배 앞선 삶을 살고 있는 셈이지.”

어깨를 으쓱인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 역시도 에세이 모음집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집중이 되지는 않았다. 방안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 때문이기도 했고, 며칠 전부터 축축 의욕 없이 늘어지는 기분 때문이기도 했다. 눈은 몇 번째 읽었던 구절을 반복해서 보고 있었지만, 글귀가 사고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한숨을 쉬지 않으려 입안의 점막을 슬쩍 치아로 깨물며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는 페이지로 종이를 넘겼다. 하지만 역시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온 몸에 날이 슨 것처럼 정신이 예민해져있기 때문이다.

“무척 심란해 보여.”

모르는 새에 그가 내게 집중하고 있었나보다. 책을 소리 나게 덮은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이며 다리를 꼬았다.

“제가 책 읽는데 방해가 되나 봐요.”

“아니아니. 방해라면 저 애들이 하고 있지.”

손가락 끝으로 방문을 가리키며 그가 웃었다. 괜히 바이올린을 가져왔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어디서 이런 천진난만한 즉흥 연주를 들어보겠어. 이런건 돈 주고도 못 듣지.”

나로서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천진난만한 감동을 느낄 수 없는 연주였다. 돈을 받고 들어줘야 할 만큼 끔찍했다. 한참을 의미 없는 소리가 이어졌다. 음이 거의 바뀌지 않은 채 낑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방안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바이올린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이들이 다투는 것 같았다. 제이미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고 룽윈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을 덮은 그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얼음을 담은 냉수에 커피원액을 조금 넣어 투명한 갈색이 될 때까지 휘저었다. 여태 지켜본 바로는 그는 설탕도 크림도 들어가지 않은 씁쓸한 맛을 즐겼다.

“가브리엘. 그런 얘기 하나만 해줘요.”

싱크대 앞에서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는 가브리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말을 지껄였다.

“방황하는 청소년을 바로잡아줄 만한, 그러니까 흔하지만 묘한 감동을 주는 얘기요.”

“너 충분히 바른 길로 가고 있어.”

굳은살이 잔뜩 베긴 납작한 손바닥으로 건배를 하듯 커피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내리며 그가 웃었다. 성큼성큼 테이블로 걸어와 나무의자를 빼 앉은 그는 투명한 유리잔에 든 커피가 출렁거릴 만큼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했다.

“뭔가가 두렵구나.”

“…….”

“그런데 말이지 조이. 실존하는 두려움이던, 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두려움이던 그걸 극복하게 하는 건 아주 단순해. 생각하기 나름인 거지. 지레 겁먹는 것부터가 두려움으로부터 지는 거거든.”

“그렇죠.”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을 긍정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두려움의 실체를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이상, 이 고민은 내가 떠안고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다만 너무도 지쳐서 쉬어가고 싶었을 뿐. 상상만은 늘 최악을 달리는 나였기에 내일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고등학교 생활이 두렵기만 했다.

문이 벌컥 열리며 귀를 째는 듯한 현의 비명이 들려왔다. 살짝 열린 틈 사이로 발을 빼꼼 내밀은 미겔이 아주 조심스레 문을 닫고는 내게로 달려왔다.

“조이! 조이!”

“응?”

“나 이거 읽어줘!”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던 나를 끌고 건물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서재까지 끌고 간 미겔이 책장에 꽂혀진 동화책을 들었다. 디즈니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그려놓은 동화책은 집에서 가져온 전집이었다. 오랜 세월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동안 습기와 먼지에 책의 결이 뒤틀어져 있었지만 보는데 문제가 없어서 가져온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일을 나가 집을 비운 사이에는 칼릭스와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어렸을 적 기억 속에 남아있던, 나의 기형적인 영어를 지적하며 수정하던 교사들의 흉내도 냈다. 외국인 자녀들의 방언을 감당할 수 없었던 국립학교 교장의 추천으로 외부에서 온 교사들은 포르말린 속에서 죽어가던 것처럼 발버둥 치던 나의 혀를 가지고 노는 법을 알려주었다. 쉬워. 어렵지 않아. R 발음을 해보자 조이. 좋아. 옳지. 그렇게 하면 돼. 손거울을 들고 입을 쳐다보는 거야. 그리고 선생님의 입 모양을 봐. 눈앞에서 그녀의 말랑말랑해 보이는 혀가 꼼지락거리며 언어를 뱉어냈다.

나를 데리러 온 어머니의 차 안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그것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귀를 꼭 막고 웅얼거리며 그것들을 발음했다. 집에서 멍청하게 티비를 보면서도 그것들을 따라했다. 하지만, 나를 가르치는 레이첼이란 선생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녀석은 r 발음을 불분명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rice가 아닌 lice를 먹는다고 야만인이라 놀려대기도 했다. 멍청하게 언어를 더듬어대는, 쪽팔리기 그지없는 특별 수업을 받던 중국에서 온 아이. 뉴햄프셔 주의 맨체스터로 전학을 갔던 첫 학기에는 나는 그런 식으로 불려졌다.

“이것으로 우리의 모험도 끝이 나는 모양이야.”

“마법사님이… 여기… 계셨다면 우리가… 구퉁받는 것스을.”

“음, 미겔 내 생각에 구퉁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아.”

야단을 친 것도 아닌데 우움, 입술을 삐죽 내밀어 심통 맞은 얼굴을 한다.

“나 이거 안 읽어! 어렵단마랴!”

“어제도 다 읽었잖아. 우리 예쁜이가 어젠 이게 제일 재미있다며.”

“내가 언제!”

“기억 안나?”

“안그래써어어어!”

아이고, 알았어 알았어. 허벅지 위에 앉아 나를 끌어안고 있던 미겔이 몸을 뒤틀자 발끝부터 찌릿찌릿 절여왔다. 더 이상 몸을 뒤틀지 못하게 꼭 껴안고 뒤통수에 뽀뽀를 하자 우웅 대며 칭얼거렸다. 머리카락에 시럽이라도 뿌린 것처럼 달콤한 사탕냄새가 났다.

“그럼 다른 책 읽을까?”

보드라운 양쪽 볼에 두 번씩 번갈아 키스를 하며 방귀를 뀌듯 뿌웅 입으로 바람을 불자, 미겔이 까르르 웃었다.

“우웅.”

“싫어?”

“응.”

“왜?”

“조이가 읽어죠. 미겔은 조이 목소리 진짜 좋아해.”

“정-말?”

옆구리를 간질이자 키득키득 거리며 웃어댔다. 아무리 간질여도 꽉 안고 있는 허리를 놓지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도 어린 코알라처럼 내 옆에 꼬옥 붙어 커다란 눈망울로 바라보는 순진한 눈동자가 싫지 않았다.

“그럼 미겔한테 뭘 읽어줄까?”

“움, 백조 열한마리 나오는 거. 그 공주님을 풀 같은 걸로 잡고 하늘 날아다니는 거”

“백조왕자?”

“응응. 공주가 따가운 풀로 옷 만드는 거 있자나.”

풀썩 몸을 일으켜 책장으로 달려간 미겔은 꽂혀있는 동화책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펴보며 책을 골라냈다. 한참 만에 책을 찾아낸 미겔이 책을 두 손으로 들고 달려와 내 앞에 펼치며 그 조그만 입술을 옹알거리며 말했다.

“목소리 다르게 막 해가지고 해죠.”

“어떻게?”

“배 잔뜩 내밀고 목소리 두껍게 해서… 이렇게. 엘리스, 사랑하오!”

“하하하하하….”

볼록 내민 배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과장된 목소리로 미겔은 왕자님의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실실 웃음을 흘리며 이마에 슬쩍 베이비키스를 하자 히히거리며 웃는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쐐기풀 코트를 백조 왕자들에게 던져주는 부분을 펼치며 미겔이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여기부터 읽으면 돼.”

“음… 그럼 내가 공주님 목소리도 내야 돼?”

“그건 시른데. 내가 공주님 할까?”

히힛, 웃으며 내 다리 사이에 앉은 미겔이 제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으며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내가 엘리스 공주 할 거야. 알겠찌? 다짐하듯 내 대답을 들은 미겔의 이마에 슬쩍 뽀뽀를 하고 책을 읽으려 입을 열었다. 그 때였다. 거실에서 거친 투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 들락거리면서 익숙해진 가브리엘과 로사리오의 다투는 소리였다.

가브리엘과 로사리오의 다투는 소리에 자연히 건넌방에서 들리던 바이올린 소리도 그치고 미겔과 나의 대화도 그쳤다. 대신 우리는 숨을 죽이고 거실에서 다투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고함이 들릴 때 마다 아이가 품안에서 움찔 거렸지만,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창피함과 곤혹함이 뒤섞인 표정을 짓는 미겔은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보였다.

훈계조의 일이라면 치를 떠는 듯 보이는 가브리엘이었지만 그는 로사리오에게만은 예외인 것처럼 행동했다. 아이들을 대할 때처럼 사근사근한 말투를 사용하는 대신 반항하는 사내아이를 대하듯 고압적인 어투로 반항기로 가득 찬 풍선 덩어리를 내리눌렀다.

요 몇 주간 이 곳에 들락거리면서 알게 된 사실은 로사리오가 여느 십대처럼 평범한 학생은 아니라는 거였다. 손을 대면 거친 상처를 남길 정도로 날카로움을 숨기지도 숨길 필요도 느끼지 못 했다.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가기 시작한 철로를 이탈한 기차처럼 통제하는 어떤 것도 참아내지 않았다.

“어휴. 또 싸운다.”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은 미겔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린애답지 않은 그 모습이 귀여워 실실 웃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멍청아 집에 가자.”

벌컥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분에 못 이겨 거친 숨을 내쉬는 로사리오였다. 나를 보자마자 찌푸려지는 얼굴에 덩달아 기분이 나빠졌지만 애써 굳어지는 얼굴을 폈다.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못 나눠본 어색한 사이였지만, 앞으로도 그 사이가 좁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범생, 또 왔네?”

“안녕.”

“응 그래.”

성의 없이 대답하며 로사리오는 성큼성큼 소파로 걸어왔다. 미겔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책을 집어 휘리릭 넘긴 그녀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야, 미겔 이런 유치한 게 재미있는 거야? 중얼거리며 물었지만 시선을 맞추지는 않았다. 앞으로 넘어온 긴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내말 안 들려? 일어나.”

미겔의 가느다란 손을 슬쩍 잡아당겨 제 쪽으로 끌어낸 로사리오는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나 이거 읽고 가야대!”

“나도 너 데리러 오는 거 귀찮거든?”

“그럼 두고 가면 되자나!”

“하, 지금 나랑 장난해? 내가 왜 여기 일부러 들렸겠어?”

“나 더 있다 갈 거라니까!”

“미겔.”

손목을 잡아당기며 자신의 앞으로 끌어내 억지로 눈을 마주치게 한 로사리오가 짜증을 억눌러 참아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말 들어.”

“…….”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금방이라도 이를 드러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미겔을 몰아붙였다. 잘게 잘린 마른 장작처럼 가느다란 미겔의 팔목을 두 손으로 꽉 쥔 채로 화를 냈다. 당황한 미겔이 입술을 달싹였다.

“조이가… 내일부터 학교 가서… 앞으로 자…주 못 들린다고 했단… 마랴.”

“그래. 내가 데려다 줄테니까 먼저 가는….”

“아니, 필요 없어.”

경고를 하듯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 로사리오는 단칼에 잘라내듯 말을 했다. 상대방을 탐색하는 시선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났다. 나를 향한 시선에 드러난 미묘한 적의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점점 굳어가는 얼굴을 보면서도 로사리오는 모르는 척 고개를 획 돌려 제 동생의 불복종에 선을 그었다.

“지금 밖에서 나랑 미겔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 나가야해. 미겔 언니 말 들어.”

주의를 주듯 몸을 앞으로 기울여 눈을 피하는 미겔과 시선을 맞춘 로사리오가 손가락으로 미겔의 머리를 넘겨주며 덧붙였다.

“미겔. 언니 화내는 거 무섭잖아.”

“…….”

“얼른 짐 챙기자.”

고압적인 태도로 명령을 내리는 로사리오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미겔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따질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화를 내는 것 도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일방적으로 누군가의 편을 들어 다른 한 사람을 나무라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그 둘 사이가 가족이라면 더더욱.

아랫입술을 꼭 물고 주섬주섬 늘어놓은 자신의 짐을 챙기는 미겔을 도와 거실 밖으로 나갔다. 팔짱을 끼고 자신의 동생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로사리오를 힐끗 쳐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흐음, 콧소리를 내며 또다시 나를 위 아래로 살피는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나빴지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 이런 막무가내인 계집애에겐.

나를 그대로 지나쳐 미겔이 챙겨놓은 짐을 오른 손에 든 로사리오는 거실의 소파위에 앉아있는 가브리엘에게로 다가갔다. 바이올린을 갖고 놀던 제이미를 불러 무릎에 앉혀 머리를 땋아주던 그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로사리오는 좀 전의 다툼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에 턱을 얹었다.

“가브리엘 나 가요.”

그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답 대신 안에서부터 몽울지듯 맺힌 텁텁한 한숨을 뱉어냈을 뿐이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로사리오의 볼에 입술이 닿을 상황이라 그는 몸을 뒤로 조금 뺀 뒤 고개를 돌렸다. 그가 고개를 돌린 방향은 반쯤만 열려있는 창문 쪽이었다.

“저 자식들과 어울리지 마라.”

좀 전에 보았던 우중충한 창밖의 풍경 속에는 낯선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창백한 인상의 소년 하나와 역시 키는 크나 체격은 좋은 골격이 단단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두 사람은 촌스러운 붉은 색의 구형 세턴 밖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피부색으로 보건데 골격이 단단해 보이는 청년의 조상은 남미에서 건너온 이방인일 것이었다. 풍기는 분위기로 보나 체격의 차이로 보나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음에도 시선은 온통 골격 좋은 청년에게로 향했다. 옷차림은 소년이 더 불량했지만 청년의 건들거리는 여유로운 표정과 몸짓과 비교하면 한 때의 치기어린 반항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손바닥에 동그란 구를 올려다 놓고 그 안의 인간군단의 모습을 지켜보다 파괴적인 욕구가 일 때마다 그것을 쥐어 짜내 비명을 즐길 것 같은, 힘의 서열을 나누는 본능이 있는 남자라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비록 촌스러운 구식 세턴을 몰고 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단순하지가 않았다. 정말이지 밥맛 떨어지게 생겼다.

“싫어요.”

“그럴 거면 다신 여기 오지 말고.”

“그건 더 싫은데요.”

코웃음을 치며 가브리엘에게서 몸을 뗀 로사리오는 거실 한복판에 서서 내 옷을 잡고 있는 미겔을 품에 안아들었다.

“조이 다음에 봐. 꼭 올거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약속을 다짐하는 미겔의 이마에 베이비 키스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같잖다는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보는 로사리오의 태도가 기분 나빠 얼굴을 찌푸리자 그런 건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렸다.

“아무튼 다음에 봐요.”

로사리오의 인사에도 가브리엘은 소파 등받이 위에 올려놓은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곽을 열어 기다란 한 개피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질을 돋우듯이 삐딱선을 타는 로사리오를 가만히 바라봤다. 현관을 향해 걸어가던 그녀는 걸음을 멈춰 도전적으로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넌 경솔한 짓을 하고 있는 거다.”

“네, 네 알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연인에게 키스를 보내듯 손바닥 위에 입 맞추는 모양을 만들어 뿌리며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마치 제 영혼을 구제하려 드는 가브리엘의 노력이 부질없다는 듯이. 하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현관 밖으로 나서며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로사리오의 얼굴은 빛에 퇴색된 그림처럼 침침해져 있었다.





인내할 수 있는 가장 더딘 속도로 움직이고 분열되지 않을 만큼 신경을 분산시키며 나의 두려움은 실체가 아닌 허상인 것이라 생각하려 애썼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그리 성공적인 결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내 심장이 너무 크게 뛰고 있지는 않나 느리게 눈을 떴다 감으며 생각했다. 찬송가가 작은 소리로 흘러나오는 엄마의 차 안에서 그 보다 더 크게 뛰는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오른 손을 들어 왼쪽 가슴 밑 부분에 살짝 올려놓았다. 생을 증명하는 그 규칙적인 박자를 느끼며 살아 있는 것을 감사해야하는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가 진지한 고민에 빠져있을 때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로 가면 되지?”

엄마의 손끝이 가리키는 것은 짙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도서관이었다. 방학동안 북관의 대형 도서관을 다니느라 와보지 못했던 기숙사 근처에 위치한 작은 도서관이었다.

“맞아. 저 건물 뒤편에 바로 기숙사 있어.”

불빛이 닿는 곳에는 어느 곳에나 사람들이 있었다.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이하기 위해 전국의 각 주에서 일찍부터 학교로 날아온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녀석들도 있었고 도서관 로비를 서성이며 반가운 얼굴을 찾는 녀석들도 있었다. 물론 동관에 남자 기숙사가 위치한 탓에 여자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애들 다시 보니까 기분이 어때?”

“그냥… 그래. 귀찮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핸들을 잡고 있던 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들. 새 학긴데 즐거운 마음으로 임해야지. 묵묵히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을 쳐다보는 나에게 엄마는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한숨이 나오려고 해 아랫입술 안쪽의 부드러운 점막을 지그시 깨물었다.

기숙사 입구부터 시커먼 남자애들이 득실거렸다. 오렌지 빛으로 강렬하게 어둠속으로 뿜어져 나오는 입구의 불빛에 녀석들의 그림자가 길게 어둠 속으로 뻗어나갔다. 소음과 욕설, 오랜 만의 만남으로 흥분한 녀석들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벌써부터 정신이 없었다.

사감으로부터 배정받은 방에서 가장 가까운 입구에 차를 대고 책과 옷, 노트북과 기숙사에서 사용할 물건들을 담은 박스를 바싹 마른 잔디밭 위로 내려놓았다. 책이 많아서 네 박스를 채우고도 모자라 작은 여행용 가방을 가져왔다. 짐의 양에 질려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자 엄마가 박스를 들어 올리려 허리를 숙였다.

“같이 가지고 올라갈까?”

“그냥 가세요. 내가 알아서 가지고 올라갈 테니까.”

“무거우니까 그렇지.”

“남자 기숙사에 여자 들어오는 거 아니야. 그냥 들어가.”

얼른 보내기 위해 문을 열어 주자 이 녀석이, 하며 엄마가 웃었다.

“그렇게 보내고 싶으냐?”

“아니야. 그런 거.”

“애효 아니긴. 얼굴에 써 있구만.”

“짐 정리할게 많아서 그래.”

열어둔 차 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날 올려다보며 작은 숨을 몰아쉬더니 한숨을 깊게 뱉어낸다. 그 한숨에 묻어나는 것들이 새로운 학기에 대한 걱정, 앞으로 주기적으로 헤어져 있는 동안 겪을 그리움이라는 걸 아들인 내가 모를 리 없다. 그 마음을 모른 척 하기가 미안해 한 번 더 돌아가라는 재촉을 하는 대신 확신할 수 없는 약속을 했다.

“학교생활 잘 할게. 걱정하지 마.”

“그럼. 엄만 아들 믿는걸. 너무 공부만 하지 말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친구들과도 재밌게 놀아.”

“12학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하고 싶어도 못해.”

차에 올라타고서도 엄마는 한참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재촉하지 않으면 차 안에 앉아서 내가 짐 옮기는 모습을 모두 지켜볼 것 같아 열려있는 창문으로 손을 집어넣어 벨트를 메어줬다.

“엄마 이제 가. 나 짐 정리해야 지.”

창틀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어 생전 하지도 않는 키스를 볼에 하자 소리 없이 웃으며 손바닥으로 볼을 쓰다듬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 감촉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비유와도 같았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행동에 빗대어 표현된 것은 분명 아들에 대한 애정이었다. 조금씩 그 따듯한 솜털 같은 손바닥에서 벗어나 창틀에서 완전히 몸을 떼었을 때 엄마가 말했다.

“고민 있으면 하나님한테 기도 하고 엄마한테도 전화해. 기도해 줄 테니까.”

“응 그래요. 그럴게.”

“엄마 간다.”

“응 잘 가. 주말에 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멀어지는 차 안에서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는 엄마의 모습이 건물에 가려 사라질 때 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엄마까지 떠나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년 가까이 다닌 학교인데 낯선 세계에 떨어진 것처럼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의 지나친 따듯함을 보상받으려는 듯 쓸쓸함이 몰려들었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는 회색분자가 되어버린 느낌.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정말이지 싫다. 끊임없이 감정이 소모되고 감성이 남발되어 예민해진다. 타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잡생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일단은 짐을 옮기기로 했다. 삼층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짐을 옮기려면 고생을 할 것이다. 네 개의 박스 중에 책이 담겨 있는 가장 무거운 박스를 골라 품에 안아들고는 열려있는 입구 속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같은 클래스를 듣는 한 학년 아래의 후배서부터 가끔씩 도서관에 같이 가곤 하던 동기들까지. 저마다 모습이 조금씩 변해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삼 개월 전의 얼굴들은 성장을 거치며 도태되어 버렸다. 대신 남아있는 것들은 키가 자라고 좀 더 소년의 티를 벗어난 어른이 되어가는 얼굴들이었다. 물론,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나도 저들처럼 변해버렸겠지만.

어떤 녀석들은 트렁크 팬티만을 입은 채로 복도에 나와 운동을 하고 있었고 또 어떤 녀석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물 묻은 손으로 내 볼을 쿡 찌르고 방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모두가 기숙사 내로 짐 옮기는 일을 마친 상태였다. 이층 복도를 걸어가며 덤벨을 들고 있는 리버 녀석에게 인사를 건네자 집도 가까운 녀석이 제일 늦는다며 타박을 줬다.

학기 초답게 기숙사 안은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방안에 찌그러져 벌써부터 공부를 하고 있는 녀석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떠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오랜 만의 만남으로 들떠있는 소년들의 쓸데없는 잡담들, 시선을 의식해 방학동안 키운 몸을 드러내기 위해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멍청한 녀석들, 유쾌하다 못해 천박한 커다란 웃음소리를 흘리는 운동선수 녀석들. 온갖 인간 군상들이 한 건물 안에서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그제야 나는 정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죽어도 오지 않기를 바라던, 빌어먹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환난을 피해 방주 안으로 들어간 노아처럼 기숙사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물론 거룩한 계시를 받은 노아와는 달리 나는 그저 개인적이고 은밀한 휴식을 원할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쉬지는 않았다. 머릿속에서 내려지는 단순한 지시에 순응했다. 비효율적일 만큼 아주 천천히 책꽂이에 책을 꽂고, 옷장에 옷과 신발을 색별로 정리해 넣었으며 서랍에는 마트에서 산 인스턴트를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옅은 갈색의 얼룩이 묻은 시트를 벗겨내고 집에서 가져온 흰색 트윌 원단의 시트를 깔고 창가에 하늘색의 얇은 커튼도 달았다. 커튼은 각각 여섯 개씩 개수를 맞추어 주름을 잡았고 카키색의 작은 통 안으로 분할된 네 개의 공간에 크기와 색깔 별로 문구를 정리해 담았다. 액자의 비뚤어진 틀을 맞추고 그 위에 있던 먼지를 걸레로 닦아냈다.

이 좁은 기숙사 안에 머물러 있을 핑계를 찾기 위해, 온갖 질서와 규칙에 얽매이는 강박증 환자처럼 굴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편안해지지 않아 바닥으로 걸레를 내팽개치고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버렸다. 내가 처한 불쾌한 상황과 싸우지 않으려 그저 숨을 죽였다.

나의 은밀한 공간과 흥분으로 떠들썩한 홀을 갈라놓는 저 갈색의 문을 넘어서면 월플라워가 되버릴 것 같았다. 나만 당당하면 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매정하게도 기숙사내 방송을 통해 시니어들은 십분 뒤인 9시까지 1층 로비 라운지로 모이라는 기숙사 담당 선생의 통보가 내려졌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목적일 터였다. 매년 이맘때마다 시니어들을 중심으로 기숙사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프록터를 뽑곤 했으니까. 속이 요동치고 호흡이 가빠졌다. 온 몸 속으로 아드레날린이 퍼져가는 기분이 섬뜩했다.

빳빳하게 굳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일단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토할 것 같은 속을 진정시키고 청량한 느낌을 가지려 가글도 했다. 젖은 얼굴을 닦기 위해 수건을 찾았지만, 수건걸이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그제야 멍청하게 집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뱃속에 석유를 잔뜩 들이붓고 불을 붙이는 기분이었다.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며 자신의 한심함에 대해 으르렁거리듯 한숨을 내뱉었다. 수건 따위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괜찮을 거라고 끊임없이 마인드 컨트롤을 해도 기분이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걸어 잠근 문을 여는 내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주어 문을 열자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삼층에서 내려다본 일층의 풍경은 혼란스러웠지만 생기가 넘쳤다. 버넷 홀 담당 선생인 빅과 데비가 11학년을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내는 중이었다. 총 세 채의 남자 기숙사 건물 중 하나인 버넷 홀은 대대로 11학년과 12학년이 함께 쓰고 있었다. 총 오층까지 지어져있어 층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옆으로 아주 길게 이어진 구조로 세 개의 건물 중 가장 큰 편이었다. 부드러운 적갈색의 벽돌로 지어진 건물의 외관은 그 크기와 아름다운 조경이 어울려 압도적으로 보였다. 거대한 로비라운지를 품고 있는 실내 역시 마찬가지여서 처음 입실을 하는 11학년들은 입을 벌려 놀라곤 했다. 하지만, 곧 생활하면서 알게 되지만 엘리베이터 이용이 규제되다 보니 비교적 고층에 방을 배정받는 학년들은 이 커다란 규모를 저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버넷홀의 뒤에 지어진 나머지 두 건물은 9학년과 10학년 그리고 학교의 선생들이 지내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물론,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건물을 오르내리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어느새 라운지에는 편한 옷차림을 한 녀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울적한 표정을 감추고 그 틈 속으로 끼어들어 2층의 계단으로 걸어가자 익숙한 얼굴이 인사를 건넸다.

“이런! 진짜 오랜만이잖아!”

어깨를 손바닥으로 치며 인사를 건네는 녀석은 샤샤였다. 전학을 와서 가장 처음 들었던 수학부에서 만난 부원 중 한명이었다. 녀석의 말로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저명한 과학자의 외손자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말 재수 없을 정도로 수학과 물리를 잘했다.

“살 빠졌네. 방학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이렇게 바아짝 꼴았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녀석이 킬킬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있잖아 샤샤. 너는 퉁퉁 불었다.”

허옇게 불어있는 볼을 슬쩍 쳐다보자 녀석이 킬킬 웃으며 또 두꺼운 손바닥으로 등을 탕탕 두드렸다.

“방학동안 뭐했냐?”

“…뭐, 계절학기 듣고 여행도 갔다 오고 이것저것 바빴지.”

“어디?”

“음… 그냥 그런 데가 있어.”

“그래? 아 맞다. 너 기숙사 방 배정 어디 받았냐?”

“4003호. 넌?”

“아, 난 2031데… 기숙사에서는 마주칠 일 별로 없겠다.”

정말로 아쉬워하는 것 같진 않지만, 아쉬운 표정을 짓는 녀석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경시대회 때문에 몇 번 차를 같이 탄 적은 있지만 녀석도 나름대로 어울리는 패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깊이 사귄 사이는 아니었다. 함께 있으면 애써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어색함이 느껴지는 사이였다. 녀석에 비해 뒤떨어지는 수학 실력이긴 했지만, 우습게도 녀석이 나를 견제한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AIME대회 1차 시험까지 붙어 USAMO까지 시험을 치른 녀석과 2차 시험에서 떨어진 나 사이에 얼마나 많은 벽이 있는 줄 알면서도 그랬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샤샤는 유럽출신 녀석들이 반대편의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나중에 보자며 손을 흔들어 뛰어가 버렸다.

함께 있는 것은 어색하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덜 쓸쓸해서 녀석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는 얼굴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자 마침 아벨이 삼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녀석과 인사를 나누고 나는 좀 전에 샤샤와 나눴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대로 우리는 조회가 시작 될 때까지 라운지의 원탁으로 만들어진 원목의자에 앉아 지난여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를 했다. 녀석은 방학동안 야외에서 활동을 했는지 얼굴의 주근깨가 더 짙어져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도드라진 주근깨와 통통한 젖살 때문에 방학이 지났음에도 불구하도 더 어려진 것 같았다.

“7월에 치른 시험은 어땠어?”

“여태 본 시험 중에서는 제일 괜찮았는데, 그래도 내신이 별로라… 특별히 해놓은 것도 없어서 더 그래. 넌?”

“나도 너랑 똑같지 뭐. 가을학기 어떻게 버티냐.”

한숨을 푸욱 내쉬며 아벨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자 친구에게서 온 문자라도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확인하던 녀석의 입술에 미소가 어렸다.

“내일 아침 7시까지 식당으로 오라네.”

“여자친구가?”

“응. 줄게 있대.”

“뭘?”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핸드폰을 보던 그대로 어깨를 으쓱이며 녀석이 웃었다. 둘이 사귄지 벌 써 반년도 더 되어 가는데 녀석들은 별 부딪힘 없이 아직까지 잘 지내고 있었다. 블리스와 내가 유쾌하지 못한 결말을 맺은 것에 비하면 아벨의 연애는 빛이 나 반짝거릴 정도였다.

“블리스는 만났어? 저 쪽 끝에 있던데.”

아벨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힐끗 시선을 돌리자 기다란 붉은 색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는 한 무리의 소년들이 보였다. 방만하게 소파위에 늘어져 있는 소년들 틈에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고 손 안에 든 사과를 먹고 있는 블리스가 있었다. 달콤한 사과가 아니라 쓴 약을 들고 있는 듯이 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아벨의 손끝이 정확히 블리스를 지적했지만, 눈이 마주칠까 모르는 척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나, 아벨에게 블리스와 내가 전과 같지 않다는 확신을 주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눈을 감았다. 매스꺼움을 느끼지 않으려 차갑고 신 오렌지가 입안에서 짓이겨지며 과즙을 터트리는 상상했다. 옆에서 아벨이 괜찮은지를 물었지만, 웃으며 별것 아니라는 말을 했다.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쌌던 손으로 녀석의 무릎을 툭 쳤다.

“프록터 되고 싶어?”

“별로. 12학년들은 기숙사 담당 선생 외에는 아무도 주의 주지 않으니까 굳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재비 뽑기에서 걸리면 어쩔 수 없고.”

아마도 창백해졌을 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녀석이 대답했다. 흐트러지지 않게 재정비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11학년들을 각자의 기숙사로 들여보내는 일을 마친 빅과 데빗이 라운지 내에 작게 마련되어 있는 단상으로 걸어왔다. 빅은 단상 밑에서 작은 종이 박스를 들고 서 있었고 데빗은 위로 걸어 올라갔다. 삼십대 초반인 빅은 생물학을, 사십대 후반인 데빗은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는데 이름만 알고 있을 뿐 두 사람의 수업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가을학기 영어를 데빗의 수업으로 신청했으니 좋든 싫든 자주 마주치게 될 사람이었다.

그가 단상에 올라가자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일순간 정지되었다. 데빗은 손에 있던 메모와 물 잔을 단상에 올려놓았다. 마치 포도주를 홀짝이듯 조심스레 입 안을 적신 그는 근질근질한 입을 다물고 사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년을 닮은 소년들을 향해 웃었다.

“오랜만이지?”

데빗은 일단은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얼굴들을 보니 잘들 지낸 것 같군. 하나같이 윤기 나게 반짝거려. 방학이라고 늘어지게 잠만 잤던 녀석들은 없겠지? 적당한 긴장을 유지해야 가을 학기를 버틸 수 있다고 개학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다들 지켰는지 궁금하군. 이번 학기는 11학년 때 보다 조금 더 바쁠 거다. 하아… 빌어먹을, 벌써 마지막 학년이라니. 믿기지 않을 거야.”

미칠 것 같아요. 어떤 녀석의 커다란 외침에 군중이 떠들썩하게 웃었다. 살짝 벗겨진 옅은 갈색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데빗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봐 게리. 가을학기를 지내다보면 느낄 테지만, 왜 시간이 안가나 그게 더 미칠 것 같을 텐데.”

견딜 수 있습니다! 라고 마치 군대라도 온 것 같은 우렁찬 대답을 하는 녀석을 보며 데빗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분명히 견디고도 남지. 너희 안에서 독한 것들을 끌어낸다면 인내란 얼마든지 가능해. 뭐, 감동적인 연설을 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게 아니니 사설은 여기서 접고 오늘의 목적을 되새겨보도록 하겠다. 지금 나눠주는 프린트는 여러분이 여태 지겹도록 들어왔던 기숙사 내의 규칙이다. 나중에 룸에 들어가 주의를 기울여 읽어보도록 하고 12학년이 된 여러분에게 새롭게 내려질 규칙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하겠다.”

크흠, 주먹으로 입술을 막아 헛기침을 한 그는 말을 이었다.

“일단, 가을학기부터는 토요일 오전에 수업이 있다. 가이던스를 통해 수업 일정을 잡는 건 다 확인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시니어들은 11시 반까지 취침 시간이 연장된다. 하지만, 그 시간 이후에 프록터들을 통해 적발이 될 경우 그 전과 동일한 벌칙이 주어진다. 같은 학년끼리 얼마나 적발해낼지 믿음이 가진 않지만 규칙은 지켜지기 위해 존재하는 만큼 여러분이 잘 지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치 정치가처럼 뜸을 들여 조용해진 좌중을 둘러본 데빗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지금부터 프록터들을 뽑아 보도록 하지. 빅터 선생님?”

“네.”

단상 밑으로 내려온 데빗을 대신해 위로 올라간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안녕. 올해부터 새로 기숙사를 담당하게 된 빅터 루스라고 한다. 물론, 내 수업을 들었던 녀석들은 날 잘 알거야. 생물학을 가르치지. 앞으로 기숙사에서 자주 볼 테니 친하게 지내보자.”

데빗은 소년들을 뿌듯한 눈으로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층별로 모여서 서보도록 할까? 2에서 5까지 층별로 패널에 숫자를 새겨놨으니 자신이 방이 2층이면 2번 앞에 5층이면 5번 앞에 서보도록.”

자신의 방이 3층이라며 걸음을 옮기는 아벨을 보며 나도 미적미적 발걸음을 옮겨 숫자 4가 새겨진 패널 앞에 섰다. 무심함을 가장한 심란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얼굴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칼릭스였다. 어쩐지 녀석을 보자 활활 타오르던 뱃속에 차가운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디 있었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슬쩍 밀자 아픈 시늉을 하며 녀석이 입을 당겨 웃었다.

“케빈이랑 있었어. 녀석은 5층이라더라. 아주 죽으려고 하던데.”

“진짜 불쌍하다. 4층도 힘들긴 하지만 5층이라니 어떻게 다니냐.”

“그러게.”

킬킬거리며 허리를 숙여 웃는 날 내려다보며 칼릭스는 흐흠, 코로 웃었다. 손을 뻗어 어느새 조금 자라 있는 내 머릿속에 손가락을 파묻어 흔들어댔다. 나를 향해 뻗은 녀석의 팔등에선 타투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긴 하지만 일주일 전만 해도 희미하게 남아있었는데 열심히 닦아낸 모양이었다.

“고생했네.”

“뭘?”

“타투 없애느라 말이야.”

머리 위에 얹은 녀석의 손을 잡아 손등이 보이게 뒤집었다.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가 팔등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깨끗했다.

“이런… 다 지워졌네. 아깝다.”

“그러고 학교를 다닐 순 없으니까. 이거 없애느라 비눗물 속에서 반나절동안 있었던 것 같아. 놀란 표정 짓지 마. 욕조 안에서 공부하면서 했으니까.”

씩, 입술을 당겨 웃는 녀석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칼릭스의 커다란 손을 들어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라운지로 내려오기 전에 오렌지를 먹고 있었는지 손에서 상큼한 냄새가 났다. 얼굴 앞에 놓인 녀석의 손가락 사이로 내 뒤에 줄을 서는 소년들의 행렬이 보였다. 그 사이로 주변을 훑는 눈을 감싸 앞을 가린 칼릭스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왜 킁킁거려.”

“아… 오렌지 냄새 나길래.”

“집에 잔뜩 남아서 기숙사 냉장고에 가져다놨거든.”

따듯하게 감촉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얼굴을 감싼 녀석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패널마다 남학생들이 줄을 모두 섰는지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패널 옆에 마련해놓은 간이 탁자마다 작은 박스가 놓여있었다.

“자, 줄을 다 섰으면 2층에 방을 배정받은 학생부터 제비뽑기를 하겠다. 흰색구슬과 붉은 구슬이 섞여있는데 붉은 구슬은 두 개 뿐이다. 그걸 뽑는 사람이 프록터가 되는 거지. 스니퍼. 네가 먼저 시작해라.”

가장 앞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빅을 쳐다보던 스니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녀석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우물쭈물 거리다 주먹으로 입을 가려 헛기침을 한 녀석이 박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녀석이 꺼낸 구슬은 붉은색이 었다. 시작부터 프록터가 뽑히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니퍼는 전교에서 알아주는, 이를테면 기크 같은 녀석이었기에 2층에 방을 배정받은 녀석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자신들의 공공연한 밥이 프록터로 뽑혔으니 앞으로는 편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녀석들이 눈에 보이는듯했다.

2층의 학생들이 제비뽑기를 마치자 이어 3층의 남학생들이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고스 다음으로 두 명의 남학생이 연달아 붉은 구슬을 꺼냈다. 두 녀석 모두 친한 사이었기에 다른 녀석에 비해서 수월할 터였다. 3층의 붉은 구슬이 초반부에 뽑혔기에 예상보다 빨리 4층은 제비뽑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앞으로 서있던 세 명의 학생이 뽑은 구슬은 흰색의 반질반질한 유리구슬이었다. 차례가 되어 속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작은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매끈하고 차가운 구슬의 감촉이 느껴졌다. 프록터로 지내는 것이 사명감에 불타야만 할 수 있는 부담스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나는 아니기를 바랐다. 사소한 책임을 필요로 하는 만큼 개인적인 일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원치 않았다. 상자 안의 어두운 공기에 잠겨있던 손을 꺼냈을 때 검지와 엄지 사이에는 하얀색의 구슬이 끼여 있었다. 다행이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 다음으로 제비뽑기를 했던 칼릭스의 손엔 붉은 구슬이 들려있었다.

“…….”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 녀석은 손안의 붉은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숨죽여 웃고 있는 소년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인 녀석이 하하,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4층엔 피바람이 불게 될 거야.”

“뭐?”

“진지하게 사감 놀이를 할 거거든.”

퍼부어지는 야유에도 녀석은 여유롭게 웃기만 했다.

우리가 앞줄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릭스 이후 끝에서 다섯 명이 남을 때 까지 붉은 구슬은 나오지 않았다. 다섯 명에서 네 명이 되고, 네 명에서 세 명이 되고, 그 세 명이 마지막 한명으로 남을 때까지도 붉은 구슬은 나오지 않았다. 모스라는 늘 금발로 염색하고 다니는 키가 작은 녀석이 마지막으로 박스 안에서 구슬을 꺼냈을 때에도 붉은 구슬이 나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웅성거리는 소년들에게 조용히 하라 주의를 기울인 데빗이 패널 옆으로 걸어와 박스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없을 거란 예상을 깨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붉은 구슬이었다.

“빅터, 명단 좀 확인해줘 봐요. 총 31명 맞는지.”

“음… 31명 맞는데요. 지금 서있는 학생들이… 잠시 만요. 세어 볼게요.”

“…….”

“서른 명이네요. 이런, 한명이 안 나왔군요.”

빅이 들고 있던 종이를 받아든 데빗이 셔츠의 앞에 달려있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며 명단을 살폈다. 모두의 이름과 얼굴을 외고 있는 듯 이름과 학생들의 얼굴을 대조하며 번갈아보던 그가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블리스는 어딨지?”

안경을 벗어 조심스럽게 접으며 주머니 앞에 집어넣은 그가 블리스 아이언사이드 말이야… 한숨에 섞어 이름을 내뱉었다. 조용한 좌중을 찌푸린 얼굴로 둘러보던 그가 크음, 거친 숨소리를 내며 헛기침을 했다.

“나중에 녀석이 돌아오면 나한테 오라고 전해주도록. 그리고 남은 프록터는 블리스 아이언사이드가 하게 된다고 전해줬으면 좋겠네 칼릭스군. 이 시간 이후로 간단히 프록터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브리핑을 할 예정인데 그 때 까지 안 나타나면 대신 좀 전해줘야 해.”

하지만, 어떤 녀석이 라운지 옆의 복도를 가리키는 바람에 칼릭스가 번거롭게 두 가지 일을 전해줄 필요는 없어진 것 같았다. 라운지에 비해 비교적 어두운 복도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는 인영은 블리스 아이언사이드였으니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한 것을 보면서도 녀석은 걸어오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벌레를 씹은 것처럼 얼굴을 슬쩍 찌푸리고 데빗에게로 걸어간 녀석은 입술을 깨물며 죄송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블리스의 부재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데빗의 날카로운 말에 정적이 감돌았다. 블리스는 네가 제비뽑기를 하지 않아서 프록터가 됐다는 말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칼릭스와 함께 4층을 담당하게 됐다는 데빗의 말을 듣자 얼어붙은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녀석을 얼음상자에 가둔 채로 시간을 좀먹어가는 것 같았다.

하, 한참 만에 겨우 기가 막힌 한숨을 뱉어낸 녀석이 아랫입술을 깨물어 고개를 끄덕였다. 억눌린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을 한 블리스는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로 늘어선 줄 뒤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걸음 옮기는 게 힘들다는 듯, 불안해 보이는 시선을 숨기려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비틀거렸다. 괜찮다고 생각하려 애를 쓰고, 하나님이 정말로 나만 미워하는 게 아닌가 유치한 생각을 하며 웃으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사람들을 밀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모든 것들을 게워냈다.





샤워를 하는 중에야 수건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허탈한 마음에 뜨거운 물에 풀어져 노곤해진 몸을 미지근한 욕조에 기대었다. 흰색의 반짝거리는 욕조 안에 넘실거릴 정도로 잔뜩 담겨있는 물속에서 최대한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가슴 앞으로 다리를 당겨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후끈거리는 물 안에 갇힌 다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가장 작아진 자세로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졸음이 몰려왔다. 물에 젖어있지만, 마른 장작처럼 건조하기만 한 몸을 일으켰다.

물에 젖은 발로 마른 타일 위를 걸어 선반위에 올려놓은 옷을 꺼내들었다. 흐르는 물을 닦아낼 것이 없어 젖어있는 그대로 옷을 껴입었다. 옷이 물에 젖어 축축했지만 실내는 더웠으므로 금방 마를 것이다. 날씨가 추웠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직도 변기를 붙잡고 모든 것을 게워내던 그 역겨운 감각이 생생했다. 소화되기 전 온전한 형체로 마주했던 것들을 다시 재회하게 된 일은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뱃속에서 형체를 잃고 가수분해 되던 그것들은 아주 끔찍한 모양새와 냄새를 풍겼으니까.

규정된 소등 시간 까지는 삼십분 가까이 남아있었지만,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베갯잇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눈물이 베갯잇을 적시며 번지는 것 같았지만, 눈물처럼 따듯하지는 않았다.

따듯한 양수에 감싸인 태아처럼, 제 심장을 뛰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안에 늘 감춰져 있던, 늘 귀하게 여기던 중도를 지킬 줄 아는 이성은 이미 오래전에 상실해버렸다. 블리스와 함께 잠을 잤던 그 날부터. 그러니까 단 한 번의 불장난으로 끝났어야 할 그 상황을 유야무야 넘겨버린 그 순간부터.

정신을 놓고 있으면 심장에 고여 있던 목소리가 피를 타고 온몸을 도는 것 같았다. 자신의 사랑이 자신조차도 어이없다던 녀석의 목소리가 울리며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 순간에, 녀석은 얼마나 상처받은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던가.

“제발… 도와주세요.”

목 끝으로 흐느낌을 닮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런 말을 내뱉었다. 절대자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내 안에 꽁꽁 감춰져 있을 독한 의지를 향해 내뱉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만큼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암흑 속을 헤쳐 나와야만 하는 외로운 상황인 것도.

녀석의 아픔을 모른척 외면해버렸으면 좋겠다. 이기적으로 굴었으면 좋겠다. 녀석이 아프던 말던, 그 고통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평상시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을 외면하고 맞이할 학교생활이 낯설긴 하겠지만, 아마도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감정의 소진 없이 아주 개운한 마음으로 떨어져나간 블리스의 빈자리를 바라본다. 그것도 아주 냉막한 시선으로. 그런 내게는 잠자리를 같이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만 남을 뿐이다. 다시는 멍청한 짓을 하지 말아야지. 경계하고 또 경계하면서 블리스의 사랑을 경멸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괴로움에 쓴 잠을 잔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무자비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증거를 외면하고 한계까지 버티고는 있지만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했다. 이렇게 아프다는 것, 사랑한다는 고백에 두려움마저 느꼈다는 것, 녀석의 상실이 내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녀석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 진실이 나를 유린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여학생 기숙사와 가까운 서관에서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동관의 급식소 대신 서관의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패널 위에 옥스퍼드 양식의 새파란 패브릭을 붙여 꾸민 건물의 내벽은 반복되는 무늬 때문에 강박증 환자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나하나 눈여겨보면 지루한 무늬일 뿐이지만 전체적으로 바라봤을 때 상상에 따라 그 무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치 매직아이처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늬에 포크로 음식을 집어먹으면서도 무의식중에 벽에 시선을 뺏기곤 했었다. 블리스는 그런 날 늘 나무랐고.

우리는 이곳에서 밥 먹는 걸 좋아했었다. 단출한 메뉴가 나오는 동관에 비해 다양한 메뉴와 탄산음료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블리스와 조쉬는 내기라도 하듯이 접시에 수북이 음식을 담아오곤 했었다. 그 엄청난 음식의 양에 질려하면서도 꾸역꾸역 입안으로 집어넣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꺼억 트림을 하며 포만감을 자랑하던 블리스의 얼굴도 역시. 물론 서관의 카페테리아를 함께 찾아오는 일은 앞으로도, 평생 동안 없겠지만 그 얼굴들을 예전처럼 마주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조쉬와 블리스가 다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그들 사이에서 나의 진정한 위치를 부여받은 것처럼 투닥이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달랜다. 내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마주쳐야 할, 메아리처럼 반복 될 추억들 중 하나였다. 행복한 줄도 모르고 흘려보냈던 시간들이 내게 보내는 조소에 쓸쓸함이 몰려들었다. 벽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눈앞에 놓인 바질이 들어간 스파게티를 내려다봤다.

테이블에는 나를 포함해 다섯 사람이 앉았다. 배식 받은 음식을 들고 비어있는 자리에 앉자 차례로 칼릭스와 케빈, 루시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앉았다. 메인 요리를 담는 대신 무가당 주스와 채소를 잔뜩 담은 접시를 들고 온 루시는 다이어트 중이라며 드레싱을 아주 조금만 뿌렸다. 그래봤자 살이 빠지겠냐며 놀리는 케빈을 샐쭉 노려본 루시는 남자친구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실실 웃으며 삐진 제 동생을 보던 케빈은 잘게 썰린 감자를 포크에 뭉텅이로 찍어 삼켰다.

“조이 너 전 학기에 미국사 수업 안 들었었지?”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담긴 물을 마신 케빈은 손등으로 입가를 슬쩍 닦아내며 물었다.

“응. 그래서 이번에 들어.”

“누구 수업인데?”

“로사.”

“잘됐네. 나도 그 수업 신청했거든. 페이퍼 주제 내줬다며. 기한이 언제까지라고?”

녀석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이주 뒤에 걷는다고 했어.”

“어려운거야?”

“글세. 워낙 포괄적인 거라 오히려 쉬운 것 같아. 3장 내외로 해오라고 했으니까 핵심만 짚으면 될 것 같거든. 냉전시대가 미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조사해오라고 했는데 그 주제라면 자료가 많으니까 어렵진 않을 거야.”

“그럼 너 조사할 때 같이하자. 작년 마지막 페이퍼 벼락치기로 했더니 B?를 줬더라고.”

새하얀 밀랍 같은 피부를 가진 케빈은 북유럽, 특히 스위스 청년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루시와 케빈 남매를 처음 보는 사람은 그들의 귀족처럼 보이는 근사한 외모 때문에 귀하게 자랐을 거라는 예상을 하지만 의외로 그들은 서부의 공립중학교 출신이었다. 두 남매 모두 보조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 학년 초에 많은 화제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 때는 내가 입학하기 전의 상황이라 칼릭스에게 지나가는 말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 벼락치기를 한다고 말 하긴 했지만, 케빈 남매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지 뭐.”

어깨를 으쓱이며 포크로 스파게티를 말아 입안에 넣어 우물거렸다. 스파게티에 섞인 바질의 알싸한 맛이 혀끝에서 감돌았다. 아침에 거의 먹지 못한 것에 비하면 지금은 그나마 식욕이 돋았다. 어제부터 좋지 못한 속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되도록 가벼운 음식들만 골라서 먹고 있었다.

“속은 좀 괜찮아?”

반대편의 대각선 끝에 앉아서 크림을 잔뜩 얹은 호밀빵을 먹고 있던 칼릭스가 눈을 맞췄다. 안부를 묻는 것 치고는 언뜻 과감해 보이는 시선이었다.

어제 화장실로 뛰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토하는 내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칼릭스는 밖으로 나와 세면대에서 입을 헹궈내는 나를 보면서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피가 몰려 붉게 충혈 된 눈으로 거울을 노려보며는 내 뒤로 다가와 괜찮은지를 물었을 뿐이다.

부드럽게 뒷목을 주무르며 등을 두드리는 녀석에게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캔자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들 뻔 했다. 칼릭스라면 나의 어떤 말에도 뒷걸음쳐 달아날 것 같지 않았다. 녀석은 어떤 말을 들어도 괜찮아 라는 말을 해줄 것 같았다. 넌 아무 잘못 없어라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안심시키며 어깨를 두드려줄 것 같았다. 하지만, 절박한 희망에 왜곡된 기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응 괜찮아.”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흠, 하고 코로 웃어 보인다. 무슨 일 있었냐며 묻는 루시에게 속이 좋지 않아 어젯밤에 먹은걸 게워냈다는 말을 하자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양호실은 갔어?”

“아니. 단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라.”

“뭐야 조이. 신입생도 아닌데 겁먹을 거 없잖아.”

“루시.”

“응?”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 했던 각오를 잊고 나태해지기 마련인데 나는 좀 특별하거든.”

대답대신 접시 위에 놓여있던 샐러리 조각을 나에게 던지며 루시는 킬킬 웃었다.

“너 의외로 엉뚱하다니까.”

눈을 마주치는 대신 접시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루시는 몰몬교도에다가 도도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갖게 되는 편견과 달리 털털한 성격이었다. 아이다호 주의 지저분한 공립학교 출신인 것을 밝히기 싫어하는 케빈과 달리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주 이야기 하곤 했다. 향수를 느낄만한 공간조차 갖지 못한 나와 달리 그녀는 그곳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어보였다.

남들보다 이르게 식사를 마친 나는 다음 수업을 준비해야하는 탓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들 중 유일하게 독일문학을 신청했기에 동관 근처의 건물로 서둘러 걸어가야 했다. 나중에 보자는 칼릭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미리 사물함에서 챙겨놓은 책을 들고 일어났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노란색의 건물에는 익숙한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의 뒤섞여 있었다. 대부분의 소년 소녀들이 나보다 학년이 낮은 후배라는 사실이 어색하기만 했다. 나는 어느새 학교의 최고 학년이 되어버렸다.

멍한 눈으로 교실에 들어갔을 땐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온 탓에 수업을 시작하려면 이십분이나 남아 있었다. 텅 빈 교실이 주는 낯선 감흥이 예전 같으면 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독히도 쓸쓸했다.

양치질을 대신해 씹고 있던 껌을 종이에 감싸 주머니에 집어넣고 스프링 노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그대로 엎드렸다. 모차르트의 소나타와 교향곡이 들어있는 mp3를 책상에 올려놓고 이어폰도 귀에 꼽았다. 볼륨을 최대한 낮게 하고 피아노 위를 미끄러지는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을 상상했다. 하지만 톡톡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소리에 황홀한 망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눈도 안 마주치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새하얀 셔츠 위로 흔들리는 카멜과 차이나 블루 빛이 섞인 넥타이가 보였다. 하지만,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트럭 밑에 깔린 것처럼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들썩이는 가슴을 숨기려 숨을 멈췄다.

“옆 반에 수업 들으러 가는데 지나가다 네가 보여서 들어왔다.”

굽힌 허리를 세우자 검은색에 금빛 테가 둘러진 벨트버클이 바로 눈앞에 드러났다. 생일 선물로 받은 거라며 복도에서 위협적으로 벨트를 휘두르고 다니던 조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미친 듯이 웃었었지만, 지금은 희미한 웃음조차 지을 수가 없었다.

“이봐.”

“…….”

“할 얘기 있다는 거 알잖아.”

부드럽게 압력을 가하며 어깨를 누르는 손바닥이 주는 부담에 안에서부터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일단 나가자. 나가서 얘기하자.”

“난 할 말 없어.”

조쉬가 서 있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깨를 내리누르던 압력이 약해지고 마침내 체온조차 느낄 수 없게 떨어져나갔다.

“나한테 할 말은 없겠지.”

“…….”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한숨을 푸욱 내쉰 녀석은 고개를 돌린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낮춰 시선을 맞췄다. 빠르게 뛰는 심장과 가빠지는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녀석은 나의 혼란을 읽고 있을 것이었다.

시간에 따라 윤기를 잃어가는 물을 부어 개어놓은 석고처럼 녀석의 얼굴이 침침해져갔다. 바짝 말라 건조해진 입술을 혀로 축인 녀석이 말했다.

“도망치지 마.”

무엇으로부터?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을 어리석게 되풀이하지 않았다.

결국에 나는 길쭉한 무늬가 새겨진 벤치 위에 녀석과 마주 앉았다. 건물과 가깝지만 펜스와 나무로 감싸여 있는 탓에 벤치가 늘어선 정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진 척 하던 때는 언제고 초조함에 손가락을 바르작거리며 조쉬의 갈색 광택이 도는 검정 구두를 내려다봤다.

“어떻게 지냈냐.”

등받이 뒤로 두 팔을 넘겨 꽃이 져 푸른 잎만 남은 장미덩쿨을 바라보며 녀석은 입을 열었다.

“상상해봐 어떻게 지냈을지.”

“…그래. 그 질문은 좀 멍청한 것 같네.”

찡그린 얼굴에 주름이 잡힌 코를 만지작거리며 조쉬는 한숨을 쉬었다. 이 순간이 매끄럽게 연마하지 못한 대리석처럼 거끌 거끌하게 느껴졌다. 추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긴장감이 섬뜩하기만 했다.

“전화라도 좀 받지.”

“받으면 뭐가 달라지나?”

“무서워?”

녀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두려워?”

조쉬가 미쳐버린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녀석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 그런 고민을 하는 내가 오히려 미친 것 같았다. 입에 발린 말 하나 없이 서두부터 뚫고 오는 직설적인 말들. 기본적인 예의 없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대하듯이 녀석은 말을 했다. 그러니까, 아직 우리가 틀어지기 전의 방식으로.

“하, 내가 무서워하는지가 그렇게 궁금했어?”

“흥분하지 마.”

표정 없이 내려다보는 그 눈에 속이 타들어갔다.

“아, 그래. 그러면 넌 내가 겁먹고 바들바들 떨고 있기를 기대했어?”

“그런 식으로 비꼬지 마.”

“지금 내가 얼만큼 비참한지가 궁금해?”

“하지 말랬지.”

“겁에 질린 표정이라도 기대했어?”

“하지 말라고 했어.”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하는데!”

“하지 말랬잖아!”

“네가 자꾸 건들고 있잖아!”

험악한 표정으로 일어나 내게로 달려드는 녀석의 배를 몸무게를 실어 발로 걷어찼다. 윽, 배를 움켜잡으며 뒤로 물러난 녀석의 눈에 불이 뿜어졌다.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눈앞이 번쩍거렸다. 고개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내가 연체동물이었다면 고개가 360도 회전했겠다. 라고 시답잖은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상상 따위 웃길 리가 없었다. 입안에서 철맛이 느껴졌다. 입안의 여린 점막이 터진듯 입안에서 너덜거렸다. 퉤, 타액을 모아 내뱉은 것은 끈적끈적한 침과 뒤섞여 보기 흉하게 잔디 위에 뿌려졌다.

거센 숨을 몰아쉬던 조쉬는 박제된 것처럼 정지한 나에게로 다가왔다. 흠, 숨을 몰아쉬며 날 내려쳤던 그 손으로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강한 마찰로 열이 오른 손바닥이 몸에 닿은 순간 속에서 불이 올라왔다.

씨발, 욕을 내뱉으며 주춤주춤 눈을 가렸다. 천천히 그 불길이 온 몸을 좀먹어 들어갔다. 열이 오른 눈에선 마치 증기처럼 습기가 베어져 나왔다.

“그래.”

“…….”

“나 진짜 무서웠다.”

아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입을 움직일 때마다 역겨운 피 맛이 느껴졌다. 퉤, 다시 한 번 침을 뱉어냈다.

“지구에 종말이 온 줄 알았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나조차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몸을 떨며 웃었다. 들큰해진 목소리를 감추려 목을 가다듬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얼굴을 가렸지만 밭은 숨에 섞인 물기는 감출 수가 없었다.

“넌 몰라.”

“…….”

“레이 그 자식이 나한테 했던 말들. 곰곰이 곱씹으면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그 말들. 그 말들이 계속 귀에서 맴돌아서….”

나는 나보다 나약한 인간을 살면서 본 적이 없다. 나는 가벼운 바람에 무너지고 마는 모래성처럼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아무것도 없다. 또다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있잖아 조쉬.”

“…….”

“다그치지 말아줘. 더 이상 캐내려고도 하지 말아.”

“…….”

“나는 지금… 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만한 최소한의 근거도… 찾을 수가 없…어.”

미치도록 한심하지. 코를 훌쩍이며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런 얘길 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로 아물게 하던 상처를 헤집는 꼴이었다. 잠자코 숨을 몰아쉬던 나는 어깨에 얹힌 녀석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조쉬는 아주 느리게 벤치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마치 그 고개를 돌려놓기라도 하듯 말을 잘라낸 조쉬는 잔뜩 찌부러진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했다.”

“…….”

“걱정했다고.”

하지만, 그 말에 감동이라도 받았으면 좋았으련만 이미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혀는 통제되지 않았다.

“걱정?”

목소리는 어느새 약간의 증오를 담은 냉소를 띄고 있었다. 벌써부터 판단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피로해서 더 이상의 고통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걱정이라. 약간의 혐오와 …동정, 불안이 뒤섞여서, 보통 사람들이 시시껄렁한 가십을 접하듯이 그랬겠지. 뻔하잖아. 네 마음 따위.”

그 말에 조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의 턱이 긴장으로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침착한 한숨 뒤에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의 흥분으로 비뚤어진 도발에 거리를 둔다. 이 모든 상황 속에 가장 침착한 사람은 조쉬일 터였다. 상처투성이인 감정이 홍건하게 새어나가는 배관을 수리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기 위해 애를 쓰는 유일한 소년. 크흠, 낮게 목을 정리한 조쉬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 그렇게 가고 나서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

“너만 그런 거 아냐. 블리스 너, 그리고 레이. 그렇게 셋이 싸우고 나서 모든 게 엉망이 됐다고. 고등학교 시절 내내 소중하다 생각했던 내 우정도 함께 허물어졌어. 너만 힘든 거 아냐. 물론, 네 고통이 더 크겠지만 네 아픔만 있는게 아니다.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냐. 이 모든 문제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닫게 된 데에는 나의 사소한 잘못이 있진 않았나 생각하게 된단 말이다. 사실 난, 그 때 너희가 싸운 뒤에 조이 네가 도망치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해. 네가 없어진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오히려 상황만 악화됐지. 레이가 좀 끔찍하게 굴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했어. 블리스가 레이를 어떤 눈으로 보는 지 알아? 자기 부모를 죽였어도 그런 눈으로 보진 않을 거야. 아주 병신처럼 지내고 있는 걸 너도 알고는 있을 거야. 레이는 발랑까진 파렐 새끼랑 친해져서 아주 약에 절어 살고 있고. 아고스와 난 그 둘의 눈치만 보면서 살아. 최소한의 복구도 불가능할 만큼 엉망이 되어버렸지.”

빠르게 말을 뱉어낸 조쉬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이며 덧붙였다.

“너희 둘. 그러니까 블리스와 너. 두 사람 이해한다고 말은 못해.”

“…….”

“하지만 내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냐. 레이는 주제넘은 짓을 한 거고. 난 그걸 알면서도 끝내 캔자스에서 도망치는 널 방관 한 거고. 그 때는 그냥 널 보내버리면 어떻게든 되는 줄 알았다. 아니, 워낙 정신이 없었잖아. 안 그래도 술에 잔뜩 취해 있었는데 어떻게 제정신일 수가 있겠어. 미안해. 그냥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한숨을 내쉬며 목을 꽉 조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낸 녀석이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마지막으로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을 퉤, 뱉어냈다. 그저 그 뿐, 입에 발린 괜찮아. 네 잘 못도 아닌데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쉬의 잘못이 아닌 건 알고 있으나 녀석의 미안하다는 말이 지르르 심장을 간지럽혔다. 훼손된 정신은 그런 류의 말을 양식 삼아 치유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조이. 하나만 부탁할게.”

“…….”

“이건 정말 미친 부탁이긴 하지만.”

조쉬는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던 의외의 말을 한다. 뜸을 들여 살짝 달랜 마음을 확인하고는 용인을 구한다. 그것도 내가 가장 증오하는 이름을 입에 담으며.

“레이. 용서해줘.”

다시 한 번 깨닫는 사실이지만, 세상에 내 편이란 없다. 그래서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어버렸다.





나는 그저 멍하니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는지를 재차 물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너무도 똑똑히 그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방안을 천천히 훑었다. CD가 꽂혀있는 수납장과 주름으로 엉망이 된 시트가 깔린 녹색 침대, 메모된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작은 냉장고, 벽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이란 영화 포스터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에서 녀석과 함께 봤던 그 영화의 주인공은 돈을 벌기 위해 일주일동안 잠들지 않고 자그마한 원을 자전거로 도는 내기를 하게 된다. 그 잔혹한 생리에 치를 떨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주인공의 절박함. 피딱지가 얹힌 남자의 거친 얼굴까지 모두 제자리였다.

“맙소사.”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바람에 숨이 거칠었다. 숨을 몰아쉬며 문에 어깨를 기대어 녀석을 내려다봤다. 그 얼굴, 침울하고 우아한 그 백지 같은 얼굴에는 홍조조차 없었다. 내가 봐왔던 녀석의 얼굴 중에서 가장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고백하는 그 얼굴엔 설렘이라던가 두근거리는 즐거움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녀석은 그런 식의 고백이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다.

칼릭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녀석의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기까지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끈질긴 침묵 뒤에 녀석이 긴 몸을 일으켜 내게로 걸어왔다. 어슬렁거리며 움직인 그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디디고 그 긴팔을 둘러 나를 압박하며 안아오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허리 뒤로 손을 둘러 감싸 안고는 머리에 얼굴을 묻어 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의 호흡을 참아왔다는 듯이 긴 숨을 몰아쉬었다.

우습게도 그 정적 속에서 아침의 새소리가 들려왔다. 생기가 넘치는 아침의 사랑 고백은 절망스런 내용일망정 밝아오는 여명과 지저귀는 새소리는 오하라의 말처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내일쯤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난 두서없이, 한참의 침묵 뒤에 약간 정신이 나간 상태로 입을 열었다.

“타인을 의식해본 적 있어?”

“…….”

“너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시선에 대해.”

칼릭스는 그저 나를 꼭 껴안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호흡으로 인해 솜털마저 떨렸다.

“그 시선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정도로 절박하게 의식해본 적 있어? 평생 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구속되어 살아간다는 느낌에 괴로워본 적, 타인의 의지로 움직이는 삶을 살아간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 말이야. 그것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결국에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그런 기분을.”

정수리에 얹어져있던 녀석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지며 이마를 내려와 볼에 닿았다. 통제된 것처럼 가벼운 접촉을 남기고는 입술을 떼어냈다. 칼릭스는 불투명한 유리 안을 들여다보듯 나를 내려다봤다. 나의 말은 이상한 것 같았다. 어떠한 실마리도 주지 않은 채 두서없이 이런 말을 지껄이는 나를 칼릭스가 미친 사람처럼 여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순전히 내 이기심 때문에 너에게 말 안한 게 있다.”

칼릭스는 여전히 고요했다. 고른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블리스와 나 단순한 이유로 헤어진 거… 아니야.”

몸을 조금 낮추자 귀 옆에 칼릭스의 가슴이 닿아왔다. 평생 빠르게 뛰지 않을 것 같던 녀석의 심장 역시 뛰고 있었다. 온 몸이 진동을 하듯 떨려왔다. 하지만 내게서 솟아나는 감정들을 처리하기에는 그 떨림은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다.

“추잡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이 관계를 맺고 사귄다는 것에 대해 한동안은 그런 생각을 했었어. 떳떳하기는커녕 환영받는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레이가 알아버렸어. 그 미친 자식이 내게 했었던 말. 세상에 그 이상의 무거운 모욕은 없을 거다. 순식간에 난 더러운 창녀가 되었고 블리스는 더러운 창녀에게 놀아난 미친 호모가 되었지. 블리스와 레이가 죽일 듯이 싸웠어. 서로를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서로를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우리 모두 충격을 받았어.

레이가 비겁하게 부모님에게 알리겠다고 하더라. 부조리긴 부조리였던 모양이야. 알려지는게 그렇게 두렵다니. 근데 난 그걸 버텨낼 정도로 강하지가 않거든. 그렇게 되면 내가 어디에 이르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도망쳤어. 녀석으로부터.”

팔을 둘러 감싸고 있던 녀석을 밀어냈다. 칼릭스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나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백에 대한 일반적인 거절대신, 그저 긴 이야기를 하는 나를 내려다봤다. 그 눈을 보며 마침내 물었다.

“넌 그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날 사랑할 수 있겠어?”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칼릭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강 건너편에 서 있는 망자의 기억을 돌아보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속의 나를, 온전히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추억을 떠올려내듯이 여태 알지 못했던 얼굴의 칼릭스로 나를 보았다. 정확히 내 안의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애달픈 얼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자, 이제 사랑의 마법에서 깨어날 시간. 내가 기대하는 싸늘한 대답을 줘.

“그래.”

“…….”

“난 거리낄게 없어.”

의외의 진지한 대답에 웃음마저 나왔다. 허탈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녀석의 손이 팔뚝을 옭아맸다. 낄낄거리며 웃는 나를 잡아채며 감싸 안으려 했다. 녀석의 몸을 밀어내버렸다. 네 대답은 로맨틱 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난 아니야.”

녀석이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모든 것이 원점이 되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를 내려다보던 눈이 무심을 가장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모를 곳을 바라보던 녀석이 담담하게 입을 열어 또박또박 힘을 주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렵게 돌려서 말 하지 말아줘.”

턱을 슬쩍 들어 삐딱하게 선 채로 녀석은 고개를 돌렸다. 느리게 감았다 뜨는 그 눈은 거절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와 지척에 섰을 때 표정과는 달리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호흡을 다스리려 노력하며 내 뒤통수에 손을 얹었다. 언제나처럼 그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을 것처럼. 하지만 그 커다란 손은 뒤통수를 강하게 옭아매 자신의 이마와 마주 닿게 했다. 그리고 눈을 마주했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대답. 아직 하지 않았어.”

이번엔 웃을 수가 없었다. 압도된 기분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마주 닿은 이마로부터 열이 올랐다.

“내가 좋아 싫어. 그것만 말해.”

조금의 감정의 무게도 실리지 않은 듯한, 녀석의 파란기가 섞인 푸른 눈을 보며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좋아해.”

“…….”

“친구로서. 넌 좋은 녀석이니까.”

녀석은 얼마간 아무런 말도 없이 잠시 서 있었다. 그 말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에 대한 상상과는 달리 녀석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꽉 내리누르던 손바닥의 힘이 서서히 풀어지며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쌌다. 차갑게 얼려놓은 밀랍처럼 믿을 수 없이 싸늘했다.

수긍의 대답도 없이 녀석은 코로 작게 웃었다. 그리곤 닿을 듯 가까이 있는 입술을 열었다.

“하나만 더 묻겠어.”

“…….”

“블리스는?”

그 말에는 거의 감정이 없어보였다. 추운 곳에서 꽁꽁 얼려진 기계가 미리 만들어놓은 텍스트를 입김도 없이 읽어 내리는 것처럼, 흥분의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입술을 깨무는 날 보는 녀석의 숨이 거칠어져갔다. 마주 닿은 이마를 천천히 부비며 눈을 질끈 감았다. 후으으, 탄성과도 같은 한숨을 내 뱉으며 머리를 감싸던 손이 뒷목을 꽉 잡아당겼다. 금방이라도 입 맞출 것처럼 입술을 살짝 벌려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 피하자 젖은 입술이 볼에 축축하게 닿았다.

“없었던 일로 하자.”

귓가로 더듬어 올라가는 입술을 피해 녀석을 밀어냈다. 칼릭스는 마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처럼 밀쳐졌다. 아니, 뒷걸음쳤다.

“잊어줄게. 그러니까.”

“…….”

“정신 차려.”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와 버렸다. 녀석 역시 나를 잡지 않았다. 시선을 피한채로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을 때에 그곳은 아무도 없이 황량하기만 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무너질 것 같아 난간을 잡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문 안에서 뭔가가 둔탁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





유년시절을 보냈던 뉴햄프셔는 여름을 나기에 괴로운 곳은 아니었다. 산악지대이니 만큼 공기는 선선했고 집 주변은 그 자체가 가공하지 않은 정원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이민 온, 두 모녀가 주인인 집에 세를 들어 살았는데 이주에 한 번씩 집세를 걷어 아버지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던 광경을 자주 보곤 했다. 하지만, 그 이외에 사소하게 드러나는 문제점은 없는 듯 보였다. 스키장을 비롯한 캠프시설이 많았고 휴가철에는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물론 관광객으로서가 아닌 주민으로서의 생활공간인 그곳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방학을 한, 친구가 몇 없는 이민자의 자녀의 시간은 아주 느린 속도로 흘러갔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인 가게의 종업원이었다. 그 시절엔,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에게서 풍기는 섬유냄새를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면 그 품에 안길 새도 없이 잠에 들던 날들의 반복이었다. 당연히 동생 지은을 돌보는 건 내 차지였고 어려웠던 형편 탓에 캠프를 다녀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몇 안 되는 친구들이 8주간 캠프를 떠난 뒤에는 모든 것이 지루했다. 그 시절에는 동생을 살갑게 대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시절이라 함께 인형놀이를 한다던가 산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타고 놀곤 했었다. 하지만, 단순한 놀이로 제 또래에 대한 갈증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그곳에서의 일들이 시간의 선명함과는 반대로 기억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그나마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 중의 하나가 일 년에 한 번씩 아버지와 단 둘이 화이트 산맥 근처의 니페소키 호수로 낚시여행을 가던 것이다.

아버지와 난 호수 근처의 작은 산에서 텐트를 치고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워 밤을 밝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이 핀다는 그곳에서 우리는 내내 낚시를 했다. 캐논 산 근처에서 호수까지 걸어온 하이킹 족들과 함께 저녁을 즐기기도 했다. 수렵을 통해 삶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그 시절의 아버지는 뭐랄까. 낭만을 즐기는 법을 알았었다.

그 날도 하이킹을 온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리의 텐트 근처에 자리를 폈었다. 나는 갈색의 나무 통 안에 잡은 물고기를 풀어놓고 그 중 몇 마리를 골라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내장을 발라내고 있었다. 물비린내가 나는 그것을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잡아당기며 구역질을 참고 있던 그 때, 아버지는 산 속으로 마른 잔가지를 주우러 가고 없었다.

자진해서 나서긴 한 것이지만, 미끄럽고 축축한 핏물 베인 민물고기의 내장을 잡아떼는 감촉이 좋진 않았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텐트 안으로 잠을 자기 위해 들어갔던 무리 중 한 남자가 흥미로운 눈으로 물고기를 해체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잔뜩 찡그린 얼굴을 지켜보던 남자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 긴 몸을 이끌고 내 옆에 앉아 내 손에서 칼을 가져갔다.

그가 칼을 가져가자마자 나는 얼른 호수로 뛰어가 비린내와 핏물이 뒤섞인 손을 닦아냈다. 비린내가 남은 손을 옷에 닦아내며 자리에 돌아왔을 때는 물고기 해체가 깔끔하게 모두 끝난 후였다. 피 묻은 손으로 담배를 피던 남자가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오기 전까지 나는 좀 기분이 좋았던 것도 같다.

담배를 어지럽게 널린 내장 위에 비벼 끈 남자는 그 누린내에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멍청하게 몸을 굳히고 있는 내 턱을 들어 입술을 열게 했다. 물컹하고 뜨겁고 커다란 혀가 입안으로 서서히 밀려들었다. 상상 속에서도 성적인 종류의 스킨십에는 무지하던 내게 그것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가만히 남자의 구역질나는 혓바닥을 문대고 있었던 걸 보면 성적인 추행을 당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지독하게 무지했던 건지도 모른다.

온 몸을 떨며 그 뜨겁고 축축한 것의 접촉에 공포를 느끼고 있던 내게 구원이 된 것은 나의 반항도 아버지의 발견도 아니었다. 남자의 일행 중 하나가 요의를 느끼고 텐트 밖으로 나서다 그 참혹한 광경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그 일을 목격했다면 소년에게 성욕을 느꼈던 남자의 일생은 좀 더 처참한 방향으로 틀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남자의 일행은 그 행동에 혐오를 느꼈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 날 새벽, 텐트 안에서 아버지와 바짝 붙어 누워있으면서도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한기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손과 그 단단한 몸을 꽈악 껴안고 나서야 옅은 잠에 들 수가 있었는데 그 짧은 수면 뒤에 텐트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빌어먹게도 나는 중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사겨본 여자 친구와 키스를 하기 전까지 키스가 세상에서 가장 기분 나쁜 행위인줄 알고 살았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귀었던 그녀는 대담하게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집어넣도록 허락해주는 유의 소녀는 아니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화교출신으로 그녀의 부모님은 42번가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주말에 그녀의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데이트 코스의 전부일 뿐인, 남들이 보기에는 시시한 연애였다.

우리는 성적인 농담이나 긴장감을 주는 스킨십에 대해 무지했다. 우리에게는 대담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사귄지 이년하고도 반이 지난 때에야 관계를 맺었다. 또래에 비해서 지나치게 건전한 관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무덤덤했고 나는 너무 과민했기 때문이다.

처음, 여자 친구가 내 입을 열고 그 안으로 물컹한 혀를 집어넣었을 때 떠오른 것은 니페소키 호수에서 처음으로 내 입을 가르고 들어온 남자의 물컹한 감촉이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처럼 행동이 자연스러워지고 그녀의 초조하고 달큰한 숨을 느끼기 시작하자 불쾌한 감각은 사라져갔다. 입안에 끈적하게 남는 그 농밀하고 따듯한 감촉은 불쾌함을 상쇄시켜버리고 어깨를 움츠리게 만드는 감각이었다.

키스의 등급을 분화하고 낙차를 수치화 할 수 있다면 내가 느꼈던 최고의 경험은 아이러니하게도 녀석을 통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키스라는 것이 믿지 못하게 아주 달콤한 것이란 걸 알려 준 건 블리스 아이언 사이드였다.

허기 속에서 섞이는 혼돈스러운 열기, 뿌듯함, 불규칙한 박자의 호흡, 쪼그라들 것 같은 압박, 내부를 둘로 쪼개며 기어들어오는 성기. 그 감각들은 불쾌하고도 불가사의한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좀 더 성적인 경험이 많았다면, 녀석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나의 삶에서 별개로 그것을 떼어놓을 수 있었을까를.

마지막으로 자위를 할 때 여자의 나체를 상상했던 게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희미했다. 보드라운 가슴보다 등 뒤에 닿는 단단한 가슴에 더 익숙했고, 억누름보다 억눌림에 더 익숙해져버렸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나는 그 감촉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멍하니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반쯤 발기되어있는 성기를 내려다봤다. 어쩌면 이런 망상들은 내가 평생을 끌어안고 가야 할 비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기만 한 내게 유일한 탈선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겠지.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로 만들어진 미지근한 욕조의 턱에 팔을 얹어 그 위에 고개를 묻었다. 물속에 있던 내내 꿇었던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이대로 몸을 일으키면 온 조직이 산란되는 감각에 괴로울까 미련하게 계속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물에 젖은 손을 움직여 욕조 위 선반에 올려두었던 담배를 집어 들었다. 멀쩡한 몸을 이끌고 찾았던 양호실에서 역시 멀쩡한 몸을 이끌고 양호실을 찾은 애나에게서 얻은 담배였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다 흰색의 필터를 입술에 살짝 물었다. 역시 애나에게서 얻은 싸구려 라이터로 그 끝에 불을 붙였다.

시선을 모아 가만히 타들어가는 담배의 끝을 내려다봤다. 입술 속에서 천천히 흘러나온 연기가 얼굴을 쓸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 진한, 텁텁한 향기의 흐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갈무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머리를 비우는 것은 담배에 중독된 사람에게 한한 고유의 특권인가, 담배의 장점을 어느 것 하나 발견하지 못한 초보는 단지 지독히 쓰다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머리를 비우자고 시작한 일인데 외려 더 복잡해졌다.

필터 가까이 담배를 태운 뒤에 욕조 안에 그대로 담배를 뱉어냈다. 치지직 타들어간 담배꽁초에서 천천히 말린 담배가루가 물 위로 퍼져나왔다. 장난을 치듯 휘적거리다가 깊은 절망감에 신음을 토해냈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훔치며 방으로 걸어갔다. 붉은 빛으로 깜빡이는 전자시계는 새벽 2시 30분을 말하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프록터 역시 수면을 위해 기숙사의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간 시간이었다. 나 역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오늘 하루 동안 그랬던 것처럼 피로하기만할 뿐 잠이 오지는 않았다.

저리는 다리를 주무르기 위해 창가에 걸터앉았다. 어두운 밖을 밝히는 유일한 빛은 점점이 켜진 가로등뿐이었다. 비가 오려는지 갑자기 흐려진 날씨 탓에 하늘의 별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습기가 가득한 바람이 싸하게 얼굴을 훑고 사라졌다. 제법 쌀쌀해진 바람은 여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몇 조각의 열기는 내 주변에 그대로 남아버렸다. 그것들은 더 이상 내가 작게 웅크려있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언젠가는 잊혀질 기억 속에 사는 나라지만 전승되는 기록처럼 따라다녔다.

나는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칼릭스의 고백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적절했던 것인지를. 너무도 복잡하면 오히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 종일 그저 멍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녀석의 감정이 실감 나지 않았다.

벗은 채로 새벽의 바람을 맞았더니 온 몸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새벽 두시 반에 창가에서 벌거벗은 채 청승떠는 소년을 볼 사람도 없겠지만 옷을 걸쳐야겠다 싶어 더듬거리며 옷장을 열었다. 온통 어둠뿐이어서 어느 것 하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문 옆의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새벽이었기에 소란을 부려 사람들이 깨지 않는 이상 밝은 빛이 복도로 새어나가더라도 프록터가 주의를 주기 위해 문을 두드릴 리는 없었다.

옷을 꺼내 입은 뒤에는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게 없나 살폈다. 하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는 소년의 냉장고답게 먹지도 않는 영양제가 몇 개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텅 빈 냉장고처럼 속 역시 텅 비어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아마도 영양사와의 개인 면담이 있을 것이었다. 끼니를 거르더라도 급식 명단에 이름을 체크해야하지만, 그것마저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양호실과 좁은 기숙사 방안에 누워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더니 정신이 피폐해진 것 같았다. 나는 칼릭스와 나눌 진지한 대화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의 유예기간은 오늘 까지만. 상심한 소년의 얼굴을 외면하고 나는 또 이기적으로 내일을 살아야한다.

어슬렁거리며 스위치를 끄기 위해 문 옆으로 걸어갈 때였다. 복도에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이라면, 프록터가 잠에 든 사이 기숙사를 탈출하려는 불량학생일터였다. 그런 주제에 제 발걸음 소리조차 죽이는 조심성도 없다. 하지만 그 발걸음 소리는 문 앞에서 멈추었다. 문이 두드려지는 걸 보니 허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이잉, 귀에서 귀울음이 울렸다.

머뭇거리며 문을 바라보고 있자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소등해.”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따듯한 물웅덩이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온 몸이 물에 휩싸여 몸의 무게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런.

“아….”

“…….”

“그래. …그래야지.”

한참의 정적 만에야 문 밖에서 녀석이 내게 무언가를 명령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블리스 역시도 들고 있는 명단에 내 이름을 적는 것을 잊은 듯 했다. 더듬거리며 문 옆의 스위치를 누르자 환했던 방이 다시 캄캄해졌다. 녀석의 손에 들린, 건전지가 거의 닳은 손전등만이 위태롭게 미미한 빛으로 껌뻑 거렸다.

어두웠기 때문에 블리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음영 진 그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럼, 수고해.”

문을 닫자 문을 사이로 두고 복도와 방 안이 무거운 적막에 휩싸였다. 벽을 집듯 이마를 차가운 문에 기대었다. 열이 올라 머리가 멍했다. 시선을 발언저리 어딘가에 두었다. 시간이 지나도 밖에서는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낮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적막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온 신경이 그 작은 소리 하나에 집중되었기에 그 사소한 소리마저 들을 수가 있었다.

벽처럼 느껴지는 문의 건너편에서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기침을 했다.

“잠깐만 열어봐.”

손 안의 땀을 바지에 닦아 문을 열자 녀석은 뻣뻣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가슴 언저리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블리스와 이런 식으로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눈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서로가 마주치는 것을 피해온데다가 이 사사롭고 난해한 공통의 화제에 대해 굳이 입을 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녀석은 오늘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블리스는 둔한 동작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자그마한 무언가를 꺼내서 큰 손으로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 어색한 동작을 문에 기대어 가만히 바라봤다. 마침내 파지직 소리를 내며 완성이 되는가 싶더니, 녀석은 내 앞에 그것을 내밀었다. 예상 밖의 물건이었다. 머리에 온통 구름이 낀 것처럼 먹먹해졌다.

“밥 안 먹었더라?”

“…….”

“명단에 네 이름 없어서.”

블리스가 내민 것은 흐린 손전등 빛만으로는 식별이 어렵긴 했지만 초코바였다. 손전등 불빛을 받아 초콜릿 코팅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나를 보며 녀석이 말했다.

“받아.”

“…….”

“왜, 그 때처럼 집어던지게?”

녀석은 웃으며 말했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였지. 화장실에서의 고백 이후로 우리의 세계가 붕괴되기 시작한 게.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지 않은 채 녀석의 손에서 초코바를 집어 들었다. 반을 입안에 우겨넣고는 무식할 정도로 우걱우걱 씹었다.

“…마이네.”

“하나 더 있어. 줄까?”

목이 메도록 씹어 삼켜 하나를 모두 없앤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반대 주머니에서 초코바를 하나 더 꺼내 포장을 뜯으며 웃었다.

“몇 년 굶었냐.”

예전 같았으면 따라 웃었겠지만, 지금은 웃을 수가 없었다. 블리스는 두 번째 초코바를 모두 먹어치울 때 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조금의 접촉도 원하지 않는다는 듯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고개 숙인 날 내려다봤다. 손바닥으로 입술에 묻은 흔적들을 닦아내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지.”

“아니.”

“거짓말. 여태 넌 내 눈도 안 마주쳤잖아.”

“네가 싫어했으니까.”

인간이 미쳐가는 정서적 단계 중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지친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얼굴은 왜 그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윤곽은 전과 달리 조금 부어 있었다. 눈 옆이 찢어져 살짝 부어 내일쯤이면 파랗게 피멍이 들 것 같았다. 피딱지가 맺힌 입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넘어졌어. 좀.”

“맞은 것 같은데.”

흐흐, 바보처럼 웃으며 녀석은 엉망이 된 얼굴을 감추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감정을 억누르기라도 하려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은 온화한 초식동물처럼 온순해보였다. 손을 뻗어 쓰다듬어도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처럼. 하지만 그 온순한 생명체가 예상외의 이를 드러냈다.

바닥을 비추며 껌뻑거리던 손전등이 눈앞에 갑자기 들이밀어졌다. 갑작스런 빛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얼굴을 찡그리자 녀석이 손을 잡아챘다.

“뭐야.”

“자세히 보고 싶어서.”

“눈부시잖아.”

“자위할 때 필요해서.”

“미친 새끼.”

웃는 녀석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씨근덕거리는 호흡을 정리하기 위해 크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발작처럼 심장이 뛰어서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삼켰다. 미친놈, 넌 끝까지.

하지만, 이 상황에 웃음마저 나왔다. 블리스와 나의 삶이 희극적 비극, 혹은 비극적 희극으로 꾸며진 것만 같았다. 내 귀는 또 맹렬히 문 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밖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 앞에서부터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조차도.

문을 열었을 때, 블리스는 밀쳐졌던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문을 연 나를 보며 웃었다.

“블리스.”

“응.”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건 명백한 반칙이야.”

녀석은 말이 없었다. 내가 초조함에 팔을 쓸어 올리며 그 다음 말을 기다려도 녀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성큼 다가왔다. 고개를 숙여 입술을 귓가로 옮겼다. 후, 바람을 넣는 감각에 몸서리치자 녀석이 손으로 얼굴을 들어 올려 자신과 눈 마주치게 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와 자고 싶지.”

녀석의 손이 나의 손을 잡아 사타구니 사이로 이끌었다. 평소보다 부풀어있는 자신의 페니스를 쓰다듬도록 손목을 움직였다. 손 안에 갇힌 채로 사타구니 사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녀석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하지만 나의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블리스는 정지했다.

“자고 싶어.”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질량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내 손을 덮고 있던 블리스의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왔다.

“하고 싶다. 그럼 당장은 편해질 테니까.”

손아귀에 갇힌 손을 빼내었다. 손에서는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녀석이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네가 한 손에 총을 들었다면, 난 못 이기는 척 옷을 벗었을 거다.”

“…….”

“하지만 넌 지금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해.”

농담을 하면서도 나는 웃지 않았다. 그냥, 열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척 고개를 들며 녀석의 얼굴을 훔쳐봤다. 슬쩍 스쳐 본 블리스의 얼굴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피잉 소리를 내며 유일하게 서로를 비추던 손전등이 꺼져버렸다. 암흑이 복도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메마른 공기조차. 그 어두운 적막 속에서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녀석의 젖은 호흡뿐이었다. 얼굴에 닿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숨결을 느끼며 녀석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가슴에 닿은 오른 손에 그 심장의 뜀박질이 느껴져 그 움직임을 저지하듯 녀석의 가슴을 밀어냈다.

“미쳤나봐.”

“…….”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머리를 흔들며 녀석에게서 떨어지듯 뒷걸음쳤다.

“피곤해서 그런가봐.”

“…….”

“지금 좀 제 정신이 아니야.”

어두웠기 때문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블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벼랑 끝. 거기까지가 녀석의 한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난 비겁하게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거야. 너도 들어가서 자라.”

뒷걸음치며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손 위로 녀석의 땀에 젖은 손이 강하게 감싸왔다. 그제야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큰일을 저질러버렸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 역시도.

나를 방 안으로 밀어내면서 녀석은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잠갔다.

“이봐, 진짜 잘 생각은 없었어.”

“알아.”

“알면 이제 돌아가지?”

녀석은 대답대신 손을 뻗어 방 안의 불을 켰다. 갑작스런 빛에 눈을 간신히 떴다. 블리스는 손에 들고 있는 손전등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카펫 위를 빠르게 구르다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박살나는 파열음이 들렸다. 그 소리에 마치 그 깨진 조각이 보인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려는데 녀석이 옷을 벗었다.

“블ㄹ….”

“너도 날 상상하면서 자위해?”

블리스는 티셔츠의 밑단을 잡아 한꺼번에 끌어올리며 바닥에 던져버렸다.

“야, 블리스.”

“나는 그래.”

녀석은 서슴지 않았다. 브리프와 바지를 한꺼번에 끌러 던진 후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너만 상상해.”

“제발, 멍청하게 굴지 말자.”

시선을 피하려 녀석의 목 언저리에 시선을 두자 주먹을 쥔 손을 잡아 가슴에 얹게 했다. 손을 빼려 했지만 강하게 옥죄는 바람에 빼낼 수가 없었다. 단단한 가슴에 얹어졌던 손바닥의 잔 떨림을 통해 블리스의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녀석의 가슴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가쁜 호흡과 그 떨림, 축축한 땀과 냄새가 낯설기만 했다.

“그러니 너도 날 상상해.”

녀석에게는 조용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게 내뿜어지는 광기가 있었다. 어쩌면 녀석은 나의 작은 부분을 억누르고 짓밟아버리고 죽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나를 향한 냉소와 증오를 섞어서. 상대적으로 약한 부위를 파내어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 증식하고, 갉아버리고 원했던 방식대로 나를 정복해버리는 방식으로.

그리고 아마도 녀석은 나의 가장 여리고 약한 부위로 파고들어가 심장을 원했던 방식대로 주무르는 것에 성공한지도 몰랐다. 녀석이 의도한 대로 충분히 혼란스러워졌으니까.

가슴을 만지게 하던 손을 뻗어 반쯤 발기한 페니스를 잡게 했다. 숨이 멎었다. 나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물속에 빠진 사람처럼, 숨 쉴 수 있는 공기의 부족에 허덕이다 끝내 숨쉬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멈춰버렸다. 그걸 알면서도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감촉인지, 모양인지, 어떤 온도인지. 잊지 않도록 기억해.”

“…….”

“그게 네 안에서 어떻게 들락거렸는지도.”

수치스러운 말에 열이 오르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녀석이 불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축축한 손 안의 그것이 조금씩 부피를 늘리며 부풀었다. 손을 빼내려 하자 두 손으로 강하게 내 손을 감싸 빼내지 못하게 했다. 늘어진 살덩이가 혈관을 드러내며 단단해질 때까지. 힘을 주어 쓰다듬게 했다.

거칠어진 메마른 숨이 얼굴에 닿았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빼내려 하자 문으로 밀어붙였다.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닿을 듯한 입술에 온 몸이 바르르 떨렸다.

초조해하는 나를 보는 그 얼굴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코로 내뱉어지는 나지막한 한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애써 감춰둔 열기를 끌어내려는 그 습함에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블리스의 손이 뒷목을 강하게 잡아 앞으로 당겼다. 성급하게 끌려온 반동으로 녀석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고개를 숙인 녀석으로부터 순간적으로 보인 것은 녀석의 확장된 검은 동공을 둘러싼 바다색 눈동자였다. 그 섬세한 눈동자를 가리듯 얇은 눈꺼풀이 사르르 감겼다.

키스를 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녀석은 볼에 베이비 키스를 했다. 그리곤 좀 전의 열기는 거짓말인 것처럼 갑자기 몸을 돌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고 싶지만.”

“…….”

“그랬다간 네가 정말 날 죽일지도 모르지.”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들며 녀석이 웃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브리프도 입지 않은 채 바지를 꿰어 입었다. 툭 튀어나온 바지춤을 농밀하게 만지작거리는 그 손을 바라보다 녀석의 얼굴을 보자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밀랍처럼 굳어있는 날 내려다보며 장난스럽지만 어딘가 날카롭게 들리는 말투로 말을 했다.

“나머지는 네 상상하면서 뽑아내야지.”

어느새 바싹 말라버린 손바닥으로 내 팔뚝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감촉과는 다르게 녀석의 얼굴은 흥분으로 여전히 붉고 눈은 충혈 되어 있고 호흡은 거친 채였다.

“잘 자라.”

굳은 내 입술에 짧게 입맞춤 하고는 문고리를 돌렸다. 복도의 찬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끼이익 비명처럼 울리는 돌쩌귀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긴 몸이 빠져나갈 최소한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나에게서 자취를 감추듯 끝 간 데 없는 암흑에 휩싸인 어두운 복도로 걸어 나갔다.

블리스가 사라졌음에도 한참이 지나도록 나는 그 상태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게 마법을 부려놓은 것처럼 나의 인내와 의지가 시험당한 느낌이었다. 한참동안 참아왔던 깊은 신음을 토해내며 손바닥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양 손에 무기를 들고, 발버둥 치는 나를 잡아 찍어 내리며 너덜너덜해지도록, 모든 힘을 소진해버리도록 농락한 것 같았다.

참을 수가 없어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집히는 베개를 문에 힘껏 집어던졌다. 할 수만 있다면 문까지도 때려 부수고 싶었다. 녀석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개자식!”





새우와 칠리소스, 크림 스파게티 그리고 시나몬티볼로 조합된 아침 식사는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내게는 어떠한 인상도 남기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를 목구멍으로 넘긴다는 것 자체가 고역일 뿐이었다. 고열량의 식단 탓에 학교 측에서 작년엔가 유기농 농산물로 식단을 꾸려 인스턴트, 탄산음료를 일체 금한 적이 있었는데 학생회의 반대로 삼 개월 만에 철수된 적이 있었다. 그 때, 딱딱한 빵을 씹으며 느꼈던 감흥과 지금의 느낌이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피곤해 보인다.”

루시의 남자친구인 덴과 이야기를 나누던 케빈이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응. 잠 못 잤거든.”

“어제도 하루 종일 양호실에 있더니. 몸 괜찮아?”

대답대신 미적지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건강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는 다시 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루시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루시의 대학 추천서 문제로 한창 얘기 중이었다. 나 역시 동아리 담당 선생들과 생물학 선생에게 추천서를 부탁해놓긴 했지만, 나의 온 신경이 그 일에 지배된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발전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이 나의 최선이자 유일한 길인 것을 알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와 오히려 아무 것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작 내가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칼릭스는 칠리소스가 묻은 새우를 거의 먹지 않고 있었다. 대신 크림 스파게티를 나의 배 이상은 담아 신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조심스럽게 먹고 있었다. 아마도 입 안의 여린 점막이 터져 매운 음식이 닿기만 해도 쓰라린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었다.

얼굴에 큰 상처는 없었지만 귀와 턱 사이에는 피멍이 들어있어 조금만 힘을 주어 눌러도 어마어마한 통증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게다가 작은 링 귀걸이가 걸려있던 귀는 찢어져 피딱지가 굳어있었다.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녀석은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할 말 있어?”

직접적으로 물어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기에 어색하게 웃고는 포크로 새우를 찍어 입에 집어넣었다. 전과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그 날을 기점으로 녀석과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버렸다. 붉게 몽울져 있는 새우를 향해 시선을 내리깐 나를 녀석의 눈이 천천히 훑는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낯선 상대에 대해 관찰을 하듯, 예리한 날을 거두지 않았다. 서러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얼굴은… 어쩌다 그런 거야.”

조금이라도 멈칫할 줄 알았던 칼릭스는 여전히 태연한 태도로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씹은 후, 물 한 모금을 마셔 꼼꼼히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넘어졌어.”

어제 누군가도 같은 얘길 했었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스파게티를 삼키는 그 모습에 머리가 다 아팠다.

“아프겠네.”

그 말에 녀석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최후의 선고를 기다리듯 내 얼굴은 빳빳하게 굳어있을 터였다. 그런 나를 보던 칼릭스의 굳었던 얼굴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건조하기만 하던 얼굴이 피식, 묘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응. 좀 많이 아픈데.”

어쩐지 응석을 부리듯 여유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 미묘한 변화에 칼릭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새우를 찍어 삼켰다.

“양호실 가봐.”

“아니, 연고 있어. 그거 바르면 돼”

포크로 접시 귀퉁이의 스파게티 면을 말아 입안에 넣어 꼼꼼히 씹은 녀석이 스파게티를 다 삼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응?”

“턱이랑 귀 말고도 뒷목에 좀 생채기가 났거든.”

“심하게 굴렀나보네.”

“후, 뭐… 그렇지. 나 안 보이니까 있다가 바르는 거 도와줘.”

그 전이었으면 별다른 생각 없이도 녀석의 부탁에 쉽게 승낙의 말을 했겠지만, 지금으로선 머뭇거려졌다. 물론, 친구 사이에 재고의 여지가 없어야 하는 말일 테지만, 나는 그 이외의 것들을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답은 같을테지만.

“…그러지 뭐.”

면을 말아 천천히 씹어 삼키던 녀석의 입술의 반쪽이 웃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다 시나몬티볼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밤을 새었던 탓에 조금의 음식이 들어갔을 뿐인데도 속이 더부룩해졌다. 두 개째의 시나몬티볼을 집어 입안에 넣고는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칼릭스의 그릇이 비워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포크로 스파게티를 말아 입안에 넣어 삼키는 모습을 바라보다 남의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민망한 일인 것 같아 커피라도 한잔 뽑아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탄산음료도 반기지 않는데 하물며 커피라고 교내 식당에서 반길 리 없었다. 그런 사실은 식수대 옆에 커피를 타 마실 수 있게 마련한 테이블 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타져 있는 커피에 크림이나 설탕 따위만 첨가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었는데 크림과 설탕은 첨가하지 않는 나였기에 아주 피곤한 날에만 그 커피를 마시곤 했다. 원액 그 자체의 맛은 정말 최악이었다.

플라스틱 투명한 머그컵에 커피를 받아 그 자리에서 홀짝였다. 역시, 첫 맛은 쓰고 뒷맛은 독특하게 오묘했다. 결코 깔끔한 맛은 아니었다.

커피 테이블을 향하던 몸을 돌려 넘실거리는 커피 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케빈과 덴, 칼릭스가 앉아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수많은 테이블 중 거의 입구 쪽에 위치한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티볼 조각을 입안에 넣고 오물 거렸다. 얼핏 본 녀석이 얼굴의 찡그러져 있었다.

입구에서는 블리스가 조식을 위해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간밤에 보았던, 내 앞에서 벗어던졌던 옷을 껴입은 차림 그대로, 누군가와 싸운 얼굴로.

블리스 역시도 입구의 우리를 보는 순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언짢음을 숨길 필요 없다는 식으로 찡그리던 얼굴이 자신의 등을 두드리는 소년을 돌아보며 풀어졌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은 굳은 채였다. 그것으로, 간밤에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던 건지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근질근질한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 차기 시작하자 급속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다 먹었어?”

“으응?”

어깨를 두드려 고개를 돌려 블리스를 바라보는 내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린 칼릭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뭐 좀 더 먹을래?”

“아… 아니. 배불러.”

“그럼 일어나자.”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서둘러 일어난 녀석이 아직 다 챙기지도 못한 내 그릇까지 들며 앞서 걸어갔다. 케빈과 덴에게 채 인사도 건네지 않고 걸어 나가는 칼릭스의 큰 보폭을 따라 걷자 마치 허리에 손을 감듯, 남은 한 손으로 등에 손을 가져다댔다. 블리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뒤 돌아 보고 싶었지만,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칼릭스는 굳은 얼굴로, 너무 낮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약 바르러 가자.”





방 안은 무질서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마치 자신의 혼란을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지난 새벽, 칼릭스의 방을 나설 때 들렸던 부서지는 소리들을 증명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 어슬렁거리며 걸음을 옮긴 녀석은 어지럽혀진 방안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 역시 방 안이 더럽다던가, 좀 치우지 그랬어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칼릭스가 어딘가에 앉아 고개를 숙여 상처 난 연약한 뒷목을 드러내주길 기다릴 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플라스틱 파편을 신발로 쓰윽 밀어낸 칼릭스는 책상 서랍 속에서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붕대라던가, 밴드, 익숙한 상표의 연고들이 들어있었다. 그 중의 하나를 꺼내 건넨 녀석은 침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리곤 조아리듯 고개를 숙여 한 손으로 뒷머리를 잡아 흘러내리지 않게 들어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쏟아지는 가느다란 머리카락 속 표백된 듯 창백한 피부 위로 피맺힌 생살이 드러났다. 밤새 굳어 딱지가 된 핏물이 베인, 그 열린 상처를 바라보던 내 표정도 굳었다.

“흉터 되겠다.”

머리카락에 닿지 않도록 주의 하며 손가락에 묻힌 연고를 살살 펴 발랐다. 칼릭스는 아프다는 엄살도 없었다. 대신 묵묵하게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면 말해.”

“아파.”

“…어쩔 수 없어.”

무뚝뚝한 내 대답에 녀석이 웃었다. 칼릭스의 반듯한 이마가 벨트 위로 숙여졌다. 그리곤 길게 목을 빼어 배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 접촉은 너무도 가벼웠지만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넘어졌다는 것 치고는 상처가 크네.”“백 바퀴는 구른 것 같아.”

“…재미없어.”

그 말에 칼릭스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나지막한 숨이 흩어질 때마다 얇은 옷 위로 축축하고 따듯한 습기가 베어들었다. 녀석의 긴 팔이 허리를 둘러 감싸 안았다. 빠져나갈 길을 차단해놓듯이. 하지만 원하면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도록 가볍게. 피부 위로 넓게 연고를 펴 바른 뒤에 손을 둘 곳이 없어 풀어내야하는 가를 고민하는 나를 알기라도 하듯, 녀석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얼핏 본 시계는 수업 시간까지 채 30분도 남아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녀석의 팔뚝에 손을 얹어 잡아당기자 아무런 저항 없이 몸을 구속하던 손이 풀어졌다. 한발자국 뒷걸음 쳐 거리를 두자 칼릭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 녀석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의 작은 부분을 점유하듯, 그 접촉으로 내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듯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자 칼릭스의 손이 힘없이 공중에 멈춰 섰다.

“왜 그랬어.”

그 말에 칼릭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나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냐.”

“무슨 말이야.”

“시치미 떼치마. 블리스와 너, 둘이 싸웠잖아.”

“왜 우리 둘이 싸웠다고 생각하는 건데?”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난처한 화제를 쉽게 꺼내놓았지만, 어떤 언급도 할 수 없었다. 그 반갑지 않은 주제에 대해 그 이상을 얘기하는 것은 내게 한계였다.

“아… 그래. 네 입으로 말하기엔 좀 난처하겠지.”

권태가 담긴, 쓸쓸해 보이는 웃음을 흘리며 칼릭스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사소한 문제였어.”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손으로 제 옷의 끝자락을 잡고는 바람을 일으키듯 장난스레 펄럭였다.

“기숙사 학생 재중 명단 문제로 좀 다툼이 있었어.”

“…….”

“토요일 저녁 같은 경우에는 서로 재중 문제를 확인할 수가 없는데, 하필이면 그 날 어떤 미친 녀석이 사감에게 말도 없이 기숙사를 이탈했어. 게다가 차사고까지 냈고.”

“그래? 그런데 둘 다 과격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네.”

말에 날이 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칼릭스는 입술을 가늘게 당기며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랬지. 좀… 과격했지.”

옷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올려 턱을 가만히 쓸며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네 얘기가 꺼내고 싶더라. 어쩐 일인지 서로 의식적으로 건들이지 않던 얘기를 꺼내고 싶었어. 그 전까지만 해도 블리스와 대화할 일이 거의 없었거든. 적이던 아군이던 대화를 위해선 공통의 화제가 필요하잖아? 특별한 주제를 생각해봤어. 떠오르는 게 하나 있더군. 너와 키스했다고 말했지.”

“…….”

“그랬더니 주먹이 날아오더군.”

칼릭스는 오래된 기억을 돌아보듯, 아무런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 마치 남의 일기를 읽는 듯 건조한 얼굴로. 열이 오르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면서도.

“그 자리에서 서로를 죽일 수도 있었을 거야.”

“칼릭스.”

“그런데, 조이. 미련하단 생각에 둘 다 관뒀지. 그 싸움에서 누가 승리하던 간에 변하는 건 없더라. 네 말대로.”

녀석은 순간 정지한다. 그리고 웃었다.

“넌 끝내 거부할 테니까.”

턱을 쓸던 손으로 양 미간사이를 꾹꾹 누르는 칼릭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지친 얼굴을 드러냈다. 미처 메우지 못한 균열처럼. 하지만 곧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좋아해.”

“…….”

“이 말이 네겐 어떤 의미도 없겠지만.”

어제의 충격으로 인해 그 말은 내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뺨을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게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떠한 색깔도, 향기도 없는 하얀 얼굴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린 그 말, 그 얼굴을 마주하자 생소한 고통에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 전과 마찬가지로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여전히 모르는 채였다.

한참 만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녀석이었다. 칼릭스는 나를 내려다보던 고개를 돌려 깨끗하게 쓸어버려 휑한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저벅거리며 걸음을 옮긴 녀석은 책상 위에 유일하게 올려진 사물함 키를 집어 손가락에 걸었다. 손가락에 어색하게 끼워진 커다란 반지처럼 헐렁거리는 열쇠고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문 앞으로 걸어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교실까지 뛰어가야 할 것 같다.”

그 자리에 굳어있던 나를 돌아본 녀석이 뭐해. 가야지. 입으로만 벙끗거렸다. 녀석은 여전히 멍한 나를 돌아보며 예의 보여주던, 씁쓸함을 베어 문 반쪽짜리 웃음을 지었다.





*





오전 내내 비가 내렸던 탓에 밤은 생명력 넘치는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차갑고, 고요하고, 생기로 가득 차있는 마력 같은 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밤에는 그 자체만을 위해 자신의 작은 부분을 던져 헌신하기를 원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달콤하게 분해되고 싸구려 인생에 생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지는 밤. 그러니까, 이성을 잃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밤.

그런 밤과 나 사이에는 수 없이 많은 간극들이 존재했다. 밤은 방황하게 하지만 내 눈은 머무르길 원하고 밤은 들뜨게 하나 나는 고요함을 지키길 원한다.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어느 순간부터 내게 수없는 자문을 하게 되었다. 똑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내가 원했던 자리에 서 있는가, 나의 생에 질서가 부여되어 있는가를. 지금으로썬 반은 실패하고 반은 성공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나는 안전장치 하나 없는 위태로운 줄 위를 피로에 절은 채 걸어가는 광대가 되었다. 생을 유지하는 힘을 소진해버린, 젖 먹던 힘밖에 남지 않은 광대. 그러니 나는 내게 남은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서라도 맞은편의 땅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서관의 저녁은 선생과 여학생 기숙사가 밀집해있는 탓에 건물의 외부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간간히 멀리서부터 소리가 들려왔는데 벤치에 앉아 있는 몇몇의 무리들로부터 들려오는 것이었다. 소녀들은 가로등 아래 벤치에서 읽던 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녀들을 비추는 유일한 빛인 가로등으로 몰려드는 날벌레는 없었다. 얇은 가디건 아래로 조용히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은 가을답지 않게 매서웠으니까.

귀뚜라미가 귀 울음을 울었다. 가을밤의 우수와 무상, 비애와 전율이라는 단어들을 떠올리게 했다. 질척하게 들러붙는 감성덩어리들.

하지만 나는 가장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자각을 들게 하는 그럴듯한 일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저녁 식사 이후 7시 30분부터 교내에서 시니어의 진로상담을 담당하는 카운슬러인 로렌과의 면담을 가졌다. 로렌과의 면담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인생이란 것은 잔뜩 쌓여있는 문서와도 같다는 것이다. 감정이 배제된 문서를 통해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고 역시 문서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 탁상공론 같지만 그것이 가장 실제적으로 자신의 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망상으로 가득 차는 머리를 털어내며 기둥에 세워뒀던 자전거에 올라탔다. 근래 빗속에서 방치해뒀던 탓에 기어가 연결된 철골구조물이 녹슬어 페달을 밟을 때 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쇠가 긁히는 거친 소리는 비단 나 혼자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봐 장!”

뒤에서 불쑥 내뱉어진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애나가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을 주어 내 옆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애나가 옆에서 달릴 수 있도록 속도를 줄였다. 휘날리는 짙은 금발을 고무줄로 느슨하게 묶어 미처 묶지 못한 곁머리가 바람결에 휘날렸다. 애나가 입을 열었다.

“상담 받았니?”

“어. 너도?”

“응. 나도 지금 끝내고 가는 길이야. 너는 좀… 희망적인 것 같아?”

“그다지.”

“몇 군대 지원할건데?”

“지금으로썬 확실하지 않지만, 확정된 건 11곳. 앞으로 더 늘어나겠지.”

“그래? 근데 바빠?”

“아니.”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듯 흐흥, 콧소리를 낸 애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핸들을 잡고 있던 한 손을 놓으며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럼 벤치에서 수다나 떨까?”

“그러지 뭐.”

우리는 곧 달리던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가로등으로 달려갔다. 오전에 내렸던 비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벤치의 나뭇결 내부에 잔재한 축축한 수분은 앉은 지 한참 지나서야 느낄 수가 있었다. 지면에 발을 대고 앉은 나와 달리 애나는 신발을 신었던 그대로 벤치에 발을 올려 무릎을 팔로 감싸 앉았다. 그리곤 작은 가방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할래?”

“아니.”

“어제 빌려갔던 건 피웠어?”

“피웠지만, 그다지 상쾌하진 않더라.”

한쪽 뺨을 무릎에 기댄 채로 나를 바라보던 애나는 후우, 익숙하게 담배를 내뱉었다. 하얀 얼굴 위로 어렸던 연기의 흐름이 점차 옅어지며 그녀의 살짝 찌푸려진 얼굴이 드러났다.

“내신은 괜찮아?”

“글쎄. 언웨이티드 기준으로 3.81 이었나. 기말 시험 잘 봐야 돼.”

“훌륭한데 뭘. 너 USAMO 명단에도 들어가지 않았나? 그 때 전국에서 500명도 안 뽑았었지? 그리고 너 수학클럽 회장도 했었고.”

“그 명단에서는 거의 꼴찌였고 수학클럽 회장은 한 학기만 했어. 도대체가 하는 일이 없어서 퇴출됐지.”

그 말에 애나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너 한국어도 할 줄 알잖아.”

“이민자가 모국어를 하는건 그다지 플러스가 아니야. 대학 당국이 바보도 아니고.”

“하긴. 그렇게 따지면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대학에 들어갈 수가 없겠다.”

어깨를 떨며 웃은 애나는 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애나가 검지로 담뱃재를 바닥에 털어내는 모습을 지켜보다 오른 발로 비벼 흙과 섞어버리자 그녀가 킥, 하고 웃었다.

“괜찮아. 담뱃재로 유전자 감식까지 할 수 없을걸.”

그 말에 우린 서로 웃었다.

겨울도 아닌데 패딩을 입고 있는 그녀와 달리 나는 얇은 가디건 하나 걸치고 있었다. 추위에 팔을 쓸어 올리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애나가 입을 열였다.

“내 옷 입을래?”

“응. 작겠지만 끼어 입을 순 있겠지.”

“…농담인데.”

한쪽 눈썹을 찡긋 올리며 불만스럽게 말하는 얼굴을 보며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자 애나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필터 가까이에서 타들어가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기 위해 허리를 잔뜩 숙이자 느슨하게 묶여있던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았다. 머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애나가 말했다.

“아아, 난 뭔지 싶어.”

“왜.”

“지각과 결석 때문에 깎인 개인 점수만 해도 엄청나거든. 점수 관리도 별로였고. 아… 왜 내 아버지는 칼리지스쿨을 나온 거야. 레이는 아마 프린스턴 들어갈걸. 그 녀석 아버지 그 학교 출신인데다가 기부한 금액도 엄청났고.”

“마티는 떨어졌잖아.”

“갠 심각한 꼴통이었고.”

그 말에 애나와 나는 킬킬 거리며 웃었다.

“마티가 꼴통이어서 다행이지,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인데 그 얼굴에 공부까지 잘했으면 으….”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얼굴을 찡그렸다. 마티는 레이보다 두 살 위의 형으로 공부와는 사이가 멀었지만 운동을 잘해 특기생으로 뽑힌 학생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생활의 방황으로 운동이나 공부에서 커다란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졸업으로 한 학기만을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말 인기가 많았다. 그와 유일하게 사이가 나쁜 사람을 고르라면 그의 동생인 레이일 정도였다. 그 둘은 유별나게 나쁜 사이도 아니었지만 서로 고운 말을 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 깊은 속사정까진 알 수 없지만 서로를 위해주는 사이는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그리고 애나는 버크셔에서 유일하게 마티와 레이를 모두 사귀어본 여자였다. 마티와 사귀었던 것은 내가 전학을 오기 전의 일로 듣기로는 한 달도 가지 않았던 짧은 연애였다고 했다. 내가 전학을 왔던 당시에 애나는 레이와 사귀고 있었다. 조쉬는 애나가 두 사람 모두와 관계를 맺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이 사귀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일부 녀석들은 애나가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레이라는 소문이 확실하다고 떠들고 다녔다. 레이가 함구하는 바람에 그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진 바 없이 잊혀진 얘기가 되고 말았지만.

차가운 바닥에 열기를 빼앗긴 담배꽁초를 메탈 파우치 안에 집어넣은 애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

다. 그리고 내 무릎을 쿡 찔렀다.

“어디 쓸 생각인데?”

“비밀인데.”

“왜.”

“안 붙을 걸 알면서 넣어보는 거니까.”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시선을 돌려 바닥의 흙을 신발 끝으로 툭툭 쳐냈다.

“뭐 어때. 말해봐.”

“너 먼저 말해봐 그럼.”

“음…. 나는 칼텍, 밴더빌트도 지원할 거야. 붙을 리 없다는 거 알면서도. 뭐 어때, 원서비 날려도 써 보는 거지. 웬만한 주립 대는 다 쓸 거고. 자, 이제 넌?”

“유펜 와튼, MIT 솔란. 뉴욕대 스턴도 쓸 거고. 그 외에도 많지만. 뭐, 꿈이 과하지.”

“역시 비즈니스 스쿨계열이네.”

“아무래도 경영을 전공하면 대우해주니까. 안정적이기도 하고.”

진로에 대해 늘 고민하면서도 난 대학을 진학한 이후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분명한 청사진을 그려 넣고 사회가 내게 허락하는 자리 그 이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위치는 분명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내가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비즈니스라는 길을 택한 것이고, 막연하게나마 경제신문 1페이지 중 구석에 위치한 사진 속 월가의 비즈니스맨들 중에 내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애나도 이러한 주제에 대한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사촌 중에 외무부에 취직한 남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자신의 롤모델이라는 얘기였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단계, 자립을 앞둔 혼란스러운 청춘답게 우리의 주제는 자연스레 경제적 자립에 대한 얘기로 옮겨졌다. 우리가 소유할 것들에 대하여, 또 우리가 감당해야 할 금전적 위기에 대해서도. 그러다 문득 애나는 우스운 생각이 났는지 킬킬거리며 웃었다.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뭘”

“엘린이라고 너 좋아한다고 했던 애.”

“아… 기억나. 개는 왜?”

애나는 끌어안고 있던 오므린 다리를 펴 바닥에 발을 대며 한쪽 팔을 벤치 뒤로 둘렀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어린 악당처럼 개구지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기에 저렇게 눈을 빛내며 뜸을 들이나 싶었다.

“너한테 고백 했었어?”

의외의 말이었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예상하고 있던 얘기이기도 했다. 놀라는 표정도 없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자 흠, 코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연애 경험이 만다보니까 가끔 나에게 와서 상의를 하곤 했는데. 엘린 그 애가 좀 소심하거든.”

“…….”

“언젠가 네가 너무 남자들과만 붙어 다닌다고 게이 아니냐고 절망하던걸.”

우스갯소리를 하듯 악의 없는 얼굴이 말했다. 하지만, 단순한 농담인걸 알면서도 머릿속이 온통 진공 상태에 빠진 것처럼 아득해졌다.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아버린 기분이었다. 꼭 그런 느낌이었다.

귀 울음이 경고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힌 뒤에야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다. 숨이 막혔지만 너무 오랜 시간 정적에 휩싸이지 않도록, 단순한 농담이 어색한 침묵에 휩싸이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하하, 입에서 짧은 호흡을 내뱉으며 나는 가까스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상상이 과한데.”

“응. 나도 좀 어이없긴 했어. 아, 기분 상하라고 얘기한 거 아니야.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그냥 엘린 생각 하는 게 웃기지 않느냐고 말한 거였는데. 혹시 기분 나빠?”

견고하게 포장했다고는 하나, 내 얼굴에 어떤 두려움의 단서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내가 게이처럼 보였다니. 너무… 웃겨서.”

“엘린 개가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서는 다가오는 동성이든 이성이든 모두가 적이라고 나한테 얘기했었거든. 지금 사귀는 애가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인데 개한테도 그러더라. 좀 특이하지?”

여느 수다스런 소녀들처럼 주변의 넘쳐나는 가십을 얘기하는 애나에게 정말 악의는 없었다. 다만, 나의 결함이 그렇게 받아들였을 뿐.

“재밌는 애구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을까, 내가 나도 모르는 단서를 남길까, 그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충동 외에는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

“정말 웃겨.”

애나는 모르겠지만, 이 말에는 나 자신을 향한 적의와 신랄함이 담겨 있었다. 단순한 자극이 되는 한 마디에도 내가 얼마나 펄쩍 뛰고 싶은 심정이 되는지, 딱딱한 등껍질 아래로 숨어 오그라들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무엇이 나 같은 사람, 감동을 배운 적 없는 무감각하고 심약한 소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상을 순회하는 소년을 자극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 한마디면 되었다. 단 한마디.

그 순간, 나는 비겁하게도 그런 다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상을 영유하며, 사람들의 시선에서 나를 가리고 또 가려버릴 것이다. 나를 알아보는 시선이 없도록, 동성과의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도 함께 욕하고, 함께 불쾌해하며 함께 침을 뱉어 버릴 것이라고. 마치 그것이 나의 결함을 가려준다는 듯이.





하지만 가브리엘은 달랐다. 3번가의 세입자 전용 허름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그의 작은 픽업트럭에 앉아 있는 동안 느낀 것은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쾌함도 동정도 없는 평소와 같은 대화였지만 막연하게나마 그런 느낌이 들었다. 비오기 전의 흐린 날씨처럼 공기 중의 밀도가 눅눅하게 차오르는 기분. 그와 나 사이에 예전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 불쑥 끼어든 느낌이었다.

여느 때와 달리 가브리엘의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다. 비단 그의 입술이 피멍이 들고 찢어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흡사 오래되고 가죽이 터진 샌드백처럼 곳곳이 찢겨 있었다. 프린스 조지스 카운티로 로사리오를 찾으러 갔다가 그의 패거리들에게 얻어맞아 생긴 상처라 했다.

살색의 밴드를 붙여놓긴 했지만, 그의 얼굴에 드러난 피멍까지 가릴 순 없었다. 가브리엘은 다쳤던 당시 보다 많이 아물은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보는 사람으로선 안심을 하며 웃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고통에 시간과 관심을 할애하는 대신 주말에는 여전히 도시락을 배달하고, 오전에는 불법 이주민의 자녀들을 돌보는 생활을 했다. 그것이 그의 삶의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듯이.

그리고 그의 관심은 칼릭스와 나에게로 까지 이어졌다. 그는 내가 얘기를 꺼내길 기다리는 듯 했다.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앞에서 투명하게 노출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이 그이기 때문에 두려움은 없었다. 철저한 제 3자이지만, 그는 타인의 결함에 대해 비난하는 류의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를 알게 된, 짧은 그 기간 동안 느꼈던 것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편견에서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나의 결함일 수도 있는 그것에 대해 얘기를 한다면 그는 양손에 든 무거운 짐을 한손으로 옮기고 남은 한 손으로 내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나눠들 것 같았다. 물론 그에게는 짐을 덜어줄 이유가 없고 나 역시 그 얘길 꺼낼 이유가 없지만.

시동이 꺼진 차안에서는 그 흔한 음악 소리조차 없었다. 담배를 피워도 되겠느냐고 물은 그는 상관없다는 내 대답에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여전히 일그러진 낙타가 그려진 그의 담뱃갑. 연기를 창밖으로 뱉어내는 그를 보다 그의 너머에 있는 창백한 아파트의 전경으로 눈을 돌렸다.

창백하고 늙고 부풀어있는 백인 여자가 철골구조가 드러난 잿빛 아파트 사이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유령처럼 지쳐있는 걸음걸이. 이 아파트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식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웃돈을 얹어 다시 방을 세놓기도 하고 불법적인 개인 사업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건 시설의 불량으로 아파트 로비에서 나는 하수구 냄새에 대한 두 번 이상의 건의를 삼가는, 지친 사람들이었다. 정부의 규정으로 주인의 폭리 없는 저렴하고 안정적인 세를 내지만, 그만큼의 불편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브리엘과 나는 그들 중 구호센터의 도움을 필요 하는 일부에게 각자 할당된 도시락을 배달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칼릭스만 돌아오면 바로 다른 지역으로 도시락 배달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 노인네는 여전한가?”

후우, 길게 담배 연기를 창밖으로 뱉어낸 가브리엘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두서없이 꺼낸 얘기에 의아해 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목사 양반.”

“아… 네. 그렇죠 뭐.”

고개를 끄덕이자 가브리엘은 손바닥으로 내 뒷목을 잡아 슬쩍 힘을 주어 누르며 웃었다.

“그게, 너 전 주에 냄새나는 국물 밀폐용기에 담아서 드렸었잖아. 그 노인네가 구호센터 전화해서 네 칭찬을 하더라고.”

“그랬어요? 드실 때는 별 말씀 없으시더니.”

“전에 담당하던 녀석이 그러는데 괴짜라고 하더군. 그 괴짜 노인네는 네가 맘에 들었나봐.”

대답 대신 가만히 웃었다. 필터 가까이 타들어가는 담배를 입술에 비스듬히 끼워 마지막으로 빨아 뱉어낸 그는 담배를 차체에 붙어있는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일은 할 만해?”

“할 만해요. 가브리엘이야 말로 힘들지 않아요?”

“뭐가.”

“야간에는 경호업체서 일하고 주간에는 애들 돌보고 또 주말에는 이렇게 구호센터에서 일 하는 거요.”

“물론 힘들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 웃은 그는 검은색의 진으로 타이트하게 다리를 감싼 바지 주머니에 담뱃갑을 구겨 넣었다.

“그들을 도와주고 나서 느끼는, 착한 일을 했다는 순간의 쾌감으로 그 일을 한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걸. 우리가 하는 것은 부부 싸움이라던가 연인간의 싸움에 제동을 거는 일이 아니잖나.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타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뭐, 힘들지만 정말로 힘든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차체의 천장에 달려있는 햇빛 가리개에 달린 거울로 얼굴의 상처를 살펴보던 그가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봤다. 그의 피부색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새파란 눈동자를 덮은 눈꺼풀이 슬쩍 감았다 뜨였다. 흑인의 금발 만큼이니 이질적이지만 그 보다는 좀 더 우아하고 야만적인 조합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문득 말이 나왔다.

“가브리엘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잠시 가만히 나를 내려다 봤다. 그 파랗고 맑은 큰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난방으로 덮인 자신의 팔뚝을 느리게 쓸던 그가 잠시간의 정적 뒤에 입 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나도 알아.”

껄껄 웃은 그는 주먹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순간적으로 아파트의 입구에 시선을 준 그는 손가락으로 도도독 자동차 핸들을 두들겼다. 그렇게 한참을 입구를 바라봤다. 입구에서는 여전히 아무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입구를 날카롭게 바라보던 눈을 뗀 그가 입을 열었다.

“보통 동양인들과 대화할 때는.”

“…….”

“그런 느낌이 들곤 해.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

머리 옆에서 양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까딱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친절의 과잉일지는 몰라도. 그런 착각을 하게 되지.”

“저도 그래요?”

웃으며 묻자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입안에 사탕을 문 것처럼 혀를 달싹였다.

“넌 보통 대화를 할 때 들어주는 편이냐 아니면 얘기를 하는 편이냐.”

보통 들어준다고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어.”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데요.”

“넌 네 얘기를 전혀 안하잖나.”

대답 대신 웃으며 손으로 볼을 쓰다듬었다. 난감한 얘기였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거의 없었다. 자신과 자신의 일상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재능이 내게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정작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아… 부담 갖지 마라. 지금 당장 네 얘기를 들려 달라는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난 간만에 얘기가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거든.”

“무슨 얘기요?”

“아주 지루한 이야기.”

흠, 코로 웃은 그는 핸들을 두드리던 손을 걷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조금은 건들거리는, 전혀 진지하지 않은 투로.

“지금은 남에게 해코지 하지 않지만 어렸을 때는 꽤 겉멋에 찌들었었거든. 약이나 팔고 남의 집이나 털던 패거리들 속에서 소속감이나 느꼈던 놈팽이였지. 그런 주제에 제대로 살고 있는 인간들이 참으로 한심해 보였어.”

“믿기지 않네요.”

“뭐… 어렸으니까. 그러다 깨달았지. 16년 동안 살아오면서 한 짓이 갱단 짓밖에 없다니.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는가! 하고 말이지. 스키드 로우의 주택가에서 에스코트 사업을 벌이던 남창에게 마약을 팔고 나오는 길이었지. 반쯤 벗고 있던 남자가 내 눈앞에서 코카인을 했는데 늘 일상으로 보이던 것들이 갑자기 눈이 멀 정도로 추하게 느껴지더군. 아주 순식간이었어. 아이는 소년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어른이 되는… 각성의 순간이었다고 해야 하나. 뭐,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내 인생을 새롭게 조명해 보았다. 청소년 시절의 방황 뒤에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깨달았던 운명은.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내가 남들 보다 유일하게 나은 점이 있다면 나는 인생의 목적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는 거지. 그리고 실천할 용기가 있었다는 거다.”

“…….”

“하지만, 반대로 그게 나를 살게 하는 길이더군.”

그 다음에 그가 꺼낸 얘기는 조금 어려운 주제였다.

“20살쯤에 봤던 책이 있어. 짜라투스트라의 재래라는 책이지. 거기서 날 사로잡은 문구가 있는데 아직까지도 기억해. ‘우리의 일은 우리의 운명을 인식하는 것이며 우리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그 쓰라림을 달콤함으로 바꾸고 고통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듯이, 운명과 하나 되는 것이다.’ 라는 문구지.”

“어렵네요.”

“응. 어려운 얘기지. 뭐, 쉽게 말하자면… 네가 평생을 다하여 추구해야할 운명을 찾아내어 그 운명대로 살란 말이지. 사람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은 모두 다 틀리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데는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거지. 결국은 그거야. 무엇이 너를 너로 만드는가를 철저하게 체험하는 것.”

“그래도 어려워요.”

“그렇다면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해보지. 아주 작은, 자신의 작고 안전한 부분만을 꺼내어 살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고통이란 없다. 그들은 늘 회피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시련에 맞서지 않고, 사회의 틀에 자신을 맞추는데다가, 자신의 타고난 속성을 부정하거든. 하지만, 인간이 인내할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란 없어. 견딜 수 없게 느껴질 뿐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예수가 위대한 것은 그가 스스로 그의 운명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예수는 믿지 않지만 존경해. 그가 사람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아픈 이들을 치료해서가 아니야. 그를 존경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는 십자가 처형에 처해지고 숨을 거둘 때까지 몸을 뚫는 창과 쇠가 박힌 채찍질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고 덤덤히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그 전과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면 살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죽음의 공포 까지도 극복해냈다는 거야. 게다가 그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까지 사랑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극기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물론 나는 신을 믿지 않아. 그렇지만 예수의 운명이 단순한 착각에서 비롯된, 자신마저 속아 넘어간 사기극이라 해도 그를 가엾게 여긴다거나 어리석게 여기지 않아. 그는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살다 갔으니까.”

“특이한 논리네요. 하지만 가브리엘의 논리대로 모든 사람이 그런 극단적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 수는 없잖아요.”

“물론 모든 삶이 험난할 수는 없지. 모두가 극적으로 살 필요도 없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인식한다는 것은 바깥세상에서 자신 안으로 시선을 옮기는 거라는 거다. 타인이 가는 길 보다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게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산다는 거지.

운명을 깨닫는 다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상태가 되는 거야. 신이 인간의 역사를 그려나가면서 사용한 제멋대로 휘두르는 체스 말이 아니란 거지. 삶은 일종의 연단의 과정이거든. 철저한 성찰을 통해 자신 안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아야 하고 그 쓰라림을 달콤함으로 바꾸어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전부를 꺼내놓고 사는 게 순리대로 사는 것이며 진정한 삶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다.”

긴 얘기에 목이 타는지 가브리엘은 운전대 옆에 놓인 생수를 길게 들이켰다. 가득 차 있던 물을 반 이상 비워낸 후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쓰윽 닦아냈다.

말을 마치고 난 뒤의 그는 긴 연설을 마치고 난 정치인처럼 뿌듯한 표정을 짓지도, 사진기자를 위한 온화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나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생각을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홍수처럼 쏟아졌던 말들이, 내가 너무 과민해서일지도 모르나 나를 겨냥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물쭈물 거리던 나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마침내 대답했다.

“멋진 말이네요.”

어딘가 좀 멍청하게 들리는 말일지도 모르나, 그 외에 내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이란 없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상태가 되는 것, 자신의 안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 고통을 달콤함으로 바꾸는 것. 자신의 전부를 꺼내놓고 사는 것은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니까 나를 인정하는 것. 자신의 전부를 꺼내놓고 사는 삶은 그 본질이 정당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내가 했던 일들이 정당하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뭔가를 더 얘기하기 원했지만,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 얼굴이 굳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지 않고 필터를 자근자근 치아 끝으로 씹어댈 뿐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중고로 구입한데다가 오랜 사용으로 키패드가 고장 나 숫자조차 잘 눌리지 않는 그의 폰이었다. 성의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그는 몇 번의 무성의한 대답을 한 후 플립을 닫았다. 가브리엘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네.”

“…….”

“애 엄마가 사고로 손을 잃은 사람인데 몇 달 전에 애를 낳았데. 남자애 목욕 시켜주고 있는데 자기도 그렇고 여자도 모두 다 서툴러서 좀 늦었대. 욕실만 치우고 올 거라네.”

“언제 오페어로 취직했데요?”

그 말에 우리 모두 웃었지만, 어쩐지 허탈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껄껄거리며 웃는, 손끝으로 담뱃재를 차체의 재떨이에 털어내는 그를 보며 각종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플라스틱 수납구 위에 한쪽 볼을 댔다. 하루에 한 갑은 피겠지. 그의 단단한 피부를 바늘로 찔러보면 그 내부를 가득 채우던 모든 것이 연기로 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담배 연기를 창밖으로 뱉어냈다. 담배연기에 실린 그의 한숨이 보이는 듯 했다. 입 밖으로 쏟아진 연기의 선명한 흐름이 부옇게 흐려지며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 연기만큼이나 흐린 잿빛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한바탕 비를 쏟아낼 기세였다. 무기력한 눈으로 잿빛하늘이 비치는 창문을 바라보며 나는 혼잣말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있잖아요. 가브리엘.”

“응.”

“나 문득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났어요.”

가브리엘의 손끝에 들린 담배에서 엷은 연기를 뿜어내는 새빨간 불씨를 바라보다 졸린 사람처럼 눈을 감아버렸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쓸었다.

“초등학교 때 뉴햄프셔에서 살았는데 그 쪽은 여름이 되도 볼티모어나 D.C처럼 많이 덥거나하진 않거든요. 여름을 나는 게 괴롭거나 하진 않았지만 심심하긴 했어요. 보통 그맘때 애들은 캠프를 가잖아요. 근데 전 거기서 4년 가까이 사는 동안 여름캠프는 딱 한 번 가봤어요. 가정 형편이 안 좋기도 했고 어린 여동생 돌보느라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스키를 타러 간적이 있긴 했지만, 여동생이 골절을 당한 이후로 가본적도 없고요. 아…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진짜 따분했던 곳이에요. 그래서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도 잘 기억이 안나요.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일 년에 한 번씩 아버지와 단 둘이 화이트산맥 근처의 니페소키 호수로 낚시여행을 가곤 했던 거예요. 호수 근처의 작은 산에서 텐트를 치고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들을 주워서 불을 피워 밤을 밝혔죠. 우리는 거기에 있는 내내 낚시를 했는데 그곳 경치가 정말 아름답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이 피는 곳이라고도 하는데 가을에 안 가봐서 확인해 본적은 없지만. 하여튼 그래요. 캐논 산도 있고 하이킹하기 끝내주는 곳이었죠.

아, 생각해보니 마지막 해는 안 갔네요. 세 번째로 갔을 때 빌어먹을 사건이 있었거든요. 이건 좀 웃기기도 하고 내 흠이 되기도 하는 얘긴데 아버지가 산 속으로 마른 잔가지 주우러 갔을 때 전 그날 잡아놓은 물고기 손질하고 있었어요. 해본답시고 칼을 들어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찌르긴 했는데 도저히 그 다음으로 진도를 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때 옆에서 텐트치고 쉬고 있던 한 남자가 다가와서는 도와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뭐, 아버지 다음으로 내 입술을 훔친 최초의 남자가 되었죠. 빌어먹을. 전 중학교 들어가서 키스를 하기 전까지는 키스가 세상에서 가장 기분 나쁜 행위인줄 알고 살았어요. 이런, 웃지 말아요.”

눈을 떴을 때 가브리엘은 핸들 위에 두 팔을 괴고 어깨를 떨며 웃고 있었다. 손끝으로 고정하고 있던 담배 끝의 높게 쌓인 재를 떨구어 낼 생각도 잊은 채. 핸들 위에 괴고 있던 팔에 턱을 얹어 몸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다행이 키스에서 끝이 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생각할수록 분해요. 근데 웃긴 건.”

“…….”

“그 이후로 남자와 키스해본 일이 여러 번 있어요.”

그의 얼굴을 살폈을 때,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느슨하게 구부러져 있던 그의 허리가 조금씩 뻣뻣해지며 허리를 세웠다. 그의 상체가 틀어졌다. 그는 완전히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런 얘길 왜 하나 싶으시죠.”

“…….”

“저도 잘 몰라요.”

“…….”

“내가 게이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몰라요. 그런데.”

“…….”

“내가 떳떳하지 않다는 것만은 알아요. 그러니까 가브리엘.”

가브리엘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타버린 재를 물고 있는 것 같은 쓴 웃음.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의 눈에 어린 안타까움까지도, 섬세한 인물화를 품평하듯 나는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손 데겠어요.”

필터를 넘어 그의 손 가까이 타들어는 매캐한 연기를 풍기는 담배를 지적하자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쌓여있던 담배 위로 태우던 담배를 지지자 연기가 사그라졌다. 열기가 사라진, 싸늘해진 담배꽁초를 바라보다 시선을 들었다.

때마침, 가브리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입구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키에 비해 너무도 낮은 회색의 아가리를 벌린 입구에서 걸음을 옮기는 칼릭스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녀석은 우리를 향해 걸었다. 그러다 잠시 멈춘다.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한 손을 빼어 얼굴을 문지른다.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칼릭스의 낮은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정지해있던 그 긴 다리로 노를 저어 강을 가르듯 발걸음을 옮긴다. 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을 높이는 녀석에 맞추어 시선을 내렸다. 땀이 맺힌 손바닥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나 자신을 인정하라는 그런 말.”

“…….”

“내게 하지 말아줘요.”





아버지는 영어를 잘한다. 원한다면 정말 미국인처럼 말할 수 있다. 미국식 관용어와 제스추어를 사용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미국인처럼 웃지 않고 미국인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그가 택하는 방식은 대부분이 초연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유년시절 뚱뚱한 백인 녀석에게 두들겨 맞은 나와 함께 그 녀석의 부모의 집을 찾았을 때도,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의 동료가 집에 찾아왔던 날, 그가 자신의 주머니에 도자기로 만들어진 조그만 장식품을 넣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것들은 아버지가 자신의 권리를 찾는데 소극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것이 백인들과의 대면이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취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는 가끔 소년처럼 보이게 만드는 말쑥한 얼굴과 뻣뻣하고 단단한 직모를 가지런히 빗어 올린, 약간은 반들거리는 정결한 머리카락. 그를 잘생겨 보이게 만드는 높고 곧은 코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는 그의 코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습관적으로 콧잔등에 손가락을 얹는다던가 거울을 볼 때 그의 시선이 코를 향해 가장 먼저 가는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납작한 코를 가진, 미국으로 건너온 아시아의 남자들을 바라보는 창백한 그들에게서 그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켜세우는 일종의 방패가 되었다. 그것은 슬픈 것이었다.

일부의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외양은 미국에서 성공한 이민자의 표상이 되었다. 그는 한인교회의 목사와 신도의 도움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불굴의 정신으로 와습, 그리고 유태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 안에는 아버지가 기울였던 노력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어떤 위협으로 보이지 않도록 그는 그의 가정을 손에 들린 가위로 가지를 치고 다듬어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다. 그리고 그의 백인 친구들에게도.

하지만, 아버지가 그를 둘러싼 덩치 큰 백인 남자들과 진정으로 어울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정에서 오는 친구들에 대한 걱정과 편안함. 그 모든 것들을 누리며 그들의 술친구가 되어 얼굴을 붉히며 농담을 하고, 당구를 치고, 야구 경기를 보았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우리 부자는 대화라는 측면에서 거의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으므로.

나의 완벽하지 않은 한국어와 어머니의 완벽하지 못한 영어로 인해 깊은 대화를 하지 못해 오는 좌절감에 대해 그의 언어는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없는 자리에서 그의 백인 친구에게 나와 지은의 얘기를 늘어놓았을 수도 있다. 그의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자녀들에 대해. 제 2의 분신인 나에 대해, 그의 미래의 방패가 되어줄 우리에 대해. 우리 앞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을 드러내면서.

그래서 나는 가끔씩 상상하곤 했다. 그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분명하게 그려낼 수가 없지만 불쑥, 선명한 이미지로 나타나 내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고 사라진다. 녹슨 칼과 방패를 든 지명(知命)의 전사. 그의 상처받은 얼굴, 축 처진 어깨는 너무나 지쳐있다. 그가 이뤄온 완벽한 전투들 끝에 찾아온 것은 포상이 아닌 독주이다. 그는 너무나 지쳐서 저항할 힘이 없다. 그는 그것을 음미한다. 생이 자신을 배반하고 내린 보상에 대해, 고통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나는 아버지의 독(毒)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보이지 않는 신뢰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외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고통으로 둥글게 몸을 만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이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무릎에는 고양이가 배를 깔고 누워있었다. 털이 하얗고 긴 탓에 아버지의 검은 바지엔 고양이의 털이 듬성듬성 묻어났다. 천천히 고양이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아버지는 눈이 감긴 고양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바지를 제 털 인양 붉은 혀로 그루밍하는 것을 지켜보다 포크를 들고 있던 남은 손으로 예쁘게 깎아낸 사과를 찍었다.

“비가 많이 오네.”

창밖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어머니가 손에 들고 있던 과도를 탁자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밖은 어둠에 잠겨 있었기에 비 내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쏟아지는 소리는 온 집안에 울렸다.

“내일 당신 출장 가는데 어떻게 해요.”

“이정도 비는 괜찮아.”

힐끗 창밖에 눈길을 준 아버지는 리모컨으로 TV의 볼륨을 높였다. 채널은 뉴스방송이었다. 재미도 없는 뉴스를 가족이 일주일 중 유일하게 모인 이 시간에 시청해야하는 것에 지은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TV는 우리 가족의 모든 대화를 대신하듯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말리부에서 일어난 산불로 인해 주택 11채가 불에 타고 주민 2명이 질식사 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불에 탄 거대한 저택과 혼란스러운 표정의 그을린 주민들이 카메라에 담긴다.

말리부는 미국 내에서 부유한 유명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이번의 산불로 운명을 달리한 사람 중에는 유명한 언론인도 포함되어 있다. 그에 대한 짧은 영상과 사진이 나오자 어머니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진다.

다음 뉴스는 냉전시대 방사선과 독극물로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계획의 차질에 대한 것이었다. 정부 비밀문서에 접근할 수 없는데다가 자신들이 핵무기 공장에서 일한 기록조차 찾을 수 없어 노출 피해자들에 대한 대책이 사실상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노동자들의 각종 합병증과 암, 피부병등에 시달려온 병원 기록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노동부의 내부 문건에 대한 기록 역시도. 엄청난 병원비에 시달리다 영혼까지 바싹 매마른듯 보이는 늙은 노부부가 인터뷰를 한다. 그들의 인터뷰 사이사이 낡은 영수증과 메마른 난이 화면에 잡힌다.

그 다음 뉴스는 동성결혼 헌법 수정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였다. 작년의 헌법 수정 가결 판결 이후 대부분의 유권자들의 관심이 이민법과 오르는 기름값에 대한 헌법 수정 결의안에 쏠렸으며 이에 대해 동성애자 인권 권리 단체에서 이 차별적 헌법 수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뉴스는 과거 미국 내에서 일어난 동성 결혼에 관한 헌법 수정의 승인과 가결에 대한 이야기를 내보냈다. 2003년, 매사추세츠주의 최고재판소가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결정을 내렸고 그 다음 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성커플에 대한 결혼증서를 발행했다는 것이었다.

자료 화면으로 나온 젊은 남성 커플이 예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여과 없이 화면에 잡혔다. 그 둘은 인터뷰를 하며 즐거운 표정으로 키스를 했다. 그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여성스러움이 가미된 전형적인 게이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하고 수수한 남자들이었다.

“으 징그러.”

안고 있던 쿠션을 팡팡 내리치며 지은이 얼굴을 찌푸렸다. 말세군. 아버지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나를 향해 혀를 차는 것 같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부러 포크를 떨어트려 그것을 찾는 양 허리를 숙여 바닥을 더듬었다.

“저 사람들은 부끄럽지도 않나.”

포크가 소파 밑으로 들어갔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사과조각이 포크에 꽂혀져 있던 터라 찾지 못한다면 곰팡이가 필 것이 분명했기에 꺼내놓아야 했다. 소파에 걸쳤던 엉덩이를 떼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바닥과 소파의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지 부모 얼굴에 침 뱉는지도 모르고. 쯧쯧.”

아버지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물론, 강도를 저지르는 위험한 십대 소년들을 보며 한탄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 속에 혐오와 경멸을 담았다면 모를까. 그 순간, 뇌 속에 찐득찐득한 뜨거운 검은 액체가 끊임없이 주입되는 기분이었다. 불쾌한 감각이 온 몸을 감쌌다.

가까스로 포크를 잡아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다행히 화면은 다음 뉴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나 나의 숨이 거칠어지지는 않았나, 실마리를 남길만한 부자연스런 행동을 남기지는 않았나. 또 다시 무표정을 가장하며 지루한 듯 새 포크로 바꾸어 사과를 찍어 입안에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억눌린 숨소리가 차분히 뱉어졌다. 아버지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나는 부러 재미도 없는 뉴스에만 집중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지은은 빠른 속도로 답장을 보내며 웃는다. 어머니는 새로운 과일을 깎았고 아버지는 뉴스가 끝난 채널을 돌렸다. 우리 가족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가끔씩 서로에 대해 성의 없는 질문을 해보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짧다.

비는 여전히 조금도 제 분노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온 집안을 울리는 빗소리. 무자비하게 천정을 뚫고 들어올 기세로 비가 퍼부었다. 물에 잠기는 세상 위로 유일하게 떠오른 노아의 방주 속에 갇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속에 갇힌 사람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이 우연히 생의 마지막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가족 안에 있지만, 한없이 고독하기만 한 낯선 이 기분. 우두커니 어둠 속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낯설기만 한 이 기분.

그 때, 촌스러운 새 소리가 현관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모두가 물에 휩쓸려버려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남아있지 않은데, 유령처럼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지은이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 쏴아아 좀 전보다 큰 빗소리가 문 밖에서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안녕.”

“어, 웬일이야?”

빗속을 걸어 왔는지 전신이 젖은 채로 현관을 물로 적실까 문 밖에 서서 웃고 있었다. 물에 젖은 손으로 역시 젖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월요일에 제출할 페이퍼 때문에.”

“우산 없었어?”

“응.”

“전화하지. 그럼 지우가 갔을 텐데.”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인 녀석은 지은의 어깨 너머로 방안을 들여다봤다.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에게 꾸벅 인사하고 조금 더 눈동자를 굴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층의 욕실로 빠르게 걸어가 커다란 타월을 들고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물에 젖은 몸에서 김이 나는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까치발을 들고 목욕을 마친 커다란 개를 닦는 것처럼 힘주어 물기를 닦아냈다. 녀석의 몸이 추위에 오슬오슬 떨리고 있었다. 약한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손가락 끝이 절여왔다.

너 뭐야. 녀석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이자 블리스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녀석이 크게 심호흡했다.

“왜 전화 안 받아.”

“뭐?”

“오늘 밤에 같이 정리하기로 하구선.”

전화기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다. 평소 습관대로 진동으로 돌려놓긴 했으나, 블리스로 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녀석을 가만히 올려다보자 도톰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마, 월요일까지 제출 하는 거 잊었어?”

“…….”

“뭐야. 정말 잊었어?”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던 손이 정지했다. 블리스의 손바닥이 손목을 감싸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녀석은 당황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아…니. 이제 기억났어.”

가까스로 당황을 숨기며 대답했지만, 무슨 생각으로 이 시간에 블리스가 찾아왔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촘촘히 젖어 들어간 타월을 넘겨주고는 나는 뒤로 물러나 멈칫거리며 녀석에게 사과를 했다. 물론, 우리에게 못 다한 숙제란 없었다. 함께 공동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도 없었고 서로 간에 겹치는 수업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스의 의심스럽고 혼란스런 행동을 묵인했다.

하지만 블리스의 다음 행동은 녀석이 나의 집을 불쑥 찾아왔던 것처럼 예상 밖의 일이었다.

“숙제 때문에, 지우가 밤에 찾아오기로 했었거든요. 근데 연락이 안 되서.”

“…….”

“집에 우산도 우비도 없어서 뛰어오긴 했는데… 집에 자료가 다 있어서. 젖을 까봐 일부러 두고 왔거든요.”

블리스는 어설프게 웃었다. 하지만 충분히 신뢰를 줄 수 있는 만큼 웃었다.

“블리스. 춥겠다. 일단 들어와 있어.”

어느새 다가온 엄마가 팔짱을 끼며 현관 앞으로 걸어왔다. 몇 달 만에 이곳을 방문한 블리스의 행동에 엄마는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안도까지도. 내심 아들의 잘난 친구가 이곳을 방문하기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목소리엔 반가움마저 어려 있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보던 내게 엄마의 눈길이 향했다. 작은 손을 내밀어 내 어깨를 떠밀었다.

“지우 뭐하니. 숙제하러 갈 준비 안하고.”

“아니에요. 저희 집에 가서 하기만 하면 되요. 자료를 다 제가 가져갔으니까.”

기막혀하는 나를 바라보며, 블리스는 그녀를 만류했다. 맥박이 빠르게 뛰는 사람처럼 톤이 높아지고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안도감을 주려 웃었다. 그 말과 그 행동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마는 종용하기 위해 눈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뭐하니. 그녀가 난감한 듯 웃었다.

다시 녀석을 올려다봤을 때 차가운 손이 차마 내 손에 깍지를 끼지 못하고 난방의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차가운 물비린내가 나는 블리스의 얼어있는 손가락. 으슬으슬 떨리는 몸, 억눌린 숨소리, 미처 숨기지 못한 갈망을 드러낸 젖은 눈까지. 녀석은 또 이런 식으로 사랑을 들켰다.

녀석은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절박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를 잡아당겼다.

“…가자.”





작은 라이트가 달린 자전거는 페달을 밟을 때마다 반짝이는 빛을 냈다. 가로등이 켜진 자전거 도로 위에서 그 빛은 의미를 잃었지만, 그 모습은 마치 반딧불이 옅은 빛으로 밤을 밝히듯 어딘가 애상적인 느낌이 들었다.

찌르릉, 장애물 없이 훤히 뚫린 자전거 도로를 달리며 블리스는 아무 의미 없이 벨을 눌러댔다. 녀석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페달을 밟으며 어둔 밤 속으로 달려갈 뿐이었다. 블리스의 허리를 감고 있던 한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몸서리치게 차가운 비가 손바닥을 타고 우비에 덮여있던 팔목을 적셨다.

“너 대범해 졌구나.”

손바닥에 고이는 비를 움켜잡듯 주먹을 쥐었다. 끊임없이 얇은 비닐에 감싸인 몸을 두들기는 비의 감각이 선명했다. 블리스의 허리를 감았다. 얇은 우비를 통해 느껴지는 녀석의 몸은 빗물에 노출된 변온동물처럼 차가웠다.

“응.”

“그리고 미쳤구나.”

“하하, 응.”

블리스가 웃는 느낌이 닿아있는 가슴을 통해 전해졌다. 웃음소리는 날카로운 빗소리에 깎여 희미하게 들려왔다.

“감기 걸리겠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게 누가 오랬냐.”

퉁명스런 말에 블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 없이 빗소리만 가득한 도로 위에 찌르릉, 자전거 벨을 울렸다.

“그… 좀 더…….”

“뭐? 잘 안 들려.”

“그냥 좀 더워서.”

좀 전보다 큰 목소리로 블리스는 분명히 들릴 수 있도록 말했다. 단지 몸의 열을 식히기 위해 비를 맞기에는 가을의 밤비는 매섭고 싸늘했다. 블리스의 몸에 닿아있는 나의 몸 어느 곳에도 녀석의 열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피부의 얇은 표피를 한 겹 벗겨내면, 녀석의 몸 안에는 식힐 수 없는 열기가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열기의 이유를 알고 있었고.

웃었다. 한숨에 섞인 웃음이 실없지만.

“너 때매 나까지 비에 젖고. 이게 뭐냐.”

우비의 여밈 사이사이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 왔다. 차가운 물이 몸에 닿던 어느 순간부터 젖는 것을 의식하는 것도 잊어버렸지만, 으슬으슬 떨리는 한기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녀석의 단단하고 넓은 등에 볼을 가져다 대었다. 핸들을 꽉 쥐고 있던 녀석의 오른손이 주저하듯 허리를 감은 내 손을 잡았다. 미끄러운 빗물을 사이에 두고 꼭 쥐어졌다. 지난 늦봄의 어느 날처럼, 자신을 꽉 끌어안아 달라는 듯이. 저항하는 대신 허리를 꼭 껴안자 녀석의 숨이 편안해졌다. 이런 식의 접촉이 왜 이렇게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지, 삭막하게 바라진 유년의 기억을 훑는 것만큼이나 애수 어렸다.

도로 위에는 비바람에 떨어진 붉은 나뭇잎사귀가 물에 젖어 반짝거렸다. 붉은 단풍, 그리고 가로등의 주황빛이 어린 도로는 붉은색의 유화물감을 어지럽게 뿌려놓은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버린 듯이.

한참을 달려 도착한 녀석의 집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그 안에 사람의 온기 따윈 없다는 듯이 적막했다. 차고로 들어서 불을 켰을 때,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자전거를 차고에 세운 후, 블리스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물기를 짜냈다. 블리스의 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 바닥에 흥건히 고이는 물웅덩이를 응시했다.

“부모님은.”

“자선행사에 가셨어. 일주일 뒤에 돌아오시고.”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쓰다듬었다. 소름이 돋는 기분에 팔짱을 꼈다. 블리스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발로 슬쩍 찼다.

“뭐해. 들어가자.”

주저하는 내 등을 손바닥으로 밀어 차고 밖으로 내보낸 후, 스위치를 눌러 차고를 닫았다. 차고 밖으로 나온 사이에도 비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온통 어둠뿐인 정원으로 걸어가면서도 블리스는 내 등을 향해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젖은 티셔츠를 말아 목에 건 채로 현관의 문을 열자 짙은 오렌지 빛의 조명이 머리 위에서 빛났다. 뒤돌아보며 나를 내려다보는 블리스의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이 어렸다. 판화처럼 음영이 뚜렷한, 붉은 그늘진 얼굴이 말했다.

“춥지?”

대답대신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에게 우비를 건넸다.

“마실 것 줄까?”

“응. 우유 데워서.”

그 말에 녀석은 작게 웃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불을 켜자 리놀륨 바닥이 창백하게 반짝거렸다. 한때는 너무도 익숙했던 것들이었다. 그 위로 물을 뿌리며 카펫을 피해 부엌으로 걸어가는 블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피곤함에 소파에 몸을 묻었다. 냉장고를 여는 소리, 우유를 따르는 소리, 가스레인지를 켜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그리고 완벽한 적막 까지도. 받침도 없이 김이 나는 우유를 잔에 담아온 블리스가 건네준 따듯한 우유에 입김을 불자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우유를 홀짝이는 동안 블리스는 샤워를 했다. 녀석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따듯한 물의 증기가 눈앞에서 떠오르는 듯 했다. 공기 중에 엉겨 붙는 축축한 수분덩어리들이 블리스를 감싸면 간신히 차가워진 몸에 다시 열이 오르겠지. 우리 간에 생겨난 어색함이 성적 긴장감에서 초래된 것임을 모르는바 아니었다. 눈을 감고 블리스의 순간의 충동이 초래할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변할 건 없었다. 아무 것도.

젖은 샌들을 벗어 소파 밑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던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정원이 보이는, 벽 한 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창가로 걸어갔다. 차가운 유리벽에 굳게 닫힌 욕실의 문이 비쳤다.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발언저리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자 유리벽에 블리스의 모습이 비쳤다. 커다란 타월을 목에 걸고 느슨하게 달라붙는 검정 브리프만을 입은 채였다.

욕실 앞에 서서 돌쩌귀에 손을 기댄 채로 녀석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성큼 거리며 그 긴 다리로 노를 저어오듯 내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샤워할래?”

어느새 차가워진, 따듯했던 기억을 잃은 물이 볼 위에 번졌다.

“집에서 했어.”

“추울까봐 물어 본거야.”

“이젠 그다지 안 추워.”

녀석의 눈을 마주하기도 어색하고 블리스의 벗은 상채를 보기도 민망했기에 고개를 돌렸다. 볼에 닿아있던 물기를 손등으로 훔치며 녀석에게서 등을 돌리려했다. 하지만, 녀석은 물러섬을 예상했다는 듯이 허리를 둘러 안았다.

“단 둘이네.”

입술을 질끈 물었다. 어색하게 굳어진 내 얼굴에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이런 식의 유희는 달갑지 않았다.

“불안해?”

“아니.”

단호한 내 말에 블리스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호흡이 거친데.”

“놀리지 마.”

“너 살짝 섰다.”

블리스의 다리가 사타구니 사이를 비비듯 눌렀다. 말문이 막혔다.

“쉬이.”

“…….”

“화내지 마.”

가슴을 밀어내려는 내 손을 잡아채며 녀석이 조용히 속삭였다. 블리스는 나의 분노에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일그러진 내 얼굴을 예상했다는 듯이 가만히 바라봤다. 입술을 즈려문 나를 바라보다 블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나의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맞닿게 했다.

“이젠 사랑한다는 말 하는 것도 지겨워.”

슬쩍, 내가 놀라지 않도록 아주 슬쩍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떼며 녀석이 말했다. 물기도 없이 건조하게 닿은 메마른 촉감이었지만 무시할만한 촉감도 아니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서로의 코끝이 닿았다.

“그랬냐? 듣는 나도 지겨웠는데.”

우스운 말도 아닌데 우리 둘 다 그 말에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탈하기만 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블리스의 손을 풀어내려 할 때, 블리스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사랑해.”

그 말에 나는 그저 멀거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바짝 마르는 입에 마른 침을 삼키며 녀석의 눈에 비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블리스의 검은 동공 속의 나는 너무도 작아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럽게 해서 미안해.”

자신의 볼을 나의 볼과 맞닿게 하며 녀석은 허리를 감았던 손에 힘을 주었다.

“계속 널 사랑한다 해서 미안해. 그런데. 노력해봤는데 안되더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지더라. 널 보면… 뱃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

“너한테 어떤 감동을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

“그냥 그렇다고.”

블리스는 허리에 감았던 팔을 들어 등을 감싸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묻듯 내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옅게 흩어지는 따듯한 숨결이 흩어질 때마다 내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굴복하지 않는 심장. 로맨스를 믿지 않는 심장이 얼마든지 와해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는 듯이.

손을 들어 블리스의 등을 안았다. 어린 아이를 타이르듯 손바닥으로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서로의 혼란을 매만지듯이, 환한 빛 앞에 드러난 서로의 질문을 읽어내듯이.

“가끔 궁금하지 않아?”

손 안에 감기는 블리스의 열기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내 인생의 어디쯤에 서 있는 건지.”

“…….”

“매 순간마다 우리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 미래가 바뀐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디쯤에 서있는 건지. 또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지를 말이야. 내 생각에 지금의 우리는 북경에서 날갯짓을 하는 작은 나비인 것 같아.”

블리스는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돌려 목덜미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발끝까지 간지러움이 몰려왔다. 거부하기 위해 몸을 떨어트리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네 식대로 얘기하자면.”

“…….”

“내게 최초의 날갯짓은 널 좋아한다고 느꼈던 그 때부터인 것 같아. 뭐, 지금쯤 뉴욕 대기 위의 허리케인이 됐으려나.”

녀석은 힘주어 안았던 손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몸을 뒤로 물러 팔짱을 꼈다. 소름이 돋는 팔을 쓸며 거실의 벽에 붙어있는 좌종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의 시침은 어느새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녀석과 나 사이에 긴장의 흐름이 보일 것만 같아서, 그 어색함이 싫어서 녀석의 눈을 피해 등을 돌렸다. 하지만 채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녀석이 뒤에서 안아왔다.

“잘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면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자.”

“…….”

“기분 좋게 해줄게.”

너무도 긴장해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수많은 생각들일 떠올랐다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대로 암전되어 먹먹해진 머릿속에서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녀석의 뜨거운 손이 맨살을 쓰다듬으며 슬쩍 유두를 건들이자 숨이 터져 나왔다.

“잠깐, 블리스 이러….”

손끝이 유두를 비틀었다.

“하지마.”

“우리 둘 뿐이잖아. 그러니까.”

“블리스 잠깐만.”

블리스의 팔을 내리 눌렀지만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덜미에 입맞춤을 하며 녀석의 한 손이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었다. 갑작스런 애무에 당황하는 나완 달리 녀석은 너무도 덤덤했다.

“잠깐, 잠깐 블리스.”

흘러내리지 않도록 묶어놓은 갈색의 끈을 풀어내며 느슨해진 바지의 여밈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쉬워도 이렇게 쉬울 순 없었다.

“기분 좋을 거야.”

“…….”

“복잡한 생각만 하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간 손이 힘들이지 않고 간신히 골반에 걸쳐져 있던 바지를 내렸다. 허벅지에 녀석의 단단한 다리가 닿았다. 마치 옥죄듯이 녀석의 팔이 가슴을 둘러 안았다. 하지만 펄쩍 뛰어오르지 않도록 부드러움을 유지하며, 마치 희롱하듯이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몸을 쓸어내리는 대로 바들바들 떨어대는 우스운 내 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잇!”

녀석의 따듯한 숨이 귀를 온통 먹어버렸다. 밀려오는 간지러움에 도리질을 치는데도 귀를 감싼 따듯한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움츠리며 허리를 숙이자 마치 위에서 내리누르듯 녀석의 가슴이 등을 압박했다. 하지마, 하지말라니깐. 탄성처럼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갔다.

엉거주춤하게 숙인 허리가 눌려지며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엉덩이의 둔덕 사이에 닿은 단단한 감촉에 온 정신이 선득해졌다. 노골적인 감각에서 벗어나려 무릎걸음으로 움직이자 허리를 강하게 감싸 자신의 곁으로 당겼다. 브리프 겉을 매만지는 손의 거친 움직임에, 귀를 감싼 젖은 입술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더운 한숨이 절로 났다.

브리프를 살짝 끌러낸 녀석은 손에 침을 뱉었다. 침에 젖은 손으로 반쯤 발기되어 있던 페니스를 잡아 미끄러트렸다. 절로 숨이 멈췄다. 끈적끈적하게 마찰하는 굳은살 베긴 커다란 손안에 갇힌 페니스는 이미 반쯤 발기되어있는 상태였다.

녀석의 손이 선단의 갈라진 틈새를 꾸욱 누르자 극심한 간지러움에 허벅지 근육이 단단해졌다. 하지마, 하지말라니까. 억눌러지는 신음이 나로서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리고 녀석도 알고 있었다. 손안에서 마찰되는 사이 끈적끈적해지고 뜨거워지는 녀석의 타액에 내가 얼마나 젖어 가는지를.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문제는 내게 있었다. 끊임없이 부정하면서도 어느 한편으로 그런 감각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녀석의 행동에 힘을 실어주는 것일 테니까. 움츠러드는 몸과 발개지는 얼굴, 한숨 같은 신음이 녀석의 질문에 대응하는 즉각적인 대답이라는 것을. 그러니 문제의 진짜 원인은 내게 있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끈적한 포말을 만들어가던 녀석의 타액이 말라 블리스의 손안에서 거칠게 비벼졌다. 그 단단하고 거친 감촉에 움찔 떨어대는 내 어깨에 입을 맞추며 녀석은 가만가만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손안의 감촉과 은밀한 흥분을 음미하듯이.

다시 한 번 침을 뱉어 주먹을 쥐듯 손가락을 비벼 고르게 펴 바른 후 녀석은 부푼 페니스를 미끄럽게 비볐다. 마치 똬리를 뱀의 피부 속에서 비벼지는 것처럼, 선득한 쾌감이었다. 눈을 감고 흥분을 견디며 아랫입술을 물자 녀석의 손바닥이 페니스와 고환을 지나 회음부를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아주 느리게, 젖어있는 손바닥 전체로 힘을 주어 마찰하다 빠르게 열이 날 정도로 강하게 비벼댔다. 마치 내가 안달 나 울부짖기를 바란다는 듯이.

“읏, 흐윽.”

울음을 토해내듯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숙이자 녀석의 단단한 가슴이 같이 접혀졌다. 그대로 천천히 밀어내며 나의 이마가 차가운 바닥에 닿도록 했다. 그 차가움으로 인해 이 순간이 꿈이 아님을, 분명한 현실임을 자각하도록.

회음부를 쓰다듬던 타액에 젖은 손이 미끄럽게 둔부 사이로 올라왔다. 녀석의 손가락이 애널 위에서 빙글 돌며 마치 당장이라도 집어넣을 듯이 슬쩍슬쩍 파고들었다. 그 간지러움에 정신없이 손을 뒤로 뻗어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

“좋아?”

“으으… 으…. 아냐.”

도리질을 칠 때마다 축축하게 습기가 어린 리놀륨바닥에 얼굴이 쓸렸다. 민감해지는 몸 때문에 목소리가 얇아지려해서 입술을 물고는 코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장난을 치듯 회음부와 애널 사이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비벼대자 참을 수가 없어 허리를 휘었다. 녀석이 힘을 주어 잡아당긴 티셔츠가 몸 위로 밀려났다. 몸이 뒤집혀 차가운 리놀륨 바닥에 등이 닿았다. 발목을 잡아 올려 벌리며 그 밑으로 들어오자 허벅지 뒤의 맨 살에 닿은 녀석의 단단한 허벅지가 마치 날 선 검처럼 피부를 날카롭게 자극했다.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젓자 턱이 잡혔다. 축축한 혀가 턱에서 미끄러져 아랫입술을 핥았다. 점막을 물고 깨물며 부드럽게 씹어댔다. 부드럽게 녹여버릴 것처럼, 거칠게 브리프를 벗겨내는 아래와는 달리 키스는 섬세하기만 했다.

숨을 쉴 때마다 불규칙하고 뜨거운 블리스의 숨이 입술위로 퍼졌다. 뒷머리가 옭아매지며 뒤로 당겨졌다. 목이 젖혀졌다. 혓바닥 전체를 이용해 느리게 핥아 올렸다. 녀석이 숨을 쉴 때마다 그 더운 숨이 온 몸 전체를 뒤덮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페니스를 받아내게 할 것처럼 애널 주위를 애무했다. 몽울진 주름을 꾸욱 눌러 펴지게 만들며 희롱했다.

“네 달 만인가.”

“흐으….”

“여기 들어가는 게.”

“아으으!”

그대로, 손가락이 푸욱 비집고 들어왔다. 급작스런 행동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며 절로 힘이 주어졌다. 으으으, 절로 신음이 나왔다. 갑작스럽게 들어오기에는 아직 마르고 뜨거웠고 아팠다. 녀석의 손가락을 끊어버릴 듯이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보이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지만 네 개의 손가락이 회음부를 쓰다듬는 것을 보아 엄지손가락인 듯 했다.

쑤욱 빠지는가 싶더니 기억자로 구부려진 손가락이 느리게 내부를 긁었다. 숨을 참으며 녀석의 어깨를 짜내듯 힘주어 잡았다.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아니야, 이건 아닌 것 같애. 속절없이 말을 내뱉는 사이에도 녀석은 쉬지 않았다.

한 손으로 몸을 일으키려 버둥대는 나를 내리 누르며 몸을 낮추었다. 녀석의 입술 안에 고환이 말려들어가고 두 번째 손가락이 애널 안으로 들어왔다. 좀 전처럼 엄지손가락이었다.

“아파, 블리스 아파!”

뭉글하게 혓바닥 안에 머금어진 페니스의 쾌감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들어온 녀석의 굵은 엄지는 아프기만 했다. 우는 소리처럼 쏟아지는 거친 숨이 따듯하게 빨아들여지는 입안의 압박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빙글 돌려지는 두 개의 손가락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울고 싶었다.

“학! 아아… 그, 그만해.”

두 개의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내부를 벌리듯 좌우로 당겼다. 녀석의 입이 회음부로 미끄러져 강하게 빨아들였다. 강하게 벌려지는 애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발버둥치는 다리를 옆구리에 끼워 넣고는 허리를 수직으로 세워 올렸다.

손바닥이 엉덩이 골 사이를 벌리자 엄지손가락이 애널의 좁은 입구를 함께 벌렸다. 마치 찬바람이 여린 점막과 마주 닿는 기분에 숨을 멈췄다. 서서히 느린 숨을 몰아쉬는 녀석의 온 몸이 흥분해있다는 걸, 위험해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새빨갛다.”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심장이 절였다. 무심한듯, 하지만 노골적인 시선에 머리에 열이 올랐다.

“보,보지마.”

“벌렁…거려.”

“미, 미친!”

허리를 움직이려 흔들자 녀석의 손아귀가 더욱더 더 단단하게 엉덩이를 감쌌다. 엄지손가락 중 하나가 쑤욱,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손가락이 힘을 주어 내벽을 누르자 절로 얇은 신음이 새어나갔다.

“그으…만 해애.”

손가락으로 꾸욱꾸욱 눌러대며 녀석은 엉덩이에서 시작해 사타구니사이로 길게 혀로 쓸어 올렸다. 집요하리만치 괴로운 자극이었다. 사타구니 사이의 깊게 갈라진 골을 핥던 입술이 조금씩, 입술을 가볍게 눌러 가며 골반을, 배꼽을, 옆구리를 애무했다. 그 사이에도 엉덩이 골 사이에 들어간 녀석의 손가락 움직임은 쉬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았다. 바닥을 긁어대던 손을 더듬거리며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 희게 질리는 손가락에 더운 샤워를 마친 것처럼 습한 물기가 고였다.

더운 키스는 가슴에서 쇄골로, 쇄골에서 턱으로, 턱에서 입술로 이어졌다. 혼을 빼놓듯이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씹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와 붉은 점막이 보였다. 고이는 타액에 입술 주위가 침으로 범벅이 되어도 불쾌하지가 않았다. 그저 수동적으로 열렬한 입맞춤을 받아들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 속의 이성이 죄다 함몰되어 갔다. 이상하리만치 육감적이고, 이상하리만치 공중에 떠오른 기분이었다.

키스에 열중하는 녀석의 살짝 감긴 눈이, 고개를 틀어 더 깊은 입맞춤을 할 때마다 각도를 달리하는 높은 콧날이 보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껌뻑이는 모습이, 그 아름다움이 어딘가 현실감이 없었다. 갸름하게 내려 뜬, 짙은 하늘색의 눈이 크게 떠지며 나를 응시했다. 블리스와 나 모두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법을 모른다는 듯이 서로를 마주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찰박이는 끈기어린 소리가 울렸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지만 입안으로 혀를 넣지는 않는다. 얼굴 바로 앞에서 후끈한 숨을 몰아쉰다. 온 몸에 따듯한 꿀이 흐르는 기분이다. 밭은 숨을 뱉어내며, 마치 내 의지로 키스를 하도록 애를 태웠다. 녀석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꾸욱 전립선을 긁었다. 하아, 절로 허리가 비틀어지고 탄성이 쏟아졌다. 하지만 단단하게 긴장하는 배가 그 이상을 원한다고 말해도, 더운 숨을 몰아쉬며 기다려 봐도 녀석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휘며 웃었다.

이렇게 해놓은 주제에 마지막 선택권을 내게 주겠다는 듯이. 비겁하게도.

“…….”

“…….”

블리스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뒤통수를 감쌌다. 그대로 내리 눌러 서로의 입술이 닿도록, 서로의 젖은 점막 안에 갇히도록. 녀석의 아랫입술을 슬쩍 물었다. 머뭇머뭇 거리며 깨진 유리 위를 디디듯이, 하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아주 느리게.

그대로 깊은 입맞춤을 했다. 마주 닿은 블리스의 아랫배가 흥분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깊은 비부에 숨겨져 있던 녀석의 손이 빠져나갔다. 간지러움에 어깨를 움츠리자 젖은 입술이 동그란 어깨에 입을 맞췄다.

“해줘.”

“…….”

“여기.”

내 위에 기댔던 몸을 일으킨 녀석은 어느새 앞섶이 팽팽해진 브리프를 벗어버렸다. 단단해진 그 모습이 어떤 느낌인지, 어떤 촉감인지 만져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허리를 숙인 블리스는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껴 나의 허리를 일으켰다.

오른 손을 잡아 이끌었다. 어느새 단단해진, 녀석의 페니스 위로.

“핥아줘.”

블리스의 골반위의 근육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긴장으로 단단해진 녀석의 허벅지를 바라봤다. 볼에 매끄러운 귀두가 닿았다. 손으로 페니스를 받치고는, 멈칫멈칫 고개를 돌리며 혀를 내었다.

촉촉이 젖어가도록 입안에 머금고는 깊이 삼켰다. 불규칙한 호흡과 함께 좀 전과 달리 급하게 오르내리는 녀석의 아랫배를 보면서 힘을 주어 빨아 당겼다. 녀석 역시 급작스런 흥분에 서툴기 만한 거친 숨을 터트렸다. 기분이, 기분이 너무도 이상했다. 입 안에서, 그리고 손 안에서 흥분을 참아내는 녀석을 보면서 그리고 나를 보면서 기분이 너무나 이상해져버렸다. “기분 좋아.” 흥분에 달아오른 그윽한 목소리를 들으며 좀 더 깊이 빨아들였다. 목젖에 닿은 페니스로 인해 둔한 오심이 올라와 신음이 흘렀다. 그러나 눈앞에 땀에 젖어 오르내리는 배, 채 다 들어오지 못하고 내 입술을 기다리는 페니스와 거친 한숨, 어느새 뒤통수를 감싼 열이 나는 손바닥에 정신이 낱낱이 흩어져버렸다. 기분이… 너무도 이상했다.

몰캉몰캉 뜨겁게 입안으로 쏟아지는 쿠퍼액이 입 밖으로 질질 포말을 만들어내며 흘러나왔다. 페니스를 끝까지 담아내기 위해 허벅지를 감싸 안고는 내게로 당겼다. 절로 눈물이 나왔다.

“하아아….”

“…….”

침과 쿠퍼액이 뒤섞여 흐르는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눈물이 나오는 걸 느끼면서도 내가 왜 울지? 머릿속에서 이 생각뿐이었다. 녀석의 페니스를 입안에서 빼낸 뒤에도 턱이 얼얼했다. 잘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을 즈려 물었지만 쿠퍼액과 뒤섞인 척척한 침이 턱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렸다. 나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블리스가 무릎을 꿇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미안한 얼굴로 잡아 당여 이마를 맞대게 하고는 머리를 쓸어내렸다. 가슴에 채 뱉어내지 못한 한숨이 뭉쳤다.

“내가….”

“…….”

“내가 여태 했던 고민들이… 너무, 너무…….”

목이 메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에 고이는 눈물에 당황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처럼 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생리적인 현상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나왔을 뿐이다. 습기가 베이는 호흡을 정리하려, 차분해지려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어서 손바닥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회피하고 또 외면하려 했지만, 불가결하게 다시 귀결되는 서로를 향한 작은 권력에 이렇게 나는 또 굴복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관계를 맺었던 그 날의 밤에도 이렇게 혼란스러웠던가, 아니면 죄의식 없이 간단하게 해치웠는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 날 밤엔 이렇게 병신처럼 훌쩍이지 않았다.

날카롭게 갈린 신경을 소모할만한 일들을 만들어내고, 착한 아들이 되고, 착한 학생이 되고, 지옥 같던 여름을 버티어 내고, 죽은 사람을 바라보듯 블리스를 보아야 했던 지난날들이 모두가 부질없어진 기분이었다.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워지는 머리를 블리스의 단단한 어깨에 기대었다.

“여태 계속 그런 생각들을 해왔어. 너와, 너와 다시… 붙어먹을 수 없는 수백 가지 이유에 대해서.”

“…….”

“그런데, 이렇게 너와 하고 싶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너지는.”

“…….”

“내가 너무 병신 같아서.”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지친 어깨를 늘어트렸다. 블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촉촉이 땀이 베이는 손으로 등을 안았다. 눈물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울었다. 눅진눅진 뇌에 가루아가 꼈다. 너무 짙고 습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둘러 안은 두 팔이 당겨졌다. 땀에 젖은 서로의 가슴이 마주 닿았다. 나는 눈물을 억제하려 애썼고 블리스는 나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억제하려 애썼다. 내 눈물이 나에게 어렵듯이 녀석에게도 나의 눈물은 아주 어려운 것이었나 보다. 어쩌면 나 이상으로 내 눈물을 견딜 수 없어하는지도 몰랐다. 아주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는 아이를 어르듯이 허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그렇게 열정을 가라앉힌 채, 나를 부둥켜안았다.

한참을 멍청하게 질질 짠 뒤에야 눈물을 블리스의 어깨에 비벼 닦았다. 나의 눈물은 피학애가 아니기에 더 이상 훌쩍이긴 싫었다. 기운 빠진 한숨을 내 쉬며 바라본 블리스의 얼굴은 아프게 웃고 있었다.

“다 울었어?”

녀석이 다정하게 물었다. 멍청하게도 또 울컥, 눈물이 솟았다.

“어.”

손바닥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여태 계집애처럼 훌쩍 댔다는 사실이 민망하기만 했다. 블리스의 입술이 눈물을 멈추기 위해 찡그린 눈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미안하다.”

“…….”

“정말.”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피가 아래로 쏠리며 머리가 울렁거렸다. 태양이 빛이 아닌 실체로 물컹거리며 따듯하게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말은 따듯했지만, 아팠다.

숙인 고개에 절로 내려간 시선에 녀석의 반쯤 시들고 반쯤 발기한 페니스가 눈에 들어왔다. 너도 양심은 있구나. 눈물이 나는 와중에도 우스워서 어깨를 떨었다. 의아함에 동그랗게 떠진 블리스의 눈을 보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바보같이 웃어버렸다.

어느새 건조해진 입술로 블리스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말했다.

“어서 나를 안아.”





몸 안에 들어온 뒤에야 녀석이 콘돔을 끼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뻑뻑한 날것이 몸 안에서 움직이며 내부의 살을 쓸어 올렸다. 귀두에 딸려 올라간 여린 점막이 뜨거워졌다. 그 두껍고 묵직하게 쳐 올리는 감각에 둔한 아픔이 몰려와 목을 움츠리자, 긴장을 풀라는 듯 뒤통수에 쪼는 듯한 키스를 했다.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은 채 골반을 붙들고 블리스는 허리를 서서히 쳐 올렸다. 조급하지 않게, 내가 견딜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녀석의 큰 것이 꽈악 들어왔다. 그리고 서서히 빠져나갔다. 툭 튀어나온 귀두가 내부를 생생하게 긁는 느낌에 소름이 돋아 몸을 숙이자 골반을 잡던 한 손으로 가슴을 감싸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너무… 조여.”

흥분된 더운 속삭임이 귓가에서 뱉어지자 녀석을 꽉 물고 있던 애널이 아릿해지며 허벅지 전체가 긴장했다. 둔하게 조여지는 감각에 흥분한 블리스의 허리가 잘게 흔들렸다. 뻑뻑하게 마찰되는 감각이 아파 우는 소리를 내자 골반을 잡던 손으로 등을 눌러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삽입을 하면서 입에 고인 침을 뱉어냈다.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미지근한 타액이 블리스의 페니스와 함께 들어오면서 마른 안을 적셨다.

미지근한 고환이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서 찌부러졌다. 그리고는 고리로 긁어내듯 허리를 위로 올렸다. 도리질 치며 앞으로 무릎을 움직이자 녀석 역시 무릎을 움직여 다시 깊게 삽입했다. 블리스의 손이 연결되어있는 비부의 입구에 고인 물기를 쓰다듬다 회음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한 번씩 삽입될 때마다 그곳에서 맥박이 뛰는 느낌에 고개가 꺾였다.

“들어갈 때마다 여기가 조금 튀어나와.”

등 위로 허리를 숙인 녀석이 어깨를 깨물며 웃었다. 몸을 잘게 떨자 골반을 잡은 손을 자신에게로 잡아당겨 삽입을 깊게 했다. 찰박이는 소리가 난다. 서로의 피부가 엉기는 마찰에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부드럽지만 깊게 꾸욱꾸욱 눌러가며 삽입을 하던 허리놀림에 조금씩 속도가 붙는다. 조금씩 버티기 힘들어진다. 땀이 나는 젖은 몸이 미끄덩거리며 마찰했다. 무너지는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찔러 넣은 블리스가 억눌린 신음을 토해냈다. 그 더운 숨결에 온 몸이 젖어가는 것 같았다.

땀으로 젖어 끈적이는 허벅지 안의 여린 살을 블리스의 두 손이 파고들어 결박했다. 그리고는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 있던 무릎을 뒷걸음 쳐 뒤로 빼냈다.

“다리 모아봐.”

남성은 파고듦을 멈춘 상태였지만, 그 굵은 굵기에 숨을 몰아쉬며 녀석이 말한 대로 힘없는 다리를 움직여 무릎을 붙였다. 그와 동시에 허벅지 안을 결박하던 녀석의 팔이 힘주어 당겨졌다.

“아으으으…!”

거칠어진 움직임에 도리질을 치며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기어갔지만, 녀석이 따라와 다시 깊게 박아 넣었다. 몇 번이나 무릎걸음을 옮겨도 끈적한 마찰이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리놀륨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는 블리스가 피스톤 질을 할 때마다 헉헉 거리며 더운 숨을 토해냈다. 온 몸이 경직됐다. 다가오는 사정감에 허리를 비틀었다. 한 번씩 박아 넣을 때마다 절로 정액이 흘러나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페니스를 넣을 때마다 움찔거리던 내 반응에 웃던 녀석도 이젠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블리스의 입술이 어깨를, 숙인 뒷목을, 귓불을 적시고 씹었다. 결박하던 두 손 중 하나를 풀어 바닥을 마주했던 고개를 돌리게 해 입을 맞췄다. 뒤를 돌아보며 키스하는 것이 쉽지 않아 블리스의 입술이 입 끝만을 물고 빨아댔다. 입안을 파고드는 혀와 거칠고 음란하게 움직이는 허리, 비부 안을 긁어대는 페니스 모두가 지독했다.

좀 전과 다른, 다급한 숨을 몰아쉬며 녀석의 허벅지가 빳빳하게 긴장했다. 블리스의 손이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흐,ㅅ… 으윽!”

애널 안으로 꽉 들어찬 페니스에서 따듯한 물이 물컹거리며 쏟아졌다. 생소하고도 낯익은 이질감이 온 몸을 점령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몸이 잘게 떨렸다. 귀두만을 걸친 채 빠져나간 페니스 사이로 회음부를 타고 길게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모자라기만 한지, 질척하게 젖은 비부 사이로 블리스의 페니스가 빠르게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뜨겁게 쏟아졌다.

“하아아….”

사정을 끝냈지만, 여전히 안에 남아있는 블리스의 페니스가 자극하는 내벽은 예민하기만 했다. 페니스와 내벽 사이에 꽉 채워진 체액이 남성이 파고 들어올 때마다 묘하게 감각을 자극했다.

“역시… 한번 만으론 부족하지?”

어느새 체온과 같아진 바닥에 한쪽 볼을 대고서 눈을 감았다. 늘어진 몸에 입을 맞추며 녀석이 물었다. 나는 그저 대답 대신 웃었다. 여전히 안에 파묻혀있던 페니스가 조금씩 좀 전의 경도를 되찾아갔다.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떼어내 연결된 그 대로 내 몸을 돌려 마주 보게 한 녀석이 볼에 키스를 했다.

“너 진짜 사랑스러워.”

“넌 진짜 못생겼어.”

“너무하잖아.”

마치 벌을 주듯이 페니스를 밀어 넣어 위로 쳐올렸다. 미처 감당할 새도 없이 꽈악 차고 들어온 페니스에 짧은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 일을 기점으로 녀석의 페니스가 조금씩 움직임을 달리했다. 좀 전의 섹스로는 갈증을 다 풀어낼 수가 없다는 듯이 비벼졌다. 좀 전보다 탁하게, 하지만 더 젖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블리스의 손이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벽에 기대앉아 서로를 마주보게 한 뒤에 페니스를 세웠다.

이번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고정한 페니스에 체액이 세어 나오는 애널을 맞춰 조금씩 몸을 낮췄다. 아무리 몸을 낮춰도 길기만한 느낌이 힘들어서 블리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몸을 더 낮췄다. 비부와 남성 사이로 맞물려 안에서부터 밀려나오는 새하얀 체액들이 눈앞에서 그려졌다.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반응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블리스의 살에 부딪힌 허벅지가 끈적거렸다. 수십 번 살과 살이 비벼지는 동안 점도가 높아진 정액덩어리가 질척한 소리를 냈다. 녀석의 음모는 이미 비부에서 흘러내린 정액으로 흠뻑 적셔진 채였다.

“너… 정말 사랑스러워.” 헐떡임에 섞어 녀석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말했다. 그 말에 고개를 숙여 블리스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혀 좀 내밀어봐.” 숨소리처럼 속삭이자 혀를 길게 내었다. 입술의 점막을 이용해 사탕을 빨듯 길게 내어진 혀를 꼼꼼하게 빨아먹었다. 지독히도 흥분하는 블리스가 느껴졌다. 그 끈적임이, 바닥을 어지럽힌 서로의 체액이, 뱀처럼 들락거리는 블리스의 굵은 페니스가, 달콤한 침이 흐르는 혀가 그저 좋았다. 내부에 꽉 차있다는 것이, 갈급할 때마다 허리를 쳐 올려 자지러지게 만든다는 것이 그저 좋기만 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세게 쳐 올려봐.” 채 뱉지 못한 말을 입안에서 웅얼거리며 손으로 블리스의 뒷목을 잡아당겨 입맞춤을 깊게 했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당장 내일이면 마주쳐야 할 현실에서 눈을 가려버린 채로 이젠 나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밤이 끝나지 않길 빌 수밖에.





눈을 뜬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매 순간마다 나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내 의지가 아니듯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을 뜰 준비가 되지 않은 나를 깨운 것은 블리스였다. 어서 이 믿기지 않는 하루를 맞이하라고, 그리고 느끼라고. 부연 졸음에 겨운 나를 내려다보는 블리스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젖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침대 맡에 서서 허리를 숙여 누워있는 나와 시선을 맞춘 블리스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그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하늘색의 연한 눈동자. 아주 조금 금색이 섞여있는 보석 같은 눈을 바라보는 동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넷, 열까지 세어보아도 생각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러이 크라통이라는 태국의 연례행사가 생각났다. 바나나 잎을 연꽃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불을 붙인 촛불을 넣어 강물에 띄우는 것이었다. 핑강의 급류에 떠내려가는 크라통들은 검은 밤을 붉게 밝히며 시야 너머로, 각자의 소원을 떠안고 떠내려가며 장관을 이뤘다. 블리스의 검은 동공 속에 갇힌 나는 강물에 띄워진 크라통 같았다. 따듯하고 밝고 안락하고. 하지만 그만큼 고독하고.

손을 뻗어 블리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정신은 여전히 온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멍한 와중에도 간밤의 일들이 떠올랐다. 몸은 어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내려다보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머뭇거리던 생각이 진전된다. 둔한 아픔이 사타구니 사이에서 밀려온다. 머리가 울렸다. 소음이 가득한 방에 하루 종일 갇혀있던 것처럼 괴로운 이명이 귀를 울렸다. 찡그리는 얼굴이 걱정됐던지 손으로 이마를 쓸어주었다.

괜찮아. 작은 내 대답에도 안심이 안됐던지 방을 나가 아스피린을 가져왔다. 미지근한 물과 함께 약을 삼키며 바라본 시계는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교회의 예배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고 구호센터를 통해 도시락을 나르는 일도 중반에 이르렀을 터였다.

“너무 곤히 자길래.”

새벽에 잠이 들었다고는 해도 10시간은 넘게 잠들어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반쯤 비워낸 컵을 받아들며 블리스는 커다란 손을 뻗어 뒷목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너희 어머니껜 전화 드렸어. 학교의 교회로 간다고.”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 사이에 약해지고 작아진 기분이었다. 간밤에 있었던 일들이 거짓말 같지만 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아주 약한 전류가 몸의 구석구석 남겨져 있는 느낌이었다.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올라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아직 너에게 부끄러움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 영광인데.”

능글맞게 웃으며 블리스는 벗은 어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어깨에서 쇄골로, 쇄골에서 목덜미로 올라온 입술은 결국에는 입가에 닿았다. 다물었던 입술을 열자 슬며시 블리스의 혀가 파고들어왔다. 달콤하게 서로에게 감기고 스치는 감각이 좋았다. 서로의 입에서 혀를 거두고 나서도 한참을 젖은 입술을 비비다가 얼굴을 떼어냈다. 블리스의 손은 어느새 허리 아래로 미끄러져 엉덩이를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나 계속 벗은 상태로 내버려둘 거냐?”

“창피하면 나도 벗을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멍청아.”

콱, 블리스의 어깨를 치아로 물자 아픈 표정을 지으며 품에 안기듯 가슴에 파고들었다. 하나도 귀엽지 않다고 타박하자 우는 소릴 낸다. 한동안 서로에게 기대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예전의 우리들처럼.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는 게 자신도 민망했던지 녀석은 나를 꼭 껴안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블리스는 행복해보였다. 예전의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복구 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감정들 속에서 멀쩡한 조각들을 찾아다니느라 완전히 지쳐버렸지만 어쨌든, 어떻게든 불안함 속에서도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다.

녀석이 나를 안았던 가슴을 누르며 나를 다시 침대에 눕힌다. 그리곤 매트리스와 등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꼭 껴안는다. 두 개의 몸이 침대 위에서 나란히 겹친다. 하지만 그것은 전과 달리 성적인 감각이 배제된, 아주 부드러운 것이다. 서로의 빳빳한 몸에 위로를 바라는 상한 감정을 눕히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녀석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며칠 전에 책을 봤는데, 그런 책들 있잖아. 심란할 때 보면 마음 진정되는 글들.”

갈라지는 목을 풀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녀석은 다시 말을 이었다.

“거기에 그런 글이 있더라. 좀 특별하게 와 닿아서 기억해뒀던 얘긴데, 남극에서 빙하에 대해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어느 날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바다에 떠 있던 빙하들이 바람 부는 방향으로 떠밀려가 과학자들이 철수하려던 때였지. 그런데 과학자들 중에서 한 박사가 특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됐어. 바람 방향으로 떠내려가던 빙하들 중 거꾸로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빙하를 보게 된 거지. 그 이후로도 그 현상이 몇 번 목격 되었는데 조사를 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비교적 크기가 작은 빙산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떠밀려 내려가지만, 바다 속에 엄청난 크기의 빙하를 감춘 빙산들은 바람에 의해서간 아닌, 바다 속 조류에 따라 움직였던 거지. 그 글을 읽고 나서는 기분이 이상하더라. 그저 그렇게 자신의 세계 없이 시류에 따라 흘러가는 사람과 자기 세계가 확고한 사람 간에는 얼마나 많은 차이점이 있는가. 다른 사람이 걸을 때 걷고, 누울 때는 눕고… 남들이 다 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시류와 상관없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나도 내 세계를 갖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그 책이 그 추운 날, 널 비 맞게 하면서까지 우리 집으로 인도 했나보네.”

“어느 정도는.”

말할 때마다 얼굴에 어리는 따듯한 입김에서 맡아지는 민트향을 느끼며 눈을 떴다. 블리스의 머리카락이 이마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머리를 들어 벌려진 블리스의 입술에 다시 한 번 키스했다.

“좀 감동적인데…. 내 생각에 너는 목사나 정치가를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게이라서 그건 힘들 것 같은데.”

“…….”

블리스의 입술에 닿은 시선을 껌뻑였다. 두꺼운 모래에 덮여있던 현실이 수십 번의 산들바람이 불어온 끝에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전혀 거칠지 않은 방법으로 산뜻함이 느껴질 정도로 가볍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완벽하게 시인하는 거야? 네가 게이라고? 그건… 너무….”

“이상하지.”

“…….”

“이상한데,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했어.”

녀석은 천천히 내 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기대어졌던 무게가 사라지며 가벼워진 몸을 나 역시도 일으켰다. 침대 맡에 허리를 기대며 창밖의 커튼을 열어젖히는 블리스를 올려다봤다. 불편한 심정이 되는 나를 알면서도 녀석은 피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하지만 네게 그런 걸 인정하라는 강요는 안할게. 사실, 내가 생각해도 그래. 이렇게 달라붙고 귀찮게 굴고, 허구한 날 사랑한다 하고. 내가 생각해도 끔찍한데 넌 오죽 했….”

“그렇게 느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열 오른 얼굴을 건조한 손으로 쓸었다. 부석부석 해진 눈가를 꾹꾹 눌렀다. 나는 녀석을 아주 비참하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반대로 아주 기쁘게 만들 수 있었다. 블리스에 대한 나의 영향력과 블리스의 감정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부터 절망의 이유가 아니었으니까.

녀석이 입술 끝에 걸려 있던 작은 미소가 점차 깊어졌다. 한쪽 볼을 긴장시키는, 언뜻 개구지게 보이는 그 미소를 바라보다 피식, 고개를 숙여 웃었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그 시선에서 등 돌려 방을 벗어났다. 아래층의 거실과 연결된 계단을 걸어 거실 앞 소파근처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들었다. 옷들을 모두 입고 나자 2층 계단으로부터 블리스가 내려왔다. 손을 뻗자 계단에서 내려오던 블리스가 손을 내어 깍지를 꼈다. 그대로 계단을 내려온 블리스는 마주 잡은 손을 끌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신지….”

“케비어와 레시스프, 바다가제 요리가 먹고 싶구나.”

거만한 내 대답에 블리스는 황당하단 표정도 없이 자유롭던 한 손으로 볼을 잡아당겼다. 건조하게 마른, 입술을 슬쩍 볼에 부딪힌 후 말했다.

“펜케익 믹스 해둔게 있는데 다른 건 좀 그렇고, 바다가제 모양으로 만들어줄게.”

블리스의 말에 키들키들 웃어대며 녀석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블리스는 깍지를 꼈던 손을 부드럽게 빼내어 허리를 감쌌다. 그대로 걸음을 옮겨 냉장고를 열어 알루미늄 볼에 담긴 반죽을 꺼냈다. 블리스가 펜에 약간의 버터를 두른 후 반죽을 덜어 펜케익을 굽는 동안 맥없는 병아리처럼 녀석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아랫배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블리스의 남성이 느껴졌다. “너 살짝 섰다.” 어제 녀석이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뱉어내자 정수리에 닿아있던 입술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더 깊어지는 미소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블리스는 그대로 가스레인지의 불을 꺼버렸다.

물론, 나는 여전히 두려웠다. 내 절망의 진짜 이유 앞에서 자유롭지도 않았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과 내가 세상에 행사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욕심도 그대로였다. 나는 더 강해지지도 전 보다 더 약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돌아와 버렸다. 그것이 현실 도피이던, 막다른 길에 몰려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건, 눈물에 젖은 노스탤지어건 상관없었다. 머리가 돌아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마저도 상관없었다.

단지 정상을 벗어나있는 균열을 애초에 드러내지 않는 것과 잠재적 위협을 모두 거부하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가릴 수 있는 만큼 가려라. 그리고 비겁한 사랑을 하라. 그것이 때론 비열하게 느껴질 지라도.





*





반쯤 투명해진 설탕에 절인 람부탄을 포크로 찍었다. 설탕에 절인 과일은 맛이 모두 똑같았다. 람부탄 역시 어딘가 바보 같은 맛이었다. 내가 설탕에 절여진다면 저 맛과 똑같을까. 상상하자 비위만 상할 뿐이었다. 포크로 반을 잘라 계속해서 조각조각 해체하며 그 해체된 조각을 입안에 넣고 씹기를 반복했다. 혀가 람부탄의 단 맛에 마비가 될 것 같다.

식당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온갖 종류의 소음이 여과되지 않고 들려왔다. 칼릭스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어수선했다. 소음뿐인 세상에서 격리된 것은 우리 둘 뿐이었다. 주위의 소란은 우리의 침묵을 돋보이게 만들 뿐이었다.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고요함을 외면하려 눈앞의 음식들을 꾸역꾸역 집어 삼켰다.

“아프다고 한건 괜찮아?”

녀석은 포크로 치즈가 잔뜩 뿌려진 음식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테이블 위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나를 마주본다. 어딘가 도전적인 시선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녀석이 한 말은 분명히 안부와 관련된 말이었으니까.

“응. 많이 나아졌어. 그런데… 오늘 많이 바빴지?”

“뭐… 그리 바쁘진 않았어.”

칼릭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옆에 놓인 콜라를 마셨다. 조금 나른해보였다.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주변의 소음에 묻히지 않는 녀석의 목소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긴장이 배제된 침착한 목소리는 오늘 따라 그 속이 텅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그래….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칼릭스와 나 사이 간에 대화를 지속해나가는 방법을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떤 말을 해도 편안해지지 않으리란 걸 칼릭스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적지근한 미련에 다시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정확히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 나 조차 알 수 없지만.

“저기… 칼릭스.”

녀석은 입가에 묻은 음료수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것은 아니었기에 한참이나 녀석을 멍하게 바라본 뒤에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

“이거 너무… 달지 않아?”

반쯤 투명해진 설탕에 절인 람부탄을 포크로 찍으며 말했다. 그 말에 칼릭스는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이런 멍청한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님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칼릭스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시 접시 위에 놓인 음식으로 시선을 돌리는 칼릭스를 바라보다 나 역시 포크로 찍어놓은, 반쯤 투명하게 변한 람부탄으로 시선을 옮겼다.

“먼저 일어나도 되지? 가이던스와 상담 잡혀있어서.”

잔에 담긴 콜라를 모두 비워낸 칼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승낙의 말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기에 녀석은 곧바로 접시를 들고 몸을 돌렸다. 개수대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칼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식당 내부는 여전히 왁자지껄했다. 집중할 대상이 없어지자 썰렁할 정도로 고요해진 주변과 달리 소년들의 웃음소리와 소녀들의 수다 떠는 소리가 공중에 메아리쳤다. 턱을 괴고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흙과 먼지가 가득한 땅에서 다이아몬드를 골라내듯 섬세하게 페이지를 골라 넘겼다. 그러나 음식도 책도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헬륨가스가 가득 차있는 풍선처럼 잡아주는 것이 없다면 끝도 없이 하늘로 떠오를 것 같았다.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소외감이 내 나약함의 증거였다.

나란 존재는 그저 혼자인 게 두려운 이기적인 인간일지도 모른다. 나를 향해 오는 이정표에는 오직 세 단어만이 적혀있을 것이다. 나약함, 이기심 그리고 약간의 우울함. 하지만, 단순히 혼자남고 싶지 않아서 칼릭스와 함께였던 건 아니었다. 종국에는 그런 모습이 되어 버렸지만.

멍하니 잘게 잘려진 과일조각들을 바라보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테이블을 쓸며 천천히 오른쪽으로 걸었다. 기숙사로 돌아가 이른 원서 마감을 하는 대학에 맞춰 구비해둔 서류를 정리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바쁘게 지나갈 것이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의자 곁을 막 스치려는 때였다. 손바닥만 한 사각의 검은색 물건이 바닥에 떨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가끔씩 계산을 필요로 할 때마다 봤던 칼릭스의 지갑이었다. 책과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주웠다.

칠칠맞은 성격은 아닌데,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으로 회색 먼지가 묻은 지갑을 털었다. 회색이 가미된 얇은 가죽에 연결된 체인의 일부분이 끊겨 있었다. 이 때문에 지갑이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핸드폰으로 칼릭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긴 신호음이 가도 받지 않았다. 상담을 받기 위해 부러 전원을 꺼둔 듯 했다.

기숙사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며 책 사이에 끼워뒀던 지갑을 꺼냈다. 마른소녀가 그려진, 체인이 걸린 빈티지한 느낌의 낡은 지갑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학지원 프로그램에 맞춰 회계사에 대리 신청을 해둔 텍스리턴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대학 진학이 너무나 먼 꿈처럼 느껴졌던 때가 있었지만, 인생의 틀에 맞추어 짜둔 프로그램대로 조금씩 진행돼서 이미 일상이 되어 있었다. 이 시간들이 두렵지만,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때에 다른 것에 신경이 분산되어 있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가 와있었다. 욕실에서 찍은 블리스의 사진이 포함된 메시지였다. 샤워직후에 찍은 듯 한쪽 어깨에 타월을 걸치고 있는, 각도나 표정에 멋을 부린 흔적 있는 사진이었다. 어딘가 부담스럽게 잘나온 얼굴을 바라보다 ‘샤워해서 촉촉한 블리스’라는 문구에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밑에는 지금 문자를 읽고 난 후의 내 사진도 전송해달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유일하게 켜둔 조명인 스탠드를 꺾어 내 얼굴에 정면으로 빛을 비추게 하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유치하게 느껴졌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화면 속에 정지한, 새하얀 조명이 배합된 얼굴이 유독 창백하게 나왔다. 이정도면 이상하게 나온 건 아니라는 생각에 ‘우주 최고 미남’이라는 참신하지 못한 문구를 적어 답장을 보냈다. 그에 대한 답장은 간단했다.

화났냐.

액정의 새하얀 화면에는 오직 그 말만 적혀 있었다. 골리는 표정의 이모티콘과 함께 온 메시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플립을 닫아버렸다. 이대로 오 분만 지나면 왜 답장이 없냐며 혹시 화났냐는 조심스러운 문자가 날아올 터였다. 유치한 말다툼이었지만 감정을 노출할 방법은 기계를 통한 것뿐이니까.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그 뿐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메시지는 예상했던 내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우습기도 했고 귀엽기도 해서 실없이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얼마 뒤 걸려온 전화에선 고르게 잦아든 숨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왔다.

-뭐해?

“텍스리턴폼 읽고 있어.”

-뭐? 섹스리턴폼?

“…재미없어.”

-목소리는 웃고 있는데?

그 말에 킥 하고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도 따라 웃었다. 방안은 열기 없이 싸늘했지만, 그 웃음소리는 사막의 마른 땅에 내린 비처럼 청량하게 느껴졌다. 녀석의 웃음 속에는 머리를 단순하게 만드는 마법적인 효과가 있다는 망상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소리 나는 웃음이 희미한 미소로 바뀌어 가자 방안과 전화기 너머의 세상이 고요해졌다. 블라인드 살 사이로 보이는 창밖의 어둠을 보다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응?

“너는 뭐 했는데?”

그 말에 맞물렸던 입술을 떼어내는 끈적한 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블리스에게 말했다. 잠깐, 잠깐만 말하지 말고 기다려. 핸드폰에 이어셋을 연결시켜 귀에 꼽은 후에 무얼 했냐고 다시 묻자 녀석이 웃었다.

-샤워했다니까. 방금 전에.

“아아… 그 샤워해서 촉촉한 블리스?”

-자매품도 있는데.

“뭐?”

-땀 흘려서 축축한 블리스. 이건 너랑 그 짓 할 때 젖어서 그런 거.

“너 이럴 때마다 나 진짜 민망하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숨죽여 웃었다. 그 낮은 웃음을 들으며 책상에 엎드리자 팔 안에 갇힌 눈앞의 세계가 온통 어두워졌다. 후우, 전화기에 입술을 모아 가만히 바람을 불어넣었다. 뭐야? 녀석의 물음에 귀에 바람 불어넣은 거란 대답을 하자 기분 이상해지잖아 라며 웃었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무기력 속에서 성욕이 생길 수 있다니. 입고 있던 난방을 벗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팔 안의 여린 살에 슬쩍 입술을 대어 미끄러트렸다. 부드러운 그 감각은 무기력하고 따듯하고 감각적이었다.

-주말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흐음, 한숨을 내뱉으며 매끄러운 팔 안의 여린 살에 한쪽 볼을 기댔다. 녀석의 말에 골리듯 웃었다.

“뭘 기다려?”

-뭐긴. 보고 싶으니까.

어둠 속의 대화는 꼭 그런 기분이 들었다. 햇빛도 비추지 않는 깊은 동굴 속에 갇힌 남자에게 유일한 구원이 된 타인의 음성. 불안하지 말라, 아파하지 말라 속삭여주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았다. 그 속의 애정을 느끼며 팔에 묻었던 얼굴을 떼었다.

“내 사진 봐. 더 보내줄게.”

전화기 너머에서는 대답 대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끈적해지는 손바닥을 바지에 비벼 닦았다.

-겨울 방학에 계획해둔 거 있어?

“아직은. 원서 제출 한 뒤가 한참 쉴 때긴 한데. 넌 생각해둔 거 있어?”

-빅베어 호수에서 하이킹하자. 근처에 삼촌 별장이 하나 있는데 부탁하면 들어주실 걸. 어차피 영

국에서 생활 중이니까 별장도 비어있을 테고.

“하이킹하기엔 춥잖아.”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에선 어느새 빅베어 호수와 산의 전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D. C에서 가족과 조용한 새해를 맞는 것 보다야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그간 학교생활을 하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더 나을 터였다. 스키나 보드도 즐길 수 있을 테고 추위를 제외하고 여러모로 조건이 좋았다.

-춥기야 춥겠지. 근데 지우. 나는 단 둘이 방안에 있는 게 더 좋아. 하이킹 뭐 그까짓 거 안하면 되지.

블리스의 말에 키들키들 웃으며 바닥에 닿아있던 발 한쪽을 굽혀 의자 위에 걸쳤다. 접은 무릎에 턱을 세우고 무너지지 않도록 팔로 다리를 꽈악 감쌌다. 올라가는 입꼬리에 절로 긴장되는 볼이 느껴졌다.

“그럼 부모님한테 말씀드려 볼게. 어차피 허락해주시겠지만.”

그 이후로 지속된 이야기들은 8할은 통화한지 하루 만에 잊게 될법한 사소한 것들이었다. 분명히 결정되지도 않은 겨울 여행에 대한 일정이나 대학 생활, 학교 수업에 대한 불만에 대한 얘기였다.

전화를 끊고 나자, 사춘기 소녀들처럼 끝이 없을 것 같은 긴 통화 끝에 찾아온 적막이 낯설었다. 아직도 왼쪽 귀엔 내 재미없는 농담에 웃어주던 블리스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남아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며 텍스리턴폼을 종이봉투에 집어넣은 후, 책장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러다 문득 칼릭스의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칼릭스는 지갑을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을 뻗어 스탠드 뒤편의 침침한 어둠에 몸을 숨긴 지갑을 잡았다. 하필이면 그려진 그림이 소녀라니. 칼릭스는 절대 소녀적 취향을 가진 녀석이 아닌데. 물론, 지갑이 여성적인 취향에 부합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영국의 어느 길거리 위, 구제물품을 파는 행상에서 구입할법한 독특하고 오래된 느낌의 지갑은 녀석과 묘하게 어울렸다. 건조하고 감각적인데다가 먼지가 쌓인, 오래된 고서적 같은 느낌이었다.

실례인줄 알면서 지갑을 열어보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 실용적이었다. 안에는 지폐와 다섯 장의 카드, 아무렇게나 휘갈겨진 메모 그리고 몇 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사진의 대부분은 바닷가 근처에 지어진 전망 좋은 주택과 칼릭스가 몰고 다니는 은색의 구형 캐딜락, 칼릭스의 부모님이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회사를 담고 있었다. 그 밑의 사진은 좀 전의 사진들과 느낌이 달랐다. 인공물이 아닌 사람이 담겨있었다. 지금보다 더 앳되고 정갈한 느낌을 풍기는 짧게 깎인 머리카락의 칼릭스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중년으로 보기엔 젊고, 청년으로 보기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치열을 드러내 웃는 녀석과 달리, 그는 칼릭스의 옷에 묻어난 갈색의 짙은 자국을 잡아당기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처음 보지만 그를 처음으로 접한 기분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덜 수수하고 생기가 덜 느껴졌지만, 칼릭스의 얘기 속 그와 크게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았다.

남자의 고향 음식점에서 찍은 사진인지 두 사람의 앞에는 각종 볶은 음식과 김이 나는 차가 놓여 있었다. 중국식 붉은 융단과 홍등, 황금빛 조형물이 어지러이 번쩍이는 모습을 보아 중국 내에서도 꾀나 고급 레스토랑인듯 보였다. 두 사람의 뒤로 음식을 나르는 검은 머리의 종업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흐린 초점으로 찍혀 있었다.

한참을 사진과 마주하고 있을 때 책상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이 울렸다. 칼릭스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했더라.

“응. 아까 전에 식당에서 네 지갑 주웠거든.”

그 말에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흠, 하고 폐에서부터 쏟아지는 한숨이 들려왔다.

-그랬구나. 고마워.

그 말에 우습게도 안도의 감정이 밀려들었다. 지갑을 주워준 것에 대한 단순한 고마움의 표현임을 알지만, 서먹해진 관계일수록 관계 회복에 대한 멍청한 기대를 갖게 되니까. 고맙다는 그 말이 마치 관계 회복의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안도가 되었다. 비록 그것이 망상임을 알면서도.

“뭘, 주운 것뿐인데.”

헛기침을 섞어 대답한 말에 칼릭스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대답을 했다.

-지금 가지러 갈게. 도서관이니까 십분 뒤면 도착할거야.

그 말처럼 칼릭스는 정확히 십분 뒤에 방문을 두드렸다. 의자 위에 포갰던 두 다리를 땅 위에 내려놓으며 문을 열어주는 대신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삐걱 돌쩌귀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후 열려진 틈 사이로 녀석이 들어왔다. 방안의 짙은 명암에 휩싸인 칼릭스의 아이보리색 컨버스화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두 눈을 깜빡인 칼릭스는 한 손으로 어깨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지갑.”

“…….”

“주웠다며.”

그 말에 책상 위에 올려뒀던 지갑을 집어 녀석에게 내밀었다.

“이거지?”

“응.”

“체인이 끊어졌는지 그래서 잃어버렸나봐. 체인이 약해보이진 않는데 어디에 걸리는 바람에 당겨졌나 보더라.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 했네.”

어색한 미소와 주절주절 길게 내뱉는 내 긴 말은 물론 관계회복을 위한 노력이었다. 그 노력에 대한 별다른 동조 없이 칼릭스는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장난스럽게 지갑을 잡은 손을 흔들자 칼릭스가 긴 다리를 움직여 내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여기.”

끊어진 체인을 지갑에 둘둘 말아 칼릭스에게 건네자 녀석의 커다란 손이 내 손과 함께 지갑을 덮었다. 무슨 생각에선가 나답지 않게 장난을 치고 싶었다. 힘없이 내 손등을 잡은 손을 미끄러트려 지갑을 잡는 칼릭스의 손안에서 힘주어 손을 빼냈다.

“뭐 없어?”

공중에 어색하게 떠 있는 손을 놀리듯 내 목소리는 조금 높아져 있었다.

“지갑 같은걸 주워주면 보통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잖아.”

지갑을 칼릭스에게서 먼 손으로 옮기며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의외의 행동에 녀석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칼릭스의 기분이 그리 언짢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얼굴을 보자 즐거워졌다.

지갑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던 녀석의 시선이 옮겨졌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칼릭스는 아랫입술을 치아로 꾸욱 내리 눌렀다. 그것은 난감함 보다는 어떤 망설임의 표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핏기 없이 창백해지는 입술을 꾹 눌렀던,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치아를 떼어낸 칼릭스가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보통의 경우에….”

끝이 날아가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운을 떼며 말을 이었다.

“지갑을 주워준 대상이 맘에 들면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걸로 알고 있어. 점심 한 끼를 산다던가. 뭐 그런 식으로.”

“…….”

“물론 난 네가 맘에 들어.”

네가 맘에 들어. 정열을 품어야 하는 말답지 않게 그 고백의 느낌은 침착했다. 지글지글 타오르는 열정 혹은 부끄러움의 흔적은 없었다.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때, 데이트 할래?”

농담이라기엔 너무 진지했고, 진담이라기엔 낭만이 없었다. 칼릭스는 주의를 기울여 내 표정을 살폈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정수리에 닿았다. 버석거리는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 천천히 뒤통수를 감쌌다. 가슴이 울렁거려 두 손으로 녀석의 배를 밀어냈다.

“노, 놀리지 마.”

다급한 내 목소리가 내 귀에도 어색하게 들렸다. 입안의 점막을 치아로 깨물며 마주했던 시선을 피했다. 녀석이 마지못해 웃었다.

“장난이었어.”

“…….”

“장난.”

칼릭스는 뒤통수를 감쌌던 손을 바지 옆단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는지 볼록해지며 둥그렇게 튀어나왔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녀석의 바지주머니를 바라보다 지갑을 쥐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찾아다녔거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지 내밀어진 손은 핏기 없이 새하얘 부연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갑을 열어 주머니 속의 잔돈을 집어넣으며 녀석이 말했다.

“좋은 일 있었나봐.”

“…….”

“기분 좋아 보여.”

뭐, 그다지. 어깨를 으쓱이며 어색함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좀 전의 농담을 걸었던 사교성은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칼릭스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농담이 되는 것이고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진담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녀석과 어색해지는 것이 싫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캔 음료를 꺼내 차가운 김이 서린 그것을 칼릭스에게 건넸다.

“봤구나.”

캔을 따 시원하게 넘기며 녀석은 나를 곁눈질 했다.

“응?”

“나 이사진 맨 위에 올려둔 기억 없거든.”

두 모금 만에 캔을 모두 비워낸 칼릭스는 굳어있는 나를 보며 지갑을 열어보였다. 남자와 칼릭스가 함께 찍힌 사진이 가장 위에 들어있었다.

“아… 미안해.”

“뭐, 상관없어. 이 사람이 페이린이야.”

“…….”

“키는 너보다 반 뼘 정도 작았나. 그런데도 집에서 목소리는 제일 컸어.”

어느새 미소가 어리는 입가를 바라보다 문득 그것이 녀석이 서로간의 관계 회복을 위해 꺼낸 얘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칼릭스도 나만큼이나 그것을 원했을지도 몰랐다. 잘못 꺼내진 얘기로 인해 감정의 골이 생겼던 만큼 그 간격이 회복되길, 녀석도 나처럼.

“너 그 때는 머리 짧았더라.”

“지금도 굳이 이 머릴 유지할 생각은 없어. 오히려 너무 길렀지. 그렇다고 잘생긴 얼굴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시도하는 그 모습이 능청맞게 느껴져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자 녀석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농담 아냐.”

“진담이 더 웃긴 말인 거 알지?”

그 말에 녀석도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었다. 그 웃음에 이번엔 진짜로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칼릭스는 서로간의 어색한 관계를 이쯤에서 그만 두자고, 일시정지 상태가 아닌 정지 상태로 두자고 결심했는지도 몰랐다. 전보다 긴장이 풀린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칼릭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프로젝트 준비는 다 했어?”

나에게 묻는 질문까지 예전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은 걱정의 레퍼토리에 웃음이 나왔다.

“응. 일정 잡힌 대로. 너는?”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묻는 내 말에 녀석은 대답대신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방안을 스탠드 불빛만으로 밝히기에는 너무 어둡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갑작스런 빛에 시린 눈을 찡그리는 칼릭스의 팔을 잡았다.

“바빠?”

“…그다지.”

“그럼 놀다 가.”

칼릭스의 등을 침대로 떠밀며 책상 서랍 속에 집어넣었던 과자들을 꺼내었다. 침대 위에 행상을 꾸리듯 그 위에 과자를 늘어놓았다.

“근데 아까 그 사람 이름이 페이린?”

“응.”

“그런데 아버지는 왜 없냐. 섭섭하게.”

“그 사진 찍어준 사람이 아버지야.”

“아…. 가족끼리 중국 여행 갔었나보네.”

뜯지 않은 과자의 포장을 뜯어내며 칼릭스는 치즈가 잔뜩 묻어있는 과자를 한 움큼 집었다. 그 중의 하나를 입안에 집어넣어 와그작 씹으며 대답했다.

“나 태어나서 한 번도 중국에 기본적 없어.”

“그래?”

“거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차이나타운이야.”

“아…. 그렇구나.”

“게다가 그 때는 페이린이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도 문제가 됐던 때라.”

힐끗 사진이 들어있는 지갑을 쳐다본 칼릭스는 또 다른 과자를 입안에 던져 넣었다. 와그작 입안에서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녀석은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로 손 안의 과자를 모두 입에 털어냈다. 내 난감한 얼굴을 보고 한쪽 입술을 올려 조금 웃어보였다. 어떠한 혼란이나 곤혹스러움도 없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칼릭스의 말이 과거형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럼 지금은 다 해결됐어?”“응.”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은 엄지손가락에 묻은 치즈가루를 혀를 내어 핥았다. 꾀나 질척하게 느껴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좀 전에 다 마시지 못한 음료를 들이켰다. 급하게 들이키느라 묽은 이온음료가 입가를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다.

“잘됐네.”

칼릭스는 내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잘됐네. 내 말을 따라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티슈를 한 장 뽑아내 손가락을 닦아냈다. 주황색으로 얼룩진 티슈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녀석은 작은 소리로 내뱉었다.

“글쎄. 사건의 종결을 해결이라 부를 수 있다면 분명한 해결이겠지.”

“무슨… 말이야?”

“뭐어, 추방당했어. 신고를 받고 이민세관단속국에서 집으로 찾아왔었거든.”

두 팔로 책상의 모서리를 짚은 채로 녀석은 고개를 숙였다. 내뱉은 말의 충격의 강도에 비해 칼릭스의 뒷모습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조금 오르내리는 것 외에는 목석처럼 굳어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당황한 얼굴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미안. 내가 널 고문하기 위해서 얘기하는 것 같다.”

“…….”

“이런 얘기 보통은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유쾌하진 않으니까.”

책상에 팔을 짚은 그대로 칼릭스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당황스런 말에 대해 동정을 할 수도 그렇다고 그에 대해 파고들 수도 없었다. 나는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찌되었건, 칼릭스에겐 결국 상처를 남긴 일이었을 테니까.

“심각한 표정 짓지 마.”

“…….”

“아주 오래된 일이야. 결국엔 잊혀질.”

그대로 칼릭스는 한쪽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심각한 상황은 칼릭스다운 그 미소로 인해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덧입혀졌다. 비일상적이고 약간의 비극을 띄긴 하지만 결국에는 잊혀지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더 이상의 이야기는 봉인하듯 칼릭스는 그것에 대해 차단해 버렸다. 대신 더 이상 과자에 손대지 않는 나를 보더니 과자를 한곳에 옮겨 담았다. 비닐을 접어 그 위에 테이프를 덧붙여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소등까지는 앞으로 두 시간정도 남아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소등직전까지 방안에 남아 함께 책을 본다거나 못 다한 숙제를 했겠지만, 칼릭스는 벌써 방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가려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과 복사한 프린트를 챙겨드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가야지.”

“아홉시밖에 안됐잖아. 더 있다가지?”

그 말에 칼릭스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봤다. 거부도 긍정의 눈빛도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침대 맡을 팡팡 내리치자 녀석의 희미하게 웃었다. 다정하게 구는 나의 행동에 노력이 얼마나 기울여졌는가를, 그 노력의 양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의 의도를 읽었다. 머릿속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칼릭스는 손안의 책들을 옆구리에 끼우고 책상에 걸쳤던 엉덩이를 떼어 일어서는 것으로 나의 이어질 공세들을 미리 막아냈다. 녀석이 말했다.

“그동안 그런 생각 했었다. 네가 내 마음이 부담스러워지면, 언젠간 떠나갈 수 있겠구나.”

“…….”

“그러니까… 네가 블리스를 떠나 내게 왔듯이.”

칼릭스는 어려운 말을 어렵지 않게 뱉어냈다. 그 말에 숨이 멈췄다. 들이마셨던 숨을 차마 내뱉지 못하자, 천천히 내부의 압력이 높아졌다. 절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칼릭스, 그런 생각했다면 그건, 그건! 정말 아니야.”

“알아.”

나의 흥분을 보며 녀석은 흠, 코로 웃었다. 의심하지 않는단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괜히 꺼낸 얘기였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나에 대한 너의 우정의 믿음에는 변하는 건 없다고. 녀석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간다.”

녀석은 남은 손으로 팔뚝을 느리게 쓸어 올렸다. 덧붙이려는 말을 신중하게 골라내듯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이나 서로 말이 없었다.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서자 창백한 형광등 밑의 하얀 얼굴에 우울한 짙은 그림자가 졌다.

“유감스럽게도… 나. 아직…. 그러니까.”

“…….”

“널 좋아해.”

띄엄띄엄 다음 말을 고르기 위해 시간을 두며 칼릭스는 그렇게 말했다. 고개를 숙여 앞으로 쏠린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마른침을 삼켰다. 치아에 짓눌려지는 입술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그 말에 어쩔 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린 좋은 친구지. 좋은 친구가 되어야겠지.”

“…….”

“그러니, 나한테도 좀 더 시간을 줘야지. 어떻게 마음이 그리 쉽게 변하겠어.”

녀석은 마치 찢어진 속살을 드러낸, 목이 긴 짐승 같다. 상처를 입어 연약해진, 심장의 박동이 위태로워진 사슴 같다. 하지만 상처를 드러낸 목을 감싸 치료해주지 않는다. 희망을 주는 것이야말로 녀석을 더 괴롭게 만드는 것임을 안다.

덤덤한 고백 뒤에 녀석은 손을 들어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흠칫 몸이 떨렸다.

“지갑 주워줘서 고마워.”

내 떨림에 녀석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긴 다리를 움직여 방을 빠져나갔다.

적막해진 공기, 그 정적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대로 무너지듯 침대에 뻗었다. 베개를 집어 빛에 노출된 얼굴을 가려버렸다.

감정들, 그 필사적인 감정 덩어리들.

기름과 물로도 씻기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질척한 접착제였다. 흐으음, 안으로 무너지는 신음을 토해냈다. 가장 추한 진실은 블리스를 생각하는 범주에 칼릭스 역시 그런 논란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어댑터가 연결된 PC는 위성 인터넷이었기에 속도가 일정치 않았다.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웹사이트의 속도를 참으며 나는 디지털카메라에 담겨있는 사진을 비공개 계정에 올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스키장과 호수, 동물원에서 찍었던 사진 외에도 별장 내부에서 블리스와 찍었던 사진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인물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키스를 하는 사진이라던가 벗은 상채를 드러낸 것들이 들어 있었다.

업로드를 끝낸 카메라에서 USB 선을 뽑아내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실내에서는 가벼운 보사노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블리스도 나도 그런 장르에는 취미가 없었지만 별장에 들러 둘 만의 새해파티를 시작할 때 음악이 필요하다 느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70년대에 십대 시절을 보냈을 이들을 위한 향수어린 것들이어서 불가피하게 그것을 틀었던 것이었다.

창가에는 호수의 잔물결에 산란된 눈부신 빛이 새어 들어왔다. 방안을 밝히는 조명이 없어 더욱더 도드라진 그 빛은 방안의 어둔 그림자를 몰아내며 맞은 편 벽의 앤틱 장식장까지 닿았다. 작은 회중시계 안에서 시침과 분침이 그려내는 그림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자, 발코니 너머로 Treasure Island 호수가 보였다. 초록빛으로 반사된, 보물섬이라 불리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호수의 풍경에는 청둥오리 무리의 가벼운 산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후의 태양이 뜨거웠으므로 찬 눈을 녹일 지경이었으니 오리부부의 여흥에 추위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블리스는 창틀에 손을 기댄 채로 발코니 너머의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표백해버릴 듯 매섭게 내리쬐는 창백한 태양빛에 반사된 블리스의 옆모습은 청둥오리의 자취를 쫓고 있었다. 그 모습을 쫓느라 어느 것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은 추위도 잊은 채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인상적으로 느껴져 새하얀 빛 무리에 감싸인 블리스의 옆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소리에 녀석의 고개가 돌려졌다. 녀석의 눈이 커졌다.

카메라를 발견한 블리스는 장난스럽게 몸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창가에서 몸을 돌려 내게로 다가왔다. 창가에서 멀어질수록 녀석을 감싸고 있던 빛 무리가 옅어지며 몸 옆으로 긴 그림자를 남겼다. 노을 지는 해변, 일렁이며 반짝이는 햇살 같은 아름다움이 녀석과 어울린다는 생각에 또 다시 찰칵, 셔터를 눌렀다.

“나 몰래 뭘 찍는 거야. 음흉하게.”

내게 음흉하다고 소리치는 주제에 나보다 더 즐기는 표정을 짓는 블리스는 낄낄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벗고 있는데.”

다가오는 블리스를 피해 뒷걸음치며 정면 사진을 한 장 더 찍자 녀석이 내게 달려들었다. 내게서 카메라를 빼앗아 카메라 속 사진을 확인하는 녀석의 눈썹이 비대칭으로 올라갔다.

“사진에 재능이 있는 거야 아님 모델이 훌륭한 거야.”

“당연히 전자지.”

“글쎄. 내 생각엔 후자인 것 같은데.”

씨익 웃으며 몸을 돌린 블리스는 손 안의 카메라를 내게로 넘기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던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걸쳐 입으며 끈으로 허리를 졸라 묶은 블리스는 화력이 줄어든 벽난로의 불을 키우기 위해 허리를 숙여 장작을 집어넣었다.

“더워?”

“아니. 이정도 거리에 오면 괜찮아.”

카메라 속 블리스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카메라의 버튼을 눌렀다. 화면을 확대할수록 자세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꼭 영화 속 포스터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보였다. 기다란 속눈썹에 걸린 이슬 같은 햇살과 아름다운 각도의 콧날과 도톰한 입술위에 걸린 빛 무리 때문에 꼭 빛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음, 새삼 반하면 곤란해.”

“그러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블리스는 손에 묻은 먼지들을 털기 위해 손바닥을 비벼 털어댔다. 그리곤 가볍게 한손으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녀석의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뒤에서 등을 껴안아 앞으로 팔을 둘러 가슴을 껴안으며 목에 입술을 묻었다.

“뭐 먹을래?”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찍어놓은 사진을 계정에 올리기 위해 컴퓨터로 걸어가자 녀석이 등 뒤에 매달린 채로 함께 발을 움직였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인터넷 페이지는 좀 전에 내가 올려둔 사진이 담긴 계정이었다.

가장 상위 화면을 채운 사진은 새해를 맞아 각종 행사로 들뜬 주변일대의 상가 레스토랑에서 찍었던 것이었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휴가를 즐기기 위해 빅 베어 산을 찾은 것이었기에 두 소년이 안내된 곳은 레스토랑 내부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한 곳인데다가 화장실이 근처에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장식된 트리로 가려져 있어, 위험한 장난을 즐기기에는 나무랄 것 없는 장소였다. 모니터의 반을 차지한 사진은 그 곳에서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사이 블리스가 찍은 것이었다.

“네 입술 꼭 설탕에 절인 체리같이 나왔다.”

살짝 부어 있는 화면 속 블리스의 입술을 손끝으로 찍으며 말하자 녀석이 웃었다.

“너도 별로 다르지 않은데. 거긴 식용 색소가 너무 과했어.”

스키장에 부모와 놀러온 어린 아이들이 우글거리던 식당에서 이벤트 메뉴로 나왔던 사탕이 잔뜩 들어간 컵케이크의 진저리칠 만큼 단 맛을 생각하자 절로 혀에 침이 고였다. 물론, 그 맛이 그리워서는 아니었다.

부엌으로 걸어간 블리스가 음식들을 데우는 사이 계정에 올려놓은 사진들을 클릭했다. 눈이 잔뜩 내린 D.C에서 출발 직전에 찍은 사진, 공항 내부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모습, 호수에서 해적선을 타고 찬바람이 부는 수면 위를 달리던 모습 외에도 이곳에서 지내면서 찍었던 사진들이 정지된 채 남겨져 있었다. 날카로운 신경 대신 튼튼한 두 다리의 근육과 에너지를 소모해가면서 남겼던 사진들 속에는 유쾌함이 가득했다. 훗날에 떠올렸을 때 우리 두 사람간의 관계에서 황금기 중의 하나로 기억될, 고귀한 결정들이었다.

“사진 보는 거?”

블리스는 손에 두꺼운 주방용 장갑을 낀 채로 몇 차례에 걸쳐 여러 개의 냄비를 들고 와 컴퓨터 근처 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레스토랑에서 케이터링 용으로 판매하는 파티 음식을 사왔는데 양이 많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던 것이었다.

“응. 일단, 다른 사람 보여줄 수 없는 사진은 계정에 올려둬야 하니까.”

그렇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나무 국자로 포타주와 크런치, 스튜 등을 접시에 나눠 담은 블리스는 내 앞으로 그릇을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장갑 맘에 들어.”

화면의 모니터 속에는 비비스와 벗헤드가 그려진 회색과 검은 색의 장갑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행의 첫날,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품 판매점에서 빅베어 호수의 전경이 담긴 사진이나 티셔츠를 사는 대신 골랐던 장갑이었다. MTV의 간판 만화 캐릭터가 왜 빅베어 호수 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지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우리 같은 꺼벙한 십대들의 구미에 맞춰 구비해둔 모양이었다.

물론, 우리가 애들도 안 낄 촌스러운 벙어리장갑을 산 이유는 서로를 기념해 맞춘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비비드와 벗헤드의 엽기적인 얼굴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만화에 은근한 동성애적 코드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고, 게이 프라이드를 외치며 마련한 의미 있는 장갑이었다. 우린 좁은 기념품 판매점에서 남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즐거워하며 서로의 손에 장갑을 끼워줬었다. 커플링이나 장갑이나 손에 끼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기념관에서 그 장갑 산 사람이 우리밖에 없을걸.”

“그건 그래. 주인이 물건을 알아본 거지. 게다가 똑같이 생겼잖아.”

킬킬거리며 좁은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냄비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블리스는 내 앞으로 포크와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넌 친척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냐. 매번 방학 때마다 여행 다니는 걸 보면 엄청 많은 것 같은데.”

걸쭉하게 우려진 포타주를 떠먹으며 묻자 녀석이 크런치를 입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친가는 아버지 포함 3명, 외가는 4명이 다야. 물론, 나야 외아들이지만 사촌은 많아서 한번 모이면 무슨 여름캠프 온 기분 들 정도로 많고. 너는?”

“나도 있긴 하지만, 다 한국에 있잖아.”

“그래? 그럼 졸업하면 한국에 놀러갈까?”

“음…. 나도 그건 생각해봤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 우리 둘이 가는데 친척집에서 자긴 좀 그렇고 유스호스텔에서 묵어야 되거든. 비용, 식비, 교통비, 관광비는 그렇다 쳐도 왕복 비행기 값이 부담돼서. 돈 너무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잔에 따른 우유를 넘겼다. 크런치로 꽉 막혔던 속이 뻥 뚫리며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뭐… 언젠간 가겠지. 안 그래?”

어깨를 으쓱이자 녀석이 입술에서 포크를 떼어내며 말했다.

“내가 대주는 건 싫지?”

“그 돈이 순전히 네가 번 돈이면 빌려서라도 간다.”

“하긴, 그건 그렇다.”

킥, 웃으며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유하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블리스 개인의 것이 아닌 아이언사이드 가의 재산이었다. 게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곧바로 금전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블리스는 자신이 상속할 것들에 대해 권리를 누리려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무척이나 관대해서 자신의 아들이 게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 말은 나 외에는 어느 것에도 미련이 없다는 확신을 주려는 감정적 계산이었을 수도, 어쩌면 정말로 진심일 수도 있었다. 사랑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있다고는 하나, 그 말까지 믿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더 일리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최악의 경우를 위한 내 나름의 안전장치였다. 그것은 누구에게 물어도 같은 답이 나올, 자기 방어의 일종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만남의 순간에 최악부터 상상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몰려드는 현실적이고 우울한 상상을 지우려 나는 눈앞의 음식들을 빠른 속도로 비워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리스는 자신에게로 덜어놓았던 크런치를 내 접시로 옮겨 담았다.

“배고프면 이거 먹고 나갔다오자.”

“어딜?”

“그냥… 바람도 쐬고 포장음식도 음식도 좀 싸오고.”

건네준 조각의 반을 다시 블리스의 접시에 덜어 놓으며 좀 전보다 느린 속도로 음식을 비워냈다.

“내일이면 집에 가는데 뭐 하러 음식을 또 싸오냐.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해결하자.”

“그런가? 그럼 자전거나 타지 뭐.”

나보다 느리게 접시를 비워낸 블리스가 옆의 우유를 마시는 동안 좁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접시와 냄비들을 모두 한 곳에 담았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그것을 들고 부엌의 싱크대에 올려놓자 블리스는 입가에 우유를 묻힌 채로 턱을 괴고 있었다.

“애냐?”

“왜.”

“우유 입가에 묻었잖어.”

그래? 건성으로 끄덕이며 입술을 삐죽 내민 블리스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박박 문질렀다.

“거친데.”

“아끼는 마음에서 그러는 거야.”

손에 묻은 우유를 바지에 닦아내며 블리스의 등 뒤로 걸어가 목에 팔을 둘렀다. 빈 컵만이 황량하게 놓여있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블리스의 얼굴에 볼을 대었다. 말랑하고 보드랍고 그을려서 약간의 갈색 빛이 도는 피부가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건 벽난로 근처에서 나눈 가벼운 점심식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네 얼굴 뜨거워.”

“그래? 난 네가 그렇다고 느꼈는데.”

나 역시도 뜨거웠다는 블리스의 말에 후, 웃음이 나왔다.

이런 것이 안식이라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나눌 수 있는 것이 안식이라면 그것은 마치 크리스마스 날 받는 특별한 선물과도 같았다. 비일상적인,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매력적인 순간들. 아주 오래전 캔자스에서 블리스가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일상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너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했던 그 말이. 우리의 관계 자체가,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순간에만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생이 안식이 되는 그 순간이 언젠간 오게 될까. 고개를 돌려 키스하는 블리스의 젖은 입술을 받아들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그런 안식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녀석은 나로 인해, 나는 녀석으로 인해 희게 젖어있었다. 지쳐 쓰러진 나를 대신해 바닥에 묻은 정액 덩어리들을 휴지로 닦아내는 블리스의 다리 역시 힘이 빠져 후들거리고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기에 녀석도 그렇고 나 역시도 전에 없이 열정적이었다. 후끈거리는 서로의 몸의 열기가 눈앞에서 열선을 그리며 보이는 것 같았다.

발바닥을 땅에 대고 있던 다리를 뻗자 땀이 고여 있던 바닥에 마찰해 미끄덩거리는 소리를 냈다. 침대 위에서 관계를 맺은 뒤 시트를 빨아 널기에는 우리 모두에게 시간이 부족했기에 여행 내내 소파 근처라던가 욕조 안, 바닥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엎드렸을 때는, 녀석이 들어올 때마다 바닥에 무릎이 쏠렸다. 관계를 맺는 동안 블리스와 나 모두 몸의 어딘가는 바닥이나 유리, 칠이 발라진 벽에 쓸리곤 했다.

“샤워할까?”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넣어 나를 일으켰다. 축 늘어지는 몸에 힘을 주어 한발씩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에서 둔하고 얼얼한 아픔이 몰려들었다. 블리스는 물기 없는 마른 욕조에 입욕제를 뿌린 뒤에 샤워꼭지를 돌려 적당한 온도로 물을 틀었다. 서서히 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욕조에 들어가 턱에 팔을 걸쳤다. 가슴을 팡팡 치며 들어오라는 블리스 위로 엎드려 가슴의 유두를 치아로 슬쩍 깨물었다.

그렇게 해놓고도 간지러운 감각이 몰려드는지 녀석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녀석의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잡아 뜯듯 당겼다.

“으… 하지마.”

“아직 나오는데.”

“배 아퍼.”

녀석의 손가락이 수없이 들락거리면서 느슨해진 애널 사이로 들어왔다. 따듯한 물에 적셔진 손가락이 살살 안의 정액들을 긁어냈다.

“잘 안 나와. 잠깐만 몸 좀 세워봐.”

“으… 나 이런 거 안 할래.”

“배 아프다며.”

“싫어.”

“손가락이 싫으면 귀두로 긁어줄까?”

“와씨 너!”

장난스럽게 웃는 녀석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도 이 비상식적인 성적 농담이 우스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손바닥에 밀어 올려져 잔뜩 구겨진 얼굴로 어버버 변명을 하려는 녀석을 막아 블리스의 반대편 욕조로 등을 기대었다. 어느새 차오른 거품이 배꼽 아래에서 부풀어 올랐다.

아픈 배 위로 따듯한 거품과 물을 끼얹으며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는 블리스의 다리 사이에 두 발을 뻗었다. 두 발바닥을 모아 그 사이에 블리스의 페니스를 끼워 만지작거리자 녀석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리 이게 네 장난감이라지만.”

“으하하.”

“소중히 대해줘야 한다고.”

말랑거리는 그것을 부드럽게 비비자 녀석이 가슴에 뭉쳐있던 깊은 숨을 토해냈다. 몰려드는 감각에 녀석의 얼굴에 붉은 열기가 번져갔다. 거품과 함께 따듯하게 비벼지는 감각에 녀석의 한쪽 눈썹이 찡그려졌다. 점점 단단해지는 페니스에서 발을 떼자, 녀석이 한숨을 쉬며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거품이 가슴께로 올라와 보이지 않았지만, 붉어진 얼굴과 한숨을 보아 만지작거리는 듯 했다.

“할래?”

“더 하면 나 죽어.”

“그럼 왜 건드렸어.”

“그냥.”

“나쁜 놈.”

아랫입술을 슬쩍 무는 블리스의 모습을 보고 웃다 욕조의 턱에 팔을 걸쳤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을 때, 창백한 별빛이 구름에 걸러지지 않은 채로 쏟아졌다. 눈 내린 산속의 풍경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 별빛들이 너무 환해서 우리 둘의 모습이 완전무결하게 노출될 것만 같았다. 물론, 반사유리였기에 내부가 노출될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벽 한 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유리 탓에 산 속에 노출되어 있는 듯 시각적 황량함 마저 느껴졌다.

“겁이 많다면, 여기서 혼자 목욕을 하는 것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서 대부분 차양막을 치고 하더라고.”

바람이 부는지 상록수 위에 쌓여있던 눈이 새하얀 입자를 뿌리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늑대인간이 나타난다 해도 믿을 만큼 창백한 풍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흥분을 가라앉힌 블리스가 수도꼭지를 잠그고 가슴께로 차오른 거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리 인형만 있으면 딱인데.”

“내가 애냐.”

거품을 모아 나에게로 던졌지만 채 나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에서 흩어지는 거품방울을 보며 웃자 녀석이 다시 한 번 거품을 모아 내게로 던졌다. 이번에는 거품방울이 내 코 위에 슬쩍 얹어졌다. 후, 바람을 위로 불어 코 위에 얹어진 거품을 불어냈다.

온 몸이 따듯한 물에 노곤노곤 풀어지자 졸음이 쏟아졌다. 가물가물 감기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블리스는 몸을 굽혀 내 손을 잡아 자신에게로 당겼다. 내 어깨에 머리 기대.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나를 잡아 올려 어깨에 뒷머리를 기대게 만들며 녀석은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내 배 위에서 깍지를 꼈다. 녀석이 물었다.

“좋지?”

“응.”

“사랑해.”

“응.”

배 위에 얹어진 블리스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리며 고개를 꺾었다. 시야 가득 들어오는 블리스의 턱에 슬쩍 입을 맞췄다. 녀석이 낮게 웃었다. 따듯한 온수 속에 잠긴 젤라틴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시장의 능력을 겨울철 눈 내린 도로의 신속한 제설로 평가한다는 워싱턴 D.C답게 도로 주변에는 눈이 잔뜩 쌓여있었다. 켈리포니아의 하늘과 달리 잿빛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을 보자 그제야 D.C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도로의 제설기계에 밀려난 잿빛 눈은 어느새 어른의 허리춤까지 쌓여있었다.

와버렸다. 공항에 도착해 잡고 있던 블리스의 손을 놓으면서 한 최초의 말은 그것이었다. 커다랗게 부풀어있는 새빨간 색의 점퍼 바람이 모두 빠지도록 껴안고 있던 블리스는 그러게. 라고 중얼거리며 내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그대로 택시를 타 조지타운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전처럼 손을 잡는다던가 야한 농담을 하지 않았다. 꿈이 화려하고 아름다울수록 현실은 냉혹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제설차로 인해 지체되는 도로 위를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 이 도시 대부분의 택시 운전사들은 얼굴이 검거나 노랗거나 아니면 그 사이의 색을 갖고 있다. 우리와 함께 이 시간의 일부를 함께하게 된 그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크림이 잔뜩 들어간 커피색을 띄고 있다. 그는 십대다운 껄렁한 농담하나 없는 우리를 힐끗 룸미러로 바라보더니 이내 관심을 끈다. 그의 관심은 눈으로 인해 지체되는 지저분한 도로로 돌려진다. 지나가는 시간에 비해 달리는 차의 속도는 너무도 느리다. 그는 그 지겨움을 라디오로 달래려 음악을 튼다. 유음이 잔뜩 들어간 스페인어다. 시를 읊기에 좋은, 감성이 풍부한 목소리다.

네온사인이 밤을 밝히는 창밖의 울긋불긋한 풍경은 창에 낀 습한 습기로 인해 물속에 떨어진 수채화처럼 번져보였다. 뽀드득 손가락 끝으로 물기를 닦아내자 눈길을 걸어가는 커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눈길을 달리는 택시로 인해 그 모습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추위를 피하기 위해 연인들은 한 코트 안에서 서로의 추운 몸을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처럼 닿을 수 없었으므로 무언가를 공유하기 위해 함께 나누어 듣던 이어폰 속으로 별장에서 내내 듣고 있던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곤하지?”

신기한 구경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창을 향해 몸을 돌린 내게 블리스가 말했다.

“응. 좀. 허리도 좀 아프고.”

직항을 타고 온 탓에 그리 긴 비행은 아니었지만, 앉아있는 내내 허리가 아팠다. 무리해서 관계를 맺은 탓도 있지만 이코노미석에 뻣뻣하게 앉아있어야 했던 이유가 더 컸다. 뻣뻣하게 굳은 허리를 주무르려 블리스의 손이 점퍼 속으로 들어왔다. 척추를 사이에 두고 커다란 손이 꾹꾹 눌러오자 한결 둔한 통증이 가시는 것 같았다.

느리게 달리는 차 안에서도 시간은 갔다. 택시는 워터게이트주상복합 건물 주변일대를 달리고 있었다. 몇 분만 더 달리면 조지타운이었다. 이어폰을 빼 가방에 집어넣은 블리스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차를 세워 어딘가로 달려 나가고 싶은 것처럼.

“여기서 세워주세요.”

주택가인 탓에 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낮은 속도로 달리던 택시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블리스의 집보다 가까웠던 탓에 먼저 택시에서 내렸다. 트렁크의 짐을 꺼내는 동안 코를 아리게 하는 매서운 추위가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여행 가방을 끌고 창문이 열려진 차 옆으로 걸어갔다.

“잘 들어가.”

“너도.”

“푹 쉬어.”

“응. 너도.”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한 블리스는 비비스가 그려진 회색의 벙어리장갑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 나 역시 끼고 있던 벗헤드가 그려진 검정색의 벙어리장갑을 흔들었다. 당연하게도 헤어지는 연인들이 나누는 작별의 키스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멀어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 것이 앞으로도 익숙해질, 우리의 헤어지는 방식일 테니까.





*





짧았던 겨울 방학이 끝나고 맞이한 새 학기는 매년마다 맞이하던 것과는 달랐다. 모두에게 있어, 새 학기에 대한 긴장감은 나태함으로, 설렘은 익숙함으로 바뀌어버렸다. 갑작스럽게 맞이하는 태만. 아마도 그것은 senirotis라 불리는 12학년병 때문일 것이었다.

전투적이고 첨예한 사고방식에 나태함이라는 개조가 이루어지는 때, 선생들은 이럴 때 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는 예언자처럼, 혹은 물의 심판을 대비해 방주를 짜던 노아처럼 외치고 다녔다. 하지만 그 당시 대다수의 사람이 노아의 말을 무시했던 것처럼 지금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학 지원서 접수가 끝난 뒤, 긴장의 맥이 풀린 시니어들이 가득한 로비라운지는 방학동안 가졌던 가족과의 만남 혹은 여행의 후유증으로 어수선했다.

“방학동안 어디 갔다 왔어?”

아래는 트렁크 팬티를, 위에는 독수리가 그려진 커다란 수건을 걸치고 있던 벤자민이 옆에 털썩 앉았다. 치즈가루가 잔뜩 얹힌 과자를 먹으며 TV만화나 보고 있던 나는 훅하고 맡아지는 땀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캘리포니아. 빅 베어 호수 다녀왔어.”

“젠장, 난 고작 집에 있었던 게 단데.”

과자봉지를 내밀자 녀석은 사양하지 않고 한 움큼 가져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나와 함께 만화채널로 시선을 옮겼다. 계집애 같은 생김새답지 않게 지저분하기로 유명한 벤자민은 또래 학년들보다 세 살이나 어린, 월반에 월반을 거듭한 녀석이었다. 벤자민은 한마디로 천재는 범인과는 다르다는 선입견에 걸맞은 녀석이었다. 그것은 공부뿐만이 아닌 생활의 전반적인 방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혼잣말을 즐기는 녀석의 별명은 영혼과의 접속이었다.

“아참. 버클리 붙었다며.”

“누가 그래.”

“애들이 그러던데. 부럽다고.”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벤자민은 과자조각을 공중으로 던져 입으로 받아먹었다.

“천재를 알아 본 거지.”

“헐.”

내 무시에도 불구하고 벤자민은 꿋꿋하게 과자조각을 공중으로 던졌다. 입을 벌렸으나 턱을 맞고 튕겨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침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밟고 지나가는 한 무리의 소년들로 인해 그것은 지저분한 가루가 되었다. 허리를 굽혀 과자를 주우려던 벤자민은 작게 욕을 중얼거리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밟고 지나간 소년의 엉덩이를 때렸다.

“젠장 뭐야.”

“니가 치워. 밟아서 가루 됐잖어.”

“병신, 그냥 냅둬.”

바닥에 지저분하게 떨어진 과자가루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린 녀석은 조쉬였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TV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레이 혹은 아고스와 조쉬를 마주칠 때 반응하는 반사중추는 뇌가 아니라 척수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무릎반사처럼 자동으로 굳은 표정을 짓는 내가, 비열하게 느껴질 정도로 작아지는 내가 낯설기만 했다.

고작 바닥의 과자를 밟았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사람의 엉덩이를 추행한 벤자민이 못마땅한지 조쉬는 벤자민이 들고 있던 수건을 빼앗았다. 벤자민과 조쉬가 사소한 일로 서로에게 시비를 거는 사이 내 무릎위로 작은 종잇조각이 떨어졌다. 떨어졌다는 표현보다는 던져졌다는 표현이 옳겠지만 급하게 던져진 작은 조각은 엉성하게 구겨져 깃털이 바람에 떠다니듯 천천히 무릎위로 안착했다. 구겨진 종이를 펼쳤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써진 것이 없었다. 고개를 들자 조쉬의 뒤에 서있던 블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그새를 놓치지 않고 볼을 부풀려 우스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 모습을 보다 나 역시 볼을 부풀리자 녀석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녀석이 약지와 중지를 접는 제스처를 몰래 해보였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의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나 역시 약지와 중지를 접어 손을 들려던 순간 눈이 마주쳤다. 벤자민의 수건을 빼앗아 손목에 감던 조쉬와.

“…….”

서걱서걱. 귀 바로 옆에서 가위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기분이었다. 귀가 잘릴까 눈을 감고 있으면 소름이 돋는 그 오싹함. 꼭 그런 느낌이었다. 고개가 돌려지지가 않았다.

손목에 감았던 수건을 풀어내며 조쉬는 슬쩍 블리스를 뒤돌아본 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조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황을 숨기며 손에 감았던 수건을 풀어냈다. 벤자민에게 보란 듯이 발로 가루가 흩어진 바닥을 쓸어 흩어낸 녀석이 말했다.

“여기 신경 쓰지 말고 네 방이나 치워라.”

“내 방이 뭐 어때서.”

“몰랐냐? 너 쓰고 나면 방 옮길 때 아무도 네가 썼던 방에 안 들어가려고 하는 거. 하도 더러워서.”

마지막 말에 발끈하며 일어서는 벤자민을 모른 척 어깨를 으쓱이며 조쉬는 들고 있던 수건의 냄새를 맡았다. 훅, 끼쳐오는 땀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녀석은 수건을 내게로 던졌다. 얼떨결에 젖은 수건을 받아들자 녀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조이. 너도 얘랑 같이 있으면 세트로 바보취급 받는다.”

흥분하는 벤자민을 무시하며 뒷걸음치던 조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긴장한 내 얼굴을 보며 조쉬는 어색하게 굳은 블리스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우리 둘의 눈빛에서 어떤 확신을 받은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위협이나 가치의 전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듯 조금 웃어보였다.

몸을 돌리며 2층의 계단을 올라간 조쉬는 블리스의 목을 강제로 껴안았다.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지만, 심각한 말은 아닌지 블리스의 굳었던 얼굴이 풀어졌다. 2층의 계단 끝을 올라가며 그제야 블리스는 나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녀석과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두려움에 기초한 조바심에 대해서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오늘 밤 걱정으로 뒤척이며 밤을 샐 일은 없다고.

“넌 왜 웃어.”

아무도 없는 2층의 계단을 올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보다.

“만화가 웃기잖아.”

TV 속에선 여자 주인공이 악당에게 쫓기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게 웃겨?”

“하하, 어.”

한쪽 눈썹이 비대칭으로 올라간 벤자민의 얼굴에 손에 들려있던 과자봉투를 내밀었다. 너 다 먹어. 주저 없이 봉투를 받아든 녀석은 안의 노란색 과자를 집어 들었다. 손에 묻은 치즈를 브리프에 닦아내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을 보다 녀석에게 땀에 젖은 수건을 건넸다.

“땀으로 샤워했냐.”

“운동하고 와서 그래.”

팔을 굽혀 근육을 만들어 보지만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 때문에 가늘어 보이는 새하얀 팔에 솟은 근육은 볼품없기만 했다. 어쩐지 조쉬의 말대로 함께 있으면 세트로 바보취급을 받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갈라구?”

“왜. 놀아줘?”

어린 아이 대하듯 손으로 녀석의 머리를 쓸어주자 녀석이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도 애면서 애 취급 하긴. 어디 가는데?”

“서관. 새해기념 파티하기로 했거든.”

“나도 갈래.”

흥분된 목소리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녀석에게서 땀 냄새가 훅 불어왔다. 한발자국 뒷걸음쳐 녀석에게서 멀어지며 말했다.

“그럼 샤워하고 옷 좀 입고 와. 너 지인짜 냄새나.”

“뭐 이정도 가지고. 아무튼 알았어. 몇 시까지 가야하는데?”

“끝나기 전에만 가면 상관없어. 나는 저녁식사 명단에 체크하고 갈 테니까 먼저 서관으로 가. 천문학 클럽에 칼릭스하고 다른 애들 있을 거야.”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2층의 계단으로 뛰어가는 벤자민을 보다,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점퍼를 걸쳤다. 엄마가 집으로 배송되는 우편카탈로그를 보고 주문한 옷이었다. 주문을 잘못 하는 바람에 한사이즈 큰 걸 주문해서, 새빨간 유광의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으면 어디에서도 눈에 띄었다. 지은이 새빨간 츄파춥스 같다고 계속해서 놀리는 바람에 녀석의 방에 몰래 콜라를 쏟고 나왔던 나는, 확실히 나쁜 오빠였다.

서관으로 어서 오라는 재촉의 전화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되었을 파티를 위해 기숙사의 뒤편에 세워둔 자전거를 찾기 위해 로비를 벗어났다. 밖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난방으로 따듯한 안을 벗어나자마자 차가운 바람에 실린 솜 같은 눈이 얼굴위로 내려앉았다. 다행히 혹한은 없었다. 눈이 모두 내리고 나서, 하늘의 구름이 모두 거두어질 때쯤이면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오겠지만.

뽀드득 밟히는 눈을 밟으며 시린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블리스가 지정해놓았던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울렸다. 녀석의 전화였다.

-뭐해.

“파티 가는 중. 새해 파티 겸, 새 학기 시작 기념하는 의미에서 애들이 준비했다네.”

-눈 엄청 오는데.

“괜찮아. 옷 따듯하게 입어서.”

-그러네. 근데 꼭 눈 위를 체리가 걸어가는 것 같다.

“어? 너 나 보여?”

전화기를 귀에 붙인 채로 뒤돌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위 올려다봐. 웃음에 섞인 낮은 목소리가 작게 속삭였다.

위를 올려다보자 건물의 4층중 유일하게 창문이 활짝 열린 방이 조그맣게 보여 왔다. 몸을 반쯤 내밀어 손을 흔드는 블리스를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 방에 눈 다 들어가겠다.”

-괜찮아. 너는 눈 맞고 걸어가잖아.

“나는 옷 두껍게 입어서 괜찮아. 얼른 문 닫어.”

-신경 쓰지 말고 가. 그냥 눈 위를 체리가 걸어가는 게 신기하고 귀여워서 보는 거니까.

“그런 말이 어딨냐.”

블리스의 말에 킬킬 웃으며 몸을 앞으로 한 채 뒤로 발을 뻗어 걸었다. 아래완 달리 위에는 찬 바람이 부는지 어느새 많이 자란 블리스의 머리카락이 흰 진눈깨비에 섞여 휘날렸다. 밤이 깊어오지만, 내리는 눈으로 인해 탁한 보라색으로 물든 하늘은 환했다. 그 속에 어우러진 녀석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마치 마음속에 각인될 사진처럼. 찰나의 아름다움이 잊히지 않도록 그 모습을 가슴에 담았다.

“끊을게.”

-응.

“들어가.”

-응.

“문 닫으라니까.”

-하하, 알았어.

손을 흔들며 창문을 닫고 방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내가 지나온 발자국을 보았다. 삐뚤빼뚤 걸어온 내 못난 발걸음이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엉망이었다. 전화 통화로 인해 얼어붙은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자전거를 세워둔 기숙사 뒤편으로 달려갔다.

맨손으로 자전거의 핸들을 잡자 손바닥에 싸늘함이 밀려왔다. 이 추위를 견디며 눈 속을 헤쳐 갈 자신이 없어 주머니 속의 벙어리장갑을 꺼냈다. 블리스가 선물로 준, 코를 파고 있는 벗헤드가 그려진 장갑은 다시 봐도 웃겼다.

저녁식사 명단에 체크를 한 뒤에 서관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도서관 옆으로 달렸다. 도서관 길옆으로 전나무 숲이 있어 으슥한 이곳은 버크셔의 학생들이 잦은 일탈의 장소이기도 했다. 12학년병에 시달리는 졸업시즌이 다가올수록 느슨해지는 교율에 일탈은 잦은 빈도로 일어났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내리는 눈과 추위로 인해 전나무 숲 속에선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늘은 어두워졌지만 눈은 여전히 쉬지 않고 쏟아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셀 수 없이 쏟아지는 눈송이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대로 한 시간만 눈 속을 달리면, 달리는 눈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을 주었다.

중간쯤 지날 즈음, 점퍼와 목 사이로 들어온 차가운 눈에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눈앞의 가로등 옆 벤치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바닥을 보고 있던 인영이 고개를 든 건 마침 내가 그 곳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였다. 고개가 느리게 들려지고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어렸던 시절 읽었던 사키의 황혼이란 소설이 떠올랐다. 연필과 파스텔로 삽화가 그려진 단편 소설은 그의 소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벤치에 앉아있는 그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소설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쓸쓸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오히려 편안한 기분마저 들게 하는 공원에 와 있었다. 왜냐하면 그 풍경들은 그의 마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땅거미가 길게 드리워진 침침한 공원은 인생의 전쟁터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머물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으니까. 물론, 레이를 보는 순간 그 소설을 떠올린 이유는 녀석을 인생의 패배자로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다. 레이는 그저, 한 없이 고독해보였다.

한겨울의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찬 눈을 맞던 레이의 옆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어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야에 녀석의 얼굴만이 가득 차며 슬로우 모션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추위를 잊은 몽롱한 얼굴,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에 물린 타들어가는 담배, 바람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격렬히 뛰는 심장에 마주쳤던 고개를 돌리고 페달을 세게 밟았다.

“잠깐만!”

“…….”

“가지마. 가지마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이는 소리를 질렀다. 그 의외의 행동에 페달을 밟는 것도 잊은 채 속도가 줄어든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게 꼭 약에 취한 사람 같았다.

더 이상 멀어지지 않는 나를 확인한 레이가 담배를 눈 위로 던지며 웃었다. 전나무 밑에 있었던 탓에 눈을 많이 맞지는 않았던지 녀석의 머리는 습기 없이 보송보송했다. 그러나 약에 취한 창백한 얼굴이, 붉어진 눈이 젖어있어서 온 몸이 차가운 얼음물 속에 담겨져 있던 것처럼 보였다.

“네 친구들은 어쩌고 여기서 이러고 있냐.”

약에 취했어도 내 목소리에 담긴 경멸까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지, 녀석은 피식 웃었다. 비틀거리며 내게로 다가온 녀석은 자전거에 앉아있어 상대적으로 낮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추위에 새빨개진 손이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너.”

“…….”

“아직도 내가 무섭냐.”

숨을 내쉴 때마다 응결된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추위에 얼어있는 보라색 입술이, 살구빛 혈색이 돌던 피부가 창백해져 있었다. 만화적 상상력을 빌리자면, 공주를 구하겠다고 길을 나섰다가 야만적인 방법으로 마녀의 저주에 걸려 온 몸이 보라색으로 변해버린 기사처럼 느껴졌다. 추위도, 어떠한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마법에 걸려버린. 물론, 기사에게 마법의 저주를 건 마녀는 나였고.

“안 무섭다고 하면, 애들한테 떠벌리기라도 할 거냐.”

내 차가운 말에 레이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깨를 옭아맨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눈 위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차갑게 언 손으로 바닥의 눈을 긁어 주먹 안에서 뭉치며 입안에 고인 침을 내 자전거 밑으로 뱉어냈다.

“보통 약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야하는데… 오늘은.”

“…….”

“들쥐가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것 같어.”

“그럼 끊어.”

그 말에 레이는 하아, 긴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최악의 경우 육탄전이라도 예상했기에 지금의 대화는 예기치 못한 방향이었다.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잠언에 나오는 말이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뭐, 지들이 알아서 바치는데 내가 거부할 이유가 없지.”

바닥에 앉아 중얼거리는 녀석을 내려다보던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실없이 웃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 레이의 헛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왜 불렀어.”

“몰라.”

“…….”

“…….”

“약 깨면 찾아오던지.”

한숨 섞인 차가운 내 대답에도 레이는 실실 웃으며 쌓인 눈 위로 드러누웠다. 하지만 가볍던 그 웃음은 이내 거두어졌다. 레이는 두 눈을 꼭 감으며 입술을 앙 물었다. 녀석의 검정 오버코트 위로 쌓이는 눈은 체온에 녹지 않고 쌓여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랜 시간 찬 바람이 부는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어나.”

“…….”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얼어 죽어.”

“네가 뭔 상관이야.”

“네가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내 앞에서 얼어 죽는 걸 방조하는 건 내 양심에 걸리니까.”

감았던 눈을 살짝 뜨며 녀석은 나를 올려다봤다. 눈을 느리게 끔뻑끔뻑 거렸다. 눈 위에 누워있지만, 안락하고 따듯한 솜털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에 대한 증오를 잃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렇다 해도 우리 사이에 변하는 건 없겠지만.

“약에 취하긴 했어도 나… 제정신이야.”

뇌를 점령한 코카인에도 불구하고, 레이의 말처럼 녀석은 여느 때의 약에 취한 순간과는 달랐다. 모든 열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약에 취해 드러날 수 있는 주제넘은 호기도 없었다. 마약과 함께 안정제를 먹으면 저런 반응이 나올까. 녀석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 날 이후로….”

“…….”

“블리스랑은 말도 못해봤어. 그 개자식이랑.”

차갑게 얼은 손으로 눈을 짚으며 천천히 허리를 세운 레이는 코트에 묻었던 눈을 털어냈다. 속눈썹에 붙은 눈송이를 손등으로 훔쳐내자 마치 눈물방울처럼 녀석의 눈 위에 물기가 어렸다. 흐흐, 작게 웃으며 레이는 말을 이었다.

“너랑도 거의 반년 만에 얘기해본다.”

“기념할만하네. 달력에 체크해. 원수와 말 튼 날.”

“하하.”

허리를 숙여 웃는 녀석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나의 마음속엔 조금의 온기도 일지 않았다. 나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생각보다 레이에 대한 증오가 깊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감정적인 도발을 당한다면 서슴지 않고 주먹을 내리꽂기라도 할 것처럼.

실실거리며 웃던 녀석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제야 자신을 둘러싼 추위를 느끼기라도 한 듯 얼어붙은 손으로 어깨를 쓸었다.

“엄청나게.”

“…….”

“엉망이야.”

폐의 모든 공기를 쏟아내듯 하아아, 차갑게 응결되는 한숨은 길기만 했다. 코트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손으로 라이터를 가려 불을 붙인 손이 덜덜 떨렸다.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엉망으로 만들었어.”

어느새 뿜어지는 연기 속에는 울음도 섞여 있었다. 코를 훌쩍이며 레이는 담배를 든 손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너희가 엉망으로 만들었어.”

“…….”

“너희가… 그랬어.”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녀석의 찬 볼 위로 떨어졌다. 차갑게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흐른 눈물은 턱 끝에 고여 큰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손바닥으로 고인 눈물을 훔쳐내며 후우, 울음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내가.”

“…….”

“내가… 엉망으로 만들었어.”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던 녀석의 몸이 흔들리더니 다시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레이는 우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머릿속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추위가 엄습하는 장갑안의 시린 손을 꼼지락거렸다. 눈이 오는 이곳은 너무도 추웠고 또 너무도 황량했다. 녀석이 울수록 머릿속의 차가운 한기류는 더욱더 거세질 뿐이었다. 아마 내가 상처를 덜 받았었다면 녀석의 눈물에 우리의 상처 난 우정이 회복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로 물러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긴 시간동안 내가 받은 상처에 몰두해 있었다. 뼈를 드러낸 상처가 아무는 과정을 누구보다도 고통스럽게 견뎌왔다. 녀석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여 어깨를 떠는 녀석을 보며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럼. 사과해. 네가 얼마나 개자식이었는지에 대해서.”

“싫어! 내가 왜!”

레이는 소리를 지르며 손안에 뭉친 눈을 내게 던졌다. 뭉쳐있던 차가운 눈이 볼을 맞고 산산이 흩어졌다. 단단하지 않았기에 아프지 않았다. 이미 내 얼굴은 추위에 얼어있기에 새로운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레이의 창백했던 얼굴에 열이 올라 붉어졌다. 녀석이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어린아이 같은 고집을 부리는 얼굴은 위로를 바라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약이나 끊어. 병신아.”

네가 얼어 죽든 말든 이젠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까.

입술을 깨물며 멈춰있던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때마침 거센 바람이 불어 녀석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 레이와의 접촉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복도에서, 로비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마주침은 있으나 의식적인 무시가 반복되었다. 나는 어쩌면, 레이가 생각보다 멀쩡하지 않다는 것. 약에 의지하지 않고는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다는 것. 문드러진 속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이 마약이라는 것을 기뻐하는지도 몰랐다. 자업자득이라고, 레이를 향한 불가결한 분노 속에 녀석의 불행을 동정하지 않는 내가 있음을 시인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순수한 행복이 될 수는 없었다.

잔뜩 때가 낀 건물에 오랜 시간동안 범위를 늘려온 그 불안전한 균열. 맞은 편 건물의 갈라진 벽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멍하게.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머리에 손을 얹어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

“뭐 기분 나쁜 일 있나?”

한쪽 입 꼬리를 슬쩍 들어 올린 칼릭스였다. 녀석의 머리는 예전보다 많이 짧아져 있었다. 목의 반을 덮던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을 뭉텅 잘라내 버렸다. 귀를 드러낸 짧아진 머리를 보며 든 생각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에 머리를 자른다는 의미는 자신의 옛속성 잊고 다시 시작하는, 분기점을 의미했으므로.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런 거 있는 표정인데.”

하하, 웃으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러는 너야 말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냐. 입에 고이는 한숨을 삼키며 팔꿈치로 녀석의 배를 밀어냈다.

“그럴 리가.”

노래를 부르듯 과장된 어투로 말하는 나를 칼릭스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밥이나 먹자. 낮게 말하며 내 손목을 잡아 거실로 이끌었다. 가브리엘의 집은 새해를 맞이하여 대청소를 했기에 눈에 익었던 가구 중 일부가 눈에 띄지 않았다. 새해라는 것은 많은 의미로 옛것을 잃게 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비롯해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것들을 싹둑 잘라내 버리는 계기가 되니까.

아이들은 방안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몸싸움을 했다. 이곳의 아이들에게는 찢어진 폐종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조각이 곧 장난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언젠가는 잃어버릴, 자신들의 고유의 언어로 제멋대로 즐기고 제멋대로 싸웠다. 나와 지은이 그랬듯이 그들의 부모가 돈을 벌수록 폐종이가 아닌 종이 인형, 로봇, 컴퓨터 게임으로 바뀌어가겠지만.

커다란 탁자를 이어 붙이고 창고의 의자를 모두 가져왔음에도 자리가 모자라 나는 미겔을, 칼릭스는 코라손을 안고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콩이 곁들어진 소고기 안심요리가 각자의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미겔의 가족 시민권 인터뷰를 마친 기념으로 안젤리카가 준비한 자리였다.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묶어 뒤로 넘긴 미겔은 데이지가 그려진 분홍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미겔 못 본 사이 더 예뻐졌네.”

“응. 그거는 엄마가 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으면 예뻐진 댔는데, 남기지 않고 다 머거서 예뻐진 걸 거야.”

나이프로 잘라놓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새가 모이를 먹듯 조금씩 씹어 먹으며 미겔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묵묵히 가브리엘의 옆에서 스테이크를 썰던 로사리오의 눈썹이 올라갔다.

“멍청아 그걸 믿냐.”

“언니는 맨날 남겨서 못생긴 거자나.”

“내가 너보다 천배는 예쁘거든?”

“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껄렁껄렁한 로사리오의 반박에 묵묵히 소스에 푹 젖은 콩을 찍어먹던 가브리엘이 중얼거렸다. 가브리엘이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게 기쁜지 미겔은 두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눈을 흘기는 로사리오를 모른 척 또 다른 요리를 내오는 안젤리카를 보며 가브리엘은 입을 열었다.

“어땠어요. 인터뷰?”

“잘 모르겠어요. 잘 한 건지 못한 건지. 불안해서 잠도 안와.”

“뭐, 잘 됐을 겁니다.”

“그렇겠지? 콜롬비아로 돌아갈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니까.”

가브리엘의 말에 소녀처럼 웃으며 안젤리카는 손에 들고 있던 냄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토마토와 돼지고기가 잔뜩 들어간 걸쭉한 스튜를 접시에 담아 내게로 내민 안젤리카와 눈이 마주쳤다. 잘 먹을게요. 씩씩한 내 말에 웃는 그녀의 얼굴은 주름져 있지만, 그 눈만은 젊음의 매력을 잃지 않고 활기가 넘쳤다.

“대학 들어가는 건 잘 된 거니?”

“4월까지 기다려봐야죠.”

“내가 네 엄마가 되고 싶다니까. 로사리오 재는 공부할 생각을 안 해.”

“나는 대학 안 갈 거니까 괜찮아.”

스튜가 담긴 접시를 내려다보며 로사리오는 안젤리카의 잔소리는 이미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요리사나 할까?”

“요리? 어이구, 넌 계란 프라이도 제대로 못 하잖니.”

“걱정 마. 난 머리가 좋아서 금방 배우니까. 게다가 나 결심만 하면 못하는 것도 없어. 이제 더 이상 약 안 하는 거 엄마도 알잖아?”

조금의 주저도 없이 말하는 모습이 거만하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새침한 소녀의 짓궂음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거칠었던 첫인상과 달리 가끔씩 마주칠 때마다 느낀 것은 갱단 소속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또래 사춘기 소녀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였다. 성격이 별나긴 했지만 사소한 농담에 키들거리며 웃고, 또래 소녀들처럼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그저 그 또래의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요리? 요리에 취미가 있었나?”

창고에서 꺼내온 등받이가 없는 불편한 의자에 앉아있던 가브리엘은 식탁 가까이로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재밌잖아요. TV에서 요리채널 나오면 보고 있는 것도 즐겁고.”

“그럼 뉴욕에 있는 스시전문 레스토랑에 소개시켜줄까? 친구가 레스토랑 오너거든.”

“아아, 제발 가브리엘 너무 앞서가지 말아요. 난 거기까진 생각 안 했으니까.”

포크를 든 손을 저으며 로사리오는 덧붙였다.

“사실 쉽게 빠져나갈 수도 없어요.”

“뭐? 어제는 나온다고 했잖아.”

“제대로 들었어야죠. 나온다는 게 아니라 나오고 싶다는 거였죠.”

능청맞게 느껴질 정도로 어깨를 들썩이는 로사리오를 보며 가브리엘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간의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비춰지는 얘기로 보아 오랫동안의 설득 끝에 로사리오는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된 듯 했다. 그것이 손톱만한 후회인지, 아니면 자신의 인생 전반을 뒤돌아볼만한 후회인지 알 수 없지만.

“한번 들어가면 못나간다고 했잖아요. 복종 아니면 의무 밖에 없는 곳인데.”

고작 16짜리 소녀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험악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이 하는 얘기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사람 다그치는 법이 없는 가브리엘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두 사람간의 대화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미안함을 느낀 건지 가브리엘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마침, 미겔이 내 머리카락을 슬쩍 잡아당기며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조이 있자나. 작게 속삭이며 야금야금 포크에 찍은 스테이크를 먹는 미겔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절로 볼에 손이 갔다.

“왜?”

응. 그게. 주저주저 내 얼굴을 자신에게로 잡아당기며 미겔이 말했다. 나 오빠 얼굴 그렸어.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에 섞인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진짜? 대답대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젤리카의 눈치를 살핀 미겔이 다른 사람이 들을까 두 손을 모아 내 귀 옆에 대며 말했다. 밥 먹고 나서 방에 들어가서 보여주께.

내 얼굴을 그렸다는 것이 큰 비밀이라 할 순 없겠지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미겔을 따라 나도 신중한 목소리로 그러자고 속삭였다.

“조이 인기 많네.”

스테이크를 베어 문 한쪽 볼이 볼록해진 채로 칼릭스가 웃었다. 어느새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온 미겔을 보다 코라손의 스테이크를 쓸어주며 녀석이 덧붙였다.

“미겔 남자친구 있다며.”

“헤어져써.”

“왜?”

“지겨워져서.”

아이답지 않은 성숙한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말에 모두가 웃어준 것이 기뻤는지 미겔도 헤헤, 따라 웃었다. 사람들이 왜 웃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모를테지만.

미겔은 가라앉아가던 금요일 저녁식사의 분위기를 되살려놓을 의도까지는 없었겠지만, 덕분에 저녁식사는 그럭저럭 활기를 띄어간다. 작년 한 해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얘기, 올해의 걱정들에 대해 시간을 때울 수다를 떤다. 물론, 이곳에서는 서로의 언어가 얼마나 비틀려져 있는가는 흠이 되지 않는다. 이중모음과 무성음에 대해 공을 들여 얘기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곳은 대체로 편안하다. 누구도 독특한 사람 취급을 받지 않으려 언어를 필사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고무장갑을 낀 사람은 나와 로사리오였다. 가끔 들러 저녁을 먹고 가도 설거지만은 피해가던 그녀가 자진해서 나선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변덕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야, 범생.”

팍 구겨지는 내 얼굴을 모른 척 로사리오는 거품 묻은 접시를 내게로 넘겼다.

“너희 학교에 혹시 파렐이라고 있어? 시니어라던데.”

“있어. 근데 왜.”

“아… 정말이었구나.”

간지러운지 거품이 묻지 않은 팔등으로 코를 비비며 로사리오는 재미난 생각이라도 나는지 키들키들 웃어댔다.

“그게, 우리 딜러한테 가끔씩 약 사가는 애가 있는데. 날 본 모양이더라고. 딜러가 그러는데 그 애가 날 맘에 들어 한다고 그러더라? 근데 그 애가 딱 약하게 생긴 애들 있지, 비실비실 해가지고 얼굴 창백한 애들. 눈 밑은 또 시꺼매가지고. 아무튼 그렇게 생겼잖아. 근데 버크셔였구나. 난 또 어떤 한량이 거짓말 하는 줄 알았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품 칠 한 접시를 내게 넘긴 로사리오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의아함에 접시를 잡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자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지 비식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팔등으로 얼굴을 쓸자, 아니 그게 아니고. 발로 내 다리를 슬쩍 차며 씨익 웃었다. 예상치 못한 덧니가 드러났다.

“나 예쁘냐?”

의외의 말에 하, 웃었다. 내 기막힌 웃음에도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눈에 꼭 그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짓궂은 농담을 할까, 아니면 부정을 할까. 짧은 순간에 수십 가지 답변이 떠올랐다. 하지만 로사리오가 원하는 대답은 따로 있었다.

“응. 너 예쁘게 생겼어.”

대답을 예상하고 물었겠지만 그 대답을 들은 본인조차도 의외였는지 로사리오는 입을 벌렸다.

“어머, 너 뭐냐? 네가 그렇게 날 순순히 인정하다니. 너도 날 보다보니까 정들었구나.”

“글쎄. 그런가.”

“그렇지? 역시 너도 그렇지? 그게 처음엔 다들 나를 싫어한다? 근데 날 보다보면 자꾸 매력이 느껴지는 거야. 착한 애가 갑자기 못된 짓 하면 미워지는데 나는 처음부터 착한 척 안하거든. 예쁘고 새침한 애가 만날 틱틱거리다가 한번 귀엽게 굴면 그게 또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잖아. 근데 내가 그래. 아하하, 내가 내 입으로 이런 소리 하니까 엄청 웃긴다.”

“기분 좋나봐.”

설거지도 잊고 거품이 잔뜩 일어난 스펀지를 들고 열변을 토하던 로사리오는 내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뭐, 조금.”

“좋은 일 있어?”

“아니 딱히 없어. 그냥 이유 없이 기분 좋은 날도 있는 거지 뭐. 안 그래?”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어깨를 으쓱이며 물로 닦아낼 그릇이 없어 녀석의 앞에 잔뜩 쌓인 접시를 내려다봤다. 저녁식사를 했던 인원이 많았던 관계로 아직 한참이나 쌓여 있었다.

“힘들면 바꿀까?”

“아니, 내가 너무 늑장부렸나? 빨리 해서 줄게.”

손목까지 내려간 고무장갑을 끌어올린 후 로사리오는 수세미로 벅벅 문질러 닦은 그릇을 내게 넘기며 말했다.

“대학 들어가지?”

“응.”

“뭐 할 건데?”

“경영 생각하고 있어.”

“오… 돈 버는 거네? 부자 되려고?”

대답대신 웃으며 개수대 옆에 접시를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언뜻 천진해 보이는 모습에서 길거리의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풍기는 거칠고 메마른 위협의 느낌은 없었다. 필요에 따라 그 방법이 서툴긴 하지만 매력적으로 보일 줄도 아는 것 같았다. 그런 소녀가 왜 하필이면 그런 무리에 끼게 되었는지, 로사리오의 앞에 쌓여있던 그릇이 반으로 줄어드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무심한척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일 위험하지 않아?”

딱딱하지도, 조금의 비꼼도 없는 말투에 로사리오는 웃었다.

“12살에 가입했는데 뭘 알고 했겠어? 그 때 나랑 놀던 애들 절반이 들어갔어. 뭐, 어렸을 때는 돈도 좀 벌고 폼 나니까 좋은 건 줄 알았지.”

“12살이면…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그렇게.”

“8살에 들어온 애도 있는데 뭐. 어리니까 멋도 모르고 시작하는 거지. 물론, 내 역할은 마약딜러랑 붙어 다니면서 운반하는 역할이라 총질하고 그런 일은 없어. 다만 무서운 게 있다면 아직 시민권자가 아니니까 경찰에 연행될 경우에 추방당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런데 나 콜롬비아에서 살 때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어.”

“위험?”

“메데인이라고 좀 험악한 동네에서 살았는데. 아버지와 삼촌이 경찰이셨거든. 그래서 맨날 보디가드와 학교 같이 다녔어. 미겔만한 나이 때 납치도 당한 적 있고. 삼촌은 결국 돌아가셨는데. 뭐, 거기서는 경찰 자녀라면 흔한 얘기야.”

“그럼 아버지가 너 하는 일 싫어하시겠네.”

“아버지는 몰라. 알릴 생각도 없고.”

얼굴을 찡그리는 로사리오는 좀 전보다 거칠게 그릇을 문지르며 덧붙였다.

“알면 많이 실망하실 걸.”

로사리오는 거품이 줄어드는 스펀지에 세제를 짜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 말에 대해 가브리엘이라면 어떤 대답을 했을까. 나는 멋들어진 대답이나 성의를 다한 조언을 할 수도, 할 생각도 없었다. 로사리오는 그저 앞으로 자신이 원하고 갖게 될 것에 대해 제약을 거는 결정을 내린 것뿐이었다. 조금의 제고도 없이 단순하고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은 마치 가치 없는 대가를 목표로 자신의 인생 모두를 도박에 내건, 미련한 도박꾼 같았다. 실력 없는 도박꾼에겐 몇 장의 지폐보다 인생에 대한 조언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누구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데.”

“생각해둔 게 없는데. 근데, 나 그만 말할래. 이런 얘기 계속하면 우울해진단 말야.”

쯧 혀를 차며 로사리오는 고민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거품이 묻은 그릇을 모두 닦고 새로운 그릇을 기다리는 나를 갸름해진 눈으로 쳐다보며 좀 전보다 속도를 냈다. 곱실거리는 긴 머리가 자꾸만 흘러내려 귀찮게 하는지 앞머리가 흘러내릴 때마다 입으로 바람을 불어 눈앞의 시야를 확보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손에 낀 장갑을 빼어 또 다시 코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머리 묶어줘?”

“응. 내 주머니에 머리끈 있거든? 좀 꺼내봐. 응 거기 왼쪽.”

몸에 붙지 않는 바지를 입었기에 로사리오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기가 수월했다. 머리 끈을 찾는 것은 쉬웠다. 주머니에서 밴드를 꺼냈을 때 부스럭거리는 투명한 비닐을 밀봉하고 있는 것이 머리끈이었다. 그러나 나와 로사리오 모두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비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새하얀 가루였다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유혹을 느꼈다거나 충동이 든 것은 아니었지만, 엄지손가락 한 뼘 가까이 들어있는 새하얀 코카인 가루를 보자 머릿속이 선연해졌다.

“아, 이런.”

“로사리오.”

때마침 방 안에서 그릇을 들고 나오는 안젤리카로 인해 대화는 중단되었다. 접시와 스푼이 담긴 커다란 볼을 들고 나오던 안젤리카의 눈에 띌까 나는 급히 들고 있던 비닐을 구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것도 같이 닦아 놔라. 방에 그릇이 쌓여있었네.”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로사리오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거품이 잔뜩 묻은 장갑을 낀 채 그릇을 받아들며 그녀는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럼 수고해.”

손까지 흔들며 거실을 지나 방안으로 사라진 안젤리카의 뒷모습에 로사리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끊었다며.”

“끊었어. 그리고 목소리 낮춰.”

“끊었다면 이건 뭔데.”

주머니 속에서 비닐을 꺼내어 로사리오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어떤 위협도 그렇다고 훈계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저녁 식사 시간에 했던 말과 다른 로사리오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을 뿐.

“버릴 거였어.”

“그럼 내가 버릴게.”

“그건 안 돼.”

“끊었다며.”

로사리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안하면 팔면 돼.”

“파는 건 더 나쁘지.”

“내가 너한테까지 훈계를 들어야겠어?”

“그러면 가브리엘한테 말하지 뭐.”

세모네 지는 로사리오의 눈을 보며 나는 조금 웃었다. 이미 로사리오에게 그 또래의 여자애다운 순진하고도 명랑한 면모를 발견했기에 조금의 위협도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것이 나보다도 훨씬 작은 여자이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그네들 식으로 분노를 폭력으로 해소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아무튼 내가 가져간다.”

확 구겨지는 얼굴을 모른 척 비닐봉지에서 머리끈을 빼어 손목에 걸었다. 봉투를 묶어 주머니 속에 구겨 넣으며 기막혀하는 로사리오의 뒤로 걸어갔다.

“머리 묶어줄게. 고개 숙여봐.”

그 말에 로사리오의 얼굴이 확,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보느라 상대적으로 흘겨보는 눈이 된 얼굴을 보며 나는 덤덤히 고개 숙이라는 말을 했다. 녀석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머리 안숙이면 나 못해. 내가 머리 길어서 머리 묶어본 것도 아니고.”

“하….”

“머리 묶지 말까?”

“아 몰라. 그 약 너 다 마시고 죽든 살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린 로사리오의 머리카락을 모아 손 안에 쥐었다. 웃음을 참으며 날개뼈 밑까지 자란 기다랗고 윤기 나는 갈색의 곱슬머리를 고무줄 사이에 두었다. 예쁘게 묶으려 애 썼지만, 보통여자애들이 묶는 가지런한 모양새는 나지 않았다. 내 어설픈 실력이 짜증나는지 로사리오는 손을 저었다.

“근데.”

“응.”

“너 보기보다 오지랖이다?”

마지막 남은 커다란 냄비에 눌어붙은 스튜를 수세미로 박박 닦아내며 로사리오가 말했다.

“보기엔 어떤데.”

“무뚝뚝하고 좀 재수 없어 보여. 나 같은 애들한테 말도 안 붙이게 생겨서는.”

“그랬냐.”

그녀의 말에 웃으며 스푼과 포크를 가지런히 꽂았다. 내 외모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이 비슷했기 때문에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구호기금 마련을 위해 포스터로 사용하는 사진 속 동양인처럼 동정심을 끌만한 얼굴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한 백인 녀석들의 여유로운 얼굴을 흉내 내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비굴한 인상을 남기지도 않았다. 내가 들었던 얘기 중에 가장 심한 것은 웃음과 눈물 그리고 분노를 극도로 단순화 시킨 얼굴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내 얼굴은 감정을 드러내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마음의 문제였지만.

“너. 괜한 오지랖 부리지마. 가브리엘도 벅차거든?”

항복의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자 혀를 차며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싱크대에 던지듯 올려두었다. 화난 얼굴의 로사리오가 거실로 걸어가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미겔이 한쪽 다리에 팔을 감쌌다.

“조이. 언제 끝나?”

“응. 이제 다 했어.”

“얼른 와. 빨리 그림 보여줘야 대.”

“응. 이것만 할게.”

물로 행군 냄비를 싱크대에 뒤집어 올렸다. 로사리오가 뒤집어 벗어둔 장갑과 내가 끼고 있던 장갑을 정리해 그 위에 올려놓고는 뒤돌아섰다.

“자, 다했어.”

“그럼 나 안아줘!”

다리에 매달려 움직일 때마다 뒤뚱거리며 따라오는 미겔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쪽, 하고 볼에 베이비 키스를 했다.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내 얼굴이 우스운지 깔깔 거리며 웃었다. 멋쩍은 나를 아는지 미겔은 계속해서 웃어댔다.

“오빠한테 계속 뽀뽀하면 엄마가 안 좋아하셔. 알겠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미겔의 코를 잡아 살짝 흔들었다. 방으로 들어가자고 보채는 미겔을 한 팔에 안고 거실을 가로질러 방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미겔이 그렸다는 그림 속의 나였다.

“와… 미겔 그림도 잘 그리네?”

“응. 유치원에서 그림그리기 했는데 난 오빠 그렸어.”

미겔이 그린 스케치북 속의 나는 검정 머리에 새까만 눈, 그리고 온통 핑크색으로 칠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핑크색 드레스가 아닌 핑크색 정장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이의 취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 옷이 웃기기도 하고 귀여워서 웃자, 미겔도 천진하게 따라 웃었다. 그림 속의 나는 얼굴이 아주 크고 몸통이 아주 작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늘상 거울을 보면서도 놓치는 나의 부분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광대뼈 아래의 작은 점이라던가 겨울철 들어 자주 트는 바람에 갈라진 아랫입술이 아주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 너무 잘 그리는데?”

“오빠 줄까?”

“미겔이 힘들게 그린 건데, 내가 받아도 돼?”

“응. 꼭 액자에 걸어둬야 돼?”

아이의 순수한 호감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기대하는 발그레한 얼굴을 보자 어쩐지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미겔의 집중하는 얼굴을 슬쩍 잡아당긴 후, 방에 쌓여있던 신문에 조심스럽게 그림을 말아 구겨지지 않도록 가방의 지퍼를 열어 꽂아 두었다. 가방을 열면서 얼핏 본 핸드폰의 액정에는 문자가 와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잠깐만 미겔. 오빠 전화 좀 할게.”

“응. 전화하고 나와. 난 애들이랑 놀게.”

종종걸음으로 뛰어나가는 미겔을 보며 확인한 문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집에 있으면서 내 생각이 날 때마다 여러 통의 문자를 보냈을까 기대를 했던 자신이 우스워서 실없이 웃었다. 문자의 내용은 간단했다. 시간 나면 전화해달라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이 간단한 문자를 보내놓고 초조해하며 전화기를 흘깃거릴 블리스를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배터리가 한 칸밖에 남지 않은 핸드폰이 꺼지기 전에 서둘러 문자를 보냈다.

-오늘 너희 집 간다. 우리 집 오지 마.

하트 표시도, 어떤 감정적 표현도 없는 건조한 문자였지만 그에 대한 답장은 절절했다.

-빨리 와. 보고 싶어서 죽어가. 칼릭스와 빨리 떨어져라!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에 대한 답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문 밖에서 빠르게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노크 없이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은 칼릭스였다. 형광등의 빛이 너무 어두워 바닥에 꿇어앉아있던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녀석의 표정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갈 준비 안 해?”

“응?”

“여덟시 넘었어.”

손가락 끝으로 나무문을 피아노를 치듯 두들기며 녀석이 말했다. 녀석의 손가락 사이엔 차키를 끼워놓은 열쇠고리도 끼어 있었다. 문에 기댔던 몸을 움직여 내게로 다가오며 녀석은 손안의 키를 빙그르르 공중에서 한 바퀴 돌렸다.

“인사하고 가자.”

차키를 잡은 손을 내게 내밀며 녀석이 말했다.

“벌써 8시가 넘었나?”

“응. 가야지.”

기다림이 길어지자 녀석이 손을 흔들었다. 손을 뻗자 힘주어 당겨 일으켜졌다.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둘러 어깨동무를 하며 거실로 나가자 키 차이로 인한 어색함에 가브리엘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인사를 하고, 보내기 싫어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던 미겔까지 달래어 떼어놓고는 칼릭스의 차에 올라탔다.

알스트리트를 벗어난 자동차는 메디슨 드라이브도로로 빠져나왔다. 금요일 저녁의 열기로 인해 정체된 도시의 도로는 새해의 흥분의 여운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식당 유리에 붙어있는 새해 특선 요리라던가 백화점 전면을 크게 덮고 있는 새해맞이 이벤트 따위가 그것이었다. 정체된 도로에 주의를 집중하는 칼릭스와 달리 나는 편하게 창밖의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난방 더 올릴까?”

“아니 난 괜찮은데. 너 추우면 올려.”

“나도 그다지.”

액정에 나온 실내의 온도를 체크한 칼릭스는 구겨지지 않도록 손으로 잡고 있는, 둘둘 말아진 종이를 힐끗 쳐다봤다.

“그게 뭔데 그리 소중하게 안고 있어.”

“아, 미겔이 그려 준거야. 유치원에서 그림 그리기가 있었는데, 날 그렸다고 해서. 보여줄게.”

차 안의 실내등을 키고 둘둘 말았던 종이를 녀석의 얼굴 옆으로 폈다. 정체된 도로를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도화지를 본 녀석이 웃었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그려놓냐.”

“왜. 애가 그린 것 치곤 잘 그렸는데.”

정체된 도로의 붉은 헤드라이트를 바라보던 칼릭스의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그게 아니고.”

“응?”

“좀 심하게 미화했잖아.”

주먹을 쥐어 약하게 녀석의 배를 치자 억, 하고 아픈 흉내를 내며 웃었다. 아픈 척 찡그린 얼굴로 아니, 그럼 네 얼굴이 더 멋지다는 말이냐며 웃었다. 다음에 미겔에게 네 얼굴도 부탁할게 라는 말에 아동착취라는 말로 맞서는 녀석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사고나 사고.”

몸을 비틀어 피하는 녀석을 흘겨보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운전 중이니까 봐줄게.”

“어쭈.”

“어쭈 뭐.”

“어쭈쭈쭈.”

“아 뭐야.”

대답대신 웃는 녀석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따라 웃으며 좌석에 몸을 묻듯이 기댔다. 가끔 기대하지도 못하던 유머감각을 보이는 녀석이었다. 창과 좌석의 머리 받침대 사이에 편하게 기대어 손을 뻗어 녀석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흐트러트렸다. 녀석의 미소가 짙어졌다.

버튼을 눌러 튼 음악은 에코와 화음이 잔뜩 들어간, 단순한 멜로디의 울림이 가득한 브릿팝이었다. 칼릭스는 기분이 좋은지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끔 방심하여 흐름을 놓치기도 하고, 그 흐름이 완전히 끊어지기다 이어지기를 반복 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녀석의 모습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흥얼거림이 아닌 어떤 낯선 어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노래의 가사를 빌어 나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나의 얼굴의 표정에서 답을 읽는, 무너진 형식의 대화. 나와 함께 가라앉아. 도시를 지나 바다에 이를 때 까지. 몰려드는 꿈. 오 그것은 고통이야. 고통이 내 안에 배어들고 있어. 오 나의 고통을 달래줘. 나의 고통을. 자꾸만 붕 뜨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창문을 아주 조금만 열었다. 그러자 손톱만한 틈 사이로 거리의 소음이 새어 들어왔다. 눈을 감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쉬이익, 틈 사이로 들어온 겨울의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눈을 떴을 때, 웃음이 잦아든 녀석의 하얀 얼굴 위로 거리의 야경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네온사인으로 환한 도로가 영사기가 되고, 녀석의 백지 같은 얼굴이 스크린이 되어 도시의 고독과 소란스러움을 그대로 비춰냈다.

“짧은 머리….”

“응?”

“짧은 머리 잘 어울린다.”

그 말에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던 녀석이 나를 내려다봤다. 운전 중인 것도 잊고 올려다보는 내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이 아닌 입술이 반쪽짜리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곧 고개를 돌려 노래의 볼륨을 조금 더 높이며 노래를 좀 더 크게 했다. 그것이 독립된 곡조가 아닌, 라디오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하나가 되어 흐르도록.

머리가 짧아졌다고는 하나,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짧은 머리가 아직은 어색했지만, 녀석의 낮은 목소리의 음역이라던가 온전히 환해지지 않는, 행복이 결여된 미소가 모두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나는 달라졌다고 생각했던가. 녀석의 짧아진 머리를 보면서 왜 돌연한 변화를 기대했을까. 녀석은 모든 게 그대로였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조차도.

짧은 숨을 들이마시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대로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녀석의 입술이 벙끗 거렸다.

“우리 앞으로 반년 뒤면 졸업한다.”

흠, 녀석이 작게 웃었다. 더 이상 녀석의 허밍은 없었다. 그저 외로운 노래의 곡조만이 차안에서 공허하게 울리는 느낌에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졸업…. 그러네.”

불과 반년 뒤에 다가올 졸업이란 또 한 번의 마침표가 아직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딘가 꿈결 같은 내 목소리에 칼릭스는 메마른 코웃음을 흘렸다. 녀석이 침묵했다. 또 한 번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녀석이 말했다.

“전화 자주 해줄 거지?”

목소리에도 땀이 베일 수 있다면, 녀석의 목소리엔 긴장으로 인한 손바닥의 땀처럼 축축함이 묻어 있었다. 창가에서 시선을 돌려 칼릭스를 손을 바라 봤을 때, 어둠 속에서도 관절이 다 드러나도록 새하얗게 꽉 쥐어진 녀석의 손등이 보였다. 울컥, 속에서 솟든 뜨거움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그래.”

그제야 핸들을 가두던 녀석의 옥죄어진 손이 느슨해졌다. 창문의 거울에 비친 칼릭스의 옆모습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하단 말이라던가, 좋아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정체되는 도로는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커다란 자동차의 물결이 아주 느린 속도로 육지를 덮으며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아주 느리게, 땅을 점령하고 도시를 점령하는 커다란 기계 유기체. 기계로 이루어진 해류속의 물방울이 되어 흐르는 차안에 갇힌 채로 칼릭스는 노래의 리듬을 따라 손끝을 까딱였다. 고요히 운전에 집중하던 얼굴이 말했다.

“4월에.”

라디오의 볼륨을 줄이지 않았기에 녀석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좀 전보다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했다. 녀석 쪽으로 완전하게 시선을 돌린 나를 모른 척 녀석은 앞만을 응시했다.

“우간다 북부지방으로 간대.”

“누가?”

녀석이 웃으며 말했다.

“가브리엘.”

당황한 내 얼굴을 힐끗 바라본 뒤, 커다란 볼륨의 음악이 거슬렸는지 소리를 반으로 줄였다.

“삼 년 전에 영국에서 알게 된 영화감독하고 몇 사람이 팀을 이뤄서 북부 난민촌으로 가게 되었다더라. 저명한 문화재건가라는데 난민촌 중심으로 학교를 세우나봐. 가면 몇 년간은 돌아오지 않을 거래.”

피아노 건반을 치듯 핸들을 두드리며 칼릭스는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구호센터에서 알게 된 부부에게 지금 운영하는 센터도 맡길 거라더라. 비원어민 교육에 좀 더 적극적인 곳이라고 잘 된 일이라던데. 내 생각에도 뭐, 오히려 잘 된 일인 것 같아. 아직 확정된 게 아니라지만.”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며 녀석을 올려다봤다. 녀석은 가브리엘과의 이별에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괜찮아?”

“뭐가.”

“가브리엘 가는 거.”

그 말에 칼릭스는 정면을 바라보던 고개를 나에게로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 웃었다. 다시 도로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별이라는 것도 반복되면 무뎌져.”

“…….”

“세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이후로도 아버지 동거했던 사람 자주 바뀌었다고 내가 전에 말했잖아. 페이린은 좀 오랫동안 같이 있었지만, 뭐 그도 결국엔 가버렸지. 가브리엘은… 내가 많이 의지하긴 했지만 마음이 굳어진 사람에게 가지 말라고 붙잡는 거 의미 없는 짓이니까. 나는 그다지 섭섭하거나 하지 않아.”

담담한 옆모습을 바라보다 그래, 작게 중얼거리며 무릎 위에 펼쳐져 있던 종이를 신문에 말아 손에 쥐었다. 반복된 이별로 견고하게 자신을 감싸온 칼릭스의 모습은 그럼에도 완벽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얼마나 지쳐있는지. 결국엔 녀석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열려있었다. 이별만큼은 자신에게 어떠한 상처도 주지 못한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 만큼.

창에 머리를 기댄 채로 칼릭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녀석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그리고 초조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이 견딜 수 없게 느껴졌다. 한 때는 칼릭스를 지나치게 의식했던 때도 있었다. 감정의 어떠한 변형이었을지는 나 역시도 깨닫지 못하던 순간에 지나가 버렸지만. 어쩌면 내가 힘든 시기를 보내기 이전에 녀석이 다가왔더라면 즉시 녀석에게 끌림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결국에는 단순한 문제였다. 사회적 가치와 의미, 구속을 제하고 남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 블리스인가 칼릭스인가. 그리고 나는 블리스를 버리고 칼릭스와 함께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블리스와의 사랑에 순수하게 도취되기에는 나는 반쯤만 행복한 상태였다. 그것이 너 때문임을 나는 평생을 가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보지마.”

멍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칼릭스의 입술이 웃었다.

“왜.”

내 물음에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이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여 음악을 크게 틀었다. 빛이 환하던 중심가를 벗어나 한산한 주택가로 들어서면서 녀석의 얼굴에 어린 그림자가 짙어졌다. 조지타운 내부로 들어와 익숙해진 집 근처의 골목길을 돌며 칼릭스는 실내등을 켰다.

“도착했어.”

“응.”

“푹 쉬어.”

“너도.”

도도독, 자동차의 핸들을 두드리는 손가락 끝을 보다 고개를 돌려 녀석의 눈을 바라봤다. 달리 어떤 말이 필요할까. 블리스와 달리 칼릭스는 스스로가 인정했듯이 이별에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녀석은 진저리나게 수많은 이별을 겪어온 소년이었다. 그러니, 우리의 이별 역시 아쉬움도 미련도 없을 수밖에. 그러나 잘 가. 라는 말 뒤에 차안에 남겨진 녀석의 마지막 얼굴엔 혼탁액 속의 침전물처럼 씁쓸함이 녹지 않고 가라앉아 있었다.





*





4월이 되면서 지원한 사립대학의 합격 여부가 학교로 통보되고 그에 따라 학생은 대학에 입학할 것인가를 서면으로 통지하게 되는데 그 때문에 학교는 일 년 중 여느 때보다 소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원했던 대학의 입학 결과 통보에 기쁨으로 날뛰는 반응을 보이는 학생이 있는 반면 오전 수업을 빼먹으며 깊은 실의에 빠져 있는 학생도 있었다. 예치금 납부 문제로 도서관에서 빠져나와 집에 전화를 하고 돌아온 나는 다행이도 전자였다.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온다는 기분이 이런 것인지,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며 생각한건 나에 대한 자랑스러움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꿈의 대학이라 여기던 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 노력의 결과인지 아니면 신의 도움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학 입학에 무리수가 있었던 만큼, 지금의 느낌에 유치한 비유를 하자면 꼭 천국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수상성적을 비롯해 비교적 가능성이 있는 공과대학과 비즈니스가 결합된 제롬 피셔 프로그램에 지원했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입학 통지 허가서가 나온 것이었다. 입학허가에 대한 수락을 서면으로 보내고 예치금만 내면 믿기지 않게도 유펜의 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생각 할수록 전율이 일어, 나는 근래에 들어 미친 사람처럼 웃고 다녔다.

수업이 모두 끝난 목요일, 음악을 들으며 벤치에 앉아 비즈니스 스쿨 학생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겨울학기부터 토요일의 수업이 없어져 한결 시간적으로 여유로워져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집은 경제학 도서의 중요 문구를 노트에 필기까지 하며 읽고 있는 나를 부른 건 지나가던 아벨이었다.

“뭐 보냐.”

머리 위에서 불쑥 나타나 내려다보는 얼굴이 피곤해보였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보고 있던 책을 슬쩍 들었다 놓았다.

“그냥 책.”

“대런이 내준 기말 프로젝트는 진행되고 있는 거야?”

“응. 참고문헌만 정리하면 돼.”

“미리 해놨네? 다른 애들은 노느라 정신 없더만. 넌 그걸 언제 했냐.”

“그냥 시간 남을 때마다. 수정 하긴 해야 돼.”

어깨를 으쓱이며 보던 책을 접으려 하자 녀석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냥 뭐 하나 궁금해서 가다 본거야. 읽던 거 계속 읽어.”

“어디 가는데.”

“여자 친구. 지원한 곳 대부분이 안됐나 봐. 위로해주러 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벨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대학 축하한다. 유펜 붙었다며.”

“운이 좋았지 뭐.”

“운은 무슨.”

손바닥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녀석이 웃었다. 어쩐지 쓰게 느껴지는 웃음을 바라보다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사라지는 녀석을 보다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대학을 떨어지고, 가고 싶어 하던 대학에 붙은 친구를 바라보게 된다면 나 역시 같은 반응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4년간의 노력 끝에 찾아온 것이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라면 나 역시도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겠지.

주변의 대학 합격 소식은 여러 사람의 입을 타거나 본인의 입을 타고 귀에 들어왔다. 수학클럽의 9학년 후배로부터 들었던 얘기는 레이 로만이 프린스턴의 금융공학과에 붙었다는 것이었다. 달리 내가 그 말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없었다. 녀석의 패배를 바라지도 그렇다고 녀석의 성공을 바랄 수도 없는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그저 이렇게 끝나는 구나 싶었다. 몇 달 뒤 졸업을 하고 더 이상의 접점이 없어지고, 세월이 더 흐르고 나면 서로에게 받았던 상처가 아물어 갈 것이었다. 흉터는 남았지만 더 이상의 아픔은 없는 상처처럼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되겠지.

답답해지는 가슴에서 한숨을 뽑아내며 벤치에 드러누웠다. 봄날의 햇빛치고는 강해서 새하얀 노트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해도 눈이 무셨다. 책과 노트를 머리맡에 깔고 베개 삼으며 눈을 감았다.

지척에서 딸랑 거리는 벨소리가 들렸다. 실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빠르게 회전하는 동그란 자전거 바퀴였다. 눈부신 햇살에 실눈을 뜨고 자전거 바퀴를 따라 시선을 올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을 보았다. 길고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배겨있지만 그럼에도 곱다는 인상의 새하얀 손이었다. 그 손을 확인하며 눈을 감았다.

“잠자는 숲속의 홈리스?”

“홈리스라니.”

투덜거리는 내 목소리를 모른 척 녀석은 긴 다리를 움직여 내게로 걸어왔다. 시원한 무언가가 얼굴을 사뿐하게 덮었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새어 들어오던 새하얀 빛이 차단되었다. 슬쩍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커다란 활엽수 잎 뒤편의 가지모양으로 뻗어가는 잎맥이었다.

“자라.”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투명하게 새하얗던 빛이 녹색 차양막에 가려져 한층 어두워졌다. 바퀴가 잔디를 밟는 소리가 멀어질 쯤 녹색의 잎맥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렸다.

칼릭스는 나완 달리 앞으로 변해갈 상황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켜놓은 것 같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이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횟수가 줄어들 거라는 것, 고작 일주일 뒤면 가브리엘이 미국을 떠난다는 것에 대해 단념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녀석에게 남은 시간들이 너무나 짧고 아쉽게 느껴진다고 고백하는 건 동정처럼 느껴질까 봐 나는 이별에 대한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 건, 졸업을 앞둔 시니어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기숙사 담당 선생이 재중인원을 파악하고 돌아간 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책을 읽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잠결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자 스탠드의 밝은 빛무리가 동공을 자극했다. 그 빛이 너무도 환해서 눈이 아릴 정도였다. 눅눅히 젖은 옷처럼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끌고 문을 열었을 때 블리스가 서 있었다.

“축하해.”

“…….”

“대학 붙었다며.”

으음, 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여 녀석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방안의 희미한 스탠드 불빛에 블리스의 긴 그림자가 맞은 편 난간까지 뻗었다.

“자고 있었어.”

“불 켜져 있어서 아직 안자는 줄 알고. 미안.”

“그게… 불 켜놓고 잠들었나봐.”

졸음이 잔뜩 묻어난 내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있었다. 단단한 어깨를 이마로 툭툭 찧다, 고개를 들어 녀석의 목에 마른 입술을 묻었다.

“그래서 축하해주러 온 거야?”

“응.”

손으로 녀석의 엉덩이를 두드려주자 녀석이 웃음을 참으며 작게 속삭였다.

“난리 났어.”

“왜?”

“너 부럽다고.”

“음… 그게 나도 안 믿겨.”

키들키들 웃으며 녀석의 목에 손을 둘러 안으로 잡아당겼다. 졸음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 곤죽이 되어 있던 머릿속이 차차 정리되기 시작했다. 손을 뒤로 뻗어 문을 걸어 잠그며 녀석은 고개를 숙여 짧게 입 맞췄다. 입술을 살짝 핥으며 사라진 녀석의 혀를 찾아 뒷목을 감싸 키스를 깊게 했다. 한참이나 숨죽인 입맞춤이 계속 되고 먼저 입술을 뗀 녀석이 낮게 웃었다.

“더 다행인건, 필라델피아랑 D.C랑 그리 멀지 않다는 거. 대학가서도 자주 볼 수 있어.”

“잘됐네.”

대답 대신 녀석은 입술을 쪽, 짧게 부딪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돈 좀만 더 모으면 중고차 살 수 있거든. 대학 입학할 때쯤이면 자전거 신세를 벗어나겠지. 엄마가 보태준다고도 했고.”

“난 포르쉐 아니면 안탄다.”

“폐차 직전 포르쉐라면 살 수 있으려나.”

뒤로 뻗었던 팔을 앞으로 돌려 내 엉덩이를 꽉 움켜쥐며 블리스가 웃었다. 녀석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는 것으로 보답을 하며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차가운 무언가가 엉덩이를 적셨다.

“읏, 차가워. 뭐야?”

허리를 돌려 엉덩이의 짙게 젖은 자국을 바라보다 녀석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음을 보았다. 유리 음료수병에 담긴 꽃이었다.

“민들레?”

“아… 축하의 의미로 꽃을 사다줄 수도 없고 학교 잔디밭에 피어 있길래. 사실 여기 들린 것도 이거 주려고 온 거거든.”

물이 찰랑거리는 유리병의 입구에 빽빽하게 꽂혀있는 것은 샛노란 민들레였다. 방안의 어둠에 가려 진노랑의 꽃에는 온통 어두운 그림자가 져 있었다.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교복이 구겨지는 것도 모르고 몸을 숙여 민들레꽃을 딸 블리스를 생각하자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나만 대학 들어 가냐. 음… 근데 냄새는 정말 아니다.”

부드러운 꽃잎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자, 씁쓸한 냄새가 올라왔다.

“에… 일부러 코를 학대할 필요는 없고. 뭐, 책상 옆에 두고 있다가 내 해맑은 미소가 그리워 질 때면 보는 거지.”

“…나 피곤한데 좀 가줄래?”

정색하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녀석이 씨익 웃으며 코를 잡아당겼다. 푸흐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참. 이어북에 실릴 사진 찍었던 파일 받았어?”

“응. 보여줄까?”

“어.”

침대 맡 협탁에 민들레꽃이 든 유리병을 올려놓은 후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지난주에 체육관을 빌려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졸업사진을 찍었었다. 실내와 야외에서 진행된 사진 촬영은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날에는 교복을, 둘째 날에는 정장을 입고 촬영했는데 가족과 함께 공연을 갈 때마다 입던 정장이 키가 크는 바람에 길이가 짧아져 새로 맞춘 옷을 입고 촬영했었다. 각각 세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이번 주 토요일까지 제출해야 했다.

“이 사진은 학교 다니는 내내 학대당한 얼굴인데.”

“뭐라?”

“쉿. 목소리 줄여.”

노트북의 액정 화면이 일그러지도록 꾹 사진을 누른 블리스가 웃었다. 카멜과 차이나블루 빛이 교차된 실크넥타이를 목이 졸릴 정도로 꽉 매고 있었다. 경직된 표정을 한 사진 속 나는 내가 봐도 어색했다.

“사진 되게 못 찍나봐.”

“실물이랑 똑같은데.”

“아, 너 진짜 미워. 빨리 가. 나 잘 거야.”

킬킬거리며 뒤에서 나를 꽉 끌어안은 블리스가 귀를 깨물었다. 아프다며 밀어내자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감싸 안았다.

“뭐 좀 먹을래? 밤 되니까 출출하다.”

“어차피 잘 건데 뭐.”

“우리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냐?”

“하긴.”

우리는 한참 자랄 나이니까 한밤중에 먹어도 된다며 녀석의 손을 꽉 쥐었다. 내 말에 코로 웃으며 녀석은 늘어진 그라운드 티로 인해 드러난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배고프진 않은데 널 먹고는 싶다.”

녀석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때렸다.

뒤에서 나를 꽉 안은 채로 뒤뚱거리며 녀석은 나와 함께 허벅지 깨에 오는 크기의 미니 냉장고로 걸어갔다. 귀찮다고 타박해도 몸까지 함께 굽혀 허리를 숙였다.

“음… 치즈케익도 좀 남았고, 집에서 만들었던 도넛도 있고. 음료수도 있고, 만두도 있고, 요거트랑 떡도 있네. 뭐 먹을래?”

지난주에 가져오거나 카페테리아에서 간식으로 사왔던 음식들이 냉장고에 가득 쌓여 있었다. 먹는 양보다 잊고 버려두는 양이 더 많았기에 신선하진 않았다. 죽진 않을 거란 생각에 냉장고 속을 헤치던 내 손목을 블리스의 손이 잡았다.

“이건 뭐야.”

“응?”

“이거. 밀가루는 아닐 테고.”

블리스의 손이 냉장고 속을 더듬었다. 녀석이 잡은 것은 투명한 비닐 봉투에 밀봉된 새하얀 가루였다.

“너… 약 하냐.”

등 뒤의 긴장한 목소리는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 블리스의 손에 끌려 나온 투명한 비닐은 따듯한 공기와 만나자 응결된 물방울로 금세 뿌옇게 변했다. 심각한 목소리로 물어오던 블리스는 손에 든 비닐을 주먹 안에서 천천히 구겨 쥐었다. 나조차도 냉장고에 그런 것이 있는지 몰랐었기에, 그 출처를 기억해 내기 위해 애쓰는 머릿속엔 혼란만이 가득했다.

“내가 약을 왜 하냐.”

“그럼 이건 뭔데.”

“몰라. 그게 왜 거기 있는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몸을 돌려 바라본 녀석의 얼굴은 냉장고의 조명 빛에 어린 그늘로 어두워보였다. 입술을 깨무는 녀석을 보는 내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왜 너한테 숨기겠냐. 안한다니까.”

“…….”

“진짜라니까.”

“그럼 누가 네 냉장고에 약을 집어넣기라도 했다는 거냐.”

한숨을 쉬며 녀석은 굽혔던 허리를 피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내 눈 앞에서 주먹에 쥔 코카인을 흔들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깨를 으쓱이며 팔짱을 새로 고쳐 꼈다. 녀석이 웃었다.

“왜 못 믿는… 아 잠깐, 맞아. 기억났어.”

“…….”

“주말에 내가 구호센터 나가는 건 알지? 거기서 알게 된 애한테 뺏은 거야. 그 녀석이 마약 안하다고 하고선 가지고 있길래 내가 버리겠다고 가져온 걸….”

“근데 이걸 왜 냉장고에 넣는데. 바로 안 버리고.”

블리스는 의연함을 가정하려 했지만 의심스런 눈으로 손바닥 안에 구겨진 코카인을 내려다 봤다. 녀석의 의심이 부당하게 느껴져 어깨를 밀어내버렸다.

“잊어버렸어. 그리고 버린다는 게 어쩌다가 냉장고에 넣은 거야. 그렇게 의심되면 네가 버리던가.”

“화 내지마.”

“나 화 안냈어.”

“목소리는 화내고 있는데.”

자꾸만 높아지는 목소리를 달래려 녀석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블리스의 손이 뒷목을 감쌌다. 뜨거운 손바닥의 부드러운 매만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고요해진 방안의 서로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녀석의 작고 낮은 목소리는 피아노를 조율하듯 내 감정의 높낮이를 조율하려 했다.

“걱정돼서 그런 거다.”

“…알겠어.”

“이런 거 가지고 있다 걸리면 문제가 생기니까.”

주머니 속에 비닐을 구겨 넣은 후 녀석의 손이 얼굴을 감쌌다. 어느새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는 걸 녀석의 엄지손가락이 입술을 쓰다듬자 알 수 있었다. 입술을 더듬던 손이 천천히 얼굴 전체를 감싸 안았다.

“걸리면 정학으로도 안 끝났을 걸.”

“누가 냉장고 뒤져보는 것도 아닌데 뭐.”

“그래. 그렇지만.”

얼굴을 찡그린 채 블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에 불안을 느끼는지 녀석의 얼굴이 굳었다. 얼굴을 감싼 블리스의 따듯한 손 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잖아. 내 작은 속삭임에 녀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네가 약을 할 리가 없지.”

“아직도 의심이냐.”

“그냥. 지우 너를 내 품에서 내 놓기엔 세상이 너무 험해서.”

“뭐라는 거야.”

녀석의 어깨를 밀어내려 하지만, 볼을 감싸고 있는 녀석의 힘이 더 강했다. 두 손에 볼을 꽉 눌리는 바람에 튀어나온 입술을 쪽 빨며 녀석이 피식 웃었다.

“사랑의 크기가 죽음의 척도라면, 난 이미 관 속에 누워 있을걸.”

“뭐야 너.”

“쑥스러워 하기는. 너 웃고 있는데 뭐.”

어느새 나도 멍청하게 웃고 있었는지 입술이 자꾸만 귀에 걸렸다. 고개를 흔들어 녀석의 손에서 얼굴을 빼냈다. 놀리듯 웃는 얼굴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손바닥으로 녀석을 밀어냈다.

“이런, 냉장고 문 닫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러네.”

“뭐 먹을래? 치즈케익?”

방안의 온도에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냉장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치즈케익을 집었다. 플라스틱 곽 안에 든, 나이프로 깨끗하게 잘라먹은 반 정도 남은 것이었다. 데코가 그대로 남아있는 케익을 내밀자 고개를 저었다.

“벌써 1시 반도 넘었어.”

블리스는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손목에 걸린 시계의 시침은 거의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 갈게. 계속 이러고 있다간 아침에 같이 방에서 나오겠다.”

“이거 가져가. 나중에 배고플 때 먹어.”

고개를 끄덕이며 케익을 받아든 녀석은 이마에 베이비 키스를 한 채로 웃었다. 이마에 고이는 따듯한 숨결을 느끼며 녀석의 등을 껴안았다.

“그럼 간다.”

“응. 일어나면 전화해.”

“알았어.”

짧게 입술에 키스를 하고는 녀석은 문을 돌려 복도로 빠져나갔다. 굳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 협탁에 올려놓은 유리병에 시선을 돌렸다. 침대로 걸어가 습관적으로 코로 가져가려던 손을 멈춘 것은 악취에 가까운 민들레의 냄새를 기억해낸 머리였다. 일부러 예쁘게 핀 민들레만을 골라왔는지 이틀만 지나면 시들어버릴 것처럼 활짝 피어있었다. 여자도 아닌데 꽃을 주면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지 웃음이 나와서 손가락 끝으로 여린 꽃잎사귀를 쓰다듬었다.

샛노란 꽃잎을 바라보다 이제 그만 자야겠다는 생각에 협탁에 조심스럽게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유리병 위에는 흰색의 스티로폼을 벽에 붙이고, 그 위에 핀으로 꼽아 고정해놓은 벙어리장갑이 꽂혀 있었다. 벗헤드가 코를 파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비실비실 숨죽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블리스의 방에는 겨울이 지남에 따라 사용하지 않게 된, 비비스가 그려진 장갑이 액자처럼 벽에 걸려 있을 터였다.

아마도 처음 고리타분한 기념품 판매점에서 이 장갑에 즉시 끌림을 느꼈던 이유는 우리의 상황에 한줄기 웃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갑 속에 새겨진 희극에 웃다 보면 머리 아픈 고민도, 서로를 향한 불안도 모두 잊어버릴 테니까.

가만히 벗헤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녀석이 내게 말을 거는 기분이 들었다. 그 특유의 쨍알거리는 목소리로, 얼른 잠이나 자라 멍청아 짜증을 낸다.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스탠드의 불을 껐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이었다.





*





나는 내가 주인공인 꿈은 꾸지 않는다. 평생을 통틀어 내가 주인공인 꿈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타인의 관심에 부담스러워하는 본성이 꿈에서조차 이어져 나의 무채색 인생이 무의식 속에 무한대로 뻗어갔다. 눈에 띠지 않는, 주변인으로서 살아가던 인생의 지루한 궤도가 꿈에서조차 이어졌다.

봄볕치고는 따가운, 여름의 뙤약볕 같은 햇살 아래 누워 있던 나는 점점 세력을 더해가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환한 눈꺼풀 속 세상에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할 무렵 잠에 빠져들었다. 눈꺼풀 바로 아래의 한 겹, 또 한 겹을 지나 시작된 꿈은 황량한 도로 위가 배경이었다. 그 전의 꿈들과는 달리 주인공은 나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기다란 이차선의 도로 위에 서 있는 것은 나였다.

도로 위에는 이따금씩 차가 지나갔다. 빠르게 달려가지만 또한 느리게 달리는 그 차안의 내부를 나는 모두 들여다볼 수 있다. 길을 걷는 나는 이상했다. 웃기도 하고 꺽꺽거리며 울기도 하면서 터벅터벅 길을 걷는다.

가장 먼저 내 곁을 지난 차에 탄 사람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떤 남자이다. 편한 하이킹 복장을 입은 그는 시뻘건 생선의 내장을 손에 감아쥐고 웃고 있다. 침에 번들거리는 입술에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위협을 하기 위해 창문 밖으로 몸을 뻗지만 그가 닿기에는 너무도 멀다.

두 번째 차에 탄 사람은 고교 때 같은 방을 썼던 필립이었다. 입고 있던 풋볼 의상을 벗고 녀석은 붉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황량한 풍경 속에 유일하게 반짝거리는 붉은 드레스는 고혹적이면서도 천박한 인상을 준다. 왼 손에는 거울을 오른 손에는 립스틱을 든 채로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녀석의 미소가 천천히 뇌리 속에 각인되도록 아주 천천히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차는 사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간다. 약에 취해 울고 있는 레이와 손수건을 건네는 아고스, 고양이를 껴안고 잠이 든 지은,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은 부모님, 그리고 잊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도 지쳐 누군가의 차에서 편히 쉬길 원하지만 스쳐지나가는 차는 너무도 빠르고 나는 지쳤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아주 멀리서 시끄러운 음악이 들려온다. 뒤돌아보자 보이는 것은 노래에 고개를 끄덕이는, 머리가 길었을 때의 칼릭스이다. 칼릭스는 박자에 맞추어 손가락을 창틀에 두드린다. 감겨있는 눈과 음악에 멀어있는 귀는 나를 보지도 내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나를 스쳐간다. 너무나도 자유로워 녀석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나는 또다시 목적도 없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처럼 걸어간다. 나는 너무도 절망과 고통에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바닥을 보며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른다. 익숙한 목소리는 블리스의 것이었다. 녀석은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녀석은 좀 전에 달려오던 차들과 달리 내 뒤에서가 아닌 앞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더위도 잊었는지 녀석은 비비스가 그려진 멍청한 검은색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다. 왜 울고 있어. 자전거에서 내린 녀석은 내게 걸어와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다. 나와 함께 가자. 울고 있는 내 눈물을 부드러운 장갑으로 닦아준다.

너와 같은 방향이 아니야 나는 앞으로 가고 있어. 그 말에 블리스의 얼굴은 슬픔으로 얼룩진다.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어. 상관없어. 너처럼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뿐이야.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 말에 블리스는 눈을 내리 깐다. 내 말 속에서 어떤 필사적인 느낌을 받았는지 안았던 나를 놓는다.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 가다가 지치면 돌아와도 돼. 내가 돌아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녀석은 내 손을 놓는다. 앞으로 걸어가는 나를 녀석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터벅터벅 길을 걸어 블리스의 모습이 점이 되고, 그 점조차 희미해질 때까지 나는 열기에 아지랑이가 핀 땅을 걷는다.

한참을 걸었지만 이제 더 이상 자동차는 달려오지 않는다. 나의 모든 기운들, 자신의 모든 의지를 죽여 가며 나아가는 나의 발은 이미 물집 투성이다. 끝없이 펼쳐진 열사의 땅처럼 이 길은 고행의 길처럼 느껴진다. 땅이, 하늘이, 먼지가, 돌덩어리 모두가 내가 무너지기를 기다린다. 나는 멈칫멈칫 하면서도 힘겹게 발을 뗀다. 발바닥이 땅에 녹진녹진 녹아내리며 붙는다.

내 숨소리와 내 지친 발걸음 외의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태양에 끓어 물렁물렁해진 아스팔트를 달려오는 덜덜거리는 차의 소음을. 가브리엘이 예의 끌고 다니던 먼지가 잔뜩 쌓인 픽업트럭이다. 그의 차 뒤편엔 여전이 붉은 색의 구호센터의 도시락 박스가 들어있다. 그의 차를 보며 나는 지친 몸을 멈춰 섰다. 앞을 보고 달리던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같이 갈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달렸지만 나에게 함께 가자 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대답대신 돌처럼 굳은 고개만을 끄덕인다. 그는 차에서 내려 내게로 걸어온다. 넋두리에 지친 울음을 섞어 울먹이는 나는 어찌나 나약한지. 캄캄한 절망감에 젖어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왜 이렇게 험난한 길을 가고 있는 거죠. 그는 대답 대신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말해줘요.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어딜 향해 가고 있는 지를요. 그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아지랑이가 끓는 도로의 소실점 너머를 바라본다. 그는 나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까. 내가 보이지 않는 이 길의 끝, 상상 속의 낙원을 보고 있을까.

가브리엘은 비애에 가득 찬 나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측은함을 담은 얼굴로 내게 말 했다. 이 길의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아니,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겠어. 그저 네가 가는 길의 끝, 그 결론이 정답일 뿐이야. 그는 내 손을 잡으며 덧붙였다. 네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이 길이 내 눈에는 천국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다. 해와 달의 비췸이 없어도 빛나고 대지에는 만발한 꽃이 피어있다. 무지개보다 아름다운 보석이 길을 꾸미고 탐스런 실과가 타는 목을 적시니 나는 애통할 일이 없구나.

그는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의 미소는 생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허용한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온화하고 따듯하지만 아득하게 멀어서 나는 함께 웃어줄 수가 없었다.





잔디는 내린 비로 인해 흠뻑 젖어있었다. 자전거로 잔디 위를 달리자 연약한 이파리의 짓이겨지는 비명이 들렸다. 농구코트에서 운동을 하던 녀석들은 비가 내리자 모두 자취를 감춘 뒤였다.

교내 중앙의 소극장 앞 벤치에서 잠에서 잠들어있던 나를 깨운 것은 친구의 목소리도 핸드폰의 벨소리도 아니었다. 어느새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한 봄비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나를 깨웠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눈을 떴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회색 구름이 몰려있는 하늘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하늘을 가렸다. 옷은 이미 비에 젖어있었다. 이 비의 pH는 몇이나 될까.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 몸을 일으켜 자전거를 끌고 길을 나섰다. 외출증을 끊어뒀기에 다시 학교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정문을 지나고 꽃이 피어있는 가로수를 지나고 랑팡플라자를 지나 한참을 달렸다.

꿈속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이 생생한 것은 아니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라곤 황량한 도로와 그 위를 달리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엉망으로 편집된 영화처럼 중간 중간 끊긴 기억 속엔 여러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블리스와 음악을 들으며 허밍을 부르던 칼릭스의 얼굴.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던 필립. 그리고 미소 짓던 가브리엘까지. 재미있는 꿈이라 생각하며 편의점에 들러 물을 샀다. 비가 내리지만, 목이 마르다고 이 비를 마실 수는 없는 일이니.

가브리엘은 구호센터의 도시락 배달하는 일을 지난주에 정리했다. 그에 따라 랜덜 공원의 3번가로 도시락을 배달하러 갈 일도 없어졌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로사리오의 가족은 영주권자로서가 아닌, 시민권자로서 이 땅에 머물게 되었고 한 번도 본적 없는 조수아의 아들이 결혼식을 올렸다. 나와 칼릭스는 각각 대학에 입학했고 가브리엘은 센터를 맡아줄 후임자를 구했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새로운 분기점이 시작되었다.

방 안에는 먼저 도착한 칼릭스가 가브리엘과 체스를 두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며 녀석은 무릎에 기대었던 팔꿈치를 떼어 허리를 세웠다.

“홀딱 젖었네. 전화하지. 데리러 갔을 텐데.”

“너 귀찮잖아. 옷이야 뭐 어차피 마르는 거고. 근데 아무도 없네?”

“평일엔 원래 안와. 저녁 만들어 놓은 거 좀 남았으니까 데워 먹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안에서 나와 부엌으로 걸어갔다. 남은 스파게티를 프라이팬에 데워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채로 서서 후다닥 먹어 치웠다. 설거지를 하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체스를 두고 있던 두 사람 간에 승패가 났는지 체스 말이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불이 붙은 담배를 왼쪽 손에 쥔 채로 가브리엘은 나를 올려다봤다.

“나갔다 올까?”

“네?”

“칼릭스는 집이나 보라 그러고 우리 둘이 바람 좀 쐬러.”

그 말에 칼릭스는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쿠션을 배위에 깔고 그 위에 손을 얹으며 녀석은 TV의 채널을 돌리며 말했다.

“공주님 모시러 가는 거야.”

“공주님?”

“로사리오. 손 하나 까딱 안하는 게 꼭 하는 짓이 공주잖아.”

그 말에 가브리엘은 옆에 놓인 빈 담뱃갑을 칼릭스에게 던졌다. 피식 웃으며 가브리엘이 던진 담뱃갑을 왼 손으로 받아낸 칼릭스는 낙타가 그려진 그것을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저 옷 젖었는데. 괜찮아요?”

“칼릭스 괜찮지? 네 차 좀 젖어도.”

“어. 상관없어.”

배위에 올려놓은 쿠션을 만지작거리던 칼릭스는 나의 배 언저리를 힐끔 쳐다봤다. 집에 들어오기 전 현관 밖에서 물기를 짜느라 내교복은 잔뜩 구겨진 채였다. 손바닥으로 밋밋한 배를 쓸며 구겨진 옷을 펴자 녀석이 몸을 일으켜 내게로 걸어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시트 젖는 건.”

마른 손바닥으로 어깨를 비벼 열을 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릭스가 갑자기 티셔츠의 밑단을 위로 끌러 옷을 벗었다. 목에 걸린 셔츠를 빼내느라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이거 입어. 네 교복은 빨아놓을 테니까.”

“괜찮아.”

“어서 입어. 비 맞은 꼴이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칼릭스는 셔츠를 들고 있던 손을 흔들었다. 녀석의 손을 내려다 보다 말했다.

“왜. 바지도 벗어주지 그래.”

“…그런 건 가브리엘에게 부탁하고.”

피식 웃는 칼릭스를 올려다보며 나는 입고 있던 교복의 단추를 빠르게 풀었다. 녀석은 젖어 잘 벗어지지 않는 옷을 잡아당겨 벗는 것을 도와줬다. 옷은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어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폴로향수가 뿌려져 있었는지 목의 칼라를 잡아당겨 산뜻한 냄새를 킁킁거리자 녀석이 볼을 잡아당겼다.

“음… 너무 큰데.”

“뭐야. 별로 안 커.”

볼을 잡아당긴 녀석의 손을 떼어낸 후 몸을 돌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브리엘에게로 걸어갔다. 열쇠고리를 손에 건 채로 빙빙 돌리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는 칼릭스의 지나쳐 보이는 호의에도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마치 그림자로 만들어진 벽처럼 어떤 말이나 행동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차는 팔아버리고 픽업트럭은 구호센터에 돌려줬기에 가브리엘과 타고 있는 차는 칼릭스의 오래된 캐딜락이었다. 차의 목적지는 6번가의 사우스이스턴 대학 근처의 어느 주택가였다. 무작정 주소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는 로사리오의 무례함에 대해 가브리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옆모습은 약간 피곤해보였다. 급변하는 환경에 대한 부담인지는 몰라도 조금 야위어 있었다.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거예요?”

“짐은 일주일 전부터 꾸릴 거고. 그것만 제외하면 이 땅에서의 삶은 거의 끝이 났다고 볼 수 있지.”

“섭섭할 거예요.”

코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그의 반대편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웃었다.

“몇 년 뒤에 다시 돌아올 텐데 뭐. 그 때가서 모른 척 하거나 하진 않겠지?”

“안 그래요.”

그는 핸들을 잡았던 손 중 하나를 뻗어 나의 어깨에 얹었다. 단단한 그의 손이 어깨를 두드리다 꽉 쥐었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비가 그쳐있었기에 안으로 빗물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날려댔다. 거울 속의 나는 재난 영화에 나올법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에 젖어 흐트러지는 머리, 창백한 뺨, 굳은 얼굴까지 그대로다. 핸들을 꺾어 골목을 벗어나 대로로 들어서자 비에 젖은 도로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칼릭스와는 어때?”

“음… 여러모로 좋죠.”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차를 천천히 몰았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차선을 바꿔 추월해 앞에서 달려 나갔다. 멀어지는 차의 붉은 헤드라이트를 보다 그는 주먹을 얼굴에 대고 기침을 했다. 사실 나는 애초에 짐작하고 있었다. 가는데에만 삼십분 가까이 걸리는 6번가에 굳이 나를 부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오래 전부터 칼릭스와 나의 관계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어 했었다. 즉각적인 진술이 아닌, 오랫동안 심사숙고 한 뒤에 뱉어낼 수 있는 이야기들을.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칼릭스와는 자주 얘기 나누나.”

“정치 얘기 빼고는 모두요.”

여자 역시 이야기의 주제에서 제외되지만,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진 않는다. 그는 칼릭스와 나의 오락을 추구하는 단순성에 소리 내어 웃었다.

“너도 짐작했겠지만.”

“…….”

“칼릭스에 대한 얘기를 하려 했다.”

쌔애액, 손가락 마디만큼 열린 창문으로 강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문을 열어도 가슴이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열어놓는 것은 그의 상념에 방해가 될 터라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바람에는 물비린내가 섞여있었다.

“칼릭스 아버지와 오랫동안 동거했던 사람이 중국에 있다는 건 알고 있나.”

“페이린이라는 남자였다고 들었어요.”

“그래?”

흠, 코로 웃으며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운 눈 아래의 파란 눈동자가 붉은 헤드라이트에 비쳐 반짝거렸다.

“그럼 왜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지도 말했나?”

“그냥… 어떤 사람이 신고했다고 하던데요.”

그 말에 가브리엘은 말이 없었다. 눈앞의 도로를 보지만 생각을 헤매는 듯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시선을 앞으로 둔 채로 목을 돌렸다. 우두두둑, 피곤에 결린 소리가 쏟아졌다.

“그게….”

“…….”

“신고한 사람이 칼릭스의 아버지였어.”

주변의 차가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지만, 캐딜락은 여전히 느리게 달렸다. 덩달아 그의 목소리도 느려졌다. 가로등이 길을 밝혔지만 실내는 충분히 밝지 않아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의외의 얘기, 공동의 대화 주제가 아닌 개인과 개인 간에 이뤄지는 낯설고 은밀한 거래 같은 대화는 너무도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온 몸의 맥이 풀렸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세웠던 허리의 힘이 허물어졌다.

“물론, 칼릭스도 알고 있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그는 멈칫 거리며 말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억을 재구성하고 생각에서 대화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았다. 무겁게 부푼 구름이 비를 쏟아내듯 부푼 그의 가슴이 가라앉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앞가슴에 달린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하나를 뽑아냈다. 피워도 되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불을 붙였다. 첫 모금을 빨아들이는 그의 표정이 달았다.

“중국의 대 도시에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호구라는게 있는데 개념이 다르긴 하지만 미국의 시민권과 비슷한 제도라고 할 수 있지. 호구가 있으면 도시의 당당한 일원이 되지만, 그게 없다면 돈을 벌 기회가 제한되다보니 농촌에서 무일푼으로 올라와 하루하루를 비참하게 살아가는 농민공의 인생으로 남게 되지. 페이린도 농민공 중 하나였다고 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북경으로 상경했는데 워낙 비참하게 살다보니 혼자 밀항선을 탄 모양이야.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지내다 카슨의 회사에서 잡일을 맡게 되었지. 그 전에 말해둘게 있는데 카슨은 게이거든. 하지만 지켜보기론, 페이린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고 부당한 대우는 하지 않았어. 천천히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었고 칼릭스가 학교에 들어가고 몇 년 뒤 동거를 시작했어. 내 생각에 두 사람은 게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이상적인 관계였던 것 같아. 그 모난 성격도 페이린 앞에서는 예외적으로 부드러워졌거든.”

�e, 입으로 소리를 낸 그는 필터 가까이 피운 담배를 차에 고정된 음료수대 위에 올려진 빈 캔에 버렸다. 지루하지?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어딘가 작심한 듯 긴 얘기를 하는 가브리엘의 말이 개인의 은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 저속한 호기심이 일기도 했고.

신호등으로 인해 잠시 정체된 도로를 갸름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북경에 남아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실질적 가장이었기에 페이린은 돈을 버는 족족 카슨의 명의로 된 통장으로 중국에 돈을 부쳤지. 그 외에도 카슨은 페이린이 알게 모르게 상당한 금액을 북경의 가족들에게 보냈던 모양이야.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었기에 그는 미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으니까 많이 그리울 거란 생각에서였겠지. 그게… 중국으로 송금된 금액이 상당하다보니 중국의 가족들이 불법이긴 하지만 호구도 샀고, 그들의 동생들도 자라 북경의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갈 무렵이어서 페이린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을 거야. 그런데 어느 날인가, 어떤 여자가 회사로 찾아왔다. 페이린도, 카슨도. 그 누구의 계획에도 없던 깜짝 이벤트였지. 열 살배기 쌍둥이 남매와 함께 찾아온 여자의 얼굴을 난 아직도 기억해. 무척 곱상한 도자기 같은 피부를 가진 여자였지. 영어를 할 줄 몰라 중국인 가이드와 함께 물어물어 회사로 찾아온 그 여자는 자신을 페이린의 부인이라고 소개하더군. 마침, 페이린이 자리를 비웠던 터라 변명을 꾸밀 새도 없었지. 여자는 마지막 송금을 했던 몇 일전 까지만 해도 페이린과 연락을 했다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꼼꼼하게 닦아냈어. 페이린이 돌아왔을 때, 십년만의 해후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지.”

나에게 얘기 하지만, 가브리엘의 얘기는 기다란 독백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얘기를 하면서 나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래도 뭐, 인간적인 예의는 지켜줬어. 십년 만에 해후한 부인 앞에서 게이연인에게 뺨을 맞게 할 순 없으니까. 카슨은 그 때 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미친 짓을 벌였어. 가족들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두 달 동안 부동산을 통해 집까지 렌트해주고, LA의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지. 와이프의 눈에는 그저 중국인과 미국인 사이에 피어난 진한 우정처럼 보였을걸. 페이린의 자녀들의 눈에는 카슨이 돈 많은 마술사로 보였겠고. 뭐, 그 부인과 아이들이 중국으로 돌아가고 난 뒤, 뒤통수를 치긴 했지만.”

“…….”

“십여 년간의 세월이 전화 한통에 끝나버렸지.”

그 순간의 고통이 가슴 속에 각별히 새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브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마치 관속에 묻어두었던 부패한 시체의 일부를 들쳐보기라도 하듯이 그 순간의 고통을 재차 확인했다. 쓴 입맛을 다시며, 그는 말했다.

“물론, 전적으로 페이린이 나빴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소동 같은 사랑이야 결국엔 자취도 없이 조용해지기 마련이지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그리움으로 감당하기엔 벅찼겠지. 그리고 칼릭스는….”

“…….”

“그 어린 것이 이해하려 들더라. 페이린이 자신보다 그의 쌍둥이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다고 용서가 쉬웠던 건 아니었을 거다.”

길은 어느덧 가톨릭교회의 사거리로 접어든다. 주택가로 들어서며 길을 밝히던 가로등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가로등보다 헤드라이트의 빛에 의지해 길을 밝히며 가브리엘은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공기에 검은 물감을 타놓은 듯 내부는 깜깜했다. 가브리엘의 옆모습을 돌아보았을 때, 어둠 속에서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구식 아파트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붙인 그는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적막한 골목에 팔짱을 낀 연인이 차 옆을 지나가며 소란스런 웃음을 남겼다. 그는 담배 끝에 길게 매달린 재를 창밖으로 털어냈다. 그가 말했다.

“언젠가 칼릭스가 그러더군. 학기 중에 어떤 남자애가 전학을 왔는데, 도통 웃지를 않는다고.”

“…….”

“어쩌면 그 발견이 너에 대해 칼릭스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네 얘기를 하면서 꼭, 페이린은 얼마나 잘 웃는 사람이었는가에 대해 얘길 했거든.”

“…….”

“그리고 그 관심이 너에 대한 어떤 감정으로 발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을 펴 매끄러운 손톱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가브리엘은 그 감정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진 것은 곤혹스러운 침묵이었다.

“고백… 받았나?”

매끈매끈한 손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 했고?”

“예.”

그래. 그렇구나. 가브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런 침묵에 그는 주먹에 대고 기침을 했다. 사실, 그가 나의 거절과 칼릭스의 감정에 대해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는 그저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일반적인 저속한 호기심이 아닌, 상대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으로 구성된 관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유의 대화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어둡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밝았다면 가브리엘도 나도 이런 대화를 참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릴 뿐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담배의 재를 털다 아직 긴 장초임에도 재떨이에 비벼 끄며 그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6번가로 들어서는 동안 그가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은 로사리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거의 다 도착했다는 간단한 말을 하고 전화를 끊은 뒤, 그는 오랫동안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몸매 자랑하냐?”

입고 있던 얇은 가디건을 벗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로사리오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칼릭스는 고개를 숙인 그대로 대답했다.

“어.”

녀석의 대답에 아랫입술을 삐죽이던 로사리오는 리모컨을 거칠게 낚아채며 TV를 켰다.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볼륨을 높여 쇼프로그램을 틀며 그녀는 칼릭스 쪽을 힐끗 거렸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신경질이 나는지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으, 긴 한숨과 함께 연기를 뱉어내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담배를 잡은 손이 떨렸다. 평소에 극도로 내향적인 사람이 약간의 술을 빌어 분수에 맞지 않는 용기를 얻게 된 것처럼,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날선 긴장이 배어있었다. 자신 역시도 평소와 다르다는걸 알고 있었는지 담배를 빨아들이며 로사리오는 의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자꾸만 붕 뜨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성급하게 몰아쉬던 숨도 정리했다.

가브리엘은 부엌에서 맥주 캔과 나초를 담은 볼을 거실로 가져왔다. 커다란 볼륨의 TV에 눈을 찌푸리며 그는 로사리오에게 맥주캔을 건넸다.

차가운 김이 나는 맥주캔을 따 주욱 반 이상을 들이킨 로사리오는 입에 묻어난 거품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하아, 안에 단단히 뭉쳐있던 한숨을 뱉어내며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아프리카 따라 갈 거에요.”

예전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을 가브리엘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맥주를 한 모금씩 천천히 들이킬 뿐이었다. 개인과 개인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신경, 적응의 과정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이제 로사리오의 무모한 행동에 대해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전, 그냥 관두고 싶었단 말이에요.”

“…….”

“가브리엘.”

따듯한 공기에 닿아 물방울이 맺힌 캔을 꼬옥 잡자 원통형의 캔 밑으로 물방울이 맺혔다. 그 고인 물이 로사리오의 다리를 적셨지만 그녀는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보였다.

로사리오의 애원조의 말에도 그는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초조하게 타들어가는 로사리오의 담배 끝 붉은 열기를 바라보면서. 그의 생각은 다른 차원을 달리는 것 같았다. 그런 가브리엘이 낯설기만 한 것은 나뿐이 아니었던 듯 칼릭스 역시 보던 신문에서 시선을 떼어 그를 바라봤다.

“난. 솔직히 모르겠다.”

그는 한숨조차 쉬지 않았다. 그저 TV속 타인의 불우한 소식을 접한 사람처럼 그 슬픔이 자신에게는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남은 맥주를 끝까지 목에 털어 넣었다. 맥주를 마실 때마다 느리게 움직이던 그의 결후가 멈췄다.

“애초에.”

“…….”

“애초에 네가 그 일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낭만적인 상상은 신경만 소모할 뿐이지.”

그는 손안에서 맥주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물이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아낸 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그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구나.”

“어떻게 좀 해줘요. 가브리엘. 전, 그냥 가브리엘이 좋아할 줄 알았단 말이에요.”

주먹을 꽈악 쥐고 있던 로사리오는 가브리엘의 말에 훌쩍거리며 울었다. 왈칵 눈물이 솟는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아이처럼 울었다. 로사리오의 갑작스런 울음에 동결된 분위기 속 TV만이 홀로 웃음을 쏟아냈다.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가 울음을 달래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르르 떨리는 턱에 고이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동안 로사리오의 어느 곳에 숨어있었는가 싶을 만큼 봇물이 터지듯 흘러내렸다. 손가락에 끼운 담배가 제 손 근처에서 타들어 가는지도 모르고 흐느끼는 로사리오를 내려다보는 가브리엘의 눈이 침침했다.

가브리엘이 로사리오의 뒤로 걸어가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빼앗아 캔 속에 집어넣었다. 로사리오의 주변으로 부옇게 흐려진 연기의 흐름을 손으로 저으며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로사리오는 들이 마시는 숨조차 울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쳐지지 않는 울음을 참아내느라 끅끅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알겠다는 말을 하며 가브리엘이 내민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방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가자 닫힌 문 너머로 로사리오의 울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적막한 실내에는 TV속의 빈 웃음만이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무슨 일 있었어?”

리모컨을 집어 TV의 전원을 끈 칼릭스는 아직도 로사리오의 서러운 울음이 들리는 것처럼 갈색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칼릭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워낙 상식 밖의 일이라. 좀… 엄청난 일 인가봐.”

“그게 무슨 말이야.”

“몇 주 전부터 비디오 인터뷰를 해왔대. 연방에 로사리오가 속한 조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겠다고 협조를 했었나봐.”

“…….”

“로사리오가 있던 곳, 우리가 생각했던 거 이상으로 광범위한 조직이었지만 연방 쪽에서 정보가 전무한 상태였대. 무슨 생각에선가, 로사리오가 자진했던 거지.”

“그게 잘못한 일은 아니잖아. 오히려 좋은 일인데 가브리엘은 왜 저래.”

“그렇긴 한데…. 애초에 의심받지 않도록 인터뷰도 일반 세입자 아파트를 렌트해서 진행됐는데 그게 중간에 세어 나갔나봐. 자세한건 로사리오도 모르지만, 같이 다니던 딜러한테 오늘 전화가 왔었대. 로사리오가 밀고자란 말이 돌고 있는데 사실이냐고. 어떤 조치가 내려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무겁게 짓눌린 마음이 고스란히 말 속에 드러났다. 목소리 위에 단단한 시멘트가 발린 것 같았다. 칼릭스는 내 말에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눈썹을 찡그리긴 하지만, 재미없고 불쾌한 유머를 듣는 것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손으로 천천히 턱을 쓸며 녀석은 눈앞의 나초를 집었다.

살사 소스에 찍어 입안에 넣자 바삭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손에 묻은 가루를 마주 비벼 털어냈다.

“네 말대로 너무 상식을 벗어난 일이라.”

다시 과자를 집어 손 안에서 하나씩 빼어 입에 가져가며 녀석이 말했다.

“현실적이라 느껴지질 않네.”

갑자기 입맛이 사라지는지 집었던 과자를 볼에 던지듯 집어넣으며 몸을 의자에 깊숙이 파묻었다. 머리를 싸맨다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차곡차곡 모아온 불행의 씨앗이 이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려 관망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지독할 뿐이었다.

한참 만에 방에서 나온 가브리엘은 지쳐보였지만, 그의 뒤를 따라 나오던 로사리오는 좀 전과 달리 많이 진정되어 있었다. 두려움과 혼란으로 한치 앞도 가리지 못했던 좀 전에 비해 가브리엘의 대화를 통해 생각이 정리된 듯 보였다.

거실에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우리를 돌아보던 가브리엘이 손끝으로 피곤에 절은 눈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칼릭스 잠깐 밖에 다녀오자.”

“어딜?”

“조수아한테. 전화는 해뒀어.”

“잠깐 기다려.”

방안으로 들어가 검은색의 져지를 걸치고 나온 칼릭스는 소파에 앉아 멀뚱멀뚱 녀석을 올려다보는 나를 보며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금방 다녀올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 현관 옆의 벽에서 차키를 빼 손 안에 꼭 쥐며 녀석이 말했다. 굳은 얼굴은 웃음과 여유를 몰랐다. 어느새 9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힐끔 바라 본 뒤 칼릭스는 나를 보는 그대로 뒷걸음치며 현관을 빠져나가 문을 닫았다.

찰칵 잠기는 문소리가 들리고 나서도 우리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진정된 로사리오의 눈에는 눈물의 흔적이 있었지만, 그녀의 숨결 어디에도 흐느낌의 흔적은 없었다. 눈앞의 샛노란 나초와 붉은 살사소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로사리오는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허기를 느끼는 내 몸이 저주스럽다.”

우울하게 내리깐 눈으로 나초를 집어 소스에 묻혀 꼭꼭 씹어 먹던 로사리오는 그 말에 흐으음, 안으로 무너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로사리오의 입술은 절망의 깊이와는 달리 더 이상 울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라도 하듯 굳게 다물려있었다.

“뭐 만들어줄까. 토스트라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로사리오를 위해 부엌에서 토스트기로 식빵을 구웠다. 땅콩 잼이 발린 빵과 우유를 건네자 고맙다 말하며 머뭇머뭇 받아들었다. 노릇노릇 구워진 빵을 베어 무는 로사리오를 바라보다 어지럽혀진 탁상 위를 정리했다.

적막함 속에서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남자답게 로사리오를 달래주는 것과 그저 옆에서 조용히 지켜주는 주는 것 중 어떤 행동이 그녀의 불안을 해소시키는 것일까 고민하다 결국 전자를 택하기로 했다.

“더 만들어줄까?”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며 한입 조그맣게 토스트를 뜯는 로사리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사리오 역시 비를 맞았는지 손끝에 닿은 그녀의 옷이 축축했다. 로사리오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가브리엘과 얘기하니까.”

“…….”

“간신히 생각의 가닥이 잡혀.”“그런 면에서, 가브리엘은 훌륭하지.”

목이 메는지 우유를 마신 후 로사리오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일단 연방수사국에 전화는 해뒀어. 경호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다고.”

“잘 했어.”

“응. 그리고, 허락해줬어.”“뭘?”

“나도 따라가기로 했어. 엄마한테 전화로 말해뒀지만, 아버지까지 설득할 자신은 없어. 가브리엘이 도와주겠다는데 믿어봐야지.”

“우간다 북부로 가기로 한 거야?”

“응. 가서 힘쓰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해야지. 나 진짜 열심히 할 거야. 폐 안 끼치고, 정말정말 열심히 할 거야.”

남은 토스트를 입안에 모두 집어넣으며 다짐하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볼록하게 된 볼이 한참이나 씰룩거렸다. 천천히 꼼꼼하게 씹어 삼킨 후 로사리오는 우유가 든 잔을 비웠다. 포만감으로 인해 예민했던 신경이 가라앉는지 초조했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으으, 잘 먹었어. 이제는 좀 살 것 같다.”

아프리카 중부 지역으로 떠나고 나면, 더 이상 삶을 위협하는 모든 것과 마주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로사리오의 얼굴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몇 달 전부터 가브리엘을 따라 함께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로사리오의 희망은 분명 즉흥적인 발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세월의 삶을 후회하며 봉사로 새 인생을 시작하기에는 거룩한 애타정신이 부족해보였다.

사나운 맹수에서 순화되고 교화되어 마침내 거룩한 영혼의 자유를 얻은 장발장처럼 살아가기에는 로사리오에게는 순수한 동기와 열정, 고난이 부족했다. 상황이 극한으로 몰려 미국에서의 생활이 위험해지긴 했지만, 그녀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을 터였다. 나는 어쩐지 그 동기를 알 것 같았다.

“너.”

바람처럼 가벼운 부름에 로사리오는 나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가브리엘 좋아하지.”

땅콩잼이 묻은 손가락을 빨던 입술이 살짝 벌려졌다. 그대로 잠시, 로사리오는 정지했다. 그녀의 윤기 나는 올리브색 피부 위로 옅은 홍조가 어렸다. 그녀가 웃었다.

“응.”

“역시 그랬구나.”

“좋아하니까 여기 오는 거지. 그럼 내가 누굴 보러 여길 오겠어. 아, 뭐. 너랑 칼릭스도 좋아.”

변명하듯 덧붙이는 로사리오를 보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잔뜩 물에 젖은 운동화를 신고 있는 발이 리듬에 맞추기라도 하듯 움직였다. 로사리오는 불현듯 웃음을 터트렸다. 비에 젖어 선명해지는 색처럼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그 웃음은 그 흐름이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하고.”

“…….”

“내 안에 너무 여러 명이 산다.”

긴 한숨을 쉬며 로사리오는 등을 소파에 기대었다. 뒤통수를 소파에 얹으며 눈을 감아 얕은 숨은 쉰다. 그녀를 따라 나 역시 몸을 깊게 묻었다. 로사리오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내뱉는 숨에는 안정감은 없었다. 찡그린 눈썹, 하지만 웃고 있는 입술의 묘한 대비가 회피하기만 하던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고통스럽지만 그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고. 묘한 동질감에 그녀의 찡그린 감은 눈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잠깐 전화 받고 올게.”

“응.”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다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플립을 열었다. 잔뜩 바람이 들어가 있는 들떠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어.

다짜고짜 보고 싶다 고백하는 블리스의 목소리를 듣자 웃음이 나왔다.

“귀엽기는.”

-뭐야. 하하하

청명하게 웃는 목소리를 들으며 네모난 아이들용 의자에 엉덩이를 기대어 앉았다. 허리에 비해 낮기 만한 책상에 엎드리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고 있었어?”

-그냥, 심심해서 예전에 모아뒀던 자료들도 보고, 오랜만에 아버지가 전화해서 대화도 하고.

“어떤?”

-그냥, 대학에 대한거지 뭐. 그리고 네 얘기도 물으시던데.

“그래서?”

-와튼스쿨 붙었다고 했지.

“그랬더니?”

-계속 연락하면 든든한 지원군이 될 거라던데.

“음… 지원군 치고는 각별하네?”

그 말에 녀석이 가볍게 웃었다. 엎드린 채 손안에 고개를 묻자 주변이 어두워졌다. 녀석이 속삭였다.

-낮잠을 자다가 꿈을 꿨는데, 너랑 나랑 결혼한 꿈이었다?

“내가 늦잠 자면 네가 밥 차려서 침대 위로 가져오고, 내가 피곤하면 네가 어깨 주물러주고, 정원 정리는 너 혼자 다하고 뭐 그런?”

-너 은근 세뇌시킨다?

불만이 섞인 힘준 목소리에 그럼 안 할 거냐? 라고 묻자 내가 언제 안 한댔어. 시키면 열심히 할게. 시켜만 줘! 라고 큰소리친다. 어쩐지 녀석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웃었다.

-그냥 동거하는 걸 수도 있는데, 꿈속에서 내가 네가 되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내 영혼이 너한테 들어가고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꿈속 주인공이 너였어. 그 때 나는 집에 없었지만, 대신 거실 한 면을 가득 채운게 우리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지. 비비스와 벗해드 장갑도 방안의 한편에 걸려있었는데, 손을 내려다보니까 그 때는 멍청한 벙어리장갑 대신 맞춘 듯한 반지가 끼어있었더라. 사실 꿈 내용 자체는 별게 아니고, 어렸을 적 향수에 젖어 그 때 우리가 캔자스에서 찍었던 비디오를 돌려보는 꿈이었어.

“아 맞아 그 비디오. 잊고 있었어.”

-생각해보면 우리 잊고 있는 게 더 많을 거야.

“그렇겠지. 근데 블리스. 이쯤에서 끊자. 밖에서 얘기하던 중이었거든.

-응 알겠어. 다올린 녀석도 조심하고. 있다가 전화해.

“조심하라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네가 좀 매력적이어야지.

“그건 그렇긴 하다.”

뻔뻔한 내 말에 녀석이 웃었다. 그럼 이만 끊을게. 달짝지근하게 귀에 남는 녀석의 목소리의 여운에, 말이 없는 건너편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전화기를 귀 옆에 대고 있었다. 블리스 역시 전화를 끊지 않았다. 녀석이 조용히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고백을 듣자 새삼 무기력한 나른함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았다.

-너는?

“글쎄.”

그 말에 녀석이 재촉하듯 듣고 싶어 말해줘, 라고 말했다.

“뭘?”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전화기 건너편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됐어. 오기만 해봐. 다짐하듯 이를 갈았다. 말할 틈도 없이 있다 보자고 전화를 끊는 목소리엔 서운함이 남아있었다. 한번만 더 해달라고 하면 대답해 줄 생각이었는데 녀석 답지 않은 쉬운 포기에 김이 샜다.

“내가 너무 못됐나.”

끊어진 전화기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내 목소리는, 블리스가 느꼈을 서운함에도 불구하고 웃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을 때 로사리오가 팔짱을 끼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묘한 각도로 틀어진 눈썹이라던가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노골적으로 궁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지쳐있다는 인상이 강해서 억지로 공통의 유쾌한 화제를 꺼내려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전환데 안에 들어가서 받냐?”

“그런 게 있어.”

“연애 하냐?”

“몰라도 돼.”

로사리오가 들고 있던 쿠션을 내게로 던졌다. 왼손으로 가볍게 잡아 품에 안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절로 웃음이 번지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신발 끈을 다시 묶는 척 허리를 숙였다.

“정말 연애하나봐.”

“아니야.”

“진짜?”

로사리오 역시 허리를 숙여 신발끈을 고쳐 묶고 있는 나와 시선을 맞췄다.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을 무시하며 다른 편의 신발 끈을 풀었다. 웃지 않기 위해 입안의 점막을 치아로 물었다.

“하면 하는 거지 말 못할 건 뭐가 있어?”“괜한 짐작 하지마라.”

“괜한 짐작 하게 되거든.”

신발을 묶던 손으로 로사리오의 볼을 슬쩍 잡아당기자 녀석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얼른 뒤로 몸을 빼내어 볼을 닦아낸다. 나를 흘겨보며 팔짱을 낀 그녀가 긴 한숨을 쉬었다.

“답답하다.”

“왜. 또 고민이 떠올라?”

“아니.”

“근데 왜 답답하냐.”

운동화 끈에 묻어있든 축축한 물기가 손에 베여들었다. 찝찝한 그것을 바지에 닦아내며 허리를 일으켰다. 로사리오는 컬이 들어간 긴 앞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냥 나 힘든 것 때문에 잊고 있던 일이 떠올라서.”

로사리오의 갈등도 어느 선까지는 해소가 되었고 나 역시 블리스와의 통화로 들떠 있던 상태였기에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마음이 한없이 부풀어 그녀의 말에 반응하는 나는 텅 비어있었다. 나의 기억과 상념이 모두 다른 곳에 초점이 맞춰져서, 녹취록을 담는 테이프처럼 어떠한 말이라도 무감동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처럼.

“가까이 와봐.”

그런 나를 알기라도 하듯 손짓해 불렀다. 일으킨 몸을 앉히며 그녀의 옆으로 바싹 다가가자 로사리오가 신발을 신었던 한쪽 발을 빼 소파에 올렸다.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며 턱을 괸 그녀의 얼굴은 좀 전과 다른 의미로 심란해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전에 말했던 파렐이라는 녀석의 집에 갔었어.”

“파렐? 그 등 구부리고 다니는?”

“응. 너희 학교 애 있잖아.”

로사리오는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귀에 걸며 애매하게 웃었다.

“친해졌나봐.”

“아니. 그다지. 난 그렇게 생긴 애 안 좋아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짓궂은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로사리오의 거친 말투에 희생된 파렐이 불쌍해서.

“파티 연다고 부른 거거든. 나 혼자 간 게 아니라 같이 일했던 애들 몇이랑 갔던 거야.”

파렐과 어울린 것에 대해 마치 변명을 하듯 덧붙인 후 로사리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얘길 하더라.”

“개는 원래 이상한 소리 잘해.”

“그래?”

내 가벼운 농담조의 말투에 로사리오는 웃었다. 하지만 가벼운 바람에 날아갈 만큼 가벼운 미소였다. 로사리오답지 않은 애매하고 진지한 태도에 나는 물렁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고쳤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면서도 답지 못하게 쉽게 화제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좀 전처럼 생을 위협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불쾌한 불안 속에 빠진 사람처럼 어두워보였다.

심각한 얼굴에 덩달아 내 목소리도 작아졌다.

“무슨 얘긴데 그래.”

“헛소리일걸. 아마도.”

“그 헛소리가 뭔데 그렇게 망설여. 말 해봐. 가브리엘만큼은 아니지만 같이 고민하다보면 뭔가 해결책이 나오겠지. 혹시, 그 녀석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그 말에 로사리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심하라는 듯이 로사리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무릎에 깔았던 터라 손에 닿은 맨살의 어깨가 매끈거렸다. 서서히 로사리오의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나를 보던 시선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뜨린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한참 만에 말했다.

“아니. 그 애는 나한테 무슨 일을 벌일 만큼 대담하지도 않아.”

이를 앙 물며 로사리오는 고개를 숙였다. 핑크색의 매니큐어가 발라진 손가락이 주먹을 쥐자 새하얘졌다. 다시 고개를 든 로사리오는 어떤 결심을 한 것만큼이나 비장하게 다물렸던 입을 열었다.

“너한테 궁금한 게 생겨서. 네가 정말 그런지.”

로사리오는 내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듀폰 써클 공원에서 너를 봤다는 사람이 있대. 밤늦게 한참이나 서성였다고.”

로사리오의 말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상과 대사가 맞지 않는 영화처럼 어색했다. 설사 나를 그 공원에서 봤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뜸들여가며 얘기할 것은 아니란 생각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 그쪽 안사는 데 무슨 소….”

그러나. 곧 내 목소리는 붕괴되어 힘이 없어졌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서서히 심장에서 불이 타올랐다. 온 몸에 기포가 부글부글 끓어 피부를 뚫고 뛰쳐나올 것 같았다. 얌전하기만 하던 숨결이 헐떡여졌다.

“그…게.”

“…….”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목소리는 이상하게 갈라져있다. 너무 힘을 주어 쥐어짜는 바람에 목이 아팠다. 극단의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반응 네 가지. 여유롭거나, 아니면 시뻘개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울거나. 웃거나.

머리는 여유롭게 굴라 명령했지만, 심장은 벌써 빠르게 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나를 누군가가 조정했다. 머리가 아팠다.

“…누군가가 널 공원에서 봤대.”

로사리오는 그저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제멋대로 절여오는 통제가 불가능한 손가락이 점점 오그라들었다. 그 괴로운 감각에 주먹을 꽉 쥐었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로사리오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키스를 하다 그 남자의 차에 타서 어디론가 사라지는걸.”





황량한 마음에 비추는 모든 것은 색이 바래져 있었다. 모든 것이 잿빛 풍경이었다. 붕괴되고 풍화되어가는, 세기말적 상상력 속 풍경. 무슨 정신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는지 그 과정이 기억나지 않았다. 난도질된 필름처럼, 중간 중간의 장면은 남아있지만 그 이미지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번호를 지워버렸지만, 막상 버튼을 누르기 시작하자 또렷해졌다. 기억은 물살을 가르는 배처럼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뚜렷한 항적을 이뤘다.

신호음이 흘러가도 전화의 주인은 받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조금은 통쾌한 눈으로 벨이 울리는 전화기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상을 하자 속이 허물어졌다.

몇 번을 전화해도 받지 않는 전화기를 내려다보다 욕실로 뛰어갔다. 비어있는 속에서 또 다시 위액이 물컹거리며 흘러나왔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였다. 별 것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일어나는 이제는 친구 같은 생리적인 현상일 뿐이니까.

토사물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눈을 감고는 그대로 물을 내려버렸다. 얼핏 보았던 토사물의 내용 중에는 칼릭스가 사다주었던 약도 있었다.

탈진한 사람처럼 지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팔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시선은 바닥을 방황했다. 이제는 분노할 힘도 없었다. 아니,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늘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지만, 그 거대한 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폭력에는 반항을 하지만, 반복되는 폭력에 전의를 상실하고 수동적으로 변한 상태. 그게 지금의 나인지도 몰랐다.

물론, 나는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게이들이 득실거리는 듀폰서클의 공원을 서성인 적은 없었다. 서로의 마리화나에 불을 붙여주고 맘에 드는 파트너의 차에 들어가서 벌어지는 불건전한 하룻밤의 섹스를 꿈꾼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런 나를 여러 사람이 목격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흥미를 위해 잔뜩 부풀려진 얘기일 터였다. 그런데 왜. 왜? 무슨 이유로?

“왜 전화를 안 받아!”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반대편의 벽으로 던져버렸다. 벽에 튕겨 나온 전화기는 반으로 갈라졌다. 마치 그것이 레이이기 라도 한 것처럼. 반으로 부서져 버린 기계를 노려보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폐가 한계까지 부풀어 뻥 터져버릴 때까지. 극의 정점에 이르러 참지 못하고 긴 숨을 내뱉는 나의 입술을 부들부들 떨렸다.

복도로 나갔다. 온 세상이 비틀거렸다. 그러다 문득, 요즘 들어 부쩍 잦아졌다고 느낀 주변의 수군거림이 내가 와튼 스쿨을 붙었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붙이는 대에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할는지.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이층으로 내려왔다. 이층의 난간에서 떠들던 한 학년 아래 주니어에게 레이의 방 번호를 물었다. 내 심상치 않은 상태에 녀석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방문을 두드렸음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쾅쾅쾅. 힘주어 미친 듯이 두드려도 방문은 열릴 생각을 않았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물속에 빠진 것처럼 모든 소음이 웅얼거리며 뭉뚱그려져 들렸다. 이마를 문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질끈 눈을 감고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 번 주먹으로 문을 쾅 내리쳤지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흐으으….”

손가락 끝이 너무 절여서 주먹을 꼭 쥐었지만, 그 불쾌한 느낌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온 몸이 덜덜 떨려댔다.

“뭐야.”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왔다.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레이 로만이의 목소리였다. 몸을 돌려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의 눈썹 끝이 뾰족하게 올라갔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접으며 나를 밀치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꺼냈다.

“무슨 짓이야.”

“뭐?”

“무슨 말을 지껄이고 다닌 거야.”

그 말에 열쇠를 꽂아 문을 돌리던 레이의 손이 멈췄다. 평정을 가정하던 녀석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벌게졌다. 점점 거칠어져가는 내 숨소리를 들으며 녀석은 다시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들어와.”

나를 잡아당겨 안으로 밀어 넣은 레이는 문을 닫으며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잠갔다. 녀석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뻔뻔하게 말했다.

“무슨 말.”

심기가 불편한 듯, 나에게 왜 이런 취급을 받는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 절로 터지는 기막힌 한숨에 녀석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손바닥으로 녀석의 가슴을 강하게 밀어내자 녀석의 몸이 벽에 닿았다. 레이의 입술이 험하게 벌어졌다.

“그래. 네가 날 싫어한다고 치자.”

“…….”

“그렇다고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쳐?”

온 몸의 열기가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분노로 높아져가는 안압으로 인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주먹으로 벽을 쾅 내리쳤다. 이러다가 온 몸이 폭발할까 싶을 만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니, 진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듀폰써클에서 남자와 키스? 그래. 너 참 말 잘 지어내더라. 내가 남자에 미쳐서 거기서 섹스 할 남자라도 고르고 있었다는 말이냐?”

“…….”

“말 한마디로 사람이 죽는 수가 있어.”

“…….”

“지금 내가 죽을 만큼 짜증나거든?”

어깨를 쥐어짜듯 벽에 밀어붙이며 으르렁거리자 녀석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일까. 억울한 마음에 울분이 토해졌다.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

“어?!”

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내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이 나왔다. 이성적으로 군다는 거, 애초에 가능할리 없었다. 얼굴을 찌푸려 마주보던 레이는 힘을 주어 떨어지지 않는 나의 손을 떼어냈다.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 손에 힘이 쥐어지지 않아 억지로 주먹을 꽉 쥐어보지만 그게 잘 안됐다.

지나진 분노는 눈물마저도 마르게 하는 것인가. 눈가에 흔적을 남기며 고였지만,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없었다. 레이는 씩씩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긴 한숨과 함께 나를 밀어내며 방안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미간을 모은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레이는 교복 베스트의 단추를 풀었다. 옷을 곱게 개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네가 믿던 안 믿던. 난 안 그랬어.”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차분하기까지 한 녀석의 말을 듣자 헛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입고 있던 베스를 벗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성을 잃은 몸의 본능은 여지가 없었다. 녀석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씨발! 끝까지 들어!”

녀석에게 달려드려는 나를 제지하며 녀석이 심각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 약에 취해서… 네가 게이라고는 했어! 끝까지 나 나름대로 지키려고 했는데!”

“…….”

“그…런데.”

“…….”

“너, 너무 취했었는지”

발밑에 깊은 수렁이 있어서, 그 밑으로 쑤욱 꺼져가는 기분이었다. 빛도 없고, 온기도 없는 검은 물이 넘실거리는 수렁 속으로. 레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이를 악 물었다. 양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잡아당기며 덧붙였다.

“그 말하고서 다음 날에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 하지 말라 했어…. 믿던 말던, 네가 싫긴 해도 떠벌릴 생각까진 없었어. 진짜. 듀폰써클… 난 이런 얘기 한적 없어.”

“…….”

레이는 목이 답답한지 넥타이 역시 검지를 걸어 주욱 잡아당겼다. 그것을 주먹 안에서 구겨 바닥에 집어던지지는 녀석의 눈의 새빨갰다. 비틀거리며 침대로 걸어갔다. 털썩 앉으며 녀석은 손바닥 안에 얼굴을 감춰버렸다. 마치 나를 대신해 애통의 눈물을 흘리기라도 것처럼 어깨가 떨려왔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녀석의 눈은 메말라 있었다. 대신, 이를 드러낸 입이 험하게 벌려졌다.

“빌어먹을!”

침대를 주먹으로 치며 레이는 울분을 토하듯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비웃는 대신 화를 내는 레이에게 감사의 절이라도 해야 하나. 헛웃음이 나왔다. 온 몸의 체액이 바닥으로 다 흘러내려 내 몸에서 습기가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한없이 건조해졌다.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젖은 운동화로 바닥을 툭툭 내리쳤다. 딱딱한 방안의 바닥에 구멍을 내기라도 하듯 바닥을 차는 것에 열중했다. 그러나 분풀이라도 하듯 갈수록 거세어지는 발길질 때문인지, 아니면 속에서 서서히 불이 일기 때문인지 숨이 거칠어졌다. 악귀처럼 바닥을 차며 크흐으, 신음 섞인 거친 숨을 내쉬었다.

딱딱한 바닥에 깔린 붉은 색의 카페트에서 먼지가 날렸다. 발끝도 마비될 것처럼 아파왔다. 보다 못한 녀석이 일어나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쳐냈다. 손을 잡아채자, 아랫입술을 악 물며 시선을 피했다. 레이의 땀에 젖은 차가운 손을 잡는 순간, 발끝이 너무 아파서,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러면, 난 누굴 증오하면 되는 거냐?”

훌쩍 코를 삼키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땀에 젖어 있던 손이 천천히 메마른 내 손을 감쌌다. 그 손을 쥐어짜듯 꽈악 잡자 녀석이 고개를 숙였다. 녀석이 체념하듯 속삭였다.

“아마도. 나.”

한숨처럼 가벼운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창백하게 질려버린 레이의 뺨을 갈겨버렸다.





*





밤새도록 잠을 설쳐 늦잠을 자느라 아침 식사를 잊었다. 멍한 눈으로 벽에 붙어있는 전자시계를 올려다보니 9시 41분이었다.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손안에 쥔 채로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대로 준비하고 간다 해도 도착하고 나면 수업이 끝나있을 것이었다. 이른 아침에 나를 깨우기 위해 방문을 두드리며 말을 걸던 칼릭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잠결에 더 자고 싶다고, 그냥 가달라 했던 나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정리를 하고 욕실에서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수건으로 대충 닦아냈기에 구겨진 교복을 걸쳐 입자, 셔츠 깃 위로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동관의 캐비닛에서 책을 챙겨 인문학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조용했다. 간간히 교실 안에서 수업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창가를 통해 밖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는 학생들은 없었다. 아무도 걸어가는 사람이 없어 텅 비어있는 복도는 낯설기만 했다. 산만하고 생기 넘치던 풍경은 쓸쓸한 고독함에 잠겨 어딘가 음습한 분위기를 풍겼다.

수업이 없어 비어있는 교실로 들어가 창가 구석에 앉아 책상에 엎드렸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까지만 조금만 더 눈을 감을 생각이었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정신 사나운 음악을 듣고 있으니 심란하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랑에 관한 가사라기보다는 너와 자고 싶다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의미한 가사들을 소리 없이 입과 혀만을 움직여 흥얼거리며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듯 책상 위를 두들겼다. 갑자기 귀에 꽂아 넣은 이어폰의 한쪽이 빠졌다. 앞으로 걸어와 자신의 귀에 이어폰을 꽂은 녀석은 벤자민이었다.

“취향하고는.”

혀를 차며 고개를 숙여 내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민 녀석은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이런 음악이 얼마나 정서를 더럽히는지 알아?”

여태 전적으로 보건대,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내 옆에서 종알종알 말을 걸 녀석이었다. 대답 대신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어 벤자민에게 넘겼다.

“다른 폴더 보면 장르별로 노래 들어가 있어. 좀 듣고 있어라. 난 잘 테니.”

“나 심심한데.”

녀석의 말을 들으며 이마를 책상위에 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벤자민이 수업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교실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너는 왜 일찍 왔냐.”

“늦잠 자서. 아무도 안 깨워주더라고.”

“이런.”

빛을 가리기 위해 팔 안에 가둔 팔 안에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잠을 자려했지만, 벤자민은 음악을 대신 나와의 대화를 시도하며 수면을 방해했다.

“기분 안 좋아?”

“응.”

“왜?”

“글쎄.”

어둠 속에서 느리게 눈을 껌뻑이던 나는 목소리마저 느려져있었다. 달콤한 시럽 같던 일상에 타고남은 재를 넣어 휘저어놨으니 유쾌할 리가 없었다. 억지로 즐거운 척 꾸며낼 자신도 없었고. 늘어지는 대답에 벤자민의 몸이 내게로 기울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난 기분 안 좋으면 꿀에 절여놓은 체리 먹어.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날 위로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벤자민의 목소리가 얇아지고 높아졌다. 주니어 때만 해도 벤자민은 변성기가 오기 전이라 목소리에 귀여움이 남아있었는데.

“넌 그런 거 없어? 스트레스 해소하는 법.”

살짝살짝 끄트머리를 잡아당기자 머리전체가 간질간질했다. 엎드린 채로 녀석의 얇은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난 자. 그게 스트레스 해소하는 법이야.”

잔뜩 부풀린 볼에서 바람을 빼내며 녀석의 얼굴 위로 바람을 불자 잔뜩 얼굴이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시답잖은 수다에 열을 올리며 반응하는 나를 상상한 벤자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 나에게서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재속에 아무리 설탕을 들이붓는다 한들, 그것을 달게 느낄 수는 없을 테니까. 다시 책상에 엎드린 나를 가만 두기로 한 건지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엠피쓰리의 볼륨을 키우는 소리가 들렸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룻밤사이 긴 숙면을 취하고 나니 조급함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아직까지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없어서 인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이 일이 내 인생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 인간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역사를 열거할 때, 아무리 그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따라붙는 단서가 있다면 순식간에 평가절하 되어 버리고 마는 그것. 분홍색의 역삼각형. 핑크트라이앵글이 상징하는 동성애. 장애처럼 느껴지는 그것이 나에게 붙는다면, 또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 한다면 그 때 나는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부푸는 상상에도 불구하고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기만 한 일상에 나는 무감각해졌다. 그러나 나는 곧 폭풍이 불어 닥칠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수학 문제가 프린트된 종이, 두꺼운 교과서를 잔뜩 짊어들고 점점 짙은 녹색을 띄어가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었다. 저녁 시간이었다. 하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공기가 꽉 들어찬 풍선이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더부룩하기만 했다. 내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보여주는 증거. 정신만큼이나 고통에 쉽고 굴복하고 마는 육체였다.

동관의 캐비닛에 책을 넣기 위해 정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질적인 공기가 나를 감쌌다. 몽중의 환영만큼이나 특별하게 천장의 화려하고 퇴폐적인 샹들리에가 번쩍거렸다. 동관의 건물은 모던한 현대건축 양식을 따랐지만, 특별히 정문 로비의 샹들리에는 세속적인 아름다움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려 소란스런 복도를 보았지만, 눈앞에서는 아직도 빛 무리가 러시아 동화 속, 눈으로 만들어진 소녀의 피부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맨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눈을 감아도 빛의 여운이 남아, 빛 가운데 길을 잃은 것 같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찾았다. 하지만, 어젯밤에 욕실에서 맞은 편 벽으로 던져버렸던 것이 떠올랐다. 욕을 중얼거리며 비어있는 주머니 속으로 양 손을 찔러 넣고 책이 들어있는 가방을 팔목에 걸친 채로 캐비닛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캐비닛 앞에는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이 시간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이곳에 사람이 득실거릴 이유는 없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어 손안의 가방을 가슴에 안았다. 걸음을 옮기자 일제히 캐비닛 앞에 서 있던 녀석들이 나를 돌아봤다.

돌아보는 시선이 낯설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분명한 벽이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강화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철장 안에서 피해자와 피의자가 면담이라도 하듯 동떨어져 있었다. 녀석들의 시선이 꼭 그런 느낌이었다. 길을 비켜주지 않는 그들을 헤치고 캐비닛 앞에 섰을 때 보았다. 울긋불긋한 페인트로 캐비닛에 그려진 조잡한 그래피티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 같은 게이에게도 인권을.

분홍색 핑크트라이앵글이 붉은 색으로 쓰인 글자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상징하는 핑크트라이앵글이 왜 여기에 그려져 있는지 의문이었다. 붉은 페인트로 휘갈겨진 글씨의 문구도 창의적이지 못했다. 페인트 조절을 잘못해 면을 타고 뚝뚝 핏물처럼 흘러내린 페인트를 멍하니 바라보는 내 머릿속이 침침해졌다. 너무 유치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나마 로사리오로부터 들어서 예상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아마 쇼크로 심장이 멈췄을 테니까.

그러나.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고 해도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진 것은 아니었다. 심장에 칼을 꽂아 주욱 찢은 다음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사람들이 기어들어왔다. 지옥의 풍경과도 같은 그 모습을 그려낼 수가 있었다.

“누구 나하고 원수진 사람 있어?”

공황상태인 머리를 따라 내 목소리도 정상이 아니었다. 찐득하고 차가운 검은 액체가 머리를 타고 온몸으로 흘러내렸다. 화염의 지옥이 아닌, 차갑고 음습하고 불쾌한 지옥 속에 빠진 듯이.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려 손끝에 잔뜩 힘을 주고 캐비닛을 열어 책을 구겨 넣었다. 탕, 문을 닫고 의연해지려 노력하며 새빨간 글씨를 노려보았다.

“누구야.”

“…….”

“누가 그랬어.”

주변의 웅성거리던 소음이 일제히 멈췄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거친 숨을 삼키며 뒤돌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노려보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 광경이 재미있는 걸까. 난 죽을 것 같은데. 간신히 숨을 쉬고 서 있는 건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어떤 미친놈이 날 모함하는지는 더더욱 모르겠는데.”

“…….”

“진짜.”

“…….”

“유치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내 목소리가 이상하긴 했지만, 단지 분노 때문이라고. 내가 떨리는 이유는 모함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숨기는 나의 가면에 칭찬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한 순간에 사자우리에 떨어진 고깃덩어리처럼 너덜너덜 찢겨질 것이다.

공기 자체가 내겐 독이었다. 숨을 쉴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온 몸의 혈관이 팽창되었다. 이러다 뻥, 심장이 터질 것이다. 주위를 천천히 노려보는 나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구는 방법 따위 나는 몰랐다. 미친 척 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을 중심으로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다. 마치 회전목마처럼 어지러웠다. 그 중심에서 누군가가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왔다. 소문은 발 없는 말이 되어 녀석의 주변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조쉬와 함께 뛰어온 블리스의 숨이 거칠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생존 본능처럼 고개를 돌려버렸다.

“괜찮아?”

어찌나 부들부들 떨어댔는지, 그 꼴이 가여워 앞에 서 있던 어떤 소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니. 괜찮지 않아. 교, 교장선생님에게 말, 말해야겠어. 더듬더듬 힘을 주어 내 뱉는 목소리는 추한 느낌을 줄 정도로 잔뜩 갈라졌다. 순결한 처녀가 창부로 오해받은 것보다 더한 수치심을 느끼며 무리를 밀쳐 길을 뚫었다. 아무도 나를 잡는 사람이 없었다.

힘이 풀린 다리에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 했지만, 침착하게 걸어서 로비를 벗어났다. 차가운 밤바람이 나를 맞았다. 싸늘하게 식혀주었다.

“정말….”

죽고 싶다.

한 참을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짙은 남색의 어둠에 잠긴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손안이 허전했다. 오그라들었던 주먹을 펴 그 안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캐비닛 앞에 가방을 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시 가지러 갈 용기가 없었다.

하아아. 왜 입김을 불면 하얗게 김이 번질 만큼 추운 겨울이 아닌 걸까. 땀나는 건 싫은데. 어기적어기적 걷다, 조금씩 걸음을 빨리했다. 속도를 높여 달렸다. 쓰레기 같은 청춘을 불태우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최저의 쓰레기가 되어버렸으니, 나의 분노를 내 몸을 혹사시켜 불태워버려야지.

숨이 턱 끝까지 닿았다. 배가 당겨왔다. 붉은 가로등의 불빛만이 운동장을 밝힌 텅 빈 운동장의 반을 가로지르자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았다. 더위가 머리끝으로 몰려왔다. 부족한 산소와 당기는 배, 열병에 걸린 듯 고통스런 머리만 아니라면 날듯이 달려갈 텐데. 그러나 아픔을 느낄수록, 괴로워할수록 느껴지는 이면적인 희열에 실실 웃음이 흘러 나왔다. 고통의 정점에 이르러 마침내 미쳐버린 것인가, 그러나 자아가 분열되기에는 고통이 너무나 미흡했다. 미쳐서 고통을 떠넘길 기회도 주지 않았다. 저 멀리 포토맥강의 운하가 가로등빛에 반짝거리며 빛을 산란했다. 이 열기를 식혀줄 것이 비가 아니라면 얼음같이 차가운 강물이라도 괜찮았다. 그 속으로 첨벙 뛰어들자 차가운 운하의 강물이 나를 적셨다. 빠른 유속의 물이 묵직하게 머리끝까지 감쌌다. 눈을 뜨자 물 위로 붉은 가로등빛이 일렁였다. 달려오느라 헉헉거리던 입 속에 물이 들이찼다. 꼴깍꼴깍 물을 삼키며 몸을 뒤틀어 물위로 떠올랐다. 순식간에 나를 죽일 것 같던 열기가 사라졌다.

어제의 비로 인해 물이 불어나있었기에 유속이 빨라져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끝도 없이 흘러갈 것 같아 팔과 다리를 저어 물살을 건너갔다. 둑에 닿자마자 힘을 주어 올라가 둑 위에 엎드렸다. 온 몸에 산소가 모자라 죽을 것 같았다. 심장과 함께 온 몸이 뛰었다. 손가락 끝에서도 빠르게 뛰는 심장의 맥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손바닥으로 심장을 부여잡고 젖은 잔디 위에 얼굴을 묻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소리와 내 거친 숨소리만이 적막한 고요 속에서 내 귀를 온통 사로잡았다.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내가 얼마나 미친놈처럼 악을 품고 먼 거리를 달려왔는가에 대해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뒷일도 생각하기 싫었다. 어차피 괴로울 뿐일 텐데 걱정으로 신경을 소모할 순 없었다. 손가락하나 까딱할 힘없이 맥이 풀렸다.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저 깊은 운하의 삭막하고 아찔한 강보다 더 깊고 더 어두웠다. 문득, 블리스와 함께 갔던 캔자스에서의 야간비행이 떠올랐다. 도시의 밤과 달리 어둠에 익숙했던 대지. 대기에 걸러지지 않은 채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빛나던 별들. 우주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몽환적이었던 야간비행. 녀석과 함께 나누었던 비행기속에서의 키스도.

머리가 점차 차갑게 개어갔다. 장대비로 소모되어 먹구름이 사라지고 청명한 하늘만 남은 비갠 오후처럼. 생각이 정리되고 머리가 맑아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찌르릉, 지척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청명하게 방울이 구르는 소리. 그 소리를 예상했었기에 놀라움은 없었다. 생각보다 나를 빨리 찾아냈다는 것이 예상을 벗어났을 뿐.

다시 한 번 찌르릉 자전거 종소리가 울렸지만 눈을 감아버렸다. 소리가 사라진 뒤의 적막함 속엔 흐르는 운하의 물소리만이 가득했다. 풍덩. 물속에 무언가가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찰박거리며 물살을 가르는 소리, 힘을 주어 둑을 올라오는 소리, 젖은 잔디를 밟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그리고 내 옆에서 서성이는 소리까지.

“전화는 왜 안 받아.”

내 옆에 앉으며 블리스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숴버렸어. 중얼거리자 녀석은 쓰게 웃었다. 차갑게 얼은 손이 앞머리로 뒤덮여있던 이마를 쓸어 넘겨주었다.

“가방 두고 갔더라.”

“다시 가지러가기 쪽팔려서.”

내 웃음에도 블리스는 따라 웃지 않았다. 대신 녀석과 나 사이를 긴 침묵이 지배했다. 공허하게 비어가는 시간을 녀석과 나는 너무도 의식했다.

“너….”

톡톡, 블리스의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볼을 적셨다. 작은 호박 알갱이처럼 오렌지 빛 붉은 조명에 반짝거리는 그것이 녀석의 머리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보석같이 예뻐서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씩 크기를 더하다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볼 위로 뚝 떨어졌다.

“무서웠어.”

녀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잔뜩 억눌리고 갈라졌다. 손가락 끝을 머리카락에 대자 주르륵 손목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머리가 차가워지지. 머리맡에 민트를 뿌려놓은 것 마냥 생기가 넘쳤다. 그것은 열정이 아닌, 싸늘함이었다.

“왜.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았냐.”

내 웃음 띤 질문에 블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응? 자살할 것 같았어?”

“…….”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블리스의 무거운 속삭임에 실실거리며 웃었다. 고개를 숙인 블리스의 얼굴은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어느 것 하나 구분할 수 없었다.

“뭐, 작년에 캔자스에서 예행연습을 한 탓에.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는 아니네.”

기력이 빠진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세워 앉으며 녀석의 몸과 마주 앉았다. 녀석의 숨은 아직도 거칠었다. 블리스의 숨이 편안해지길, 느려져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기를 기다렸다.

“레이 반 죽여 놓을 생각이었다면. 관둬.”

고개를 든 블리스의 얼굴은 물기로 반짝거렸다. 그대로 검은 도화지가 되어 붉은 빛과 물기로 반짝거렸다. 침침해지는 눈빛을 보다 고개를 숙여 잔디의 여린 잎을 뜯어냈다. 그 중의 하나를 골라 갈래갈래 찢어냈다.

“레이는 이미 변명할 말을 아주 많이 준비했으니까. 그런 헛수고는 하지 않아도 돼.”

실실,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의 웃음이라니 나답지 못했다. 그러나 어차피 허무하게 시작된 웃음이니 끝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끝도 없는 무기력에 흐물거리는 몸을 지탱할 수 없어 녀석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있잖아. 블리스.”

이미 허망한 웃음 같은 건 없었다. 잔뜩 갈라진 쇳소리로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는 거북하기만 했다.

“나 그냥. 조용하게 졸업해서 대학 들어가고 직장도 잡고. 착한 여자랑 결혼해서.”

“…….”

“애 낳고 살란다.”

블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블리스만큼 진심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좋게 말해서 순수한 것이고 나쁘게 말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눈물과 분노 그리고 웃음을 속박하는 가면에서 벗어난 천연 그대로의 얼굴. 그러나 어떤 고통은 때때로 사람을 아주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 고개를 들어 녀석을 보았을 때, 블리스의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까.”

“…….”

“내가 가진 것들을…. 아니, 앞으로 가질 것들을 포기 할 수가 없더라고.”

나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블리스를 말 잘 듣는 아이로 만들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신념이란 타인의 언어를 통해 받아들였을 때 그에 반하는 사상과 공존하기 때문이다. 본인 스스로의 필요와 각성의 순간이 오기 전 까지는 타인의 말은 영원히 제 것이 될 수 없겠지. 그리고, 사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리스의 창백한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럼 나는.”

“…….”

“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거고.”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며 두 손을 들었다 떨어트렸다. 고통의 완곡한 관용적 표현.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블리스의 얼굴이 침침하게 어두워졌다.

한참을, 서로의 몸이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 억지로 갈려진 채로 침묵을 지켰다. 녀석은 나란 존재를 잊은 것처럼 고요한 숨을 몰아쉬었다. 녀석이 피식 웃었다.

“그것 참 편하네.”

한참 만에 어깨를 으쓱이며 블리스는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었다. 어느새 바짝 말라 열이 오르기 시작한 블리스의 손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녀석은 고개를 숙여 쓰게 웃었다.

“그래. 뭐, 나도 알아. 이젠 알겠어. 너에게 내가 어떤 가치인지. 네가 머릿속에서 나를 어떻게 그려 왔는지도.”

후우우, 부풀린 볼의 긴장을 풀어 긴 한숨을 쉬며 블리스는 치아로 아랫입술을 뜯었다.

“너는 그랬겠지.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줄 날 상상해서 그걸 나라고 믿고, 의심하고. 결국에 혼자 남겨지고 마는 상상을 했겠지. 그게 이 머릿속에서 얼마나 반복되었을지 보지 않아도 뻔해.”

빠르게 속삭이며 두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 자신에게로 당기며 이마를 맞닿게 했다. 축축하게 젖은 서로의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뭉개지도록 블리스는 힘주어 당겼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넌 내가 정상으로 보이냐.”

블리스는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대답을 바라 질문의 형식을 띈 것이 아니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진심을 보여줘도 믿어주지 않는 널 보면서 내가 멀쩡하게 버틸 거라 생각했냐.”

표정 없는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웃었다. 녀석의 손끝이 떨려왔다. 마치 옥죄듯이 뒤통수를 감싼 블리스의 손의 떨림이 심해졌다. 녀석은 결국 통제할 수 없이 떨리는 손을 감추려 팔짱을 꼈다. 손끝의 떨림이 팔뚝으로 녀석의 어깨로 전해졌다. 그 떨림이 견딜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어 버텼다.

“제발 이러지 마라.”

“…….”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아무런 대답 없이 침묵하는 나를 파르르르 떨리는 손이 껴안았다. 블리스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심장은 빠르게 뛸수록 블리스가 죽어가는 상태라고 반증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랑한다니까.”

블리스는 우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블리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모든 기력이 소진되어 녀석이 자신을 얼마나 사납게 쥐어짜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손을 들어 블리스의 심장 근처에 손바닥을 대었다. 미친듯이 뛰는 그 움직임을 저지하듯 꽈악 짓눌렀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응? 언젠가는 들키고 말겠지.”

“…….”

“결국에.”

“…….”

“너는 날 버리게 될 거야. 왜냐면 넌 너무나 가진 게 많거든. 아니라고 부정하지 마. 솔직해져봐. 넌 아무것도 내려놓고 싶지 않잖아. 따지고 보면 너에겐 나도 그중의 하나일 뿐이야. 그런데 도저히 동시에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 고민될 뿐이지. 어째서 사랑이 완전한 거라고 생각해? 나처럼 너 역시 자신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난… 자신 있어.”

“천만에! 넌 결국 내가 괴물처럼 보이기 시작할 걸. 세상에 우리 둘만 남게 되는 그 순간부터. 절대로 행복하지 않을 걸.”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어.”

“글쎄. 네 아버지와 똑같이 날 괴물 보듯 하겠지. 안 그래?”

“제발. 제발. 이러지 말자.”

점점 격해지는 나와는 다르게 블리스는 점점 차가워져갔다. 제발 이러지 마라. 한숨에 섞인 애원의 말로 나를 달래려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블리스의 얼굴은 아주 차분하게 느껴졌다. 어떤 말로도 녀석을 도발해서 흥분을 유도해 낼 수 없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떤가. 너무 조심스러우면 때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의 시선에 나체로 노출된 기분이 든다. 그럴 때는 가만히 웅크려 앉아 무릎 안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것이 손톱만한 구원이 된다. 나는 늘 그래왔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나란 존재가 너무나도 비겁하게 느껴졌다.

결국 블리스의 핑계를 댔지만, 문제의 초점은 내게 있었다. 원죄의 원인을 아담이 이브에게,이브가 뱀에게 떠넘겼듯이 인정하는데 두려움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에 나의 문제였다. 블리스와 미래를 양손에 들고 둘 다 버릴 수 없어 끝까지 짊어지려 했던 내가 이제 와서 한계를 느낀 것이다.

그러니 블리스를 설득하기 위해 더 이상의 비난은 필요 없었다.

“내가 그럴까봐 그래.”

내리깔았던 고개를 들어 블리스와 마주했다. 블리스를 짚었던 손으로 가슴을 밀며 닿아있던 몸을 떼어냈다. 손끝에 쿵쾅거리던 블리스의 심장의 여운이 남았다.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지옥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면 꿈속의 순간이 얼마나 허망할까. 그 때도 말했었지. 나는 나의 사랑을 믿을 수 없다고. 헤어지자고 하는 건 오늘 이후로 내가 널 괴물처럼 느낄까봐, 나를 막는 장애로 느낄까봐. 그래서 그래.”

허리를 감았던 손이 떨어지며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거렸다. 시계추 같은 움직임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녀석의 눈을 마주했다.

“네가 사랑한다 할수록 넌 내 안에서 괴물이 되어갈 걸. 왜냐면 나는 사랑이란 환상에서 이제 막 깨어났으니까. 너에겐 사랑이 불치병이지만 나는 한 철 앓고 마는 감기일 뿐이거든. 그만큼 비겁한 게 나야.”

푹푹, 한글자마다 생채기를 남기는 나의 말을 블리스는 놓치지 않았다. 굳게 다물었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하지만 블리스의 얼굴은 마치 거울과도 같다. 어떠한 상처도 지나가고 나면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다. 멍한 내가 하는 말의 반도 못 알아들은 것 같다. 그러나 한 편으로 블리스는 이 순간의 고통을 가슴에 새긴다. 내가 주는 상처를 문신처럼 새겨 두고두고 그 고통을 음미하려는 듯. 눈동자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이젠 네 사랑이 부담스러워.”

“…….”

“네가 괴물이 되기 전에.”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헤어지자.”

“…….”

다시 눈을 떴을 때, 블리스는 멍하니 서 있었다. 영혼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얼음 같던 마녀의 저주에서 깨어나고, 한참 만에 녹이 잔뜩 슨 기계처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대신 입술과 혀만 뻥끗 거리며 그러마라고 속삭였다. 질끈, 입술조차 물지 않았다. 강을 건너 자전거를 탄 블리스의 몸에서 차가운, 피 같은 물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녀석은 그대로 페달을 밟아 시야 너머로, 너머로 달려갔다.

세상이 쩍, 갈라졌다.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아픈 것 외에는 느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육체와 정신이 마비된 것 같아. 악귀 들린 듯이 달렸던 운동장을 다시 되돌아가면서도 감각이 없었다. 일부러 블리스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을 비우려 애썼다. 공기가 고여 있던 풍선을 터트리면 그 안의 공기가 바람에 섞여 사라지듯이 내 안의 블리스가 펑 터져버리고 나니 생각이 비어졌다. 방전된 배터리처럼 어떠한 에너지도 끌어낼 수 없는 상태.

이상하기도 하지. 로비로 들어서자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음이 하나의 커다란 목소리가 되어 나를 비난했다. 그 중에는 동성애라는 단어도 있었고 불쌍하다는 동정도 있었다. 그리고 나의 변명처럼 누가 그런 오해를 퍼트렸는가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나의 유일한 죄가 있다면,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뿐인데. 차라리 비난의 내용이 블리스에게 상처를 준 나의 비겁함에 대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를 동성애자라 놀리는 것 보다, 혹은 동정하는 것 보다 그게 더 아플 테니까.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쓰게 웃으며 계단을 오를 때 난간을 잡고 있던 칼릭스를 보았다. 녀석이 내게로 다가왔다.

“수영했나봐.”

“응.”

“수영장 문 닫았을 텐데.”

“강에서 했어. 물 더럽더라.”

키들키들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녀석은 옆에서 같이 걸으며 내 손에 두고 왔던 가방을 걸어주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녀석 역시 목격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응.”

“어떻게 할 건데.”

우뚝 멈춰 섰다. 기운 없는 고개를 들어 녀석을 올려다봤다. 밝은 형광등이 녀석의 뒤편에 있어 그늘진 녀석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냥… 내일 생각할래.”

“피곤하구나.”

“응.”

칼릭스의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 부드럽게 흔들었다. 녀석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 했다.

“나도 알아볼게. 잘 될 거야.”

“응. 고마워.”

안마를 하듯 어깨를 꾹꾹 눌러주는 녀석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그렇게나 잔인했던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칼릭스 하나 때문에라도 나는 인생에 충일감을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고맙고 또 미안하기만 해, 내 마음은 한 없이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나약해진 때에 그 마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절박한 상황을 빌어 전하는 마음은 한순간 빛나는 일회성 이벤트처럼 느껴질 테니까.

“그럼 들어가.”

“응.”

“피곤한데 쉬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일이면 밝혀질 테니까.”

애써 기운을 북돋아주는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닫았다. 함께 있어주겠다는 말에도 거절하고 적막한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젖은 옷을 벗고 운동화도 벗어 빨래를 담는 바구니에 집어던졌다. 차갑고 새하얀 욕조 위에 입욕제를 뿌리고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욕실을 채웠다. 욕조 안에 들어가 호화롭게 느껴지는 거품들을 만지작거리며 욕조의 턱에 뒤통수를 기댔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시간의 흐름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것 같다. 제스씨가 집에서 늘 틀어놓던 가스펠이 떠올랐다. 그의 늙고 짧은 몸을 둥글게 말아 신음과도 같은 중얼거림으로 기도를 할 때, 그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건하게 느껴진다. 밖의 세상에서 그는 무너지고, 추락하더라도 그의 하나님만이 그를 지켜준다. 그리고 그의 작은 눈이 들뜬 열병과도 같은 희열에 젖어 부르는 노래들.

평화가 강같이 내 길을 따를 때나, 슬픔이 파도처럼 굽이칠 때, 내 운명이 무엇이든 간에 주께서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 주셨도다 ‘평안하다, 내 영혼이 평안하다’

그러면 그는 정말 평안한 얼굴로 두 손을 포개어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나 역시 그 노래들을 흥얼거려보지만, 내게는 어떤 느낌이 없다. 내 안에 신을 담는 부분이 모두 죽어버린 것 같다. 평안하지 않을 때 어떻게 평안하다 말하지. 반발만 생길 뿐이다.

목욕을 마치고나자 힘없던 몸에 노곤함까지 더해진다. 침대 위에 몸을 뻗고는 불을 껐다.

한참을 눈을 감고 죽음과도 같은 잠을 기다려도 잠이 오지 않는다. 불현듯 살인자가 된 느낌에 시달린다. 손끝에 살해당한 자의 뜨겁던 피가 남아있다. 블리스의 멍한 얼굴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픔의 진술이고 차분한 숨소리는 귀청이 나갈듯 한 비명의 다른 해석이다. 나는 얼마나 잔혹한 살인자인가.

잠이 오질 않는다.

눈을 떠 오래전에 빛을 잃어버린 야광별을 보았다. 번민의 밤. 나는 너무도 지쳐서 오히려 어떠한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내 삶을 이루던 것들이 조금씩 와해되어 허물어져가는 것이 보였다.

두 갈래의 선택의 기로에 서서 넓은 길을 택한 나는 좁은 길이 보이지 않도록 온갖 도구를 이용해 그 길을 메워버렸다. 더 이상 좁은 길이 눈에 띄지 않도록, 되돌아가 그 길을 걸어갈 가능성을 없애도록. 더 이상의 길이 아니게 된 그것을 바라보자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몰려들었다. 그럼에도 아직 어둡다는 것이, 새벽의 여명이 밝지 않았다는 것이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왔다.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홀로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를 넘긴 시간. 아직 밤이지만, 곧 여명이 밝을 것이고 새로운 하루도 시작될 것이다. 지옥 같은 밤을 보냈음에도, 오늘의 태양이 뜨고 마는 것이다. 눈을 감고 익사할 것 같은 고통으로부터 정신도 닫아버렸다. 간절히 원하는 죽음과도 같은 잠 외에는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불현듯, 어떤 느낌이 강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뇌를 게워 내고 대신 그 속에 찬 얼음을 퍼부은 느낌이었다.

기분이 나빠 허리를 일으킨 이후에도 쓰린 속에 허리를 구부렸다. 갑자기 구토가 밀려든다. 침이 왈칵 넘어온 입을 부여잡고 욕실로 달려갔다. 몇 번이나 왁왁 거리며 안의 것들을 게워냈다. 안압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내며 겨우 몸을 일으켜 입을 헹궈냈다. 그러나 다시 치미는 오심에 변기를 붙잡고 허연 위액을 토해냈다.

어기적거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오늘 누구도 재중확인을 하지 않았다. 11시 반이 되면 칼릭스와 블리스 둘 중의 하나가 기숙사에서의 이탈 여부를 확인하느라 방에 들러 체크를하곤 했는데. 이번 주는 블리스의 담당이었다. 녀석은 절대 거르는 일이 없었다. 나의 거부로 방황했던 그 날들에도, 감기로 몸살을 앓거나 급체로 먹은 것을 모두 토했던 날에도 꿋꿋하게 그 일을 수행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기분이 나빠서, 시체가 된 느낌이었다.

옆방의 문을 두드리자 한참 만에 얼굴을 찌푸린 녀석이 나온다. 나를 보자 조금은 놀란 눈치다. 나의 질문에 녀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확인하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옆의 방도, 또 그 옆의 방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너무… 나빠. 중얼거리며 온통 깜깜한 복도를 걸어 블리스의 방문 앞에 섰다. 한쪽 귀를 문에 대었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순히 잠에 든 것일 수도 있는데, 녀석을 마주치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세게 두드렸다. 마찬가지였다.

쾅쾅쾅 연달아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썩은 시체무더기 속에 떨어진 기분이다. 불쾌하고, 무서워 누가 대신 저 안을 확인해주었으면 좋겠다. 블리스의 잠귀가 이렇게나 어두웠던가, 발로 문을 부술 듯이 두들겨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자는 거라면 아니, 단순한 수면이 아닌 거라면 어떡하지. 망상이 꼬리를 물고 물어 가장 두려워하던 결말을 만들어낸다. 열어 제발. 시체가 말한다면 이런 목소리일까 싶게 갈라졌다. 한참 울던 사람처럼 떨리는 목소리를 키워 다시 한 번 말했다.

“블리스!”

쾅쾅쾅쾅! 덜덜덜 손과 발에 감각이 없었다. 누가 뒤에서 등에 칼을 꼽아도 아픔을 느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블리스의 모습을 보기 전에는 정상으로 돌아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선연한 감각이 발끝까지 뻗어갔다. 숨 쉬는 것도, 눈을 껌뻑이는 것도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제바알! 악귀 들린 사람처럼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반응이 없었다.

“문 좀 열어줘어!”

뿌옇게 눈앞이 흐려졌다. 억눌렸던 모든 감정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잘 못된 거라면 어떻게 하지. 블리스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미칠 것 같았다.

“자, 잘… 못했어. 흐읏, 블리스으.”

“문… 흐윽 문 좀. 흣, 열어줘. 다신 흑, 안… 그럴게.”

길을 잃은 아이 같은 서러운 울음소리에 복도의 불이 켜졌다. 복도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옆으로 다가왔다. 부서져라 두들기는 나를 잡아당겼다. 사람들의 얼굴이 눈물로 뿌예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발악할 뿐이었다.

“흣, 흐억. 잘 못… ㅎ.”

발작하는 나를 잡아 누르며 누군가가 뺨을 두들겼다. 문 좀 열어줘. 손끝으로 문을 가리키며 열어 달라 말하려 해도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흐읏, 윽, 저… 저.”

흐느낌이 감당할 수 없이 몰려와 숨을 쉬는게 힘들었다. 눈을 깜빡이자 눈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순간 눈앞이 맑아졌다. 바로 눈앞에 들이밀어진 얼굴이 물었다.

“문 열어줘?”

녀석의 말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 헐떡이며 심장을 손으로 짓눌렀다. 어느새 고인 눈물로 다시 뿌예지는 세상에 고립되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문을 돌려보지만 열려지지 않자 얼굴을 찡그린 녀석이 서둘러 복도를 달려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왜, 왜 안 열어주는 거야. 블리스 제발. 헐떡이는 내 흐느낌을 나조차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의 뺨을 때렸다. 숨이 안 쉬어져, 온통 울음뿐인 숨에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나오는 건 울음 섞인 쇳소리뿐, 흐느낌을 멈추려 해도 숨을 쉬려해도 잘 되지 않았다. 숨을 처음 쉬는 사람처럼 서툴기만 한 나를 누군가가 뒤에서 안았다. 차갑게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는 내 손을 주무르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조이. 괜찮아.”

“흣, 흐억, 흐으읏… 칼, 칼릭스.”“그래 조이. 나 여기 있어. 괜찮아.”

“무, 무니… 안, 흐읏, 안…열려.”

손을 주무르며 녀석이 나를 꼭 안아왔다. 끊임없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녀석의 팔뚝을 꽈악 잡아당겼다. 흐느낌에 호흡이 벅차 질식할 것 같은 내 가슴을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아래층에서 잠옷 바람의 데빗이 빠르게 뛰어왔다. 수 많은 열쇠 중에서 블리스방의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데빗이 큰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했다. 누군가의 등에 엎여 나온 블리스는 축 늘어져 있었다.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었기에 녀석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데빗이 초조하게 911에 전화를 걸었다. 그 역시도 침착을 잃고 있었다. 짧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데빗이 복도로 달려간다. 블리스를 업은 무리도 복도로, 계단 너머로 달려갔다.

아아아, 겨우 참았던 울음이 발작처럼 흘러 나왔다. 모든 사람이 나를 짓밟아 주었으면, 내게 돌을 던져주었으면. 내게 세상의 모든 모욕을 퍼부었으면.

통제할 수 없게 된,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기차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지겨워요.”

그 말에 연한 갈색의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 흘러내린 안경을 손가락이 쓰윽 올려 콧대에 걸쳤다.

“지겹다고요.”

그 말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덮었다. 조심스럽게 신중한 태도로 책상에 올려놓았다.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손등에 도드라진 혈관과 뼈의 흔적을 눈으로 쫓았다. 그러나 권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아요.”

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드르륵 의자가 뒤로 빠지며 그녀가 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따듯하고 건조한 손이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나의 손을 잡았다.

“조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독특한 악센트로 그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말투가 크림을 잔뜩 탄 커피처럼 부드러워졌다.

“이 상담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더 훌륭한 상담가를 소개해줄 수도 있어.”

“선생님도 훌륭하세요. 다만.”

“…….”

“전 이런게 필요 없어요.”

눈을 떴다. 그녀의 손에 덮여있던 손을 천천히 빼내었다. 나의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세라는 끝까지 입가에 띄고 있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도 온순해서 이 세상에 어떠한 해악도 끼치지 않을 것 같았다. 향긋한 냄새가나는 밝은 노란색의 가디건을 걸치고 옅은 금발의 짧은 커트머리의 그녀는 알려진 나이에 비해 훨씬 활기가 넘치고 젊어 보였다. 삶이 생기로 넘쳐나는, 생의 무게에서 해방된 상징처럼 보였다. 그녀는 학생지도 교사중의 하나였다.

세라는 책상 서랍에서 흰색의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13번가 메트로센터 부근에 위치한 정신과 개업의의 명함이었다.

“실력 있는 사람이야. 원한다면 시간을 정해 예약해줄 수 있어. 물론 상담은 무료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앉아있던 의자에서 허리를 미끄러트렸다. 자세가 물렁해졌다.

“제가 이상해 보이세요?”

내 말투는 느려져있었다. 의무실에서 받은 안정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느긋해져있었다. 그 말에 세라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절대 그렇지 않아 조이. 넌 지극히 정상적이야. 다만, 며칠 전 상담에서 네가 인정했듯이 조금 심신이 지쳐있을 뿐이야. 상담은 그런 상황을 훨씬 더 쉽게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네에.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며 뭉뚝한 손톱 끝을 내려다보았다. 지나치게 짧게 깎았던 탓에 살짝만 누르고 있어도 아팠다.

“조이.”

“네.”

“편하게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해보렴.”

“지금은 그냥 쉬고 싶어요.”

그 말에 세라는 입술을 당기며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러자꾸나. 한숨과 함께 그녀는 부러 유쾌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다음은 조금 더 마음을 열어줄 거지?”

작은 상처를 더듬을 때 아픔에 대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이면적인 쾌락을 느끼듯,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자 사악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손톱의 끝을 꾸욱 누르자, 새하얘지며 지긋한 통증이 몰려왔다. 어린 아이같이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한 태도를 제지하려 세라의 손이 팔목을 잡았다.

“교장 선생님의 특별히 널 책임지라고 말씀하셨단다. 나도 널 도와주고 싶고.”

손톱 끝에 주던 힘을 풀자, 아스라한 통증이 사라지며 붉은 핏기가 돌았다. 도대체 뭘요? 머릿속에서는 무엇이 나를 도와주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솟아났지만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라를 비롯한 지도교사들은 끝까지 나를 훼방하려 들 것이고 나의 사소한 한마디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그들의 잣대에 따라 평가할 것이니까. 말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것이다.

“알았어요.”

귀찮음이 묻어난 대답에도 불구하고 세라는 치열을 드러내 환히 웃었다. 나의 무례함은 그녀의 성실함과 상냥함에 손톱만큼의 상처도 남기지 못한다는 듯이. 순수한 호의를 호의로, 특별한 상냥함을 상냥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나는 세라의 웃음이 어떤 거북한 화법으로 느껴진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대답할 수 없는 외국어로 느껴졌다.

그녀와 나를 모두 만족시키지 못한 상담을 마치고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문에는 작게 유리가 끼워져 있다. 블라인드가 쳐져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순 없지만, 그녀는 오늘 만난, 그리고 만날 학생 중 최악의 학생과의 전쟁 같은 상담이 끝난 것에 대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다. 실실 웃으며 몸을 돌리는 순간,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있던 붉은 머리의 여학생과 마주쳤다. 붉은색으로 물결치는 고수머리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고 있던 여자애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보자 눈이 동그래졌다. 마치 자신의 인생의 범주에 들어와 있는, 친근한 사람을 의외의 곳에서 마주친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느새 유명인사가 된 모양이었다.

그녀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새하얀 얼굴이 잔뜩 박힌 주군께와 동그란 눈은 왠지 토끼 같은 인상을 준다. 힘내. 그녀는 응원의 의미로 양손의 엄지를 들어 보인다. 나는 기막혀하면서도 뒤로 걸어가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등에 차가운 유리문이 닿는다. 팔꿈치로 문을 밀어 열며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눈이 커다래진다. 몸을 돌렸다.

그날 밤, 케비넷 앞에서 가졌던 나의 조악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교내에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으나 한밤중의 발광에 가깝던 울음이 비공식적으로 블리스와 나의 관계를 폭로한 셈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서 어떤 동정을 끌어냈는지는 몰라도, 케비넷에 쓰인 말로 내게 욕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쾌한 시선이나 케비넷 안에 욕설이 담긴 쪽지를 남기는 녀석들은 있었지만.

상담실의 건물 옆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카페테리아로 달려갔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기에 안에는 캐셔 밖에 없었다. 포장해놓은 인스턴트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그것을 손에 든 채로 나왔다.

소금과 치즈가 떡칠이 된 이상한 모양의 핫도그는 역시나 맛이 없고 퍽퍽하다. 우유로 목을 축이며 목에 걸려있던 핫도그조각을 겨우 넘겼다. 이렇게 억지로 배를 채운다. 사람이 많은 식당에 가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렇지만 이런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았지만, 그 괴로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품이 가라앉으며 희미해져갔다. 나를 울게 하고 나를 떨게 하던 이 감각의 실체가 고작 이 정도였다니. 나는 매우 담대해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집에, 교회에. 그리고 내 인생에.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문을 통해 언젠가는 알려질 것이었다. 헤스터의 옷 위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아닌, 가슴에 달군 쇠로 새겨 넣은 딤스데일의 주홍글씨처럼 죄의식과 위선으로 더럽혀진 채, 앞으로 나를 평생 따라다닐 꼬리표였다. 결국 내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두려움이 아직 실체가 되어 나타나지 않아서일 뿐이었다.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블리스는 급성중독으로 인한 호흡장애가 오긴 했지만, 고비를 넘기자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치열 교정기를 낀, 붉은색 더벅머리 아론이 교실로 뛰어 들어오며 호외를 전하듯 떠벌린 이야기였다. 돌아온 뒤에 마약 흡입에 대한 추궁이 있긴 하겠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개인적인 의견까지 덧붙이며 아론은 신나게 떠들어댔다.

나는 오전의 수업을 모두 다 빼먹고 책도 없이 오후의 수업에 들어와 있었다. 구석의 창가 자리에서 책상에 엎드려 아론의 얇고 갈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드는 생각이라곤 오직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블리스가 생각보다는 양호하다는 사실이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는데 이용되지 않길 바랐다. 녀석이 다시 얻은 삶이 나의 죄를 구제해줄 수는 없기 때문에.

외출증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교문을 벗어났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리며 메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갑자기 녀석과의 첫 대면에서 녀석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넥타이를 조여 매는 습관이 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신체적 위험과 나의 모습이 답답해 보인다며 긴장을 풀라 했던 녀석의 말들이. 눈앞이 먹먹해져 콧잔등을 찡그렸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공원에는 꽃이 피어있었다. 벚꽃 아래를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걷고 있었다. 4월의 포토맥 공원에서는 아주 흔한 풍경이었다. 나는 그들이 걸어오는 방향과 반대로 자전거를 끌며 걸었다. 벚꽃 아래의 비어있는 벤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공원은 주말이 아님에도 나들이 나온 연인과 관광객으로 북적거렸다. 결국 나는 앉을 빈자리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강변 둑의 스탠드에 다리를 걸치고 앉았다. 넘실거리는 차가운 물이 흔들거리는 발끝을 적셨다. 주변의 작달만한 돌을 집어 물위로 던지자 통통 튀어 오르다 이내 가라앉아버렸다.

마치 또 다른 내가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레인 파슨즈의 시가 떠올랐다. 적절하지 못한 순간의, 적절하지 못한 고백이라 혹평했던 블리스의 고백이.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이해와 조금 더 많은 그대의 시간까지도. 제발 이해하여 주시기를. 그 시의 말처럼 나는 녀석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나. 녀석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나 있을까.

나의 삶 속 어느 곳이든 블리스는 산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내가 유일하게 놓치고 있던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똑똑한 척 굴었으면서 왜 진작 그것만은 깨닫지 못했을까. 주먹으로 눈가의 눈물을 훔쳐냈다. 흐느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이를 꽉 깨물었다. 나에게는 눈물조차 사치였기 때문에.





녀석의 시선은 오직 책에만 집중되어 있다. 몇 번이나 읽어 헤지고 낙장으로 벌어진 손 때 묻은 펄 벅의 대지였다. 책에서 분리된 떨어진 페이지마다 테이프로 붙여 누더기가 되어있었다. 칼릭스가 유독 그 책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어느 샌가 애정을 느끼게 된 책이었다.

“뭘 그렇게 물끄러미 봐.”

칼릭스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시선은 여전이 나를 외면한, 앞을 향한 채였다. 너무 따듯하지도, 또 너무 차갑게 굴지 않으려 거리를 두는 칼릭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냥. 미안해서.”

입고 있던 베스트의 결을 따라 손으로 쓰다듬었다.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옆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조금 웃고 있었으나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 도도독 손가락 끝으로 책의 매끄러운 겉장을 두드리며 녀석은 말했다.

“너희 둘. 내가 몰랐을 거라 생각했다면.”

“…….”

“넌 정말 바보다.”

칼릭스는 입술을 입안으로 말았다 튕기듯 힘을 풀었다. 후우, 녀석이 내쉬는 긴 한숨의 흐름이 눈앞에 그려졌다. 칼릭스는 슬픔에 도취되지도,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을 보이지도 않았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고행의 길을 걷는 수도자의 피가 녀석의 몸 어딘가에 옅게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릎의 책을 다시 펼쳐 읽던 페이지를 찾아 넘기던 녀석이 문득 웃는다. 칼릭스의 웃음은 부질없는 것에 대해 추억하듯 체념의 향기가 짙었다.

우리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붕괴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포진되어 있는가. 한 인간을 바꿔버릴 붕괴와 추락의 고통. 그 붕괴를 겪어온 사람으로서의 체념과 한숨에도 불구하고 칼릭스는 반짝거리며 영롱하게 빛났다. 곁에 칼릭스 같은 사람이 있어준다는 게, 얼마나 많은 힘이 되는지. 버팀목이 되어주는지.

“고마워.”

그 말에 칼릭스는 책에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뚜렷한 결후가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였다. 녀석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말 하지 마. 별로 착한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고마워.”

녀석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깜빡였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어제 밤새도록 생각한 게 있다. 나와 블리스의 차이점에 대해.”

“…….”

“철저하게 절망하거나 아니면 체념하거나. 그게 블리스와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이더라. 나 이렇게 쉽게 물러나는 게 널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냐. 또 자신감이 결여되어서도 아냐. 솔직히 나 매력적이었잖아?”

씨익 입가의 주름이 깊어지도록 웃으며 녀석은 책의 페이지를 촤르륵 몇 십장 넘겼다. 녀석의 말대로 내가 아는 사람 중 칼릭스는 확실히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아주 작은 행동에조차 불가사의한 차분함과 그 이면의 열정이 존재했으니까.

녀석의 입가에 남은 미소가 사라지고 다른 분위기로 변한다. 녀석의 목소리의 톤이 낮아졌다.

“근데… 난 절망하고 싶지 않더라. 체념이 그런 면에서는 편하거든. 그게 너에게는 다행이겠지. 블리스 같은 놈이 두 명이나 더 있다면….”

칼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유의 대화가 지속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 듯 화제를 돌렸다. 책을 덮으며 완전히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음 주 수요일에 시간 되지?”

“응?”

“가브리엘 때문에 조수아가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네. 해링턴 호텔 라운지로 잡았어. 근사하게 할 모양이더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비워두겠다고 했다. 세라와의 면담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미친 사람처럼 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상담 같은 거, 필요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다.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 정도는 해주고 싶은 거겠지.”

녀석은 피식 웃었지만, 희미하게나마 씁쓸함이 베여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슬퍼하는 법이 없는 녀석 나름대로의 서운함의 표현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밀어붙일까. 열정일까 연민일까. 하긴, 이런 고민은 의미가 없지.”

“…….”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칼릭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한참이나 멍하니 맞은편의 붉은색의 도서관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깊어지는 상념을 떨쳐내듯 몸을 떨었다. 칼릭스는 갑자기 쿡쿡 거리며 낮게 웃었다. 나에게로 시선을 돌려 웃음이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가장 비싼 메뉴로만 시켜 먹자고.”

18

가끔씩 버크셔의 교사들은 날씨가 좋은 날 야외수업을 진행하곤 했다. 좁은 책상에서가 아닌,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유복하고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의 수업. 비단 학생뿐만이 아니라 버크셔의 선생들 역시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을 동경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노을이 지는 늦은 오후, 새파랗게 깔린 잔디 위에서 눈이 부신 태양 아래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는 제자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교과서 속의 쓸데없는 지식이 아닌 참다운 인생에 눈 뜨라 역설하는 교사. 그것이야 말로 삶의 지혜의 구현. 카르페 디엠.

나는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기숙사의 뒤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해뒀던 탓에 방 안 구석에 쓰레기봉투의 개수가 늘어나 거치적거렸기 때문이었다. 터벅터벅 먼지가 나는 마른 땅을 걸으며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기숙사의 벽을 따라 땅에서 주먹만 한 돌을 공처럼 차며 앞으로 나갔다. 기숙사의 건물 옆에 걸린 붉은 노을에 부신 눈을 땅에 집중했다. 기숙사의 모퉁이를 돌자 빅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외 수업 중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무언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지휘봉을 들고 오케스트라를 지도하는 지휘자처럼 다양한 표정과 몸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너무 멀어 그의 말을 들을 순 없었지만, 간간히 들리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를 보아 그는 꽤 유쾌한 수업을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그가 힘껏 몸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외치자, 소년과 소녀들의 청명한 웃음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러나 블리스는 웃지 않았다. 노을의 붉은 빛에 반짝거리는 블리스의 얼굴은 진흙으로 빚어놓은 도자기 인형 같다. 만들어질 때 주어진 단 한 가지 표정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인형. 녀석은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시선이 향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만, 그 곳엔 기숙사의 붉은 담벼락 밖에 없다.

이주만의 귀환 이었다. 이주 동안 차갑게 식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복도에 앉아 바라보면서 나는 어떤 환영의 인사도 건넬 수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녀석은 나를 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주머니 속에 양 손을 집어넣고 함께 온 남자들이 밝은 원색의 시트와 가구, 짐을 옮기는 것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엔 새로운 가구를 들여놓는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 같은 건 없었다. 온통 흑백으로 가득 찬 재미없는 풍경을 바라보듯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끝나자, 블리스는 조금 웃으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팁을 지불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웃음은 거짓말처럼 소멸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숨죽여 돌아온 블리스를 관찰하고 살펴보았다. 나의 시선 역시 그 수많은 시선들 중의 일부일 뿐이었다. 어떤 연고도 없는, 관계를 맺은 적 없는 타인처럼 멀어져 있었다.

잔디밭 운동장에 느슨하게 앉아 시선의 긴장을 푼 블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발밑의 돌멩이를 찼다. 가슴 속의 깊은 우울은 사치일 뿐. 앞으로 나아갔다.

기숙사의 뒤편에 있는, 청색의 펜스를 사이에 두고 운동장과 구분되어 있는 공간에서는 옅은 악취가 났다. 기숙사에서 나오는 쓰레기나 수업 중에 생긴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는 곳이었다. 양손에 봉투를 들고 있었기에 어깨로 펜스의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봉투가 잔뜩 쌓여있는 담벼락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레이와 함께 몰래 약을 하거나 담배를 피곤하던 녀석들이었다. 개중에는 파렐도 있었다.

녀석들은 근신 중이었다. 교내에서 마약을 흡입한데다가 마약을 돈 주고 판 일이 발각되어 사주간의 정학을 벌로 받게 된 것이었다. 보통 단순 마약 흡입이 아닌 마약 판매의 경우 발각 시 퇴학까지 고려될 만큼 심각한 문제였지만 교내의 잇단 마약흡입 문제와 시니어로써 졸업을 불과 두 달도 안 남겨놓은 시점이었기에 비교적 가벼운 벌이 내려진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들의 퇴학을 바라고 신고한 것이었기에 단순히 한 달간의 정학으로 그들의 죄가 사면되는 것이 분하기만 했다. 나는 그들의 인생이 처절하게 망가지길, 후회로 일그러지길 바랐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나의 이성을 지배하고 결정했다. 감정을 통제하는 기능이 고장 났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울거나, 하루 종일 화를 내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좋겠지만.

정학으로 인해 수업을 받지 못하는 대신 그 시간에 녀석들은 교내의 곳곳에서 청소를 하거나 외부로 봉사활동을 나가곤 했다. 지금만 해도 그들 중 두 사람이 지난 주 동안 잔뜩 불어난 학생자치구에서 가져온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고 있었다. 시선의 사각으로 녀석들이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무심을 가장한 무표정으로 양손의 쓰레기봉투를 담벼락 아래에 내려놓았다.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두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척 쓰레기봉투를 끌러 집게로 그 안의 내용들을 분리수거했다. 저들 역시 대놓고 나를 욕할 순 없었다. 케비넷에 페인트로 낙서를 한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고 밝혀질 경우 단순한 훈계로 끝나지 것이었다. 약 문제로 정학중인 그들이 여기서 더 일을 벌였다간 단순 정학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저들도 알고 있었다.

아무런 흥미 없이 권태로운 동작으로 봉투 속의 음료수 캔과 병을 분리수거 함에 집어넣었다. 뒤에서 파렐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녀석이 웃기 전, 나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나의 이름은 파렐의 혀 속 조직과 함께 사는 것 같았다. 녀석의 혀가 구역질나는 말을 지껄일 때 그 위에서 맴돈다. 그러나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녀석들이 뭐라 하건 나는 이미 그들과 다른 차원에 살고 있다. 눈물과 분노는 별개여서 그들이 내게서 눈물을 기대한다면 그들이 기대하던 것을 줄 수 없다.

다만 내가 다짐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독한 것을 녀석들에게 돌려주어야 겠다는 그런 허망한 바램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내 인생의 양지에서 그늘로 옮겨져 잊혀질 때까지 곱씹고 곱씹으면서 내 안에 독을 만들어 낼 것이다. 지옥의 아가리를 벌려 녀석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이런 걸 원한이라 하는 거겠지. 심장이 끓는 기분에 집게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분노로 턱이 떨려 이를 질끈 물었다.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자제하지 못할까봐 동작을 빨리했다. 분리수거 할 수 있는 쓰레기를 반 이상 비우고 재활용이 되지 않는 스티로폼이나 비닐 따위를 비우기 위해 땅에 내려두었던 쓰레기봉투를 들고 자리를 옮겼다.

물건들이 분리수거함의 옆에 잔뜩 쌓여있었다. 블리스의 이불과 단색의 단순한 가구들이었다. 녀석의 어머니가 돈을 들여 블리스 방의 모든 가구와 커텐, 침구의 색을 쾌활한 원색으로 바꾸고 나서 버려진 것들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가져가 재활용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떤 끔찍한 추억을 떠올리는 매개체가 될까 그들의 차고 앞에서 이웃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팔 기회조차 포기한 것 같았다.

손 안의 쓰레기와 집게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의 서랍을 슬쩍 열어봤지만 그 안에는 지우개가루나 쓸모없는 메모조각 따위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메모 조각 안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참 TV에서 방영했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만화의 악당 캐릭터였다. 차례차례 쌓아둔 물건들을 뒤척였다. 옅은 갈색의 아름다운 나무 무늬 결이 인상적인 블리스의 옷장도 버려져 있었다. 삼년이나 사용했지만, 새 것 같아 버리기에는 아까운 물건이었기에 시니어가 졸업한 뒤 언젠가는 다시 쓰일 가구들이었다.

옷장의 문을 열었을 때 옷걸이에 걸려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오래 신어서 잔득 헤진 블리스의 흰색 컴버스화가 끈이 풀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허리를 천천히 숙여 새까만 장갑을 주웠다. 짐을 옮기는 동안 잔뜩 짓밟혔는지 다양한 신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자 흙으로 뒤덮여있던 비비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물컹물컹 새어나왔다.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목적이었는지도 잃어버렸다. 시간의 흐름에 구멍이 생긴 것처럼 멍해졌다.

등 뒤의 호들갑스런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요란하게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얼굴을 찌푸리며 비비스가 그려진 장갑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느새 축축하게 땀으로 젖어가는 손을 바지에 비벼 닦았다. 긴 심호흡을 하고 난 뒤, 집게와 쓰레기봉투를 들어 기계적인 빠른 동작으로 분리를 시작했다. 그것들을 모두 비우고 나니 세라와의 약속시간이 삼십분 가까이 남아 있었다. 상담실 앞 복도에서 기다릴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매끄럽고 부드러운 보풀이 일어난 벙어리장갑이 만져졌다. 가슴이 허했다. 어떤 간절한 신호로 느껴졌지만, 그 신호를 무시하는 것 외에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검지와 엄지로 보들 거리는 장갑을 비벼 만지며 뇌를 비운채로 터벅터벅 걸었다.

학생들 사이에 퍼진 말이 교사들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말란 법은 없었다. 세라 역시도 나의 진정한 불안의 원인을 모르는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단순히 대학 문제와 미래의 삶에 대한 걱정이 나의 모든 불안의 원인이었다면, 나는 즉시 그녀의 부드럽고 섬세한, 세련된 방식의 대화에 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원인은 거기에 없었다. 세라조차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복도로 들어서자 마침 세라가 얇은 파일에 담긴 프린트를 들고 상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일찍 왔네.”

“복도에서 기다릴게요.”

“아, 아니야. 같이 들어가자.”

어깨에 손을 얹는 최소의 스킨십으로 친근함을 표시한 그녀는 커피포트에서 머그잔에 커피를 내려 내게로 가져왔다. 상담실의 책상 위에는 알록달록한 무늬의 독특한 모양의 쿠키도 놓여 있었다.

“어제 저녁에 아들이랑 쿠키를 구웠거든.”

공중에 발을 둔 사람처럼 들뜬 목소리였다.

“아, 그 애도 네 또래야.”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지 웃으며 손끝으로 쿠키를 집어, 내게 건넸다.

“먹어봐. 꽤 맛있어.”

“사이가 좋은가 봐요. 그 보통은 이런 거 하기 싫어하거든요.”

중간 크기의 쿠키를 집어 반으로 갈라 입안에 집어넣었다. 민트 맛이 나는 탄산처럼 톡 쏘는 젤리가 들어있었다. 불행히도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 보통 남자애들은 그런가? 마이클은 집에서 이것저것 만드는 걸 좋아해서.”

“홈스쿨러인가봐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는 향이 좋았다. 커피의 종류라고는 헤이즐넛만 아는 나였지만, 손안에 든 커피는 헤이즐넛 특유의 냄새가 아니었다. 고소하면서도 진하고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글쎄. 그렇다고 볼 수는 있지만 마이클은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아이라. 물론, 다닐 수는 있지만 힘들어해서.”

뜨거운 머그를 두 손에 든 채 커피를 홀짝이며 그녀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운증후군이거든. 그래서 보통의 또래들과는 좀 달라.”

세라는 점심에 먹었던 메뉴에 대해 설명하듯 얘기했다. 어떠한 아픔과 슬픔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는 고통이었던 것이 일상으로 받아들여져 그 이면의 소중한 행복을 발견했지만, 그것마저도 일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덤덤했다.

내 당황한 얼굴을 보며 세라는 미소 지었다. 커피에 설탕 한티스푼을 넣고는 저으며 말을 이었다.

“노산이었거든.”

이런 순간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적절한 행동일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 나는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타인이 약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아픔을 보고 자신의 아픔의 크기와 비교해 위안을 얻는 것이 얼마나 비겁한 짓인지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두 번째 쿠키를 집었다.

형광핑크로 삐뚤빼뚤 웃는 얼굴을 그려놓은 쿠키는 혀를 마비시킬 정도로 달았다.

“맛있네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쿠키를 모두 입안에 밀어 넣고는 커피를 들이켰다. 쓴 커피를 마시니 속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맛있다는 말 한 마디에 환해지는 얼굴 위로 환한 조명이 켜진다. 그녀의 머리맡의 조명은 아들에 대한 말 한마디에 조도가 달라진다. 그녀의 삶을 구성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부품이 바로 그녀의 아들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의 삶이 나의 어머니의 삶과 같아보였다.

싱글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홀짝인 그녀는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조이. 오늘은 좀 기분이 어때?”

편안한 분위기의 조성은 이쯤에서 되었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친근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떤

거북한 권위도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말투였다.

“별로에요.”

그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크흠, 거친 소리로 목을 풀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난 이주일 동안 너와 상담을 하면서 곰곰 하게 생각해본 게 있는데. 넌 입을 열 것 같지가 않더라. 그래서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따듯한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는 건 참 힘든 일일거야. 물론, 신을 의지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네 문제는 너 스스로 하나님의 도움을 원치 않을 것 같더구나.”

에둘러 말하며 머뭇거리는 세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느슨하게 허리를 기대고 있던 의자 등받이에 등을 밀착시켜 자세를 고쳤다. 계속 해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게…. 데빗 선생이 말해줬어. 단순한 추측일 수도 있지만, 네가 무단결석과 외출을 하고 한밤중에 위험하게 강가에서 수영을 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적든 많던 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에게 블리스라는 존재가.”

세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너무 느리지도 조급하지도 않은 빠르기였다. 높은 허공에 매달린 줄을 타는 사람처럼 묘하게 불안하면서도 안정적이라 나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블리스라는 이름이 내게 어떤 떨림을 선사했다. 아프고 또 아팠다.

“두 사람 간에… 어떤 감정이 있었니?”

세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안에 든 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말간 커피 위에 옅은 거품이 허리케인의 눈처럼 퍼져있었다. 후, 바람을 불자 산산이 흩어졌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예.”

그녀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미소와 연민 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숨길 수 없었다는 듯이. 그 눈을 보며 덧붙였다.

“아니.”

“…….”

“잘 모르겠어요.”

온 몸이 붕 떴다. 열기구에 타면 꼭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지금은 아니거든요.”

“…….”

“…….”

“그럼 너는 지금 블리스를 어떻게 생각하니.”

눈을 깜빡이며 반쯤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앞에 놓인 형광녹색의 딱딱하게 굳은 설탕크림이 잔뜩 발려있는 쿠키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눈물까지 찔금 나올 정도로 달았다. 서둘러 커피를 마셔 혀끝의 단 맛을 없애버렸다.

한숨이 나왔다.

“블리스요?”

“응. 모든 제약과 구속을 떠나서 네 순수한 마음 말이야.”

이것이 만약 그녀의 상담가로서의 긴 이력에 의해 얻어진 연기력이라면 나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낄 것 같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는 성난 폭도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어있는 잔을 그녀 쪽으로 밀며 말했다.

“요즘엔 그냥 블…리스를 생각하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고 머리가 멍해져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좋아하니.”

“글쎄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심장이 아픈 느낌 있잖아요. 감정이 어떤 순간을 벗어나면 좋아하는 사람을 봐도 단순히 행복하지가 않잖아요. 막 고통스러워지고. 그냥, 그래요. 그거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눈물이 나와서가 아니었다. 후우우,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선생님이 봐도. 남자끼리 그런 건 좀 이상하죠?”

“…그 문제는 나도 어렵기만 하다. 내가 그랬다면 더 버티지 못 했을 거야. 단지,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너는 그 감정들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지?”

“예.”

“무서웠고?”

“네.”

“어떤 면에서?”

“그냥. 모든 것이 다.”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았다.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려 무릎에 올려놓았던 다른 손의 손등을 덮었다. 깍지를 껴 만지작거리다 구겨진 바지를 엄지손가락으로 밀었다. 세라는 그 말에 얼굴이 굳었다.

“그런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구나.”

대답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의 눈빛이 연민으로 깊어졌다. 나의 숨은 조금씩 후회와 고통으로 꽉 잠겨갔다. 애써 버텨왔던 이성이 무너질까 빠르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는 도망가고 싶지 않아요. 숨어있는 상태가 더 괴롭다는 걸 느꼈거든요.”

아무리 손으로 밀어 봐도 펴지지 않는 구겨진 바지를 손가락 안에서 비틀어버렸다. 성급하게 흥분하는 가슴을 억누르며 속삭였다.

“블리스가 보고 싶어요.”





땅은 젖어있었다. 지는 해와 떠오르는 달이 동시에 하늘을 점령한 저녁 무렵, 잔디의 곳곳을 적시는 스프링클러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축축하고 푹신한 잔디가 발밑에 닿는다. 그러나 꽁꽁 얼어붙은 땅을 걷는 기분이었다. 자전거 핸들에 걸쳐놓은 슬리퍼를 신고 자전거를 탔다. 봄 치고는 추운 탓에 긴 팔 티 위에 얇은 저지를 입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핸들을 놓은 손을 코로 가져갔다. 손목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샤워를 한 뒤 딸기향의 샤워코롱을 몸에 뿌린 탓이었다.

블리스는 가끔 저녁 이후 학교 중앙의 소규모 극장 뒤편의 돌담에 앉아있고는 했다. 시니어가 되면서 친해진 녀석들을 비롯하여, 조쉬와 함께 공부와 과제에 지친 머리를 식힐 겸 찾는 곳이었다. 어제 저녁에도 이곳을 지나다 조쉬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거의 말이 없었다. 조쉬는 블리스에게 추궁도, 설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언뜻 평온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더 이상의 열정도 위험도 없는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풍경. 나는 그들의 뒤편 대각선을 지나고 있었기에 내가 요란한 소리로 신경을 끌기 전에는 녀석들이 나를 돌아보는 일은 없을 터였다. 지금의 나는 어제와 같이 지나가다 뒤통수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중이었다.

이번 일로 블리스에게 내려진 학교 측의 처벌은 한 달 동안 근신하는 것이었다. 블리스는 마약의 출처를 길거리의 어린 흑인 소년에게서 샀다고 밝혔다. 처음으로 하는 것이라 양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고 둘러댔지만 결국 블리스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판단, 방과 후 일주일에 학교에서 지정한 정신과 전문의와의 면담을 갖게 되었다.

블리스가 거짓말을 한 건, 아마도 나를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 것이다. 단순히 둘러대는 것이, 사건을 축소시키고 나와 얽히지 않는 가장 편한 방법이었을 테니까.

자전거에서 내려 양손으로 끌며 소극장의 모퉁이를 돌았다.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블리스는 단풍나무 밑 돌담에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로 돌담 위에 긴 몸을 누인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혼자였다.

발밑의 잔디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다가갔다. 녀석의 몸 옆으로 남아있는 돌담에 엉덩이를 걸치며 앉았다.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게 된 건 이주만의 일이었다. 겨우 함께 남을 수 있게 되었지만, 녀석이 원치 않을 거란 생각에 선뜻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등 뒤에서는 아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어폰을 꼽은 귀와 감은 눈 때문에 내가 와 있는 것을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리를 돌려 뒤를 봤을 때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블리스의 얼굴 그 어디에도 의외라는 표정은 없었다.

“…….”

한 참이나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영원 속에 갇힌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손끝으로 전기가 올라 주먹을 쥐었다.

“블리스.”

녀석의 이름이가 혀끝에 작게 맴돌았다. 녀석은 많이 야위어 있었다. 이주간의 긴 시간 동안에 절망을 곱씹고 곱씹으며 야위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블리스는 평안해 보였다. 고통의 정점을 맛보았으니 이제 내려오는 일만이 남았으므로. 팔을 머리에 괸 채로 말없이 유리알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주변의 어둠에 함께 색이 짙어지는 파란 눈동자를 들여다보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하고 있었어?”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녀석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 블리스의 눈이 한참 만에 깜박였다.

“불어 공부해.”

“…….”

“프랑스 남자나 꼬셔볼까 하고.”

농담을 하듯 경박한 투도, 비난하는 경멸의 어조도 아니었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며 녀석은 몸을 일으켰다. 등 뒤로 손을 뻗어 느슨하게 허리를 세웠다.

“왜 왔어.”

“그냥.”

그 말에 녀석은 약간 웃었다. 내 말이 재밌는 농담이라도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나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깨물었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여전히 비비스가 그려진 벙어리장갑이 들어있는 채였다.

“…미안해.”

녀석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은 황폐한 사막의 바람에 실려 온 모래알갱이처럼 건조하기만 했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넌 이제 네가 원하던 것들을 손에서 놓지 않게 되었고 난.”

“…….”

“이제야 널 무시할 수 있게 됐는데.”

비꼬는 말과 달리 말투는 더 없이 진지했다. 어둠에 짙어진 금발머리는 귀를 덮을 정도로 길어져 있었다. 블리스의 모습을 본 뜬 밀랍인형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예전의 블리스처럼 농담을 섞어 나를 웃겨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어떠한 시도도 녀석을 뚫지 못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환청처럼 누군가 나의 자만을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일 조쉬한테 들었어. 고맙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쓰게 웃었다. 그 날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물어가는 상처에 또 다른 상처가 새겨진다. 외로움에 던져져 있던 시간, 녀석은 약에 취해 숨을 헐떡이면서 어떤 환상을 보았을까. 어떤 고통가운데 있으면 이렇게 변해버리는 걸까. 나의 침묵에 녀석이 쓰게 웃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켰다.

“더 할 말 없는 것 같은데, 간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는 녀석의 허리를 안았다. 야윈 허리를 덮은 교복의 품이 헐렁했다. 그 차갑고 서늘한 옷깃에 얼굴을 부비며 꽈악 껴안았다.

녀석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를 악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에 파인 척추골 사이에 코를 묻고는 녀석의 체향을 들이 쉬었다. 체온이 이렇게 간절할 수가 있다니, 온 몸의 모든 면이 녀석에게 모두 닿도록 힘주어 껴안았다. 너무 미안하고 괴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허릴 감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러지마.”

“미안해.”

울음 섞인 목소리가 이상했다. 너무도 이상해서 내 목소리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미안해, 잘못했어.”

눈물로 면죄부를 삼는 비겁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떨림으로 얇아지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정말 너무 미안해. 절박한 목소리에 팽팽하게 긴장해있던 녀석의 몸이 허물어졌다. 녀석이 공허하게 웃었다.

“조이.”

“…….”

“미안해 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녀석의 따듯하고 건조한 손이 손목을 부드럽게 쓸었다. 손가락으로 깍지를 낀 사이에 손을 밀어 넣어 나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내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한건. 그 말을 하는 너를 찢어 죽이고 싶었는데도 방안으로 들어오니까 또 보고 싶어지는 내가 병신 같아서, 그래서 벌을 주었던 거야.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 마.”

팔을 끌러내기 위해 블리스는 마주 닿은 손에 힘을 주었다. 녀석의 몸에 닿는 면적이 줄어드는 안타까움에 미친 사람처럼 속삭였다.

“사랑해.”

숨을 들이쉬던 그대로 멈춰버렸다. 한 겨울 눈보라에 밀려온 바람에 얼어버린 것처럼 정지했다. 녀석은 어떤 공포를 느낀 것 같았다. 오그라드는 녀석의 손과 나의 손이 최대한 닿을 수 있도록 깍지를 깊게 했다. 한참만에야 녀석의 폐 속에 맺혔던 공기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사랑한다고.”

뜨거운 숨이 녀석의 얇은 옷에 반사되어 나의 얼굴로 돌아왔다. 온 몸이 뜨거운 물속에 빠진 것처럼 더웠다. 억눌린 신음 섞인 고백에 녀석의 몸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흐으으, 신음 소리가 들렸다. 거칠어지는 숨을 참으려 숨을 띄엄띄엄 쉬었다. 나의 말이 기폭제가 되어 녀석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화학변화처럼 침착했던 본질이 바뀌어버렸다. 녀석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절박하게.

“그거 알아?”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잔뜩 억눌려 있었다.

“넌 여태 내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단 걸.”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비겁했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블리스의 말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악을 쓰듯 힘을 주던 손끝에 힘이 풀려 마주 닿았던 손안에 공간이 생겼다. 블리스의 덜덜 떨리는 손이 마치 더러운 오물을 털어내듯 깍지 낀 손을 빼냈다. 다리를 움직여 등에 닿아있던 나의 몸에서 멀어졌다.

“그랬던 네가, 이제 와서 어쭙잖은 동정으로 이러는 거 진심이던 아니던 필요 없어. 아니, 이젠 싫다.”

저만치 앞으로 걸어간 녀석의 어깨가 떨렸다. 쌔액쌔액 거친 숨소리에 섞여 희한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선 녀석의 얼굴은 온통 울고 있었다.

“너 때문에 울기 싫어.”

“…….”

“이젠 더 이상. 울기 싫어.”

나무토막처럼 굳은 나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그 힘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어 나는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블리스는 쓰러진 나를 보면서 실실 웃었다. 왈칵 솟아나는 울음을 참으며 우스워 죽겠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젠 안속아.”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주먹으로 닦아내며 녀석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나에게서 자취를 감추듯 끝 간 데 없는 암흑에 휩싸인 어두운 운동장으로 사라져버렸다.





*





한 번의 시도로 기대했던 행복을 맛볼 수 없다 해서 그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그 희망의 끝에 매달려 해빙의 미세하고 느린 변화를 인내하는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복잡하게 생각할수록 깊어만 지는 고민에 나는 단순해지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나의 권리와 행복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행복해지는 건 죄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나의 이기심으로 절망했던 만큼 내가 아닌 블리스를 위하는 방식으로 다가서는 나를 상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고민마저도 자만에서 비롯된 허황된 꿈일지 모른다. 블리스는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희망을 품은 가슴을 거부할 수도 있다. 관계의 회복이 그저 나의 바램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면, 정말로 내가 싫어진 거라면…. 그런 생각을 하자 속이 허물어졌다.

차가운 철제 캐비닛에 이마를 기대며 속을 진정시켰다. 서늘하게 닿는 매끄러운 철제의 촉감이 복잡해지던 머리를 식혀주었다. 후우,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캐비닛은 얼룩으로 지저분했다. 붉은 색의 글씨와 핑크색의 핑크트라이앵글이 그려졌던 캐비닛을 아세톤으로 문질러 지웠기에 남겨진 글자는 없었다. 그러나 본래의 아이보리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던 부분까지 지워져 얼룩덜룩 흉하기만 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캐비닛에서 책을 꺼냈다. 머뭇거리고 있다간 수업에 늦을 것이었다.

이주만의 수업이었다. 미국사 수업시간에는 결석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지난 방황으로 인해 그 기록이 깨어졌다. 나를 바라보는 선생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것이 나에 관한 소문을 들어서인지, 무단으로 결석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업을 듣는 눈동자들의 총명함은 나날이 흐려졌다. 4월 이후 대학합격 발표가 일단락되자, 고등학교 시절동안 품었던 가장 큰 목표중의 하나가 끝나 긴장이 풀어진 것이다. 이전보다 늘어지는 수업태도에 선생들 역시 터치하지는 않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꼭 강조하곤 했다. 버크셔의 전통과도 같은 졸업논문으로, 원하는 과목의 기말 시험을 대체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주제는 자유, 졸업 앨범과 함께 시니어의 논문을 실은 책을 따로 나눠주기 때문에 졸업 뒤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었다. 중간과정 중에 담당 교사에게 끊임없이 지도를 받아야 했기에 나태해질 수도 없었다.

졸업프로젝트 제출 기간까지 불과 삼주일도 남지 않았다며 그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했다. 불성실한 논문의 경우 가차 없이 낮은 점수를 주는데 이것이 대학 합격 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합격자 중 다른 대학으로 지원하는 학생들 때문에 대학 당국에서는 정원보다 훨씬 더 많은 합격자를 뽑는데, 예상보다 더 많은 학생이 입학지원을 할 경우 신입생 정원수에 맞춰 남는 학생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덧붙인 그녀의 얘기는 관심을 끌었다. 실제로 대학에 예치금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남학생에게 오늘 아침 합격번복 통지서가 날아왔다는 것이었다. 예정보다 지원자가 많아 학생들을 걸러내던 중 2학기 성적의 부실함과 마약문제로 인한 정학을 문제 삼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에 갑자기 반 안이 추측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이번 학기에 마약 문제로 정학을 받은 학생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추측의 거리가 좁혀지자 여러 명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익명이긴 했지만, 내가 신고한 녀석들이었다.

막연한 기쁨 보다는 씁쓸함이 컸다. 내가 괴로우면 녀석들도 괴로워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꿈꿔왔을 대학에 떨어졌다는 얘길 들으니 그들의 상실감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턱을 손바닥에 기대며 녀석이 느낄 기분에 대해 상상했다. 다른 대학을 갈 기회는 있겠지만, 최선의 기회라 여겼던 대학에 합격의 통보를 받았다 취소된 것은 견딜 수 없는 수치를 안겨줄 것이었다.

쓸데없이 넥타이 끝을 만지작거렸다. 쓴 웃음이 나왔다.





도서관의 컴퓨터실에서 대학의 기숙사 입주 마감일과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학교생활에 대한 사항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새벽 2~3시까지 공부 하는 건 기본이고 A학점은 15%만 주며, 학생 간에 경쟁이 치열해 스터디 그룹이 거의 결성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먼 훗날의 일처럼 느껴져 재학생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고생담은 나의 기분을 고양시킬 뿐이었다.

변화라면 변화라 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부터 나를 끌어가는 어떤 힘이 있었다. 녀석이 나를 거부하긴 했지만, 몇 주간 쓰레기처럼 굴었던 나의 삶을 다시 재구성하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 힘 때문인지 나 자신을 너무 극단으로 몰고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엄격한 잣대로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 블리스에게 상처를 주었던 행동에 대한 위선이라 여겨졌다. 나를 고양시킨 그 감각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뜨거운 열로 충만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블리스의 말대로 더 이상 나 때문에 눈물을 보이지 않게,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블리스가 나에게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겠다. 그것으로 태산같이 쌓였던 분노가 티끌만큼이라도 사라질 수 있다면. 녀석의 나를 돌아보는 눈이 마치 타인을 보는 듯 무심하더라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고양된 느낌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상상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없었다.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커리큘럼을 꼼꼼히 보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연락이 안 된다는 불편함에 엄마가 필요 없다는 나의 거절에도 사 온 핸드폰이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 이번 주에는 꼭 오길 바란다. 지난주에 보지 못해 섭섭했다.

핸드폰을 바꾼 지 얼마 안 되어 번호 주인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문자의 말미에는 -가브리엘 이라는 글자가 덧붙여져 있었다. 서신을 보내는 것도 아닌데 딱딱하기 그지없는 그의 문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 꼭 갈게요. 지난주에는 일이 있었어요.

답장을 보내고 나서 한참 뒤에 문자가 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무슨 일?

-말하자면 길어요. 만나서 얘기해요 :)

그에게 답장을 보내며 웃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투명하고 두꺼운 강화유리로 구분되어 있는 컴퓨터실 밖 도서관에 누군가 목석처럼 서있는 것이 보였다. 손에 프린트 된 종이를 들고 있는 블리스였다. 주머니에서 문자가 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엉거주춤 일어선 채로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굳은 얼굴로 책이 잔뜩 꽂혀있는 진열대 사이로 들어갔다. 손에 들고 있는 프린트와 진열대의 책들을 대조해가며 몇 권의 책을 골랐다. 제목과 내용을 훑고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하며 도서관의 미로 같은 장서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마침내 맘에 드는 책을 찾았는지 프린트를 책 사이에 끼워 넣으며 기다란 진열대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녀석이 사라진 복도로 걸어 나갔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톡톡 손가락으로 진열대의 책들을 건들이며 녀석이 사라졌던 모퉁이를 돌았다.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바닥에 앉아 책을 보는 후배들뿐이었다. 또 한 번의 모퉁이를 돌자 비상구가 보였다. 비상구로 빠르게 걸어가 난간에 몸을 기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책을 한 손에 들고 계단으로 내려가는 블리스가 보였다. 녀석은 난간을 짚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블리스.”

비상계단에 온통 녀석의 이름이 메아리쳐 울렸다. 못 들었을 리 없을 텐데도 녀석은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언사이드!”

그 말에 녀석의 몸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계단 위의 나를 올려다보거나 하지 않았다. 녀석은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라가는데도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다. 자신에게 어떤 감정적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녀석의 앞으로 뛰어가 녀석을 마주한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뒤로 넘어질까 난간을 잡으며 녀석을 올려다봤다.

“멈춰 봐.”

두 손을 들어 녀석을 막았다. 블리스는 가슴과 어깨 사이에 올려진 내 손을 흘끗 바라봤지만 손을 들어 치워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너무도 냉랭했다. 녀석 안에 어떤 결벽성이 발현하여 사소한 스침만으로도 불쾌함과 적의를 느끼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손을 내려놓자, 녀석의 시선이 나의 가슴 언저리로 내려갔다.

“무슨 일인데.”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순식간에 전의가 사라짐을 느꼈다. 너무나도 냉랭한 반응에 뛰어오며 생각했던 말들이 차마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

녀석은 덤덤하게 나를 내려다봤다. 이 눈빛은 거부가 아닌 시험일뿐이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녀석이 나를 인정하느냐가 결정된다. 마치 주문처럼 끊임없이 되뇌었다. 망상이라 할지라도 그 외에는 나에게 용기를 주는 말이 없었다. 다시 내쳐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어 녀석을 잡았다.

“있잖아 블리스.”

손목의 옷깃을 잡아 그 안의 여린 살이 느껴지도록 손을 집어넣어 팔목을 잡았다.

“…….”

하지만, 좀 전에 나를 이끌던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내 뱉는 숨이 떨리기만 했다. 이런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진심이 보이도록 당당하고 싶었는데 자꾸만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단단한 녀석의 팔목을 꽉 움켜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한, 한번만 더 속아줘.”

잡고 있는 녀석의 양 팔목을 천천히 내게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녀석의 팔만이 내 힘에 움직였을 뿐 녀석의 몸은 내게로 당겨지지 않았다.

“한번만 더 믿어줘.”

내 말에 숨겨진 어떤 필사적인 후회를 이해하여 주었으면, 받아주었으면. 녀석이 깊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기회를 줘.”

한참 만에 부푼 가슴이 내려앉았다.

“한 번만 더 속아줘.”

“…….”

“제발….”

“…….”

한참이 지나도록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녀석의 침묵이 증명했다. 우리 관계에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고. 다시 이어질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은 나의 오만이었다고. 이를 꽉 깨물었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녀석은 더 이상 진지한 사랑놀이를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진심을 보여주려 하는데 녀석은 듣는 귀조차 닫아버리려 한다.

개자식.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욕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블리스 제발.”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믿어줘. 미친놈아 좀 믿어봐. 제바알. 발악 같은 외침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매달릴 수가 없었다. 긴장으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참아내는 날 알기라도 하듯 녀석의 손이 어깨에 올려졌다. 그 접촉에 반짝이는 기대를 갖는 것도 잠시, 녀석이 속삭였다.

“애쓰지 마.”

관자놀이에 서늘한 총구를 가져다댄다면 꼭 이런 기분일까.

“이제 그만해도 돼.”

녀석은 끝까지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마치 탄환이 발사되기 직전의 온 신경을 오그라들게 하는, 기기긱 거리는 마찰음 같았다. 말 한마디로 방아쇠를 당겨 모든 희망을 사살시켜버리는 것이다. 마치, 내가 블리스에게 그랬듯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리 없이 혀를 달싹여 녀석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자존심의 상처로 인한 떨림이 아니었다. 다음에 한 번 더 용기를 내면 되니까. 하지만 녀석이 계속해서 나를 거부한다면, 나는 자신이 없었다.

정말로 내가 싫어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겨워져서 이렇게 매달리는 내가 싫어져서.

그런 생각을 하자 안에서부터 허물어졌다. 핑, 백열등의 필라멘트가 끊어지는 소리가 귀 옆에서 들렸다. 뇌 속 신경의 한 부분이 끊어진 것 같았다.

“…….”

한참을 멍하니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블리스의 눈은 나를 마주보지만, 나를 지나쳐 내 등 뒤의 벽을 바라보는 것 같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무심한 파란 눈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

“…….”

“이젠 나 사랑 안 해?”

하다하다 이런 짓까지. 녀석의 눈엔 내가 얼마나 추하게 보일까. 나조차도 어이없는데 녀석은 오죽할까. 기막힌 웃음이 실실 비어져 나왔다. 차라리 묻지 말 것을, 그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미 뱉어낸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어 웃음 섞인 희한한 한숨소리가 내 입에서 갈라져 나왔다. 아니라고 말 좀 해봐. 입 안에서 그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지만 차마 다그칠 수가 없었다.

블리스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녀석은 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블리스의 피곤으로 갈라진 입술이 달싹였지만, 어떤 말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어깨에 올렸던 손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토록 차분할 수가 있는 거지. 힘이 빠진 나의 몸을 아래로 밀어내며 녀석은 한 발짝 계단 위로 물러섰다.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을 모른 척 블리스의 눈이 나를 피했다. 온몸 피가 얼굴로 솟아 구멍을 찾아 새어나오는 느낌이었다. 녀석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내 옆으로 계단 밑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어깨를 스치지도 않았다.

텅 빈 비상구 계단 안에는 나의 거친 숨소리와 녀석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블리스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다리에 힘이 빠져 무너지듯 난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다. 이 걷잡을 수 없는 고통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르겠다.

용서를 필요치 않는 사람에게 타인의 참회만큼 거추장스럽고 추한 것이 있을까. 녀석은 나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자만이 얼마나 추한 모습이었는지, 또 녀석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미 방주의 문은 닫히고 하늘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는데.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서, 나의 어리석음을 자학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서 눈물이 흘렀다. 또 다시 녀석을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계단 아래를 보았을 때 녀석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리석은 기대로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눈물이 가득 찬 눈 때문에 녀석이 어떤 표정으로 나를 보는지 알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아 맺힌 눈물을 떨어트렸다. 내 모습이 추할까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러나 이미, 녀석이 서 있던 자취는 맺혀있던 눈물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물집이 나지 않은 쪽으로 미지근하게 식은 음식을 천천히 씹어 넘겼다. 왼쪽 어금니 주변으로 난 입안의 물집은 건들이기만 해도 따끔거리며 아팠다. 입 주변에 난 수포에 입을 벌리는 것도 쉽지 않아, 녀석들이 음식을 거의 비우는 사이 나는 반도 먹지 못했다. 우리 중 가장 천천히 먹는 루시 보다도 느린 속도였다.

“밥 먹고 비타민 좀 물고 있을래? 방에 있는데 가져다줄게.”

샐러드를 찍은 포크를 손에 든 채로 루시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절대 살가운 성격이 아닌데, 근래의 내가 얼마나 불쌍해보였는지 타인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성격인 루시마저 연민을 보였다. 샐러드를 입안에 넣어 씹자 와삭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다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어. 약 있어.”

“근데, 물집에 수포까지 났는데 어떻게 그 매운 걸 먹어. 스프라도 좀 많이 떠오지.”

루시는 핀잔하듯 칠리소스에 버무려진 닭가슴 살을 가리켰다. 내 기준에서 이건 매운 축에도 못 낀다고 받아치려다 그냥 웃어 넘겼다. 말을 한다는 것이, 다른 것에 신경을 소모한다는 것이 한없이 피곤하기만 했다.

칼릭스가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여태 나의 맞은 편 대각선에 앉아 묵묵히 음식만을 먹던 녀석이었다. 퉁퉁 부운 눈이 민망해 고개조차 들지 않는 나였지만, 가끔 고개를 들어 칼릭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녀석은 여전히 음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눈앞의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자신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는 듯이, 녀석이 좋아하는 메뉴도 아닌데.

“이거라도 먹을래?”

깨작거리며 음식을 먹던 나에게 내민 것은 한 번도 건드리지 않은, 접시에 가득 차있는 스프였다.

“내 것도 아직 남았어.”

녀석을 향해 반 정도 남아있는 스프를 기울여 보여주었다. 내 힘 빠진 목소리에 녀석은 왼 손으로 오른 쪽 팔뚝을 감싸 안았다.

“다이어트 적당히 해. 루시가 질투하잖아.”

맞은편에 앉아있던 루시가 칼릭스를 흘겨봤다.

“왜 날 물고 늘어져!”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칼릭스는 스푼으로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뭐야. 너 내 동생 무시 하냐?”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케빈이 험악하게 입을 열었다. 전에 없이 동생을 감싸는 행동에 루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케빈은 그녀의 의심에 불이 붙은 듯 테이브를 강하게 손으로 치며 말했다.

“지금은 루시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먼 훗날 현대과학의 힘을 빌리게 되면 칼릭스 너 후회하게 될 걸! 내가 왜 루시를 무시했을까! 내가 왜!”

“너 죽는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루시는 케빈의 목에 손을 걸어 잡아당겼다. 먼저 불을 질러놨으면서 두 사람간의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녀석은 손 안의 스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루시도 그녀의 남자친구도 케빈도 모두 접시가 비워져있던 터라 나 역시도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왜, 더 먹지 그래.”

케빈을 구박하면서도 나의 행동을 신경 쓰고 있었던지 루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입맛 없어서. 배고프면 냉장고 뒤지면 돼.”

고개를 흔들며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을 남겨 잔뜩 잔소리를 들었지만, 넘어가지도 않는 걸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의 뒤를 따라오던 칼릭스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오늘도 상담 있어?”

“아니 내일이야.”

“내일? 내일은 같이 저녁 먹으러 가는 거 아니었나?”

“응. 그래서 상담은 목요일로 미뤘다.”

그 말에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여기저기 나를 돌아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주 전에 비해서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내가 그들의 저속한 호기심의 대상에서 멀어지려면 한참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왜 앞만 봐. 사람 눈을 마주쳐야지.”

군인처럼 뻣뻣하게 앞만 보며 걷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녀석이 고개를 숙여 내 앞으로 내밀었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 한 입술에 걸음을 멈추었다. 불과 반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느껴지는 칼릭스의 숨결에 불편함을 느껴 고개를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좀. 눈 부운게 이상하잖아.”

“…….”

“좀… 많이 웃기지?”

내 어색한 반응에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답 없는 녀석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내가 좀 요즘 상태가 안 좋잖아.”

“…….”

“여기 있지 말고 가자.”

가만히 서 있는 녀석의 팔을 잡아끌며 앞으로 걸어갔다. 여학생들의 기숙사가 있는 서관이었던 탓에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의 수가 많았다. 많은 남학생들도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하지만, 게이로 유명해진 소년이 체감하는 관심은 여느 소년들이 받는 관심과는 달랐다. 쓰고 아프게 닿는 시선에 움츠러드는 건 내가 작게 느껴져서가 아니었다. 그 시선이 기이한 괴물을 보는듯한 가슴을 후벼 파는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유독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소녀가 있었는데 작년에 스페인어 클럽의 회계를 맡았던 라이언의 여자 친구였다. 식사를 하는 중간 중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때마다 그녀는 눈앞의 라이언에게 무언가를 얘기하곤 했다. 라이언은 이번 학기의 성적 하락과 정학문제로 인해 대학으로부터 합격번복 통지서를 받은 녀석이었다.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 UC계열의 대학을 지원했던 것인데 이번 일로 인해 사립대를 가게 되면서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자신의 도를 넘은 장난과 나의 복수에 의해 희생을 당한 것이었다.

그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 녀석의 여자 친구가 나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괴물을 보는 듯 한 과장된 표정이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시선이었겠지만, 그들에게 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의 눈이 온통 충혈 되어 있었다. 눈물로 인한 것이었지만, 나와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나에 대한 실망으로, 녀석은 누군가에 대한 증오로 인한 것이었다.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입구로 걸어가는 시간이 무저갱 속에서 하늘의 천국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느리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사감이 돌아간 뒤 조용해진 기숙사 내에서 주머니 속에 숨겨놓았던 마약을 파는 것이 녀석들에겐 흔한 일이었으므로 어떠한 긴장감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늘 별다른 의심이나 조심 없이 공공연하게 약을 팔았다. 그래서 그 날 역시 누군가가 신고를 한다고 상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익명의 신고자이긴 했지만, 언제까지 그 익명이 지켜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녀석들이 약을 팔던 로비라운지에서 그 시간, 밖으로 나간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으니까.

고개를 돌려버렸다. 녀석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너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 인생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니까.

카페테리아의 입구로 빠져나오자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라이언의 분노로 내내 나를 붙잡고 있던 깊은 우울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곧 씁쓸함이 밀려왔다. 타인의 추락으로 나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였구나.”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고 있던 녀석이 뒤를 돌아봤다.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쓰게 웃었다.

“네가 괜히 했을 리는 없고….”

흐음, 녀석은 가늠하는듯한 한숨을 쉬며 나를 바라봤다. 괜히 심통 난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거렸다. 녀석이 웃었다. 주변은 어느새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마주 본 채 뒤로 걸으며 녀석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게… 그 자식들이었구나.”

“…….”

“뭐, 잘 했어.”

하늘을 바라보며 걷던 녀석은 작은 돌부리에 걸려 몸이 휘청였다. 재빨리 균형을 잡으며 고개를 숙인 녀석은 두 팔을 높이 들어 기지개를 켰다. 성큼성큼 걸었다. 속도를 내 걷는 녀석을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자전거를 두고 왔기에 칼릭스의 자전거 뒤에 앉아 서관의 클럽으로 달려갔다. 음악 감상클럽의 회원인 녀석은 가끔씩 클럽에 들려 진열대에 잔뜩 쌓아둔 CD 중 하나를 골라 귀가 얼얼해지도록 스피커를 틀어놓고 노래를 듣곤 했다. 며칠 전 인터넷으로 구매한 밴드의 CD를 두고 왔는데 카페테리아에 들린 겸 음반을 찾으러 가까운 학생 자치구에 가는 길이었다.

“자전거 수리는 맡겼어?”

“아직.”

“쓸 일 있으면 내 자전거 써.”

“고마워.”

누군가 악의적으로 내 자전거의 볼트를 빼놓은 탓에 앞바퀴가 자전거에서 이탈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아웃팅을 상태에서 악의적인 장난을 각오했다 하더라도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익명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외로운 전쟁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시선에 나는 끊임없이 추락하는 존재일 것이다. 실제로도 끝도 없이 추락하고는 있지만.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자전거의 위태로움이 좋았다. 칼릭스의 허리를 감싸 자전거 뒷자리에 앉는 대신 나는 녀석의 등을 나의 등과 맞대고 앉았다. 앞을 보고 달렸다면 볼 수 없을 멀어지는 건물들의 풍경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바람에 쓸려 얼굴 앞으로 휘날렸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으로 휘둘리는 인생을 살아왔다. 작고 안전한 부분만을 꺼내어 살며 인생의 변화를 거부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가브리엘이 내게 얘기했던 얘기들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졌던 것들이었지만 받아들이자 안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해졌다. 인간이 인내할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란 없다. 견딜 수 없게 느껴질 뿐이지. 지금의 고통도 견디다보면 언젠가는 지나가버릴 것이다. 덧없이 사라지는 봄날의 백일몽처럼.

하지만 블리스를 견디다보면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고통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녀석은 덧없는 봄날의 꿈이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독이 되더라도, 기꺼이 잔을 비우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다시 행복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이 소진되어 절망의 끝에 죽어가던 사막의 여행자의 입술에 닿은 차가운 물방울만큼이나 기쁠까. 모든 것을 불 태웠으니, 다시 채워가는 일만 남았으므로 그 가슴에 새로운 열정이 싹틀까. 그 새로운 시작이 얼마나 기쁠까.

가슴이 저려와 의자 뒤편의 작은 고리를 잡고 있던 손 중 하나를 떼어 심장을 짓눌렀다.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은 독일뿐이다. 정신병자가 환상을 보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또 다시 희망을 가져야 할까.

지친 몸을 칼릭스의 등에 기대었다. 자전거의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힘들면 기대.”

“기댔잖아.”

“몸 말고 네 마음.”

녀석의 말에 후, 웃음이 나왔다. 뒤통수에 녀석의 목덜미가 닿았다. 가슴을 누르던 손을 떼어 하늘에 뻗었다. 이른 저녁임에도 남색의 하늘에서는 밝은 별이 반짝였다. 도시를 밝히는 하늘의 기묘하리만치 밝은 빛은 분명 인공위성일 테지만. 그 빛을 손가락 사이에 걸쳐 올려다보며 말했다.

“더위 잘 참아?”

“응? 그건 갑자기 왜?”

“너 가려는 대학이 텍사스에 있잖아.”

“아… 더운 거 쥐약이야. 늘어지잖아.”

“더운데서 고생하겠네.”

대답대신 녀석은 피식 웃었다.

“나중에 놀러가도 돼?”

“방학 때도 거기 있을 거니까 놀러와.”

“근데, 이렇게 매일 붙어 다니다가 떨어지면 이상할 것 같아.”

“그래도 금방 익숙해질걸.”

한숨과 함께 녀석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남이란 원래 다 그래.”

녀석의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의 침묵에 녀석이 낮게 웃었다.

“뭐, 넌 예외로 해줄게.”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졸업 뒤에 멀리 떨어져 지내다 결국에는 서로를 잊고 마는 한 철 나는 잡초 같은 관계로 남고 싶지 않았다. 먼 훗날 과거를 회상하며 우리 사이에 무엇이 있기나 했을까, 그 시절의 순수했던 끌림과 즐거움 우정 따위를 잊어버린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그래서, 녀석이 덧붙인 말에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녀석의 등과 등을 맞대자 흔들림이 심한 자전거 위에 앉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위험하면서도 묘하게 안정적인 움직임에 눈을 감아버렸다.

자치구의 음악 감상클럽에서 CD를 가지고 내려온 칼릭스는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앉아있던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다리느라 지루할 틈도 없이 건물 안에서 빠져나온 녀석의 거친 숨소리를 듣자 녀석이 긴 복도를 얼마나 빠르게 달려 다녀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전거의 핸들을 잡아야 하는 탓에 칼릭스를 대신해 CD는 내가 들었다. CD에는 내가 모르는 가수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영국을 비롯해 독일, 아이슬란드의 밴드라 했다. 녀석이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이 있다며 그중 하나를 열어 CDP에 집어넣었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원맨밴드라 했다. 노래는 여태 칼릭스가 들려주었던 음악 중에서 가장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끊임없이 It’s alright라 반복되는 가사 속에는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서관에서 동관으로 긴 거리를 달려가는 내내 녀석은 내게 그 노래를 들려주었다. 가끔씩 잘못된 말을 하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숨을 수 없어져. 고갈되어 싸울 수 없게 되어 버리지. 하지만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흥얼거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환한 헤드라이트의 불빛처럼 어두운 운동장을 밝힌다. 그 목소리의 흐름이 빛이 되어 반짝거리는 기분에 녀석을 따라 더듬거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 오늘 진짜 우울했다?”

귀에서 덜렁거리며 빠지려는 이어폰을 다시 꽂아 넣으며 취한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너 오늘 얼굴에 우울하다고 써놨더라.”

“요즘 내 사정이 좀 그렇잖아.”

“일생일대의 위기지.”

대답대신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턱, 녀석의 목덜미에 뒷목을 기대었다. 그래, 일생일대의 위기. 맥없는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녀석이 되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신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어떤 자의 죄에는 관대하지만 어떤 자의 죄에는 그 죄의 정죄함을 묻는다. 그 자체가 신이 불공평하다는 증거였다. 레이는 그 이후로 새로운 여자 친구와 함께 으슥한 숲에서 담배나 피워대고, 라이언을 제외한 파렐 무리들은 히히덕거리며 교내를 돌아다녔다. 나만이 혼자만이 세상의 모든 고난은 다 짊어진 것처럼 그늘진 얼굴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어서 공평하게 블리스를 내게 돌려줘야 했다. 나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차차 갚아나갈 테니. 쓸데없는 망상에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귀에 꼽았던 이어폰을 녀석의 비어있는 한쪽 귀에 꼽았다. 음악의 여운이 몸에 남아 설탕에 절인 체리처럼 온 몸이 노곤 노곤해졌다. 비스듬히 들린 고개로 어둠에 잠긴 세상을 바라보았다. 달을 감추고 있던 구름이 걷혔다.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서 개암나무 숲과 흉벽을 타고 내려온 여린 잎사귀가 달린 넝쿨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뽐내는 생기는 없었다. 다만, 봄날의 풋풋한 풀 내음이 멍해지는 머리를 맑게 했다.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개암나무 숲 속에서 기괴한 술렁거림이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동면에 들어가 깨어나지 않는 잠을 자는 마녀가 나오는 북쪽 나라의 설화가 떠올랐다. 저 개암나무 숲에서는 마녀의 꿈에 등장하는 두발로 걷는 짐승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블리스와 단 둘이 이 길을 걸을 때면 녀석은 늘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귀를 틀어막는 나의 손을 결박하여 끝내 무서운 이야기를 마치고는, 내가 붙잡을 새라 빠르게 도망가 버린다. 그렇게 되면 금방이라도 이야기 속 귀신이 뛰쳐나올 까봐 어두운 개암나무 숲을 쳐다볼 수가 없게 된다. 무서움에 저만치 앞으로 달려 나가는 블리스에게 악을 쓰며 돌아오라 외치면 나를 놀리듯 내가 뛰어가는 만큼 멀어지던 녀석의 모습들이 생생했다. 그 유치하고 우습기만 한 기억들이, 그 때는 행복인지 몰라 소홀히 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달이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모든 것이 어스름한 어둠 속에 잠겨버렸다. 블리스와의 추억과 생생했던 그 순간의 공포 까지도 모두 구름에 가려지는 달빛처럼 흐려져 버린다.

나는 더 이상 개암나무 숲을 바라보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 곳엔 상상력이 만들어낸 괴물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겐 어두움 자체가 공포였지만 그 공포를 이겨내고 물끄러미 그 속을 응시하다보면 해를 끼칠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두려움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이 나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그 긴 고독과 두려움을 인내하면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상담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내가 아주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굴었다가 한 순간에 토라진 아이로, 사탕을 주지 않으면 더 이상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변덕스런 아이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에 세라는 대체로 웃어넘기지만 자동판매기의 녹음된 목소리처럼 어색한 대답을 할 때도 있다. 나의 변덕이 그녀의 불편을 이끌어냈음에도 그 유쾌하지 못한, 공허한 미소를 보면 상처를 입는다. 미친 사람처럼 굴지 말아야하는데 쉽지가 않다.

단순히 예절바르고 공손하고 거슬리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과 마주앉아 상담을 한다면 그 시간은 과연 상처받은 영혼에게 가치 있는 시간일까. 아니면 상처에 상처를 덧입히는 시간일까. 나는 세라와의 얘기를 통해 미처 감추지 못한 그녀의 보수적인 성향을 발견한다. 불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져 나의 색을 반은 흡수하고 반은 반사해버린다. 대화가 겉돌기만 한다.

완벽한 상담은 환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감정의 전이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가 아니면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으로 그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일어나는가. 세라는 후자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자를 원했고 그것이 불신을 일으킨 원인이었다. 나는 그저 세라의 이해를 바랬을 뿐이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네 말대로라면, 블리스 역시 너를 포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에 대해 눈을 뜬 게 아닐까.”

한 손 위에 다른 손을 포개 올려놓은 손의 모양이 신뢰감을 주었다. 그녀가 네트워킹 세일즈맨으로 일했다면 그녀의 밑에서 개미처럼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금쯤 호화로운 크루저에서 바다의 풍경을 즐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안정적이고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와 그녀의 지적이면서도 푸근한 얼굴이 그녀의 첨단 무기였다.

“내년에 아이언사이드씨가 시장으로 출마할 때, 아버지의 약점이 된다고 생각해서 너와의 관계를 포기했다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어. 그렇게 블리스가 마음을 굳혔다면 너 역시 어떤 결단을 내려야할 것이고.”

굳어가는 내 얼굴을 보면서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가설일 뿐이야.”

그녀는 그런 식으로 조금씩 나의 전의를 시험하고 가파른 낭떠러지 위로 몰아붙였다.

사막에 서 있는 바위가 아무리 단단하다 하더라도 추위와 더위가 반복되고 모래바람에 깎이다보면 어느새 그 자신도 모래가 되어 있는데 하물며 나란 존재야. 가설이라는 말로 일축하긴 했지만, 그 말을 들으며 드는 생각이라곤 내 마음이 민폐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블리스를 비롯해 녀석의 부모와 나의 가족들에게 어떤 죄를 짓는 기분이 들게 한다.

내 논지는 터무니없이 감정적이고 빈약했고 세라는 합당함과 이성적인 논리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바로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그럼 포기하란 말인가요.”

어느새 느려진 내 말을 들으며 세라는 팔짱을 꼈다. 그녀의 낮은 한숨소리만이 적막한 상담실 안을 채웠다.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럼요.”

“네가 마음을 드러내기 이전에 여러 가지 정황들을 살펴봐야 한다는 밀이다.”

결국 그 말이 포기하란 말이었다. 배신당한 기분이지만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이 괴롭기만 했다.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뒤에 걸려있는 정물화가 그려진 액자를 보는 척 시계를 보았다. 길어진 상담은 예상시간보다 삼십분이나 지나있었다.

“저 그럼 일어날게요.”

후덥지근한 느낌에 느슨하게 잡아당겼던 넥타이를 고쳐 메며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의 정도 이상의 공손한 태도에 세라는 곤혹감을 느끼지 않았다. 내 한손을 두 손으로 잡아 흔들다 등을 두드려주었다.

“조이.”

내 손을 꽈악 잡아 느린 속도로 흔들 뿐, 그녀는 더 이상 덧붙이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아마 그녀도 알 것이었다. 그녀와의 상담이 어떤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주지 못한 것을. 세라는 분명 미안해하고 있었다.

“다음에 봐요.”

부러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방을 나왔다. 찰칵, 닫힌 문에 등과 머리를 기대고는 한숨을 쉬었다. 같은 고민의 반복,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실의 무게에 온 몸이 짓눌렸 다.

세라의 말처럼 블리스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나를 받아주지 않는 거라면 나에게는 녀석을 설득할 어떠한 힘도 없었다. 곱씹지 않으려 해도 그 말들이 귀에서 은밀하게 속삭인다. 그 말을 듣기 전 까지 세라와 나는 결함을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동의 유대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세라의 다운증후군 자녀에 대해 안쓰럽게 생각하듯이 그녀도 나의 결함에 대해 안쓰러움을 갖고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현명한 상담가일 필요가 있었다. 아픔에 전이되어 함께 괴로워하고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어리석은 상담가가 아니라.

곱씹지 말아야지. 고민할수록 블리스에게서 멀어지고 절망만 갖게 되니까. 게다가 내 안에서는 이미 현실과 타협하자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헛된 희망은 잊고 다시 시작하라고. 그런 목소리들은 내게 너무나도 매혹적으로 들린다. 나를 강하게 할 것만 같다. 답답하게 짓무르는 가슴을 짓이기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젠 나조차도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가 없다.

터벅터벅 걸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식사를 예약한 시간이 채 30분도 남지 않았다. 칼릭스는 차를 가지고 D.C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차에 태우느라 먼저 학교에서 떠난 상태였다. 조금만 게으름 부렸다간 예약한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이었다. 수업 후 상담실로 바로 오느라 가져왔던 책들을 캐비닛에 넣을 생각으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점심을 굶으면서까지 누군가의 못된 장난으로 인해 자전거에서 이탈한 앞바퀴를 고치는 일을 했다. 아직도 손톱 끝에는 볼트를 조이느라 묻었던 자전거의 기름때가 잔뜩 끼어있었다. 숙직실에서 얻어온 탓에 자전거의 너트와 맞지 않아 달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늦을까봐 서관에서 동관으로 가는, 길고 긴 내리막길을 달리며 브레이크를 잡지 않았다. 속도를 더 내기 위해 기어를 높이고 페달을 밟자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속도가 났다. 그러나 계속 내려가기만 하는 평이한 주행이 계속되자 소음은 사라지고 안정적으로 바퀴가 돌아간다. 예쁘게 정리한 화단을 사이에 둔 내리막기로 핸들을 꺾었다.

“엇!”

갑자기,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털털거리며 앞바퀴가 튀어 올랐다.

찰나의 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모든 세상이 빙글거리며 천천히 돌아갔다. 앞 허브에서 바퀴가 이탈해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것이 눈앞에 보였다.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려 감싸 안았다.

키기긱, 쇠가 지면과 마찰하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몸에 딱딱한 무언가에 잔뜩 쓸리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정신이 없었다. 세상이 뒤죽박죽 섞이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바닥에 닿을 때마다 일어나는 흙먼지를 마시며 굴렀다. 어렸을 적 배웠던 낙법이고 뭐고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아 마찰을 최소화했다.

한참을 거칠게 미끄러져 내려가다 가까스로 멈추었을 때, 옆에서 무언가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팔로 얼굴을 감싸고 겨우 그 소리를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 앞바퀴가 바로 내 옆을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내리막길을 굴러가던 그것은 화단으로 굴러들어가 작은 나무와 엉키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아픔이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어지럽히던 혼란이 사라지고 현실이 인식되기 시작하자, 온 몸에서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넘어지는 몸을 짚으며 쓰러질 때 돌부리가 박혔었는지 왼 손의 피부가 너덜거리며 찢어져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아프면 서러워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솟아나는 피가 손바닥에 고였다. 힘을 줄 수가 없을 정도로 아파서 눈에 눈물이 핑 고였다.

“아파… 뒤지겠네.”

겨우 들었던 고개를 다시 흙먼지가 가득한 땅에 볼을 기대버렸다. 온 정신과 육체가 KO패 당한 기분이었다. 레스토랑도 가야하고 캐비닛에 루시의 책도 집어넣어야 하는데 바쁜 와중에 한 가지 일이 더 늘었다. 의무실에 가야 한다. 피가 나는 손목은 제외하더라도 온 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코가 시큰해지는 느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손 하나 까딱할 사람이 없으니 착한 사마리아인이 나를 거두어가 주었으면, 바닥에 널브러진 창피함도 잊고 그런 상상을 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에 타는 통증에 몸을 태아처럼 말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서럽다.”

서러운 내 신세가 너무 우스워서 공허한 웃음이 흘렀다. 안 그래도 괴로운데 자전거까지 나의 의지를 배신하고 나를 상처 입힌다. 어떤 의지도 내 안에서 끌어낼 수 없을 것만 같다. 갑자기 너무도 지쳐버렸다. 손 하나도 까딱하기 싫어 넘어진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괴로움 속에서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무던히도 대상없는 증오로 뛰는 격렬한 가슴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한참 만에 눈을 떴을 때, 눈앞에서는 공중의 뿌연 흙먼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가브리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년 동안 그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지친 몸을 일으켰다. 너덜너덜 헤진 옷감사이로 붉은 피가 비어져 나왔다. 이대로 굳으면 옷과 붙어 떼어낼 때 엄청 아플 텐데. 한걸음 옮기기가 힘에 겨워 절뚝거리며 시큰 거리는 코를 훌쩍였다.

한참 위에 자전거가 널브러져 있었다. 자전거에 부착된 전조등과 거울이 박살나 산산이 흩어져있었다. 절뚝거리며 무릎을 짚어 오르막길을 올라 자전거 뒤에 매어놓은 끈을 풀었다. 모서리가 찍혀 뭉뚝해져 있었다.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서럽네 정말.”

얼마나 큰 충격을 입었는지 자전거의 탑튜브가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입안에 고인 침을 퉤 뱉어내고는 두꺼운 책을 끈으로 묶어 오른 손에 들었다. 도저히 자전거까지 챙겨 갈 정신이 없다. 무엇보다 감정과 생명 없는 물체일 뿐인데도 자전거에 대한 증오가 가슴에서 끓어오른다.

자전거도 고장 난 마당에 의무실로 치료 받으러 갈 수가 없다. 저녁 식사 시간에 늦을 까봐 이를 악 물고 절뚝거리는 걸음을 빨리했다. 가장 가까운 건물의 화장실에 들어가 흙먼지가 잔뜩 묻은 몸을 닦아냈다. 지독한 아픔에 거친 숨이 기침처럼 쏟아져 나왔다. 거울 속의 나는 황폐한 모래바람 속을 걸어온 패망한 전사 같았다. 모든 전의를 상실한 채 삶의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얼굴. 핏기 없는 얼굴에 찢어진 상처와 모래로 인한 얼룩이 남은 얼굴이 멍청하다.

시계를 흘긋 보았다. 약속 시간까지 채 10분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친 몸을 끌고 동관의 캐비닛에 책을 두고 나면, 칼릭스의 자전거를 타고 랑팡 플라자로 향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약속 시간보다 한참을 늦겠지만, 저녁 식사 이후에도 계속 가브리엘과 함께일 테니까. 의무실 대신 근처의 약국에서 연고와 거즈를 사서 급한 대로 응급처치도 할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을 간단하게 정리하자 혼란스럽던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동관으로 들어섰을 때, 절뚝거리는 느린 걸음으로 인해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칼릭스의 전화에 금방 도착할 거라는 말로 둘러대긴 했지만, 적어도 그 곳에 도착하게 되면 사람들이 마지막 식사로 디저트를 즐기고 있을 터였다. 급해지는 마음에 아픈 무릎을 무시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손바닥의 피는 이미 응고되어 있었다. 아픔으로 오므릴 수 없는 손을 뒷짐 지고 어깨로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임에도 그 안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상처 난 내 모습을 돌아보는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헤치고 캐비닛 앞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어디선가 담배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옷에 베인 냄새인지 아니면 누가 실제로 담배를 피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용기인지 치기인지 무모한 행동에 혀를 차며 걸어갈 때였다.

시큰거리는 손목이 누군가의 버클에 긁혀 강한 통증이 몰려왔다. 아퍼 씨발. 입 안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상처를 살폈다. 거칠게 회를 뜬, 들짐승의 헤집어진 속살처럼 엉망이었다. 한참을 그 끔찍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손을 마비시키는 얼얼한 아픔에 덜컥 머리가 아찔해졌다. 물로 거칠게 닦아낸 탓에 모래는 없었지만, 너덜거리는 살이 미치도록 거슬렸다. 붉은 피를 보자 정신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토하고 싶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에 정신을 차리려 이를 악 물었다. 누군가가 근처로 걸어와 캐비닛을 열었다. 아픔으로 가늘게 뜬 시선의 사각으로 커다란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큰 키로 인해 형광등이 가려 눈앞이 어둡게 그늘졌다. 키 크다고 유세떠는 건가. 모든 상황이 억울하기만 했던 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

눈이 마주쳤다.

“…….”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유리알처럼 투명했다. 그 무덤덤한 얼굴이 순간 왜 그렇게 서럽게 느껴지는지 눈앞이 먹먹해졌다. 블리스의 눈이 나의 심상치 않은 상태를 파악하고는 크게 뜨여졌다. 먹먹해지는 가슴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병신같이 울 것 같아 잘게 떨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거운 책을 드느라 감각이 없던 손으로 열쇠를 꽂아 힘껏 돌렸다.

그러나 눈앞의 풍경을 보는 순간, 블리스의 얼굴을 보고 느꼈던 내 서러움들이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기가 막혔다.

캐비닛을 연 그대로 내 눈을 얼어붙었다. 안의 모습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깊고 기다란 캐비닛 안의 모습은 익숙하고 일상적인, 내가 기대했던 풍경이 아니었다. 꽂아 넣은 열쇠가 캐비닛과 맞지만 않았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 옆의 캐비닛을 열어보았을 것이다.

온 몸의 기운이 빠졌다. 하다하다 이젠 캐비닛 안까지 도를 넘은 장난을 치다니. 자전거 볼트를 풀어놓는 바람에 오늘 죽을 뻔 했는데 이젠 캐비닛 안까지. 눈을 질끈 감았다. 떨리는 턱을 진정 시키려 입술을 즈려물었다. 하지만 분노는 다음으로, 책임을 묻는 것 역시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분노 보다는 가브리엘이 우선순위였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캐비닛 안에 들어있는 각종 잡지들을 꺼내 바닥에 던져버렸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숨조차 쉬지 않고 기계적으로 안에 잔뜩 쌓인 게이 포르노 잡지들을 바닥에 던졌다. 온통 살색의 향연이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잡지는 난교와 구강성교의 장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블리스가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 녀석뿐만이 아니다. 웅성거리던 주변의 소음이 차차 사그라진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안의 잡지를 모두 밖으로 던져버리고 바닥에 내려두었던 루시의 책을 캐비닛 안에 집어넣었다. 허리를 굽힐 때마다 너덜거리는 온 몸이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 모든 책을 집어넣고 주머니의 열쇠로 문을 잠갔다. 오늘은 내 인생에 손에 꼽힐 최악의 순간 중 하나가 되겠지. ‘최악의 순간에는 웃어라.’ 라고 무리한 주문을 하던 어느 영화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가슴의 깊은 허무에서 새어나오는 신음 같은 웃음소리가. 차가운 캐비닛에 이마를 기대었다.

목석처럼 굳어있던 블리스가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으로도 눈앞에 그림이 그려진다. 성큼성큼 긴 다리를 움직여 바닥에 널려진 게이포르노 잡지를 집어 들었다. 파르륵,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녀석은 깊은 한숨을 쉬며 또 다시 걸음을 옮긴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로 보아 녀석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린 모양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시선을 아무렇게나 떨어트리고 나를 둘러싼 녀석들을 밀치며 나아갔다. 나는 수치도 모르는 짐승이 아니었다. 엄연히 존엄성이 있고 존중 받아야 할 인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써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타인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을 즐겁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의 저속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큼 매혹적인 것이라서?

분노로 온 몸이 떨렸다. 아픈 다리를 끌고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나아갈 때였다.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야.”

고개를 돌리자 한 손에 담배를 높이 들고 한 손으로는 나의 어깨를 건드리며 인파를 헤치는 라이언이 보였다. 녀석이 피식 웃는다고 느낀 순간, 주먹이 날아와 얼굴에 박혔다.

“윽!”

휘청이며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기에 방어할 새도 없었다. 맞은 순간의 충격은 실감하지 못했으나, 주먹에 의해 고개가 뒤로 꺾이자 그제야 그 아픔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의 웅성거림이 싸늘한 정적으로 바뀌었다. 코에서 뜨끈한 피가 흘러내렸다. 라이언은 휘청거리는 어깨를 다시 잡아 앞으로 잡아당겼고, 나는.

“아프잖아 개새꺄!”

오른 손에 온 힘을 실어 녀석의 얼굴 정면으로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닿는 따듯한 얼굴의 체온이 섬뜩했다. 균형을 잃고 쓰러진 녀석의 위로 타고 올라가 상처가 난 왼 손으로 주먹을 쥐어 다시 한 번 내리쳤다. 쾌감과도 같은 고통이 온 몸에 불길처럼 타올랐다. 온 몸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라이언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의 손이 나의 옷을 움켜쥐며 미친 듯이 밀어냈지만 오른 손으로 다시 한 번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읏, 신음을 지르며 이를 드러낸 녀석의 치아가 온통 새빨갰다.

주먹을 내리 꽂으려는 순간 녀석이 재빨리 다리를 세워 배와 가슴 사이를 걷어찼다.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어 끅끅 거리는 나를 어느새 일어난 녀석이 잡아챘다. 머리를 잡아당겨 고개를 젖히게 하며 나를 내려다봤다. 온통 울고 있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동안 노력 한게….”

“……”

“너 때문에!”

힘주어 잡아당겨 나를 일으키며 녀석이 배에 주먹을 날렸다.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것만큼이나 둔하게 지속되는 아픔에 몸을 구부리자 아귀처럼 달라붙어 나를 벽으로 밀쳤다. 무릎으로 올려치는 아픔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영화처럼 멋진 싸움은 없었다. 둘이 엉킬 대로 엉켜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서로를 짓눌렀다. 녀석의 위에 올라타 온 힘을 다해 녀석의 얼굴을 내리눌렀다. 전력을 다한 짓누름에 라이언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네가… 먼저 시작, 했어.”

“왜! 호모…한테 호모라고 하지… 그럼 뭐라… 윽!”

일어나 녀석을 발로 걷어찼다. 머릿속에서는 통제되지 않는 분노에 대한 경고를 보내왔지만, 죽일 때 까지 녀석을 걷어찰 것 같았다. 뒤에서 누가 나를 당겼다. 너 미쳤냐고 내 뺨을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것 같았다. 온 몸의 모든 에너지가 고양되어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생기가 넘치고 아픔을 느낄 수가 없었으니까.

사실 라이언은 언제고 폭발할 가능성이 잠재된 부비트랩을 실수로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덕분에 분노에 대한 해방감을 얻었으니까.

“냅둬! 덕분에 저 새끼 어미 좀 학교에 불려오게. 너희 엄마는 너 뭐하는 새낀 줄 아냐? 공원에서 남자 만나서 난잡하게 노는 거 알면 진짜 볼만 하겠다.”

와하하 웃으며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얼굴로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머리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를 잡아당기던 녀석들에게서 몸부림쳐 떨어진 후 주변에 집히는 대로 잡고 녀석에게 덤벼들었다. 검은 호수가 칭칭 감긴 소화기였다. 내려치려 달려들자 녀석이 온 몸을 웅크렸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 때, 누군가 나를 뒤에서 강하게 끌어당겼다. 배를 강하기 짓누르는 탓에 라이언에게 맞아 엉망이 된 속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만해.”

“놔!”

“그만! 그만 하랬잖아!”

라이언을 내리치려는 소화기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녀석의 힘이 더 강했다. 블리스는 빼앗은 소화기를 창문으로 던져버렸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귀를 막는 내 손을 잡아당겨 자신에게로 끌었다. 어깨를 강하게 짓눌러 잡아당기며 나를 흔들었다. 고함을 질렀다.

“너 미쳤어? 어?!”

마치 찌부러트릴 것처럼 억세게 어깨를 흔들며 소리 지르는 녀석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금방이라도 나를 짓눌러 없애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너 왜 이렇게 미친 척 굴어! 어?!”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 내가 어리석다고, 라이언이 아닌 나를 비난하는 녀석의 말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를 향해 드러낸 감정이 고작 비난일 뿐이라니. 온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때문이잖아. 목 끝까지 그 말이 치고 올라왔지만 차마 말 할 수 없어 녀석의 어깨를 뿌리쳤다.

“네 눈에도 내가 미쳐 보이냐?”

혼백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이렇게 마지막에 뒤통수를 때리는 사람이 너일 줄이야. 정신도 육체도 진정이 되지 않아 떨리는 목소리엔 울음도 아닌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녀석을 뻔히 바라보았다.

“그래애. 내가 봐도 좀 미친 것 같다.”

입술을 악 문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비참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눈물을 보임으로 더욱 더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니.

“요 몇 주 동안 내가 미쳤었나보다.”

“…….”

“그런데… 그게 누구 때문이었는데.”

“…….”

“어떻게, 어떻게! 감히 네가 그따위 말을 하는 거야!”

녀석의 앙가슴을 강하게 밀어냈다. 손바닥에 맺힌 붉은 피가 녀석의 교복에 위에서 번져나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온 몸 때문에 나는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리끝으로 열이 올라왔다. 밀쳐진 힘에 뒷걸음치는 녀석에게서 몸을 돌려버렸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

로비 밖으로 뛰쳐나갔을 때 밖은 온통 어두워져 있었다. 겨우 아물었던 상처가 터져 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어떠한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음의 고통이 너무나 생생해서 육체의 고통 따윈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끄럽던 로비로부터 벗어나 적막한 운동장으로 들어서자 내 몸의 신호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하게 걷기를 종용 당하던 관절과 라이언으로부터 얻어맞은 가슴과 얼굴은 숨이 쉬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넘어지면서 다친 온 몸의 상처들로 여기저기 터진 샌드백이 된 기분이었다. 난자당한 왼손의 통증으로 손가락을 필 수도, 주먹을 쥘 수도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 것도 너무나 고통스러워 축축한 잔디밭에 뻗어버렸다.

손바닥의 피를 바지에 쓰윽 닦아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쓸어 올리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은 아니라고, 이를 악 물고 견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내게 이 같은 위로를 해줄 수가 없었기에.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운동장은 어둡고 적막해서 내가 아무리 미친 사람처럼 흐느껴도 모두 받아줄 것 같았다. 완벽하게,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혼자 남겨졌다. 모든 것으로부터 동떨어져 극심한 두려움과 외로움에 떠는 어린아이처럼 오열이 흘러나왔다.

“흐으으….”

눈을 감아버렸다. 끊임없이 홍수처럼 흘러나오는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귓가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흐느끼는 오열이 서러워서, 이렇게 나 혼자 울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외로워서 흐느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는 왼 손으로 땅을 내리쳤다.

“흐아….”

아픔으로 희한한 신음소리가 폐에서부터 쏟아졌다. 퉁퉁 부운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쓰린 눈을 손으로 닦아냈다. 호흡을 정리하기 위해 울음을 참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 때였다. 삐걱거리며 잔디를 밟는 자전거의 소리가 먼 곳으로부터 들려왔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체인 돌아가는 소리에 내가 지금 헛소리를 듣고 있는 건 아닐까, 기대를 품었다 실망하면 그만큼 더 괴로워질 텐데. 그러나 눈을 떠 확인하고 싶지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녀석이 없으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질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자전거가 옆으로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내 곁으로 다가왔다.

“…….”

서늘한 옷깃이 이마에 닿았다. 그 서늘함에 가슴안의 모든 열기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흡, 눈물을 참으며 눈을 꼭 감았다. 내 곁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느껴졌다. 따듯한 호흡이 얼굴 전체를 감쌌다. 그 간의 서러움으로 얼어붙었던 체온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너무나도 따듯해서 흐어엉, 아이처럼 울음이 터졌다.

“미안하다.”

얼굴 전체를 감싸며 녀석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엄지로 훔쳐냈다. 그간의 분노로 녀석의 손을 뿌리치고 싶은 마음 한편으로 녀석의 체온이 닿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절실하고 간절해서 온 몸이 재가 되는 기분이었다.

“미안해.”

블리스의 이마가 나의 이마 위에 닿았다. 열기로 뜨겁던 이마에 닿은 녀석의 체온이 서늘해서 나의 울음은 어느새 지친 사람처럼 조용한, 작은 흐느낌이 되어 있었다.

“내 멋대로 너랑 나랑….”

“…….”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어.”

“…….”

눈을 떴다.

블리스와 눈을 마주친 순간, 어지러운 꿈을 꾼 것 같았다. 눈앞에 환한 불빛이 켜지고 뜨거운 무언가가 쏟아지는 장면이 잔류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녀석의 하늘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영혼까지 관통할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릿저릿한 전류가 몸에 흘러 손끝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귀에 따듯한 물이 들어차는 것처럼 먹먹했다. 내가 녹아 없어져버렸다.

“울지 마.”

엄지로 눈가의 눈물을 훔쳐내며 녀석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오랜 투쟁으로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을 달래는 듯이 부드러웠다. 녀석의 울지 말라는 달램은 되레 나의 눈물을 유도했다.

“흐으으….”

저도 모르게 다시 시작되는 흐느낌이 괴로워 녀석의 팔을 잡아 뜯었다. 흐느끼는 입술 사이로 녀석의 입술이 닿았다. 조금씩 부드럽게 따듯하고 편안한 온기가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상처 난 입술을 혀로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파고들었다.

목 쉰 흐느낌으로 변한 울음소리는 녀석의 입술 안에서 점차 사그라졌다. 눈을 찡그려 눈물을 꼬옥 짜내며 성한 오른 팔로 녀석의 뒷목을 감싸 안았다. 부드럽고 축축한 점막이 혀를 감싸고 달콤한 사탕을 먹는 것처럼 빨아들였다. 그제야, 지친 안도감이 나를 감싸 안았다. 단순한 키스가 아닌 나의 영혼의 반을 블리스에게, 블리스의 영혼의 반이 내게로 연결된 느낌이었다. 황홀과는 별개인 성스러운 영역 속으로,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참 만에 떨어진 입술이었지만 아쉬움에 녀석의 혀가 부드럽게 입술 위를 쓸었다. 눈을 떴을 때 녀석의 눈 역시 그렁그렁 눈물로 젖어있었다. 마비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아득히 먼 곳에 존재하는 은하수 너머의 별을 바라보듯이.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녀석이 느리게 말했다.

“사랑해.”

녀석이 미소 지었다. 그 말에 먹먹해지는 가슴을 짓누르며, 내 온힘을 다해 내 전신의 힘을 쥐어짜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애.”

말끝이 무너지며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 흐느낌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녀석은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몸의 모든 죽어있던 조직이 새로 살아나고 삶이 기쁨으로 재구성되어 새 삶을 얻은 것처럼 녀석의 얼굴이 기쁨이 가득했다. 그 등 뒤에 날개를 달아 떠올라 하늘을 나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에 우는 것도 잊고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녀석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아마 난리가 나겠지?”

웃다 눈물이 나는지 녀석은 손등으로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렇겠지.”

울음에 웃음이 섞인 내 목소리가 이상했다.

“무서워?”

“응.”

“그래…. 나도 무서워.”

녀석이 피식 웃었다. 눈을 감아 이마 위에 꼬옥 입을 맞추었다. 블리스는 몸을 일으켜 누워있던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그 손을 잡아 아픔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어디든.”

“어디든?”

씨익 웃으며 녀석이 대답했다.

“그래 어디든.”

바보 같은 말에 우린 둘 다 웃어버렸다. 웃음의 여운이 남은 입술로 다시 입맞춤을 했다. 자전거를 세워 뒤에 나를 태우며 녀석은 한 팔을 자신의 허리에 감게 했다. 상처로 헤진 손을 늘어트린 채 블리스의 등에 볼을 기대었다. 얇은 셔츠 안으로 느껴지는 녀석의 매끈하고 단단한 피부의 체온이 좋았다. 행복으로 충만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블리스는 페달을 밟았다. 시원한 밤바람이 온 몸의 땀을 훔치고 저 건너편으로 사라져갔다. 마치 꿈결과도 같았지만, 코 안이 뻥 뚫린 것 같은 생생한 현실이었다. 한참을 달려 잔디밭이 펼쳐진 휑한 운동장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어둠 속 유일한 빛에 잠겨있는 학교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빛으로 조각한 권위의 성.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내게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던 고개를 돌려 녀석의 등에 이마를 기대었다.

우린 함께 있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맨들맨들한 어깨에 입술을 묻으며 녀석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낮은 숨이 목덜미에 따듯하게 흩어졌다. 어설프게 붕대로 감겨있는 손으로 머리에 얹어진 수건을 끌러내었다. 물에 젖은 온 몸을 닦아내느라 잔뜩 젖어있는 채였다. 그것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블리스의 알몸을 껴안았다.

“아파?”

조심스럽게 젖어있는 부드러운 무언가를 밀어 넣었으며 물었다. 귓가에 닿는 속삭임이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붕대를 감은 손으로 녀석의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었다. 녀석 역시 대충 물기만 훑어냈을 뿐 축축하게 젖어있는 상태였다. 손가락을 넣어 안을 넓히자 그 간지러움에 허리가 침대 위에서 붕 떴다. 녀석의 입술이 가슴에 닿았다. 혀를 길게 내어 느리게 핥자 온 몸의 모공이 바짝 조여들었다. 녀석이 낮게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남은 가슴을 손가락 안에서 비벼댔다.

열이 오른 얼굴로 가슴을 빨고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아!”

치아로 유두를 깨무는 바람에 가슴께가 욱신거리며 아팠다. 극도로 예민한 그곳을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듯 혀와 치아로 잔뜩 깨물고 비비는 바람에 입안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만, 아!”

손가락 두 개를 안에서 굽혀 갈고리처럼 긁어내며 전립선 부위를 꾹꾹 강하게 내리 눌렀다. 견딜 수가 없어 오므리는 다리를 무릎으로 누르며 녀석은 유두를 희롱하던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아 아래로 당겼다.

녀석의 입술이 손가락을 꼼꼼하게 핥았다. 타액이 잔뜩 묻은 그 손을 다리 사이로 가져가며 손가락을 구부리게 했다.

“같이 넣자.”

그 말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입술로 고환과 허벅지 사이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손으로 감고는 남은 한손으로 나의 손을 잡아 그 부드럽게 적셔진, 나에게는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비부로 안내했다. 손가락을 밀어 넣자 바짝 조여지는 입구가 느껴졌다. 붉어지는 얼굴에 쪽쪽 입 맞추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 간지럽고 외설스런 느낌에 손가락을 빼내려는데 블리스의 손가락이 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하윽….”

내 손가락을 사이에 끼고 녀석이 늘 상 나를 흥분시키려 할 때 눌러대던 그 곳으로 인도했다. 나의 손가락 위로 손가락을 올려 전립선 주위를 꾹꾹 눌러대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 그 감각에 집중하려해도 지나친 쾌감에 자꾸만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블리스으, 주… 죽을 것 같아. 그으…만 해.”

“좋아?”

“으으… 그, 그만.”

남은 한 손으로 녀석의 어깨를 짜부라트릴 듯이 꽈악 쥐었지만 블리스는 느긋하게 페니스 주변을 애무할 뿐이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손가락을 빼내자 녀석을 밀어버렸다.

“너 죽었어.”

“죽여 봐라.”

여유롭게 웃으며 침대위로 드러누운 녀석의 위에 올라탔다. 그러나 막상 녀석의 페니스를 입에 넣으려고 해도 상처로 인해 부은 입술을 크게 벌릴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녀석은 여유롭게 애널과 고환 사이의 회음부를 입술로 강하게 빨아들이며 압박했다. 쾌감에 몸을 움츠리자 녀석이 웃었다. 안간힘을 쓰듯 블리스의 페니스 끝 선단을 입으로 빨아들였다. 갈라진 선단에 혀를 미끄러트려 쪽쪽 강하게 빨자 녀석의 허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 그, 그건, 좀!”

밭은 숨을 쉬며 떨어대는 녀석이 웃겨서 오른손으로 고환을 주물거리며 강하게 빨아 당겼다. 어느새 흘러나오는 쿠퍼액을 손바닥에 뱉어 젖은 손으로 페니스의 기둥을 쓸며 갈라진 선단을 혀로 꼭꼭 누르자 녀석의 발가락이 꿈틀거렸다.

“지, 지우.”

쉰 목소리로 헐떡이는 녀석은 어느새 나를 애무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아프지 않을 만큼만 입안에 집어넣고는 아이스크림을 빨듯이 부드럽게 머금었다. 폐에서부터 웃음이 쏟아졌다. 녀석의 허리가 겁에 질린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펠라티오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치 엄마젖을 빠는 아이처럼 집요하게 붙드는 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애무에 결국 녀석은 사정을 했다. 예상보다 이른 사정에 입술 속으로 정액이 쏟아졌다. 입안에 잔뜩 머금은 그것을 녀석의 배 위에 퉤에 뱉어냈다. 흥분으로 꿈틀거리는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느리게 쓰다듬으며 키들키들 웃었다.

“왜 이렇게 빨리 싸!”

뒤 돌아본 녀석의 얼굴이 온통 새빨갰다.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는 얼굴을 놀리듯 내 목소리는 가벼워져 있었다.

“근데 너 그거 알아?”

빨개진 얼굴을 팔등으로 가리는 녀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정하고 나서 내가 핥아주면… 너 좋아서 죽으려고 하더라.”

말을 마치자마자 페니스를 손으로 꽈악 쥐고는 선단 아래까지 머금어 강하게 빨았다. 허억, 짧은 호흡을 내지는 녀석의 아랫배가 경련하듯 떨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녀석이 나를 밀어내버렸다.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내가 괘씸한지 녀석은 씩씩 거리며 엎드린 내 위에 올라탔다. 가슴 속에서 웃음의 여운이 사라지질 않아. 한참을 키득거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블리스가 엉덩이를 벌려 귀두 끝을 밀어 넣었다. 미끈거리는 뱀처럼 망설임 없이 끝까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안을 가득 채우는 압박감에 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흐윽.”

위로 쳐 올리듯 끝까지 밀고 들어와 갑자기 허리를 위로 튕겼다. 압박감으로 배에 힘이 들어가자 녀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술로 귀를 머금었다. 머리 양 옆으로 두 손을 묻어 몸을 지탱시키며 블리스는 서서히 허리를 움직였다.

“장난감을 학대하다니.”

웃음소리와 섞인 신음소리가 폐에서부터 쏟아졌다. 짧게 끊어내듯 규칙적으로 둔덕에 블리스의 차가운 고환이 닿았다. 엎드린 채로 똑바로 누워있었기에 다 집어넣기가 수월치 않아 몸을 지탱하던 팔을 떼어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으으응….”

엉덩이를 밖으로 잡아 늘렸다가 짜부라트릴 듯이 안으로 모으기를 반복하며 삽입하는 느낌이 지독히도 간지러워서, 마치 애널만이 살아 숨 쉬는 짐승이 된 것 같았다. 녀석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혀를 이용해 귀 전체를 머금으며 내뿜는 축축한 숨결에 온 몸의 근육이 바짝 조여들었다.

좀 전의 짧았던 사정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느리게 그 길고 굵은 것이 안에서 밖으로 빠지며 들락거렸다. 귀두가 굵은 페니스에 비해서도 튀어나온 편이었기에 한번 씩 움직일 때마다 안을 긁고 지나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이불을 말아 쥐며 밭은 숨을 내쉬는 입술을 혀가 할짝 핥았다. 조금 더 빨리 할까.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지만 녀석은 웃으며 아랫배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위로 끌어 올렸다.

“아윽! 아! 아!”

갑자기 푹 집어넣는 통에 침대 위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를 질렀다. 거칠게 살이 비벼지는 쿨쩍 거리는 비문과 페니스 사이의 젖은 소리가 억눌린 신음 사이로 들려왔다. 무너지는 허리를 강하게 감싸며 녀석은 거칠게 몇 번이고 페니스를 박아 넣었다.

다리를 벌려 그 사이에 들어오며 녀석은 침대의 협탁에 기댄 채로 나를 그 위에 앉혔다. 갑자기 푸욱 박히는 섬뜩한 느낌에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 상태 그대로 허리를 고정시키며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쾌감에 온 몸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극렬한 긴장으로 다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아 털썩 주저앉자 페니스가 끝까지 들어찼다. 배가 찌르르 아파왔다.

“하아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무너지자 녀석이 머리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돌리게 했다. 외설스럽게 입술을 빨며 다시 한 번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윽!”

“더 세게 해줄까?”

“흐읏… 시, 시러. 이 새꺄!”

무너지는 허리에 앞으로 고꾸라지는 허리를 잡으며 녀석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무릎안쪽을 잡아 페니스를 꽂아 넣은 그대로 블리스는 물컹한 침대 끝에 앉았다. 블리스의 무릎과 가슴 외에는 기댈 것이 없어 위태롭게 몸이 흔들렸다. 옆구리를 잡아들어 올려 페니스를 귀두까지만 걸치게 하고는 서서히 애가 탈 정도로 천천히 허리를 쳐 올랐다. 고통스러운 쾌감에 몸을 잔뜩 긴장 시키자 녀석이 어깨를 질척하게 핥으며 속삭였다.

“그렇게 꽉 물면 빨리 넣어줄 수가 없잖아.”

“윽!”

“힘 빼봐.”

“흐윽!”

“끊어지겠…어.”

“읏!”

말을 끝 낼 때마다 강하게 쳐올리는 바람에 도저히 힘을 풀 수가 없었다. 절로 눈물이 흘러 이를 악 물며 쾌감을 버티자 녀석이 목덜미에 키스를 하며 웃었다. 나는 죽을 것 같은데 녀석은 여유로웠다.

허리를 강하게 잡아 공중에 띄운 그대로 녀석은 허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 박았다. 아래로 몸이 떨어질 때마다 강하게 쳐올리자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흑, 히, 힘들어어….”

“…….”

“으으, 천, 천천히 윽! 해…줘어. 흐윽!”

흔들리는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더듬거리며 블리스의 단단한 팔을 잡아당겼다. 숨찬 울먹임에 녀석은 마지막으로 강하게 쳐올리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발작적으로 튀어 오르는 몸을 꽉 껴안았다.

“천천히… 할까?”

“그래 이 새끼야아. 하다… 죽겠어.”

울먹이는 내 목소리에 녀석은 키들키들 웃으며 혀를 길게 내여 등에 고인 땀을 핥았다. 등에서, 옆구리로, 옆구리에서 유두로 이어진 축축한 애무를 받으며 녀석의 어깨에 뒷목을 기대었다. 녀석이 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벽을 긁는 귀두의 선명한 감각을 느끼자 사정감이 밀려왔다. 손으로 페니스를 흔들며 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밭은 숨을 쏟아냈다.

찔끔거리며 진하고 하얀 정액이 터져 나왔다. 폐에서 벅찬 숨이 쏟아져 나왔다. 사정은 내가 더 빨랐지만, 사정이 끝났다고 해서 쾌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녀석 역시도 사정이 멀지 않았는지 허리를 좀 전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극심한 간지러움에 부들부들 떠는 나를 껴안고 녀석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사정하려는지 녀석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블리스의 손이 강하게 허리를 옥죄였다. 쿨럭 거리며 쏟아지는 정액에 안이 뜨겁게 젖어 들어갔다. 한참을 들락거리며 녀석은 길게 사정을 했다. 따듯하게 번지는 질척한 정액이 분문과 결합한 페니스 사이로 떨어지며 바닥을 적셨다.

“하아아….”

한참 만에 녀석이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녀석도 나도 온통 젖어버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블리스는 나를 껴안은 채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미친듯이 뛰고 있는 블리스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나 울던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쾌감 뒤의 나른한 여운으로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애널 안에는 여전히 녀석의 페니스가 들어 있었다. 녀석도 나도 알고 있었다. 이 밤이 얼마나 길 것임을.





나는 끊임없이 간밤에 블리스가 고백했던 속삭임들을 떠올린다. 가슴 안에서 반복되어 나의 살과 피의 일부가 되는 목소리들을. 낮고 힘 있는 울림의 특별한 언어들은 가슴 안에서 힘차게 도약하며 끊임없이 심장을 울린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그 특별한 단어의 아름다움을 지금의 나는 사랑한다.

사랑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말해주는 그 목소리들을.





*





아침 아홉시.



나는 한가하게 창문 밖의 세상을 바라본다. 강렬한 아침의 태양이 도시의 빌딩 속 첨탑의 긴 그림자를 만들며 머리 위로 떠오른다. 지극히 창백한 도시의 풍경을 따듯하게 감싸며 떠오르는 태양은 도시에 의미를 부여한다. 어떤 이에게는 하루를 연명할 돈을 벌어야 할 이유를, 또 다른 이에게는 그들이 힘들게 번 돈을 써야할 이유를, 웃어야 할 이유를, 울어야 할 이유를, 불행해야 할 이유를. 그리고 행복해야할 이유를 부여한다. 어찌되었건 태양은 살아있어만 느낄 수 있는 모든 의미를 강렬하게 선사한다.

태양이 나에게 부여한 의미는 행복함이었다. 나는 풀저 공원 근교의 한가한 2번가의 누추한 여관에 있었다. 러시아워가 끝나가는 도시의 혼잡이 사라지는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아침의 맑게 정제된 공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코를 뻥 뚫리게 했다. 생생한 생기에 미소를 지으며 창틀에 몸을 기대었다.

모닝커피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차분한 삶의 질서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 질서는 슬픔과 행복의 혼합물이다. 하루하루가 이어진 것이 삶이고 삶을 분할한 것이 하루라면, 슬픔과 행복의 이면성은 하루 그 짧은 삶의 역사 속에도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온전한 행복도 또 온전한 슬픔도 주어지지 않는다. W. 제이콥스의 소설 속 원숭이 손처럼 모든 게 양면적이다. 그래서 나의 하루의 시작은 행복했지만 슬프기도 했다.

창밖으로 풀저 공원을 가로 질러 걸어오는 블리스의 모습이 보인다. 손에는 무언가 잔뜩 들려있다. 왼손에 들린 것은 베이글과 커피이다. 오른 손에 들린 종이봉투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창백하면서도 따듯한 아침의 태양빛을 받으며 블리스는 회색빛 보도블록을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문이 벌컥 열리고 녀석의 기다란 몸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가렸다.

“배고팠지?”

커피를 담은 박스를 손에 쥐고 살짝 흔들며 녀석이 웃었다.

“커피 말고 다른 건 뭐야?”

“너 입을 옷. 싼 거긴 하지만.”

“이 시간에 문 열은 곳이 있어?”

“응. 있더라고. 노상이긴 했지만.”

창가의 테이블에 커피와 베이글이 담긴 박스를 내려놓고 녀석은 종이봉투 안에서 옷을 꺼내 흔들었다. 폴 프랭크 원숭이 캐릭터가 그려진 커다란 티였다.

“사이즈는 프리.”

“이것만 입고 돌아다녀도 되겠네.”

몸에 옷을 대보며 피식 웃자 녀석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커피를 꺼내 내게 건넸다. 녀석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변한다.

“뭐야, 그런 훌륭한 취미가 있었어?”

그 말에 쌜쭉 노려보자 녀석은 모른척 따듯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베이글을 커다랗게 뜯는다. 블리스가 사온 베이글 중 크림이 잔뜩 묻은 것으로 골라 커피와 함께 먹었다. 딱딱하고 질긴 그것을 꼭꼭 씹어 삼키는데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입모양으로 묻자 녀석이 웃었다.

“사랑스러워서.”

그 말에 나는 쑥스러워하지도 않고 푸흐흐 웃어버렸다.

“도대체 왜 하는 것 마다 사랑스럽다고 하는 건데!”

“너야말로 사랑스럽지 않은 게 도대체 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우리는 사춘기 소녀들처럼 키들키들 웃는다. 행복한 풍경이다.

사온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고는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녀석도 입고 있던 교복을 벗고는 가벼운 가운을 걸치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녀석의 손이 가운을 묶었던 끈을 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살피며 상처에 바르는 연고를 펴 발랐다.

“많이 나았네.”

왼 손을 감았던 기다란 거즈를 조심스럽게 풀어 휴지통에 버리고는 녀석은 왼 손을 꼼꼼하게 살피며 말했다. 블리스의 손이 상처 주변의 살을 천천히 매만진다. 녀석의 표정이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느끼는지 잔뜩 찌푸려진다. 얼핏 화가 나는 것 같다.

“음. 이젠 좀 괜찮아.”

“흉터 남겠다.”

한숨을 쉬며 녀석은 연고를 펴 발랐다. 아픔으로 찡그리진 않는지 얼굴과 상처를 번갈아보며 조심스럽게 기다란 거즈로 품이 넉넉하게 남도록 손바닥을 감쌌다.

“끝!”

가위로 잘라내고 남은 거즈와 연고를 공중으로 날렸다 잡아채듯 받아내며 녀석이 웃었다.

가운의 끈을 묶어 다시 옷을 여며주며 녀석은 내 등 뒤로 몸을 움직여 다리 사이에 날 앉혔다.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자신의 가슴에 나의 등을 닿게 하고는 목덜미에 쪼는 듯한 키스를 했다. 성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제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침대에서 뒹굴며 진이 빠질 때까지 콘돔을 낭비했던 탓에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페니스가 벌떡 서는 일은 한동안은 없을 터였다. 목덜미를 더듬는 블리스의 키스는 성적 욕망보다는 보듬는다는 의미의 건조한 애무였다.

“졸업하고 뭐할까.”

“켄자스 갈까?”

“거기 보다는 사람 많은 곳으로 가자. 뉴욕 어때?”

“뉴욕 가면 노숙해야할걸. 우리 돈도 없는데.”

하긴, 껄껄거리며 녀석이 웃었다. 블리스는 내 어깨에 턱을 올리며 허리에 손을 둘러 꼬옥 끌어안았다. 그 위에 손을 얹으며 블리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럼. 대학 졸업해서 직장 구하면 뉴욕에서 살자.”

“왜?”

“그냥. 거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잖아.”

시선 안에 가득 들어오는 블리스의 턱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가운 안으로 커다란 손을 집어넣어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며 녀석이 속삭였다.

“다행이다.”

“뭐가?”

“함께 있는 십년 뒤를 상상할 수 있어서.”

그 말에 푸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블리스는 내 무릎 위에 커다란 책을 올려놓는다. 흑백 사진이 인쇄된 종이를 펄럭거리며 넘겼다. 물이 묻었다 마른 자국으로 책은 쭈글쭈글했다. 조악한 모텔과는 어울리지 않는 뉴욕의 거리의 사진이 담긴 포토에세이였다.

거리는 황량했지만 아름다웠다. 첨탑으로 이루어진 회색의 숲속을 도약하는 걸음걸이들. 자유분방한,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도도한 시선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중학교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기에 어린 나에게도 그런 삶이 동경이 된 순간이 있었다. 가끔씩 레드라인 전철을 타고 Bubby’s 파이라는 곳을 들리곤 했는데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맛이라 생각했지만 지은은 유독 그곳의 튜나 요리를 좋아했다. 동생을 데리고 뉴욕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걸 생각하면 나는 생각보다 다정한 오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에게 소홀해지긴 했지만. 삭막해 보이는 외견과 말투와는 달리 유독 영화와 미술을 좋아하는 지은 때문에 전철을 타고 이곳저곳에 들리기도 했다. 소호의 무료 겔러리라던가 트라이베카의 노부에 들려 초밥을 먹고 특이한 가게를 들리곤 했다. 혼자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을 지은과 함께했다.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미래의 일들을 상상하게 됐다. 그 중간의 힘들고 괴로울 과정을 뛰어넘어 함께 있을 우리들을.

“무슨 생각 하냐?”

“응?”

“생각에 잠긴 얼굴인데.”

뒤에서 꼭 껴안으며 녀석이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전이 지은이랑 플러싱이나 퀸즈 소호 같은데 돌아다니던 생각이 나서. 나중에 거기 살면 너랑도 그 거리를 거닐겠구나… 뭐 이런 생각?”

“기특한데.”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녀석이 웃었다.

“같이 살려면 요리도 배워야겠고, 아파트에서 살까?”

“아파트도 좋은데 난 정원 딸린 곳 상상했는데? 내가 핸디맨적인 기질이 좀 있잖아. 손으로 못 만드는 게 없어.”

내 눈 앞에서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녀석은 덧붙여 말했다.

“내방이랑 연결된 방에 있는 수납장 그거 내가 만든 거다?”

“뭐? 진짜? 진짜로?”

“응. 뭐 조립한 거긴 하지만.”

“…너 뭐냐. 나도 그 정도는 한다. 김새게.”

키들키들 웃으며 녀석의 배를 팔뚝으로 은근히 압박하자 죽는 소릴 낸다.

버석거리는 거즈로 성기게 감싼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상처로 인해 주먹을 쥔다던가 힘을 주어 쫙 필 순 없었지만 전처럼 눈을 감으면 그 아픔에 온 정신이 집중되는 괴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자 구름을 보면 하늘이 연상되듯이 자연스럽게 블리스와 함께 맞췄던 비비스와 벗헤드 장갑이 떠올랐다. 쓰레기처리장에 오래된 가구와 함께 버려져있던 짓밟혀있던 장갑을 떠올리자 괜히 서러움이 몰려와 몸을 돌려 녀석의 귀를 깨물었다.

“못된 새끼.”

“응? 뜬금없이 왜.”

간지러운지 목을 움츠리는 녀석의 목을 고정하며 치아로 자근자근 녀석의 귀를 씹었다. 아픔과 함께 밀려오는 간지러움에 블리스의 입술에서 낮은 탄성이 쏟아진다.

“비비스 장갑 주워놨어.”

그 말에 녀석은 간지러움의 여운도 잊고 나를 돌아봤다. 하, 탄성 같은 숨을 쉰다.

“역시… 그랬구나.”

“응? 뭐가?”

“찾으러 갔을 때 없었거든.”

불신의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지만 블리스는 조금 웃으며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마음고생 심했어? 아이를 달래듯 이상한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녀석의 코를 손가락 사이에 집어넣고는 잡아당겼다. 아파, 한번만 봐줘. 충분히 손으로 떼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걸하듯 관용을 바라는 녀석의 목소리에 마음이 풀어진다.

“뭐, 잘못은 내가 먼저 했지만.”

키들거리며 코를 잡아당기던 손가락을 느슨하게 하고는 도톰한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입술을 벌리고 그 간지러운 감각을 느끼고만 있던 녀석은 자꾸만 비벼지는 몸을 견딜 수 없는지 블리스는 유두를 꼬집으며 반격을 한다. 손을 뻗어 녀석의 바지춤을 더듬었다. 몸을 비틀어 피하지만 내 손이 먼저 녀석의 페니스를 낚아챈다.

“아파아. 야, 야.”

“아프라고 하는 거다.”

“윽… 또 하는 수가… 있어.”

아픔에 얼굴을 찡그리며 페니스를 꽉 잡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으르렁거리듯 탁한 숨을 내쉰다. 또 하시던가. 샐쭉하게 내뱉은 말에 녀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솔직히 너도 만만치 않다. 진짜! 그건 너도 인정해야 돼.”

“네가 잘하니까 그렇지.”

“그런가?”

그 말에 녀석은 푸흐흐 바보같이 웃었다. 턱, 허리에 손을 얹고는 끌어당겨 가슴이 맞닿게 했다. 벽에 녀석을 밀어붙이고는 머리카락 속에 손을 집어넣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 살짝 벌려진 블리스의 아랫입술을 물어 부드럽게 빨아들이다 혀 아래로 고인 침과 함께 녀석의 긴장이 풀린 부드러운 혀를 빨아들였다. 마주 닿은 배에서 긴장으로 경련하는 블리스가 느껴졌다. 서서히 부푸는 페니스를 느끼며 허리를 움직여 자극이 되도록 마주 비볐다. 탁한 숨이 입안에서 모두 막혀 녀석은 거친 숨을 코로 내쉰다. 수동적으로 키스를 받아들이던 녀석이 등으로 손을 미끄러트려 뒷목을 잡아 내 뒤통수를 강하게 감쌌다.

가운만을 입고 있었기에 벗어던질 필요가 없었다. 성급하게 콘돔을 끼워 둘둘 말린 그것을 기둥으로 내린다. 하지만 끝까지 콘돔을 내리지 못해 하얀 띠가 페니스 주변으로 반지를 끼운 것처럼 둘려져있다. 불쑥 튀어나온 그것은 삽입할 때마다 입구를 긁으며 들락거린다. 녀석의 뭉툭하게 튀어나온 귀두처럼 간질거리는 자극을 준다. 바셀린이 발라진 콘돔을 끼운 페니스가 애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오랜 자극으로 이완되고 예민해진 그곳으로 푸욱 페니스가 박힌다. 그리고 거세게 흔들린다. 나를 더 강하게 눌러주길, 극단적으로 울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녀석의 허리를 다리로 감싼다. 녀석의 엉덩이를 쥐어뜯는다.

마치 허기진 짐승처럼 녀석을 핥고 깨물고 녀석 역시 마찬가지다. 몸의 모든 면이 서로에게 비벼지도록 꿈틀거리며 마찰한다. 아프고 근질근질하고 불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칠 것 같이 녀석을 원하게 된다. 녀석 역시 마찬가지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밭은 숨을 내쉰다. 서로가 서로에게 섞여 혼합물이 되어간다. 서로의 속으로 스며든다. 블리스는 내게 있어, 나는 녀석에게 있어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 모든 감정과 섞여있다. 석유에서 파라핀을 분리해낼 순 있지만 원래는 하나였듯이 분노와 욕망, 슬픔과 욕망, 기쁨과 욕망 그 모든 것들이 뭉뚱그려져서 하나처럼 존재한다. 녀석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샤워를 마친 나른한 기분으로 티비를 틀었다. 동전을 집어넣어야 전원이 켜졌기에 블리스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탈탈 털어 넣어 전원을 켰다. 은행에서 잔뜩 인출했던 돈은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불효자식도 이런 불효자식이 없다.

부웅, 공기가 흔들리며 파박 거리는 정전기 소리를 낸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브라운관에 서서히 빛이 어리며 혼란스럽고 화려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쇼프로그램이었다.

멀쩡하게 잘생긴 사람이 나와 우스꽝스런 표정을 만들어낸다. 사람을 웃기기 위해 필사적이면서도 그가 긴장을 즐기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사실 TV 속 모든 것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그 안에 필사적인 무언가가 감춰져 있다. 다소 과장되어 있긴 하지만 그 안에도 인생이 있다. 철학자나 된 것처럼 TV를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을 관조적으로,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언제까지 물 위의 기름처럼 도시를 방황할 생각은 아니었다. 마치 세상과 동떨어져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에게,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실이 나와 블리스를 두렵게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내 안에 그리고 녀석의 안에 어떤 담대함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무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했다.

제발 나를 이해하여 주기를. 어머니에게, 지은이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빌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왔고, 이게 나였고 나다운 것이니까. 금박으로 부풀어있던 세상이 펑 터져버렸고, 그 안의 허무를 맛본 후 이제야 내 안의 모든 것을 꺼내어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제발 나를 이해해 주시기를.

침대와 마주 닿은 벽에 허리를 세워 앉은 블리스의 맨들맨들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깊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닥치고 나면 현실로 인식되는 법이니까 미리 겁을 집어먹고 그 두려움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블리스의 버석하게 건조한 손을 내 손 위에 올려놓고는 꼼지락거렸다.

채널을 돌렸다. 르포형식의 다큐멘터리가 나온다. 코소보 내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 부근으로 피난을 갔던 알바니아계 난민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전이 종료되며 평화안 이안에 들어섰지만 그 이후 숨겨졌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들이 삶과 죽음의 앞에서 직면했던 문제들과 세르비아 군인의 강간으로 낳은 아이를 키우는 알바니아계 어머니, 내전의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여자, 인종청소 이후 불거진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계 인들의 갈등과 적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우리는 심각한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런 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노라면 나의 삶에 직면한 문제들은 깃털보다도 가벼운 어깨의 짐으로 느껴진다.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고통 앞에 무릎을 꿇는,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어쩐 일인지 우리는 그런 것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은 시선을 잡아끈다. 그 재난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서 안도하면서도 남의 불행을 외면할 수 없는 이치다.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우리는 고통으로 질려있던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 한 시간여 남짓한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겪었던 고통에서 서서히 벗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잊어간다. TV 밖의 시청자들은 예민하지만, 비겁하고 건망증에 시달린다.

어느새 5시였다. 밖은 아직 밝았지만 도시의 첨탑들 사이에는 황혼이 걸려있다. 금요일이었다. 몇일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통해 행복했기에 조금 더 미적거리는 우리였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이미 우간다의 난민캠프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을 터였다.

칼릭스에게는 미안함뿐이었다. 녀석 역시 나의 이기심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블리스는 보상을 받았지만, 칼릭스는 아니었다. 아마 이용당하고 버려진 느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이 내게 그런 존재가 아님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자 입이 썼다. 핸드폰의 배터리가 나가있긴 했지만, 전화를 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뜻 녀석의 목소릴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블리스는 내가 TV를 보고 있지 않음을 알자 리모컨으로 전원을 껐다. 이른 저녁을 먹을 생각에 점심에 사왔던 음식들을 차례차례 훑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샀던,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던 음식 중 고프르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쵸콜릿 무스, 휘핑크림을 아무렇게나 퍼 올리며 녀석에게 가져갔다. 녀석은 신문을 펼쳐 보고 있었다.

모텔의 입구에 놓여있던 지역신문이었다. 설마 우리의 얘기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우스갯소리를 하며 블리스는 접시를 받아들었다. 일개 고등학교의 게이소년 탈출에 대한 기사가 실릴 리 없음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문을 훑었다. 물론, 그런 기사는 없었다. 그러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생각하지도 못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왜…그래?”

와플에 올려두었던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도 잊고 신문의 기사를 읽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몰랐다. 손에 들린 와플에서 아이스크림이 녹아 신문 위에 떨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블리스가 물었다. 머리가 멍했다.

“응? 왜 그래.”

“아…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손에 들고 있던 와플을 접시에 도로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운을 훌렁 벗어던지고 속옷과 바지를 껴입었다. 그 우스운 커다란 박스티를 대충 껴입고는 지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녀석이 결국 몸을 일으켜 내게로 걸어왔다.

“신문에 난 사람이 아는 사람이야?”

“응.”

“너랑 갱단은 별로 연관이 없을 것 같은데.”

“없어.”

“근데 왜 그….”

상황 설명을 하려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무작정 녀석의 목에 손을 둘러 잡아당겼다. 녀석의 뒤통수를 잡아당겨 짧게 입을 맞추었다. 녀석의 눈이 커졌다.

“상황설명 하기엔 너무 기니까. 다녀와서 얘기할게.”

“잠, 잠깐 무슨 일인데.”

“금방 올게.”

녀석을 뒤로 한 채 복도를 뛰어갔다. 작은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밝힌 복도를 뛰어나가며 녀석에게 방으로 들어가란 의미로 손을 저어보였다. 풀저 공원으로 뛰어가 근처의 전화부스 안에서 녀석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을 울려도 받지 않았다. 사서함으로 연결되는 목소리에 전화를 끊고는 다시 번호를 눌렀다. 울린 지 한참 만에 딸칵,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잔뜩 잠기고 갈라져있었다.





전철을 타고 한참 만에 도착한 병원의 정문은 수많은 사람으로 혼잡스러웠다. 그러나 한 눈에 찾아볼 수가 있었다. 칼릭스는 평소에는 잘 입지 않던 밝은 원색 계열의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커다란 키와 눈에 띄는 옷의 컬러 때문에 녀석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녀석은 아직도 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헉헉거리며 뛰어가는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돌아보는 눈은 평소처럼 덤덤했다.

“왔네.”

무릎에 손을 짚으며 헉헉거리며 녀석을 올려다봤다.

“지하철 입구서… 여기까지 뛰어오느라고.”

당기는 옆구리와 벅찬 호흡으로 헉헉거리는 숨을 달래며 후우, 커다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녀석이 말했다. 내 입에서 나올 어떤 염려의 말을 미리 막아버렸다.

“별로 다치진 않았어.”

“응. 안 그래도 신문 보고 왔어.”

“신문? 신문까지 실릴 일인가?”

처음으로 칼릭스의 얼굴 위에 표정이 어렸다.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녀석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봤다. 답답한 호흡으로 뻐근했던 가슴을 피며 허리에 손을 얹는 나를 바라보며 녀석이 물었다.

“이젠 숨 안차?”

“아… 응. 이젠 좀 괜찮아.”

“그럼 가자.”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서 시선을 돌려 칼릭스는 정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광등의 창백한 조명아래 기다란 복도를 걷는 녀석의 뒤를 따라 발을 떼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 아무 말도 없이 빠진 것에 대해 사과를 할 생각이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녀석 역시도 블리스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하게는 아니어도 주변에 난무한 풍문을 들었을 것이었다. 칼릭스의 담담한 표정과 말투가 녀석과 나 사이에 분명하고도 서늘한 선을 긋는 것 같아 평소에 녀석을 대하던 방식으로 말을 걸 수가 없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자 수 많은 사람 사이에 갈려 녀석과 나 사이에 두 명의 노인이 끼게 되었다. 떨어진 거리를 의식하는 나완 달리 칼릭스는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숫자의 층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이어지고 썰물처럼 빠지고 밀물처럼 들어오는 인파 속에 녀석과 나는 각각 가장 가장자리에 몸을 밀리게 되었다. 17층에 도착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겨우 엘리베이터를 빠져 나오자 병원 특유의 옅은 소독약 냄새가 났다.

칼릭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앞으로 걸었다. 녀석의 우울한 긴 등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뒤를 따랐다. 녀석이 멈춰선 곳은 2인 병실이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섰을 때 2인병실 안에는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링겔을 꽂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가브리엘의 모습은 죽은 사람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아직 안 왔어?”

그러나 그는 칼릭스의 목소리에 느리게 눈을 떴다. 피곤에 젖어 숙면을 취했던 듯 그의 쌍꺼풀이 깊어져있었다. 그는 칼릭스에게서 시선을 옮겨 녀석의 뒤편에 서 있던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하마터면 다신 못 볼 뻔 했구나.”

잔뜩 갈라진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죄송해요.”

“뭐가 미안해. 너 나름의 급한 사정이 있었겠지.”

지친 안도감에 그의 미소는 전과 달리 희미한 느낌이었다. 그는 손을 까딱이며 가까이오라고 손짓했다.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서자 희미하게 웃으며 내 옷을 잡아당겼다.

“패셔너블한데.”

폴 프랭크 원숭이가 그려진 캐릭터 옷은 스스로가 노상 출신임을 극명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미테이션인 것이 티가 나 멋쩍게 웃자 그도 웃었다.

“손은 왜 다쳤어.”

“자전거 타다 넘어져서요.”

“심하게 넘어졌나봐. 꼭 싸운 것처럼 여기저기 다쳤는데.”

그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바닥이랑 좀 심하게 싸웠죠.”

재미도 없는 농담에 그는 사춘기 소년처럼 키들키들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 당긴 배가 아픈지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찌르르 울리는 아픔에 진통제와 연결된 버튼을 꾸욱 누르며 짧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상처의 원인은 자상이었다. 모텔의 로비에 있는 테이블 위에서 방으로 가져온 지역 신문은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폭력조직 내에서 연방의 정보원으로 인해 분열이 일어났고 긴급한 회의를 거친 그들이 말단 조직원을 통해 정보원을 살해 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경위인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보원 옆에 있던 가브리엘이 자상을 입었고 그를 찔렀던 칼이 패러거트 웨스트 지하철역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버려진지 한 시간 만에 경찰에 신고가 되어 조사하던 중 그 주변을 서성이던 십대 소년을 붙잡았는데 인상착의가 동일해 검거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신문은 이를 통해 사회 내에 십대를 물들이는 폭력단체에 대해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하고 정부의 강력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뭐, 거창하게 휘말렸지.”

쓰게 웃으며 가브리엘은 고개를 힘없이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느새 야위고 희어진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칼릭스에게 손을 내밀자, 녀석은 새로 떠온 물을 군말 없이 가브리엘에게 건넸다. 빨대를 통해 타는 목을 축이며 그는 흐뭇한 눈으로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나에게 물을 떠다주는 날이 오다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칼릭스는 팔짱을 꼈다.

“간병인 불러. 저녁때마다 오기 힘들어.”

“간병인도 5시엔 퇴근 해야지. 근데 너 누가 오라고 했나?”

“혼자 두자니 신경 쓰여.”

침대를 받치고 있는 아이보리색의 철제 봉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칼릭스의 얼굴 역시 지친 피곤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느새 핼쑥해진 그 얼굴을 가브리엘은 다 큰 자식을 보는 듯 뿌듯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가브리엘의 시선을 모른 척 가습기의 물을 채우며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진 음료수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기자기한 포스트잇으로 쾌유를 빈다는 메모가 적혀있는 음료수였다.

“마셔. 오는 사람들 마시라고 사오는 거니까.”

물끄러미 음료수를 바라보는 나를 보며 칼릭스는 말했다. 붉은 오렌지빛의 자몽음료수를 골라 뚜껑을 열자 뻥, 귀여운 소리가 났다. 향긋한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오는 음료를 내려다보다 한 모금 꿀꺽 삼켰다.

“로사리오는 어디있어요?”

간병인 전용 침대에 앉으며 모습이 보이지 않는 로사리오에 대해 물었다. 사고의 현장에 같이 있었고 가브리엘이 다치게 된 간접적 원인이기도 한 그녀의 부재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분명 그녀의 부재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 아마 비행기 안에 있을 걸.”

“난민 캠프로 가는 중인가 봐요.”

“아니. 난민캠프에 도착했는데 참고인으로 재판에 나와야 해서 다시 귀국하는 중이다. 덕분에 비행기 값만 날렸지.”

얼굴을 찡그리며 그는 진통제의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창백해지는 얼굴에 고이는 땀이 고통을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병문안이라고는 하나, 가브리엘의 휴식을 방해하는 기분이 들어 일어서려는데 때마침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키가 크고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는 중년의 신사들이었다. 그들은 힘들게 눈을 뜨고 있는 가브리엘과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잠깐만 자리를 좀 비워주시겠습니까?”

뭔가 긴히 할 얘기가 있는 그들의 분위기에 다 마신 음료수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안 그래도 가려는 참이었어요. 가브리엘.”

“응.”

“내일 올게요. 전화로 먹고 싶은 거 말해요. 사올게요.”

그 말에 가브리엘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말할게. 덧붙이는 그의 말에 웃으며 문을 닫았다.

굳게 닫힌 갈색의 문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그의 상태가 양호하긴 했지만 온전히 안심할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이 묘한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매끄러운 자기를 덧씌운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다 손을 떼며 물었다.

“누구?”

“아마도… 연방에서 온 사람들.”

“연방?”

“응. 그놈의 오지랖 때문에.”

이미 굳게 닫혀있는 방문을 힐끗 쳐다보며 녀석이 피식 웃었다. 그 씁쓸한 웃음이 오늘 내게 최초로 보여준 웃음이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칼릭스는 오늘 나를 마주친 이후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보고 더 이상 웃을 일이 없는 건지도 몰랐다.

“간병… 했던 거야?”

머뭇거리는 내 질문에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가자. 데려다줄게. 대답도 듣지 않고 앞서 걸어가는 녀석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칼릭스와 함께 걸어가는 복도는 적막하기만 했다. 일반 병실이었기에 가운을 휘날리며 다급하게 뛰어가는 의사도 없었고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의 울먹임도 없었다. 복도 끝에서 트레이를 끌며 식판을 비운 그릇들을 챙기는 파란 옷을 입은 여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삭막하기까지 한 병원 복도의 풍경을 꾸민 것은 유명 화가의 작품들을 모사한 그림이 걸린 액자가 다였다. 모조품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조잡한 그림들이 오히려 병원의 품격을 떨어트린다는 생각을 하며 손끝으로 액자를 쓸었다. 손끝에 먼지가 잔뜩 묻어났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늦긴 했지만 저녁식사를 하기에 무리인 시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먹었어?”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먹었어. 너는.”

“…나는 대충 때웠어.”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이며 칼릭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17층에 닿기를 기다리면서도 녀석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은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금요일이었던 탓에 부쩍 병문안을 옷 사람이 늘어서일 터였다. 사람들 사이로 몸을 끼워 넣으며 1층에 닿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울타리 안에 갇혀있다 방목된 양떼처럼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흐름과도 같은 사람들의 인파속에 휩쓸려 입구로 걸어가려는데 녀석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얘기나 좀 하자.”

나의 대답을 필요로 한 얘기가 아니었기에 칼릭스는 빠르게 병원의 로비 근처에 늘어선 가게중 하나로 들어섰다. 동양식 차 전문점이었다.

일본식인지 베트남 식인지 알 수 없는 인테리어는 공을 들였지만 국적을 알 수 없었다. 이 병원에 들어선 이후 긴장을 풀고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는 방문객들은 변형이 되건, 뒤 섞이건, 의미가 없어지건 상관이 없다. 오직 오리엔탈리즘. 그들에게 그것은 그저 일상에서 벗어난 이국의 낭만적 취향일 뿐이니까. 나의 어머니가 프랑스와 영국을 단지 머나먼 이국의 땅으로 여기며 그들 고유의 문화를 버무려 버리듯이.

나는 바나나잎 차를 골랐고 칼릭스는 녹차를 골랐다. 쌀강정과 화과가 대나무가 그려진 단조로운 접시에 실려 나온다. 따듯한 차에는 꿀을 탔는지 단맛이 우러나온다. 밍밍한 차를 마신다는 건, 평소의 우리였다면 결코 원하지 않을 사치였다. 서로가 어색하게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맛을 음미하는 흉내를 낸다. 긴장으로 막혀있는 장막을 베어 먼저 말문을 트길 기다린다. 먼저 말문을 연건 나였다.

“내일은 내가 간병할까.”

그 말에 칼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더 환자 같다.”

“그렇게 심한가?”

“아파 보여.”

“자극을 가하지 않는 이상 아프진 않아.”

“크게 싸웠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자기로 빚은 녹색의 투박한 컵을 잡은 칼릭스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바라볼 뿐이다. 한숨과 함께 어색하게 웃으며 그 사실에 대해 시인했다.

“내가 더 많이 팼어.”

그 말에 칼릭스는 피식 웃었다.

“학교는 언제 올 건데.”

“어차피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월요일에는 가야겠지.”

학교에서의 반응에 대해 묻고 싶지는 않았다. 녀석 역시도 필요 없는 말을 덧붙여가며 신경을 소모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후우, 잔속으로 입김을 불자 뜨거운 김이 부옇게 시야를 가리며 올라왔다. 뿌연 수증기너머로 녀석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칼릭스는 한참 만에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블리스와 지금 함께 있냐.”

축축하게 얼굴에 어리는 증기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며 남은 손으로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응.”

“…….”

“미안해.”

칼릭스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행복해?”

“아마도.”

“아마도 라니. 많이 행복하구나.”

입가에 어리는 미소를 가리기 위해 잔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화과를 집어 한입에 넣어 씹으며 칼릭스는 마른 목을 차로 축였다. 한참동안 그것을 씹어 삼킨 후 녀석이 말했다.

“변한 것 같아.”

“뭐가.”

“강해진 것 같다.”

“왜?”

그 말에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목 쉰 소리로 대답했다.

“관계에 대해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아서. 홀가분해진 것 같아.”

칼릭스는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물론 학교에 와서 근신 아니면 정학을 받겠지만.”

웃으며 칼릭스는 내가 건들지 않았던 화과를 마저 집어먹었다. 금방이라도 이 모든 음식들을 먹어치우고 이 불편한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 했다. 성미 급한 사람처럼 적당하게 식은 차를 벌컥 들이킨 녀석이 시계를 살피며 말했다.

“일어날까. 더 마실 생각 없으면.”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다 준다는 말로 정문에서 기다리게 한 녀석은 곧 차를 끌고 왔다. 늘 틀어놓던 음악도 라디오도 없이 적막한 가운데 차를 몰았다.

복잡한 거리와 합류하기까지의 주행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도시의 중심과 합류할수록 차는 더디게 나아갔다. 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은 창밖의 풍경이었다. 하늘과 맞닿은 높은 첨탑에서 내려다보지 않더라도 도시의 야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도시의 빛은 어둠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어둠만으론 혹은 빛만으론 이 도시가 이토록 아름다울 순 없었을 테니까.

매트로 센터 부근의 거리는 혼잡했다. 온갖 기념관과 백화점들이 밀집되어 있는 이곳의 지하에는 전철의 환승역이 있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꾸역꾸역 사람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그 인파는 도시의 밤을 채우는 물결로, 흐름으로 흘렀다. 나는 가끔씩 혼자서 이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 수많은 인파속을 거닐며 사람들과 부딪히며 그들의 검은 얼굴과 노란 얼굴, 하얀 얼굴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면 그들도 나의 노란 얼굴을 마주하며 스쳐지나갔다. 무표정의 얼굴들 속에서 가끔씩 방심하며 웃는 천진난만한 얼굴을 기대하며 이 거리를 거닐던 일들이 머나먼 과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창밖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저 멀리서 붉은 신호등이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신호등과 도시의 야경이 반사된 칼릭스의 얼굴은 축소된 유화판 같았다. 캔버스 위에 드러난 칼릭스의 표정은 덤덤했다. 파란불로 바뀌고 차는 느린 속도로 앞으로 나아간다. 운전을 하면서 다른 것에 신경을 기울여도 앞차와의 충돌을 면할 만큼 느린 속도로 달린다.

문득, 녀석의 인생에 삶이 어떤 위로를 해준 적이 있었던가 의문이 들었다. 사랑도, 유년시절의 행복했던 기억도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이민자들의 그림자가 칼릭스의 가슴에 남아있진 않을까, 뜬금없이 그런 상상을 한다.

나의 시선을 느낀 칼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 무거운 시선에 이성이 충동으로 함몰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충동적으로 불쑥 튀어나온 말이 떨렸다.

그 말에 녀석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을 억눌러가며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속살을 벗겨내고 칼로 도려내 그 안에 꽁꽁 감춰진 감정들을 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녀석의 움직임은 너무 빠르다. 잡아 챌 수도, 닿을 수도 없다. 운 좋게 표피만을 벗겨냈을 뿐이다. 그것들은 대개 관용적인 표현들이다. 우리가 일상을 영유하며 수없이 습관적으로 내뱉었던 흔하디흔한 표현이다. 어떠한 아픔도 없고, 어떠한 슬픔도 없는 비결정으로 조직된 언어들.

“괜찮아.”

녀석은 웃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말 뒤에 칼릭스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얼굴이 찡그려진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려 애쓰지만 결국에는 호흡을 모아 긴 한숨을 내쉬며 우울을, 자신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녀석의 무거운 시선이 입술에 닿는다.

“키스해줄래.”

예상치 못한 말에 멍하니 바라보자 녀석은 성급하게 내 뒷목을 잡아 당겨 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입술을 가르고 파고드는 녀석의 혀를 거부하지 않았다.

거칠게 파고들었지만 칼릭스의 혀는 따듯하고 몰캉거리면서도 부드러웠다. 혀 밑의 고여 있는 침을 훔치고 부드럽게 치열을 갈라 나를 빨아들였다. 천천히 입술을 맞추면서도 잡아먹을 듯이 뒤통수를 옥죄며 빨아들였다. 애틋하게 키스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 긴 키스였다.

한참 만에 입 안을 헤집던 혀가 떨어지고 번들거리는 타액에 젖은 입술이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거친 숨을 내쉬는 나와 달리 녀석은 숨을 쉬는 걸 잊은 것 같았다. 츄, 젖은 입술이 찰박이는 소리를 내며 다물어진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눈앞의 청록색 눈동자가 바다처럼 일렁인다. 녀석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찰랑이는 수면을 사이에 두고 녀석은 깊은 바다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뒷목을 감쌌던 서늘한 손을 거두었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칼릭스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

“이거면 충분해.”

녀석은 참아내는 것 같았다. 급해지려는 호흡을 모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나 역시도 이 순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 느끼지만 이 순간의 어색함이 나의 모든 행동을 소극적으로 만든다. 칼릭스는 차창의 문을 모두 열었다. 차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도시의 소음을 들으며 녀석은 음악을 틀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듣지 않는 가벼운 가사의 가벼운 팝이었다.

녀석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어떤 결심을 내린 듯 녀석이 말 했다.

“미안한데, 전철 타고 가줄래.”

우수에 찬 무거운 시선으로 녀석이 나를 바라봤다. 창백한 그 얼굴이 쓰게 웃었다. 목소리는 긴장으로 잔뜩 갈라져있다. 칼릭스는 시선을 거두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자코 녀석의 말과 외면하는 얼굴을 바라보다 매여져 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녀석을 위해서 갈게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매트로 센터의 인파속으로 급류에 휘말리듯 걸어갔다. 세상이 어지럽고 환했다. 롤러코스터 위 세상처럼 밝은 빛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정처 없이 급류에 휘말려 바다 속으로 떠밀려가는 강물처럼 한 없이 붕 뜬 걸음을 옮겼다. 문득, 기다란 경적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은색의 캐딜락은 그 자리 그대로 멈춰있었다. 귀를 울리는 클락션 소음은 녀석의 상념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결심을 내린 듯 차는 한참 만에 앞으로, 앞으로 날아가듯 나아갔다. 신호등 저편의 뻥 뚫린 넓어진 차선을 향해 돌진했다. 날아가듯 달림으로써 과거의 모든 짐을 홀가분하게 벗어버릴 수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인내할 것처럼. 달려갔다.





Epilogue





눈앞의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기분 좋은 망상에 빠진 것처럼, 어딘가 들떠있는 그 모습은 공중에 발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가벼운 미풍에 공중을 나는 것처럼 하루 종일 이질적인 공기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지은은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그녀도 나의 변화가 낯선 모양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이것저것 참견하던 그녀는 삐죽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무스를 발라 넘겨주었다.

“오빠 멋있지?”

내 질문에 지은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멋있으면 뭐해. 자전거 타고 가다보면 다 구겨질 텐데.”

“멋있다는 말이지 그거?”

내 들뜬 말에 지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느리게 자신의 팔뚝을 쓸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돈은 있어?”

“주면 잘 받을게.”

동생에게까지 비굴한 내 모습에도 그녀는 철없는 오빠에게 철든 동생이 부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불친절한 가르침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지폐 한 장을 내게 건넸을 뿐이다.

“백 불인데 꼭 갚아.”

“동생. 사랑한다.”

“시끄러.”

내민 손 위에 올려놓는 대신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듯 지폐를 집어넣으며 지은은 방에서 나갔다. 쿵쾅거리며 계단을 걷는 소리와 방문을 벌컥 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문을 거칠게 닫지는 않았다. 조금 열어놓은 문 사이로 예민한 신경이 뻗어 나의 사소한 움직임을 감시하고 관찰할 것이었다. 그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은은 마음 속 한 구석에서 나를 동정하고 나를 인정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예민한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핏줄의 결함을 인정하려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 그들을 생각하면 충만하게 차오르던 내 가슴에는 안타까운 공허함만이 남는다. 아마도 아들이 남자와 사랑을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젠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닌, 어떤 장애보다 더욱 수치스런 결함을 가진 아들이 되어버렸으니까.

그간의 괴로움들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 어떤 진실을 담은 회고록으로도 그 처절한 상황들을 서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힘들었다는 것만 말하겠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훌쩍 자라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는, 우회할 수 없는 마지노선을 쌓았고 결국에는 그들에게 아픔을 주는 방식으로 버텨냈다.

시간이 되었다. 죽은 자들의 도시처럼 침묵에 휩싸인 집을 벗어났다. 남들이 졸업파티에 갈 때 타는 멋들어진 리무진 같은 건 없었다. 오늘도 역시, 여느 때처럼 나를 마중 나온 것은 블리스의 자전거였다.

블리스는 여느 때와는 달리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늘 대충 빗어 넘기던 머리를 무스로 한 올 한 올 이마 뒤로 넘겨 화보속의 신사들처럼 느끼해보였다.

“섹시한데.”

장난기 가득한 내 말에 녀석이 큰 소리로 자신감 있게 웃었다.

“졸업파티라고 꾸민 거냐? 평소에도 좀 이렇게 해보지?”

“매일 이렇게 꾸미고 다니면 네 심장이 견딜 수 있을까.”

블리스의 느끼한 말에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자 녀석이 키들거리며 웃었다. 졸업파티가 열리기까지 채 삼십분도 남아있지 않았다. 블리스의 자전거 뒤에 앉으며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녀석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한참을 달려 조지타운을 벗어나 포토맥 공원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다가온 초여름의 더위는 저물어가는 태양과 떠오르는 달로 인해 주춤거리고 있었다. 황혼 무렵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강가의 신선한 물비린내가 나는 포토맥운하 옆 자전거용 도로로 진입했다.

찬란하게 산란되는 물결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블리스는 알 수 없는 곡조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흐르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들, 공원을 거니는 연인들의 다정한 속삭임과 함께 그것은 아름다운 합창이 되어 나의 귀에 들려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늘로 뻗은 전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침엽수림이 자란 숲 속의 습한 풀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블리스의 허리를 감쌌던 손 중 하나를 풀어 하늘로 높이 뻗었다. 그럼에도 닿지 않아 녀석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켜 손을 스쳐지나가는 전나무의 가지를 꺾었다. 따끔거리며 손을 자극했지만 나무의 냄새는 정신을 맑고 푸르게 했다.

전나무 숲을 벗어나 오하이오 드라이브 코스 옆 좁은 길로 들어섰다. 저 멀리에 학교가 보였다. 숲에서 꺾은 나뭇가지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블리스의 넓은 등에 볼을 기대었다. 나의 기쁨으로 슬픔을 맛보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칼릭스의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완전히 회복된 가브리엘이 우간다로 떠나고 일주일 뒤, 칼릭스는 며칠 전 비행기를 타고 텍사스의 라이스 대학으로 떠났다. 이주 뒤에야 서머스쿨 밑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시작하지만 녀석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떠났다. 지금쯤 텍사스 하늘 아래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터였다. 당연히 그럴거라 생각했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액정에 뜬 내 이름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고 있을 칼릭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항에서의 이별은 덤덤했다. 친구들을 비롯 학교의 후배들과 녀석을 보내주기 위해 찾았던 공항에서 칼릭스는 모두에게 공평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나에게 시선이 이르렀을 때, 녀석은 비애에 찬 얼굴로 웃어보였다. 긴 침묵 뒤에 쉰 목소리로 속삭인 행복해라.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행복해라. 입가에 어리는 미소를 블리스의 등 뒤로 숨기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옷장에 오랫동안 박혀있었던 듯 옷에서는 은은한 나프탈렌 향과 텁텁한 먼지 냄새, 그리고 향수 냄새가 섞여있었다.

어느새 학교의 정문에 다다랐다. 학교의 정문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그러나 여느 때와 같이 조악하게 꾸며진 풍경은 아니었다. 돈을 들여 풍선 장식을 달고 반짝이는 조명으로 현란하고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정문을 지나 오르막길을 달리자 들리는 요란한 음악소리에 마음이 들떴다.

“힘들어어….”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죽을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 블리스의 숨소리는 잔뜩 거칠어져 있었다.

“속도 좀 내봐 이러다 늦겠다.”

녀석을 골리는 장난기 어린 내 목소리에 뒤돌아보며 블리스는 눈을 흘겼다.

“어제… 저녁에 내…가 그만… 먹으라고 했지!”

“아무리 먹어도 살 안찌는 체질이라니까 그러네.”

“근데 왜 이렇게 무거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녀석이 우습고 귀여워 키들키들 웃으며 모른 척 녀석의 허리를 손으로 꽉 감았다. 길옆으로는 졸업파티를 기념해 대여한 리무진 차량들이 빠르게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전거를 타르고 이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은 원조가 끊겨 가난에 허덕이는 우리 둘 뿐이었다.

거칠게 헉헉 거리며 온 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 블리스의 등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고지가 멀지 않아 녀석은 죽을힘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귀에 내 말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어깨에 턱을 올려 귓가에 속삭였다.

“야.”

“허억, 헉. 왜!”

“사랑해.”

그 말에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뒤돌아본 블리스의 눈동자가 커져 있었다. 거친 숨을 내 쉬던 입술이 천천히 다물어졌다. 녀석의 입술 끝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차 깊어졌다. 꽃이 피어나듯 점차 환해지는 웃음을 숨기지 않는 얼굴에 나도 따라 웃었다. 고개를 돌려 페달을 밟으며 녀석이 중얼거렸다.

“새삼 반하기는.”

쳇,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블리스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좀 전보다 페달을 밟는 녀석의 숨소리가 가벼워져 있었다.

오르막길을 모두 오르자 건너편에서 화려한 조명으로 꾸민 학교의 커다란 강당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늘의 졸업파티를 위해 한 달간이나 고생하며 꾸며놓은 주변 일대는 그럴듯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흥겨운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던 녀석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좀 전에 하지 못했던 고백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

“나도 사랑해.”

나는 아마도 평생을 걸쳐 블리스가 내게 보여준 그 미소를 잊지 못할 것이다. 아득하게 아름다웠다. 서로에게 어떤 위험의 순간이 닥치더라도 그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모든 것을 치유할 것 같았다.

파티가 시작되었는지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손을 잡고 두꺼운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버크셔st 개교 57년 만에 졸업파티에 등장한 최초의 동성 커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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